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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1 Condicion de Expresion
RAW1 Condicion de Expresion
프롤로그
“으읏…… 읍……!”
“깨물어도 소용없어.”
뿌리까지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서우의 입 밖으로 나왔다. 기다란 타액이 실처럼 늘어나다 툭 끊
어졌다.
“하아…….”
“후회 안 할 거거든요.”
서우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태인의 몸에서 백단나무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읏……!”
“난 분명 경고했어.”
태인의 얼굴이 조금씩 아래로 향하는가 싶더니, 차가운 입술이 목에 닿았다. 서우의 하얀 어깨
가 움츠러들었다. 곧이어 그보다 뜨거운 혀가 말캉하게 느껴진다. 태인의 입술이 움푹 들어간
쇄골을 스쳐 아래로 향한다.
그가 혀를 내어 조그마한 유륜을 핥았다. 감질만 난다. 손으로 판판한 가슴을 그러모아 움켜쥐
었다. 금세 젖꼭지가 뾰족하게 곤두섰다. 그는 볼우물이 파이도록 깊게 젖꼭지를 빨았다.
“읏…….”
“흣…….”
테이블에 엉덩이가 걸쳐진 서우의 탄탄한 다리가 벌어졌다. 태인의 차가운 손끝이 구멍에 닿았
다. 서우는 허리가 얕게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태인의 검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겁고 좁은 구멍은 태인의 손가락을 끊임없이 먹어치웠다.
“아! 읏…….”
“하아…… 하아…….”
“읏…… 하앗…….”
아래에서부터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서우는 목덜미가 붉게 변하다 못해, 뺨에 홍조가 돌고,
급기야 귀까지 새빨갛게 익었다.
아래를 치대는 귀두가 구멍을 가르고 찔벅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곧이어 회음부를
긁고, 음낭을 찌르고, 애액이 묻어 미끄러지듯 위로 치솟아 색이 연한 서우의 귀두에 닿았다가
뒤로 물러났다.
태인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의 귀두가 질척거리는 구멍을 가르고 안으로, 조금씩, 느리게
파고들었다. 서우는 아랫배를 빠듯하게 채워 올라오는 감촉을 고스란히 느꼈다.
“읏!”
“반도 안 넣었어.”
반동하듯 서우의 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태인이 붙잡은 장골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얀 엉덩이
가 책상 끝에 닿아 마구잡이로 뭉개졌다.
“읏……!”
서우는 아래를 관통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서우가 한 손으로 책상
을 짚었다. 둥글게 다듬어진 손끝이 희게 질렸다.
태인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끊임없이 붉은 자국이 생겼다. 서우는 아래에서 쳐올리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성기 끝이 내벽을 휘젓는 게 아니라,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듯했다.
태인이 안쪽을 깊게 파고들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까맣게 점멸했다.
“아앗…….”
***
남편이 죽었다.
장례식장 한쪽에 자리한 서우의 눈동자는 흐릿하다. 천태인의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는다.
조급하게 그가 향하는 서재로 걸음을 내디뎠다. 서우를 향한 도우미의 시선이 사방에서 밀려든
다. 서우는 마치 천태인의 뒤를 따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급기야 천태인을 바라보던 서우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천태인의 눈동자는 오랫동
안 마주 보기 힘들었다. 서우는 그의 뾰족한 목울대와 구김살 없는 와이셔츠를 눈에 담았다.
천태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서우의 고개는 점점 밑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돌아갈 순 없었다. 그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천태인의 맞물린 입술이 떼어진다. 수려한 그의 얼굴은 차가웠으며 눈동자는 서릿발처럼 냉담하
다. 그의 눈동자에 서우는 베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말해.
─…….
휴대폰을 든 마른 손이 덜덜 떨린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격한 심장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대로 쓰러진 그는 끝끝내 의
식을 되찾지 못했다. 차 안에는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
이던 천태인이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그 말조차 서우는 귀에 닿지 않았다.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그를 처음 만난 건 결혼식장에서였다.
서우가 지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사진첩에 이마를 대었다. 희미하게 백단나무 향기가 난다.
뺨에 닿는 페로몬이 금세 코끝을 스쳐 심장까지 전해졌다. 하얗게 부르튼 서우의 입술이 떼어지
고 지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서우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아파…….
“……!”
“하아…… 하아…….”
이미 늦어 버린 모양이다.
1. 죽어서 다시 시작
아버지 백영길이 다정하게 웃으며 서둘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서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었다. 그의 마른 목울대가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솟구쳤다.
눈을 뜬 서우는 극심한 목마름을 느낀 터였다. 그는 엎드려 있던 책상에서 간신히 상체를 세워,
비틀비틀대며 문을 열고 나온 직후였다. 그런데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반색하는 낯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서우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장 비서님…….”
장 비서가 말했다.
앞서 서우는 결혼식을 비공개로 돌리자고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결혼한 사실도 공표하지 않
길 바랐다. 대학생인 그의 학업에 지장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고, 무조건 맞춰 달라 덧붙였
다. 그렇게 하면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천태인이 결혼을 거부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묻어두었던 기억이 차곡차곡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암요. 상무님께서…….
서우가 조급하게 다가가 소파 등받이를 짚었다. 그렇지 않고선 무릎이 구부러져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암요. 상무님께서…….”
“태인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
아버지의 시선에 장 비서의 눈길이 더해졌다. 서우의 입에서 나온 ‘태인 씨’라는 호칭에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서우는 마치 그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애틋하게 부르고 있었다.
***
서우가 타월을 끌어당겨 두 얼굴을 묻었다. 포근하다.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특히나 문밖에서
연이어 서우를 부르고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랬다.
꿈이 아니야.
“……?”
“윽…….”
통증도 느껴져.
스무 살이었던 백서우는 줄기세포 연구원인 아버지에 의해 천태인과 결혼을 했다. 서우는 어떻게
든 결혼만큼은 막아 보려고 했지만, 이미 아버지는 막대한 연구 기금을 받아 사용한 터였다. 어
떻게 해도 그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별안간 서우의 시선이 한곳에 못처럼 박혔다.
하물며 서우는 어려서 일찍 어미를 여의었다. 그에게는 아비가 되어 가지고 연구를 한답시고 서
우를 보듬지도 못한 책임이 있었다. 그는 훈계할 처지도, 명분도 없다. 급기야 서우의 결혼마
저 이런 식으로…….
서우가 거울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수룩하다고 일컬었지
만 서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마저 그렇게 여기면 아버지의 왜소한 어깨가 초라하게 보
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
탁 트인 전경, 상무실 책상에 자리한 천태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련의 일을 보고
받는 중이었다. 그 안에는 혼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를?”
서우의 애틋한 목소리로 짐작건대,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천태인이 깊은 상념에 잠기는 눈빛을
띠었다. 장 비서가 조곤조곤 말했다.
***
“서우야, 시험 잘 봤어?”
“응…….”
그래도 지난날 서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인 것과는 반대로, 한번 치러봤던
시험이라 서우는 막힘없이 손을 움직였다. 마치 제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였다.
옆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대는 지훈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서우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
다. 장 비서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가 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서우야. 백서우!”
