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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노 모럴(No Moral)(외전) 

: 낫 애니모어(Not Anymore)

지은이|테하누

펴낸곳|이클립스

ⓒ테하누, 2020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출판


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
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01.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승패를 가르는 핵심은 ‘누가 더 상대편을 아쉬워하게 만드는가.’라


고.

“올 때가 됐는데.”

아버지의 충고를 떠올리던 윤신은 사무실에 앉아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쯤이면 간부 회의를 끝낸 세헌이 돌아올 타이밍 같아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역시나, 익숙한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졌다.

강세헌이다.

시니어 변호사 두 사람과 함께 집무실 복도 쪽으로 다가오는 세헌


은 오늘도 여전히 스리피스 차림의 흐트러짐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
었다.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의 수려한 얼굴이 꽤 냉담했다.

그가 제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세헌이 입은 저 하얀 드


레스 셔츠도, 희미하게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회갈색의 실크 넥
타이도 어젯밤 자신이 골라 둔 착장을 그가 그대로 입고 출근한 거였
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들떴다.

시니어들에게 잠시 보고를 멈추라고 손짓한 세헌이 비서실 직원들


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예 두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받쳐 든 윤신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나 세헌은 제 사
무실 방향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달이 났다.

‘저 넥타이 누가 고심 끝에 골랐는지 확 소문내 버릴까 보다.’

명령을 하면서 벌어지는 그의 유려한 입술 사이에 제 입술과 혀를


끼우는 상상을 하자, 단전이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한 마지막 삽입 섹스 후 정확히 오늘로 한 달째였다. 물


론 그사이 달콤한 키스 정도는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더 나갔다
간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윤신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와의
모든 농밀한 스킨십을 자진 반납했다. 세헌을 배려한답시고 저지른
일이었는데, 딱 1주일째 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루한 후회의 연
속이었다.

사실 제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헌은 이번 프로젝트를 시


작하며 유난히 바빴다. 업무 강도가 지난 몇 년간 윤신이 보아 온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새벽에 들어왔다 새벽에 다시 나갔다. 회사법
팀이 살얼음판을 걷는 비상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국이 다른 몇 개의 로펌과 함께 모 해외 기업의 합병 거래 자문을


맡게 되면서 강세헌은 전체 프로젝트의 총괄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
필이면 해당 국가의 정부가 이 딜에 개입 아닌 개입을 하면서 일이
꼬였다. 수 개의 법무 법인을 대표하는 M&A 전문가들이 촉각을 곤두
세우고 모두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언제 어디에서나 최고여야만 하는 강박 관념이 있는 그는 해외를


왔다 갔다 하며 정말이지 미친 듯이 일했다. 그래서 자신이 방해되는
일 없도록 초강수를 둔 거였다.

업무에 매진하는 강세헌은 매우 근사했다. 윤신은 그런 그가 좋았


다.

다만.

‘선배랑 섹스하고 싶어…….’

그의 것을 먹어 치우며, 흥분한 세헌이 제 귀에 쏟아 내는 거친 숨


소리를 듣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보채거나 조
르지 않고 프로젝트의 막바지인 오늘만 착하게 기다렸다. 그게 기특
했던지 지난 한 달간 자신을 독수공방시킨 죗값이란 명목으로 세헌
이 조건을 걸어 주었다. 소원 세 가지를 아무 군소리 하지 않고 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현지와 시차가 있어, 제일 긴박한 상황은 이른 아침에 이미 종료된


것으로 알았다. 자잘한 실무는 아랫사람들의 몫이고, 세헌이 할 건
입장 정리만 남은 듯했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됐다.

오늘로 격리 해제. 그걸 기점으로 강세헌은 다시 일도, 로펌도 아닌


제 거였다. 윤신은 그때 이 소원을 아주 신중하게 사용할 생각이었
다.

그 전에 일단 눈부터 마주치고 싶어서 지치지 않고 빤히 바깥만 직


시하고 있는데, 보라는 세헌 대신 그에게 지시 사항을 듣고 돌아선
탁 비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흠칫한 윤신이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
고 서류에 눈을 박았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
렸다.

똑똑.

“하나도 안 괜찮아요. 들어오지 마세요.”

그러나 야속하게도 문은 조심스럽게 열렸다. 탁 비서가 고개를 안


으로 쏙 밀어 넣었다. 윤신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탁 비서님, 저 안 괜찮다고 했는데…….”

“에이, 우리 사이에. 프로젝트 결과 기다리셨던 거 알아요. 이제 해


외발 기사만 뜨면 돼요. 다들 그거 보려고 대기하고 있어요. 곧 실시
간 뉴스 뜰 테니까 확인해 보세요.”

“왜 그걸 저한테…….”

티가 많이 났나?

“진짜 말씀드리지 마요? 며칠 전부터 계속 프로젝트 언제 마무리되


는 거냐고 사무장님한테 물어보셨잖아요.”

“제가 회사법 팀 일에 관심 갖는 거 강 수석님도 아세요?”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탁 비서의 표정이 능청스러
워졌다.

“그분이 모르는 게 어디 있어요. 다시 회사법으로 오고 싶으신 거


아니에요? 마침 밖에 강 변호사님 계신데 완전히 대승해서 기분 나
쁘지 않으실 때 어필 좀 하세요.”

도와주려는 마음은 진심으로 고마우나, 사실 지금 윤신이 강세헌에


게 보채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좀 더 은밀하고, 사적이며, 섹슈
얼한 어떤 행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탁 비서가 오지랖을 부려 주어서, 시니어 변호


사들을 물리고 제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세헌의 시선도 드디어 이쪽
을 향했다.

건조해진 아랫입술을 살짝 혀로 축인 윤신이 마지못해 수락하는 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세헌이 파티션에 한 팔을 걸치고 나
오라는 양 손가락을 까딱, 했다.

이윽고 문밖으로 나서자, 그가 뭐 할 말 있느냐는 듯이 고갯짓했다.

“얘기해.”

“그게…… 축하드립니다. 또 이기셨네요.”

조용히 듣고 있던 세헌이 양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대체 네 뇌는 언제쯤 활성화가 되는 거지?”


울컥한 윤신이 눈으로 광선 쏘듯 그를 째렸다. 그러자 그가 ‘어디서
건방지게.’라는 말을 행동으로 함축하듯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그
걸 본 윤신은 나지막이 심호흡하고, 응수했다.

“결과가 확실해지기 전까진 아무것도 자축하지 말라고 분명히 가르


치셨습니다.”

“기억하는 걸 보면 어딘가에 달려 있긴 한데.”

대꾸하며 희멀건 얼굴을 훑는 세헌의 눈길이 오늘따라 끈적했다.


펌 내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 특히 더 윤신에게 까다롭고 야멸
치게 구는 평소의 세헌과는 조금 달랐다. 여러 가지 문제로 지금 한
껏 예민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그 이유엔 현재 맡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합병도 있었지만, 그 일에


몰두하는 동안 내버려 두었던 자신에 대한 갈증도 분명히 존재했다.
새벽녘 퇴근한 그는 종종 잠든 자신을 품에 가둔 채, 안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윤신도 그때마다 선잠에서 깼던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깼다고 알릴 수 없었던 건 그가 두 시간, 혹은 한 시간을 겨


우 자고 다시 나가 봐야 한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제 윤신은 자신 또한 움찔거리는 그의 근육 하나하나를 다 만져


대고 싶을 만큼 안달 났다는 걸, 세헌에게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아직 많이 바쁘세요?”
“급한 건 정리됐고, 그렇다고 한가하진 않고. 얘기 길어질 거 같으
면 사무실로 들어와.”

애써 냉정하게 돌아서려던 그를 향해, 윤신이 급히 응답했다.

“아뇨. 그냥 여기서요. 수석님, 저 첫 번째 소원 지금 쓸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안 듣는 체하며 모두 귀담아듣고 있던 비서 팀 직


원들이 흠칫했다. ‘소원’이라는 단어가 윤신이라면 몰라도 세헌에게
는 퍽 이질적으로 들려서였을 것이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뒤에서 수군거릴 걸 알지만 지


금 당장이었으면 했다. 마음이 급했다. 세헌도 이 조바심을 영 모르
지는 않는지, 제 쪽을 지그시 보며 명확히 확인받듯 되물었다.

“지금?”

“네.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에요.”

“얘기해 봐.”

탁 비서를 비롯한 직원들의 흥미진진해하는 눈빛을 슬쩍 본 윤신이


세헌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퍽 중요한 사안이라는 듯이 낮게 대꾸
했다.

“일단 사무실 말고, 다른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좀 옮기시죠.”

가늘게 뜬 눈으로 그런 윤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


다. 그러고는 여유가 있을 것 같았던지 사무실 반대 방향으로 앞서
걸었다. 그를 쫓으려던 윤신이 탁 비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딱 한 시간만요. 자리 비울 테니까 수석님 찾는 분 계시면…….”

“그건 걱정 마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소원은 또 뭐고.”

“이 프로젝트 때문에 저한테 크게 빚지신 게 있어서요. 돌려받으려


고요.”

“알겠어요. 아무튼 다녀오세요.”

꾸벅 인사한 윤신이 세헌의 뒤로 빠르게 다가섰다. 사람들의 시선


이 닿지 않는 복도 모퉁이에 다다른 순간, 승강기 방향으로 가려는
그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힐끗 돌아본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비상
계단으로 끌고 가자, 세헌도 순순히 딸려 왔다.

서로 간에 말은 없었다.

그를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간 윤신이 수면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


다. 텅 빈 공간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문을 그대로 닫고 안에서 단단히 잠근 뒤 세헌의 등을 벽으로 몰아


붙였다. 그가 대충은 예상했다는 듯 무릎을 세워서 제 앞에 선 윤신
의 다리 사이에 끼웠다. 그러고는 허벅지를 가볍게 들어 올려 사타구
니 사이에 문질렀다.

“원하는 게 뭔데. 얘길 해야 알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여기 비어요. 읏, 그 뒤에 청소하러 오시거
든요. 으응.”

세헌의 딱딱한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고 있던 윤신이 점점 더 노골


적으로 변하는 그의 움직임에 화답하며 얼굴을 푹 숙이고 신음했다.
그에게 제 몸을 바짝 맞닿도록 기울인 채 머리를 울대뼈 위에 적극적
으로 비비자, 세헌이 큼지막한 손으로 등을 감싸 안으며 머리 전체에
골고루 비를 내리듯 입 맞췄다.

“우리, 한 시간으로 돼?”

쪽, 쪽. 입술이 향긋한 향이 풍기는 머리카락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


져 나갈 때마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도 함께 움직였다. 틈새를 자극하
던 세헌이 이내 회음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다. 결국 윤신이 그에게
완전히 무너졌다.

“선배, 아…… 나 더는 못 참겠어.”

세헌은 기다렸다는 양 서로의 하체를 노골적으로 문질렀다.

그의 성기가 옷 위로 느껴졌다. 윤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신음


했다. 그러다 곧 손바닥으로 세헌의 탄탄한 온몸 전체를 마사지하듯
이 훑어 나갔다. 깔끔한 옷 아래 감춰진 그의 나신을 상상하니 도저
히 못 견디겠는 기분이었다.

헐떡이는 윤신을 돌려세운 그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를 전복했


다. 하얀 벽을 보게 된 윤신이 두 손으로 차가운 벽면을 짚었다. 그
순간, 세헌이 이미 발기하기 시작한 성기를 옷 위로 박아 넣듯이 엉
덩이 위에 꾹 짓눌렀다.

“흣, 으…….”

“이게 네 소원인가? 통일도 아니고, 부귀영화도 아니고, 내 좆?”

“선배 더, 더러운 데서 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다른 사람 누웠


던…… 흐으.”

“차라리 좀 더 건설적인 데 쓰는 게 어때.”

‘정말 재고 안 해?’ 하듯이 귀두로 짓궂게 쿡쿡 찌르는 바람에 윤신


의 입에서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하복부를 뚫고 올라올 듯한 성욕
으로 괴로웠다. 이보다 더 건설적인 사용처가 존재할 것 같지 않았
다. 등 뒤로 손을 뻗어 서로의 몸이 좀 더 밀착되도록 허리를 붙들고
당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반응도 없었다.

“선배 거 섰어.”

“계속 잠을 못 자서 그래.”

“피곤하면 시들어야지 왜 발기해요. 이제 안 속아요.”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윤신을 침대 쪽으로 막힘없


이 이끌었다.

풀썩. 세헌이 뒤로 먼저 무너졌다. 뒤이어 윤신의 몸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거의 동시에 윤신이 그의 베스트부터 벗겨 나갔다. 슬그머니 드러
난 회갈색 타이 밑부분에 키스하며 허리를 들썩이자, 윤신의 바지 버
클을 풀어내던 세헌이 누운 채로 그 모습을 올려다보곤 미간을 흠씬
구겼다.

아무렇지 않은 체하고 있지만 사실 윤신은 자신만큼, 어쩌면 그보


다 훨씬 더 세헌이 안달 나 있다는 걸 맞닿은 끝에서, 저를 향한 표
정에서, 음험해진 눈빛에서 모두 느꼈다.

윤신은 젖 먹던 시절의 인내심까지 쥐어짜 냈다. 일부러 보란 듯이


느릿한 손길로 그의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세 개째 풀
었을 때 단단한 가슴팍을 두 손으로 짚고 제 자세를 고친 뒤, 상체를
앞으로 훅 숙였다. 뒤이어 하체가 닿아 있는 채로 세헌의 매끈한 뺨
과 날렵한 턱선을 핥았다. 그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억눌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 젠장.”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이 반응을 즐기며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귓


바퀴를 훑고, 귓구멍 주변을 야릇하게 핥았다. 그러자 이번엔 탄력적
인 복부가 꿈틀거리는 게 고스란히 감지됐다. 이미 반쯤 발기해 있던
그의 성기가 좀 더 단단하게 강직되는 그 감각은 그가 제 안에 사정
할 때에 견줄 만큼 짜릿했다.

후우, 그의 귓가에 숨을 쏟듯이 뱉어 낸 윤신이 속닥거렸다.

“이게 다예요? 한 달 만인데, 더 딱딱하게 세워 보세요.”


“부추기지 마. 그러다 꼭 후회하지 않나?”

“끝날 때까지 안 보채겠다고 한 말 이미 대차게 후회했어요.


아……. 저 너무 흥분돼요.”

“빌어먹을.”

어설픈 도발에 자극받은 그가 바로 몸을 일으켜 위치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걸 간파한 윤신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
고는 동작 금지라는 듯이 상체를 일으켜 눈을 마주치고 엄중하게 경
고했다.

“손 움직이지 마요. 나 만지지 마.”

동시에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느닷없는 하극상에 헛웃음을 터트


리는 건 덤이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못 들었어요? 그럼 다시 알려 줄게요. 나 만지지 말라고.”

“여기 아직 펌 안이야. 난 너의 상사고. 후회 안 해?”

“그래 봤자 우리 팀장님도 아니면서.”

자신의 일은 파트너 변호사인 세헌의 영향권 내에 있지만, 그의 일


은 이제 갓 시니어 견장을 어깨에 단 제 사정거리에 없었다. 그걸 실
감할 때마다 느꼈던 섭섭함을 이참에 넌지시 토로하자, 세헌도 어울
리지 않게 울컥한 듯했다.
“우리?”

두 손으로 눈앞의 골반을 단단히 쥔 그가 성기 위로 윤신을 끌어 내


렸다.

퍽!

“아흑!”

농염한 탄성을 터트린 윤신이 그의 위에서 허덕거렸다. 그러나 감


정적 허기로 포악해진 세헌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변호사가 인칭 대명사를 똑바로 써야지. 이딴 것도 가르쳐야 돼?”

“흐읏, 흣! 선배! 잠깐, 잠…….”

“우리?”

아찔해진 윤신이 신음하든 말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비를 베풀


어 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는 듯했다. 세헌은 더욱 집요하고 거칠
게 윤신을 재차 제 위에 처박듯이 억눌렀다.

퍼억!

“아……!”

“씨발, 우리?”

딱딱해진 그의 것이 회음 위에 강하게 꽂혀 드는 느낌을 받은 윤신


이 다리를 덜덜 떨었다. 이것보다 더 직접적인 감촉을 기대하기 때문
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너무 오랜만에 그와 접촉하는 터라 작은 자
극에도 쉽게 흥분했기 때문이 컸다. 금세 속옷이 프리컴으로 젖어 가
는 느낌을 받은 윤신은 꼬리를 내리고 그의 단추 풀린 셔츠 깃을 힘
겹게 쥐었다.

“자, 잘못했어요…….”

곧이어 부들거리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쥐고는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다시 마주친 세헌의 깊은 눈동자에 지금이라도 당장 제 안
에 성기를 깊숙하게 처박고 싶어 미치겠다는 간절한 성욕이 득시글
거렸다.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면서 그 눈에 키스하듯 시선을 교환하
던 윤신이 퍽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건드리지는 마요.”

이 말을 세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좋아, 하자고. 수면실 이 더러운 침대 위에서. 남이 쓰던 시트, 베


개. 다 참아 준다니까?”

“모르시나 본데 제 뇌 잘 활성화되어 있어요. 이게 얼마짜리 소원


인데 그렇게 단순하게 써요. 선배 나한테 박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뭘 해? 아니, 뭘 하지 마?”

“건설적인 데 쓰라면서요.”
일순 몹시 기막혀하는 기색이 그의 미끈한 얼굴에 스쳤다. 하나를
하라고 판을 깔아 줬더니 둘을 한다는 듯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그는 강세헌이었다. 황당해하는 한편 그 여유 시간을 활용


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곧이어 금세 상대방의 의도가 잡혔다는
양, 제 목을 핥으려는 윤신의 목울대를 손등으로 밀어내며 다시금 눈
을 마주쳤다.

“나는 너를 안 건드리는 게 규칙이다. 그러니 내가 널 건드리면 원


점이다?”

그의 말은 정답이었다.

규칙을 깬 게 강세헌이라면, 자신은 세 개의 소원을 고스란히 다시


쓸 수가 있었다. 만에 하나 그가 규칙을 안 깨더라도 상관없었다. 청
결도가 유지되기 어려운 장소를 웬만해선 기피하는 세헌이 이 더러
운 데서 못 참고 결국 제게 박는 꼴을 봤으니 심신 양쪽이 만족할 터
다.

얕은수를 바로 간파당해 정곡이 찔린 윤신은 솔직하게 응답했다.

“수락하실 거죠?”

“내가 못 참고 계속 달려들면 넌 그 소원을 무한대로 쓸 수 있는 거


잖아.”

사실 양심에 찔려서 그렇게 간사한 방법까진 고려 안 했다.


“……그렇게까진 생각 안 했는데. 이렇게 교활하니까 전방위로 욕
먹는구나.”

“사리에 밝은 거지. 그러니까 성공하는 거고.”

“그래서 수락할 거예요, 말 거예요.”

늘 전략적으로 상대방을 착실히 쓰러뜨리는 강세헌이라도 가끔은


다 알면서 당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했다. 도윤신이라
는 독립 변수가 그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가 자신을 원
하는 한 이 기조는 반복될 터였다.

그걸 잘 아는 윤신이 엉덩이를 움직여 빳빳하게 서 있는 그의 성기


위에 회음을 문질렀다. 그러자 바로 세헌이 누구의 뒤통수가 닿았을
지 알 수 없는 베개에 머리를 젖히면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깔끔한
성격인 그가 이 공간을 참아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 거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승패를 가르는 핵심은 ‘누가 더 상대


편이 아쉬워하게 만드는가.’래요. 저 지난 한 달 동안 너무 아쉬웠거
든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외롭게 해요.”

분명히 자신은 그에게 매일 졌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강세헌도 제게 매일 진다는 점이다.

뒷주머니에서 낱개 콘돔 두 개를 꺼낸 윤신이 세헌에게 내보였다.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달랑 두 개야.”

“선배 하나, 나 하나. 여사님들 곧 오실 텐데 시트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요.”

계속 전신의 인내심을 쥐어짜 내던 그가 결국 이를 으득 짓이기며


콘돔을 싹 빼앗아 갔다.

“아니지. 내가 여기서 이걸 쓴다면 너만 두 개야. 난 네 안에 싸고.


네가 여기 싸고.”

곧이어 그것들을 모두 시트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수락하지. 더 가까이 와.”

그를 보고 있던 윤신은 시키는 대로 착하게 얼굴을 기울였다. 젖은


입술을 아프도록 확, 깨물었다. 세헌이 인상을 쓰는 게 기척으로 느
껴졌다. 자신을 만지고 싶어서 손을 움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즐거워진 윤신은 행동에 탄력받아 더 거침없이 뒷일을 이어 나갔


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목울대부터 벌어진 셔츠의 끝까지 느릿하


게 핥았다. 그러다 다시 역행하듯 고스란히 올라가서 세헌의 울대뼈
위를 입 안에 가득 담았다. 그걸 삼킨 채로 치아를 이용해 잘근잘근
씹으면서 질척하게 핥아 댔다.

이윽고 두 손을 이용해 마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낸 윤신은 빈틈


없는 직물처럼 짜인 세헌의 살결에 얼굴을 비볐다. 입에서 절로 탄성
이 터져 나왔다.

“강세헌, 하아…….”

살갗에 닿는 호흡 때문인지 아니면 제 음성 때문인지, 둘 다인지는


몰랐다. 순간 움찔한 세헌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가 다시 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서서히 그가 이 붉은색 공기를 감당하기 벅차하는
게 온몸으로 전이됐다.

윤신은 당장 그의 것이 제 안 아득한 자리까지 꿰뚫어 주었으면 싶


다가도, 이렇게 안달 난 그를 정복해 나가는 짜릿함을 언제 또 느껴
볼 수 있을까 싶어 인내하게 됐다. 어차피 자신이 날뛰지 않아도, 임
계점에 다다른 그가 움직이리라.

마침내 윤신이 그의 바지 버클을 만지작거렸다. 지익. 지퍼를 내리


자마자 이미 팽팽하게 발기해 있던 성기가 드로어즈를 뚫고 나올 듯
이 툭, 튀어 나왔다. 그 위에 뺨을 꾹 누르듯이 뭉갠 후에, 조금 전
세헌이 버클을 풀어낸 제 바지를 허벅지께까지 끌어 내렸다.

위는 갖춰 입고 아래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차림으로 그의 다리에


올라타서, 세헌의 기둥에 제 회음 부위를 달싹거리니 안타까워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흐응…… 수석님. 아…….”

가능한 한 느긋하게 움직이려던 윤신의 몸은 점점 더 자력 통제가


어려워져 갔다. 제 회음에 드로어즈로 어설프게 감싸인 그의 것을 열
이 일 정도로 문지르는 동안, 하얗던 얼굴이 벌겋게 달떴다. 이미 많
이 닿아 있는데도 더 부대끼고 싶은 마음에 몸을 앞으로 숙여서 세헌
에게 짙게 키스했다. 그가 낮은 목 울림 소리를 내며 입을 열어 주었
다.

그의 보드라운 입술을 위아래로 번갈아 깨물던 윤신은, 혀를 세워


서 동굴 깊은 곳으로 살덩이를 쑥 밀어 넣었다.

고른 치열과 뜨끈한 체온을 차례로 만나, 축축한 혀를 얽었다. 입


안 점막을 헐게 만들겠다는 기세로 혀끝을 이용해 내벽을 들쑤셔 댔
다.

다만 상·하체의 성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윤신의 움직임은 어딘지


조금 어설펐다. 이에 감질내던 세헌이 능숙하게 허리를 들썩였다.

그가 반칙을 쓰려 하는 걸 느낀 윤신이 그대로 팔을 끌어 내려 그의


골반께를 잡고 더 진하게 키스했다. 일부러 얼굴을 더 비스듬하게 기
울여 혀로 세헌의 입천장까지 간헐적으로 건드렸다.

그때까지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그가 갑작스럽게 윤신


의 말캉거리는 젖은 혀를 난폭하게 빨아 대더니, 이내 콱 깨물었다.

“웁, 흐읏!”

놀란 나머지 비좁은 입 안에서 물린 혀를 뒷걸음질 치듯 빼냈다. 그


러자 이번엔 그가 윤신의 입 안으로 제 체온을 넘겼다. 세헌은 윤신
의 혀를 적시고 있는 타액들을 죄다 빨아들일 기세로 혀를 쪽쪽 빨면
서, 노골적으로 하체를 움직여 성기를 찔러 댔다.
결국 윤신은 수세에 몰려 제 얼굴을 그로부터 떼어 낼 수밖에 없었
다. 대신 그의 허벅지 쪽으로 몸을 조금 이동했다. 뒤이어 드로어즈
밖으로 비집고 나온 성기 요도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 씹, 읏.”

갈라진 음성으로 신음하는 세헌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제 쪽이 먼저


사정하게 될 것 같아 애써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빠듯하게 서서 핏줄
들이 모조리 곤두서 있는 성기를 양 손바닥으로 겹치듯 문질렀다. 자
연히 세헌의 단단한 치골이 파르르 떨렸다.

“선배 기분 좋아요?”

“입 다물어. 처박고 싶어져.”

“빨리 항복해요. 저 버티기 힘들어요.”

그를 부추기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침내 윤신은 세헌의 것을 단단하게 쥔 채로 선단부터 입에 물었


다. 거의 동시에 세헌이 결 좋은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그 바람
에 윽, 하며 그의 기둥을 깨물 뻔했다.

심호흡하며 통증을 다스리곤 가까스로 혀를 내어 표피 위를 꼼꼼하


게 핥아 갔다. 그러면서 이걸 놓든지, 이제 양보하든지 택일하라는
의미로 제 머리카락을 움켜쥔 세헌의 손을 뿌리쳤다.

성기를 빠는 윤신을, 이마 좁힌 채로 지켜보던 그의 눈가에 갈등이


스몄다. 그러는 사이에도 윤신은 핏줄이 불거진 성기를 정성스럽게
애무했다. 세헌의 것이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윤신의 입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꼿꼿하게 선 그의 성기가 점점 더 번들거렸다.

턱이 빠질 것 같다.

그의 것을 입 속에 모두 담으려니 너무 컸다. 그래서 차마 전부 다


물진 못하고 기둥 뿌리를 위아래로 쓸면서, 입으로는 선단부터 중심
부까지를 입에 넣고 버겁게 핥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양 몹시 열중한 윤신의 모습이 꽤나 에로틱했다.

바로 그때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세헌이 갑작스럽게 윤신의 골반을 거칠게 잡


아챘다. 뒤이어 그대로 팔 힘만으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제 얼
굴 위에 둔부를 앉히듯이 내리고 눈앞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속옷
위를 혀로 게걸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침대의 낮은 헤드를 쥔 윤신이 그


의 위에서 허덕거렸다.

“선배 이거 싫, 잠깐. 확실, 읏!”

허겁지겁 윤신의 하체를 탐닉하는 그의 눈빛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사나웠다. 혀끝이 어설펐던 윤신의 애무와 달리 그의 것은
매우 농밀했다. 이 능란하고도 농염한 행위가 그의 얼굴 양옆을 지탱
하듯 버티고 있는 두 다리를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후들거리는 양팔
로 겨우 헤드 위에 손톱을 세운 윤신의 입에서 힘겨워하는 음성이 연
신 터졌다.
“안, 안 돼……. 규칙 깬 거예요. 빨리 그렇다고 말…… 웁!”

그 순간.

확, 윤신의 멱살을 쥐고 아래로 내린 세헌이 한 손을 올려 비좁은


입 안에 욱여넣었다.

“알아들었으니까 빨아.”

겨우 극적 타결을 지은 윤신은 그의 기다랗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열심히 빨았다. 흥건하게 만들 작정으로 혀를 이용해 문질렀다. 아울
러 제 입 안의 여린 곳 여기저기를 쑤셔 가며 적셨다.

그사이 세헌은 윤신의 하체를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던 드로어즈


를 쑥 끌어 내렸다. 곧이어 윤신의 입에서 빼낸 젖은 손가락을 거침
없이 회음 위로 밀어 넣었다.

평상시와 같은 전희의 여유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나 급했는지 세헌은 달아오른 피부를 지분거리거나, 탐색전을 거치
며 달래 주는 과정도 생략했다. 윤신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가 제 유
두를 애무해 주는 것도, 두드러진 뼈 위를 핥아 주는 것도 잠시 미루
고 당장 제 안을 꿰뚫어 주기만을 바랐다.

그는 윤신의 음낭을 질척하게 빨면서 푹, 밀부에 찔러 넣은 손으로


구멍의 입구를 거침없이 휘저었다. 그렇게 주변부를 착실히 점령해
가던 그가 돌연, 좀 더 깊은 샘 속으로 중지를 콱 쑤셨다.

“흣…….”
한 달이나 관계가 없었는데, 그런 것치곤 매우 손쉽게 안으로 박혀
들었다. 게다가 아주 가까운 어느 시점에 무언가로 내부를 넓혔다는
걸 증명하듯 내벽이 미세하게 부어 있었다. 세헌은 이 감각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입 속에서 굴리던 음낭을 빼내고 성기의 뿌리를 혀로 핥으며


은근히 말문을 뗐다.

“도윤신 너…….”

세헌이 무슨 얘길 할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더욱 당황한


윤신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만 말해요.”

그러나 하지 말란다고 진짜 안 한다면, 이 남자 이름이 강세헌일 리


가 없는 일이다.

“내가 시키지 않으면 이쪽으로 자위는 안 했었잖아.”

“준비해 둔 거예요. 그럼 안 돼요?”

“준비? 아, 넌 출근하기 전부터 내가 이 펌 안에서 좆질 해 주기만


을 기대한 거군.”

매우 수치스러워진 윤신이 그의 머리맡 베개를 끌어다 이마 위로


덮어 버렸다. 앞이 안 보이게 만들자, 그는 더욱 보란 듯이 손가락
개수를 한 번에 세 개로 늘려 음부에 찔렀다.
쿡, 박혀 든 그의 매끈한 손끝이 평상시보다 훨씬 수월하게 밀부를
유영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립선의 위치를 순식간에 찾아 그 부
어오른 위를 힘껏 눌렀다. 버티는 윤신의 몸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
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한쪽 팔로 제 얼굴을 감춘 베개를 갈기듯이
날려 떨어뜨렸다.

“이 구멍으로 내 좆 물고 싶어서. 응?”

“……흐으, 읏!”

세헌은 짓궂게도 윤신이 자지러지는 자리만을 능숙하게 짓이겼다.

“아침부터 혼자 여길 손가락으로 쑤시고, 이렇게 부은 채로 내 일


이 끝나기만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 했지?”

“으응! 흣. 수석님, 거기 좋, 좋아요.”

하나를 잘하는 사람은 둘도, 셋도 잘했다. 세헌은 불규칙적으로 윤


신의 안을 휘저으며 혀로도 회음을 건드려 아찔한 감각을 끌어 올렸
다.

아직 앞은 제대로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윤신의 것은 이미 사출까지


고대하며 꺼떡거렸다. 어서 절정에 다다르고 싶다는 양 둔부를 세헌
의 얼굴 위에서 몇 번이고 흔들거리면서 바르작거렸다.

결국 세헌이 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앞으로 몸을 기울여서 제 얼굴


쪽에 올라타 있던 윤신의 몸을 반대 방향으로 누여 버렸다. 그거로도
모자라 그대로 윤신을 끌어다가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허리
를 걸치게 하고는 자신이 밑으로 내려가 땅을 디뎠다.

발치에 늘어져 있는 베개를 걷어찬 그가 무릎 위치에서 흔들리는


바지와 속옷을 벗겨 던져 버렸다. 바들대는 늘씬한 두 다리를 허공으
로 끌어 올려 제 옆구리에 단단히 걸듯 채우는 행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쭉, 찢듯이 가로로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에 세헌의 집요한 시선이


틀어박혔다. 그는 제 뻣뻣한 성기를 윤신의 엉덩이 골 사이에 느긋하
게 문지르면서 찔끔찔끔 쿠퍼액이 흐르고 있는 윤신의 것과, 경련하
는 입구에 공평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몰두하고 있는 그는 꼭 영화
속 악당처럼 눈매가 서늘하게 빛났다.

제 하반신에 온 신경을 집중한 세헌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 윤신의


허리가 조금씩 떨렸다. 그러자 세헌이 손가락 끝에 요도구에서 흐르
는 쿠퍼액을 바르듯이 훔쳐 쪽, 빨며 그를 희롱했다.

“줄줄 흘리는 거 보여?”

“그…… 렇게 쳐다보지 마요.”

“지금 네 거에 손도 제대로 안 댔는데 이렇게 젖은 거야. 알아?”

“그런 말도 하지…….”

“여기 경련하는 거 봐. 넌 이제 내 좆이 아니면 사정도 제대로 못


한단 뜻이야, 윤신아. 나 때문에 인생 좆 된 널 보니까 쌀 거 같아.”
그는 벌름거리는 사타구니 틈새의 좁은 구멍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길 지그시 보다가 얼굴을 숙이곤, 윤신을 부러 더 욕보이듯 성기엔
손도 대지 않고 회음과 입구 주변만을 아주 신중하게 적시기 시작했
다.

어느새 착실하게 사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던 윤신의 것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세헌은 혀끝을 세워서 구멍 속에 쑥 밀
어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하으, 흐, 이제 그, 그만.”

한계에 다다른 요도구가 움찔거렸다. 밀부에서 혀를 빼낸 세헌은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콘돔의 포장지를 까서 윤신의 성기 위에 감싸
듯이 돌돌 말아 씌웠다. 그런 뒤 능청스럽게 다시 구멍 속에 손가락
을 집어넣고 전립선 위를 노련하게 쿡 눌렀다.

“아아, 선배, 아……!”

순간 절정에 다다라 목을 뒤로 젖힌 윤신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꺼떡이던 윤신의 선단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너무 쉽게 팟, 하


고 정액을 토해 냈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늘어진 윤신의 것에서 천천히 콘돔을 벗긴


세헌이 제 셔츠 자락으로 축축해진 기둥을 닦았다. 그러고는 콘돔 안
에 고인 정액을 손바닥에 떨어내 제 성기 표피에 발랐다.
이윽고 윤신의 것에 새 콘돔을 씌워 준 그는 다시 고스란히 흥분하
게 만들 셈인지 젖은 귀두를 입구에 깔짝거리며 고압적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쿡, 쿡. 선단으로 움찔거리는 회음 위를 눌러 대는 그 때문에 윤신


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굵은 성기에서 맥박이 뛰는 느낌이
전달돼 미칠 지경이었다. 아울러 귓전에 아득하게 퍼지는 세헌의 낮
고 거친 숨소리 때문에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그것
만으로도 피가 성기에 쏠려 도로 서서히 발기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서 겨우 두 개 챙겨 온 거야?”

툭, 세헌의 손끝이 다시 곤두선 성기를 능욕하듯 건드렸다.

창피해진 윤신이 베개로 제 것 위를 가리려고 주변을 더듬었다. 한


데 손에 잡히는 게 없어 곤란했다. 그 모습을 위에서 고스란히 내려
다보던 그가 바르작거리는 두 팔을 단단히 붙잡으면서 움직이지 못
하도록 통제하고 전신을 짓눌렀다.

그 바람에 입구 주변을 누르던 그의 것이 슬쩍 안으로 들어왔다.

“허억, 흡.”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던 내벽이 침입자인 그의 기둥 선단을 힘껏


조였다.

세헌이 반사적으로 눈을 슬쩍 찡그렸다. 그러면서 반쯤 더 안으로


성기를 푹 밀어 넣은 뒤, 야릇하게 속닥거렸다.
“어떻게 박아 주면 돼? 네가 네 손으로 여길 쑤셔 대면서 상상한 그
림이 있을 거 아냐.”

“읏, 부드럽게…… 천천히 더 들어와요.”

“난 너 흐트러뜨리고 물어뜯고 싶은데, 넌 내가 부드럽게 해도 만


족해?”

“…….”

“난 솔직한 도윤신한테 빠진 거야.”

모든 게 그의 말대로다. 윤신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섹스도 좋지만,


우습게도 거친 행위에 더 잘 느꼈다. 또한 그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걸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주 잘 알
았다. 강세헌이 자신을 길들였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자신은 그가
아니면 안 될지도 모른다. 아주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쑤셔 줘.”

“어떻게.”

“거칠게…….”

잘했다고 칭찬하듯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세헌이 허리를 뒤로 해


단단히 박혀 있는 제 성기를 빼냈다. 뒤이어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윤
신의 몸을 팔 힘만으로 뒤집어 버렸다.
윽. 순식간에 무릎 꿇리듯 엎어진 윤신이 미세한 고통으로 허덕거
렸다. 세헌은 그런 윤신의 머리채를 확 잡아채더니, 다른 한 손으로
골반을 단단히 쥐어 그대로 제 것을 좁고 예민한 내벽에 난폭하게 꽂
았다.

퍽!

내려치듯이 귀두를 밀어붙인 그는 단박에 뿌리까지 삽입했다. 젖은


둔부에 음낭과 치골이 부딪치며 질척한 마찰음이 일었다.

“흐으, 흣. 읍!”

통증과 쾌감을 동시에 느낀 윤신은 거의 까무러쳤다. 세헌이 윤신


의 탄력적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철썩, 내려쳤다.

“아……! 아! 아!”

신음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격렬하게 허리를 쳐올리는 그의 미간


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거의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박아 넣다가 종
잇장처럼 흔들리는 윤신의 머리를 젖히게 만들었다. 윤신이 세헌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흥분으로 눈 주변이 빨갛게 된 세헌이 어설
프게 벌린 입 안으로 제 혀를 욱여넣었다.

쿡, 쫀득한 내벽을 찌를 때마다 입 속의 살덩이를 함께 농밀하게 얽


어 대니 밀부와 입 안이 그의 혀와 성기를 한꺼번에 수축하듯 조였
다.
머리끝까지 흥분한 세헌은 이내 윤신의 몸을 침대 위로 완전히 짓
눌렀다.

엎드리듯 자세를 잡고 있던 몸이 납작하게 시트에 달라붙었다.

상체의 하중을 이용해서 침대와 자신 사이에 윤신이 바짝 끼워져


압박당하도록 만든 그는, 덜덜 떨리는 윤신의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모로 세워 붙잡았다. 곧이어 밀부에 담긴 제 것으로 거칠게 추삽질해
전립선을 자극했다. 윤신은 자지러졌다.

“으응! 흣! 좋, 너무 좋아.”

“엉덩이 긴장 풀고 허리 더 흔들어. 그래야 기분 좋은 자리에 귀두


가 잘 박히지. 벌써 까먹었어?”

아이러니하지만 세헌은 다정하고도 난폭했다.

자상하게 속삭인 그가 피스톤질을 사납게 이어 갔다. 서로의 몸이


과격하게 들썩거렸다. 열락에 빠져드는 두 육체가 빠듯하게 맞물렸
다. 그 위로 이곳에 부유하는 뿌연 먼지들이 내려앉았으나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쿨쩍거리는 외설스러운 소리와 그들의 헐떡임이 하나의 주파수로


겹쳐졌다. 그 위에 채 벗지 않은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와, 침대의 삐
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그가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서로의 살갗이
부딪쳐 빚어진 마찰음 따위들이 세력 싸움을 하듯 얹혀 들었다.

퍽, 퍽!
세헌의 하반신이 마치 윤신의 안으로 모두 파고들 기세로 극렬하게
틀어박혔다. 상하 운동에 열중하는 그의 매끈한 이마에 핏줄이 돋아
올랐다.

윤신을 희롱하기 위해서라면 가공할 인내를 보여 주곤 하던 그도


오늘만큼은 영 느긋하게 즐길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변주 없이 일
률적인 삽입 운동을 반복했다.

길게 넣었다가 짧게 쳐올려 주는 것도, 내부에서 전립선 주변을 아


슬아슬하게 비껴가며 감질나게 만드는 것도, 아주 느릿하게 애태우
다 급속도로 처넣는 것도 모두 하지 못하고 그저 윤신이 좋아하는 자
리에 제 것을 박아 대며 난폭한 인터코스를 이어 갔다.

그때였다.

