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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보는 회사원 - ⓒ 영완(映完)

무당이 되어 세상을 어지럽힐 팔자를 타고난 아이.


욕심을 버리고 신을 받지 않기 위해 평범한 회사원이 되려 한다.
관상과 사주로 운명을 꿰뚫어 보는 최영훈.
과연 평범한 회사원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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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무당이 될 아이 >

1996 년 경남 통영.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끼끼끽~

요란스러운 벨소리에 영순 엄마가 밖으로 나가 녹슨 철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미천한 중입니다. 죄송하지만 시주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영순 엄마는 평소 독실한 불자였기에 없는 살림이지만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스님을 안으로 들였다.


스님은 마당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낡은 집을 둘러보았다.

“식은 밥하고 나물 있는데 비빔밥이라도 자실라예?”


“아이고, 그 정도면 진수성찬입니다.”
“쪼매만 기다리시소.”

영순 엄마는 부엌에 들어가 커다란 대접에 식은 밥과 나물 몇 가지를 덜어 넣고 참기름 한 숟갈과 고추장을


곁들여 비빔밥을 내왔다.
그런데 그 새 스님의 곁에 이제 대여섯살 먹은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야?”
“난 스님이란다.”
“스님이 뭔데?”
“부처를 따르는 사람이지.”
“부처는 뭐야?”
“허허...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단다.”
“에이~ 엉터리.”

영순 엄마는 얼른 다가가 비빔밥이 든 쟁반을 스님의 앞에 내려놓고 남자아이의 팔을 잡아 뒤로 끌었다.

“스님한테 그카면 못 쓴다.”


“괜찮습니다.”

영순 엄마는 사내아이에게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하고는 스님에게 사과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직 어리다 보니까예.”
“허허... 정말 괜찮습니다”

스님은 사과하는 영순 엄마를 말리곤 맛있게 비빔밥을 먹었다.


순식간에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해버리는 모습에 영순 엄마는 인스턴트 커피 하나를 종이컵에 타 건네주었다.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예. 집에 이런 것밖에 없어서...”


“저도 커피 좋아합니다.”

스님은 웃으며 커피를 받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아까 남자아이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영훈이요?”
“이름이 영훈이군요.”
“영훈이가 와예?”
“본래 시주를 받으면 조용히 축원해주고 떠나는데 영훈이 관상을 보니까 조금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혹시 사주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영순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그녀는 오래되고 정성스럽게 접혀 있는 종이를 천천히 풀어 스님에게 건넸다.
스님은 종이를 펴서 한참 동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곤 말했다.

“혹시 보살님께서 영훈이 진짜 어머니 맞습니까?”


“옴마야!”

영순 엄마는 깜짝 놀라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맞습니까?”
“그걸 어찌 아싰는데예?”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아이의 사주를 보니 초년에 부모가 두 번 바뀔 팔자였습니다. 그런데 보살님의 관상을 보니 중년이 어렵긴 해도
자식을 잃을 운은 없다고 봤습니다.”

영순 엄마는 영훈이가 들어간 방을 슬쩍 돌아보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유 참말로... 스님, 지는 우째야 합니까?”

스님은 그녀가 한참 울 동안 두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울다가 조금 진정이 됐는지 그녀는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스님, 사실은예 지하고 엄청시리 친한 언니가 있었다아입니까.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둘도 없을 만치...


아이다, 친자매보다 더 친하그로 지냈는데 그 언니가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지 뭡니까. 그라다 한 5 년쯤 지났나?
돌이 막 지난 아를 안고 나타나대예”
“그게 영훈입니까?”
“예. 언니가 울면서 그카대예. 자기가 키우몬 영훈이는 무당이 돼야 한다꼬... 세상만시로... 그 언니가 그 새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돼삤다아입니까.”
참으로 기구한 사연이다.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아를 키아준다는 기 어데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래서 안 된다 캤는데 지가 아를 받지


않으몬 자기는 아를 데꼬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꼬. 둘이 죽으면 죽었지 아를 무당 만들 수는 없다꼬 함서요.”
“허허...”

스님은 안타까워했다.

“지는 언니 말이 거짓말이 아닌 줄 알았어예. 그리 철석같은 언니 얼굴은 처음 봤다니까예. 근데... 아 하나


키운다는 기 너무 힘들대예. 바깥양반 사업은 갈수록 꼬꾸라지서 인자는 우리 식구 먹을 쌀도 떨어지뿠는데...
흑흑...”

그녀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자 스님은 눈을 감고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는 스님의 소매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우리 집은 인자 우찌 되는 건대예? 솔직히 이런 말 꺼내기는 좀 거시기하지만 지는 참말로 나쁜 생각도


했었고예...”

그 나쁜 생각이 무엇일지는 말 안 해도 뻔했다.


스님은 눈이 퉁퉁 부은 그녀에게 말했다.

“영훈이는 굉장히 드문 팔자를... 그러니까 망신살과 육해살, 그리고 귀문관살을 타고났습니다.”


“예? 그기 뭔 말인가예?”
“하면 되는 일이 없고 가업이 몰락합니다. 되는 일이 없으니 현실도피로 종교인이 되거나 하는데 이 아이는
타고난 욕심이 과해 조용히 속세를 등지지 못합니다.”
“그라모예...?”
“세상에 원망이 많고 욕심이 과한 이런 팔자가 잘못되면 사기꾼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굉장히 힘들게 할 팔자지요.
특히 귀문관살이 아주 강하니 점쟁이가 되면 그 신통함이 이루어 말할 수 없고 그것으로 세상에 큰 해를 끼칠
것입니다. 아이를 제게 주십시오.”
“스님한테예? 아를예?”

영순 엄마는 크게 놀랐다.

“중이 될 팔자는 아니니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제가 거두어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참말로 그리해도 되는 긴가...?”

영순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스님의 눈치를 보았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스님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영훈이의 팔자는 소용돌이와 같습니다. 그릇이 너무 커 일반 사람은 감당할 수 없어요. 건강이든 재물이든
아니면 재주든지 간에 다 가지려 할 겁니다. 또한 보살님께서 지금은 조금 어렵다고 하나 콧망울이 두텁고 얼굴
빛이 곱고 윤택하니 재복이 없을 팔자는 아닙니다. 아이를 제게 주시고 나면 곧 재운이 들어올 겁니다.”

안 그래도 나쁜 생각까지 했던 그녀이기에 스님의 제안은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단박에 스님의 제안을 승낙하며 그 즉시 영훈의 옷가지를 싸고 스님의 손에 들려주었다.
세속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했던가?
그날 온 동네방네가 떠나가라고 영훈이는 울어댔다.
심지어 동네 주민 한 명은 경찰에게 신고해야 하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영훈이는 스님의 손이 마치 악마의 손이라도 되는 양 잡기를 거부했고 영순 엄마는 모진 말을 해가며 영훈이를
떼어 놓았다.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말이 충격이었을까?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종일 한 끝에 결국 영훈이는 스님을 따라가기로 했다.

“네가 날 만난 것도 인연인 것이다. 다 털어버려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나면 내 돌려 보내줄 것인즉.”

그게 내 나이 7 살 때였다.

< 프롤로그 : 무당이 될 아이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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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지도 못한 첫 직장(1) >

한적한 오후, 산새가 지저귀는 이름 모를 절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암자에서 평화로운 절의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던 주지 스님은 앞에
앉아 있는 서른이 좀 넘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 마음은 정했고?”


“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주지 스님은 평온한 얼굴의 영훈을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뭐 하고 살지는 생각해 봤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인연 가는 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고생이 많을 건데?”
“속세에 살면서 고생을 안 하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한창때 나이를 이런 재미없는 곳에서 썩게 만들었다. 아마 죽어 뼛가루가 바람에 날려도 너에 대한 미안함은


가시질 않을 게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가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더 일찍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제 게으름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마음먹은 건데요. 잘 먹고 잘 놀았습니다.”
“후회하지 않겠니?”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할 마음 편한 백수 생활을 10 년이나 했는데 후회가 있겠습니까?”

영훈은 진정으로 후회하지 않았다.


이 고리타분한 절에 갇혀 있었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의외로 현대문물의 힘이 컸다.
한창 혈기가 들끓었을 때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스타크래프트가 발을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고 스타크래프트가
질릴 무렵 이어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마음을 다잡게 도와주었다.
가끔 컴퓨터 성능이 떨어진다며 새걸로 사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만 부려주면 주지 스님은 젊은날을 절에 갇혀 사는
자신이 안타까워 없는 돈에도 컴퓨터를 새것으로 사다 주었다.
사실 마음속 욕심을 다스릴 수 있겠다고 느껴진 건 이십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그 때 못나간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TV 와 인터넷이 아닌 진짜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다스릴 수 있겠다고 확신했는데 혹시나 그 생각이 틀린 것일까봐 감히 주지 스님에게 떠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잘 지킬 수 있겠니?”
“네.”

주지 스님은 그럼에도 걱정하고 있었다.


영훈은 무당이 될 팔자를 타고 났다.
주지 스님은 영순 엄마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진실은 말해주었다.
영훈이 세상을 어지럽힐 만큼 용하면서도 악한 점쟁이가 될 거라는 것.
어렸을 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걸 말이다.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 체온 이외에 기이한 온도가 느껴졌다.
어릴 때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가 나중에 가서야 알았다.
그 사람이 태어난 날의 시각을 뜻하는 것이라는 걸.
이것만 해도 기함할 일인데 이상하게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기분이나 걱정이 뭔지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그걸 알고부터였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스님의 말씀을 따르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끔 노력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수백번 말했지만 네 재주로 점을 봐주고 이익을 챙겨선 절대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타고난 사주팔자는 고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당이 되지 않으려 일부러 사주와 관상을 배웠다.
일종의 액땜이었다.
점쟁이가 될 팔자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려고 하면 사고가 생긴다거나 신이 내려오는, 일명 신병이 걸릴 테니까.
사주를 봐주고 복채를 챙겨서는 안 된다는 건 다른 맥락이다.
진짜 점쟁이가 되면 신이 들어올 것이기에.
타고난 사주팔자에 따라 역학을 배웠지만 진짜 점잼이가 되면 사주팔자에 내재된 본성이 튀어나와 사람을 해칠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사주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배운 것이라고는 그것뿐인데 험한 세상에서 뭘 하면서 먹고 살려고 하누?”


“사지 멀쩡한데 먹고 살 일이 없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 그리 만만한게 아니다.”

주지 스님은 작은 탁자 서랍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내 영훈에게 넘겨주었다.


종이에는 달랑 핸드폰 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윤 보살 알지?”
윤 보살이라면 매년 절에 가장 많은 시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타고나기를 지역 유지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사는 그녀였지만 항상 자식들 문제로 애를 태우며 절을 자주
찾았다.

“그럼요. 알죠.”
“윤 보살이 소개해준 사람이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데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연락처를 받아놨다.”
“네?”

설마 주지 스님이 자신의 직장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기에 영훈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소에 워낙 세속에 관한 일은 언급도 안 하시는 분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다 자신 때문임은 알고 있었다.
혹여 마음을 다잡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서울이라고 하더라. 가서 만나 봐라.”

더군다나 서울이란다.

“서울이요? 무섭지 않으십니까? 세상사 온갖 유혹이 서울에 다 몰려 있을 것인데.”


“네 청춘을 온전히 운명을 피하는데 썼다. 나가서도 계속 피하기만 할 생각이냐?”
“그건 그렇습니다.”

영훈도 무덤덤하게 받은 종이를 승복 바지에 쑤셔 넣었다.


주지 스님은 영훈이 입은 옷을 훑어 보다가 말했다.

“옷도 사 입어라.”
“설마 이 옷으로 면접보러 가겠습니까? 저 애 아닙니다.”
“허허... 맞구나. 이제 아이가 아닌 것을... 이제 가라.”

영훈은 주지 스님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절을 올렸다.


묵묵히 절을 받는 주지 스님에게 영훈은 짧게 감사의 말을 올렸다.

“그동안 사람 만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가 많이 미안하다.”

영훈은 붉어진 눈을 들킬까 얼른 암자에서 나와 속옷 몇가지와 그동안 스님이 챙겨준 통장 하나를 들고 산을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서 핸드폰을 개통했다.
예전에 ‘남들 다 갖는 핸드폰 나는 왜 못 가지나?’ 하면서 하나 개통한 적이 있었는데 어디서 전화 올데도 없고
핸드폰 게임보단 PC 게임을 더 좋아해 1 년도 못 쓰고 중고나라에 판 경험이 었었다.
그렇기에 새 핸드폰을 개통했어도 엄청나게 기쁘거나 감격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저 ‘이제 정말 속세인이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을뿐.
KTX 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가 밤 10 시.
서울에 가면 꼭 들러보고 싶었던 동대문 시장에 가서 적당히 캐쥬얼한 옷과 회사 다닐 정장을 샀다.
승복을 입고 정장을 산다고 했을 때 점원이 놀라던 눈빛이 참으로 웃겼는데...
혼자 삼겹살과 소주로 늦은 저녁의 행복감을 누리고 근처 모텔에서 잔 후 다음날 고시원을 구해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지 스님이 주신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누구요? 아...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일단 오시겠어요? 여기가 명동인데...”


명동은 쇼핑의 천국이라던데 무슨 회사가 있을까 생각하며 문자에 찍힌 주소로 갔을 때, 따닥따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명일빌딩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가... 4 층이라고 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좁은 계단을 타고 뚜벅뚜벅 올라가니 4 층에는 딱 하나의 회사만이 영훈을 반기고
있었다.

[명일금융]

아무리 세상을 처음 경험하는 영훈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껏 TV 와 인터넷으로 경험한 지식이 있으니 눈앞의 회사가
무슨 회사일지 딱 봐도 견적이 나왔다.

“대부업체라... 윤 보살이 어떤 회사를 운영하는 지는 잘 모르셨나 보구나. 그런데 참으로 운명이란 게 얄궂구나.
날 시험하기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있을까.”

영훈은 잠깐 숨을 고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생각지도 못한 첫 직장(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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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지도 못한 첫 직장(2) >

“그러니까 스님이시라구요?”

이 자그마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람은 쉰은 넘은 것처럼 보였는데 관상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그의 두툼한 뱃살과
기름진 얼굴, 그리고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 돈걱정 없이 살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스님은 아니고 그냥 절에서 오랜기간 수양한 사람입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불심이 부족하니 불자라 할 수 없고 쉽게 말해서 절에서 오랜기간 고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무슨 공부를 했어요?”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곳 명일금융의 사장인 송병창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예전에 흘러가는 말로 직원이 구해지지 않아 요즘 힘들다는 말을 아는 누님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모르는 전화로 그 누님의 소개를 받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왔다는 말에 만나긴 했다.
보통 자기 힘으로 취업에 힘들어하고 이곳까지 소개를 받고 올 정도면 뭔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족함이 있을
거라는건 감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평생 절에서 철학 뭐시기만 공부한 반 중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크흠... 내가 좀 당황스럽네요.”
“그래도 중‧고등학교 교육내용은 빠짐없이 공부했습니다.”

전혀 자랑할게 아닌 내용을 가지고 뭐라도 되는양 뻔뻔스럽게 말하는걸 보면서 송 사장은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난적은 처음이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우리 회사가 무슨 회사인지는 알겠어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높은 이자로 고객에게 빌려주는 대부업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바라는게
있다면...”
“있다면?”
“법에서 정해진 이자율을 넘어서는 폭리를 취하는 불법업체라면 전 이곳에서 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송 사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조금은 나이든 청년을 잠시 쳐다보았다.

“죄송할 것 없어요. 우린 불법 대부업체는 아니니까.”


“그것 참 다행입니다.”

환하게 웃는 청년의 얼굴이 이제는 얄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입사가 결정된 건 아닙니다.”


“그렇겠죠. 사측으로썬 입사할 직원을 평가하는건 당연한 권리일 겁니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 참 사람 시원시원하면서도 사람 답답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답답하게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사회생활이 많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니, 뭐 됐어요. 그건 그렇고, 우리 회사는 말했듯이 대부업체지만 일반적인 그런 대부업체는 아니에요.”
“그럼요?”

처음으로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송 사장은 만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개 대부업체라고 하면 보통 서민에게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서민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아요.”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요?”
“저축은행 같은 2 금융권이나 3 금융권에서 돈을 빌린 사람들이 돈을 제때 못 갚아 악성채권으로 남은걸 우리가
아주 싼 값으로 사들여서 회수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일이에요.”
“아, 들어본적 있습니다. 기사로 몇 번 본 것 같아요.”
“더 쉽게 설명해드리면 예를 들어 천만 원짜리 부실채권을 백만 원에 사와서 우리가 원금이나 원금에 이자를 더한
금액을 받아내는 겁니다. 상당수의 경우는 이자는 포기하고 원금 정도만 회수하죠. 이자까지 회수하려고 하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그렇군요. 그럼 혹시 돈을 받아낼 때 굉장히 위협적이고 사람을 압박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요?”
“그랬다간 큰일납니다. 예전에는 다들 그런식으로 회수 했다지만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무턱대고 그렇게 하다간
감옥가기 십상이에요. 최대한 합법적인 방법으로 회수하려고 하는데 만만치는 않죠. 특히 채권자가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해버리면 이건 뭐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니까. 그래서 채무자와 만나서 서로 적당히 합의를
보다가 안 될 것 같으면 무리하지 않고 그냥 강제집행하는 방법으로 합니다. 돈이 있는대도 일부러 명의를 돌리고
없는척하는 사람들은 뒤조사를 하기도 하죠.”

영훈은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강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사실 우리가 정말 필요한 직원은 채권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사무직이 아니라 부실한 채권으로 원금을 받아올 수
있는 추심 직원이 필요합니다. 요즘 사무직 직원 구하는건 월급 150 만 줘도 지원자가 넘쳐나거든요.”
“그런가요?”
“그럼요. 대졸은 기본이고 워드 자격증에 심지어 토익 점수 커트라인까지 올려도 다들 못해서 안달인데 추심직
직원은 다들 안 하려고 해요. 참 이상하죠?”
“왜 이상한 겁니까?”
“영업직원 회수한 원금의 일정 부분을 보너스로 주거든요. 남들 150 만원 가지고 갈 때 능력이 좋은 추심 사원은
월 천만 원, 그 이상도 넘게 가지고 간단 말이에요.”
“와...”

영훈은 진심으로 놀랐다.


월 천만원은 지금까지 상위 1%만이 가지고 간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랄거 없어요. 어떤 영업이든 그렇겠지만 영업이라는게 잘하면 일반 직장인보다 많이 가져갈 수 있는 수익


구조가 되어 있어야 사람들도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일 할 테니까.”
“그렇겠군요.”

송 사장은 절에서 살았다는 조금 연식있는 청년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추심 사원은 첫째 그 누구보다 의심을 많이 해야 하는데 눈앞의 인물은 눈 뜨고 코를 베어가도 누가 자기 코를
베어갔는지도 모를 것 같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송 사장이 영훈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는 거였다.
영훈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송 사장의 관상을 살폈다.
송 사장은 이마가 번듯하고 코가 우뚝하며 하관에 덕이 많아 재복이 있고 배포가 크며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회사를
이끌어가면 부하직원이 많이 따르는 상이다.
이런 사람은 사기를 쳐도 몇 천 단위로 치지 않는다.
빈털터리로 서울에 처음 상경한 촌놈을 상대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그의 설명을 진실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영훈은 월 천만 원 이상 벌 수 있다는 소리에 오히려 이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적성에 안 맞으면 오래 있을 수 없는 곳이었고 적성에 잘 맞으면 돈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새로운 경험을 한다 생각하고 일단 입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솔직히 일이 쉽지는 않아요. 일이 쉽다면 다들 이 일을 하겠지. 문전박대는 기본이고 어떤 때는 욕을 들어먹고


어떤 때는 식칼을 들고 위협하는 경우도 있어요. 잘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퍼래져서 ‘나 못할 것 같아요’ 할거면
그냥 안하는게 낫습니다.”

어지간한 간담 없으면 그냥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송 사장은 당연히 이 순진무구한 청년이 겁을 먹을줄 알았는데 청년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 제가 이름도 말씀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까지 말이 나오니 거의 입사는 확정이나 다름 없어졌다.


송 사장은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일단 석달정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워낙 일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대신 석달 동안 월급은


주겠습니다. 그리고 석달이 지나면 월급 대신 수당으로 받아가야 합니다. 싫다면 지금 거절하면 됩니다.”

영훈은 돈은 필요없다고 말하려다가 그것도 너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 편하게 해주십시오.”
“크흠... 그래. 잘 해보자고.”

그렇게 인사하고 회사를 나온 영훈은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채권추심이 뭔지 대략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공부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시원에 도착해서 컴퓨터 앞에 딱 앉으니 허기짐이 밀려왔다.
식당에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고 공부하려는 생각에 고시원 중앙에 있는 작은 식당에 가니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커다란 김치통을 옮기고 있었다.
짧은 바지에 티가 짧아 등허리가 훤히 노출된 모습에 잠시 멈칫하는데 고시원의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와 말을
걸었다.

“총각 왔어? 오늘 직장 구한다며? 잘 됐고?”

아침에 어디 가냐고 묻길래 취업 면접을 보러 갈 거라고 했었다.


아주머니의 말소리가 들리자 김치통을 옮기던 여자가 황급히 일어나며 영훈에게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볼살이 통통한 귀여운 인상의 아주머니는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잘 됐네. 우리 고시원이 터가 좋아. 들어왔다 하면 좋은일이 생긴다니까. 여기 우리 딸인데 우리 딸도


대기업 다니잖아. 거기가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거든. 우리 딸이지만 참 대단해.”

알고 보니 김치통을 나르는 여자가 고시원 주인의 딸래미였던 거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는 딸에 대한 자부심과 은근히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의 딸이 똑 쏘아붙였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어차피 이 김치 내가 먹나? 아저씨들이 먹지.”


“얘! 너 말 좀 예쁘게 해. 쟤가 저래도 얼마나 마음씨가 고운줄 몰라. 엄마 고생한다고 이거 다 쟤가 들고
왔거든.”
“아, 네...”

영훈은 얼떨결에 커다란 김치통 몇 개를 냉장고에 넣어주었다.

“고마워, 총각. 너는 됐으니까 이제 얼른 들어가.”


“안 그래도 가려고 했었어. 아휴, 여긴 올때마다 냄새가 나.”

그녀는 불쾌한 듯 코를 막으며 식당을 나갔고 주인 아주머니는 미안한 얼굴로 신경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총각한테 한 말은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어. 오늘 심부름을 시켰더니 예민해서 저래.”


“아, 네...”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영훈은 그녀의 눈빛에게서 경멸의 기운을 읽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받는 시선이 이런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 생각지도 못한 첫 직장(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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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는 피할 수 없다(1)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한 영훈은 작은 사무실에서 터줏대감처럼 껌을 딱딱 씹으며 자신을 반기는 경리 여직원에게
가장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최영훈이라고...”


“알고 있구요. 일은 저기 저분한테 배우실 거예요.”

경리 여직원은 영훈의 뒤를 힐긋 보며 가리켰다.


영훈이 뒤로 돌아보니 무언가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남성을 볼 수 있었다.
나이는 영훈과 비슷해 보였는데 키는 앉아 있음에도 길쭉한 다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길쭉한 얼굴형에 날카로운 눈빛을 보면 딱 채권추심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될만큼 이 직업에 잘
어울려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신인사원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신입사원은 아니고 일종의... 뭐라더라? 인턴? 뭐 그런 거라던데? 맞지?”

바로 대뜸 반말을 한다.

“네. 석달 동안 고정급으로 일하다가...”


“됐어. 네가 돈을 어떻게 받는지는 내 알바 아니고 어쨌든 반가워. 난 양태평이다.”

불쑥 손을 딱 내미니 영훈도 악수를 받았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보니까 나보다 1 살 어리던데 말 놔도 되지?”
“그럼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편하다기보다는 신선했다.


절에 있을 때 주지 스님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자 스님이었을 때는 반 농담으로 ‘스님 예불하러 가세요?’, ‘스님 식사는 하셨어요?’라는 말을 들었고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아예 말을 놓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을 따라서 부처를 모실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 주지 스님도 그걸 원치 않았기에 어렸을 때 호기심에 몇 번
스님을 따라 했던 걸 제외하면 예불에 참여했던 역사도 별로 없었음에도 다들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았었다.
몇몇 불자들이 주지 스님이 밖에서 실수(?)로 얻은 자식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을
스님과 동등하게 대우해줬던 거였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게 느껴졌다.

“일단 따라와.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윤 대리, 나 오늘 일산 갔다가 포천 갈거야.”


“그래서 안 온다는 말이죠?”

경리 여직원인 윤 대리의 대답에 양태평이 씨익 웃는다.


“일찍 끝나면 일찍 들어올게.”

여직원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양태평은 영훈을 데리고 빌딩을 나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이름을 듣고 보통 ‘아, 졸라 태평한 인간이겠구나’ 이런 예상들을 하더라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실수야.


나처럼 부지런하고 꼼꼼한 인간도 드물거든. 커피 마시나?”
“네? 네. 마십니다.”
“하긴, 뭐 담배도 아니고 요즘 커피 안 마시는 사람 없지. 혹시 담배는 해?”
“담배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기긴 했어. 딱 보니까 얼굴에 고생이 없네. 집이 부자야?”
“아닙니다, 부자.”

양태평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인 스타벅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 할 생각 하지 마.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테이크아웃으로다가. 아메리카노 괜찮지? 혹시 라떼 같은 거 좋아해?”
“아닙니다. 커피는 아메리카노죠.”
“뭘 아네. 어쨌든 어설픈 거짓말은 안 통해. 여기서 일하면 허구헌날 듣는 게 거짓말이거든. 내일 된다. 모레
된다. 돈이 없다. 먹고 죽을래도 없다. 전~부 거짓말이야.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딱! 딱 보면 견적이 나오거든.
고생 한번 안 해봤지?”

양태평은 그렇게 말하면서 영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거짓말 아닙니다. 정말 부자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장 라인을 타고 들어와?”
“그냥 아는 분이 소개시켜줘서 어쩌다 오게 됐습니다. 원래 살던 곳은 경남 고성쪽에서 살다가 이번에 처음
서울로 올라오게 됐는...”

양태평은 영훈의 말을 끊었다.

“경남 고성? 공룡이 유명한 그 고성?”


“네. 공룡이 유명한 곳이긴 하죠.”
“완~전히 시골 촌...에서 왔네.”

촌뜨기라고 하려다가 만게 분명했다.

“맞습니다. 촌이죠.”
“그런데 어째 사투리가 하나도 없네?”

영훈은 주지 스님이 사투리를 쓰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려다가 스님 이야기를 꺼내면 더 이상하게 볼 것 같아 대충


둘러댔다.

“집에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흐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나온 커피를 가지고 공용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만나러 갈 사람은 작년 초에 천만 원을 빌렸다 갚지 않은 아줌마야. 원금은 120 만원 상환했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원금은 880 만 원인 거지.”
“이자는 얼마나 상환했습니까?”
“그걸 알아서 뭐하게?”
“네?”
“이자만 천만 원 넘게 갚았으면 그걸로 퉁치게?”

그는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마티즈에 몸을 구겨 넣으며 영훈에게 조수석에 타라고 손짓하곤 말을 이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딱 하나야. 원금을 받아내는 것. 이자도 받아낼 수 있으면 땡큐지. 가능하다면
말이야.”
“그렇군요.”
“돈 빌려준 사람은 애가 타는데 빌린 사람은 뻔뻔하게 안 갚겠다는 게 우리가 만날 사람들이야.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잘 생각해야 돼. 우리가 무슨 쌍팔년도 사채업자인 줄 알면 안 된다고. 신입 중에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우리가 무슨 악의 근원이라고 착각하는 것들 말이야. 넌 아니지?”
“아닙니다.”
“말은 다들 그렇게 하더라. 여기 계약서 있으니까 가는 동안 잘 살펴봐.”

그렇게 양태평은 일산으로 차를 출발시켰고 영훈은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그 금융기관이나 누구에게서도 돈을 빌려본 적 없던 영훈이었기에 이런 계약서는 굉장히 흥미롭기도 했었던
것이다.

“서일저축은행? TV 에서 본 것 같은데.”
“맞아. 서민들을 대상으로 대출 많이 나가는 데야. 소득 대비 비교적 승인금액이 커서 많이들 거기서 빌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서일저축은행 고객들이고.”
“아...”
“이번에 가서 또 돈 없다고 하면 법원에서 강제집행 명령 받을 예정이다. 그런데 모든 채권자들한테 전부 법의
힘을 빌리려고 하면 또 돈이 들어요. 채권자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니면 또 채권자들끼리 얼마 없는 돈을 가지고
내가 더 가지겠다고 경합을 벌여야 하니까 이게 또 골치 아프거든. 가장 최선은 뭐겠어?”
“서로 좋게좋게 돈을 갚는 거?”
“그렇지. 우리 일은 그거야. 추심팀이 가서 최대한 상환을 유도하는 거고 그게 안되면 법조치를 하는거지.
그런데 그렇다고 계속 오냐오냐 기다려주면 어떻게 되겠어? 다른 채권자들이 다 달려들어서 뼛조각 하나 안
남겠지?”
“그렇겠네요.”
“정보력이 핵심이야. 눈치도 빨라야겠지. 결국 이거야 이거.”

양태평은 검지를 세워 머리에 갖다 대며 강조했다.

“이게 서 있어야 한다고. 날을 바짝 세우지 않으면 이 짓도 못 해먹는다. 알겠지?”


“네.”
“하이고~ 내가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열나게 가르쳐줘도 될지 모르겠다.”

듣는 사람 대놓고 무안주는 말이건만 그는 전혀 영훈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영훈도 어차피 경험삼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양태평의 말이 오히려 더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1 시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일산에서 조금 벗어나 논밭이 펼쳐진 지역의 마을이었다.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이 주택은 현재 모습만 봐도 이 집 주인이 돈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게 만들었다.
양태평은 위협적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마도 집 주인이 괜히 겁먹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것도 일종의 추심 스킬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누구세요?”

안에서 들리는 힘없는 여자의 목소리.

“명일금융에서 나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죠.”


“네...”

조금 망설이는 듯 했지만 바로 문이 열렸다.


나이는 생각보다 젊어 아마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지만 화장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한 얼굴에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전형적인 희망 하나 없이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얼굴이다.
조금 의외인 건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눈에 생기가 가득했던 시절이라면 주변에서 꽤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거라는 점?
양승태는 아주머니를 지나쳐 망설임 하나 없이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마루에 턱 앉았다.

“일단 앉으세요. 왜 왔는지는 아시죠?”


“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어렵습니다. 어려워요. 이미 시간을 많이 드렸잖습니까. 계속 다음달에 된다고 하고, 또 다음달에 된다고
하고... 저저번달에는 근 한 달간 연락도 안 받으시고 잠수였다가 이번달에 꼭 갚겠다고 하셨는데 또
어기셨잖아요. 이번에는 더 시간을 드릴수가 없어요. 오늘 원금 이자 일부분이라도 상환하셔야 합니다.”
“드리고 싶어도 드릴 돈이 없어요.”
“이러면 저희도 기다려 드릴 수가 없어요. 강제집행 신청하면 하나 남은 이 집도 넘어가는 거 아시죠?”
“제발, 이 집은 안 됩니다. 이거 없으면 우리애랑 저희는 갈데도 없어요.”

애원하는 그녀를 양태평은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도 도저히 돈이 나올 구멍이 없어 보였던 것 같다.

“후... 어쩔 수 없겠네요. 일단 회사에는 상환 어렵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 달만 더 기다려주세요. 애기 아빠가 다음 달에는 어느 정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이제는 제 권한을 벗어났습니다. 어쩔 수 없네요.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아주머니는 양태평이 찬바람을 뿌리며 일어서자 옆에 가만히 서있던 영훈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하지만 영훈이라고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신 갚아준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냥 갈 수밖에.
그런데 이때 또 하나의 손이 영훈의 팔을 붙잡았다.

“도와주세요.”

이제 초등학교에나 들어갔을까?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엄마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야! 거기서 뭐해?”

갑자기 다리를 땅에 딱 붙이고 움직이지 않는 영훈을 향해 양태평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영훈은 태평의 고함소리를 듣고도 여우에 홀린 것처럼 그 여자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 사주는 피할 수 없다(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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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는 피할 수 없다(2) >

양태평은 황당함에 다시 되돌아가 영훈의 팔을 확 잽아챘다.


그제야 영훈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자신의 실책을 눈치채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미안합니다. 갑자기 딴 생각이 나서요.”


“뭔 소리야? 이 상황에 다른 생각이 나다니. 어쨌든 빨리 가자. 저기 이주희 씨, 이렇게 막 붙잡으셔도 소용
없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영훈은 태평의 성화에 이끌리듯 차에 올라탔다.


당연하게도 태평은 영훈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 뭐하는 거야, 인마!”


“미안합니다.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무슨 생각으로 일하는 거지? 하나만 물어보자. 군대는 다녀왔어? 이건 뭐 거의 관심병사 수준인데?”
“군대는 안 다녀왔습니다.”

초등학교만 다니고 절에서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했으니 군대는 자연스럽게 면제가 되었다.

“그래? 잘 안 다녀왔네. 그 정신으로 군대 갔다간 여럿 엿 먹였을 거다. 자살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너,


내가 가면서 회사에 내려줄 테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사장님한테는 내가 얘기해놓을거야.”

태평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영훈은 뭐라 항변하려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얼마 후, 화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태평은 명동역 앞에 차를 세우고 차분하게 말했다.

“오면서 찬찬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이 일하고 잘 안 맞는 것 같아. 잘 생각해보라고. 일 못하겠으면 내가 잘


이야기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가 봐.”

영훈은 자신을 내려주고 멀어져가는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바로 핸드폰으로 대중교통을 검색했다.


그리고 길찾기 노선에 나와있는 대중교통 노선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방금 전에 다녀온 이주희 집이 목적지였다.
전철을 타고 대화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 다시 아까 그 집에 도착했다.
영훈은 대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아까처럼 이주희가 어두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어머... 이번 한달 더 여유를 주기로 하신 건가요?”

이주희가 반색하며 물었다.


영훈은 잠시 고민했다.
아까 그 자신의 팔을 붙잡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봤을 때 자신의 어릴 때가 생각났다.
6 살 때 영순 엄마와 헤어졌던 그 순간이 떠올랐던 건 왜였을까?
참으로 공교롭고 얄궂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릴 때 영순 엄마와 살던 곳을 찾아와 운명을 바꾸어준 주지 스님의 모습이 지금 자신과 겹쳐 보였다.
섣부르게 나서도 되는 것일까?
내가 손대지 않아도 결국 만나게 될 인연일 수 있는데 억지로 엮으려 드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하나, 둘 다른 사람의 인생에 참견하다가 결국 무당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 피하려고 청춘을 온전히 버렸건만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운명인 건가?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못 봤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모른척 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이왕 일을 시작했으니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돈을 회수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

“그건 아니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네... 잠깐 들어오세요.”

영훈은 아까 태평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방 안에서 빼꼼하게 얼굴을 내미는 은지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여자아이의 상(相)은 일반적으로 보면 엄청 대단하거나 범상치 않은 상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상이었는데 문제는 현재 이 가정의 형편에 맞지 않는 상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관상은 보통 초년운, 중년운, 말년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여자아이의 상을 봤을 때 초년운이 굉장히
강하게 보였다.
여자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다 쓰러져가는 이런 집구석에서 초년의 운이 굉장히 좋게 태어나다니 말이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다.
아주 좋은 사주를 타고 났는데 부모의 현재 상황이 좋지 않아 그 좋은 운을 다 누리지 못하는 경우.
많지는 않지만 더러 그런 경우가 있기에 이번에도 그런가 생각했다.
그래서 태평의 차를 타고 돌아오며 계약서에 붙은 주민등록등본을 바탕으로 년(年)‧월(月)‧일(日)을 알아내고
아까 손을 잡을 때 느꼈던 온도로 태어난 시각(時)을 유추했다.
사주는 네 개의 기둥(四住)을 말하는 것으로 년‧월‧일‧시에 해당하는 각 두 글자가 모두 합해서 여덟 글자가
나와야 제대로 해석이 가능했다.
태어난 시각을 모르면 제대로 된 사주 해석이 나올 수 없는데 영훈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능력으로
태어난 시각을 유추할 수 있기에 생일만 알면 사주를 물어보지 않아도 파악이 가능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주희는 영훈의 손에 들린 계약서 복사본을 흘깃 바라보았다.


답답한 그녀 마음이 읽혀지는 것 같았다.

“당장 갚으라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영훈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명동에서 홀로 이곳까지 오면서 곰곰히 이주희와 그녀의 딸인 조은지의 사주를 계산해보았다.
이주희의 사주는 기구한 인생 바로 그것이었다.
사주에 돈도 없고 학업도 인연이 없으며 남편복도 없는 지지리 복도 없는 팔자라고 해야 할까?
처음 이주희를 봤을 때 그녀의 상도 그리 복이 있어 보이는 상이 아니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마가 좁고 끝이 뾰족해 초년운도 따르지 않고 재복도 없으며 눈썹도 희미해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어
보였다.
젊었을적 미인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을지 몰라도 가난하게 사는 게 이해가 되는 상이었고 사주를 봐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조은지의 사주를 보니 기가 막혔다.
관상에서 본 것처럼 초년의 사주 역시 무척 좋았던거다.
보통 유년기의 사주는 잘 보지 않는다.
개인의 운은 가정의 운에 영향받고 가정의 운은 국운에 영향받는다.
개인이 아무리 잘나봤자 전쟁이 나거나 imf 처럼 국가에 큰 위기가 오면 휘청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렇기에 유년기의 어린아이는 부모를 따라가기 때문에 볼 필요가 없는 것인데...
하나만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사주 뿐만 아니라 관상까지 같으니 뭔가 이상한 건 분명했다.
그래서 영훈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주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이의 아빠가 뭘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원래는 배를 타는데 보증을 서줬던 남편 친구를 잡으러 가서...”

사정을 듣긴 했었다.
평범한 가정인 이집이 왜 어려운 사정이 됐는지.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으니 계속 빚을 지다가 이리된 거였다.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지 3 년도 넘었다던가?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다른 분이요.”


“네?”

영훈은 자신이 메고 온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뭐라고 적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조은지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은지의 진짜 아빠에 대해 물어본 겁니다.]

이주희는 영훈이 내민 수첩을 들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역시나 생각이 맞았다.

< 사주는 피할 수 없다(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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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는 피할 수 없다(3) >

아이의 관상은 평범했지만 사주는 조금 특이했다.


사주에 지살과 반안살이 있었는데 지살은 부모와 이별할 가능성이 높으며 반안살은 곧 조상의 덕을 보는 운이 들어
있음을 의미했다.
부모와 이별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가 조상덕을 본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이 아이는 이 집의 자식이 아니거나 아니면 부모 중 어느 누구 한 명과는 핏줄의 연이 닿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는 집을 나가 밖을 떠돌아다니니 이 아이의 아버지가 다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물었는데
그게 맞았던 거다.

“아이 아버지가 하는 일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저도 몰라요.”
“모른다구요? 아이 아버지와 연락이 닿지 않는 겁니까?”
“몰라요.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만나면 애를 지우라고 할 거라서...”
“흐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아이에게 희망이 생겼음에 영훈은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그럼 이름이나 당시 어떤 일을 했었는지나 말해보세요.”


“꼭 아이 아빠를 찾아야 하나요?”
“계속 이렇게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네? 아이 아빠를 찾는다고 해도...”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뻔했다.


찾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떤 도움을 줄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나서 괜히 마음의 상처만 얻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잖아요. 아이를 보고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려고 할지.”

그녀는 영훈의 속마음을 모르고 경계심을 가졌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돈을 빌렸고 갚아야 하는 건 맞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은지 아빠를 어떻게 알고


와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 이야긴 없었던 걸로 해요.”
“그럼 이 집을 날릴 겁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만약 찾아봐서 어렵게 산다면 굳이 우리도 그 사람에게 돈을 갚아달라고 할 생각이 없습니다. 법적으로 그게
가능하지 않겠죠. 그런데 만약 찾아보니까 미혼에 대기업을 들어가서 굉장히 여유롭게 살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아이를 위해서라도 양육비를 받아 키우셔야죠.”
“그럼 그쪽은요?”
“저희야 아이 아빠가 돈을 대신 갚아주기를 바라고 있지요. 말했듯이 아이 아빠가 능력이 없어 보인다면 굳이
만나서 대신 갚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을 겁니다. 여유가 있어도 갚아주길 원하지 않으면 더 권하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말했듯이 우리야 그냥 강제집행 하면 되니까요.”

사실 이래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지 잘 몰랐다.


그저 어렵게 사는 모녀가 불쌍해 보였고 이 둘의 삶을 위해서라도 빚을 해결하고 살 방법은 아이 아버지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게 돈을 빌려준 회사 입장에서도 좋은 것이니까.
그녀가 싫다고 하면 굳이 더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들어온 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사주의 핵심 키워드는 운(運)이다.
결혼할 운, 재물이 들어올 운, 사고를 당할 운 등등...
결혼할 운이 들어왔다고 다 결혼을 하는 게 아니며 재물이 들어올 운이 있다고 전부 재물이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 운을 현실로 만드는 건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이다.
은지의 초년 사주는 분명 유복한 아이의 그것이지만 엄마인 이주희가 극구 가로막으면 아이는 부모를 따라가는
것이기에 초년의 운이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이래도 되는 건지...”
“싫다면 하지 마세요. 저도 억지로 권했다가 굳이 일 만들기는 싫으니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말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제야 그녀가 영훈의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말할게요. 그런데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이름이랑 당시 다니던 대학교 이름 정도니까요.”


“일단 그거라도 알려주세요. 아, 혹시...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혹시 아이 아빠의 사주를 아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그렇게 아이 아빠의 이름과 다녔던 대학교를 적어 회사로 오니 경리 여직원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어딜 다녀오는 거예요? 양 과장님이 몇 시간 전에 명동에서 내려줬다는데 지금까지 어디서 뭘하고


오셨어요?”
“아, 미안해요. 실은 이주희 씨 집에 다시 다녀왔어요.”
“네? 거기를 혼자 다녀오셨다구요?”
“그러면 안 되나요?”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보는건데 경리 여직원은 그게 기분이 나빠서 비꼬는 것이라고 느꼈는지 인상을 팍
일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사장실의 문이 열리며 송병창이 영훈에게 손을 까딱였다.

“일단 들어와.”

영훈이 사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차분히 앉으니 송 사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죄인을 심문하려는 분위기가 아니라 송 사장의 눈빛에는 잔뜩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보고를 받았는데 이주희 씨 집에 다시 갔다고? 채무액이 얼마나 되지?”


“현재 880 만원이 남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음... 양 과장에게 듣기론 더 나올 구석이 아니라서 강제집행 절차 들어가면 된다고 들었어. 맞나?”
“맞습니다.”
“그럼 왜 간거야?”
영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싶었던 거다.
아이의 관상을 보건데 앞으로도 그렇게 빌어먹을 팔자 같지 않아 혹시 진짜 아빠가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도움을
받을 조상이랑 연결된 끈이 있는지 알아 보려고 갔다고 하면 완전히 상또라이처럼 보일 게 뻔하다.
사주를 유명한 철학원 뺨치게 잘본다고 할수도 있지만 이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약 말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온갖 잡스런 인물들까지 자기의 사주를 봐달라고 아우성을 쳐댈 것이다.
그토록 벗어나려 했는데 그 오랜 세월 노력한 게 전부 헛수고가 될 테니 절대 관상이나 사주 따위의 이유를
대서는 안 된다.
영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상담을 해주러 갔습니다.”


“상담?”
“네. 어렵게 살고 있어서 뭐 도와줄 게 있을까 싶어서였죠.”
“하...”

미친놈을 보는 표정.
영훈도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전 다른건 몰라도 개인상담을 통해 대상자의 심리를 안정시키는데 자신 있는 편입니다.


물론 이게 채권 회수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불필요한 일이겠죠.”
“그건 아니다?”

송 사장의 눈빛에도 다시 흥미로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네. 역시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지금 키우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현재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 아빠를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게 되겠어?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렇게 주변 사람 찾아내서 돈 달라고 하는 세상이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아이 아빠한테 억지로 돈을 받아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예 돈 달라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럼?”
“그저 보려는 겁니다. 아이 아빠가 어떻게 반응할지. 여유가 있다면 도와주려 하겠고, 없다면 모른척 하겠죠.”

담담한 영훈의 표정에 송 사장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도대체 이 새끼 정체가 뭔지 싶었던 거다.
영훈은 괴상한 표정의 송 사장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이번 일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왜? 일이 안 맞나?”
“솔직히 말해서 너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 잘 맞을 것 같았다.


본래 사주에 재물이 들어있는 사람이 빚도 많이 질 확률이 높다.
반대로 말하면 큰 빚을 지는 사람은 그만큼 큰 빚도 잘 갚을 재운을 타고 난다는 말이다.
사주에 재물이 없는 사람은 빚을 져도 작게 지고 평생 큰 돈을 만지지도 못한다.
그럼 왜 누구는 재물을 얻고 누구는 빚만 얻어갈까?
성장과정에서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다.
똑같이 사주에 칼이 들어도 성장과정에 문제가 없이 잘 풀린다면 검사나 경찰이 되는 것이고 잘 안 풀리면
살인자가 되는 법이니까.
딱 보면 이 사람이 갚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견적이 바로바로 나오는데 세상 이보다 더 잘맞는 일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너무 잘 맞아서 문제다.
아무리 돈을 빌린 사람들에게 다시 회수하는 일이지만 현재 충분히 갚을 능력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재정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쥐어짜내 돈을 갚게 하는 게 이 일이다.
그렇게 돈을 벌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다 돈 버는 맛이 들려서 자신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잘 맞는데 왜 그만두게?”
“때로는 잘 맞는 일도 그만 두어야 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따위 개소리를 지껄였다면 송 사장은 버럭 화를 내며 쌍욕을 퍼부었겠지만 영훈이 스님(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찝찝한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일단 일을 시작했으니 딱 한 달만 일해봐. 이왕 손을 댔으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


나중에 어디 가서 이런 일 좀 해봤다고 가오라도 세우지.”

이유가 황당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이번 달까지 일해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일을 정리하고 송 사장이 영훈에게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사람을 찾아봤을 때 딱 이틀이 지나
지은 아빠의 종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지은 아빠의 정체는 놀라웠다.

“백순데?”

송 사장은 보고서를 들고 황당한 얼굴로 영훈을 돌아보았다.

“그런가요?”
“어. 그런데 이 인간 아버지가 강남에 건물을 세 개나 가지고 있다. 이 인간 앞으로도 하나가 올라가 있네.”

커피를 들고 온 윤 대리가 허탈한 표정으로 툭 내뱉는다.

“아빠가 건물을 세 개나 가지고 있으면 나라도 백수짓 하지.”

맞는 말이다.

< 사주는 피할 수 없다(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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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회사 지원(1) >
송병창 사장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바닥에서 잘난 놈, 못난 놈, 이상한 놈 다 겪어 오면서 무수한 경험을 해보았지만 이번처럼 기이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최영훈이라고 했던가?
그놈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양 과장이 회수 불가능하니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선언한
채권을 원금 880 만 원과 배의 배가 넘어가는 이자 중 상당부분까지 회수해냈다.
그 많은 이자 중 절반을 깎아준다고 하니 그 금수저 백수놈은 감사하다는 말보다 그렇게 해도 회사생활에 문제가
없냐고 물을 정도로 푼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면 돈을 회수한 회사가 제일 좋아해야 할텐데 가장 좋아한 사람은 회사도 아니고 그 금수저 백수 놈도
아닌 금수저의 아버지였다.
평생 사람 구실 못하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놈이 토끼 같은 손녀딸을 데리고 나타났다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말도
못한다고 양태평이 전했다.
양태평은 그 덜떨어져 보이는 신입이 이렇게 일을 처리하자 돈을 상환받는 내내 말도 제대로 못 붙였다고 한다.
한 달 뒤에 그만둔다고 선언해놓고 그 한 달 동안 회수한 돈이 2 억 7 천만 원이 넘는다.
상환절차를 마무리 짓는데 양 과장이 도움을 준 것만 빼고는 누가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일을 너무 잘하기에 백개가 넘는 채권 목록을 넘겨줬는데 그 중에서 알맹이를 쏙쏙 고르듯 골라 회수해왔다.
지금껏 그 어떤 신입직원도 해내지 못한 압도적인 실적이다.
그런 신입이 이제 그만두겠다고 한다.
마치 ‘여기 일해봤는데 별거 없네요. 수고하세요’ 하면서 졸라 시크하게 비웃음을 남기고 떠나는 것만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 바닥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일이며 그로 인해 얻게 될 성취감과 보상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신입사원은 손오공을 가지고 노는 부처님처럼 자애로운 미소만을 짓고 있었을 뿐이었다.

“경력도 학력도 부족한데 나가서 할 일은 정해놓은건가?”

그렇게 물으니 그 놈은 대단한 직업이라도 찾은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보험영업이 저에게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미래에 다가올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니, 정말 뜻깊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보험업을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대단한 걸 하려는 것처럼 퇴사한다고 해놓고 기껏 한다는 게
보험영업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대답이었다.
하지만 막상 반박하려니 할 말이 궁했다.
따지고 보면 채권추심이 사람들에게 더 험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 뭐라고 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그놈의 발걸음이 어찌나 경쾌한지 10 년 묵은 숙변이라도 해결한 놈 같았다.

“그렇게 희한해?”

송병창 앞에서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는 그의 누나인 송은채.


나이는 쉰이 넘었지만 연예인 귀싸대기를 올려 붙일 만큼 피부관리를 해대서 그런지 그 나이대에서 볼 수 없는
피부탄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이 송은채라는 여인네가 보통 재력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은 오버고 열 손가락으로 범위를 좀 넓혔을 때 꼭 들어가는 현진그룹 장손의 며느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고 송사장을 명동 사채시장에서 큰 손으로 만들어준 배후이자 조력자이기도
했다.
영훈에게는 일반 개인들에게 대출해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명일금융은 급한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 고금리로
대출을 해주었는데 이는 송 사장이 직접 처리했기에 직원들은 아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렇다니까. 난 지금까지 세상 저렇게 쿨한 놈을 본적이 없어. 중이라서 그런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없지?
내가 이번에 회수한 돈에서 10%를 준다고 하는데도 극구 거부하더라고. 많이 배웠으니까 자신이 받을 보너스는
앞으로 돈을 갚지 못할 사람들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래나? 이건 좀 미친놈 같지?”
“희한하긴 하다. 그래서 무슨 일 할거래?”
“이것도 걸작이야.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어디 이력서를 내볼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또 물었지.
절에서 공부하다가 서른 넘어서 나오셨는데 뽑아줄데가 있을 것 같냐고. 그랬더니 글쎄...”
“뭐라는데?”
“보험 영업을 해보겠다는 거야.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어디 보험 영업이 쉬워? 그런데 짜증나는
게 그놈은 되게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송 사장의 누나인 송은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네가 아주 걔한테 푹 빠졌구나?”


“아니, 웃긴다니까. 누나도 보면 그렇게 생각할걸? 지식이 엄청난 것도 아니고 뭘 배운것도 없는데 분위기가
희한해. 돈 한푼 나올 것 없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돈을 구할 구멍을 막 찾아준다니까? 내 평생 살면서 그렇게
추심하는 놈은 처음 봤어.”
“그래? 음... 그럼 우리 회사에 이력서 한번 넣어보라고 할래? 마침 우리 회사 지금 공채 뽑는데.”
“누나네? 현진물산?”
“어.”
“에이~ 말도 안 되지. 인사과 애들이 통과 시키겠어? 서류는 통과됐다고 쳐. 임원 면접은 어떻게 할 건데?”

송은채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말했다.

“내가 찍었는데 뭘 그런걸 걱정하고 그래. 내가 면접에서 보고 결정하면 되지. 서류야, 내 말 한마디면 그냥
통과니까.”
“진짜 그렇게 하게?”
“왜? 나 주기 아까워?”
“그런건 아닌데...”

뭔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송 사장을 보고 은채가 진짜 놀라는 표정으로 쓱 다가왔다.

“너 진짜 아까워 하는구나?”
“솔직히 아깝다기보다 걘 영업을 해야 하는 애야. 그 성격에 잘못하면 괜히 오해나 받고 아주 힘들어질걸?”
“기껏해야 한 달 봐놓고 그렇게 챙기는 거야?”
“챙기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딱 봤을 때 그렇다는거지. 누나는 몰라도 아래 직원들은 걔 컨트롤 못해. 우리 양
과장 알지? 걔도 이번 사건 다음에 괜히 어려워서 일부러 피해 다녔다니까? 걔가 은근히 사람을 쪽팔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윗사람이 대범하지 못하면 갈구고 못살게 굴걸?”
“됐고, 일단 이야기나 해봐. 우리도 보험회사 있으니까 일단 보험회사에 이력서 넣어 보라고 해. 내가 면접 봐서
괜찮다 싶으면 물산에서 써보고 아닌것 같으면 생명사로 보내버리게.”
“그러네. 현진생명이 있었지.”

송 사장은 여전히 불만스러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송은채는 그저 동생의 장난감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영훈이 절에서 지냈다는 것만 들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지 정규교육이나 남들이 기본으로 취득하는 자격증
하나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네? 현진생명이요?”

영훈은 자기가 그만둔 회사의 사장이 보험회사를 소개시켜준다고 하니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대부업체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달동안 있으면서 그래도 나름 적응해서 인간관계를 잘 쌓은 게 돌아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마침 딱 현진그룹 공채 공고가 떠 있었다.


보험회사를 알아보려고 했지 막상 어떻게 입사해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이렇게 알려주니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양식을 보면서 대충 어떻게 쓰는지 익힌 영훈은 현진그룹 공채 공고에
떠있는 이력서 양식을 다운받아서 열심히 작성하기 시작했다.
보통 보험회사 영업사원은 이렇게 공채로 입사하는 게 아니라 각 보험회사 지점에서 채용하는 방식이라라는 걸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용감한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보험회사 영업사원은 특별한 학력이나 자격증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본 적
있었기에 이력서에 공란이 훤했음에도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던가?
지금 영훈이 딱 그러했다.

현진물산 인사팀.
작년에 공채로 입사한 막내인 김학주 사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저 신경질적인 오 대리는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냐고 타박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김학주 사원은 여자친구와 싸워서 기분이 팍 가라앉은 오 대리에게
어정쩡한 자세로 다가갔다.

“저기...”
“왜?”
“그... 말씀하셨던 사람이 현진생명에 이력서를 내서 우리쪽으로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요.”
“누구?”
“그 최영훈이라고 하는...”

역시나 오 대리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아~ 진짜! 위에서 통과시키라고 했잖아! 한 얘기 또 해야 해? 너 이제 신입사원 아니야. 정신차려 인마!”


“그게 아니라... 이력서가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뭐가 이상한데?”
“이름이랑 주소 말고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습니다.”
“뭐? 뭔 소리야 그게?”

오 대리는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출신 고등학교나 대학도 없고 경력도 빈칸입니다. 하다 못해 워드 자격증이나 운전면허증도 안 적혀 있어서...


자기소개서가 있기는 한데 그것도 좀 이상한 게,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랐고 어쩌고 하는데 이게 장난을 하는 건지
진심인지도 모르겠구요. 주소도 경남 고성입니다.”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오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학주 사원의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문제의 이력서를 보고 난 뒤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미친놈인가 이거? 미친거 아니야? 아니, 이 새끼가 지금 우리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과장님!”

영훈은 자신 때문에 현진물산 인사과가 뒤집어진 줄도 모르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웹툰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이거 재밌네.”

걱정 하나 없이 말이다.

< 두 번째 회사 지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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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회사 지원(2) >

현진물산 인사과의 분위기는 무척 좋지 않았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오재준 대리의 항변에 인사과 민홍기 과장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렇다고 항변이라도 할 거야? 네가 전무님한테 올라가서 서류 통과 못 시키겠다고 할


거냐고?”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솔직한 말로 SKY 대학 출신들도 서류통과 못하는 애들 수두룩 합니다.
누구는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채우려고 좆빠지게 토익공부하고 논문에 봉사활동까지 하는데 저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하지. 너무하고 말고.”
“그럼 전무님께...”
“뭘 전무님께야? 이거 어디서 내려왔는지 몰라서 그래? 사장님이 다이렉트로 우리한테 꽂은 거잖아. 그런데
전무님한테 말하면 전무님이 뭐라고 할 것 같아?”
“...”

오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흥분해서 과장님한테 밀어붙인 것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말이 안되는 일임을 자각한 것이다.
현재 현진물산의 주인은 송은채 사장으로 본래 송은채 사장의 남편이었던 임지훈 사장이 몸이 안 좋아져서
투병하자 대신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말기신부전증이 심하게 온 터라 임지훈 사장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앞으로 송은채
사장이 회사를 운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지훈 사장과 송은채 사장 둘이서만 회사 지분의 40% 이상을 가지고 있어 경영권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도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송은채 사장이 생명에 입사 지원한 이력서를 물산으로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을 때 인사과에서는
누가 낙하산으로 올지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낙하산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혹시 우리 인사과의 충성심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오재준 대리의 의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오 대리의 의심이 더 일리가 있었는지 민홍기 과장이 바로 반응한다.

“우리를? 왜?”
“아무리 사장님이 대권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양철기 전무님의 힘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오 대리는 민 과장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어투인 ‘그건 그렇지’에 욱하고 올라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께서 과장님이 양 전무님 라인인지 확인하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양 전무님 라인은 연대 라인이잖아. 우리 회사에서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
“그래도 사장님 입장에서는 확실히 알고 싶을 수도 있죠.”
“그건 그래. 어쨌든 일단 전무님께 보고하지 말고 통과 시켜. 참 이럴 때 보면 우리 회사가 입사시험이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이번에 면접을 직접 보신다고 하셨으니까 면접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 사장님께서 이력서 상태를 알고도 통과시키려는 게 맞을까? 아니면? 면접에서 이력서 보시고 깜짝 놀라서
나 부르면 그때는 너나 나나 좆되는 거야.”
“설마...”
“씨발, 으슬으슬하다.”

민 과장은 오한이 든 듯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민 과장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사장님께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이건 사장님의 말을 거역하려는 게 아니라 다시 체크하는 거야. 문제될 게
없다고.”

말은 오 대리에게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하는 다짐이라는 걸 오 대리도 느끼고 있었다.


이력서를 들고 한참 방황하던 민 과장은 결국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뭔데?”

민홍기 과장은 입사 후 사장과 독대를 해본적이 딱 한 번 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긴장이 송 사장에게도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말씀하셨던 최영훈이라는 친구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최영훈? 그게 누구지?”

민 과장은 속으로 안 찾아왔으면 좆될뻔했음을 깨달았다.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도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전에 현진생명에 입사할 지원자를...”
“아~ 알겠어. 기억났어. 그래, 왜?”
“이력서를 보니까 조금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여기 사진하고 이름, 주소 외에는 기록된 것들이 없어서...”

민 과장은 이력서를 송 사장에게 내밀었다.


송은채 사장은 민 과장이 내민 이력서를 보기 전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다가 실제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와도 같은 이력서를 보고 나서야 문제점을 깨달았다.

“어머. 하하하하!”

너무 황당해서일까?
송은채 사장은 이력서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민 과장은 따라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가 한참 뒤 송 사장이 웃음을 그치고 나서야
물었다.

“이 친구가 맞는 겁니까?”
“응, 맞아. 이 친구가 맞을 거야. 주소도 경남 고성 맞네.”

영훈은 고시원에 차마 전입신고를 할 수 없었기에 본래 살던 곳인 경남 고성 주소를 그대로 썼던 거다.

“그럼 이대로 통과시킬까요?”

송은채 사장은 잠시 고민했다.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 이 정도 인물일지는 몰랐던 거다.
아무리 자신이 사장이라고 해도 이런 인물을 면접장에서 보고 오케이를 줬다간 임원진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없다.

“얘 면접날에 나한테 데리고 와. 다른 데 알리지는 말고.”

민 과장은 송 사장의 어투에서 단호함을 읽었다.


이 사안은 절대 인사과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될 비밀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이 친구에 관한 내용은 인사과를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럼 구관(舊館) 5 층이 괜찮을까요?”

양철기 전무가 있는 곳에 신관이었고 면접을 볼 장소도 신관(新館)이었으니 민 과장은 아예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이었다.

“그거 좋네.”

송은채 사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영훈은 서류전형을 통과해 면접에 오라는 문자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보험영업사원을 구하는데 설마 서류에서 탈락시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 농사를 짓고 살던 정 보살도 나이 쉰을 넘어 보험영업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떨어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다만 면접을 오후 5 시에 오라고 한 게 조금 의아했을 뿐이었다.

“면접을 뭘 이렇게 늦게 봐.”

의아했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전에 동대문에서 샀던 정장을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수선할 뿐이었다.
그렇게 서류합격 문자가 온지 사흘 뒤 종로구 을지로에 위치한 현진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와...”

이렇게 큰 건물이라니.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빌딩을 앞에 두고 보니 산 속 절에서 평생 살았던 삶이 속세와 너무 달랐다는 자각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본사 건물에 들어서니 TV 에서만 봤던 보안요원들과 아름다운 안내원이 눈에 들어왔다.
영훈은 당당하게 걸어가 말했다.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왔다는 말에 안내하는 여직원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면접이요? 지금요?”
“네. 5 시까지 오라고 했는데요.”
“뭔가 착오가 있지 않으실까요? 면접은 오전 9 시부터 시작이었는데요. 그리고 이곳이 아니라 저쪽 신관으로...”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장난을 친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때 누가 후다닥 다가왔다.

“혹시 최영훈 씨?”

고개를 돌려보니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니 이곳의 직원이 틀림없었다.

“네, 맞습니다. 면접을 보러 왔는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네.”

그렇게 그 남자를 따라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잠자코 따라갔다.
건물 5 층에 내려 어딘가로 깊숙이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이 층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깁니다. 면접을 보실 분은 한 분입니다. 사장님 되시니 언행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행운을 빕니다.”

남자는 영훈에게 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런데 사장이라니... 뭔가 착오가 생겼다는 건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영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의 여성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뭔가 예상했던 그림과 달랐지만 일단 면접에 들어가면 어찌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앉으세요.”

그녀가 자신의 앞에 딱 하나 있는 의자를 향해 턱짓했다.


영훈이 조심스럽게 앉으니 그녀가 물었다.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 면접 분위기가 이상하죠?”
“네. 사장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명일금융 송병창 사장의 소개로 당신을 따로 불렀어요.”
“아... 그렇게 된 거군요.”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이건 현진생명 면접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회사는 현진물산이고 당신은 현진물산 입사
공채 면접을 보는 중입니다. 송 사장이 당신의 능력을 좋게 봐서 따로 면접 자리를 만든 거니까 부담가지지
말아요. 우리 회사에서 당신의 능력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생명사로 보낼테니까요. 제법 실력이 좋은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보험회사 영업사원을 하려 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각종 자격증과 어학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진물산이 뭘 하는 회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대기업에 취업하려면 상당한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가 가능한 건가요? 전 이력서에 썼다시피 아무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따로 면접 자리를 만든 거예요. 자, 이제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면접 시작할게요. 뭘
잘하세요?”
“네?”
“자기 소개서를 보니 평생 절에서 공부하셨다구요. 남들이 학교에서 국영수와 토익에 인생을 걸었을 때 그냥
놀고만 있었다면 회사에서 당신을 뽑을 이유가 없잖아요.”

송병창 사장이 칭찬을 과하게 했었나보다.


고맙기는 한데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묘하게 자존심을 긁는 말임에도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괜시리 자리가 불편해졌다.

“자기 소개서를 보니 좋은 회사원이 되고 싶다고 하던데요? 그러니 어필해봐요. 당신이 다른 지원자들보다 뭐가


더 뛰어난지.”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굳이 억지로 지어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을 잘 봅니다.”
“사람을 잘 본다?”
“네. 사람을 많이 잘 보는 편입니다.”

< 두 번째 회사 지원(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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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회사 지원(3) >

송은채 사장은 황당했지만 동생의 희한하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있었다.


남들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너무도 덤덤하게 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영훈이 말한 사람을 잘 본다는 건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사실 사람을 믿을 수 없기에 수많은 검증과정을 거치고 오랜 세월 지켜보는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사람을 잘 본다는게 입사 전에 장담할 만한 말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마치 나는 일을 잘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자기 소개서를 보니 절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그래서 사람을 잘 꿰뚫어 보는 건가요?”

송 사장의 물음에 의구심이 담긴 건 당연했다.

“무슨 도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투시한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의 복장, 말, 사는 환경 등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겁니다.”
“심리학적 접근인건가요?”
“학문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그와 비슷합니다.”

그녀의 관상을 보니 대략 그녀의 성격이 가늠이 되었고 그 이야기를 해주면 그녀가 더 신뢰할 거라는 건 알지만
말하지 않았다.
관상으로 사람을 잘 본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그저 관상쟁이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애매한 답이네요.”

송은채 사장은 실망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뜬구름 잡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못 믿으시겠죠?”
“솔직히 그래요.”
“당연합니다.”

영훈은 당연히 그럴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 사장은 황당했다.
당연히 믿기 힘들지만 신뢰할 만한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을 어필할 줄 알았는데 거기서 입을 딱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소싯적에 친구들한테나 당해본 ‘믿기 싫으면 말든지’라는 태도 아닌가?

“끝인가요?”
“네. 제가 남들보다 유일하게 나은 게 있다면 사람을 잘 본다는 정도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신다면
저보다 다른 직원을 채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영훈은 현진물산 입사가 욕심이 나긴 했지만 그보다 부담스러움이 컸기에 그냥 보험회사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송은채 사장은 영훈이 저 정도로 자신만만하니 이제는 호기심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을 잘 본다는 건 시험을 쳐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그걸 확인할 수 있죠?”


“오래 지내다보면 잘 알게 되겠지만 사장님은 시간을 두고 알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맞아요. 난 불확실한 일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뭐 방법이 없군요.”

영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제 당신이 결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송 사장은 동생이 왜 희한한 놈이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생각해보면 저 이상한 친구는 면접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보통 면접을 보러 오는 이들이면 본사 건물에 압도되고 나이가 지긋한 임원들의 기에 눌려 어떡해서든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려 노력하는데 눈앞의 청년은 옆집 아줌마와 대화하는 것처럼 편하게 말하고 있었던 거다.
일부러 긴장하지 않는척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봤지만 그 정도로 표정관리를 잘하면 회사를 다닐 게 아니라 연기를
해야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말 긴장하지 않고 있다는 건데 취업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초연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욕심이 없었다면 면접에 오질 말았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때쯤 영훈이 입을 열었다.

“다 끝나신 건가요?”

아예 할 얘기가 없으면 그만 일어나겠다는 태세다.


동생이 왜 퇴사한 영훈에게 그렇게 안달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본래 사람이란 게 남의 떡이 더 커보이고 수중에 아무리 많은 명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한정판에 환장하는 법
아니겠는가?
차라리 하버드 대학이나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를 수석 졸업한 인재가 면접에 왔는데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저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생각했을텐데 이상하게 영훈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출신이 스님이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명일금융에서 한 달 일했다고 하셨죠? 우리 회사에서도 한 달 정도 인턴으로


일해보는 거 말이에요.”

예전 미생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바둑만 배웠던 주인공이 대기업에서 인턴부터 시작했던걸 알고 있었다.


참 감명깊게 봤던 드라마였기에 영훈은 송 사장의 제안이 퍽 괜찮게 생각되었다.

“그렇게 해도 된다면 좋습니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스코리아 뺨 칠 것처럼 도도하게 굴더니 이제는 또 헤벌쭉 웃으며 감사해한다.


송 사장은 순간 자신이 연기에 넘어간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어차피 한 달 인턴이기에
회사 입장에서 문제될 것도 없어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럼 밖에 직원에게 대략적인 설명 듣고 다음주부터 출근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것 보라지.
금방 함박웃음으로 좋아하더니 다시 전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감히 사장에서 부탁까지 한다.
이쯤되면 궁금해서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뭐죠?”
“제가 한 달 인턴이라는 걸 직원들이 알면 금방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가 능력을 발휘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회사를 나갈 때까지는 비밀을 유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마디로 다른 공채 인턴처럼 대해 달라는 거였다.


일리있는 말이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제안하지 못했을 부탁이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송 사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는 영훈에게 잘해보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터치하고 면접장을 먼저 나가려고 할 때
다시 영훈이 물었다.
“그런데 저...”
“네? 또 뭐죠?”
“저를 뽑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데.”
“이 회사가 지금까지 뽑았던 인재들 중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아직 회사는 정체되어 있어요. 그래서 한
명 쯤은 사람을 잘 보는 사람을 뽑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회사는 변화를 필요로 해요. 이해됐죠?”
“네.”

송 사장은 그렇게 면접장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면접장까지 데려다 주었던 직원이 들어왔다.
면접장에 데려다 줄때만 해도 그렇게 깍듯하고 예의 바르던 그였지만 인턴으로 채용이 됐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완전히 태도가 바뀌었다.

“반가워요. 난 오재준 대리라고 해요. 궁금한 거 많을텐데 지금 그거 풀어줄 여유 없으니까 내가 지금 말하는거


잘 기억해요. 할 수 있죠?”
“네? 네...”
“다음주 월요일 아침 8 시까지 출근해요. 출근 복장은 지금처럼 정장이고 머리는 지금 좀 부스스한 상태니까 더
다듬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손바닥만한 노트와 필기구 항상 챙겨 다니세요. 언제 어디서든 적을 준비가 되어
있도록. 알겠어요?”
“네.”
“8 시까지 오면 회사 앞에 버스들이 줄지어 있을 겁니다. 그 버스를 타고 회사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해야 합니다.
입사 전에 받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2 박 3 일 일정이라 사흘동안 갈아입을 속옷과 편한 옷을 챙겨와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홈페이지 공채관련 공지 확인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이력서에 학력과 경력이 전무한걸로 되어있던데 진짜인가요?”
“네.”

그게 뭐 문제 있냐는 태도.

“크흠. 알겠습니다. 그럼 영어 실력은요? 설마 그것도 모르지는 않겠죠?”


“모르는데요.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중학교 1‧2 학년 정도 수준입니다. Hi~ Nice to meet yo.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딱 이 수준입니다. 사장님도 그거에 관해서 말씀은 없으셨는데. 뭐, 문제
있나요?”

면박을 주기 위해 질문했는데 오히려 더 세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와서인지 순간 오재준 대리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훈은 그런 오 대리에게 재차 물었다.

“그리고 제가 일하게 될 부서는 어디입니까?”


“그건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출근하면 알게될 겁니다. 더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왠지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색이라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봅시다.”
“네. 수고하세요.”

영훈이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 오 대리는 후다닥 인사과로 올라갔다.


인사과 직원들은 오늘 면접실 정리 및 뒤처리 때문에 다들 나가고 없었고 오직 민홍기 과장만이 남아 있었다.

“야! 어땠어?”

오 대리가 잔뜩 화가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이 합격시켰습니다.”
“진짜? 이야~ 도대체 뭐지? 무슨 끈이 있는 거야? 설마...”
“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그 ‘설마’는 아닙니다. 사장님하고 생긴게 완전히 달라요.”
“그래? 그럼 뭐지?”
“일단 인턴으로 채용하고 보시겠다고 하니까 완전히 금수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금수저면 경남 고성 절에 틀어박혀 있을 리가 없지. 씨발, 존나게 궁금하네.”
“이거 인턴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써야 하는거 아닙니까? 애가 뭔가 무서운게 없던거 같던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일단 평소 하던대로 해. 스님이었는데 뭐 눈에 보이는게 있었겠냐? 부처님 말고는 다
공평한 중생들이지. 설마 사장님 앞에서도 부처 앞 중생을 대하는 태도로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민 과장이나 오 대리는 왠지 그 정체 모를 인턴 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 두 번째 회사 지원(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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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1) >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영훈은 왠지 모를 기대감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남들처럼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자 했는데 어쩌다 현진물산이라는 대기업에 덜컥 입사하게 됐으니 인생의 목표에
한발짝 다가선 느낌이었다.
이제 남들처럼 월급을 꾸준히 모아 대출껴서 작은 집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여자를 만난다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팔자는 아주 못돼 처먹어서 사주에 나무가 있는 여자를 만나면 자신의 화기(火氣)를 키워 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다.
여자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팔자인 거다.
어쨌든 그렇게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 정장을 입은 채 집 근처에서 홀로 삼겹살에 맥주를 마시며 자신도 직장인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렇게 알딸딸하게 고시원에 들어가니 입구에 주인 아주머니가 나와 인사한다.

“총각, 오늘 면접 본다더니 잘 됐어?”


“네. 잘 된 거 같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에휴, 이번에는 좀 진득하니 버텨봐. 사람이 끈기가 있어야 해. 회사 다니다 말고 한
달만에 그만두는게 뭐야.”

주인 아주머니는 아침에 꼬박꼬박 출근하다가 요 며칠 회사를 안 나가니 바로 회사를 관뒀냐고 물어왔었다.


본래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성격인 건 관상에도 나와 있기에 영훈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회사를 관두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었다.
그때부터 눈만 마주치면 회사는 알아보고 있냐고 물어왔다.
이번에 면접 합격되면서 아주머니의 참견인지 걱정인지 알쏭달쏭한 간섭을 안 받아도 될 것 같으니 그것도 좋다고
생각됐다.

“이제 열심히 다녀야죠.”


“그런데 회사는 어디야? 그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건실한데 다녀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궁금한게 많은 아줌마가 나이도 안 물어봤을 리 없었다.


첫날에 어지간한 호구조사는 마쳤다고나 할까?

“안 그래도 이번 회사는 나름 괜찮은 회사예요.”


“그래? 어딘데?”
“현진물산이요.”
“현진물산?”

주인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재차 따지듯이 물었다.

“그... 현진물산 말하는거야? 대기업? 엄청 큰?”


“네. 오늘 을지로에 있는 본사가서 면접 보고 왔어요.”

한참 멍하니 영훈을 바라보던 주인 아주머니는 재차 물었다.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거기 들어가기 엄청 힘들다던데?”


“에이~ 그렇지는 않을걸요? 물론 저같은 경우야 워낙 배운게 없으니까 힘들지만 현진그룹이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거대 재벌그룹도 아니고, 그냥 십대 그룹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라던데.”

주인 아주머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십대 그룹이 어디야! 거기가 얼마나 큰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거기 지원하려면 대학도 엄청 좋아야 하고
영어도 엄청 잘해야 한다던데?”

영훈은 슬슬 아주머니가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되기 시작했다.


관상으로 보면 자신과 관계도 없는 사람이 땅을 샀다고 배가 아플 만큼 욕심이 과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 뭐 제가 입사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제야 아주머니는 자신이 과하게 흥분했음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그, 그게 아니고... 요즘 워낙 학벌도 속이고 직장도 속이고 그렇잖아.”


“제가 아주머니한테 직장 속여서 뭐하겠어요. 아주머니 제가 좋은 직장 구하면 고시원비 싸게 내려주실 거예요?”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요. 제가 뭐하러 직장을 속여요.”
“내 딸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네? 하하하!”

영훈은 한참 웃다가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됐습니다. 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현진물산 다니면 우리 딸도 보게 되겠네?”
“거기 다녀요?”
“그래. 우리 딸이 거기 다녀. 얼마나 똑똑한데.”
“그렇구나. 일주일 뒤에 출근하니까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회사가 크니까 못 만날수도 있고. 그럼
들어갈게요.”

영훈은 떨떠름해하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삼겹살 냄새가 짙게 밴 정장을 벗어 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불현듯 주인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정말 자신이 아주머니의 딸을 염두에 두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 것일지, 아니면 그저 배가 아파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세상이 참 각박하다는 것이었다.
욕할 수는 없다.
평생 자신의 딸이 얼마나 공부에 매달려 고생하며 살아왔는지 옆에서 지켜봐왔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별거 없는
청년이 자신의 딸이 그렇게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 덜컥 합격했다니 딸의 고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수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걸 주인 아주머니를 탓해서 무엇할까.
그저 괜히 주인 아주머니 딸과 엮여서 오해받을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 사이 정장과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 등 필요한 옷을 몇 벌 더 사고 유튜브나 핸드폰 앱을 통해 영어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영어를 못한다고 자신있게(?)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만큼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동대문에서 싸게 산 작은 트렁크를 끌고 회사 앞에 도착하니 이미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영훈은 대충 눈치를 보다가 버스를 기다리는 줄로 보이는 곳에 다가가 섰는데 누군가 출석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조윤희 씨!”
“김은중 씨!”
“강경훈 씨!”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불려지고 가장 마지막 영훈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불려졌다.

“최영훈 씨!”
“네!”

영훈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손을 들었다.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주변의 사람들이 돌아보았지만 영훈은 주변의 회사원들과 같은 일원이 된 것이 기뻐서 그
시선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후다닥 달려와 말을 걸었다.

“최영훈 씨?”

고개를 돌려보니 면접날에 봤었던 그 사람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잠깐 저 좀 볼까요?”

뭔가 둘만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처럼 보이자 영훈도 되묻지 않고 바로 따라갔다.


그런데 영훈이 인사과 직원과 둘이서 은밀히 사라지자 주변 신입사원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졌다.

“뭐야? 인사과 직원 아닌가? 왜 데리고 가?”


“맞아요. 인사과 저분 면접날에 잠깐 봤었어요. 그런데 저렇게 따로 불러내서 이야기를 해야 할게 있나?”
“혹시 지금 따라간 사람이 백이 엄청난 사람 아닐까요?”
“오~ 그럴 듯 하다.”

그렇게 뒤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 지도 모르고 영훈은 오 대리에게서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사장님께 따로 면접을 봐서 들어왔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을 때 영훈씨는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신에 대해 적당히 부풀릴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혹시 이번 오티에 가서 동기들이 예전에 어느 대학을 나왔고
무슨 공부를 했냐고 물을 때 산속에서 철학 공부했다고 말할 건 아니시죠?”

이 부분은 오기 전부터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기도 했다.


분명 솔직하게 말하면 이상한 놈이 될 테고 그렇다고 거짓을 하자니 이미 이력서에 다 나와 있기에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거 절대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네.”
“유학은 다녀온적 없고 대학은 지방대라고만 말씀하시고 절대 대학 이름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저 너희는 알
것 없다는 듯이 미소만 보이세요.”
“알겠습니다.”
“뭘 배웠냐고 물어보면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하세요. 본인 장기이니 이 부분에서 우리가 걱정할 일은 없겠죠?”

영훈은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요. 중요한 건 이겁니다. 절대 사장님 얼굴에 먹칠하시면 안 된다는 것. 의심받을 정보를 제공하지 말 것.
오티에서 너무 튀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서 동기들이 인사과 직원과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것도 일종의 시험인가?


날카로운 눈빛이 어디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겠다는게 훤히 보였다.

“이력서에 주민번호를 잘못 적어서 수정했다고 말하죠 뭐...”


“나쁘지 않군요. 못 믿고 계속 질문해오면 회사 통장을 만들 때 주민번호가 막혀서 은행에서 통장개설이
불가능했다고 첨언하는것도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세요.”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영훈을 못 마땅하게 바라보는 신입사원이 있었다.


‘뭐지? 왜 인사과에서 따로 불러내? 송 사장 라인인가?’

그렇게 의심하는 이는 양철기 전무의 둘째 아들인 양준기었다.


이번 공채 서류전형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었고 면접에서 압도적인 1 등을 받은 그는 이미 경계해야 할 사원들과
가까이해야 할 사원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는데 저 해맑은 표정의 사원은 명단에 없었다.
그리고 송은채 사장이 은밀히 신입사원 하나를 공채로 뽑았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아마도 저 사람이 송 사장의 픽이 분명했다.

‘주의해서 봐야겠어’

양준기의 경계해야 할 리스트에 한 명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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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2) >

두 시간 정도 버스가 달려서 도착한 곳은 경기도 양평의 교육센터였다.


넓은 녹지로 둘러싸인 이곳은 상당히 깔끔하고 세련된 건물들로 신인사원으로 하여금 저절로 자부심이 들게
만들었다.
수십 명의 신입사원들은 각자 트렁크를 끌고 교육장 직원의 지시를 받아 대강당으로 입장했다.

[현진물산 입사를 축하합나다]


[더 멀리, 더 크게! 꿈을 키워라!]

영훈은 대강당에 걸린 플랜카드를 보며 진짜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일단 조를 짜겠습니다! 순서대로 이름이 호명된 분들은 8 명씩 한 조가 됩니다. 강당 왼쪽 끝부터 둥글게


모여주시면 됩니다. 호명되신 분들은 나와주세요. 성우진 씨!”

그렇게 8 명씩 조가 짜여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훈으로서는 사실 혼자 교육을 받는 게 편했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서로 협력해가는 거라는 걸
자각하곤 편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버스를 탈때도 이름을 가장 마지막에 부르더니 조를 짤때도 가장 마지막에 불려졌다.

“최영훈 씨!”
“네.”

영훈이 트렁크를 끌고 자신의 조에 끼니 다 합쳐서 사람이 7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마지막 조는 사람이 부족해서 7 명이 한 조가 됩니다. 대신 한 명이 빠진만큼 간식을 더 많이 먹게 되니


좋으시죠?”
“하하하!”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 직원의 농담에 조원들이 다들 웃는다.
영훈은 별로 웃기지 않았지만 아웃사이더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럼 이제 각 조별로 조장을 뽑아주세요. 어떤 방식이든 상관 없습니다.”

순간 숨막히는 정적이 조원들 사이에 흘렀다.


영훈은 당연히 나설 생각이 없다.
다른 이유를 제쳐두고 일단 뭘 알아야 조장이 되지 않겠는가?
그 사이 현진물산이 뭘 하는 회사라는 정도는 알아 왔지만 그래도 경영이나 경제, 회계, 수출 관련 해서 아는
지식이 전혀 없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인사과 직원이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좋다고 했는데 그렇다는건 분명 각 개인마다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고 영훈에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일단 있는 듯 없는 듯 상황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조장이 되고자 나서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영훈은 조원들을 찬찬히 살폈다.
남자는 자신 포함 3 명에 여자 4 명.
딱 봐도 자기가 나이가 가장 많아 보였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다가오는데 네 명의 여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원래 조장은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 서열정리 한번 어때요?”

아뿔사... 이렇게 빨리 선수를 칠 줄이야.


영훈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원래 조장이 가장 허드렛일을 많이 해야 하잖아요. 막내가 하는 거 아니예요?”

인터넷에서 나이 많은 복학생이 조별 과제를 할 때 그렇게 말하며 조장을 피한다는 댓글 하나가 떠오른 건 천만


다행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럼 그럴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누가 봐도 이중에 가장 연장자는 영훈이었다.


그래서 연장자인 영훈이 그렇게 말하니 다들 수긍하며 넘어갔다.
이래서 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가보다.

“그럼 생년월일 한번씩 부르죠. 혹시 이중에 오리엔테이션때 생일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영훈의 말에 다들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생년월일을 불렀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자신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이가 92 년생이었으니 이건 완전 늙다리가 된 기분이었다.
조장에 당첨된 이는 올해 스물다섯살인 이윤지로 생긴 것도 굉장히 귀엽고 예쁘게 생겨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타입이었다.

“어... 제가 가장 어린 것 같네요. 95 년생이고 3 월 26 일이 생일입니다. 히히... 저 그런데 잘하지 못해도


이해 부탁드려요. 이런거 처음이라... 헤헤.”
“그럼요.”
“상관없어요.”
“자, 박수!”

짝짝짝!

그 다음 조장을 뽑았으니 자기소개가 빠질수 없었다.


당연히 영훈도 자기소개 때 간략하게 지방대에 심리학과를 나왔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다들 지방대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인지 정확하게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윤지가 심리학과를 나왔다는 말에 말을 붙였다.

“그런데 심리학이면 보통 뭐 배워요? 저도 심리학 부전공으로 들으려고 했었는데 너무 바빠서 못 들었거든요.


재밌을거 같아.”
“네? 아 뭐...”

조원들은 심리학과가 합격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잡스런 질문을 해댔는데 예전에 봤었던 심리학책
내용을 적당히 읊어가며 상황을 모면했다.
이후 각 조들은 자기 조의 이름과 구호 따위를 만드는 시간을 보냈다.
정말 이 따위 것들을 왜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영훈은 이런 시간이 회사원이 되기 위한 절차라고 생각하며
나름 충실히 임했다.
자기 소개시간에 가장 인상적인 친구는 92 년생 남자인 박찬기라는 사원으로 고대 경영학과 출신에 영어나 각종
스펙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런 박찬기도 조원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할 때 겸손해하며 다른 조의 조원을 가리키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저기 저 분 보이죠? 저분이 면접 최고 점수 받았다고 하는데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래요. 저는 저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와... 대단한 사람이네.”

영훈은 박찬기가 가리킨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딱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영훈은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닌 다른 조원을 보는 거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사원은 92 년생인 남자로 덩치는 송병창 사장보다 옆으로 더 컸다.
에어컨이 빵빵 틀어져 있는 강당에서도 땀을 흘리는 걸 보면 다이어트가 절실해 보이는 친구였는데 이름이
장가람이라고 했다.
이름이랑 외모랑 참 안 어울리긴 했다.
인상 깊은 이유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연신 눈동자를 돌리며 조원들을
살폈다.
왠지 자신보다 사람을 대하는게 더 어려운 듯 한 모습에 괜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 다음 친구는 93 년생인 임연희.
그녀는 속세(?)에 내려와 실제로 본 여자 중 가장 예쁘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정도 미모라면 회사에 입사하지 말고 연예인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내성적인 건지 도도한 건지
말이 많지 않았고 진행요원의 가벼운 농담에도 미소 한번 보여준 적 없었다.
자기 소개를 할 때도 아주 짧막한 한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했을 뿐이다.

“임연희에요. 어렸을 때 유학갔다 와서 잘 모르는 게 많습니다.”

이게 끝.
그리고 다음으로 인상깊은 친구가 바로 막내인 이윤지였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연신 웃으며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그녀는 영훈에게도 서슴없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친해지려 했다.
성인 여자라고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찾아오는 나이 지긋한 불자들밖에 없었기에 영훈으로서는 확 부담스럽고
자신도 모르게 경직됨을 느꼈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남중‧남고를 나와 처음 여자와 대화해 본 대학생 마냥 설레는 것이 아무래도 그녀를 가까이
하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식당으로 이동하겠습니다. 1 조부터 순서대로 식사할게요!”

자기 소개가 끝나고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사는 어찌나 잘 나오는지 이게 대기업이고 이래서 다들 대기업, 대기업 노래를 부르는구나하고 알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내고 다른 조원들이 커피를 마신다며 카페테리아로 갈 때 영훈은 슬쩍 빠져 강당으로 향했다.
아웃사이더가 되길 자처한 게 아니라 왠지 말을 많이 섞다 보면 약점(?)이 들킬까 괜히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이곳 시스템에 익숙해진 다음에 천천히 친해지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인사과 직원의 경고를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며 조심하고 있었던 거다.
강당에는 먼저 식사를 끝내고 후식까지 끝낸 신입사원들이 각자 자신들의 자리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영훈은 머쓱하게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데 누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해서 보니 임연희다.

“어? 커피 안 드세요?”

눈이 마주친 김에 그냥 물어본 것인데...

“삼촌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네?”
“사람을 잘 보신다면서요.”

이건 뭔 상황인지...

“삼촌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명일금융 송병창 사장님. 그분이 우리 삼촌이에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왜...?”

주변을 슬쩍 돌아보고 행여 누가 들을까 속삭이며 물으니 그녀의 대답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전 어떤 사람 같아요?”

무심한 그녀의 표정.


마치 용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처럼 모든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을 보면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이러나
싶기도 했다.

“아니, 다짜고짜 이러시면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무슨 점쟁이라도...”

그녀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사주를 그렇게 잘 보신다면서요? 아닌가요?”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느낌이 이럴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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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3) >

자신이 사주를 볼 줄 안다는 사실은 영훈이 쭉 거주했었던 절의 불자들, 그 중에서도 아주 소수 밖에 몰랐다.


한 마디로 주지 스님 외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거다.
사주를 봐주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게 된 것 역시 그 다섯 손가락에 꼽는 사람들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본래 한 명 밖에 모르다가 다섯이 된 것이었으니까.
이후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에 그 누구도 사주를 봐달라고 찾아온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삼촌에게 물었어요. 어떻게 알게 되신 분이냐고. 경남에 큰 손으로 유명하신 분이 소개해주셨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직접 찾아갔죠. 당신이 거주했던 암자까지.”

그게 뭐라고 거기까지 찾아갔을까?

“고작 신입사원 정체를 알기 위해 경남 고성까지 가셨다구요?”


“전 미신 따위를 믿지 않거든요. 엄마한테 이상한 사람이 달라붙어서 안그래도 힘든 엄마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단호한 그녀의 눈빛은 이미 영훈을 사기꾼으로 단정짓고 있는 것 같았다.


영훈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점심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가장 마지막 조인 영훈의 조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엄마는 또 누굽니까?”
“이 회사 사장되시는 분이 우리 엄마예요.”

갈수록 예상을 뛰어넘는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말했습니까?”


“어떤 거요? 당신이 사주를 본다는거?”
“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합니다.”
“왜죠? 들킬까봐 두려운가요?”

드디어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라는 표정이 담겼다.


“맞아요. 두렵습니다.”
“그러게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일려고...”
“그런게 아니라 나중에 저에게 사주를 봐달라고 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사주를 봐달라고 사람들이 찾아올까봐 두렵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사주를 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렵습니다.”

임연희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녀의 눈빛에 담긴 의아함.

“자신감이 과하시네요.”
“특정 부분에서는 그런 편입니다.”
“그럼 증명해보세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왜 용한 점쟁이들이 그렇다면서요? 무슨 고민이 있는지 척척
알아맞히는 그런거. 당신도 그런가요?”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해야 할 걸요? 오리엔테이션을 무사하게 끝마치고 우리회사 직원이 되고 싶다면요.”

어찌해야 할까?
그냥 안 해주겠다고 하는 순간 돌팔이, 사기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여기서 신입 오리엔테이션을 못 받겠다고 뛰쳐 나가면 그건 그것대로 레전드다.
한숨을 푹 쉰 영훈이 입을 열었다.

“본인 생년월일은 아까 들었고, 태어난 시각까지 말해보세요.”

임연희는 다시 비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훗, 태어난 시각을 어떻게 기억해요. 아, 엄마는 알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난 몰라요. 그런데 웃기네. 사람 잘
본다면서요? 만나는 사람마다 태어난 시각을 물어볼 거예요?”
“후... 그럼 됐고, 우리 악수 한번 해봅시다.”
“네?”

그녀의 쌍심지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딱 봐도 불쾌한 표정.
하지만 영훈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태어난 시각은 못 물어도 악수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지금 수작 부리는 건가요?”
“전 절에서 지내기는 했지만 스님처럼 수양을 쌓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충분히 짜증스러운 상황이니까 긁지
마시고 악수 한번 하시죠.”

영훈의 착 가라앉은 말투에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신을 받는 사람들은 대개 예민하고 기가 약하다고 평가받지만 실제 기가 약하다고 다 그런게 아니라 귀접, 환청,
빙의 등 신(神)에 밀접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신을 약하게 느끼는 사람이면 ‘나 어제 가위눌렸잖아’라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며 평범하게
사는 것이고 신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신통이 시작되며 신내림을 받는 수순을 밟는다.
무당, 그것도 세상을 어지럽힐만큼 영험한 무당이 될 팔자였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
산에 어둠이 내리고 홀로 잠을 청할 때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말도 못한다.
열 살 무렵부터 사타구니에 거뭇하게 털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매일 밤 자다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 주지
스님을 깨웠다.
그 비명 소리에 산 인근에서 지내던 주민들이 무서워 이사를 갔을 정도였다.
청소년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고 귀신에 빙의돼 불상을 깨뜨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고난을 견디고 산에서 내려온 영훈이었기에 그 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네, 뭐...”

영훈은 슥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손 감촉 때문에 아주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며 계산하곤 말했다.

“당신의 사주를 논하기 전에 먼저 아까 내가 물어본 거 아직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걸요?”
“다른 사람이 알고 있냐는 물음. 아직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도 모르고 삼촌도 몰라요. 내가 비서랑 같이 가서 알아온 거니까.”
“비서도 있습니까?”
“비서라기보단 친구같은 사이예요. 그리고 그 친구도 자세한 건 몰라요. 직접 대화한 사람은 나 혼자예요.”
“그럼 이제 약속하세요. 절대 그 누구에게도 내가 사주를 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내가 왜요?”
“두 번 말하게 할 겁니까?”

그녀는 영훈과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한 뒤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요. 말 안할게요.”


“약속하시는 겁니까?”
“네. 전 약속을 안하면 안 했지, 했으면 반드시 지켜요. 단, 당신이 범죄를 저질러서 내가 경찰이나 검찰에
조사를 받게 될 때는 말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그건 괜찮습니다. 그럼 약속한 걸로 알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회사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없다면 회사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거다.

“이제 사람들 몰려올 거예요. 빨리 말해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영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우선 재복과 인복을 타고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 한 번 없었을 테고 총명해서 뭘 배우든 잘했을 겁니다.
음악을 해도 잘했을 거고 공부를 해도 잘했을 겁니다. 도화살이 적당하니 미인으로 타고나 어딜가나 주목받고
인기도 많았겠죠. 능력이 출중해 사업을 하면 명예를 얻고 직장인이라면 승진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부러워할 사주입니다.”
“내가 누구 딸인지 아니 그 정도는 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외모야 지금 보고 있는대로고.”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안 좋은 이야기 해드려도 됩니까?”

임연희는 순간 움찔했지만 턱짓하며 대답했다.

“계속 해봐요.”
“타고 나기를 오만하게 타고나서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인물은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람을 가려
사귑니다.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공과 사의 구별이 심해 때로는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
자기가 정한 기준이 철저해 그 틀을 깨는 사람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던 연희는 영훈이 말을 이어가지 않자 재촉했다.

“그리고요?”
“아닙니다. 대략적으로 종합하면 당신은 부귀를 타고났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남들을 힘들게 하는 팔자를 타고 났습니다. 맞습니까?”

연희는 이를 악물고 영훈을 노려보다가 재차 말했다.

“아까 하다 못한 말 계속 해봐요.”
“별거 아닙니다. 사주풀이는 다 끝났습니다.”
“다 못했잖아요. 계속 해봐요.”

계속된 추궁에 영훈이 한숨을 쉬었다.

“후... 굳이 들어서 좋을 게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해보라구요.”

영훈은 고민했지만 결국 말할 때까지 연희가 그만두지 않을 성격임을 알기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

“편관이 과다하니 본인보다 못하면 무시하기 일쑤라 친구, 선후배, 형제자매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좋은
인연을 만나기 어렵고 특히 결혼하더라도 그 생활을 지속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라는 말이 나오자 연희의 주름이 더욱 깊게 패였다.

“그리고요?”
“비견이 공망이라 서른 이전에 부모 중 한 명을 잃을 수가 있고 월주도 공망이니 초년에 형제를 잃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연희는 주먹을 움켜쥔 채로 부르르 떨었다.

<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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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4) >

사주에 흉살(凶殺)이 보이긴해도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유는 대개 사이비들이 이 흉살을 거론해서 사주를 보러 온 사람들을 겁주고 돈을 뜯어내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고 싶지 않았던 사주풀이를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많이 격동돼있어 하지 않아도 될
사주까지 말해주었다.
말하기 전에는 될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후회가 되었다.

“사주라는 게 항상 맞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대비해 조심하면...”


“어떻게 알았어요?”

세상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

“네?”
“우리 아빠 아픈 거 세상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내 동생 어렸을 때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구요.”
“아버지가 편찮으시군요.”
“이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영훈은 놀라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쉿! 조용히 하세요. 누가 듣겠습니다.”


“지금 누가 듣는 게 중요해요? 난...”
“중요합니다. 저에게는.”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놀라운 침착함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제력을 잃은 것처럼 달려들려고 하더니 잠시후 언제 동요했냐는 듯 안색을 가라앉혔다.

“좋아요. 인정할게요. 그 사주라는 거 솔직히 지금도 믿지 않아요. 어디서 우리 집안 사정을 알아내서 아는척
하려는 것 같지만 그걸 알아낸 것 역시 본인의 실력이겠죠. 그 실력 인정할게요.”

뭔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 다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쉽게 자신의 생각을 바꿀 리 없으니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당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다 가라앉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자제력 하나만큼은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후 시간은 회사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예의와 신입사원으로서 적응을 잘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
선배가 나와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영훈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로 집중해서 들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을 안고 살았던 만큼 이런 교육이 그로서는 새롭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훈을 남몰래 주시하는 두 인물이 있었다.

이틑날부터 교육 강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회사업무에 필요한 기본 지식과 인트라넷 사용법, 전산업무 실습 등이었다.
당연히 이 교육을 받고 있는 신입사원들은 기본 지식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있어 무리가 없었지만
영훈은 인트라넷에 관련된 기본 교육 말고는 알아듣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줄기 동앗줄이 내려오니.

“아저씨,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수업 내내 인상을 쓰며 괴로워하는 걸 본 이윤지가 살갑게 다가온 것이다.
물론 저 아저씨라는 단어는 조금 어감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이차이가 너무 나서 차마 누구누구 씨라고 하기
미안하다는 말에 그럼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어? 어. 나 하나도 모르겠어.”


“심리학과라 그러실 거예요. 여기서 B/L 이라는건 선하증권이라는 건데요. 이건...”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무역 용어와 영어에 대해 가정교사처럼 친절히 알려주니 그나마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고 점심을 먹고 다시 강당에 들어오니 어제처럼 임연희가 따라와 앉았다.

“아주 그냥 좋아 죽던데요?”
“뭐가 말입니까?”
“회사에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연애하러 왔나봐요?”
“아~ 윤지 씨요?”

연희는 잠시 영훈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어요?”


“말씀 못 들으셨나봐요.”
“뭘요?”
“내가 원해서 입사한 거 아닙니다. 당신 삼촌 되시는 명일금융 사장님께서 현진생명에 이력서를 내보라고
하셨는데 막상 면접을 보니 음... 이분이 나와 계셨던 거죠.”

영훈은 행여 누가 들을까 조심하며 목소리를 죽이면서도 사장님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아 ‘이 분’을


언급할 때 엄지만 들어 올렸다.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거 아니구요?”


“뭐 그렇게 믿으시던지. 솔직히 난 여기보다 그냥 현진생명 보험영업 사원으로 옮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을 굳이 억지로 설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연희는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며 슬쩍 턱짓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 인간 어때요?”

영훈이 시선을 돌리니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스타일에 매끈하게 잘생긴 청년이다.

“금색 안경을 끼고 와인색 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이요?”


“네.”
“저 사람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관상으로 보면 대략 나오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관상과 사주를 같이 봐야 정확하죠.”

연희가 고개를 돌려 영훈을 바라보았다.

“관상이요? 어제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말했듯이 관상만 가지고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요.”
“그럼 내 관상은 어땠는데요?”
“말하지 않을 겁니다.”

연희의 미간이 확 찌그러진다.

“왜요?”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상에 대한 설명도 어제 한 이야기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더 알려 하지
마세요.”

영훈의 단호한 대답이 생각 밖이었는지 살짝 입을 씰룩였다.


그녀 나름대로 불만족스러운 표정인 것 같았다.
연희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저 남자에 대해서나 말해주세요.”


“싫습니다. 내가 이럴까봐 사주를 본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방금 전에는 봐줄 것처럼 말했잖아요. 관상만 보면 확실하지 않다느니 하면서.”
“그냥 그렇다는거지 봐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저 사람을 정확히 파악해내면 앞으로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게요.”
“진짜입니까?”
“난 약속하면 지켜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할 때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


“1991 년 12 월 4 일 아침 7 시 10 분이요.”

영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내 나름대로 정보력을 동원한 거예요.”
“그 정보력을 어떻게 동원했길래 태어난 시각까지 알아낸 겁니까? FBI 도 힘들 것 같은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어쨌든 말해봐요. 저 사람 어떻냐구요.”

영훈은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며 계산하다가 말했다.

“당신이랑 비슷한데 좀 다릅니다.”


“어떻게요?”
“재복이 있기는 한데 당신처럼 강하지 않아요. 대신 부모와 연이 깊어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네요.”

임연희의 눈동자가 떨린다.

“우리 집이 화목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순간 영훈은 자신이 실수 했음을 깨달았다.


어제 사주를 봐주다 그녀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말을 하다 말았다는 걸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음...”
“말 돌리지 말고 끝까지 말해봐요.”
영훈은 이왕 꺼낸 이야기 끝까지 해주기로 했다.

“정확한 건 당신 아버지의 사주를 봐야 해요. 안 되면 어머니라도. 하지만 대개 당신처럼 재성이 고립된 사주를
타고 나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죠. 당신이 유학을 다녀왔던 것, 그것도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서 헤어질
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속 돈 문제와 재산 문제로 골치를 썩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알겠어요. 아까 하던 저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계속 해봐요.”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분명하며 명예욕이 강합니다. 특히 눈치가 빠르고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구분이 명확해
자신의 마음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으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한참 영훈을 보다가 재차 물었다.

“그게 다예요?”

자신에게 있었던 나쁜 이야기는 없냐는 물음이었다.

“당신 사주를 당신이 직접 듣는 것이기 때문에 흉살에 대해 말해주었던 거지 남에 대한 흉살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은 초년에 흉살이 낀 경우고 저쪽은 말년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어째서요?”
“어째서긴요. 사주가 그러니까요. 물론 타고난 성정이 그 연유가 된다고 유추할 수 있겠네요.”
“타고난 성격?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구분이 명확해 마음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 받는다는 거요?”
“그건 사주에 나온 건데 저 사람 관상이 더 정확히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어떤 부분으로요?”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인다.

“본래 그리 안 좋은 상은 아닙니다. 다만 타고나기를 재복과 명예욕을 타고 나서 회사 생활을 해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텐데 광대가 약하고 상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인덕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화는 같이 피하려 해도
복은 혼자 누리려고 하니 사람이 따르지 않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고 할까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언젠가 크게 뒤통수를 맞을 상입니다.”

연희는 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내 저 새끼 저럴줄 알았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가까이하면 안 될 놈이라는 거죠?”


“아니 뭐...”

그리고 나서 나오는 말이 걸작이다.

“당신 사람 좀 보네. 인정.”

<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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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5) >

이쯤되니 사주를 본 사람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누굽니까? 저 사람.”

연희는 허리를 꽂꽂이 세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양철기 전무 아들인 양준기예요. 어릴적부터 알고 지냈어요.”


“아... 그래서 사주도 알고 있었던 거군요.”
“준기네 엄마가 점쟁이를 잘 믿거든요. 새해가 될 때는 물론이고 준기가 고등학교나 대학 들어갈 때, 준기 누나
시집갈 때, 인사이동 시즌 등. 뭐 하여튼 점 없으면 못 사는 분이라 자주 가는 점집에 슬쩍 가서 알아오라고
했어요.”
“그걸 알려줍니까?”
“돈만 많이 주면 준기네 망하는 부적도 써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아, 이게 당신한테 실례인
말인가요?”
“사이비가 문제인 건 알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어쨌든 저 인간이 올해 갑자기 우리 회사에 입사하겠다면서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왔어요.”
“그게 뭐 문제가 됩니까?”

연희는 가만히 영훈을 돌아보았다.

“아까 내 사주를 말해주면서 돈 문제랑 재산 문제로 골치를 썩을거라고 했죠? 아무래도 내 느낌에 저 인간이 내
재산에 흠집을 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그 정도 감이면 저 대신 돗자리를 펴도 되겠는데요?”

영훈이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려서부터 봐와서 하도 많이 싸웠던지라 나나 저 인간이나 서로 성격 안 좋은 거 알고 있고 서로 호감 없는 거


뻔히 아는데, 갑자기 얼마 전부터 들이대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이상했는데 딱 그것 때문이었던 거죠.”
“그냥 당신이 예뻐서 들이대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머, 지금 꼬리치는 건가요?”

저런 말을 무표정하게 눈하나 깜빡 안하고 한다.

“미안하지만 전 얼굴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


“아님 말구요. 어쨌든 나하고 결혼해서 현진물산을 갖겠다는 수작이겠죠. 난 그게 궁금했어요. 저 인간이 정말
괜찮은 사람일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본심은 따뜻한 사람일지.”
“아~ 그런데 이런 거 저한테 다 얘기해도 되는 겁니까?”
“원래 사주나 점보러 가면 속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낸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어제까지만 해도 절 사기꾼처럼 봤던 거 기억하시죠?”
“상황은 항상 변하는 거니까요.”
“으흠~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상담 요청하는 겁니까?”
무표정하던 연희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든 것 같다.
아무래도 어제까지만 해도 비난을 퍼붓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리라.

“뭐, 그렇다고 해두죠.”


“미안하지만 전 상담 안 받습니다. 더 이상 요구하지 마세요.”

연희는 뭐라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싫어해요? 남들은 다들 자기 재주 뽐내지 못해서 안달하는데. 자기 PR 시대가 언제부터였는데 왜


시대 역행을 하려고 해요?”
“두 번 말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그러니까... 왜 두렵냐구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더 유명해질테고 이정도 실력이면 부르는 게 값이지
않아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 말하기는 싫구요. 말해줘야 할 의무도 없지 않습니까?”
“...”
“남이 싫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세요. 그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캐묻는거 좋은 버릇 아닙니다.”
“와...”

연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영훈을 돌아보았지만 영훈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정면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 귀찮게하지 않으실거라 믿습니다.”


“좋아요.”

연희는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돌렸지만 영훈은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사기꾼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말을 그저 개소리라고 치부했다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 수 있겠지만
이제 자신의 말을 믿기 시작했으니 어제 했던 사주풀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거다.
부모 중 한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해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못할 거라
했으니 그 속이 어떨지...
이래서 흉살은 풀어주는 게 아닌데 괜히 입을 잘못 놀려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게 왜 그렇게 사람을 압박해서는...

“오늘도 두 분만 여기 남아 계시네요.”

이윤지가 웃으며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분위기로.
손에 커피를 들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 영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괜히 미리부터 앉아서 강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은근 간이 작으시네. 그래가지고 배짱 있는 상사인이 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을 전공하셨으면 협상은 엄청 잘하시겠다. 원래 우리 일이 서로 간에 밀고 당기기가 엄청
중요하다고 선배님들이 그랬잖아요. 막상 일 시작하면 날아다니는 거 아니에요?”
“날아다니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제발 기어다니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하하! 설마 기어다니시겠어요.”

이윤지가 재밌다고 팔을 툭툭 쳤다.


이게 바로 회사생활인가?
일반인들은 중‧고등학교때 또래 여자애들과 이런 장난을 치고 놀았던 것일까?
캠퍼스 커플들은 얼마나 좋을까?
여자를 만날 생각은 안 하지만 이렇게 달달한 분위기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무척 감사함을 느꼈다.
임연희가 멍청하게 헤헤 쪼개고 있는 영훈을 황당한 얼굴로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이거 제가 끼어도 되는 분위기입니까?”


“우리 조는 서로 많이 친해진 것 같아요. 다른 몇몇 조는 아직도 서먹해서 애먹고 있다는데.”

어느새 다가온 조원들이 하나 둘씩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오후 수업을 보내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은 영훈이 제일 좋아하는 제육볶음과 쌈채소.
다 먹어치우겠다는 마음으로 허겁지겁 먹는데 대각선 맞은편에 의외의 사람이 자리했다.

“안녕하세요. 5 조 조장 맡고 있는 양준기입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다른 조 사람이 인사를 걸어오자 조원들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양준기가 인사도 안 받고 고개를 숙이며 식사하는 임연희에게 말을 건넸다.

“연희야. 인사 좀 받아줘라.”
“어?”
“아시는 분이세요?”

다들 머리에 느낌표가 뜰 정도로 놀래 양준기와 임연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 친구였어요. 오빠, 회사니까 우리 공과 사는 구별하자.”


“이거 섭섭한데?”
“나 아직 다 안 먹었는데 일어날까?”

양준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임연희의 맞은편에 앉은 영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까 보니까 연희랑 많이 친해지신 거 같던데.”
“아니요. 전혀 안 친합니다.”

건조하다 못해 사하라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습기 하나 없는 영훈의 대답에 연희도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양준기도 괜히 실없는 사람이 된 상황이 당황스러워 약간의 노기를 담아 말했다.

“그런가요? 굉장히 친해보이시길래.”


“몇가지 물어본 거 대답해드린 거라서요.”
“아... 그런데 원래 그렇게 차가운 성격이세요?”
“차갑다기 보다는 돌려말하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말나온 김에 충고 하나 해드리면 그런 식으로 친한척 나서면
오히려 연희 씨가 반발심만 더 생기지 않을까요? 여자들은 애처럼 유치한 남자 싫어한다던데.”

양준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다.


그런데 그때, 임연희가 된장국을 먹다 ‘풉’ 소리를 내며 내뱉었고,

“아이!”
하필 영훈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된장국을 얼굴에 뒤집어 썼다.
찝찌름하게 올라오는 된장국의 냄새...

“어머, 미안해요. 웃겨서... 잠깐만요.”

임연희는 서둘러 휴지를 뽑아와 영훈의 얼굴을 찍어댔다.


영훈은 그녀에게 휴지를 뺏듯이 챙기곤 대충 닦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저도...”

임연희가 미안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가는 걸 양준기는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좀 미인 앞에서 친한 척 해보려다가 개쪽만 팔린 모습이었다.
영훈의 조원들은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버티는 상황.
막내인 이윤지는 수저를 쥔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고 고대 경영학과 출신이자 스펙이 빵빵한 박찬기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전 다른 곳에서 먹어야겠네요.”


“아, 네.”
“맛있게 드세욬. 흡.”

이윤지는 인사를 하다 웃음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된장국의 흔적을 정리하던 영훈은 밖에서 기다리던 연희와 마주쳤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됐습니다.”
“그런데 아까 좀 심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걔가 속이 넓은 편은 아닌데.”
“전 당신 믿고 그런 건데요?”
“절 믿구요?”

영훈은 황당한 얼굴로 엄지를 들어보였다.

“아니, 연희 씨 어머님이 이거시잖아요. 저 인간 깽판치면 저 안 지켜 줄겁니까?”


“그렇다고... 아니에요. 잘했어요. 못하는 게 많으시지만 그래도 주어진 배경을 잘 이용할 줄 아시네.”

영훈은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뭘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머리 나쁘면 사주 못 봅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게 장난인줄 아시나. 크흠...


그리고 확실히 칭찬을 생활화하시는 윤지 씨랑은 많이 다르시네요. 그러니까 친구 없으시... 아, 아닙니다.”

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멀어져가는 영훈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5)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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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업 2 팀의 사람들(1) >

2 박 3 일의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끝났다.


조원들은 아쉬워하며 회사에서 만나면 잘해보자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조장인 이윤지의 주도로 단톡방도 개설했다.
영훈은 별 중요하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동조하고 자신도 그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이런 상황이
즐겁기 그지 없었다.
산에 있을 때 인터넷으로 게임과 드라마, 영화를 보며 나름 즐겁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하며 대화를 나누는 건 그것과는 다른 즐거움과 활력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총각, 출근해? 가서 우리딸 만나면 꼭 인사하고.”


“네. 그래야죠.”

주인 아주머니의 안부(?)를 받으며 드디어 시작한 첫 출근.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육받은 대로 가장 먼저 인사과에 도착하니 이미 교육 때 봤었던 신입사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대기하고 있는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가장 먼저 눈에 띈 이는 커다란 덩치의 장가람 사원이었다.


맞춤 양복점에서 원단 꽤나 들었겠다고 생각이 저절로 드는 이 친구는 역시나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도 땀을 훔치고
있었다.

“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아닙니다. 저도 온지 5 분 밖에 안 됩니다. 후우... 긴장되네요.”

그는 가슴을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어떤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될지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되는 것 같다.

“저도 긴장됩니다. 다른 분들은 아직 안 오셨나봐요.”

단톡방에는 오늘 첫 출근에 대한 기대로 아침부터 수다스러웠다.

“박찬기 씨는 벌써 오셔서 사원증 받고 배정받은 곳으로 갔습니다. 화학 1 팀이라고 하던데요.”


“아~”

그곳이 뭘 하는 곳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척했다.


잠시 후, 이윤지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헉헉... 아직 안 늦었죠?”
“네. 저희도 계속 기다리는 중이에요.”
“후... 다행이다.”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검은색 정장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인터넷에서만 보던 섹시한 여사원
바로 그 모습이었다.
땀을 닦고 있던 장가람이 말했다.

“들리는 말로는, 우리 같이 식사했을 때 말 걸었던 사람 있잖아요? 연희 씨랑 친하다고 했던...”


“네. 왜요?”

윤지가 눈을 반짝인다.

“그 사람 기획조정실로 들어갔대요.”
“헐~ 정말요?”
“네. 임원 중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대요.”

윤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주 찰나의 순간에 영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가람에게 물었다.

“또 기획조정실에 뽑힌 신입사원이 있어요?”


“그건 못 들었어요.”
“그렇구나...”

윤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길 때 임연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자켓과 하얀 정장 바지가 늘씬한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업무처리에 정신 없는 인사과 직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모습 때문에 괜히 잡담하고 있던 자신들이 민망했는지 가람과 윤지는 입을 다물었다.

“장가람 씨, 철강 1 팀입니다.”
“이윤지 씨. IT 영업팀입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지고 난 뒤, 인사과에 남은 신입사원은 영훈과 연희 둘 뿐이었다.


인사과 오재준 대리는 먼저 임연희에게 사원증을 주며 말했다.

“임연희 씨는 영업 2 팀입니다. 자리에 가서 본인 아이디랑 비번 설정하시면 됩니다. 교육시간에 배우셨죠?”


“네.”

연희가 나가자 오 대리가 불렀다.

“그리고 최영훈 씨?”


“네.”

영훈이 급히 다가가니 오 대리가 사원증을 내밀었다.

“영훈 씨도 영업 2 팀입니다.”
“네? 아, 그럼 같은 팀이...”

당황해서 물어보는데 오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분은 영업 2 팀으로 배정됐습니다. 혹시 모르는 게 있으면 저기 임연희 씨에게 물어보시고 그래도
모르는게 있으면 선임에게 물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모르면 상사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라 동기인 연희에게 물어보라니...


오 대리는 그것도 불안한지 계속 주의를 줬다.

“엑셀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엑셀 못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른건 몰라도 엑셀은
완전히 마스터해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리고 영어 공부 열심히 하세요. 특히 무역용어 모르시면 가장 기본인 운송장 하나 작성하기 힘듭니다.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영훈은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타입 같다고 물어보려다가 다물었다.


이게 어디 그의 성격 때문일까?
다 송 사장이 직접 뽑은 신입이 사고 치면 사장님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걸 보면 확실히 송 사장이 한 달의 기한을 줬다는 걸 인사과 직원들은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한 달만 있다가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초조해하지도 않을 테니까.

“혹시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치면 나한테라도 연락을 하던지 찾아오세요. 사장님 귀에 당신이 사고 친
내용이 다이렉트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끝인가요?”
“후... 네. 끝이에요. 가보세요.”
“그런데 질문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임연희 씨는 뭡니까? 사장님 딸이라면서요? 저랑 같은 부서에 일하도록 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겁니까?”

순간 인사과 전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눈을 꿈뻑이던 오 대리를 대신해서 지금까지 계속 자신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던 인사과 과장이 나섰다.

“어떻게 알았어?”
“따님 분께서 직접 말씀하시던데요?”

민 과장은 얼마 없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물었다.

“당신 말고 아는 사람 있나?”
“그 연희 씨 친구라는... 누구더라? 안경끼고 홀쪽하게 생긴 사람 있지 않습니까?”
“양준기? 그 친구 말고.”
“없습니다.”
“임연희가 왜 자네 앞에서 사장님 딸이라고 밝혔지?”

영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인사과 직원들은 발끈했지만 민홍기 과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원래 우리 회사에 입사하려고 준비중이었어, 그러다 당신이 들어온거지. 마침 잘 됐다 생각해서 사장님이 연희


씨와 같이 영업팀으로 배속시켰어. 사장님이 당신을 계속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럼 절 평가할 사람이 같은 신입사원이라는 건가요?”

민 과장이 코웃음을 쳤다.

“건방 떨지마. 자네에 대한 평가는 임원이 하는 거야. 대신 업무에 필요한 지식이 부족한 자네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도움을 줄거야. 임연희씨 말고 그럴 수 있는 신입사원이 어디 있겠어? 다들 본인 살기도 힘들텐데.
그래서 임연희씨가 옆에서 도와주면서 주관적인 견해를 사장님에게 전달하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네. 알겠습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신입사원에게 도와달라 말하는 건 열심히 달리는 사람
발목을 잡는 것과 같으니까.
이런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사장 딸 말고 누가 있을까.
어쨌거나 결론은 주관적인 평가는 연희가, 업무적인 평가는 임원이 내린다는 말이다.

“알면 됐어. 나가 봐.”

영훈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오 대리가 황당한 얼굴로 인사과 문을 가리키고는 영훈 특유의 무덤덤한 말투를
흉내냈다.

“방금 보셨습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완전히 미친거 아닙니까?”


“그건 맞는데... 일단 계속 지켜봐. 사고 치지 않게.”
“사장님께 보고하실 겁니까? 임연희씨가 스스로 밝혔다구요?”
“아니, 그 어린 나이에 혼자 유학가서 코넬대 경제학과 수석으로 나온 애다. 똑똑한 애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양 전무님 아들이 이미 임연희가 사장님 따님인거 알고 있는데 그 비밀이 얼마나 가겠어? 길어야 한
달일걸? 어쨌거나 간만에 우리 고 과장 회사생활 익사이팅해지겠구만. 얼굴 보는 재미가 생기겠어.”

민 과장은 빡빡한 영업팀에서 과연 연희와 영훈을 데리고 어떤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낼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인사과를 나오니 연희가 사원증을 손에 쥐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가는 김에 같이 가는게 좋잖아요. 인사 받는 사람도 두 번 인사하지 않게. 그런데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했어요?”
“왜 같은 부서에 배치했냐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당신이 내가 업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고 하던데요?”
“뭔가 잘못 알고 있으시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희는 살포시 인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감시할 생각이잖아요?”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연희의 어정쩡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이어졌고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트러블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미인인지라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둘만 있게 되니 괜히
싱숭생숭했다.
그런데 연희가 층수를 누르고 문이 닫히자 입을 열었다.

“해줄 일이 하나 있어요,”
“벌써부터 업무지시를 내리는 겁니까?”
“맞아요.”

엄밀히 말하면 같은 신입사원 주제에 일을 준다고 하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임연희는 신입사원 이전에 사장의
딸이었다.
어쩌면 송 사장이 자신을 채용한 이유도 단순히 실적을 잘 올리라는 뜻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뭘 해주면 됩니까?”
“영업팀 윤성우 부장과 본부장인 차지열 상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세요. 추가로 알려드리면 이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지시한 거예요.”

< 영업 2 팀의 사람들(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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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업 2 팀의 사람들(2) >

“사장님이 지시한 일이라구요?”


“네.”
“사장님이 제가 사주 보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그냥 사람을 잘 본다고 하니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잘 보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도
궁금하시대요. 내가 가진 패가 뭔지 알아야 베팅을 하든 죽든 할 수 있는 거겠죠?”

연희가 대답을 마친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표정을 바로하고 영업팀으로 향했다.

“오~ 신입!”

영업 2 팀은 11 층 오른편에서 중앙 가까운 곳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연희와 영훈이 들어오는걸 보자 직원들이


반색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어! 여기야. 여기.”


“뭐야, 두 명이야? 우리는 하난데?”
“이거 너무 차별인데?”
윤희는 직원들의 소란한 말소리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영업 2 팀이라고 쓰인 곳의 가장 상석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영업 2 팀에서 일하게 된 임연희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응, 반가워. 나 고일주 과장이야. 이런 미인이 우리 팀에 들어오다니, 눈부시네. 응? 흐흐... 형석아. 자리
좀 알려주고, 전산실 불렀지? 프로그램 세팅 좀 해주라고 해.”
“알겠습니다.”
“일단 인사들 해. 여기는 노형석 대리라고...”

고일주 과장이라는 사람은 키가 작지만 탄탄한 체격으로 조금 과장하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샘을 닮았다.
그리고 고 과장의 말에 연희와 영훈의 자리를 알려주고 전산실에 전화를 거는 노형석 대리는 반대로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연희를 보고 첫눈에 반했는지 연신 연희를 힐끔거렸다.
성격이 오만하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쁘긴 하지...
그리고 자리에 없는 사람은 이은성 사원으로 작년에 입사했으며 현재 출장을 나가 있다고 했다.

“고 과장아, 잠깐 나와봐.”

전산이 세팅되는 동안 연희와 영훈이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익히고 있을 때 영업 1 팀의 김승규 과장이 고일주
과장을 슬쩍 부른다.
김승규 과장과 고일주 과장이 복사실 안 탕비실로 들어서니 담소를 나누고 있던 직원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김승규 과장이 고일주 과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야, 저 미스코리아는 뭐고? 저 폭탄은 뭐야?”


“나도 사진으로 봐서 저 정도로 이쁠지는 몰랐는데, 굉장하네. 왜 홍보팀이나 비서실에 안 넣고 우리팀에 넣었지?
이해가 안 가는데?”

보통 저렇게 외모가 뛰어나거나 하면 회사 이미지를 위해 비서실이나 홍보팀으로 배정하는 경향이 많은데 하필


회사에서도 제일 빡센 영업팀으로 보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거다.
영업을 하다 보면 접대를 하거나 받을 때도 많고 거친 말이 오가는 경우도 있기에 저렇게 뛰어난 외모의 여자
신입이 들어오면 무척 난감하다.
괜히 술자리에서 바이어가 취해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기도 하니까.
미인이 있음으로 해서 협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고 과장은 지금까지 여자와 같이 일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경험이 없었다.

“스펙은 어때?”
“빵빵해. 스펙으로는 홍보팀에 있기 아까울 수는 있는데 일단 물어봐야지. 영업을 지원해서 온건지 말이야.”
“딴건 몰라도 출근할 맛 나겠는데? 너 아침에 눈이 번쩍번쩍 떠지겠다. 이제 알람도 안 맞추는거 아니냐?”
“그럴거면 네가 데리고 갈래?”
“아니, 난 싫어. 쟤 데리고 있으면 어디 술이라도 마음껏 마시겠냐?”
“새끼, 밝히기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저 폭탄이다. 아직까지 자기소개서도 보여주지 않아.”

입사가 결정되고 미리 각 팀에 어떤 신입사원이 배정될지 통보를 해주었는데 어떤 자료도 없는 신입이 배정돼


그때부터 노심초사했던 고 과장이었다.
그런데 배정된 이후에 어느 대학에서 뭘 배웠는지, 자격증은 뭐가 있는지도 안 알려주니 자기소개서라도 달라
했는데 그것도 까여버린 거다.
단순히 이 정도라면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텐데 모르는 게 많으니 이해하라는(?), 잘 가르쳐보라는 이상한
지시가 함께 내려온 신입이라 영락없이 폭탄이 되버린 상황.
상사의 기본 언어인 영어도 못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농담인 줄만 알았었다.
“인사과에서? 뭐라면서 안 보내줘?”
“밝힐 수 없대. 이거 뭐냐?”

김승규 과장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다.

“뭐야, 그거? 로얄패밀리야?”


“로얄패밀린데 왜 여기로 보내? 실적도 개판인데.”
“그것도 그렇지.”

영업 2 팀이 현진물산 최하의 영업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게 벌써 3 분기째였다.


이러다가 곧 목이 달아날 것 같아 전전긍긍하던 고일주 과장에게 최영훈은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민 과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몸 사리기로는 우리회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그 인간이 입 꾹 다물고


있는거 보면...”
“뭐가 있기는 있는거네.”
“그렇지. 그런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고일주 과장이 그렇게 김승규 과장과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영훈도 열심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침 노형석 대리가 전화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연희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아까 저쪽 과장님이 우리 과장님 데리고 커피 마시러 가던데 무슨 일일까요?”


“뻔한거죠. 당신이랑 나 때문에.”

영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나 때문에 고민되는 건 이해가 가는데 당신 때문에 고민할 게 있습니까?”


“음... 혹시 모르죠. 내가 사장 딸이라는 걸 알고 있을지.”
“그걸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까? 인사과에서는 다들 알던데?”
“인사과는 알 수밖에 없고 다른데는 모르는 게 정상이에요. 알리지를 않았으니까. 다만 아무리 조심해도 말이
밖에 새는 걸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어요. 어차피 양준기 걔 입이 그렇게 무거운 편도 아니라서 아마 한 달도 안
돼 내 어릴적 별명까지 알려질 게 뻔해요.”
“어릴적 별명이 뭐였습니까?”
“얼음공주.”
“크흡...”

영훈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재빨리 틀어막았다.


연희의 눈빛이 서늘해진다.

“왜요?”
“굉장히 잘 어울려서요. 어린 나이에도 작명 솜씨가... 깜짝 놀랐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긴 그만하고 우리팀 매출내역이나 회의자료 살펴보세요. 혹시 복사기 다룰 줄은 아세요?”
“아니요.”
“후... 이따가 점심 먹고 와서 쉬는 시간에 알려드릴게요. 아마 처음에는 복사하는 일이 주가 될 거예요.
영어를 못하니까 전화 받는 건 나중에 할 것 같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많이 들었으니까요. 아빠... 하여튼 많이 들었어요.”
“네...”

영훈은 괜히 미안해서 고개를 돌리고 보던 것에 집중하는데 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결혼에 진짜 실패할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꺼운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영훈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 대리는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었고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주에 칼이 있다고 다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본성을 잘 알고 노력한다면 검사나 경찰이 될 것이고
짐승처럼 막 산다면 살인자가 되는 거니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잘 알고 다스리려 노력하면 대범하고
카리스마 있는 기질로 바뀔 수도 있겠죠. 정해진 사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난 여기에 있을 수도 없을
겁니다.”
“당신의 정해진 사주는 무엇이었는데요?”
“비밀입니다.”

연희는 다시 침묵하며 회의자료를 살펴보다가 또 말을 걸어왔다.

“그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건가요? 이를테면 궁합이 잘 맞는다던가...”

영훈은 다시 주변을 살펴보고는 속삭이듯 대답했다.

“좋은 인연은 찾는다고 막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말했듯이 본인을 변화시켜야 좋은 인연이 찾아오는 겁니다.
당신 사주의 문제는 운이 없어서 나쁜 남자를 만날 확률이 높은게 아니라 당신이 좋은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

연희는 대답이 없었다.


슬쩍 돌아보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부모 중 하나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 그건 어떻게 피해갈 수 있죠?”


“피할 수 없습니다.”
“네? 방금 사주는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잖아요.”
“흉살은 다릅니다. 직업이나 재산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지만 죽음을 피하는걸 뭘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 그런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만약 흉살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생긴다는 건 무슨 뜻이죠?”
“당신이나 당신 주변이 죽거나 다칠 수 있다는 말이죠.”

연희는 긴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전에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는데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아버지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사기꾼이길 바래야겠군요.”


“그게 마음 편하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 고일주 과장이 자리로 돌아왔고 때마침 통화하러 나갔던 노형석 대리도 돌아왔다.
노 대리는 고 과장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갔다.
“과장님, 런던에서 연락이 왔는...”

노 대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 과장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너 인마, 내가 그거 드랍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인도네시아에 집중하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거 분명히 한국에서 먹힙니다.”
“한국에서 먹히기 전에 내가 부장님한테 욕을 먹겠다. 아주 한 바가지 먹겠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드랍해.
그리고 오늘 쟤들 데리고 회식 할거니까 그렇게 알고.”
“알겠습니다.”

노 대리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노 대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영훈의 옆구리를 연희가 푹 찔렀다.

“뭐해요?”
“아, 네.”

노 대리가 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불쾌할 수도 있음을 인지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연희가 슬쩍 자리로 돌아가는 노 대리를 확인하고 카톡 개인메시지를 보내왔다.

[왜 그래요? 뭐 있어요?]
[아닙니다]
[저도 좀 알죠]
[알 필요 없습니다]
[(화난 이모티콘)]

귀여운 캐릭터가 성질을 내는 이모티콘을 보내왔지만 영훈은 신경쓰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연희는 그런 영훈을 힐끔거렸다.

< 영업 2 팀의 사람들(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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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업 2 팀의 사람들(3) >

“자, 우리의 새로운 식구들, 잘 해봅시다. 건배!”


“건배!”

회식은 회사 근처 삼겹살집이었다.
삼겹살...
스님도 한 번 고기를 맛보면 그 맛을 잊어버리기 힘든 법인데 스님이 될 생각도 없는 영훈이 1 년에 몇 번 못 먹는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라 영훈은 상사들이 점심 안 먹었냐고 놀랄만큼 흡입해댔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지방 출장을 갔다가 막 도착한 이은성 사원은 말끔하게 생긴 청년으로 나이는 영훈보다 1 살이 어리다고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중요한 건 나이보다 직급과 경험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감히 맞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영훈이었다.
지금 영훈은 이런 작은 회식자리에 참석해서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중간에 연희가 ‘그렇게 재밌어요?’라고 물어볼 만큼 말이다.
드라마나 웹툰에서 보던 직장인들의 생활, 그것도 대기업 직원으로 갖는 첫 회식에 감개가 무량하고 속세를 떠나
절에 있던 외로운 시간이 보상받는 기분까지 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다섯명의 팀원중 유일하게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연희 씨는 왜 영업에 지원했나?”

얼큰하게 술이 오른 고일주 과장이 묻는다.

“상사의 꽃은 영업이니까요. 남들은 회사의 얼굴이 되라고 하지만 전 회사의 얼굴이 아닌 회사의 손발, 머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야~ 배짱이나 야심이 장난 아닌데? 자, 한잔해.”

연희는 술도 센지 지금까지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시면서도 꽂꽂한 허리가 단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고 과장은 연희가 술 마시는 걸 보고 나서 영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근데... 난 자네가 너무 궁금해. 인사과에서 정보를 하나도 안 주네. 그래, 학교에서는 뭘 배웠고 특기는
뭐야? 영어를 하나도 못한다는데 맞아?”

언젠가 이런 시간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퇴근하기 전 인사과 직원이 최신 업데이트해준 정보들을 쭉 나열했다.

“충북에 있는 태평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건 맞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평대학교? 그런 데가 있었나?”

고 과장이 당황하며 노 대리와 이은성 사원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 둘이라고 알 리가 없었다.


오 대리가 전국의 대학을 뒤지고 뒤져 최근에 개설됐고 아직 졸업생이 얼마 없는 심리학과를 찾아 소개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졸업증명서를 떼지 않는 이상 걸릴 리가 없다면서 자신하던 그 모습을 보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네. 규모는 작지만 나름 평가가 좋은 학교입니다. 취업률도 좋구요.”


“그런데 왜 상사에 지원했나? 심리학과면 다른 회사를 지원할법한데?”
“뻔해서요.”
“뻔하다고?”
“심리학을 전공하면 보통 아동심리나 입시쪽, 또는 트라우마가 많은 직종의 심리상담 쪽으로 진로를 정하거나
부전공을 공부해 다른 쪽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구요. 그런데
마침 현진물산 입사 공고를 보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나 인사과 직원이 알려준 내용이다.

“오호~ 그래서?”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라서 그저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면접에서 잘 봐주셨습니다.”
“그래? 면접에서 잘 봐줬어? 그랬구만.”

고 과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영훈은 그가 내심 면접을 본 그 인간들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영어 공부 필수인데 잘 따라잡을 수 있겠어?”

고 과장은 미련을 못 버리는지 다시 질문한다.


혹시 자신의 생각과 다르니 퇴사를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해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자는 시간 줄이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크흠. 그래. 노력이 중요하지. 무역실무도 공부해야 할거야. 회사에서 하는 신입사원 대상 교육 잘 배워둬. 노
대리랑 OJT(직장 내 교육훈련) 할 때도 집중해서 잘 하고.”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여기 노 대리한테 물어보고, 노 대리 없으면 여기 이은성 사원한테 질문해. 모르면 질문해야
해. 괜히 혼자서 처리하려다가 일 만들지 말고.”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해보자.”
“네, 잘 해봐요.”

이은성 사원은 영훈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때문인지 조금 난감해하는 눈빛이다.


이후 회사생활에 필요한 팁 따위를 전수하는 시간을 갖다가 자연스럽게 회사 업무 문제가 나왔다.
고 과장은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회사에서 자원개발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거 알지? 좋은 기회야. 부장님이 밀어주는 사업이라고. 이거 잘되면


너나 나나 이은성까지도 앞길에 아스팔트 깔아주는 사업이야. 집중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인도네시아 언제 갈거야? 나르힘푸난 맞나? 그 인간 지금 눈이 벌게서 돈 만들러 다니는데 다른 데서 채가기
전에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이거 놓치면 팜 농장 못 구한다고.”
“네. 출장 품의 올리겠습니다.”

노 대리는 입을 달싹이며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이내 다물고 술을 들이켰다.


고 과장은 그런 노 대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인상을 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일어난다. 우리애 학교에서 상받았다고 케잌 사서 들어오라는데 술이나 먹고


있을 순 없지. 처녀 총각들은 더 마시고 일어나.”
“아닙니다.”
“됐어. 더 마셔. 여기 법인카드 있으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일어서지 마. 앉아.”

고일주 과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쿨하게 휘적휘적 가게를 나갔다.


노 대리는 고 과장이 떠나는걸 보고 연희와 영훈에게 말했다.

“원래 저러신 분이니까 이해해. 회식 자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분이 아니셔서.”


“그렇군요.”
“우리 과장님이 겉으로는 욱하고 말이 심할때도 있는데 그래도 정이 많으신 분이시거든. 좋으신 분이야.”
“네. 그런데 인도네이아 팜농장은 뭐하는 사업입니까?”

영훈이 묻자 노 대리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기름야자 열매를 쪄서 압축시키면 나오는 기름을 팜 오일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식량자원산업이라고 할 수
있어. 인도네시아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들이 팜 농장을 운영하고
있기도 해. 그런데 2018 년도부터 인도네시아에서 환경문제 때문에 새로운 팜농장 개발을 3 년간 금지시켰거든.
그래서 새로운 농장 설립이 불가능한데 거기 엄청 큰 농장을 운영하는 현지기업주 하나가 큰 빚을 졌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 농장을 사려고 하는 건가요?”
“그런거지.”
“그럼 런던의 사업은 뭡니까?”
“어? 그거... 별거 아니야.”

노 대리는 말을 얼버무리며 입을 닫아버렸다.


이은성은 그저 노 대리의 술잔에 술을 따라줄뿐이었지만 씁쓸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뜨뜨미지근한 회식을 끝내고 큰길로 나가는데 노 대리가 먼저 손을 흔든다.

“난 지하철로 간다. 내일 보자고. 최영훈이라고 했지? 모르는 거 많다고 기죽지 말고,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노 대리가 악수를 건넨다.


웬 떡이냐 싶어 얼른 악수를 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들어가세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노 대리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이때 이은성 사원이 영훈에게 말했다.

“영훈 씨는 집이 어디세요?”
“저는 동대문 쪽입니다.”
“그럼 지하철?”
“네.”
“근데 왜 노 대리님이랑 같이 안 갔어요?”
“같이 타고 가면 왠지 어색할 것 같아서요.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하하, 그렇긴 하죠. 그럼 이제...?”

어서 가라는 눈빛.
어차피 가려는 마음이었는데 왠지 저 눈빛을 보니 연희에게 한 잔 더를 권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하고 싶지 않아 인사를 하고 지하철로 가려는데 연희가 이은성에게 물었다.

“선배님은 어디로 가세요?”


“네? 아, 저는...”

이은성이 버벅이자 연희가 재빨리 선수친다.

“전 늦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택시를 잡는다.


역시나 자신의 눈에 안 맞는 사람이면 대화조차 잘 이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불쌍한 이은성을 뒤로 하고 지하철에 몸을 맡기는데 연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전화입니까?”


“누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겠어요? 내일 오전에 임원 면담 있으니까 알려주려구요.”
“임원 면담이요?”
“부서 발령 받으면 임원이랑 만나서 차 한잔 하면서 인사하는 거예요. 요식행사라 별 의미는 없는 건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그쵸?”

그렇다.
송 사장님이 지시한 내용이 있었으니.

“내일 만날 임원이 누구입니까?”


“영업본부장 차지열 상무요. 눈치가 보통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 영업 2 팀의 사람들(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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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업 2 팀의 사람들(4) >

“나 왔어요.”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들어오는 연희를 송은채 사장이 빤히 바라본다.

“왜?”
“입사기념 회식이었니?”
“응.”
“난 너 회식 안 가고 그냥 들어올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회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칫, 내가 그럼 보스가 회식 하자는데 첫날부터 싫다고 빼겠어?”
“너 그런 성격이잖아.”

송 사장의 말이 그녀의 아픈곳을 찔렀는지 자신의 방에 들어가려던 연희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송 사장이 와인과 함께 먹고 있던 과자와 치즈를 집어들어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내 성격이 그렇게 별로야?”


“그럼 좋은줄 알았니?”
“이 성격으로 결혼하면 이혼당하고 막 그럴까?”

송 사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농담으로도 할 말이 아닌 것이다.

“왜? 누가 너한테 이혼당할거라고 하니?”


“아니... 그런건 아니고...”
“설마 그 신입사원이 그래?”

연희는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미쳤어? 지가 뭐라고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


“그렇지? 말 나온김에 물어보자. 그 친구 어떻디? 진짜 사람을 좀 잘 보는 것 같아? 내일 임원 면담 있잖아.”
“아...”

연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송 사장의 눈치를 잠깐 봤다.


엄마의 감이라는 게 있는데 딸의 표정만 보고도 뭔가 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할리 없다.

“뭐 있니? 왜? 사기꾼 같아?”


“사기꾼은 아닌 것 같은데... 이번 오리엔테이션에 양준기도 참여했잖아.”
“그래, 준기.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정말 남자다워졌더라.”
“남자답긴 개뿔...”
“됐고, 그래서?”
“그 신입한테 양준기를 보여주면서 사람이 어떨꺼 같냐고 물어봤지. 그런데 그 신입이 한 번 봐서는 잘 모르겠대.
계속 봐야 한다고.”
“그렇겠지.”
“내가 또 성격 급한 걸로는 어디 안 빠지잖아. 그래서 일단 느낌만 봐달라고 졸랐어. 그러니까 그냥 참고만
하라면서 한참 지켜보더라고.”

연희는 나름대로 영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양념을 살짝 가미했다.

“결론만 말해. 그래서?”


“엄마도 성격 참 급해. 어쨌든 그렇게 지켜보다가 하는 말이 눈치가 빠르고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구분이 명확해
보인대.”
“어머. 정말?”

송 사장이라고 양준기의 성격이 어떤지 모를까.


지금껏 연희를 통해 들어온 준기의 성격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딱 들어맞는 표현에 송 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람이 정이 없어 보인다는거야. 화는 같이 맞으려고 하면서 복은 혼자 누릴 성격 같다나? 나 그 얘기


듣고 완전 소름 돋았잖아.”
“뭐니? 그 사람 정말 무슨 관상이나 사주라도 보는 거니?”

연희는 찔끔했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에이~ 그런거 다 가짜잖아.”


“그게 어떻게 다 가짜니? 예전에 신입사원 면접볼 때 관상가랑 같이 보던 기업도 있었어.”
“난 그런거 다 가짜라고 생각해. 어쩌다 운 좋아서 맞는거지.”
“오래된 학문은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이것아.”
“뭐 하여간 무슨 짓을 했든 준기는 기가 막히게 보더라고. 좀 놀라긴 했어.”
“그렇네. 그럼 내일 차지열 상무도 잘 볼 수 있을까?”

송 사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연희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물었다.

“차지열 상무는 믿지 못하는 거야?”


“네 아빠가 끝까지 신임하지 못했던 사람이거든. 그러니 나도 믿을 수 없지.”
“할아버지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는 어때?”

송 사장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아빠? 네가 웬일이니? 아빠 상태를 궁금해하고?”


“그냥... 궁금할 수도 있는 거지.”
“한번 가볼래?”
“그럴까?”

이번에는 송 사장이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줄 알았는데 병원에 가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거다.

“정말? 그럼 좋지. 언제 갈래? 내일 퇴근하고나서 갈래?”


“그래.”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희가 이해되지 않은 송 사장은 몇 번이고 다시 물었지만 연희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어쨌거나 송 사장은 요 근래들어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제발 내일 돼서 딸래미의 마음이 바뀌지만 않기를 기도하며 와인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자고로 회사생활의 첫 번째는 인사라고 배웠다.


신입사원답게 활기차고 당당한 목소리로 하는 인사는 팀에 활력을 주고 신입사원의 적극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나 뭐라나...
어쨌든 대기업인 현진물산의 당당한 신입사원이 된 영훈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웃으며 존재감을 내뿜었다.
고일주 과장도 아침부터 기운차게 인사하고 들어오는 신입이 밉지 않은지 웃으며 반겼다.

“이야~ 우리 신입 기운차네. 오전에 회의 있으니까 회의자료랑 간단히 마실 음료수 세팅 좀 해줘.”


“알겠습니다. 회의자료는 어디에...”
“노 대리가 어제 정리한 자료 자리에 두었을거야. ‘인도네시아 팜 오일 시세 동향’이라고 쓰여 있어. 있어?”

영훈은 노 대리의 책상을 살피다 해당 파일을 찾았다.

“네. 찾았습니다.”
“그래. 그거 5 부 복사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고일주 과장은 그러고 나서 거래처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음...”

노 대리의 책상에는 ‘인도네이사 팜 오일 시세 동향 보고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서류가 더 있었다.


바로 ‘Nodri Clare 의 국내시장 전략’라고 쓰여 있었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핸드백 따위를 만드는 해외 브랜드인 듯 싶었다.
온갖 영어와 전문용어가 혼재된 보고서였기에 영훈은 보면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질 못했다.
그런데 옆에서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보고 있어요?”
“아, 노 대리님이 작성하신 보고서예요. 오늘 오전에 회의 있으니까 이거 말고 이거 복사해서 회의실 세팅하라고
하셨어요. 고 과장님께서.”
“근데 왜 이거 말고 그거를 보고 있어요?”
“이게 노 대리님께서 준비하셨던 사업 같아서요.”

연희는 영훈을 잠시 바라보다가 회의자료를 들고 말했다.

“얼른 준비해야죠. 오늘 오전에 면담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바빠요. 빨리 움직여야 한단 말이에요.”


“그것 말고 오늘 정해진 스케줄이 있습니까?”
“오후에 교육 있죠. 영훈 씨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실무교육에다가 신입사원들끼리 스터디 하자는 말 나온거
아시죠? 아마 스터디를 빙자한 회식이겠지만 그래도 참여하는게 좋을 거예요. 아, 이거 복사만 하면 된다고
하셨나요?”
“간단히 마실 음료수도 세팅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가요. 어제 한 번 보고 다 못 외웠죠? 이번에 다시 보여줄 테니까 완전히 배워요.”
“누가 보면 연희 씨는 신입사원이 아닌 줄 알겠습니다.”
“가르쳐드리지 말까요?”
“아니 뭐 그건 아니구요. 갑시다.”

연희를 따라 복사실로 들어가 복사하는 법을 배우고 회의자료와 탕비실에 비치된 음료수를 가지고 작은 회의실에
깔아두었다.
그리고 나가려는데 연희가 슬쩍 물었다.

“노 대리님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요?”


“관심이 많은 게 아니라 왠지 노 대리님을 보고 있으면 직장인들의 애환을 직접 옆에서 보고 있는 느낌이라서요.
괜히 짠하고 그렇습니다.”
“뭐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건 아니구요?”

그녀가 왜 저렇게 눈을 빛내고 물어보는지 알아챘다.

“설마 노 대리님이 사주나 관상으로 보면 뭐 회사를 먹여 살릴 인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뭐... 자꾸 쳐다보길래...”
“하하, 사주도 안 봤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 관상으로는 어느 일에 적합하고 잠재된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아까 노 대리님이 준비하던 사업을 본 이유가 뭔데요?”
“그냥 궁금해서요. 보면서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는데 이상하게 호기심이 생겨요. 노 대리님은 왜 이걸
하려고 하는 걸까? 왜 고 과장님은 이걸 포기하라고 하실까? 도대체 이 사업은 뭘까? 뭐 이런 것들.”
“으음~ 꽤 생산적인 고민이군요.”

연희는 영훈에게 그런 면이 있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가 지금껏 몰랐던 세상이라서 그런지 더 관심이 갑니다.”


“어차피 고 과장님이 보류한 아이템인데 우리가 한번 건드려 볼까요?”
“우리라... 왠지 감동이 몰려오기 보단 걱정이 되는데요?”

연희는 의뭉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관상을 보셔서 그런가, 눈치 빠르시네. 이른바 이런 거죠. 업무 분담이랄까?”
“어떻게 분담한다는 겁니까?”
“당신과 내가 같이 일하면서 실적을 나눠 갖되 나와 우리 엄마가 원하는 정보를 꾸준히 제공하는 거죠.”
“내가 입사하면서 고려했던 건 사장님에게 정보를 주는 거였는데 제공해야 할 곳이 하나 더 늘었군요.”
“주는 김에 하나 더 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딱 자르는 영훈의 말에 연희가 미간을 좁혔다.

“너무 칼 대답 아닌가요?”
“일에 흥미가 생기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실적을 나눠 갖고 싶지 않습니다. 뭐, 그런데 고려는 해보죠.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으니까.”
“어째 안 한다는 말보다 더 성의없어 보이는데요?”

똑똑해서 그런지 연희의 눈치도 보통이 아니다.

“연희 씨?”
“네?”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들었을 때 생각할 시간을 주는 습관을 길러보도록 하세요. 너무 급하게 상대를
재촉하고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거. 그거 문제입니다. 내가 말했죠? 세상을 너무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면 나중에 결혼... 크흠, 아닙니다.”
“와... 나 진짜 황당한거 알아요?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다가 아니라고 하는거...”

연희가 막 따지려고 할때 문이 벌컥 열리며 고 과장이 들어왔다.

“연희 씨, 여기 있었구만.”

고 과장은 마치 죽었던 조상님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나 영훈이나 고 과장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연희가 누구의 딸인지 알아낸 게 분명했다.

< 영업 2 팀의 사람들(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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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운(大運)이 충돌하다(1) >

“네. 좋은 아침입니다.”
“흐흐, 그래. 좋은 아침이지. 아침에 출근하는데 뭐 불편한 건 없었어?”
“네, 없었습니다.”
“아침은 먹었고? 안 먹었으면 뭐 샌드위치라도 배달 시켜줄까? 요즘 배달 안 되는게 없어요. 샌드위치, 커피,
팥빙수 이런것들도 배달 된다니까. 세상 너무 좋아졌어.”
신입사원이 뭐 했다고 점심시간도 아니고 오전부터 샌드위치를 배달시켜주겠다는데 연희도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침 간단히 먹고 와서요.”


“그래? 배고프면 얘기해. 회의실 세팅은 여기 영훈이에게 맡기고 연희 씨는 앉아 있지 그래.”
“아닙니다. 회의 준비 다 끝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 하지마. 영훈이한테 다 맡기라고.”

이때 영훈이 나섰다.

“과장님, 방금 그 얘기는 잡스러운 허드렛일은 전부 제가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건가 해서요.”

고일주 과장은 뭐 이런 새끼가 있나 싶어 혼내려다가 연희를 보고는 멈칫했다.

“연희 씨는 나가 있을까? 이 친구랑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연희는 영훈의 무표정한 표정을 보아하니 좋게좋게 넘어가기는 글렀음을 알았다.

“과장님, 저랑 먼저 이야기 좀...”


“어?”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지금요.”
“크흠... 그래? 너 나가봐.”

영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을 나가니 연희가 회의실 문을 닫고 말했다.

“혹시 제 어머니 이야기 듣고 저한테 잘 해주시는 건가요?”


“어? 하하하, 아유, 미리 말하지 그랬어. 앞으로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아니요. 다른 대우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사장님도 그걸 원치 않으니까 말씀 안 하셨던거구요.”
“그런가?”
“네. 그러니까 아까 같은 상황은 저를 더욱 난처하게 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큼큼. 그래. 알겠어.”
“그리고 최영훈 사원, 사장님이 직접 뽑으신 거 아시죠?”
“어? 어... 듣긴 했었지.”
“업무적으로만 평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업무 외적인 일로 잡음이 생기는 거 사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지
않거든요.”

이 정도까지만 말해도 고일주 과장은 알아들었다.


사장이 직접 뽑은 인재를 업무 외적인 사사로운 일로 문제를 만들면 고 과장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할 걸
생각하라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고 과장은 그렇게 스마트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저 신입한테 쩔쩔매야 한다는 말인가?”

연희는 난감함을 느꼈다.


고 과장의 성격을 봤을 때 지금은 곱게 넘어간다고 해도 저 꽉막힌 영훈과 언젠가는 또 부딪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과장님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인데. 못
들은걸로 해주세요.”

연희가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고 과장이 당황한다.


로얄패밀리를 대하는 직장인의 제 1 원칙은 절대 로얄패밀리가 사과하는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
콧대가 롯데타워보다 높은 로얄패밀리가 사과하는 순간 그 상황을 만든 대상은 평생 로얄패밀리의 미움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느 기업을 떠나 불문율과도 같은 것.
당연히 고 과장은 당황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야. 주제넘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 다만 그냥 내 생각이


이렇다는 거였어.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아, 그리고 최영훈이는 나도 잘 주시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 굉장히 냉철한 사람이야. 업무와 업무 외적인건 칼같이 가려내거든.”
“감사합니다.”

연희는 좋게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고 과장이 인상을 쓸때는 고작 이런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게 짜증났지만 번뜩이며 떠오른
영훈의 말에 생각을 달리했다.
성격 바꾸지 못하면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 요즘 그녀의 신경을 계속 쓰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의실을 나온 고 과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영훈을 못 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내 대범한 척
영훈에게 말했다.

“아까는 좀 오해가 있었지? 그런 뜻은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쓰지 마.”


“알겠습니다.”
“우리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일에만 집중하자고. 응?”
“네.”

그런데 고 과장이 영훈의 어깨를 두드려주다가 갑자기 손을 쓰윽 잡으며 물었다.

“혹시 사장님하고 깊은 관계인가?”


“저 말입니까?”
“응, 그래. 편히 얘기해.”

영훈은 사실대로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인사과 오 대리의 말이 떠올랐다.


너무 진실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

“실은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사장님이 아주 모르는 분은 아니십니다.”


“아, 정말?”

고 과장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떠진다.

“인사과도 모르는 비밀이라... 과장님만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뭐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데?”
“사장님과 가까운 분이 저한테 큰 도움을 받으셔서...”
“아~ 은인처럼 생각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이건 오직 연희 씨 정도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둘이 같은 부서에 왔구만. 그래 그래. 이제야 알겠어. 하여튼 뭐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고 과장은 자리에서 돌아온 후 입을 씰룩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희가 왜 그렇게 영훈을 비호했는지 알았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영훈은 내심 웃음을 참기 어려웠지만 꾹 참고 아까 손을 잡을때의 그 느낌을 기억했다.
그리고 어차피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고 과장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

30 여분 후 바로 아침회의.
노트북으로 회의록 작성은 연희가 하고 노 대리는 회의자료를 가지고 브리핑했다.

“현재 나르힘푸난이 소유한 농장의 면적인 만 5 천 헥타르로 국내 자원개발업체가 소유한 농장 규모 대비 60%


수준입니다. 나르힘푸난이 원하는 가격대는 약 500 억원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시세는 어때?”
“톤당 2,137 링킷트(말레이시아 화폐단위로 한화 약 61 만 원)로 올해 내내 가격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세계자연기금인 WWF(World Wildlife Fund)도 2020 년까지 세계 팜유 수요가 현재보다
약 2 배 정도 증가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판매처는?”
“바이오 오일에 대한 수요는 계속 상승중입니다. 자원팀에서 확보한 루트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분은 어느 정도나 가져올 수 있어?”
“90%까지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주재원 나가 있지?”
“네.”
“통역 섭외해서 바로 출발해. 결과 가지고 와. 알겠어?”

고일주 과장은 눈썹을 꾹꾹 눌렀다.


이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누가 알고 있냐?”
“아직 조용합니다만 삼강물산에서 눈독을 들인다는 말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주재원이랑
통화하면서 체크하겠습니다.”
“은성이는 노 대리 옆에서 서포트하고 연희랑 영훈이는 노 대리가 바쁘니까 OJT 는 힘들거든? 그러니까 신입사원
대상 실무교육에 집중하면서 노 대리 오면 은성이랑 같이 서포트할 준비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를 끝내려고 할 때 연희가 입을 열었다.

“과장님, 노 대리님께서 출장갔다 오실 때까지 영업 2 팀에서 드랍한 아이템을 살피면서 공부해도 될까요?”
“좋지. 연희 씨가 봐서 괜찮다 싶으면 디벨롭 해봐도 괜찮겠고 말이야. 기대가 돼.”

고 과장은 연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회의실을 나갔다.


연희는 고 과장이 격려할 때 순간 움찔하기도 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영훈과 회의실을 정리했다.
회의실에서 빈 음료수 병과 자료를 들고 나오니 고 과장이 말했다.

“본부장님께서 부르시니까 가봐. 신입직원 면담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난 인천 출장갔다가 5 시는 돼야


들어올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은성이 생일이니까 센스있게 팀에서 선물 뭘 할지 준비해봐. 그리고 지금까지는 은성이가
이렇게 팀원들 경조사 챙겼으니까 앞으로 자네가 챙기도록 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고 과장은 그 정도 일 시키는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듯 눈을 찡긋 거린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팀원들 각종 기념일이랑 연락처는 은성이 책상에 가면 있으니까 그거 보고 확인하면 돼.”
“알겠습니다.”

영훈은 이은성 사원의 자리로 가서 슬쩍 팀원들 전원의 생일을 확인하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래도 계산을 잘못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계산을 하곤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된통 걸려버렸다.
하필 걸려도 이런 곳에 걸릴 줄이야...
영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영훈을 기다리고 있던 연희는 영훈 뒤에 따라 오는 사람이 없는지 슬쩍 살피곤 아주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뭡니까?”
“뭐겠어요?”

영훈이 쪽지를 펴보니 1963 년 6 월 7 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차지열 상무님?”

영훈이 주변을 살피며 물어보니 연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생일을 모르니 관상만 가지고 판단해야 해서 조금 난감하던 차였는데 연희의 이런 센스는 나쁘지 않았다.

“고맙군요.”
“그런데 아까 고 과장님이 뭐라고 하시던데.”
“별거 아닙니다.”
“비밀 참 많으시네요.”

연희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릴 때 영훈이 주변에 누가 오는지 살펴보곤 물었다.

“저기...”
“네?”
“혹시 부서 옮기는 거 가능합니까?”
“왜요?”
“우리 부서 망할 것 같아서요.”

연희는 너무 놀라 목소리를 쥐어짜듯 죽이면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 있어요?”


“어...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영훈은 갑자기 딴청을 피웠지만 연희는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대운(大運)이 충돌하다(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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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운(大運)이 충돌하다(2) >

도착한 차지열 상무 방 앞에는 이윤지와 몇몇 얼굴만 아는 신입사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저씨!”

윤지가 반가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영훈도 반가워 손을 흔드는데 차지열 상무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오셨으니까 들어가실까요? 오신 순서대로 안쪽으로 들어가셔서 앉으시면 됩니다.”


“네.”

신입사원들이 하나, 둘 들어갔다.


연희와 영훈도 들어가니 머리를 깔끔하게 7:3 가르마로 타고 회색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네. 앉아, 앉아.”

신입사원들과 한명씩 악수를 나누고는 주르르 앉자 차지열 상무가 흐믓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사원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연희와 영훈을 볼 때는 아주 잠깐 눈꼬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무슨 생각일까?
관상으로 보면 차지열 상무의 상은 눈이 가늘고 길어 지혜가 엿보였고 하관이 발달했으며 턱이 두툼해 말년에
고생없이 장수할 상이었다.
다만 하관이 너무 발달해서 욕심이 과하달까?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건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툭 튀어나온 사각형의 뾰족한 턱에서 보인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인재들은 다른 때보다 더 기대가 크네. 신입 오리엔테이션 때 느꼈겠지만 우리 현진물산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회사로, 그대들이 충분히 꿈을 펼칠만한 회사가 될 거야. 재작년에 인수한 몽골의 구리광산이나 호주의
석탄 광산은 회사에 큰 이익을 내주는건 물론이고 국가에 큰 보탬이 되고 있어. 이런 사업을 그대들의 손으로
직접 일구어 낸다고 생각해 보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나?”
“맞습니다.”
“그래. 그게 상사인이지.”

이후 차지열 상무는 자신이 회사에 입사해서 이뤄냈던 여러 가지 사업을들 열거하며 자기 자랑(?)을 신나게 1
시간 가량 했다.
허리를 꽂꽂히 펴고 듣고 있던 신입사원들도 점차 허리가 굽어갈 때쯤에 상무는 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끝냈고 그
질식하듯 잠이 쏟아지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으후~ 너무 지루해. 졸려서 혼났어요.”


이윤지는 팔을 축 늘어뜨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졸려 혼났어요. 우리 식사하러 갈건데 팀이랑 같이 먹어야 해요?”


“어? 그런 얘기 없으니까 동기랑 먹었다고 하면 괜찮을 거예요. 아직 우리팀 너무 어려워서 불편해요. 같이
먹어요.”
“그래요, 그러면...”

영훈이 슬쩍 연희의 눈치를 보았는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셋이 회사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난 후 회사로 복귀하는데 영훈이 근처
커피숍을 보고는 말했다.

“전 커피 한잔 사서 들어갈게요.”
“다 같이 먹어요.”

연희가 그렇게 말하자 윤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영훈은 혼자 따로 마시고 싶었지만 따라온다는데 거부하기 그래서 승낙했다.

“전 여기서 마시고 가겠습니다.”


“회사에 안 들어가시구요?”
“점심시간에는 여기서 좀 여유를 가져보려구요.”

영훈은 회사에 다니면 꼭 해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는 살짝 풀고 사원증을 내놓은 채로 커피숍에 앉아 알 수 없는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회사원.
이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멋있는 장면인가?

“그럼 쉬다 와요. 난 먼저 들어갈게요.”


“저도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요.”

두 미녀가 들어간다는 말에 서운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웠다.

“먼저 들어가세요.”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니는 학생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이렇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부러움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훈은 즐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영업 2 팀의 팀원들을 떠올렸다.
사실 영훈은 어떻게 하면 이 회사 생활을 오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을 잘 보는 것으로 사장에게 어필한다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 알려주고 나면 자신의
쓸모가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게 마음에 안 들어 회사를 나가면 어떻게 될까?
보험이나 부동산 영업을 하면 전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만나는 고객마다 설득하고 계약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니 결국 어딜가나 똑같을 거다.
그렇다면 결국 일회용 인간이 아닌 지속 가능한 능력있는 사원이 돼야 한다는 것인데 사주나 관상 보는 것 말고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이 그럴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밤잠을 줄여가며 영어를 비롯한 무역실무 공부에 매진하고 있지만 그렇게 공부를 한들 동기들과의 차이는
좁힐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묻혀 살아가려하는 자신에게 힘껏 기지개를 피고 살아가라는 듯 말이다.

“무역관련 법규로는 3 대 무역 관련 기본법이라고 하는 대외무역법, 외환거래법, 관세법이 있습니다. 그 외에


무역거래에 관련하는 법규로 ‘기타 무역관련 법규’와 개별품목별로 수출입거래를 제한하는 50 여 개의 ‘개별
법’이 있죠. 사실 대외무역법이나 외환거래법, 관세법은 거래를 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확인하면 되지만
이 ‘개별법’ 만큼은 무역거래를 시작하기 전부터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유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거래 실무 교육은 영훈에게 있어서 정말 황금같은 시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영훈은 그 시간을 통해 이 회사에서 쓰는 언어를 조금씩 이해해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육에 참석할지 안 할지는 신입사원의 재량에 맡겼기에 연희를 비롯해서 신입사원 중 1/4 정도는
참여하지 않았다.

“완전 어렵죠? 저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렵긴 하네요.”

이윤지가 교육에 참석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나마 윤지가 옆에서 같이 교육을 듣고 있기에 모르는 게 있으면 대답도 해주고 쉬는 시간에는 잡담도 해가며
교육시간을 너무 힘들게만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교육이 끝나갈 무렵 교육장에 연희가 찾아왔다.

“교육 잘 받고 있어요?”
“네. 잘 배우고 있습니다.”

옆에서 윤지가 거든다.

“아저씨는 센스가 있는 거 같아요. 진짜 나중에 제가 가르쳐 달라고 하는거 아닌지 몰라.”


“하하, 설마 그러겠어요?”

연희는 얼마 전 영훈이 얘기한 ‘칭찬을 생활화 하는 윤지’와 자신이 다르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 연희 씨, 우리 오늘 동기들끼리 치맥 한 잔 하기로 했는데 같이 할래요?”

인터넷에서 마치 신앙처럼 떠받들여지는 치킨과 맥주.


동기들과의 치맥으로 그날의 피로를 푸는 것 또한 영훈의 로망 중 하나였다.

“미안해요. 난 저녁에 약속이 있거든요.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할래요?”

연희의 표정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짐작했기에 영훈은 윤지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고 말하고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녀를 따라 올라간 건물 옥상에는 몇몇 무리가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차지열 상무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네. 맞아요. 아니, 그 전에 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우리 팀이 망할거라는 말.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그건 내가 얘기하고 싶을 때 말해주겠습니다. 그 얘긴 이 자리에서 거론하지 맙시다.”

언제나 그랬지만 영훈이 단호하게 거절할 땐 연희는 더는 채근하지 못했다.


영훈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존재감은 감히 거역하기 힘든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영훈은 손을 저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단 말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봅시다. 왜 궁금해하는 거예요? 임원이라고는 하지만 회사
직원이잖아요.”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팔짱을 꼈다.

“짐작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알 것 같은데.”

그녀 말대로 짐작을 못하는건 아니다.


소위 말하는 직장내 권력투쟁 때문이 아닐까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짐작은 하고 있지만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럽니다.”


“내 생각이요?”
“네.”
“왜 내 생각이 궁금해요?”
“그냥 궁금합니다. 속칭 남들이 말하는 금수저 중에 금수저로 태어난 당신 아닙니까? 그런 당신이 가진 생각,
회사의 임원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연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영훈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에게 아들은 한 명이에요.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우리 아빠. 할아버지는 본인이 일으킨 현진그룹이


능력 없는 사람이 경영하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아빠가 쓰러졌고 엄마가 아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엄마를 믿지 않고 있고 이 회사의 중역들 상당수는 할아버지와 같이 성장한
사람들이에요.”
“설마 그대의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송은채 사장님을 밀어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음...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송은채 사장님이 경영을 잘못해서 회사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직원들의 생계도 위태로울테고.”

당연히 화를 낼거라고 생각했다.


오만한 그녀의 성격상 감히 자신의 어머니를 의심하는 말을 그냥 넘길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움찔하던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아직... 엄마가 능력을 발휘할 시간도 없었어요.”

놀랄만한 변화다.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고작 부족한 점을 지적 받았다고 쉽게 바뀔수 있는 것이던가?
게다가 질문을 한 인물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임을 감안하면 진정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뭘 말이죠?”
“그대 어머니, 송은채 사장님이 형편없는 경영능력으로 회사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난 사장님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겁니다.”
“와...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우리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 당신을 해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요?”

연희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다.


“난 이 회사가 좋아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라는 배경도 마음에 들고 이런 사업에 내가 한 손 거들 수
있다는 것 역시 무척 기뻐요. 하지만 여기에 남고 싶다고 회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을 도와줄 생각은
없습니다. 아쉽긴 해도 포기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거든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영훈을 보며 연희는 척추에 서늘한 기운이 짜르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입사원이 회사를 관두겠다는데 이상하게 협박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좋습니다. 훌륭하군요.”

씨익 웃는 영훈에게 연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제 차지열 상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세요.”

영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타고난 사주에 맞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사주로 보면 그는 회사를 이끄는 사장으로 타고난 사람입니다.
남의 밑에서 평생 2 인자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에요.”

< 대운(大運)이 충돌하다(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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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운(大運)이 충돌하다(3) >

“그럴수가 있나요? 타고난 사주대로 사는거 아니예요?”

영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타고난 사주는 그저 길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개의 길을 보여주죠. 만약 사주만
보여주고 이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으면 난 백퍼센트 정확하게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맞출 수 없을 겁니다.”
“그럼 현재 직업과 직급이 해석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가 완전히 똑같이 살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주는 같은데 왜 그럴까요?”
“성격이 달라서?”
“성격만 다르겠습니까? 생긴것도 조금 다르죠. 결정적으로 자라오면서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취향이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지면 친구도 달라지겠죠. 취향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집니다. 만나는 여자가 달라지고
배우자가 달라지며 자식들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삶을 살 수 없죠.”
“그럼 사주를 왜 봐요?”
“말했듯이 여러개의 길 중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러다 현재 그 사람의 직업이나 배우자의
사주를 알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주변을 한번 살피곤 물었다.

“그럼 차지열 상무의 사주는 뭔가요?”


“그는 본래 사업가의 사주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사업가의 사주는 아니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본래 사업가의 사주를 타고 나면 배짱이 있고 대범하며 큰 돈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그냥
사업가가 아니라 성공적인 사업가의 사주라면 예지력이나 감각이 발달합니다.”
“그런데요?”
“차지열 상무는 큰 돈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고 예지력이나 감각이 발달한 것까지는 좋은데 자의식과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게 타고 났습니다. 아마 자신을 압도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라면 그 자존심을 숙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반발심이 일겁니다. 만약 송은채 사장님이 그 스스로 숙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회사에 출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스트레스 받고 있을 게
분명하겠네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을까?
연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정도라면 그냥 사업을 할 것이지...”


“바로 그게 문제예요. 이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고 실천력이 떨어지면서 욕심은 과다하거든요. 그래서
자기돈으로는 뭘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업을 하기만 하면 분명히 잘 할 사람인데 실천을 할 배짱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아마 누군가 그의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쯤 꽤나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을
텐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었던 거겠죠. 대운이 오는 시기를 놓친 겁니다. 전형적으로 좋은 사주를 타고 났지만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해 타고난 운을 다 펴지 못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그럼 나도 타고난 재복을 다 누릴 수 없을 수도 있나요?”

영훈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죠. 배우자를 누구로 맞을 지에 따라서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잘 알겠어요.”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이어 말했다.

“고마워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무섭습니까?”
“네?”
“운명을 무서워하는 것 같거든요.”
“내가요?”
“음... 처음에는 당신이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건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두려움이 생긴다면 다르겠죠.”
“...”

연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두려워하는 거 나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거든요. 좋은 모습입니다.”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연희를 지나쳐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연희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얘는 왜 이렇게 안 내려와.”

송은채 사장은 작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약속한 시간에서 10 분이 넘었는데도 아직 주차장으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비즈니스에서 시간약속의 중요성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법이라고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빨리 나타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어쩌나 하는 조급함 뿐이었다.

“어? 아가씹니다.”

수행기사의 말에 송 사장이 얼른 창밖을 바라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차량을 향해 다가오는 연희를 보고서야 송 사장은 마음을 놓았다.

“미안, 늦었지.”

송 사장은 옆자리에 타는 연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혹시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는데 연희의 얼굴은 평소와 전혀 다를바 없었다.

“괜찮아. 얼마 안 기다렸어. 그런데 다음부터는 늦으면 늦는다고 미리 연락좀 주지 그러니?”


“미안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거든.”
“응? 무슨 이야기?”
“어... 조금 있다가 이야기할게.”

연희가 얼버무리자 송 사장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무리 수행기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백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 이외에는
없다는 게 송 사장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연희와 송 사장이 향한 곳은 신촌세브란스병원 VIP 병동.
송 사장은 남편인 임지훈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 계속 연희를 힐끔거렸다.
역시나 말이 없어진 연희는 바짝 긴장해서 입술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지만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고 있어 송 사장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연희는 잠시 멈칫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짝 마른 몸으로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임지훈 사장은 누워 있다가 들어오는 연희를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보, 우리 왔어요. 인사해.”


“나 왔어요.”

연희는 송 사장의 생각보다 차분하게 말하며 임지훈 사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네가 웬일이냐?”

힘없고 메마른 목소리에 연희는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꼈다.


“언제까지 안 보고 살 수는 없잖아요.”
“난 네가 안보고 살려는 줄 알았다.”
“생각을 바꿨어요.”

연희는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도 내가 영수 대신 죽었으면 해요?”

송은채 사장은 흠칫 놀랐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거짓말인 거 알아요. 뭐,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니까.”
“...”
“종종 들를게요.”
“보기 싫은 아빠 뭐하러 보러 와?”
“영정사진 보면서 화내면 무슨 소용이에요? 원망 들어줄 사람 있을 때 원망하려구요. VIP 병실이라 좋네요.
갈게요. 나 갈게, 엄마. 윤 기사님 부르지마. 택시 탈거야.”

연희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는데 송은채 사장이 불렀다.

“얘, 온 김에 그 얘기나 하고 가. 그 신입사원 있잖니.”


“아... 차 상무 이야기?”
“응. 뭐라고 하든?”
“그냥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 같대. 그 정도야, 엄마. 오늘 처음 만났잖아. 고작 처음 만난 사람을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 있겠어?”
“준기도 처음 만나서 다 알아봤잖아.”
“사람마다 다른가 봐. 나 갈게.”

연희는 송 사장이 더는 말을 꺼내지 않게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왔다.


차지열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말을 꺼내봤자 오히려 더 난감한 상황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신기하고 영험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작 신입사원일 뿐이다.
꼴랑 한번 본 사람이 차 상무에 대해 언젠가 뒤통수를 때릴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엄마가 믿을 수 있을까?
믿는게 이상한 것이며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디서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 맞을거다.
가정집 주부라면 몰라도 한 기업의 수장이라면 이런 근거 없고 불확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렇다고 좋은 이야기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호기심에 입사를 시키긴 했지만 아마 엄마도 이런 수준의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야기를 들은 자신이 중간에서 커트 하는게 맞다고 연희는 판단했다.
지금쯤 안에서 엄마와 아빠가 그 신입사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게 분명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괜히 삼촌이 엄마한테 바람을 넣어서는...”

연희는 투덜거리면서도 홀가분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집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그녀는 택시를 타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이 우울한 기분으로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 동기들끼리 치맥 한잔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자리 끼려고 했는데 택시를 타고 을지로에 도착하니 이미
영훈은 치맥 한잔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연희는 궁금함을 못 참고 바로 회사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 빨리 빠져나갔어요? 술자리 재미 없었어요?”


“아니요. 그것도 좋은데 아무래도 내가 부족한 게 많다 보니까 한가하게 술이나 마실 수가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뭐 좀 보는 겁니다.”

영훈이 보는 건 노 대리가 하다가 고 과장이 보류시킨 ‘Nodri Clare 의 국내시장 전략’이라는 보고서였다.
이미 고 과장이 연희에게 보고 디벨롭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지시까지 내린 아이템이었다.

“오오~ 열정이 대단한데요? 저도 같이 할까요?”


“그러면 좋죠. 혼자 보다는 둘이 나으니까.”

연희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전에 이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왜 관심이 생긴 거예요?”


“지금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요?”
“이 보고서의 내용은 잘 몰라도 노 대리님에게 대운(大運)이 들어 왔다는 건 알거든요. 그러니 노 대리님이 만진
이게 꽤 좋은 아이템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연희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어차피 팀에서 팜 오일건 때문에 정신없어서 이거 손대 봤자예요. 아마 내년은 지나야 손댈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과장님이 디벨롭 하라는 거 그냥 하는 말이죠. 큰 기대 걸지 마요.”
“연희 씨.”
“네?”
“회사 임원진에게 인정받고 싶으시죠?”

연희의 눈동자가 떨린다.


사장 딸이라고 인정받고 싶지 않을리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을 수 있다.
아들이 아닌 딸이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녀의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심은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요?”
“그럼 이거 잡으세요.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형석 대리를 잡으시면 됩니다.”
“그럼 당신은요?”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렵니다.”
“일은 우리가 하고 당신은 배우면서 실적 올리고?”
“아직 한창 배워야 할 시기 아닙니까. 서로 윈윈이죠.”

< 대운(大運)이 충돌하다(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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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운(大運)이 충돌하다(4) >

신입사원이 뭘 안다고 사업을 주도하겠는가?


다만 성공적인 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한 축을 담당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업무능력
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고 과장님은요?”
“과장님과는 조금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고일주 과장님, 아마 올해 안에 회사를 관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연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그런지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게 진짜냐?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마라 따위의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영훈의 말이 사실일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연희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주에 그런게 나와 있어요?”


“기본적으로 고...”

영훈은 말하다 말고 잠시 주변을 훑었다.


사람이 없는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며 말했다.

“고 과장님은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입니다. 한마디로 불과 같죠. 말도 많이 하고 쉽게 흥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열정적이죠. 아마 회사에서 한번 일이 맡겨지면 상당히 열정적으로 임했을 겁니다.”
“그럼 회사 입장에서는 좋은 인재네요.”
“꼭 그렇지만도 않은것이, 대신에 산만하고 집중력이 약하기도 합니다. 또 일을 진행하다가 막히면 쉽게
포기하는 경향도 있죠.”
“내 참... 인사평가 자료를 뒤질 수도 없고... 어쨌든 전에 양준기 얘기할 때도 느꼈지만 참 사주에 많은 게
나와 있네요.”
“그런데 이런 건 사실 중요한게 아닙니다.”
“네? 사람의 성격을 아는 게 중요하지 않다구요?”
“그다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주에 있어서 사람의 성격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과는 동떨어져
있죠.”
“그럼 뭐가 핵심인가요?”
“인생. 운명입니다. 정확히는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 어떤 고난을 겪을 것인가, 어떤 행운을 얻을 것인가.
결국 중요한 건 이거라는 겁니다. 착하다고 잘 사나요? 똑똑하면 돈을 많이 벌던가요? 성격이 더럽다고 미인을
못 만날까요? 베풀고 산다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던가요? 아닙니다. 인생이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죠.”

연희는 그제야 영훈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고 과장님이 지금 회사를 떠날 운명이라는 건가요?”


“사주를 보면 당사자의 나이에 따라 어떤 운(運)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고 과장님의 운이
안타깝게도 그냥 떠날 운명이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큰 실수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고 해직을 당할 운에
해당합니다.”
“어...”

연희는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누가 성격이 어떻다더라’ 정도만 알려줬는데 당장 부서 상사가 얼마 안 있어 크게 실수하다
해직을 당할 거라고 하니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양준기와 자신의 성격을 딱 맞춰서 정말 신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의 성격을 아는 것과
눈앞의 미래를 예측하는 건 문제가 달랐다.

“그럼 저는요?”

연희의 눈빛은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단순히 이러저러해서 앞으로 열심히 살라는게 아니라 당장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있다고 하니 묻지 않을 수
없었던거다.
그런데 영훈은 왜 이렇게 흥분하냐는 듯 받아쳤다.

“토정비결 본 적 없습니까?”
“토정비결이요? 매년 새해에 보는 거?”
“네.”
“난 아니지만 엄마는 볼걸요?”
“내가 방금 해준 얘기가 그거랑 비슷합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엄마가 매년 보기는 하는데 그렇게 잘 맞지 않던데요? 당신이 말한 고 과장님의 미래도 잘 안 맞을 수 있는
건가요?”

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세상에 절대적인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얼굴은 전혀 그래보이지 않거든요?”

연희의 말처럼 영훈이 보고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자못 진지하고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확신하고 있나요?”

영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의견을 의심한다면 왜 차 상무님에 대해 물었습니까? 차 상무님이 사업가가 될 사주라 언젠가 뒤통수를 칠


거라는 건 믿을만하고, 고 과장님이 크게 실수하고 회사를 나갈 거라는 건 믿기 어려운 건가요?”
“그건 그런데...”
“차 상무님에 관한 일은 당장 일어날지 아닐지 모르지만 고 과장님은 곧 벌어질 일이라고 말해서요?”
“네. 이건 좀 선을 넘은 거라구요. 맞히면 이게 신이지 뭐야.”

영훈은 연희의 투덜거림에 신경쓰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이며 홀로 계산을 하다 말했다.

“음... 노형석 대리님이 고 과장님과 상극입니다. 남녀 사이에만 궁합이 있는게 아니에요.”


“노 대리님은 어떤데요?”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며 가까이 다가온 연희를 슬쩍 밀어냈다.

“좀 떨어지세요. 부담스럽습니다.”
연희는 순간 당황해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니 목소리가 작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가간 거잖아요. 되게 웃긴다. 내, 내가 무슨 뭐 좋아서 간 줄


알아요?”
“목소리 큽니다. 광고하실 겁니까? 우리 팀 망할 거라고?”
“...”

연희는 벌게진 얼굴로 입을 삐죽댔다.

“다시 돌아와서 노 대리님은 성향이 과장님이랑은...”


“반대라는 건가요?”
“반대는 아니고 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성격 참 급하네요,”

연희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삭히며 말했다.

“네. 입 다물고 있을게요. 말씀하세요.”


“크흠... 노 대리님은 직관이나 감각이 발달한 사람입니다. 이런 명품 브랜드를 왜 아이템으로 선택했을까
생각해봤는데 사주를 보니 노 대리님은 애초에 회사가 이쪽이 아니라 디자인이나 고급 브랜드 회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인거죠.”
“아하~”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이, 본능적인 직관이 발달한 사람이면 성격이 예민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게 보통인데 노
대리님은 사람을 설득하지 못할 때는 싸움을 피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굳이 관철시키려 하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따라가죠. 잘 될 때는 이 성격 때문에 고 과장님이랑 잘 맞는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노 대리님한테 대운(大運)이
왔거든요.”
“대운이요?”
“대운이라고 ‘커다란 운’이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대운이란 운명의 전환점을 의미하죠. 여기서 고 과장님은
안 좋은 쪽으로, 노 대리님은 좋은 쪽으로. 서로의 대운이 부딪혔으니 어느 한 쪽은 대운이 죽습니다.”
“그럼 고 과장님이 노 대리님의 대운을 죽인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차라리 노 대리님의 성격이 화끈하게 들이받는 성격이면 노 대리님이라도 살텐데 그것도 아니라서...
잡설이 길었고 결론적으로 시한폭탄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연희는 조금 진정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믿기는 힘든데 그렇다고 아주 안 믿기지도 않고... 참 어렵네요.”


“차라리 믿지 마세요. 모르면 편합니다.”
“...”

연희는 진심으로 이 모든 걸 다 믿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저는요?”


“당신 정도로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더 알려하지 말고 주어진대로 열심히 사는게 복받는 겁니다. 욕심부리지
마세요.”

연희는 입을 삐쭉이더니 퉁명스러 말했다.

“왜 집에서도 못 듣던 꾸지람을 여기서 듣는 것 같죠?”


“기분 탓입니다.”
“...”
*

일주일 후, 말레이시아로 출장갔던 노형석 대리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600 억? 가격이 왜 갑자기 뛰었어?”

나르힘푸난이 자신이 소유한 팜 오일 농장의 가격을 20%나 올렸다는 것만 제외하면 좋은 소식이 확실했다.

“대신 95%의 지분을 받기로 했습니다.”

무려 가격이 100 억이나 올랐다는 말에도 고 과장은 주먹을 불끈 쥐며 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곧바로
영업팀 윤성우 부장에게 진행사항을 보고 했다.

“잘했어, 고생했어!”

잘했다고 노 대리의 어깨를 치며 격려하는 고 과장은 이번 사업으로 영업 2 팀의 실적이 크게 올라갈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너, 이 새끼 어떻게 처리한거야!”

난데없이 영업팀으로 직접 방문한 차지열 상무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집어던지며 고성을 질렀다.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야! 너 제대로 확인한거 맞아? 자원팀 애들이 확인하니까 팜 나무가 다 20 년 이상된 늙다리 밖에 없다는데?”

< 대운(大運)이 충돌하다(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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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프로젝트(1) >

“네? 아니, 상무님. 무슨 일인지...”


“너 그 농장에서 팜 나무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확인 했어?”
“물론입니다. 전부 5 년 이내 쌩쌩한 놈으로다가...”
“이거 아주 허당이네. 야, 자원팀에서 확인하니까 20 년 넘은 나무들이 허다하다는데? 장 과장, 네가 설명해.”

차지열 상무 뒤에 따라온 자원 1 팀 장교일 과장이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약 3 천 헥타르는 고 과장 말대로 5 년 이내의 어린 나무들인데 나머지 만 2 천 헥타르는 20 년 넘은 노년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마 고 과장처럼 팜 나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팜 나무라고 다 같은 생산량을 보장하지 않는다.


4~8 년 된 팜 나무를 도입기, 8~13 년 된 나무를 성장기, 13~20 년 된 나무를 성숙기, 20 년 이상된 나무를
노년기라고 하는데 가장 많은 생산량이 나오는게 성장기에 있는 나무다.
그리고 성장기의 팜 나무와 노년기의 팜 나무는 생산량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딴 소리는 됐고. 그래서 만약 이거 계약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원래 기대 매출을 연간 180 억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노년기의 나무가 많을 땐 생산량이 많이 떨어져서
연간 130 억 정도로 예상됩니다. 결론적으로 금융비용과 현지 업체 운영비용까지 고려하면 매년 20 억 이상의
적자가 예상됩니다.”

돈은 돈대로 써놓고 매년 20 억 이상 적자 나는 사업을 할 뻔 했으니 삼도천을 건널 뻔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고 과장은 믿을 수 없는지 더듬거리면서 항변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작 직접 확인하면서...”


“만 5 천 헥타르 다 확인 했어?”

고 과장은 그걸 어떻게 다 확인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차 상무는 한심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너 현지 농장 관리인 없이 혼자 간 적 없지?”
“...”
“농장 관리인이 어린 나무들 있는데만 보여주면서 쑈한건데 거기에 홀랑 넘어가? 주재원이랑 대충 둘러보다가 술
처먹고 놀다 온 거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이거 접어. 계약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지 돈 넘어간 다음에 발견했으면 너나 나나 한강물 마시면서 온도 체크할
뻔 했다.”

차 상무가 영업팀을 완전히 박살내놓고 돌아간 후 다들 고 과장에게 운이 없었고 악독한 놈들에게 당할 뻔했다며
위로를 건넸지만 이틀이 더 지나자 고 과장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갔다.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와는 반대로 영훈과 연희는 크게 충격받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직장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형프랜차이즈 커피숍에 앉아 점심시간의 여유를 즐기다 홀로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연희를 힐끔 쳐다봤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운일까? 아니면 누가 나한테 몰래카메라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중이었어요.”
“...”
“다음에는 또 누구 목이 날아갈 것 같아요?”
“모르죠.”
“회사 직원들 명부 가져다 드려요?”
“됐습니다.”
“아, 태어난 시각을 몰라서 안 되려나?”
“진지하게 얘기하는거 아니죠?”

그녀는 회사 직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잠시 멍 때리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뭐 때문이랍니까?”

연희는 영훈의 질문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현지에서 팜 농장에 쓰이는 비료업체를 고 과장의 동생 명의로 인수했다고 해요. 말레이시아에서 우리 회사


상대로 제대로 빨대 꽂으려고 했던 거죠.”
“아이고”
연희는 점심 후 커피를 마시며 한가롭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누가 오려나...”


“누가 오든 우리는 노 대리만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노형석 대리는 말레이시아 건이 엎어지면서 요즘 우울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마치 쌈짓돈 털어 주식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한 얼굴이랄까?
궁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입사할 때부터 고 과장 밑에서 배웠는데 그런 상사가 감사실 조사를 받으며 사표를
쓰고 나가니 마음이 말이 아닌 듯했다.

“근데 난 좀 이상해요.”
“뭐가 말입니까?”
“아니,,, 노 대리가 건드린 그 Nodri Clare 라는 브랜드.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영훈도 Nodri Clare 라는 브랜드를 보고 어떤 좋은 느낌을 받았던 건 아니다.


솔직히 명품 브랜드는 개뿔도 모르는 그였기에 봐도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연희도 잘 모르겠다는 말에
살짝 뜨끔했다.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대운이 들어온 노 대리가 만진 사업이다.


현재 노 대리가 들어선 대운 정도면 그냥 가다가 넘어져도 돈을 줍는 정도의 운이다.
영훈은 잘 모르겠다는 연희의 안목이 의심스러웠다.

“뭐예요? 날 못 믿겠다는 거예요?”


“아니 뭐...”

연희의 위아래를 훑는 영훈의 눈빛.


대한민국에서 10 대 그룹에 속하는 재벌 가문 출신이 바로 그녀다.
하지만 아무리 재벌 티를 내고 싶어도 직장인 신분에 온갖 명품을 걸치고 출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연희는 영훈의 무시하는 눈빛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안 꾸미고 다녀서 이렇지 나 장난 아니에요. 내가 소싯적에는 학교앞에 남자애들 줄서고 길거리
캐스팅에... 됐어요. 말해 뭐하나. 어이가 없어서 정말...”
“큼큼... 아닙니다. 어쨌든 브랜드가 많이 부족합니까?”
“많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디자인도 독특하고 가죽의 패턴도 보면 볼수록 눈을 끌기도 하는데 이걸
임원들에게 설득하려면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어야한단 말이죠. 그런데 아직 영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정도는 아니라서 매출로 접근하면 얻어 맞을게 분명하고... 하여튼 뭔가 애매하다고 해야 하나?”
“애매하다... 그럼 노 대리님한테 한번 들어보죠. 전에 고 과장님한테 이거 무조건 먹힌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참 신기하죠? 그 자신감이 왜 보고서에 없었을까.”

연희의 궁금함은 사무실에 들어와서 노 대리에게 묻자 해결할 수 있었다.


노 대리는 고 과장 때문에 보류됐던 자신의 아이템을 파고 드는 연희가 고마운지 오랜만에 화색을 띄며 대답했다.

“그거? 내 감이지.”

물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했지만 노 대리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요즘 영국의 젊은 애들이 여기에 꽂혔거든. 그거 알아? 명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연령층이 어딜거 같아? 30
대? 40 대? 50 대? 아니야. 바로 20 대거든. 웃기지? 걔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명품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아니야. 20 대 명품 소비율이 전체 대비 40% 가까이 돼. 돈이 썩어나서 명품을 사는게 아니라 한푼두푼 모아서
명품을 사려고 하거든.”

영훈은 전혀 몰랐던 세계의 일이라서 그런지 노 대리의 설명이 흥미롭게 들렸다.

“그렇군요.”
“영국도 비슷해. 그리고 그런 애들 사이에서 요즘 이게 인기란 말이야.”

연희도 명품 브랜드라면 상당히 관심이 많았기에 노 대리의 사업이 점점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럼 이건 20 대를 타게팅으로 삼은 거네요?”


“정확히 말하면 20 대에서 30 대를 노리고 있어. 그리고 그건 Nodri Clare 의 사업방향이기도 하고. 아,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라인이 나왔는데 내가 보여줄게.”

신난 노 대리가 Nodri Clare 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뭔가를 찾는걸 보고 연희는 못 참고 물었다.

“그러니까 독점계약이 가능한건 맞아요? 우리한테 주겠대요?”


“아니.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무산됐지. 고 과장님이 보류 시켰잖아. 그런데 Nodri Clare 의 아시아 마케팅
본부장과 미팅까지는 잡아놨었어. 결국 못하긴 했지만.”
“그럼 약속을 깨서 실망했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많은건 맞아. 특히 한국은.”
“왜 그렇게 생각해요?”
“Nodri Clare 의 유일한 약점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역사가 짧다는 거거든. 역사가 일천한 브랜드가 단기간에
큰 명성을 얻기 위해선 스타 마케팅보다 좋은게 없지.”

연희는 손가락을 튕겼다.

“한류스타?”
“맞아.”

연희는 긍정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일리가 있네요. 그런데 입점할 백화점은 이야기가 됐어요?”

노형석 대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 그게 문제야. 국내 대형 백화점 셋 다 듣보 브랜드라고 거부했거든.”


“네? 그럼...”
“그래. 가지고 와도 팔데가 없다는 게 문제지. 명품 브랜드 가져와 놓고 아울렛에 떨이로 팔 수는 없잖아. 고
과장님도 그래서 깐 거고.”

연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고 영훈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첫 프로젝트(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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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프로젝트(2) >

사흘 뒤, 영업 2 팀의 수장으로 아무도 내려보내지 않는 파격적인 인사조치가 이루어졌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건 전적으로 연희의 입김이 강하게 적용된 결과였다.
혹시나 고 과장 같은 사람이 와서 노 대리의 사업을 까고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으로 쥐고 흔들면 어쩌나 하는
고민 때문에 연희가 송은채 사장을 졸랐던 것이다.
결국 졸지에 영업 2 팀의 사업은 다이렉트로 영업팀 윤성우 부장의 결재를 맡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윤성우 부장은 아직 배워야 할게 많은 영업 2 팀에게 거의 붙어 있다시피하며 팀원들을 가르쳤다.
일종의 개인수업이라고 할까?

“그래서? 이걸 하겠다고?”

날카로운 눈매의 영업팀 윤성우 부장은 짐덩이를 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특히 연희를 바라볼 땐 혹시 연희와 무슨 인척관계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굉장히 예뻐하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유야 뻔했다.
오너의 딸이 입사한 후 첫 사업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게 하고 싶은 마음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일 거다.
그래서일까?
노형석 대리는 제법 쫄지 않고 윤 부장에게 이 사업을 왜 해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현재 오프라인 소매 매장 중에 유일하게 성장하는 산업이 명품 브랜드 사업입니다. 경기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지라도 비교적 다른 소매업에 비해 피해가 적을 것이고 경기가 살아난다면 그 성장폭은 더 커질 겁니다.
지속 가능한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자원산업도 좋지만 명품 사업 역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좋은데... 아직 영국에서만 인기라며? 가격대도 낮은게 아니잖아. 백 하나에 200 만원에서 천만원
정도면 프라다... 보단 조금 비싸고 구찌 정도라고 할 수 있나? 이 가격대면 구찌를 사겠지. 잘 모르는 Nodri
Clare 를 사려고 하겠어?”
“대중들이 구찌를 더 친숙하게 느끼는 건 맞습니다만 유행과 SNS 에 민감한 요즘 젊은 소비자들은 계속해서 더
새롭고 독특한 디자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기에 Nodri Clare 는 탁월한
선택...”

윤성우 부장이 피식 웃으며 말을 잘랐다.

“야, 적당히 해. 그렇게 말하면 난 못 알아들어. 데이터를 가지고 와야지.”

이때 연희가 준비했던 자료를 내밀었다.

“Nodri Clare 의 매출 성장 추이입니다. 그리고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Nodri Clare 가 EU 지역에서 얼마나
거론되고 있는지 분석한 자료입니다.”

윤 부장은 연희가 준비한 자료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성장률이나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호감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Nodri Clare 는 젊고 독특하며 새롭다는
느낌을 소비자들에게 주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국에 들어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브랜드라고 생각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네?”

윤 부장은 팔짱을 끼며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로 연희를 살폈다.


이미 윤성우 부장은 연희의 사업 아이템이 참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연희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정말 전형적인 재벌 3 세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누려왔던 부와 가장 가까웠던 것이 바로 명품이었을 테고 특히 여자라서 스스로 이 아이템에 대한 자신감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원재료 시세 변동에 대한 리스크도 없고 고부가가치에 남들에게 가장 그럴듯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사업.
영업 2 팀이 보류한 아이템 중에 가장 영리하게 골랐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윤 부장은 이걸 커트해서 차기 오너에게 밉보일 생각도 없었다.
일단 그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사업적으로 봤을 때 좋아 보이는 거야? 아니면 개인적으로 이 브랜드의 물건들이 괜찮다는 거야?”

연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개인적으로도 이 브랜드 백을 한번쯤 들고 싶기는 합니다.”


“그래? 그럼 해 봐. 사업적으로만 좋다고 평가했으면 의심스러웠을 텐데 개인적으로 들고 싶다고 하니 진짜
매력이 있기는 한 것 같네.”
“감사합니다.”

무슨 대답을 하든 대답에 맞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자신감을 세워주었을 거다.


그저 이 질문으로 자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며 앞으로도 일을 진행함에 있어 조금더
신중하라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윤성우 부장은 쿨하게 사업을 승낙했다.

“밀어주는거야 할 수는 있는데 거래조건을 어떻게 할거야? 수익비율 지킬 수 있겠어?”


“무조건 30% 이상은 가져올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네. 더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고 미팅은 누구랑 하기로 했어?”
“아시아 마케팅 본부장과 메일로 이야기 나눴습니다. 보내준 샘플 말고도 2 차분 샘플 다음주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래? 1 차분 샘플은 어떻게 했어?”

순간 노 대리가 연희를 슬쩍 돌아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브랜드 파악을 위해 각자 가지고 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


“웃기고 있네. 너네 넷이 나눠 가졌단 말이잖아?”
“아닙니다. 평가 끝내고 회사로 가져올 생각이라...”
“됐다. 이거 만지느라 고생했으니까 가지든지. 그래도 고가 샘플은 쟁여놨다가 필요할 때 써. 나중에 다른
사업할 때 써야할 곳이 많을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노 대리는 이은성이나 저기... 누구더라?”
“최영훈입니다.”
회의석 가장 마지막 자리에서 노트북으로 회의록을 작성하던 영훈이 재빨리 대답했다.

“어. 최영훈이나 아무나 데리고 가. 대신 수익비율 철저히 지켜. 30% 이하로 떨어지면 이 사업 할 이유가 없는
거야. 알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연희 씨는 어느 백화점 뚫을 건지 전략 세워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다 잊고 파이팅 해.”

그렇게 툭툭 팀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아준 윤 부장이 나가자 이은성 사원이 물었다.

“저 가는 겁니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니 꼭 같이 가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노 대리도 아무것도 모르는 영훈보다는 은성이 더 친하기도 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영훈은 고려대상에
넣지도 않았다.

“어. 내일 런던행 비행기표랑 호텔 예약해. 연희 씨는 어디 생각하고 있어?”


“딱히 넣고 싶은 곳은 없습니다. 노 대리님께서 독점유통권 따오시면 세 군데 다 말해보려구요.”
“혹시 말이야...”

노 대리가 잠깐 머뭇거린다.
연희는 그 모습에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제 신분 밝히고 협상했으면 하시는 건가요?”

회사에 연희가 송은채 사장의 딸이라는 소문이 쫙 퍼진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임원들과 직원들 몇몇은 알고
있었다.
영업 2 팀이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고.
연희는 양준기를 연신 씹어댔지만 이미 퍼진 소문을 어쩔 것인가?

“어려울까?”
“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칼같은 대답.


연희는 재차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싫고 이런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과연 뚫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요. 자칫 잘못하면 그냥 망신만


당하고 끝나거든요.”
“아, 그런가? 미안.”
“미안해하실 건 없어요.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거예요. 이미 제 얼굴을 알고 있어서 어쩌면 협상하는 과정에서
알려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누워서 떡먹기 수준으로 쉽게 따낼 수
있는건 절대 아니에요. 어쩌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거절할 가능성이 있구요.”
“음... 오케이. 알겠어. 내가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가지고 올게.”

노형석 대리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다음날 노 대리와 이 사원 둘다 런던으로 떠났고 영업 2 팀엔 연희와 영훈만이 남았다.

“혹시 노 대리의 사업이 실패하면 어떡하죠?”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했듯이 노 대리님만 믿고 가면 되니까요.”
“Nodri Clare 가 듣보 브랜드라서 세 군데 백화점에서 다 까인 상태인 건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
“크흠... 그건 일이 진행됨에 있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고난? 아니면 난관? 뭐 하여튼 그런 거죠.”
“당신은 참 태평하시네요. 좋으시겠다.”

영훈은 은근 불안해하는 연희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신기하네. 어지간해서는 쫄릴 성격이 아닌데. 그렇게 절박해요?”


“믿지 못하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할아버지는 엄마를 못 믿고 있고 난 외동딸이거든요. 할아버지는 우리가
조금만 실수해도 전문경영인이나 고모부에게 넘길 생각일 거예요.”
“고모부라... 그럼 할아버지에게 아들 하나와 딸 하나 입니까?”
“네.”

영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당신의 가정이 맞다고 치면 아마도 난 회사에서 나가지
않을까요? 아참, 사장님은 별 말 없으십니까?”
“당신에 대한 칭찬을 좀 했어요. 그래서 당분간 계속 지켜보시겠대요.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에 사람을
평가하기는 힘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시면 될 거예요.”
“걱정은 안 합니다. 다만 어째 그 말이 이번 노 대리의 사업이 실패하면 그 책임을 저한테 돌릴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농담입니다. 정색하긴...”

연희가 입을 삐죽이는데 갑자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등장했다.

“어이, 바쁘셔?”

기획조정실로 발령받은 양준기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그도 신입사원이니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이제 좀 시간이 나나보다.
그런데 항상 여유만만하던 그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어려 있었다.

< 첫 프로젝트(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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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프로젝트(3) >

“영업 팀이 안 바쁘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 너도 바쁠 텐데?”

연희의 까칠한 말투에 준기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운을 띄웠다.

“신영투자증권 이형준 본부장 알지?”


“형준 오빠? 응, 알아.”
“언제 자리 한 번만 만들어줄래?”
“회사 일?”
“당연하지.”
“고마워. 언제 밥 한 번 살게. 아, 그리고 나도 도움 하나 줬어. 잘 해봐.”

연희가 승낙하자 준기는 멋들어지게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자기가 도움줄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뭐 때문에 저러지? 우리 회사가 신영투자증권이랑 만날 일이 있나?”

혼자 중얼거리던 연희는 영훈이 핸드폰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걸 보고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그랜드 백화점 BM(브랜드 매니저)에게 메일 보냈었잖아요? 한 번 만나자는데요?”
“어? 만나자고 해요?”
“네. 뭐지? 노 대리님은 다 까였다고 했는데?”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것 역시 운명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도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와... 이게 다 노 대리님한테 대운이 들어서 그런 건가요? 말도 안 돼. 나 지금 소름돋았어.”

연희가 팔을 걷어부치고 자신의 팔을 내보인다.


가느다랗고 하얀 팔을 들이미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니 연희가 민망해하며 슬그머니 옷을 내렸다.

“고 과장님 때가 더 소름 돋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소름 돋았어요. 지금도 그렇고... 사람 참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 있으시네요.”
“민망하게 했으면 미안합니다. 신기해서요.”
“내가요?”
“네. 처음 만났을 때랑 비교해서 상이 좀 변한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요?”
“아닙니다. 잊어버리세요. 어떻게 할까요? 내일 미팅할까요?”
“당연하죠. 샘플북 챙기고 갈색 가방 있죠? 그거 가지고 갈게요. 아, 그리고 정장 그거 한 벌이에요?”

연희가 영훈의 위아래를 빠르게 스캔한다.

“한 벌은 아닙니다.”
“미안해요. 말을 잘못했네. 오늘 입은 정장 말고, 소매랑 바짓단 길게 나온 검은색 정장 말고, 또 원 버튼의
빛깔나는 회색 정장도 제외하고 다른 건 없어요?”

하나만 입고 다닐 수 없어 정장 세 벌에 와이셔츠는 다섯 개로 돌려가며 입는데...

“검은색 정장이 소매랑 바짓단이 좀 길었나요?”


“네. 원래 정장은 소매가 여기까지 오는게 맞는 거구요. 바짓단도 너무 길면 보기 싫어요. 구두 뒷굽에 딱 맞는
길이가 가장 보기 좋거든요. 재질은 뭐... 그리고 영훈 씨는 허리가 좀 두툼해서 원 버튼은 너무 안 어울려요.”

그녀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지 순식간에 우르르 쏟아냈다.

“좀 평소에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뭘 말해줘요. 이미 산 거고 환불할 수도 없었을 텐데.”
“그럼 지금은 왜 말해줍니까?”
“영훈 씨도 이제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는 상사인이 됐잖아요. 그럼 패션에 대해 좀 아셔야 하는거 아니겠어요?
맞춤 정장에 커프스 버튼과 짱짱한 원단, 그리고 패션의 완성은 구두 인거 알죠? 좀 갖추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그녀는 영훈을 향해 손가락을 휘휘 돌리며 조언을 빙자한 지적질을 해댔다.


평소에 계속 구박만 받으니 쌓인게 많았나보다.

“나 아직 고시원에 삽니다. 커프스 버튼인가 하는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거 집에 놔둘 곳도 없어요.”


“네? 고시원에 산다구요?”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후다닥 자리에 앉아 말을 쏟아냈다.

“돈이 없어요?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요? 아, 식사야 식당이 있겠고, 빨래는요? 샤워실은 따로 있어요?”
“큼... 거 참 궁금한 것도 많으시네. 평생 산에서 살았는데 돈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있다고 해도 아껴 살아야지.”

주지 스님이 모아주신 돈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비싼 서울에 괜찮은 전세방 얻을 정도는 아니었다.
요새 5 백만 원 가지고 얻을 전세방이 어디 있겠는가?

“와, 그런데 삼촌한테 듣기로는 보너스까지 다 거부하셨다면서요? 왜 거부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무시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이야 언제든지 벌 수 있으니 굳이 욕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시원이야 조금 좁기는 해도 내 한몸 편히 누일


수 있고 샤워야 평생 찬물로만 씻다가 뜨신물 잘 나오니 불만 없습니다. 다만 방음이 좀... 코 고는 소리도
짜증나고 통화하는 소리까지 다 들려서 그게 많이 힘들더군요.”

영훈이 말을 하고 나서 슬쩍 옆을 돌아보니 연희가 세상 이런 불쌍한 사람이 옆에 있었냐는 듯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뭡니까, 그 표정은? 내가 불쌍해요? 하여간 금수저 들이란...”


“아니, 내가 뭐라고 했어요? 가만 있었잖아요.”
“그 눈빛, 마음에 안 듭니다. 눈빛 조심하세요.”
“와~ 난 내 눈 가지고 마음대로 뜨지도 못하나요?”
“농담은 됐고, 옷을 사야 된다는 말이죠?”
“후... 원래 그쪽 사람들이 차나 옷 같이 외형만 보고 사람 판단하거든요. 직장인이라고는 해도 일단 명품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옷은 제대로 맞춰 입고 가는게 설득력을 더 올릴 것 같아요.”
“그냥 갑시다. 한두 푼도 아니고...”

연희는 잠깐 자신이 옷을 사주겠다고 말하려했지만 괜히 그게 영훈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마음을
접었다.

“그래요. 영훈 씨 말대로 고작 미팅 한 번인데 정장까지 새로 맞추는 것도 웃기네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고작 옷 아니겠는가?


정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연희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그랜드 백화점 입점 브랜드 심사를 주관하는 박운호 BM 과의 만남을 위해 본사 4 층을 방문한 연희와
영훈은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약속시간 30 분이 넘도록 미팅할 관계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슬 연희의 얼굴이 붉어지며 화가 치밀어 올라갈 때쯤 미팅룸 문이 덜컥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연희가 흠칫 놀랐다.

“어?”
“왔어? 내가 좀 늦었지. 미안~”

들어온 이는 서른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였는데 짧은 원피스에 온갖 화려한 악세서리로 자신의 몸을


꾸민 모습 만큼이나 얼굴도 화려하게 생겼다.
화려하게 생겼다는 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강렬할 때 대개 여자들은 화려하게 생겼다고 하고 남자들은
진하게 생겼다는 평을 듣는데 이 여자가 꼭 그랬다.

“어머, 은진 언니...”
“반갑다, 얘. 넌 어쩜 정장을 입어도 그렇게 예쁘니?”
“제가 올 줄 아셨어요?”

당황하는 연희가 묻자 은진이라는 여자는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여기는 어떻게 되지? 나 송은진 실장이에요.”

영훈도 재빨리 일어나 그녀와 악수했다.

“아, 네. 현진물산 영업 2 팀의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아직 사원?”
“네.”
“음~ 실무진이 조금 약하네? 중요한 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나봐?”

송은진은 자리에 앉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너 몰랐구나? 준기가 잘 부탁한다고 직접 연락왔잖아.”
“하하...”

연희가 허탈하게 웃는 걸 보며 송은진이 달래듯 말했다.