“아, 어?”
서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지훈과 이마가 콩 부딪혔다. 서우가 움찔거
리자, 고개를 뒤로 물린 지훈이 서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지훈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서우는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소매에 배어 물씬 풍기는 알파의 향기가 전해진다.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한참을 망설이던 서우가 액정에 손가락을 얹었다. 태인은 두 대의 휴대폰을 지니고 있는데, 서
우가 누르고 있는 건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번호였다. 그러나 서우는 이 번호로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다른 말은 없었나요?”
“장 비서님.”
[네?]
통화를 끝내려던 장 비서의 의아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서우가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바람이 그의 옷깃을 사부작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뭐…… 뭐를 말씀이십……니까?]
‘태인 씨’라는 호칭에 당황한 장 비서가 말을 더듬는 사이, 서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장 비서가 한 번 채로 걸러내듯 말을 바꾸어 전달할 것까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
“방금 그 말 무슨 소리야?”
서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임지훈이 서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서우의 통
화를 듣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우의 얇은 배를 내려다봤다.
“그…… 그게…….”
이곳이 교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서우는 뒤늦게 뺨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다행히
지훈 말고는 서우의 말을 들은 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별일 아니야.”
“너 정말 아이…….”
“아냐.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서우가 손을 거두고, 지훈에게서 멀어지듯 걸음을 재촉했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서우는 하얀
가운을 걸쳐 입었다. 실습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서우는 좀처럼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 방법도 안 통하나…….
시선이 부딪힌 장 비서가 몸을 비스듬히 돌린다. 정차된 세단은 창문이 조금 내려온 상태였다.
순간 그가 이쪽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서우는 넋을 놓은 것처럼 서 있었다.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기다란 장신의 실루엣이 유려하
게 움직인다. 결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서우는 심장이 가
파르게 뛰었다.
태인 씨.
서우의 다리가 비틀거리며 떼어졌다. 정면을 응시한 서우의 손이 배를 감쌌다. 태인의 시선이
맞물린 것도 잠시였다.
“서우야.”
지훈이 서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서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흡사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면을 쳐다봤다. 학생들의 눈길이 하나둘씩 더해진다.
“너 울어?”
시야가 흐려진 서우가 조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태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
느새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서우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인 씨가 죽다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서우는 믿을 수 없었다.
“계속 연락…….”
기다렸는데.
“일찍 온다고…….”
했으면서…….
그것도 기다렸는데.
“내려.”
“나와.”
“흑…… 네…….”
요리사가 친히 안으로 들어와 음식을 올렸다. 천태인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눈치껏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미닫이문이 닫히고 룸 안은 급속도로 고요해졌다. 테이블에 앉은 서우의 울
음소리도 조금씩 잦아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서우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노릇하게 익은 장어와 전복, 오리고기와 푸릇한 채소잎까지. 테
이블에는 어느새 먹음직한 빛깔을 뽐내는 보양식이 자리했다.
“내 애를 가졌다고?”
전후 사정에 관한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는 천태인의 눈동자는 서슬이 퍼
렇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린 서우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딸꾹질이 흘
러나왔다. 서우가 손수건을 입술에 댔다. 그럼에도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처럼 멈추지 않았
다.
“……!”
“이제 말해.”_ડ χ
─용건만 말해.
“난 너랑 잔 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 내 애를 가졌지?”
“그게요…….”
“…….”
“저도 태인 씨가…….”
쿵!
“…….”
“장 비서님.”
“내가 그런 거 아닙니다.”
***
“아, 아니! 이게 어찌 된…….”
“정신을 좀 차려 보십시오.”
장 비서가 서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서우의 머리카락에 고정됐
다. 땅콩 소스가 앞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결혼을 하실 분이 아닙니까.”
태인의 시선이 서우가 쥐고 있는 손수건에 머물렀다. 서우는 너무도 당연하게 태인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달라고 했다.
‘기우겠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자신뿐인 건 아닐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툭, 동그란 정수리가 태인의 시야에 채워진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서우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온다.
그거야말로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태인이 기다란 검지를 올려 서우의 이마를 꾹 밀었다. 서우의 머리가 재차 차 시트에 닿는다.
***
“……목말라.”
서우가 눈가를 찡그렸다. 그가 타들어 가는 목울대를 만졌다. 좌우로 조그마한 머리가 움직였
다. 일렁거리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진다. 서우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꿈이었구나…….
서우가 문을 열자, 지나가던 도우미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품 안에는 세탁물이
들려 있었다. 서우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반쯤 떨군 채 말했다.
“이쪽으로 데려와요.”
“꿈이 아니었네요.”
“너 술 마시지 마.”
“…….”
천태인은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이동했다. 긴 햇살이 화려하면서도 모던한 가구들 사이를 비집고
집 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문을 나서자 서 있던 사람들이 생동감 넘치게 다시 움직이기 시
작했다.
***
욕실에 들어선 서우는 투명한 샤워부스에 자리를 잡았다. 버튼을 눌러 가며 온도로 맞추어 미지
근한 물로 샤워를 하는 내내 서우의 얼굴은 청초했다.
서우가 몸을 돌리자 연임이 가지런히 개어진 옷가지를 내밀었다. 서우가 웃으며 받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제 옷은 누가…….”
“상무님께서 하셨어요.”
“아, 그랬어요?”
“……?”
“제가요?”
“그럼 전 이만…….”
서우가 짧게 불렀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아이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신기한 건 도대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저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거지?
***
징-
“네.”
“누굽니까?”
“상무님 댁 가사도우미입니다.”
“도우미요?”
“네.”
─내가 하죠.
서우의 하얀 손끝이 향하는 방향은 태인의 벨트였다. 달각, 뒤늦게 정신을 차린 태인은 벨트를
풀려는 서우의 손을 잡아 뜯어 던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던 서우가 침대 위로 풀썩 나자빠졌
다. 태인은 주변 사람을 전부 내보냈다.
─너 취한 거 아니지?
“네?”
***
세화 병원.
진료실에 자리한 연임은 울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서우의 말을 듣자마자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초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드문데, 운이 좋네요. 보기보다 장기들 사이에 깊숙이 숨겨져
있어 발견하기 어렵고, 뒤쪽에 위치하고 있어 배를 만져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
셨습니까?”
증상부터 일반인이 알아채기 어려웠다. 췌장암은 통증이 느껴졌을 땐 이미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
이 컸다. 특히나 혈관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진행 속도도 훨씬 빠르다.
***
“너 괜찮아?”
“나?”
예전에 아버지가 놔둔 소주를 물로 착각해서 먹고, 서우는 거의 기절을 하다시피 했다. 서우는
정말이지 술과 잘 맞지 않는 체질이었다.
─너 술 마시지 마.
─그러고 서 있을 건가?
과거, 결혼한 뒤 침실에 자리한 태인이 서우의 셔츠 단추를 빼내는 동안, 서우는 초조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결혼했으니까, 이제 부부니까. 관계도 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 준비
가…….
─치…… 으응…… 읍!
***
달칵, 도곡동에 위치한 오피스텔로 들어선 서우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창문을 열어 집
안부터 환기를 시켰다. 밀려든 봄바람에 종이가 날려 바닥에 흩어졌다.
