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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현의 조건 1 권

프롤로그

“으읏…… 읍……!”

태인이 한 손을 위로 올렸다. 입고 있던 검은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빼내었다. 바닥에 무릎을


댄 서우의 모습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서재 방 안은 서우가 성기를 빨고, 뱉을 때마다 나는 습한 소리가 전부였다. 태인이 붙잡고 있던


정수리에 힘을 주었다.

“깨물어도 소용없어.”

뿌리까지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서우의 입 밖으로 나왔다. 기다란 타액이 실처럼 늘어나다 툭 끊
어졌다.

서우는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눈가도 불그스름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아…….”

눈동자가 물기로 얼룩진 서우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입고 있는 하얀 반팔 셔츠가 격하게 오르내


렸다.

태인이 걸음을 옮기어 마호가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긴 팔을 뻗었다. 정갈하게 놓여있


던 노트북, 서류철, 만년필과 메모지들이 죄다 한쪽으로 밀려났다.

태인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나가.”

서우가 바닥을 짚고 있던 두 손을 뗐다. 그가 일어서며 입고 있는 반팔 셔츠를 위로 벗었다. 머


리카락을 스친 셔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는 태인의 앞까지 다가가 단호한 얼굴로 올려다봤
다.

“후회 안 할 거거든요.”

서우가 입고 있던 바지를 벗었다. 가뜩이나 진한 페로몬이 더욱 짙어졌다. 그가 드로즈마저 벗


기 위해 손을 아래로 댔을 때였다.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턱밑에 감기었다.

서우의 얼굴이 위로 향한다. 젖은 입술이 거칠게 부딪치듯 맞닿았다.

그가 손을 뒤로 뻗어 서우의 엉덩이를 받쳤다.


태인의 혀끝이 얽힐 때마다 젖은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서우가 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키스였다. 서우는 깊게 파고드는 혀끝에 허리가 얕게 떨렸다. 마치 입속에서 피스톤 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서우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태인의 몸에서 백단나무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읏……!”

서우의 엉덩이가 책상 위에 걸쳐지는가 싶더니, 뒤로 느리게 몸이 기울었다.

“난 분명 경고했어.”

서우가 좌우를 살폈다. 그는 마호가니 책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시야 가득 태인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채워졌다.

태인의 얼굴이 조금씩 아래로 향하는가 싶더니, 차가운 입술이 목에 닿았다. 서우의 하얀 어깨
가 움츠러들었다. 곧이어 그보다 뜨거운 혀가 말캉하게 느껴진다. 태인의 입술이 움푹 들어간
쇄골을 스쳐 아래로 향한다.

그가 혀를 내어 조그마한 유륜을 핥았다. 감질만 난다. 손으로 판판한 가슴을 그러모아 움켜쥐
었다. 금세 젖꼭지가 뾰족하게 곤두섰다. 그는 볼우물이 파이도록 깊게 젖꼭지를 빨았다.

“읏…….”

서우의 하얀 상체가 숨 가쁘게 들썩거렸다. 태인이 혀를 길게 내어 가슴을 핥아 내려갔다. 배를


혀로 치대며 드로즈를 끌어 내렸다. 끝이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서우의 아랫배에 올라붙었다.

툭, 드로즈가 태인의 발밑에 떨어졌다. 태인은 숨을 고르고 있는 서우를 한번 쳐다보고, 조그


마한 성기를 거머쥐었다.

“흣…….”

서우가 숨을 들이켰다가, 멈추었다. 태인은 성기를 움켜쥔 채 반대쪽 손을 뻗어 허벅지를 더 넓


게 벌렸다.

테이블에 엉덩이가 걸쳐진 서우의 탄탄한 다리가 벌어졌다. 태인의 차가운 손끝이 구멍에 닿았
다. 서우는 허리가 얕게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태인의 검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겁고 좁은 구멍은 태인의 손가락을 끊임없이 먹어치웠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아래에서 새어 나오자 서우의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금세 구멍을 가르


고, 손가락 하나가 더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태인은 서우의 성기를 쥐고 아래위로 문질렀다.

“아! 읏…….”

태인의 손에서 질척대는 소리가 거듭 울린다. 서우가 허리를 비틀었다.

서재 방 안에 퍼져 있던 라벤더 향기가 한층 더 물기를 머금었다. 덩달아 태인의 성기도 더욱 힘을


받듯 위로 치솟았다.
태인이 구멍을 치대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그의 손끝을 따라 애액이 은사처럼 늘어나듯 흘러나왔
다. 어느새 손가락 세 개를 넣어 안을 휘젓고 있었다. 서우가 버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아…… 하아…….”

태인이 젖은 손으로 서우의 장골을 붙잡았다. 끌려 내려가듯 동그란 엉덩이가 마호가니 책상 밖


으로 삐져나왔다. 태인이 성기를 흰 허벅지에 가져다 대었다.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성기가 난
폭하게 회음부에 닿아 비벼졌다.

“읏…… 하앗…….”

아래에서부터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서우는 목덜미가 붉게 변하다 못해, 뺨에 홍조가 돌고,
급기야 귀까지 새빨갛게 익었다.

아래를 치대는 귀두가 구멍을 가르고 찔벅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곧이어 회음부를
긁고, 음낭을 찌르고, 애액이 묻어 미끄러지듯 위로 치솟아 색이 연한 서우의 귀두에 닿았다가
뒤로 물러났다.

태인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의 귀두가 질척거리는 구멍을 가르고 안으로, 조금씩, 느리게
파고들었다. 서우는 아랫배를 빠듯하게 채워 올라오는 감촉을 고스란히 느꼈다.

서우가 손을 아래로 내려 배를 감쌌다.

“읏!”

“반도 안 넣었어.”

태인이 허리를 뒤로 물리는가 싶더니, 더욱 강하게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성기 기둥이 반


정도 들어왔다가, 뒤로 물러난다. 곧이어 뿌리까지 푹 처박혔다.

반동하듯 서우의 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태인이 붙잡은 장골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얀 엉덩이
가 책상 끝에 닿아 마구잡이로 뭉개졌다.

서우의 허벅지를 벌린 채 앞뒤로 드나드는 태인의 허리 짓은 리드미컬하다. 목울대가 달달 떨리


는 서우와는 달리 여유마저 묻어났다. 그는 서우의 변해가는 안색을 바라보며 피스톤 질을 이어
나갔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동자가 자꾸만 그를 자극해 왔다. 그러다가 충동을 억누르지도
못하고 강하게 올려붙였다.

“읏……!”

서우는 아래를 관통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서우가 한 손으로 책상
을 짚었다. 둥글게 다듬어진 손끝이 희게 질렸다.

태인의 고개가 밑으로 향한다. 그는 판판한 가슴에 있는 젖꼭지를 빨았다.

태인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끊임없이 붉은 자국이 생겼다. 서우는 아래에서 쳐올리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성기 끝이 내벽을 휘젓는 게 아니라,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듯했다.
태인이 안쪽을 깊게 파고들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까맣게 점멸했다.
“아앗…….”

서우의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태인이 만져 준 것도 아닌데, 그의 성기 끝에서 울컥울컥 체액


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좁은 내벽이 있는 대로 태인의 성기를 쥐어짰다. 태인은 갑작스럽게 허리를 뒤로 물


려 새하얀 허벅지에 정액을 흩뿌렸다. 꿀처럼 녹아내리는 액이 서우의 흰 허벅지를 타고, 마호
가니 책상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

남편이 죽었다.

2 년 8 개월의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장례식장 한쪽에 자리한 서우의 눈동자는 흐릿하다. 천태인의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는다.

불과 죽기 전날만 해도 평범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는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서우는 앞에 놓


인 메뉴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마주 앉은 천태인 때문이리라.

천태인의 갸름한 얼굴은 표정이랄 게 없었다. 깊게 뻗어 올라간 눈매, 벼린 듯한 콧날, 보기 좋


게 맞물린 입술까지. 서우는 천태인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다. 식사를 마친 천태인은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


에 서우의 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두 사람은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서우의 옆으로 셰프가 다가섰다. 그가 반도 비우지 못한 접시를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까지도 테이블 위로 얹은 손끝을 초조하게 말아 쥐고 있던 서우가 별안간 두 다리를 세웠다.


그는 천태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두 다리가 조급하게 움직였다. 어찌나 긴장이 되는지, 손과
다리가 같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조급하게 그가 향하는 서재로 걸음을 내디뎠다. 서우를 향한 도우미의 시선이 사방에서 밀려든
다. 서우는 마치 천태인의 뒤를 따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천태인이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내일은 늦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너른 등이 미동도 없이 멈추었다. 이내 느리게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차가운 눈동자가 서우를 바


라보았다.
서우는 저도 모르게 말아쥔 손가락을 허벅지에 댔다. 손바닥에 절로 땀이 차오른다. 천태인의
시선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급기야 천태인을 바라보던 서우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천태인의 눈동자는 오랫동
안 마주 보기 힘들었다. 서우는 그의 뾰족한 목울대와 구김살 없는 와이셔츠를 눈에 담았다.

천태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서우의 고개는 점점 밑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돌아갈 순 없었다. 그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천태인이 잡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서우의 두 어깨가 곧게 세워졌다. 아니,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천태인의 전신에서 한기가 묻어난다. 그가 마주 보자 주변의 공기마저 달라지는
듯했다.

천태인의 맞물린 입술이 떼어진다. 수려한 그의 얼굴은 차가웠으며 눈동자는 서릿발처럼 냉담하
다. 그의 눈동자에 서우는 베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말해.

─…….

서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우미의 기척에도 세포 하나하나가 경직되는 걸 느


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냥 하는 게 나을까.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망설였던
서우는 또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그사이, 천태인이 말을 덧붙였다.

─알았어. 내일 일찍 오도록 할게.

천태인이 서재로 사라졌다. 서우는 말아 쥐고 있던 손을 올려 가슴을 쓸며 심장을 다독였다. 그


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연달아 긴 숨을 쏟았다. 곧이어 미끄러지듯 손바닥으로 배를 감쌌
다.

그리고 이튿날, 서우는 아침 일찍 결연한 얼굴을 한 채 학교로 향했다. 그는 교수의 말에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고 언제부터인가 생긴 버릇처럼 배를 더듬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놀랄까?

서우가 고개를 저었다. 천태인이 당황하거나 놀라는 얼굴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는 늘


무표정했으며, 그의 백단나무 향기는 겨울 숲에 홀로 있는 것처럼 서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주치의를 통해 알게 되는 것보단, 그의 얼굴을 보며 직접 말


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서우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정원을 내다보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징-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댔다. 장 비서님? 의구심도 잠시였다. 서우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


가 싸악 가셨다.

휴대폰을 든 마른 손이 덜덜 떨린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격한 심장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대로 쓰러진 그는 끝끝내 의
식을 되찾지 못했다. 차 안에는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
이던 천태인이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그 말조차 서우는 귀에 닿지 않았다.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결혼 생활 내내 부부다운 감정 교류는 없었지만, 그래도 2 년이 넘도록 한집에서 함께 지내던 사


람이었다. 일곱 살 차이가 나는 그는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서우를 포함하여 모두에게
동일했다.

천태인은 한 번도 살갑게 말을 건 적이 없었으며, 함께 식사를 한 것도 그날을 포함하여 몇 번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를 처음 만난 건 결혼식장에서였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한구석에 앉은 백서우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모두 백서우를 두고 입을 놀렸다.

서우가 고개를 숙였다. 모아 세운 무릎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문득 이 눈을 뜨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감았던 눈을 떠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천 상무님께서 남기신 유류품입니다. 받게 되실 상속금은 지금 살고 계신 한남동 자택과 세화


병원, 세화 백신 연구소, 청담동 빌딩과 세화 제주 병원, 그리고…….”

끝도 없이 나열하는 말에 서우는 귀가 웅웅거릴 뿐이었다. 같이 듣고 있던 서우의 아버지 얼굴에


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주치의이자 세화 병원의 총책임자인 조 원장의 낯빛은 퍼렇게
질렸다. 그는 펄쩍 뛰었다. 이제 겨우 의대 본과 2 학년인 서우가 경영에 대해 알지 못할 게 자명
하거늘.

조금 전까지 슬픔을 애도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변했다. 2 년 8 개월의 결혼 생활. 그


짧은 기간의 대가로 백서우가 상속받게 되는 돈은 수조 원에 달했다.

발인을 마친 서우가 비틀비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있던 도우미들이 달려와 그를 양쪽에


서 부축했다. 서우는 그녀들의 손을 힘겹게 밀어내고 서재로 향했다. 그 뒤를 장 비서가 조금 떨
어져서 따랐다.

서우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이 문을 열면 천태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서우가 느리게 손을 올려 문고리를 조심스레 잡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갈라졌다. 거실에서 드


리워진 불빛이 전부인 방 안, 서우가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탁, 스탠드 등을 밝혔다. 넓은 책상은 그의 성품이 돋보일 정도로 모든 게 질서정연하게 제 자리
를 차지하고 있었다. 금속 스탠드 등과 그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는 노트북, 서류철, 만년필과
메모지.

서우가 손을 뻗어 책상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체온이 손끝에서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었다. 서우가 의자에 앉았다. 무거운 머리가 뒤로 넘어가듯이 등을 기댔


다. 장 비서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열린 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세화 제약 상무였던 천태인은 늘 바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서우와 저녁을 함께 먹곤 했


다. 그와의 추억을 더듬어 보아도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우는 늘 눈치를 보는 입장
이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다. 애정 따윈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린 걸까.

반대로 열이 오른 머리는 뜨거웠다. 서우가 고개를 숙여 책상에 엎드렸다. 희미하게 차디찬 백


단나무 향기가 나는 듯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저벅, 한참을 서 있던 장 비서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옮기


어 책장을 살폈다. 장 비서가 뭔가를 끄집어냈다.

그는 엎드려 있는 서우의 옆으로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서우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장 비서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 걸음을 뒤로 돌렸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방 안은 서우가 힘겹게 내는 숨소리가 전부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서우가 느릿느릿 상체를 세웠다. 좀 전에 장 비서가 두고 간 물건을 말


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우가 손을 뻗었다. 정갈한 손톱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손때가 묻어 낡은 가죽 덮개, 장 비서가 내려놓은 앨범은 서우의 눈에 익숙한 것이었다.

서우가 느리게 사진첩을 넘겼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있는 사진. 그녀는 서우가 아홉 살 때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아버지는 자책을 했으며, 더욱 연구에만 매진했다.

서우는 그런 아버지를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기도 했


다.

서우가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어느새 두 사람이 아닌, 혼자만 서 있는 제 모습을 흐린 눈에 담


았다.

문득 서우의 시선이 사진 속, 한 사람에게 가 닿았다. 손을 뻗어 스탠드 등을 아래로 끌어당겼


다. 금속의 지지대가 밑으로 끌려 내려왔다.

서우는 사진에 담긴 제 모습. 정확하게는 뒤에 있는 남자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쪽을 보


고 있는 날카로운 옆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천태인이었다.

서우는 그를 결혼식장에서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서우가 쥐고 있던 스탠드 등을 놓았다. 사진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었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그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가는 충혈되어 붉었다. 그가 눈꼬리에 힘을 주
었다. 그럼에도 텅 빈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서우가 지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사진첩에 이마를 대었다. 희미하게 백단나무 향기가 난다.
뺨에 닿는 페로몬이 금세 코끝을 스쳐 심장까지 전해졌다. 하얗게 부르튼 서우의 입술이 떼어지
고 지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서우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아파…….

사진첩을 긁어내리던 손가락이 밑으로 향했다. 서우가 두 손을 내려 배를 감쌌다.

“……!”

서우가 도움을 요청하듯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누가


좀…… 도와…… 그의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점차 간격이
짧아진 거친 숨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하아…… 하아…….”

격한 복통에 휩싸인 서우의 하얀 이마에 땀방울이 어렸다. 두 손으로 배를 꽉 움켜쥐었다. 급기


야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배 안에 있던 것이 아래로, 밑으로 흘러내리는 듯했
다. 극심한 고통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우는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내일은 늦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그 사실을 천태인에게 말하려 했건만.

이미 늦어 버린 모양이다.

1. 죽어서 다시 시작

새하얀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앞을 쳐다봤다

“마침 나오네요. 서우야,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뭘 그렇게 서 있어?”

아버지 백영길이 다정하게 웃으며 서둘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서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었다. 그의 마른 목울대가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솟구쳤다.
눈을 뜬 서우는 극심한 목마름을 느낀 터였다. 그는 엎드려 있던 책상에서 간신히 상체를 세워,
비틀비틀대며 문을 열고 나온 직후였다. 그런데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반색하는 낯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서우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장 비서님…….”

그는 천태인의 전담 비서였다. 대체 왜 그가 아버지와 함께. 더구나 서우는 전날 발인을 마치고


한남동으로 왔다. 그러나 이 어수선한 집 안은 한남동 저택과 확연하게 달랐다.

사방에는 아버지의 연구 흔적이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창가로 길게 나열된 테이블에는 시약과


정체불명의 초록색 액체가 담긴 삼각 플라스크, 현미경, 사용하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스포이
드, 각종 논문과 번개 같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마구잡이로 휘갈긴 종이들이 서우의 발밑
까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백영길이 소파와 테이블에 있는 종이를 주섬주섬 주워 한곳으로 밀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치워 놓았을 텐데.”

“연락 드렸지 않습니까? 어제.”

장 비서의 말에, 백영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연구에 몰입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


람이었다.

“결혼식 날짜는 언제가 좋으시답니까?”

아버지의 말에 서우의 뒷목이 쭈뼛거렸다. 결혼이라니…… 이미 결혼을 했지 않은가. 더욱이


이곳은 오피스텔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니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천 상무님께서 워낙 바쁘시니 저희가 맞추겠습니다.”

서우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귓가에 스며든 말이 뇌리를 스쳐 심장을 쿵쿵 울렸다. 그럼에도 서


우는 좀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꿈과 현실이 혼재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장 비서가 말했다.

“날짜는 이 안에 있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건 모두 용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장 비서가 들고 온 단자함을 가리켰다. 붉은색의 함은 낯이 익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서우가 두 다리를 옮기었다. 저벅저벅-. 발밑에 흩어진 종이가 밟혀 부스럭거


렸다.

“서우가 워낙 공부에 욕심이 많아서요. 그걸 이해해 주시다니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 주십시


오.”

앞서 서우는 결혼식을 비공개로 돌리자고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결혼한 사실도 공표하지 않
길 바랐다. 대학생인 그의 학업에 지장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고, 무조건 맞춰 달라 덧붙였
다. 그렇게 하면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천태인이 결혼을 거부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묻어두었던 기억이 차곡차곡 수면 위로 떠올랐다.

─회장님께서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짓길 원하십니다.

─암요. 상무님께서…….

장 비서가 목을 낮게 가다듬었다. 아버지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서우를 의식하듯 쳐다보았


다.

“회장님께서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짓길 원하십니다.”

장 비서의 말에 서우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어느새 말아 쥔 손끝이 저릿하다. 머릿속을 훑


고 지나간 영상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반복되고 있었다.

서우가 조급하게 다가가 소파 등받이를 짚었다. 그렇지 않고선 무릎이 구부러져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암요. 상무님께서…….”

큼. 장 비서가 목을 울렸다. 그것마저 똑같았다. 두 사람은 백서우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


다.

서우가 마른 입술을 떼었다.

“태인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

아버지의 시선에 장 비서의 눈길이 더해졌다. 서우의 입에서 나온 ‘태인 씨’라는 호칭에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서우는 마치 그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애틋하게 부르고 있었다.

“제가 보고 싶다고, 할 말이 있다고 전해 주세요…….”

서우는 습관처럼 배를 감쌌다.

***

뺨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붉은 입술에 맺혔다. 세면대 앞에 허리를 숙인 서우는 두 손으로 연달아


물을 퍼 올려 얼굴에 뿌렸다. 쉴 새 없이 차가운 물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쳐졌다.

서우가 타월을 끌어당겨 두 얼굴을 묻었다. 포근하다.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특히나 문밖에서
연이어 서우를 부르고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랬다.

서우가 문을 열고 나오자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며 탄식을 쏟았다.

“아직도 화가 나서 그러는 거야? 천 상무님의 심경을 계속 그렇게 거스르면, 네 결혼 생활도 평


탄치 않을 걸 알지 않느냐?”
“…….”

꿈이 아니야.

머리카락과 입고 있는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은 서우가 타월을 쥔 채 아버지를 쳐다봤다. 이내 한


손을 올려 제 뺨을 툭툭 치더니, 급기야 꽈악 꼬집었다. 백영길의 눈이 동그래진다.

“……?”

“윽…….”

서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통증도 느껴져.

눈가를 찌푸린 서우의 모습을 훑던 아버지가 낮게 침음하더니 말을 더했다.

“미안하구나. 애비가 못나서.”

백영길이 짧게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렸다. 그의 두 어깨가 축 처져 내려온다.

서우가 타월로 젖은 앞 머리카락을 닦았다. 그가 어수선한 주변을 정리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뒀다.

스무 살이었던 백서우는 줄기세포 연구원인 아버지에 의해 천태인과 결혼을 했다. 서우는 어떻게
든 결혼만큼은 막아 보려고 했지만, 이미 아버지는 막대한 연구 기금을 받아 사용한 터였다. 어
떻게 해도 그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별안간 서우의 시선이 한곳에 못처럼 박혔다.

서우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올려 밀가루라도 뒤집어쓴 것 같은 희멀건


얼굴을 더듬었다.

모아 든 연구 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백영길은 지금 서우가 단단히 화가 나 결혼을 엎기 위해


천 상무를 자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서우를 응시했다.

아비로서 면목이 없었다. 그도 예전에는 작은 연구소를 가지고 있었다. 세화 제약에서 거액의


투자금을 지원받아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무색하게 어떠한 성과도 내보이지 못했다. 결
국 연구소는 적자에 허덕이다 못해 지금은 세화 제약에 의탁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하물며 서우는 어려서 일찍 어미를 여의었다. 그에게는 아비가 되어 가지고 연구를 한답시고 서
우를 보듬지도 못한 책임이 있었다. 그는 훈계할 처지도, 명분도 없다. 급기야 서우의 결혼마
저 이런 식으로…….

백영길이 고개를 숙인 채 희귀병에 관한 논문을 눈으로 좇았다.

“……결혼 전이면 스무 살…….”

거울을 바라보며 서우가 중얼거렸다.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한 제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당


시 대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지금 살고 있는 도곡동 오피스텔부터, 서우가 어릴 적부터 먹고 자고 한 데에 들어간 돈이 모두 세
화 제약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 년이 넘도록 아버지는 연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열의와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서우가 거울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수룩하다고 일컬었지
만 서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마저 그렇게 여기면 아버지의 왜소한 어깨가 초라하게 보
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우는 태인과 결혼을 하고 나서, 더욱 부족함 없이 의대에 다닐 수 있었다. 그곳은 오직


공부만 하면 되는 환경이었다.

다만, 결혼 생활이 무척이나 짧게 끝이 났지만 말이다.

“아버지.”

서우가 몸을 돌렸다. 그가 뭔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백영길이 종이를 든 채 이


쪽을 쳐다본다.

“그런데 서우야, 너 학교 안 가니? 오늘 시험이라고 밤새웠잖아.”

서우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

탁 트인 전경, 상무실 책상에 자리한 천태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련의 일을 보고
받는 중이었다. 그 안에는 혼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를?”

날카로운 눈동자는, 그를 오랫동안 보필했던 장 비서마저 위축되게 만들었다.

“예. 그게, 뵙고 싶다고…….”

장 비서는 ‘보고 싶다고’라는 말을 걸러서 전달했다. 특히나 낯빛이 창백하여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단 사실도 뺐다.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서우의 애틋한 목소리로 짐작건대,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천태인이 깊은 상념에 잠기는 눈빛을
띠었다. 장 비서가 조곤조곤 말했다.

“혹시 짐작 가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생각을 마친 천태인이 차디찬 목소리로 답했다.


“결혼을 물러 달라고 말하려는 거겠지.”

그가 연구소에서 올라온 신약 개발 보고서를 찬찬히 내려다봤다. 개발자 목록 제일 하단에 백영


길이라는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임상시험까지 마친 상태라 시판을 앞두고 있지만, 천태인
이 원하는 약은 아니었다.

결재를 마친 천태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 뒤를 장 비서가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


로 이동하자, 흰 가운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세화 제약은 생명 공학 기술 및 세포 대량 배양 기술을 기반으로 항암제와 각종 단백질 치료제를 만


들어냈다. 특이한 것은 모두 알파를 겨냥한 연구라는 사실이었다.

***

“서우야, 시험 잘 봤어?”

강의실에 앉은 서우는 한바탕 진땀을 뺐다. 그가 곁으로 다가온 임지훈을 쳐다봤다. 2 년 전이


나 후나 지훈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어쩌면 2 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른
다.

그는 서우의 몇 안 되는 대학 동기였다. 우연히 신입생 환영회 날 알게 된 뒤로 급속도로 친해졌


다. 지훈은 누구와도 금세 친해지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응…….”

그래도 지난날 서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인 것과는 반대로, 한번 치러봤던
시험이라 서우는 막힘없이 손을 움직였다. 마치 제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였다.

책상 위를 정리하는 서우의 손끝에는 모처럼 힘이 묻어났다. 오히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잘 본


것 같았다. 그때 틀렸던 걸 복기해 두길 잘했어.

뿌듯함도 잠시였다. 아침부터 몰아쳤던 긴장감이 일시에 풀린 서우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나도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옆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대는 지훈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서우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
다. 장 비서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가 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걸까.

“서우야. 백서우!”

“아, 어?”
서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지훈과 이마가 콩 부딪혔다. 서우가 움찔거
리자, 고개를 뒤로 물린 지훈이 서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지훈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서우는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소매에 배어 물씬 풍기는 알파의 향기가 전해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도서관 갈 거지? 나도 오늘은 밤새워야지.”

서우가 커다란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난 집에서 하려고. 오늘은 좀 피곤하네.”

진심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켜며 날을 세웠겠지만, 지금 서우는 시험보다


태인이 더욱 신경이 쓰였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가 죽은 모습을 보아서 그런 걸까.

익숙한 강의실을 나서며 4 월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서


우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그리고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러나 서우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시험 기간이 끝나도록 장 비서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


았다.

교정을 거닐며 서우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의학 서적밖에 모르던 그에게 새로 생긴 버릇이었


다. 책보다 휴대폰을 가까이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샤워를 하다가도 벨 소리가 들린 것 같았고,
어떤 날은 울리지도 않은 휴대폰을 연달아 바라본 적도 있었다.

서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아마도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 저뿐일


것이었다. 태인 씨 성격에 남 따위에게 신경 쓸 사람이 아니지. 장 비서님에게 전달받고 잊어버
렸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망설이던 서우가 액정에 손가락을 얹었다. 태인은 두 대의 휴대폰을 지니고 있는데, 서
우가 누르고 있는 건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번호였다. 그러나 서우는 이 번호로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무례한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직접 전화를 할 수도, 무턱대고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


법이 아니겠지.

‘일단 장 비서님께 연락하는 게 낫겠어.’

태인의 번호를 누르다가 빠르게 지웠다.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댔다. 수신자는 장 비서였다. 연결음이 짧게 울리고 조금 놀란 장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직접 전화를 했냐는 듯한 놀라움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개 아버지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번호는 아버지께 여쭤봤어요.”

거짓말이었다. 서우는 천태인과 함께 살면서 장 비서의 보고를 받곤 했는데, 대개는 천태인의


일정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있던 서우는 집으로 허겁지겁 돌아가곤 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날 하신 말씀을 전달했는데…… 상무님 일정이 워낙 빠듯하여 스케줄을


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장 비서는 배려를 하듯 장황하게 돌려서 설명을 하고 있지만, 결론은 태인이 안 만나겠다고 했을


거다.

역시나…… 서우가 한숨 대신 조금 느리게 입술을 뗐다.

“다른 말은 없었나요?”

그는 결정한 것을 무르는 법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4 개월 뒤 결혼식장에서 보게 될 터였다.


서우의 고개가 점점 밑으로 내려간다. 바닥을 쳐다보는 순간, 눈앞에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방
문이 떠올랐다. 늘 망설이다가 차마 열지 못한 문이었다.

“장 비서님.”

[네?]

통화를 끝내려던 장 비서의 의아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서우가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바람이 그의 옷깃을 사부작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태인 씨한테 제가 한 말 그대로 전해 주세요.”

[뭐…… 뭐를 말씀이십……니까?]

‘태인 씨’라는 호칭에 당황한 장 비서가 말을 더듬는 사이, 서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장 비서가 한 번 채로 걸러내듯 말을 바꾸어 전달할 것까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제가 태인 씨의 아이를 가졌어요.”

정확하게는 2 년 뒤에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우는 4 개월 뒤에 결혼식장에서 그와 처음 만


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꼭 만나야 한다고 해 주세요.”

***

통화를 마친 서우가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방금 그 말 무슨 소리야?”
서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임지훈이 서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서우의 통
화를 듣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우의 얇은 배를 내려다봤다.

“그…… 그게…….”

이곳이 교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서우는 뒤늦게 뺨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다행히
지훈 말고는 서우의 말을 들은 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별일 아니야.”

서우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의 뒤를 지훈이 바짝 따라왔다.

“너 정말 아이…….”

서우가 손을 올려 지훈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냐.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서우가 손을 거두고, 지훈에게서 멀어지듯 걸음을 재촉했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서우는 하얀
가운을 걸쳐 입었다. 실습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서우는 좀처럼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번에도 무시하면, 정말 그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서우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은 아니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우는 천태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눈을 감고 잠이


든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닌, 오롯이 살아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천태인의 모습이 말이
다.

……휴대폰 잠금장치를 푸는 서우의 손끝이 조급하다. 상기된 얼굴은 반색하는 낯이었다. 조금


전에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진동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출 광
고 메시지를 삭제했다.

서우가 가방을 챙겼다. 고작 스팸 메시지나 받자고 이 휴대폰을 사용해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지훈이 다가오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서우는 강의실을 나서는 내내 우울한 낯빛이었다.

이 방법도 안 통하나…….

역시나 천태인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를 낳아서 안고 찾아가면 모를까. 일순, 교문


을 나서던 서우의 시선이 한 곳에 가 닿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장 비서님……?

시선이 부딪힌 장 비서가 몸을 비스듬히 돌린다. 정차된 세단은 창문이 조금 내려온 상태였다.
순간 그가 이쪽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서우는 넋을 놓은 것처럼 서 있었다.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기다란 장신의 실루엣이 유려하
게 움직인다. 결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서우는 심장이 가
파르게 뛰었다.

마침내 검은 슈트를 입은 천태인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서우는 일순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그날 밤처럼.

칠흑 같은 밤, 서재 책상에 홀로 엎드린 서우는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퍼지는 걸 느꼈다. 어떻


게든 배를 움켜쥐어 아이를 지켜보려 했지만,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는 걸 막아내지 못했다. 고
통에 몸부림치면서 도와달라고 말을 했지만 굳게 닫힌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서우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


기 때문이다.

태인 씨.

정말…… 태인 씨가 내 눈앞에 살아 있어.

꿈과 현실이 혼동되는 시간 동안 서우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태인이었다. 그


를 보자 이제야 비로소 모든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어서 묻어두었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서우의 다리가 비틀거리며 떼어졌다. 정면을 응시한 서우의 손이 배를 감쌌다. 태인의 시선이
맞물린 것도 잠시였다.

“서우야.”

지훈이 서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서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흡사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면을 쳐다봤다. 학생들의 눈길이 하나둘씩 더해진다.

천태인의 얼굴은 기사에 오르내리며 알음알음 알려진 상태였다. 세화 제약은 의대생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선망받는 기업이었다. 사내 복지가 잘되어 있는 것도 그러했지만, 매년 천문학적인
금액을 유전자 연구에 쏟아부었다. 그로 인해 세화 병원이 보유한 의료 기술은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나 불임·난임, 줄기세포 연구 기술은 국가 경쟁력에 보탬이 될 정도였다.