그의 음낭이 윤신의 엉덩이 위에 턱, 하고 부딪쳤다. 자연히 뿌리까


지 완전히 꽂혀 드는 바람에 배 속이 꽉 찬 이물감으로 괴로워진 윤
신이 헐떡거렸다.

“흐읍, 흣, 선배, 아……. 너무 깊게 들어왔어요. 여긴 아파요. 아


파.”

“배 속까지 찌르고 싶어. 더 넣자, 윤신아, 응?”

“더는 못 들어와, 싫, 좋, 싫, 모르겠어요…….”

“빨리 된다고 해.”

안 된다고 해도 할 거면서!
“천천히, 천천히 해요. 후으.”

명암이 분명한 고통과 쾌락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게 쉽지 않았


다. 꼭 길쭉하고 날렵한 물체가 제 안에 파고들어 헤집어 놓는 듯했
는데, 그런 한편으론 머리가 빙글빙글 돌 정도로 좋아서 미칠 지경이
었다.

꿰뚫린 윤신은 이러다 새된 교성이 터질까 봐 눈앞이 아찔했다. 자


꾸만 아랫입술만 깨물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시트를 입에 물려고
겨우 잡아당겼다. 그러나 독점욕 강한 세헌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바들거리는 목울대를 손바닥으로 받치듯이 잡고 얇은 천에서
얼굴을 떼게 만들었다.

“네가 입 안에 넣고 물고 빨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이러다 나 소리 지를 것 같단 말이야. 흣!”

이에 그가 제 손가락을 윤신의 입에 넣어 주면서 달랬다.

“아프면 이걸 물어.”

“이러면 선배가 아프잖아요. 싫어요.”

“상처 내. 괜찮아.”

쪽. 머리카락 위에 입 맞추며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끈질기게 달래


자 힘겨워하던 윤신이 결국 세헌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콱 깨물었다.
손의 통증을 느낀 세헌이 본의 아니게 제 하반신으로 그걸 고스란히
윤신에게 돌려주었다.
콰악!

이렇게 깊이 넣어 버리면 쾌감만큼 괴로워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전립선 주변부만 문질러 주며 어설프게 찔러 넣는
것으론 한참 모자랐다. 연신 뿌리까지 힘껏 처넣는 세헌의 얼굴에 서
서히 황홀한 기운이 스몄다.

“읍, 읍! 으읍!”

퍼억! 퍽! 성기가 꽂히면서 윤신의 둔부가 바르르 떨렸다. 끙끙 앓


으며 그의 손가락을 한 차례 더 힘껏 깨문 순간. 우습게도 사정하고
말았다. 세헌의 하중 때문에 억눌린 성기의 끝에서 희뿌연 정액이 터
져 나와 콘돔에 쏟아졌다.

한숨 같은 신음을 토해 낸 윤신이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그가 제


것을 훅 쳐올렸다.

세헌이 몰아붙일수록 윤신의 몸은 시트에 거칠게 쓸렸다. 그의 골


반이 둔부에 부딪칠 때마다 잔뜩 약 오른 성기가 움찔거리는 민감한
내벽을 두루 찔렀다. 자연히 딱딱한 기둥이 전립선을 함께 건드려 댔
다. 난잡하기 짝이 없는 음험한 인터코스를 반복하며 두 사람의 움직
임에도 점점 더 속도가 붙어 갔다.

조금 전 토정했는데도 윤신은 짜릿해서 목소리가 절로 높아질 것


같았다. 세헌의 손가락 표피에 상처가 나고 있다는 걸 알았으나 깨무
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단단하고 묵직한 성기로 미친 듯이 박아 대던 그가 열락에
파묻혀 뜨거운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윤신의 몸을 뭉개 버릴 기세로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헐떡이는 전신을 짓이기는 것처럼 억누르
고, 귓전에 끈적하게 키스하면서 속살거렸다.

“내가 이 안에 찔러 줬으니까 너도 날 기쁘게 만들어 줘야지.”

“흐으, 후, 웁.”

“들으면서 싸고 싶어.”

사정의 신호를 보낸 그는 윤신의 입에서 손가락을 훅 빼냈다.

“사랑해요, 읏.”

늘 들어도 이 말은 질리지가 않았다.

치아에 깨물려 찢긴 세헌의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그걸 분명히 보


고도 전혀 개의치 않은 그는 젖은 제 손을 윤신의 왼손 위에 덮듯이
깍지 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젖은 뺨을 쥐고 질척하게 입을 맞추면
서 아득한 내부에 사출했다.

미끄덩한 체액이 제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외설스러운 감각을 느끼


며, 윤신이 먼저 풀썩 무너졌다. 그 위에 골고루 발린 케이크 크림처
럼 함께 쓰러진 세헌이 발그레한 윤신의 뺨에 쪼듯이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정액을 뭉개듯이 성기를 내부에서 들썩였다.

한껏 지친 윤신이 여기에도 뽀뽀해 달라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가 사양하지 않고 그 붉은 살갗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런 상스러운 섹스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더 큰 자극을 찾게
된다고요. 체력 소모도 크고요.”

“더 큰 자극을 위해 한 번 더?”

아직 파묻혀 있는 내부에서 그의 것이 꿈틀, 했다. 식겁한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콘돔도 없고, 시간도……. 선배가 안에 해서 전 반차 써야 돼요.”

“그러게 콘돔 두 개 갖다 누구 코에 붙여.”

잠시 제 뒤의 그를 힐난하듯 지그시 응시하던 윤신이 어렵사리 입


을 뗐다.

“수석님, 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걸 소원으로 쓰기엔 아까웠다. 평소


였다면 그냥 할 수 있는 요구들이었으나, 조건부가 서로에게 걸려 있
어 말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쉬웠다. 윤신이 말을 얼버무리자, 그 생
각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세헌이 한 수 물렀다.

“내가 오늘 좀 일찍 퇴근하는 걸로 하지. 도련님 숫자 교육도 좀 하


고.”

싫진 않았던 윤신의 음성이 한풀 누그러졌다.

“씻겨도 줘요.”
들어주겠다는 대답 대신 제 뺨에 뽀뽀하는 세헌이 밉지 않아서, 결
국 팔꿈치로 그를 툭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02.

얼핏 보면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그저 쌓여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론


일정한 질서가 있었다.

집무실의 번잡한 책상 주변부를 더듬어 원하는 걸 정확히 찾아낸


윤신이 도톰한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있던 휴대폰을 고쳐 들며 대꾸했다.

“이번 달로 3년이 됐다는 말씀이시죠?”

- 예, 지난주 월요일입니다.

그와 통화 중이던 상대방은 종로의 아주 유명한 어학원에서 강의하


는 스타 강사로, 얼마 전 아내가 집을 나간 지 꼬박 3년째가 됐다며
의뢰를 청해 왔다.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찾지 말라는 의미의 쪽지 한 장 달랑 남기


고 연락 두절이 됐는데 본인의 유명세 때문에 드러내 놓고 수배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이 꽤 오래 흘렀다는 거였다.

윤신도 대학 시절 이 강사의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만큼 저


명한 인사였다. 배울 만큼 배운 데다 잃을 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었
다. 그런 입지에서 괜한 구설수로 몸값이 떨어질 걸 우려해 대처가
소극적이었다는 말 자체는 납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방관적 태도가 이해 안 됐다. 자취를


감춘 이는 단순한 친구도 동료도 아닌 평생을 약속한 배우자였다. 물
밑에서 몰래 시도할 수 있는 여러 수색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찾지 않고 방치했다는 건 필시 의도가 있었을 터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 법에서 3년이라고 한다던데요. 배우자 생사가 3년 이상 불명일


경우 이혼 소송이 가능하다고요. 그래서 이쪽으로 이름 있는 도 변호
사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인간 군상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할 정돈 아니지만, 매일같이 다


양한 클라이언트들을 접하면서 윤신도 어느 정도는 자체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근육이 생겼다.

어쩌면 이 남자는 아내가 집을 나간 처음부터 이혼을 염두에 뒀으


리라. 아울러 배우자가 가출을 시도하게 된 원인 또한 이 사람의 문
제일 공산이 컸다.

그러나 무결한 의뢰인의 사건만 수임한다는 건 최소한 도국에선 상


상하기 어려운 사치였다. 윤신은 영 내키진 않지만 수임을 하겠다는
표식으로 서류 상단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맞아요. 3년이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민법 840조 5호요.”


- 혹시 그거보다 더 장기간 연락이 두절되거나 그러면 혼인이 취소
되고 그런 법은 없겠죠?

“사망하지 않는 이상 헌법엔 그런 규정이 없어요. 나라에서 정한


제도에 약속을 하신 거기 때문에 무효화하려면 반드시 소를 거셔야
해요.”

- 만에 하나 소재 파악은 안 되지만 생존해 있다고 하면, 그땐 어떻


게 됩니까.

사락. 종이를 뒤로 한 장 넘기던 윤신의 손 움직임이 멈췄다. 맞은


편에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세헌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
기 때문이다.

탁 비서가 문을 열어 주었다.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왔던 연락이나 혹은 중요한 안건에 대해 간략
히 보고하는 듯했다. 그걸 들은 세헌이 추가로 뭔가를 지시하며 탁
비서를 어디론가 보내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윤신은 그를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살짝 몸을 일으켰다. 뒤이


어 책상에 걸터앉아 세헌이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해 주기만 고대하
고 있는데, 마침 돌아섰던 그와 눈길이 부딪쳤다.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명확히 고정됐다.

화색이 된 윤신이 손을 흔들었다. 한데 그가 그대로 블라인드를 쳐


버렸다.

차락, 하는 야박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참, 너의 싸가지도 한길 소나무다.’

문제는 연인에게조차 짤 없는 저런 각박한 점까지 사랑스러워 미치


겠는 자신이다.

‘강세헌 너무 좋아, 젠장.’

속으로 궁싯댄 윤신은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내분이 어디 계신지는 몰라도, 생존하긴 한다는 게 입증되면 말


씀이시죠? 음, 그 경우엔 이 이혼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요. 그땐 ‘악
의의 유기’를 이유로 소를 제기하셔야 됩니다.”

- 확실하게 단정을 해 주세요. 그러니까 도윤신 변호사님 의견에,


제 경우 와이프가 없이도 소송 제기가 가능하단 말씀이네요? 아내의
소재가 불명이니까요.

제 이름을 거론하며 확실하게 알려 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


다. 이 남자는 지금 통화의 내용을 녹취하고 있는 듯했다. 십중팔구
중간에 혹여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의 책임이라고 몰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다. 혹은 아내의 소재가 소송 준비 중 밝혀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파 두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이런 의뢰인을 한두 번 상대한 것도 아니라, 제게도 내공이


생겼다.

눈을 살짝 접어 인상을 쓴 윤신이 부드럽고도 딱딱한 다변적인 말


투로 응답했다.
“네. 소장 송달하고 재판에 참석하게 만드는 일이 어려우니까, 생
사가 3년간 불분명했다는 걸 우리가 증명하면 됩니다. 그러면 법원
에서 공시 송달[1]로 소장을 송달하고, 배우자 출석 없이 궐석 재판
[2]이란 걸 해요.”

생사 불분명은 배우자가 관계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증거여서, 꽤


중대한 이혼 사유였다. 다시 나타난 배우자가 소송 결과에 이의를 제
기해도 그 혼인이 부활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남겨진 쪽에서 생사
확인이 어렵다는 걸 까다롭게 입증을 해야 하는 거였다.

-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카드 사용 내역 같은 건 뽑아 뒀어
요.

이 의뢰인은 증거까지 철두철미하게 미리 준비를 해 둔 모양이다.

“저희 펌 비서실에서 오늘 중으로 목록 보내 드릴 거예요. 그것 중


에 저희한테 제공해 주실 수 있는 정보들 정리하셔서 내주까지 회신
해 주십시오. 내용 확인한 후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펌에서 정식으로 뵙는 걸로 하죠.”

- 잘 좀 부탁드릴게요.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윤신은 까맣게 변한 휴대폰 화면을 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가끔 이런 찝찝한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수임을 거절할 만한
결격 사유가 있는 건 아니다. 아울러 특별히 의뢰인이 나쁜 사람이거
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주 묘하게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그런 사건들을 맡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조금 전 동그라미 쳐 두었던 서류를 들고 자


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가 비서실 쪽으로 향하자, 뭐 필요한 게 있느냐는 듯 사


무장이 살짝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어, 사무장님. 안 일어나셔도 돼요.”

파티션 앞으로 직접 다가간 윤신은 괜찮다는 양 재차 손짓하며 서


류를 건넸다.

“이분요. 저희 정보 협력 매뉴얼 보내 주세요. 회신 오면 알려 주시


고요.”

“배우자 생사 불분명…… 어라, 이 건부터 하시게요? 제가 변호사


님이 관심 가지실 만한 거 여러 건 올려 드렸는데요. 가정 폭력 건이
랑, 빨리 도움 필요한 케이스들요. 안 하세요?”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고 팀장님이 이분부터 하래시네요. 차근차근


할게요.”

“아아, 가사 팀장님이. 그분 너무 유명세에만 신경 쓰시는 거 아닌


지 모르겠어요. 어째 요즘 도 변호사님 계속 이런 건만 맡으시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아무튼 네, 알겠습니다.”

이제 윤신의 성향을 잘 아는 비서실에서 나름대로 사건을 선별해서


가져다주긴 하지만, 위에서 직통으로 명령이 내려오면 그것들은 미
뤄지는 수순인 게 당연했다.

신경 써 줘 고맙다는 듯 사무장에게 눈인사한 그가 비서 팀 직원들


의 눈치를 슬쩍 살피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세헌의 방문 쪽으로 다가
갔다.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네.” 하고 대답하는 잠긴 목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빈틈 사이로 제 얼굴만 쏙 밀어 넣은 윤신이 서류를 보


는 데 몰두하고 있는 세헌을 가만히 직시했다.

몇 초가 지나도 상대방이 들어오는 기미는커녕 조용히 관찰하는 시


선만이 느껴지니, 일에 열중하던 세헌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
았다. 냉담한 눈동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일 줄 알았다.

본인 집무실 방문을 열고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하게 만들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의미 같았다. 무언의 힐난엔 아랑곳하지 않고 뽀뽀해
달라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이없어하는 기색으로 그걸 관찰하
던 세헌은 이내 다시 책상 위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벌써 한 번 저 방에서부터 블라인드로 차였던 윤신은 울컥했다. 지
기 싫은 마음에 그 자세 그대로 살짝 눈을 감아 좀 더 키스를 졸랐
다. 시야가 어둠에 차단돼 있어 정확힌 모르지만, 한 번쯤은 그가 제
쪽을 힐끗 쳐다봤으리라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탁, 펜대를 가볍게 내던지는 소리가 들려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세헌이 등받이에 등을 기댄 오만한 자세로 자신을 빤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만 까불고, 문 닫고 들어와.”

그제야 승리감에 도취되어 문을 닫고 안에 들어섰다. 뚜벅뚜벅 걸


어 세헌의 앞에 서니 네 속쯤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그가 손끝
하나 대지 않는 거였다.

“할 말은. 알겠지만 브리핑은 가능한 한 간략한 언어로 핵심을 담


아서.”

“들어오라고 했으면 저를 막 더듬고 그래야죠.”

“나도 간절히 그러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말고. 두 시간 뒤에 놀아


줄게. 용건.”

“많이 바빠요? 이번 주는 좀 괜찮을 줄 알았어요.”


“대체로 괜찮아. 그 와중에 급히 봐야 할 게 생겼어.”

분주한 상황에서 자신이 방해하는데도 최대한 참아 주는 그가 느껴


졌다. 윤신은 비로소 제 타이밍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식했다.

이제는 팀이 다르다 보니 그에게 급작스럽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


기고, 또 처리할 시간이 필요해지는 때를 바로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주 가끔 이런 일이 빚어졌다. 왠지 초조해진 윤신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저 첫 번째 소원 오늘 쓸게요. 이따 같이 퇴근하시죠.”

팔짱을 척 낀 그가 눈살을 미세하게 구겼다.

“이거 소원 자가 증식의 서막인가? 벗겨 먹힐 쪽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첫 번째 소원을 쓸 때 그가 규칙을 깼다는 이유로, 제 소원은 다시


세 개가 되었다. 램프의 지니로선 그걸 앞으로도 계속 증식하게 만들
거냐는 물음을 하는 게 당연했다.

“아니에요. 앞으로 딱 세 개만 쓸게요.”

이 대답에 세헌이 의외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편법은 삶을 꽤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데, 아는 거지?”

“제가 양심적인 사람이라서…… 라기보단 생각해 보니까 선배가 너


무 매 순간 양보를 많이 해서요. 진짜 머저린가 봐요. 아는데 가끔
까먹어요. 지금 1초가 아까운데 참는 거죠?”

“참는 거지.”

“죄송해요.”

“왜 참는 거 같은데.”

“그거야…… 절 너무 사랑해서?”

“…….”

“이 타이밍에 침묵하시는 거 별로 본인 인생에 도움 안 될 텐데요.”

“당연히 그래서지. 아무리 머저리라도 그건 까먹지 마.”

아무래도 그는 지금 보이는 데면데면한 태도가 귀찮거나 번거로워


서가 아님을 윤신이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이런 세헌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제 기분은 널을 뛰었다. 감정 기복


파동이 요란한 편은 아닌데도 강세헌은 가뿐히 그 일을 해냈다. 때론
직접적인 언어가 아니어도 좋았다. 에두른 말조차도, 제 언어를 빌린
소극적 동의조차도, 누굴 좋아해 본 적 없는 그로선 어려운 심정으로
하는 고백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윤신에겐 세헌의 표현들이 모두 소
중했다.

날아갈 듯 기분 좋아져 픽 웃게 됐다.


“제가 훨씬 더 사랑해요. 방해 그만하고 가 볼게요. 하던 일 하세
요. 이따 봐요.”

아쉬운 마음에 1초만 더, 1초만 더 하고 뭉개게 될까 봐 서둘러 세


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한데 그런 윤신을 그가 도로 불러 세웠다.

“윤신아.”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어요? 나가는 길에 사무장님한테 말씀드


릴게요.”

“너야말로 뭐 잊어버린 거 없어?”

영문을 모르는 듯하자, 세헌이 직접 힌트를 제시했다. 그는 나른하


게 살짝 고갯짓하더니 제 입술을 길쭉한 검지로 툭툭, 가볍게 쳤다.

아. 뒤늦게 중요한 걸 깨달았다는 양 윤신이 빠르게 세헌에게 뛰어


갔다. 하얀 뺨을 두 손으로 붙잡고는 제 것이라고 도장 찍듯이 쪼옥,
입 맞춘 뒤 떼어 냈다. 더불어 매우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세헌의 입
술을 혀끝으로 할짝인 뒤, 꾸벅 공손하게 인사했다.

더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듯 단박에 자세를 틀어 밖으로


나가 버리는 동안, 집무실에 남겨진 세헌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만년필을 쥐려던 그의 곧은 손가락 사이


에서 펜대가 툭 떨어졌다. 허무하게 그걸 내려다보던 세헌은 짜증스
럽게 마른세수했다.
이미 윤신은 사라지고 없는데, 눈앞에 저 문을 조금 열고 머리만 밀
어 넣은 채 눈을 감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갈증이 나 목구멍이 간
지러운 기분이 치밀었다. 본능적으로 방금 전 윤신이 닿았던 제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친 그는 입술 사이에 그걸 끼웠다.

그리고 손끝을 더 안쪽으로 넣으려던 순간, 멈칫했다.

“돌았군.”

이런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

윤신은 신중하게 고르고, 고르고, 또 골랐다.

사실 세헌은 웬만하면 제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그라


도 절대 해 주지 않는 몇 가지가 확실하게 존재했다.

예컨대 누나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알리는 일이라든지, 왔다 갔다


하기 복잡하니 서로의 집을 하나로 합친다든지, 제대로 커플링을 맞
춘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랬다. 이 기회에 그런 미지의 세계 중 그도
들어주기 어렵진 않을 몇 가지를 해결해 버릴 심산이었다.

고민하던 와중 불현듯 이 장소가 떠올랐다.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사택에서 한참 떨어진 창고형 대형 마트 주차


장에 도착해 있었다.

운전석의 세헌은 힐끗 앞 유리 밖을 내다보곤 믿기지가 않는다는


기색으로 핸들을 강하게 쥐었다. 뒤이어 예상 그대로 기각을 선언했
다.

“안 돼.”

물론 이럴 줄 알았다.

윤신이 안전벨트를 풀면서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

“소원이잖아요.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나름대로 소프


트한 걸 고른 거라고요.”

“하나도 안 소프트해. 나한테 이건 고어야. 몰라?”

“다른 건 다 해 주면서 별것도 아닌 이건 안 된다고 하니까 더 하고


싶죠. 변호사님은 맨날 클라이언트들한테 이거 잘해야 된다고 충고
하면서, 왜 본인은 안 해요.”

“그거랑 이거랑 같…… 징그럽게 남자 둘이 무슨 카트 끌고 생필품


쇼핑을 해. 애초에 난 대형 마트에 와 본 적이 없어. 다른 거로 해.”

왠지 그의 안에 답이 있는 듯해, 떠보듯이 물었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수석님 머릿속에 이미 답 있는 거죠.”

“마침 봐 둔 매물이 하나 있어. 차명으로 내가 먼저 매입해서, 또


다른 차명으로 양도를 하는 방식이면 괜찮을 것 같아. 네가 비법이네
불법이네 난리 칠까 봐 먼저 말해 두는 건데 세금은 국세청에서 내라
는 대로 낼 거야.”

봐 둔 매물?

윤신이 한 단어에 꽂혀 눈을 반짝거렸다. 혹시 사택을 나가 자신과


둘이 살자는 얘기인 건 아닌가 기대감이 치솟았다. 사택은 펌에서 가
깝고, 관리가 편하다는 장점만큼 언제나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
는 단점도 명확했던 터였다.

제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알겠다는 양, 세헌


이 설명을 더했다.

“재테크 용도야. 스스로 돈을 좀 벌어.”

윤신은 지금도 또래 평균에 비해 압도적일 만큼 잘 벌었다. 물론 세


헌과 비교할 바는 못 됐으나, 그가 단순한 수입 격차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누나가 제 세컨 카를 교체해 주었다. 꽤 오래 몰기도 했고,


생일도 겹쳐서 겸사겸사 선물해 준 거였다. 그때부터 마음에 영 안
들어 하는 기색이더니 거기까지 생각을 전개해 뒀던 듯했다.
그녀가 ‘제 것’인 윤신에게 물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 싫은 것이
다.

“그런 거 말고 저랑 작정하고 동거를 해 달라고요.”

“그건 이미 반은 하고 있잖아.”

“그게 또 사택이랑은 다르다니까. 아니, 징그럽게 다 벗고 섹스도


하면서 이게 뭐 그렇게 싫다고. 됐어요. 저랑 장 보기. 그게 제 소원
이에요. 협상 불가.”

“도…….”

“결렬. 내려요.”

이름 세 글자 중 성만 겨우 뱉어 낸 그 순간, 윤신이 그의 말허리를


훅 잘라 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런 여지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이 차 밖으로 먼저 나가 버렸다. 운전석에 앉아 잠시 갈등하던 세헌
이 결국 아랫입술을 꽉 깨물곤 마지못해 하차했다.

지하 주차장 모퉁이에 겹겹이 겹쳐 있는 카트를 하나 꺼낸 윤신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묘하게 찜찜해하는 기색으로 다가간 세헌은 복
잡한 기미가 만연한 표정으로 제 턱을 쓸었다.

“혹시 날 주부로 만들 생각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걱정 마세요. 변호사가 훨씬 더 잘 어울리시니까.”


“그렇다면 내가 가사 일에 대체 인력을 고용할 수 있게 나를 놔두
는 방법은?”

강세헌이 고용한 아주머니는 고급 식자재 마트와 인근의 백화점에


서 반드시 정해진 브랜드의 제품만 샀다. 재산 증식에 엄청난 소질이
있는 이 돈 많은 물주로부터 브랜드 지정 외엔 다른 어떠한 요구 조
건도 없었다.

이런 창고형 마트에서 사는 공산품 같은 것들이 싫은 거라면, 차라


리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윤신이 작은
슈퍼나 편의점에서 사 온 걸 챙겨 주면 그건 그거대로 군소리 없이
두고 썼다.

바꿔 말하면, 이 남자는 생활의 근간이 되는 세간에 아무런 관심도,


취미도 없다는 뜻이다.

“이참에 이런 것도 해 보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한 애인인 게 불만인가? 너무 복에 겨


운 거 아니야?”

“물에 빠진 사람 구하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이 왜 존재하


는 거 같으세요. 예로부터 저만 이러는 게 아니란 뜻이죠. 이거나 잡
으세요.”

윤신은 척, 카트의 손잡이를 세헌에게 내밀었다. 그는 불특정 다수


의 손길이 닿았을 카트를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졌다는
양 몸을 움직였다.
“가지가지……. 비켜.”

마침내 그가 그걸 잡곤 앞서 걸었다. 세헌의 옆을 쫓는 윤신은 몰래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왜 그렇게 싫어요? 마트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어요? 와 본 적


도 없다면서요.”

“난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불편해.”

왠지 그다우면서도, 조금은 의외의 답이었다.

“본인은 바쁜데 다들 느긋해 보여서?”

“그것보단 내일은 뭘 해 먹을지, 욕실에 샴푸는 떨어지지 않았는


지, 어떤 세제가 더 깔끔하게 닦이는지, 휴지는 몇 상자가 남았는지
그런 거 고민하는 감각을 나도 알게 될까 봐. 그거 너무…….”

세헌은 생각이 많아진 모양인지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나 말줄임


표에 숨은 말들을, 윤신은 어쩐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버
티듯 살아온 그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듯했다.

“이런 게 행복이면 내가 평생 불행하게 살아온 게 되잖아.”

“…….”

“이래서 내가 남이 쓸데없이 행복한 걸 싫어하는 거야.”


꺼림칙하고 싫은 게 아니라 낯설고 불편한 것이라면, 그 감각을 알
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것일 뿐이라면 이제부터 자신이 하나씩 가르쳐
주면 되는 일이다. 진작 더 강하게 졸라서 함께 와 봤어야 했다고 후
회하며, 윤신이 세헌의 손가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폐점이 가까운 아주 늦은 시간이라 사위는 조용한 편이었다. 주변


을 둘러보던 윤신이 마침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 전의 사각지대에서
고개를 기울여 세헌의 뺨에 쪽, 뽀뽀했다.

“볼테르가 그랬대요. 자긴 행복해질 거라고요. 왜? 건강에 좋으니


까. 큰일 났다, 강세헌. 이제 튼튼해지겠다. 가뜩이나 체력 괴물인
데…….”

‘뭔 소리야.’ 하듯 윤신을 어이없어하며 보던 그는 픽 웃곤 이내 여


기에도 하라는 듯 얼굴 반대편을 슬쩍 내밀었다. 다시 주변을 살핀
윤신이 그 위에도 입 맞춰 주자, 마무리는 자신이 하겠다는 것처럼
입술 위에 키스해 주었다.

그도 ‘우리 같이 쇼핑해요.’에 들어 있는 소소한 바람들을 아주 모


르진 않는 모양이다.

줄곧 이런 게 너무 하고 싶었다.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발개진 뺨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휴대폰을 꺼


낸 윤신이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뒤따라 올라타는 세헌을
마주한 채로 화면을 열어 보여 주었다.
“선배, 이거 봐요. 이게 오늘 우리가 사야 될 것들이에요. 당장 저
희 집에 없는 거.”

그는 꽤 신중하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유 유통 기한 꼭 확인하고 사기, 수석님 드실 탄산수 성분 꼼꼼하


게 확인하고 고르기, 버터랑 체다 치즈 칼로리 제일 낮은 걸로, 시리
얼은 그래놀라가 포함된 것으로.

거기까지는 나름대로 순조롭게 눈에 담나 싶다가 돌연 인상을 썼


다. 그의 반응을 보고 대충 어디쯤을 읽고 있는지 눈치챈 윤신이 맞
은편에서 카트를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능할까요?”

그는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윤신이 직접 작성해 온 목록을 육성으


로 딱딱하게 뱉어 냈다.

“내가 술 사면 수석님이 못 사게 막기.”

“……안 되나요?”

“수석님이 과일을 고르면 그건 신선도가 별로라고 내가 타박 주


기.”

“전 자신 있어요.”
“샴푸 두 개 붙어 있는 거 가격 비교해서 장만하려고 하는데 수석
님이 이게 향이 더 좋다면서 바꿔서 넣기. 쌀 살 때 무거울 테니까
들어 주겠다고 대신…… 더는 못 읽겠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윤신에게 휴대폰을 탁, 하고 다시 넘긴 세헌


이 그것으로는 모자랐던지 판판한 복부를 카트로 밀어냈다. 구체 관
절 인형처럼 삐걱대다 몸이 후방으로 밀린 윤신이 에스컬레이터에서
겨우 벗어나며 그를 흘겼다.

“제가 남자라는 점을 너무 알차게 이용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그렇게 뒷걸음질 치면 어떡해. 버텨야지. 넘어져, 이리


와.”

밀어낼 땐 언제고, 뒷걸음질 치며 윤신이 조금 비틀거리자 그가 득


달같이 손을 내밀었다. 손톱 끝이 잘 정리된 깔끔하고 예쁜 손을 가
만히 보던 윤신이 마지못해 잡는 척 붙잡고는 세헌의 곁에 나란히 섰
다. 정말 새삼스럽게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넘어져, 이리 와.’라는 아이 다루듯 하는 말을 ‘저’ 강세헌의 입으


로 듣게 될 줄이야.

세헌과의 연애는 이래서 좋았다. 그를 다 안다고 착각할 즈음 또 다


른 모습을 보여 주고, 또 그 특별함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 함께 주지해 주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그냥 세헌


의 수려한 외모에 관심을 두는 건지 힐끗거리며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을 쳐다봤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윤신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
다. 다른 한 손으로는 카트를 밀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긴장한 귓전에 낮게 속삭이는 건 덤이었다.

“콘셉트가 뭐야. 신혼 부부?”

늘 그렇듯, 윤신은 순순히 자백했다.

“당연하죠. 그런데 여기도 사람들이 쳐다봐요. 일부러 멀리 온 건


데, 수석님 알아본 걸까요?”

“별수 있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아, 이쪽에 채소랑 과일


있다.”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을 피해 과일 코너로 이동한 윤신은 개별로


포장된 체리를 적당히 카트에 담았다. 그러다 불현듯 세헌에게 눈길
을 돌렸다. 그는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르는 제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냉장고는 집에 와 주시는 아주머니가 알아서 주기적으로 채워 넣어


두시기 때문에, 사실 윤신도 신경 쓸 일이 많진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게 좋은 과일인지 아닌지 대충 짐작은 되지만 명확히는 판별하기 어
려웠다. 하나 능숙한 체하며 과일을 보는 시늉을 하니, 세헌이 그 속
이 뻔히 보인다는 듯이 눈짓했다.

“도윤신 너 과일 볼 줄 모르지.”

“이게 신선하고 맛있는 거예요.”


“확신해?”

“신선…… 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맛은 있을걸요.”

투명한 봉투에 든 새빨갛지만 조금 물러 있는 사과를 들어 보이자,


그가 짧게 한숨을 뱉어 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사과 아래쪽 엉덩
이 주변이 노랗고, 꼭지가 깊숙이 박힌 것들이 담긴 봉투를 집어 들
었다. 그뿐만 아니라 알이 단단한지를 만져 보더니 윤신이 고른 것과
바꿔 카트에 담았다.

“드라마 콘티를 써 올 거면 자료 조사를 제대로 하는 게 기본 아닌


가?”

발끈해서 제 봉투를 다시 집어 든 윤신은 반박했다.

“제가 고른 게 옳은 선택이면 어떡하실 건데요. 지금 큰 실수하시


는 거예요.”

“난 실수 안 해. 내려놔.”

“네…….”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그가 채소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윤신은 머쓱해하며 사과를 내려놓고 따라붙었다. 생각해 보니 갑을
이 바뀌긴 했지만 결론적으론 자신이 써 두었던 쇼핑 목록의 방향성
을 충실히 지킨 셈이었다. 기분이 들떠서 세헌의 팔짱을 끼듯이 살짝
몸을 기대고 어리광을 피우자 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적당히 샐러드용 채소를 고르곤, 드레싱도 몇 개 담았다.
세헌이 선택한 것들은 모두 평상시 윤신이 자주 먹는 맛들이었다. 윤
신이 선택한 건 정확히 그 반대였다. 서로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세헌이 평소에 얼마나 제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기쁘기도 했다.

계속 장을 보다 보니 의외로 윤신이 서툴고, 세헌이 능숙했다.

윤신이 처음 보는 브랜드의 제품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리뷰를 훑는


동안, 세헌은 직접 영양소 따위를 확인하고 비교했다. 그렇게 잡곡류
와 육류, 냉동식품 따위들까지 차곡차곡 고르다 보니 금세 카트 안이
쌓여 갔다.

“우리 이제 위로 올라가요.”

“여기선 다 골랐어?”

“네, 샴푸 떨어졌어요. 그거랑 유제품 사야 돼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며 카트를 잡은 세헌이 윤신의 손을 끌어 갔


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도리어 과감하게
서로의 손을 겹쳤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러워진 윤신이 손등을 움찔
했다. 이에 그가 천연덕스럽게 더 꽉 짓누르듯 깍지를 꼈다. 고개를
돌리고 벽을 바라보는 윤신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보디용품 따위들이 전시되어 있는 코너로 이동하니 아래층과 달리


향긋한 향기가 코끝에 스몄다. 윤신은 샴푸의 향들을 직접 꼼꼼하게
맡아 보았다. 세헌에게도 맡아 보게 하면서 제일 합리적인 가격대의
통 두 개를 양손에 쥐어 들었다.

“제가 원래 가끔 쓰는 건 이건데요.”

그에게 먼저 보라색 통의 향기를 맡아 보게 한 윤신은, 곧 반대편


손에 든 하늘색 통을 내보였다.

“이번엔 이거 사 보려고요. 어떠세요? 선배도 쓸 거니까 의견 수렴


할게요.”

두 번째 샴푸의 향까지 코끝으로 음미한 세헌은 잠시 대답이 없었


다. 그저, 가만히 제게 시선만 고정한 채였다. 의아해진 윤신이 고개
를 갸웃했다.

“본인 쓰는 비싼 브랜드 아니라서 그래요? 저희 집에 둘 거니까 대


충 타협하시죠.”

그러자 이번에도 입 다물고 있던 그가 돌연 손을 뻗어 윤신의 머리


카락을 손에 한 움큼 쥐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향기를 맡아 보는 동
안 서로의 몸이 밀착됐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를 재빨리
확인한 윤신은 그가 제 향기에 집중하는 사이 긴 목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요.”

그는 여전히 별말 없이 윤신의 머리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


는 베이지색 통의 외부 뚜껑을 열어 윤신의 코끝에 대 주었다. 아까
자신이 이것저것 고르면서 향기를 맡게 해 주었던 것들 중 제일 담백
하고 깔끔한 향기의 샴푸였다.

보라색과 하늘색 통을 둘 다 손에서 빼앗아 간 세헌이 그것들을 제


자리에 도로 내려놓고, 본인이 직접 고른 걸로 카트에 놓았다. 이런
말도 함께 덧붙였다.

“넌 이런 향이 더 어울려.”

필연적으로 윤신의 머릿속에 자신이 적어 왔던 쇼핑 목록이 떠올랐


다.

수석님이 이게 향이 더 좋다면서 바꿔서 넣기.

그걸 곱씹는 입가에 샴푸 향기보다도 더 향기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 서서히 지는 꽃처럼 사그라졌다. 이 급격한 온도 차의 영문을
모르는 세헌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콘셉트 회의 다시 해?”

“아뇨.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 좋아서요.”

“참고로 그게 진짜로 더 어울려.”

“전 앞으로 샴푸는 이거만 쓸 거예요.”

당신이 너무 다정해서. 그런데 오직 제게만 상냥해서. 그걸 자신만


알 수 있어서.
그게 너무, 너무, 너무 좋아서.

그 벅찬 감정이 도리어 자신을 심란하게 했다.

그를 좀 더 합법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갖고 싶었다. 강세헌이 제


것이란 걸, 제겐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란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
다. 이렇게 인파가 모두 지나간 뒤 숨어서 몰래 키스하는 게 아니라
손을 잡고 걷고 싶고, 가끔은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서로의 허리
를 바짝 끌어안고 싶었다.

연인들 사이에 애정이 생기면 더 오래 함께하는 미래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윤신도 약혼이나 결혼 같은 형태를 늘 염두에
는 두고 있었다. 다만, 그런 한편으론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함께 인지했다.

그래서 여태까진 그저 서로의 애정을 더욱 공고히 해 주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화두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겨 왔다. 한데 불현듯 강세
헌을 완벽히 가지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감각이 밑부터 올라와
버티기가 힘들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세헌을 끌어간 윤신은 애써 표정을 지우며 유제품


코너로 이동했다.

“저 선배랑 가끔 이렇게 장 보고 싶어요.”

불쑥 이런 말을 꺼내자 쇼케이스 앞에서 버터를 고르던 그가 멈칫


했다.
막상 해 보니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선배는요? 저랑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는


데 왜 말을 잘 안 해요?”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든 세헌이 거절할 리 없었다. 말론 거절해도


진짜로 마음에 안 들어 할 리 만무했고, 만에 하나 그렇다손 치더라
도 중요한 순간엔 양보할 걸 알았다.

오늘, 지금 이 순간처럼.

이쪽도 얼마든지 그렇게 해 줄 수 있는데, 그는 왜인지 좀처럼 털어


놓질 않는다. 그게 꼭 강세헌이 몰래 남겨 둔 1센티의 거리 같았다.
허물고 싶었다.

제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세헌이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곤


눈을 마주쳐 왔다.

“넌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

“그 말을 선배한테 들으니까 웃기네요.”

“넌 이미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있어. 그리고…….”

그는 카트를 사이에 두고 지그시 윤신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곧 발


그레해진 뺨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그 따뜻한 손끝에 말로는 빚어
내지 못한, 억누른 애정이 가득했다.
“글쎄, 난 너랑 진짜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꼭 제 사고 체계 안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세헌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을 돌려주었다. 필연적으로 윤신의 어깨부터 발목까지 전부 얼음
이 되고 말았다.

강세헌은 자신을 매 순간 충만하리만치 사랑하고, 또 그걸 시시때


때로 알게 해 주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듣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
였다. 정말이지 전율이 일 정도로 좋았다.

너무 기뻐서, 외려 장난스럽게 흘려 넘기게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


다.

꼭 신기루 같아서일까.

“그 제도에는 회의적이라고 할 땐 언제고.”

“그러게. 여기 자주 오면 안 되겠어. 두 달에 한 번 이상은 안 되는


걸로.”

탁. 버터와 체다 치즈, 그리고 우유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골


라서 카트에 넣은 그가 윤신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카트를
직접 잡아 운전하게 하면서 뒤에서 윤신을 밀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
럽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시리얼 코너를 향해 뚜벅뚜벅 걸으면서도 윤신의 뇌리는 강세헌으


로 가득 찼다. 늘 이런 이야기를 농담인 양 먼저 꺼낸 건 제 쪽이었
고, 세헌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저 얘기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기념
비적인 일이었다.

혹시 나도 이 사람 좀 더 구속해도 되나?

어떤 물리적인 형태로 말이다.

물론 대한민국에 살면서 남자끼리 거창한 관계 정립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소한의 구속으로 커플링 정도는 하는 게 어떠냐고
한번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 불편하다며 그가 아주 명확하게
거절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반지라도 끼고 나타나면 펌 내에선 물론이고 법조


계 전체에서 제 누나와 드디어 결혼을 하는 거냐느니, 아니면 또 다
른 물주가 생긴 거냐느니 온갖 구설수에 시달릴 걸 알아서 조르진 못
했다. 분명히 뒤집어질 게 제 눈에도 훤했다.

하지만 그도 원한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게 아닌가.

“저기. 수석, 아니 세헌 선배.”