서우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힘든 사람을 돕고 살리겠다는 의협심보단 아버지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
일인실 침상에 누워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그 모습이 장 비서와 어렴풋이 비슷하다.
“오셨어요.”
“몸은 괜찮아요?”
보안과 방비가 삼엄한 한남동은 출신과 학력이 명확한 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안에 사적으
로 연임을 넣은 건 장 비서였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네?”
연임이 눈동자를 굴렸다. 침대에 기대어 이쪽을 보고 있는 어머니를 한 번 보고 조그맣게 말을 덧
붙였다.
“그럼…….”
“그래?”
***
“……김 의원이요?”
“어디가 아픈 겁니까?”
“천 상무님.”
시선을 느낀 서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우를 내려다봤다.
***
서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천천히 다가와 서우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서우의
쇼핑백을 받아주려는 듯 두 손을 뻗었지만, 서우는 웃으며 곧 내린다고 답했다. 귓가에 MC 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쩐지 너무 예쁘더라.]
평범한 베타와 달리 알파들은 타고나길 고도화된 신체와 비상한 두뇌를 지녔다. 또한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뛰어난 기량으로 스포츠와 전문 분
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극우성 오메가들은 달랐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노화가 더뎠으며,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를 지녔다. 특히나 매혹적인 페로몬은 일반 오메가와 확연한 차이를 가졌다.
“천 상무님.”
“태인 씨.”
“곧 내려오신다고…… 하시는데요.”
기분이 나쁜가?
하긴, 그것도 많지 않았지. 어쩌다 가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간혹가다 태인이 밥
을 먹자고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하얀 가운을 날리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백영길은 한달음에 뛰어와 서우의 옆
에 다가섰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거뭇거뭇하게 자란 턱수염. 서우는 새어 나오려는 긴 한숨을
삼켰다. 머리도 안 감고, 끼니도 걸렀는지, 아버지는 볼살에 우묵하게 파여 전체적으로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천태인이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좀 씻는 게 좋겠어요.”
백영길이 세면대에 허리를 숙였다. 그가 연이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서우는 쇼핑백을 뒤
적여 타월을 꺼내어 내밀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연구 결과물은 서우가 결혼을 하고도, 그리고 천태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
간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자신을 몰아세워 봤자 축나는 건 아버지의 건강이
었다.
“나 결혼할래.”
서우가 늘어진 타월을 백영길의 손에서 잡아 빼냈다. 그대로 접어 쇼핑백에 넣으며 말을 덧붙였
다.
“…….”
서우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천문학적인 상속금이 서우에
게 떨어지던 순간이 귓가에 생생하게 퍼졌다.
태인의 성격에 그렇게 갑자기 서우에게 쏟아지듯 넘길 리 없었다. 서우는 비공식적으로 결혼을
했다. 그렇게 요구하면 천태인이 거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모든 걸 수용했다. 그리고
세화 법무 법인은 마치 오랫동안 준비를 했던 것처럼 서우에게 모든 과정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
다. 그 말인즉, 태인 씨는 자기가 죽을 걸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닐까?
그러니 미리 서우의 앞으로 자택과 세화 병원, 빌딩과 연구소의 지분을 옮겨 놓았을 확률이 높았
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서우가 쇼핑백에 타월을 넣고 고개를 들었다.
“태인 씨 몸에 무슨 문제 있는 거야?”
***
“용건만 말해요.”
“차 돌려요.”
“네?”
“차 돌려.”
그런데…….
세단이 멈추고, 조수석에서 뛰어내린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그보다 태인이 더 빨랐다. 장
비서는 문에 부딪힐 뻔한 상체를 화들짝 뒤로 물렸다. 태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벌써 돌아갔나?
“뭐 놓고 가셨어요?”
장 비서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태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서우의 눈길이 미끄러지듯이 이동했
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적어도 서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장 비서님.”
“그분이 살아 있어요?”
태인의 눈길에, 장 비서의 시선이 더해졌다.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그 사이를 가르는 건, 장
비서의 손아귀에서 거듭 징- 징- 울리는 휴대폰 진동음이었다.
“살아 있냐고?”
태인의 낮은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서우가 떨떠름하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백영길은 강제로 서우의 가느다란 뒷덜미를 감싸 뒤를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
“병환이 뭡니까?”
뒤늦게 이해한 듯 조 원장이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럴수록 천태인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꽉 움켜쥔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장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2. 젖어드는 향기
백영길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지문이 확인되자 유리문이 열린다. 그 뒤를 따라 서우가 걸음
을 옮겼다. 좌우로 굳게 닫힌 문이 늘어졌다. 한곳에 다다르자 백영길이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
을 댔다. 출입문이 열린다.
고요한 연구실 안, 같이 사용하는 사람은 퇴근을 했는지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연구실은 2
인이 사용하는 구조였다. 대형 모니터와 집에 있는 구형 현미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최신 기계들
이 곳곳에 있었다.
“나중에.”
보통은 외부인은 출입 금지였지만, 서우는 예외였다. 태인과의 결혼은 서우의 위치를 다방면으
로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달칵, 문소리가 들리자 서우가 황급히 창을 껐다. 그가 몸을 돌리자 백영길이 흰 타월로 얼굴을
닦으며 걸어온다. 서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몸으로 모니터를 감추며 손끝으로 뒤를 가리켰
다.
***
세화 병원, VIP 실.
“허억……!”
“과호흡입니다.”
“허억…… 허억…….”
“조 원장!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또! 또! 그 소리야?”
“하…….”
조 원장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테이블을 훑었다. 귓가에 김 의원이 갈비를 뜯으며 쩝쩝대는 소리
가 들려왔다. 김 의원이 먹고 있는 건 외부 음식이었다. 그는 보좌관을 시켜 아침부터 만찬을 즐
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 원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구기고, 입을 놀렸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거 안 보여?”
아무리 보아도 천 상무님이 너무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린 나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 원장은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심히 고민하는 얼굴로 문을 닫았다.
***
똑똑-
“천 상무님.”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믿지 않아요.”
“그러면…….”
말끝을 흐리는 장 비서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태인의 긴 다리가 떼어졌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표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 비서가 노크를 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천건명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감정을 잘 드러
내지 않는 건 부자(父子)의 공통점 중 하나였다.
“그새를 못 참고.”
천 대표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에 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 비서가 책상에 올라가 있던
봉투를 가지고 왔다.
“김 의원에게는 네가 직접 전해 주거라.”
“좀 이따가 들어와요.”
“……네, 상무님.”
쾅!
“상…… 상무님.”
─열다섯 살이 고비입니다.
“천 상무님, 손을 좀…….”
태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대신하듯 묻어두고 있던 잔상이 떠
올랐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천 상무님은 서른을 넘기기 힘드실 겁니다.
냉담한 얼굴로 마주한 태인의 앞에선 조 원장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낮게 조아렸다. 그의 옆으로
켜진 모니터에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7 세에 발현을 시작한 태인의 몸에는 알파 세포뿐만이 아니라, 변형된 세포도 생겨나기 시작했
다. 극우성인 그의 세포들은 분열 능력이 뛰어났으며, 모양이나 크기가 정상 세포와도 다르다.