수군거림이 커지자, 천태인이 몸을 돌린다. 그가 장 비서가 붙잡고 있는 차 뒷좌석에 몸을 싣는


다. 서우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의 말보다 지훈의 목소리가 더 크게 새어 나왔다.

“너 울어?”

시야가 흐려진 서우가 조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태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
느새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서우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태인의 시선이 뒤로 향하는가 싶더니, 장 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 비서가 서둘러 걸음


을 옮겨온다. 그는 서우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타시죠. 가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하십니다.”


태인은 전자만 얘기했을 확률이 높았다. 장 비서가 서우를 배려하듯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
래도 상관없었다.

서우는 그때까지도 손목을 붙잡고 있던 지훈의 손을 뜯어냈다. 장 비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서우는 정면만 응시한 채 걷고 또 걸었다. 그가 열린 차 뒷좌석에 올랐다. 코끝에 익숙한 백단나
무 향기가 물씬 닿아온다.

서우는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는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다. 서우는 자신이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죽음이라는 사
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태인 씨가 죽다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서우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순간 눈물이 마구잡이로 솟구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서우의 두 어깨가 세차


게 들썩거렸다. 끅끅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에, 차 뒷문을 닫아 주던 장 비서가 난색을 표하면서
조수석에 올랐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차 안은 서우의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그 밤, 홀로 서재에 엎드린 서우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몸을 잔뜩 옹송그린 서우는 두 손으


로 힘껏 배를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끝끝내 아이는 지키지 못했다.

“……파서…… 흐, 흑…… 도와달라고…… 했는데…….”

뒷좌석에 앉은 서우가 배를 감싸며 울었다. 한번 터진 울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 앉


은 장 비서의 낯빛은 잿빛이었으며, 운전을 하던 기사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흐윽…… 손수건 좀…… 주세요…….”

천태인의 손끝이 멈칫거렸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차 안에 울리는 흐느낌에, 무심하게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그레이 톤의 손수건은 심플한 모양이었다. 서우는 한 손
으론 배를 감싼 채 반대쪽 손으로 손수건을 넘겨받았다.

“아……무도…… 흐으윽…… 안…… 도와줬……어요. 배가…….”

너무 아프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날 알았다고 말했다. 서우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


며 일련의 상황을 조리 있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울음소리와 숨소리가 들쭉날쭉 섞
여 있는 탓에 태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계속 연락…….”

기다렸는데.
“일찍 온다고…….”

했으면서…….

그것도 기다렸는데.

차가 번화가를 지나 한 곳에 정차되었다. 태인이 차에서 내린다. 반대편으로 뛰어가던 장 비서


가 왔던 길로 돌아간다. 서우가 있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새 축축해진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누르고 있던 서우의 귓가에 차디찬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내려.”

서우가 눈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천천히 떼었다. 그가 발갛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상체를


조금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천태인과 시선이 얽혔다.

“나와.”

서우의 어깨가 작게 들썩거렸다.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온정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로


인해 서우는 늘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흑…… 네…….”

천태인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서우는 일시에 위압감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워낙


눈물이 솟구치는 탓에 다른 걸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장 비서가 앞서 걸었다. 거의 뛰다시피였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지배인이 서우의 우는 얼


굴에 장 비서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럼에도 태인의 얼굴은 흔들림 따윈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


다.

식당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자 와인 소믈리에가 두 사람의 빈 잔을 채운다. 입은 천태인을 향해 와


인을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테이블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우를 흘깃거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무님.”

요리사가 친히 안으로 들어와 음식을 올렸다. 천태인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눈치껏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미닫이문이 닫히고 룸 안은 급속도로 고요해졌다. 테이블에 앉은 서우의 울
음소리도 조금씩 잦아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언제까지 울 거야? 배고프다며.”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서우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노릇하게 익은 장어와 전복, 오리고기와 푸릇한 채소잎까지. 테
이블에는 어느새 먹음직한 빛깔을 뽐내는 보양식이 자리했다.

“내 애를 가졌다고?”
전후 사정에 관한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는 천태인의 눈동자는 서슬이 퍼
렇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린 서우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딸꾹질이 흘
러나왔다. 서우가 손수건을 입술에 댔다. 그럼에도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처럼 멈추지 않았
다.

서우가 손을 뻗었다. 일단 물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딸꾹질이 나오는 탓에 제대


로 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우는 정면을 응시한 채 잔을 집었다. 태인을 바라보며 잔뜩 긴
장한 서우의 목울대가 울렸다.

서우가 붉은 와인이 든 잔을 입술에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

서우가 움찔거렸다. 뒤늦게 전부 비워 버린 와인 잔을 바라보다가, 앞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듯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말해.”_ડ χ

너른 어깨선에 딱 맞아떨어지는 검은 슈트, 빠듯하게 몸을 감싼 그의 베스트에 설핏 주름이 생겼


다. 태인이 왼손에 착용한 손목시계를 흘깃거렸다. 그러자 서우의 귓가에 지금과 똑같은 그의
목소리가 훑고 지나간다.

─용건만 말해.

그는 미세한 차이도 알아챌 정도로, 무척이나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자택에 있는 사람


들은 모두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건 서우도 마찬가지였다.

“난 너랑 잔 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 내 애를 가졌지?”

귓가에 태인의 또 다른 음성이 파고들었다.

─혀 치워, 목구멍까지 박을 거야.

서우는 양쪽에서 들리는 태인의 목소리에 현기증을 느꼈다. 그건 그가 와인을 전부 마셨기 때문


일 것이다. 서우는 술을 마시지 못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도 지훈이 그의 술을 대신 먹어 주면
서 친해졌다. 서우의 얼굴이 점점 더 농염하게 익었다.

“그게요…….”

딸꾹. 서우가 손수건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의 붉은 입술이 뭉개졌다.

“죄송, 해요…… 제가 술을 잘 못해서요…….”

“…….”

“용건만 간단히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 딸꾹질이…… 지금 애를 가진 건 아니고, 제가 나중


에…… 태인 씨 아이를 갖거든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서우가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입을 열 때마다 달큼한 와인의 향이 풀풀 나는 듯하다. 더구나 조
금씩 오르기 시작한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울어서 눈가가 뜨거워진 탓인지, 자꾸만
태인이 두 사람으로 보였다.

“저도 태인 씨가…….”

급기야 천장이 빙글빙글 돈다. 이내 퍽 발밑으로 곤두박질친다.

쿵!

서우가 갑작스럽게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

천태인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손을 뻗어 오리고기가 담긴 접시를 밀어냈다.

“장 비서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미닫이문이 즉시 열린다. 장 비서가 안을 설핏 들여다보더니, 더욱 당


황한 얼굴로 허겁지겁 다가왔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서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 비서가 혼비
백산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무리 잘못을 하셨어도 그렇지요, 어린 사람을


이렇게 만드시면 어쩌십니까…… 천 상무님.”

장 비서는 서우의 당부대로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 태인은 신랄한 눈빛을 띠었다. 장 비서


는 서우의 수업 시간을 체크하고, 그가 나오길 기다리는 내내 걱정을 놓지 못했다. 태인은 거짓
말임을 알면서도 왔다. 두 사람의 혼담은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차 안에서의 서
우의 행동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서우는 천태인을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마치 태인을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정말


그의 아이를 갖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울지 않았던가.

장 비서가 고개를 돌려 천태인을 바라보자, 그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그런 거 아닙니다.”

앞 머리카락에 질척한 땅콩 소스가 묻은 서우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저도 태인 씨가 죽었다고 했을 때 믿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제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


는 가요. 그래도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태인 씨가 3 년 뒤 오늘, 죽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아, 아니! 이게 어찌 된…….”

지배인이 다가오다가 옆으로 물러섰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천 상무를 향해 허리를 깊


게 숙였다. 냉담한 그의 눈빛이 신랄하다. 그의 뒤로 장 비서는 서우의 옆구리를 보듬은 채 걸음
을 옮기는 중이었다.

천태인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장 비서가 의식이 없는 서


우를 부축하여 걸음을 옮겼다.

전광판의 숫자가 바꾸는 동안 장 비서는 흘러내리는 서우를 재차 추켜올렸다.

“정신을 좀 차려 보십시오.”

장 비서가 서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서우의 머리카락에 고정됐
다. 땅콩 소스가 앞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장 비서가 반대편 팔을 뻗어 서우가 쥐고 있는 손수건을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손수건


은 빠지지 않았다. 정갈한 손톱 끝이 손수건을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장 비
서는 넥타이를 끌어 올려 서우의 머리카락에 묻은 땅콩 소스를 닦아 주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태인이 내린다. 장 비서가 서우를 재차 보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물었다.

“천 상무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

운전기사가 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천태인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에


비해 의식이 없는 서우를 뒷좌석에 앉히는 장 비서는 끙끙댔다.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조수석에 올랐다. 룸미러로 눈이 마주친 천태인을 향해 말했다.

“결혼을 하실 분이 아닙니까.”

장 비서는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천태인을 향해 간곡하게 호소하듯 말을 덧붙였다.

“천 대표님께서 잘 대해 주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는 태인의 아버지였다. 결혼에 뜻이 없다고 밝혔건만, 멋대로 이런 걸 옆에 붙여 놓다니. 태


인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뒤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서우의 눈가는 손수건으로 세게 문질러 댄 탓에 불그


스름했다. 술기운이 도는 뺨도 발그스름하긴 마찬가지였다. 입술은 그보다 더 빨갛다.

태인의 시선이 서우가 쥐고 있는 손수건에 머물렀다. 서우는 너무도 당연하게 태인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달라고 했다.

‘기우겠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자신뿐인 건 아닐 테니까.

오늘 낮, 태인은 장 비서의 말을 전해 듣는 내내 조소하는 눈빛을 띠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뻔


한 거짓말을 해대는 서우의 낯짝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툭, 동그란 정수리가 태인의 시야에 채워진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서우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온다.

태인의 귓가에 울먹이던 서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 딸꾹질이…… 지금 애를 가진 건 아니고, 제가 나중


에…… 태인 씨 아이를 갖거든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갖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태인에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혼은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태인은 제가 지닌 피를 남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서우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거야말로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태인이 기다란 검지를 올려 서우의 이마를 꾹 밀었다. 서우의 머리가 재차 차 시트에 닿는다.

***

“……목말라.”

서우가 눈가를 찡그렸다. 그가 타들어 가는 목울대를 만졌다. 좌우로 조그마한 머리가 움직였
다. 일렁거리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진다. 서우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서우는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을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입고 있는 실크 잠


옷이 늘어진다. 비틀, 침대 아래로 힘겹게 내려왔다.

꿈이었구나…….

서우는 테두리가 화려한 문을 바라보며 급속도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방 안은 클래식한 의자


와 테이블, 유럽풍의 소품들이 즐비했다. 벽에 걸린 그림과 둥그런 원형 조명이 곳곳에 설치되
어 있어 좀 더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자아냈다.

여긴 태인과 살던 한남동이었다. 2 년이 넘도록 살았던 장소를 서우가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


가 없었다.

서우가 문을 열자, 지나가던 도우미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품 안에는 세탁물이
들려 있었다. 서우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반쯤 떨군 채 말했다.

“연임 씨, 장 비서님 좀 불러주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아침은 안


먹을게요.”
가뜩이나 입안이 쓰다.

스쳐 지나가듯 걸음을 옮기던 연임이 서우의 말을 듣고 우뚝 멈추었다. 그녀가 토끼 눈을 한 채


뒤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우는 풀 죽은 얼굴로 긴 복도를 터덜터덜 걸었다. 꿈속에서
도 술을 마시면 취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시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곤 했는데……. 서우가 이마를 더듬었다. 어떠


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선 정말 꿈에서 마신 모양이었다.

그가 거실로 나오자 도우미들이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로, 차가운 목소리가 곧장 파고들었다.

“이쪽으로 데려와요.”

서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자 도우미들이 한곳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이 집에 처음 온 서우를 안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우는 목소리가 들려온,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응접실을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 안쪽에는 베스트에 넥타이만 걸친 천태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장 비서


가 몸을 돌리더니 서우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이내 서우를 스쳐 밖으로 나갔다.

입구에 못처럼 박힌 서우는 눈을 끔뻑거렸다. 기다란 햇살을 등 뒤로 받고 있던 천태인이 몸을 일


으켰다. 그가 슈트 상의를 챙겨 들더니 팔을 끼웠다. 출근을 하려는 모습이었다.

거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 비서의 옆으로 도우미 연임이 다가간다. 말을 전해 듣는 장 비서가 고


개를 끄덕였다. 중앙에 있던 그가 재차 서우의 옆으로 다가섰다.

“절 찾으셨습니까?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요?”

서우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꿈이 아니었네요.”

장 비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우의 앞으로 점점 더 천태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얼음송곳처럼 뾰족한 건 착각인 걸까. 태인이 낮은 어조로 경고했다.

“너 술 마시지 마.”

“…….”

태인이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 그의 몸에 밴 차가운 백단나무 향기가 물씬 뒤로 풍겼다. 이끌리


듯 서우의 발끝이 느리게 돌아선다. 그는 찬찬히 걸어가는 태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태인은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이동했다. 긴 햇살이 화려하면서도 모던한 가구들 사이를 비집고
집 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문을 나서자 서 있던 사람들이 생동감 넘치게 다시 움직이기 시
작했다.

***
욕실에 들어선 서우는 투명한 샤워부스에 자리를 잡았다. 버튼을 눌러 가며 온도로 맞추어 미지
근한 물로 샤워를 하는 내내 서우의 얼굴은 청초했다.

그가 가운을 걸쳐 입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어린 그의 얼굴은 생기


가 넘쳤다. 희멀건 낯빛, 연한 눈썹과 꽤 많이 울었던 것치고는 하나도 붓지 않은 눈. 그가 타
월로 젖은 머리카락을 쓱쓱 문질렀다.

서우는 정확하게 물건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편안하게 방 안을 누볐다. 문득 서우의


시선이 침대에 놓인 손수건에 머물렀다. 그레이 톤의 손수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어제 입고 오셨던 옷이에요.”

서우가 몸을 돌리자 연임이 가지런히 개어진 옷가지를 내밀었다. 서우가 웃으며 받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제 옷은 누가…….”

서우는 누가 자신에게 잠옷을 입혀 놓았는지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상무님께서 하셨어요.”

“아, 그랬어요?”

결혼까지 했으니 놀라울 건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서우는 문득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연임이 살짝 망설이는 듯하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천 상무님 바지를 벗기려고 하셨어요.”

“……?”

옷을 바라보고 있던 서우가 고개를 들어 연임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요?”

연임은 대답 대신 머리를 슬쩍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천태인의 벨트를 붙잡았다. 그러나 태인이


힘없는 서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태인은 모두를 내보냈다. 장 비서를 포함하여 전부.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서우의 입가가 잘게 경련했다. 그러나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까 나한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었나?

“그럼 전 이만…….”

연임이 용무를 마친 듯 머리를 숙였다. 그녀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연임 씨.”

서우가 짧게 불렀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아이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신기한 건 도대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저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거지?

묘한 경계심이 섞인 연임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서우를 향했다. 그러나 서우의 다음 말을 들은 연


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

징-

빠르게 이동하는 차 안, 장 비서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수신자를 확인한 그가


의구심이 서린 눈으로 룸미러를 흘깃거렸다. 찰나의 순간 천태인과 시선이 얽혔다.

“네.”

장 비서는 통화를 짧게 마쳤다. 그의 변화한 안색을 보고 천태인이 물었다.

“누굽니까?”

천태인은 무심하게 눈길을 옮기어 태블릿 PC 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세계에서 쏟아지고 있는 각


종 의료 기사를 찬찬히 훑었다. 장 비서가 상체를 비스듬히 뒤로 돌렸다.

“서우 씨가 세화 병원 예약을 좀 해 달라고 하는데요.”

“내 애를 가졌다고 증명이라도 하겠대요?

그렇게 말하는 천태인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장 비서는 빠르게 답했다.

“아니요. 연임 씨의 어머니가 췌장암이라고 합니다.”

그제야 천태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게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상무님 댁 가사도우미입니다.”

“도우미요?”

“네.”

서우는 오늘 그의 집에 처음 방문했다. 더구나 가사도우미 본인도 아니고, 그의 집 안에 존재하


지도 않는 연임의 어머니 병환을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상무님.”

“해 줘요. 원하는 대로.”


차가 멈추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장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천태인의 긴 다리가 밖으로 뻗
어 나왔다.

태인이 태블릿 PC 를 장 비서에게 넘겼다. 그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뒤를 따랐다. 태인


은 무정한 얼굴을 한 채 높다랗게 치솟은 세화 제약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천태인이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내가 하죠.

여기 옷이요. 연임이 갈아입힐 잠옷을 내밀자 장 비서가 건네받았다. 그러나 그는 천 상무의 눈


치를 보며 망설였다. 백서우는 천 상무와 결혼할 사람이 아니던가. 불순한 의도는 아니지만 그
의 앞에서 옷을 벗기는 게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러자 태인이 잠옷 셔츠를 낚아챘다. 그는 차 안에서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건 아까부


터 느껴지던 향기 때문이었다.

태인이 셔츠를 잡자 서우의 눈꺼풀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그가 교차하듯 손을 뻗는다. 서우는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모두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건 태인도 마찬
가지였다.

서우의 하얀 손끝이 향하는 방향은 태인의 벨트였다. 달각, 뒤늦게 정신을 차린 태인은 벨트를
풀려는 서우의 손을 잡아 뜯어 던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던 서우가 침대 위로 풀썩 나자빠졌
다. 태인은 주변 사람을 전부 내보냈다.

─너 취한 거 아니지?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서우의 조금 열린 입술 사이로는 색색대는 숨소리만 흘러나올 뿐


이었다.

태인의 눈썹이 유려하게 올라간다. 아까부터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건, 서우의 몸에서 나


오고 있는 짙은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태인은 극우성 알파였다. 그런데 고작 우성 오메가라던
서우의 몸에서 나오는 페로몬이, 태인의 피를 절절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여러모로 사람 놀라게 하네.”

“네?”

전날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되짚던 태인의 말에 장 비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상층에서 열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태인이 걸음을 옮기었다.

***

세화 병원.
진료실에 자리한 연임은 울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서우의 말을 듣자마자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임의 어머니는 식욕부진과 미세한 복통, 만성피로감에 빠져 누워 있는 날이 늘


었다.

연임이 병원에 가자고 권해도 어머니는 체했을 뿐이라며, 그냥 일을 하느라 몸이 조금 축난 것뿐


이라며 한사코 거절을 일삼았다.

하지만 연임은 서우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모시고 지금 당장 병원에 가요. 제가 장 비서님께 말씀드릴게요.

좀 전까지 봄꽃처럼 따뜻하던 서우의 눈빛이 변했다. 그에 반해 연임의 앞에 있는 의사의 목소리


에는 활력이 묻어났다.

“이렇게 초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드문데, 운이 좋네요. 보기보다 장기들 사이에 깊숙이 숨겨져
있어 발견하기 어렵고, 뒤쪽에 위치하고 있어 배를 만져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
셨습니까?”

증상부터 일반인이 알아채기 어려웠다. 췌장암은 통증이 느껴졌을 땐 이미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
이 컸다. 특히나 혈관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진행 속도도 훨씬 빠르다.

연임은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버지와 이혼을 한 뒤로 홀로 연임을 키워 온 그녀


였다.

“아, 그리고 장 비서님이 따님도 부탁을 하셨어요. 어머님과 같이 검사를 받게 해 달라고.”

연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의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가족력이 있는 병환이다 보니, 만약을 위해 검사를 받는 것이니까요. 그리


고 지금처럼 초기에 발견할수록 완치될 가능성이 더 크답니다.”

***

같은 시각, 강의실에 앉은 서우는 멍한 눈동자로 창밖을 내다봤다. 그는 교수의 말에 도통 집중


을 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 학년 수업은 이론이 대부분인데, 서우의 머릿속에 이미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그땐 두꺼운 책을 들고 학교와 집,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러나 그때의 열의가
지금의 서우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긴 꿈이었던 걸까. 그렇기엔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의문투성이다. 마치 어디서 본 듯한


일들을 다시 겪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게 아니면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말처럼 시간여행이라
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그럴 리가 없지. 서우가 머리를 가볍게 털고서는 옆에 앉은 지훈을 쳐다봤다.

“옷도 어제랑 똑같고.”

서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연임이 가져다준 옷은 다림질이 잘 되어 있어 빳빳한 각이 잡혀 있었


다. 보송보송한 옷은 좋은 향기도 났다.

“아까 보니까 수업도 안 듣는 것 같던데…….”

말을 하던 지훈이 말끝을 흐렸다. 전날 서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서우는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생전 책밖에 모르던 서우였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 빼앗긴 것처럼 홀린 듯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서우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옷을 바라보는 서우는 웃고 있었다.

“너 괜찮아?”

“나?”

서우가 고개를 들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작게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았다. 술을 먹


었던 것치곤 컨디션도 좋았다.

예전에 아버지가 놔둔 소주를 물로 착각해서 먹고, 서우는 거의 기절을 하다시피 했다. 서우는
정말이지 술과 잘 맞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데.

아버지라면 태인 씨에 관한 일들을 알고 있을까. 한번 연구실에 들어가면 집으로 오시질 않으시


니. 전화라도 드려 볼까.

서우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연임 씨 어머니는 검사받고 있으려나.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녀의 어머니 병환을 알게 된 건 서우가 결혼을 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서우는 집 안에 머무는


사람들과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서우는 누군가를 부리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뭔가를 부탁하는
것도 어색했다.

그는 직접 하는 게 더 편하고, 익숙했다. 프로젝트가 잡히면 몇 날 며칠 집을 비우는 연구원인


아버지를 둔 탓에, 서우는 뭐든 혼자서 잘 해냈다. 혼자 밥을 먹고, 집 안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고.

더구나 연임은 그 집 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는데, 주로 침구 정리나 세탁물 처리를 도


맡곤 했다.

그녀는 누가 보는 사람이 없어도 커튼을 관리하고, 쿠션의 커버를 바꾸고, 침대 시트의 각을 맞


추었다. 연임은 작은 일에도 성실했으며, 누구보다 꼼꼼했다.
그랬던 그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둡게 변했다. 저녁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허기를 느낀 서우는
주방으로 향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엄마한테 아직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우연히 주방에서 도우미들이 연임을 위로해 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서우는 참담한 감정


을 느꼈다.

그리고 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몸이 약했던 서우의 어머니는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서


우의 앞에선 의연했다. 웃기도 하고, 오히려 서우를 위로하듯 안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홉 살, 죽음이란 걸 받아들이기 힘든 어린 나이에 그녀는 서우의 곁을 떠났다.

……강의실로 교수가 들어왔다. 지훈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얼굴로 입을 떼려다가, 정면을


응시했다.

서우가 휴대폰을 책상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이내 삐뚤어진 것 같아 살짝 손끝으로 만졌다.


문득 태인이 떠오른다. 꼭 꿈처럼 흘러가는 건 아닌가. 그와의 첫 만남은 결혼식장에서였는데,
그때와 다르게 어제 만났다.

─너 술 마시지 마.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서우가 손바닥으로 창백한 낯을 쓸었다. 어제 보니까, 내 말을 하나도 안 믿는 눈치던데…….

나라도 그랬을 것 같지만, 이건 더 안 믿겠지.

사실 서우가 벨트로 손을 뻗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서 있을 건가?

과거, 결혼한 뒤 침실에 자리한 태인이 서우의 셔츠 단추를 빼내는 동안, 서우는 초조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결혼했으니까, 이제 부부니까. 관계도 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 준비
가…….

서우의 고개가 점점 더 밑으로 굽어 내려가자, 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생자지 박았다가, 네 구멍 찢어져도 난 책임 안 져.

그 순간, 서우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허둥지둥 손을 뻗어 태인의 벨트를 풀고, 그의 커다


란 좆을 눈앞에 마주했을 때 서우는 손끝이 저릿한 걸 느꼈다. 끝이 뭉뚝한 자홍 빛깔 성기는 다
른 부위보다 유독 열감이 높았다.

러그가 깔린 바닥에 무릎을 댄 서우는 크게 입을 벌렸다. 그럼에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말은 차


가웠다.
─혀 치워. 목구멍까지 박을 거야.

─치…… 으응…… 읍!

입 안을 빠듯하게 채운 터라 치울 곳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서우의 말은 밖으로 새어 나오


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성기와 함께 깊게 푹 파묻혔다.

……꿈이라기에는 매우 생생한 기억을 떠올린 서우의 뺨이 화끈거렸다. 그가 지훈을 의식하듯 고


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되새겨지는 감촉에 혀 위에서 미끄러지듯 목구멍 깊숙하게 파고 들던 형형한 열감이 혈액을 타고


번지는 듯했다. 서우가 붉게 물든 목덜미를 쓸었다.

***

달칵, 도곡동에 위치한 오피스텔로 들어선 서우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창문을 열어 집
안부터 환기를 시켰다. 밀려든 봄바람에 종이가 날려 바닥에 흩어졌다.

서우가 걸음을 옮기어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가지런히 끝을 맞추어 테이블에 얹어 놓은 뒤, 책


을 위에 두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만들었다.

서우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에너지 드링크가 눈에 들어온다. 공부를 하는 내내 잠을 쫓기 위해


마셔댔던 것이었다. 서우는 손을 안쪽으로 뻗었다. 어느새 잎이 시들어가는 채소를 챙겼다.

“오늘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볶음밥이네.”

주방 안에 금세 맛있는 내음이 났다. 서우는 접시에 고슬고슬한 밥을 담아 거실로 나왔다. 가지


런히 끝을 맞춰 놓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희소 질환 사례들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는 완치가 되기보다 고치지 못하는 병들이 더 많


았다. 서우가 책을 밀어내고, 종이를 들어 찬찬히 바라봤다. 반대쪽 손으로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 올려 입에 넣었다. 그의 한쪽 뺨이 볼록해졌다.

서우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여기저기에 흘려 놓은 책들을 보곤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


도 그 안에 있는 그림들을 그림책 보듯이 보았다.

때때로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가 서우에게 알아듣기도 힘든 어려운 말을 늘어놓곤 했는데. 서우


는 열과 성을 다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웃는 어머니를 따라 웃었던 기억이 난다.

서우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힘든 사람을 돕고 살리겠다는 의협심보단 아버지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서우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두꺼운 책을 얹어 흩어지지 않게 고정시켰다. 서우


가 휴대폰을 흘깃 쳐다봤다.
아버지께 문자를 남겨 놓긴 했는데, 답이 없었다.

***

세화 병원 앞에 세단이 멈추었다. 조수석에 내리는 사람은 장 비서였다. 그는 사람들과 섞이듯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외근을 나온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들렀다. 장 비서가 여기에 온 건 천태인의 지시를 받았


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코너를 돌아 ‘장혜원’이라는 환자명을 확인하고 병실 문을 열었다.

일인실 침상에 누워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그 모습이 장 비서와 어렴풋이 비슷하다.

“바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오셨어요.”

열린 문으로 연임이 들어섰다. 연하게 웃는 그녀의 손에는 검사 결과서가 들려 있었다. 일주일


전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연임은 아픈 곳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운 좋게 조기에 암을 발견한 어머니의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연임은 1


년마다 와서 정기검사를 받기로 의사와 상담을 마친 터였다.

병을 일찍 발견한 것도 그러했지만,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수술을 받기 힘든 세화 병원에서 빠


르게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게 컸다.

“몸은 괜찮아요?”

장 비서가 침대에 누운 장혜원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사촌 간이었다. 그로 인해 장 비서는


형편이 어려운 그녀를 돕기 위해 연임을 가사도우미로 들였다. 다른 곳보다 처우가 좋고, 천 상
무는 비교적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보안과 방비가 삼엄한 한남동은 출신과 학력이 명확한 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안에 사적으
로 연임을 넣은 건 장 비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짧게 안


부 인사를 마친 장 비서가 문을 나서기 전 연임이 말했다.

“빨리 수술 받을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엄마 상태가 더 좋아진 거라고 의사 선생


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장 비서가 고개를 돌려 연임을 바라보았다. 짧게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네?”
연임이 눈동자를 굴렸다. 침대에 기대어 이쪽을 보고 있는 어머니를 한 번 보고 조그맣게 말을 덧
붙였다.

“그럼…….”

“서우 씨가…… 네 어머니가 췌장암이라고, 위급하니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

연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서우는 그녀에게는 병원에 가야 한다고만 일컬었다. 그건 그녀


의 충격을 완화시켜 주기 위함이었을까. 더구나 의사는 더욱 따스하게 말했다. 마치 큰일이 아
닌 것처럼.

연임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그분, 저를 보자마자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래?”

“네…… 저한테 장 비서님께 물어볼 게 있다고, 전해 달라 말씀하시고 지나가셨는데…… 마치


우리 사이를 아는 것 같았어요.”

장 비서의 얼굴이 굳었다. 일단 알겠다고, 몸을 잘 추스르라고 말을 하며 병실을 나섰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본사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때였
다.

같은 층에 위치한 병실 안쪽이 소란스럽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그 뒤에서 설핏 고래고


래 소리를 지르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돌린 장 비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
고 바삐 다리를 놀렸다.

***

“……김 의원이요?”

오후 5 시가 넘어간 시각, 본사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이 올랐다. 1 층 버튼을 누르며 장 비서가


보고를 했다.

“오늘도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어디가 아픈 겁니까?”

옆에 서 있던 천태인이 묻자 장 비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픈 곳은 없는데, 정황상 정치 후원금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김 의원은 세화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나이가 있는 탓에 몸이 아파서 오기도 했지만, 정
치적으로 병원을 이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특히나 정계에서 수세에 몰리면 일단 세화 병원으로
찾아와 눕고 봤다.

천태인이 고심하는 눈빛을 띠었다. 돈을 내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들어


가기 시작하면 끝이란 없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1 층에 도착했다. 오가던 사람들이 천태인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


다. 태인은 무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약속은 안 했는데, 제가 왔다고 하면 내려오실 거예요.”

매우 낭랑한 목소리였다. 태인의 고개가 찬찬히 이동했다. 장 비서가 같은 곳을 쳐다봤다. 1


층 데스크에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조그마한 머리가 요리조리 움직인다.

“여기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세요.”

긴 바지에 하늘거리는 체크 남방을 걸쳐 입은 서우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천 상무님.”

데스크 안쪽에서 통화를 하던 남자가 허둥지둥 허리를 숙였다. 서우의 희멀건 얼굴 위로 짙은 그


림자가 늘어졌다.

시선을 느낀 서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우를 내려다봤다.

***

수업을 마친 뒤, 서우는 집에 들러 옷가지를 챙겼다. 아버지가 입으실 와이셔츠와 넥타이, 속


옷과 양말, 하얀 수건 두 장을 잘 포개어 쇼핑백에 담았다. 그가 말끔하게 치워진 거실을 한번
둘러보고 현관문을 열었다.

서우는 버스에 올랐다. 그가 자리를 잡고 쇼핑백을 무릎에 얹었다. 퇴근 시간대가 아니라 차는


막히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긴 했지만 답이 없었


다. 그래도 찾아가면 반겨 주실 것이었다.

문득 서우의 귓가에 라디오가 들려온다. MC 두 사람은 최근 가장 핫한 여배우 이야기에 열을 올


렸다.

[신예나 씨가 극우성 오메가라는 사실을 공개했잖습니까.]


세상에는 다수의 베타, 소수의 알파, 그리고 극소수의 오메가가 존재한다. 일곱 살이 되면 자
연적으로 발현을 하기 시작하는데, 페로몬이 발산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신체 리듬이 확연하게
바뀌었다.