라면과 우동 따위의 즉석식품 앞에 멈춰 선 윤신이 진지한 표정으


로 말문을 뗐다. 세헌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제 쪽을 보며 이어질 말
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심호흡한 윤신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그의 머리 뒤에 보


이는 컵라면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이런 얘길 꺼내기에 장소가 지나치리만치, 로맨틱하지가 않았던 것
이다.

“얘기해.”

“……예? 아, 라, 라면 드셔 본 적 있어요?”

그는 무슨 이런 황당한 질문을 다 하냐는 양 가만히 눈길을 주더니,


곧 평범하게 답했다.

“먹어 본 적은 있고, 앞으로 또 먹을 생각은 없고. 먹을 거면 네 것


만 사.”

‘이게 아닌데.’ 하고 자괴감 비슷한 걸 느끼며 착잡해하던 윤신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왜요? 이렇게 편리한 문명사회의 산물을……. 강세헌 씨 지


금 인생의 큰 즐거움 놓치고 사시는 거예요.”

“난 인스턴트 혐오론자야. 이런 건 인간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발명


품이고.”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죠.”

“뭐가 곤란해. 이것보다 더 심플할 수가 있어?”

“편식하는 거 귀여워서 괴롭히고 싶잖아요.”

그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구겼다.


“보통 이런 것도 편식이라고 표현하나? 학술적으로.”

“됐고요. 수석님은 가끔 게으름을 부릴 필요가 있어요.”

타악. 카트에 손에 집히는 라면 번들을 집어넣은 윤신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헌은 이제 이 소꿉놀이에 참견하는 걸 포기한 듯
했다.

“그래. 알차게 갖고 놀아. 후환이라는 말을 모르면 까불다가 몸으


로 학습하는 수밖에.”

그러고는 그들 옆을 장 보러 나온 노부부가 지나가 찰나의 사각지


대가 생긴 바로 그 순간, 윤신을 진열대 쪽으로 몰아붙여 쪽, 이마에
뽀뽀했다. 곧이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초연히 카트를 끌고 가 버
렸다.

그의 늘씬한 뒷모습을 보던 윤신이 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만 홀


로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몰래 웃으며 황급히 그를 쫓아갔다.
03.

현관까지 마중 나온 이경이 윤신을 반겼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윤


신의 허리만큼 오는 조카가 쏙 나타나더니 제 삼촌을 끌어안았다. 양
손에 가득 쥐고 있던 쇼핑백들을 땅에 내려놓고 폭 안긴 아이를 번쩍
추켜든 윤신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늘 아쉽고 안타깝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따


금 재회했을 때 기대보다 더 큰 행복을 주곤 하니까.

그 사실을 입증하듯 말간 얼굴에 오랜만에 조카를 보게 돼 설레고


반가운 기운이 완연했다.

“볼 때마다 커 있네. 삼촌 안 보고 싶었어?”

순한 아이가 고개를 저으면서 윤신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언젠


가 윤신의 길어진 앞머리를 보고 커다란 인형의 머리핀을 떼어 내 선
물해 주었던 그 막내 조카였다. 보다 안정적으로 아이를 안은 그가,
쇼핑백을 들고 거실로 이동하는 누나의 뒤를 따라갔다.

걷는 동안 이경은 동생이 무엇을 사 왔는지 꽤 까다로운 눈으로 살


펴보았다. 윤신은 고개를 그녀에게 기울여 넌지시 물었다.
“알맹이 왜 하나밖에 없어.”

“연재? 학원 갔지. 우리 연진이, 삼촌한테 뽀뽀해 주고 방에 가서


놀아.”

그에게 매달려 있던 둘째가 상체를 떼어 냈다. 그러고는 가끔 그렇


게 했듯이 윤신의 입술에 뽀뽀하려고 입을 내밀었다. 귀엽다는 양 눈
에 사랑을 가득 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신은 이내 제 왼쪽 뺨을
내밀어 여기에 하라는 듯 부추겼다.

“오늘은 여기.”

쪽. 뽀뽀한 연진을 내려 주자, 아이가 누나의 손에 매달렸다. 제 삼


촌이 저 주려고 사 온 선물들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듯했다. 이경
의 판단에도 아이들에게 줄 만한 것들이라고 여겨졌던 것 같았다. 그
녀는 쇼핑백에 든 상자를 몇 개 꺼내 들려 주곤 집에서 일하는 도우
미를 향해 손짓했다.

“선물 같이 정리 좀 해 주고, 윤신이는 차 좀 주시고요. 뭐 마실


래?”

그녀의 물음에 윤신이 도우미 쪽으로 대답했다.

“레몬차 주세요. 누나가 직접 청 담근 거. 얼마 전에 사진 보내서


자랑하더라고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우미가 연진을 데리고 방 쪽으로 사라졌


다.
이경이 다이닝룸 오른편으로 윤신을 안내했다. 통유리로 훤히 뚫린
한강을 내다볼 수 있는 다용도 거실이었다. 그녀의 표정과 태도가 오
랜만에 피붙이를 만나 매우 즐거워 보였다.

“내가 먼저 전화 안 하면 연락하는 법이 없지? 얼굴 까먹겠다.”

“바쁜 거 알면서. 좀 어때? 누나도 그렇고, 애들도.”

확 트인 시야에 노을 진 한강이 가득 찼다. 물 위에서 보석들이 반


짝이는 것처럼 찬란했다. 거기에 잠깐 시선을 빼앗긴 윤신이 창을 마
주한 소파에 앉자, 그녀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응답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애들이 슬슬 아빠 찾아. 특히 연재는 학교에


서 친구들이 왜 넌 아빠랑 따로 사는 거냐고 놀리고 그러나 봐. 그
사람이 가끔 뉴스에 나오니까. 그럴 땐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모
르겠다. 강 수석 충고대로 외국으로 갔어야 했나.”

첫째는 인근의 학교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중이었다. 둘째도 내년


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그녀의 재정으로 시킬 수 있는 훨씬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도, 가


능하면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쩌
면 그 선택을 이제 와 조금은 후회하는 모양이다.

세상을 가득 채웠던 사랑이 모두 흩어지고 깨진 유리 같은 현실에


홀로 남겨졌을 때에도, 누나는 모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으리란 듯
아주 강했다. 그런 사람도 작은 아이들에겐 죄인처럼 구는 게 마음
아팠다.
“애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부모들이 하는 소리일 거
야.”

“내 생각도 그래. 어른들 하는 말 듣고 그러는 거겠지. 학부모 총회


에 참석해 봐야 하나.”

“누나가 나타나면 뒷말은 더 나올걸.”

“역시 그렇겠지?”

“내가 다른 학교 알아볼까? 학군 좀 더 나은 데로. 아니면 우리 졸


업한 초등학굔 어때?”

“아직 그럴 정돈 아냐. 진짜로 네 도움 필요하면 얘기할게. 그건 그


렇고…….”

화두를 바꾸는 누나의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감정 표현이 많지 않


은 그녀로부터 좀처럼 이끌어 내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말을 꺼내기
도 전부터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건지 궁금해하는 윤신을 향해 몸을 기울인 이경이 넌지


시 물어 왔다.

“왜 입에 뽀뽀하는 건 안 돼?”

그 물음을 듣자마자 한 번쯤 입에 올릴 줄 알았다는 듯, 윤신이 덤


덤히 대꾸했다.

“안 되긴. 돼. 뺨에 받고 싶어서 그런 거야.”


“거짓말. 너 걔랑 키스하고 왔지.”

어깨가 굳은 윤신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정곡이었기 때문이


다.

사택에서 누나의 집까지 차로 20분가량은 소요됐다. 그러니 세헌과


입술이 닿았던 후로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은 흐른 거였다. 그런데도
그가 닿았던 자리에 다른 게 부대껴지는 게 싫었다. 그게 누나에 대
한 마음에 비견할 만큼 아주 사랑하는 조카라고 해도 여지없었다.

강세헌 닮아 가나.

“그런 거 물어보면서 안 창피해? 누나 그렇게 안 봤는데.”

“그거 강세헌 수석이 잘 쓰는 방법이지? 내용에 오류가 없으면 그


걸 주장한 스피커를 대신 공격하는 거. 나 몇 년 동안 수한 언론 플
레이랑 싸운 몸이야. 나한텐 안 통해.”

상황 판단이 너무 정확해서 더 뭐라 더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입을 한일자로 다문 윤신을 보며 부드럽게 웃던 그녀가 덧붙여 물


었다.

“네 여자 친구도 참 귀엽다. 조카한테도 질투야?”

조카뿐만 아니라 누나인 그녀에게도, 자신과 닿은 클라이언트들에


게도, 지나가다 인사를 한 펌 동료에게도, 심지어 제 손길이 닿은 그
어느 것에도 질투했다. 세헌은 자꾸 그렇게 구속하면 숨 막히지 않겠
느냐고 말했었지만, 사실 윤신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난 그게 너무 좋아.”

“그렇다고 너까지 너무 신나 하면 안 되지. 너 연애하느라 우리한


테 좀 소홀해. 알지?”

그와의 연애는 치명적인 단점이 결부됐다. 어디에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토로할 수가 없어 답답했던 것이다. 누나가 옆구리를 찌른 순
간 둑이 터지듯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는데,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천연덕스럽게 온갖 시


치미는 다 떼면서 꼭 질투는 안 숨겨. 진짜 싫은가 봐.”

“…….”

“누굴 기다리게 만드는 게 훨씬 익숙한 사람이 나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다른 데 여유를 못 쓰겠고, 빨리 보러 가고 싶
고…….”

거기까지 들은 이경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단 듯 오묘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잠시 어이없어하더니, 결국 웃으며
대꾸했다.

“너 결혼할 때 됐나 보다.”

“결혼하면 무뎌져?”

“글쎄다. 말 나온 김에 걔 좀 내가 보면 안 돼? 너희 무슨 국정원이
야? 몇 년을 둘이서만 숨어서 연애하게. 그렇게 몰래 하니까 둘이서
만 더 애틋하지.”
신중하게 연애하고 있다고만 전했을 뿐 계속 구체적인 것들을 숨겨
왔던 터라 누나로부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제 연인이 뭐 하는 사람인지, 몇 살인지, 어디에 살고, 어떻게 생겼


는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입 뻥끗한 적이 없었다. 덜미를 잡히지 않
기 위해 최대한 뭉뚱그리며 선택적 정보 전달에 심혈을 기울였다.

누나가 제 결정을 전폭적으로 믿고 캐묻지 않긴 하지만, 가족으로


서 내심 매우 궁금해한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더욱 철저
하게 감췄다. 거짓말에 서툰 자신은 어떤 것들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게 될 테고 그러면 영민한 그녀는 상대가 세헌이라는 걸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조금 전까지는 신나서 털어놓다가 또 금세 입을 다무는 동생이 의


아했던지, 이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러운 눈치로 덧
붙였다.

“걔 혹시 뭐 어두운 일 하는 애야? 안 놀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네가 그 애 아니면 안 되겠다 그러면,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도 있어.”

“그런 거 아냐. 업계 동료야.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만.’이라는 말을 굳이 추가하지 않은 건 앞으로도 그 대상이


강세헌임을 밝힐 생각은 없어서였다. 그는 십중팔구 이 정보 공개를
동의하지 않을 테고, 세헌이 정 안 내켜 한다면 윤신도 괜한 욕심 부
리고 싶지 않았다.
몹시 바쁜 윤신이 만날 수 있는 직업군 중 하나이리라고 짐작은 하
고 있었던 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더라. 몇 살인데? 네가 너무 방어적으로 굴어서 이걸 이


제야 물어본다.”

“누나가 기함할 나이 차는 아냐.”

“여자애가 더 많구나? 결혼 안 보채?”

〈글쎄, 난 너랑 진짜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얼마 전 세헌이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는 윤신의 얼굴이 퍽 진지해


졌다.

“내가 한번 보채 볼까 싶은데.”

“정말? 세상에, 잘됐다. 나 시누이 노릇 절대 안 할게. 1년에 딱 두


번만 같이 얼굴 봐. 아버지 기일. 엄마 기일. 제사도, 명절도 필요 없
어. 너희 해외여행 가. 비용은 내가 싹 다 대 줄 테니까. 그럼 나도
몇 년 후면 조카 보는 거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 단둘뿐이었다. 친척들이 몇 있긴


하지만 연락은 거의 다 끊겼다시피 했다. 아버지가 공직에 계실 땐
혹여 그걸 주춧돌 삼아 친지들이 괜한 일들을 벌일까 멀리했고, 누나
가 결혼한 뒤로는 사돈댁에 누가 될까 꺼렸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은
이혼하고, 동생인 윤신은 미혼이니 부모님 영전에 갈 때 퍽 쓸쓸했던
모양이었다.
반지를 나눠 끼는 걸 염두에 두고 가볍게 한 얘긴데 누나가 현실 속
에 자신을 편입시키는 바람에 윤신의 말문이 닫혔다.

가족이 이런 걸 기대하는 상황에서 제 연인이 세헌이라는 건 더더


욱 알리면 안 될 듯했다.

어디에서나 빛날 그를 자신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


고 싶지 않았다.

“당장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그쪽 얘기도 들어 봐야지.”

“너희가 많이 바쁘면 내가 대신 준비해 줄 수도 있어. 스튜디오, 드


레스, 메이크업, 전부. 네 와이프 최고로 예쁜 신부로 만들어 줄게.”

한 번 실패했는데도, 그녀는 이 제도에 대해 그다지 환멸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아마 이경의 마음속에 결혼은 실패했어도, 사
랑까지 실패한 건 아니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터다.

윤신도 같았다. 세헌을 붙잡고 싶다고 느꼈다. 처음 송 대표의 부추


김으로 얼떨결에 약속한 7년 같은 게 아니라 보다 오래, 보다 길게
함께할 수 있기를 원했다. 수많은 실패들을 매일 눈으로 보면서도 모
순적으로 그런 게 하고 싶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놀라웠다.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인 윤신이 이 얘기를 더 이어 가면 안 될 듯


해 말을 돌렸다.

“나도 도움 필요하면 얘기할게. 그런데, 오늘 왜 보자고 그런 거


야?”
이번엔 윤신이 그녀를 현실 세계로 편입시킨 게 분명했다. 즐거운
생각들로 달떠 있던 이경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마냥 재미있는
용건으로 부른 건 아니라는 뜻이다.

“아아, 그렇지. 실은 누구 좀 소개해 주고 싶어서. 내 오지랖인 거


같긴 한데, 나랑 처지가 비슷해서 그냥 두고 못 보겠다.”

“소송 때문이야?”

“응. 왜, 예전에 내가 말한 적 있지? 우리 갤러리 직원 중 하나가 결


혼하면서 퇴직했다고.”

“그 엄청 유명한 소설가랑 결혼한 분. 이혼하고 싶대? 기사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잖아. 남편이 어디 나다니는 것도 못 봐서 작


은 공방 하나 열어 주고 거기에만 틀어박혀 있게 한대. 의처증이 엄
청 심한가 봐. 이거 보여?”

그녀는 귀에 걸린 동그란 모양의 귀걸이를 가리켰다.

“직접 만들어 준 거야. 이런 소일하면서 시간 보내고 그런다네. 남


편이 대중적으로 너무 알려진 사람이라 제 선에서 뭘 해 보기가 무서
운 거지. 얼마 전에 연락 와서 어떻게 해야 되냐고 우는데……. 혹시
맡아 줄 수 있어? 너희 펌 정책 때문에 안 되려나?”

협탁에서 명함을 꺼낸 그녀가 윤신의 앞에 도톰한 종이를 놓아 주


었다. 그 순간, 다이닝 룸 방향에서 차를 준비해 온 도우미 아주머니
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경이 그걸 받아 찻잔에 따라 주는 사이, 윤신
이 명함을 꼼꼼하게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뒷면에 흐릿하게 적힌 경력들 중 몇 가지 사항이 눈에 갈고


리처럼 걸렸다.

〈미국 주얼리 평가사 및 국가 보석 감정사〉

〈주얼리 디자이너〉

“아냐, 연락 잘했어. 오히려 팀장님이 딱 좋아할 케이스거든. 우선


내가 만나 볼게.”

대꾸와 함께 윤신의 우아한 손이 향긋한 레몬 향이 풍기는 찻잔을


들었다.

* **

승강기에 올라탄 그의 하얀 얼굴에 복잡한 기미가 서렸다. 벽면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누나에게 받아 온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럼 공방에서 금속 제품을 직접 만들 수도 있는 건가.


직접 만든 커플링을 선물하고 싶단 생각은 예전부터 했던 거였다.
강세헌이 제 거라고 명확하게 도장을 찍어 둘 수 있는 쉽고 빠른 방
법이니까. 그가 거절해서 좌절됐을 뿐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세헌과의 관계에는 분명한 문턱이 존재했다.


그건 현실적인 한계였다.

이 관계를 앞으로 계속 지속한다 한들 지인들을 초대해 식 같은 걸


올릴 수도 없었고, 혼인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지내는 현재의 생활이 최선이었다. 가끔 생각도, 성향도 너무 달라
투덕거리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이해하고, 사생활이 보장되
지 않는 것에 때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상대방이 없이는 잠들지 못
하는 그런 삶 말이다.

앞으로도 제 인생에서 뭐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터다.

그리고 그건 바꿔 말하면, 갑자기 그들이 헤어지게 된대도 제 삶에


서 엄청난 변화가 생기진 않으리란 의미다.

그 누구도 ‘헤어지셨어요?’라고 둘 중 아무에게 묻지 않으리라.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 흔적이 없는 건 싫었다.

“문제는 반지를 어떻게 끼고 다니게 만드느냐인데.”

열심히 고민하던 와중 승강기의 문이 ‘지잉.’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도톰한 명함을 쏙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은 윤신은 분연히 밖으로 걸
음을 내디뎠다.
세헌의 집으로 들어오니, 내부가 고요했다. 볼 의견서들이 쌓여 있
다고 했던 얘기가 기억나 서재로 다가가자, 역시나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똑똑. 노크한 윤신은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살짝 열었다. 종


이를 뒤로 넘기던 세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하
곤 제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도윤신, 여유 있다. 내가 꼬박 5주 만에 쉬는 주말인데 누나 만나


러 다녀올 시간도 있고.”

픽 웃은 윤신이 세헌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


는 그를, 선 채로 꽉 끌어안았다. 바람 냄새와 함께 달려온 제 연인
의 허리를 그가 포근히 감싸 안았다.

정신없이 그의 머리카락에 코끝을 묻고 쪽쪽, 뽀뽀해 대던 윤신이


돌연 세헌의 뺨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세워 그의
허벅지 위에 꿇듯이 앉은 뒤 허겁지겁 온 얼굴에 입 맞췄다. 익숙하
게 받아 주던 세헌이 윤신의 재킷을 벗겼다.

툭. 땅으로 떨어진 그의 외투 주머니에서 아이보리색 명함이 살짝


비집고 나왔다. 깨알같이 쓰여 있는 글자 위에 세헌이 잠시 눈길을
두었다. 그것도 못 참겠다는 양 윤신이 다시 제 앞으로 유려한 얼굴
을 끌어갔다.

“어딜 봐요. 한눈팔지 마요.”

“읽던 거 있어. 흐름 끊겨. 씻고 오든지, 나가서 기다리든지.”


“여유는 강세헌 네가 있네. 난 없어. 입 열어.”

젖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슬쩍 핥은 세헌이, 이 하극상과 도발이


무척 재미있다는 양 눈을 살짝 구겼다. 그러고는 턱을 비스듬히 젖혀
입을 열어 주었다.

조급해진 윤신은 혀를 뾰족하게 세워 그 안에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쑥, 들어간 살덩이가 세헌의 것과 엉켜들었다. 얼굴을 옆으로 미세하
게 틀어서 뿌리까지 박아 넣을 기세로 깊숙하게 욱여넣자 그가 살결
을 적극적으로 얽었다. 윤신은 신음했다.

“흐응, 흐…….”

질척한 촉감이 서로의 성감을 부추겼다. 금세 달아오른 윤신의 무


릎이 부들거렸다. 불거진 무릎 뼈에, 모로 놓인 세헌의 굵은 성기가
닿았다. 그걸 느끼고 볼이 움푹 패도록 혀를 좀 더 들여보내자, 세헌
이 두 손을 뻗어 윤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윽고 그의 커다란 손이 윤신의 셔츠 안으로 침투해 왔다. 밑단을


더듬으며 척추 뼈를 따라 올라오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흥분한 윤신
은 세헌의 입 속에 새된 탄성을 토해 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라
고 말하듯 세헌이 제게서 손을 떼어 내도록 뿌리쳤다.

사위가 얼듯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세헌이 입술을 떼어 냈다. 윤신이 어설프게 쏟아 내던 타액이 그의


입가에 번졌다. 그는 혀끝으로 그걸 죄다 핥아 삼키면서, 음험한 눈
동자를 하곤 정면을 주시했다. 그 날카로운 양쪽 눈두덩에 공평하게
입 맞춰 준 윤신이 세헌의 다리에서 일어났다.

“두 번째 소원 지금 여기에서 쓸래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 장소, 이 순간


이어야 하는 상황 중 대충 예상 가는 영역이 있었던 듯했다. 윤신은
벌써 즐거워서 빙글거리며 확, 세헌의 바지 버클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날렵한 턱에 쪼듯이 키스하며 속삭였다.

“자위하는 거 보여 주세요.”

“…….”

“당연히 제 얼굴에 사정까지 해야 돼요.”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기미가 스며 있었다면


모를까.

“솔직히 제가 이거 해 달라고 할 거란 거 알고 있었죠.”

“넌 뻔해.”

“그러게 진작 보여 주지 그랬어요. 그럼 소원 다른 데 썼을 텐데.


수치스럽게 만들어 줄게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양쪽으로 가르듯이 치워 낸 윤신이 세헌


을 억지로 일으켰다. 마지못해 일어난 그가 책상에 둔부를 가볍게 걸
치고 듀얼 모니터를 등진 채 비스듬히 섰다. 그러는 사이 윤신이 이
동식 의자에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세헌은 매우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그러다 회유로 방법론을 정했


던지 말을 돌렸다.

“너희 누나 만나고 온 얘기나 하자.”

“누나 아는 분이 이혼하고 싶대서요. 조만간 펌으로 올 거예요. 끝.


지퍼 내려요.”

“도윤신 변호사.”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 설핏 엄정함이 깃들었다.


그러나 윤신은 여기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뼈
에 사무치게 배웠다.

“여기 펌 아니에요. 무슨 말 해도 절대 안 넘어가요. 이거 못 보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관에서도 벌떡 일어날 거 같단 말이에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보여 줘.

몇 년이나 같은 집에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으니 어쩌다 들킬 만도


했는데, 어찌나 철저했는지 여태까지 비공개 상태였다. 그는 제 앞에
서도 웬만해선 무너지는 모습이 없었다. 게다가 섹스할 때조차 완전
히 흐트러지는 자신에 비해선 여유로웠다. 한 번쯤은 제 쪽에서 일방
적으로 그가 힘겹게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상했다. 윤신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걸 못 견뎠다. 어
떻게든 해결해 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지 못한다면 줄곧
마음을 썼다.

그런데 세헌만큼은 예외였다. 그를 오직 자신만을 이유로 좀 더 곤


란하게 만들고 싶은 못된 충동이 때때로 일었다.

책상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세헌의 두 다리는 앞으로 늘씬하게


뻗은 채였다. 윤신은 손바닥으로 그의 무릎 뒤편을 문지르며, 검은
바지에 감싸인 살결을 훑듯이 지분거렸다. 그가 신경질적인 한숨을
삼키곤 다리를 느릿하게 들썩였다.

그 외설적인 모습을 관찰하는 희멀건 뺨도 서서히 상기됐다. 젖은


눈가에 가득한 기대감을 인식한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는 책상 구석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 손끝에도
약간의 심란함이 엿보였다.

아마 강세헌은 이번에도 져 주기로 한 모양이다.

그는 짜증 날 때마다 담배를 피우니까.

후우, 필터를 입에 물었다 뗀 세헌이 호흡하며 손을 뿌리쳤다. 침실


로 가려는 것 같았다. 윤신은 그가 이 원 안을 벗어나기 직전, 급히
다리를 다시 붙잡았다.

“선배 어디 가는데?”

“침실로 와.”
“여기서 해요.”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헌은 이내 졌다는 양 다시 책상에 기대어 비


스듬히 섰다. 반색한 윤신이 적극적으로 그의 허벅지를 짚으며 이어
말했다.

“저로 적당히 세워요. 만지게 해 드릴게요.”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일단 이 위에 키스해.”

자유로운 한쪽 손끝을 거꾸로 한 그는 가볍게, 윤신의 정수리를 찍


어 눌렀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밑으로 향하게 된 윤신이 세헌의 앞섶
에 입 맞췄다. 그러고는 눈동자만 들어 올려 그를 응시했다. 담배를
물고 있던 그가 손가락에 장초를 끼우면서 계속 명령했다.

“잘했어. 허벅지에 뺨 비벼 봐.”

꿀꺽 침을 삼킨 윤신은 좀 더 안으로 얼굴을 밀어 넣어 사타구니 사


이에 뺨을 문질렀다. 왠지 제 요구 조건을 이행하는 중인데도 역으로
당하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중요한 고지가 눈앞이어서 이의를 제기
할 타이밍을 놓쳤다.

성기의 부피 때문에 꽤 두툼한 양감이 느껴지는 앞섶에도 얼굴을


비비니 세헌이 미간을 구기면서 잔뜩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하…….”

필연적으로 윤신의 흥분 지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하필이


면 세헌이 제 뒤통수를 붙들 듯이 쥐고 좀 더 거칠게 성기 위에 문지
르는 바람에 슬슬 몸에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몇 번 귀두부터 뿌리까지 윤신의 뺨을 문지르던 그가, 움켜쥐고 있


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곧이어 길고 곧게 뻗은 청결한 손으로 바
지 버클을 풀어냈다. 연달아 지퍼를 지익, 내리자 벌어진 틈 사이로
그의 검은색 드로어즈가 드러났다.

언제나 제 안을 들락날락했던 그 묵직한 성기의 모양새가 속옷에


밀착돼 두드러졌다. 잔뜩 가빠진 숨을 겨우 삼킨 윤신이 다시 세헌을
올려다봤다. 턱을 가볍게 든 채로 한숨을 몰아쉰 세헌이 눈길을 교차
하듯 시선을 마주쳐 주었다. 그 서늘한 눈매에 당장 자신을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다는 듯한 음습한 욕망이 가득했다.

“끌어 내려.”

오만하게 턱짓하는 그의 지시에 따라 윤신이 손끝을 세웠다. 그러


자 세헌이 곧바로 턱을 밀어 올리며 행위를 막았다.

“이게 어딜 날로 먹으려고. 입으로.”

명령을 이행하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


헌의 두 다리를 짚고 치아를 세워서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까칠한
음모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뒤이어 툭, 하고 반쯤 발기한 그의 것이
튀어나와 윤신의 뺨을 쳤다.

점점 더 얇은 천을 밑으로 내리자, 마침내 음낭까지 모두 드러났다.

윤신이 심호흡한 순간 세헌이 마저 일렀다.


“핥아야지.”

거기까지 듣고는 소박하게나마 반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위가 아니죠.”

“내가 좆 쥐고 흔드는 게 보고 싶은 거 아니야?”

“그건 맞는데.”

“그럼 핥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윤신은 하는 수 없이 요도구부터 혀끝으로


핥았다. 뒤이어 핏줄을 따라 뿌리 방향으로 길게 이어 가며 훑듯이
쓸었다. 실시간으로 세헌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팽팽하리만치 꼿꼿하
게 발기했다.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그의 성기를 일방에


서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 지켜볼 만하면, 그가 머리끝까지
흥분해서 자신을 내버려 두질 않았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부풀어 오르는 그의 기둥, 강직되어 가는 모양새, 민감


한 피부 위에 돋아난 핏줄들, 그리고 제 둔부에 닿을 때마다 아찔한
기분을 자아냈던 음모와 음낭까지 꼼꼼하게 관찰하다 보니 윤신도
점점 회가 동했다. 그러나 아직 고비가 남아 있었다. 부끄러움을 감
추고 짐짓 태연한 체하며 좀 더 의자를 당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렇게 뿌리와 음낭까지 본격적으로 핥아 내려 하니 그의 긴 다리


가 툭, 제 종아리를 건드렸다. 그러고는 거기까지 하면 된다는 양 왼
손으로 윤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잘 봐. 나중에 감상문 쓰게 할 거니까.”

마침내 핏줄이 손등에 도드라진 큼지막한 오른손이 발기한 성기를


가볍게 잡았다. 뒤이어 기다란 손가락으로 기둥을 감싸고,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얽듯이 단단히 움켜쥐었다.

뺄 땐 언제고. 의외로 세헌은 한번 시작한 뒤로는 거침없었다.

그는 앞뒤로 성기를 거칠게 문지르면서, 속도를 서서히 높였다. 제


게 삽입할 때와 비슷했다. 부드럽게 쥔 뒤, 얼마 후 정반대로 압박을
가하는 식으로 짓궂게 손장난했다. 기둥 전체를 잡았다가, 귀두를 쓸
었다가, 다시 뿌리까지 한 번에 붙들어 피스톤 운동 하듯 손으로 자
극하는 모양새가 그 어떤 포르노보다도 외설스러웠다.

힘겹게 붙들고 있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윤신은 얼


굴이 새빨개진 채로 그 손바닥의 촉감과 눈앞의 시각 자극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가, 별안간 흠칫했다.

“읏…….”

자유롭던 세헌의 왼쪽 손이 귓구멍으로 파고들었다. 뾰족하게 세운


손끝으로, 좁아서 잘 들어가지 않는 귓속에 진입하려는 게 꼭 대충
푼 제 밀부에 억지로 박아 넣을 때 같았다.

윤신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그의 두 다리를 쥔 손에 더 힘을 주


었다. 이 압박이 감각을 더 북돋은 모양인지 잘 관찰하라는 양 퍽 느
릿하게 움직이던 세헌의 오른손이 급격하게 빨리 운동했다.

“하, 씨발, 입 벌려.”

입술을 달싹거리던 세헌이 반쯤 연 윤신의 입 안으로 시선을 고정


했다. 그 안의 빨간 혀가 제 것을 감싸고 있다고 상상이라도 하는 것
처럼, 집요하리만치 눈을 떼질 않았다. 붉은 속살을 보며 자위하던
그의 성기가 점점 더 빠듯하게 단단해져 터질 듯이 꿈틀거렸다. 그
덕분에 윤신의 손바닥에도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는 것만으로는 충족이 안 됐던지, 그가 윤신의 입 속으로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선배, 웁…….”

혀 밑과 위를 번갈아 들락날락하는 그의 손가락에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윤신의 허리가 함께 들썩거렸다. 여유롭게 그의 모습
을 지켜보고 싶어서 종용한 거였는데, 정작 자신도 잔뜩 흥분해서 사
정할 것만 같아 곤란했다.

자위하는 강세헌은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야했다.

그를 어떻게 해 버리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이 치밀었다.

망할. 미칠 것 같다.

가쁘게 신음하는 윤신의 입술을 가르고 자꾸만 낯 뜨거운 한숨들이


함께 샜다. 세헌은 그걸 기다렸다는 양 더 고집스럽게 입 안에 손가
락을 쑤셔 넣고 내벽들을 문질렀다. 혀뿌리까지 야릇하게 만지다가
목구멍으로 찔러 넣을 것처럼 밀어붙이자 이물감이 든 윤신이 눈을
내리감으며 기침했다.

“컥, 흡, 흣.”

“눈 떠.”

“흐으, 읏.”

“여기부터가 클라이맥스인데 잘 봐야지. 얼굴에 싸 달라고 했잖


아.”

후우. 단전부터 치미는 사정 욕구를 짓누르듯 세헌이 크게 심호흡


했다. 다리를 쥔 윤신에게까지 딴딴해진 복부의 근육들의 긴장이 느
껴질 정도였다.

이윽고 세헌은 미간을 흠씬 찌푸린 채로 쿠퍼액이 쏟아지기 시작하


는 귀두부터 뻣뻣한 기둥까지를 미친 듯이 쓸어 댔다. 젖기 시작한
선단에서 묻어난 액체들이 뿌리까지 번졌다.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철벅거리는 음란한 효과음들이 그들의 귓전으로 스며들
었다.

마침내 성기 끄트머리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걸 입에 담으려고 입을 좀 더 벌렸다. 그러나 세헌이 확, 머리채를
쥐고 허공으로 치켜올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아윽!”

“고개 똑바로 해.”


“내가 할래.”

“그럼 자위가 아니라면서.”

“내 거잖아.”

“빨고 싶어? 도윤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는 윤신의 얼굴이 잘 익은 석류처럼 벌겠다.


인상을 쓰고 그 모습을 직시하던 세헌이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빌어.”

“빨고 싶어요.”

“더.”

“이거 빨고 싶어요……. 제가 물게 해 주세요.”

제 머리채를 쥔 세헌의 손을 힘껏 뿌리친 윤신은 의자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로 허벅지를 단단히 쥐고는 성기
기둥에 젖은 입술을 문지르며 애원했다. 그제야 세헌이 선단을 윤신
의 입 안에 툭, 물려 주었다.

처음에는 최저 속도로 운전하듯 매끄럽게 박는가 싶더니, 중간쯤


밀어붙였을 때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욱여넣었다.

“웁……!”
사정감이 차올랐을 때의 세헌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강압적이다. 난
폭하게 삽입한 성기를 목구멍까지 찔러 넣는 그의 얼굴에 죄책감은
없었다. 윤신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파들거리는 턱을 겨우 다물고
볼이 터져라 성기를 입에 담았다. 이 갑갑하고 구역한 느낌만큼, 제
게 박은 채로 황홀경에 빠진 강세헌의 얼굴이 짜릿해서 돌 지경이었
다.

축축하고 단단한 그의 성기가 윤신의 입 속에서 꿈틀거렸다. 내부


에 가득 찬 그의 양감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실핏줄이
터져서 벌게진 눈가로 그를 올려다보며, 앞뒤로 머리를 움직여 피스
톤 운동을 대신했다.

위에서 그런 윤신을 내려다보는 세헌도 머릿속이 아득해지긴 마찬


가지였다. 성공만을 거듭해온 그는 윤신의 앞에서만큼은 번번이 스
스로를 통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박자를 맞춰 완전히 짓이기듯
이 윤신의 입 속에 추삽질했다.

퍽, 퍽!

음낭이 턱에 닿을 지경으로 처넣던 그의 성기가 마침내 절정에 다


다랐다. 가장 좁고 아득한 자리에 욱여 댔던 성기를 훅 빼내는 순간.
팟, 하고 윤신의 얼굴에 점도 높은 불투명한 정액이 튀었다.

“컥…… 커흑! 헉. 허억…….”

“후우, 입 열어.”
앞뒤로 기둥을 상하 운동 하듯 쓸면서, 벌린 입 안에 남은 정액들을
쏟아 내니 윤신이 착하게 그걸 받아 삼켰다.

삽입만큼 격했던 이 행위만으로도 몸이 노곤해졌다. 꿀꺽, 침을 삼


킨 윤신이 낭창해져 비틀거렸다. 그렇게 땅에 무너지려고 하는 찰나,
세헌이 가랑이 사이에 다리를 밀어 넣어 맨발등으로 회음 위를 문질
렀다. 아주 느릿하고 집요하게 쓸자 이미 모르는 사이 한 차례 사정
한 윤신의 젖은 바지 앞섶이 서로에게 느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빨아 줄 기회도 안 주고, 다 젖었군.”

수치스러워하며 그의 하체를 품에 감싸듯 끌어안은 윤신은 끝내 주


저앉았다. 바지를 대충 추스른 세헌이 자연스럽게 그 위로 함께 무너
지며 윤신을 끌어안은 채로 서재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모로 누워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 사정의 여운이 흥건했다. 세헌


은 창백한 얼굴을 앞으로 숙여서 윤신의 입술에 쪼듯이 입 맞췄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그가 선물하는 다정한 촉감을 음미하던 윤
신이 홀린 듯이 대꾸했다.

“저 이거 또 보고 싶어요. 또 해요, 우리.”

“소원에서 까.”

“1년 무료 애프터서비스.”
“난 ‘무’로 시작하는 말 대체로 싫어해. 무상, 무지, 무료.”

“우수한 유전자 이대로 멸종시킬 생각 하니까 지구에 죄짓는 기분


이에요.”

나름대로 진중하게 듣고 있던 세헌의 눈썹 사이가 뜬금없는 소리를


듣고 바로 구겨졌다.

“정액 마시고 취했어?”

“감상문 쓰라면서요.”

그는 진심으로 기막혀하며 짜증 냈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 씻으러 가게.”

“힘없어. 나 안아 줘.”

세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지친 양 팔을 내미는 윤신을 내


버려 두진 못했다. 그는 품에 흐느적거리듯 늘어진 윤신을 꼭 안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 위에 입 맞추며 서재를 빠져나갔다.


04.

공익 사건 케이스의 신청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윤신의 눈매가 진


지했다. 치매 걸린 어머니의 치료비 부담이 너무 커서 도움을 요청하
는 의뢰인의 사연은 꽤 곤란해 보였다. 이런 경우처럼 어머니 본인이
아니기에 건드릴 수 없는 재산의 관리 자격을 얻기 위해선 후견 제도
를 잘 활용하면 될 듯했다.

“민법…… 민법. 이게 어디 있더라.”

책장에 꽂힌 두툼한 책들에 눈을 돌린 윤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창문 너머로 탁 비서가 세헌의 방 문을 여는 모습을 발견했
다. 그 반가워하는 시선의 끝에 어떤 여자가 걸렸다. 층이 없는 단발
머리의 그녀는 탁 비서의 안내에 따라 그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수석님 클라이언트인가.’

여자는 키가 꽤 컸다. 깔끔하게 갖춰 입은 투피스가 고급스러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궁금한 마음에 왼편으로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
다. 그러자 이쪽의 호기심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가 잠시간 뒤
돌아보았다.
그 순간 윤신은 움찔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엄청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선명


한 이목구비와 생기 넘치는 표정이 잘 어울렸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 자신이 ‘강세헌이라면 저런 여자랑 연애할 것 같다.’라고 생각했
던 그런 자신만만한 이미지라 인상 깊었다.

왠지 신경이 쓰여서 책을 고르는 체하며 책장 앞에 선 채로 그쪽을


더 유심히 지켜보았다. 자신은 서 있고, 저들은 앉아 있는 터라 각도
가 비스듬했다. 여자를 마주하고 앉은 세헌의 얼굴이 꽤 잘 들여다보
였다.

윤신은 이제 세헌의 얼굴 근육만 봐도 그의 기분이 어떤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방문자를 향한 대응이 확실히 썩 호의적이진 않았다.
자연히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정답지도 못했다.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남녀 사이의 긴장 같은 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빠진 윤신은 결국 책을 고르는 둥 마는 둥, 책장을 손바닥


으로 훑던 행위를 관두고 밖으로 나섰다. 탁 비서에게 몇 가지 물어
보려고 했는데, 차라도 준비하러 간 건지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장에게로 다가갔다.

“사무장님, 방금 강 변호사님 방으로 들어간 여자분 누구세요?”

그가 세헌에 관한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궁금해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면역이 된 사무장은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
“도 변호사님은 처음 보시겠구나. 왜, 연초에 제약 회사 주식 인수
거래 자문해 주셨던 적 있잖아요. 거기 고명따님이에요.”

“딸요?”

매우 짧은 반문이었으나, 그 안엔 미처 담아내지 못한 호기심의 언


어들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여자의 부모와 연이 있을 뿐, 저 사람 개
인과는 엮일 일이 없는데 왜 펌으로 세헌을 찾아온 건지에 대한 의문
이었다. 다년간 세헌의 밑에서 일하며 변호사의 속내를 읽는 훈련이
확실히 되어 있는 사무장이 찰떡같이 그의 반응을 이해하고 대꾸했
다.

“그냥 따님은 아니고요. 그때 같이 프로젝트에 참가하셨어요. 미국


에서 재무 관리자 하다가 이쪽으로 넘어왔다네요. 강 수석님이랑도
원래 안면이 있었대요.”

“아…… 원래 아는 사이셨구나. 정확히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아세요?”