변형된 세포는 아무리 사멸시켜도 그의 체내에 잔류했다.
***
교수가 강의를 마치자 서우는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둥그런 손끝이 액정을 빠르게 누볐다.
‘없어…….’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기도 했고, 1 학년이었던 서우는 외워야 할 것도, 태인과의 결혼으로 신
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또한 김 의원이 사망을 하고,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기에 정확한 날짜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자극적인 제목에는 확인되지 않는 추측성 내용도
많았기 때문이다.
장 비서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서우는 한동안 꿈에서 본 것들을 헤아렸다. 김 의원이 죽는 바람에
세화 병원은 의료 사고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천태인이 조사에 응하기 위해 기
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결혼을 하고도 태인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서우의 아버지가 연구원이라는 사실은 지훈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자주 만나지 못하는 만큼,
서우가 아버지의 걱정을 유독 많이 하는 것도.
지훈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서우는 그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가방을 어깨에 얹으며
강의실을 나섰다. 머릿속으로 퍼즐처럼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끊임없이 맞추었다.
서우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에게는 값비싼 것도, 태인이 가진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서우가 계단을 내려왔다. 교정을 거니는 그의 눈동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의대생이 된 것에는 좋은 머리와 환경, 아버지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서우의 암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고 복기했다.
─숨 쉬어. 안 박고 있잖아.
풀어진 벨트와 벌어진 버클 사이로 자홍색 성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친 음모에 서우의 코끝
이 푹 처박혔다가, 뒤로 물러난 허리로 인해 뒤늦은 호흡을 골랐다. 무릎을 꿇은 서우의 머리 위
로 쏟아지던 욕구로 점철된 태인의 숨결은 뜨거웠다.
태인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깨끗한 걸 좋아했다. 서우의 눈에는 문제랄 게 없어 보이는 것들도 그
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읏.
아랫입술을 세게 빨고, 통증을 완화해 주듯 혀를 할짝댄 태인이 입술을 뗐다. 긴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서우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코앞에 자리한 그를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깊
은 두 눈동자, 갸름한 얼굴에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
두 사람이 1 층에 모습을 드러내자 오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태인은 냉담한 얼굴로 대
기 중이던 세단에 올랐다.
징-
징-
장 비서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연달아 울리는 소리는 태인의 슈트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좁은 차 안에는 날짜와 시간을 다급하게 외치는 서우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장 비서가 휴대폰
을 들여다봤다. 오늘이었다.
“너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
태인이 정면을 응시하자 뒤를 돌아보던 장 비서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눈으로 결단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휴대폰은 지극히 태인의 개인적인 용무로만 사용했기 때문이
다. 대외적으로 뿌리는 번호가 따로 있거늘. 장 비서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천 상무님…… 손이 왜?”
태인은 김 의원의 문병을 가장하여 약속을 잡은 터였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아버
지가 원했던 대로 김 의원에게 백지수표를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았다.
***
“어쩌지…….”
징-
서우는 어떻게든 그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
고, 책상에 앉았다. 전공 책은 펼쳐 보지도 않고, 한동안 뭔가를 끼적였다. 그의 노트는 다양
한 글귀들로 빼곡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연구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징- 서우가 휴대폰을 바라보며 이마를 감쌌다. 눈썹이 팔(八) 자로 내려왔다.
“이러다 말 거야.”
[드디어 받네.]
“……앞이요?”
다행히 뒷말은 떨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휴대폰 너머로 찰나의 정적이 흐른
다.
서우는 다급한 마음에 태인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정도로 상황이 급했기 때
문이다. 그런데도 그게 다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태인은 한 대목에 넌지시 힘을 주었다. 휴대폰 너머로 화들짝 놀란 듯 당황한 서우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올라오세요. 저 지금 집에 있어요.]
***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인터폰에 기다란 실루엣이 어렸다. 서우가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이
열리고 태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라도 내올게요.”
놀랐을 테니, 마음을 가라앉혀 줄 따뜻한 게 필요할 것이었다. 서우는 안내할 것도 없는 거실을
가리키곤 몸을 돌렸다.
실시간 검색어에 ‘김정한 의원’이 떠 있다. 그가 죽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서우가 엄지손가락
으로 목록을 툭 눌렀다.
“넌 죽을 걸 어떻게 알았지?”
“…….”
서우는 급속도로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태인의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번호는?”
장 비서는 서우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눈으로 읽으며 속으로 따라 되뇌었다. 서우의 입술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연임 씨랑 장 비서님 관계, 태인 씨도 아나요?
“맞아요. 그때 들었어요.”
“그걸 보고 알았다고?”
그러나 밀려드는 태인의 눈총에 서우는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한곳에 시선이 다
다른 서우가 물었다.
“다쳤어요?”
서우가 재빨리 태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길고, 짧은 베인 듯한 상처가 있었다.
“잠시만요.”
“유리잔 깨트렸어요?”
“…….”
서우는 상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태인의 눈동자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
다.
“조심하지 그랬어요.”
“죄송해요.”
태인은 가볍게 손가락을 털었다. 서우가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내려다 말고, 주머니에 손을 넣
었다.
“내 벨트라도 풀게?”
“소파에 앉아.”
태인은 의심의 눈초리를 했지만, 반박하지도 않았다. 서우가 의대생이라는 건 누구보다 태인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싫든 좋든, 애정이 있든 없든, 결혼은 하게 될 사이니까.
“아픈 곳이 있나요?”
“없어.”
“가족력이 있나요?”
서우의 입술이 맞물린다. 태인의 말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세 번째는 서우의 사심이 그득한 질
문이다. 할 수 없나.
“프러포즈요. 그건 언제 하실 거예요?”
“…….”
“…….”
예전이었다면 태인에게 이렇게 말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우는 고요한 서재 책상에
혼자 엎드렸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
***
……뭘 말인가?_ડ χ
3. 완전무결한 결혼(1)
“이게 다 뭐예요?”
서우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장 비서의 등 뒤로는 사람들이 물건을 싣고 끊임없이 들어
오고 있었다. 급기야 입구가 틀어 막힐 지경이었다.
“저한테요?”
“잠시만요!”
서우는 테이블에 늘어진 목걸이와 반지, 시계, 금수저 세트도 앞으로 밀었다. 가방은 조금 탐
이 나긴 했지만, 이런 고가를 가지고 다닐 순 없었다. 학교에서도 때가 탈까 봐 무릎에 얹고 있
어야 할 테니.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할 거다.
“이거 다 태인 씨가 고른 거 아니죠?”
“……네.”
“예?”
“그거면 돼요.”
태인은 바쁜 사람이기에 날짜는 지정하지 않았다. 서우는 두 손을 분주하게 놀렸다. 열린 보석
함을 닫아 원래의 상자에 넣어, 보자기를 싸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 비서의 얼굴은 당혹으
로 물들었다.
***
“다른 말은 없었나요?”
태인이 서류에 서명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장 비서가 반색하며 답했다.
“저녁이요?”
“네.”