서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천천히 다가와 서우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서우의
쇼핑백을 받아주려는 듯 두 손을 뻗었지만, 서우는 웃으며 곧 내린다고 답했다. 귓가에 MC 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쩐지 너무 예쁘더라.]

평범한 베타와 달리 알파들은 타고나길 고도화된 신체와 비상한 두뇌를 지녔다. 또한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뛰어난 기량으로 스포츠와 전문 분
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곤 했다.

그에 비해 오메가들은 일반 베타와 섞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베타 행세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극우성 오메가들은 달랐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노화가 더뎠으며,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를 지녔다. 특히나 매혹적인 페로몬은 일반 오메가와 확연한 차이를 가졌다.

서우가 버스에서 내렸다. 높다랗게 치솟은 세화 제약 건물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입고 있


는 체크무늬 남방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그가 안내 데스크에 다가가 말했다.

“백영길 연구원님을 뵈러 왔는데요. 약속은 안 했는데, 제가 왔다고 하면 내려오실 거예요. 여


기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세요.”

“천 상무님.”

데스크 반대편에 서 있던 직원이 수화기를 귀에 댄 채 허리를 숙였다. 그때 시선을 느낀 서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우의 눈동자
가 말갛게 반짝거렸다.

“태인 씨.”

그 사고가 있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기대감에 찬 서우의 눈과는 달리 내려다보는 태인


의 눈동자는 싸늘하다.

그사이 직원이 네, 네. 라는 말을 연이어 반복하더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곧 내려오신다고…… 하시는데요.”

직원은 서우에게 말을 하면서도, 태인의 눈치를 보듯 말을 더듬었다. 서우가 활짝 웃으며 고개


를 돌렸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재차 태인을 올려다봤다.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저 이거 아버지에게 전해드리기만 하면 되는데, 같이 저녁 드실래


요?”
서우가 들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내보였다. 가느다란 손끝에 걸린 쇼핑백이 달랑달랑 흔들린다.
그의 희멀건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말은 차가웠다.

“아니, 내가 왜 너랑 저녁을 먹어야 하지?”

웃음을 머금고 있던 서우의 뺨이 두드러지게 딱딱해졌다. 그가 쇼핑백을 내리며 뒤로 감추듯 돌


렸다. 그리고 태인의 냉담한 표정을 눈여겨보았다.

기분이 나쁜가?

원래 무표정하여 그의 생각을 알 수 없는 편이긴 했지만, 2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아 오면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었다. 태인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가 있다는 건 매우, 심각하게 불편하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_공.금

“하…… 하하…… 그러게요.”

서우는 꿈과 현실이 아직도 혼동되고 있었다. 결혼을 했더라면 이 말조차 서우가 먼저 하지 않았


을 것이다. 식사를 권하는 건 태인이었으니.

하긴, 그것도 많지 않았지. 어쩌다 가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간혹가다 태인이 밥
을 먹자고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하얀 가운을 날리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백영길은 한달음에 뛰어와 서우의 옆
에 다가섰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거뭇거뭇하게 자란 턱수염. 서우는 새어 나오려는 긴 한숨을
삼켰다. 머리도 안 감고, 끼니도 걸렀는지, 아버지는 볼살에 우묵하게 파여 전체적으로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백영길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한 손을 옆으로 뻗어 서우의 앞을 막았다.

“상무님, 애가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제가 잘 타일러 놓겠습니다.”

그는 서우가 사고라도 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서우가 뭐라 입을 열려다가 관두었다. 이


미 아버지가 우려하시는 일은 벌어졌으니까. 사고는 진즉 쳤고, 오늘은 그 연장선에 불과했다.

천태인이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좀 씻는 게 좋겠어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온전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서우는 말끄러미 바


라보았다. 너른 어깨와 등에 맞춰진 슈트,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긴 다리는 조화로웠다.

서우가 찬찬히 시선을 거두어 옆을 올려다봤다. 비교되는 행색이었다. 백영길은 목에 걸린 사원


증만 없었어도 내쫓겼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서우는 백영길을 데
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백영길이 세면대에 허리를 숙였다. 그가 연이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서우는 쇼핑백을 뒤
적여 타월을 꺼내어 내밀었다.

“내 전화도 안 받고, 이러고 있었어?”


서우의 타박에 흰 타월에 고개를 푹 묻은 백영길의 얼굴이 올라올 줄 모른다. 서우가 가볍게 혀를
차고 아버지를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자 서우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뭘 연구하는진 모르겠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거였으면 진즉 됐겠지.”

서우의 타박에 백영길의 어깨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서우는 더 화를 낼 기운도 나질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왜 이렇게 몰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받아 쓴 연구 기금에 상응하는 결
과물을 내어놓고 서우의 결혼을 막아 보려고 애쓰는 것일 거다.

하지만 아버지의 연구 결과물은 서우가 결혼을 하고도, 그리고 천태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
간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자신을 몰아세워 봤자 축나는 건 아버지의 건강이
었다.

“나 결혼할래.”

백영길이 수건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결의를 다지는 눈빛을 띠었다. 그러나 눈 밑은 움푹 들어


가 있어 더욱 퀭한 몰골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든 더 노력을 해서, 반드시 이 연구를 성공시켜서…….”

“아니, 아니. 나 태인 씨랑 결혼할 거라고. 아버지가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집에서 공부만


하는 거 사실 버거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우는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대부분 공부에 할애했다. 학교와 도서관, 집


을 오가며. 그럼에도 오롯이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장을 보고, 집 안을 치우고,
생활비가 담긴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지출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를 걱정하고.

사실 그런 건 서우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우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예전이었으면 결혼을 하지 못할 이유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아버지 앞에 늘어놨을 테
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태인과 결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서우가 늘어진 타월을 백영길의 손에서 잡아 빼냈다. 그대로 접어 쇼핑백에 넣으며 말을 덧붙였
다.

“그 집에서 살면, 난 공부밖에 할 게 없어. 아…… 없을 거야.”

“…….”

백영길의 의심하는 눈초리를 서우는 능숙하게 마주했다.

“일주일 전에 가 봤거든. 태인 씨 돈 많더라.”

서우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천문학적인 상속금이 서우에
게 떨어지던 순간이 귓가에 생생하게 퍼졌다.

태인의 성격에 그렇게 갑자기 서우에게 쏟아지듯 넘길 리 없었다. 서우는 비공식적으로 결혼을
했다. 그렇게 요구하면 천태인이 거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모든 걸 수용했다. 그리고
세화 법무 법인은 마치 오랫동안 준비를 했던 것처럼 서우에게 모든 과정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
다. 그 말인즉, 태인 씨는 자기가 죽을 걸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닐까?

그러니 미리 서우의 앞으로 자택과 세화 병원, 빌딩과 연구소의 지분을 옮겨 놓았을 확률이 높았
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서우가 쇼핑백에 타월을 넣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서우의 말간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태인 씨 몸에 무슨 문제 있는 거야?”

***

저벅, 건물 밖으로 나온 천태인이 뒷좌석이 열린 세단으로 향했다. 그가 앉자 걸음을 옮겨오던


장 비서가 급하게 휴대폰을 건넸다.

“조 원장입니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천태인이 휴대폰을 받아 귀에 댔다. 조 원장은 세화 병원을 도맡아 관리·감독하고 있으며, 태인


의 주치의였다. 장 비서가 뒷문을 닫아 주고, 조수석에 올랐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상무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요.]

조용한 차 안에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울린다.

“용건만 말해요.”

병실에서 막무가내로 행태를 부리는 김 의원의 일을 조목조목 떠들어 대려던 조 원장이 헙,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조 원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천태인은 문
득 귓가에 서우의 목소리가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려고 했는데요…….

그때도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태인은 제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같이 저녁을 먹자며 올려다보던 서우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순간, 왜 날 만나러 왔다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상무님? 담당의들도 더 이상 김 의원을 맡기 힘들다고 서로 미루고


아우성입니다.]

조 원장의 음성은 경박하다 못해 호들갑스러울 정도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그 주위를 빙빙 도는


듯한 발소리도 들려왔다. 그에 반해 천태인의 수려한 입술은 냉담하다.
“조 원장이 하면 되잖아요? 그런 일 하라고 거기 앉아 있는 겁니다.”

할 말을 마친 듯 태인은 휴대폰을 앞으로 건넸다. 몸을 비스듬히 돌린 장 비서가 넘겨받으며 눈치


를 살폈다. 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차 돌려요.”

“네?”

장 비서가 반문하자 천태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차 돌려.”

왜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인의 하루 일정은 모든 게 순차적으로 짜여 있었다. 지금도 그가 향하는 곳은 새롭게 신축되는


최첨단 연구소였다. 우수 연구 인력을 증원하고, 신물질 및 신약 연구 개발에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곳.

태인은 그곳에 직접 방문하여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세단이 멈추고, 조수석에서 뛰어내린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그보다 태인이 더 빨랐다. 장
비서는 문에 부딪힐 뻔한 상체를 화들짝 뒤로 물렸다. 태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퇴근 시간에 맞춰 나오는 직원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구부리며 길을 내어줬다. 그 사람들의 얼굴


을 면밀하게 훑는 태인의 눈길이 냉담하다. 그가 안내데스크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직원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벌써 돌아갔나?

태인은 제가 떠올린 생각에 멈칫거리며 걸음을 세웠다. 그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온 김에 아버지 연구소 보고 갈래.”

태인의 시선이 더디게 뒤로 향했다. 서우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백영길을 보고 있는 탓


에 태인이 있는 곳에선 그의 뒷모습만 보였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팔랑대는 체크무늬 남방.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일을 하는 곳이니만큼, 갖춰 입은 차림이었


다. 그로 인해 태인의 눈에 비친 서우는 마치 그곳에 뚝 떨어진 이물질 같았다.

장 비서가 상층 전용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기척을 느낀 서우가 뒤를 돌아봤다. 그가 웃


으며 말했다.

“뭐 놓고 가셨어요?”
장 비서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태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서우의 눈길이 미끄러지듯이 이동했
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적어도 서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시선조차 주지 않은 태인의 걸음이 이어졌다. 그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서우가 기


다리는 엘리베이터는 홀수마다 멈춰 서는 탓에 느렸다.

태인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장 비서가 백영길 연구원을 불렀다. 서우가 아버지를 따


라 몸을 돌렸다.

네 사람이 자리한 엘리베이터는 침묵만이 자리했다. 연구소는 57 층이었다. 상무실은 그보다


위인 65 층이었다.

태인은 뭉근하게 퍼지는 라벤더 향기를 느꼈다. 그건 서우의 옷깃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가 아


버지를 바라보았다가, 정면을 보았다가 하는 통에 입고 있는 옷이 나부꼈다.

“장 비서님.”

뒤늦게 서우는 그를 향해 연구소 안을 둘러보아도 되냐고 물었다. 장 비서가 난색을 표했다. 연


구소는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그러나 서우는 태인과 결혼을 할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백
영길의 아들이었다. 장 비서는 속으로 고민을 하면서 태인을 의식하듯 쳐다봤다.

서우가 몸을 뒤로 돌려 태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떤 환경에서 일하시는지 보고 싶은데 살짝만 보고 나오면 안 되나요?”

백영길의 몰골이 처참하여, 자식 된 도리로 걱정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태인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징- 장 비서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발신자를 확인하고 낯빛을 굳혔
다.

“조 원장입니다. 아무래도 김정한 의원님 일로 계속 연락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할까


요?”

태인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그분이 살아 있어요?”

태인의 눈길에, 장 비서의 시선이 더해졌다.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그 사이를 가르는 건, 장
비서의 손아귀에서 거듭 징- 징- 울리는 휴대폰 진동음이었다.

서우가 눈을 끔벅거렸다. 벌어졌던 아랫입술을 서서히 닫아 안쪽으로 말아 꽉 깨물었다. 실수를


한 것 같았다. 태인도 버젓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도 살아 있는 게 당연한 건지 모른
다.

“살아 있냐고?”

태인의 낮은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서우가 떨떠름하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그…… 그게요. 그분이 호흡기 질환이 있다고…… 기사를 본 것 같아서요.”


서우가 또렷하게 기억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세화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정한 의
원은 호흡 곤란 증세를 호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 사실을 기사로 접한 서우는 결혼이 미뤄지
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때마침 57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백영길이 황급히 서우의 팔을 붙잡고 내렸다.

“상무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얘가 워낙 의학 기사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것저것 보아 놓고


선, 본인도 헷갈려서 괜한 소리를 한 것입니다.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백영길은 강제로 서우의 가느다란 뒷덜미를 감싸 뒤를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상층으로 향하는 내내 장 비서의 손안에서 휴대폰이 거듭 진동했다.

“…….”

천태인이 65 층에서 내렸다. 고요한 복도는 무게감이 있는 발소리뿐이었다. 이내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장 비서가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얹었다.

[저 좀 살려 주세요, 상무님. 듣고 계십니까요?]

김 의원이 한 차례 더 의사에게 패악을 부렸다며 조 원장이 말을 덧붙였다. 천태인이 차가운 목소


리로 말했다.

“병환이 뭡니까?”

[네……? 아…… 천, 천식입니다.]

뒤늦게 이해한 듯 조 원장이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럴수록 천태인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꽉 움켜쥔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장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서우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특히나 서울 의대 1 학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장 비서 역시 말을


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 연임과 주고받았던 말들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내 병원에서 송장 치울 일 있습니까? 조 원장에게 직접 담당하라고 하세요.”

태인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장 비서가 두 손으로 냉큼 받았다. 태인이 멈춰 있던 걸음을 떼었


다. 결단을 마친 듯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는 거침이 없었다.

2. 젖어드는 향기
백영길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지문이 확인되자 유리문이 열린다. 그 뒤를 따라 서우가 걸음
을 옮겼다. 좌우로 굳게 닫힌 문이 늘어졌다. 한곳에 다다르자 백영길이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
을 댔다. 출입문이 열린다.

고요한 연구실 안, 같이 사용하는 사람은 퇴근을 했는지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연구실은 2
인이 사용하는 구조였다. 대형 모니터와 집에 있는 구형 현미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최신 기계들
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서우는 딱 보아도 백영길의 자리라는 걸 알 수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그가 의자에


앉았다. 버릇처럼 손을 앞으로 뻗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펜 뚜껑을 닫아 꽂았다. 서랍에서
면도기를 발견한 서우가 그것을 집어 올렸다.

“가서 수염이라도 깎고 와. 사람들이 홀아비인 거 티 내냐고 하겠어.”

“나중에.”

백영길이 서우의 손을 밀어내자, 서우가 그의 손바닥을 펼쳐 면도기를 척 올렸다. 그러면서 쇼


핑백 안에 있던 흰 타월을 얹었다.

“하고 와. 그리고 나가서 같이 저녁 먹게.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나 굶겨서 보낼 거야?”

백영길이 손끝을 말았다. 뭔가에 빠져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의 말은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그가 면도기를 쥔 채 몸을 돌렸다. 백영길이 출입문을 열었다. 나가기 직전 고개를 뒤로 돌린


다. 서우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다녀와. 나 배고파.”

백영길이 문을 열고 닫으며 사라졌다. 서우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약한 부분은 그도 잘 알


고 있는 것이었다.

서우는 사실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결혼을 하고 아버지를 보러 왔을 때,


장 비서의 도움으로 이 안쪽까지 출입을 했던 적이 있었다.

보통은 외부인은 출입 금지였지만, 서우는 예외였다. 태인과의 결혼은 서우의 위치를 다방면으
로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조금 전 서우는 화장실에서 아버지에게 태인에 관해 물었지만, 백영길은 의미 없는 말만 나열했


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냐며……. 또한 시험을 본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잘 봤냐고
물어보며 말까지 돌렸다.

결국 아버지에게선 태인에 관한 일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서우는 눈


치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참 못한단 말이야.


서우가 마우스를 잡았다. 화면 보호기가 없어지고 암호를 입력하라고 뜬다. 서우는 망설임 없이
두 손을 올렸다. ‘백서우’라고 입력하자 창이 바뀌고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현란하게 화면의 절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폴더들을 바라보며 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를 잘 하지 않는 건, 이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중요한 것들을 아래쪽에 놓는 버릇을 알아서 다행이야.”

서우는 밑에 깔린 폴더들을 살폈다. 세포분열에 관한 논문, 암세포 발현에 관한 논문, 항암제


반응 촉진에 관한 문서들. 서우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움직였다.

문득, 서우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그는 연구 일지라고 적힌 창을 열었다. 서우의 긴 속눈


썹이 끔뻑거렸다.

“……오늘도 실패인가?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문제인 걸까…….”

계속 읽어 내려가던 서우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뭐야. 일지가 아니라, 아버지 일기였잖아.’

마우스 휠을 빠르게 돌렸지만, 실패하여 좌절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서우가 창을 닫고 다른


폴더를 띄웠다. 보고서 넘버가 적혀 있는 창은 쓰다 만 듯 짧게 기록이 되어 있었다.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형질이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7 세, 알파들에게서 나타나는 희소 질


환. 발현 세포 변형 증후군…….」

달칵, 문소리가 들리자 서우가 황급히 창을 껐다. 그가 몸을 돌리자 백영길이 흰 타월로 얼굴을
닦으며 걸어온다. 서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몸으로 모니터를 감추며 손끝으로 뒤를 가리켰
다.

“아까 올 때 보니까, 저 안에 뭐가 많이 있던데 저건 뭐야?”

사실 서우는 아무거나 가리킨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백영길이 눈길을 뒤로 돌렸다. 커


다란 의료용 냉동고의 문은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유리창이 나 있었는데, 다양한 혈액형의
샘플이 들어 있었다.

서우가 걸음을 옮겼다. 손목을 감싼 체크무늬 남방을 걷어붙이곤 하얀 팔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실패 일지를 봤던 탓일까. 뭔가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내 피도 도움이 될까? 나 우성 오메가잖아.”

극우성 오메가만큼 희귀한 건 아니지만, 오메가가 워낙 적다 보니, 실험을 할 때마다 세화 병원


에 요청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

백영길이 아주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생기가 도는 서우의 눈을 보며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우를 의자에 앉히고, 소독약을 묻힌 솜과 주삿바늘을 챙겨 왔다.

서우의 흰 팔에 차갑고 뾰족한 바늘이 닿는다. 금세 붉은 피가 주르륵 뽑혀 나간다. 서우의 눈가


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사이 모니터에는 화면 보호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

세화 병원, VIP 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어두운 침상에는 기계에서 새어 나오는 심장 박동 불빛이 전부였다.

“허억……!”

김 의원이 바싹 마른 숨을 내쉬었다. 그가 입고 있는 환자복의 가슴팍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누가 쏘아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부신 라이트가 켜졌다. 병실 안은 순식간에 환하게 불
이 켜졌다.

부지불식간에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움직인다. 김 의원이 덮고 있던 이불이 공중에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조 원장은 능수능란하게 김 의원의 주름진 얼굴을 덮듯 산소 마스크를 씌웠다.
하얀 가운이 펄럭펄럭 나부꼈다. 그대로 고개를 뒤로 돌려 크게 소리쳤다.

“혈압, 혈중 산소 포화도 확인해!”

혈액 내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김 의원은 폐도 좋지 않았는데, 그


에게는 수면 중 호흡 장해가 일어나는 일이 위험했다.

대기 중이던 의사가 확인하고 답했다. 산소 호흡기에 입이 꽉 틀어막힌 김 의원이 눈을 부릅떴


다. 흰자에 서린 붉은 핏발이 가지처럼 뻗어나간다.

“과호흡입니다.”

조 원장의 등 뒤로 의사가 황급히 보고했다. 조 원장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시선을 앞으로 돌


렸다.

김 의원이 가슴팍을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는 조 원장의 손목을 잡더니, 비틀어 거세


게 밀쳤다.

“허억…… 허억…….”

김 의원이 상체를 일으키며 가쁜 숨을 골랐다. 곁에 있던 보좌관이 김 의원을 향해 물을 내밀었


다. 김 의원은 단숨에 들이켜고 조 원장을 향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조 원장!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조 원장이 머리를 숙였다. 김 의원의 따가운 눈총이 좌우로 이어졌다.

“자네들 지금 이게 며칠째인가? 날 죽일 셈이야? 아니면 단체로 미치기라도 했나?”


등 뒤에 포진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 원장이 버석한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저희 병원은 밤낮없이 애쓰시는 김 의원님의 건강을 위하여 항시 대


기…….”

“또! 또! 그 소리야?”

조 원장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대신하듯 그의 허리가 더욱 납작하게 굽어 내려간


다.

김 의원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벌써 열흘째였다.

조 원장은 자고 있는 김 의원의 얼굴에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체온과 혈압을 확인했다. 그럴 때


마다 김 의원은 더욱 깜짝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는 것은 물론이고, 원활한 수면을 취하기도 힘들
었다.

조 원장은 한 차례 더 사과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사들과 눈길이 닿


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러나 정작 죽을 맛인 건 조 원장이었다.

천 상무는 앞뒤 부연 설명도 없이 무조건 김 의원의 안위를 최우선 사항에 두라고 지시했다. 그리


고 그 책임을 조 원장에 일임했다. 그가 볼품없는 손을 올려 까딱까딱 저었다.

“수고들 했네. 멀리 가진 말고, 잠깐 눈 좀 붙이게나.”

하도 시달린 탓인지 고달픈 낯빛으로 서 있던 의사들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서로 눈


치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상대가 조 원장이었기에 그들은 토를 달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
다.

날이 밝자 조 원장은 책상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자정에 있었던 일을 장 비서에게 전했다. 그


러면서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장 비서가 천태인에게 묻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일말의 망설


임도 묻어나지 않는 차가운 음성이 조 원장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김 의원에게 무슨 일 생기면 조 원장이 전부 책임지라고 해.]

“하…….”

내려놓은 수화기에서 미련처럼 손을 떼지 못하는 조 원장은 망연자실한 눈빛을 띠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럴 순 없어!

그는 세화 병원의 총책임자였다. 숱한 고생길을 지나왔다. 그는 이제야 겨우 정상에 앉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일로 끌려 내려갈 순 없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얀 가운이 바람에 쓸쓸하게 날렸다.


조 원장은 의사들을 대동하여 회진을 돌았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김 의원의 병실 문을 열었다.
넘치는 의욕과는 달리 이 작은 문턱을 넘는 게 곤혹스러웠다.

때마침 병실 침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던 김 의원이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맛이 없어.”

그의 옆에는 보좌관이 서 있었다. 조 원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가에 만개한 웃음을 진하


게 머금은 채 걸음을 내디뎠다.

“밥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제가 몇 번이나 신경을 쓰라고 일러두었더니, 의원님의 건강을 생각


하여 간이 조금 약한 모양이네요.”

조 원장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테이블을 훑었다. 귓가에 김 의원이 갈비를 뜯으며 쩝쩝대는 소리
가 들려왔다. 김 의원이 먹고 있는 건 외부 음식이었다. 그는 보좌관을 시켜 아침부터 만찬을 즐
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 원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구기고, 입을 놀렸다.

“자네를 봐서 그런 게지.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

김 의원이 잡채를 집어 올려 입에 후루룩 넣는다. 조 원장은 쓴웃음을 지은 뒤 등 뒤로 손짓을 하


였다. 의사가 다가와 조심스레 체온과 혈압을 확인하겠다고 말하자 김 의원이 살점이 조금 남은
갈비뼈를 던졌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거 안 보여?”

조 원장이 고개를 돌려 의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래, 의원님께서 식사를 마치시거든 확인하게.”

조 원장은 의사의 어깨에 손을 올려 꽈악 쥐었다. 뒤를 맡기겠다는 듯한 눈빛을 던지며 곁을 스쳤


다. 등 뒤로 김 의원이 물을 달라 외쳤다. 차가운 물을 주니, 이가 시리다고 난리다. 그래서
따뜻한 물을 주니, 혀를 뎄다고 소란을 피웠다.

조 원장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귀를 닫고 입가에 인자한 웃음을 띤 채 병실을 나섰


다. 그는 문을 닫기 직전 안을 쓱 둘러보았다. 김 의원은 먹성 좋게 젓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였
다.

천식이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지병이라 끊임없이 관리를 요했다. 그건 그렇지만, 열흘 동안


지켜본 바로는 김 의원은 무척이나 건강하다. 그것도 매우 나무랄 곳이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천 상무님이 너무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린 나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 원장은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심히 고민하는 얼굴로 문을 닫았다.

***
똑똑-

“천 상무님.”

장 비서가 문을 닫고 바삐 걸음을 옮겨왔다. 그때까지도 책상에 앉아 결재 서류를 바라보던 천태


인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넓은 책상에는 그가 나누어 놓은 결재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앞에는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을 받은 유리 명패가 빛났다. 그것 또한 한 치의 기울어짐 없이 자리
했다.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그제야 천태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왼쪽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 시 15 분이었다. 천태인


은 보고 있던 서류에 서명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장 비서가 걸어둔 슈트 상의를 챙겨 건넸다.

태인이 긴 팔을 넣고 앞서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장 비서가 버튼을 누


르며 넌지시 말했다.

“조 원장이 많이 난처해하는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계속 묻고 있습니다.”

“그만하고 싶으면 능력껏 퇴원을 시키라 하세요.”

김 의원은 현재 건설 회사와 유착 관계였다. 뇌물 수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지병을 내세워


세화 병원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니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쉽게 나갈 리 없었다.

“정말 그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믿지 않아요.”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서우의 말에 흔들릴 태인이 아니었다.

“그러면…….”

말끝을 흐리는 장 비서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태인의 긴 다리가 떼어졌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요인은 사전에 제거해야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만약, 세화 병원에서 김 의원이 숨을 거두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의료 과실은 없었는지 확인


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보면 신약 개발과 백신 연구소에도 수사가 들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또한, 어떠한 과실이 없더라도 그걸 증명해 내는 일이 남았다.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건 태인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표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 비서가 노크를 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천건명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감정을 잘 드러
내지 않는 건 부자(父子)의 공통점 중 하나였다.

태인이 안으로 들어서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가 소파에 착석하자 하 비서가 찻잔을 내려놓


았다. 두 개의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정적을 깨트리듯 천 대표가 입을 열었다.

“조 원장에게 이야기 들었다.”

태인의 눈가가 좁혀진다.

“그새를 못 참고.”

태인이 요지부동이니, 어쩔 수 없이 그를 설득해 줄 수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했나 보다.

천 대표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에 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 비서가 책상에 올라가 있던
봉투를 가지고 왔다.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하 비서는 몸을 돌려 나갔다. 고요한 대표실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선반과 책상에는 난이 놓여 있었는데, 개중에는 보기 힘든 꽃이 핀 난도 있었다.

천 대표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봉투를 태인의 앞으로 밀었다.


태인은 거침없이 손을 뻗어 두께감 없이 얇은 봉투를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태인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김 의원에게는 네가 직접 전해 주거라.”

봉투를 거머쥔 태인의 손에 힘이 실렸다. 백지수표였다. 그의 눈매가 예리하게 치솟았다.

천 대표는 백지수표를 건네며 태인과 김 의원의 연이 이어지길 바랐다. 신약이란 건 임상 시험이


불가피하다. 그럴 때마다 유명무실한 법안에 가로막힐 텐데, 그걸 김 의원을 이용하여 태인이
잘 헤쳐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태인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함께 가 봐야 제 손만 더러워질 뿐인 거 아시잖아요?”

천 대표가 칠흑색 눈동자를 맞댔다.

“일은 신념에만 사로잡혀서 하는 게 아니야. 때에 따라서는 김 의원 같은 사람이 네가 부리기 수


월할 게다.”

그 말을 듣는 태인의 먹색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아버지야말로 그깟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봉투를 찻잔 옆에 던지듯 내려놓은 태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미련 좀 버리시죠.”

그의 너른 어깨를 감싼 슈트, 빠듯하게 펴지는 베스트에 주름이 가해졌다. 그가 앉아 있는 천 대


표를 내려다봤다.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간다.

“그런다고 어차피 죽을 제가 살기라도 하겠습니까?”

태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장 비서가 걸음을 옮겨 오다가 뒤로 물러섰다.


태인의 눈동자가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달칵, 장 비서가 상무실 문을 열었다. 태인이 앞서 들어가고 뒤를 따르려는 그에게 차갑게 말


했다.

“좀 이따가 들어와요.”

“……네, 상무님.”

태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저벅.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하게 변했다. 마치 그의 주위만 다른


공간인 것 같았다.

탁 트인 전경, 기다란 소파와 테이블, 꼭 필요한 물건들만 놓인 책상에는 유리 명패, 결재를 기


다리는 서류, 전화기와 만년필.

책상 앞에 다다른 태인이 손을 뻗었다. 그가 햇살이 투과된 유리 명패를 쓰다듬었다. 제 이름을


눈으로 훑었다. 가느다란 인내심이 실처럼 늘어지다가 툭 끊어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의 손등
에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태인이 유리 명패를 집어 들어 서슴없이 내려쳤다.

쾅!

책상에 닿은 유리 명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은 태인의 손끝까지 이어지더니 한순간에 터지


듯 깨어졌다. 삽시간에 태인의 몸으로 부서진 유리 조각이 우수수 날아들었다.

눈처럼 날리는 파편은 태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스쳐 슈트 어깨와 넥타이, 와이셔츠까지 파고


들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장 비서는 착잡한 얼굴을 했다. 안쪽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조금 주저하다가 장 비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 비


서는 태인이 취임을 했을 때부터 그의 옆에 있었다. 그래 봐야 3 년이 채 되지 않지만, 태인은 위
태로운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인이 뒤를 돌아본다. 그의 앞에 있던 책상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투


명한 유리 명패는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장 비서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었다. 유리 명패로 책상을 내려친 듯한 태인의 손바닥에서 새어 나
온 피가 손끝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상…… 상무님.”

장 비서가 걸음을 멈추자,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태인은 손등으로 턱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로


인해 하얀 와이셔츠와 네이비색 넥타이에 핏방울이 튀었다.

“다쳐 봐야,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태인은 죽음이라는 말조차도 우스웠다. 너무 많이 들어 진저리가 난 건지도 모른다. 그가 몸을


돌렸다. 발밑에서 유리 조각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알파들의 우수한 지각 능력은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최고의 두뇌, 비상한 신체 능력,


타고나길 우월하게 태어난 그들. 남들은 몇 년이 걸려야 해내는 것들도 그들은 너무도 쉽게, 단
번에 해냈다.

태인이 책상에 앉았다. 햇살을 받은 유리 조각이 반짝거린다. 핏방울이 묻어 있음에도 눈부심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엉망이 되어 버린 내부를 뛰어다니는 장 비서는 분주한 모습
이었다.

태인이 긴 숨을 토해 냈다. 귓가에 아버지를 향해 말하던 조 원장의 젊은 시절 목소리가 훑고 지나


간다.

─태인 도련님은 열 살을 넘기기 힘드실 겁니다.

일곱 살에 발현을 시작한 어린 태인을 검사하고 난 뒤였다. 그는 병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


지만 자고 있진 않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인은 열 살까지 버텨냈다.

와이셔츠와 넥타이에 피가 묻은 태인이 조소를 지었다. 그러자 조 원장의 음성이 더해진다. 예


전보다 좀 더 살집이 차오른 목젖은 침착함이 묻어났다.

─열다섯 살이 고비입니다.

그 뒤, 조 원장은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태인은 살아남았다.

“천 상무님, 손을 좀…….”

장 비서가 다가와 두 손을 뻗었다. 책상에는 그가 내려놓은 소독약과 거즈가 놓여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태인이 무심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장 비서가 그의 다친 손가락을 소독했다. 금세 장 비서의


손끝도 붉게 변했다.

태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대신하듯 묻어두고 있던 잔상이 떠
올랐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천 상무님은 서른을 넘기기 힘드실 겁니다.