“뭐 예전에 일하다가 한 번쯤 마주치셨겠죠? 저희도 자세한 건 잘


모르고요. 그런데 확실히 저 여자분 공세가 좀 심상찮긴 했어요.”

”뭐 데이트 신청이라도 했대요?”

“네. 그래서 한동안 비서실에선 그 얘기로 난리였어요.”

‘설마 강세헌에게.’라는 심정으로 농담한 거였는데 돌아오는 말은


매우 충격이었다. 그 때문에 윤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덤덤한
척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법정에선 도리어 능숙하게 할 수 있는
포커페이스 유지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조금 흔
들렸다.

“진짜였어요? 왜 전 처음 듣죠?”

“어머, 도 변호사님은 모르셨구나. 세미나 가셨을 때 일인가? 1월


요.”

“만약에 1월 둘째 주라면…… 네.”

“어차피 강 수석님이 사적으로 들어온 신청을 공식 루트로 거절하


셨어요. 창피 좀 당했을걸요. 또 올 줄 몰랐는데 왔네요. 되게 용감
하네.”

아니면 강세헌처럼 만만찮은 상대가 주는 창피마저도 감수할 만큼


그를 갖고 싶든지.

아마 둘 다일 터다.

제약 회사 주식 인수 자문 건은 이미 몇 달이 지난 사건이었다. 한
데 그사이 세헌에게 그런 얘긴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물론 원래도
시시콜콜하게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업
무에서 벗어나 저 여자 쪽에서 개인적으로 접촉을 시도했다면 그건
단순한 일 얘기가 아닌 셈이니 제게 말을 했어야 옳았다.

어떻게 비서실에서조차 다 아는 이 사건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수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평정심을 안면에 띄운 윤신이 부드럽게 되물
었다. 당장 알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공세는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심상찮았는데요?”

“그걸 말로 어떻게 표현해요. 여자들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비서


실 미혼 여성들이 다 동의했어요. 강 수석님이 워낙 연애하신단 얘기
도 전혀 없고 하니까 공략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그런 남자가 나한
테 무너지면 얼마나 짜릿해요.”

윤신은 입술을 열없이 짓씹었다. 침묵과 연쇄해 일어난 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사무장이 어깨를 파티션 맞은편에 있는 그에게
로 슬그머니 기울이며 목소리 낮춰 덧붙였다.

“강 수석님이 넘어갔단 얘기가 있어요. 둘이 가끔 만난다네요. 진


짜일까요? 도 변호사님은 뭐 아는 거 없으세요?”

분노인지 섭섭함인지 알 수 없는 감각으로 바짝 약이 올라 있던 윤


신의 어깨에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누군가 본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제게 말해 주지 않은


건 몹시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세헌을 의심하진 않았다.

원래 그와 마주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강세헌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걸 일일이 보고하는 것도 불편했을 거라고 자위하면 납득은 됐다.
다만 창피한 건, 제 쪽은 추파를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질투해
줬으면 싶어서 일일이 다 얘기해 왔는데 두루 생각해 보니 강세헌은
여태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남자는 진짜 어떤 의미에서든 한결같다.

“도 변호사님, 여기서 뭐 하세요?”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 갑작스러운 호명이 들렸다. 뒤를 돌


아보자, 어느새 비서실 쪽으로 다가온 탁 비서의 손에 원목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추정되는 두 유리컵 속의 액체가
낮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수석님한테 제가 모르는 손님이 오셨길래요.”

윤신의 대답과 사무장의 흥미진진한 표정만으로도 대충 상황이 그


려졌던지, 탁 비서가 혀를 차며 세헌의 집무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다.

“사무장님, 강 수석님을 아직도 몰라요? 인간 대 인간으로 관심이


전혀 없는 거라니까요. 있었으면 엄청 신경 쓰고, 더럽게 갈구죠. 여
기, 훌륭한 예시가 있네요.”

윤신을 향해 눈짓한 그는 문에 노크했다. 그걸 보고 있던 윤신이 사


무장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말을 긍정했다.

가끔 〈이혼 문제 연구소〉 일로 조언을 구할 때마다 아직도 세헌


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곤 하는 윤신을 잘 아는 비서실 직원 몇몇
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짐짓 의아해하는 얼굴이 된 탁 비서가 한 번 더 문을 노크
했다. 안에서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가 닿았다. 윤신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불안해져 창 너머를 살폈다. 세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 안에서 문을 벌컥 열어젖힌 뒤, 바깥을 향해 손


짓했다. 직접 육성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의도를 모두가 눈치챌 수
있을 만한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곧 불편하다는


표정을 그다지 숨기지 않은 채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두 남녀가 문간에 마주 섰다. 솔직히 윤신의 생각에도 그림체는 아


주 잘 어울렸다. 파티션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비주얼 좋은 배우들
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심정으로 그 모습을 관찰했다.

물론 제 눈앞에서 보다 확실하게 굴지 않으면 한 열흘쯤 독수공방


을 시킬 셈이었다.

이윽고 세헌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가 아주 근사했다.

“난 아주 바쁜 사람입니다. 다시는 이런 자잘한 일로 독대 요청하


지 마세요. 오늘 같은 용건 처리하라고 저런 거 고용하는 겁니다. 연
봉 몇억씩 받아 가면서 한가한 애들.”
별안간 세헌의 날렵한 턱이 윤신을 슬쩍 가리켰다. 자연히 3인칭
관찰자였던 자신이 저 무대의 조연 배우로 승격 아닌 승격을 하며,
순간적으로 일시 정지 상태가 됐다.

‘저 사디스트가.’

윤신은 속으로 짧은 시간에 뱉어 낼 수 있는 온갖 험담을 그를 향해


쏟아 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지막하
게 심호흡했다. 그러는 동안 여자의 대꾸가 이어졌다.

“제 전화를 안 받으시니까 일 핑계 만들어서 직접 찾아오죠. 공연


한 편 같이 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내가 가끔 클라이언트들한테 하는 얘기가 있는데……. 세 번 걸었


는데 콜 백 없으면 더 하지 마세요. 안 받겠다는 뜻이니까.”

“강 수석님.”

“공연은 다른 사람이랑 보시고.”

“강세헌 수석님!”

“살펴 가요.”

그는 나가는 문은 저쪽이라는 듯 오만하게 턱짓했다. 여자가 대답


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비서실에서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
는 걸 인지했는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돌아섰다.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사라지고, 세헌도 더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양 탁 문을 닫고 도로 들어가 버렸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금세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들이 야


단스럽게 들려왔다.

이 일련의 상황을 쭉 지켜보던 탁 비서가 트레이를 들고 돌아서려


하자, 윤신이 붙잡았다.

“탁 비서님, 그거 버리실 거예요?”

“그래야죠. 사실 달라고 안 하셨는데 임의로 챙긴 거라서요. 한 잔


드릴까요?”

“네, 주세요. 제가 수석님이랑 마실게요.”

“어, 지금 들어가셔도 분위기 괜찮을까요? 공에 사 끼얹는 거 진짜


혐오하시잖아요.”

그도 십분 동의했다. 가뜩이나 일하는 데 쓰는 것만으로도 한참 모


자란 본인 시간을 과소비하게 해 짜증이 치민 게 조금 전 세헌의 빈
정거리는 말투에서 확연히 전달됐다. 실제로 미팅을 빙자한 술자리
가 벌어졌을 때도, 일과 전혀 관계없는 개인적인 대화들이 시작되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윤신은 세헌을 정말 사랑하지만, 그의 남다른 능력치가 아니었다면


벌써 성격 결함 혹은 사회성 부족으로 업계에서 사장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모두의 눈에 띄느니 그랬어도 좋았을 텐데.

어쩌면 강세헌은 매일 이런 미칠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시원한 게 필요하죠. 제가 또 강 수석님 기쁨조 아


닙니까.”

능숙하게 트레이를 대신 받아 간 윤신이 그의 방을 노크했다. 그러


고는 낮은 음성이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접견용 소
파에 앉아 이마를 짚은 모양새로 눈 감고 있던 그가, 보지 않아도 자
신이라는 걸 짐작한다는 양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탁자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마주 앉으니 세헌의 눈꺼풀도 서서히


젖혀졌다. 마침내 드러난 눈동자 색이 유난히 짙었다. 좀 피곤해 보
였다.

“질문해. 5분 줄게.”

“딱 세 개만 물어볼게요. 2분이면 됩니다.”

이 대답이 꽤나 의외였던 것 같았다. 진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듯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러나 자신은
정말로 상황 자체가 궁금했을 뿐이지 자질구레한 호기심이 일지는
않았다. 오늘 일로, 앞으로 다시는 강세헌이 그녀를 이런 방식으론
만나 주지 않을 걸 알아서였다.

세헌의 눈치를 살피던 윤신이 일단 마시라는 듯 유리컵 한 잔을 그


의 앞에 밀어 주며 넌지시 물었다.
“1번. 여태 이런 일 많았어요? 오늘도 제가 못 봤으면 전 영영 몰랐
을 거예요.”

“우리 암묵적으로 지난 일은 안 묻기로 한 거 아니었나? 네가 목격


한 것만 해. 다음.”

대답과 함께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마저 해 보라는 듯


시선을 던졌다. 윤신으로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2번. 확실히 거절한 거 맞아요?”

“앞으로도 모두에게 그럴 거야. 네가 결코 헷갈릴 일 없는 아주 명


확한 태도로. 다음.”

“수석님이 사랑하는 건 앞으로도 나죠?”

후우, 가볍게 한숨을 몰아쉰 그가 퍽 진지한 태도로 눈을 맞추며 답


해 왔다.

“너니까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해명하고 있겠지.”

“좋아요, 100점. 마저 드세요.”

“질투 안 해? 누구 좋아할 때 상대방 마음에 확신 같은 게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라며. 네 입으로 했던 말이야.”

“질투는 엄청 하죠. 그런데 수석님의 삭막한 인생엔 저밖에 없는


걸 제가 알아요. 화는 진짜 내야 될 때 낼게요. 싸움은 그때 해요.”
핑계, 변명, 해명.

그가 절대 하지 않는 세 가지다.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세


헌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먼저 물어보라고 청해 왔다. ‘앞으
로’를 전제하는 희미하고도 불명확한 제 질문에 기꺼이 긍정의 대답
을 해 줬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언제 바뀔지 장담할 수 없는 거였는데도 불구


하고, 그렇기에 온갖 경우의 수를 상정해서 일을 타진하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건 그의 선택은 자신이었다.

더 완벽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음을 너무 줬군.”

“자업자득이십니다.”

굳이 부정하지 않은 그가 픽 웃었다. 윤신을 향한 눈동자에 미처 눌


러 숨기지 못한 사랑이 가득했다.

하나 제 할 말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윤신은 그 눈빛에 화답해


주긴커녕 꼭 남처럼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세헌은 어이없단 기색을
눈에 가득 담고 동공을 끌어 올렸다.

이런 사소한 사건들이 생겨 주지 않는 이상 윤신이 이 방 안에 들어


와 시간을 보내는 건 이제 조금 낯선 일이 되었다. 그걸 잘 알기에
진입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돌아가 버리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그냥 가? 너 여기 들어온 지 3분도 안 지났어.”

“연봉 몇억씩 받으면서 제가, 전혀 한가하지가 않거든요. 수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바빠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요.”

“삐졌어, 귀엽게.”

“계속 반성하시다가 퇴근하고 마저 귀여워해 주세요.”

블라인드가 여전히 걷혀 있어서 서로 살갗을 마주하진 못했다. 창


문을 등진 윤신이 허공에 대고 쪽, 뽀뽀하는 시늉을 하며 입을 내밀
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방을 벗어났다.

비서실 직원들에게 눈인사로 수고하시라는 의사를 전한 뒤, 제 방


으로 돌아와 서랍에 고이 수납해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아마 오늘 일은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들킨 것뿐이고, 세헌


은 앞으로도 계속 본인에게 접근하는 여러 접촉들에 대해서 굳이 설
명하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본인이 알아서 잘 해결할 테고, 또 그런
칼 같은 본인을 신뢰하는 윤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강 수석님이 워낙 연애하신단 얘기도 전혀 없고 하니까.〉

사무장의 말을 곱씹는 윤신의 얼굴이 심각했다. 안 그래도 그런 얘


길 만들어 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럴싸한 계기까지 생기는 걸 보
니, 온 우주가 부추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단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 임자가 있다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그런데 선배 손가락 사이즈를 알아야…… 대놓고 만지거나 재면


바로 눈치챌 테고.’

사념 끝에 휴대폰을 든 윤신이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


다. 상대방의 조심스럽고도 다소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금세 귓가
에 들려왔다.

- 네, 말씀하세요.

“법무 법인 도국 도윤신 변호사입니다. 갤러리 〈산사〉 도이경 관


장님께 명함 받고 연락드립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명함을 도로 내려놓은 윤신은 통화 중 메모를 병행하기 위해 랩톱


앞에 정자세로 앉았다.

* **

상담자의 심신 안정을 위해 조도를 낮게 꾸며 놓은 접견실 안에서,


이미 도착한 윤신의 손님이 대기 중이었다. 집무실의 그는 노트북과
몇 가지 서류들을 챙겨 거기로 이동했다.

노크 후 안으로 들어서니 모자를 푹 눌러쓴 30대 중반가량의 여자


가 공손하게 묵례했다. 이 모습을 본 윤신은 그 위에 제집을 찾아왔
던 언젠가의 누나를 겹쳐 보게 됐다. 절박했던 그 순간을 되새기려는
데, 그때의 감각이 왠지 흐렸다. 마치 아득한 옛날 일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이제 자신이나 누나는 괜찮은 모양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잘 오셨어요.”

그가 명함을 내밀면서 맞은편에 앉자, 여자가 모자를 벗으면서 한


번 더 인사했다.

“관장님 소개받고 왔어요. 동생분이시죠, 도 변호사님.”

“맞아요. 그저께 처음 통화할 때보다 목소리가 훨씬 나아지셨네


요.”

“도국에서 도와주신다고 하니 마음이 좀 편해져서요. 정말 고맙습


니다.”

다행이라는 듯 그녀의 앞에 서류를 내민 윤신이 차분하게 질문을


시도했다.

“오실 때 차량은…….”

“변호사님이 시키신 대로 제 차는 다른 쪽으로 돌리고 중간에 택시


로 갈아탔어요. 제 공방 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거예요. 남편은 지금
제가 거기에 있는 걸로 알 거고요.”

대답과 함께 종이들을 본인 쪽으로 끌어간 여자가 물물 교환 하는


것처럼 저장 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만 한 물체를 윤신에
게 넘기면서 문장을 덧붙였다.
“올 때 준비해 달라고 하신 것들도 다 담았고요. 확인해 보세요.”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의 예감은 이 사람이 아주 모범적인 의


뢰인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USB를 노트북과 연결해 내용을
눈대중으로 대강 담은 윤신이 상대방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고 본
격적인 말문을 뗐다.

“저도 얘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배우자분 외도가 의심되신다고요.”

“네. 의심이라고는 하지만 전 확실하다고 봐요. 그래서 작은 변호


사 사무실 몇 군데를 갔었는데. 저한테 뭐 자꾸 내용을 써 오라
고…… 의견을 정리해 오라는데 제가 거기에 쓸 게 없어서요. 남편이
외도하는 것 같다, 폭언이 심하다. 그거 외에는요. 그래서 관뒀어
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기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의뢰인에게 아


주 많은 일들을 일임하는 변호사들이 심심찮게 있긴 있었다. 운이 나
빴던 듯했다.

“의심만으로는 소송을 걸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제일 중요해요.


어디까지 갖고 계세요?”

“실은…… 안 그래도 관장님께 한 소리 들었는데. 제 수중엔 아무


것도 없어요.”

타닥.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 위를 내려친 윤신이 그것도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소송을 건다고 한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승소할 확률은 제로에 한없이 수렴
했다. 진지한 태도로 노트북 화면을 여자를 향해 돌려 준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이미지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꽉 차게 드러난 사진에 눈을 고정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


했다.

“이게 뭐죠?”

“아시겠지만 법원은 증거로 말하는 곳이라서요. 우리의 입증이 부


족하면 역으로 당하는 수도 있어요.”

“바로 소송 준비는 어렵단 말씀이시죠?”

“네. 이혼이 하고 싶으신 거지, 지는 소송이 하고 싶으신 건 아닐


테니까요. 이건 오늘부터 의뢰인께서 어떻게든 찾아서 저한테 가져
오셔야 하는 것들이에요. 한번 살펴보세요.”

그제야 여자가 트랙 패드를 움직여 이미지들을 한 장씩 살펴보았


다. 그가 보여 준 건 법정의 판례를 통해 이미 확실하게 증거의 효력
이 인정된 샘플용 예시 스케치들이었다. 상간 상대방과 배우자가 숙
박업소에 들어가는 모습이나, 차량 안에서 스킨십을 하는 장면 따위
들이 구체적으로 나열됐다.

신중하게 그걸 확인하는 여자에게, 윤신이 부연 설명을 이어 갔다.


“차량이 숙박업소에 들어간다든가, 이런 장면 보이시죠. 번호판 보
이고, 창문으로 얼굴 보이고요. 혹시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을 발견하
신다면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겨 두셔야 해요.”

성실하게 경청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관장님 남편…… 아니, 전 남편한테도 그런 증거로 이겼다고 했어


요. 여기 도국에서 차량 안에서 성관계하는 장면을 구해 줬다고 하던
데요.”

그건 세헌이 개인 정보원들 통해 취득한 증거였다. 그가 수집한 증


거들은 매우 적나라했고, 필연적으로 재판에도 주효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것까지 도와주진 않았다.

다만 이 의뢰인이 누나를 통해 제게 도움을 요청한 특수한 케이스


고, 또 제 쪽에서도 반대로 부탁할 것이 있어 미리 어느 정도는 환경
을 조성해 둔 참이었다.

“저희 펌이 직접 그런 것까진 해 드리지 않고요. 도이경 관장님이


고용한 신변 보호 업체가 있어요. 거기서 사람 행방 추적 정도는 같
이 도와주거든요. 의뢰인께서 동의하시면 제가 거기에 따로 문의를
해 두긴 할 거예요. 비용은 좀 들 수 있어요.”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그럼 제가 해야 할 건 따로 없는 건가요?”

“아뇨. 부인께서도 집이라든가, 작업실 같은 사각지대에서 이런 외


도 증거들을 찾으셔야 해요.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증거는 확보할
수 있겠지만 과거를 증명하는 건 의뢰인밖엔 할 수가 없어서요. 그래
서 남편분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들을 복사해 오셔야 하고요.”

여자는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나눈 대화 중에 애정 표현 같은 걸 찾아오시면 크게 도움이


되거든요. 외도 상대를 부르는 애칭이라든가. 밀어를 나눈다든가. 사
랑한다든지. 함께 자고 싶다든지. 그런 대화요.”

“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같은 거 말씀이죠. 해 볼게요.”

“또 배우자 본인이 대화 중 상간 사실을 실토하는 걸 녹음하시면


가장 좋아요. 어려우시겠지만, 그것도 고려해 주시고요.”

“안 그래도 관장님 조언대로 집에서 몰래 녹취 시작했어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해 준 게 제 누나라는 부분에서 울어야


할지, 그게 변호사의 입장에서 아주 도움되는 방향이니 웃어야 할지
선뜻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속으로 복잡다단한 심경을 꾸역꾸역
삼킨 윤신이 화제를 바꿨다.

“물리적인 폭행은 없었다고요.”

“네. 그런데 폭언이 심해요. 울면서 사과하면 제가 받아 줬고요. 아


이 아빠니까.”

이혼하는 부부들에게서 이런 경우는 아주 흔했다. 아마 남편 쪽에


서 아이를 봐서라도 참으라고 설득했을 터다.
이럴 때가 제일 어려웠다. 현상은 존재하지만, 기록은 존재하지 않
을 때. 그리고 제게는 그게 아주 많이 필요할 때.

“윽박지르거나 하는 장면을 본 증인은요? 혹은 자녀분.”

“없어요. 아이가 본 적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얘길 해 본 적이 없


어서…….”

“만약에 봤다면 자녀 증언이나 사실 진술서로도 가능해요. 자녀분


이 몇 살이죠?”

“이제 유치원 들어가요. 다섯 살.”

너무 어리다.

아직 학교도 못 들어간 제 조카의 얼굴을 떠올린 윤신이 담담하게


응답했다.

“제가 만나 봐야겠네요. 펌으로 오라고 하는 건 좀 그렇고, 밖에서


같이 한번 봬요.”

“증거 때문이라면 전 더 당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그런 방식은 별로 권장하지 않아요.”

“남편이 집요해요. 의처증도 있고요. 확실한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런 순간이 오면 강세헌은 어떻게 할까.


갈등이 생긴 부부에게 가정 법원은 일종의 전장이었다. 손에 무기
없이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아군이 적군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게 존재했다. 그걸 막기 위해 세헌은, 본인이 강구한 여
러 가지 방법 중 제일 효율적인 걸 활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확
실하게 이긴다.’라는 명제에 가장 근접한 형태일 터다.

순간적으로 그런 유혹에 휩싸인 윤신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그의 방식과 제 방식 사이의 교차점을 찾았다.

“제 생각엔…… 너무 증거가 불충분해서 남편분을 좀 자극할 필요


가 있긴 할 것 같아요. 의처증 증명부터 시작하면 다른 건 줄줄이 나
오게 될 거거든요. 그렇다고 의뢰인이 또 폭언을 당하실 필욘 없고
요. 화살을 외부로 돌리면서 증거를 확보할 방법을 제가 찾아볼게
요.”

이 방 안에서 처음 마주쳤을 땐 그래도 안정을 찾고 있는 듯 보였는


데, 어느새 여자의 안색이 좀 어두워져 있었다. 대화를 지속하며 점
점 자신이 역으로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 같았
다. 그녀가 손을 달싹이며 윤신이 주었던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그는 가능한 한 공기를 편안하게 만들


어 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이럴 땐 아는 체를 하는 것보다, 모르
는 체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노트북을 다시 제 쪽으로 당겨 온 윤신
은 화면을 켜서 의뢰인이 제공한 자료들을 확인하다가, 곧 다시 입을
뗐다.
“잘못하신 거 없는데 너무 위축되지 마세요. 배우자가 알게 되더라
도 주눅 들지 마시고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에 먼저 연락하
시고, 바로 저한테도 전화 주시고요.”

“그럴게요.”

“주신 자료들 정보 제공 동의하시면 업체에 넘겨서 남편분 동선을


확보할 거예요. 이 안에 제가 작성해 달라고 요청드린 건 모두 충실
하게 작성해 오신 것 같고…….”

그가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던 건 가사 분담 형태, 육아 분담 정도,


직계 부모 부양 여부, 월 소득 따위의 정보들이었다. 이것들은 법원
의 판결 사례를 기준으로 비율을 정해, 위자료나 재산 분할의 정확한
액수를 책정할 때 필요했다.

제 요구의 의도를 이해하고 착실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온 걸 보니


그래도 의지가 확실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업체에서 행적 확보가 되는 동안, 전 다각도로 재산 분할이라든가


위자료 부분들 확인하겠습니다.”

“일정은 변호사님 편하신 대로 해 주세요. 그런데, 지난번 통화할


때 말씀하신 건 뭐예요? 변호사님도 제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
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찾아오라고요. 그 말 때문에 용기 얻어서
왔거든요.”

이 자리에서 꺼낼 만한 화두가 아닌 것 같아서 함구하려고 했는데,


의뢰인이 먼저 서문을 여는 바람에 뒷얘기를 이어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머쓱하게 뺨을 붉힌 윤신이 괜스레 제 턱을 손등으로 쓸면서
대꾸했다.

“음. 실은 제가 반지를 직접 디자인하고 싶은데요. 그쪽으로는 완


전히 문외한이라…… 마침 장신구 디자인을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귀걸이랑, 반지, 초대장 카드 같은 것도 만들고요. 혹시


웨딩링……?”

“아뇨, 커플링요.”

“아…….”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런 말 하니까 좀 웃기죠.”

반지가 끼워진 제 왼손을 만지작거리던 윤신이 어색하게 입술을 달


싹였다. 이를 본 그녀가 풋 웃는 바람에 미세하게 날 서 있던 공기가
누그러졌다.

“천만에요. 더 믿음이 가네요.”

“저, 두 사람 디자인은 다르게 하고 싶은데.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


요?”

“재료를 뭘 쓰느냐에 따라, 또 어떤 디자인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죠. 은이 제일 빠르고 간단하긴 한데 은으로 커플링을 하실 건 아닐
거고요.”
“네, 오래가는 걸로요. 아, 그리고 누나한텐 비밀 지켜 주실 수 있
어요?”

“그럼요. 변호사님도 제 비밀 유지해 주실 텐데, 저도 당연히 그래


야죠.”

서로 간에 비밀이 생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동시에


웃었다.

* **

회의실 가장 상석에 앉은 세헌의 앞에서, 회사법 팀 시니어 변호사


한 사람이 몹시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브리핑에 열중했다.
세헌을 비롯한 몇몇 팀의 팀장급 변호사들과, 연차 높은 중견들, 나
머지 어쏘들까지 바글거려 넓은 공간임에도 내부가 꽉 찼다.

어스름이 깔린 공간을 스크린의 불빛이 은은하게 채워 갔다.

“컨소시엄으로 대상 회사를 공동 매입하려는 상황이니, 투자금 회


수 조항이 필요합니다.”

팔짱을 척 끼고 보고를 받던 세헌이 입을 뗐다.

“다 아는 얘긴 생략하고, 좀 전에 A팀은 상장이 베스트라고 얘기했


어. B팀 생각은?”
“일반론으로 가서 유가 증권 시장에 상장되는 것도 괜찮겠지만, 저
희 팀 판단에 인수자 쪽에선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고려
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안이 있어야 할 거고.”

“이 프로젝트의 경우 인수자가 예상보다 소극적입니다. 딜을 안정


적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봐서요. 저희 팀은 풋옵션[3]을 추천
하려고 합니다. 이쪽에 지분 매입할 자급력이 있어 가장 해 볼 만하
고요. 클라이언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금융위 투자 가이드라인, 준비됐나?”

그의 물음에, 중간에 다른 시니어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필요한 파트만 요약본으로 준비해 뒀습니다.”

세헌의 앞은 물론이고, 각 자리마다 놓인 태블릿의 화면에 불이 들


어왔다. 그가 거기에 눈을 고정하려고 하는 그때였다. 복도에서 윤신
과 어떤 여자가 다정하게 대화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무심코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딱 잡혔다.

의뢰인을 대할 때 저런 식으로 수줍어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뚫어져라 창문 너머를 보던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태블릿 PC로 눈을 돌렸다. 처음엔 그럭저럭 집중하는가 싶더니 별안
간 탁,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죽인 채로 그의 반응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직원들이 모
두 그를 쳐다보았다. 세헌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집중이 안 됩니다. 10분만 쉽시다.”

“10분이나 말씀입니까?”

발표하던 시니어가 그의 전에 없던 기행에 어리둥절해하며 그의 행


보를 가로막았다. 세헌의 입에서 나온 ‘집중이 안 된다.’라는 말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러자 움직이다 멈춘 그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꼭 이런 돌대가리가 하나씩 들어와. 내가 너희 수반이야. 명령에


따르기 싫으면 집에 돌아가서 영영 쉬어. 문도 열어 줘?”

“아닙니다. 제가 브리핑 중 뭐 실수한 게 있나 해서…… 문제가 있


었다면 고치겠습니다.”

물론 이 브리핑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시니어가 아니라 세헌 스스로가 문제였다. 그는 모두에게 들으라
는 양 주변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10분 뒤에 돌아올 테니까 각자 부족한 거 보충하세요.”

그러고는 의아해하는 모두의 시선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승강기 방향으로 향하자, 마침 의뢰인


을 배웅한 뒤 돌아오고 있던 윤신과 모퉁이가 있는 사각지대에서 딱
마주쳤다.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윤신은 세헌을 미처 보지 못
하고 쭉 직진할 기세였다. 그 앞을 간단히 막아 내니, 그제야 밑으로
보이는 구두코가 세헌의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수석님?”

“누구야.”

힐끗 제 뒤를 돌아본 윤신의 사고 회로가 팽글팽글 돌았다. 여기 선


사람이 자신뿐임을 인지한 뒤라야 그가 다짜고짜 꺼낸 말의 핵심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아, 회의하다 보셨어요? 의뢰인요.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죠. 누나


가 직접 부탁했다던.”

“김정아 디자이너.”

“이름을 어떻게…… 저 아직 탁 비서님한테 위임장도 안 넘겼는데


요.”

매우 황망해하며 대꾸하던 윤신이 얼마 전 그의 서재에서 두 번째


소원을 쓰던 날의 일을 되새겼다. 그때, 세헌이 제 외투에서 살짝 빠
져나온 명함의 일부를 순간적으로 눈에 담았던 걸 떠올렸다.

“선배 카메라예요? 힐끗 보면 기억하게.”

“저 복도 지나면서 무슨 얘기 했지?”

“소송 얘기 했죠. 뭐 다른 얘기 할 것도 있어요?”


“나야 알 수 없지. 그러니까 묻겠지? 불어.”

직접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반지를 나눠 낄 사람에 대


한 대화를 나눴다. 정말로 뭘 수공예하는 데엔 까맣게 문외한이라,
디자이너에게 그 사람의 성향을 얘기해 둬야 적당한 모양을 추천받
을 수 있을 듯해서였다.

기본적으로 디자인은 깔끔한 걸 선호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


이 아주 많으며, 어려운 관계의 사람을 만나는 일도 잦다. 메모할 땐
두툼한 만년필을 주로 사용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도 빈번하다.
결정적으로 종종 태우는 담배 냄새가 배는 게 싫은 건지 손을 청결하
게 자주 씻는다. 그런 얘기 따위들을 나누며 잠시 아주 즐거웠다.

한데 이 얘길 세헌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대충 얼


버무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냥, 소송 얘기.”

“아니, 너 다른 얘기 했어.”

그는 가끔, 꼭 귀신같다.

당황한 윤신을 내려다보는 세헌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연이어 짜증


을 내거나, 빈정거리거나, 또는 그 어떤 감정 상태도 드러내지 않은
고저 없는 어투로 단어들을 뱉어 냈다.

“나는 거짓말을 빈정거리는 것만큼 자주 해. 아울러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도리어 그럴 가능성을 고려해
서 늘 양동 작전을 짜지. 교란하려고.”

“알아요.”

“그런데 네가 하는 건 못 참아. 넌 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안 돼.


하지 마.”

“…….”

“또 얼버무리면 그땐 화낼 거야. 다시 묻는다. 무슨 얘기 했어.”

입술을 살짝 깨문 윤신이 세헌의 옷자락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들


었다.

“저 거짓말 잘 못하는 거 아시죠.”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를까?”

“나중에 얘기해 주면 안 될까요? 다 말할게요. 지금 계속 물어보시


면 저 거짓말해야 돼요. 왜 그래야 하는 건지도 나중에 다 설명할게
요.”

깨끗한 눈동자에 비친 간절한 부탁을 읽어 낸 건지, 그가 윤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쓸어 주었다. 그러고는 짧은 한
숨 끝에 결국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알겠어. 가 봐.”
공손하게 묵례한 윤신이 세헌을 지나쳤다. 차분히 몇 걸음 걷다가
괜히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어느 때고 근사한 그의
연인은 같은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곳에 버틴 채로 제 모습을 봐 주자, 더 앞으로 못 가겠는 기분이


었다. 다시 다가와서 세헌의 앞에 우뚝 선 윤신은 주변의 눈치를 살
폈다. 뒤이어 짧은 찰나를 이용해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밑부분
에 키스했다.

“선배 회의 중에 나온 거죠. 여유 몇 분 있어요?”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양, 한 손으로 윤신의 뺨을 어루만지


던 세헌이 다른 한 손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5분.”

“충분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의 단단한 손을 덥석 쥔 윤신은 마치 첩보전을 펼치듯이 빠른 속


도로 승강기 오른편의 비품실로 향했다. A4용지와 공구 같은 자재들
이 가득 있는 그 안으로 세헌을 쏙 밀어 넣곤, 이 모습을 본 사람이
없는지 밖을 확인했다.

뒤이어 안에서 문을 탁, 닫아 버렸다.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탁자로 세헌을 몰아붙인 윤신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능숙하게 허리를 끌어안아 윤신의 자세를 고
정하고 지탱해 주었다.
그들은 바로 얼굴을 맞대 입술을 포갰다. 겹겹이 재료들이 겹쳐진
샌드위치처럼 서로의 살갗을 위아래로 쌓은 뒤 빨다가, 윤신이 먼저
그의 보드라운 표피 사이로 혀를 숨겼다.

가뿐하게 들어간 혀끝이 세헌의 혀와 적극적으로 엉켰다. 질척거리


는 두 개의 살덩이가 익숙한 위치를 찾아 맞물렸다. 입 안 곳곳을 헤
엄치듯이 들쑤시던 윤신이 입술을 떼어 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
면서도 이 5분을 최대한 알차게 써야겠다는 듯 그의 얼굴 이곳저곳
에 정신없이 키스해 댔다.

쪽, 쪽. 보드라운 입술이 쫀쫀한 피부 위에 닿을 때마다 야릇한 마


찰음이 일었다. 윤신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끌어 올려 뒤통수를
쥔 세헌은 보은을 하겠다는 듯 관자놀이 위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왼손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4분 지났다.”

충분하다고 말했던 4분 전의 자신을 원망하며, 윤신이 세헌의 품에


더 빠듯하게 안겼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냉정하게 이마를 쑥 밀어낸
세헌이 몸을 곧추세우곤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가 몸을 걸치
고 있던 탁자에 대신 걸터앉은 윤신은 꽤나 섭섭하다는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관찰했다.

“와, 진짜 일 앞에선 가차 없다. 가끔 정말…….”

말을 도중에 관둔 윤신의 입술이 앙다물렸다.

“끝까지 해야지.”
“제가 현명하게 말을 아끼겠습니다.”

“다 말해 놓고 안 한 척하는 버릇이 있더라.”

그야말로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잘 알면서 꼭 한 번씩 까다롭


게 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맞불을 놓긴커녕 세헌이 기대하고 있을 더 많


은 사랑을, 얼마든지 속삭여 주고 싶어진다.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딱 1분만요.”

“나 포함 저 회의실 안에 있는 인간들 1분씩, 다 합친 총액이 얼만


줄은 아나? 내가 이미 머저리같이 너 쫓아 나오면서 수천 날렸어. 넌
3분 뒤에 나와.”

흐트러진 옷을 모두 추스른 세헌이 윤신의 이마에 입술을 문질러


주곤 돌아섰다. 뽀뽀는 해 주지만 결국은 매몰차게 가 버린다. 멀어
지는 탄탄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윤신이 그를 흔들어 놓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사랑해. 가끔 개새끼지만.”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세헌이 멈칫했다. 손이 삐끗한 것 같았다.


제 손등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야릇하게 구긴 그는, 찰나간 사념에 빠
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신이 그의 옆구리를 찔러 대
듯 덧붙였다.

“돈 많이 벌어 와, 자기야.”
후우,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몰아쉰 세헌이 놀랍게도 이렇게 대
꾸했다.

“……그래.”

탁. 여지없이 문은 닫혔다.

다만, 가끔 호칭에 변화를 꾀할 때마다 영 신통찮은 반응을 보였던


여태까지와 달리, 이번엔 그가 분명하게 화답했다.

방금 이거 뭐지.

그래?

그으래?

닭살 돋는다고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제게 맞춰 주려는 정성이 가상


했다. 아닌 체하지만 여기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제 양쪽 귀를 번갈아 탈탈 털어 보는 시늉을 하
던 윤신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서툴지만 다정한 강세헌이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세헌의 이름 세 글자를 육성으로 내지르게 될까 봐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완전하게 가렸다. 그러고는 최대한 소리 죽여
정신없이 발버둥 쳤다.
05.

삑. 스마트키의 동그란 버튼을 누른 세헌이 주차장 로비 쪽으로 걸


음을 내디뎠다. 그는 습관처럼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이미 새벽 1
시가 넘은 지 한참이었다.

예기치 않게 클라이언트 미팅이 길어지는 바람에, 정시에 칼같이


퇴근한 윤신과는 귀가 시간이 엇갈렸다. 그래서 곧 도착한다는 메시
지를 남겨 뒀는데 아직 답이 없었다.

보통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을 땐 으레 그렇듯 제집에 가 있을 듯해


A동 방향으로 이동하려는데, C동 쪽의 승강기 문이 열렸다. 지잉, 하
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윤신이었다.

“도윤신?”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놀란 윤신이 세헌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와, 조금만 늦었으면 엇갈릴 뻔했다. 새벽이라 그런가, 제 예상보


다 빠르게 오셨어요.”

“넌 왜 거기서 나와. 집에 갔었어?”


“네. 뭐 확인할 게 있어서요. 피곤하죠.”

고개를 끄덕이며 뺨을 쓰다듬어 주자, 윤신이 세헌의 서류 가방을


빼앗듯이 가져가 팔짱을 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옆에서 허리춤을
와락 끌어안았다.

로펌 사택의 특성상 세대수는 많아도 대체로 주민끼리 서로 매우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공용 공간일수록 늦은 시간에 사람
이 거의 없긴 했다. 지금 이 로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마냥 안
도할 건 아니었다. 당장 어디에서 누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잘 아는지라 평소엔 두 사람 다 적절하게 눈치를 챙기고, 또


적절하게 들킬 듯 말 듯 한 스릴을 즐겼다. 한데 오늘은 뭔가 달랐
다. 윤신에게서 떨어지기 싫다는 맹목적인 분위기가 어렴풋이 풍겼
다.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인지한 세헌이 윤신을 옆구리에 포개듯이 세


운 채로 A동 승강기 앞에 섰다. 카드 키를 리더기에 대자 마침 지하
에 내려와 있던 기계가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위에 탑승했다.

승강기 문에 비친 윤신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세헌이 고개를


기울여 정수리에 입 맞추며 넌지시 물었다.

“외근 간다고 했다며.”

“네, 일찍 퇴근했어요. 의뢰인 만났고요.”


대답과 동시에 좀 더 세헌의 몸으로 깊이 파고들려 하는데, 돌연 승
강기가 운동을 멈췄다.

윤신이 민첩하게 움직여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양문형 문이


열렸다. 밖에는 담배와 라이터를 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릿속 데
이터베이스를 돌리니 도국 내 세무 법인으로 얼마 전 스카우트된 베
테랑 세무사라는 게 기억났다. 위층에 있는 공개 정원으로 흡연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먼저 세헌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가 가볍게 까딱, 하는 것


으로 답했다.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라는 사정을 대충 아는 펌 직원들이라면 모


를까, 뉴 페이스인 이 남자에겐 자신이 A동에 세헌과 함께 있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내심 난처해진 윤신은 급한 대로 세무사를
향해 정중하게 묵례하곤 괜히 서류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던 세헌이 윤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으니 무의미한 걱정은


하지 말란 뜻 같았다. 그 덕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짓 하나로, 제게 그 어
떤 사람의 보호보다 안도되는 심경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의뢰인은 뭐래.”


“네? 아…… 누나가 소개했다던 그분 뵙고 온 거거든요. 초장부터
좀 부침이 있긴 하지만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나름대로
수석님 벤치마킹해서, 제 식대로 전략을 짜고 있고요.”

두 사람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 어느 틈에 기계가 세헌의 집


층에 당도했다. 그들은 함께 내렸다. 집으로 들어가서, 넓은 복도를
거닐어 안으로 나란히 진입하는 동안에 세헌은 학구적인 태도로 윤
신의 표정과 움직임 따위들을 관찰했다.

드레스 룸에 도착한 그가 재킷을 벗으면서 되물었다.

“너 지금 나한테 할 말 있는데.”

외투를 받아 든 윤신이 그걸 서류 가방과 함께 진열대 위에 올려 두


었다. 그러고는 세헌이 커프 링크스를 풀고, 베스트를 벗고, 넥타이
를 풀어내는 일련의 순서를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이윽고 셔츠의 제
일 위의 단추를 붙잡는 그의 손을 쓰윽, 밀어내곤 직접 단추를 풀어
주었다.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인 세헌이 재차 물었다.