“토요일 저녁이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1 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가는 사람들이 태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무표정
한 얼굴로 세단에 올랐다. 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태인은 장 비서가 건네는 태블릿 PC 를
받아 일을 이어서 처리했다.
장 비서가 고개를 뒤로 돌려 도착을 알렸다. 태인이 태블릿 PC 를 아래로 내리며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사이, 조수석에서 내린 장 비서가 뒷문을 열었다.
태인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쾌청한 하늘, 줄지어 세워진 나무들이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태
인의 머리카락도 가볍게 날렸다. 그의 시선이 언덕 위에 세워진 둥근 돔 모양의 지붕, 하얀 납골
당 건물에 다다랐다.
***
“없어.”
“연구실에 두셨나.”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비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
백영길이 차가운 태인의 눈빛에 짓눌린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 무릎을
꿇었다.
“…….”
“보시겠습니까?”
***
10 년 전.
─내 자네 말을 어떻게 더 믿나?
─하지만, 회장님…….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태인이 발끝을 돌렸다. 현관문을 나서는 백영길을 쳐다봤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주차된 차 옆
에 웅크리고 있던 서우가 다가왔다.
태인은 그날 김 의원의 병문안을 빌미로 방문하여 백지수표를 건네려고 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김 의원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조 원장에게도 딴 사람처럼 행동했다.
─고맙네.
***
“전화로 물어볼까.”
서우는 상체를 당겨 빛바랜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금발의 리암은 식물학자로, 희귀한 식물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꽃대의 모양, 씨앗 위에 난 돌기를 나열한 글귀를 보다가, 시선이 테이
블에 펼쳐놓은 앨범에 닿았다.
8 월 27 일 박석원. 세포 연구 기술 유출.
노트를 바라보던 서우의 눈동자에, 과거 한남동 거실을 다급하게 걸어오던 장 비서의 모습이 어
렸다. 평소 장 비서답지 않게 그에게는 서우에게 인사조차 건넬 여유도 묻어나지 않았다.
쏴아아-
***
서우가 책 위를 탁탁 두드렸다.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대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선 통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서우는
통화 연결을 누르고 장 비서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요?”
“나 먼저 갈게.”
“하아…… 오래 기다리셨어요?”
“태인 씨가 이걸 줬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식물학자?”
“이 사람을요?”
장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안전벨트가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몸을 틀어 뒤를 돌아봤다. 찢어
질 것처럼 얇은 종이, 식물을 들고 있는 금발의 리암에게 서우의 시선이 닿았다.
리암은 희귀한 식물이 자라는 곳이라면 절벽이라도 달려갔다. 그녀는 세계 방방곡곡을 누볐다.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거예요.”
장 비서가 종이를 가져가 리암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서우에게 뭔가를
묻고 싶은 듯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서우는 우울한 얼굴로 가져온 책을 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책은 ‘알파 해부학’이었다.
***
고가의 턱시도가 즐비한 명품관으로 장 비서가 들어갔다. 서우는 연륜이 묻어나는 재단사의 도움
을 받아 정확하게 신체 사이즈를 쟀다. 그의 앞으로 사람들이 턱시도를 가지고 나와 보여 주었
다.
“저걸로 할게요.”
장 비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우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보았다. 길게 내려온 칼라의 선이
유독 매끄러운 하얀 턱시도였다.
진중한 재단사의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하다. 그건 이곳에 방문하였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일
까.
“입어 보시겠습니까?”
상념을 깨우듯 서우가 가리킨 턱시도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 들어.
혀 밑까지 고인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때 기다란 검지가 턱밑에 닿았다. 차갑고 서늘한
감촉에 서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그렇게.
재단사가 서우가 입고 있는 턱시도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소매를 바라보던 서우가 시선을 옮기어
재단사를 똑바로 마주 봤다.
“아니요. 전 꽃을 싫어해서요.”
“그러셨습니까.”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직원이 서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다. 네 번째 손가락에 미끄러지듯 안착하는 반지를 서우
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손끝을 살짝 구부렸다가 폈다. 묵직하다. 허전했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어쩐지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뒤이어 광채를 뽐내는 시계가 서우의 앞에 늘어졌다. 그는 태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시계를 막힘
없이 집어 들었다.
***
서우가 세단에 올랐다. 어느새 주변은 어둡게 변해 있었다. 조수석에 장 비서가 앉자 서우가 불
렀다.
“장 비서님.”
“예?”
“말씀하세요.”
집으로 들어선 서우는 거실을 환하게 밝히고 욕실로 들어갔다. 짧게 샤워를 마친 서우가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아둔 책을 스쳐 가방을 붙잡았다.
***
이른 아침, 상무실.
“연구실에 출입을요?”
“죄송합니다.”
급하게 말을 맺은 장 비서가 상체를 조심스레 세웠다. 흘깃, 곁눈질로 태인의 안색을 살폈다.
“저, 상무님.”
그 혼자 결정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장 비서님.”
“괜찮아요.”
서우는 장 비서가 불편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야말로 주변에 있는 옥석이
가려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습니까.”
“장 비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서우도 같이 왔네.”
그때 백영길이 다가와 서우의 옆에 섰다. 박석원이 어린 동생을 대하듯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
며 말을 덧붙였다.
“네.”
서우가 지퍼를 당기어 가방을 열었다. 백영길이 입을 옷가지가 가지런히 접혀 있다. 서우는 그
안에서 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세수는 했어?”
사무실은 2 인이 사용하는 구조였다. 걸음을 옮겨가던 서우의 눈길이 한곳에 다다랐다. 저번에
왔을 땐 보지 못했던 커다란 원형으로 된 실험기기를 바라봤다. 안쪽을 볼 수 있도록 유리 돔 안에
있었다. 장 비서가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혈액 분석 기기입니다.”
“아…….”
의료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혈액만으로도 앞으로 발병이 가능한
병을 유추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을 토대로 대책을 세우고, 한발 앞서 미리 예방하여 치료
할 수 있었다.
장 비서는 기계의 앞으로 다가가 혈액이 투입되는 입구와 결과가 송출되는 모니터를 번갈아 가리
켰다. 서우의 눈에 비친 호기심을 채워 주려는 듯했다.
뒤늦게 서우의 안색을 살핀 장 비서가 움찔거렸다. 서우의 눈빛이 어쩐지 차갑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는지, 눈이 마주친 서우가 웃었다.
“잘됐네요.”
서우가 걸음을 옮기어 백영길의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고, 그는 습관처럼 어질러
진 책상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 비서가 혈액 진단 기기에 시선을 옮기었다.
“왜 그러십니까?”
뒤돌아 있던 장 비서의 어깨가 곤두섰다.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천태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백영길의 모습이 영상처럼 펼쳐졌다. 더욱이 흰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백영길의 손도
얼어붙었다.
“……잘 찾아봤어?”
“그럴…… 리가 없는데?”
서우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백영길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장 비서가 손가락을 뻗었다.
차마 백영길의 행적에 대해 밝힌 순 없지 않은가. 그가 도움을 주어야 할 때였다.
“이 기기 최종 테스트는 끝났습니까?”
***
[그 여자, 찾고 있지?]