냉담한 얼굴로 마주한 태인의 앞에선 조 원장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낮게 조아렸다. 그의 옆으로
켜진 모니터에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7 세에 발현을 시작한 태인의 몸에는 알파 세포뿐만이 아니라, 변형된 세포도 생겨나기 시작했
다. 극우성인 그의 세포들은 분열 능력이 뛰어났으며, 모양이나 크기가 정상 세포와도 다르다.
변형된 세포는 아무리 사멸시켜도 그의 체내에 잔류했다.

태인의 뛰어난 몸은 변형된 세포마저 보호하고 막대한 번성을 이루었다.

***

교수가 강의를 마치자 서우는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둥그런 손끝이 액정을 빠르게 누볐다.

‘없어…….’

김 의원에 관한 기사는 건설 회사에서 뇌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정황상의 내용뿐이었다. 그


리고 세화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글을 훑는 내내 서우의 얼굴은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찾는 내용
은 아니었다.

서우는 한 차례 장 비서에게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 안부를 물어보는 척하다가 넌지시 김


의원에 관한 것도 물어보았다. 서우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꿈에서 보았다고 생각되는 일들 중에
그 부분만 정확한 날짜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기도 했고, 1 학년이었던 서우는 외워야 할 것도, 태인과의 결혼으로 신
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또한 김 의원이 사망을 하고,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기에 정확한 날짜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자극적인 제목에는 확인되지 않는 추측성 내용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의원이 죽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장 비서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서우는 한동안 꿈에서 본 것들을 헤아렸다. 김 의원이 죽는 바람에
세화 병원은 의료 사고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천태인이 조사에 응하기 위해 기
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뒤늦게 세화 병원에선 어떠한 의료 과실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냈지만, 1 년이라는 시간이 소


요된 후였다.

결혼을 하고도 태인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강의실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소음으로 소란스러웠지만, 서우는 휴대폰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지훈이 말을 걸었다.
“도서관 갈 거지?”

“아, 미안. 난 바로 집으로 가 봐야 해.”

서우는 휴대폰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다.

“요즘 수업도 제대로 안 듣는 것 같고,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서우는 가방을 챙기며 애써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아냐, 아버지가 오실 수도 있어서.”

서우의 아버지가 연구원이라는 사실은 지훈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자주 만나지 못하는 만큼,
서우가 아버지의 걱정을 유독 많이 하는 것도.

지훈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서우는 그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가방을 어깨에 얹으며
강의실을 나섰다. 머릿속으로 퍼즐처럼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끊임없이 맞추었다.

─내일은 늦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알았어. 내일 일찍 오도록 할게.

꿈속에서도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우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늘 받는 입장이었다. 서우에 비해


태인이 가진 게 많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를 받기만 한다는 것만큼, 눈치를 보게 만
드는 일도 없다.

서우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에게는 값비싼 것도, 태인이 가진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서우가 계단을 내려왔다. 교정을 거니는 그의 눈동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의대생이 된 것에는 좋은 머리와 환경, 아버지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서우의 암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고 복기했다.

분명 서우는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떠올려야 해.

종종걸음을 내딛던 서우의 다리가 불현듯 멈추었다. 묻어두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그의 뺨이 불


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숨 쉬어. 안 박고 있잖아.

풀어진 벨트와 벌어진 버클 사이로 자홍색 성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친 음모에 서우의 코끝
이 푹 처박혔다가, 뒤로 물러난 허리로 인해 뒤늦은 호흡을 골랐다. 무릎을 꿇은 서우의 머리 위
로 쏟아지던 욕구로 점철된 태인의 숨결은 뜨거웠다.

잠옷을 벗어 얇은 상체를 드러낸 서우는 가쁜 숨을 흘렸다. 젖은 눈동자만 들어 그를 올려다봤


다. 붉게 물든 입술은 두툼한 귀두로 인해 다물리지 않은 채 벌어져 있었다. 태인은 허리를 뒤로
물리기는 했지만, 서우의 입에서 성기를 빼지는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태인의 시선은 베일 것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백단나무 페로몬은 감미로
웠다. 그리고 깊게 들이켤수록 가슴 한구석이 고양감으로 부풀었다.

─후…… 다시 목구멍 벌리고 자지 깊게 넣어서 빨아.

가뜩이나 낮은 태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서우가 입을 벌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턱밑이 아릿하긴 했지만 참을 만은 했다. 그러나 성기


끝이 목구멍을 거듭 쑤시자 눈물이 핑 돌았다.

별안간 태인이 성기를 빼고, 몸을 낮추었다.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살덩이로 인해 서우가 눈을


번쩍 떴다. 태인은 무릎을 꿇고 있는 서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서우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끌어당겨 입술을 포갰다.

태인은 발그스름한 서우의 입술을 삼켰다. 그리고 체액과 함께 고여 있는 타액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서우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수록 뒤엉킨 질척한 혀끝에선 젖


은 파열음이 쏟아졌다. 태인의 손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판판한 서우의 가슴을 한가득 그러쥐
고 색이 연한 젖꼭지를 주물렀다.

한껏 열이 오른 서우의 눈가가 발갛게 변했다. 그 열기가 머릿속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다. 그


래서 서우는 입술을 내어준 채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그의 성기를 빨아댔
던 입술인데……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태인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깨끗한 걸 좋아했다. 서우의 눈에는 문제랄 게 없어 보이는 것들도 그
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읏.

아랫입술을 세게 빨고, 통증을 완화해 주듯 혀를 할짝댄 태인이 입술을 뗐다. 긴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서우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코앞에 자리한 그를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깊
은 두 눈동자, 갸름한 얼굴에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태인이 긴 손가락을 뻗었다. 그가 눈물이 고인 서우의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서우가 느끼기에 태인은 성격이 나쁜 편이었다. 워낙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하는 그


였으니까. 그러나 아주 가끔 보이던 공허한 눈동자에 서우는 거스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인의 눈동자는 밤보다 더 어두웠다.

***

상무실에 앉아 있던 태인이 서류를 덮었다. 그의 손목시계가 4 시 42 분을 가리켰다. 그는 오른


손바닥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장 비서는 걱정이 되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으나 태
인을 막을 순 없었다.
천태인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기다렸다는 듯 장 비서가 슈트 상의를 내밀었다. 태인은 블랙 슈
트의 단추를 끼우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장 비서가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꺼냈다. 일전에 태인이 대표실에 두고 간 것이었다.


그는 지금 세화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장 비서는 봉투를 내밀었다가 도로 안주머니에 넣었다. 태인의 차가운 눈동자에 떠밀리듯이 손이


알아서 움직인 것이다.

두 사람이 1 층에 모습을 드러내자 오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태인은 냉담한 얼굴로 대
기 중이던 세단에 올랐다.

빠르게 이동하는 차 안에서의 태인은 여전히 태블릿 PC 를 보며 일을 했다. 사무실에서 차 안으로


위치만 바뀐 모습이었다.

차가 신호에 걸리자 태인이 왼쪽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4 시 55 분이다. 태인이 재차 태블릿


PC 에 시선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징-

휴대폰 진동음이 고요한 차 안에 울렸다. 장 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봉


투와 함께 딸려 나온 휴대폰 두 대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나는 장 비서의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
는 태인이 공적인 용도로 소유한 것이었다.

징-

장 비서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연달아 울리는 소리는 태인의 슈트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태인이 움켜쥔 태블릿 PC 를 아래로 내리며 교차하듯 자상이 남은 오른손을 뻗어 안주머니에 넣었


다.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나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매우 가까운 지인들만 아는 태인의 개인 휴대폰이었


다. 태인은 무심한 얼굴로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와 정반대로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났어요. 5 월 23 일, 김 의원님이 세화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시간 말이에요. 5 시예


요.]

좁은 차 안에는 날짜와 시간을 다급하게 외치는 서우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장 비서가 휴대폰
을 들여다봤다. 오늘이었다.

[빨리, 태인 씨, 당장 세화 병원으로 가 보셔야 해요. 급해요!]

태인의 손목시계가 이제 막 5 시를 가리켰다.


서우는 마치 뭔가에 쫓기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잠자코 듣고만 있던 태인이 입을 열
었다. 눈동자에 음습함이 깃들었다.

“너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

휴대폰 너머로 찬물 세례라도 받은 듯 얼어붙은 침묵이 감돌았다. 차 안에는 그보다 더 짙은 냉기


가 휘몰아쳤다. 조금 전까지 태인이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쏘아붙이던 서우가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긴 숨을 내쉰다.

“누구한테 들었어? 장 비서?”

태인이 정면을 응시하자 뒤를 돌아보던 장 비서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눈으로 결단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휴대폰은 지극히 태인의 개인적인 용무로만 사용했기 때문이
다. 대외적으로 뿌리는 번호가 따로 있거늘. 장 비서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인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내려다봤다.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태인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게 울리더니, 고객의 사정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 멘


트가 나온다. 조금 전까지 제 할 말을 숨도 안 쉬고 내뱉어놓고선, 이제 와서는 전화도 받지 않
았다.

그사이, 차는 세화 병원 앞에 당도했다.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태인이 내리자 그가 봉투를


재차 건네었다. 태인은 휴대폰과 함께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장 비서가 앞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서우의 말이 마음에 걸린 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이 내리자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흰 가운을 입고 달려가는 의사의 뒷모습


이 눈에 띄었다. 그가 들어간 곳은 김 의원의 병실이었다. 태인의 걸음이 그곳으로 이어졌다.

김 의원의 병실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어수선했다. 그의 침상 옆에 서 있던 조 원장이


진땀을 닦으며 몸을 뒤로 돌렸다.

“오셨습니까, 천 상무님. 다행히 고비는 넘겼습니다.”

병실 침상에 누운 김 의원의 낯빛은 창백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그는 동공이 풀린 듯 보이


나, 느리지만 눈꺼풀이 움직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장 비서가 묻자 조 원장이 지친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답했다.

“조금 전, 5 시에 김 의원님께서 갑작스럽게 숨을 못 쉬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제가 근처에


있었던 터라, 즉각 대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조 원장은 문을 사이에 두고 고민했다. 정말이지, 미치도록 들어가기 싫었다. 이번
엔 또 뭐로 트집을 잡으려나. 그런데 곧 천 상무가 이곳에 방문할 예정이다. 그러니 자신의 앞날
을 위해선 김 의원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어필하며, 눈도장 찍어야 함이었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김 의원의 꺽꺽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조 원장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간의 예행연습 덕분인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했다.

“참으로 선견지명이 대단하십니다.”

힘든 와중에도 조 원장은 잊지 않고 천태인을 추켜세웠다.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는 차가운 기운


이 그득했다.

“천 상무님…… 손이 왜?”

말을 잇던 조 원장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태인이 손끝에 힘을 주어 말아 쥐었다. 아물어 가던 상


처가 벌어졌다. 그는 눈동자로 할퀴듯 누워 있는 김 의원의 얼굴을 훑고 몸을 돌렸다.

그가 병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의사들이 들어갔다. 장 비서가 곁으로 다가와 조그맣게 말했


다.

“이야기도 안 나눠 보시고 가실 겁니까?”

태인은 김 의원의 문병을 가장하여 약속을 잡은 터였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아버
지가 원했던 대로 김 의원에게 백지수표를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았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목숨을 구해주었으니까.

***

“어쩌지…….”

같은 시각, 서우가 좁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가 침대에 앉았다가 스프링에 튕겨 나오듯이


일어났다. 작은 발끝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급기야 손가락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징-

서우가 침대를 바라봤다. 휴대폰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태인의 번호였다.

서우는 어떻게든 그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
고, 책상에 앉았다. 전공 책은 펼쳐 보지도 않고, 한동안 뭔가를 끼적였다. 그의 노트는 다양
한 글귀들로 빼곡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연구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징- 서우가 휴대폰을 바라보며 이마를 감쌌다. 눈썹이 팔(八) 자로 내려왔다.

“이러다 말 거야.”

가진 자의 여유일까. 태인은 태생이 느긋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심했으며 타인에게 무뎠


다. 관심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물건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그가 뭔가에 집착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서우가 지켜본 바로는 아쉬운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이었다.

거듭 울리던 휴대폰이 잠잠해진다. 그제야 서우가 이마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가슴을 쓸었다.


긴 숨을 내쉬며 노트로 손을 뻗었다. 스프링이 손끝에 스친다. 그때였다. 징- 진동음이 울린
다.

서우의 시선이 더듬더듬 뒤로 향했다. 손으로는 스프링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아버지인가. 애


써 다른 사람이길 바라는 듯한 그의 낯빛이 점점 창백하게 변했다.

몸을 돌려 상체를 낮추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태인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끊임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음 때문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폭탄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드디어 받네.]

서우의 어깨가 쭈뼛거렸다. 그는 습관처럼 태인이 앞에 있을 때같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애


써 등을 세웠다. 날 보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당당하게 말을 하면…….

[오피스텔 앞이야. 잠깐 나와.]

청천벽력에 가까운 태인의 말이었다. 서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로 인해 한 박자 늦게 답했


다.

“……앞이요?”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자 어두워진 주변에 세단


이 정차되어 있었다.

서우의 두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태인 씨가 행동력이 이 정도였나?

“제가 지금…… 학교 도서관에 있거든요. 그래서 통화를 오래 할 수가 없…….”

[알았어. 그리로 갈게.]

서우가 헐레벌떡 말했다.

“아니요…… 제가 꼭 오늘까지 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요. 지금은 만날 수가 없어요.”

다행히 뒷말은 떨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휴대폰 너머로 찰나의 정적이 흐른
다.

서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거짓말인 걸 눈치챘나?


[김 의원이 죽었어.]

차디찬 어조였다. 그의 목소리는 유독 낮아 더 그렇게 느껴졌다. 서우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


졌다. 그가 창밖에서 라이트만 켜진 세단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제가 좀 더 빨리 알렸어야 했는데…….”

서우는 다급한 마음에 태인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정도로 상황이 급했기 때
문이다. 그런데도 그게 다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서우가 자책을 하는 사이, 1 층에 주차된 세단의 뒷문이 열린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구두, 길


고 곧은 다리가 밖으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뛰어오던 장 비서가 걸음을 멈추었다. 태인은 그를 눈짓으로 물리고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밖으로 나왔다. 장 비서가 손가락을 펼쳤다. 9 층, 그는 손짓만을 이용해 위를 가리켰다.

조금 전, 장 비서는 보안요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서우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는 연구원을


만났다. 이 오피스텔은 세화 제약에서 백영길에게 지원한 사택이었다. 그 말고도 다른 이들도
함께 거주하는 곳이었다.

태인이 25 층에 달하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본다. 그의 한쪽 눈썹이 기묘하게 치솟았다.

“그래서 지금 곤란한 지경이야. 하필 그때 ‘내가’ 옆에 있었거든.”

태인은 한 대목에 넌지시 힘을 주었다. 휴대폰 너머로 화들짝 놀란 듯 당황한 서우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올라오세요. 저 지금 집에 있어요.]

서우는 마치 태인을 오피스텔에 숨겨 주기라도 할 기세였다. 태인이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정제된 얼굴은 표정이랄 게 없었다. 긴 다리가 매끄럽게 이동했다.

***

서우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바닥에 미약한 땀방울이 맺혔다. 그가 책상을 뒤로한 채 몸을 돌


렸다. 터덜터덜 걸으며 서우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우울한 얼굴을 했다.

내가 좀 더 빨리 찾아냈어야 했는데……. 연임의 어머니는 운이 좋았던 케이스였나 보다. 일이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가 없지.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인터폰에 기다란 실루엣이 어렸다. 서우가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이
열리고 태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태인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담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좌우로 집을 훑는 여유마저 묻어났다. 창가


쪽에 자리한 테이블에는 연구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백영길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현미경과 눈
금 실린더, 시험관, 비커, 미생물을 배양할 때 사용하는 납작하고 투명한 페트리 접시가 깨끗
하게 닦여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우의 눈길은 장 비서에게 머물렀다.

“차라도 내올게요.”

놀랐을 테니, 마음을 가라앉혀 줄 따뜻한 게 필요할 것이었다. 서우는 안내할 것도 없는 거실을
가리키곤 몸을 돌렸다.

서우가 싱크대에 서서 커피포트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서우는 착 가라앉은 눈


빛으로 휴대폰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실시간 검색어에 ‘김정한 의원’이 떠 있다. 그가 죽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서우가 엄지손가락
으로 목록을 툭 눌렀다.

기사가 펼쳐지고, 그걸 내려다보는 서우의 눈동자에 액정에서 반사된 불빛이 너울거렸다. 그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다. 사망 소식이 아닌 천식에 관한 문구가 가득하다.

팔팔 끓어오른 커피포트가 탁 소리를 내고 꺼졌다. 동시에 서우가 몸을 휙 돌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에는 김 의원이 위급한 순간을 넘겼다고 되어 있었다. 구사일생이라는


기사에는 찬반론이 격하게 일었다. 아무튼, 그는 지금 살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기사에 김 의원님이 나오는데…….”

차를 가져온다던 서우가 도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장 비서가 몸을 일으켰다. 상석에 앉아 있


는 태인은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서우가 더욱 가깝게 다가서며 말했다.

“저한테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때까지도 듣고만 있던 태인의 고개가 비스듬히 움직이더니,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위로 향했


다.

“넌 죽을 걸 어떻게 알았지?”

“…….”

서우는 급속도로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태인의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한테 빨리 가 보라고 했지, 아마?”

조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 가고, 서우의 입술이 조금씩 다물린다. 태인이 느긋하게 말을 덧붙


였다.

“내 번호는?”

“그건…… 잘못 눌렀는데…… 하필 태인 씨가 받은 거예요…….”


태인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백금 핀으로 고정이 된 넥타이는 흐트러짐이 없다. 블랙 베스트가
빠듯하게 펴진다.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무심하게 울렸다.

“아, 숫자를 잘못 눌렀는데, 그게 내 번호였다?”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비꼬고 있었다. 서우의 손끝이 말렸다.


그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흘깃 현관문을 쳐다봤다.

방이 3 개인 오피스텔은 거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 달리면 도망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도망간들 달리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사실대로 털어놓는 수밖에 없나.

“자…… 장 비서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때마침 등 뒤로 쟁반에 머그컵 두 잔을 담은 장 비서가 다가온다. 그는 절대 아니라는 듯 태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었다. 결혼을 하고, 집안의 대소사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장 비서에게


들은 것이었다. 장 비서는 태인의 전담 비서이면서도, 그의 개인적인 일들도 수준급으로 처리를
해냈다.

“선반을 열어 봤는데도 찻잔이 보이질 않아서요.”

장 비서는 조심스럽게 세화 제약 로고가 들어간 머그컵을 태인의 앞에 놓았다. 그걸 태인이 내려


다보는 사이, 장 비서는 허리를 세웠다.

“제가 언제 알려드렸습니까? 전 절대…….”

서우는 태인을 등진 채 장 비서를 바라봤다. 그로 인해 장 비서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굳었다. 서


우가 입술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장 비서는 서우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눈으로 읽으며 속으로 따라 되뇌었다. 서우의 입술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연임 씨랑 장 비서님 관계, 태인 씨도 아나요?

태인은 공과 사가 명확한 사람이었다. 자칫하다간 연임이 쫓겨나든, 장 비서가 쫓겨나든, 아니


면 둘 다 내쳐질 수도 있었다. 장 비서가 입술을 떼고 재빨리 태인에게 읊조렸다.

“상무님, 제가…… 제가 알려드린 것 같습니다. 저번에 백 연구원을 만나러 왔을 때, 그때 말


을 잘못 흘린 것 같아요.”

서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앉아 있는 태인을 내려다봤다.

“맞아요. 그때 들었어요.”

거들어 주듯 서우가 고개를 힘있게 주억거렸다. 태인이 손짓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김 의원이 죽는 건 어떻게 알았지?”


서우가 휴대폰을 앞으로 내보이며 5 시 전부터 시시각각 올라온 기사들을 쭉 펼쳐 보였다. 그 안
에는 오보성이 짙은, ‘김 의원은 돈을 받았을 리 없으며, 그의 병색이 깊으니 예우를 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첨부된 사진은 3 년 전, 자원봉사를 나간 김 의원이 밭에서 배추를 뽑아 들고 인자하게 웃는 모습


이 담겼다. 그가 입고 있는 작업복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또한, 서우는 스무 살답게 맑고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알았다고?”

“네. 혹시 모르고 계실까 봐,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서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표가 날까 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털어놓아도, 그가 믿어줄까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태인은 큰소리를 내는 사
람도 아니었을뿐더러, 조곤조곤 말을 하면 설득하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태인의 눈총에 서우는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한곳에 시선이 다
다른 서우가 물었다.

“다쳤어요?”

서우가 재빨리 태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길고, 짧은 베인 듯한 상처가 있었다.

“잠시만요.”

서우가 손목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그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서랍을 열고, 구급상자를


챙겼다. 문으로 향하려던 그가 재차 손을 뻗어 서랍 한쪽에 놓여 있던 그레이 톤의 손수건을 움켜
쥐었다. 예전에 태인에게 받았던 것이었다.

서우가 방에서 한달음에 나와 소파까지 빠르게 다가갔다. 서우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태인


의 손을 재차 끌어갔다. 옅은 상처와 깊게 베인 듯 벌어진 자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우는 한 손으로 구급상자를 열어 소독약을 끄집어냈다. 그가 태인의 상처에 대고 소독약을 살


살 부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 태인은 서재에서 나왔는데, 그의 등 뒤로 도우미가 들어가,


안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다. 놀란 서우가 다가가자 태인은 냉담한 얼굴로 붙잡은 손을 뿌리쳤
다.

별것 아니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겨가는 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우는 제 손등에 피가 묻었


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서우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아니, 그럴 용기도 나질 않았다.

“유리잔 깨트렸어요?”

“…….”
서우는 상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태인의 눈동자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
다.

“조심하지 그랬어요.”

“내가 유리잔이라고 말을 했던가.”

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기 무섭게, 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끝에서 소독약이 줄


줄줄 쏟아져 태인의 손바닥 전체를 적셨다. 투명한 액체는 테이블 위로 퍼져 머그컵까지 닿았다.

“죄송해요.”

태인은 가볍게 손가락을 털었다. 서우가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내려다 말고, 주머니에 손을 넣
었다.

“저번에 빌려주셨던 거.”

서우가 네모반듯하게 접힌 그레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태인은 손수건을 눈으로만 쳐다봤다. 그


의 손끝에서 소독약이 뚝뚝 떨어진다. 서우는 그가 받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수건을 내밀었다.

태인은 남이 사용했던 물건은 자신의 것이라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집에는 이보다


더 좋은 것들이 차고 넘치……니까. 서우의 눈이 커졌다.

태인이 긴 손을 뻗는다. 그가 손수건을 가져다 손바닥을 느릿하게 닦았다.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서우는 입을 조그맣게 열었다. 그러나 새어 나온 말은 태인이 더 빨랐다.

“내 벨트라도 풀게?”

서우는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무심하게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문지르며 태인이 말을


더했다.

“소파에 앉아.”

그제야 서우는 제가 바닥에 두 무릎을 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 서우가 주춤거리며 무릎을 세


웠다.

서우는 소파에 앉았다. 한 손을 무릎에 올려 움켜쥐었다. 뒤늦게 피가 통하는 다리가 찌릿하다.


태인의 시선이 흘깃 닿는다. 발이 저린 서우가 먼저 말했다.

“상처, 손에 난 상처 보고 말씀 드린 거예요. 베인 것 같아서 혹시 컵인가 해서요.”

정말 그것뿐이라는 듯 서우는 손끝을 말아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태인은 제약 회사 상무였다.


그런 그가 저렇게 다칠 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용하는 물건, 잔에 베였다는
게 억측은 아니다.

서우가 반대편 손을 뻗어 세화 제약 로고가 들어간 머그컵을 들었다. 후후 불어 입술을 댔다. 장


비서님의 커피 맛은 여전히 수준급이네. 주방에 있는 커피와 설탕을 정확한 비율로 넣었다.
서우가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따뜻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불안했던 가슴
한구석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태인은 의심의 눈초리를 했지만, 반박하지도 않았다. 서우가 의대생이라는 건 누구보다 태인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싫든 좋든, 애정이 있든 없든, 결혼은 하게 될 사이니까.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장 비서의 낯빛은 잿빛이었다. 그는 좀 전에 서우가 입술로 굴린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연임과 그의 관계까지 알고 있다니.

더구나 연임의 어머니가 췌장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게 장 비서에


게 요청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엘리베이터에서 김 의원이 살아 있냐고 묻던 것도 마음에 걸렸
다. 마치 죽은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게 고작 서울 의대 1 학년이 알 수 있는 걸까. 장 비서는 좀처럼 서우의 옆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희멀건 얼굴에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커피를 음미하던 서우의 눈 밑에 아른아
른 그림자가 생기더니, 고개를 돌려 태인을 쳐다봤다.

“이제 저도 물어봐도 돼요?”

장 비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태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우가 들고 있던 머그


컵을 내려놓았다. 반 정도 비운 커피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 안에 서우의 차분한 얼굴이 비
스듬히 담겼다.

“태인 씨가 세 개를 물어봤으니, 저도 세 개만 물어볼게요.”

그때까지도 그는 듣고만 있었다. 어디 해 보라는 듯도 하다. 하지만 서우는 태인의 눈썹 한쪽이


올라가는 걸 알아챘다.

“아픈 곳이 있나요?”

장 비서가 떨어지려는 발끝에 가까스로 힘을 주었다. 서우가 덧붙였다.

“결혼할 사이니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요.”

서우의 아버지인 백영길은 번번이 말을 돌리거나, 딴청을 부렸다.

그 예로, 서우는 연구실에서 혈액을 채취할 때 아버지에게 한 번 더 태인의 병증에 관해 물었지


만, 백영길은 딴소리를 했다. 그리고 아까워서 사용하기가 꺼려진다면서 혈액을 냉동시키기만
했다.

“없어.”

태인의 목소리는 자못 무미건조했다. 서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질문을 이어 나갔


다.

“가족력이 있나요?”

서우는 유전병에 관해 묻고 있었다. 태인은 좀 전보다 더 단호하게 답했다.


“없어.”

서우는 머리를 주억거리고, 재차 입을 뗐다. 태인이 날 선 눈동자로 말했다.

“난 질문을 두 가지만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서우의 입술이 맞물린다. 태인의 말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세 번째는 서우의 사심이 그득한 질
문이다. 할 수 없나.

서우가 체념하듯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태인이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말해 봐. 대신 답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해.”

태인은 어디 들어나 보겠다는 듯 느긋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생각이 바뀌기라도 할세라, 서우


가 재빨리 입술을 뗐다.

“프러포즈요. 그건 언제 하실 거예요?”

“…….”

“…….”

장 비서의 전신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태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서우를 좌우에서 쳐다봤다.

서우는 태인이 말을 하길 기다렸다. 서우는 과거, 비공개 결혼을 요구했었다. 신혼여행도 원하


지 않았다. 태인은 모두 응해 주었다. 그로 인해 서우는 이렇다 할 추억도, 그를 떠올릴 만한
특별한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태인에게 이렇게 말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우는 고요한 서재 책상에
혼자 엎드렸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다.

***

빠르게 이동하는 차 안, 창밖으로는 네온사인이 지나갔다. 어두워진 창가에 얼굴이 비친 태인은


무표정하다. 그는 그레이 톤의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태인이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그의 것이긴 했지만, 왜 그 순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원래대로


라면 버리라고 말하든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게다가 마지막 질문을 쏟았던 서우의 말에 한
마디도 답을 하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그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태인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위로 치


솟는 손바닥에선 소독약 냄새가 난다. 그리고 옅게 밴 젖은 라벤더 향기도.
서우는 두 사람을 배웅하며 현관 앞까지 나왔다. 장 비서에겐 커피를 잘 마셨다고 말을 했고, 태
인에게는 웃으며 기다린다고 말했다.

……뭘 말인가?_ડ χ

3. 완전무결한 결혼(1)

소파에 앉은 서우는 눈을 끔뻑거렸다. 마주 앉은 장 비서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 닦았다. 6 월은


제법 더운 바람이 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서우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장 비서의 등 뒤로는 사람들이 물건을 싣고 끊임없이 들어
오고 있었다. 급기야 입구가 틀어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은 침대와 이불, 소파, 거실 테이블, 책상과 안락한 흔들의자를 들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


다. 모두 오피스텔과는 어울리지 않은 과한 것들이다.

장 비서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일단 안에 있는 물건들을 빼시고요. 그 자리에 맞춰서 놔주세요.”

장 비서의 등 뒤로 사람들이 우왕좌왕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 한 사람이 나서서 진두지휘한다.


장 비서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의 옆으로 몇몇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들은 서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화려한 보자기를 풀고, 보석


함을 열어 보인 장 비서가 목록을 훑으며 말했다.

“다이아몬드 세트, 진주 세트, 이건 순금 세트, 유색 보석 세트도 있습니다.”

서우는 영롱한 진주와 붉은 루비가 박힌 목걸이, 반지가 담긴 보석함을 바라봤다. 아무리 보아


도 잘못 온 것 같았다.

“저한테요?”

“네, 천 상무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뭐였더라.”

이마를 긁적거린 장 비서가 목록을 한 장 넘긴다.

“아, 백 연구원이 입을 슈트입니다. 서우 씨 것도 아래 있고요.”


장 비서는 목록을 쉬지 않고 확인했다. 그 외에도 지갑과 롤렉스 시계, 가방과 금수저 세트가 담
긴 상자들이 나열됐다.

“결혼식 당일 입으실 슈트는 맞춰야 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실 때 저와 함께 치수를 재러 가


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서우가 서둘러 말했다. 그는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집 안 중앙에 앉아 있었다. 과한 물건들로 간


격을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끙끙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았다. 그들은 들어가지도 않는 테이블을
억지로 놓고 있었다. 서우가 보기에는 다리를 두 쪽은 떼야 할 듯싶었다.

“도로 가지고 가 주세요.”

이 좁은 공간에 걸맞지 않았다. 특히나 오피스텔은 방이 3 개였지만, 방 하나는 백영길이 창고


로 쓰고 있었다. 거긴 그의 고물 창고였다. 사람들은 그 방문을 열고 더욱 난처한 얼굴을 했다.
케케묵은 냄새도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부 마음에 안 드신단 말씀입니까?”

목록을 바라보던 장 비서가 그제야 눈을 맞댔다.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가는 건 착각인 걸


까.

서우는 테이블에 늘어진 목걸이와 반지, 시계, 금수저 세트도 앞으로 밀었다. 가방은 조금 탐
이 나긴 했지만, 이런 고가를 가지고 다닐 순 없었다. 학교에서도 때가 탈까 봐 무릎에 얹고 있
어야 할 테니.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할 거다.

“아뇨. 저한테 과한 것 같아요.”

어쩐지 좌불안석이 된 장 비서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때까지도 서우의 앞에 물건을 놓아두던 사


람들도 손짓으로 뒤로 물렸다. 장 비서가 겸허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말을 해 주시면…….”

“이거 다 태인 씨가 고른 거 아니죠?”

그는 지시만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선택은 장 비서가 했을 테고. 서우가 이 물건을


모두 돌려보내면 난처해지는 것도 장 비서일 것이었다.

“……네.”

장 비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이 저녁 먹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예?”

“그거면 돼요.”
태인은 바쁜 사람이기에 날짜는 지정하지 않았다. 서우는 두 손을 분주하게 놀렸다. 열린 보석
함을 닫아 원래의 상자에 넣어, 보자기를 싸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 비서의 얼굴은 당혹으
로 물들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서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맞지도 않는 가


구를 욱여넣느라 비지땀을 흘려대는 사람들에게 물을 건넸다. 그러고는 어수선해진 집 안을 정리
해 나갔다.

무수한 물건들과 함께 떠밀리듯 현관으로 향하는 장 비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을 천


상무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 어질러진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청소하려던 참이었거든요.”

서우는 흐트러진 거실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태인 씨한테 전 아무 때나 상관없다고 말해 주세요.”