“왜? 어렸을 때부터 네 가방 들어줬던 애잖아. 예쁘게 봐줘. 지금도 너 도와주려고 한 거잖니.”
“준기 얘기는 그만하고, 그럼 내가 무슨 얘기할지 아는 거네요?”

연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본 모습이 딱 이랬던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에 상대를 탐색하는 눈빛, 그리고 조금은 편해진 자세.

“이거 어쩌니? 내가 너 오기 전에 다 챙겨 봤잖아. 전부 계약기간이 많이 남았더라구. 그나마 계약만료가 가까운


브랜드가 있는데 월 매출이 15 억이나 나와서 계약해지가 쉽지 않아. 너희 브랜드... 아, 미안. 내가 자꾸
깜빡깜빡하네. 브랜드 이름이 뭐였지?”

영훈이 봐도 이건 알면서 모른척 하는게 분명했다.

“Nodri Clare 입니다.”

영훈의 대답에 은진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맞다, 맞다. Nodri Clare. 우리 직원들이 다들 그거 찾아보느라고 한동안 난리였잖아. 아~무도 몰라.
하하하.”

한동안 배를 잡고 웃던 그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하필 가지고 와도 왜 그런 걸 가지고 왔니? 어쨌든 다들 반응이 안 좋았어. 그래서 나도 밀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서 어떡하지?”
“언니는 이게 웃기나 봐요? 난 하나도 안 웃긴데.”
“어? 뭐 그냥...”
“그 얘길 하려고 직접 나온 거예요?”

연희의 싸늘한 대답에 순간 그녀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달랬다.

“우리 직원들이 너한테 안 된다고 하면 좀 그렇잖아. 네 체면도 있는데... 그래서 직접 왔지. 내 마음도
몰라주고 너무한다.”

연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영훈에게 말했다.

“아, 내가 소개를 안 했네. 이 언니가 그랜드 백화점 소유주인 대명그룹 송주훈 회장 손녀분이에요. 나랑 네
살차이. 생일도 나랑 몇 달 차이 안 나요. 7 월 8 일 맞지?”
“어? 어... 그런데 갑자기 생일은 왜 얘기하니? 뜬금없다.”

영훈은 그녀가 왜 갑자기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탁자 아래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한방 먹여달라는 소린데...

“그런가? 언니 선물 좋아해서 혹시 회사에 남는 선물 있으면 생일 때 줄까 했었죠.”


“됐어. 이제 입사해놓고 네가 무슨 힘이 있니? 그리고 생일도 지났어. 너 회사 들어가더니 조금 이상해졌다.”

은진이 황당하게 쳐다볼 때 영훈이 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안타깝네요. 여기 연희 씨가 이번에 잘 해결해주셨으면 괜찮은 남자분 소개시켜드리려고 했는데.”


“응? 뭔 소리야. 나 결혼했잖아. 호텔에 와서 축하한다고 한 지가...”
“어? 연희 씨는 이혼... 아닙니다. 제가 착각을...”

순간 송은진의 손이 파르르 떨렸고 연희는 한 순간에 화색을 띠며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언니, 내가 아니면 누가 언니 마음을 알아? 많이 힘들었지?”


< 첫 프로젝트(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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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프로젝트(4) >

“너, 너 어떻게 알고 있었어?”

너무 놀랐는지 송은진의 목소리는 떨림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들었어. 그런 일 있으면 연락 좀 하지. 내가 말동무라도 돼줬어야 하는데... 괜찮아?”


“누가 더 알고 있는데?”
“아무도 몰라. 나만 알고 있어.”
“너... 이거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마. 이거 다른데서 들리면 너...”

연희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내가 언니 같을까? 난 또 직접 행차하셨길래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역시나였어. 나 갈게.”


“연희야, 잠깐만.”

송은진은 연희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한 달 뒤에 1 층 메인 라인에 자리 하나 날 거야.”
“매출 15 억 넘어서 어렵다며?”
“그 자리 말고 다른 자리.”
“아니야. 됐어. 직원들 반발 있을거 아니야. 억지로 하고 싶지가 않네. 수고해.”

연희는 은진에게 싱긋 미소를 보이며 미팅룸을 나왔다.

“속 시원합니까?”

연희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짜릿한 미소를 지으며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와 진짜 대~박! 아까 그 ㄴ... 그 언니 부르르 떠는거 봤어요? 하하하! 아 진짜 고소해.”


“그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그 분이 되지 않는 일 가지고 우리를 농락하니까 말을 꺼내긴 했는데, 아까 그만큼
놀리면 됐으니까 이제 적당히 넘어갑시다. 뒤에서 그러는거 좋은 습관 아닙니다.”

연희와 자신을 볼 때의 송은진 실장의 눈빛은 경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희와 얼마나 악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대놓고 보이는 그 악의에 속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알겠어요.”

영훈의 말이 섭섭하면서도 맞는 말이라 연희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더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너무 기분이 좋은지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히 영훈의 뒤를 따라오던 그녀는 뭔가 생각났는지 후다닥 다가와 물었다.

“사주에 이혼이 나와 있었나요?”


“아니라면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다른 건...”
“알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알 필요 없는 겁니다.”

한번 입을 닫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 걸 알기에 연희는 다시 입을 꾹 닫고 조용히 영훈의 뒤를 따랐다.


샘플북에 샘플가방까지 들고 있던 그녀는 무겁다고 말하려다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해 보이는 영훈을 보고 차마
무겁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 영훈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흠칫 놀란 그녀도 딱 멈추자 영훈이 말했다.

“아까 왜 자리 내준다는 거 거부했습니까?”


“네? 아니, 그럼 그걸 받아요?”
“받았어야죠.”
“아니... 영훈 씨.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요. 그 언니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요? 뒤에서
온갖 험담을 하면서 날 완전 나쁜년으로... 하여튼 그랬다구요. 그런 상황인데도 난 아까 그 언니가 최대한
우호적으로 나왔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라구요.”
“말로는 절박하다고 해놓고 지금 보니까 아직 급하지 않으시네.”

싸늘한 영훈의 한 마디에 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급하지 않으니까 거절하고 나온거 아닙니까? 급하지 않으니까 자존심부터 세운거 아니에요?”
“...”
“금수저의 자존심 뭐 이런거 알겠는데 이건 당신만의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최소한 아까 깽판을 놓기 전에
시간이라도 벌고 나왔어야죠. 이혼이라는게 당신한테는 가벼운 일입니까? 아니죠? 당신 나중에 결혼 실패할까봐
지금 성질 많이 죽이고 지내잖아요.”
“이혼이라는 게 가벼워서 그런게 아니잖아요.”
“아니, 가볍지 않았으면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면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 왔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홧병 올라서
죽어버리라고 대놓고 놀리고는 제안까지 뻥차고 나오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연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영훈은 그녀가 바로 사과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 내심 놀랐지만 그럼에도 표정 변화없이 말을 이어갔다.

“난 산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 회사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롭습니다. 회사 생활이
즐겁고 내가 하는 일을 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로 내가 할 사업에 도움이
되는데 거리낌은 없지만 기껏 사주를 봐주고 당신 기분이나 채워줄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연희는 이상하게 영훈의 꾸지람(?)에 반발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위압감은 왠지 모르게 저항하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아까는 그냥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막 통쾌하고 그래서... 화 풀어요.”

타고나기를 오만한 성격인 그녀로서 이 정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네, 후... 내가 할아버지 한테도 이렇게 안 혼났는데.”
“나라고 남의 집 귀한 딸래미에게 뭐라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닙니다.”

연희는 투덜거리면서도 영훈이 화낸 기색을 풀자 배시시 웃었다.

“솔직히 그랜드 백화점이 크긴 하지만 다른 두 곳의 백화점이 더 커요. 그리고 꼭 본점에 오픈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입점하는건 크게 안 어려울거예요.”
“확신하십니까?”
“그럼요. 이미 얼굴 다 팔렸는데 이참에 적극적으로 영업 나서봐야죠. 내 입으로 이런말 하기 그렇지만 나 인기
좀 장난 아니에요. 그 언니가 날 왜 싫어하는지 알아요?”

그녀가 어깨를 뿜뿜하며 어깨에 내려온 머리칼을 홱 흩뿌린다.

“뭔데 그럽니까?”
“언니 남편이 예전에 나한테 고백했었거든요. 날 싫어할만 하지. 돈으로 들이민 것도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무릎꿇고 울면서 고백했던 남자인데 나한테 차이고 자기랑 정략결혼 했으니 얼마나 내가 꼴보기
싫었겠어요.”
“아~”

그녀의 어깨가 잔뜩 올라갈만하다.

“솔직히 부모님이 돈 많은 여자들은 많지만 돈도 많으면서 나처럼 예쁘기 힘들거든요. 내 말 한마디면... 흠...
하필 백화점 쪽에 나랑 친한 애들이 없네.”
“결국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제부터 친해지면 돼죠. 얼른 가요. 아침부터 기운 뺐더니 배고프네. 뭐 드실래요? 혹시 파스타 좋아해요?
내가 죽이는 파스타 집 아는데. TV 에 나오는 스타들이 먹는 파스타 맛 궁금하지 않아요?”

영훈은 이제 그녀도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아유, 그럼요. 죽여요.”

회사로 돌아온 연희는 한동안 양준기와 통화로 격렬한 대화(?)를 하고 난 뒤 다른 백화점 입점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 뛴다는거지 아직 재벌 3 세의 자존심이 단단하게 가슴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인지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되는 이유를 갖다대며 어영부영 했다.
억지로 만나라 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영훈은 그저 노 대리만 믿으며 계약을 지원하는데 주력했다.
노 대리가 보내달라는 서류나 요청하는 일에 주력하면 알아서 대어를 물어주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노형석 대리가 드디어 Nodri Clare 와의 독점유통계약을 계약함에 이르렀다.
아직 입점할 점포도 못 구했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건 당연했다.

“네. 연희 씨랑 가고 있습니다. 네. 다녀와서 보고하겠습니다.”

영훈은 윤성우 부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연희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도 운전하면서도 핸즈프리로 세명백화점 BM 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으며 어필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였다.
통화를 끊은 그녀에게 물었다.

“뭐랍니까?”
“올해 말에 계약이 끝나가는 매장이 있는데 아직 협의중이래요. 임대료와 수수료 문제 때문에 해당 매장하고
재계약을 할지 안할지 아직은 결정을 못 내린 상태라고 하는데 말이 길었지만 결국 우리 브랜드를 못 믿겠다는
거죠.”
“이거 참...”

둘은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계약을 마치고 도착하는 노 대리와 이은성 사원을 맞이하러 가는게 아니라 바로 그 뒤편 항공을 타고 들어올
Nodri Clare 의 아시아 마케팅 본부장을 맞이하러 가는 중이었다.
도착시간이 고작 1 시간 차이라 노 대리도 도착해서 바로 가지 않고 서울에서 지낼 호텔 체크인 후 간단하게
식사하는 것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차가 4 인용 세단이라 원래 영훈까지는 올 필요가 없었던 일인데 연희가 혹시 모른다며 부득불 끌고 와 영훈까지
같이 오게 됐다.
아직 태어나서 인천공항을 본 적 없었던 영훈은 거대한 공항의 위용에 촌놈처럼 사방을 둘러보며 신기해했고
연희는 그런 영훈이 신기해 계속 힐끔거렸다.
그렇게 공항투어(?)를 40 분 가량 했을 때 노형석 대리와 이은성 사원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여기요!”
“많이 기다렸지?”
“아니에요. 축하드려요. 고생하셨어요, 대리님.”
“하하하, 고마워.”

원하던 거래에다가 미인의 축하라서 그런지 노 대리의 입은 귀에 걸릴 것처럼 찢어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런데 어떡하지? 아직 입점할 백화점 못 정했지?”


“다들 난색을 표하고 있어서요. 인지도가 너무 차이나서 오너 일가나 경영진의 확신이 없으면 명품 브랜드 라인에
끼기 쉽지 않아 보여요.”
“큰일이네...”

그렇게 게이트 앞에 서서 축하와 걱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나왔다.
그리고 달려드는 카메라들.

“어? 뭐지? 누구 같이 타고 왔어요?”

노 대리는 고개를 흔든다.

“몰라. 연예인 누가 탔다는 얘기는 있는데 정확히 듣지는 못했어. 비즈니스나 퍼스트 타고 왔나보지. 그건 신경
끄고 이따가 올 제임스 노튼은 한식을 상당히 궁금해 했거든? 괜찮은 한식당 섭외했지?”

연희가 재빨리 대답했다.

“광화문에 한정식 식당 예약했습니다.”


“차는 주차장에 있지? 영훈 씨, 운전면허증 없다고 했나?”
“네.”
“그럼 은성이가 가서 차 빼와. 아직 시간 있으니까 여유있게 가. 전화하면 빼서 6 번 게이트 앞에 대고.”

이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 대리가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괜찮으십니까?”

덩치가 과장 없이 영훈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엎어진 노 대리에게 다가가 일으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버럭 화를 내는 이은성.
남자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악성 팬이 달려들어서 뿌리친다고 그만.,,”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작은 체구의 여인이 다가와 노 대리에게 사과한다.


산에서의 일상이 게임과 드라마, 영화 따위를 보는것이었기에 영훈은 그녀가 요즘 제일 핫한 여배우인
서가은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았다.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영훈은 노 대리가 자빠져도 돈 주울 대운이 들어와 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애초에 백화점 잡고 난리 부르스를 출 필요도 없었던 거다.
그냥 두면 본인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던 건데...

< 첫 프로젝트(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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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프로젝트(5) >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노 대리도 눈 앞에서 사과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봤나보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황송함에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보니 말이다.

“다친거 아니시죠?”

노 대리를 쓰러뜨렸던 경호원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이 상황에 괜찮으니 그냥 가시라는 듯 쿨하게 넘어가는 노 대리를 보고 영훈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사업의 가장 핵심이 한류스타라는걸 알텐데 아무래도 눈앞에서 스타를 직접 보고 있으니 머리가 하얗게
됐나보다.
보아하니 저러다 아무것도 없이 이대로 헤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서가은이 누군가의 명함을 받아 노
대리에게 건넸다.

“혹시 나중에 불편한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보시다시피 보는 사람이 많아서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서가은이 연락처를 주고 갔다.


본인의 핸드폰 연락처는 아니지만 어쨌든 서가은과 연락이 가능하다는게 어딘가?
뒤따라온 기자들이 궁금해서 어떤 상황이냐고 물어봤지만 노 대리와 연희가 상황을 잘 마무리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소리없는 환호성이 그럴까?
다들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공항 한켠의 커피숍에서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 Nodri Clare 의 아시아
브랜드 전략 담당인 제임스 노튼을 픽업해 광화문의 한정식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영훈은 그 일행에 끼지 않고 따로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세단은 4 인승이었으니까.
왠지 따로 남겨지는 기분에 마음이 살짝 섭섭하기도 했지만 막내에다가 영어가 안되는 자신이 혼자 가는게
당연했기에 택시비를 영수증 처리할거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회사로 복귀했다.
그런데 입구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

“어?”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들고 멍하게 서 있는 여자는 바로 고시원 주인 아주머니의 딸이었다.


고시원의 작은 부엌에서 편한 차림으로 있던 그녀와 지금의 모습은 천지차이였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에 화장까지 한 그녀는 고시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물론 객관적으로 예쁘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호감이 간다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언제 주인 아주머니께서 만나면 인사 하라고 하시던데 이제야 만나네요.”


“어... 정말 우리 회사에 다니는 거였어요?”
“네. 영업 2 팀입니다.”

영훈은 어딜가나 절대 빼놓지 않고 걸고 다니는 목걸이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그러시구나. 전 홍보팀에 있어요. 그럼 정규직이신 거예요?”

그녀 옆에는 같은 홍보팀으로 보이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회생활 경험이 적은 영훈도 그녀의 질문이 예의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영훈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직 인턴입니다. 정규직이 될지는 모르는거구요.”


“아~ 인턴... 알겠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처음 보고 놀랄 때와는 다르게 조금 표정이 풀린 모습이다.


그게 너무 확연히 티가 나서 영훈은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네. 수고하세요.”

인사하고 뒤로 돌아서 들어가는데 뒤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린다.


얼핏 자신의 어머니가 하는 고시원에 세들어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훈은 그런 얘기들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팀에 올라와 윤성우 부장에게 바이어 도착과 여배우 서가은 연락처를
받아 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진짜 우연이었어? 임연희가 개인적으로 얻어온게 아니고?”

당연히 윤성우 부장은 믿기 힘든 얼굴이었다.

“네. 노형석 대리가 우연찮게 경호원과 부딪혀 날아가면서 죄송하다고 연락처를 줬습니다. 매니저 연락처긴
한데...”
“당연히 매니저여야지. 연애할거야? 개인 연락처 받아서 뭐해? 연예인들 어차피 지들 맘대로 하는거 아니야.
협찬도 다 회사에서 받아주는 거거든. 우린 서가은 비위만 잘 맞춰주면서 회사랑 잘 얘기하면 만사 오케이야.
이거 노 대리한테 운이 따르는 건가? 아니면 연희 씨한테 운이 따르는건가? 신기해 죽겠네?”
“저도 참 신기합니다.”
“그래, 고생했고 서가은 소속사랑 빨리 연결해서 이거 빨리 띄워봐. 그리고 바이어 지금 식사하고 있다고?”
“아마 지금쯤 식당에 도착했거나 식사중일겁니다.”
“이후 스케줄은 어떻게 돼?”
“세종백화점 본점이랑 명동을 노 대리와 같이 살펴보고 다시 뉴월드 백화점 에비뉴엘관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모든 스케줄이 마무리되면 대략 저녁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저녁 식당은 어디 잡았지?”
“뉴월드 백화점 8 층 식품관에 있는 양식당을 잡았습니다.”
“음... 그러지 말고 을지로 풍월관 알지? 모르나? 투플러스 고깃집 있어. 잘 모르면 검색해서 예약해놔.”
“알겠습니다.”
“수고했어, 가 봐.”

영훈이 자리로 돌아와 예약한 식당을 조정하고 있을 때 누가 어깨를 톡톡 치며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연희가 빙긋 웃고 있었다.

“가서 밥 안 먹었습니까?”
“영훈 씨 혼자 식사할까봐 전 그냥 왔죠.”
“허허... 왜 그럽니까? 불안하게?”
“당신은 나 같은 미인이랑 밥 먹는게 기쁘지 않은가 봐요?”
“부럽네요, 그 자신감.”
“당신이 그 능력에 대해 가지는 자신감만큼? 솔직히 이것도 힘들어요. 얼마나 피곤한데. 이게 진짜 겪어보기
전에는 몰라요. 조금만 잘해줘도 ‘사랑한다’, ‘보고싶다’, ‘나 죽는다’. 별의 별 얘기를 다해. 웃는것도
마음대로 못한다니까요?”
“그런 말하는 것치고 되게 잘 웃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무표정하더니.”

연희는 잠깐 멈칫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영훈 씨가 좀 편한가봐요. 아마 내 성격 안 좋은거 누구보다 잘 아니까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가?”
“...”
“아참, 아까 나 혼자 회사로 돌아오면서 서가은 소속사랑 연락 했어요.”
“노 대리님이 안 하시구요?”
“아무래도 연예인 쪽은 여자인 내가 컨트롤하라고 하셔서요. 연락해서 노 대리님 건강에 문제 없다고 하면서 우리
회사 밝히고 서가은 씨한테 우리 브랜드 협찬해주고 싶다고 전했어요. 진짜 노 대리님 대운이 장난 아니었다는거
다시금 느꼈잖아요. 나 아까 공항에서 노 대리님이랑 서가은 씨가 대화할 때 박수 칠 뻔 했어요.”

사실 영훈도 똑같았다.
“저도 그랬습니다.”
“영훈 씨도요?”
“그 운이 부럽더라구요.”
“하여튼, 이게 정말 다행인게 만약 정상적인 절차 밟아서 신청했으면 배우가 보고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는
경우도 있고 회사내에서 브랜드 따져가며 받는 경우도 있거든요.”
“잘 아시네요.”
“사실 노 대리님한테 들었어요. 아, 그런데 오면서 궁금한거 생겼어요.”
“연희 씨 은근 말 많은 거 알아요? 얼음공주라는 거 거짓말 아닙니까? 무슨 얼음공주가 이렇게 말이 많아?”
“허... 누군 나한테 말도 못 붙여서 난린데...”

연희가 쌍심지를 켜자 영훈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물어봐요.”
“영훈 씨는 자신의 대운이 언제 들어오는지 알잖아요? 그럼 그때 어떻게...”

영훈은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모릅니다.”
“네? 왜 몰라요?”
“내 사주는 좀 특이한 편입니다. 그게 내 인생의 족쇄가 되기도 했고... 하여튼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내 사주를
보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보지 않았다고 아예 기억이 안나는 건 아니지만 몇 살에 대운이 들어오고 몇 살에
건강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따위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 정확히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잊었다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왜 안 봤어요? 언제 들어오는지 잘 알면 좋은거 아닌가요?”
“그 얘긴 넘어갑시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또 영훈이 입을 딱 다물어버리자 연희도 잠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일어섰다.

“뭐해요? 점심 먹으러 가야지.”


“그럽시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식사시간은 영훈에게 있어서 힐링하는 시간이다.


산에서 매일 나물과 씨름하며 살았던 영훈은 매 끼 색다른 음식으로 오랜 세월 흘러간 시간에 대한 보상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김치찌개는 일주일에 한 번만, 순대국은 2 주일에 한 번 정도만 먹겠다는 기준을 정했다.
까다롭기가 거의 재벌 3 세 저리 가라할 정도였다.

“크흠. 블로그 보니까 이 근처에 간장게장 정식 잘하는 데가 있던데...”


“와... 메뉴가 너무 센거 아니에요?”
“먹기 싫으면 빠지시든지.”
“가요, 가요.”

1 인당 3 만 원인 간장게장 정식을 폭풍흡입한 영훈이 연희를 데리고 항상 가는 프렌차이즈 커피숍에 갔을 때 마침


오늘 마주쳤던 사람이 커피를 사려고 줄을 서 있는게 보였다.
아는척을 할까 하다가 괜히 친한척 한다 생각할까 그냥 뒤에 줄을 서니 회사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 같이 있었던
그녀 동료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고시원에서 살면서 회사 합격된거면 대단하다. 생긴건 조금 촌스럽게 생겼는데 원래 뭐 했던 사람이래?”
“몰라.”
“근데 이거 완전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인연 아니야? 잘해봐~”
“아우! 미쳤어!”
“왜? 잘 어울리던데?”

영훈은 차마 듣고 있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데 딱 연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연희는 고시원이라는 단어가 나올때부터 영훈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의 대화 주인공이 영훈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연희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영훈 씨, 뭐 드실거예요?”
“네? 네 뭐... 카라멜마끼아토 먹겠습니다. 연희 씨는요?”

영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앞에 서 있던 주인 아주머니의 딸이 몸을 홱 돌렸다.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
그녀는 민망해하며 말했다.

“어머, 오늘 또 보네요? 신기하다.”


“아, 그래요. 신기하네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주인집 딸래미는 신기한 듯 영훈의 옆에 그림같이 서 있는 미녀를 힐끔거렸다.


같은 여자가 봐도 예쁘니 관심이 갈 수밖에.
영훈은 연희를 소개했다.

“아, 여기는 내가 살고 있는 고시원 집 아주머니의 딸이세요. 마침 같은 회사 다니더라구요.”

영훈의 설명에 당황한건 오히려 주인집 딸과 그녀의 동료들.


이렇게 직접적으로 설명할 줄 몰랐던 것 같다.

“여기는 임연희 씨라고 영업 2 팀 동료예요.”

사실 주인집 딸의 이름도 몰랐기에 대충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얼른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는데...
연희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애교스러운 톤으로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영훈 씨 살고 있는 고시원 집 주인이시라구요. 영훈 씨 잘 부탁드려요.”

< 첫 프로젝트(5)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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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부업? 투잡?(1) >
“네? 아, 네...”

주인집 딸은 물론이고 그녀의 동료들도 연희를 향한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들은 이 황당하고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빠르게 커피를 주문하고 모습을 감췄다가 나온 커피를 들고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뭡니까? 그 애매한 말은?”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연희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아까 그 여자한테 한 말이요. 잘 부탁드린다니... 내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거야... 그럴수도 있죠.”

연희는 당신 혼자 살았기 때문에 그런거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돌려 말했다 뿐이지 패드립이나 다름 없는 말이니까.
그러다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여자라뇨? 왜 그렇게 말해요?”


“이름을 모르거든요.”
“이름도 몰라요? 고시원 집 딸이라면서요?”
“네, 그런데 회사 입사해서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그쪽도 물어보지 않았고 저도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어서 안
물어봤죠.”
“와, 되게 웃긴다. 이름도 모르면서 뒤에서 당신이 고시원에 있다 어쩐다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거예요?”
“그런 것 같네요.”

연희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왜 화를 안 내요? 당신 뒷담화를 하는데 화나지 않아요?”


“아마 그 여자도 못지않게 화가 났을 겁니다. 평생 어렵게 공부해서 우리 회사에 입사했는데 어디서 배운 것도
없는 놈이 자기가 이룬걸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이루니 화가 날 수 밖에.”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절에서 도 닦았어요?”


“게임 했습니다. 혹시 스타랑 와우 아세요? 엄청 재밌는데. 제 인생의 3 분의 1 정도를 투자했었죠.”
“아... 엄청 노셨네. 확실히 그 주인 딸이 속상할만 하겠어요.”
“그래서 화가 나기보다 조금 미안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지 않았다면 악의를 품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나와 같은 소시민들일때만 그렇습니다. 당신처럼 금수저들에게는 좀 엄격한
편이거든요.”
“알아요. 그래서 조심하고 있어요.”

연희가 눈치를 보며 커피를 호로록 들이키는데 영훈이 물었다.

“소문 돌 거 걱정 안 했습니까?”
“고작 그 얘기 한 걸로 당신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거요? 후후... 난요 아주 어렸을때부터 나와 상관없는
소문들에 둘러싸여 살았어요. 누구랑 사귄다더라. 누구랑 잤다더라. 남자가 한둘이었게요? 그렇게 십년 넘게
살았는데 이깟 회사에서 그런 소문 정도에 신경 쓰겠어요? 그것도 우리 엄마 회산데?”
그녀는 엄마 회사라는 말을 할 때 누구도 듣지 못하게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때 풍겨오는 이름모를 꽃향기.
그녀가 즐겨 쓰는 향수 냄새인 듯 했다.
영훈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시킨 일에 대해 안 물어봅니까? 윤 부장에 대해서는 왜 안 물어봐요?”

연희는 표정이 굳어졌다.


얼마 전까지도 엄마가 윤성우 부장과 차지열 본부장에 대해 영훈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기 때문이다.

“윗분은 알아서 둘러댔고 아랫분은 당분간 묻지 않을 거예요.”

윗분은 차 상무를 말하는 것일테고 아랫분은 윤 부장을 말하는 것일테다.

“왜 그럽니까?”
“솔직히 조금 무섭거든요.”

연희는 몇 번이나 윤성우 부장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가 말았다.


엄마의 지시가 있었기에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걸 알지만 고일주 과장 사건 이후로 너무 안 좋은 말이 나올까 살짝
두려워졌던 거다.

“무섭다... 당신 답지 않은데요?”
“나라고 뭐 무서운거 하나 없는줄 아세요? 그리고 굳이 꼭 들어야 할게 아니면 당신 이야기를 듣고 선입견을
가지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노 대리님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고. 그렇다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건 아니에요. 이런 마음이 얼마나 갈지 나도 모르죠.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말해주세요. 그냥 지금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에요.”
“좋은 자세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영훈도 처음 자신의 능력을 알고 난 후, 소름이 끼쳐 그 후 몇 년간 사람도 가까이 하지 않았었다.
연희는 성격은 조금 모날지 몰라도 똑똑한 건 확실했다.
지금 집중해야 할게 무언지 알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것도 돈과 명예를 중시하는 그녀가 회사를 가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연희가 이렇게 말해주니 영훈도 부담이 없어졌다.
아무리 남의 운명을 잘 본다고 해도 모든 걸 볼 수 있는건 아니었고 노 대리의 경우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으로 대운이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게 인생이다.
필요한 상황에서는 이야기해야 할 테지만 윤성우 부장 같은 경우는 차지열 상무와 달리 전형적인 무난한
직장인으로 살아갈 사주를 타고 났으니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할 것도 많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이나 대운이 들어올 때야 있기는 하지만 굳이 연희에게 알려주며 주의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랫분은 그렇고, 윗분은 왜 둘러댔습니까?”


“솔직히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긴가요? 고작 신입사원이 한 얘긴데? 진실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면
당신에 대한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너무 황당한 이야기는 앞으로 조심하시는게 좋아요.”
“날 위해서 입을 다문 겁니까?”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날 위해서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당신은 사장님과 한 약속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그냥 일반 직장인처럼 실적에 집중하고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시면 되는 거죠. 아시겠죠?”
뜻밖의 말이지만 더없이 반가운 말이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마울 것 없어요. 서로 줄건 주고 받을건 받는 거니까. 그런 만큼 당신의 능력이 발휘되길 바래요.”

영훈은 처음으로 연희의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송은채 사장은 머리를 가볍게 감싸쥐었다.

“후... 방법이 없는 건가요?”

그녀의 앞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는 이는 기획조정실 강노식 실장으로 작은 키에 눈도 작고 전체적으로 왜소한


체구였다.
그는 손을 비비고 입술을 씹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단단히 상한 것 같습니다. 우리 발목을 잡고 안 놔줄 것 같습니다.”


“양 전무님? 전무님 의견은 어때요?”

송 사장의 옆에 앉아 있는 이는 양철기 전무로 진한 눈썹과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연희 양이 직접 가서 잘 달래야 할 것 같습니다.”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애초에 그럴 수 있었다면 당신들 불러놓고 해결하라고 하겠어요? 지금 이 결과가
당신들의 능력인 건가요?”
“죄송합니다.”

양 전무도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강노식 실장 역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제 어쩔 거예요? 폭탄 떠안을 거예요?”


“시간을 주시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송은채 사장은 강노식 실장의 말에 대답도 않고 홀로 생각에 빠졌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봐요. 강 실장은 최대한 빨리 다른 방도를 강구하고. 양 전무님은 준기한테 입단속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가보세요.”

양철기 전무는 고개를 숙이고는 사장실을 나왔다.


옆에 따라나온 강노식 실장과 같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양 전무는 강노식 실장에게 물었다.

“할 수 있다며?”
“죄송합니다. 준기가 잘 알지는 못해도 건너건너 인맥이 있다고 워낙 자신만만해 하기에 보냈는데 생각보다
이형준 본부장이 강하게 나와서... 아무래도 연희 양과 이 본부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본부장이 연희 양한테 크게 망신스러운 상황을 겪었고 연희 양의 사과 없이는 일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양 전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럼 준기를 보내기 전에 상황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이게 뭐야! 기조실 데려가놓고 이 따위로 키울거야?”
“죄송합니다. 준기한테 좋은 인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보냈는데...”
“후... 씨발, 이걸 좋아해야 하는거야? 싫어해야 하는거야? 설마 회장님이 신영투자증권에 손을 뻗친건
아니겠지?”
“아무리 회장님이 송 사장님을 탐탁치 않아 한다고 해도 회사 지분을 가지고 송 사장님을 협박하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긴한데 너무 뜬금없잖아? 갑자기 우리더러 인수하라니.”
“그래서 저희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연희 양을 곤란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준기가 끼어들게 된 거라서...”
“준기는 앞으로 신중하게 일을 시키도록해. 송 사장이나 상대쪽한테 책잡힐 일은 아예 만들지 말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양철기 전무는 갑갑한지 자리에 앉아 넥타이를 살짝 풀고는 싱긋 미소지었다.

“신영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어느 정도지?”


“7%입니다.”
“송 사장 똥쭐이 바짝바짝 타겠구만.”
“신영투자증권이 가진 현진물산의 지분 5%가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에게 넘어간다면 경영권이 위험할 수 있으니
시장에서 추가로 매입하거나 우호지분을 모아야 할 겁니다.”
“딸자식 챙기겠다고 폭탄을 인수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대놓고 회사 지분가지고 장난치고,
진퇴양난인데... 하필 내 자식새끼가 바보가 됐어.”
“그건 죄송합니다.”

양철기 전무는 전자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고는 물었다.

“이대로 폭탄을 떠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자본금이 4 천억이 안되는데 작년 순손실만 2 천억이 넘습니다. 종양 하나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졸지에 임지은 사장한테 백기사가 등장한 셈이네. 아니지, 흑기산가?”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차피 혜성기업 인수는 불가능합니다. 딸 자존심 세워주겠다고 부채덩어리를 떠안을
수는 없으니까요. 단지 연희 양이 얼마나 희생하느냐에 따라 과정에서 잡음이 얼마나 생길지가 좀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어디 20 년 넘게 살림에 매진했던 주부 실력을 좀 보자고.”

연희는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뭐지?”
“뭔데 그럽니까?”
“우리 회사가 혜성기업을 인수한다는 루머기사가 떠서요.”
“혜성기업? 그런 회사도 있구나...”

영훈이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연희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왔다.

“어? 영훈 씨...”
“네?”
“오늘 저녁에 엄마가 저녁 같이 하자는데요?”
< 알바? 부업? 투잡?(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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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부업? 투잡?(2) >

“사장님이 당신도 같이 불렀습니까?”


“그런 말은 없었지만 그냥 같이 가요. 나중에 나한테 무슨 말 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을 거잖아요?”
“...”

영훈은 꼭 같이 갈 필요가 있겠나 생각했지만 그녀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을 끝내고 저녁 시간이 되자 연희가 영훈을 이끌고 시청 광장 맞은편의 호텔로 이끌었다.
연희를 따라 올라간 곳은 호텔 내의 고급 중식당이었다.
룸으로 된 그곳에는 커다란 원형으로 된 식탁과 면접때 봤었던 송은채 사장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면접때와 같이 긴장 하나 없이 원래 아는 사람과 식사를 하러 나온 것처럼 편안한 영훈의 모습에 송 사장도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요. 오랜만이에요. 앉아요.”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에요. 금방 왔거든요. 식사는 미리 시켰어요. 이런 식당이 익숙치 않을 것 같아서 미리 주문했는데.”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호호, 다행이에요. 그런데 넌 왜 왔니?”

송 사장의 물음에 연희가 엄마와 영훈의 딱 중간 자리에 앉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내가 오면 안 되는 자리였어? 피해줘?”


“됐다. 나중에 물어볼거면 입 아프게 뭐하러 두 번 얘기하겠니. 그리고 Nodri Clare 잘 가져 왔다며?
서가은인가? 걔 확실히 잡은거니?”
“진행중이야. 샘플로 가방 하나 줘봤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대. 그래서 기대중이고.”
“나쁘지 않다... 그거 위험한 표현인거 알고 있지?”
“충분히 알아보고 하고 있어. 서가은 잡고 이번에 뉴월드 백화점에 입점시킬 계획이야.”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거 명심해. 백화점에서도 들어온 가게 빼는거 쉽지 않다. 입점 브랜드 개편한다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생각대로 잘 넣을 수 있겠어?”
“해봐야지.”

연희는 자신이 있었다.


노 대리만 믿고 가면 된다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Nodri Clare 라는 브랜드가 그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독특하고 계속 눈길이 가는 디자인은 적어도 젊은층에게는 확실히 어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너 잘해. 너 못하면 윤성우 부장도 체면 깎이고 내 체면도 깎이는거야.”
“알고 있어. 배고프니까 일단 잔소리를 하더라도 먹으면서 해.”
“후... 그러자. 입맛에 안 맞더라도 맛있게 들어요.”
“전 다 잘 먹습니다. 사장님 덕분에 이런 곳에도 다 와보고 참 좋네요.”

조금 지나서 들어오는 중국요리들.


하나같이 영훈이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고급 요리였다.
짜장면에 탕수육이 중국음식인줄 알았는데 요리 하나하나가 입을 즐겁게 만들어 허겁지겁 입에 집어 넣었다.
이래서 돈을 벌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할 때 쯤 송 사장이 입을 열었다.

“천천히 먹으면서 들어요. 연희에게 듣기로 일을 잘 따라간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업무적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언어적인 문제만 제외하면 생각보다 잘하신다고 해서 다행이에요.”
“과찬이십니다.”
“오늘 영훈 씨를 보자고 했던건 조금 민망하긴 한데 부탁할게 있어서에요.”
“네? 저한테요?”

영훈은 순간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그녀가 송 사장에게 사주에 대한 이야기를 한게 아닐까 했는데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희의 적극 부인하는 걸 눈빛을 보고 사주에 관한 것 때문에 부탁하는게 아님을 알게 되자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래요. 동생하고 일할 때 채권 회수 실력이 굉장했다고 들었어요. 혹시 그럴 수 있었던 노하우가 있었나요?”


“글쎄요. 그냥 채무자가 돈을 잘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습니다. 물론 갚을 능력이 절대 안 될 것 같은
사람은 저도 포기했지만요.”

송은채 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동생은 당신에 대해 말하기를 단순히 채권회수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려 할 때 수많은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는데 당신은 단 한번도 채무자와 트러블을 일이킨 적이
없다구요. 맞나요?”
“맞긴 합니다.”

이때 연희가 끼어들었다.

“엄마, 영훈 씨한테 빌려준 돈 회수하라고 시킬려고?”


“아니야. 나 말하는 중이니까 끼어들지 말래?”
“알았어요.”

연희가 입술을 쏙 집어넣자 다시 송 사장이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빌린 돈을 찾아달라고 하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내가 원하는건 그게 아니에요.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거든요.”
“정확히 어떤 상황입니까?”
“신영투자증권의 이형준 본부장이라고 있어요.”
“어? 얼마 전에 준기가...”
“연희야?”
“오케이, 오케이.”
“그 친구가 우리한테 혜성기업이라는 회사를 인수하라고 제안했어요. 인수금액이나 기업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우리는 그 회사를 인수할 마음이 없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그냥 인수 안 하면 되잖습니까.”
“신영투자증권이 현진물산의 주식을 5% 가지고 있어요. 이형준 그 친구는 우리가 혜성기업을 인수하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우리 주식을 다른 곳에 넘길수도 있다는 말을 흘리고 있구요.”
“...”

그제야 돌아가는 사정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사장님 말씀은 그 이형준 본부장에게 회사를 인수하라는 말을 포기하게 해달라는 말씀입니까? 아무
뒤탈 없이?”
“맞아요.”
“제가 그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안하시는 건가요?”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법무팀이나 기조실 모두 설득에 실패했어요. 법적으로나 합리적인 설득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어요. 당연히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행태를 띠진 않지만 우리가 거부한다면 분명 우리 주식을 다른 곳으로
넘길 거예요.”
“이형준이라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연희에게 따로 물어보면 될 거예요.”

영훈이 고개를 돌리니 연희가 처음의 발랄했던 표정과 달리 잔뜩 굳어 있었다.


영훈이 다시 물었다.

“거절하면 인사고과에 문제가 생깁니까?”


“당신을 입사시키면서 한 달이라는 기간을 두었는데 생각해보니 한 달이라는 기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어요.
연희에게 듣기로 일도 상당히 잘한다고 들었구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인턴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그렇죠.”
“거절한다고 해도 계약을 해지할 생각은 없어요. 어차피 당신의 일은 영업 2 팀에서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일이니까. 다만 이번 일을 잘 해준다면 정규직으로 채용할게요. 급여는 대리급. 연봉으로 치면 5500 정도에요.
어때요?”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라니...


급여가 높은 것도 마음에 들지만 이젠 목에 걸린 사원증이 언제 떨어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하던 일은 계속하고 이건 부가적인 일인 겁니까?”


“맞아요.”
“알겠습니다.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네요.”
“이형준 본부장하고 만날 때는 비서실 소속이라고 밝히면 돼요. 명함은 모레 줄테니까 그 이후에 만나보도록 해요.
그리고 명심해야 할 건 돈을 회수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냥 순순히 물러나도록 하세요.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니까.”
“성질 건들지 말라는 말이죠?”
“그래요. 그럼 나머지는 연희에게 듣도록 해요.”

희미한 미소를 보인 송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희도 따랐다.

“벌써 가려구?”
“넌 이 친구 도와줘. 어차피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어쩔 수 없어. 네가 수습해야 해.”

어찌보면 냉정할 수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송은채 사장이 나가자 연희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영훈은 말없이 남은 음식을 먹었다.
대략 5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연희가 입을 열었다.

“입맛에 맞으니 다행이네요.”


“솔직히 배부른데 가만히 있기 뭐해서 먹고 있는 겁니다.”
“작년 말쯤에 힐튼호텔에서 파티가 있었어요. 보통 연말이 되면 호텔에서 파티를 하는데 그렇다고 뭐 엄청 대단한
재벌 3 세들이나 오는 그런 파티는 아니에요. 다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호텔이 정기적으로 파티를 여는걸 모르고
파티에 참석한다고 하면 10 만원 내외의 비용이 부담 되는지 잘 참석하지 않아서 대개 있는집 자식들만
참석하죠.”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이형준 본부장을 거기서 만났어요.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인가? 많더라구요. 얼굴도 제법 괜찮게 생겼고 매너도
있고... 사귀자더라구요. 뭐 이런 일이 한 두번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솔직히 갈등했어요. 이형준 본부장이
신영금융그룹 회장의 손자거든요. 그것도 하필 장남.”
“오호~ 갈등할 만 한데요?”
“그러니까요. 흐음... 몇 번 만났어요. 근데 나 너무 속물인가요?”
“남자는 여자 외모 보고, 여자는 남자 경제력을 보는게 자연스러운겁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내가 왜 변명해야하는건지 모르겠는데 변명 하나만 하자면 상대방이 경제력이 너무 없으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쪽에서 기가 죽어요. 괜히 미안해하고 자격지심 때문에 별것도 아닌 걸로 화내면서
무시하냐고 하고. 하나같이 끝이 좋지 못했어요.”
“굳이 뭐 나한테... 그런말 안해도 됩니다.”

연희는 슬쩍 영훈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했다.

“그냥 그렇다구요. 어쨌든 그렇게 몇 번 만나다가 연초에 친구들하고 같이 파티를 하는데...”


“파티 참 자주 하네요?”
“말이 파티지 그냥 모임이에요. 앞에 간식거리 있고 와인 있고 그러면 파티인거지.”
“알겠습니다. 계속해요.”
“제 친구들도 있고 형준 오빠... 뭐 하여튼 그 사람 친구들도 같이 있는데 정말 우연히 그 사람이 서빙하는
여직원의 다리를 힐끔거리는 장면을 목격했던거죠. 그냥 한번 슬쩍 보고 만 것도 아니고 계속 힐끔거리는거...
솔직히 한눈에 반하고, 내 사랑이고, 이런 감정으로 만나는건 아니지만 그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으면 이상한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래서 꺼지라고 했어요.”
“네? 중간과정이 있을거 아닙니까?”
“없어요. 재수 없으니까 나가서 그 여직원이나 꼬시라고 했죠. 뭐 오해다, 잘못 본거다, 헛소리를 해대길래
조금 강하게 말했죠.”
“강하게 어떻게요? 욕이라도 했습니까?”
“따귀를 때렸죠.”
“아...”

역시 요즘 좀 성질을 죽이고 있는 것 뿐이지 타고난 성격이 어디 가는게 아니라는걸 다시 한번 느꼈다.


연희는 부끄러운지 시선을 돌렸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났나봐요. 쪼잔하게...”


“알겠습니다. 할 얘기 다 하신거죠?”
“왜요? 가게요?”
“그럼 더 있습니까?”
“아니... 뭐 궁금한거 더 없어요?”
“시간 늦었습니다. 나도 가서 쉬어야죠. 내일 자료 가지고 회사 나오시면 됩니다.”
“무슨 자료요? 아! 이형준 본부장의 생년월일 말하는 거죠? 그것 뿐이면 되나요?”
“그거 가지고 되겠습니까? 혜성기업이라는데가 뭐하는 회산지, 왜 신영투자증권이 가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요?”
“가장 중요한 거. 혜성기업 오너의 사주를 가지고 오세요.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오세요.
그거 없으면 안 됩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먼저 호텔을 나섰다.


연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거실에서 치즈 몇 조각과 와인을 들고 있는 송은채 사장에게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왜 그런 일을 저 사람한테 시키고 그래? 법무팀이나 로펌에 맡겨야지.”


“말했잖아. 해결 안 됐다고.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다 너 때문이야. 너 속좁은 남자가 한 번 여자한테 삐지면
그것만큼 치사하고 짜증나게 하는 일이 없는 거 모르니?”
“그건 그런데... 그럼 영훈 씨는 그걸 해결할 수 있다는거야?”
“그럼 네가 그 놈이랑 결혼이라도 할래? 쪼잔한 성격 보니까 너 결혼해서 맞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아니다. 그때
여직원 훔쳐보고 있었다며? 맞지 않으면 일년에 여자가 서너명씩 바뀌는걸 현장관람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얘기가 아니라... 그런데 말이 안 되잖아.”
“너 저 친구가 네 삼촌이랑 일할 때 얼마나 희한하게 일을 해결했는지 모르지? 나도 그때는 그냥 과장한다고
생각해서 걸러 들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어.”
“이형준 그 인간이 진짜 진심으로 그러는 걸까?”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꺼내 본거야. 그 친구가 어려울 것 같다고 거절하면 그냥 보낼
생각이었는데 아까 봤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단 한 순간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어. 단 한 순간도. 그냥
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거 있지? 신기하지 않니?”

송은채 사장은 와인잔을 들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만약 진짜 해내면 어떡할거야?”


“어쩌긴 보너스라도 왕창 안겨주고 회사에 꼭 붙잡아 둬야지.”

< 알바? 부업? 투잡?(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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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부업? 투잡?(3) >

“보너스요? 난 보너스 관심 없는데.”

다음날, 출근한 영훈은 연희가 보너스 이야기를 꺼내며 전의를 북돋으려는 마음을 왕창 깨뜨렸다.

“왜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돈은 훨씬 쉽게, 많이 벌 수 있습니다. 돈만 생각했으면 대기업 안 왔어요. 명일금융에서
못 갚은 돈 받아내고 있었지.”
“아니면 돗자리를 깐다거나 하겠죠?”
“...”

굳이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희는 궁금한지 몸을 조금 더 다가가며 물었다.

“이제 어떡할거예요?”

바짝 다가오는 연희를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가서 애먼 회사 괴롭히지 말고 본인 인생 살라고 해야지. 준비는 해 왔습니까?”


“아니, 날 왜 밀어내요? 되게 기분 나쁘네?”
“채무자 정보나 내놔요.”

연희는 입을 삐쭉이다가 준비한 서류를 건넸다.

“일단 여기서 대화를 나누기는 그렇고 나가서 얘기해요.”


“그럽시다.”

연희는 회사를 나와 스터디룸을 빌렸다.

“이런데 처음 와보죠?”
“나도 인터넷 합니다. 이런데 있는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와보는건 처음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거 지금 촌놈 취급하는 거 아닙니까?”
“으흥~ 발끈하니까 좀 귀엽네. 일단 서류 봐봐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준다고 해도 당신이 본 내용을
내가 다시 설명해주는게 이해를 더 쉽게 할거예요.”
“그러죠.”

영훈은 찬찬히 내용을 살폈다.


혜성기업은 건설업체로 토목, 건축, 플랜트 3 개 분야를 주력으로 삼고 있었다.
민간부분으로는 아파트 건설을, 공공부분으로는 도로, 항만, 철도 등 정부 발주를 받는 혜성기업은
시공능력평가액이 7 천억으로 국내 도급업체 39 위 건설업체인 것으로 나와 있었다.
찬찬히 살펴본 다음 물었다.

“이게 왜 신영투자증권에 손에 들린 겁니까?”


“정확히는 신영투자증권이 아니라 신영은행이에요. 2015 년에 혜성기업이 미분양 사태가 크게 오면서 실적악화로
워크아웃에 들어갔어요. 당시 주 채권은행은 신영은행이었고 신영은행에서 워크아웃을 주도했는데 사실 지금까지
실적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예요.”
“아이고...”
“이미 가지고 있던 부동산들 몇 개를 처분했는데도 작년에 또 미분양 크게 나면서 당기순손실이 2 천억이 넘게
났어요. 부동산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고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끌어다 쓴 자금 때문에 매달 내야 할
이자만 20 억이 넘어요. 회사를 살리려면 최소 천억 넘는 자금이 투입되야 숨통이 트일 거예요.”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까?”
“올해 말에 창원에서 850 세대 아파트 단지가 입주를 앞두고 있어요. 지금 창원지역 부동산 시세 어떤지 혹시
알아요?”
“모릅니다.”
“망했어요. 수도권 제외한 부동산 시세는 전부 안 좋은 추세인데 그 중에서도 창원은 엄청나게 하락한 지역이라
입주율이 얼마나 될지 확신하기 힘들어요.”

영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해도 신입사원이잖아요.”

연희가 살짝 민망해하며 말했다.

“사실 아침에 비서실 직원한테 브리핑 받았거든요.”


“아... 그럼 결론을 내보면 돈 빌려준 회사가 망하니까 어쩔 수 없이 떠맡았고 어떡해서든 잘 키워서 내보내려고
했던 회사가 살아나기는커녕 오히려 망하기 일보직전에 왔다. 그걸 우리 회사에 떠넘기려고 한다?”
“인수제안금액이 3500 억이에요. 미래가 없는 기업을 수천억을 받고 팔면 신영그룹에서 이형준 본부장의 입지는
엄청나게 올라갈 거예요. 솔직히 난 그 남자가 정말 나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에 대한 분노는 그저 명분이다?”
“내 생각은 그래요. 그러니까 투자증권의 일도 아니라서 자기가 실적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는데 갑자기
저러는게 아닐까요? 게다가 내가 사람을 볼 줄 몰라서 그런 걸수도 있지만 웬지 그가 나한테 엄청 반했다는
느낌은 안 들었어요. 모르죠. 티를 안 냈을수도 있고...”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이긴 했다.


다만...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엄청 반했으면 딱 알아챕니까? ‘아, 이 인간이 완전히 나한테 껌뻑 넘어갔다’, ‘나
아니면 죽겠구나’, 뭐 이런거.”
“지금 나 놀리는거죠?”
“진짜 궁금한건데... 크흠.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 악성채권같은 회사를 넘기려고 하고 이걸 우리가 안 받으면
회사 주식을 다른 곳에 넘기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인거죠?”
“당연히 대놓고 협박은 아니에요. 계속 운만 띄우고 있을 뿐인 거지. ‘우리 손에 니네 주식 5%가 있는데 이걸
누구한테 팔면 좋을까?’하면서 계속 약올리는 중이니까. 아... 근데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막막하네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
“그럼 한번 가서 말해봐요. 결혼해주겠다고.”

연희가 빽 소리지른다.

“미쳤어요?”
“아니...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면서요? 그럼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하... 진짜 절망스러운건 정말 그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회사를 고모한테 넘길수도 없고, 그
인간과 결혼할 수도 없고... 가능할까요?”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다른 준비한 거나 보여주세요.”

연희는 어두운 표정으로 따로 챙겨온 종이를 영훈에게 건넸다.

“이건 비서실에서 알아온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그러니까 내가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가지고 온


거예요. 이건 이형준 본부장 거고, 이건 혜성기업 구도욱 사장 거예요.”
“태어난 시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와요?”
“아니...”
“없으면 안 되죠?”
“당연히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지금 출장중이라 태국까지 따라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그쪽 집안이 사주나 무당을
좀 찾는 집안이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난감했다.
이형준 본부장이야 만나면 어찌어찌 알아낼 수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기업오너의 사주를 모르니 답답했다.

“그럼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그냥 회사로 찾아가서 협상하면 되나요?”


“어떻게 하길 원해요?”
“회사로 찾아가면 이야기가 무겁게 되지 않겠습니까?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가 불리하니까 그냥 가볍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연희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번주 토요일에 이형준 본부장의 사촌누나 결혼식이 있어요.”


“그럼 재벌 3 세 결혼식이겠네요? 온갖 경제인들이 다 참석하는...”
“맞아요. 신영금융그룹 회장 손녀의 결혼식이라 재계 거물들이 상당히 모일 거예요. 원래는 청첩장이 없으면 못
들어가지만 당신은 나랑 같이 가니 참석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주말에 가서 만나 봅시다. 상대를 알아야 어떻게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으니까. 아, 이형준 본부장 가족에
관한 것도 같이 준비해주세요. 아버지나 어머니나, 혹은 할아버지까지. 혹시 모르니까.”
“알겠어요. 그런데 꼭 구도욱 사장게 필요해요? 정말 필요하면 태국에라도 나가서 물어볼까요?”
“됐습니다. 어떻게 물어보려구요. 본인이 몇시에 태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됐습니다.”
“그런데 기업 오너의 사주가 왜 필요해요? 이형준 본부장을 설득하는 게 목적이잖아요.”

영훈은 연희가 준 서류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전 아직 모르는 게 많고 배울 게 많아서 이 서류를 보고 이 회사가 망했는지, 앞으로 희망이 있는건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만약 사주에 망할 것 같지 않으면요?”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
“일단 다시 한번 알아보도록 시켜볼게요.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그럴 생각입니다.”

영훈은 찝찝한 마음으로 계속 서류를 뒤적였다.

그렇게 간단히 회의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 둘은 서가은 협찬 건과 뉴월드 백화점 입점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까지 빡세게 일하고 난 토요일, 연희는 영훈을 붙잡고 신라호텔을 찾았다.

“차 좋네요?”
“내 애마예요. 눈치 때문에 회사엔 못 타고 오지만.”

그녀가 타고 온 차는 모델명까지는 정확히 몰라도 포르쉐는 확실했다.


한때 속세로 내려오면 저건 꼭 타고 싶다고 바랐던 차인데 타보니 정말 근사하긴 했다.
“그런데 이사 안해요?”
“보기 그렇습니까?”
“난 정말 괜찮아요. 당신은 내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시한다고 했지만 솔직히 당신 능력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니까 무시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거죠. 단지 고시원에 있으면 사람들이 무시하니까... 솔직히 나만 그런
생각하는게 아닌 거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적당한 시기에 대출 받아서 옮길 생각입니다.”
“아, 대출...”
“대출을 받아야만 고시원을 벗어날 수 있다는게 쉽게 이해가 안 가죠?”
“아니에요.”
“여태껏 그렇게 살았으니까 쉽게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겠죠. 난 또 뭐 집이라도 구해주는줄 알았습니다.”
“구해주면 받을 거예요?”

농담으로 한 말에 그녀가 왠지 진담으로 받는 것 같자 영훈은 말을 돌렸다.

“어느 정도나 준비 됐습니까?”


“역시 구도욱 사장건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알아보니까 점 같은 건 믿지 않는 집안이래요.”
“으흠... 다른 분들은요?”
“이형준 본부장 가족들은 전부 알아왔어요. 그런데 태어난 시각은 할아버지인 이경호 회장밖에 몰라요. 대기업
회장 사주라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몇몇 있잖아요? 거기에 이경호 회장도 끼어 있더라구요.”
“가면 이형준 본부장한테 그냥 자연스럽게 인사해요. 그리고 혹시 가족이 보이면 굳이 꺼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가족도요?”
“사주라는 게 본인 혼자만 본다고 다 알 수 있는게 아닙니다. 가족중에 누구라도 보게 되면 훨씬 더 깊이 볼 수
있죠.”
“알겠어요.”

호텔 예식장 입구에서 청첩장을 보여주며 들어가니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 긴 통로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꽃이 저 멀리 보이는 신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재벌들의 결혼식이라 솔직히 조금은 껄끄럽고 괜시리 베베꼬인 속으로 왔는데 막상 처음으로 결혼식이라는걸 보니
그런 생각들은 다 날아가버리고 그냥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뭘 그렇게 봐요?”
“아, 별거 아니에요. 갑시다.”

연희와 영훈이 수 많은 원형테이블 중 빈자리에 자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이 놓여진다.


식사를 하면서 결혼식을 보는 시스템인 듯 했다.

“다른건 모르겠고 여기 결혼식때 나오는 스테이크는 먹을만 해요.”

그녀의 말처럼 스테이크는 무척 맛있었다.


축의금을 내지 않은게 미안할 만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주례사가 끝나자 결혼식의 끝이 보였다.
신랑과 신부의 그림같은 키스가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들 결혼식에는 관심 없어요. 어차피 신영금융 이세준 부회장이나 오늘 참석한 사람들과 인맥을 넓히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또는 각자 다른 목적이 있거나.”
“우리처럼요?”
“맞아요. 그리고 우리랑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이 저기 오네요.”
연희가 웃으며 시선을 한곳에 두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훤칠한 남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큰 키, 날렵한 몸매까지 완벽에 가까운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왔구나.”
“어. 오랜만이네?”
“그러게. 그 때 이후로 얼마만이지?”
“한... 넉달 지났나? 그때 내가 좀 미안했어. 원래 내가 흥분하면 앞뒤 안 가려서.”
“손 맵더라. 그 때 그 얼얼한 감각이 사흘을 가더라고. 나 여기 앉아도 되지?”

그는 말하면서 대답도 듣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마침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한창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자리를 떠난 상황이라 원형 테이블에는 셋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분은...”
“안녕하십니까.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영훈이 손을 내밀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악수를 하고 싶지 않은 모습에 손을 슬쩍 거두려는데 연희가 말했다.

“악수 안해?”
“아니, 그냥 당황해서 그랬지.”

이형준은 마지못해 영훈과 악수했다.

“비서실 직원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사적인 얘기를 해야 우리의 엉클어진 매듭을 풀 수 있을까? 아니면 공적인 얘기를 해야 풀 수 있을까? 종잡을
수가 없지 뭐야.”
“하하하! 그랬어? 그런데 공적인 얘기로는 어렵다는거 알지 않아? 내가 근 2 주일간 너희 회사 사람들하고 몇
번이나 미팅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던데? 이야기는 깨진거 아니었어? 난 그렇게 알고 있었지.”

능글맞게 다 끝난 얘기를 뭘 꺼내냐는 식으로 찔러본다.

“이거 왜이래? 우리 이야기 이리저리 돌리지 말자. 서로...”

연희가 말을 이어갈 때 키가 작고 옆으로 딱 벌어진 체격의 남자가 다가와 이형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왠일로 이런 미인과 대화하고 있는 거냐?”


“어? 아버지?”

알고 보니 이형준의 부친이었나보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그는 한 기업의 오너가 아니라 체육관 관장이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이긴 했다.
물론 관상은 그렇지 않았지만.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


“안녕하세요. 임지훈 사장님이 저희 아버지 되십니다.”
“아~ 임 사장 딸이구만. 임 사장은 어때? 몸은 괜찮고?”
그는 다가와 연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악수를 나눴다.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병원에서 회복중이십니다.”


“건강한 친구라 곧 털고 일어설거야. 그런데 우리 형준이랑 인연이 있었나봐?”
“예전에 몇 번 만났었습니다.”
“오호, 그래? 여기 이 친구는 어떻게 되지?”

그는 영훈에게 손을 내밀며 어느 재벌가의 자제인지 탐색하려는 듯 했다.


영훈은 얼씨구나 손을 맞잡고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비서실? 비서실에서 여길 왜 왔나?”

그는 조금 당황해하며 슬쩍 손을 뺐다.
어디 일반 직원이 자신의 손을 잡느냐는 듯 노한 눈빛이 살짝 엿보였지만 영훈은 신경쓰지 않고 대답했다.

“이형준 본부장님께서 혜성기업에 대한 인수의향을 여쭤보셔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찾아왔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은 형준을 슬쩍 쳐다보고는 연희에게 미소를 보였다.

“이거 업무 이야기에 눈치없이 끼어들 뻔 했구만. 그럼 이야기 잘들 나누시게.”

그가 자리를 떠나자 연희가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은 모르시는 일이신가봐요? 은행에서 가진 혹을 대신 나서서 우리에게 던지려고 하는데 굳이 떠벌릴


것도 아니겠죠?”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안 받는다며?”
“그럼 우리 주식 가지고 협박은 하지 않았어야죠.”
“난 협박한 적 없는데? 그냥 더 많은 돈을 주는 곳에 넘길 수 있다고 했을 뿐이야. 그 정도 말도 못하나?”

연희는 할 말이 없어 옆의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영훈은 고개를 떨구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이형준은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야?”


“아, 미안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뭐야, 원래 이렇게 일해?”

형준이 연희에게 뭐 이런 놈이 있느냐는 눈빛을 보냈을 때 영훈이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현진물산의 주식을 우리에게 양도할 것. 그러면 혜성기업의 인수를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인수를 고려해보겠다? 당신 뭔가 굉장한 착각을 하는거 아니야? 우린 당신네들이 안 사겠다면 안 팔면
그만이야.”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형준 본부장님, 본부장님은 우리한테 주식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쯤되니 연희도 당황해 영훈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왜 그래요? 주식을 넘겨 받는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영훈은 그녀의 말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내가 왜?”
“그렇게 하는게 본부장님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테니까요.”
“이런 미친 새끼가...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
“부회장님과 참 다르십니다. 키도 크시고 굉장히 미남이시고... 어머님이 미인이신 것 같네요. 아, 동생은 좀
다른가요?”

이형준 본부장은 떨리는 눈동자로 와인잔을 움켜쥐었다.

< 알바? 부업? 투잡?(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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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부업? 투잡?(4) >

“시세는 현재 시장가인 15,500 원 합시다. 거절하려면 미리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건을


받아들이시겠다면 여기 연희 씨를 통해 알려주시면 재무팀과 협의를 통해 적당한 시기에 매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할 말 있으신가요?”
“...”
“없군요. 알겠습니다. 친척분의 결혼식 축하드립니다. 신부되신 분이 정말 아름다우시더라구요. 진심입니다.”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희도 얼결에 따라 일어섰다.


이형준 본부장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두고 호텔을 나와 연희의 차에 타자 그녀가 속사포 쏟아지듯 질문을 쏟아냈다.

“주식을 왜 산다고 했어요?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 인간이 저렇게 놀래요? 설마 우리한테 현재
시장가에 팔거라고 생각해요?”
“거 운전에 집중합시다.”
“아니... 집중하고 있으니까 천천히 말해봐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에 한번 말했는데 본래 사주를 볼 때 중요한 건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그랬죠.”
“그런데 이형준 본부장은 운명보다 성격이 조금 더 중요했습니다.”
“왜요?”
“재벌 3 세로 태어났으니 재복이야 말할게 없고 흉살이 들어와 투옥되거나 일찍 죽지 않는 이상 당장 그의 사주로
뭔가 특별한 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연희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벌 3 세의 사주가 특별하지 않다구요?”


“거 참, 재벌 3 세 사주가 특별하다는 게 아니라 초년에 큰 사고 없고 중년에 타고난 재복으로 큰 문제 없이 사니
별다를 게 없다는거지 사주 자체가 특별하지 않다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지만 당신만큼이나
기구하기도 해요. 그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구한 사연은 당연히 말해주지 않겠죠?”
“말해야 할게 있다면 말해주지만 지금 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면 당신이 알 자격은 없습니다.”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그럼 계속 얘기해봐요.”
“주식을 사라고 한건 이형준 본부장의 타고난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야심이 많은데다가 욕심이 과하게
많습니다. 관상으로 보면 코 끝이 아래를 덮는 것만 봐도 그의 집착을 알 수 있는데 한 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상대방을 괴롭힙니다. 어찌보면 잔혹하다고 할 수 있죠.”
“어... 그런 사람이었어요?”
“섬뜩하죠? 그런 사람의 뺨을 후려갈겼으니.”

연희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긴장감을 쓸어내렸다.

“그래서요?”
“내가 뭘 안다고 우리가 주식을 산다고 했겠습니까? 회사 자금 사정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살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데도 아까 그런 얘기를 한 건 주식을 가져 와야지만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번 만큼은 운명보다 성향이 중요하다고 한 겁니다.”

연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만약 현재 시세로 주식을 다 매입할 수 있다고 하면 회사에서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다. 나도 잘 모르네요. 회사 유보금이 정확히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가장 중요한 거. 아까
그 인간한테 한 이야기는 뭐예요?”
“대략 눈치 채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음... 일단 말해주기 전에 확답을 하나 받겠습니다.”
“뭔데요?”
“지금 듣는 이야기는 절대로 먼저 입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약속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요, 엄마가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물어보면 일의 진행과정을 설명해야 할 것
아니에요?”
“설명하지 마세요. 만약 그가 이 정도에서 주식을 넘기고 넘어간다면 연희 씨도 그에 대한 일은 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요?”

영훈은 별게 다 걱정이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결과가 중요한거 아닙니까? 우리한테 주식 넘겨준다고 하면 받을지 안 받을지 위에서 결정할 문제고
인수하라는 말을 안 해주면 감사한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야 하잖아요?”
“모른다고 하세요. 그냥 내가 알아서 했다고.”
“하... 엄마가 그럼 알겠다고 하면서 넘어가겠어요?”
“넘어갈 겁니다. 자꾸 하기 싫은거 시키면 회사 나갈려니까.”

연희는 어이가 없는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우고는 빽 소리 질렀다.

“무슨 퇴사한다는 소리를 그렇게 가볍게 해요?”


“회사는 직원들 짜른다는 소리는 쉽게 하면서 직원이 나간다는 소리는 쉽게 좀 하면 안 됩니까?”
연희는 움찔하다가 기어가듯 중얼거렸다.

“요즘 세상이 변해서 회사에서 직원들 쉽게 못 짤라요.”


“나 아직 인턴입니다. 정규직 아니에요.”
“그 말 빨리 정규직으로 해달라는 소리로 들리는건 저의 착각인가요? 난 왜 그렇게 들리죠?”
“기분 탓입니다.”
“진짜 나갈거예요?”
“그거야 당신 하기 나름이죠.”
“와~ 이걸 나한테 돌린다구요?”
“그래서 약속 하실겁니까? 안 하실겁니까?”
“할게요.”

또 이러니 저러니 꼬투리를 잡을 줄 알았는데 불만이 가득한 표정임에도 재빨리 대답한다.

“좋습니다. 전에도 얘기했겠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본인 사주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사주 역시
중요합니다. 특히 금수저로 태어난 당신 같은 사람들은 부모 사주가 굉장히 중요하죠.”
“그 금수저 이야기는 그만하면 안 될까요? 꼭 내가 죄 지은 것 같잖아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누구는 못 생기게 태어나고, 누구는 똑똑하지 못하게 태어납니다. TV 예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못 생겼다, 멍청하다 놀리는데 그깟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하는 걸로 상처를 받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연희는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그게 뭐가 대수라고... 계속하세요.”


“세상에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처럼 재복, 인복, 처복, 자식복 등등 다 가지고 타고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재벌들 역시 마찬가지죠. 이세준 부회장은 자식복이 없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주에 자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연희는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몰던 차를 다시 길가에 세우고 물었다.

“이세준 부회장 아래에 아들 하나, 딸이 둘이나 있어요. 그런데 자식 복이 없다뇨?”


“자식복이 없는 사람들은 의외로 꽤 많습니다. 자식이 불효하거나 단명해도 자식복이 없는 것이며 아예 자식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그게 재벌 2 세라 놀라는 거지만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럼 이형준 그 인간이 이세준 부회장의 자식이 아니라는 건가요?”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은 사주에 자식이 하나 있는데 아내는 사주에 자식이 셋이 있을 때, 그럴때는
자식이 셋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사주에 자식이 아예 없을때도 간혹 아이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궁합이
아주 좋다면 말이죠. 그래서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데 이세준 부회장과 이형준 본부장의 생김새가 너무도
달랐습니다.”

연희는 간혹 이런 개막장 집안의 이야기를 가끔 들어 왔기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영훈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건 조금 신기하긴 했다.

“아... 이해했어요.”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더군요. 아마 내가 제시한 조건을 따를 겁니다.”
“확신해요? 이미 그가 알고 있었다는거?”
“내가 한 말이 헛소리라고 확신했으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조용히 넘어가겠습니까?”
“어?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만약 경찰이라도 불렀으면 어쩔 뻔했어요?”
“조용히는 있지 않더라도 경찰은 못 부릅니다.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다만 이렇게 쉽게 보내진
않겠죠. 어쨌거나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습니다. 전 인사과에서 연락만 기다리면 되는 거겠죠?”
“정규직 전환 연락 말하는거죠?”
“당연한거 아닙니까?”

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를 출발시켰다.

“이형준이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어떻게 하려고 생각중이에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말했듯이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거든요. 결코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건드려봤자 이득 볼 것도 없을테고. 아, 전 저기 전철역에서 세워주세요.”
“집까지 태워 줄게요.”
“괜찮습니다. 갈데가 있어서요.”
“어디요?”

영훈이 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궁금해합니까? 누가 보면 여자친군줄 알겠는데요?”


“할말이 없게 만드시네. 알겠어요. 내려줄게요.”

그렇게 영훈은 연희 차에서 내리곤 털레털레 지하철 역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부터 극장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영훈의 발걸음에는 설레임이 가득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결혼식 갔다왔다면서 왜 말이 없어?”

송 사장의 물음에 연희는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몰라 엄마. 할 건 하고 왔으니까 더 이상은 묻지 마.”


“왜? 잘 안 됐니?”

차라리 잘 안 됐으면 하소연을 하든 회사를 포기하자고 하든 할텐데 차마 입을 뗄 수 없으니 연희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잘 안 된건 아니야. 이형준 본부장 만나서 영훈 씨가 이야기 잘 했어.”


“너는 뭐하고?”
“난 빠져 있었지.”
“둘이서만 이야기하게 뒀다고?”
“괜찮아. 영훈 씨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리고 물어보니까 알아서 잘 해결했대.”

연희는 본인이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둘이 잘 해결했다고? 진짜?”


“응.”
“그래? 알겠어. 그럼...”

연희는 자기가 한 개소리보다 그걸 빠르게 수긍하는 엄마의 모습이 더 황당했다.

“진짜 알겠는거지?”
“네 삼촌도 그랬단다. 돈을 어떻게 받아왔냐고 물으니까 그냥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잘 해결해서 받아왔다고
했다는거야. 내가 말했지? 얼마나 황당하게 일을 했는지. 그런데 둘이 잘 해결했다고 하니 뭘 하긴 했겠지.
알겠어. 쉬어라.”
“우... 난 요즘 내가 바보가 된 거 같아.”

연희는 얼른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송 사장은 연희의 뒷 모습을 지켜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신영투자증권 이형준 본부장 상황 지켜봐요. 다른 움직임이 있으면 보고하고.”

송 사장은 이상하게 이번 일이 쉽게 마무리 될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강남의 한 일식집.

“아이고 반갑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오늘 결혼식은 잘 치르셨습니까?”

차지열 상무는 어두운 얼굴로 들어서는 이형준 본부장을 보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별거 아닐 거라고
여기곤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사촌 결혼식이라 제가 뭘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적대감에 차 상무는 양손을 저으며 오해하지 말라는 말투로 말했다.

“본부장님께서 우려하시는 것 때문에 뵙자고 한 건 아닙니다. 본부장님의 생각을 적극 찬성하는 쪽이니까요.”


“혜성기업 인수를 찬성한다구요?”
“솔직히 혜성기업은 이제 쭉정이 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관심있는건 신영에서 가지고 있는 현진물산의
주식입니다.”
“우리라... 상무님이 말하는 우리가 어디입니까?”
“그야 현진물산의 주인 아니겠습니까?”

이형준 본부장은 차 상무의 애매한 대답에 팔짱을 끼고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뭘 말씀하시는 건지...”
“됐습니다. 오늘 자리는 큰 의미가 없겠어요.”

형준이 식사도 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 상무는 당황했다.

“제가 모르는 상황이 있는 겁니까?”


“모르는 걸 보면 앞으로도 당신은 알 수 없게 되겠군요. 송 사장이 다른건 몰라도 입은 무거워 다행입니다.
아니면 당신을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어쨌든 둘 다 내가 당신을 신뢰할만한 이유가 되지
못하겠군요.”

한 마디로 차 상무를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해버린 이 본부장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곤 나가버렸다.


차 상무는 뒤통수를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 알바? 부업? 투잡?(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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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진 불도 다시 보자(1) >

송은채 사장은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장인 홍승대 실장으로부터 당황스러운 소식을 듣게 됐다.

“신영투자증권에서 현진물산의 주식을 인수하겠냐고 타진해 왔습니다. 15,500 원으로 말입니다.”

홍승대 실장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기가 힘든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치를 보았다.

“15,500 원? 현재 얼마죠?”
“동시호가 16,300 원에 걸린 것까지 확인했는데 9 시에 얼마로 시작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의 시장가나 마찬가지네? 조건은?”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혜성기업을 인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를 가볍게
물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며칠 전만해도 당장이라도 혜성기업을 인수하지 않으면 우리 지분을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에게 넘기겠다고 이리저리 돌려 말하면서 협박했었는데, 뭔가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 그게 뭘까요?”
“그건... 일단 임원 회의 소집할까요?”
“아니요. 그럴필요 없어요. 재무팀 오재식 상무만 불러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어떤게 남았나요?”
“혜성기업을 인수할거냐고 의향을 물어본 것은 어떻게...”

송 사장은 당연히 거절한다고 말하려 하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애초에 이형준 본부장과 협상할 때 거절한다고 말하면 됐을 일인데 이 결정을 다시 자신에게 넘겼다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혜성기업의 미래가 없다는건 연희를 통해 수차례 이야기했을게 뻔했는데 말이다.

“그건 일단 넘어가죠. 주식 회수에만 집중해요.”


“알겠습니다.”
“이형준 본부장, 주말에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사촌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걸 제외하곤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송은채 사장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토요일 결혼식에서 연희와 그 신입사원이 담판을 짓고 왔는데 비서실 실장이 특이한 점이 없다고 하니 답답할
수밖에.
그렇다고 뭐라 하기에도 뭐한 것이 비서실 직원들이 심부름센터도 아니고 어느 대기업 정보팀처럼 국정원 뺨때리는
수집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려려니 할 수밖에.

“알겠어요. 나가보세요.”

홍승대 실장이 나가고 송 사장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원인은 하나였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길래 이형준 본부장이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불러서 물어보고 싶지만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정규직부터 시켜주고 봐야 하나?”

“최영훈 씨. 인사과로 오라는데?”

이은성 사원이 자리에서 돌아보며 영훈에게 말했다.


혹시 무슨 실수한거 아니냐는 눈빛이었지만 영훈이나 연희는 이 소식이 무얼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넵! 다녀오겠습니다!”

영훈이 벌떡 일어나서 나갈 때 연희도 잽싸게 따라붙었다.

“벌써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하고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라 뭐가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왕 결정하는거 질질 끌지 않겠죠.
이제 이 문제는 내 손을 떠난 거니까 회사에서 묻지도 마세요. 난 아예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훈이 항복하듯이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따라올겁니까?”
“전 다른데 가려는 거예요. 인사과 가세요.”

연희를 보내놓고(?) 인사과에 들어선 영훈은 자신을 기묘한 표정으로 보라보는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오재준 대리는 이럴 리가 없다는 듯 똥씹은 얼굴로 영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찾으셨다고해서 왔습니다.”


“네, 여기로 잠깐 오실래요?”

영훈이 오재준 대리에게 다가가니 그가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인턴으로 입사할 때도 썼던 계약서인데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다시 쓰는 것 같았다.

“축하드립니다. 영훈 씨는 이제 현진물산 정규직으로 채용되셨어요.”

이토록 무미건조한 축하라니.


하지만 영훈은 그 메마른 축하가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어디서 몸 쓰는 일이나 하다가 결국 점이나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남들은 대기업에 합격하면 온 가족이 다 축하해주던데...
문득 엄마 생각이 떠올랐다.
무당이 된 엄마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영훈이 대기업 정규직이 된 걸 알면 어떤
기분일지...

“뭐해요?”
“아, 미안합니다. 여기 쓰면 되는 건가요?”
“네. 그런데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러세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 크흠... 도대체 사장님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그러니까 무슨 먼 친척이시라거나 아니면 회장님 일가의 장학금을 받으셨다거나...”

순간적으로 인사과에 정적이 흘렀다.


사르륵 하는 종이 넘기는 소리 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침묵.
영훈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사장님이 절 스카웃 하셨습니다.”
“스카웃이요?”

전에는 이 말을 하기 꺼려졌었다.
분명 송 사장이 스카웃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자신의 모습에 당당히 스카웃 당했다는 말을
못했는데 이번 일로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물론 인사과 직원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본다.

“네. 사장님께서 스카웃하셔서 능력을 보고 인정하시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능력을 뭔가 보여주셨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인사과 직원들에게 있어 진정 미스테리한 미소였다.


네까짓 것들은 알 수 없는 사장님과 나만의 비밀이 있다는 식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귀를 활짝 열어놓고 집중하며 듣고 있던 민홍기 과장은 빈 종이에 최영훈이라는 이름을 적고 동그라미를
연속해서 그렸다.
이전까지는 그냥 사장님의 치부일지도 모르는 신입사원에서 사장님의 비밀스러운 칼이 됐기 때문이다.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 미스터리한 칼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양철기 전무는 머리에 손을 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어, 왜?”
“영업팀 차지열 본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차 상무? 들어오라고 해.”

양철기 전무는 갑자기 들이닥친 차 상무 때문에 계속했던 고민을 날려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인사하며 들어온 차 상무.


업무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방으로 먼저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던 그였기에 양 전무는
궁금함을 참고 허허 웃었다.

“웬일이야? 자네가 내 방에 왔을 때가 작년 초에 우크라이나 건 때 이후로 처음이지?”


“맞습니다.”
“뭘 서서 얘기를 하고 있어. 앉아. 차 뭐줄까? 커피? 홍차? 내가 전에 영국 갔다가 홍차 기가 막힌거 사왔거든.
그거 한 잔 할래?”
“그럼 오랜만에 온 김에 귀한 거 맛보겠습니다.”

양 전무는 차 상무의 대답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차 상무도 너무 일에만 몰두했어. 좋은 거, 맛있는 거 먹어야 할 때야. 소연아! 여기 내가 아껴 먹는


홍차 있지? 그거 좀 타와.”
“알겠습니다.”

양 전무는 그렇게 허허 웃으며 차를 내놨지만 먼저 왜 왔냐고 묻지 않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이고 배고픈 자가 구걸하는 법이다.
부탁하는 사람과 부탁을 들어주는 관계가 확실해야 나중에 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차 상무는 영국에서 들여온 고급 홍차를 잠시 음미하고는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맛이 깊습니다.”
“내가 그래서 비싸게 주고 사왔지.”
“혹시 신영에서 날아온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뭐 말인가?”

방금 전까지도 그것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던 양 전무는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신영투자증권에서 혜성기업에 대한 인수제안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아~ 그거? 들었지. 아침에 그거 듣고 무릎을 쳤다니까. 그것 참 다행이지 뭐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차 상무의 물음에 양 전무는 미소를 싹 걷어내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마. 원하는 게 있으니까 찾아왔을 거 아니야? 나 떠보려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건 아니지? 적당히 간 봤으면 이제 패를 까야지, 계속 뭉개고 있다간 개평도 못 받고 쫓겨나.”
“흐음...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토요일에 이형준 본부장과 만났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차 상무 엉큼한데가 있었네? 그래서?”
“주식을 주십사 했는데 면전에서 하고 싶은 말의 반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양철기 전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주식을 달라 했다고? 구매자가 설마 임지은 사장인가?”


“현진그룹의 경영권 안정화를 위해 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현진물산이 아닌 현진그룹이라고 칭했다.


차 상무의 말은 역설적이게도 구매자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반대로 양 전무에게 자신이 누구 줄을 타고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시켰다.

“이거이거 내가 사람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부족했어. 차 상무에게 많이 배워야겠는걸?”


“그게 어떻게 전무님이 부족한 탓이겠습니까? 제가 그저 좀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죠.”

대놓고 임지은 사장의 라인을 탄 걸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패를 깐 셈이다.
“위험한 발언인건 알지?”
“어차피 전무님도 임지은 사장님에게 회사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해도 며느리보다 더 애착이 가는건 당연하지요. 게다가 임지은 사장님은 지금까지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지만 송 사장님은...”

말을 흐렸지만 결국 송은채 사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부에 불과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양 전무가 대놓고 송 사장과 반대라인을 타고 있는걸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좋아. 나도 빙 돌아가는 건 그만하지. 그래서 그 어린놈이랑 만나서 말 한마디 못했다는게 할 말 전부는 아닐


테고... 그 다음은?”
“신영에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모든 계획을 전면 철회할 거라고 은연중에 밝혔습니다.”
“전면 철회한다고? 확실해?”
“인수제안 철회 소식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이형준 본부장에게 송 사장님이 접촉한게 확실합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송 사장이 이형준 본부장의 목을 잡은 것 같습니다.”
“목을 잡았다?”
“네. 만나자마자 제가 송 사장 라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식사도 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목을 잡고 있다... 목을 잡고 있단 말이지...”

양 전무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회사 경영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양반이 어떻게 신영금융그룹 손자의 목을 잡을 수 있을까?

“전 사장님의 손이 닿았을까?”
“임지훈 사장님은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긴, 그 양반도 좀 고지식한 스타일이긴 하지.”
“아마 임지훈 사장님이었다면 신영그룹 회장을 만나 일을 처리해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럼 뭘까...”

이때 문을 똑똑 두드리며 비서가 들어와 양 전무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갔다.


비서가 나가자 양 전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재무팀 오재식 상무를 불렀다는데?”


“오 상무를요?”
“송 사장님이 사람 쫄리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네 그려? 재밌지 않나?”
“전무님은 재밌으신가 보군요.”
“원래 상대가 강해야 이겼을 때 짜릿함이 더 강해지거든.”

차 상무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바라보았다.


과연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 꺼진 불도 다시 보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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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진 불도 다시 보자(2) >
사흘 뒤, 영업 2 팀.
영국의 명품 브랜드 Nodri Clare 의 성공적인 런칭을 위해 여배우 서가은의 협찬을 이끌어낸 팀원들은 뉴월드
백화점의 입점 계약을 위해 발바닥에 땀나게 뛰는 중이었다.
특히 어제 서가은이 드라마 종방연에 참석하며 들고간 가방이 SNS 를 타고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뉴월드
백화점쪽에서도 긍정적인 신호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형석 대리는 크리스마스 전인 12 월 5 일에 뉴월드 백화점 1 층 쥬얼리 브랜드의 입점 계약이 종료될 때 맞춰
들어가겠다고 벼르며 준비중이었다.
이번 입점 계약을 성사시키고 성공적인 매출을 올리고 브랜드를 정착시킨다면 향후 기대 매출은 연 100 억여원.
단번에 과장으로 진급하며 영업 2 팀의 팀장으로 정식발령을 받을게 분명했다.
그런 팀의 분위기에 맞춰 일에 열중하는데 맞은편 영업 1 팀의 사원이 갑자기 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그리고 그때부터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뭐야? 이거 진짜야?”

영훈도 뭔가 해서 반쯤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는데 옆자리 연희가 슬쩍 소매를 잡는다.


그리고 자신의 화면을 가리켰다.

[현진물산, 신영투자증권에서 현진물산 지분 5% 매입]

“아, 이것 때문에?”

연희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영훈을 데리고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이게 다 당신 덕분이에요. 이제 엄마의 부담이 훨씬 줄었거든요.”


“그건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다들 동요하는 겁니까?”

그냥 놀라는게 아니라 다들 수군거리며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특히 팀장급 이상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당신 같은 신입사원들은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임원을 앞두거나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과장급 이상은 이제 누구


라인을 타야 하는지 결정해야 할 시기예요. 그런데 이번 주식 매입으로 엄마의 경영권이 안정화 되면서 기존의 양
전무 라인이나 중립을 지키던 사람들이 동요하게 된거죠.”
“으음...”

영훈이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들자 연희가 물었다.

“혹시 누구 라인을 타야 하는지 고민하는거 아니죠?”


“나도 이제 정규직입니다. 사내 정치에 끼어들 자격 있어요.”
“허...”

연희가 황당한 듯 헛웃음을 터뜨리자 영훈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과연 차 상무님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네요.”


“반대로 납작 엎드리려고 하지 않을까요? 이번 일로 운신의 폭이 더 좁아졌을 텐데?”
“내 예상대로면 그래서 더 움직이려고 할 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사장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럼 그 스스로가 견디질 못할 걸요?”
“뭘 그렇게 못 견딜까요?”
“그냥 그 사람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이 위에 있는 것 자체가 힘들 겁니다. 어떻게 될지 지켜보면 알겠죠.”
“그건 그렇고 엄마가 혹시 받고 싶은 게 없는지 물어보랬어요. 이걸 고작 정규직으로 올려주는 걸로 퉁칠 수는
없으니까. 보너스는 특별상여금으로 처리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처리해줄 수도 있대요.”

아무래도 금액이 적으면 회사돈으로 처리하고 큰 금액을 달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줄 모양인 것 같았다.

“됐습니다. 돈은 필요 없어요.”
“우움... 이럴 것 같아서 생각해놓은 게 있는데. 혹시 이건 어때요? 내 이름으로 된 오피스텔이 몇 군데 있는데
지금 한 군데가 공실이거든요. 그거 쓰실래요?”
“어째 내용이 좀 이상한데, 나만 느끼는거 아니죠?”
“이상한 생각하지 말구요. 돈도 싫다 하고 고시원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렇죠. 나중에 대출 받아서 집 얻을 때
나가면 되잖아요. 정규직 됐다고 바로 은행에서 몇 억 대출해주는거 아니니까.”

사실 고시원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통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나, 통풍이 안 돼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짐 놓을 곳도 없어 한쪽 구석에 산처럼
쌓아놔서 들어가면 서 있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주는것도 아니고 그냥 빌려 쓰는 것이니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이 정도는 영훈이 욕심을 부려서 얻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좋습니다.”

씨익 입가에 호선을 그리는 영훈을 보고 연희도 안심했는지 웃었다.

“다행이에요.”

둘이 영업 2 팀으로 내려오니 노형석 대리가 말했다.

“연희 씨, 인천 송도에서 서가은 씨가 화보 촬영한다고 하는데 가서 샘플 좀 주면서 전속계약 슬쩍 흘려줘요.


내가 본사 쪽이랑 얘기해서 어셉트 받았어요. 1 년 계약에 10 억 선에서 가능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영훈 씨는 샘플 많으니까 연희 씨 도와서 같이 다녀오고. 아, 영훈 씨 이제 운전면허 준비 좀 해야 하지
않아?”

운전면허 역시 사회생활의 기본이 아니던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단지 끌고 다닐 차가 없었기에 준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회사에서 업무용 차를 쓸 일이 생기니 이제는 빨리 면허를 따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은성 씨랑 외부 미팅 좀 다녀올게. 수고들 하고 있어.”

노 대리가 은성을 데리고 나가자 연희가 슬쩍 물어본다.

“인천이면 혜성기업이 있는 곳인데, 혹시 한번 가볼래요? 마침 대표가 어제 입국했다고 하는데.”


영훈은 생각지도 못하게 오피스텔 하나를 빌린 덕분에 기분이 좋아서 쿨하게 승낙했다.

“그럽시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영훈과 연희는 서가은에게 보여줄 샘플을 챙겨 회사를 나섰다.

“뭐야? 300 억? 꼴랑 300 억에 그걸 다 받아와?”

양진철 전무는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장 형제의 난이 벌어진거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수익에 목숨을 거는 금융회사가 시장가
그대로 주식을 넘긴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5%의 주식이 어딜 가냐에 따라 현진물산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기에 상황만 잘 맞아 떨어지면 300 억이
1,000 억으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재무팀 오재식 상무를 단독으로 만날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날 결정한 것
같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양 전무의 방에 찾아온 차지열 상무는 뒤통수를 후드려 맞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송 사장이 이형준 본부장 목을 쥐고 있다고 했지? 그게 뭔지 알 수 없나?”


“전무님께서도 알아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비서실쪽에 심어둔 사람으로 알아보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차 상무가 아직 양 전무를 완전히 믿지 않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오해하지 마, 이 친구야. 난 순수하게 물어본 거라고.”


“죄송합니다. 제가 좀 예민했네요. 재무팀 오 상무도 어떻게 해서 이 거래를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는
눈치입니다.”
“오호, 재무팀에도 끈이 있었어?”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제 어떡할 건가?”
“그래 봤자 송 사장님이 직접 확보한 게 아닙니다. 현진물산이 자사주 매입한 셈이니까요. 송 사장의 실책이
나오면 대표이사 해임 건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송 사장에 붙는 임원이 많아지지 않겠어?”
“송 사장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밥그릇이 걸린 일에 그 어떤 동물보다 예민하죠.
상황이 변하는 걸 보여주면 언제든지 말을 갈아탈 사람들입니다.”

양 전무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고 없음을 떠나 송 사장에 대한 적의를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이형준 본부장하고 전에 만났다고 했지? 다시 한번 약속 잡을 수 있나?”

차 상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거절하려고 할 텐데요?”


“내가 만나보지. 다리만 놔 줘.”

차 상무는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형준 본부장과 짝짝꿍이 맞아 해결해 버리면 영락없이 자신은 능력 없는 사람으로 찍힐
테니까.
임지은 사장이 현재 자신을 보는 시선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을 눈치챘기에 결코 흠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 사람아!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

느닷없는 호통에 차 상무가 흠칫 놀라니 양 전무는 속사포처럼 몰아붙였다.

“이대로 지켜만 볼거야? 그래서 그 자리에 제대로 붙어있을 것 같아? 나나 자네나 이 자리까지 올랐으면 칼 끝에
서 있는 거야. 임지은 사장 라인 탔으면 목숨 걸고 일이 되게 해야지, 어디 자기 목 걸지 않고 반정에 성공한
이가 있었어? 잘 생각해. 반정을 성공시켜 공신이 될지, 아니면 박쥐처럼 눈치만 보다가 목 잘리고 나가서
치킨집이나 차릴지.”
“죄송합니다. 연락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양 전무는 차 상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나직이 말했다.

“차 상무 자네 나 알잖아. 내가 언제 내 새끼 내친적 있어? 난 한 배 탄 내 새끼는 절대 버리지 않아.”

자신의 둥지 아래로 들어오라는 말.


양 전무는 반정에 성공해도 넌 내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차 상무는 일단 반발심을 내리 눌렀다.


지금 중요한 건 송 사장이 무슨 짓을 해서 이형준 본부장의 목을 쥐었는지를 알아내는 일이니까.

혜성기업에 도착해 사장실로 향하는 건 쉬웠다.


이미 혜성기업 내부에서도 현진물산에 인수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현진물산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니 무사통과처럼 사장실로 인도 됐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사장인 구도욱입니다. 현진물산에서 오셨다구요?”

영훈은 비서실에서 만들어준 명함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현진물산 비서실 소속인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인수를 결정하기 전에 최고 경영자인 구도욱 사장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비서실 임연희입니다.”
“비서실에서 오셨다구요?”

구도욱 사장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자리를 권했다.


기업 인수를 결정하기 위해서 회계장부부터 까보며 난리를 쳐야 정상인데 비서실 사람들이 왜 온 것인지 의아했던
거다.

“사장님께서는 구도욱 사장님의 경영철학과 앞으로의 비전을 듣고 결정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내 자리를 그대로 유지시켜주겠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같이 결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구도욱 사장은 뭔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하니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영훈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무려 한 시간 가량의 강의(?) 후 영훈과 연희는 구 사장과 작은 구내식당에서 식사까지 하고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연희는 운전대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회사 직원들 얼굴 봤죠? 다들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다니던데. 그리고 구내식당 식단이 그게 뭔지... 영훈
씨는 어떻게 봤어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전에 구도욱 사장 생년월일이라고 줬던거 제대로 확인한 겁니까?”


“네? 왜요?”
“이상한데... 사주가 맞지 않아요.”
“사주가 맞지 않다뇨?”
“생년월일을 잘못 준 것 같다구요.”
“어? 맞을 건데? 잠시만요.”

연희는 어디론가 전화하며 구도욱 사장의 생년월일을 다시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후 그녀에게 연락이 도착했다.

“맞다는데요? 생년월일 두 번, 세 번, 확인했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데요?”
“이 사주는 사업에 어려움은 있을지 몰라도 결코 망할 사주가 아닙니다.”
“아니 뭐 지금도 망한 건 아니니까...”
“그 정도가 아니에요. 재복으로 따지면 당신보다 더 한 사람입니다. 빈손으로 일가를 이룰 사주예요. 재신(財
神)이 돌봐주는 사주입니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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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진 불도 다시 보자(3) >

연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구도욱 사장의 나이가 이제 오십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재신이 돌봐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주가 좋은게
맞는 건가요?”
“한 사람의 인생을 전체로 보면 나이 오십이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닙니다. 특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일가를 이루려면 나이 마흔이 넘는건 대수로울 것 없지요. 구도욱 사장의 사주는 만약
혜성기업의 사장이라는 말을 못 들었다면 중간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로요?”
“이 사람은 나이 마흔 지나서 모든 어려움이 술술 풀리고 사방에서 도움이 밀려오는 대운이 들어와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게 지금쯤이면 돈방석을 깔고 앉아도 한 두 개 깔고 앉은게 아닐 텐데 저러고 있는게 이상합니다. 진짜
생년월일이 잘못된 게 아닙니까?”
“잘못된 건 없어요.”
“흐음, 이상하다...”

영훈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성기업 리포트를 보면 분명 회사의 상황은 최악인데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단 서가은 씨 만나러 가요.”


“그럽시다. 어차피 구도욱 사장의 사주가 맞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죠?”

연희는 한숨을 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그렇긴 해요. 영훈 씨의 의견이 그렇다고 해도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인수는 불가능에
가까울거예요.”
“그럼 괜히 온거 아닙니까?”
“으음~ 괜히 왔다기 보다는 어차피 인천 오는 김에 왔다고 생각하면 되죠.”
“사장님께는 어떻게 보고할겁니까?”
“당연히 모른척 할 생각이에요. 알고 보니 혜성기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일 수도 있다고 영훈 씨가 그랬다고 하면
엄마가 ‘정말 그러니?’ 하면서 회사를 인수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임원들이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
올릴 걸요? 대신 최대한 돌려서 말해볼게요.”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어머? 영훈 씨가 아니라 우리 현진물산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죠. 엄마한테 혜성기업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고 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조사하다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시든가요. 그런데 오피스텔은 어디에 있습니까?”

연희는 운전대를 잡은 상태로 씨익 미소지었다.

“궁금하죠? 거기가 엄청 좋은 데예요. 여의도에 있는데 전용 45 평이고 전망 끝내줘요. 풀옵션이라 뭘 챙길 것도


없을 걸요?”
“45 평이요? 뭐가 그렇게 넓습니까? 너무 큰 거 아닙니까? 부담스러운데?”
“부담가지지 말아요. 엄마가 이번에 주식 매입하고나서 얼마나 고마워했는데요. 언제 다시 자리 한 번
만드실거예요. 지금은 너무 자주 만나면 사람들 눈에 띌까봐 타이밍을 잡고 계세요.”
“뭐 그러라고 하십쇼. 그런데 오피스텔 너무 큰데...”

영훈은 슬쩍 연희의 눈치를 보면서도 기대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고급 오피스텔에서 언제 살아볼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스스로 빌려준다고 한 것이니 과욕을 부린 것도 아니다.

“목소리는 그게 아닌데요? 솔직히 지금 바로 달려가고 싶어 죽겠죠?”


“크흠, 아닙니다.”
“퇴근할 때 톡으로 주소, 공동현관 입구 비번이랑 도어락 비번도 알려 드릴게요. 고시원은 편할 때 짐 빼면
될거예요.”
“편하니 좋네요.”
그렇게 둘은 즐거운 분위기로 인천 송도 센트럴 파크 호텔에 도착하니 한창 화보 촬영 중이었다.
촬영 스태프와 간단히 인사하고 서가은 매니저와 인사하니 이제 현진물산 사람들을 몇 번 만났다고 반갑게
맞아준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마침 조금 있으면 쉬는 시간이라 딱 맞춰서 오셨네요.”
“박현승 실장님은 어디 계세요?”

박현승 실장은 서가은을 담당하는 매니저이자 서가은의 각종 스케줄과 협찬 등 모든 걸 관리하는 임원급


관리자였다.
오늘 함께 있다는 말을 듣고 왔기에 연희가 물어보는 거였다.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 금방 오실거예요.”


“네. 그럼 기다릴게요.”

그 사이 영훈은 차에 실어온 각종 가방과 악세서리 등 샘플들을 끌어내렸다.


이 중에는 싼 건 250 만원짜리 손바닥만한 클러치백부터 2 천만 원이 넘는 목걸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서가은에게 이걸 다 안겨주고 전속계약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낼 계획이었다.
잠시 후, 30 대 초반의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다가왔다.
금테 안경에 수려한 인상의 그는 얼핏보면 잘 생겼지만 눈꼬리인 간문이 흩어져 바람기가 짙었고 눈썹과 눈썹
사이인 인당에 작은 흉터가 있어 젊었을적 학업을 이루지 못했을 상이었다.

“아유, 오셨어요? 전에 뵙고 두 번째네요. 진작 연희 씨가 오시지... 제가 엄청 기다리고 있었던거 아세요?”

역시나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한다.

“아하, 네...”

연희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는 박현승 실장에게 남자용 장지갑을 건넸다.

“이거 Nodri Clare 에서 새로 나온 남성용 장지갑이에요. 올블랙 컬러로 시크하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라서 오래 쓰실 수 있어요. 아마 이번 뉴월드 백화점에 입점하고 나면 판매가가 90 만원으로 책정될
거예요.”
“아유~ 이거 받아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받으세요. 실장님 드리려고 특별히 챙겼거든요.”
“그럼 잘 받겠습니다.”

박 실장은 그러면서도 영훈의 옆에 놓인 산더미 같은 명품들에 흘깃 시선을 주었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으리라.
뭐 서가은과 친하다면 그녀가 몇 개 챙겨줄 수는 있겠지만 상관할 일은 아니었기에 연희는 본척만척했다.

“이따가 대화 나눠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가은이가 Nodri Clare 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더라구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이번에 우리 회사 대표님 생신이라고 소속 배우들하고 같이 조촐한 파티가 있어요. 참석하시는거
어떠세요?”
“저희가요?”
“여러 명이 참석하기는 그렇고... 대표적으로 한 분만 참석하시는 게 보기에도 좋고 해서요. 아무래도
여성분이시니까 연희 씨가 현진물산 대표로 참석하시는 것이...”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게 영훈의 눈에도 보이는데 연희라고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이런 수작을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무수하게 받아왔지 않겠는가?

“으음... 지금 확답을 드리긴 어렵고 회사에 물어보고 말씀 드릴게요. 그런데 초대해주신다는건 저희랑 가은
씨가 전속계약을 맺는데 아무 문제 없다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전속계약이야 다른 브랜드들도 하고 그러는데요. Nodri Clare 정도면 저희야 환영이죠.”

현재 계약중에 있는 다른 브랜드들과 상충하는지 여부 확인 때문에 오래 걸릴거라던 당초 대답과는 달리 아주


화끈하게 밀어부친다.
어지간히 연희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런데 이때 서가은이 박현승 실장의 어깨를 툭 치며 들어왔다.

“나 왔어.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갈색 웨이브진 머리에 호수 같이 맑은 눈망울, 티없이 하얀 피부는 그녀를 보는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게 틀림 없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선택한 가방과 악세서리라면 화제의 중심이 되는건 필연적일 터.

“아닙니다.”
“전속계약 얘기 하고 있었죠? 제가 오빠한테 이거 괜찮을 것 같다고, 하면 좋겠다고 말해놨어요.”
“어머, 고마워요.”
“제가 좋아서 협찬 받겠다는건데요. 오빠는 들어가, 이제.”
“어? 어, 그래...”

박 실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퇴장하자 가은이 연희에게 슬쩍 말했다.

“박 실장이랑 개인적으로 친해지지 말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하하, 네. 알겠어요. 일단 저희가 가져온게...”

서가은은 연희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띄며 연희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았디.


서가은의 상은 전형적인 고양이상으로 이해심이 넓고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지나친 이해심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특히 콧대가 반듯해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데 이번 협찬건도 그렇고 대부분의 스케줄
결정은 아마도 그녀가 주도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러다보니 외로움과 고독함을 자주 느끼는 경우가 많은 상이었다.
보아하니 나중에 둘이 상당히 친해질 것 같았다.

“어머, 이거 예쁘다.”
“예쁘긴 한데 가은 씨가 하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 이 컬러가 이렇게 잘 받기 힘든데.”
“그런가요?”
“그럼요. 이 역삼각형의 독특한 클로져와 나선형의 스트랩은 어지간한 사람이면 뭘 저런걸 했나 싶거든요. 딱
서가은 씨 것 같아요.”

연희는 연신 칭찬을 쏟아냈다.


영훈은 명품에 대해서는 쥐뿔도 아는게 없었기에 그저 들고 온 샘플을 하나하나 연희에게 건네는데 열중할
뿐이었다.

“그런데 연예인 하셔도 되겠어요. 정말 예쁘시다.”


서가은의 칭찬에 연희는 손을 저으며 웃는다.

“아니에요. 연예인은 아무나 되나요? 전 연기하는 분들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니까요? 어쩜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를 할 수 있는지... 전 아마 대사 한줄도 못하고 어버버 댔을 거예요.”
“연예인 하라고 명함 같은 거 받지 않았어요?”
“받긴 했는데 전 제 주제를 알았던 거죠. 자, 이 목걸이는요, 이번 가을에 새로 나온 라인인데 일곱 개의 다른
패턴이 서로 이어지고 있죠? 디자이너 선생님이 가을의 기억을 표현했다고 해요. 그래서 착용하게 되면...”

영훈은 연희가 그렇게 열심히 브랜드를 홍보할 때 탁트인 송도의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지 얼마 안 된 높은 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그 사이에 잘 조성된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엄마가 무당이 되지 않았다면 나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았을까?

“영훈 씨.”

멍하니 공원을 바라보던 영훈을 연희가 딱 때렸다.

“네?”
“뭐해요? 그 숄더백 주세요.”
“아, 미안해요.”

영훈이 가방을 건네자 서가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루하신가봐요?”
“아닙니다. 다만 명품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으니 제가 끼어들면 대화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습니다.”

영훈의 솔직한 말이 의외였는지 서가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되게 솔직하시네요?”
“좀 그런 편입니다.”
“그럼 솔직한 생각을 말해봐요. 이게 정말 나한테 어울리나요?”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네.”
“솔직히 동네 보세 옷가게에서 아무 옷을 걸쳐 입으셔도 어울릴 겁니다.”
“어머,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요? 칭찬 맞는거죠?”

연희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원래 영훈 씨가 웃음이 많지 않은데 대신 빈말을 하진 않아요. 그래서 상사한테 혼난 적도 있다니까요?”


“그렇구나...”

거래처라면 거래처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이렇게 편한 모습을 보이니 궁금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럼 잘 모르는 영훈 씨가 봤을 때 이중에 가장 어울릴 것 같은거 하나만 골라주실래요?”


“개인적으로 쓰실 건가요? 아니면 외부에 노출될 걸 원하시는 건가요?”
“음~ 개인적으로 쓸 거요.”

영훈은 널려 있는 명품들을 슥 훑어보다가 단조로운 패턴의 무늬만 있는 아이보리색 지갑 하나를 손끝으로 톡


찍었다.
“그럼 전 이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게 어떤 점에서 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서가은 씨가 좋아할 것 같아 보여서요.”

연희는 그 찰나에 서가은의 눈빛이 흔들리는걸 놓치지 않았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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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1) >

영훈은 사실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본래 뛰어난 미인이 이런 상을 타고 나면 남자들은 겉만 보고 도도하거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데 알고 보면 천상 여자가 따로 없다.
남자들에게 이보다 좋은 배우자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장래희망이 현모양처일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특히 전에 노 대리가 서가은을 만나러 회사에 갔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면서도 별다른 악세서리를 하고 있지 않아 놀랐다는 말에 그녀의 성격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화려한 다른 것들보다 단순한 패턴의 깔끔한 지갑 하나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맞았는지 그녀가 놀라는걸 보면서 영훈은 스스로가 더 놀랐다.

‘이게 이렇게 맞는다고?’

딱 이 생각이 들 때 서가은이 말했다.

“눈치가 빠른 거예요? 아니면 관찰력이 뛰어난 건가요? 셜록홈즈처럼 그런...”


“그런거 아닙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습니다.”
“대단하네요. 나 방금 되게 놀랐는데. 예전에 되게 유명하다는 점집에 점 보러가서 크게 놀랐을 때 딱 이
느낌이었거든요.”
“기분 탓입니다.”
“아하하, 되게 신기한데요? 어쨌든 오늘 즐거웠어요. 전속모델계약 날짜 정해지면 연락주세요. 어차피 실장
오빠가 말해주겠지만 왠지 그날은 저도 참석하고 싶네요.”

연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전속모델계약 때 참석 안 하세요?”


“제 도장 가지고 보통 회사에서 많이들 계약해요. 스케줄도 바쁘고 한국에 없을 때도 많은데 항상 내가 계약할
자리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내 허락 없이 아무 계약이나 막 하지는 못해요.”
“그렇구나. 그럼 저희쪽에서 계약서 교환해서 검토하고 날짜 정해지면 연락 드리도록 할게요.”
“네. 오늘 좋은거 협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잘 쓸게요.”

그녀는 영훈이 골라준 아이보리색 지갑을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렇게 서가은과 헤어지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연희가 운전하다가 슬쩍 물어본다.

“아까 무슨 멘트를 그렇게 기름치게 쳐요?”


“무슨 멘트 말입니까?”

연희는 영훈 특유의 무심한 말투를 따라하며 말했다.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 보여서요. 와~ 나 90 년대 드라마 직관하는줄 알았잖아요. 원래 그렇게 느끼한 말


잘해요?”
“난 그게 느끼한 말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어째 질투하는 느낌인 것
같은데요?”
“어머! 무슨 말이에요? 그냥 웃겨서 그래요. 세상 아무 욕심 없을 것 같은 분이 그러니까 신기해서 그런거죠.
그런 멘트 쉽게 안 나오는데 완전 선수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리고 세상 욕심 없지 않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욕심을 안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죠.”
“오호~ 그러니까 돈 욕심이 아닌 건 욕심을 낸다는 말인거죠? 이를테면 여자라든가?”
“욕심을 낸다기 보단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난 출가하려고 산에 간 거 아닙니다. 아직도 혈기왕성한
청년이에요.”
“알겠어요.”

영훈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 것 같은 생각에 연희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서가은과의 미팅에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 연희와 영훈은 노 대리에게 간략하게 보고하고 법무팀 협조하에
전속모델계약서 작성을 시작했다.
이후 업무시간을 보내고 퇴근한 영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시원으로 향했다.
연희는 몸 먼저 들어간 다음 나중에 짐을 옮기라고 했지만 어차피 퇴근하고 나서도 크게 할 일이 없었기에 얼른
이 좁은 고시원을 탈출하고 싶었던 거다.

“총각, 왔어?”

언제나 그렇듯이 고시원 입구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반겼다.

“네. 안녕하세요.”
“우리 딸이랑 인사했다며?”
“네.”
“회사는 좋지? 인턴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해. 그러면 혹시 알아? 정규직이 될 수 있을지?”

기운을 북돋아주기보다는 어째...

“제가 열심히 해서 그런지 운 좋게도 정규직 됐습니다.”


“어? 정규직이 됐다고?”
“운 좋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걸 두 번이나 강조했음에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저, 정규직이면 그럼 월급을 얼마나 받는 거야? 연봉으로 한 삼천?”


“죄송한데 그건 말씀드리기가...”
“그러지 말고 한 번 말해봐. 삼천? 혹시 삼천 보다 많아?”
“원래 급여는 막 말하고 다니면 안 돼서...”
“총각, 외지에 나와서 반찬 챙겨주고 걱정해준게 누구야? 나만큼 총각 챙겨준 사람이 있었어? 엄마나 마찬가지지.
엄마다 생각하고 말해봐. 얼마야?”

반찬이래봤자 맨날 김치 떨어지면 그것만 채워주는 것 뿐이었고 사실 영훈은 그 김치로 라면 한번 끓여 먹은적도


없었다.
차라리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강하게 면박이라도 주겠는데 나이 많은 엄마뻘 어른이라 참 난감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건 막 물어보는거 예의 아니에요. 그리고 저 오늘 고시원 나갑니다.”


“어? 여길 나간다고?”

아주머니는 처음에 예의가 아니라는 말에 확 기분나쁜 티를 내다가 고시원을 나간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고시원을 나간다는 말이 곧 진짜 정규직이 됐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 짐 챙기려구요.”
“아니 아직 기간 많이 남았는데... 벌써 간다고 해도 환불 안 돼. 알지?”

혹시나 환불할까봐 마지막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치를 본다.

“환불은 됐습니다. 그럼...”

더 말 시킬까봐 바로 자리를 피하는데 공동부엌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딸이 나왔다가 시선을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마지막이요?”
“네. 이제는 고시원 생활 정리하려구요.”

가볍게 츄리닝 차림의 그녀는 오늘도 그녀 엄마의 심부름으로 냉장고에 김치를 채우러 온 것 같았다.

“갈 데는 정하셨구요?”
“네.”

이때 주인 아주머니가 뒤에서 따라오며 말했다.

“이 총각 정규직 됐데. 야, 인턴에서 정규직 되기가 그렇게 쉬운 거니?”


“어? 정규직 되셨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적어도 입사 후에 빠르면 3 달 정도 평가하고 정규직 전환될
텐데?”
“운이 좋았어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서울은 월세가 비싸서 어지간한 데는 엄청 부담스러울 텐데요?”
“오피스텔 하나 구했습니다. 혼자 살기 적당한 곳이더라구요.”
“오피스텔 월세 엄청 비싼데?”
“뭐...”

이제는 대답해주는 것도 지쳐 그냥 웃으며 그녀를 지나쳤다.


그리고 전에 오리엔테이션에 가지고 갔었던 캐리어에 옷을 챙겨 넣고 한 짐 싸서 나오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둘.

“잘 지냈습니다.”
“그래, 총각. 잘 지내고. 혹시 갈데 없으면 또 와.”
“안녕히가세요.”

씁쓸해 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택시로 연희가 찍어준 주소에 도착하니 아주 으리으리한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30 층은 넘어 보이고 주변에 식당과 편의점 등 각종 편의시설이 넘쳐났다.
공동현관을 통과하자 정중히 인사하는 경비원과 엘리베이터부터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괜히 수락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특히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꼈던 충격은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거실 가운데 화이트톤의 소파와 50 인치가 넘는 TV, 커튼을 열자 보이는 한강과 여의도의 야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영훈은 캐리어의 짐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20 년간 산에서 수양한 보람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평생 꿈꾸던 좋은 오피스텔에 왔음에도 들뜨지 않는 걸 보면.
그렇지 못했다면 저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모두 가지고 싶었을 거다.
날 무시한다고 고시원의 두 모녀에게 호통을 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그립다는 것.
그렇게 영훈은 커튼을 잡고 한참 동안 야경을 바라보았다.

영훈이 새로운 집에 들어간 그 시각, 송파구의 고급 갈비집.


이형준 본부장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어이쿠, 오셨습니까?”

딱 봐도 그보다 나이를 최소 20 년은 더 먹었을법한 양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인다.


이형준 본부장이 아무리 신영금융그룹의 차기 대권을 손에 쥘 사람이라고는 해도 양철기 전무도 무려 현진물산의
전무인지라 이런 저자세는 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 본부장은 한 술 더 떴다.
인사를 받지도 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서로 허례허식으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앉으세요.”


“이거 저희가 본부장님께 큰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단단히 화가 나셨군요.”

이형준은 양철기 전무를 슬쩍 살피곤 말했다.

“보아하니 전무님도 모르신다 이 말인데... 좋습니다. 일단 식사라도 하고 이야기 합시다.”


“하하하, 맞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껄끄러운 사이라고 해도 일단 식사를 같이하면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기 마련이다.


양 전무가 화색을 띄며 반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형준 본부장은 보기보다 대식가인지 둘이 6 인분이나 되는 고기를 해치우고 나서 후식으로 나온 냉면을 반쯤
먹었을 때 입을 열었다.

“전 성격이 모나서 시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한테 뭘 줄 수 있습니까?”


“이거 젊으신 분이라서 그런지 나같이 늙은이들은 쉽게 따가갈 수가 없겠습니다. 허허...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영투자증권에서 새로운 수익처 창출을 위해 수익성 좋은 해외 호텔을 매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개 사들이긴 했죠. 그런데요?”
“2015 년에 현진관광에서 호주 시드니에 있는 포시즌 호텔을 사두었습니다. 당시 매입가는 3 천억. 현재 가치는
5 천억이 넘어갑니다. 4 천억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현진관광이 임은진 사장 소유죠?”
“맞습니다.”
“내가 해줘야 하는건요?”
“현진물산에서 호주 레버턴에 있는 코발트 광산을 인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자원개발업체랑 컨소시엄을 맺고 들어와 달라?”
“그냥 입찰가만 조금 올려주시는 정도면 만족합니다.”
“조금 가지고 되겠어요?”
“경쟁이 생기면 이런저런 이유로 예상보다 많은 금액이 도출되겠지만 원래 입찰이라는게 그런거 아닙니까?”
“이봐요, 송 사장은 바보가 아니에요. 내년 중순에 신영은행에서 발행한 5 천억 채권이 만기가 되는데 그걸
생각못할까?”
“안 되는 걸 되도록 만드는 걸 능력이라고 부르죠.”

형준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욕심이 많으시네?”
“본인의 것을 찾는 건데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형준 본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아니... 욕심이 맞아요. 능력이 안 되는데 더 가지려고 하면 욕심이지.”

양철기 전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씀이 과하시군요.”
“이봐요, 전무님. 거래를 하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고 들이밀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내가 지금
협상의 ABC 도 모르는 사람하고 앉아있는건가?”
“회사 전 직원이 내 시야에 있습니다. 비서실, 기조실이고 전부 말입니다. 말씀만 해주시면 본부장님께서
원하시는...”
“하하하!”

양 전무는 이형준 본부장의 웃음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형준은 한참동안 웃어대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시네. 등잔 밑이 어두운 것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날 찾아온 게 비서실이었어요. 당신 시야에 있다는 비서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히 허당이시네.”

양철기 전무는 충격에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형준이 나가자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비서실장 이 개새끼가..."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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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2) >

휘문중-휘문고-연세대.
서울대에 진학을 못한게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양철기 전무는 자신의 출신학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과정을 밟으며 입사한 친구가 바로 홍승대였다.
얼마나 예뻐했던가?
좀 된다 싶은 사업은 밀어주고 리스크가 큰 사업은 다른 팀을 주면서 최대한 경력에 흠집이 없도록 도왔다.
하지만 서운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돌봐줬는데도 비서실장이 된 후에는 어느 선 이상의 정보는 결코 주지 않으면서 임지훈 사장에게 철저하게
충성했으니까.
하지만 임지훈 사장이 쓰러지고 송은채 사장 취임 이후 홍승대는 완전히 돌아섰다.
아니, 돌아섰다고 생각했다.
양 전무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고민했다.
이걸 바로 전화해서 조져야 하나, 아니면 모른척 넘어가야 하나...
양 전무는 차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바쁘지 않으면 좀 보지.”

양 전무는 아무래도 오늘 저녁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에서 위화감을 느낀 영훈은 자신을 둘러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다시 한번


당황하다 이내 집이 바뀌었음을 생각해내곤 서둘러 씻었다.
항상 다니던 지하철 노선도 달라졌고 길거리의 풍경도 달라져서인지 영훈은 오늘따라 출근길이 즐겁기 그지 없었다.
다만 졸음이 쏟아지는 게 흠이랄까.

“오늘 엄마가 저녁에 한번 보자고 하세요. 그런데 어제 잠 못 잤어요? 왜 그렇게 아침부터 하품을 쌕쌕하고
그래요?”

침대는 또 어찌나 좋은지 괜히 신숭생숭한 마음에 새벽 3 시를 넘겨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출근해서 연신 하품을 하고 있으니 연희가 눈치를 준다.

“어제 잠을 좀 못 잤나봐요.”
“왜요? 오피스텔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행여 누가 들을까 소리 죽여 묻는다.

“마음에 안 들긴요. 내 생전에 그렇게 좋은 집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왜 잠을 못 자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다가요.”
“으흥~ 집이 너무 좋았구나? 솔직히 영훈 씨가 욕심을 조금만 냈으면 그냥 지내는게 아니라 달라고 해도 줬을
거예요. 그만큼 이번에 영훈 씨가 너무 큰 도움을 줬거든요.”
“됐습니다. 그 얘기는 그만해요.”
필요 이상으로 받는 건 좋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까.
영훈이 안 좋은 안색으로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자 연희도 눈치껏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죠?”
“네, 다행히도.”
“다행히도라니 솔직히 좀 그렇다. 보통 우리 회사 정도 되는 큰 회사 사장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있던 약속도
취소하는게 보통인데.”
“원래 내가 보통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연희는 그가 지방에서 올라와 가족도 없이 고시원에 살고 있는걸 아는데 약속이 많다니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럼 평소에 무슨 약속들이 있는데요?”


“얼마 전에 동호회 하나 가입했습니다.”
“무슨 동호회요?”
“미식 동호회요. 첫 오프라인 모임에서 육회집을 갔는데, 와... 육회를 처음 먹어봤는데 맛이 새롭더라구요.
새로운 세계를 맛본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오프가 모레인데 꽃게찜 잘하는 곳으로 가기로 했어요. 오늘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하아... 그것 참 다행이네요. 꽃게찜을 놓칠 수는 없잖아요?”
“맞습니다.”

연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김민희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홍승대 실장으로부터 점심 전에 모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위 ‘한딱가리’ 할 때마다 직원들 모아놓고 훈계 및 군기를 잡았었기에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고 혼낼까
걱정이었다.
어쨌든 모이라고 했기에 현재 다섯 명의 직원이 서 있는 상황인데 선배인 유호정 대리가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또 뭔 일이라니?”
“요즘 우리가 뭐 실수할 일이 있었나요?”

민희의 물음에 그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럴 일이 어디어? 며칠 전에 신영투증한테서 주식 사오는 이후로 사장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거 너
못봤어?”
“봤죠.”
“그런데 왜 불러모은거야? 짜증나게...”

이때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장규종 대리가 말했다.

“이유가 있겠지. 이제 오실 때 됐으니까 조용히 해.”


“알겠습니다.”

장규종 대리는 이중에 가장 연장자이자 선배였다.


이제 과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할 만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철두철미한
일처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10 분 정도를 기다리자 홍 실장이 들어섰다.

“내가 왜 모이라고 했는지 모를거야. 그런데 내가 오늘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홍 실장이 스스로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하기 전부터 직원들은 바짝 얼어있었다.


진짜 화가 날 때면 항상 귀부터 빨개지는 그의 특성을 직원들은 모르지 않았는데 지금 홍 실장의 귀가 빨개진
상태로 씩씩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난 우리 비서실은 다른 부서와는 달리 가족같은 분위기를 지향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다.”

가'좆'같은 분위기겠지.

민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족이라는 게 뭐야?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야. 적어도 이 비서실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어. 그래서 난 지금 참을 수가 없다.”
“...”
“저번 토요일, 점심 때 아가씨와 같이 신라호텔 결혼식장 간 사람. 여기서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 없지?”

당연히 모를 수가 없다.
연희가 입사하기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고 입사하고 나서는 어느 부서에 배치돼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누이 설명 들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연희랑 결혼식장을 갔냐니...

궁금함을 참지 못한 유호정 대리가 물었다.

“저희가 아가씨랑 왜 결혼식장을 가나요? 여기서 아가씨랑 대화 한 마디 해본 사람도 없을 텐데요?”


“시끄러. 질문은 내가 하는거야. 간 적 있어? 없어?”

유 대리는 괜히 질문했다가 혼만 난 상황에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다른 일반적인 결혼식장도 아니고 무려 신라호텔 결혼식장이다.
재벌이나 톱스타들의 결혼식에 갈 일이 뭐가 있을까?
민희는 괜한 오해를 받는 이 상황이 억울하기만 했다.

“없어?”
“네.”
“좋아. 그럼 저번 토요일 점심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사람? 사진이나 카톡, 또는 영수증
같은 걸로 증명 가능한 사람.”

이때 가장 연장자인 장규종 대리가 손을 번쩍 든다.

“토요일 1 시에 봤던 영화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실장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리고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후... 그래. 나머지 사람들은?”


“찾아보겠습니다.”
“친구랑 점심 약속 하는 카톡 있는데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홍 실장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당연히 직원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유 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짜증을 냈다.

“뭐야, 왜 저래? 이거 엄연히 개인정보야.”


“내기 싫으면 회사 나가든지.”

장 대리의 말에 유 대리는 입을 다물었다.


민희는 다행히 남자친구와 뮤지컬을 예매했던 기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다 문득 사장님이 얼마 전 명함을
하나 파달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방에 차를 가져다 달래서 가지고 들어갔을 때 은밀하게 했던 부탁.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말에 본래 명함을 파주던 곳이 아닌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디자인을 주고 만들었던 그
명함이 마음에 걸렸다.
아가씨와 똑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그 신입사원이 설마 이번 주말 같이 결혼식장을 갔던 사람일까?
민희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이걸 실장에게 보고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계속 고민하던 그녀는 식사 후 항상 차를 즐기는 사장의 부름에 결정을 내렸다.
원래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니까.
최소한 물어보기라도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책 잡히지 않는다는 걸 짧지 않은 회사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민희는 조심스럽게 차를 내려놓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송은채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응? 왜?”
“실은 오늘 홍승대 실장님이 토요일에 아가씨와 같이 신라호텔 결혼식장에 갔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는데요.”

민희는 송 사장의 안색이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홍 실장님은 우리 비서실 직원들 중에 아가씨와 같이 간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명함에 대해...”
“말했니?”
“아닙니다. 말해야 할지 몰라서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잘했어. 앞으로 모른척 해.”
“알겠습니다.”

역시나 물어보는게 현명했다고 생각한 민희는 송 사장의 이어진 말에 척추에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홍 실장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빠짐 없이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민희는 무료했던 회사 생활이 갑자기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업무를 끝내고 연희와 헤어졌다가 다시 광화문에 있는 포시즌 호텔에 들어선 영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음식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하면 즐겁기 그지 없었다.
회사의 오너를 만난다는 부담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호텔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도 눈이 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눈이 갔다.
눈이 호강하는 느낌으로 식당에 들어서니 역시나 이번에도 송 사장님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좀 더 서두를껄 그랬습니다.”


“아니에요. 사장이 되니까 업무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일찍 움직였죠.
앉아요.”
“네.”

송 사장의 옆에 앉아 있던 연희가 투덜댔다.

“난 뭐 보이지도 않아요?”
“30 분 전까지도 같이 있었지 않습니까.”
“에휴...”

연희가 한숨을 내쉴 때 송 사장이 말했다.

“딸아이한테 들으니 미식하는 걸 즐겨한다고 해서 이곳으로 정했어요. 여기 도미 스테이크가 괜찮거든요.”


“잘 먹겠습니다.”

지금껏 생선은 날것으로 먹거나 구이로 먹었는데 스테이크라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한 입에 먹을 음식부터 차례로 나오는데 송 사장이 말했다.

“여긴 코스라서 천천히 말하면서 먹도록 해요.”


“네, 잘 먹겠습니다.”
“영훈 씨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요. 특히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주식을 우리가 살 수 있게 해줘서 굉장히
고마웠어요.”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궁금 한게 있어요. 혹시...”
“제가 어떻게 이형준 본부장을 설득했는지 궁금하십니까?”
“맞아요.”

영훈은 처음으로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궁금하실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제 입장에서도 이건 좀...


그냥 영업비밀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사장이 물어보는데 자기 마음 편하자고 그냥 묻어달란다.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 행태였지만 송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입이 무거우면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존중해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요.”


“감사합니다.”
“딸아이에게 듣기로 혜성기업 사장이 그렇게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던데, 맞나요?”

연희가 어찌저찌 둘러대며 말한게 저런 식이었나보다.

“비슷합니다. 다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제가 잘 못 본 것일수도 있으니까요.”


“확실하지 않다... 좋군요. 선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혹시..."
"네?"
"비서실로 부서를 옮기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강요는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해주면 과장급
대우를 해줄게요. 물론 지금처럼 없는듯 움직이셔도 괜찮아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훈의 대답에 송 사장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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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3) >

일주일 뒤, 연예면에 뜬 기사 하나.

[Nodri Clare 와 함께하는 서가은의 가을]

잡지에 실릴 기사가 포털 메인에 올라왔다.


내용은 서가은이 지금까지 찍은 작품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 현재 관심사 따위를 인터뷰 기사로 작성한
거였다.
하지만 이런 기사가 그냥 올라가겠는가?
인터뷰 중간중간 서가은이 Nodri Clare 의 가방이나 악세서리 등을 착용한 화보를 삽입해 기사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
기사를 낸 주체는 현진물산 영업 2 팀이고 목적은 딱 하나였다.
바로 뉴월드 백화점 해외명품팀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뉴월드 백화점 본사 회의실.


영업 2 팀의 팀원들 모두가 브랜드 입점을 확정짓기 위한 마지막 미팅에 임하고 있었다.

“서가은 씨가 협찬에 까다로운데... 확실히 좋은 브랜드를 가지고 오신 것 같아요.”

해외명품팀 이윤재 팀장은 지금까지 어정쩡했던 포지션에서 확실히 긍정적인 포지션으로 바뀌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톱스타 중 하나인 서가은이 샤넬 계약을 끝내고 바로 다음 계약한 브랜드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니까.

“감사합니다. 서가은 씨가 우리 브랜드의 느낌을 굉장히 잘 살려주셨고 브랜드 가치도 충분히 이해하고
계셨어요.”

노 대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미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앞으로 현진물산에서의 자신의 입지는 쭉 뻗은 고속도로처럼 탄탄하게
펼쳐질게 눈에 훤했다.
당연히 그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고 손에는 촉촉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 특수를 누리려면 늦어도 12 월 중순에 들어가야 하는데 12 월 초에 계약이 종료되는 건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참... 저도 이럴줄은 몰랐는데 그쪽에서 임대료와 수수료를 더 올리는 조건으로 계약
연장을 요청했습니다.”
“네?”
“입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시기에 있어서는 조금 여유있게 생각하시는 게 어떤지 하는데요.”

본래도 백화점 매출에서 해외 명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줄어드는 소매 매출 때문에 해외명품팀에 대한 매출의 압박 역시 강해지는 상황.
그런 면에서 이윤재 팀장은 뉴월드 백화점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백화점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해외명품팀의 팀장을 맡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그의 눈으로 보건데 Nodri Clare 의 브랜드 자체 퀄리티나 매력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어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가 이번 서가은과의 전속모델계약 체결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입점계약 허가를 올렸고 윗선에서 오케이가 내려왔다.
모든게 순조롭게 진행되던 상황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계약 종료를 앞둔 브랜드의 계약연장 요청이 들어온 거다.
백화점 입장에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매장이 임대료와 수수료까지 올리며 계약 연장을 요청하니 거부하기가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 말은 없었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해당 매장에서 계약 연장을 요청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시아 매출 감소로 한국 내 매장을 줄일 거라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 뉴월드 백화점 에비뉴엘관은 특별하다보니까 본사에서 계속 유지시키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노형석 대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무조건 12 월 중순 이전에 오픈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세명 백화점이나 미래 백화점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죄송하지만...”

이윤재 팀장은 임연희를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혹시 상무님과 대화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제 선에서 결정하기 힘든 사안이거든요.”

사실 연희는 이윤재 팀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이윤재 팀장이 사적으로 만나라는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상무님이시라면 누굴 말씀하시는거죠?”
“손혜수 상무님입니다. 잡화팀과 해외명품팀을 맡고 계십니다.”

연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확하게 말씀해주실래요? 저한테 손혜수 상무님께 요청을 해달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저와 만나고 싶다고
하시던가요?”

이윤재 팀장은 당황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말씀드렸듯이 전 이 자리에서 결정할 권한이 없을 뿐입니다. 상무님이라면 다를 수


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정 필요하면 제가 결정할 문제니까.”

노 대리는 괜히 상황이 안 좋아질까 서둘러 끼어들었다.

“일단 알았습니다. 저희도 생각 좀 해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좋은 결과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노 대리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오늘 입점을 확정짓고 계약서 초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영업 2 팀 전체가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거절만 당하고
온 셈이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연희는 다 됐다고 생각한 일에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리자 씩씩대면서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렇지도 않은 영훈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영훈 씨는 화도 안 나요? 일이 어그러지게 생겼는데?”


“일을 하다 보면 변수도 생기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보니까 그쪽에서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조급함을 못 버리고 무리하다보면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럼 크리스마스 특수를 놓치자구요? 크리스마스에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브랜드가 다음해 명품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게 될 거라구요.”
“전 명품 시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 인생은 조금 압니다. 말했잖아요, 노 대리님만 보고 가면 된다고.
노 대리님 어디 가는 거 아니고 올해만 사업 하고 끝낼 거 아닙니다. 괜히 이번 크리스마스 전에 입점하겠다고
이리저리 만나고 다니거나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이리저리 만나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거 아닙니까?”
“후... 귀신이네.”
“나도 가끔 내가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둘 사이에 누군가가 쓱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의 이은성이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동기라서 친한건 이해하는데 영훈 씨는 아직 배워야 할게 많잖아? 우리


일에 집중하자.”
“네. 알겠습니다.”
“영훈 씨는 내가 데이터 최신화 시키라는건 다 했어?”
“하는 중입니다.”
“요즘 일이 바빠서 내가 직접 챙기지 못했는데 안 되겠네. 나 때는 출근해서 선임한테 물어볼 때 빼고는
업무시간에 잡담 한번 안 했어.”

영훈은 본래부터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대화하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온 건 연희였음에도 그녀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연희가 말했다.

“선배님, 제가 먼저 말 걸었는데요.”
“그래? 연희 씨도 영훈 씨를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러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 연희 씨야 다 잘한다지만 영훈 씨는
아직 한참 부족하잖아.”

사실 은성은 불만이 많았다.


연희가 같은 팀으로 발령난 이후 그녀의 미모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같은 팀에다 앞으로 사수가 될 생각을 하니 꿈같은 나날이 펼쳐질 일만 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같은 과장님이
날아가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 지속되었다.
자신은 이렇게 바쁜데 연희 동기라고 들어온 놈은 상사의 기본 언어인 영어도 중학교 수준이고 어디서 뭘 배운지도
모르는 이상한 놈이었다.
그런 놈이 연희와 바짝 붙어다니는 꼴을 보니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연희가 사장님의 딸이라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연희만 붙잡으면 바로 소위 남들이 말하는 재벌의 울타리에 들어가는 셈이니까.
그러니 더더욱 연희와 저 이상한 놈과의 사이는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마침 잘 걸렸다고
생각하며 끼어들었는데...
다만 영훈을 신경쓰느라 연희가 어떤 성격인지는 몰랐던 게 바로 은성의 실수였다.

“누가 누굴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아, 그건...”
“영훈 씨야 본인이 알아서 일을 할테고 전 업무와 관련해서 대화한 건데 대화 소재 하나하나 선배한테 허락
받아야 하나요?”
“연희 씨가 오해했나본데 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영훈 씨가 많이 부족하니까... 우리가 도와주자는 차원에서
한 말이잖아.”
“뭐가 자꾸 부족하다는 건지... 그거 아세요? 이틀 전에 서가은 전속모델 계약 했을 때, 서가은이 영훈 씨를
찍어서 자기네 회사 파티에 초대했어요. 서가은이 영훈 씨를 잘 봐서 계약도 굉장히 쉽게 진행된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계약하기로 마음 먹고 나서 영훈을 만난 것이지만 어쨌든 은성으로서는 처지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박이야 할려면 할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와 싸우자는 것이고 그럼 연희에게 잘 보이겠다는 그의 계획은
물건너 가기 때문이다.

“그, 그런가? 그래, 영훈 씨는 어쨌든 내가 시킨거 최대한 빨리 해서 주고.”


“알겠습니다.”
“크흠...”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호되게 혼난 그는 머쓱하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러자 연희가 영훈의 눈치를 보며 투덜거렸다.

“저런 사람이 젊은 꼰대라고 하는 건데 본인은 그걸 모르나봐요.”


“꼰대라서 그렇다기 보다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아... 영훈 씨를 질투한 거다?”
“사실 요즘 이은성 씨 눈초리에서 살기가 느껴지긴 했습니다. 이해해요. 그럴 수 있죠. 그리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건 맞으니까. 그것 보다... 서가은 씨가 초청했다는말, 사실입니까?”

순간 연희가 멈칫한다.

“계약할 때 지나가는 말로 하기는 하더라구요.”


“그런데 왜 말 안했습니까?”
“바쁘다 보니까 깜빡한거죠. 요새 정신 없었잖아요.”
“언제랍니까?”

영훈이 달력을 들고 물어본다.


달력에는 꼼꼼하게 스케줄이 적혀 있었는데 전부 어학원 강의 시간이나 미식동호회 메뉴가 적혀 있었다.

“11 월 25 일이요.”
“한참 뒤긴 하네.”

영훈은 11 월 25 일에 ‘서가은 파티 초대’라고 적고는 별표 두 개를 그렸다.


연희는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다시 주변을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됐고 혹시 부탁하나 해도 돼요?”


“뭔데 그럽니까?”
“저기... 자원 1 팀 팀장 사주를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자원 1 팀이요? 갑자기 뜬금없이 자원 1 팀 팀장은 왜 나옵니까?”
“실은 자원팀이 호주의 코발트 광산을 운영하는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서 회사 차원에서 지원받으면서 움직이고
있거든요. 인수자금만 7 천억이 넘는데 코발트가 배터리 소재 핵심 재료라 회사에서는 미래를 위해 이걸 꼭
인수하려고 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이거 잘못되면 그냥 가는 거라구요.”

연희는 자신의 목을 그으며 회사가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영훈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네? 왜요?”
“당신 사주가 아무리 잘나봤자 당신 아버지 사주가 길바닥에 나앉을 사주면 길바닥에 나앉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사가 아무리 경쟁력이 좋아도 IMF 맞으면 휘청이죠.”

그녀는 단박에 이해했다.

“아~ 엄마 사주가 망할 사주가 아니라는 건가요?”


“사주는 보지 않았어요. 다만 사장님 상으로 보건데 말년까지 큰 고난이 없을 상입니다. 회사가 흔들릴 수는
있겠지만 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굳이 자원팀장님의 사주까지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그렇구나... 안심이에요. 솔직히 엄마한테 그 이야기 듣고 엄청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회사가 돈이 많은가보네요? 요즘 재무재표를 공부하고 있어서 우리 회사 재무재표를 계속 보고 있는데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던데? 매출이 7 조가 넘는데도 당기순이익은 500 억을 겨우 넘겼으면 좋은게 아닌거 맞죠?”

연희는 할말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7 천억을 던진다구요? 아이고...”


“그러니까 걱정하는거잖아요. 회사 유보금이랑 가지고 있는 빌딩을 청산해야 할 거예요.”
“흐음... 그러지 말고 돈을 빌리지 그래요? 한 10 년 장기 저리로 빌리면 괜찮지 않나? 빌딩 안 팔아도 되고.”
“좋기는 한데 당장 내년에 5 천억 채권 만기가 돌아와요. 지금 상황에 어느 은행에서 그 큰 돈을 빌려주겠어요?”
“한 번 말해볼까요?”

주변에 돈 백만 원을 빌려본다는 말보다 더 가벼운 말투지만 연희는 영훈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잘만 해결되면 아마 엄마가 과장급 이상으로 대우해줄 거예요. 차? 집? 원하는 거 다 해줄걸요?”


“이건 전적으로 내가 다닐 회사가 흔들리면 안 될 것 같아 하는 거지만 그래도 뭐... 주는 성의를 마다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먼저 요구한 거 아닌거 알죠?”
그녀는 이제 영훈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요 그럼요. 싫다는 사람한테 굳이, 억지로 안겨주는 거죠.”


“크흠... 한번 말은 해볼게요. 그쪽에서 들어줄지는 모르는 거라 미리 좋아하진 말아요.”

연희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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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4) >

송은채 사장은 연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고민했다.


수천 억의 자금을 빌려보겠단 말이 어디 신입사원이 할 만한 말인가?
그 가당치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 친구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닥치고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기에는 이번 혜성기업 건으로 확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송 사장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해보지도 않고 깔 수 없는 사안임을 말이다.
그렇다고 엄청난 기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정도?

”민희 들어와 볼래?“

인터폰으로 민희를 콕 찍어 불렀다.


잠시 후 살짝 긴장 어린 표정의 여비서 하나가 들어왔다.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눈치가 빠른게 마음에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요즘 홍 실장 어떠니?”

짧은 물음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민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퇴근할 때 영업팀 본부장인 차지열 상무님과 만나는 걸 확인했습니다.”

송 사장은 재주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평소 퇴근이 늦어질 때면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다 같이 먹는데 그 날따라
안 드시겠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퇴근할 때 뒤따라 갔습니다. 시키신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잘못된
행동이었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계속해.”
김민희는 안도한 듯 옅은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홍 실장님이 종로 유미관이라는 식당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지열 상무님의 차가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차량번호 확인했으니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이 다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잖아.”
“다음 날 아침에 법인카드 결제내역 확인했는데 결제된 게 없었습니다.”
“원래 개인적인 식사는 결제 안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고자질 하는 것 같아 송구하지만 업무 외적인 식사에 종종 결제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대기업 비서실장인데 법인카드 결제내역 가지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지는 않는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자기 돈으로 결제했다?”


“네. 차지열 상무님 법인카드 결제내역도 확인했는데 깨끗했습니다.”

송 사장은 내심 감탄했다.
눈치만 빠른줄 알았는데 의외로 똑똑하고 꼼꼼하기까지 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 그치?”


“네.”
“음...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나가서 비서실 직원들 아무도 모르게 신영투자증권 이형준 본부장한테 약속 좀 잡아.”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께서 만나시는...”
“내가 아니야. 그냥 조용히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 아무 식당이나 예약해서 알려줘.
연락처는 연희 번호 알려주면 되고.”
“알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민희는 인사하고 종종 걸음으로 사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홍승대 실장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뭐야?”
“네?”
“왜 놀라고 그래?”
“갑자기 그렇게 서 계시니까 놀랜겁니다.”

민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데 홍 실장이 따라온다.

“사장님이 왜 불렀어?”
“별 다른거 없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새로 나왔다는 허브차 직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셔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래? 무슨 허브차?”
“에몬스 사에서 나온 쟈스민 차를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회사가 있어?”
“네.”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널 찍어서 불렀지? 보통 그냥 직원 들어오라고 하잖아?”
홍승대 실장은 뭐 하나라도 허점이 보이면 물어뜯을 기세로 민희의 표정을 살폈다.
민희는 그 살벌한 기세에 떨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가 전에 차에 대해서 잘 설명해드렸습니다. 저도 차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래 뵈도 대학 다닐 때까지 연극동아리 소속이었고 한때 연기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외모도 자신 있었던 그녀였다.


그때 배웠던 연기를 이때 발휘하게 되자 민희는 역시 뭐 하나라도 배우면 언젠가는 써먹게 된다며 뿌듯해했다.

“그래? 혹시 뭐 특별한게 있으면 빼먹지 말고 말해.”


“정확히 어떤걸 말씀하시는 건지...”

그냥 넘어가도 되는걸 일부러 짚은건 최대한 홍 실장의 생각을 알아내고자 함이었다.

“그냥 뭐라도. 난 비서실장으로서 사장님이 요즘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알아야해.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일 봐.”

홍승대 실장은 그렇게 쌩 찬바람을 내고는 자리를 떴다.


민희는 이번에 홍 실장과 차 상무와의 만남을 보고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장님의 신뢰가 더욱 올라갔다는걸
확신했다.
이대로만 쭉 가면 앞으로 홍 실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민희는 하늘처럼 높은 산으로 보이던 홍 실장이 갑자기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장소를 바꿨어요. 이태원으로 오라는데요?”

연희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온 문자를 영훈에게 전송했다.

“이태원이라... 말로만 듣던 덴데 이제야 가보네요.”


“별거 없어요. 그건 그렇고 만나면 뭐라고 할 거예요? 안 빌려주면 확 불어버리겠다고 협박할 거예요?”

영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협박을 왜 합니까?”
“네? 그럴 생각 아니었어요?”
“미쳤어요? 말했잖아요, 그냥 물어본다고.”
“헐... 그럼 정말 순수하게 물어볼 생각이에요?”
“내가 뭐 바봅니까? 그래서 자료 모아 달라고 했잖아요?”

영훈은 연희에게 말을 꺼낸후 바로 이형준 본부장과 그룹 지배 현황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자료 역시 그룹 오너의 가족관계도였다.

“그럼요?”

영훈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연희 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면 손해본 쪽은 원한을 가집니다.
아무리 손해를 본 쪽이 약자라고 해도 원한을 많이 사면 그 악의가 언제 어느 순간 강자에게 닥칠지 모르는
거예요. 이건 당신이 언젠가 회사를 이끌어 갈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명심해두세요.”

연희는 억울한지 잠시 볼을 부풀렸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이럴땐 진짜 산에서 도 닦은 사람 같다니까?”


“도는 안 닦았습니다. 게임했지.”
“어쨌든 그래도 난 이해가 안 가요. 당신 말대로라면 그쪽에서 우리한테 원하는게 있어야 거래가 성립된다는 건데,
신영투자증권에서 우리한테 원하는게 있을 리 없어요.”
“그래서 찾아보는 겁니다.”
“지금요?”
“네.”
“그럴거면 시간을 더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약속을 미룰까요?”
“됐습니다.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충분해요?”
“네.”

본인이 괜찮다는데 연희도 더는 권하지 못했다.


영훈은 따라오고 싶다는 연희를 말리고 혼자 약속한 술집에 도착했다.
이태원에 있는 술집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외국인들이 오는 술집인줄 알았는데 도착해서 보니 흔히 볼 수 있는
룸싸롱이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에 봤었던 이형준 본부장이 벌써부터
술을 여러병 까놓은 상태로 마시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결혼식장에서 뵙고 두 번째입니다.”


“빈 말이라도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군. 그런데 혼자 왔나?”
“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여기서 선약이 있으셨나 봅니다?”
“영양가 없는 만남이라 신경쓸 필요는 없고... 그래, 언젠가 또 만나자고 할 줄은 알았어. 아, 나보다 나이
어리지? 말 놔도 되나?”

사실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안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나이가 많은건 맞았다.

“이미 놓고 계신데 여기서 올리라고 하면 분위기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이형준 본부장은 영훈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기하네. 내가 누구인지 알 텐데... 현진물산 비서실에 있다고? 나이를 보면 비서실장은 아니고, 전에 명함


줬었나?”

영훈은 양복 안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직책도 없고 그냥 비서실 최영훈이라... 졸라 희한하네? 하나만 묻자. 어떻게 알았어?”
“그건 영업 비밀이라서 말해드리기 곤란합니다.”

영훈이 웃어 넘겨도 형준은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 뭐, 그럴수 있지. 순순히 알려줄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근데 졸라 궁금해. 씨발, 우리 아빠도
모르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그것 때문에 술과 여자가 없으면 잠이 안 와.”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는 사람 몇 없으니까.”
“그거 듣고 닥치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진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연희 씨랑 사장님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실제로는 사장님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그냥 사장님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형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날 뻔질나게 찾아왔겠지. 송 사장이 내 목에 개목걸이를 채운지도 모르고 말이야.”
“개목걸이라니요. 자학이 심하십니다.”
“개목걸이가 아니다? 좋아, 만나자고 했으니 이제 용건을 꺼내보지?”

영훈은 쑥스럽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기는 하는데 남는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수익창출을 위해
자원개발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격이 급해서 본래 이런 잡설은 안 듣는데 오늘 내 처지가 처량하네? 큰 소리 한 번 못 치고...”
“하하. 그럼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한다고?”
“어? 아셨습니까?”
“뻔질나게 드나드는 인간 하나가 말해주긴 했지. 그래서?”

다 알고 있다니 말하기 편해졌다.

“인수자금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나더러 인수자금을 빌려달라?”
“맞습니다.”
“하하하. 이건 씨발, 컨소시엄 만들어서 같이 참여하자는 말보다 더 황당하네?”
“꽤나 흥미로운 말을 하고 갔군요.”
“왜? 누가 왔는지도 알려줘?”
“관심 없습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가장 궁금한 게 그거 아니야?”
“아닙니다. 사실 전 사내 정치보다 회사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누가 찾아왔을지 짐작이
가기고 하고...”

형준은 빙그레 웃는 영훈을 보며 허튼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씨발, 재미없네. 그럼 그 얘긴 됐고, 내년에 신영은행에서 5 천억 채권이 만기가 돌아오는 건 알고 있나?”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나?”
“원래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 아니겠습니까?”
“내가 왜 친구가 되어야 하지?”
“그럼 적이 되고 싶으신가요?”
“하하, 이 새끼 말 잘하는 거 보게? 내가 개목걸이, 개목걸이 하니까 진짜 개로 보이나 보지?”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현진물산도 큰 회사예요. 저희 회사랑 친해지면 본부장님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혀에 기름을 쳐도 정도가 있는 거야.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어?”
영훈은 앞에 놓인 양주 대신 작은 매실음료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부친께서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언더락 잔을 움켜쥔 형준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뭐라고?”
“부회장님 동생분이 신영카드 사장님이시죠? 들어보니 그 자제분 능력이 출중하다고 소문 났다고 하던데.
신영카드의 시장점유율을 얼마나 올렸다더라? 하여튼 본부장님이랑 사촌 되시는 분이죠? 그래서 본부장님이
부실한 혜성기업을 우리한테 넘기려 한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래서?”
“당신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착각한 겁니다. 전 지금 본부장님을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다만
그냥 도와드리면 서로간에 신뢰가 쌓이지 않으니까 하나씩 주고 받으면서 상부상조하자는 말입니다.”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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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5) >

형준은 영훈의 뒷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이미 그의 머리는 아버지 이외의 것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됐고, 우리 아버지가 알고 있을 거라고?”

영훈은 표정을 바로 하고 잠시 텀을 두다가 말했다.

“이세준 부회장님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통하고 남자다운 성격이지만 굉장히 섬세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취미도
예술쪽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자식이 자신과 아주 다르게 생겼다면 한 번 쯤은 의심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심한 분이 이렇게 자신과 다른 미남의 아들을 보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보십니까?
평소에도 사람을 잘 안 믿으시는 분이?”

형준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입가를 타고 흐르는 술을 거칠게 닦으며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단순히 심부름 센터를 고용해서 알아냈다고 하지마. 그런 쓰레기들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그런건 아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영업비밀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앞으로 본부장님이 어떻게 하시느냐가 중요한 거죠.”
“씨발, 혀에 기름이라도 발라놓은 것 같군. 그런데 아버지가 알면서 왜 가만 뒀지?”
영훈은 말하지 않고 형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더 이상 이야기하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실례가 아닌 것 같은가?”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남의 비밀을 자꾸 들춰내봐야...”

형준은 영훈의 말을 끊었다.

“가식 그만 떨어. 도움을 준다고 했지? 그럼 도움을 줘. 내가 궁금한 건 왜 알면서 티를 내지 않았냐는 거야.”

영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매실음료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하나 뿐인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면 신영금융그룹 회장님이 본부장님의 아버님을 부회장에 앉혔을까요?
누군지도 모르는 핏줄이 그룹을 물려받을지도 모르게 될 텐데?”
“그럼 그룹 내 권력을 위해서 내가 친아들이 아닌줄 알면서 그냥 뒀을 거라고?”

형준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리고 그렇게 흥분한 그에게 영훈이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부장님, 아버님이 알고 있으면서 모른척한 건 본부장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분노하실 일이 아니라는


거죠.”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제 일이 아니라서 쉽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회장님이 원해서 자식을 안 낳았겠습니까? 자식을 낳지 못하는
걸 알았을 때 부회장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부회장님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부장님과 본인 스스로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본부장님은
부회장님께 감사함을 가지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시면 됩니다.”

형준은 핏발이 선 눈으로 비웃었다.

“이게 놀리나... 그런 개소리를 짓거릴 거면 뭐하러 아버지에 대해 말을 꺼냈어? 몰랐으면 더 나았겠지.”

형준은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들어서 그런지 지금 이 상황이 자신에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영훈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닐겁니다.”
“뭐?”
“솔직하게 물어보겠습니다. 부회장님께서 본부장님이 회사 내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십니까?”

이형준 본부장은 영훈에 말에 표정이 굳어지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온더락 잔을 바라보며 숙고하던 그는 어느 순간 영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기가 막히는군. 아버지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아버지 복심이라는 강 전무도 당신 만큼은 아닐 텐데


말이야.”
“돈과 권력을 위해 삼십 년을 넘게 티를 내지 않은 분입니다. 그런 분이 본인 핏줄도 아닌데 그룹을 물려준다?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 지금까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야 이해가 가. 몰랐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깝치다가 언젠가
영문도 모른채 버려졌겠지.”

크게 깨달은게 있는 양 혼자 고개를 끄덕여댄다.

“자, 이제 전 계산을 치른 것 같습니다만.”

형준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다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럴 수야 있나. 그 광산업체 인수자금이 못해도 5 천억은 넘을 건데 방금 했던 조언이 5 천억 짜리라고는 볼 순


없지.”
“먹은 것도 없이 계산 먼저 하니까 이렇게 섭섭한 부분이 생기는군요. 계산 방식이 저와 많이 다릅니다. 5 천억을
주시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 5 천억 빌려주시는 거잖습니까. 그것도 이자까지 얹어서. 그럼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칠 텐데요?”
“씨발, 한 마디를 안 지네.”

형준은 들고 있던 잔을 쓰다듬더니 한잔 들이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알고있듯이 난 신영은행이 아니라 신영투증 사람이야. 그래서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금액이 5 천억 이상은
안 돼.”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요?”
“대신 혜성기업 받아야 해. 나도 명분이 있어야지.”

영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키지 않은 메뉴를 계산할 순 없습니다.”


“아니, 먹어. 그거 먹지 않으면 나도 못 끊어줘. 싫어서가 아니야. 내가 왜 혜성기업을 넘길려고 했는데?
그룹에서 아직 내 힘은 크지 않아. 몰랐었는데 네 말 듣고 이제 알겠어. 이거 해결 못하면 내가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어.”

보아하니 여기서 더 받아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예전 메뉴판에 올렸던 가격 그대로는 아니겠죠?”


“달라고 하면 다 줄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혜성기업이 가진 부채 중 어느 정도는 털어줄게. 물론 우리 것만.
그런데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부담을 덜거야.”
“그래도 이건 좀...”
“대신 이거 받으면 내년에 돌아오는 5 천억 만기 채권은 연장해주지. 당장 이것만 해도 회사 숨통이 트일걸?”

전부 예상했던 거래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전문적인 내용의 거래는 자신이 유불리함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지 않았다.

“전부 제 손을 떠난 내용입니다.”
“뭐야? 전권 가지고 온 거 아니었어?”
“비서실에서 왔지 않습니까?”
“하... 이상한 놈이네. 뭐 그래. 이것까지 다 하면 부사장 달고 있어야 정상이지. 권한 있는 놈이 누구야?”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한도는 5 천억이야. 혜성기업을 받는 조건이고 돌아오는 5 천억
만기 채권은 연장해줄 수 있어. 다른 걸 원하면 그쪽 실무자들 협의해서 연락해, 당연히 나한테. 멍청하게
신영은행에 문의하지는 않겠지?”
“그 정도 머리도 없겠습니까?”
“너 아니고 다른 놈은 믿을 수 있어야지.”
“전 믿을 수 있습니까?”

형준이 씨익 미소지었다.

“넌 나 믿을 수 있냐?”
“전 본부장님 믿지 않습니다. 본부장님의 권력을 향한 욕심을 믿을 뿐이죠.”
“씨발, 협박하는 수준 보게?”

영훈은 협박하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의 성정을 말하는 거였지만 그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권력을 원한다면 수작 부리지 말고 순순히 거래를 따라야 한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의도야 어쨌든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그걸로 됐다.
이상한 걸 덤으로 받긴 했지만 그건 회사 사람들이 알아서 조절할 테고 정 못 받겠으면 거래를 없는 것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잠깐만.”

그는 아까 받았다가 탁자에 올려놓았던 명함을 다시 받아들고는 슬쩍 눈길을 주면서 말했다.

“얼마 받아?”
“뭘 말입니까?”
“다 알아 들었으면서 모른 척하긴... 지금 얼마 받는지 몰라도 내가 거기서 0 하나 더 얹어줄게. 내 밑으로
와.”

영훈은 씁쓸하면서도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능력을 인정 받은 셈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형준 본부장 밑에서는 일할 생각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당장 회사를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돈을 얼마 주시든 그건 제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0 하나에 0 을 하나 더 붙여도?”

이건 좀 놀랐다.
욕심 많기로는 그 한도를 측정하기 어려운 인간이 그인데 연봉 수십억을 제안한다니 그 배포가 놀랍기는 했다.

“죄송합니다.”
“졸라 비싸게 구네. 어쨌든 당장 옮길 생각이 없다는 거지,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잖아? 오케이.
알아두지.”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아 영훈은 오늘 술자리가 만족스러웠다.

영훈이 미소를 지으며 룸을 나가자 형준은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힘이 빠졌는지 주먹조차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는 웨이터를 불렀다.

“가서 꿀물 좀 타오고 여기 싹다 정리해. 그리고 라면 두 개 끓여와. 고춧가루 팍팍 넣어서.”


“알겠습니다.”

형준은 웨이터가 타 온 꿀물 한 컵을 순식간에 들이키고는 직원들이 싹 청소를 마치고 나가자 들어온 라면까지 싹
비웠다.
그가 휴지로 입을 닦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나이가 마흔 전후로 보이는 그는 늦은 시간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로 인사하며 형준의 옆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아닙니다.”
“술이나 한잔 하자고 불러낸 건 아니고... 강 전무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강주현 전무.
아버지인 이세준 부회장의 오른팔이자 복심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형준이 어렸을 때는 아저씨로 불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룹을 이끌 황태자를 뒤에서 보필해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 형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10 분 전까지만 해도...
이제는 모든게 달라졌고 형준은 살아남아야 했다.

“부회장님이 전에 낸 인사발령... 날 신영투증으로 보내고 내가 골드만삭스에서 데리고 온 데이빗 김을


신영카드로 보냈잖아요? UBS 에서 데려온 내 친구 필립도 다시 홍콩으로 보내고... 내 손발 잘라내려고 한
거였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앞으로 본부장님께서 더 큰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내 손발의 경험치를 더 올려주기 위함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그거 아니더라고.”
“오해하고 계십...”

형준은 강 전무의 말을 잘랐다.

“이봐, 강 전무. 나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로 생각하지 마.”

형준의 분위기가 일변했고 강 전무는 단순히 술에 취해 강짜를 부리는게 아니라 사안이 심각함을 느끼고 있었다.

“본부장님.”
“강 전무 딸이 이번에 줄리어드 음대 합격했다면서? 학비 많이 들겠네?”
“아, 네 뭐...”
“그런데 강 전무가 횡령으로 검찰에 들어가면 명문대에 들어간 딸 어떡하나?”
“본부장님...”

강 전무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10 년 전인가? 투자전문은행으로 거듭나겠다고 지랄하다가 천억 넘게 손실본 거... 그거 절반이 유령회사에


투자했다가 폐업시키고 슈킹한 거잖아.”
“말 조심하십시오. 부회장님과도 연결된 일입니다.”
“연결이야 됐겠지. 그런데 증거 있어? 그거 결재한 거 다 당신 아니야?”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형준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한번 축이고는 강 전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나 쳐낼 생각이지? 그렇지? 말 잘해. 여기서 거짓말하면 앞으로 당신 딸래미 얼굴 한 번 못 보고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거야. 그것도 추징금 억소리 나게 맞고서.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애진인가 하는 여대생은 어떻게
될까?”

강 전무는 울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저... 부회장님이 본부장님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정도만... 살려주십쇼. 전
시킨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강 전무는 탁자를 밀어내고 무릎을 꿇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습니다.”
“그럼 칼 가지고 와. 단번에 쳐낼 수 있는 날카로운 칼. 당신도 나도 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어.”
“설마 부회장님을...?”
“그래,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아버지를 날린다. 지금 골골하시니 몇 년 안에 가시겠지. 그럼 당신이 부회장
자리에 앉는거야. 어때? 할 만한 도박 아니야?”

강주현 전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형준은 그런 강 전무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당신 영혼, 나한테 팔아. 그럼 부와 권력을 줄거야. 배신하면 지옥보다 더 큰 고통을 겪게 해준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

강 전무의 고민은 짧았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충성하겠습니다.”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5)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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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6) >

“엄마! 엄마!”

연희는 전화기를 붙잡고 우두두 계단을 내려오며 소리질렀다.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던 송은채 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넌 아무리 집이라고 해도 좀 조심해.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엄마, 대박...”

연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송 사장 옆에 앉았다.


심각하기도 하고 귀신을 본 것 같기도 한 그 묘한 표정에 송 사장이 물었다.
“뭐니? 그 표정?”
“영훈 씨가 방금 이형준 본부장 만나고 왔대요.”
“그래서?”
“신영은행에서 5 천억 대출 가능할 것 같대요.”

송 사장의 입가로 가져가던 잔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뭐라고?”
“대신 조건이 있대요. 혜성기업 인수해야 한다는 조건. 대신 그거 받으면 내년 5 천억 만기 채권
연장해주겠대요.”
“진짜야?”
“이런걸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혜성기업을 얼마에 인수하는 조건이라니?”
“전에 인수제안 금액보다는 조정 가능하지만 정확한 가격은 실무자와 협의해보래요. 그리고 부채 일부 탕감에다가
말을 잘하면 더 얻어올게 있을 거래요.”

송 사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일을 고작 신입사원이 혼자 가서 결정짓고 왔다니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송 사장은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이형준 본부장이 왜 우리한테 돈을 빌려주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것도 5 천억이나? 만약
우리 회사가 잘못되면 만기될 채권까지 합해서 신영은행에서 물어야 할 자금만 1 조 원인데?”
“그건 나도 모르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이형준 본부장이 장난 치는거 아니니? 신영그룹을 물려받을 손자가 왜 이런 거래를 해?”

연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상황에 그녀라고 달리 할 말이 있을 리가...
그리고 그녀도 지금 이 상황이 완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
“일단 내일 되면 정확히 알게 되겠지. 진짜인지 거짓인지...”

송 사장은 최대한 냉정한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다.


고작 신입사원의 말에 흔들려서 잘못 판단해버리면 회사가 흔들릴 테니까.
그리고 다음날, 송 사장은 바로 재무팀 오재식 상무를 불렀다.
그리고 홍승대 실장은 송 사장이 또다시 오재식 상무를 불렀다는 것에 주목하곤 은밀하게 양 전무와 차 상무에게
연락했다.

“입점제안서랑 PPT 자료 챙겼지? 샘플은 가방 하나만 챙기고 서가은 화보파일 잊어먹지 마.”

노형석 대리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어제만 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어깨가 축 쳐졌던 그는 아침에 미래 백화점에서 입점제안 메일을 받고 생기를
되찾았다.
그렇기에 연희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영훈에게 뭐 하나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신 없이 움직여야 했다.
윤성우 부장이 미팅을 하러 떠나는 팀원들에게 당부했다.

“임대료 너무 퍼주지 마. 남 좋은 일만 시키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이거 잘 되면 과장 진급 눈앞이야. 잘하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 대리는 윤성우 부장의 격려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미래백화점 강남점으로 향하려 할 때 윤 부장이 영훈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최영훈이 맞지?”
“네, 맞습니다.”
“야, 얘도 데리고 가야 하냐?”

노 대리는 영문을 몰랐지만 영훈이 회의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심부름 하나 시켜도 되지?”
“물론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가 봐.”

연희는 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담아 한번 눈빛을 마주치곤 힘 없이 나갔다.


윤성우 부장은 영훈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너 힘 좀 쓰냐?”
“솔직히 힘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래 보이긴 한다. 그런데 가야 해. 너 ‘레이디 로렌’이라는 브랜드 알지?”
“네.”
“그거 우리 거거든. 이번 가을 신상으로 코트 하나가 나왔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래서 공장에서
지원을 요청했는데 각 팀의 막내들이 가야 할 것 같아. 연희는 로열패밀리인 거 너도 안다며?”
“알고 있습니다.”
“원래 그쪽 사람들이 허드렛일 시키면 죽는줄 알아. 해본적도 없을 테니까 가도 도움도 안 될거야. 네 동기들 다
갈 테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혼자 간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텐데 동기들이 같이 간다고 하는데 불만이 있을 리 없다.

“괜찮습니다. 가야죠.”
“그래, 1 층에 버스 불러놨으니까 가서 고생 좀 하고 와.”

윤 부장의 말대로 1 층에 내려가니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약간의 불만 어린 신입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아저씨!”

언제나 귀엽고 발랄한 이윤지였다.


그리고 그녀 옆에 같은 조원이었던 고대 경영학과 출신의 박찬기와 지방국립대 출신의 장가람이 서 있었다.

“늦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버스 10 분 뒤에 출발한대요.”
“그런데 그 옷 입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이윤지는 무릎 위 허벅지로 올라오는 타이트한 치마를 입고 있어서 아무래도 일을 하기에는 적합한 복장이 아닌 듯
보였다.

“오늘 출근할 때 이럴줄 알았으면 바지를 입고 왔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힝...”

윤지는 울상을 지었지만 여자라고 봐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연희는 여자라서 봐준게 아니라 로열패밀리라서 봐준 듯 싶지만.
그때 박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뉴월드 어그러지고 어때요? 분위기 아직도 안 좋아요?”

오리엔테이션 단톡방에 수시로 글이 올라오는데다가 종종 일이 끝나고 술 한잔 하는 일도 있었기에 이미 각 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아침에 미래 백화점에서 입점제안이 와서 미팅하러 갔습니다.”


“와~”
“잘됐다.”
“축하드립니다.”

동기들의 축하에 영훈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노형석 대리님이 다 한 일인데요. 그런데 다들 아침은 드셨습니까?”


“아니요, 배고파요.”

윤지가 배를 문지르며 울상을 짓자 영훈이 말했다.

“우리 토스트나 먹고 갈까요? 가면 힘써야 하는데 배 속이 비면 힘쓸 수가 없잖아요?”


“토스트 완전 좋습니다.”

장가람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영훈은 그들을 데리고 회사 건너편에 위치한 푸드트럭으로 향했다.

재무팀 오재식 상무는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에 신영투자증권에서 15,500 원에 주식을 넘겨준다고 했을 때 그는 솔직히 송 사장의 딸인 연희와 이형준
본부장이 결혼이라도 하는줄 알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형제의 난이나 다름 없는 이 상황에 얼마로 뛸지 모르는 그 주식을 그 가격에 팔 이유가 없어
보였으니까.
물론 나중에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오해는 풀렸지만 오늘 받은 지시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정말 재벌 3 세들간의 결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라고 할까?

“상무님 이거 의미가 있는 겁니까?”

오재식 상무의 지시를 받은 재무팀 이상명 부장이 이게 무슨 헛짓거리냐는 듯 물었다.

“너, 건방지다? 내가 사장님이 내린 지시라고 그랬지?”

건방지다고 말했지만 오재식 상무나 이상명 부장은 상하관계로 꽉 막힌 사이는 아니었다.


이상명 부장이 입사했을 때 오재식 상무가 사수였고 이후 지금까지 찰떡같이 붙어 다니며 수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그렇기에 가끔 이 부장이 이렇게 대거리를 해도 괜찮은 거였다.

“사장님 지시 아니었으면 농담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시끄럽고, 혜성기업 얼마에 사야해?”
“계산해보니까 2,500 억 이상은 어렵습니다.”
“2,500 억이라... 그럼 실질적으로 우리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2,500 억이네? 큰 돈이긴 한데, 애매해. 이
정도면 판교에 있는 빌딩 처분해야 하는거나 마찬가지니까. 흠... 그건 그렇고 3,500 억을 불렀는데 천억을
후려쳐도 되는 걸까? 그쪽에서 이걸 받겠어?”
“신영은행에서 부채 일부를 탕감해준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혜성기업이 가진 미래가치가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다 정리한다고 가정했을 때 가치가 딱 2 천억이고 나머지 5 백억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시공능력이랑
경영권을 프리미엄으로 잡아준 겁니다.”
“아무 쓰잘데기 없다는 말은 이르지 않나? 우리 회사 건설업체 없잖아. 혜성기업을 우리가 인수하면 건설업체
시너지가 장난 아닐건데?”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당장 인수한 회사를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긴 인수해놓고 당장 공구리 칠 사업이 없기는 하지.”
“그래도 2,500 억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상무님이 말씀하셨던대로 나중에 시너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혜성기업은 그렇다 치고 진짜 5 천억을 주긴 준답니까?”
“너 그 질문, 전에 주식 산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물었어.”

이상명 부장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꾸 의심이 돼서...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만약 은행에서 근무하는데 아래 직원이 저


대출 허가해준다고 하면 쌍욕을 하면서 석달 열흘을 갈굴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내년에 돌아오는 5 천억 채권
만기까지 연장해준다는 말을 어떻게 쉽게 믿겠습니까?”
“나도 너랑 똑같이 말했다.”
“사장님께요?”
“그래.”
“그러니까 뭐라고 하십니까?”

오 상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이게 진짜 골때리는 건데, 사장님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예?”

이 부장은 인상을 팍 쓰며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냥 느낌이 그래. 사장님이 돌려서 말하긴 했는데 결국 결론을 내보면 모른다는 말이더라고. 왜 모를까?”
“왜 모를까요?”
“씨발, 그러니까... 신영은행 애들이 미친 건가?”
“은행 애들 보통 똑똑한거 아닙니다. 돈 굴려서 돈 버는거에 미친 애들이에요.”
“내가 그걸 모르겠냐? 어쨌든 이거 들고 올라가보면 알겠지.”

오재식 상무는 이상명 부장이 정리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


이 부장이 물었다.

“그런데 만약 이게 된다고 하면 진행하실 겁니까? 상무님 말씀대로 이거 대출 받아도 판교에 있는 빌딩 처분해야


하는건 마찬가진데요?”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리고 당장 내년에 갚아야 할 5 천억 연장되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걸 거절할 수 없어.”
“신영은행에서 금을 주는 건지 독을 주는 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신영은행에 회사 통째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만 은행거 아닌 회사 없다.”

오 상무는 단호하게 말하며 사장실로 향했다.


최소 2,500 억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단단히 각오하며 들어섰는데 송은채 사장은 서류를 훑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2,500 억이면 인수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안서 보낼까요?”
“아니에요. 담당자를 통해서 다이렉트로 협의 볼 거니까요.”
“담당자요? 그게 누굽니까?”

보통 오재식 상무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무사안일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성격상 사내정치는 극혐하는 것이었고 사내정치를 피하기 위해선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건 도저히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송 사장도 이 질문에 답변해주기 곤란했다.

“미안한데 이건 이야기해줄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해하세요.”

어떻게 말해주겠는가?
지금 평택 공장에 내려가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신입사원 중 하나가 이 엄청난 딜을 이끌어낸 담당자라는 걸
말이다.

“큼, 괜찮습니다. 무리 없이 잘 해결만 된다면야...”


“잘 해결될 거예요. 2,500 억은 최대한 지켜볼게요.”
“알겠습니다.”

오재식 상무가 나가자 송은채 사장은 고민에 잠겼다.


본래 영훈은 실무자가 직접 이형준 본부장에게 연락하면 된다고 했지만 송 사장은 오 상무에게 이 딜의 마무리를
맡길 수 없었다.
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계약이 어떤 이유로 성립된 것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뭘 거래에 껴도 되는지, 어떤건
건들면 안 되는지 따위의 협상의 기준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담당자인 영훈이 이 딜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인데...
고민하던 송 사장이 결국 연희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띵띵 띠딩띠!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전화를 받았다.

“헉... 헉... 여보세요?”


“일하는 중이었죠? 나 송 사장이에요. 급해서 일하는 중인거 알면서 전화했어요.”
“아,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주셨습니까?”

송 사장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혜성기업 인수 때문에 그러는데...”


송 사장이 말을 다 끝나기도 전에 영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안 받으시면 거래 안 됩니다. 무조건 받아야 해요. 대신 너무 비싸서 걱정이시면 천억만 주고 나머지
금액은 분할납부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세요.”

분할납부라니...
이 정도면 신영은행을 거의 벗겨 먹겠다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그러면 좋긴 하지만 그건 너무 과한 제안 아닌가?”


“아마 받을 텐데요?”
“이걸 받을 거라구?”

평소 어지간히 친하지 않으면 결코 반말을 하지 않는 송 사장은 무심코 말을 놓았다는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럴걸요? 제 생각은 그렇지만 혹시 아닐수도 있으니까 정 그러시면 제가 일 끝나고 물어보겠습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걸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최영훈 씨! 농땡이 치지 말고 이거나 날라. 그리고 젊어서부터 전화로 막 허세 부리고 그러면 안 돼.
천억이 뉘집 애 이름인 줄 아나...”

이에 영훈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바로 옮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 끝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럼...”


“여보세요?”

뚜... 뚜...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6)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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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에서 사람으로(1) >

연희는 미래 백화점과의 미팅을 끝내고 와서 종일 초조하게 기다렸다.


미래 백화점과의 입점 계약을 맺기로 확정짓고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노형석 대리와 이은성 사원과는
다르게 혼자 세상 심각한 얼굴로.
그러다 어느 순간 도착한 메시지에 그녀는 퇴근하고 바로 움직였다.
목적지는 한남동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
그녀가 도착하니 아직 영훈은 오지 않았고 엄마만 있었다.

“오늘 미래 백화점하고 입점 계약 하기로 했다며?”


“응, 법무팀에 계약서 검토 요청했어. 어려운 내용 아니니까 내일 검토 끝날거래. 입점일은 12 월 3 일. 딱
좋지?”
“미래 백화점에서 왜 갑자기 입점 제안서를 보냈다니?”
“서가은 때문이지. 원래 우리가 뉴월드 백화점이랑 계약 얘기 중이었으니까 급하게 진행했나봐. 오늘 미팅 내내
뉴월드랑 깨졌다는 말 안 꺼냈거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뉴월드보다 더 좋은 조건 때문에 계약한 줄 알고 있잖아,
헤헤...”
“뉴월드가 그래도 입은 안 싼가 보구나.”
“엄마랑 내가 뉴월드 VVIP 잖아. 거래는 깨져도 깽판을 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수고했다. 매출 100 억 기대해도 되는 거니?”
“못해도 100 억 이상은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솔직히 서가은 모델료만 10 억이 넘는데 연매출 100 억도 안
나오면 헛고생하는 거지.”

송 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래 백화점 강남점 입점 계약한거 아니야? 난 Nodri Clare 전체 매출을


물어본게 아니라 강남점 하나에서만 100 억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본 거였어.”

연희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내 그게 당연한 거라는 듯 대답했다.

“나도 그 말이었어. 강남점에서만 100 억 보고 있지.”


“그렇지?”
“그럼~”

그때 문이 열리며 영훈이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다 같이 버스 타고 왔는데 늦는게 당연하죠. 앉아요.”

영훈이 자리에 앉자 시큼한 땀냄새가 미미하게 퍼졌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와 조금은 지친듯한 표정을 보니 오늘 꽤 힘든 하루를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희는 혼자만 편히 회사생활을 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영훈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좋더라구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힘들었을 텐데.”
“동기들 다 같이 일해서 그런지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면서 보내주신 연락처로 이형준 본부장과
통화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에서 가장 궁금한 내용이라 송 사장과 연희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떻게 됐나요?”
“잘 해결됐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천억 지불하고 나머지 1.500 억은 3 년간 500 억씩 분할납부하기로 했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에 이제는 송 사장도 더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형준 본부장이 그런 딜을 받아줄 수가 있죠? 이건 은행 입장에서 대단히 부담스러운
대출이에요. 게다가 혜성기업 인수대금 분할납부를 허락한다는건...”
“이게 알고 보니까 혜성기업에 신영은행에서 많은 돈을 집어 넣었고 앞으로도 회생 가능성이 안 보이다보니까 돈
먹는 하마가 되기 전에 빨리 털어버리는 게 낫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쉽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이형준 본부장에게 들은 더 자세한 사정이 있었지만 최대한 축약한 내용이다.


“그건 그럴 수 있는데 어느 누가 회사 내부 사정까지 다 밝히면서 이런 불리한 계약을 할 수 있죠?”

영훈은 미간을 찡그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죽을 뻔한 이형준 본부장을 살려줬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그래서 조금 유리한 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설마 죽고 산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 진짜는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형준 본부장에게는 이게 비유만이 아닐 겁니다. 그에게는 죽음이나 다름 없거든요.”
“도대체 그게 어떤 일인데 그러죠?”

영훈은 슬쩍 연희를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앞으로 신영그룹에서 후계자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이형준 본부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구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은 이게 답니다.”

송은채 사장도 바보가 아니라 이 정도만 이야기해줘도 대부분 알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가 이형준 본부장을 밀어낼 생각이었고 본부장은 그걸 모르고 있다가 당신이 알려준 거군요.”
“맞습니다.”

송 사장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처리였지만 그의 그런 방식은 익히 알고 있었고 또 물어본다고 알려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영은행과의 거래는 환상적이었고 회사는 한단계 더 올라설 일만 남았다.
호주 레버턴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는 현진물산의 10 년, 20 년을 내다본 사업이기에 이번 입찰이 가지는
압박감이 너무 컸는데 아마 이 소식이 회사로 전해지면 전 사원이 펄쩍 뛰면서 기뻐할 거다.

“그렇군요. 고생했어요. 혹시 원하는 게 있나요? 말해봐요.”

이때 연희가 송 사장의 다리를 툭 때렸다.


그제야 송 사장은 자신의 실책을 인지하곤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미안해요. 돈에 연연하지 않는걸 깜빡했어요. 이걸로 식사나 교통은 물론이고 사고 싶은게 있으면 언제든지
보고 없이 사도 괜찮아요.”
“이건 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돈을 최고로 알고 살아와서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게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부서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왠지 이 말은 나올 것 같았다.

“비서실로 말인가요?”
“그래요. 오늘처럼 중요한 상황에서 갑자기 불려나가 일하는 사태는 없어야 하니까요. 솔직히 굉장히 당황했어요.
직원이 내 전화를 먼저 끊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거든요.”
“아, 그건...”
“아니에요. 책망하는게 아니라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영업 2 팀 신입사원의 신분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라구요.
당신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봤어요. 하나의 사업부서에서 잡일을 하며 천천히 배울 사람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에요. 꼭 영업 2 팀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옮겨 줬으면 하는데, 어때요? 싫다면 더 말하지 않겠지만
이건 부탁하는 거기도 해요.”

연희는 영훈에게 어서 승낙하라고 연신 눈짓을 보냈다.


사실 너무 빨리 승진하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사장이 부탁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인정받았다는 말이니까.

“알겠습니다.”
“직급은 과장급으로 하되 승진 속도가 기형적으로 빨라서 외부에는 알리지 않도록 할게요.”

과장이라니...
직장인의 성공으로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나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산에서 지내온 세월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주와 관상이라는 건 곧 사람의 인생을 말함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통달하지 못한다면 사주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번 일도 이형준 본부장과 이세준 부회장의 희로애락애오욕을 완전히 꿰뚫어 보지 못했다면 아마 술집에서
어설프게 대화하다 얼간이 취급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20 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을 공부했던 건 결코 낭비한 삶이 아니었음에 영훈은 뿌듯하고 감사함을 느꼈다.

“그럼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비서실에 가면 일반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들을 못하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특별한 일이 없을때는 회사 업무와 필요한 지식을 잘 배울수 있도록 강사를 붙여 줄게요.
무역, 회계, 언어, M&A 원하는 것 다 배울 수 있도록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비서실 소속이 됐으니까 계속 존대를 하시면 제가 불편할 것 같습니다.”

송 사장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말 놓은 김에 과장 진급 축하주를 건네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송 사장은 직원을 불러 이름을 알아듣기 힘든 와인을 시켰다.


호텔 서빙 직원이 와인을 가지고 와서 따라주려고 하자 송 사장이 와인을 내려놓고 나가라고 하고는 병을 직접
들었다.

“이번 일 고생했어. 원래 이런 일은 소주를 줘야 하는데 여기는 소주가 없어서 와인으로 줄게.”


“비싼 와인 한번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너도 한 잔 따라주리?”

연희가 냉큼 와인잔을 들어 올린다.

“당연하지. 한 병에 500 만 원 짜린데.”

영훈은 깜짝 놀랐지만 비싸서 어쩌냐고 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저 사람들은 자신과 살아온 인생이 달랐고 물건을 보는 가치도 다를 것이기에.
흐믓하게 와인을 마시고 나니 송 사장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조실로 보내서 회사의 컨트롤 타워를 맡게 해주고 싶지만 임원들 생각이 다 나 같지는 않아.
그리고 아마 기조실로 보내놓으면 견제한다고 아무것도 못하게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비서실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면 될거야.”
“제가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십니까?”
“무리한 건 원하지 않아. 자네 능력껏 회사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주면 돼. 거기에 필요한
지원은 내가 해줄게.”
“알겠습니다.”

이미 송은채 사장은 이번 일로 완전히 영훈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겠지만 일단 비서실 상황에 대해 말해줄게. 홍승대 실장이라고 있는데...”

이날 호텔 식사는 생각보다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끝날 수 있었다.

[인사발령 공고]

홍승대 실장은 점심 잘 먹고 느긋하게 아메리카노를 들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 느닷없이 뜬 공고에 속된 말로 놀라


자빠질 뻔했다.
사장님이 단 한번의 상의도 없이 비서실로 두 명의 직원을 올리고 기존 직원 두 명을 다른 부서로 내리는
인사발령을 조치했기 때문이다.
영업 2 팀 노형석 대리가 과장으로 진급하고 다른 팀의 직원들이 영업 2 팀으로 발령난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중요한건 비서실로 발령받은 사람들이니까.
하나는 오너의 자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너의 자식과 같이 입사한 동기였다.
오너의 자식을 승진시키는 거라면 놀라지도 않았을 거다.
입사할 때부터 쥐뿔도 아는 것 없는 상태로 임원으로 턱 들어앉아 아랫사람 똥개훈련 시키는거야 너무 흔해 따로
언급을 하기에도 입 아플 지경이지만 비서실로 오너 자식을 들여앉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의 핵심 업무를 배우려면 기획조정실로 가야지 속된 말로 사장 딱까리인 비서실로 와서 뭘 배우겠는가?

“야! 이거 뭐...”

홍 실장이 비서실 직원들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박스에 한 짐을 안고 두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은 익히 알고 있는 임연희였고 다른 하나는 뭐 하는 놈인지도 잘 모르겠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비서실로 발령받은 임연희라고 합니다. 자리는 어디로 잡을까요?”

비서실 직원들도 방금 본 공고 때문에 당황하는데 일단 홍 실장이 나섰다.

“저기 일단 짐은 저기 안쪽에 내려놓고 오늘 빈자리 날 거니까 그 자리 쓰도록 하면 돼요. 그런데 인사발령 날 줄


알고 있었나? 공고가 뜬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짐을 빨리 쌌네요?”

홍 실장의 물음에 연희가 빙그레 웃었다.

“점심 때 공고나서 점심 안 먹고 챙겼습니다.”


“어? 그래요. 반가워요. 나 홍승대 실장이에요. 언제 한 번 본 적 있죠?”

비서실 직원들도 연희가 사장의 딸인 걸 알고 있기에 그가 높임말 하는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 사장님 취임식 때 뵌 적 있습니다.”


“여기에 올 줄은 몰랐네. 연희 씨가 사장님께 부탁했어요?”
“으음~ 글쎄요.”

연희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웃음으로 대답을 넘길 때 갑자기 사장실 문이 열리며 송은채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자 송 사장이 말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이에요. 여기는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임연희. 내 딸이지만 신입사원으로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연희가 인사하자 비서실 직원들은 박수를 치면서도 허리도 같이 숙이는 재밌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리고 여기는 최영훈 씨. 임연희 씨와 같은 신입사원이지만 임연희 씨와는 다르게 과장급으로 대우 부탁해요.
외부에는 비밀이고 공식적으로는 사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홍승대 실장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과장급 말입니까?”


“그래요. 다들 새로온 사람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럼...”

송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사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쌩하니 영훈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김민희라고 합니다. 짐은 여기다 내려놓으시면 되구요. 성함을 부르긴 그러니까 주임님으로 불러도
될까요?”

영훈은 그녀의 순간적인 판단력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네, 그래주세요.”
“식사 못하셨다고 하니까 샌드위치라도 시켜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주임님?”

홍 실장은 3 년이나 먼저 입사했음에도 거리낌 없이 주임님이라고 불러대는 민희를 보며 멍청한 년이라고 속으로
욕하곤 바로 비서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인사과에 가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런 홍 실장의 행동을 영훈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 유령에서 사람으로(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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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에서 사람으로(2) >

인사팀 민경훈 과장은 담배 하나를 준비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도 옆 건물 때문에 그늘진 곳은 조용한 이야기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웬일이냐? 나를 다 찾고?”

민 과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홍승대 실장과 입사 동기인 둘은 어느 순간부터 차이를 보였다.
아무런 빽없는 민 과장과 연대 라인을 탄 홍 실장은 어쩌면 승진속도가 비슷한게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철강팀에서 기조실을 거쳐 비서실까지 회사 핵심 라인을 거친 홍 실장은 현진물산을 넘어 그룹 핵심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인재라는게 주변의 평가였다.
어쨌거나 홍승대는 비서실장이 된 이후로 입사 동기인 민경훈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던 건 물론이고 그가 회사
동기 그 누구를 따로 만나서 회사 일을 의논한다든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민 과장은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오늘 그가 대면을 요청한게 의아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뭘 그렇게 날을 세워? 연락 한 번 없어서 섭섭했냐?”


“우리가 연락 뜸하다고 섭섭해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냥 신기해서 물어본건데 너야 말로 좀 예민한 것 같다?”
“그런가? 뭐 내가 그렇게 느꼈나보네. 아들래미 잘 크고?”
“어. 날 닮아서 그런지 학교에서 공부는 안하고 사고나 쳐서 그렇지 크기야 잘 큰다.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 그만
물어보고 본론을 말해봐. 흐흐... 나도 궁금해서 그래.”

홍승대 실장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쪼개는 민 과장을 보며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인사과 발령난 거 언제 지시 받았냐?”

민 과장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씨익 미소를 그렸다.

“새끼... 너 몰랐구나?”
“어.”
“비서실장이 모르는 인사였다 이 말이지?”

민경훈 과장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생각에 잠겼다.


홍 실장은 민 과장이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민 과장이 눈썹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 대해서 궁금한 건 아닐테고, 최영훈이가 궁금했구나?”


“맞아.”
“안 돼.”
“뭐가?”
“최영훈이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어.”

홍 실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데 알려줄 수 없다는거야?”


“난 당연히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라면 알려줄 수 없어. 이건 내 권한을 넘어선 거야.
인사기록카드도 인사과 내에서 열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돼. 이건 기조실에서도 내 허락 없이는 못 열어. 그리고
내 허락은 곧 사장님의 허락이지. 안 된다는 말이야. 솔직히 난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좀 놀랐다.”
“인간적으로 힌트라도 좀 주자.”
“힌트? 흠, 힌트라... 학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거?”
“어느 정도나?”
“대학은 그리 좋지 못하고 영어도 못해.”

어차피 같이 지내면 당연히 알게 될 내용이라 말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입사를 할 수 있어?”


“나도 궁금하다.”
“좋아, 입사는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과장급 대우야? 진짜 과장급이야?”
“맞아. 그리고 과장급 대우라는 거 인사과에서도 나 빼고 한 명밖에 몰라.”
“이런 진급이 어떻게 가능해? 로열패밀리야?”
“말했잖아, 말해줄 수 없다고.”
“맞네. 그치?”

민 과장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너 지금 굉장히 급해보여.”


“그런가? 좋아, 찬찬히 생각해보자. 학력이 지방대 수준에 영어도 못하는데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불가능한
진급을 보여줬단 말이지.”
“그렇지,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씨발... 힌트가 너무 적어. 하나 더 줘라.”
“뭐가 이쁘다고?”
"아, 쫌!"

민 과장은 담배를 빨면서 누가 오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야. 증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 느낌인데...”


“알겠으니까 빨리 꺼내 봐.”
“재무팀에서 신영투증 주식 가져올 때, 가서 도장만 찍어줬다고 한 거 알고 있지?”
“어.”
“그거 누가 양념쳤는지 알아?”
“모르지.”
“비서실장이 몰라? 그럼 누가 한 건데?”

순간 홍 실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민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걸 최영훈이가 했을 거라고?”


“그냥 느낌이 그래. 그게 아니면 이 진급 속도가 이해가 돼?”
“아, 그래그래. 좋아. 씨발, 말도 안 되지만 그걸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최영훈이가 혼자 신영투증과 담판
지어서 가지고 왔다고 쳐. 그걸로 과장까지 단다고? 영어도 못하고 출입증에 잉크도 안 마른게? 그게 가능했으면
나 대리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철광석 가져온 걸로 과장 달았어야지. 그게 얼마짜리였는지 알지?”
“나도 그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한 단계는 이해가 가는데, 세 단계를 올라간 게 이해가 안 가.”
“한 단계는 뭔데?”
“어? 아니, 그건 몰라도 돼.”

민 과장은 애초에 정규직이 아닌 인턴으로 입사했다는 사실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그 주식을 최영훈이가 손 댔을 것 같다는 게 네 느낌이다?”


“그래. 순전히 내 느낌이야.”
“씨발...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민 과장은 고민하는 홍 실장에게 말했다.

“승대야, 내가 오랜만에 입사 동기 만난 기념으로 순수하게 충고 하나만 할게.”


“그래, 말해봐.”
“사장님 만만하게 보지마.”

민 과장은 그렇게만 말하고 담뱃불을 껐다.

“그게 끝이야?”
“그래, 끝.”
“고맙다. 충고 가슴에 새길게.”

홍 실장이 떠나려 하자 민 과장이 말했다.

“그리고 너...”
“왜?”
“잘 생각해. 바람이 바뀌고 있어. 바람이 바뀌면 돛을 조정해야 해.”

민 과장은 홍 실장의 어깨를 툭 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홍 실장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금껏 10 년 넘게 인사과를 지키면서 무수한 사람을 겪었던 민 과장은 결코 가벼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송 사장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며 회사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양철기 전무를 버리라고 말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양철기 전무 라인은 그로서 끝나는 게 아니다.
지금 양 전무는 그룹 회장이 밀어주고 있는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룹 전체를 장악한 회장에 비해 송은채 사장의 힘은 미약한 수준.
현진 물산은 현진 그룹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작은 계열사임을 다시 한번 자각한 그는 민 과장의 충고를 애써
지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해야 했다.
정말 바람이 바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찮은 날씨의 변덕인지...

“최 주임님, 17 층 3 번 회의실에서 3 시부터 회계원리 교육 잡았습니다. 간단한 음료수와 과자 세팅해놨으니까


편하게 드시면서 교육 받으시면 되세요.”
“아, 네...”

영훈은 예전에 명함을 받을 때 민희를 한번 보긴 했었다.


그 때는 그저 무표정하게 명함을 전해줬었는데 오늘 만나보니 상냥하기가 백화점 VVIP 를 대하는 직원들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더 필요한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 찾으시면 됩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민희가 자리로 돌아가자 옆 자리에 앉은 연희가 쓰윽 몸을 디밀었다.

“왜 저래요?”
“뭘 말입니까?”
“저 김민희라는 여자요. 언제 봤다고... 저러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건 그렇고... 비서실 온 거 후회 안 합니까?”

어제만해도 연희가 비서실로 같이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노형석 대리와 같이 Nodri Clare 브랜드 사업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면 내년 영업 2 팀에서 상당한 매출을
올리며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자신과 같이 비서실로 올 줄이야.

“당연히 안 하죠.”
“왜요?”
“당신 옆에 있는게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렇게 말하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이젠 재미보다 실리를 택할 나이 아닙니까?”


“그거야 모르는 거죠. 그나저나 말 돌리지 말고 저 김민희라는 사원, 어때요?”
“악의는 없어요. 내 명함을 만들어준 사람이라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일 겁니다. 그러니까
잘 보이려고 하는 거겠죠.”
“흐음... 아까 보니까 다른 직원들이 민희 씨한테 눈치 주던데, 너무 대놓고 저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모르고 저럴까요?”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네? 왜요?”
“민희 씨 상을 보면 눈썹이 진해서 자신의 주관이 확실하고 두 눈썹 사이의 인당과 눈두덩이의 전택궁이 밝아서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믿고 추진해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천창이 발달해서
관찰력과 결단력이 뛰어나죠. 눈치도 빠르고 행동력이 좋으니 아랫사람으로 두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호라~ 그래서 종합해보면 민희 씨는 당신을 비서실의 새로운 실세라고 확신했다, 이 말인거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오...”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홍 실장님은요?”
“그분은 좀 지켜봅시다.”
“왜요?”
“직책이 직책이다보니까 단순히 상으로 판단하기 그래서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

무엇보다 영훈은 내편과 상대편으로 나누어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순진한 생각이고 아니고를 떠나 같은 회사 직원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면서 싸우는 행위에 자신까지
끼어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의 주요한 이익이 걸린 일도 아니었고 피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인 것도 아닌데 이제 처음 본 사람을
평가해서 결론을 내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만약 홍 실장이 당신을 견제하려고 하면요?”


“어떻게 견제하느냐에 달렸지만 그게 회사의 이익에 반한다면 가만 있을 수는 없겠죠.”

영훈은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양 전무처럼 배가 부름에도 먹이를 탐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홍승대 실장은 얼굴이 전체적으로 크고 튼실하며 코도 크고 입도 큰 전형적인 토형(土形)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속이 깊고 입이 무거워 오너를 보좌하는 비서실장에 제격이라고 할 수 있고 신의가 두터워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가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 인연을 변화시켜 나갈지 영훈은 그게 궁금했다.

인사과 민경훈 과장을 만나고 돌아온 홍승대 실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해나갔다.


언제나처럼 송은채 사장의 스케줄을 체크하고 보고하며 일과를 보냈기에 겉으로 봐서는 비서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6 시가 넘어 송은채 사장이 퇴근하자 홍 실장은 새로 온 직원들을 환영하는 회식을 한다고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적당히 환영파티를 한 그는 회식이 끝나기 전에 계산하고 회식자리를 벗어났다.
택시를 타고 그가 도착한 곳은 논현동의 한 고급 저택.
대지만 300 평이 넘는 그곳은 삼엄한 감시카메라가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를 때도 혹시 누가 보고 있지는 않을까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본 그는 문이 열리자 얼른 들어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걸음을 빨리 옮겨 응접실로 가니 여러명의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서릿발 같이 냉막한 표정으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성.


임강철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딸이자 그룹 핵심인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이다.

“죄송합니다.”

변명 없이 고개를 숙인 그는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의 옆에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양철기 전무와 차지열 상무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갑자기 오라고 한 이유를 알아요?”

홍 실장은 회식 때 갑자기 연락을 받았기에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심정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양 전무나 차 상무나 전혀 짐작을 못하는 표정들이었으니까.

“이것봐, 이것봐... 내가 이런 사람들 믿고 일할 수 있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임지은 사장이 가지고 있던 서류 파일 하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신영은행에서 5 천억 대출 심사한다고 하는데 몰랐어요?”

차지열 상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갑자기 신영은행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것일까?

“5 천억이요? 그걸 어디에 준다고 합니까?”

임 사장은 코웃음을 치다가 어이가 없는지 얼굴을 가리면서 웃었다.

“하! 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이봐, 당신네 회사에 대출해준다잖아. 신영은행에서 현진물산 5 천억 대출


심사가 들어갔다잖아!”
마지막에 분노가 차오른 임지은 사장의 고함소리에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 유령에서 사람으로(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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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에서 사람으로(3) >

“몰라요? 지금 처음 들어요?”

뒤통수를 너무 호되게 맞아서 그런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가는 눈빛의 대화에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시가총액 7 천억이 안 되는 회사가 5 천억 대출을 신청했는데 경영지원본부장, 영업본부장, 비서실장이 모르고


있었다? 당신들 호구야? 아니면 지금 내 앞에서 쇼하는 건가? 나 물 먹이려고 단체로 짰어?”

양철기 전무는 일단 탁자 위에 올려진 서류를 후다닥 펼쳤다.


빠르게 서류를 살펴본 양 전무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회사에서 5 억만 펑크나도 줄줄이 경위서를 올리고 관련자 책임소재 파악해야 하는데,
경영지원본부장이 회사에서 5 천억 대출을 신청한 것도 모르면서 죄송하지 않으면 월급 너무 날로 먹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연한 소리는 그만하고... 왜 죄송한 상황이 생겼는지 설명이라도 해야 내가 당신을 계속 믿을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싹다 잘라버릴지 결정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아, 나 머리 아파. 아줌마! 나 시원한 냉수 좀
줘.”

일하는 아주머니가 급하게 얼음물을 대령했다.


임지은 사장은 그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어서 말을 하라는 눈빛을 양 전무에게 보냈다.
하지만 양 전무라고 딱히 할 말이 있겠는가?
결국 양 전무의 곤혹스러운 눈빛에 차 상무가 마지못해 나섰다.

“아직 심사 중이니까 거절날 가능성도...”

차 상무가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어디에선가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절나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거네요? 그쵸? 우리 엄마 괜히 소리 질렀다. 아저씨들 민망하게 그게 뭐야?”

2 층에서 느긋하게 내려오는 사람은 임지은 사장의 큰아들인 김태민.


그룹의 중추인 현진중공업에서 경영기획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사실상 임지은 사장이 그룹을 다 차지해 물려주고 싶은 근원적인 이유이자 차기 대권주자인 셈이다.
그리고 아저씨들이라니...
한 마디로 그룹 계열사 임원으로 생각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임지은 사장의 옆에 앉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죠? 거절나면 끝이잖아.”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기를 죽인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옴팡지게 덤탱이 쓰게 생긴 차지열 상무는 얼른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깊지 못했습니다.”

거절될 상황이었으면 임지은 사장이 이리 난리를 치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당황한 마음에 급하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다가 크게 실수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연매출이 7 조원이 넘는 거대 기업이 은행에 대출신청을 할 때는 이미 실무자와 협의를 다 하고 진행한다.
어느 대기업이 서민들처럼 대출 신청해놓고 나오면 좋고 안 나오면 망한다는 마음으로 기도나 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심사는 요식행위나 다름없는 것.
결국 대주주나 경영자가 태클을 걸지 않는 이상 대출이 진행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임지은 사장은 냉수를 마시고 치솟는 화를 잠시 가라앉혔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정신들 차렸을 테니까 말해봐요.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양 전무는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직감햇다.

“아무래도 송은채 사장이 오재식 상무를 시켜서 몰래 진행한 것 같습니다.”


“재무팀 오재식 상무? 아... 오 상무가 경영지원본부장이랑 비서실장 모르게 조용히 진행했다? 하... 이봐요
전무님. 둘이 싸웠어요? 회식때 어디 주먹이라도 날렸나?”
“네? 아닙니다.”
“싸운게 아닌 다음에야 입 싹 다물고 어떻게 이렇게 조용하게 진행될 수 있지? 이걸 설마 하루이틀만에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요? 태민아, 이게 가능한 거였니?”

김태민은 입꼬리를 한 쪽으로 올리면서 말했다.

“신영은행을 하루이틀만에 찜쪄먹을 실력자가 오재식 상무였나 봅니다. 이 정도 인재라면 그룹 핵심인


미래전략본부장에 앉혀도 되겠는데요?”

양 전무는 이런 상황에 몰린 것 자체가 억울했다.


신영은행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하필 신영은행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회사 차원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시도 조차 말이 나온적도 없었다.
나올 수가 없었다.
회사입장에서는 막말로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 때문에 허리띠 박박 졸라가며 이면지까지 아껴 쓰는 마당에 대출
생각 한번 안 해봤을까?
내년 신영은행에서 돌아오는 5 천억 만기 채권이 있는데 어느 은행에서 그 위험을 감수하고 추가로 대출을 해줄까?
안 될 거 뻔히 아니까 안 하는거였다.
그런데 그걸 시도했다는 것 자체로 감이 없다고 욕먹을 상황에 몇 백억도 아니고 5 천억이라는 금액을
대출받겠다고 마음먹는다?

“혹시 정권에서 움직이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양 전무가 생각했을 때 가장 현실적인 가정은 이것밖에 없었다.


당장 내년에 막아야 하는 5 천억 채권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자금으로 5 천억을 지원한다는 건 권력의 입김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음... 그건 일리가 있네. 올케네 집안이 정치권과 인연이 깊었지, 아마? 어디보자... 여당 이건호 사무총장이
올케 부친 동창이지?”
“맞습니다.”
“접촉해봐. 진짜 이건호 의원이 손을 쓴 건지. 아니면 여당 다른 의원이 움직인 건지 말이야.”
“기조실 통해서 움직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차지열 상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대로 입 닫고 가만있으면 그저 바보 멍청이로 남을게 뻔했으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했다.

“혹시... 혜성기업으로 딜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혜성기업?”

임지은 사장이 고개를 갸웃하자 김태민이 끼어들었다.

“신영은행에서 워크아웃해서 매각시도 중인 혜성기업 말이죠?”


“맞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영투자증권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을 쥐고 흔들면서 혜성기업을 사달라고
압박했습니다.”

임 사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이형준 본부장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하더니 빈 손으로 밥만 먹고 눈뜬 장님 됐잖아. 그리고
주식을 시장가 그대로 사왔었지? 그래.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럼 그것도 오재식 상무
작품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갑자기 혜성기업을 인수하라는 압박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혜성기업을
우리가 사고 대신 대출을 받는 제안을 했다면 어쩌면...”

김태민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착 내려쳤다.

“혜성기업을 주면서 폭탄을 제거하는 대신에 대출을 내준다? 말이 되긴 하네. 그럼 저 5 천억 대출 중에 실제로


현진물산으로 들어가는 건 어느 정도가 되지?”
“전에 인수가격을 3,500 억 제안했습니다.”
“그럼 1,500 억이 들어간다? 흐음... 그래도 성주훈 부사장이 들으면 좋기는 하겠네.”

김태민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현진물산 전략기획총괄을 맡고 있는 성주훈 부사장은 현재 호주 레버턴의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위한 TFT 를
진두지휘하며 현지에 가있는 상태였다.
입찰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을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회사에 5 천억 자금이 수혈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마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게 뻔했다.
그런데 들어오는 자금이 5 천억이 아닌 1,500 억에 혜성기업이라는 폭탄을 떠앉을 걸 알게 되면 과연 좋아할까?
싫어할까?
임지은 사장은 차 상무에게 말했다.

“혜성기업을 정말 딜에 넣었는지 알아봐요. 만약 딜에 넣었다면 인수가격도 확인해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혜성기업을 끼워넣었다고 해도 왜 자기들 돈 빌려주고 그걸 팔겠어요? 정치권의 입김 아니었으면
말이 안 되는 딜이니까 그것까지 확실하게 파악하세요.”
“네.”

임지은은 지금껏 입 한번 안 열고있는 홍승대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비서실장님은 조용하시네? 무슨 할 말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흐음... 실망이네. 그렇게 안 봤는데. 늦었는데 가봐요. 그리고 앞으로 오늘처럼 당신들에게 실망할 일들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잘 하시겠지.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그런거 아니겠어?”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좌불안석인 임원들은 속으로 김태민에 대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게 지옥 같았던 훈계시간이 끝나고 집을 나온 세 사람은 양철기 전무의 수행비서가 운전해 온 차를 타고
논현동을 벗어났다.
홍 실장이 불편한 마음에 말했다.

“전 그냥 가까운 지하철에 내려주십시오.”

양 전무는 조수석에 앉은 홍 실장에게 말했다.

“홍 실장, 왜 그래? 내가 전에 오해해서 섭섭했던 게 아직 남아있는거야?”

전에 비서실장을 의심하며 한번 크게 혼을 냈는데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닌가 했지만 홍 실장이 침묵하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홍 실장은 뭐 아는거 없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홍 실장은 아까 그 자리에서 5 천억 대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었다.


딱 맞아 떨어졌다.
이형준 본부장이 비서실 사람이 자신의 목을 잡고 있다고 했었고 오늘 비서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양 전무는 오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다가 이형준이 투자증권 사람이라 신영은행과 연관을 못 짓고 있을 뿐이지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결국 이 모든 딜의 키가 이형준 본부장임을 알아챌 것이다.
새로 들어온 비서실 직원이 입사한지 석달도 안 돼 과장급으로 초고속 승진한 걸 알게 된다면 이 엄청난 딜을
주도한 사람이 최영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될 건 불문가지.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이 과장급 대우를 받게 된 이유, 이 거래가 그토록 은밀하게 진행됐던 모든
이유가 모두 설명 가능해졌다.
문제는 최영훈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졌는가 일 뿐,

“너 다른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홍 실장은 갈등하고 있었다.


민 과장이 말한 바람이 바뀌는게 피부로 느껴졌다.

“중요한 시기야. 임지은 사장님이 마음을 굳게 잡수셨어. 여기서 실수하면 너나 나나 앞으로 치킨집 사장
되는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습니다. 전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이자고.”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홍 실장은 양 전무가 탄 차를 향해 90 도로 인사하며 배웅했다.

“어때?”

차지열 상무는 이제는 빈 자리인 조수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무님이 처음에 생각하셨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비서실에서 움직였고 홍 실장이 우리 뒤통수를 친게


틀림 없습니다.”
“그래, 이 와중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은 이형준 본부장 밖에 없지. 그 어린놈이 자신을 찾아온게
비서실이었다고 했단 말이야.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우리가 잘못 생각한게 아니었던거야. 이 개새끼가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거였어.”
“그런데 홍 실장이 어떻게 신영은행과 딜을 할 생각을 했을까요?”
“아까 임지은 사장님 말씀하셨던거 못 들었어? 정치권에 부탁했겠지. 신영은행이 선택된건 아직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확실한건 송 사장 수완이 만만치 않다는 거야. 홍 실장을 구워 삶은것만 봐도 한 칼 있다는
거겠지.”
“그렇겠네요.”
“그리고 홍 실장 이 새끼...”
“그냥 두면 안 되겠습니다.”
“일단 모르는척 해. 결정적인 상황이 왔을 때 다 같이 쳐야 해.”
“네.”

양 전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이를 갈았다.

< 유령에서 사람으로(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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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에서 사람으로(4) >

출근한 송은채 사장은 홍승대 비서실장으로부터 간단하게 하루 스케줄을 보고 받았다.

“...과의 미팅이 끝나고 저녁에 상공회의소 주최 만찬이 예정돼있습니다.”


“알겠어요. 나가봐요.”
“네.”

홍 실장이 나가자 송 사장이 인터폰을 눌렀다.

“민희 들어와.”
잠시 후 들어온 김민희에게 송 사장이 미소지으며 물었다.

“새로운 사람 들어와서 당황스럽지? 그것도 한참 후배인데 과장급이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네가 도와줄게 많을거야. 중요한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네.”
“교육 일정 잡는건 어때?”
“외부 강사 초청이라 어려울줄 알았는데 강의료가 생각보다 많아서인지 섭외하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강의
끝나고 물어보면 최영훈 과장님이 잘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으음... 나중에 알려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강의는 최대한 비밀스럽게 진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혹시 뭐 보고할거 있니?”

민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제 새로운 식구가 왔기 때문에 간단하게 회식자리를 가졌습니다. 홍승대 실장님도 참여했는데 회식 중간에
갑자기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래서 또 따라갔어?”
“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송 사장이 웃으며 물었다.

“뭔가 이상해 보였어?”


“그런건 없었습니다만 그냥 느낌에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래서?”
“택시를 타고 가길래 한번 뒤따라 가봤는데 운 좋게 끝까지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영화 찍었네?”

민희는 부끄러운 듯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논현동 고급빌라 단지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혹시 따라가다 들킬까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돌아왔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체크해보니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님 댁에 가까웠습니다.”

이거야 원 조금 믿고 맡겨주니 정보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너 따라가면서 안 무서웠니?”
“긴장되긴 했는데 짜릿하더라구요.”

배시시 웃는게 놀이동산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라도 탄 듯했다.

“고생했네.”
“감사합니다.”
“나가서 최영훈 과장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민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훈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긴장 하나 없이 들어온 그는 사장실을 한번 둘어보고 싱긋 웃었다.