***
장 비서가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손목을 문질렀다. 백영길은 그의 혈액을 들고,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유리 돔이 갈라지듯 열린다.
고도화된 기계는 소량의 피로도 검사가 가능했다. 더구나 이 기계는 피 이외에, 체액을 넣어도
검사가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병원뿐만 아니라 다각도에서 활용이 가능한 진단 기기였다.
백영길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그가 이토록 민첩한 건 연구와 관련됐을 때뿐이었다. 서우는
그 모습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았다.
비밀번호 0426 은 서우의 생년월일이다. 그리고 태인이 꽃과 케이크를 구입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일 같은 건 잊고 살았는데.
“나왔습니다.”
장 비서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상용화되기 전이다 보니, 암호처럼 떠 있
어 해독을 요했다. 그가 백영길을 향해 손짓했다. 백영길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렇다고 뭔가를 먹고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내려가기 전보다 혈색이 더 창백하
진 않을 테니까.
“아니, 이게 왜 이래?”
장 비서가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렸다. 서우가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으러
가긴 틀린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문을 나서는 동안 백영길과 박석원은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
다.
“태인 씨가 알면 실망하겠네요.”
“아무래도…….”
“…….”
“사, 상무님?”
“안 탈 겁니까?”
“누구의 피였습니까?”
“어? 나?”
박석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가 주변을 의식하듯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거절을 하
려는 그의 입을 막듯 서우가 선수를 쳤다.
“내…… 내가?”
“그, 그래.”
─네!
박석원이 그 약속을 한 건, 자줏빛 앨범에 들어간 사진을 찍고 난 뒤였다. 그러니까 중학생이 된
서우에게 했던 약속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
서우가 지갑을 열었다. 둥글게 다듬어진 손톱,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블랙 카드를 꺼내 태인의
앞으로 내보였다.
“바쁘면 어쩔 수 없구요.”
장 비서가 앞질러 가더니,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태인이 뒤를 돌아봤다. 서우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달려가듯 차에 올랐다. 코끝에 물씬 백단나무의 페로몬이 닿아 왔다. 익숙했
으며, 그리웠던 향기였다.
***
우당탕-
“서우야, 이제 그만 저녁 먹으러…….”
“빨리요! 빨리.”
“방금 장면 뒤로 돌려주세요.”
“2 차…… 발현.”
***
“오셨습니까, 상무님.”
지배인이 룸으로 안내를 했다. 은은한 조명과 엔틱한 촛대, 고풍스러운 그림이 자리한 내부는
밖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아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서우는 태인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이 다가와 의자를 빼 주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
며 착석을 했다. 그때까지도 장 비서는 서우의 조그마한 옆얼굴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우는 고개를 저었다. 먹을 음식은 정해져 있었다. 태인은 주로 자연식 음식을 선호했다.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그가 왜 그렇게 건강을 우선시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같은 걸로.”
“와인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그건 됐어요.”
“그 사람은 왜 찾는 거지?”
태인은 감정은 숨기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의 냉담한 눈매는 사람을 관통하는 것처럼 꿰
뚫어 보곤 했다. 그러나 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내를 숨기는 데는 서툴렀다. 그러니 웃음으
로 속을 감출 수밖에.
서우가 눈을 끔벅거렸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우연이겠죠…… 저도 그게 먹고 싶어서.”
지배인이 요리에 관해 설명을 하려고 하자, 태인이 손짓했다. 지배인은 눈치껏 맛있게 드시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가 문을 나섰다.
“맛있네요.”
“석원 형, 동생이에요.”
“넌 그걸 어떻게 알지?”
“아니.”
“봤어요.”
“어디서?”
“꿈에서.”
그 말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꿈?”
“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아니요. 안 믿을 줄 알았어요.”
“꼭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
풀썩-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온다. 일렁거리던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서우의 입술이 떼어지고 얕은
숨이 새어 나왔다.
“감기인가.”
***
일요일 오전 9 시, 서우는 집 안을 분주하게 오갔다. 그가 목에 수건을 건 채 책상 앞에 섰다.
서랍을 열어 억제제를 꺼내었다. 발정기 주기에 따라 다르지만 서우는 보통 일주일가량을 복용해
야만 했다. 그런데 몸에 열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서우가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쳐 입었을 때였다. 발밑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박석원이었다. 서우가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귀에 댔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박석원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휴일에 출근을 하는 사람치고 활력
이 넘쳤다.
“네, 기대할게요.”
몽롱한 눈빛을 한 서우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점차 아래로 향하다가 팔걸이에 뒷머리가
닿았다. 서우가 눈을 감았다.
***
박석원이 몰고 온 차가 세화 제약 앞에 멈췄다. 그가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는 1 층 로비에
서 장 비서를 만났다.
“그렇습니다.”
장 비서는 담담한 어투로 화답했다. 리암은 서우의 말대로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녀에게도
사람을 보내었다.
“직접 물어보시죠.”
“앉아요.”
태인은 찰나의 고민을 마치고 사람을 수소문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장 비서는 서우의 말
대로 그녀를 찾아냈다.
장 비서는 그곳으로 직원을 보냈다. 태인은 그녀에게 세화 제약으로 오라고 스카우트를 제안했
다. 그건 어디까지나, 리암의 능력을 따져 보아서였다. 그녀는 식물의 우열을 맞추어 재배를
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술이 백 연구원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
징-
징-
서우가 액정에 떠 있는 태인의 번호를 바라봤다. 서우가 연결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너머로 차
가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야?]
“……집이요.”
몽롱한 시야를 다잡듯 서우가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가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걸터
앉았다. TV 앞에 있는 탁상시계가 11 시를 가리켰다.
휴대폰 너머로 정적이 길어진다. 서우가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가 끊어진 건 아니었다. 서우가
휴대폰을 귀에 대며 물었다.
“그러는 태인 씨는 어디신데요?”
[서울역.]
서우의 머리가 갸웃거렸다. 이마에 오르는 미열 때문인지, 머리가 한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거기서 뭐 하시는데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
“놀이동산, 가시려구요?”
[내가 거길 왜 가.]
“그럼…….”
[…….]
“제 말 듣고 있어요?”
[끊어.]
***
“저…… 상무님.”
조수석에 앉은 장 비서가 눈치를 보았다. 태인이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통화가 끝난 액정을 한참이나 노려보는 중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장 비서가 넌지시 재차 물었다. 태인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도곡동.”
***
“보통은 다들 바꾸셔서.”
“죄송……!”
태인의 시선이 소파에 닿았다. 서우는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의 몸에서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인이 서우의 손을 밖으로 빼냈다. 발정기에 접어든 오메가는 알파의 향기에 맹목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지금 태인의 페로몬에 반응하여, 사정하고 싶은 욕구에 온 정신이 휩쓸리고 있을
뿐이었다.
“태인 씨…….”
“하아…… 하아…….”
“이리 가져와.”
태인이 서우의 허리를 붙잡아 머리를 옆으로 빼냈다. 그가 주사기를 꺼냈다. 태인이 엄지에 힘
을 주어 액체를 밀어냈다. 태인에게 맞춰진 양보다는 적어야 할 것이었다. 서우는 우성 오메가
였으니까.