장 비서는 그 모습에 더욱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우는 태인을 어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현관문이 닫혔다. 서우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거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탓에 뒤엉킨 물건을 바라봤다.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긴 서우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서랍을 열어 마스크와 커다란 비닐봉지


를 꺼냈다. 그의 눈동자가 견고하게 빛났다.

그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비장하게 문을 열었다.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든 서우가 백영길의 고물 창


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얇은 그의 머리카락이 하느작
거린다. 긴 햇살이 안쪽까지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천장까지 닿아 있는 책장에는 무수한 서적이 꽂혀 있었다. 각종 논문과 의학 서적, 서우가 어릴


적에 보던 책과 교과서도 있었다. 서우가 두 손을 뻗었다.

낡고 색이 바랜 종이 뭉치는 봉투에 담았다. 커피를 흘린 탓에, 글자가 번지거나 두 장이 달라붙


어 떨어지지 않는 책들도 버렸다.

아버지는 자주 못 보는 만큼 어머니와 서우의 사진을 종종 찍곤 했다. 백영길의 방을 확인했으나


거기선 찾지 못했다. 그러니 이 방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

“면목이 없습니다, 상무님.”

탁 트인 전경, 상무실 책상에 앉은 태인의 얼굴은 냉담하다. 그러나 그는 원래 심경이 겉으로 드


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장 비서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서우는 모든 가구와 값비싼 보석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
려보냈다.

“다른 말은 없었나요?”

태인이 서류에 서명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장 비서가 반색하며 답했다.

“그게……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고…….”

“저녁이요?”

“네.”

장 비서가 태블릿 PC 를 펼쳤다. 태인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와 저녁 식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다. 뭔가를 부탁하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대부분
이 그랬다. 그러나 서우는 어디에 넣어야 할지 고심했다. 2 개월 뒤면 결혼을 할 사이니 가족으
로 해야 하나.

“토요일 저녁이면…….”

스케줄을 확인하던 장 비서를 깨우듯 태인이 말했다.

“다른 걸로 준비해서 보내요.”

장 비서가 입술을 뗐다가 다물었다. 서우가 원하는 건 물건이 아닌 듯 보인다고 말을 하고 싶었


다. 이미 오늘 갔던 것들도 최상급의 보석과 가구들이었다. 그러나 결재 서류를 덮고 몸을 일으
키는 태인의 행동에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슈트 상의를 건네받은 태인이 걸음을 옮긴다. 문을 나서는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장 비서마저도 가


끔 태인에게서 위압감을 느끼곤 하는데, 서우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유한 얼굴
로 또박또박 묻던 모습이 눈앞에 맴돌았다.

……두 사람이 1 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가는 사람들이 태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무표정
한 얼굴로 세단에 올랐다. 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태인은 장 비서가 건네는 태블릿 PC 를
받아 일을 이어서 처리했다.

차 안은 깊게 가라앉은 정적이 가득하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을 달려 경기도 외곽에 도달한


세단이 조금씩 서행하다가 멈추었다.

장 비서가 고개를 뒤로 돌려 도착을 알렸다. 태인이 태블릿 PC 를 아래로 내리며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사이, 조수석에서 내린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태인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쾌청한 하늘, 줄지어 세워진 나무들이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태
인의 머리카락도 가볍게 날렸다. 그의 시선이 언덕 위에 세워진 둥근 돔 모양의 지붕, 하얀 납골
당 건물에 다다랐다.

장 비서가 안내를 하듯 앞서 걸었다.

***

“없어.”

서우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깨끗해진 방을 살폈다. 그의 발밑에는 사진이 끼워진 앨범


이 있었다. 그러나 서우가 찾고 있는 건, 어머니의 사진이 들어간 손때 묻은 작은 앨범이었다.

“연구실에 두셨나.”

사진이 한 장씩 들어가는 크기다 보니, 백영길이 가지고 다닐 수도 있기는 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세화 제약에서 지원해 준 오피스텔로 들어온 뒤, 모든 짐은 이 방에 있었다. 아버지는 꼼
꼼하게 물건을 정리하는 성격도 아니기에, 여기에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그 앨범이 대체 왜 과거에 태인 씨의 서재에 있었을까.

서우는 그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발인을 마치고 서재 책상에 엎드렸을 때, 장 비서


는 분명 그 방에서 앨범을 꺼내어 내밀었다. 스탠드 등 하나만을 밝힌 터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
진 않지만 장 비서는 뭔가를 말하려 했었다. 그러나 힘없이 엎드린 서우를 바라보고는 앨범만 놓
아두고 돌아나갔다.

서우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 번 더 살펴보듯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

커다란 손이 납골당의 유리문을 열었다. 연구만 했기 때문인지, 길고 곧은 손은 비교적 하얗다.

백영길이 백자 유골함 옆에 펼쳐진 앨범을 꺼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아내와 어린 서우가 있는


사진을 눈에 담았다.

어느새 웃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서우의 모습을 바라보자 아내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저벅이는 발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백영길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앞서 걸어오던 장 비서가 걸


음을 멈추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천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제된 이목구비, 너른 어깨를 따라 이어진 슈트, 절제된 손끝에서마저 한기가 전해졌다.


“오셨습니까, 상무님.”

백영길이 보고 있던 앨범을 덮었다. 그가 몸을 돌려 온전히 그를 마주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접견실에 마주 앉았다. 산속에 자리한 특성 때문인지, 무척이나 조용했


으며, 아늑하게 꾸며진 내부는 편안함까지 더해 주었다.

장 비서가 천태인과 백영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백영길은 넙죽 들었지만, 태인은 손도


대지 않았다.

가볍게 목을 축인 백영길이 들고 있던 앨범을 앞으로 내보였다. 유리 테이블을 쓱 스쳐 지난 앨범


이 태인의 앞에 당도했다. 가운데 부분을 어찌나 잡고 넘겨댔는지, 색이 바래 있었다.

태인이 눈으로 의도를 물었다. 백영길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직 어리지만, 속이 깊고 눈치가 빨라서 상무님께서 곁에 두어도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백영길의 목울대가 느리게 내려갔다가 빠르게 치솟았다.

“아비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

백영길이 차가운 태인의 눈빛에 짓눌린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 무릎을
꿇었다.

“우리 서우를 지켜주실 분은, 상무님뿐입니다.”

백영길이 고개를 떨궜다. 그의 두 눈가가 붉게 변했다. 자그마치 10 년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백영길은 가슴 한구석에 분노가 자리했다. 아내가 죽고, 홀로 남은 서우


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의미가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서우를 담
보로 내걸고, 연구에 매진했다. 열과 성을 다하여 매달리면 길이 열릴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
는 참담하다. 모든 일은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백영길은 변형된 세포 연구에 삶을 바쳤다. 그의 아내는 서우를 낳고 몸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자궁에서부터 퍼진 암세포는 급기야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갉아먹었다.

“그런 말이나 늘어놓을 거면 이쯤에서 끝내죠.”

천태인이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먼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백영


길에게 듣고 싶은 말은 이런 말 따위가 아니다.

백영길이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두 손을 뻗었다. 그가 태인의 슈트 바지를 붙잡았다.

“다 제 탓입니다, 상무님. 제가 오만하였습니다. 제 치기가 서우를…….”


장 비서가 백영길의 손을 떼어냈다. 태인이 그의 두 팔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
고 차갑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난색을 표한 장 비서가 테이블에 있는 앨범을 챙겼다. 백영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하다


가 그 역시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세단 안은 좀 전보다 더욱 무거워진 침묵이 자리했다. 장 비서가 쥐고 있던 앨범을 내려


다봤다. 그가 조심스레 손때가 많이 묻은 가죽을 넘겼다. 그러자 밝게 웃고 있는 어린 서우와 그
의 손을 붙잡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웃고 있는 눈매를 바라보던 장 비서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서우 씨는 어머니를 닮았나 봅니다.”

“…….”

장 비서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가 룸미러로 뒤를 살피자 태인이 고개를 들


어 눈을 맞췄다. 장 비서가 몸을 뒤로 돌려 펼쳐진 앨범을 내보였다.

“보시겠습니까?”

장 비서가 팔을 뻗었다. 태인이 태블릿 PC 를 아래로 내리고, 그의 손끝에서 앨범을 넘겨받았


다.

희멀건 얼굴에 밝게 웃는 어린 서우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여인의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태


인은 무심한 눈으로 한 장을 넘겼다. 그리고 또 한 장을 넘겼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옅은 분홍색과 푸른색이 섞인 수국꽃이 담긴 사진은 낯이 익은 풍경이었다.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서우의 얼굴은 좀 전과 같은 활기가 묻어나지 않는다. 그 뒤에 비스듬히 서


있는 제 모습을 바라봤다. 같은 곳을 보고 있던 장 비서가 말했다.

“천 회장님 댁이 아닙니까? 두 분이 만나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

10 년 전.

올해 열여섯 살인 태인은 학교를 마치고 대저택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정원은 관리가 잘 되어 있


어 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는 하프를 연주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세단에서 내린 태인은 낯선 차가 멈춰 있는 걸 바라봤다. 그 옆에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꽃을 쳐다보며 말했다.

─수국은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었는데…….


태인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마중 나온 집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와 있다는 집사
의 말을 들으며 태인은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넸다. 집사가 어깨에 짊어진 채 그의 뒤를 따라 걷는
다.

대저택은 지하 2 층, 지상 3 층의 구조였다. 지하는 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용했다. 그로


인해 내부에는 엘리베이터도 만들어져 있었다. 태인은 손님이 앉아 있는 응접실을 지났다. 엘리
베이터로 향하는 그의 귓가에 천 회장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내 자네 말을 어떻게 더 믿나?

태인의 눈길이 뒤로 향했다. 그의 두 다리가 멈추었다. 천 회장의 옆에는 아버지도 함께 있었


다. 접객용 의자에 앉아 있던 백영길이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이 되
어 있었다. 얼핏 보면 실핏줄이 터진 것도 같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여
푸석한 낯으로,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패기 있게 말했다.

─이 연구에 제 목숨을 걸라면 걸겠습니다. 아내도 죽은 마당에, 전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회


장님,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태인은 거들어 주듯 아버지가 천 회장을 설득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일곱 살


에 발현을 시작한 태인은 몸속에 변형된 세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 선생의 역량으로 그는 열 살
때 첫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지났다.

그는 두 번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태인이 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연구원이라는 사람까지 대동하여 나타나, 변형된 세포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것
이리라.

─좋아. 내 이렇게 하지.

눈시울이 붉은 백영길의 두 눈이 기대감에 차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천 회장의 말에 그


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망연자실했다.

─자네한테도 오메가인 아들이 있다지? 그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내 손자와 결혼을 하는 걸세.

태인이 몸을 돌렸다. 그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온전히 응시했다.

천 회장은 태인이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는 몽상가에 가까웠다. 병이 완치되면 좋은 집안과 연을 맺고, 아이를 낳고, 편안한 일생을 맞
이하는.

─하지만, 회장님…….

─왜? 내 손자가 그 전에 죽기라도 할 것 같나? 자네가 성공을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때 백영길의 눈과 태인의 눈이 맞닿았다. 백영길이 눈길을 돌려 태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가 중재에 나서자 천 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자식새끼도 못 지키는 놈이 뭔 잔말이 그렇게 많아? 못하겠으면 그만 돌아가.


천 회장이 몸을 일으켰다. 백영길이 두 팔을 뻗어 조급하게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꼭 해내야 할 걸세. 내 손자가 죽으면 자네 아들도 남은 여생이 편치 않을 테니.

천 회장이 차갑게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인 그는 매서운 눈길로 태인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그가 곁을 스쳐 가며 말을 덧붙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혼자 외롭게 갈 수야 없지.

백영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넘어지려는 다리를 세워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태


인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비틀비틀 걸음을 내디뎠다.

태인이 발끝을 돌렸다. 현관문을 나서는 백영길을 쳐다봤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주차된 차 옆
에 웅크리고 있던 서우가 다가왔다.

─이 꽃 엄마가 좋아하는 거예요.

백영길이 쓰게 웃으며 서우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차 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는 서우를 수


국꽃이 만발하는 정원에 세웠다.

순간, 멈칫거린 백영길의 시선이 밖으로 나온 태인에게 가닿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멈추지 않


고 셔터를 눌렀다.

……탁, 회상을 마친 태인이 보고 있던 앨범을 덮었다. 그가 앨범을 장 비서에게 도로 넘겼다.


그는 무심한 눈동자로 태블릿 PC 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어려운 일 있으면 날 찾아오게나.

김 의원이 퇴원을 하면서 태인에게 했던 말이었다.

태인은 그날 김 의원의 병문안을 빌미로 방문하여 백지수표를 건네려고 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김 의원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조 원장에게도 딴 사람처럼 행동했다.

─고맙네.

그가 조 원장의 어깨를 토닥이고 뒷짐을 졌다. 그는 병원을 나서서 진을 치고 있는 취재 기자와


마주했다. 김 의원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태인이 세단에서 내렸다. 주변은 어슴푸레하다.

그가 정원을 지났다. 현관문이 열리고, 집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던 도우미들이 오가던 걸음을


멈춘 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던 장 비서가 사람들을 물렸다.


장 비서는 서재로 들어가 들고 있던 앨범을 책장에 꽂았다.
그 모습을 태인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지켜볼 따름이었다. 생각에 잠긴 눈매가 깊었다.

그 모든 걸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

달그락, 세화 제약 로고가 들어간 머그컵이 거실 테이블에 놓였다. 서우는 소파에 지친 듯 앉았


다. 그가 4 개의 커다란 비닐봉지를 쳐다봤다. 낡고 오래되거나, 불필요한 물건들이 담겨 있었
다. 그 옆에는 길게 쌓아 올린 책들이 있었다.

서우는 머크컵을 입술에 대고 물을 마셨다.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가죽 앨범은 결국 찾지


를 못했다.

“전화로 물어볼까.”

서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백영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뭐든 한번 빠지


면,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직접 가 볼까. 그러나 연구실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태인에게 말을 해 본들, 단칼에 거절당할 확률이 높았다. 가뜩이나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는 사


람이기도 하다.

역시, 장 비서님께 부탁을 해야 하나.

서우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밀려든 바람에 팔랑대는 색이


바랜 종이를 내려다봤다. 영문으로 된 기사 한쪽 모서리에는 커피 잔을 놓았는지, 동그란 얼룩
이 생겨 있었다.

서우는 상체를 당겨 빛바랜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금발의 리암은 식물학자로, 희귀한 식물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꽃대의 모양, 씨앗 위에 난 돌기를 나열한 글귀를 보다가, 시선이 테이
블에 펼쳐놓은 앨범에 닿았다.

자줏빛의 앨범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서우와 세화 제약 사원증을 목에 건, 하얀 가운을 입은 연


구원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 서우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남자에게 시선이 사로잡혔다.

귀를 덮는 짧은 머리를 한 박석원은 수수한 이목구비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사람도 쉽게 호감


을 느끼게 만드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줄기세포 연구에 매진해 왔
다. 누군가와 같이 연구를 하는 것이 서툰 아버지가 함께 연구실을 쓰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서우가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들어선 그가 책상 위에 놓아둔 스프링 노트를 집어 올


렸다. 가지런한 글씨가 빼곡한 종이를 바라보던 서우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8 월 27 일 박석원. 세포 연구 기술 유출.
노트를 바라보던 서우의 눈동자에, 과거 한남동 거실을 다급하게 걸어오던 장 비서의 모습이 어
렸다. 평소 장 비서답지 않게 그에게는 서우에게 인사조차 건넬 여유도 묻어나지 않았다.

서우는 도우미에게 트레이를 넘겨받아 서재 방문 앞에 다다랐다. 두 개의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


락 피어올랐다. 장 비서가 워낙 급하게 들어간 탓인지,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서우가 손을 올
려 노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상무님. 3 년 동안 200 억을 들여 만든 혈액 진단 기술까지 빼갔습


니다.

서우의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해외로 도주한 박석원이 함께 연구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료까지 모두 가져갔다고 합니다.


거기에 백 연구원의 자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생할 손실은 어느 정도입니까?

─정확하게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재무팀에서 전달받은 바로는 550 억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서우가 스프링 노트를 내려놓았다. 그가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태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은 결혼을 하고 보름이 지나서였다.

태인은 즉시 상용화를 지시했지만, 미국 의료 회사에서도 판매를 시작하였으며, 영업 비밀을 침


해한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어 왔다. 그로 인해 세화 제약은 법정 공방까지 가야 했음은 물론이
고, 발생된 피해 규모도 상당했다.

서우가 비닐봉지를 묶어 현관으로 옮겨 놓았다. 내일 학교를 가면서 챙겨 내려가면 될 터였다.


서우는 테이블에 놓아둔 자줏빛 앨범을 스쳐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샤워기에서 미지근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머리부터 희멀건 발끝까지 금세 흠뻑 젖었다. 두 손으


로 얼굴을 문지르던 서우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었다.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박석원이 기술을 빼내 가는 8 월 27 일은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이었다.

***

서우는 교수의 말을 듣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후의 볕은 따사로웠다.

수업을 마친 서우는 모처럼 지훈과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훈은 늘 앉는 곳에 가방을 두었다. 서


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책들이 즐비한 책장 사이를 누볐다.
밤새 아버지의 방에서 논문 자료를 찾아봤다. 서우는 학교 도서관에 구비된 알파에 관한 책들을
확인했다.

예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더 알고 싶고, 좀 더 이해하고 싶었


다.

서우가 책을 내려놓자 단번에 지훈의 시선이 향했다.

“전공 책도 아니잖아. 그건 다 뭐야?”

서우가 책 위를 탁탁 두드렸다.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서우가 의자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징- 휴대폰 진동음에 서우가 뒷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발


신자는 장 비서였다. 서우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거늘.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대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선 통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서우는
통화 연결을 누르고 장 비서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요?”

복도로 나온 서우가 왔던 길을 도로 들어갔다. 그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놓았던 책을


품에 안았다.

“나 먼저 갈게.”

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그에 비해 서우의 낯빛은 생기가 돌았다.

서우는 책을 품에 안고 교정을 달렸다. 그가 교문을 나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각선에 위


치한 카페가 보였다. 서우는 그곳으로 한달음에 뛰어갔다.

“하아…… 오래 기다리셨어요?”

서우가 안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카페에 앉아 있던 장 비서의 눈동자


가 요동쳤다. 서우가 내려놓은 책의 목록은 ‘알파 심리학’, ‘알파의 페로몬’, ‘알파 유전자’,
‘알파 해부학’이었다.

“아니요. 제가 음료로 주문을 해 두긴 했는데…….”

장 비서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읊조렸다. 서우가 맞은편에 앉으며 오렌지주스 잔을 들었


다. 그가 빨대에 입술을 대고 쭉 들이켰다.

“전화로 말씀하셔도 되는데요.”

빨대를 손으로 잡은 서우가 웃으며 말했다. 따라 웃는 장 비서의 뺨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는 오


전과 오후 내내 명품관을 누볐지만, 아무것도 구입하지 못했다. 뭘 사 와도 서우는 돌려보낼 것
이었다.
고심 끝에 장 비서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끄집어냈다. 붉은 봉투가 서우의 앞에 닿았다. 서우
가 눈으로 물어보다가 손을 뻗었다.

“한도는 없습니다. 그걸로 필요하신 것을 구입하시면 됩니다.”

장 비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선택권을 서우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그를 찾아오기 전에


태인에게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했으나, 그는 건성으로 듣는 듯했다. 그러니 의미도 없는 물건을
사서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바엔 장 비서는 서우가 직접 원하는 품목을 구입하도록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서우의 손끝에서 기울어짐에 따라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테두리가 빛난다. 물끄러미 블랙카


드를 바라보던 서우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태인 씨가 이걸 줬어요?”

“네.”

장 비서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서우의 눈이 더욱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는 카드를 봉투


에 도로 넣었다.

“그렇게 할게요.”

한껏 의기소침해진 모습을 바라보며 장 비서는 가슴 한구석이 콕콕 아렸다. 그는 알 수 없는 죄책


감이 들었다. 통증에 대한 의구심을 뒤로하고 장 비서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시간이 되시면, 저와 함께 결혼식 때 입을 턱시도 치수를 재러 가셨으면 하는데요.”

서우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


다. 장 비서는 서우의 책을 대신 들어 주었다.

그가 세단의 뒷문을 열었다. 서우가 앉으며 두 손을 뻗었다. 장 비서는 책을 넘겨주고 조수석에


올랐다.

부스럭,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차 안은 고요함이 가득했다. 장 비서가 룸미러로 뒤를 살폈


다. 그때 서우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가 가방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장 비서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색이 바랜


종이의 모서리에는 동그란 자국이 나 있었는데, 커피 잔의 자국 같았다.

“……식물학자?”

영문으로 된 기사를 읽으며 장 비서가 혼잣말을 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서우가 말했다.

“그 사람을 찾아줄 수 있어요?”

“이 사람을요?”
장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안전벨트가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몸을 틀어 뒤를 돌아봤다. 찢어
질 것처럼 얇은 종이, 식물을 들고 있는 금발의 리암에게 서우의 시선이 닿았다.

리암은 희귀한 식물이 자라는 곳이라면 절벽이라도 달려갔다. 그녀는 세계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녀를 바라보는 서우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거예요.”

장 비서가 종이를 가져가 리암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서우에게 뭔가를
묻고 싶은 듯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서우는 우울한 얼굴로 가져온 책을 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책은 ‘알파 해부학’이었다.

***

고가의 턱시도가 즐비한 명품관으로 장 비서가 들어갔다. 서우는 연륜이 묻어나는 재단사의 도움
을 받아 정확하게 신체 사이즈를 쟀다. 그의 앞으로 사람들이 턱시도를 가지고 나와 보여 주었
다.

장 비서는 느리게 소파에 앉았다. 오래 걸릴 것이었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턱시도의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그가 안주머니에 넣어둔 기사를 끄집어내려던 찰나였다.

직원을 바라보던 서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걸로 할게요.”

장 비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우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보았다. 길게 내려온 칼라의 선이
유독 매끄러운 하얀 턱시도였다.

서우는 마치 처음부터 마음에 둔 턱시도가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걸 바라보는 재단사의 눈이


빛났다.

“보시는 안목이 남다르시군요.”

진중한 재단사의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하다. 그건 이곳에 방문하였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일
까.

그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턱시도를 입어 보았다. 워낙 서우가 선뜻 고르지 못하자 장 비서가


나섰다. 그는 태인에게 맞춰 턱시도를 선별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서우는 기절하듯 쓰러졌
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반죽처럼 침대에 엎어진 채 억울함을 성토했다. 처음부터 태인이 골라둔 게 있었으면, 말


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랬으면 이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테니.

“입어 보시겠습니까?”
상념을 깨우듯 서우가 가리킨 턱시도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탈의실로 향했다. 등 뒤로 커튼이 촤르르 쳐진다. 서우는 도움을 받아 바지와 와이셔츠,


베스트, 상의까지 갖춰 입었다.

양쪽으로 달라붙어 있던 사람들에게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그녀들은 서우의 얼굴이 작고, 백옥


같은 피부에 순백의 턱시도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서우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귀에 닿는 머리카락, 연한 눈썹과 희멀건 피부, 조


금 상기된 입술을 훑어 아래로 내려갔다. 곧이어 눈동자가 새하얀 구두에 머물렀다.

그걸 바라보는 서우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이 턱시도를 입고 식장에 서 있던 서우는 이 옷의 진


가도, 의미도 알지 못했을뿐더러, 결혼식이 행해지는 내내 기가 잔뜩 눌려 바닥만 보고 있었다.

비공개로 치러진 결혼식, 아버지의 하객은 연구원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세화 제약 소속이


었다. 대비되듯 태인의 하객들은 천여 명에 달했다.

서우는 결혼식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듯했다.

─고개 들어.

하얀 구두를 바라보고 있던 서우의 귓가에 낮은 어조가 스며들었다. 눈앞에 대조되듯 검은 구두


가 다가왔다.

서우가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깨물었다. 안 그랬다간 원망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았


기 때문이다.

태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가 그럴수록, 저 사람들은 더 즐거워한단 걸 알아야지.

서우는 눈가가 뜨거웠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모자란 자신 말고, 능력 좋고 외모 출중한 오메가랑 결혼하면 되지 않은가? 왜 사람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건지…….

혀 밑까지 고인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때 기다란 검지가 턱밑에 닿았다. 차갑고 서늘한
감촉에 서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그렇게.

수려한 얼굴, 날카로운 태인의 눈매에 서우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너른 어깨를 감싼 블랙 턱시


도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에게선 어색함이나 동요되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태인이 다가온 것만으로도 서우에게 몰리던 시선은 배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많은 사람 앞


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했다. 몸에 밴 듯한 정제된 움직임. 극우성 알파이기에 그런 걸까. 저와
는 다른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가 서우의 턱밑을 들어 올린 손가락을 거뒀다.
그리고 잠시 뒤, 장 비서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와 태인을 데리고 갔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는 만큼, 서우의 머리는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왔다. 눈가로 몰린 열기가 귀로 번졌다. 그
는 잘 익은 벼 이삭처럼 고개를 떨궜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커튼이 좌우로 벌어졌다. 재단사의 목소리에서 격한 감격이 묻어났다. 소파에 앉아 있던 장 비


서가 몸을 일으켰다.

고가의 보석과 가구들을 당차게 거절하던 서우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랬던 그가 가장 수준 높은


턱시도를 선택했다. 그것도 태인과 똑같은 턱시도를 골랐다.

장 비서는 점점 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혹시 그가 지니고 온 물건들이 하나같이 조악하여 마


음에 안 들어 했던 걸까.

“이 칼라 부분에는 크리스탈로 장미꽃을 수놓으면 되겠습니다.”

재단사가 서우가 입고 있는 턱시도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소매를 바라보던 서우가 시선을 옮기어
재단사를 똑바로 마주 봤다.

“아니요. 전 꽃을 싫어해서요.”

“그러셨습니까.”

재단사는 턱시도를 마음에 들어 하는 서우를 바라보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천 상무님께서도 이 턱시도를 고르셨답니다. 정말이지, 두 분은 천생연분이신가 봅니


다.”

정확하게는 태인이 직접 방문하지는 않고, 여기서 추려 보낸 카탈로그에서 선택했다. 소매를 정


리한 서우가 고개를 들어 웃음을 지었다.

서우는 재단사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유리문을 나섰다.

장 비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서우를 데리고 액세서리가 즐비한 매장으로 이동했다. 다른


날로 일정을 잡으려고 했건만, 워낙 턱시도를 빠르게 고른 탓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장 비서의 안색은 회색빛이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서우는 가장 완벽한 순백의 턱시


도를 고른 안목을 선보였다. 그러나 반짝이는 귀금속이 가득한 매장에서 서우가 고른 건 실반지
였다.

장 비서의 안색을 본 서우가 가느다란 반지를 내려놓았다. 태인 씨 생각을 안 했네. 예전에는 너


무 화려한 반지를 받은 탓에 학교에는 끼고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서우는 무난한 반지를
고르려 했지만, 태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서우는 무광에 다이아몬드가 조그맣게 박힌 반지를 골랐다. 이 반지라면 학교에도 끼고 갈 수 있


을 법하다.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직원이 서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다. 네 번째 손가락에 미끄러지듯 안착하는 반지를 서우
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손끝을 살짝 구부렸다가 폈다. 묵직하다. 허전했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어쩐지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뒤이어 광채를 뽐내는 시계가 서우의 앞에 늘어졌다. 그는 태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시계를 막힘
없이 집어 들었다.

***

서우가 세단에 올랐다. 어느새 주변은 어둡게 변해 있었다. 조수석에 장 비서가 앉자 서우가 불
렀다.

“장 비서님.”

“예?”

장 비서의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더 그랬다. 그가 몸을 뒤로 돌리


자 서우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장 비서는 묘한 위압감을 느꼈다. 그건 태인에게서 느끼던
것과 닮아 있었다.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말씀하세요.”

“아버지 연구실에 좀 들어가고 싶어서요.”

서우는 아버지가 자주 집에 오지 않아 걱정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방문을 할 수 있도록 도


와달라 했다. 장 비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흔쾌히 답했다. 태인과 서우는 부부가 될 사이였
다. 출입증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차가 오피스텔 앞에 당도했다. 서우가 세단에서 내렸다. 그는 장 비서에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서우는 품에 책을 안은 채 종종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선 서우는 거실을 환하게 밝히고 욕실로 들어갔다. 짧게 샤워를 마친 서우가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아둔 책을 스쳐 가방을 붙잡았다.

서우가 붉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었다.

태인 씨가 주는 거라기에 받기는 했지만, 서우는 시무룩한 얼굴로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태인은 연말이라든가, 새해에 맞춰 선물을 주곤 했는데, 그 자신도 상자 안


에 든 물건이 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결국 장 비서님이 골라서 들려 보냈을 게 분명했다.

왜 하필 그날은 꽃과 케이크를 샀을까.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면서.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쓰러져 끝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차 안에는 꽃다발과 케이
크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인 태인이 구입한 것이라고 장 비서가 말해 주었
다.

서우가 블랙카드를 위로 들어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야트막하게 떼어졌다.

“태인 씨다워서 좋네…….”

***

이른 아침, 상무실.

“연구실에 출입을요?”

“네, 특별출입증을 만들어서 드리면 어떨는지.”

매끄럽게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 만년필을 세운 태인이 앞을 쳐다봤다. 장 비서는 저도 모르


게 뒤로 물러나려는 뒤꿈치에 가까스로 힘을 주었다.

“거긴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그걸 몰라서 장 비서가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장 비서가 잘 알고 있었다. 그


러나 상황이 다르다. 아니, 사람이.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두 달 뒤면 가족이 되실 분이니, 그 정도는 배려


해 드려도……”

장 비서가 말을 할수록, 태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장 비서가 넙죽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말을 맺은 장 비서가 상체를 조심스레 세웠다. 흘깃, 곁눈질로 태인의 안색을 살폈다.

태인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결재판을 누비는 손은 막힘이 없었다. 끼어들 틈도 없어 보였다.


장 비서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들고 있던 서류철을 움켜쥐었다. 그가 느릿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저, 상무님.”

그 혼자 결정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우 씨가 사람을 좀 찾아달라고 하는데요.”

태인의 손이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장 비서가 내미는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서른여섯 살, 식물학자인 리암입니다.”


장 비서는 보고를 하기에 앞서 그녀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다. 제일 위에는 서우에게서 받은 빛바
랜 영문기사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첨부된 그녀의 신상 명세서를 태인이 넘겨 봤다. 그
의 손끝에 맞춰 장 비서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

서우가 택시에서 내렸다. 하늘거리는 와이셔츠가 바람에 날렸다. 더워지는 날씨만큼이나 얇아


진 옷차림이었다. 그가 흘러내리는 가방을 어깨에 추켜올렸다. 그는 오피스텔에서 장 비서의 연
락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장 비서님.”

1 층 데스크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 비서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임시 출입증을 더디게 내밀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찍힌 출입증이었다. 오늘이 지
나면 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 드는 서우의 입가엔 웃음이 깃들었다. 장 비서는 서운해하거나, 아쉬워하지도 않는


서우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서우는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한 건 장 비서 혼자였나 보다.

“제가 옆에서 따라다니라고 지시하셔서, 불편하시겠지만 워낙 보안이 필요한 곳이라서요.”

두 사람이 상층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우는 손가락에 출입증을 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서우는 장 비서가 불편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야말로 주변에 있는 옥석이
가려진다고 하지 않던가.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장 비서는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태인의 발인을 마치는 그날까지도,


서우를 옆에서 보필했다.

“오늘은 수업을 일찍 마치셨나 봅니다.”

“아, 방학을 했거든요.”

“그렇습니까.”

장 비서는 서우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화답했다. 엘리베이터가 57 층에 멈추었다.