“왜 웃어?”
“좋네요.”
“마음에 들어?”
“그냥 인테리어가 고급 같아서 그랬습니다.”

송 사장은 웃으며 자리에서 나와 영훈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앉아.”
“네.”
“홍승대 실장이 임지은 사장 집에 갔었다고 해. 그냥 불렀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 신영은행 5 천억 대출에 대해
알아내지 않았을까 싶어. 뭐, 홍 실장 뿐만 아니라 다른 임원들 몇몇도 같이 갔겠지. 어떻게 생각해?”
“처음부터 저한테 너무 무거운 질문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거 물어보려고 과장급으로 올려준거야. 꼭 엄청난 비밀이나 제갈공명이 울고갈 비책을 듣고자 하는것도
아니야. 앞으로 이런 질문은 그냥 편하게 대답해주면 돼. 부담없이.”
“알겠습니다. 부담없이... 홍승대 실장님은 조금 지켜보시죠?”
“왜?”
“뭘 꾸미고 왔다기에는 아침부터 너무 근심이 많아 보였거든요.”

송 사장은 뭐라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차 말했다.

“호주에 있는 코발트 광산 업체를 인수하기 위해 부사장이 직원들을 끌고 내려가 있어. 원래 우리가 가진


유보금이 3 천억 정돈데 판교에 있는 빌딩을 처분하면 딱 7 천억 정도 확보 가능해. 문제는 경쟁업체에서 7 천억
이상 쓸지, 그리고 7 천억을 입찰에 다 던지고 나면 내년에 돌아올 5 천억 만기를 어떻게 막을지가 걱정이었어.
그런데 최 과장 덕분에 다 해결할 수 있었지.”
“그렇군요.”
“코발트 광산 업체를 인수하려고 한건 향후 배터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테고 코발트가 배터리 핵심
소재라서이기도 해.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광산 업체 인수는 내가 여기에 사장으로 부임하고 맡는 첫 대형
프로젝트야. 이걸 성공하지 못하면 연희의 친할아버지이자 그룹 총수인 임창호 회장의 신임을 얻지 못할게 분명해.
지금도 못 미더워 하시거든.”
“그렇다고 사장님을 쫓아내실 수 있는 겁니까?”
“그럼. 회장님의 말 한마디면 대표이사 해임건의안에 모든 임원들이 다 찬성할 테니까. 그래서 연희의 고모인
임지은 사장은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적극적으로 막으려 할거야.”
“아...”
“그런 와중에 회사에 5 천억 대출금이 들어온다고 하면 무척 신경쓰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장님 말씀은 혹시 대출금이 안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겁니까?”
“역시... 이해가 빨라 좋네.”

영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고 송 사장은 그런 영훈의 생각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영훈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확실히 사장님의 걱정이 일리가 있습니다. 전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임지은 사장님 쪽에서 어떤 방법을
쓸지 모르니 함부로 단정 지으면 안 되겠네요.”
“대출이 중단된다고 해도 최 과장을 탓할 생각은 없어. 어차피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왕
일이 진행된 마당에 설사 대출이 안 되더라도 내년에 돌아올 5 천억 만기 채권은 연장해야 해. 그것만 연장하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도 문제는 없을 테니까.”
“그건 걱정마세요. 아무리 큰 압박을 받아도 이형준 본부장이 본인 살기 위해서라도 만기 연장은 잡아줄 겁니다.
그것보다...”
“응?”
“현진고속이라는 회사에 대해 알고 싶어요. 사장님 입장에서 가장 큰 적인 거잖아요.”

송 사장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가장 큰 적은 그룹 계열사 핵심인 현진중공업이지. 임지은 사장의 아들인 김태민이


경영기획본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회장님에게 일종의 경영수업을 받고 있거든.”
“그래서요?”
“그룹을 물려받으면 현진물산을 포기하지 않을거야.”

영훈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사장님 설마...”


“설마?”
“현진그룹을 다 먹을 생각이십니까?”
“난 현진물산만 있으면 만족해. 진심이야. 더는 욕심 없어.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끝나는 싸움이 아니야.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에 실패하면 난 저들 모자가 손을 쓰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물러나겠지. 하지만 인수에
성공하면? 그때부터는 회사를 먹어치우려고 할거야. 회장님은 날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방관할 테고 회사는
휘청이겠지.”

영훈은 양 손을 들었다.

“전 자신 없습니다. 이런 재벌들 싸움에 제가 끼어들거라 상상도 해본적 없었고 공부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래, 끼어들지 않아도 돼. 솔직히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앞으로 비서실에서 월급만 10 년동안 받는다고
해도 뭐라할 생각 없어. 진짜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나쁜놈 된 거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경우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만 일해. 대신 그만큼 지원해줄거고 나중에 혹시나 내가 이
싸움에서 이겼을 때 계열사 몇 개 떼줄 수도 있어. 난 정말 욕심 없거든.”
“하하, 그러지 마세요. 일단 현진중공업까지는 너무 멀고 현진고속에 대해서만 알고 싶습니다.”

송 사장은 계열사 몇 개 떼어준다는 말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영훈의 모습에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아닌 척하는게 아니라 진짜 눈꼽만큼도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임지은 사장이 가진 기업체는 두 개야. 하나는 현진고속, 하나는 현진관광. 현진고속은 여객운송업을 하는
회사야. 많은 고속버스를 보유하고 있고 터미널도 몇 개 가지고 있어. 상장된 업체가 아니라서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걱정이 없지. 그 현진고속이 현진관광 지분을 50% 가지고 있어. 주로 국내외 호텔을 다수 보유하고 있고.”
“그 두 개 회사는 큰 어려움 없습니까?”

송 사장이 눈을 빛냈다.

“현진고속이야 별다른 어려움이 있을 수 없지. 경기도 잘 타지 않으니까. 기름값에 따라 영업이익이 출렁이는


정도? 하지만 현진관광은 달라. 해외의 많은 호텔을 사느라 재무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거든.”
“알겠습니다.”
“더 물어볼 건 없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연희 씨 도움을 받아도 되고 민희 씨도 있으니까...”
“그래, 필요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하고.”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영훈이 그대로 나가자 송 사장은 화장실 가서 뒤처리를 안하고 나온 것처럼 찝찝했다.


뭔가 있을 것처럼 기대심리를 올려놓고 그냥 나가버리다니...

“후... 괜한 말을 한게 아닌가 모르겠네.”

상식적으로 M&A 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고작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입사해서 이룬 업적이 어디 상식적이던가?
송 사장 입장에서 최대한 영훈의 상식에 맞춰(?)준 것인데 이게 어떤 바람을 가져올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장실을 나온 영훈은 자신을 은근슬쩍 훔쳐보는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희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임지은 사장이랑 양 전무, 그리고 현진관광 주요 임원 사주 좀 알아봐요.”


“알겠어요.”

연희는 이유는 묻지도 않고 어딘가로 문자를 찍어댔다.


그리고 다시 영훈에게 시선을 건넨다.
또 다른 시킬 일은 없냐는 눈빛이었다.

“현진관광에서 최근 매입한 호텔이랑 현진관광 재무상황을 파악해서 나한테 이해시켜줘요.”


“내가 당신을 교육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셈입니다.”
“으흥~ 내가 가르치는 건 또 기가막힌데.”
“재능 발휘할 일 생겼으니까 축하드립니다.”
“그리구요?”
“혹시 내가 전에 혜성기업에 대해 더 알아보라는 거 했습니까?”

연희가 손뼉을 치며 아차했다.

“맞다! 준비해놓고 주지는 못했네요. 잠깐만요.”

연희는 빽빽하게 꽂힌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빨간색 서류철을 뽑아들고 내밀었다.

“여기요. 혜성기업이 가진 자산과 현재 진행중인 사업이에요. 혹시 이해 안 될까 봐 포스트잇으로 설명


첨부했어요. 중간에 모르는거 있으면 물어보구요.”
“고마워요.”

보통 드라마에서는 이런걸 받아서 몇 장 척척 넘기면 바로 내용을 파악하던데 영훈은 봐도 사실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는 뜻이리라.
그래도 어떡해서든 이해하려고 오전 내내 혜성기업의 리포트를 살펴보는데 어느 순간 연희가 툭툭 건드린다.

“점심 시간이에요. 밥은 먹고 일해요.”


“그럽시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벌써 12 시가 넘어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 같이 식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는데 어째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하는 기색이다.
김민희라도 있으면 불러서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연희가 영훈의 눈치를 살피곤 말했다.

“민희 씨는 교대 때문에 벌써 먹으러 갔어요. 아마 좀 있으면 올 거예요. 그리고 다른 직원들은 우리랑 먹기


꺼려질거예요. 불편할 수도 있고.”
“흠... 알겠습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바로 아래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보이는 장년의 인물 두 명.
한 명은 예전에 입사하고 만난 적 있던 차지열 상무였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사진으로만 봤던 사람이었다.
경영지원본부장 양철기 전무.

“안녕하세요.”
“아, 임연희 씨. 비서실로 옮겼다는 거 들었어. 앞으로 자주 보겠어?”
“하하, 네...”

양 전무는 연희를 스윽 쳐다보고는 말했다.

“입사한지 꽤 됐는데도 어째 한번 찾아오지를 않아? 섭섭하다.”


“회사에서 그럴 수 있나요?”
“준기랑은 좀 봐?”
“준기도 기조실 들어가서 바쁘다 보니까 서로 마주칠 시간도 없어요.”
“준기 말로는 네가 더 바쁘다던데?”
“에이~ 준기가 원래 가볍게 농담 잘 하잖아요.”
“크흠...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안녕하세요. 영업 2 팀에 있다가 이번에 비서실로 옮긴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그래?”

양 전무는 영훈을 쓱 훑어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고작 사원 하나와 일일이 대화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문득 든 생각에 양 전무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싸가지 없게 빙그레 웃는 걸 보면서 뭔가 이상한 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할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이름이 뭐라고?”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학교가 어딘가?”
“말해도 잘 모르실 지방대를 나왔습니다.”
“말해도 잘 모르는 지방대를 나와서 비서실로 왔다고? 특이하군.”

영훈은 말없이 웃으며 양 전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 층에 도달했고 양 전무는 찝찝한 얼굴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연희가 영훈의 허리를 툭 치며 말했다.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 거 아니에요? 예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당신을 주목할 수도 있잖아요?”


“특이한 상이라서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네? 어떻게요?”
영훈은 흥미로운 얼굴로 멀어져가는 양 전무의 뒤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양 전무님 아마 여자문제가 좀 있을 겁니다. 조사해봐요.”


“네?”

< 유령에서 사람으로(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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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술은 새 부대에(1) >

연희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니, 여자 문제까지 어떻게 알아내요? 그건 좀...”


“힘들어요?”
“여자문제면 통화내역도 봐야 할거고, 차명 부동산이나 계좌내역도 봐야 할 텐데 어떻게 그걸 다 찾아내요?
감사실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연희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자신의 말을 다른 쪽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말하는 여자 문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따로 집 해주고 차 사주고 그런 첩같은 걸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럼요?”
“양 전무님의 눈을 보면 검은자위가 몽롱하면서 눈꺼풀이 두텁고 눈 전체가 어둡습니다. 이런 눈을 관상에서
돼지눈, 저안(猪眼)이라고 하는데 성품이 거칠고 흉폭한 경우가 많죠.”
“네? 그렇게 보이지는...”
“그래서 저 눈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저 자리까지 오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거칠고 흉악한 성정을
자제하지 못하면 저 자리까지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
“그럼요?”
“저안의 또다른 특징 하나가 음욕이 강하다는데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풍족하게 살았다면 여자가 부족하지
않았을 테고 자신의 거친 성향을 음심으로 풀면서 달래왔을 겁니다.”
“아~ 그래서 여자가 많을거다?”
“단순히 많을 거다라는게 아니라... 어쩌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지금도 자신의 음욕을 풀고 있을지도 모르죠.”

연희는 영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크게 놀랐다.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떡합니까? 사실 사주를 봐야 정확하지만 아까 당신을 쳐다볼 때 흘리는 음심으로 보건데 아마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니 당신이 알아서 방법을 강구해야죠. 뒤를 밟든 은밀히 수사를 하든.”
“날 볼 때 음심이 흘렀다구요? 진짜?”
“보기보다 감이 없으시네. 그런데 계속 여기에 서 있을겁니까?”
“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멸치국수 국물 끝내주게 하는데 있는데 어때요?”
“국수만 먹기에는...”
“그 집 왕만두도 죽여요.”
“갑시다.”

양철기 전무와 차지열 상무는 회사에서 좀 떨어진 관철동 먹자거리의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룸이 나눠져 있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하고 음식 맛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차 상무 나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신영은행 기업여신심사부 도한수 부장이었다.

“만나자고 부른 사람이 늦으니 이거 영 염치가 없습니다.”


“고작 몇 분 차이에 늦고 빠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서 앉으시죠.”

양 전무와 차 상무가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 후 회덮밥 세 그릇이 들어왔다.


도한수 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회덮밥을 비빌 때 차 상무가 입을 열었다.

“아직 우리 현진물산이 신영은행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5 천억이나 되는 큰 대출을


진행해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한수 부장은 비비던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감사하다구요?”
“그럼요.”
“그럼 절 만나자고 한 건 무슨 이유입니까?”
“그거야...”
“5 천억 대출이 어떻게 진행된거냐 물어보시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괜히 없는
시간에 찔러보느라 시간낭비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죠.”

이렇게 나오니 차 상무가 머쓱하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양 전무가 나섰다.

“좋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거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그거 정말 나오는겁니까?”

도한수 부장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물을 한번 마시고는 말했다.

“나갑니다.”
“5 천억 전부?”
“1 원 한 장 안 빼고 다 나갑니다.”
“누가 개입한 겁니까?”
“위에서 내려온 겁니다. 전 정확히 누가 개입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위? 어느 위를 말하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가 개입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양 전무가 봤을 때 누가 이 대출을 주도했는지
알아내는건 힘들어 보였다.

“혹시 정치권이 개입했습니까? 이 정도는 말해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모릅니다.”
“흠... 이거 뭐, 알고 계시는 게 없군요.”
“우리 같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뭘 알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만나자고 하셨을 때 도움을 못
드릴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럼 이건 아십니까? 혹시 5 천억 대출 딜에 혜성기업이 들어가있습니까?”

도한수 부장은 이번에는 신기하다는 눈빛을 띄며 양 전무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회사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요. 같은 회사 사람에게 이렇게 혜성기업 인수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진행할 줄이야.”

양철기 전무는 황당하고 쪽팔려서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며 나가고 싶었다.


병신도 아니고 기업 경영지원본부장이라는게 워크아웃 기업 인수가 확정됐는데 매각주관사 직원에게 여태껏 회사를
인수하는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냐고 질문을 받으니 쪽팔려서 살 수가 있나.

“이거 영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양 전무의 말에 노기가 묻어 있음을 알았는지 도 부장은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아닙니다. 5 천억 대출이 나가는 대신 혜성기업을 현진물산에서 인수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인수대금은 2,500 억.


대출금 5 천억에서 우선 인수대금 천억만 먼저 제하고 입금될거고 나머지 1,500 억은 3 년간 500 억씩 상환하는
조건입니다.”

양 전무와 차 상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3,500 억에서 2,500 억으로 천억이나 날아간 것만으로도 황당한데 분할상환으로 실질적인 인수대금을 천억으로
틀어막아 놓았으니 말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왜...?”

왜 그 따위 거래에 응했느냐는 물음에 도한수 부장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런지 제가 제일 궁금합니다. 제가 이 얘길 듣고 그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어요. 어떤 등신...


아니, 어떤 이유로 이런 딜을 지시했는지 멱살을 잡아다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허... 천억 플러스 500 억 분할납부라...”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해드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죠.”

그렇게 셋은 어색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양 전무와 차 상무가 어두운 얼굴로 떠나갈 때 도한수 부장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방금 헤어졌습니다. 아직 감을 못 잡고 있지만 곧 알아낼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도 부장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흐음... 짐작도 안 가네. 아 정말 생년월일 확실한 거예요?”

영훈의 짜증에 연희도 억울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요. 몇 번이나 확인했다니까요?”

영훈은 혜성기업 리포트를 계속 들여다보았지만 애초부터 어떤게 어느만큼 가치가 있는지 볼 줄 아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을 게 없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들여다 본다고 뭐 알아낼게 있을까.
자신이 알아낼 정도면 이미 전문가인 다른 사람들이 진즉 알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거라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유, 모르겠다.”

결국 영훈은 혜성기업 리포트를 던져버리곤 의자를 힘껏 젖혀 누웠다.


이때 김민희가 다가와 말했다.

“주임님, 오늘 4 시 강의는 14 층 회의실을 잡아놨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을지로입구역 6 번출구 나가서 5 분


거리에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하시면 됩니다. 한달간 예약해놨기 때문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실 필요는 없고
드시고 싶은 음료나 간식 있으시면 말하고 드시면 됩니다.”
“회사 사람들한테 안 보이게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죠?”
“맞습니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단어 선택이나 눈치가 확실히 보통이 넘는다.

“혹시 또 알아둬야 할 게 있나요?”


“현재는 없습니다. 보고할게 있으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민희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간다.


그 모습에 연희가 입을 툭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니, 자기보다 한참 후배인데 주임님~ 주임님~ 화도 안 나나?”


“날 배려해주는 것 같긴 한데 확실히 굽혀야 할 땐 확실히 굽히는 성격이 보이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느껴서 후배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다 혹시 질투하는 거
아니죠?”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가요? 왜요? 왜? 뭐 때문에?”


“아니 뭐...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하~ 아니 그냥 좀 많이 흘리고 다니는 스타일을 안 좋아하긴 하거든요. 상대가 영훈 씨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그냥 내 취향이랄까?”
“그래요? 나랑 취향이 반대시네요.”

연희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어, 어허... 아~ 그런 스타일 좋아하셨구나?”


“네, 전 좀 많이 흘리셔서 제가 주워다 줄 수 있는 분 좋아합니다.”
“잘해보세요. 그러면...”
쌍심지가 확 올라가는 것이 단단히 삐친게 분명했다.
이제 그만 놀릴까 하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왔다.

[안 바쁘면 저녁에 나랑 술 한잔 하지?]

영훈이 핸드폰을 바라보자 연희가 물었다.

“뭐... 민희 씨가 밖에서 보자고 해요?”


“그만 삐쳐요. 이형준 본부장이 한번 보잡니다.”
“그 사람이 왜요? 다 끝난 거 아니었나?”
“계산을 다시 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궁금하네. 나도 가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왜요?”
“난 괜찮아도 이형준 본부장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로서는 들려주기 싫은 이야기일 수 있거든요.”
“아... 궁금하다.”
“그런데 양 전무님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영훈 씨 말을 듣고 계속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막 뒤를 밟거나 하는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에요? 만약 양 전무가 영훈 씨가 말한 그런 성격이라면 회사에서 뭔가를 해도 했겠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요?”
“교육 한 번 하자고 건의했죠.”
“응? 교육이요?”

양철기 전무는 불편한 점심 이후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고심중에 있었다.
일단 혜성기업을 천억 플러스 분할납부 형식으로 인수하기로 결정난 걸 들은 이상 임지은 시장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임 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듣는 거야 좀 참으면 그만이지만 이 이야기가 회장님 귀에 들어간다면 이후에 현진물산이 임
사장 손에 들어가도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게 뻔했다.
대출을 막든, 혜성기업에 폭탄을 하나 더 얹어서 회사에 부담을 주는 방법을 만들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 도 부장이 자신도 잘 모르는 윗선이라고 한 걸로 보아 오너가 직접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결국 돌고돌아 이형준 본부장의 손에 닿았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형준 본부장을 다시 만나야 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온 신경이 머리로 곤두서는 느낌이 그의 가슴을 옥죄여 왔다.

“야, 시원한 냉수 좀 가지고 와.”

양 전무는 언제나 그랬듯 왕처럼 인터폰으로 고함쳤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총애하는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냉수를 떠오며 말했다.

“지금 전 여직원 빠짐 없이 대회의실로 모이라고 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뭐? 왜?”
“긴급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다고...”
“뭔 소리야, 짜증나게. 기다려.”
양 전무는 짜증이 치솟았다.
성희롱 예방 교육이라니.

“그냥 못 간다고 할까요?”

인터폰으로 교육담당자를 찾아 혼내주려던 양 전무의 손길이 순간 굳어졌다.


어쩌면...
양 전무는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거지?”

양 전무 앞의 비서는 비맞은 새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 전무는 그 모습을 보며 혹시나 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 새 술은 새 부대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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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술은 새 부대에(2) >

“아... 뭐야, 지금 할 일이 태산인데.”


“그런데 전에도 했잖아? 갑자기 왜 성희롱 교육을 하는거야? 혹시 누가 사고 쳤나?”
“맞다. 그거네. 누구지? 혹시 아는 거 없어?”

대회의실에 모인 현진물산 여사원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는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갑자기 불러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도 있었고 누구는 일 폭탄에서 잠시
해방돼 여유를 즐기려는 이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이 자리에 모인 여직원들 대부분은 강사 한 명 와서 동영상 시청하고 적당히 시간 때우는
강의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등장한 이는 예상을 벗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감사실 조영주 과장입니다. 간단한 설문조사 후 다시 부서로 복귀하셔서 근무에 열중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빠르게 작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평소의 성희롱 예방교육과는 진행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감사실이라니...
직장인들에게 감사실이 가지는 무게감은 굉장히 컸다.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단단히 벌어졌다는 예감이 대회의실에 모인 여직원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와 설문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비밀 지켜드릴 테니까 설문조사에 사실 그대로 작성 부탁드리겠습니다. 설문지 작성하신 분께 절대


피해가 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설문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은 감사실 직원들과 바로 비서실 직원들이었다.


당연히 그 중에 영훈과 연희도 끼어 있었다.
영훈은 연희의 아이디어를 듣고 무릎을 쳤다.
이 설문조사에 무조건 피해 여직원이 걸릴거라 확신해서 무릎을 친 건 아니었다.
양철기 전무의 상이 그렇다는거지 그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확신하는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양 전무와 같이 일하는 사람을 자세히 살필 기회가 된 것만으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지금 대회의실에 모인 수많은 여직원들은 영훈이 양 전무의 비서와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다만 감사실장은 송 사장의 지시에 영문도 모르고 끼어든 것이었기에 도대체 왜 사장이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 꼼꼼히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영훈은 설문지를 쭉 돌리면서 체크하듯 여직원들의 얼굴을 보며 지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녔을 때 막 설문지를 받아들고 검지를 깨물면서 고민하는 여직원을 찾을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둥근 얼굴형에 코 끝도 동글하다.
관상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에는 딱 착하게 생겼다고 말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관상학적으로 보기에는 그리 좋은 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설문지를 보며 갈등하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있었긴 한 것 같아 슬쩍 돌아오며 감사실 직원에게 해당 여직원을
찍어주고 나중에 따로 불러내달라고 요청했다.

“경영지원본부장님 비서 말이야?”

하필 딱 찍은 여직원이 양철기 전무 비서라니...


기가 막힐 일이지만 스스로도 단번에 찍을 줄은 몰랐다.
본인이 찍어놓고도 괜히 소름돋는다고 해야 하나?

“맞습니다.”
“왜?”

아직 과장급 대우 사실을 모르는 감사실 조영주 과장이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네가 뭔데?’라는 빛이 역력했지만 이번 일은 사장님과 사장님 딸이 직접 진행하는 일이었기에
감히 입밖으로는 내지 못했다.
물론 그런 생각 밑바닥에는 송 사장이나 연희나 회사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뭣도 모르고 괜히 설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뭔가 있는데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야?”
“독심술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거침없이 ‘없음’으로 내용을 채울 때 설문 첫 번째 질문부터 대답을 못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럼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라고 보입니다.”
“그런 애들 많아. 별거 아닌데 괜히 혼자 오버해서 쓸까말까 망설이는거. 막상 하나하나 캐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
“그거야 물어보면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영주 과장은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이제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사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비서실 들어갔다고 설치는 꼴이
아주 눈꼴 시리기 그지 없었던 거다.

“됐고, 설문지나 돌려.”

그런데 조영주 과장은 영훈이 어떤 성격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훈은 조영주 과장의 위압적인 지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저 경영지원본부장 비서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싫으시면 제가 따로 불러서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조영주 과장은 순간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야, 너 나와.”

조 과장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영훈을 데리고 나가려는데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연희가 다가왔다.

“과장님?”
“어?”
“사장님께서 감사실 지원 부탁하셨던거 기억하시죠?”
“아무리 사장님이라고 해도...”
“싫으시면 그냥 가시면 됩니다. 저희는 사장님이 시키신 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연희 씨... 아무리 연희 씨가 사장님...”

조 과장은 말을 하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연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걸 보고나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실감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저 사원 신분이지만 갑자기 사장 마음이 바뀌어서 임원으로 올려버리면 자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감사실에서 어렵다고 한다면 비서실에서 진행하겠습니다. 빠지셔도 괜찮아요.”

말은 빠지라고 했지만 여기서 진짜 빠지면 회사를 나가겠다고 선언하는거나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조 과장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아닙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 합니다. 경영지원본부장님 비서를 성희롱 의심으로 감사실로 부르면 일이 커집니다.
자칫 잘못하면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조영주 과장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조 과장은 감사실 직원을 시켜 은밀히 경영지원본부장 비서를 데리고 오라고 시켰다.


이후에 양철기 전무에게서 올 엄청난 압박을 어떻게 견뎌낼지 모르겠지만 그거야 감사실장이 견뎌야 할 일이다.
단지 저 뻔뻔한 얼굴로 다시 여직원 사이를 도는 최영훈의 얼굴이 빡치게 만들 뿐이었다.

“야! 바빠 죽겠는데 성희롱 예방교육인지 뭔지 그 쓸데없는 거 빨리 끝내고 애들 올려보내!"


감사실장인 박운재 부장은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어냈다가 양 전무의 고함소리가 끝났을 때 말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빨리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되는 일 있으니까 우리 비서라도 먼저 올려보내라고!"

박운재 부장은 또 다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맞은편에서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 전무의 고함소리가 끝나자 말했다.

“네. 최대한 먼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운재 부장이 영훈에게 말했다.

“들었지?”
“네.”
“악셀 밟을거면 제대로 밟아라. 아니면 너 내일 바로 퇴사야. 그냥 퇴사도 아닐걸? 그냥 넘어갈 분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이 양철기 전무님 스타일이 어떤지 알고 있다고? 자신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거야. 오만도 적당히 부려야지.”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어쨌든 하실 말씀은 다 끝나셨습니까?”

박운재 부장은 감사실 한 켠에서 연희와 대화하는 유미애를 바라보았다.


사장 딸이 나선 이 상황에 아무리 양철기 전무를 두둔하고 싶다고 해도 그로서는 막을 명분이 없었다.
이제 누구 하나의 목은 날아가야 이 피바람이 멈출게 분명했다.

“후... 들어가.”
“알겠습니다.”

영훈이 조사실로 들어가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유미애의 손을 연희가 꼭 잡고 있었다.


연희는 손을 들며 영훈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고 영훈은 조용히 바로 문을 닫고 나왔다.

“왜 다시 나와?”
“연희 씨가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야, 벌써 끝난거야?”
“분위기를 보니 제가 있어서 좋을 것 같지는 않고, 벌써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뭐 그러든지. 빨리 끝내면야 좋지.”

홍승대 비서실장은 오늘 갑자기 시행된 여직원 대상 성희롱 예방교육 이야기를 듣고 뒷덜미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신영투자증권에서 주식을 시장가 가까운 가격에 가져올 때만 해도 그저 운이 좋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5 천억 대출을 진행시킨 걸 알았을 때 지금까지 가졌던 송은채 사장에 대한 모든 편견을
거두어들였다.
애초부터 송은채 사장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임지은 사장이 현진물산을 인수해서 경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지은 사장보다 송은채 사장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송은채 사장을 싫어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것만 가지고도 송 사장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오늘 이루어진 기습적인 성희롱 예방 교육.
그리고 감사실에 경영지원본부장 비서가 조사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은밀히 전해 들은 직후 송은채 사장이 양철기
전무의 치명적인 약점을 제대로 저격했음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그런 행각은 자신과 몇몇 말고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는데...
홍 실장은 이 모든 행동이 송 사장의 실력인지 아니면 새로 온 최영훈이라는 놈의 실력인지 궁금했지만 이내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한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송 사장의 실력이 아니면 어떤가?
송 사장이 오른팔로 생각하는 직원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건 곧 송 사장의 능력이 뛰어난 것 아니겠는가?
홍 실장은 얼른 자신의 서랍에서 비밀열쇠를 사용해야만 열 수 있는 칸을 열었다.
안쪽 깊숙이 잠자고 있었던 USB.
그걸 쥐는 홍 실장의 손이 조금 떨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홍 실장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조사 끝났나? 이리 와서 나 좀 볼 수 있을까? 주차장에 내 차로 와.”

홍 실장은 노트북을 꺼내 작동시키곤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렸다.


잠시 후, 영훈이 문을 열고 탔다.

“부르셨습니까?”
“응, 그래. 앉아.”

영훈이 자리에 앉자 홍 실장이 잠시 숨을 고르고 물었다.

“비서실에 와서 일하기는 어때?”


“좋습니다. 다들 잘해주시고, 실장님께서도 좋게 봐주셔서요.”

최영훈이 비서실에 온 이후 자신을 보는 직원들의 눈이 변했음을 느꼈다.


송은채 사장 역시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스케줄 말고는 자신을 찾지 않았고 오히려 김민희를 더 자주 불렀다.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양 전무 무리와 동급으로 취급되어 내팽겨질 수는 없었다.

“좋게 봐주긴,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본적 없는데.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더 고맙군.”

영훈은 이런 대화를 하는 상황이 의외이긴 했지만 어차피 홍 실장에 대한 평가는 조금 두고 보기로 했기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크흠... 내가 보자고 한 건 오늘 성희롱 교육에 관해서야. 경영지원본부장님 비서를 데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멍청한 사람이 아닌데 ‘설마 시류 파악을 못하고 조사를 그만두게
하려나?’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영훈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만약 증거가 나오면 양 전무를 날릴 수 있겠지만 어설픈 증거로는 오히려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야.”
“일은 좀 복잡해도 됩니다. 중요한 건 옷을 벗기는 거라서요. 아무리 뒷배경이 좋아도 일단 옷 벗기면 힘 못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법무팀이 비서의 억울한 일을 다 밝혀낼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홍 실장은 속으로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 새끼는 지금 회사에 피바람을 예고하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신입사원인데 어떻게 그렇게 회사 일을 잘 아나?”
“이 정도 일은 뉴스기사에 많이 뜨지 않았나요? 그리고 회사에서 짤렸는데도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보통 비리 사실을 알아도 상대의 권위에 눌려서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 못하지.”
“그런가요?”
“어쨌든 자네 말이 틀리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단순히 피해자의 증언만으로는 일이 지저분해지잖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게 좋지.”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떡할건가?”

영훈은 홍 실장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도와달라는 말입니까?”

홍 실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사장님이 자네를 과장에 단 이유가 있군. 그래, 난 양철기 전무와 동급으로 엮이고 싶지 않아.
난 내가 지금껏 일해온 이 회사가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랄 뿐이야.”
“알겠습니다. 증거를 보고 판단하죠.”

홍 실장은 USB 를 노트북에 꽂았다.


잠시 후,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저녁 10 시 30 분으로 표기되는 시각.
지나가는 사람 하나 안 보이는 공간에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고 어떤 여자가 흐트러진 옷가지를 부여잡고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바지가 반 쯤 벗겨져서 뛰어나오는 남자가 보였다.

“이런 씨발,,,,”

평소 욕을 잘 하지 않는 영훈이었지만 이 볼썽사나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왔다.

< 새 술은 새 부대에(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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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술은 새 부대에(3) >

“어떻게 비서실장님이 이걸 가지게 됐습니까?”


“석달 전에 찍힌 영상이야. 감사실장이랑 나만 알고 있지. 물론 양 전무님도 알고 있겠지만. 원래는 그냥
삭제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내가 가지고 있었어.”
“혹시 다른 분 것도 가지고 있습니까?”
홍 실장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영상을 가진 건 없어. 소문이나 들은 이야기야 많지만 그게 도움이 될만한 건 아닐거고.”


“양 전무님께서 실장님이 이 영상을 가지고 있는걸 압니까?”
“모르지. 알면 날 그냥 뒀을까? 양 전무님은 감사실장이 CCTV 영상을 지운 걸로 알고 있을거야. 역시나
감사실장도 내가 보고 지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아니어도 상관 없고.”
“감사실장님이 양 전무님 라인입니까?”

홍 실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 전무님 라인은 다 걷어내려고 하는건가?”

영훈은 잠시 생각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사내 정치싸움에 관심 없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관심 없어요. 그저 제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회사가 잘 되는 것보다 다른 곳에 열정을 쏟는 몇몇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뭐, 그거야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거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회사의 일을 방해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죠.”
“양 전무님처럼?”
“맞습니다. 이런 쓰레기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전 이런 사람들이 회사에 있는게 순수하게 가정과 회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욕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전무님 라인이라서 걷어내는게 아니라 그런
생각에 일조하는 사람이라면 전부 걷어내야 회사가 건강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금의 협상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 칼 같은 말이었다.

“그렇군. 어쨌든 이걸로 조용히 잘 처리했으면 해.”

홍 실장은 굳이 양 전무나 그 라인들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영훈이 쥔 칼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속마음이 궁금했을 뿐이다.
영훈은 홍 실장이 준 USB 를 들고 감사실로 향했고 홍 실장은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피곤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잠시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아마 한숨 자고 일어나면 꽤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등받이를 뒤로 눕혔다.

양철기 전무는 엄습하는 불안감으로 계속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차지열 상무에게 전화를 했을 때 교육 갔던 모든 여직원들이 복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평소에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것처럼 인사하며 자신의 앞길 좀 열어달라고 애원하던 감사실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고 5 시에 예정돼있던 회의까지 취소된 상태였다.
아무래도 감사실로 직접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벌떡 일어난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전무님.”

놀랍게도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감사실장인 박운재 부장이다.


그가 직접 나타난 것에 양 전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야, 너 뭐야!”
“죄송합니다.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너 이 새끼가 지금...”
“죄송합니다. 모셔.”

박운재 부장의 말에 직원들이 전무의 양 팔을 잡고 끌고가려했다.

“어딜 만져! 손 안 떼? 내가 내발로 가!”

박운재 부장이 눈짓하니 직원들이 양 전무에게서 손을 뗀다.


양 전무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죽일 듯 박 부장을 노려보았지만 박 부장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만
말할 뿐이었다.

“너 이대로 내가 가만 있을 것 같아? 너 당장 옷 벗긴다. 내가 헛소리 하는 것 같아?”


“가시죠.”

박 부장은 대꾸하지 않고 감사실로 향했고 양 전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감사실로 향했다.


그 멍청한 년이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실에 가서 유미애와 대질하면 결국 이 모든 일이 무마될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감사실에 들어서니 유미애는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조사실에 앉은 양철기 전무는 불안한 마음에 맞은편에 앉은 박운재 부장에게 말했다.

“이제 말해봐. 뭐야?”

박운재 부장은 한켠에 비치된 카메라 위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저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응하셔야 합니다. 제가 드릴수 있는


말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양철기 전무님, 5 월 13 일 밤 10 시 반에 사무실에 계셨던 것 맞습니까?”


“너, 너... 이 새끼...”
“거기서 유미애 씨를 강제로 성폭행 하려고 했던거 맞습니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증거 있어?”
“5 월 13 일을 제외하고 다른 때에도 그런 적 있습니까?”
“이 개새끼가...”

양 전무가 막 고함을 치려 할 때 박 부장이 탁자를 쾅 치며 소리쳤다.

“양철기 전무님! 사실대로 대답하세요. 지금 이 상황이 장난으로 보입니까? 당신 제대로 해명 못하면 옷 벗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지금 법무팀에서 당신 상대로 고소 절차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 전무는 너무 놀라 감히 박 부장이 버릇없이 굴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 뭐라고?”
“위력을 이용한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굉장히 심각한 범죄입니다. 회사에서는 이 일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 대한 민‧형사상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그렇기에 있었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피해자와...”
양철기 전무는 참지 못했다.

“이 개새끼가!”

짝!

박 부장의 뺨을 후려친 그가 막 박 부장에게 달려들려 할 때 문이 열리며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와 양 전무를


말렸다.
그런데 뺨을 맞은 박 부장은 오히려 한결 편해진 얼굴로 뺨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해당 내용은 법무팀에 인계하겠습니다. 전무님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출근하실 수 없습니다.
가지고 계신 핸드폰 반납 부탁드립니다.”
“이... 이 새끼...”
“꺼내.”

직원이 양 전무의 품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회사에서 지급한 핸드폰이기에 당연히 퇴사하면 반납해야 하는게 맞았다.
박 부장은 이 핸드폰에 어떤 폭탄이 들어있을지, 혹시 자신과 관계된 안 좋은 사항이 없기만을 빌었다.
당장 핸드폰을 뒤져보고 싶었지만 이 모든 사항은 감사실이 아닌 비서실에서 진행하는 것이었고 이제 비서실에서도
감사실을 주시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감히 핸드폰을 뒤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이대로 회사를 나가시면 됩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옷가지 등 당장
가지고 나와야 할 게 있으십니까? 직원 올려보내서 가져오겠습니다.”
“...”
“없으면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박 부장을 비롯한 감사실 직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이제 공은 법무팀으로 넘어갔고 피해 여직원과 상의해 법적조치를 취할거다.

“이 핸드폰 비서실로 갖다줘.”


“알겠습니다.”

박 부장은 이 피의 숙청이 어디까지 뻗칠지 무서워졌다.

차지열 상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철기 전무가 누군가?
수십 년을 넘게 현진물산과 함께 성장해왔던 양 전무는 사실상 성주훈 부사장과 더불어 회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었다.
임지훈 사장이 있긴 했지만 임 사장은 사장직에 올라선지 10 년도 채 되지 않았었다.
당연히 양철기 전무 밑에서 일을 배운 이들이 얼마겠으며 부장급 이상 임직원 중 그의 도움 한 번 안 받은 사람이
드물거다.
그만큼 회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양철기 전무였기에 임지은 사장이 그를 믿고 있었던 거다.
현진물산을 자신에게 안겨줄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손 한 번 못쓰고 단번에 날아갔다.
막말로 찍소리 한 번 못했다.
전쟁으로 치면 적군이 기습하는데 정찰병이 종을 울리기도 전에 장수의 목이 떨어진 셈이다.
너무 놀라서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차 상무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어차피 회의도 취소된 마당이고 이제 곧 퇴근시간이었기에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논현동으로.”

수행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준 그는 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이미 회사를 나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는 양 전무에게 자초지종을 들어야 임지은 사장에게 설명이라도 할 거
아닌가?
그런데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아무래도 개인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씨발...”

아마 양 전무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아 거의 패닉 상태나 다름없을 게 뻔했지만 일단 그가 패닉이든 아니든


자신부터 살고 봐야 했기에 그의 개인 핸드폰에 문자를 남겨 빨리 연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논현동에 도착할 때까지 양 전무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참혹한 마음으로 임지은 사장의 집으로 들어선 그는 놀랍게도 거실 한 가운데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양철기
전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왔어요?”

임지은 사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이미 그녀의 앞에는 얼음만 남겨진 물컵이 한 잔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이미 자신이 오기 전에 한바탕 했으리라.

“늦었습니다.”
“퇴근시간도 전에 출발했는데 늦을게 있나. 그나저나 차 상무?”
“네.”

차 상무는 임 사장이 그냥 물어보는 것인데도 살이 떨려오는 긴장이 느껴졌다.

“우리 양 전무가 크게 실수했나봐. 있어서는 안 되는 실수긴 한데... 왜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잖아?”
“네? 네, 그렇습니다.”
“양 전무가 그렇게 힘이 정정한지 몰랐는데 어쨌든 뭐 그렇다니 어린 여비서에 마음이 동했을 수 있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여비서가 입이 그렇게 쌌대?”

사실 차 상무도 양 전무가 어떻게 한순간에 목이 날아간건지 정확한 정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성희롱 예방 교육이 있었고 조금 소란이 있다가 양 전무가 바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
당연히 임지은 사장이 물어본다고 한들 아는 게 있을리 없었다.

“그, 그건...”
“모르겠지? 차 상무는 우리 양 전무가 그렇게 정정한지 알았어?”
“몰랐습니다.”
“왜? 룸싸롱도 자주 다녔을거 아니야?”

차 상무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무리 룸싸롱을 자주 간다고 해도 차 상무는 같은 회사 사람과 발가벗고 그 짓거리하는건 결코 하고 싶지 않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 전무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쪽으로는 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의외네? 뭐 어쨌든 차 상무도 잘 모르는 일을 올케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빠르게 처리했을까? 나도 우리
양 전무가 이렇게 이팔청춘처럼 살고 있는지 몰랐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다.
임 사장의 말에 틀린게 없었다.

“맞습니다. 분명 이상합니다.”
“그래~ 설마 성희롱 예방 교육을 했다가 우연찮게 걸려서 양 전무 목을 날렸다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랬으면 지금까지 수많은 성희롱 교육에서 말이 안 나왔을 리 없습니다. 특히 감사실장은 양 전무님과 무척
가까웠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인간입니다. 작년에 김장 담글 때도 감사실장
부인이 찾아와 도와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 정도야? 그런 감사실장이 우리 양 전무 모가지를 직접 날려버렸네? 그 감사실장이 양 전무한테
원한이라도 품어서 그럴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결론은 우리 깜찍한 올케님께서 양 전무가 경우 없이 허리를 막 놀린다는 걸 알고 그 빌어먹을
교육인가 뭔가로 목을 날렸다는 거잖아?”

차 상무는 침음성을 흘렸다.


임지은 사장의 입에서 뒤를 이어 나올 말이 무엇인지 예측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알아와, 그게 뭔지. 올케 옆에서 옆구리 찔러대는 놈. 그놈이 누군지 알아오라고. 그걸 알아야 뭔가 대책을
세울거 아니야? 안 그래?”
“알겠습니다.”
“제대로 알아오지 못하면 차 상무도 여기 이 인간처럼 이러고 있게 될 거야.”

양 전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다 쉰 목소리로 처절하게 입을 열었다.

“살려주십쇼. 한 번만 기회를 주십쇼.”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요? 검찰에 고발한다면서요? 내가 검찰총장이라도 움직여줄까요? 그럴 힘이 있었으면
현진그룹이 재계 10 위권 내에서 아등바등 하지도 않겠지. 이봐요, 양철기 전무님.”
“네.”
“집에 가서 오랜만에 와이프 엉덩이 두드려 주면서 식사나 해요. 우리 착한 올케 손에 아무것도 없길 빌면서.
이제 가족들하고 헤어지면 언제 볼지도 모르잖아. 혹시 알아요? 별일 없이 지나가면 나중에 당신을 써먹을 날이
올지. 그러니까... 그만 질질짜고 나가.”

얼려버릴 듯 차가운 임 사장의 말에 양 전무는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거실을 빠져나갔다.

“저런 걸 믿고 내가...”

임지은 사장의 말이 축 늘어진 그의 등을 할퀴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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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술은 새 부대에(4) >

연희의 손에는 양철기 전무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본래 연희가 영훈에게 주려고 했지만 영훈은 그녀에게 알아서 쓰라며 아예 받지도 않았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라는 거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어요. 어떻게 피해자를 한번에 찍었어요? 목에 출입증이 걸려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설문지를 보면서 고민하고 있었기도 하고... 상을 봤을 때 느낌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딱
저 여자가 경영지원본부장 비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운이 좋았던 겁니다.”
“유미애 씨 상이 어땠는데요?”

영훈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상은 우리처럼 배운 사람들만 보는게 아니라 당신이나 사장님도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꼭 보려고
노력한다기보다 살아온 세월을 통해 경험적으로 까칠할 것 같다, 위험하다, 또는 가까이 지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죠.”
“뭐, 주는 것도 없이 보면 좋은 사람이 있고 말도 섞기 싫은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아요.”
“그게 다 맞다거나 틀리다는게 아니라 그 살아온 세월 동안 겪었던 경험들이 축적돼서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봤을 때 양 전무 같은 인간 쓰레기도 사람을 볼 때 본능적으로
건드려도 될 것 같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판단하게 될 겁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지만요.”
“어쨌든 그래서요?”
“대개 눈이 크고 동그라며 귓볼이 두툼하고 광대가 살아 있으면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마련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착하게 생겼다는 말로 평가되며 실제 감정이 섬세하면서 인정에 약하고 애착과 미련이 많은 편에
속합니다. 특히 눈동자가 까맣고 깊으면 눈물이 많은데 이런 분들은 뭔가 꼭 억울한 일을 당할 것 같고 슬픔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그런데 유미애 씨가 이렇게 생겼다는 거죠?”


“네. 남자들도 대개 이런 상을 좋아합니다.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고 할까요? 아마 학창시절에
남자들에게 인기 꽤나 있었을겁니다. 그런데 이 상은 여자 본인에게 있어 꼭 그렇게 좋은 상은 아닙니다.”
“왜요? 이번 일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니까?”
“이번 일은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발현됐지만 어쨌든 비슷합니다. 남자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맞춰주고 억울해도 그냥 삭히고 넘어가는 편이 됩니다. 남들이 보기엔 현모양처 같아 보이지만 남자를 잘못
만나면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있죠.”
“아...”
“당신과는 딱 반대라고나 할까요?”

연희의 눈썹이 역팔짜로 확 꺽인다.

“내가 왜요?”
“당신은 마음에 안 들면 바로바로 말해야 직성이 풀릴 테니 적어도 말 못해서 생기는 홧병은 안 걸릴겁니다. 대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부족하니 크게 다툴 가능성이 있죠.”
“허... 와... 이렇게 멕이는 거예요?”
“자신의 성격을 아는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신을 모르면 본인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도
모르죠.”
“아, 예~ 그러겠죠.”

연희가 눈을 흘기자 영훈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어쨌든 그래서 감사실 직원에게 말해봤는데 딱 걸린 거였습니다. 나도 놀랐어요. 한 번에 찍을 줄은.


사장님은 어떻습니까?”

양 전무가 감사실에서 바로 쫓겨날 때 당연히 송은채 사장의 허락이 있었다.


다만 현재 외부 미팅건으로 출타중이어서 아마 이 좋은 소식을 듣고도 대놓고 기뻐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따로 연락해보지는 않았어요. 어차피 집에서 만나면 물어보면 되니까. 모르긴 몰라도 엄청 좋아하겠죠.”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희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지금 가는 거예요?”
“네. 지금 나가야 얼추 시간을 맞출 것 같습니다. 일 더 하다가 갈겁니까?”
“그래야죠. 오늘 일도 그렇고 당신이 나한테 준 일거리도 다 체크해야 하니까. 한동안 빡세겠어요.”
“수고해요.”

영훈이 움직이려고 할 때 민희가 다가왔다.

“주임님, 퇴근하시는 건가요?”


“아, 네.”
“혹시 운전면허증 있으신가요?”
“아직 없습니다.”
“그럼 운전면허증을 최대한 빨리 따시는걸 추천할게요. 앞으로 계속 운전 안 할건 아니시죠?”
“그럼요.”

근사한 차를 타고 도심을 누비는 그런 광경이야 말로 영훈이 산에 있을 때 꿈꿔오던 바가 아니겠는가?


지금까지는 차를 살 형편도 안 됐었고 과장급으로 올라선 이후에는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을 뿐이다.

“그럼 면허증 따시면 말씀해주세요. 차량 신청해야 하니까요.”


“어? 회사에서 차 지원해주시는 건가요?”
“네. 사장님께서 특별히 주임님께 3000cc 차량이랑 주유 지원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 나실 때 쇼핑 좀
하는게 어떠냐고 물어보셨는데...”
“쇼핑이요?”
“네. 이제 외부 미팅이 잦을 수 있으니까 복장에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희 씨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걸 보니 면전에서 직접 말하기가 조금 그랬나보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거 하라고 전에 법인카드까지 줬으니 할말이 없었다.

“알겠어요. 언제 시간 내서 백화점 한번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네. 수고해요.”

영훈은 괜히 입고 있는 자켓을 툭툭 털며 회사를 나왔다.


하긴 이 정장이 동대문에서 산 거라 아무래도 명품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부족해 보이는게 맞는 것
같았다.
이형준 본부장이 만나자고 한 곳은 방배동에 위치한 고깃집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해보니 대로변에 커다란 간판이 달려 있고 외제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비싼
가게인 듯 싶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이형준으로 예약돼있을 겁니다.”
“아, 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직원의 안내를 따라가니 가장 안쪽에 방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형준이 영훈을 보며 툴툴거렸다.

“왜 이렇게 늦어?”
“퇴근 시간이니까요. 누구처럼 퇴근 전에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나 안 그래. 나도 출퇴근 칼 같이 지키기로 했어.”
“지금까지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고기는 내가 알아서 시켰어. 괜찮지?”
“얻어 먹는 입장에서 그런거 따지겠습니까?”
“내가 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건 그것대로 좋죠. 선물 한 가득 안겨주고 고깃값 계산하라고 하면야 그거 못하겠습니까?”
“내가 내 돈 빌려주고 밥 사라는 소리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엄밀히 말하면 신영은행 고객의 돈임에도 그는 당연히 자신의 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툴툴거리다가 직원이 고기와 음식, 숯불을 세팅하고 나가자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고기는 제가 구울까요?”
“됐어. 이런건 원래 을이 해야 하는 거거든.”
“거 참, 상하관계 확실하게 정해놓으시네요?”
“그래야 언제고 내가 너 제대로 부려먹을거 아냐? 원래 엎드려야 할 때는 어설프게 엎드리면 안 되거든. 너도
언젠가 그 때가 오면 내 앞에서 납작 엎드려야 한다. 크크크...”

농담인지 진심인지...
그런데 이형준 본부장의 얼굴을 보니 전에 룸싸롱에서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어째 결혼식 때만큼이나 활력이 돌아 보인다고 할까?

“뭐 좋은일 있습니까?”
“그래 보여?”
“네.”
“그래 보이면 다행이고. 사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다. 씨발, 언제 눈뜨고 일어나면 납치돼서 통통배 타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도 편히 못 자.”
“그건 좀 너무 가신 것 같은데요? 누가 보면 조폭하다가 배신하는줄 알겠습니다.”
“둘 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인데 다를게 없지. 한 잔 해.”

주전자에 어떤 술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는 거니 받았다.


그는 시원하게 한 잔 꺾고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현진그룹쪽에서 신영은행을 계속 찔러보고 있어. 들었어?”


“네.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적당히 무마하고 있지만 아버지 귀에 계속 이야기가 들어가면 이거 엎어질 수 있어.”

영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계산 다시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다시 하자고 하면 할 거야?”
“아니요. 우리쪽에 더 얹어 준다면 모를까.”
“현실적인 상황을 이야기해준거야. 네가 말해준 거지만 아버지는 날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 어쩌면 지금도 내가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뭘 하려고 해도 이게 함정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체크해야
하거든.”
“혹시 양철기 전무 쪽에서 움직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형준은 영훈이 알고 있는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자꾸 쑤시고 들어오면 곤란해. 방법은 찾은 거야?”


“양 전무 오늘부로 회사에서 나갔습니다.”
“나가? 어딜 나가?”
“성추행 혐의로 퇴사 조치했습니다. 앞으로 현진그룹쪽에서 찔러오는게 아니라면 우리쪽에서는 문제 생기게 할 일
없을 겁니다.”

형준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영훈을 바라보다가 웃는건지 우는건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너 진짜 무서운 새끼구나.”


“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그래, 어쩌다가... 매출 7 조가 넘는 대기업 넘버 3 가 어쩌다가 재수없게 걸려서 날아갔다, 이거지? 인생
졸라게 파란만장하네.”
“그런 셈이죠.”
“휘유... 씨발, 목에 땀나는거 보게.”

그는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고는 말을 이었다.

“싹 정리하고 나면 이제 네 세상 되는건가?”
“전 그런거 관심 없습니다.”
“씨발, 도 닦았나.”
“뭐 그런 이야기는 됐고,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진짜 고기 먹을 친구가 없어서 만나자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형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친구가 없기는 해. 나랑 같이 술 마시려는 놈들 천지이긴 하지만 다들 뭐 하나 얻어 먹을거 없나 눈이 벌게서


달려드는 놈들밖에 없거든.”
“저도 오늘 뭐 하나 얻어 먹을까 해서 온 겁니다.”
“크크... 그런데 미안하게도 오늘 너한테 줄게 없다. 그리고 오늘은 나도 그런 놈들처럼 너한테 뭐 하나 얻어
먹을게 없나 해서 왔다.”
“그래요?”
“우리 꼰대. 뭐 약점 같은거 없냐?”

영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형준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진심이십니까?”
“장난 같냐?”
“장난은 아닌 것 같지만... 설마 그걸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습니다. 양 전무처럼 여자를 밝힌다거나 했으면
하는 마음이겠죠?”
“솔직히 쉽게 마무리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부회장님 쉬운 분 아닐 겁니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맞아. 지금 아버지 오른팔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단번에
승부를 볼만한게 안 나와.”

솔직히 이세준 부회장과 결혼식장에서 본 게 처음이지만 잘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조언을 원하는 겁니까?”


“맞아.”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이미 할만큼 해드린거 같은데. 그리고 혹시 나중에 그...”

그는 영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알아채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친! 설마 아까 통통배 얘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를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거냐? 미친거야?”


“그런건 아니죠?”
“당연하지. 아버지가 가진 재산만 수백억이 넘어. 난 그거 털끝만큼도 관심없다. 내가 신영금융을 가지면 그걸로
충분해. 난 살아남기 위해 이러는거야. 반대 상황이 되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흠... 그래도 좀...”
“돈 드냐?”
“솔직히 공짜로 해주기에는 아깝긴 합니다.”
“말로는 원하는거 다 해준다고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지금 진행하는 대출만으로도 버거워. 이것도 잡음
나오는거 최대한 틀어 막으면서 진행하느라 골치 아프거든. 하지만 난 계산은 확실하다.”
“외상으로 하시겠다는 거네요?”
“이자는 확실히 쳐줄게.”
“흐음...”

영훈이 대답 없이 고기를 먹자 형준도 더는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고기를 구웠다.


그렇게 기묘한 침묵이 흐르며 4 인분이 넘는 고기의 절반을 먹었을 때 영훈이 말했다.

“상환계획 먼저 들어볼까요?”

형준은 하얗고 작은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들이키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양철기 전무 날린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너 임창호 회장한테 경고한거야. 현진물산 넘보지
말라고. 크크크큭... 너 이 새끼, 네가 눈치만 보던 형제들 싸움에 불을 질렀어.”
“그래서요?”
“내가 친구가 돼주지.”

단순히 밥 먹고, 술 마셔주는 친구가 아니라는 건 둘 다 알고 있다.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뿐인 약속은 상환계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좋아. 진짜 친구라면 먼저 양보할 수 있어야지. 내가 네 친구가 되는데 뭐가 필요해?”

영훈은 그제야 웃으며 술이 든 주전자를 들었다.

“일단 한 잔 하시죠.”

< 새 술은 새 부대에(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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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술은 새 부대에(5) >

“씨발, 네가 술 따라준다니까 연예인이 따라준다는 것보다 더 짜릿하다. 응?”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술을 받고는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크’ 소리를 내며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뭘 해줄까?”
“지금 당장은 됐습니다.”
“뭐야? 방금 전에는 말로는 안 된다며?”
“더 빌려줄 수 있는 돈도 없다면서요?”
“그랬지.”
“그럼 가지고 있는 주식들 가지고 도와주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는 신영은행의 돈을 자신의 돈이라고 할 정도로 회사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친구가 되주겠다는 말은 곧 현진물산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겠다는 말과 같다.

“흐흐... 맞아. 백기사든 흑기사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건 해줄 수 있어. 물론 가지고 있는 돈


한도내에서지만.”
“그럼 그걸로 됐습니다. 당장 내가 본부장님한테 바랄게 뭐가 있겠어요. 우리 회사가 문제 없이 잘 성장하면
그걸로 된 거지.”

이 말이 친구를 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는지 형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너 잘 생각해. 국내 은행중에 세 손가락에 꼽는게 우리 회사야. 거대기업이 우리 같은 금융사와 친해진다는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아는거야?”
그 정도는 아직 한창 공부중인 영훈도 알고 있었다.
다만 영훈은 형준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살아남고자 아버지를 끌어내리려고 하지만 그가 가진 욕심은 그의 아버지 못지 않다.
그가 말하는 친구는 그야말로 주고 받을게 있어야지만 유지되는 관계.
그러니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 도움이 될게 없다면 그는 언제고 등을 돌리고도 남을 사람이다.
다만, 그 스스로가 개목걸이가 채워져있다고 믿고 있을뿐.

“알고 있습니다. 상환계획을 물어본건 본부장님의 진심이 어느정도일지가 궁금해서 그랬던 겁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뭐라도 해줄 마음인 걸 알았으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사실 영훈도 뭐라도 요구하고 싶지만 당장 회사에 5 천억 대출이 들어오는 마당에 크게 도와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임창호 회장의 심경을 긁었다는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오버해서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웃기다.
그룹 지분에 관한 사항과 계열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섣불리 이야기를 꺼냈다가 괜히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형준에게 당장 엄청난 비밀이야기를 해줄 것도 아니었다.

“젠장... 내가 손해보는 기분인데.”


“담보도 안 잡고 외상으로 주겠다는데도 손해보는 기분이라뇨?”
“나중에 뭘 달라고 할지 모르잖아.”
“뭐, 그건 그렇겠지만.”
“씨발...”

그는 영훈이 나중에 어떤 요구를 하든 거부할 수 없다는걸 알고 있었다.

“친구 되자면서요? 설마 친구가 과한걸 요구하겠습니까?”


“그래서 방금 그 술이 우리가 친구가 되는 기념주였다 이거지?”
“그렇죠.”

영훈도, 형준도 친구라고 표현했을 뿐 정확히는 동맹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불안한 동맹.
이형준이 신영금융그룹을 손에 틀어쥘 때까지 현진물산의 충실한 신하가 될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하하하! 그래, 좋네. 자, 한 잔 받아.”

형준이 술을 따라주곤 말했다.

“외상 끊었으니까 물건 좀 보자.”

영훈은 술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라고 부회장님이 대단한 실수를 했다는 증거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꼭 그런걸 원하는 건 아니었어. 친구로서 조언을 구하는 거야.”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도 얻길 원하고 있었다.

“부회장님은 섬세하고 꼼꼼하신 성격이며 남을 믿지 않는 분이라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쉽게 내보일 사람이
아닙니다.”
“맞아.”
“주변에 여자는 있을지 몰라도 고작 그 문제로 회사에서 내보낼 순 없겠죠.”
“당연하지.”

오죽 철저한 사람이면 자신의 자식들이 아닌걸 알면서도 30 년 넘게 모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까?

“그러니 제가 본부장님이면 아버지를 직접 노리지 않겠습니다.”


“뭐? 그럼?”
“하나의 큰 그룹을 이끌려면 사람이 중요한거 아닙니까? 부회장님 오른팔을 회유하셨다면 다른 분들도 하나하나
포섭하세요. 어차피 이사회에 은행장 임명과 해임 권한이 있다는데 맞습니까?”
“맞지. 그리고 그 이사회 사람들은 전부 할아버지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 상당수를 본부장님 편으로 만드시면 되겠네요.”

형준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쉽지. 무슨 수로? 그 사람들 못해도 10 년 넘게 아버지랑 지지고 볶던 사람들이야. 강 전무야 내가 약점을
틀어쥐고 있으니까 넘어왔지,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를 배신할 리가...”

영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본부장님.”
“왜?”
“부회장님 스타일이 아랫사람들 다 포용하면서 덕장처럼 끌고가는 스타일인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멍청했군. 그래, 우리 아버지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


“그럼 어떤 스타일이십니까?”
“냉혹하고 철저해. 본인이 어지간하면 실수하지 않기 때문에 부하직원이 실수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형준은 몰랐던 부분을 깨달은게 아니라 익히 알고 있는걸 다시금 상기하기 위해 대답했다.


당연히 영훈도 부회장의 그런 성격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있게 주변사람을 포섭하라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이세준
부회장의 상 때문이었다.
그의 상은 다 좋은데 턱이 약했다.
권력가가 턱이 약하면 아랫사람을 믿으면 안 되고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
인색하기 그지없고 자신만 알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고 배신을 당할 수 있는 상이다.

“그렇군요. 그럼 부회장님은 지금 뭘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절로 회장 직에 앉을 테지만 혹시나 작은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그룹 지분이랑 인맥을
가지고 자신을 위협할까봐 미리 임원들 단속하겠지.”
“본부장님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이상 의심하지는 않겠군요. 그럼 본부장님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버지 피를 이어받진 않았지만 나도 아버지랑 같을 것 같군. 덕장 스타일은 나랑 맞지 않아.”


“그럼 정해졌군요.”
“씨발... 회사가 개판이 되겠군.”
형준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긴장을 풀었다.
긴장되는 게 당연할거다.
부회장은 자신의 동생을 견제하느라 아들을 신경쓰지 못할 거다.
그 사이에 그룹 회장이 죽기 전까지 부회장의 인맥들 거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와야 하니 그 어려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말처럼 훌륭한 인품으로 사람들을 품을 그릇이 아니니 아마도 이제부터 피 튀기는 암투가 시작될 거다.
그리고 자칫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모든게 끝장날게 틀림없다.

“제 조언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말도 안 되게 어려워서 그렇지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어. 나보다 우리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 해준
조언이잖아. 그래서 소름이 끼친다. 언제든지 네가 입을 여는 순간 난 끝장일 테니까.”

이 말은 진심일 거다.
그의 가슴 밑바닥에 깔린 공포심이 아니라면 그가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하나 말씀드리자면 언제고 본인 성격을 못 이기고 급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내 성격이 어떤데?”
“딱 봐도 느긋하고 차분해 보이는 성격은 아니시잖아요?”
“훗, 그렇지.”
“참으세요.”
“그게 쉬울까?”
“어려우면 본부장님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두시든지.”
“네가 옆에 있으면 안 되냐?”
“원래 친구끼리 동업하면 의 상하기 마련입니다.”

형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게를 집었다.

“씨발, 알았다. 말을 말아야지. 고기 더 구울까?”


“그럼요, 그런데 여기 숯불 다 죽었네. 사람 불러야겠다.”

형준은 이런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벨을 눌렀다.

다음날 영훈이 출근한 회사의 분위기는 아주 폭탄이 터지다 못해 폭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전직원이 참호에 숨어 있는 것처럼 칸막이 아래에 고개를 파묻고 메신저를 하거나 아니면 옥상에 올라가 이 폭격의
파편이 어디까지 튈지에 대해 토론 삼매경에 빠졌다.
비서실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이 전쟁을 주도했던 본부였고 적에게 치명타를 안기며 승리했기에 분위기가 나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식사는 하셨어요?”

민희의 물음은 그냥 예의상 묻는게 아니라 안 했다고 하면 당장 뭐라도 사다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요. 식사하셨죠?”
“물론입니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니 연희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어제 무슨 얘기했어요?”
“어제는 특별한 이야기 없었습니다. 그냥 이번 대출에 대해서 문제될게 있는지에 관해서 대화했으니까요.
사장님은 어떠십니까?”
“엄마는 좋아하던데 아빠는 무척 걱정하셨어요.”
“어제 전 사장님 만났습니까?”
“네. 요즘 가끔 가서 만나긴 해요. 뭐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 앞으로 회장님이 우리 회사에 개입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더라구요.”
“그건 미리 걱정해봤자 소용 없으니 우리 일에만 집중합시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나저나 집들이는 언제 할거예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영훈은 다시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달력을 집어 들었다.

“생각을 못 했네요. 별거 없지만 궁금하시다면... 흠... 동호회 모임이랑 강의가 없는 날이 목요일이네요.


괜찮아요?”
“음... 나도 좀 많이 바쁘긴 한데 스케줄 조정이 가능할 것 같아요. 목요일 오케이.”

영훈은 자신의 달력에 ‘집들이’라고 적다가 연희 책상에 놓인 달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희 씨 많이 바쁘다고 하는데 어째 달력엔 아무것도 적힌 게 없습니까?”

연희도 순간 멈칫하더니 속사포처럼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그거야 뭐, 내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요. 아~주 바쁘지만 그 많은 일정들이 모두 이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구요.


너무 많아서 달력에 다 쓰면 빽빽해서 보기 힘들어요. 손도 아프고. 그리고 난 달력 지저분한거 별루더라.”
“아, 네~”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훈을 보며 연희가 불만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금 불쑥 머리를
들이밀고 달력을 가리켰다.

“그리고 ‘집들이’에 왜 별표 안 해요?”

영훈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연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에 ‘서가은 파티’ 메모할 땐 별표를 두 개나 그렸잖아요.”

영훈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피식 웃으며 빠르게 ‘집들이’ 위에 별표 두 개를 그렸다.

“아유, 깜빡했네. 크흠...”

영훈이 달력을 내려놓으며 컴퓨터를 켜는데 누군가 영훈의 파티션을 톡톡 두드렸다.

“바쁜가?”

홍승대 실장이다.
“괜찮습니다.”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네.”
“담배 하나?”
“아닙니다.”

영훈은 그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고급스러운 담배케이스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걸 보고 영훈이 물었다.

“담배하셨습니까?”
“비서실장이 되고 나서부터 몸에 냄새가 배일까봐 하지 않고 있었지.”
“담배를 다시 한다는 말씀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다는 말씀인가요?”

그가 담뱃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고 나서 말했다.

“후... 아침에 사장님께서 혹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곳이 없냐고 묻더군. 난 자네가 날 다른 곳으로


내보내라고 한 줄 알았어.”
“그건 아닙니다.”

홍 실장은 영훈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말했다.

“거짓은 아닌 것 같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좌천시키시지는 않을 겁니다.”

홍 실장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린다.

“정말인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이번에 실장님의 공이 컸으니까요. 다만 이번 일로 공석이 꽤 생길 겁니다. 아마 그
자리에 실장님을 앉히려고 할 수도 있죠.”
“빈 말이라도 기분이 좋군.”
“전 이런 일로 빈 말 하지 않습니다.”

전 직원이 살 떨리는 심경으로 지켜보는 이 상황을 ‘고작 이런 일’로 치부하는 영훈을 보면서 홍 실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갈수록 자네가 좋아지는 것 같아. 적어도 내 뒤에서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거든. 그런데 혹시...”

홍 실장이 뭔가 물어보려 할 때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홍 실장!”

잔뜩 굳어진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은 기획조정실의 강노식 실장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양준기가 서 있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5)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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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술은 새 부대에(6) >

강 실장은 영훈을 슬쩍 보더니 홍 실장에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평소의 홍승대 실장이라면 당연히 자리를 피해 따로 이야기를 나눴을 테지만 지금 상황이 참으로 얄궃었다.
홍 실장이 생각했을 때 사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영훈이었고 자신과 강 실장은 양철기 전무와
상당히 친했던(?) 사람이었다.
아마 양 전무가 남기고 간 핸드폰에 강 실장과의 수많은 대화와 기록이 남아 있을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홍 실장으로서는 절대 영훈 앞에서 자신을 의심할만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특히나 방금 전에 좌천이 아니라 핵심 부서 임원으로 계약을 하게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은 상황 아니던가?
자중하고 또 자중해야 할 때였다.

“그럼요.”

강 실장은 홍 실장이 그대로 그 자리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걸 보고 ‘이 새끼가 왜 저러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얘기 좀 해.”
“네, 하세요.”

그제서야 강노식 실장은 홍 실장이 지금 다른데 정신 팔려서 개념 없이 행동한게 아니라 일부러 이러는 것임을
알았다.
강 실장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친구는...?”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에 비서실로 발령받은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아, 그런가?”

고작해야 신입사원.
사실 강 실장으로서는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는게 당연했다.
연희가 비서실로 올라가고 바로 양 전무가 날아가면서 이 모든 일을 비서실에서 주도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그 모든
일을 송 사장이 주도했다고 생각했지 설마 신입사원 하나가 주도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혹시나 홍 실장이 배신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가 신입사원의 눈치나 보는 처지라고 생각하는게
오히려 비상식적이었다.
당연히 강 실장으로서는 이제 홍 실장과의 대화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아니야. 바쁜 것 같으니까 다음에 얘기하지. 가자.”


“네...”

양준기는 홍 실장에게 뭐라도 할 말이 있는것처럼 보였지만 옆에 영훈도 있고 강 실장이 가자고 하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묵묵히 따라갔다.
영훈은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다가 물었다.

“왜, 가서 대화해주지 그랬습니까?”


“옛말에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도 고쳐쓰지 말라고 했지.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굳이
따라가서 할 이야기도 별로 없어. 강 실장한테 양 전무를 날린 사람이 신입사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네요.”
“어차피 따라가봤자 서로 핵심은 못 잡고 빙빙 돌아야 하는데 자네한테 오해 사가면서까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선을 그은 것 뿐이야.”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양 전무님을 날린게 실장님이라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영훈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의지를 보여주는거군요, 사장님한테.”


“맞아. 이제는 죽으나 사나 송은채 사장님께 충성하는 수밖에 없어졌거든.”
“으음...”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영훈이 의아한지 홍 실장이 물었다.

“왜? 이상한가?”
“아닙니다. 그저 조직의 장에게 충성한다는 그 마음이 특별해 보여서요.”
“너도 사장님께 충성하는거 아니었나?”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니라고?”
“전 충성하는게 아니라 회사를 위해 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고, 그저 이 회사가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계속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양 전무는 그런 환경을 해치려고 했다, 이 말이지?”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렇군.”

홍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기준은 확실하게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다시 비서실로 내려오니 민희가 다가왔다.

“주임님, 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어요.”

영훈이 사장실로 들어가니 송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어서 와, 앉아.”
“어제 일 때문에 걱정 많으시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연희가 그래? 현재 사장이 아니고 전 사장. 하하, 연희 아빠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사장님은 걱정 없으십니까?”
“걱정 왜 없겠어? 그런데 난 기분 좋아. 솔직히 일방적으로 얻어 맞다가 끝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눈엣가시
같던 양 전무를 쫓아냈잖아.”
“양 전무를 안 좋아하셨군요.”
“시아버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었거든.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었지. 어쨌든 고생했어. 난 무슨 마술 보는
것 같아. 이렇게 단번에 양 전무를 잘라낼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운이 좋았습니다.”

송 사장은 빙그레 웃더니 양 전무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영훈은 굳이 그걸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양 전무와 엮인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고민도 많고.”


“홍 실장님한테 다른 자리를 원하는지 물으셨다구요?”

그녀는 피식 웃더니 물었다.

“홍 실장이 애가 많이 닳았나봐? 최 과장한테 벌써 떠볼 줄은 몰랐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아직 사장님께서 내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몇몇 비는 자리가 생길거고 그쪽으로 이동하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랬구나.”

송 사장의 표정이 묘했다.

“혹시 아니었습니까?”
“사실 고민을 하기는 했어. 이번에 양 전무를 쳐내는데 그 공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날 밀어내려고
했던 사람이잖아. 고민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건 이해합니다.”
“그래서 홍 실장은 곁에 둘만한 사람이다?”
“곁에 두기 찜찜하시면 말씀드렸던대로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고 홍 실장님 같은 사람은 남의
밑에서 묵묵히 돕는 일을 잘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장을 맡으면 더 좋은 성과를 낼만한 사람 같은데요.”

송 사장은 가만히 영훈을 보더니 말했다.

“그래, 최 과장이 봤을 때 그렇다는 거지? 음... 또 물어보고 싶어. 양 전무가 저렇게 가고 이제 조직 개편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람을 잘 본다는 이유로 채용됐기에 어쩌면 지금 이 질문은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적합한 질문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직 못 만나본 임원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답답하네. 최 과장한테 면접을 보라고 할 수도 없고... 일단 그래서 호주에 있는 성주훈 부사장이
내일 들어올거야. 내가 최 과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좋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성주훈 부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네.”
“흠... 그럼 일단 만나보고 생각할까?”
“그러는게 좋겠습니다.”
“좋아, 알겠어. 어제 고생 많았고 민희한테 차량 지원에 관해서 이야기 들었지?”
“네. 쇼핑을 권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

송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최 과장이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꾸미면 훨씬 보기 좋을거야. 그리고 이제 홍 실장이 다른 부서로 가면 비서실장
자리가 비는데 혹시 최 과장이 맡아볼래?”
“부담스럽습니다.”
“그래? 흠... 난 좋을 것 같은데. 아니다. 나랑 계속 같이 있어야 하면 최 과장이 따로 움직여야 할 때
불편하겠구나. 어쨌든 비서실장 아니라고 해도 앞으로 나랑 외부에 자주 나가야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고 쇼핑 좀 해.”
“알겠습니다. 조만간 면허도 따겠습니다.”
“그래. 그럼 낮에 별 다른 일 없으면 백화점이라도 다녀와.”
“네.”

영훈은 사장실에서 나와 겉옷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연희가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어디 가요?”
“오전에 딱히 스케줄 없어서 백화점이라도 다녀올까 합니다.”
“아...”

연희가 뜨뜨미지근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미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희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미래 백화점에 오늘 Nodri Clare 입점 인테리어 공사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번 보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실 영업 2 팀의 일을 민희가 어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설사 알고 있다 해도 이제는 부서를 옮겼기에 굳이


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일이 아니었지만 연희가 퍼뜩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받은거다.

“아, 맞다. 고마워요. 내가 깜빡하고 있었다. 백화점 가는 김에 미래 백화점으로 가죠?”

가깝기는 뉴월드 백화점 본점이 회사에서 훨씬 가까웠지만 여기서 굳이 강남 미래 백화점까지 갈 필요있냐는 말을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가요, 그럼.”

백화점에 가는 내내 연희는 영훈에게 요즘 정장 브랜드가 어떤게 있고 어느 연령대에서는 어떤게 먹힌다는다는


내용을 풀어놓았다.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묵묵히 들으며 백화점 신사복 매장에 도착하니 그녀가 줄줄이 읊어주었던 브랜드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저기로 가요.”

그녀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놓고 왔는지 바로 한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점원에게 영훈이 알아듣기 힘든 패션용어를 섞어가며 이것저것 주문했다.
남자 직원은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었는데 능숙하게 연희의 주문을 캐치해서 영훈에게 가져다 주었다.

“평소 관리하시나 봅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이어서 핏이 살아나네요.”

자고로 몸 좋다는 칭찬에 약해지지 않는 남자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영훈은 평소 자신의 몸에 대해 은근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옆으로 그려졌다.
“하하, 좀 그렇죠? 제가 산을 좋아해서...”
“네? 아, 등산을 즐기시는 군요. 역시 관리한 몸은 다릅니다.”

백화점 점원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돌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느긋한 말투의 소유자 답지 않게 살이 찌지는 않았다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슬림한 라인의 세련된
슈트를 입으니 그럴싸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꽤 매력적이었다.
참 특이한 남자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줄곧 연희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자꾸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연희의 머릿속엔 본래 남자가 들어앉을 만한 자리가 전혀 없었다.
병중인 아빠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엄마를 지키기 위해 굳게 다짐하고 입사한 연희였다.
그런 연희가 남들 다 아는 건 하나도 모르면서 세상사 다 꿰고 있는 이 특이한 남자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점원이 다른 옷을 가지러 사라지자 연희의 시선을 느꼈는지 거울을 보고있던 영훈이 뒤돌아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확실히 비싼 거라 그런가 동대문 거랑 촉감이 다른데요?”


“뭐... 나쁘지 않네요.”
“역시 칭찬에 야박하네. 아까 저분 말 들었죠? 관리된 몸이라고. 이게 헬스장에서 만든 근육이랑은 다르거든요.
장작을 팰 때 도끼를 딱 이 자세로 들어서 정확하게 내리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니까 여기 등근육이...”

영훈은 몸이 좋다는 점원의 말에 몸소 장작을 패는 자세까지 해본다.

"칫, 고객 기분 좋으라고 한 립서비스에 너무 우쭐해 하는 거 아니에요?"

새침하게 말하긴 했지만 연희의 시선이 자꾸 영훈의 뒷모습에 꽂혔다.


어깨, 팔뚝, 허리, 허벅지까지.
주인 몰래 훔쳐보고있는 자신에 놀라면서도 연신 시선이 가는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명은 괜히 신났고 한 명은 괜히 부끄러워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김민희는 요즘들어 무료했던 인생에 뭔가 새로운 엔진이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밀려오는 카드값과 월세, 공과금, 그리고 이제는 점점 지쳐가는 남자친구와의 싸움으로 그저 쳇바퀴처럼 의미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 단 한 번, 호기심으로 한 행동이 그녀의 무언가를 깨웠음을 느꼈다.
이전까지 회사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나를 옥죄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개안을 한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흘러가던 삶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능동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자 죽었던 세포가 살아난 것처럼
몸에 활력이 돌았다.
단순한 업무 지시로 보였던 것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스치듯 지나가는 질문에도 깊은 의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민희 씨, 요즘 어때?”

식사를 마치고 항상 들리는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기획조정실 강노식 실장.


예전에는 종종 사장실로 업무차 방문하면서 얼굴을 익혀뒀었고 가끔 점심시간에 만나면 계산을 해준다거나 하면서
비서실 직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우연히 만나 근황을 물어보는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해당했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게 분명했다.

“어머, 실장님. 식사 하셨어요?”


“그럼~ 뭐 마실거야? 내가 살게.”
“아니에요. 전에도 식사 사주셨잖아요.”
“그건 그거고~ 하하하. 뭐, 아메리카노? 라떼?”
“그냥 아메리카노요. 차가운걸로.”
“그 정도 쏘는 거야 일도 아니지. 요새 비서실 분위기는 어때?”

민희는 인상을 구기며 무언가 생각하는척했다.

“비서실이요? 음... 솔직히 좀... 아니다. 아유, 뭘 이런걸 얘기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뭔데? 응?”
“그게... 아니에요.”

애가 닳은 강 실장이 진열장에 곱게 비치된 조각케잌을 가리켰다.

“민희 씨, 요새 저런게 맛있다며? 여기 이거, 하나 할래? 이름도 희한하네.”


“어머~ 마리아쥬 화이트카망베르치즈. 완전 맛있는데.”

민희가 소녀처럼 두 손을 꼬옥 모으고 좋아하자 강 실장이 얼른 같이 계산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가장 안쪽의


자리로 데리고 와 앉혔다.

“요즘 정신 없었지? 사장님 따님도 들어오고.”


“그랬죠. 좀...”
“홍 실장은 어때?”

민희의 눈빛이 찰나간 번뜩였다.

“실장님이야 뭐 사장님 방에 들어가서 나올줄 모르시죠.”


“그래? 그 정도야?”

< 새 술은 새 부대에(6)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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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초전(1) (여기까지 무료) >

쇼핑을 마치고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영훈과 연희는 일단 주차장에 들러 짐을 차에 실어놓은 뒤 다시


명품잡화가 있는 1 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둘 다 ‘여기를 꼭 들러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희의 체면이 있는지라 안 들러볼 수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살피다 하얀 가벽으로 둘러쳐져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간 매장을 찾을 수 있었다.
안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문을 통해 매장안으로 들어서니 몇몇 인부들이 진열대를 꾸미고 있는 모습과 한
가운데에서 누군가와 논의를 하고 있는 노형석 대리를 볼 수 있었다.

“노 대리님!”

연희가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노 대리가 놀라며 반가워했다.

“어? 이게 누구야? 일부러 찾아온거야?”


“그럼요~ 공사는 얼마나 걸린대요?”
“공사라고 할 것도 없어. 백화점내라서 대규모 공사를 할 수도 없고 그냥 갖다 붙일수 있는 소재로 간단하게 하는
거거든.”
“그럼 시간여유는 많은 편이네요.”
“그렇지. 아, 그리고 은성이한테 이야기 못 들었지?”
“어떤거요?”
“이번에 서가은 씨가 드라마 들어가잖아. 여주인공인데 재벌 3 세로 나온대. 그래서 일단 우리 물건 PPL
신청해놨어.”
“오오~”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아한다.

“근데 그쪽이 원하는 금액이 꽤 쎄서 모르겠어.”


“얼마나 달라고 합니까?”

영훈의 질문에 노 대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회당 1 억.”
“와... 보통 미니시리즈가 16 회 정도 하니까 그럼 16 억이나 달라는 거죠?”
“아니야. 요즘 1 회 방송을 중간광고 넣겠다는 꼼수로 2 회로 나눴거든. 그러니까 회수로 보면 32 회야.”
“어머, 진짜요?”
“대작 드라마인 것 같아. 제작비가 300 억이 넘는대. 요즘 드라마 시장이 미쳤다면서 꼴랑 10 억 PPL 로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노 대리가 인상을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희도 이건 너무 한거 아니냐며 중얼거렸지만 영훈은 그래도 이런 기회가 생긴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확실히 노 대리가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는 사업이다보니 가만히 있는대도 자꾸 뭔가 기회가 생기고 있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같이 점심이나 드시죠.”

영훈의 제안에 노 대리가 반색한다.


아마 여기서 혼자 먹을거라 생각했다가 같이 식사할 사람이 생기니 좋은가보다.

“그럴까? 여기 식당가에 태국음식 잘하는 데가 있다는데?”


“좋죠.”

경험해보지 못한 음식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렇게 영훈과 연희가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와을 때 민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영훈에게 다가왔다.
“주임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그래요.”

그녀가 쓸데 없는 일로 따로 불러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녀를 따라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살짝 미소짓더니 입을 열었다.

“점심때 강노식 실장님을 커피숍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래요?”
“네. 요즘 비서실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보시기에 그냥 얼버무렸는데 저한테 뭘 알아내려고 하셨는지 억지로
자리에 앉히시고는 홍 실장님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요?”
“음... 아무래도 양 전무님 퇴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것 같아서 홍 실장님이 계속
사장님과 같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

민희는 신나게 말을 하다가 조금씩 인상이 굳이지는 영훈을 보면서 점점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왜 그랬어요?”
“네? 그, 그건... 죄송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곤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영훈은 그녀를 책망할 생각이 없었다.
과장급 대우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막 혼낼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죄송하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거니까.”


“그게... 혹시나 주임님께 이목이 쏠려서 일하시는데 불편할까봐 그랬습니다.”
“흠... 일단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였어요.”
“그런가요?”

그녀의 얼굴에 자책감이 묻어났다.

“민희 씨가 뭔가 잘못했다기보다 어차피 강 실장님은 홍 실장님을 의심하고 있었을 겁니다. 굳이 민희 씨가


나서서 그 생각을 굳히게 할 필요가 없었어요.”

민희는 순간 영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거죠?”
“나중에는 어차피 밝혀질 테니까. 그럼 당신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될 겁니다.”

송 사장은 당장이라도 영훈을 데리고 다닐 테세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비밀이 지켜질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마음에 도와준다고 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녀가 송 사장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인재임을 드러낸 꼴이었다.
판단력이 빠르고 결단력도 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에 일어난 실수라고 보았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대단하기는 했다.
현진물산 기획조정실은 회사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갈 전략을 수립하는 중추적인 곳이며 회사의 최고 두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임원으로 진급하기 위한 최고의 부서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렇기에 양 전무 아들도 그곳으로 발령 받았던
거다.
그런 곳의 장이 급한 마음에 다가왔다고 바로 속여 먹으려고 들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감히 꿈도 못 꿀 상황 아닌가 말이다.
이 정도면 타고난 배짱이라고 봐도 좋았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사주가 궁금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일 정도라고 할까?
오히려 영훈은 그녀가 일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그녀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조금 더 능력 있는 인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제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민희가 스스로를 자책할 때 영훈이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민희 씨가 일부러 한 일도 아니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상황에서 한 일이니까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입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음... 그런데 혹시 이 이야기 사장님께 하셨어요?”
“아니요. 사장님 지금 외부 미팅 나가셔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럼 이 내용은 내가 보고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했어요.”

영훈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민희도 상황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얼결에 악수를 받아주자 영훈은 격려하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했지만 민희는 영훈이 원래 그런 성격인가보다 하면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경남 거제시.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조선소에는 육중하고 거대한 장비들이 옮겨지며 엄청난 크기의 선박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건물 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고령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가 있음에도 키는 상당히 크고 힘이 부치는 듯 지팡이를 짚고 있음에도 눈빛이 호랑이처럼 강렬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진그룹을 이끌고 있는 임창호 회장이 바로 그였다.

“기억나나? 십년 전이었던가? 좀 잘 나간다고 주접떨다가 돈 날리고 수주도 안 돼서 발을 동동 구를 때 저거


어떻게든 팔아치우겠다고 맨손으로 중동을 돌고 그랬잖아. 그때 그거 소화해준 자네 덕분에 우리가 한시름
덜었었지.”
“그럼요, 회장님. 그때 회장님 참 정정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배는 어떡해서든 팔아서 현금
챙기셨을겁니다.”

대답하는 이는 놀랍게도 양철기 전무였다.


그는 임창호 회장 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의 아들이자 현진중공업에서
경영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태민이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아니야. 나야 성질이 급해서 소리만 지를줄 알지 그 모래바람 뚫고 모진 고생 해가며 팔 수 있었을 리 없어.


그러고 보면 참 자네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 배 만든다고 모자란 부품 사다주고 철강 값 급등할 때 싸게 가져와
주고... 현진물산은 그래서 그냥 계열사가 아니라 현진중공업에게 동지이자 친구였지. 참 고생 많았어.”
“다 회장님께서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우리 지훈이 보좌한다고도 애썼지. 걔가 성격이 나 닮아서 한 고집불통 하잖아? 허허허...”
“하하, 맞습니다. 한 번 고집을 부리시면 아무도 못 말렸죠. 만약 지금 건강하셨으면 벌써 호주 코발트 광산을
인수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양 전무의 그 말이 떨어지자 임창호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코발트 광산인가 뭐시긴가 하는 그거... 그거 어찌해본다고 애쓰다 지 몸 상하는 줄 몰랐지.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제가 곁에서 건강을 계속 챙겼어야 했습니다.”
“자네가 우리 지훈이 마누란가? 그걸 왜 챙겨? 에이...”

임 회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양 전무를 보고는 혀를 차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게 조심을 해야지. 남자는 혀랑 거시기 간수 잘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오죽 못나면 20 년 넘게


쇼핑이나 하고 집에서 살림이나 했던 여자한테 약점을 잡혀서 쫓겨나? 자네가 이렇게 쫓겨나면 내 얼굴은 또 뭐가
돼?”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허, 참...”

임 회장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곤 다시 창 밖 조선소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 없이 시간을 보낸 임 회장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고생했어. 휴가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몇 달 쉬다 와. 고문 자리 하나 만들어 놓을 테니까.”

양 전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됐어. 내가 자네 하루 이틀 보나? 자네 장남 결혼식까지 가서 잘 살라고 축의금까지 넣었어. 게다가 똑똑하다던
둘째까지 입사해서 창립기념일 때 보여준다고 톡톡히 벼르고 있었잖아. 자네 이대로 떠나면 그 똑똑하다던 둘째가
회사를 떠날 텐데 그럼 우리 회사한테 얼마나 손해야? 내가 그 둘째 때문에 이러는 거야.”
“감사합니다. 크흑...”

양 전무가 소매로 눈물을 훔칠 때 임 회장이 보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나가. 꼴보기 싫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남자가 눈물 흘리는 거야. 우리 자주 가던 요 앞 양평댁 가서


돼지국밥에 소주 한잔 하고 씻고 자. 꼴이 그게 뭔가?”
“크흑... 알겠습니다. 정말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양 전무는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큰 회의실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잠시 후, 임창호 회장의 손자인 김태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굳이 받으셨어야 했습니까? 앞으로 검찰에 몇 번이나 들락거릴지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모든


결과가 확정된 후 위촉하시겠지만 나중에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태민의 우려에 임 회장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라는게 말이야, 내 동냥 바가지를 걷어찬 대갓집 주인보다 집에서 내쫓은 부모를 더 원망하는 법이다.
지금이야 며늘아기에게 원망을 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 실수는 잊고 평생을 충성했다 생각한 나를 원망하게 될
거다. 그리고 나를 향한 원망은 바로 너를 향하겠지.”
“그깟 원망, 뭐가 두렵습니까?”

임 회장은 태민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아. 세상에 흠 하나 없는 놈이 어디있어? 그 자리까지 오르려면 구정물도 튀고 거머리도 들러붙고 하는게지.


저런 등신 하나가 무서워서 그러는게 아니다. 똥통에 빠진놈을 구해줬으니 이제 네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게다. 그놈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네 마음에 달린 것이야.”

김태민이 송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런 인간을 보니 속이 끓어 올라서...”


“그릇이 넓어야 많은 걸 담을 수 있단다. 이 모든 게 다 네 것이야. 그러니 넌 그릇만 키우면 된다. 알겠지?”
“네, 할아버지.”

태민은 할아버지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임 회장은 그런 손자의 손을 잡고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 숙모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구나. 이 할애비 도움 없이 가져올 수 있겠니?”


“그럼요. 지켜보세요.”

태민은 자신만만하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 전초전(1) (여기까지 무료) > 끝


ⓒ 영완(映完)

< 전초전(2) (여기서부터 유료) >

호주에서 출발한 항공기가 아침 10 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현진물산의 비서실과 기조실, 전략기획총괄부서 전 직원은 아침부터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양철기 전무가 강제 퇴사한 직후 넘버 2 나 다름없는 성주훈 부사장의 입성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주훈 부사장이 몰고 올 사태만을 걱정하던 현진물산 직원들은 점심 전 11 시에 뜬 기사를 보고 혼란에
빠져버렸다.

[(단독)신영은행, 현진물산에 5 천억 지원.]


[현진물산이 신영은행으로부터 5 천억 자금을 수혈받기로 결정됐다. 이는 앞으로 있을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전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며...]

“이 기사 뭐야? 찌라시야?”
“한국일보잖아. 찌라시일 리가 없지.”
“검토중인게 아니라 확정 난 거 같은데?”
“진짜 5 천억 들어오는거야?”

이 기사만으로도 놀랍기 그지 없었는데 성주훈 부사장이 인청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한 그 시각, 추가 기사가
터졌다.

[(단독)현진물산, 혜성기업 인수 확정]


[현진물산이 워크아웃중인 혜성기업을 신영은행으로부터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총 인수자금은 2,500 억으로
대출받을 5,000 억에서 1,000 억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이후 3 년간 500 억씩 분할납부한다는 조건이다.
혜성기업은 국내 도급순위 39 위에 해당하는 건설업체로...]

그야말로 빅딜이다.
공항에서 출발한 차 안에서 성주훈 부사장은 핸드폰으로 뜨는 기사를 확인하고는 경영기획총괄부서의 박재윤
부장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실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 왜 몰라? 5 천억 대출은 뭐고 그중에 천억으로 혜성기업을 사오는 건 무슨 경우야? 그런데 이걸 몰랐다고?
야 인마, 너 내가 호주간 사이에 놀고 있었냐?”

걸걸한 목소리의 성주훈 부사장은 호탕하고 화끈한 성격이지만 그게 조금 과해 욕설도 서슴치 않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부사장이 돼서 조금 덜해졌지만 예전 팀장급 시절에는 툭하면 개새끼, 소새끼, xx 새끼가 난무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고 인권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했기에 그의 이런 성격이 흠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주 화나야 욕설이 튀어나오는 정도라지만 그래도 박재윤 부장은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번 신영은행 대출은 임원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파다했습니다. 퇴사 처리된 양철기
전무님 역시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양 전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그럼 이 대출을 누가 준비해서 신청한건데? 사장님이 신영은행 찾아가서 대출 서류
작성했겠냐? 사장님이 번호표 뽑고 기다렸대?”

뻔히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톡톡 쏘아 붙이지만 원래 저런 식으로 농담하듯 말하는 걸 알기에 박 부장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홍승대 실장이 이 딜을 주도했을 거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성주훈 부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걔가 이런 걸 어떻게 해? 홍승대 그런 스타일 아니야. 혹시 오재식 아니고?”


“오 상무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홍승대 실장이 주도했다는 소문이 기조실에서 나온
이야기라...”

그제야 성주훈 부사장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기조실에서?”
“네.”
“홍승대가 그렇게 파이팅 있는 스타일이 아닌데... 새로운 사장님이 기를 많이 불어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에 양 전무님 퇴사에 관여한 곳이...”
“그것도 흥승대라고? 야!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 홍승대가 양 전무한테 얼마나 비벼댔는데 뒤를 깠다고?
그것도 기조실 쪽에서 나오는 소문이야?”
“네.”

성 부사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이거 뭐지? 홍승대가 그런 칼을 숨기고 있었다?”


“저희도 듣고 믿기 어려웠지만 기조실은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럼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라는 건데... 무서운 놈이네?”
“저도 실장님을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무섭긴 합니다.”
“그래도 좋은거야. 양 전무 그렇게 간 거야 쫓겨날 짓을 했으니까 쫓겨난거고 신영은행을 구워 삶았건 어쨌건
우리한테 동아줄 내려준 거잖아. 내가 궁금한 건 그런 능력을 왜 숨기고 살았을까 하는거지.”
성 부사장은 깊은 고민을 담은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획조정실 강노식 실장은 홀로 회의실에 앉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신영은행으로부터 5 천억 대출이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솔직히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루머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스를 준 사람이 차지열 상무였기에 그래도 마냥 흘려듣지 않고 나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와중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올줄은 몰랐다.
그리고 단돈 천억에 혜성기업 인수는 또 무엇인가?
아무리 혜성기업이 부실한 건설사라고 하더라도 가진 자산만 갖다 팔아도 2,500 억은 충분히 나오고도 남을게
분명했다.
선금 천억에 500 억 씩 3 년 분할이면 거저 먹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때,

똑똑...

“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를 들어보아 양준기다.

“어, 그래. 들어와.”

양 전무가 그렇게 쫓겨난 뒤로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것처럼 죽상으로 다니던 그는 오늘 아침부터 그나마 생기가
돌고 있는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조사가 끝나면 아버지를 그룹 계열사 고문으로 위촉시켜주겠다는 회장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앉아.”

양준기는 잠시 강노식 실장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기사를 보니 아무래도 사장님께 힘이 많이 실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인사이동이 있다면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강 실장이 준기의 말을 끊었다.

“준기야.”
“네.”
“이번에 아버님 그렇게 되시고 마음 고생 심했을거야.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양 전무님도 회장님께서 잘
봐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일에 집중해야지.”
“네? 아, 네. 그런데...”
“너 아직 신입 딱지도 못 뗐어. 지금까지 전무님 아들이라고 많이 배려해준게 있었지만 이제는 선을 지켜야지.
감히 대리도 못 단 사원이 임원 인사에 왈가왈부한다는게 말이나 돼?”
“죄송합니다.”
“그런 얘기 할 거면 나가.”
“알겠습니다.”

양준기가 다시 어두운 얼굴로 나갔지만 강 실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따끔하게 혼내긴 했어도 준기의 걱정을 본인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대출건으로 사장에게 힘이 실리면 누군가 올라가야 할 임원 승진에 사장쪽 인물이 발령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까지 양 전무를 비롯한 회장파에 힘이 실리던 상황에서 이제는 임원 면접 통과를 위한 과반수가 사장쪽에 힘이
실리게 될 수 있었다.
회장님이 양 전무를 살려줬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검찰 조사가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거다.
이럴 때 호주에 있어야 할 성주훈 부사장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도 송 사장이 원하는 인사에 손을 들어준다면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으로 송 사장을 밀어내는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후... 죽겠구만.”

강 실장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와 말했다.

“실장님, 성주훈 부사장님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30 분 뒤에 임원회의 시작하니까 참석하라고 하십니다.”


“알겠어.”

강 실장은 입술을 깨물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서 와요. 먼 타지에서 고생 많았어요.”


송은채 사장이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성주훈 부사장은 송 사장의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제가 뭐 한게 있겠습니까. 오면서 신영은행 5 천억 대출 이야기 들었습니다. 뒤에서 이렇게 서포트 해주시니
이번 인수전에서 크게 힘을 받을 것 같습니다.”

성 부사장은 마음 같아서는 거의 성공한거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큰 사업을 앞두고서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기에 겸손하게 표현한 거였다.
“부사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생각하면서도 자금적으로 많은 제한을 받을 것 같아서 최대한 노력했어요.
혜성기업을 인수하는 조건이라 실질적으로 받아올 자금이 4 천억이긴 하지만 내년에 돌아올 5 천억 만기 채권을 1
년더 연장했기 때문에 회사 자금 사정에도 꽤나 많은 여
유가 생겼어요.”
“허... 내년에 돌아올 채권까지 연장하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힘써준 덕분이죠. 어머, 멀리서 오셨는데 앉으라는 얘기도 못 드렸네요. 앉으세요.”

성주훈 부사장이 자리에 앉자 송 사장이 말했다.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는 와중에 오시라고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까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아닙니다. 오면서 대략적인 상황을 들으니 제가 한가하게 외부에 나가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빨리 들어올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양철기 전무는 어쩌다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하던가요?”

송 사장이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어휴, 모르겠어요. 일단 법무팀에서 심각한 범죄라는 사실이라고 전해듣고 알아서 진행하라고 했어요. 자세히
듣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 전무가 나가면서 경영지원본부장 자리가 공석이 됐어요. 그리고... 양 전무가 놓고간 업무용 핸드폰에서
회사에 해가 될만한 내용이 몇 개 파악됐다고 해요.”
“심각한 일이군요.”
“부사장님의 조언이 필요해요.”

이미 증거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잘라낼수 있으면서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보면서 성 부사장은 사장이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도움이 있어야 임원면접에서 원하는 사람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 부사장은 회사로 오는 내내 고민을 했다.
과연 이 상황에 송은채 사장을 도와주는게 맞는 건지, 아니면 회장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양 전무 라인을
밀어주는게 좋을지 말이다.

“그럼요, 도와드려야죠.”

물론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했지만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아, 벌써 회의 시간이 다 됐네요. 일어날까요?”

사장실의 문이 열리고 송은채 사장과 성주훈 부사장이 나왔다.


비서실 직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희가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이동하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영훈의 곁으로 홍승대 실장이 다가왔다.
영훈이 슬쩍 홍 실장을 보며 말했다.

“임원회의라는데 안 따라가십니까?”
“사장님 수행해야 하지 않냐고? 지금 상황에 그럴 필요가 있나? 뭐, 원한다면 가서 공개적으로 다구리 맞아줄
수는 있어.”

안 그래도 오늘 기사로 모든 관심이 홍승대 실장에게 쏠렸을 텐데 회의에 얼굴을 드러낸 순간 질문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질 거라는 말이었다.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장단을 맞춰주려면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굳이 모습을 드러내서 호기심을 해결해줄 필요는 없었다.

“왜? 내가 5 천억 대출도 받아오고 양 전무도 날린 것처럼 연기하면 되지 않겠어?”


“어설픈 거짓말은 오히려 사장님을 곤란하게 만들겁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연기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성주훈 부사장은 계속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당장 회의 끝나고 식사라도 하자고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고.”
“흠... 글쎄요. 생각 좀 해볼게요.”

영훈은 그렇게 애매하게 말을 끝내곤 자리를 옮겨 연희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영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은밀히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가족관계사항이랑 사주예요. 부사장 와이프가 가끔 점을 보러 다녀서 알아낼 수 있었어요.”

영훈은 주변을 살펴보며 부사장의 사주를 살폈다.


계산을 끝내고 입을 열 찰나, 홍 실장이 손에 핸드폰을 쥔 채로 빠르게 다가왔다.

“일났다.”
“네? 왜 그러십니까?”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골든 브릿지라는 사모펀드랑 손잡고 이번 코발트 광산 인수전에 뛰어든다는 기사가 떴어.”

홍 실장이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여주었다.


영훈은 기사를 읽지도 않고 물었다.

“갑자기 왜요?”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는 임지은 사장 남편의 동생이 운영하는 펀드야.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가격을 절대
헐값에 사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
“그럼 돈이 얼마나 더 들거라 생각하십니까?”
“글쎄... 만약 정말 경쟁이 붙게 되면 못해도 3~4 천억 정도는 더 들어갈걸? 게다가 세원 인터내셔널은 몽골
구리광산이랑 호주 철광석 광산까지 가지고 있어. 옆구리는 골든 브릿지가 찔렀을지 몰라도 세원 인터내셔널은
진짜로 욕심을 낼 수도 있지.”

영훈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하려고 하면 자꾸 방해를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성주훈 부사장의 사주.

“이거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뭐?”
“이거 광산업체 꼭 인수 해야하는 거냐구요.”

< 전초전(2) (여기서부터 유료) > 끝


< 전초전(3) >

홍 실장은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말이냐는 듯 말했다.

“이거 인수에 매달린 기간만 6 개월이 넘고 호주 현지에 나간 직원들 숙식이랑 업무에 쓰인 비용만 수억이야.
그런데 그냥 엎자고?”
“수억이 개인에게는 굉장히 큰 돈이 맞긴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푼돈 아닙니까? 우리회사 영업이익이 수백억이
넘는데 그깟 수억이 아까운가요?”
“순수하게 손해가 된 비용만 그렇다는거야. 그 시간에 다른 사업에 매진했다면 들어왔을 기회비용까지 생각하면
단순히 푼돈이니까 엎자는 말이 나올 수 없을걸?”

홍 실장의 말이 일리가 있긴 했지만 영훈은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광산 업체 인수가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이제 이거 파토내려고 경쟁자까지 붙었습니다. 상대는


먹으면 좋고, 안 먹으면 경쟁회사 자금줄 말려버리겠다는 생각에 여유있게 들어올 텐데 우리는 여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게...”
“그래, 어떻게 보면 외통수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 하지만 사장님은 이 프로젝트 포기하지 않으실거야.”

그 이유는 전에 사장과 이야기하면서 들은 바 있다.


코발트가 배터리 핵심소재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맡게 된 첫 프로젝트였기에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불리한 싸움을 자처하는 겁니다.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어쩌게?”
“사장님과 대화를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임원회의에 들어가서 이 사업은 무효라고 외칠 수도
없으니까요.”
“하... 그러면 볼만은 하겠네.”

영훈은 손가락으로 파티션을 톡톡 두들기다가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회사에?”
“네.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요.”
“머리가 좋은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솔직히 이런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치고 머리 나쁜 사람이 있을까?


다들 어렸을 때 수재 소리 들었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머리가 좋은 사람을 찾으니 홍 실장은 쉽지 않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조실 친구들은 강노식 실장한테 꽉 잡혀 있을 테고, 경영기획총괄 쪽은 이 프로젝트 놓는 걸 수용하지 않을게


분명해. 법무팀이 똑똑하기는 한데 그런 쪽을 원하는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그럼 내가 생각했을 때 머리 좋고 믿을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떠올라.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 이 친구가
스카이 출신은 아닌데 번뜩이는 게 있거든. 지방대 출신인데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부장 달았어. 그렇다고 사내
정치에 관심이 있냐? 그것도 아니야. 그냥 일을 잘 해.”
“좋네요. 혹시 만나볼 수 있습니까?”
“당연히 조용히겠지?”
“맞습니다. 둘이서만 만나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될 테니까 실장님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오케이. 아, 그리고 하나만 묻자.”

홍 실장이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연희를 슬쩍 바라보았다.


비서실장이 사원에게 계속 지시를 받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옆에서 보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불편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자리 비켜드릴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장 딸이다.


이 자리에서 안 듣는다고 그녀 귀에 이 내용이 안 들어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사장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아?”

영훈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걱정하실 일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잘 알겠어.”

홍 실장의 얼굴이 밝아진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계속 불안했던 것 같다.
아무렴 불안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붙잡던 끈을 그 스스로가 잘라가며 노선을 바꿨는데 이 상황에서 토사구팽을 당한다면
회사를 나가야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홍 실장이 사라지자 연희가 물었다.

“어쩌려고 그래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큰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이형준이 그랬다.
양 전무를 쫓아낸 건 임창호 회장의 콧털을 건드린 셈이라고.
형제 간의 싸움에 불을 지폈다고 했으니 고작 인수가격 조금 올리고 그만둘 리가 없다.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회사 미래가 달린 거니까요.”


“회사 미래가 꼭 코발트 광산에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누구는 석탄에, 누구는 구리에, 누구는 태양광에...
현진물산은 수많은 미래 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잠깐 미뤄두어야 마땅합니다.”
“임원들이 납득하지 못할 거예요. 특히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진두지휘했던 성주훈 부사장은 결코 이
프로젝트를 중단하려 하지 않을 거라구요.”
“그게 문제입니다. 성주훈 부사장.”
“네? 왜요?”
“운이 다했어요. 이 사람은 나이 쉰에 이를 때까지 이룬 것으로 남은 평생을 먹고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도하는 사업이에요. 솔직히 코발트가 미래에 얼마나 유망한 소재인지 난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성주훈 부사장은 이제 운이 다했습니다.”
연희는 단호한 영훈의 말에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 이대로 둘 수 없잖아요?”


“내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요. 그럼 머리 좋은 사람은 왜 찾은 거예요?”
“주머니에 돈이 들어왔는데 그냥 쟁여놓자고 하면 처음에는 그러자고 하면서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는 게
사람입니다. 하물며 지갑에 돈 빵빵하게 쟁여놓고 눈앞에 미래 먹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걸 포기하자고
하는데 순순히 포기하겠습니까? 돈 쓸 곳을 만들어줘야 수긍하고 넘
어갈겁니다.”
“그걸 머리 좋은 한 명에게 물어보자는 건가요? 집단 지성을 무시하면 안 돼요.”
“집단 지성이 좋은 말이긴 한데 그 집단 지성이 준비한 사업이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 아닙니까? 지금은 집단
지성보다 한 개인의 번뜩이는 생각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뭐, 근데 만나고 나니까
부사장님이랑 별다를 게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거구요.”
“후... 알겠어요.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이라고 했죠? 인사기록 확인해볼게요. 언제 만나실거예요?”
“홍 실장님이 연락 주시겠죠. 난 잠깐 전화 좀 하겠습니다.”

영훈은 조용한 곳으로 가 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원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뜬 신영은행 대출건으로 회사 분위기가 모처럼 살아난 상황에 갑자기 세원 인터내셔널의 입찰 참여는
다시금 회사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임원회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다들 초조하게 기다리던 와중 해외자원사업부의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은
뜬금없는 전화를 받았다.

“고 부장, 나 홍승대인데.”
“아, 네. 실장님.”
“다른데 알리지 말고 조용히 비서실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고승현 부장은 바짝 긴장했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지금 비서실이 회사를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게다가 지금 세원 인터내셔널이 사모펀드를 물고 들어와 참전을 선언한 마당에 갑자기 자신을 은밀하게 부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가 않았다.
사내정치는 딱 질색이라 괜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르는데 가지 않을 수도 없다.
혹시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하면서도 일단 부하직원들 모르게 계단을 타고 비서실로 향했다.

“실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실에 도착하니 똘망똘망한 여직원이 묻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안내한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따라가니 안쪽 작은 회의실에 홍 실장과 처음보는 젊은 직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서와.”
“안녕하십니까.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홍 실장은 앉아서 반겼고 최영훈이라는 직원은 벌떡 일어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 부장은 얼결에 영훈에게 악수를 건네고는 물었다.
“아, 네. 선배님. 그리고 최영훈이라고? 반가워. 이 친구는...?”

홍 실장이 고개를 돌리고 영훈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훈이 만나는 자리에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 일단 자리에 앉을까?”


“네? 알겠습니다.”

고 부장은 덜컥 떨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과거를 되짚으며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게 아닌지 떠올리려 열중할 때 영훈의 싸인을 받은 홍 실장이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에게 볼 일 있는게 내가 아니고 이 친구야.”
“네?”

얼굴도 모르는 친구니 아마 회사에 입사한지 1 년도 채 되지 않는 사원이 분명했다.


그런데 고작 그런 녀석이 석유화학팀장인 자신을 오라가라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던가?
순간 ‘사장님께 숨겨놓은 아들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 때 영훈이 말했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제가 부장님을 뵙고자 했던게 맞습니다.”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왜?”
“부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서요.”
“의견? 무슨 의견?”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입니다.”
“아니 거 참, 뜸들이지 말고... 응? 뭐?”
“만약에... 코발트 광산 업체 입찰을 포기한다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요?”

고승현 부장은 영훈의 물음에 눈만 껌뻑여댔다.


질문의 의도를 감히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만약 둘만 자리한 상황에서 저렇게 물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꾸짖으며 혼냈겠지만 지금 눈앞에 다른 누구도 아닌
비서실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사 5 년 선배인 홍승대 실장은 평소에 입이 무겁고 임원급이 아니면 얼굴도 잘 보여주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괜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문제는 질문을 한 대상이 고작 대리급도 안 돼 보였고


질문의 내용도 황당했다는데 있다.

“질문이 잘못됐어. 우리가 왜 포기해야 하지?”


“세원 인터내셔널이 참여하면 인수가격을 생각보다 많이 높여야 할 거라고 하더군요.”
“원래부터 입찰은 경쟁이야. 경쟁이 없었으면 우리가 뭐하러 호주까지 가서 그 지랄을 했겠어? 세원
인터내셔널만 경쟁업체인가?”

고 부장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가까스로 참으며 최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눈앞의 인간이 사장의 숨겨둔 아들이라고 세뇌하고 있었다.
숨겨둔 아들이 아니면 이 상황은 말이 안되는 거니까.

“다른 경쟁업체는 광산 업체인 프록시아의 가치를 6 천억에서 7 천억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 회사는 최대 1 조


원까지 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원 인터내셔널 역시 그렇구요.”
“세원이 1 조원까지 보고 있다고? 누가 그래?”
고 부장이 코웃음을 치자 영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골든 브릿지라는 사모펀드 운용주체가 김우진이라는 사람인데 임은진 현진고속 사장님 남편의 동생분 되신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퇴사하신 양철기 전무님이 그간 김우진과 몇 차례 연락한 정황이 있구요. 당연히 우리가 가진
정보가 흘러들어갔을겁니다.”

고승현 부장은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내용을 믿을 수 없는게 아니라 일개 사원이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눈앞의 인간은 사장의 숨겨둔 아들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게 진짜인가?”
“네.”
“그럼 인수가격을 최소 1 조를 써야 한다는 말인데 골든 브릿지가 그정도 자금력이 된다고?”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1 조 원을 쓸 수 있다면요?”
“그럼...”

고승현 부장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1 조원 이상이 비싼가 하면 분명 비싼 건 맞지만 미래에 얼마만큼 돈을 벌어다줄지는 또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건 1 조 원의 현금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4 천억이 들어온 현진물산에게도 결코 쉬운
금액은 아니라는 거였다.
고 부장은 저 젊은 놈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냥 덮는다고 치면?”


“어차피 장기적으로 꾸준히 회사를 먹여살릴 사업을 찾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호텔업은 어떻습니까?”
“호텔? 아니 무슨...”

고승현 부장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헛소리냐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려다가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졌다.
설마...

“설마... 그 호텔이 현진관광을 말하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매력있는 매물은 맞는 겁니까?”
“이런 미친...”

< 전초전(3) > 끝

< 전초전(4) >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승대 실장은 생각지도 못한 영훈의 발언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예상을 뛰어넘는다지만 현진관광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거론할 줄이야...
하지만 여기서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반응하면 고승현 부장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짓이기에 허벅지를
틀어쥐며 표정을 관리했다.
반대로 고승현 부장은 자신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최영훈이라고 했나? 입사한지 얼마나 됐지?”


“아직 3 개월이 좀 안 됐습니다.”
“아... 이번 공채 신입사원?”
“맞습니다.”

갈수록 기가 차고 코가 막힌다.
자기가 입사했을 때를 생각하니까 한창 선임을 따라다니며 보고서 작성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있을 때다.

“사장님하고 관계가 어떻게 되나? 혹시 인척관계?”


“전혀 아닙니다.”
“전혀?”
“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 남입니다.”

이쯤이면 민망해하거나 죄송해하는 표정이라도 지어야하는데 이 놈은 ‘그게 뭐 어때서?’하는 표정이다.


오히려 질문한 스스로가 더 이상해지는 묘한 상황.
그래서 고 부장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홍승대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장님, 지금 몰래카메라 찍는거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저 이거 진지하게 답변해야 합니까?”
“답변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장담하건데 답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네한테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거야.
다만...”
“다만?”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 내용은 자네 와이프한테도 꺼내선 안 돼.”
“그러니까 장난은 아니다 이거네요? 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출입증에 잉크도 안 마른 꼬맹이가 사장의 인척은 아니면서도 비서실장을 움직일만큼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걸
인정해야 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인 고승현 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텔업은 세계적인 공유숙박업체가 나왔음에도 꾸준히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는 사업이야. 물론 5 성급


이상의 고급 호텔에 한해서지. 현진관광이 소유하고 있는 호텔은 종로의 리츠 칼튼, 강남의 켄싱턴과 제주의
포시즌 호텔이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페이먼트 호텔을 얼마 전에
인수했어. 매출흐름 견고하고 조금씩이지만 계속 성장하고 있어. 솔직히 내가 호텔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건 현진관광이 우리 계열사이기 때문이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매력적이냐고?
그래. 솔직히 코발트 가격에 따라 수익이 들쭉날쭉한 프록시아보
다 리스크 적고 안정적인 현진관광이 더 알짜배기일 수 있어.”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야. 너, 이거 적대적 인수합병을 노리고 물어본 거지?”
“맞습니다.”
“1 조가 큰 돈이긴 해. 아마 그거 가지고 현진관광 매수 들어가면 주가 폭등할거고 그룹이 요동칠거다. 그런데
그거 놀래키기만 하고 가지지는 못해. ‘타초경사’라고 알아?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거야. 회장님이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

고승현 부장의 경고에도 영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신영은행에서 흑기사로 참여할겁니다.”

꿀꺽...

홍승대 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남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 부장이 눈빛을 번뜩였다.

“얼마나?”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분 13%에 추가 4 천억 가능하다고 확답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신영은행이 무슨 현진관광 주식을 13%나 가지고 있어?”
“신영은행에서 2%, 신영투자증권에서 3%, 신영생명에서 4%, 신영모건스탠리 자산운용에서 4%, 총 13%가
맞습니다.”

당연히 이형준 본부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게 끝이야?”
“모건스탠리에서 운용하는 아시아코어펀드에서 현진관광 주식을 8%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확실해?”
“신영금융지주 사외이사 중 한 명이 모건스탠리 일본 현지법인 CEO 라고 하던데요?”

고 부장은 감탄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흑기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물어왔군. 아버지가 정치권에 계시나?”


“아닙니다.”
“이제는 그 아니라는 말도 믿지를 못하겠군. 어쨌든 총 21% 가지고 시작하는거네? 플러스 1 조 4 천억?”
“맞습니다.”

고 부장은 다시 시선을 홍 실장에게 돌렸다.

“할 겁니까?”
“사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성주훈 부사장님이 가만 있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프록시아 인수 가능하겠어? 어차피 같은 해외자원사업부라 정보는 다 파악하고 있을 거잖아?”
“세원 인터내셔널이 정말 입찰에 참여하면 장담하기 힘듭니다.”
“4 천억 들어온거 물론 좋긴 한데 그거 이자도 생각해야지. 1 년에 금융비용만 얼마인지 감이 오지? 그리고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혜성기업 때문에 신영은행에다가 매년 500 억씩 상환해야 해. 그거 못 갚으면
가진 자산 다 팔아치워야 하고.”
“그걸로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고 부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사장님을 마땅히 설득할 방법은 없는 거군요.”


“맞아.”
“사장님을 설득할 방법은?”

이번에는 홍 실장이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훈이 언제나처럼 담담히 말했다.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뭐, 설득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프록시아 인수를 지켜보면 되겠죠.”

고 부장은 최영훈이라는 인간이 사장과 인척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 비서실장 이상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회사가 사력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고 그룹 계열사를 적대적 인수합병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도
송은채 사장이 미친놈 취급하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훈이 물었다.

“그냥 입 꾹 다물고 하시던 일 하실 겁니까? 아니면 저희를 도와주실 겁니까?”


“지시가 아니라 권유라 이 말이지? 내가 안 한다고 해도 문제 없는?”
“물론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아두셔야 합니다. 어쩌면 이번 일이 회사에 아주 큰 변환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고 부장님은 그 일을 회피하신 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부장님이 임원으로 성장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아, 이건 협박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순수하게 걱정이 돼서
말씀드려본 겁니다.”

고승현 부장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게 협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더 이상 줄다리기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내가 해야할 일은?”


“일단 사장님께 결재를 받겠습니다.”
“보아하니 결재 받는데 문제될 건 없어 보이네? 그 이후에는?”
“현진관광을 문제 없이 인수하기 위한 작전을 짜주세요. 팀은 원하는 대로 꾸리되 외부에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당연하지. 알려지는 순간 무슨 후폭풍이 불어닥칠지 모르는데. 그런데 인원은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잡아도
되는 거지?”
“법무팀, 재무팀, 홍보팀 아무나 잡아가셔도 됩니다. 외부인력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비밀엄수만
할 수 있다면.”
“무슨 명목으로?”
“아무거나 하나 잡으시죠? 너무 황당한 건 말고 적당히 내세우기 좋은 걸로요.”
“사이즈가 작으면 팀원 빼가는 걸 용납 못할 거야.”
“그럼 큰 프로젝트에 적당히 내세우기 좋은 걸로.”

잠시 생각하던 고 부장이 말했다.

“혜성기업을 엮자.”
“어떻게 말입니까?”
“광주 봉선동에 추가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겠다는 얘기가 있어. LH 공사가 부지 매입 끝냈고 시공사 선정만
남았는데 알다시피 봉선동 아파트 값이 미쳤거든. 고급 단지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선정만 되면 엄청난
이익이 생길 거야. 전에 기사 보고 그냥 넘겼는데 여기에 혜성기업을
끌어들이자고. 건설업체 인수해서 알맹이만 쏙 빨아먹고 팔거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보여주기에는 더 없이 좋지.”
“좋긴 한데... 그럼 혜성기업에서 단독으로 들어가도 되는거 아닙니까?”
“아니지. 도급능력 39 위가 어딜 끼어들어? 이거 평당 분양가가 최소 3 천은 넘어야 해.”
“우리는요?”

고 부장은 피식 웃었다.

“역시 신입은 신입이네. 그렇죠?”

홍 실장도 여기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한테도 옛날이잖아.”

고 부장은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5 년 전에 우리도 외부 인력 스카웃해서 건설 부분에 잠깐 진출한 적이 있었어. 대규모는 아니었고 상류층들을


위한 초고가 빌라 단지를 청담동에 지은 적이 있는데 현진이라는 이름을 안 넣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지는 모르지.
현재 1 채에 50 억에서 70 억이 넘는 초고가로 거래되고 있
어.”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후로 건설에 손을 안 댄 겁니까?”
“조직도 없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힘을 많이 줘서 그런지 막상 남는 게 많지 않았거든. 그래서 전
사장님께서 조직 개편할 때 깔끔하게 우리가 잘하는 부분으로 집중하자면서 정리했지. 어쨌든 혜성기업과
현진이라는 우리의 이름, 그리고 초고급 디자인 설계 능력을 합치는 거야. 건
설비용만 6 천억이 넘는 대단지야. 보여주기에 딱 좋아.”
“그렇네요. 뭘 하려는 듯이 보이기는 하네요.”
“어차피 이거 우리가 못 따. 의욕만 가지고 달려들다가 헛 힘 쓰기에 딱 좋은 건데... 나 이거 완전 바보
되겠구만.”
“어차피 못 하는거 알고 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어쨌든 외부에는 그렇게 알리는 걸로 하고... 그리고 제가
서포트 할 겁니다.”
“업무 지휘가 아니라 서포트를 한다고?”
“제가 업무 지휘하면 팀이 돌아가겠습니까?”
“알긴 아네. 그런데 팀원으로는 들어오지 않겠다?”
“일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방식?”
“저는 좀 특이한 방식입니다. 숫자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편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닙니다. 그냥 저만의 인맥을 통해 알아내는 방식이라고만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

“아~ 인맥... 그렇지. 그런데 그럼 이번에 신영은행 5 천억 대출도 혹시...?”


“맞습니다. 제가 받아왔습니다.”

그깟 일은 자랑할 거리도 안 된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그럼 혜성기업 건도?”


“네.”

옆에서 홍승대 실장이 거든다.

“내년에 막아야 할 5 천억 채권도 연장한게 이 친구야. 아, 이 내용은 모르고 있었지? 기사로 안 나갔던데.”
“...”
*

“최 과장의 말은 그러니까... 프록시아 입찰을 포기하자는 거지?”


“네.”

임원회의에 들어갈 때 만면에 미소를 띠었던 송은채 사장의 얼굴은 회의가 끝나고 돌아왔을 땐 무척 굳어져 있었다.

회의에 들어갈 때 들었던 세원 인터내셔널의 입찰 참여 소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의를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영훈이 찾아와 건넨 이야기에 안색이 굳어지다 못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현진관광을 인수하자는 거고?”


“맞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까?”
“아니요. 그냥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계속하셔도 됩니다. 조금 난관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직원이
준비한 만큼 위기를 겪어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최 과장이 입찰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유는 뭐지?”
“광산 업체 입찰을 끝으로 이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거든요.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면 제 의견은 안 들으신 걸로
하시면 됩니다.”

송은채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영훈의 말은 틀린게 없지만 그렇다고 그룹을 향해 선전포고 하나 없이 적대적 M&A 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뉴스 헤드라인에 오를만한 일이 될 거다.
부담이 안 되고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일거다.
하지만 영훈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 역시 힘들었다.
그가 지금까지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거절을 하려고 해도 이유가 필요했다.
적어도 그냥 싫어서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만약 세원 인터내셔널이 중간에 입찰을 포기할 수도 있잖아? 아니면 어제 기사가 오보일 수도 있고.”
“물어보셨습니까?”
“아직.”
“그럼 물어보시죠? 가까운 사이니까 그거 물어보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좋아. 만약 세원 인터내셔널이 지금 손들고 빠지거나 골든 브릿지가 포기한다면 입찰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거야.”
“당연합니다.”
“만약 그게 아니면 이거 결재하도록 할게.”

송 사장의 앞에는 홍승대 실장이 작성한 ‘봉선동 시공사 선정을 위한 TFT 조직안’이라는 결재서류가 올라와
있었다.

< 전초전(4) > 끝


< 전초전(5) >

송은채 사장은 비교적 굳은 표정으로 광화문 포시즌 호텔에 도착했다.


수행기사는 차에 대기하게 한 채 홀로 올라가는 그녀는 링에 올라가는 격투가가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내리 누르며 호텔 2 층의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직원이 바로 알아보고 안내한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룸에 들어선 송 사장은 임지은 사장과 그녀의 남편이자 현진기계 사장인 김대영이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늦지 않게 온다고 왔는데 빨리 와 계셨네요?”


“올케가 보자고 하니까 설레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지 뭐야?”
“안녕하세요, 아주버님.”
“연희 엄마가 사장이 되더니 아주 포스가 줄줄 풍기시는데? 역시 미인은 나이 먹었다고 어디 가는게
아니라니까?”

송 사장은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아 천천히 물을 마셨다.


전투 전에 치르는 의식 같이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걸 느꼈음인지 임 사장이 물었다.

“올케 기분이 좋은가봐?”


“기분이 뭐 좋을게 있나요? 식사 먼저 할까요? 저 배고프면 기력 딸려서 말 못 하는데.”
“하하, 준비 단단히 하고 왔나봐? 그래. 자기야.”
“어, 그래.”
“올케 배고프다니까 그냥 음식 다 가져다 놓으라고 해.”
“그럴까? 그게 좋지.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지도 않고.”

김대영은 얼른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시켰다.


음식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나왔다.
이번에도 송은채 사장은 맛으로 먹는게 아니라 허기를 채우려는 듯 입 한번 열지 않고 조용히 먹었다.
그게 은근히 압박이었는지 임지은 사장 역시 먹는데 집중했다.

“많이 배고팠나 봐?”


“그렇기도 하고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그랬어요.”
“대충 먹었으니까 이제 말해봐. 명절에도 바쁘다고 얼굴 한 번 안 내미는 올케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만나자고 했을까?”

송 사장은 마지막으로 물로 입을 살짝 헹구고 입을 열었다.

“오늘 기사 봤어요.”
“아~ 나도 봤어. 축하해. 신영은행에서 5 천억 대출 받았다며? 굉장하다. 어떻게 받았어? 나도 그 노하우 좀
받아보자. 나 이번에 페이먼트 인수한다고 자금줄 꽉 막혔잖아. 나도 올케 덕에 막힌 자금줄 좀 뚫었으면
좋겠는데?”
“뭐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혜성기업인가? 그것도 인수한다면서? 천억에 홀랑? 어머... 이제 보니까 지훈이보다 올케가 더 능력있었나봐.
괜히 지훈이가 현진물산을 경영한다 어쩐다 할 필요도 없었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냥 아버님께 제가 받았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텐데...”
순간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에 뼈가 있네?”
“뼈 있는 말은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말 나온 김에 할게요.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요? 연희 10 년 동안
해외에서 돌아다니느라 엄마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랐어요.”
“왜 나한테 그래? 연희 내쫓은거 아버지랑 지훈이야.”
“그런가요? 그때 아버님께서 연희 앞으로 주신 호텔 가지고 가셔서 현진관광 만드셨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임 사장 들고 있던 포크를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우리 아빠한테 연희 내쫓으라고 하기라도 했다는거야?”


“아님 말구요.”
“이봐, 올케. 연준이 죽은거 솔직히 올케 책임이잖아. 어린애 간수 잘 했으면 그렇게...”

이때 김대영 사장이 임지은 사장을 말렸다.

“여보, 그만해.”
“후... 그래, 옛날 일 말해 뭐해.”
“그래요. 지나간 일 말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요. 죽은 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송은채 사장은 탁자 아래 쥔 주먹을 파르르 떨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오늘 기쁜 날이잖아. 현진물산에 동아줄이 내려온 날 아니야?”


“그런 줄 알았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프록시아 인수전 뛰어들 생각이에요?”
“프록시아? 그게 뭔데?”

뻔히 알면서 의뭉을 떠는 임지은 사장의 모습에 송 사장은 열이 뻗쳤다.

“호주 코발트 광산 업체요. 우리가 입찰에 참여하려고 굉장히 오래 공을 들이고 있던거 모르셨어요? 연희 아빠가
처음 추진했던 사업이니까 모를 리 없지 않아요?”
“내가 다른 회사 사업을 어떻게 다 알아?”
“그런가요? 아주버님은 아시죠?”
“어? 어... 난 알고 있지.”

본인 동생이 골든브릿지 사모펀드 매니저니 모른다고 잡아뗄 수 없었던 거다.

“골든브릿지가 먼저 제안했나요? 세원 인터내셔널은 어제까지만 해도 코발트 광산에 관심 없었는데 왜 오늘


갑자기 기사가 떴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면 지금 연락좀 해줄래요? 안 바쁘면 나 좀 보고 가라고 해도 좋구요.”

임지은 사장이 보다 못해 나섰다.

“올케, 너무한 거 아니야? 아주버니 어려운 줄 모르는거야?”


“미안해요. 내가 좀 급하게 됐거든요. 어쨌든 여기에 오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로 물어볼 수는 있죠?”
“크흠... 그건 좀 곤란한데.”
송 사장의 안색이 변했다.

“아주버님, 그거 거절이라고 봐도 되는 거죠?”


“아무리 내가 형이라고 해도 동생 일에 다 간섭할 수는 없는거야. 솔직히 사모펀드가 해야하는 일이 뭐야?
어딘가에 돈을 투자해서 수익을 내야 하는거 아니야? 저들이 봤을 때 프록시아 인수가 수익률이 높다고
판단했는데 내가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겠어?”

임 사장도 거들었다.

“이건 이이 말이 맞지. 들어보니까 올케가 인수하려던 회사 입찰에 도련님이 끼어들었나본데 그걸 사적으로


연락해서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게 말이 돼? 억지가 너무 심하다.”
“그런가요? 그런데 난 억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쩌죠? 골든 브릿지가 하필 우리 경쟁사인 세원 인터내셔널
손을 잡고 프록시아 입찰에 뛰어든 이 상황이... 현진물산을 노리고 이러는게 아닐까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거든요.”

임지은 사장은 가볍게 와인을 마시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올케. 회사 운영하기 힘들잖아. 올케랑 지훈이 지분 내가 시장가보다 두배 쳐서 사줄게. 그 돈이면 평생 돈자랑


하면서 살 수 있어. 아마 나보다 돈 더 많을걸?”
“내가 그 제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대기업 오너 자리를 포기하라는 건 결국 돈 많은 졸부가 되라는 말과 같았다.


수많은 엘리트 인재들과 조단위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지는 권력은 가진 부를 수십 년 가져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송은채 사장으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며 이는 오히려 현진물산을 가지겠다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아니면 할 수 없지.”

임 사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니면 말고’의 태도를 취했지만 송 사장은 그녀가 자기 마음대로 저럴리 없다는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그러라고 하셨어요? 이제 태민이에게 그룹을 주시겠다고 하시던가요?”


“글쎄... 그 양반 속을 누가 알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꼬리 한쪽이 말려 올라가는 걸 보면서 송 사장은 이번 세원 인터내셔널의 입찰 참여를 누가


주도했는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송 사장은 치솟는 울분을 누르면서 말했다.

“참 너무하시네요. 누구보다 힘든 사람은 우리 가족인데... 누가 보면 아버님이 가장 큰 피해자인줄


아시겠어요.”
“가장 예뻐하셨으니까.”
“알겠어요. 태민이한테 선물 잘 받았다고 말해주세요.”

송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끝난거야? 난 또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줄 알았잖아. 괜히 기대했네.”


“미안해요. 기대 충족 못시켜드려서. 그런데 조금 화나네요. 솔직히 연희 아빠 상태가 어떤지, 지금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아프니까 가족도 아닌건가요?”
“솔직히 우리가 못보면 서로 궁금하고 걱정되는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지훈이 몸상태는 아마 올케보다
우리 아빠가 더 잘 알고 있을걸? 굳이 내가 물어야 해?”
“네... 생각해보니 형님 말이 맞네요. 굳이 서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데.”
“그러니까... 이제 말이 통하네.”
“그래요. 오늘 식사 맛있었어요. 그리고 그 대단한 이야기 나중으로 미룰게요.”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한 거 아니었어?”
“다 했는데 이제 막 또 하나 생겼거든요.”
“그럼 앉아. 서서 그러지 말고.”
“아니에요. 이 자리에서 다 해버리면 재미 없잖아요. 아주버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어? 어, 그래. 조심해서 가고...”

송은채 사장은 매서운 눈빛으로 둘을 노려보고는 몸을 휙 돌려 나갔다.

“흥, 지깟게 화내면 무서울 줄 아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임지은 사장의 목소리에 송 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은 다리를 달달달 떨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제 고 부장은 비서실로 불려 올라가 입사 후 가장 충격적인 지시, 혹은 제안을 받고 외부에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퇴근한 뒤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도저히 회사 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 관리하며 평상시처럼 행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괴물같은 녀석의 제안이 사장님의 손에 커트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완전히 나가리(?)되기 전까지 다른
일에 집중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네 정신도, 내 정신도 아닌 상태로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음에도 그 긴장감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필 여기서 또 세원이랑 붙을게 뭐야...”


“이러다 입찰에서 떨어지면 손해가 얼마인 거야? 빌린 돈 바로 상환해야 하는거 아니야?”

당장 고 부장 주변에서도 회사의 미래가 어찌될지 걱정하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전 직원이 프록시아 인수가 되느냐 마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상황.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고 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아유, 깜짝이야!”
“제가 더 놀랐습니다.”

석유화학팀 이철순 과장이 입을 삐쭉 내민다.


키가 190 이 넘고 체격이 산만한 거구의 이철순 과장의 성격은 완전히 체격과는 반대여서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욕 한 번 한 적 없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하는 순둥이였다.

“갑자기 나오니까 그러지.”


“어제부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임원회의 이후로 갑자기 사라지시구...”
“별거 아니야.”

그때 ‘띠링’ 소리가 울리며 직원들에게 긴급공지가 떴다.


“어?”
“이거 뭐야? 고승현 부장님?”

고 부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닐 수도 있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 부장은 떨리는 마음으로 공지를 클릭했다.

[인사발령 공고]
[봉선동 시공사 선정을 위한 TFT 조직안에 의해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을 TFT 팀장으로 발령한다.]

“후...”
“어? 부장님 이거 뭡니까? 저희 모르게 무슨 프로젝트 진행하는게 있었습니까?”

10 년 전에 끊었던 담배 한 모금이 절실했다.


이제 자신의 손을 거쳐 현진그룹이 두쪽으로 갈라지며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자고로 지면 역적이고 이기면 공신이라 했다.
고승현 부장은 주먹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모른다.”

미리 준비했던 박스에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석유화학팀 과장급 인사들은 우르르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짐을 싸는 무거운 분위기에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경영진의 의도를 모르기에 이 인사발령이 좌천인지 승진인지조차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5 분 정도가 흘렀을 때 누군가 사람들을 제치고 들어왔다.

“야, 이거 뭐야?”

해외자원사업부 윤정환 상무다.


고 부장은 짐을 싸다 말고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몰라? 몰랐다고? 나도 모르는데 이런 인사를 했다고?”

각 팀장급 직원들도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고승현 부장의 보스인 윤 상무의 허락이 떨어진 인사인 줄 알았는데 윤 상무 윗선에서 다이렉트로 내린
인사발령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네.”
“봉선동은 뭐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 이 새끼, 구라 칠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진짜 모르는거지?”
“정말입니다.”

윤정환 상무는 인상을 긁으며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고 부장은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짐을 싸서 인사발령 공고에 나온 15 층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지원부서에서 나와 각종 전산 프로그램을 깔거나 탁자와 회의실 등을 세팅하고 있었다.
팀장 자리에 자신의 짐을 넣은 박스를 내려놓은 고 부장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홍승대 실장이다.
고 부장은 자리를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어때? 햇볕 잘 드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제가 눈 부신걸 안 좋아하는데 귀신같이 고르셨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어두운색 블라인드 달아달라고 해.”
“그래야겠습니다.”
“누구 고를지 생각해뒀어?”
“네.”

그냥 사우나에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누구 붙여줄까?”
“법무팀에 경력직으로 새로 온 직원 있죠? 법무법인 동해 다니다가 여기 왔다고 하던데...”
“그건 또 어떻게 들었어? 대학원 때 M&A 를 배웠다고는 하던데... 그런데 그 친구 가지고 되겠어? 나이가 서른
밖에 안 돼. 경력으로 왔지만 사실 경력이라고 할게 별로 없거든.”
“실력 있는 놈들은 많지만 믿을 수 있는 놈이 없잖아요. 이거 끝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 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긴 가장 중요한건 보안이지.”
“나머지는 알아서 세팅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뭔데?”
“이거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현진관광이 끝입니까? 아니면...?”
“알면서 뭘 물어? 지금은 먼 미래 걱정하지 마. 당장 앞의 일만 생각해.”

홍 실장은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씨발...”

고 부장은 이제 공신이 아니면 역적이 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줄타기에 올라탔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담배를 다시 펴야 할 것 같았다.

< 전초전(5) > 끝

< 준비단계(1) >


현진물산 홍보팀은 어제부터 각종 경제지와 언론사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회사에서 내려온 공문이나 지시사항 하나 없는 상태에서 터진 기사 때문이었다.
임원회의가 끝나고 오후가 되어서야 내려온 신영은행 대출과 혜성기업 인수에 관한 지시사항으로 간신히 한숨
돌렸지만 결코 한가해진 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온 현진건설과 혜성기업의 합병식 때문이었다.
준비할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한 달 전부터 준비해도 여유롭지 않은데 바로 어제 이야기를 듣고 준비하기
시작한 일정이다.
당연히 화장실 갈 때도 눈치를 보아야 했고 칼퇴근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 비서실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혜성기업과의 합병식에 '광주광역시 봉선동 아파트 단지 시공사 선정 참여'에 관한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는
지시였다.
안 그래도 일이 터져 나가는 와중에 떨어진 지시에 홍보팀 정혜숙 부장은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한 시간 뒤 사람 한 명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에 근무하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업무협조 때문에 내려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홍보팀 정혜숙 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네?”
“네. 이번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영업 2 팀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비서실로 이동했습니다.”
“홍 실장님은 많이 바쁘시지?”
“아무래도 요즘 정신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다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아니다. 이 사업 내용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아마 이번 신영은행발 대출건 때문에 단단히 뿔이 난 것 같다.


미리 알려줬으면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인 것 같은데 그녀의 말이 틀린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건이다.

“물론입니다. 광주 봉선동에 LH 공사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려고 추진중인데 우리 회사가 혜성기업과
합병한 후 첫 프로젝트로 시공사 선정 경쟁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정혜숙 부장이 안 그래도 궁금했었던 내용을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와중에? 하필 프록시아 입찰 때문에 펑크난 해외자원사업부 인력까지 빼내면서까지 해야할
일인가?”

정 부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네. 사장님께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행하는 사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이거 제안자가 누군데?”
“죄송한데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곘습니다.”

그녀는 따지고 싶은게 한 가득이었지만 하필 내려온게 고작 입사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이라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 그럼 합병식 때 해당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야?”


“네, 맞습니다.”
“할 일이 계속 느네? 알았어. 일단 저 안쪽에 들어가면 박세영이라고 있어. 걔한테 설명하고 보도자료 만들어
달라고 해. 합병식 때 보여줄 내용은 보도자료 보고 만들어서 올릴 테니까. 이거 결재권자가 누구니?”
“홍승대 비서실장님입니다.”
“그런데 왜 이걸 비서실에서... 아니다. 네가 뭘 알겠니? 그래, 가 봐.”
“감사합니다.”

영훈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하고는 정혜숙 부장이 정해준 자리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박세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영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시원을 나간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던 거다.
영훈도 그녀가 홍보팀에서 일한다고 듣긴 했었지만 오늘 만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워낙 바쁘고 중요한 일이 산적해있기에 그녀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정혜숙 부장님께서 박세영 씨에게 업무 설명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아... 네. 일단 앉으세요.”

그녀가 얼른 옆자리를 권했다.


영훈이 앉자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에요?”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섭니다. 혜성기업을 인수한 우리 현진물산은 이 사업에 참여해서
사업권을 따낼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부실한 건설회사를 인수해서 알짜배기 자산을 매각할거라는 세간의 예상이
있는데 우리는 앞으로 혜성기업을 현진건설로 바꾸고 새
로운 프로젝트로 사업을 확장할거라는 식의 보도자료를 뿌려주시면 좋겠어요. 최대한 깔끔하고 그럴듯하게.”
“그럴듯하게요?”
“네. 현진물산과 현진건설이 역량을 총 동원해 진행할 예정이라고 해주세요.”
“역량을 총 동원이요?”

박세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회사의 역량을 총 동원한 프로젝트가 무엇인지는 회사 사람 중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 없이 역량을 총 동원할 다른 프로젝트가 등장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네.”
“음... 진짜 맞는 거죠?”
“맞습니다. 박세영 씨가 만든 자료로 위에 올려서 결재 받아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만들어서 올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직접 왔잖아요. 가이드라인 잡아주려구요. 제가 잡은 가이드라인이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세영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하는 영훈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고시원에서 봤던 그의 모습은 찌질하고 미래가 없어보이는 모습이었고 현진물산에 취직했다고는 해도 겨우
계약직에 얼마 안 있어 퇴사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정규직이 됐다고 할 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지금 이런 모습은 그녀가 예상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려 20 분 정도를 자세히 설명한 영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수고하세요. 모르는거 있으면 비서실로 전화해서 김민희 씨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줄 겁니다.”

이 사업의 진짜 목적을 아는 건 아니지만 모든걸 혼자서 처리할 수 없기에 민희에게 대략적인 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김민희 씨요? 혹시 입사 3 년차인 그 김민희 맞나요?”


"그럴걸요? 그리고 비서실의 김민희는 한 분이라 아마 생각하는 그분이 맞을 겁니다. 두 분이 동기셨나 봐요?”
“네...”
“잘 됐네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영훈이 자리를 뜨자 한동안 멍 때리던 그녀는 후다닥 문자를 보냈다.


화장실 갈 때도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거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오케이]

답장을 받은 이후에야 박세영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광주 봉선동 집값 상승률에 놀라는 거였지만 말이다.

“아니... 여기가 왜...”

성주훈 부사장은 계속 뚱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마 아침에 인사공고가 떴을 때부터 였을거다.
박윤재 부장은 무슨 이유로 부사장이 저러는지는 몰랐지만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게 안 좋은 방향으로
직원들에게 터져나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하지만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를 않는다.

“야, 윤재야.”
“넵.”

박 부장이 후다닥 달려가 부사장 앞에 서자 그가 계속 뚱한 표정을 풀지 않은채 말했다.

“갑자기 사장님이 왜 이러시는 것 같냐?”


“광주 봉선동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혜성기업? 그래. 천억에 홀랑 먹어치웠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데 인수하자마자 가진 부동산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
“팔고 싶어도 구도욱 사장의 경영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그가 가진 지분이 상당해서 팔 수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생색은 내고 싶은거 알겠는데 지금 상황이 상황 아니냐? 안 그래도 내가 해외자원사업부 인력 빼서
호주에 갖다 박았는데 인력이 펑크난거 모를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해외자원사업부 에이스인 고승현이를 쏙
빼간다고? 왜?”

박윤재 부장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 아다리가 맞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합니다. 고승현이를 빼간다는 건 이 사업을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경쟁사들 면면이 우리와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 겁니다. 상식적으로 시공사 선정이 될 리가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정부와 연결된 끈이 있지 않을까요?”

성 부사장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모로 꼬며 말했다.

“지금이 90 년대도 아니고 정치인 몇몇이 기라성 같은 건설사 다 제끼고 우리를 잡아 준다고? 우리야 좋지만 이거
선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사실 신영은행 대출건도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지. 따지고 들면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하지. 그런데 이것과 그건 경우가 달라. 은행 대출이야
은행장 마음이지만 시공사 선정은 민감한 문제거든. 몇 명 구워삶아서 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흠... 이것도 홍승대가 설계했을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홍승대가 이 정도 능력자였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야, 봉선동 TFT 팀이 쓸 사무실 어디라고 했지?”
“15 층에 마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홍 실장더러 15 층으로 내려오라고 해라. 삼자대면 한번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박윤재 부장은 곧장 전화를 돌렸고 성주훈 부사장은 거침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5 층으로 내려갔다.
분명 자신 모르게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건데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걸
깨닫게 해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15 층에 내려 새로 붙은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니 창밖을 향해 서 있는 고승현이 보였다.

“훤하고 좋네.”

고승현은 뒤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여기가 네 책상이냐?”
“네, 그렇습니다.”
“책상도 좋고, 경치도 좋고... 내 방보다 좋다.”
“하하, 어떻게 부사장님 방보다 좋을 수 있겠습니까. 앉으시죠. 제가 혹시 몰라서 소파는 직접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반질반질하네. 너도 앉아봐라.”

고 부장은 감히 바로 앉지 못하고 물었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마침 조금전에 음료수랑 차를 세팅해왔습니다.”


“그럼 병으로 된 음료수나 세 개 꺼내와.”
“알겠습니다.”

고승현 부장은 음료수 세 개라는 말에 한 명이 더 올거라는 걸 알았다.


작은 매실음료 세 개를 챙겨 자리에 놓는데 문이 열리고 홍승대 실장이 들어왔다.

“왔어? 빨리 왔네? 앉아.”


“네.”

홍 실장은 가타부타 별 말 없이 성주훈 부사장이 앉은 상석 바로 옆에 앉았다.


고승현 부장이 둘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이는데 성 부사장이 말했다.

“자, 셋 다 모였으니까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 승대야.”


“네.”
“봉선동 이거 누가 만진거냐?”

고 부장이 눈치를 보려는 찰나 홍 실장이 즉각 답변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 진짜 네가?”
“네. 혹시 부사장님께서 이번 코발트 광산 입찰에 걸릴돌이 될까 염려하실 수 있는데 전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고 부장은 양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홍 실장은 이번 인수전에 성 부사장을 완전히 제외할거라고 선언해버린거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홍 실장의 판단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 혼자만의 판단이라면 저렇게 뻔뻔하게 연기할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최소 송은채 사장님의 결단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점점 자신이 올라탄 줄이 얇아지는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중심을 잘 못 잡으면 바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거다.

“진짜야?”
“물론입니다.”

성주훈 부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승현아. 넌 이 프로젝트 알고 있었냐?”


“그냥 이야기만 들었지 제가 담당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 네가 생각할 때 어때? 이거 가능할 것 같아?”

부사장의 입꼬리가 뒤틀린다.


당연히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 믿고 있는 거다.

“가능합니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후진은 곧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간판 바꿔 달아봤자 도급능력 39 위가 어디 가는거 아니고 우리가 고급 빌라 단지 하나 지어봤다고는


하지만 그런 경험 하나 없는 건설사가 어딨어? 이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파이팅 하면 내가 넘어가 줄거라고
생각해?”

부사장의 부리부리한 눈이 부릅 떠졌다.


여기서 더 가면 당장 쌍욕이 터져나올 분위기.
“3,850 가구 입주자 전원에게 호텔급 조식 서비스 제공할 예정입니다.”
“뭐?”
“어차피 이곳은 분양가 상한제 적용 지역이 아닙니다. 분양가 4 천만 원 이상으로 올리고 서울에서도 진짜
부자들만이 누리는 호텔급 조식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면 전라도에서 내로라 하는 부자들 전부 몰려들 겁니다.
분명 승산 있습니다. 이거 우리가 따낼 수 있습니다.”

순간 반박을 못하는 부사장을 보며 홍승대 실장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칠 뻔했다.


고 부장 저 새끼는 혹시나 모를 가능성까지 생각해 정말로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계획까지 짜고 있었던 거다.

< 준비단계(1) > 끝

< 준비단계(2) >

회사일이라는게 보고서로 판단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사업을 계획하고 진행하려 할 때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 정말 이 사업이 될 사업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적당히 보기 좋은 보고서를 만들어 왔는지는 기세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고승현 부장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열정적인 기운은 이 사업 내용의 진실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홍 실장도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자세히 설명해봐.”
“지방이라고 못 사는 사람들만 있는거 아닙니다. 저들도 돈 많지만 서울처럼 최고급 주거 단지가 안 들어서니까
그들만의 고급 단지로 몰리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 전라도 최고 부자들만 입주할 수 있을 것 같은 환경을 만들
생각입니다. 고급 휘트니스와 골프연습장, 사우나 같은 시설과
호텔급 조식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호텔급 조식 서비스라... 그거 먹히겠냐?”
“현진관광이 있지 않습니까? 종로 리츠 칼튼 뷔페는 대한민국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뷔페입니다. 그런 호텔 몇
개를 가진 현진관광이 같은 계열사라는 점을 어필하면 충분히 먹힌다고 봅니다. 적어도 현진이라는 두 글자는
이번 사업을 관심있게 보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겁
니다.”

성 부사장은 고 부장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몰랐다면서 준비 많이 했네?”
“제가 팀장으로 발령날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다만 홍 실장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이러면 괜찮겠다고
생각해둔게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걸 듣고 저를 팀장으로 추천한 것 같습니다.”
“일리 있네. 잘 만들어봐.”

부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시지 그러십니까?”

홍 실장이 물으니 성 부사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나 매실 음료 안 좋아해. 그리고... 홍 실장, 다시 봤다?”

그는 홍 실장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고 부장은 부사장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숨을 내쉬었다.

“후우... 뒤지는줄 알았네.”


“뒤질거 없다. 새끼, 쫄기는... 그나저나 임기응변이야?”
“어제부터 생각해봤습니다. 대충 눈가림해서는 금방 들통날 것 같아서 이왕 손대는거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루만에 생각해낸 것 치고는 꽤나 괜찮은게 나왔네?”
“그렇죠? 요즘 한남동 재개발도 그렇고 기존의 최고급 아파트를 나누는 기준이 호텔 조식서비스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잖습니까. 지방에는 아직 그런 서비스가 없으니 이거 잘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필 딱 호텔 아닙니까.”

홍 실장은 바로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래. 하필 딱 호텔이지.”
“현진관광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조식서비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같이 엮어 들어가면...”
“이것도 명분이 되는 건가?”
“원래 역사라는게 승자가 주장하기 나름 아닙니까.”

아무리 적대적 인수합병이라고 해도 외부에 내세울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유가 합당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좋네. 해외자원사업부 에이스 답다.”

홍 실장이 만족하며 일어서려고 하자 고 부장이 말을 걸었다.

“가지 말고 저 궁금한거 하나만 풀어주세요.”


“뭐? 최영훈?”
“흐흐... 아시네. 뭡니까? 정체가?”
“나도 잘 몰라.”
“에헤이~ 이러시면 섭섭합니다. 한 배 탄 거 아닙니까?”

홍승대 실장은 피식 웃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말했다.

“못 믿겠지만 나도 아직 정확히 몰라. 어떻게 신영은행에서 5 천억 대출에 혜성기업까지 플러스 알파로 얻어


왔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어.”
“그게 정말입니까?”
“그것 뿐일까. 그 전에 신영투자증권에서 주식 받아온 거 다 최영훈이가 한 작품이지. 더 놀라운거 알려줄까?
양철기 전무님 날린 거... 그거 최영훈이가 작전 짜서 한 방에 보내버린거야. 이유도 기가 막혀. 회사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
고승현 부장은 입을 떡 벌렸다.
“못 믿겠지? 나도 죽었다 살아났다.”
“실장님도 혹시 양 전무님과 함께 엮였던 겁니까?”
“그럴 뻔했지. 더 자세한 건 알려주기 그렇고 하여튼 지금 이 그림을 다 만든건 최영훈이야. 당연히 사장님은
최영훈이를 회사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고.”
“저 같아도 5 천억 물어오면 가장 최측근에 두긴 할 것 같습니다.”
“현재 비서실내에서는 과장급으로 대우하고 있어. 만약 현진물산이 망하지 않고 앞으로 5 년만 더 지나지?
부사장에 누가 앉아 있을 것 같아?”
“그 정도란 말이죠?”
“너나 나나 이제 후진은 없다. 나가서 치킨집 차리느냐 여기서 성공하느냐 갈림길에 섰어.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무조건 지는 싸움인데 이상하게 난 질 것 같지가 않네.”

고승현 부장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일어서는 홍 실장을 보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회사 근처 파스타집에서 점심을 먹은 김민희와 박세영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요즘 많이 바빴지?”
“응, 정신 없어. 홍보팀도 정신 없지 않아?”
“어, 그렇지.”
“이번 일 끝나면 조금 줄어들 거야. 혹시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긴 하지만 조금만 참아. 그리고 이번 네가
홍보하게 된 프로젝트 잘 되면 보너스 기대해봐도 좋을걸?”

민희는 오랜만에 만난 세영을 보며 모처럼 긴장을 놓았다.


입사 동기인 둘은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친해져서 부서가 나뉘어진 뒤에도 만나곤 했다.
세영은 항상 무기력하고 어두운 표정을 하다가 밖에서 따로 만날 때면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민희 때문에 종종
일부러 시간을 내며 같이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민희의 얼굴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지루하고 지겨워 보이기만 했던 얼굴은 재미있는 게임을 발견한 것처럼 생기발랄해 보였던 거다.

“보너스? 진짜?”
“아직 확정된건 아니지만 요즘 회사 분위기 좋잖아. 나올지도 모른다 그거지.”
“너 요새 기분 좋은 일 있구나? 되게 기분 좋아 보여.”
“내가? 으흥~ 요즘 좀 생각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런가봐. 계속 안 좋은 생각을 해봤자 바뀌는게
없으니 나를 바꾼다고나 할까?”
“대단한데?”
“그런데 오늘 무슨 할 말 있어? 오늘 정신 없어서 점심시간이라도 시간 내기 힘든거 아니야?”

세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최영훈 씨라고 아니?”

민희의 눈빛이 변했다.

“최영훈... 씨?”
“어.”
“얼마 전에 우리 비서실로 온 사람이야. 왜?”
“아니, 사실 그 사람 우리 고시원에 살았었거든.”
“그랬었구나...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인턴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몇 달만에 정규직이 됐다는 거야. 그러더니 바로
고시원을 나간거 있지? 이게 말이 되는 거니?”

민희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오늘 최... 영훈 씨랑 만났던 거니?”

주임님이라는 말이 나올뻔한 걸 겨우 참았다.

“응, 아까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프로젝트 가이드라인 잡아주러 왔었잖아. 되게 황당하던거 있지?”
“그래?”
“일은 좀 하는 사람이니?”
“일은 좀 하냐구? 으흥... 잘하는 정도가 아닌데? 일적으로는 완벽하다고 할까? 그런데 어쨌거나 그럼 우리
회사에서 네가 최영훈 씨를 가장 먼저 만난셈이구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 정도로 일을 잘해?”
"그렇지."

민희는 속으로 세영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어쩌면 현진물산을 이끌어갈 최고 엘리트를 눈앞에서 보고 그대로 놓치다니...
그런데 여기서 세영의 말이 예상 밖이었다.

“음... 아직 늦지 않았는데 확 꼬셔볼까?”


“어? 최영훈 씨를? 가능할까?”
“내가 원래 한번 찍은 남자는 놓치는 법이 없거든.”

세영은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을 빛냈지만 민희는 황당함을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녀의 라이벌이 누군지 알게 되면 아마 많이 실망할거라 생각하면서...
그때 가게 밖에서 낯익은 인물이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게 목격됐다.
바로 양철기 전무의 아들인 양준기였다.

“나 잠깐 일어나볼게.”
“어? 어디가?”
“미안... 급하게 가볼 데가 생겼거든.”

민희는 급하게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왠지 전에 했던 실수를 만회할 수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 영훈은 연희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식사 자리를 하고 있었다.

“요즘 자주 보니까 정들것 같다.”

형준은 며칠 지났다고 살이 더 빠진 듯해 보였다.

“요즘 다이어트 하십니까?”


“비슷해. 조금 덜 먹고 운동하고... 씨발, 노인네들은 꼭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좋아한다니까? 아니, 적당히
살 좀 찌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면 나태하네, 정신이 해이하네, 별 지랄들을 해요. 어쨌든 요즘 새사람 된
것처럼 보이느라 노력 좀 한다.”
“보기 좋네요.”
“다른 건 몰라도 여자들은 좋아하더라. 내가 그 맛으로 버틴다니까. 크크.”

그러면서 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은 형준은 인상을 팍 썼다.

“에이씨... 이제는 회도 질리네.”


“조용하게 대화할 곳이 참 마땅치 않더라구요.”
“됐다. 회 먹으러 온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어떻게 하기로 했어? 송 사장이 진짜 한 판 붙을 생각이래?”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형준은 말없이 진하게 미소지었다.

“좋으시겠습니다?”
“좋지. 그런데 계산은 확실하게 하자. 난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마음인거야. 여기서 얻는 부가수익은 터치하지
않기.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많이 드십쇼.”
“크크큭...”

적대적 M&A 에 들어가는게 공개되는 순간 현진관광의 주식은 미친 듯이 상승할게 분명했다.


영훈을 도와주기 위해 흑기사로 참전한다는 계획이지만 이로 인해 엄청난 수익을 거둘건 분명했다.
특히 신영금융그룹이 보유한 현진관광의 주식은 이후 모두 현진물산에서 매입한다는 약속까지 해놓은 상태다.
만약의 경우 M&A 가 실패한다고 해도 신영금융그룹은 타격이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한 가지.

“그런데 외부 압력이 있을 텐데 잘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외이사 포섭 들어가는 중이다.”
“대단하시네요? 며칠이나 지났다고?”
“우리 강 전무가 내 생각보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더라고.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우리 아버지가 방해하는건데...
어차피 지금 당장 하는건 아니잖아?”
“그럼요.”
“코발트 광산 업체 입찰이 내년 초였던가?”
“맞습니다.”
“그럼 그 때쯤이겠네?”
“그렇게 잡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최대한 영향력 넓혀볼게. 그런데... 아무리 내가 아버지 자식이고 날고 기어도 한계가 있거든.
그래서 말인데...”

영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불안하게?”
“내가 은행에 들어가야겠다. 사람들 움직여서 일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
“저한테 바라는게 있습니까?”
“고향에 돌아가는데 그냥 빈손으로 가기는 그렇잖아. 못해도 부모님 내복이라도 한 벌 사 가야 손이 안
민망하지.”

기가 차서 풋 웃었다.
“하하, 언제 사드려보기는 했습니까?”
“말이 그렇다는거야, 인마.”
“그래서 원하는 내복이 뭔데요?”
“현진물산 주거래 은행 좀 바꿔주라.”
“예?”
“그냥 거래 은행 바꾸는거야. 어려울 거 없어.”

회사일을 배우는중인 영훈도 거래계좌를 바꾼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일거 같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을까?

“내복 사드려서 금의환향 하시면 인간적으로다가 고맙다고 말 한번 해주시면 어떨까요?”


“흐흐... 그렇지. 넌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누구한테 전화드리면 될까?”
“현진관광이 얼마 전에 페이먼트 호텔 인수하면서 좀 많이 버거워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했는데 형준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야, 넌 인마, 나한테 절해야 돼. 아, 물론 나도 너한테 절해야 하긴 하는데, 어쨌든 절해야 돼,


인마.”
“왜 그러십니까?”
“현진관광이 올 연말에 막아야 할 2 천억 채권을 신영은행이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이번에 페이먼트 호텔을
인수할 때 우리한테 좀 봐달라고 했고 내부적으로 연장해주기로 합의한 상태야. 현진관광도 그거 믿고 호텔
인수한거지.”
“그럼...?”
“내가 그거 파토내 줄게. 어때? 이 정도면 감사 인사는 충분히 한 거 같은데?”

< 준비단계(2) > 끝

< 준비단계(3) >

이형준 본부장과 점심을 먹고 돌아온 직후 바로 사장실로 들어가 송 사장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 했다.


송 사장은 바로 영훈의 제안을 수락했고 재무팀에게 지시해 결제계좌를 신영은행으로 바꾸도록 했다.
기존에 결제계좌를 쓰고 있던 우성은행 쪽에서 재고를 요청할 것이 예상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장실을 나와 홍 실장으로부터 고 부장이 세운 계획을 전해 듣고 바로 홍보팀 세영에게 추가 내용을 알려주었다.
연희는 돌아가는 사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고승현 부장님이라는 이분 능력이 대단하네요. 진짜 머리가 좋은 가봐요?”


“태어나기를 총명하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지방대를 나오셨지?”
“어렸을 때 원하는 학업을 끝까지 마칠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을 수도 있고 당시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흥미가 있었을 수도 있죠.”
“부사장님과는 다르게 이번 일을 잘 해결할만한 운이 있을까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딱히... 노형석 대리님처럼 손에 대는 일마다 성공하는 운이 들어온 건 아닙니다.”


“그럼 불안한거 아니에요?”
“하려는 모든 일을 어떻게 대운이 들어온 사람들하고만 같이 하겠어요. 다만 고 부장님 같은 경우는 직감력,
판단력이 뛰어나고 근 10 년간 크게 흉살이나 악운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크게
빛을 발할 사주니 이 사람은 상사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
생이 바뀔 사람입니다.”
“오오... 그럼 우리 엄마가 좋은 상사일까요?”
“글쎄요.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죠. 그런데 잘 해낼 것 같습니다. 그냥 느낌이 그래요.”
“영훈 씨 느낌만큼 확실한게 또 없죠.”

이때 김민희가 다가와 파티션을 톡톡 두드렸다.

“주임님, 잠시 말씀 좀 드릴게 있는데요.”


“아, 네. 말하세요.”

어차피 연희는 사장 딸이기에 민희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오늘 점심 때 양준기 씨가 누군가와 지나가는 걸 봤습니다. 눈에 익은 사람이라 뒤따라가면서 누군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생각해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현진중공업 비서실 직원이었습니다. 작년 그룹 창립기념일에 한번 봤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음... 대놓고 트롤 하려는건가?”
“네?”
“아니에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민희는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했다는 생각에 환하게 웃으며 떠났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연희가 물었다.

“내가 개인적인 일 시키는 사람들보다 능력이 더 나은 것 같은데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나저나 준기 그 인간... 확 짤라버려야 하는거 아니에요?”
“그냥 둡시다.”
“왜요?”
“원래 첩자인 걸 몰라야 우리한테 치명적인 거지 알면 첩자가 아니라 조력자가 될 뿐입니다. 그냥 두죠. 그런데
무슨 정보를 줬을라나?”
“봉선동 프로젝트 아닐까요?”
“그거 알아서 뭐 할게 있을까요? 건설업을 가진것도 아니고... 오히려 달려들어주면 감사할 겁니다. 아, 이러지
말고 아예 일을 줘버릴까요?”

잘하면 통째로 엮어서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요?”
“흐음... 일단 생각 좀 해봅시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급하게 진행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사흘 뒤, 혜성기업이 현진건설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그날 바로 봉선동 아파트 개발 사업에 관한 청사진을


발표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처음에는 전라도 쪽 부동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지방 부동산 가격을 급등시키는 사람들이 지방 사람들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감도는 언제 나오는 거야? 지금 경제지쪽에서 문의 엄청나게 들어오는거 알지?”

홍 실장의 물음에 고 부장이 실실 쪼갠다.

“흐흐...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이거 반응 좋을거라고 했죠?”


“대신 지방 부동산 흔드는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어.”
“말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속으로는 좋아 죽을걸요? 대전이고, 광주고, 부산이고 지금 집값 올리는 사람들은
전국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정보력이 보통 아니거든요. 아마 이번에 우리가 시공사로 선정되면 청약
경쟁률 엄청날 겁니다.”
“자신하지 마. 다른 데도 조식 서비스 넣으려고 할 수도 있어.”
“쉽게 못 할 겁니다. 각 건설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에 조식 서비스를 넣기 시작하면 모든 지역에 똑같은 서비스를
해달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초고가 브랜드를 넣자니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그럴까?”
“예를들어 가장 큰 경쟁사인 다보건설의 하이퀄리티 브랜드 ‘디브이 아너힐스’도 호텔급 조식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지만 평당 8.000 만 원 이상의 초고가 브랜드입니다. 국내에서 한남동 딱 한 군데에만 있는데 그걸 광주에
넣을까요? 아무리 높아도 평당 5 천 이상 받기 힘든 곳인데?”
“그건 그렇네. 결국 건설사의 대표 브랜드와 붙으면 해볼만하다는 거네?”

고승현 부장은 코끝을 문지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물론 우리의 일방적인 예상일 뿐입니다. 어제부로 현진건설로 직장이 바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선정에
평가되는 항목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그런데 어차피 상관없는거 아닙니까?”

홍 실장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 현진건설 친구들은 언제 합류해?”


“그쪽에서 아파트 쪽 전문가들 다섯 명 정도 추려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좀 부담스러워졌어요.”
“왜?”
“이번에 우리가 발표한 내용이 꽤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목소리에 기대감이 어찌나 가득한지... 이거 엎어지면
굉장히 실망할 것 같던데요?”
“이거 우리가 따내면 수익이 얼마나 날 것 같아?”
“미분양은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만약 생각대로 된다면...”
“된다면?”
“최소 1 조 이상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홍승대 실장이 혀를 내둘렀다.


“휘유~ 굉장한데? 그래서 주가가 이렇게 뛰는 건가? 어제 하루에만 14% 오른거 알지? 만약 이거 우리가 따내면
주가가 얼마나 갈려나?”
“최소한 지금보다 열배는 더 올라도 그리 비싼게 아닐 겁니다.”
“이 정도면 현진관광이고 나발이고 여기에 올인해야 하는거 아닐까 싶다만... 어쨌든 잘 해봐. 사장님도 그렇고
최 과장도 그렇고 생각보다 그림이 그럴듯하게 나와서 잘만 진행되면 이것도 밀어줄 생각인거 같더라고.”
“밀어줘요? 여기서 더 어떻게 밀어줍니까?”
“최 과장이 있잖아. 혹시 알아? 우리가 모르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어떻게 밀어줄 수 있을지?”
“그것까지는 기대 안 합니다. 솔직히 전 아직도 최 과장 속을 짐작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백프로 믿기가
힘드네요.”

상사의 말만 철썩같이 믿고 일하다가 뒤통수 맞고 회사를 떠나게 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기에 홍 실장은 고 부장의 저런 조심성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넌 너 할 일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중에 억울한 일 생기면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 난 너 원망
안 할거니까.”
“각오하셔야 할 걸요? 절대 떨어지지 않게 꽉 잡을 겁니다.”
“흐흐... 그러시든지.”

며칠 뒤, 영훈의 집들이 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회사를 방문했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앞으로 안 볼 것만 같았던 임지은 사장이 도도한 얼굴로 찾아왔다.


그녀는 비서실에서 연희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며 사장실로 들어서더니 휘적 둘러보고는 말했다.

“마실 것도 안 줄거야?”
“좋은 일로 찾아왔으면 마실거 내드리구요.”
“됐다. 여기선 물 마셔도 체할라.”

그녀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고 말했다.

“혜성기업 인수 축하해. 이제 현진건설인가? 지분은 얼마나 가졌어?”


“기사 나갔는데 안 보셨어요?”
“아니다. 됐고, 내용 들었어.”
“무슨 내용 말이에요?”
“봉선동에 아파트 짓는거. 거기에 호텔식 조식 서비스 넣을 거라며? 우리 염두에두고 준비하는거 아니야?”

송은채 사장은 시치미를 뚝 뗐다.

“조식 서비스야 꼭 호텔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거짓말 하기는... 호텔 뷔페라는게 쉬워 보여도 신경 쓸게 한 두가지가 아니야. 재료의 퀄리티나 쉐프의 능력
뭐 하나 문제 생기면 컴플레인 감당 안 돼.”
“그래서요?”
“같은 계열사잖아? 내가 도와줄게.”
“원하는 게 있으신건가요?”
임지은 사장은 뻔뻔하게 말했다.

“우리가 얼마 전에 페이먼트 호텔 인수했잖아. 조금 무리를 해서 그런지 자금사정이 빡빡해. 올케네 얼마 전에


신영은행에서 돈 들어왔잖아. 그것 좀 빌려 쓰자.”
“그 돈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아시잖아요?”
“걱정 마. 골든브릿지 1 조 없어. 내가 그거 모르겠어?”

송 사장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전 이번 프록시아 인수전에 모든 걸 걸어야 해요. 쓸 수 있는 입찰가격을 내 손으로 깎을 수는


없어요. 그러지 말고 아버님 한테 부탁해보세요.”
“현진중공업 살아난지 얼마 안 된 거 몰라? 쌓아둔 현금 가지고 지금까지 겨우 버틴거야.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하셨지 우리한테 빌려줄 현금이 있을 리가 없어.”
“그럼 다른 계열사한테 말해보세요.”
“몰라서 물어? 다른 계열사들 자금줄 바짝 마른지 2 년이 넘어가. 그런 와중에 현금 2 천억을 빌려줘도 휘청이지
않을 계열사가 어디 있어? 다 현진중공업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원해왔잖아.”

현진그룹은 현진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이었다.


중국발 조선업 불황이 시작되고 나서 대한민국 대기업 중에 가장 크게 흔들린 재벌그룹이 바로 현진그룹이었다.
어쩌면 지금껏 계열사 정리 하나 없이 버텨온 게 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형님 사정은 알지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절박해요. 그러게 골든브릿지 가지고 왜 장난 치셨어요? 지금이라도
세원 인터내셔널이 이번 입찰에서 빠진다면 고려해볼게요.”

임지은 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 2 천억이 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송은채 사장이 프록시아 인수에 성공한다면, 그것도 큰 출혈 없이
인수한다면 현진물산은 그야말로 현진그룹 계열사 중에 넘버 2 자리를 굳히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 이야기는 곧 자신의 아들인 태민이가 현진물산을 곱게 얻어올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말과 다를바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난치긴 누가 장난쳤다고 그래? 그리고 말했잖아. 도련님이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해라, 마라 간섭할 수


있겠어? 대신 말은 해볼게. 다른 쪽으로 수익날 곳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네요. 전 문서로 확답을 받지 않으면 빌려드릴 수 없어요.”

급기야 임지은 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정말 이렇게 나올거야? 우리 아빠가 이 일을 알고 그냥 넘어가실 것 같아?”


“이미 아버님은 제게 회사 경영권을 넘기셨어요. 전 회사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결정이구요.”

임지은 사장은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돌아올 2 천억 만기 채권을 막지 못하면 다른 모든 걸 떠나서 임창호 회장에게 실망감을 주리라는 것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실망이 곧 자식에게 이어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빌려줄래?”


송은채 사장은 손발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최 과장이 혹시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진행되고 있었다.

“현진고속이 가지고 있는 현진관광의 주식을 교환하는 조건이면 생각해볼게요.”

당연히 임지은 사장이 극렬히 반대했다.

“올케! 그렇게 안 봤는데 응큼하네? 주식을 달라니?”


“우리가 가진 분당에 있는 건물, 어제부로 매각공고 냈어요. 그렇게 확보한 자금 8 천억과 2 천억에 해당하는
현진관광 주식으로 1 조 원 입찰 맞추려구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시공사 선정할 때 점수를 유리하게 할 수
있어요. 말로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보다 주식교환이 됐다면 신뢰도를
더 높일 테니까.”
“진짜 이러기야? 그러지 말고 주식을 담보로...”
“주식 담보는 의미 없어요. 현진관광 주식을 시장가 2 천억으로 교환하는 게 아니면 전 거절하겠어요.
받아들이시겠어요?”

분노한 임지은 사장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 준비단계(3) > 끝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1) >

자택으로 돌아온 임지은 사장의 얼굴은 의외로 평안했다.


그녀의 곁에는 임창호 회장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양철기 전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임지은 사장이 그를 부른건 그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가 현진물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찰에서는 연락 왔어요?”
“네, 조만간 출석하라고...”
“참, 어렵게 사시네. 그건 그렇고 올케가 내가 알던 그 순둥이가 아니던데? 양 전무가 있을 때도 이랬어요?”

양 전무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처음에 사장 자리에 앉았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저 잘 가르쳐달라고 했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도 주로 우리가 의견을 내고 송 사장은 결재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저희가 내는 의견에 반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요? 이상하네? 어디서 저런 배짱이 갑자기 생겼을까?”
“홍승대 실장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바람을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차지열 상무도 그렇고 기조실에서도 홍 실장이
이번 신영은행건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홍 실장이 그 정도라고?”
“이빨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 전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양 전무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 보는 것도 능력이에요. 그러고 보면 양 전무 능력에 대해서 나나 우리 아빠나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거
아닌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지 한번 예상해봐요.”

그녀의 시험과도 같은 질문에 양 전무는 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현진물산과 현진건설에서 기를 쓰고 시공 사업권을 따내려고 해도 결코 쉽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나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 다른 건설사들이 호구도 아니고 쉽게 넘겨줄 리가 없지요. 지금이야
뭐라도 할 것처럼 건방 떨지만 프록시아 입찰 건만 실패하면 줄
줄이 허점들이 드러날 겁니다.”
“그런데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입찰 따낼 수 있을까?”

그녀는 세원 인터내셔널이 입찰을 방해하는게 아니라 아예 따낼 걸 예상하고 있었다.

“본래도 자금력이라면 상사 업체들 중 최고였습니다. LS 화학이 배터리에 목숨을 건 상황에서 코발트 광산을
확보한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에서 충분할만큼 자금 지원을
못해주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서라도 이기려고 할 겁니다.”
“그 정도로 자금력이 큰가?”
“세원에서 가진 부동산과 주식만 가지고도 마음만 먹으면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 도움 없이 입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었다가 프록시아가 가진 코발트 광산의 매장량과 생산능력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습니다.”
“마음만 확실히 먹어준다면야 그보다 좋을 수 없지. 어쨌든 양 전무는 지금도 세원 쪽이랑 계속 채널 유지하는 건
맞아요?”
“그럼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세원 대표이사도 사장님과 만남을 연결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임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흥, 됐어요. 선보는 것도 아니고 만남은 무슨... 그리고 내가 거기 사장 얼굴 한번 안 봤을까 봐. 그것보다


세원 인터내셔널 쪽 반응 계속 보면서 체크해주세요. 주식을 넘겨주는 건 이제 필연적이라서 이거 그대로
가져오려면 이번 입찰에서 현진물산이 반드시 실패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임지은 사장은 주먹을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 준 주식은 그저 빌려준 것일 뿐이라고...

영훈은 돌아가는 상황이 참으로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현진관광을 인수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해야 했고 그 조직을 눈가림하기 위해 고 부장이 어떤 사업을
하든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고승현 부장이 거기에 혜성기업을 엮어 아파트 사업권을 노리면서 상황이 묘하게 변해버렸다.
고승현 부장이 아파트 시공사로 선정되기 위해 꺼내든 칼이 호텔급 조식 서비스를 비롯한 프리미엄급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눈덩이처럼 굴러서 현진관광의 주식에까지 이르렀다.
아직 2 천억 원어치의 주식을 교환하는 게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손 안 대고 코푸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 거였다.
참으로 인생 모르는 거라고 생각됐다.
그렇게 새삼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각하는데 홍승대 실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최 과장, 전에 노드리 뭐시긴가 하는 명품 브랜드 가져온 게 영업 2 팀이었지?”

옆에서 연희도 듣고 바짝 다가왔다.

“네. 저희가 계약했습니다.”


“그때 서가은이랑 전속모델 계약했다며?”
“네, 맞습니다.”
“혹시 말인데... 서가은이랑 한번 연결 가능할까?”

옆에서 연희가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현진건설을 고급 브랜드 전략화 해보려고. 서가은이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이미지잖아?”
“그렇긴 하죠.”

가끔 나오는 예능에도 차분한 말투와 어떤 옷을 입어도 고급스럽게 소화하는 모습 때문에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가볍거나 싼티나지 않았다.

“현진건설 모델로 쓰고 싶은데 소속사에다가 공식적으로 제안할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안면 있는 최 과장이나
연희 씨가 가서 말 좀 해주면 어떨까 하고. 바쁘면 그냥 현진건설쪽에서 제안 해보고.”
“말해보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 좋은 이유가 있나요?”
“지금이야 현진건설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 혜성기업이었던게 어디 가는게 아니거든. 규모도 작았고 아파트도
지방에서나 짓던 수준인데 서가은 소속사가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아. 물론 모델료를 퍼부어주면야
가능하겠지만 나중에 좋은 이야기도 안 나오고.”

안 그래도 형준을 만나고 와서 이제 할 일이 없을 것 같던 와중이라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 쪽 회사에 연락해보고 미팅 결과 알려드릴게요.”


“그럼 고맙지. 아마 고 부장이 무척 좋아할거야.”
“회사일인데 고마워할거 있습니까? 다 같이 하는 일인데요.”

연희는 홍 실장이 가고 바로 서가은의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녀는 곧이어 들어가는 드라마 때문에 집에서 준비중이라고 했다.
집으로 찾아갈까 물어보니 회사로 오라는 말에 내일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럼 전 먼저 나갑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이어지는 외부 강의 때문에 영훈은 4 시 이전에 회사를 나가곤 했다.


외부 강의는 6 시가 된다고 칼처럼 끝나는건 아니었고 저녁 이후에 스케줄이 없을 때는 강사와 같이 저녁을 먹고
와서 계속 이어가기도 했다.
강사료를 많이 줘서인지 강사들도 흔쾌히 시간을 연장해주면서까지 강의에 임했다.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거예요? 땡땡이 치는 거 아니죠?”


의심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괜히 물어보는 거다.

“의심되면 따라오실래요?”
“아니에요. 그럼 이따가 봐요.”
“그럽시다.”

오늘이 그녀와 약속했던 집들이 날이었기에 이따가 만나자고 하는 거였다.


영훈은 6 시에 칼같이 강의를 마치곤 서둘러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음식과 후식 등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연희는 남은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조금 늦게 출발하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 어질러진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적당히 청소를 마친 후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연희가 왔다.

“어서 와요. 아직도 차가 막히는 시간이죠?”


“조금요. 여기 집들이 선물이에요.”

그녀가 내민 선물은 주먹만한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 액체가 담겨 있어 막대기 몇 개 꽂혀 있는 걸 본적 있었기에 이 유리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냥 와도 되는데... 이거 향기 나는 그거 맞죠? 뭐라고 하더라?”


“디퓨저요. 남자 혼자 사는 집엔 필수품이죠. 와... 어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지. 더 채워진 것 없이
집이 처음 그대로네. 딱 이렇게 살고 있을 것 같더라구.”
“풀옵션인데 더 살 것도 없죠. 아주 만족합니다.”

연희는 집을 휘휘 둘러보며 영훈에 대해서 다 꿰고 있다는 듯 쫑알댔다.


영훈은 그런 연희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는 재빨리 저녁 준비를 했다.
직접 다 요리할 거라는 기대는 안 할 것이기에 미리 ‘메이드 인 백화점’이라는 사실을 실토했고 다행히 연희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이 집 주인님을 위해 특별히 와인을 준비해봤는데. 한 잔 할래요?”


“준비한 성의를 봐서 맛 좀 볼까요?”

연희가 기분이 좋은지 화색을 띠며 답하자 영훈이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음... 그럼 저쪽으로 갈래요? 요즘 내 취미생활인데 연희 씨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영훈이 와인잔을 들고 창가로 향하자 연희도 따랐다.
창가 옆 테이블의 의자 두 개를 당겨 창밖을 바라보도록 나란히 놓고는 연희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겁니다.”

연희에게 와인잔을 건네며 옆자리에 앉은 영훈이 리모컨으로 전등과 조명을 모두 껐다.


한강 다리와 그 위를 지나는 차들의 불빛, 서울의 수많은 빌딩들의 조명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와, 우리 집보다 야경이 더 멋진데요? 월세 받아야겠어요, 후훗.”

연희는 옆의 영훈을 보며 쌩긋 웃고서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훈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야경과 함께 어둠 속 연희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와 그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카락, 가녀린 허리. 영훈은 연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애써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머~ 너무 반가워요~”

연희가 서가은을 향해 양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서가은도 연희의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몇 번 안 봤는데 이상하게 되게 친한거 같은 느낌이에요. 나만 그런거 아니죠?”


“나도 가은 씨가 안 바빴으면 몇 번이고 찾아왔을 거예요.”
“하나도 안 바빠요. 그러니까 연락 자주해도 돼요. 영훈 씨도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괜히 회사에 나온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집에만 있으면 괜히 우울해져서 일부러라도 밖에 나와야 해요. 배역에 계속 파고들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다운되거든요. 그런데 오늘 어떻게 오셨어요? 아무 용건 없이 그냥 놀러 오셨으면 좋겠지만 직장인
분들이라 그러지는 않겠죠?”

영훈이 머쓱하게 대답하려는데 문이 열리고 박현승 실장이 들어왔다.


서가은의 모든 스케줄을 관리하는 임원급 관리자인 그는 연희를 보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한다.

“오셨다는 말 들었습니다. 종종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이번에 하는 파티 오실거죠?”

연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네, 뭐...”

이때 서가은이 박 실장에게 말했다.

“오빠, 나 만나러 오신 분들이라 대화 좀 할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가라는 말이다.


그는 민망한 얼굴로 바로 들어온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럼 말씀 잘 나누다 가시고 혹시 계약과 관련된 사항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괜히 자기 없이 계약에 관한 이야기 하지 말라고 경고(?)한 그가 나가자 서가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원하는 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도 돼요. 자꾸 나 대신에 뭘 하려는게 싫어.”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영훈은 얼른 현진건설의 새 모델을 구하고 있으며 고급스럽고 지적인 그녀가 딱이라고 줄줄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어졌다.

“혹시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을까요?”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난 CF 한 개 더 찍고 말고 큰 상관이 없어요. 아직 건설회사 모델은 해본적이
없어서 크게 문제될 것 같지도 않구요. 그런데 내 후배 중에 조금 어려운 친구가 있어서 혹시 그 친구를 밀어줄
수는 없을까요?”

서가은은 천생 여자다우면서도 자기 일은 자기가 직접 처리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성격이다.


다정하면서도 의리가 있다고 할까?
그냥 이번 광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누굽니까?”

가은은 얼른 핸드폰으로 앨범을 뒤적여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미인 두 명이 식당에서 셀카를 찍은 모습이 찍혀있었다.
가은은 그 중 왼쪽의 여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김예서라고 아시죠? 데뷔한지는 7 년 정도 됐는데 관계자분들이 하나 같이 감탄해요. 예쁘기는 정말 예쁘다구요.


그런데 이상하게 뜨질 않아서... 미안해요. 친한 동생인데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요.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제가
할게요.”

김예서는 영훈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산에 있으면서 놀 때는 게임하거나 드라마, 영화 따위를 보았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뜨지 못했는지 영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송한데 이분은 우리 회사 모델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서요. 그런데 오른쪽
분은 누굽니까? 연예인인가?”

안 된다는 말에 가은이 실망하면서 답했다.

“대학 후배예요. 연극영화과라서 이곳저곳 오디션을 보기는 하는데 여의치가 않네요.”


“차라리 저 분이 조금 인지도가 있는 분이라면 모르겠는데 말씀드렸듯이 예서 씨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럼 아까
실장님이랑 세부적인 내용 토의하면 될까요?”

서가은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주희요? 주희는 괜찮던가요?”


“보니까 곧 잘 될 것 같은데요? 그냥 제 느낌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이상하게 영훈의 그 느낌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1) > 끝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2) >

“이 자리에 없는데 괜히 없는 말 하시는건 아니죠? 주희가 정말 뜰까요?”

인기라는 건 곧 사주로 말하면 도화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도화살이라고 하면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안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옛날 사람들의 구시대적인
생각이고 여자든 남자든 어느 정도 도화살이 있으면 좋다.
도화라는 건 꼭 사주에서만 보이는게 아니라 얼굴에서도 보여야 진짜 도화라고 할 수 있는데 눈과 눈꼬리인 어미와
간문에서 볼 수 있다.
주희라는 여자는 지금은 비록 힘들다고 해도 코가 작지만 동그랗고 복스러운 형상이라 돈이 많이 모이고 도화살이
강해 인기가 많을 상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서가 도화살이 약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가 뜨지 못한 이유는 도화살이 약해서가 아니라 초창기 작품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걸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냥 소싯적에 드라마 좀 봤던 사람 입장에서 매력있어 보이는 것 뿐입니다. 큰 의미 두지 마세요.”

서가은은 이상하게 영훈이 대답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답을 하기 전에 연희의 눈치를 살짝 본다든가 하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눈치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는데 영훈의 그런 모습이 자꾸 궁금한걸 묻고 싶게 만들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감이 좋으신 것 같아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예서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따지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영훈은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후배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를 하겠는데 그 이유까지 묻는 연유가 있습니까?”


“예서가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열심히는 하는데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친해지면서 조금이라도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인데 본인은 죽어라 노력하는데 안 되니까 옆에서 보기가 안타까워서 그래요.”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유라고 해봐야 특별할 건 없습니다. 예서 씨 같은 경우는 뭐랄까,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은 이미지거든요.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대신 아까 주희 씨라고 했나요? 저분은
단아하고 선명한 이미지라서 우리 회사 이미지와 잘 맞겠다 싶은 것 뿐입니
다. 물론 아직 신인분이라 우리 모델로 채택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네요.”

가은은 실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그런데 현진건설이라는 데는 처음 들어보는데 어떤 곳인가요?”

이번에는 연희가 대신 대답했다.

“예전에는 혜성기업이라는 작은 건설회사였는데 현진그룹이 인수하면서 같은 식구가 됐어요. 앞으로 고급 주거


단지를 지어나갈건데 그에 걸맞는 모델을 찾고 있어서 가은 씨를 다시 찾았던거예요.”
“어느 정도로 고급 주거 단지를 짓길래... 궁금하네요.”
“지금 현진건설을 홍보할 팜플렛 만들고 있으니까 나중에 나오면 보내드릴게요.”
“네. 자세한 계약관련 내용은 실장 오빠하고 논의하면 될 거예요.”

영훈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Nodri Clare 오픈 런칭 행사 때 참석하시죠?”


“그럼요. 그게 계약사항에 포함된 일정이잖아요.”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자리를 빠져나와 박 실장에게 대략적인 내용을 전달했다.


어차피 영훈과 연희는 서가은이 전속모델이 될 수 있도록 도와만 주는 역할이지 계약에 관련된 사항은 현진물산
봉선동 TFT 팀이나 현진건설에서 할 일이었다.
그렇게 박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한참이나 더 지났을 때 연희가 가은과 같이 나왔다.
그새 얼마나 친해진건지 아예 서로 팔짱까지 끼고 있었는데 마침 둘이 동갑이라 말을 놓기로 했단다.
그리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

“가은이가 부탁이 있대요.”

영훈이 영문도 모르고 가은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가와 말했다.

“오늘 저녁 같이 하실래요?”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해서 급히 연희를 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승낙하라는 눈치를 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요?”


“하핫, 아니요. 연희 씨랑 같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뵐게요.”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로 사무실을 나오니 연희가 운전석에 앉으며 재잘대기 시작했다.

“가은이가 전에 영훈 씨가 지갑 골라줄 때 완전 놀랐었대요. 어쩜 자기 스타일을 그렇게 잘 아냐면서. 만약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심쿵했을거라고 하던데요?”
“그 사이야 그런 이야기까지 나눴습니까? 절친이 된 것 같은데?”
“히힛, 내가 회사 사장 딸이라고 했거든요. 아무래도 회사 직원의 신분이면 상하관계가 되지 않겠어요? 솔직히
영훈 씨 앞이라서 그렇지 나 어디가서 꿀리는 사람 아니에요.”
“누가 꿀린다고 얘기 했습니까?”
“하여튼 그렇다구요. 그러니까 일단 내가 누군지 딱! 보여줬죠. ‘나 원래 사장 딸인데 바닥부터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완전 놀라면서 더 편해 하더라구요. 왜 그렇거든요. 돈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돈 걱정을 못해요. 괜히 잘난척하고 우는 소리 한다
고. 근데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이거든요. 그래서 사람을 만나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구요.”
“뭐 하여튼 그래서요?”

연희는 씨익 미소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가은이가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대요. 근데 영훈 씨가 가은이 앞에서 딱 보고


기가 막히게 취향을 맞춰 버렸잖아요? 오늘도 얼굴만 슬쩍 보고 이미지가 어쩌고 하면서 단번에 결정 내버리고...
사실 광고회사에서 모델 결정할 때 인지도가 없는 상태라
면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 못하거든요. 또 그 이유가 그럴 듯 하니까...”
“그래서 나더러 남자친구를 봐달랍니까?”
“네. 그냥 취소할까요?”

말로는 저렇게 해도 애처러운 눈빛을 보내며 도움 한번 주는게 어떠냐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봐주는건 어렵지 않은데 어떻게 설명하시려구요?”


“당연히 영훈 씨가 사주나 관상을 본다는 것 같은 말은 할 수 없죠.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식으로만 가볍게
말해주면 돼요. 들어보니까 나름 고민이 많을 것 같은게, 연예계에 있다 보면 워낙 사기꾼들도 많고 그렇잖아요.
남자를 쉽게 못 믿는 거죠.”
“뭐 하는 남자랍니까?”
“벤처 기업가래요.”
“벤처 기업가요?”

한 때는 모든 이들이 우러러 봤고, 또 한때는 모든 이들이 사기꾼처럼 봤던 직업이 벤처 기업가가 아니던가?


한창 IT 기업 열풍이 일다가 꺼지고 나서 자신이 벤처 기업가라고 으스대는 사람들도 많이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 그 벤처 기업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영훈은 벤처의 ‘ㅂ’도 모를 만큼 IT 에 대해서는 아는게 쥐뿔도 없었다.
아는 거라고는 게임을 설치하고 실행 시키는 정도?

“생년월일은요?”
“혹시 물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안 물어봤어요. 대신 어느 회사인지 알아냈죠. 그것만 알면 대표 생년월일
알아내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요런건 철저해서 좋다.

“그런데 아까 김예서 씨가 우리 이미지와 안 맞는다고 했잖아요?”


“아, 그거요? 왜요?”
“딱 보니까 그게 끝이 아닌 것 같더라구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하는 느낌?”

이제는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표정까지 캐치하는 것 같았다.

“아... 안타까워서요. 개인적으로 김예서라는 배우 좋아했거든요.”


“그랬어요? 못 떠서 안타까웠던 거예요?”
“네, 초창기 때 작품을 잘못 골라서 더 뜨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렸어요. 소속사가 멍청했던건지, 아니면 본인이
그런 선택을 한건지 참 안타깝더라구요.”
“어? 초창기 작품이 뭐였는데요?”
“제목은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게 노출이 좀 심한 작품이었어요.”
“그래요? 요즘 노출 있는 작품으로 데뷔해서도 잘 되는 배우들 많은데?”
“다릅니다. 전에 양철기 전무 사건 때 말했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관상을 보고 있다고.
예서 씨 같은 경우는 남자들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귀여운 스타일이에요. 하얗고 둥근 얼굴에 처진
눈꼬리와 반달 같은 이마 등등... 관상학적으로 보면 여러 이유
가 있는데 복잡하니까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어쨌든 그런 매력 자체가 바로 장점이에요. 그런데 그런
장점을 타고 나서 노출이 심한 작품에 출연하면 그대로 그 장점이 날아가버리는 겁니다.”

연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너무한거 아니에요? 노출 좀 했다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나?”


“이건 그저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짜장면을 먹을 생각에 중국집을 갔는데 칼국수만 팔고 있으면 손님은
실망합니다. 칼국수가 맛있건 아니건 말이에요. 애초부터 남자들은 김예서 씨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기대심리를 가지고 보다가 노출이 심한 작품을 보고 실망을 하게 되
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비슷한 다른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는 겁니다.”
“아직 순수함을 간직한 다른 중국집으로 말이죠?”
“맞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작품을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 무작정
들어왔다고 아무거나 막 하면 훨씬 더 잘 될 수 있는 사람도 날개가 꺾이고 마는 거죠. 만약 아까 주희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작품에 출연했다면 별다른 이미지 손상없이 계속
좋은 작품이 들어올 겁니다.”
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어렵네...”
“맞습니다. 나도 이걸 이십대 초반에서야 깨달았으니 일반 사람들은 어려운게 당연한 겁니다.”
“그 때 알았으면 예서 씨가 그 작품 출연한다고 했을 때 말리고 싶었겠네요?”
“마음이야 굴뚝 같았죠.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기사에 댓글도 달았었습니다. ‘안 돼~~~!’라고요.”
“하하하하! 왠지 그때의 영훈 씨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회사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는 홍승대 실장에게 간단히 결과를 보고했다.
이후 영훈은 다시 강의를 받으러 갔다가 6 시가 돼서 칼퇴근한 연희의 차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연희는 가는 중에 그동안 파악했던 가은의 남자친구에 대해 줄줄이 설명해댔다.
간략히 말하면 서울공대와 대학원 박사 과정을 거친 엘리트 출신 사업가로 반도체 설계 회사를 설립한지 이제 1
년이 조금 안 됐다고 했다.
잘 되면 세계를 선도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업종이라고 했던가?
삼호전자가 몇 십조를 투입해가면서 키워가려는 분야가 바로 그 분야라고 덧붙였다.
어느새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선 영훈과 연희는 미리 도착해 있는 가은과 의외로 조금 평범해 보이는 듯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일어나서 인사하는 그는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체격도 호리호리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서가은이 손해본다고 말할 것 같았다.

“네, 반갑습니다.”

영훈은 그와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희도 그와 인사하며 잠시 가은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영훈은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오면서 연희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청담동 쪽에서는 연예인들이 자주 오기 때문에 여기 오는 손님들은 연예인이라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래서 남자친구를 보여주는데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일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영훈은 조금은 긴장한 채 연희를 살피는 가은을 보고 확신했다.
애초부터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신이 출연할 작품부터 광고 하나까지 자신이 모두 결정하는 그녀가 만난지 몇 번 안 된 사람에게 남자친구를
보여주며 어떤 사람인지 봐달라고 한다?
핑계다.
가은은 이미 이 남자를 자신의 남자로 점찍어 놓은게 확실했다.
어떤 의미로는 감탄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내조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벤처 기업을 운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굉장히 머리가 좋으신가 봅니다?”

영훈이 묻자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좌충우돌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합니다.”

이때, 가은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왜~ 당신 회사 기술이 최고라면서? 아직 투자를 못 받아서 그런거지.”
“투자요?”

영훈은 속으로 ‘올타쿠나!’를 외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연희는 만나자마자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걸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영훈이 하는 일이기에
잠자코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그런데...”


“말씀드려. 기업하시는 분들이시잖아.”

가은이 부추기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반도체 설계라는게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과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몇몇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유치중입니다.”

본래 이 남자의 사주가 별로였다면 적당히 웃어 넘기며 자리를 모면했을 테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가만히 있는데
금덩이가 스스로 날아와 안기는 격이었다.

“그럼 회사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화색으로 변한 가은을 보며 영훈은 과연 이 복덩이를 송은채 사장이 어떻게 다룰지 궁금해졌다.


돈이 부족하다고 포기할까?
아니면 자신을 한번 더 믿고 베팅을 던질까?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2) > 끝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3) >

식사가 끝나고 영훈은 자리를 길게 끌고가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목적에 걸맞게 남자친구와 다음 미팅 일정 잡고 바로 나와버리자 연희가 물었다.

“너무 도망치듯이 헤어진거 아니에요?”


“어차피 저쪽도 불편했을 겁니다. 막상 연희 씨가 입 꾹 다물고 있으니 초조했겠죠.”
“네? 제가 왜요?”
“가은 씨는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남자친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당신이 현진물산 사장의 딸이라고 하니까
지금 어려운 사정에 있는 남자친구 투자처를 알아봐주고 싶었겠죠.”

연희도 입을 삐죽이다가 말했다.

“사실 인사하면서부터 느낌을 받긴 했어요. 남자친구에 대한 의구심 있는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직


결혼도 안 한 남자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결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네?”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 그랬죠? 가은 씨가 다부지면서도 천생 여자 같다고. 그런데 아무리 천생 여자라고 해도 자기 수준에 안


맞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남자 입장에서 최고의 신부감이지만 결코 쉬운 여자는 아니에요. 당신
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그 기준이 굉장히 높을 겁니다.”
“아... 그럼 지금 별볼일 없는 남자에서 꽤 잘 나가는 벤처 사업가로 만들고 나서...?”
“그런 이후에 멋들어진 예비신랑에 대해서 발표하겠죠. 똑똑한 여자입니다.”
“똑똑하다기보다는 영악하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후... 조금 그렇네.”

연희는 자신과 잘 맞는 친구를 만나서 좋았는데 왠지 배신당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화났습니까?”
“난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단 말이에요.”
“친구 없어요?”
“10 년 넘게 외국에만 있었어요.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친구를 사귄다기보단 그냥 한국에서
휴가를 즐기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남들이 말하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주변에 없어요.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지.”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나보다 낫네요.”

연희는 투덜거리려고 튀어나왔던 입이 다시 쏙 들어갔다.


그녀가 아무리 힘들었다고 한들 산에서 20 년을 넘게 살았던 영훈의 발끝도 따라가기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습니다.”

영훈은 이미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고 예전의 일들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과정 덕분에 지금 이렇게 인정받으며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친구가 그렇게 매력적이던가요? 난 잘 모르겠던데?”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김학수요.”
“아, 그래요. 김학수. 학수 씨는 얼굴만 봐도 딱 학자처럼 생겼습니다. 콧대가 살아 있고 코가 크죠. 체격이
크지는 않지만 단단하고 눈빛이 바르기 때문에 아마 가은 씨는 그런 학수 씨의 성품에 반했을 겁니다.”
“사주는 어떤데요?”
“더 좋을 수 없는 사주를 타고 났습니다. 사주에서 삼기귀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주는 인격이 드높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또한 머리도 좋아 박학다식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삼기가 삼합을 이루니 국가의 동량이 될
사람입니다.”

연희는 입을 떡 벌렸다.

“네? 그 정도예요?”
“네. 저도 지금까지 배우기만 했지 실제 이런 사주를 타고난 사람은 처음 만납니다. 만약 관에 뜻을 두고 있으면
능히 장관까지 갈 사람인데 벤처 사업가가 됐으니... 수백억 이상의 투자 가치는 충분할 만큼 대단한 인재는
맞습니다.”
“와... 가은이 좋겠네. 그럼 당신도 투자할래요? 아마 당신이 원한다고 하면 당장 엄마가 십억... 아니다,
만약 빌려달라고 하면 당장 수십억 정도는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영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전 돈에 욕심 없습니다.”

사주는 아무리 많이 봐도 상관 없지만 돈을 벌 욕심으로 사주를 봐줘서는 안 된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이라는 사주가 나왔는데 돈을 투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무슨 돈에 대해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 같네요?”
“결벽증 아닙니다. 나도 돈 좋아하고 좋은 차에 풍요로운 삶 좋아합니다. 단지 내가 열심히 노력한 일 덕분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면 모르지만 돈을 목적으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뭔가 되게 어렵네요. 어쨌든 그런 사람이란 말이죠? 흐음... 엄마가 이해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다면 그냥 포기하세요.”

혹시나 투자를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능력을 알려줄까 걱정돼 그렇게 말하니 연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요? 이렇게 좋은 기횐데? 에이~ 설마 내가 엄마한테 영훈 씨 능력 가지고 뭐라고 말할 것 같아서 그래요?”


“솔직히 좀 불안하긴 합니다.”
“원래 정보라는 게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가치가 올라가거든요. 내가 알면 되는데 굳이 엄마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죠.”

생긋 웃는 걸 보니 괜한 우려를 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일단 엄마한테 말하기 전에 김학수 씨 회사에 대해 알아보자구요. 여기 알아온 내용은 그냥 회사 설립 연도나
대표이사 생일 정도고 진짜 뭘 하는 회산지, 얼만큼 유망한 업종인지 등등.”
“그럽시다.”

연희도 잘 모르는 분야였기에 그녀도 섣불리 어떻다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가장 먼저 찾은 이는 현재 봉선동 TFT 를 이끌고 있는 고승현 부장이었다.
뭐 말이 찾았다는 거지 실제로는 고 부장을 비서실로 불러 올린게 맞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홍승대 실장도 같이했다.

“반도체 설계? 엄청 똑똑한가 보네?”

고 부장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뜸 그렇게 되물었다.

“거의 천재 정도는 돼야 할 수 있는 겁니까?”

영훈의 물음에 그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설명하려면 우선 비메모리와 메모리 반도체 차이를 알아야 해. 쉽게 설명하면 비메모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CPU 나 그래픽카드 같은걸 말하는거야. 메모리는 RAM 같은 걸 말하고.”
“아,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고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오케이. 음~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돈이 되고 앞으로도 계속


세계시장을 주도하게 되는 건 비메모리 반도체야. 인공지능이라든지 자율주행 같은 거.”
“그렇군요.”
“우리나라도 비메모리 쪽으로 진출하고 싶은데 딱 한 가지 약한 게 있어. 그게 바로 설계 분야야.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반도체 설계도를 사서 공장에서 만들어 판다고 보면 되는데, 요 반도체 설계 분야를 선도하는 곳은 다
해외업체란 말이지. 근데 요게 돈 때려 박고 공장 들입다 짓는
다고 키울 수 있는 사업이 아니야.”
“어지간한 머리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렇지. 수만 명의 인력을 몇 명의 천재가 이겨 먹는 분야거든. 벤처 사업하기 딱 좋긴 한데 그만큼 실패하기도
딱 좋아. 투자된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매출 1 원 한 푼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설계 한 번
팔아먹으면 수백, 수천 억을 벌지만 못하면 그냥 끝이잖아.”
“그렇군요.”
“설마 여기 투자하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고 부장은 영훈과 연희를 슬쩍 돌아보고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에이~ 이건 아니지. 돈 날리기 딱 좋아.”

어쩌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거다.


아마 지금껏 매출 한번 일으키지 못했을 텐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영훈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니 어쩌겠는가?


영훈은 굳이 설득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런데 연희는 달랐다.

“일단 알겠어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빛을 보니 결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 송 사장에게 담판을 짓고 싶은 모양이다.
연희의 기색을 읽었는지 홍 실장이 말했다.

“연희 씨, 이 회사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 이십억이 들어가는 간단한 투자가 아니야. 아무리 몇
명의 천채가 이겨먹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회사를 더 키우려면 인력을 추가 스카웃해야 할 건데 여기에 들어가는
돈만 수십억일걸? 만약 정말 투자하고 싶은 회사면 혼자 결정
하지 말고 회사에 맡겨보는게 어때?”

그녀도 무작정 우길 수만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맡기는 건데요?”


“이런 거 잘하는 데가 기조실이거든.”
“네?”
연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기조실이 회사 내의 엘리트 집단으로 알아준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그쪽에 정보가 넘어가는 순간 비밀은 없다고
봐도 좋았기 때문이다.

“기조실을 못 믿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회사 일이잖아. 그럼 회사 시스템을 따라야지. 아무리 기조실 쪽이


믿음이 떨어진다고 해도 회사 기밀을 외부에 누설하면 당장 검찰에 불려가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야.”
“하지만 프록시아에 대한 정보를 양 전무가 누설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있는 상황이고 아들인 양준기
역시 마찬가지로 의심되는 상황이에요.”

홍 실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양준기? 고작 신입사원 주제에?”


“고작 신입사원이라고 하기에는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기조실장님도... 아니에요.
이건 내가 말하기 주제 넘은 것 같네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홍 실장이나 고 부장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인사이동을 서둘러야겠군.”

결국 결론은 하나. 이대로 회사의 엘리트 조직 하나를 괴사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이게 내가 할 일인데? 내용 정리해서 사장님께 보고하지. 자네는 더 할 이야기 있나?”

홍 실장이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영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영훈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강노식 실장님이 기조실장님이죠?”


“맞아.”
“제가 한번 뵐 수 있을까요?”

홍 실장은 우려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번 투자 때문에...”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전 솔직히 이 투자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네. 제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여러분들의 몫이죠.”

홍 실장은 영훈의 말을 이해 못해 얼굴을 찌푸렸다.


영훈이 했다는 일이 뭔지 몰랐으니 당연했다.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강노식 실장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건 홍 실장님과 뜻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능력 없는 분이 아닐 테니


제가 직접 보고 싶어서요.”
“혼자?”
“에이~ 혼자 되겠습니까? 고 부장님 뵐 때처럼 같이 자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홍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1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홍 실장이 자리로 찾아와 어딘가로 가자고 손짓했다.
그를 따라 봉선동 TFT 팀이 위치한 15 층의 빈 회의실로 들어가니 스쳐가듯 보기만 했었던 강노식 실장이 앉아
있었다.

“늦었습니다.”
“어? 아니야.”

강 실장은 따라들어온 영훈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실 최영훈입니다.”


“그래. 나 강노식이야.”
얼결에 악수를 나눈 강 실장이 해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홍 실장을 돌아보았다.
홍 실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여기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랬으니까 불렀겠지. 그런데... 이번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친구를 여기에 왜 대동했지?”

강 실장이 묻자 홍 실장은 슬쩍 영훈을 돌아보았다.


이때 영훈이 뜬금없이 홍 실장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 좀 피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 실장은 이게 무슨 개똥 같은 경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이후에 일어났다.

“그럼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나가 있으랬다고 진짜 나가는 홍 실장을 보며 강 실장은 잠시 머리가 하얗게 굳어졌다.


뭔가 자신이 중요한 걸 놓쳤다는 생각과 그게 무엇인지 캐치해내려고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영훈은 잠시 강 실장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넌 뭐야? 너 전에 옥상에서 홍 실장 옆에 있었던 그 친구 맞지?”

그렇게 강 실장이 입을 열었을 때 영훈이 말했다.

“이제 곧 인사이동이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실장님은 해외부서로 발령나게 될 겁니다.”

강 실장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당장 네 까짓게 뭔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눈앞의 젊은 녀석이
자신이 모르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작 이 말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이왕이면 최대한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씨발...”

이런 개같은 경우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홍승대 실장이 이렇게 나왔다면 제법 인정하는 후배였기에 깨끗하게 승복이라도 했을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내분이 자녀들과 미국에서 유학중이시라구요.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건 어떠십니까?”


“회사를 나가고 말지 그딴 개소리를...”

그런데 이어지는 영훈의 말이 그의 혼을 통째로 흔들었다.

“미국에 한번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요즘 기러기 생활하다가 바람나서 이혼당하는 그런 경우


많다던데.”
“너... 뭐야? 뭔가 알고 있어?”