“말하기 싫은 거야, 하고 싶은 거야. 노선 똑바로 정해.”

“계산 중이에요. 제가 선배한테 이 얘길 하는 게 얼마나 치사한 일


인 건지. 혹시 혼자서 해결해 볼 수는 없는 건지. 정말로 이 방법이
최선인지도요.”

“너 펌에서 사고 쳤어? 수습해야 되는데 도움 필요한 건가?”

두 개째 단추를 풀며, 윤신이 느긋하게 답했다.


“저처럼 일 잘하는 변호사가 사고 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러나 세헌의 표정은 그 어떤 답변을 들었을 때보다도 미심쩍게


변했다.

“물어볼 때 말해. 일분일초라도 빨리 얘기해야 수습이 쉬워.”

“진짜 그런 건 아니라는데도요.”

“네가 얘기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알려 줘?”

세 개째의 단추를 붙잡고 있던 윤신이 움찔했다. 이 순간 세헌의 눈


을 마주 보면 모든 걸 들키게 될 것 같아서 그저 쇄골쯤에 시선을 고
정하고 있자, 그가 직접 턱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눈길을 강제로 교
차하며 덧붙였다.

“내가 손수 가르쳐서 내보냈는데, 가사 팀장이 너 갈군다는 얘기


같은 걸 들어야겠어?”

왠지 강세헌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긴 했다. 원체 그가 사내에 도


는 말을 빠르게 흡수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이게 그가 어떤 화제
보다도 관심을 쏟고 있는 도윤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단추를 풀다 말고 세헌의 품에 풀썩 무너지듯이 기댄 윤신이 그의


딱딱한 어깻죽지에 뺨을 문지르며 호흡을 골랐다.

결국은 못 이긴 척 입을 떼게 됐다.
“팀원인 이상 팀장님 방식 따르는 게 맞는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게 틀렸다면요? 제 사건, 언론이 물기 좋은 사건이라면서 자꾸 신
문사에 뿌리고 싶어 하세요.”

의뢰인 이름이 유명한 순서대로 사건을 처리하는 건 참을 수 있었


다.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약간의 역차별이 될진 모르지
만 결론적으로 제겐 다 똑같은 의뢰인이니까. 하나 그걸 이용해서 사
건 해결 이상의 부가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건 확실히 부당했다.

“의뢰인 신상은 보호하고, 배우자 쪽 유명세를 이용하겠다는 거 아


냐?”

“맞아요.”

“이혼 문제 연구소 홍보용이겠지. 슬슬 실적 필요할 시즌이야. 다


들 그렇게 일해. 그걸 틀렸다고 말한다면 난 네 편 못 들어 줘.”

“하지만 로펌이 직접 그러면 안 되잖아요. 당장 증거가 너무 없어


요. 벌써부터 시끄러워지면 우리 쪽 클라이언트한테 유리할 게 하나
도 없다고요. 부팀장님도 저랑 같은 의견이세요.”

“가사 부팀장 수준이 딱 너 정도라는 거군. 인사에 참고하지.”

쿡. 그의 딴딴한 복부를 손가락으로 찌른 윤신이 차분히 설득했다.

“단순히 의뢰인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론 소송에 이기


자는 거라니까요.”
설명 끝에 슬그머니 얼굴만 떼어 낸 윤신이 가까이에 있는 세헌의
턱을 콱 깨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서늘한 눈동자와 제 것을 마주치며
솔직하게 부탁했다.

“팀장님한테 설득이 전혀 안 통해요. 부팀장님도 백기 드셨어요.


선배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저도 제가 틀렸을지도 모를 땐 여러
가능성 염두에 둬요. 그런데 이건 진짜 아니에요. 제가 맞아요.”

가사 팀으로 옮긴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윤신이 해 오는 부탁이


었다.

늦둥이를 본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


며 자라 왔을 윤신은 종종 사적인 부분들에서 세헌이 예상치도 못했
던 귀여운 행동들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의외로 업무적인 영역에서만큼은 전혀 의존적이지 않았다.


혼자 해결하고, 수습하는 일에 훨씬 익숙했다. 힘들다는 푸념이나 투
정도 거의 없었다. 일을 즐겼다.

그건 처음 업무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도 있겠지만, 본인의 자존심


도 강했고, 승부욕도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윤신도 평범한 공략으론 안 되겠다 싶었던 것 같았다. 정식으


로 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강세헌이라는 편법을 쓰려고 하
는 것이 그걸 증명했다. 정수만을 쓰고, 정도만을 걷는 윤신이 좋았
으나 그 과정에서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도 참고, 참다, 끝내 하는 수
없어 이용하는 도구가 자신이라는 게 세헌은 솔직히 싫지 않았다.
누군가의 수단이 되는 일이 즐거워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진열대에 등을 기댄 그가 윤신의 등을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대꾸


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뭘 도와주면 되는지를 얘기해. 들어 보고 결정할


테니까.”

“이 사건은 제 방식대로 해결해 보고 싶어요. 기사 보도만 막아 주


세요.”

“팀장을 네 입맛에 맞게 갈아 줄 수도 있어. 더 쉬운 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

“나쁜 분은 아니에요. 합리적인 상사인데, 가끔 저랑 가치가 충돌


하는 것뿐이지.”

“글쎄. 그 충돌이 잦던데.”

정곡이 찔린 윤신이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회사에선 상하부 의견이 부딪치는 게 건강한 거예요. 바텀 업이


된다는 거죠.”

대꾸 대신 눈을 가늘게 뜬 세헌의 뺨이 꿈틀했다. 무조건 톱다운 형


식으로 일하는 그와 반대되는 개념을 제 쪽이 옹호한 셈이기 때문이
다. 그걸 눈치챈 윤신이 어리광 부리듯 그에게 몸을 어설프게 문지르
며 눈을 마주치자 그가 말문을 뗐다.
“내가 도와주면 넌 뭘 제공할 거지?”

“글쎄요. 대의를 위한 무상 복지야말로 제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난


데…….”

“내가 ‘무’로 시작하는 거 싫댔지. 난 신자유주의자야.”

“그럼 오랜만에 프로 보노인 걸로. 와, 이래서 인맥, 인맥 하는구


나.”

헛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그는 늘 그렇듯 연인의 바람을 모른 척


하지 못했다. 더 힘주어 제 몸에 전신이 닿도록 끌어안고는 손바닥으
로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살짝 풀린 셔츠에 윤신의 살갗이 닿았다. 그들은 껴안은 채로 몇 초


간 서로의 숨결을 음미했다. 그러다 세헌이 먼저, 손끝을 세워 윤신
의 셔츠 안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허리춤을 아슬아슬하게 만지작
거리자 윤신의 하반신이 긴장감으로 꿈틀했다.

“지금 1시 넘었어요. 안 피곤해요?”

“2시가 넘은 것도 아니잖아.”

“2시였어도 그 소리 했을 거죠? 3시 넘은 것도 아니잖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가르쳐 주려는 거야. 넌 내 지도 편달이


필요해.”
야릇하게 속삭이며 윤신의 달아오른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 대니,
점점 서로의 숨도 가빠졌다. 드레스 룸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농염한
빛깔로 물들었다. 세헌의 손가락 움직임이 점점 더 관능적으로 변했
다. 척추를 따라 등을 쓸어내리나 싶었는데, 한술 더 떠 바지 틈새로
나아가 윤신의 속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엉덩이 골을 가르고 진입한 손끝이 입구를 지분거리듯 문질러 댔


다. 윤신은 캥거루처럼 세헌에게 매달려 안기며 신음했다. 그가 구멍
안에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기에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몸을 들썩
거렸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어디부터 알려 줄 거예요?”

“어디부터 알고 싶은데.”

세헌의 판판한 등을 감싼 셔츠를 붙들고 있던 윤신이 제 한쪽 손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을 비비듯이 만지작거리다
입 안으로 쏙, 끄트머리를 넣었다.

“후으, 여기요.”

고른 치아를 훑고 더 깊숙이 전진해 천장과 여린 살들을 구석구석


애무했다. 그러자 세헌이 혀끝으로 윤신의 손가락을 쫓으면서 표피
를 타액으로 적셨다.

이윽고 그의 입 속을 장난스럽게 유린하던 검지와 중지를 빼낸 윤


신이 얼굴을 기울였다.
“하, 선배 나 키스하고 싶어. 입 열어 줘.”

“혀 넣어. 빨아 줄게.”

그의 지시에 따라 착하게 붉고 촉촉한 혀를 밖으로 내어 입술 사이


로 끼워 넣으려 하니, 세헌이 살짝 만류했다.

“손가락 먼저 넣고, 그 위에 넣어야지.”

시키는 대로 세헌의 입안 왼쪽에 손가락을 다시 끼운 채 중앙에 제


혀를 반쯤 욱여넣었다. 곧바로 세헌의 내부에서 손톱과 혀를 함께 빨
아들이는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늘 하던 키스의 변형일 뿐인데,
이상하리만치 복부가 빠르게 단단해지며 온몸에 전율이 일듯 피부
위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살덩이가 아득한 내부에서 몇 번이고 부딪쳤다. 그러면


서도 윤신이 끼워 넣은 손끝 때문에 접촉이 완전하지 않아 애가 탔
다.

“흐응, 흐, 으읏.”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온몸을 흐느적거리던 윤신은 도저


히 못 버티겠다 싶어 손가락을 빼냈다. 연이어 본격적으로 키스를 시
도하며 세헌의 셔츠를 마저 벗겨 나갔다.

겨우 단추를 다 풀어 셔츠를 땅에 떨어뜨린 뒤 그의 쭉 뻗은 탄탄한


팔을 곡선 그리듯 어루만졌다. 복부에서부터 다시 역주행을 하는 것
처럼 판판한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상반신의 탄력적인 살결과 꿈틀
거리는 잔근육들이 손바닥에 마찰하며 쉴 틈 없이 움찔대는 듯했다.

어설픈 애무에 세헌도 빠르게 흥분했다. 결국 뾰족하게 솟은 목울


대가 크게 일렁일 정도로 거칠게 심호흡한 그가 윤신의 셔츠 단추를
난폭하게 풀었다. 그러고는 반쯤 벌어진 틈새로 손을 쑤셔 넣어 뾰족
하게 선 유두를 꼬집었다.

“읏……!”

세헌을 만져 가던 윤신은 제 몸에 닿은 노련한 손길이 주는 자극에


항복해 다리를 꼬며 그에게 하체를 문질렀다. 선명하게 발기하려 하
는 두툼한 양감이 전이돼 눈앞이 아득해졌다.

“으응, 좋아해요.”

“그래? 얼마나.”

“선밴 상상도 못 할 만큼. 더 들어오세요.”

으득, 잇새를 짓이긴 세헌이 윤신의 젖꼭지를 거칠게 짓이기며, 동


시에 아득한 입 속에 제 혀를 깊숙이 욱여넣었다.

“웁, 읏!”

그 후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지퍼까지 순식간에 끌어 내리고 피차 곤두서기 시작
한 서로의 성기를 속옷 위로 덮듯이 만졌다.
뒤이어 외부로 꺼내 두 개의 기둥을 자연스럽게 겹치려고 하던 바
로 그때였다.

지잉. 지잉.

윤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헉, 헉, 스타카토처럼


끊듯이 신음하던 윤신이 매우 괴로워하며 세헌에게 제 몸을 비비적
거렸다. 그러다가 애를 끓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핏줄 선 팔뚝을
꽈악, 쥐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진열대에 기대 있던 세헌이 언짢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두


손은 윤신의 골반에 가볍게 얹은 채였다.

“펌?”

이 시간에 연락이 왔다면 그럴 공산이 제일 컸다.

“아마도…… 어? 아니에요.”

한데 아니었다. 화면을 확인한 윤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연 설


명했다.

“제 의뢰인이에요. 김정아 씨. 위험한 일 생기면 아무 때고 연락 달


라고 했거든요. 이 시간에 연락할 정도로 물색없는 분이 아닌데, 무
슨 일이 생겼나 봐요.”

이쯤 되니 세헌도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또 그 여자야?”
며칠 전 복도에서 함께 걸으며 웃는 걸 봤을 때도, 조금 전 그 여자
의 사건을 빌미로 제게 부탁을 해 왔을 때도 그는 모두 참아 넘겼다.
그러나 이런 야심한 시각에까지 거슬리는 일이 반복되자 신경질이
이는 듯했다.

“씻고 계세요. 바로 따라갈게요.”

윤신은 미안하다는 표식으로 세헌의 입술에 제 것을 부대끼곤 돌아


섰다. 자세를 고친 세헌도 옷을 마저 벗고 두툼한 배스 가운을 꺼내
대충 걸친 뒤 침실과 연결된 간이 문으로 향했다.

타악. 윤신이 휴대폰을 귀에 댄 순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네, 도윤신입니다.”

세헌이 자취를 감추며 꽉 닫아 버린 문을 애틋하게 돌아본 그도 잔


뜩 헝클어진 옷을 추스르며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 **

타닥. 타닥.

의견서를 작성하는 세헌의 양미간이 설핏 좁혀진 채였다. 뭔가 마


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듯 불편해하는 기미가 미형의 얼굴에 묻어났
다.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았
다. 그러다 조금 전에 돛대마저 이미 동났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빈
갑을 휙, 책상 너머로 던져 버렸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댄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깊은 한숨


을 내쉬는 건 덤이었다.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자연히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근육을 운동을 하던 세헌은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6시 반이었다. 때마침 메시지가 도착해 휴대
폰을 들여다보았다.

짧은 문장을 몇 번이고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살이 있는 대로 구겨


졌다.

[저 오늘도 먼저 퇴근해요. 밤에 집에서 봐요. - 도윤신]

“퇴근?”

곧바로 블라인드를 걷어 올려 건너편 방을 확인했다. 이미 윤신은


짐을 챙겨 나간 건지 불이 꺼져 있었다.

최근 윤신은 계속 이랬다. 한마디로 말해 1주일이 훌쩍 넘게 세헌


을 내버려 두었다.

이혼 소송은 늘 성수기였다. 바꿔 말해 변호사가 언제, 얼마큼의 일


을 하게 될지 대충 예측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 윤신의 일정이
종잡을 수 없어진 건 처음이었다. 며칠 내내 연속으로 칼퇴근을 반복
했고,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세헌만큼은 아니더라도 윤신 역시 늘 일에 파묻혀 살았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주말은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대체로 반납이었다.
드물게 일찍 퇴근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조차 대부분 본인 하루 할당
량 정도는 다 마치고 가는 식이었는데, 최근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
지 매일 새벽까지 서재에 불이 켜졌다.

세헌은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굳이 변곡점을 따지자면 얼마 전 새벽 드레스 룸에서 의뢰인의 전


화를 받았던 날부터였다.

그날 윤신은 그가 다 씻고 나올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얼굴에


스킨을 바를 때쯤 나타나,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
다. 의뢰인의 가정 내 문제가 생긴 듯했다. 일 욕심 있는 도윤신을
알아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어졌다. 이토록 자신을 말없이


방치하는 건 곤란했다. 내버려 둘 거라면,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게 맞
았다. 그들은 서로의 바쁜 시간에 대한 상호 이해가 아주 잘되어 있
는 연인이었다. 업무에 관련된 사항일 경우 세헌은 거의 100퍼센트
납득했다. 그런데도 윤신은 그를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전에 종종 보내곤 했던


문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구체적으로 왜, 어딜 가서, 무엇을 하고,
언제쯤 돌아올 건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던 예전과 달리 단순한 입장
만의 나열이었다.

“육하원칙부터 다시 가르쳐야겠다.”

탁.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던지듯 내려놓은 세헌은 내선용 인터폰


을 손에 쥐었다.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네, 변호사님. 탁 비입니다.

“도윤신 또 어디 갔어.”

- 클라이언트 만나러 외근 가셨습니다. 그, 소설가 와이프 공예 공


방에요.

또다.

그가 침묵하자 탁 비서가 눈치껏 덧붙였다.

- 도 변호사님께 뭐 지시하실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연락


넣어 두겠습니다.

뭔가 찜찜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라면 행방을 묘연하게 하는 게


옳았다. 한데 윤신은 비서실에 제 행로를 아주 투명하게 밝혔다. 어
딘가로 새어 나갔으면 하는 심사가 느껴졌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의
뢰인의 배우자일 터다.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했고, 나름대로 자신을
벤치마킹해 전략을 짜는 중이라고도 했으니까.

문제는 그러면서도 왜 제겐 자세히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예 공방…….’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최근 윤신의 태도와 자신이 던진


말들, 그리고 이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지
어졌다. 아울러 여자 쪽이 주얼리 디자이너라고 하니, 짐작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다만, 그걸 알면서도 세헌은 인내가 안 됐다. 쉽게 짬을 내기도 어


려운 오후 시간을 여자와 단둘이 쓰면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을 상
상을 하면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익숙한 자기 혐오감에 도윤신의
부재가 주는 심리적 공허감이 보태져 그의 심기를 어수선하리만치
어지럽혔다.

〈수석님의 삭막한 인생엔 저밖에 없는 걸 제가 알아요.〉

도윤신의 풍성한 인생엔 자신만 있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애정이란, 아무리 열심히 물을 줘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샘 같았다. 상대방이 온몸에 끓어 넘치는 사랑을 오직 제게만 다 쏟
아붓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갈증이 나고, 때로는 숨이 가빴다.

도윤신은 정말로 끝까지 자신을 견딜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말


이다.

단 한 번도 손가락에 뭔가 채워졌던 적 없는 허전한 제 왼손을 내려


다본 세헌의 입맛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비서실엔 오픈했다는 거군.”


- 네. 그런데 괜히 배우자 쪽에서 걸고넘어지면 애꿎게 안 좋은 말
씀 들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조언드려야 할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세헌이 마른세수했다. 곧이어 푹 잠겨 긁히는 듯


한 음성으로 탁 비서의 말에 차갑게 응답했다.

“도윤신이 너보다 어린 변호사라서 우습지.”

- 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친하다고요.

도윤신 넌 좆같은 ‘우리’ 많아서 참 좋겠다.

꽉, 아랫입술을 깨문 세헌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네가 걔 단편적인 행동만 보고 3분 만에 생각할 수 있는 결과는 도


윤신도 3초면 생각할 수 있어. 충고는 그걸 못하는 사람한테 해야
지.”

그제야 탁 비서도 그가 하는 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인지한 듯했


다. 윤신이 지금 일부러 그러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린 것이다.

- 아…… 하긴. 도 변호사님은 보통 정공법 쓰시는 분이라서 설마


했는데. 선수 다 되셨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생각은 길게 하는 거라고 몇 번 얘기…… 됐다. 미희 선배 퇴근 안


했으면 잠깐 나 좀 보자고 해. 사무실로 가겠다고.”
- 알겠습니다. 다른 건요?

“담배.”

- 오늘 아침에 드렸는데 그걸 그새 다 태우셨어요? 적당히 하시죠.

“잔소리할 거면 끊어.”

탁. 통화를 종료한 세헌은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부디, 제


손으로 직접 도윤신의 뒷조사를 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강
력한 통제 욕구와 도윤신의 애정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
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목구멍으로 끌어 올리며 결국 그걸 내려놓았
다.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담배를 달라는 양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정면을 보자, 미희가 서 있


었다. 한 품에 얇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도 마침
그에게 용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왜. 하이파이브라도 하자고?”

“탁 비가 내가 가겠다고 했다는 말은 안 전했나?”

“마침 너한테 오려던 길이었어. 나 계속 여기 서 있어?”


피곤한 듯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짚은 세헌이 접견용 소파를 가리켰
다. 그녀가 그곳에 가 앉는 사이,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으로
향했다.

마주 본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접


견을 수락한 미희였다.

“탁 비 쩔쩔매던데. 혼냈어? 왜?”

“남의 팀 일에 신경 끄고.”

“쟨 일 잘해서 너한테 혼날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런 거 보면 재밌


잖아.”

“각설해. 선배도 나한테 용무 있어?”

“아, 응. 내가 먼저 할게. 이거 검토 좀 해 주라.”

그녀가 건넨 봉투를 열어 보니 서류가 한 부 담겨 있었다. 그걸 꺼


내 들어서 차분히 읽기 시작하는 세헌에게 미희가 설명을 이어 갔다.

“내가 펌 대표인데, 왜 네 컨펌을 안 받으면 마음이 안 놓이지는 모


르겠어. 쪽팔려서 이거 어디 내놓고 말할 수도 없고…….”

내용은 금융 팀이 현재 다루고 있는 금융 분쟁 사건의 간략한 요약


자료였다. 뒷면에 별첨으로 프로젝트 관련 TF팀 구성 계획이 달렸
다. 금융 거래 전문가들은 물론 송무, 국제 거래 등의 각 분야에서
뽑은 전문 인력들 이름 목록이었다.
사락, 프로필이 적힌 종이를 뒤로 넘기는 세헌의 눈이 신중한 빛깔
로 젖어 갔다.

“법무부 자문 위원……. 정부가 어깃장 놓고 싶어 하는 눈치라 이


타이틀은 필요해. 금융감독원 위원이랑 관세청 위원이 없군. 왜 안
넣었어?”

“금융 팀 변호사들 중에 딱 써먹을 인력이 없어서 그래. 다들 이번


분기에 바빠.”

“무슨 소리야. 구색은 맞춰야 돼. 순 검사장 출신만 있고. 싸우자는


건가?”

“역시 그렇게 보여?”

“이 리스트 쓰레기야. 누가 짰어?”

“나.”

“다시 짜.”

툭, 서류와 봉투를 한데 겹쳐 탁자 위에 가볍게 던지자 미희가 그걸


집어 들었다. 그가 보자마자 기각할 줄 알았다는 양 한결 마음이 편
해진 표정이었다.

“사건 따 와서 하나씩 몰아 줬더니 쓸 놈이 없어서 그런다. 나라고


이러고 싶겠니.”

“쥐어짜. 그게 대표 능력이지.”
“차라리 세헌이 네가 금융 팀 일도 좀 봐 줄래?”

“사람을 더 뽑는 게 훨씬 빨라. 나 말고 리쿠르트 팀장한테 부탁


해.”

“금융 팀 일이 별로면, 공동 대표는 어때?”

이 말을 들은 세헌은 멈칫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냉정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그의 눈길을 마주한 미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반응으로
미루어 잘못 들은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의 도국을 만든 데 세헌의 공이 지대하다곤 하지만, 근원적으


로 이 로펌은 미희의 아버지가 아주 성실하게 일군 밭이기도 했다.
그런 제반 상황을 포함해 이 펌의 입지와 규모까지 모두 고려하면 아
무리 영입 대상이 강세헌일지라도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
녀는 설득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어느 모임을 가도, 대표는 난데 네 얘기만 해. 웃긴 건 자존심도


안 상해. 다 사실이라서. 이럴 거면 너한테도 감투를 주는 게 내 입
장에서도 훨씬 이득이지.”

자기 객관화가 매우 잘되어 있는 그는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는 제의가 아니란 것쯤은 눈빛만 봐


도 잘 알았다. 오래 알아 온 사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을 위에 두었을 때와 달리, 책임이 무거워진 현 상황이
미희는 꽤나 버거운 듯했다. 실제로 예전보다도 더 세헌에게 선택과
결정을 의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제안인 게 분명했다.
“계산기 두드려 보니 7년이 너무 짧더라. 해마다 연말 카운트다운
하는 느낌이 들어.”

“제안은 고맙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그녀는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어디 얽매이는 것도 싫어하고, 다 잡은 고기도 싫어하잖아.


그래도 도국 정도면…… 관심 없어도 쥐고 있을 만하지 않나? 우리
업계 2위 펌이야. 1위 탈환까지 곧일 거고.”

“선밴 나랑 파이 나눠 먹는 거 상관없어?”

“네가 뒤통수만 치지 않는다면 파이는 상관없어.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가져야지.”

“날 믿나? 내가 취임해서 선배가 목숨처럼 여기는 도국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 줄 알고.”

“100퍼센트는 못 믿지. 네가 나한테 그런 것처럼. 그런데 세헌아,


나도 이제 네 약점 알아. 네가 도국을 치면 난 너 말고 그걸 칠 거야.
걔 하나 밟는 거 나한테 일도 아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그는 몹시 불쾌해하며 냉랭한 시선을 보


냈다. 그녀는 세헌과 윤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극소수였다. 단 한 번
도 그의 입으로 직접 확실히 해 둔 적은 없지만, 일련의 상황을 통해
익히 짐작하고 있음을 서로 인지했다.

그렇게 날 세울 거 없다는 양, 미희가 덧붙였다.


“공생을 하자는 말이야. 이 정도 규모 펌 대표라기엔 너무 젊어서
꼰대들 거부감은 있겠지만 다들 네가 얼마나 대단한 변호사인지는
아니까 문제없어. 수치가 있는 지표로 설득하면 다들 동의해 줄 거
다.”

오래전 미희로부터 도국의 파트너가 되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


았을 때 손쉽게 출자를 결정했던 건, 직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꾸
이곳저곳에서 그의 판단에 어깃장을 놓는 일들을 참기가 어려워서였
다. 결과적으로 보면 늘 세헌이 맞았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고 윗선을 설득해야 하는 게 엄청나게 쓸모없는 소모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현재 그는 일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어 그런 무거운 직함까


진 불필요했다. 아울러 공동 대표가 된다면 앞으로 남은 변호사로서
의 삶도 도국과 뗄 수가 없어질 터다.

하나,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마따나 판돈이 워낙


큰지라 승리하고 성취하는 데 매력을 느끼는 그의 구미를 당기는 것
도 사실이었다.

그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니 또한 이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 그녀


가 이어 말했다.

“고민해 봐. 너만 마음의 결정 내리면 바로 타진할게. 그럼 내 얘긴


일단 여기서 갈음하고. 네 용건은 뭔데?”

그의 용건이지만, 실은 윤신의 일이었다.


도국 내에서 팀장급은 주기적으로 로테이션을 돌았다. 변호사마다
대체로 주력하는 분야가 있긴 했으나 경력과 경륜이 쌓이면 큰 테두
리 안에서는 겹치는 게 많아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1년 전 바뀐 가사 팀장은 처음부터 윤신과 잘 맞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나쁘진 않았으나 두 사람의 가치관이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
가 윤신의 주장과 달리 바텀 업이 되는 스타일도 아닐 터다. 제 쪽에
서 설혹 손댈까 봐 농담처럼 얼버무렸다는 걸 명확히 느꼈다.

세헌은 윤신이 일을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는 그게


어울리니까.

“가사 팀장 교체 건.”

미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가사 팀장? 일을 썩 잘하진 않아도 영 못하진 않아. 사유는? 합리


적이어야 할걸.”

세헌은 단박에 대꾸했다.

“우리.”

“……웬 우리?”

“그 ‘우리’가 내 마음에 안 들어.”

이는 아주 비합리적인 이유였다. 맥락이 없어 억지로 납득해 보려


해도 그럴 수조차 없었다. 한데도 발화자가 강세헌이어서, 미희는 묘
하게 설득됐다.

“얼마 전에 네가 홍보 팀 보도 막았다는 얘기 들리던데. 혹시 그거


때문에 개기데? 아닌데. 펌 안에 너한테 개길 사람이 없는데. 도윤신
빼고.”

“…….”

“아아, 도이경 관장이 부탁해? 네 애인…… 아이고, 본인 동생 좀


잘 부탁한다고?”

“재밌지?”

“이런 재미가 있는 줄 몰랐던 지난 수십 년의 삶이 아까워 미치겠


다고나 할까.”

그가 진작 말하고 싶었던 화두라는 양 꽤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송 대표 부디 도윤신 앞에서 뭐 비밀스러운


거 알고 있다는 티 좀 내지 마. 가뜩이나 펌에 걔 편 없는데 왜 대표
눈치까지 보게 만들어.”

“도 변 반응이 귀여워서 그러지.”

“시니어가 보기엔 너무 까마득한 본인 위치는 생각 안 해?”

“넌 걔가 그렇게 아까워 미치겠니? 막 지켜 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네? 낯설게.”
“그거까지 귀하랑 상관있어?”

미운 눈치로 세헌을 흘긴 미희가 알아듣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


러나 대화는 여전히 위성처럼 그 주변부만을 빙빙 돌았다.

“어떻게, 그럼 너의 윤신이를 위해서 이번엔 뭘 해 줄 건데?”

“무슨 윤신이? 좆 깐다고 고생이다. 슬슬 짜증 나. 적당히 해.”

신랄한 대꾸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은 그녀가 빙글거리며 이어 물었


다.

“좌천?”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세헌은 공과 사의 구분을 지어 주는 분


계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사 팀장이 펌에 당장 손해를 끼친 게 없
으니 그건 합당하지가 않았다. 일차적으로 징계를 본인이 납득 못 할
테고, 다른 직원들 보기에도 안 좋았다. 사기가 저하될 터다. 무엇보
다 윤신도 이런 결말을 원하진 않을 게 명백했다. 그렇다면 채찍보단
당근을 주는 게 현명했다.

“일은 못하지 않는다니 돈 되는 금융 팀으로 보내. 마침 바쁘다며.


거긴 연차 쌓인 인간들 득시글거리니까 팀장급이 들어와도 문제없을
거야. 본인도 욕심이 있는 스타일이면 만족할 거고. 공석된 팀장 자
린 가사 팀 부팀장 승진시키면 될 것 같다.”

“부팀장? 걔는 또 왜 갑자기 승진을 시키재. 인사철도 아닌데.”

“내 마음에 들어.”
못 들을 얘길 들었다는 양, 미희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달처럼 떠
올랐다. 세헌의 입을 가르고 나온 말이라곤 믿을 수가 없다는 기색이
었다. 실제로 가사 팀 부팀장은 그의 밑에서 한 번도 일해 본 적이
없어 접점이 전무했던 터였다.

그 덕분에 궁금한 게 아주 많았으나, 그녀는 이 사안에 윤신이 조금


이라도 걸려 있는 이상 그가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을 걸 지난 시
간 동안 충실하게 학습했다.

“뭐…… 네가 웬만하면 청탁 같은 건 잘 안 하기도 하고. 또 네가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알겠다. 이럴 때 점수를 따야지. 얘기해 둘
게. 수고해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각자 나설 방향으로 이동했다.


미희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세헌이 집무용 책상 앞으로 되돌
아와 앉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밤의 어스름이 스멀스멀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금융 팀 일이 별로면 공동 대표는 어때?〉

그녀가 남기고 간 제안을 떠올리고 있자니 왠지 윤신이 제 곁에 있


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인생의 항로를 정할 때,
세헌은 윤신을 떠올렸다. 뭐든 혼자 하는 게 삶의 암묵적 습관이었던
자신이 이제는 둘이 함께 머리를 맞대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생각이 듣고 싶었다.


한데 늘 고개를 들면 가시거리에 있었던 윤신이 어디에도 없어, 솔
직히 약이 올랐다.

‘공동 대표라…….’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듯 엄지와 검지로 차분히 쓸어


내리던 그가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돌렸다.

* **

같은 시각.

창문 밖을 내다본 윤신이 인기척을 듣고 돌아보았다. 쌍방 의뢰인


인 정아가 샘플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윤신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
서 그녀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반지 모형을 눈에 담았다. 아직은 백색
의 라운드 링 형태일 뿐이어서 투박했다.

“모양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네. 기본 세공은 된 거예요. 최종적으론 여기서 호수 조절을 하고


요. 이 부분을 매끈하게 깎아서 시안 같은 형태가 되고요. 이렇게 진
행하시겠어요?”

시안 중 하나는 깔끔한 백색 링의 부드러운 곡선 끝에 살짝 모서리


가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다이아를 겉에 장식해 볼까도 했지만,
세헌이 평상시에 끼고 다닐 걸 고려하니 외부에 군더더기는 없는 편
이 나을 듯했다. 그래서 안쪽에 한 겹 여유를 두고 작은 다이아를 박
았다.

또 다른 하나는 제 것이었다. 재질이 같은데 똑같은 모양이기까지


하면 안 될 듯해 일부러 판이하게 만들었다. 세헌의 것과 같은 백색
의 링 측면에 다이아를 촘촘하게 박았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링을 겹
치면, 한데 포개어졌다. 안쪽 보이지 않는 자리에는 서로의 이름을
각인했다.

“애인분 호수는 아직 모르시는 거죠?”

“네. 제가 손가락으로 이렇게 말았을 때…… 이 정도?”

윤신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자, 그녀가 웃었다.

“어림짐작으로 좀 크게 만들게요. 작은 건 못 늘려도 큰 걸 줄이는


건 가능해요.”

“그럼 이 측면 다이아보다 내부 다이아를 더 크게 제작해 주세요.


얼마나 걸릴까요?”

“실은 제가 세공을 다 혼자 하느라…… 뚝딱 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도 다음 주 중엔 드릴 수 있어요. 가능한 한 빨리 연락드릴게
요.”

이미 디자인하는 데만 꼬박 며칠이 걸렸던 참이었다. 그런 뒤 알맞


은 크기의 다이아를 주문하느라 일정이 하루 또 미뤄졌다.
장례식장에서의 첫 만남 다음으로 제게 강력했던 세헌의 인상은,
사택에서의 재회였다.

그때 본, 손톱이 깔끔하게 정리된 아름다운 손이 아직도 눈앞에 생


생했다. 길쭉한 손가락과 손등에 드러난 핏줄의 이미지까지 더해져
그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것도 어울릴 것 같고, 저것도 어울릴 것 같아 고민이


깊었다. 심지어 지난주 내내 공방 주인도 없는 빈 공간에 홀로 남아
다른 반지들을 보며 머리를 쥐어짜 내 그림을 그렸다. 겨우 완성본을
전달한 게 사흘 전이었다.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경호 업체에서 마


침 연락 왔거든요.”

“정말요?”

“네. 지난번 저한테 새벽에 전화하셨을 때 녹취랑 영상 너무 잘 남


겨 두셔서. 그거랑 몇 가지 증거만 더 확보하면 될 것 같아요. 소송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요.”

“다행이다……. 그런데 남편이 변호사님께서 여기 왔다 갔다 하시


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거 같아요. 정말 괜찮을까요?”

“의처증이 의심된다는 주장을 하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뭐가 없으


니까요.”
“하지만 꼭 거기로 안 찾아갈 수도 있잖아요. 다른 식으로 분출이
라도 하게 되면…….”

정신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규격화된 행동 패턴이라는 게 있었다.


특히 사건을 맡으면서 편집증이나 의처증이 있는 배우자들의 양상을
정리해 보니, 거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에 하나를 위해서 경호 업체를 고용하는


거니까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윤신을 마중했다. 그는 다시 한번 묵례하곤


차에 올라탔다.

핸들을 쥔 윤신이 의뢰인을 뒤로하고 주택들이 가득한 골목을 서행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마침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니 세헌이었다.

곧 반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들뜬 윤신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 어디야.

“아, 의뢰인 만나러 왔는데요.”

- 또?
왠지 상대방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깊게 잠긴 것 같았다. 잠시간
해저의 한가운데 빠져들었다 나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동안 계속
제대로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그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다는
건 눈치챘다. 솔직히 자신도 슬슬 곤란하던 참이었다. 얼른 세헌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조금 높이게 됐다.

“지금 막 나왔어요. 댁에 계세요?”

- 응, 댁에 계셔. 데리러 가?

“아니에요. 차 안이에요. 제가 곧 갈게요.”

- 윤신아.

“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꾹꾹 억눌린 침묵이 이어졌다.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세헌은 제 이
름을 진중하게 불러 놓고 별말이 없었다. 기분이 이상해 뒷말을 부추
기려는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냐. 얼른 와라. 보고 싶다.

언제 들어도 그의 고백들은 귀에 달콤했다.

자신도 모르게 잠시간 숨을 참고 있다가, 겨우 대꾸했다.

“저도 사랑해요. 쏜살같이 갈게요.”


귀엽다는 양 세헌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상시에 웃을 일이 별
로 없는 그라서, 세헌이 이럴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핸들을 고쳐 쥐는 윤신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06.

침실로 들어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윤신의 발걸음이 매


우 조심스러웠다.

그는 세헌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가선, 곁에 소리 죽여 쪼그려


앉았다. 더 가까이 가 닿고 싶지만, 침구가 들썩거리면 곤히 잠든 이
를 깨우게 될까 봐 어쩔 수가 없었다.

제게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거였다. 이렇게라도 이 남자를 미


리 봐 둬야 오늘 하루를 용감하게 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신은 차분히 숨을 내쉬며 수마에 사로잡힌 세헌을 꼼꼼하게 관찰


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 달빛에 시야를 의지해야 했으
나, 그래도 가까이에 있으면 미세한 표정 변화가 들여다보일 정도는
돼 다행이었다.

‘잘 자네.’

언젠가 세헌이 했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뭐 하긴. 무슨 꿈 꾸나, 잠은 안 설치고 잘 자나. 가만히 보는 거


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강세헌이 왜 그때 그
런 말을 했었던 건지 잘 알았다.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 사실을 인지


했던 몇 년 전 그 어느 날,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이미 빠진 뒤라는
걸 통렬하게 깨달았다. 재미있는 건 벗어날 생각이 그때도, 지금도
전혀 없다는 점이다.

‘조물주가 밤새워서 만들었나.’

옆모습의 곡선을 따라 눈 운동을 하던 윤신은 서서히 밑으로 시선


을 끌어 내렸다. 긴 목 위에 유난히 도드라진 울대뼈를 지나 더 내려
가자, 그의 단단한 어깨가 보였다. 상처가 가득했다. 새로 생긴 것도
있었고, 오래돼서 많이 아문 것도 있었다. 모두 자신이 통증을 견디
며 긁어 댄 훈장들이었다. 세헌의 몸에 매달려 잔뜩 헤집어 댄 등 쪽
은 훨씬 더하리라.

늘 섬세하게 끝까지 채우는 단추와, 그의 상반신을 덮은 드레스 셔


츠 아래 이런 저속한 흔적들이 가득하다는 걸 누가 상상할까.

약이라도 발라 주고 싶지만, 세헌은 곁에 누운 도윤신의 살결이 아


닌 다른 게 몸에 닿으면 득달같이 깼다. 그뿐만 아니라 몹시 조심스
레 방문을 여닫는 소리에도, 최저 데시벨의 진동 소리에도, 복도 끝
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가정부 아주머니의 발걸음 소리나 관리실에
서 걸려 오는 월패드의 아주 작은 알람에도 모두 민감하게 반응했다.
처음에는 그저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그런 건 줄 알았다. 종종 평균
이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강세헌은 그런 게 누구보
다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같이 지내다 보니 단순히 잠귀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애초


에 깊은 잠을 들지 못해서 그런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늘 긴장하고
있거나, 어쩌면 가장 개인적인 공간마저도 그에게는 편치가 않거나.
어느 쪽이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자신이 껴안고 함께 잠들면 그래도 그럭저럭


순하게 새벽까지 안 깨고 잘 버틴다는 거였다. 해서 웬만하면 윤신은
세헌보다 단 1분이라도 더 늦게 일어나려고 노력했다. 그걸 요사이
계속 못 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까지만 바쁠게요.’

일부러 새벽부터 출근하는 건 낮에 짬을 내 일산에 있는 의뢰인의


공방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업무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기에 제
개인 시간을 쓰는 거였다.

어젯밤 직접 디자인한 반지가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커플들처럼 단순히 커플링을 나눠 낀다는 개념으로 이 행위를


해석해선 안 됐다. 제 상대는 강세헌이었다. 이 연애는 강세헌이 도
윤신을 전방위로 구속하는 행위였고, 그 반대로는 아직 그가 허락하
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고로, 이는 난공불락이었던 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불편하게 쪼그려 앉은 윤신은 무릎을 더 좁게 모았다. 온갖 생각이


뇌리에 가득 찼다.

자라는 동안 한 번도 잠자리가 평안한 적 없었을 그가, 이렇게 얌전


히 잠든 무방비한 모습이 애틋했다. 제게 침입을 허락한 이 사적인
공간에서 그가 누리는 안온한 생활의 일부가 너무나도 아깝고 사랑
스러웠다. 어쩌면 두려움이고,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르는 그의 순간
순간이 다 빈틈없이 제 것이었으면 좋겠다.