장 비서가 앞서 내렸다. 뒤이어 서우가 출입증을 움켜쥔 채 걸었다. 장 비서가 손가락을 뻗었


다. 지문이 인식되자 유리문이 열린다.

마주 오던 연구원이 장 비서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서우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긴 복도


는 좌우로 나뉘어 문마다 연구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패에 적힌 백영길 이름 석 자를 눈으로 확인했을 때였다. 서우가 출입증을 대기도 전에 문이 열
린다. 앞서 비집고 나온 흰 가운이 나부꼈다. 서우의 머리 위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비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박석원이 웃으며 나란히 서 있던 서우를 쳐다봤다.

“서우도 같이 왔네.”

서우의 손끝에서 달랑달랑 움직이던 출입증이 느리게 멈추었다. 박석원이 뒤를 돌아본다. 그때


까지도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백영길을 향해 서우가 왔음을 알렸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
다.

백영길이 벌떡 일어난 탓에, 의자 바퀴가 뒤로 데구루루 구른다. 힘있게 밀려나 박석원의 의자


에 닿아 부딪쳤다.

“내가 부를 땐 대답도 하지 않으시더니, 서우가 왔다고 저렇게 달라지네요.”

박석원은 너스레를 떨며 장 비서와 간단한 사담을 주고받았다. 서우는 그의 웃는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서우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형, 어디 가시는 거예요?”

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오전 내내 보고서를 썼더니, 배가 너무 고프네. 연구원은 실험 하나 마치면 써야 할 서류


가 산더미거든.”

그때 백영길이 다가와 서우의 옆에 섰다. 박석원이 어린 동생을 대하듯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
며 말을 덧붙였다.

“올라올 때 케이크라도 사다 줄까?”

“네.”

서우가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박석원이 그의 옆을 지나간다. 서우의 시선이 멀어져 가는 박석


원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백영길이 허둥지둥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집에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서우가 시선을 옮기어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수염은 언제 깎은 건지, 턱밑이 거뭇거뭇하다, 머


리카락은 좌우로 움켜쥔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고뇌의 흔적일 거다. 그렇게
잡아당기는데도, 머리카락이 풍성하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서우가 지퍼를 당기어 가방을 열었다. 백영길이 입을 옷가지가 가지런히 접혀 있다. 서우는 그
안에서 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세수는 했어?”

장 비서가 몸을 뒤로 돌렸다. 부자(父子)간의 대화에 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수건을 넘겨받


은 백영길이 턱밑을 쓱쓱 더듬는다. 그가 몸을 돌려 안으로 돌아 들어가더니, 서랍을 열어 면도
기를 챙겼다. 서우의 옆을 스쳐 가며 등을 토닥였다.

“다리 아플 테니까 앉아 있어.”

교차하듯 서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장 비서는 조금 망설이더니, 서우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장 비서는 어디까지나 태인의 지시에 충실하게 임했다.

사무실은 2 인이 사용하는 구조였다. 걸음을 옮겨가던 서우의 눈길이 한곳에 다다랐다. 저번에
왔을 땐 보지 못했던 커다란 원형으로 된 실험기기를 바라봤다. 안쪽을 볼 수 있도록 유리 돔 안에
있었다. 장 비서가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혈액 분석 기기입니다.”

“아…….”

서우가 짧게 입을 열어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자 장 비서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혈액을 집어넣으면, 이 기기가 혈액 속에 있는 유전자를 토대로, 향후 일어날 수 있는


질병에 대해 예견을 해 주는 겁니다.”

의료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혈액만으로도 앞으로 발병이 가능한
병을 유추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을 토대로 대책을 세우고, 한발 앞서 미리 예방하여 치료
할 수 있었다.

장 비서는 기계의 앞으로 다가가 혈액이 투입되는 입구와 결과가 송출되는 모니터를 번갈아 가리
켰다. 서우의 눈에 비친 호기심을 채워 주려는 듯했다.

“최종 점검을 마치면, 이 기기는 병원에서 상용화가 이뤄지게 될 예정입니다. 이래 보여도 천


상무님께서 3 년이나 각고하신 끝에 완성이 됐답니다.”

장 비서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러다가 너무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서우의 안색을 살핀 장 비서가 움찔거렸다. 서우의 눈빛이 어쩐지 차갑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는지, 눈이 마주친 서우가 웃었다.

“잘됐네요.”

서우가 걸음을 옮기어 백영길의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고, 그는 습관처럼 어질러
진 책상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 비서가 혈액 진단 기기에 시선을 옮기었다.

서우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뭔가를 끼적인 메모지와 뚜껑이 열린 볼펜, 가게 오픈 행사에서 받


은 듯한 병따개 같은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엉켜 있었다.
그는 눈으로 빠르게 물건을 확인했다. 없어. 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옆으로 밀고, 무
릎 높이만 한 개인금고에 손가락을 뻗었다. 0426.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손끝에는 거침이 없었
다. 문이 열리는 삐리릭 소리가 나자 장 비서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서우는 순간 굳었다.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러십니까?”

장 비서가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서우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침착하게 가방에서


백영길의 옷을 꺼내었다.

“아버지가 입던 팬티를 여기에 넣어놔서요.”

그러라고 있는 금고가 아니었다. 할 말을 잃은 듯, 장 비서가 발끝을 돌렸다. 이러니 서우 씨가


아버지의 걱정을 그토록 하는 모양이었다.

서우가 한쪽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댔다. 그는 새 옷을 넣으며, 서류가 켜켜이 쌓인 안쪽을 손바


닥으로 훑었다. 그의 손끝이 작게 떨린다.

서우가 금고를 닫고 몸을 일으켰다. 가방의 지퍼를 채워 어깨에 짊어지고는 백영길을 기다렸다.


장 비서는 혈액 진단 기기를 눈으로 어루만졌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얼굴이 말끔해진 백영길이 들어온다. 장 비서가 즉각 쳐다봤다. 서우는


조금 늦게 아버지를 바라봤다.

백영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맞댔다. 서우의 얼굴이 급속도로 가라앉은 걸 그는 알아챌 수


있었다. 서우가 몸을 비스듬히 틀어 물었다.

“엄마 사진이 들어 있는 앨범 말이야. 그거 어디에다 뒀어? 아무리 찾아봐도 집에는 없던데.”

뒤돌아 있던 장 비서의 어깨가 곤두섰다.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천태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백영길의 모습이 영상처럼 펼쳐졌다. 더욱이 흰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백영길의 손도
얼어붙었다.

“……잘 찾아봤어?”

백영길이 수건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서우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가 자세를


바로 하여 백영길을 온전히 마주 봤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그럴…… 리가 없는데?”

백영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서우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어, 상심한 듯한 모습


이었다.

서우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백영길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장 비서가 손가락을 뻗었다.
차마 백영길의 행적에 대해 밝힌 순 없지 않은가. 그가 도움을 주어야 할 때였다.
“이 기기 최종 테스트는 끝났습니까?”

백영길의 눈길이 뒤로 향했다. 장 비서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천 상무님께서 심혈을 기울이는 거 아시고 계시죠? 이번에는 꼭 성공하셔야 합니다.”

***

세화 제약 1 층 로비로 내려온 박석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접객용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정장을 입은 그가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걷는다. 박석원이 간격을 벌리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밖으로 나온 박석원은 주위를 의식했다. 앞서 걷는 남자가 건물 뒤로 이동했다. 그가 한적한 곳


에 주차된 검은 차의 뒷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운전기사가 내린다.

박석원은 뒷좌석에 앉아 있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금발을 쳐다봤다. 차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


다. 박석원을 데리고 왔던 남자는 차 뒷문에 서 있었다.

데이브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박석원이 영어로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전 그런 짓 안 합니다. 그 돈도 필요 없어요. 더 이상 찾아오지 말아


요.]

빠르게 말을 내뱉은 박석원이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데이브가 선글라스에 날아든 먼지


를 떼어내듯 후- 불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자신만만하게 움직였다.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내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거든.]

차 뒷문이 열렸다. 데이브의 말이 이어졌다.

[그 여자, 찾고 있지?]

조금 열려 있던 뒷문을 문밖에 있던 경호원이 손바닥으로 밀어 닫았다.

***

장 비서가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손목을 문질렀다. 백영길은 그의 혈액을 들고,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유리 돔이 갈라지듯 열린다.

고도화된 기계는 소량의 피로도 검사가 가능했다. 더구나 이 기계는 피 이외에, 체액을 넣어도
검사가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병원뿐만 아니라 다각도에서 활용이 가능한 진단 기기였다.
백영길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그가 이토록 민첩한 건 연구와 관련됐을 때뿐이었다. 서우는
그 모습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았다.

서우는 아버지의 책상과 서랍, 개인금고까지 확인했지만 앨범을 찾지 못했다. 오피스텔도 샅샅


이 뒤졌건만, 보이지 않는다.

……벌써 태인 씨의 서재에 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서우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어떻게나 마나 아버지가 줬을 확률이 높았다. 그건 백영길의 물건이


니까.

서우가 멀찌감치 앉아 관망하듯 정면을 응시했다. 이내 그의 눈동자가 흘러내리듯 무릎 높이의


금고에 머물렀다.

비밀번호 0426 은 서우의 생년월일이다. 그리고 태인이 꽃과 케이크를 구입한 날이기도 하다.

잊고 있었다. 그간은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계실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


녀의 병환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아주 가끔 어머니가 잊지 않고 기억을 해 줄 때도 있
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지났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생일 같은 건 잊고 살았는데.

“나왔습니다.”

장 비서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상용화되기 전이다 보니, 암호처럼 떠 있
어 해독을 요했다. 그가 백영길을 향해 손짓했다. 백영길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우성 알파인 장 비서님은 앞으로 주기적인 건강검진이 필요하겠네요.”

“왜요? 어디가 많이 안 좋나요?”

장 비서는 모니터를 쳐다봤지만,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숫자가 전부였다.

“혹시 가족 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장 비서는 속이 뜨끔했다. 연임과 그녀의 어머니가 떠오른 탓이었다. 사촌지간이란 걸 아는 사


람이 이곳에 있기는 하다. 눈치를 보듯 서우를 바라봤다.

의자에 앉아 있는 서우의 눈동자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미리 예방을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 기계는 그런 용도니까요.”

백영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장 비서가 시선을 옮기었다.

“그래도 세화 병원에 방문해서 검진을 한번 받아 보세요.”

달칵, 문이 열린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이동했다. 들어서는 건 박석원이었다. 서우가


언제 침체하여 있었냐는 듯 웃으며 일어난다.
“형, 제 케이크는요?”

박석원의 손은 빈손이었다. 그가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난색을 표했다.

“미안, 나 혼자 다 먹고 와 버렸네. 배가 너무 고팠거든.”

그렇다고 뭔가를 먹고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내려가기 전보다 혈색이 더 창백하
진 않을 테니까.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랑 저녁 같이…….”

“아니, 이게 왜 이래?”

백영길이 우왕좌왕했다. 그는 모니터에 연속하여 뜨는 숫자를 바라보며 키보드에 손가락을 놀렸


다. 박석원이 곁으로 다가와 참여를 했다. 급기야 제로 코드가 뜨기 시작했다.

장 비서가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렸다. 서우가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으러
가긴 틀린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문을 나서는 동안 백영길과 박석원은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
다.

서우가 복도를 거닐었다. 장 비서가 옆을 따라 걷는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 멈췄다. 서


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인 씨가 알면 실망하겠네요.”

“아무래도…….”

“말씀 안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장 비서는 아주 찰나 동안 고민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태인이 서 있었


기 때문이다.

“사, 상무님?”

장 비서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6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는 본래 서우와 백영길이 함께 연


구실을 나서면 상무실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정에 없던 혈액을 채취하고, 검사를 하면
서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을 줄이야.

정갈한 블랙 슈트 차림인 태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안 탈 겁니까?”

낮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장 비서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서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뒤이어 장 비서가 걸음을 내디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던 순간이었다.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고, 박석원이 다다다 뛰어나왔


다. 서우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가 유리문을 밀치고, 한달음에 달려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하얀 가운이 나부꼈다. 그는
43 층을 눌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인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박석원이 연달아 새어 나오는 숨을 고르듯 목울대를 손으로 훑고 답했다.

“혈액을 인식하는 단계에서 제로 코드가 떴습니다.”

“누구의 피였습니까?”

장 비서가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보관 중이던 혈액 샘플이었습니다.”

박석원이 힘있게 말을 덧붙였다.

“염려 마십시오, 상무님. 공학 엔지니어들이 아직 사무실에 있을 겁니다. 말씀하신 기한까지


는 문제없습니다.”

최종 승인은 9 월 1 일이었다. 태인이 8 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어 일정이 자연스럽게 미뤄진 것이


었다. 전광판의 숫자가 50 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49 가 되었을 때 서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태인의 시선이 미끄러진 듯 옆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우가 보고 있는 건 박석원이었다.

“어? 나?”

박석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가 주변을 의식하듯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거절을 하
려는 그의 입을 막듯 서우가 선수를 쳤다.

“저번에 방학하면 놀이동산에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내…… 내가?”

박석원이 입을 연달아 뻐끔거렸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43 층에 멈추었다. 문이 열린다. 서


우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방긋 웃었다.

“저 방학했어요. 그러니까 일요일 오전 11 시, 서울역에서 기다릴게요.”

“그, 그래.”

박석원은 밀려드는 눈총에 저도 모르게 답하고 말았다.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서우가 누


르고 있던 버튼에서 손을 뗐다.

─방학하면 형이랑 놀이동산에 갈래?

─네!
박석원이 그 약속을 한 건, 자줏빛 앨범에 들어간 사진을 찍고 난 뒤였다. 그러니까 중학생이 된
서우에게 했던 약속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

엘리베이터 내부에 적막이 감돌았다. 찌이익- 그로 인해 서우가 가방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유


독 크게 퍼졌다.

서우가 지갑을 열었다. 둥글게 다듬어진 손톱,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블랙 카드를 꺼내 태인의
앞으로 내보였다.

“이걸로 태인 씨 저녁 시간도 살 수 있어요?”

장 비서는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순간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숨이 가빠왔다.


그에 반해 서우의 눈은 천연덕스러웠다. 그가 태인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카드를 아래로 내렸
다.

“바쁘면 어쩔 수 없구요.”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1 층에 도착했다. 서우가 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이다. 그보다 태인 더 빨


랐다.

“술은 빼도록 하지.”

목덜미를 당길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서우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가 뒤를 쫓아가듯


걸음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태인에게 허리를 숙이며 길을 내어준다.

서우는 그의 너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은 조각처럼 다듬어져 있었다.


태인은 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게다가 190cm 가 넘는 키라서 그런가. 앞서 걷는
태인이 든든한 보호막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그 막이 사라졌을 때, 서우는 절망감을 느꼈던 건
지 모른다.

장 비서가 앞질러 가더니,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태인이 뒤를 돌아봤다. 서우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달려가듯 차에 올랐다. 코끝에 물씬 백단나무의 페로몬이 닿아 왔다. 익숙했
으며, 그리웠던 향기였다.

***

우당탕-

백영길이 연구실을 바쁘게 누볐다. 유리 돔이 좌우로 갈라지듯 열린다. 재차 가동을 돌리려는


듯 혈액 진단 기기에서 등을 돌려 샘플을 담아 놓은 냉동고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어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혈액을 챙겨 기기 앞에 섰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우리 서우는……. 백영길의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했다.

10 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줄기 세포 연구에서 어떠한 성과도 보지 못했다. 인간의 몸은 그리 단


순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하면 서우조차 천 상무의 눈 밖에 나고 말 것이었
다.

두 사람의 시작점이야 어찌 됐든, 태인은 열 살, 열다섯 살, 스무 살, 스물다섯 살. 네 번의


고비를 넘겼다. 그는 이번에도 고비를 넘길 거다. 백영길은 서우가 그의 심경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가 혈액을 넣고,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유리 돔이 닫힌다. 백영길이 건조하게 말라가는 아


랫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내 기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백영길이 기다
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서우야, 이제 그만 저녁 먹으러…….”

백영길이 주변을 살폈다. 그는 텅 빈 주위를 보고 낙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가 버린 거지?

백영길이 자책하듯 머리카락을 휘적거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못 챙기고, 정신머리가 이렇


게 없어서야.

뒤늦게 그가 집어넣은 혈액 샘플에 적힌 기호를 확인했다. 백영길은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우성 오메가인 서우의 피였다.

아까웠다. 되도록 서우의 피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워낙 급박하여 정신없이 손에 닿


는 샘플을 넣었다. 그때 혈액 진단을 마친 듯 모니터에 숫자가 나열되었다. 그걸 지켜보는 백영
길의 눈이 커졌다.

“빨리요! 빨리.”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박석원이 뛰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공학 엔지니어 두 사람이 들어


온다. 그들은 백영길의 앞을 가로질러 기계를 살폈다. 3 년이라는 시간과 200 억이 넘는 투자가
들어간 설비였다.

박석원은 퇴근을 하려던 공학 엔니지어를 복도에서 만나 급하게 불러왔다. 그가 넋을 놓고 있는


백영길을 부르려다가, 같은 곳을 보듯 모니터에 뜬 결과를 응시했다. 일순 눈가를 찌푸리며 낮
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하. 아무리 테스트를 해 본다고 해도 그렇죠. 극우성 오메가의 피를 사용하시면 어쩝니까.”

박석원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누구의 피입니까?”

오메가는 소수만이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극우성 오메가의 피를 구하는 건, 더 어려웠다. 그


러나 세화 제약은 병원을 따로 두고 있기 때문에, 무리 없이 조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구하기 어렵고, 귀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백영길의 무릎이 꺾였다. 그가 뒤로 넘어가듯 바닥에 쿵 주저앉았다. 백영길은 입을 벌린 채 정
면만을 응시했다. 박석원은 그를 일으키려는 듯 팔을 붙잡았다. 공학 엔지니어가 끼어들듯 말했
다.

“기계 안으로 혈액이 조금 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정상으로 작동하는 것 같은데…… 내일까지는 원상복구 되겠죠?”

박석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영길의 팔을 붙잡았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학 엔지니어가 키보드를 조작했다. 모니터에 떠 있던 숫자가 바뀌고, 보호막을 두른 세포가


담긴 영상이 나타났다. 박석원이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 화면을 들여다
봤다.

박석원의 얼굴이 점점 더 앞으로 향했다. 공학 엔지니어를 향해 말했다.

“방금 장면 뒤로 돌려주세요.”

공학 엔지니어가 화면을 뒤로 돌렸다.

“배속 늦춰 주세요. 우측 모서리 확대해 주세요.”

박석원이 연달아 요청을 하자, 바닥에 앉은 백영길이 같은 곳을 올려다봤다.

화면 가득 채워진 두 개의 세포가 아주 느리게 결합하듯 달라붙더니, 급기야 하나로 뭉쳐졌다.

“백 연구원님. 이거 어떻게 한 겁니까?”

그답지 않게 조급하게 물었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박석원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아래로 내


렸다.

“네? 이거 어떻게 하신 거냐고요.”

박석원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백영길의 팔을 재차 잡아 일으켜 세웠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백영길의 목울대가 덜덜 떨렸다.

“2 차…… 발현.”

보편적으로 일곱 살이 되면 발현을 시작한다. 다수의 베타와 소수의 알파, 극소수의 오메가는


그때 나뉘었다. 그러나 극히 일부분은 뒤늦게 발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

“오셨습니까, 상무님.”
지배인이 룸으로 안내를 했다. 은은한 조명과 엔틱한 촛대, 고풍스러운 그림이 자리한 내부는
밖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아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서우는 태인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이 다가와 의자를 빼 주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
며 착석을 했다. 그때까지도 장 비서는 서우의 조그마한 옆얼굴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당돌함에서 오는 것일까. 엘리베이터에서 카드를 꺼내 보이던


서우의 모습에 장 비서는 경악하여 소리를 지르지 않은 자신의 인내심에 경탄했다. 그도 그럴 것
이 블랙 카드의 주인은 천 상무가 아니던가.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비워두었습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장 비서가 연락했다. 천태인이 의자에 앉자 지배인의 등 뒤로 다가선 남자가


두 사람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금색의 술이 달랑거렸다. 서우는 글자를 눈으로 바라봤다. 지배인이 눈짓했다. 메뉴판을 내밀


었던 남자가 서우의 곁으로 다가서 추천을 돕겠다고 나섰다.

서우는 고개를 저었다. 먹을 음식은 정해져 있었다. 태인은 주로 자연식 음식을 선호했다.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그가 왜 그렇게 건강을 우선시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서우가 자연식 메뉴 선택을 마치고, 태인을 바라봤다. 그가 짧게 입을 열었다.

“같은 걸로.”

“와인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그건 됐어요.”

직원이 메뉴판을 챙겨 나가고, 지배인이 천 상무와 서우에게 번갈아 인사를 한 뒤, 룸을 빠져나


갔다. 문이 닫히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서우는 어쩐지 태인이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우가 손을 뻗어 물 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떼어지는 아랫입술이 미약하게 뭉개졌다. 태인은


거침없이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찾는 거지?”

차가운 물이 혀를 스쳐 목 안으로 넘어간다. 서우가 물을 삼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태인


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태인은 감정은 숨기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의 냉담한 눈매는 사람을 관통하는 것처럼 꿰
뚫어 보곤 했다. 그러나 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내를 숨기는 데는 서툴렀다. 그러니 웃음으
로 속을 감출 수밖에.

“그거 물어보시려고, 시간 내주신 거예요?”

서우가 다소 실망을 한 것처럼 격앙되게 말끝을 올렸다. 태인이 상체를 조금 당기었다. 블랙 슈


트에 미세한 음영이 생겼다.
“불쾌해, 네 태도.”

서우가 눈을 끔벅거렸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날 떠보는 기분이 들어.”

태인은 역시나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서우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심하고 있는 모습이


었다. 태인이 당기었던 상체를 뒤로 기댔다. 넥타이를 고정한 백금 핀이 반질거렸다.

“조금 전만 해도 그래. 마치 내가 고르려고 하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어.”

서우가 입꼬리를 과하게 당겨 웃었다.

“우연이겠죠…… 저도 그게 먹고 싶어서.”

“아니, 우연이 반복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지.”

태인의 눈동자에 조명 빛이 깃들었다.

“다시 묻지. 그 여자 왜 찾아?”

“사실대로 말하면 제 말 믿어주실 거예요?”

서우의 입가 웃음이 느리게 지워졌다. 태인의 눈매가 자못 매서웠다. 더 이상의 말장난은 용납


하지 않겠다는 듯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지배인이 들어왔다. 그의 등 뒤로 요리사가 줄지어
따라 들어온다.

그들은 테이블을 빠르게 채웠다. 태인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접시에도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서


우만 쳐다보았다.

지배인이 요리에 관해 설명을 하려고 하자, 태인이 손짓했다. 지배인은 눈치껏 맛있게 드시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가 문을 나섰다.

서우가 손을 뻗었다. 그가 포크를 들어 접시를 둘러봤다. 뒤늦게 허기가 느껴졌다. 뭘 봐도 군


침이 돌았다. 기름기가 쏙 빠진 담백한 고기를 찍어 올렸다.

“이번 주 일요일 뭐 하세요?”

태인의 눈가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서우는 그의 앞에서 박석원에게 일요일 날 오전 11 시에 만나


자는 약속을 잡았다. 그러니 이어질 말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또한, 그의 인내심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우가 말을 덧붙였다.

“놀이동산 같이 가 주시면 사실대로 말할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태인은 서우가 아니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다만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될 뿐. 서우
의 입술이 우물거렸다. 그가 맛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씹을 것도 없이 살살 녹아 넘어갔다. 그러나 이제 앞에 있는 태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우가 천천히 눈을 맞대고 입을 열었다.

“석원 형, 동생이에요.”

천태인은 짧게 침묵했다. 뒤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박석원이 떠오른 듯 서우를 응시했다.


서우가 포크를 재차 움직였다.

“어릴 때 놀이동산에서 여동생을 잃어버렸거든요. 리암은 그때 해외로 입양이 되어서 만날 수 없


었어요.”

“넌 그걸 어떻게 알지?”

서우는 서재에서 장 비서가 태인에게 올리던 보고를 떠올렸다. 그도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었다.

미국 의료 회사에서 박석원에게 제시한 건, 돈이 아니었다. 부모를 떠나보낸 박석원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 찾고 싶은 가족.

재회한 두 사람은 미국 의료 회사에서 연구를 이어 나갔다. 박석원은 줄기 세포 연구에 박차를 가


했고, 리암은 희귀한 식물에서 유전 형질을 발견해 냈다.

“여동생을 찾고 있다고 말해 준 건 석원이 형이었어요.”

“아니.”

태인은 서우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의 눈동자가 냉담하게 바뀌었다.

“리암이 여동생인 걸 어떻게 알았지?”

더 이상 속이기는 어려울 거 같았다. 서우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봤어요.”

“어디서?”

“꿈에서.”

서우는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겪었던 일들이 순서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러나 그걸 태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린 이미 결혼을 했었고, 아
이를 가졌고, 그리고 태인이 죽었다고.

그 말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꿈?”
“네.”

태인의 눈빛이 싸늘하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아니요. 안 믿을 줄 알았어요.”

태인이 손을 뻗었다. 그가 잔을 들어 물을 전부 들이켰다. 그의 눈동자가 벼린 것처럼 날카롭


다.

“꼭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

풀썩-

서우가 침대에 엎드렸다. 이제 막 샤워를 했기 때문인지, 그의 얇은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서우가 몸을 돌렸다. 창밖에서 스며 들어온 빛이 물결처럼 너울대는 천장을 올려다봤
다.

눈가가 뜨거웠다. 그리고 열이 몰리는 이마도.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온다. 일렁거리던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서우의 입술이 떼어지고 얕은
숨이 새어 나왔다.

“감기인가.”

그러고 보니 히트 사이클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오메가는 매달 발정기인 히트 사이클이 존재했다. 그 기간에는 주로 억제제인 주사를 이용하거


나, 약을 복용해야 했다.

서우가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책상 서랍을 열어 알약을 꺼내었다. 서우는 주방


으로 가, 물과 억제제 한 알을 꿀꺽 삼켰다. 그가 눈을 감다시피 한 채 소파에 드러누웠다. 지
친 듯 금세 수마에 잠겨 들었다.

***
일요일 오전 9 시, 서우는 집 안을 분주하게 오갔다. 그가 목에 수건을 건 채 책상 앞에 섰다.
서랍을 열어 억제제를 꺼내었다. 발정기 주기에 따라 다르지만 서우는 보통 일주일가량을 복용해
야만 했다. 그런데 몸에 열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서우가 약을 입에 넣었다. 세화 제약 로고가 들어간 머그컵에 물을 가득 채워 전부 마셨다. 서우


가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뜨겁다.

놀이동산에 가서 기구를 탈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서우는 그곳에서 박석원을 설득해 볼 요량이었다. 아버지에게는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인에게 박석원이 떠날 거라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태인의 눈동자가 깊게 물들었던 게 마음
에 걸렸다.

─돈으로는 붙잡을 수 없을 거예요.

─네가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건……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서우의 말에, 태인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서우가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쳐 입었을 때였다. 발밑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박석원이었다. 서우가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귀에 댔다.

“지금 출발하려던 참이었어요.”

[다행이다. 내가 지금 급하게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하거든. 미안한데 놀이동산은 다음으로 미뤄


야 할 것 같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박석원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휴일에 출근을 하는 사람치고 활력
이 넘쳤다.

[다음에 연구실에 놀러 오면 내가 맛있는 밥 사 줄게.]

“네, 기대할게요.”

서우가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오전 9 시 30 분이라 떠 있던 숫자가 사라졌다. 그가 옷을 입은


채로 걸음을 내디뎠다. 장 비서님에게 한 번 더 출입증을 부탁해야 하나 싶었다. 놀이동산이라
면 감성에 젖어 더욱 설득하기 쉬울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뭐든 계획대로 되는 건, 없나 보다.

서우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조금 무거웠다. 보통은 억제제 한 알을 먹으


면 금방 괜찮아지곤 했는데, 감기몸살인가.

몽롱한 눈빛을 한 서우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점차 아래로 향하다가 팔걸이에 뒷머리가
닿았다. 서우가 눈을 감았다.

***
박석원이 몰고 온 차가 세화 제약 앞에 멈췄다. 그가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는 1 층 로비에
서 장 비서를 만났다.

일요일인 터라 건물 내부가 텅 비어 있어 두 사람의 발소리가 거듭 울렸다. 박석원이 가슴에 손을


올려 심장을 다독이듯 짓눌렀다.

“정말입니까? 상무님께서 제 여동생을 찾으셨다는 게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장 비서는 담담한 어투로 화답했다. 리암은 서우의 말대로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녀에게도
사람을 보내었다.

엘리베이터가 65 층에 당도했다. 장 비서가 내리고, 박석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대체 그 아이가 거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아셨답니까? 아니 그것보다 제게 동생이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아시고요.”

이곳으로 오는 내내 박석원은 장 비서의 말을 좀처럼 알아듣기 힘들었다. 장 비서가 상무실의 문


을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직접 물어보시죠.”

박석원이 시선을 옮기어 안쪽을 들여다봤다. 탁 트인 전경, 길게 나열된 테이블과 소파, 선반


에는 비어 있는 곳도 많았다. 태인의 성격이 곳곳에서 엿보이는 내부는 필요한 물건만 놓여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석원이 이곳에 오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올 때마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다.


책상에 앉아 있던 천태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을 마주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도
박석원은 압도되는 걸 느꼈다.

태인의 입술이 서늘하게 떼어졌다.

“앉아요.”

박석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잠시 뒤, 장 비서가 찻잔을 챙겨 안으로 들어왔


다. 소파에 앉아 있던 박석원은 긴장된 얼굴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오셨습니까?”

그답지 않게 긴장감을 밀어내려는 듯 질문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화제를 잘못 꺼낸 듯하다.


마주 앉은 태인의 눈동자가 냉담하다. 베스트가 빠듯하게 펴진 그가 왼손에 착용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죠.”


무릎을 움켜쥔 박석원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는 태인의 입술이 떼어지길 기다렸다. 장 비
서가 책상에 있던 서류철을 가지고 걸어온다. 그가 보기 좋게 펼쳐 박석원의 앞에 놓았다. 그곳
에는 계약서가 담겨 있었다. 서명란에 기입된 이름은 영문으로 ‘리암’이었다.

“이건 사본입니다. 원본은 지금쯤이면 비행기를 탔겠군요.”

장 비서가 시간을 체크했다. 그는 서우의 부탁을 받았지만, 혼자서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


었다. 그래서 태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서우에게서 받은 낡은 기사 하나만을 그
에게 보여 줄 순 없었다.

장 비서는 보고하기에 앞서 리암에 대해 사전 조사를 마쳤다.

─서른여섯 살, 식물학자인 리암입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전적이 있습니다. 다음 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국인입니다.

태인은 금발을 가진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깊게 들여다볼수록 눈매와 얼굴형이 동양


인에 가까웠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리암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놀이


동산과 솜사탕이었습니다. 오빠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을 했는데. 더 이상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태인은 찰나의 고민을 마치고 사람을 수소문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장 비서는 서우의 말
대로 그녀를 찾아냈다.

장 비서는 그곳으로 직원을 보냈다. 태인은 그녀에게 세화 제약으로 오라고 스카우트를 제안했
다. 그건 어디까지나, 리암의 능력을 따져 보아서였다. 그녀는 식물의 우열을 맞추어 재배를
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술이 백 연구원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달 안으로 그쪽을 정리하고,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무리 없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장 비서


는 말을 하며 서류철 위로 휴대폰을 얹었다. 금발의 리암이 화초를 키우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틀 전에 전송받은 사진이었다. 박석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두 사람이 정말 가족인지도 정확하게 판명이 나겠지요.”