강 실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영훈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실장님, 실장님은 지금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 와 계시는 것 같습니다. 배짱부리다가 정말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서 퇴사 당하고 이혼까지 당하면 그때 실장님께 남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실장님이 잡고 있는 줄은
현진물산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놓으면 천길 낭떠러지
만 있을 뿐입니다.”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3) > 끝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4) >

강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영훈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영훈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말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뭘 알고 그러는 거야?”


“정확한 건 본인이 직접 확인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일반 중소기업도 아니고 현진물산이라는 대기업의 엘리트라는 기획조정실 실장이면 그 머리가 더 없이 좋을 거라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만 강 실장의 사주엔 안타깝게도 고진살이 붙어 있었다.
고진살, 또는 고신살이라고 부르는 이 흉살은 쉽게 말하면 홀아비가 될 사주로 보면 된다.
여자는 반대로 과숙살, 또는 고란살이라 해서 과부가 될 사주가 이와 같다.
보통 역마살이 강한 사주가 이 고진살에 해당되기 쉬운데 공교롭게도 밖을 많이 돌아다니는 이 팔자가 홀아비가
되기 쉬운 고진살에 걸리기 쉬우니 어찌 보면 참으로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상처(喪妻)할 사주는 아니고 부인과 화목하지 못하고 별거하거나 이혼할 사주까지 같이 들어있으니
부인이 사망할 사주라기보다는 바람을 펴서 이혼하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제 현진물산은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회사는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진 능력만 믿고 회사에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가장 먼저 이것부터 정리하고 가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뒷조사를 하셨다?”
“뒷조사라기보다는 혹시나 업무에 매진할 수 없는 환경이 있을지도 몰라 배려했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뒷조사를 해놓고 뻔뻔하게 업무를 위한 배려를 했다고 말하다니.


강노식 실장은 영훈의 헛소리에 뭐라 대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중요한 건 과정이 어찌 됐든 자신이 생각했던 화목한 가정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니까.

“휴가 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겠군.”
“주말 포함해서 일주일 휴가 다녀오시죠. 해외 출장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기조실 인사이동은
없을 겁니다.”

강 실장은 기가 찼다.
고작 신입사원 주제에 자신의 휴가를 제멋대로 결정해버리면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사이동은 없을 거라고 배려하듯이 말하는데 가장 열받는 건 이놈이 왜, 어떻게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거였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건가?”
“회사를 위한 일입니다. 고맙다고 말씀하실 건 없습니다.”
“내가 갑자기 회사를 비우면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사장님에게는 어떻게
보고할 셈이지?”
“홍 실장님이 알아서 보고하실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내가 나갔다 왔을 때 내 자리가 비워져 있다면?”
“그런 걱정을 하실 수 있다는 것 이해합니다. 사실 실장님이 굳이 미국에 가지 않으셔도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착각하실까봐 다시 말씀드리면 현진물산은 강노식 실장님께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저는 얼굴도 뵌 적 없는 나이 많으신 누군가가 아니라 수
많은 가정의 행복이 걸린 이 회사를 위해서요. 불필요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회사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면 굳이 미국까지 갈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주어도 자기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는게 사람이다.


증거 하나 없이 ‘네 마누라가 지금 바람 피고 있을 걸?’이라고 했는데 곧이곧대로 믿는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외통수로군.”
“인사이동에 관한 부분은 제가 아니라 홍 실장님하고 말씀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아, 제가 방금 한 이야기는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홍 실장님께 말씀하시는건 전적으로 강 실장님 마음입니다. 그럼 오늘 반가웠습니다.
언제 기회 되면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영훈이 그렇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갔고 곧이어 홍승대 실장이 들어왔다.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강노식 실장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쟤 뭐야? 사장님 숨겨둔 아들인가?”


“다들 그렇게 묻더군요. 뭐, 사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유력 정치인의 자제도 아닌 것 같고, 어느 재벌 가문의 자제 역시 아닌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저 역시 정확히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하던가?”
“방금 최 과장이 뭐라고 했는지 물으신 겁니까?”
“과장?”
“어차피 알게 되실 테니 굳이 비밀로 할 것도 없겠죠. 현재 비서실 내에서 과장급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씨발... 기조실장이라는 게 완전히 장님에 귀머거리였군. 어쨌든 밖에서 뭐라고 했어?”
“잠시 휴가를 다녀오실거라고만 했습니다.”
“그게 다야?”
“네. 솔직히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 미치겠는데 물어봐도 되는 건지 계속 고민중입니다.”

홍 실장의 얼굴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지 못한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미치겠네. 나 휴가간 사이에 책상 빼는건 아니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실한 거야?”
“그렇게 조바심 낼 거면서 아직도 임지은 사장님과 연락하고 계셨습니까?”

강 실장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도 내 뒤 밟고 다니냐?”
“굳이 밟고 다니지 않아도 모를 수 없지 않습니까? 저와 양 전무님, 차 상무님, 그리고 실장님...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논현동에 모였겠죠.”
“역시... 네가 양 전무님 날렸구나.”
“이제 와서 누가 어떻게 했는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양 전무님은 나갈만 했으니까 나간 겁니다. 강 실장님은
있을만 하니까 있는 거겠죠. 우리 이제 쓸데 없는 일로 힘 빼지 맙시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냐?”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이나 임지은 사장님에 대한 약점을 캐오라고 하는 등의 지시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기조실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시면 됩니다. 오로지 현진물산을 위한 자세로. 그렇게만 하신다면
임직원 평가에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홍 실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손의 뜻을 알아챈 강 실장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홍 실장은 그가 건네준 핸드폰에서 임지은 사장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연락처를 다 차단시키고 지워버렸다.

“그 정도면 되나?”
“사실 이 정도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기조실에 CCTV 도 달고 감청장치도 달고 싶지만
그렇게 믿지 못하면서 일하면 지금까지 우리의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네도 배신하고 전향한 사람인데 참 철저하군.”
“원래 배신한 사람들이 더한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양준기는 어떻게 할까?”
“인사이동 조치할 겁니다.”
“어디로?”
“어디가 좋을까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다.

“인도에 나간 주재원이 꽤 능력이 좋은 걸로 알고 있어. 이번 중고차 매매 사업에도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해서 그


친구 밑에 있으면 배울게 많을 거야.”
“아~ 변형재? 양철기 전무가 추진했던 우크라이나 철광석 수입을 반대했다가 쫓겨났었던 그 친구 맞죠?”
“맞아.”
“그러고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능력 있는 친구였는데 말이죠. 준기한테 좋은 선생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 친구
성격이 좀 거친 편인데 준기가 버틸지 모르겠네요.”
“그렇겠지. 정 힘들면 다른 회사를 찾을 거야. 젊잖아.”

홍승대 실장은 만족했는지 환하게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기분이 참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실장님이 회사에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최 과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군.”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개뿔... 난 내려가서 휴가 준비나 해야겠어. 알아서 보고할거라고 하던데 그게 맞지?”
“걱정 마십시오.”
“그럼 믿고 가지.”

강 실장은 가슴 위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얹힌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획조정실로 가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오셨습니까.”

기조실로 들어가니 직원들이 인사한다.


그 중 사무실 가장 안쪽에 있는 양준기의 얼굴도 보였다.
준기는 강 실장과 시선을 마주치자 얼른 걸음을 빨리해 자리에 앉는 강 실장의 곁으로 다가왔다.

“실장님,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저희 아버지께서...”


“나 급하게 미국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네?”

강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말했다.

“어... 내가 내일 급하게 미국 출장을 가게 됐어. 이유는 다녀와서 말해줄 테니까 그냥 맡은 일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유 대리는 봉선동 TFT 관련해서 정보 지원 확실히 해주고, 이 과장은 나 대신해서 문제 생기지
않도록 관리 잘 해.”
“알겠습니다.”

강 실장은 자리에 앉으면서 준기에게 말했다.

“너도 괜히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하고 있어.”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가시는지...”
준기의 물음에 그가 인상을 긁었다.

“내가 다녀와서 말해준다는 거 잊었나?”


“죄송합니다.”
“과장도 못 물어보고 가만히 있는데 보자보자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네가 전무님이라도 되는 줄 알아?”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가 봐.”
“네.”

준기가 자신의 자리로 이동하는 걸 보면서 강 실장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노선을 확실하게 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묵묵히 컴퓨터 비번을 바꾸고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회사를 나왔다.

나흘 뒤, 현진물산은 현진광광 주식 12%를 시간 외 거래를 통해 사들였다.


당연히 공시에 떴고 이 소식을 거제에서 본 임창호 회장은 당장 경영기획본부장인 김태민을 불러올렸다.

“너... 이거 알았냐?”

임 회장이 해당 공시 프린트한 걸 태민에게 보여주자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도 방금 어머니한테 확인하고 올라온 길입니다.”


“네가 왜 이제야 알아?”
“신영은행에서 연장해준다는 말을 믿고 페이먼트 호텔을 인수했는데 갑자기 말을 바꿨다고 합니다. 2 천억 현금을
가진 회사가 현진물산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교환했다고 합니다.”
“신영은행에서 왜 갑자기 말을 바꿨어?”
“그건 정확히...”

임창호 회장은 혀를 찾다.

“쯧쯧쯧... 이런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사실 어머니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습니다. 그룹 내 현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태민은 점점 굳어져가는 임창호 회장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임 회장은 고개를 숙인 그에게 말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니? 주식을 교환해서 그 돈으로 채권을 막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최선의 방책은 무엇이었냐?”
“팔았어야 했습니다. 이미 매입한 페이먼트 호텔이든 아니면 가지고 있는 다른 호텔을 매각해서라도 채권을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래, 그게 맞는 거다. 네 어미는 큰 실수를 했어. 이제 현진물산을 집어 삼키려고 할 때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칼을 쥐게 됐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겁니다. 어차피 현진물산은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입찰에 현금 8 천억과 현진관광 지분을
넣을 겁니다. 현진관광 지분은 현진물산의 손에 고작 몇 달 정도로 잠시 머물게 된 것일 뿐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찾아올 겁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임 회장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창밖 조선소를 바라보았다.

“과연 우연히 그리 된 것일까? 세상 일에 우연이란 없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야.”


“조사해보겠습니다.”
“태민아, 참으로 공교로운 일 아니겠니?”
“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연희 말이야. 고것이 현진물산에 입사한다고 했을 때 난 괘씸해서 가 보지도 않았단다. 그런데 연희가 입사하고
나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오히려 지훈이가 있었을 때보다 경영권은 단단해졌고 자금력은 풍부해졌지. 저들
입장에서 목구멍의 가시 같았던 양 전무도 단번에 뽑아냈다.
내가 생각을 달리 해봐야 하는 거니?”

임 회장이 고개를 돌려 태민을 바라보았다.


태민은 임 회장의 담담한 눈빛에 전율을 느꼈다.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잘못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구나.”

다시 조선소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임 회장을 뒤에서 바라보며 태민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4) > 끝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1) >

차지열 상무는 요즘 들어 하루에 살이 1kg 씩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밥맛도 도통 없고 어디서 전화라도 걸려오면 괜히 긴장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회사를 지탱하고 일으켜온 회사 내 실질적인 넘버 2 인 양철기 전무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날아갔고 인사이동을
앞두고 양 전무 라인이 통째로 날아갈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스스로가 과민반응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안테나를 극도로 세우지 않으면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진중공업 경영기획본부장인 김태민이 서울 모처로 차 상무를 불러냈다.
극도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잘 지냈어요?”

태민은 차 상무가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들었고 차 상무는 얼른 잔을 들어 올렸다.

“저야 그냥 회삿밥이나 축내고 있을 뿐입니다.”


“영업본부장이 회삿밥이나 축내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한겨울 삭풍이 몰아쳐대고 있으니 몸이 시려서 얼굴 한 번 내밀 수 있겠습니까.”

차 상무로서는 내심 가지고 있던 불만을 슬쩍 내비쳤다.


양철기 전무가 날아가고 송은채 사장은 대놓고 인사이동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회장 라인의 핵심인 김태민은
지금껏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불만이 쌓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좀 무심했죠?”
“아닙니다.”

김태민은 술을 들이키는 차 상무의 모습을 흘깃 보다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계속 거제에 내려가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 어르신이 워낙 바닷가를 좋아하시니


손자된 입장에서 어르신 홀로 계시도록 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마땅한 말씀입니다.”
“양 전무가 그렇게 되고 우리도 당황했습니다. 설마 양 전무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닐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양 전무의 능력은 존중하지만 그런 짓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래서 조금 생각을 해봤습니다. 과연 현진물산을 안고 가도 되는 것인지... 껴안았다가 되려 뒤통수를 맞는게
아닌지... 저로서는 고민이 되더란 말입니다.”

실실 웃으며 말하는 태민을 보고 차지열 상무는 소름이 끼쳤다.

“서, 설마 현진물산을 포기하신다는...?”


“지금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 건 맞지 않나요? 외부에서 뭘 하고 싶어도 내부에서 손도 못쓰는 범죄 때문에
검찰에 고발되는 상황 아닙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현진물산에서 영업본부장 직책을 맡고 계신분이
신영투자증권에서 주식을 가져오는 것도 모르고, 대출금이 5 천억이나 들어
오는데도 모르고 계셨는데 제가 그런분을 믿고 아등바등 현진물산을 가져와 보겠다고 설치면 바보, 등신
아닙니까?”
“...”

차 상무는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태민의 말 중 틀린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진물산은 현진그룹 계열사 중에 중공업 계열을 제외하고 가장 탄탄한 조직과 매출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현진물산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나 될 소린가?
역시 태민은 얼굴빛을 바꾸고 태연히 말을 바꿨다.

“농담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가족도 아니고 주고 받는게 확실하지 않는 관계에서 신뢰라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상무님께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차 상무가 안절부절 못할 때 태민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상무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예?”
“좀 도와주세요.”

말이 도와 달라는거지 태민의 위압적인 표정은 금방이라도 차 상무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그, 그럼요. 도와드려야죠.”
“그렇게 말고!”

버럭 소리 지르는 태민의 기세에 차 상무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적당히 몸 사리고, 적당히 눈치 보면서 도와주시지 말고, 상무님 한 몸 던져서... 네? 상무님 몸이 상무님
것이 아니잖아요. 토끼 같은 자식들도 있을거고, 집에 바가지 긁는 마눌님도 있을거고... 그런 가족 위해서 좀
던져 보시라구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태민은 다시 술병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차 상무가 아까와는 달리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자 넘치게 술을 따라주며 태민이 말했다.

“지금 현진물산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뭡니까?”


“그야 프록시아 입찰입니다만... 제가 입찰가격을 확실하게 알아내서 세원에 보낼까요?”

나름 각오하고 한 말인데 태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됐어요, 그게 뭐라고...”
“네? 입찰에 성공한다면 회장님께...”
“아유 씨발,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신영은행에서 우리 엄마 목을 조일게 뭐람.”
“그럼...?”
“우리 어머니가 급한 마음에 실수를 했어요. 돈 급하다고 현진관광 주식을 주면 안 되는 건데... 현진물산에서
입찰에 실패하면 현진관광 주식을 손에 그대로 들고 있게 될 거 아닙니까? 골치 아파진 상황이긴 한데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쩌겠습니까. 좋게 생각해야지. 입
찰에 실패하면 회장님한테 밉보일거고 입찰에 성공하면 넘어간 주식을 다시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현진물산이 입찰에 성공하면 현진관광 주식과 현찰 8 천억이 프록시아 매각 주관사로 넘어간다.


매각 주관사로 넘어간 주식은 언제고 다시 사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차 상무는 전략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프록시아 인수하고 나면 현진물산이 가진 부채가 얼마죠?”
“신영은행 건만 1 조 원에, 다른 금융권 부채를 더하면 3 조 원이 넘습니다. 매년 소모되는 이자만 700 억이
넘습니다. 프록시아를 인수한다고 해도 거기서 뽑아내는 돈이 현진물산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겁니다.”
“입찰에 실패하면 할아버지한테 찍힐거니 그것도 나쁘지 않고, 만약 입찰에 성공하면 곳간이 텅텅 빈다는
말이죠?”

차 상무는 그가 현진물산이 프록시아를 최대한 한계가격까지 끌어올린 가격으로 가져가게 할 생각임을 알아챘다.

“맞습니다.”
“그럼 지금 진행 중인 사업 몇 개 날아가면 회사 휘청이는거 아닌가요? 어디 보자... 아! 차 상무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유연탄 가져오는 거 주도했죠?”

차 상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맞습니다.”
“그거 채굴 허가 떨어져서 올해 말부터 생산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윗선에서 틀어버리면 큰일
아닙니까? 왜 중국에서는 사업하다가 정부 마음이 바뀌는 바람에 크게 손실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재수
없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차 상무는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많은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좋네. 그리고 그 뭐야, 봉선동에 들어간다는 아파트 사업권 따내려고 준비중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아주 지랄들을 하고 앉아 있네. 아니, 왜들 그럽니까? 대한민국에서 현진물산 직원들이 일 제일 잘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아주 기대가 커요.”
“본부장님이 나중에 현진물산의 주인이 되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거야 먼 훗날이고... 어쨌거나 그것도 꽤나 떠들썩하던데 알아서 손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상무님. 이게 다 나만 잘 살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습니까. 나도 잘 살고, 상무님도 이제 사장
타이틀 하나 떡하니 달아 보자구요.”

차 상무는 차마 그 말이 진짜냐고 묻지 못했다.


의심하는 순간 하나 남은 끈마저 끊어질 것 같은 공포 때문이었다.

연희는 영훈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고 있었다.


당연히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연희였고 영훈은 옆자리에서 운전면허시험 문제지를 풀며 공부하고 있었다.
연희는 고속도로라 정면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말했다.

“강노식 실장님 아내분이 바람 피우는 장면을 딱 목격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만약 미국까지 갔는데 증거도 없고
허탕으로 돌아오면 어떡해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와... 너무 무대뽀인거 아니에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있으면서 어느 한 명 영특하지 않은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강 실장님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감성적인 면보다 이성적인 면이 발달했고 합리적인 면이 강합니다. 모든 일을 다 계획을 세우고
감정적인 자극은 최대한 절제하는, 오로직 직진밖에 없는 남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거랑 당신이 무대뽀처럼 한 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 사람은 명예를 중시하고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아내가 바람을 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적인 일인
거죠. 그런 사람이 미국까지 갔는데 별다른 증거가 없이 그냥 돌아온다? 어지간한 사립탐정보다 철저하게 파고들
겁니다. 그런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건 아내가 바람을
피지 않았다는 결론에 가까울 겁니다.”
“만약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았으면 어떡해요?”

이번에는 영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흠... 일리가 있는 질문인데... 그건 그것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 개인적으로 조금 곤란을


당하겠지만 그거야 내 실수니 누굴 탓할게 아닙니다. 다만 내가 말한 것과 다르게 바람을 피지 않았다면 아내가
언제고 급사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운전대를 잡은 연희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식이든 아내를 잃게 되는 건 벗어날 수 없다는 거네요? 사주라는 건 정말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죽고 사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이건 조금 다르죠.”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었다면 자신은 이미 무당이 되어 있을거다.

“그럼요?”
“사람이 살면서 계획대로 되는게 많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살다 보면 여러 사정이 생기고 또 계획한
스스로가 마음이 변할수도 있죠. 물론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추어 노력하는 사람들이야 많겠지만 이 사람은
여자를 대할 때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놓고 행동하는 사람일 정도로
감성보다 이성이 앞선 사람입니다. 그 말이 곧 무슨 뜻일까요?”
“아! 저렇게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면 아내와 따뜻한 감정 교류를 못했을 거라는 말이란 거죠?”

확실히 똑똑한 여자다.

“맞습니다. 고진살을 피하고 싶었다면 자신의 차가운 성격을 바꿔보려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살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사주는 어떻게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주어진 숙명 같아도 그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면 무척이나 촘촘한 인과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

연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자신의 사주를 다시금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물었다.

“그런데 영훈 씨가 사주를 계속 공부했기 때문에 잘 아는 건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거예요? 산에서 여자를 많이 사귀었던 것도 아닐 테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연예 팁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아마 저일 겁니다. 연애를 유튜브로 배웠다고나
할까요?”
“아~”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훈풍이 부는 자동차를 타고 세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이 광주광역시에 있는 라마다 호텔이었다.
주차하고 로비에 들어서니 입구에 [조재민 의원의 ‘철인의 길’ 출판기념회]라는 팻말이 보였다.
영훈과 연희는 팻말을 따라 3 층 컨벤션 홀로 올라갔다.
이미 그곳에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무수한 인파가 북적이고 있었다.

“와~ 대단하네요.”
“국회의원 출판기념일이니까요.”

연희의 대답에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걸어갔다.


오늘 이곳 광주까지 온 이유는 바로 봉선동에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 시공사 선정을 위한 사전작업 때문이었다.
본래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서포트 할 계획은 없었지만 고 부장이 이 사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되기만 하면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사업이라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연희가 미리 준비한 봉투를 손에 쥐고 기나긴 줄을 섰을 때 누군가 연희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연희와 영훈이 손을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모델처럼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이 빙그레 미소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임연희 맞지?”
“어? 창훈아! 반가워!”

연희가 손을 내밀었고 창훈이라는 남자와 악수를 했다.


그러다가 창훈이 영훈을 돌아보았고 연희가 소개를 해주었다.

“나 취직한거 알지? 우리 회사 비서실 최영훈 과장님이셔. 여기는 나랑 같이 학교 다녔던 대학 동기예요. 이름은


김창훈.”
“반갑습니다. 최영훈입니다.”
“김창훈입니다.”

악수를 나누고 나니 창훈이라는 남자가 연희에게 말했다.

“현진물산에 입사했다는 말 들었다.”


“넌 언제 한국에 들어왔어?”
“난 한 달 전에.”
“그럼 연락이라도 하지.”
“바빴어. 아버지가 하도 난리를 치는 통에 말이야. 그리고 내 나름대로 준비할 것도 있었고.”
“그럼 회사 들어간 거야?”

창훈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기묘한 역함에 영훈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상체를 뒤로 빼는데 창훈이 말을 이었다.

“나 우명건설 주택영업본부장 됐어.”


“우명건설? 아니, 그 많은 계열사 중에 하필 우명건설?”

연희의 눈동자가 떨린다.


왜 여기서 창훈을 만나게 됐는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창훈의 말이 더 걸작이다.

“나 이번에 봉선동 사업권 따낼거야. 그리고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요구할거다. 너랑 결혼하겠다고.”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1) > 끝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2) >

“우리가 너희랑 경쟁 관계인 거 알고는 있는 거니?”


연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들었어. 현진물산이 혜성기업을 인수해서 현진건설로 탈바꿈했다고. 맞지?”

창훈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옆에는 창훈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절도있게 상체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네 손에 쥔 사업인지는 전혀 몰랐고. 정말이야. 나도 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네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사업이었다면 미안하게 됐다.”
“아직 결정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미안해할 건 없어.”
“글쎄, 난 벌써 미안한데? 실은...”

창훈은 연희의 귀에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 약속까지 잡았거든.”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그를 보며 연희가 코웃음을 쳤다.

“넌 한결같구나. 여전히 성급하고 가벼워. 그러다 몇 번 혼쭐났던 거 기억 안 나니?”


“난 안 좋은 기억은 쉽게 잊거든.”
“그 자신감, 이번에는 얼마나 가는지 한번 볼게.”

창훈은 품 속 명함지감을 열어 검지와 중지로 멋들어지게 명함을 꺼내 연희에게 내밀었다.

“연락해.”
“나도 여기.”

연희도 명함을 주자 그가 연희의 명함을 받아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서실? 사원? 뭐야, 서민 체험이라도 하는 거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려고.”
“하하,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하여튼 열심히 해 봐. 아마 잘 안 되겠지만.”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걸 보고 영훈이 말했다.

“원래 저렇게 대사를 만화 주인공처럼 합니까?”


“네. 본인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애거든요. 성격이 악한 건 아닌데 뭐랄까... 좀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애 같은 면이 있어요.”
“신기한 친구네.”
“아, 생년월일은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잠깐요.”

그녀는 얼른 핸드폰으로 그의 SNS 를 검색해 생년월일을 빠르게 찾아냈다.


영훈은 그걸 보고 사주를 계산하는데 연희는 태연하게 이곳에 참석해 줄 서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의아해 물었다.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는데 너무 태연한 거 아닙니까?”


“아이, 여태 내 말을 어떻게 들었어요? 내가 결혼하자는 말 처음 들었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얼핏 들었던 것 같기는 했다.

“고백은 많이 받았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고백뿐이겠어요? 고등학교 때 백인 선생님이 이런 고~져스한 동양인은 처음 봤다고 사귀자고 무릎을 꿇지를 않나,
대학 들어가서는 아랍 왕자가 자기 세 번째 부인이 되겠냐고 제안해 오기도 했어요. 첫 번째 부인에다가 더 이상
부인을 안 들이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그건 안 된다
고 해서 거절했죠.”
“진짜 할 생각이었습니까?”
“그 때는 진심이었어요. 그 아랍 왕자가 가진 재산이 얼마였더라? 80 조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어쨌든 그것
말고도 창훈이 쟤, 오늘까지 한 것 빼고도 서너 번은 더 저랬어요. 그래도 급하게 만나서 다행이지, 내가 여기에
오는거 알고 있었다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했을걸요? 아유...”

연희는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경험이 많으시네요?”
“말해 뭐해요? 장담하건데 나만큼 청혼 많이 받아본 여자는 많지 않을걸요? 그냥 예쁘기만 했으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예쁜데다가 집에 돈까지 많으니 날 가만 둘 리가 없었던 거죠. 당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인생
역시 쉽지는 않았답니다.”
“흠... 아까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 귓속말 한거요? 조재민 의원이랑 저녁 약속을 잡았다고 하던데요?”
“빠르네.”
“오늘 와서 후원금 전달한 건 그냥 의례적인거고 이미 며칠 전에 약속을 잡아두었을 거예요. 정치인들 목이
뻣뻣해서 당일에 약속 잡는 건 힘들거든요.”
“그럼 이미 이야기가 많이 진행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거예요. 보는 사람도 많고, 많은 이권이 걸려 있어서 정치인 한, 둘로는 결정적 힘을 쓸 순
없을 테니까.”
“우리도 그거 알고도 온 거 아닙니까? 한, 둘로는 힘들지만 셋, 넷이 되면 또 다르니까.”
“더군다나 조재민 의원 사촌동생이 LH 공사 임원이기도 하고... 다 알고 왔을 거예요. 광주에서 조재민 의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아마 우리보다 더 잘 알 거예요. 일단 우리는 우리 할 일 합시다. 약속장소
찾아가서 깽판칠 수도 없으니.”
“하핫! 진짜 그래볼까요?”

연희는 창훈이 얄미운 듯 주먹을 휘두르며 깽판을 놓는 시늉을 하다 주변 눈치를 보고 그만두었다.

“봤냐? 졸라 멋있었지?”

창훈이 호텔 로비의 거울을 보며 자뻑에 빠져있는 사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윤희찬 부장이 옆에서 초를 쳤다.

“아까는 너무 성급했어. 그 여자 표정 제대로 본 거 맞아? 심지어 당황하지도 않고 심드렁하던데?”

그는 놀랍게도 상관에게 반말을 해댔고 창훈은 반말을 듣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연희 걔가 원래 그래요. 쉬운 여자 아니야. 그래서 내 여자가 될 만한 여자인 거지.”


“너무 급하게 다가서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어. 여자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면 오히려 튕겨 나가.”
“에헤이~ 네가 연희를 몰라서 그런다니까. 학교 다닐 때 남자들한테 얼마나 도도했는데.”
“네가 몰랐던 거 아니야? 너만 모르고 연애 몇 번은 했을 수 있어. 너 원래 눈치 없잖아. 그것도 드럽게...”
“이번엔 달라.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연희는 그렇지 않다니까."

윤 부장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대답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더욱 가볍게 다가서면 안 될 걸? 대개 연애를 잘 하지 않는 여자일수록 남자친구나 배우자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에 여자가 가진 환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이루어지기 힘들거든. 모태솔로인 남자나
여자가 연애를 시작하기 힘든게 눈이 높아져서이기도 해.”

창훈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 말고 도대체 누가 연희의 기대감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 외모와 배경과 여자를 배려하는 나 같은
신사 말고 누가 연희 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구?”
“재수 없긴 하지만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한데...”

창훈은 드디어 긍정적인 대답을 한 윤 부장의 말 덕분인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인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그런데 하필 우리랑 붙는게 문제네. 아니, 뜬금없이 현진물산에서
아파트 시공 사업을 왜 욕심 내는 거야? 꼴랑 도급능력 39 위 인수해놓고 이렇게 대규모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진짜 따낼 수 있다고 믿는건가?”
“그래도 이번에 저쪽에서 내민 한 수가 담당자들이나 주민들의 귀를 간지럽힌 건 사실이야. 아파트 단지 전체에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는 전라도 부동산 일대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인데 이걸 틀어막고 들어가려면 고생 좀 할
것 같아.”

창훈은 그제야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조재민 의원 부친부터 우리랑 맺은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니야. 게다가 우리 아버지랑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었어. 아, 그때는 국민학교였지? 어쨌든 절대 우리가 미끄러질 수가 없는 일이야.”
“지방 부동산 시장이 들썩인지 얼마 안 됐어. 지방 사람들은 서울이나 수도권 집값 올라갈 때 남 이야기로만 알고
살았거든. 이런 분위기를 계속 타고 싶을거야.”
“이거 왜 이래? 우리 브랜드도 만만치 않아.”
“알지.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도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오늘 현진물산 외동딸까지 직접
내려왔어.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흥, 그래 봤자지. 지네가 언제부터 건설회사였다고 조 단위로 남겨먹는 아파트 시공권을 따려고 해?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야. 어쨌거나 난 이번 일 걱정 안 한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연희를 만나게 된 건 하늘의
뜻이다. 이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봐. 연희를 여기서 만
날 줄 알았으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하는 거였는데... 아까 너무 건조하게 말했나?”

윤희찬 부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이상하게 아까 옆에 있던 남자가 신경 쓰이던데?”


“남자? 누구?”
“그 연희 씨 옆에 서있던 남자 말이야.”
“최영훈이라는 비서실 직원?”
“어.”

창훈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인마, 너 안 본 사이에 감 많이 죽었구나. 걔가 어딜 봐서 연희 스타일이야? 딱 봐도 내 동생


스타일도 아니구만. 내 동생이 딱 연희랑 비슷해. 잘 생기고 완벽해야 하거든. 그런데 비서실 직원? 말이
되냐?”
“아까 네가 결혼할거라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그 남자 눈치 봤어. 넌 눈치 못 챘지?”
“비서실 직원이라며? 회사 직원이 옆에 있으니 괜히 민망했을 수 있지.”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너 유부남이 괜히 유부남 된 게 아니야. 여자들 눈치를 기가 막히게 본다고.
그래서 여자들이 유부남인 거 알면서도 빠져드는 거야.”
“네가 평소에 눈치 빠른 거 인정하는데 이건 아니야. 최영훈이면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아무리 잘 봐줘야
재벌 서자 아니냐? 그런데 재벌 서자가 남의 회사 비서실에 왜 가있냐?”
“그건 그렇지.”
“그럼 일반인이라는 건데 로열패밀리가 일반인하고 결혼하는 게 말이 되냐? 남들은 그런 순수한 사랑을
꿈꾸겠지만 연희는 그렇게 말랑한 성격 아니야. 걔가 얼마나 독하고 야무진데? 나 정도 아니면 눈에 차지도
않을걸?”

윤 부장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 내가 씨발, 이 꼴 보기 싫어서 다른 데 지원했던건데...”


“크크크. 그래도 나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부장 타이틀 다냐? 넌 친구 잘 만나서 운이 트인 거야. 가자, 내가
오면서 죽이는 간장게장 집 봐 놨다.”
“나 운전할 때 뒤에서 그거 찾고 있었냐?”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지. 가자!”

김창훈과 윤 부장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벗어났다.

“축하드립니다. 잘 읽을게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의원님, 너무 멋지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조재민 의원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지칠 수도 있을 텐데 돈이 들어오는 자리여서인지 아니면 성품이 좋은 건지 연신 호탕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반겼다.
드디어 차례가 된 연희와 영훈도 조재민 의원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출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조재민 의원이 한눈에 기업에서 나왔음을 알아챘다.

“아이고, 젊은 분들이 찾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오늘 이렇게 미인이 찾아주시고 눈까지 호강하는군요.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현진물산을 경영하시는 분이 제 어머님 되십니다.”

연희의 말에 조재민 의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 현진그룹 자제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일전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떴었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조 의원은 며칠 전 현진물산에서 봉선동 아파트 시공을 따내기 위해 올린 홍보기사를 바로 기억해내며


언급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언급했다는건 이미 그도 현진물산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감사합니다. 그냥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면 결과는 따라올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에 연희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조 의원의 뒤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는 여성에게 또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물러나는데 영훈은 그
여인에게 간단히 목례하고 말했다.

“의원님 사모님 되십니까?”


“아, 그래요. 오늘 날이 날이라고 도와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훈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몸도 안 좋으신데 날이 추우니 들어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조 의원의 아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말했다.

“네? 제가요?”
“심장이 안 좋으시면 추위를 조심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영훈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설 때 조 의원의 아내가 영훈을 붙잡았다.

“저기, 잠시만요.”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2) > 끝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3) >

영훈이 뒤를 돌아보자 조 의원의 아내가 다가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의사분이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눈가가 항상 짓물러 있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심장이 안 좋으셨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심장이 안 좋은 분들이 다 그런 걸 보고 괜히 눈가가 짓물러 있고
실핏줄이 눈가로 가늘게 퍼져 있는 분을 보면 심장이 안 좋으
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건강하시다면 괘념치 말아주세요.”

상을 보면 오장육부가 안 좋은 것이 티가 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마다 ‘너는 어디가 안 좋고’, ‘너는 어디를 조심해야 하고’ 따위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상으로 보이는 건강의 이상은 대부분 본인들도 알고 있는 데다가 말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경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심한 증상이 뚜렷이 보임에도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굳이 알려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도 아닌데 괜히 알려줬다가 어떻게 알았느니, 앞으로 내가 뭘 조심하면 되겠느니 따위의 쉴새 없는 질문을
해오면 피곤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조재민 의원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해준건 상을 봤을 때 건강이 안 좋을망정 말년까지 큰 고생 없이 살
팔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볍게 말하고 표정을 살피는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실은 얼마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기는 했어요. 그래서 혹시 의사분이 아니신가 물어봤죠. 아유, 이거 참 병원을
가봐야 하는 건지...”

보아하니 이미 병원을 가봐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했었나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회의원의 아내이니 아마 자신이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다른 차이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럼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주변에 괜찮을 거라면서 늦게 갔다가 많이 안 좋아지신 분들도 몇 분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혹시나 하고 있는 차였는데... 그런데 아까 들어보니까 현진물산에서 오셨다구요?
명함이라도 하나 받을 수 있을까 싶은데...”

영훈은 얼른 명함을 꺼내 건넸다.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렇게 영훈이 인사하고 나오자 연희가 후다닥 달려왔다.

“세상에... 관상으로 그런 것도 다 보이는거예요? 말도 안 돼...”


“그리 대단할 건 없습니다. 엄청난게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사실 급사할 때가 되면 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도 알고 있지만 지금껏 실제로 본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실제 그런 상황을 맞딱뜨리면 그걸 알아볼 수 있을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알아볼 수 있을 거다.
자신은 그걸 알아보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운명을 타고났으니까.
그래도 자신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어쨌든 반응은 나쁘지 않던데요? 표정 보니까 되게 고마워하는 것 같던데?”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도와준거예요?”
“일단 가서 얘기하죠.”

영훈은 그녀를 데리고 차로 돌아온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재민 의원의 사주를 보니 전형적으로 밖에서는 신사여서 주변사람들에게 칭찬이 자자한 사람인데 집에서는
그렇지 못할 사람입니다. 돈 좀 생기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서 보낸다거나 비싼 술을 사면서도 집에는
짠돌이처럼 군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게 아내를 미워해서가 아
니라 밖에서 보여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아...”
“그러다보니 겉으로는 표현을 못해도 평소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누가
아내에게 잘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 고마움을 가지게 됩니다. 아, 그렇다고 어설프게 도와주면
아내를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
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중시하지만 쉽게 믿지도 않습니다. 참 전형적인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주입니다.”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 좀 있는데 그럼 다 그 와이프를 공략하면 되겠네요?”

영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 의원은 가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냥 친구랑 술이 좋아서 밖을 나도는 남자들도 많아요.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렵네.”
“한 사람의 성격과 인생을 아는게 쉬울 리 있겠습니까. 그냥 그때그때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요. 난 당신이 해설하는거 듣고 내가 해줄 것만 해주면 되니까. 그럼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요.”

연희는 슬쩍 영훈의 팔을 잡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 기분 좋은 감촉에 영훈도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무렵 창훈과 윤 부장은 광주의 조용한 한정식 집에 미리 도착해 앉아 있었다.

“빈손으로 오기 영 찝찝하네.”

창훈이 양손을 비비며 말하자 윤희찬 부장이 말했다.

“회장님이 어설프게 뇌물 쓰지 말고 능력껏 따오라고 했잖아. 그리고 회장님 친구 분이나 마찬가진데 뇌물이
통하겠어?”
“뇌물이라기보단 너무 빈손으로 와서 민망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얼굴이 모습을 보였다.


창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벌써 와 있었네?”

연희가 웃으며 들어오며 말하자 창훈이 말했다.

“실력 좋네.”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너 너무 자신감이 심하다니까. 일단 앉을까? 상석은 비워둬야겠지?”

창훈의 옆에 영훈이 앉고 맨 끝에 연희가 앉았다.


한쪽 공간은 비워두고 맞은편에 네 명이 주르륵 앉은 모양새가 기묘했다.
창훈은 내심 자신의 옆에 연희가 앉지 않은게 불만인지 콧잔등을 긁으며 불만 어린 말을 내뱉었다.

“거 참, 눈치가 부족한 친구네.”


“아, 저 말씀하신 건가요?”

영훈이 못 알아들은 척 묻자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 둘 사이에 앉은 사람이 댁 말고 누가 있습니까? 아까 보고도 모르십니까?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는
사이인데...”

연희가 단번에 끼어들었다.

“창훈아, 우리 직원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줄래?”


“아, 미안... 직원 앞에서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했나? 이런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있을 때...”
“... 그냥 입 다물어줘.”

창훈은 억울한 마음에 뭔가 말하려 했지만 윤 부장이 허벅지를 연신 찔러댔기에 그만 입을 닫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지속되기를 5 분여가 흘렀을 때 창훈이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진짜 이거 하려고 그러는 거야? 우명건설을 이겨보겠다고?”

연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있나?”


“혜성기업이 아파트를 몇 개나 지어봤지? 브랜드 들어는 봤어? 난 모르겠는데... 윤 부장은 혹시 알아?”
“있기는 한데 지방 몇 군데에만 지어져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 윤 부장이 그러잖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현진건설로 간판 바꾸면서 이제 새롭게 시작해보려고. 아니, 그렇게 빡치면 너네도 배 만들면 될 거 아니야?
우리는 아파트 지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연희의 목소리에 점점 짜증이 담기자 창훈이 움찔한다.

“아니... 일을 효율적으로 하자는 거지. 혜성기업은 아파트보다는 다른 걸 많이 하지 않았어? 그치?”

윤 부장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혜성기업은 아파트보다는 도로나 항만 같은 정부 발주 공사를 주로 해왔습니다. 사실상 정부 발주 공사로 돈을


벌고 아파트로 돈을 까먹는 행태로 많은 손실을 자초했습니다. 얼마 전에 대규모 미분양 사태도 그렇고.”
“들었지? 아파트보다는 정부 발주 공사를 노려보라고.”

연희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뭐라 반박을 하려는데 옆에 앉아 있던 영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고 자신의 말이 먹힌다고 판단했는지 창훈이 더 이야기를 하려는데 문이 열리고 조재민 의원이 들어왔다.
일행들은 전부 벌떡 일어섰고 조 의원은 자리에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오셨습니까.”
“앉아요, 앉아. 우명건설은 좀 놀랐죠? 미안해요. 내가 미리 말을 못 했어요.”
“하하, 손님이 더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괜찮습니다.”
“원래는 그쪽하고만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어차피 따로 만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할 바에는 같이 만나는게 나을 것
같아서 자리를 마련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재민 의원이 같이 따라온 보좌관에게 손을 내밀자 놀랍게도 그가 소주병과 소주잔을 꺼냈다.


조 의원은 소주잔을 네 명에게 건네주고 한 명씩 차례로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남은 술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음료수 잔에 한 번에 따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해서 네 명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조 의원은 아무 말 없이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아니...”

김창훈이 당황하며 뭐라 하려는데 조재민 의원이 말했다.

“멀리서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자리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내가 국회의원 신분이니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아는데 즐겁게 식사하며 대화하기에는 남들이 흉볼까 무섭습니다. 요즘 정치, 옛날과 다른 거 알고
있죠?”
“이해하고 있습니다.”

연희가 얼른 대답하니 조 의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각자 그 소주 한 잔씩 마시고 딱 한 번씩만 말하고 깔끔하게 일어섭시다. 내가 벌주로 가장 많이


마셨으니 먼저 말하겠습니다. 시공사 선정에 있어서 내가 개입할 수도 없고 도움을 줄 수도 없습니다. 자, 하고
싶은 말 하나씩 하고 일어납시다.”

결국 그냥 돌려보내기 그래서 한 번씩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


낭패한 얼굴을 한 창훈이 일단 윤 부장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도 방법이 없다는 듯 가장 먼저 소주를 들이키고는
말했다.

“아파트는 부동산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가치가 바로 부동산이죠. 우명건설의 브랜드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시공능력 하나만 봐주시면 바랄게 없습니다.”
“오직 실력만 봐달라. 좋은 이야기군요. 알겠습니다.”

창훈은 시선을 연희와 영훈에게 돌렸다.


이제 너희 차례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최영훈 과장이라는 사람이 마실줄 알았는데 연희가 먼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입을 열었다.

“저 대신에 여기 최 과장이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럼 두 번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조 의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것 말 되는군요. 그런데 연희 양이 현진그룹 자제분으로 알고 있는데... 전권은 다른 분이 가지고


있었군요. 재밌습니다.”

연희의 말에 놀란 사람은 조 의원 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연희를 보좌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던 창훈이나 윤 부장도 놀란 얼굴로 연희와 영훈을 번갈아 보았다.
연희는 이제 너희 차례라는 듯 창훈을 바라보았다.
창훈이 잠시 숨을 가다듬고 소주를 마신뒤 말했다.

“아버지께서 의원님께 안부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 편히 해주십시오. 어릴 때 몇 번이나 뵙지 않았습니까.”


“허허, 좋아. 그렇게 하지. 나야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하게. 이렇게 장성한 아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부러워.
자식 교육 참 잘 시켰구만.”
“저도 의원님께서 건강하신 것 뵀으니 할 일을 다 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창훈은 자세를 바로했다.


연희는 창훈과 조 의원과의 대화를 듣고 바짝 긴장했다.
대한민국에 학연, 지연, 혈연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을까?
창훈이 언급한 말엔 단순히 친분을 과시하는 것 이상의 힘이 있었다.
조 의원 역시 창훈의 이야기에 대답은 잘 해주었지만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자신에 대한 압박으로 느껴졌음이리라.
이제 조 의원이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는데 영훈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듯 소주잔을 앞으로 밀었다.

“응?”
“제가 원래 안주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조 의원의 이마에 굵은 금이 그어졌다.

“무슨 뜻인가요? 더 할 이야가 없다고 해석해도 됩니까?”


“의원님께서 일이 공정하게 처리될거라고 하셨는데 더 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집이 더덕구이가
유명하다는데 잘 먹고 올라가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옆의 연희 양은 당신에게 짐을 넘겼는데 그렇게 쉽게 기회를 포기할 셈인가요?”

방금 전에 어떤 힘도 쓰지 못할 거라고 해놓고 딴소리를 한다.


그런데 영훈의 대답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상상을 벗어났다.

“네, 그리고 그깟 아파트 시공사 선정에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뭐라구요?”
“일을 하다 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에 아파트가 지어지는 곳이
봉선동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닐 겁니다.”

이쯤 되니 조 의원도 호기심이 강하게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낮에 의원님을 만나고 저녁까지 기다리면서 심심해서 기사를 보다보니 군산버스터미널이 낙후돼서 지역 주민들이
많이 불편하다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의원님께서 예산을 많이 못 타서 현대화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는 기사를
봤는데, 맞습니까?”
“그러고 있기는 합니다. 공사대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업이 지연되고 있지요. 그런데... 설마 그걸 하겠다는
말입니까?”
“대규모 초고가 아파트 단지를 짓는 게 서민들에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돈 있는 사람들에게나 좋은
일이지.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현진건설이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조재민 의원은 감탄했는지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영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더덕구이가 괜찮기는 하지만 최고의 안주로는 홍어 만한 게 없지. 혹시 홍어 먹을 줄 아나?”

그는 어느새 반말을 하고 있었다.

“없어서 못 먹습니다.”
“내 최고의 홍어집을 알고 있지. 자리 한번 만들 테니 시간 내 보게.”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3) > 끝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4) >

윤희찬 부장은 너무 놀라 엉덩이를 들썩일뻔한 걸 겨우 참았다.


저 최영훈이라는 자의 말은, 결국 돌려 말했지만 군산 버스터미널을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과 묶어버리겠다는 말과
다를바 없었기 때문이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자신들은 이번 사업을 잘 봐달라고 왔는데 저 최영훈이라는 자는 군산 버스터미널을 묶어서 조 의원에게 던지며
선심을 쓰는 상황을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너무 세게 맞아서 ‘억’ 소리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조재민 의원이 아무리 이번 사업에 힘을 쓸 수 없다고는 했지만, 정치인이 몇 번 만난적도 없는 기업인을 상대로
진실을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현진물산이 조재민 의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이번 시공사 선정에 우명건설이 탈락될 가능성이 높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의원님. 잠시만...”

윤희찬 부장이 말을 하려할 때 조 의원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주 한 잔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다음에 봅시다.”

조 의원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오히려 지금까지 영훈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던 게 이상했을 만치 도망치듯 나가버리자 윤 부장이나 창훈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반대로 연희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창훈이나 윤 부장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소리라도 질렀을 얼굴이었다.
창훈은 얼굴이 벌게져서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거 문제 될 수 있는거 알지?”

연희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문제? 현진물산이 군산 시민들을 위해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 버스터미널을 현대화 하겠다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너희가 하면 되잖아.”
“...”

창훈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깟 수십억 손해 보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다.
지금껏 우명건설이 시민들을 위해 손해를 보면서 뭘 해본적이 있던가?
하고 싶어도 그걸 제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진건설처럼 간판을 바꿔 단 것도 아니고 창립 몇 주년을 걸고 쇼한다는 것도 웃긴다.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해서 봉선동 사업권을 따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적어도 이걸 결정하려면 회사 임원회의의 결정이나 최고 경영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이상 자신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놈은 어떻게 이걸 이 자리에서 결정했을까?
창훈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연희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우린 이만 가볼게. 우리 상황이 저녁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잖아? 더덕구이는 나중에 먹어야겠다.
가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영훈은 창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연희를 따라 나갔다.


창훈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콧김을 씩씩 뿜어대다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과 술을 시켰다.

“시발, 뭐가 뭔지 엉망진창이네.”

창훈이 자리에 앉아 소주 마시는걸 보면서 윤희찬 부장이 말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됐어. 회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는거 아닐까?”


“고작 이거 가지고?”

희찬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이거’라고 할 게 아니야. 군산 버스터미널을 봉선동 사업에 엮은 거란 말이야.”


“군산이 조재민 의원 지역구도 아니잖아. 뭘 그렇게 흥분해?”
“아까 조 의원에게 예산을 못 가져왔다고 말하는걸 보니까 조 의원 지역구가 군산이 아니라는 걸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필 핵심을 짚었어. 군산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구야?”
“강주원?”
“그래, 그 백년 묵은 여우 같은 강주원이 군산 지역구 의원이라고. 전라도에서 강주원 입김이 얼마나 센지 알지?
그 양반 한 마디면 안 되는게 없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야. 그리고 강주원의 정치적 후계자가 조재민이지. 알고
그랬다면 제대로 찌른거라고.”
“그래도 안 돼. 뭐 하나 터졌다고 아버지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윤 부장은 답답했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사업이 엎어지는 것보다 본인들 체면이 더 중요할 수도 있는게 로얄패밀리 아니던가?
어쩌면 자신들과 보는게 다르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대책을 세워야 해. 진짜 강주원 의원을 노린 거라면 우리도 조재민 의원이나 강주원 의원을 사로잡을
뭔가를 제시해야 한다고. 막말로 강주원, 조재민 의원이 LH 간부들 모아놓고 요즘 호텔급 조식 서비스가 그렇게
좋다더라고 칭찬 한 마디만 해도 게임 끝나는 거야.”

그런데 창훈의 관심사는 다른데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해. 미리부터 버스터미널을 준비했다면 모르겠는데 아까 좋은 가르침이 어쩌고 하는 말 들었지? 씨발, 내가


아까 정부 발주사업을 노려보라고 한 걸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걸까?”
“설마 그랬겠어?”
“그리고 고작 비서실 과장이라며? 주택영업본부장인 나도 아까 같은 제안은 쉽게 할 수 없어. 우리 아버지나
돼야 즉석에서 그런 제안도 할 수 있는 거라고.”
“확실히 그건 이상하긴 해.”
“그것뿐이 아니야. 건설비만 7 천억에 달하고 분양 후 수익이 조 단위에 달하는 이번 사업을 가지고 그깟 시공사
선정 떨어지면 그만이라고? 이게 고작 과장 타이틀을 가진 놈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윤희찬 부장은 확실히 일이 성사되는지에 주목했던 자신과 다르게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심을 가지는
창훈을 보고 사안을 보는 시야가 다름을 느꼈다.

“과장은 물론이고 어느 임원급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지.”


“그럼 결론은 이미 군산 버스터미널을 가지고 딜을 해보자고 미리부터 작전을 짜왔다는 말이잖아?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되는거 맞지?”

윤 부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보도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 세게 얻어맞아서 그런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도 않았다.
겨우 상황을 정리한 윤 부장이 말했다.

“근데 그것도 이상해. 내가 알기로 현진물산에서 현진건설 인력 데려와서 본격적으로 TFT 를 꾸린 거로 알고


있거든. 시공사 선정 사업에 뛰어든다는게 학교 반장선거처럼 그냥 손들고 나선다고 되는 일이겠어? 수많은
인력이 여기에 붙었을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버스터미널을 봉선동에 묶었다고는 해도 정치인이라는게 어디 받은 만큼 족족 돌려주는
족속인가?”
“그랬으면 우리가 벌써 버스터미널 열 번은 넘게 지어줬겠지.”
“그럼 현진물산 경영진에서는 봉선동이 안 된다고 해도 버스터미널만 손해보고 해주자고 결론을 내렸다는건데 어떤
경영자가 이딴 식으로 결정해?”
“씨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정말 그 최영훈 과장이라는 사람이 네 조언 때문에 그런 임기응변을 발휘했다고 친다면, 그냥 과장은
아닐거야.”

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까 봤어? 국회의원을 상대하는데도 여느 옆집 아저씨 대하는 것처럼 긴장도 하지 않더라고. 우리


아버지 동창인 걸 알고 있는 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럼 뭘까? 혹시... 연희 씨라는 여자 약혼자 아닐까?”

창훈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약혼자? 그게 말이 돼?”
“그게 아니면? 외동딸인 연희 씨의 약혼자라면 현진물산 차기 경영자잖아. 그럼 이 모든 판단을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지.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말이 돼. 협상이라는 건 자리에 앉은 사람의 판단을 믿고
도박하는 거니까.”
“그럼 네가 호텔에서 연희가 그 놈 눈치를 봤다는게 진짜 그 뜻인건가?”
“아무래도 둘 사이가 그냥 직원 사이 같지 않아. 현진물산 외동딸이 이 중요한 자리에서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안
했어. 고작 과장 따위한테 발언을 넘기면서까지.”
“씨발...”

창훈은 화가 치밀었는지 소주를 음료수잔에 반쯤 따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사업권을 못 따낸다는 것보다 연희와의 사이 때문에 더 화난 듯 보였다.
윤 부장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다가 말했다.

“만약... 정말로 임기응변이라면 하필 군산 버스터미널을 지목한 것도 임기응변이었을까? 다른 지역도 아니고


군산이면... 진짜 소름인데.”

그는 아무래도 이번 사업권을 따내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강주원 의원? 그래요? 진짜 몰랐습니다.”

연희는 뚱한 얼굴로 대답하는 영훈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아까 그 자리에서 말하는걸 옆에서 보며 소름이 끼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한 말이었다니...

“정말요? 전 강주원 의원의 영향력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광주에 조재민 의원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었는지 그제 연희 씨가 알려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강주원이라는 국회의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리 없잖아요.”

하긴 산에서 게임만 하고 산 사람이 정치에 관심이 있을까 싶었다.

“그럼 군산 버스터미널은 정말 뭐였어요?”


“오면서 그 조재민 의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계속 생각했는데 마땅히 떠오르는게 없었습니다.
출판기념회 때 보니까 뭘 주면 받은 값은 하겠다는 생각에 계속 기사를 뒤져봤는데 뭐가 보이는게 없더라구요.
사주로 봐도 크게 걸리는게 없었고.”
“그런데 군산 버스터미널이 눈에 띄었다구요?”
“사실 그걸 보고서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아까 김창훈 상무가 한 이야기 덕분에 번뜩
떠올랐습니다. 혜성기업이 잘하는 것. 그래서 던져본 겁니다.”
“던져요?”
“군산 버스터미널이 그가 원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는 이런 걸 해줄 수 있다고 던져본 거죠.
받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네가 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이렇게 도와줄 수 있다?”
“네. 그런데 바로 받더군요. 당신 말대로 군산이 그렇게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있는 지역구면 버스터미널에다
자신이 원하는 거 하나를 더 가져오겠네요. 난 그냥 예를 든 거였는데...”

연희는 양손을 흔들며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말했다.

“됐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버스터미널 현대화 사업한다고 해도 까짓것 손해 얼마나 나겠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조재민 의원이 뭘 들고 오냐에 따라 부담이 좀 생기겠는데요?”
“그냥 원하는 것만 많고 입 싹 다물 것 같아서요?”
“그럴 사람 같아 보였으면 그 자리에서 그런 말 안 했을 겁니다. 강주원 의원은 모르겠지만 조재민 의원은
말했듯이 외부에 보여지는 이미지를 굉장히 중시해요. 그리고 남에게 받은 게 있으면 그 이상으로 보태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잘 받지 않으려고도
해요. 그런데 아까 덥석 받은 걸 보면 뭐가 필요하긴 한 것 같은데 말이죠...”

영훈은 질러놓기는 했는데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짐을 들고 올까 걱정이 되긴 했다.


오히려 연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럼 뭐가 걱정이에요? 그거 받아서 아무것도 안 된다면 모를까 봉선동이 된다면 걱정할게 하나도 없죠,
히힛...”

그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저장되 있지 않은 핸드폰 번호.
누군지 짐작이 갔다.

“현진물산 최영훈입니다.”
“조재민 의원님 보좌관입니다. 조금 늦었지만 군산항의 벽란도라는 음식점에서 뵐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연희가 바짝 다가왔다.

“바로 보자고 해요?”


“그래도 배려를 할 줄 아네요.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일정이 빡빡할거라고 생각했나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선물을 주는 건 우리니까요. 가요!”
“아, 대리 부르세요. 아까 술 마셨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광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서울의 현진물산 사옥에서는 긴급 임원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송은채 사장이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왼편에 자리한 임원들 중 한 명인 영업본부장 차지열 상무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말고 일단 상황을 설명해봐요!”
“갑자기 흑룡강성 대표회의에서 유연탄 광산의 개발과정 문제점을 들고 나오면서 작업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럼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요?”
“성급 인민정부에 보고가 올라간 상황이라 국무원에서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제 인맥으로도 막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작업이 얼마나 중지될 것 같아요?”
“최소 6 개월에서 최대 1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송은채 사장은 머리를 감쌌다.


그때, 홍승대 실장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말했다.

“큰일입니다. 흑룡강성 유연탄 광산 작업 중지된 사실이 증권시장에 흘러나갔습니다. 내일 오전부터 주식이


급락할 겁니다.”
“우리도 방금 안 일 아닌가요? 그게 어떻게 벌써 증권시장으로 빠져나갔죠?”
“누군가 일부러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홍 실장은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증거도 없이 범인을 지목했다가 나중에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송 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룡강성 유연탄 광산 개발 사업을 이뤄낸 핵심 키맨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차지열 상무였다.
이 문제를 풀 유일한 열쇠가 바로 그다.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4) > 끝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5) >

임원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송은채 사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재서류를 탁자에 내리쳤다.

탕!

“나쁜 새끼... 이거 차 상무가 한 짓 맞죠?”

뒤따라 들어온 홍승대 실장이 얼른 대답했다.

“차 상무가 이번 사업의 키맨이었습니다. 그가 성 대표 위원과의 꽌시로 결정지은 사업이니 사실상 이번 사업에


문제를 일으키려고 마음 먹으면 물컵을 엎는 것보다 쉬웠을 겁니다.”
“만약 차 상무가 아니라면요?”
“그렇다면 정말 운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다만 몇 년 전 사드 보복 이후로 중국 정부가 대놓고 한국기업을
죽이기 위해 달려든 건 많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공교롭습니다.”
“의심이 갈 만한 상황은 확실하다는 거죠?”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그가 이번 사업의 키맨인 만큼 차 상무를 자른다거나 인사조치하면 이
사업은 되돌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송 사장은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하... 정말 이렇게까지 나와야 할까?”

홍 실장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았다.

“현진물산을 인수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영훈 과장이 방향을 틀어버린 건 정말 신의
한 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프록시아 입찰을 반드시 따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했을 테고 계속 저들에게 휘둘려야 했을 겁니다.”
“맞아요.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제는 프록시아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그건 현진관광이 프록시아보다 훨씬 매력적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겠죠. 그럼 일단 지켜보자는 말인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차 상무가 정말 이 일에 관련이 없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소방수일 테니까요.”
“광주에 내려간 애들한테서는 연락 왔나요?”
“아까 정신이 없어서 오래 통화는 못했는데 조재민 의원하고 오늘 밤 만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밤?”
“네. 아마 밤 10 시는 넘어서 만날 예정이라 미팅 결과 브리핑은 내일 오전이 돼야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왜 군산까지 가서 조 의원을 만난다고 하던가요?”
“그게, 최 과장이 조 의원에게 군산 버스터미널을 현진건설에서 현대화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네? 군산 버스터미널을요?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결정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지만 군산 버스터미널 현대화는 정말 상상을 벗어난 내용이었다.

“저도 그래서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왔냐고 물으니까 정확한 건 저녁 미팅이 끝나야지 결정 날 것 같다고
합니다. 군산 버스터미널은 그냥 미끼였다고 하면서 다른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결국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게 결론입니다. 일단 내일 오전에 브리핑을 받아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저녁에 따로 연락해보시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간 것도 아니고 일하러 갔으면 정식 보고를 받아야죠. 내일까지 기다려볼게요.”
“알겠습니다.”

군산항의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자리에 위치한 벽란도라는 횟집에는 늦은 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횟집 앞에 주차된 차량 두 대는 딱 봐도 높으신 분들이 타고 다닐 만한 고급 차였고 음식점 입구에는 종이로 대충
써갈긴 [영업 끝났습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영훈과 연희는 그 글귀를 보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는 큰 소리 때문에 주인장이 입구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높으신 분들이 기다리는
손님이라는 걸 눈치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로 오시죠.”

더덕구이 맛집에서 봤었던 조재민 의원 보좌관이 서둘러 다가왔다.


이 사람 말고도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국회의원이 한 명 더 있는게 확실했다.
누가 왔는지는 알 것 같았다.

“늦었습니다.”
“아이고~ 오늘 두 번 만나는구만. 여기 이분들이 제가 말했던 분들입니다. 인사드리게, 강주원 의원님일세.”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훈과 연희를 살피는 노인네가 바로 강주원 의원이었다.


이 늦은 밤에 등산이라도 다녀온 듯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는 그는 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친구가 바로 자네한테 그 제안을 했던 친구라고?”


“맞습니다.”
“잘 생겼구만.”

누가 봐도 사실 영훈의 얼굴은 미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저 남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빈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가 한 잘 생겼다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일게 분명했다.
영훈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태어나서 잘 생겼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내가 관상을 좀 보거든. 자네 눈을 딱 보니까 얕은 수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야. 잘 생겼어.”

연희는 내심 웃음을 참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내세워도 하필 영훈 앞에서 관상을 내세우니 가당치도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영훈은 당사자임에도 전혀 티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어디 가서 잔머리 굴리면서 남에게 피해준다는 말은 안 들었습니다.”

강주원 의원은 조재민 의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 말대로 바르게 자란 청년이야. 요즘 이런 청년들이 흔치 않은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영훈이 굳이 정식으로 인사하면서 악수를 청하지 않은건 이미 연희가 강주원 의원에 대한 사주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인, 또는 연예인들은 생년월일시가 정확히 나온 사주가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광주에서 군산까지 오는 동안 강주원 의원에 대해 여러 가지를 확인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주였다.
사주를 본 영훈은 오면서 연희에게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했고 연희는 영문을 몰랐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될 테고 택시기사까지 있는데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어를 먹을 줄 안다고? 젊은 사람이 홍어 먹기 쉽지 않은데?”


“처음엔 고생 좀 했습니다.”
“그렇지? 나도 어릴 때 요거 딱 한 점 먹고 나서 코를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지. 하하하!”
“하하하! 저도 그랬습니다.”

조재민 의원이 호탕하게 같이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자 강주원 의원이 홍어를 한 점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는 요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자네도 한 점 해보게.”


“여기 홍어가 진짜로군요.”
“크하하하! 먹을 줄 아네! 이게 소주랑 궁합이 기가 막히거든.”
“확실히 대단하긴 합니다.”

강 의원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래, 서민을 위하는 마음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매출을 내서 직원을 먹여 살려야 하는 회사가 서민을 위하는 마음이 뭐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만 혜성기업이
이제 현진그룹으로 들어와 같은 식구가 됐으니 그 기념으로 서민들을 위해 한 가지 작은 일을 해보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조재민 의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린다.


분명 아까 광주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와 내용은 같지만 어감이 미세하게 달라졌다는 걸 느꼈음이리라.
어감이야 어쨌든 강 의원으로서는 기쁘기 그지 없는 말이었다.

“그래, 우리 군산이 이제 관광객들도 좀 오고 하는데 버스터미널이 너무 낙후됐어. 내가 예산을 많이 가져오고


싶은데 이게 우선순위에서 밀리다보니까 몇 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인데 잘 진행이 되지가 않아. 현진건설에서
도와주면야 그것보다 좋을 일이 없겠지.”
“네. 발주 공고 내시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연희도 속으로 조금 당황했지만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반대로 강 의원이나 조 의원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업인이기에 일단 뭘 줬으면 받을 걸 말해야 하는게 정상인데 그게 끝이라는 듯 홍어만 집어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군.”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조재민 의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강주원 의원에 대한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보라는 의미로 보였다.
강 의원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조 의원은 당황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도 들러리로 이 자리에 온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혹시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시죠.”
“광주 월곡동에 초등학교를 하나 지었는데 건설업체에서 공사대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학교 상태가 영
안 좋아.”
“부실건설이군요.”
“조사를 시작했는데 그런 곳이 몇 군데가 더 있더군. 큰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들어가야 할 돈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서 영 곤란하기가 이를 데 없지 뭔가. 요새 인공지능
중심 산업융합단지다, 광주형 일자리다, 군 공항 이전까지...
사실 이 모든게 다 중요하고 보통 예민한 사업들이 아니거든. 그래서 혹시 도와줄 수 있겠는가?”

광주 월곡동이면 조재민 의원의 지역구가 맞다.


이제는 조재민 의원이 어느 지역구인지도 확인한 상태였다.

“좋은 일이군요.”
“맞아. 좋은 일이면서도 중요한 일이지.”
“알겠습니다. 현진건설에서 이 부분까지 도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고맙군, 한 잔 받게.”

조 의원은 영훈의 말을 이해했다.


주는 건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선언한 거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영훈이 한잔 마시고 말했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혹시 봉선동 사업, 현진건설이 될 수 있을까요?”

원래는 대놓고 물어볼 생각이 없었는데 강주원 의원이 참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조 의원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까 식당에서 말했듯이 난 이번 사업에 끼어들 수 없네. 보는 눈이 너무 많은데 하필 나와 가까운 사람이 이


사업을 주관하고 있네. 이건 안 되는 일이야. 자네가 만약 다른 사업을 원한다면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네.
말했듯이 광주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나쁘지는 않지만 봉선동 아파트처럼 많은 이익이 나는 대규모 사업은 아닐 거다.


정말 큰 규모의 발주를 맡길 생각이었으면 표정부터 미안해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적어도 준 것 이상은 해줄게 분명했다.
영훈은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때 강 의원이 끼어들었다.

“자네 번지수를 잘못 잡은 거 아닌가?”

왜 자기는 빼놓고 이야기하느냐는 말이었다.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달라고 해도 주시지 않으실 생각이셨잖습니까?”


강 의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왜 안 줄거라고 생각했나?”


“죄송합니다. 강 의원님께서 고작 버스터미널 가지고 봉선동 사업에 손을 대주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다시 여쭙겠습니다. 혹시 봉선동 시공사 선정에 힘을 써주실 수 있습니까?”
“...”

강 의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해준다고 하면 정말 해주어야 한다.
어차피 해줄 생각도 없었는데 여기서 확답을 해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애매하게 대답할 만한 상황도 아니게 됐다.
영훈은 다시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만약 내가 안 줄 걸 알았다면 버스터미널은 왜 해주는 건가?”
“조재민 의원님께서 강 의원님께 확언하고 말씀드렸을 텐데 체면을 구기게 해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강 의원의 눈가가 떨려왔다.


조 의원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수십억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말은 이 자리의 주인공이 바로 강주원 의원이 아닌
조재민 의원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한 마디로 ‘넌 그냥 조 의원 체면 봐줘서 하나 해준 거다’라는 말.
어디서 이런 취급을 받아봤을까?

“자네 덕분에 밥 잘 먹었네.”


“아니, 의원님!”

강주원 의원은 화가 났는지 찬바람을 날리며 조 의원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버렸다.


조 의원은 당황하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망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너무 심한거 아닌가?”


“의원님, 말 그대로 의원님의 체면 때문에 버스터미널을 해드린다고 한 겁니다. 수십억의 손해를 보면서까지
도와드린다고 했는데 책망을 받아야 할 상황이 맞는 겁니까?”
“그, 그건 그렇네만...”
“의원님은 화를 내실 게 아니라 제가 왜 강주원 의원님께서 안 해줄거라고 생각했는지를 물으셔야 합니다.”

조 의원은 영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흥분한 기색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물었다.

“왜 강 의원님이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나?”


“생각해보십시오. 고작 버스터미널과 봉선동 아파트 단지 시공사 선정 건. 저울이 맞겠습니까? 그분이 그런
거래를 하실 분인가요?”
“...”
“게다가 저울이 맞으려면 다음 총선 이후에 우리가 계속 물건을 쌓아 올려야 하는데, 글쎄요. 그때도 강
의원님이 의원님이실지...”

조 의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눈앞의 청년이 다음 총선에서 강주원 의원이 당선 안 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5) > 끝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6) >

강주원 의원의 다음 총선이 위험하다는 건 몇몇 여당 의원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다.


우선 지금까지 너무 오래 군산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이번 만큼은 공천이 힘들지 않을까 하는게 일부 여당
의원들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건 일부의 예상이고 정론은 아니었기에 조재민 의원은 다음 총선에도 강주원 의원이 당연히 당선이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 비서실 직원이라는 자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강주원 의원이 다음 총선에서 당선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강주원 의원 계파의 한 축을 담당하는 조재민 의원에게 있어 이 이야기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실인가?”
“대기업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여의도에서 모르는 정보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죠.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요.”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네. 다음 총선까지 현진건설에서 특별히 의원님께 뭘 원하는 바는 없습니다. 솔직히 봉선동의 아파트 시공을
우리쪽으로 밀어주셨으면 하는 바는 있지만 안 되더라도 의원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드린
것 이상은 해주시겠죠.”
“맞네. 이번에 들어가는 수많은 사업 중에 현진건설로 몇 개 정도는 밀어줄 수 있어. 사람들은 아파트를 어느
기업에서 짓는지 관심 있어도 지나가면서 흔히 볼수 있는 빌딩을 어느 건설회사에서 지었는지는 관심이 없거든.
그래서 편히 밀어줄 수 있는 거지.”
“그거면 됩니다.”

영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조재민 의원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강 의원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아예 선거에 나오지 못하거나 나온다 하더라도 떨어질게
확실하다면...
아니,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니 아예 공천을 받지 못하는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를 준 셈이다.

“자네 말에 따르면 이건 저울이 맞지 않지.”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저울이 기울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이 정보를 들은 이상 하나씩 주고 받았다고 하기는
어려웠음이리라.
조 의원의 말에 영훈이 미소 지었다.

“의원님과 현진물산이 처음으로 만났으니 기념으로 선물 하나 드린겁니다.”


“부담스러운 선물을 받았군.”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 오늘 즐거웠네. 내 강주원 의원에게는 잘 말해주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응? 자네를 버릇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아무리 다음 총선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 양반
화나게 해서 좋을 것 없어.”
“그분이 화를 내실 것 같습니까?”
“그럼?”
“아까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에 대소를 터뜨리셨을 겁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까요. 아마 저를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버스터미널을 가지고 어떻게 홍보할지 구상하고 계실
겁니다.”

조재민 의원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하군. 자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주원 의원에 대해 굉장히 깊게


알아봤군.”

말을 하면서 조 의원의 가슴 속에 잔은 파동이 일고 있었다.


강주원 의원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알고 있을지 두려우면서도 그 능력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군산은 태어나서 처음 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필 밤에 와서 바닷가 풍경 한번 못 보는군요.”


“내일 아침에 보면 되지 않는가?”
“아침에는 바로 광주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참 안타깝습니다.”

영훈의 뜬금없는 말에 조 의원은 신경을 집중했다.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뭐가 말인가?”
“오면서 기사를 보니까 군산의 자살률이 급증했다고 하더군요.”
“경제가 무너지면서 일어나는 참담한 상황이지.”
“하필 이럴 때 군산 시장님이 선거법 위반으로 시장직을 잃었다고 하고... 참 공교로운 상황입니다.”
“응? 그래, 안타까운 상황이지.”
“이런 군산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지... 오늘 홍어는 잘 먹었습니다. 저울에 홍어 값은 올려주실 수 있으시죠?”
“이를 말인가?”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만 말하고 연희와 함께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조재민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에 김시원 보좌관이 다가와 물었다.

“안 가십니까?”
“자네 나랑 몇 년째지?”
“올해가 3 년째입니다.”
“내년이 4 년차 들어가는구만.”
“그렇습니다.”
“내년에도 내가 광주 갑에 출마한다면 당선이 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의원님이 딱 버티고 계신데 누가 광주 갑에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공천 문제
없습니다.”

조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공천으로 올라올 다른 인재도 안 보이고 일단 공천만 되면 당선이야 문제없을 거야. 그래서
중앙에서는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지역의 정치인 정도로 평가하겠지. 국민들도 마찬가지겠고.”
“그건 그렇지만 이곳에서 공천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당장 의원님도 처음에 공천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잊을 수가 없지. 그런데 내가 아직 젊어서 그런가? 누가 내 마음속에 불을 질러넣는구만.”

이제 막 50 에 다다른 조재민 의원은 국회의원치고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광주에서 국회의원을 4 년 더 하고 났을 때 지금 상황보다 나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까 그 청년 말씀이십니까?”
“통찰력이 있는 청년이야.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려. 그런 친구가 도대체 왜
군산으로 가라고 하는 걸까?”
“군산 말씀입니까? 군산에는 강주원 의원님이 계시는데...”
“아니아니, 국회의원이 아니라 시장을 언급했어. 아무 생각 없이 언급한게 아닐 텐데 도통 그 청년의 생각을
읽을 수 없어.”
“군산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굳이 이미지 손상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대로 그 고난을 뚫고 일어났을 때 내 입지는 어떻게 될까?”
“...”

김시원 보좌관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마 그렇게만 된다면 단번에 전국구 인재로 발돋움하게 될 거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이후 입을 열었다.

“현진물산에서 군산에 무얼 하겠다는 걸까요?”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어떤게 말입니까?”
“저울의 추가 기울어져 있단 말이야.”
“네?”
“뭔가 묵직한 걸 하나 올려줘야 균형이 맞을 텐데... 고민스럽군.”

조재민 의원은 사색에 잠긴 채 소주를 들이켰다.


아무래도 이 밤이 깊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산의 호텔에서 짐을 풀고 나서 바로 잠을 청하긴 그래서 호텔 앞 포장마차에 앉았다.


평소 다니는 고급 호텔이 아니라 실망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연희는 방 곳곳에 배인 냄새와 좁고 추운 욕실
때문에 한바탕 투덜거렸지만 소주 한 잔 마시고 얌전해졌다.
로얄패밀리로 자랐으니 말만 호텔인 이곳 모텔이 마음에 찰 리 없는게 당연했다.

“아까 배고파서 혼났어요.”


그녀는 소주에 국수를 호로록거리며 연신 젓가락을 놀렸다.
홍어를 본래 못 먹어서 아까 그 자리에서 수육만 깔짝거리다가 말았다고 했다.

“여기서 많이 먹어요.”
“그런데 강... 의원이 어떻기에 아까 그런 거예요?”

연희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사주를 보니 평소에 그의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겠더군요. 내년은 그가 뿌린 업이 다시 거두어질 시기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내년부터 크게 낭패를 겪을 겁니다.”
“그럼 조 의원에게 아까 마지막에 했던 말은 뭐 때문이었어요? 갑자기 군산 시장이라니?”
“그의 성향은 정치인이 맞습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성격과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의 운은 조금 다릅니다.”
“성격은 정치와 맞지만 운이 다르다는거죠?”
“맞습니다. 그는 행정가를 해야 운이 몰려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여왕벌과 같다고 할까요?
시장이나 장관처럼 한 조직을 이끄는 장이 되면 가만있어도 주변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그를 떠받칠 사주입니다.
반대로 개인 혼자이거나 조직의 하부에서 위에서 내려준 명령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그의 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 그럼 그를 위해서 조언해준 셈이군요?”

영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그를 위해서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잘 되면 우리와의 관계도 계속 지속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는


야심이 꽤 대단한 사람입니다. 결코 지역구 정치인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에요.”

요 근래 정치기사를 탐독하다 보니 예산, 총선, 보궐선거, 지역구 따위의 정치 언어들도 입에 붙었다.

“헐... 아예 정치권에 대권을 노릴 수 있는 주자를 하나 포섭해놓은 셈이군요?”


“대권은 또 다릅니다. 대통령이 될 사주까지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처럼 좋은 운을 타고난
이가 한창 어려운 곳의 시장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쁠 게 없을 겁니다.”
“그건 그래요. 아까 군산의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거든요.”
“오호~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하는게 아니에요. 단지 내가 가지고 싶은게 우선이었을 뿐이지. 그것도 당신이 내
사주를 말해준 다음부터 많이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당신 상이 조금씩이지만 변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네? 정말요?”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많이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생깁니다. 천진하고 환하게 웃을수록 주름이 예쁘게 지는데 그런 주름을 가진 이들은
여자면 좋은 남편을 만나고 남자면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지요.”
“남자는 왜 그래요? 그런데 결국 웃음이 많은 남자는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네요?”
“사주라는게 옛날에 만들어졌으니 남녀에 대한 설명이 현대와 차이가 있지만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다는
내용은 동일합니다. 옛말에 나이 마흔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다 자신의 마음
씀씀이가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흠... 어디가 바뀌었지?”
영훈은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연희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쾅쾅쾅!

“영훈 씨! 문 좀 열어봐요!”

영훈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어기적거리며 문을 열었다.

“뭡니까?”
“큰일났어요! 아...”

상의는 안 입은 채 아랫도리를 대충 이불로 감싸고 나온 영훈을 보며 연희는 얼굴을 돌렸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심장이 뛰는 와중 영훈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아침부터 그렇게 문을 두드리고 그래요?”


“전화를 안 받으니까 그렇죠.”

연희는 고개를 돌린 채로 버럭 소리 질렀다.

“아... 급한 일입니까?”
“네...”
“잠깐만 있어봐요. 나 옷 좀 입고 문 열어 줄 테니까 그때 말해요.”

영훈이 다시 들어가 옷을 챙겨 입고 대충 세수를 마치자마자 문을 열어주니 아직 상기된 얼굴의 연희가 후다닥


들어오며 말했다.

“큰일났어요. 우리가 흑룡강성에서 유연탄 광산을 채굴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게 이제 채굴을 앞두고
막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중국 정부에서 개발진행 과정을 문제로 걸고 나섰어요. 현재 작업은 중단됐고 해당
내용이 증권시장에 퍼진 상황이에요.”
“지금 몇 십니까?”
“7 시 20 분이요. 이제 1 시간 40 분이 지나면 주식시장이 열리는데 오늘 폭락할 건 기정사실일 것 같아요.”

동시호가가 뭔지 모르는 영훈은 그저 귓등으로 흘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걸 물었다.

“손해가 그렇게 큽니까?”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일단 고승현 부장님이 내려오신대요.”
“고 부장님이요?”
“이곳 상황 브리핑하니까 사업 주관하는 고 부장이 직접 내려와서 상황을 들어보고 싶대요. 그리고 고 부장님한테
본사에서 돌아가는 상황 들으면 될 것 같아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좀 미안하네. 내가 이번 사업 해주고 싶었는데.”

연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이 도와준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큰 사업을 할 때는 당연히 실패할 것도 예상해야


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실패도 아니고.”
“정작 원하는 일 말고 다른 일만 물어왔잖습니까. 그리고 아파트가 아닌거니까 실패가 맞습니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어제 그 번호다.
“안녕하십니까. 조재민 의원님 보좌관입니다. 혹시 오늘 아침에 미팅 가능하십니까?”
“네, 가능합니다.”
“오동근린공원에서 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연희가 물었다.

“또 만나쟤요? 왜요?”
“모르겠습니다.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제랑 또 딴소리 하는건 아니겠죠?”
“모르죠.”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보좌관이 말한 오동근린공원이라는 곳에 도착해 주차하고 전화하니 바로 보좌관이 달려왔다.

“의원님은 저쪽에서 조깅하고 계십니다.”


“네. 오랜만에 운동 좀 하겠네요.”

영훈은 자켓을 연희에게 주고 천천히 뛰어갔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조재민 의원을 볼 수 있었다.

“헉... 헉... 왔군,”


“아침부터 조깅이라니, 정말 자기관리에 철저하십니다.”
“자네 주변에는 이런 사람 없나?”

생각해보니 아직 주변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른 시간에 갑자기 보자고 하신 연유가 있으십니까?”


“후...”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저 멀리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말이야, 군산 시장에 대해서 말했잖아?”


“그랬죠.”
“그곳의 시장이 되려면 능력이 참 좋아야 할 테지?”

영훈은 순간 박수를 칠 뻔했다.


마치 오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조 의원의 눈빛이 강렬했다.
그의 야심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한 유혹을 느낄 줄이야...

“시장이야 아무나 될 수 있지요. 하지만 망해가는 군산을 일으키려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재민 의원은 잠시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다가 말했다.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라... 그렇군. 맞는 말이야. 좋아, 나도 저울에 선물 하나 올리지. 이제는 저울이 내


쪽으로 기울었네.”

영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곧 하나 올려놓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는 웃으며 영훈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할 이야기는 끝났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은 이제 현진건설로 굳어졌다.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6)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1) >

조깅을 마친 조재민 의원은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를 보고 고민에 잠겼다.


잠시 발신자를 쳐다보다 언제 고심했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의원님.”
[어제 잘 들어갔나? 술 많이 마셨던거 아니야?]
“의원님 들어가시고 그 어린놈 버릇 좀 고쳐주느라고 잠시 지체하다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랬어?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젊으니까 객기에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객기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단단히 주의 줬습니다.”
[그러다 마음 상해서 괜히 했던 말 돌리는거 아니야?]

조 의원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영훈 과장이 했던 말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올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한치도 틀리지 않게 반응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놈 같지는 않던데요? 제가 다시 한번 연락해볼까요?”


[아니야. 그래,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겠지.]
“그럴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아, 요즘 대하 철인데 소주에 대하구이 어떻습니까?”
[좋지!]
“그럼 자리 한번 마련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조 의원은 김시원 보좌관에게 말했다.

“내년 총선 공천 마감이 언제쯤 될까?”


“아마 2 월 말에서 3 월 초쯤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석달 정도인가?”
“그쯤일 것 같습니다.”
“석달이라... 그 정도만 버티면 일단 하나는 안고 갈 수 있다는 말이지?”
김 보좌관은 경악한 채로 물었다.

“혹시 버스터미널을 공약으로 낼 생각이십니까?”

김시원 보좌관은 아직 강주원 의원이 내년 총선에서 떨어질거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일단 상황을 보자고. 요즘 여의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하니까, 잘 체크해.”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체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 의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런 때일수록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영훈과 연희는 광주의 한 호텔 로비에서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하고


있었다.

“커피가 영 맛이 없네요. 맛이 뭐 이래?”

영훈이 인상을 쓰며 투덜거리자 연희가 귀엽다는 듯 미소지었다.

“원래 호텔 커피는 맛이 없어요. 5 성급 최고급 호텔에서 파는 커피도 그냥 먹을만 하다는 정도? 그래서 내가
차를 마시는 거예요.”

평소 식사를 하고 난 이후에는 언제나 커피를 즐기던 그녀가 왠일로 커피 대신에 아침부터 차를 마시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미리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음식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잖아요? 의외로 호텔 커피가 당신 입맛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 다른 거
시켜드릴까요?”
“됐습니다. 어차피 잠 깨려고 마시는 건데요. 그나저나 그 핸드폰은 그만 내려놓지 그래요? 목 디스크
걸립니다.”

연희는 장이 시작되는 9 시부터 계속 주식시장을 체크하고 있었다.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어차피 주식이야 오르고 내리는게 당연한건데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시장이 반응하면
회사를 운영하는데도 큰 차질이 오거든요. 주주들도 이 사태를 그냥 지켜보지 않을 테고... 어쩌면 회장님이
직접 사태의 원인을 알아본다며 경영에 참여하려고 하실지도 몰라
요.”

결국 연희가 걱정하는 건 단순 실적 악화가 아닌 이걸 빌미로 회장이 경영 간섭을 해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걱정이지만 영훈은 맛없는 커피를 다시 입에 가져가며 신경을 껐다.
어차피 자신이 신경 쓴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훈으로서는 그 유연탄에 관한 일보다 조재민 의원에 관한 일이 더 신경 쓰였다.
그때 호텔 입구에 굳은 얼굴로 들어오는 고승현 부장이 보였다.

“여깁니다!”

영훈이 손을 흔들자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방은?”
“잡았습니다. 올라가시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면서 대충 김밥으로 때웠어. 아침에 그 사람, 또 만났다며?”
“결과는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리 예약한 방으로 올라가자 고 부장은 가지고 온 가방을 풀며 말했다.

“우명건설에서 나왔었다고?”
“주택영업본부장이라는 김창훈 상무와 그 비서가 내려왔었습니다.”
“내용은 내가 전달받은 게 전부고?”

고 부장에게 내용을 전달한 사람은 연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우명건설 회장님과의 인맥으로 밀어보려고 시도했는데 잘 안 된 상황입니다.”


“잘 안 됐다고? 그걸 어떻게 단정해?”

연희는 대답 대신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훈은 고 부장이 자리에 앉자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회사 사정이 많이 안 좋습니까?”


“안 좋긴 하지. 그런데 회사가 정말 휘청일 정도는 아니야. 상황이 애매해.”
“자세히 좀요.”
“유연탄 광산 사업은 우리 혼자 한 사업이 아니야. 중국에 진출하려면 기본적으로 중국 자본이 같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일이 되기 힘들어. 이번 사업 역시 중국 회사와 합작으로 들어간 거지. 이걸 중단시킨다고 해보자고.
우리만 망하겠어?”
“중국 현지 업체도 견디기 힘들겠군요.”
“당연하지. 이거 오래 안 가. 기껏해야 석달에서 길면 반년 정도? 반년이면 현지 업체 나자빠지지 않으면
다행인데 과연 그때까지 시간을 끌까 싶어.”
“그럼 이거 손댄 사람은 현지업체와 그리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니겠군요.”
“아마 공산당 간부가 손을 썼겠지. 그것도 무척 힘이 있는 사람이. 어쨌든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자국 기업을
쓰러지게 할 리 없어. 그럼 대충 시늉만 하다 끝낼거라는 건데... 문제는 당장 생산만 못한다는게 아니야.”
“그럼요?”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 파는 것도 아니고 설마 우리가 판매처도 안 잡아놓았을까? 당장 다음 달 인천항에
유연탄 20 만 톤 떨궈야 해.”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군요.”
“그렇지. 그래서 어제부터 영업부 전 직원이 유연탄 구하기 위해서 발바닥에 땀나게 뛰기 시작했어.”
“흐음... 일단 구하기만 하면 큰 문제는 아니라는 거네요?”
“그래, 그래서 애매하다는 거야. 연희 씨는 아마 현진중공업이 경영에 개입할까봐 걱정하겠지?”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방금 전에도 그 얘기를 하는 중이었어요.”


“사실 요게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야. 주식하락은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어. 반등의 기회만 잘 포착하면
자사주 매입으로 경영권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거든. 대신 주식이 반등하지 못하면 헛돈 쓰는 거지만.”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영훈의 물음에 고 부장이 인상을 썼다.


“차지열 상무가 뛰고 있기는 한데 사장님이나 홍 실장도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차 상무가 아닐까 의심하는
중이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
“이번 사업을 만든 키맨이 그였거든.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움직이면 중국에서 이번 사업이 진짜 문제가 있었다고
의심할지도 몰라. 꽌시가 중요한 중국이기 때문에 모든걸 서류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없어.”
“골치 아픈 상황이네요. 그냥 방치할 수도 없고, 쉽사리 손을 댈수도 없는...”
“맞아.”
“흠...”

영훈은 상황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확실히 코발트 광산 인수를 포기한게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현진물산을 노리는 자들이 이토록 공격적이고 저돌적이라면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이제 고승현 부장이 물었다.

“여기 상황은 어때?”


“여러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와중에 군산 버스터미널 때문에 군산에 다녀온 이야기도 들으셨죠?”
“그래.”
“군산에 도착하니 강주원 의원이 나와 있었습니다.”
“강주원 의원? 그 늙은 여우가?”

고 부장은 기대어린 얼굴로 상체를 확 앞으로 당겼지만 이내 이어진 영훈의 말에 실망어린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버스터미널로 봉선동 사업권을 우리한테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후... 그렇겠지. 그래서?”
“군산 버스터미널 현대화에 대한 메신저가 조재민 의원이라서 그냥 버스터미널 현대화 사업 공고가 나오면 우리가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손해액이 상당할걸?”
“감수해야죠.”

고 부장은 인상을 썼지만, 결코 이렇게 손해볼 일만 할 영훈이 아니라는 생각에 재차 물었다.

“메신저 체면은 세워줬네? 그럼?”


“결론적으로 보면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은 우리가 받을 것 같습니다.”
“진짜?”
“네.”
“와! 대박!”

연희도 영훈의 지금 발언은 처음 듣는 것이기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조 의원을 만나고 온 뒤에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어 차마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지 못했던 거다.
고 부장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다가 영훈의 얼굴이 계속 굳어있는 걸 보고 흥분했던 감정을
누르며 물었다.

“왜? 뭐 문제 있는거야?”
“솔직히 전 봉선동 사업권 대신 다른 걸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알고 보니 광주광역시에서는 지역
발전을 위해 꽤 많은 사업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그중에 몇 개를 줄 생각이었던 것 같거든요.”
“정말?”
고 부장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도대체 요 며칠 사이에 얼마나 만났다고 조재민 의원을 그렇게 구워삶았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그의 정치 생활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야?”
“이름 모를 지역구 정치인 생활을 하기보다 큰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 같거든요. 군산 시장에 도전할 것
같습니다.”
“군산 시장? 거기 사정 안 좋잖아?”

국내 조선업의 대장격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진중공업이 중국발 조선업 불황 때 군산조선소 가동을 중지시켰다.


이후 군산 경제는 침몰했고 수많은 실업자와 부동산 가격 하락, 그리고 자살률이 치솟았다.
군산 경기는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그 안 좋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허...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만약이요.”

고 부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마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박에 전국구 톱스타로 떠오르겠지.”


“그럴까요?”
“지금 경기도지사가 대권 후보까지 떠오를 정도로 대단해졌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러다 파산지경에 이른 성남의 시장이 된 이후에 성남을 일으켜 세우면서 떴거든. 사람들은 정치인은 혐오해도
능력 있는 행정가는 좋아하지.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
다는게 희한하네. 원래부터 야심이 있던 사람이었나? 내가 알기로 이번 군산 보궐선거에서 강주원 의원이
밀어주는 사람으로 후보를 낸다고 알고 있는데?”
“강 의원은 이번 총선 이후에 정치권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겁니다.”

이번에는 고 부장이 진심으로 놀랐는지 입을 떡 벌리고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유는 묻지 마시고 어쨌든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와... 기가 막힌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그럼 이 이야기도 조 의원 귀에 들어갔겠네?”
“네.”
“그렇군. 그래서 이렇게 쉽게 마음을 돌릴 수 있었겠어. 보스가 날라간다고 하니 이제 자신을 위로 이끌어줄
사람이 없어진 셈이겠지. 그런데 쉽게 믿던가?”
“쉽게 믿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꼼꼼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제부터 제가 말했던 내용이 맞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움직이겠죠.”
“잠깐, 잠깐... 그러니까 뭐야? 조재민 의원이 봉선동 사업권을 주겠다는 건 그냥 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는
거네?”

그제야 고 부장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맞습니다. 조 의원은 봉선동 사업권을 줄 테니 군산을 일으켜 세워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로서는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죠.”
영훈이 이 사업을 받아왔으면서도 계속 얼굴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다.

“씨발... 이거 받아야 하는거야?”


“안 받아도 됩니다. 현진건설이 간판을 바꿔 단 기념으로 군산 시민들을 위해 버스터미널을 현대화 해줬다는 뉴스
한번 내주고 깔끔히 물러나면 되니까요. 돈은 좀 깨지겠지만 말이죠.”
“그게 끝인가?”
“앞으로 조 의원이 현진그룹을 신뢰하지 못할 거라는 정도?”
“최 과장의 결론은 뭐야?”

영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방법이 있다면 찾아주는 게 이익이긴 합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우리가 조 의원을 키워주게 된다면...”
“대권 주자 급 정치인을 키워준 회사가 된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지.”
“게다가 우리는 어려운 지역 경제를 살린 회사로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되겠죠.”
“방법이 문제네.”
“맞습니다.”

고 부장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한데...”


“네?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무진중공업이 가동 중단시킨 군산조선소. 그거 다시 돌리면 되기는 할 거야. 당장 수천 명의 인력이 투입돼야
하고 협력사도 일이 돌기 시작하겠지.”
“그럼...?”
“군산조선소, 그거 우리가 털어먹을 수 있을까?”

< 피하지 못한 화살(1)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2) >

그렇게 하자는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 부장은 최선의 방책을 제시했지만 자신으로서는 그걸 실현시킬 방법이 없음을 자인한 셈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요?”
“별거 있나? 우리는 먹어 봐야 기술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다 가진 현진중공업에 비싸게 넘기는 거지.”

그게 된다면 매력적인건 분명했다.


“이게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까?”
“그래. 원래 무진중공업은 이거 가동 중지시킬 때 올해부터 가동 재개한다고 약속했거든. 그런데 약속 안 지킨
지 1 년이 다 돼가고 있는 셈이지. 원래 5 천 명이 상주하고 있던 인력을 300 명으로 줄여버리면서 그냥 유지만
하고 있는 중이야. 이거 중지시키면서 80 개 넘는 협력업체들 중에
남은 게 열 몇 개인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거의 다 망했다고 보면 돼.”
“처참하네요.”
“정치권에서 이거 걸고 넘어질 수 있어. 국가 지원금까지 들어간 조선소인데다가 한국산업단지관리공단이
무진중공업에 입주계약 해지까지 걸고 나온 상황이야.”
“그래요? 이미 압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군요.”
“이걸 우리가 먹겠다고 하면? 정치권에서 어떻게 반응할까?”
“대승적 차원에서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문제네요.”
“그렇지. 군산조선소는 무진중공업이 가진 울산이나 목포조선소에 비해 가장 최신 시설을 갖춘 곳이야. 중국발
불황이 끝나고 한국으로 쏟아지는 LNG 선을 수주받는데 주력하고 있는 현진중공업이 군산조선소를 가지게 된다면
단번에 국내 최고 조선소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될 거
야. 당장 현진중공업의 거제조선소보다 규모가 더 커. 회장님이 절대 안 놓칠걸?”
“으흠...”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현진중공업이 커진다는건 결국 사장님의 적이 강해진다는 말과 같지. 너는
어때?”

고승현 부장이 영훈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영훈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공짜로 주는거 아니잖습니까.”


“물론 돈 꽤나 주긴 하겠는데 군산조선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수 있어.”
“그럼 주식으로 받죠.”

고승현 부장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거... 현진관광처럼 미끼를 던지는 거냐? 현진관광이 당하는걸 보고 또 주식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뭘 주든 그 이상 받아내면 되겠죠. 굳이 꼭 뭘 가져야 한다고 단정지을 필요 있습니까? 안 그래도 가진게 많은
분한테.”

고 부장은 무릎을 칠 뻔했다.

“하하, 맞다. 굳이 지금부터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우리는 상사인이야. 시베리아에서 냉장고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 우린데 죽은 조선소 살려서 갖다 파는게 뭐 이상할게 있나. 그런데 이건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혼자 괜찮겠어?”
“모르겠습니다. 해본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일이 쉽게 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처리될 일이었으면
이미 정치권에서 쉽게 해치웠겠죠.”
“그야 정치적으로만 처리하려고 해서 그렇지. 우리처럼 저 조선소를 탐낸 사람이 없었잖아. 그리고 전주(錢主)도
없었고.”

전주는 신영은행을 일컫는 것이리라.


맞는 말이었다.
신영은행이 아니었다면 감히 군산조선소를 얻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그 외 별개로 고 부장의 날카로운 감각에 내심 놀랐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신영은행과 영훈이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있으니 말이다.
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었다.

“전주가 어느 정도나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건 다음 총선이 끝난 다음에나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에요. 부장님은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을 따고 난 이후 일에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허... 이렇게 쉽게 마무리될 일인줄 알았으면 내려오지 않아도 될 뻔했네.”

수많은 자료를 챙긴 가방을 무거운데도 억지로 들고 왔는데 이게 다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회사 상황에 대해 잘 전달받았으니 우리는 좋았네요.”


“그럼 이제 이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전 여기서 사흘 정도 더 머물렀다가 조재민 의원하고 한 번 더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사흘이나?”
“아직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에둘러서 선물을 준다는 식으로 봉선동을 가리켰지만,
우리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선물상자의 내용물을 바꿀 수 있는 양반입니다.”

고 부장은 영훈이 광주에 사흘이나 있어야 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진물산에게 있어 영훈의 존재는 일종의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그런 치트키가 먼 지방에 오래 머물고 있는다는건 효율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최 과장을 대신할 사람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난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겠군.”


“오신 김에 식사라도 든든히 하고 올라가시죠. 부장님하고 같이 갈 맛집 찾아놨습니다. 그래야 갈 때 기차에서
한숨 푹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좋군.”

고 부장은 내려올 때는 유연탄 사건 때문에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이상하게 올라갈 때는 그 유연탄 건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윤희찬 부장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호텔 방에 널부러진 창훈의 등짝을 내리쳤다.

짝!

“아! 아퍼!”
“야, 일어나봐.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조재민 의원 쪽에서 우리랑 약속을 안 잡아. 아예 피하고 있다고. 아무래도 현진물산으로 넘겨주려고 작정한 것
같아.”
“확실해?”

그제서야 창훈이 부스스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술 냄새가 진동해와 윤 부장은 한 걸음 떨어진 후 말했다.

“그게 아니면? 조재민 의원하고 동창인 회장님 아들인 널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는게 말이 돼? 그것도
버스터미널 이야기에 횃까닥 해서 현진건설 그 애송이 홍어 먹이겠다고 데려간 그 양반이?”
“우리가 뭘 준비했는지 이야기는 꺼내 봤어?”
“그 보좌관이 하도 이야기가 안 통하는 것 같아서 슬쩍 이야기를 꺼내 봤어. 조재민 의원 지역구에 어린이집을 몇
개 지어주겠다고. 평소 같았으면 당장 만나자고 해도 모자랄 사람인데 그 보좌관이 잠시 후에 연락을 준다고
해놓고 나중에 전화와서 뭐라고 했는줄 알아?”
“뭐라는데?”
“마음은 너무 고마운데 정말 순수하게 시민들을 위해 기증하는게 맞는지 물어보더라고. 봉선동 사업에는 절대
도움을 줄 수 없다면서 말이야. 이거 선을 너무 긋고 있잖아.”
“이상하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조재민 의원이 이렇게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나? 회장님이 뭐라고 하신 말씀이 있을 거 아니야?”
“그 정도로 청렴한 사람이었으면 우리 아빠가 날 보내면서 잘 해보라고 말했을 리가 없지.”
“그럼 이유가 뭐겠어?”

창훈은 침중한 얼굴로 생각에 빠지더니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갔다.

“희찬아! 짐 챙겨!”
“그러게 진즉 회장님한테 도움 요청하자니까. 그런데 전화로 하면 안 되나?”
“오전에 경제인 만찬에 오후엔 우명솔라 충북사업장 시찰 있어. 전화 통화할 상황이 아니야.”
“충북? 여기서 그렇게 안 머네?”
“다행이지.”

그렇게 후다닥 준비해서 출발한 그들이 충북 청주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비서실 직원들을 통해 우명솔라 사장실에서 여전히 대화중임을 파악한 둘은 서둘러 사장실로 올라갔다.

똑똑...

“들어와.”

창훈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리에는 우명솔라 사장이자 창훈의 큰형인 김도훈과 우명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태현
회장이 앉아 있었다.
김태현 회장은 창훈을 보자마자 물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말씀 좀 드리고 싶은게 있어서 왔어요.”
“앉아.”
“형 오랜만이네.”
“인마, 그러게 이제 한국 왔으면 집에 자주 들러. 어머니가 너 얼굴도 안 비춘다고 많이 섭섭해 하신다.”
“바쁘니까 그렇지.”
“클럽인지 뭔지에서 노느라 바쁜건 아니고?”

김태현 회장이 툭 질문을 던지자 창훈이 바로 손사래를 쳤다.

“아버지, 저도 이제 마음 다잡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 왜 왔어? 조재민 의원이 말 안 들어?”
“네...”
“그럴 것 같았어. 쉬운 친구 아니거든. 내가 직접 간 것도 아니고 아들래미 보내놓고 그 큰 걸 달라고 하니 쉽게
내줄리 없지.”

김태현 회장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우명건설이 기초가 탄탄하니까 정면승부해도 꿀릴게 없을 겁니다.”

큰형인 김도훈이 굳이 정치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지원사격까지 해준다.


여기까지만 하면 굉장히 흡족할 상황이지만 창훈은 해야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걸 현진건설에 줄 것 같습니다.”


“현진건설? 현진그룹에 건설이 있었나?”
“얼마 전에 혜성기업을 인수해서...”
“그래, 기억났어. 그러니까 혜성기업을 봉선동 시공사로 선정하겠다고? 조재민 의원이?”
“네. 아무래도...”

김태현 회장은 손을 휘저으며 창훈의 말을 끊었다.

“됐어, 네 친구 같이 왔지?”
“네.”
“들어오라고 해.”

창훈이 얼른 뛰어나가 윤희찬 부장을 불러왔다.


김태현 회장은 헐레벌떡 뛰어온 윤 부장에게 말했다.

“이 녀석한테 들으면 이 녀석 주관적인 의견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서 불렀어. 조재민 의원이 현진건설한테
봉선동 사업을 넘긴다고?”
“돌아가는 상황이 그럴 것 같습니다.”
“의견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 진행사항 빠짐없이 보고해.”

윤 부장은 광주에 와서 조재민 의원 출판기념회 일부터 타임라인을 따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명하던 윤 부장의 말을 김태현 회장이 끊은건 군산 고속터미널이 나온 시점이었다.
그런데 질문의 대상자는 윤 부장도, 창훈도 아니었다.

“최영훈이라는 놈 알아?”

우명그룹의 장남인 김도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듣습니다.”

김태현 회장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계속해봐.”

이후 10 여 분 동안 설명이 이어지고 난 다음 윤 부장이 입을 다물었을 때 창훈이 말했다.

“조 의원이 이렇게 연락을 피한다는건 현진건설에...”


“아니야.”

김태현 회장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네? 분명 강주원 의원까지 만났을 텐데 강 의원이 지시했다면 충분히 일이 이루어질 만하지 않아요?”
“흥, 그 여우가 고작 버스터미널 하나에 봉선동 사업권을 넘겨줬을거라고 생각해? 열을 줘도 하나를 받기
어려운게 강주원이야. 그 여우한테 줄 댔다가 손해 본 기업이 한둘인 줄 알아?”
“그럼 조재민 의원이 어떤 기업으로부터도 청탁을 받기 싫어서 피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냐?”

김태현 회장이 김도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버스터미널을 앉은 자리에서 제안할 정도면 둘만의 자리에서는 더 큰 걸 제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더 큰 거 뭐?”
“그건 모르겠습니다.”

도훈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이 부분은 물어본 김태현 회장도 짐작이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
김 회장은 안절부절하는 창훈에게 말했다.

“할 말큼 했으니까 됐어. 고작 그거 따내려고 팬티까지 벗어줄 거야?”


“그럴 수는 없죠.”
“그럼 그냥 서울 올라가. 실력으로 붙으면 질 수가 없어. 좀 편히 가보려고 했는데 안 됐다고 생각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 선 봐라.”
“선이요? 아버지, 전 생각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창훈이 극구 거부하려는데 김 회장에게서 나온 말이 뜻밖이었다.

“현진물산 임연희. 너 걔랑 결혼하고 싶다며?”


“어? 아버지? 진짜요?”

그렇게 현진물산 임연희와 선보게 해달라고 조를 때는 안 해주더니...


어떤 이유로 마음을 돌렸든 창훈으로서는 아버지의 제안이 기쁘기 그지 없었다.

“약속 잡을 테니 잘 해봐.”
“감사합니다.”

창훈은 금방이라도 연희와 결혼을 앞둔 것처럼 기쁜 표정이었다.


그렇게 창훈과 윤 부장이 나가자 김 회장이 도훈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현진물산이요?”
“그래.”
“송은채 사장이 현진중공업에게서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질문은 내가 했다.”

도훈이 빙그레 웃었다.

“알아볼 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이번 봉선동 시공사로 현진건설이 선정된다면 현진그룹으로서는 또 다른


든든한 계열사 하나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주력이었던 조선을 중심으로 기계, 호텔을 양 날개로 두던
현진중공업에 비한다면 초라했던 현진물산이 4 천 가구 가까
운 대단지 아파트 건설을 수주한 현진건설을 곁에 두게 되면 싸움이 꽤나 흥미로울 겁니다.”
“적어도 쉽게 지지는 않겠지?”
“시간이 갈수록 현진중공업 측이 경영권을 뺏기 어려워질 겁니다. 잘하면 계열사 분리를 통해 갈라설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현진물산과 현진건설이라...”

탐스러운 먹잇감에 김태현 회장은 오랜만에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머리는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덤벙대는 창훈이 이번 만큼은 잘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 피하지 못한 화살(2)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3) >

아무리 일적으로 왔다고는 해도 남들의 이목이 있는데 둘이서 장기 출장을 한다는 건 영훈에게도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고 부장이 서울로 올라갈 때 연희도 같이 보내고 영훈만 광주에 남았다.
영훈을 도와주기 위해 민희를 내려보내주겠다는 홍 실장의 제안을 연희가 칼같이 자른걸 제외하면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저 광주 시내에서 맛집 투어를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게 영훈의 일과였다.
그러다 사흘 정도가 흘렀을 때 영훈이 조재민 의원에게 광주 외곽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간판도 잘 안 보일 곳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토종닭집은 인터넷이
아니었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곳이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서 잘도 이런 곳을 찾아냈군.”


“믿을 만한 분 통해서 소개받았습니다.”

물론 그 믿을만한 분은 요즘 영훈이 믿고 구독한 유튜버였다.

“소식이 뜸해 기다리고 있었네.”


“마음은 정하신게 맞습니까?”
“날 떠보는 건가?”
“뭐든지 확실해야 하니까요. 고작 버스터미널 정도 원하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이건 우리의 결심도 중요하지만 의원님의 의지도 중요합니다.”
“내 의지?”

조재민 의원이 눈을 빛냈다.

“의원님의 의지가 없으면 이건 우리가 도와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좋아. 의지를 어떻게 보여줄까?”
“만약 군산 시장에 당선 되신다면...”
“되면?”
“군산조선소를 매각시켜주실 수 있습니까?”

조 의원의 움직임이 일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1 조 원이 넘을 텐데? 그 만한 돈은 있고?”
“공짜로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현진물산에서 가져갈건 아니겠고, 현진중공업?”
“아마 그렇겠죠.”
“아마 그럴거다...? 어감이 묘하군.”
“세상 일은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거니까요. 중요한 건 지금 죽어있는 군산조선소를 우리가 돌려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을 가졌든지간에 살 떨리게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군산시의회에서 군산조선소를 매각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기는 해. 그들은 군산조선소 재가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거든. 무진중공업이 해주조선해양을 합병한다고 군산조선소를 거들떠도 안보고
있지 않나? 군산조선소를 매각하는게 어려모로 자연스럽
기는 하군.”

무진중공업이 해주조선해양을 합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상황은 더 좋아지는 셈이었다.

“무진중공업도 해주조선해양과 합병하기 위해 큰 자금이 들어갈 텐데 군산조선소를 매각해서 얻는 자금이 꽤 도움


되겠습니다.”
“최 과장이 보여줘야 한다는 의지가 뭘 이야기하는지 알겠네. 그런데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이때 미리 시켜놓았던 토종닭이 들어왔다.


엄청나게 큰 솥에 푹 고아져 들어온 토종닭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조재민 의원은 소주 한 병을 시켜 영훈의 잔에 따라주곤 영훈에게서 술을 받았다.

“우리 짠 한번 하세.”
“그러시죠.”

쨍.

맑은 잔소리 후 둘은 말없이 닭을 먹는데 집중했다.


영훈은 이제 자신이 광주에서 맡은 임무는 다했다는 생각에 마음 편히 토종닭을 즐겼다.
*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강노식 실장은 그 며칠 새 10kg 은 빠진 것처럼 얼굴 살이 쏙 빠져 있었다.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아무 표정 없이 입국절차를 마치고 입국장을 나올 때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젊고 예쁜 이 여인은 몇 번 사장실을 방문했을 때 봤었던 직원이었다.


이름이...

“비서실에서 나온 김민희라고 합니다. 실장님 모시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누가 보냈지?”
“최 과장님 지시였습니다.”

강 실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다른 곳으로 갈까 봐 그랬나?”


“오랜 시간 비행에 지치셨을 거라고 댁까지 편하게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고맙군.”

사실 민희도 자기가 여기에 왜 온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영훈에게 강 실장이 언제 들어오니 가서 그의 상태를 체크하고 집까지 운전해달라는 지시를 받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와보니 강 실장의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이기는 했다.


미리 주차된 차에 짐을 싣고 출발하자 뒷자리에 몸을 맡긴 강 실장이 물었다.

“회사는 어때?”
“흑룡강성 유연탄 광산 작업이 중지된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뭐라고?”

강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민희는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아는 만큼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강 실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최 과장은?”
“광주에서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 관련해서 출장 가셨다가 오늘 올라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 출근하실
겁니다.”
“거길 최 과장이 직접 가야 할 이유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건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민희의 단호한 대답에 강 실장은 내심 황당함을 느꼈다.


고작해야 비서실 직원인데 기조실 실장인 자신에게 과장 스케줄 따위는 알 필요가 없다는 듯 말하니 황당할 수밖에.

“개판이군. 내가 직접 물어보라 그거지?”


“죄송합니다.”
“집에 들렀다가 회사로 가지.”
“네? 출근하실 생각이십니까? 과장님께서 오늘 쉬신다고...”
“최 과장이 내 상관인가?”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강 실장은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최 과장이 광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왔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일에 몰두라도 하지 않으면 터질듯한 화를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회사에 일이 터졌으니 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적막한 집에 혼자 있다보면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게 분명하니 말이다.

아침에 출근한 영훈이 송은채 사장에게 광주 출장건을 보고하려고 할 때 강노식 실장이 아침부터 비서실로
올라왔다.
그는 영훈을 보자마자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휴가는 잘 보내셨습니까?”
“잘 보냈지. 내 평생 그렇게 다이나믹한 휴가는 처음이었어. 인생의 밑바닥까지 파 들어간 기분이었거든.”
혼자 사는 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추세에서 이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이혼은 인생의 커다란 실패로 다가온다.
정신적인 충격에 그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찾아 성격을 바꾸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특히 자식이 있고 그 자식에게 애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심한 충격으로 다가오는게 이혼이다.
그래서 살(煞)이라는 글자가 붙는 것이다.
고진살은 사람이 죽고 사는 살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살이라는 글자를 붙일 만큼 당사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예민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살아왔던 강노식 실장에게 이번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민희를 보낸 건 그가 심적 충격에 운전이라도 실수할까봐 그런 건 아니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웃기는군. 그 아가씨를 공항에 보낸 이유, 임지은 사장님이 날 찾을까봐 걱정돼서 보낸 거잖아?”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임 사장님 사람이 공항에 나와 있다가 그 여비서를 보고 바로 돌아가더군.”

역시나 임지은 사장 쪽에서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강 실장의 행적을 찾아보았음이 틀림없었다.

“그랬군요.”
“어제 회사로 와서 몇 가지 확인한게 있어.”
“유연탄 건에 관한 일인가요?”
“그래.”
“그럼 차 상무님에 관한 일이 맞습니까?”

강 실장이 눈빛에 이채를 띄었다.

“알고 있었나?”
“아닙니다. 그저 차 상무님일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죠. 저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다만 이야기를
못하고 있었을 뿐인겁니다. 뭘 찾았습니까?”

그는 잠시 말 없이 영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최 과장, 우리 이렇게 된 마당에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말씀하시죠.”
“진짜 아무 끈이 없다는게 사실이야?”

강 실장이 말하는 끈은 아무래도 학연, 지연 따위를 말하는게 분명했다.


영훈은 과연 여기서 사실대로 말해주는 게 그를 설득하는데 이득인지를 생각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고 싶고, 듣고 싶은 걸 들려줄 때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끈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신영은행에도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있구요. 그런데 실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재벌가와 혈연 관계 같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상황에 중요한 문제인가요?”
“중요하지. 현진물산이 바람 앞의 등불인 상황에서 같은 배 승객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바람 앞의 등불이라... 저랑 보는게 많이 다르시네요.”
“아니라고? 지금 유연탄 광산 작업 중지 된 거 보면서 아무것도 못 느끼나?”
“예상 못 한 일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배가 뒤집힐 만큼 큰 파도가 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일파일 뿐이야. 이파, 삼파가 몰아칠거라고.”
“그래서요? 제 백그라운드에게 임창호 회장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장난처럼 남의 집 싸움에 껴서 대충 놀다가 언제고 몸을 빼려는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뿐이야.”
“아... 그게 걱정이셨군요?”

영훈의 웃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다행이군.”

강 실장은 여기까지만 하고 바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사장실에서 영훈을 찾았다.
영훈이 사장실로 들어가니 송은채 사장이 강 실장을 옆에 두고 반겼다.

“출장은 잘 다녀왔어?”
“법인카드 덕분에 잘 먹고 잘 다녀왔습니다.”
“최 과장 보고는 나중에 듣고 방금 강 실장이 차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거든. 같이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강 실장은 이미 영훈이 송 사장의 총애를 받는 걸 알고 있기에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흑룡강성 인민대표로 주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구성과정이 복잡하지만 쉽게 우리나라로 따지면 국회의원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췬이라는 사람이 차지열 상무와 인연이 깊습니다. 이 사람이 개발허가는
물론이고 사업체를 연결시켜 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이
주췬이라는 사람은 저 역시 안면이 있습니다. 어제 출근해서 연락을 취해보니 저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자꾸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요?”
“이 주췬이라는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건지 정말 우리와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한다면 이 사태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송 사장은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주췬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알겠군요.”
“돌아가는 상황 봐서는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은데?”
“화가 많이 난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송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런데 최 과장 광주에서 올라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중국 출장 보내게 돼서 미안하네.”

영훈은 내심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괜찮습니다.”
“강 실장님은 그만 나가보세요.”
“알겠습니다.”

강노식 실장은 사장실을 나오고 나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중국을 보내도 자신을 보낼줄 알았는데 최 과장을 보낼줄이야...
이때 흥승대 실장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잘 쉬고 왔습니까?”
“쉬긴... 유연탄 건으로 최 과장을 보낼 생각이시던데?”
“아무래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최 과장일 테니까요.”
“중국어는 할 줄 안대?”
“아마 못할 걸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손짓 발짓이라도 하면서 설득한대?”
“통역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까?”
“흥, 성급 인민대표를 만나는데 통역을 데리고 온 친구한테 마음을 열 것 같아?”

홍 실장은 강 실장의 안색을 살피더니 슬쩍 얼굴을 들이밀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사장님께 의사표시를 확실하게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피아식별 제대로 하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중국어도 안 되는 최 과장을 중국에 보내는거 아닙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 회사에 없으니까요.”
“씨발... 내가 좆 같아서 인사과 들렀다 내려간다.”

멀어져가는 강 실장을 보며 홍 실장이 피식 웃었다.

“준기 안 됐네.”

그리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기획조정실 양준기 사원은 갑작스럽게 뜬 인사발령에 혼이 쏙 빠져버렸다.


이게 무슨일인가 싶어 일주일만에 출근한 강노식 실장에게 달려가니 싸늘한 대꾸만이 들려왔을 뿐이다.

“아직 이곳에 있을 만한 능력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인도에서 경험 좀 쌓고 와. 거기 변형재라는 친구가 능력이


상당해.”
“시, 실장님... 가면 언제고 돌아올 수 있기는 한 겁니까?”

준기가 울듯한 얼굴로 애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강 실장의 대답에는 한 가닥 자비심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거야 너 하기 나름이지. 얼른 가서 짐 싸. 가기 전에 이틀 휴가 줄 테니까 푹 쉬고. 그리고 가기 싫으면


사직서 내 책상에 올려 놓고 가.”

< 피하지 못한 화살(3)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4) >

강 실장이 나간 사장실은 제법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송은채 사장은 생각지 못한 물건 때문에 머리를 짚으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군산조선소를 매각시켜서 현진중공업에 붙인다는 거지?”
“일단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 부장은 현진중공업이 이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
“맞습니다.”
“우리가 이걸 해줘서 괜히 위험을 무릅쓰게 될까봐 난 걱정이 되는데?”
“덩치가 커진 현진중공업이 현진물산을 위협할까봐 걱정 되십니까?”
“후...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군산조선소는 1 조 원이 넘는 큰 덩치입니다. 소화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꿔보시는게 어떨까요?”
“어떻게?”
“군산조선소를 현진중공업에게 제시할 때면 현진관광이 현진물산의 소유가 된 이후일 겁니다. 저는 임창호
회장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만약 제가 임창호 회장이라면 현진물산이 내가 잡아먹을 상대라기보다는 내 것을 더
빼앗아 가지 않을까 걱정할 것 같습니다.”

송 사장은 차분히 커피를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많은 고층빌딩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며 말했다.

“회장님은 무서운 분이야. 아직 단 한 번도 우리 연희한테 살가운 표정을 지어준 적 없었어. 친정이 어려워지고
내가 동생을 도와줄 때도 명동 사채시장 따위에 현진그룹 냄새도 안 나게 하라고 불호령을 내렸었지. 그때는
어찌나 서럽던지... 연희 아빠가 저렇게 되고 내가 이 자리에 앉
을 때 말씀하셨어. 회사에 단 1 원이라도 손해를 보게 하면 당장 사장을 교체하겠다고.”

영훈은 그녀의 넋두리에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송 사장은 영훈을 보고 피식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최 과장은 복에 겨웠다고 생각하고 있지?”


“사실 사장님의 아픔이 잘 와닿지 않는 건 맞습니다.”
“하하, 맞아. 그럴 거야. 미안해.”
“미안해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불안해서 그랬어. 난 솔직히 최 과장이 오기 전만 해도 여기만 잘 지키면 우리 식구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제가 불청객인 셈이네요.”
“내가 초대한 불청객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런데 그 불청객이 너무 고마워. 자꾸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좀 문제지만 말이야. 일단
군산조선소는 어차피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게 아니니까 눈앞의 것부터
하나하나 처리해볼까?”
“그러시죠.”
“중국어 할 줄 모르지?”
“네.”
“강 실장이랑 같이 다녀오는거 어때? 차 상무 대신에 주췬이라는 사람과도 안면이 터 있고.”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희도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될 거야. 중국어도 꽤 잘하고 센스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 아니다. 그럼 나가봐.”

송 사장은 이번일을 잘 처리하면 보너스를 두둑하게 준다고 하려다가 연희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며
그만두었다.
속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일을 맡겨놓으면 그처럼 안심이 되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송 사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우명그룹의 제안을 받는 순간 이상하게 최 과장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선 중국에 출장을 보냈으니 생각할 시간은 생긴 셈이었다.
송 사장은 그동안 연희에 대한 생각도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장실을 나온 영훈에게 연희가 다가가 물었다.

“광주 건 보고 했어요?”
“네. 아마 저랑 중국으로 가게 될 겁니다. 준비하세요.”
“중국이요? 갑자기? 둘이서만요?”
“아니요. 기조실 강노식 실장님과 같이 가게 될 겁니다. 며칠 다녀올지 모르니까 준비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우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영훈의 안색을 살피는 그녀는 지나가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엄마가 무슨 말 안해요?”
“무슨 말 말입니까?”
“아니 뭐... 아니에요. 언제 출발할 거예요?”
“나야 언제 떠나도 상관없을 사람이라 강 실장님과 의논해보고 떠나려고 합니다. 강 실장님은 미국 다녀온지 얼마
안 되셨는데 또 나가게 돼서 그게 좀 걱정이네요.”
“그럼 바로 떠난다는 말이네요? 저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요.”
“다녀올 필요 없습니다. 준비 되고 연락하면 바로 나 데리러 오면 됩니다.”
“아... 차가 없으시죠?”

영훈은 잠시 연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음 주에 필기시험입니다.”
“요즘 필기 어렵다는데... 그리고 예전하고 달라져서 도로주행 힘들어요.”
“제가 안 해서 그렇지 운동신경이 제법 됩니다.”
“아~ 그 도끼질?”
“그거 운동신경 없는 사람이 했다간 바로 허리 나가...”
“네네~ 알겠구요. 전 이만 출장 준비하러 가볼게요.”

연희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웃더니 재빨리 짐을 챙겨서 후다닥 회사를 떠나버렸다.

양 전무, 이제는 퇴직해서 자연인 신분인 그는 뻘개진 얼굴로 달려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준기를 보고 너무
놀라 화도 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노식 실장이 자신의 아들을 다른 곳도 아닌 인도 오지 주재원으로 보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승대 실장이 돌아섰고 이제 강노식 실장 역시 돌아섰다.
이제 현진물산에 임지은 사장과 연결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지경이고 그 중에서 회사에 막강한 힘을 발휘할
사람으로는 차 상무만이 남았다.
양철기는 분노를 토하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일단 논현동으로 향했다.
자신들을 구제해줄 사람은 임지은 사장밖에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다행히 논현동 자택에 임지은 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임 사장이 양철기 전 전무를 살갑게 대한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검찰 조사 받으시는 분이 자꾸 여기 들락거리면 좋지 않아요. 사방팔방에 저랑 친분있다고 광고할 생각이에요?”


“그게 아니라... 제 아들놈이 글쎄 인도 주재원으로 발령났다고 합니다.”

임 사장은 짜증이 솟구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아이, 정말... 내가 당신 아들래미 인사발령까지 신경써야 해!”


“그게... 그 인상발령을 주도한 사람이 강노식 실장이라고 합니다.”
“어? 뭐라구요?”

그제야 임지은 사장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인도에 있는 주재원이 변형재라는 친군데... 실은 예전에 제가 추진했던 우크라이나에서 철광석 들여오는


사업을 그 친구가 반대해서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변형재 밑으로 보낸건 제
아들더러 사표를 쓰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걸 강노식 실장이 지시했다고?”
“맞습니다.”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강 실장이 직접 제 아들에게 인도 가기 싫으면 사직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 아줌마! 나 냉수 좀 갖다줘!”

임지은 사장은 가정부가 가져다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서성거렸다.
당황스러웠음이 틀림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양철기 전무가 날아가고 홍승대 실장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차 상무가 뭔가 일을 벌이는 이 와중에 갑자기 강 실장이 마음을 돌렸으니 상황이 심각해졌음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임창호 회장이 이 사태를 알게 되면 그녀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게 분명했다.
사장이 된 이후에 아랫사람을 완전히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송은채 사장의 수완에 완전히 당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현진관광이 다가오는 2 천억 채권을 막기 위해 현진물산과 현금, 주식을 교환할 걸로 크게 실망한
상황이니 말해 무엇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임지은 사장은 양철기에게 말했다.

“알겠으니까 이만 돌아가봐요. 당신 아들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볼테니까.”


“감사합니다.”

여기서 더 채근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걸 아는 그는 조용히 논현동 집을 빠져나왔다.


남은 임 사장은 차 상무에게 은밀히 연락했다.
이제 현진물산에 남은건 차지열 상무밖에 없다.
차 상무까지 날아가기 전에 치명적인 일격이 필요했다.

흑룡강성의 하얼빈시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 그리고 강노식 실장은 두꺼운 점퍼를 더욱 여미며 미리 예약한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후... 엄청 추운데요?”
영훈이 으슬으슬 몸을 떨며 말하자 강 실장이 말했다.

“곧 적응 될거야.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주췬이라는 사람을 만나야죠.”
“아무 계획도 없이?”
“주췬이라는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건지, 우리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만나봐야 정확히 원하는게 뭔지 알겠죠.”

어차피 강 실장은 여기에 오면서 최 과장의 서브로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반대로 호기심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는건지 궁금한 와중에 송은채 사장이 최 과장과 같이 중국으로 가서 일을
해결하라는 지시에 내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훈에게 하는 질문은 그저 궁금해서 하는 질문만이 아니라 영훈의 생각이 궁금해 떠보는 것이
절반이었다.

“그렇군. 저녁에 주췬이 신바이(新百) 백화점 개장 축하 행사에 모습을 보인다고 알고 있어. 일단 그곳에서
만나서 추후 약속을 잡기로 하지.”

전화로는 약속을 잡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정면승부를 해야했다.


그 와중에 연희는 미리 준비해온 주췬에 대한 인적사항과 가족관계 서류를 건네주었다.
강 실장은 이미 여러번 봤던 자료라 슬쩍 보고 관심을 다른데 두었지만, 영훈은 한참을 보고 생년월일을 다
외웠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사주를 보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애초에 기원을 따지자면 중국 역학에서부터 시작된 학문이 여러 갈래로 퍼져 그 중 하나가 사주명리가 되고 또
한국으로 넘어와 토정비결이 된 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그렇게 홀로 준비를 하면서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나서는 저녁까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강 실장은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양이었고 연희는 호텔 로비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영훈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댔다.
그리고 호텔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신바이 백화점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개장 축하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 저기 저 사람.”

연희가 행사장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훈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풍채가 넉넉한 대머리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인자한 눈웃음을 흘리며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옆에는 부인과 자녀들이 서 있었다.
키가 아버지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아들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 있고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갈법한 딸은
아들과 반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 실장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영훈과 연희도 재빨리 따라붙었다.

“안녕하십니까. 현진물산 강노식 실장입니다.”

강 실장이 얼른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건네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난 당신들과 할 이야기가 없는데?”

연희가 실시간으로 영훈에게 통역을 해주는 상황에서 강 실장이 말했다.


“일단 저희도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모른다고? 그리고 차지열 상무는 어딨나?”
“한국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여기까지 강 실장이 말했을 때 영훈이 한 걸음 나섰다.

“반갑습니다. 현진물산에서 나온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전권을 가지고 나왔으니 불만이 있다면 제가 다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영훈의 말을 연희가 빠르게 통역하자 주췬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금 기다리지. 행사가 마무리되면 위층에서 조용히 차를 하자고.”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영훈이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기다리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이번에는 주췬의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역시 이번에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한명씩 악수를 하더니 주췬의 아내에게 말했다.

“한국의 현진물산에서 나왔습니다. 주췬 인민대표님께서 잘 봐주셔서 편히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췬은 무슨 수작인가 해서 계속 눈길을 고정했다.


옆에서 연희가 통역을 해주는 상황이라 의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마음이었을거다.

“아, 그런가요?”

주췬의 아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할 때 영훈이 멀뚱히 서 있는 아들을 칭찬했다.

“아드님이 훤칠하니 잘 생기셨군요. 혹시 한국에 관심이 있습니까?”


“예? 아니 뭐...”

아들이 당황하면서 대답할 때 영훈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옆에서 연희가 고개는 돌리지 않고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아들이 문제인 집안이네요. 문제는 쉽게 풀리겠습니다. 다만... 강 실장님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네요.”
“네? 왜요?”
“회사에 한중교류 유학 프로그램 하나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 피하지 못한 화살(4)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5) >


연희는 그깟게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회사마다 장학생 제도는 하나씩은 있는데요, 뭐... 그 정도 만드는 건 문제 없어요. 그런데 어느 학교를
보내려고요?”
“사실 학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일단 기다려봅시다.”

영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잠자코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당연히 강 실장 역시 주췬이 행사일정을 마무리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략 30 분 정도를 돌아다니며 가족을 소개시키고 인사하던 주췬이 영훈을 향해 눈짓을 하며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를 따라 일행이 이동해 음식점 안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영훈은 그가 자리를 권하자 일단 손부터 내밀었다.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나온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주췬일세. 앉게.”

그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일단 악수를 하곤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이 차를 가져다주자 영훈이 말했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연희가 영훈이 말이 끝나자마자 재깍 통역을 했다.

“크흠...”
“평소 가족분들과 오붓하게 나오시는 편이신가 봅니다. 가족분들 얼굴이 좋던데...”
“뭐, 그렇소.”
“그런데 아드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주췬은 일 이야기를 하지 않고 딴소리를 하는 영훈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것도 다른 화제도 아니고 가족을 거론하는 건 뭔가 뜬금없고 앞뒤가 맞지 않았던 거다.
오히려 그렇기에 주췬은 이자가 겉으로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놈이야 항상 딴 생각이지. 공부도 안하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속이 타네.”


“아직 한창 어릴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속 태우지 마시고 한국으로 유학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국 유학?”
“네. 현진물산이 모든 경비를 지원해 최고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자랑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한국 유학이 다른 건 몰라도 질나쁜 친구들을 만나 안 좋은 물이 드는 경우는 별로 없는 장점이 있지요.”
“그건 그렇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모님과 천천히 상의 후에 결정하시면 됩니다.”
“고맙군.”
“그럼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저희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
“일이 어떻게 된건지 알아야 저희도 대책을 세우든 보상을 하든 할 텐데 참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주췬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당신네들이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매달 양쯔엉에게 20 만 위안을 지급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네. 그런데 당장


이번달에 지급돼야 할 금액이 들어오지 않았어.”

영훈은 양쯔엉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딱 봐도 그 양쯔엉이라는 사람이 이 사업의 핵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언가 큰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까지 크게 곤혹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네. 내가 양쯔엉을 소개시켜주었는데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어.”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입금되어야 할 20 만 위안은 바로 입금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쉽게 넘어가리라 생각했던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달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전달하려고?”

이번 만큼은 영훈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췬을 바라보자 그가 이번 만큼은 인정을 베푸는 것처럼 가르쳐주듯이 말했다.

“양쯔엉은 결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돈을 받지 않네. 그런데 이번에 전달해야 할 사람이 오질 않았어.
그럼 둘 중 하나지. 전달할 사람에게 사고가 생겼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다른 마음을 먹었든지.”
“저희는 결코 아닙니다.”
“그럼 중간에서 문제가 생겼겠군.”

이때 강노식 실장이 끼어들었다.

“거래가 잘못되면 중간책을 바꾸는 거야 언제든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사후처리를 확실히 할 수 있느냐일 겁니다.
우린 이 사태를 일으킨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금 원래대로 돌려놓길
원합니다.”

주췬은 강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서 고민을 좀 해보겠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영훈이 더 붙잡지 않고 그대로 물러서자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다 말했다.

“내 아들 얼굴 어디가 안 좋아 보이던가?”

그냥 가도 괜찮을 텐데 질문까지 하는걸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문제가 더 심각한게 분명했다.

“다른 가족분들은 다 웃고 있는데 아드님만 혼자 웃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시선 한번 안


마주치더군요.”

주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영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는 반항 꽤나 했었죠. 그러다 우연찮게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1 년 정도는 꽤 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 년, 3 년 정도가 흘렀을 때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더군요. 그저 나 잘 되라고 했던 충고
가 그때는 왜 그렇게 고깝게 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연희의 통역에 주췬은 의자 손잡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빠졌다.


강 실장은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왜 화제가 갑자기 아들로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주췬이
이 이야기에 집중하는 걸 보면서 마치 어릴 때 마술을 보며 놀랐던 기분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물론 연희는 영훈이 혼자 산속에서 20 년 넘게 산 걸 알고 있기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지만 말이다.

“아들놈이랑은 이야기가 안 통해.”


“언젠가 아드님이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올 겁니다.”
“떨어져서 시간을 가지자는 말이군.”
“한 가지 확실한 건 단순한 서운함에서 그쳐야지 부모에 대한 원망이 깊어지면 나중에는 남보다도 더한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돼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제대로 공부하기는 할까?”

솔직히 주췬의 아들이 뭐에 빠져서 공부를 안 하는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주췬의 아들이 전형적인 학자형 사주라는 것.
아마 아버지와의 트러블이 없었다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무탈하게 살지 않을가 싶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떨어뜨려 놓으면 다시 공부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릴게 분명했다.
한 가지 염려되는 건 여자에 휘둘릴 성격이라 그게 걱정인데 그건 여기나 한국이나 영훈이 어찌 해줄 수 없는
거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시각을 넓히게 될 겁니다.”
“하긴 한국으로 유학가서 사고 치는 놈이 많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 최영훈이라고? 눈이 날카롭군.”
“계산은 빠르지 못해도 사람은 잘 봅니다. 그래서 전권을 맡고 여기에 온 겁니다.”
“사람을 잘 본다? 크게 될 인재군. 어느 호텔에서 묵나?”

주췬은 영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텔을 묻고는 명함을 받아 자리를 떴다.


강 실장은 주췬이 떠나가고 나자 영훈에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아들은 뭐야? 아들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주췬이 아들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그냥 짐작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아까 들으셨잖아요? 표정이 달랐다고.”
“고작 표정 좀 안 좋았다고 이걸 그렇게 연결시킨다고?”
“어쨌거나 잘 된 건 맞지 않습니까?”
“...”

강 실장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유도 모른 채 화가 났었던 주췬의 화가 풀렸고 오히려 마지막에는 숙소의 위치를 물으며 가깝게 다가오는
모습에 ‘원래 일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던가?’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 전달자라는 사람은 알고 계십니까?”


“그건 차 상무가 알지. 하지만 그 전달자가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으니 차 상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어.”
“그런데 20 만 위안이 얼마입니까?”
연희가 대답했다.

“대략 우리 돈으로 2 천만 원이 넘어요.”


“그걸 매달 지급했다구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뉴스 보니까 중국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고 막
그러던데...”

강 실장이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걸로 안 될 일이 된다면야 비싼 것도 아니지. 어쨌거나 주췬이 다시 양쯔엉을 연결해준다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어.”
“그렇게 하세요. 아, 한중교류 유학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싶은데 될까요?”
“기조실에다가 얘기해놓지. 며칠 안에 그럴듯하게 프로그램 짜올 거야.”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텔로 향했다.


강 실장이 보고를 위해 노트북으로 작업할 때 영훈은 연희와 호텔 바에서 칵테일을 주문했다.
호텔 바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칵테일.
이것도 언젠가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연희는 이름도 어려운 빨간색 칵테일을 입에 가져갔다가 물었다.

“어떻게 아들이 문제인지 알았어요?”


“아들의 사주를 보니 큰 문제 없이 살 학자형 사주입니다. 조용하고 연구하길 좋아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길 원하는 인생이 그와 딱 맞다고 할 수 있죠. 대개 이런 사주를 타고 나면 부모들과 크게 틀어질 일이
없습니다. 공부 좋아하는 자식을 싫어할 부모가 없거든요. 그런
데 상을 보니 미간에 주름이 진 것이, 초년에 공부와 인연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주와 관상이 반대로 나타난 거네요?”
“맞습니다. 만약 집안이 어렵다면 부모가 자식을 뒷받침 해주지 못해 이런 경우가 나타날 수 있는데 인민대표라는
권력을 가진 그가 돈이 없어서 뒷바라지를 못해준다는게 말이 안 되는 일일 겁니다.”
“그렇죠.”
“그럼 결론은 하납니다. 누군가 아들의 진로를 계속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아~ 이해했어요.”

영훈은 바다색을 닮은 푸른색 칵테일을 맛보며 그 청량한 맛에 감탄하고는 말을 이었다.

“주췬의 문제는 아들을 극하는 살을 가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연희가 눈을 동그렇게 뜨며 놀랐다.

“네에? 아들을 극하다뇨?”


“아들을 죽인다는게 아니라 아들의 기를 죽인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사건건 아들과 부딪히는 사주를 타고
났으니 집안이 화목할 리 없습니다. 눈은 높은데 아들이 하는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계속 아들의
자존감을 죽이고 억압하게 되죠.”
“그럼 아들이 공부는 안하고 컴퓨터만 한다는 말은 어쩌면 아버지가 그렇게 몰아갔을 수도 있다고 보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것도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저렇게 학자형 사주를
타고난 사람들 중에 고집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집도 보통 아니고 자존심도 강하니 억눌린 감정에 대한 반항심
또한 크게 튀어나올게 당연한 거겠죠.”
“그렇구나...”
“이런 상황을 풀어보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좋은 관계로 돌린다는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거든요.”
“그래서 유학을 권유한 거군요?”
“맞습니다. 우습겠지만 떨어뜨려 놓으면 둘 사이가 더 악화되진 않을 겁니다. 왜 주말부부들이 더 애틋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꽁꽁 얼었던 부자관계가 회복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주췬이 아들을 유학 보낼까요?”
“보낼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저렇게 사이가 멀어진 부자관계는 서로에 대한 미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들도 아버지가 밉겠지만 아버지도
아들이 미울 겁니다. 그러니 보내고 싶겠죠. 그리고 자기 집안의 화근을 없애준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낄 겁니다.
모든게 좋은 방향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겠죠. 물론 그 생각
이 틀린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연희는 단번에 칵테일을 반쯤 마시고는 말했다.

“가끔 당신에게 소름이 끼칠 때가 있어요. 사람이 아니라 도사를 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배운게 다르고 보는게 달라서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저 사람을 보지만 난 그 사람의 인생을 봅니다.”
“만약 나도 당신처럼 된다면 지금보다 더 싸가지가 없어 지겠죠?”
“하하,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시커먼 산중에서 귀신을 보며 자라온 고통을 그녀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때 정신적으로 처절한 싸움을 해오던 영훈은 그냥 무당으로 사는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식을 무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을 두고 떠났던 어머니 때문이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평범한 사람들처럼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이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직감적으로 주췬의 전화임을 알았다.
영훈은 중국어가 안 되니 바로 연희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아 통화를 마치곤 영훈에게 말했다.

“주췬이에요. 내일 저녁에 시간을 낼 수 있냐고 물었어요. 당연히 된다고 했구요. 그런데...”


“그런데요?”
“부탁할게 있다고 했어요. 뭔지는 말하지 않았구요.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흠...”
“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게 꽌시예요. 원하는 것만 있고 주는게 없다면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어요.”
“들어보기 전에 겁부터 먹을 필요 없습니다. 만나보면 알겠죠.”

영훈은 빙그레 미소 짓고는 칵테일을 마시며 야경을 감상했다.


하얼빈 시의 야경도 꽤 그럴듯해 중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피하지 못한 화살(5)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6) >

호텔에서 조식을 마친 일행은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뿌연 대기를 뚫고 하얼빈 시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향했다.
말이 조금 벗어난 곳이지 네비게이션으로 2 시간 반이나 걸려 사실상 서울에서 강원도 홍천 즈음까지의 거리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그런가보다 마음먹어야 했다.
주췬이 초대한 집은 고속도로를 한참 타고 가다 국도로 빠져 고풍스럽고 으리으리한 철제 대문이 눈에 들어왔을
때에야 도착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으리으리한 대문을 통과하고서도 5 분여를 더 들어가자 그림 같은 저택 정문이 나왔다.
중국의 권력가라고 해서 오래된 저택을 상상했는데 의외인건 꽤나 모던한 현대식 건물이었다는 거다.
마치 경기도 외곽의 타운하우스가 훨씬 더 커졌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다만 그 현대식 건물에 어울리지 않은 건 집사처럼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가 내려와 안으로 안내했다는 정도.

“어서 오시오.”

주췬은 마침 가족들과 담소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지 과일 몇 가지와 차를 함께한 채 식탁에 모여앉아 있었다.
그 식탁이 대략 열 명 정도는 둘러앉을 만큼 크다는 것만 빼면 겉으로 보아서는 굉장히 화목한 집안처럼 보였다.

“인사드려라. 한국으로의 유학을 도와주실 분들이다.”

주췬의 말에 주췬의 아내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인사했다.

“이야기 들었어요. 우리 애한테 좋은 기회를 주셨다구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대학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어떤 대학에 갈지 사실 영훈도 모른다.


이때 명석한 강 실장이 재빠르게 나섰다.

“현재 우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 아드님에게 맞는 대학을 맞춰 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아드님 성적표와
학생기록카드 같은 게 있다면 저희 쪽으로 주시면 빠르게 진행될 겁니다.”

주췬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럼 성적이 좋아야 하는거 아닌가요?”


“성적에 맞춰서 가야만 한다면 우리가 주췬님께 어떻게 도와드린다고 생색을 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췬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남들하고 똑같은 기준으로 유학을 보낸다면 뭐하러 내 앞에서 그런 자랑을 했겠어? 당신은
걱정할게 없다니까!”

강 실장은 주췬이 아내 앞에서 턱하니 배를 내밀고 자랑하는걸 보면서 최 과장이 그 짧은 순간에 제대로 약점을
찔렀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주췬의 아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강 실장에게 말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당신은 그만 고마워해. 자꾸 그러면 내 체면이 깎인다고.”

주췬은 호탕하게 웃으며 아내에게 그만 들어가라는 듯 등을 두드리며 일행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식탁에 앉아 있던 일남일녀의 남매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중에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뻘쭘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잘생긴 친구.”

딱히 칭찬할 말이 생각 안나서 한 말인데 남자는 잘 생겼다는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쑥쓰러워 했다.


주췬은 그런 아들을 인사시키고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오가게 한 뒤 강 실장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하시오.”

눈치 빠른 강 실장은 얼른 대답했다.

“마침 유학 프로그램에 대해 안내해드릴게 있으니 이곳에서 사모님과 아드님께 말씀드리면 되겠군요.”


“그거 좋군. 둘은 이리로 따라오게.”

지금부터가 진짜 용건임이 분명했다.


응접실을 지나 구불구불한 복도를 여러개 지나가니 놀랍게도 20 여 평 정도의 공간에 세 명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며 마작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의 남자는 오십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들로 중국 어디를 가나 흔히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남은 한 명의 여인은 놀라운 미모를 지닌 중년 여인이었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는 특히 매끈하고 긴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물며 마작을
하는 모습이 퇴폐적으로 보이면서도 섹시했다.
주췬은 네명이 앉을 사각형 식탁 빈 자리에 앉고는 마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절거렸다.
옆에서 연희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통역했다.

“손님이 와서 늦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를 사업차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마작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를 옆에 두고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마작을 두겠다고 해요.”
“이거 참 별 경험을 다 하네.”

잠시 후, 주췬이 영훈과 연희를 향해 주변의 의자 몇 개를 가리키며 자신의 옆으로 오라고 말했다.


영훈이 의자 두 개를 가져와 주췬의 뒤에 나란히 두고 앉자 그가 말했다.

“원래 우리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장이 되는게 꿈이었소. 낙후되고 가난한 하얼빈의 시장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게 꿈이었지.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게임에만 빠져 살기 시작했지. 그 잘했던 공부는
아예 손을 놓았어.”
“안타까운 일이군요.”
“안타깝지. 어릴 때는 수재라고 다들 칭찬들이었다니까? 반에서도 1 등을 놓치지 않았었지. 한 때는 말이야...”

주췬은 마작을 두면서 계속 아들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연희는 도대체 왜 마작을 두면서 일 이야기는 하지 않고 계속 아들 칭찬을 늘어놓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할 일이
통역밖에 없었기에 묵묵히 통역에 매진했다.
하도 말을 많이해서 입에서 단내가 날 것 같다고 느껴질 때쯤 주췬의 옆에서 마작을 두던 중년의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아들 칭찬을 하는 건 처음 보는데? 아들을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으면 참한 며느리라도


소개시켜 줄 걸 그랬잖아?”
“며느리 좋습니다. 그런데 벌써 며느리를 들였다간 여자 치마폭에 휩싸여서 천지분간을 못할테니 그건 또 안 될
말이지요.”

연희는 영훈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통역했다.


그런데 연희가 통역하는 걸 알았는지 그녀는 연희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예쁜 아가씨네? 한국 사람인가?”

연희는 깜짝 놀라 말했다.

“네. 한국 현진물산의 임연희라고 합니다. 사업차 이곳을 방문했는데 마작 구경은 처음이라 무척 신기하고
진귀한 구경을 하는 것 같네요.”
“북경어도 꽤 수준급이네? 하고 있는 옷이나 악세서리를 보니까 단순히 직장인 같지는 않고... 있는 집
자제인가?”

연희는 그녀의 눈썰미에 감탄했지만, 명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생긋 웃으며 답했다.

“이 코트를 한눈에 알아보시는 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안목이 대단하세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미소를 짓는 그 중년 여인의 말에 연희가 손에 땀을 쥐며 대답했다.

“현진물산 사장님이 제 어머니 되십니다.”


“오호~ 한국에서 말하는 재벌집 여식이란 말이지? 그런데 고작 통역만 해주고 있네? 얼마나 대단한 집
자식이기에 그렇지?”

여인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주췬의 뒤에 앉아 있는 영훈과 시선을 마주쳤다.


영훈은 연희가 하는 통역을 듣고 말했다.

“현진물산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온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평소 항상 직원이라고 했던 영훈이 구태여 ‘현진물산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온’이라고 표현한건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군인지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겸양하고 자신을 숨기면 안 되는 자리였다.

“오호~ 현진물산의 일이라면 혹시...?”

여인이 말을 하다가 주췬의 얼굴을 살짝 살피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광산 문제로군요.”
“맞습니다.”
“이야기는 얼핏 들었어요. 주췬이 상당히 곤란해 하더라구요.”

이로써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 여자는 양쯔엉이 아니며 최소한 이 자리에는 양쯔엉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호기심이 돌았다.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이 자리에 초대했다면 도대체 무슨 도움을 요청하려고 그랬을까?

“그 곤란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췬의 얼굴을 보니 어느새 그 곤란했던 얼굴은 사라져 버렸군요. 능력이 좋은가 봐요?”
“과찬입니다.”

주췬은 자꾸 영훈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여인에게 말했다.


“젊은 남자한테 그만 신경 쓰고 패를 돌리는게 어떻습니까?”
“호호, 패가 잘 안 들어왔나 보죠?”
“패는 잘 들어왔는데 같이 하는 사람이 한눈을 팔고 있으니 돈을 못 딸까 봐 염려돼서 그렇습니다.”

연희는 통역을 하면서 주췬이 저 중년의 여인에게 공손하게 대한다는걸 계속 강조했다.


다시 마작이 진행되고 주췬은 아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섯 살에 글을 뗀 걸 시작으로 일곱 살에 논어를 읽기 시작하고 열 살에 학교에서 수학을 제일 잘했다는데
이르렀을 때 연희는 통역 중간에 영훈에게 투덜거렸다.

“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들 이야기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네?”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을 때 영훈은 연희의 손을 잡았다.


뜬금없는 스킨쉽에 연희가 당황할 때 영훈이 말했다.

“끝났습니다.”

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췬이 양손을 들었다.

“이거 오늘 운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만 주췬이 판돈을 다 잃고 말았다.


주췬이 속된말로 오링을 당하자 같이 마작을 하던 남자들이 덕담 또는 위로의 말을 건넸고 중년 여인은 흡족한
미소로 주췬에게 다음에 또 하자는 말을 건넸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주췬은 손님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다시 마작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떠나 위층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주췬의 서재인지 고풍스러운 책장에 온갖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가운데 단촐한 의자 몇 개와
식탁만이 있을 뿐이었다.

“앉게.”

주췬은 큰 덩치를 삐끄덕거리는 오래된 의자에 맡기며 영훈에게 자리를 권했다.


영훈과 연희가 맞은편에 앉자 그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까 왜 그 자리에 그대들을 데리고 갔는지 알겠나?”


“아까 그 자리에서 마작을 하던 사람들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는게 아닙니까?”
“맞네. 사람을 잘 본다고 했지? 내가 자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 셈이지.”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사주와 관상을 떠올리지 못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좋은 환경을 제공한 건 맞았다.


그저 생년월일에 악수 한번 해주게 했다면 모든게 만사형통이었겠지만 말이다.

"사람의 본성을 알게 하기에 도박보다 좋은게 없지. 내면 깊숙한 곳에 내재 된 밑바닥까지 끄집어내게 만든다네.
자네는 도박 좋아하나?”
“즐기지 않습니다.”

영훈의 대답에 주췬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렇군. 한국 사람들은 도박을 즐기지 않는다는데 다 틀린 말이야. 인생은 본래 도박이거든. 다만 한국인들은


조금 안정적인 걸 선호할 뿐인 거지.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네. 가끔 확실하지 않은 것에 거액을
걸어야 할 때가 있지. 그리고 그건 정치 역시 마찬가지야.”

그는 의자 손잡이의 고풍스러운 꽃 문양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사업은 돈을 잃고 끝나지만 정치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지. 한국은 그렇지 않겠지만 이곳
중국에서 정치를 한다는 건 천길 낭떠러지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네. 누구 손을 잡느냐가 나와 내 가족의
수십 년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어.”
“아까 중년의 여인 때문에 고민입니까?”

주췬의 눈빛이 번뜩였다.

“맞아. 그 여자의 이름은 허바이바이라고 하네. 한쩡 국무원 부총리와 긴밀한 사이지.”

연희는 주췬의 말을 통역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국무원 부총리는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에 속하는 최고 권력가 중의 한 명이에요. 중국을 이끄는 열


손가락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어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력한 권력가와 긴밀한 사이라니 새삼 아까 그 여자가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아까 돈을 잃어주셨군요?”

주췬은 조금 전보다 더 놀란 눈빛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내가 돈을 잃어준 걸 알았나? 그녀가 눈치챌 만큼 어수룩하게 연기하지 않았는데?”

영훈도 주췬의 연기를 알아챈 건 아니었다.


다만 주췬은 타고나기를 배짱 있고 손재주가 뛰어나며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이길 만한 싸움을 찾아다니는 사람인데 돈을 잃고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걸 보고 예상한
거다.

“그럼 느낌이 그랬습니다.”


“놀랍군. 그럼 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들을 수 있겠는가?”
“대답해드리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궁금한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제가 대답을 하면 그대로 따르실 겁니까?”

주췬이 묘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중요한 일을 하려면 많은 조언이 필요한 법이지.”


“제가 하는 조언은 그저 제 생각일 뿐 객관적인 증거 따위는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조언을 해드려봤자 서로
기분만 상하지 않겠습니까?”
“기분이 상해? 어째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요.”
“괜찮네. 일단 내가 들어보고 나서 판단하지.”
“흠... 일단 그 전에 제가 의아한 건 뭔가 잘 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가 말인가?”
“아까 그 여자분, 한쩡인가 하는 그 국무원 부총리분과 긴밀한 사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랬네.”
“뭔가 잘 못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 피하지 못한 화살(6) > 끝

< 피하지 못한 화살(7) >

주췬은 잠시 영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거짓이 있다면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듯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노려보았지만 영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나한테도 들리는 귀가 있고 보이는 눈이 있네.”

그저 두 눈과 두 귀가 달렸다고 강조하는 건 아닐 터였다.


분명 중앙정치에도 그의 눈과 귀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겠지만 영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금 주 대표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사업은 돈을 잃고 끝나지만 정치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당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돈이라는 것도 회사에서는 굉장히 중요시하기에 어느 하나 확실하지 않으면 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데이터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주관적인 의견은 데이
터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말이군.”
“아니면 누가 주 대표님의 눈과 귀를 가리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나?”

그 바이바이허라는 여자는 타고난 상 자체가 빈천했다.


상이 빈천하다고 돈을 못 버는건 아니다.
코가 두툼하고 탱탱하며 위로 솟아 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엄청난데 그러면서도 코가 계단처럼 각이 져 있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독하기 그지 없다.
독하고 집요하게 돈을 탐하는 데다 가진 재산을 푸는 여자도 아니니 재산은 풍족할 게다.
또 피부 관리를 잘했는지 피부에 윤기는 돌았지만 눈썹 사이의 인당과 코의 뿌리가 되는 산근이 죽어 있다.
인당과 산근이 죽어 있으니 본인 스스로 무엇을 이루기보다 남들에 기대어 사는 팔자인데 거기에 돈 욕심이 하늘을
찌르니 가까이 있다가는 언제 재산을 홀랑 뺏길지 알 수 없는 상이다.
게다가 눈이 깊지 못해 지혜가 없으니 가벼운 이야기는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크고 무거운 이야기는 나눌 수
없다.
이런 상이 중국 최고 권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가와 긴밀한 사이다?
이 여자는 그 권력가가 단순히 즐기는 여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권력가를 도와준다거나 그 권력을 같이 나눌
그릇이 되지 못한다.

“말씀드렸듯이 사람을 잘 보는 편입니다. 아까 그 여성분과 몇 번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말투와 행동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하고 손놀림이 가벼웠지만, 자세히 살피면 끊임없이 우리와 주 대표님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만한 위치에 있다면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
었을 텐데도 말이지요. 주 대표님이 일부러 잃어주는 것도 모를 만큼 판단력이 빠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최고 권력가와 긴밀한 사이가 될 수 있다? 중국 최고 권력가들이 그렇게 허술하다고 생각하기 힘드네요.
다만...”
“다만?”
“타고난 매력이 있으니 남자를 잘 홀릴 것 같기는 합니다. 사람을 쉽게 믿게 만들 것 같으니 쓰임새는 많은
여자겠네요.”
“아무리 사람을 잘 본다고 해도 앉은 자리에서 자네처럼 확정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한 거였습니다. 믿지 못하면서 뒤돌아서면 괜히 찝찝한거 아닙니까?”

주췬은 순간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분명 이 청년이 그런식으로 말했는데 자신이 재촉했으니 할 말이 없긴 했다.
하지만 이 억울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설마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좋은 분 같다거나 불순한 마음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따위의 조언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가도 너무 간 내용이었다.

“허... 이렇게 당황스러운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군,”

아들의 상태를 단번에 파악한 능력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한번 물어본 거였는데 오히려 걱정만 한 짐을 가슴에
얹혀놓게 생겼다.

“도와드릴 일은 이제 끝인 겁니까?”

천연덕스럽게 묻는 영훈을 보고 주췬은 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자네는 걱정이 되지도 않나?”


“당연히 걱정됩니다.”

사실 걱정이 되는건 아니다.


상을 보고자 하면 본능적으로 봐야 할 부분이 눈에 들어 온다.
그렇기에 자신이 본 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너무 사기꾼 같아서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했다.

“걱정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제 느낌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하는게 주 대표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제가 전한
내용을 가지고 주 대표님께서 가져갈 부분은 가져가시고 쳐낼 부분은 쳐내서 필요한 부부만 쓰실게 아닙니까?”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그렇지.”
“지금 잠시 언짢으신 기분은 시간이 지나면 곧 가라앉을 겁니다. 남은건 주 대표님의 결정 뿐이죠. 아, 그런데
양쯔엉 씨는 언제 연결해주실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야 한가롭게 하얼빈을 여행해도 상관없지만, 서울에서
밤낮없이 퇴근도 못하며 고생하는 동료를 생각하면 일단 정
지된 광산은 돌리고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연희의 긴 통역이 끝나자 주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정말 못 당하겠구만. 양쯔엉은 내가 곧 연결시켜주지.”


“그 전달자에 관한 부분은...?”
“아, 그거? 돈이 필요한 사람이면 제가 스스로 사람을 구해 오겠지.”

어제 말했던 것과 상황이 달라졌을 리 없다.


그저 주췬의 마음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럼...?”
“내가 연락해 놓을테니 숙소에서 기다리게.”

그제야 마음을 놓은 영훈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면 이제 현진물산과 자주 연락하게 되겠군.”
“직원들이 최고의 유학 프로그램을 제공할 겁니다. 물론 현진물산과 주 대표님이 앞으로도 더욱 끈끈한 관계가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네들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관계야 문제 될 게 없겠지.”

이번 광산 문제의 실수를 언급한 것 같으면서도 영훈의 조언에 관해서 경고한 것 같기도 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할 땐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명심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음... 맞는 말일세. 만약 말이네.”
“네?”
“만약 자네 말이 맞는다면 자네 회사가 중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영훈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만, 연희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환희에 가득차서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주췬의 집에서 나와 차량에 올라탄 연희는 환호성을 질렀다.

“앗싸! 대박!”

강 실장은 궁금한걸 지금까지 억지로 참다가 일단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키면서 질문을 토해냈다.

“어떻게 됐어? 주췬이 양쯔엉과 연결시켜 준대? 전달자는?”

연희가 조수석에서 신나게 열변을 토했다.

“어제랑 완전히 달라졌어요. 어제는 시큰둥하더니 오늘은 양쯔엉이 계속 돈을 받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전달자를
마련할 거라고 단정짓더라구요. 일단 숙소에 가서 기다리면 연락을 주기로 했어요.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더 세심하게 하는걸 보니까 완전히 우리한테 마음을
연 것 같아요.”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연희는 순간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슬쩍 뒷좌석에 앉은 영훈의 눈치를 보았다.


영훈은 곧바로 말했다.

“그냥 조언 몇 가지 해줬습니다.”
“그 조언이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건가?”
“죄송하지만 주췬과 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서로 다른 곳에서 꺼내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회사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바이어와의 약속을 지키는건 영업사원의 기본 철칙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강 실장으로서는 더 캐낼 명분이 없어졌다.
밖에서 아줌마와 재미없는 유학 이야기로 지루한 시간을 보낼 때 그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크흠, 그럼 어쩔 수 없겠고 이제 편히 쉬기만 하면 되겠군. 양쯔엉을 소개시켜주면 최 과장도 같이 갈 건가?”


“아닙니다. 그건 실장님께서 맡아서 처리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서포트하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진짜 회사로 돌아가서 최 과장 서포트 잘 하고 왔다고 보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뭐라도 손에 하나 쥐고 돌아가야 강 실장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겠는가?
양쯔엉 문제까지 자신이 손 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강 실장은 영훈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잔잔히 미소지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
영훈 일행을 내보낸 주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서재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금고를 열어 수십 다발의 현금 뭉치 중에 두 개를 꺼내고는 다시 아까
마작을 하던 곳으로 갔다.

“어머? 다시 오신 거예요?”

주췬은 웃으며 돈 뭉치를 내려놓고 말했다.

“사업 이야기가 일찍 끝나서 마침 할 것도 없고 다시 왔습니다. 앉아도 되지요?”

허바이바이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말했다.

“그럼요. 우리야 셋이 하는 것보다 넷이 하는게 훨씬 더 재밌으니까요.”

주췬은 그녀의 눈빛에 탐욕이 깃드는 걸 보면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분명 그녀가 돈을 좋아하는 것도 알았고 일부러 그녀를 이곳으로 초대해 그녀의 환심을 사고자 마작으로 돈을
잃어주려고 마음먹었었다.
자신은 그게 현명하게 그녀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찬찬히 그녀를 다시 살펴보니 ‘과연 저렇게
속물적인 여자를 한쩡 국무원 부총리가 곁에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된 마작에서 주췬은 여전히 돈을 잃었다.
50 만 위안이 고작 두 시간만에 날아갔음에도 주췬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또 다시 두 손을 든 주췬은 말했다.

“이거 오늘은 영 운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군. 오늘 손에 패가 안 들어오나봐?”
같이 자리한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주췬은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돈을 많이 잃어서 그런지 오늘은 기분이 영 좋지 않네요. 이만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그, 그러지.”
“딴 돈은 모두 챙겨가십시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때문인지 세 명의 사람들은 급히 돈을 챙기고 일어났다.


그런데 주췬이 허바이바이에게 말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에 앉는게 어떻습니까?”


“네?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가요? 혹시 내가 너무 많이 따서 배가 아픈건 아니죠?”
“돈이야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고 마작은 제가 자리를 주선한 것이니 고작 그것 때문에 대면하자는 말을
하겠습니까?”
“뭐 그럼...”

허바이바이가 자리에 앉자 나머지 남자들은 급히 자리를 떴다.


주췬은 남자들이 사라지자 열심히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번주에 북경에서 상무위원회 위원들이 모여 긴밀히 회의를 했다고 하는데 혹시 무슨 일로 모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 오늘 보인 정성이면 이정도 질문은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아닙니까?”

주췬이 슬쩍 미소를 보이자 그녀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손톱을 매만졌다.

“어쩐지 그래서 오늘 그렇게 운이 없으셨군요.”


“성의도 없이 얻고자만 하면 도둑놈 심보가 아닙니까?”
“호호,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녀는 주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미국 무역분쟁 대응 때문에 모인 걸로 알아요. 주 대표님이 관여하고 있는 곡물에 관한 부분도 같이 의논한 것


같은데 정확한건 물어보지 않았어요. 혹시... 정확한 내용까지 알고 싶은가요?”

그녀가 은근하게 물어볼 때 주췬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묘한 긴장에 허바이바이가 미간을 찌푸릴 때 주췬이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대로 그녀의 다리를
찍어버렸다.

“아아악!”

철철 흐르는 피가 낭자해진 그녀의 다리에는 손바닥만한 칼이 꽃혀 있었다.


주췬은 비명을 지르는 그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언제고 내가 노는 판에서 손장난을 하는 사람들에게 쓰던 칼인데 오늘 손이 아닌 다리에 꽂아보기는 처음이군.”


“왜... 당신 이게 무슨...”
주췬이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으며 말했다.
“한쩡 국무원 부총리가 저번주에 뭘 했는지는 몰라도 같은 상무위원회 위원인 왕후닝이 저번주에 광동성에 계속
있었다는건 알고 있지. 그가 없이 상무위원회가 긴밀한 회동을 한다고? 감히 내 돈을 공짜로 먹으려고 들어?”

그녀의 눈빛에 절망감이 감돌았다.

“미, 미안해요. 원래 그러려던게 아니라... 제발 살려주세요.”


“내가 왜? 날 속이려 들고 내 돈을 쳐먹은 네년을 왜 살려줘야 하지?”
“시키는대로 다 할게요. 정말이에요.”

피범벅이 되어 가는 다리를 부여 잡은 그녀가 처절하게 주췬의 소매를 붙잡았다.

“정말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난 거짓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믿어주세요.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그래?”

주췬은 그녀의 머리를 놓으며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상체를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딸이 있다고?”
“네? 네...”
“다리 치료하고 딸이랑 같이 이곳으로 짐을 옮겨. 마침 내 딸과 나이가 비슷하니 친구가 되겠군.”

허바이바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가 뭘 원하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딸을 인질로 잡겠다는 거군요.”


“인질일지 정말 친한 친구가 될지는 알 수 없지. 다리를 치료하고 북경으로 가. 그리고 내가 시키는대로 해.”

주췬은 영훈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여자다.
쓰임새는 자신이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 피하지 못한 화살(7) > 끝

< 맞춰지는 퍼즐조각(1) >

기분 좋게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 실장은 생각할 게 있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레 남은 영훈과 연희는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 호텔 라운지에서 한잔하기로 했다.
둘은 조금 전까지 강 실장이 곁에 있어서 말하지 못하고 참아왔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난 정말 영훈 씨랑 일하면서 놀란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오늘은 진짜 너무 놀랐잖아요! 와... 어쩜...”


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작판은 처음이지만 어차피 사람을 보는 건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도 그런 장소와 분위기에서 하나도 안 쫄고 할 말 다하는 걸 보면 영훈 씨는 진짜 강심장이라니까요.”

‘귀신보다는 사람이 낫죠’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영훈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영훈의 미소를 보며 연희는 와인을 홀짝였다.
술이 들어가고 하얼빈의 야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연희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억이 슬며시 떠올랐다.
아까 마작이 끝날 때 갑자기 영훈이 연희의 손을 잡은 것 말이다.
손을 왜 잡았을까? 꼭 잡을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던가?
영훈이 자신의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여자의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알 턱이 없는 영훈이 일어서며 말했다.

“배도 부르고 술도 들어가니 좀 덥고 답답하네요. 밖에서 잠깐 바람 쐬고 들어가려고요. 연희 씨는 더 마시고


들어갈 겁니까?”

영훈에 대한 야릇한? 생각을 하던 중 영훈이 말을 거니 순간 당황한 연희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뭐... 혼자서 뭐 하겠어요? 나 잠깐 손 좀 씻고 따라 나갈게요.”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라운지에서 이어지는 바깥 정원쪽으로 향하자 연희는 후다닥 화장실로 향했다. 술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진짜 얼굴이 발그레해 보였다. 거울을 보며 손 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메이크업을 다시
손보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저렇게 눈치도 없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예쁘게 발랐다.


소복이 눈이 쌓인 야외 정원은 조명만 열심히 반짝여댈 뿐 고요했다. 영하 10 도의 날씨에 춥지도 않은지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영훈에게로 다가갔다.

“안 추워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추워서 손을 비비며 다가오는 연희를 바라보며 영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 머리가 상쾌해지죠. 복잡한 생각 정리하는 데에는 좋은 방법입니다.”


“복잡한 생각이요? 뭐가요?”

영훈은 대답 대신 연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몇 초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연희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길을 피하기도 그렇다고 계속 마주하기도 어려워
그냥 얼어버렸다.
그 순간 영훈이 추워서 맞잡고 있던 연희의 손을 잡아 살며시 아래로 내리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놀라 토끼눈이 된 연희를 보며 영훈이 빙긋 웃고는 말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게 사람 보는 겁니다. 그러게 왜 아까부터 자꾸 내 입술을 보고 있어요?”


“...”

영훈이 연희의 볼을 살짝 쓰다듬은 후 키스를 했다.

*
조재민 의원은 요즘 아침에 눈을 뜨는게 예전처럼 어렵지 않았다.
대개 일반인들은 국회의원들이 일은 안하고 탱자탱자 놀면서 세비만 축내는 세금벌레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일의
효율과는 별개로 굉장히 바쁘게 살고 있다.
아침 7 시 조식 모임부터 시작하려면 새벽 5 시에 일어나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고 10 시 전에 집에 들어간적이
없으니 하루에 자는 시간이 5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즘엔 한창 군대에서 구르던 이십대 초반처럼 새벽에도 눈이 번쩍번쩍 떠지는게 마치 젊을적 호기가
다시 차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본인도 자신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강주원 의원이 자신의 앞길을 잘 닦아줄 수 있게끔 보좌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현진물산의 그 이상한
친구를 만난 이후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거다.
이런 조 의원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당연하게도 김시원 보좌관이었다.
요즘 얼마나 여의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서울대 동창과 선
그런데 오늘 아침 같은 당 사무총장의 보좌관을 하고 있던 선배에게서 카톡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의원님!”

아침 일찍 광주의 한 기업 식당에서 강연을 끝내고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조재민 의원에게


김시원 보좌관이 급히 다가왔다.
조 의원은 식판에 한가득 담은 밥과 국을 먹다가 김시원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고 많은 직원들이 몰려 있는 와중에서 급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김시원 보좌관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조 의원에게 귓속말로 소식을 전했다.

“허허허... 이거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하게 집안에 일이 생겼네요. 이거 참 마누라가 정말...”


“집에 일이 생기셨으면 들어가보셔야죠.”

조재민 의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 먹지 못한 식판을 회수하는 곳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조금 빠른 걸음이었지만 회사를 나올 즈음에는 거의 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는 사람은?”

차 뒷자석에 타자마자 묻자 운전석에 앉은 김시원 보좌관이 빠르게 대답했다.

“민재원 사무총장 보좌관한테 다이렉트로 받은 연락이라 아직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허... 이래서 정치하는 사람은 구린 짓을 하면 언젠간 탄로난다니까? 중앙에서는 어떻게 할 것 같아?”
“아무리 강주원 의원이라고 해도 뇌물혐의가 수면 밖으로 드러나면 당규에 의해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민재원 사무총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불같이 노하면서 바로 진상을 조사하라고 했다니까요.”
“만약 이게 기사로 터지면...”
“강주원 의원은 다음 선거 걱정은 하지도 못하게 공천에서 배제될 겁니다.”
“그럼 끝이군.”

일흔이 넘은 노회한 정치인에게 말년에 뇌물혐의가 터진다?


정치인생은 끝났다고 봐도 좋다.
말년이 깨끗하면 뒤로 물러나서 후배 양성에 주력한다는 명목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한 권력을 향유하겠지만 더럽게
물러나면 누가 그를 찾을 것인가?
“당장 다음주에 강 의원님 손녀 결혼식이 있습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양반집 대감이 하야했다고 해도 양반이 어디 가지 않아. 경조사는 기본중에 기본이니까. 다만 내가
전에 지시했던거 잊지 않았지?”
“군산 버스터미널을 공약화 하자는 말씀 말입니까?”
“그래, 현진건설에 조감도 미리 신청해놓고 그럴듯하게 구상 좀 해봐. 최 과장한테 연락하면 잘 만들어서 줄
테니까 그걸 가지고 요리하는 건 자네가 돼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은 현진물산에 밀어볼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해야겠지. 이번주에 확답 받아놔야겠어. 이럴 때 보면 처남이 LH 공사에 입사했던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만약 처남 되는 분께서 어렵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려울게 뭐가 있어?”
“입찰이라는게 수많은 종목마다 다 점수를 메기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밀어줬다가 나중에 말이라도 나오면
의원님께 피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강주원 의원 때문에 걱정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는데 이건 강 의원 건이랑 달라. 객관적인 점수만 가지고 어디
입찰이 진행 되던가? 법원 판결이 어디 법리만 가지고 해? 왜 전문 용어로 비가격 점수라는것도 있잖아.”

조 의원은 자신 있었다.
봉선동 시공권 정도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고 군산조선소를 이용해 군산경제를 다시금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군산 지역에 차츰 모습을 보이셔야겠습니다.”


“마침 내가 어렸을 때 잠깐 군산에 살다가 다시 광주로 갔거든? 한 5 년 살았나? 잘 됐지.”
“5 년 살았으면 군산 사람이나 마찬가지네요.”
“하하, 자네도 이제 정치인 다 됐구만. 맞아. 5 년 살았으면 군산 사람이지.”

조재민 의원은 뛰는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어쩐지 군산조선소가 보고 싶어졌다.
힘차게 돌아가는 조선소의 풍경을 상상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4 박 5 일간의 중국 출장이 끝낸 영훈 일행이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이후 현진물산은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벌어졌다.

“사장님...”
“어휴...”

임지은 사장은 자신 앞에 침통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두 양반을 바라보며 머리를 짚었다.


이미 냉수 한 컵을 비웠지만 답답해오는 가슴을 달래기엔 그 시원함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임지은 사장은 고개를 푹 숙인채 변명하는 차지열 상무의 말을 잘랐다.

“아니, 무슨 일을 그렇게 안일하게 처리해요? 얼마나 안일하게 했으면 고작 몇 명이 중국 가서 차 상무가 벌인


일이라는걸 다 밝혀내냐구요!”
“제가 직접적으로 지시했는지는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제 실수로 인해 회사에 피해를 끼쳐...”
“그게 뭐 달라요? 어쨌든 계약 해지 됐잖아요! 도대체 어느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나 너무 실망이야. 내가 정~말 사람을 잘 못 봤다니까? 얘! 너 무슨 말 좀 해봐라.”

오랜만에 거제에서 서울로 올라온 김태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 제가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어요? 이미 알아서 사고 다 쳐놨는데?”


“...”

차 상무는 김태민 상무의 지시가 있었기에 한 일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문제를 일으키라고만 지시했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하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더러운 일을 시킬 때 하는 수법이다.
나중에 지시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충성심에 한 일이라고 대충 둘러대기 위해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거다.
결국 문제 생기면 자기가 책임지기 싫어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니 자신더러 멍청한 놈
취급하는 것에 차 상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됐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니?”

임 사장의 물음에 태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 현진물산에 손을 댔다간 괜히 일만 더 키울 수 있어요. 일단 코발트 광산 인수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생각해요.”
“후... 괜히 내가 너한테 짐만 된 것 같다.”
“아니에요. 엄마도 잘해보겠다고 하다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제 며칠 뒤에 입찰이니까 한번 보자구요. 그리고
요즘 할아버지를 쭉 지켜보니까 현진물산에는 아예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아요.”
“그래? 그럼 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카타르 LNG 선 수주에 일단 올인하고 계시거든요. 일단 가장 큰 일은 그거니까. 이번 수주경쟁에서 최대한 많은
선박수주를 받는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예상대로 받으면 수주액만 2 조 원이 넘어가니까 현진물산을 인수하고
말고는 할아버지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남의 회사도 아니고 어차피 며느리가 운영하고 있는데 자기거라고 생각할 거 아니니? 하여튼 속도
좋아. 그 난리를 치며 본다, 안 본다 하더니 이제는 좀 잘하는 것 같으니까 말도 안 꺼내. 내가 이래서 네
할아버지 안 믿는거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일단 입찰결과 보고 결장하기로 해요.”
“그래, 그 수밖에 없겠구나.”

임지은 사장은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젊었을 적 태민이 아빠와 연애할 때 귀걸이를 짝짝이로 하고 나섰을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다.

< 맞춰지는 퍼즐조각(1) > 끝

< 맞춰지는 퍼즐조각(2) >


성주훈 부사장은 기분이 내심 언짢았다.
차지열 상무가 중국에서 손 댄 일이 문제가 생겼고 그 일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건 이해하지만 바로 책임을
묻고 계약을 해지한건 섣부른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자신의 의견은 전혀 묻지도 않은 채 사장실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있었다.
아무리 회사의 오너라고 해도 절차라는게 있는데 어떻게 부사장의 의견을 하나도 묻지 않을 수가 있는가?
물론 프록시아 인수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해 물어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업본부장
목을 날리는데 부사장도 몰랐다는게 어떻게 보면 쪽팔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차지열 본부장이 조금 독하기는 해도 그 독한 맛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업을 일구어낸
장본인 아니었던가?
저 정도의 인재는 쉽게 구할 수 없다고 본다.
해직시키는 방식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게 끝낸 것도 아니고 저렇게 해직시키면 분명 회사에 악감정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
현진물산에 해가 될 비밀사항까지 마구 퍼트리게 될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인사 조치는 섣부른 결정이라는 생각에 성주훈 부사장은 오랜만에 사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송은채 사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그를 반겼다.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습니까?”
“차지열 상무 때문에 화가 좀 나셨죠?”

송 사장이 웃으며 묻자 성 부사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부사장님이었어도 화가 났을 거예요. 영업본부장을 자르는데 부사장의 의견도 묻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잘라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거네요?”
“맞아요. 이번 광산 영업 중단건에 차 상무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정황증거가 있어요. 하지만 이걸 드러냈다간
중국에서 우리를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정황 증거라서 법적으로 처벌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해직으로
그친거예요.”
“흐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골치 아픈 상황이 맞았군요.”

송 사장은 여전히 그에게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함을 느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는 것 자체가 송 사장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그런 어조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을 텐데 이상하게 최 과장과의 기상천외한 사건들 때문에 담이 커진
건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건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리기로 해요.”


“아, 그럴까요?”

마음먹고 따지러 왔던 성 부사장은 사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졌다.

“마침 오시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어떤 이야깁니까?”
“듣고 많이 놀라실 수 있어요. 어... 솔직히 이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는데 며칠 걸릴 정도였거든요.”
성 부사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며칠이나 걸리면서 고민을 하셨습니까?”


“아마 들으시면 차 상무 잘린 이야기는 단번에 머리에서 사라질 만큼 충격일 수 있어요.”
“그... 정도 인가요?”
“제가 사장인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아니면 뺨이라도 때릴까 봐 아마 다른 사람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을 것 같거든요.”

웃으며 그런 말을 하니 그저 과장이라는 걸 알지만 저 정도까지 표현한다는 것 만으로도 송 사장의 입에서 나올


발언이 무엇일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었다.

“허허... 이거 청심환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송 사장이 말했다.

“다음달에 집행할 입찰보증금...”


“입찰보증금이 무슨 문제라도...?”
“집행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입찰보증금을 내지 않고 입찰하는건 불가능하다.


곧 이번 입찰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송 사장은 본래 이걸 성주훈 부사장에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고심을 해왔었다.
결국 혼자서는 결론을 내지 못해 병상에 누워있는 임지훈 전 사장과 현재 봉선동 TFT 팀을 이끌고 있는 고 부장,
홍 실장과도 의논을 한 결과 사실대로 이야기 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무엇보다 성 부사장이 가진 영향력을 생각하면 입찰을 포기한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입찰을 포기한다는 말을 흘렸을 때 과연 성주훈 부사장이 그 정보를 다른 곳에 퍼뜨릴
것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프록시아 인수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에요.”

성주훈 부사장은 생각지도 못한 송 사장의 선언에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성주훈 부사장은 화를 씩씩 내며 돌아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직원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가운데 박재윤 부장 역시 고개를 숙이며 괜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했다.

“시팔, 진짜 좆같아서 못해먹겠네 진짜...”

드디어 부사장 입에서 쌍욕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여기 어딘가의 물건 하나는 작살날 거라는 선언이다.
박재윤 부장은 근처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는지 슬금슬금 살폈다.
괜히 재수 없게 근처에 있다가 상처라도 입으면 누구한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면서 푸는 수밖에.

“야, 이리 와봐.”

역시나 그냥 넘어갈리 없다.


박재윤 부장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가니 성 부사장이 커다란 탁자 옆 작은 의자를 턱 가리켰다.

“앉아봐.”
“네.”
“직원들 다 어디갔어?”
“다들 어제 회식 때 무리한 것 같아서 1 층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고 정신 좀 차리라고 내려 보냈습니다.”

부사장 상태가 저런데 직원들을 어떻게 그냥 둘 수 있나?


자신만 빼고 과장급 이하 직원들은 전부 피신시켰다.
사실 어제 부사장이 계산만 하고 갔기 때문에 회식이 9 시에 끝난 걸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너 뭐 들은거 있냐?”
“어떤거 말씀이십니까?”
“프록시아 인수 관련해서 비서실이나 기조실에서 뭐 들은거 없냐고.”
“비서실이랑 기조실 말씀입니까? 음... 떠도는 소문 같은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성 부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박 부장을 앞에 둔 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박 부장은 경험상 이럴 때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걸 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장님이 프록시아 입찰 포기하시겠단다.”


“네? 어떤거 말입니까?”

박 부장은 잘못 들은줄 알았다.

“프록시아. 네가 좆빠지게 먹으려고 고생하는 그거. 그거 포기하잖다.”


“그걸 왜...?”

지금껏 몇 달간 프록시아 입찰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온 직원만 몇 명이던가?


지금도 호주 현지에서 현장 업체 매장량과 생산량이 데이터와 일치하는지 확인중이고 입찰에 이기기 위해
경쟁업체들 재무상태 체크하느라 허리가 굽을 지경이다.
그런데 그 고생을 해놓고 이제 입찰이 코앞인데 포기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도 궁금하다.”
“이유를 말 안해주셨습니까?”
“말해줬어. 세원 인터내셔널이랑 골든브릿지 사모펀드 컨소시엄에서 최소 1 조 원을 쓸 거라고 하면서 그 이상의
자금은 회사에서 부담스럽다고 하시네.”
“진짜 세원 인터내셔널 컨소시엄에서 1 조 원 이상을 쓸거라고 합니까? 얘네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한테
프록시아 따위는 관심도 없다고 했었습니다.”
“알지. 네가 그 이야기 한두 번 하냐? 그런데 일단 저쪽에서 가지기로 작정했나봐. 그런데 그건 그거고... 1 조
넘으면 이거 포기해야 하는 거냐?”

박 부장은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얼핏 보면 부사장님이 원하는 대답을 말하라고 하는 것 같아도 아무 생각 없이 살살 비위를 맞추려 하다간 된통
혼난다.
그리고 사실 비위를 맞춰주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박 부장은 프록시아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못해도 20 년 이상 회사를 꾸준히 먹여 살릴 캐시카우를 장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장량은 초기 측정했던


값보다 훨씬 커졌고 생산량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증가할 겁니다. 배터리 수요는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할게 분명하니 설사 1 조 원이 넘어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돈이 없다고 하니 어쩌냐?”
“부사장님께서는 있는 자산을 더 처분해서라도 입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신영은행에서 우리한테 떠먹여준 혜성기업. 그거 간판 바꿔달고 현진건설로 봉선동인가
뭐시긴가 그거 한다고 주접 떠는데 그건 계속 주접 떨라고 하고 혜성기업이 가진 부동산. 그거 당장 처분해도 2
천억 이상 나오는데 그거라도 잡고 해야 하는거 아니냐?”

생각지 못했는데 돈 나올 구멍이 있는 셈이라 박 부장은 더욱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네요. 만약 혜성기업... 아니, 이제 현진건설이 됐으니까 하여튼 거기에서 은행에 담보 잡힌게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오면서 재무팀 들려서 확인해봤어. 깨~끗해. 그런데 이거 나만 알겠냐?”
“당연히 사장님도 알고 계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럼 뭐야? 그 2 천억이 아까워서 못 던지겠다는거 아니야!”

또 목소리가 커진다.

“일단 제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돈 아까워서 못 던진다는데 알아보면 뭐 나오냐?”

방금 전에는 뭐 들은 거 없냐고 물었으면서 괜히 화가 나 심통 부리는 거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대출까지 받은 그 돈 다시 은행에 넣어서 뭐 하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자비용이 얼마나 나가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혹시 다른 프로젝트를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1 조 원짜리?”

부사장의 미심쩍은 눈빛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프로젝트가 여러개일 수도 있으니까요.”


“흠... 그래. 한번 알아봐. 제대로 알아봐. 어물쩍 넘기지 말고.”
“제 스타일 아시지 않습니까?”

박 부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성 부사장은 손을 홱 저으며 가라고 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한번 손을 대면 제대로 처리하는 능력을 가졌기에 부사장이 계속 곁에 두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일단 부사장 곁을 탈출한 박재윤 부장은 가장 먼저 인사과를 찾았다.
현진물산에서 가장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민홍기 과장이 모르는 일은 제 아무리 들쑤시고 다녀봤자 알아내기
힘들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인사과에 모습을 드러낸 박 부장이 주변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일어나는 직원들을 억지로 앉히며 민
과장에게 다가갔다.

“민통~ 바쁘신가?”

박 부장은 후배인 민 과장이 회사 정보를 가장 통달했다 해서 항상 민통이라고 불렀다.

“바쁩니다.”

민 과장이 본 척도 안하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워낙에 친하기 때문에 박 부장은 개의치도 않았다.

“바쁜거 알지~ 그래도 우리가 잠깐 커피 나눌 정도 사이는 되잖아? 응?”


“요즘 엄청 예민한 시긴거 아시죠?”
“알지~ 임원 몇 모가지 날아갔고 그것 때문에 빈 자리 차지하려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것도 알지.
우리 민통이 권한은 없어도 괜히 말 나올까 몸 사리는거 누가 몰라?”

이렇게까지 하니 민 과장도 더는 못 버티고 일어섰다.

“담배 한 대만 태우고 다시 들어올 겁니다.”


“흐흐... 어디로 갈까? 옥상?”
“네. 가시죠.”

민 과장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간 박 부장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고 말했다.

“혹시 알고 있었어?”
“뭐 말입니까?”
“프록시아 건.”
“프록시아요? 그게 왜요?”

박 부장은 영문을 모르는 민 과장의 표정을 보며 그가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연기하면서 모른척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모르고 있구나.”
“뭐 있습니까?”
박 부장은 잠시 말을 아꼈다가 재차 물었다.

“요즘 기조실에서 뭐 하는거 있어?”


“기조실요? 강노식 실장님이 중국에서 돌아와서 뭐 알아보고 있다고 하기는 하던데.”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박 부장의 눈빛이 돌변했다.

“어떤거?”
“반도체 회사라고 하던데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기조실 전체가 달라붙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기조실 전체가 달라붙어?”
“네. 지금 기조실 가면 전화 받을 직원 한, 둘 빼고 아무도 없을 걸요?”

< 맞춰지는 퍼즐조각(2) > 끝

< 맞춰지는 퍼즐조각(3) >


다른 것도 아니고 반도체란다.
반도체는 최고의 기술 집약 사업이며 몇 백억 단위로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어마어마한 자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물건을 떼어다 팔거나 자원을 캐서 파는 상사가 반도체를 건드린다는 건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박윤재 부장은 민홍기 과장의 말을 듣자마자 감이 딱 왔다.
프록시아 입찰 포기의 이면에 반드시 이 건이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섣부르게 성주훈 부사장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보고하는 실수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단순히 이 건으로 보고하면 그 반도체 회사가 어떤 회산지, 규모는 어느 정도고 매출이며 순이익, 그리고 발전
가능성에 회사가 어느 정도로 투자할지까지 싹 다 물어볼게 뻔하기 때문이다.
대답을 못하는 순간 능력 없는 놈으로 찍히는게 당연했으니 일단 강 실장을 만나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조실이랑 그리 친하지 않다는 거?

“민통~”
“왜 또 그러십니까? 불안하게?”

민 과장이 흠칫하며 뒤로 몸을 빼자 박 부장이 얼른 다가와 슬그머니 팔을 잡고 말했다.

“강 실장님이랑 요즘 어때?”
“실장님 바빠서 얼굴도 못 봅니다. 그리고 알잖아요? 강노식 실장님이 양철기 전무님 라인이었던거. 요즘 그것
때문에 기조실 애들이 불안해서 죽으려고 해요.”
“그래?”
“뭘 모른척하고 그러세요? 다 알면서.”
“난 정치에 관심 없어.”
“관심 없으신 분이 부사장님 옆에 딱 붙어 계십니까?”

박 부장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민통아. 이거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 아니냐. 누군 성질 더러운 그 양반 옆에 있고 싶냐?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처럼 누구 라인 안 타고 가만히 주는 거나 잘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내가 부사장님한테 엄청 뭘 얻기나
했으면 말이나 안 한다만...”
“에이... 연봉이 얼만데 자꾸 우는 소리십니까?”
“거 참 인사과장 앞이라서 죽는 소리도 못 하겠네. 어쨌든 묻는 말에나 대답해봐. 강 실장님이랑 친해?”
“실장님이랑은 안 친하고 기조실 친구들 몇몇이랑 친합니다. 왜요?”
“요즘 기조실 애들 힘들 테니까 내가 회식이라도 시켜주려고.”

민 과장이 기가 찬 듯이 물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 아닙니까? 누가 알면 혹시 기조실장직 노리나 생각하겠습니다.”


“에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지. 난 임원 자리 관심 없어. 벌써 상무 욕심낼 연차나 나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임원은 고액연봉이지만 그래봤자 단기 계약직 아니냐? 명예퇴직 이야기 나오기 전까지 오래 해먹다가
쓸모없다고 하면 해외주재원이라도 나갈란다. 그리고 강 실장님과
도 언제 만나서 인사 한번 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원래 남의 부서 일에 신경 안 쓰셨잖아요?”
“내가 궁금했겠냐?”
“아... 부사장님... 골치 아프시겠네요.”
“뭐 당연한거 아니겠냐.”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뭘?”
“저한테 부장님처럼 비슷한 질문 하려고 왔던 사람이 있었던 거?”
“뭔 소리야?”
“임지훈 사장님이 그렇게 되시고 사실 회사 내에 불안한 기류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송은채 사장님이 부임하고 나서 예상 밖으로 모든 일이 빠르게 정상궤도를 찾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사실 부장님이 계획하시는 프록시아 인수, 사장님이 신영은행에서 대출받아온 5 천억 아니었으면 지금쯤 절반은
포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였다.

“놀라운 일이긴 해. 인정하는 바야.”


“부장님은 모르셨는지 모르겠지만 회사 내에서는 치열하게 암투중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치열했냐면 양철기
전무님이 그 암투에 찍소리도 못하고 날아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짐작은 하고 계셨죠?”
“성추행 건으로 날아간 거잖아. CCTV 증거까지 확보했고. 그걸 사장님이 찍어 날렸다고? 정확한 소스야?”
“아마 맞을 겁니다.”
“허... 장난 아니시네.”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민 과장이 장난기가 심하고 사내정치를 안 좋아하지만 적어도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평생 집에서 살림만 했다고 알고 있는데 강단 있는 분입니다. 아까 저를 찾아와서 분위기 묻고 갔다는 사람,
라인 바꿔서 사장님께 붙었습니다.”
“그게 누군데?”
“뭘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아마추어 같이... 어쨌든 그런 판국이라 이건데, 놀라운건 그룹 회장님이신 임창호
회장님이 손수 키운 양철기 전무, 차지열 상무 다 날아갔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알겠습니까?”
“나더러 조심하라는 이야기야?”
“네. 혹시나 사장님이 하고 계신 일에 태클을 걸까봐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죠.”

박윤재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과는 어땠는데?”
“사장님에게 붙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죽을뻔 했다가 아직 잘 살아 계십니다.”
“섬뜩한 소리 하지 마라. 가슴 떨리니까.”
“공포영화에 조연들이 왜 죽는지 아십니까?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부득불 호기심을 해결하겠다고 어두운 곳에서
혼자 나돌다가 칼에 맞는 겁니다. 가슴이 떨릴 땐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게 맞아요.”
“네 말도 맞긴 한데, 이건 가만히 있을 건이 아니야. 조 단위 금액이 걸린 일이고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고.”
“부장님이 어련히 잘하겠지만 부사장님께 보고하려고 할 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겁니다. 자칫하면
부사장님과 세트로 묶여서 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박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 과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지만 그건 내가 결정하도록 할게.”


“뭐, 들을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흐흐... 넌 역시 날 알아. 나중에 소주에 삼겹살이나 하자.”
“목 안 날아가면요.”
“목 날아가면 안 볼 것처럼 말한다?”
“경영기획총괄 부장님이니까 밖에서 시간 내서 보는거지 생판 남이면 뭐하러 봅니까? 가요. 나 담배 다
폈습니다.”

박 부장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고기 사준다고 해도?”


“그럼 뭐... 생각해봐야겠네요.”
“새끼, 튕기기는... 흐흐...”

박윤재 부장은 역시 민홍기 과장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조실에 들러본 박 부장은 민 과장의 말마따나 여직원 둘밖에 없는 모습을 보고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민 과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 법인카드로 유혹해 회식이라도 시켜주며 꼬셔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박
부장을 본 여직원 하나가 일어서며 말했다.

“어머, 실장님 찾으러 오셨어요?”


“어? 어... 어디 가셨나?”
“방금 오셨다가 15 층 가셨습니다.”
“15 층? 봉선동 TFT 있는데?”
“네, 그렇습니다.”
“거긴 왜?”
“네?”
“아, 미안... 하여튼 고마워.”
“네. 들어가세요.”

여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기획조정실을 나온 박윤재 부장은 바쁘게 걸음을 놀려 엘리베이터 15 층을 눌렀다.
반도체 회사 하나를 싹 털어가며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조사하던 그가 갑자기 왜 봉선동 TFT 로 향했을까?
생각해보니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TFT 역시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혜성기업을 거의 날로먹다시피 했다지만 아파트 미분양으로 워크아웃을 벗어나지 못했던 회사가 어디
가겠는가?
그런데 또 아파트 시공권을 따내겠다고 우리 회사가 직접 TFT 를 만든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것도 해외자원사업부 에이스라고 인정받는 고승현 부장을 팀장으로 앉혀 놨다는 건 이걸 따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영은행에서 들어온 5 천억과 혜성기업. 그리고 봉선동 사업이 진행된 이후 프록시아 입찰을 다시금 생각한게
틀림없었다.
강노식 실장과 고승현 부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TFT 부서 문을 여는데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부서를 둘러보다가 안쪽 회의실에 다가가니 안에 세 명의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

몰래 엿듣는 건 괜스레 치사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놀랍게도 고승현 부장과 강노식 실장 그리고 얼굴이 익지
않은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부장님?”

고 부장이 여기 웬일이라는 듯 쳐다볼 때 박 부장이 강 실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나중에 다시 찾아올까요?”


“뭐야, 나 찾아 온거야?”
“기조실 가니까 여기 올라가셨다고 해서...”

강 실장이 묻자 쑥스럽게 웃는 박 부장의 시선에 테이블 위 수북한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빠르게 스캔하려는 찰나 젊은 청년이 자연스럽게 서류를 모아 살포시 뒤집는다.
딱 봐도 겨우 대리나 달 것 같은 젊은 청년인데 자신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서류를 뒤집는 걸 보면서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뭔데? 사적인 거야? 아니면 공적인 거야? 사적인 거면 조금만 기다려줘. 한... 20 분 정도?”
“사적인건 아닙니다.”
“그럼 말해봐. 뭔데?”

박윤재 부장은 난처한 눈빛으로 젊은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강 실장은 태연히 말했다.

“괜찮아. 아, 아직 인사 못 했지? 여기 비서실 최영훈 과장이야.”


“최영훈... 과장이요?”

현진물산에 자신이 모르는 과장이 있었던가?

“잘 모르지? 올해 입사해서 그럴 거야.”


“경력직을 비서실로 채용한 건가요? 특이하네요?”

강 실장은 대답대신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영훈의 옆자리를 권했다.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 뭔데?”


“긴밀한 이야기라서 그냥 다음에 하겠습니다.”

나중에 둘이 따로 자리를 만들려 했는데 강 실장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여기서 할 수 없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 만나도 대답 못 해줘. 그리고 공적인 일이면 코발트 광산 입찰 건 아니야?


여기서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프록시아 입찰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요?”

강 실장이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해 욱한 마음에 내질렀다.


이렇게 말하면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 실장이나 다른 두 명 모두 놀라기보다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사장님이 말했군.”

이렇게 되니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박윤재 부장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실은 나도 안지 얼마 안 됐어. 너나 나나 그리 큰 차이는 아닐거야. 그래서 만약 코발트 광산
입찰에 관해 궁금한게 있으면 내가 아니라 여기 고 부장에게 묻는게 나을걸?”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박 부장은 반도체 회사를 들쑤셔 놓은게 기조실이면서 안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어쩔 수 없이 고승현 부장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가 미적찌근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윗선에서 결정한 내용입니다. 부사장님이나 경영기획총괄부에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같은 직급이지만 고승현 부장은 박윤재 부장보다 2 년이나 늦게 입사했다.


스카이 출신인 박 부장보다 2 년이나 늦으면서 지방대 출신인 고 부장이 부장 진급을 동시에 했으니 그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악의가 있을 거라는게 아니라 합당한 이유를 듣고 싶은 거야. 혹시 반도체 회사에 투자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강 실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이야기 듣고 나 찾아온 거였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뭘 어떻게 하다가야? 부사장님한테 이야기 듣고 열심히 파보다가 나왔겠지. 그래서? 반도체 회사에 1 조
투자할까봐 헐레벌떡 뛰어온 거야?”
“그거 듣고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기껏 해야 수백억이야. 물론 초기 투자지만 중간에 추가 투자가 들어간다고 해도 천억 내외가 될까? 조 단위
투자는 아니야.”
“반도체 회사라면서요?”
“반도체 생산, 포장이 아니라 디자인, 설계 쪽이거든. 설비자원이 아니라 인적자원이 핵심인 회사야.”
“그럼 그 돈 어디에 쓸 겁니까? 그냥 놀려둘 거예요?”
강 실장은 대답 대신 시선을 영훈에게 돌렸다.
박 부장 역시 그 시선을 따라 영훈에게 고개를 돌리니 영훈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최영훈입니다.”
“어, 그래. 나 경영기획총괄 박윤재 부장이야. 경력직이면 전에 다니던 회사가 어디였어? 세원 인터내셔널은
아니지?”
“채권회사였습니다. 말씀드리긴 그렇구요.”
“아... 은행권? 엘리트구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멋대로 오해하는 박 부장을 보면서 영훈이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연희가 준 현진물산 임직원 자료에서 과장급 이상 핵심 인사들의 인적사항은 외워 놓고 있었다.
당연히 부사장과 그 밑의 박윤재 부장의 생년월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말 돌리지 말고 핵심으로 들어가자. 사장님이 1 조 그거 어디다 쓰려고 마음 먹고 계셔?”


“음...”

영훈은 대답 대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박윤재 부장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혹시 영업본부장 자리, 관심 있으십니까?”

< 맞춰지는 퍼즐조각(3) > 끝

< 맞춰지는 퍼즐조각(4) >

순간 당황한 박윤재 부장은 강노식 실장을 향해 물었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거 같은데요?”


“방금 나도 헷갈렸는데 제대로 들은 것 같아. 혹시 상무 달고 싶은 생각 있냐고 묻는 것 같은데?”
“그걸 왜 이 친구가 묻습니까?”
“여기서 직급은 가장 낮아도 힘은 가장 크거든.”

강 실장의 진지한 답변에 박 부장은 다시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훈의 얼굴을 보며 박 부장은 급하게 고승현 부장의 바지를 뒤졌다.

“왜 그러세요?”

고 부장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얼른 그의 핸드폰을 살핀 그는 강 실장과 영훈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어디 지금 녹음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핸드폰 줘보십쇼.”


“그러지.”

강 실장이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놓았고 영훈도 거리낌 하나 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박 부장의 머리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여기에 도청장치 돼있지는 않은지 조사하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드라마나 영화 보니까 무슨 기계로 방을 막
훑던데.”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저도 농담하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농담으로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혼란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리죠.”

영훈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자 박 부장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고 부장이 말했다.

“당황스러우시죠?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실장님은 그 전에 몇 번 보셔서 크게 안 놀라셨는데 전 미친놈인줄


알았어요.”
“너한테는 뭐라고 했는데?”
“음... 그건 방금 임원을 해보겠냐는 제안보다 훨씬 충격적이라서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그렇습니다.”
“과장이... 그것도 올해 입사한... 그치? 올해 입사한 과장이 나한테 며칠전에 목이 날아간 영업본부장 자리를
해보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이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고?”

고 부장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고작 임원 되보라고 한게 뭐 충격적입니까? 하... 참, 입은 근질근질하는데 차마 말씀을 못 드리니까


가슴이 답답하네요.”

솔직히 고 부장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고작 승진 하겠냐고 권유하는 수준이랑 계열사 하나를 통째로 해먹을 생각인데 계획 한번 짜보라는 말을 들은 건
수준이 달랐다.
박윤재 부장은 팔짱을 끼며 지켜보는 영훈에게 물었다.

“질문의 의도가 뭐야?”

질문의 의도는 당연히 이제 헤어져야 할 부사장 곁에서 그를 빼오고 싶은 게 첫 번째다.


부사장은 초년에 들어온 운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었기에 앞으로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 역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박 부장의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는 사주 때문이다.
본래 그는 직장인이 되면 안 될 사주다.
겉으로 보면 유들유들하고 사람 사귀길 좋아하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라 떠돌길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놀기 좋아하는 한량 사주냐 하면 그건 아니다.
손재주가 좋고 눈썰미가 좋아 예술쪽으로 나가면 굉장한 인재가 되었을 사람인데 그걸 모르고 샐러리맨이 됐으니
타고난 복을 다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40 대 중반 넘어서 다시 대운이 들어오니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복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예민한 성격 만큼이나 예민한 촉을 타고나서 자신도 모르게 위험을 피해온 사람이다.
능력은 고 부장보다 못한 사람이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타고 났기에 고승현 부장 같이 유능한 사람을 밑에
두면 잘 써먹을 사람이다.

“차지열 상무님이 나가면서 영업본부장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조직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사람을 빨리 채워 넣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마치 얼마 전에 학교에서 배웠다는 말투다.


저 말투부터 적응이 되지 않지만 일단 중요한건 말투가 아니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제가 정할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사장님께 추천을 해드리는 거죠.”
“아니,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전 추천만 할 뿐 결정권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부장님이 거절하신다면 굳이 강권할 생각 역시 없습니다.”

민홍기 과장 앞에서야 임원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대기업 직장인인 이상 임원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제 직원이라면 달 수 있는 가장 높은 부장을 달았다.
여기서 임원 진급이 안 되면 결국 언젠가는 명예퇴직을 당할 시점이 온다는 이야긴데 만약 임원 승진 후 능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엄청난 연봉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장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게 진짜 기회라면 말이다.

“날 추천하고 싶은 이유라도 들어보자. 너 오늘 나 처음 봤잖아?”


“얼굴은 처음 뵙지만 입사해서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결정했다고?”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라 영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영기획총괄부의 존재에 대해 좋은 이야기가 들리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부사장님을 위한


독립된 부서인데다가 부사장님이 직접 맡아서 집중하고 있던 사업의 매출이 몇 년 전부터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건 원재료 가격이 떨어져서 그런 거지. 그런데 뭐야? 설마...?”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습니다. 섣부르게 오해받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경영기획총괄부서에 부장님과 같은
인재가 썩고 있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 부장은 강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지금 맞는 이야깁니까?”
“솔직히 난 이유야 어찌 됐든 당신이 영업본부장이 된다고 상상해보니까 나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리고 빙빙
돌리지 마. 최 과장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우리를 보면 알 수 있는거 아니야? 설마 최 과장이 우리
앞에서 농담하려고 바쁜 사람 붙잡아 두겠어?”
“...”
“돌다리 그 만큼 두드렸으면 이제 답을 해. 생각해보겠으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든지.”

이때 영훈이 말했다.

“생각해보는 건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답을 내려야 합니다.”


“왜?”
“발을 애매하게 걸치고 간을 보려는 행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으니까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부장님, 직장인에게 임원이 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럼 대부분의 직장인이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겠다고 한다는 건 이리저리 상황 보면서 찔러보겠다는 말 아닙니까?”

고승현 부장도 거들었다.

“난 그 자리에서 제안 안 받아들이면 나중에 한직으로 내쫓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최 과장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렸었죠.”
“나도 그럴 거라는 이야기네?”
“그래도 나보다는 덜 할걸요?”

고 부장은 빙그레 웃는다.


어떻게 보면 너보다 직급은 아래지만 더 중요한 일을 제안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랑하는 것 같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당시에 좀 억울했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나쁘지 않았던 제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부장님도 그럴겁니다.”

박윤재 부장도 이렇게까지 된 마당이니 더는 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영업본부장 시켜주면 하지.”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뭐?”
“부사장님에게 프록시아 입찰 건이 문제가 생겼다는 얘길 듣고 알아보겠다고 하셨죠? 그럼 여기 강 실장님에게
브리핑 잘 받아서 부사장님께 전달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돼?”
“네.”

강 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상의 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야기해도 된다고? 부사장님한테?”

강 실장이 묻자 영훈이 태연히 말했다.

“반도체 설계 회사가 한두 개가 아니잖습니까. 비슷한거 몇 개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대놓고 미끼를 던지자고?”
“그거 안 물면 믿어도 되는 분인 거겠죠.”
“음... 일리는 있는데... 설마 이걸 물겠어?”
“솔직히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게 뭡니까? 서로 시끄럽고 얼굴 붉히면서 남의 가장 직장
잃게 만들고... 진절머리 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려면 믿고 함께 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누가 모르나? 다만 의심해야 할 사람이 부사장님이라서 그런 거지. 어쩌면 자네는 아직 부사장님을 별로
뵌 적이 없기에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 모른다.
부사장과 부딪히며 울고 웃었던 경험이 없기에 그의 사주 하나만 보며 냉정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영훈은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졌다.
마치 자신이 컴퓨터가 된 기분이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때그때 쉽게 판단하며 결정했는데 이게 다시 생각해보니 남들과 공유한 추억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던 거다.
이 상태로 10 년이 지났을 때 과연 사주만 보고 냉정히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앞날이 어떠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면 잘 될 거라고 응원하면서 밀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래서 무당이 될 팔자였나 하는 생각에 괜히 우울해진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전 그렇게 알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강 실장은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로 일어서는 영훈을 보며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생각했다.

“왜? 벌써 가려고?”
“부장님도 영업본부장 자리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제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실장님과 부장님이 알아서
작전 짜셔서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장님?”

영훈이 갑자기 쳐다보자 박윤재 부장은 괜히 긴장하며 답했다.

“어? 왜?”
“어차피 많은 고민을 해봤자 결론은 하나 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지 말고 어떤 게 회사를
위한 일인가만 생각하세요. 성주훈 부사장님을 위한 일과 다수의 현진물산 직원을 위한 일. 이 둘만 고려하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영훈이 나가고 벙찐 얼굴의 박윤재 부장을 보며 고승현 부장이 키득거렸다.

“졸라 웃기죠? 저도 그랬습니다. 당황스럽고 그런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어떻게 되는데?”
“왜, 재벌그룹 회장이 일 년에 몇 천억을 벌었다고 하면 별 감흥이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 산
아파트가 엄청 올라서 몇 억 벌었다고 하면 배가 엄청 아프죠. 그 차이입니다. 아예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방금 같은 상황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돼
요.”
“나도 한 긍정하는 사람이라 아마 너처럼 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당황스러운건 어쩔 수 없네. 그런데
실장님, 나 진짜 우리 보스한테 미끼 던져야 합니까?”
“들었잖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거예요?”
“시키는대로 안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걸? 아마 임원이 못 되고 저~기 인도나 알제리 같은 곳으로 발령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아, 우리 팀에 있던 양 전무님 아들 있었잖아? 걔, 내가 날려 보냈어.”

박윤재 부장은 웃고 있는 강 실장에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전 부사장님이 이 정보를 임 회장님께 흘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모르지. 부사장님은 그게 회사를 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럼 그게 맞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진짜 회사를 위한 생각이라면 그 정보를 가지고 사장님을 찾을 거야. 만약 그렇다면 부사장님과 함께 갈 수
있겠지.”
“뭐, 알겠습니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박 부장을 보며 강 실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확신에 찬 박 부장보다 침울한 얼굴로 나간 최 과장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침울한 얼굴로 비서실에 나타난 영훈을 보며 연희가 다가와 탕비실로 몰래 이끌었다.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요?”
“그냥 기분이 다운돼서 그럽니다.”

연희는 영훈이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본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래서 연희는 굳이 캐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갈래요? 내가 끝내주는 스테이크 집 알아놨는데.”

확 다가와 팔짱을 끼는 연희 덕분에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럽시다.”
둘이 잠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미소를 띤 채 탕비실을 나오는데 누군가 영훈을 불렀다.
"최영훈 씨?"

영훈과 연희가 뒤돌아보니 예전 고시원 집 딸인 박세영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영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맞춰지는 퍼즐조각(4) > 끝

< 맞춰지는 퍼즐조각(5) >

영훈은 세영의 뒤에 서있는 민희를 보며 그녀가 어떻게 비서실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저 찾아오셨나요?”


“네. 조재민 의원님께서 군산 버스터미널 조감도를 요청하셔서 문의드리려고 왔는데요.”