강세헌은 무슨 꿈을 꿀까.

왜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내 꿈 꿔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어 속삭이듯 묻는 순간, 세헌이 몸을 모로 틀


어 뒤척였다. 그러고는 꼭 기분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그가 잠결에 자세를 고쳐 제 쪽을 봐 준 건 좋았다. 풍성한 속눈썹


과 희고 깨끗한 피부, 미끈한 눈두덩이나 날카롭게 뻗은 콧대 같은
것들이 잘 보였다. 옆으로 누우면서 음영이 두드러진 얼굴이 아름다
웠다. 다만, 닭살 돋는다는 듯 순식간에 좁아진 양미간이 거슬렸다.
산통 깨는 재주는 좀 없었어도 좋으련만.

울컥한 윤신은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찌푸린 부위를


다리미로 펴 주듯이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힘을 주면 깰까 봐 몇 번
어설프게 그러자 다행히 느릿하게 미간이 다시 펴졌다.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은 무릎에 두 팔을 다시 올리고, 그 위에 턱


을 괸 채 그를 직시했다.

계속 탐색하듯 주시하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배 잠들어 있을 땐 제가 지켜 줄게요. 그러니까 푹 자요.”

이번엔 세헌도 미간을 구기지 않았다.

고개를 좌로 했다가, 우로 했다가 한참을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관


찰하던 윤신은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혹 문 닫는 소리가 잠든 그를 언짢게 만들까 봐 아주 미세한 틈을


남기고 열어 두었다. 벌어진 좁은 틈새로 윤신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
져 갔다.

삐릭.

꽤 아득하리만치 먼 곳에서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


다. 자동 반사적으로 슬그머니 떠진 세헌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눈매에는 느른한 잠기운이 스민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도리어 또
렷하고 청명했다.
사실 그는 이미 윤신이 제 품에 안겨 있다가 일어나 씻으러 들어갔
을 때부터 깨 있었다. 이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든 윤신의 몸을 힘
껏 끌어안은 뒤 하루를 시작하는 게 습관이 돼서, 부들부들한 살결의
촉감이 사라져 버리면 바로 정신이 들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세헌의 상체에서 시트가 스르륵 내려갔다. 반라인 그


의 상반신 군데군데에 손톱을 세워 긁어 댄 상처가 만연했다. 마른세
수한 그의 눈길이 비어 있는 옆자리로 향했다.

이따금 도윤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선배 잠들어 있을 땐 제가 지켜 줄게요.〉

“옆에나 잘 붙어 있을 것이지.”

탁, 푹신한 베개를 침대 밑으로 내던져 버리는 그의 손길에 신경질


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제기랄, 반지를 남극에서 빙하라도 녹여 만들어 오는 건가?”

2주째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의 사정거리 내에서 통제되던 도윤신이 몰래 외부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말없이 들락날락한 것도 벌써 2주째였다. 어디까지 자신을
시험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인내심 없는 그로선 이게 최대치였다. 윤
신의 설레고 벅차 하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버텨 주고는 있지
만 슬슬 한계가 오는 걸 느꼈다.

아무나 툭, 건드리면 폭발할 지경이다.


끝내 세헌은 하루의 기분을 서막부터 가열히 망친 채로 일어나 욕
실로 향했다.

* **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세헌의 안색이 떼꾼했다.

자연히 비서실 내부가 폭풍 전야처럼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평소 며칠을 꼬박 새워도 별 타격 없을 만큼 가공할 체력의 소


유자라는 걸 비서실 직원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오늘 유난히 세헌의
컨디션이 저조하다는 걸 인지한 그들이 일부러 회의 전 프로젝트 팀
원들에게도 그의 상태에 대해 미리 경고해 둔 차였다.

다행스럽게도 선수 쳐 경고장을 날린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았다. 세


헌의 뒤를 이어 회의실을 연달아 빠져나오는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
한 기미가 가득했다.

팀원들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향해 걸어온 세헌을, 매우 긴장하고


있던 탁 비서가 빠르게 앞질렀다. 그렇게 집무실 문을 열고 기다리는
데, 내부로 들어서려던 그가 별안간 비어 있는 윤신의 사무실을 확인
하고 멈춰 섰다. 사나운 눈매엔 이런 글자들이 쓰였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말없이 불 꺼진 공간을 쳐다보는 세헌에게, 탁 비서가 넌지시 물었
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한테 말씀을 하시면…….”

“도윤신 또 어디 갔어. 설마 또 거기야?”

“오늘은 점심시간 이용해서 다녀오시겠다고 했어요.”

쌀쌀맞게 대꾸하는 세헌의 말투가 유독 신랄했다.

“아아, 이젠 퇴근하고 가는 게 아니라 업무 시간에. 대놓고.”

“그…… 일부러 일찍 나오셔서 처리하실 일 다 하셨고요, 서류에


서명도 다 해 주셨고…… 업무에 지장 없이 움직이시는 거예요. 마침
좀 전에 펌 도착하셨다고 하거든요.”

이래서 일찍 나간 거였군.

꽉, 옆면의 파티션을 쥐는 세헌의 손등에 핏줄이 바짝 섰다. 스트레


스가 혈당 오르듯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아서 당장 여기 있는 물건들
을 다 갈겨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 역전이 싫었다. 자신이 일에 매몰돼 한 달이나 제대로 윤신


을 만지지도 못하고 내버려 두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초조함, 조바심, 불안, 안달.

그리고 약간의 의심.


도대체 도윤신은 이것들을 어떻게 견뎠던 건지 감조차 안 왔다. 아
무리 상응하는 보상을 약속했다지만 어떻게 단 한 마디도 보채지 않
고 이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을 참아 넘겼는지도 말이다.

애정의 밀도 차이인가?

아니면 내 쪽이 강박 상태인가?

가능성은 비등비등해 보였다.

이를 간 세헌이 파티션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집무실로 들


어서려던 때였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탁 비서가 음성을 낮춰 세헌에
게만 속삭이듯이 덧붙였다.

“조금 전에 차량 주차장 통과했다고 알림 왔어요. 곧 올라오실 거


예요.”

탁 비서를 쳐다보는 세헌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거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매서운 시선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던 그는, 머뭇거림 없이 돌
아섰다. 일분일초도 참지 못하겠다는 양 승강기 방향으로 걸어가는
세헌의 뒷모습에 아래부터 들끓는 분노가 설핏 비쳤다.

따각. 따각.

그가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는 복도에 낮은 구두 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중앙 로비로 향하는 모퉁이에 다다르자, 때마침 승강
기에서 내린 윤신이 작은 서류 봉투를 품에 꼭 안으면서 마주 걸어오
고 있었다. 그는 세헌을 발견하곤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공손하
게 꾸벅 인사했다. 그러고는 뭔가 말을 걸고 싶은 모양새로 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였다.

고요한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세헌은 못마땅해하는 눈빛으로 윤신을 직시했다. 그 시선을 의아해


하던 윤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거의 동시에 서로의 유려한 입술이
벌어졌다.

“왜 여기 나와 계세요?”

“너 뭐 하는 새끼야.”

세헌은 미동이 없었으나, 윤신은 어깨를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 냉랭한 표정, 그리고 제게 불만이 있는 게 분


명한 적대적 태도가 신경 쓰였다. 그가 속으론 싫지 않으면서 겉으로
거부할 때의 감각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개의하게 됐다. 지금 세
헌은 진짜로 골이 났다.

그러나 자신이 뭘 잘못한 게 있나 고민해 봐도 딱히 찾기가 어려웠


다. 당장 급하거나 시간 맞춰 해야 하는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나갔다. 미비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부터 해결하면 되
는 일이었다.

영문을 알지 못해 그의 대답부터 구하고 싶었다.

“선배 왜 화났어요?”
질문과 동시에 윤신은 품에 안은 작은 서류 봉투를 신줏단지라도
다루듯 정성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달싹이는 손가락 끝에는 밴드가
하나 붙어 있었다. 하얀색 배경에 토이스토리 캐릭터들이 돌아다니
는 모양새였다.

그걸 본 세헌이 윤신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벽 쪽으로


서로의 몸을 겹쳐 밀착하듯 윤신을 몰아붙였다.

타악.

등이 딱딱한 면에 부딪힌 윤신의 눈살이 통증으로 구겨졌다. 아픈


것도 아픈 거였고, 세헌의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인 것도 있었지만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건 이곳이 그들의 회사라는 점이었다.

여긴 다들 자중하는 사택과는 달랐다. 몇 분 사이 수십 명의 직원들


이 왔다 갔다 했다. 당장 저 승강기에서 바로 사람이 내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걸 의식해 세헌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팔을 비
틀었다.

“할 얘기 있는 거면 조용한 데로 가요.”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너 뭐 하는 새끼냐고.”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이건 꼴같잖게 왜 이래?”

“윽……!”
확, 난폭하게 끌어 올린 검지에는 밴드가 말려 있었다. 그걸 본 윤
신이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반지를 받으러 공방에 갔다가 열을 식
히고 있는 기다란 플래티넘 막대에 손을 대 데어 버린 상처였다. 그
걸 자세히 설명하려면 시간이 좀 소요될 듯해 말을 고르고 있는데,
마침 승강기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화들짝 놀란 윤신이 세헌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힘껏 밀어냈


다. 겨우 떨어진 두 사람의 뒤로 변호사들 몇몇이 지나갔다. 그들이
세헌에게 공손하게 인사했지만 그는 오로지 윤신에게 시선을 고정하
고 있느라 봐 주지도 않았다.

지금의 강세헌은 꼭 활화산 같았다. 언제 터져 버릴지 불안했다. 어


제 새벽만 해도 이런 기미가 없었는데 갑작스러웠다. 안 되겠다 싶어
진 윤신은 지지난 주쯤 그들이 키스를 나눴던 비품실로 세헌을 억지
로 끌어당겼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내부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그 안에 세헌과 자신을 모두 가


둔 채, 안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두 사람이 뜨겁게 입 맞추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던 이 장소에서,


이유도 명확히 모르는 갈등으로 세헌과 다투고 있자니 돌연 서러움
이 북받쳤다.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걸 참아 내느라, 윤신은 한참
을 더 침묵했다. 한데 그게 세헌의 분노를 더 부추긴 듯했다.

“끝까지 대답을 안 하시겠다.”


이윽고 그는 윤신의 손가락에 돌돌 말려 있는 밴드를 벗겨 버렸다.
끈적하게 살갗을 감싸고 있던 얇은 쪼가리가 떨어지자, 표피가 벗겨
져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꽤 아찔한 장면이 그들의 시야에 들
어왔다. 세헌이 미간을 구겼다.

“이건 왜 다 헐었어. 누가 빨아 주기라도 했나 봐?”

다짜고짜 당하고 있는 것도 황당한데, 이런 몰아붙임에 윤신은 정


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선배 같은 변태 아니고서야 누가 제 손을 이렇게 표피 다 벗겨질


때까지 빨아요?”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지. 밖에서 좆질하면 넌 그냥은 못 죽는다


고. 농담 같아?”

“좆질, 허……!”

그 어떤 말보다도 기막혀 황당해진 윤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화


가 나서 눈가가 떨리고, 뺨도 경련했다. 윤신은 대체로 순한 편이지
만 부당한 순간에 침묵하는 스타일은 못 됐다.

“일을 너무 해서 미치신 것 같은데 나 붙잡고 이러지 말고 어디 요


양이라도 가서 좀 쉬지 그래요. 같이 가 드려요?”

최대치로 비꼬는데도 세헌에게 타격을 전혀 주지 못한 듯했다. 그


는 가뿐히 무시하고 제 할 말만 내뱉었다.
“여태 넌 단 한 번도 나한테 의심 산 적이 없었어. 난 네가 어디 가
서 뻘짓 할 거라곤 상상조차 안 했다고. 왜? 넌 거짓말도, 숨기는 것
도 안 하거든. 묻기 전에 자판기같이 다 불거든. 몇 시에 뭘 할 건지.
누굴 만나는지. 용건은 뭐였는지! 거기서 나랑 떡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까지!”

“누가 듣겠어요! 진짜 왜 이래, 오늘!”

아무리 비품실 안이라지만, 언성이 이 이상 높아지는 건 위험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우려된 윤신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하나 세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만큼 도윤신 네가 쉽고 뻔한 새끼란 뜻이지. 그럼 너는 계속 나


한테 쉽고 뻔해야지. 왜 일을 어렵게 만들어.”

“요지가 뭡니까, 대체. 선배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고 싸우고 싶다고요.”

“너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내가 어디가 잘못된 것 같아. 넌 나를


믿는다는데, 난 너를 못 믿겠다고. 왜 네까짓 게 할 수 있는 걸, 나는
못 하지?”

일순 윤신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일차적으로 당혹스러워서였다. 오


해 살 만한 일을 한 게 있나 돌이켜 보니, 그런 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복잡하게 요동치는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울리지 않게 감정이


격해진 듯한 세헌이 날카롭게 덧붙였다.
“네 부재가 나를 불안하게 해. 불쾌해. 왜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
로 이런 엿 같은 감정을 느껴야 돼.”

“선배 지금…… 혹시.”

“그러게 왜 설명도 없이 날 방치해. 너랑 나 사귄 지가 대체 몇 년


째야. 내가 이런 거 제일 못 견뎌 하는 거 몰랐나? 네가 그 공방 가서
여자랑 시시덕거리면서 반지 같은 거 만들어 오면, 너 기다리면서 혼
자 침실에 처박혀 있던 내가 고마워하며 넙죽 받을 줄 알았어? 그
래?”

잠자코 듣다 멈칫한 윤신의 어깨가 느릿느릿 들썩였다. 직접 반지


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 안 했다. 제 행
보는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해 주는 걸 알아서,
이런 식으로 어이없게 털어놓게 만들 거라곤 예상 못 했다.

어디부터 답변해야 할지, 그게 정답이 맞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


었다. 윤신은 열없이 눈만 깜빡였다. 펌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서로
의 사랑이 더욱 견고해지는 그림들을 그리며 행복감이 물씬했다. 그
런데 10여 분 만에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세헌의 옷을 쥔 손을 풀진 않았다. 그러자 그가 그걸 지


그시 내려다보다가, 매정하게 쳐 냈다. 그 행위는 그에게도, 윤신에
게도 서로 상처였다.

망설이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세헌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한 번 거부당해서 선뜻 끌어안지는 못하고, 거리만 좁힌 채로
애써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오해받을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어요. 같이 있던 시간도 얼마


안 돼요. 정보 교환이 필요한 순간 외엔 늘 따로였어요. 여러 마리
토끼 한 번에 잡으려던 거였다고요. 선밴 언제나 그랬듯이 다 알 거
라고 생각했고요.”

같이 화를 내는 대신 그를 설득하는 이유는, 그의 감정이 손에 잡히


듯 만져졌기 때문이다. 세헌은 낯설게도 상실이 두려워진 모양이었
다.

그건 두 사람의 역할이 예고도 없이 바뀌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


다. 그들의 관계에서 기다리는 이는 대체로 윤신이었다. 세헌이 훨씬
바빴다. 자연히 그가 사이를 조절했고, 모든 사안을 숙고한 뒤 결정
했다. 아울러 뭔가를 주는 건 그였고, 그건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터
다.

온전히 이 관계를 틀어쥐고 있던 와중, 그 모든 게 사실은 윤신이


그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느끼며 전혀 미동하지 않았기에 가능했
던 일이라는 걸 마지못해 인정한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을 촉발시킨 건 제게도 책임이 있는 셈이었다. 그가


인생에 자신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매 순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초조해서 쥐락펴락하고 싶어 하는 서툰 사람이라는 걸 기
억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조급했던 나머지 일부러 미뤄 두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두 팔을 뻗어 세헌을 안아 주려고 하자, 그가 한 번
더 윤신의 손길을 밀어냈다. 꼭 맨 처음 제게 마음을 쓰면서도 거부
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안 어울리게 왜 2주나 참아 줬어요. 별말 없어서 괜찮은 줄 알았어


요.”

“내가 못 참겠다는 이유로 네 계획을 망쳤어야 맞는다는 거야?”

“네. 얼마든지요. 왜 안 돼요? 짓밟고 망치는 거 세상에서 제일 잘


하면서.”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건방 떨 건가?”

“네. 전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도 나한테 뭐든


해도 돼요.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그때의 제가 화 짧게 내고 어떻게
든 하겠죠. 저도 그 정도 순발력은 있어요.”

“…….”

“난 하는데, 왜 선밴 못 하냐고요? 강세헌이 나보다 겁쟁이니까요.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면서 이렇게 명백한 사실
관계에서 도망치지 마세요. 어차피 난 감추는 것도 못해서 선밴 내가
자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잖아요.”

그가 불안한 건 강세헌이 도윤신을 더 좋아해서도, 윤신의 삶에 다


른 잃을 것들이 많이 존재해서도 아니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
만 세헌이야말로 내심 제대로 느끼고 있을 터다. 자신 또한 다 버리
고 그에게 전부를 던진 지 오래라는 것을 말이다.

빌어먹을. 윤신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듯 욕지거리를 삼킨 세헌이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한 박자 늦게 뭔가 반박하려
던 찰나였다.

동시에 윤신의 재킷 주머니 속 휴대폰이 주파수 높여 진동했다.

한풀 누그러졌던 두 사람 주변의 공기가 다시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그가 ‘또야.’ 하듯 지겨운 얼굴을 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씹


듯이 말했다.

“또 득달같이 쫓아가야지. 받아 봐.”

새벽녘 타인의 연락을 받느라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았던 기억이 떠


오른 윤신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어 민망해졌다.

이제 보니 갈등의 씨앗은 모두 자신이 차곡차곡 뿌리긴 했다. 휘황


찬란한 꽃은 그가 혼자 물 주고 키워 끝내 피웠지만.

“우리 얘기 먼저 끝내고요.”

“안 그래도 오늘쯤 터질 것 같았어. 네 말이 머리론 이해되는데 그


빌어먹을 진동 소리 들으니까 또 화가 나. 아무래도 난 진정할 시간
이 필요한 것 같다. 이따 다시 얘기하자.”
붙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그가 문 쪽으로 다가
갔다. 벌컥 열어젖힌 문을 뒤로하고 곧게 뻗은 다리를 내디뎠다. 빠
르게 뒤쫓으려던 윤신은 마침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여럿
내리면서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이 묶
였다.

이럴 때 세헌을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한데 금세 세헌이 모퉁이를 돌아가 버릴 것 같아서 초조했다. 결국


직원들 사이를 헤치고 윤신이 그를 쫓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누군가의 시선이 짧게 느껴지나 싶더니, 이내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파고든 웬 남자가 윤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 이 새끼, 어딜 가.”

“읏……!”

하필이면 벌겋게 까진 자리가 함께 잡힌 건지 찌릿한 통증이 밀려


왔다. 놀란 윤신이 가해자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자, 시선 끝에 익숙
한 얼굴이 바로 보였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뿔테 안경을 쓴 키 큰
남자였다. 제 의뢰인의 남편이기도 했다.

조금 전 휴대폰으로 온 전화는 의뢰인이 아니라, 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경호 업체의 연락이었던 모양이다. 펌까
지 따라 진입할 수가 없어 전화했던 것 같았다.
이 남자의 등장으로 올 것이 왔음을 인지한 윤신이 최대한 차분하
게 말문을 뗐다.

“무슨 일이신……. 헉!”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의 깡마른 손이 윤신의 멱살을 확, 붙들었


다.

“네가 도윤신이지. 도이경 동생. 딱 알아보겠네. 방까지 갈 것도 없


겠다. 너 잘 만났어.”

본능적으로 피해 보려고도 했으나, 이미 우위를 선점한 남자 쪽이


거칠게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전혀 방어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얼
결에 몸이 밀리고 말았다. 덕분에 윤신은 두 다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윽, 큭, 놓고 말씀, 하세요.”

“너 내 마누라 데리고 무슨 꿍꿍이야. 어? 어린놈의 새끼가.”

힐끗, 대답 대신 머리 위의 CCTV 위치를 확인한 윤신의 얼굴에 낭


패감이 서렸다. 최근 의뢰인을 자주 만나면서 그 사실이 남자의 귀에
도 들어가도록 유도했다. 다섯 살 난 아이도 함께 한 차례 만났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타입인 그로 하여금 이런 순간을 자초하게 만
들기 위해서였다. 다만, 장소가 안 좋았다.

여기서 소란이 벌어진다면 이 상황의 앞 장면까지 찍힌 영상을 펌


에서 증거물로 확보하게 될 텐데, 조금 전 자신과 세헌이 저 모퉁이
끝의 비품실 안에서 나란히 나왔던 터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강세헌은 비품실 같은 데 들어갈 만한 사람이


못 됐다.

미치겠네. 어떡해야 되지.

가뜩이나 세헌 때문에 복잡했던 차에 머리를 굴리면서 방어까지 하


느라 벅찼다. 제게 위해를 가한다고 해서, 의뢰인의 배우자에게 폭력
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조금 전 승강기에서 내린 직원
들은 도와주긴커녕 이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미움받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안 되겠다 싶어진 윤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뒤이어 탁 비서의


이름을 목청 높여 부르려고 입을 떼던 그 순간.

확, 제 멱살 쥔 남자의 손이 누군가의 참견으로 옷깃에서 강제로 떨


어져 나갔다.

“이건 또 뭐야!”

버럭 소리치는 남자의 음성이 맞은편 구세주에게 가 닿았다. 가빠


지던 숨을 겨우 추스를 수 있게 된 윤신도 감사하다는 표시로 그쪽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허억, 감사합니다…….”
그런데 질 좋은 천에 착 감싸인 기다란 다리와 구두코가 익숙했다.
마침내 다시 얼굴을 들어 상대를 마주 보았을 때, 정면에 보이는 게
지나치게 낯익은 외양이어서 당황했다.

“수석님?”

“너한테 원한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어?”

구원의 손길을 내민 등장인물은 다시 나타난 세헌이었다. 소란 때


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온 듯했다.

뒤도 안 돌아볼 것처럼 가 놓고, 꼭 저렇게 얼마 못 가 돌아본다.

윤신은 울컥했다. 그런 기색을 감추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그사


이 지켜보는 시선이 몇 배로 늘어났다.

세헌은 매우 짜증스러워하는 시선으로, 자꾸 눈을 피하는 윤신을


한번, 당황한 듯한 소설가를 한번 쳐다봤다. 곧 손에 단단히 틀어잡
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한데 모아 쥐었다. 그러고는 수갑을 채우는
것처럼 뒤로 넘겨 가뿐하게 엑스 자로 겹치게 해 상반신을 제압했다.
이윽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퍼억. 몸의 앞면이 벽면에 부딪힌 남자가 꽤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욱, 이, 넌 누구야!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힐끗 남자의 뒤통수를 살핀 세헌은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신선하군.”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안 놔?”

“이 펌 안에서 나한테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지껄이는 사람은 처


음이라서요. 얼굴 좀 봅시다. 이쪽으로 고개 돌려요.”

그는 바르작거리며 해 대는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턱을


한 손으로 힘껏 쥐었다. 얼굴을 난폭하게 옆으로 돌려 옆모습을 제대
로 확인하곤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워낙 대중적으로 유명한 소설가라 얼굴을 바로 알아본 듯했다.

“도윤신 변호사, 이거 치정극인가?”

그 와중에도 맥락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가 현 상황을 법정에서 활


용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게 느껴졌다. 이곳엔 증거, 증인, 모
두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배우자분 의뢰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치정은 아니다……. 너흰 뭘 처구경하고 있어. 보안


팀에 연락 안 해? 너.”

척,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변호사를 향해 턱짓하자 지명당한 주


니어 어쏘가 깜짝 놀라며 뒤늦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동안 동선이 통제된 상태였던 남자가 세헌의 빈틈을 노리려


고 몸을 달싹였다. 그걸 손바닥의 감각으로 인지한 세헌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머리채를 쥔 후 뒤로 훅 젖히면서 남자의 목울대가 벽면에
닿도록 밀었다. 필연적으로 남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트렸다.

“이거 놓, 욱, 웁…….”

“법무 법인 도국 소속 도윤신 변호사에게 폭력을 먼저 시도한 건


귀하고, 이에 따라 제 행동은 전적으로 임직원 보호를 위한 방어 행
위임을 알려 드립니다.”

완전히 상대방을 제압한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딱딱하고 고저 없


는 말투로 남자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서늘한 눈매와 형형한 눈
빛이 향한 건 윤신이었다. 그는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오직 윤신을 겨
냥해 비난하고 있었다. 그사이 지켜보는 관중은 더 늘어나서 송 대표
까지 나온 참이었다. 아비규환이었다.

어느 틈에 소식을 듣고 온 건지 제일 먼 사무실에서 일하는 세헌의


비서진들도 한 박자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탁 비서가 제일 먼저 군
중을 뚫고 다가왔다.

“강 수석님! 도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아니, 이분…… 그 작가님


아니에요?”

“보안 팀 출입 관리 똑바로 못 해?”

“유명한 작가분이라 우리 클라이언튼 줄 알았나 봐요. 바로 시정


명령 하겠습니다. 이분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쪽으로 넘겨주십시
오.”
“어떻게 파트너가 이러고 있는데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새끼가 탁
비 말곤 하나도 없어. 내가 얼굴이랑 관등 성명 매치해서 하나씩 족
치기 전에 꺼져.”

무대를 관람하듯 이 상황을 관전하던 직원의 대다수가 세헌을 비롯


한 간부급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곤 썰물 빠지듯이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어느새 남겨진 건 사건의 중심인물인 세 사람과 세헌의 비서
들, 미희, 그리고 세헌과 직위가 같은 몇몇 파트너 변호사들이었다.

그 대신 탁 비서가 남자를 통제하자, 훨씬 덜 강압적으로 저지당한


다고 느꼈는지 남자가 벗어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몸부림쳤다.

“이거 놔! 당신들 내가 싹 다 고소할 거야!”

세헌은 매우 한심해하며 ‘도국’이라고 쓰인 한글 명패를 올려다봤


다. 그러고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낮게 내뱉었다.

“……씨발, 가지가지.”

욕설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점점 남자의 저항이 거세졌다. 하는 수


없이 지켜보던 윤신이 같이 제지하려는데, 세헌이 손목을 꽉 잡아당
겼다.

“더 짜증 나게 만들지 마.”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대부분 남자를 더 자극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을 터다. 하지만 윤신은 그게 세헌 본인을 말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시선이 남자의 손이 닿았던 구겨진 옷
깃에 고정돼 있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세헌은 윤신이 클라이언트의 배우자에게 이런 취급을 당한 것 때문


에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게 한동안 윤신을 빼앗아 갔
다고 느낀 의뢰인의 남편이라는 점도 일부 그를 분노하게 했을 터다.
무엇보다 더 대갚음해 주고 싶은데, 애초에 이게 윤신이 의도했던 상
황이란 걸 알기에 망쳐 놓을 수가 없어서 욕구 불만으로 짜증이 치민
듯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타이밍 좋게 승강기 문이 열리고 보


안 팀 직원들이 나타났다. 비서들에게 남자를 인계받은 후, 멈춰 있
는 승강기에 다시 올라탔다.

그들의 뒤를, 상황 수습을 위해 탁 비서와 다른 비서들이 따라붙었


다. 탁 비서가 대표로 보고했다.

“우선 저희가 같이 내려가서 이분 경찰에 넘기고 서류 정리해 오겠


습니다. 증거로 제출할 CCTV 영상도 떠 올게요. 그때 수습 시작하시
죠.”

‘CCTV 영상?’

헉. 안 돼.

이 상황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져 있던 윤신이 한


단어에 꽂혀 흠칫했다. 곧바로 다른 승강기를 잡고 그들을 쫓으려는
데, 미희가 다른 파트너들에게 돌아가라는 듯 손짓해 들여보내곤 그
의 앞을 막아섰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다는 듯 손짓하는 건
덤이었다.

“이런 건 먼저 경찰에 넘긴 뒤 정리하는 게 제일 정석이야. 빠르기


도 하고. 비서들한테 맡겨. 그리고 자긴 나한테 상황 설명을 해 줘야
겠는데?”

“저기, 대표님. 영상을 제가 제일 먼저 확보를 해야 해서요.”

“왜 비서들이 하면 안 되지? 쟤들 일이잖아.”

주장은 있으되 근거로 댈 게 없어 곤란해진 윤신이 세헌을 쳐다봤


다. 눈으로 열심히 글자들을 작성해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는 매우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시선을 마주쳐 오다가, 쌀쌀맞게 고개를 돌
렸다. 그러고는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건지 돌아섰다.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세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의 몫이


기도 해서였다.

변호사로서 강세헌의 커리어는 도국에서 주춧돌부터 세워 서까래


까지 올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걸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망치게 두
고 싶진 않았다. 영상 확보는 제 쪽에서 제일 먼저 해야만 했다. 간
절한 시선을 던진 윤신이 미희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세헌
의 옷자락을 잡았다.

“세헌 선배.”
“건방지게 어디서 파트너 변호사 이름을 함부로 불러. 잘리고 싶
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담배 말려, 놔.”

탁. 팔로 윤신을 밀어낸 그가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그 안


에 담배는 물론 라이터까지 다 있었던 건지 윤신을 매정하게 지나쳐
승강기를 잡고 올라탔다.

지잉. 문이 닫히는 걸 보고만 있던 윤신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일


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희가 그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법조계에서 잔뼈 굵은 그녀의 눈치가 남들보다 매섭고 빨라
천만다행이었다.

“영상에 뭐 걱정되는 게 있나 본데 자긴 일단 내려갔다 와.”

“고맙습니다, 대표님.”

바로 버튼을 눌러 내려갈 승강기를 잡으려는 윤신에게, 미희가 덧


붙였다.

“도 변, 방금 거 강 수석 진심 아닌 거 알지? 쟤는 원래 말이 미운
애잖아.”

“잘 알아요. 아직도 매일 혼나요.”

정말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세헌이가 이런 일에 끼어드는 걸 다 보고. 좋은 구경 했다. 오늘
사내 메신저 먹통 되겠어.”

그 말 역시 전적으로 동의했다.

음성을 내뱉는 대신 묵례하는 것으로 답변한 윤신은 계속 침묵했


다.

미희마저 자취를 감추고, 로비에 홀로 남겨지자 별의별 생각이 머


릿속에 다 스쳤다.

종이 대신 반지를 담아 온 작은 서류 봉투를 품에 꼭 안은 채로, 세


헌이 밴드를 강제로 벗겨 버린 검지를 응시했다. 불그스름한 속살이
아까보다도 더 부어올라 있었다.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속상한 표
정이 된 윤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은 오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질 셈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려 옷 위에 흙탕물이 번지듯, 진창이


되고 말았다.
07.

상황을 대략적으로 매조진 윤신은 세헌의 집무실로 직행했다. 한데


그 안에 방의 주인은 없었다. 잔뜩 쌓여 있는 서류들만이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비서실을 지키고 있던 사무장에게 넌지시 묻자, 잘은
모르지만 위층으로 다시 가신 듯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대답을 들은 윤신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은 가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지면 이 건물 제일 높은 곳으로


향했다.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은 펌 층층마다 따로 있어서 옥상은 좀
처럼 사람이 방문하지 않았다. 그 정적이 편했다. 지나가듯 말한 적
이 있었으니, 세헌이라면 필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승강기를 타고 제일 고층으로 올라온 그는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사방을 살폈다.

‘있다.’
다행히 멀리 난간에 팔을 걸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길쭉한 뒷모
습이 보였다. 제 연인임을 확실히 확인하자마자 문부터 걸어 잠갔다.

“세헌 선배.”

인기척은 물론이고 제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세헌은 돌아보는 기


색이 없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그가 있는데도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윤신이 빠르게 그를 향해 뛰었다.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 뒤에
서 세헌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까처럼 뿌리칠지도 모르니 밀려나기 전에 보다 단단히 안겨야겠


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가만히 있어 주었다.

서로의 몸이 맞닿은 채로 수 초가 흘렀다. 세헌이 필터를 빨아들이


며 들숨을 삼키고, 날숨을 내쉴 때마다 탄탄한 몸이 차분하게 오르락
내리락했다.

윤신은 그를 껴안고 편안하게 하중을 기댄 상태에서 판판한 복부를


감싼 양손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마치 세헌을 자신의 좁은 세계 안
에 가두듯이 끌어안곤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너른 등의 근육들이 뺨
에 닿으니, 이 자세가 매우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윤신의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피는 꽃처럼 서서히 벌어졌다.

“언제 여긴 또 올라왔어요?”

나지막하게 꺼낸 말에도, 세헌은 별 대꾸가 없었다.


“나랑 말 섞기 싫어요?”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하나 앞의 마천루들만 보고 있던 세


헌의 관심이 실은 등 뒤에서 종알거리는 제게만 쏠려 있음을 모르지
는 않았다. 윤신은 제 얼굴을 그의 넓은 등에 문지르면서 차분히 말
을 이어 갔다. 목소리가 좀 더 분명해졌다.

“CCTV 원본은 통제실 가서 제가 직접 확보했어요. 앞부분은 잘라


서 넘겨야 할 것 같아서 추후 제출하겠다고 했고요. 선배 증언이 꼭
필요한데, 안 도와주시…… 겠죠?”

후우, 깊은숨을 내쉰 세헌의 어깨가 넘실거리는 낮은 파도처럼 한


번 들썩였다.

아까 전 위기 상황에선 본능적으로 움직였지만, 정리된 마당에 그


렇게까지 도와주기 싫은 모양이다. 기대도 안 했다.

“아무튼 일단 그분은 한나절 정도는 서에 계시게 하려고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뱉어 낸 세헌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고는 난간에 올려 둔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그가 새 담배를 태우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멈
춘 윤신이 아까 일이 어떻게 진척될 건지 이어서 상황 보고 하려 말
문을 뗐다. 그런데 돌연 세헌이 제 깍지 낀 손을 풀어내는 바람에 좌
절됐다.

왠지 분한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그의 두 팔과


상체 틈으로 양손을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눈앞에서 손 인사
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그러자 세헌이 이번에도 제 손을 뿌리쳤다.

“와…… 진짜 너무하신, 어?”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계속 튕기는 그에게 한 마디를 하려는데 갑자


기 세헌이 윤신의 늘씬한 두 팔을 끌어당겼다. 곧이어 난간과 본인의
몸 사이 아주 좁은 틈새로 윤신을 끼우듯이 욱여넣곤, 서로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후, 담배 연기를 얼굴로 직통으로 맞게 된 윤신이 세헌의 어깨를 내


려쳤다.

“눈 매워요.”

그러자 그가 얼굴을 기울여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다시 입에 필터


를 물었다.

“저도 해도 돼요?”

“…….”

“뭐라고 말 좀 해요. 목소리 듣고 싶어요.”

세헌은 대꾸 대신 한쪽 뺨을 내밀었다. 제 눈앞에 있는 뺨에 뽀뽀한


윤신이 와락, 그를 마주 껴안았다.

이미 빠듯하게 닿아 있는 서로의 몸을 더 바짝 마찰했다. 그 상태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윤신이 착하게 그가 먼저 입을 떼 주길 기다
리고 있자니, 마침내 귓전에 고대하던 음성이 들려왔다.
“윤신아.”

“아,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다. 네, 뭐든 말해요.”

“나 공동 대표직 제안받았어.”

곧바로 제 상체를 뒤로 늘어뜨리듯 젖힌 윤신이 세헌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가 조금 전처럼 다시 얼굴을 기울여 짤막하게 입 맞춰
왔다. 알싸한 담배 냄새를 제게 새기려는 듯 그 행위를 몇 번 반복하
곤 장초를 난간에 비벼 껐다.

얼떨떨하게 그런 그를 지켜보다 되물었다.

“언제요? 송 대표님이 제안하셨어요? 조건은요? 엄청 파격적인 거


아니에요?”

“며칠 됐어. 미희 선배 제안 맞고, 구두였고, 조건은 아직이고, 꽤


파격적이지. 추진된다면 정말 나한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로 한동
안 업계가 시끄러워질 거야.”

“그 얘길 왜 이제……. 이런 중요한 얘기 할 타이밍 정도는 있었잖


아요!”

세헌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정말 있었어?”

“그저께처럼 잠깐 밤에 시간 같이 보낼 때나. 일요일 새벽에, 나란


히 깼을 때나…….”
지그시 제 쪽을 보는 그의 시선에 말로 형용하지 않은 많은 감정들
이 묻어났다. 횟수로 따져도, 기한으로 따져도 그가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 훨씬 많고 잦았다. 그러나 여기선 그걸 주장할 수가 없었다. 언
제나 납득할 만큼 서로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이미 결정된 일이지만
그럼에도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게 룰이었는데 이번에 자신은 그
러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반칙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요?”

“이거 이상하지 않아?”

“업계 뒤집어질 만한 얘기긴 해도 그건 이 바닥이 기수 사회에 보


수적이어서 그런 거고. 다들 속으로 납득은 할걸요. 저도 충격이긴
하지만 송 대표님 결정이 이해는 되거든요.”

강세헌 같은 꼿꼿하고 똑똑한 사람이 옆에 있어 주면 든든한 느낌


이 무엇인지, 이 세상 누구보다 윤신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거 말고.”

“아니면 뭐, 본인 미래를 저랑 상의하는 일이 아직도 어색하세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이 명제에는 반만 수긍했다.

“그것도 썩 자연스럽지는 않은데, 익숙해졌어.”

“그럼…….”
“내 인생이 자꾸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 거 말이야. 그동안 다른 사
람 눈에 눈물 내는 짓을 많이 해서, 난 그런 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
각했거든.”

윤신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가 어떤 의미로 하는 이야기인


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였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못 주고 공기처럼 부유하던


삶이 언젠가부터 자꾸 어딘가에 깊숙하게 박혀 양분을 공급하는 형
태로 변하려 한다는 뜻일 터다. 그리고 그가 그렇다고 첨언하진 않았
지만, 그 시발점은 자신이 끊은 게 명백했다.

그간 강세헌에게 삶이란 버티는 거였다. 싸우고, 이겨서, 살아남는


총체적 과정이었다. 밀리면 끝인 전투였을 것이고, 지면 도태되는 전
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지킬 게 생겼다. 뭔가를 보호하는 감각에 순응하면


서, 잃어버린다는 공포를 함께 맞닥뜨리게 되는 바람에 지난 며칠간
자신을 더 찾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짐작에 다다르자, 이번엔
정말이지 두 사람의 타이밍이 나빴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쓰윽. 세헌의 딱딱한 어깻죽지부터 가슴팍까지를 양 손바닥으로 천


천히 쓸어내린 윤신이 그와 또렷하게 시선을 겹쳤다.

“원래 뿌리 깊은 나무가 오래가요. 그건 아시죠.”

“너 많이 컸다. 날 다 가르치는 거 보면.”


“선밴 그 제안 수락하고 싶은가 봐요.”

“아마도.”

“그 얘기 나랑 의논하고 결정하고 싶었는데 내가 없었고?”

“그건 확실히.”

그래서 표정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모양이다. 본인 삶의 이정표를


적을 때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느꼈는데 자꾸 옆자리가 비어 있
어 초조했던 게 분명했다.

그는 화가 났는데, 모순적이게도 강세헌이 본인의 삶에 대해 잔뜩


고민한 흔적 위에 자신의 향취가 가득하다는 사실 때문에 윤신은 행
복해졌다.

“청혼도 내가 먼저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선수 쳐서 인터셉


트를 하시면 됩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걸 했다고.”

윤신이 황망해하며 혀를 찼다.

“지금 선배가 한 게 바로 청혼이거든요? 길 가는 사람 100명한테


물어보세요. 100명 다 제 말에 동의하지. 선배 미래에 내가 있는 거
잖아요. 그래서 내 의견 수렴이 필요한 거고.”

다만 정작 당사자인 그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양 눈매를 날카롭게


접었다.
“너 많이 컸다, 아마도, 그건 확실히, 이 중에 그런 말이 어디 있
어.”

지난 몇 년을 그와 동고동락했더니, 이제 정신없이 끝까지 몰아붙


였다가 자신이 손 뻗을 만하면 한발 빼는 강세헌을 대하는 덴 이쪽도
도가 텄다.