박석원이 무릎을 세게 쥐었다. 그의 귓가에 데이브의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여자, 찾고 있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거 확인했어. 그러니 이제 내 이야기도 들어 봐야


지.

데이브는 8 월 안에 연구소에 있는 혈액 진단 기기의 설계도와 줄기 세포 연구 기술을 가져오도록


요구했다. 그러면서 박석원의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DNA 일치해. 피는 못 속이나 봐. 그 여자, 학자야. 동생 봐야 하잖아. 안 그래?


데이브는 박석원에게 사진을 전송해 주었다. 박석원은 마침 천태인의 결혼식이 잡혀 있는 그날이
좋을 것 같다고 화답을 한 상태였다.

박석원은 일이 정리되는 대로 리암을 찾아갈 계획을 세워놓았다. 그녀를 풍파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석원의 눈동자가 웃고 있는 리암의 옆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변해 있다.

“확인…… 안 해 보셔도 될 겁니다. 제 동생이 맞거든요.”

장 비서의 시선이 아래로 고정됐다. 태인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걸음을 옮기어 슈트


상의를 낚아챘다.

단추를 끼울 새도 없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어 귀에 댔다. 수신자는 백


서우였다.

***

징-

소파에 누운 서우의 머리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징-

끊어졌다가, 재차 울리길 반복하는 통에 서우의 눈꺼풀이 들렸다. 그가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을


들었다. 박석원과 통화를 마치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서우가 액정에 떠 있는 태인의 번호를 바라봤다. 서우가 연결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너머로 차
가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야?]

“……집이요.”

몽롱한 시야를 다잡듯 서우가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가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걸터
앉았다. TV 앞에 있는 탁상시계가 11 시를 가리켰다.

휴대폰 너머로 정적이 길어진다. 서우가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가 끊어진 건 아니었다.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대며 물었다.

“그러는 태인 씨는 어디신데요?”

[서울역.]

서우의 머리가 갸웃거렸다. 이마에 오르는 미열 때문인지, 머리가 한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거기서 뭐 하시는데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어쩐지 그의 심사가 뒤틀린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서우의 옆머리가


재차 소파 팔걸이에 닿았다. 그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오전 11 시, 서울역에서 만나요.

엘레베이터 안에서 낭랑하게 울리던 제 목소리였다. 박석원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 자리에는 태


인도 있었다. 서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가 시계를 응시한 채 말했다.

“놀이동산, 가시려구요?”

[내가 거길 왜 가.]

“그럼…….”

서우가 한 손을 올려 눈을 문질렀다. 한쪽 눈가가 찡그려진다. 그럼에도 일렁이는 시야가 자꾸


만 부옇게 일그러졌다.

“집에 들어가시기 전에, 약 좀 사다 주고 가세요.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지, 꼼짝도 할 수가 없


어요.”

[…….]

“제 말 듣고 있어요?”

[끊어.]

일말의 여지도 없이 통화가 끝났다. 자세를 바로 하듯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개도 안 걸린다


는 여름 감기에 걸렸나 보다. 서우의 뻑뻑한 눈꺼풀이 금세 말려 내려왔다.

***

“저…… 상무님.”

조수석에 앉은 장 비서가 눈치를 보았다. 태인이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통화가 끝난 액정을 한참이나 노려보는 중이었다.

태인의 얼굴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묻지를 못한 것 같았다. 아니, 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태인이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서울역을 바라봤다. 서우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뿐이


거늘, 대체 왜 여기로 왔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장 비서가 넌지시 재차 물었다. 태인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도곡동.”

서우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

오피스텔 건물 9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검은 슈트를 입은 태인이 걸음을 옮겼다. 그


보다 반보 앞서 걷는 장 비서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의 손에는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

장 비서는 등 뒤가 따끔했다. 위압감에 떠밀리듯 재차 벨을 눌렀다. 그럼에도 기척이 없었다.

“아무래도 잠이 드셨나 봅니다.”

장 비서가 난처한 듯 고개를 돌려 태인을 바라봤다. 그가 도어록을 쳐다보자 장 비서가 손가락을


올렸다.

“보통은 다들 바꾸셔서.”

이곳은 세화 제약에서 지원하는 사택이었다. 그렇지만 집은 개인의 공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기 마련이었다.

장 비서는 처음 설정된 비밀번호를 눌렀다. 1, 2, 3, 4, #. 그러자 삐리릭 소리를 내며 문


이 열린다. 장 비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것도 잠시였다. 백 연구원이라면 이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장 비서가 문을 열었다. 태인이 앞서 들어갔다. 이내 그의 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뒤따라 걷


던 장 비서가 너른 등에 부닥쳤다.

“죄송……!”

그가 사죄를 하듯 허리를 넙죽 숙였다. 동시에, 훅- 끼쳐오는 페로몬에 코를 틀어막고 뒷걸음


질을 쳤다.

태인의 시선이 소파에 닿았다. 서우는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의 몸에서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 비서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오메가가 발정기인 히트 사이클에 접어들면 향기가 진하고, 무


척이나 멀리까지 퍼졌다. 자의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알파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저벅, 태인이 구두를 신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그가 소파에 누워 있는 서우를 내려다봤다. 태


인이 손을 뻗었다. 서우의 뺨을 두드리며 의식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자 서우의 눈꺼풀이
갈라지듯 벌어졌다. 연한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정신이 들어? 감기랑 히트도 구분하지 못하다니.”


서우가 한 손을 위로 뻗었다. 그가 태인의 벨트를 붙잡았다. 태인이 팔을 내려 서우의 손을 단박
에 뜯어냈다.

태인이 눈가를 찌푸렸다. 소파로 나동그라진 하얀 손이 재차 움직였다. 서우가 힘겹게 소파를


짚어 상체를 세웠다. 그의 발간 입술 사이로 달뜬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태인의
벨트를 잡았다.

태인이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그가 장 비서에게 차 안에 있는 억제제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휴대폰 너머로 장 비서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사이, 벨트가 아래로 늘어진다. 태인의 슈트 바지 버클이 달깍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짙은


드로즈에 음영이 생겼다. 길고 곧은 두툼한 성기의 윤곽을 따라 서우의 흰 손이 안으로 파고들었
다. 태인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후회할 짓 만들지 마.”

태인이 서우의 손을 밖으로 빼냈다. 발정기에 접어든 오메가는 알파의 향기에 맹목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지금 태인의 페로몬에 반응하여, 사정하고 싶은 욕구에 온 정신이 휩쓸리고 있을
뿐이었다.

태인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거의 놓치다시피였다. 서우가 두 팔을 뻗어 목


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태인 씨…….”

태인이 소파에 앉았다. 목덜미를 스쳐 퍼지는 숨이 뜨거웠다. 태인이 서우의 얇은 등을 감싸고


있는 셔츠를 꽉 붙잡았다. 그보다 목에 닿는 서우의 입술이 더 빨랐다.

서우는 갈급한 사람처럼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달뜬 숨소리가 태인의 귓바퀴를


거듭 울렸다. 동요되듯 태인은 심장이 난폭하게 뛰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건 정상적인 일이었다. 발정기에 접어든 오메가의 페로몬에 몸이 순차적으로 반응을 보


이고 있었다. 더욱이 태인은 누구하고도 자지 않았다. 그는 주기적으로 러트가 오면 억제제를
맞았다.

서우의 손이 벌어진 슈트 상의로 파고들었다. 와이셔츠 위로 단단한 가슴팍을 더듬었다. 태인이


그의 팔을 붙잡기 위해 고개를 내렸을 때였다. 발갛게 물든 점막이 스치듯 닿았다. 서우가 입술
을 포갠 채 눈을 감았다.

말캉한 살덩어리가 태인의 입술 점막을 가르듯 파고들었다. 뒤엉킨 살덩이에선 습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급기야 태인의 허리춤 위로 서우가 올라탔다. 높이가 맞춰진 탓에 서우의 혀는 거침이
없었다.

서우는 그의 입술을 빨며 엉덩이를 들었다. 그의 양손이 분주하게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서우


가 입고 있는 드로즈가 드러난다.
서우는 답답함을 호소하듯 손가락을 구부려 드로즈를 끌어 내렸다. 색소가 연한 성기가 밖으로
나왔다. 귀두 끝에는 동그랗게 물기가 맺혀 있었다.

“하아…… 하아…….”

서우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상체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그가 두 손으로 태인의 머리를 감싸 가


슴에 묻었다.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젖꼭지에 태인의 젖은 입술이 닿았다. 서우는 쾌감을 좇아
성기를 그의 베스트에 비볐다. 태인의 손이 서우의 가느다란 허리에 닿았을 때였다.

삐리릭- 현관문이 열린다. 장 비서가 넥타이로 코를 틀어막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겹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동상처럼 굳었다. 특히나 올라타고 있는 서우의 바지는 아래로 내려가 있었
는데, 같이 끌려 내려간 드로즈 위로 하얀 엉덩이가 보였다.

태인이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은 채 손을 길게 뻗었다.

“이리 가져와.”

장 비서가 더듬더듬 들고 있던 은색 케이스와 약이 담긴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태인


이 잘 꺼낼 수 있도록 커버를 열어 놓고 몸을 돌렸다. 장 비서는 왔던 것보다 두 배로 빠르게 뛰쳐
나갔다.

태인이 서우의 허리를 붙잡아 머리를 옆으로 빼냈다. 그가 주사기를 꺼냈다. 태인이 엄지에 힘
을 주어 액체를 밀어냈다. 태인에게 맞춰진 양보다는 적어야 할 것이었다. 서우는 우성 오메가
였으니까.

그러나 서우가 그의 뒤통수를 붙잡아 가슴에 묻었다. 입술이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젖꼭지에
닿는 느낌이 생경하다. 태인은 입속으로 파고든 천을 혀로 뱉었다.

“망할.”

태인은 눈이 보이지 않아 약이 어느 정도 빠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주사기를 위로 들었


다. 그가 허리를 잡은 손을 옮겨 동그란 엉덩이를 꽉 거머쥐었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하얀 피
부가 비집고 나왔다.

“허리 흔들지 마.”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스산하다. 그럼에도 서우는 그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베스


트에 치대는 성기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태인의 커다란 손이 위치를 확인하고, 뒤이어 주삿바
늘을 콕 찔렀다.

태인이 느리게 주삿바늘을 빼서 곧장 테이블에 던졌다. 한참을 머리 위에서 달뜬 숨소리를 내던


서우의 움직임이 멈추는가 싶더니, 태인의 머리를 잡은 손이 힘없이 늘어진다.

태인은 뒤로 넘어가려는 서우의 몸을 두 팔로 붙잡아 안았다. 그가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품 안


에서 늘어진 서우의 옆모습을 보며 낮게 뇌까렸다.

“어느 쪽이 본모습이야?”
백서우는 가끔 태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에 반응하여 태인은 불쾌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적수를 만나지 못
한 탓에 더 그랬다.

그러다가도, 이럴 때 보면 스무 살 풋내기 같기도 하다.

“히트랑 감기도 구분 못 하고.”

그도 그럴 것이 서우의 키스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그에 비해 거실을 가득 채운, 물기 어린 라


벤더 향기는 태인을 부추기기에는 충분했다. 태인은 슈트 바지를 사이에 두고, 부풀어 오른 제
성기 위에 앉는 서우를 바라봤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한순간에 태인을 극점까지 몰고 간 서우를 눈으로 훑었다. 희멀겋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
었다. 그리고 그보다 새빨갛게 변한 입술은 젖어 있었다.

***

“음…….”

서우가 머리를 뒤척거렸다. 그가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는 엉덩이를 더


듬었다. 그러자 덮고 있던 이불이 소파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우가 눈을 떴다. 손바닥에 닿는 맨살이 기묘하다. 동시에 머리맡에서 서늘한 어조가 파고들었
다.

“깼어?”

서우의 턱이 들렸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자 상석에 앉아 있던 태인이 거꾸로 보였다.

“아직도 정신이 안 돌아온 거면, 한 대 더 놔주고.”

서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버클이 풀어진 바지에 혼비백산했다. 드로즈가 아래로 내려가 성기


가 여과 없이 보인다. 서우는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어 허리를 급하게 가렸다.

“태, 태인 씨.”

“응.”

“여긴 어쩐 일이세요?”

태인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는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이었다.

“신발도 신고, 여기에 이러고 있으면…….”

서우의 눈동자가 방황하듯 이곳저곳을 누볐다. 테이블에는 사용한 듯 보이는 주사기가 놓여 있었


다. 그 옆에는 약 봉투도 있다. 그 외에 은색 케이스 안에는 3 개의 주사기가 남아 있었다.
TV 앞에 있는 탁상시계가 11 시를 가리켰다. 서우는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내 밖이 어
두워졌단 사실을 깨달았다.

“약 사 오라며.”

서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태인이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그만큼, 서우는 밀려드는 한기를 느꼈
다.

“기억 안 나?”

“…….”

서우가 입을 다물자, 태인이 눈짓으로 자신의 벌어진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늘씬하게 뻗은 다


리는 운동을 많이 해서 단단해 보였다.

“내 허리에 올라타서, 자지를 비벼댄 것도 기억 안 나?”

“하…….”

서우의 시선이 얼룩이 남은 태인의 베스트에 닿았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가 손을 위로 올


려 입술을 틀어막았다.

태인이 몸에서 힘을 빼듯 등을 기댄다. 그가 낮은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기억나나 보네.”

서우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눈가가 붉게 변했다. 열기가 귀로 번졌다. 문득 서우의


시선이 셔츠에 머물렀다. 제 가슴 부근에도 얼룩이 남아 있었다.

낯이 화끈거렸다. 서우는 드문드문 뇌리를 스쳐 가는 장면이 있었다. 정신이 혼몽하던 제 모습


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겼다. 태인의 머리를 끌어다가 가슴에 묻고, 허리를 흔들던 자신의 행
동이 낯설었다.

“죄송해요. 약을 먹어서 히트가 올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

“약도 안 사다 주실 줄 알았는데.”

“너 말이야.”

“네.”

서우가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사람 떠보는 행동 적당히 해.”

서우가 태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은 검은 슈


트 상의를 낚아채서 긴 팔을 끼웠다.
서우는 그 모습을 눈동자에 새기듯 담았다. 태인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린다.

그가 두 발자국 앞으로 걷는가 싶더니, 상체를 뒤로 돌려 손가락을 들었다.

“그 약 전부 넣지 말고, 반쯤 버리고 써.”

태인이 가리키는 건,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억제제였다. 약보다 주사의 효과가 더 빠르게 나타


났다. 그러나 사람마다 투여되는 양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의 처방이 필요했다.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인이 몸을 휙 돌린다. 등 뒤로 찬바람이 불었다.

“다 쓰면, 조 원장한테 가서 받아. 말해 놓을 테니까.”

서우가 멀어져 가는 태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장 비서가 들고 있던 봉


투를 안에 들여다 놓는다.

문이 닫혔다. 서우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드로즈를 올리고, 바지 버클을 채웠다.

서우가 걸음을 옮기어 현관 앞에 다가갔다. 바닥에 있는 건 죽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다 먹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는지, 장 비서는 3 개로 나누어 소포장을 해 왔다.

서우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등이 둥글게 말렸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진짜 와 줬네.”

히트가 올 때마다 서우는 혼자 침대에 누워서 버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우를 보듬어 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지만, 백영길은 이런 일에 둔했다.

서우가 손을 뻗어 죽이 담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 손바닥으로 따끈한 온기가 퍼져 나갔


다.

서우는 빈속을 채우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내일 아침과 점심에 먹으면 될 것 같았


다.

서우가 거실 테이블에 있는 억제제가 담긴 케이스를 챙겼다. 그가 다 쓴 주사기를 들어 바늘을 빼


고 쓰레기통에 분리해 담았다. 서우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웬일로 백영길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서우가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평상시라면 아무리 길게 울려도 받지 않았을 텐데, 연결음이


뚝 끊어진다. 짧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지만, 서우는 아버지가 떨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휴대폰 너머로 백영길의 경직된 음성이 쏟아졌다.

[네 혈액을 검사 기기에 돌렸는데, 네가 극우성 오메가로 나왔어.]


서우가 몸을 낮추어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 기계 고장 난 거 아냐? 태인 씨도 알아? 엄청나게 실망할 텐데…….”

[내일 연구소로 나와.]

백영길이 거두절미하고 비장하게 말을 잘랐다. 서우는 임시 출입증을 떠올렸다. 그건 그날 하루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내가 지금 집으로 갈게.]

“알았어.”

통화를 마친 서우는 휴대폰을 멀건 눈으로 바라봤다. 손끝으로 액정을 문질렀다. 태인이 그 기


계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연구의 성과가 미미한 것이 신경 쓰였
다.

서우는 어수선한 거실을 둘러보다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가볍게 닦아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

“괜찮으십니까?”

빠르게 이동하는 차 안, 태인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베스트에 눌어붙은 체액을


닦았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태인이 베스트를 손수건으로 비볐지만, 얼룩은 닦이지


않았다. 그는 슈트 단추를 채웠다.

태인이 밖을 내다봤다. 차창에 그의 냉담한 얼굴이 비쳤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한순간에 발끝


부터 머리까지 잠식시키는 오메가의 페로몬은 그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보통 오메가라면 그렇게 페로몬을 남발하지도 않겠지.’

더구나 다른 오메가였다면, 그렇게 몸을 비벼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다. 멱살을 잡아서
베란다로 데리고 가 정신이 들게끔 만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태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까 있었던 일은.”

“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태인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서인지 장 비서는 함구하라는 그의 의중을 빠르게 파악했다.

장 비서는 정면을 응시했다. 태인은 재차 상념에 젖어 드는 눈빛을 띠었다.


입안을 파고드는 혀는 작고 뜨거웠고, 뭉근하게 퍼지는 향기는 지독하게도 달콤했다. 아직도 품
안에는 젖은 라벤더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때 장 비서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태인은 밀어낼 수 있었을지, 그도 장담할 수 없었다.

***

서우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쌌다. 며칠째 온몸에 퍼져 있던 미열이 가신 것 같았다. 시야도


한층 맑아졌고, 무거웠던 몸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가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백영길이 들어왔다. 그는 한달음에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치 서우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서우가 수건을 목에 건 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백영길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


놓고, 그걸 기다리지 못한 듯 책장을 뒤졌다. 서우가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책들이 발밑으로 우
수수 떨어졌다.

백영길은 두 손을 마구 놀리며,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뭘 찾는 건데?”

“2 차 발현.”

“그게 뭐야?”

백영길이 파일을 꺼냈다. 그가 발밑에 늘어놓고, 스크랩을 해둔 듯 보이는 낡은 종이를 넘기었


다.

“어디 있지? 어디 있는 거야?”

백영길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서우가 긴 한숨을 내쉬


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다. 등 뒤로 백
영길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다!”

반쯤 비스듬히 몸을 돌렸던 서우가 뒤를 돌아봤다. 저벅저벅. 서우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아버


지의 옆으로 다가서서 그가 보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서우가 글귀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열여덟 살에 오메가로 발현했다라. 꽤 늦게 했네? 보통은 일곱 살이면 하잖아.”

서우가 숙였던 상제를 세웠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끌어 내려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닦았다.


백영길이 고개를 돌려 서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아비가 돼서 너한테 신경도 못 쓰고…….”

서우가 눈을 굴렸다.

“그게 하루 이틀이야? 엄마가 있을 때도 그랬잖아. 묻고 싶은 게 뭔데?”

백영길이 정면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최근에 네 몸에 무슨 변화 같은 거 없었어? 극심한 열이 났다거나, 아니면 고통이라든가. 그


것도 아니라면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내가 그런 일이 어디 있어?”

눈을 뜬 나머지 시간에는 죄다 공부만 했지만, 서우는 힘든 일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다른 이들


이 흔히 겪는다는 사춘기도 서우는 조용히 넘어갔다. 아버지가 워낙 바쁜 탓도 있었으며, 어머
니가 없는 빈자리를 밖에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우는 누구보다 올바른 품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내색은 하지 않지


만,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나름 아버지도 존경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아까 말했던 극우성 오메가라는 결과 때문에 그래?”

서우가 몸을 돌렸다. 그가 무릎을 구부려 백영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기계 진짜 고장 난 거 아냐? 태인 씨도 알아?”

“…….”

백영길의 얼굴이 다소 의기소침해진다. 서우가 말을 정정했다.

“내가 최근에 겪은 일?”

서우는 순간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백영길이 가까이 다가왔다. 조그맣게 뭔가 떠올랐냐고 묻


는다. 서우는 수건으로 뺨을 문질렀다. 좀 전에 거실에서 태인에게 했던 행태가 떠오른 탓이었
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일 거다.

“아빠는 우성이고, 엄마가 오메가인데. 내가 어떻게 극우성이 될 수가 있어?”

서우가 우성 오메가로 발현한 것도 백영길의 영향이 큰 것이었다. 또한, 인척 관계를 따져보아


야 하겠지만, 어머니의 집안과는 연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해 줄 수 있는 어
머니도 계시지 않는 게 문제였다.

서우는 백영길의 진지한 눈빛에 떠밀리듯 고심하는 척을 했다. 백영길이 고개를 돌려 모니터 화
면을 쳐다봤다. 서우가 같은 곳을 좇아 머리를 좌우로 갸웃거렸지만, 딱히 그랬던 일이
없…….
서우가 눈을 끔벅거렸다. 느리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서우는 판판한 배를 보았다. 백영길이
재차 서우를 쳐다봤다.

“나…….”

서우가 고개를 들었다. 백영길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우가 입꼬리를 당겼다. 뺨이 미약하게


경련했다. 그러나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서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걸음을 옮기었다.

“나 피곤해서 먼저 잘게. 내일 아침 같이 먹어.”

서우는 거실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방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서우의 무릎이 접혔


다. 그의 등이 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우가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어루만졌다.

달라진 일이 있다면, 서우가 아이를 가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인을 마친 그날 서우는 서재


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다리 사이가 축축하고, 뭔가가 아래로 흐르는 느낌은,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서우는 손끝이 차갑게 변하여 저리는 걸 느꼈다.

“……아닐 거야. 아버지가 뭔가를 착각하신 거겠지.”

서우는 자조적인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면서도 배를 만지던 손을 떼지 못했다.

“내가 극우성 오메가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한 번도 바란 적 없고,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은 바란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우는 이미 불가능한 일을 겪고 있지 않은가. 서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마가 무릎


에 닿자 묻어두고 있던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서우는 반팔 셔츠를 꺼내어 입었다. 방학이기는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지훈을 만나 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서우는 요즘 학교 도서관과 집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장 비서의 도움으로 연구실에 갔던 서우는 박석원을 만났다.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짧


게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천 상무님이 그렇게 직원들을 세세하게 신경 쓰고 계실 줄은 몰랐어.

박석원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딸을 잃은 슬픔에 어머니는 몸져누우셨고, 아버지는 술로 생


을 마감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리암을 보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슬프
기는 했지만,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듯도 보였다.

서우는 태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우는 감정에 호소하듯 대화로
설득을 해 보려 했지만, 태인은 박석원이 떠나지 못할 사유를 만들었다.

리암이 한국으로 들어오는데, 박석원이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서우가 교정을 거닐었다. 그가 도서관에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지훈이 옆을 바라봤다. 그가 자


리를 맡아놓았던 가방을 치웠다.

서우가 의자를 빼내고 앉았다. 지훈은 펜대를 한 바퀴 돌렸다. 그가 뭔가 할 말이 그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서우는 책을 꺼내었다.

그 일이 있고 태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서우는 먼저 전화를 하여 사과를 할까 싶었지만, 그러


지 않기로 했다.

미안하긴 했지만,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우가 태인의 향기에 반응하는 건,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을 좇아 몸이 동하는 것에


죄책감은 느끼지 않기로 했다.

서우가 책장을 넘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훈이 책 위로 손을 뻗어 두드렸다. 서우가


고개를 들자 지훈이 밖으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어느새 저녁 6 시가 넘어갔다. 서우가 아직도 밝은 교정을 바라봤다. 여름은 해가 길었다.

“저녁 어떻게 할래? 금요일인데,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어때?”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개를 뽑은 지훈이 물었다. 서우가 오렌지주스 캔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저


었다.

“나 술 못 마시는 거 알잖아.”

“내가 마실 테니까, 넌 고기랑 사이다 마시면 되잖아. 기분도 그렇고, 나 너한테 할 말도 있


어.”

“뭔데? 지금 말해.”
서우가 캔을 뜯었다. 그의 시선이 걸음을 옮겨오는 남자에게 머물렀다. 지훈의 등 뒤로 다가오
는 소은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같은 과 동기였다. 서우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시
감이 들었다. 그가 어깨를 스쳐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지훈이 말했다.

“여기선 못 해.”

“여기서도 못 하면 안 들을래.”

서우가 음료수를 삼켰다. 지훈이 다 마신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너 요즘 변한 거 알아?”

서우가 눈으로 의도를 되물었다. 지훈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자 말을
덧붙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 내가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고 그러는 건지.”

서우가 입술에 대고 있던 캔을 내렸다. 지훈이 눈길을 옮기어 서우를 쳐다봤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서우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들고 있던 오렌지주스 캔이 미약하게 찌그러졌다.

“착각이야.”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이나 잘못 짚었어. 내가 아니라고. 나중에 이불킥 날려도 난 몰라.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이 좋아하는 사람은 서우가 아니었다. 아직은 연이 닿지 않은 모양인데. 지


훈은 좀 전에 지나간 은준을 챙기느라 서우 따위는 안중에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알려 줄까? 아냐…….

서우가 입술을 뗐다가 다물었다. 어차피 만나게 될 사이인데, 자신이 말을 해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서우가 몸을 돌렸다. 그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는 은준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만나야 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나 보네.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땐 몰랐던 걸 보면 말이다.

자리에 앉은 서우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으로 태인의 번호를 쓰다듬었다. 먼저 연락하


지 않으면, 결혼식 때나 볼 사람이었다.

서우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메시지 창을 띄웠다.

[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
둥글게 다듬어진 손끝으로 문구를 빠르게 지웠다. 이렇게 보내면 태인 씨의 성격에, 보고 못 본
척. 그냥 씹힐 확률이 더 높았다. 서우는 다시 한 자 한 자 힘주어 입력했다.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긴 속눈썹을 따라 눈 밑에 아른아른 그림자가 생겼다.

[나 술 마셔도 돼요?]

서우가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

태인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었다. 결재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움찔거


렸다. 태인의 눈매가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보완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상무님.”

남자는 내밀었던 서류를 회수해 걸음을 옮기었다. 그때 안으로 들어오던 장 비서와 마주쳤다.
장 비서는 눈으로 의구심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빠르게 상무실을 도망치듯 벗어났
다.

장 비서가 휴대폰을 보고 있는 천태인을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태인이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 액정에 재차 불이 들어온다. 서우


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 잔만 마실게요. 오늘은 금요일이잖아요.]

태인이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한 잔도 못 마시는 주제에.”

“예?”

장 비서가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태인이 휴대폰을 결재판에 놓았다. 이내 다시


집어 올렸다.

***

서우가 액정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전화가 오려나? 안 오려나?

그때 은준이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교차하듯 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녁 어떻게 할래?”

징- 서우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태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한가롭게 메시지 따위나


누르는 위인이 아니었다. 서우가 애써 웃음을 참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의 시선에 문을 나서
는 은준이 담긴다. 정확하게는 그의 다리를 보고 있었다.

서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멀쩡하게 걷고 있어. 아까 느꼈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은준은 다리가
불편했다. 그래서 지훈이 늘 곁에서 도움을 주었다. 서우를 신경 쓰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
다.

“오늘 며칠이야?”

서우가 지훈을 향해 물었다. 휴대폰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벌써 취했어?]

지훈이 휴대폰을 앞으로 내보였다. 7 월 13 일. 날짜를 확인한 서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휴


대폰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은준의 뒤를 쫓아가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똑같아. 전부 똑같아.

단지, 잊고 있었어.

그때의 서우는 도서관에서 돌아가는 길에 지훈과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태인과의 결혼을
앞둔 탓에 그 역시 마음이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곳에 가며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되는데, 졸음운전을 하던 화물차가 일으킨 6 중 추돌사고였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서우가 태인에게 연락을 하느라 이곳에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딪친 승합차가 도로로 튀어 올라오면서 발생하는 사상자는 5 명. 그중 같은 과 동기인


소은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된다.

서우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세차게 교정을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아까 붙


잡았어야 했는데!

사고가 나는 위치라면 알고 있었다. 서우는 초록 불이 깜박이는 횡단보도를 간당간당하게 지났


다. 등 뒤로 바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 대각선에 있는 카페에서 나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
다. 그럼에도 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칠게 달려갔다.

“은준아.”

앞서 걷고 있는 소은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서우


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서우의 시선이 반대편에 머물렀다. 멀리서 화물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서우가 손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있는 힘을 다해 은준의 가방을 낚아
챘다. 은준이 놀란 듯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화물차가 기울어 중앙선을 넘는가 싶더니, 마주 오던 승합차와 부딪쳤다. 거대한 소리


가 날카롭게 귓전을 6 번 울렸다.

거세게 부딪친 승합차가 튀어 오르듯 서우와 은준이 있는 도로로 날아들었다.

***

장 비서가 슈트 상의를 챙겨 넌지시 몸을 돌린다. 태인이 휴대폰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전


화가 끊어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부스럭대는 잡음만 들리고, 서우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
다. 태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그가 통화 연결을 종료했다.

태인이 슈트 상의를 걸쳐 입으며 걸음을 옮기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곧이어 1


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태인은 주차된 세단에 탑승했다. 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자리했다. 태인은 태블릿 PC 를 바라보
며 일을 처리했다.

세단이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 비서의 시선이 전광판에 향했다.

“상무님.”

태인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장 비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위로 들었다. 대형 전광판에


긴급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6 중 추돌사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
다. 피 묻은 셔츠를 입고 눈을 감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백서우였다.

***

“은준아.”

서우가 손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있는 힘을 다해 은준의 가방을 낚아


챘다. 은준이 놀란 듯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때 강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어깨를 올린 소은준이 한쪽 이어폰을 뺐다. 두 번째


굉음이 들렸다. 회색의 차가 뒤를 들이받았다. 소은준의 고개가 더디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가
차도를 내다봤다.

달려오던 차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듯했지만, 피하지 못하고 세 번째 충돌이 일어났다. 도


로에는 선명하게 새겨진 타이어 바퀴 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서우가 은준의 가방을 붙잡은 채 몸
을 돌렸다.
“아니, 무슨 소리야?”

그 순간, 편의점의 문이 열리더니 유니폼을 입은 점주가 나왔다. 서우가 반대쪽 팔을 뻗었다.


점주의 허리를 밀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밖으로 나오던 여학생이 휴대폰을 만지다가, 점주와 부딪쳤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고개
를 들었지만, 남자들에게 떠밀려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결국 모두의 다리가 뒤엉키듯 나자빠졌
다.

동시에 열린 유리문이 산산이 깨어졌다. 날아온 승합차가 유리창을 부수고, 건물과 강하게 충돌
했다. 승합차는 편의점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유리 전면이 부서진 탓에 진열대에 쌓여
있던 물건들이 아비규환으로 쓰러졌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편의점 안쪽에 서우와 은준이 엎드려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바닥에 주저앉은 편의점 주인이 덜덜 떨면서 손을 위로 올렸다. 그의 머리가 축축했기 때문이다.

서우가 재빨리 무릎을 세웠다. 이마를 내려친 선반을 위로 들었다. 점주의 한쪽 얼굴이 피로 덮
였다. 서우가 그의 이마를 손으로 누른 채 은준을 불렀다.

“은준아, 전화. 휴대폰 어디 있어!”

서우는 소지품을 도서관에 그대로 두고 왔다. 은준은 휴대폰이 뒷주머니에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가방을 풀어 헤쳤다. 그의 손에 얇은 하늘색 카디건이 잡
혔다. 패닉에 빠진 그는 서우에게 그 옷을 건넸다.