군산 버스터미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직 회사에 몇 없다.


그런데 의원실에서 홍보팀에 조감도를 요청하니 당황스러웠을 테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바로 찾아왔을까?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절 찾아왔어요?”


“의원님 보좌관이 최영훈 씨가 알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아... 알겠어요. 일단 안에 들어가 계실래요?”
“네.”

세영이 회의실에 들어가자 민희가 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고 들여보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민희는 웃으며 괜찮다는 영훈의 말에도 표정이 어두웠다.


영훈 뒤에 서있는 불편한 표정의 연희가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따라 미니스커트에 풀메이크업까지, 대놓고 신경 쓴 티가 나는 세영 때문에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영훈이 세영을 따라서 회의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앉으세요. 정확히 그쪽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일어섰다가 앉을 때 짧은 치마와 다리가 영훈의 시선을 끌었다.
“아, 네. 군산 고속버스터미널에 대한 조감도를 최대한 빨리 받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요? 어떤 디자인 컨셉을 원한다거나 완공시기라던가 어떤 문구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따위의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세영은 순간 당황했다.
솔직히 전화를 받고 최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잘됐다는 생각에 얼른 비서실로 올라갈 생각밖에 없었다.
평상시라면 이런 실수는 결코 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 영훈이 고시원에 있을 때의 어수룩한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에
일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했던거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미안해요.”


“음... 일단 알겠어요. 조감도 관련해서는 내가 봉선동 TFT 에 전달할 테니까 기다리도록 하시구요. 봉성동
시공사 사업권 홍보쪽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광주쪽 언론사 통해서 기사 위주로 나가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도 반응이 좋아서 오히려 우명건설보다 더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 것 같다.


솔직히 이건 영훈이 어떻게 마케팅을 하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 분야는 고승현 부장이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시민들의 반응이며 이게 조 의원에게 어떤 이익으로 돌아오느냐다.
그리고 군산 버스터미널을 조재민 의원이 원했다는 건 이걸 자기가 가지겠다는 뜻이다.
왜?
강주원 의원에게 주는게 아니라면 주지 않아도 될 만한 상황이 생겼다는 뜻이고 그건 곧 강 의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이다.

“네. 현진건설 쪽 마케팅 직원들과 같이 협업하면서 하는 거라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우는


중이에요.”
“배울게 많다니 다행입니다. 아, 아까 기다리라고 한 건 취소할게요. 조재민 의원실과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이제 조감도 관련해서는 신경쓰지 마세요. 아무래도 내가 직접 연락하는게 나을 것 같으니까.”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영훈이 일어나자 세영이 따라 일어나더니 슬쩍 물었다.

“저기... 그런데 아까 그 여직원 분하고는 많이 친하신가봐요?”


“연희 씨요?”
“네.”
“뭐... 친한 편이죠.”

아직 고백만 안 했을 뿐이지 사귀는 거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인터넷으로 연애를 배울 적에 사내연애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배웠다.

“아~ 그러시구나. 언제 한번 식사나 같이 해요. 잠시지만 가족처럼 지냈던 사인데...”

영훈은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승낙했을게 분명했지만 이번 만큼은 왠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쎄요. 제가 요즘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럼...”

괜히 더 말을 걸기 전에 후다닥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딱 마주치는 연희와의 시선.
아무래도 방금 전의 선택이 훌륭했던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조 의원실에서 군산 버스터미널 조감도를 요청했나봐요. 나한테 연락하면 될 건데...”
“그래요? 왜 그랬지?”
“물어보면 알겠죠. 그런데 눈빛이 왜 그럽니까?”
“아니에요.”

사실 연희는 아까 세영이 인사하는 와중에 빠르게 자신을 스캔하는 눈빛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눈빛이 그냥 예뻐서 쳐다본 게 아님은 그 동안의 숱한 견제와 질투를 받아오던 경험으로 알았다. 게다가
남자를 유혹해보겠다고 작정하고 온 차림새까지.
눈치를 보니 이 남자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 난 잠시 15 층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연희는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하며 회의실에서 나와 민희와 인사하고 비서실을 나가는 세영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영훈은 15 층을 비상구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가며 조재민 의원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최 과장님.]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홍보팀에 터미널 조감도를 요청하셨다구요?”
[의원님께서 상당히 놀라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정보를 미리 알고 계셨는지 말이에요.]

뭐가 걸리긴 했나본데 궁금했지만 차마 그게 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럼 터미널을 가지고 공약에 쓰시려고 하신다는 거죠?”


[네. 그래서 저는 미리 준비하고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만 하면 바로 받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거 곤란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 참 죄송스럽네요.]
“아닙니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얘기가 나오게 될 줄 몰라서 아직 준비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봉선동 쪽이 더 급하니까요.”
[아, 그것도 이야기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네요. 의원님께서 말씀 잘 해주셨습니다. 시공사 선정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성격이 느긋한 편이 아닌건 알고 있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그의 행동을 부채질 했음이 틀림없었다.
강주원 의원이 날아갈 거라는 정보를 듣고 바로 움직이는 걸 볼 때 이번 군산 시장에 자신의 정치 인생 전부를 걸
모양이다.

[의원님께서 현진물산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이번 일만 우리가 손 잡고 잘 헤쳐나간다면 의원님도 그렇지만


현진물산에도 상당한 이익이 돌아갈 겁니다.]
“그럼요. 그렇겠죠. 터미널 조감도는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혹시 원하는 컨셉 같은게
있으신가요?”
[정치인이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신경쓰는게 뭐겠습니까? 뭘 지어도 그럴듯하고 번듯하면서 어르신들 오가는데
편하기만 하면 최고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죠.”
[그럼 최 과장님만 믿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이 15 층 봉선동 TFT 로 들어서자 가장 안쪽에서 누군가와 통화중이던 고승현 부장이 손을
흔든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는 영훈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간 후 블라인드를 내렸다.
이제는 부서 직원들이 종종 영훈이 내려오는 걸 봐서 익숙해하는 것도 같지만 아직 누구도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블라인드를 치자마자 고 부장이 물었다.

“군산 버스터미널 지금 준비중인가요?”


“아직 사업 공고도 안 떴잖아. 준비라고 할 것도 없지.”
“사업 공고 기다리지 마시고 바로 준비해주세요. 조 의원 쪽에서 군산 시장 유세에 쓰려는 모양이에요.”
“준비하는거야 문제도 아니야. 현진건설 쪽 애들한테 잘 뽑아놓으라고 하면 되니까. 그리고 이것 때문에 건축
디자인 쪽 사람도 리쿠르팅 하려고 준비 중이야. 앞으로 건설 쪽 놀릴거 아니지?”
“그럼요. 건설이 돈이 된다면 놀릴 이유가 없죠.”
“현진건설 전신인 혜성기업이 아파트보다는 정부 발주 공사를 주로 해왔기 때문에 정부쪽 사람들도 혜성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아. 만약 조 의원이랑 커넥션이 계속 이어진다면 앞으로 정부 발주 공사 중에서도 덩치가
있는 걸로 받을 수 있겠어.”
“대략 뭐가 있을까요?”
“예전이야 항만이나 도로 같은 기간산업이 주였지만 지금은 각종 지식산업센터 같은 건물을 많이 발주하거든.
터미널도 사실 군산 버스터미널이 작아서 돈이 별로 안 되지만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한번 재건축 들어간다고 하면
공사비만 해도 얼마야? 아... 어떻게 지을지 몰라서 감이 안오긴 하는데 최소 수천억
짜리 공사일걸?”

영훈도 당연히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을 가본적 있다.


연희를 따라 서래마을 맛집을 간다며 지나갈 때 봤던 그 거대하고 오래된 건물을 다시 짓는다면 엄청난 공사비가
들거라는건 건설에 대해 잘 모르는 그도 알 것 같았다.

“그런거 하나 땄으면 좋겠네요.”


“혹시 또 알아? 혜성기업이 지금까지는 국내 발주 시공만 맡았는데 이제는 해외에서 수주하게 될지?”
“그럼 혜성기업 정말 날로 먹게 되는 거네요.”
“사실 지금도 날로 먹기는 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도대체 신영은행이랑
어떻게 딜을 한 거야?”
상체를 바짝 들이밀고 묻는 고 부장의 얼굴을 보며 영훈이 웃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주세요.”


“원래 그 어떻게가 중요한건데... 하여튼 알았어. 어쩔 수 없지. 조 의원한테 보내준다 치고... 봉선동은
어떻게 되는 거래?”
“이야기 끝냈답니다.”
“뭘?”
“시공사 선정이요. 걱정하지 말라는데요?”
“허... 진짜?”

고승현 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사실 조재민 의원과 일을 진행함에 있어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사비만 7 천억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설마 이 작은 현진건설이 딸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걸 땄다면...
고 부장은 아내의 친척을 통해 주식을 사야 한다는 말을 못 한다는게 너무도 서글퍼졌다.
안 그래도 혜성기업을 현진물산이 인수하면서 주식이 상당히 올랐는데 이 내용까지 공시에 올라간다면 주식은 지금
가격보다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될 거다.

“그렇다고 티를 내시면 안 됩니다.”


“그럼, 당연하지. 모른척하고 직원들 빡세게 밀어붙일 테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사장님한테는 보고 했고?”
“아직 안 했습니다. 지금 외부에 계시거든요. 어디 대사관이랑 뭐 한다는데 자세한건 듣지 못했습니다.”
“비서실에 있으면서 사장님 스케줄에는 관심도 없구만?”
“정말 사장님 보좌하려고 들어온 비서실이 아니니까요.”
“나 하나만 물어보자.”

뭐가 또 궁금한지 무게부터 잡는다.

“뭔데 그럽니까?”
“부사장님이 만약에 날아가면... 혹시 네가 부사장 할 거냐?”

이건 좀 놀랐다.
설마 자신을 부사장까지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너 하는거 보면 사실 부사장님이나 다를 거 없어. 어니, 따지고 보면 요 근래에 네가 부사장님이 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이뤘잖아. 그리고 사장님의 신뢰도 회사에서 제일 높고.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 안 들어?”

영훈이 피식 웃었다.

“절 부사장 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솔직히 다른 것보다 난 일이 우선이거든. 근데 너처럼 일 시원시원하게 잘하는 사람 못 봤어. 상사는
다른 어떤 것보다 능력이 우선이야. 그리고 일 제일 잘하는 사람이 위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꾸 비행기 태우시는 걸 보니까 뭘 바라고 있으신 것 같은데...”

영훈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자 고 부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정말 생각이 없어?”


“저 이제 입사했어요. 입사한지 반년도 안 됐는데 무슨 부사장입니까? 솔직히 내가 원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거 없어. 진짜야.”

다른 사람이라면 통했을 거짓말이지만 영훈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똑똑한 사람이며 그렇다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며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실적을 얻을 사업이면 어떡해서든 일을 성사시키는 추진력을 가졌기에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경영기획총괄 박윤재 부장을 상무에 추천하는 걸 보고 아무 생각이 안 들었을 리 없다는데 생각이 이르렀다.

“하하하! 내가 아니라 부장님이 부사장...”


“조용... 밖에 다 들린다.”
영훈이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이자 고 부장이 얼른 다가와 영훈의 입을 막았다.
영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뭘 돌려 말합니까? 간이 작으신 편은 아닌데... 뭐, 저도 고 부장님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 부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정말?”
“당장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싶은건 아니실거 아닙니까?”
“아유 그러면 도둑놈 심보지. 나 그렇게 계산 안 되는 사람 아니다.”
“네. 사장님께 잘 말씀드려볼게요.”
“정말?”

영훈이 웃으며 일어나자 고 부장이 눈빛을 빛내며 따라 일어섰다.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럼... 당연히 잘해야지.”

묵묵히 일만 하던 사람이 임원 승진이라는 눈에 보이는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 맞춰지는 퍼즐조각(5) > 끝

< 잔인한 겨울(1) >

12 월 크리스마스가 한창 다가오는 겨울.


산에서 내려오면 길거리에 한창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며 연인들이 꼭 부둥켜 앉은 채 돌아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 보니 빌딩 사이를 몰아치는 삭풍과 음악 하나 들리지 않는 거리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연희가 있기에 마음 한구석에 따뜻함이 들어와 있어 이번 겨울은 세상 따뜻하게 보내고 있었다.
퇴근 후 매일 맛집 투어를 다니며 데이트를 하니 세상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건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많은 남자를 사귀어본 건 아니었어도 수많은 남자들에게서 대시를 받아왔던 그녀였다.
영훈은 지금까지 만났던 그 많은 남자들과 완전히 달랐다.
쉽게 흥분하지 않았고 속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음흉하거나 음침하지도 않고 도를 닦은 스님처럼 항상 고요한 마음을 유지했기에 그의 곁에 있으면 그녀
스스로도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곁에 있기만 해도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그였기에 연희는 영훈과 시간을 보낼수록 마음이 깊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마주치자 괜히
찔린 마음에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얘! 너 잠깐 앉아봐라.”

하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왜?”
“일단 앉아봐. 앉으면 얘기할건데 뭘 묻니?”

연희는 송 사장 옆에 앉으면서도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미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고 있기에 듣기 싫었던 거다.

“어떻게 할 거야? 계속 피하기만 할 거야?”


“싫다고 했잖아.”
“싫으면 그냥 이거 안 한다고 해? 너 진찌 포기할거야?”
“솔직히 나보다 엄마가 더 원하는 거잖아. 우명그룹 사위 얻고 싶은 마음 알겠는데 난 싫어.”
“너 왜 그래? 신영투자증권 이형준 본부장 때는 좋다고 만났었잖아. 갑자기 왜 그러니?”

연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각을 바꿨어. 내가 잘해서 회사 키우면 되는데 굳이 재벌 아들이랑 결혼해서 평생 비위 맞추면서 살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지도 재벌이면서?”
“하여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선자리는 됐어. 이제 자꾸 물어보지 마.”
“너 이거 한번 취소하면 절대 못 돌려. 알지?”
“아, 안다니까!”
“짜증내지 말고.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야? 혹시 최 과장 때문이니?”

송 사장의 물음에 연희의 어깨가 움찔한다.


질문에 순간적으로 대답을 못하며 시선을 피하는 걸 본 송 사장이 말을 이었다.

“최 과장 사람 좋은거 알아.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그 사람 우리랑 달라. 너 결혼식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신랑 부모님 석에 아무도 없이 텅 비워둘 거야?”

연희는 고개를 홱 돌렸다.


생각보다 엄마의 반대가 약했기 때문이다.
정말 반대할 거라면 ‘이 미친년!’이라는 욕설과 함께 등짝을 후려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분위기 자체가 이것과
완전히 달랐어야 했다.
그런데 꼴랑 반대할 이유라는게 결혼식장에서 부모님석을 비워놓아야 한다는 건 너무 약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여기 말 많이 도는거 몰라서 그러니? 네가 고아랑 결혼했다는 걸 누구 한 명이라도 아는 순간 세상 모두가 알게
될걸? 이게 너 쪽팔리는 걸로 끝나는 것 같니? 최 과장이 너랑 결혼하는 순간 온 매스컴에서 쫓아와서
취재하려고 할 거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서 너랑 결혼했는지.”

고아라는 말에 잠깐 불끈 올라오려 했지만, 연희는 이 정도는 앞으로 들을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집안이라면 뭘 벌써부터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냐며 너무 오버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혼기가 찬 재벌가 딸이
단순히 연애만 할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는 견더야 사랑이지.”
“어머, 벌써 사랑 이야기까지 나오니? 너 얼굴 두껍다.”

연희는 빨개진 얼굴로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나도 사랑할 줄 아는 여자야. 왜 이래?”


“그래서 최 과장 사랑해? 벌써 둘이 사귀는 중이었어?”
“거의 그런 셈이지.”
“그런 셈? 아직 프로포즈도 못 받아놓고 김치국 마시는 거니?”
“엄마야 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으려는거 아니야? 최 과장 회사에 입사한지 반년도 안 됐어. 얼마나 만났다고
벌써 프로포즈야?”

송 사장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했다고 느꼈는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 그건 내가 너무 나갔다. 그래도 마음이 급한 걸 어쩌니? 우명그룹 사모님쪽에서 직접 연락 온 거야.
우명그룹에서 건설쪽을... 걔 누구니?”
“창훈이? 김창훈.”
“그래. 김창훈 상무. 걔한테 우명건설 넘긴다고 하더라. 우명건설 국내 1 위 건설사야. 현진물산보다 훨씬 큰
회사라고.”
“알아. 그런데 우리가 현진관광 인수하고 나면 사이즈가 우리보다 작아질걸?”
“너 요새 간 커졌다.”
“엄마도 사실 마찬가지지. 최 과장 덕분에 우리 회사 직원들까지 다 간 커졌잖아.”

한 마디도 안 지고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연희를 보며 송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도 최 과장 싫어서 이러는거 아니야. 그런데 잘 생각해야해. 결혼은 되돌릴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니까.
나중에 마음 바뀌어서 좋은 자리 알아봐달라고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이 정도면 거의 항복했다고 봐도 좋았다.


항복 뿐만이 아니라 나중에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분위기라 연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엄마에게 안겼다.

“고마워~ 내가 앞으로 잘할게.”


“마음이 조석지간으로 변하는게 넌데 내가 믿을 수 있겠니?”
“내가 장담은 못 하겠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라.”
“그래, 너 알아서 해라.”

사실 송 사장도 말했듯이 최 과장이 싫어서 그런게 아니었다.


능력이야 사실 부모 잘 만난 김창훈 상무보다 훨씬 나을 테고 고아라는 것도 시댁 식구들이 없으니 신경써야 할
것도 없었다.
말하는 거나 행동거지나 그 어느 사람보다 예의있고 경우가 바르니 사람만 보자면 나무랄데가 없다.
다만 재벌 가문의 사람이 일반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반인들이야 재벌가 자식이 일반인과 결혼하는 걸 보고 대단하다며 칭찬하지만 재벌가 사람들은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기 마련이다.
결혼할 때야 서로 사랑했겠지만 같이 살다보면 항상 좋을 수만 있을까?
결혼 전에는 죽고 못산다던 이들이 결혼 후에 이혼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니 애초에 사랑 없이 비즈니스적으로만 접근하는 재벌가끼리의 결혼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럼 나 올라갈게.”
“그런데 너 최 과장이 부담스럽다고 프로포즈 안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연희는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하... 엄마. 나 임연희야. 내 나이에 나보다 더 많이 프로포즈 받아본 사람 없을걸?”


“잘났다.”

송은채 사장은 혀를 찼지만 딱히 연희의 말이 틀리다고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딸인데도 얄미울 뿐.

인사이동이 휘몰아쳤다.
차지열 상무가 떠난 자리엔 놀랍게도 경영기획총괄의 박윤재 부장이 앉았다.
이제 박윤재 상무가 된 그는 자신의 승진은 모두 성주훈 부사장 덕분이라고 덕담을 건네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고
한다.
박 부장이 떠난 경영기획총괄의 성주훈 부사장은 새로 발령받아 오게 된 윤찬일 부장에게 말했다.

“오랜만이네. 철강팀에 있을 때 같이 했잖아. 그치?”


“맞습니다.”

윤찬일 부장이 머쓱하게 웃자 성 부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일단 직원들하고 얼굴 좀 익히고 있으라고.”


“어디 가십니까?”
“어. 난 좀 나갔다 와야겠어.”

사람이 처음 왔는데 오자마자 상관이 자리를 비운다고 하니 윤 부장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혹시나 부사장 라인을 타고 임원 진급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원까지 했는데 돌이라도 씹은 듯 굳은
얼굴의 부사장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선택이 잘못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알겠습니다.”
“수고하고.”

부사장은 윤찬일 부장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회사를 나왔다.


성주훈 부사장은 한참을 움직이던 중 운전하던 수행기사에게 말했다.

“저기 충무로 역 앞에서 차 세워.”


“네.”
“그리고 내가 운전할테니까 그만 퇴근해.”
“그, 그래도...”
“오랜만에 일찍 들어가서 애들 얼굴이나 한번 봐 줘.”
“알겠습니다.”

수행기사도 알고 있다.
자신을 생각해서 일찍 보내려는게 아니라 수행기사에게도 목적지를 알려주기 싫기 때문에 혼자 운전하려는 것임을.
그렇기에 계속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다.
운전대를 바꿔 잡은 성주훈 부사장은 목적지를 경기도 양수리의 오래된 카페로 잡았다.
마치 한가한 오후에 유유자적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처럼 한강변을 운전하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카페에 들어선 부사장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타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퇴사하더니 아주 팔자 좋아졌구만. 살 판 났어.”

눈을 뜬 양철기가 입꼬리를 올렸다.

“팔자가 좋아서겠습니까? 팔자가 고약하니 회사에서 그 창피를 당하고 쫓겨난 것 아닙니까?”


“그러게 허리를 잘 좀 놀리지 그랬나?”
“부사장님도 너무 그러지 마십쇼. 예전일 들추어 봐야 뭐하겠습니까? 인사이동 결과는 어땠습니까?”

성주훈 부사장도 민망하고 서로 불편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게 편했다.

“엉망이야. 박윤재를 덜커덕 영업본부장에 올려놓더니 해외자원사업부 고승현이를 특수사업본부장에 앉혔어.”


“특수사업부요? 그건 또 뭡니까?”
“이번에 새로 만든 사업부야. 봉선동 TFT 가 그대로 간다고 하는데... 자네는 모르지?”
“봉선동은 또 뭡니까?”

양철기 전 전무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퇴사한지 1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반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회사에 변한 것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그런게 있어. 하여튼 싹수가 있어 보인다고 지네 마음대로 막 갖다 앉혀 대니...”


“그럼 경영지원본부장은 누가 됐습니까?”
“해외자원사업부 윤정환이가 네 자리 맡았다.”

양철기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손에서 두둑 소리를 내며 주먹을 쥔다.

“시벌놈... 내가 그 놈 박쥐 같은 건 알고 있었지.”
“박쥐 같았다기보다 속을 잘 내보이지 않는 친구니 가능했을거야. 여하튼 윤정환이 그것도 한 칼 있기는 해도
간이 작아서 전무 할 놈은 못 되는데...”
“부사장님께 인사에 관련해서 논의도 안 했습니까?”

성주훈 부사장은 대답 없이 종업원에게 차를 주문하고는 양철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은 어떠신가?”
“아직 정정하십니다. 저한테 직접 변호사 소개시켜주시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직접 전화로
물어보십니다.”
“자네한테 신경을 많이 쓰는구만.”
“선배님이나 저나 회장님하고 쌓은 정이 보통 아니지 않습니까?”
“정? 그래봤자 우린 일꾼일 뿐이야. 착각하지 마. 자네는 일은 잘하는데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어. 그 선만 잘
지켰어도 부사장 자리는 내가 아니라 자네 게 됐을 거야.”
“크흠... 거 지난 일 그만 좀 이야기 하시지.”
“그러지.”

양철기는 성 부사장을 힐끔 보다가 말했다.

“회장님이 마음을 돌린 것 같소.”


“그게 무슨 소리야?”
“며느리가 생각보다 경영을 잘하니까 김태민 본부장에게 회사를 꼭 줘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 것 같습니다. 김태민
본부장도 회장님 앞에서 더 이상 현진물산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있어요.”
“허... 잘하긴 뭘 잘해?”

부사장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양철기가 쏘아 붙였다.

“화가 나도 내가 더 많이 날 겁니다. 날 그렇게 내쫓고 지금도 검찰이랑 씨름하게 만들어 놨는데... 내가 그냥


마음 같아서는... 아휴, 내 복장만 터지지.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회장님께서 마음을 그렇게 잡수신 것 같은데.
게다가 이제 프록시아까지 인수하면 뭐...”
“프록시아 인수 불발되면?”
“불발될 이유 있습니까? 1 조원이면 될 것 같은데?”
“프록시아 포기하고 그 돈을 헛짓거리에 쓰면 회장님이 좋아하실까?”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양철기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자세히 말씀 좀 해주세요. 어떻게 되고 있다구요?”

< 잔인한 겨울(1) > 끝

< 잔인한 겨울(2) >

현진중공업 경영기획본부장인 김태민은 아침부터 회장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비서실 직원들의 말에 바짝


긴장하며 들어섰다.
역시나 회장실에 들어서니 몹시도 언짢은 안색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회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찾으셨습니까.”
“아침은 먹었나?”
“네.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든든하게 채웠습니다.”
“잘했다. 모름지기 아침이 든든해야 하루가 활기차다.”
“명심하겠습니다.”
“현진물산 이야기는 들었고?”

요새 현진물산에 관해서는 입도 뻥끗 안하고 계셨기에 태민도 최근엔 현진물산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코발트 광산 인수전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왜? 이제 현진물산이 재미없나 보지?”
재미없냐고 묻는 건 현진물산에 흥미가 떨어졌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탈이 난다고 하셨던 회장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기에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창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다. 하지만 안테나는 놓지 않고 있어야지. 곤충들이 더듬이를 세우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다.
더듬이를 세우지 못하는 곤충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네, 할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태민은 변명 한 마디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는 되도 안는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진물산이 그 뭐시냐... 코발트 광산인가 하는 그거 입찰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던데, 못 들었어?”

태민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어제 저녁 양철기 전 전무에게서 걸려왔었던 전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을 내주면 어떻겠냐는 말에 바쁘다는 말로 넘어갔었던게 생각났다.
퇴사 이후 몇 번 만나봤지만 쓸 만한 이야기는 얼마 없고 순 자기 구제해달라는 이야기만 했었기에 어제 연락도
크게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임창호 회장은 태민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엄마가 태어났을 때 참 예뻤지. 어릴 때 어찌나 귀엽고 말을 잘하는지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예뻐하셨던 건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 키웠어. 너무 오냐오냐 키우니까 떠받들여 질줄만 알았지 남을 존중해줄 줄 몰라.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리 오래되고 능력있는 직원이라도 무시하고 깔아뭉개기 일쑤지.”
“네...”
“너도 그러냐?”

태민은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양철기가 왜 나한테 이야기한 걸 너한테 입 꾹 다물고 있었겠어?”

임창호 회장의 통렬한 호통.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양철기 전 전무에 대한 노여움도 올라갔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였다면 전화로 이야기해도 됐을 거 아닌가?
그깟 성범죄자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니 짜증이 치솟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양철기 전무가 잘렸을 당시, 그리고 그 이후로도 어머니는 그에게 굉장한 수모를 주었음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옆에서 말리기는커녕 같이 비아냥댔으니 그리 좋은 마음을 품지 못했을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양 전무가 자리에서 쫓겨나니까 칠푼이처럼 보이냐?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쫓겨나서 검찰까지 들락거리는
놈한테 고문 자리까지 내 준다고 약속했는지 말했지 않느냐. 그걸 왜 벌써 잊었어!”

임창호 회장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쾅 두들겼다.


평소에는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아직도 화가 날 때는 저렇게 기운이 펄펄 나신다.

“죄송합니다.”
“밟을 때는 확실하게 밟아라.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게 밟아서 네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게 만들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면 품어라. 이도 저도 못할거면 그룹 오너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

절대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반드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임창호 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얼굴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현진물산이 코발트 광산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이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양철기 전 전무가 회장님께 헛소문을 전했을
거라는 거였다.
투자전문 은행이나 사모펀드도 쉽게 할 수 없는게 반도체 회사 투자인데 기껏해야 자원 투자나 하던 회사가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다는 건 완전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다.

“그게 소스가 어디라고 하던가요?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성주훈이가 그리 말했단다.”
“성주훈 부사장이요?”

그게 정말이냐고 되물을 뻔했다.


아무 의미 없고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가까스로 참은 거였다.

“그가 없는 이야기를 했겠느냐?”


“아닐 겁니다.”
“그럼 이제 넌 여기서 무슨 생각이 드냐?”
“...”

태민은 일단 대답을 미루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프록시아 입찰을 포기하는게 맞는 것인가?
성주훈 부사장이 말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완전히 포기한 것인지 그냥 외부에 보여주는 스탠스를 저렇게 취하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저 말을 믿고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입찰가를 싸게 낸다면 현진물산은 기존에 예상했던 입찰가보다 싸게
프록시아를 인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진짜라면?
현진물산은 스스로 똥볼을 차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셈이다.
반도체 회사에 1 조를 박아 봐야 정말 결과가 좋다고 해도 최소 3 년은 맨땅에서 구를게 뻔했다.

“그 반도체 회사가 어딘지도 말해주었습니까?”


“그래. 회사 몇 개 말해주더라.”
회사 이름까지 나왔다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잘 하다가 갑자기 스스로 똥물에 빠진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래도 쉽게 믿기 힘든 내용입니다.”
“나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투자 움직임이 회사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건
주목해야겠지. 내가 현진물산을 그냥 내버려둔건 스스로 잘 하기 때문이었다. 은행 돈까지 끌어와서 얼토당토않은
곳에 쓰려는 꼴을 보려고 한게 아니었어!”
“만약 사실이라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두고 보지 않으면 가서 깽판이라도 칠 게냐?”

그걸 왜 자기에게 묻는단 말인가?


그룹 회장도 아니고 경영기획본부장이 계열사 사장이자 숙모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당연히 할아버지께서 불러다 혼을 내셔야...”


“뭐라고 혼을 내? 투자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평생 배만 보고 살아온 내가 반도체에 대해 쥐뿔이나 알아?
그리고 아직 돈을 집어 넣은 것도 아니잖니. 입찰을 포기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도 아니다. 바쁜 며느리 불러다가
실없는 사람 만들 작정이냐?”

태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원할 것 같은 해답을 찾아냈다.

“지금 바로 그 반도체 회사를 낱낱이 해부한 다음 현진물산이 해당 반도체 회사에 투자 결정시 대표이사의 투자가
중대한 실수임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대표이사 해임 건의를 올리겠습니다.”

그제야 임창호 회장도 표정이 풀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명심해라. 조용히 숨어 있다가 삽시간에 목덜미를 물어뜯는 호랑이가 무서운 거지 지나가는 사람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개새끼가 무서운게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양철기 그 친구한테 섭섭해하지 마라.”
“네?”
“네가 품을 그릇을 보여줬다면 서울에서 예까지 달려와서 보고했을 친구다. 워낙 경험이 많고 발이 넓은 친구니
잘 살펴서 네가 품어라.”
“알겠습니다.”
“나가 봐.”

태민이 고개를 숙이곤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태민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임창호 회장은 고개를 흔들며 조선소가 보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지 어미를 닮아서 성격이 급하고 품이 넓지 못하니 그게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 할애비가 없을 때 그룹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양철기 그 친구가 부족한 사람이긴 해도 붙여둘 수밖에 없는게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는 것 같으니...
“쯧쯧쯧...”

임창호 회장을 혀를 찼다.

“물었다.”

강노식 실장은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영훈은 그가 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부사장이 회사 기밀을 외부에 유출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결과로 드러나니 실망한 것일 테다.

“어떻게 됐답니까?”
“두 회사 모두 투자 제안이 들어왔다고 해. 그리고 두 군데에 투자 제안한 사모펀드가 골든브릿지고.”
“그쪽에다가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투자받아 볼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고 했지. 어쨌든 투자자를 못 구해서 쩔쩔매던
회사들이었고 돈 많은 사모펀드에서 코를 벌름거리니까 마침 딱 기회잖아.”
“투자 잘 받았으면 좋겠네요.”
“마음은 그런데 잘 되겠어? 아무래도 간만 보다가 싹 빠지지나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AMA 시스템’은 잘
가렸어.”

AMA 시스템은 톱스타 서가은의 남자친구인 김학수가 세운 반도체 설계 회사였다.

“그럼 부사장님 이야기는 됐고... 투자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하는게 적당할까요?”


“1 차 투자는 5 백억. 2 차 투자는 천억 규모로 잡고 있는데 아직 확정적이지는 않아. 그보다... 이거 꼭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말까요?”
“반대하려고 한다기보다 어떤 확신이 있는 거냐고 묻는 거지.”

기획조정실에서 AMA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재무구조는 물론이고 기존에 가진 기술력과 영업력, 판매루트 및 투자 이후 인재 영입 리스트까지 모두 살펴본
결과 내린 결론은 ‘아직 모르겠다’ 였다.
분명 괜찮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고 오너의 능력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아직 뚜렷한 실적을 내보인 회사가
아니었기에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이게 될 투자라는 확신을 주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 실장이 이 투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건 반도체 회사치고 투자금이 크게 투입되지 않고 만약
터지면 투자금의 백 배, 천 배 이상을 벌어다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이 회사 정말 잘 될 것 같거든요.”


“최 과장이 그렇다면야...”

이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승현 부장... 아니, 이번에 특수영업본부장으로 승진한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기껏해야 천억이면 그럼 우리가 쓸 수 있는 자금은 거의 다 써도 되는 거네?”


“빌딩은요?”
“계약 막바지야. 협의를 해봐야겠지만 비싸지 않은 금액이라서 금방 처리될 것 같아. 일단 담보로 4 천억을
빌려왔기 때문에 돈주머니는 빵빵해.”
“흠...”
이제 정말 거사일에 눈앞에 보였다.
고 상무가 물었다.

“신영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매입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요. 신영은행과 신영투자, 그리고 신영생명 모두 5% 직전까지
매입중이라서 거사날에는 못해도 18%는 매입 가능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현진관광 주식이 조금씩이지만 계속 오르고 있어. 현진관광에서 눈치를 못채야 할 것 같은데...”
“눈치를 챈다고 해도 설마 그게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긴 하지. 사모펀드도 아니고 1 금융권에서 매집하는 걸 보고 적대적 M&A 를 위한 흑기사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단지 신영금융그룹쪽에 문의를 넣게 되면 그쪽에서 답변해주기가 곤란할 거 아니야? 무슨 대답을
해주든 거짓말을 해야 할 테니까.”
“그건 그쪽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영훈이 신경 쓸 것 없다고 하니 고 상무도 바로 걱정을 접었다.


어쨌거나 저렇게 쉽게 주식을 매집할 수 있다면 일이 너무 쉬워졌다.
하필 무리한 호텔 인수로 회사 자금사정이 안 좋다는게 주식시장에 너무 잘 알려졌다보니 주식 가격이 하방압력을
받고 있었고 매도세가 강하다보니 주식의 반짝 반등에도 크게 매수세가 달라붙지 않고 있었다.
일이 너무 순조로워 불안할 지경이라고 할까?

“후... 긴장되는군.”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내일 오전에 현진관광 주식 3%를 가지고 있는 고성저축은행 은행장 만나기로 했다. 그것부터 시작이야.”

고승현 상무는 긴장감에 괜히 허벅다리를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이 긴장은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진정되기 힘들 것 같았다.

< 잔인한 겨울(2) > 끝

< 잔인한 겨울(3) >

나흘 뒤, 15 층 회의실.

[현진물산 프록시아 인수 포기하나?]


[현진물산이 호주 코발트 광산업체인 프록시아 입찰을 포기할거라는 소문이 증권가를 돌고 있다. 세원
인터내셔널과 골든브릿지 컨소시엄이 이번 입찰에 전격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인수가격이 예상치보다 높게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다. 현진물산
관계자는 해당 소문을 찌라시로 일축하며 아직 호주 현지에 입찰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고...]
영훈은 아침에 뜬 기사를 핸드폰으로 확인하곤 고 상무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늦게 뜨긴 했네요.”

부사장을 통해 말이 나간 직후 증권가에 소문이 돌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입찰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에야


증권가에 소문이 돌았다.

“굳이 소문을 내야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우리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 떠보려고 뿌린걸 거야.”
“부사장님은 어때요?”

영훈의 물음에 강 실장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어제는 출근하자마자 사우나에서 쉬다가 오후에 올라와서 대충 시간만 때웠다고 하던데? 아예 의욕을 잃은 것
같아.”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의욕을 잃은게 아닐 겁니다.”


“그럼?”
“지금은 자신이 할 일이 없으니 체력을 비축하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무언가에 집중할 때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한다고 해요. 그러니 자신이 움직여야 할 순간 모든 심력을 쏟아낼 수 있게 준비하는 겁니다. 고작 이런
정도의 일로 자신의 자리를 포기할 사람이 아닙니다.”

강노식 실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난 20 년 가까이 부사장님을 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최 과장이 부사장이랑
만나본 시간이 고작 몇 시간 안 되지 않나?”
“짧은 순간의 만남이라고 해도 사람을 깊게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겁니다.”
“비밀엄수야 걱정하지 마.”

강노식 실장은 며칠 전에야 봉선동 TFT 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지 알았다.


당시 느꼈던 놀라움은 그가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아마 조재민 의원이 구색으로 갖춰놓은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까지 갖다 바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 놀라겠지만
그건 이번 인수전과 관계가 없는 사실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 실장은 봉선동 TFT 가 정말 순수하게 구색으로만 갖춰놓은 조직으로 알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만 참으시면 됩니다.”


“나야 어차피 AMA 시스템 투자건만 손대고 있으니까 나머지 일은 지켜만 보면 되는 것일 테고.”
“유연탄 광산을 잘 처리해주셔서 그런 거죠.”
“내가 처리했나? 최 과장이 처리하고 나야 설거지만 한 거지.”

중국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유연탄 광산이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년초는 지나야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겠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정상가동을 시작해 떨어졌던
주가도 빠르게 원상회복됐다.

“영업팀 고생했으니 회식이라도 시켜줘야 하는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천항에 들어와야 할 유연탄이 당장 막혔으나 영업팀이 발로 뛰며 구해와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박 상무 발령받으면서 유연탄 때문에 정신없다고 회식도 못 했잖아. 잘 처리됐으니 박 상무 승진기념 겸해서
회식하겠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 현진관광 인수전이 코앞이니까 우린 우리 일만
집중하자고.”

영훈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됐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사장님은 어때?”
“여러가지 생각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얼굴이 밝지는 않으세요.”
“흠... 그렇겠지. 나 같으면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의외로 잘 버텨내고 계십니다.”
“그게 희한해. 사장님이 그렇게 강단 있는 분인지 몰랐거든. 감히 회장님 뒤통수를 치고 계열사를 먹어 치울
생각을 하니까 말이야.”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현지 직원들은 어떻게 할 거야?”


“입찰 며칠 전에 복귀시키면 빠르게 눈치챌 겁니다. 그냥 느긋하게 관광이나 하고 오라고 하세요. 입찰 현장에
직원 몇 명 보내놓고 눈치나 보게 하시고.”
“그게 맞겠지.”
“매입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신영금융에서 예상처럼 매입을 다 완료한다고 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진관광 주주들에게 추가 매입한 지분까지
다해서 간신히 50% 가능할 것 같아. 현진관광 주식을 2 천억으로 교환한게 컸어.”
“주주들이 비밀엄수는 잘 지켜줍니까?”
“시가의 세 배를 쳐주기로 했으니까. 지정한 날 시간 외 거래를 통해 거래하는 거라 그전까지 비밀유지 안 해주면
앉아서 세 배 차익을 먹을 수 없잖아. 일단 고성저축은행 지분 3%와 도원시멘트에서 1.5%, 그리고 명동
사채에서 유명한 큰손이라는 유지란 씨한테서 2% 확보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적게는 세 배,
많게는 다섯 배까지 주기로 약속하고 매입하기로 했어.”
“잘됐네요.”
“유지란 씨는 좀 어려웠어. 생각보다 아주 까탈스럽고 보통내기가 아니었거든.”
“세 배나 쳐준다는데도 어려웠습니까?”
“가격 때문이 아니었어. 이상한 조건을 걸어서 문제였지.”
“이상한 조건이라뇨?”
“사장을 만나고 싶다는 거야. 만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는 거였어.”
“그래서요?”
“지금은 곤란하다고 했지. 일이 끝나면 약속을 잡겠다고 했고 순순히 승낙했어.”
“궁금하네.”
“나도 마찬가지야. 사장님께 보고하니 알겠다고 하시더라고. 두 여성 파워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나도
궁금해.”
“어쨌든 일이 잘 풀렸습니다.”
“남은 건 피델리티 자산운용이 가진 2.3% 지분인데... 마침 피델리티 아시아 지부 CEO 가 일본에 있다고 해서
내일 다녀올 생각이야. 잘 처리되면 무난하게 50% 확보 가능할 것 같아.”
“넘겨줄까요?”
“넘겨주지 않아도 우리쪽을 지지해준다고 위임장만 써주면 되는데 아무래도 세 배나 쳐준다고 하면 넘기지 않을까
싶어.”
“만나보면 알겠죠.”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서 도와주고 싶지만 모든 일을 자신이 다 처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능력있고 똑똑한 사람들이니 잘 할 것이다.

현진관광 사장실.
임지은 사장은 여유 있게 홍차를 즐기며 경제 뉴스를 시청 중이었다.
사실 임 사장은 경제 뉴스를 그다지 재미있게 보지 않았지만 사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경제 돌아가는 걸 모르는 안
되기에 억지로 보는 거였다.
그래도 경제 채널 중에 재밌게 보는게 있다면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해 궁금해하는 시청자가 전문가와 직접
통화하면서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는 아파트를 얼마 대출을 끼고 샀는데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아서 고민이라거나 주식을 얼마에 샀는데 물려서
고민이라는 등의 사연을 보고 있으면 은근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런 안타까운 사연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상담받을 사연은 현진관광에 묶인 내 주식, 이제 팔면 될까요? 라는 질문을 보내주신 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임 사장은 마침 오늘은 자신의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로운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근 몇 년간 계속 지지부진하던 주가가 몇 주 전부터 조금씩 상승중이었기에 임 사장도 요새 주식 오르는 맛을
느끼는 중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중랑구에 사는 주부 김순옥이라고 합니다.]


[현진관광에 주식이 묶이셨다구요? 투자한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3 년 전에 누가 호텔주를 추천해주더라구요. 경기 잘 안 타고 매출 꾸준하고... 또 은근히 배당 이익도 있어서
쏠쏠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침 돈이 생겨서 투자를 하게 됐습니다.]
[3 년 전이면 대략 2 만 원에서 2 만 5 천 원 선인거 같은데 맞습니까?]
[맞아요. 2 만 2 천 원에 샀거든요.]
[그럼 지금 원금 회복이 가까워져 오는 수준이네요.]
[그래서 고민인 게 요즘 현진관광 주식이 반등하니까 이걸 원금회복이 가까워 오는 이때 팔아서 원금회복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계속 들고 있어야 하나 고민이에요. 막상 팔고 나서 주가가 계속 오르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내가 샀을 때는 떨어졌다가 원금회복 할 때 팔고 나니까 주식이 계속 쭉쭉 오를 때, 정~말
속상하죠.]

전문가는 현진관광 주식 차트를 띄워놓고 설명을 이어갔다.

[차트상으로 보면 만 7 천 원에서 2 만 천 원 사이의 박스권을 오가던 현진관광의 주식이 두 달 전쯤에는 만 7 천


원의 지지선을 깨고 급락하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현진관광의 주식이 한 단계 추가 하락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는데 그러다 갑자기 11 월 24 일자에 대규모 거래량이 터지면
서 V 자 반등을 시작하죠. 그리고 지금 오늘 2 만 천 원의 저항선을 돌파하면서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궁금한게 도대체 왜 주식이 오르는 건가요?]

전문가는 난감한 얼굴로 설명했다.

[사실 현진관광의 주식이 반등하는 건 어떤 모멘텀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대표적인 경기방어주인데다가
저평가주이기 때문입니다. 실적이 꾸준하면서 얼마 전에 인수한 페이먼트 호텔 때문에 생긴 부채를 상환하면서
재무적으로도 상당히 건전해졌어요. 때문에 기관에서 현진관광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
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썰이 길었지만 결론은 자기도 이유를 잘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럼 주식이 계속 오를까요?]


[현재 증권사 리포트를 보면 전부 현진관광 주식의 목표가로 2 만 천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스권을
돌파한 상황이라 조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힘을 받는 모습이거든요.]
[그럼 목표가를 얼마로 잡으면 될까요?]
[저 같으면 목표가를 2 만 3 천 원 정도로 잡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박스권 돌파로 강한 힘을 보여줬지만
그래도 한번은 쉬어주는 모습을 보여줄 테고 그때 부분 매도하며 차익실현하는 게 올바른 매매라고 보여집니다.]

이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뭔지 모르게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뭔데?”
“사장님, 지금 우리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방금 8% 돌파하는 것까지 보고 왔습니다.”
“8%? 정말?”

임지은 사장이 화색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하루에 8% 이상으로 올랐던 적이 얼마 없었다.
근 몇 년간 지루한 박스권 횡보 장을 보여주던 주가가 요 근래 들어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던 와중에 오늘 8%가
넘는 상승을 보여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CEO 는 모름지기 주가의 상승으로 주주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들 사장 자리가 위태롭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주식이 올라준다면 대외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식이 이 정도까지 오를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주식을 사고 있는데?”
“국내 기관에서 올리는 걸로 보이고 있는데 정확하게는...”
“그럼 뭘 걱정해? 걱정해야 할 이유가 있어?”

비서실장은 무언가를 이야기 하려다가 다물었다.


적대적 M&A 의 가능성을 꺼내보려고 해도 대기업 계열사를 상대로 시도된 역사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시장 역사상 적대적 M&A 가 성공한 사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해외 투자자도 아니고 국내 기관에서 사들이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그래도 특별한 이유 없이 주식이 상승하는건 전례가 없는 지라...”


“요즘 경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경기방어주에 이목이 쏠려서겠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 전에 신영은행 대출까지
갚았잖아. 재무적으로도 건실해졌고.”

임지은 사장은 방금 전에 전문가가 해주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비서실장은 그녀의 반박에도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경기방어주라서 이목이 쏠리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조금씩 점진적으로 상승해야 할 텐데 지금 상승폭은 마치


작전주가 매집했다가 이후에 폭발시키려는 모습인듯 강력합니다. 오전에만 거래금액이 백억을 넘겼으니까요.
그리고 2 천억을 갚긴 했지만, 아직 부채는 상당히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급한 불만
끈 셈인데...”
“주식투자자들이 그런거 어떻게 다 생각하겠어?”

그때, TV 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현진관광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어요! 어떡해요?]


[오늘 현진관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라서 그런 걸까요? 상당히 힘이 좋은 모습을... 어? 벌써 10% 넘게
오르고 있습니다.]
[선생님, 벌써 목표가가 다가오고 있는데 일단 매도 걸어놓을까요?]
[아, 네. 일단 일부만...]

전문가가 땀을 닦으며 말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상담자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세상에! 순식간에 팔렸어요! 계속 올라욧!]

임지은 사장은 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주식차트를 켰다.


현진관광의 주식이 미친 듯이 매도물량을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16%를 돌파하는 중이었다.
각 증권사 HTS 에서는 일제히 주목할 만한 주식으로 현진관광을 지목했고 거래량은 폭증하기 시작했다.
주식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 잔인한 겨울(3) > 끝

< 잔인한 겨울(4) >

이날 현진관광 주식은 장중 –3%에서 28%까지 등락을 거듭하며 마치 작전주처럼 움직여댔다.


그 누구도 현진관광 주식이 이렇게 날뛰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일단 지속적인 상승추세 와중에 폭발한 거래량은
수많은 개미들을 홀리게 만들었다.
당연히 거제에서 카타르 LNG 선 발주에 목을 메고 있는 현진중공업 경영진들 귀에도 이 소식이 안 들어갈 수
없었다.

“뭔데? 뭔데 이 난리야?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임창호 회장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수많은 임원들 중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임 회장의 시선이 태민에게 돌아갔다.

“너는 뭐 아는거 없냐?”


“호재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오히려 주가가 빠졌으면 빠졌지 이런 비정상적인 상승은 확실히 이상합니다.”
“누가 쓸어 담는 중이야?”
“알아본 바로 국내 기관에서 주로 매입했다고 합니다. 외국자본은 신영모건스탠리에서 운용하는
아시아코어펀드에서 추가 매입한 것으로 알려왔습니다.”
“직접 확인한 거야?”
“네. 신영금융 본사에 문의해서 확인했습니다.”
“왜 갑자기 우리 회사 주식을 샀대?”
“투자 목적이라고만 밝혔습니다.”
“호텔 주식이 우리 하난가?”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확한 투자 목적이 있다고 치더라도 잘 밝히지도 않구요.”
“그럼 아무도 모른다는 거네? 누가 우리 회사 주식을 미친 듯이 사고 있는데 아무도 이유를 몰라?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임창호 회장의 호통에 임원들은 다들 고개를 숙였다.


사실 모르는게 당연했다.
현진관광 주식 급등은 따지고 보면 현진중공업에 상당한 호재다.
현진중공업이 가진 현진관광 주식이 무려 6%다.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못해도 수십억, 아니 백억 이상의 평가금액 상승이 있을 거다.
그럼에도 임 회장이 호통을 치는 이유는 혹시나 회사 경영권에 이상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인데 적대적 M&A 가
어디 쉬운가?
생뚱맞은 외국 자본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추진하려면 주식을 매집하는데만 한세월이다.
그리고 국내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양의 주식의 의결권을 외국 자본이 확보하기도 힘들다.
이러니 적대적 인수합병을 생각해냈다가도 슬그머니 입이 다물어지는 거다.
결국 보다 못한 태민이 다시 나섰다.

“별일 아닐 겁니다.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면 분명 티가 났을 게 분명하고 국내 자본은 안 좋은 마음을 먹어봤자


기껏해야 명동 사채시장이랑 조폭들 엮여서 작전주 만드는게 다 아니겠습니까?”
“대주주도 없이 작전주를 만들어? 네 어미가 도와주지 않고 작전이 가능하기는 하냐?”
“최악의 경우를 말씀드린 겁니다. 증권가에서도 그저 지속적인 반등추세를 타고 개미들이 몰리면서 일시적으로
거래량이 폭발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끄응...”

임창호 회장도 더는 역정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라고 해서 특별히 의심이 가는게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 뭐라고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던 거다.
이때 임원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실 직원이 후다닥 달려왔다.
파래진 안색이 뭔가 급박한 일이 생겼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기에 모든 임원들은 비서실 직원의 입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게... 지금 신영모건스탠리 아시아코어펀드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요청했습니다.”
“뭐? 무슨 이유로?”
“임지은 사장의 무능력한 경영과 전년과 이번년도 배당률을 문제삼았습니다. 실적이 떨어지는 호텔을 매각해
주식을 부양하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지급하라고...”

임 회장은 다 듣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

“미친놈들이네?”

태민은 아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로 자신이 한 말을 뒤집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주식이 갑자기 변동이 심한 것도 그렇고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까는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어?”

태민은 비서실 직원에게 물었다.

“신영모건스탠리 아시아코어펀드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오늘까지의 주식 지분 변동사항을 공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10%는 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임 회장이 끼어들었다.

“10%나? 그럼 주식을 거기서 끌어올린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 거래량이면 다른 곳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래량이 너무 큽니다.”
“태민아.”
“네, 회장님.”
“아무래도 주식 가지고 장난을 칠 모양이다.”

태민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무기삼아 회사를 위협해 주식을 비싸게 처분하려는 수작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아니면 갑자기 저렇게 나올 이유가 없지. 지금까지 저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잖아.”
“그렇긴 합니다. 저렇게 소동을 벌이고 가진 주식 가격의 몇 배를 챙겨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으니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국내와 관계가 전혀 없는 외국 자본이었는데 신영모건스탠리는 신영은행과 관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라. 내가 신영금융 이경호 회장을 만나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지 임창호 회장은 태민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넌 주주들을 만나봐라. 주주명부에서 1% 이상 소유한 주주들을 직접 찾아서 위임장을 받든 주식을


사오든 해.”
“자금이 부족합니다. 얼마 전에 신영은행 2 천억 대출건도 주식교환을 통해 겨우 마련했던 겁니다. 현재
현진관광이 가지고 있는 현금이라 해봤자 백억이 채 안 될 겁니다.”

임 회장이 쾅 탁상을 내리쳤다.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도대체 회사를 어떻게 운영했길래 회사에 백억도 없어!”


“그래도 연말 호텔 특수 기간이라 매출이 오르는 중이라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상당한 금액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조금이 언제인데?”
“연초는 지나야...”

관광업의 최대 성수기는 7 월 말부터 8 월 초까지의 여름 휴가와 크리스마스때부터 1 월 중순까지의 겨울방학


기간이다.
이 기간은 최대 피크 기간이기에 유명 리조트 회원권을 가진 회원들도 추첨을 통해 당첨되어야 갈 수 있고 비행기
값은 엄청나게 올라간다.
당연히 호텔 숙박 비용 역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공실 없이 꽉 들어 채울 수 있는 기간인데, 문제는 그
기간이라고 바로 돈이 들어오는게 아니라는 거였다.
누가 호텔에서 현금으로 결제하겠는가?
당연히 카드로 결제할 것이고 카드사는 수일 후에 그 결제한 대금을 쏴주게 된다.
그 며칠이 문제였다.

“그럼 위임장이라도 받아와! 주주총회에서 네 애미 끌어내리겠다고 하니 그놈들 입이라도 막아야 할 거 아니야!


이대로 그놈들의 협박에 넘어갈거야!”
“알겠습니다.”

임 회장은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중국발 조선업 불황이 닥쳤을 때 이후로 이런 두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움직여본다고 한들 뾰족한 방법이 없었고 급기야 아시아코어펀드 측에서 공개매수를 선언했다.
주식은 또다시 급등하기 시작했고 현진중공업과 현진관광은 뒤늦게 백기사를 찾으며 현진관광 주식 매수에
동참했다.
2 만 원이었던 주식이 5 만 원을 돌파했을 때 드디어 주주총회가 열렸다.

광화문 인근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가장 안쪽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영훈이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영투자증권 본부장에서 신영은행 그룹전략부문 전략기획팀 상무로 직책이 바뀐 이형준이 대답했다.

“우리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한 거고, 너희 쪽도 잘 끌어모았네. 막판에 부족한 주식 채운다고 급하게 흔들어서
괜히 손해만 보고 주식 확보도 못하는가 싶었는데 말이야.”
“능력있는 분들이 알아서 잘 하셨습니다.”

약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조용히 매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시장에 나온 매물을 급하게 매수하느라 주식이 급등하게 된 거였다.
어쨌거나 일은 잘 마무리됐다.
이미 신영금융쪽에서 가진 주식이 워낙 많았고 신영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 교환했던 주식이 12%나 됐다.
사실상 거의 이긴 싸움에서 시장을 통해 부족한 주식을 매집하는 과정으로 마무리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영훈은 그 과정에서 괜히 자신이 나쁜놈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개미들이 달라붙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게 다 경제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기업을 인수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과정에 소액투자자들이 붙을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우리야 문제가 아닌데 상무님 쪽은 괜찮습니까?”


“아주 괜찮을 리가... 너희 꼰대가 우리 회장님 면담 신청했어. 회장님이야 모건스탠리가 한 일이라고 싹 잡아
떼겠지만 나중에 그 주식 위임장이 현진물산을 지원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뒷일은 내가 감당해야 해. 물론
회장님도 알고 하는 거지만.”
“회장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형준은 입을 씰룩이며 커피잔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우리라고 어디 해외 투자은행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엄청난 거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 다만 그럴 환경도


되지 않았고 뭘 하려고 하면 오만 잡것들이 꼬이면서 발목을 잡으니까 그랬지. 뭐,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그런데 손자인 내가 적대적 M&A 로 크게 먹어보겠다고 하잖아.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하셨지만 그래도 날 믿어주셨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셨나
봐. 그리고 지금 흘러가는 상황도 긍정적이고. 당장 평가이익 금액만 4 천억이 넘어.”

꼭 돈이 되어서만이 아니라 이번 기회로 손자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다.


“다행스럽군요.”
“날 못 믿으면 지금 주주총회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만나줄 이유가 있겠어? 이미 그 전에 만나서 다
해결해줬겠지. 니네 회장님 지금 엄청 열 받았을 거야.”

사실 영훈은 임창호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현진물산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그것도 물어보고 싶었다.

“아마 그렇겠죠.”
“이제 어떡할 거야? 1 조에 다 먹어치우면 깔끔하긴한데 그러면 진짜 현진중공업하고 전쟁이야. 알지?”
“전쟁은 이미 시작한거 아닙니까?”
“대국적인면에서 보면 이 정도는 국지전이라고 봐야지. 여기서 물러나면 서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열사 분리를 하든가.”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손에 들어온 걸 토해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현진중공업이나
현진관광은 그 주식 살 돈도 없을 겁니다.”
“휴전은 하더라도 깃발 꽂은 데까지는 우리 거다?”
“양보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영훈은 지금쯤 주주총회에서 무슨 말이 오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시끌벅적한 현진관광 본사 대회의실.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점퍼를 대충 입고 온 소액주주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단상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경제지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분위기를 담느라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회사 경영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페이먼트 호텔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채는 전부 해결됐으며
재무구조는 건실합니다. 때문에 오늘 임시주총에서 건의할 안건은 무의미한게 아닌가...”

현진관광 이진열 부사장이 해명하는 와중에 마흔 중반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이진열 부사장은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계열사 직원이었기에 오고가며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현진물산의 고승현 부장이었다.
아니, 이제 상무가 됐다고 하던가?
그런데 왜 저 자가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이의 있습니다. 임지은 사장님께서 경영을 맡은 이후 외형 확장에만 열을 올려 주식은 계속 2 만 원대를


맴돌았고 배당률도 극히 낮았습니다. 현진관광이 가진 잠재력이 이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며 주주의 입장에서
회사가 이런 상황에 이른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때문에 임지은 사장님의 경영능력에 의
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진열 부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저 위협을 주면서 주식을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수작인줄 알았는데 현진물산 관계자가 경영진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상상을 벗어나는 상황이었다.

“배당에 관한 사항은 경영진의 회의를 통해 다음 분기에...”

고승현 상무는 이 부사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진물산은 현진관광 주식 16%를 보유하고 34.1% 지분의 위임을 받은 대주주의 권한으로 대표이사
해임을 건의하겠습니다.”

이진열 부사장은 그제야 고승현 상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송은채 사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잔인한 겨울(4) > 끝

< 잔인한 겨울(5) >

을지로입구역에는 상당수의 금융회사 본사가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중 신영금융지주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 있는 신영금융지주 본사 사옥의 지하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한 대형 세단 안에는
현진중공업 임창호 회장이 타고 있었다.
현재 그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한 상태였다.
며칠 전부터 만남을 요청했음에도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다 이제야 찾아오면 잠시 시간을
내주겠다는 식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가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해서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을 임시주주총회에서 뭔가 안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임시주총이 열리는 현진관광 대회의실에 들이닥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로 가봐야 위신만 떨어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구만. 경제인연합회 오찬 때 보고 거의 반년 만인가?”

임창호 회장과 나이가 엇비슷한 이경호 회장은 정성스레 난을 손질하고 있었다.

“무릎이 쑤셔서 서울에 자주 올 수가 있어야지. 한가하게 난이나 손보고 있으면서 그리 매정하게 나올 수가


있어?”

임창호 회장이 붉은 가죽 소파에 몸을 실으며 퉁명스레 말하자 이경호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단단히 뿔이 나셨구만.”


“농을 치는게 아니야. 내가 뭐 자네에게 섭섭하게 대했나? 날 물먹이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이 중요한 시기에
내 연락을 피할 리 없잖아.”

임 회장의 섭섭한 말투에 이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상석에 앉았다.

“그러지 마시게.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자네랑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허나...
자네나 나나 이제 곧 물러날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보면 젊었을 적에 참 힘들었어. 그 가난했던 시절에 살아보겠다고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며 식당일에,
조금 근육이 생기고 나서는 공사장 잡부까지 안 해본 게 없었지. 그 때는 삶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살만했었던 것도 같아. 힘들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왔거든.
희망이 있었지.”
“갑자기 옛날 일은 꺼내 뭐해?”
“그렇게 상고를 나와 은행일을 시작한 이후부터 내 세상이었어. 뭘 하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자네도 그런
때가 있었잖아. 한창 팔팔했을 땐 조선소 확장해보겠다고 나한테 돈도 꾸었었던 게 기억나네.”
“이 양반아, 내 자네 말 듣다가 숨 넘어가겠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일 넘기세. 이제 손자가 재롱을 어떻게 떠나 구경만 하고 살아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임창호 회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 아들은 재주가 많아 믿고 맡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새끼들은 아직 부족한게 많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가르쳤음에도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애들 같아. 뭘 하든 똑바로 하는게 없는데 내가 어떻게 손을 놓나?”

이경호 회장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흘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며느리와 손녀딸이 저렇게 똑똑한데?”


“뭐라?”
“내 그동안 우리 손자... 자네도 알지? 형준이라고. 내가 전에 몇 번 데리고 다니긴 했는데 말이야.”
“뭐, 봤다고 치세.”

임창호 회장의 성격상 빈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기억나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안타깝군. 내가 우리 형준이 자랑하는 맛으로 요즘 지내는데 말이야. 어쨌든 형준이 녀석이 현진관광 투자 건을
물고 왔어.”

그제야 기다리던 화제가 나왔는데 임 회장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투자건을 가지고 온게 하필 이 회장의 손자라는 말.
자칫 잘못하면 두 기업 간의 싸움이 될 수 있는 말을 이 회장이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이건 둘 중 하나다.
현진그룹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거나 지금 이 사태가 현진그룹에 큰 손해가 아닌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일단 임 회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신영모건스탠리도 그렇고 신영투자증권도 요즘 실적이 부족해서 굉장히 난감한 상황인 건 자네도 알거야.
미국하고 중국하고 싸우는 통에 주식이 영 재미가 없거든. 회사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긴 한데... 한국
사람은 ‘정’이라는 게 있어서 자네 뒤통수를 친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네.”
“그런데도 눈 딱 감고 신영모건스탠리에 넘기려고 한 건가?”
“아니야.”
“뭐가 아닌데?”
“넘기려는 데가 신영모건스탠리가 아니라고. 현진물산이네.”

임창호 회장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줄 알았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쉽게 믿기지 않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현진물산이 왜 현진관광을 먹으려고 하겠나?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네. 자네 며느리,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장부야.
툭하면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니 다 흰소리였구만.”

임 회장은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지금 이 판을 다 짠 게 현진물산이었다고. 우린 거기에 같이 좀 어울려서 놀아주고 품삯 좀 받은거라네.”
“그럼 지금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해임 건의를 했을 거네, 현진물산에서.”

임창호 회장은 격동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그 애가 그런 배짱이 있다고?”
“그걸 왜 우리한테 묻나? 자네 며느린데 자네가 더 잘 알 거 아닌가?”
“몰랐으니까 묻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임 회장에게 이 회장이 귀를 막고 말했다.

“소리 좀 지르지 말게. 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내가 자네처럼 우아하게 계산기만 두드리면서 살지 않아서 그러네. 작게 말하면 기계 소리 때문에 듣질 못하니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게 습관이 됐네. 됐나?”
“거 성격 하고는... 자네 며느리가 현진관광 주식을 현금 2 천억이랑 교환한 건 알지?”

그제야 다시 임 회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알지.”
“우리 그룹이 가진 현진관광 주식이랑 본인이 가진 주식을 가지고 현진관광을 먹으려고 판을 만들었네. 이미 한참
전부터 소액주주들을 설득하고 위임장을 받아왔을 거야. 대표이사 해임은 막을 수 없을 거네.”
“허허...”

임창호 회장은 허탈한 웃음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그런 임 회장을 바라보는 이 회장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아닌 흥미로움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딸이 가진 걸 며느리가 가져갔을 뿐이네. 누가 가지든 자네 핏줄 아닌가? 그리고 능력있는 며느리와


친손녀라면 꼭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지. 솔직히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네 손자는 몰라도 자네 딸은 거대한
기업을 이끌어가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거 말이야.”
“부족하긴 하지만 주변에서 도와주면 못해낼 정도는 아니었네.”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임 회장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이경호 회장이 물었다.
“내 자네가 꼭 돌려달라고 한다면 돌려주겠네. 자네와 내가 불알 친구는 아니지만 그간 돈거래하던 정이 있으니
한 번쯤은 손해봐주지.”
“됐네.”

임 회장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까지 말했다면 이미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이 통과된 이후일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위임장을 뒤집는다?
그 파장이 엄청날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파장이 크면 클수록 현진그룹에서 지불해야 할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손해를 봐준다는 말을 고스란히 믿을 만큼 임 회장이 그 긴 세월을 순진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또한 설마 정말로 그 엄청난 파장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되돌리며 현진중공업에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임 회장은 이제 기력이 빠져 버렸다.
딸에 대한 실망, 그리고 이 상황이 오기까지 무력하게 자신의 것을 뺏겨버린 기대했던 태민에 대한 실망이
겹쳐졌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그 귀여운 놈을 하늘로 보내버린 손녀딸이 생각났다.
그 아이가 지 살겠다고 고모 걸 빼앗는 걸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난 이만 가보겠네.”
“정말 그냥 가도 되겠어?”
“그냥 안 가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려들랑 하지를 말게. 그리고 차가 영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구만. 돈
있으면 좀 바꾸게.”
“클클클... 입맛이 영 까다로우이.”

임창호 회장은 회장실을 나와 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수행기사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임 회장이 답했다.

“현진관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본래 논현동으로 가서 딸을 달래주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신영금융지주 사옥에서 현진관광 본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면서 미리 연락을 했기에 현진관광 정문에 차가 멈췄을 때, 반쯤은 혼이 나간 표정의 임지은 사장이 임원들과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빠!”

차에서 내리자마자 뾰족한 고성에 임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올케가 나 끌어내리려고 대표이사 해임 건의 올렸어요. 위임장만 어떻게 해주면... 신영은행에서 어떻게
해준다고 해요?”
“들어가자.”

임 회장은 대꾸 없이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들어갔다.


그 단호한 태도에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임지은 사장이 조금 밝아진 얼굴로 얼른 뒤따랐다.
우르르 이동하는 현진그룹 임원들을 향해 경제지 기자들이 연신 플래쉬를 터뜨리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하게
대회의실로 입장한 임창호 회장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어느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오셨어요.”

놀란 얼굴로 일어나는 송은채 사장.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현진물산 직원들은 자동 기립하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임창호 회장을 바라보았다.

“앉아라.”

임 회장이 다가서자 송 사장 옆에 앉아 있던 고승현 상무가 얼른 자리를 내어준다.


그 자리에 앉은 임 회장이 다시 자리에 앉은 송 사장에게 말했다.

“아침은 챙겨 먹고 왔나?”
“네, 아버님.”
“코발트 광산인가 뭐시긴가 그거 안 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원인이 되기는 했습니다.”

임창호 회장을 쫓아와 뒤에 서 있던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아버지를 믿고 입을 열지 않았다.

“지은이가 괜히 조용한 숲에 불 붙인 장작을 던졌구나. 세원 인터내셔널을 끼워넣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그런 게지?”
“맞습니다.”
“단단히 화가 났을 텐데 슬기롭게 잘 풀었구나.”

긴장된 마음에 손을 꼬옥 맞잡고 있던 송은채 사장의 눈빛에 놀람이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임지은 사장이 놀란 얼굴로 어버버했다.

“아, 아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끄럽다! 다른 사람들 눈이 안 보이는게냐?”
“아빠...”

임지은 사장을 힐난한 임 회장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회사를 하나 운영하는 것과 두 개 운영하는 건 아주 많이 다르다. 생각해놓은 게 있니?”


“베스트 웨스턴 호텔에서 15 년간 부사장으로 근무하며 뚜렷한 실적 상승에 기여했던 로져스 박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이미 초빙했습니다. 기존 경영진이 물러나면 바로 새로운 경영진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막힘없는 대답에 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임지은 사장은 울상이 되어갔다.

“호텔을 쪼개 팔지는 않을게지?”


“인수 전부터도 현진관광에 대한 미래를 보고 결정한 일입니다. 코발트 광산인 프록시아 인수보다 더 안정적이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지. 그깟 광산 따위야 시장 상황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지만 호텔은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지. 좋은
판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임 회장은 급기야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찍어내는 딸의 모습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송 사장 주변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누구야? 판을 짠 놈이 누구야?”

고승현 상무는 눈을 굴렸다.


작전을 짠 건 자신이지만 이 모든 판을 지휘한 건 최 과장이었다.
그런데 그걸 말해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송 사장이 나섰다.

“이 자리에 없는 직원입니다.”
“그래? 성주훈이는 아니겠고... 누군데?”
“말씀드려도 모르는 직원입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직원이라서요.”

임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친구,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라. 오랜만에 서울 올라왔으니 좀 쉬다 내려가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애비 병원에 가보자.”

송은채 사장은 떨리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님...”
“나올 거 없다. 내가 왔으니 기자들이 이상한 이야기는 못 쓸 게다. 그리고 넌 날 따라와라.”

임창호 회장의 말에 임지은 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못 가요! 어떻게 이렇게 가요? 아빠 진짜 이럴 거예요? 날 이렇게...”


“그럼? 현진중공업도 여기 아가한테 주랴?”

임 사장은 서슬 퍼런 임 회장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럼 넌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나는 그렇다고 치자. 태민이한테는 어찌 그럴 수 있어? 네가 애먼 짓만
안 했으면 이게 다 태민이 거였다. 당장 오후에 기사 나갈 텐데, 흉한 꼴 태민이가 보게 할 거냐? 가자.”

그제야 임지은 사장은 엉망이 된 얼굴을 수습하고 억지로 임 회장의 뒤를 따랐다.

< 잔인한 겨울(5) > 끝

< 잔인한 겨울(6) >


현진관광 임시주총이 열리기 전부터 신영모건스탠리에서 공개매수를 선언했기 때문에 이번 주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임지은 사장 해임이 확정된 직후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임지은 현진관광 사장, 전격 해임!]


[현진관광, 현진물산에 인수. 충격 반전의 내막!]
[신영금융의 흑기사 참여, 국내 금융기관의 적대적 M&A 첫 사례]
[현진물산의 프록시아 입찰 포기? 이유가 있었다.]
[현진관광을 기습 인수한 현진물산의 속내는?]
[임지은 사장의 눈물과 임창호 회장의 결단.]
[현진그룹, 본격적인 남매의 난 시작?]
....

포털 1 면엔 온통 현진물산과 현진관광의 기습 인수합병 기사들이었다.


영훈은 핸드폰으로 기사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갔고 그 모습을 보는 이형준 상무는 귀엽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주 행복하시겠어?”
“상무님은 안 좋으십니까?”
“나야 수익률로 어깨에 뽕 좀 세웠지만 넌 다르잖아. 할아버지한테 전화로 이야기 들으니까 니네 회장님이 완전히
포기 했다고 하던데? 난 또 니네 회장님이 니네 사장님을 죽이네 살리네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거 보면 참 노인네들
생각은 읽을 수가 없어.”
“그게 되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겠습니까? 금수저에다가 키도 크시고... 사람 마음까지 읽으려고 하는건
좀...”
“왜? 그런건 너만 해야 하냐?”
“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사는게 걱정되면 우리 회사로 올래?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안 하고 살게 해줄 수 있는데.”
“됐습니다.”
“얼마나 줄지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하지만 물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알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회사를 옮길 생각도
없구요.”
“왜? 아침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서 상사한테 욕 처 들으면서 일하는 목적이 돈 아니야?”

형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물론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그 누구보다 세속적인 판단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저는 조금 다릅니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건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제가 마음 먹고 돈만 밝히면 상무님이 다리 쭉 펴고 살 수 있을까요?”
“하하하! 이 새끼, 진짜 말로는 못 이기겠네. 알았어. 무서워서 꼬시지도 못하겠네.”
“꼬실려면 여자나 꼬시든가요.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 못갈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화내거나 섭섭해하기 없기입니다.”

영훈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자 형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았어. 뭔데?”
“연희 씨랑 사귀기로 했습니다.”
“임연희?”
“네.”
“하하핫! 내가 그거 가지고 섭섭해할 줄 알았어?”

형준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영훈은 속지 않았다.

“솔직히 배 아프잖아요. 제 앞에서는 거짓말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래? 크흠... 너 어떻게 꼬셨냐?”

역시나 잠깐 표정관리를 하며 짐짓 통큰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영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걸 남에게 뺏기면서 허허 웃을 만큼 속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데 그처럼 욕심이 많은 사람이 연희처럼 빼어난 미인을 뺏겼음에도
배가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대화로...”


“아, 시끄러. 됐어. 안 들을 거야.”

형준은 듣기 싫다며 손을 흔들어댔다.


당분간 속은 쓰리겠지만 이렇게 일부러 말해준 건 형준 같은 사람은 나중에 따로 알게 되면 괜히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혼자 분노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좋겠다, 연희랑 사귀고... 그럼 현진물산도 이제 네 꺼네? 안 오는 이유가 있구만.”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사실이 그러니까. 그럼 이제 다음 스텝이 어떻게 되나? 현진중공업? 현진기계? 현진고속은 상장회사가
아니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인수합병을 추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일거리가 꽤 쌓였거든요.”


“일거리?”
“현진건설에서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들어가는 아파트 시공사업권을 따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거? 설마 하려고? 안 될 건데?”
“될 것 같습니다.”

형준은 코웃음을 쳤다.

“하핫!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너희가 어떻게 따내? 그거 공사비만 못해도 5 천억이 넘을걸?”


“대략 7 천억 정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7 천억 짜리 아파트 시공권을 혜성기업이 무슨 수로 따내려고? 이건 내가 돈으로 지원해준다고 해도...”
“아마 될 겁니다.”

영훈이 그의 말을 끊으면서까지 말하자 형준의 안색이 굳어졌다.

“입찰에 관여했구나.”
“그냥 될 것 같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와... 씨, 귀신 같은 놈이네. 그래서 뭘 지원해주면 돼? 공사 자금도 필요할 거고... 분양할 때 집단대출을
우리 은행에서 나가주면 될까?”
“그래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인수로 회사 자금이 바닥을 보이는지라 앞으로 있을 대형공사에
은행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거든요.”
“들어가서 한 번 알아보지. 공사규모나 시기와 법적인 문제까지. 그리고 또 다른 건 없어?”
“서비스 좋으십니다.”
“흐흐... 말했듯이 어깨에 힘 좀 들어간 상황이잖아. 이 정도야 뭐...”
“사실 하나 더 있는데, 이건 좀 예민한 거라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예민해? 설마 정치권과 연결된 사항인가?”

욕심이 많을 뿐이지 머리가 좋아 척하면 척 알아듣는다.

“맞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해. 정치인들은 우리랑 달라.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뭐든 하는건 비슷하지만 우린
협상이라는 게 먹히거든. 그쪽은 원하는 게 한번 어그러지면 협상 따위는 없어. 보복만 있을 뿐이지.”
“명심하죠.”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준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가냐?”
“회사 들어가야죠. 직장인 아닙니까?”
“그렇게 회사를 생각하는 놈이 지금까지 농땡이 친 거야?”
“상무님과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대화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끄럽고, 술이나 한 잔 하자.”
“안 됩니다. 저녁에 약속 있습니다.”
“데이트?”
“네.”
“흥! 가라 씨발... 난 모델들하고 놀거다.”
“일찍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형준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버지가 날 경계할 거라는 말인가?”


“혹시 드라마 도깨비 보신 적 있습니까?”
“도깨비? 공유 나오는 드라마?”
“네. 거기서 공유가 백성의 신망이 대단했던 장수였는데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왕에게 죽습니다.
백성들에게 받아야 할 존경과 사랑을 왕이 아닌 장수가 받고 있었거든요. 큰 성공은 큰 주목을 받게 마련입니다.
긴장 풀지 마세요. 그러다 죽습니다.”

형준은 괜히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왠지 저 죽는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죽는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크흠... 알았어. 알겠다고.”


“그럼 적당히 노세요.”

영훈이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자 형준은 잠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형준을 지켜보고 있던 수행비서가 얼른 다가오자 형준이 말했다.

“회사로 돌아가자.”
“백화점 예약 해놨는데 어떻게 할까요?”
백화점은 형준이 주로 놀러가는 룸싸롱 이름이었다.
형준은 수행비서를 흘겨보곤 말했다.

“지금 내가 여자나 끼고 술 퍼먹을 때냐? 넌 내가 술 마신다고 하면 좀 말려라. 하... 정말...”

형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어두운 바를 빠져나갔고 수행비서는 억울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

“아빠, 정말 이렇게 물러날 거예요? 이대로 끝낼 거냐구요.”

거의 쫓겨나다시피 논현동 집으로 들어온 임지은 사장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임창호 회장을
닦달했다.

“...”
“현진관광이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지 아세요? 수천억을 현금으로 따박따박 벌어들이는 캐시카우라구요.
매출도 지난 5 년간 꾸준히 오르고 있었어요. 그런 알짜배기를 이렇게 놓아줄 거냐구욧!”

임 회장은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런 좋은 회사를 왜 그렇게 힘들게 운영했어? 그렇게 벌어들인 자금은 다 어디가고? 조선업이 그리 힘들 때
다른 계열사들 최소 5 천억 이상 지원했다. 현진관광은 그때 얼마나 지원했냐?”
“저희도 5 천억 지원했어요!”
“그래. 일 년에 수천억 현금을 벌어온다고 자랑하는 현진관광이 다른 계열사랑 다른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호텔 인수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것만 있었냐? 호텔 지어보겠다고 부지 사느라 쓴 돈만 8 천억 아니었어?”
“...”
“그 자리에 지금 호텔 올라가 있냐? 결국 허가 안 나와서 그대로 묶인 자금 아니야? 그 돈 있었으면 현진물산에
2 천억으로 주식 교환할 필요가 있었을까?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 내가 그 자리에서 위임장 내용 엎게 해줬으면
온 세상이 현진그룹 산산조각날 거라고 떠들어댔을 게다. 내가 그 꼴을 봐야겠니?”
“위임장 내용 엎을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래. 신영그룹 회장하고 독대까지 했는데 빈손으로 왔을까? 그런데 위임장 내용 엎으면 현진물산에서 꼬리
말고 그냥 갔을 것 같으냐? 현진물산에서 가진 신영금융 지분 제외한 나머지만 가지고도 흔들기 시작하면
어쩌려고? 시장가 대비 최소 세 배는 주고 사와야 회사가 안정을 되찾을 게다. 그 돈 줄 수 있
는 능력은 있는 게냐?”
“설마 우리한테 세 배 씩이나 되는 돈을 요구할 거라고 보세요?”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네 등에 칼을 꽂았을 것 같으냐? 왜 이렇게 물러?”
“...”

임지은 사장은 더이상 아버지를 조른다고 한들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받아들였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임 사장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낀 임 회장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것아, 아직 현진고속이 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현진그룹 계열사가 다 네 아들 것이 아니냐?”


“크흥... 속상해서 그래요. 아빠가 나한테 잘 해보라고 한 회사인데 이렇게 뺏기니까 너무 속상해요. 흑흑...”
“이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집에서 살림만 해서 뭘 할줄 아는게 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게다.”
“아빠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것아. 네 애비는 언제 관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내가 강제로 지분 정리를 해주기에도 이미
늦었다. 현진관광까지 먹은 네 올케가 이제 와서 가진거 내놓으라고 하면 말을 들을 것 같니?”
“아빠 말도 안 들을까요?”
“내 말이 무서웠으면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것 잊지 말아라.”

그렇게 한참 동안 임 회장은 그녀를 달래주고 저녁 즈음에 되어서 논현동 집을 나왔다.


논현동에서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르메르디앙 호텔에 도착한 임창호 회장이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자리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낮에는 조금 당황하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편안해진 모습의 송은채 사장과 조금은 어려워하는 표정의 연희,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올리는 영훈이었다.
임 회장은 손을 들었다 내리며 수행비서에게 코트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연희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많이 컸구나.”
“네...”
“할애비 피해서 해외 돌아다닌다고 욕 봤다.”
“...”

연희라고 여기서 별다른 할 이야기가 있을리 없었다.


눈치껏 송은채 사장이 말을 받았다.

“아버님 좋아하시는 농어 스테이크 주문했어요. 주방장이 아버님을 기억하고 있어서 간을 신경쓰겠다고 했구요.”
“잘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넨가? 우리 애 회사를 날름 먹어치우도록 한 게?”


“세부 계획은 고승현 상무가 잡았지만 제가 주도한 일인 건 맞습니다.”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입사한지 얼마나 됐나?”
“올해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임 회장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가 재차 물었다.

“그 전에 어느 회사를 다녔는데?”
“작은 채권회사에서 추심 업무를 했습니다.”

이 황당한 답변에 임 회장이 설명을 요하는 표정으로 송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동생이 하는 채권회사에 다니던 직원이었어요. 너무 유능해서 제가 직접 채용했습니다.”


“얼마나 유능하길래... 허... 쓸데없는 말을 했군.”

생각해보니 눈앞의 청년은 결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유로 그를 믿었는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졌다.
임 회장은 영훈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할 건가?”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영훈이 되물었다.


“더 가져갈까봐 불안하십니까?”

< 잔인한 겨울(6) > 끝

< 현진건설의 도약(1) >

“으허헛! 그거 맹랑한 놈이구나. 맞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더 가져갈 게 남았냐?”


“별로 생각 없습니다.”
“왜 생각이 없는 건데? 먹을 게 없어서냐? 아니면 내 눈치가 보여서?”
“둘 다 아닙니다. 현진중공업만 하더라도 사실 굉장히 탐이 나니까요. 그런데 회장님 때문에 인수할 욕심이 안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럼?”
“인수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현진중공업은 우리가 인수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럼 현진관광은 현진물산이 인수하지 않았다면 망할 회사라고 생각했나?”
“그건 아닙니다. 단지 회장님께 보내는 사인이었습니다.”

임 회장은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사인? 무슨 사인?”
“현진물산을 현진그룹에서 제외해서 생각해 달라는 사인이었습니다.”

꽤나 건방진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 회장은 노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계열사 분리를 해달라는 건가?”


“음... 회장님의 뜻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싸움으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피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현진물산의 직원들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타인의 욕심 때문에 회사가 불안해지는 걸 볼 수
없었습니다.”

임 회장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설사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이런 식의 핑계를 대지는 않는다.

“그래서 현진관광을 인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상처를 입은 맹수는 트라우마를 가지는 법이니까요. 물론 도와주신 분이 많습니다.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원래 인생이라는 게 그렇거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생각을 하는게 어렵지.
그리고 그걸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건 더 어려운 것이고. 도대체 대출회사에 다니던 신입사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자네 능력이라고 믿지.”
“감사합니다.”
임 회장은 송 사장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월급은 많이 챙겨주고 있나?”


“입사 3 개월 만에 과장 진급에 오피스텔까지 하나 주었습니다. 더 주고 싶은데 본인이 마다해서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돈 싫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는데...”

연희는 할아버지가 괜히 영훈을 의심하며 불필요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오기 전부터 꺼내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저희 사귀고 있어요.”


“뭐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임창호 회장은 물론이고 송 사장이나 영훈도 깜짝 놀랐다.


아마 먹고 있는 게 있었다면 입에서 튀어나왔을 것이 분명했을 만큼 놀란 영훈이 연희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제 혼처를 구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제가 골랐어요. 집안은 별거 없어요. 그래도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고 또 그 누구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능력은 있어 뵈는구나. 그래서 혹시나 놓칠까봐 이 할애비 앞에서 선언하는 게냐?”
“솔직히 제가 여자라서 못 미더우시잖아요. 어디서 못난 남자 만나서 아무 문제 없는 회사 망칠까 두려우시구요.
그런 남자 만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송 사장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연희의 태도에 내심 놀랐다.


별 생각 없이 터뜨린 게 아닌가 했는데 들어보니 연희가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연희는 연희 나름대로 할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적어도 당장 스스로의 능력을 앞세울 수 없으니 영훈을 내세워 현진물산의 경영권을 가지고 흔들지 말라는
말이었다.

“많이 컸구나. 알겠다. 이거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손녀사위 될 사람까지 만나게 되는구나.”

임 회장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때 영훈이 입을 열었다.

“사실 식사 자리라고 해서 왔지만 회장님 따님 회사를 뺏어놓고 같이 식사를 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자리는 가족분들이 오랜만에 모인 만큼 저는 그만 일어나려고 합니다.”
“영 자리가 불편한가?”
“왠지 불청객이 끼어서 할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하실 것 같아 그렇습니다. 아니라고 하셔도 그냥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실례지만 언제 내려가십니까?”

임창호 회장은 호기심이 진하게 동했다.


감히 본인이 불러낸 자리에서 가족과의 시간이라고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며 가겠다고 하더니 오히려 자신이 약속을
잡겠단다.
그룹 회장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긴장 하나 없는 태도나 태연히 약속을 잡으려는 목소리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늙은이가 바쁠 게 뭐가 있겠어? 내 마음이 가고 싶을 때 가는 거지.”
“그럼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괜찮은 장어요리 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장어라... 그거 좋군.”
“그럼 전 일어나보겠습니다.”

영훈이 일어나더니 임창호 회장 앞에서 다소 뜬금없는 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뵌 것도 영광인데 악수 한 번만 청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거 없지.”

영훈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곤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송 사장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룸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임 회장이 송 사장에게 말했다.

“걸물이구나.”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처음부터 신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연희랑 같이 영업팀에 두었는데 신영투자증권이 가진
현진물산 지분을 저 친구가 물어오면서 신뢰를 가지게 됐거든요.”
“회사 지분을 되찾아 온 게 저 친구라고?”
“그것뿐이 아니에요. 신영은행에서 받은 5 천억 플러스 알파도 저 친구가 가져왔어요. 그걸로 과장에 올렸죠.”

임 회장은 진정 놀란 눈빛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허... 진짜 걸물이구나. 그래, 그 정도 걸물이니까 현진관광을 먹자는 말에 네가 거부하지 않았겠지.”


“그 외에도 저 친구가 입사해서 처리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또 능력이 대단한 것도 대단한 거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보통 아니에요. 현재 실질적으로 회사에서 부사장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어요. 저 친구의 말 한
마디에 기조실, 이번 인수를 주도한 특수사업부가 총력을 다해서 움직이거든요.”
“고작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과장의 말에 강... 누구야? 강노식이 맞지?”
“네.”
“강노식이가 손발 노릇을 한다고?”
“맞아요.”
“믿을 수가 없구나.”

능력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여느 재벌 가문의 후계자도 저 나이에 저 직급으로 사람을 부리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일을 배우면 바로 임원으로 승진을 시켜 힘을 실어주는 것인데, 고작 과장의 직급으로 회사
임원들을 말 한 마디로 움직이니 어디서도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에 연희한테 우명그룹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네 삼남(三男)하고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연희가 거부했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최 과장이라고 하니까 저도 더는 말리지
못했어요.”
“우명그룹? 김태현이가 관심을 가진다...”

임창호 회장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며느리 될 아이의 얼굴도 잘 모르는 인간이 연희의 성품을 보고 선을 보라고 했을 리는 만무했다.
현진물산이 탐이 났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현진물산이 현진관광을 인수하면서 덩치가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전에는 몰랐지만 고작 삼남으로는 이제 임 회장의 눈에 차지 않았다.
“할아버지 전...”

연희가 뭐라 말하려하자 임 회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다. 우명그룹 첫째가 온다고 해도 네가 싫다고 하면 권할 생각이 없다.”

연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입사한지 1 년도 되지 않아서 현진관광을 먹은 남자를 할애비에게 소개시켜줬는데 누군들 눈에 들어올까.”

임 회장이 생각했던 건 ‘우명그룹이 왜 현진물산을 탐을 낼까?’였었다.


두 주먹을 꼬옥 쥐며 눈빛만으로 환호하는 연희를 보면서 임 회장은 나직이 말했다.

“연준이가 아마 다 컸으면 저리 똑똑했을 게야.”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금기와도 같은 단어를 꺼냈음에도 임 회장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고놈이 한번 말하면 척척 알아들었어. 하나를 배우면 열이 뭐야? 스물, 서른을 알아내는 놈이었지. 성품은
얼마나 좋았는지 길거리에 주인 없이 지나가는 개, 고양이는 죄다 데려와 먹이도 주고 놀아주고는 했다.
허허허... 고사리 만한 손으로 제 덩치보다 큰 개한테 사료를 주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고놈이 컸
다면 아마 최 과장처럼 똑똑했을 게다.”

연희는 아픈 과거를 들추는 회장의 말에 화가 나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송 사장은 회장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아버님...”
“됐다. 옛 생각이 나서 그랬다. 늙으면 원래 주책없이 감상적이 되곤 한다. 밥은 언제 나오냐? 오늘 내내
정신을 쏟았더니 허기가 지는구나.”

송 사장은 얼른 종업원을 시켜 준비된 식사가 나오도록 했다.


이후 식사를 하면서 임 회장은 연희에게 외국에서 뭘 공부했는지, 친구는 누굴 사겼는지, 힘든 건 없었는지
따위를 물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연희는 그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만 하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임 회장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내해라.”

송 사장과 연희는 가지고 온 차를 수행기사 혼자 운전하도록 하고 임창호 회장이 탄 차에 같이 타고 이동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한 임창호 회장은 병원 1 층의 편의점에서 산 따뜻한 꿀물을 몇 모금 마시며 숨을
가다듬은 다음 VIP 병동으로 올라갔다.

“죄송하지만 환자분 지금 잠드셨습니다.”

간호사의 말에 임 회장은 괜찮다며 조용히 병실로 들어갔다.


홀로 병실로 들어선 임 회장은 잠이 든 임지훈 전 사장 옆에 앉았다.
가만히 임 사장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은 임 회장이 중얼거렸다.

“왜 이리 말랐누... 살이 쪽 빠졌네. 미안하다. 애비가 늦었다. 가슴에 화가 많아서 그랬다. 그러게 몸 생각을
했어야지. 아프면 쉬었어야지.”

아들을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아들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신경을 써주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는 거였다.
임 회장은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병실에서 아들과 같이 했다.

겨울임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삼청동에 대형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던 대형 세단이 작은 장어 가게 앞에서 멈추었고 수행기사가 우산을 펴 뒷자석 문을
열었다.

“됐다, 요 앞인데 우산은 무슨...”

수행기사가 멋쩍게 웃자 임창호 회장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가게 전세 냈나?”

가게에 손님이라고는 영훈 밖에 없어 묻는 말이었다.

“조용하게 식사하길 원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여긴 따로 방도 없구요. 주인한테 하루치 이상 선불로


지불했습니다.”
“잘했다.”

임 회장이 가운데 자리에 턱 앉자 영훈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들어왔다.

“장어는 안에서 구워 나올 겁니다.”


“연기 안 나고 좋구나. 술은 할 줄 알고?”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자리에 맞게 하는 편입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거 마음에 드는구나. 자고로 술 좋아하는 남자 치고 아내 힘들게 하지 않는 남편 없는
법이니까. 내가 그랬다.”

임 회장은 클클 웃더니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한잔 올리라는 표현이다.
영훈이 얼른 소주를 따르자 그가 한잔 들이키고 나서 안주로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물었다.

“할 이야기가 무엇인고?”
“혹시 군산조선소 관심 없으십니까?”

임창호 회장이 오물거리던 입을 딱 멈췄다.

“그건 왜?”
“잘 포장해서 드리면 가질 생각 없으신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임 회장은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인자하게 보이던 미소를 지우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난 옛날 사람이라 포장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네. 내용물이 중요한 거지.”


“보기에도 좋은 게 먹을 때도 좋은 법이니까요.”
“포장이 과하면 가격이 비싸지니 하는 말이야.”
“흥정도 하기 전에 우는 소리부터 하시면 물건을 가진 사람은 다른 구매자를 찾는 법입니다.”
“그 물건이 자네 손에 있다는 듯이 말하는 구만.”
“요즘 세상은 생산자보다 유통업자가 더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왜 노래를 만든 사람보다 노래를 파는 플랫폼이
돈을 더 많이 가져가지 않습니까?”
“자네 손에는 없지만 팔 수는 있다?”
“네.”

임창호 회장은 괜시리 목이 말라 왔다.


생각이 많아진 임 회장을 보면서 영훈은 처음으로 손에 땀을 쥐었다.
시간이 없었다.
임 회장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 현진건설의 도약(1) > 끝

< 현진건설의 도약(2) >

한참을 고민하던 임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건 안 되는 거야. 탐이 나긴 하는데 거제에서도 지금 받은 물량은 거의 다 소화할 수 있어.”

이미 고승현 상무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았다.


중국발 조선업 불황이 시작된 이후로 수주 물량이 끊겼던 한국 조선업은 LNG 선을 수주받으며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특히 중국 조선소가 건조한 LNG 선이 공해상에서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고 중국 조선소가 이를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선주에게 큰 손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중국 조선소는 한국 조선소에 기술자를 보내 달라며 요청했지만 중국 조선소의 저가 공세와 기술 빼가기에 질렸던
한국 조선소측은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 사고 이후로 중국 조선소에 대한 유럽 선주들의 신뢰가 큰폭으로 하락했고 중국 조선소의 선박 수주의 대부분이
자국 물량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조선업이 점차 불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유는 또 있었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LNG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IMO(국제해사기구)의 2020 년 환경규제로 친환경 선박으로
대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졌다.
이제 선주들은 자신들이 가진 노후 선박을 교체하거나 개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거다.
특히 카타르에서 백여 척에 이르는 발주물량 대부분을 한국 조선사에서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에 드디어
조선업이 살아나는게 아느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수주 물량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해도 국내 조선소들의 생산능력이 부족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카타르에서 쏟아낼 백여 척에 달하는 LNG 선을 예상대로 70% 이상 수주한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소화해낼 수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기에 무진중공업이 군산조선소를 재가동시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리고 해주조선해양을 합병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했다.

“두려우십니까?”

임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배고픔을 겪어본 자만이 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알고 있지. 자네, 굶어본 적 있나?”


“굶어본 적은 없습니다.”

절에 있었다고 풀떼기만 먹었던 건 아니었다.


물론 피자도 먹고 싶고 치킨도 먹고 싶었지만 그래도 지독한 굶주림이 무언지는 모르고 살았다.

“난 굶어본 적이 있네. 다섯 남매가 감자 세 알로 하루를 버텨본 적이 있었어. 먹을 거에 눈이 돈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지. 그래서 난 굶주림이 무섭다네. 이 나이가 돼서도 굶주림에 대한 공포는 잊혀지지가 않아.”

다시 한번 조선업이 불황에 든다면 그 파급이 두렵다는 말이었고 또, 군산조선소을 떠안은 이후 닥칠 불황은


공포를 주기에 충분하다는 말이었다.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이야기는 그게 끝인가?”

임 회장은 흥미로운 얼굴로 영훈이 어떻게 나오는지 살폈다.


영훈은 고개를 모로 꼬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군산조선소는 저희가 인수합니다. 대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현진중공업의 인력과 기술로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그룹에서 엄연히 조선업을 하고 있는데 따로 조선회사를 세우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현진중공업은 그룹의 중심이자 핵심이며 정신이었다.
일단 임 회장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합작회사를 세우자고?”
“네.”
“왜? 지금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 다 빠진 죽은 조선소를 왜 끌어안겠다는 건데?”

조재민 의원은 대통령이 될 운명까지는 아니지만 가히 대권주자 정도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조 의원은 현진물산을 만나서 날아보려는 계획이지만 사실 현진물산도 조 의원 덕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조재민 의원은 뜨거운 여름의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 곁에 물이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은 사업을 해도 술, 또는 음료를 파는 일이 잘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군산조선소의 앞날에 대해서는 영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업이 욕심이 나서 이러는 건 전혀 아니다.
고승현 상무에게서나 매일 오후에 받는 수업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천지인 데다가
현진건설만 가지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합작회사를 세우는 계획 역시 고승현 상무가 며칠 동안 고심해서 내린 방안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계열사 분리를 위해서다.
임창호 회장 입장에서 굳이 계열사 분리를 해줄 이유가 없었고 김태민 현진중공업 경영기획 본부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계열사 분리를 해줄 수밖에 없는 미끼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손에 걸리는 게 군산조선소밖에 없었다.
물론 진심으로 조선업에 진출할 생각은 없다.
임 회장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군산조선소를 가동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허... 도대체 그걸 누구랑 약속했단 말이지?”
“누구와 약속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하고 현진중공업이 인수해서 가동시키지
않겠다면 우리가 직접 인수해서 가동시켜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어렵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잘 다니던 조선소에서 잘려 아직도 집에서 쉬는
전문인력들이 많습니다. 중국 조선소의 비싼 연봉에 혹해서 갔다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서 다시 못 들어오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군산조선소는 시설만으로 보면 대한민국 최대 규모이니 인력과
조직만 갖춰지면 조선회사 하나 만드는거야 문제도 아닐 겁니다.”

임창호 회장은 버럭 소리 질렀다.

“누가 인력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 시설이 낙후돼서 굶어 죽었냐고! 수주를 못 받아서 굶어 죽은 거 아니야?”
“IMO 규제(선박연료 황 함유량 기준을 현행 3.5%에서 0.5%로 강화)를 피하겠다고 스크러버(탈황장치)
달았다가 입항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아일랜드는 이미 시작됐고 내년부터 싱가포르랑
아랍에미레이트도 입항이 금지됩니다. 코트라에서도 2025 년에는 전체 선박 발주의 60% 이상
이 LNG 추진선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거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런데 어디 연구 결과대로만 가던가?”
“맞습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영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임 회장이 그 모습에 괜시리 불안해지는데 영훈이 재차 폭탄을 터뜨렸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시장에 나와 있는 해주조선해양, 저희가 인수합니다.”


“뭐?”
“무진중공업도 탐내는 해주조선해양입니다. 이미 2021 년까지 수주물량을 받아 놔서 수주도 걱정 없습니다. LNG
기술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군함건조에도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곳입니다. 산업은행에서도 돈만 있다면
누구한테라도 팔 수 있다는 입장이죠. 무진중공업이 인수한다고 하는 것보다 군산조선소를 가
진 우리가 인수한다고 하면 산업은행이 누구 편을 들 것 같으십니까?”

“...”

볼 것도 없다.
군산 경제를 파탄낸 게 바로 무진중공업이다.
군산조선소를 돌리겠다고 하면 무진중공업보다 금액을 훨씬 덜 제시해도 아마 현진물산의 손을 들어줄 거다.
산업은행은 공기업이니까.
임창호 회장은 잔을 들어올렸다.
영훈이 한잔 가득 따라주니 벌컥 들이키곤 안주도 먹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군산조선소에 해주조선해양까지. 둘 다 가지겠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군산조선소를 돌리겠다고 하면 산업은행에서 분할납부 인정해줄 겁니다. 여론만 잘 조성되면 인수에 들어가는
돈까지 그쪽에서 대출해줄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부채도 일정 부분 털어주겠죠. 마침 현진관광을 인수했고
인수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대출금이 들어간 게 아니니 현진관광 지분을 담보로 최소 5 천
억 이상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가로...”
“추가로?”
“이번에 보셔서 아시겠지만 신영금융은 현진물산과 행동을 같이 합니다. 이번에 현진관광 인수건으로
신영금융에서 얻은 이익만 수천억인데 최소한 그 돈 만큼 지원해달라고 하면 못 얻겠습니까?”

고승현 상무가 내놓은 몇 가지 해결책 중에 가장 최적의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 고 상무는 이걸 생각해내며 해주조선해양 인수전에 진심으로 뛰어들기를 은근히 바랄 정도였다.
임창호 회장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곧이어 주방에서 구운 장어가 나왔다.
임 회장은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짜지도 않고 부드러운게 입에 맞구나.”


“다행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그래, 오랜만에 허리띠 풀어야겠다.”

실제 허리띠를 풀지는 않았지만 임 회장은 꽤나 많이 먹었다.


장어와 밥 한공기를 뚝닥 비운 임 회장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닥고는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쩌기를 바라냐?”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현진관광과 현진물산 지분을 시장가에 넘겨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해주조선해양 인수는
계획에서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군산조선소를 받아라?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건 보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계열사 분리를 하지 않으시면 해주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들겠습니다.”
“허허... 지금 협박하는 게냐?”
“통보하는 겁니다. 회장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지만 물산과 관광 지분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그렇다고 손해본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말 그대로 잘 포장해서
넘겨드리겠습니다.”
“무진중공업이 가만히 있지 않을게다.”
“무진중공업은 인망을 잃었습니다. 올해 안에 가동시키겠다는 약속을 어긴 뒤로 이건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정상적인 가격에 팔려 한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방법이 있는 게냐?”
“그건 제가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 건을 풀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그냥 웃자고 한 농담이 될 겁니다.”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고?”
“풀어낼 겁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차기 군산 시장이구나.”
“맞습니다.”

임창호 회장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차기 군산 시장이 될 사람과 군산조선소를 가지고 거래를 끝냈단다.
이게 어디 될 만한 소린가?

“넌 뭘 받았고?”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현진건설로 간판을 바꿔 단 혜성기업 말하는 게냐?”
“맞습니다.”
“그걸 진짜로 따냈다고?”
“거래조건이었습니다.”

임 회장은 그제야 영훈이 군산조선소를 돌려야 한다고 한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단순히 블러핑이 아니라 계열사 분리를 안 해줄 경우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한다는 건 그저 계획이 아니라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목표가 될 게 분명했다.

“왜 그런 조건을 걸었냐? 하필 군산조선소를 건드린 이유가 뭐야?”


“군산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요. 대기업의 분별없는 경영으로 수많은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성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왕 돈을 써야 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결과가 돌아가는 곳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이익과 성장이 아닌 고통받는 시민들을 구제하고 싶은 생각이라는 말이 임 회장의 머리를 때렸다.

“허허... 그렇군. 그래...”

어째서 죽은 손자가 다시 떠올랐는지 몰랐다.


하늘에 있는 그 착한 녀석이라면 어쩌면 이와 같은 황당한 이유로 할애비를 졸랐을지도 모른다.
꼭 그랬을 것 같았다.
임창호 회장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놈의 통보를 들었으니 회사로 돌아가서 전해야 할 게 아니냐?”
“그건...”
“걱정마라. 내가 아무리 늙었다고 한들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나돌게 하겠냐? 다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다.
네 놈 말대로 나도 통보라도 해줘야 할 게 아니냐?”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꾸벅 허리를 숙이는 영훈의 어깨를 임 회장이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나게는 임 회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영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많았다면 이렇게 급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의미 없는 싸움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현진중공업으로써도 조 의원의 기운을 받은 군산조선소를 가지게 된다면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거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랐다.
이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재민 의원 보좌관이다.

“네, 보좌관님.”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다름 아니라 내일부터 본격적인 선거 준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군산조선소 관련 브리핑을 곧 받아볼 수 있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광주 인공지능 집적단지 공고가 날 예정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현진건설에서 입찰하면
어느 정도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의원님께서 군산조선소 문제를 잘 해결해달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제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됐다.

< 현진건설의 도약(2) > 끝

< 현진건설의 도약(3) >

회사 비서실로 돌아온 영훈에게 연희가 후다닥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조용한데로 갑시다.”

영훈이 궁금해 죽겠다는 연희를 데리고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간 후 입을 열었다.

“일단 회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계열사 분리 안 해주면...”


“그거 말구요. 고승현 상무님한테 대략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것 말고 할아버지가 뭐 특별한 이야기한 거
없었어요? 아니면 할아버지에 대해 알게된 거라든지...”

표정을 보아하니 임창호 회장의 사주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었다.


영훈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계속 고민한 상태였다.
임창호 회장의 태어난 시각을 알아내 이미 알고 있는 생년월일에 더해 사주를 알고 나서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알고 있는 게 좋은 것인가, 아니면 모르고 있는 게 좋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봤지만, 딱히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연희에게 있어 남이라면 당연히 말해주지 않아야 겠지만 친할아버지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알면서 말해주지
않는게 과연 옳은 일인가?

“특별한 건 없습니다. 회장님의 사주는 사실 이미 오랜 기간 살아오시면서 당신도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재복, 인복, 자식복 등등... 이미 그 나이대에 계신 분은 사실 사주를 볼 이유가 없기도 합니다. 다만 말년이
어떻게 될지 정도만 본다면 그건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말년에도 특별한 우환 없이 가진 재복을 잃지 않을 사주입니다. 다만 핏줄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연희에 대한 감정 때문에 고민이 깊었던 것 같다.


이 여자에게는 남은 수명을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그걸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결론은 비밀로 묻어둬야 한다는 거였다.
지금이야 그냥 그렇구나 넘어갈 수 있겠지만 자신과 가까운 핏줄에 대해 궁금해질 날이 오면 언제고 물어보고 싶을
거다.
나중에 송 사장이 병이 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또,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그녀의 아버지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건 도저히 알려줄 수 없었다.

“후,,, 일단 그건 넘어가요.”
“그러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공을 넘겨 드렸으니 이제 답을 주실 겁니다.”
“어떤 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임창호 회장님은 지극히 실리적이면서도 현명한 분입니다. 또한 명분을 중시하고 외부의 이목에 신경을 쓰시죠.
한 그룹에 두 개의 조선업. 게다가 완전한 협업이 아니라 본인 사후에 같은 업종으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절대 현진물산의 해주조선해양 인수를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군산조선소를 받을 거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아실테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계열사 분리하면서 그들이 가진 주식을
우리가 사게 되니까 당장 현금이 들어와서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는데 큰 무리도 없을 겁니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엄마가 경영권 가지고 마음 졸이는 것도 보기 힘들거든요.”
“잘 될 겁니다.”

영훈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한동안 그녀를 다독였다.

현진물산 본사 사옥 옥상.
본래라면 한창 일에 열중해야 할 시간이라 담배를 펴도 간혹 한두 군데에서 연기가 피어올라와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임직원들 덕분에 마치 대형 커피숍이라도 차려진 것처럼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과장님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까?”

인사팀 오재준 대리가 한 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손엔 담배 한 개비를 끼운 채 물었다.

“당연히 모르고 있었지. 와...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현진물산의 현진관광 적대적 인수.


적대적 인수합병이라는 게 어디 쉬운가?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적대적 인수합병이 성공한 사례도 몇 없을 정도로 쉽지 않았다.
게다가 생판 남인 회사도 아니고 같은 그룹의 계열사이며 송은채 사장에게는 손위 형님의 회사를 날름 먹어버린
상황이다.
그렇기에 이번 인수는 현진물산 임직원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특히 이번 인수를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진 봉선동 TFT 에 대한 궁금증은 폭발적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부사장님도 모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알고 계셨다면 그 난리를 치지도 않으셨겠지. 오늘도 결근하셨지?”
“네, 어제부터 병가 내셨습니다.”
“흐음... 이거 인사폭풍 시즌 2 가 시작될 것 같은데...”

오 대리는 민 과장의 예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부사장님 날아가면 그 아래로 줄줄이 날아가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고 봐. 성주훈 부사장님이 이렇게 쩌리 되기 전에 박윤재 상무님이 바로
경영기획총괄부서에서 영업본부장으로 영전했잖아? 부사장님 라인이라고 다 갈아버리려고 했으면 그렇게 했을 리
없지.”
“어? 그럼 지금쯤 부사장님이 박 상무님한테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요? 완전히 자기 배신한 거 아닙니까?”
“그게 배신인가? 아직 확실하지 않지.”
“에이~ 설마 상무님이 이번 기습 인수전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몰랐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갑자기 상무로 영전했다면 당연히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이때 뒤에서 누가 고개를 홱 들어밀었다.


민 과장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박윤재 상무가 서 있었다.

“아, 깜짝 놀랐습니다.”
“뭐가 그건 그렇냐? 나도 몰랐어.”
“진짭니까?”
“진짜야. 나도 뉴스보고 기함했다. 일단 어제 계속 이어진 임원회의 때 눈치 보니까 알고 있었던 쪽이
재무팀이랑 특수사업부밖에 없더라고. 다들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거지. 오죽하면 호주에 나가 있던 현지
직원들이 돌아오면서 얼마나 허탈해 했는지 모른다고 항변을 하더라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더니 진짜 너무 잘 속였네.”

오재준 대리가 감탄하자 박 상무가 담배 하나를 입에 물더니 그에게 말했다.

“불 좀 줘봐라.”
“네.”
“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부사장님이야 나도 잘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인사 불이익 없을 테니까.
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고 사장님 기조가 그래.”

민 과장이 말을 받았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현진관광 쪽으로 인사이동 같은 건 없을 것 같습니까?”


“뉴스 봐서 알잖아? 로져스 박이라는 사람이 사장에 앉은 거. 소유는 하되 경영은 하지 않는다는 선을 그은 거지.
사장님이 현진관광쪽에는 아예 신경쓰지 말라고 하더라고. 우린 우리 일만 잘하면 돼. 그냥 프록시아 인수해서
회사로 들어와야 할 매출을 현진관광 배당으로 받는 걸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돼.”
“이야... 그럼 배당률이 꽤 되겠는데요?”
“최소 6% 이상은 생각하고 있고 이번에 인수하면서 특별배당 나갈거야. 연말이라 현진관광쪽으로 꽤나 많은
매출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연초에 최대한 땡기려는 거겠지.”
“흐음...”

민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 상무가 오 대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오 대리는 얼른 알아들었다.

“그럼 전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응, 그래.”

오 대리가 사라지자 박 상무가 말했다.

“직원들 분위기 어때?”


“뒤숭숭하기는 해도 다들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임원회의에서 무슨 이야기 나온 줄 알아? 우리 회사가 군산에 버스터미널 지어주기로 했단다.”
“우리 회사가요?”
“정확히는 현진건설이지. 사장님께서 말씀하셨어. 현진관광은 회사의 캐시카우로 안정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경영에 특별히 관여할 생각이 없다고. 대신 현진건설을 현진물산만큼 크게 키우겠다고 하셨단 말이야.”
“현진건설을요? 사이즈 차이가 너무 나는데?”

아무리 현진물산이 상사 업체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큰 회사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매출 7


조원 이상을 내는 거대 기업이다.
신영은행에서 워크아웃조차 다 마치지 못하고 떨이로 팔려온 현진건설과는 사이즈가 다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 그러면서 군산 버스터미널을 거론하셨어. 이미 군산


버스터미널과 관련해서 특수사업부와 홍보팀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
“갑자기 뜬금없네요.”
“나도 뜬금없더라고. 그런데 사장님이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것 뿐이 아닌 것 같았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신
말씀이 이거였다.”

박 상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봉선동 사업. 이건 단순히 눈가리기로 만든 사업부가 아니라고 말이야. 진짜 따낼 사업이라고 강조하셨어.”

민 과장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박 상무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현진건설이 이제 알짜배기가 될 거야. 만약 현진건설로 갈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마라. 너도 언제까지
인사과장에 머물고 싶지 않잖아? 현진건설로 가면 단번에 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방금 내용은 너만
알고 있어라.”

박 상무는 어리둥절한 민 과장의 어깨를 두드리고 주변을 살핀 후 내려갔다.

“그만 우세요.”
“흑흑... 내가 어떻게 안 울게 됐니? 엄마는 너무 속상해...”

김태민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얼마나 놀랐던가?
거제에서 일하고 있던 중 직원들이 호들갑을 떨며 TV 를 틀어주었고 뉴스에서 현진관광이 현진물산에게 인수됐다는
소식을 속보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후 계속 울려대는 전화 속에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엄마와 겨우 통화가 됐을 때, 그녀는 분에
못이기며 소리를 질러댔었다.
[네 할아버지가 날 버렸어!]

귀청이 찢어질듯한 비명 소리에 태민은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렸지만 내용이 충격적인 건 확실했다.
이번 현진관광 인수에 할아버지의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것.
임지은 사장은 오후 즈음에 거제에 도착해서 계속 이렇게 울어대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이런다고 현진관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엄마는 네 할아버지가 이럴 줄 몰랐어.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렇게 올케한테 힘을 실어주고 나올 수가 있니?
기자들 다 보는 자리에서 날 이렇게 버릴 수 있느냐는 말이야.”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뭘 어쩔 수가 없어? 미리 위임장 내용 뒤집을 수도 있었다는데!”
“위임장 내용을 뒤집을 수 있었다구요?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거 아니에요?”

태민은 임지은 사장이 잘못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임 사장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아니, 네 할아버지가 그럴 수 있는데 안 한 거라고 하셔서 내가 직접 신영은행에 알아봤다. 그런데 신영그룹


회장님이 그러시더라. 네 할아버지가 원치 않아서 그냥 접었다고. 내가 직접 물어본거야.”
“허...”

태민은 배신감에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니? 위임장 뒤집을 수 있었으면서 그렇게 그냥 포기했어야만 했다고 생각하니?”


“아니요. 일단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현진관광은 지키고 보는게 맞았습니다.”

호텔업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부동산 사업에 바탕을 둔다.


땅값이 오르면 회사의 자산가치는 손님이 있으나 없으나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땅값이 떨어지느냐?
땅값은 일단 한번 오르면 어지간해서는 하락하지 않는다.
오직 그 자리에 위치한 땅은 그곳 한 군데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옛말에 친구는 배신해도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현진관광이 가진 호텔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5 성급 브랜드를 가진 최상급 호텔이었다.
당연히 경기를 타지 않았고 매출은 견고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호텔 사업은 전망이 우수했다.
쥐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현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는 회사였던 거다.
물론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또 사느라고 조금 무리를 하긴 했지만 그룹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면 지킬 수
있었다.
조금만 버텨줬다면 조금 무리했던 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되었을 테고 새로 산 거위는 앞으로 황금알을 꾸준히
낳아줬을 거다.

“그치? 엄마 말이 맞는 거지?”
“그럼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나봐야겠습니다.”

태민은 흥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회장실을 찾았다.


마침 임창호 회장도 거제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회장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임 회장은 마침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딱 찾아오니 잘됐다고 생각하는데 붉게 달아오른 태민의 안색을 보고 왜
찾아왔는지 알아챘다.

“회장님.”
“그래. 네 엄마가 왔더냐?”
“네? 네...”
“또 너한테 울고불고 했겠구나.”
“위임장 내용을 뒤집을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너도 내가 거기서 뒤집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현진관광은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회사입니다.”

임 회장은 멀리 보지 못하는 태민이 안타까웠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에서 봤었던 손녀사위 될 그 친구가 떠올랐다.
만약 그놈이었다면 이미 끝난 일을 붙잡고 우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터.
갑자기 눈앞의 안쓰러운 손자가 답답하고 미련한 외손자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현진건설의 도약(3) > 끝

< 현진건설의 도약(4) >

“이것아. 내가 그걸 뒤집었으면 신영은행에서 어떤 요구를 해왔을 것 같으냐? 그리고 넌 현진물산이 가진 주식을


어떻게 사오려고? 회사에 돈 있냐? 현진고속에 돈 있어? 또 은행에 빚 지려고?”
“빚이라도 져야 했습니다.”
“허허... 이것아. 현진물산이 얼마나 요구할 것 같으냐? 내 눈치도 보지 않고 벌인 싸움이다. 주식 값으로 1
조를 요구하면 네가 들어줄 거냐?”
“그건... 말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그럼 말이 될 때까지 공개매수하고 주식을 끌어모을 거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겠지. 그 과정에서 신영그룹은
무언가를 계속 요구할 거다. 요구대로 되지 못하면 언제든지 내용을 뒤집겠지. 이미 주도권을 잃은 싸움이다. 진
싸움에 왜 미련을 두려고 해?”
“...”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크게 봐야 한다. 아직 그룹에는 많은 기업이 있어. 현진관광이 아깝기는 하지만 다른 좋은 기업들이 많아.
그리고 너도 이번 상황처럼 다른 기업을 사냥할 수도 있는 거겠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이번 같은 경우는 만에 하나도 나오기 힘든 운이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일생에 다시 오기 힘든 기회였어요.
숙모는 그 기회를 잡은 것 뿐이구요.”
“그게 단순히 운이었을 것 같으냐? 신영그룹 전체에서 이번 인수전에 참여했다. 신영은행에서 2 천억 대출 연장이
안 돼서 주식으로 교환한 일. 지금도 그게 운이었을 것 같아?”

태민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임 회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놈이었다.
그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그게 자신에게 너무 큰 악재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리라.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더더욱 이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회사를 노리고 그런 악독한 행태를 저지를 자들을
어떻게 그냥 둡니까?”
“그럼 계획을 짜와라. 가서 우는 소리만 할게 아니라 현진물산이 한 것처럼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짜 와. 그럼 내가 허락해주마.”
“그건...”
“어렵다고? 왜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만 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급기야 임창호 회장이 탁상을 쾅 때렸다.


그 벼락같은 호통에 기가 죽은 태민은 움찔 어깨를 움츠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만 나가서 찬찬히 다시 생각을 해봐라. 그리고 패배를 인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건지,
아니면 싸울 건지. 결정해서 보고해라. 그리고 싸울 생각이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전쟁을 하려면 네 자리를
걸고 해야 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나가.”

임 회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가는 태민을 보고 혀를 찼다.


답답한 마음에 혼을 내느라 군산조선소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리 생각이 얕은 건지...
아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민이 부족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서울로 갔다 와서 그 손녀사위 될 놈을 본 다음부터 눈에 차질 않는다.
아마 그 손녀사위 될 놈이었다면 호통을 치면서 탁자를 때릴 때 눈썹하나 흔들리지 않고 웃으며 조건을 걸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평정심과 배짱, 그리고 머리를 보고 왔으니 눈에 차지 않는 게다.
게다가 그 성품까지 죽은 손자 놈을 빼닮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탐이 났다.
하지만 어쩌랴?
피는 물보다 진하니 태민이를 밀어줄 수밖에 없다.
임 회장은 처음으로 지난 옛일에 대해 진하게 후회가 밀려왔다.

현진물산이 현진관광을 인수한 이후 가장 먼저 들린 좋은 소식은 바로 영업팀에서 진행한 Nodri Clare 의


폭발적인 매출 기록 뉴스였다.
작년 12 월에 오픈한 Nodri Clare 매장은 단 하루만에 15 억의 매출을 기록하며 1 층 명품잡화점 매장들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며 매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새로 자리에 앉은 박윤재 영업본부장은 연초부터 회식을 추진하며 영업팀의 기운을 북돋았다.
올해 Nodri Clare 에서만 500 억 매출을 새로 목표로 잡으며 기존 영업팀의 매출 기록을 뛰어넘겠다는 패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최 과장 들어오라고 할래?”

송은채 사장은 성주훈 부사장이 출근했다는 소리에 바로 영훈을 찾았다.


영훈이 들어오자 송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는 최 과장을 보기만 해도 그냥 웃음이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어, 앉아. 요즘 뭐 불편한 건 없고?”
“불편할 일이 없습니다.”
“면허는 땄어?”
“내일 도로주행 있습니다.”
“그래, 한사코 임원이 싫다고 하니 수행기사를 붙여줄 수도 없고 본인이 직접 운전하고 다녀야 하잖아.”
“나중에 임원이 된다고 해도 아직 누가 운전해주는 건...”
“부담스러워?”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는 것도 같아서 싫습니다.”

게다가 이 나이에 뒷자석에 타고 다니면 부모 잘 만난 운 좋은 놈인 걸로만 알게 뻔했다.


자기라도 뒤에서 능력도 없는 놈이 부모 잘 만났다고 수근댈 게 뻔하니 그런 대우는 사절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어쨌거나 시험 잘 보고 합격되면 차량 지원해줄게. 평소 타고 싶었던 차 있어?”

왜 없겠는가?
인터넷에서만 보던 그런 슈퍼카부터 벤츠, BMW 등등...
하지만 이제 면허 딴 초보운전자가 그런 차를 몰고 다닌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중고 중형차 하나 지원해주시면 운전이 손에 익을 때까지 타고 다니겠습니다.”


“그게 맞긴 해. 그건 그렇고 오늘 성주훈 부사장이 출근했어. 원래 생각했던 대로 계약 해지하는 게 나을까?
그런데 명분이 없어. 그냥 박 상무가 총대 메고 확 지르게 할까?”
“굳이 원수를 만들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냥 두면 알아서 물러날 겁니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지금 현진물산에서는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할게 분명합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을 더 해보려고 하기 보단 아직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몸을 옮길 가능성이 더 큽니다.”

송 사장은 어떻게 그를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애초부터 사람을 잘 본다고 들어온 사람이니까 잘 보는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현진중공업으로 가겠지?”


“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성향은 알지만 그의 과거와 인맥을 아는건 아니니까요. 그가 현진물산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비밀 같은 걸 알고 있습니까?”
“비밀유지각서가 있어서 큰 문제는 안 될거야. 그렇게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문제없겠네요. 그리고 아직 현진중공업으로부터 연락 없습니까?”

송 사장은 상체를 뒤로 기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 아버님 성격상 결정이 느린 분은 아닌데 아무래도 임원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는 것 같아.”
“언제까지고 대답을 기다릴 순 없습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어쩌려고?”
“강주원 의원이 뇌물혐의로 검찰에 고발된게 뉴스에까지 나왔습니다. 조재민 의원은 몸이 달았습니다. 이제는
군산 시장에 당선되는 건 사실 크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버스터미널만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공약이고 본래 군산
지역이 조재민 의원이 속한 당에 유리한 지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단 공천만 받게 되면 당선은 문제가 아니긴 해.”
“선거 전부터 전국적인 이슈를 군산에 집중시키려고 할 겁니다. 고작 버스터미널과 군산조선소는 이슈의 크기부터
다릅니다.”
“선거 전부터 전국구 정치인으로 올라설 생각이라는 거지?”
“보좌관과 통화해보니 군산조선소 문제는 당의 협력이 절대적이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국민의 관심이 뒷받침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 전부터 몸값을 올릴 필요가 있을 겁니다.”
“최 과장은 우리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혼자만이라면 모르겠지만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게 된다면 못할 거 없습니다.”

영훈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임창호 회장의 포부와 이상을 믿고 있지만, 그 아랫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몰를 일이다.
임 회장의 말처럼 한 번 굶주림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 공포가 뼈속 깊게 각인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보자. 이번주까지 연락 없으면 내가 직접 아버님께 연락해볼게.”


“알겠습니다. 전 그럼 오늘 현진건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구도일 사장 만나러?”
“네. 봉선동 사업부가 현진관광 인수전을 지휘한 곳이라는 소문 때문에 많이 낙담했을 텐데 가서 안심시키고 광주
인공지능 집적단지 공고 참여하라는 것도 전달해주고요.”
“그래. 수고하고.”
“알겠습니다.”

영훈이 나가자 송 사장은 민희를 불렀다.

“최 과장 내일 도로주행 있다고 하니까 잘 봐주고 면허 나오면 차량 지원해줘. 우리가 어디랑 계약하고 있지?”
“SI 렌트카입니다.”
“연락해서 BMW 5 시리즈급으로 하나 준비해. 초보운전이라도 차는 단단한 거 타고 다녀야 안심이지.”
“알겠습니다.”
“요즘 회사 분위기는 어때?”
“다들 긴장하면서도 회사가 계속 커지고 있으니까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연말 보너스도 작년보다 많았는데
회사도 외연 확장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올해 보너스를 더 기대하는 그런 분위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경영기획총괄쪽은?”
“뒤숭숭합니다. 며칠간 부사장님께서 출근하지 않으시면서 그대로 부서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말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잘 살펴봐. 그리고...”

이때 송 사장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송 사장은 민희에게 그만 나가라고 손짓했다.
발신자가 우명그룹 김태현 회장의 사모였기 때문이다.

“어머, 사모님.”
[송 사장~ 오랜만이야. 어떻게 연락 한 통이 없어?]
“요즘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 나도 뉴스 봤잖아. 너무 대단하더라.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호호호.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그럼 이제 연초도 됐고, 애들 얼굴도 좀 보게 해야지.]

미루고 미뤄 왔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결론을 내려줘야만 할 것 같았다.

“사모님, 죄송해요. 우리 애가 남자에 관심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계속 미루기에 혹시 남자가 있나 캐보니까
글쎄 사귀는 사람이 있었지 뭐예요. 에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좀 기다리라니까.”
[정말? 어느 집 자식인데?]
“그냥 회사 직원이래요.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부터 사귀나 몰라요.”
[이번에 입사했잖아? 너무 급하다. 그리고 회사 직원? 설마 결혼시키려는 건 아니지?]
“애가 워낙 자기 주장이 강하다 보니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지가 않아요. 기어코 하겠다고 하면 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럼 알겠어.]
“네, 사모님,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송은채 사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려운 통화를 끝낸 후련함이 더 컸다.

“송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김태현 회장이 물었다.

“뭐야? 딸래미가 누구랑 사귄데?”


“네, 회사 직원이랑 사귀고 있대요.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벌써 눈이 맞지? 애가 경솔하네. 쯧... 하여튼 얼굴
반반한 것들은 남자가 끊이지를 않아. 결혼시켜도 우리 애가 마음 고생 많이 하겠어요. 사진만 딱 봐도 여우
같더라니...”

우명그룹 사모인 우혜선의 불평어린 말에도 김 회장의 굳어진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현진관광을 먹은 현진물산이야. 그걸 포기할 수야 있나.”


“그럼요? 우리 애를 기어코 연희한테 붙이려구요?”
“재벌가 자식이 언제 연애만으로 결혼하나? 그리고 송 사장이 그렇게 물러터진 사람이면 이번 인수전을 그렇게
박력있게 처리하지도 못했어. 계산이 달라진 거야.”
“무슨 계산이요?”
“말했잖아. 현진물산에 현진관광을 얹었어. 그럼 우명건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지.”
“허... 송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분수가 너무 과한거 아니에요?”
“과하지. 과하긴 해.”
“감히 우리 창훈이를 어떻게 보고...”

곰곰이 생각하던 김태현 회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어. 몸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들어는 봐야지.”


“꼭 현진물산을 가져야만 해요?”
“임창호 회장은 늙었어. 자고로 왕이 후계자를 든든히 세워놓지 않고 죽은 이후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없었지.
이때를 놓치면 쓰나.”
김 회장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현진건설의 도약(4) > 끝

< 현진건설의 도약(5) >

인천에 위치한 현진건설은 예전 혜성기업이었을 적 찾아왔을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간판을 새로 달아서일 수도 있고 입고 있는 옷이 달라져서일 수도 있지만 왠지 직원들의 얼굴 표정부터가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 같았다.
혜성기업이라는 중소기업에서 비록 다른 대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다고는 해도 엄연히 대기업 계열사가 됐으니
여러모로 사기가 올라간 것이 틀림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실 최영훈 과장입니다.”

비서의 안내를 따라 사장실에 들어서니 구도일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와요, 오랜만이에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허허... 그러지. 앉게.”

구도일 사장 역시 한창 신영은행 아래에서 워크아웃 중이었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 보였다.


영훈이 자리에 앉으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혹시 생신이 어떻게 되십니까?”


“생일? 내 생일은 왜 물어보나?”
“제 친한 친구가 꽃집을 하는데 제 주변에 사람 생일이 있으면 꼭 배달을 시켜주거든요. 요즘 꽃가게 힘들어서
그런지 제 연락이 오면 그렇게 좋아합니다.”
“아 그래? 난 6 월 2 일이네.”

연희가 알려준 생일이 맞았다.


이렇게 되면 사주가 틀렸거나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 6 월 2 일이 맞으십니까? 혹시 양력...?”


“맞아. 난 음력 생일 몰라.”
“아... 그러시군요.”

그는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영훈이 앉자마자 이야기를 쏟아냈다.

“뉴스 봤네. 현진물산이 우리 회사를 인수할 때는 그저 얼떨떨하긴 했었는데 다들 이제 기대를 많이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네. 현진그룹의 복지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시키고 급여도 올리겠다고 하니까 다들 얼떨떨해 해.
사실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아직 혜성기업에서 현진건설이 된 것 말고는 얻은 게 없으니
까.”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현진물산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어려운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직원들 급여까지 올려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장부상으로만 보면 아직 현진건설은 어려운 상황이고 매달 상환해야 하는 부채도 상당했다.
그러니 직원들 급여까지 올려준다는 이야기에 구도일 사장이 화들짝 놀란 것일 테다.

“당장 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올해 연말부터 현진물산 급여에 맞도록 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래야 하구요.”
“당장 일감부터 부족해.”
“조금 있으면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발표됩니다. 아직 결과 안 나왔으니까 지켜보시죠.”
“그거 진심으로 따내려고 하는 건가? 이번 현진관광을 인수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부서 아니었어?”
“그렇지 않습니다. 본사에서도 최대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으니까 지켜보시죠. 그리고 이번에 현진관광
인수하면서 호텔 조식 시스템을 전 세대에 공급한다는 계획도 훨씬 설득력을 얻게 될 겁니다. 본사에서는 이거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정말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그리고 조만간 광주광역시 인공지능 집적단지 조성
공고를 발표할 겁니다. 최대한 많이 지원하세요.”
“인공지능 집적단지? 잠깐... 그게 규모가 어느 정도였지?”
“약 1 조 2 천억 정도가 투입된다고 합니다.”

구도일 사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원래 우리가 정부발주 공사에 자주 참여했기 때문에 여기 입찰에 들어가는 거야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단순히
공고에 현진건설의 이름만 넣는다고 다가 아니거든? 혹시 위에 끈이 있는 거야? 있다면 확실히 말해줘야 해.
입찰가격부터 내장재, 디자인 등등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
“흐음... 만약 끈이 있다면 입찰 가격을 올리고 내장재를 안 좋은 걸로 넣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영훈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구 사장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이런 공사가 들어갈 때는 정부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기준 같은 게 있다고. 내장재를 안 좋은 걸 쓴다기보단,


전문가가 봤을 땐 비슷한 수준인데 가격이 월등하게 차이나서 공사대금이 확 올라가 버리는 것도 있고.”
“그래서요?”
“만약 위에 정확한 끈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합리적인 대금으로 입찰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저가 입찰할 수밖에 없어. 그럼 공사를 따내도 남는 것도 없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대부분의 건설사가 일단 공사만 따내고 내장재를 싸구려 써서 공사대금
을 낮추는 거지.”

이해가 되긴 했다.

“특별히 저가 입찰할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공사 따내서 손해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이번 인공지능


집적단지 말고도 계속 수주를 따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속 중소기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지만...”
“가능하다면 전문인력 많이 충원하세요.”
“건설회사에서 전문인력이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채용할 수 있지. 원래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그렇거든.
시장이 조금만 활성화되면 인력을 많이 뽑아다가 실력 쌓게 해놓고 불황이 되면 그 아까운 인력들을 퇴직하게
만들어.”
“그럼 나중에 또 경기가 좋아지면요?”
“그래서 또 실수하다가 공기(공사하는 기간) 날리고, 손해 보고, 뭐 그런 거지. 어쨌든 그게 사장님의 뜻이라는
거지?”
“맞습니다.”
“허허... 그래도 최 과장이 와서 마음이 놓이네.”
“사장님께서 언제 한번 자리 마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정신이 없으셔서...”
“알지. 그런 큰일을 하셨는데, 정신 없으실 거야.”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구호준 실장 왔습니다.”


“어, 그래. 들어오라고 해.”

갑자기 누가 들어오나 했더니 영훈 또래의 남자가 쑥쓰러운 얼굴로 들어온다.


키는 170 정도에 평소 잘 먹고 다니는지 풍채가 상당한 친구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상이 굉장히 좋았다.
눈빛이 깨끗하고 눈동자가 검으며 하관이 튼실하고 광대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얼굴만 봐도 사람 좋아보인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순하고 호감이 가게 생겼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상에서 우유부단한 면이 보인달까?
정이 많고 우유부단하니 여자를 잘못 만나면 꽤나 고생할 수도 있는 성격이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사주와 좋은 상을 타고 난다고 해도 남편이나 아내를 잘못 만나면 주어진 복을 다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분은...?”
“아, 여기는 우리 막내야. 설계팀에서 일하고 있는 구호준이라고 해. 여기 이분이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이라고
비서실에서 근무하시는 분이야. 인사드려.”

영훈이 현진물산에서 사장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실세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호준입니다. 하하...”

역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영훈이 슬쩍 악수를 하고는 물었다.

“반갑습니다. 원래 이 회사에 계속 다니셨나요?”


“입사한 지는 3 년쯤 됐습니다.”
“건설쪽으로 공부를 많이 하셨나봐요?”
“어렸을때부터 아버지가 이쪽에 계셔서 건축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유학도 다녀왔구요.”

여기서 구도일 사장이 끼어들었다.

“우리 집이 아들만 넷인데 얘가 우리 막내야. 나랑 무려 열 일곱살 차이가 나. 거의 아들 뻘이지.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실력이 대단해. 학교다닐때부터 온갖 공모전에 다 이름을 올려서 얘 데리고 가려고 벡텔에서
학교에다가 지원 안 하느냐고 막 묻기도 하고 그랬다니까.”

벡텔이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지만 영훈은 눈치껏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정말요?”
구호준 실장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 뿐만 아니고 그때 연락받은 친구들이 몇 있었습니다.”


“대단한 분이네요.”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실력이 대단해. 봉선동 아파트 설계를 여기 호준이가 담당했거든. 지네들이 이름
값으로 우리를 누르려나 본데, 솔직히 말하자면 설계 능력은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서 절대 안 꿀린다고.”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무슨 이야긴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능력이 좋다는 말이었고 그걸 떠나서 영훈은 그의 상 만으로도 충분히
인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간 무식한 것만 탄로날 것 같아 얼른 나왔다.
영훈은 회사를 나오면서 연희에게 구호준에 관한 인사자료를 요청했다.
연희가 바로 해당 내용을 찾아서 영훈에게 보내주자 비로소 영훈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왜 구도일 사장이 그토록
어마어마한 재복을 타고 났음에도 회사가 어려웠는지도 알수 있었다.
구도일이 큰 재복을 타고 났다고는 하지만 구호준은 구도일을 뛰어넘는 그릇을 가지고 태어났다.
속된 말로 기가 세다고 할까?
영훈이 어릴 때 욕심이 많아서 주변의 재복을 쓸어오는 사주를 타고 났다면 구호준은 그 반대였다.
그는 서른 전까지 들어오는 복을 전부 걷어차는 사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아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서른 전까지 극히 어려운 삶을 살았을 인물인데 구도일 사장의 재복 덕분에
유학까지도 다녀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지금 그에게 재운이 들어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다만 이제 그에게 들어온 악운이 물러가면서 구도일 사장의 재운이 다시금 들어올 길을 열어줬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며칠 뒤, 거제조선소.
현진중공업 임원회의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거제의 날씨 만큼이나 싸늘했다.

“입이 있으면 말들 해봐. 왜 말이 없어? 이거 받아? 말아?”

임창호 회장의 말에 임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게 확실하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그 임원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김태민 상무가 소리쳤다.

“안 됩니다! 이제야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면 당장 채용해야 할 직원만
최소 천 명을 넘어갑니다. 군산의 그 큰 도크를 다 채울 만한 수주를 받는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만약 카타르
수주전에서 예상한 만큼 따오지 못한다면 엄청난 손실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임원은 반박했다.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시장이 변하는 중입니다. 카타르가 대형 수주를 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외에도 수주를 따낼 만한 프로젝트는 여전히 많습니다.”
“못 따면? 당신이 책임질 건가?”

태민의 거친 반박에 그 임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책임지겠습니다. 임원 자리 내놓으면 되겠습니까?”


“흥! 회사가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고작 목 하나 내놓고 끝내려고 합니까?”
“아예 반대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식입니까?”
“그럼 책임져보시든가요. 책임도 못 질 이야기 아닙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창호 회장이 말했다.

“그럼 우리 김 상무는 조선 경기가 앞으로도 계속 성장세를 지속하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회, 회장님... 그거야...”
“그렇게 닦달하지 마시게. 아예 입을 막자는 게 아니면 그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 섭섭하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그럼 우리 김 상무는 군산조선소를 포기하고 한 그룹에서 두 개의 조선업을 하는 걸로 하자 이 말이지?”
“회장님,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가정입니다. 무진중공업이 군산조선소를 쉽게 팔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판다손
치더라도 무진중공업이 노리는 해주조선해양을 어떻게 인수하겠습니까?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사려면
현진물산이 가진 자산을 다 팔아도 살 수 없습니다.”
“은행이 있잖아. 현진관광을 인수하는데 썼던 신영은행. 적대적 인수합병에 몰래 흑기사로 들어올 정도면 둘이
아주 죽고 못 사는 사이 아니야? 그런 사이에 고작 인수자금 정도 못 빌려주겠어?”
“정말 천에, 만에 하나의 경우일 뿐입니다. 설령 그런 희박한 확률 때문에 그룹의 미래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 경기가 살아난다고는 하지만 해양플랜트는 아직도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살아나고
있다고 확신하기는 이릅니다.”

임 회장은 극구 반대하는 태민이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왜 저렇게 반대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현진관광을 잃어버리면서 계열사가 축소된 상황에서 군산조선소를 껴안았다가 만약 다시 한번 불황이 닥치면
그때는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걸 아는 까닭이다.
군산조선소는 분명 양날의 검과 같았다.
잘 되면 현진중공업을 국내 최대의 조선회사로 우뚝 세울 테지만 반대가 되는 순간 그룹 전체를 쓰러뜨릴 폭탄과도
같았다.

“일단 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보지. 다들 나가 봐.”

임 회장은 지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임원들을 쫓아냈다.


그런데 태민만 홀로 남아 버티고 서 있었다.

“왜 안 나가?”
“할아버지, 정말 군산조선소를 인수하셔야겠습니까?”
“아직 생각해보자니까.”

태민은 화가 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항상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회장님 뜻대로 안 되면 항상 안건을 미루고 의견이 일치될 때까지
밀어붙이셨잖습니까!”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정말 너무하십니다. 현진관광이 그렇게 될 때까지 그냥 두고 보셨으면서 이제는 현진중공업까지 쓰러뜨릴
작정이십니까? 아니, 이제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겠습니다. 현진중공업이 군산조선소를 안고 허덕일 때
현진물산으로 하여금 도움을 받게 할 작정이시지요? 그래서 이 회사를 연희 그년에게 갖다 받칠 생
각이시지요?”
“뭐 인마!”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지르는 순간 뒷골이 뻣뻣해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 현진건설의 도약(5) > 끝

< 부산에서 생긴 일(1) >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임창호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 연희는 마치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당장 출발하려던 송 사장은 임지은 사장이 아빠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만류했기에 회사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그러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임원회의를 소집했고 영훈은 연희 옆에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영훈은 임창호 회장이 바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쓰러질 만큼 횡액을 당할 운이었다면 분명 상에 나타났을 것이다.
예전에는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다시 떠올려봐도 임 회장은 이렇게 당장 쓰러져 죽을
운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봐야 음력으로 내년 중, 후반이다.
아직 해가 가기도 전인데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김민희가 급히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이 이제 곧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아가씨와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저두요?”
“네, 사장님께서 과장님과 같이 간다고 하셨습니다.”
“비서실장님은요?”
“홍 실장님도 같이 출발할 겁니다.”
“음... 알겠어요.”

솔직히 영훈은 임창호 회장을 보러 가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죽으리라는 건 알고 있다.
곧 죽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괴로워 할 인척들 앞에서 모른척 시치미를 떼려니 그냥 마음이 내키지를
않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같이 가자는데 가기 싫다고 할 수는 없는지라 아직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연희의 팔꿈치를
톡톡 두들겼다.

“네?”
“사장님이 준비하랍니다. 이제 곧 출발하신대요.”
“지금요? 부산으로요?”
“네. 갑시다.”

그녀는 가자는 말에 핸드폰이랑 지갑도 안 챙기고 코트부터 입고 나섰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의 짐을 마저 챙기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사장님이 탈 차 외에 한 대의 세단이
더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저 차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아 영훈이 뒷차에 타자 연희가 따라 탄다.

“연희 씨는 사장님이랑 같이 타고 가지 그래요?”


“싫어요. 어차피 할아버지한테 당신 소개도 다 시켜줬는데 어때요. 당신이랑 같이 갈거예요.”
“그럼 그럽시다.”

아무래도 부산에 도착하면 볼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녀는 외부 사람들의 눈보다 자신의 심적 안정을 택한 듯했다.

차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왔다.


회사 중역 전부가 송 사장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인사를 하는 거였다.
송 사장과 흥 실장이 앞차에 타서 출발하자 뒷차도 따라 서서히 미끄러져가며 회사를 벗어났다.
시커먼 두 차가 약 네 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려서야 부산 백병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일행이 쓰러진 임 회장이 있는 병실에 도착하니 또 일단의 무리들이 병실 앞에 몰려 있는게 보였다.
영훈은 이 광경을 보고 내심 웃음이 나왔다.
이 얼마나 드라마,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이란 말인가.
이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근거리에서 보고 있다는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빨리도 왔네? 왜?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뭐 하나라도 줄까봐 이렇게 급하게 왔어?”

임지은 사장의 표독스러운 말에 송 사장은 태연히 맞받았다.

“이미 받은게 많아서 더 받고 싶은 건 없어요. 괜히 더 뺏길까봐 전전긍긍하시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날 세우지


마세요. 아버님 편찮으신데 큰 소리 들으셔서 좋을거 없잖아요.”
“올케 그렇게 안 봤는데 원래 이렇게 뻔뻔했어?”
“맞아요. 원래는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쥐죽은 듯이 살았는데 바깥양반 쓰러지고 가진거 지키려고 하니 아들 셋
키운 것 마냥 드세지네요. 이제는 형님 얼굴이 그렇게 무섭지 않은 걸 보니 변하긴 변했나봐요.”
“허...”

임 사장은 어이가 없어 웃는데 송 사장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서있는 태민에게 말을 걸었다.

“회장님은 어떠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네가 처음 발견했다며? 어떻게 되신거야?”

임 사장이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 애 취조하는 거야?”


“취조가 아니라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는 거예요. 며느리로서 어떻게 아버님이 쓰러지신 건지 궁금한게 당연한거
아닌가요? 형님, 제가 남도 아니고 고작 이런 거 물었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니까 더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지금 우리 태민이가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면서 약을 먹었어. 알아?”
더 흥분하는 임지은 사장을 제 3 자가 보면 오히려 더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김태민 상무가 말렸다.

“엄마, 그만해. 그런데 옆에 누구야?”


태민은 송 사장 뒤에서 연희가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걸 보고 물었다.
연희는 슬쩍 영훈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리 비서실 사람이야. 최영훈 과장.”


“그래? 딱 달라붙어 있기에 사귀는 사이인줄 알았다.”
“맞아. 사귀고 있어.”
“뭐?”

태민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 영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입니다.”

태민은 영훈이 내미는 손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 결혼할 사이야? 여기까지 데리고 오게?”


“할아버지도 알고 계셔.”
“벌써 소개시켰어? 못 보던 얼굴인데 어느 집 자식인데?”

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비웃는 태민의 눈빛.
딱 봐도 영훈이 재벌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한 눈빛이었다.

“어느 집 자식인지 궁금해할 정신이 있나 봐? 지금 상황이 그렇게 한가한가?”


“뭐라고?”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정신 딴데 팔지 말고 오빠 할 일이나 잘해. 그러다 또 회사 뺏기지 말고.”

차를 타고 오면서도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느라 별 말도 하지 않던 그녀였는데 한번 독설이 나가니 거침없이


찔러댄다.

“너, 지금 오빠한테 무슨 버릇없는 말이니?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한 거야. 넌 위 아래도 모르니?”

듣다 못한 임 사장이 끼어들자 연희는 눈썹하나 흔들리지 않고 태연히 쏘아붙였다.

“맞아요, 제가 유학파라 한국식 예절에는 익숙하지 않거든요. 아, 전에 모임에서 들으니까 오빠 또 여자


임신시켰다며? 이번에는 여배우도 아니고 텐프로라는데 조심 좀 하지 그랬어. 그러다 졸지에 룸싸롱 여자랑
호텔에서 식 올리는거 아니야? 쪽팔려서 친구들한테 청첩장이나 돌릴 수 있겠어?”

짝!

보다 못한 임지은 사장이 있는 힘껏 연희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였다.


어찌나 손이 빨랐는지 영훈은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처럼 막지도 못했다.
영훈도 놀라고 송은채 사장도 놀란 이때, 연희는 별일 없다는 듯 고개를 들며 입술을 매만지고는 말했다.

“오늘은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은 날이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현진관광 얻은 대가로 맞은 셈 치면 되니까요. 뺨


한 대에 현진관광이면 싼 거 맞죠?”
“뭐?”

임지은 사장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력이 좋거든요. 그런데 오늘 일은 특별히 잊어 줄게요, 고모니까. 이제 그만 나와주실래요?
정신도 못 차리신다는 할아버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온 거니까.”

연희는 벙찐 임 사장의 옆을 지나치며 나아갔고 홍승대 실장이 얼른 송 사장을 이끌고 병실로 움직였다.
찬바람이 풀풀 풍기는 연희의 모습은 본래 그녀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영훈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변하려고 지금껏 노력했지만 본래 그녀는 태어나기를 자신이
정한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여자였다.

“저, 저런 싸가지 없는게...”


“그럼...”

영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려는데 김태민 상무가 영훈의 팔을 잡아 챈다.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네,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나?”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는 영훈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잠시 동안 눈을 쳐다보았다.


암묵적인 눈싸움의 시간이 지나고 영훈은 연희가 선물로 사준 명함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최영훈입니다.”

명함을 주며 자연스럽게 악수라도 하려 했는데 김태민 상무는 한쪽 입꼬리를 이죽거렸다.


“내가 너랑 명함 주고받을 군번이라고 보여?”

이미 형준의 반말에 익숙해져 있기에 누가 반말을 한다고 해도 크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정도에 욱할 정도면 산에서 20 년 넘게 수양해온 세월이 아까울 테니까.
다만 아까 연희가 뺨을 얻어맞은 것 때문에 영훈은 조금 화가 올라온 상태였다.

“군대는 다녀오셨나 보군요. 보통 재벌집 자제들은 군대를 안 간다고 하던데.”


“뭐 이새끼야?”
“흥분하지 마세요. 저도 안 다녀왔으니까. 그러니 서로 군번이 없는셈치고 말하자면 명함 주고받을 군번이
맞습니다. 아마 앞으로 제 이름 많이 듣게 되실 거니까요. 그리고... 혹시 군산조선소에 관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순간 태민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와락 영훈의 멱살을 잡으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머어머, 얘 왜 이러니?”

임지은 사장이 말리려 했지만 태민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영훈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우리 할아버지한테 헛소리 지껄인 놈이냐?”


“흥분하지 마시죠.”

영훈의 멱살을 잡고 있는 태민의 손을 잡을 때 그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너냐니까!”
“저라면 뭐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흥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그때 순간적으로 멱살을 잡은 태민의 손에 힘이 빠졌다.


영훈이 그의 손을 풀고는 구겨진 옷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누가 제안한 건지 알아내는데 주력하지 마시고 결론을 빨리 내셔야 할 겁니다.”


“왜? 해주조선해양까지 인수하려고?”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임지은 사장이 물었다.

“얘, 무슨 소리를 하니? 해주조선해양은 또 뭐고?”

태민이나 영훈이나 임 사장의 물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영훈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상무님, 흥분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이제 현진중공업을 이끌어갈 분이 아닙니까? 흥분하지 마세요. 그리고
상무님의 결정은 현진중공업의 결정으로 알겠습니다.”
“무슨 결정?”
“군산조선소, 포기하시는 거 아닙니까?”
“...”
“현진중공업 잘 운영하시길 바랍니다.”

영훈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송 사장 일행이 들어간 병실로 따라 들어갔다.


뒤에서 임지은 사장이 아들에게 무슨 상황이냐고 채근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지금 그런 이야기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늑대를 키우셨어... 그것도 사냥도 못하고 성질만 더러운 고약한 늑대를...’

영훈은 병실로 들어가며 탄식했다.


태민이 멱살을 잡을 때 잠시 잡았던 손을 통해 태어난 시각을 알아낸 영훈은 미리 알아온 생년월일을 통해 그의
사주를 계산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냈다.

“지금 당장은 깨어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경찰은 와서 조사했나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낙담하는 송 사장과 연희를 보며 영훈은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의사가 나가고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자리를 지킨 모녀를 보며 홍 실장은 슬쩍 영훈을 불러냈다.
마침 임지은 사장 일행 역시 자리를 비운 걸 보면 어딘가로 간 모양이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홍 실장의 물음에 영훈이 임 회장이 누워있는 병실에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군산조선소를 포기할 것 같습니다.”


“그래, 쉽지 않을 거야. 아직 활황기 때 모습도 다 찾지 못했는데 거의 1 조 가까운 빈 조선소를 안으라고 하니
놀래 자빠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겠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우린 이제 우리 할 일을...”

말하는 중에 어떤 여자가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게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여자였으면 눈길을 거뒀을텐데 입고 있는 옷차림이나 얼굴이 범상치 않았다.
이제 연희와 백화점을 종종 다니며 명품에 대한 눈을 띄워가고 있는 와중이라 그녀의 가방이나 옷이 꽤나 비싼
것임을 알아보았다.
게다가 어딜 가나 한눈에 들어오는 미인이라 자연적으로 시선이 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아는 여자야?”

영훈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씨익 올렸다.

“재밌게 됐네요.”
“뭐가?”
“회장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초상은 다른 곳에서 치르겠어요.”

< 부산에서 생긴 일(1) > 끝

< 부산에서 생긴 일(2) >

역시나 생각했던 게 맞았다.


그녀가 병실을 살피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님 병실 앞에 딱 멈추어 섰다.
병실 앞을 지키는 현진중공업 시큐리티 직원이 그녀를 막아서자 홍 실장이 다가갔다.

“잠깐이면 돼요. 이야기 좀 나누려고 하거든요.”


“안 됩니다.”
“저 외부인 아니에요. 김태현 상무님과 관계 있어요.”
“그럼 상무님과 같이 오십시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실랑이하는 그들에게 홍 실장이 다가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이 아가씨가 다짜고짜 회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시큐리티 직원의 말에 홍 실장이 그녀를 달랬다.


“회장님은 지금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세요.”
“회장님이 지금 많이 아프신가요? 말도 못 하시고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인가요?”

이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임창호 회장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해준단 말인가?


홍 실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알거 없고 일단 가시라니까요. 상무님과 관계가 있으면 상무님하고 같이 오시면 됩니다.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를 수밖에 없어요.”

영훈은 뒤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를 모자가 이 광경을 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 시각, 임지은 사장은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아까 연희가 한 이야기가 도대체 뭐야? 혹시 누구 임신 시켰니?”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연희가 그렇게 확신에 차서 해? 너 똑바로 이야기해. 어떻게 된 상황이야. 내가 알아야 돈
주고 애를 지우든지 시킬거 아니야!”

김태민 상무는 짜증이 올라온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잠깐 만난 여자야. 술집 여자 아니고.”


“텐프로라며?”
“그거 아니야... 그냥 만난 여자야. 클럽에서 만났어.”
“임신한 거 맞아?”

태민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들의 행동을 보자 직감적으로 상황을 알아챈 임 사장이 더욱 채근했다.

“임신한 거 맞지? 아니다. 혹시 낳은 거니? 혹시 아이를 낳은 거야?”


“내 아이인지는 몰라. 아닐걸? 말도 안 되지.”
“이 미친...”

임 사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 부들부들 떨었다.


임신한 것도 아니고 애를 낳기까지 했다니...

“내 아이 아닐걸? 내가 그래서 검사해보자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검사 결과 언제 나온대?”
“곧 나올거야. 윤 실장한테 시켰으니까 알아서 처리하겠지.”

일단 친자확인검사를 시작했다는 말에 임지은 사장은 화를 내리 눌렀다.

“정말? 확실히 니 애 아닌 거지?”


“아니라니까. 나 못 믿어요?”

임지은 사장은 입술을 깨물더니 독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너, 조심해. 여기서 여자랑 애 때문에 발목 잡히면 이 좋은 기회 놓치는 거야. 당장 어제도 GK 그룹 여편네랑
통화했어. 너, 그 애 못 잡으면 안 돼. 알지?”
“알아요, 알아~”

태민의 표정은 엄마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는 아들의 표정 그것이었다.

“이번에 주변 여자들 다 정리해. 주연인가 하는 그 애,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하더라.”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 유언장 내용 정말 확실하죠?”

임 사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내가 본게 맞다면 그렇겠지. 변호사도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만약 변경했으면 내가 모를 리 없어.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주식은 전부 네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후...”

태민이 답답한지 긴 숨을 토해내자 임 사장이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 할아버지 오래 사셨다. 누릴 거 다 누리셨고 온갖 여자들 만나고 다니셔서 우리 엄마 제 명에 못 살고


돌아가시게 했어. 지금 돌아가셔도 호상이야.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알겠어요.”
“나가자.”

임은진 사장이 몸을 돌려 나가자 태민도 따르는데 어디서 소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 회장님을 만나러 왔다니까요. 인사만 하고 갈 거예요. 왜 못 들어가게 하는데요?”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실랑이하는 현진물산 홍승대 실장.


그리고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최영훈 과장의 모습이 태민의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가라니까요. 어디 회장님을 독대하려고 그럽니까?”

급기야 홍승대 실장이 짜증을 내는 상황에 태민이 급하게 발걸음을 놀렸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와? 나가자.”

태민이 놀라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나갔다.


임지은 사장도 헐레벌떡 태민을 따라 나갔고 홍 실장은 벙찐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 시끄러워서 그런지 병실에서 나온 연희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 여자 뭐지?”
“김태민 상무와 아는 사람 같아요.”

영훈의 대답에 눈치챘는지 연희가 눈빛을 반짝인다.

“혹시 아까 내가 말한 그런 여자 같았어요? 난 제대로 못 봤어요.”


“그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영훈은 굳이 사람들이 많은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병원장이랑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일단 나가자. 신경을 썼더니 배가 고프네. 식사라도


해야겠어.”

송은채 사장이 지친 표정으로 나가자 다들 이야기를 멈추고 그녀를 따라 나섰다.


홍 실장이 급하게 섭외한 횟집에 들어서니 마침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가게를 빌린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마침 손님이 없었던 것 같았다.

“조금 단촐하네요?”

연희의 물음에는 가게가 조금 허름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홍 실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횟감이 좋아. 회장님도 종종 들르시는 곳이거든. 예전 사장님도 부산에 오시면 여기서 돌돔 한 마리를
꼭 드시고 가시긴 했어.”
“아... 그래요?”
“회도 그렇고 기본 반찬이 먹을만 할 겁니다.”

송 사장은 홍 실장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다가 영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어떤 상황이었어?”
“김태민 상무의 숨겨둔 여자 같은데 회장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생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뱃속에 있는 건 아니고?”
“그건 모릅니다. 그런데 생각이 없는 여자 같지는 않았습니다.”

송 사장은 영훈의 말을 알아들었다.

“형님이 골치 좀 썩겠네. 태민이가 원래 노는 걸 좋아하긴 했지. 최 과장은 이런 거 한심하지?”


“뭐 조금...”
“여기 있다 보면 이런 거 많이 볼 거야. 재벌들 보면 의외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긴
한데, 적어도 유흥에 관련해서는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보다 실제가 더 심해. 그래서 결혼하게 되면 부부간의
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몇 없어. 우명그룹에서 우리 연희를 자기네 아들이랑 선보게 해달라
고 했는데 나도 억지로 권하지 않은건 그런 이유야.”

영훈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잠깐 연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저런 태민의 행태가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님도 그렇고...
하여튼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다 그래와서 너무 익숙해졌는지도 모르지.”

송은채 사장이 왜 말을 하다 말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연희의 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는 뜻이었으리라.

“그렇군요.”
“우리 최 과장은 안 그럴 거라고 믿어.”

그 소리에 가장 놀란 사람은 홍승대 실장이었다.


그동안 설마설마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최 과장을 인정하고 있으니 이제 현진물산의 차기 경영자는
최영훈인게 확실해졌다.
그 불가사이한 인맥과 능력을 보인 그가 송은채 사장의 사위가 된다면...
홍 실장은 등에 한줄기 전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얼마 전부터 자신이 민홍기 과장의 말을 듣고 최 과장의 편에 선게 인생을 살면서 몇 안되는 잘 한 선택 중
하나였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민홍기 과장의 말을 듣지 않고 양철기 전 전무의 라인을 타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 검찰을 들락거리는
양철기와 비슷한 처지였을 게 아닌가?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내용이 자신이 생각한 그것이라면 자신이 잡은 동아줄이 황금 동아줄이 맞았던 거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보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아버님이 유언장을 미리 써놓으셨다고 해도 우리에겐 얼마
남기지 않으셨을 거야. 솔직히 더 받고 싶지도 않고. 예전에 생각해 왔던 대로 그냥 깔끔하게 분리했으면
좋겠는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일단 손에 들어온 걸 쉽게 내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미 가지고 있던 것까지 뺏긴 마당이니 다시
찾아오리라는 각오가 상당할 겁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그룹의 전권을 손에 쥐면 피곤한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한데... 저쪽 입장에서는 불청객이 등장했으니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하네요.”
“태민이 아이 말하는 거지?”
“네.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깔끔한데 과연 그럴까요?”
“아니, 절대 그렇게 못해. 지금 태민이를 GK 그룹 손녀랑 이어주려고 하고 있거든. 이건 아버님이 직접 챙기셨던
일이었어. GK 그룹이 가진 면세점과 유통을 탐내하셨거든. 더 정확히 말하면 GK 그룹이 가진 현금동원력을
탐내셨지. IMF 때도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현금 부자인 데가 거기거든.”

GK 면세점은 영훈도 알고 있을 정도로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대형 면세점 브랜드다.

“거긴 아들 없습니까?”
“있지. 그런데 적어도 면세점 만큼은 똑똑한 손녀한테 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어. 그 애가 똑똑하긴 하지.”
“아...”
“아버님은 한번 불황을 겪고 난 뒤 위기가 찾아올 때 자신을 도와줄 파트너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걸 느끼셨어.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아주버님쪽이 많은 도움을 주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셨지. 내 친가는 아무 도움도 못
됐고.”
“그래서 현금부자인 곳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는군요.”
“맞아. 그런데 갑자기 태민이 자식이 등장했네?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골치를 썩기는 해도 형님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송 사장의 말에 다 수긍하지는 않았다.


잠깐이었지만 그 여자의 상을 봤을 때 결코 쉬운 여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희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였기에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아마 둘만 있을 때 그 여자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댈 게 분명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병원에 도착한 일행은 병원장을 독대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는 인자한 얼굴로 송은채 사장과 일행을 반겼다.

“어서오십시오. 병원장 노석춘입니다.”

영훈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굉장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을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 그는 송은채 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버님 상태는 어떤가요?”

그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의료진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그렇군요.”

송은채 사장은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오늘 병원장을 방문하는 것도 반드시 살려내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니었고 그저 잘 보살펴달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의 더 큰 병원으로 이송시키고 싶었지만 분명 임지은 사장 쪽에서 반대할 것이기에 말도 꺼내지
않았다.
거제백병원에서 조금 더 낫다는 이곳으로 옮겨온 것만으로도 생색을 낼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형식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송 사장 일행이 나올 때 영훈이 송 사장에게 말했다.

“잠깐 병원장과 대화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응? 왜?”
“다른 건 아니고 알고 보니까 예전에 인연이 있는 분이어서요.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억났다.
십 년도 더 전에 딱 두 번 봤었지만, 그 사람이 분명했다.

“응, 그래.”

호기심이 가득 찬 연희의 눈빛을 뒤로 하고 다시 병원장실로 들어가니 노석춘 병원장이 왜 다시 들어왔냐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혹시 예전에 윤주사에 가끔 불공을 드리러 오시던...”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노석춘 병원장이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어디서 봤다 했는데 거기서 봤구만. 그때 그 동자승 맞지요?”


“네, 맞습니다. 알고 보니 의사선생님이셨군요.”
“허허... 일단 앉아요.”

노 병원장은 영훈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지금도 꾸준히 절에 시주를 합니다. 그때 너무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있나요. 따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때 스님 말 듣고 유학 보내서 지금 첼리스트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그 용하던
동자승이 회사에 있다니.”
“거 참 동자승 아니라니까 자꾸 동자승이라고 하십니다. 머리도 안 깎는 스님이 있습니까?”
“승복을 입고 절에 있으면 다 스님 아닙니까? 뭐 그렇다 치고 이제 회사원이 다 된 겁니까?”
“네. 이제 속세로 나와 어엿한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아주 딴 사람 같네요. 보기 좋습니다.”

노석춘 병원장은 환하게 웃으며 속세는 어떠냐는 둥, 회사 생활은 할 만하냐는 둥 물어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혹시...”
“네?”
“지금도 사주를 보십니까?”
“죄송합니다. 이제는 사주를 보지 않습니다.”
“허허... 이런...”
“힘드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주는 보지 못하지만, 회사원의 신분으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영훈은 이미 그가 지금 어려운 지경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그의 사주를 봐주었던 순간부터 말이다.

< 부산에서 생긴 일(2) > 끝

< 부산에서 생긴 일(3) >

10 년도 더 된 오래된 이야기다.
영훈이 더 이상 칠흑 같은 산속 어둠이 무서워지지 않을 무렵, 괜히 자신의 능력을 뽐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주지스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사주를 본다고 말은 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기회를 보면서 괜히 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을 때였다.
대개 절에 불공을 올리면 생년월일을 적어 내기 때문에 태어난 시각만 알면 사주를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
불공을 올리고 내려가는 보살들에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곤 했다.
지금 외부에서 영훈이 사주를 볼 줄 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이때 영훈이 툭툭 던져준 이야기를 받아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노석춘의 아내가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당시 노석춘 아내에게 해준 이야기는 자식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내용이 심각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충고를 해주었는데 당시 노석춘의 아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 남편과
함께 영훈을 찾았었고 주지스님 몰래 사주를 풀어준 뒤 해답을 알려주었었다.
그게 너무 오래된 일이었고 또 노석춘이 당시에는 머리가 이 정도로 하얗게 센 편이 아니었기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였다.

“이게 참 그래서... 내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병원 전체에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뭔데 그러십니까?”
“전에 그랬었지요? 내가 사업을 할 팔자라고.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말은 안 했지만, 솔직히 스님... 아니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영훈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냥 최 과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허허... 최 과장이라... 참 인생은 모르겠습니다. 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최 과장만큼 신통한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과장이라니 말이에요.”
“옛 일입니다.”
“흐음... 어쨌든 최 과장이 그때 내가 사업을 할 팔자라는 말을 듣고 최 과장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난 어릴
때부터 의사가 꿈이었고 의사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요. 사업가가 될 팔자라는 말이 굉장히 황당하게
들렸습니다.”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병원장에 올라서 운영하다 보니까 계속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이 일이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죠?”
“맞아요.”
“사주라는 게 그렇습니다. 병원장님께서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더 잘 풀리셨을지를 알려 드리는 거니 꼭
병원장님의 지금 직업이 무엇일지를 맞추는 건 아닙니다. 그게 된다면 사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신점을 보는
사람이겠죠.”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드렸듯이 이제 전 사주를 보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당시 봤었던 병원장님의 사주를 기억해보자면 지금 시기가 그리 좋지 않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석춘 병원장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얼만큼, 어떻게 어렵습니까?”


“그냥 사람만 보면서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할 때는 모르겠다가 이제 돈이 보이기 시작하시죠? 그런데 병원장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하실 겁니다.”
“맞아요.”
“그것만 해도 어려울 텐데 재작년부터 악재가 들어왓을 겁니다. 회사 생활이니까 실적 압박도 있으셨겠군요.”
“그것도 맞아요.”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병원을 나와 사업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혹시 돈 사고도 났습니까?”

노석춘 병원장은 크게 놀랐다.

“그건 또 어찌 알았습니까? 사주를 안 보신다고 하셨는데 이게 다...”


“예전에 봤었습니다. 다만 이야기해드리지는 않았죠.”
“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노 병원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허허... 당시 딸의 상황을 맞춘 최 과장님이었는데 왜 더 물어보지 않았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후회가 돼요.”


“그게 인생 아닙니까? 당시에는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셨을 겁니다. 전 오히려 병원장님께서 따님을 살리셨던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주나 미신 따위는 믿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에요.”
“맞습니다. 내가 최 과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건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따님을 사랑하는 마음 덕분에 짧은 순간이나마 제 말을 믿으셨으니 따님이라도 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조금 어렵다고 한들 그때 그 고민과 고통만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어려움이 닥쳤으니 쉽사리 참고 넘기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래도 고민이 되시겠죠?”
“맞습니다. 잃을 것도 많고 챙겨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했던 딸도 장성해서 이제
남자를 만다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됐습니다. 저렇게 예쁘게 잘 자라주었으니 아빠 된 마음으로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영훈은 당시 그의 사주를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기억이 안 나는 척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건데 병원장님의 사주는 역마가 강한 사주입니다. 한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으니 혈류가 막힌 듯이


병원장님의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지금 자리를 나와 계속 돌아다니시면 막혔던 기가 뚫리듯이 모든 일이 풀릴
겁니다.”
“풀린다면 어느 정도나 풀린다는 말일까요?”
“최소한 돈에 관한 문제는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풀릴 겁니다.”
그제야 노석춘 병원장의 얼굴에 근심이 사라졌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요즘 너무 힘들어서 다른 철학관에 몇 번 가보기도 했는데 좋은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 않았었는데 최 과장에게 그 말을 들으니 참 신기하게 마음이 놓입니다.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는게 어려운 문제지만 그래도 답을 알고 나니 아주 모르던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분 탓이겠죠. 음... 그럼 이제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시에도 복채를 굳이 받지 않는다고 하셔서 항상 가슴속에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줄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훈은 노 병원장의 말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임창호 회장이 부산 백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운명이 이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하필 병원장이 과거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아채고 나서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말해보세요.”
“다름 아니고 제가 아주 오래전에 부모와 떨어져 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찾고 싶은데 아는 거라곤 이곳 부산
백병원에서 저를 낳았다는 것과 어머니 성함이 이명자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이름이 본명이 맞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주지 스님이 영훈을 데리고 올 때 당시 친모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든 정보였다.

“본명이라면 찾기 그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 만약 본명이 아니라면 쉽지 않을 수도 있어요.”


“못 찾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꼭 찾아야 한다고 마음 먹고 있는 건 아니니 정 안 되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병원장실에서 나오니 연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고모 만나러 가셨어요.”
“갑자기?”
“갑자기 고모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거든요. 이왕 부산에 온김에 정리할 건 정리하자는 식으로 말씀하셨대요.”
“계열사 분리를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뻔하죠. 할아버지가 쓰러졌으니 현진중공업 회장직이 공석이 됐고 다음 정기주주총회가 3 월이니까 그때 김태민
상무를 밀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아... 도와주지 않으면 김태민 상무 쪽에서 불편한 상황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해외 쪽 주주들이나 국내 기관들도 현재 경영권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거든요. 아, 물론 지금까지는 그래요. 현진중공업 주식 10% 정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헤지펀드에서 갑자기
경영진에 대해 태클을 걸어오면 또 골치 아파지니까 미리 엄마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죠.”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공수가 바뀔 염려는 없는 거겠군요.”
“3 월까지는요. 김태민 상무가 회장직에 바로 앉기는 힘들겠고, 회장직을 공석으로 두고 부회장직에 올라 전권을
휘두르게 되면 또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안심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 때까지 뭐하고 있을까요?”

연희는 빙그레 웃으며 영훈의 팔짱을 와락 꼈다.

“일단 요 앞 커피숍에 갈래요? 나 지금 궁금한 게 너무 많아.”


“그럽시다.”

영훈은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우명지주회사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회장실.


김태현 회장은 몹시도 불편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해?”

언제나 자신만만한 얼굴이던 창훈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 시간 뒤에 올라올 거라고...”
“이게 말이 돼! 다른 곳도 아니고 현진건설이라니! 작년만 해도 도급능력 39 위인데 아니었어?”
“아무래도 조재민 의원이 손을 쓴거 같습니다.”
“고작 군산 버스터미널 하나로? 그거 하나로 4 천가구가 들어서는 대단지 아파트 시공권을 내줘? 이거 현진건설이
분양가를 평당 4 천 넘게 매긴다고 하던데 그럼 도대체 얼마를 남기는 거야?”
“지방치고는 너무 고가라 미분양 확률이 큽니다. 자칫 잘못하면 절반 이상 분양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 현진물산이 현진관광 먹고 거기에 리츠칼튼 호텔 쉐프들 데리고 와서 조식 서비스 제공하겠다고 했다며?”
“네...”
“그럼 내가 지방에 살고 있더라도 혹하지 않겠냐?”
“그거야...”

창훈은 억울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애초부터 다 알고 있었음에도 설마 우명건설을 제끼고 현진건설을 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현진건설이
호텔급 조식서비스니 지랄이니 하는 걸 다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와서 왜 그 정도를 못하냐고 묻는다면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때 자리에 앉아 있던 큰형이 그를 도왔다.

“창훈이도 설마 현진건설이 따낼지는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호텔급 조식서비스에 LH 애들이 넘어갈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수도 있구요. 그리고 애초부터 조재민 의원이 손댔다면 조식서비스고 다른 부가적인 요소를
넘어서 처음부터 결론이 난 상황에서 입찰을 붙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조재민이가 고작 버스터미널에 넘어갔을 것 같아?”
“강주원 의원이 뇌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조재민 의원이 군산시장 보궐선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구요. 만약 작년 겨울부터 강주원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군산시장을 노리고 있었다면 고작
버스터미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태현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공천만 된다면 누가 나오든 선거에서 당선되는 지역이 거기야. 강주원이 날아갈지 알았다면
둘 중 하나를 했어야지. 공천이 불확실했다면 여의도에 힘을 써서 공천을 확정 받든가. 공천이 확실했다면 그냥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선거에 나서든가.”

여기까지 말하던 김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긴 해, 보궐선거를 벌써부터 떠들썩하게 준비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왜 군산시장을 노리지?
군산에 뭐 꿀 발라 놓은것도 아니고 말이야.”
“맞습니다. 군산 경제도 안 좋은 상황이고 작은 지방 시장보다는 국회의원을 더 하는게 나을 텐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직에 뛰어들려고 하는게 이해가 안 되긴 합니다.”
“그렇지. 잘 돼야 본전인 곳이 군산이야. 누가 봐도 험지인 곳에 왜 가는 걸까?”

김 회장이 고심할 때 억울한 표정의 창훈이 툭 던졌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알고 보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그곳이었을지.”


“응?”

이때 도훈이 도착한 문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메디슨 펀드에서 현진중공업을 노릴지도 모른다는데요?”


“현진중공업? 가지고 있는 지분도 얼마 안 될 텐데? 먹을게 있나?”
“임창호 회장이 쓰러졌으니 그냥 쥐고 흔들면서 차익을 내려는 것 같습니다. 마침 3 월에 주총이 있으니 잘 됐다
싶겠네요.”
“임 회장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외국계 펀드가 회사를 노린다... 회사 임원진은 갈팡질팡하겠고
근로조건이 어쩌고 하면서 노조까지 흔들면 볼 만하겠구만.”
“조선업이 불황이면 아예 손도 대지 않을 텐데 이제 경기가 살아나고 있는 추세라 기회라고 본 것 같습니다.”
“절묘하군. 절묘해.”

탄식을 내뱉던 김태현 회장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우리도 현진중공업 주식을 들고 있지?”


“네. 그룹 전체를 다 합하면 대략 4%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친구가 쓰러진 마당에 외국계 펀드가 현진중공업을 삼키는 걸 두고 볼 수 있나. 우리가 도와줘야지.”

도훈은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죠. 아마 차기 경영진 쪽에서도 반길게 분명합니다. 뭐,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하하!”

< 부산에서 생긴 일(3) > 끝


< 부산에서 생긴 일(4) >

군산시 경암동의 한 낡은 건물 외벽에는 조재민 군산 시장 선거 사무실이라는 대형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 사무실을 개소하고 당직자들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파이팅을 하는 이때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이 있었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러대는 강주원 의원은 금방이라도 뭐 하나라도 집어서 던질 듯했다.

"아니, 의원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겁니까?"

조재민 의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항변하자 그가 눈에서 불길이라도 토해낼 기세로 몰아붙였다.

“너, 알고 있었냐? 알고 있었지?”


“뭐가 말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 감히 내 뒤통수를 쳐?”

조 의원은 그가 이미 다 알고 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쉽사리 인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가 가야하는 길은 대권을 향한 험난한 여정이다.
그 여정에 조금이라도 흠이 발생하면 언제 어느 순간에 터져나와 앞길을 막을지 모른다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뒤통수를 치긴 누가 뒤통수를 칩니까? 일단 앉으세요. 자, 신경쓰지 말고, 일단 다들 나가 있어요. 넌 사람들


데리고 저기 중국집에서 식사라도 시켜주고.”
“알겠습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김시원 보좌관을 내보낸 조재민 의원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강주원 의원을 소파로 이끌었다.

“아휴, 일단 앉으세요.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일단 제 말 좀 들어보시고 흥분을 하시든 고함을 치시든


하세요.”
“그래, 말해봐. 들어나 보자.”
“의원님 갑자기 그 사건 터지고 가장 먼저 생각했던게 바로 군산시였습니다. 의원님도 아시다시피 군산이 이렇게
어려워졌을 때 조선소 중단 사태 해결해보겠다고 형님 만큼이나 뛰어다닌 저 아닙니까? 당시 무진중공업 관계자도
만나고 노조도 만나고...”
“흥! 너 혼자 만났냐? 당 차원에서 전라도 의원 전부 나서서 만난거 아니야?”
“제가 놀러 갔습니까? 가기 전에 군산 상황 다 알아보고 안타까운 사연들 접하고 나서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습니까? 저, 솔직히 그 지역구 그대로 물려받으면 문제될거 하나 없습니다. 현진물산에서 지금
부실공사로 문제 있는 초등학교 수리해준다는 확약까지 받았어요. 이번 총선 전에 애들 입학 때까지 수
리해주는 모습 보여주면 공천 다시 받는거 일도 아닙니다. 아니,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그 지역구 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험지에 일부러 옵니까?”
“무슨 꿍꿍이 속이 있겠지.”
“그런 거 없습니다. 의원님도 군산에서 물러나고 지역 주민들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제가 한 번 일으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원님 뉴스 뜬 거 보고 계속 고심하다가 여의도에 제 진심을 알렸던 겁니다.”
“그럼 나한테 말했어야지!”
“의원님 지금 검찰 조사 받는다고 힘드실 거 아닙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의원님 지역구에
대타로 이어가겠다고 말하면 얼마나 화가 나시겠어요? 지금 보세요. 제가 이럴까 봐 말씀 안 드린 겁니다.”

강주원 의원이 버럭 소리질렀다.

“내가 바보야! 군산 시내에서 내가 모르게 벌어지는 일이 있을 줄 알아!”


“그렇죠. 말 안 해도 언젠가는 아셨을 거 압니다. 하지만 빨리 아셔서 좋을 것도 없는 거 아닙니까? 당
차원에서는 다음 보궐 선거 준비해야 하는데 의원님께서 길길이 화내시면 선거 준비도 늦춰질 테고, 어차피
공천은 해야 하는 거고... 이대로 군산시를 혁신국민당에 넘길 겁니까?”
“누가 넘겨? 나 아직 안 죽었다.”

조재민 의원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미 뇌물 사건이 크게 터져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엮여 들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그 와중에 강주원 의원도 엮여 있었다.
도무지 빠져나가기 힘들어 보이는 그물에 엮여 있음에도 아직 군산의 왕 자리를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말로 제가 의원님 자리를 뺏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의원님이야 검찰 조사에서 별게 없다면 제가 시장이


돼서 의원님 도와드릴 수도 있는 일인데 뭘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군산시장은 이미 낙점된 사람이 있어.”

이거다.
군산시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나가리 된 순간부터 당연히 이번 차기 군산시장이 누가 될지에 대해 이야기가 돌았다.

당연히 차기 군산시장을 노리는 이들은 가장 먼저 강주원 의원의 허락을 얻어야 했을 거다.


허락. 동의도 협조도 아닌 허락이 필요했을 게다.
그 허락을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이 오고 갔을까?
안 봐도 훤히 그려진다.
그런 과정을 거쳤을 텐데 갑자기 생뚱맞게 광주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군산시장 선거에
도전한다고 하니 강주원 의원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거다.

“그렇습니까?”

몰랐던 척 시치미를 뚝 떼니 강 의원이 탁자에 놓인 재떨이를 움켜쥔다.

“몰랐다고 개소리 지껄이지 마. 너 이 새끼... 내가 호구로 보여? 너 당장 이 사무실 접고 광주로 가.


군산시장은 이미 낙점 돼있어.”
“안 됩니다. 이건 당 차원에서 결정한 일입니다.”
“당 차원에서 결정했어도 당사자가 물러난다고 하면 결정 되돌리는 건 일도 아니야. 내가 그걸 몰라?”
“좋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군산시장이 될 사람. 누굽니까? 만약 그 사람이 저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제가
깨끗하게 물러나겠습니다.”
“뭐?”
“말씀드렸죠? 저, 정치인생 쉽게 가고자 했으면 광주에서 편하게 다음 선거하고 국회의원 뱃지 4 년 갱신했을
겁니다. 제가 이곳으로 온 건 오로지 군산시민을 위해서입니다.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면 굳이 의원님한테
이런 험한 소리 들으면서 엉덩이 붙이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차라리 뭘 얻어 먹을 게 있어서 온 것 같으면 말이 통할 텐데 이렇게 정공법으로 나오니 강주원 의원으로서도


할말이 궁색해졌다.
정치인이 군산 시민을 위해서 일부러 험지로 왔다고 하는데 무작정 비난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인 거다.
하지만 강주원 의원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이효창. 알지? 군산에서만 20 년 넘게 살았고 시의원 경력만 10 년이다. 누구보다 군산을 위해 열심히 일해온
사람이야. 그 보다 나은 사람 없다.”

조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의원님을 형님처럼 모시면서 굳은 일, 험한 일 도맡아서 하는 사람이죠. 성실하고 똑똑하고... 그런데


안 되겠습니다. 그 사람으로는 군산시가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강주원 의원은 단호하면서도 당당한 조재민 의원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놀랐다.


평소 자신을 그렇게 살갑게 모시던 까마득한 후배가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바꾸어 놨을까?

“네가 효창이보다 나은 게 뭔데? 효창이보다 군산시를 더 잘 알아?”


“그보다 잘 알지 못할 겁니다.”
“그럼? 국회의원 뱃지 달았다는 거? 그게 시민들에게 크게 도움 되는 게 있을 것 같아?”

당연히 도움 된다.
하다못해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오는데도 국회의원이었던 경력과 인맥이 당연히 더 도움이 될 걸
강 의원이라고 모르겠는가?
그저 억지를 부리는 거다.

“그게 아니라도 제가 군산 시장에 더 적합합니다. 저는... 군산 경제를 쓰러뜨린 근본 원인부터 해결할


생각입니다.”
“근본 원인이 뭔데?”
“모르십니까?”
“허... 그거야...”

강주원 의원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재민 의원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군산조선소, 제가 다시 가동시킬 겁니다. 군산시장이 돼서 다시 군산 경제를 일으킬 겁니다. 이게 제가


군산시장이 돼야 할 이유입니다.”
“이 새끼...”

강주원 의원은 재떨이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소리 지껄이지 마. 그걸 네가 어떻게 돌릴 건데? 무진중공업이 해주조선해양 인수한다고 쳐다도 안 보는 걸
어떻게 돌릴건데?”
“이미 구상해 놓은게 있습니다.”
“뭔데?”
“죄송한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조 의원이 담담히 고개를 젓자 강 의원은 들고 있던 재떨이를 툭 던지듯 내려놓더니 그대로 조 의원의 면상을
후려쳤다.

퍽!

“이 개새끼가 날 가지고 놀아?”

이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봐 밖에서 몰래 들고 있었던 김시원 보좌관이 문을 벌컥 열고 달려 들어왔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의원님, 피가 납니다! 어서 병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119! 119 불러야
합니다!”

솔직히 한 대 맞은 것 가지고 119 를 불러야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조 의원은 김시원 보좌관이 일부러 고함을 치는 이유를 알았다.
괜히 강주원 의원이 흥분하다가 사태가 더 악화되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없기에 강 의원을 말리려고 저러는
거였다.
역시나 강주원 의원은 멈칫하고 밖을 슬쩍 내다본 후 말했다.

“네 개소리를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냐?”


“믿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말, 개소리 아닙니다.”
“지랄... 너... 이번 검찰 조사 끝나면 정치인생 오질라게 꼬였다는 거 절절히 느끼게 될 거다.”
“그럼 안 나갑니다. 들어가십시오.”

조재민 의원이 한쪽 입가가 터진 채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 의원이 욕설을 내뱉으며 사무실을 나가자 김시원 보좌관이 조 의원의 입가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의원님, 아무래도 병원에 가셔야...”


“너 어릴 적에 친구들이랑 싸움 안 해봤어? 이 정도는 대충 약 바르면 된다. 그나저나 단단히 뿔이 났네. 보통
받아먹은 게 아닌가 본데?”
“군산의 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걷어들인 게 많으니 마지막에 뿌려줄 수 있는 만큼 뿌려줘야 뒤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네. 받은 게 있는데 그만큼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 또 다른 줄기가 엮여 나올 수 있겠지.”
“이제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떡해? 계속 하던거 진행하자고. 그리고 1 월 전에 현진물산 최 과장 이리로 불러 내려. 결론을
지어야지.”
“알겠습니다. 약속 잡겠습니다.”
“인공지능 집적단지는?”
“공고 나가자마자 현진건설에서 입찰 들어왔습니다. 그중에서 메인 단지 4 천억 공사를 가장 핵심으로 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 주라고 해. 그거랑 봉선동이면 선금으로 충분하지. 아, 봉선동은?”
“내일 발표입니다.”
“잡음 없도록 끝까지 확실히 챙기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강주원 의원이 도와주지 않으면 선거가 의외로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강 의원이 미는 이효창이라는 자가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나올 거야. 우리당 조직들 상당수가
그쪽으로 붙을 거고. 그럼 네 생각엔 질 것 같아?”

김시원 보좌관은 씨익 웃었다.


“탈당한 조직원들 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연희와 영훈은 커피숍에서 대화하다 말고 급하게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로 달려갔다.


지금 그곳에서 임지은 사장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송 사장이 영훈을 급히 호출했기 때문이다.
송 사장 옆에 홍 실장이 같이 있어 당연히 알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끝낼 줄 알았는데 급히 찾자 불안해진
마음으로 움직였다.
해운대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 곳에 위치한 파라다이스 호텔 식당에 도착하니 임 사장 일행은 없었고 송은채
사장과 홍승대 실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 사장이 영훈에게 옆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네.”
“현진중공업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지금 당장 결론을 내달라고 해서 도움을 받으려고 불렀어.”
“다음 정기주총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런데 상황이 좀 복잡해졌어. 10% 정도를 들고 있는 외국계 헤지펀드가 다음 정기주총 때까지 주식을
추가 매입한 다음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압박할 것 같다는 거야.”
“그렇군요. 그럼 김태민 상무를 현진중공업 부회장에 임명되도록 지지해달라는 겁니까?”
“그렇지.”

영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적당히 편을 들어주고 계열사 분리를 조건으로 해서 깔끔히 헤어지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훈의 눈빛을 읽었는지 송 사장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방금 우명그룹측에서 연락이 왔어.”


“뭐라고 하던가요?”
“백기사로 현진중공업을 도와주고 싶다는 거야.”
“네?”
“우리는 정말로 현진관광을 인수하겠다고 달려들었다면 헤지펀드쪽은 달라. 그냥 회사를 흔들어서 주가를
끌어올린 다음에 투자한 금액의 두, 세배 정도를 먹고 나가겠다는 전략이야. 이 전에도 이런 식으로 크게 수익을
올린 펀드들이 있어. 그래서 별스럽지는 않은데 우명그룹이 도와주겠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야. 그것도 우리한테 특별히 미리 이야기를 했다는 게 말이지.”

영훈은 송은채 사장이 왜 불렀는지 이해했다.

“우명그룹이 헤지펀드가 놀 판에 껴보겠다는 거군요?”

‘야! 나도 한 입만!’을 외친 우명그룹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우리한테 권하는 거야. 같이 껴볼 생각 없냐고.”


“만약 원한다면...”
“생각보다 일이 잘 되면 우리를 밀어줄 생각도 있다는 거지.”

영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발을 빼야 합니다. 그 헤지펀드 지금 큰 실수하는 겁니다. 우명그룹도요.”


< 부산에서 생긴 일(4) > 끝

< 이형준 상무의 싸움(1) >

“그게 무슨 말이지?”

송은채 사장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영훈은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연희와 계속 함께하다보니 순간적으로 속에 있는 말이 그대로 튀어나와버린 거였다.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쓰러지셨고 그룹의 남은 임원들은 회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메디슨 펀드가 회사를 쥐고
흔들려고 할 테지만 의외로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그 판에 껴서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크게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나중을 생각하시죠.”
“그건 그렇지...”

송은채 사장은 영훈이 아까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헤지펀드와 우명그룹이 큰 실수를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확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영훈은 그 이유를 말하기 꺼려했다.
왜 말하지 않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문제는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하다는데 있었다.
그래도 송 사장은 그 궁금증을 억지로 내리 눌렀다.
왠지 최 과장에게 그걸 물어보는 순간 최 과장과의 신뢰관계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열려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최대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만 얻어내면서 협조해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식만 받아가자는 말이지?”
“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회장님은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고 아예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현진중공업이나 그 계열사가 탐나시는 게 아니라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현진물산이 가야할 길을 가는 게
낫습니다.”
“전혀... 난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럼 정리하시죠.”

임창호 회장은 이대로 그대로 숨만 붙어있다가 음력으로 올해가 지나고 바로 사망할 가능성도 있지만 설사
깨어난다고 해도 이제와서 계열사 분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거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운 좋게도 메디슨 펀드가 김태민 상무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었다.
여기에 우명그룹도 끼어들어 한 입만을 외치는 와중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김태민 상무는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현진물산과 현진관광의 지분을 넘겨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제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하자. 홍 실장은 강 실장이랑 협의해서 현진중공업과 실무 진행하도록 하세요. 가격은 최대한 잘
받아줬으면 좋겠네요.”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비싸게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자금이 얼마나 소모될까요?”
“우리가 가진 현진중공업 주식보다 저들이 가진 우리 주식이 더 많아서 못해도 2 천억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후... 돈 들어 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만약 해주조선해양과 군산조선소를 우리가 인수하게 되면 많이
힘들지 않을까?”

홍 실장은 대답 대신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은 영훈이 해야 할 것 같다는 뜻이었는데 영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신영은행측과 미팅을 잡아놨습니다. 아마 크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아직 약속을 잡은 건 아니지만 이형준 상무야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연초에 현진관광에서 들어올 수익 거의 대부분을 배당하기로 했으니까...”

송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서울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오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동행한 운전기사 때문에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연희는 영훈의 팔을 붙잡고 을지로의 유명한 낙지볶음 집으로 향했다.
매콤한 낙지볶음과 맥주로 저녁을 해결한 둘은 2 차를 고급 가라오케집으로 정했다.
이형준 상무를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연희를 굳이 보내지 않은 건 연희가 있어도 되냐는 물음에 쿨하게 승낙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잘 됐다는 투로 대답했다.

“맥주 마실 거죠? 폭탄주?”


“맥주로 합시다.”
“헤헤...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죠?”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일단 목이라도 축이고 이야기해요.”
“그래요.”

간단한 과일 안주와 맥주가 세팅되자 영훈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김태민 상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사람은 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확히 어떻게요?”
“일단 강운을 타고 났습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곤 하죠? 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별거 한
게 없는데도 저절로 손에 뭐든지 들어오는 사주를 타고 났는데... 사실 재벌 3 세 정도 되면 운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긴 해요. 원래 부모 복을 타고 나는 건 최고의 운이니까요. 그건 나도 인정.”
“그런데 이 사람은 많이 다릅니다. 부모 복은 물론이고 초년 이후의 운도 계속 좋아요. 타고난 사주를 본인이
본능적으로 아는 건지 이 사람은 반대로 게으르고 크게 뭘 얻기 위해 노력한 적이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내가 예전부터 태민 오빠가 공부 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 그런데 회사 입사해서 꽤나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하긴 했었죠.”
“노력파가 아니라서 그런지 재능이나 수완이 대단한 편은 아닌데 욕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손에 들어온 건 꼭
쥐고 놓지 않는 도사견 같은 타입이에요. 문제는 그의 대운이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운이 너무 좋아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거네요? 그럼 그것 때문에 우명그룹이나 메디슨 펀드도 손해볼 거라고
한 거예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심각한 얼굴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그냥 욕심은 많으면서 능력은 없는 그런 사주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표현할 게


아니었어요. 본래 올해 유산을 받고 승진을 할 대운이 들어와 있었는데 하필 임창호 회장님이 쓰러지면서 그 운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운은 주변을 잡아 먹습니다. 섣부르게 그의 손에서 먹이를 뺏어먹으
려다가 호되게 물릴 수 있어요.”
“어머... 그런데 희한하네요? 현진관광을 인수할 때는 꼼짝 못했잖아요?”
“그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의 어머니 것이었으니 인수 과정에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그 운이 언제까지 이어지나요?”
“조금 더요. 그의 나이가 곧 서른 일곱이니 최소 서른 여덟이 될 때 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후아... 그럼 최소 2 년은 아무 문제 없겠네. 그럼 그 이후는요?”

영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관재수가 강하게 들어옵니다. 자칫 처신을 잘못하면 크게 문제가 생길 겁니다.”


“관재수는 뭐예요?”
“그냥 송사가 들어오거나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착실히 준비하지 않으면 강주원 의원이나
양철기 전 전무처럼 크게 곤란을 겪게 될 겁니다.”
“아...”

연희가 입을 벌리며 놀라는 사이 영훈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실 영훈은 마음이 무척 좋지 않았다.
임창호 회장이 쓰러진 것이 왠지 자신 때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때 임 회장에게 군산조선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임 회장이 쓰러졌을까?
이대로 쓰러진 임 회장이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된다면 임 회장과 자신은 악연이나 다름없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 죽게 된 상황에 마음이 심란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거다.
이때 연희가 또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백병원 원장님하고는 무슨 사이였어요?”


“예전에 절에 있었을 때 인연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주를 본다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구요. 내가
봐줬던 사주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줄 수 없어요. 이건 당신이 알아야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연희는 입을 툭 내밀었다.

“알았어요. 그냥 궁금했던 거예요. 그럼 그냥 반가워서 이야기하러 들어간 거예요?”


“그냥 부탁 하나 했습니다.”
“그것도 비밀?”

영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벅이는 그녀가 귀여워 싱긋 미소지었다.

“내가 태어난 병원이 부산 백병원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혹시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몇 가지 정보를


주고 부탁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미안해요.”
“미안할 거 없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연희는 빙그레 웃으며 영훈에게 착 달라붙어 종알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김태민 상무의 여자를 보고 어떻게 한번에 알아보았냐느니, 어떻게 아이가 있을지 알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문이 벌컥 열렸다.

“반갑네.”

연희는 이형준 본부장의 등장에 살짝 눈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일찍 왔네요.”
“소울 메이트가 오래 떨어져 있다가 왔다는데 지체할 수가 있나.”
“당신 원래 그렇게 능글맞았어요?”
“원래 내가 조금 그래.”

신영은행 전략기획팀 이형준 상무는 빈 자리에 편하게 앉으며 탁자를 스윽 훑었다.


그리곤 바로 웨이터를 불러 영훈이 잘 모르는 양주를 시키곤 말했다.

“오늘은 네가 사라. 맨날 내가 사니까 내가 호구 같잖아.”


“알겠습니다.”
“흐흐... 빌지 받으면 놀라지나 말고.”
“저도 법인카드 있습니다.”
“오오~ 하긴,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회사에서 이깟 술값 아까워하면 말이 안 되지. 부산에서는 일 잘
처리하고 왔어?”
“네.”
“김태민이가 협조를 잘 안해줬을 텐데? 아... 메디슨 펀드 때문에 몸이 달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이 기회에
계열사 분리하는 건가?”
“맞습니다.”

이때 들어온 새로운 술을 능숙하게 딴 형준은 제 잔에 스스로 따르고는 탄식하듯이 말했다.

“씨발, 내 처지가 처량하네. 자작은 내 스타일 아닌데.”


“따라드려요?”
“커플인 놈이 따라주는 술은 받기 싫다. 우명그룹이 현진중공업에 손 댄다며?”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들어갔습니까?”
“우리 회사 얕보지 마.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형은행이라고. 속칭 찌라시들을 가장 먼저 접하는
데가 우리야. 소문을 퍼뜨리는 곳도 우리고. 좀 대단해 보이냐?”
“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항상 깍듯이 형님 대접해 드리지 않습니까?”

형준은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크흐~ 좋다, 좋아. 이게 바로 권력의 맛이거든. 돈 필요해?”

단번에 치고 들어온 형준의 물음에 영훈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민 있습니까?”
“씨발, 뭐야. 너 관심법 쓰냐?”
“그게 아니라, 얼굴이 전에 봤을 때보다 어두워져서요. 순 술만 마시고 다닌 것 같은데? 조명이 이래서
그런가?”
“크흠... 그래서, 돈 빌려줘?”
“그건 됐고, 고민이나 먼저 털어놔 보시죠?”

형준은 술병을 잡고 잠시 고심하더니 다시 술을 따라 마셨다.

“눈치가 빨라도 정도가 있는 건데, 넌 너무 심하지 않냐?”


“그래서 말하기 싫으면...”
“싫다는 건 아니고.”
“말해봐요.”

형준은 괜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하다가 연희를 돌아보았다.

“크흠... 네가 이야기했던... 혹시 이 여자도 내 얘기 다 알고 있냐?”


“이 여자가 뭐예요?”

연희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형준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우리 사이에 간지럽게 ‘누구 씨’라고 부르지는 말자. 이름 부르기는 더 간지럽고. 어쨌든 알아?”

영훈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릅니다.”
“오케이. 나가라고 하기도 좀 그러니 우리 걸러서 이야기 하자고. 그때 네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내가 준비를 좀
하다가 마음처럼 진행이 잘 안 됐어. 그래서 부행장이 날아갔지.”

영훈은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었다.


아마 부행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약점을 잡으려다가 실패하고 부행장이 퇴사한 상황인 듯했다.

“그래서요?”
“새로운 부행장 인사가 진행중인데 아버지가 생뚱맞은 인사를 들고 왔어.”

형준은 다시 술 한 잔을 따라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름은 마석대. 졸라 촌스러운 이름인데 경력은 촌스럽지 않아. 예일대 출신 경제학 박사인데다가 JP 모건,
골드만 삭스등 투자은행에서 오래 근무했고 싱가포르 투자은행인 UOB 의 CFO 를 역임했었어. 이유는 하나야.
신영은행에 국제적 투자 감각을 익힌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건데, 내가 봤을 때는 그렇
지 않아. 너도 그렇지?”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를 끌거라고 그랬죠?”
“그래도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세심한 겁니다. 벌써부터 준비를 하는 거겠죠.”

연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궁금증을 참고 핸드폰을 보며 관심이 없는 척했다.


형준은 그녀가 그러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연희를 내보내지 않은 것도 어차피 영훈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또한 방금 영훈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백퍼센트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더 웃긴 건 이거지. 이 사람은 평소에 한국의 재벌구조가 한국경제를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훗... 할아버님께서 그걸 두고 보신답니까?”
“아직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는 몰라.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 할아버지 앞에서야 국제적인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됩니까?”
“섣불리 반대하고 나섰다간 찍히고 말거야. 그렇다고 두고 볼수도 없어. 외통수야.”
“묘수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맞아.”

< 이형준 상무의 싸움(1) > 끝

< 이형준 상무의 싸움(2) >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국할 사람은 상무님입니다. 제가 참여하면 반칙이 되죠.”
“알아. 훈수만 해달라는 뜻이야.”
“훈수를 하려면 상대하는 기사의 실력도 알아야 합니다.”
“엄살피지 말고 제대로 말해. 할 수 있어? 없어?”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차피 네 정보라인으로 알아보는 거 아니야? 꼭 만나야 하는 거야?”

형준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사실을 알아낸 불가사의한 정보력이 있는데 왜 굳이 만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보는 제가 내리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근거일 뿐입니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사흘 뒤에 서강대학교에서 국제금융시장의 흐름에 관한 특강이 있어. 신영은행 관계자도
몇몇 참석할 거고.”
“거기에 우리가 참석하는 건 뭔가 어색합니다.”
“아니야. 재학생들만을 상대로 하는 강연이 아니거든. 실제 대기업 임원이나 중소기업 사장들도 꽤 많이 참석해.
거기에 네가 참석한다고 한들 전혀 이질감이 없을걸?”
“흐음...”
“오히려 좋은 기회일걸? 인맥 넓히려고 일부러 대학원 과정 밟는 사람들 많아.”
“가서 강연만 듣고 끝나는 거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독대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그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힘들어. 아직 부행장으로 임명된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접근하는 것도 웃기잖아? 아! 특강이 끝나고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과의 회식이 있어. 이미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데... 네 여자친구가 그 특강에 참석하면 내가 특강 이후 회식 참
석 리스트에 넣어줄 수 있어.”
“상무님이 어떻게 넣어줍니까?”
“그 특강, 우리가 진행하는 거거든. 말했잖아, 신영은행 관계자도 참석한다고.”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건 됐고... 난 뭘 해줘야 되나?”
“아직 해줄 건 없습니다. 현진중공업과 주식 교환을 해야 하는데 확정된 게 없어서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건
없습니다.”
“공짜로 해줄 놈은 아니고... 어차피 언제가 됐든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건가?”
“꼭 그렇게 생각하실 것까지야 있습니까? 상무님과 저는 한 배를 탄거나 마찬가지인데 도와드릴 수 있다면
도와드려야죠. 다만 말씀드렸듯이 제가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 합니다. 해결책을 찾는다면 실행은 상무님이
하셔야 할 것이고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형준 상무는 다시 혼자서 자작으로 술을 들이킨 다음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할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김태민 상무를 그룹 후계자로 보고
있는 건 알 테고. 그래서 이대로 계열사 분리를 끝내버리면 현진물산과 관광, 건설 쪽 투자자들은 이제 너를
주목할 수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내 남편이 될 사람을 주목할 거라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 너의 능력을 평가할 거라는 이야기야. 지금도 이미 물산과 중공업이 완전히 갈라섰다는 평가가
대부분인데 그래도 송은채 사장에 대한 평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는 쪽이야. 여자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재벌 기업을 맡았던 여자 CEO 치고 좋은 성과를 거둔 CEO 는 많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주식 떨어질까 봐 걱정이다?”

연희는 쌍심지를 치켜 떴다.


하지만 형준은 당연하다는 듯 무겁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래. 현진관광을 인수한 다음 이제 어떤 인수합병 하나 없이 상사 업무에 주력하겠다면 모르겠어.


그런데 그럴 거야?”
“그건...”
“외부에서는 지금도 현진물산의 이번 기습적인 인수에 대해 아직 어떤 평가도 내리지 못하고 있어. 현진물산
경영진의 의도를 모르니까. 어쨌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야 해. 그래서 만약 최
과장이랑 결혼할 생각이면 빨리 발표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 사
람을 최 과장으로 내세우면 보기는 그럴 듯하거든. 아니면 송은채 사장의 추진력을 더 내세우든지.”
“아니, 저기...”

영훈이 뭐라 말하려 하자 형준이 손을 들어 막는다.

“이건 대주주로서 조언하는 거야. 당장 결혼을 발표하라는 건 아니지만 이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거라는
거야.”

영훈은 벌써부터 투자기관에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 조금 답답해졌다.


솔직히 지금까지 한 일은 집안싸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 인수는 현진관광 인수와는 급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부분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형준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기는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훈의 대답에 형준이 피식 웃더니 사과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전에 정치권이랑 엮어서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고 했지? 뭘 하든 잘해야 할 거야. 이번에 현진관광에 들어와
있는 주주들 중에 영향력이 상당한 사람들이 많아.”
“그 사람들 결국 우리 덕분에 돈 번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더 주목하는 거야. 내 돈을 더 불려줄 사람인지 아닌지 얼마나 궁금하겠어?”
“생각해보니 그렇겠군요.”
형준은 웃으며 술을 마시다가 장난식으로 연희에게 말했다.

“우명그룹에서 너를 탐낸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연희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응, 창훈이는 나랑 대학동기였고 몇 번이나 프로포즈 했었거든. 우리 엄마 통해서 만나게 하자고 연락 왔었는데
내가 거절했어. 그런데 왜?”
“혹시 만나면 안 되냐?”

영훈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연희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내가 지금 누구랑 만나고있는지 모르는 거 아니지?”


“알아. 그러니까 둘 다 흥분하지 마.”
“그러면?”

형준은 영훈에게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우명그룹의 막내딸이 이제 올해 대학 4 학년이야. 미술을 전공했고 모친 닮아서 화랑 하나를 물려 받을 것


같다고 하네.”
“그 여자를 만나고 싶은 겁니까?”
“단순하게 할아버지를 통해 선자리를 만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런 식으로 만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어이가 없어서... 혹시 그 우명그룹 아들이랑 친해져서 소개 좀 시켜줄 수 있나
했지.”
“헐...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농담이야. 근데 창훈이라는 사람이랑 친분 있으면 그 아가씨 소개시켜줄 수 있어?”
“동생은 만난 적 없기는 한데 연결시켜주는 거야...”

이때 영훈이 말했다.

“다른 여자를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응? 왜?”
“우명그룹의 배경 때문에 그 여자를 찾는 거라면 다른 여자를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영훈이 한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자 형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몇 번이나 겪어봤었다.
그가 이렇게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다는 걸 말이다.

“이유가 뭔데? 혹시 우명그룹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상무님은 지금 여자를 만날 때가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잖아. 나 혼자만으로는 힘에 부칠 수 있어. 우명그룹 회장
정도 되는 장인어른이 있으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거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릅니다.”
“정확히 말 안 할 거야?”
“하여튼 그렇게만 아시면 됩니다. 지금은 아버지만 생각하세요. 어설픈 동반자는 가끔 없으니만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형준은 영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영훈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씨발, 무슨 도사랑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알았어.”

형준은 그렇게까지만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실 겁니까?”
“그럼? 눈꼴시려운 커플 앞에서 혼자 술이나 계속 마실까?”
“훗... 알겠습니다.”

형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갔다.


그가 나가자 연희가 물었다.

“우명그룹이 현진중공업에 손 댔다가 망할까봐 그랬어요?”


“아닙니다. 손해를 보겠다고 생각할 뿐이지 얼마나 손해를 볼지는 저도 모릅니다. 우명그룹 회장 얼굴도, 사주도
모르는데 모를 수밖에요. 다만 이형준 본부장의 사주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 여자를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여자와 구설수는 항상 같이 따라다닙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피해야 하죠.”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요?”
“음... 이형준 상무에게는 중요한 시기라고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치... 그럼 그건 넘어가고, 가볍게 만나는게 아니고 진지하게 만나는 것인데도 피해야 해요?”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피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피하는게 좋습니다. 구설이라는 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오는지는 나도 알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제서야 내막을 알게되죠.”
“어후~ 어쩐지 여자 많이 밝히게 생겼더라구요. 딱 느낌이 왔어.”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난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연희는 배시시 웃었다.


“솔직히 첫인상은 사기꾼 같았는데... 내 선입견이었지. 그 다음에는 선비 같았어요. 조선시대 선비. 딱 그
느낌이었어.”
“그래서 별로 였습니까?”
“난 선비 좋아요. 가끔 답답하긴 한데 먹물 냄새 가득한 그거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변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연희는 맥주잔을 들어올리더니 자그만 입으로 속삭였다.

“짠!”
“짠.”

둘은 잔을 마주치고 웃었다.

서울로 올라오고 사흘이 지났다.


임창호 회장은 아직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영훈이 부탁했던 일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조재민 의원은 군산에서 개소식을 열고 본격적으로 조직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광주광역시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 입찰 결과가 발표됐다.

[현진건설, 7 천억 시공권 따내!]


[애물단지 헤성기업이 복덩이 현진건설로 변한 이유]
[지방 부동산 시장을 뒤흔들 고가 아파트 분양, 과연 성공할까?]

현진건설이 시공권을 따내자 갖가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현진건설의 주가는 발표 당일 상한가를 찍으며 고공행진을 시작했고 현진건설을 소유한 현진물산의 주가도 당일
10%가 넘는 급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때 영훈은 신촌 부근의 서강대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 적당히 경사진 언덕을 걷는 발걸음에 맟줘 연희도 따라왔다.
본래 주차장에서 내릴 예정이었는데 영훈이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내리겠다는 말에 그녀도 따라 같이 내렸다.

“캠퍼스를 걷고 싶었어요?”
“네, 많이 궁금했거든요.”

학교 생활을 해본적 없는 영훈으로서는 TV 에서만 보던 대학 생활이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적당히 가벼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두꺼운 책을 한 손에 들고 드넓은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이제는 서른을 넘은 나이라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젊은 저들처럼 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같은 장소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소원 하나를 이룬 것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학교 다니면 너무 괴롭고 힘든데 당신에게는 그것도 부러운 일이었겠죠?”