“변태. 사디스트. 겁쟁이.”

“도윤신 변호사,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변태, 사디스트, 겁쟁이. 이 중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본인이 그거라고 인정하시는 거예요?”

고스란히 했던 말을 돌려받고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세헌이 픽 웃


었다. 그러고는 윤신의 콧잔등에 제 날렵한 콧대를 문질렀다.

오래 사귀어 서로를 잘 안다는 건 바로 이런 데서 태가 났다. 두 사


람의 고개가 가장 익숙한 입맞춤 자세를 찾아 좌·우로 움직였다. 그
러면서 솜사탕처럼 가볍게 몇 번이고 얇고 민감한 표피가 마찰했다.

윤신의 입술 사이에 제 아랫입술을 한 번, 윗입술을 한 번 순차적으


로 끼워 넣고 문지르던 세헌이 손을 뒤로 뻗었다. 소중한 걸 품에 안
듯이 윤신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연이어 바람에 어설피 흩날리는 머
리카락들에도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얌전히 서서 그가 주는 부드러운 촉감을 누리던 윤신이 그의 상박


을 밀어냈다. 세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양이가 눈 키스 해 주듯 제 눈을 빤히 응시하며 눈길을
하나로 맞춰 왔다.

“이젠 나도 선배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면서요. 걱정 마세요. 딱 달


라붙어 있을 거니까.”

“난 지금보다 더 바쁘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럴 터다. 만약 미희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면, 그때부턴 그의 삶


에 도윤신 말고도 지킬 게 생기는 셈이었다. 물론 법무 법인인 이상
일반 회사의 경영진과 같은 권리로 로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
니겠지만, 모든 변호사들의 대표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세헌을
좀 더 방어적이고 그런 한편 공격적으로 만들게 될 게 명백했다.

“지금보다도 더, 외부에 널 내놓을 수 없고.”

그건 그를 선택했던 그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못 해 주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해 줄 수 있는 걸 말
해 보세요.”

하얀 눈자위를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고민하던 세헌이, 장고 끝에


간단하게 대꾸했다.

“널 발견한 거 후회 안 할게.”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선율처럼 맴돌았다.

그는 보다 분명하게 덧붙였다.
“네가 날 선택한 걸 후회하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

적막한 밤의 바다처럼 서로를 감싼 공기가 눅눅하게 내려앉았다.

그에게 의외로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런 순간, 이런 형태로 그걸 확인시켜 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윤신의 경직된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썩거렸다. 이윽고 떨리는 투명


한 눈동자가 오직 세헌을 직시했다. 꼭 서로의 그림자 끝마저 닿은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졌다.

세헌의 앞에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가 설정한 이 테두리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않다는 수동
적 충동에 휩싸였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의지는 소리가 되어
나와 주지 않았다. 그걸 잘 안다는 양, 그가 잠긴 음성으로 부추겼
다.

“너도 사랑한다고 얘기해 줘야지. 평소엔 잘만 하면서.”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요. 매번 뭘 사 줄까, 그러


는 사람이니까. 선배 요즘 100점 자주 맞네요.”

“넌 건방지게 계속 나를 채점하고.”

그가 여느 때의 세헌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윤신이 부


드럽게 웃었다.

윤신은 세헌의 입술에 제 것을 맞물렸다. 잠시간 그렇게 농밀하게


혀를 섞는 대신 살갗을 겹치고만 있다가, 슬그머니 떼어 냈다. 뒤이
어 주머니 안에 구깃하게 접어 둔 작은 봉투를 꺼냈다. 주둥이를 열
어 안에 있는 걸 손바닥에 떨어뜨리자, 백금색 반지 두 개가 보드라
운 살결 위에 툭 떨어졌다.

사실 이런 식으로 주고 싶진 않았다. 좀 더 그럴싸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다,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레스토랑도 예약해 두
었다. 진짜로 예식 같은 건 못 할 테니까, 두 사람이 기억하는 가장
근사한 그림이 배경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막상 여기 서 있자니. 그와 만나게 된 이 펌의 황량한 사막


같은 옥상이 그다지 나쁘진 않은 선택지 같았다. 잔뜩 다투고 올라
와, 세헌에게 약속을 받아 내며 건네주게 되는 쪽이 훨씬 두 사람에
겐 어울리는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커플링이에요. 앞으론 매일 끼고 다니세요. 처음만 어렵지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이거 하나 때문에 별…… 대체 그 커플링이 뭘 증명해 주길래 2주


나 그 공 들여 만드느라 날 버려뒀는데. 대충 파는 걸 살 순 없었
나?”

〈내가 네 거라는 요건 사실.〉

언젠가 세헌이 제게 반지를 끼워 주며 했던 말을, 이제는 자신이 돌


려줄 수 있어 기뻤다.

“우리가 서로의 거라는 요건 사실요. 이제 더 이상 선배가 외로울


일은 없는 거죠.”
물끄러미 윤신을 보던 세헌이 부드럽게 웃었다. 말려 올라간 입매
가 유려했다.

“그 ‘우리’는 마음에 든다.”

뒤이어 그는 바로 손을 뻗었다. 실랑이하다 결국은 마지막 소원을


들먹여야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려 기분이 묘했
다.

그는 본인이 먼저 끼워 주려는 듯 둘 중 더 둘레가 좁은 걸 골라 갔


다. 그러고는 살짝 뒤로 물러나 윤신의 왼손을 붙잡았다. 이미 몇 년
전 세헌이 선물한 심플한 반지 위에 예의 바르게 입을 맞추고는 그걸
빼내 윤신의 입술 틈에 끼웠다.

착하게 그걸 물고 있는 사이, 링의 안쪽에 새겨진 본인의 이니셜을


확인한 그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이윽고 세헌이 길게 뻗은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표면이 반질


반질한 고급스러운 플래티넘 링이 딱 맞았다. 싱글거리며 그 위를 내
려다보던 윤신은 제 입에 물고 있던 반지를 주머니에 보호하듯이 넣
었다.

서로의 마음만 알면 됐지, 닭살 돋게 무슨 반지 같은 걸 나눠 끼냐


면서 산통 다 깰 줄 알았던 세헌이 그러지 않는 것부터가 신기했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설핏 웃고는 그를 보는데, 별안간 세헌이 이런 말을 꺼냈다.


“내 거에도 이니셜 새겼어?”

“당연히 새겼죠.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요. 밖에 나가서 쓸데없는


짓 하면 침실 벽에 묻히는 게 저뿐만은 아닐 거라는 뜻입니다. 유의
하세요.”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오


늘 그는 간지러운 일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윤신은 그의 손을 일단 관찰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뼈가 도드라


진 손은 감탄스러울 만큼 말끔했다. 종종 그의 손을 잡을 때 그러듯
바짝 깎인 손톱을 매만지고는 아주 신중한 태도로 그의 약지에 반지
를 밀어 넣었다.

뾰족한 부분을 위로 해서 천천히 끼우자 다행히 잘 들어갔다. 그런


데, 끝까지 지퍼를 올리듯 링을 채워 놓고 손을 떼어 낸 순간. 뒷부
분이 휙, 돌아갔다. 어느 틈에 뾰족한 돌기 쪽이 세헌의 약지 옆면을
덮은 채였다.

물끄러미 그 위를 내려다보는 윤신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 모습


을 쳐다보는 세헌의 입가는 정반대로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윤
신을 힘껏 끌어안고 귓바퀴에 정신없이 키스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안해진 윤신이 변명했다.

“작은 건 못 늘려도 큰 건 줄일 수 있대서…… 분명히 잘 때 재긴


쟀어요. 그런데 손대중으로 대니까 그게 맞겠냐고요.”

“줄자 같은 걸 활용한다는 개념은 네 머릿속에 없는 거야?”


“그럼 선배가 깨잖아요.”

“……선배 잠들어 있을 땐 제가 지켜 줄게요.”

미세하게 몸을 바르작거리던 윤신이 모든 운동 에너지 발산을 멈추


고 멈칫했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완연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 뜨거운 문장은, 오늘 새벽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 세헌에게 속삭였
던 말이었다.

고로, 그때 그가 깨어 있었다는 얘기다.

그 말을 할 때 기상한 상태였다면 옆에 쪼그려 앉아 본인 얼굴을 관


찰하는 집요한 시선을 죄다 느끼고 있었단 뜻도 됐다. 윤신의 얼굴이
석양에 반사된 것처럼 빨개졌다.

이래서 새벽에 편지 쓰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부스럭거리는데 어떻게 안 깨. 그리고 모르는 거 같아 알려 주는


데, 너 일어나면 나도 무조건 같이 깨. 어떻게 해도 깨니까 좀 더 편
안하게 움직여도 돼.”

“안 깬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런 적 없어. 그냥 눈 감고 너 안고 있었던 거지.”

“왜요?”
“내가 잠든 줄 알고 네가 귀여운 짓 하니까.”

지난 몇 년 동안의 경험치를 돌이켜 보려 했으나, 너무 개수가 많아


통계가 안 나왔다. 눈 감은 그의 풍성한 속눈썹을 만지작거린 적도
있었고, 뺨에 괜히 제 뺨을 문지른 적도 많았다. 아침이라 발기한 성
기를 아슬아슬하게 손끝으로 건드리며 놀았던 적도 숱했고, 머리카
락에서 풍기는 샴푸 향을 맡거나, 바짝 깎은 손가락 끝에 입 맞춘 적
도 잦았다.

윤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떻게 그걸, 몇 년간 한 번을 말 안 해요? 인간이 이렇게 지독해


도 되는 거예요?”

제 행동들을 모두 느끼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장 어디에 숨


고 싶었다. 그런데 세헌이 자신을 결박하듯 막아서고 있어 여의치가
않았다.

창피한 동시에 조금 풀이 죽었다. 자신만 그의 예민함에 예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기뻤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난 선배가 내 몸의 감촉이랑 소리만 받아들이는 변태라고 생각해


서 좋았는데…… 제가 내는 기척이나 소음도 예외는 아닌 거네요.”

계속 윤신을 놀리며 즐거워하는 기색이던 그가 별안간 미간을 흠씬


찌푸렸다.

“내가 무슨 변온 동물인 줄 알아? 너 가끔 진짜 제정신 아니야.”


“저 왔다 갔다 하고 그런 거 거슬리면 앞으로 침대는 따로 쓸까
요?”

“헛소리하지 말고. 잠은 무조건 내 옆에 붙어서 자.”

“바로 깬다면서.”

“깼을 때 네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돼. 네 소음은 예외 맞아.”

꾸욱, 제 턱으로 윤신의 정수리를 누른 세헌이 난간을 등지고 섰다.


그의 애정 표현에 기분이 좋아져 픽 웃은 윤신이 그 옆에 기대어 같
은 곳을 보면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노을이 져 가는 하늘을 배경색
으로 해서 그 위에 이 손을 그려 냈다고 생각하니 꽤 운치 있었다.

주변의 마천루들이 대강 하객이라고 치고, 구름 낀 주황빛 하늘이


대충 식장이라고 치고, 이 주변을 감싼 공기와 바람들이 결혼 행진곡
을 불렀다 치고, 주례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그걸 보며 여러 가지 즐거운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입을 다시 열었다.

“플래티넘요. 심박 조정기에도 이걸 쓴대요. 체내에 매식해도 괜찮


은 물질인 거죠. 알레르기도 없다고 하고요. 안전한 거니까 절대 빼
시면 안 돼요.”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세헌이 나지막하게 혼잣말하듯 응답했다.

“나한테 끼워 준 걸 보면, 네 반지는 목에 걸 생각일 거고.”


역시나, 그는 자신을 잘 읽었다.

디자인이 다르긴 하지만 백금색 깔끔한 링에 다이아를 박아 넣었다


는 큰 틀의 결은 같았다. 아울러 두 개를 겹치면 레이어드한 하나처
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잠시 빼 둔 반지를 하필이면 누군가 발견해 한데


겹쳐 볼 가능성 같은 게 희박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 만에 하
나조차 조심해야 하는 게 그들의 사이였다. 더 오래, 안전하게 사랑
하기 위해서 몸을 사려 나쁠 건 없었다.

“네. 전 출근 안 하는 날에만 손에 끼려고요. 그래도 선밴 매일 끼


고 다녀야 돼요.”

“너도 그냥 하고 다녀.”

세헌은 가끔 이런 면에서 무모했다.

“그러다 누가 눈치라도 채면요.”

“받아들여야지. 감기 걸리는 것처럼.”[4]

“…….”

“가뜩이나 못 하는 거 많은데 그거까지 숨기게 하긴 싫다.”

그와의 공통분모였던 책 속 문구를 떠올린 윤신이 미소 지었다. 고


개를 돌린 그가 제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매끄럽
게 말려 올라간 세헌의 입가에, 다시금 매료됐다.
이 얼굴. 윤신은 이걸 오직 자신만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알았다. 이
런 행복을 앞으로도 누리고 싶었다. 세헌이 그 마음 또한 읽은 것처
럼 윤신의 손등을 끌어 올려 그 위에 다시 진득하게 입 맞춰 주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으로 시작하는 어떤 대단한 약속


이 없어도, 이 관계가 법적 구속력을 보장받지 못해도, 주변 사람들
이 아무도 몰라줘도, 이거면 충분했다.

앞으로도 두 사람의 삶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였다. 세


헌이 공동 대표가 되고, 자신이 다른 어떤 것이 된대도. 그대로이리
라.

그들은 이렇게 또 내려가서 하던 일을 마무리할 터다. 강세헌은 2


주 동안 농축된 자기혐오와 질투심으로 오늘 하루를 내내 낭비했으
니 주말까지 집에서 업무를 연장할 게 뻔했다. 자신도 아까의 사고를
마저 수습해야 하니 상황은 비슷했다.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같이 일어나고. 평범한 일상의 반복


을 하게 될 것이다.

윤신이 또다시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는데, 그 짧은 외도조차 참을


수 없다는 양 세헌이 손을 뻗었다. 그는 윤신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
로 반 바퀴 굴리듯이 당겨 온 뒤, 깨끗한 얼굴을 마주 본 채 끌어안
았다.

고개를 기울여 약속의 증표라는 양 키스하려는 순간, 윤신이 쓱, 왼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자기라고 불러 봐요. 그럼 키스하게 해 줄게요.”

세헌은 바로 반문했다.

“내가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말라 그랬지. 좀 더 제대로 된 조건을 걸


어.”

“이 와중에, 이런 순간에도. 요컨대 오늘이 우리 기념일인 건데!”

“이건 어때. 오늘 밤 섹스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기. 그럼


불러 주지.”

그건 원래 하늘이 두 쪽 나도 제 좆대로 하면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듯 윤신이 세헌을 힐난하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손바닥에 닿은 입술을 좀 더 앞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턱, 손등이 입술에 닿자 더 말할 수가 없어진 윤신이 눈만 깜빡거렸
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뜬 채 보다 편안한 방향으로 턱을 기
울였다.

손을 가운데 두고 혀를 내밀어 손바닥을 쑤실 듯 혀로 자극하기 시


작한 세헌의 움직임이 야릇해졌다. 당황한 윤신이 손을 쑥 아래로 빼
냈다. 그러자 밀어붙이고 있던 그의 혀끝과 입술이 잠시 닿았다가 떨
어졌다.

“읏, 저 아직 마지막 소원 안 썼어요. 그거 쓸 거예요.”

“그걸 이렇게 간단한 거로 쓰고도 괜찮겠어?”


윤신은 하나를 배우면 최소한 세 개쯤 할 정도로는 영민했다. 이제
세헌의 방치에 배상을 청구하는 만족스러운 협상 방법을 습득했으
니, 잘 배워서 그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내버려 둘 때 적재적소에 써
먹으면 되는 일이다.

“금세 선배가 바쁜 시즌이 또 오거든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세헌을 주시했다.

그가 그런 윤신이 제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 같잖아하는 시선으로


마주 응시했다.

곧 나른한 어투로 속삭이듯 이렇게 대꾸했다.

“입 벌려, 자기야.”

헉. 일순 돌이 된 윤신의 얼굴이 타들어 갈 듯 붉게 달아올랐다. 정


말 바로 해 주리라곤 짐작 못 했다. 성격 나쁜 강세헌이 종종 그러듯
몇 번 제 애간장을 녹이다 하리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애가 닳았


다. 기계처럼 다시 듣기 같은 걸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놀라느라 반 박자 늦게 반사 반응을 보이게 됐다. 느릿하게 열린 입


술 사이로 비명 같은 감탄사들이 새어 나왔다.

“와, 미쳤어! 강세헌 하란다고 진짜, 웁!”


바로 그 순간, 시끄럽다는 듯 입술을 겹친 세헌이 윤신의 안으로 거
침없이 파고들었다.

황혼의 무드가 가득한 자리에서, 달싹거리는 살갗 사이로 진입한


살덩이가 질퍽한 소리를 내며 겹쳐졌다.

“읏, 으응…….”

치열을 훑듯이 스쳐 지나간 그의 혀가 윤신의 것에 맞물렸다. 자연


히 격했던 반응이 점점 사그라졌다.

지루하리만치 느리게 겹쳤다가, 또 금세 속도감을 주면서 맞물리는


혀의 움직임이 농염했다. 혀뿌리까지 삼킬 것처럼 깊이 파고들어 엉
켜 대며 능숙하게 윤신을 몰아가는 세헌의 혀끝에마저 독점욕이 묻
어났다. 마른 등을 끌어안은 손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검불처럼 연신
달싹거렸다.

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 밀도도 함께 높아져 갔다. 농밀하게 상대


방의 혀에 열중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점점 더 붉어져 가는 저녁
노을이 나부끼듯이 내려앉았다.

오늘따라 그의 혀끝도, 타액도, 모두 달았다. 세헌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두 손을 어깨 너머로 넘기듯 세헌을 끌어안은 윤신이 그에게 빠듯


하게 매달렸다.
세헌의 결 좋은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 넣은 왼손 측면에서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그런 윤신의 등을 부축하듯 끌어안은 그
의 왼손 안쪽에서도 같은 광채가 반짝, 빛났다.
08.

욕조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윤신의 두 볼이 발그레했다. 계속 여기


서 뭉개고 있던 바람에 목구멍이 텁텁했다. 주변의 습도 때문에 아가
미가 돋을 것 같았다.

이젠 나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다. 한데 왠지 침실의 문지


방을 밟는 순간부터 온갖 창피를 당하게 될 것 같아서 선뜻 몸이 안
움직였다. 젖은 손가락 위를 감싸듯이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자 심
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더 용기가 안 났다.

오늘은 그들은 싸우고, 화해한 뒤, 반지를 나눠 낀 거 외엔 아무것


도 안 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꼭 기분이 첫날밤 같아 미칠 지경
이었다.

새삼 그와 했던 첫 섹스를 떠올리자 기분이 야릇했다. 분명 그를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짐작했다. 하나 당시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깊
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 못 했다. 상대가 다름 아닌 강세
헌이었으니까.

풍덩.
부끄러워하던 윤신은 제 얼굴을 투명한 물속에 담근 채 물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번쩍 얼굴을 들어 젖은 채로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보자,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문간에 선 가운 차
림의 세헌이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팔짱을 척 낀 채로 삐딱하
게 서서 욕조 안의 윤신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졌다.

“불어 터지면 네가 더 맛있어질까 봐 그래?”

“저 음식 아니거든요.”

“아니면 배곯아 있었을 때 먹으면 더 맛있어할까 봐.”

“그만 놀려요. 이제 나가려고 했어요.”

물기라도 닦고 나갈 테니 밖에서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는데, 지나


치게 말을 생략했던 모양이었다. 세헌은 미동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제 쪽만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담긴 색욕은 꽤 익숙한
파동으로 노출됐다. 민망해진 윤신의 귀와 목이 함께 달아올랐다. 쑥
스러운 기분을 누르며 보다 직관적으로 제 의사를 전하게 됐다.

“나가서 기다리면 안 돼요?”

“안 돼. 너 그대로 일어나 봐.”

그들 사이에서 알몸을 보이는 게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


소의 특수성과, 상황의 개별성이라는 게 존재했다.
지금 윤신은 전신이 물에 흥건하게 젖어 있는 나체 상태였다. 반면
관찰자인 세헌은 자신과 달리 실크로 된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아울러
욕실의 조명에 주광 빛이 돌아 사방이 조금 어스름했고, 결정적으로
오늘 윤신은 유난히 이 모든 게 창피했다.

시키는 대로 일어서는 대신 툭, 손바닥으로 물 위를 가볍게 내려친


뒤 동그랗게 손가락을 세워 회오리치듯 돌렸다. 물이 조금 요동치다
가, 자신이 움직임을 멈추자 잦아들었다.

그사이 세헌이 다가와 욕조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젖어 있는 윤


신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가득 쥐었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이 귀를 만지작대다가, 이내 뺨으로 옮겨 갔다. 마침내 다다른 입
술 위에서 엄지를 세운 그는 안으로 들어갈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제 쪽에서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니 그제야 엄지를 넣어 안쪽의 민감
한 살결들을 꾹 짓눌러 자극했다.

“흐으, 흐…….”

집요하게 입 속을 괴롭히는 세헌의 엄지를, 윤신의 혀가 종종거리


며 쫓았다. 그는 기꺼이 술래잡기를 시도하며, 말을 붙였다.

“지능이 높을수록, 쾌감에는 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데. 들어


본 적 있어?”

“과, 과학적 근거 있는 거예요? 후, 으.”

“글쎄. 내 경우 그런 것 같긴 해. 난 내가 섹스를 이렇게 좋아하는


지 몰랐거든.”
“읏, 으음.”

“밖에서 딸기 케이크가 너 기다리고 있어. 일어나.”

여린 내벽을 유린하다 쑥, 입에서 손가락을 빼낸 세헌이 돌연 젖은


겨드랑이 밑으로 양손을 밀어 넣었다. 뒤이어 팔의 힘으로 빨래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자, 놀란 윤신이 바르작거렸다. 그는 약
간의 저항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욕조에 윤신을 세운 채, 물이
배 축축해진 전라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수치를 느낀 윤신이 두 팔로 세헌의 어깨를 붙들었다. 상체를 조금


숙여서 그의 머리 위로 기울이니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고급스러
운 가운 위를 적셨다.

“그만 쳐다봐요.”

“나를 보자마자 발기하고 그럴 순 없나? 좆이 너무 얌전해서 기분


나빠.”

“중학생도 안 그래요.”

“난 되는데. 이건 어른이라 그런가?”

헛웃음을 터트린 윤신이 세헌의 가운 위를 힐끗 봤다. 그의 말마따


나 하체 부분이 조금 곤두서 있는 게 보였다. 흥분한 건 그인데, 애
꿎은 제 뺨이 화끈거렸다.

“그건 제가 홀딱 벗고 있으니까 그렇죠. 선밴 고학력 고지능 사디


스트고.”
한데 세헌은 제 대꾸에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어떤 답을
하든 행보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일 터다.

그가 손을 예고 없이 윤신의 하반신으로 뻗어 왔다. 뒷일이 예상돼


말려 봤으나 무용지물이었다. 기어코 물에 젖어 늘어진 음모에 손가
락 등을 댔다. 흠칫한 윤신의 반응은 무시하고 멋대로 쭈욱 밑으로
내리듯이 이동해 금세 성기 뿌리를 건드렸다.

“선배, 흐읏, 그만.”

세헌은 꿈틀거리는 기둥을 훑는 것처럼 좀 더 손을 끌어 내려서 제


체온을 선단까지 옮겨 갔다. 달뜬 교성을 터트리게 될까 봐 입을 꽉
다물고 그를 겨우 붙잡는 윤신의 손등에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나도 좀 벗어 주면 어때. 그럼 서?”

솔직해지자면, 세헌의 육감적인 몸을 보고 흥분하는 건 아주 간단


한 일이었다. 그러나 윤신은 그걸 털어놓을 타이밍조차 없었다. 자꾸
세헌이 아슬아슬하게 성기를 건드릴 때마다 표피가 요란하게 움찔거
리고 있어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만, 그만해요. 으응. 응.”

계속 욕조 안에서 다리 사이를 좁히고 있었던 데다, 세헌이 강한 자


극 대신 찔끔찔끔 감각을 주지하는 바람에 균형 잡기가 힘들었다. 두
다리가 금방 후들거렸다. 그걸 눈치챈 건지 그도 장난을 멈추고 걸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윤신이 욕조 안에 있는데도 밖의 세헌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잡으라는 듯 두 손을 내민 그가 윤신에게 나란히 뻗었다.

“이리 나와, 닦아 줄게.”

망설이던 윤신은 그걸 잡고 발을 내디뎠다. 뚝, 뚝, 중력의 영향을


받고 추락하는 물방울들이 욕조 바닥을 조금씩 적셨다.

이윽고 세헌은 커다란 타월로 윤신의 몸 위를 흥건하게 적신 따뜻


한 물기들을 닦아 냈다. 축축해진 머리를 다정하게 털어 주고, 목부
터 상반신, 그리고 하반신으로 하강하듯 젖은 부분들을 부드럽게 훔
쳤다. 그러다 늘씬한 한쪽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 발잔등에 입 맞추
었다. 얌전히 서서 그의 상냥한 손길을 받아 내던 윤신은, 그걸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결국 제 발목을 마저 닦아 주고 있는 세헌의 뺨을 만지기 위해 왼손


을 뻗었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한 손으로 직접 성기를 덥석 쥐는 바
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툭. 도톰한 타월이 바닥에 떨어졌다. 윤신은 가쁘게 신음했다.

“흐, 아흑!”

아무래도 그는 도구를 활용하는 대신 손수 남은 물기들을 떨어내


줄 셈인 듯했다.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성기를 감싸고 음낭을 손가락
에 끼우듯이 쥔 세헌이 살갗에 묻어난 투명한 물들을 긁듯 닦았다.
몸을 바들거리던 윤신은 세헌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어설
프게 몸을 수그리고 있던 그도 일어나서 그 포옹에 화답했다.
윤신의 귓전에 소름 끼칠 정도로 낮아진 목소리가 콱 틀어박혔다.

“여긴 손으로 닦아 주려는 거였는데, 불편해?”

“일부러 이러는 거죠.”

“이제 눈치챘어?”

“그만 괴롭혀. 나갈 테니까…….”

“잘 생각했어.”

쪽, 벌게진 귓바퀴에 입 맞춘 세헌이 윤신의 알몸을 번쩍 안아 들었


다. 제 얼굴을 그의 뺨 쪽으로 감춘 윤신은 볼 가운데 살결을 잘근잘
근 씹는 것으로 섹스의 수락 의지를 전달했다. 통증을 기꺼이 느끼며
더 힘주어 안아 준 그가 조금 전까지 물기들을 닦아 주었던 타월을
짓밟고 그대로 파우더 룸을 거쳐 침실로 직행했다.

풀썩, 윤신을 침대 위에 쏟듯이 내려 둔 세헌이 협탁 위의 케이크를


베갯잇으로 끌어왔다.

아까 전 레스토랑에 가까스로 들러 받아 온 기념 케이크였다.

오늘 몇 가지 변수로 인해 예상 밖의 일이 많아지는 바람에, 퇴근


시간을 맞춘다고 했는데도 늦고 말았다. 그 때문에 윤신이 예약한 레
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마지막 주문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미리 부탁한 케이크만 들고, 와인은 보관해 둔 뒤 돌아왔다.

“입 열어야지.”
오늘 밤 그는 도구를 활용할 생각이 그다지 많지 않은 모양이다.

포크 대신 손가락으로 분홍색 딸기 크림을 듬뿍 뜬 세헌은 윤신의


입가에 그것을 댔다. 뒤이어 보란 듯이 꾸덕한 크림을 입술 위에 비
비듯 문질렀다. 윤신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입을 벌려 잘 받아 냈다.
이윽고 미끄덩한 크림을 맛본 뒤 삼키려는데 느닷없이 세헌이 상반
신을 기울이면서 키스했다.

“읏……. 흐읏.”

물리적 압력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사이, 그가 입 속으


로 본격적인 침투를 감행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혀끝이 만나면서
크림이 입 안에서 뭉개졌다.

세헌이 이 케이크 박스를 차 뒷좌석에 넣을 때부터, 이러지 않을까


싶긴 했다. 짐작하면서도 만류하지 않은 이유는 말하자면 입 아팠다.

싫지 않다.

탄성을 터트린 윤신은 세헌의 가운 라펠 부분을 움켜쥐었다. 그가


입을 열어 화답했다.

“맛있어?”

“달아요, 흐읍, 으…….”

농염한 키스는 때론 섹스만큼 짜릿했다. 간헐적으로 목구멍에 넘어


가는 크림을 느낀 윤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꼼꼼하게 입 속에
남은 크림들을 전부 없앤 세헌이 이번엔 살덩이의 맛을 느껴 보라고
제안하듯이 혀를 깊이 쑤셔 넣었다.

서로의 표피가 부딪치며 돌기들이 야릇하게 마찰했다. 필연적으로


입 안이 갑갑해지면서 단맛과 쫀쫀한 촉감으로 양껏 찼다. 타액이 뒤
엉켜 질척거리는 외설스러운 소리들이 연달아 일었다.

선정적인 그림만큼, 세헌의 움직임도 에로틱했다. 그는 침대의 가


장 가운데 쪽으로 윤신을 능숙하게 안아 옮기면서 케이크판도 함께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뽀송뽀송해진 나신 위를 손바닥으로 지분거렸
다.

이윽고 떨어져 나간 서로의 입술에 투명한 실선이 이어지다 뚝 끊


겼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달떠 세헌만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윤신


은 사실 꽤 안달이 나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윤신의 턱에 달래듯
입을 맞추면서 서서히, 밑으로 동선을 옮겼다.

푹. 돔형으로 된 케이크에 손가락을 다시 찔러 넣은 세헌이 손끝에


풍성하게 묻어난 크림을 윤신의 젖꼭지에 문질렀다.

“아! 아, 읏. 미끌거려, 기분 나빠요.”

“다른 쪽도 해 달라고? 내 귀엔 그렇게 들리는데.”

“싫, 아…….”
한쪽 유실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는 것처럼 지분대던 세헌이, 곧 반
대편 유두에도 같은 행위를 했다. 꼿꼿해진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문지르자, 윤신이 허리를 떨어 댔다.

세헌이 어지럽힌 유륜 주변이 분홍색 크림으로 범벅됐다. 그는 이


제 막 그림을 완성한 화가처럼 그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녹은 눈처럼 질퍽댔다. 이내 길게 호흡한 그가 한쪽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입 속에 젖꼭지를 담듯이 문 세헌이 고른 치아를 세웠다. 반대편의


유두를 손으로 꼬집듯이 어루만지며, 한껏 민감해진 표피를 살살 긁
듯이 자극하니 역시나 쉽게 부어올랐다.

“흐읏! 선배, 흐응.”

상반신만 건드리고 있는데도, 온몸이 성감대인 것처럼 민감해진 윤


신은 금방 성기를 세웠다. 다리 사이가 몹시 예민해져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결국 윤신이 세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새된 교성을 터
트렸다. 세헌은 그 소리 하나하나를 모두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주
의를 기울이면서, 가슴팍 애무를 하는 정성도 함께 기울였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가 벌겋게 부어 번들거렸다. 그 밑에 희미


하게 남은 분홍빛 크림과 세헌의 타액이 질척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세헌이 손등으로 제 턱을 슬쩍 쓸었다. 크림이 그의 날렵한 턱에도
묻어났다.
헐떡이며 그 에로틱한 모양새를 올려다본 윤신이 한쪽 다리를 뻗었
다. 그러고는 밑 부분이 살짝 흐트러진 가운 사이로 집어넣었다. 아
까 전 세헌이 입 맞췄던 발등으로 그의 사타구니쯤을 건드리자, 욕실
에선 반쯤 곤두서 있던 그의 것이 이미 터질 듯 팽팽하게 발기해 있
었다.

“읏, 젠장.”

성기에 직접 자극이 닿자 그가 바로 반응했다. 그는 두 팔을 침대로


전신의 하중을 받치듯이 뻗어 윤신의 매끈한 발등에 제 것의 기둥을
몇 번 문질렀다.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어두운색 가운 밑부분이 볼록
튀어나와 들썩였다.

억눌린 신음을 토해 내던 그는, 곧 다시 케이크를 한 손에 잔뜩 움


켜쥐어 윤신의 몸 위로 뿌리듯이 내던졌다. 푹. 긴장해서 단단해진
복부와 곤두선 성기 위에 크림이 쌓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타구니 아
래로 퍼지듯이 번졌다. 흐릿한 분홍빛이 윤신의 다리 사이를 흠뻑 적
셨다.

주도권을 되찾아 간 강세헌이 할 일은 뻔했다. 예정된 수순대로 꼿


꼿하게 선 성기와 반쯤 벌어져 있는 다리 사이를 주시하던 그가 양쪽
발목을 덥석 쥐었다. 자연히 윤신의 발목 위에도 세헌의 손바닥에 남
아 있던 크림이 묻어났다.

그것들은 윤신이 바르작거릴 때마다 세헌의 가운 위에도 튀었다.


이젠 어디에 바르고, 바르지 않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침대 위와
서로의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단단히 쥔 발목을 양쪽으로 벌린 세헌은 윤신의 다리 사이에 분명
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둔부를 들어 올리게 해 보다 제 시야
를 넓게 확장했다. 이윽고 드러난 수줍은 회음 위에 복부 이곳저곳에
안착해 있는 크림들을 바르기 시작했다.

“읏, 흐으. 느낌이 이상해요. 꿀렁거려.”

단순히 이상한 게 아니라, 묘하게 불경한 느낌이 들어 곤란했다. 하


면 안 되는 짓을 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하나 이런 윤신의 말에도
개의치 않은 세헌은 보다 손바닥을 넓게 펼쳐 꼼꼼하게 크림을 문질
렀다. 그 덕분에 곤두서 있던 윤신의 성기 요도구가 움찔거리더니,
기둥 전체가 사출을 기다리듯 꺼떡거렸다. 복부는 파들거리고, 팔다
리도 미약하게 경련했다.

사정을 위해 좀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던 윤신이 두 손을 아래로 뻗


었다. 제 것을 쥐고 흔들기 위해 성기를 잡는 순간, 세헌이 ‘탁.’ 소
리가 나도록 확실하게 쳐 냈다.

“아직이야.”

“나 자위하고 싶어.”

“아직 쌀 때가 아니라니까.”

“선배가 만져 줘.”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다, 결국 세헌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기대


를 배반하지 않은 그는 마치 마사지를 하는 것처럼 윤신의 성기와 회
음을 함께 정복해 나갔다.

집요한 손길이 이어졌다. 짓무른 분홍빛 크림들이 윤신의 밀부 주


변을, 비 온 뒤 젖은 땅처럼 촉촉하게 물들였다.

이윽고 양 발목을 꽉 쥐어 하체를 통제하고 있던 세헌이 두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려 주었다. 몸을 좀 더 낮춘 그는 곧이어 혀를 뾰족
하게 세워서 윤신의 다리 사이를 정신없이 핥아 댔다. 질고 차진 반
죽을 치대는 것처럼 음란한 마찰음이 일었다. 야하고 노골적인 소리
가 서로의 성감을 더욱 북돋웠다.

눈앞이 아득해진 윤신은 힘겹게 손을 내밀어 세헌의 어깨를 헤집어


댔다. 그러다 실크 가운이 조금 쓸려 그의 옷자락이 벌어졌다. 가시
거리에 드러난 그의 딱딱한 어깨를 아찔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젖
은 머리를 움켜쥐곤 제 성기 위에 짓눌렀다.

“아! 아…… 이제 넣어 주면 안 돼요?”

하반신 근육이 떨리는 느낌이 들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헌은 무관용 원칙을 지키기로 결심한 듯 느긋하게 나왔다.

가운을 꿰뚫을 것처럼 치솟은 성기의 양감이 분명히 도드라져 있는


데도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여유를 유지하는 저 선택적 인
내심과 면밀함이 무서울 정도였다.

“보채지 마. 이건 다 먹고 시작해야지.”

“흐읏, 읏! 아!”
회음 위로 혀를 내밀어 핥아 대던 세헌이 길쭉한 손끝을 세웠다. 그
러고는 크림을 한데 모으듯이 밀부의 입구 주변을 지분거렸다. 명백
한 의도를 갖고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했다. 어떤
말이라도 꺼냈다가 세헌의 삽입이라는 후속 행동을 늦출까 불안했
다.

하는 수 없이 윤신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세헌의 귀와 머리카락


을 미친 듯이 문질렀다. 그는 그 행위들을 모두 두고 봐 주면서 손가
락 끄트머리를 세웠다. 그러다 아이스링크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처럼 회음을 유연하게 문지르더니 별안간 크림이 가득
고인 손가락을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오일이나 러브젤과는 조금 다른 질퍽거리는 느낌 때문에 윤신은 단


전이 답답해졌다.

“아! 거기 들어 갔, 빼요. 빼 주세요.”

애원에도 그는 여봐란듯이 곧은 손가락을 더 욱여 대 안을 함락해


나갔다. 깊숙하게 파고든 그의 손가락이 내부를 들쑤셔 놓았다. 윤신
이 씻으면서 미리 풀어 둔 은밀한 내벽이 그의 진입만을 기다렸다는
듯 살갗에 쫀쫀하게 달라붙었다. 손가락 표피에 닿는 촉감을 인식한
세헌이 미간을 구겼다.

“아랫입이랑 윗입이 하는 말이 다른데 의견 통일부터 하는 게 어


때.”
얼굴을 붉힌 윤신이 뭔가 반박하려는 찰나였다. 세헌의 손이 움직
이는 게 한 박자 더 빨랐다. 이윽고 그가 수월하게 전립선을 찾아 그
대로 꾸욱, 눌렀다.

허억, 윤신의 목울대가 아주 크게 꿀렁거렸다. 파들거리는 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붙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의 딴딴한 느낌 때문
에 미칠 것 같았다. 윤신의 입이 새처럼 뻐끔거렸다. 이런 제 반응을
즐기던 세헌이 짓궂게 전립선의 주변부에 무게를 가했다.

쿡. 쿡. 찌르면서 힘을 주니 윤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 전 그


자리를 더 세게 짓이겨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
여서였다.

꺼떡거리는 성기는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정도로 빠듯하게 발기한


뒤였다. 안절부절못하며 사정을 기다리는 제 것의 선단을 힐끗, 내려
다본 윤신은 결국 세헌의 팔꿈치를 쥐고 좀 더 안쪽으로 밀었다.

“거기 말고요. 알잖아…….”

“아아, 빼 줘?”

“그 말이 아니라, 안 돼, 나가지 마. 아!”

“생크림까지 넣은 건 내 실수야. 놀랐구나.”

“읏, 실수 안 한다면서요.”

손가락을 쑥 빼낸 세헌을 밉게 노려보자 그가 키스하는 것처럼 눈


을 맞춰 주곤, 다시 회음을 문질렀다. 일부러 애태우는 걸 알면서도
윤신은 속절없이 차곡차곡 안달을 쌓아 갔다. 벌름거리는 입구가 그
만을 기다리며 움찔댔으나 세헌은 터질 듯 발기한 성기를 두고도 여
전히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다시금 손가락으로 회음 위를 비비던


그가, 이번엔 더욱 노골적으로 사타구니 사이에 퍼진 크림을 손에 찔
러 밀부에 좀 더 많이 욱여넣었다.

“어흑, 흣!”

기분 나쁜 촉감이 안으로 진입해 입구 주변을 적셨다. 촉촉하고 쫀


득거리는 내부가 움츠러들면서 세헌의 손가락을 단단히 감쌌다. 그
는 귀엽다는 양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 주더니 이번에도
쏙, 손가락을 빼내 버렸다.

윤신은 그의 음험하고도 음란한 행위에 기가 질렸다.

“진짜 이럴 거예요?”

“자그마치 2주나 나를 방치했으면 이 정도 벌은 각오했어야지. 허


리 들어. 내가 이 케이크 어떻게 먹는지 똑똑히 봐.”

아직 화가 전부 풀린 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워밍업에


불과했다는 양, 세헌의 눈매가 어둡고 사나워졌다.