“네 바지에 휴대폰 있는 거 아냐?”

서우의 시선이 은준의 바지 주머니에 닿았다. 은준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곧이어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다가 놓쳤다. 빠르게 휴대폰을 주워 올려 간신히 귀에 댔다.
그러나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은준이 그것을 빼내며 앞으로 던졌다.

두 손으로 점주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서우의 팔을 타고 붉은 피가 반팔 셔츠에 스며들었다.

“다친 곳 없으면 나 좀 도와줄래?”

서우의 말에, 여학생이 허겁지겁 가방으로 나뒹구는 컵라면과 과자봉지, 유리 조각을 밀어내어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은준이 신고를 하는 동안 서우는 얇은 하늘색 카디건을 점주의 머리에 대고, 신중하게 바닥에 눕
혔다. 만일을 위해서라도 머리가 흔들리면 안 되었다. 그러면서 서우의 가슴팍에도 피가 묻었
다.

점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갈수록 서우는 더욱 침착하게 그를 달래었다.

“괜찮아요. 이마가 조금 찢어져서 그런 거예요.”


서우는 피 묻은 손으로 점주의 셔츠 단추를 풀어주며 호흡을 일관되게 내쉴 수 있게 기도를 확보해
주었다. 그러면서 입안으로 피가 고이고 있는 건 아닌지도 체크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마만 찢어진 모양이었다. 서우는 카디건으로 점주의 눈썹 위를 지혈했다.

편의점 밖이 소란스럽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6 중 추돌사고, 5 명의 사상자.

승합차에 타고 있던 남자는 이미 처음 충돌이 일어났을 때 죽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이


받힌 회색 차주도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 편의점 점주와 여학생, 은준은 서우의 옆에 있었다. 서우는 점주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제가 초치는 것 같지만, 미리 말해 주는 건데요. 누나 지금 임신 4 주예요. 형이 계속 눈치를


못 채서 언제 말을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으니까 이따 집에 가실 때 꽃다발 꼭 사가세요.”

그날 눈이 붓도록 많이 울었거든요.

서우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형, 구급차가 오나 봐요. 조금만 더 버텨요.”

“어? ……그게 정말이야? 좀 전에 네가 한 말…….”

서우는 입술이 파리하게 변하는 점주를 바라보았다.

“네. 아기가 안 생겨서, 누나가 오랫동안 힘들어하셨잖아요.”

“……맞아…….”

서우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깨어진 유리창을 비집고 구급대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응급처치를
마친 점주가 들것에 실려 나간다. 그가 중얼거렸다.

“내…… 내가 아빠가 됐어.”

서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대로라면 머리를 크게 다친 점주는 뇌사 판정을 받기에 이


른다. 장기를 기증하여 다른 사람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또한 바뀌겠지.

“은준아. 괜찮아? 어디 다쳤어?”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은준을 바라보며 서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뒤늦게 피가 통


하는 다리가 저릿하다. 서우의 발목이 휘청거리며 상체가 비틀거렸다. 그때 구급대원이 서우의
팔을 붙잡았다.

“학생.”
“아, 전 괜찮아요. 이거 제 피 아니에요.”

그럼에도 양쪽에서 달라붙는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서우가 도움을 요청하듯 은준을 쳐다봤지
만,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얼굴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그도 서우에게 도움을 줄 여력이 없어 보였다.

서우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사방에서 밀려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어디선가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서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

세화 병원 앞에 세단이 멈췄다.

조수석에서 내린 장 비서가 뒷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보다 먼저 문이 열리더니 검은 구두


가 앞서 모습을 드러냈다.

태인이 차에서 내렸다. 하마터면 문에 부딪힐 뻔한 장 비서가 넥타이를 쓸었다. 그럼에도 서둘


러 태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기었다.

그는 본관으로 가지 않고, 응급실이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태인이 구급차가 서 있는 곳을 지나


쳤다. 들것에 사람이 실려 나오자 태인의 시선이 흘깃 향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태인의 걸음이 이어졌다. 내부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좀 전에 있었던 6 중 추돌사고의 사상자


들이 이곳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상무님. 좀 전에 장 비서에게 연락을 받고, 분부하신 대로 환자를 저희 병원으로


인계받았습니다.”

조 원장은 급하게 전갈을 받고 응급실로 내려온 터였다. 태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


빛이 자못 매섭다. 조 원장이 같은 곳을 휙 둘러보며 물었다. _공.금

“누구를 찾으십니까?”

“전 괜찮아요! 진짜 다치지 않았다니까요.”

태인이 뒤로 몸을 돌렸다. 그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커튼을 치우자 백서우


가 침상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서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반팔 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두 손
도 마찬가지였다.

셔츠를 자르기 위해 가위를 든 의사와 대치하고 있던 서우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태인 씨, 저 멀쩡해요.”
서우가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였다가, 뒤로 돌렸다. 피가 묻어 얼룩진 손을 얼른 감추었다.
의사가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가 천태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간호사와 함께 다른 환자를 보
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서우가 손을 뒤로 감추었지만, 그런다고 태인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차갑게 입


을 열었다.

“그래 보이네.”

서우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커튼이 쳐진 옆에서 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아냐. 오지 마. 나 금방 집에 갈 거야.”

점주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20 바늘이나 꿰매었지만, 자꾸만 헤실헤실 웃


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집에 있어. 갈 때 꽃 사갈게. 왜긴? 그러고 싶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학


생이 다쳐서 같이 온 거야. 난 다친 곳 없어. 당신은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서우가 걸음을 옮기었다. 그는 앞서가는 태인을 따라 걷다가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피가 굳은 셔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야겠네. 운전기사가 놀라면 어쩌
지. 안 태워 주진 않겠지.

“아, 내 지갑.”

뒤늦게 아차 싶었다. 서우의 물건은 모두 도서관에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은준의 뒤를 쫓아 달


렸다.

태인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다가 멈추었다. 조 원장이 곁에 다가섰다. 태인이 뒤를 돌아보자,


피 묻은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더듬고 있던 서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태인의 옆으로 다가섰
다. 조 원장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서우가 말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택시비가 없어서 그런데…… 저 좀 태워다 주실 수 있어요?”

조 원장이 뒤늦게 서우를 알아본 것처럼 그의 모습을 더디게 훑어내렸다. 희멀건 뺨에는 피가 튀
어 있었다. 땀을 흘렸는지, 뻣뻣해진 앞머리와 이마에는 검게 줄이 생겨 있다. 더욱이 태인과
다음 달이면 결혼을 할 사람이거늘. 너무나 비교되어 초라해 보였다.

문득 서우가 고개를 돌려 조 원장과 눈을 마주쳤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조 원장이 먼저 운을 떼었다. 그때 태인의 기다란 손가락이 매끄럽게 단추를 빼내 슈트 상의 벗어


던졌다. 바닥에 닿기 직전에 서우가 가슴으로 날아든 슈트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서우는 앞을
쳐다보았다.

“따라와.”

태인이 냉담한 얼굴로 말을 내뱉고, 몸을 휙 돌린다.


“이 옷에 피 묻으면 어떻게 해요?”

“버릴 거야.”

“그럼, 저 가져도 돼요?”

서우가 슈트 상의에 팔을 끼웠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 걷는다. 조 원장의 곁을 지나가던 의사들


이 허리를 숙이며 오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조 원장이 혀를 쯧쯧 찼다. 회장님도 너무하셔. 아무리 불치


병을 가진 손자라도 그렇지.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저렇게 별 볼 일 없는, 아무하고 결혼
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

빠르게 이동하는 차 안, 태인은 베스트만 입은 모습이었다. 그가 옆을 쳐다보자 서우는 누가 봐


도 태인의 옷인 듯한 슈트 상의를 입고, 그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닦고 있었
다.

차가 신호에 걸렸다. 피가 묻은 서우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도로변에 꽃이 나열된 꽃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 비서의 두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우가 손수건으로 뺨을 문지르며


말을 덧붙였다.

“전 꽃 싫어해요.”

“사 줄 마음도 없는데, 꼭 사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네?”

서우가 고개를 돌려 태인을 응시했다. 그는 경우의 수를 만 번은 생각하고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었다. 서우가 한쪽 눈을 비볐다. 땀이 들어간 눈이 아까부터 따가웠다. 그가 눈을 찡긋거린 채
답했다.

“케이크도요.”

“그건 피차 마찬가지네.”

서우가 손수건으로 반대쪽 눈을 비볐다. 그의 얼굴이 상념에 젖었다. 역시, 직접 그런 걸 샀을


리가 없지. 그날의 케이크와 꽃은 장 비서님이 샀나 보다. 그랬으면서 위로하기 위해 그런 거짓
말을 꾸며댔던 모양이었다.

“내려.”
차가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서우가 얼굴을 닦고 있던 손수건을 떼었다. 그가 차창 밖을 확
인했다. 안이 보이지 않도록 높게 올라간 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남동에 위치한 태인의 집이었다.

장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로 데려올 줄 몰랐던 탓에, 서우는 상황 판단을 하느라
꾸무럭거리며 느리게 나왔다. 그에 비해 태인은 열린 철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서우는 그가 사라진 정원을 걸었다. 입고 있는 슈트 소매를 코에 댔다. 백단나무 향기가 옅게 배


어 있었다. 돌계단을 사이에 두고 은은하게 켜진 조명을 지났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이 왔다고 인식하고 다가오던 도우미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장
비서가 직접 안내를 자처했다.

“저 다친 거 아니에요.”

서우는 그녀들이 놀라지 않도록 입가를 과하게 당겨 웃으며, 피 묻은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팔짱


을 끼워 감추었다. 그럴수록 더욱 다가가기 힘들단 사실을 정녕 모르는 모양이었다.

***

쏴아아-

샤워부스에 하얀 김이 서렸다. 서우가 손을 뻗어 거울을 문질렀다. 붉은 얼룩이 남은 손끝이 뽀


드득 소리를 냈다.

서우가 손으로 뺨에 굳어 있는 피를 닦아냈다. 머리 위로 줄기차게 물줄기가 쏟아진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아서일까. 뒤늦게 어깨와 손목, 다리가 욱신거렸다.

아까는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우는 은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를 붙잡고 있었다. 뭔가를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그는 편의점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내내,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랐다. 단지, 그뿐이었다.

서우가 샤워부스 밖으로 나왔다. 기다란 타월을 꺼내어 머리를 덮었다. 그는 선반에 있는 물건
을 자연스럽게 꺼내어 사용했다. 그가 샤워가운을 걸쳐 입고 허리를 가볍게 묶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연임이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다가오길 주저하는가 싶더니, 다림질이 잘된


빳빳한 옷가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서우가 머리에 얹고 있던 수건을 잡아 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쓸어넘겼


다. 연임이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저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덕분에 어머니 수술도 잘됐어요.”

“장 비서님이 하신 건데요.”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서우가 말을 마치자, 연임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빙빙 돌린 티가 역력하다. 서우가 방긋 웃었다. 수건으로 목에 흐르는


물기를 닦으며 덧붙였다.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어린 서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병환을 앓고 있던 어머니에게 안겨 응석을 부리


기도 했다.

“…….”

“연임 씨는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연임이 몸을 돌렸다.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좁게 열리는 문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


다. 서우는 걸음을 옮기어 옷을 집었다.

연임이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문을 닫고 긴 복도를 걸었다. 긴장을 하고 있던 어깨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서우가 하는 말이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묻는 건 실례 같았
다.

그 덕분에 조기에 치료를 마친 어머니가 건강하게 퇴원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서우가 조금 전,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봤을 때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했었다. 그의 셔츠와 손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연임이 흘긋 뒤를 돌아봤다. 굳게 닫힌 방문을 눈여겨보았다.

“그래도 씻으니까, 완전 딴사람 같으시네.”

연임은 하얗고 청초한 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과 입술이 유독 붉어 더
그렇게 보였다. 방 안을 느리게 둘러보는 것도 여유가 넘쳤다.

***

서우가 셔츠 단추를 끼웠다. 그리고는 서랍을 열어 드라이기를 끄집어냈다.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으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어쩐지, 여기도 내 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서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에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우는 한곳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거실로 나온 서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래식한 소파와 테이블, 원형으로 이뤄진 기둥과 선반
에는 유럽풍의 소품들이 즐비하다. 벽에는 조명이 나뉘어 있어 따스하고, 아늑했다.
서우는 전체적으로 포근해 보이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태인의 취향이라기보단 이 집을 관리해
주는 사람의 영향이 컸다. 태인은 불필요한 물건을 싫어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에 직
접 관여를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_ડ χ

“나오시면,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등 뒤로 도우미가 다가왔다. 단발머리의 해윤이 앞서 걸음을 옮기었다. 서우가 발끝을 뗐다.

지나가던 도우미가 해윤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태인의 본가에서 온 사람이었다. 이 집안을
관리·관장하는 사람이 해윤이었다.

서우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자리를 잡고 있던 태인이 고개를 돌렸다. 곁에는 셰프도 서 있었다.

태인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검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여 드러난 팔에는 손목시


계가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에서처럼 딱딱한 슈트 차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편한 옷차림도
아니었다.

“저 먹으라고 준비해 주신 거예요?”

서우가 마주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셰프가 둥근 덮개를 벗겼다. 밥과 국, 정갈하게 소분된 반


찬, 육즙이 흐르는 고기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아스파라거스와 불에 살짝 구운 색색의 채소,
얇게 썰어 튀긴 화려한 연근 장식, 고기는 겉만 살짝 익은 게 셰프가 신경을 많이 쓴 모양새였다.

그에 비해 태인의 앞에는 크리스탈 잔이 전부였다. 커다란 얼음이 담긴 호박색 액체가 그의 손끝


에서 찰랑거렸다.

태인이 대꾸조차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서우가 숟가락을 들었다. 맑은국을 한입 맛보았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그때까지도 서 있던 해윤을 태인이 쳐다봤다. 시선에 떠밀리듯 그녀가 몸을 돌렸다. 태인이 두


팔을 아일랜드 식탁에 올렸다. 그의 팔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태인은 상체를 앞으로 당기어 넌
지시 물었다.

“너…….”

나가기 직전, 해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뒷말은 너무 작아 듣지 못했다. 곧이어 셰프도


밖으로 나갔다. 이제 주방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요?”

서우가 숟가락으로 국을 재차 떴다. 그가 한 번 더 맛을 음미했다.

태인이 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보기 좋게 맞물린 입술에 영롱한 액체가 닿았다. 서우는 그의 뾰


족한 목울대를 바라보다가 읊조렸다.

“제 머릿속 들여다보는 건 태인 씨도 만만찮은데요?”

“다시 묻지. 아까 조 원장한테 하려던 말 뭐였어?”


태인은 조금 전에 물어보았던 말을 되물었다. 서우는 분명 조 원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뭔가 하
고 싶은 말이 있는 눈으로.

서우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냉담한 태인의 눈을 마주했다.

“프러포즈 해 주면 답해 줄게요.”

“…….”

태인은 결코 하지 못할 거다. 그가 보내오는 고가의 선물, 한도가 없는 카드. 그런 건 감정이


필요 없었다. 장 비서에게 지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우는 이토록 자신만만한 표정
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지.”

서우는 순간, 태인의 눈동자를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네가 말한 꿈에서, 난 죽었나?”

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조급하게 입을 열려던 찰나였


다. 태인이 크리스탈 잔을 위로 들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서우가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아직 말이 안 끝났…….”

태인이 차가운 눈동자로 서우를 내려다봤다.

“답은 이미 네 얼굴에 쓰여 있어.”

서우의 다리가 의자 밖으로 나왔다. 그가 문을 나서는 태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서우가 테이


블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태인의 상속 목록 중에는 세화 병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조 원장이 펄쩍 뛰던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었다. 서우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랐다.

서우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었다. 잔을 들고 걷고 있는 태인을 바짝 쫓아갔다. 도우미들의 시


선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태인 씨.”

거실 중앙에서 서우가 그를 불러세웠다. 예전 같았으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태인의


걸음이 멈추었다. 검은 실루엣이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서우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내 말도 듣고 가야죠. 태인 씨는 건강했어요.”

그 말과는 달리 눈앞에는 태인이 잠든 것처럼 누워 있던 모습이 펼쳐졌다. 창백한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그렇게 힘없이 누워 있는 태인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제가 태인 씨 아이도 가졌다고 했잖아요.”


태인이 몸을 온전히 뒤로 돌렸다. 그의 한쪽 눈썹이 의미심장하게 위로 올라갔다.

“너랑 살면 심심하진 않겠네.”

서우가 손을 말아 주먹을 꽉 쥐었다.

“프러포즈 잘 받았어요.”

장 비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서우가 왔던 길을 돌아갔다. 사방에


서 밀려드는 시선이 따끔하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예전에는 이


곳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체하곤 했는데, 왜 그랬는지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서우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태인에 대해 전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건만. 아무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 같다가도, 금세 밑으로 끌려 내려와 우위가 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태인이 그렇게 앞뒤 없이 물어볼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죽음을 그렇게 쉽게 말하다


니.

─네가 말한 꿈에서, 난 죽었나?

그렇게 묻는 태인의 눈은 냉담했다. 제 죽음을 남 일처럼 묻고 있었다.

아니, 그게 태인 씨 성격이지.

망각하고 있었다. 전보다 몇 번 더 봤다고, 태인의 태도가 달라질 리 없는데. 서우의 얼굴이 시
무룩하게 변했다. 목이 멨다. 물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그때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들어서는 건 장 비서였다. 그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그가 넓은 아일랜드 식탁에 놓는다. 서우가 물을 마시고 손을 뻗었다.

“안 받을게요.”

서우는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밀어냈다. 그러자 장 비서가 밀려난 만큼 서우의 앞으로 쇼핑백을 도


로 놓았다.

“아닙니다. 이건 청첩장입니다.”

일순, 얼어붙은 서우의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보시겠습니까?”

장 비서가 서우를 대신하여 손을 안으로 넣었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의 테두리가 들어간 상자가
천천히 테이블에 놓였다. 그가 커버를 열어 청첩장을 꺼내었다. 연분홍색 봉투는 벚꽃과 닮아
있었다.
장 비서가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어 서우의 앞으로 내보였다. 그의 눈이 끔벅거렸다. 한지로 된
얇은 종이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그 위에는 리본이 묶여 길게 내려왔다.

결혼식이 행해지는 호텔 약도를 지나, 서우의 눈동자가 한 곳에 다다랐다.

8 월 27 일 토요일, 천태인과 백서우의 이름 석 자를 눈으로 훑었다.

서우는 심장이 콩콩 뛰었다. 손을 뻗어 장 비서에게서 청첩장을 넘겨받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그의 일상도 착실하게 진행이 되고 있음이었다.

***

달칵, 서우가 방문을 열었다. 장 비서의 도움으로 세단을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서우는 들
고 있던 쇼핑백과 함께 침대 위로 엎드렸다. 하루가 어떻게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뛰어다기만 한 터라, 급속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서우의 시선이 침대 위에 있는 쇼핑백에 머물렀다. 그가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상자를 열어 청


첩장을 끄집어냈다.

밀려난 이불에 물결이 생겼다. 서우는 두 손을 천장으로 옮기어 펼쳐 보았다.

‘예전에는 청첩장을 아버지를 통해 전달을 받았지.’

그때의 서우는 청첩장을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고 두 번 다시 꺼내 보지 않았다.

서우가 새겨져 있는 천태인의 이름을 매만졌다.

흘깃, 서우의 시선이 옆에 있는 상자에 닿았다. 태인의 하객은 천여 명에 달했다. 호텔이 북새


통을 이뤘다. 서우 쪽의 하객은 연구원이 전부였다.

위로 들어 올렸던 서우의 두 팔이 찬찬히 밑으로 향했다. 등을 침대에 묻고 있는 탓일까,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졌다. 서우가 청첩장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그의 눈이 금세 감겨 내려왔다.

***

이른 아침, 서우는 침대를 벗어나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전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밥을 먹


고, 깊게 잔 덕분일까. 서우의 몸은 가뿐했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서우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학교로 곧장 향했다. 그의 물건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서우가 계
단을 올라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인 터라 학생들이 드문드문 착석해 있었다. 서우는 늘 앉던 곳으로 직진했다. 책상에


는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서우가 손을 뻗어 가방을 잡았다. 그가 지퍼를 열었다. 책과 휴대폰, 지갑을 눈으로 확인했다.


모든 물건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등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내가 어제 집에 가져갔다가, 아침에 갖다 놨어. 없어진 거 없을 거야.”

서우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지훈이었다. 그는 서우의 책상 위로 에너지 드링크를 내려놓았다.


아침에는 이걸 모두 마셔야만 머리가 돌아가는지라, 서우는 커피를 대신하여 에너지 드링크를 늘
마시곤 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마신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서우는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개운하고, 전신이 가벼웠다. 곧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자리를 채웠다.

지훈이 밖으로 잠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가 앞서 걷는다. 서우는 휴대폰만을 챙겨 걸음을


내디뎠다.

두 사람이 복도로 나왔다.

“어제 깜짝 놀랐잖아. 너 갑자기 그렇게 뛰어가서, 내가 가방 챙겨서 나갔는데. 갑자기 사고가


나는 거야.”

지훈은 어제 있었던 교통사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서우의 뺨이 실룩였다. 그러고 보니 지나


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피했다.

“네 기사도 났어.”

지훈의 말에, 서우가 휴대폰 잠금장치를 풀었다. 몇 번 손가락을 움직인 끝에, 얼굴은 모자이
크로 가려져 있지만 가슴에 피가 묻은 셔츠가 찍힌 사진을 내려다봤다. 지훈은 단번에 서우인 걸
알아보았다. 더욱이 구급차에 실려 가던 때는 얼굴이 살짝 공개되기도 했다.

서우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눈빛을 띠었다. 어쩌지. 난처한 기색을 하는 것도 잠시였
다.

“서우야.”

서우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보고 있던 휴대폰이 아래로 향했다. 서우는 다가오는 소은준을 응


시했다.

귀를 덮는 짧은 머리, 단정한 이목구비를 한 소은준이 찬찬히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지


훈을 한 번 보고, 의식하듯 서우를 향해 말했다.
“많이 안 다쳤어?”

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지. 넌 어때?”

“나도, 유리에 팔 조금 벤 것 말고는…….”

코발트 카디건을 걸치고 있던 소은준이 손목을 매만졌다. 지훈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어제 집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내가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나도 거기 근처에 살거든.”

지훈과 은준이 도란도란 대화를 잇는다.

서우가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름방학이 지나고, 한동안 학교에 소은준
이 오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목발을 짚은 채 강의실에 나타나는데 지훈이 그를 도와주면서 자연
스럽게 서로를 알게 된다. 하지만 어제 이미 시작이 되었나 보다.

지훈이 말했다.

“병원은 안 가 봐도 돼?”

“어. 난 괜찮아.”

서우가 가자미눈을 떴다. 혀 밑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눌렀다.

‘너 어제 나한테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알파와 오메가는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생기곤 했다. 모두 페로몬 때문이었다. 좋은


향기를 맡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어제 팔에 피도 났잖아.”

“아냐. 조금 긁힌 거야.”

서우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여름방학이 지나면 만나게 될 사이였다. 그러니 그 전에


조금 더 빨리 만난다고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서우가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래도 다행인가. 흘깃 뒤를 쳐다봤다. 지훈이 은준의 팔을 매


만지고 있었다.

얼굴이 팔리기는 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서우가 도서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책들을 둘러보았다.

……과거에는 다리를 다친 은준은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지훈은 상심에 빠져 지냈다.


─은준이한테 고백했는데, 차였어.

서우는 지훈과 삼겹살을 먹으러 가서 그 말을 듣게 됐다. 지훈은 그날 술을 진탕 먹고, 눈물까지


보였다.

그리고 사실, 그날은 서우도 울고 싶었다. 태인과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

똑똑-

장 비서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가 두꺼운 종이 뭉치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도 태인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보고서를 한 장 넘기자, 장 비서가 그를 불렀다.

“상무님.”

태인이 고개를 들었다. 장 비서가 품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보기 편하게 내려놓았다.

장 비서의 손끝을 따라 종이가 펼쳐졌다. 대지면적 3000 평 규모의 거대한 부지 도면을 내려다
보는 태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장 비서는 지하 5 층에서 지상 20 층에 달하는 건물 도면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 된다면 2 천 석이 넘는 병상을 확보하게 됩니다.”

세화 제약은 미래 지향적인, 격조 높은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건강 증진 센터를 설


립하려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교육과 연구 시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소문에는 이번 입찰 공시에 미림과 효현도 참여를 할 거라고 합니다.”

미림과 효현은 같은 제약 회사였다. 다만, 세화와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미림은 얼마 전,


수면 장애 신약 개발에 성공하여 대대적인 이슈가 되었다. 그로 인해 이번 부지 입찰 공시에 참여
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 않습니까?”

태인은 도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부지를 낙찰 받아도 준공 기간은 4 년이 넘는다.

장 비서가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슈트 상의를 챙겼다. 태인이 몸을 일으켰다. 상의를 건네받


아 팔을 끼워다. 등 뒤로 장 비서가 도면을 챙겨 바삐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64 층으로 향했다. 상무실 바로 아래였다.

태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그들은 전략기획팀과 재무


팀이었다.
태인이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 내부가 어둡게 변했다. 파란 빛줄기가 정면을 가리켰다. 세화
제약이 지닌 현금과 동원할 수 있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부지를 낙찰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논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

***

“받아.”

서우가 봉투 두 개를 좌우로 내밀었다. 노릇노릇하게 익고 있는 삼겹살 불판 위로 지훈과 은준이


손을 뻗었다.

서우는 한참이나 고민을 했다. 그럼에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


다. 지훈이 봉투를 받아 들며 물었다.

“뭔데 이런 데 넣어서 줘? 꼭 청첩장 같잖…….”

“청첩장이네.”

지훈의 말을 가르고, 은준의 목소리가 작게 끼어들었다. 그가 리본이 나풀대는 청첩장을 내려다


봤다. 지훈이 같은 곳을 응시했다.

“너 결혼해?”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달리 그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꺼내게 된다면 밤을 새워도 모


자랄 테니 말이다.

서우가 젓가락으로 잘 익은 삼겹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곤 사이다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이거 받았는데…….”

느릿하게 시선을 돌린 서우가 눈을 끔벅거리며 은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청첩장을 내리며 눈을


맞댔다.

“그 상대가 너였구나.”

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준이 가방에서 똑같은 봉투를 꺼내어 흔들었다. 서우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럼에도 결혼식장에서 은준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이 몰린 탓에 서우와 마주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개를 숙


이고 있어서 못 봤을지도.
비공개로 이뤄지는 결혼식, 하객도 추려 청첩장을 발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더구나 태인 쪽
에서 초대장을 받았으면, 그와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소은준…….

서우는 이름을 혀로 느리게 굴렸다. 그의 주변에서 흔치 않은 성이기도 했다. 뒤이어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소강욱, 소 사장.

“너 혹시.”

은준이 청첩장을 겹쳐 가방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형이 있어? 소, 강욱.”

서우가 말을 더듬었다. 이름만 머릿속에 있을 뿐, 그의 얼굴이 마찬가지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이 이름이 떠올랐을까? 의문도 잠시였다.

“응, 맞아.”

“그럼 아버지가…… 효현 제약…….”

은준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되물었다. 서우가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의 손에서 젓가락이 밑으


로 내려왔다.

“기사에서 봤어.”

“아, 그래?”

효현 제약은 주로 영양제를 다루는 바이오 회사였다. 그로 인해 규모도 세화 제약보단 작았다.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가는 게 있었다. 아, 그때! 서우가 고기를 먹고 있는 은준을 쳐다봤다.

그때의 은준은 사고를 당하고 난 후였으니, 식장에 오지 못한 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

달칵, 서우가 방문을 열었다. 그의 그림자가 앞서 길게 늘어졌다. 방을 환하게 밝힌 서우가 가


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책상에 놓아둔 상자를 응시했다. 청첩장이 가득하다.

“998 개가 남았네. 이걸 어쩌지…….”

청첩장 위를 가볍게 두드렸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외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이 되었다. 또한, 아버지의 연구 실패가 거듭되면서 친인척과의 관계도 끊어진 지 오래였다.

서우는 상자를 닫았다. 그가 거실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짧게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고기를 먹었더니 소화가 필요했다. 그는 TV 를 켜서 조금 보다가 자정이 되어야 침실로 들어가 잠
이 들었다.

다음 날도 서우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느긋하게 주변을 훑는 여유도 묻어났다.


사고가 났던 편의점은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렇게 어느새 8 월에 접어들었다. 서우가 손끝으로 반팔 셔츠를 펄럭거렸다. 오늘은 날씨가 제


법 더웠다.

교정을 거닐던 서우가 자판기 앞에 서서 오렌지주스 3 캔을 뽑았다. 그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자 두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왔어?”

“여기 앉아.”

지훈과 은준이 번갈아 말을 걸어왔다. 은준이 올려놓았던 가방을 내려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요즘은 셋이서 같이 공부를 하는 때가 많았다. 그 사고를 겪고도 은준은 차분하게 이겨내고 있었


다. 단지, 이어폰은 꽂지 못하고 문득문득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지만 말이다. 그래도
유리에 긁힌 팔의 상처는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

토요일.

세화 병원 앞에 세단이 멈추었다. 장 비서가 뒷문을 열자 태인이 차에서 내렸다. 병원 내부에서


조 원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결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태인은 입고 있던 슈트를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조 원장이 그를 옆에서 보필했다. 더


불어 뒤에 있는 의사들이 거들었다. 그의 두 아들이었다. 외부에는 건강검진이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여 검사를 진행했다.

태인은 3 개월마다 마지막 주 토요일에 방문하여 검진을 받았다. 그의 몸에 있는 변형된 세포를


확인하고 치료를 하기 위함이었다.

오전 내내 검사를 마친 태인이 VIP 병실로 들어섰다. 그는 입고 있는 환자복부터 벗었다. 장


비서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만류하지 못했다.

태인은 와이셔츠를 입고, 베스트에 넥타이까지 견고하게 갖춰 입었다.

조 원장이 검사 결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슈트를 말끔하게 입은 태인을 익숙하다는 듯 받아


들였다.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았다. 환자복 따위는 검사가 끝나면 곧장 벗어던졌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건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베스트를 입은 태인이 침상에 기대어 앉았다. 조 원장이 가까이 다가가 태인의 소매 단추를 풀었
다. 그가 접어 올렸다.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상무님…… 이러면 들어가질 않습니다…….”

조 원장은 힘을 빼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곤 손목에 링거 바늘을 꽂았다. 조 원장은 수혈을 하
면서 태인에게 검사 결과를 보고했다.

태인은 부족한 혈액의 혈구 성분과 혈장 성분을 타인으로부터 공급받았다. 건강한 극우성 알파의
피를 받아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태인으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건강한 극우성 알파의 피는 태인의 전신에 있는 변형된 세포를 억눌렀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
나면 또다시 변형된 세포가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전보다 더 건강해지셨습니다. 이대로만 가신다면 서른 살도 무리 없이 넘기실 수 있으실 겁니


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해대는 매번 똑같은 조 원장의 위로에, 태인의 눈동자가 싸늘하다. 조 원


장의 말과는 반대로 수혈의 기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땐 1 년 주기였는데,
어느새 3 개월 단위까지 내려왔다.

─태인 씨는 건강했어요. 제가 태인 씨 아이도 가졌다고 했잖아요.

태인의 귓가에 절박한 음성이 스치고 지나간 것도 그때였다. 왜 그 목소리가 떠오른 건지 모르겠
지만, 태인이 고개를 돌려 손목을 내려다봤다.

태인은 열 살 때 고비를 넘기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절망을 맛봤다.

그는 스무 살을 기점으로 두 번 다시 기대란 걸 하지 않았다.

2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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