“맞습니다.”
“오늘 강의가 기대되네요. 개인적으로는 무지하게 졸려서 당신이 대학 강의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면 좋겠어요.
그럼 조금이라도 덜 부러울 테니까.”

영훈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특강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앞에 오늘 강의의 주인공인 마석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연희와 영훈을 알아보고는 급하게 달려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영은행 최일제 과장이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리로...”


그는 연희와 영훈을 능숙하게 마석대 앞으로 이끌고는 인사시켰다.

“여기는 현진물산 송은채 사장님의 따님인 임연희 씨입니다. 여기는 현진물산 비서실의 최영훈 과장님. 두 분다
마석대 씨의 강의를 무척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 이렇게 젊은 분들이 저를 알고 계셨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이렇게 해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굳이 회식까지는 가지 않아도 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영훈이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간단히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다 강의실로 들어가 앉는데 연희가 속삭이며 물었다.

“관상이 어때 보여요?”

영훈은 대답 대신 단상으로 올라오는 마석대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이형준 상무가 고생 좀 하겠습니다.”

그 시각 형준은 신영금융지주 부회장실로 불려가 있었다.

“요즘 아주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다.”

이세준 부회장은 따스한 눈길로 형준을 바라보았지만 형준은 웃음을 보이면서도 솜털까지 곤두세우며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형준을 바라보던 이세준 부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형준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사회에서 너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던데... 혹시 벌써부터 은행장이 되고 싶은 거냐?”

형준이 황망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그럼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데요.”
“안 그래도 내가 자리를 만들어뒀다.”
“네? 은행에 온지가 얼마나...”
“우리가 지금 베트남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지 알고 있지? 앞으로 우리 신영은행의 미래는 베트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가 가서 신영은행을 베트남 제일의 은행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형준은 격동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세준 부회장의 따스한 눈빛이 자신을 덮치기 위해 바짝 엎드린 맹수의 눈빛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이형준 상무의 싸움(2) > 끝


< 이형준 상무의 싸움(3) >

형준은 신영은행 전략기획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블라인드를 내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대로 베트남으로 가게 되면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신영금융그룹 직원의 신분으로는 절대 돌아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대로 영영 한국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영은행으로 옮긴지 얼마나 됐다고 베트남으로 보낼까?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이해하지 못할 인사조치를 밀어붙이는 건 그만큼 아버지도 자신의 성장이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는 결론 아니겠는가?
일단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겨우 시간을 벌고 나왔지만 한번 입에서 베트남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이번 정기인사 때
형준의 베트남지부 발령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적어도 3 월 정기인사 전까기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인 이세준 부회장의 영향력은 그룹 전체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할아버지는 이제 아버지에게 천천히
그룹의 전권을 물려주고 있었다.
이제는 부행장에 누가 오는지보다 일단 내가 사는 걸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설마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칼을 들이댈 줄은 전혀 몰랐다.

“강 전무, 저녁에 나 좀 봅시다. 강남 블루문으로 오세요.”

결국 형준은 강주현 전무를 호출했다.


혹시 아버지의 눈에 뜨일까봐 사소한 만남도 자제하고 있던 형준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이때 영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회식도 안 했을 텐데 벌써 전화야?”


[회식은 됐습니다. 운 좋게 우리쪽 정보라인 통해서 상무님이 원하는 건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시간 전에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쁜 마음에 당장 만나자고 했겠지만 지금은 마석대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게 됐다.
당장 나부터 죽게 생겼는데 생판 모르는 남이 부행장이 되든 말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형준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후...”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야, 너 혹시 연희랑 지금 같이 있냐?”
[같이 있기는 한데... 중요한 일이면 데이트는 미루도록 하죠.]
“내가 어지간하면 네 데이트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좀 상황이 심각하다. 강남역 3 번 출구로 나와서 계속
직진하면 왼쪽에 블루문이라는 룸싸롱 있어. 거기 가 있어라. 나도 최대한 빨리 일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형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자신의 방을 나섰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모습에 젊고 아름다운 비서가 다가와 물었다.
“혹시 퇴근하십니까? 5 시 반에 회의 있습니다만.”
“회의 취소하고 오늘 저녁은 빨리 퇴근하라고 해. 괜히 야근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혹시...”

여비서는 주변을 잠시 살피고는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응?”
“또 룸싸롱 가시는 거 아니시죠?”
“내가 우리 지은이 두고 그런델 왜 가?”
“칫... 전에도 가셨잖아요?”
“일 때문에 간 거야~ 나 요즘 지은이 말고 다른 여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거짓말.”
“진짜야.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래.”
“왜요? 안 좋은 일인가요? 아까 부회장님이 불러서 다녀왔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

형준은 살짝 인상을 썼다.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나 기다리지 말고, 응?”


“알았어요.”

형준은 시무룩해진 그녀의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고는 전략기획팀을 나왔다.


이곳에 와서 단번에 눈에 들어온 박지은을 꼬셔서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잡아줄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와 즐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더욱 우울해졌다.
혹시나 뒤를 미행당할까 싶어 회사에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강남에 도착해서도 뒤에 누가 따라오는 게 아닌지 괜히 두리번거리다가 룸싸롱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올 거라고 말했던 친구는?”
“20 분 전에 도착하셔서 술 넣어드렸습니다.”
“잘했어.”
형준은 웨이터의 어깨를 두드리고 미리 예약한 룸으로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늘씬한 미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빠! 요즘 너무 뜸한 거 아니에요?”
“바빠서 정신 없었지.”

형준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훈이 과일 안주를 먹고 있는게 보였다.

“안 늦었지?”
“네.”

젊은 마담이 영훈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어머, 이 오빠는 처음 보네?”

영훈은 대꾸도 안 하고 형준을 바라보았다.


그 무심한 눈빛에 찔끔한 형준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내가 부른거 아니야. 오늘은 아가씨 앉히지 않을 거니까 술이나 가져다 줘.”

마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진짜요?”
“두말하게 하지 말고 얼른 나가.”

마담도 분위기가 심각한 걸 느꼈는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마담이 나가자 형준이 말했다.

“뭘 그렇게 민망하게 만들고 그래?”


“제가 여자 조심하라고 한 거 금새 잊어버렸습니까?”
“방금 들었지? 내가 뭐라고 그랬어? 오늘은 여자 앉히지 않을거라고 했잖아. 저 여자는 일종의 영업사원이고 난
방금 아주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한 거야. 칭찬을 해도 모자를 일이라고.”
“예, 예...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런데 제 말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데... 생각을 해봐. 그 얘기를 1 년 전부터 한 것도 아니고 나도 생활을 하다 보면 공적이나 사적으로
여자를 만날 일도 생길거 아니야? 당장 여자를 끊으라고 하면 조금 그렇지.”

형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지만 영훈은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겁게 받아쳤다.

“여자는 일단 살고 난 뒤에 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뭐...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하지. 정리할 거야, 깔끔하게.”

형준은 속으로 지은이에게 어떻게 오피스텔에서 나가라고 해야 할지 아득해졌지만 그건 지금 당장 문제도 아니었다.

“아까 목소리 들어보니까 안 좋던데 무슨 일입니까?”

영훈이 물어보자 다시금 안색이 어두워진 형준은 깔아놓은 술 중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고 온더락 잔에 가득 따라


마시고는 말했다.

“아까 아버지가 날 불러서 베트남으로 가라고 하셨어.”


“베트남이요?”
“그래. 신영은행이 지금 베트남에 지부를 개설하고 상당히 공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는 중이야. 너도 알겠지만
이제 한국에서 은행업은 과포화 상태야. 인구는 줄고 있고 각 은행마다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흐릿해지고 있지.
성장에 한계가 다다랐다는 거야.”
“아...”
“밖으로 눈을 돌리니까 보인게 바로 베트남이었지. 인구도 1 억이고 젊은데다가 일을 열심히 하는 민족이거든.
게다가 삼전전자가 베트남 GDP 의 3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한국에 친화적이기도 하고. 아직 금융이
발달하지 않아서 우리가 진출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
“그렇군요.”
“어쨌든 그래서 회사에서는 베트남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는 중이야. 물론 지금까지 나는 그게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저 우리가 전략을 세우면 최전방에서 전투 할 장수를 보낼거라고만 생각했었거든. 내가 그
장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칼을 빼들었군요.”
신라호텔에서 이세준 부회장을 처음 봤을 때 권력을 향한 탐욕이 대단한 사람임을 익히 알아보았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자식이 아닌 걸 알면서도 30 년 넘게 연기를 해왔던 사람이다.
남의 아들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망치를 꺼내드는 걸 볼 때 그의 결단력은
권력욕 만큼이나 대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한테 마석대 그 인간 어떻게 해보자고 일 시켜놨는데 내 목이 먼저 날아가게 생겼다. 하... 씨발... 인생


진짜 좆같네. 새해 됐는데 어디 점 잘 보는데 가서 올해 토정비결이라도 봐야 하는거 아닌가 싶네.”
“토정비결은 모르겠지만 일단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닙니다.”
“당연히 포기하지는 않았지...”

형준은 그렇게 말하다가 영훈이 지금까지 이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전혀 표정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지
않은 걸 보고는 눈빛을 반짝였다.

“너, 혹시 내가 살아날 구멍을 알고 있는 거냐?”

솔직히 이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 몰렸을지는 몰랐다.


이형준 상무의 올해 사주에 이직의 운이 있기는 하지만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운이 훨씬 컸다.
그래서 여자 문제만 거론한 거였다.
“음... 확실하지는 않은건데요.”
“뭔가 방법은 있다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하하하! 인마! 이 새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일단 한 잔 해.”

형준은 호탕하게 웃고는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영훈에게 술을 따르고 말했다.

“내가 오늘 술 좋은거 깔아놓으라고 했거든. 전에 네가 술 샀지? 내가 너한테 술 사라고 말해놓고 집에 가서


내내 마음이 걸리더라고. 가라오케에서 법인카드 긁은거 가지고 회사에서 눈치 받는 건 아닐까 싶어서 잠이 안
왔잖아.”
“그랬습니까?”
“그럼, 그럼~ 혹시 송은채 사장이 뭐라고 한 건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휴, 다행이네. 일단 쭈욱 들이켜.”

영훈은 피식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맛보고는 말했다.

“일단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뭔데?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부회장님께서 베트남에 보낸다고 하셨을 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부회장님한테 받은 느낌이요.”
“어떤 느낌이었냐고?”
“네.”

형준은 영훈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뒤에 술을 마시곤 말했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 만약 내가 너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정말 단 한 점의 의심 없이 베트남으로 갔을


정도였어.”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뱀 같은 속을 지닌 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형준 상무의 싸움은 굉장히 힘들 게 틀림없었다.

“왜?”
“아닙니다. 일단 제가 드리는 답이 결코 백프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상무님의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그나마 최선의 방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무슨 제갈량도 아니고 안 그래요?”
“그거야 그렇겠지.”
“어쩌면 상무님이 원하는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망하실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물건을 꺼내. 답답해 뒤지겄다!”

형준이 가슴을 쾅쾅 때리자 영훈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마석대라는 분은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군데도?”
“선비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싫어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데 선을 넘는 법이 없을 사람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흠 잡을 만한 게 없으니 부친께서 자신있게 밀어붙이려는 것일 수 있겠죠.”
“뭐야? 그럼 어떡해?”
“선비 같다고 말씀 드렸죠? 본래 선비는 어설픈 협박이나 수작으로는 곤란하게 하기 힘듭니다 단, 한 가지의
경우에는 납작 엎드리죠.”
“그게 뭔데?”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됩니다.”

형준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일대일 격투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실력을 겨루겠다는 건지...”

그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감 잡으셨어요?”
“이슈를 만들라는 건가?”
“맞습니다. 정기인사 전에 상무님이 전면에 나서서 신영은행의 엄청난 실적을 이끌어 내면 됩니다. 그럼 설사
마석대가 부행장에 아무 문제없이 오른다고 해도 나중에 상무님을 지지할 겁니다. 단순히 재벌 3 세 혈연빨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죠.”

형준은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가만, 가만... 그건 이해가 가는데 내가 살아날 만한 구멍이 있다며?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해서 그대로 베트남
가버리는 거 아니야?”
“그 이슈가 상무님이 빠지면 안 되는 이슈라면요?”
“그런 게 있을라고? 야, 대기업 일이라는 게 꼭 나만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전부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간다고 하지만 막상 빠져도 다 잘 돌아가.”
“세상 일에 반드시라는 건 없습니다. 예외가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이 뭔데?”
“군산조선소 산업단지입주계약이 곧 종료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입주계약 연장이 안 될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임대 계약이 종료된 광활한 땅에 설치된 한국 최대의 조선소. 매각주관사로 신영은행을 선정할 생각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상무님에게 맡기겠죠. 무진중공업은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안 그러면 엄청난 돈이 들어간 그
설비들을 제값도 못 받고 팔아야 할 테니까요. 상무님이 이거 잡고 중간에서 컨트롤 하고 있
으면 베트남 안 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하... 야, 그 애물단지를 누가 사?”
“우리가, 현진물산이 삽니다.”

형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이형준 상무의 싸움(3) > 끝

< 이형준 상무의 싸움(4) >

“전에 정치권이랑 엮어서 준비한다는 게 이거였어?”


“맞습니다.”

형준은 잠시 생각하다 아까 영훈의 단어가 조금 묘했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현진물산이 산다고? 현진중공업이 아니라?”


“네.”
“공짜로 얻어도 손해일 텐데 못해도 수천억 이상은 할 거 아니야? 뭐 하려는 수작이야?”
“해주조선해양 인수전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형준은 입을 벌리며 한참을 영훈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다 술을 따라 마시고는 잔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치열하게 계산하고 있으리라.
영훈은 그의 생각이 끝나길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구랑 쇼부 본 거야?”
“조재민 의원. 이번 군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의원입니다.”
“그 인간 지역구가 광주였던가? 그런데 강주원 딱까리 아니었어?”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습니까? 그걸 다 아시고?”
“그 정도는 기본이지. 그런데 강주원 앞마당에 들어간다고? 허락은 받고 하는 거래? 군산에서 말뚝 하나라도
박으려면 강주원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돈데?”
“강주원 의원 검찰 조사받는 거 모르십니까?”
“정치인이 검찰 조사받는 게 뭐 대수로울 게 있어. 원래 그네들 정기행사처럼 때 되면 받는 게 검찰 조사야.
그리고 시간 지나면 유야무야되고. 판검사들한테는 조사받는 정치인들이 한 다리 건너면 다들 친구고 선후배라
결국 감싸주게 돼있어. 판검사 새끼들이 언제 지내 식구 조지는 거 본 적 있어?”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확실해?”
“네.”

형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걸렸다 이건데... 그럼 조재민이가 군산을 차지하고 넌 그래서 얻은 게 뭐야?”


“봉선동 아파트 얻었잖습니까?”
“아~ 그거? 씨발, 아주 제대로 해 먹었네?”

사실 그거 말고도 몇 개가 더 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군산조선소를 가지고 선거를 준비하겠다는 전략이지?”
“맞습니다.”
“허... 이거 수도권에서는 관심도 안 가질 군산시장 보궐선거가 총선 메인 이슈로 떠오르겠는데? 단번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르겠어.”
“그걸 노리는 거죠.”
“그러니까 조재민 의원이 군산조선소를 다시 가동시켜서 군산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계시다는
건데... 그 사람이 원래 그렇게 통이 컸나? 네 머리에서 나온 계획 아니야?”
“넌지시 힌트만 던져주었을 뿐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빠리 정치인이 기업인 없이 그런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지. 좋아. 그건 오케이.
산업단지입주계약 만료되는 게 확실하면 무진중공업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무조건 가동을 약속하고 계약
재갱신을 요청하든, 매각에 동의하든.”
“그렇겠죠.”
“무조건 가동을 약속하면 해주조선해양 인수는 물건너 가겠지?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할 여력이 있으면서
군산조선소도 돌리면 이전까지 여력이 없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 되니까. 실제로 인력 몇천 명 다시 고용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거야. 그러니 이건 무진중공업이 할 수 없는 결정이야. 근 3 년을 지방경
제를 폭파시키면서 버텼으니까. 그럼 매각은 확정적이라고 보고, 금액을 얼마나 받으려고 할까?”
“건설비용만 1 조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거 다 받으려고 하면 도둑놈 심보지.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조선소를 파는 거잖아. 아까 말했듯이 7
천억이면 괜찮지 않을까? 대신 매각주관사가 최대한 거래를 신속하게 결정해주니 매각공고 후 3 개월 이내 매각시
추가 수수료 항목을 넣어야겠네. 우리가 천억 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가져가십쇼. 그 정도는 돼야 회장님이나 임직원들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살아남으려면 너는 빠지고 내가 주인공이 돼야 해. 괜찮아?”
“전 연예인 체질 아닙니다.”
“흐흐... 그럼 내가 전면에 나서서 일을 진두지휘한다 이거네?”
“맞습니다.”
“조재민 의원은?”
“제가 연결시켜드리죠.”
“굿, 그럼 가이드라인은?”

영훈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첫째, 매각을 진행하는 동안 시장선거에 불리한 사항을 언론에 퍼뜨리면 안 됩니다. 조재민 의원의 군산시장
당선은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기도 합니다.”
“조재민이랑 발을 맞춰가라? 명심하지. 또?”
“둘째, 가격을 가지고 줄다리기 할 수는 있어도 결국 군산조선소는 현진물산이 안아야 합니다.”
“돈은 더 먹어도 되지만 뒤통수 치지는 마라? 걱정마. 나도 멍청이는 아니야.”
“셋째,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일단 일이 시작되면 중간에 어떤 변수가 일어나든 결과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내부에서 난관이 생기면 상무님이 알아서 처리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현진물산의 부족한
현금에 대해 신영은행측이 도와주는 것에 관해 반발이 일어나도 책임져주셔야 합니다.”
“그것도 당연한 이야기지.”
“마지막 네 번째, 정보 공유 확실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격 외적인 문제는 다 해주십시오.”
“흠... 좋아.”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좋습니다.”
“난 언제 이거 풀어도 되는 거냐? 늦게 풀면 입도 못 열고 인사서류에 도장 찍힐 수 있거든.”
“조만간 조재민 의원이랑 약속 잡겠습니다. 협의 끝내시고 할아버님께 말씀드린 다음 조 의원이랑 발을 맞추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넌?”
“전 그동안 산업은행장을 만나봐야죠.”
“씨발... 무진중공업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나...”

형준은 킬킬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영훈이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강주현 전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앉아요.”
“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선 강주현 전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베트남으로 보내겠다는데 알고 있었습니까?”

강 전무가 흠칫 놀란다.

“네?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강주현 전무는 이세준 부회장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다를바 없었다.


그런데 강 전무의 귀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이렉트로 불러서 바로 베트남행을 언급했다?
결론은 두 가지다.

“당신, 일 똑바로 하는거 맞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베트남 행에 대해서 들은건 전혀 없었습니다. 상무님에 대한 충성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진심이에요?”
“물론입니다.”

그럼 남은 가정은 하나.
아버지가 결국 자신의 측근도 거리를 두기 사작했다는 것.
그제야 이사회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일부분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음이 틀림없으리라.

“아버지가 요즘 누구 만나고 있습니까?”


“근래 조웅진 행장과 자주 독대하는 편입니다.”
“조웅진 행장에 대해 더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 건물에 발을 들이려고 하는 마석대 부행장 후보...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영훈은 대쪽같은 선비 성향이라 실력으로 눌러주면 된다 했다. 그는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있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가족은 미국에 있다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요즘 어디서 지냅니까?”
“부행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호텔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임명되면 집을 구할 것 같습니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형준은 급히 마담을 불렀다.

“왜, 오빠?”
“너 잠깐 앉아 봐.”

마담이 옆에 다가오자 형준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돈 필요한 애 있지? 배포 있고 입 무거운 애로 하나 골라서 보내. 공사 좀 치자.”


“누굴?”
“넌 몰라도 돼.”
“위험한 거 아니야?”
“아니야. 일반인이고 학자야. 교수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냥 망신만 주면 돼.”
“아~ 그럼 뭐... 여기에 돈 급한 애들 천지야. 그리고 예쁘면서 돈 급한 애들은 널렸지.”
“하나 잡아서 여기 이 사람한테 연락해.”
“오케이~”

마담이 나가고 난 뒤, 형준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비라고 했으니 어디 개똥밭에 구르면서도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보자고.”

임지은 사장은 머리를 짚으며 고심에 빠져 있었다.

“정말 이래야 하는 거니?”


“메디슨 펀드 쪽에서 벌써 매집을 시작했어요. 숙모가 가진 지분을 교환해 와야 그나마 마음이 놓이죠.”

태민은 임 사장을 달랬다.

“우명그룹이 도와준다고 하잖아.”


“엄마는 그걸 믿어요? 말만 백기사지, 지들도 한 숟가락 먹겠다고 달려드는 게 확실해요. 게다가
우명그룹으로서는 선박과 플랜트를 가진 현진중공업이 탐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어 했는데?”
“지금은 나아지고 있잖아요. 오히려 어려운 구간을 지나면서 경쟁력 없는 중국 쪽 조선소들이 상당수 엎어졌고
LNG 기술이 상당한 일본 조선업체도 밀려나는 추세예요. 그럼 이제 치열한 경쟁은 한 번 건너갔다고 볼 수
있잖아요. 아직 겨울이 다 간 건 아닌데 외부에서 볼 때는 장밋빛 전망만 보일 수 있어요.”
“여기나 저기나 우리 회사 뜯어먹으려는 늑대들 천지야. 친척도 다 믿을 수가 없어. 믿을 건 돈밖에 없다니까.”
“엄마 말이 맞아요. 누구 하나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주식 교환으로 경영권 확보를 철저하게 해야 해요. 일단
이사진들이 저를 확실하게 밀고 있으니까 숙모 지분만 받아오면 제 아무리 거대한 헤지펀드고 우명그룹이라고 해도
절대 원하는 거 가져갈 수 없을 겁니다.”

태민은 자신 있었다.
오히려 전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대놓고 자신의 것을 빼앗겠다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하면 저들을 한 방 먹여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태민은 핸드폰을 잡아 들고 겉옷을 챙기며 말했다.

“주연이 왔나봐요. 저 나갔다 올게요.”


“잘해.”
“아이 참, 걱정은...”

내려가니 늘씬한 미녀가 로비 한켠에 다리를 꼬고 앉아 유리벽 너머를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왔어? 어머님은?”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손바닥 만한 작은 명품 백을 들고 일어났다.

“엄마는 여기에 안 왔어요. 호텔에 계시거든요. 할아버님은 어떠세요?”


“아직 못 깨어나고 계셔.”
“음... 일단 나갈래요?”

170 에 이르는 키에 글래머인 그녀는 모델이라고 해도 쉽게 믿을 만큼 아름다웠다.


애당초 태민이 그녀를 원했던 이유에는 그녀의 배경도 한 몫 했지만 그녀의 외모 역시 태민의 스타일이었던 건
무시할 수 없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자식의 등장으로 조금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주연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여자였다.

주연은 호텔 로비를 걸어나가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마 다음 정기 주주총회에서 부회장 임명을 진행하겠지. 난 그 자리에 오를거고.”
“아버지가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메디슨 펀드 때문에?”
“실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녀가 말하는 실수란 현진관광을 빼앗긴 걸 말하는 것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었던 주식교환의 실수로 현진관광이라는 황금알 낳는 거위를 눈 뜨고 빼앗긴 것에 대한 통렬한
채찍이었다.
“말 그대로 실수였어.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고.”
“맞아요. 당신은 두 번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죠?”
“맞아.”

한주연은 찬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하얀 볼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도 너무 예뻐서 태민이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녀가 멀리 시선을 두며 말했다.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혼처를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해해. 그럴 만해.”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전 당신을 믿는다고 했고 아버지는 제 의견을 존중해주셨어요.”

태민은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는 이별의 자리였을 게 분명했다.
아직 이 여자를 포기할 생각이 없던 태민으로서는 당연하고도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하지 말아요. 나는 내 남자가 그렇게 쉽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거든요.”
“그러지.”
“이번 주주총회에서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없어요. 아버지는 이번 위기를 당신을 평가하는 기회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잘 됐군. 본래 관객이 많을 때 자기 실력을 발휘해야 진짜 스타거든. 잘 보시라고 해. 내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한주연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감돌았다.


본래도 예쁜 여자인데 미소를 머금으니 여느 연예인 못지않았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라고 평가받은 연희 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녀였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인식시켜줄게.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라는 거.”

태민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고 주연은 그 미소를 보며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남자는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형준 상무의 싸움(4) > 끝

< 이형준 상무의 싸움(5) >


군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영훈의 옆에서 운전하는 이는 놀랍게도 이형준 상무였다.
본래 따로 가고 싶었지만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이동을 회사 사람들에게도 잘 알리고 싶지 않았던 영훈이었기에
운전기사를 붙여준다는 비서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연희와 매일 붙어 다니는 것도 꼴불견이 분명했기에 혼자 내려가려고 했는데 형준의 연락에 같이
움직이는 거였다.
이형준 상무가 직접 운전을 하는 것도 수행기사를 믿지 못해서다.
군산에서 만난 이형준 상무와 조재민 의원은 이야기가 잘 통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대형은행의 전략기획팀 팀장이 이번 프로젝트를 지휘할 거라는 말에 조 의원이
좋아하는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지방의 별볼일 없는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조 의원의 예상 외의 카리스마를 본 형준은 이번
프로젝트에 더욱 큰 자신감을 얻었다.

“잘할 수 있겠죠?”
“당연하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거야.”
“그런데 말이죠...”
“뭐?”

영훈은 운전에 열중하는 형준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뭐 다른 생각 합니까?”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주 미세하게 상이 변한 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눈치도 못 챌 정도여서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처신 잘하셔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중요한 시기예요. 여자 조심, 말 조심 잊으시면 안 됩니다.”

순간 형준은 뜨끔했다.
어제 강 전무와 했던 이야기를 알고 저러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 당연하지.”
“어련히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자신도 모르는 실수 하나 때문에 나중에 곤란을 겪을 수 있어요.”
“알았어. 조심한다니까.”

형준은 괜히 찔려 자꾸 같은 이야기를 한다며 역성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군산에서 올라와 경부고속도로의 시작이자 끝인 한남대교에 이르렀을 때가 저녁 6 시 40 분이었다.


형준은 한남대교를 건너 영훈을 내려주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본래 여의도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영훈은 이태원에서 데이트가 있다며 거절하기에 형준은 두 말 하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한남동 고급주택촌에 위치한 이경호 회장의 저택은 높은 담장과 수많은 CCTV 로 완벽하게 보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대식구가 같이 사는지라 형준은 항상 본가에 있을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는 했었다.
예전에는 그저 집에 있으면 놀지 못한다는 생각에 철없이 답답해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기에 어지간하면 집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이른 저녁부터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니?”

거실에서 동생들과 같이 수다를 떨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거실 탁자 위 수북이 쌓여 있는 명품포장백을 보니 어디 백화점을 또 털어온 게 분명했다.

“그냥 일찍 왔어요.”
“배 고프지? 아줌마! 형준이 왔으니까 형준이 좋아하는 갈비찜 좀 해줘요.”

어머니가 집안일을 해주는 아주머니에게 소리친다.


당연하겠지만 이 집의 여자들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기에 어려서부터 일하는 아주머니가 바뀔 때마다 형준이
좋아하는 메뉴의 맛이 조금씩 달라졌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번 아주머니의 손맛이 좋아 형준은 적어도 집밥 만큼은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죠?”
“아니, 방금 오셨어. 아마 서재에 계실거다. 들어가서 인사해.”
“알겠어요.”

형준은 바로 할아버지가 주로 계시는 서재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어? 빨리 왔구나.”
“네.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와 같이 식사하려고 일찍 왔습니다.”
“오~ 그래? 잘 됐구나. 요즘 회사 일은 어떠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신영투증에 있다가 은행으로 와서 그런지 임직원들하고 친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려서 자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렇지. 내 손자라고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서 뻐기고만 있으면 직원들이 흉보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친해지면 그게 다 네 재산이 되는 법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가서 옷 갈아입고 내려와라.”
“네.”

형준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와서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자못 긴장해서 그런지 셔츠를 벗는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다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이세준 회장과 눈을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시팔...
이건 정말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평소 들어오지 않을 이른 시간에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미리 선수를 치려고 했는데 하필 아버지도 오늘따라
일찍 들어올 줄이야.
형준은 마치 연기자라도 된 듯 아버지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오셨어요?”
“일찍 왔구나?”
“네. 한 번쯤은 일찍 들어와서 가족하고 같이 식사라도 하려고요.”
“잘했다.”
그렇게 이세준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와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형준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경계하고 있었다.
경계심이 분명했다.
맹수의 추적을 받는 초식동물이 된 것 마냥 소름이 돋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분명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되자 드는 공포심은 어찌할 수 없었다.

형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뉴스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샌가 아주머니가 다가와 식사 시간임을 알렸다.
형준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로 정신을 차리곤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식사 자리로
들어섰다.
푸짐하게 차려진 한 상을 보면 절로 군침이 돌 터였지만 오늘 만큼은 식욕이 전혀 돌지 않았다.

“앉아라. 형준 애미가 특별히 얘기했나보다. 갈비찜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니?”

이경호 회장은 오랜만에 손자와 같이 식사를 하게 돼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형준이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잡는 순간, 이세준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아, 말씀 안 드렸는데 형준이를 베트남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경호 회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베트남? 은행에 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굳이 형준이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어?”


“기존 임원진은 사고방식이 굳었습니다.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생각을 시시각각 맞추어 가기보다 기존에
해왔던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베트남은 우리 신영은행이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인데 베트남 역시
사회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라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기존 임원들이라고 전부 머리가 굳어 있을 리가 있을까.


특히 한국처럼 SNS 를 기반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 발전한 곳도 많지 않다.
하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형준을 미래 신영금융을 이끌어 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경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우리 형준이처럼 젊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빠르게 변화를 이끌어야 시장 주도권을 선점할 수
있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꼼짝없이 베트남으로 가야 할 상황이라 형준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나섰다.

“저기... 베트남행은 잠시 미루면 어떨까 합니다.”


“왜? 거기 가서는 못 놀까봐 그러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준비하도록 해.”

이세준 부회장의 강압적인 어조에 움찔할 때 이경호 회장이 물었다.


“왜? 애비 말처럼 그냥 놀려고 안 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네.”
“그럼 이유가 있겠구나. 무엇이냐?”

형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지금 멈춰있는 군산조선소를 팔아볼까 합니다.”


“뭘 팔아?”
“무진중공업이 세웠다가 직원을 해고하고 지금 놀고 있는...”

형준이 말을 하는데 이세준 부회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그게 무슨 벼룩시장에 나온 물건이야? 마음대로 사고 팔고 하게?”


“그래, 그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경호 회장 역시 고개를 흔들며 안 될 거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박하는 형준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군산 시의회에서 산업단지입주계약 연장 불가 방침을 세웠습니다. 입주계약 연장 안 되면 무진중공업으로서는


조선소에 세운 막대한 시설을 다 날릴 수밖에 없습니다.”
“입주계약 연장을 안 시켜준다고?”

이경호 회장의 눈빛이 변하자 이세준 부회장이 급히 말했다.

“말도 안 됩니다. 무진중공업이 어딥니까? 정치권에 언론까지 꽉 잡고 있는 데가 무진입니다. 무진자동차가


고려일보에 주는 광고료만 해도 어마어마 합니다.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이 회장의 시선은 형준의 얼굴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는 게냐?”


“확신하는 이유는 있지만 아직 모든 게 정리되진 않았기에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제
생각만으로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 일은 지금 상당히 진척된 상태입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임대계약 연장이 안 된다고 치자. 그걸 어떻게 우리가 손을 대?”


“시의회에서 임대연장불가 방침을 공표하고 난 뒤 매각 주관사로 신영은행이 선정될 겁니다.”

여기까지 되니 이경호 회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누구랑 이야기를 한 거냐?”


“차기 군산 시장이 될 사람과 협의를 끝냈습니다.”
“벌써?”
“네.”
“그럼 그냥 베트남 가기 싫어서 땡깡을 부리는 건 아니구나.”
“할아버지, 저 베트남에 가기 싫을 이유가 없어요. 이건 제가 우리 회사를 위해 한번 진행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예요. 회사에도 상당한 수익을 안겨줄 게 틀림없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이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전혀 매력적인 물건도 아니고 괜히 분란만 일으켰다고 역풍을 불러올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 회장이 물었다.

“가격은 어느 정도나 생각하고 있냐?”


“7 천억에서 8 천억으로 보고 있습니다.”
“7 천억이라... 조선업체들이 다들 기나긴 겨울을 벗어난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만한 현금을 쥐고 있는 업체도
많지 않을 거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고용해야 할 직원들까지 생각하면 투자해야 할 돈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걸
누가 할 수 있겠니? 애비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건 가능성을 보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구매자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구매자가 정해져 있다고?”


“네.”
“어디에서 이걸 사겠다고 하더냐?”
“죄송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이 새어나가서 문제가 생길까봐 염려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자신을 벼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보고 있는 이 상황에 현진물산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들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다.
문제는 현진물산의 이야기를 벌써부터 꺼낸다면 그때부터 이 일은 신영은행 전략기획팀의 일이 아니라
신영금융지주의 일로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자신은 베트남으로 가게 될 것이고.
아마 ‘이제부터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지휘할 테니까 너는 베트남 일에 집중해’라는 말로 달랠 게 분명했다.
형준에게 있어 현진물산은 절대 놓을 수 없는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나한테도?”
“죄송합니다. 제가 손을 댄 일이고 제가 핸드링 하고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뉴스가 나오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겁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회장은 손자의 그런 배짱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짓는다.
“허튼 소리는 아니겠지?”
“할아버지, 저 어린애 아닙니다. 신영은행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판은 이미 짜놨습니다.
차기 군산시장은 군산조선소로 선거유세를 들어갈 테고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끝이냐?”
“네. 지금은 그저 뉴스 보도만 나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어떤 보도?”
“산업은행에서 무진중공업에게 해주조선해양 매각을 보류한다는 보도가 첫 단추입니다.”

이경호 회장은 진정 놀랐는지 한동안 형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내가 뭘 해줄까?”
“나중에 때가 됐다 싶을 때 산업은행장에게 힘 한 번만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던차에 잘 됐구나. 먹어라. 애비도 들어라. 콩나물국이 시원하구나.”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베트남 행은 미뤄졌다.


형준은 주먹을 움켜쥐고 희열을 애써 감췄고 이세준 부회장은 담담한 눈빛으로 식사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 담담한 눈빛에서 보여지는 열기를 놓칠 정도로 형준은 어리석지 않았다.

< 이형준 상무의 싸움(5) > 끝

< 불꽃이 튀어 오르다(1) >

조재민 의원의 선거사무실.


삼십대 중반의 기자 한 명을 독대하고 있는 조재민 의원은 차분하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기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인터뷰에 나올 질문들은 사실 보좌관을 통해 걸러진 것들이었다.
당연히 미리 연습한대로 대답하면 될 일이지만 조 의원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내심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야 계속 계획을 세우고 일의 진행을 착착 이어 갔었지만 오늘 인터뷰가 사실상 자신의 정치 인생 새
시작을 알리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에 그대로 출마하셨으면 무난히 공천받고 당선까지 생각했을 수 있는데 갑자기 군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 배경이라도 있으신가요?”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이철모 기자는 조재민 의원도 몇 번이나 술자리를 했을 정도로 잘 아는 기자였다.
광주 MBS 정치부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이철모 기자는 전라도 지역의 무수한 정치인들과 인맥을 쌓은 베테랑이었고
정치인들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기획 인터뷰에는 그보다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저라고 순탄한 정치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
수는 없겠죠. 십 년 넘게 제집처럼 누비던 월곡동은 이제는 구석구석 내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어, 새로 닦은
도로들과 개보수한 시장, 초등학교 담벼락 높이까지 전부 제가 신경을 썼어요. 우산
월곡시장 주변으로 해서 근방에 위치한 상인들 중에 저와 악수 한번 안 해보신 분이 없을 정도예요.”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이곳 군산으로 오기를 마음 먹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바로 우리 주민들. 나를 뽑아주고 믿음을
주었던 유권자들에게 이제 이번 총선에 나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 분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낙담하실지 눈에 뻔~했단 말이야.”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가며 말하는 정치인들의 화법은 이철모 기자에게는 익숙했다.


“저런... 주민 분들이 많이 낙담하시겠네요.”
“나는 중요한 결심을 해야 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정체할 수 없었어요. 어려운 결정이지만
대의를 생각했습니다.”
“의원님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기도 힘듭니다. 그럼 도대체 의원님께서 그런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이유가 이곳
군산에 있다는 거잖습니까?”
“맞습니다.”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합니다.”
“허허... 지금 생각해도 참 묘한 인연인 게... 가끔 군산 앞바다에 놀러가고는 한단 말이에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쉴 때 와이프랑 애들이랑 같이 회도 먹고 바다 구경도 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종종 들르고는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군산 시민들의 얼굴에 서 웃음이 사라진 거예요.”
“군산 경제가 많이 안 좋았죠.”
“조선소가 문을 닫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도시는 활력을 잃었어요. 1 년에 80 명이 넘게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인구도 얼마 안 되는 이 도시가 죽어가고 있지요. 여기 이 가슴이 막 아려옵니다.”

조재민 의원은 가슴 한쪽을 꾹꾹 눌러댔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내 지역구가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민망하네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요.”
“마음에 계속 걸려서 도저히 내 지역구에 다시 출마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의 군산시를 그대로 두기에는 내
정치적 양심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혹시 현재 절망적이라고 볼 수 있는 군산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안이 있으신가요?”

사실 이철모 기자는 이 질문을 김 보좌관이 커트하지 않았을 때 속으로 상당히 의아했었다.


본래 정책을 비판하는 건 쉽지만 대안을 들고 나오는 건 어려우니까.
선거에서 흑색선전을 괜히 하는게 아니다.
일단 남을 비판하는 건 듣는 사람의 속이 시원해지고 쉽게 이목을 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들고 나오면 그게 왜 합리적인 해결책인지 유권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수많은 비판까지 들어야 한다.
선거판에서 대안 없이 비판으로 일관하는 행태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군산 경제가 꽉 막힌 이유는 조선소 문제가 가장 크단 말이야. 그렇다면 반대로 조선소가 다시 가동된다면 이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철모 기자는 수첩에 적어 내려가던 손을 멈췄다.


그는 이 질문을 준비하며 당연히 대답으로 ‘차차 준비하고 있다’거나 ‘당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라는 걸 일반 시민들도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시민들이 조선소 문제 해결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장 후보님께서...?”
“지금 멈춰있는 군산조선소를 매각할 계획입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이철모 기자는 머릿속에 ‘대박 특종’이라는 느낌표가 불꽃이 터지듯 파바박 튀어 올랐다.

“산업단지입주계약 연장 안 시킬 거예요. 군산 시민들을 암흑의 구렁텅이에 밀어넣고 한가하게 해주조선해양


합병에 주력하는 무진중공업은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어요. 저는 말이죠, 이 상황을 결코 마냥
두고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죠...”

이철모 기자는 침착하자고 되뇌며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차분히 질문을 이어갔다.

“군산조선소를 매입할 조선사가 있을까요?”


“지금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씀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적막했던 군산조선소는 다시 예전처럼
활기차고 역동적인 조선소의 모습을 찾을 겁니다. 뭐, 조선소의 주인은 바뀌겠지만. 하하하!”
“정말 기대됩니다. 정말 가능하다면요.”

조재민 의원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이철모 기자를 바라보았다.

“이 기자.”
“네?”
“날 말이에요. 선거에서 한 번 이겨보겠다고 공수표나 날리는 그런 정치인들과 동급으로 엮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뭐,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드러나겠지만 말이야.”
“만약 이게 기사로 나간다면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조재민이야. 군산으로 올 때부터 쉽고 편한 길을 간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이에요. 하하하!”

조재민 의원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이철모 기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진중공업 대회의실.

[(단독)조재민 시장 후보, 군산조선소 매각으로 재가동 선언!]

스무 명이 넘는 임원들이 모여 있음에도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장 중앙에 앉은 정호균 회장이 광주 MBS 단독으로 올라온 기사를 팝업시켜 놓은 테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원들은 그의 씰룩이는 미간과 꿈틀거리는 입매만 보아도 지금 정호균 회장이 얼마나 당황하고 화가 났는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해주조선해양 합병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갑자기 터진 군산조선소 임대연장불가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기사에서 눈을 뗀 정호균 회장이 입을 열었다.

“조재민이 뭐하는 녀석이야?”

기다렸다는 듯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광주광역시에서 2 선을 지낸 지역구 정치인으로 지금까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영향력이 적은


환노위(환경노동위원회) 소속으로 눈에 띄는 활동도 별로 없었습니다. 정치적 후원자는 지금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강주원 의원입니다. 고등학교 후배라서 그런지 처음 지역구에 공천을 받을 때
도 강주원 의원이 상당히 도움을 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강주원이? 군산이 강주원 거잖아.”
“맞습니다.”
“그럼 이게 다 강주원 짓이라는 거야?”
“그게...”

비서실장은 대답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사가 뜨자마자 바로 회의가 열렸는데 어떻게 모든 걸 확인할 수 있겠는가?

“확인해봐. 그 친구가 받아먹은 돈이 있는데 설마 내 뒤통수를 쳤을까 싶지만 모르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문 사장.”

무진중공업 문태범 사장이 얼른 대답했다.

“네, 회장님.”
“이거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문태범 사장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는지 즉각 답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습니다.”


“확실해?”
“확실하지 않아도 대비해야 합니다. 논조가 심상치 않습니다. 선거를 의식해서 뻥카를 날리기에는 그리 치열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사 보고 오면서 확인해보니 군산 버스터미널을 개조하는 공약만으로도 이미 군산
지역에서는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굳이 군산조선소를 매각해서 재가
동 시킨다는 선언까지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에 몰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
“군산이면 수도권에 비해 주목도가 현저히 낮은 지역입니다. 그것도 보궐선거에 깃발만 꽂아도 당선이 유력한
곳이기 때문에 아마 별다른 이슈도 없을 게 뻔합니다. 하지만 군산조선소라면 다릅니다.”
“이 기회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올라서보겠다?”
“기사에 나와 있듯이 광주광역시의 지역구에서 편하게 출마할 수 있는데 굳이 군산으로 간 걸 주목해야 합니다.”
“마침 강주원이가 검찰 조사를 받고 당에서 꼬꾸라졌군.”
“맞습니다. 강주원 의원이 검찰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군산은 무주공산이 될 거고 시의회는
산업단지입주계약 불허를 강력하게 주장할 겁니다.”
“어리석은 것들... 그걸 누가 살 건데?”
“...”

정호균 회장의 물음에 이번에는 문태범 사장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매각을 하긴 할 것 같은데 과연 누가 이걸 살까 생각하니 답이 나오지 않았던 거다.

“근호야.”

정 회장의 첫째 아들이자 무진건설기계 사장인 정근호가 대답했다.

“네.”
“조재민이랑 만나서 이야기 좀 해봐라. 원하는 게 정말 군산조선소 재가동인지 확인해 봐. 그리고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해. 중앙정계 진출이든 정치자금이든. 하지만 군산조선소는 안 돼. 그건
우리 거다.”
“물론입니다. 아마 우리를 자극해서 뭘 얻어내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인간들 이러는 거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근호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있게 나왔지만 정호균 회장은 찝찝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실수하지 마라. 자그마한 용접 실수가 배를 침몰시키는 법이다.”
“네.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 사장은 조재민이가 말한 그 회사가 어딘지 알아보도록 해. 정말 군산조선소를 사려고 마음 먹었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할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해주조선해양 합병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아직 유럽 쪽에서 답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무진중공업과 해주조선해양 합병 건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EU 쪽에서 무진중공업이 해주조선해양을 합병하면 사실상 독점 형태가 되는 게 아니냐며 아직까지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EU 가 반대의 기조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합병을 밀어붙이면 선주의 60% 이상이 모여 있는 유럽시장에 엄청난
타격이 갈 터.
물론 일부 선주들은 합병 이후 무진중공업의 입지상승으로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무진중공업 배들의 중고가격이 오를
수 있다며 은근 기대를 하는 중이지만 적어도 표면상의 반대는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현재 결합심사절차에 들어갔고 답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 우리 쪽 입장 전달하고 우려 불식시키도록 해. 너무 오래 끌었어. 이거 1 분기에 끝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이때 비서실장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회장님!”
“왜?”
“산업은행에서...?”
“산업은행에서 뭐?”
“해주조선해양 매각과 관련해 문제가 있는지 다시 검토해보겠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비서실장은 얼른 태블릿을 정호균 회장의 앞에 대령했다.

[(속보)산업은행, 해주조선해양 매각 과정 재검토 지시]

기사 내용도 없이 말 그대로 속보였다.

“이게 뭐야?”
“확인해보겠습니다.”
“잠깐...”

정 회장은 손을 들며 비서실장을 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너무도 충격적인 속보에 임원진들 역시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이 말했다.

“회장님, 이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일단 기사를 쓴 내일경제 기자를 찾아서...”


“기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 사장.”
“네. 회장님.”
“산업은행장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것 같아?”
“장사꾼이 다 된 거래를 깨는 경우는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보다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경쟁자가 나타난 게
틀림없습니다.”
“그 경쟁자가 누군지 알아봐. 차 대기시켜. 여의도로 가자.”

비서실장은 허리를 숙이고 급히 뛰어나갔다.


여의도 어디로 가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산업은행 본사가 틀림없을 테니까.

< 불꽃이 튀어 오르다(1) > 끝

< 불꽃이 튀어 오르다(2) >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다.”

영훈의 미소에 김만석 산업은행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아직도 의심이 들어. 자네들 정말 할 수 있겠나?”

머리가 희끗한 그는 처음 영훈을 만날 때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산업은행과 전혀 관련이 없는 현진물산 관계자가 은행장인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전 정권에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던 그는 다른 건 몰라도 공직생활을 청렴하게 보냈다는 것 하나를
자부심으로 삼고 살아왔다.
대개 자신을 직접 찾아오는 기업인들치고 국가와 은행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다는 경험
때문에 좋게 볼 수 없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걱정을 하게 됐다.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으로 해주조선해양을 넘겨달라고 요구하는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김만석 산업은행장은 저들이 바라는대로 무진중공업에 선전포고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게 정말 잘한 선택인지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중이다.

“잘할 수 있어서 하려는 게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는 게 아니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일해서 다 잘 됐으면
세상이 동화 같았겠지. 이건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날카로운 눈매에 굳게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 다부진 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현실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당연히 현실적인 방안이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닌 것 같으니까 자네 말을 듣고 매각 건을 전부 보류시킨거야. 말이 되는 듯 했으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건 이 상황이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게 저들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거야. 대한민국 재벌을
무시하지 말게. 저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이기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영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그래도 김만석 은행장은 안심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군산조선소는 얼마에 살 건가?”


“7 천억 내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금은 얼마나 들고 있고?”
“얼마 전에 현진관광을 산다고 지갑이 빈털터리입니다.”
“하여튼 재벌들,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건지...”
“이번 만큼은 좋게 봐주십시오. 비록 남의 돈이긴 하지만 죽은 조선소를 살리려는 일입니다.”
“아네. 아까도 말했듯이 알고 있어. 아니까 자네 말대로 해주는 거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러네. 그래,
어디서 충당할 생각이고?”
“신영은행에서 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담보는 군산조선소를 잡고?”
“아무래도...”
“신영금융 이경호 회장이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닌데?”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영훈이 얼버무리자 김만석 은행장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좋아. 아마 한 시간도 안 돼서 무진중공업 정 회장이 여기로 들이닥칠 거야. 성격 급한 그 양반이 느긋하게


기다릴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없거든. 내가 막아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그게 아니야.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네. 일단 일을 벌렸으니 이걸 끝까지 만들어가는 건 자네들의 몫이야. 내
손에 있는 물건이지만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해했습니다.”
“여론이 우리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는 순간, 자네들과 우리의 거래는 끝이야.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영훈은 미소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하곤 행장실을 나갔다.


만나기 전에는 걱정했는데 만나고 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람이 은행장으로 앉아 있었다.
사주를 보고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은 강골이다.
대기업 회장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을 사람이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영훈이 타려는 순간 확연히 굳어진 얼굴로 내리는 노신사와 마주쳤다.
그는 영훈을 지나쳐 거친 발걸음으로 행장실을 향했다.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면 영훈이 아니다.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시간 안에 들이닥칠거라고 하더니 정말 기사가 나가고 한 시간 안에 들이닥쳤다.
그 행동력에 감탄을 하며 영훈은 산업은행 본사를 나왔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왔구만.”


“아닙니다. 앉으시죠.”
김만석 은행장이 자리를 권했다.
정호균 회장은 서슴없이 소파에 몸을 맡기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기사 보고 오는 길이야. 너무 놀라서 혼이 달아날 뻔했지 뭔가. 웃음이 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일단
자네한테 저간의 사정이라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으니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기사 내용이 사실인가?”

정 회장의 돌직구 질문에 김 행장은 담담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당황이라도 할 법하건만 김 행장의 표정은 차분했다.


오히려 방금 전 영훈과 대화했을 때 표정이 더 다양했다.

“누가 더 준다고 하던가?”


“그것도 맞습니다.”
“그래, 가지고 있는 물건 값을 더 처준다는데야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잖나? 자네가 가진
건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도 아니고 시장에서 파는 과일도 아니야. 국가 기반 산업 중에 하나네. 수많은 가정을
지탱하는 기업의 운명을 하룻밤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네.”
“회장님 말씀대로 수많은 가정을 지탱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결정한 일입니다.”
“이미 약속한 일이야. EU 에 결합심사절차까지 들어갔고 합작법인을 만들기까지 여기에 쏟아부은 돈과 시간만
해도 어마어마하네.”

김만석 행장은 비릿하게 웃었다.

“회장님. 솔직하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하게.”
“그 쏟아부으셨다는 돈과 시간 중에 제대로 쏟아부은 건 인력과 시간이 다 아닙니까? 3 조 원이 넘는 회사를 돈
한 푼 안 들이고 다 드시겠다고 달려들고 계신 거 아닌가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까?”

정 회장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떡해서든 해주조선해양을 넘기기 위해 사력을 다하던 행장이었다.

“조선업이 몇 년째 불황이었어. 그런데 무슨 돈이 있어서 해주조선해양을 사나? 자네도 그걸 이해했으니까


합작회사 세우는 걸 동의한 거 아닌가?”
“인정합니다.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해주조선해양을 사겠다는 기업이
나타났습니다. 무려 현금 일부분이 추가된 상태로 말이죠.”
“말도 안 돼! 누가 해주조선해양을 산단 말이야! 현진중공업도 진작에 포기했고 삼전중공업도 포기했었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진짜 이럴 거야?”

김만석 행장은 전혀 물러섬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현금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최소 1 조 5 천억. 그 정도 자금을 들고 오시면 판을


다시 깔겠습니다.”
“우리가 그 돈이 어디 있어!”

정 회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김 행장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무진오일뱅크 지분을 사우디의 석유회사 아람코에 팔면서 생긴 1 조 4 천억이 있지 않습니까?”

정호균 회장은 설마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굳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
“그거 투입하십시오. 그럼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밑천이네.”
“밑천을 투입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건 애당초 합의한 것과 달라. 기존 원안으로 가야 해,”
“공적자금만 10 조 넘게 투입한 회사가 해주조선해양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어떡해서든 넘겨야
했지만 꼭 전액이 아니라고 해도 현금을 주고 사겠다는 회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가 회장님께 이
회사를 넘기면 무진중공업과 뒷거래가 있을 거라는 말이 안 나올 거라고 보십니까? 전 회장
님처럼 두꺼운 벽이 되어 막아줄 돈도 백그라운드도 없습니다. 회장님을 위해 이 위기를 감당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서릿발이 풀풀 날리는 김 행장의 말에 정 회장은 더 이상 말로는 해결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하필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공기업 인사들이라고 하나 같이 청렴하고 성실할까?
그 중 대부분이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수억이 넘는 연봉이나 받아 먹으려는 인사들인데 하필 이 김만석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청렴하고 대단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산업은행장 자리는 그저 거쳐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정권이나 다음 정권에서는 못해도 금융위원장이나 경제부총리 정도까지 노리고 있을 정도로 야망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회사 내부에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도움 하나 안 되는 기업의 합병 가지고 오점을 남기기 싫어할 수밖에.

“생각이 확고하군. 후회하지 않겠나?”


“사실 이래도 되는건가 싶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정호균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행장실을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실장이 즉시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렸다.
묵묵히 기다리던 정 회장은 빈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입을 열었다.

“누가 우리 먹이에 손대려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봐. 그리고 룸싸롱에 각 언론사 기자들 초청해서 배불리 먹여.”

비서실장은 바로 정 회장의 뜻을 알아들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화선진당 원내대표와 약속 잡아,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이형준 상무는 블라인드로 가려진 혼자만의 사무실에서 영훈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즉각 기사가 뜬거 보고 그래도 좀 놀랐어. 산업은행장이 그렇게 빨리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알고 보니까 굉장히 웃긴 상황이었습니다. 무진중공업에서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했더라구요.
산업은행에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해주조선해양을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가 산다고 하니 걱정은 하면서도
굉장히 달가워 했습니다.]
“그랬겠지. 무진중공업이 돈 없다고 물적 분할로 합작회사 지분을 가지는 형식으로 합병하는 거였거든. 머리를
기가 막히게 쓴 거지. 그런데 정호균 회장이 보통 성깔이 아닌데 산업은행장이 잘 버틸까?”
[야심이 보통 아니었습니다. 군산조선소 이야기를 꺼내니 눈빛부터 달라지던데요?]
“흐흐... 네 말대로 정치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면 군산조선소 회생 기차에 한 발 올리고 싶겠지. 이거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결국 군산경제 회생에 자신도 한 몫 했다고 뻐길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겠죠. 하여튼 제가 맡은 일은 해결했습니다.]
“오케이. 내가 믿...”

말을 하는 중에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상무님.”
“응? 왜?”
“부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후... 알았어.”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볼일 끝났으면 문을 닫으라는 형준의 눈빛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요즘 들어 갑자기 냉랭하게 바뀐 그의 행동에 불안하고 섭섭했지만 어려운 일이 있는가 싶어 감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형준은 일부러 그녀를 피하며 어떻게 헤어질 것인지 구실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후... 아버지가 또 찾으신단다.”


[그래요?]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
“왜 말이 없어?”
[아닙니다. 일단 다녀오세요.]
“그래, 갔다 와서 통화하자고.”

형준은 찝찝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부회장실로 향했다.

“왔니?”

언제나처럼 이세준 부회장은 따뜻한 미소로 형준을 반겼다.

“네, 부르셨어요?”
“기사 봤다. 네가 말한대로 잘 진행되고 있더구나.”
“감사합니다.”

형준이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 앉는데 탁자에 너저분하게 서류가 어질러져 있었다.
뭔가 해서 보니 놀랍게도 그룹 임원 명부와 실적, 그리고 목표달성 성과율 따위를 종합해놓은 자료들이었다.

“이건...”
“어, 이번 정기인사 때문에 좀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가장 윗줄에 강주현 전무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보라고 올려놓은 게 분명했다.
형준은 철렁이는 가슴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번 정기인사에 탈락하는 사람이 꽤 되네요.”


“그렇지? 이제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실력이 떨어지는 인사는 가차없이 잘라내야 해.”

지금껏 10 년 넘게 오른팔로 곁에 둔 강주현 전무를 실적미달로 잘라내겠다고 선언한다.


형준은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마주 웃어야 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2) > 끝

< 불꽃이 튀어 오르다(3) >

영훈은 연희와의 데이트 코스와 저녁 메뉴까지 다 정해놓은 상황이었다.


근사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추운 겨울에 뮤지컬 공연과 뜨끈한 소머리곰탕을 코스로 잡고 기대하는 와중에
걸려온 이형준 상무의 전화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전화를 통해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형준의 목소리에 일단 데이트 계획을 접고 전에 갔던 룸싸롱인
블루문으로 향했다.
웨이터는 영훈이 오자마자 얼굴을 기억하는지 바로 룸으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웨이터를 따라 들어가니 이형준 상무가 전에 봤었던 마담이라는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영훈을 보고 살짝 멈칫했다가 바로 자리를 권했다.

“앉아.”
“뭡니까?”
“오늘은 여자 가지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진짜 큰일 났다고.”
“그러니까 뭔데요?”

형준은 옆에 앉은 여자를 내보내고는 말했다.

“아버지가 강주현 전무를 이번 정기인사에서 실적 부진을 이유로 해고 시키기로 결정하셨어.”


“강주현 전무면···.”
“아버지 오른팔이었다가 내가 끌어들인 내 사람이야. 이건 나한테 경고하는 거야. 더 날뛰는 걸 보고 있지
않겠다는 거라고.”

영훈은 그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면 저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거다.
그는 본래 약한 사람이 아니고 쉽게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역시 아니다.
다만 그 대상이 아버지이기에 일단 두려움부터 느끼고 보는 것이리라.
안타깝지만 그의 운명이기에 영훈으로서는 도와주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강주현 전무가 꼬리가 긴 타입인가요?”


“응? 무슨 소리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들켰을까요?”
“그야 아버지가 강 전무를 철저히 감시했겠지.”
“강 전무가 그걸 생각 못 하는 사람인가요? 내가 강 전무를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형준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강 전무는 회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신영금융에서 상당한 업적을 이뤄낸 인물이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딱히 실수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고 지금까지 추진했던 일은 거의 성공시킨 인물이다.
능력이 있는 인물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거다.
꼬리가 긴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금융 일이라는 게 꼼꼼하고 세심하지 않으면 언제고 큰 사고가 터진다고 항상 이야기를 들었지. 꼬리가 긴
사람이었으면 아버지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승승장구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럼 강주현 전무의 실수는 아니라는 말이군요.”
“아버지가 강 전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알아냈을 수 있지.”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어째 그것보다 다른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무님과 강 전무 사이의 일을 아는 사람이 꼭 강 전무 뿐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야? 그럼 내가 실수했다는 거야?”
“어지간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상무님이 실수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형준은 그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비밀이 새어나갈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아니야.”


“흐음···.”

영훈은 형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큰 고난은 없어 보였다.
올해 여자로 인한 구설수는 있어도 목숨이 위험하다거나 이직운이 강하지도 않았다.
분명 큰 어려움 없이 지나갈 일인데···.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영훈으로서는 형준의 고민이 그렇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표정이 드러났는지 형준이 심통을 부렸다.

“야, 네 일 아니라고 너무 평안한 거 아니냐? 너랑 나랑 같은 배 탄 거 아니었어?”


“같은 배를 타긴 했는데 어째 난 미풍이 불어오는 걸로 보이는데 자꾸 태풍이 온다고 하니까 실감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게 미풍으로 보인다고? 내가 이상한 거야? 난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중이라고.”
“그럼 진짜로 강 전무를 자를 생각인지 확인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뻥카인지 아닌지 패는 뒤집어 봐야죠.”
“어떻게?”
“이번 정기인사 전에 강주현 전무 퇴사를 가장 먼저 주장하세요. 그럼 무슨 반응이 나올 거 아닙니까?”

형준은 술잔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럼 더 의심 사지 않을까?”
“거 참 조심성 많으시네. 왜 이러세요? 그렇게 돌다리 막 두드려 보는 성격 아니시지 않습니까?”
“아니··· 나도 원래 이렇지 않은 거 아는데 상황이 그렇잖아. 최대한 조심해야지.”
“동요하지 말아요. 그리고 고작 그거 들었다고 룸싸롱 와서 술 마시고 이러는 거··· 의심에 확신을 심어줄
뿐입니다.”
“그, 그런가···?”

다른 사람이 이런 충고를 하면 무시하곤 하는데 이 놈 말은 무시하게 되지 않았다.


꼭 맞는 말만 하는 데다가 겉으로만 존대를 할 뿐이지 하는 행동이나 머리 굴리는 걸 보면 형님으로 모셔도 할
말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때.

“어? 지은이네.”

형준이 핸드폰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전화가 걸려오면서 여자 사진이 뜨는 걸 설정해놔서 영훈도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굉장한 미녀임은 분명해 보였다.

“여자친굽니까?”
“응, 사실 네 말 듣고 이제 정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느 집안 딸인데요?”
“있는 집 딸은 아니고, 내 비서.”
“사내연애?”

대기업 비서들은 전부 얼굴을 보고 뽑는 게 분명했다.

“응. 일단 이것만···.”

형준이 전화를 받으려고 할 때 영훈이 그의 전화를 낚아챘다.

“어?”

영훈은 대답을 구하는 형준의 표정을 무시하고 여비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흘이 걸렸다.
무려 사흘.
아무리 여당의 원내대표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지만 그래도 무진중공업과 그 계열사를 이끌고 있는
자신과의 만남을 무려 사흘이나 미뤄가면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찝찝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평화선진당 강금원 원내대표는 여당 원내대표치고 아주 젊은 편이었다.
이제 고작 마흔 여덟이라 아직 쉰도 안 된 나이에 원내대표를 달고 있으니 상당히 성공한 정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 운만 가지고 됐을까?
당연히 정치권, 법조계, 재계와 두루두루 안면이 있었고 야당 정치인들과도 크게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좋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람 좋다고 쉽게 보다간 큰코 다친다.

“작년 국정감사 때 뵀었지요?”


“맞습니다. 아직 정정하시군요.”
“허허... 아들래미가 계열사 사장 자리에 있다고 저 할아버지 취급하실 겁니까? 아직도 젊은 여자 옆에 있으면
가슴이 펄떡펄떡 뛴다니까요?”

강금원 원내대표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자리에 앉는 정호균 회장을 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게 되셨겠네요. 해주조선해양 합병에 문제가 생기셨다면서요?”


“안 그래도 바쁜 의원님 붙잡고 하소연 좀 하려고 왔습니다. 세상 참 오래 살 일 아닙니까? 하하하.”
“하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어쩝니까? 하소연이야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실 수
있으실 텐데.”

어차피 정 회장은 오늘 만남이 원하는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이 가슴에 얹힌 돌부터 내려놓고 해결책을 생각해봐야지요.”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말씀하시죠.”

정 회장은 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참으로 매정하셨습니다. 우리를 혹독하게 가르치셨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조차


없으셨어요. 돌아가실 때도 따뜻한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들렀다 가시는 분처럼 그렇게 가셨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제들끼리 피를 튀기며 싸웠어요. 누구는 차를 가지고 누구는 금융을, 누구는 건설을
가졌지요. 전 배와 기계를 가졌습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알짜배기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잘 살아남으셨고.”
“조선업 불황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우린 처절하게 버텼습니다. 남들이 군산조선소 가지고 손가락질할 때
우린 허벅지 살을 베어 허기를 버티는 마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 마음 아시겠습니까?”
정호균 회장의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그런 마음이셨군요.”
“군산조선소는 우리 겁니다. 흔들 게 따로 있지,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강금원 원내대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군산조선소에 투입된 자본과 인력이 어마어마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우시겠죠.”

그의 마지막 말이 정 회장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매각으로 방향을 잡은 겁니까?”


“군산시의회와 주민들의 반응이 너무 격렬합니다. 오늘 기사 보셨어요? 군산조선소 매각으로 재가동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 때문인지 업체 동원해서 조사해보니까 조재민 의원 지지율이 95%까지 올랐습니다. 아무리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90 년대나 2000 년 초반도 아니고 요즘 어느 지
역이 저렇게 압도적인 지지율이 나옵니까? 게다가 군산조선소 사태 후에 여당 지지율이 굉장히 떨어졌던 곳입니다.
1 년 전이 뭐야,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지지율 어림도 없었어요. 덕분에 전라도 지역의 당 지지율까지 덩달아
상승했습니다.”
“정치적인 사정이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강 대표님,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그거 사면 돌릴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몇천억짜리 LNG 선을 몇십척씩 수주하니까 그게 그렇게 쉬워 보입니까?”
“수주는 해주조선해양이 하는 거 아니었나요? 해주조선해양에 군산조선소를 붙이는 거···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강금원 원내대표의 말에 정 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해주조선해양이 군산조선소까지 돌릴 만큼 수주잔량이 넘쳐날 거라고 보십니까? 지금 수주량은 거제


조선소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알아보니까 그렇게 여유 있는 건 아니더군요. 그리고 무진중공업과 해주조선해양이 합병하는 거 노조에서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두 회사가 합치니 결국 어느 정도 직원 감축은 불 보듯 뻔한데 어느 직원이
좋아할까요? 그런데 빈 조선소를 더해주는 거니 직원은 감축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엄청난
고용증진 효과가 있겠죠.”

어떻게 이야기를 돌려도 결국 여당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정 회장은 악이 받쳐 올랐다.

“이봐요, 원내대표님!”
“압니다. 현실적으로 군산조선소 돌리다가 수주 못해서 휘청거릴 거 알고 있어요. 아마 몇 년 못 가고 다시
산업은행에 다시 맡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라고요?”
“······.”
“그건 당신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진들과 직원들이 할 일입니다. 회사를 망하게 할 정도로 경영을 못하면
망해야지 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 써줘야 합니까? 수주? 솔직히 해주조선해양이 수주 못 채워서
다시 군산조선소가 망한다 한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그냥 죽은 상태로 두는 것보다는 나
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말한 강금원 원내대표는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회장님,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돌아가지도 않는 조선소 때문에 골치 썩지 마시고 그거


팔아서 현금이라도 두둑하게 챙기면 오히려 다른 좋은 매물이 나왔을 때 무진중공업이 인수할 수 있는 여력도
생기고, 혹시나 모를 불황을 대비해서도 좋은 선택 아닐까요? 게다가 군산조선소로 가
지게 될 부담을 현금으로 교환하면서 악재를 털어버리니 이것보다 더 좋은 리스크 헷지 방법이 또 있습니까?”
“그게 여당의 방침입니까?”
“당의 방침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몇몇 의원들의 생각입니다. 우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요. 아, 제가
우리 회장님께서 만나자고 하셔서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을 모셨습니다.”

그는 보좌관을 호출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을 모셔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자 마음 같아서는 갈아 마시고 싶은 조재민 의원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청년은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딱 떠오르지 않았다.

“뵙고 싶었습니다, 회장님. 나 군산시장 출마 하려고 준비 중인 조재민이에요.”


정호균 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일어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정호균이오. 그대가 바로 내 새끼 훔쳐가겠다고 이 사단을 낸 장본인이구먼.”


“하하하, 아이고 회장님도 참··· 말씀에 어폐가 있습니다. 돈 안 된다고 죽여놓고 내 새끼라니요. 남의 새끼도
그렇게는 안 할 텐데요, 하하하! 그리고 여기는 신영은행 이형준 상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신영은행 이형준입니다.”

정 회장은 그제야 저 젊은 청년이 누군지 기억이 났다.


경제인 모임에서 이경호 회장이 데리고 다니며 칭찬을 해대던 그 친구가 바로 이 친구라니···.

“그래, 기억나는군. 그런데 왜 이 자리에···?”

대답은 조재민 의원이 했다.

“우리가 신영은행을 매각주관사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두 회사가 자주 만나게 될 거 아닙니까? 이 자리에서


만나 잘해보자는 의미로 불렀습니다. 자네, 너무 싸게 팔면 안 되네! 알지?”
“그럼요. 최대한 비싸게 팔아보겠습니다.

순간 정 회장은 눈앞의 물컵을 집어 던질 뻔한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3) > 끝

< 불꽃이 튀어 오르다(4) >

형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블루문에서 영훈이 한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 여자 앞에서 부회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니면 전무님이라도. 이상하게 전 얼굴도 안 본 그


전무라는 사람보다 상무님이 실수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직후 형준은 사무실에 들어와 한동안 도청 장치 따위의 전자기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지 온


사무실을 뒤져댔었다.
물론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에 말이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때 안심하기보다 혹시 이곳이 아니라 다른데 설치해놓은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때,
더 이상 지은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띵동!

형준은 바로 일어나 현관문으로 나갔다.


“짠! 오빠 좋아하는 맥주 가져왔지~”

지은이 회사에서 막 퇴근한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손에 들고 온 맥주를 흔들어댄다.


오늘 먼저 퇴근해서 오피스텔에 가 있겠다고 하고 집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찍 왔네? 일 많다며?”


“윤 대리님한테 부탁했지. 헤헤···.”
“윤 대리 자꾸 부려먹지 마. 너 좋아해서 그러는데 미안하지도 않냐?”
“본인이 좋아하는데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신발을 던지듯 벗고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형준은 천천히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당분간 여기 못 올 거야.”

그녀가 홱 돌아서며 물었다.

“왜?”
“바빠서. 새로운 프로젝트 맡아서 움직여야 해. 이번에 진짜 중요한 거라서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진짜?”
“응, 진짜야. 그리고···.”

형준이 어렵게 이 오피스텔에서 그녀더러 나가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프로젝트가 뭔데?”


“응? 아··· 뉴스에서 봤지? 군산조선소. 그거를 조율하는 일이거든.”
“그렇구나. 오빠 혼자?”
“아니, 아무래도 팀으로 움직이겠지. 전략기획팀 전체가 움직여야 할 거야.”
“혹시 우리가 매각주관사로 결정된 거야?”
“아직 진행 중이라서 결정난 건 없어.”
“그런데 조선소를 사려는 회사는 어디야? 되게 궁금하네?”
“그게 왜 궁금해?”
“그렇잖아. 군산조선소는 짐 덩어리 아니야? 해주조선해양까지 인수하려는 거 보면 조선업을 가지고 있는 회사도
아닌데 갑자기 인수하려고 하니까 궁금하지.”

군산조선소를 인수할 회사가 해주조선해양까지 인수할 거라는 기사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형준은 순간 움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세원 인터내셔널.”
“세원 인터내셔널? 진짜?”
“응, 그쪽에서 준비하고 우리는 중간에서 절충만 해주는 거지. 거기 대표가 마음먹고 준비하는 작업이야.”
“와··· 말도 안 돼.”
“그렇지? 나도 놀랐다니까. 저녁은 시켜 먹을까?”

형준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나가서 안 먹고?”
“귀찮아. 너 배달어플 있지? 잠깐 좀 줘봐.”
형준은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한참 동안 만져대다 말했다.

“찜닭 시켰어. 맥주는 찜닭 먹으면서 먹자.”


“응···.”
“나 잠깐 씻고 올게.”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샤워를 하고 나온 형준은 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자신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그녀가 누군가와 나눈 카톡 내용이 모조리 자신의 핸드폰에 전송되어 있었다.
배달을 핑계로 깔았던 해킹 프로그램이 그녀의 카톡 대화 내용을 모조리 복사했던 것이다.

“후···.”

역시 영훈의 말이 맞았다.
허탈하고 허무했으며 화가 치밀었다.
순정을 바쳤다고 하면 오버겠지만 적어도 지은이를 만날 때만큼은 다른 여자와 잔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띵동!

“내가 나갈게~”

형준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던 그녀가 초인종 소리에 부리나케 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녀를 반긴 사람은 찜닭을 배달해온 배달부가 아니었다.

“어? 누구세요?”
“신영은행 감찰부에서 나왔습니다. 회사기밀유출 혐의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일단의 남자 무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오빠! 아니, 잠깐만요. 오빠!”


“같이 가시지 않으면 검찰에 바로 고발조치 합니다. 가시죠.”
“아니··· 오빠!”

놀란 지은이 형준을 부를 때 그는 맥주를 따서 TV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심하게 걸어간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 를 켰다.
지은의 고함소리가 귀에 꽂혀 들었지만 착 가라앉은 눈빛의 형준은 개그프로그램을 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군산조선소 해법, 이게 최선인가?]


[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후진국?]
[임대연장 불허된 군산조선소, 과연 해법이 있기는 한가?]

영훈은 기사를 훑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아주 악을 쓰고 쏟아내는구나.”

옆에서 연희도 투덜거렸다.


“분명 돈 주고 기사 내라고 했을 거예요. 하나같이 논조가 똑같아. 이걸로 정치권에서 이상한 쪽으로 방향을
잡는 건 아니겠죠?”
“예전처럼 사람들이 언론에 쉽게 휘둘리지 않잖아요.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연희와 대화를 나누는데 민희가 다가와 사장님이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곧장 사장실로 들어가니 송은채 사장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요즘 정신없지?”
“직장인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부담도 크고 그럴 거야. 신영은행 쪽은 어때?”
“며칠 전에 무진중공업하고 인사까지 나눴다고 하던데요? 정호균 회장이 뜨악했다고 하던데 일단 눈 마주치고
얼굴 익혔으니 조만간 본격적으로 가격 협상 들어갈 겁니다.”
“오늘 기사 보니까 쉽게 따라와 주지는 않을 것 같던데?”
“안 따라오려고 하겠죠.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네. 그들을 따라가게 하는 건 정치권에서 할 일입니다. 그 정도 능력도 안 되면 우리가 조재민 의원을 잘못
판단한 거겠죠. 아, 제가 잘못 판단한 거겠죠.”
“최 과장 실수일 수 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실수가 맞다면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참 최 과장답다. 그럼 이제 뉴스만 쳐다보고 있으면 된다는 거지?”
“네. 우리는 신영은행에서 제시한 가격으로 협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해주조선해양은?”
“군산조선소가 먼저입니다. 산업은행에서도 무진중공업과의 거래를 재검토하겠다고 했지, 깨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산업은행하고 단둘이 테이블에 앉으려면 군산조선소를 쥐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앉지도
못하게 하겠죠.”
“음··· 알겠어. 그리고 최 과장 오늘 스케줄 좀 널널하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나 따라갈래?”
“어디 가십니까?”

송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비서실 과장이면서 사장 스케줄도 체크 안 하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야?”


“하하··· 그런가요?”
“농담이야. 인도 대사관에서 초청했어.”
“인도요?”
“인도 대사 아내가 내 어릴 적 친구거든. 계속 인도에 있다가 얼마 전에 들어왔는데 주한 인도 대사를 소개시켜
준다고 초청했어.”
“그런 자리에 제가 참여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우리 최 과장 자랑을 좀 했거든. 게다가 연희 남자친구라니까 꼭 보고 싶다네? 괜찮지?”

솔직히 귀찮았지만 여기서 안 간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인도는 아주 중요한 시장이야. 중국 이상으로 커질 수 있는 시장이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사업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곳이야. 만약 주한 인도 대사와 친분이 생기면 굉장한 힘이 될 거야.”

영훈은 감이 잘 안 왔지만 그렇다고 하니 꽤 중요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외부 강의 끝나고 지하주차장으로 와. 내 차로 다 같이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사장실을 나오니 민희가 다가와 말했다.

“과장님, 오늘 저녁 Nodri Clare 행사 참석 잊지 않으셨죠?”


“어? 그게 오늘이었어요?”
“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VIP 초청 행사가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요즘 하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돌아다니느라 깜빡했다.
그리고 다른 일은 몰라도 Nodri Clare 브랜드는 노형석 과장이 쥐고 있는 한 문제가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예 신경을 꺼놓았던 것도 한몫했을 거다.

“흐음··· 이걸 어쩐다···.”

영훈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연희가 무슨 일인가 해서 다가온다.

“왜 그래요?”
“오늘 Nodri Clare VIP 초청 행사라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힘 좀 줬는데?”

연희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생로랑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여느 배우 못지않았다.
오늘 평소보다 더 예쁘게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사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인도 대사관에 초청받았다고 하셔서요. 아무래도 거기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진짜요?”
“그 자리는 빠지면 안 될 자리 같으니 Nodri Clare 는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어후··· 아침부터 힘 빡 준다고 새벽부터 미용실 다녀왔는데.”
“아니, 뭐 연예인이세요? 새벽에 미용실을 왜 갑니까?”

영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니 그녀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예인만 새벽에 미용실 가라는 법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하고 가야 걔네들이 날 보고 딱 기가 죽는다고요.”


“가만 있는 연예인들 기는 왜 죽이려고요?”
“히힛··· 그냥 내 기분 좋으려고.”
“아~”

역시나 임연희 성격은 어디 안 간다.


연희는 영훈을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안 하면 걔들이 날 보고서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그저 부모만 잘 만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야? 미모는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뒤에서 흉볼 거라고요.”
“예, 예. 알겠어요. 어쨌든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지 누굴 만나러 가야 하는 건 똑같으니까 새벽 미용실행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근데 그 자리에 다른 백화점 관계자들도 나올 거란 말이에요. 당신이 안 가면 누가 협상을 해요? 노 과장님이
잘 하실까요?”

영훈은 솔직히 누가 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럴 겁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형석 과장의 사주를 다시금 곱씹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어···.”
“왜요?”
“나 말고 다른 분을 보내죠.”

노 과장의 운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올해 노 과장에게 이직의 운이 들어와 있었다.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데 이직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본인이 회사를 못 버텨서 나가는 게 아니라 만약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을 해간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 VIP 초청 행사에서 다른 백화점 사람들과 만나면 오히려 득보다 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준비한 게 있으니 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을 내세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누굴 보내게요? 임원급을 보내려고요?”

아무리 회사에서 힘이 세다고 하지만 Nodri Clare 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원을 보내서 무슨 협상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득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희에게 시선이 갔다.
맞다.
이 여자가 지금 비서실에 있기 때문에 자꾸 비서로 능력을 한정하고 있었다.

“민희 씨, 혹시 Nodri Clare 브랜드 좀 알아요?”


“네? 네. 회사 브랜드라서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럼 잘됐네요. 나 대신 행사장 좀 갈래요?”
“제가요?”

민희보다 더 놀란 사람은 연희였다.


하지만 영훈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네. 가서 백화점 관계자들과 협상할 때 노형석 과장님 옆에서 도와주세요.”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녀는 직장인이 될 사주가 아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스릴을 즐기며 배짱이 두둑하고 눈치도 빠르다.
아이러니하지만 굉장히 잘 풀려서 지금 대기업 비서직으로 일하는 거지, 만약 자칫 잘못했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사람이 잘못 풀리면 범죄자가 되기 딱 좋다.


사기를 치면 수백억을 사기 치고도 눈썹 하나 흔들릴 여자가 아니었고 도박을 하면 수많은 사람을 속여먹는 타짜가
될 수도 있었다.
마침 사주에 칼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 여자가 이렇게 정상적으로 회사를 다니니 잘 풀린 게 아니면 뭔가.

“가서 본인이 생각할 때 가장 회사에 이익이 되는 거래인지 생각해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잘 모르겠다면 나한테
연락하시고요.”

영훈이 그렇게 말하자 연희가 끼어들었다.

“노형석 과장님과 의견이 갈리게 되면요?”

영훈은 얼떨떨해하는 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희 씨는 나를 대신해서 가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영업팀으로 가서 필요한 자료 확인하세요.”
“네.”

그녀는 부리나케 움직였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4) > 끝

< 불꽃이 튀어 오르다(5) >

민희가 영업팀으로 내려가자 연희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영훈은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궁금합니까?”
“당연하죠. 아까 그 자리에서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단 말이에요. 뭐예요? 노형석 과장님처럼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주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좀 불안정하다고 봐야죠.”
“왜 불안정해요?”
“본래 도전 지향적인 사주를 타고났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호기심이 많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실패할
확률도 높은데, 이 사람은 승부사 기질을 타고나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도 합니다.”
“민희 씨가 그런 성격이었어요?”
“본래 자기 자신도 자신의 성향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본래 자신의 성향을 발현시키려면 그만한 환경과 운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참에 한번 보도록 합시다.”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연희가 걱정하는 이유는 이해가 된다.


한두 푼이 걸린 사업이 아닌데 경험도 많지 않은 사원을 보내놓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협상을 대비하게 하니
걱정이 안 되면 그것도 이상하다.
다만 영훈은 보는 관점이 조금 달랐다.

“실수하면 배우는 게 있을 겁니다. 그럼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죠.”


“겨우 직원 경험치를 늘려주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요?”
“어떤 직원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그녀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거든요. 회사를 위해 통
크게 투자한다고 생각하세요.”
“와··· 당황스럽긴 한데 당신이 말하니까 또 그럴듯하게 들리네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도박판에 보내는 것도 아니고 손해를 봐도 얼마를 보겠어요?”
“하긴 뭐··· 딱히 위험한 거래도 아니긴 해요. 그래 봤자 백화점 입점 관련해서 수수료나 뭐 그런 것 정도만
이야기할 테니까.”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렸다.

“엄마가 당신을 왜 데리고 가려고 한대요?”


“사장님께서 당신 남자친구로 자랑을 열심히 하셨답니다.”
“아하~ 하긴, 자랑할 만하기는 해요. 히히··· 음··· 오늘 좀 그런데···.”

그녀는 영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넥타이도 다시 만지고 머리도 슬쩍 만져본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을 펴지 않았다.

“이거 뭐 나도 미용실 가야 하는 겁니까?”


“가면 좋죠. 요 앞 포시즌 호텔 지하에 있는 미용실이 실력 괜찮대요. 한번 가볼래요?”
“호텔 지하에 미용실이 있습니까?”
“그럼요, 유명해요.”
“어디에서 유명한 겁니까? 인터넷에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아무래도 내 주변에서?”
“그냥 이대로 갑시다. 귀찮은데.”
“알겠어요. 내가 예쁘니까.”

그녀는 방긋 미소지었다.
그렇게 영훈과 연희가 회의실에서 나와 인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영업팀에 갔던 민희가 돌아왔다.

연희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감 때문인지 조금 얼어있는 그녀를 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가방을 들고 그대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촤라라락!

가방에서 온갖 화장품과 잡동사니들이 쏟아져나왔다.


연희는 빈 가방을 들고 민희에게 가서 말했다.

“갈 때 이 가방 들고 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민희가 손사래를 쳤다.


줘도 적당히 좋은 걸 줘야지 천만 원이 넘는 Nodri Clare 최고급 모델을 주니 부담스러워서 받을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연희는 민희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쪽 사람들 사람 외형만 가지고 사람 판단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뭐,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가서 꿀리지 말고 와요.”

영훈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보탰다.

“받아요. 결과 좋으면 그거 보너스 될 수도 있을 텐데.”

연희가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영훈을 돌아봤다.


하지만 영훈은 그깟 가방 하나 보너스로 주면 어떠냐는 마음에 말을 이었다.

“게임에서도 본인 능력치만큼이나 중요한 게 장비거든요. 장비빨 무시 못 합니다.”

민희는 영훈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을 텐데 괜히 고집부리지 말라는 말에 민희가 연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깨끗하게 잘 쓸게요.”
“이미 중고라 그렇게 애지중지 안 하셔도 돼요.”

영훈은 자리에 돌아가려다가 민희를 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혹시 노형석 과장을 스카우트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요. 노 과장이 브랜드 담당자로 돋보이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네? 아, 네···.”
“무슨 이야긴지 잘 이해 못 하겠지만 명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내자 연희는 영훈의 소매를 슬쩍 잡아끌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진 화장품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인심은 내가 썼는데 왜 당신이 생색내는 것 같죠?”


“기분 탓입니다.”
“칫.”

그렇게 비싸 보이지 않았는데 천만 원이 넘는다는 말에 뜨악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럼 동기부여가 더 확실하게 되겠네요.”


“진짜 본인 거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싫으면 다른 거 하나 사줘요.”

연희는 슬쩍 민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민희는 가방을 책상 앞에 올려둔 상태 그대로 자신의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깨에 메어 보고 기대에 들뜬 모습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의아했다.

“좋아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면 보너스로 줄게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지금 직급으로 보면 민희 씨가 나보다


훨씬 높아요. 내가 보너스를 주고 말고 할 그런 상황이 아닌데.”
“그게 뭐 의미 있습니까? 비서실 직원 전체가 연희 씨 눈치 보고 있는 거 몰랐어요?”
“아니 뭐··· 그건 알고는 있지만 대놓고 보너스를 주기는 좀 애매하다는 거죠. 그리고 아까 장비빨 어쩌고
하면서 본인 장비는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니에요?”

영훈이 빙그레 웃었다.

“난 기본 능력치가 워낙 좋아서요. 장비까지 좋으면 너무 사기 아닙니까? 하하, 그럼 이제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합시다.”
“우리 일이요? 그게 뭔데요?”
“점심 뭐 먹을래요?”

연희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더니 주변 맛집에 대해 열거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민희는 연희가 빌려준 가방이 고맙기는 했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행사에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게 한다면 최영훈 과장이 크게 실망할 거라는 걸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현진물산의 권력서열은 사장 다음이 바로 최 과장이었다.
그렇기에 영업팀에서 받은 자료와 각 백화점 명품매장 매출 관련 자료를 달달 외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저녁이 다가올 무렵 화장을 다시 손보고 연희가 준 가방에 자신의 물건을 담아 행사장인 청담동으로
출발했다.

행사장은 청담동의 고급 주택 하나를 빌려 진행했는데 본래 미래 백화점에서 컬렉션을 열자고 하는 걸 노형석


과장이 거절했다.
언제까지 미래 백화점 단독으로 브랜드를 이끌고 가기에는 매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호텔이나 전시장 쪽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특색있는 곳에서 컬렉션을 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더 좋았다.

매우 큰 저택 입구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포토존에서는 연예인들이 한 명씩 사진을 찍으며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연예인 이야기를 좋아하고 드라마도 즐겨 보는 그녀였기에 눈이 돌아갈 법도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렇게 좋아하던 연예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고 입구 경비 직원에게 신분을 확인시켜준 후 저택에 들어갔다.


중간중간 톱스타들이 보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입고 있는 옷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왜 연희가 자신의 명품 가방을 들고 가라고 했는지, 왜 최 과장이 장비빨을 무시 못 한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팔에 천만 원이 넘는 가방이 걸려있어 그런지 어깨가 움츠려 들러다가도 다시 펴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창가나 진열대, 탁자, 소파 테이블 등에 Nodri Clare 브랜드의 가방, 액세서리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세팅된 형태나 조명을 봤을 때 굉장히 섬세하게 준비를 잘 했다는 게 느껴졌다.

“어? 왔어요?”

노형석 과장이 멀리서 그녀를 보고 다가왔다.


자신이 주최한 행사라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네. 연예인들 진짜 많아요.”
“다 서가은 덕분입니다. 브랜드 인지도가 확 올라가니까 우리가 초청한 연예인 대부분이 행사에 응했어요. 뭐,
스케줄 때문에 못 온 사람들도 꽤 되긴 하는데··· 그래도 톱스타도 오고 그렇네요. 하하하!”

같은 팀이었다면 직급이 낮은 민희에게 말을 놓겠지만 같이 일해본 적도 없었고 그녀의 부서가 비서실이기에 노


과장은 감히 말을 놓지 못했다.
직급보다 무서운 게 최고 권력자와 얼마만큼 가까이 있는가가 아니겠는가?

“백화점 관계자들은요?”

노 과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전부 와 있기는 한데 아직 우리 쪽에 접근하는 관계자는 없어요. 분명 관심 있어 하기는 하는데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무슨 눈치를 보는 건데요?”
“뉴월드나 그랜드 백화점 모두 우리와 입점 계약을 진행하다 거절한 곳들이거든요. 먼저 다가와서 다시
입점해달라고 해야 하니 불편한가 봐요.”
“아···.”

그때 서가은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서가은 씨. 저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나온 김민희라고 해요.”

서가은은 인사를 받아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최 과장님과 연희 씨를 찾으시는 건가요?”
“네.”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못 나오세요. 대신 제가 나왔습니다.”
“아···.”

실망하는 서가은의 눈빛.


민희는 이미 영훈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고 왔다.
서가은의 남자친구가 운영하는 반도체 회사가 우리 회사에서 투자하는 곳이라는 것.
당연히 영훈이나 연희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을 것이기에 실망하는 그녀를 보고 민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Nodri Clare 브랜드 런칭이 이렇게 성공하게 된 건 가은 씨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네, 고마워요.”
“혹시 오늘 컬렉션 중에 마음에 드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가은 씨잖아요.”

서가은은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게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제안해주니 민희가 제법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서가은 씨, 반가워요~ 오늘도 너~무 예쁘다.”

민희는 옆에서 슬며시 끼어든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의 드레스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녀는 서가은과 친분이 상당한 듯이 보였다.

“어머~ 실장님. 반가워요. 언제 오셨어요?”


“나야 아까부터 왔었지. Nodri Clare 랑 가은 씨랑 너무 잘 어울리더라. 아, 근데 여기는···.”
“현진물산 관계자분이세요. 어··· 최민희 씨였나?”
“김민희입니다.”
“아! 김민희 씨. 미안해요. 내가 이름을 잘 기억 못 외워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현진물산 노형석 과장님. 이름 틀리지 않았죠?”
“아휴, 기억 잘 하시네요. 하하하!”

노형석 과장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민희는 눈웃음을 짓는 와중에도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반가워요. 난 그랜드 백화점 송은진 실장이에요.”


“노형석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노형석 과장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숙이는데 송은진 실장은 고개만 까닥거렸다.


사실 송은진은 현진물산에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혼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연희였는데 연희가 회사에 자신의 이혼 사실을 다 퍼뜨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좋게 생각할 수 없었던 거다.
송은진은 노 과장에게 말했다.

“전에 서로 간의 오해로 우리 백화점에 입점이 안 됐잖아요. 마침 기존 브랜드 하나가 나가게 생겼어요.


아마··· 3 월쯤? 그때 자리가 빌 것 같은데, 수수료는 1 층 명품 매장 중에 최저급으로 맞춰 드릴게요.
어때요?”

노형석 과장은 이게 웬 떡이냐는 얼굴로 냉큼 수락했다.


“그거 좋습니다.”

이때 민희가 끼어들었다.

“자세한 계약사항을 메일로 보내주세요. 보고 검토하겠습니다.”

사실 민희도 저 정도 좋은 조건이면 어차피 계약 내용 이야기는 나중에 진행할 건데 굳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초를 쳐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선 이유는 영훈의 마지막 지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노 과장을 전면에 돋보이지 않게끔 하라는 지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랐지만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 과장은 당황했고 송은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담당자가 이분이 아니었던가요?”


“담당자는 맞는데 계약 협의는 회사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노 과장은 민희의 단호한 선언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곧 비서실의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송은진은 입술을 깨물다가 서가은에게 말했다.

“가은 씨,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는데··· 벤자민 청이라고 에르메스 아시아 담당자. 가은 씨도 에르메스
좋아하지?”
“네? 네···.”

엄연히 기존 브랜드 담당자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리기에도 뭐한, 그런 상황인데 민희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가은 씨, 연희 씨가 오늘 행사에 가면 가은 씨가 동료 연예인분들 많이 소개해줄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Nodri Clare 가 여성에게만 특화된 브랜드라고 할 순 없잖아요? 남성용 슈즈도 있고. 이번에 남성용 향수
브랜드 런칭을 계획하고 있거든요.”
“네? 아··· 그런가요?”

가은이 당황하는데 민희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에르메스 담당자 만나고 오셔도 됩니다. 연희 씨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서운해하겠지만 제가 비밀


지켜드릴게요.”

민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었지만, 가은은 그게 자신을 향한 경고임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물론 소개해 드려야죠. 실장님, 죄송한데 그분들은 다음에 만나도록 할게요.”

서가은의 거절에 송은진 실장은 대답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민희를 노려보았다.

< 불꽃이 튀어 오르다(5) > 끝

< 역마살이 꼈나?(1) >

서가은은 민희와 노형석 과장을 이끌고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은은 오늘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남자친구 회사에 투자를 결정한 연희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생각 정도밖에
없었다.
오히려 연희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는 생각에 오늘 컬렉션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몇 개 득템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희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자친구 회사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이제 자신은 현진물산의 고객이 아니라 협력업체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던 거다.

바뀐 신분에도 컬렉션 아이템 몇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협력업체 직원 신분으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먼저임은 인지하고 있었다.
“도현 씨, 여기 인사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강도현은 오늘 컬렉션에 참석한 사람 중 유일하게 서가은과 비견될 만한 톱스타였다.


본래 가수 출신인 그는 연기와 노래 두 방면에서 걸출한 실력을 뽐내고 있으며 스타일도 독특하고 개성 있어 각종
명품 브랜드에서 초청할 정도로 패션계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

180 센티의 훤칠한 키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그는 가만히 입 다물고 서 있기만 해도 한
장의 화보와 같았지만, 민희는 지금 그런 그의 멋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현진물산에서 나왔습니다. 김민희예요.”

민희가 악수를 청하니 그가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현진물산은 입사할 때 외모를 보고 뽑나 보네요? 연예인인 줄 알았습니다.”

물론 입에 발린 말이지만 사실 민희는 객관적으로 상당한 미인이 맞기는 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컬렉션 참가해주신 거 감사합니다. 아, 과장님 명함 드리세요.”


“아, 네. 현진물산 노형석 과장입니다.”

노형석 과장이 얼른 명함을 꺼내 준다.


누가 봐도 노 과장보다 민희가 더 높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모습이었는데 이는 민희가 일부러 노린 거였다.
최대한 노형석 과장을 내세우지 않되 일을 주도하는 사람은 노형석 과장임을 각인시키려는 방법이었다.

“Nodri Clare 브랜드를 총괄하시는 분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평소 강도현 씨를 생각할 때 우리 브랜드와 잘 맞는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여기에 참석해주실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혹시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현은 조금 당황했다.


딱히 Nodri Clare 에 관심이 있어서 참석했다기보다 소속사에서 잡아준 일정이었고, 참석하면 명품 몇 개
얻어다가 몇몇 여자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별 생각 없었는데요?’라고 말할 정도로 도현은 경우가 없지 않았다.

“솔직히 기존 브랜드보다 조금 평범하지 않은가 싶었어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계속 눈이 간다고 해야 하나?


평범한 듯한데 애정이 가는 그런 브랜드 같아서 왠지 모르게 기존에 계속 쓰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Nodri Clare 컬렉션을 간다고 하니 주변 지인이 해준 이야기였다.


도현은 그래도 그거라도 들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큰일 났을 뻔했다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 그러셨구나. 저희 브랜드를 정말 잘 이해하고 계시네요. 너무 고맙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강도현


씨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더욱 힘을 내야겠어요. 혹시 저희가 도현 씨 회사에 연락 드려도 실례는 아니죠?”
“그, 그럼요.”
“다행이에요. 오늘 컬렉션 잘 즐겨주시고 사진 많이 찍어서 SNS 에도 올려주세요. 도현 씨 인스타는 제가 매일
찾아가 보고 있었는데 내일 인스타 기대해도 되는 거겠죠?”
“하하, 네. 뭐···.”

민희는 웃으며 노형석 과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과장님. 우리 도현 씨한테 몇 개 챙겨주실 수 있죠?”

노형석 과장은 순식간에 도현을 어르고 달래는 민희를 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노블레스 라인으로 준비해야겠네요.”


“와! 정말요? 도현 씨, 저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우리 과장님이 어지간해서는 노블레스 라인은 협찬 아닌 이상
공짜로는 잘 주시지 않거든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거 사진 잘 찍어야겠네요.”
“호호호,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한번 또 뵐게요.”

민희는 도현이 있는 곳에서 멀어지며 가은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도현 씨 평판이 어떤가요?”


“평판이요?”
“네. 기존 행실이라든가···.”

서가은은 민희가 그냥 연예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님을 알았다.

“정확히는 몰라요. 저도 친한 편은 아니니까.”


“그래도 같은 배우면 코디나 주변 회사 관계자들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걱정하지 마요. 가은 씨한테
들은 말은 회사 외부로 나가지 않을 테니까. 수억 주고 계약한 모델이 갑자기 도박을 한다든가 음주운전을 할
수도 있고 또는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곤란하니까 묻는 거예요.”
“술은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술 좋아하는 남자 스타 치고 여자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 여자도 많겠죠?
그런데 도박이나 음주운전을 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요. 그리고 저 정도 급이 되면 어지간한 매체에서 뒤를
캘 텐데 지금까지 뭐가 터졌다는 소리도 들은 바 없고···.”
“여자가 있어도 알아서 깔끔히 정리한다는 말이네요? 알겠어요.”

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은은 그렇게 민희와 노형석 과장을 끌고 투어를 다녔다.

“고생하셨어요. 이거 오늘 컬렉션 중에 가장 예쁜 건데 어때요?”

민희는 드넓은 저택 곳곳에 포진해있던 연예인들을 다 만나고 난 후 가은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노 과장은 목걸이의 가격을 생각하며 속으로 뜨악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무려 비서실에서 내려온 사람인 데다 자신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는 카리스마에 완전히 기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너무 예쁜데 이거 받아도 되려나 모르겠어요.”


“받으세요. 오늘 고생하셨으니까.”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누구는 선물을 주고 누구는 선물을 안 주던데 그 기준이 궁금해서요.”

민희는 웃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냥 제 나름대로 기준을 세운 거였어요.”


“어떤 기준이요?”
“브랜드 가치가 있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옷을 줘도 그게 입고 어울려야 주는 사람도 마음이 좋지 않겠어요?
그래서 가은 씨에게 목걸이를 드려도 아깝지 않아요. 가은 씨 목에 걸리면 그만큼 우리 목걸이가 가치있어 보일
테니까요.”

가은은 민희의 말에 진심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너무 고마워요.”


“고맙긴요. 우리 에스코트해준다고 시간 뺏었죠?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어쩌면 조금 냉정하다 싶은 말이지만 가은은 원래 민희의 성격이 그런 건가 하며 인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가자 민희가 미안한 얼굴로 노 과장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오늘 너무 나댔죠?”
“아닙니다. 저였으면 오늘 연예인들 구경하는 것만 찍고 보도자료 냈을 겁니다.”

노 과장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마 그랜드 백화점과 뉴월드 백화점 입점 계약이 주고 다른 건 그저 부차적인 일로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김민희는 오히려 연예인들과 소통하는 걸 주로 생각하고 다른 백화점 입점 계약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직 그게 의문이었지만 그녀의 의중이 바로 윗선의 의중이라고 생각했기에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죄송해요. 노 과장님이 실권자인데 낙하산처럼 뚝 떨어져서 이래라저래라 했으니까.”


“진짜 괜찮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까 협찬 물품 주는 것도 어울리는 사람에게 골라서 줬다는 이야기 듣고
감탄했습니다. 전 나름대로 명품을 볼 줄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그런 정도의 안목은 없거든요.”

노형석 과장은 나름 명품을 볼 줄 아는 눈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이번 Nodri Clare 를 론칭하면서 그 자부심이 더욱 올라가 있었는데 마치 진짜 패션을 잘 아는 전문가처럼
사람을 판별해가며 협찬을 결정했다는 말에 감탄했던 거다.
그런데 민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더니 주변을 슬쩍 돌아보고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아까 그거 뻥이었어요.”
“네? 진짜로요?”
“네.”
“그럼 왜 그렇게 말한 겁니까?”
“그래야 서가은이 감동할 테니까요.”

노형석 과장은 잠깐 벙찐 얼굴을 하다가 재차 물었다.

“그럼 진짜 사람을 가려가며 협찬한 이유는 뭔가요? 아까 보니까 누구는 급이 낮은 연예인이라고 해도 협찬을
주고 누구는 주연급 배우라고 해도 안 주던데.”

민희는 새침한 얼굴로 쿠키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SNS 안 하는 사람한테는 안 줬어요. 받고 나서 효과도 없을 텐데 뭐하러 줘요? 아깝게···.”


“아···.”
“협찬 안 나가고 아낀 거 있으면 노 과장님이 쓰세요. 위에서도 별말 안 할 거예요. 노 과장님이 가지고 온
Nodri Clare 매출이 너무 예상 밖이라 다들 노 과장님 칭찬이 자자 하거든요.”
“하하, 그런가요?”
“그럼요. 위에서 노 과장님을 앞으로 굉장히 중요한 인재로 키우겠다고 말씀하시더라니까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예요.”

민희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 영훈도 오늘 컬렉션의 계약 여부보다 노형석 과장이 스카우트 당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으니까.
진심을 담아 말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미인의 말은 잘 믿는 건지 노 과장은 쑥스러운 얼굴로 괜히 시선을
돌린다.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었어요. 그리고 진짜 가방 몇 개···.”

민희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말을 멈췄다.


노 과장은 민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급할 게 없는데 저쪽은 확실히 급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보네요.”

걸어오는 그랜드 백화점 송은진 실장을 바라보며 민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인도 대사관저에 도착한 송은채 사장 일행은 인도 대사인 아미르 밧찬과 그 아내인 쿠잠의 환대를 받으며 식탁에
앉았다.
송은채 사장은 가장 먼저 자신의 옛 친구를 연희와 영훈에게 소개했다.

“인사드려. 여기는 내 어릴 적 친구인 정문숙. 여기는 내 딸, 어릴 때 봤었지?”

송은채 사장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데 정문숙이라는 여자 역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그럼. 연희가 열네 살 때였나? 열다섯 살 때였나? 미국에서 한번 봤었는데, 아줌마 기억나니?”


“그럼요. 그때랑 똑같으세요.”
“어머, 고맙다, 얘~ 호호호. 여기는 연희 남자친구?”
“안녕하십니까? 최영훈입니다.”
“훤칠하네. 그렇게 능력이 있다며? 은채 부럽네.”
“아들 잘 둬놓고 뭐가 부럽니?”

송 사장이 눈을 흘기자 정문숙은 웃으며 대사 일행을 소개했다.


정문숙은 영어로 능숙하게 소개했고 송 사장이나 연희는 역시나 능숙하게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인도 사람이 영어를 잘 한다더니 역시나 그런 듯싶었다.


영훈은 연희가 소개하며 영어를 할 줄 모른다고 하니 그때 정문숙이 살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영어를 못하는 인재라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인도 대사인 아미르 밧찬은 비록 영어를 못하기는 해도 이 자리에 자신을 제외한 남자가 영훈 하나라 그런지
영훈과 악수도 하고 옆에 앉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사실 영훈은 그와 만나기 전에 포털 사이트를 통해 그의 생년월일을 확인하고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이었다.

사주라는 게 중국에서 온 학문이고 바로 옆 나라였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과연 인도 사람의 사주가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치킨 커리를 비롯한 인도 가정식으로 화기애애한 식사자리를 마친 후 쿠잠과 정문숙, 그리고 송 사장 이렇게 셋이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아미르 밧찬 인도 대사가 연희를 통해 영훈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로 여기 한국은 신분의 차별은 없지만, 기업 재벌들은 재력을 상당히 많이 본다고 알고 있어요. 그걸
뛰어넘을 만큼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여기 아가씨와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습니까?”

연희는 통역하면서 괜히 얼굴이 빨개진다.

“맞습니다.”
“당신의 능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별거 없습니다. 그냥 사람을 잘 보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잘 본다고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 사람을 잘 보는 걸 특기로 내세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한국
사람이 허풍을 잘 친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으니 참 새롭군요.”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할 겁니다.”
“혹시 점쟁이 같은 건가요?”
“하하, 아닙니다.”

영훈은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어떻게 잘 보는 겁니까?”


“그냥 대화를 나눠보고 일을 같이하면서 상대방을 잘 읽어내는 겁니다.”

인도 대사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 같습니까?”

영훈은 고민했다.
과연 자신이 알아낸 사주가 인도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건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결과일지.
그래서 본래라면 그냥 둘러대고 말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호기심 때문에 툭 던졌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보이지만 급하고, 남의 실수를 그냥 못 넘어가는 그런 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미르 밧찬 인도 대사는 짙은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혹시 나에 대해 미리 알아보았나요?”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을 풀었으니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농담으로 들으시죠.”

영훈은 손을 내저으며 가식적인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미르 밧찬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 역마살이 꼈나?(1) > 끝


< 역마살이 꼈나?(2) >

아미르 밧찬 대사는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친구의 능력이 꽤 훌륭한가 보군요.”

연희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잠깐 영훈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네. 능력이 좋은 사람이에요. 기사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진물산이 지금 좋은 회사로 변해가는데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거든요.”
“뉴스는 항상 챙겨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초대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이었어요. 인도는 지금 많은
성장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부족합니다. 좋은 기업과 기업인들과의 만남이라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연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이유라면 우리보다 더 좋은 기업들이 많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많은 만남을 가지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오늘 기존의 사람들과는
다른 아주 흥미로운 분을 만난 것 같아서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방금 전의 영훈 씨 이야기는 잊어주세요. 영훈 씨는 농담처럼 저런 이야기를 하고는


합니다.”

연희가 영훈의 눈치를 보며 화제를 피하려 했지만 아미르 밧찬 대사는 자신의 호기심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농담치고는 꽤나 색달랐습니다. 한편으로는 놀랐어요. 어떤 마술을 썼는지 궁금하군요.”

궁금하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주를 풀어줄 수 없으니 농담처럼 넘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연희의 어쩔 수 없는 통역에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몇 마디나 했다고 대사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습니까? 그냥 대사님의 얼굴과 말투, 몸짓 같은 것에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작은 재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를 궁금해서 죽게 만들려고 작정 하셨군요. 하하하! 이거 큰일났습니다. 당신이 가고 나면 난 한동안 당신이
어떤 트릭을 썼는지 궁금해서 아무 일도 못할 테니까요.”
“그러다 며칠 지나면 저와 만났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겁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미르 밧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말이 조금 오만하게 들리겠지만 다른 기업인들은 나에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지요. 당신은 이상하게


나와 거리를 두려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혹시 자신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영훈은 계속 변명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서로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게 때문에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그냥 신기한 재주를 본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아미르 밧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믿기지 않아 호기심을 불러오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내가 얼마


전에 손목이 참 아팠습니다. 병원에 가도 낫지를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는데 한의원이라는 데를 소개 받았어요.
엑스레이나 약이 아니라 뾰족한 바늘을 몸에 꽂아 치료한다는데 이걸 믿어야 하는지 당
황스러웠습니다.”
“하하, 그랬겠습니다.”
“솔직히 하루는 그 뾰족하고 작은 바늘을 몸에 꽂고 나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그런데 소개해준 사람이
한번만 가지 말고 반드시 여러번 가라는 말을 해줬기 때문에 속는 셈 치고 여러번 다녀봤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손목의 통증이 조금씩 사라지더군요.”
“다행입니다.”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 그게 꼭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걸 말이지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는데 괜히 당신을 재촉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미르 밧찬은 영훈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다시 연희와 사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영어를 하고 있기에 무슨 대화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걸로 보아서 크게
심각한 주제는 아닌 듯 싶었다.
그렇게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아미르 밧찬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연희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했다.

“아니, 글쎄... 저 아저씨 동생이 인도 건설부 차관이래요.”


“네? 진짜요?”
“네. 난 또 그건 몰랐네.”
“아니, 그런 거 안 알아봤습니까?”
“우리 일하러 온 거 아니었잖아요? 가족관계까지 알아보지는 않았죠.”
“대단한 양반이네.”
“그런데 사주로는 그게 안 나와요?”
“그것까지 알아내면 그건 신점을 보는 사람이에요. 신점 알죠? 신령님이 알아서 다 맞춰주는...”

영훈이 손으로 방울을 쥔 것처럼 흔들어댔다.

“알아요. 아까 기업인들이 자신한테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데 속으로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그리고 잠시 후, 아미르 밧찬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연희와 그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병원은 자주 가십니까?”


“병원이요? 아직 건강해서 근래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럼 병원에 한번 가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보통 당신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폐가 좋지 않거든요.”
“폐가 좋지 않을 거라구요?”
“가볍게 들으시면 됩니다. 그냥 그런 경우가 많으니 가볍게 검사 한번 받으시길 추천하는 거예요.”
그는 화(火)의 기운을 타고 난 사람인데 그 기운이 과해 금(金)에 해당하는 폐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특히 사주를 봐도 건강하게 장수할 팔자가 아니라 환갑을 넘어서부터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살아갈 터였다.
다만 그렇다고 단명할 팔자는 아니라서 한마디로 골골대면서도 적당히 남들과 비슷한 수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니 쉰 중반을 넘은 지금쯤이면 폐가 상당히 상했을 게 분명했다.

“허허... 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군요.”


“그냥 가볍게 들으시면 됩니다. 혹시나 제 말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주변에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병원에 가게 되면 바보라고 욕을 먹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영훈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아미르 밧찬은 그 웃음에 담긴 자연스러움을 읽어 냈다.
그는 자신의 말을 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함이 커졌다.

“알겠습니다. 언제 한번 병원에 가보도록 하지요.”


“그러세요.”

이때 세 여자가 대화를 끝냈는지 웃으며 들어온다.


아미르 밧찬과의 대화는 끊겼고 화제는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연희와 영훈은 과연 아미르 밧찬이 병원에 가게 될지 궁금해졌다.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아들이자 무진건설기계 사장인 정근호 사장에게 말했다.

“신영은행에서는?”
“5 천억을 제시했습니다.”

정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흥! 미친새끼들... 그 조선소가 얼마 짜린데...”


“정말 그 가격에 팔라고 하면 정신 빠진 놈들입니다. 일단 5 천억 제시하고 간을 보려고 하는 것일 겁니다.”
“그게 문제라는 거야. 제깟 놈들이 감히 우리를 간을 봐? 뜨내기한테 좌판 열어놓고 장사를 해도 정도가 있는
게다. 건설비용이 1 조가 넘게 든 조선소를 가지고 절반을 넘게 후려쳐? 건방진 새끼...”
“아직 어린 놈이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신영은행 이 회장이 아끼는 손자라지?”
“맞습니다.”
“하필 이 회장 손자가 이걸 잡았다... 고작 서른 중반밖에 안 된 어린 놈이 이 판을 쥐고 흔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
“키맨은 조재민 의원이 아니겠습니까?”

정호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이게 될 일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어? 그놈이 경제를 알아? 조선을
알아? 평생 광주 바닥에서 구르던 놈이 갑자기 군산조선소를 왜 걸고 넘어져?”
“하긴 그렇습니다.”
“분명히 있다. 조재민이, 신영은행, 그리고 산업은행까지 쥐고 판을 짜놓은 놈이 분명히 있어. 아마도 그놈이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먹으려 하는 놈일 거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저들이 준비 다 끝내고 발표할 때서야 알아내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흘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밝혀내겠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주먹을 틀어쥐고 이를 갈았다.

“이대로 앉아서 뺏길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 정호균을 우습게 본 거야.”

그는 거친 콧바람을 뿜으며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날 출근한 영훈은 민희에게 간당하게 브리핑을 받았다.

“1 층 명품매장 라인 중에서 수수료는 기존 하이퀄리티 브랜드와 동급으로 제시했습니다. 입점은 다음달 중순


즈음부터 가능하다고 확답 받았습니다.”
“으음... 잘했네요.”
“그리고 어제 참석했던 연예인들에게 협찬 선물 돌리고 리스트 뽑아왔습니다. 이중에 어제 받았던 협찬 물품을
오늘 아침까지 자신의 SNS 에 올린 사람은 일곱 명인데 적어도 열 명 정도는 추가적으로 올릴 것 같습니다.”

민희는 그렇게 말하고 영훈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영훈이 왜 그렇게 물건을 막 퍼줬냐는 말을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잘했네요. 리스트는 노형석 과장님한테도 있죠?”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어제 강도현도 참석했는데 특별히 서가은과 같은 급의 노블레스 라인으로 협찬 선물
증정하고 나중에 매니저 연락처도 받았습니다.”
“강도현? 오... 강도현이 참석했구나.”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했던 영훈이었기에 강도현이 가지는 무게감을 잘 알고 있었다.


민희는 영훈이 그걸 읽어내자 더 밝은 안색으로 말했다.

“서가은 씨 소개로 안면을 트게 됐지만 일단 우리 브랜드에 거부감을 가진 건 아닌 것 같았고 전속모델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냈는데 무리 없이 잘 넘어간 상태입니다.”

특이한 표현이다.

“무리 없이 잘 넘어갔다?”
“대화는 잘 풀렸지만 소속사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어서...”

영훈은 민희의 태도를 보고 이해했다.


아마 당시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대화를 나누었을 테지만 혹시나 소속사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기에 저런
식으로 표현한 듯 싶었다.

“알겠어요. 잘했네요. 노 과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민희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끝나고 간단히 막창에 소주 먹으면서 대화 나눴습니다. 혼자 하려니까 부담이 많이 됐었는데 위에서 직접
챙겨줘서 힘이 많이 됐다고 하시더라구요.”
“혹시 노 과장을 눈여겨 본 사람들은 없었나요?”
“제가 보기에는 없었습니다. 협상도 제가 진행하되 실무는 노 과장님이 진행하는 식으로 해서 대화는 주로 제가
했습니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상관의 의도를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캐치하는 사람이 있다.
민희가 바로 그런 부류다.

“잘했습니다.”

영훈이 흡족하게 웃으니 그녀도 마음의 긴장이 풀렸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을 던져준다.

“과장님, 그리고 특수사업부 고승현 상무님께서 찾으세요.”

요즘엔 잘 찾지 않았는데...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를요?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 물어봤어요?”


“중국 쪽 이슈라고 말씀하셨고 정확한 사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흠... 알겠어요.”

영훈은 곧바로 특수사업부로 내려갔다.

“왔어?”

고승현 상무는 익숙하게 영훈을 반기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제는 다들 익숙해져서 특수사업부의 직원들은 영훈을 보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정도였다.

“네, 찾으셨다구요?”
“그래. 일단 앉아. 매실음료 마실래?”
“주세요.”

고 상무는 매실캔을 따서 영훈 앞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유연탄 광산이 생각보다 잘 되고 있어. 생산량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유연탄 값이 올랐거든. 알다시피 중국에는
석탄 발전소가 많아. 우리야 미세먼지 때문에 죽겠다, 어쩐다 하지만 10 억 넘는 인구의 전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요?”
“나쁜 일은 아니지. 우리가 짓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중국 내에서 소비하는
유연탄을 주췬 쪽에서 빠르게 공급해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어.”
“왜요? 중국업체들이 개발하는 유연탄 광산도 많을 텐데?”

그는 그렇게 선량하게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게. 그게 궁금했는데 주췬한테서 연락이 왔어. 최 과장을 만나고 싶다네.”


< 역마살이 꼈나?(2) > 끝

< 역마살이 꼈나?(3) >

불안하게 왜 부르고 난리일까?


그런데 문득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이 생각났다.

“아, 맞다. 그때 주췬 아들 대학교 알아봐 준다고 해놓고 아예 신경을 못 쓰고 있었네요. 어떻게 됐어요?”
“기조실에서 연세대학교에 연결해줬어. 지금 어학당 다니고 있다는데?”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내가 그건 기조실에다가 물어볼게.”
“상무님 바쁘시니까 기조실 직원더러 저한테 보고해달라고 해주세요.”
“건너 듣는 것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전달할게. 어쨌든 주췬이 먼저 나서서 저래 하니 우리로서는 거절하기가
어렵게 됐어.”
“뭐 때문에 불렀는지는 모릅니까?”
“나야 알 길이 없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최영훈 과장이 중국으로 와주었으면 한다’라고만 했거든.
그것도 공식적인 채널은 아니었고 돈을 전달하는 사람을 통해서 전해졌어.”
“왜 그렇게 전달한 겁니까?”
“아주 조그만 기록이라도 남기길 싫어한 거지. 오로지 사람의 말만으로 전해지면 흔적이 남지 않으니까.”
“흐음··· 더 불안하네.”
“불안하면 안 갈래?”

물어보는 고 상무나 듣고 있는 영훈이나 둘 다 말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되는 겁니까?”
“솔직히 가긴 가야 하는데 정 가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 회사에서 사장님 다음으로 몸값 비싼 사람이
자네잖아.”
“이번에도 연희 씨랑 같이 가기는 그렇고 통역 하나만 붙여주세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고승현 상무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국에 주재원으로 있는 사람인데 이름은 황대출, 중국통이야. 특히 자원사업을 주로 해서 우리 일을 잘


파악하고 있어. 나이도 최 과장이랑 그렇게 차이가 안 날 거야. 몇 년생이었더라? 하여튼 마흔은 안 된 걸로
알고 있어.”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흐음···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내가 단박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겠는데 최 과장이 물어보니까 확언하기가
힘드네. 만나보고 판단해봐.”
“만약 아니라고 하면요?”
“12 시간 이내에 새로운 사람을 붙여줄게. 정 사람이 없으면 내가 직접 가서라도 12 시간 이내에 새로운 사람이
있도록 할 거야.”
“그건 좋습니다. 그럼 여기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게 문제야. 조재민 의원이랑 신영은행 컨트롤 하는 게 최 과장이잖아. 이걸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게
문젠데···.”

고승현 상무는 솔직한 마음으로 영훈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신영은행 라인을 알려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보통 예민한 문제인가?
이런 문제는 알려주면 고맙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절대 먼저 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영훈도 고승현 상무에게 이형준 상무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건 단순히 정보를 독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준과 자신과의 사이는 단순히 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극도로 예민한 사건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조재민 의원 쪽에서 일이 생기면 상무님께서 나서서 처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되는 이슈가 있을까?”
“많죠. 임대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혹시 임대 해주는 쪽으로 결론 나는 순간 바로 끝날 테니까 혹시나
문제가 생길지 항시 주시해야 하고요.”
“그건 당연하고. 일반적인 사항 말고 내가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이 있냐는 거야.”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거나 정치 관련해서 도와줄 일 있으면 상무님께서 처리하시되, 만약 신영은행과 일이 틀어지면 제가 직접


오겠습니다. 만약 제가 직접 오지 못하는 상황이면 연희 씨를 보내시면 됩니다.”

고승현 상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임연희? 연희가 사장 따님인 건 알겠는데 조재민 의원을 컨트롤 할 능력이 돼?”


“안 됩니다. 하지만 신영은행을 담당할 사람은 당장 연희 씨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저를 제외하면 신영은행 라인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신영은행 쪽에서도 연희 씨가
아니면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연희가 알고 있다는 이야기니 고 상무는 답답해졌다.


도대체 무슨 라인을 어떻게 연결하고 있기에 그런 재주를 부렸고 이제는 연희가 아니면 알리지도 못하는 것인가.

“후··· 답답하네.”
“상무님께는 알려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연희에게도 형준에 관한 내용을 다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연희는 형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맡기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현진물산 사장의 외동딸이라는 간판이 있기 때문에 부족한 경험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산업은행 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것도 상무님께서 처리하시면 됩니다. 산업은행은 현금을 들고 인수하려는 우리 쪽 제안이 매력이라고 느끼고
있지만, 만약 무진중공업이 현금을 들고나온다는 제안을 해오면 태도를 바꿀지도 모릅니다.”
“무진중공업은 현금까지 동원하지 않을걸? 위험하다고 생각할 거야.”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감정에 휘둘리기에 십상입니다.
군산조선소를 내주고, 해주조선해양까지 다른 회사에 뺏긴다면 그건 손해를 조금 봤다는 걸 넘어서 치욕감을 줄
겁니다.”
“자존심상 그렇게 못할 수 있다는 거네?”
“네. 아마 막판에 몰리면 가지고 있는 현금을 동원해서라도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무진오일뱅크 지분을 팔고 얻은 1 조 4 천억에다가 군산조선소를 팔고 얻게 될 현금이 대략 6, 7 천억
아닌가? 2 조 가까운 돈을 쏟아붓겠다고 나오면 산업은행장이 흔들릴까?”
“아닙니다. 그건 계산을 잘못하신 겁니다.”
“어? 왜?”
“해주조선해양과 군산조선소는 세트입니다. 그 둘이 세트이기 때문에 산업은행장이 인정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무진중공업이 이제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려면 군산조선소를 무조건 안고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그럼?”
“무진중공업은 조재민 의원을 먼저 쓰러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군산조선소 매각을 중지시키고 산업은행장과 딜을
해서 해주조선해양 합병을 다시 이어가야 합니다. 물론 군산조선소를 당장 가동하거나 하면서 은행장에게 신뢰를
보여야겠죠.”
“그럼 무진중공업이 둘 다 가지려고 한다면?”

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우린 손 털고 빠지는 거죠.”


“뭐?”
“굳이 우리가 꼭 군산조선소를 돌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의 목적은 군산조선소가 다시 돌아가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해주조선해양까지 뻗어 봤지만 돈 한 푼 안 들이고 군산조선소를 돌릴 수 있게 되면 그냥 손
터는 게 맞지 않습니까?”

다만 이렇게 되면 딱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바로 이형준 상무.
이형준 상무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대 프로젝트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사내에서 권력을 발휘해야
한다.
현진물산에서 손을 털어버리면 이형준 상무가 공중에 붕 떠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무진중공업이 저렇게 나온다면 현진물산도 대항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손을 터는 게 비정상적인 건 아니다.
다만 이형준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방도를 찾아주면 될 터.
그게 무엇일지는 벌써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그렇긴 한데···.”

무려 3 조 원에 해당하는 세계적인 조선회사를 눈앞에 뒀음에도 저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게 고 상무는 이해되지


않았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아쉬운지 고승현 상무의 목소리가 축 처진다.

“아직 모르는 겁니다. 무진중공업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른 거니까.”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무진중공업이 계속 이렇게 뻗댔으면 좋겠다.”
“글쎄요.”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영훈은 바로 퇴근해 짐을 챙겨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바로 기조실 직원이 나와 항공편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얼빈 공항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혹시 모를 일에 쓰시라고


준비했습니다.”

그가 전해준 건 작은 화장품 케이스였다.


영훈이 이게 뭔가 싶어서 열려고 하자 그가 말린다.

“현금입니다. 사람이 많으니 열지 마시고 바로 가방에 넣으십시오.”

영훈은 곧바로 트렁크에 화장품 케이스를 넣으며 물었다.

“현금이요?”
“법인카드를 쓸 수 없는 상황일 때 쓰시라고 준비했습니다. 50 만 위안으로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약 8 천만 원
정도 됩니다.”
“무슨 정보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데···.”
“한국은 치안이 상당히 좋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간혹 해외로 가는 사람 중에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낮이니까, 사람이 많으니까, 선량한 웃음을 지으니까 안전할 거라고 말이죠. 이건 협상에서 또 다른 무기로 쓸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 과장님을 구할 여벌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셔
도 됩니다.”

영훈은 그 기조실 직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눈빛이 깨끗하고 눈썹이 진하면서도 단정해 원만한 성격으로 주변의 평판이 좋을 것이 짐작됐다.
각진 턱과 솟은 광대를 보면 고집이 보통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할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유선해라고 합니다. 다들 여자 이름 같다고 말을 합니다.”
“이름 좋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이름이 좋았다.


이름이 그의 각진 성향을 누르니 사고가 날 일도 줄여줄 터였다.

“감사합니다.”
“언제 한국에 오면 식사라도 합시다.”

영훈은 그와 악수하곤 바로 출국장으로 향했다.


어떤 내용으로 부르는지 알기라도 하면 가면서 고민을 해볼 텐데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면세점에 들러 연희에게
선물로 향수라도 사줄까 하면서 돌아다녔다.
하얼빈 공항에 도착하니 고작 이십 대 초반이나 될까 싶은 어린 여성이 영훈에게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한국말을 무척 잘했다.


그리고 그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커다란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그는 덩치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살집이 넉넉해 보였다.
턱살이 두툼하고 입이 크며 귀가 좋아 말년에 평안할 상이었다.
“최영훈 과장님?”
“아, 네. 황대출 대리님 되시나요?”
“맞습니다. 그런데···.”

황대출이 영훈 앞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키가 170 은 넘을 듯한 늘씬한 그녀는 마치 모델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대체 해외 출장에 왜 여자를 데리고 왔냐는 눈빛이 담겨있자 영훈이 여자에게 말했다.

“주췬님이 보냈습니까?”
“맞아요. 제가 통역까지 같이하게 될 겁니다.”

그제야 황대출 대리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통역을 보냈습니까?”
“아무래도 중국 측에서 통역을 미리 준비한 것 같네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같이 가시죠.”

영훈의 말에 여자가 손을 들었다.

“주췬 대표님은 최영훈 씨만 만나길 원했습니다.”

단호한 거절이지만 영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나자고 해서 비행기 타고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왔는데 말동무라도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요? 싫으면 바로 돌아가고요.”

여자는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전화해보시든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영훈을 세워놓고 바로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나 전화를 끊은 그녀는 말했다.

“두 분이 동행하는 건 괜찮다고 하십니다. 다만 주췬님은 중요한 자리에서는 최영훈 씨와 독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건 좋습니다. 가시죠.”

그녀가 끌고 온 차는 놀랍게도 포르쉐 카이엔이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1 억이 넘는 차를 능숙하게 운전한 그녀는 하얼빈의 JW 메리어트 호텔에 도착했다.

“댁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주췬님은 댁에 계시지 않아요. 이제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예약해놨으니까 일단 체크인부터 하세요. 두 분이
오게 될 줄 몰라 방을 하나만 잡았으니 불편하더라도 두 분이 지내세요. 그 정도는 괜찮으시죠?”

우리는 혼자만 오라고 했는데 둘이 왔으니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하라는 말이었다.


왠지 심술이 묻어났지만, 영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영훈과 황대출은 얼결에 방에 짐을 풀고 내려오자 그녀는 다시 둘을 태워 움직였다.
그런데 이번에 도착한 곳은 또 다른 호텔이었다.
숭베이 샹그릴라 호텔로 둘을 데리고 온 그녀는 2 층의 식당 앞에서 황대출에게 말했다.

“여기까지입니다. 식사 시켜드릴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비싼 곳이니까 입에 맞을 거예요.”


“아, 그런데 이름이 뭡니까?”

황대출이 묻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양티엔이에요.”

그녀의 이름을 듣자 순간 양쯔엉이라는 사람이 떠올랐다.


단순히 우연으로 양쯔엉과 같은 성을 쓰고 있을까?
왠지 느낌이 그렇지 않았다.
황대출은 영훈에게 시선을 보냈고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대출을 보내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들어가니 은밀한 곳에 고급스러운 룸이 보였다. 그리고 양티엔이 훅 다가와
영훈의 팔짱을 꼈다.

“놀라지 말아요. 그리고 오늘 당신은 내 약혼자가 되어야 해요.”

그녀의 웃음은 진심으로 천진해 보였다.

< 역마살이 꼈나?(3) > 끝

< 역마살이 꼈나?(4) >

“약혼자?”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저 자리에 참석할 수 없어요. 들어갈까요?”

양티엔은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살짝 내밀고는 팔짱을 낀 채로 문을 열었다.


네다섯 명이 앉으면 꽉 차는 룸을 생각했던지라 스무 명이 둘러앉아도 될 듯한 넓은 룸은 영훈도 내심 놀랄
정도였다.
특히 그 넓은 룸 중앙에 있는 커다랗고 둥근 탁자는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쨌거나 이 대단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주췬 대표와 예전에 도박판에서 봤었던 허바이바이, 그리고
환갑은 되어 보이는 어느 남자였다.

“이제 왔군. 반갑네.”

주췬이 호탕하게 웃으며 영훈을 반겼다.


갑자기 친한 척을 하자 영훈도 본래 그와 굉장히 친했던 사이였던 양 악수를 하며 웃었다.
“하하하, 뵙고 싶었습니다.”
“앉게.”

영훈의 옆에 양티엔이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러면서도 연신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그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 이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예요.”


“한국에서 유학하더니 결국 한국남자를 사귀는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영훈 씨, 인사드려요. 우리 아버지와 의형제 관계인 황레이예요.”

영훈이 일단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최영훈입니다.”
“중국어를 못하는구나?”

영훈이 한국말로 인사하자 황레이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양티엔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국말을 잘하니 상관없어요. 그리고 결혼하면 중국에서 잠시 살면서 배운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벌써 그렇게까지 이야기했어?”
“그럼요. 요즘 결혼하려면 최소 1 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요. 호텔 결혼식 하기가 쉬운 줄 아세요? 여기
호텔만 해도 거의 1 년 치 예약이 다 잡혀 있을걸요?”
“정신이 없구나, 정신이 없어. 그래, 이 친구는 한국에서 뭘 한다고 하더냐?”
“회사원이에요.”
“회사원?”
“능력이 대단해요. 입사한 지 1 년 만에 과장을 달 만큼요. 그것도 작은 회사가 아니라 현진물산이라는
대기업이에요. 아, 잘 모르시죠? 1 년 매출이 500 억 위안이 넘는 큰 회사예요.”

아마 영훈이 그녀의 중국어를 알아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거다.


직급이 과장이라는 거야 비밀이 아니지만 입사한 지 1 년이 채 안 됐다는 건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도 회사는 중국에도 많이 있다.”

이때 주췬이 나섰다.

“저 친구 능력은 저도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현진물산과 지금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요.”


“흐음··· 자네가 인정한다면야···.”

양티엔은 주췬의 말에 못내 인정하는 그를 보고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말아요. 대부님이 소개해주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에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잘 생겼지, 집안 괜찮지. 뭐가 문제였어?”
“매력이 없었거든요. 그나저나 대부님은 제 생일 때 뭐 해주실 거예요?”
“신혼집을 어디로 정할 건데?”
“우와! 아파트 사주시게요?”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결혼하는데 그 정도 못 해주랴?”
“꺄약! 좋았어! 영훈 씨, 대부님이 우리 결혼하는데 아파트 해주신대요. 분명 엄청 좋은 곳일 거예요. 우리
대부님, 엄청 부자거든요.”

영훈은 솔직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기인 건지, 저 대부라는 사람이 도대체 주췬과 무슨 관계인 건지. 그리고
주췬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어벙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받아도 되는 거야?”

혹시나 한국말을 알아들을까 최대한 정성 들여 연기했다.


“한번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세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이제 우리 신혼집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양티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대부님이랑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정치를 하게 되면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거지. 나도 네가 황레이님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하필 네 남자친구가 최영훈 과장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 인연은 소중한 것이지.”

그렇게 말한 주췬은 황레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영훈은 작은 목소리로 양티엔에게 물었다.

“중국인이었습니까?”
“그럼 한국인 같아 보였어요?”
“원어민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말을 무척 잘해서요. 교포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저는 한 번 배우고자 하면 끝을 보려고 죽어라 달려들어요. 한국말이 쉽지는 않았지만 2 년 동안 죽어라
배웠죠.”
“어디서 배웠습니까?”
“그건 왜요?”
“궁금하니까요.”

그녀는 잠시 영훈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고려대 어학당이요.”
“거기서 거의 수재였겠습니다?”
“뭐··· 그랬죠.”
“그런데 오늘 이 자리 도대체 뭡니까? 아니, 일단 이 자리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맞습니까?”
“맞아요.”

일단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고 하니 조금 긴장이 풀렸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도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양티엔은 영훈의 옷에 묻은 털 따위를 털어주며 싱긋 웃었다.

“표정 너무 굳었어요. 긴장하면 들킨단 말이에요. 우리 대부님 삼합회 간부예요. 눈치 없는 흐리멍덩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갑자기 여기서 삼합회는 또 뭔가?


어쨌든 영훈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연기에 최선을 다할 테니 이제 말해주시죠?”


“한국의 조직폭력은 그저 술집이나 털어먹고 사는 정도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아요. 정치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요?”

양티엔은 여기서 대답을 멈추고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름 모를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영훈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도대체 당신이 왜 필요했을까? 주췬 인민대표님은 당신이 꼭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나도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연기를 하고 있고요.”

결국, 그녀도 주췬의 의도를 모른다는 말이었다.


도박판에서 주췬을 속이려고 했던 허바이바이와 삼합회의 간부인 황레이, 그리고 갑자기 끼어든 의문의 여자인
양티엔.

“지금 저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지만 사실 내용은 별거 아니에요. 후원하고 싶은 사람과 돈이 필요한 사람, 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뻔하지.”
“음···.”
“성급 인민대표라고는 하지만 아직 중앙에서 보면 발이 넓지 않고 뒷배가 약한 주췬님이 삼합회 간부를 통해
인맥을 넓히려 하는··· 이런 로비는 너무 흔한 상황인데 갑자기 한국 직장인이 여기에 왜 참여해야 할까? 나는
그게 더 궁금해요.”

영훈은 음식을 씹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이 맛있다는 듯 젓가락을 움직였다.
슬쩍슬쩍 황레이와 주췬을 번갈아 보았는데 그 둘은 서로 대화를 하느라 주변에는 무신경했다.
특히 신기한 건 허바이바이였는데 그녀는 마치 술 시중을 들러 온 종업원 마냥 황레이의 잔이 비워질 때마다 잔을
채웠다.
입 한번 열지 않고 묵묵히 잔을 채우는데 술 따르는 기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영훈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여기에 왜 끼게 된 겁니까?”


“후훗, 내 역할은 무엇일 것 같으세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혹시 양쯔엉과 관계가 있습니까?”

그녀는 눈을 끄게 뜨며 손을 튕겼다.

“오호~ 맞췄어요. 양쯔엉은 우리 아빠예요. 우리 아빠와 황레이님은 의형제죠.”


그렇다는 건 결국 양쯔엉이 삼합회 간부라는 뜻도 되었다.
그제야 매달 현금을 갖다 바쳐야 광산개발이 수월했단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양쯔엉이 단순히 지방에서 힘 좀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요?”
“주췬 대표님은 이곳 흑룡강성에서는 힘이 있으시지만 크게 전국으로 보면 그리 주목받는 정치인은 아니세요.
하지만 딱 하나, 주췬님이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중국 모바일 공동구매 플랫폼인 메이홍이 바로 주췬님의 것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지분구조가 복잡하지만 하여튼 그래요.”
“그럼 혹시···?”
“맞아요. 난 메이홍의 도움을 받아서 내 화장품 회사를 키워 보려고 해요. 마침 주췬 아저씨도 굉장히 가까운
분이시고 황레이 대부님이야 거의 큰아버지 같은 분이시거든요.”
“그러니까 결혼할 사람을 소개해주는 자리를 만들면서 두 사람을 이어줬다?”
“두 분은 본래 아는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약속을 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리고 주췬 대표님은
인민대표인데 대놓고 삼합회 인물들을 만나기는 조금 그렇잖아요?”
“아···.”

한 명은 정치인, 한 명은 조직폭력배 간부인 둘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그녀라는 매개체가


필요했다는 거다.
이때 황레이가 양티엔에게 말했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냐?”


“신혼집을 어디로 할까 고민하는 거였어요. 중국에서 살게 된다면 이 사람 직장도 구해야 하는데 어느 회사에
다녀야 할지도 고민이고요.”
“별것이 다 고민이구나. 그 정도 능력이 있다면 어디든 못 들어갈까. 난 이제 들어가 보련다. 자네는 언제 시간
내서 나 좀 보지.”

황레이가 영훈을 콕 찍어 말했다.


양티엔에 통역해주자 영훈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연락을···.”


“저 아이를 통해서 전달하겠네.”

황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췬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허바이바이와 함께 자리를 떴다.


둘이 나가자 주췬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영훈을 보며 말했다.

“통역을 데리고 왔다고?”


“네. 밖에 있습니다.”
“그렇군. 가짜긴 하지만 그래도 양티엔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 아이는 자네가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양티엔은 주췬의 말을 통역하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미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양티엔이 통역해주자 주췬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거 아쉽군. 아마 전에 같이 왔던 여자겠지? 그 정도 미모에 배경이라면 이해가 되는군.”

양티엔은 말을 통역하다가 자신의 궁금한 걸 덧붙였다.

“그 여자는 누군가요? 얼마나 예쁘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날 왜 부른 겁니까?”
주췬은 양티엔에게 말했다.

“그만 내려가 있다가 내가 다시 부르면 올라오도록 해.”


“제가요? 통역은요?”
“둘이 알아서 대화하도록 하지.”
“날 못 믿나요?”
“네가 들을 이유가 없는 이야기다. 너와 상관없는 이야기야.”

주췬의 단호한 어조에 양티엔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주췬은 영훈에게 같이 왔던 통역을 부르라고 말했다.
영훈은 얼른 전화로 황대출을 호출했고 황대출은 음식을 먹다 말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앉으세요. 여기는 주췬 인민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진물산···.”
“앉게.”

주췬은 황대출의 인사 따위는 다 듣기 싫다는 듯 말을 끊고 자리에 앉혔다.

“네···.”
“황레이는 중국의 연예기획사와 다수의 매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재벌이라고 할 수 있네. 물론 그
혼자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고 삼합회가 소유하고 있다고 봐야지. 당연하게도 그 연예기획사들을 가지고
정치인들과 수많은 커넥션을 이루고 있어.”

황대출은 빠르게 통역했다.


영훈은 대략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자네가 그때 말했지? 쓰임새가 많은 여자라고. 어지간한 여자들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무슨 수를 쓴 건지
황레이의 곁에 앉을 정도가 됐어.”

그때 한 말을 기억해서 그녀를 이용했다는 얘긴데··· 진정 놀라운 실행력이었다.


고작 그 한마디로 그녀를 삼합회에 던져넣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어쨌거나 허바이바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요?”
“어떤가? 황레이라는 인간 말이야.”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주췬이 영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주췬은 재촉하지 않고 자작하며 그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10 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영훈의 입이 열렸다.

“황레이라는 사람이 궁금하십니까?”


“맞네.”
“그렇지 않을 텐데요?”
“그게 무슨 말인가?”
“황레이가 아니라 양티엔이 궁금한 게 아니었습니까?”

주췬은 눈을 크게 뜨다가 술을 들이키고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맞아. 맞았네. 한국에서 자네를 부르길 잘했어. 내가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는데 정말 기가


막히는군.”

< 역마살이 꼈나?(4) > 끝

< 역마살이 꼈나?(5) >

영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그 여자가 뭐라고 유연탄까지 빠르게 소비시켜주며 자신을 불렀단 말인가?

“저 여자가 저를 불러야 할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까?”


“중요하지.”
“양쯔엉의 딸이라서요?”
“들었나? 그 짧은 사이에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군.”
“같은 양씨라고 생각해서 떠올렸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군. 하나 물어보겠어. 어떻게 내가 양티엔을 궁금해 할지 알았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주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영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정색하면서 말했다.

“전 당신을 도와주러 왔지만 사실 당신이 유연탄을 처리해준 건 우리가 부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날
필요로 해서 불러냈다면 먼저 오늘처럼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됐습니다.”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주췬 인민대표가 이 흑룡강성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도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와서 이렇게 면전에다 비난을 해대고 있었다.
사실 황대출은 본사에서 나온 최영훈 과장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들은 건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과장 자리에 앉은 낙하산이라는 정도?
어느 라인을 타고 내려온 낙하산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기조실에서 최영훈 과장을 서포트 하라고 했을 땐 뭣도
모르는 낙하산 뒤치다꺼리나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니 대화 내용이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당돌함이라니...
역시나 주췬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지금 나를 가르치려는 건가?”


“경우가 아니라는 겁니다. 차라리 유연탄 소비를 도와주기 보다 먼저 저에게 도움을 달라고 요청해서 미리 사정을
말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지금 대표님의 태도는 저를 시험하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주췬 인민대표님의
직원인가요?”
“...”

황대출은 등에 식은땀을 흘려가며 통역을 했고 주췬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저와 대표님의 관계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전 대표님을 도와드리러 온 겁니다. 그러니 도움을 받고
싶으면 최대한 저에게 협조 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 지금 일어나겠습니다.”

황대출은 정말 이렇게 통역해도 되는 건지 영훈의 눈치까지 보았지만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통역하라고
지시했다.
역시나 주췬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더이상 중국에서 사업하기 싫은가 보지?”

영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되물었다.

“그 협박이 통하시리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런데 여기서 더 날뛸 것 같았던 주췬은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자네는 자네 때문에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서로 불필요한 감정 때문에 힘 빼지 말자는 겁니다. 대표님이 우리를 거부하면 우리는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다른 사람을 찾을 겁니다.”
“...”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빙빙 돌리지 마십시오.”

주췬은 잠시 술을 마시며 생각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실수했네. 사과하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췬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레이와 끈이 닿았던 건 순전히 운이었어. 자네 말대로 허바이바이는 재주가 많은 여자였던 거지. 그 짧은


시간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람을 곁에 뒀으니 말이야. 처음에는 역시 자네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요?”
“나중에 알게 됐어. 양쯔엉과 황레이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말이야.”

황대출이 통역을 제대로 한 게 맞다면 지금 양쯔엉과 황레이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주췬은 코웃음을 쳤다.


“흥! 양쯔엉이 6 년을 쫓아다녀서 얻은 아내가 바로 양티엔의 어머니네. 그리고 지금 그 아내는 황레이의 첩이
되어 있지.”
“네?”
“대부? 웃기지도 않지. 아마 양쯔엉이 산채로 갈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황레이 일 거야.”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통역한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할 정도였고 영훈은 황대출의 통역을 들으며
주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까 양티엔의 행동을 보면 굉장히 친한 큰아버지 같은 느낌이었지 않은가?
주췬은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레이는 양쯔엉이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삼합회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야. 양쯔엉?


고작 흑룡강성 내에서나 목소리에 힘을 주는 정도지.”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친한 친구라기 보다는 부하에 가깝다는 거군요?”
“맞아.”
“이야기를 계속해주시죠.”

주췬은 다시 담배를 빨아들이고 입을 열었다.

“양쯔엉과 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었네. 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지. 그래서
양쯔엉의 그런 사정도 모를 수 없었어. 문제는 양티엔이 황레이에게 접근하는 걸 알았다는 거야. 난 누가 내
앞길을 방해하는 걸 원치 않아.”
“전 관심법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마 이 사람이 내가 사주를 보는 걸 알고 저렇게 디테일하게 물어보는 건가 싶을 정도다.

“알고 있네. 그냥 양티엔이 어떤 사람인지, 그게 궁금해. 겉으로 보이는 데로 내 사업체를 이용해서 한 몫


챙기려는 마음이 다라면 얼마든지 이용 당해줄 수 있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게 다인가요?”

여기서 주췬은 망설였다.


그러다 영훈이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자 마지못해 말했다.

“양티엔... 가지고 싶네.”

순간 황대출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멈칫했다가 영훈에게 통역했다.


하지만 영훈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자네는 속일 수 없는 사람이군.”
“아마 마지막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대로 한국에 갔을 겁니다.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영훈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길었지만 결국 양티엔이라는 어린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유혹하는데 이 여자의 속셈을 모르니
알려달라는 거였다.
고작 그걸 알려달라고 사람을 움직여 유연탄을 팔아주었으니 이걸 통이 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딸 같은 여자에
미쳤다고 해야 할까?

“이제 자네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겠나?”


“시간을 주시죠.”
“얼마나?”
“사흘이면 될 듯 싶습니다. 그동안 양티엔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가져보면서 파악해보겠습니다.”
“알겠네. 호텔 번호를 놓고 가게.”
“그런데... 계산을 잘못 하신 것 같습니다.”
“응? 무슨 계산 말인가?”
“말씀드렸듯이 그 유연탄의 처리는 굳이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족하다는 거군.”
“맞습니다.”
“무얼 원하는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알겠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알겠습니다. 식사 잘했습니다. 그리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영훈의 미소에 주췬도 따라 웃었다.

“솔직히... 자네가 오니까 마음이 놓이는군.”


“그럼 최대한 빨리 연락 드리겠습니다.”

영훈이 황대출과 함께 바로 룸을 나오니 식당 앞에 양티엔이 기다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영훈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황대출에게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방금 전의 대화 내용은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됩니다.”


“나도 눈치는 있습니다.”

황대출은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중이었다.


마치 영화 속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빨리 나왔네요? 안에서 무슨 이야기했는지 물어보면 혹시 가르쳐줄 건가요?”

확 다가와 팔짱을 끼는 그녀의 물음에 영훈이 빙그레 웃었다.

“미안하지만 회사 기밀입니다. 체크인했던 호텔로 가시죠.”

영훈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을 슬며시 피했다.

“칫... 대부는 당신이 미심쩍은가 봐요. 한번 시간 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괜찮아요?”


“일단 회사 일부터 처리해야겠습니다. 가면서 이야기하죠. 보는 사람이 많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자 그녀의 수다가 시작됐다.

“아무리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부님 앞에서는 그 연극 제대로 해줘야 해요. 아, 주 대표님이 그건
이야기 안 하시던가요?”

확실히 그녀는 황레이한테는 대부라고 하면서 주췬에게는 대표님이라고 깍듯하게 말한다.


이런 모습만 보면 그녀는 황레이에게 더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맞는 것일 텐데...
그런데 고작 중국까지 와서 다 늙은 아저씨에게 접근하는 여자와 그런 나이 어린 여자를 꼬시려는 늙은 아저씨를
도와줘야 하는 건지에 대해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했던 일은 산에서 사주와 관상을 공부했던 게 쓸모 없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이 들게 했는데 오늘 일은
정말...
그냥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밀려오는데 그녀가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닙니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니까 좀 조용히 갑시다.”

양티엔은 입을 삐죽거리곤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


메리어트 호텔에 내린 영훈은 일단 방에 들어오자마자 황대출에게 말했다.

“저 양티엔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조사해주세요. 양쯔엉도 같이요. 가족관계부터 성적, 교우관계 등등 알아낼 수
있는 건 모두 다요.”
“알겠습니다.”
“고대 어학당을 나왔다고 들었는데 진짜 거기 다녔는지도 확인해주세요.”
“오... 그거면 빠르게 확인 가능하겠습니다.”

영훈은 잠깐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중국에서 잘하고 있어? 주췬이 부탁하는 게 뭐야?]

고승현 상무였다.

“별거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사적인 걸 부탁하는 바람에 더 짜증나는 상황이네요.”


[사적인 거? 사적인 거 어떤 건데?]
“자세한 건 서울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고작 유연탄만 받고 도와주기는 그래서 말인데 뭐 얻어낼 거
없습니까?”
[사적인 거라며? 사적인 일 도와주는데 더 요구해도 되는 일이야?]
“사적인 일이라서 더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작 유연탄 좀 팔아준 거 가지고 이런 일 해주면 버릇
나빠져요.”
[하하! 그 정도야? 글쎄...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건지 알아야 견적이라도 내 보지.]
“어지간한 거면 들어줄 겁니다.”
[그래? 어지간한 거? 음... 알겠어, 일단 확인해보고 연락줄게.]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영훈은 전화를 끊은 뒤 씻고 나왔다.


황대출은 본사와 계속 전화통을 붙잡고 이야기중이었는데 영훈이 나온 걸 보자 전화를 끊고 말했다.

“고대 어학원에서 공부했었던 게 맞았어요. 여기 인적사항입니다.”

그가 빠르게 휘갈겨 쓴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있네요?”
“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는데 아마 주췬의 말이 맞다면 이후에 양쯔엉이 재혼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쯔엉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답니까?”
“주로 부동산과 대부업에 손을 대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거부는 아닌데 워낙 발이 넓고 사교
관계가 좋아서 우리도 유연탄 광산을 진행할 때 양쯔엉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음...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지에 적힌 그녀의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주를 계산하는 와중에 고승현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벌써 계산 나왔습니까?”
[주췬이 흑룡강성 유통 업계를 꽉 잡고 있다는데?]
“그래요?”
[그 모드린가 노드린가 하는 브랜드 있지? 그거 우리가 중국에 넣어보자.]

영훈은 주췬을 처음 만난 장소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어떤 백화점이었던 걸 기억했다.


“아... 그거 괜찮겠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넣어도 되는 겁니까?”
[방금 영업팀 노형석이한테 전화했는데 우리가 넣어도 계약상에 문제는 없다고 확답받았어. 야, 이거 중국에서
대박 터지면 현진물산이 아니라 현진패션으로 간판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고승현 상무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노형석 과장의 운빨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이쯤 되면 걸어 다니는 로또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 역마살이 꼈나?(5) > 끝

< 역마살이 꼈나?(6) >

샤워하고 나온 황대출은,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꺼내놓고 앉아 있는 영훈을 보고 살짝 멈칫했다.


종일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바빠서 서로 제대로 인사도 나눌 시간이 없었지만, 그 짧은 사이에 영훈을 보면서 느낀
점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일 거라는 거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각자 대충 시간을 보내다 잘 거라 생각했는데 맥주를 가져다 놓고 자신을 기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다.

“기다렸습니까?”
“네. 오늘 정신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요. 호텔 들어와서는 본사에 연락한다 어쩐다 하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는데 그대로 잘 수는 없잖습니까. 며칠 같이 지낼 건데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이라도 해야죠.”

황대출은 조금은 뻘쭘한 표정으로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하하, 그럽시다. 실례지만 나이가···?”


“서른 초반입니다.”

정확한 나이를 밝히지 않고 서른 초반이라고만 하자 황대출은 최영훈이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알았지만 더
물어서는 안 되는 것도 알았다.

“그렇군요. 재작년부터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황대출입니다.”

간단히 악수하고 난 뒤 영훈이 맥주 한 캔을 건넸다.


서로 한 모금씩 목을 축인 후 영훈이 말했다.

“최영훈입니다. 작년 공채로 입사해서 비서실 과장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것이기에 말했는데 황대출은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습니다. 기조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바로 확인해보았거든요. 회사 내에도 소문은 빠릅니다.”


“하하, 그랬군요. 낙하산이라고 들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영훈은 낙하산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럼 어느 라인을 타고···?”
“신영은행 쪽과 가깝습니다.”
“아··· 그래서 그 대출이···.”

황대출은 이제야 신영은행이 대출을 해줬던 이유를 알게 됐다며 무릎을 쳤다.


낙하산이 아닌 척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이렇게 하니 굳이 더 변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석해서 굳이 보탤 이야기가 없었다.

“갑자기 임무가 내려와서 당황스러우셨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유연탄 광산 쪽에 문제가 생길 때도 정신없었지만요. 그땐 갑자기 일이 해결되어서 조금
편해지려나 싶었는데 이렇게 다급하게 일이 내려올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상해에 있다가 바로 하얼빈까지
비행기 타고 왔는데도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그저 비서실에서 오신 과장님
을 도와 일을 해결해주었으면 한다는 거였죠.”
“대리님이 여기에 안 계셨으면 무척 곤란했을 겁니다.”
“그럼 저 궁금한 것 좀 물어보겠습니다. 양티엔이라는 여자와는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영훈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곤 말했다.

“양티엔이 주췬 인민대표의 호감을 끌어냈다는 건 아시죠?”


“그거야···.”
“제가 그녀와 들어갔을 때는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한 명은 황레이라는 삼합회 간부와 그의 여자였죠.
황레이는 양티엔의 대부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잘 알았던 것처럼 굴더군요. 그리고 난 황레이 앞에서
양티엔의 약혼자처럼 행세했습니다.”
“약혼자요? 허··· 그러니까 이게 무슨 관계입니까? 주췬은 양티엔을 탐내고 있었고, 양티엔은···.”
“양티엔과 황레이. 그 둘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주췬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본래 그 둘은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 없어야 하는데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어느 친척 관계보다 가까워 보였거든요. 마치
아빠와 딸 같았습니다.”
“허 참···.”
“뭐, 복잡하긴 하지만 대리님은 이 건에 대해서 굳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황대출이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영훈이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신바이 백화점이라고 하얼빈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있습니다. 매출 규모로 보면 국내 여느 대형 백화점의 매출을
압도할 만큼 대단한 곳인데 이곳에 우리 Nodri Clare 를 넣으려고 합니다.”
“가능할까요? 백화점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명품 쪽은 쉽게 라인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주췬이 도와줄 겁니다.”
“그걸 조건으로 걸 생각이군요.”
“맞습니다. 대리님은 이걸 진행하는 데 주력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본사에서 실무인력을 보낼 테니까 그전까지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건 처리해서 계약서에 도장만 찍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목표입니다.”
“주췬 인민대표가 도와만 준다면야 그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안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통역이
필요할 텐데요?”
“한 사흘 정도는 양티엔 외에는 따로 만날 사람이 없습니다. 양티엔은 한국말을 잘하니까 당연히 대리님이 같이
안 계셔도 되지요. 사흘 후에 주췬을 만날 때 그때 잠깐 도와주시면 되는데 어쩌면 그때도 안 도와주셔도 될지
모릅니다.”
“양티엔 때문에요?”
“아니요. 보아하니 주췬은 오늘 그 자리에 따로 통역을 불러온 듯했습니다. 대리님이 계시니 굳이 부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통역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요?”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주췬과 나는 적대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죠. 주췬은 내 도움이 필요하고 나는 주췬의
도움이 필요하니 서로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황대출은 주재원으로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쉽게 누군가를 믿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중국인들과의 비즈니스는 한순간에 틀어질 가능성이 항시 있으며 계약서조차 뒤집는 경우가 많아 한 장의
서류를 봐도 최소 세 번, 네 번은 검토하지 않으면 불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국인, 그것도 정치인을 이렇게 쉽게 믿는다고 하니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으면 여러모로 편하잖아요. Nodri Clare 의 경우처럼··· 반대로 그는 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배신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보다 기조실에서 양티엔에 대해 더 특별히 알아낸 내용은 없다고
하던가요?”
“네. 아무래도 한국 사람도 아닌 중국인에 대한 정보를 고작 회사가 알아내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요. 특별히
알아야 할 내용이라도 있습니까?”
“음··· 아닙니다.”

사실 그녀의 사주를 보고 바로 떠오른 궁금증이 있었다.


그녀는 본래 부모 복이 없는 사주를 타고났다.
단순히 부모가 재물복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을 운명이었던 거다.
보통 아버지와 친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친하다거나 어머니와 친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친해야 하는데 그녀의 사주는
둘 다 해당하지 않았다.

이런 사주를 타고나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


반면 사주에 도화와 화개가 만개해 재주도 많고 인기도 많을 터이니 어떻게 보면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에게
받을 팔자이기는 했다.

아마 옛날에는 이런 삶을 사는 여자를 팔자가 센 여자라고 했을 거다.


궁금했던 건 그녀가 유학을 오게 된 계기였다.
단순히 공부하러 온 것일지, 아니면 누군가의 조언이 있었을지 그게 궁금했다.
그게 부모였다면 생각보다 초년의 악운이 오래가는 셈이었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제 흩어졌던 부모와의 인연이
이어져간다고 보았다.
물어보았자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으니 그냥 접었다.

“그럼 이제 내일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전 양티엔을 만나면서 장단을 맞춰줘야죠. 아, 생각하지 못했는데 혹시 황레이에 대해서도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뭐 대단한 것까지는 힘들 것 같고 가족관계나 생년월일 따위의 것들로···.”

영훈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공안 쪽에 아는 라인이 있어서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정도 정보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까요. 내일 아침이면 알게 될 겁니다.”

황대출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켜며 웃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둘은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양티엔과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주췬을 만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영훈의 계획이었다.


전에는 급한 마음에 바로 허바이바이에 대해 이야기했었지만, 이번에는 적당히 시간을 끌며 나름 신중하게
알아보았다는 인상을 주려 했었던 거다.

그런데 양티엔은 아침부터 찾아와 닦달해대고는 바로 데리고 간 곳이 전날 주췬과 만났던 호텔이었다.


그리고 전날 똑같은 곳에는 주췬도, 허바이바이도 없이 황레이 혼자만 자리하고 있었다.
주췬과 만난 이후에나 만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영훈은 실로 오랜만에
당황했다.
그나마 황대출이 그의 정보를 알아 온 게 다행이라는 정도?

“대부님이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냐고 하세요. 얼른 앉아요.”

양티엔이 팔을 잡아끌어 영훈이 일단 황레이의 맞은편에 앉으니 양티엔이 또 종알거렸다.

“대부님이 제가 예의가 없으니 이해하래요. 칫, 이제 이런 건 통역 안 해야지.”

그녀가 가벼운 말로 무거운 분위기를 띄울 때 황레이가 말했다.

“주췬은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전에 유연탄 광산 건으로 알게 됐습니다. 그가 양쯔엉님을 잘 이해시켜줘서 다행스럽게도 문제가 있었던 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로 입을 헹군 후 말했다.

“그럼 양티엔은 언제부터 알았지?”

양티엔은 영훈에게 통역하지 않고 대신 대답했다.

“어제 저한테 다 들어놓고선 또 그걸 물어보고 그래요?”


“저 친구한테 듣고 싶어서 그런다.”
“어차피 내가 통역해서 듣게 될 텐데 거짓말을 한다고 한들 대부님이 알 수 있겠어요?”
“고얀 녀석···.”

황레이는 인상을 썼지만 양티엔은 가슴을 척 내밀며 어쩔 거냐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버릇이 없어, 버릇이···.”

그때 양티엔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녀는 전화기를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곤 영훈에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미쳐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가 훅 나가버리는 순간 영훈은 보았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음식을 먹고 있던 입가를 쓱 닦아내는 황레이가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더니 방 뒤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고 키가 180 정도 되는 단신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황레이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황레이의 옆에 섰다.

“시끄러워서 잠깐 내보냈네. 아마 제 아버지가 부른 줄 알고 정신이 없을 거야. 이제 연극은 그만하고 진짜


이야기를 해보지.”

알고 보니 그는 통역사였다.
영훈은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에 담담한 얼굴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한국 현진물산이라는 무역회사 비서실에서 나온 최영훈입니다.”

황레이는 영훈이 내민 손을 쓱 보더니 앉은 채로 대충 손을 잡아주었다.


영훈은 다시 자리에 앉고는 말했다.

“하실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당연히 거짓말을 해서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영훈의 모습에 오히려 황레이가
황당해했다.

“내 앞에서 거짓 연극을 해놓고 지금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냐고 물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왜 연극을 다 지켜보고 있으셨던 겁니까?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
“사실 어제 만남 이후로 계속 궁금하긴 했습니다. 도대체 어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거든요.”
“그게 무슨 이야기지?”
“양티엔은 주췬 대표가 가진 모바일 플랫폼을 이용해서 화장품 회사를 일으켜보고자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중앙에 연줄을 원하는 주췬 대표가 당신과의
자리를 원하는 거야 당연하고··· 그런데 황레이 당신은 모르겠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모르겠다는 말이지?”
“대부라고는 하지만 가족도 아닌데 굳이 양티엔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궁금했다면 언제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면 될 일 아닙니까? 있을 수는 있는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가 않더군요. 아무리 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일인지··· 도무
지 이해가 안 가더란 말입니다.”
황레이는 담담하게 영훈의 얼굴을 쏘아 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주췬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당신도 익히 짐작하고 있을 내용이었죠.”
“그게 다인가?”

영훈은 차마 주췬의 본심을 꺼낼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황레이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게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난 정치인을 믿지 않아.”
“한국에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건넌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게 떠오르네요. 왜 돌다리를 두드리고 계십니까?
흑룡강성은 당신의 본거지가 아니니 그냥 돌아가시면 될 일 아닙니까?”

황레이는 순간 대답을 못 했다.


영훈은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흑룡강성이 탐나는 겁니까?”

순간 황레이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여기서 영훈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혹시··· 양쯔엉을 처리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주췬 대표의 힘이 필요한 겁니까?”

< 역마살이 꼈나?(6) > 끝

< 역마살이 꼈나?(7) >

황레이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훈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이내 그것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배가 고프군.”

그는 말을 꺼내는 대신 앞에 놓인 음식을 조금은 거칠게 흡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 앞에 있으면 같이 먹자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는 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한참 동안 음식을
먹어치우더니 입을 열었다.

“주췬이 현진물산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양티엔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사업에 중요한 파트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알아봤는데 크게 관련이 없더군. 이제 보니 주췬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진물산이 아니라 자네였던 것 같아.”
“그럴지도 모릅니다.”

부정하지 않는 영훈의 태도에 황레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살짝 짓다가 말했다.

“양쯔엉과 나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어. 둘 다 사고나 치고 돌아다니는 얼간이들이었지. 난 그래도 생각이라는 걸


했지만 양쯔엉은 그런 것도 없었다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때리고 죽였지. 그렇게 10 여 년이
지나니까 우리도 조직에서 힘이 생겼어. 그때부터는 동네 불량배라고 할 수 없었지. 제법
사업가 흉내도 내면서 갖가지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그때 우리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어.”
“양티엔의 어머니겠군요.”

이런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하도 많이 봐서 솔직히 조금 지겹기는 했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라이벌이 돼서 싸우는···.
그런데 이어진 황레이의 이야기는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 양티엔의 엄마와는 상관이 없는 여자였어. 배우를 지망하는 어린 여자였는데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했네. 그런데 내가 없는 사이에 양쯔엉이 그녀를 강간하고 애인으로 삼았네. 거의 강제로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버린 거지. 난 분노했지만 참았네. 그를 죽이면 사업이 위태로웠거든.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거야.”

황레이는 통역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얼른 밖에 나가 작은 술병과 술잔을 들고 왔다.
겉보기에도 꽤 비싸 보이는 술을 뜯어 잔에 따른 황레이는 한 잔 마시고는 잠시 음미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작은 것에 얽매여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경우가 있지. 그때 내가 그랬어. 그때 그를


죽였어야 했던 거야. 그랬다면 나중에 만난 소친까지 그놈에게 뺏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아, 소친은 양티엔의
엄마다.”
“지금 옆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주췬에게 들었나?”
“네.”
“맞아. 지금은 내 옆에 있지.”
“그럼 양티엔의 친부도 양쯔엉이 아니겠군요?”

영훈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순간 술잔을 집어드는 황레이의 손이 떨렸다.

“한국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쉽게 폭력이 이루어진다네. 가볍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면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잊어버리시죠.”
“양티엔과 나 사이가 그렇게 티가 났나?”
“그런 편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난 예전에 못다 한 실수를 정리하려고 하네. 그런데 양쯔엉은 이곳
하얼빈에서 꽤 많은 인연을 맺고 있어. 주췬의 도움이 필요해.”
“공권력을 필요로 하시는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주췬이 날 위해 손을 써줬으면 좋겠어.”
“굳이 제게 부탁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난 양티엔 그 아이가 불안해. 굳이 자네를 데리고 오는 연극까지 해가면서 주췬에게 다가가는 이유. 그게
돈이라는 걸 알 것 같지만 왠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난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는 양티엔의 의도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영훈도 의심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공짜로 도와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익의 유무를 떠나 공짜로 도와준다고 하면 덜컥 의심부터 하고 볼 인간이다.

“직접 부탁하시지 그러십니까? 어차피 그러려고 여기까지 오신 게 아닙니까?”


“그랬지. 양티엔이 자네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요?”
“정치인에게 무언가 부탁을 한다는 건 악덕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것과 같아. 이자는 턱없이 비싸고 제대로
빚을 갚지 못하면 갚아야 할 빚은 원금을 넘어가지. 중요한 건 돈은 가치가 정해져 있지만 이런 부탁은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거야.”
“주췬 대표도 당신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아마 중앙 정치에 껴보고 싶어 안달일 거야. 그렇지?”

영훈은 그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황레이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공산당원이 나 같은 인간을 가까이하려는 이유가 그 이유 말고 더 있을까? 그래서 이건 공정한 거래가 될 수


없네. 그런데··· 이제는 조금 균형이 맞춰질 수 있을 것 같아. 자네가 나타났으니까.”
“그런가요?”
“모르는 척 잡아떼지 말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 자네가 양티엔의 남자친구인 이상
나에게 자네는 남도 아니지 않은가?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야 가족에게 부탁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지. 주췬은
내가 이 연극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내가 자네를 통해 부탁한다고 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여길 거야.”
“제가 비밀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췬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면 나와 거래를 못 할 건 없지.”
“그럼 무엇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황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무역회사라고 했지? 솔직히 내가 자네 회사를 도와줄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아. 중국 공산당 정치인을


소개시켜 준다? 뭐,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상대하는 인물들은 고작 한국의 조그만 무역회사 직원을 만날
정도로 위치가 낮지는 않은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취급하는 물건들을 자네들이 해결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설마 인신매매나 장기매매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네는 정말 말조심을 할 줄 모르는군. 어쨌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네.”


“그러죠.”

영훈도 머리가 있기 때문에 농담을 해도 될 사람과 해서는 안 될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난 해줄 게 많지 않네.”

황레이가 양손을 들어 흔들어 보인다.


자기는 빈털터리나 다름없다는 제스처였다.

“그럼 제가 굳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드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황레이는 갑자기 딴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양티엔은 어떻게 생각하나? 내··· 하여튼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저 정도 미인은 흔치 않은데 말이야. 성격도
나쁘지 않고 한국말도 꽤 잘하지. 양쯔엉이 이곳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재산은 양티엔에게 갈 테니 어지간한
한국 부자들보다는 훨씬 부자가 될 거야.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
“전 여자가 있습니다. 설마 지금 양티엔으로 퉁치려는··· 아니, 양티엔을 조건으로 걸려는 건 아니겠지요?”
“여자가 있다니 아쉽군. 난 배짱 있는 남자를 좋아하거든. 공부만 한 놈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헛발질을 하곤
하지. 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나?”

황레이는 아예 배짱을 부리는 것처럼 등을 뒤로 척 기대고 어디 말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줄 태세인데···.
영훈은 잠시 고심하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양쯔엉을 살려두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솔직히 양쯔엉은 지금 현진물산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흑룡강성에는 수많은 자원이 매장돼있으며
그중 상당수는 해외 업체들의 공동개발로 채굴되는 상황입니다. 양쯔엉이 개발허가에 상당한 힘을 써주었기
때문에 이번 유연탄 광산 건도 문제없이 진행됐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양쯔엉을 제거하
신다면 우린 당신을 도와주고 손해만 보게 될 겁니다.”
“그 자리는 우리가 차지하게 될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영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대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의 프로젝트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오랜 기간 맺어온 관계를 대신할 사람이라··· 전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 모양새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만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양쯔엉 혼자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야.”


“그렇지는 않겠지만 오로지 투자자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들을 신뢰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황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영훈은 그 모습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일단 주췬 대표와 상의해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어떤 상의를 말하는 거지?”
“말했듯이 전 당신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정치인을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저에게는 삼합회 간부인
당신 역시 믿지 못할 사람이죠. 그러니 양쯔엉을 대신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주췬 대표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황레이가 탁자를 쾅 후려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둘 중 하나만 하시죠. 양쯔엉의 제거와 이곳 흑룡강성의 이권, 둘 중 하나를 원한다면 최대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둘 다 원하신다면 그건 우리 현진물산의 이익과 어긋납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훈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급하게 소리쳤다.

“앉아! 아직 이야기 끝나지 않았네.”


“생각을 바꾸셨습니까?”
“앉아.”

영훈이 다시 자리에 앉자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황레이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최선의 결과를 말해봐.”


“간단하지만 어쩌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결과일 수 있습니다.”
“결론만.”
“양쯔엉을 해결하고 이곳 조직을 관리하는 자리에 주췬의 사람을 두기로 하고, 당신은 주췬이 원하는 부탁을 잘
들어주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서로 하나씩 주고받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건 양쯔엉이지, 그에
딸린 이권은 그저 부가적인 문제 아니었나요?”
“그건···.”
“압니다. 불공평한 거래가 될 거라는 거죠? 믿기 힘드실 테지만 주췬 대표는 크게 무리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야심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주석을 꿈꿀 정도로 자신의 그릇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걸로 만족한다는 건가?”
“맞습니다. 이후 당신에게 특별히 원하는 건 없을 겁니다. 우리로서는 말이죠.”

황레이는 잠시 침묵하며 생각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주췬이 과욕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지?”


“제가 사람을 좀 잘 보거든요.”
“흥!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변명은 아닙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영훈은 그가 믿지 못하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허바이바이 그 여자, 왜 넘어가 준 겁니까?”

순간 황레이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영훈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짜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걸 느꼈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이래서 끊을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무슨 소리지?”
“그 여자, 주췬이 보낸 여자인지 알고 있었잖습니까?”

금(金)의 기운에 관성이 과한 사주를 타고난 황레이는 범죄조직의 간부이긴 하지만 마음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폭력성이 나타나는 사람이기는 해도 나름 순정파의 기질이
있었다.

게다가 허바이바이가 타고나기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이긴 하지만 본래 황레이는 그녀처럼 색기를 드러내는
여자보다는 보호심리를 자극하는 청순한 여자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황레이의 사주를 계산한 순간, 첫날 기계처럼 술을 따르던 허바이바이의 태도가 다시 머리에 떠올랐던 건 그런
이유였다.

“······.”
“첫날 당신을 봤을 때, 옆의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더군요. 대화에 집중하려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마음에 든 여자가 아니었겠지요. 맞습니까?”
“귀신이군.”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사람을 잘 본다고. 그럼 주췬에 대한 이야기도 믿을 수 있겠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전 마음 편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던 영훈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방금 이야기는 주췬 대표에게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이거 고맙구만.”
“별말씀을요.”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 역마살이 꼈나?(7) > 끝

< 주인이 정해지다(1) >

황레이와 헤어진 영훈은 하루가 지난 후 주췬을 만났다.


그 사이에 양티엔에게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녀에게서는 연락이 딱 끊겼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녀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 관한 일은 자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지금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뭐라고 하던가?”

만나자마자 불필요한 서두는 제껴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양쯔엉에 대한 원한이 있더군요.”


“그래?”
“공권력을 동원해서 처리해달라고 합니다.”
“흠... 도와주지 않을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
“어려운 일입니까?”
“원래는 무척 어렵지. 삼합회의 조직원들은 단순한 깡패들이 아니야. 공산당원 중에도 조직원이 있을 정도야.
그들을 움직이지 않을 테니 처리해달라는 말이군. 여기를 탐내던가?”
“그랬습니다.”
“그랬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군. 아예 자네가 그와 거래를 한 건가?”
“네. 서로 하나씩 주고 받기로 했습니다. 주췬 대표님은 양쯔엉을 처리해주고 황레이는 중앙에 연줄을 주기로.
깔끔하죠?”

주췬은 피식 웃었다.

“자네가 중간에서 일을 다 처리해버렸군. 깔끔해. 마음에 들어. 그건 그렇고...”

그는 아직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영훈은 곤란한 표정으로 미간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양티엔은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양티엔이 아무래도 황레이의 딸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양티엔이 황레이의 딸이라고? 그게 진짜인가?”

주췬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그 여자는 그만 잊으시죠. 양티엔이 당신에게 접근하는 건 아무래도 황레이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거기에 같이 놀아줄 이유가 없습니다.”
“흠... 믿을 수가 없군.”
“전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양티엔은 위험한 여자입니다. 건들지 마세요.”
“알겠네. 이곳으로 불러서 제대로 대접도 못했군. 뭐 원하는 거라도 있나?”

영훈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신바이 백화점에 우리 브랜드를 하나 넣으면 좋겠습니다.”


“응? 무슨 브랜드?”
“Nodri Clare 라고 영국에서 들여온 명품 브랜드인데 한국에서 상당히 반응이 좋아요. 작년 말에 들여온 건데
중국에도 입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그거 도와주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그거 가지고 되겠어?”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럼 물건만 가져다가 중간마진만 남기고 파는 그런 거 아닌가?”
“그것도 맞습니다.”
“그래가지고 돈이 되겠느냐는 거야. 나야 중국의 정치인이라서 신경쓸 건 아니지만, 자네는 본인이 가진
그릇보다 통이 크진 않군.”

도대체 중국의 클래스는 어디까지이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 뭐... 그래도 백화점에서만 수백억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황대출이 통역하며 자동적으로 위안화로 환율을 바꿔주었다.


“수백억? 욕심이 적은 건가? 아니면 아직 통이 크지 않은 건가? 흠... 좋아. 자네가 나를 도와줬으니 나도
자네를 도와주지.”
“어떻게 말인가요?”
“그 노드린가 하는 브랜드 비싼가?”

영훈은 순간 대답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실책을 자각하며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잠깐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러게.”

영훈은 고승현 상무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마음을 돌려 노형석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노형석 과장님?”


[어, 영훈 씨, 오랜만이야.]

그는 아직 영훈이 과장으로 승진한 걸 모르고 있었다.

“다른건 아니고 혹시 Nodri Clare 가 얼마 정도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Nodri Clare 가 얼마 하냐니? 어느 라인이냐에 따라 다르지. 당연히 같은 라인이라고 해도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그게 아니라 Nodri Clare 회사 말이에요. 그 회사가 얼마 정도냐는 거예요.”
[아~ 글쎄? 신생브랜드라서 그렇게 비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사려고 하면 천억 단위는 생각해야 할걸?]
“천억 단위로 정확하게 얼마나 할까요?”
[매출이 올라가고는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보면 이제 한국에 상륙한 정도라서... 내가 뭐라고 말하기가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비싸게 불러도 1 조 이상 하지는 않을 것 같아.]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아닙니다. 누가 물어봐서 대답을 해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 고생하고. 지금 해외에 있나? 해외 통화로 뜨네?]
“네, 지금 업무차 중국에 나와 있습니다.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말만 그러지 말고 영업팀에 좀 내려와. 내가 비서실로 올라갈 수는 없잖아.]
“하하, 알겠습니다.”
[고생하고~]
“네, 들어가십쇼.”

전화를 끊은 영훈을 보며 주췬이 신기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나와 대화할 때랑 전화 통화할 때랑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군. 친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가면을 쓰는


건가?”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대표님에게 가식적인 태도를 가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뭐라고 하던가?”
“아직 신생 브랜드라 1 조 이하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정확한건 업체 CEO 와 협의를 해봐야겠지만요.
업체 CEO 가 절대 팔 수 없다고 하면 아마 가격은 훨씬 더 올라가겠지요.”

주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 브랜드를 사게. 원한다면 신바이 백화점 입점이야 언제든지 시켜줄 수 있지만 입점을 하고 나서 매각을
진행하면 가격이 훨씬 비싸질 테니 먼저 사야 될 거야. 만약 살 돈이 부족하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어. 물론
주변 눈치도 있으니 돈을 빌려준다거나 하는 건 있을 수 없어. 다만 자네가 산 지분의 일부
를 우리에게 팔게. 경영권에 위협이 안 될 정도로 팔면 걱정할 일도 없겠지.”
“가지고 있는 사업체에서 투자하는 형식으로 할 예정입니까?”
“그래야 보기에도 그럴듯하지. 자네들이 중국에서 일을 할 때도 좋을 거야. 중국 지분이 들어간 브랜드라서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마케팅하기도 편할 테고.”

좋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다만 문제는 Nodri Clare 의 가격이 얼마나 될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니 감사하군요.”


“나도 공짜로 도와준 건 아니야. 자네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고, 또 그 브랜드가 중국에서 크게 성공하면 내
사업체의 가치도 크게 올라갈 테니 그것도 고려한 거지. 사실 돈은 많은데 투자할 곳이 마땅치가 않아. 자네들
일하는 걸 보면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투자할 곳을 정한 것 뿐이네. 물론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 감사함 잊지 말게.”

주췬은 빙그레 웃었다.

한국에 돌아온 영훈을 반긴 사람은 당연하게도 연희였다.


전에는 같이 갔었던 중국을 혼자 보내서 그랬는지, 아니면 갑자기 외국에 보내놓고 떨어져 지내서 그랬는지
그녀는 주변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영훈을 보자마자 덥썩 안겨 왔다.

“보고 싶었어요.”

영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웃음을 지었다.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칫... 그놈의 사극 말투는... 일은 잘 됐어요?”
“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죠. 한국은 어땠습니까?”

이미 중국에서도 계속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통화를 했음에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였다.
당연히 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일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너무 심심해서 탈이었는데요. 난 당신이 없을 때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생길 줄 알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너무 아무 일이 없어서 솔직히 좀 실망했어요.”
“앞으로 흥미진진한 일은 계속될 거니까 너무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네? 중국에서 뭐 하나 건져 왔어요?”
“주췬 대표가 Nodri Clare 인수를 제안했어요.”
“뭘 제안해요?”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데 그때 딱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지역번호가 아니라 핸드폰 번호였기에 일단 받았다.

“최영훈입니다.”
[나 김만석입니다.]

산업은행장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기사 나갈 겁니다.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부터 당신들이 잘
만들어가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위에서도 해주조선해양의 딜이 파토나니까 그 이유 때문에 계속 닦달을 해요. 물론 무진중공업이 압박했겠지만
계속 찌라시가 시장에 돌면서 계속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습니다.]

증권가에는 무진중공업과 해주조선해양 합병이 깨진 이유를 가지고 무수한 이야기가 파생되며 돌아다녔다.
청와대의 입김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은 기본이고 해주조선해양의 생각지 않았던 대규모 부채가 발견되며
무진중공업이 한 발 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온갖 의혹이 물리고 물리니 정치권에서도 그 이유를 캐고 들어온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언제고 알려질 일이었으니까요.”


[군산조선소까지 무사히 현진물산에서 안으면 우리가 7 천억까지는 대출해줄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것도 굉장한
부담을 안고 가는 거지만... 진짜 제대로 할 수 있기는 한 겁니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믿고 가시죠?”
[흠... 어쨌거나 잘 해보세요. 절대 나에게 똥물이 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난 아주 커다란 도박을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음에 볼 때는 계약서를 쓰는 자리였으면 좋겠군요.]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니 연희가 묻는다.

“누군데 그래요?”
“김만석 산업은행장이에요. 해주조선해양 합병 파토 때문에 압박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이제 곧 기사가 나갈
거라고 하니까 이제 우리 이름이 경제면을 뒤흔들겠네요. 심심하다고 했는데 벌써 이렇게 터져주네요. 이래서
사람이 입을 가볍게 놀리면 안 되는 겁니다.”
“입이 방정이라는 거예요?”

연희가 입을 툭 내밀자 영훈이 귀엽게 그녀의 볼을 꼬집는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영훈 일행은 본사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아마 회사에 도착할 때면 할 일이 태산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무진중공업 대회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태블릿에 뜬 단독 기사는 무진중공업 계열 임원들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진물산? 여기가 왜 튀어나와? 그럼 군산조선소도 이 새끼들 작품이라는 거야?”

정호균 회장의 질문에 문태범 사장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현진물산이 이 모든 작업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면서 알아봤는데 군산고속터미널을 단독
입찰한 기업이 현진건설이라고 합니다.”
“고속터미널? 현진건설이 이번에 신영은행한테 얻어 왔다는 그거지?”
“맞습니다. 예전 기업명은 혜성기업이고 도급능력 39 위의 중소규모 건설회사였습니다. 그런데 현진물산이
인수하자마자 공사를 따내도 오히려 손해에 가까운 군산고속터미널 공고에 단독 입찰한 것만 봐도 뒤에서 이미
조재민 의원과 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조재민 의원이 선거공약으로 군산
고속터미널 리모델링을 주장한게 공고를 내기 전이었습니다.”
“이 새끼들...”
“그것 뿐이 아닙니다.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들어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시공사로 현진건설이 선정됐습니다.
무려 건설비용만 7 천억에 가까운 대규모 단지인데 아무리 현진물산에 인수가 됐다고는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명건설이 뒤집어졌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이것도
뭔가 작업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뭐야? 도급능력 39 위 건설사 하나 공짜로 업어다가 이걸 만들어내? 우리도 건설 있잖아? 저게 쉬워?”

임원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 회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군산조선소랑 해주조선해양을 둘 다 먹어치운다는 계획을 세워서 정치인을 구슬리고 산업은행장까지 자기


편으로 만든다고? 신영은행이 매각주관사잖아? 군산조선소 인수도 신영은행 대출금이 들어가겠네? 그럼
신영은행까지 이 딜에 끼어 있다는 건데 우리만 병신같이 당하고 있네?”

말투는 덤덤했지만 그 안에 섞인 분노의 감정을 임원들이라고 모를 수 없었다.


결국 아들이자 무진건설기계 사장인 정근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적을 알았으니까 지금부터 대응을 시작하면...”


“당연하지! 당장 현진물산으로...”

정 회장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 비서실장이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정 회장에게 다급히 말했다.

“이길수 총리가 군산조선소를 방문했습니다.”


“뭐?”
“여길 보십시오.”

비서실장은 다급히 태블릿을 조작해 다른 기사를 띄웠다.

[이 총리, ‘적막한 조선소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말해]


[이길수 총리는 멈춰있는 군산조선소를 방문해 이같이 말하며 다시금 군산조선소가 군산 경제의 심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

정호균 회장은 핏발이 선 눈으로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군산조선소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
정근호 사장의 안타까운 탄성에 정 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현진물산이 아니라 신영은행으로 가자.”


“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 정근호 사장에게 소리쳤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할 것 아니냐!”

< 주인이 정해지다(1) > 끝

< 주인이 정해지다(2) >

[(속보) 군산조선소 8700 억 매각 결정!]

내용도 없는 실시간 속보가 포털에 떴고 그 이후로 후속 기사가 연달아 포털 메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정호균 회장의 결단, 과연 조선소를 살릴 수 있을까?]


[피눈물 흘리며 내린 대국적인 결정에 찬사를 보내다.]
[신영은행과 무진조선소 간의 협상 막전막후 24 시]
[군산조선소 매각, 해주조선해양 매각을 재촉하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처음에는 대국적인 결정을 내린 무진중공업에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당장 조선회사 하나 없이 군산조선소를 인수하게 된 현진물산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확정된 이후 군산조선소를 인수한다는 방침이지만 일단 가격이 결정되었고,
해주조선해양 매각에 걸림돌이 될 것도 많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과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지불할 것인지였다.

“8700 억은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언제나 만나던 블루문에서 마주 앉은 영훈은 형준을 보자마자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당초 7 천억 수준이라고 얘기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이건 생각보다 더 비싸게 결정났기 때문이다.
형준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영훈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그치, 비싸다고 생각하지? 나도 깎아보려고 했어. 일단 앉아. 왜 서 있어? 목 아파, 자자···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들어 보라고. 자, 한잔 들이키고.”

영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니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곤란했어. 이길수 총리가 군산조선소에 방문한 날 연락도 없이 정호균 회장이 쳐들어와서는 다짜고짜
헐값에는 팔 수 없다고 큰소리부터 치는 거야. 이길수 총리가 방문하면서 적당히 기자들 구워삶아 여론을
바꾸려는 수작으로는 택도 없다고 판단한 거지. 확실히 판단이 빨랐어.”
“그런데요?”
“만약 마지막에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와서 억지로 테이블에 앉았다면 우리가 거래를 주도했을 수 있었을
텐데 정 회장이 직접 테이블에 앉았어. 그리고 헐값에 팔 수 없다면서 이후에 한 첫 마디가 아직 자신에게는
시간이 많다는 거였단 말이야.”

형준은 자신의 잔을 쥐고 단번에 들이키고는 파인애플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축구 좀 보나? 이적시장에서 말이야, 선수에게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그 선수 몸값은 엄청나게


떨어져. 곧 있으면 자유계약으로 풀리니까 비싼 돈을 들여가며 선수를 사지 않으려고 하고 구단에서는 공짜로
내보내기보다는 얼마라도 건지려고 한단 말이야. 마찬가지로 협상에서도 시간이 중요해.
정 회장이 미리 판을 깔아 놓은 건 최대한 가치를 높게 받으려는 수작이었고, 그게 일리가 없지는 않다는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야당 정치인을 물고 개싸움이라도 할 모양이었어. 전에 뉴스 나오는 거 봤지? 군산조선소를 매각할 거라는
조재민 의원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야당에서 얼마나 물어뜯었어? 정치인까지 움직여서 조선소 매각과 관련해서
부정이나 불법의 요소가 있는 게 아닌지 특검까지 가야 한다는 둥 지랄을 해대면 좋을
게 뭐가 있냐 이거야.”

형준의 이야기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건 일리가 있네요.”


“저들이 그렇게까지 한다고 한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는 없겠지만 이 상황 자체를 진흙탕으로 끌어 내리면
나중에 무슨 변수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가격대를 높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어. 뭐··· 당연히 우리가
가져갈 커미션을 포함한 가격대라 조금 부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얼마나 받으시려고요?”

형준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크흠··· 한 15%는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


“15%요? 그럼 얼마야?”
“1300 억 정도?”
“후아··· 많이 가져가시네?”
“그 정도는 돼야 내가 회사에 체면이 선다. 솔직히 내가 가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가 먹는 건데 내가 죽자고
달려들고 싶겠냐? 근데 저 정도 커미션 아니면 뭔가 임팩트가 줄어든단 말이야. 알지? 무슨 말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아마 절벽 앞에 선 기분일 거다.

“커미션 포함 8700 억입니까?”


“아니, 제외지.”
“헐··· 그럼 도합 1 조짜리네요? 이거 뭐···.”

영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형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알아. 비싼 거 알지. 그래서 일단 우리가 최대한 저리로 대출을 지원할 생각이야. 이건 잘만 되면 완전히
레버리지 효과로 남의 돈 빌려서 돈 벌어먹는 일이 될 거라고.”
“잘 된다면 말이죠.”
“우리 최 과장 손에 닿은 일 치고 어디 실패한 일이 있던가?”
“고작 몇 개 손댔다고 그러십니까? 흠··· 좋습니다. 가져가세요.”
“하하하! 역시 우리 최 과장, 화통해!”

형준은 호탕하게 웃으며 영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심 영훈이 커미션을 조정하자고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쉽게 승낙하고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영훈은 안도의 웃음을 흘리며 술을 마시는 형준에게 말했다.

“일단 기사 수정해서 다시 내라고 하세요. 매각금액 8700 억이 아니라 1 조라고. 그 정도면 무진중공업 뿐만
아니라 현진물산도 대국적으로 결정한 셈 아닙니까?”
“그, 그렇지. 원래 커미션 금액도 포함해서 보도자료를 돌렸는데 기사에서는 그 금액을 쏙 뺐더라고. 아무래도
조선소 건설비용 대비 매각금액을 적게 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좀 하고 싶었나 봐.”
“그런 것 같네요. 금액은 확실히 해야죠.”
“그럼, 그럼~”
“그리고 추가로 대출 하나만 더 해주세요.”
“대출? 해주조선해양? 그래, 안 그래도 8 천억 정도는 잡고 있었어. 게다가 내가 듣기로 삼분의 일은 산업은행이
대출 지원하고 8 천억 제외한 나머지는 올해 말부터 분할납부 하는 걸로 들었는데, 맞지?”
“맞습니다.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
“8 천억 정도만 더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형준은 잠시 눈을 껌뻑이다가 물었다.

“뭐에 쓰려고? 아니, 담보는 있는 거고?”


“회사를 인수하려고 쓰는 돈이니까요.”
“지금 현진물산에 우리 대출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고는 있는 거지?”
“계산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 이거 배짱이 큰 거야? 아니면 너무 큰 돈이라 현실성이 없는 거야? 8 천억을 추가 대출해달라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오는 거 아니야? 어느 회사 인수하려고?”
“아직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형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이건 나라도 힘들어. 나간 대출이 너무 많아. 부채율이 너무 올라간 상태라고. 여기서
추가 대출? 위험해. 기업여신 쪽에서 당장 반대하고 나설걸?”
“지금 당장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일단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완료되고 총선 끝난 이후에 진행할 생각이니까요.”
“한 석달 남았네?”
“네. 그러니까 그때까지 자리 잡으시고 우리 뒤 좀 팍팍 밀어주셨으면 합니다.”
“씨발, 그러니까 결국 하라는 말이네.”
“할 수 있잖아요. 전 상무님 믿습니다.”

영훈이 빙그레 웃자 형준은 썩은 표정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이래서 조선소 가격이 3 천억이나 올랐다는 데도 별말을 안 했던 거구만. 여우 같은 놈 같으니라고. 조선소 가격


안 올랐으면 어쩌려고 했냐?”
“그럼 더 애절한 표정으로 부탁했겠죠.”
“씨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 그리고 네가 말한 그 비서. 아버지가 보낸 쁘락치였어.”

영훈이 휘둥그레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아, 진짜요?”
“뭘 진짜요야? 네가 못 믿을 여자처럼 보인다며?”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쁘락치일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회사에 여자를 쁘락치로 넣습니까?”

화면에 뜬 그 비서의 얼굴은 이마가 좁고 윤택하지 못해 초년운이 좋지 못하고, 코끝과 귀 윗부분인 이각이
날카로워 복이 없으며, 남에게 정을 주는 성격도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그녀에게 복이 있다면 재벌인 형준과 결혼할 테지만 그런 복을 타고난 여자가 아니라는 거였고, 남에게 쉽게 정을
주는 여자도 아니니 형준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사이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 여자니 형준에게 조심하라고 했던 것인데 설마 이세준 부회장이 그녀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여튼 그때 충격이 심했다. 설마 아버지가 벌써 나를 노리고 그랬을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회사 기밀을 다른 곳으로 보낸 정황이 있어서 그걸로 일단 감찰부서에 넘겼어.”
“아버지는 뭐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모른 척하시지. 아마 물어보면 그런 여자가 있었냐고 되물으실걸? 감찰부서에 넘기고 나서는 모른
척하고 있을 걸 그랬나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아마 걔를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못 참았을 거야.”
“······.”

영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주는 나쁘지 않은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

“그건 그렇고 산업은행장이랑 언제 만나기로 했어?”


“모레 회동입니다.”
“가서 빨리 결정지어라.”
“결정은 빨리 지어도 세부조건 조율하고 현재 해주조선해양 노조랑도 어느 정도 협의해야 하니까 완전히 인수되는
건 아마 총선이 지나야 가능할 겁니다.”
“그래도 결정이 나는 게 중요한 거지.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결정돼야 우리 쪽에서 돈을 집행하니까.”
“현진건설이 가진 용인 사업부지가 있는데 마침 거기 땅값이 좀 올라서 2 천억 정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그거랑 회사가 가진 자금 털어서 넣겠습니다.”
“흐흐··· 그래. 나도 이제 들어가서 어깨 좀 펼 수 있겠다.”

영훈은 웃음을 보이는 형준을 보며 괜히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눌렀다.


현상은 어렵지만 분명 그의 운은 나쁘지 않으니까.
적어도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 그는 돌파구를 마련할 게 분명했다.

우명그룹 김태현 회장은 두 아들인 도훈과 창훈을 불러놓고 말했다.

“송은채 사장이 자리에 앉고 나서 현진물산이 참 많이 변했다. 증권회사가 가진 지분을 회수하고 혜성기업을


인수한 다음에 봉선동 부지 시공권을 따낸 알짜 건설사로 만들었어. 그리고 가지고만 있으면 따박따박 현금
들어오는 알짜 사업인 호텔도 인수했지. 그리고 이번 해주조선해양 인수··· 애비는 참 놀라
웠다. 너희도 그렇지?”
창훈은 아버지인 김태현 회장의 말이 그저 감탄하는 게 아님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일 때 형인 도훈이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회사 경영 쪽에는 경험이 전무하던 송은채 사장이 직접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은 없고 아마
송 사장을 서포트하는 걸출한 인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떨떠름한 반응.
도훈은 주먹을 쥐며 강하게 말했다.

“대신 반대로 보면 지금 현진그룹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건 확실합니다. 차입금의 규모가 엄청나고
현진중공업은 현진물산과 거의 계열사 분리가 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 상황에 3 월 주총에서
우리와 헤지펀드가 흔들기 시작하면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입니다.”
“으음···.”

그래도 김태현 회장의 떨떠름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본래 김태현 회장은 이번 3 월 주총에서 혼란에 빠진 현진중공업으로 쏠쏠하게 이득이나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현진물산이 파격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거대 회사를 먹어치우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고작 몇 천억
이익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았던 거다.
아들인 도훈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조선업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그래?”
“전략실을 움직여서 현진중공업과 조선업 동향에 관한 보고서를 곧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제야 김태현 회장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그래, 그거 궁금하구나. 만약 한다면 얼마나 들까?”

우명그룹은 현진중공업을 흔들어 주가 차익을 얻는다는 계획에 현진중공업 인수라는 가능성을 하나 추가했다.

“최대한 우호지분을 많이 확보한다고 계산해도 최소 3 조 원 이상은 필요할 겁니다. 돈 싸움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부회장 취임을 노리는 김태민의 삼촌이 현진중공업을 탐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길 파고들면 의외로 쉽게
결판이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이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준비 많이 했구나.”

< 주인이 정해지다(2) > 끝


< 주인이 정해지다(3)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산업은행, 해주조선해양 매각에 현진물산과 원칙적 합의]


[본격적 인수절차 돌입한 해주조선해양의 운명은?]

재계가 뒤집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계열사 분리를 성공적으로 마친 현진물산이 현진건설과 현진관광을 인수하고 세계적인 조선업체인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면서 현진물산을 중심으로 한 재벌구조를 갖추었다.

이름만 현진이라는 간판을 쓰고 있을 뿐이지 명실상부한 새로운 그룹의 탄생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이야 당연히 많은 기사를 접하며 쉽게 잊어버리겠지만 재계에는 이번 일련의 사태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연희의 기분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랜드 백화점에 입점한 Nodri Clare 의 오픈 행사를 핑계로 간만에 백화점 나들이에 나왔는데 썩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언니~ 안녕하세요?”

연희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GK 그룹 한주연은 연희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모델 같은 그녀를 보며 연희는 표정을 굳혔다.
예전에도 몇 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좋은 기억이 없었던 연희였다.
특히 김태민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걸 알고 난 이후 그녀가 더욱 싫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축하드려요.”
“뭘?”

한주연은 빙그레 웃음 짓고는 뭘 모르는 척하냐는 눈빛으로 말했다.

“해주조선해양 말이에요. 놀랐어요. 이래서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하는가 봐요.”

연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가? 하긴··· 놀랍긴 하겠다. 넌 온전한 현진그룹을 보고 태민이를 만났을 텐데. 오죽 놀랐을까 싶네.”
“으음~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전 언니네 회사 전혀 탐나지 않아요.”
“넌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진심처럼 하니?”
“안 믿으시는구나?”

주연은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난 사람 보고 만나는 거예요.”

순간 연희는 ‘풉’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요즘 연기 준비하니? 그 정도 실력이면 오디션 봐도 되겠는데?”


“이 정도 사이즈면 오디션 정도야 뭐···.”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태민이 어디를 보고 사람 보고 만난다고 하니? 차라리 네 예전 남친이면 모를까. 참,
그 사람은 잘 지낸다니? 마스크 진짜 죽였는데.”

주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남의 사랑 이야기는 참 잘 기억하시네요?”


“모를 수가 있니. 네가 소식 전해주지 않아도 요즘 TV 만 틀면 그 사람 얼굴이 나오는데. 영화 대박 난 거
축하해주고 싶은데 너랑 헤어져서 축하한다는 말을 못 전해주겠네. 그건 아쉽다.”
“결혼할 사람을 어디 얼굴만 보고 만날 수 있나요?”
“그래서 궁금해. 태민이가 똑똑하기는 하지. 그런데 걔 만큼 똑똑한 사람이 없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거든?
인성이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 욕심 많은 건 너랑 닮아서 그건 좀 맞겠다.”
“사촌오빠를 그렇게 비꼬고 싶어요?”

연희는 잠시 주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예전과는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져서였다.
그때, 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합니까? 전화도 안 받고, 한참 찾았네. 이분은 누구고요?”

영훈이었다.
노형석 과장이 송은진 실장과의 만남에 영훈을 데리고 갔었는데 벌써 이야기가 끝났나 보다.
연희는 송은진 실장을 만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백화점을 둘러보고 있다가 주연과 만난 것이었다.

“아, 전화했어요? 미안해요. 무음으로 되어있어서 몰랐나 봐요. 여기는 한주연. 현진중공업 김태민 상무랑
만나는 여자예요.”

김태민 상무의 여자라는 말에 순간 영훈은 잠시 헷갈렸다가 이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현진물산 비서실의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주연은 바로 손을 내밀지 않고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희는 바로 덧붙였다.

“참고로 내 남자이기도 해.”

영훈은 무슨 그런 노골적인 표현을 쓰는가 싶어 움찔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주연은 놀란 눈빛으로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악수 안 할 거니? 영훈 씨 손 떨어지겠다.”


“어? 어··· 반가워요. 한주연이에요.”

한주연이 영훈의 손을 잡자 연희가 바로 말했다.

“GK 그룹 한재원 회장의 딸이에요. 나이 쉰에 낳은 막둥이인 데다가 보다시피 얼굴도 예쁘고 똑똑한 편이라
그룹에서 애지중지한다고 해야 하나? 나 이 정도면 설명 잘했니?”
“칭찬만 해줘서 오히려 당황스러운데요?”
“걱정하지 마. 뒷담화는 너 없는 데서 할 거니까.”

어차피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주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분위기에 적응 못 하는 사람은 영훈이었다.

“둘이 싸웠습니까?”
“보다시피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왜요?”

대답은 주연이 했다.

“같은 대학을 나왔거든요. 언니는 그때 내가 교수님한테 잘 보여서 내가 학점을 뺏은 줄 알아요.”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아니었다니까? 뭐, 믿지는 않겠지만.”
“됐다. 다 지난 일인데.”

연희가 고개를 돌리자 주연이 영훈에게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느 집 사람이에요?”
“말해도 모를 겁니다. 그대들처럼 재벌 가문은 아니거든요.”
“어머, 그래요? 언니가 일반인하고 만난다고요? 이럴 수가··· 하하, 연희 언니가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네요.”

연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너와는 다르게 사람 보고 만나거든.”


“방금 그거 내가 했던 얘기 같은데요? 그리고 나 태민 씨 사람 보고 만난다니까요?”
“알았어. 잘 만나. 이번에 주총 끝나고 나서도 그 사랑 오래 유지되는지 한번 지켜볼게.”

연희의 말에 주연이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설마 주총에서 태민 씨가 미끄러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금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 뭐더라? CPI 펀드였나? 거기서 이미 상당 부분 주식을 사들였다며? 거기에
우명그룹도 들어갔다고 하던데 괜찮겠어?”

연희는 주연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연은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런 위기도 못 넘길 사람을 내가 만날 것 같아요? 그리고 내 걱정보다 언니 걱정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수많은 재벌 자제들이 언니 잡겠다고 모여들 텐데 그 사랑 잘 지킬 수 있을까? 부디 그 사랑
영원하길 바랄게요~”

한주연은 그렇게 웃으면서 사라졌다.


연희는 멀어져가는 주연을 보며 투덜댔다.

“흥! 영악한 게 누굴 속이려고··· 쟤 현진중공업 계열 다 먹어치우려는 속셈이에요.”


“어차피 둘이 결혼하면 김태민 상무도 나쁠 거 없지 않습니까?”
“모르죠. 무슨 수작을 부려서 태민이 쫓아내고 자기가 회장 자리에 앉으려고 할지.”
“너무 멀리 가시는데···.”
“내가 오버해서 생각한다는 거죠?”
“아니 뭐··· 보니까 똑똑하고 냉정한 사람이긴 한데 그렇다고 가족까지 잡아먹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사주를 보지 않았지만 보여지는 상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것을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변 사람을 다 파괴시키는 그런 유형의 여자는 아니었다.

“칫··· 하여튼 재수 없어. 쟤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꼬리를 치고 다녔냐 하면 단 한 번도 자기가 직접 과제를


해본 적이 없었다니까요? 참고로 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했다고요. 차이가 딱 느껴지죠?”
“아유, 뭐 대단하시네. 엄지 척입니다.”
“어째 기분이 더 나빠지려고 하네요.”
“크흠··· 노 과장님이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갑시다.”
“그래요.”

입을 삐쭉거리는 연희를 데리고 입점 행사장에 들어서니 전속모델인 서가은과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송은진
실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형석 과장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송은진 실장이 연희를 보고 다가왔다.

“왔어?”
“네. 가장 먼저 들어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두 번째로 들어오게 됐네요.”
“너 나 책망하는 거니? 그래, 솔직히 Nodri Clare 가 이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을지 그때는 몰랐잖아. 그건
인정.”
“그래도 조건 좋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너희 직원 능력 있더라. 사람 속 살살 긁으면서 약 올리는데 욕이 나올 뻔했잖아.”
“아~ 민희 씨? 그분 능력 있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좀 있나 봐요. 그래도 나중에 만나더라도 욕은
하지 마세요. 우리 직원이 욕먹으면 나 화낼 거예요.”
“무섭네? 해주조선해양까지 먹었다고 우리가 아래로 보이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도 나랑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백화점이 여긴데.”
“구라치지 마. 뉴월드를 제일 많이 가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사실 엄마가 뉴월드를 쪼~끔 더 좋아하긴 해요. 아휴, 난 거기 주차가 별로라서 잘 안 가게 되던데···.”

연희는 어차피 어느 백화점을 가나 VIP 전용입구에서 발렛요원이 주차해주는데도 괜히 너스레를 떨어댔다.


이때, 노형석 과장이 다가와 영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연희 씨도 잠시만요.”


“네? 네.”

노 과장은 영훈과 연희를 데리고 조용한 비상구 계단으로 나와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봤어?”
“네? 뭘 말입니까?”
“방금 현진중공업이 갑작스레 빅베스 날렸던데?”

영훈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네? 빅베스요?”
노형석 과장은 ‘아차’ 하는 마음에 다시 설명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임창호 회장님이 계실 때 플랜트 사업 손실 부분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당기 순손실을 1 조 원으로


잡았다. 지금 주가 폭락하고 있어.”
“어디 봐봐요.”

연희도 놀라서 핸드폰에 뜬 주식차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주가는 그 사이에 무려 마이너스 13%가 넘게 빠지고 있었다.
이 기세라면 얼마나 더 떨어질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 주연 씨가 자신만만해 하던 이유가 있었네요.”
“아니, 그럼 자기도 손해일 텐데?”
“주가가 빠지는 것보다 회사를 노리고 들어온 자들에게는 치명타가 되겠죠. 머리 잘 썼네.”

역시 사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들어갔어?”

김태현 회장의 굳은 표정에 도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7 천억 정도밖에···.”
“벌써 7 천억이나 들어가? 며칠이나 됐다고 그렇게 많이 샀어?”
“사채시장과 일본에 있는 큰손 중에 현진중공업 주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접 컨택해서 매수한 거라···.”

사실 도훈도 억울하기는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주식차익으로 이득을 보건 아니면 인수를 노리건 간에 최대한 빠르게 주식을 매입하라고
지시했던 게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계획을 같이 발전시킨 건 자신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혼자 욕을 들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추가 매입은 중지시켜.”


“그렇게 되면 들어간 7 천억이 완전히 공중에 떠 버립니다.”

투자회사도 아니고 그저 사내 보유금으로 투자한 돈인데 그걸 날리는 형국이 됐다.


차라리 현진중공업을 인수하기 위한 목적성을 가진 자금이라면 모르겠지만 단순 투자자금이 이처럼 거대한 손해를
보게 되면 대외적으로도 개망신이었다.

“그럼 어쩌려고? 추가 투입해? 1 조 원이 될지, 2 조 원이 될지 모르는데? 헤지펀드 쪽 상황은 어떤데?”


“그쪽도 당황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는 거의 1 조 넘는 자금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 주총에서 진짜
경영권을 요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
“어쩌면 더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헤지펀드가 주식을 매입하느라 주가가 계속 오르면서 추가 매입에
대한 부담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렇게 내려주면···.”

김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냐?”


“네? 그럼···.”
“그거 숨기려고 하면 못 숨겼을 것 같아? 패 하나 꺼내 본 것일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대외 이미지 때문에
숨겨두었던 손실 난 것 다 꺼내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있겠어? 네 말처럼 기회일 수도 있지만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더 들어갔다가 만약 경영권도 못 가지게 된 상태로 물리면 어쩔 거냐?”

도훈은 입을 열지 못했다.
현진중공업에 대한 경영권 욕심은 주식상승에 대한 이익을 전제로 한 거였다.
경영권을 못 가진다고 해도 주가 차익을 얻고 나온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던 건데 이제는 그 가정이 쓸모없게 된
거다.

“중지해. 개망신은 이걸로 충분하다.”

도훈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참담한 실패에 입술을 깨물었다.

< 주인이 정해지다(3) > 끝

< 주인이 정해지다(4) >

이경호 회장은 요즘 가만히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화기를 들 때마다, 또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손자 자랑을 하면 은근히 부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놈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어도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놈이라 그저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용하게 회사를 다니더니 결국 사람이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떠벌리기를 좋아하던 놈이 말을 앞세우지 않았고 겉멋에 치중하던 놈의 법인카드는 언제부터인가 쇼핑 내역이
사라져 버렸다.

단순히 마음과 행동을 바꾼 것만이었으면 이렇게 흡족하지 않았을 거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찾아내 회사에 큰 이익을 남겨오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든 아니든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마인드가 바로 직원의 마인드지만, 스스로 일을 찾아 이익을 창출해내는
것이야말로 오너의 마인드다.

그런 마인드를 가지면서도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니 어찌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버님, 요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요.”

며느리의 물음에 이 회장이 말했다.


“늙은이가 뭐 기분 좋을 게 있겠어. 자식새끼 사고 안 치고 잘 자라는 거 보면 그게 인생의 즐거움이지.”
“형준이 때문에 그러시구나. 우리 혜원이 영은이도 좀 생각해주세요.”

형준의 여동생인 혜원과 영은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놀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이경호 회장은 두 손녀딸이 예쁘기는 해도 손자인 형준만큼은 아니었다.

“혜원이나 영은이는 왜 선을 안 봐?”


“아버님도 참···. 요즘 애들이 어디 예전 저희 같나요? 선보라고 하면 바로 핸드폰으로 상대 얼굴부터
본다고요.”
“그래서? 안 시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때 되면 가겠죠.”

이 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다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이세준 부회장에게 말했다.