그러나 서우가 그의 뒤통수를 붙잡아 가슴에 묻었다. 입술이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젖꼭지에
닿는 느낌이 생경하다. 태인은 입속으로 파고든 천을 혀로 뱉었다.
“망할.”
“어느 쪽이 본모습이야?”
백서우는 가끔 태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에 반응하여 태인은 불쾌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적수를 만나지 못
한 탓에 더 그랬다.
한순간에 태인을 극점까지 몰고 간 서우를 눈으로 훑었다. 희멀겋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
었다. 그리고 그보다 새빨갛게 변한 입술은 젖어 있었다.
***
“음…….”
서우가 눈을 떴다. 손바닥에 닿는 맨살이 기묘하다. 동시에 머리맡에서 서늘한 어조가 파고들었
다.
“깼어?”
“태, 태인 씨.”
“응.”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약 사 오라며.”
서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태인이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그만큼, 서우는 밀려드는 한기를 느꼈
다.
“기억 안 나?”
“…….”
“하…….”
“…….”
“약도 안 사다 주실 줄 알았는데.”
“너 말이야.”
“네.”
“안 올 줄 알았는데. 진짜 와 줬네.”
히트가 올 때마다 서우는 혼자 침대에 누워서 버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우를 보듬어 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지만, 백영길은 이런 일에 둔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알았어.”
서우는 어수선한 거실을 둘러보다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가볍게 닦아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
“괜찮으십니까?”
더구나 다른 오메가였다면, 그렇게 몸을 비벼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다. 멱살을 잡아서
베란다로 데리고 가 정신이 들게끔 만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태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뭘 찾는 건데?”
“2 차 발현.”
“그게 뭐야?”
“찾았다!”
“왜?”
“아비가 돼서 너한테 신경도 못 쓰고…….”
서우가 눈을 굴렸다.
“내가 그런 일이 어디 있어?”
“그 기계 진짜 고장 난 거 아냐? 태인 씨도 알아?”
“…….”
서우는 백영길의 진지한 눈빛에 떠밀리듯 고심하는 척을 했다. 백영길이 고개를 돌려 모니터 화
면을 쳐다봤다. 서우가 같은 곳을 좇아 머리를 좌우로 갸웃거렸지만, 딱히 그랬던 일이
없…….
서우가 눈을 끔벅거렸다. 느리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서우는 판판한 배를 보았다. 백영길이
재차 서우를 쳐다봤다.
“나…….”
“내가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었다.
한 번도 바란 적 없고,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었다.
***
서우는 태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우는 감정에 호소하듯 대화로
설득을 해 보려 했지만, 태인은 박석원이 떠나지 못할 사유를 만들었다.
“나 술 못 마시는 거 알잖아.”
“뭔데? 지금 말해.”
서우가 캔을 뜯었다. 그의 시선이 걸음을 옮겨오는 남자에게 머물렀다. 지훈의 등 뒤로 다가오
는 소은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같은 과 동기였다. 서우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시
감이 들었다. 그가 어깨를 스쳐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지훈이 말했다.
“여기선 못 해.”
“여기서도 못 하면 안 들을래.”
“너 요즘 변한 거 알아?”
서우가 눈으로 의도를 되물었다. 지훈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자 말을
덧붙였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착각이야.”
알려 줄까? 아냐…….
[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
둥글게 다듬어진 손끝으로 문구를 빠르게 지웠다. 이렇게 보내면 태인 씨의 성격에, 보고 못 본
척. 그냥 씹힐 확률이 더 높았다. 서우는 다시 한 자 한 자 힘주어 입력했다.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긴 속눈썹을 따라 눈 밑에 아른아른 그림자가 생겼다.
[나 술 마셔도 돼요?]
***
남자는 내밀었던 서류를 회수해 걸음을 옮기었다. 그때 안으로 들어오던 장 비서와 마주쳤다.
장 비서는 눈으로 의구심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빠르게 상무실을 도망치듯 벗어났
다.
“왜 그러십니까?”
“한 잔도 못 마시는 주제에.”
“예?”
***
서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멀쩡하게 걷고 있어. 아까 느꼈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은준은 다리가
불편했다. 그래서 지훈이 늘 곁에서 도움을 주었다. 서우를 신경 쓰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
다.
“오늘 며칠이야?”
[벌써 취했어?]
똑같아. 전부 똑같아.
단지, 잊고 있었어.
그때의 서우는 도서관에서 돌아가는 길에 지훈과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태인과의 결혼을
앞둔 탓에 그 역시 마음이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곳에 가며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되는데, 졸음운전을 하던 화물차가 일으킨 6 중 추돌사고였다.
“은준아.”
***
태인은 주차된 세단에 탑승했다. 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자리했다. 태인은 태블릿 PC 를 바라보
며 일을 처리했다.
“상무님.”
***
“은준아.”
뒤이어 밖으로 나오던 여학생이 휴대폰을 만지다가, 점주와 부딪쳤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고개
를 들었지만, 남자들에게 떠밀려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결국 모두의 다리가 뒤엉키듯 나자빠졌
다.
동시에 열린 유리문이 산산이 깨어졌다. 날아온 승합차가 유리창을 부수고, 건물과 강하게 충돌
했다. 승합차는 편의점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유리 전면이 부서진 탓에 진열대에 쌓여
있던 물건들이 아비규환으로 쓰러졌다.
“이…… 이게 다 뭐야.”
서우가 재빨리 무릎을 세웠다. 이마를 내려친 선반을 위로 들었다. 점주의 한쪽 얼굴이 피로 덮
였다. 서우가 그의 이마를 손으로 누른 채 은준을 불렀다.
서우는 소지품을 도서관에 그대로 두고 왔다. 은준은 휴대폰이 뒷주머니에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가방을 풀어 헤쳤다. 그의 손에 얇은 하늘색 카디건이 잡
혔다. 패닉에 빠진 그는 서우에게 그 옷을 건넸다.
서우의 말에, 여학생이 허겁지겁 가방으로 나뒹구는 컵라면과 과자봉지, 유리 조각을 밀어내어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은준이 신고를 하는 동안 서우는 얇은 하늘색 카디건을 점주의 머리에 대고, 신중하게 바닥에 눕
혔다. 만일을 위해서라도 머리가 흔들리면 안 되었다. 그러면서 서우의 가슴팍에도 피가 묻었
다.
6 중 추돌사고, 5 명의 사상자.
그 외에 편의점 점주와 여학생, 은준은 서우의 옆에 있었다. 서우는 점주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그날 눈이 붓도록 많이 울었거든요.
“……맞아…….”
서우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깨어진 유리창을 비집고 구급대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응급처치를
마친 점주가 들것에 실려 나간다. 그가 중얼거렸다.
“학생.”
“아, 전 괜찮아요. 이거 제 피 아니에요.”
그럼에도 양쪽에서 달라붙는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서우가 도움을 요청하듯 은준을 쳐다봤지
만,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얼굴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서우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사방에서 밀려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어디선가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서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
세화 병원 앞에 세단이 멈췄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셔츠를 자르기 위해 가위를 든 의사와 대치하고 있던 서우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태인 씨, 저 멀쩡해요.”