그는 윤신의 두 다리를 더 추켜올리게 만들더니, 양쪽 허벅지를 단


단히 붙잡곤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음부 속에 밀어 넣었던 크림을
수거해 가겠다는 듯 입구에 혀를 욱여넣었다.
아찔해진 윤신이 입술을 꽉 감쳐물고 온갖 욕지거리를 겨우 삼켰
다. 입구 주변에서 헤엄치듯 돌아다니는 세헌의 혀끝이 저장하듯 넣
어 두었던 크림들을 빠는 게 느껴졌다. 몹시 밀부가 민감해진 상태라
그 촉감이 고스란히 전이돼 돌 것 같았다.

수치와 짜릿함이 동반되는 이 양가적인 느낌을 누가 알까.

싫고, 좋았다.

몸을 비틀면서 싫어하는 티를 내자, 세헌의 몸짓은 더욱 집요하고


농밀해졌다. 쫍, 쫍. 크림을 빨아들이는 음탕한 효과음들이 윤신의
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발생했다.

제 다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정작 자신이 아닌 정면에 있는


세헌에게 더 잘 들여다보인다는 게 치 떨리면서 부끄러웠다.

“아, 좋아, 아, 싫, 하지 마!”

사실 그가 침대 위에서 이런 식으로 지난 2주를 복수할 줄 알았다.


서럽고, 창피하고, 열받는 와중 느끼고 있는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
다. 세헌이 제 안에 뭔가를 담았다 수거해 가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행위를 할 때마다 늘 그랬다. 죽을 것처럼 부끄럽고
끔찍했다. 동시에 우습게도 더할 나위 없이 흥분됐다.

자신이 이상한 성벽을 지닌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두렵고, 그런 한편


하면 안 되는 은밀한 짓을 강세헌과 몰래 저지르는 것 같아 짜릿했던
것이다.
지금도 똑같았다. 선단에서 쿠퍼액이 쏟아지기 시작해 혀라도 콱
깨물고 싶어졌다. 팔과 다리만 바르작거리다가, 결국 섭섭함이 급격
하게 차올라 울음을 터트렸다.

“강세헌, 이 개새끼야…….”

윤신이 우는데도 세헌은 봐주지 않았다. 자신이 울면 그 어떤 것보


다도 못 견뎌 하면서 침대 위에선 예외였다. 흥분과 서러움으로 점철
된 감정이 윤신을 울며 헐떡이게 만들었다. 그는 숨을 힘겹게 삼키며
세헌의 혀끝이 입구 안쪽을 들쑤시는 걸 모두 느꼈다.

돌기가 곤두선 까칠한 살덩이로 내벽의 크림들을 핥아 대던 세헌이


천천히 혀를 빼냈다.

골반을 쥐어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긴 후, 핏줄까지 다닥다닥 선


성기에 윤신의 둔부를 갖다 댔다. 흔들거리던 허리를 좀 더 안정적으
로 고정하고, 입구를 뻣뻣해진 귀두로 뭉개듯 눌렀다. 흐느끼던 윤신
이 제 골반을 쥔 세헌의 손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고는 부디 들어
와 달라는 듯 깍지를 꼈다.

“이제 그만하고, 들어오세요.”

허리를 숙인 세헌이 눈물로 젖은 뺨을 핥았다. 그러고는 혀끝으로


입술을 갈라 얽자, 입을 적극적으로 벌린 윤신이 그와 체온을 품었
다. 몇 번이고 겹쳐진 살결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타액이 늘어지
면서 선을 만들어 냈다. 세헌이 혀를 내밀어 그걸 훔쳐 갔다.

“박아 줬으면 좋겠어?”


“흐으…….”

“그럼 너도 하나를 해야지.”

진짜 경제 논리로 이 행위를 이행하자는 게 아니다. 강세헌은 지금


자신을 명백히 희롱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게 저항할 여력도, 마음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윤신은 뭐든 하겠다는 것처럼 겨우 눈물을 거두고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세헌이 갑자기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무릎만 접히고 꿇어앉게 만들더니, 뒤에 바짝 버티듯 자세를 잡았다.

처음엔 뭘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모양은 다 망가졌지만 내용


물은 아직 반 정도 남은 케이크를 보자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케이크 판을 두 사람의 앞으로 당겼다. 귓가에 박자를 쪼개는


것처럼 쪽쪽, 뽀뽀하던 그는 아프리만치 콱, 귓불을 깨물었다.

“윽……!”

“오늘 윤신이 쓸 콘돔이 없네. 이 위에 싸야겠다.”

놀란 윤신의 두 팔이 뒤로 향했다. 제 몸을 뒤에서 감싼 세헌의 양


쪽 치골쯤을 잡고 무너지기 싫다는 듯 버텼다. 이에 그가 직접 앞으
로 손을 뻗어 대신 자위해 주었다. 이미 프리컴을 쏟아 질척해진 귀
두부터, 꺼떡거리는 기둥 전체를 한 손으로 앞뒤로 쓸어 댔다. 사출
직전이었던 성기가 적극적인 손길에 희뿌연 정액을 토하려고 몸통을
바들댔다.

이윽고 세헌이 윤신의 몸을 좀 더 앞으로 낮췄다. 자연히 곤두선 성


기가 자유 낙하해 케이크 크림에 푹 처박혔다.

“흡! 아! 선배, 아!”

콰악. 세헌이 제 내부에 박고 사정하듯, 윤신의 요도구에서 팟, 하


며 정액이 튀었다. 불투명하고 점성 있는 체액들이 케이크 시트 사이
에 고여 들었다. 세헌은 전부 다 쥐어짜 낼 기세로 기둥을 좀 더 크
림 속에서 문지르고, 음낭까지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다. 사정하는 윤
신의 몸이 여운으로 늘어져 점점 더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한데 그 모양새가 꼭 제게서 벗어나려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세헌이 별안간 윤신의 복부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망치지 마.”

“제가 어딜, 간다고, 읏!”

“가지 마, 윤신아.”

지친 한숨을 뱉은 윤신은 그의 반지 끼워진 손가락을 앞으로 잠시


끌어당겨 입 맞췄다. 제 몸이 그의 장난질로 엉망이 되어 가고 있으
면서도, 눈에는 세헌이 먼저 보였다.

“하아…… 전 선배 거예요.”
“그럼 보여 줘. 내가 불안해하지 않게.”

젖 먹던 기력까지 쥐어짜 내 겨우 몸을 다시 일으킨 윤신이 실크 가


운의 부드러운 천을 사이에 두고 세헌과 몸을 마찰했다. 뾰족하게 튀
어 나온 그의 성기를 제 엉덩이 골에 끼우듯이 접촉했다.

위아래로 몇 번 쓸면서, 좌·우로도 번갈아 가며 움직이자, 세헌의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숨들이 연신 터져 나왔다. 마침내 그가 이 저
속한 행위에 화답하듯 딱딱해진 기둥을 갈라진 틈새에 몹시 천박하
게 비비면서 속삭였다.

“기분 좋아?”

윤신은 고개를 옆으로 힘겹게 돌려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


신했다. 한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었던 것 같았다. 세헌이 울대뼈
가 두드러진 목울대를 손바닥으로 콱, 받치고는 난폭하게 키스했다.
이미 크림으로 범벅이 된 윤신의 몸을 다른 한 손으로 애무하자, 조
금 전 사정했던 윤신의 것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신음한 윤신이 눈을 감고 그의 혀끝을 받아들였다. 서로의 것이 입


안에서 겹쳐졌다. 둔부에 찌를 듯이 기둥을 지분거리던 세헌의 허리
짓도 함께 거칠어졌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졌다.

바로 그때였다.

세헌이 바짝 끌어안은 윤신의 몸을 힘껏 앞으로 밀며 동시에 무너


졌다.
“윽……!”

윤신의 얼굴이 케이크 위에 푹 박혔다. 안면에 분홍색 크림이 흠뻑


묻어났다.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시도로만 그쳤다. 어느 틈에 세헌
이 제 가운을 완전히 벗어 던져 버리고는 알몸으로 다시 전신을 겹쳐
왔기 때문이다. 짜임새 있는 근육들이 피부에 닿아, 기분 좋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윤신의 얼굴에 묻은 슬라이스 된 딸기와 시


트를 입에 물었다.

윤신이 허탈하게 입을 뗐다.

“이걸 안 먹으면 강세헌이 아니지.”

“나쁘지 않은데. 정액이 들어간 허니문 케이크.”

24시간 중 반 이상은 튕기면서 왜 침대 위에만 올라오면 돌아 버리


는 건지, 연구 대상이다.

이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가끔 진짜 변태 같은 거 아세요?”

“네가 귀여워서 그래.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 다 네 책임이야.”

귀밑에 묻어난 크림을 혀로 핥은 세헌이 귓가에 덧붙여 작게 속삭


였다.

“맛있어, 윤신아.”
“그래도 안 돼. 오늘은 부드럽게 해야 돼요……. 중요한 날이니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먹어 치울 거야.”

“듣고 있어요?”

“사랑해, 윤신아.”

“…….”

“사랑해.”

인생의 3분의 1쯤이 편법이었을 그는 또, 편법이다.

처음엔 아프게 하려고 미리 놀려 두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복해


서 그의 서툰 고백들을 듣다 보니 안 어울리게도 여느 때에 비해 마
음이 격해진 상태라는 게 본능적으로 전달됐다. 그리고 윤신은 언제
나, 어디서나, 그의 그 몇 마디에 하염없이 무너졌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게 사치임을 알지만 실은 아파도, 울려도 좋으니


더 자주 말해 줬으면 좋겠다.

꼭 매일이 기념일 같았으면.

불편하게 손을 내밀어 세헌의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자 그가


깊은숨을 토했다.

그 가빠진 숨소리를 듣는 순간 추잡한 생각이 치밀었다. 그에게 비


밀을 만들 순 없어, 털어놓았다. 이렇게 감추고 싶은 게 생길 땐 솔
직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제 성정이 싫어진다.

“수석님이 앞으로도 주변에 아무도 없이 외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


어요.”

“…….”

“내가 다 갖고 싶어요. 죄송해요…….”

자신이 잘못해서 싸워도, 마음에 없는 어떤 못된 말을 해도, 몇 번


이고 그를 내쳐도, 결국 그의 삶엔 자신밖에 없어 다시 돌아올 테니
까.

그 이기적이고 못된 심정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세헌은 모


두 읽은 게 분명했다.

대꾸 대신 크림으로 꾸덕꾸덕해진 관자놀이에 키스해 준 세헌이 성


기를 윤신의 입구에 조준하듯 맞췄다. 커다란 기대감, 그리고 세헌과
의 섹스에서 늘 수반되는 약간의 두려움으로 긴장한 윤신이 숨을 몰
아쉬었다. 짐승처럼 엎드리듯 무릎을 꿇고, 세헌의 하중을 받아들였
다. 그가 좀 더 노골적으로 선단을 입구에 꽂았다.

“넣는다.”

마침내 한 손으로 어깻죽지와 견갑골을 겹쳐 쥔 세헌이 다른 한 손


으로는 제 성기의 기둥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급발진하듯 퍽, 제 것을 밀부에 쑤셔 박았다.


“아……!”

이미 한번 풀어 둔 데다, 상큼한 향의 크림과 세헌의 타액으로 적셔


진 내부는 부푼 성기를 꽤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그 두꺼운 기둥이
단박에 반 정도 꽂혀 들었다.

그러나 평소에 비해 매끄럽게 들어온다고 해서 통증이 없는 건 아


니었다. 하반신이 갑갑해진 윤신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양 뺨이 벌
게져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눈두덩을 떨어 댔다.

이에 세헌은 좀 더 삽입이 쉬운 자세로 허리의 위치를 고치더니, 윤


신이 괴로워하며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 것을 뿌리까지
힘껏 욱여넣었다.

퍼억! 선단이 깊숙한 자리에 박히면서 윤신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


졌다. 그걸 세헌이 민첩하게 막아 내곤 두 개의 몸을 빈틈없이 맞물
렸다.

이윽고 그는 윤신의 골반을 양손으로 쥐었다. 곧이어 난폭하게 추


삽질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윤신은 내벽의 미끄덩한 느낌 때문에 더
푹푹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떨었다. 한데 그게 착각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다.

“아! 아! 아!”

자꾸만 전진하듯 앞으로 기울여지는 고개 때문에 윤신의 이마가 침


대 헤드에 박혔다. 쿵, 쿵, 찧듯이 부딪치는 모습을 보고 세헌이 한
쪽 손을 뻗었다. 이마가 닿는 헤드 부근을 단단히 쥐자, 그 위에 머
리를 부딪치게 돼 한결 나았다.

그는 귀두로 입구에서 가까운 자리를 훑듯 문지르다가, 깊게 푹 욱


여넣었다. 또 언제 깊숙하게 박았냐는 듯 짧게 넣었다 빼며 쳐올렸
다.

그때마다 전립선이 함께 눌리는 바람에 까무러칠 것 같았다. 이성


을 붙잡고 있을 여력이 없는 윤신으로선 그의 불규칙한 호흡을 도저
히 따라갈 수가 없어 벅찼다. 그저 성기가 빠져나가려 할 때마다 제
내벽이 딸려 나가는 걸 느끼며 수치스러워하는 게 고작이었다.

퍽! 퍽! 허리 짓 하는 세헌의 행동이 점점 더 사나워지고 광폭해졌


다. 아득한 삽입감과 찌릿한 밀착감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끝내 윤신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
었다. 그저 꿰뚫려서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너무 좋아서
돌연 무서워졌다. 호흡이 달려 갔다. 목까지 빈틈없이 빨개졌다.

“흣! 아! 아아! 선배, 거기! 읏!”

“내장까지 내 좆으로 다 뭉개 버리고 싶어.”

익숙하게 서로가 좋아하는 자세를 찾아 피스톤 운동하는 그들은 약


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폭주했다. 세헌이 길고 두꺼운 성기로 비밀스
러운 내부에 침입해 무법지대인 양 휘저어 댔다. 그러는 동안, 윤신
은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뒤에서 콱콱 쑤셔 댈 때마다 윤신의 눈앞에 보이는 세헌의 반지가
헐거워 달랑거렸다. 헤드를 붙든 손등에 핏줄이 빠듯하게 선 모양새
가 몹시 선정적이었다.

그걸 보자 시각적인 자극까지 더해져 기분이 하늘을 걷듯 둥둥 떠


올라 죽을 맛이었다. 괴로워진 윤신은 밀부를 조이면서 그의 것을 압
박했다. 그러자 꼭 하체를 내부에 전부 밀어 넣기라도 할 셈인지 그
가 매우 거칠게 삽입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상하 운동을 해 대는 세헌의 둔부에 오목하게 보조개가 팰 정도로


움직임이 격렬했다.

“씨발! 윽!”

음험한 목소리가 윤신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뱀이 빈틈을


지나가듯 쑥,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뒤에서 있는 대로 힘껏 피스
톤 운동하던 세헌이 윤신을 좀 더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서로의
왼손을 겹친 채 완벽하리만치 오차 없이 전신을 짓눌렀다.

깍지를 낀 세헌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기 위해 허리 운동에 열중


했다. 섹스에 몰두한 그의 이마에서 투명한 땀이 뚝, 떨어져 윤신의
어깨를 스쳤다.

동시에 한번 사출한 윤신의 것은 제때 옆으로 치워 두지 못한 케이


크 위에 다시 처박혀 비벼졌다. 복부와 음낭까지 한데 뭉겨져 괴로웠
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게 꿰뚫린 배 속이 사방이 꽉 막힌 막다른 골
목처럼 답답해졌다.
점점 사나워지는 그의 허리 짓 덕분에, 윤신은 세헌의 토정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음낭이 둔부에 막혀 살갗에 콱콱 박혀 드는 느낌
과, 까칠한 음모가 마찰하는 감각이 미칠 듯이 짜릿했다. 가장 깊숙
한 곳을 찾아 귀두를 찔러 넣는 그의 삽입이 정교함을 서서히 잃어
갔다.

윤신은 제 손에 겹친 세헌의 손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반지를 핥아


가며 헐떡이니 퍽퍽 미친 듯이 쑤셔 넣던 성기를 뒤로 쑥 빼낸 세헌
이 돌연 엎드린 윤신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제 허벅지 위에 앉게 해,
서로의 달뜬 얼굴을 마주했다.

“이대로 있어.”

그는 위로 솟구친 성기를 음부에 다시 쑥 밀어 넣고는 그대로 윤신


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위에 콱 짓눌렀다.

“윽, 선배, 흐읏.”

세헌은 대꾸 대신 크림 범벅인 윤신의 온 얼굴에 요란하게 키스했


다. 그러자 그의 허벅지 위에서 흔들거리던 윤신이 땀에 젖은 세헌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가가 새빨개진 그는 좀 더 제 것을 깊숙이 퍽,
하고 박아 넣으면서 눈 맞춤으로 대답했다.

눈동자 속에 서로밖에 없는 짤막한 시간이 흘렀다.

곧이어 가볍게 쳐올린 귀두가 전립선을 건드렸다. 윤신의 것이 끝


을 고대하며 꿈틀댔다.
“하, 할 거 같…….”

그 또한 한계 지점에 다다른 건지, 고집스럽게 혀를 얽고 입 맞췄


다. 윤신도 세헌의 혀를 열심히 빨면서 야릇한 성감을 부추겼다.

쿨쩍, 쿨쩍, 그가 상하 운동 할 때마다 내부에서 크림이 눌리는 선


정적인 소리들이 일었다. 그러나 윤신은 민망한 감각도 차치하고 쾌
락으로 헐떡댔다.

며칠 굶은 사자처럼 게걸스럽게 제 허리를 쳐올리는 세헌이 위로는


서로의 살덩이를 쫀쫀하게 엮어 가며 아래로는 두 사람의 절정을 도
모했다.

콰악!

음낭이 윤신의 둔부에 부딪치며 그가 뿌리까지 성기를 욱여 댔다.


내벽을 짓누르듯 삽입해선 선단을 문질렀다.

발밑부터 덩어리진 쾌감이 차오르는 것 같더니, 눈앞이 아찔해졌


다. 일순 몸이 가벼워져 전신이 허공에 붕 뜬 기분을 느끼며 윤신이
먼저 절정에 다다랐다. 세헌의 탄력적인 복부와 시트 위에 정액을 흩
뿌렸다.

“아! 아! 좋아……. 아! 학.”

곧바로 세헌도 사정했다.

“제기랄, 하아.”
마침내 끈적이는 액체가 내부에 쏟아졌다. 은밀한 내부에 느릿하게
토정액이 퍼져 나갔다.

기가 다 빠진 윤신은 힐끗 제 몸을 내려다봤다. 자신은 물론이거니


와 계속 서로 비비고, 문지르고, 마찰해 대느라 세헌의 온몸도 분홍
색 크림으로 엉망진창이었다. 한숨을 몰아쉰 뒤, 완전히 자신을 의지
하듯 그에게 하중을 기대자 세헌이 기꺼이 받아 주었다.

그들은 겹쳐 앉은 채로 서로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아직 그의 것은 윤신의 안에 있었다.

숨을 고르는 동안 두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정적인 시간이


째깍째깍 흘렀다. 여운을 즐기던 세헌이 먼저 움직여 왼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헐렁거리는 반지를 보여 주자, 머쓱해진 윤신이 뺨을 붉혔
다.

그걸 본 그는 사정 후에도 건재하게 곤두서 있는 제 것으로 내벽을


쿡, 찔렀다.

“아랜 쫀쫀한데.”

“읏, 잠깐만…….”

“위는 헐겁군.”

윤신은 이상하게 이 순간이 너무나도 창피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고 변명할 마음도 안 생겼다.
“주말에 반지 사이즈 조절 맡기고 올게요.”

온순한 대답과 함께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꼭 그러겠다고 다


짐하는 것처럼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자 세헌이 동그란 뒤통
수를 붙잡고 제게서 떼어 내더니, 벌어진 입술 사이에 헐렁한 반지가
끼워진 약지를 밀어 넣었다.

“그럼 둘레부터 제대로 재야지.”

작심한 듯 그의 손목을 양손으로 잡은 윤신이 혀로 입 속의 손가락


을 정신없이 핥기 시작했다.

세헌이 그런 윤신의 머리 위에 몇 번이고 입 맞췄다.

* **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탁 비서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


인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세헌의 차량을 발견하곤 고개를 꾸벅 숙였
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그가 승강기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태


블릿 PC에 띄운 브리핑 화면을 키워 그에게 내민 탁 비서는 서류 가
방을 넘겨받으며 미리 잡아 두었던 기계를 향해 손짓했다. 세헌이 먼
저 올라타고, 탁 비서가 연달아 탑승했다.
화면을 키워 가며 내용을 살피던 세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음
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기색을 살피던 탁 비서의 입이 열렸다.

“아무래도 딜에서 법률적 문제점을 전부 찾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시간적, 장소적 제약 때문에 그쪽에서 보내 준 자료들 검토하는 것만
으로도 너무 벅차다고 그러네요.”

“실사 업체들은 일 못한다는 소리를 본인들 입으로 지껄이면서 수


치심도 뭣도 없군. 대상 회사에서 자료는 제대로 왔어?”

“네. 현재 회사법 팀 어쏘 변호사님들이 같이 붙어서 점검 중이십


니다.”

“결국 남은 시간상 매도하는 쪽에 보증 요청을 해서 정보 공개를


유도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긴데. 이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계속 좆같이
삐걱거리네. 사람 인내심 테스트하나.”

“이건 제 사견인데, 우리 펌 연계 업체 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동의해. 일단 알겠어. 그것도 같이 검토하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땡.’ 하는 소리를 내며 양문형 문이


열렸다. 먼저 앞서 나간 세헌이 태블릿 PC를 탁 비서에게 돌려주었
다. 한데, 무심코 받아 들려던 탁 비서가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에 딱 맞게 끼워진 백금색 반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그것을 놓쳤
다. 그 바람에 손바닥만 한 기계가 땅으로 추락했다.
잠시 멈춰선 세헌이 툭, 떨어진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탁 비서
를 마주 봤다.

“미련하게 뭐 하는 짓이야. 시간 없어. 주워.”

“예? 아…… 예. 죄송합니다. 저기…….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라 태블릿 PC를 주운 탁 비서는 긴 복도를 따라 세헌을


뒤쫓았다.

“그리고 저, 저기. 제가 무슨 말씀 드리려고 했었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던 세헌이 의외라는 기색으로 다시 멈춰 섰


다. 웬만해선 탁 비서가 이러는 일이 없기에, 매우 미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일하기 싫어? 아니면 연봉을 더 올려 줘? 원하는 걸 확실하게 얘


기해. 질척거리지 말고.”

“아뇨. 저…… 그게 아니라. 제가 놀라 가지고 진짜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죄송해요, 진짜로. 수석님 손에 반지가…… 제 눈에도 충격적
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그제야 이런 반응이 나오게 된 원인을 알아챈 세헌이 눈살을 구겼


다.

“호들갑 떨지 말고 봤으면 소문이나 내.”

“소문요? 이거 설마 저 해고하려고 판 까시는 거예요?”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양 아랫입술을 꽉 깨물곤 덧붙였다.

“어차피 날 거라면 네가 내는 게 제일 나아. 적당히 살 좀 붙여. 돈


이 아주 흘러넘치게 많은 연상이라고. 아니면 갓 20살 넘은 애 꼬여
낸 쓰레기라 그러든지.”

상대방이 누군지 특정할 수 없도록 혼선을 줘 본인에게 화살을 모


두 쏠리게 하라는 명령인 듯했다. 그 뒤에 숨겨 보호하고 싶은 게 있
는 것이다. 뭐든 해도 되는 나쁜 이미지가 진실을 가리고 싶을 땐 도
움이 될지도 몰랐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탁 비서가 넌지시 대꾸했다.

“빠릿빠릿한 비서 두신 보람을 느끼게 해 드리겠습니다.”

“사적으로 말고 공적으로도 좀 느끼자. 정신 돌아왔으면 마저 보고


해.”

뒤늦게 제 용무가 다시 떠오른 탁 비서가 앞쪽을 향해 손짓하며 다


시 걸었다.

“아, 예. 그 공동 대표 취임 건요. 아직 펌 내에선 엠바고고요. 송


변호사께서 파트너 변호사님들 의사 수렴해서 딜 시작하실 것 같고
요. 저희 비서실 쪽에선 행정 절차 준비랑, 기사 보도, 그리고 취임
사. 그 정도 계획 일단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취임하면서 새로운 서비스 실행안 바로 가동할 거야. 당분간 네


일이 좀 많아질 거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정식 취임은 언제쯤으로 예상하시는
지…….”

“내년 상반기 목표로. 물론 중간에 내 프로젝트 일정 따라 변수 생


길 수 있을 테니까 그거까지 고려해.”

“알겠습니다.”

마침내 사무실 근방에 다다른 두 사람의 눈에 비서실 직원들과 웬


서류에 서명하고 있는 윤신의 모습이 잡혔다. 모두가 정중하게 아침
인사 했으나, 늘 그렇듯 세헌은 무시했다. 집무실로 바로 들어가 버
릴 기세기에, 윤신이 말로 그를 붙들었다.

“강 수석님, 잠시만요. 여기 서명해 주실 거 있다는데요. 비서실 추


가 예산 편성 건입니다.”

눈으로 감사 인사한 사무장이 벌떡 일어나 세헌을 향해 서류철을


내밀며 부연 설명했다.

“도 변호사님이 진행비 쓰시는 게 별로 없어서 저희 비서실이 늘


덕을 보거든요. 그런데 그걸 당겨 쓸 거면 수석님 전결이 필요해서
요. 서명 부탁드립니다.”

그가 다가와서 대충 눈대중으로 내용을 훑더니 왼손으로 상단부를


잡고 오른손으로 서명했다. 그의 손 움직임이 정갈했다. 사각사각,
자연히 펜대를 움직이며 펜촉이 긁히는 소리마저 깔끔했다.
한데 평화롭던 와중, 부드럽게 움직이는 세헌의 손을 보던 사무장
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윤신이 세헌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전혀 아랑곳없이 사인한 그가 사무장에게 도로
서류철을 넘기면서 윤신을 마주 봤다.

“너도 용건 있어? 있으면 빨리하지. 지금 말곤 3시 전까지 너한테


낼 시간 없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윤신의 눈가에 당장이라도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충동이 스몄다. 표정만 봐도 그 속내를 읽을 수 있
는 세헌은 무뚝뚝하게 이어 말했다.

“말로 해. 싸가지 없이 고개 젓지 말고.”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그대로여서 도리어 윤


신은 흠칫했다. 저렇게 시큰둥한 기색으로 빈정거리는 건 솔직히 아
직도 열받았다. 그의 방식대로 제게 돌려주었던 모든 사랑 고백들을
떠올리자 더욱 그랬다.

윤신은 눈으로 광선 쏘듯 힐난들을 담아 보내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쓱. 야멸치게 돌아선 세헌이 탁 비가 문고리를 잡고 있는 제 집무실


로 향했다. 탁 비서가 마저 보고할 사항이 있는 건지 문을 닫고 따라
들어갔다.
세헌의 기다란 뒷모습이 사라지자, 윤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매우
얄미워하는 표정으로 닫힌 문을 지켜보다가, 끝내 픽 웃음을 터트렸
다. 누가 볼 때 상냥하게 굴면 사달 나는 줄 아는 저런 칼 같은 면까
지도 좋아 미치겠으니 진짜로 답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윤신이’ 사
건 이후 펌이 한번 소소하게 뒤집어진 전적이 있던 터라 세헌의 판단
이 멀리 보면 맞긴 했다.

그는 다시 자신이 서명해야 하는 서류 위로 주의를 기울였다. 이윽


고 사인을 모두 마쳐 펜을 내려놓곤 사무장에게 함께 돌려주려는데,
그때까지도 어설프게 일어선 채로 굳어 있던 그녀가 많이 당황한 얼
굴로 입을 뗐다.

“봤어요, 도 변호사님?”

“뭘요?”

“강 변호사님 손에 반지 있었잖아요!”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거짓말이나 남을 속이는 일에는 영 서툰 윤신이 괜히 세헌의
방을 힐끗 보곤, 어색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제가 확실히 봤어요. 자기들은, 자기들도 못 봤어?”

늘 차분한 사무장이 웬일로 흥분해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안타


깝게도 다른 직원들은 다들 제 일을 하느라 목격하지 못한 건지 고개
를 가로저으며 하나둘씩 대꾸했다.

“사무장님이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그런 거 끼고 다닐 분 같지 않
은데.”

“연애하는 기미가 있으셨으면 저희가 알죠. 수석님이 데이트할 시


간이나 있어요?”

“왜요? 솔직히 저 스펙에 솔로인 게 말이 돼요? 애인 생기셨을 수


도 있죠. 시간은 쥐어짜 내면 되는 거고요. 이 펌 변호사분들 바쁘지
만 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시잖아요.”

“에이, 같은 펌에서 일한다고 그게 동일 노동이야? 강 수석님은 좀


특수 케이스지. 저분은 일중독인 데다가 책임져야 할 게 너무 많아.
중압감이 다르다고.”

사실 시간을 쥐어짜 내면 된다는 신입 패러리걸의 말이 제일 정답


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잘 만들면 어느 정도는 생겼다. 아울러 서로
의 취미가 서로라는 점도, 같은 건물에 있는 시간이 하루의 반이 넘
어 행동반경이 거의 같다는 것도 낭비할 시간 단축에 꽤 도움이 됐
다.

“아니, 내가 봤다니까? 제가 봤어요! 진짜 못 봤어들? 도 변호사님


도요?”

난처해진 윤신이 대충 눈짓으로 얼버무리곤 제 방으로 들어가려 하


는데, 마침 세헌의 방에서 나온 탁 비서가 유일하게 사무장의 말에
긍정했다.
“제가 봤어요, 사무장님.”

다만 곧바로 이쪽으로 눈길을 던져 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돌아서


던 윤신은 흠칫했다.

여태 단 한 번도 서로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하나, 윤신의 직


감에 송 대표와 탁 비서 두 사람만큼은 세헌과 자신의 관계를 짐작하
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런 게 거의 확실했다. 지금 제게 보내는 저
미심쩍은 시선이 그걸 증명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사적인 범주의 세헌과 윤신에 대해선 잘 모르지


만, 그 두 사람은 조금 달랐다. 아울러 탁 비서는 눈썰미도 원체 좋
아서, 제 반지 디자인이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도 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워진 윤신이 마른침을 삼키고 손을 뒤
로 감추려는데, 탁 비서가 그러면 더 수상쩍어 보인다는 듯 능청스러
운 눈길을 보냈다.

그냥 목걸이로 한다 그럴걸.

세헌에 대한 탁 비서의 충성도는 기이할 정도로 높았다. 사람들 앞


에서 이상한 소리를 할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서 불안했다. 윤신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탁 비서가 엄정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단호하게 뱉어 냈다. 윤신과 사무장을 비
롯한 내부의 직원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브리핑합니다. 강 수석님 왼손 약지에 반지 있고요. 백금색이고,


모양은 라운드인데, 끝만 뾰족해요. 따로 데이트할 시간은 없으신 걸
우리가 아니까…… 서로를 적당히 방치해도 되는 꽤 오래된 여자 친
구 아닐까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가 집요한 소유권 행세를 거두고 자신을 적당히 방치하는 건 생


각만 해도 싫었다. 윤신은 속으로 으득, 이를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 곰곰이 듣던 사무장이 반론을 펼쳤다. 반지가 끼워진


첫인상에 놀라긴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던
듯했다.

“그것보단, 추근거리는 사람 많아서 귀찮은 일 자꾸 생기니까 아무


거나 끼고 오신 건 아닐까요? 강 수석님 같은 분이 낄 커플링치곤 심
심한 디자인인 것도 그렇고요. 또 주말 빼면 매일 뵙는 우리가 보기
에도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말에 탁 비서는 별일 아닌 것처럼 수긍했다.

“저도 그게 제일 먼저 의심되긴 했어요. 시간이 알려 주겠죠. 어차


피 저분 결혼하셔도 우린 초대 못 받아요. 이 펌에서 송 대표님 정도
나 청첩장 받으려나. 자, 메신저로 소문낼 시간 5분 드릴게요. 얼른
털고 일들 합시다.”

파티션 너머에 서 있는 윤신의 뒤를 지나면서, 탁 비서가 의미심장


한 눈빛을 보냈다. 꼭 그 안에 ‘본인은 참석하실 분이니까 그렇게 말
해도 문제없죠?’라고 말하는 듯했다.

흠칫한 윤신이 가볍게 묵례하곤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고 들


어와 창문 너머를 힐끗 살피자, 직원들이 모두 신이 나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
는 것 같았다.

저렇게 반지 하나에 재밌어할 일인가, 싶다가도 대상이 강세헌이라


납득됐다.

웃음을 터트린 윤신이 책상 앞에 앉았다.

곧이어 제 왼손에 끼워진 반지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뒤, 또


하나의 평범한 하루를 시작했다.

* **

두 사람 다 여유롭게 쉴 수 있는 틈새 시간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기다란 소파 위에 평상복 차림의 세헌
이 가로로 앉았다. 그 위에 제 등을 기댄 윤신이 하중을 편안하게 기
울였다.

그들은 나란히 전신을 겹쳐서 로트렉의 그림들을 모아 둔 얇은 책


을 감상했다.

사락, 빳빳한 질감의 종이를 한 장 넘길 때마다 세헌이 결 좋은 머


리카락 위에 입 맞췄다. 수차례 그 행위가 반복되는 동안 윤신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 자리한 세헌의 얼굴이 보고 싶으면서도 제 상상의 영역으
로 남겨 두고 싶었다. 외부에선 잔뜩 날이 선 그일지라도 제 옆에서
만큼은 모든 경계가 다 사라진 얼굴을 하고 있을 걸 알아서였다. 굳
이 쳐다보면 자신이 너무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 간만인 강세헌의 여
유가 마모되어 닳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상상만 거듭하다 보니 감질나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뒤통수를 그의 어깻죽지에 기댄 채 키스를 받기만 하던 윤신


이 느닷없이 얼굴을 돌려 서로의 민감한 살갗이 부딪치도록 유도했
다.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헌이 입술 위에 천연덕스럽게 뽀뽀를


하더니, 곧 윤신의 턱을 잡고 앞을 보도록 돌렸다.

“가뜩이나 네가 느려서 책장 넘기는 게 더뎌. 앞에 봐.”

“그림 감상하는 것도 속도전으로 하시는 선배가 비정상이에요.”

“넌 활자도 느리게 읽잖아.”

“저 진짜 속독으로 어디 가서 져 본 적이 없어요. 그것도 선배가 비


정상이고요.”

“속독 잘한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도윤신이 그립다.”

그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윤신이 맨 처음 로펌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몸을 달싹이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입을 뗐
다.
그러고 보니 왜 이런 화제로 대화한 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선밴 나 언제부터 좋았어?”

흐음. 생각에 잠긴 듯 낮은 감탄사를 뱉어 낸 세헌이 이내 덤덤하게


답했다.

“기억 안 나.”

“거짓말. 본인 메타인지 좋다고 자랑할 땐 언제고.”

“진짜 기억 안 나.”

분명히 기억나는 거 같은데.

머리를 젖히듯 들어서 세헌의 턱을 이마로 찧은 윤신이 다시 편안


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말해 주기 싫은 모양이다. 이런 반응
으로 미루어 정확한 시기는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 수도 있었다. 하
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 관계를 건졌다.

강세헌이 먼저 좋아했다.

제 쪽이 먼저였다면 조금 전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 적어도 ‘기억


안 나.’는 아니었을 테니까.

즐겁게 웃은 윤신은 세헌의 몸에 자신을 좀 더 의지하듯이 기댔다.


그러고는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닿는 자리들을 따라 그림을 눈에 담
았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 마분지에 그린 유채가 제 마
음을 사로잡았다. 아주 짧은 머리를 한 두 명의 여자가 한 침대에 누
워서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꿈자리가 매우 편안해 보였고, 서로를
향한 신뢰로 가득한 듯했다. 아마 좋은 꿈을 꾸고 있으리라.

제 옆에 누운 강세헌의 얼굴이 이랬으면 좋겠다. 자신을 끌어안고


잠들기 직전, 봐 온 중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하긴 했다. 그래도 아
직까지 완전히 평온한 상태로 잠드는 건 멀어 보였다. 다행인 것은
이제 그들에게 그 소박하지만 위대한 변화를 꾀할 시간이 많다는 점
이다.

세헌의 품에서 제 몸을 달싹이던 윤신이 별안간 이런 제안을 꺼냈


다.

“우리 신혼여행 가요. 오르세에 이 그림 걸려 있으려나? 저 프랑스


는 안 가 봤거든요.”

가볍게 제 뒷머리를 세헌에게 문지르며 그러자, 그는 잠시 별말이


없었다.

안 튕기면 이 손이 강세헌의 손일 리가.

제 몸의 왼쪽으로 뻗은 세헌의 손을 힐끗 본 윤신이 예상했던 반응


이라는 듯 덧붙였다. 그가 거부하는 척하면, 윤신은 더욱 승부욕이
일었다.

“가까운 해외도 가능해요.”


“…….”

“국내까지도 수용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대신 바다 보이는 곳이어


야 돼요. 풀빌라가 옵션.”

교섭안을 제안하면서 책 한 장을 뒤로 더 넘기려는데, 그가 그 손짓


을 막아 냈다. 왠지 이렇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던 윤신이 한 번 더
분명하게 덧붙였다.

“신혼여행이란 말이 싫으면 여행의 목적을 자유 여행 정도로 바꿔


보고요. 이제 넘어오죠?”

열심히 두드리니, 결국 세헌의 말문도 열렸다.

“그래. 조만간 시간을 내 보자.”

생각보다 쉽게 수긍한 세헌 때문에 윤신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진짜요?”

“네가 가고 싶은 데로.”

“진짜?”

“여행의 목적도 네가 원하는 걸로.”

약속의 증표를 새기듯 눈두덩 위에 닿는 세헌의 입술의 온기가 애


틋했다. 윤신은 그의 살갗이 닿는 동안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윽고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불현듯 윤신의 뇌리에 어디선가 읽은 푸른 장미 이야기가 스쳤다.

가끔 자신과 사랑에 빠진 강세헌을 보면 그 꽃이 떠올랐다.

처음 푸른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이었다고 한다. 장미에는 푸른색


색소를 생산하는 유전자가 없는지라, 흰 장미를 염색한 형태로밖에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누군가가 오랜 유전 공학 연구 끝에
푸른 장미를 끝내 만들어 냈고, 결국 그 꽃의 꽃말이 ‘기적’으로 바
뀌었다는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비좁던 세헌의 세계는 확실히 확장됐다. 그 안엔 자신이 있었다. 또


한 제 넓었던 세계는 축소되었다. 다만 그 안에 강세헌이 존재했다.
그들이 피운 푸른 장미가 각자의 손에 끼워져 있었다.

그의 핏줄 도드라진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얽은 윤신은 다시 자세를


고쳐 처음처럼 세헌에게 안정적으로 의지했다. 그의 것과 맞댄 손등
에는 언제나 솔직하게 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윤신조차도 차마
형언할 수 없었던 수만 가지의 애정이 가득했다.

그 온도를 느끼며 침묵하던 세헌이 별안간 푹 잠긴 음성으로, 왠지


내놓기 싫은 비밀을 마지못해 꺼내듯 입을 뗐다.

“난 첫눈에 반했던 것 같아. 다시 만나기 전까진 몰랐지만.”

헉.

고개를 돌린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헌을 직시했다.


습관처럼 머리카락 위에 키스해 준 그가 손가락을 세워 윤신의 머
리를 앞쪽으로 다시 돌리곤, 책의 한 장을 또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
다.

〈Not Anymore〉 마침
주석

[1] 公示送達. 송달받을 자의 주소 또는 거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법원 사무관 등이 서류를 보관하고 그 사유를 법원 게시장에 게시하
는 방법.

[2] 闕席裁判.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재판.

[3] Put Option. 주식 매수 청구권. 인수자가 정해 놓은 자에게 정


해진 가격으로 지분을 매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4] Charles Dickens, Great Expectations, Penguin Classic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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