“애비도 애들 선 자리 신경 써라. 언제까지 놀게 할 셈이냐.”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형준이 전무로 올려도 되겠다.”

이세준 부회장이 흠칫 놀란다.

“네? 아버지, 전무는 부행장급이나 마찬가지인데 형준이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빠릅니다.”


“안다. 지금 형준이 나이에 전무 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모를 것 같으냐? 하지만 넓게 생각해. 한국
기업들은 너무 늙었다. 나이가 들어야 높은 직급을 주니 오너의 생각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투자는
결국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실패하는 거다. 나이가 젊다는 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
이 될 수도 있음이야.”
“그래도 아버지···.”
“씁···.”

이경호 회장은 쇳소리를 내며 고래를 쳐들었다.


그 서슬에 감히 반박하지 못한 이세준 부회장이 고개를 숙였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이번에 형준이가 무진중공업 정 회장하고 담판 짓느라 고생 많이 했다. 그 고약한 늙은이 앞에서 기죽지 않고
결과를 냈어.”
“생각했던 가격에 비하면 과하게 비싸게 결정됐습니다. 현진물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와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굉장히 곤란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게야. 그 애가 정 회장이랑 급이 맞아야 제대로 목소리를 낼 거 아니냐? 어디 큰소리나 제대로
냈겠어? 본인이 원하는 가격을 고수할 수 있었겠냐고. 열심히 하려는 녀석 좀 밀어줘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끄음···.”

이경호 회장은 곧 죽어도 고려해보겠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이세준 부회장이 탐탁지 않았지만 불편한
기색만 내비쳤을 뿐 더는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부회장의 권위를 깎는 행위가 그리 좋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다시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준이는 만나는 여자가 있대?”


그녀는 시아버지의 물음이 단순히 가볍게 만나는 여자가 아니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가 있는
것인지 묻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마 없을걸요? 형준이도 선 자리 알아볼까요?”


“이번에 현진물산에 군산조선소를 넘겼잖니. 현진건설에 현진관광에 해주조선해양까지··· 거기 사장 딸이
외동이라며?”
“연희요? 유명하죠. 그런데 아버님, 걔는 안 돼요.”
“어째서?”
“전에 잠시 만나다가 둘이 잘 안 됐는지 헤어졌거든요.”
“그거 안 됐구나.”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네가 신경 써서 제대로 골라라. 집안에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평안하고 남자 일이 잘 되는 거다. 널 봐봐라.
네가 들어오고 우리 은행이 얼마나 잘 됐어?”
“호호호~ 아유, 아버님도 참··· 저보다 이이가 잘해서 그런 거죠.”
“당연히 그렇지만 네 도움도 무시 못 하는 거다.”

이경호 회장은 며느리와 웃느라 미처 이세준 부회장의 굳은 얼굴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 흔들렸던 태도를 고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신의 밥을 전부 해치웠다.
마치 남기면 큰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군산의 오후.


조재민 의원은 우산을 쓴 채 적막한 조선소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좋습니다. 표정, 구도 전부 완벽합니다.”

전문 촬영기사의 말에 조재민 의원이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이게 다 군산을 사랑하시는 의원님의 마음 때문이 아닙니까. 요즘 기사 나오는 거 보면서 군산
시민들이 정말 조선소가 다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희망 섞인 말들을 하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하, 네. 기대하십시오.”

사진 촬영을 마친 조재민 의원은 다시 움직였다.

“오후 일정은?”
“벽란도에서 1 시간 이내에 미팅을 끝내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빨리 움직이자고.”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벽란도 횟집에 도착해 조용한 방으로 들어서니 영훈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새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이거 반갑네. 어째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아?”
“바쁜 게 좋은 거니까요. 앉으시죠.”
“미리 주문했는데 오후 일정이 있어서 술은 안 될 것 같네. 괜찮지?”
“저도 운전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잘 됐구만. 서울은 어때?”

조재민 의원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고 강렬한 열망이 가득했다.


이제 전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보궐선거 지역이 됐고, 경제기사마다 조재민 이름이 오르내렸다.

“다 좋습니다. 조선소 가격이 조금 비싼 것 말고는 말이죠.”


“거참··· 무진중공업 정 회장이 그렇게 발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그것 때문에 어찌나
화가 나던지. 전라도 쪽 기자들 다 불러놓고 내가 한바탕 연설을 했다니까! 군산 경제를 파탄 내놓고 저렇게
비싸게 팔려고 한다고 말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열변을 토하니 일단 믿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일, 이백억도 아니고 삼천억이나 뛰어올라서 내부적으로 조금 말이 많은 상황이거든요.”

실제 조선소 가격이 1 조 원에 해당한다고 하자 굳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냐는 말이 회사 내부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물론 현진물산과 조재민 의원과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오로지 경제적인 부분만 해석해서 발언한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의미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허허··· 그렇긴 하지. 다 이해하네.”

조재민 의원은 기업인으로서 충분히 할 만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대충 우는 소리 좀 하다가 지나갈 일일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좀 버겁습니다.”


“응? 뭐라고?”
“삼천억··· 의원님께서는 어차피 정치인이시니 크게 생각하시지 않겠지만 삼전그룹 정도 되는 거대 그룹도
아니고 현금 삼천억을 추가 지출해야 하는 상황은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럼 매각주관사인 신영은행을 더 압박하지 그러는가?”

그럴 수가 있었다면 당연히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대외적으로 절대 형준을 흔들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외부에서 봤을 때 신영은행은 최대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고 그 결과로 상당한 커미션을 얻게
된 능력 있는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얻어야 했다.

“은행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그쪽과 저희와의 거래 조건입니다.”


“끄응··· 그래서?”
“의원님께서 손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조재민 의원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소리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설마 이 딜을 깨려고 저러는 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랬다간 서로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테니까.
그래도 일단 상대의 의중을 확인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만약 움직이지 못한다면?”


“못하는 것입니까? 안하는 것입니까?”
“까탈스럽군. 좋아, 안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어쩔 수 없이 삼천억 더 주고 사야겠죠.”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조 의원은 그렇기에 더욱 어려운 상황에 닥쳤다고 느꼈다.

“해봤는데 안 되면 어쩌는가?”
“최선의 노력을 다 했는데도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있습니까. 다만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가 문제겠죠.”
“내가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 삼천억 때문에?”
“그깟 삼천억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업의 자금이라고 해도 회사 직원들이 밤낮으로 고생하며 벌어들인
돈입니다. 그만큼 가치 있게 써야 하고요.”
“그래서?”
“의원님께서 내 일처럼 뛰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이게 의원님께 손해도 아닐 거고요.”

지금까지 결코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던 영훈이었기에 조 의원도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지금 기사들을 보면 의원님에 대한 내용이 올라오고 있지만 솔직히 주인공이 의원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둘 다 인수하려는 현진물산에 대한 각종 기사가 넘쳐나는 상황이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그 당연한 게 의원님께서는 마음에 드십니까?”

주인공 역할이 싫은 정치인이 어디 있을까?

“그럼?”
“딜을 한번 깨보는 게 어떻습니까?”
“깨자고?”
“다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이 현진물산의 품에 안기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작 삼천억
때문에 딜이 깨지게 생겼습니다. 조선소의 부활을 기대하던 군산 시민들은 낙담하겠죠.”
“군산 시민들뿐일까? 전국의 국민이 분노할걸세.”
“그걸 의원님께서 되살리면 어떨까요?”

조재민 의원은 탁자 밑에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3 조가 넘게 걸린 이 딜이 깨진다.
그걸 한 정치인이 기어코 되살려 군산 경제를 일으켜 세운다.
이것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을 수 있을까?
다만 이게 어디 말이나 될 스토리인가 말이다.

“그게 되리라고 보는가?”


“삼천억 전부 까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그 절반 정도는 줄이면서 양쪽에 협조를 구하는
식으로 나가면 우리는 그것에 적극 협조할 생각이 있습니다.”
“자네들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무진중공업도 그럴까?”
“의원님과 국민들이 압박한다면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뭐, 못하시겠다면 저희도 포기하고 삼천억
더 주겠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러신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조재민 의원은 느꼈다.


영훈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그릇을 증명하라고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 정도 판이 깔렸다면 한 번 더 레이스를 질러봐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해보지.”
영훈은 미소지었다.
어차피 이 생각을 떠올릴 때부터 조 의원이 거절할 거라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이걸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을지가 걱정일 뿐.

“좋은 선택입니다.”
“자네는 이 기상천외한 도박판을 깔아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했나? 고작
삼천억 때문에?”
“말씀드렸지만 고작 삼천억이 아닙니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회사에 현금이 많이 부족하게 생겼거든요.
이면지까지 아껴야 할 판입니다. 천오백억이라면 이 정도 쇼는 벌이고도 남죠.”

영훈은 웃으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이날 오후 기사 하나가 전국을 강타했다.

[(속보) 현진물산, 군산조선소 인수 불가 통보]


[내용 없음.]

< 주인이 정해지다(4) > 끝

< 주인이 정해지다(5) >

현진물산 발 속보가 뜨자마자 포털사이트가 뒤집어졌고 이후 2 보, 3 보를 쏟아내며 관심을 끌어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인수 불가가 맞는 것인지, 오보가 아닌지를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잠시 후 오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정확한 후속 기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후속 기사를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아봤어?”

정호균 회장의 물음에 문태범 사장이 즉시 대답했다.

“일단 계속 연락을 취하고는 있지만 몰려오는 기자들 전화 때문인지 통화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연락을 못 해? 우리가 무슨 식당에 껌 팔러 왔어?”
“가격에 대한 이야기는 신영은행과 직접 대화를 나누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정 회장이 급기야 욕설을 내뱉자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이 얼른 나섰다.

“이렇게 된 거 이참에 그냥 없던 일로 해버리시죠.”

정 회장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팔고 싶어서 파는 거였냐? 팔기 싫은데 나만 눈치 보면서 파는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건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도 발을 뺄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명분이 될지, 함정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다. 문 사장.”
“네!”
“현진물산이 진짜 발을 뺄 것 같아?”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이번 조선소 인수는 기업과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 아니게 돼 버렸습니다. 이 총리를
비롯해서 거물급 정치인까지 한 발 보탠 인수였습니다. 그냥 물러난다는 건 현진물산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게다가 현진건설이 정부와 척을 져서 좋을 수 없잖아?”
“여기서 이렇게 틀어지면 분명 흠이 남을 겁니다.”
“그럼 현진건설이 일단 튕겼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런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튕기는 방식이 조금···.”
“뺨부터 때리고 보네, 그치?”
“맞습니다. 얼씬도 하지 말라는 건지, 여지를 주는 건지 헷갈리게끔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영은행에서는 뭐래?”

문태범 사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이형준 상무 쪽도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쪽도 현진물산과 계속 대화 중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8,300 억은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너무 평온합니다. 이 상황이면 중간에서 가장 난처한 지경이 신영은행일 텐데 일단 지켜보자는 식으로
나오니까···.”
“우리만 호들갑 떠는 형국이라 이거지?”
“맞습니다.”

이때 비서실장이 들어오며 정호균 회장에게 말했다.

“후속 기사 떴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태블릿을 조작해 최신 기사를 화면에 띄웠다.

[현진물산, 군산조선소 인수 불가 통보(종합)]


[현진물산이 매각주관사인 신영은행의 군산조선소 결정가격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인수 불가를 통보했다.
신영은행에서 무진중공업과의 장기간 협상 끝에 결정된 8,300 억은 현진물산이 기존 고려했던 금액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이번 군산조선소 인수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군산조선소의 앞날은 불투명해졌으며···.]

“이게 뭐야? 원점으로 돌아가? 이거 기자의 일방적인 논조라고 봐야 해? 이 정도면 뺨을 때린 게 아니라 턱을


돌려버린 거 아니야?”
“속보를 낸 기자와 동일합니다. 현진물산의 언론창구 기자인 셈인데 현진물산의 의중이 백프로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영은행 연결해. 진짜 엎을 건지, 아니면 가격을 깎으려고 이 지랄을 떠는 건지 확인부터 해!”
“네, 알겠습니다.”

문태범 사장은 즉시 일어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정호균 회장은 정근호 사장에게 말했다.
“넌 현진물산으로 가.”
“네? 제가요?”
“그럼 내가 며느리뻘 되는 애한테 굽신거리면서 뺨을 때린 건지 턱을 돌린 건지 확인해야겠냐?”
“아, 아닙니다. 제가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가서 송 사장 직접 만나고 와. 송 사장 직접 만나기 전에는 회사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알겠어?”
“알겠습니다.”

정근호 사장도 부리나케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나머지는 언론사와 정치권 동향 체크하고 실시간으로 보고하도록 해. 정근호 사장 말대로 이게 명분이 될 수


있다면 지킬 수 있는 건 지켜야지. 안 그래?”
“네, 회장님.”

마치 군대처럼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도 정 회장은 답답한 마음이 영 가라앉지 않았다.

“이게 뭐냐? 너, 현진물산하고 커뮤니케이션 제대로 되고 있는 거 맞아?”

저녁 8 시가 가까울 무렵 신영금융지주 본사.


이세준 부회장은 다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아들인 형준을 불러 앉혔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진짜야? 협상장에 앉지도 않고 인수 불가부터 때렸어. 이건 무슨 의도야?”

아마 형준도 영훈의 연락을 미리 받지 않았다면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어리버리 했을


게 분명했다.
사실 그리고 지금도 영훈의 의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건 맞았다.

‘신영은행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일은 조재민 의원과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커미션은
그대로 받게 될 테니 그 부분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언론에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 흘리시면 안 됩니다. 저 믿으시죠?’

이게 영훈이 한 말이었다.
저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 못 믿겠는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알겠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은행 내부를 단속해야 하는데 가장 난적이 하필 자신의 상관이라는데 있었다.

“가격이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협상장에 앉아서 조정해야지.”
“협상장에 앉아봤자 답이 안 나올 거라고 예상한 듯합니다.”
“그 ‘같습니다’, ‘예상한 듯합니다’는 네 생각이냐? 아니면 현진물산 측 생각이냐?”
“죄송합니다. 현진물산 측 생각입니다. 협상장에 앉아봤자 답이 안 나올 거라고 합니다.”
“확실해?”
“네.”
“그럼 지네들이 어쩌려고?”
“무진중공업을 갑이 아니라 을의 위치로 격하시켜 협상장에 앉히려는 의도입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허··· 넌 그 말을 어떻게 그렇게 맹신하고 있냐? 저러다 이 딜이 깨지면?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비릿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빛처럼 느껴졌다.
형준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세웠다.

“딜은 깨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두고 보지 않을 거고요. 지금 제가 중간에 끼면 커미션을 가지고


조정하려고 들 겁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는 나서지 않을 겁니다. 가격 조정은 오로지 커미션을 제외한 순수
매각금액에서 움직이게 하겠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깨지면?”

함정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딜을 받지 않으면 당장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짐도 알고 있었다.
이건 안 받을 수 없었다.

“자리 내놓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세준 부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내 아들이구나.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아무렴.”

그는 형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고 형준은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인이었다.


형준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하게 될 마석대 부행장이 바로 그였다.

“아이고, 왔구만.”

마석대 부행장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이세준 부회장은 형준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앉아. 뭘 그렇게 오래 고심을 해?”


“원래 월급쟁이는 이런저런 고민을 해야 할 게 많습니다. 부회장님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하하하, 나도 고민 많아. 오늘 뉴스 봤지?”
“네. 나라가 그것 때문에 떠들썩하니까요. 그런데 이분은···?”
“어, 인사해. 여기는 내 아들이자 이번 군산조선소 딜을 담당하고 있는 이형준이야.”
“오~ 반가워요. 나 마석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전략기획팀 이형준 상무입니다. 오늘부터 근무하시는 겁니까?”

이세준 부회장이 대신 답했다.

“내일 인사공고 날 거고 모레부터 출근할 거야.”


“아··· 그렇군요.”
마석대 부행장은 형준을 보면서 감탄한 듯 말했다.

“아주 훤칠하시군요. 회장님의 손자 사랑이 그렇게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우리 아버지가 형준이를 많이 아끼긴 합니다.”
“잘 생기기만 했다면 모르겠는데 능력도 대단하니 회장님이 아주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이번 군산조선소 매각
프로젝트는 외부에서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 취임은 안
했지만 곧 출근할 예정이니까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맞지요?”

형준은 곤란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담담히 말했다.

“원만하게 처리될 예정입니다. 저 자세한 사항은 아직 외부인 신분이시기 때문에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형준의 말에 마석대 부행장이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아··· 궁금한데 이거 참···. 하루 일찍 출근할 수도 없고···.”


“하하하! 이 녀석 봐. 내 아들이지만 이런 면이 있다니까.”
“은행원이라면 이렇게 철저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아들 두셨습니다.”
“이뿐인가? 조금 전에는 이번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전략기획팀 상무직까지 내려놓겠다고 하지 뭐야.
대단한 놈이지?”
“아··· 정말 그랬습니까?”

마석대 부행장이 놀란 표정으로 형준을 본다.


어차피 마석대 부행장이 이 자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형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허···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전 솔직히 1 시간 전만 해도 사태가 꽤 복잡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사가 심상치
않더라고요. 아, 지금쯤 한창 뉴스가 나올 때인데···.”
“형준아, TV 좀 틀어 봐라.”

형준은 벽면에 설치된 TV 를 틀어 8 시 뉴스로 채널을 바꾸었다.


마침 군산조선소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는 중이었다.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리포터가 묻자 군산 시민이 대답했다.

“이제 좀 나아질까 싶었는디 갑자기 요래 되부러서 너~무 실망스럽고 아쉽습니다.”


“보시다시피 군산 시민들은 참담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멈춰져 있던 조선소가 가동될 날만 꿈꿔
왔는데 다시 그 희망이 사그라질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MBS 뉴스 박종찬입니다.”

화면이 넘어가고 아나운서가 다음 꼭지를 이어갔다.

“이번에 현진물산이 인수 불가를 통보하면서 가장 실망한 사람 중 한 명은 바로 조재민 의원이었습니다. 군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군산조선소 매각에 가장 앞장섰던 조 의원을 만나봤습니다. 김원중 기자?”

조재민 의원이 아무도 없는 조선소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적막한 조선소를 바라보는 조재민 의원, 그는 지금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 화면은 인수 불가 사건이 터지기 전 촬영한 것이었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화면이 바뀌고 의원실에서 조재민 의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시민들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상황은 아닙니다.”


“현진물산이 다시 협상장에 앉을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가격이 문제라면 제가 직접 중재하겠습니다. 제가 중재해서 무진중공업과 현진물산 둘 다 협상장에 앉혀 놓도록
할 것입니다. 국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뉴스를 보면서 이세준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영웅놀이 하는 건가?”

마석대 부행장이 웃기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황이 재밌게 됐네요. 어지간한 정치인이면 감히 겁나서 저런 소리를 못할 텐데···. 아무래도 뭔가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저런 무식한 짓을 하려고. 형준아, 넌 아니?”
“협상이 마무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준은 이미 알고 있는 척 대답했지만 사실 그도 속으로는 당황하는 중이었다.


조재민 의원과 현진물산이 알아서 할 거라고 했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저렇게 무식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재민 의원에게 이 상황은 어쩌면 천재일우의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다.
이건 애초부터 기획된 것이니 결과는 정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영훈이 처음부터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말,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뭘 알고 있는 거야?”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지켜보고 있으면 됩니다. 딜이 깨지면 제가 책임질 겁니다.”

형준은 그제야 마음 편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주인이 정해지다(5) > 끝

< 주인이 정해지다(6) >


아버지 앞에서는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사실 형준은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조재민 의원과 영훈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이지만, 혹시 뭐 하나라도 잘못되면 자신은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준은 저녁도 거르고 곧장 블루문부터 찾았다.

“술은 그냥 깔아두고 일단 라면이나 두 개 좀 끓여와. 고춧가루 팍팍 넣어서.”


“알겠습니다.”

배부터 채우려는 생각에 술은 따지도 않고 라면부터 후루룩 해치우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강주현 전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식사했어요? 여기 라면 괜찮은데.”
“전 괜찮습니다.”
“하긴 나이도 있으신데 좋은 거 드셔야지.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했어요?”

강주현 전무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석대 부행장은 주로 쉴 때 골프를 즐겨 한다고 합니다. 출장을 가도 항상 골프채를 놓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골프광이군.”
“맞습니다. 그래서 마석대 부행장이 취임한 뒤 몇 번 골프모임을 가져볼까 합니다. 여자는 우연히 만나는 걸로
해서···. 일단 만나 보시겠습니까?”
“불러와요. 아, 사진만 보내줘요. 여기에 부르지는 말고.”

형준은 괜히 여자를 불렀다가 혹시나 영훈과 맞닥뜨릴까 싶어 얼른 말을 취소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엮은 다음에?”
“자연스럽게 관계를 진행 시킨 다음 증거를 잡아서···.”
“으음···.”

강 전무는 말을 하다가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의 형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식상해요. 너무 뻔하잖아. 솔직히 젊은 여자가 갑자기 접근하면 나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그
나이라면 더 그러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겠지만 젊은 여자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너무 뻔해요.”

형준은 자신에게 얼마 전 벌어졌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로 접근시켜 자신을 감시하게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한데 너무 비슷한 상황이라 이번
계획이 꼭 걸릴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 여자··· 그냥 용돈벌이 하는 거래요? 아니면 집이 좀 어렵나?”
“들어보니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이 길로 빠졌다고 합니다. 빚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럼 아예 대놓고 밀어줍시다.”
“네?”
“가족은 미국에 있고 혼자 외로울 거 아니야. 그냥 룸싸롱에 데리고 와서 붙여줘요. 어설프게 수작 부리느니
차라리 대놓고 술집 여자라고 하면 의심할 게 뭐 있겠어?”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아니, 사진을 찍거나 해서 망신을 줄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둡시다. 아예 정분나도록.”

강 전무는 형준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 그냥 옆에 계속 두자는 거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언제고 계속 써먹을 날이 올 테니까요. 대신 돈은 꽤


많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여자 돈 필요하다니까 오히려 잘 됐지. 그냥 용돈벌이나 하려는 여자는 중간에···.”

여기까지 말했을 때 문이 열리고 웨이터가 영훈을 안내하며 들어왔다.

“어? 이분은···?”
“어~ 인사해. 여기는 우리 회사 강주현 전무. 내가 최고로 믿는 사람이야. 그리고 여기는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
요즘에 거의 뭐 내 소울메이트나 다름없지.”

강주현 전무가 일어나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강주현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최영훈입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봐요.”
“아니야, 아니야. 강 전무랑 할 이야기 다 했어. 이제 그만 가봐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그렇게 강 전무가 나가자 영훈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웬일입니까? 술도 안 따고 여자도 없고?”


“인마, 상황이 이런데 내가 지금 술이 넘어가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오늘 내내 심장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무슨 엄살을 그렇게 떠십니까?”
“엄살이 아니라 다 된 계약을 엎겠다는데 내가 안 놀라겠냐고.”
“그래서 미리 연락드렸잖아요. 깨질 거니까 놀라지 말라고.”
“네 전화 받고 이미 놀랐어.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오늘 뉴스 보니까 아주 가관이던데. 진짜 조재민 의원
때문이야?”
“조 의원 때문이기도 하고 돈 때문이기도 합니다.”
“삼천억?”
“네.”
“하··· 그게 아까워서? 여기서 더 깎아도 기껏해야 천억에서 이천억인데?”
“이천억 마련하려면 현진건설이 가지고 있는 하남 땅을 팔아야 합니다. 지금이야 큰 가치가 없지만, 언제고
개발이 들어갈 땅이에요. 지금 팔면 헐값에 처분해야 합니다.”
“그게 아까웠다? 그래서 저렇게까지 했다고?”
“그럼 커미션 깎아줄 생각 있습니까?”
“그건···.”

역시나 형준이 말을 흐린다.

“상무님 생각해서 일을 키운 거예요. 저한테 고마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면 일단 협상장에 앉아서


커미션부터 칼을 댔을 걸요?”
“그건 알지···.”
“그거 안 하려고 조재민 의원을 움직이게 한 겁니다. 뭐,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건 뭔데?”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누구 하나는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일이 완전히 틀어지면 차기 총선을
생각해야 하는 여당도 불리해지죠. 그럼 결국 해결될 일인데 조재민 의원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해봤다는 거네?”
“시험이라고 하기는 그런데···.”
“그게 시험이지.”
“뭐, 그렇다고 치죠.”

조재민 의원의 사주를 알고 있기에 그가 앞으로 얼마나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으며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막말로 그가 그렇게 큰 정치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가 자신과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자신의 사주를 봐야 하는데 그건 이미 예전에 잊어버렸다.


더 정확히는 억지로 기억에서 지웠다고 하는 게 맞았다.
어쨌든 그렇기에 조 의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진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잘할 것 같아?”


“뉴스 보니까 생각보다 열심히 하던데요?”
“그렇긴 하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늦어도 일주일 안 갑니다. 그 전에 여론 뒤집을 테니까 가만히 지켜보세요.”
“그래야 해. 오늘 마석대 부행장이 왔어. 모레부터 출근한다고 하더라고. 씨발··· 이제는 날 보는 눈빛이
달라지셨어.”
“아버지요?”
“그래. 눈빛에서 적대감이 느껴져. 위기감이 드시는 것 같아. 저러다 진짜 어디 암살자라도 보내는 거 아닌가
싶다니까.”
“걱정이 과하십니다.”

과하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영훈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세준 부회장은 불타는 여름에 하늘 끝까지 치솟은 나무와 같은 사주를 타고났다.
그와 같은 사람이 일단 경쟁자라고 느끼면 다른 나무의 영양분을 혼자 다 섭취하듯 빨아들여 주변을 죽여 버린다.

물론 이건 이형준의 사주와도 비슷했다.


그 둘이 만났으니 불꽃이 튀지 않을 수 없다.
누구 하나는 한국을 떠야 이 싸움이 마무리될 게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어느 정도면 만족할 거야?”


“절반. 삼천억에서 서로 공평하게 절반씩만 양보하면 협상장에 앉을 수 있습니다.”
“뭘 다 정해놓고 협상장에 올라.”
“원래 이런 거 할 때는 미리 다 정해놓고 형식적으로만 하는 거 아닙니까?”
“누가 그래?”

영훈은 속으로 드라마랑 소설에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입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보통 다 그러던데요?”
“이건 다르지. 어쨌든 현진물산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겠어. 알고 나니까 나도 좀 마음이 놓이네. 술 한잔 하고
갈래?”
“약속 있습니다.”
“또 데이트? 이럴 거면 그냥 결혼해서 귀가를 해.”

형준의 미간이 확 찌푸려지자 영훈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루가 지나고 무진중공업 본사 사옥 앞으로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정문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찰칵! 찰칵!

“의원님, 한 말씀만 해주시죠.”


“정호균 회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신가요?”

세단에서 내린 조재민 의원은 달려드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저 ‘진심을 다해 설득해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전부 생중계가 되는 황당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응은 어때?”

둘만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 의원이 김시원 보좌관에게 물었다.

“어제 기사 댓글이 벌써 1 만 개가 넘게 달렸습니다. 다들 의원님께서 이번 인수 협상을 다시 돌려놓기를


바란다는 댓글이었습니다.”
“후··· 정 회장이 어떻게 나올지···.”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무작정 뻗댈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르지. 이 정도 기업의 총수면 남들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아.”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조 의원이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나 정호균입니다.”
“아이고, 회장님. 이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조재민 의원은 정 회장이 살짝 당황할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의원님께서도 곤란하시겠지요. 일단 앉으시죠.”

조 의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저도 그렇지만 회장님도 곤란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 너무 커졌지 않습니까. 서로 양보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 조선소는 우리 무진중공업의 미래였습니다. 사실상 눈 뜨고 빼앗기는 형국인데 그것도 헐값으로 팔라고 하면
우린 억울에서 어떻게 살겠어요?”
“그 미래를 지금까지 사실상 방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가격이 나올 수 없었겠지요. 그러니 조금
더 양보하시지요.”
정호균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3 백억은 우리가 양보하겠습니다. 8 천억. 그 이하는 안 됩니다.”

현진물산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이다.


조 의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회장님, 이 딜이 어그러지면 난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합니다.”


“의원님의 공약이라서 신경을 쓰시는 건 알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선거에 큰 영향은 없을 텐데요?”

고작 군산시장이 골인 지점이라면 그게 맞겠지만 조 의원이 바라보는 곳은 군산시장이 아니었다.


군산시장은 그저 경유지에 불과했다.

“일을 어렵게 만들고 계시는군요.”

정 회장은 잠시 조 의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로 빙빙 돌리지 맙시다. 이봐요, 조 의원님. 나 아버지 밑에서 30 년을 넘게


굴러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오. 살아남기 위해 형제들끼리 치열하게 싸워서 가진 게 바로 이 무진중공업인데 누가
내 걸 헐값으로 가져가려고 한단 말이오. 좋아. 회사를 경영하다가 선택을 잘못해 상황이 이
렇게 됐으니 내 잘못이 큰 건 인정 못 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 헐값에서 또 후려치려고 들면 내 자존심이 인정
못 하지. 설사 빤스 바람으로 쫓겨난다고 해도 이대로는 물러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소?”

조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리를 꼬면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전북대병원 건립사업이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토지보상 때문에 계속 연기되다가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인데···.”

정 회장의 눈빛이 흔들린다.


조 의원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곤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왠지 이번 인수협상이 잘 되면 전북대병원 건립도 탄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단 말이에요. 건립예산이 대략 1,800 억 정도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그냥
후려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거절하지 말아요. 이건 내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입니다. 이거 거절하면 당신네들 지금 나랑 한번
싸워보자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기업인이 정치인이랑 싸워서 득 될 거 있겠어요?”
“음···.”
“사흘 드립니다. 사흘이면 자존심 충분히 세웠을 테니까 협상장에 나오도록 하세요.”

조재민 의원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호균 회장이 따라 일어서자 그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말했다.

“바둑 좋아해요?”
“좀 둡니다.”
“궁하면 적에게 기대라 했습니다. 외로울 때는 같이 가야 살 수 있어요. 독불장군처럼 홀로 싸우면 언제고
쓰러집니다.”
“허허··· 잘 알겠습니다.”

조재민 의원은 그렇게 웃으며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 주인이 정해지다(6) > 끝

< 주인이 정해지다(7) >

조재민 의원이 말한 최종기한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조 의원은 이미 정 회장과 단독으로 만난 이후 기자들에게 사흘 안에 다시 협상을 시작할 거라고 선포했었다.
그렇게 되니 정호균 회장으로서는 당연히 협상장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정 회장은 일단 협상장에 올라가는 순간 자신들이 원하는 가격대를 고수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현진물산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호균 회장의 아들이자 무진건설기계를 경영하고 있는 정근호 사장은 계속해서 송은채 사장과의 만남을
시도했음에도 송 사장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보내고 협상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야 송 사장이 정 사장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크흠...”

그토록 원했던 송 사장과의 만남이지만 정근호 사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던 송 사장은 군산조선소 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젊은 남자 한 명을 불러 앉혔기
때문이다.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악수를 청하던 그 청년은 송 사장의 옆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어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보라는 식으로 있으니...
게다가 직급이 겨우 과장.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인 건지, 아니면 이 거대한 딜의 실무진이 정말 저 젊은 청년인 건지 감이 오지를
않았던 거다.

“아마 우리가 사장님을 무시해서 그러는게 아닌가 생각하실 것 같아요. 맞나요?”


“크흠...”

송 사장이 싱긋 웃으며 묻자 정 사장은 이번에도 헛기침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 최 과장이 직급이 과장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유능한데다가 우리 애와 약혼할 사이라서 직급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정 사장이 조금 놀란 눈빛으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요? 그럼 조선소 관련한 모든 일을 컨트롤한 사람이 이 친구입니까?”


“맞아요. 오로지 우리 최 과장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뼈대를 잡은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겠죠?”
“그렇다면야...”

정근호 사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 해봐야 서른 중반이 될까 싶어 보이는 친구가 정치인을 엮어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직접 찾아 오셨으니 하실 말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시죠.”

영훈이 말하자 정 사장은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며 입을 열었다.

“조재민 의원을 움직인게 현진물산이 맞나?”


“그럴리가요. 일개 기업이 현역 정치인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조재민 의원이 저러는 건 온전히 그 스스로의 판단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설마 우리가 조재민 의원을 뒤에서 조종했을 거라고 보십니까?”

영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자 그도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원하는 가격대가 있겠지? 얼마면 되는가?”


“8,500 억이면 많이 부담스럽기는 해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7,200 억만 가져라?”
“커미션 계산을 다시 해야 하니까 그보다는 조금 더 많겠네요.”
“안 돼. 받아들일 수 없어.”
“에이... 솔직히 내일 협상장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훈이 농을 치듯 말하자 정근호 사장은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어린놈이 사장인 자신에게 저런 식의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만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현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럼 제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원하는 가격대가 어떻게 되십니까?”
“...”
“8 천억 정도 생각하고 계시겠죠? 그럼 저희는 손 털고 포기하겠습니다.”

정 사장이 발끈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게 할 말인가?”
“엄밀히 말하면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 둘 다 가진다는 건 여러모로 모험적인 일입니다. 막말로
무진중공업에서도 군산조선소 안 돌리고 해주조선해양만 먹겠다고 지금껏 그 고생을 해온 거 아닙니까? 솔직히
8,500 억도 우리는 굉장히 무리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더 가지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손을 터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제가 틀린말 했나요?”
“...”

이번에도 정 사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


영훈은 그걸 보면서 역시 이 자리에 직접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두 사장의 만남에 영훈은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끼어들 직급도 아니었고 굳이 할 이야기도 없었다.
이야기를 한다고 해봤자 지금처럼 서로의 의견만 주구장창 내밀다 결론을 못 내리고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바뀐 건 들어오는 정 사장의 얼굴을 본 이후였다.
턱이 부실하고 광대가 약한 걸로 보아 말년에 고생을 할 상인데 지금 재벌의 신분이니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민희를 송 사장에게 보내 의중을 전달하고 자리에 참석하며 사주를 확인했는데 역시나 사주와 관상이
일치했다.

“우리는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가격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우리 현진물산의 입장입니다.”

고작 과장 주제에 사장 앞에서 회사의 입장이 이렇다고 결론을 지어 버리는데 옆에 앉은 송은채 사장은 별말을
하지 않는다.
정 사장은 처음 송 사장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어차피 결론은 아버지인 정호균 회장이 내릴 것이기에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잘 알겠어. 회사 잘 구경했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언제 또 보게되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그렇게 합시다.”

그는 그렇게 간단히 인사하고 회사를 빠져 나갔다.


송 사장은 그가 나가자 영훈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자리하고 싶었던 거야? 정 사장에 대해 알고 싶어서?”


“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무진중공업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어때 보였어?”
“전형적으로 아버지의 능력에 기대 사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
“네. 이성보다 감정에 지배당하는 성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 정도 직급에 있으면서 특별한 카리스마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는 크지만 눈빛에 힘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자신이 하는 말에 신뢰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주에 나타난 그의 성향을 방금 전 만나보며 눈에 띄었던 장면들과 엮어 대충 설명했다.


그 말이 그럴듯한지 송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 과장 말을 듣고 나니까 조금 그래보였던 것 같아. 무진그룹 사장단의 핵심 인물 치고는 조금 많이


어설퍼 보였다고 할까? 그럼 최 과장이 봤을 때 무진중공업은 정 회장이 물러나고 나서 힘들어질 것 같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부하직원들의 능력으로 회사가 성장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회사에 큰 위험이 닥치면 슬기롭게 헤쳐갈 능력이 없어 보이네요.”
“흐음...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수고는요. 몇 마디 안 했습니다.”

영훈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송 사장이 넌지시 말했다.

“오늘 봤겠지만 최 과장 직급이 그래서 움직이는데 문제가 많이 있을 수 있잖아.”


“네? 아, 뭐...”
“우리 연희랑 결혼할 생각 맞지?”
갑자기 던진 돌직구에 순간 영훈이 멈칫했지만 이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볍게 만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 최 과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최 과장도 알겠지만 회사가 커지다보니까 이제
온갖 곳에서 우리 연희를 만나고 싶어해. 연희 나이도 그렇고 이제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거든?”
“네...”
“최 과장은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내가 그냥 날을 잡을까 하는데 어때?”

결혼이라니...
산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이제 여자와 연애도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긴 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학력도 보잘 것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신 자신에게 딸을 내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희와 연애를 하면서도 어쩌면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렇게 송 사장이 직접 날짜를
거론하니 기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직 연희씨 의견을 듣지도 못했고 프로포즈도 못했는데요?”


“프로포즈야 나중에 둘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고 연희는 반대하지 않을 거야. 내 딸인데 내가 걔 마음을 모르겠어?
괜찮지?”
“네? 네. 괜찮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네.”

영훈이 사장실에서 나오자 연희가 다가왔다.

“정근호 사장 아까 나갔는데 사장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요?”


“어... 사장님이 우리 둘 날짜를 잡겠다고 하시던데요?”
“어머!”

연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영훈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쑥 들어왔다.


그녀는 문을 닫고 영훈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당신 의견도 중요하고 아직 프로포즈도 못했다고...”
“그래서 안 된다고 했어요?”
쌍심지를 치켜뜨는 그녀를 보며 영훈히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다고 했어요. 좋다고.”


“진짜요?”

연희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영훈에게 와락 안겼다.


영훈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프로포즈도 못 했는데...”


“기대하고 있을게요. 아, 참고로 난 사람들 너무 많이 모아놓고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딱 우리 둘이만.
너무 시끄러운 것도 싫고.”
“아...”
“혹시나 센스가 없을까봐 하는 말인데 반지는 좀 좋은 곳에서 해줬으면 좋겠어요. 브랜드는... 까르띠에는 조금
흔하니까 반 클리프 아펠이 좋겠어요.”
“그러면 내가 뭘 사는지 다 알잖아요?”
“더 기대되는 맛이 있을 것 같아요. 아! 미리 전날에 얘기해줬으면 좋겠어요. 구두랑 머리도 오늘처럼 내가 혼자
하고 나올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장소는 호텔보다는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 어때요? 호텔은 너무 뻔하고 지루해.
차라리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리조트가 좋겠어요.”

보아하니 예전부터 그녀가 꿈꾸던 로망이 있었나보다.


황당하긴 했지만 차라리 이렇게 잘 알려주면 혼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네요.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

붉은 노을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아름다운 풍경을 생각하니 괜히 영훈도 기분이 설레어 왔다.

하루 뒤,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을 비롯한 협상 관계자들은 인수금액을 확정짓고 계약을 체결했다.

[현진물산, 군산조선소 인수 계약 체결]

기사에 쓰인 사진은 조재민 의원이 현진물산 송은채 사장과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이 악수할 때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려놓은 모습이었는데 이게 꽤 임팩트가 있었는지 한동안 그 사진이 계속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순간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른 조재민 의원은 자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군산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흥분한 김시원 보좌관이 스케줄을 줄줄이 읊어 내렸다.

“내일 오전에 전북의원들과 조찬 간담회가 있고 군산조선소 전 노동자들과 오찬 모임 있습니다. 이 두 개는


빠지면 안 될 스케줄입니다. 그리고 각종 인터뷰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JWBC 8 시 뉴스 오늘의
초대석에 의원님을 초청했구요.”
“아, 그래? 언제?”
“모레 생방입니다.”
“가야지.”

전국 단위 종편 8 시 뉴스에 단독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기회임을 모르지 않았다.


김시원 보좌관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인터넷에 의원님에 대한 칭찬이 가득합니다. 아직 조선소도 안 돌아가는데 벌써 군산 부동산 가격이 들썩인다는


소식도 들리구요.”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게 꼭 나쁜 게 아니야. 그만큼 사람이 몰린다는 거니까. 도시에 활력이 있어야 경제가
살아나는 거지.”
“맞습니다.”
“너도 신나지?”
“네. 하루에 세 시간밖에 못 자지만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활력이 돕니다.”
“흐흐... 나도 그렇다.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아. 피가 도는 게 느껴져.”
“정말 현진물산과 좋은 관계를 맺게된 게 신의 한 수가 된 것 같습니다.”

앞자리에서 실실 웃는 보좌관을 보며 조재민 의원이 말했다.

“항상 말 조심하고 밖에서 언급하지 않도록 해.”


“아, 네. 죄송합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야 괜찮지만 항상 주의해야 실수를 하지 않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보좌관을 보며 조 의원은 싱긋 웃었다.


그때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별다른 미사여구 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조재민 의원은 흐뭇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주인이 정해지다(7) > 끝

< 줄을 타려는 사람들(1) >

극심한 추위를 자랑하던 1 월이 가고 2 월에서도 절반이 지나갔다.


군산조선소 인수가 확정되고 해주조선해양 인수절차에 본격 착수하게 되면서 3 월 정기인사에 현진물산 전 직원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당연했다.
직원들 중 요 몇 달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련의 인수들이 누구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핵심 임원 몇몇에 불과했다.
이번에 이루어질 정기인사 결과는 그간 비밀리에 이루어진 인수 릴레이를 주도적으로 지휘한 사람이 외부에
드러나는 지표가 될 게 확실했다.
그런데 정기인사 전에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현재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송은채 사장의 외동딸이 사내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곧 현진물산과 현진건설, 현진관광, 그리고 해주조선해양의 차기 주인이 될 사람이 재벌이 아닌 일반
직장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안 그래도 정기인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직원들은 비서실에서 들려오는 소문까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테나들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당연히 이같은 분위기를 영훈이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신경을 쓰지 않을뿐.

“부사장은 부담스러운가?”

신경 쓰는 건 직원들이 아니라 송은채 사장의 부담스러운 관심 정도일 거다.

“제 나이에 부사장까지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예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도 않거든. 젊은 벤처 CEO 가 계속
나와주고 있고 외국이야 그런 CEO 들이 엄청난 실적을 이끌어 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내가 사장에
올라있기는 해도 실질적으로 회사를 움직이는 게 최 과장이라는 거 이미 핵심 임원들은 알고 있
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
“솔직히 연희와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나도 부사장 자리에 앉힐 생각은 없었어.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남에게 내 회사를 맡긴다는 게 아무래도 그러니까. 이제 가족이 될 거잖아?”
“그래도 부사장은 너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렇게 나올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러네? 원래 그렇게 욕심이
없는 거야?”
“이건 욕심을 떠나 아직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뭐... 그렇다면 좋아. 기조실 강노식 실장을 부사장으로 올리고 거기 맡는 건 어때? 그 정도는 괜찮지?”
“네?”
“이건 반대하지 마. 이 정도는 보기 나쁘지도 않으니까.”

영훈도 이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의 반발이 있지 않을까요?”


“연희랑 결혼할 테고 지금까지 일련의 인수 협상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면 다들 인정할거야.”
“후... 알겠습니다.”

송은채 사장은 싱긋 웃었다.

“자꾸 그렇게 싫어하니까 더 주고 싶은 거 알아?”


“진짜 부담스럽긴 하거든요.”

단순히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과 결정을 내린다는 게 큰 차이가 난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모든 결정의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부담스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도 난 최 과장이 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봐.”
“네.”

영훈이 사장실에서 나오자 민희가 다가와 말했다.

“인사과장님이 찾으세요.”
“민홍기 과장님이요?”
“네. 올라오시라고 할까요?”
“아니에요. 과장님이 찾는데 내가 가야죠.”

인사과에 내려가니 민 과장이 영훈을 조용한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블라인드로 차단까지 하고 문까지 잠근 그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부사장 자리로 올라간다는 말 들었습니다.”

말투가 바뀌었다.

“허...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네.”
“하아... 빨리도 결정하셨네. 부사장 아니고 기조실장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도 알겠다고 하셨구요.”
민홍기 과장이 약간 놀란 눈빛이 되었다.

“그럼 강노식 실장님이 부사장님이 되시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직 과장이니까 말 놔주세요. 그게 편합니다.”
“그러지. 그런데 전혀 모르고 있었나 봐?”
“방금 듣고 왔습니다.”
“나도 많이 놀랐어. 그간 이루어진 인수협상의 핵심 키맨으로 어떻게 활약했는지 사장님께 직접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거든.”
“뭐 그거야... 그런데 어떤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사장님께서 이번 정기인사에 대해서 이미 거의 결정을 내리셨어. 결제만 내리면 될 정도였는데...”
“그런데요?”

민 과장은 잠시 고민하면서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본래 우유부단한 성격인 걸 알기에 천천히 기다리자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현진건설의 앞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현진건설이요?”
“그래.”

영훈은 그제야 민홍기 과장의 의도를 알아챘다.

“인사과장에서 더 나아가고 싶으시군요?”


“아니 뭐...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 나야 지금까지 항상 시키는 일만 해왔으니까. 현진건설이 앞으로
상당히 커질 거라는 소문이 들리고 있어. 그래서 건설을 바라보는 경영진의 의도가 궁금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사장이 될거라고 생각한 이가 영훈이다.


당연히 그가 말하는 핵심 경영진이 영훈이라는 것인데 이를 듣는 영훈의 기분은 참 묘했다.
처음 입사할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일반 직장인처럼 무난하게 섞여 살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 소문이 맞을 겁니다.”
“그런가?”
“네.”

그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무리 건설이 잘 나간다고 해도 영훈은 그를 현진건설의 핵심 경영진에 앉힐 생각이 없었다.
그의 운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노형석 과장 만큼의 운을 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배짱이 두둑하지도
못했으며 우유부단했다.
아마 경영지원본부장 정도가 그가 나아갈 수 있는 최고 직급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니 그 정도만 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나을 테니 그로서는 굳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의견 고마워.”
“이제 정기인사가 끝나면 현진건설에서 뵙는 건가요?”
“사장님께서 허락 하셔야지.”
“그렇군요.”
“아, 이건 내 선물이야. 나중에 한 번 써먹을 데가 있을 거야.”
그는 작은 USB 를 건네고는 웃으며 자리를 떴다.
영훈은 그 USB 를 가만히 주머니에 넣었다.
과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4 평 짜리 작은 방의 한 면에는 여러 신령상들과 그림이 나열되어 있다.


얼핏보면 조잡해 보이지만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그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앞에 과일 몇 가지와 쌀, 그리고 몇 개의 초로 분위기를 잔뜩 잡는다.
이 정도만 해도 ‘범상치 않은 곳이구나’하는데 자리에 앉아 한쪽 다리를 세우고 부채를 잡은 팔을 그 위에 척
올려놓은 채 번들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면 자연히 공손해지기 마련이다.
한주연이 바로 그렇다.
평소에는 항상 눈을 아래로 깔고 세상 냉정하게 사리를 분별할 것 같던 그녀는 다소곳하게 앉아 눈앞의 점쟁이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자못 긴장하고 있었다.

“거 봐. 내 말 맞지?”
“네. 제가 생각해도 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 쉽게 위기를 벗어나는 것
같아요.”
“말했잖아. 김태민이라는 이 청년은 앞길이 탄탄대로야. 산사태가 나도 김태민이 있는 곳은 돌이 비껴 굴러가.
홍수가 나도 딱 김태민이 고층 빌딩에 있을 때 물이 밀려 들어온다고. 어디 내 말이 틀린 것 봤어?”

머리가 길어 뒤로 질끈 묶은 장년의 남자는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도사님 말이 맞았어요.”

한주연은 본래 사주나 점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위에게 시간을 내주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니, 그런 것 따위에 휘둘리는 사람을 보면서 한심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평소 그녀는 사기를 치는 사람도 나쁘지만 당하는 사람 역시 바보라고 생각할 정도로 차가운 여자였으니 그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생각이 바뀌게 된 건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부터였다.
그 후 그녀의 인생은 변했고 그녀는 그 누구보다 이곳 연화당 명우도사의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럼 뭐 하러 왔어? 내 말대로 됐으면 됐지.”

그녀가 명우도사의 말을 신뢰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소름끼치게 잘 들어맞는 그의 말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어설픈 점쟁이들처럼 무작정 굿이나 부적을 권하지 않는다는 것도 컸다.
당시 딱 한 번의 굿과 부적 이후 그는 여러번 찾아오는 그녀에게 더 이상 굿이나 부적을 권하지 않았고 만날 때도
특별히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30 만 원만 받고 보냈다.
호구가 호구가 아니게 될 때는 본인이 호구였다고 자각할 때라던가?
명우도사는 할 말 다 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으니 한주연이 신뢰하는 거였다.

“뉴스 보셨죠?”
“무슨 뉴스?”
“현진물산이 현진중공업에서 완전히 계열사 분리하는데 성공했어요. 같은 ‘현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도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됐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 낭군님 회사가 쪼그라들었다고?”
“네.”
“흐음...”

명우도사는 눈을 딱 감고 혼자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한참 뒤 그가 눈을 뜨더니 대뜸 혀부터 차기 시작했다.

“쯧쯧쯧...”
“왜 그러세요?”
“잘 나가는 남자 앞길에서 살살 꼬리를 흔들어대는 여우 하나가 나타나서 홀랑 가져가버리고 있네.”

한주연은 그 여우가 연희라고 생각했다.

“여기 이 여자가 바로 태민 씨 사촌인 임연희예요. 따로 떨어져나간 현진물산 외동딸이구요. 좀 봐주세요.”

주연은 핸드폰을 꺼내 연희 사진을 보여주었다.


명우도사는 입을 툭 내밀고 연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말했다.

“궁합이 안 좋네. 궁합이 안 좋아.”


“네? 궁합이요? 둘은 사촌인데...”
“남자 여자만 궁합이 있는 줄 알아? 부모자식간에도 합이 있고 형제간에도 합이 있는 거야. 애정이 있고
없고와는 다른 문제야.”
“네...”
“어? 잠깐만...”

그는 또 눈을 감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면서 말했다.

“신령님이 그러는데 이 여자는 여우가 아니라 용이라고 하시네?”


“네?”
“원래는 이무기에 불과했는데 운 좋게 여의주를 물었어. 그래서 용이 되어버린 거야. 김태민은 죽어도 이 여자를
못 이길걸?”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한주연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그녀는 굿이나 부적을 써야 하나 생각했는데 명우도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어떻게 하긴? 여의주를 뺏어야지.”


“여의주가 어떤 건데요?”
“나도 모르지. 신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알 수가 있나.”
“하아...”

그녀가 낙담할 때 명우도사가 툭 내뱉었다.

“정말 알고 싶어?”
“네.”
“그럼 나흘 뒤에 와. 신령님께 기도를 올려야 하니까.”
“기도요?”
“신령님께 방도를 물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안 들어주시니까 치성을 올려야지.”
“그럼 얼마나 필요할까요?”
“5 천.”

아무리 재벌가의 그녀라고 하지만 꽤 많은 금액이었다.


백화점에서 명품을 팍팍 지르는 거야 법인카드로 써 제끼는 거라 한달에 억단위를 질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현금으로 나가야 할 돈이라 오로지 자신의 돈을 써야만 했기에 5 천만 원이라는 돈이 결코
적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명우도사는 싫으면 관두라는 투로 말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도 기도를 올린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신령님이 기똥찬 대답을 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 아니야. 원하는 대답을 못 들을 수도 있으니까 괜히 부담스러우면 하지 마. 그냥 이대로 만족하고 살아도
가진건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을 거야.”
“그대로 가진 것만 만족해서 살 것 같았으면 김태민이라는 남자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뭐 그렇지. 내가 골라준 남자니까 잘 알지.”
“솔직히 남자를 잘 못 골라준 도사님의 책임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 깎자고? 그때 당시에는 이 남자 미래는 초원에서 보는 하늘처럼 맑고 탁 트였었어. 거리낄 게 없었거든.
뭐, 억울한 마음이 있는 건 이해하겠고 나도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기도비는 깎을 수 없어. 복비는 깎는 게
아니야.”

결국 그녀는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요. 드릴게요.”
“이해해. 나도 사흘간 손님 못 받고 예약한 손님들 다 뒤로 미뤄서 해주는 거야. 5 천이 비싼 게 아니야.”
“알겠으니까 잘 좀 부탁드릴게요. 전에 보내드렸던 계좌 거기로 보내면 될까요?”
“맞아. 나흘 뒤 이 시간에 오라고.”
“알겠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한주연이 방을 나가자 명우도사는 그녀가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적당히 해먹으려고 할 것이지. 욕심이 그득하구나.”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문밖을 향해 외쳤다.

“다음 손님 모셔!”

기도는 오늘 손님을 다 받고 난 이후에 할 생각이었다.


그는 죽은 마누라만 있었으면 혼자서 이리 힘들지도 않았을 거라고 투덜거리면서 부채를 흔들며 다음 손님을
받았다.

< 줄을 타려는 사람들(1) > 끝


< 줄을 타려는 사람들(2) >

처음에 민홍기 과장이 USB 를 주었을 때 누군가의 비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그렇게 배짱 있고 과감한 움직임을 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무사안일주의가 제일인 사람일 텐데 누군가의 비리를 담은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다른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는 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안 됐다.
그래서 골똘히 생각하며 비서실로 올라오니 연희가 잔뜩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요?”
“잠깐 인사과에 좀 다녀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엄마···. 아니, 사장님이랑 무슨 이야기했어요?”
“표정 보니까 이미 다 아는 것 같은데?”

그녀는 입술을 씰룩이다가 못마땅한 듯 툭 내뱉었다.

“그럴 때는 좀 자랑도 하면서 살아요. 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해요? 남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방방
뛰어다니다가 온갖 곳에 전화를 해댈 텐데?”
“전화할 곳도 없습니다.”

영훈의 말에 연희가 조금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알아요.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럼 오늘 끝나고 회식 어때요? 우리끼리라도 축하해야지. 내가 쏠게요. 대신 메뉴는 내가 고를게요. 영훈 씨
입맛은 너무 아저씨야.”
“그렇게 합시다.”

이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최영훈 과장님, 과장님의 말씀을 듣고 오랜 시간 고민을 했습니다만 아직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이라 그런 듯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살던 곳의 주소를 찾아냈습니다. 언제 부산에 한
번 들르시지요.]

부산 백병원의 노석춘 병원장이었다.


그때 병원을 나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알려주었지만 역시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았던 곳의 주소를 찾았다니···.
아무래도 부산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뭔데 그래요?”
“미안해요. 전에 말했죠? 부산 백병원 노석춘 원장에게 부탁 하나 했다는 거.”
“그럼요. 기억하고 있어요.”
“주소를 찾았다고 해요.”
“어머! 그럼 가야죠.”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일 끝나고 출발하면 밤에 도착할 테니 내일 오전에 노 병원장을 만나면 될 것 같아요.”
“지금 출발하지 그래요?”
“병원장님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일하다 중간에 빠져야 할 정도로 급하지는 않아요. 다른 직원들은 반차
써가면서 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나갈 수는 없죠.”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USB 를 컴퓨터에 꽂았다.


연희가 옆자리에 앉더니 물었다.

“그건 뭐예요?”
“음··· 일단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그렇게만 말해주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USB 에 들어있는 파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목도 점 하나 찍혀 있는 그 한글파일을 클릭하니 꽤 흥미로운 내용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회사 임직원들을 주요 인맥으로 분류해 놓은 것도 흥미로웠고 누가 누구의 경조사를 어떻게 챙겼는지에 관한
내용도 적혀있었다.

현진물산 직원들만이 아니라 현진중공업을 비롯한 계열사 일부 임직원들에 관한 내용도 적혀있었다.


불법적인 내용을 적은 게 아니라 그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뒀다고 보면 좋았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꽤 중요한 내용일 수도 있었다.

민홍기 과장이 이걸 전해주기 전에 아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인사과장으로 회사 생활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절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평소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는데 회사가 커지면서 시야가 확장됐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건 꽤 유용할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연희가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누가 정리해서 넘겨준 거요.”


“당신이 요청한 거예요?”
“아니요. 그냥 주더라고요. 정기인사를 앞두고 있어서 다들 목이 간질간질 한가 봅니다.”
“우와··· 이제 진짜 회사 실세가 됐네요. 대단해요.”

그녀는 진심으로 뿌듯한 얼굴이었다.

“글쎄요. 솔직히 아직도 이게 현실인가 싶어요. 사람 구실이나 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풉! 아마 고승현 상무님이 방금 영훈 씨가 하는 말을 들었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을걸요? 고 상무님은
거의 영훈 씨를 괴물 보듯이 생각하는 거 알죠?”

영훈은 그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때, 민희가 전화기를 붙잡고 다가왔다.

“과장님, BS 엔터테인먼트에서 연락이 왔어요.”


“네? 거기가 뭐하는 곳인데요?”
“배우이자 가수인 강도현 소속사예요.”
“거기서 왜요?”
“전에 Nodri Clare 행사장에 찾아와서 전속모델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헤어졌는데 우리랑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거든요.”
“노형석 과장님이 아니고요?”
“원래 그랬는데 그쪽에서 노 과장님보다 저랑 대화하기를 원했어요. 과장님이 전에 노 과장님을 전면에 내세우면
안 된다고 하셔서 대화는 제가 하고 업무처리는 영업팀에서 처리하는 방향으로 하고 있었고요.”
“아··· 잘하셨네요. 그런데요?”
“전속모델 계약 건으로 미팅을 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가보세요. 어차피 민희 씨가 주도한 건이니 마무리 지어야죠. 그리고 앞으로 Nodri Clare 건에 관해서는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하나하나 세부적인 건 보고하실 필요 없구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요.”
“네, 알겠습니다.”

민희는 밝아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연희는 영훈에게 물었다.

“민희 씨를 계속 비서실에 둘 거예요?”


“안 그래도 내가 기조실로 발령 나면 데려갈까 생각 중입니다. 아, 당신도 같이 갈 거죠?”

연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바늘이 가면 실도 따라가야죠. 히히··· 그리고 부산에 갈 때 같이 가요. 혹시 불편하면···.”


“아니에요. 같이 갑시다.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불안하거든요.”

아까 노 병원장에게서 문자를 받고부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요.”
“같이 가준다니까 내가 고맙죠.”

영훈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최영훈 과장이 자신에게 업무를 맡겼다.


민희는 뛰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오늘도 맡은 업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 빠르게 영업팀에서 업무
자료를 받아왔다.
현재 비서실에서 홍승대 비서실장과 최영훈 과장을 제외하면 가장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당연히 이번 정기인사에 관한 내용을 듣기 싫어도 어느 정도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최영훈 과장이 이번 정기인사 때 잘하면 부사장까지 승진할 수도 있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못해도 상무급 이상은 될 테고 그의 줄을 타고 계속 능력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한계가 분명한 비서실 직원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게 분명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요즘 너무 힘들다. 네가 없는 옆자리, 너의 향수 냄새, 네가 해주었던 김치찌개, 그리고 너와 같이 걷던 길...


너 없는 내 인생이 이렇게 쓸쓸하고 외로울 줄은 몰랐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흥! 지랄을 하세요, 아주.”

민희는 핸드폰으로 온 문자를 다 보지도 않고 욕설을 하며 바로 지웠다.


전 남친에게서 온 문자.
아마 예전이었다면 저 문자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문자가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지나간 사랑이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고 그가 했던 말들이 전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머리가 깨끗하게 포맷된 기분이었다.

“나가는 거야?”

같은 비서실 직원인 강소연 대리가 물었다.


직급은 자신보다 훨씬 높은 선배였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비서실에서 그녀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민희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온갖 험담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걸.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전 남친의 애절한 문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깟 험담이 신경 쓰일까.

“네.”
“회사 들렀다가 퇴근해야 하는 거 알지?”

아마 자신이 일을 핑계로 회사를 나가는 것 역시 못마땅해할 게 분명하다.

“그럼요. 아마 5 시 전에는 들어올 것 같아요. 혹시 더 늦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회사 들렀다가 일 정리하고


퇴근할 생각이에요.”
“눈치 많이 보네?”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영업팀에 결과 전해줘야 하거든요.”

강소연 대리가 눈살을 찌푸린다.

“이봐, 김민희 씨.”


“네?”
“요즘 사장님이랑 최 과장님한테 딱 붙어서 여우짓 하는 거 아는데 적당히 해. 누구는 그런 짓 못 해서 안 하는
줄 알아? 최 과장님이 일 좀 시키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해요. 그럼 저 가봐도 되죠? 늦게 출발하면 최 과장님이 시킨 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가 봐.”
“네, 다녀올게요.”

민희는 강소연 대리의 나무람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죽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게 아니라 실제 강소연 대리의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런 자신을 신기해하며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움직이는데, 갑자기 중형 세단 하나가 딱 와서
선다.
창문이 스르륵 열리고는 누가 말을 걸어왔다.

“비서실 김민희 씨?”

민희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부른 사람을 살피곤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푸근한 덩치에 큰 머리를 더 크게 보이게 하는 곱슬머리는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게 했다.

바로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


스카이 출신의 엘리트로 지금은 상무가 된 고승현과 입사 동기인 사람이다.
어딜 가나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민희도 잘 알지 못했다.
비서실에 있으니 주요 임직원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어도 막상 대면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지환 부장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바쁜가?”
“네? 아, 네···. 청담동에 급히 가야 해서요.”
“그래? 잘됐네. 나도 나가는 길이었는데.”

여기까지 오면 민희도 그가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거절하려고 해도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아니야. 택시 위험하지. 마침 나도 그쪽으로 가야 하는 길이었어. 타.”
“네··· 그럼···.”

민희가 조수석에 타 짧은 치마를 입은 다리를 코트로 가리는데 오 부장이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오해할까 하는 말인데 난 민희 씨한테 이상한 수작 부리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나 우리집에 있는 토끼 같은


새끼들이랑 여우 같은 마누라 엄청 사랑하거든.”
“아··· 그런 오해 안 했어요.”
“우크라이나 일 때문에 사장실 올라갔을 때 보고 처음인가?”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 갑자기 타라고 해서 놀랐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닌데 민희 씨가 딱 나오니까 안 부를 수가 없더라고.”
“네? 왜···요?”
“민희 씨가 궁금해서. 아, 이 말도 오해하지 마. 개인적인, 사적인 감정으로 궁금하다는 게 아니라 요새
영업팀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 노드리 클··· 뭐더라? 하여튼 그 브랜드 있잖아?”
“네.”
“그거 비서실에서 움직인다며? 그리고 민희 씨가 노형석 과장 누르고 직접 컨트롤 한다던데? 맞아?”

아마 예전이었다면 어쩔 줄 몰라 했을 거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진실을 말해야 할지, 거짓으로 회피하고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건지 말이다.
그런데 오지환 부장의 생각을 알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걸 느꼈다.

“비서실에서 관여하는 건 맞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은 죄송하지만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민희의 답변이 의외였는지 오지환 부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계속 운전하면서 말했다.

“대답이 묘하네? 회사 기밀사항이었어, 이게?”


“기밀인지 아닌지 제가 판단할 수 없어서요. 궁금하시면 직접 비서실장님께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민희 씨 강단 있네?”
“감사합니다.”
“난 민희 씨처럼 강단 있는 사람이 좋아. 아, 이것도 오해하지 마.”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는 전제로 말하는 거지. 본인이 해도 되는 말, 아닌 말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은
질색이거든. 우리 친하게 지내자고.”

오지환 부장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친하게 지내자.

“그 말도 오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업무적으로 말이야.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해도 좋아.”
“어떤 부탁이라도요?”

민희의 도발적인 물음에 잠시 놀란 눈빛이던 오 부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사적인 부탁만 아니라면 말이야. 여우 같은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풉! 알겠어요. 혹시나 필요한 일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민희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잡았다.


회사에서 주목하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실제로 느껴지고 있었다.

< 줄을 타려는 사람들(2) > 끝

< 줄을 타려는 사람들(3) >

그 시각, 군산 앞바다에 위치한 횟집 벽란도에는 조재민 의원과 이형준 상무가 회를 곁들이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선거운동 시작하셨는데 술 드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조재민 의원이 입은 주황색 점퍼에는 여당을 뜻하는 기호 1 번과 이름이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괜찮아요. 딱 두 잔만 마실 거니까.”
“왜 하필 두 잔입니까?”
“이번 협상에 큰 공헌을 세운 이형준 상무가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한 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한 잔만
마시면 사람이 정이 없잖아. 세 잔을 마시면 얼굴이 달라지니까 딱 두 잔이 적당해요.”
“그래도 두 잔이라도 같이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군산은 요즘 어떻습니까?”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지요.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마무리되면 이제 곧 조선소가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니
부동산이 벌써부터 들썩거립니다.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했던 기술자들이 기존에 유지되고 있던 노조에 가입하려고
엄청나게 전화를 한다고 해요.”
“다행입니다.”
“다행이긴 한데... 요게 잘 다뤄야지, 안 그러면 말썽이 될 수도 있어요. 기존에 일했던 인원 전부 고용하기는
쉽지 않을 테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많을 테니 또 여러 가지 소리가 나올 텐데 이게 참 어렵단 말이지요.”

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선거보다 그게 더 어려우시겠습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사실 난 지금 선거운동 한다고 나가서 시민들과 악수하고 뭐 이럴 필요가
없어요. 이제 군산 유권자들 중에서 내 얼굴 모르는 사람 몇 없으니까. 시장이나 시내 돌아다니면서 악수하면
다들 그래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군산조선소 제대로 해결하라고. 인수가 결정되고 나서도
그럽니다. 여기 시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라는 말이군요.”
“그래요. 조선소는 돌아갈 테지만 해주조선해양이 현진물산에 인수되고 나서도 난 여기서 계속 현진물산,
해주조선해양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용률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게... 아주 골치가 아파요.”
“그래도 잘 해내셨지 않습니까. 솔직히 전 의원님께서 무진중공업 정 회장을 설득한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조재민 의원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양반이 공짜로 양보했겠어요? 내가 전북대병원 건설 맡긴다고 하니까 억지로 양보하는 척한 게지.”

이 이야기는 형준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눈을 크게 떴다.

“그랬습니까? 공사 규모가...?”
“대략 1,800 억 정도가 되는 걸로 알아요. 그러니 계산이 섰겠지. 무진중공업에서 손해본 거 무진건설이 만회할
걸 생각하면서 위안 삼지 않았다면 그 양반이 쉽게 양보했을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상당히 우려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쉽게 협상장에 나타나서 저도
놀랐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많이 뛰었지만 신영은행도 고생했어요.”
“우리가 무슨 한 일이 있겠습니까. 전부 의원님 덕분에 손 안 대고 코 풀어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나 혼자서 다 하려고 했으면 여론이 쉽게 움직였겠어요? 국내 손꼽히는 대형은행에서 협상을 이끌어 내려고
했으니까 일이 수월했지.”

형준은 계속 얼굴에 금칠을 해대는 조 의원을 보며 뭔가 바라는 게 있음을 알아챘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아까도 말했지만 군산조선소 인수가 확정되긴 했어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였어요. 그중에 가장
급한 게 바로 우리 시민들 경제사정이지.”
“그렇겠죠.”
“장사해본 적 있어요?”
“없습니다.”

재벌 3 세 장자로 태어났는데 장사를 해봤을 리가.

“우리 어머니가 우리 삼형제를 아버지도 없이 혼자서 키우셨어요. 음식 만드는 재주가 있으셨는지 곰탕을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됐지요. 그때 어머니는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싶어 돈을 모아 좁은 가게를 넘기고 큰
곳으로 옮기셨지. 그런데 웃기게도 큰 곳으로 옮겨서 장사를 하니 희한하게 손님이 줄어들
기 시작했던 말이오. 참 이상도 하지.”
“...”
“매달 들어와야 할 돈이 줄어들고 빚은 늘어만 갔지요. 그렇게 한 삼 년에서 사 년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그만
병으로 누우셨어요. 하루하루가 고통이셨던 게지. 진짜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형님께서 어머니에게 음식을
배우고 가게를 다시 일으키셨어요. 형님이 가게를 일으켜서 내 학비를 대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요.”
“그렇군요.”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하다가 지금까지 일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가정은 굉장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테지요.
그대가 좀 도와줬으면 해요.”

긴 썰을 풀어대는 걸 보면서 대략 무슨 부탁을 할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도와드리고 싶지만...”
“무조건적으로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적어도 군산조선소에 다시 근무하게 될 사람들은 기존 대출이 있어도
추가로 저리 대출을 지원해줬으면 좋겠어요.”

기존에 대출이 없는 사람이라면야 취직을 한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는 게 뭐가 문제일까.


물론 신용대출이라는 것도 1 금융권에서는 그 벽이 상당히 높긴 하지만 이런 특수상황에서는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문제는 기존에 대출이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추가 대출을 해주는 거였다.
아마 담보도 없을 테고 그저 군산조선소에 입사한 것으로 추가 대출이 나가야 한다는 것일 텐데 그렇게 되면
은행에서 상당한 부담을 져야 한다.
만약 군산조선소를 운영하게 될 해주조선해양이 무진중공업처럼 큰 위기를 겪어 직원들을 감축하게 된다거나 다시
조선소 가동을 중단하게 되면 그 엄청난 추가 대출이 고스란히 손해로 돌아올 거다.
형준은 고심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안 된다는 말이군요?”
“현진물산 측의 이번 인수 때문에 우리가 지원해야 할 금액이 조 단위입니다. 기업금융도 아니고 이 정도 규모의
가계대출이 나가게 되면 위험부담이 엄청납니다.”

조 의원은 두 번째 술을 잔을 따르고는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당신들 은행가라는 사람들은 말이야. 사람을 숫자로 보는 경향이 있어.”

말투가 달라졌다.
형준은 긴장했고 조 의원은 말을 이었다.

“한때 카드사태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신용불량자 때문에 겁먹고 있는 건 아는데 그 때 이후 지금은


가계대출에 대한 연체율이 극히 낮은 걸로 알아. 맞나?”
“그렇기는 하지만...”
“1 금융이 그렇게 벽을 세우니까 사람들이 케이블 광고에 나오는 러쉬, 산와 따위의 사금융을 쓰는 거지. 그
사람들이라고 이자율이 높은 거 모르겠나? 한번 쓰면 신용등급 떨어지는 거 모르겠어? 인생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효율적으로 살아지던가? 잘 다니던 회사에서 짤렸는데 큰돈이 들어가야 하면? 집주인
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면? 집에 크게 아픈 사람이 생기면? 그리고 그게 하필 가장이면?”
“...”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네는 인생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드라마라고 생각하겠지만 자네 주변의
엑스트라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야. 그 고통을 가지고 숫자로 판단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이지?”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만약 일반적인 정치인의 부탁이었으면 거절하는 게 맞다.
문제는 하필 조재민 의원의 부탁이라는 데 있었다.
조재민 의원은 최영훈 과장의 픽이다.
최영훈 과장이 찍은 정치인과 척을 진다?
페널티 박스까지 공을 잘 끌고 와 놓고 골문 앞에서 헛발질을 하는 격이다.
적어도 최 과장과 전화 찬스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여기서 물러나서 전화 좀 하겠다고 하는 순간 자신은
신영은행에서 전권을 가지지 못한 일개 직원으로 격이 떨어질 거다.
그럴 수는 없다.

“후... 알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결국 레이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패를 까지도 못하고 죽으면 도박판이 끝나기도 전에 교체당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해주조선해양 거래 은행을 신영은행으로 바꿔 달라고 최 과장에게 요청하면 그나마 부담은 조금 줄어들 수 있을
거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의 거제조선소 이 두 군데서 일하는 직원만 수천 명에 달한다.
이 많은 사람들의 급여통장과 연금 등 재테크 관리를 신영금융그룹이 관리하는 건 결코 적지 않는 가치다.

“조건? 음... 들어보지.”


“들어보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이건 거래입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주셔야 하지요.”
“훗, 그래. 조건 말해보게.”
“조건은 하납니다. 제가 의원님을 도와드린 것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끝인가?”
“맞습니다.”

조 의원은 고개를 치켜들고 형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모로 꼬면서 물었다.

“언제고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건데... 내가 만약 도와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최영훈 과장이 믿은 정치인이 바로 의원님입니다. 저 역시 최 과장을 믿고 최 과장도 저를 믿습니다.”
“허허... 그러니까 서로 어깨동무하고 있으니 같이 가자, 이 말이지?”
“맞습니다.”
“흐음... 알겠네.”

조재민 의원은 형준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뭐 후달리는 거라도 있나?”


“모르지요.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그렇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라네.”

조재민 의원은 흡족하게 웃었다.

6 시가 되자마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한 영훈과 연희는 밤 11 시가 넘어서야 해운대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노석춘 병원장에게 만나자고 전화하고 싶었지만 급할 게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치킨과
맥주로 배를 채웠다.
좋은 호텔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치킨과 맥주를 먹고 있지만 그저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만약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시나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걱정돼요?”

연희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물었다.


그녀는 부산으로 내려오는 내내 말없이 영훈의 옆을 지켰다.
그녀 성격상 많이 궁금했을 텐데 눈치나 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이 가긴 했다.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고... 그냥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요. 나도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를


정도로요.”
“원망하지는 않아요?”
“엄마요? 아니요. 전혀... 난 내 운명을 알고 있어요. 엄마도 알았겠죠. 내가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아마
내가 엄마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혼자서 많이 힘들었잖아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그걸 보고 연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어요?”
“조금 웃겨서요. 사실 당신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모르지 않아요?”

그녀에게 산속에서 어떤 고통을 겪어 왔는지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산에서 많이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고 했을 뿐.
신을 받지 않기 위한 그 기나긴 몸부림을 설명한다는 게 사실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긴지, 당시에 정신착란을
겪었던 게 아니었는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다.
더군다나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뭐... 당신 이야기는 들었으니까.”


“아니에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고통보다는 더 심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난 원망하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내면에서는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러워
요.”

연희는 영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였나? 그쯤일 거예요.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혐오스러울 때였죠.
날 외국으로 쫓아낸 할아버지와 아빠. 또 그런 상황을 막아주지 못했던 엄마. 그리고 그런 원인을 자초한
나까지... 그냥 다 미웠어요. 사는 게 너무 짜증나고 싫었어요. 그때 어떻게 버텼는지 알아요?”
“어떻게 버텼는데요?”
“잤어요. 억지로 자려고 노력했고 잠이 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졸린 책을 찾아서 읽으며 잠에 빠졌어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저녁에 했던 오만가지 나쁜 생각들이 괜히 유치한 생각인 것처럼 느껴지더라구요.”
“후후...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자라는 겁니까?”
“맞아요. 오늘은 조금 일찍 자요.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첫날밤의 극적인 긴장을 위해 자리를 비켜줄게요.
뭐... 원하면 옆에 있구요.”
“아닙니다. 그냥 머리를 비우고 누워야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잘 자요.”

연희는 영훈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곤 방을 나갔다.


영훈은 그녀가 나간 뒤 한참 동안 깜깜해져 보이지 않는 창밖 밤바다를 바라보다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조식을 먹고 연희와 백병원으로 출발한 둘은 곧바로 노석춘 병원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전에 만났을 때처럼 노스님을 보는 것처럼 정중하게 영훈을 맞이하고는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명을 쓰지도 않았고 주소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름이 맞다면 주소는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가정집이 아니었습니다.”
“네? 그럼요?”
“연화당이라고...”
“연화당이요?”

< 줄을 타려는 사람들(3) > 끝

< 줄을 타려는 사람들(4) >

연화당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느낌이 왔다.


제대로 찾았다는 걸.
영훈은 즉시 연희를 데리고 연화당이라는 곳으로 출발했다.
마산에서 멀지 않은 교외에 위치한 그곳은 미리 주소를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에 작게 연화당이라고 쓰여 있는 그곳을 본 순간 영훈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손님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입구 한쪽 공터는 분명 방문한 차들이 모여 있어야 할 주차장일텐데 휑하니 썰렁했다.


이 근처를 둘러보면 가게 하나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인가도 보이지 않은데 손님까지 없으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절 낳으셨으니 보통 신기가 있으신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손님이 없을까요?”

어떻게 보면 자랑인 것 같기도 하고 자조 섞인 푸념 같기도 했다.

“일단 들어가요.”
“그럽시다.”

영훈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오래된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날씨가 추워서 만약 손님이 많으면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영훈은 마당을 가로질러 방안을 향해 소리쳤다.
“계십니까?”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나왔다.


째진 눈에 시골 아낙네 특유의 곱슬머리 파마를 하고 있었지만 미간 한가운데 튀어나와 있는 검은 점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얼굴을 찬찬히 살피니 어째 엄마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혹시 예약했어요? 아니면 하러 왔어요?”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도사님 만나러 온거야 당연하지. 여기에 뭐 커피 마시러 온 사람 있겠어요?”

영훈은 그녀의 농담이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도사님이라고 했다.
보통 신점을 보는 여자 점쟁이는 도사라고 칭하지 않고 선녀님이나 보살님 등으로 불린다.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화를 하시지. 언제 예약하시게?”
“오늘 뵙고 싶은데요?”
“오늘은 안 돼. 오늘 도사님 기도드려야 해서 예약된 손님도 다 뒤로 미뤘는데 갑자기 와서 도사님을 만나겠다고
하면 되나? 그리고 우리 도사님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당일 와서 봐달라고 하려면 새벽부터 와서 줄 서야
해.”

오늘 날을 잘 잡은 것인지, 아니면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건지 오늘 중요한 날인 것 같았다.

“그래도 만나야 합니다. 전 점을 보려고 온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려고 온 겁니다.”

그제야 그녀도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도사님을 만나러 온 게 점을 보려는게 아니라고? 그럼 무슨 이유로 만나려고 하는데요? 경찰이에요?


공무원이신가?”
“개인적인 일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개인적인 일이 뭔데? 말을 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내가 도사님께 전해드리지. 치성을 올리고
계신데 이 중요한 때에 별것도 아닌 이유로 방해를 할 수는 없잖아.”

그녀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저들 입장에서는 그 기도가 무척 중요한 의식일 테니까.

“이명자 씨를 찾고 있습니다.”
“이명자? 그게 누군데?”
“그 도사님께 이명자라는 분을 아시냐고 여쭈어 보세요. 만약 아신다면 날 만나야 할 겁니다.”
“어째서?”

이때 연희가 급히 나서서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일단 물어봐주세요. 만약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가지시고요.”

영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도대체 돈은 언제 준비했냐는 눈빛이었다.
연희는 가만 있으라는 듯 영훈의 팔을 잡고 봉투를 내밀었다.
영훈이 자고 있을 때 혹시 몰라 현금을 챙겨놓고 있었다.
여자는 봉투를 슬쩍 열어보고는 잠시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여기 잠깐 계세요.”

그녀는 봉투를 들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후다닥 움직여 기도를 올리고 있는 방을 향해 귀를 갖다 붙이고 말했다.

“도사님~”
“······.”
“도사님~ 누가 찾아오셨어요.”

잠시 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못 들을만큼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도드릴 때 말 걸지 말라고 그랬지? 그리고 오늘 손님 안 받는 거 몰라?”


“점을 보러오신 손님이 아니에요. 그냥 도사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면서 5 만 원짜리를 수십 장 넣어서···.”
“점을 안 볼 거면서 돈은 왜 가져와?”
“그냥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요? 이명자 씨를 아는지 물어보라고···.”
“누구?”
“이명자라고 했어요.”
“나갈 테니 5 분··· 아니, 10 분만 기다리라고 해. 아니···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젊은 남자랑 여자였어요. 여자는 여배우 뺨치게 예쁜 얼굴이라 내 생전에 저런 미인은 처음 봤네요. 남자는
그렇게 특별하게 생기진 않았는데. 몸은 좀 좋아보이고 선하게 생긴···.”
“나이가 서른 정도 돼 보였나?”
“서른 중반에서 이십대 후반 그 사이일 것 같아요.”
“알았으니까 10 분 있다가 들어오라고 해.”
“네.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챙겨놔.”
“네.”

그녀는 다시 후다닥 걸어가 영훈에게 말했다.

“도사님이 10 분 있다가 들어오시래요. 기도를 중간에 막 끊을 수는 없거든. 추운데 커피나 한잔 타 드릴까?”


“아닙니다.”
“그런데 이명자가 누구예요? 누군데 도사님이 들여보내지?”

영훈은 대답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를 찾기는 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 역시 적지 않았다.
어머니가 신기가 있었다는 건 확실한데 아버지까지 도사일 줄은 전혀 몰랐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혹시 자신을 보고 싶어 했을까?
나에 대해 궁금하기는 했을까?
오만가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때 그녀가 말했다.

“시간 됐네요. 들어가세요.”

영훈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다가 이내 가만히 서 있는 연희를 돌아보았다.


“같이 들어갈래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연희는 자못 긴장했는지 잠깐 숨을 내쉬다가 구두를 벗고 영훈의 뒤에 섰다.


영훈은 여자의 안내를 따라 문을 열고 도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남자.
날카로운 눈빛과 헬쓱한 얼굴, 그리고 검은 낯빛.
처음에는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상대방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명우도사도 영훈을 보자마자 앉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영훈은 도사 주변의 기이한 기물과 뒤편의 그림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대화도 없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을 때 영훈이 말했다.

“이명자 씨를 아십니까?”
“아내이자 동반자였고 파트너였지.”

영훈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때 도사가 물었다.

“영훈이냐?”
“맞습니다.”
“그렇군··· 네가 드디어 나를 찾아왔구나. 흐흐흐··· 언제고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네 애비다.
수십 년 떨어져 있었기에 아버지라고 말이 떨어지지 않으면 도사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이상하게 들떠 보이는 그를 보며 영훈은 의아했다.


그 들뜸이 헤어진 아들을 만나 올라오는 벅찬 감격으로 보이지 않아서다.
그렇기에 영훈은 벅차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다 점을 보며 살아왔습니까?”
“신을 모시고 살았으니 당연한 게 아니겠냐? 인사드려라. 일월장군님이시다. 네 어머니도 모시고 살았다. 아마
장군님이 네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돌봐주셨을 게다. 아무렴.”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영훈의 아버지이자 명우도사는 대답 대신 영훈의 뒤에 서 있는 연희를 바라보았다.


명우도사는 단박에 연희가 한주연이 보여준 재벌가의 그 여식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무릎을 치며 물었다.

“하하! 좋구나! 처자는 우리 애랑 어떻게 되는 사이신가?”


“결혼을 약속했어요.”
“더욱 좋구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어? 시아비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연희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가방을 내려놓고 절을 올리려 했다.


그런데 영훈이 그런 연희의 팔을 잡았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며느리가 시아비한테 절하는 걸 왜 말려? 그리고 너도 얼른 절해라. 그리고 일월장군님께도 절 올리고.”

영훈은 명우도사의 뒤에 그려진 그림을 흘깃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 비웃음을 보고 명우도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하는 게냐?”
“일월장군이고 뭐고 난 관심 없습니다.”
“괘씸한 놈!”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흥! 네 애미는 왜 찾으려고? 네 애미는 널 버렸어.”
“그럼 그때 아버지는 뭐 하셨습니까?”
“난 널 찾았다. 넌 그렇게 버려져서는 안 될 아이였어.”
“그럼 어떤 아이였습니까?”
“네 애미는 신기가 하늘에 닿은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일월장군님의 정기를 받아 낳은 아이가 바로 너였다.
네가 나한테서 자랐다면 세상을 떨쳐 울리는 신기가 되었을 것을···.”
“그럼 어머니가 절 버린 게 아니라 탈출시킨 거였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원망했으면 참으로 가슴이 아팠을 겁니다.”
“그럴 줄 알았다? 어째서 그럴 줄 알았어?”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영훈을 쏘아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의 일월장군에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뭐하는 겁니까?”
“장군님의 보우에 네가 총명을 잃지 않았구나. 어디서 배웠어? 누구에게 사사 받았느냐?”
“틀렸어요. 난 장군 따위를 모시지 않아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는 버럭 소리질렀다.

“헛소리! 신기가 하늘에 닿은 네 애미가 널 보고 감당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신통이 무서운 게냐?
걱정하지 마라. 일월장군을 모시면 네 신통은 씻은 듯 사라질···.”

영훈 역시 참다 못해 버럭 소리쳤다.

“개소리하지 마!”

연희는 흥분한 영훈의 모습에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영훈은 명우도사를 쏘아보다가 일월장군이 그려진 곳으로 다가가서는 쌀과 과일 등의 제기를 후려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가 이 따위 걸 무서워 할 것 같습니까? 일월장군? 네, 잘 알죠. 매일 밤 날 찾아와 괴롭히던 그 영감탱이
얼굴을 잊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나타나지 않아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네 녀석이 장군님을··· 그래서 그 순간부터···.”
“헛소리 그만하고 어머니가 어디에 계신지나 말해요. 당장!”

이때, 밖에서 소란을 듣고 미간에 점이 박힌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아이고, 이게 뭔 일이야!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감히 신당에서 이 무슨···.”


“박 보살은 나가 있어. 어서!”

박 보살이라고 불리는 여자는 명우도사의 말에 다시 신당을 나갔다.


명우도사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일월장군님이 널 당하지 못했던 게구나. 그럼! 그 정도 그릇은 되어야 내 아들이지! 날 따라와라. 절절한 한이
서린 녹두장군이라면 네가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개소리하지 말라니까! 난 신 따위는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눈앞에서 일월장군인지 뭔지 찢어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말해요. 당장.”
“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게냐? 네 운명이 바로 여기다.”
“아니, 내 운명은 여기가 아니야.”
“웃기는 소리. 일월장군님의 기를 감히 일반인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아니아니··· 아니지. 신을 받지
않고는 사지가 멀쩡할 수가 없지. 신이 아니라면 뭘 배웠지? 혹시 사주 따위를 배웠냐?”

순간 움찔하는 연희를 보고는 명우도사가 다시 웃었다.

“하하하! 역시 그렇지? 사주를 보는 게지? 좋아. 네 애미가 어디에 있을지 맞춰봐라. 계유에 태어나고 을미에
경자, 경신이다. 네 애미는 사주에도 뛰어나서 연월일시를 들으면 만세력도 보지 않고 줄줄 내뱉었다. 너는
어떠냐?”

듣지 못했으면 모를까 듣고 났는데 어떻게 셈해보지 않을 수 있을까?


영훈은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당신 사주는 어떻게 됩니까?”


“내 사주? 그래, 그것도 좋지. 잘 들어라.”

그는 자신의 사주를 줄줄 읊으며 잔뜩 기대어린 눈빛으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영훈이 말했다.

“맞아요. 난 사주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신을 받는 일 따위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는 몰라도 당신은 귀문관살이 강하지 않아 어머니처럼 영력이 강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내가 일월장군을
죽였으니 지금 당신은 신점을 치는 게 아니라 사기를 치고 있겠죠. 내가 필요한 이유는 이제
신기를 잃었으니 내가 어머니를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맞습니까?”

명우 도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신과 나는 부모 자식의 연이 끊겼으니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삽시다. 그리고 이제 이 짓도 관두세요. 기도를


드린다 어쩐다 하면서 엄한 사람 돈 빼앗지 말고. 알겠습니까?”

영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할 때 명우도사가 말했다.

“저 여자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네?”
“한주연이라는 여자가 여기 찾아왔었다. 내 비록 신기를 잃었지만 가진 영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 조심해야 한다.”
“명심하죠.”

영훈은 아직 얼떨떨해하는 연희의 손목을 잡고 연화당을 빠져나왔다.

< 줄을 타려는 사람들(4) > 끝


< 줄을 타려는 사람들(5) >

부산으로 내려올 때도 그랬지만 서울로 올라갈 때도 연희가 운전대를 잡았다.


내려올 때는 싱숭생숭한 마음 때문에, 그리고 올라갈 때는 참담한 마음 때문에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면허증을 딴지 얼마 안 된 초보를 고속도로 운전 못 시킨다며 괜한 소리를 해가며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무거운 침묵이 차 안을 지배하기를 한 시간여.
연희가 물었다.

“어머니에 대해 더 묻지 않은 건 그... 도사님이 말해준 사주 때문이었어요?”


“도사님이라고 하지 말아요. 님은 무슨...”

평소에는 사람을 저렇게 막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지금 영훈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미안요. 그 도사가 말해준 사주 때문이었어요?”


“네.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묻지 않고 나왔어요.”
“배신감 때문에요?”
“처음에는 그런줄 알았어요. 내가 생각했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연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가 이내 다시 정면을 주시하며 물었다.

“돌아가셨어요?”
“중년을 넘기기 힘든 사주예요. 태어났을 때부터 허약하게 태어났을 텐데... 어머니는 풀이나 꽃과 같은 사주를
타고 났어요.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커다란 나무가 아니라 풀이나 꽃이니 얼마나 약한지 알겠죠?”
“네.”
“그런 풀과 꽃이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려면 많은 정성이 필요해요. 물도 필요하고 적당한 온도도 필요한데
귀문관살이 강해 신을 받았어요. 보통 사람들은 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죠?”
“하늘이요.”
“맞아요. 일종의 태양이라고 볼 수 있어요. 태양의 강렬한 열기를 오래도록 받으면 말라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걸 버티려면 정기가 가득한 사람이 태양의 빛을 가려줘야 하는데 아버지... 아니, 그 도사는 정기가 강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정기요?”
“정신력이요. 귀문관살이 강하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기가 약하다는 말과 같아요. 기가 약한 사람이 헛것을
보기도 하고 가위에 눌리기도 해요. 그게 심할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로 궁합이 좋지 못한 남자와 결혼한 것이에요.”
“아...”
“궁합이라는 게 그래요. 꼭 잘난 남자, 잘난 여자를 만나야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완해줄 수 있는 인연을 만나야 서로에게 좋은 거죠.”
“그럼 우리는 어때요?”

잠시 영훈이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창밖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사주를 알지만 난 내 사주를 잊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궁합이 완전한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도 나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내가 왜 내 사주를 잊었다고 생각합니까?”
“그야...”
“내 미래는 알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당신과 만나 결혼하고 안 좋은 인연 때문에 화를 당한다고 한들 그게
인생일 겁니다. 다행인 건 당신은 스스로의 성격을 돌아보았고 나아지려고 하니 우리 결혼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입에서 그런 바람이 나오니까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것도 듣기 좋아요. 나도 우리 둘이 앞으로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많이 슬픈 날도 있을 테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돌아가신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그게 맞다면 어머니 묘소를 찾아볼게요. 돌아가신 걸 알
았으니 제사는 지내 드려야죠.”
“고마워요.”
“아, 그런데 아까 그런줄 알았다고 했잖아요? 배신감 때문이 아니면 뭐였는데요?”

영훈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신당의 분위기가 싫었어요. 특히 일월장군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니까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맞다. 아까 일월장군이라는 귀신? 하여튼 그런 걸 죽였다고 했잖아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연희는 소름이 쫙 돋았다.

“죽였다는게 말 그대로 죽였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표현일 뿐이죠.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놈은 감히 내 근처에도 오지 못할 겁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데요?”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할 때요. 내 욕심이 내 스스로를 무너뜨릴 때 놈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럼 당신이 계속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맞아요. 난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저랑 결혼하잖아요?”
“당신의 배경을 보고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와... 이거 진짜 트루 러브네요. 나 지금 엄청 좋아해야 하는 거죠? 기쁘긴 한데... 하필 오늘 그런 소식을
같이 들으니까...”

연희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 조금 누워도 돼죠?”
“네, 그럼요.”

영훈은 등받이를 뒤로 조금 젖히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고 같이 지내온 추억 하나 없기 때문에 그럴까?
이상하게 이 상황이 현실같지 않게 느껴졌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어머니를 찾으러 연화당으로 찾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이 든 영훈은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로 오피스텔에 쓰러지듯 침대에 파묻혔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연희가 영훈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내일 월차 낼게요. 그리고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요.”


“알겠어요”

연희가 떠나자 영훈은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연희가 어머니의 사망 사실을 확인해오자 그제서야 영훈은 울음을 토해내고는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깨질듯한 두통과 오한이 사흘간 이어졌고 중간에 연희가 약과 음식을 사다주지 않았다면 아마 응급실로 향했을지도
몰랐다.

“그냥 더 쉬지 그랬어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져서 출근한 거예요.”

영훈은 잔뜩 걱정하는 얼굴인 연희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민희가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가져오며 걱정스레 말했다.

“과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훈은 자신에게 있어 하늘에서 내려준 동앗줄 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사흘이나 아파서
병가를 냈으니 오죽 걱정됐을까?

“괜찮아요. 나 없을 때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사흘간 몸살에 시달린 후 언제 아팠냐는 듯 건강해진 영훈이 물었다.

“전에 강도현 전속모델계약 때문에 BS 엔터테인먼트를 방문했었어요.”


“맞다. 그거 어떻게 됐어요?”
“모델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중이에요. 법무팀에서 계약서를 영업팀에 전달하면 바로 계약 진행하기로 했어요.”
“으음... 그리고 혹시 중국쪽 연예인 중에 괜찮은 사람 있을지 한번 알아봐달라고 영업팀에 전달해주세요.”
“중국이요?”
“네. B 급은 곤란하고 A 급으로 남자, 여자 한 명씩. 총선 이후에 진행할 거니까 급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장님은 저 안 찾았어요?”
“네. 그간 군산쪽에서도 특별한 이슈가 없어서 과장님을 찾는 분들도 없었습니다.”
“다행이네. 알겠어요.”
“저기 그리고...”
“네?”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 접근해왔어요.”

아마 사적으로 접근했다면 민희가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거다.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요? 뭐라던가요?”


“친하게 지내자고 하던데요?”
“음... 전에 런칭 행사에서 민희 씨가 꽤 돋보였나 봐요?”
“그게 아니라 제가 노형석 과장님을 대신해서 나선 것 때문에 Nodri Clare 를 비서실에서 움직인다고 다들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미 회사에서 소문이 엄청 퍼진 상태예요. 과장님에 대해서요.”
“나에 대해서요?”
“네. 비서실 직원들의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민희야 알아서 조심했겠지만 다른 직원들까지 완전히 비밀을 지키지는 못했을 거다.

“어떻게 퍼졌는데요?”

민희는 옆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듣고 있는 연희를 살짝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승진을 할 사람이 바로 사장님 딸과 결혼할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브랜드 사업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구요.”
“뭐... 알만한 내용은 다 알게 된 거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되니 오히려 승진을 끝까지 거부했다면 억울할 뻔했다.
이왕 다 알고 있다고 하니 마음은 더 편해졌다.

“아마 고승현 상무님도 저보다 더 곤란한 일을 겪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모르죠. 친하게 지내자는 게 끝이면 그래도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네. 알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
있으면 굳이 나한테 전할 필요 없어요.”
“네? 그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중요한 일이면 나중에 꼭 알아야 할 때만 전해주세요.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지시해야 하면 나중에 머리아파서
쓰러질지도 몰라요. 나 천재 아닙니다. 민희 씨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면 민희 씨 선에서 처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정기인사에서 기획조정실로 옮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아시구요. 혹시 싫으면 거절해도...”

민희는 영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좋습니다.”
“좋네요. 알겠어요. 일 보세요.”

민희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연희가 물었다.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데, 아까 한 이야기는 진짜예요. 내가 모든 걸 하나하나 컨트롤할 수는 없어요. 난 사람을 잘
보는 것 뿐이지 제갈공명 같은 천재 전략가는 아니니까요. 솔직히 군산조선소 관련한 것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소소한 사내 정치에 관련해서까지 굳이 알고 싶지가 않네요.”
“하긴... 영훈 씨 말이 맞아요. 근데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진짜라니까요. 씻은 듯이 나았어요. 그리고 나 원래 이렇게 막 아프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산에 오래 살았으면
되게 꾀죄죄하고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 1 년에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살았어요. 요 며칠 아팠던 건
인생에 몇 없는 이벤트라고 보면 됩니다.”
“알겠어요.”

연희는 다시 본 모습을 찾은 영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이세준 부회장은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자식이 저렇게 날뛰는 게 보기 싫었다.
낳은 정은 없다지만 기른 정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계속 가야 정상이건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려고 하면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준의 얼굴에서 보이는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면 안쓰러운 한 조각의 마음조차 파도의 모래성처럼 씻겨
내려갔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조차 형준에게 온통 마음이 뺏겨서는 조금 중요한 자리가 있을 때마다 형준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떡해야 할까?
그냥 포기하고 흘러가는 대로 두기엔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자신을 괴롭혔다.

“부르셨습니까?”

마석대 부행장이 들어오자 이세준 부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하하, 바쁜데 불러내서 참 미안합니다.”


“바쁘긴 한데 그래도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엉덩이에 종기가 날 테니 가끔 바람도 쐬고 나쁘지 않습니다.
딸래미랑 어제 화상통화를 하는데 아빠 그새 살이 왜 그렇게 쪘냐면서 놀라는데 이거 당장 내일부터 운동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하하하.”
“딸 자식 잔소리보다 무서운 게 없지요. 요새는 저도 마누라보다 딸 자식 눈치를 더 보게 됩니다.”
“얼른 시집을 보내든가 해야지요. 하하, 그런데 어떤 일로...?”

이세준 부회장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새 우리 형준이 일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형준 상무야 더할나위 없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재벌 3 세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 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더군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드님을 잘 키우신 것 같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은 이야기를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렇게 보이는군요.”
“네? 제가 잘 못 보고 있다는 뜻인가요?”
“난 내 아이가 능력은 부족하더라도 바르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소문이 조금씩 들려와요.
아무리 내 아이라지만 정확한 팩트 없이 의심만으로 몰아붙일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일단 한 가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말씀하시죠.”
“우리 아이를 잘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꼭 증거를 확보해서 나에게 가져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너무 걱정스러워요. 우리 애가 안 좋은 길로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이세준 부회장을 보며 마석대 부행장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어떤 소문인지는 몰라도 단순히 모함하기 위한


헛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침중한 얼굴의 부회장을 보며 마석대 부행장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꼭 어떤 증거가 발견될 거라고 믿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줄을 타려는 사람들(5) > 끝

< 간판을 바꾸다(1) >

유난히 추웠던 2 월이 지나가고 3 월이 다가왔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사이 군산은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싹 빠져나갔던 주거지역에 월세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하나둘 계약을 맺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조선소 인근 문을 닫았던 상가들은 어느새 새로운 주인과 계약을 맺고 인테리어 시공에 들어갔고 심지어 어느
자리는 권리금까지 생겨났다.
아직 식사하러 올 손님도 없는데 식당 먼저 생기는 상황이지만 그걸 보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군산 시민들은 조선소가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얼마나 사람들이 붐볐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오히려 총선과 보궐선거를 앞두고 선거 열기는 옅어지고 있었다.


이유는 한 명의 후보가 너무도 큰 주목을 받고 있어 상대 후보는 거의 존재 자체가 희미하게 옅어졌기 때문이다.

조재민 의원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눈다거나 연설을 하는 등의 선거 일정을 잡지 않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8, 9 시 뉴스가 나올 때면 조재민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오는데 굳이 그런 비효율적인 선거 활동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국회의원, 또는 시장 후보가 한창 선거운동을 할 시간인 2 시에 선거사무소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이형준 상무가 그걸 받던가요?”

영훈은 오랜만에 군산에 내려왔다.


부산에서의 일 이후 서울에서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조 의원이 한가하면 내려오라는 말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였다.

“크크큭··· 솔직히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받더라고?”


“······.”
“그런데 궁금한 게 있네. 그 친구가 신영은행 이경호 회장 손자라지?”
“맞습니다.”
“재벌 3 세 같지 않던데?”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정치하면서 많이는 아니라도 몇몇 재벌 2 세, 3 세들을 봐왔는데 분위기가 조금 달라. 꼭···
우리 같달까?”
“우리 같아요?”
“그래. 본래 재벌들은 뭘 하든 여유가 있어. 이 사업이 망하면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지고 다른 일을 하면 된다는
마인드거든? 회삿돈을 잃으면 또 다른 회삿돈을 가져와서 메우면 되고, 누군가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안 하고 마는 경우도 많지. 아쉬울 게 없는 마인드. 크으~ 부럽지, 부러
워. 그런데 이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살아온 환경으로 습득한 거거든. 그런데···.”
“이형준 상무는 달랐다는 건가요?”
“맞아. 내가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내 제안을 결코 받지 않았을 거야. 그의 분위기는 꼭 우리
같았어. 눈빛에 어떤··· 결의? 그런 게 보였거든. 그건 기존 재벌 3 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태도였단
말이야.”

겉으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감탄했다.


과연 국회의원 배지는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말하기 싫은 거군.”
“저와 이형준 상무는 좋은 파트너입니다만 한 가지 룰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룰이라. 흥미롭군. 말해보게.”
“서로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거죠.”
“그게 룰인가? 난 또 뭔가 굉장히 섬뜩하고 대단한 룰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든지,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든지 말이야.”
“그렇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데 말입니다. 다르게 보면 꽤 특별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가족도 아니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요?”

조 의원이 눈을 빛냈다.

“그렇군. 말이 안 되는 룰이긴 하지. 서로 간에 큰 약점을 잡히지 않은 이상 말이야.”


“순수한 믿음이라고 봐주시죠.”
“그걸 바란다면 그렇게 믿어주겠네.”

영훈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모르는 조 의원이 고개를 갸웃할 때 영훈이 말했다.

“의원님.”
“말해보게.”
“제가 의원님을 도와드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방적으로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섭섭하군. 나도 자네를 도와줬으니 우린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으음··· 그건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봉선동 아파트 단지, 그 외에 여러 개의 공사입찰에 관한 도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조선소를 인수하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의원님께 답례를
받은 것뿐이죠. 이걸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저희는 의원님과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배
신감 따위의 하찮은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의원님과 우리의 계산방식이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되시죠?”

영훈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조 의원이 표정을 굳혔다.

“흐음··· 좋네. 아까 했던 말 취소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제가 의원님을 도와드린 이유, 그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재민 의원은 영훈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 군산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을 품을 당시 서로 바라는 게 있어서 이 딜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내가 더 큰 정치인이 되기를 바라며 일부러 밀어준다는 건가?”


“큰 정치인이라··· 솔직히 전 의원님이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의원님이 대선후보급
정치인의 자질이 없다고 한들 크게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파트너를 원했고 의원님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와드린 겁니다.”
“꼭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말이군.”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말씀드렸듯이 의원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파트너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 파트너십이 오래 가기 위해선 불필요한 오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형준 상무와
저와의 룰처럼요.”
“그럼 나와 자네 사이의 룰은 뭔가?”
“저에 대해서도, 이형준 상무에 대해서도 깊게 알려고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간단하죠?”
“허··· 황당하군. 그게 다인가?”

조재민 의원은 황당해하면서도 내심 뜨끔했다.


이번 선거가 끝나고 군산조선소가 정상운행을 시작하면 은밀히 사람을 시켜 영훈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일을 배웠는지, 어느 집 자식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시나 안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시에는 미리 준비하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게 다예요. 전 의원님을 도와드리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의원님은 그에 대한 보답을 우리에게
주겠지만 그렇다고 선을 넘는 보답을 바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금을 깎아 달라거나 불법을 눈감아 달라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 쓸데없는 데 에너지 소비하지 말자는 말이
었습니다.”
“크흠··· 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잘 알겠네.”
“좋군요. 그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뭐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없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선거는 치르기도 전에 결과가 나와 있는 셈이니.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해주조선해양에 관해서 확답을 받고 싶은 것뿐이지. 잘 진행되고 있나?”
“네, 총선을 전후로 결과가 나올 겁니다. 아시다시피 야당 쪽에서 총선 전에 해주조선해양 인수 결론을 내는 건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산업은행장을 계속 압박하고 있거든요.”
“알지, 썩을 놈들···. 아, 그리고 보좌관에게 들었어. 이번에 정기인사 있다면서? 승진할 예정이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이제 임원이 되는 건가? 아니면 다른 계열사로 옮기는 건가?”
“현진물산 기획조정실에서 일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해주조선해양 사장 때문에 그렇습니까?”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지 않나?”
“어차피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완료되는 건 4 월이라 정기인사 끝나고 결정될 겁니다.”
“사장을 교체할 생각이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무턱대고 칼부터 내지르는 사람은 반대야.”
“의원님의 생각은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난 솔직히 자네가 해주조선해양 사장이 되기를 바랐어. 그건 어렵겠지?”
“욕먹기 딱 좋습니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가 없으니···.”
“기다려보시죠.”
“자네만 믿겠네.”

이제 고비는 거의 넘겼다.
조재민 의원은 조급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차를 들이켰다.

꽃샘추위가 한풀 가신 3 월 중순의 늦은 밤.
회식을 마치고 얼큰하게 취한 마석대가 도착한 곳은 본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합정동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꽤 비싼 오피스텔인 이곳은 마석대의 이름으로 계약된 곳이 아니었지만 그는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연정아!”

이제 이십 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자가 블라우스만 입고 그를 반겼다.

“오빠 왔어? 아휴~ 술 진탕 마시고 왔네? 회식했구나?”


“한잔 해~쓰!”
“어후, 씻고 와. 술 냄새 엄청 나.”
“그래? 알았어. 우리 연정이한테 냄새 풍기면 안 되지.”

마석대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화장실을 찾아가 옷을 벗고 씻기 시작했다.


그가 샤워실에서 한창 씻고 있을 때 연정이라고 불린 여자는 마석대의 옷을 정리했다.
바지춤을 한번 뒤적여 보고 코트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살펴봤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어 자연스럽게 패턴을 풀고는 문자와 카톡을 확인했다.

뭔지 모르게 다급하고 긴장한 손놀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그가 한참 뒤에나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나이 오십 줄에 딸 같은 여자한테 오피스텔 내주고 자기 집처럼 살면서 두 집 살림을 시작하니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면 1 시간 가까이 열심히 씻어댔다.
게다가 그가 샤워할 때 이렇게 뒷조사(?)를 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저렇게 술을 진탕 마시며 들어왔기에 이제는 거의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오늘도 자신이 알아보기 힘든 전문용어가 섞인 대화들로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연정의
손길이 멈췄다.

[알아본 바로 사생활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홍콩에 이형준 상무 이름으로 된 작은 회사가 하나


있다는 걸 파악했습니다. 설립된 지는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데···.]
연정은 입술을 깨물다가 해당 카톡을 자신의 핸드폰으로 촬영 후 어딘가에 전송했다.
그리고 옷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옷걸이에 걸었다.
아마 마석대는 아무렇게나 벗어놨던 옷을 잘 정리해서 걸어준 자신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할 게 확실했다.
그는 지금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지금 생활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그 사람(?)의 말처럼 마석대의 직장생활은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다.

*
서초동의 한 와인카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이형준 상무는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 강주현 전무를 보고
말했다.

“빨리 왔네요?”
“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번 정기 인사 때 당신을 못 지켜줘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최대한 손을 써봤는데 아버지의 결정이
너무 확고하셔서···.”
“아닙니다. 한직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퇴직권고를 받지 않는 게 다행입니다.”

이세준 부회장이 벼르고 있었던 강주현 전무는 리스크총괄부 상무로 발령됐다.


이형준 상무를 비롯한 임원들의 반대와 이경호 회장까지 나서 오래된 인재를 그렇게 버리면 안 된다는 말 때문에
이 정도에 그친 거였다.
그 노력을 알기에 강 전무는 형준의 바짓가랑이를 더욱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마석대 부행장에게 붙여놨던 여자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강 전무가 핸드폰에 전송된 사진을 형준에게 보여주었다.


형준은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홍콩에 내 이름으로 된 페이퍼컴퍼니가 있다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부회장님께서 은밀하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이게 말처럼 쉽게 만들어지는 거였어요?”
“상무님 여권과 인감, 은행계좌 등등 모든 자료는 부회장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확보 가능합니다. 어렵기는
해도 돈을 많이 준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이거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미리 알고 있다면 대응하는 건 쉽습니다. 지금부터 해당 법인 계좌를 철저히 감시하면서 증거를 만들기 시작하면
됩니다. 문제는···.”
“문제는?”
“결국 그렇게 모은 증거는 한 군데로 화살을 돌릴 겁니다.”
“아버지겠군.”
“맞습니다.”
“내가 시작한 싸움이 아니야. 이 계좌 지금부터 감시하고 누가 얼마를 넣었는지 확실하게 파악해요.”
“알겠습니다.”

형준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아무래도 오늘 취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간판을 바꾸다(1) > 끝


< 간판을 바꾸다(2) >

현진물산 정기인사가 단행되었다.


현진물산은 물론 현진관광과 현진건설 세 개 회사의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이는 이번에 부사장으로
취임한 강노식 부사장이 근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현진물산은 현진관광, 현진건설과 4 월에 인수가 확정된 해주조선해양의 4 개사를 묶어 한 개의 그룹사로
만들기로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현진물산의 주요 임원들을 각 계열사의 핵심 위치로 발령냈다.
그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가장 궁금해 마지않던 인사는 바로 영훈의 거취였다.

[기획조정실 최영훈 실장.]

영훈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명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뭔지 모르게 현실 같지 않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또 어떻게 생각하면 20 년 넘게 산에서 지냈던 세월이 꿈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속세로 내려오면 사람 같이 살기만 해도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고 이 나이에 벌써 핵심 임원이 된다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현실 같지가 않았다.

똑똑···.

“들어와요.”

민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기획조정실로 발령받으며 영훈의 개인비서가 됨과 동시에 과장을 다는 초고속 승진을 이루어냈다.
기존 기획조정실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상황이지만 이미 강노식 실장으로부터 교육(?)받은 바 있기에 겉으로는
전혀 불편한 티를 내지 않고 깍듯하게 둘을 반겼다.

“상무님, 오늘 저녁 회식 어디로 할까요?”


“어디 가고 싶대요?”
“소고기를 강력하게 밀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분위기는 어때요?”
“너무 잘 해줘서 오히려 어리둥절한데요?”
“하하, 미인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럼 다행인데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요.”

영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기···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오해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네?”

순간 민희는 당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젠틀한 모습을 보여주던 영훈이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사귀는 사람 없습니다.”
“내가 왜 사장님께 신뢰받는지 알아요? 사람을 잘 보거든요.”
“네···.”
“사적인 부분이라 같이 일하게 될 사람 아니면 저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예요. 실례인 것 알고 있고 이런
참견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는 거 아니까. 그런데 난 민희 씨가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봤을 때 민희 씨는 연애할 때 다 퍼주고 일보다 사랑에 더 신경 쓰는 스타일 같아요. 맞나요?”

민희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내가 사람을 잘 봐요.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일을 맡겼는데 남자 때문에 일에 집중 못 하는 정도를
걱정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혹시 남자 때문에 회사
기밀이 빠져나간다든지 뭐 그런 일이 있을까 봐 이야기한 겁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요.”

지금이야 당연히 그렇게 말할 거다.


민희의 사주를 보면 다 좋은데 한 가지 단점이 정말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면 앞뒤 못 가리고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민희는 도화살이 강한데 올해 연애운까지 들어와 있으니 아마 온갖 곳에서 남자들이 그녀에게 들이댈 게
분명했다.

“남자를 만나지 말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사람을 만날 땐 잘 가려서 만나야 할 것이고, 자신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야 할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 네. 그런데 저랑 어울리는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묻는다기보단 자조 섞인 질문이었다.

“내가 어렵게 설명했죠? 간단하게 말하자면 민희 씨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민희 씨가 세속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당신 성격과 잘 어울릴 거라는 거예요. 그냥 그렇게 알고 있다가
나중에 접근하는 남자들 있으면 잘 대입해 보세요. 언제고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겁니다.”

그녀는 그릇이 큰 여자다.


세심한 돈 관리와 짜여진 인생계획은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 거다.
사주에 남편복이 없는 여자는 아니니 결혼할 때까지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할 팔자다.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굳이 그녀를 앞에 세워두고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 건 그것 때문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알아야 할 특별한 스케줄 있나요?”
“그룹 임원 회의가 3 시에 잡혔습니다. 반드시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 외 특별한 스케줄은 없습니다. 회식을 제외하면요.”
“알겠어요. 수고해요.”
민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영훈은 다시 방을 둘러보며 상념에 빠졌다.
주변 눈치만 아니었다면 연희가 와서 같이 수다를 떨어주며 이 기분을 만끽했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조금
아쉽기는 했다.
이때 형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입니다.”
[내가 안 찾으니까 아주 한가했지?]
“많이 바빴으니 한가할 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자 좋은 소리 들으니까 또 열불 나네. 오늘 승진했다며?]
“네, 상무로 승진했습니다.”
[송 사장이 은근 통이 작네? 고작 상무야?]
“상무가 어때서요? 전 좋아 죽겠는데?”
[송 사장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능력 있는 사람 찾는 것도 힘든데 저렇게 싸게 부릴 수 있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이야?]
“하하, 금칠 그만하시고 뭐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승진 축하하려고 전화하시지는 않았을 테고.”
[야, 넌 날 이상하게 보는데 내가 그 정도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 사이에 당연히 승진 축하
때문에 전화할 수 있지.]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이건 정말 절묘하게 시기가 딱 맞아떨어져서 그런 건데 말이야···.]
“알고 있었어요. 말하세요.”
[전화로는 그렇고 좀 만나자. 저녁에 블루문 알지?]
“오늘 기조실 직원들이랑 회식 있어서 안 됩니다. 첫날부터 회식에서 빠지면 직원들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아씨··· 그럼 내가 지금 나갈 테니까 밖에서 보자. 마침 딱 점심시간이잖아.]
“1 시간 뒤인데요?”
[나와서 인사하고 이야기 좀 하다 보면 12 시 아냐? 자꾸 빡빡하게 이럴 거야?]
“알았어요. 어디에서 볼까요?”
[주소 보낼게. 바로 나와.]
“그러죠.”

전화를 끊은 영훈은 연희가 골라준 가벼운 코트를 챙겨 나와 민희에게 말했다.

“나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올게요. 점심은 같이 드세요.”


“알겠습니다.”

문자에 찍힌 주소로 찾아가니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주변의 부대찌개 집이었다.


이런 데서 보자고 할 줄 몰랐던 영훈은 인근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갔다.

“어! 여기.”
“부대찌개 좋아하십니까?”
“왜? 나는 항상 초밥에 비싼 소고기만 먹을 줄 알았어?”
“그것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일부러 서민 코스프레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누구한테 보여주겠다고 서민 코스프레를 해? 나도 부대찌개 좋아해. 너 그거 아주 심각한 고정관념이야. 버려야
해.”
“예, 예~ 그래서 시켰어요?”
“방금. 승진해서 그런지 얼굴이 환해 보이네? 축하해.”

어째 얄밉다는 표정이다.
“감사합니다.”
“명함은 나왔고?”
“아, 여기요.”

영훈은 전날 명함을 받자마자 연희가 선물한 명품 명함 지갑에 고이 모셔두었었다.

“으음··· 현진물산 기획조정실 상무라··· 너희 이름 바꾼다며?”


“네. 오늘 임원회의 때 사명 변경으로 의논할 겁니다. CI 까지 나오면 그때 명함도 다시 제작할 것 같고요.”
“요 몇 달 사이에 현진중공업보다 커져서 그런가? 꽤 시간을 두고 진행하네? 정기인사 전에 다 처리하지?”
“그건 제가 손을 안 대서··· 알아서 하겠죠.”
“그럼 이번 인사에도 관여하지 않았어? 전혀?”
“몇몇 중요 자리 인사에만 조금 조언을 했을 뿐이지 전반적인 인사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몇몇이라는 중요 자리가 궁금하네?”
“뭘 그렇게 궁금해하십니까. 음식 나오기 전에 말해봐요. 왜 부른 겁니까?”
“먹고 나서 말하면 안 되냐?”
“먹는 데만 집중하고 싶거든요.”

이때 막 부대찌개가 조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상에 올려졌다.


육수가 한가득 부어지고 불이 올라오자 형준이 말했다.

“마석대 부행장 말이야.”


“네.”
“이번엔 네가 틀렸어.”
“뭔데 그래요?”
“네가 실력으로 찍어 누르라고 했지? 아무래도 그렇게 느긋하게 해서는 내가 된통 당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요?”

형준이 슬쩍 주변을 다시 확인하고는 상체를 앞으로 들이밀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여자 하나 붙여놨다.”
“네?”
“어차피 그 양반도 혼자 한국에 와서 쓸쓸할 거 아니야? 룸싸롱에서 여자 하나 붙여주니까 지가 좋아서 스폰
해주겠다고 껄떡대다가 아예 오피스텔까지 구해주더라고.”
“그게 다예요?”
“나도 이번엔 신중하게 움직였어. 혹시나 들킬 수도 있으니까 이상한 수작 부리지 않고 둘이 알아서 하게끔
해놓으니 알아서 붙더라니까.”
“그래서요?”
“붙여놓고 별일 시키지는 않았어. 그저 핸드폰이나 주머니 좀 뒤져서 나에 대해서 뭔가 알아내면 연락하고 그게
아니면 알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했거든. 그런데 얼마 전에 연락이 왔었어. 후··· 씨발, 지금도 이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
“뭐가 나왔는데요?”
“아니, 글쎄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있었다니까.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르고 철창
갈 뻔했다고.”
“헐···.”

영훈은 이번만큼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근거로 결정했던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냥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다면 크게 당할 수도 있었을 상황이
아닌가.
“거봐. 놀랐지? 이번엔 내 기가 막힌 판단으로 잡아낸 거라고.”
“자랑은 그만하시고,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게 문제야. 분명히 아버지가 증거를 조작하려고 할 텐데 내가 이걸 모아서 역공을 하는 순간 그때부터는
되돌릴 수가 없다고. 상황이 악화돼서 할아버지한테 진실이라도 폭로하게 된다면 난 끝장이야.”

외통수.
진정한 외통수에 걸린 격이다.

“골치 아픈 상황이네요.”
“그렇지?”
“그래도 일단 기다려보시죠?”
“기다려? 뭘 또 기다려. 너 전에도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그래도 뭔가 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리 사주를 다시금 살펴봐도 이형준 상무의 올해 운은 크게 나쁠 일이 없었다.


그저 구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일 뿐.

“너 우리 아버지랑 짜고 나 엿 멕이려고 하는 건 아니지?”


“에이··· 진짜···.”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야.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
“일단 지켜보세요. 그리고··· 혹시 할아버님을 제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네가? 할아버지를?”
“네. 어려우면 어쩔 수 없고요.”
“아니, 어려울 거 없지. 현진물산의 든든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소개하면 안 될 게 뭐가 있어? 게다가 이번에
현진물산 사위가 되잖아? 스펙도 이 정도로 빵빵하면 오히려 할아버지가 만나보자고 할 수도 있어.”
“그럼 언제 시간 한번 잡아보시죠.”

형준의 사주는 잘 알고 있으니 이경호 회장의 사주가 궁금했다.


그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지금 어떤 마음일지 그리고 그의 여생이 궁금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왜? 만나면 무슨 수가 나올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일단 만나 본 이후에 말씀드릴게요.”

형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끓기 시작한 부대찌개에 면 사리를 투척했다.


처음 봤을 때 자못 긴장한 그의 표정이 조금 풀린 것으로 보아, 그나마 조금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간판을 바꾸다(2) > 끝

< 간판을 바꾸다(3) >


영훈이 형준과 식사를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 민희는 기획조정실 직원들과 점심을 같이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부서들은 그렇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기조실에는 여직원이 없어서 그런지 민희는 마치 여학생이 몇 없는
공대에 입학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특히 오늘은 연희가 마케팅 관련 업무 교육에 참석한다고 종일 부서를 비우는 날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오늘 주인공은 민희 씨니까 메뉴는 민희 씨가 고르세요.”
“김 과장은 파스타 같은 것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기조실의 넘버 2 나 다름없는 박병호 부장의 말에 민희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 한식 매니아예요, 부장님.”


“그럼 좋지. 그럼 무난하게 김치전골 어때?”
“완전 좋아해요. 혹시 고향마루?”
“어? 그 집 알아?”
“그럼요~ 저 완전 좋아해요.”
“오케이! 가자고.”

호탕한 박 부장이 직원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박 부장과 민희가 붙어 걸어가고 나머지 직원들은 조금 떨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상무님은 어디 가셨나?”

영훈이 나갈 때 인사까지 했으면서도 물어보는 건 그 ‘어디’가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네.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나가셨어요.”


“급한 일?”
“네. 저도 어떤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구요. 오늘 점심 같이 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많이
미안해 하셨어요.”
“에이~ 상무님이 뭐 놀러 나가셨을까. 그런 사족 붙이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어.”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정말 아쉬워 하셨어요.”
“그럼 고맙고. 그런데 상무님이 요새 어떤 일을 준비하는지 알고 있어?”
“네? 아니요, 저도 잘...”
“우리 부서가 좀 그래. 일을 막 찾아서 한다기보다 경영자의 의중이 담긴 일을 맡아서 진행하는 경우가 있거든.
그게 아니라면 회사의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키가 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무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하거든.”
“네... 맞는 말씀이세요.”
“나중에 상무님께서 따로 말씀해주시겠지만 그래도 상무님이 요새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좀 편하지 았겠어?”
“그렇긴 한데 정말 저도 아는 게 없어서... 아!”

민희가 뭔가 떠올린듯하자 박병호 부장이 걸음을 멈춘다.

“뭔데?”
“영업팀이 가져왔던 Nodri Clare 브랜드 아시죠?”
“그럼 알지. 그것 때문에 민희 씨가 영업팀 노 과장 밟았던 걸로 한동안 회사가 떠들썩 했거든.”
“어머, 그랬어요?”
“아 뭐, 밟았다는 게 꼭 나쁜 뜻이 아니라 그 만큼 비서실에서 힘을 주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지.
그런데 그걸 계속 신경쓰시고 있다고?”
“그런 것 같아요.”
“그걸 왜?”

박병호 부장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영훈이 어떻게 기획조정실 상무로 오게 됐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영투자증권으로부터 주식을 가져온 것부터 현진건설과 현진관광은 물론이고 해주조선해양과 군산조선소의 인수를
주도한 사람이라는 것에 처음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만약 강노식 전 실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회사에서 투자한 반도체 회사 역시 최영훈 상무의 결정이었다고 하니 지금 회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런 최 상무가 회사 인수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이 아니라 고작 연매출 몇 백억 따위의 명품 브랜드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와 업무 내용에 대해 협의를 하시지는 않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고마워. 좋은 이야기 해줘서 내가 한결 마음이 가볍네.”

박 부장이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업무지시가 떨어질지 모르는데 그나마 최 상무 머리에 뭐가 주요 아이템으로 들어가 있는지 알았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린 것이리라.
점심에는 젊은 직원들이 민희 옆에 앉아 이번에 새로 온 최영훈 상무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업무 스타일이 어떤지, 대화 스타일이나 보고서에서는 어떤 점을 중시하는지 등등 끊임 없이 질문을 해와 민희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입을 열어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민희는 그게 귀찮다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회사 내 최고 엘리트들이 모이는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여주고 계속 호기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직원들은 종종 민희에게 도와줄 일이 있냐며 다가왔을 정도였다.
너무 한가해서 문제일 정도였기에 민희는 영훈이 없을 때 각종 업무를 배워가며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잘 했어요?”
영훈은 2 시가 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다.

“네. 다녀오신 일은 잘 되셨구요?”


“네. 일단 회의실에서 박병호 부장님 좀 뵙자고 해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오전에 직원들과 정식으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긴 하지만 아직 업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강노식 실장이 업무적으로 인수인계할 내용이 없었고 앞으로 모든 업무를 새로 시작할 것이기에 직원들은 현재
전부 일에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훈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박 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영훈이 웃으며 말을 건네자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 상무님이 안 계셔서 아쉬웠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앞으로 같이 하게 될 일이 많을 겁니다. 강 실장님이랑 일하실 때 어떠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자리에 이렇게 빨리 앉게 될지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사한지 1 년도 안 된 어린 놈이 상무자리에 떡하니 날아왔으니 적어도 심기가 불편하기는 할 텐데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사내정치에 익숙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일만 잘하고 사고만 안 치면 뒤에서 욕을 백 번, 천 번 한들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네요. 음... 총선이 끝나고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게 되면 많은게 바뀌게 될 겁니다. 회사 이름부터
현진물산을 중심으로 한 그룹사로 탈바꿈하기 위해 지분이동도 있어야 할 거구요.”
“맞습니다.”
“우리는 그룹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네?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담당합니까?”

그는 그룹 지배구조에 관한 전략을 짜는 것이야 말로 기획조정실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부사업부 고승현 상무님이 전담해서 처리할 겁니다. 부사장님도 그 부분에 도움을 주실 테구요. 우리가 왜 그
일에서 빠져야 하는지 궁금하실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납니다. 전 그런 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사실 관심도
없거든요.”
“이 일에서 빠진다는 건 사내 권력의 핵심 업무에서 빠진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건 곧 사내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꿈보다 해몽이 너무 좋은 편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일을 준비하면 될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남의 일이 되었다.


안 그래도 한가한 상황인데 월급은 월급대로 받아가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만은 없다.

“Nodri Clare 라고 아시죠?”

오늘 민희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된 거지만 설마 이 아이템을 정말 꺼내들지는 몰랐다.


그래도 영훈이 오기 몇 시간 동안 파악한 것이 있기에 지체없이 대답했다.

“네. 영업팀 노형석 과장의 주도로 영국에서 들여온 명품 브랜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장력이 상당하고 브랜드
이미지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견고한 매니아 층을 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서 장기적으로 매력적인
아이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많이 아시네요?”
“우리 회사 상품이니까요.”

박병호 부장은 속으로 김민희 과장에게 나중에 커피라도 한잔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Nodri Clare 의 매출이 인상적이던가요?”

박 부장은 영훈이 질문한 의도를 바로 파악해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실되게 밝히는 게 좋다고 여겼다.

“미래는 긍정적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매출은 미미합니다. 이번에 그랜드 백화점과 입점계약을 맺고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연 매출이 백억 단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백억만 넘겨도
선방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매출이 그 정도면 마진은 더 볼게 없습니다. 최소한 3, 4 년
이상은 꾸준히 밀어줘야 의미있는 매출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 의미있는 매출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요?”
“최소 천억 단위를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3, 4 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은 한국입니다. 한국이 가장 먼저 들여왔으니 당연한 상황이겠죠? 영국에서 발생한
브래드지만 아직 영국 매출도 3 천억을 조금 넘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생브랜드 치고는 괜찮은 편이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봅니다.”

영훈은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박 부장이 마음에 들었다.

“중국에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요?”


“중국이요?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되기는 할 겁니다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고급
브랜드라서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형태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지... 그리고 본사에서 우리한테 중국
입점에 대한 전권을 다 내줄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돈은
Nodri Clare 본사가 챙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다면 상당한 매출 상승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당분간 우리 직원들은 Nodri Clare 인수에 주력합니다.”
“네? Nodri Clare 를 인수하겠다구요?”
“맞습니다.”
“어... 금액이 싸지는 않을 겁니다.”
현진관광을 인수한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고 고작 몇 주 전에 군산조선소를 인수했다.
해주조선해양은 아직 도장도 찍지 않았고 한창 인수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회사를 인수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알고 있습니다.”
“부채비율도 높구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실위험 때문에 대출이 힘들 겁니다.”
“대출은 가능할 겁니다. 그게 안 된다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예요.”

박 부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인수 가능여부와 적정가격, 그리고 저쪽에서 얼마를 원하는지 파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요.”
“고맙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요. 그런데... 중국 진출에 확신이 있으셔서 인수를 결정하신 것 맞습니까?”
“맞아요. 인수를 확정짓는 동시에 우리는 중국으로 들어갈 겁니다. 인수 과정에서 부족한 자금이 있다면 중국
자금을 공동투자 형식으로 받아 진출할 수도 있어요. 물론 이 비율은 최대한 낮춰볼 생각이지만 그건 인수가격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박병호 부장은 강노식 실장이 부사장으로 영전하며 앞으로 회사 생활이 재밌어질 거라는 말을 남긴 것이 떠올랐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조실 직원들과의 회식이 끝나고 사흘 뒤, 영훈은 형준이 알려준 주소를 찾아 움직였다.


신영금융지주 이경호 회장과의 만남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급했는지
빨리도 약속을 잡았다.
을지로의 한 고급 한정식집에서 만난 이경호 회장은 상이 참 좋았다.

“자네가 그 친구군. 만나서 반갑네.”

눈썹이 가지런하고 진하며 전체적으로 살집이 많아 푸근한 인상을 풍겼다.


초년, 중년, 말년의 구분 없이 대체적으로 별다른 큰 근심 걱정이 없을 팔자라고 할까?
그 가운데 둥글고 큰 콧망울에 콧구멍이 보이지 않아 한번 들어온 돈은 꽉 움켜잡을 상이었다.

“최영훈입니다. 현진물산에서 기획조정실 상무를 맡고 있습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 이 회장이 감탄했다.

“기조실 상무? 우리 애한테 듣자니 평범한 집에서 자랐다던데,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우리 형준이가 자네를 만나면서 생각을 많이 바꿨다고 했네. 참 고마우이.”

이 회장이 옆에서 그저 미소만 머금은 채 가만히 있는 형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필사적으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했나보다.
그렇게 서로간에 기본적인 대화가 오가고 난 뒤 에피타이저로 나온 전복죽을 한 숟갈 음미한 이경호 회장이 말했다.

“그래, 나와 한번 만나고 싶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나를 만나고자 했는가?”


“다름 아니라 이형준 상무가 고민이 깊은 것 같은데 많이 예민한 문제라 혼자서 속을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회장님을 뵙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응? 우리 형준이가 홀로 속을 끓인다고? 왜? 뭐 때문에?”
“아무래도 부회장님께서 이형준 상무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세준이가? 세준이가 무슨 오해를 해?”
“오해를 하지 않고서야 이형준 상무 몰래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이형준 상무
이름으로...”
“그게 무슨...”

이경호 회장이 놀란 것 만큼이나 이형준 상무도 놀랐다.


이걸 설마 이경호 회장 앞에서 터뜨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간판을 바꾸다(3) > 끝

< 간판을 바꾸다(4) >


이형준 상무는 너무 놀라 눈이 벌게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미친새끼!’라는 고함을 억지로 삼키며 가까스로 침묵을 지켰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
무슨 연유로 저러는지는 몰라도 일단 손발은 맞춰야 한다.

“이형준 상무가 마침 우연찮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페이퍼 컴퍼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걸 만들 이유가
없으니 누군가 몰래 그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형준이 애비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저도 이상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과정을 역추적해보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세준 부회장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형준 상무의 개인정보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이경호 회장은 손바닥으로 식탁을 때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몇 안되는 사람 중에 다른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게 당연한 논리 아닌가?


내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영훈은 그의 말을 끊었다.

“마석대 부행장이 은밀히 부회장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형준 상무의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서요. 그런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어찌 된 것이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죠.”
“...”

이경호 회장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으로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은밀하게 이


상황을 알아보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아들에게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는 아버지가 있을까 싶거든요.”
“그게 가장 논리적인 가정 아닌가?”
“맞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공교롭습니다. 이형준 상무의 계좌가 하필 이형준 상무가 자리를
비운 2 월 7 일부터 8 일 사이에 홍콩에서 열렸고 그때 홍콩에 있었던 직원들을 전수 추적한 결과 이세준 부회장의
개인비서가 홍콩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거든요.”

이 회장이 형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게 맞는 이야기냐?”
“네... 어제 확인한 내용입니다.”

어제 알아낸 사실을 영훈에게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분노에 떨었던가?


그럼에도 그게 완벽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홍콩에는 그 외에도 상당수 직원들이 업무차 와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경호 회장은 영훈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부족한 것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검찰에 고발이라도 해야 할까요?”
“...”

이 내용을 검찰에 흘리는 순간 신영금융그룹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언론에서는 온갖 의혹을 제기할 테고 검찰은 압수수색을 명목으로 온갖 자료를 다 빼갈 게 분명했다.
그 자료중에 뭐 하나라도 또 다른 문제가 나온다면 그 파급은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세준 부회장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데 이형준 상무는 혹시 정말로 아버지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난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지만 그래도 모든 상황을
대비해야 했기에 그 선택지는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더러 대신 물어봐달라는 말인가?”
“맞습니다.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서로 간에 오해가 있다면 회장님께서 풀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이형준 상무가 이세준 부회장을 오해했다면 무릎 꿇고 빌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회장은 굳은 얼굴로 영훈을 노려보다가 옆에 앉은 형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다 네가 준비한 거냐?”


“아닙니다, 할아버지. 솔직히 전 여기 최 상무가 할아버지 앞에서 저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믿어주세요.”
“정말이야? 그럼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약속을 잡은 거냐?”
“말 그대로 최 상무가 제 고민을 듣고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약속을 잡은 겁니다.”

이 회장이 다시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 확실한 증거도 아니고 그저 정황만 가지고 형준이 애비를 의심하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지? 만약 아니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형준 상무는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저와 회장님은 사실 오늘 보고 내일부터 안 본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잊은 거는 아니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금융그룹의 회장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저는 회장님한테 그저 실없는 놈이 될 뿐이지만 이형준 상무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나선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현진물산에 얼간이 하나가 있다고 여겨주십시오.”
“그 정도로 우리 형준이와 가까운 사이였나?”
“하핫, 솔직히 엄청나게 친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 들으셨던 것처럼 이형준 상무와 만난지는 오래되지도
않았으니까요. 굳이 정하자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네, 그 정도 같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기업인 사이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인 사이 아닌가요? 이형준 상무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니 그의 위험을 피하게 해줄 수 있다면 한 번쯤은 얼간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경호 회장은 전복죽을 밀어내고 따뜻한 차로 입을 헹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형준이를 살려주려고 얼간이 소리를 듣겠다는데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알겠네.”
“감사합니다.”
“감사를 받을지 사과를 받을지는 정황이 밝혀지면 그때 받도록 하겠네. 식사 마저 하게. 난 먼저 일어나야겠어.”

이 회장이 일어나자 영훈과 형준이 따라 일어섰다.

“식사는 하고 가시지 그러십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억지로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아닌가? 심장도 아니고
혈압이나 당뇨도 아닌데 배탈이 나서 병원 신세를 지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형준에게 말했다.

“넌 남아서 식사 마저 하고 오거라.”
“같이 가겠습니다.”
“됐다. 나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지. 파트너 하나는 잘 둔 것 같구나.”

이 회장은 형준의 어깨를 툭 치고는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형준은 영훈이 다시 자리에 앉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쏘아붙였다.

“너, 미친 거야? 이거 뒷감당 가능할 것 같아?”


“아마 가능할 겁니다.”
“가능하다고? 어떻게?”
“요 며칠 동안 이경호 회장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보았습니다. 설마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하실 건 아니죠?”
“잡소리 말고 본론을 말해.”
“뒷조사를 했다기 보단 주변 사람들과 그동안의 행적들을 바탕으로 이경호 회장님의 성향이나 위기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등을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결론이 뭔데?”
“회장님이 상무님을 그렇게 아낀다고 하더군요.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옆에 꼭 붙여 놓고 그렇게 자랑을
하셨다고 하던데 좋으셨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며 단숨에 전복죽을 해치우고 입을 닦고는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은 알고 있을 겁니다. 상무님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치부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 회장님의 관심이
부회장님의 동생분에게 돌아갈 거라는 걸. 이건 단순히 내 손자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견고한 성의 무너짐을 말하는 겁니다.”

이형준 상무의 불만스럽던 표정이 풀어진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버지가 말하지 못할 거라는 거야?”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죠. 물론 아닐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말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게 내 말이야.”
“제 결론은 이겁니다. 만약 회장님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아마 못 들은 걸로 할 겁니다.”
“확신해?”
“네. 자신이 일궈놓은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일 겁니다. 단순히 혼자만의 기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외적으로 놀림거리가 될 거예요. 회장님의 성정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영훈이 이경호 회장이 만나려고 했던건 과연 그가 혈연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그걸 알아보려는 마음이었다.

이세준 부회장이 폭탄을 터뜨렸을 때 아들의 편을 들어 손자로 위장(?)한 이형준 상무를 내칠 것인지, 아니면
이세준 부회장의 무능(?)을 더 문제 삼을지가 궁금했던 거다.
생년월일은 당연히 미리 알고 왔으니 이 회장과 악수한 후 사주를 계산하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일궈놓은 성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 성의 차기 성주가 될 손자가 너무도 자랑스러워 대외적으로 자랑하느걸 삶의 낙으로 삶고 있는 인물이었다.
혈육에 대한 자랑은 곧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에게 했던 그 자랑들이 전부 헛소리가 되고 스스로가 병신으로 전락하는 걸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후... 좋아. 대외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쳐. 아버지처럼 외부에는 알리지 않고 날 말려 죽이시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럴 수도 있겠죠.”
“야, 너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전 신이 아닙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어요. 다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탐구해서 미래를 예측할
뿐입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뭐?”
“그냥 죽으라고 죽으실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회장님이 씨 없고 30 년 넘게 아버지를 속인 이세준 부회장에게 회사를 넘기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뭐 하나
뚜렷한 사업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둘째 아들에게 사업을 넘기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비록 자신의 혈육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손자에게 자리를 넘기겠습니까?”
“...”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이 가득하고 온갖
함정이 가득할 겁니다. 피튀기는 싸움을 거듭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싸움을 이기는 승자가 모든 걸
가지리라는 겁니다.”

그제야 형준은 영훈의 말을 이해했다.

“할아버지가 회사에서 손을 뗄 거라는 말이군.”


“맞습니다. 셋 중에 누가 되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지게 할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애정이 크지 않을 테니
누가 가지든 무슨 상관을 하겠습니까?”
“씨발...”

이때 직원이 들어와 전복죽 그릇을 회수하고 떡갈비와 잡채를 내놓았다.


영훈은 직원이 내온 음식을 맛보면서 말했다.

“그러니 당장 목이 날아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목은 안 날아가겠지. 그런데 이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숨 막히는 생활을 하게 될 거야.”

형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영훈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네요. 정 못 버티겠으면 나오십쇼.”


“나오라고?”
“적과의 동침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연기가 뛰어나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게 연기만으로 될 것 같아? 이라크에서 폭탄 해체 전담했던 군인들 정도의 간덩이를 가지지 않으면 밥 먹을
때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거라고. 난 숨 막혀서 못 살 것 같아.”
“그럼 나오시든지요.”
“네 일 아니라고 졸라 쉽게 말한다.”
“이 정도 했으면 전 꽤 힘을 써드린 겁니다. 같이 울어드리는 것까지 바라지는 마세요. 아, 그리고 이건 계산에
추가할 겁니다. 솔직히 조금 어려웠거든요.”
“와... 씨발, 정 없는 놈 같으니라고.”
“어차피 달아날 목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아날 구멍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려드렸으니까 계산서에 메뉴 하나
올리는 정도는 쳐줄 만 하지 않습니까?”
“그래, 너 다 처먹어라.”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떡갈비에 다시 젓가락을 가져갔다.

< 간판을 바꾸다(4) > 끝

< 간판을 바꾸다(5) >

이경호 회장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차량 뒷자석에 앉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잔뜩 겁먹은 손자의 눈빛을 보고 있으니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준이가 그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인과관계가 연결이 안 된다고 할까?
누군가 형준이를 노린다는 걸 이해를 하겠는데 그게 아버지일 수가 있겠냐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그저 코웃음으로 치부할 수 없었던 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손자의 파트너(?)
때문이었다.
현진물산 외동딸과 결혼할 사이라는 그는 대부분의 재벌 2, 3 세들이나 난다긴다 하는 인재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의 서두름이나 느긋함 없이 자신의 생각을,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그 생각을 자신만의 페이스로 밝히는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근거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충격적이었던 거지 만약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미친놈이 될 뿐이지만 말이다.

“김 부장.”
“네, 회장님.”
“집으로 가지 말고 회사로 가지.”
“알겠습니다.”

결국 이경호 회장은 방향을 바꾸었다.


집에서 불러 앉혀 놓고 물어볼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형준이 이름으로 홍콩에 회사 하나가 설립돼있는지 확인 좀 해봐.”


“홍콩 말입니까?”
“그래. 언제, 누가, 어떻게 설립했고 그 과정에서 돈이 오간 정황까지 전부.”
“언제까지 파악해 올리면 될까요?”
“퇴근 전까지.”
“알겠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무거운 가슴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딜 갔다 왔어요?”

기조실에 돌아오니 연희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반긴다.

“이형준 상무와 약속이 있었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연희는 기획조정실에서 민희와 마찬가지로 과장급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과장급이지 박병호 부장도 연희를 거의 터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업무가 아예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박 부장이 업무 지시를 내리면 연희가 알아서 하는 정도?
보고서의 수준을 가지고 호통을 치거나 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으며 어지간한 실수는 못 본 척 넘어갔다.
그렇다고 실수를 자주 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기조실 사람들 누구도 연희를 보고 불평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워낙 똑똑하고 업무처리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표정을 읽혔다고 생각했는지 연희가 배시시 웃었다.

“헤헤... 다른 건 아니구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시간? 내 시간이야 연희 씨도 잘 알잖아요? 민희 씨가 알려줄 텐데?”
“에이... 사적인 문제인데 비서한테 스케줄까지 물어보긴 그랬어요. 영훈 씨 오면 물어보면 되는데 뭐.”
“잘 됐네요. 없어요, 오늘은.”
“그럼 오늘 저녁에 파티 어때요?”
“파티? 갑자기 무슨 파티 말하는 거예요?”
“원래 파티 종종 하고는 해요. 영훈 씨가 안 좋아하니까 말을 안 한 거지.”
“그런데 오늘은요?”
“그랜드 백화점 송은진 실장이 특별히 초대했어요. 예전이었다면 대충 말로 때우면서 거절할 텐데 하필 Nodri
Clare 가 입점해 있잖아요. 거기서 몇 개 사주지 않으면 괜히 짠돌이 취급할게 뻔해요. 가서 기 좀 확
죽여주려구요.”
“가만히 있는 송 실장 기는 왜 그렇게 죽이려고 그럽니까?”
“허... 은진 언니가 가만히 있었다뇨? 그건 영훈 씨가 몰라서 그래요. 그때 은진 언니 이혼 사실 알아낸 후부터
내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어떻게 알았냐, 누구한테 들었냐, 그 이야기 누구한테 한 거 아니냐 등등 별별 소리를
다 들었어요. 그 뿐인가? 우리 브랜드 입점 시켜 놓고 은근히 SNS 에다가 뭐라고 쓴 줄 알
아요?”
“뭐라고 썼는데요?”
“Nodri Clare, 요즘 잘 나가는 영국 감성의 트렌디한 브랜드, 그랜드 백화점 입점. 딱 요렇게만 써놓은거
있죠?”
“뒤에 뭘 더 붙여야 하는 거죠?”

아무래도 그런가 보다.


연희의 쌍심지가 치켜 떠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녀는 한번 인상을 긁은 뒤 짧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잘 들어요. 요즘 잘 나가는... 그건 곧 역사도 없다. 근본이 없는 브랜드다라는 뜻이구요.”


“아하...”
“트렌디한 브랜드라는 말은 곧 럭셔리하지는 않은... 한 마디로 싸구려 브랜드라는 말이잖아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우리 매장 매출이 잘 나가면 백화점도 좋은 거 아니에요? 근데 그렇게 쓸 이유가 있나?”


“제대로 써도 못 알아먹는 사람들이 태반인데요, 뭘... 그냥 눈치껏 알아듣는 사람들이나 알아듣지. 그리고
본인이 무슨 셀럽도 아니고 큰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백화점 공식 SNS 도 아니고 개인 거니까, 그냥
심통나니까 저렇게 밖에 홍보 안하는 거죠.”
“으흠... 그래서 한번 가서 물건 좀 사주고 싶다?”
“그렇기도 하고...”

연희는 배시시 웃더니 영훈의 팔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는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남친 자랑도 하구요.”


“아... 그게 목적이었군요?”
“싫어요?”
“갑시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히히... 대신 내가 오늘 화끈하게 긁어줄게요.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솔직히 영훈 씨한테 내가 선물을 많이
사주기는 했는데 비싼거 사주면 질색을 하니까 고급 브랜드는 못 사줬거든요. 그런데 오늘 쇼핑은 그럴 필요가
없을 거예요. 정장 가장 싼 게 한 칠백 하려나? 어쨌든 거기서 쪽팔리게 막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나도 눈치라는 게 있습니다.”
“하긴, 영훈 씨는 눈치가 생명인 사람이니까.”

그때 민희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들어와 말했다.

“박병호 부장이 왔습니다.”


“알겠어요. 들어오시라고 해요.”

연희는 손을 흔들며 나갔고 박 부장이 들어왔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 보기 좋은 한 쌍입니다.”
“회사에서 꼴불견이죠? 알고 있습니다.”
“아유~ 그런거 아닙니다. 선남선녀 아닙니까?”
“아니에요. 연희 씨가 지금 들떠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주세요. 아마 시간 지나면 안 그럴 겁니다.”
“하하하, 부부 싸움이라도 하시려구요? 큰일 납니다. 집에서 무슨 곤욕을 당하시려구요.”
“그건 좀 무섭긴 하네요. 그때 제가 말씀드렸던 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영훈은 기획조정실로 온 첫날 박 부장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곤 그 다음부터 일정 회의나 추가 업무를 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회의와 업무가 일상인 기조실 직원들은 아직도 이런 널널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지만
영훈은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일단 그런 회의를 주도할 만큼 아직 머리에 든 지식이 많지 않았다.
자고로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생기는 법.
아마 영업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외국어를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굳이 저들에게 그 소문이
현실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래야 할 만큼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다.

“네. 일단 Nodri Clare 의 창업자이자 경영자인 노드리 클레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샤넬에서 10 년간


디자이너 생활을 하다가 따로 나와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든지 2 년 정도 됐고 그간 꽤나 어려운 생활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으흠... 자수성가한 케이스네요?”
“맞습니다. 그걸 보고 어쩌면 그렇게 비싼 가격을 부르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구요. 일단 우리가 인수의향을
표시하니까 꽤나 흥미롭다는 듯이 반응했습니다. 아직 주목할 만한 매출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신생 브랜드에게
벌써부터 인수의향을 나타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흥미는 있어 한다는 거네요?”
“네. 그러면서 우리에게 오히려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물어왔습니다. 금액만 적당하면 팔 수 있다는 뜻을
전해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얼마를 불렀습니까?”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가격 협상에서 너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르면
상대방이 기분이 상해 아예 거래를 깨버리거나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가격에서 더 비싼 금액을 불러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섣부르게 싸게 부를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겠네요. 그냥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금액을 솔직하게 보내보세요.”
“그렇다고 1 조를 부르기에는 저쪽에서 더 큰 금액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7 천억 어떨까요?”
“그럼 그렇게 하시구요. 저보다 부장님이 더 계산에 밝으실테니 그 부분은 부장님이 결정하세요.”
“알겠습니다.”

이럴 때 영국으로 날아가 노드리 클레어라는 경영자와 만날 수 있다면 뭔가 더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왠지 지금 상황에 한국을 떠났다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일이 터진다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총선이 끝나고 해주조선해양이 현진물산의 품에 완전히 들어온 다음에 출장을 갈 수 있을 거다.
과연 Nodri Clare 를 무사히 인수할 수 있을지...
그리고 형준은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은밀히 살펴본 결과 홍콩에 이형준 상무의 이름으로 Diego System 이라는 IT 업체가 세워진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설립은 작년 말에 됐고 자본금은 20 만 홍콩달러, 한화로 약 3 천만 원 가량 됩니다.”

이경호 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로 물었다.

“돈은 어디서 왔고?”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국내에서 흘러간 자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지자금이다?”
“네. 자금 경로 파악은 거의 불가능할 걸로 예상됩니다. 현지에서 법인을 설립한 컨설팅 회사에서 들어온
자금입니다. 아마 현금으로 받았을 겁니다.”
“형준이가 돈을 마련했을 가능성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특히 계좌를 설립할 때 최소한 무조건 법인에 등재된 이사 한 명이 직접 방문해 실명확인
절차와 서명을 해야 하는데 은행에 서명한 인사가 제니퍼 리라는 여잡니다. 한국계 홍콩 사람인데 몇 년 전에
이형준 상무와 호텔과 클럽에서 사진까지 찍혔던 여자입니다. 의심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나?”
“추적하면 은밀하게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홍콩에 나가 있는 임원급 인사들은 홍콩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형준 애비도 알겠지?”
“적어도 3 시간 안에 보고가 들어갈 겁니다. 추적할까요?”
“됐네. 수고했어.”

이경호 회장은 곰곰이 생각하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회장실을 나와 바로 아래층에 있는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여간해서는 회사에 잘 붙어있지 않고 특히 부회장실에는 걸음조차 하지 않는 이 회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나타나자
부회장 비서실 직원들은 혼비백산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세준이 안에 있지?”
“네.”
“차는 마셨으니 들일 필요 없고 긴히 할 이야기 있으니까 들어오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단단히 주의를 준 이 회장이 부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세준 부회장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오셨어요?”
“놀랐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앉으세요.”
“차는 내오지 말라 했다. 하루종일 물로 배를 채우고 있는 기분이야.”
“그래도 좋은 차가 있는데...”
“됐다. 앉아라.”

이세준 부회장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자리에 앉았다.
이 회장은 한동안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형준이가 홍콩에 회사 하나를 만들었더구나. 혹시 알고 있었냐?”

이세준 부회장의 눈동자가 급격히 떨려왔다.

“네? 그게 무슨...”
“애비야. 난 오늘 평생을 살면서 너무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회사에 와서 확인해보니 그
이야기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버지...”

부회장이 뭐라 말하려 할 때 이 회장은 경고하듯 말을 잘랐다.

“애비야. 순간을 모면하려고 거짓을 말하려고 하지 마라. 혹시 이 일에 네가 관련돼있는 거냐?”

이세준 부회장은 주먹을 움켜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마음은 아니라고, 자신과는 절대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외쳤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달랐다.

“네. 제가 그랬습니다.”
“왜? 어째서?”
“형준이는 신영을 물려받으면 안 되는 아이입니다.”

< 간판을 바꾸다(5) > 끝

< 간판을 바꾸다(6) >

“물려받으면 안 되는 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세준 부회장은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울컥한 마음에 내뱉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 앞으로 회사를 하나 차려주었는데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진땀을 흘리며 입을 열지 못하는 이세준 부회장을 보며 이경호 회장이 더욱 의심 어린 목소리로 채근했다.

“대답해 봐라. 도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야?”


“그게···.”
“그래, 무슨 사정 때문이냐?”

찰나의 시간에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폭탄을 터뜨려 버릴까 하다가도 3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숨기고 살았던 걸 드러낸 후 다가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하지만 둘러댈 다른 핑계가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이세준 부회장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형준이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고를 치고 있었습니다. 걔가 데리고 놀다가 낙태시킨
여자만 셋입니다. 그것도 제가 알아낸 숫자만 셋이니 아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이경호 회장은 이런 식의 답변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셋이나?”
“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현진물산 관련 문제로 나름 인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에 투자 실패로
인한 손실이 무려 삼천억이 넘습니다. 대표적으로 터키에 투자한 호텔은 지금까지 계속 적자를 일으키고 있어요.
매해 적자 규모만 삼백억이 넘습니다.”
“그, 그래?”
“그런 녀석이 이 큰 금융그룹을 이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겁니다.”
“네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야. 그런데 왜 홍콩에 회사를 세워?”
“이번에 형준이가 일을 진행하면서 저도 느낀 게 많았습니다. 형준이가 성격이 급하고 잔실수가 많아 은행업은
분명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지금처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야
하는 IT 업체를 경영한다면 의외로 좋은 성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방향을 잡으니 변명이 술술 이어져 나왔다.


마치 형준을 위해 오랫동안 고심한 결과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홍콩에 IT 법인을 세운 게냐?”


“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일단 법인을 설립해놓고 형준이가 인수해서 잘 운영해볼 만한 사업체를
은밀히 고르고 있던 참이었는데요.”

이렇게 되자 이경호 회장의 답변이 궁색해졌다.

“내가 아무리 뒷방 늙은이처럼 회사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 그런데


등기이사로 등재된 여자는 누구야? 법인 설립한 여자.”
“아··· 형준이랑 예전에 가까운 사이였답니다. 홍콩 대학교를 졸업하고 3 개 국어를 하는 재원인 데다가 집도
제법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형준이가 워낙 갈대처럼 마음을 바꿔대서 제가 일부러 좀 가깝게 지내라고
등기이사에 등재했습니다. 그 아이도 좋다고 했고요.”

사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그 여자는 오래전 형준이 홍콩지사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여자인데 똑똑하고 좋은 학교를 나온 재원은 맞지만 결코
좋은 집안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 똑똑한 머리로 좋은 집 자제들과 만나다 허영심이 들어 급기야 마카오에서 도박에 빠지기까지 했다.
딱 봐도 이상해 보이는 회사의 등기이사를 덜컥 맡을 리가 없다.
당연히 도박 자금을 준다는 말에 그녀가 승낙한 거다.

“IT 업체 인수는 무슨 돈으로 하려고?”


“전에 금융위기 때 챙겨둔 자금이 있으니까요. 적당한 회사 하나 인수할 만할 겁니다. 물론 부족한 자금은
대출받아야 할 테지만 그 정도는 지원해줄 생각이었구요.”

이 회장은 그때 챙겨둔 자금이 어떤 돈인지 알고 있었다.


회사 몇 개 폐업시키고 은밀하게 챙겨둔 비자금.

“그래?”
“저렇게 해도 싫다고 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형준이에게 신영금융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 이른 생각 아니냐? 만약 네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나도 이해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

이경호 회장은 손을 들었다.

“그만. 형준이는 신영을 이어갈 인재다. 내 손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제법 사람 사귈 줄도 알고 배짱도


두둑하다. 사고나 치고 다니던 옛날과 달라.”
“······.”

이세준 부회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지만 가까스로 이 위기를 벗어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옥을 잠시 보고 온 것 같은 소름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나에게 상의하지 않았니? 이게 뭐냐? 난 또 형준이 이름으로 페이퍼 컴퍼니라도
만든 줄 알았다.”
“페이퍼 컴퍼니라뇨. 예전에 제 개인자금으로 만들어둔 돈을 자본 삼아 적당한 업체 하나 인수하게 해줄
생각이었습니다.”
“아예 신영과 선을 그을 셈이었구나?”
“선을 그어 놔야 나중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럼 신영은 누구에게 넘길 셈이었냐?”
“세민이가 있지 않습니까?”
“세민이? 허허··· 난 네가 그렇게 세민이를 끔찍이 여기는 줄 꿈에도 몰랐다.”
“싫든 좋든 세민이는 제 동생입니다. 그리고 세민이가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손에 들어온 건
잘 지키는 놈입니다. 맡겨 놓으면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해도 망하게 할 놈은 아닙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만 그래도 이건 네가 심했다. 법인 폐업하고 흔적도 남기지 마라. 혹시나 형준이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건 나 혼자만 알고 있으마.”
“후··· 알겠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하자 이경호 회장이 탐탁치 않은 얼굴로 일어섰다.

“쓸데 없는 짓을 해가지고는··· 일 봐라.”


“들어가세요.”

이세준 부회장은 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이마를 만졌다.


촉촉한 땀이 이마와 등허리에 맺혀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겠지만 아마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이건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사실이니까.

“윤 비서, 냉수 좀 가지고 들어와.”

잠시 후 들어온 아리따운 여비서는 탁자에 냉수를 올려놓고는 말도 없이 등받이에 거의 눕다 시피 기대어 있는 이


부회장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퍼지는 기분 좋은 시원함에 이 부회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쉬세요. 너무 신경 쓰시면 몸 상해요.”

비서의 달콤한 말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경호 회장은 김 부장을 다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세준이··· 뭔가 이상해.”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이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놀기 좋아하고 사고를 많이 쳐서 중요한 자리를 맡길 수 없다는 말.
그래서 다른 회사를 맡기겠다는 말.
그런데 이건 자신의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핏줄이 괜히 핏줄이 아니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못 미더워도 하나라도 입에 더 물려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일진데 회사에서 내쫓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평소 세준이가 냉정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냉정한 정도를 넘어선 거다.
오히려 냉정하게 형준이 앞길에 방해되는 일들을 처리해왔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 이건 방향 자체가 틀렸다.

“세준이와 형준이 사이가 이상해.”


“부자지간 사이가 말입니까?”
“혹시 뭐 아는 거 없나?”
“글쎄요. 부회장은 평소에 이형준 상무에 대해서 별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직원들이 보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을 아끼셨으니까요. 하지만 또 그렇게 이 상무를 싫어한다는 인상을 준 것도 아닌 것이, 회사 내에서
어렵고 힘든 일들만 맡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승진도 상당히 빨랐고.”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을 뿐, 이 상무의 어깨에 꽤나 힘을 많이 실어주는 인사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에 직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만약 뭔가 이상하다면 말이야··· 이유가 뭐가 있을까?”

김 부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왕이 왕자를 싫어한 경우는 많았습니다. 왕위에 대한 불안감 때문 아니겠습니까?”


“형준이가 자신을 밀어내고 부회장 직을 노린다? 그게 불안했다?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부족해. 내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설마 그것 가지고 불안해하려고.”
“그럼··· 역사적으로 부자간의 관계가 극적으로 틀어지는 경우는 대개 한 가지 경우였습니다.”
“그게 뭔데?”
“여자입니다.”
“여자? 여자라··· 하··· 듣기에도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왠지 그거라면 이해가 될 것 같아.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이 여자로 인한 거라면 말이야.”

김 부장은 그 비이성적인 행동이 무얼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이경호 회장은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알아봐. 형준이도 그렇고 세준이에 대해서도 싹 다 조사해.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던
건지 싹 다.”
“회사 직원들을 이용하면 부회장이 알게 될 테고 외부에서 일을 진행하면 이야기가 새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안 새어 나가게 해야지.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은밀하고 철저하게 파악해. 그리고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네. 알지?”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해.”
“알겠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그대로 눈을 감았고 김 부장은 회장실을 나갔다.


말년에 이게 무슨 꼴인지··· 자식이 손자에게 날을 세우고 있는 광경을 볼 줄이야.
너무 오래 살았다.

“저녁 9 시에 백화점이 문을 열어요?”


“가끔 그래요.”
“신기하네.”
“VIP 들 대상으로만 행사를 여는 거라서 그렇거든요.”

연희가 그랜드 백화점 본점 1 층에 차를 가져가자 익숙하게 발렛 요원이 차 키를 받아 든다.


얼떨떨해하는 영훈의 팔짱을 낀 그녀가 문이 닫힌 백화점으로 걸어가자 안에서 직원이 나와 연희가 내민 초청장을
확인하곤 문을 열어주었다.
매장 2 층의 조금 넓은 공간에는 레드카펫이 쭉 깔려있었고, 한쪽에는 호텔 연회장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핑거푸드들이 아름답게 전시되어 있었다.

“어머, 연희야!”
“왔어?”
“여기는 누구야?”

대한민국에 돈 많은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척 봐도 수십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 손에는 와인, 그리고 한


손에는 음식을 들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연희를 보고 아는척을 하며 다가왔다.

“응, 여기는 내 남자친구. 인사해. 그리고 여기는 내 친구들이에요.”


“안녕하세요. 최영훈입니다.”
“아··· 그렇구나···. 반가워요.”
“남자친구랑 오는지 몰랐네.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이라도 데리고 올 걸.”
“야, 네 남편이 잘도 온다고 하겠다.”
“시끄러.”

그녀들은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도 영훈의 위아래를 훑어본다고 정신 없었다.


확실히 그녀들의 눈빛에는 친구라고 할 수 없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실망감과 더불어 즐거움과 통쾌함 따위의 감정.
한 마디로 표현하면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연희는 그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아했다.

“쇼핑 잘하고 가. 난 남자친구랑 놀고 갈 테니까.”

그녀는 손을 흔들며 영훈을 데리고 음식이 놓인 장소로 걸어갔다.


그리곤 영훈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아까 걔들은 친구도 아니에요. 어떻게든 나 깔아뭉개려고 이를 가는 애들이거든요.”


“난 괜찮아요. 괜히 당신이 성내고 싸울까 봐 걱정이지.”
“흥, 싸우는 것도 격이 맞아야 싸우는 거예요. 귀찮게 짖어대는 걸 뭐하러 다 상대해줘요? 어? 저기 있네요.”

연희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송은진 실장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곧바로 연희를 발견하고는 대화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가왔다.

“왔어?”
“네. 준비하느라 고생하셨겠어요?”
“고생했는지는 이따가 쇼 보면서 판단해. 여기는 그때 같이 왔었던 그 직원?”
“네. 그리고 지금은 내 남자친구예요.”
“남친? 이번에 상무로 진급했다는 그 남친?”
“알고 있었어요?”
“우리 백화점에 입점했는데 그 정도 정보는 듣고 있어야지. 반가워요, 다시 인사해요. 나 송은진이에요.”
“최영훈입니다.”
“확실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때보다 더 멋있어 보이네요. 아, 마침 시작하니까 잘 구경하세요. 넌 갈 때
양손 무겁게 가길 바랄게.”
“봐서요.”

뭐가 시작하나 했더니 레드카펫을 따라 모델들이 한 명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패션쇼장을 차린 건데 가까이서 보니 뭐 이런 행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 영훈의 팔을 툭툭 두들겼다.
누군가 해서 뒤로 돌아보니 인도 대사관에서 봤던 정문숙이 환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 간판을 바꾸다(6) > 끝

< 총선이 끝나고...(1) >

“어? 안녕하세요?”
“어머!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여기서 뵐 줄이야.”

연희도 영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를 알아보곤 바로 인사한다.


문숙은 연희의 옷을 만지며 감탄했다.

“연희는 어쩜 그렇게 예뻐? 옷도 너무 예쁘다. 여기서 산 거야?”


“여기는 아니고 청담동 매장에서 산 거예요. 그런데 여기 입점한 브랜드 옷이라서 여기서도 살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딸도 이런 옷 좀 입고 다니지, 걔는 하여튼 남자 같은 옷만 입고 다녀서 큰일이야. 엄마는 잘 계시고?”
“그럼요. 요즘 정신없어요.”
“그래, 정신없을 만하지. 최 상무는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미르 밧찬이 그 뒤에 최 상무가 참 인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래요? 그
사람 자존심도 강하고 자국인에 대한 자부심도 강해서 어지간하면 없는 자리에서 칭찬을 하지는 않거든요. 항상
추켜세우는 사람은 인도인이고 자랑하는 건 인도 기업이니까요.”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그의 그런 성정은 이미 사주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었던 척 했다.

“내가 종종 그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방문할 때면 당신에 대해 스치듯이 물어보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도 최 상무를 궁금해 하더라구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영훈이 쑥쓰러워하는데 연희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떤 거 보러 오셨어요?”
“난 옷 몇 개랑 가방, 악세서리 몇 개? 호호... 너무 많지?”
“오늘 엄청 많이 쓰시겠는데요?”
“실은 얼마 있다가 남편이 있는 인도에 가야 하거든. 그래서 가기 전에 선물을 좀 사려구, 우리 딸 줄 것도 사고
아미르 밧찬네 부부 선물도 사고. 그리고 우리 아들 알지?”
“네. 우명그룹 다닌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인도 대사관에서 만났을 때 들었다.

“그래, 맞아. 이번에 우리 아들이 결혼하게 됐어.”


“어머! 축하드려요~”
“호호, 고마워. 그래서 우리 며늘아기 될 애한테 옷 하나 해주려구.”

그러면서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의 손을 슬며시 끌어온다.


이십대 중반의 여자였는데 다소곳하게 앉아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머~ 이분이...?”

연희가 놀라니 문숙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며느리 될 아이야. 인사해. 내 가장 친한 친구가 현진물산 사장이라고 말했지? 그 친구 딸이야.”


“안녕하세요. 오민영이에요. 전 아직 학생이에요.”
“안녕하세요. 저 임연희라고 해요. 여기는 내 남자친구구요. 둘 다 현진물산에서 일하고 있어요. 학생이요?
어떤 쪽 공부하시는데요?”
“미술 전공했어요.”
“어머, 잘 어울리네요.”

연희는 그렇게까지 말하고는 문숙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머니 너~무 스윗하시다.”


“호호~ 스윗은 무슨... 그냥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우리 나이대 물건은 잘 알아도 젊은 애들 취향은 잘 모르겠어.
우리 딸은 너처럼 이렇게 하늘하늘 예쁜 옷을 즐겨 입는 게 아니라서 나도 보는 눈이 없을까봐 쉽게 고르지를
못하겠다니까. 그래서 직접 데리고 왔지. 자기꺼 자기가 고르면 본인도 좋고 나도 고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고.”
“아주머니 오늘 돈 많이 쓰시겠네요?”
“돈은 네가 더 쓰지 않겠어? 너랑 나랑 스케일이 다르다 얘.”

사실 연희는 전에 엄마 친구로 봤기 때문에 애써 다정하게 말을 섞고는 있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엄마에게 문숙에 대해 잘 듣지 못했기에 그녀가 어느 정도로 부자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백화점 VIP 파티에 참석한 걸 보면 남편이 공무원임에도 상당한 재력가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1 년에 최소 2 억 이상 구매한 VIP 가 아니면 오늘 자리에는 참석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즐거운 쇼핑 되세요.”


“그래, 너도 많이 사 가렴~”
“네.”

그렇게 연희가 고개를 돌리니 영훈이 멀리서 다가오는 모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욱한 연희가 영훈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어, 왜요?”

영훈이 번쩍 놀라 쳐다보자 연희가 심통난 표정으로 말했다.

“모델 옷 보라고 데리고 왔는데 얼굴이랑 몸매 보느라 정신없는 것 같아서요.”


“아... 그게 아니라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이요?”

영훈은 연희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우리 뒤에 있던 여자... 미술쪽에 있을 상이 아닌 것 같아서요.”

연희는 뾰로통했던 표정을 풀고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재미난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흥미가 생겼나보다.

“그것도 얼굴로 보여요? 아, 이러지 말고 자리를 옮길까요?”


“그럽시다.”

연희는 영훈을 데리고 다른 음식을 찾는 것처럼 자리를 슬쩍 피했다가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서 주변을 살핀 후
말했다.

“말해봐요.”
“으음... 일단 사주를 보면 정확해질 텐데 일단 상만 보면 냉정하고 정확한 사람 같아요. 귓불이 없고 살이
없는데다가 눈보다 낮아서 학문적으로 대성할 사람이 아닙니다.”
“어? 아까 학생이라고 했잖아요?”
“미술 전공으로 학사나 석사 따위를 받으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부를 하려면
미술이 아닌 쪽을 공부할 확률이 높고 해도 그리 좋은 성취를 얻지 못할 상이라는 거죠. 그리고 일월각이라고
불리는 이마 양쪽이 실하지 못해요. 부모 복이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주머니가 상대쪽 집안을 보지 않고 결혼을 생각하는 거겠네요?”
“아마도? 그런데 아까 그 아주머니 성격이 참 좋아요.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자라서 곤란을 겪었던 적도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주머니 귀가 얇을 거라는 말이에요?”
“네. 뭐, 우리 일 아니니까 신경 끕시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할 정도면 돈도 상당히 많을 거고 조금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게 다 저 여자의 복 아니겠어요?”
“속아서 결혼한 거면 나중에 아주머니가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연희씨, 집안의 차이가 나서 뭘 얼마나 손해를 볼 것 같아요? 원래 집안의 복은 초년을 넘어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중년이 되면 어떤 부모를 만났든 결국 자신의 복은 자신이 만들어가기 때문이에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집안을 만난 것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저 여자가 좋은 복을 가졌나요?”
“하하, 상만 보고 어떻게 다 알겠어요? 사주를 봐야지. 우린 신경 끄고 옷이나 봅시다. 솔직히 오기 전에는 별
기대 안 했는데 와서 보니까 좋네요. 이래서 돈 많은 게 좋은 건가 봅니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핑거푸드는 영훈의 입에 딱 맞았다.


이런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명품을 입은 모델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빈손으로 간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연희는 영훈의 말을 듣고 괜히 신경쓰는 것 같았지만 영훈은 아예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게 모델들의 워킹이 거의 끝나갈 때쯤 그랜드 백화점 송은진 실장이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며 은근히 판매를
독려하는 게 눈에 보였다.
연희도 송 실장과 몇 마디 대화를 하며 이것저것 골라대는데 솔직히 영훈은 무엇을 사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옆에서 고래를 끄덕이며 ‘그거 괜찮던데요?’, ‘연희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따위의 맞장구나
쳐주었다.
그렇게 쇼핑을 마무리할 때 정문숙과 그녀의 며느리 될 여자가 양손에 쇼핑백 몇 개를 들고 다가왔다.

“많이 샀어?”
“하하, 아직 고민중이에요.”
“그래? 우린 이만 가려구.”

그때 오십대 중반 쯤 되는 여자가 와인을 들고 가다가 순간적으로 발을 접질려 휘청였다.

“어머! 괜찮아요?”

손에 들린 와인잔이 엎어지고 하필 그 와인이 문숙의 며느리에게 엎질러졌다.

“아이고, 이를 어째...”

하필 코트도 하얀색이었는데 한쪽 면이 보기 싫게 얼룩져버렸다.


오민영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응했다.

“괜찮아요. 세탁 맡기면 돼요.”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세탁비는 내가 줄게요.”

실수로 와인을 엎지른 오십대 여자는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내민다.

“금액이 너무 커요.”
“괜찮아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

놀랍게도 수표는 백만 원 짜리였다.


그녀는 미안함도 미안함이지만 사람도 많은데 자신이 실수해서 이목을 모은 것에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받는다, 안 받는다 몇 번 실랑이를 하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받는데 그때 그녀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머리에 가려서 아래만 보였던 귀가 위쪽이 드러난 순간 영훈은 흠칫 놀랐다.
이때 백화점 담당자가 다가와 오늘 판매가 안 된 옷 한 개를 서비스로 드리겠다고 하며 대신 사과했다.
옷 하나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기에 오민영은 놀라워 하면서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 백화점 직원을
따라나섰다.
문숙은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나마 일이 잘 처리돼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다. 그래도 세탁비에 옷도 하나 얻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괜히 며느리 데리고 왔다가
미안해질 뻔했잖아.”
“그러게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연희가 웃으며 그녀를 달랠 때 영훈이 말했다.

“혹시 며느님 되실 분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네? 우리 민영이요?”
“네.”

다른 사람의 일에, 그것도 혼사에 섣부르게 끼어드는 일은 삼가야 하는 걸 모를 영훈이 아니기에 연희는
놀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우리 아들이...”
“으음... 미술 전공하는 건 맞는 건가요?”
“왜 그걸 물어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그럽니다.”
“어디서 봤기에 그래요?”
“아닙니다. 제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기 말을 잘 해줘야...”
“아니요, 확실하지 않은 걸 꺼내면 서로 기분이 안 좋을 겁니다. 말을 꺼내는 것도 실례인 상황이라서요.”

도대체 어디서 봤기에 말을 꺼내는 것도 실례라는 것일까?


이렇게 되니 문숙은 더욱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말씀드렸듯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남의 인생을 결론지을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그녀가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는지, 그리고 생년월일만 알려 주시면 제가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기업 상무가 혹시 몰라 신원을 확인해보겠다고 하니 문숙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문숙도 그녀를 잘 모른다는데 있었다.

“생년월일? 그건 지금 나도 모르는데...”
“지금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되시면 연희 씨 통해서 문자로 보내주시면 확인해보겠습니다. 아,
혹시나 직접 물어보는 실수를 하시면 안 됩니다. 모른척 하세요.”
“그, 그럴게요.”

문숙은 떨리는 가슴을 내리 누르고 심호흡을 하며 애써 진정하려고 힘썼다.


직위로 보나 연희와의 관계로 보나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으니 아무 이유없이 저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조금 있다가 민영이 가방 하나를 더 가지고 왔고 문숙은 애써 미소를 보이며 그녀를 데리고 백화점을 빠져 나갔다.

영훈은 역시나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연희에게서 백을 받아 쥐며 백화점을 나와 차에 짐을 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까까지만 해도 남의 일이니까 신경 끄자면서요?”


“신경 끄려고 했는데 내가 상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네? 왜요?”
“머리가 귀 위쪽을 가리고 있어서 못 봤는데 아까 머리를 넘기면서 확인할 수 있었어요. 좋지 않은 상이에요.”
“네? 어떻게요?”
“그저 귀에 살이 없고 볼이 없으면 감정보다 이성에 충실한 사람일 뿐인데 귀 위쪽인 이각이 뾰족하고 날이 서
있습니다. 관상에서 귀는 마음을 뜻해요. 마음에 날이 서 있는 여자예요.”
“날이 서 있다구요?”
“본래 관상은 어느 한 곳만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여러 부분을 같이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데 이각이 날이
서 있으니 그녀의 눈도 다시 봐야 해요. 본래 눈이 크면 보기에는 예쁘지만 마음이 약하고 정기가 약하다고
보는데 귀와 같이 보니 물고기 눈(魚眼)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안은 흉폭하고 사나워
요.”
“뭐예요,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싸이코패스?”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결코 좋은 상은 아닙니다. 혹시 아는 형사 있어요?”
“생년월일은 사주를 보려는 게 아니었어요?”
“허... 이 사람은 사주를 봐야 하는 게 아니라 범죄이력부터 조회해야 할 사람이에요.”
< 총선이 끝나고...(1) > 끝

< 총선이 끝나고...(2) >

다음날, 현진물산의 핵심 임원진은 회사가 아닌 강남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모였다.

“오늘 우리는 현진물산에서 HS 물산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HS 물산은 그룹의 중심이 될 것이며 HS 관광, HS
건설, 그리고 앞으로 인수하게 될 해주조선해양은 HS 조선해양으로 이름을 바꿔 HS 물산의 지원 아래 더 큰
도전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으며 곧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영훈은 ‘HS 그룹 창립일’ 행사장 단상 위에서 조근조근 연설을 이어가는 송은채 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룹 핵심 사장단과 임원들, 그리고 외부에서 기념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송은채
사장을 향하고 있었다.
송 사장도 이 자리가 뜻깊겠지만 영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멋들어진 수트를 입고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옆에 여배우 뺨치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연희가 얼굴을 가까이 대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요.”


“칫... 또 말 돌리기는...”

영훈은 웃으며 물었다.

“왜요? 심심합니까?”
“아니요, 난 좋아요. 우리 회사가 이렇게 커지는구나 싶기도 하고...”
“사장님 보니까 어때요?”

연희는 미리 준비한 종이를 들고 차분히 읽어 내려가는 송은채 사장을 보며 말했다.

“난 우리 엄마가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아빠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우리 엄마 참 멋있다.”
“당신도 저 자리에 있으면 똑같이 멋있을 겁니다.”
“하긴, 내가 또 비주얼 하면 어디가서 꿀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말 돌리지 말고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진짜 이런저런 생각 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어머니가 있었다면 열심히 자랑했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아...”
“앞으로 회사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전에 만났던 주인도 대사 사모님이 데리고 왔던 며느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도 들고.”
“솔직히 나도 그게 궁금해 죽겠어요.”

연희는 아는 사람을 통해 문숙에게서 받은 정보를 가지고 범죄이력조회를 요청했는데 그게 바로 1 시간 전이었다.


오전도 되기 전에 문자로 보내준 걸 보면 그녀도 꽤나 마음이 급했나보다.

“잘 아는 형사한테 요청한 거예요?”


“몰라요. 예전부터 저랑 같이 일해온 사람인데 그 사람이 믿고 맏길 만한 사람이라고 말해서 그런 줄 아는 거지.
전 누구한테 시켰는지 몰라요.”
“으음... 그 심부름 센터 같은 곳은 어떻게 아는 겁니까?”

연희는 슬쩍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사실 심부름 센터가 맞긴 해요. 제가 예전에 아예 한국에 눌러 살겠다고 마음먹고 주저앉았을 때 그때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요?”
“어린 마음에 내가 여기서 눌러 앉아서 할아버지한테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결혼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든 꼬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남자만 잘 고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웃기죠?”
“솔직히 웃기긴 합니다. 아... 이거 뭐 거의 중학교 때나...”
“그 정도는 아니죠. 어쨌든 말했잖아요. 어린 마음이었다고. 그리고 자꾸 내 입으로 내 자랑하게 되는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더 대시 많이 받은 여자는 없을걸요? 아, 연예인 빼고.”
“연예인 안 빼고 말했으면 너무 양심 없었던 거 알죠?”
“칫... 어쨌든 내가 딱 찍은 남자가 아무 문제가 없기만 하면 난 그 남자에게 여지를 주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진행한다는 게 내 계획이었죠.”

대시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지만 주면 된단다.


듣다 보니 재미있다.

“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연희는 갑자기 화가 나는지 한숨을 푹 쉬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하...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그냥 아무 남자나 막 찍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누구나 들으면 아는 재벌이나


정치인 아들을 찍어서 내가 찾은 그 심부름 센터에게 가져다 주고 뒤를 캐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요?”
“난 많은 거 안 바랬어요. 솔직히 젊은 남자가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여자 만날 수 있지. 그런데
룸싸롱을 밥 먹듯이 가고 동거는 기본에 낙태도 몇 번씩 시키면 그건 쓰레기잖아요? 그런데 다 그런거예요!
많이도 아니야. 딱 다섯 명을 봐달라고 했는데 하나같이 쓰레기인 거 있죠? 미친거 아니에요?”

영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랬어요?”
“내가 그때 열 받아서 한동안 남자를 안 만났다니까요? 그러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한국에서 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한참 뒤에 만난 게 이형준 본부장이었어요. 왠지 그 인간도 그럴 것 같긴 했는데 계속
뒷조사를 하다간 결혼 못 하겠다는 생각에 뒷조사를 안 시켰거든요? 그런데 나한테 딱 걸린
거죠.”
“으흠~ 그렇게 같이 일하게 된 거였군요. 그런데 일을 잘하긴 하네요? 뒷조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걸
다 알아내오다니?”
“저도 처음엔 조금 놀랐어요. 흘려 듣기로는 예전에 형사를 하셨다는데 정보력이 대단했어요. 조금 시간이
걸릴지언정 원하는 정보는 끝까지 캐주더라구요. 하여튼 그런 사람이니까 적어도 어설프게 알아내오지는 않을
거예요. 그나저나 난 그게 아쉬워요. 적어도 사주 정도는 알아내면 좋을 텐데.”
“저도 궁금하긴 한데... 일단 기다려 봅시다.”

영훈은 입을 다물고 단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송은채 사장의 긴 연설이 끝나고 난 뒤 이번에 승진한 강노식 부사장이 미래 그룹 비젼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현진관광은 기존에 해왔던 해외호텔의 공격적인 인수을 중단하고 기존 호텔의 내실을 다져 실적개선을 이루어
가겠다는 단기계획을 발표했다.
현진건설은 반대로 국내 공기업 위주 발주된 공사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 해외 건설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세계적인 건설회사를 목표로 한다는 아주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미래 비젼에 대한 설명을 듣는 와중 연희가 영훈의 팔을 확 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연희가 다가와 속삭였다.

“연락 왔어요.”
“뭐랍니까?”
“여기 봐봐요.”

연희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내밀었다.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확인, 폭력전과 1 건 확인, 추가로 2017 년 합정동 반지하 화재사건 용의자였던 이력
확인. 자세한 기록 메일로 전송.]

“어?”
“대박... 이거 알려주면 문숙 아주머니 우리한테 절해야 하는거 맞죠?”
“아마도?”

연희는 이제는 아예 단상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
당장이라도 주인도 대사 사모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눈빛이다.
그렇게 1 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영훈과 연희는 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송은채 사장은 조금 더 머무르며 사람들과 만나고 인맥을 넓혔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연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영훈도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송 사장에게 쏠린 이목을 굳이 자신에게로 가지고 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호텔을 빠져나온 둘은 회사에 들러 메일로 온 전과기록을 출력해서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 뒤쪽 언덕을 한참 오르면 고급 빌라단지가 위치해 있는데 그 가운데쯤에 손을 흔드는 중년 여인을 보고는
차를 세웠다.

“여기!”
“타세요.”

전에 백화점에서 봤을 때는 ‘나 오늘 외출해요’라는 듯 고급스러운 코트와 백을 걸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집에서


바로 나온 듯 편한 옷차림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다급하게 묻는 문숙에게 연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주머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뭔데? 뭐가 있기는 있는 거야?”
“글세, 그 여자 폭력전과가 있더라구요.”
“폭력전과?”

문숙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떠졌다.

“사실 폭력전과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요. 2017 년에 합정동 반지하에 화재사건이 있었대요. 저도 오면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확인해봤는데 그때 여대생 한 명이 화재로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며느리 될
분이...”
“며느리 될 여자라고 하지마. 아직 모르는 거잖아.”
“아, 그렇죠. 그 여자가 용의선상에 있었대요.”

문숙은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고는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오면서 다시 확인했어요. 용의선상에 있었던 게 맞는데 증거가 없어서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대요. 물론 이
여자가 진짜 무죄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폭력전과가 있다며. 알겠어, 고마워. 그런데 상무님은 우리... 아니, 그 애를 어디서 봤던 거예요?”

영훈은 오면서 알아낸 폭력전과 기록을 토대로 말했다.

“제작년에 친구들과 간단히 술을 마시고 나오는데 길거리에서 엄청 크게 싸움이 났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거라 당연히 남자가 여자를 때릴 거라 생각해 말리려는데 오히려 여자가 남자를 폭행하고 있었죠.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눈에 익었나봅니다. 그리고 평소에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기도 하구
요.”
“고마워요.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일단 일이 처리되면 내가 어떡해서든 답례를 할게요.”

그녀는 정신이 없는지 서류를 받아들고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영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백미러로 보다가 말했다.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놀라셨겠죠. 나 같아도 놀라 자빠졌을 거예요. 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 그런데 정말
다행이에요. 난 얼굴 보고 세상 착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보통 살집이 좀 있으면서 눈이 크고 처진 눈썹을 가지고 있으면 착하다고들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맞는 경우도
많구요. 그런데 상을 잘 보면 너무 평범하고 오히려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긴 사람이 흉악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나 관상을 오래 보신 분들은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은 어쩔 수 없이 항상 조심해야 하죠.”
“무섭다...”
“갑시다.”

이제는 제법 운전을 하는 영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도움을 줬는데 뭐 도움 받을게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내 전문이 아니니 한번 찾아보시든가요. 전 인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요. 이러라고 직원들 쓰는 거니까. 내가 부장님이랑 한번 상의해볼게요.”
그런데 한참 운전하는 와중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라 안 받을까 하다가 핸드폰 번호라서 차량 블루투스로 연결해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최영훈 상무님 전화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반가워요. 나 해주조선해양 강일후라고 합니다.]

강일후 사장.
지금까지 계속 인수 협상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훈은 산업은행장만을 만나왔을 뿐 그와 대면한 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언제고 한번 만나자고 연락올 줄 알았는데 인수가 코앞까지 왔는데도 조용하시니 말이에요.]
“그런가요? 저는 괜히 인수 전부터 사장님을 부담스럽게 하는게 아닌가 해서 그랬습니다.”
[그래도 이제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언제 뵐까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가 느긋하게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에요. 오늘 봅시다.]
“그러시죠. 거제에 계시죠?”
[아니에요. 마침 서울에 올라와있습니다.]

거제까지 내려가려니 부담됐는데 잘 됐다.

“좋네요. 제가 저녁에 괜찮은 식당 예약해놓겠습니다.”


[그래요. 그때 봅시다.]

영훈이 전화를 끊자마자 말했다.

“왜 보자고 하는 걸까요?”
“음... 아무래도 인수가 확정되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서 아닐까요?”
“그건 너무 뻔하긴 한데 그럴거면 진즉 보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또 그렇네.”
“으음...”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운전하는데 연희가 기사를 검색하고는 말했다.

“어? 방금 속보가 떴는데... 카타르 쪽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요.”


“뭔데요?”
“대규모 발주를 예고했던 카타르페트롤리엄에서 가스전 확장 산업을 연기했대요. 아무래도 대규모 LNG 선박 발주
릴레이가 끊어질 모양새예요.”

연희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무려 3 조 가까운 금액을 투자해 인수하는 회사인데...

“일단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영훈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거두었다.


조재민 의원의 운을 믿기 때문이다.
< 총선이 끝나고...(2) > 끝

< 총선이 끝나고...(3) >

영훈이 잡은 가게는 강남의 한 불고기 전문점이었다.


누굴 대접기 위한 장소라서 정한 게 아니라 그냥 영훈이 먹고 싶어서 정한 곳이었는데, 그렇다고 누추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상당히 비싼 곳이었으니까.
영훈이 룸을 잡고 미리 주문을 한 후 기다리기를 10 분 정도 됐을 때 장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조금 마른 체형에 강퍅한 인상의 남자는 쉽게 친해지기 힘들 것처럼 생겼다.
이런 사람이 상사로 있으면 아무 말 없어도 부하직원들은 괜히 눈치 보게 되는 얼굴이라고 할까?

“안녕하세요. 현진물산 최영훈입니다.”


“반갑소. 나 강일후요.”

둘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강일후 사장은 잠시 영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소문이요?”
“당신이 무진중공업 물 먹이고 우리 회사 인수하려고 작전 짰다면서요?”
“하하, 누가 그럽니까?”
“산업은행장이 그러던데요?”

영훈은 변명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 들어도 산업은행장에게 들었다니···.

“아··· 말씀 편히 하십시오.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햇병아리 아닙니까?”


“그것도 들었는데 참··· 대단하긴 해요.”
“편히 하시라니까요.”
“뭐··· 그러지. 하하, 송은채 사장 따님과 결혼한다면서? 이러니 내가 말이 쉽게 놓아지지가 않는 걸?”
“상관치 마세요. 전 제 능력 외의 신분 때문에 대우받는 거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오··· 그거 쉽게 할 수 없는 말인데. 그만큼 본인 능력에 자신이 없다면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이야기거든.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그게 사실이었나?”
“산업은행장이 한 말 말입니까?”
“그래.”

영훈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과장이 있었을 겁니다. 그저 제가 현진물산 대표로 협상했을 뿐이지 모든 그림은 저희 부사장님과
본부장님이 그린 거라서요.”
“우리 같은 식구 될 거 아닌가? 너무 숨기지 말자고.”
“굳이 숨길 이유가 있습니까?”

가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이지, 아직 가족이 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말조심에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현진물산이··· 아, 오늘 HS 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했지?”


“맞습니다.”
“그래, 원래 이름을 바꾸면 자꾸 불러줘야 재수가 좋다지? HS 물산이 우릴 인수한다고 했을 때 난 찌라시인 줄
알았어. 그것도 되도 않는 찌라시 있잖아? 연예인 이야기나 쓰던 연예부 기자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 하나
듣고 써갈긴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했거든. 이유가 없잖아? 왜? 어째서 HS 물산이 우리를
탐내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더란 말이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어보면 답해줄 건가? 아, 장기적으로 조선업이 살아날 것 같다는 말이라면 난 믿지 않을 걸세. 그런 믿음으로
던지기엔 3 조는 너무 큰 금액이거든. 게다가 HS 그룹처럼 현금이 많지 않은 곳이라면 더더욱.”
“하하, 제 마음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딱 그 대답을 하려고 했거든요.”
“그럼 이제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요. 그 대답이 맞습니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이때 마침 점원이 들어와 불고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판에 불고기를 올리고 불을 올린 후 술을 내오자 영훈이 먼저 술병을 들었다.

“일단 한잔 받으시죠.”
“미안하지만 술은 됐네. 식사를 끝내고 바로 거제로 내려갈 예정이거든.”

영훈은 술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어째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 그저 인사나 하자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닌 듯했다.

“이유가 중요합니까?”
“그래, 중요하네. 그것도 아주. 십 년이 넘었네. 잘 나가던 회사가 고통의 시간 속을 헤매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어. 그런데 현진중공업을 멀쩡히 잘 가지고 있던 회사가 갑자기 계열 분리를 하더니 또 다른 조선업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어. 차라리 현진중공업이 사겠다고 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상사가 왜 우리
를 사려고 하냔 말이야.”
“그래서 뭐가 걱정이 되는 겁니까?”
“다! 모든 게 다 걱정이 돼. 오늘 기사 봤나? 카타르페트롤리엄에서 가스전 확장 사업을 연기했어. 이건 시작이
될지도 몰라. 아직 수주잔량은 남아 있지만 언제 수주가 끊겨서 다시 굶주림이 시작될지 모른다고. 그런데
자네들은 거기에 군산조선소까지 끼얹었어. 생각해봤나? 군산조선소에 인력을 몇 명이나 충
당해야 할지 생각해봤냐고.”
“최소 2 천 명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허··· 완전히 미쳤군. 2 천 명? 그 인원들 월급 제대로 나가려면 군산 조선소 도크가 계속 돌아가야 해.
거제에서 일감 빼서 군산에 박으면 최대 1 년이야. 1 년이 지나면 거제랑 군산 도크가 놀게 된다고.”
“그럼 그 전에 일감 열심히 받아오면 되겠군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 아니지?”
영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해합니다.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많이 걱정되시겠죠.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많은 일감을 따오는 것. 그게 회사원의 업무 아닙니까?”
“난 자네들을 믿을 수 없어.”
“그래서요?”
“믿음을 주지 못하면 우린 이 인수를 받아들일 수 없어. 힘이 없는 우리가 무조건 인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테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골치 아프게 만들 수는 있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원하는 게 뭡니까?”
“믿음을 주게.”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일본 미쓰이 상선이 얼마 전에 LNG 추진 페리 2 척을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했다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조선회사들은 LNG 기술이 국내보다 많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야. 그러다 보니 크기가 작은 선박을
발주하면서 기술을 키워가려는 상황이지. 하지만 발주를 낸 미쓰이 상선이라고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야. 전 세계적으로 LNG 운임 가격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는 추세거든. 배를 발주하고
받고 난 다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면 이미 경쟁에서 뒤처진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요?”
“미쓰이 상선을 구슬려봐. 지금 돈을 쥐고 쓰지 못해 안달하고 있을 게 분명해. 아마 정치적인 문제까지
엮여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다른 해운사인 니센 카이운이 무진중공업에 LNG 선을 3 척 발주한 상황이야. 이대로
가다간 LNG 운송 시장을 잃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해주조선해양 직원들은요?”
“부끄럽지만 우리는 잘 안 됐네. 흔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한테 믿음을 주게. HS 물산의 식구가 된 후에도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는 믿음. 직원들은 그게 필요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받아들였다고 믿겠네.”

영훈은 단호한 강일후 사장의 표정을 보고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요 며칠 형준은 곤충이 된 것처럼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다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대화하고 난 뒤 아무것도 아닌 오해였다고 결론을 내려주고 나서, 일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2 차전이 시작되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에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고 가족과 같이 식사할 때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집에서는 철저하게 연기에 몰입한 형준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아이고, 여기까지 다 오고··· 갑지기 웬일이야?”


“잘 지내셨죠?”

형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는 사람은 신영투자증권 장근형 사장.
신영은행에서부터 일을 시작한 그는 근속연수가 20 년을 넘는 신영인이었다.
“투자회사 사장이 요즘 같은 시기에 잘 지낼 수가 있나.”
“하긴, 요즘 시장이 안 좋죠?”
“대외적인 요인들 때문에 예측하기도 쉽지가 않아. 편드 실적이라도 괜찮으면 모르겠는데 국내 펀드는 물론이고
해외 펀드도 미국 주식이 주가 아니면 실적이 영 별로니···.”
“호텔은 어때요?”
“네가 있을 때 매입했던 호텔들은 상황이 괜찮아. 좋은 투자가 확실했어. 경기도 안 타고 매출 흐름도 견조해.
이 기조를 이어서 우리도 계속 해외 호텔들을 주시하고 있어. 좋은 투자였어.”
“하하, 이거 다행이에요. 제가 손댄 게 영 별로였으면 얼굴 들고 여기 오기도 쉽지 않을 거 아닙니까.”
“회장님 손자인 네가 설마 얼굴 못 들고 다니겠어? 그런데 여기는 갑자기 무슨 일로 왔어? 술 마시자는 거
아니면 누구 만나러 가지도 않잖아?”

형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룸싸롱에서 불러놓고 조용히 이야기했을 텐데 문제는 이 사람이 그런 곳은 절대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데 있었다.
이 바닥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장근형 사장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회식도 저녁만 먹고 바로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소문 못 들으셨나 봐요. 이형준 사람 바뀌었다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듣기는 했지. 난 솔직히 이 상무 술 마시고 다니는 거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술 마시고 능력이
부족하면 문제인데 요새 아주 슈퍼맨이던데? 그렇게 일 잘하면 젊은 남자가 좀 노는 게 뭐가 문제겠어.”
“이야··· 우리 장 사장님 많이 바뀌셨네. 예전에는 그렇게 구박하셔놓고?”
“그때는 이 상무가 영 믿음이 안 가서 그랬지. 호텔 건 결과 좋고 요즘 일 시원시원하게 하니 내 평가가 달라진
거 아니겠어?”
“그 평가에서 조금 더 올려주세요. 요즘은 어지간해서는 룸싸롱도 잘 안 갑니다.”
“오··· 이유가 있을 때만 간다?”
“그런 셈이죠.”
“소문이 실제라니 그것보다 좋을 게 있나. 그럼 오늘 방문도 당연히 이유가 있을 테고?”
“맞습니다.”
“말해봐. 뭐 도와달라는 거야?”
“그것도 맞습니다. 저 좀 도와주십쇼.”

장근형 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많이 도와주고 있지 않아? 현진관광 인수전에도 많이 도와줬었고 말이야. 그런데 뭘 또 도와줘? 어디 또


잡아먹고 싶은 데가 있어?”
“그건 아닙니다. 현진투증 자산을 움직여달라는 게 아니라 사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어서 왔거든요.”
“나? 내가 도와줄 일이 있나?”
“네. 사장님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내가 뭐라고?”
“사장님은 신영금융지주 이사시지 않습니까.”

순간 장근형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긴 하지.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본래 신영은행 부행장이 상무이사직을 겸하고 있다가 퇴사하고 난 뒤, 장근형 사장이 그 뒤를 이어 상무이사직을


맡고 있었다.
장근형 사장이야 어차피 회장의 거수기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상무이사직을 맡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 회장의 손자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걸 까먹습니까?”


“나도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잖아. 월급쟁이들이 다 그렇지. 뭐, 연봉이 조금 높아진 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어. 덕분에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거든.”
“아직 정정하십니다. 오래 일하셔야죠.”
“하하하, 오래 일하고 싶은데 말이야. 지금 누가 내 회사생활을 위협하는 말을 하고 있지 않겠어?”
“설마 그게 저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나? 그러니까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이만 가 봐.”

장근형 사장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형준이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새 새로 사귄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도를 닦은 건지 어지간해서는 흥분을 하지 않아요. 아무리


천지개벽할 일이 생겨도 말이에요.”
“어?”
“그래서 저도 이제 그 친구 따라서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볼까 합니다. 사장님께서는 저를 보내고
아버지께 전화하시겠죠? 아니라고 말하지는 마세요. 믿지 않으니까.”
“더 해봐.”
“그럼 전 할아버지께 중동 자원개발 투자 때 손실 났던 1 조 5 천억 중에 일부 금액이 룩셈부르크에 있는 지방
은행에 들어간 정황을 말씀드릴 겁니다.”

장근형 사장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 어떻게···.”
“전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나겠죠. 아주 곤란한 상황일 텐데 뭐··· 그럭저럭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될까요? 다른 곳도 아니고 조세피난처에 5 백만 달러 규모면··· 아버지도 커버쳐주지 못할걸요?
아마 저보다 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룩셈부르크 은행에 들어간 돈 못 본 척 해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노후에 해외에 저택 하나 사놓으시고 편안히
여생 보내세요. 대신 나중에 아버지와 저, 이렇게 둘 중에 한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그 상황을 두고 보실까?”
“어쩌면··· 어쩌면 그냥 두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웃기는 짬뽕 아닙니까? 하하하!”

< 총선이 끝나고...(3) > 끝

< 총선이 끝나고...(4) >


다음날, 영훈이 회사로 출근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고승현 상무였다.
고 상무는 오랜만에 찾아온 영훈을 보고 화색을 띠며 반겼다.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야? 어떻게 회의나 공식 행사가 아니면 코빼기도 안 비춰?”


“사실 한가한데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면 사람들이 욕할까봐 자제했습니다. 요즘 별일 없으세요?”
“나야 하루하루가 즐겁지. 승진했겠다, 내 일만 잘하면 누가 터치할 일 없겠다, 해외자원사업부 윤정환 상무님이
계속 눈치주는 것만 아니면 해피해.”
“아, 그렇겠네요. 만날 때마다 눈치 보시겠습니다.”
“당연하지. 한참 어려서 아직 밑에 있어야 할 놈이 같은 상무를 단 것도 화날 일인데 지금 분위기가
해외자원사업부보다 특수사업부가 회사 내에서 더 핵심 부서로 인정받는 분위기잖아. 한순간에 찬물 뒤집어 쓴
기분이 들거야. 이해해줘야지.”
“그렇군요. 참 인사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원래 사람관리가 제일 어려운 거 아니겠어? 아가씨랑은 어때? 결혼 날짜 잡았어?”
“사장님께서 알아보고 계신답니다.”
“빨리해야 할걸? 회장님 아직도 안 깨어나셨잖아. 저러다 돌아가시면 그해 결혼 어려워. 게다가 전 사장님도
병원에 누워 계시고... 최대한 빨리 해야 할건데?”
“그래서 저도 어떻게 프로포즈를 해야 할까 고민중입니다.”
“그래, 잘 준비해. 그건 그렇고 갑자기 말도 없이 찾아온 이유가 있어? 그냥 놀러온 건 아니지.”
“네. 상의 좀 드릴 게 있어서요.”
“뭔데?”
“아까 해주조선해양 강일후 사장을 만나고 왔어요.”

고승현 상무가 씨익 웃는다.

“강일후 사장? 왜? 좀 잘 봐달래? 그래도 소문을 빠른가봐?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걸 보면? 특별할
거 없어. 원래 인수당하는 회사 임직원들은 인수 전이 가장 피 마르거든. 적당히 잘 달래면 되기는 하는데 그게
또 사람 마음처럼...”

영훈은 길어지려는 고 상무의 말을 끊었다.

“그게... 잘 봐달라고 만난 게 아니었어요.”


“응? 그게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건데?”
“우리 회사가 자기네 회사를 인수하는 게 영 불안한 모양이에요.”
“그건 그렇겠지. 그래서?”
“역량을 보여 달랍니다. 인수해서 잘 운영할 수 있는 역량.”
“그걸 왜 보여줘야 하는데?”
“그래야 안심할 수 있다구요.”
“우리가 안심을 시켜줘야 할 이유가 있어?”
“따지고 보면 없는데 무시하자니 좀 그렇습니다.”
“그냥 무시해버려. 정 뭐하면 잘라버린다고 해.”
“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목 자르는 건 상관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제야 고 상무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진지해졌다.

“자르라고 했다고?”
“네. 자기는 해주조선해양에 한평생을 바쳐왔다고 합니다. 동기들 잘려나갈 때 도와주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네요. 제대로 경영 못하고 또 수많은 사람 자르게 할거면 그냥 인수할 때 자기를 자르라는 식으로
나오던데요?”
“하핫! 그 양반 강단 있네?”
“군산조선소까지 가져온 마당에 그걸 움직일 만한 수완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하지 못하면? 노조라도 움직이겠대?”
“아니요. 언론을 움직일 것 같아요. 경영 능력도 없는 재벌이 마구잡이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또 대규모 실업을
유도할 거라는 식으로 할 것 같은데... 솔직히 무시해도 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굳이 무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기는 해요.”
“우리를 무진중공업이랑 똑같은 놈으로 만들겠다... 일리는 있네. 그래서 뭘 해주면 감동하면서 우리를
받아주겠대? 발주라도 따 오래?”
“네.”
“허... 말도 안 된다고 하자니 물건 팔아먹고 사는 상사인으로서 차마 그 이야기는 안 나오고... 어디서
받아오래?”
“일본 미쓰이 상선이 LNG 선을 발주하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정치적인 문제인지 쉽사리 결정을 못내리고 있다고
해요.”
“미쓰이 상선?”
“네. LNG 추진 페리 2 척을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하면서 미쓰비시중공업의 기술력을 끌어올려주려는 상황인데
마음을 바꿔서 우리쪽에 발주를 내도록 해줬으면 하더군요.”
“얼마나?”
“몇 척을 수주해달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진짜 딱 능력만 보여달라 그 이야기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강 사장은 물론이고 해주조선해양 직원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는 하겠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걸? 미쓰이 상선이면 우리도 잘 알지. 우리랑 거래도 꽤 했던 곳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선택지를 잘 골랐다고 할 수 있기는 한데... 난 반대야.”
“그런가요?”
“아마 사장님도 반대할걸?”
“이유가 뭡니까?”
“건방지잖아.”
“그게 단가요?”
“최 상무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의외로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해. 그렇게 걱정되고 우리의 능력이
궁금했으면 그런식의 협박 비스무레한 걸 할 게 아니라 부탁을 했어야지. 그래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감히 누굴
시험해?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리 엎고 나왔을걸?”
“흐음... 그렇군요.”
“그럼 최 상무는 어떡할건데?”
“굳이 반대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죠.”
“포기하게?”
“네.”
“쓰읍... 이러면 재미 없는데...”
“왜요? 내가 억지로 밀어붙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럴 줄 알았지. 최 상무 나이 때는 한번 결정한 일을 타인의 의견으로 되돌리는 게 쉽지 않으니까. 난 당연히
나서서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말겠다는 식으로 나올 줄 알았어.”
“사장님도 반대할 거라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영훈이 어깨를 으쓱이자 고승현 상무가 입맛을 다셨다.


“쩝... 왠지 내가 지는 기분인데.”
“이게 뭐라고 이기고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지 말고 그럼 이렇게 하자고.”
“네?”
“건방지긴 하지만 우리한테도 손해는 아니야. 지금 우리 회사 주가가 계속 하락세인 건 알지? 부채비율은
높아지고 주주들은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부담이 될 거라고 말하고 있어. 현진관광 인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 이 와중에 추가 수주를 받아오면 주가에도 도움이 될 거야.”
“그렇군요.”
“강원도 삼척과 서울을 오가는 호노다 세쿠라는 미쓰이 상선 한국지부장이 있어.”
“삼척이요?”
“국내 LNG 가스 수입은 주로 삼척 호산항을 통해 이루어지거든. 호산항에 한국가스공사 생산기지가 있기도 하고.
그래서 서울과 삼척을 오가는데 나와 몇 번 만나기도 했어. 급하게 추가로 미국 셰일가스를 들여와야 했을 때
이용했거든. 일단 그 사람을 만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고. 아, 그 전에
해주조선해양 선박 기술자 하나 보내 달라고 해. 난 기름 파는 재주는 있어도 기름을 담고 다니는 배에 대한
지식은 젬병이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약속 잡으면 연락 줄게.”

영훈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상무님께 의논드리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찝찝해. 울며 겨자 먹는 기분이야.”
“해주조선해양은 이제 거의 우리 회사 아닙니까? 우리 회사 일감 받아오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억지로 참고 넘어가주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차피 최 상무가 할 일 아니야?”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전 가스 싣는 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상무님이 도와주셔야죠.”
“흥, 현진관광 인수할 때는 호텔에 대해 잘 알면서 했어?”
“뭐, 그렇게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 같기는 하네요.”
“우리 딱 세 척을 목표로 하자. 그러면 한 7 천억 되려나?”
“와... 어마어마 한데요?”
“그 정도는 돼야 프로포즈 선물로 제격이지. 아 참, 프로포즈 선물은 정했어? 아가씨가 눈이 엄청 높을 건데?”
“네, 브랜드랑 모델명, 손가락 사이즈까지 적어주셨습니다.”
“하하하! 고민할 필요 없어서 좋겠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특수사업부에서 나온 영훈이 기조실로 올라왔을 때 연희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민희 씨가 그러는데 특수사업부에 내려갔었다면서요?”


“네. 어제 해주조선해양 강일후 사장 만났었잖아요?”
“아, 맞다. 어젯밤에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그냥 인사나 하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전화통을 붙잡고 1 시간 내내 예식장 컨셉과 신혼여행지에 대해 떠들어대니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았었다.

“네. 조금 웃긴 상황이었거든요.”
“웃겨요? 어떻게요?”
“글쎄 우리더러 배를 수주해오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배를요? 그네들도 영업조직 있잖아요?”
“군산조선소까지 떠안겼으니 그걸 돌릴 만한 영업력을 보여줘야 자기네들도 안심하고 인수를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어머,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다고? 신경 쓰지 말아요.”
“고승현 상무님하고 같은 말을 하네요.”
“상무님도 그러죠?”
“네, 그래서 신경 안 쓰겠다고 하니 상무님이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수주를 받아오면 그건 나쁜 게 아니니
해보자고 하시더라구요.”
“그건 그렇지만...”

연희는 입을 툭 내밀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낸다.