서우가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였다가, 뒤로 돌렸다. 피가 묻어 얼룩진 손을 얼른 감추었다.
의사가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가 천태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간호사와 함께 다른 환자를 보
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래 보이네.”
“아, 내 지갑.”
조 원장이 뒤늦게 서우를 알아본 것처럼 그의 모습을 더디게 훑어내렸다. 희멀건 뺨에는 피가 튀
어 있었다. 땀을 흘렸는지, 뻣뻣해진 앞머리와 이마에는 검게 줄이 생겨 있다. 더욱이 태인과
다음 달이면 결혼을 할 사람이거늘. 너무나 비교되어 초라해 보였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따라와.”
“버릴 거야.”
***
“미리 말해 두는데요.”
“전 꽃 싫어해요.”
“케이크도요.”
“그건 피차 마찬가지네.”
“내려.”
차가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서우가 얼굴을 닦고 있던 손수건을 떼었다. 그가 차창 밖을 확
인했다. 안이 보이지 않도록 높게 올라간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장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로 데려올 줄 몰랐던 탓에, 서우는 상황 판단을 하느라
꾸무럭거리며 느리게 나왔다. 그에 비해 태인은 열린 철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이 왔다고 인식하고 다가오던 도우미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장
비서가 직접 안내를 자처했다.
“저 다친 거 아니에요.”
***
쏴아아-
서우가 샤워부스 밖으로 나왔다. 기다란 타월을 꺼내어 머리를 덮었다. 그는 선반에 있는 물건
을 자연스럽게 꺼내어 사용했다. 그가 샤워가운을 걸쳐 입고 허리를 가볍게 묶었다.
“장 비서님이 하신 건데요.”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서우가 말을 마치자, 연임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
연임은 하얗고 청초한 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과 입술이 유독 붉어 더
그렇게 보였다. 방 안을 느리게 둘러보는 것도 여유가 넘쳤다.
***
서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에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우는 한곳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거실로 나온 서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래식한 소파와 테이블, 원형으로 이뤄진 기둥과 선반
에는 유럽풍의 소품들이 즐비하다. 벽에는 조명이 나뉘어 있어 따스하고, 아늑했다.
서우는 전체적으로 포근해 보이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태인의 취향이라기보단 이 집을 관리해
주는 사람의 영향이 컸다. 태인은 불필요한 물건을 싫어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에 직
접 관여를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_ડ χ
지나가던 도우미가 해윤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태인의 본가에서 온 사람이었다. 이 집안을
관리·관장하는 사람이 해윤이었다.
서우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자리를 잡고 있던 태인이 고개를 돌렸다. 곁에는 셰프도 서 있었다.
“너…….”
“……그게 왜 궁금한데요?”
“프러포즈 해 주면 답해 줄게요.”
“…….”
“아직 말이 안 끝났…….”
“태인 씨.”
“내 말도 듣고 가야죠. 태인 씨는 건강했어요.”
“프러포즈 잘 받았어요.”
서우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태인에 대해 전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건만. 아무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 같다가도, 금세 밑으로 끌려 내려와 우위가 바뀌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게 태인 씨 성격이지.
망각하고 있었다. 전보다 몇 번 더 봤다고, 태인의 태도가 달라질 리 없는데. 서우의 얼굴이 시
무룩하게 변했다. 목이 멨다. 물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안 받을게요.”
“아닙니다. 이건 청첩장입니다.”
“보시겠습니까?”
장 비서가 서우를 대신하여 손을 안으로 넣었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의 테두리가 들어간 상자가
천천히 테이블에 놓였다. 그가 커버를 열어 청첩장을 꺼내었다. 연분홍색 봉투는 벚꽃과 닮아
있었다.
장 비서가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어 서우의 앞으로 내보였다. 그의 눈이 끔벅거렸다. 한지로 된
얇은 종이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그 위에는 리본이 묶여 길게 내려왔다.
***
달칵, 서우가 방문을 열었다. 장 비서의 도움으로 세단을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서우는 들
고 있던 쇼핑백과 함께 침대 위로 엎드렸다. 하루가 어떻게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뛰어다기만 한 터라, 급속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그의 눈이 금세 감겨 내려왔다.
***
“네 기사도 났어.”
지훈의 말에, 서우가 휴대폰 잠금장치를 풀었다. 몇 번 손가락을 움직인 끝에, 얼굴은 모자이
크로 가려져 있지만 가슴에 피가 묻은 셔츠가 찍힌 사진을 내려다봤다. 지훈은 단번에 서우인 걸
알아보았다. 더욱이 구급차에 실려 가던 때는 얼굴이 살짝 공개되기도 했다.
서우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눈빛을 띠었다. 어쩌지. 난처한 기색을 하는 것도 잠시였
다.
“서우야.”
“난 괜찮지. 넌 어때?”
서우가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름방학이 지나고, 한동안 학교에 소은준
이 오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목발을 짚은 채 강의실에 나타나는데 지훈이 그를 도와주면서 자연
스럽게 서로를 알게 된다. 하지만 어제 이미 시작이 되었나 보다.
지훈이 말했다.
“병원은 안 가 봐도 돼?”
“어. 난 괜찮아.”
“어제 팔에 피도 났잖아.”
“아냐. 조금 긁힌 거야.”
그리고 사실, 그날은 서우도 울고 싶었다. 태인과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
똑똑-
“상무님.”
장 비서의 손끝을 따라 종이가 펼쳐졌다. 대지면적 3000 평 규모의 거대한 부지 도면을 내려다
보는 태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
“받아.”
“청첩장이네.”
“너 결혼해?”
“그렇게 됐어.”
“나도 이거 받았는데…….”
“그 상대가 너였구나.”
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준이 가방에서 똑같은 봉투를 꺼내어 흔들었다. 서우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럼에도 결혼식장에서 은준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은준…….
“너 혹시.”
“응, 맞아.”
“기사에서 봤어.”
“아, 그래?”
***
서우는 상자를 닫았다. 그가 거실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짧게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고기를 먹었더니 소화가 필요했다. 그는 TV 를 켜서 조금 보다가 자정이 되어야 침실로 들어가 잠
이 들었다.
“왔어?”
“여기 앉아.”
지훈과 은준이 번갈아 말을 걸어왔다. 은준이 올려놓았던 가방을 내려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
토요일.
베스트를 입은 태인이 침상에 기대어 앉았다. 조 원장이 가까이 다가가 태인의 소매 단추를 풀었
다. 그가 접어 올렸다.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조 원장은 힘을 빼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곤 손목에 링거 바늘을 꽂았다. 조 원장은 수혈을 하
면서 태인에게 검사 결과를 보고했다.
태인은 부족한 혈액의 혈구 성분과 혈장 성분을 타인으로부터 공급받았다. 건강한 극우성 알파의
피를 받아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태인으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건강한 극우성 알파의 피는 태인의 전신에 있는 변형된 세포를 억눌렀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
나면 또다시 변형된 세포가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태인의 귓가에 절박한 음성이 스치고 지나간 것도 그때였다. 왜 그 목소리가 떠오른 건지 모르겠
지만, 태인이 고개를 돌려 손목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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