“다행스러운 건 친절하게도 일단 배가 필요할 만한 회사를 콕 찍어주기는 했어요. 일본 미쓰이 상선이라고 상당히


큰 해운업체라고 하더라구요.”
“나도 들어봤어요.”
“그래서 상무님이 미쓰이 상선 관계자와 미팅을 잡아보겠다고 하셨어요. 나도 참석할 거고.”
“얼마 짜리 계약이 될 것 같아요?”
“나도 잘 모르지만 한 척에 2 천억이 넘는다고 하니 한 척만 수주해도 적은 계약은 아닐 텐데 고 상무님은 세
척을 목표로 잡겠다고 하던데요?”
“세 척이요? 그럼 약 7 천억 규모? 와... 쎄긴 하네. 그럼 이렇게 해주면 우리를 인정하겠대요?”
“몇 척을 해달라는 말은 없었으니 한 척만 해도 인정하겠다는 것 같아요.”
“애사심이 투철한 사람인가봐요? 그러다 짤리면 어쩌려고 그러지?”
“나중에 가서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왔어요.”
“허... 회사에 오래 있었대요?”
“해주조선해양이 첫 입사였나 봐요. 그래서 회사에 애정이 아주 많다는 걸 엄청나게 피력하더라구요.”

연희는 영훈의 어조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파악했다.


“피력했다? 그럼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물의 사주를 타고났는데 재성이 과해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조직이나 사람에게 큰
정을 주지 않아요. 자신의 이익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회사에 충성심이 높아서 한 직장에 오래
다닌 게 아니라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지 않은 겁니
다.”

연희는 이제 사주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빛냈다.


아예 영훈의 옆에 의자를 끌고와 앉아서 물었다.

“그리고요?”
“대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면 자기만의 생각이 확고해서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데 이 사람은 금전적인
유혹이 있을 때는 쉽게 흔들릴 겁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탐욕을 부리다가, 또는 주변 사람을 너무 믿다가 큰
곤란을 겪기도 해요. 그리고 양인이 공망이라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잘합니다. 아마 그는 스
스로도 자신이 거짓말을 잘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잘 사지
않기도 해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그럼 회사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죠.”
“그럼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말했잖아요. 그는 귀가 얇고 탐욕을 부리는 성향이 있다고. 누가 그 자를 옆에서 흔든 겁니다.”
“누가요?”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누가 그런 건지.”


“그럼 그 자가 원하는 대로 배를 수주해 올 거예요?”
“바라는 게 미쓰이 상사에서 배를 수주해 달라는 거였으니 일단 원하는 대로 움직여봐야 그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만약 문제가 드러나면...?”
“잘라야죠. 잘 됐지 않아요? 저런 사주를 가진 사람이 아무 문제 없다는 이유로 저 자리에 계속 앉아 있으면
불안해서 어떻게 두고 보겠어요? 해주조선해양에서 20 년을 넘게 근무한 사람이면 쫓아낼 명분도 많지 않은데.”
“가만 보면 당신도 참 대단해요. 그럼 앉은 자리에서 그가 거짓말 하고 있는 걸 알았을 텐데 어떻게 티를 안 내고
있었어요?”
“그가 20 년 넘게 한 직장에서 근무한 만큼 저도 20 년 넘게 절에서 수행했거든요.”

< 총선이 끝나고...(4) > 끝

< 총선이 끝나고...(5) >

총선 하루 전,
군산시장 보궐선거를 하루 앞두고 조재민 의원 선거사무소는 선거를 앞둔 긴장감 대신 들뜨고 즐거운 분위기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자체 조사결과 지지율이 89%를 넘어가는 압도적인 상황이니 그저 빨리 내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선거사무소에 한 사람이 방문했다.


행색을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행색의 아주머니인데 그런데도 그녀가 조재민 의원을 만날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서 풍기는 묘한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조재민 의원님을 만나 뵈려고 왔어요.”


“혹시 만날 약속을 하셨습니까?”

사무소 직원의 물음에 그녀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

“감히 누구한테 약속했냐, 안 했냐 물어요? 강금원 원내대표도 내가 만나자고 하면 만사 제치고 달려오는데.


가서 전해요. 임복희가 왔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느 간 큰 당직자가 감히 의원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당직자의 말을 들은 조재민 의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임복희라고?”
“네.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른 모시라고 해.”

조재민 의원은 당직자가 나가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임복희.
정치권에서는 아주 유명한 점쟁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를 떠나 이 여자가 찍은 정치인은 최소 대권후보에서 대권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이 바닥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몰라도 최소 그녀를 찾는 손님이 부지기수라는 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군산 바닥을 휘어잡던 강주원 의원이 그녀의 한 마디에 대권의 꿈을 접고 군산 바닥에 눌러앉은 건 너무도 유명한
일화니까.

당신은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했다나?


감히 국회의원에게 그런 말을 한 그녀도 웃겼지만, 그 한 마디에 꿈을 접은 강 의원도 웃기긴 했다.
하지만 반대로 도대체 어떻기에 엄청난 권력을 잡았던 국회의원들과 재벌들이 그녀의 한 마디에 벌벌 떠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잠시 후, 붉은 숄로 상체를 감싼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조재민 의원은 그녀를 본 순간 확실히 이 여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직감했다.
눈빛부터 달랐다.
분명 크지 않은 눈인데 이상하게도 부리부리하게 느껴지는 저 눈부터가 사람을 압도한다.

“절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그녀는 조재민 의원의 물음에 대답 없이 자리에 척 앉고는 씩 웃으며 말한다.

“얼굴이 좋네.”
“네?”
“신령님이 그러시네. 얼굴에 빛이 가득하대.”
“제가요?”

조재민 의원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여인의 다음 말에 웃음을 지웠다.

“어릴 때 어머니가 불공을 많이 드리셨네. 불심이 깊으셨어. 그치?”

어머니는 대학 다닐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어느 종교를 믿고 있었는지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적이 없었다.
숨긴 게 아니라 어머니가 어떤 종교를 믿고 있었는지 물어본 사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러셨죠.”

지금도 기억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위해 쉼 없이 산을 오르던 어머니의 모습.

“당시에는 어리석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공덕 덕분에 앞길이 이렇게 순탄하게 펼쳐진 거야. 어머니에게 평생
감사하고 살아.”
“그럼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 즈음해서 자꾸 꿈에 조 의원님이 나오는 거야.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어지간해서는
손님으로 온 적도 없는 사람이 꿈에 잘 안 나타나거든. 그러다 뉴스 보고 알았어.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 당신이잖아, 글쎄.”
“······.”
“내가 그래서 조 의원님을 아주 유심히 살펴봤어. 그러니까 신령님이 답을 주시더라고.”
그녀는 슬쩍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우리 의원님이 아주 대단한 분이 되실 거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아··· 그런가요?”
“주변에 인재가 구름처럼 모여들 인물인데 특히 얼마 전에 유방이 장자방을 만나듯 인재를 만났다고 하시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조재민 의원은 속으로 감탄하고야 말았다.


현진물산 최영훈 상무를 만난 것은 실로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찬 인연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 의원은 절대 내색하지 않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원래 정치를 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도와주고자 하는 법이죠. 제가 인덕이 부족하지 않아 재주 있는 분들이 많이


도와주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 비웃는다.

“조 의원님, 내 앞에서는 허세 부리지 말아요. 강금원 원내대표, 민구상 당 대표, 저기 통일평화당 사선, 오선
한 중진 의원들 전부 나한테는 거짓말 안 해. 왜 거짓말 안 할까? 거짓말하면 신령님이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저렇게 당당하게 하면 뭔가 있어 보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미 지금까지 정치판에 굴러오면서 저 여자에 대한 소문을 꽤 많이 들었으니 그녀의 말이 아주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신령님이 그러셔. 유방이 장자방을 얻었는데 소하를 얻지 못했다고.”


“소하요?”
“우리 조 의원님, 내가 왜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해?”

이놈의 점쟁이들은 신을 받자마자 존댓말을 하면 죽는다고 배운 건지 하여간에 혓바닥들이 전부 반토막이다.


욱하고 올라온 화를 살포시 억누르고 말했다.

“글쎄요. 짐작이 잘 안 되는군요.”


“내가 당신 대통령 만들어주려고.”
“네?”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허풍도 적당히 쳐야 어울려줄 만한데 대통령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유를 모르겠네요. 왜 직접 찾아와서 이러시는지···.”


“점쟁이가 복채 받는 거 말고 관심 있을 게 뭐가 있어?”

이런저런 핑계로 말을 돌렸다면 오히려 더 믿음이 안 갔을거다.


“그럼 제가 복채 드려야 합니까?”
“당연하지. 복채는 신령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올려야 해.”

그것도 선불이란다.
갈수록 기가 찬다.

“그런데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 지금 전화 걸어서 물어봐. 아까 내가 언급한 사람들 아무나 잡고 물어봐서 임복희한테 점을 보려고
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인지 순 뻥쟁이에 사기꾼인지 물어보라고. 얼른.”
“······.”
“조 의원님, 정치하려면 뻔뻔해야 해. 내가 전화하라고 할 때 바로 해야지. 그래도 그릇이 크니까 뻔뻔하지 못한
게 오히려 더 득이 될 것 같기는 하네.”

그녀는 피식 웃더니 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강 대표님, 나 임복희야. 응, 다른 건 아니고 오늘 내가 조재민 의원 좀 만나러 왔어. 우리 조 의원 잘 좀


봐줘요. 내가 봤을 때 크게 될 분이야. 응, 같이 있지. 잠깐만.”

그녀는 조 의원에게 받으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조 의원은 얼떨떨한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조 의원?]

강금원 원내대표다.
설마 했는데 정말 강 대표와 전화통화까지 이렇게 편히 하는 사이일 줄이야···.

“네, 대표님.”
[임 씨가 자네를 좋게 봤나 봐? 잘해보라고. 안 그래도 자네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야. 내일 선거 잘 치르고 언제
서울 올라와서 당선축하주나 한번 쏴.]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 잘 잡아봐. 그 여자 기가 막히게 신통하거든. 그런데 돈 욕심이 좀 많아. 그게 단점이지만
그래서 뒤끝도 없어.]
“잘 알겠습니다.”
[고생해.]

강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설마 해서 다시 번호를 살펴보니 정말 강 대표 핸드폰 번호가 맞았다.
임복희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천만 원이에요.”

조재민 의원은 순간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해봐야 백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천만 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다니···.
그런데 뭐 하고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녈 보고 있자니 왠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은행 앱을 통해 종이에 적힌 계좌번호로 돈을 보냈다.

“보냈습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신령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 의원님은 배짱도 있고 그릇도 큰데 주변에 사람이 부족하시대. 그러면서 여기 이


사람이 조 의원님 옆에 있으면 골치 아픈 일은 앓던 이를 빼듯 시원해지고, 험난한 일은 조자룡이 백만 대군을
돌파하듯 뚫어낼 거라고 말씀하셨어.”
“이 사람은 누굽니까?”
“강윤기라고 광주에서 작은 건설회사 하는 사람이야.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인데 우리 조 의원님이 어떻게
쓸지는 알아서 결정해. 종종 물어볼 게 있을 때 찾아와.”

그녀는 주소가 적힌 명함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몇 마디로 천만 원을 받아내는 그녀의 카리스마가 놀랍기도 하고 이 상황에 동조한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그러죠.”
“그리고··· 그 장자방이 누구야?”
“네? 왜 그러십니까?”
“궁금하니까. 내가 점쟁이이기는 해도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해. 다 알았으면 매주 로또 맞고 떵떵거리면서 살지
뭐하러 다리 아프게 여기까지 와?”
“회사원입니다.”
“직장인?”
“네.”
“언제 자리 한번 잡아봐. 내가 그 사람 제대로 봐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조 의원은 황당한 웃음을 짓고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만 원, 까짓거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 건설회사 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어떤 로비를 해서 자신에게 추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강금원 원내대표까지 움직여서 추천했다면 그 점쟁이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흥미가 동했다.
조재민 의원은 보좌관을 불러 말했다.

“여기 이 사람 알아봐. 뭐 하는 인간인지, 이상한 놈은 아닌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조만간 서울에 있는 최 상무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 시내의 한 고급 일식집.
인당 20 만 원이 넘는 고급 일식집이었지만 이상하게 영훈은 비슷한 가격대의 소고기를 먹는 것에 비해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승현 상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호노다 세쿠는 이 집 음식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감탄사를 뱉어댔다.
아무래도 고급 스시는 자신의 입맛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호노다 씨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이번에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게 됐어요. 듣기로는 미쓰이 상선도 LNG 선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아직 어떤 움직임을 보인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어떠십니까?”
“뭐가 어떠냐는 말인가요?”
그는 제법 유창한 한국말로 되물었다.

“해주조선해양이면 세계에서 손꼽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예요. 적당한 가격대에 발주할 용의가 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호노다 세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 상사인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돌적인 영업은 분명 일본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본사에서는 아직 외국에 LNG 선을 발주할 계획이 없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에 LNG 추진 페리선을 2 척 발주한 건 미쓰비시 중공업의 기술력을 올려주려는 계획 아닙니까?
지금 당장 발주해도 최소 2 년 후에나 인도받을 텐데 언제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실 생각인가요? LNG 운송 시장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될 게 걱정되지 않는 겁니까?”
“본사에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떤 의도로 나와 만나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전 그런 큰 프로젝트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사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허허··· 이것 참···.”
“다만, 아까 말씀하신 적당한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신다면 본사에 보고해볼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고승현 상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2,370 억입니다. 17 만 m³(입방미터)급 대형 선박으로 이 정도 가격이면···.”

호노다 세쿠는 고 상무의 말을 끊었다.

“상무님, 2,300 억이면 굳이 급하지 않은 본사에 제가 제시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전 본사에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빙그레 웃는 그에게 가만히 음식을 음미하고 있던 영훈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그만두세요. 여기 음식이 마음에 드시는 것 같으니 편히 드시고요. 상무님도 그만 하세요.


어차피 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어? 어, 그래.”

고 상무는 당황하면서도 꺼내놓았던 홍보용 선박 자료를 그대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흔들리는 호노다의 눈빛.

“최영훈 상무님이라고 하셨나요? 제가 듣기로는 해주조선해양에서 이번 HS 물산의 인수를 매우 우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전혀 급하지 않은 것 같군요?”

영훈은 호노다 세쿠를 빤히 보다가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봐요, 호노다 세쿠 씨.”


“네?”
“개수작 부리지 마세요.”
“이, 이게 무슨···.”

순간 호노다는 물론이고 고승현 상무까지 깜짝 놀랐다.


영훈은 얼빠진 표정의 호노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강일후 사장을 부추기면 우리가 급해서 떨이로라도 팔 거라고 생각했나요? 강 사장은 얼마를 먹기로
했어요? 한 척당 한··· 삼십 억 되나?”

고승현 상무는 놀라서 손을 가늘게 떠는 호노다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 총선이 끝나고...(5) > 끝

< 총선이 끝나고...(6) >

영훈은 놀라 당황하는 호노다를 보고 말을 이었다.

“본사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구요? 우리가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강일후
사장을 쥐고 흔드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이나 보죠?”

당연히 만나기 전에 호노다 세쿠에 대해 미리 파악해두었다.


그중 생년월일을 파악하는 건 기본이었고.
악수를 하고 나서 사주를 계산해보니 느낌이 왔다.
이 호노다 세쿠라는 자는 학문에 대한 재주가 있어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을 사주다.
하지만 처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는데다 무엇보다도 인복이 좋지 않았다.
장사를 하면 도와주는 사람은 없는데 사기만 치려는 사람이 꼬이고 직장을 다니면 온갖 트러블 때문에 구설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본사에서 나와 한국에서 근무하는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강일후 사장과 모의한 걸 의심한 이유는 마침 작년부터 그에게 재물이 빠져나가는 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 몹시도 궁핍할 것이며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마른 연못에서 탈출하려는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움직이려고
할게 뻔했다.
특히 작은 눈에 광대와 턱이 약한 이런 쥐상을 가진 남자는 우직한 소 같으면서도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있는
남자와 쿵짝이 절묘하게 맞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림이 맞춰지니 떡밥을 던져본 것인데 과연 단번에 들어맞았다.

“오. 오해입니다.”
“으음~ 표정 보니까 그것보다 못해 보이네? 멍청하게 한 척에 삼십억도 못 받으면서 그런 구라를 쳤대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영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풍기는 기묘한 카리스마가 호노다의 가슴을 틀어쥐듯 조여갔다.
“당신, 내가 웃으면서 말하니까 지금 상황이 장난 같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카타르 쪽에서 가스사업이 늦춰진다니까 옳다구나 진행했겠지. 당장 군산조선소를 돌려야 하는데 거제에
잡혀있는 물량을 군산으로 돌린다고 치면 버틸 수 있는 기간이래봤자 기껏해야 1 년, 가격에서 손해를 본다고
해도 무조건 받을 수밖에 없는 발주라고 봤을 거고. 거짓말하지 말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거짓말하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지.”
“...”
“아직 정신 못 차리셨네요? 좋습니다. 그럼 당신네 회사가 어떤 짓을 했는지 국내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까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증거가 뭐가 필요해요? 어차피 법적으로 문제삼을 것도 아닌데?”
“그럼 내가 이런 무례를 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있어요. 국내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 당신네들은 이제 앞으로 국내 조선사에서 배 발주 못 합니다. 안
그래도 전범기업인데 그런 수작을 부린 게 알려지면 국민 감정 때문이라도 국내 조선사는 발주 못 받아요. 국내
조선사 제외하고 LNG 선 건조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LNG 운
반 시장엔 아예 진출 포기할 건가요? 그럼 할 수 없고.”

그제야 호노다 세쿠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변해갔다.


국내 조선사의 LNG 선 건조 기술력은 해외 업체와 급을 달리한다.
전 세계 LNG 선 시장의 90% 이상을 한국이 차지할 정도다.
건조한지 2 년도 되지 않아 해상에서 엔진고장으로 폐선처리하는 중국조선사에게 발주할까? 아니면 아직도
기술력이 부족해서 18 조가 넘는 카타르 가스사업에 입찰도 하지 못한 일본 조선사에게 발주할까?
한국 조선사가 발주를 안 받아버리면 미쓰이 상선은 LNG 운반 시장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배로 LNG 를 운반하면 그만일까?
국제해사기구(IMO)의 규제로 인해 장기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박을 친환경 선박으로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 조선사가 기술력이 따라오길 느긋하게 기다리다간 어느 순간 시장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건 무리한 이야기 아닙니까?”


“어차피 LNG 선 발주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뭐가 문젭니까? 애초부터 당신네들은 배를 살 생각이
없었고 우리는 팔 생각이 없는데 서로 해피한 것 아닌가요?”
“...”
“잘 먹었으니 이만 일어납시다. 그리고 당신네 사장한테 똑똑히 전해요. 당분간 LNG 선 발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영훈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 상무도 얼른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호노다 세쿠가 소리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뭡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언론에 알리시는 건 한 번만 더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하... 이 사람 정신 못 차리시네.”
“하지만 귀사가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잘못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해의 여지를 준 책임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래서요?”
“귀사에서 원하는 가격에 배를 발주할 수 있는지 본사에 문의를...”
영훈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신을 뭘 믿고?”
“네?”
“당신 발언권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나 힘이 없는지 방금 전에 말해놓고서 기다리라? 흥, 당신이 본사에
문의한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럼...?”
“당신네 사장, 한국으로 불러오세요.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사과해야 할 겁니다. 아주 정중하게. 그럼 다시
생각해보죠. 고 상무님, 가시죠.”

영훈은 그대로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왔다.


고승현 상무는 후다닥 영훈을 따라 나와서는 차에 타자마자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던 거야? 아니, 처음부터 강일후 사장이 그런 조건을 단 게 미쓰이 상선의 로비였던 걸 알아챈
거였어?”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이상했는데?”
“그냥 느낌이 그랬어요. 직원과 회사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말투가... 하여간 뭔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알아봤어요.”

이제는 이런 거짓말도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다.

“그랬더니?”
“강일후 사장은 생각 만큼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걸 알고 궁금한 게 생기더라구요.”
“미쓰이 상선.”
“맞습니다. 왜 하필 미쓰이 상선을 찍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니였습니다. 꼭
미쓰이 상선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백마진이지.”
“맞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호노다 세쿠를 만나기 전에는 당연히 LNG 선박에 대해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연가스 시장은 점차 커지고 있고 IMO 의 규제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적어도 선박 가격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리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딴 건 내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처럼 행동하
는 걸 보고 확신했습니다.”

고승현 상무는 운전대를 치며 감탄했다.

“하하, 그렇지. 관심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건 블러핑이지. 그럼 미쓰이 상선 사장도
이 일에 관여됐다고 생각해서 부른 건가? 몸집이 굉장히 큰 회사의 사장이 쉽게 한국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말이야.”

여기서는 영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가격을 얼마를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어?”
“제가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얼마 만큼 가격을 불러야 제대로 받는 가격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사장을
오라고 한 거예요.”
“그래? 쉽게 안 올 텐데?”
“안 와도 상관없습니다.”
“어째서?”
“사장이 직접 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중한 사과예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중한 사과는 말로 전해지지만
설마 기업과 기업 간의 사과도 그저 말로 때우려 할까요? 만약 고 상무님이 미쓰이 상선 사장이라면 와서 그냥
고개 숙이면서 사과하고 끝이라고 생각할 겁니까?”

고 상무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니지. 성의를 보여야 진짜 사과지.”


“얼마 만큼 성의를 보이는지는 해주조선해양에서 알아서 판단하겠죠.”
“그런데 정말 미쓰이 상선에게 배를 안 팔 생각이었어?”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수익을 적게 남겨도 일단 수주를 해서 일감을 늘려놔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데 제가 아직 전문가도 아니니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건지 정확하게 계산이 되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어수선한 틈을 타고 최고경영자를 구슬려 덤핑가격에 사려는 짓거리를 하
는 걸 보고 있자니 진짜 안 팔고 싶기도 하고...”
“그럼 어쩌게?”
“어쩌긴요. 나머지는 해주조선해양 관계자들에게 맡겨야죠. 아, 그리고 강일후 사장 사표 먼저 받아놓구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과연 미쓰이 상선에서 사과까지 하면서 배를 사려고 할지 모르겠어. 저들이
앞으로 LNG 운반 시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가 문제인데...”
“기다려보죠. 어차피 제 가격에 안 사려고 저런 꼼수를 썼으니 안 팔면 그만이니까요.”
“후... 그건 그렇지. 기다려보자고.”

그런데 문득 영훈은 아까 호노다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사람들은 저돌적으로 영업한다는 말.

“저돌적이라...”
“응? 뭐라고?”
“저들이 봤을 때 우리가 저돌적으로 영업을 하는가 봐요?”
“아... 상사인들은 그렇지. 항상 먼저 움직이고 구매자를 찾아서 그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야 하니까.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손가락 빨아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일본 상사들도 우리 못지 않아. 미쓰이 상선은 해운 회사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상무님, 저랑 일본 좀 갔다 오실래요?”

[조재민 의원 당선 확실 떴습니다.]

“와아아!”

개표 1 시간도 되지 않아 군산시 보궐선거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당직자가 조 의원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었고 조 의원을 비롯해 선거 사무소 직원들은 다같이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조재민 의원은 이후 진작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방송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군산 시민들께 감사하고 이
모든 결과는 군산시민들의 승리라는 뻔한 수식어를 나열했다.
한동안 승리를 만끽하던 조재민 의원은 자정에 가까울 무렵 보좌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항상 애용하던 음식점인
벽란도로 향했다.
이 집 주인장은 입이 무겁고 항상 단골로 이용했기에 누구를 만나야 할 자리면 이곳 만큼 괜찮은 곳이 없었다.
봄이지만 아직 바닷바람이 차가웠음에도 조 의원은 방파제 앞에 서서 저 멀리 떠 있는 등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 순간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강윤기라고 합니다.”

조 의원이 얼굴을 돌리니 이제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갑네. 나 조재민일세.”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건설회사 한다고?”
“네.”
“임복희라는 점쟁이가 자네를 소개해주더군. 잘 알고 있는 여자인가?”
“실은 제가 한창 어려웠을 때 그 분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로 일이 잘 되고 나서 가끔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겸해서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직설적인 말이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로비를 했었다고 당당하게 소개할 줄이야.

“정직한 건가?”
“정직해야 할 때만 정직합니다.”
“날 만나고자 했으면 원하는 게 있나?”
“큰 기업인이 되고자 합니다.”
“야망이 대단하군.”
“대신 의원님을 큰 정치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를 큰 정치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충청의 만신인 화옥신녀가 저를 소하라고 소개했다고 들었습니다.”
“허... 화옥신녀라... 무협지에 나올법한 이름이네?”
“만신은 무당을 높혀 부르는 말이니 그냥 평소 부르던 대로 점쟁이라고 일컬으셔도 됩니다.”
“어쨌거나 그리 듣기는 했어.”
“말로만 소하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 의원님께서 가장 곤란해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자기소개 한번 화끈하군. 좋아. 군산조선소가 이제 곧 가동에 들어갈 텐데 해주조선해양쪽에서 말하는
임금조건과 기존 노조에서 주장하는 임금 조건에 차이가 있어. 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조선소에서 일하길
바라는데 노조에서 원하는 대로 하면 원하는 만큼 고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야. 난 서로 잘 타협했
으면 좋겠는데?”
“제가 힘써보겠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조 의원은 마음에 들었다.

“지켜보지.”

< 총선이 끝나고...(6) > 끝


< 새 인연들(1) >

총선이 끝났다.
HS 물산의 기획조정실은 총선 며칠 전부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Nodri Clare 인수 때문이었다.
기조실 실장이 처음으로 내린 업무 지시였고 그 사이즈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매출실적부터 브랜드 컨셉과 시장
방향, 향후 발전성, 인수 후 마케팅 전략까지 수립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연희였다.


지금까지 영훈의 옆에서 그저 지켜보던 입장이었다면 이번 Nodri Clare 인수에는 그녀도 직접 참여하며 박병호
부장과 발을 맞추고 있었다.
총선이 끝나고 본격적인 가격협상을 위해 연희는 박 부장과 함께 영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녀도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제가 좀 생겼다.

[바빠?]

전화를 걸어 대뜸 물어오는 이형준 상무의 말에 뭔가 또 일이 생겼나 생각했다.

“네, 조금요. 무슨 일입니까?”


[지금 잠깐 보자.]
“저 지금 군산 내려갑니다. 저녁에 못 올라올 수 있어요.”
[허··· 대출 안 급해? 해달라며?]
“급하긴 한데··· 지금 상황이 어때요? 회장님이 잘 해결했어요?”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야. 할아버지는 이상하게 요즘 아예 회사에는 얼굴도 안 비추신다.
불안하게···.]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은행에서는 추가 대출이 나가기가 힘들어. 아버지가 허용하지 않을 거야.]
“그럼 무슨 대출을 말한 겁니까?”
[신영투증에서 진행할 거야. 회사채 발행 식으로 진행해야 할 거고.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미안한데 저 오늘 군산 내려갔다가 내일 일본 출장 있습니다.”
[뭐야, 기껏 생각해서 진행하는 건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무실 유리벽 너머로 민희가 모니터를 보며 작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럼 저 대신 한 명 보낼게요.”
[임연희?]
“아니요. 제 비서예요.”
[내가 네 비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
“어차피 알게 될 사람이니까 오늘은 만나서 안면 좀 터놓는다고 생각하세요.”
[장난하냐? 내가 너한테 약점 하나 잡혔다고 내가 네 아랫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어디서 너 대신 비서를
보낸다는 소리를 해?]

상당히 화가 난 음성이었지만 영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잡니다. 그것도 예쁜.”


[하··· 야, 나 예쁜 여자 졸라 많이 봐. 어디서 같잖은 소리를···.]
“소개팅이라고 생각하세요.”
[어?]
“어디서 이상한 여자 만나고 다니지 말고 제가 봤을 때 상무님하고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한번 얼굴이나
보시라고요. 근데 여자 쪽에서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웃기고 있어. 날 싫어할 여자가 어딨어? 비서라며? 좋은 집안도 아닐 거 아니야?]
“그렇다고 다 좋아하나?”
[시끄러. 그리고 사진 있냐?]
“뭘 사진을 보여달라고 해요? 그냥 업무차 만나면서 겸사겸사 얼굴 본다고 생각하세요.”
[야, 나 예쁜 여자 좋아해.]
“됐고요. 대략적인 내용은 그 친구한테 얘기하세요. 그리고 출장 갔다 와서 저랑 만나기로 하고요. 정 안 되면
나 군산에서 올라와서 늦은 저녁에···.”
[아니야, 아니야···. 크흠··· 서로 바쁘니까 이해하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리고 미리 알려두는데 소개해준다고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말아요. 보통 여자 아니니까.”
[내가 무슨 정신병자냐? 첫 만남에 추근대게?]
“혹시 몰라서 그럽니다.”
[나 그리고 이제 많이 바뀌었어.]
“아, 예예~”
[그런데 어떻기에 보통 여자가 아니야?]
“말로 설명하기는 그렇고··· 하여튼 알겠어요. 바쁘니까 일단 끊어요.”
[아니, 말을 했으···.]

영훈은 전화를 끊고 민희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영훈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내일 일본으로 출장을 가야 할 것 같아요.”


“일본 말씀이신가요? 공항과 도착 시간은요?”
“오전 11 시 전 도착이고 고승현 상무님과 같이 갈 겁니다. 목적지는 나리타 공항이에요.”
“예매해놓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군산에 내려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내려간다면 일본 출장이 끝날 때까지 회사에 얼굴을 보이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을 찾는 분들께는 어떻게 얘기할까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이따가 점심 때 내가 알려주는 가게로 가봐요. 그럼 거기에 신영은행 사람이 나와 있을 겁니다.”
“신영은행이요?”
“네. 이형준 상무라고 현재 신영은행 내에서 우리 회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아···.”
“Nodri Clare 인수 때문에 신영에 도움을 청했고, 그쪽에서 은행 대출이 아닌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왔어요.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와서 나한테 전해주면 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금융 쪽에 관련된 이야기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알아요. 그리고 사실 나도 그쪽에 관련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아요. 아마 나도 박 부장님이나 재무팀하고


이야기를 해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정말 부담 안 가져도 될까요?”
“그럼요. 아, 그것보다 오늘 만나는 이형준 상무라는 사람, 신영금융그룹 손자예요. 그냥 알고 있으라고요.”

민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제 출발할 테니까 점심 미팅 끝나고 특이사항 있으면 나한테 카톡으로 남겨요.”
“네.”

영훈은 곧바로 옷을 챙긴 다음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급하게 내려오라는 건지···.
어차피 총선도 끝났고 조선소가 본격적인 가동을 앞두고 있으니 당선 축하 인사를 겸해서 만나야 했기에 궁금함을
애써 지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고깃집 불판 앞에 앉은 형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괜스레 유리창 밖을 힐끔거렸다.


평소 고기를 좋아하는 최 상무 때문에 고깃집을 예약해놨는데 최 상무 대신 여자가 나온다고 하니 약속장소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장소를 바꾸지 않았다.
기껏해야 최 상무 비서 아닌가?
일 때문에 만나는 건데 약속장소를 바꾸는 것도 웃겼다.

“약속시간이··· 10 분 전이네.”

형준은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아마 다른 사람이 소개해준다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을 거다.
형준이 보기에 최 상무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최 상무가 여자를 추천했다는 것만으로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흑갈색의 웨이브진 머리를 찰랑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형준 상무님 되시나요?”


“네.”
“안녕하세요. HS 물산 기획조정실 김민희라고 합니다.”

그녀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명함을 내놓았다.


예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느낌이 특이했다.
“반가워요. 이형준이라고 해요. 나에 대해서는 최 상무한테 이야기를 들었나요?”
“신영금융그룹 손자라는 것? 그 외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도 미소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고기 좋아해요?”
“네. 비싼 고기는 더 좋아하고요.”
“잘됐네요. 일단 먹고 이야기합시다.”

형준은 일부러 입을 닫고 고기를 먹는 데 집중했다.


아니, 먹으면서도 계속 눈앞의 여성을 살폈다.
보통 식사를 하면서도 상대가 말이 없으면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고 입을 여는 게 보통인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맞다. 그냥 먹는 것도 아니고 열중하면서 먹었다.


어찌나 잘 먹는지 본래 대식가인 자신 때문에 4 인분을 시켰는데 2 인분을 더 시킬 정도였다.
후식으로 나온 물냉면을 호로록 먹고 있는 그녀를 보며 형준이 말했다.

“신영투증에서 8 천억가량 되는 HS 물산 회사채를 발행하는 걸 원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5 천억 정도는


신영투증에서 사고, 나머지는 개인투자자들에게 팔도록 할 계획이에요. 표면금리는 4%대고 만기는 1 년.”
“필요한 금액이 1 조 원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냥 반응을 보고자 했을 뿐인데 대뜸 태클을 걸고 나온다.

“1 년 만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8 천억이면 부담스러울 건데요?”


“그저 우리 회사가 원하는 금액이 그 정도인 걸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상무님께서 말씀하신 제안은 최영훈
상무님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묘한 말이었다.
너의 제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부족하지만 일단 전하기는 하겠다는 뜻.
형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최영훈 상무는 어떤 사람이에요?”


“좋은 분이십니다.”
“그게 끝?”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궁금한 게 있다면 대답해줄 건가?”

의도된 반말에 민희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상무님은 능력이 대단하세요. 아주 많은 어려운 일들을 해내 오셨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제가 좋은 분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그 대단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분이어서예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항상 존대를 하고 예의를 갖추시거든요.”

길게 늘여 말했지만 축약하자면 반말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형준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잠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최 상무가 여기 이 자리로 보내면서 아무 말 안 했어요?”
“신영투자증권 측의 제안을 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는요?”

민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없었는데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라는 걸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게 뭐 같아요?”
“저도 모르는 일종의 소개팅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다만?”
“저에게 말씀을 안 해주신 건 부담을 안 주시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지금 부담스러워요?”

아마 평소였다면 이렇게까지 밀어붙이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그녀의 반응이 더 궁금해졌다.

“아니요.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이 또한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듯한 표정도 아니었고 그저 거래처에서 계산서를 받아보며 적정한 금액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그런
반응이다.

“그럼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가요?”


“아니요.”
“아니라고?”
“네, 죄송합니다.”

이것도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서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왜?”

반말하는 남자는 싫다는 걸 들어놓고도 자신도 모르게 말이 짧게 나갔다.

“죄송하지만 제 스타일이 아니십니다.”

이쯤 되니 화도 안 나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평소 원하는 스타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건 아닌데, 제가 쌍커풀이 진한 남자는 별로라서요. 바람기가 심해서···.”
“하···.”

말도 안 되는 이유 같아서 억울하기는 한데 무아지경으로 휘두른 럭키펀치에 급소를 맞은 것처럼 그 바람기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양다리, 삼다리를 걸쳐왔던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네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다고’고 말하는 듯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부처님 손바닥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오늘 식사 즐거웠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상무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명함 가져가요.”

형준이 급하게 안 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하나 건네주니 그녀가 양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안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스타일이 아니라면서요?”
“공적으로 실망할 뻔했다는 말이었습니다.”

형준은 그제야 영훈이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한 말을 이해했다.

“언제 한번 술이나 합시다.”


“저희 상무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괜찮습니다.”
“최 상무는 왜 찾아요? 연희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나?”
“상무님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회식이니까요. 그럼 오늘 즐거웠습니다.”

민희는 그렇게 꾸벅 인사하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준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냈다.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ㅎㅎ 또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해.]

그녀와 채팅하는 상대는 바로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감사를 표하기 전에 오 부장이 보내온 내용에는 이형준 상무에 관한 찌라시발 가십 기사들이 적혀
있었다.

< 새 인연들(1) > 끝

< 새 인연들(2) >

군산 시내의 조그마한 건물에 입주해 있던 선거사무소는 한창 원상복구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그 모습을 잠시 살펴보던 영훈은 다시 차를 움직여 군산시청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장실로 올라가니 이미 말이 돼있었는지 비서가 바로 시장실 문을 열어준다.

“어서 와! 하하하!”

보자마자 화통한 웃음소리가 반겼다.


양팔을 활짝 벌리고 안는데 어찌나 기뻐 보이는지 누가 보면 군대간 자식이 돌아온 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가운데 위치한 응접테이블과 소파형 의자에는 한 명의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영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목례를 했고 조재민 군산시장은 그 남자의 어깨를 치며 소개했다.
“어, 그리고 인사해. 여기는 강윤기라고 광주에서 영민주택이라는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안녕하십니까. 영민주택 강윤기라고 합니다.”

영훈은 일단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HS 물산 최영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꽉 맞잡아온다.

“그런가요? 험담하신 거 아닌가 걱정되네요.”


“험담이라뇨. 시장님께서 어찌나 칭찬을 하시던지, HS 물산에서 한국을 이끌어갈 인재가 나왔다면서 저를 잔뜩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하, 기대까지 하셨습니까?”
“누구라도 시장님의 그 칭찬을 듣고 있으면 기대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때 조재민 시장이 끼어들었다.

“자자, 일단 앉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서울에 있으니까 부를 때마다 미안하다니까.”


“시장님이 그냥 놀러오라고 부르시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강윤기라는 자가 끼어들었다.

“하하, 최영훈 상무님은 그냥 놀러 오기는 싫으신가 봅니다?”


“그럼요. 엄연히 직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군산까지 그냥 놀러 오면 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미묘하게 공기가 식어갔다.


괜히 민망해진 조재민 시장이 나섰다.

“그럼, 그럼. 내가 당연히 이해하고 있지.”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미세하게 굳어진 조 시장의 표정을 영훈과 강윤기 모두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영훈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조재민 시장 역시 영훈이 이런 상황을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한다는 걸 느꼈다.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짐을 느낀 조 시장이 말을 이었다.

“해주조선해양 인수는 문제 없지?”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신영은행과 산업은행에서 자금 오가면 끝이죠.”
“경영자를 교체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네. 강 사장과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거든요.”
“소문이 사실이었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영훈은 씨익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나중에 조용한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재민 시장은 확실히 알았다.


지금 영훈이 새로 온 남자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걸.
일단 일그러진 얼굴의 강윤기를 내보내고 둘이 이야기하게 되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 그럴수도 있지. 자네는 잠깐 나가 있게.”


“알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시장실을 나가는 강윤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조재민 시장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의 영훈에게
말했다.

“저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마음에 든다, 또는 들지 않는다는 지금 이 상황과 맞지 않습니다.”
“응?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는 저와 같이 일하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니까요. 전 오직 시장님만을 상대합니다.”
“자격이 안 된다는 거군.”
“맞습니다.”
“실력이 대단한 친구야. 선거를 준비하면서 그간 꽤 골치를 썩게 한 일이 있었어. 해주조선해양이 내민
군산조선소 신규채용 임금조건과 기존 조선소 노조가 주장하는 임금조건이 달랐거든. 알지?”
“알고 있습니다.”
“기존 노조가 주장하는 조건으로 채용하면 고작 1,300 명 밖에 채용할 수가 없어. 하지만 해주조선해양이 제시한
임금조건으로 하면 2 천명까지 신규채용이 가능해. 물론 이것도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그건 차차 늘려가기로
했으니 인정해야겠지만 말이야.”

이게 다 일감 부족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실적 부진의 낭떠러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회사가 인원을 감축하는 것도 아니고 신규 인력을 천명
넘게 고용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비이성적이게 보일 수도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와 결합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조재민 시장도 무작정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요?”
“저 친구가 무슨 수를 썼는지 단박에 해결했어. 기존 노조가 해주조선해양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방금 연락이 왔어.
기본임금은 줄어들더라도 나중에 일감이 늘어나서 연장근무가 많아지면 근로자도 살고 회사도 산다는 말이 먹힌
거지. 이걸 설득하기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받아들여졌으니 이제 한숨 돌렸어.”
“축하드립니다.”
“자네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좋습니다. 많은 노동자가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한다면 시의 경제가 더 좋아질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 표정인가?”
“저 사람 어떻게 만났습니까?”
“응? 어떻게 만났냐니?”
“자연스럽게 알게됐습니까?”

조 시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대답했다.

“누가 보면 점쟁이라고 해도 믿겠어. 어떻게 알았나?”

영훈은 살짝 뜨끔함을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면 의원님께서 지금까지 꽁꽁 숨겨두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럼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됐다는건데 당선이 확정된 국회의원 옆에 나타난 기업인. 뻔한 거 아닙니까?”
“듣고 보니 뻔하군. 맞아 누가 소개해줬어.”
“누가 소개해줬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텐데 이번에는 조금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번에 우리가 건설회사를 인수하면서 건설쪽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특히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
때문에 지방 아파트 건설업체를 많이 살펴봤죠. 경쟁업체들이니까. 그중에 영민주택도 있었습니다.”
“그랬던가?”
“시장님은 외부에서 그저 우리 회사가 되기를 밀어주셨을 테니까 그 외의 경쟁업체들에 관해서는 모르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그래서?”
“전라도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가는 건설회사더라구요. 아파트쪽은 경험이 많지 않지만 소형주택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사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대형 단지 사업권을 따려고 노력하던 회사란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왜 궁금해하느냐...”

영훈은 잠시 말을 끊고 조 시장의 눈을 마주보다가 말을 이었다.

“HS 건설과 의원님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알아도 상관없는 사람이겠죠. 얼마나 우리 회사를 무시하면
경쟁사 사람을 시장님 옆에 붙이겠습니까?”

조재민 시장은 날카롭게 날이 선 영훈의 기세에 당황했다.

“오해하는 거네. 자네가 그랬지 않나? 내가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장자방같은
자네도 필요하지만 소하처럼 묵묵히 뒤를 밀어줄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냐는...”

영훈은 조 시장의 말을 잘랐다.

“착각하고 계시네요, 시장님.”


“착각이라고?”
“네. 저는 시장님의 장자방이 아닙니다. 말씀드렸죠? 시장님과 저와는 서로 줄 걸 주고 받을 걸 받는
파트너입니다. 저는 시장님께 군산조선소를 가동시켜드렸고 시장님은 우리에게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을 비롯해서
여러 공사를 맡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건설회사를 끼워 넣는다? 제가 어떻게 이해
하길 바라셨습니까?”
“그건...”
“정치하시는 분들은 가끔 정치 외에 있는 분들을 자신보다 낮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시장님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의 관계를 정립시켜 드리겠습니다. 우린 시장님이 큰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하
나의 도움을 줄 수 있고 시장님은 그때 하나의 답례를 하는 겁니다. 뭐, 한국인의 정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중간중간에 조언 정도는 해드릴 수 있는데, 큰 틀이 이렇다라는 겁니다.”
“자네 외의 조력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군.”

영훈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말입니다. 어른들 말씀을 참 잘 들었습니다. 제법 착한 아이였거든요. 마당을 청소해라.


과일을 가져와라. 눈이 많이 왔으니 연탄재를 뿌려라. 이런 것들 말이죠. 그때마다 심부름을 하고 칭찬을 받으러
가면 맛있는 과자나 과일을 받고는 했습니다.”
“어릴 때는 그 낙으로 심부름을 하는 거지.”
“맞습니다. 그런데 꼭 그때마다 친구 녀석 하나가 제가 일할 때는 옆에서 빈둥거리다가 같이 껴서 과자나 과일,
사탕 따위를 받았습니다. 일은 내가 다 했는데 말이죠. 그게... 사람 기분을 참 안 좋게 하더란 말입니다.”
“...”
“이제는 아이에서 어른이 됐기 때문에 심부름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일도 내가 원하는 일만 할 수 있어졌죠.
어른이 되니 좋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영훈의 미소에 조재민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실수했군.”
“생각해보고 결과는 나중에 통보해주실 겁니까?”
“아닐세. 그럴 수야 있나. 아무리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군산조선소를 내 품에 안겨줄 능력이 있는
사람과는 그릇이 다를 게 아닌가? 고민할 이유가 없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잘 이야기할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게.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저녁이라도 사야 할 거 아닌가?”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대답 안 하셨습니다. 누굽니까? 저 사람 소개시켜준 사람이.”


“임복희라는 점쟁이네.”
“점쟁이요?”
“만신이라고 하더군. 만신이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던데...”
“알고 있습니다.”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점쟁이야.”
“정치권에서요?”
“그래, 심지어 나도 몇 번이나 들었을 정도였어.”

영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총선 하루 전날에 날 찾아왔네. 그리고는 내가 못 믿을까 봐 강금원 원내대표와 전화통화까지 하면서
안심시켰네.”
“원내대표까지 잡고 있는 점쟁이군요.”
“그래. 그러면서 좋은 사람을 소캐시켜줄 테니까 복채로 천만 원을 달라고 하더군.”

조 시장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주셨군요?”
“그랬으니까 저 친구를 만났지.”
“아까우시겠습니다.”
“까짓 천만 원 공부했다 치겠네.”
“쉽게 안 물러날 겁니다.”
“저 친구가?”
“네.”
“어떻게 아는가?”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욕심이 많아 보여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보내더라도 적당히 손에 쥐어주세요. 심부름 시켜놓고 머리만 쓰다듬어주는 건 부모나 가능한 겁니다. 남이면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쥐어 보내야 뒤탈이 없습니다.”
“흐음... 알겠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곤 시장실을 나갔다.
저 멀리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 강윤기는 영훈과 눈이 마주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영훈은 그를 보며 재빨리 핸드폰으로 강윤기 영민주택 사장을 검색했다.
다른 건 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생년월일만 알면 충분했다.

“시장님의 장자방이 이렇게 젊은 분이셨을지는 몰랐습니다.”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전 시장님의 장자방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쪽도 시장님의 소하는 아닐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소하가 되기에는 욕심이 과해 보이거든요.”

사주를 제외하고서라도 관상만 보아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광대가 얕고 턱에 각이 져 있으며 코가 계단식으로 패여 있다.
이런 사람은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경주마처럼 직진만 하는 스타일이다.
인내심도 부족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면서 욕심이 과하니 조금이라도 대가가 부족하다 여기면 서슴없이 남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사업이 잘 되는 건 타고난 머리와 사업운이 잘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운은 대단히 좋았다.

“흥, 왜요? 내가 조재민 시장과 가까워지려니까 쫄리나 봅니다?”

영훈은 윤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조재민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군요. 하지만 난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난 조재민 시장을
선택했어요. 그 차이를 아십니까?”

영훈은 입술을 깨무는 윤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는 그를 지나쳤다.

< 새 인연들(2) > 끝

< 새 인연들(3) >

“미안하네.”

조재민 시장의 미안한 얼굴.


하지만 이상하게 강윤기는 조 시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떠난 HS 물산의 최영훈 상무가 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그래도 날 위해 좋은 일을 해줬으니 그냥 보낼 수는 없고, 시가 가지고 있는 조촌동 큰
필지를 매각할 계획이야. 자네가 받아서 아파트 하나 지어 보는 게 어떤가?”

강윤기는 깜짝 놀랐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어떤 건설사든 가져야 하는 땅이야. 그 주변 땅에 삼전이니 우명이니 무진이니 대기업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올리고 있잖나. 자네처럼 중소건설사 한 곳쯤은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감사합니다.”
“섭섭하지?”
“뭐···.”
“원래 인생이 타이밍이 중요하지 않나? 나 말고도 크게 될 정치인들은 많을 테니 금방 기회가 올 거야. 내
멀리서 응원하고 있지.”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시장실을 나왔다.


시장실에 있을 때는 그저 많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은 시청의 주차장에 주차된 차에 올라타자마자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씨발··· 씨발! 씨발!”

그는 분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운전대를 후려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내려치던 그는 한번 크게 괴성을 지르고 나서야 화를 가라앉혔다.

“그 새끼···.”

평생 누구에게 주눅이 들어본 적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와 마주쳤을 때 주눅이 들었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이할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과 눈빛에 그만 압도당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임복희도, 자신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재민 시장의 심복 따위가 아니라는 걸.
조재민 의원조차도 그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HS 물산이 그 정도로 힘이 있었던가?


아니다.

아무리 재벌이 권력 위에 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시가총액 1 조도 안 되는 회사의 임원이 국회의원이나 시장


위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건 그룹의 능력을 넘어서 개인의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분통이 터졌다.
완벽히 졌으니까.

이성을 찾은 강윤기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군산에서 공주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1 시간 운전한 그의 차가 도착한 곳은 무령왕릉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주택.
겉으로 봐서는 그냥 일반적인 가정집같이 생겼지만, 입구에 ‘화옥당’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바로 화옥신녀인 임복희가 있는 곳이다.
본래 최소 한두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지만 만날 수 있었음에도 그는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신녀님 뵈러 왔습니다.”

미리 예약한 손님이 한쪽 소파에 주르륵 앉아 대기하고 있음에도 당당히 말하는 강윤기를 보고 접수를 받는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했다.
잠시 후 나온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 말했고 30 여 분이 지나 안에서 상담을 받던 손님이 나오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접수를 받던 직원이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에게 연신 사과해야 했음은 당연했다.

“예약도 안 하고 갑자기 왜 왔어?”

윤기는 자신을 보자 대뜸 소리를 지르는 임복희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신녀님이 잘못 보신 게 아니오?”
“내가 잘못 봤다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임복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말했다.

“소박맞은 여편네처럼 쫓겨나고 말았구나!”


“조재민 시장의 곁에 있던 자가 조 시장의 장자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장자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재민 시장이 장자방으로 거느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었다고?”
“이제 저는 어떡해야 합니까?”

임복희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찾다.

“쯧쯧쯧···. 또 애처럼 구는구나. 뭘 어떻게 해? 사내새끼가 한번 들이댔다가 물 먹었다고 포기할 거야?”


“포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조재민 시장은 이제 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HS 물산 임원에게 끌려다니는 사람이라면 그 끝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윤기는 영훈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선택하는 사람이 되리라.

“호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십시오. 더 야망 있고, 더 큰 정치인으로 클 수 있는 분. 그런 분들을 골라주시면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네가 선택을 하겠다고?”
“네.”

굳은 얼굴의 윤기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던 임복희는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 우리 신령님께서 잘못 선택하셨다는 거야?”

윤기는 더욱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틀렸다는 게 아니라 더 큰 정치인을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더 야망 있고, 더 큰 정치인을 만나면? 지금처럼 또 쫓겨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있고?”

윤기는 고개를 들었다.

“다릅니다. 증명해낼 겁니다. 조재민 의원이 잘못 선택했음을 증명할 겁니다.”


“기개는 있구나.”

임복희가 새삼스럽다는 눈길로 쳐다보자 그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봉투를 빤히 보다가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넣어 둬. 나도 제대로 알아 봐주지 못했으니까 끝까지 서비스해줘야지.”


“그럼···?”
“일주일 뒤에 다시 와.”

윤기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영훈과 고승현 상무는 바로 도쿄로 향했다.


일본에 오기 전부터 바쁘게 움직인 고승현 상무는 일본 3 대 해운사 중의 하나인 니폰유센과의 협상 테이블 자리를
마련했다.
다른 해운사들은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는 입장.
뒷좌석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고 상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솔직히 3 대 해운사가 다 거절해도 그러려니 생각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저도 상무님한테 말해 놓고 괜히 헛심 쓰는 게 아닌가 했어요.”

니폰유센이 어떤 말을 할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만나준다는 게 어디인가?


적어도 LNG 선에 관심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 가봐도 되겠어?”


“취임식이요?”
“응.”
“상무님도 안 가셨잖아요. 그리고 취임식도 약식으로 간단하게 끝나는 자리인데 뭐하러 갑니까.”

해주조선해양은 어제부로 HS 물산이 인수를 완료했다.


원체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회사였기에 사명은 변경하지 않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강일후 사장은 퇴사했고, 그 과정에서 별다른 잡음은 없었다.
아니, 잡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호노다 세쿠를 만나고 온 그날 강 사장이 퇴사를 요청해왔을 정도였다.
퇴직금이라도 무사히 챙기려는 의도였으리라.
당연히 회사에서는 법무팀을 가동해 퇴직처리를 막고 조사에 들어갔고, 몇 개의 부정을 파헤쳐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로 취임한 해주조선해양의 사장은 부사장직에 있었던 송유철이라는 사람으로 영훈은 아직 그와 대면해본
적이 없다.
“나보단 네가 실세 아니냐?”
“실세는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원래 남의 집에 인사하러 갈 때는 못해도 손에 박카스라도 한 박스 들고
가는 게 예의라고 배웠습니다.”

고 상무는 그 말에 빵 터졌다.

“하하하! 그럼 지금 우리 박카스 사러 가는 중이냐?”


“아무리 같은 식구가 될 사람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줘야 하잖아요. 박카스가 될지 강남에 있는 30 평짜리
아파트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취임식에 빈손으로 인사만 하는 것보다는 뭐 하나라도 들고 가는 게 낫겠죠.”
“그럼, 그럼. 그게 낫지. 문제는 박카스 사러 갔다가 약국 문 닫힌 거만 보고 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게
걱정이다.”
“그럼 주변 편의점이라도 찾아봐야죠.”
“몇 군데 찾아보기는 했는데 군산조선소에서 받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작아. 자칫 잘못하면 선물 주고 욕먹을 수도
있어.”
“일단 가보자고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니폰유센 본사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고승현 상무는 능숙한 일본어로 도착을 알렸고 잠시 후 빠르게 내려온 직원들이 일행을 안내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살짝 미묘했다.
분명 만나자고 청한 건 우리 쪽인데 받아들인 쪽에서 은근한 기대감을 풍기고 있었다.
영훈은 영업을 많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영업을 당하게 될 때 가장 먼저 경계심부터
갖게 된다는 건 알고 있다.
혹시나 영업사원의 말빨에 넘어가 사고 싶지 않은 물건을 사게 될까, 예상치 못한 지출을 하게 될까 하면서
마음의 벽부터 세우는 게 일반적일 텐데 저 미소는 무엇인가?

“반갑습니다. 가야 오키노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HS 물산 고승현 상무라고 합니다. 여기는 최영훈 상무고요.”

고 상무의 능숙인 일본어에 가야 오키노리가 영훈과 악수를 하며 놀란 눈빛을 지어 보였다.

“상당히 젊으신 분인데 상무의 직위에 있다니··· 가문의 일원인가 보군요?”

그룹 총수의 외동딸과 결혼할 남자니 재벌가문의 일원이 맞기는 했다.

“하하, 그런 셈입니다.”

가야 오키노리는 니폰유센 그룹의 후계자로 20 대부터 회사에 입사해 상당히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했다.
이제 갓 마흔을 넘었는데 전무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사실상 니폰유센의 실세 중의 실세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날씨가 어쩌니, 교통이 어쩌니 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대략 인사가 마무리되자 고승현 상무는 해주조선해양 측에서 제공한 파일을 꺼냈다.
초대형 LNG 선에 대해 요 며칠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한 보상을 받아보려는 찰나 가야 오키노리 전무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실은 HS 물산에서 연락이 와서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아무리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했다고 해도 HS 물산에서


해주조선해양의 선박 영업을 직접 진두지휘할 줄은 예상치 못했어요. 경계를 무너뜨리는 그런 열정적인 영업,
분명 우리도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뭐 그 정도까지야···.”
“비록 양국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라를 건너오는 수고를 하셨으니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지금 우리 니폰유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5 만 톤급 LNG 추진 자동차운반선입니다. 5,000RT 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고 연비효율이 기존 대비 40% 정도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동차 운반선 말이죠?”
“맞습니다.”
“······.”

고승현 상무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영훈에게 말했다.

“저쪽에서 LNG 선이 아니라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을 원하고 있어.”


“자동차 운반선이요?”
“본래 자동차 운송은 일본이 업계를 거의 잡고 있다고 보면 돼. IMO 규제 때문에 친환경 선박으로 바꿔야 하는
니폰 유센 입장에서 요청할 만하지. 문제는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은 아직 해주조선해양이 만들어 보지 않은
선박이라는 거야.”
“그런데 어차피 다른 LNG 추진 선박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기술은 아니지 않을까요?”
“아마 그렇기는 하겠지?”
“그럼 안 될 거 없네요.”
“그럼 해주조선해양 직원 불러서 정확한 건조 기간이랑 가격을 조정해야 할 것 같은데, 부를까?”
“아직요.”
“응?”
“일단 안 된다고 하세요.”
“뭐가 안 돼?”
“만들어 줄 수는 있는데 돈이 안 돼서 요청은 거절하겠다고요.”
“5 만 톤급이야. 이 정도면 박카스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을걸?”
“일단 반응부터 보자고요.”

고승현 상무는 어쩔 수 없이 가야 오키노리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직 기술력이 부족한가요? 해주조선해양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아니라 어차피 다른 LNG 추진 선박을 만들고 있어서 자동차운반선 기술을 확보하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회사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입니다.”

가야 오키노리는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던 기색을 띠던 고승현 상무가 영훈과 대화 후 실망하는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이 거래를 시작부터 거절하는 사람이 영훈임을 파악했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아직 LNG 선이 그렇게 급하지 않습니다.”

고 상무는 영훈에게 말했다.

“다른 선박은 급하지 않다는데?”


“그럼 어쩔 수 없다고 하세요.”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고 상무가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우린 손해 보는 거래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가격을 제시하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고 상무가 통역하자 영훈이 말했다.

“몇 척 주문할 건지 물어보세요.”

가야 오키노리가 말했다.

“2 척 주문할 생각이오.”

5 만 톤급 자동차 운반선을 2 척이나 주문한다는 말에 고 상무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그런데 영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했다.

“2 척 건조 후 LNG 선 추가 주문을 약속하지 않으면 거래는 할 수 없다고 하세요. 그리고 도쿄에서 하루 더


머무를 생각이니까 정리 후 입장을 달라고 하세요.”

고승현 상무는 가야 오키노리에게 그렇게 전달하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영훈의 뒤를 따라나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훈의 행동에 고 상무가 나직하지만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이야? 이건 예의가 아니라고! 이건 거래를 엎자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영훈은 딴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가?”
“저쪽에서 사고가 생긴 것 같아요. 한번 알아보세요.”

고 상무는 바로 알아들었다.

“기존 주문한 물건에서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니폰 유센이 기존에 발주했던 자동차운반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 새 인연들(3) > 끝

< 노림수(1) >

영훈과 고승현 상무는 니폰유센 본사 건물과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시간도 없이 전화통을 붙잡고 있던 고 상무는 30 여 분 정도가 흘러서야 메일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니폰유센이 출자한 노르웨이 선사가 있어. UACC 라고 하는데 주로 유럽지역에서 자동차 운반을 위주로 운영하는
회사야. 그런데 작년에 이 회사에서 강남해운이라는 중국 조선사에 자동차 운반선 4 척을 발주했었다고 해.”
“그래서요?”
“문제는 일반 자동차 운반선을 발주한 게 아니라 IMO 규제 때문에 친환경 선박을 발주했다는 거야. 알려진 바로는
이원연료 엔진과 배터리를 결합했다고 하는데 아직 우리쪽에는 해당 선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해진 바가 없어.”
“흐음...”

영훈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 오기 전부터 가야 오키노리 뿐만 아니라 니폰유센의 핵심 임원의 생년월일은 이미 기억하고 왔었다.
그중에 회장을 제외하고 가장 핵심적인 인사였기에 이번 회의가 잘 진행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악수를 하고
나서 사주를 계산해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이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큰 기업 자제로 태어났으면 초년운이나 중년운이 크게 나쁠 리 없다.

부모의 운이 워낙 강하고 거대한 조직이 탄탄히 갖춰지면 성격적인 결함이나 조금 부족한 재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야 오키노리는 조금 달랐다.
그는 사주에 12 살 중에 최악이라는 겁살이 들어와 있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가지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고 주변에 좋은 인연이 들어오지 못하며 조상의 업적을 망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의 운이 서서히 기울어 가기 시작한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3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쯤 문제가 드러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까 그 자리에서 배를 사주겠다고 하는데도 일단 거부하고 자리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일부러 찾아온 영업사원에게 마침 잘 됐다는 듯 자신들이 먼저 선적을 지정해서 사겠다고 하는 건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강남해운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


“4 척이나 주문했다면서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우리한테 2 척이나 추가 주문할 이유가 있을까요?”
“확실히 이상하긴 해. 그럼 일단 기다려? 그런데 계속 기다린다고 답이 나올까? 우리한테 주문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 주문할 수도 있어.”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민이 되는 것이고.

“아무한테나 주문할 순 없을 거예요.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기술적으로 뭔가 사고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당연하겠지. 아마 국내 조선사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이원연료와 배터리를 이용해서 연비를
절감하고 온실가스 감축을 노린 것 같은데 강남해운에서 기술적으로 아직 원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건조시기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을 거야. 그럼 IMO 규제를 맞출 수 있는 건 LNG 추진 선박
밖에 없을 테고. 그 중에서도 해주조선해양의 기술력은 최고지만 그렇다고 국내 다른 조선사의 기술이 많이
뒤쳐진다고도 생각할 수 없어.”
“그럼 결국 저쪽이 얼마나 급한지가 문제가 되겠네요.”
“그렇지. 정말 강남해운에서 건조하고 있던 선박에 문제가 생겼다면 건조시기를 어느 정도까지 앞당길 수
있느냐가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이 될 수 있어.”

영훈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데가 없지 않나요? 우린 지금 도크가 비어있지 않습니까?”

고승현 상무는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지! 생각해보니까 기술력이니 조건이니 따질 필요가 없는 상황이야. 원하는 조건의 선박을 가장 빨리


만들어 낼 수 있는 곳.”
“다른 조선소는 밀려있는 일감 때문에 아무리 가격을 싸게 내려도 빠른 시기에 선박을 인도할 수 없지. 그래,
그래! 그거야! 자동차 운반선에다 이후에 LNG 선 추가 구매 확정까지 받으면 최소 5 천억 이상 딜이야.”

고승현 상무는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서성였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침대 사이를 왔다갔다 두 번 정도를 하더니 물었다.

“최 상무 중국에 아는 라인 있지 않아?”
“있기는 있는데... 제가 중국어가 안 돼서 전화로 연락하기가 그래요.”
“나 있잖아.”

주췬은 함부로 쓰기 아까운 사람이다.


이번 Nodri Clare 인수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그와의 관계도 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아껴가며 대화할 상대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범하고 통이 큰 사람이라 크게 손해되는 일이 아니라면 쪼잔하게 하나하나 계산하려 하지 않는 성격이니
말이다.
결국 영훈은 주췬에게 전화를 걸며 스피커로 설정을 바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주췬이 전화를 받았다.
영훈은 전에 연희에게 배웠던 아주 기초적인 중국어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주췬씨. 최영훈입니다.”


“오~ 최영훈. 반갑군. 중국어 좀 배웠나?”
“하하, 아주 초보적입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고승현 상무를 바라보았다.


고 상무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

“크흠... 안녕하십니까. 전 현진물산이었던 HS 물산의 고승현 상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그런데 HS 물산?”
“네. 현진물산이 HS 물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 듣지 못하셨나보군요.”
“미안해요. 내가 한국까지 신경쓸 틈이 없어서. 그런데 무슨 일이오?”
“다름 아니라 최영훈 상무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상무? 승진했나? 축하하네.”

고 상무가 통역해주자 영훈이 옆에서 감사하다고 말을 받았다.


주췬은 다시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뭔가?”
“실은 중국 조선사 중에 강남해운이라는 곳에서 노르웨이 조선사에서 발주한 자동차 운반선 4 척을 건조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밀하게 전해진 소식통으로는 이들 선박건조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 이게
정확한 소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군?”
“맞습니다.”
“언제까지?”
“죄송스럽지만 최대한 빨리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이 급하거든요.”
“강남해운이라... 좋네. 알아봐 주지. 그리고 그 명품 브랜드는 어떻게 되어 가나?”

고승현 부장은 영문을 모른채 통역해주었다.


그는 아직 Nodri Clare 의 인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그런 것이다.

“현재 인수가격 협상을 위해 직원이 영국에 가 있습니다. 정확한 가격과 조건은 그들이 한국에 돌아오면 알게 될
것 같습니다.”

고승현 상무는 이야기를 전달하면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잘 알겠네. 내가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하지. 대신 메일은 안 돼. 전화번호를 남겨주면 그쪽에서


연락이 갈 거네.”
“감사합니다.”
“시간 되면 중국에 한번 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고 상무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뭘 인수해?”


“Nodri Clare 있잖아요.”
“영업팀에서 손대고 있는 거? 그걸 통째로 인수하겠다고?”
“네.”
“지금 영국에 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고?”
“연희 씨랑 기조실 박 부장이 같이 갔어요.”
“허... 이거 섭섭하네?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해주고?”
“아이고 상무님. 서로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기획조정실 직원들 놀릴 수도 없구요.”
“씁... 그건 그렇네. 있는 직원들 놀릴 수도 없고.”
“섭섭해 마세요. 어쨌든 주췬이 알아봐준다니까 다행이에요.”
“그럼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 나가서 저녁이라도 할까?”

어느새 느지막한 오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영훈은 창밖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조상의 업적을 망칠 운명이라는 것.


과연 그 운명이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궁금했다.
과연 저들이 우리 쪽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승현 상무는 피가 마른다는 느낌을 오랜만에 체험하고 있었다.


다음날이 돼서도 아직 중국에서 연락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재촉하는 것도 모양새가 웃겼다.
한시가 급하다고 말했는데 그걸 못 알아들었냐고 채근하는 행태는 그에게 모욕감을 줄 것이다.
일단 기다려야 했다.
정보가 늦으면 그때 가서 그를 신뢰할지 말지를 결정해야지 미리부터 그를 의심하는 건 그와의 파트너쉽을 해칠
뿐이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후...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결국 영훈과 고 상무는 가슴에 묵직한 돌을 하나 올려놓은 것 같은 상태로 다시 니폰유센 본사로 향했다.


어쨌거나 하루의 기한을 주었고 그들은 다시 한번 회의를 청했기 때문이다.
고 상무로서는 저들이 중국 정보통의 연락 없이도 그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도쿄의 밤은 즐거우셨습니까?”
“좋았습니다.”

가야 오키노리는 어제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일행을 반겼다.


하지만 영훈은 그의 눈빛에 초조함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았다.

“HS 물산의 결정이 곧 해주조선해양의 결정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사실 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에 우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해주조선해양에 문의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어제 해주조선해양에서 연락이 왔었다.


니폰유센과의 협상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협상 내용 공유를 부탁한다는 연락이었다.
고 상무는 대략적인 협상내용을 공유하고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 건조 기술 능력을 물어보았다.
해주조선해양은 생각지도 못한 건수에 당황하면서도 반색했다.
어디서 이상한 회사가 자기네 회사를 인수하면서 군산조선소라는 엄청난 짐덩이까지 안겨줬는데 그래도 일감이라도
물어와주니 좋을 수밖에.

“미안합니다. HS 물산이 인수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해주조선해양의 의중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해주조선해양은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가야 오키노리의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그래서 귀사의 결론은 뭡니까?”

고승현 상무의 말에 가야 오키노리는 잠깐 긴 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귀사의 제안은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기술 좋은 조선회사들이


많으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회사와 협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역시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 고승현 상무의 전화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중국어로 보낸 문자.
고 상무는 즉시 영훈에게 말했다.

“후... 최 상무의 말이 맞았어. 강남해운에서 건조중인 선박 연비 효율이 극히 낮다고 하네. 2021 년 인도


예정이라니 발등에 불 떨어진 셈이지.”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고승현 상무는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말했다.

“중국 강남해운에서 건조 중인 자동차 운반선에 문제가 생긴 걸로 알고 있는데... 2021 년까지 인도라면서요?


시간 여유가 많으시면 다른 조선사에 의뢰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가야 오키노리는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일어날까요?”

고 상무가 해주조선해양에서 보내준 자동차운반선 관련 자료를 챙기며 말하자 그가 급히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조건을 받아들이는 겁니까?”
“그대들은 2021 년까지 건조 가능한 겁니까?”
“LNG 추진 기술을 자동차 운반선에 적용하고 인증을 받는데 대략 6 개월에서 1 년정도 소모되기는 하지만 그 동안
도크를 놀리지 않고 나머지 부분을 건조하고 있다면... 빠르면 2021 년 말에서 늦으면 2022 년 초까지 건조
가능하다는 게 해주조선해양의 결론입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야 오키노리는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2022 년 3 월까지 2 척의 선박 인도를 장담한다는 부분을 계약서에 넣는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군산조선소의 도크는 한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한 척이든 두 척이든 기술만 확보된다면 22 년 3 월까지 건조는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해주조선해양 쪽 특수선사업본부 직원에게서 들은 설명이었다.
고승현 상무는 다시 영훈에게 둘의 대화를 설명해주었다.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야 오키노리에게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을 더 넣겠습니다.”

고 상무가 바로 통역했고 가야 오키노리가 물었다.

“무슨 조건을 말하는 겁니까?”


“니폰유센이 주문하는 게 아니라 노르웨이 선박 회사인 UACC 가 주문하는 거겠죠?”
“맞습니다.”
“알아보니 그렇게 탄탄한 재무구조를 가진 회사가 아니더군요. 더군다나 중국회사에 준 대금은 받기 요원한
상황이고 추가로 우리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니 재무상황은 더 악화 되겠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UACC 가 우리가 건조한 자동차 운반선을 제대로 인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제 조건을 바꾸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선금 70%, 기술인증시 30%. 22 년 3 월까지 완벽하게 기준을 충족하는 선박을 인도하지 못할 시에 선금의 두
배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가야 오키노리는 모욕감을 느꼈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고승현 상무가 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그대들이 추가로 원하는 LNG 선도 같은 조건은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LNG 선은 기존 해주조선해양의 LNG 선의 결제 조건을 그대로 이행합니다. 단, 선박 인도 시에
결제대금을 받지 못할 경우 미결제 대금 만큼 주식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회사가 망할 것도 아니고 크게 문제
되는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요?”

< 노림수(1) > 끝

< 노림수(2) >

문제를 건다면 자동차 운반선이 부담이지 LNG 선은 그렇게 부담가는 부분이 아니긴 했다.
말 그대로 회사가 망할 정도로 휘청이지 않고서야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는 없으니까.
게다가 자동차 운반선은 LNG 추진 기술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17 만㎥급의 초대형 LNG 수송선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선금을 무려 70%나 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지만 정해진 기간 내에 선박을 건조해 인도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 해주조선해양이 유일했다.
가야 오키노리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계약을 받아들였다.


대승적 차원이라는 별스런 표현까지 해가면서 자존심을 챙기려 했지만 영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해당 내용을
해주조선해양 측에 보냈다.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 2 척에 선박이 예정대로 인도되면 추가로 2 척을 발주하는 2+2 계약에 초대형 LNG 선 1
척까지 총 5 척에 관한 계약이었다.
아마 중국 강남해운과의 계약은 단순히 2 척이 아닌 2+2 계약이었음이리라.
생각지도 못하게 큰 규모의 계약을 진행하게 된 영훈과 고승현 상무는 곧바로 해주조선해양 관계자를 호출했다.
협의가 끝났으니 제대로 된 계약단계는 해주조선해양이 진행하게 될 터였다.
영훈은 분한 가운데서도 안도의 숨을 내쉬는 가야 오키노리를 보며 궁금해졌다.
과연 선박이 건조될 때까지 니폰유센은 무사할 수 있을까?
시가총액이 5 천억도 안 되는 회사가 천억이 넘는 주식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항상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기고 다니던 한주연은 웬일인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헐렁한 박스티와 청바지
차림으로 오래된 한옥집 앞에 서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눈을 끄게 뜨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개량한복을 입고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사님!”

얼마나 찾아다녔던가?
갑자기 그녀가 냈던 돈을 돌려주며 연화당을 정리하고 모습을 감췄던 명우도사였다.
대한민국에 점쟁이가 한 둘이던가?
조금 용하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점쟁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빨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그가 훌쩍 떠나버리고 나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기고 간 말.

‘이무기에 불과했는데 운 좋게 여의주를 물었어. 그래서 용이 돼버린 거야. 김태민은 죽어도 이 여자를 못
이길걸?’

HS 물산 회장이 된 송은채 회장에게 각계의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손길을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자신의 아들을 들이밀어 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여의주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고 있지만 연희와 결혼을 약속한 그 남자를 뺏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도 주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두 손 놓고 태민의 앞날이 구만리이기를 기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야망이 너무 컸으니까.
그녀는 결정해야 했다.
김태민을 믿고 그를 더 키워줘야 할지, 아니면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할지 말이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명우도사는 주연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물었다.


영훈을 만나고 난 뒤 그는 점쟁이 생활을 청산했다.
신빨이 떨어졌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그도 본인 신력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욕심 때문에 억지로 붙잡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벼락같이 호통치던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다 정리하고자
마음먹었다.
그 기세에 자신을 돌보아주던 신령님도 끈 떨어진 연처럼 희미해지지 않았던가?
사실 벌어놓은 돈도 많아서 지방 몇 군데에는 땅이나 건물도 사 놓았었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 몇에게 퇴직금 식으로 섭섭하지 않게 쥐여주고 그는 서울의 청계산 인근에 암자도 아닌
그렇다고 좋은 저택도 아닌 한옥 건물을 하나 사들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한주연이 찾아온 거였다.

“물어물어 찾아왔어요.”
“용하네.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깔아야겠어.”

그는 그녀를 지나쳐 문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잽싸게 그를 따랐다.

“사람 궁금하게 하시고 이렇게 도망치시면 어떻게 해요?”


“본래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궁금한 것 투성이인 게 사람이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다고 뭐가 달라질까?”
“제 인생에 무척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이야 그렇게 보이겠지.”
“네?”
“학교 다닐 때는 시험 한 번이 인생에 중요한 일처럼 보이고 남자를 만날 때는 저 남자가 최고의 남자처럼 보이며
취업을 할 때는 저 회사에 붙으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사람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
당장 네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한주연은 아예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말했다.

“나비효과라고 있어요. 나비의 날개짓 한번이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태풍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으로 변한들 네가 그대로인데 뭐가 바뀔 것 같으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원하는 것. 더 좋은 남자를 원하는 것이냐? 알려주면? 그 남자가 널 영부인이라도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넌 타고나기를 인덕과 인망이 부족하고 속이 좁다. 속이 좁으면 배짱이 있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부족하다. 좋은 남자도 네 옆에 있으면 좋은 기가 흩어질 게 분명한데 누구를 더 원해?”

한주연은 화가 치밀어 입술을 깨물었다.


명우도사는 그 모습에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로 그녀가 앉은 평상을 탁 때리며 말을 이었다.

“썩 내려가! 신력이 떨어졌으니 누굴 점지해줄 상황도 아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오른 주연은 명우도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집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걸 지그시 지켜보던 명우도사는 뜨근하게 열기가 오른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굴러다니는 빈 막걸리 병을 흘깃 쳐다본 그는 시장에서 사온 족발이 올려진 상 앞에 털썩 앉았다.

“흐흐... 점은 옘병...”

그는 실소를 하며 막걸리를 한 사발 가득 부었다.


그때 밖에서 누가 문을 톡톡 두들겼다.
화가 난 한주연이 다시 돌아왔음이 분명했다.
한숨을 푹 쉰 그가 기름진 앞다리살을 한 점 입에 집어넣고 막걸리를 입가심하듯 들이킨 다음 문을 여는데
뜻밖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이게 누구야?”

놀랍게도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임복희였다.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쓰고 명품옷을 휘감은 그녀는 잠시 선글라스를 들어올려 집을 둘러보곤 말했다.

“이건 뭐예요? 오빠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 일할 때 빼고는 그렇게 고급스러운 거 좋아하던 양반이 그동안


벌어둔 돈 어디다 쓰고 이게 다 뭐람?”
“뭐하러 왔어?”
“내가 오빠 예뻐서 찾아왔겠어요? 나 들어가도 되지?”
“들어와.”

그녀는 명우도사를 따라 방으로 들어와 한 상 펼쳐진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씨구? 신당은 어디 있고? 족발은 또 뭐예요? 여기까지 배달이 되나?”


“신빨도 떨어졌는데 기도는 해서 뭐해? 족발은 요 밑에 시장에서 사왔다.”
“진짜 다 놓은 거야?”
“이제 좀 쉬려고 그런다. 머리가 깨끗해. 아주 좋아.”
“그러다 죽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뭐 때문에 심통난 사춘기 애들 마냥 이러는 건데?”
“할 말 없으면 족발이나 먹고 가.”
“그러지 말고 나 부탁 하나 들어줘요.”

그녀는 족발 옆에 손바닥 만한 인물 사진을 하나 올려놓고는 말했다.

“전라도에서 적당한 건설업체 하나 운영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정치인 하나 엮에서 출세하고 싶나봐. 내가 하나 물어줬는데 대차게 까였다지 뭐예요? 사흘간 신령님께 치성을
올려봤는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답을 안 주세요. 그래서 적당한 사람이...”

명우도사는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또 버릇이 도졌구나?”


“그러지 말아요. 나도 먹고 살아야지.”
“또 주식하다 말아먹었냐?”

임복희는 쌍심지를 치켜 뜨더니 쫑알거렸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된 정보였단 말이에요.”


“내가 이 바닥에서 주식하다 망하는 점쟁이를 한두 명 본 게 아니지만, 너처럼 끈질기게 계속 망하는 점쟁이는
처음 본다. 그래서 얼마나 날렸는데?”
“3 억이요.”
“허... 많이도 날렸구나.”
“에효... 우리 신령님은 왜 주식에 관해서는 입도 뻥끗 안 하실까? 알려주면 좀 좋아? 그러니까 한번 도와줘요.
내가 발이 넓기는 해도 오빠 만큼 정치하는 인간들 잘 보지는 못하잖우.”
“난 이제 손 털었다.”
“그럼 뭐하고 살려고?”
“뭐하긴? 이렇게 즐기다 죽는 거지.”
“새장가라도 들게?”
“그것도 좋고~”

명우도사는 만사 다 귀찮다는 듯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그 모습에 임복희는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베트남에서 사업하는 사람을 잘 알고 있거든요. 무슨 사업인고 하니 베트남에서 한국남자랑 현지인이랑


중매를 해주는 사업이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해? 요새 젊은애들이 오빠같이 할아버지랑 만나주기나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말만
잘해주면 그 인간한테 최고 좋은 신부감을 추천해달라고 할 수 있는데... 돈만 많으면 나이 이십대 초반에서
중반도 만날 수 있다던가?”
“큼... 그건 네 도움 없이도 내가 하려면 할 수 있어.”
“그렇기야 하겠지. 돈은 돈대로 받아놓고 막상 현지 가서 마음에도 안 차는 여자들 소개받다가 올 수도 있는 거
아니우?”
“너는 다르다고?”
“기왕지사 아는 사람 통해서 하면 얼마나 믿음직해? 응? 얼른 점지 좀 해줘봐요.”

마음이 동했는지 명우도사가 슬그머니 다시 몸을 일으킨다.


“여당? 야당?”
“그게 뭐가 중요해?”

명우도사는 사진 속 남자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중요할 것 같은데?”
“어째서?”
“얼굴만 봐도 살이 가득해. 그냥저냥 권력자에 빌붙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고 살 사람이 아니야.”

임복희는 목이 마른지 명우도사의 막걸리를 한 사발 쭉 들이키더니 말했다.

“아이고 좋네. 내가 이래서 오빠 찾으러 온 거잖수. 기가 막히게 본다니까?”


“그래서 여당이야? 야당이야?”
“이 인간을 대차게 깐 인간이 여당이에요.”
“그럼 야당쪽 정치인이 맞겠네. 한번 원한을 가지면 쉽게 잊지 않는 놈이야.”
“야당 누구?”

명우도사는 입을 삐죽 내밀고 한참 사진을 보더니 말했다.

“주우진이.”
“지역구가 평택인 그 주우진? 이제 고작 2 선인 주우진?”
“그래. 잘 맞겠어.”
“오빠가 주우진을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뉴스 봤으니까 알지.”
“진짜 잘 맞을까?”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못 믿는 건 아니고...”
“그건 됐고, 너도 이제 적당히 해 먹어. 그러다 탈 난다. 어째 수십 년이 흘러도 수법이 변하지를 않아?”
“대한민국에서 땅만큼 확실한게 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왜 계속 주식에 손을 대? 땅으로 재미 봤으면 계속 땅만 파면 될 게 아니야?”

임복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도 몰라. 그냥 빨간불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데 어떻게 해요? 안 하고 배겨?”


“병이다, 병.”
“나도 이제 오빠처럼 건물이나 살까봐. 어쨌든 고마워요. 내가 그 사람한테 오빠 연락처 줄게. 그런데 집 좀
바꿔야겠다. 이래서 젊은 여자가 살려고 하겠어?”
“이 집도 싼 건 아니야.”
“후줄근해. 베트남 가기 전에 요 앞 아파트 하나 사서 사진이나 찍어놔요. 그래야 먹혀. 그 얼굴에 이런 집이면
아무리 내 추천이라도 쉽지 않아요.”
“잔소리는...”

그녀가 떠나고 명우도사는 빈 잔에 막걸리를 따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술이 좀 깬 다음에 아파트를 알아보러 다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노림수(2) > 끝

< 노림수(3) >

영훈 일행이 대한민국 땅을 밟음과 동시에 나온 기사.


이후 후속기사들이 연이어 나왔고 무려 8 천억 규모의 대형 계약이 공개됐다.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의 2+2 계약과 추가 초대형 LNG 선 계약은 바짝 말라가던 해주조선해양 관계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주조선해양 본사 로비를 통과하는 고승현 상무의 어깨는 한껏 올라가 있었고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
없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강일후 전 사장이 떠나고 새로 사장직에 오른 송유철 사장은 영훈도 오늘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를 한쪽으로 곱게 빗어넘긴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일행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기획조정실 최영훈입니다.”


“특수사업부 고승현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앉으시죠.”

그는 자리를 가리키며 차를 내오도록 했다.


영훈과 고 상무가 자리에 앉자 그는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참... 생각지도 못하게 사장 자리에 앉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최영훈 상무님이 미쓰이 상선과
강일후 전 사장의 거래를 캐내셨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랬나요?”
“강 전 사장님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 먼저 차부터 드시죠.”

그때 비서가 차를 내왔다.
영훈이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을 때 송유철 사장이 말을 이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임직원들이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만큼 해주조선해양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겠죠.”

얼마나 앞날이 안 보였으면 자리를 걸고 백마진을 받으려고 했을까.

“그런데 솔직히 강일후 사장이 미쓰이 상선과의 뒷거래 때문에 사퇴한 것보다 어제 니폰유센과의 협상이 더
놀라웠습니다. 갑자기 UACC 에서 자동차 운반선 2 척을 따온 건 어떤 정보가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송 사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해주조선해양이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산조선소에 일감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일본으로 날아간 거였는데
마침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반기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꺼내지도
않은 자동차 운반선을 요구했습니다.”
“하하, 그런 우연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먼저 일본에 가기는 했지만 시기의 문제였을 뿐 그들은 언제고 해주조선해양에 자동차 운반선을
발주했을 겁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 UACC 가 중국 강남해운에 발주했던 자동차 운반선에 기술적 결함으로
건조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송유철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그 정보는 도대체 어떻게 입수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어쨌든 우리는 그 정보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죠.”
“어쩐지 선수금 70%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인데 왜 그런 조건을 그들이 받아들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습니다.
대단하군요. 그럼 LNG 선에 주식교환 옵션을 넣은 건 어떤 이유인가요?”

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냥 위험을 대비한 것일 뿐입니다. 혹시 알아요? 니폰유센이 망하기라도 할지. 그때를 대비해 주식 교환
옵션이라도 넣은 겁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말로는 굉장하다고 칭찬하지만 그가 그리 감동한 게 아니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하하, 이거 눈치가 보통 아니십니다. 솔직히 아직 많이 힘듭니다. 아시겠지만 사흘 전부터 기존 군산조선소
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고용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고용인원이 무려 2,064 명입니다. 우리 재무팀장이 그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지금껏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매달 빠져나갈 월급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고 하더군요.”
“어려운 사정인 것 이해합니다.”
“그런 상황에 니폰유센과의 수주계약을 따오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만 사실 그래 봐야 1 년짜리입니다.
군산조선소 도크는 한국 최대 규모고 우리 기술은 세계 최고입니다. 그 말은 곧 같은 선박을 만들어도 적은
인원을 투입해 가장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과 같지요.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
기술이야 마음만 먹으면 시간문제이고 설계야 몇 달이면 뽑습니다. 조립하는 거야 일도 아니죠.”
“그래도 최소 2 년은 가지 않습니까?”
“설렁설렁 일할 때야 그렇지만 그럼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회사가 남는 게 없습니다.”
“결국 더 많은 수주가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네. 우는 소리로 들리는 것 인정합니다. 사실 우는 소리가 맞기도 합니다. 하하, 말 그대로 울고 싶거든요. 저
큰 조선소 안정적으로 돌리고 직원들 월급 주려면 최소 3 년치 일감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본사에서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우는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카타르 쪽이
요새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스 사업 자체를 축소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카타르 쪽에서 최소 열
척 이상의 대규모 수주를 이루어 낸다면 그때 가서는 진짜 숨을 돌릴 수 있겠지요.”
“잘 될 수 있을 겁니다. 믿고 있습니다.”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해죠? 일단 이번 계약을 마무리 짓는 대로 축하 자리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무리
부족하다고 하지만 계약규모만 8 천억에 달합니다. 그냥 지나갈 수 없죠.”
“하하, 알겠습니다.”

영훈은 웃었지만 급격한 피로감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군산시민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은 커졌고 고려해야 할 일은 늘어났다.
이제 2 천 명의 근로자와 군산 경제가 HS 그룹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큰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왔다 생각했는데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는 기분.
갑자기 연희가 보고 싶어졌다.

부산 백병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임창호 회장을 송은채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
시아버지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
둘 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은 오래 전에 명을 달리 했고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딸 하나 뿐이었다.
특히 시아버지는 아예 깨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 마음이 안 좋았다.
어차피 계열사 분리도 다 끝냈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딱 하루만이라도 몸을 일으켜 손녀딸 결혼식이라도 지켜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현진관광 전 사장이었던 임은진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냥 얼굴 좀 뵈려구요.”
“회장 취임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임은진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설마 저렇게 대놓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나랑 연희 얼마나 무시했어요? 그것 뿐이에요? 현진물산 차지하겠다고 임원들 구워삶아 회사 조직이 엉망이
되게 만들었잖아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증거 있어?”
“소리 지르지 말아요. 아무리 아버님이 누워 계신다고 하지만 그래도 형님이랑 저 싸우는 거 다 듣고 계실지도
몰라요. 형님은 딸이라서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 며느리라 아버님 앞에서 고성 지르면서 싸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흥!”

임은진도 차마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린다.
송은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룹사 회장이 되니까 형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많이 사라졌어요. 그래, 그럴
수 있지. 욕심이 났을 수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형님을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네요.”
“아주 욕을 하는구나. 예전에는 속으로 엄청 욕했나봐?”

송은채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무언의 긍정.
화가 뻗친 임은진이 따라 나오는데 그때 딱 김태민 부회장이 다가와 송은채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랜만이다. 부회장 취임 축하해. 주주총회 때 가보지도 못했네.”
“아닙니다. 의결권 양도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얼굴 좋아보이네. 결혼한다며?”
“아직 이야기 진행중이고 날짜는 곧 잡을 예정입니다.”
“GK 그룹이라니 잘 됐네.”
“연희도 곧 결혼한다면서요?”
“그래.”
“날짜는 잡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잡지는 않았는데 여름 전에 하려고.”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상황이 상황인데 빨리 해야지.”

김태민은 어색하게 웃다가 슬쩍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오늘 기사 봤습니다. 해주조선해양이 니폰유센한테 LNG 선이랑 자동차 운반선 수주했다고 하던데 HS 물산에서
움직였다면서요?”
“갑자기 그건 왜?”
“확실히 할아버지께서 현진물산을 키우신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진물산의 영업조직력을
본격적으로 움직여서 수주를 따오는 그림을 옛날부터 그리셨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쉽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숙모에게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어요.”
“무슨 부탁?”
“이미 많이 가지셨으니까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좀 양보 해주셨으면 해서요. 지분정리도 다 됐겠다, 더 욕심낼
것도 없잖아요?”
“맞아. 사실 별로 원하는 건 없어.”
“그럼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우리 법무팀 직원들 요즘 정신 없는데 얼마 남지도 않은 유산 가지고도 싸우면 퇴근
못 합니다.”
“그러렴.”

혹시나 할아버지가 남길 유산을 욕심낼까 걱정했던 태민은 원하는 걸 얻었음에도 뭔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까짓것 네가 다 먹으라는 태도에 굴욕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태민은 참았다.

“감사합니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가진 경기도 일대의 대지와 주식 지분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기명 채권들까지.
그것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인당 40 만 원이 넘는 고급 일식집.
주우진 의원은 불편한 얼굴로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얼마나 많은 접대를 받아봤겠는가?
식사비가 비싸서 불편한 게 아니라 비싼 식사비를 내는 맞은편 남자의 의도를 모르기에 불편한 거였다.
그래서 강윤기가 술잔에 술을 따라도 받기만 할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네.”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라...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설회사라고 들었는데 나를 왜 찾아왔나?”
“전라도에서 주로 일감을 받아 일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 동네에서만 일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도, 사람도 자고로 큰 물에서 놀아야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우진 국회의원은 강윤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난 사람을 잘 믿지 않아. 더군다나 오늘 처음 만난 기업인을 뭘 믿고 같이 하자고 파이팅을 하겠나?”


“그런가요? 이해합니다. 그럼 오늘은 식사를 대접해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영훈과의 만남 이후로 윤기는 조금 달라졌다.


영훈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여유로움이 가진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신도 모르게 동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우진 의원은 조금 뜻밖이었다.
대개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떡해서든 자신을 어필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달랐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식사 자리는 꽤 예민한 자리라네. 더군다나 이렇게 비싼 식사는 특히 더 조심을 해야 하지. 아무런
사심이 없는 식사라고 해도 나중에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거든.”

속내를 꺼내 놓으라는 말이다.

“전 꿈이 있습니다. 아주 큰 기업가가 되는 게 꿈이죠. 이병천, 정주연 같은 큰 기업가 말입니다. 그런데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제가 그런 큰 기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큰 정치인들과의 교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평택에서 2 선, 아직 중앙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의원님을 단번에 신문 1 면에 오르게
해드리겠습니다.”

어찌 보면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지만 주 의원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금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와 주목을 받는 여당 의원의 약점이라면 어떨까요?”
“가장 많은 지지와 주목을 받는 여당 의원의 약점이라... 그게 누군가?”
“조재민 의원입니다.”

주우진 의원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술잔을 가볍게 넘기고는 말했다.

“조재민의 저격수가 될 수 있다 그 말이지?”


“맞습니다.”
“재미있군. 들지.”

주우진 의원이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 노림수(3) > 끝


< 저격수(1) >

식사가 대충 마무리 되자 주우진 의원이 말했다.

“이제 이야기해보지. 조재민 시장을 저격할 수 있는 그 약점에 대해서 말이야.”

강윤기는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전라도를 기반으로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집을 짓는 걸 시작으로 타운하우스의 고급 저택까지 성장해오며 나름 탄탄한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이 있지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
습니다. 우리라고 언제까지 작은 일감만 맡으라는 법은 없다고요.”
“훌륭한 생각이군.”
“작년이었습니다. 광주에 꽤 주목받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혹시 봉선동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주우진 의원은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 집값 급등 지역?”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정치인이 부동산에 둔하면 쓰나. 내 주변에도 봉선동 때문에 돈 좀 만진 사람이 몇 있거든.”
“아시다시피 봉선동은 광주에서도 유독 집값 급등이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봉선동에 LH 공사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시행한다며 시공사 선정 공고를 내지 않았겠습니까? 놓칠 수 없었습니다.”
“좋은 기회였겠군.”
“맞습니다. 사업권을 따내기만 하면 노다지였으니까요. 물론 토지매입과 공사대금 때문에 은행권에 상당한 규모의
차입이 있어야겠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 재무구조가 견실했습니다. 우리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권을 따낸 곳이 다름 아닌 현진건설이었습니다. 지금은 HS 건설이 되었고 그 전에는 혜성기업이라는
곳이었죠.”
“혜성기업? 들어본 것 같은데···.”
“도급업체 43 위인 저희랑 몇 단계 차이도 없는 작은 건설사였습니다. 워크아웃 중이었는데 주채권은행인
신영은행이 현진물산에 떨이로 넘긴 회사였죠. 그런 건설사가 간판 바꿔 달았다고 몇 달도 되지 않아 건설비만 6
천억이 넘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를 따낸 겁니다.”
“허··· 기가 막히군.”
“차라리 대기업인 우명건설이 그 사업권을 따냈다면 억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현진건설이라뇨? 더군다나
지방에 대규모 미분양을 일으켰다가 워크아웃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회사가 따낼 사업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우진 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한데, 그게 전부인가?”


“당연히 전부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HS 건설이 봉선동 사업권을 따낸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조재민
시장이 군산조선소의 재가동 문제를 공약으로 들고나옵니다. 갑자기 말이죠. 그리고 마치 약속했다는 듯이 HS
물산이 군산조선소를 인수하고 해주조선해양을 붙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조재민 시장이
HS 그룹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군산조선소를 가동시키겠다는 간 큰 공약을 들고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제야 주 의원이 돌아가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맞아.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한게 HS 그룹이지? 전에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눈에 띄지 않았어. 그런데 봉선동 사업권을 생각하니까 퍼즐이 맞아들어가. HS 그룹이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을 받고 군산조선소를 조 시장의 품에 안겼다면··· 아주 절묘한 딜이
군.”
“지금 조재민 시장은 군산 경제를 일으키는 대단한 수완가의 이미지를 얻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굳어지면
앞으로 야당 입장에서 상당히 골치 아픈 여당 대권 주자까지 성장할 겁니다.”
“지금도 골치 아파. 조 시장 때문에 국민들이 여당이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럼 안 되죠. 이번 기회에 싹을 잘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싹을 자르는 분이 의원님이면
원더풀이겠고요.”

주우진 의원은 술을 마시곤 물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을 테지?”


“맞습니다.”
“흐음··· 정황상 의심스럽긴 한데 증거가 없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의원님. 확정적인 증거는 앞으로도 안 나올 겁니다. 그런데 정황상 분명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니 나중에라도 이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나중에 야당의 다른 의원님이 이 문제를 꺼내면
그때는 의원님이 나설 수 없게 됩니다.”
“······.”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주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럼 자네는 뭘 원하는가?”


“말씀드렸듯이 의원님 옆에서 성장하고 싶습니다.”
“공교롭군, 하필 당에서 날 국토교통위원회를 해보겠냐고 물어왔거든.”

강윤기의 주먹진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신이 앞길을 인도하는 착각이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국토위라니···.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국회의원과 비교하니 이제 조재민 시장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차라리 조 의원이 최영훈을 선택한 것이 고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제가 의원님 옆에서 천군만마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면야 내가 참으로 든든하겠어.”
“한 잔 올리겠습니다.”

강윤기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

인천공항에 도착한 연희는 마치 누가 뒤에서 쫓아오듯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박병호 부장이 따라오기 벅찰 만큼 빠른 걸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번 영국에서 그녀가 가져온 성과는 분명 그녀를 들뜨게 하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공항에 마중 나온 영훈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후다닥 달려왔다.

“나 기다렸어요?”
“기다리긴 했는데 이렇게 좋아하니 기다리길 잘한 것 같습니다.”
“히힛. 당연하지.”
“얼굴 보니까 성과가 있었나 봐요?”
“맞아요.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은데 일단 가면서 이야기해요.”

영훈은 일행의 짐을 트렁크에 싣고 운전대를 잡았다.


박 부장이 자신이 운전한다고 했지만, 오랜 비행을 하고 온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것도 실례 같아서 극구
거부했다.
영훈이 운전대를 잡으니 당연히 연희가 조수석에 앉게 되고, 박 부장이 상석인 뒷좌석에 앉게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영훈이나 연희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차에 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으니까.

“최고 경영자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노드리 클레어를 만나 봤는데 생각보다 자신의 브랜드에 대해 실망감이 큰 것
같았어요.”
“실망감이 컸다고요?”
“네. 이 사람 이력을 보니까 굉장한 사람은 맞아요. 세계 3 대 패션 스쿨인 세인트 마틴을 졸업할 때부터 디올,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그녀를 스카웃 하려고 했었대요. 그래서 그녀가 샤넬에서 10 년간 근무하고 나왔을 때
투자를 받는 건 어렵지 않았고, 그녀의 성공은 다들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었다는 거예
요.”
“지금 그렇게 되고 있잖아요?”
“이 정도 성장 속도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닌 것 같았어요. 노드리 클레어는 더 혁신적이고 열렬한 반응을
기대했던 것 같아요.”
“와··· 대단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네.”
“맞아요. 그리고 회사의 성장 속도보다 더 실망한 건 예상 외로 영국내 패션계에서 Nodri Clare 의 평가가
좋지 못하다는 데 있어요.”
“평가가 박해요?”
“네. 그녀가 기존에 샤넬에서 한 디자인에서 조금 더 캐주얼하고 모던해진··· 일종의 자기복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거든요.”
“자존심이 상할 만하네요?”
“그렇죠. 그래서 그런지 Nodri Clare 라는 본인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던 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계속
드러났어요.”
“회사의 성장성을 보면서도 계속 고민하던가요?”

이번에는 뒤에 앉아 있던 박병호 부장이 끼어들었다.

“의미 있는 성장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직 한국에 오픈한 매장은 겨우 두 곳입니다. 말 그대로 아시아 시장은
이제 점 하나 찍은 거나 다름없고, 대부분의 매출은 영국 내에서 일어나는데 고가이긴 해도 초고가 브랜드는
아니고 지역 확장성이 두드러지지 않다 보니 이 브랜드가 실패한 브랜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각 의사에 긍정적이다 그 말인가요?”
“맞습니다. 생각보다 더 긍정적이었고 오히려 저희에게 인수 후 어떻게 브랜드를 발전시켜 나갈 건지 구체적으로
질문까지 해왔습니다.”
“흐음··· 상대 쪽에서 원하는 금액은요?”
“5 억 파운드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화로 7,700 억이 조금 넘는 수준이고요.”
“실망했다는 것 치고 너무 비싸게 받으려고 하네요? 실망했다는 말에 살짝 기대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그 이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네요.”
“하··· 그래요? 5 억 파운드라···. 뭐, 그 정도에 깔끔하게 인수할 수 있으면 나쁘지는 않네요.”

다시 연희가 끼어들었다.

“그렇죠? 직접 본사 가서 대화를 나눌수록 확신이 왔어요. 이 브랜드가 중국에 엄청난 프로모션과 함께 진출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서 살피니까, 본사에 비치된 가방이나 액세서리들이 다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보이는 거
있죠?”

잔뜩 흥분한 연희를 보고 있자니 영훈도 뭔가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현진물산에서 HS 그룹으로 성장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했다.
고작 군산조선소를 계속 돌리는 것에도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데 현진관광 말고 당장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Nodri Clare 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게 뭐야!”

조재민 군산시장은 방금 뜬 기사를 보며 노성을 터뜨렸다.


곧바로 김시원 보좌관이 달려왔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정보가 새 나간 것 같습니다.”


“어디서 정보가 새? 이걸 누가 알고 있다고? 네가 말했어?”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러니까 너랑 나 아니면 현진물산에서 핵심 관계자들이나 아는 내용인데 미쳤다고 걔들이 이런 정보를
흘리겠냐고. 그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나가!”

열이 뻗친 조재민 시장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탁자에 툭 던졌다.

[주우진 의원, 조 시장이 봉선동 시공사 선정 관여 의혹 주장]


하필 정보가 새도 야당 정치인에게 샜다.
이제 막 전국구 정치인으로 도약하는 와중이다.
군산조선소도 성공적으로 재가동에 들어갔고 군산 경제는 이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이 일으킨 군산 경제에서 나온 달콤한 수확을 입 내밀고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생각지도 못한 악재다.


하필 LH 공사에서 일 처리를 담당한 직원이 인척이다.
이건 혼자 발뺌한다고 해서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과 HS 건설과의 관계에 대해 정확한 소스가 있기에 나온 말일 터였고 그렇다면 가장 먼저 LH 공사 직원부터 털
게 분명했다.

“일단 대응 전략을 잡아야 합니다. 기사 내용을 부정할 생각이면 철저하게 준비한 다음 대응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빠르게 수습해야 합니다.”
“발뺌하면?”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LH 공사 관계자를 채근한다고 해도 돈이 오간 것도 아니고 당시 호텔식
서비스에 관한 상당히 긍정적인 시민들 여론까지 있었습니다. 발뺌하고자 한다고 무조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거야 좋게 생각하면 그런 거지. 막상 시민들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의원님께서 전라도 지역에서만 의원 자리를 하신다고 한다면야 솔직히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경기도지사, 또는 서울시장 정도의 큰 선거나 이후에 있을 대권 경선 등을 생각할 때 대기업과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계속 남겨둔다면 언제고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수습한다면?”
“조금 타격은 있을지언정 길게 보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음··· 일단 최선은 봉선동 사업권을 HS 그룹이 포기하는 겁니다.”
“그건 안 돼. 대기업이 그렇게 물러빠진 놈들일 거 같아?”
“그렇다면 깔끔한 수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시공사 선정 과정에 문제가 남겨진 흔적을 찾아
지워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야, 이건 나 혼자 수습한다고 방방 뛸 문제가 아니야.”
“그럼···?”
“최영훈이를 불러. 아니, 내가 올라간다. 지금 출발할 테니까 차 준비해. 서울로 가자.”
“알겠습니다.”

< 저격수(1) > 끝

< 저격수(2) >

주우진 의원의 저격성 기사는 HS 물산에서도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은채 회장이 직접 영훈을 불러들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송 회장이 영훈을 소파에 앉혀 놓고 한 첫 마디는 예상을 벗어났다.

“6 월 첫째 주 토요일 어때?”
“네?”
“결혼 날짜 말이야.”

사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에서 사주를 가장 잘 보는 사람이 영훈이다.


그렇기에 날을 받고자 하면 영훈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전문가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굳이 나서서 날을 잡지 않았던 건 자신의 사주를 애써 잊었던 이유와 비슷했다.
자신의 미래를 계산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 회장이 날을 받아오면 어떤 날짜가 됐든 계산조차 해보지 않고 군말 없이 받아들일 참이었다.
“좋습니다.”
“진짜?”
“그럼요.”
“우리 연희랑 마지못해 결혼하는 건 아니지?”
“그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까지 살 이유도 없고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기지 않는데 최 상무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믿게 돼. 며칠 전에 부산에
다녀왔어.”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아직 눈을 못 뜨시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이래서 살아 계실 때 잘하라고 하는 걸 거야.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잘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쓰러지시니까 계속 마음이 안 좋아.”
“그게 당연할 겁니다.”
“시아버님은 뭐든 철저한 분이셨어. 무엇보다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셔서 가족에게도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연희 동생만큼은 그 누구보다 예뻐하셨지.”

송은채 회장의 얼굴은 지금까지 봤었던 그 어떤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실수도 아니었어. 그저 운이 없었던 거야. 유독 누나를 따랐던 그 녀석이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어. 연희는
그것도 모르고 놀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았던 거지.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표현할 수도 없다고 하지? 연희
잘못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걔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어. 내가 아니더라도 시아버지
와 연희 아빠한테 넘칠 만큼 미움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어린 나이에 외국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연희가 난 무사히 자라준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하고 고마워. 그런 연희가
최 상무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난 기뻤어. 어디서 이상한 남자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고 할 줄
알았거든.”
“······.”
“그런 면에서 난 운이 참 좋아. 주변에 적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여기 최 상무가 나타나 줬잖아?”
“회장님만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저도 운이 좋았습니다. 회장님이 아니면 누가 절 이런 번듯한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뽑아주겠습니까?”
“그럼 우리 둘 다 운이 좋았다고 하자.”
“네.”
“그건 그렇고 기사 봤지? 조재민 시장 말이야.”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조금 곤란한 상황이 됐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다른 국회의원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LH 공사 직원을 돈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한국 내
여론은 본래 오래가지 않으니 시간만 조금 끌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일 겁니다.”
“그런데 조 시장은?”
“야망이 있는 인물인데 거기다 조심스러운 사람입니다. 주변 평판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고요.”
“대통령까지 생각한다는 거지?”
“맞습니다. 증거가 없다지만 LH 공사 실무자가 조 시장 인척입니다. 정황증거가 딱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전
정치를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오랜 시간 뉴스를 보아오면서 정치인들이 제대로 된 증거를 가지고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건 몇 번 본 적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하는 자들에게는 중요한 건 상대방이 잘못
한 점이 있다는 걸 국민들이 믿게 하는 것일 테니까요.”
“후후··· 그건 맞아.”
“그리고 조 시장은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적당히 권력이나 누리고 살 사람이라면 별것 아닌 공격이
되겠지만 아마 조재민 시장은 심적으로 상당히 쫓기고 있을 겁니다.”

송은채 사장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김시원 보좌관이었다.

“조재민 시장 보좌관입니다.”
“그래? 받아 봐.”

영훈은 앉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아 스피커로 돌렸다.

“최영훈입니다.”
“김시원입니다. 기사 보셨죠?”
“네, 봤습니다.”
“지금 시장님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4 시 전에는 도착할 것 같은데 시간을 내주셔야겠습니다.”
영훈은 슬쩍 송은채 회장을 돌아보았다.
송 회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초동 조용한 곳에 자리 잡아놓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을 보고 송 회장이 말했다.

“직접 오는 걸 보니 역시 최 상무의 예상이 맞았네. 항상 느끼지만 진짜 귀신같아.”


“그리 어려운 예상은 아니었습니다.”
“서초동에서 만난다고?”
“경부고속도로 타고 강북까지 올라오려면 시간을 더 잡아먹어야 할 테니까요.”

송 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조재민 시장, 내가 만날까 하는데.”


“회장님께서요?”
“언제고 한번은 봐야 할 사람이잖아. 군산이야 멀어서 못 갔지만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얼굴도 안 볼 수 없지
않겠어?”
“그렇긴 하네요. 알겠습니다. 김시원 보좌관에게 문자 보내놓겠습니다.”
“최 상무도 같이 갈까?”
“아닙니다. 집중이 분산됩니다.”

송 회장과 조 시장이 만난다면 그만큼 그녀의 격을 올려줘야 한다.


적어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만큼은 송 회장을 들러리처럼 세워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다.
조재민 시장을 만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알겠어. 그럼 최 상무는 출장 다녀온 연희랑 Nodri Clare 인수에 주력하는 건가?”


“그러려고 했는데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주우진 의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주우진 의원? 왜?”
“제가 드라마랑 영화를 보니까 주인공이 누명을 쓰면 그 누명을 해명하려 할수록 일이 더 꼬이더라고요.”

송 회장은 영훈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하, 그래. 수고해.”


“네.”

영훈은 회장실을 나와 기획조정실로 돌아왔다.


기조실 분위기 역시 오늘 뜬 기사 때문에 뒤숭숭했다.
조재민 시장과 회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무슨 연관이 있으리라는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훈이 들어오자 다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만 빼꼼히 내밀며 분위기를 살피는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영훈이 기조실로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박 부장도, 연희도 아니었다.

“민희 씨, 잠깐만 들어와 봐요.”


“네.”

민희가 따라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자 영훈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때 안 물어봤는데 이형준 상무 만나보니까 어땠어요? 부담가지지 말고요.”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람기가 조금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은 나빠 보이지 않던데요?”
“바람기가 있으면 사람이 나쁜 거 아닌가요?”
“돈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많은 유혹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해할 수 있다?”
“아니요. 나쁜 버릇은 고쳐야죠.”

역시 보통이 아니다.

“이야기는 좀 통해요?”
“네.”
“잘됐네요. 그럼 박병호 부장에게 재무팀과 상의해서 회사채 발행에 관한 보고서 올리라고 할 테니까, 이형준
상무 만나서 7 천억짜리 회사채 발행하고 다음 달부터 판매 가능할지 확인해보세요. 적어도 4 천억 정도는
신영투자증권에서 사들여줬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영은행이 일본 쪽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니폰유센에 관해서 신영은행이나
신영투증, 신영모건스탠리 일본법인에서 얻은 정보를 우리와 공유해줬으면 한다고도 전해주세요. 이 부분은
신영은행 관계자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고요.”
“알겠습니다.”
“수고하고 박병호 부장님도 불러줄래요?”
“네.”

민희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
경부고속도로에서 교보타워 사거리 방면으로 빠져나오면 10 분 거리에 5 성급 호텔이 있는데 이게 딱 HS 관광이
소유한 켄싱턴 호텔이다.
조용하게 국회의원이나 국정 관계자를 접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셈이었다.
미리 하나의 엘리베이터와 통로만 통제하면 주차장에서부터 방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
조재민 시장 역시 호텔 그랜드스위트룸까지 들어오면서 철저하게 지켜지는 통제에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강남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뷰까지.

“좋군요.”

조 시장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은채 회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최 상무 대신에 제가 와서 실망한 건 아니시죠?”


“그럴 리가요. HS 그룹의 회장이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데 굳이 아랫사람을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오신 김에 하루 묵고 가세요. 다른 분도 아니고 조재민 시장님께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한가하게 호텔에서 일을 볼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도 아시겠지만 솔직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에요.”
“자금이 움직인 건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조 시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조재민 시장은 수많은 차가 오가는 강남대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냥 의혹을 제기할 겁니다. 그리고 그 의혹을 언론이 받아쓰겠죠. 받아 쓰는 게 아니라 심층취재까지
하며 제기된 의혹을 더욱 크게 부풀릴 겁니다. 사업 규모를 부풀리고, 사업권을 따낸 건설회사가 가지는 이익을
부풀리고, 나와 HS 그룹의 유착관계를 부풀릴 겁니다. 그럼 그걸 가지고 검찰이 칼을
들이대겠죠. LH 공사를 압수수색하고 시청을 압수수색 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나온들 그때 가면 나에게 무슨
이미지가 남을까요? 억울한 희생자? 난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검찰이 그 정도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최악의 경우를 말한 겁니다. 최악의 경우.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인데 이게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더욱 문제는 이 최악의 경우가 진행되면 중간에 막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장님이 원하는 건요?”
“HS 건설이 봉선동 사업권을 포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조재민 시장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그 말이 나올 거라고 기다렸다는 듯 칼같이 잘라왔다.

“봉선동 사업 말고도 HS 건설에 내가 꽤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집적단지에 HS 건설이


참여한 것만으로도 무려 천억 규모 아닙니까?”
“정부 발주 공사가 얼마나 남을 것 같아요? 공사대금 천억 내주면 그중에 백억도 남기기 힘들어요. 백억이면
감사할 수준일걸요?”
“회장님, 길게 보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곤란을 겪으면 HS 그룹도 미래에 거두어들일 이익이 줄어든다는 걸
생각하세요.”
“우리가 사업권을 포기한다고 의원님에 대한 의혹이 줄어든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더욱 뭔가 있으니까 제 발
저린다고 보겠죠. 게다가 공사는 이미 시작됐고 부지 매입에 들어간 돈에다 하청업체에 공사대금 일부까지 나간
상황이에요. 되돌릴 수 없어요.”
“후···.”
조 시장은 강하게 압박한다고 원하는 대로 진행될 사안이 아니라고 느꼈다.
긴 한숨을 토해내는 조 시장을 보며 송 회장이 말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말아요.”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소?”

송 회장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조금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곤란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시장님이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도 불안해해요. 그리고
애초에 기사가 터졌다고 허둥지둥 서울로 올라오는 짓도 해서는 안 됐어요.”
“짓?”

조 시장의 얼굴이 일그러짐에도 송 회장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고작 의혹 하나 터뜨린 것뿐이에요. 증거도 없는 의혹 하나. 저들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불안한 건 이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무겁게 행동했어야죠. 정치인은 천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바위 같아야 한다는
거 모르시나요?”
“······,”
“기다리세요.”

그제야 조 시장은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군요. 미안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면 무슨 해결책이 나올 거라고 보는 겁니까?”

송 회장은 다시 차분한 안색으로 말했다.

“최 상무가 그러더군요. 누명을 썼을 땐 해명하려 하면 할수록 일이 더 꼬인다고. 사실 엄밀히 말하면 누명은


아니지만···.”
“그게 무슨···?”
“말했죠? 무거워야 한다고. 엉덩이를 무겁게 하고 기다리세요. 주우진 의원은 시장님만 건드린 게 아니라 우리를
건드린 것이기도 하니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올라오세요. 그때는 웃으면서 같이
식사라도 해요. 배웅하지는 않을게요. 그럼···.”

송은채 회장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재민 시장을 두고 방을 나갔다.

< 저격수(2) > 끝

< 저격수(3) >


영훈은 송 회장이 조재민 시장을 만나는 동안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로 주우진 의원의 선거 당시 기사를
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예쁜 두 딸과 같이 지역구를 돌며 인사하는 그의 모습은 평택 일대에서 꽤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두 딸이 한 명은 고대 법대, 다른 한 명은 한양대 공대 출신으로 굉장히 똑똑한 데다 미인이라 유세에 함께
나오면 주우진 의원보다 두 딸과 악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라고 했다.

그런 주우진 의원이 갑자기 봉선동 사업권을 걸고 넘어졌다.


지금껏 그 어디서도 문제가 제기된 적 없던 봉선동 아파트 건설을 딱 찍어서 들고 나왔는데 하필 그 시기도
이상했다.
선거기간이었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총선과 보궐선거가 끝난 이후에 다리를 걸고자 나온 게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럼 애초부터 주우진 의원이 조재민 시장을 노리고 있었다고 볼 수 없던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주우진 의원에게 조재민 시장의 약점을 제공하고 그의 뒤통수를 후려달라 부탁한 게
틀림없었다.

봉선동 사업에 대해 알고 있는 누군가가 말이다.


그때 딱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군산시청에서 봤던 영민주택 대표.


그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다면 일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민희 씨, 박병호 부장님도 불러줄래요?”


“네.”

잠시 후, 박병호 부장이 조금은 의아한 눈빛으로 들어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Nodri Clare 인수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갑작스럽게 또 불렀기 때문이다.

“찾으셨습니까.”
“네. 다름 아니라 혹시 정치인들 정보도 기조실에서 관리하고 있는 게 있나요?”
“정치인들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왜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대기업 미래전략실 같은 데서 정치인들 관리도 하고
그러잖아요. 혹시나 우리 회사도 그런 게 있는지 궁금해서요.”

박 부장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회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진중공업 경영기획실은 상무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아··· 현진중공업에서요?”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회사 기조실은 그룹 핵심인 현진중공업 경영기획실에 비해 많은 게 부족했습니다. 막상
중요한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권한이 부족해서 만나지 못한다거나 일을 진행하지 못한 적도 많았거든요. 그런
일은 대개 우리 대신에 현진중공업 경영기획실에서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아마 정치권
에 관한 정보는 그쪽에서 가지고 있을 겁니다.”
“흐음···.”
“주우진 의원이 낸 기사 때문에 그러십니까?”
“맞아요.”
“주우진 의원과 만나고 싶으신 건가요?”
“어색하지 않게 만날 수 있을까요?”
“주우진 의원이 서울대인데 강노식 부사장님이 서울대 출신입니다. 제가 얼핏 듣기로 동문이라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부사장님께 여쭤보시는 게 어떨까요?”
“어? 강노식 실장님이 서울대 출신이에요? 난 연대인 줄 알고 있었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전에 양철기 전무 라인이 연대 라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강노식 실장이 양철기 전무 라인이었기에 당연히 연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울대였나보다.

“제가 부사장실로 연락해볼까요?”


“제가 직접 올라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영훈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부사장실로 올라갔다.


다행스럽게도 강노식 부사장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이혼의 고통을 이겨낸 강 부사장은 요 몇 달 새에 얼굴이 그렇게 좋아졌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할까?

“요즘 왜 이렇게 바빠? 회사에서 제일 바쁜 것 같아?”


“저보다 안 바쁜 분들 없습니다. 부사장님이 제일 한가해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긴, 부사장 다니까 일보다 누구 만나는 일이 더 많아. 한가해지긴 한 것 같아. 앉아. 차 마실래?”
“됐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차 마시면 물배 차서 밥도 못 먹을 겁니다.”
“나도 그렇더라. 그래, 그냥 인사차라도 한번 오지 않더니 무슨 일로 찾아왔어?”
“조재민 시장 때문에 왔습니다.”
“오늘 그 기사 때문에? 그건 내가 도와줄 일이 없을 건데? 최 상무가 다 컨트롤 했잖아.”
“주우진 의원 때문에요.”
“오늘 기사 낸 국회의원 말이지? 그 사람은 왜?”
“만나고 싶어서요.”
“직접? 쉽게 생각하지 마. 조재민 시장을 노리고 있는데 HS 그룹 핵심 관계자인 네가 만나면 진짜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하고 더 달려들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둘 수도 없어서요.”
“왜?”
“조 시장 이미지에 흠집이 생기면 우리도 좋지 않습니다.”

강노식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회장님이랑 네가 조 시장을 밀고 있으니 이미지에 흠집 가면 우리도 손해이긴 하지.”


“그리고 봉선동 사업에 흠집을 내서 회사 이미지에도 흠집이 생기면 나중에 국가가 발주하는 사업에서 큰 손해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깊게 생각하지 마. 사람들 그렇게 세심하게 기억하지 않아. 알잖아?”
“그래도 우리가 정경유착 그룹으로 인식이 박히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어쩌게?”
“대화를 나눠봐야죠.”
“안 통할 텐데?”
“안 통할 거라고 보십니까?”

영훈이 빙그레 웃자 강노식 부사장이 인상을 찌푸린다.


“까먹고 있었네. 따지고 보면 예전에 네가 날 양 전무에게서 돌아서게 만든 게 더 말이 안 되긴 했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최 상무한테 충고를 하려고 했어.”
“절 도와주려고 하신 건데요.”

강노식 부사장은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젓더니 말했다.

“어떻게 도와주면 돼?”


“서울대 동문이시라면서요? 박병호 부장에게 들었습니다.”
“맞아. 자리 마련해줘?”
“가능하다면요.”
“동문이기는 한데··· 국회의원 돼서 어찌나 거들먹거리는지 내가 말 한번 안 붙였거든. 연락하면 꽤 놀랄
거야.”
“그럼 득의만만해할 수 있겠네요.”
“흐흐··· 그렇겠지. 우리가 발등에 불 떨어져서 자존심 굽혀가며 연락하는 거니 아주 통쾌해할 거야.”

씁쓸한 강 부사장의 얼굴.


진짜 연락하기 싫어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부탁드립니다.”
“기다려봐.”

강 부사장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오랜만이다. 다른 건 아니고 너 우진이 연락처 알지? 주우진이. 그래, 84 학번 주우진. 국회의원 말이야.
갑자기 왜는··· 연락처 문자로 좀 찍어줘 봐. 새끼, 국회의원 연락처 민감한 거 내가 모르겠냐? 시끄럽고 빨리
보내줘. 응.”

전화를 끊은 강 부사장이 말했다.

“동문회 부회장이야. 아마 내가 우진이 연락처를 왜 물었는지 궁금해서 미쳐버리고 있을걸?”


“발이 넓으신 분이네요?”
“응. 그런데 이 새끼가 좀 골때리는 놈이야.”
“어떻게 골때리는 분입니까?”
“동문회 부회장인데 서울대 출신이 아니거든.”
“네?”
“서울대 법학과라고 속이고 4 년을 학교 다닌 놈이야. 그런데 나중에 서울대 아닌 거 뽀록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동문회를 나오고 그러다가 결국 동문회 부회장까지 하고 있어.”
“와··· 대단하신 분이네요.”
“학벌만 속였지 딱히 우리한테 피해준 것도 없고 사람이 워낙 좋아서 누구 하나 이놈 싫어하는 놈이 없었어.
그래서 동문회 부회장도 하고 지금도 누군가 무슨 일 생기면 가장 먼저 이놈을 찾아. 언제 한번 소개시켜줄게.”
“기대되네요.”

그때 강 부사장은 문자로 도착된 번호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주 의원, 반가워. 나 강노식이야.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나? 놀라기는 우리가 더 놀랐지. 오늘 저녁 어때?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에헤이~ 빼지 말자고. 적어도 우리한테 주 의원을 도울 수 있는 기회라도 줘야지.
그럼그럼~ 오케이. 거기서 보자고.”
강 부사장이 전화를 끊자 영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삿일에 감사하고 말게 어딨나? 그런데 이 녀석 원래 학교 다닐 때부터 성격이 보통 아니었어. 지는 거
싫어하고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말도 못 해.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크게 고생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후··· 어떻게? 같이 가?”
“아닙니다. 저 혼자 만나겠습니다.”
“그래. 괜히 내가 후달리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괜히 국회의원 잘못 건드렸다가 뒤에 올 후폭풍을 걱정하는 그였다.

“지금부터 출발해야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어, 가봐. 약속장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영훈은 부사장실을 나와 곧바로 차를 타고 평택으로 출발했다.
혹시나 차가 막혀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는데 생각보다 통행량이 원활해 약속시간보다 30
분이나 일찍 올 수 있었다.
약속장소는 의외로 서민적인 김치찌개집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니 그래도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일찍 도착해서 나쁠 건 없으니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는데 약속 시간을 훌쩍 넘어 1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종업원이 중간중간 들락거리며 언제 주문하는지 눈치를 주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먼저 시켰다.
그래도 맛집이기는 한 건지 밥 한 공기 뚝딱하며 배부르게 먹는 와중에 문이 열리고 주우진 의원이 들어섰다.
먼저 음식을 먹고 있는 영훈의 모습에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오셨습니까.”
“자네는 누군가?”
“반갑습니다. HS 물산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라고 합니다.”

영훈은 명함 하나 꺼내주고는 악수를 청했다.


주우진 의원은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려는지 명함도 받지 않고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영훈은 오히려 빙긋 웃으며 말했다.

“팔 떨어지겠습니다, 의원님.”
“크흠···.”

그는 억지로 악수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쯤 사라진 찌개를 보고는 말했다.

“인내심이 부족한가 보군.”


“제가 다른 건 다 참아도 허기는 못 참아서요.”
“강노식이는 어디 가고 자네가 왔나?”
“사실 의원님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저희 부사장님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어째서?”
“이유는 짐작하시지 않으십니까?”
“말 돌리지 말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게. 난 쓸데없이 빙빙 돌리는 사람을 싫어한다네.”
“봉선동 사업 말입니다. 저희는 조재민 시장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의원님이 그런 오해를 하셔서
언론에 알리시니 회사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두고 볼 수 없으면?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영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협박하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화로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세금 꼬박꼬박 내는 시민으로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에게 잘못된 사실관계를 정정하고 싶어 대화를
청하는 건 문제없지 않습니까?”
“그럼 말해보게. 들어나 보지.”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조재민 시장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게 끝인가?”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는 건가요?”
“조 시장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도 없이?”
“없다는 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럼 시장님은 저희가 조 시장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가지고 계십니까?”

주우진 의원은 대답 없이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날 불러냈다 이건가?”


“고작이라뇨? 오해를 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실망스럽군. 한심해. 강노식도 그렇고 자네는 뭐··· 말할 것도 없군.”
“아, 그리고 추가로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언론에 더이상 HS 그룹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거론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증거도 없이 그렇게 몰아세우면
열심히 기업을 운영하는 회사 입장에서 무척 곤란하니까요.”
“또 협박인가?”
“무슨 말만 하면 다 협박으로 받아들이시는군요. 그저 부탁드리는 겁니다.”
“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야. 불의를 보고 넘어갈 수는 없지.”
“도대체 우리 회사가 국민들에게 무슨 피해를 줬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쓰러져가는 군산 시민들을 위해
조선소까지 인수해서 살려 보겠다고 밤낮없이 일하는 우리입니다.”
“흥! 뭔가 떨어지는 게 있으니 인수했겠지. 군산조선소? 두고 봐. 조 시장은 물론이고 자네들 회사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알겠나? 그리고 다음에는 이런 의미 없는 만남 청하지 말게.”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갔다.


영훈은 나가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 한공기를 추가해 배부르게 저녁을 마치곤 느긋한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차에 타서 박병호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팅은 끝났습니까?]
“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말씀하세요.]
“주우진 의원이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됐나요?”
[정확하지는 않은데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경기도 지역에서 압도적
당선은 사실상 힘드니까요.]
“그럼 혹시··· 선거 과정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는지 한번 알아봐 주실래요?”
[뭐 발견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한번 찾아봐 주세요. 혹시 모르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영훈은 전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 저격수(3) > 끝

< 저격수(4) >

형준은 평소에 잘 보지도 않던 연예 기사를 클릭하며 창밖을 힐끔거렸다.


1 시간 전, 최 상무 대신 그녀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은근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하지만 모양 빠지게 얼빠진 표정을 지을 생각은 없었다.
재벌 자녀도 아니고 고작 상무 비서에게 쩔쩔매는 모습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많이 기다리셨어요?”

순간 흠칫 놀란 형준이 얼른 핸드폰을 뒤집고 고개를 들자 민희가 말했다.

“뭘 보고 계셨기에 그렇게 놀라세요? 설마 야한 거 보고 계셨던 건 아니죠?”


“아니, 날 어떻게 보고···.”
“국회의원도 국회에서 누드 검색하던데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연예 기사 봤습니다.”

형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시켜주자 민희가 묘한 눈초리로 말했다.

“아··· 한가하신가 봐요. 보통 그 위치에 있으면 연예 기사 대신에 경제면을 주로 보지 않던가요?”


“잠깐 짬이 나서 봤던 거예요. 나 그리고 엄청나게 프로페셔널한 사람입니다. 일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거 왜 이러지?”
“어머,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던 건 아니죠?”
“아니 뭐··· 앉으세요.”

민희는 싱긋 미소지으며 자리에 앉고는 물었다.

“많이 기다리신 건 아니시죠?”


“나도 방금 왔어요.”

사실 기다린지 30 분이 넘었지만, 왠지 오래 기다렸다고 하면 지는 것 같은 느낌에 온 지 얼마 안 된 척 여유를


부리며 음식을 시켰다.
식당은 을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골뱅이 전문점으로 치킨과 골뱅이, 그리고 맥주를 파는 가게였다.

“이런 분위기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재벌이라고 항상 스테이크에 와인만 마실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풉! 어머, 죄송해요.”
“왜 웃습니까?”
“방금 좀···.”
“느끼했다고요?”
“조금···.”
“최 상무 이야기나 꺼내 보세요.”

형준이 심통난 표정으로 툭 내뱉자 민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저희 상무님께서 7 천억 규모 회사채 발행을 약속하셨어요. 기간은 재무팀과 협의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발행할 예정이고 신영투자증권에서 이중 4 천억 정도를 소화해주셨으면 하셨어요.”
“4 천억? 흐음··· 이자율은요?”
“그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바로 판매가 가능한지도 물어보셨어요.”
“준비야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 하는 거지. 그게 끝인가요?”
“그리고 니폰유센에 관한 신영은행, 신영투증, 신영모건스탠리 일본법인에서 얻은 정보를 공유해주셨으면 한다고
하셨어요. 이 부분은 다른 은행 관계자들은 모르는 상태여야 한다고도 덧붙이셨고요.”

형준이 눈을 빛냈다.

“니폰유센? 이번에 해주조선해양이 수주 받은 그 회사 말인가요?”


“네.”
“거길 왜?”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상무님의 뜻이···.”

형준은 민희의 말을 끊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대략적으로는 알잖아요?”


“······.”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랑 최 상무는 파트너예요. 이 정도는 알아도 될 것 같은데?”
“말씀드렸듯이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정확하지 않은 이유. 그게 듣고 싶다니까요?”

민희는 억지를 부리는 형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절 곤란하게 하고 싶으신 거군요? 저는 내용을 전달하라는 지시만 받았지, 이형준 상무님과 친분을 유지하라는
지시는 받지 않았어요. 그러니 저를 더는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거 참, 농담 한번 못하겠네요. 뭐가 그렇게 빡빡합니까?”
“빡빡하게 하지 않으면 상무님의 그 느끼한 눈빛에 넘어갈까 봐 그래요.”
멈칫한 형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긴, 뭐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요. 내 겉모습이나 배경을 보고


바람둥이로 여기면서 미리 선입견을 갖는 여자들도 있거든요.”
“아니라는 말이세요?”
“하하, 당연하죠.”
“전 거짓말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거짓말인지 아닌지 아주 잘 캐치하거든요. 저희 보스가 절
왜 신뢰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순간 형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
“거짓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겠죠. 그런데 여자 앞에서 거짓말하는 남자는 멋 없어요. 상무님은 그런 남자
아니시죠?”

뻔히 알면서 묻는 듯한 눈빛에 형준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크흠··· 뭐···.”
“오늘 맥주랑 골뱅이는 제가 살게요. 전에 소고기도 얻어 먹었는데 계속 얻어먹으면 염치 없잖아요?”
“이거 뭐 얼마 한다고··· 내가 사도 됩니다.”
“괜찮아요. 서로 법인카드로 긁는 건데 내가 내니, 네가 내니 하는 건 우습잖아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이렇게 되니 전에 산 소고기도 고작 법인카드로 긁어서 생색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형준은 1 시간 내내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자리를 쫑내야 했다.
마지막에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민희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서 마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무래도 영훈을 만나야겠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말려들어가는 저 여자를 상대하려면 영훈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침에 출근한 영훈은 민희에게 어제 미팅 관련해서 간단한 보고를 받고 박병호 부장을 만났다.
박 부장은 어제 저녁부터 고작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꽤나 의미있는 내용을 가지고 왔다.

“일단 평택 통일평화당 선거운동 본부장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우규민이라고 선거판에서 10 년 넘게 활동하던


사람인데, 보통 선거 한번 할 때마다 집이 하나씩 생긴다는 소문입니다.”
“빠르시네요. 소문까지 들으시고.”
“평택에 저희 공장도 있고 평택항을 통해 꽤 많은 물자가 들어옵니다. 당연히 우리 회사 직원들이나 하청업체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죠.”
“오··· 그렇군요.”
“평택 바닥에서 수십 년 거주하며 살던 이들이 다 우리 식구나 다름없으니, 선거철에 어떤 이야기가 돌았는지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전화 한 통에 별별 이야기들을 다 들려주었거든요. 일단 우규민이라는
본부장은 꽤 능력이 좋기는 했습니다. 본인이 손댄 선거는 거의 다 당선을 시켰고, 그 과정
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건 틀림없는 것 같고요.”
“선거자금에서 흘러나간 게 맞기는 한 건가요?”
“우리 쪽 하청업체 대표가 말하기를 선거가 끝나고 우규민 와이프가 현금으로 용인의 상가를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고 했답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어서 지금 직원 보내서 확인 중에 있습니다.”
“으음··· 다른 건요?”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대놓고 돈을 뿌리거나 하는 일은 많이 없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선거철만 되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티를 안 내고 돈을 뿌린다고 합니다. 마침 잘된 게 저와 연락한 하청업체 대표가 평택 중소기업 살리기
운동본부 대표입니다.”

참 절묘한 상황이다.

“정말요?”
“네. 식사 얻어먹은 건 부지기수고 과일에 고기에··· 선물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선거법 위반 아닙니까?”
“맞습니다.”
“딱 걸리긴 했네. 너무 쉽게 걸려서 당황스러울 정도인데요?”
“솔직히 저도 전화통화 몇 번에 이렇게 쉽게 잡을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지역구가 평택이 아니라
고양시나 포천 같은 곳이었으면 절대 이렇게 쉽게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폭로하실 겁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폭로하면 하청업체가 무척 곤란하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름 깊게 이어온 인연이었을 텐데 우리와의 갑을 관계 때문에 사실상 마지못해
폭로한 상황이니까요.”

물어본다고 그냥 쉽게쉽게 대답한 건 아니었나보다.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리 쪽 기자 있죠?”
“네.”
“기사 하나만 냅시다. 적당히 추려서 주우진 의원이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는 수준으로
가볍게.”
“핵심은 비껴가게 말입니까?”
“네, 우리가 기사를 냈다는 정도만 티를 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주우진 의원이 쉽게 물러날까요?”
“물러나진 않더라도 대화는 하고 싶을 겁니다.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박 부장이 나가고 딱 1 시간 만에 기사가 올라갔다.


[주우진 의원, 지역구 주민에 금품 제공 의혹]

그리고 기사가 나간지 채 10 분도 되지 않아 영훈의 전화가 울렸다.

“최영훈입니다.”
“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바짝 독이 오른 주우진 의원의 목소리.

“그럴 리가요. 어느 기업인이 정치인과 맞짱을 뜨고 싶겠습니까?”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기사 네가 냈지?”
“글쎄요. 그런데 이 기사가 의원님을 많이 곤란하게 만들었나요? 내용을 보니 증거는 없고 순 의혹 투성이던데
말이죠.”
“너 이 새끼··· 뭐 하자는 거야?”
“자꾸 오해하십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날이 좋던데 전통차 어떠십니까? 종로 3 가 쪽에 전통차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이 있던데 제가 언제 시간 되면 대접해 드리고 싶네요. 아, 보는 사람이 많다면 종로 리츠칼튼에 전통차와
떡이 상당히 좋습니다.”
“지금 가지.”
“기다리겠습니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걸 보니 박병호 부장이 제대로 집기는 한 것 같다.


곧바로 회사를 나와 호텔 직원들에게 VIP 손님이 오실 거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HS 관광이 HS 물산 소유가 된 게 이렇게 편하게 작용할 줄이야.
기업이 호텔을 가지고 있으니 접대가 너무 편했다.
게다가 봉선동 사업 선정 때도 큰 메리트가 있었으니 영훈은 느긋하게 호텔을 둘러보면서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30 여 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주우진 의원이 미리 잡아놓은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또 뵙는군요.”
“감히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협박해?”

그는 아직도 열이 뻗치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안색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영훈은 그의 뒤에 서 있는 보좌관을 향해 말했다.

“잠깐 나가 있으시죠?”
“내 보좌관은 나와 같아.”

주 의원이 반대하자 영훈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저는 주 의원님과 대화하고 싶은 거지, 다른 사람이 끼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같이 하길 원하신다면


나중에 이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를 전달하시지요. 그런데 아마 전달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마시고
그냥 내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잠시 고민하던 주 의원이 보좌관에게 나가라고 고갯짓을 한다.


보좌관이 나가자 주 의원이 영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장온섬유 강만수 사장 털었지? 알아보니까 장온섬유가 너희 하청이라며? 잘 걸렸다 싶지?”

그 사이에 빨리도 알아냈다.

“그럼 당선 취소가 될 수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시겠네요?”


“잘못 생각했어. 지금 다시 전화해봐. 아마 다른 소리를 할걸?”

영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대단하시네요, 몇 시간 지났다고···. 그런데 선거 끝나고 캠프 본부장 아내가 현금으로 용인에 상가를
샀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도 선거법 위반 아닌가?”

이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주 의원의 눈가가 떨린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더욱 거친 기세로 말했다.

“그걸로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내 허락 없이 선거자금 홀랑 처먹은 그 새끼, 내가 가만 둘 것


같아? 지금 여기를 나가는 즉시 고발 조치할 거야. 더 있나? 더 있으면 내놔봐.”

영훈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쯤 되면 서로 그냥 마무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 주 의원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의정활동 전념하시고 우린 우리대로 아파트 짓고 군산조선소 돌리면서 경제활동하면 서로 좋은
거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는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처음에는 조재민이만 잡고 흔들면서 주가 좀 올려보려고 했는데 HS 물산이 조재민
대신에 커버를 치고 나오네? 진짜 뭐가 있다는 거잖아? 이거··· 내 육감이 이건 그냥 물어야 하는 거라고 막
울리고 있거든.”

영훈은 주 의원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걸 보면서 말했다.

“그 육감 틀린 것 같은데···.”
“맞을걸?”

비릿하게 웃는 그를 보며 영훈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서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원님의 아름다운 두 따님과 아내분이 공중파 저녁 뉴스로 평생
모르고 살았던 의원님의 숨겨둔 아들 소식을 듣게 될 수가 있어요.”
“뭐, 뭐라고···?”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영훈이 말을 이었다.

“사적인 거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억지로 빙빙 돌리고 있는데 자꾸 그러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로 관두자고요. 아시겠습니까? 그럼 의원님께서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육감··· 믿지 마세요. 제 앞에서는.”

영훈은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주우진 의원을 두고 방을 나갔다.

< 저격수(4) > 끝

< 저격수(5) >

얼빠진 얼굴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주우진 의원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트룸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좌관이 얼른 뒤를 따라나섰지만 주 의원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정신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할 뿐이었다.
그 서슬에 보좌관 역시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두 명만 존재할 때 주우진 의원이 말했다.

“너 당장 사람 하나 찾아.”
“네?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송미진이라고 78 년생이야. 2010 년까지 송파동에서 작은 바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어.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주소나 본적, 주민번호나 전화번호는 모르십니까?”
“주소는 잊어버렸고 누가 남의 주민번호 외우고 다니나? 전화번호는 찾아볼 텐데 10 년 전 번호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
“그거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굽니까?”

그때 문이 열리고 주우진 의원은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차에 올라탄 이후였다.

“오래전이야.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여잔데, 그때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

보좌관은 그 실수가 어떤 실수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확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내가 결혼한 상태였어.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었고, 그 여자는 애를 절대 지울 수 없다고 했었지. 그렇게
싸우다가 결국 미진이가 아기를 지웠다면서 병원에 입원한 사진을 보내왔어.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는데,
병원에서는 개인정보라 수술이 있었는지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겼어. 그
게 10 년 전이야.”
“그런데 왜 갑자기 그분을 찾으십니까? 설마···.”

보좌관은 얼마나 놀랐는지 운전을 하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나도 연락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냈지?”


“그냥 블러핑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블러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디테일해. 그냥 숨겨진 자식도 아니고 심지어 아들이라고까지 하던데? 이게
블러핑으로 나올 수 있는 단어인가?”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빨리 찾아. 어떡해서든 찾아. 찾아서 호적에 어떻게 올라가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다른 자식은 누가 있는지,
전부 파악해와.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이후 주우진 의원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기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1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랜 침묵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강윤기가 밝은 미소를
띤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의원님!”

주우진은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악수를 청해도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 의원을 보며 강윤기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사단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주 의원은 보좌관을 제외한 직원들을 내보내고 말했다.

“내 옆에서 천군만마가 되겠다고 했지?”


“물론입니다.”
“그럼 이 사태를 정리해봐.”
“네?”
“HS 물산에서 기사도 내리고 조재민 시장에 대한 의혹 제기 역시 멈추라고 하더군. 그런데 난 거부할 수 없게
됐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건가?”
“······.”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야.”

이쯤 되니 강윤기도 눈치챌 수 있었다.


주 의원의 치명적인 약점을 HS 물산에서 쥐고 있다는 것.

“그럴 수가···.”
“이대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입 싹 다물고 잠수하면 나만 미친놈이 된다. 정신병자도 아니고 제대로
밀어붙이지도 못하면서 상대 정당 의원에 대한 비리를 제기해? 그럼 이제 여의도에서 날 어떻게 볼까?”
“······.”

강윤기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대로 의혹 제기를 멈추게 되면 저격수도 아니고 그냥 얼빠진 놈이 될 뿐이라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천군만마가 되겠다고 했잖아. 그 정도 능력 없나?”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못한다고 하는 순간 자신은 얼빠진 놈 옆에서 출세하겠다고 선, 또 다른 얼빠진 놈이 될 뿐이다.
그저 얼빠진 놈이 되면 끝일까?
그 순간부터 통일평화당과 자신은 여당과 야당 사이만큼이나 간극이 벌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건 한 번으로 충분해.”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사흘 주겠어.”
“알겠습니다.”

강윤기는 침통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보좌관이 물었다.

“과연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요?”


“모르지. 그런데 제깟 놈이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어? 죽기살기로 뭐라도 만들어 오겠지. 이제는 방법
없어. 일단 너는 언론사에 연락해서 내가 제기한 의혹 싹 다 내리라고 해. 정리되면 바로 미진이부터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서 입을 막아야 해. 알겠지?”
“네.”

주우진 의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황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이래서 혀만 나불대는 놈을 쉽게 믿는 게 아니었는데···.

송은채 회장은 영훈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마무리될 것 같다고? 벌써?”
“주우진 의원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앞으로 추가적인 저격성 기사는 안 나올 겁니다.”

사주를 계산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바로 가족관계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바로 가족이다.
부모로부터 기질, 체력, 생김새, 재산, 교육 등등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받고 자라며 형제자매를 통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나이가 들면 또 중요한 게 바로 자식이다.
자식이 아예 없는 사람부터 아들만 있는 사람도 있고 딸만 있는 사람도 있으며 자식이 하나만 있는지, 둘이나 셋
있는지도 보인다.

자식은 있는데 연희 같은 경우처럼 아빠가 딸을 극하는 운을 타고 나는 경우도 있고, 부모가 자식을 귀하게 키워
자식이 극진히 효도를 다하는 경우도 있다.
주우진 의원은 사주에 아들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론 보도 어디에서도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만나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바로 그의 가족관계였다.
두 딸과 아내가 전부인 그에게 아들이 없다는 건 영훈에게 있어 하나의 가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바로 사생아.
문제는 사생아의 존재를 주우진 의원이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거였다.
그조차 존재를 모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던져보고 반응을 보려고 했었다.
전혀 모르는 눈치라면 이쪽에서 먼저 찾아내려고 했으니까.
자식운과 애정운이 동시에 들어온 해에 그의 행적을 역추적하면 그와 연분이 있었던 여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던지자마자 알았다.


그가 알고 있다는 걸.
그렇게 되니 굳이 사생아를 찾을 필요도 없어졌다.
원하는 건 주우진 의원의 당선 취소가 아니라 그저 조용히 사태를 마무리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그냥 이대로 유야무야 마무리된다는 거야? 기사 보면 야당 쪽에서 관심을 깊게 가지는 것 같던데? 언론에서도
지금쯤 심층 기사니 뭐니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알아서 막을 겁니다.”
“또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마법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이번 총선에서 불법적인 부분이 많았던 걸 확인했습니다.”

연희도 아닌 송 회장에게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해?”
“빈집인 줄 알고 강도가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집주인이 총 들고 기다리는 상황인데 거기서 뭘 더 하겠습니까.
시간을 끌면 경찰이 올 텐데요.”
“문을 따고 들어갈 만큼 담력이 있다면 총을 들고 있어도 덤벼들려고 하지 않을까?”
“강도는 멍청하지 않습니까. 주우진 의원은 적어도 멍청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하긴··· 그 정도 위치에 있는데 동귀어진 같은 걸 할 리는 없겠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밝혀냈어?”
“박병호 부장이 평택에 있는 우리 하청업체 대표와 연락해서 주우진 선거 운동본부를 캤습니다. 평택이 우리
직원들도 많이 사는 곳이라서 크게 고생하지 않고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하필 평택이 지역구라니··· 우리가 운이 좋은 건가?”
“이번에는 좋았던 게 맞습니다.”
“그 하청업체 대표한테 상 좀 줘야겠네?”
“그러시죠.”

하청업체 대표가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도움이 있었던 건 맞으니 영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태산인데 괜히 정치인 하나가 튀어나와 분탕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저 상황만 잘 마무리하고 Nodri Clare 와 군산조선소의 일감 문제만을 신경 쓰고 싶었다.

“그럼 이제 조재민 시장 다시 불러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험하게 말하지 말 걸
그랬네.”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러십니까.”
“별거 아니야. 그냥 팔랑거리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엉덩이 무겁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아··· 별거 아니네요.”

단어가 조금 강하긴 했지만 영훈은 오히려 송 회장의 배포에 더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송 회장은 막상 뱉어놓고 걱정하는 기색이다.

“별거 아니긴 한데 원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자들이 좀 속 좁게 구는 거 있거든.”


“하하, 맞는 말씀이네요.”
“어제 내려보내놓고 바로 내일 올라오라고 하기는 그렇겠지?”
“사태 진정되면 부르시죠. 그리고 엉덩이 무겁게 기다리라고 했으니, 오늘 이야기도 바로 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얼굴 보니까 하루 24 시간 내내 전화기만 쳐다볼 것 같던데?”
“회장님은 조 시장을 좋게 안 보셨나 봅니다.”

송 회장은 한쪽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더니 말했다.

“생긴 게 내 스타일이 아니야. 조금 좀스럽게 생겼어.”


“하하하! 그러신가요? 회장님도 얼굴 많이 보시네요?”
“지금 병원에서 한참 누워 있어서 그렇지 연희 아빠가 얼마나 잘 생겼는데? 그냥 돈만 많은 다른 집안 자식들과는
달랐다니까. 풍채도 얼마나 좋았다고. 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뭐, 서글픈 이야기는 됐고. 조 시장
저렇게 내려가서 속으로 이 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생긴 건 좀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성격은 대범한 편입니다.”
“대범한 성격이라면서 그렇게 촐랑거리면서 올라와?”
“그건 꼬리에 불이 붙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겁니다. 그 옛날 삼국시대 영웅 조조도 어떤 경우에는 적의
장수를 포섭하려는 대범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급할 때는 도포도 버리고 수염도 잘랐습니다.”
“이번에 그렇게 위험하다고 느꼈다는 말이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사람의 목표는 대선입니다. 어찌 보면 이제 고작 지방 시장이 돼서 벌써부터 대선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최 상무는 정말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송 회장 역시 조 시장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까봐 마음과는 다른 말이 나갔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이 동네에서 장사를 시작하며 10 년간 시장바닥에서
구르고 지역 일꾼으로 봉사한다면 10 년 후에 그 청년이 국회의원이 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 정도면 백수도 선거할 만하지 않을까?”
“맞습니다. 단지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죠.”
“그래, 인정할게. 영국 브랜드는 어떻게 할 거야?”
“신영투자증권에서 회사채 발행 7 천억 중에 4 천억을 소화해주기로 했습니다. 나머지는 증권회사를 통해 판매할
생각입니다.”
“인수하면?”
“일단 인수 절차에 들어가면 일부 지분을 중국에 넘겨야 합니다. 최소 10% 이상은 돼야 할 테고요.”
“인수하고 나서 중국에서 투자받는 형식으로 나누려고?”
“그건 전문가들과 상의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 대형 백화점에 입점한다?”
“주췬이 가진 인터넷 플랫폼도 적극 활용할 생각입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50 만 원 이상 고가 상품은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50 만 원 이하 상품은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고 있어서요. 아, 이건
연희 씨 의견이었습니다.”
“싸구려 브랜드 되는 거 아니야?”
“몇 가지 상품을 시험 판매하는 전략을 써볼 예정인데 말씀드렸듯이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닙니다.”
“흐음··· 그래. 알겠어. 고생했네.”

송 회장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별일 아닌 듯 넘긴 최 상무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저격수(5) > 끝

< 저격수(6) >

[억울한 영민주택 사장의 항변, “봉선동 사업 문제 있다” 주장.]

조재민 시장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김시원 보좌관에게 물었다.

“이게 뭐야?”
“아무래도 이 모든 게 다 이 새끼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김 보좌관의 입에서 새끼라는 단어가 나올 만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것 같았던 강윤기 영민주택 사장이 갑자기 뜬금없이 봉선동
사업권 의혹 제기를 자신이 했다고 양심선언(?)을 한 기사를 봤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그냥 물먹인 것도 아니고 꽤 큰 공사까지 물어줬는데 내 뒤통수를 친 거야? 그런데 갑자기 자수는
왜 해?”
진짜 자수를 했다는 게 아니라 의혹을 제기한 걸 스스로 밝혔다는 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김시원 보좌관도 영문을 몰랐다.

“그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당에서는 뭐래?”


“위에서도 당황스러운지 아직 별말이 없습니다. 조만간 지시가 내려올 것 같습니다.”
“통일평화당은?”
“거기도 당황스러운지 별말이 없고요.”

강윤기의 기사는 봉선동 사업 의혹을 여전히 문제 삼고 있었지만, 그 의혹에서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국민들의 이목을 주우진 의원에서 강윤기 사장에게로 옮겨온 것일 뿐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히려 그 주장에는 허점이 가득했다.
HS 건설의 호텔식 조식은 현실성이 없다거나 영민주택보다 도급순위도 높은 HS 건설의 시공능력은 형편없다는 등의
일반인이 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주장이었던 거다.
당연히 기사를 본 사람들은 기사를 보고 의혹이 드는 게 아니라 강윤기 사장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문만
남는 기묘한 기사였다.
자살골도 이런 자살골이 없다.

“뒤집어쓰긴? 이 정도면 같이 맞은 수준 아니야?”

아무리 강윤기 사장의 주장이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그에 동조해서 일을 키운 주우진 의원의 어리석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주우진 의원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게 위해 강윤기가 몸을 날렸는데 그를 안고 절벽에 떨어진
수준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왜 이렇게 하지?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 건 아니야?”
“이런 헛발질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모르니까 묻는 거 아니야? 뭐가 있으니까 저러겠지.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러겠어?”
“아무래도 최영훈 상무에게 연락을 해보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최 상무가 움직인 거다? 으음···.”

일리가 있었다.
송은채 회장의 기다리라는 말 때문에 당시 군말 없이 서울에서 내려왔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좋은 소식만 들려오길 기대했는데 어쩌면 이 황당한 기사가 그 좋은 소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재민 시장은 바로 최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그래. 잘 지냈나? 내가 서울에서 송 회장한테 제대로 혼나고 왔어. 들었지?”
[네. 많이 곤혹스러우셨겠습니다.]
“곤혹스러운 건 둘째 치고 송 회장한테 많이 놀랐어. 솔직히 송 회장이 여자라서 무시했던 것 같아.
전문경영인도 아니었고, 그저 결혼 잘해서 그 자리에 앉은 여자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
실수지.”
[강단 있는 분이십니다. 쓰러진 남편 대신 회사를 이끈다는 게 보통 뱃심으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송 회장이 나더러 진득하게 엉덩이 붙이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혹시 방금 뜬 기사가 엉덩이 붙이고 기다린
보답인가?”
[강윤기 기사 말이죠?]
“맞네.”
[맞습니다. 며칠 말들이 오가겠지만 앞으로 언론이나 검찰이 시장님을 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강윤기는 왜 저러는 거고?”
[일을 그냥 덮을 수는 없으니 자살골이라도 넣으면서 본인이 전면에 나선 것 같습니다. 바보 같아도 이미 언론과
입을 맞춘 상태일 거라서 자연스럽게 묻히게 될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언제 시간 내서 서울에 올라온 다음에
들으시죠. 회장님께서 너무 모질게 대한 것 같다고 살짝 후회하고 계십니다.]
“하하하! 솔직히 조금 꽁하긴 했네.”
[언제 시간 내서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주우진 의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 이번에도 신세 졌네.”
[그 신세 꼭 갚으시길 바랍니다.]
“자네는 빈말을 하지 않아 좋아. 내 꼭 기억하지.”

조재민 시장은 전화를 끊었다.


조 시장의 안색이 밝아진 걸 보며 김 보좌관이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에서 해결한 모양이군요.”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전화로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야. 그럴 만하지. 어쨌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까 우리도 강윤기에 대한 논의는 접자고.”
“그냥 둬도 되겠습니까?”
“둬. 우리 쪽 기자들한테도 괜히 강윤기 건드리지 말라고 해. 당에게는 내가 전달할 거고. 최 상무가 언급이
없으면 알아서 처리하고 있거나 그냥 둬야 할 이유가 있을 거야. 괜히 우리가 건드려서 서울에서 하는 일을
방해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군산조선소 상황은 어때?”

조재민 시장의 관심사는 선거 전에도, 선거 후에도 군산조선소에 쏠려 있었다.

“좋습니다. 며칠 전에 해주조선해양이 수주한 기사 때문인지 근로자들도 불안해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줄었고


조선소 근방에 비어있던 상가들이 속속 장사를 시작하는 모양새입니다.”
“부동산은?”
“임대업자들은 이제 한숨 돌렸다고 말합니다. 가격대가 있는 오피스텔들도 빈방이 몇 없을 정도로 계약이 됐다고
합니다. 집값이야 당연히 오르고 있는데 아직 조선소 가동 중단 이전의 가격까지는 회복을 못하고 있습니다.”
“차차 오르겠지.”

조재민 시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김시원 보좌관이 슬쩍 건의한다.

“제가 아는 피디가 있는데 이런 상황이면 다큐멘터리 하나 찍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귀뜸을 주었습니다. 시장님이
꼭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변화된 군산을 가지고 공중파에 다큐 하나 내보내면 시장님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긍정적으로 변할 겁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정치인들이 아무리 뉴스에서 좋은 이야기 떠들어 봐야 사람들 귀에 안 들어가. 그
다큐에 내 얼굴 딱 한 장면 스치듯이 나가도 좋지 않겠어?”
“맞습니다.”
“추진해봐. 우리 시에서 적극 홍보해준다고 하면서.”
“알겠습니다.”

조재민 시장은 한결 편안해진 안색으로 창밖의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

공주시 무령왕릉 인근의 화옥당.


화옥신녀라고 불리는 임복희가 점을 봐주는 곳에 또다시 강윤기가 나타났다.
시커멓게 죽은 안색의 그를 본 임복희는 혀부터 찼다.

“쯧쯧쯧···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가서 일부터 키워?”


“그러지 않으면요? 옆에서 돈 찔러주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옆에서 살살거리면서 입안의 혀처럼 구는 자가
한둘일 거 같냐고요. 내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절 왜 곁에 두겠습니까?”
“주우진 의원, 이제 앞길이 경부고속도로처럼 쫙 펼쳐진 사람이야. 옆에 기대서 부비고 있다 보면 기회가 올
텐데 왜 일을 망쳐?”
“······.”

강윤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임복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접근했다면 그 전의 조재민 시장에게서도 당근을 받으면서 나중에 큰일을 도모할 기회가
생겼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데 어떻게 그때를 기다릴까?


당장 성과를 보지 않으면 애가 닳아서 손이 떨리는데 어떻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조재민 시장과 HS 물산이
끝도 없이 커지는 걸 구경만 할 수 있나 말이다.
임복희는 그래도 원통함을 누르지 못하는 강윤기를 보며 또 혀를 찼다.

“쯧쯧쯧··· 넌 글러 먹었어. 과일을 따서 네 입에 넣어줘도 뱉을 놈이야.”


“이번에는 실수였습니다.”
“실수였겠지. 실수가 아니면 등신 아니야?”
“······.”

어찌 보면 과하다 싶을 만큼 비난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고도 윤기는 마치 부모님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대항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신뢰가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가.”
“죄송합니다. 한 번만···.”
“뭘 한 번만이야! 일단 가 있어. 신령님이 아직 넌 운이 다하지 않았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겠어? 사업운이
다하지 않았으니 돈은 계속 벌 수 있다는 말이야. 이 사태가 진정되고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또 언제든 기회는 올
수 있어.”
“그럴까요?”
“사람 인생 모르는 거야. 온 세상 두려울 게 없다고 떵떵거리던 대감이 하루아침에 급사를 당해서 뒤질 수도 있고
그런 대감 밑에서 개처럼 구르던 하인놈이 마님 휘어잡아 재산 틀어쥐고 살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고. 하물며
정치판이야 어떻겠어? 돈 움켜쥐고 기다리다 보면 언제고 네 손 잡겠다고 벌떼처럼 몰
려들 수 있는 것들이 정치하는 인간들이야.”
“알겠습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점쟁이인 나도 알아.”

급기야 강윤기는 억울함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알겠습니다.”
그는 임복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고 신당을 나갔다.
그가 나가는 걸 보고 임복희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우 씨발! 어떤 새끼가 자꾸 일을 방해해? 아우 열불 나! 아우!”

임복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우스꽝스러운 행태로 분을 못 이기던 그녀는 갑자기 용수철 튕기듯 몸을 세우고는 옷과 가방을 챙기고 신당을
나섰다.
기다리던 손님에게 다음에 오라는 일방적인 말을 남긴 그녀는 곧장 청계산으로 향했다.

“왜 자꾸 와?”

임복희가 찾아간 명우도사의 방 한쪽에는 수많은 부동산 팸플릿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 10 억 중반 이상의 고가 아파트들이었다.
임복희는 팸플릿을 발로 휘휘 걷어차고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오빠, 나 죽겠어.”
“뭘 죽어?”
“오빠가 알려준 주우진 의원한테 그 인간이 들이대다가 사고를 쳤지 뭐야.”
“뭔 사고?”
“아니, 오빠는 기사도 안 보고 살우? 아파트 사면 뭐해? 이렇게 상식이 부족한데?”
“왜 또 시비야? 무슨 기산데 그래?”
“여기 함 봐봐.”

임복희는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여주며 강윤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명우도사가 갑자기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HS 건설?”
“응.”
“HS 물산이 인수했다던 HS 건설을 건드렸다고?”
“그렇다니까.”
“둘이 한 회사잖아.”
“인수했으니까 한 회사겠지.”

명우도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 녀석아. 거지가 동냥을 할 때도 집주인을 봐 가면서 하는 법이다.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호랑이
굴 앞에서 깝치고 있으니 물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우?”
“됐다. 넌 몰라도 된다. 어쨌든 얘는 이제 글렀다.”
“글렀다니?”
“호랑이한테 찍혔을 게 아니야? 자고로 개새끼는 호랑이 울음소리 한 번에 오줌을 지리고 꼼짝을 못 하는데,
다음에 기회를 준들 발톱 한번 내밀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마 발톱 내미는 순간 목덜미를 물려 죽을게다.”
“그러니까 HS 물산이 호랑이굴이라는 말이우?”
“그래.”
“그걸 왜 말 안 해줘!”

임복희가 빽 소리 지르자 명우도사는 귀를 틀어막고는 냅다 소리 질렀다.


“물어봤어? 물어봤냐고!”
“이제 어떡해!”
“뭘 어째? 그냥 손님이나 받아서 돈 모아. 부동산 투기 그만하고. 자꾸 정치인 엮어서 땅 사서 돈 벌려고 하면
언제고 크~게 후회한다잉!”

임복희의 투자비법은 간단하면서도 확실했다.


개발이 확정된 땅에 관한 정보를 얻으면 개발 중심지가 아닌 그 근방의 땅을 사들여 이익을 보는 것.
개발 중심지역이 아니기에 주목은 덜 받지만 그래도 땅이 개발되면 그 중심으로부터 효과가 퍼지기 마련이다.
시청이 하나 들어서면 그 주변에 오피스텔과 상가가 들어서고 도로가 확충되며 또 그 주변으로 또 다른 상가와
오피스텔이 들어선다.

임복희의 투자는 그런 면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 정치인과 공무원, 그리고 개발업자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해야 했는데 그런 면에 있어서
그녀는 천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식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도대체 HS 물산에 있다는 호랑이가 누군데 그래요? 응?”


“몰라도 된다.”
“말 좀 해줘~”

명우도사는 버럭 소리 질렀다.

“시끄러!”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노려보는 명우도사의 모습에 임복희가 찔끔하며 눈을 내리깐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는 그저 ‘나 죽었소’하며 화가 진정되기를 바래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명우도사는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경고했다.

“잘 들어라. HS 물산에 관해서는 묻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아. 그리고 네가 보여준 걔는 그냥 사업만 하면


별다른 사고 없이 쭉쭉 클 애다. 네가 옆에서 옆구리 찔러대지 말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어요.”
“가! 얼른.”

임복희는 입을 삐죽이다가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명우도사의 집을 한번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나 이렇게 못 죽어요. 호랑인지 개새낀지 누가 잡아먹나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지요.”

< 저격수(6) > 끝

< 유혹의 기술(1) >


저녁 무렵, 영훈은 긴장된 마음으로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까만 밤 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지 얼마나 됐을까?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연희는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연희는 박병호 부장과 정신없이 일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영훈과 마주할 수 있었다.
회사채 발행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이제 본격적인 인수협상에 들어갈 생각으로 꿈에 부푼 그녀는, 이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며 상당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바빴어요?”
“그렇죠. 재무팀하고 회의가 길어졌거든요.”
“재무팀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똑같아요. 회사 재정을 생각할 때 너무 모험이라고요. 우려가 많아요. 회사채 금리랑 만기를 생각할 때 내년에
돌아올 만기자금을 과연 무리 없이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대요. 자칫 잘못하면 HS 관광에서 호텔 매각한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박 부장님이랑 저랑 계속 설득했죠.”

아무리 회사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기획조정실 실장이 추진하는 일이라고 해도
재무팀으로써는 할 말을 한 셈이다.
그들의 우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수고했어요.”
“나 많이 안 늦었죠?”
“네. 안 그래도 연희 씨가 일찍 올 것 같지 않아서 음식은 일행 오면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히히··· 요즘 운전하는 건 어때요? 많이 안 무서워요? 사고 안 내는 것 보면 기특하긴 한데.”
“저 운동신경 좋습니다. 산에서 장작 패는 게 그냥 보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해보면 운동신경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 번에 장작의 중심에 도끼를 내리꽂으려면 균형감과 눈이 좋아야 하거든요.
어지간한 남자들은 도끼질 하라고 하면 겁먹어서 제대로 못 합니다.”

영훈의 주접에 연희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쳐다볼 뿐이었다.


예전에는 남자들의 이런 허세를 보면 그저 기가 차고 유치해 보였는데, 어째서 영훈의 이런 허세는 귀엽기만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오~ 운전실력이 빨리 늘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영훈 씨가 차 가지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 불안했거든요.”


“다들 이렇게 배우는 거겠죠.”
“운전하는 게 재밌어요?”
“연희 씨는 안 재밌어요?”
“전 그닥···.”
“어렸을 때 드라마로 놀이공원 같은 데를 가면 꼭 범퍼카를 타는 장면을 보여주잖아요? 그걸 보면서 되게
부러웠습니다. 나도 타보고 싶은데··· 그러면서요. 산에서 내려왔을 때 취직한 다음 운전도 꼭 해보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공짜로 차도 내주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말해서 더 좋은 차 내달라고 할까요?”
“이제는 내가 사도 됩니다. 저 월급 많이 들어와요.”
“아··· 맞다. 연봉계약은 어떻게 했어요? 생각해보니까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나도 웃기네. 승진하면 당연히
연봉도 궁금해야 하는데 그냥 승진한 것만 좋아했었네요.”
“부자라서 그런 겁니다.”
“아··· 그 말은 좀 아프다. 내가 꼭 아무것도 모르는 재벌집 막내딸이 된 것 같잖아요.”
“그 정도는 받아들이고 살아요. 남들은 그 타이틀 죽어도 못 따는 거니까. 대신 좋은 일 많이 하고,
군산조선소처럼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 주도록 노력하면 남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재벌집 막내딸이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요. 지금도 연희 씨 많이 바뀌었어요. 상도 많이 바뀌었고.”
“어떻게 바뀌었는데요?”
“음··· 그건 비밀로 할게요. 인생이 다 보인다는 게 그렇게 축복인 건 아닙니다. 난 이제 당신의 미래에 대해
미리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럼요?”
“내 미래는 살아가면서 겪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의 미래도···.”

연희는 감동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영훈은 미리 준비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한 번도 여자를 만나 사랑해보지 않았어서 내 마음이 사랑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당신과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은 확실해요. 아마 이게 사랑일 거예요. 나와 결혼해줄래요?”

연희는 입을 막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 손을 척 내밀었다.

“좋아요. 손에 껴줘요, 얼른.”

영훈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그녀가 미리 사이즈와 모델까지 정해준 만큼 그녀의 손에 딱 맞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니 어찌나 아름다운지 영훈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연희는 마음에 쏙 드는지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감탄했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누가 골랐는데. 고마워요.”
“작은 이벤트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이게 이벤튼데 뭐가 더 필요해요? 아··· 우리 신혼집은 어디로 할 거예요?”
“그냥 당신이 준 오피스텔에 신혼살림 차리면 되지 않아요?”
“거긴 혼자 살기 딱 좋아요. 그리고 신혼살림 들어갈 자리도 없어. 회사 근처가 좋을까요? 아니면 강변?”
“연희 씨 원하는 대로.”
“오케이. 대신 내가 몇 개 추려놓을 테니까 집은 같이 보러 가기에요. 알겠죠?”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예요? 결혼해서도 계속? 존댓말 하는 게 결혼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나는 그냥 좀 남처럼 느껴져요. 가족 같지 않아.”
“그럼 이제 서로 말 놓을까?”

연희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응! 좋았어. 아휴, 내가 원래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영훈 씨 앞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
“하하, 어떻게 참았어?”
“사랑의 힘으로? 히히···.”

그때 연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문숙 아줌마네?”
“백화점에서 뵀던 사모님?”
“응. 무슨 일이지?”
“일단 받아.”

연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연희니?]
“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그렇지. 그때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어떻게 됐어요?”
[말도 마. 아들 새끼는 믿을 수 없다고 자기가 그 애랑 얘기해본다 어쩐다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 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걔랑 직접 경찰서에서 범죄경력조회서를 떼어 오겠다고 하고서는 결국 못 떼어 온 거
있지?]
“어머, 정말요?”
[경찰서 앞에서 1 시간을 실랑이를 했대. 처음에는 날 못 믿는 거냐, 우리 사랑이 이 정도냐, 뭐 이랬겠지.
뻔해. 그런데 우리 아들이 내 성격 알거든. 내가 어설프게 넘어갈 사람이 또 아니잖니. 날 설득하려면
범죄경력조회 서류 떼어 가야 한다는 거 아니까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는데 글쎄 거기서 도망갔단다.]
“어떡해···.”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우리 집안 재산 거덜내고 집안
풍비박산될 뻔했던 거야.]
“결혼 전에 알았으니까 다행이에요.”
[청첩장 돌리기 전에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예식장 예약 다 해놓고 신혼집 구하는 중이었는데···.]
“취소비용은 생각하지 마세요.”
[취소비용도 취소비용이지만 우리 아들 지금 식음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다. 뭘 잘했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작정하고 속이는데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야지··· 바쁘니?]
“아니요, 바쁘지는 않아요.”
[이번에 너무 고마워서··· 내가 어떻게 감사를 할까 생각하다가 우리 바깥 양반한테 계속 속일 일도 아니라서
얘기를 했어. 그러니까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그러는 거야. 모레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 차관이 입국할
거래.]
“어? 그래요? 무슨 일로요?”
[정확한 내용은 주한 인도 대사관으로 연락을 달라고 하던데?]
“그래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한번 알아봐.]
“알겠어요, 아주머니.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지. 언제 남자친구랑 같이 저녁이나 하자. 너무 고마워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네, 영훈 씨 시간 맞으면 언제고 연락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연희는 전화를 끊고는 손바닥을 딱 쳤다.

“대박! 모레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 차관이 입국할 거래.”


“도로교통부 차관?”
“응.”
“무슨 일로?”
“정확한 건 주한 인도 대사관 쪽으로 문의하라고 하던데? 대사님이 직접 알려주려고 하시나 봐.”
“으음··· 그런데 만나면 우리가 할 만한 게 있을까?”
“도로교통부 차관이니까 도로나 기반 시설 때문에 온 게 아니겠어?”
“그 정도는 자국 건설사에 맡기지 않나?”
“외국 건설사랑 입찰로 경쟁 붙이는 건 흔하잖아.”
“그럼 남는 게 별로 없을 텐데···.”

영훈은 그동안 해외에 진출해서 공사를 따냈던 수많은 건설사가 왜 부실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다.
계열사 한 축을 건설사가 담당하는 만큼 건설사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존 건설사들이 해외 공사에서 저가 수주로 공사를 따내도 손해만 봐왔던 걸 알고 있기에 그런 식의 경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연결시켜 주려는 게 아닐까?”


“그렇겠지? 일단 자초지종 들어보고 고민하던지 하자.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음식이 나왔다.
연희는 반지 케이스가 한쪽에 나오도록 구도를 잡고 스테이크 사진을 찍었다.
SNS 에 뭐라고 글을 남길지 안 봐도 이미 보이는 듯했다.

다음날 출근한 영훈이 점심 전 미팅을 소집했다.


당연히 Nodri Clare 인수와 관련된 회의라고 생각했던 팀원들은 영훈의 첫 마디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일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차관이 방문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인도 도로교통부차관이 무슨 일로 방문하는 겁니까?”

박 부장의 물음에 연희가 대답했다.

“방금 주한 인도 대사관과 통화했는데요. 라마누잔 인도 도로교통부차관이 자국 건설 관계자들을 동행하고


인천공항을 둘러볼 예정이라고 해요. 이미 대사관을 통해 인천공항 관계자들에게 통보됐고 협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인천공항을 둘러본다면 공항 건설 때문이겠네요? 음··· 인도가 신공항을 많이 건설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습니다.”

연희가 정보를 보탰다.

“정확히는 2024 년까지 신공항을 100 개 추가 건설한다는 계획이에요.”


“사이즈 어마어마하네.”
“인천공항과 싱가포르 창이공항도 둘러볼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프로젝트이긴 한데··· 상무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잡고 계시는 겁니까?”

영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Nodri Clare 인수만으로도 정신없는 와중에 들어온 정보라 그냥 넘길까도
생각해봤는데··· 봉선동 있잖아요.”
“네.”
“국내 아파트 건설로 꽤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세계적인 건설사는 국내에서 아파트만
지어서는 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HS 건설은 작년만 해도 도급순위 39 위였습니다.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을 따낸 것도
대단한 일이었죠. 얼마 전에 그런 의혹이 불거졌을 정도니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계속 아파트만 지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저가 수주로 힘만 쏟고 손해 볼 상황만 아니면
HS 건설 쪽에서 한번 얼쩡거려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얼쩡거려 본다는 말이죠?”
“공개 입찰을 하겠다고 나온 상황도 아니고 그냥 공항을 둘러보러 왔는데 적극적으로 우리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웃기니까요. 클럽에 예쁜 여자가 보이는데 그냥 춤만 추러 온 건지, 아니면 남자도 만나러 온 건지
알아야 끝나고 소주 한잔 하자고 불러낼 거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찔러도 들어갈 구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인도 대사님이 우리한테 정보를 줬을까요?”
“일리가 있습니다.”

박병호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으니 정보를 줬을 텐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포기하기는 아쉬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얼쩡거려 볼까요?”
“HS 건설에 구호준 실장이라고 있을 거예요. 지금도 실장일지는 모르겠는데, 구도일 사장 동생입니다. 막내라
나이 차이가 많은··· 하여튼 그 사람이 능력 있다던데 부르죠.”
“구호준 실장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인도 쪽 라인 동원해서 말만 앞세우는 건지 진짜 신공항을 100 개나 세우려는 건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고 해외 건설사가 참여할 구석은 있는 건지, 100 개 만들 거라고 했으면
지금쯤 어디에 세울지 계획 정도는 발표하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우선순위도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바로 확보하겠습니다.”
“구호준 실장 바로 불러서 계획을 세워 봅시다. 비집고 들어갈 만한 구석이 있는지.”
“그런데 구호준 실장이라는 사람 능력이 괜찮은가요? 상대가 도로교통부 차관에다가 그 옆에 잘생기고 든든한
오빠들까지 같이 있을 텐데.”

박 부장이 말하는 잘생긴 오빠들은 자국 건설사를 말하는 거였다.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벡텔에서 스카웃 하려고 했다고 하니 적어도 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추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을 때 연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영훈 씨, 클럽 많이 다녀봤나 봐?”


“어? 아니··· 드라마에서 봤지.”
“진짜?”
“진짜라니까.”

연희는 찌릿한 눈빛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 유혹의 기술(1) > 끝

< 유혹의 기술(2) >

인도 라마누잔 도로교통부 차관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당일, 영훈을 비롯한 기획조정실 직원들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적어도 점심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식사 후 공항 관계자들과 대화중인 라마누잔 일행과 얼굴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호준 실장은 이번 일이 생각보다 너무 큰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는지 아주 많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조건 이거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가는 건 아니니까. 가볍게 갑시다.”

걱정하는 구호준 실장에게 영훈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괜찮아요. 일단 준비한 것 좀 봅시다.”
“여기··· 일단 이 정도입니다.”

구호준 실장은 커다란 종이를 연달아 펼쳤다.


공항터미널을 디자인한 것으로 배치도, 단면도, 입면도, 평면도 등 누가 보면 미리 공모전을 대비해 준비해놓은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언제 이런 걸 생각해뒀습니까?”
“사실 이거 제가 대학생 때 만들어둔 겁니다. 스페인에서 신공항 공모전이 있었거든요.”
“아쉽게도 탈락했나보군요.”
“아니요. 공모전에 안 나갔습니다. 혜성기업에 취업하기로 정하면서 공모전은 그냥 포기했거든요.”
“아··· 그럼 이게 몇 년 전에 만든 겁니까?”
“4 년 전에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만족할까요? 저야 당시에도 최선을 다해서 짜내긴 한 거지만
그래도···.”
“어차피 이걸로 컨펌 받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말했듯이 저쪽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만 하려는
거니까. 한국 건설사를 끼워주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다시 제대로 만들면 됩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오래전에 만들어둔 거라 이걸로 자신의 실력을 내세우기가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영훈은 구호준 실장과 박 부장, 연희, 그리고 몇 명의 기조실 직원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늦지 않게 도착해서 지금쯤 둘러보고 있을 VIP 라운지로 향하는데 그곳에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은 관계자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어?”
연희가 놀라 손을 들어 올렸는데 마침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다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걸 보니 그쪽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게 확실했다.

“어떻게 여기에···.”
“그러게요. 우명건설이 어떻게 알고 왔지?”

놀랍게도 라마누잔 차관과 조금 떨어져서 다소곳하게 기립해 있는 사람은 우명건설 주택영업본부장인 김창훈이었다.

봉선동에서 당시 현진건설에게 한 방 먹었던 그가 주택건설도 아닌 일에 왜 나타났을지···.


영훈 일행이 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라운지에 들어서니 중앙에 앉아 공항 관계자들과 한창 대화를 나누는 라마누잔
차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 슬금슬금 다가오는 창훈이 연희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는 또 무슨 일이야?”
“그러는 너는 무슨 일인데?”
“설마 공항 건설을 따내보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해본적도 없잖아?”
“남이사 공항을 짓든 비행기를 만들든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은 그럼 처음부터 말이 됐고?”

연희가 비웃음을 담긴 눈빛으로 쏘아보자 창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게 고작 아파트 하나 짓는 거랑 비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도급순위 39 위였어, 너네.”


“글쎄··· 세상 사람들이 다 성적순으로 행복하면 무슨 재미가 있니?”
“네가 잘 모르는구나? 사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기업 실적은 성적순으로 나올 수 있어.”
“이번에는 아닐 것 같은데?”

연희가 한쪽 눈을 찡긋한 순간 마침 라마누잔 차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이 영훈 일행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아미르 밧찬 주한인도대사였다.
주인도대사가 추천한 이유를 도착해서야 알았다.
이미 아미르 밧찬과 안면이 있음을 알기에 라마누잔 차관과 쉽게 인연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거다.

“최 상무, 그대의 말을 항상 떠올리고는 합니다.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요?”


“물론입니다.”

연희가 통역해주자 영훈이 어설픈 영어로 대답했다.


아미르 밧찬은 당황하는 창훈을 두고 영훈 일행을 이끌고 라마누잔 차관에게 데려갔다.
아미르 밧찬과 귓속말로 잠시 대화를 나누던 라마누잔 차관은 영훈 일행과 악수를 하고는 말했다.

“훌륭한 인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약속된 일정이 있으니 언제 따로 시간을 잡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안 될 거 없죠.”

연희가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이자 차관의 수행원 중 한 명이 나섰다.


수행원은 상당히 아름다운 인도 여자였는데, 그녀는 연희와 이후 일정과 관련된 대화를 주고받고는 영훈 일행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생뚱맞은 상황에 얼떨떨해하는데 갑자기 구호준 실장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박병호 부장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뭡니까?”
“아··· 친구예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예쁘죠? 학교 다닐 때도 엄청 인기 많았어요.”

이때 돌아가는 상황이 마뜩잖았는지 김창훈이 영훈에게 다가와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미안한데 오늘은 좀 힘들고 언제 시간 나면 그때 하기로 하죠.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네요.”

어차피 라마누잔 차관과 약속까지 잡은 이상 여기서 더 머물 이유는 없어졌다.


하지만 영훈 입장에서 머물 이유가 없을 뿐이지 우명건설 입장은 달랐다.
김창훈 상무는 급기야 자존심까지 버리고 영훈의 팔을 잡았다.

“거 이야기 좀 합시다. 그쪽도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일 테니까.”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3 층에 커피숍 있던데 거기로 올라가시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우명건설 일행과 HS 그룹 일행이 우르르 움직였다.


영훈은 움직이면서 구호준 실장에게 슬쩍 물었다.

“아까 그 여성분이랑 많이 친합니까?”


“카트리나요?”
“이름이 카트리나인가보죠? 인도식 이름 같지는 않은데.”
“혼혈입니다. 친구 생일파티에서 만나서 알게 됐는데 굉장히 똑똑해요. 친구도 많고 활달한 데다 같은
아시아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취향인 건지 한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아마 ATS 때문이었을 거예요.
당시에는 ATS 가 지금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 않았는데, K 팝 팬이
라 다 꿰고 있을걸요?”

ATS 는 영훈도 아는 세계적인 아이돌이다.


한류열풍의 선두주자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세계적인 보이그룹이다.

“아··· ATS 가 참 많은 일을 하네요.”


“그런 셈이죠.”
“어쨌든 젊은 나이에 저 자리까지 올랐으니 능력은 굉장하겠네요.”
“똑똑하긴 한데 같이 일해본 적이 없으니 능력이 어떤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아마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게
꼭 능력 때문이지는 않을 겁니다. 쟤네 집이 굉장히 부자거든요.”

이렇게 좋을 수가···.

“아, 그래요?”
“그게 좋은 건가요?”

구호준 실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어왔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집에 돈이 많다는 건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여성과 구 실장님이 친하다는데 당연히 좋은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런데··· 카트리나가 절 위해 그렇게 힘을 써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친분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죠.”
“친분이 아니라 돈 아닌가요?”

의혹이 짙은 구 실장의 눈빛.


영훈은 웃으며 말했다.

“돈은 물과 같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죠. 어떤 곳에서는 헤어졌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납니다. 사람의 인연이 그와 같습니다.”

구 실장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HS 그룹 실세 중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기획조정실 실장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훈은 그가 알아들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다 같이 토론할 것도 아니고 둘이서만 이야기합시다.”


“그러죠.”

김창훈 상무는 무거운 얼굴로 제안했고 영훈은 받아들였다.


양쪽의 일행이 두 편으로 갈라 모여 있는 와중에 창훈과 영훈만 커피 한 잔씩 들고 공항터미널이 한눈에 보이는
창가를 바라보며 섰다.
창훈은 커피를 홀짝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쉽사리 열지 못하는 느낌.
영훈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창훈이 연희에게 결혼하자고 했던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그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법 준비를 많이 했네요. 주한인도대사를 엮어놨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이번엔 힘들 겁니다.”


“경고하려고 대화하자고 한 겁니까?”
“유치하게 그런 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린 이곳 인천공항 건설에 참여한 건설사입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양양 공항과 무안공항까지 우리가 지었습니다. 그간 쌓은 경험이 달라요.”
“그래서요? 설마 그래서 포기하라 그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죠?”

창훈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손을 합칩시다.”
“손을 잡자고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게요. HS 그룹 수완 있는 거. 우리는 경험과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당신들의 수완과 자본이 더해지면 우리는 인도가 건설하는 상당한 규모의 공항건설에 한 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수완뿐만 아니라 자본을 더했다.


그가 말하는 자본이 HS 그룹이 가진 자금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HS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영금융그룹을 말하는 것이리라.

“컨소시엄을 구성하자는 거군요?”


“맞습니다.”
“으음···.”

영훈이 고민하자 창훈이 채근하듯 말했다.

“이봐요, HS 건설이 이제 좀 커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들 입장에선 고작 한국에 있는 중소형 건설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공사를 따낸다고 해도 지방 소도시에 지어질 소규모 공항을 따내거나 대형 국제공항 건설에
일부분 참여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이건 그대들을 무시하
는 게 아니라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한 거예요.”
“그럼 우명건설은요?”
“우리도 아마 대형 국제공항 건설의 한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정도일 뿐일 겁니다.”
“그럼 우리 둘이 손을 합치면요?”
“세 개의 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면 PM(Project Management)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안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무려 100 개가 넘는 공항을 지으려고 한다고요. 그걸 한 개의 회사가 전부 맡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 얻어가는 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죠?”

눈에 불을 켜고 열변을 토하는 그를 보고 차마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시간 오래 끌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끼리 경쟁해서 남 좋은 일 시키지 맙시다.”
“연락하죠.”

영훈은 그가 말하는 남 좋은 일이 도대체 뭔지 고민하며 일행들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


연희와 구 실장, 그리고 박 부장과 같은 차를 타고 돌아올 때 연희가 물었다.

“창훈이가 뭐래요?”
“손을 합치잡니다.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하는데요?”
“갑자기요? 왜?”
“자잘한 공사 따내서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PM 을 해보자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답은 구호준 실장이 했다.

“PM 이요? Project Management 인데 이게 쉽게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빌딩을 짓는다고 가정할 때 건물을
짓는 과정뿐만 아니라 토지 매입부터 건물의 설계, 시공, 감리까지 전반적인 사업을 총괄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이건 세계적인 건축회사가 주로 하지 주어진 공사 받아먹기만 하
는 우리나라 건설사는···.”
“못 하나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상당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국내에서 건설된 초고층 빌딩들도 전부
PM 은 외국 회사에서 맡은 겁니다. 삼전물산에서 지었다고 극찬받는 두바이 호텔 있죠? 그것도 다 외국회사가 PM
맡아서 삼전물산은 그냥 짓기만 한 거예요.”
“그럼 우리나라 건설사는 왜 PM 을 안 합니까?”
“경험을 쌓을 곳이 없거든요. 주로 대형 프로젝트는 국가에서 발주를 주고 관리하는 데다가 해외에서 경험을
쌓으려고 하면 경험이 많은 해외건설사만 찾으니까 경험을 쌓고 싶어도 쌓을 데가 없는 겁니다.”
“흐음··· 그래서 이번 기회에 PM 을 해보자는 건가?”

그런데 구 실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컨소시엄은 몸 하나에 머리가 여러 개인 뱀이나 마찬가진데 그거 관리 안 됩니다. 아파트 하나


건설할 때도 엄청나게 남겨 먹는데 토지매입부터 설계, 시공, 감리까지 전부 총괄하는 PM 이 얼마나 남겨 먹는 줄
아십니까? 사실상 전체 프로젝트 이익의 절반 이상 가져갑니
다. 시공 맡은 회사는 별로 가져가는 게 없어요. 앉아서 일거리만 주고 돈방석 앉는 그 일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아···.”

그제야 영훈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연희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합시다, 그 컨소시엄.”

< 유혹의 기술(2) > 끝

< 유혹의 기술(3) >

조수석에서 듣고 있던 박병호 부장이 물었다.

“우명을 제낄 방법이 있는 겁니까?”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예?”
“김창훈 상무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우린 아직 규모도 작고 경험도 없으니까요. 인맥빨로
자그마한 공사 하나 맡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고작 그거 하자고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구 실장은 그게 아니었었냐는 눈빛이었지만 박 부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요.”
“내일 차관쪽하고 미팅 잡고 나서 생각해보자고요. 아미르 밧찬 대사가 어느 정도나 우리를 도와줄지 모르는
상태인 데다가 우리는 아직 우명건설보다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태인 것 같으니 최대한 준비해봅시다. 그리고 구
실장님은 그 카트리나인가 하는 여자분하고 계속 연락해보시
고요. 가능하면 따로 약속을 잡아서라도 미팅할 수 있으면 하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카트리나라는 여자 집안에
대해 전부 파악해서 보고서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카트리나 인스타 아이디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구 실장은 자신의 핸드폰을 빠르게 몇 번 터치하고는 연희에게 넘겼다.


연희는 핸드폰을 받아들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와··· 집이 끝내주네.”
영훈이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붙이며 살펴보니 마치 궁전같은 저택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카트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동자에 웨이브진 머릿결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는데 그녀 옆에 세워진
슈퍼카를 보니 구 실장이 부자라고 얘기한 것이 이해가 됐다.
연희는 빠르게 사진을 넘겼고 카트리나가 지내는 집과 그녀의 방, 그리고 수많은 명품 사진을 홀린 듯이
훑어보고는 연신 저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인데 내거랑 같은 거라는 식의 자랑 아닌 자랑을 곁들였다.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연희가 구 실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뭐하는 집이에요?”


“저도 모릅니다. 안 물어봤거든요.”
“왜 안 물어봤어요? 안 궁금했어요?”
“아니 뭐··· 저랑 상관없는 남이니까요.”
“아까 눈빛 보니까 꽤 친해 보이던데요?”
“학교 다닐 때 제가 도움을 많이 주긴 했죠. 과제를 많이 도와줬거든요.”

구 실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구 실장님, 진짜 인재였구나··· 잘 해볼 생각 없었어요?”


“아무리 예뻐도 종교의 벽을 못 넘겠습니다. 전 한국 여자가 좋아요. 그리고 아마 약혼자도 있을걸요?”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구 실장에게 다시 핸드폰을 넘겼다.


그리고 슬쩍 영훈의 다리를 툭 건드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창훈이가 쓸데없이 시비 걸고 그러지 않았어? 분명 우리 결혼 이야기 들어갔을 텐데?”


“아니. 시비 걸거나 유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어. 그런데 아는 것 같더라. SNS 에 그렇게 자랑했는데 모를 리가
없겠지.”

영훈에게 반지를 받고 태그에 떡하니 프로포즈 반지라고 써놨으니 연희 주변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온갖 곳에서 축하 문자와 전화가 쏟아졌고 누구랑 하느냐, 언제 하느냐, 어디서 할거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등등 그날 연희는 새벽 2 시가 넘어서야 잘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연희에게 청혼까지 했던 그가 당연히 이 정보를 모를 리 있겠는가.

“철들었나? 예전 같았으면 절대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닌데··· 어쨌든 시커먼 속셈을 감추고 있을 거야. 뻔해.
자기네가 협상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는 시공사 역할만 하고 자기네가 PM 을 하겠다고 나서겠지. 지금쯤
어떻게 영훈 씨랑 나를 한 방 먹여줄까 고심하고 있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불안해. 봉선동에서도 크게 데인데다가 현진중공업에 투자 들어갔다가 지금까지 물려서 허덕인대. 마이너스 20%
라고 하던가? 이를 갈고 있을거야.”
“그래서 더 재미있을 수도 있지.”

영훈은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본사에 도착해서 업무를 이어가다 퇴근 무렵 영훈은 을지로의 한 유명 낙지볶음 가게로 향했다.
형준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인데 항상 블루문에서만 보는 게 지겹고 맛없는 술만 홀짝이는 것도 싫어서
식당으로 불러냈다.
시뻘건 낙지볶음이 맛있게 익어가는 것에 영훈이 군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형준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요즘 연락도 안 하더라?”


“뭐, 급한 일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었지만 비서만 떨렁 두 번이나 보내놓고 연락도 없는 건 너무한거 아니야?”
“이거 왜 이러세요? 여자가 나가서 더 좋아했던 게 아니구요?”
“뭘 더 좋아해···.”

형준이 시선을 쓰윽 피한다.


영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어땠습니까? 마음에 들었어요?”


“내 스타일 아니야. 너무 뻣뻣해.”

형준은 입술을 씰룩이며 별로였다는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못해도 사람의 운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영훈이다.
민희가 형준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형준이 민희를 싫어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상무님과의 자리에 나가지 말도록 지시할게요.”


“뭘 그렇게까지 해? 일이잖아.”
“그때는 내가 바빠서 할 수 없이 보낸 거지만 앞으로 그렇게 바쁠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요.”

형준은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크흠··· 아니, 뭐 꼭 싫다는 건 아니고···.”


“아니고요?”
“그런데 네 비서 성격이 원래 그렇게 쌀쌀맞냐?”
“쌀쌀맞은 게 아니라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 괜히 심통나서 그런 거 아닙니까?”

형준은 인상을 쓰다가 물었다.

“이거 먼저 물어보자. 나한테 왜 소개시켜 준 거야? 만나보라고 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


“솔직히 상무님이 어떤 여자를 만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에 여자나 남자를
소개시켜줘서 나중에 원망 듣기도 싫고요. 그런데 상무님은 어찌 됐든 우리와 같이 가게 될 파트너 아닙니까?
신영금융을 무사히 잘 물려받아서 같이 롱런했으면 좋겠는데 괜
히 이상한 여자 만나서 고생할까 봐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내가 무슨 이상한 여자를 만나?”
“아버지한테 당했던 거 벌써 잊었습니까? 얼마나 지났다고?”

형준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때는 진지한 만남이 아니라 그냥 즐기려고 만난 거야.”


“싫다고 하면 굳이 권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말했듯이 나중에 괜한 원망 듣기 싫으니까.”
“그래서 네 비서는 확실한 여자다 그거야? 그런데 난 좀 그래. 결국 네 사람이잖아. 어떻게 보면 네 사람을
쁘락치로 심어놓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건 인정합니다.”
“왜 또 쿨하게 인정하지? 불안하게?”
“맞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제가 굳이 사람을 심어가며 상무님에 대해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을까요? 그냥 다 알
것 같은데···.”

형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발··· 기분 더러운데 반박할 수가 없네.”
“상무님은 어떤 여자 만날 겁니까?”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떤 여자를 만날 거냐니?”
“알기 쉽게 이지선다로 하죠. 집안 좋은 여자? 아니면 그냥 예쁜 여자?”

형준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말했다.

“당연히 집안이지. 예쁜 여자는 지금까지 숱하게 만났어. 지금은 배경이 중요하니까. 안 그래도 몇몇 곳에서
만나보라고 연락 온다니까.”
“그럴 것 같았습니다. 상무님에게 좋은 배경은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의 배경,
굉장히 중요하긴 합니다. 그 여자가 가지고 올 엄청난 자본과 힘이 욕심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왜?”
“잘 생각하세요. 배경은 그 여자의 것이에요. 상무님의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이혼하면 다시 떨어져 나갈
힘이고 돈입니다.”
“그럼 네가 소개해준 그 여자는?”
“민희 씨가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감안하고 들을게.”
“아마 민희 씨가 상무님 옆에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는 눈치와 상황판단이 빠르거든요. 그냥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본능적으로 거짓인지 아닌지 잘 캐치합니다. 천부적으로···.”
“귀신이야?”
“그냥 촉이 뛰어난 겁니다. 사람은 타고날 때부터 다 다른 재능을 타고 납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이 있고, 손이
발달한 사람이 있죠.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이 있고, 계산에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민희 씨는 말투와 표정,
몸짓 등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잘 캐치하는 편인 겁니다.”
“귀신이네. 그런데 왜 비서나 하고 있대?”

이게 잘 풀려서 비서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잘 안 풀려서 비서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문서나 숫자로 드러나는 재능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주변에서 쟤 눈치 빠르다 정도로 표현됐을
거고 자신은 그게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알아봤다, 이 말이야?”
“네, 저 사람 잘 보는 거 아시잖아요.”
“···졸라 재수 없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는 욕했는데 왜 지가 칭찬으로 바꾸는 거야?”

형준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낙지를 흡입했다.

“그건 그렇고 회사채는 다음 주에 발행 예정입니다. 4 천억 소화 가능하시다고 한 거 변함없죠?”


“응, 그건 틀림없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인도에서 뭐 하나 하려고 합니다.”

형준은 낙지를 씹으며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너희는 뭘 이렇게 자꾸 벌려? 적당히 해. 이제 해주조선해양 돌아가기 시작했고, HS 관광도 이제 돈 벌어다


주기 시작했어. 7 천억 끌어다 또 회사 하나 인수한다면서 또 무슨 회사를 인수하려고? 부루마블 하냐?
회사경영이 게임이야?”
“성격 참 급하시네. 회사를 인수한다는 게 아니라 인도에서 앞으로 대규모 공항 건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답니다.”
“공항? 그래, 들어봤어. 졸라 많이 짓는다는데?”
“우리는 규모도 작고 경험도 많지 않으니까 우명건설에서 우리랑 신영이랑 셋이서 같이 손잡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제안했어요.”
“거기에 왜 금융사를 낀다고?”
“Project Management 를 따내려고 하는데···.”
“PM 을 한다고? 우명이?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따내려고? 그거 못 따낼 텐데?”
“어떻게 한번 비벼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시죠?”
“이거야 뭐 돈이 많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거들어줄 수 있기는 한데 정확한 사업 내용을 알아야지. 금융사가
필요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PM 이면 토지까지 전부 맡으려나? 하여튼 사업 내용 정해지면 그때 말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집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어, 살얼음판이긴 한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건지 이게 익숙해지니까 또 살만해. 눈 딱 감고 아버지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니까 이제는 나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 나오더라고. 할아버지도
집에서는 별말 없으시고. 좋아.”
“잘됐네요. 그런데 긴장 늦추지 마세요.”
“왜? 뭐 또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건 알지만 이제 더 뭘 하겠어? 넌 할아버지가 아예 손을 놓을 거라고 했지만 은근 내 편 들어주고 있는 게
아니면 이렇게 됐겠어? 그리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몇몇 이사진까지 포섭해놨어. 준비 철저하다고.”

형준은 불안한 가운데서도 자신감을 드러냈다.


공포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여유를 찾은 듯했다.
형준이 가진 특유의 허세가 있기는 했지만 마냥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잘 살펴보세요. 방향을 아예 바꿀 수도 있습니다.”


“방향을 어떻게 바꿔?”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죠.”
“어?”
“그룹 내 질서를 바꾸려 할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니까요.”

< 유혹의 기술(3) > 끝

< 유혹의 기술(4) >

형준은 집으로 오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훈은 분명 허튼 이야기를 하는 놈이 아니었다.
그놈이 경고하는 일이라면 일단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대비는 해야 했다.
그런데 이건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였고,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한 형준은 마침 저녁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며 과일을 먹는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식사는 하고 오니?”

어머니가 과일이라도 먹으라는 것처럼 포크를 내밀며 물었다.


형준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먹었어요. 과일은 됐어요. 속이 부대껴서···.”


“뭘 먹었는데 부대껴?”
“낙지볶음을 먹었거든요. 그리고 옷도 안 갈아입었어요.”
“얘! 너 옷 갈아입고 씻는데 한세월이야. 일단 앉아. 매운 거 먹었으면 과일 먹고 속 달래야 해. 안 그럼 내일
아침부터 지옥이야. 얼른.”

형준이 할 수 없이 포크를 집어 들고 자리에 앉으니 이세준 부회장이 말했다.

“술은 안 먹은 걸 보면 회식은 아니었겠고?”


“네···.”

어머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누구야? 혹시 여자 만났니?”
“네?”
“너 빨리 말해. 너 만나자고 집 대문부터 버스정류장까지 줄 섰어. 아버님 말씀 아시지? 이상한 여자 만나고
다닐거면 빨리 제대로 된 여자 만나라고···.”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형준이 말을 끊자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그럼 여자는 맞는 거네? 어떤 여잔데? 집안은 어떻고? 우리가 아는 집안이니?”

부정하려던 형준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을 바꾸었다.


여자에 환장하고 다녔던 자신이 일에 몰두하며 그룹내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려는 모습이 아버지에게는 더 위협적일
수 있다는 게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집안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에요.”


“이상한 애 만나지 말라니까!”
“이상한 애 아니에요. 얼마나 똑똑한데?”
“뭐하는 앤데?”
“HS 그룹 기획조정실 상무 비서예요.”
“비서? 너 그게 말이 되니?”

어머니는 비서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룹 경영진 치고 비서 한번 안 건드려 본 사람 없다는게 재벌들 생리였으니까.

“HS 그룹 기조실 상무 나랑 친합니다. 그리고 HS 그룹 외동딸이랑 결혼할 사이고요. 절대 비서 건드리거나 할 놈


아니고, 그 여자도 기가 엄청 세요. 아마 어머니도 못 당할걸요?”
“그래? 데리고 와 보든가.”
“안 돼요.”
“왜 안 돼?”
“아직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뭐야? 너 요새 애들 한다는 그··· 썸인가? 그런 거 하는 거니?”
“요즘 젊은 사람들 다 그렇게 만나요.”
“허··· 알았다. 그 썸인가 하는거 오래 하지 마. 빨리 정리하고 데리고 와. 내가 보고 결정할 거니까.”
“아, 네. 그러세요.”

형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민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보다 일단 아버지의 눈을 벗어나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노려보는 어머니의 눈길을 무시했다.

인천 송도에는 한옥으로 된 호텔이 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외국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말에 영훈은 차관 일행과의
약속을 한옥 호텔 식당으로 예약했다.
당연하게도 박병호 부장과 연희, 그리고 구호준 실장이 미팅에 동행했다.

“이야··· 좋네.”

호텔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감탄사가 나올 만큼 좋았다.


저녁 무렵이라 은은한 조명이 호텔을 비추는데 굉장히 멋있고 아름다웠다.

“여기 음식이 아주 좋습니다. 저도 몇 번 미팅해봤는데 어지간한 한정식보다는 훨씬 낫더라고요. 가시죠.”

박 부장이 너스레를 떨며 식당으로 앞장섰다.


미리 예약한 대형 룸에 조금 앉아 있으니 곧바로 차관 일행이 도착했다.
라마누잔 차관 일행에는 아미르 밧찬 주한 인도대사와 몇 명의 수행원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카트리나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HS 물산 기획조정실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영훈이 미리 준비했던 영어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냥 고개만 숙였다가 혹시나 몰라 손을 내미는데 다행스럽게도 일행 전부와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카트리나까지도 악수에 거리낌이 없었다.
일행들이 서로 각자 자신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으니 묘하게 구호준 실장과 카트리나가 마주 보는 형태가 됐다.
박병호 부장이 구 실장과 카트리나가 미리 아는 사이였다고, 이것도 인연이라는 식으로 아이스 브레이킹하며
분위기를 이끌며 식사를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음식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 서서히 긴장을 풀고 있는데, 자연산 송이구이와
생선필렛을 해치운 라마누잔 차관이 박 부장을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인도의 경제성장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을 만큼 눈부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중국의 그늘에 가려


있지만 우리는 언제고 중국을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게 부족합니다. 경제성장률은 6%에
달하지만 인프라는 많이 부족해요. 앞으로 많은 부분에서 인도는
변화할 겁니다. 우리의 야심을 당신들도 알고 있겠죠.”
“그렇습니다.”

박 부장은 대답했고 연희는 옆에서 영훈에게 열심히 통역했다.


“이런 기회를 놓치기 힘들다고 생각할 거라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외부에 보이는 것처럼 돈을 퍼부어가며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아직 많은 게 부족하니까요. 신공항 백 개 건설은 우리 정부의 강력한 의중이 반영됐지만,
막상 그에 투입되는 자금은 고작 1 조 루피(한화 약 16 조 원)에
불과합니다. 인천공항 한 곳을 건설하는 데만 지금까지 7 천억 루피 이상이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고민이 되긴 했었다.


100 개의 공항이라고 하면 엄청난 규모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뜯어보면 국제 공항급 규모는 몇 군데
없었으니까.
혹시나 돈 몇 푼 안 되는 지방 공항 건설을 맡게 될 것 같으면 망설임 없이 발을 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김창훈 상무의 PM 제안이 없었다면 말이다.
박 부장이 대답 대신 영훈을 돌아보았고, 통역을 다 전해 들은 영훈이 입을 열었다.

“한국과 인도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지금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HS 그룹은
전 세계에 원자재, 식품, 철강, 석유제품 등을 거래할 수 있는 무역망을 갖추고 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건설장비 생산업체와 호텔, 세계적인 조선 회사도 소유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고 우리 회사가 한국 최고라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영훈은 HS 그룹에 현진기계를 슬쩍 끼워 넣었다.


외부에서 볼 때에는 현진중공업 계열과 한 뿌리로 보일 테니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다양한 면을 보라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HS 그룹보다 훨씬 더 크고 대단한 기업들도 많습니다만, 우리는 더 다양하고 깊게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는 우명건설, 그리고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금융그룹인 신영금융그룹과 컨소시엄을 맺고 부지면적
천만 제곱미터 이상 국제공항 프로젝트를 맡아보고자 합니다.”

라마누잔 차관은 깜짝 놀랐다.

“그 정도 규모를 원한다는 건 조금 의외군요. 미안하지만 국내 여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내


건설사를 밀어줄 수밖에 없어요.”
“딱 한 곳이면 됩니다. 100 개나 되는 공항 건설 모두를 우리가 맡겠다는 게 아닙니다. 단 한 곳의 공항을
부지매입부터 설계, 시공사 선정, 환경관리 등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끝내겠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겠다는 건가요? 오오··· 그건···.”

차관이 고개를 흔들며 부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미르 밧찬 주한 인도대사가 차관에게 속삭였다.

“한국 건설회사의 시공능력은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명건설은 세계적인 프로젝트도 해냈던 능력 있는


업체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더 적은 비용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산에서 얼마나
더 요구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 차관님도 알지 않습니까.”

라마누잔 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를 하다 보면 기존에 예상했던 금액에 딱 맞추어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특히 설계나 시공능력과는 별개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이면 이런 상황이 상당히 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눈먼 돈.
세금을 보는 기업인들의 관점은 한국이나 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물론 해외건설사에 공사를 맡긴다고 해도 부정부패가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다.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
어찌 보면 그게 그렇게 중요한 부분일까 생각할 수 있는데 라마누잔 차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미미하게
움직이고는 다시 수저를 놀렸다.

디저트까지 마무리한 뒤 이어진 대화는 지지부진했다.


라마누잔 차관은 애매한 모습을 보였고 아미르 밧찬 대사는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박병호 부장과 구호준 실장의 열정적인 브리핑으로 HS 건설을 알렸지만, PM 을 해보겠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쉽사리 긍정적인 내색을 하지 못했다.
결국 한 시간 더 이어진 대화에도 큰 소득을 내지 못한 채 미팅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허탈한 박병호 부장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PM 을 넘겨주는 건 많이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망하기는 이른데 아마 우명건설이 나름대로


노력할 겁니다.”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명건설이 일을 해결하면 대장이 되는 거 아닙니까?”

박 부장은 영훈이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무님,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은 것처럼 일도 최대한 목표를 높게 잡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건설사는 아직 그만한 경험이 없습니다. 이럴 때 우명건설을 앞세워서 경험을 쌓는 건 수익 창출보다 더
값진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아직 끝난 상황도 아닌데, 벌써부터 우명건설 아래에서 주는 공사를
받아먹겠다는 마음가짐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차관 일행의 귀국이 내일입니다. 인도로 돌아가고 나면 기회가 없습니다.”
“아직 비행기 안 탔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구 실장에게 물었다.

“연락해봤어요?”
“네. 그런데 과연 올지···.”
“올 겁니다.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까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 상황에 가란다고 누가 돌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알자 박 부장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고 연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누가 올 거라는 거예요?”


“카트리나에게 연락해보라고 했어.”
“그 부잣집 딸? 그런데 이 상황을 뒤집을 만큼 큰 힘이 있을까?”
“모르지.”

영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카트리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구 실장에게 살짝 눈인사를 해 보이고는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나를 왜 보자고 했어요?”


“우리 HS 그룹은 당신과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훈의 말에 놀란 사람은 카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박 부장이나 구 실장, 그리고 통역한 연희까지 영훈을 돌아볼 정도였다.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당신과 우리 구호준 실장이 같은 학교였다는 말에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당신의
집안을 파악해낼 수 없었어요.”

구호준 실장이 인스타 주소를 알려줄 때만 해도 그녀의 집안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막상 알아보려고 파보기 시작하니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미국 사람인데 어느 곳에서도 어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없었다.
SNS 에 나온 그 휘황찬란한 집을 알아보니 집주인이 인도에서 엄청난 부자인 건 맞는데 그 사람의 자식은
카트리나가 아니었다.
구 실장은 그때부터 당황했지만 영훈은 이제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고 이번 프로젝트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늘 카트리나와 악수하고 나서야 그녀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생년월일을 알아냈던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집안이 뭐가 중요하죠? 내가 부자였으면 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당신이 부자건 아니건 MIT 공대를 졸업한 인재니까요.”
구 실장이 졸업한 대학이 바로 MIT 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건축학과를 나왔으니 벡텔에서 구 실장과 그 친구들을 스카웃 하려 했었다는 말은 아마
가짜가 아니었을 거다.

“그럼요?”
“우리는 인도에서 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싶고 당신이 다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건가요?”
“네.”
“무슨 근거로 그러시죠?”
“사실상 이번에 입국한 일행의 가장 실세는 라마누잔 차관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아닌가요?”

카트리나는 연희의 통역을 듣고 난 뒤 크게 놀랐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 표정.

“우리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아니라고는 하지 말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일어날까요?”
“생각할 시간을··· 아니, 좋아요. 대신 단둘이서 대화하고 싶어요. 통역할 분은 있어도 좋아요.”

이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박 부장과 구 실장이 자리를 떴다.


그 사이, 연희가 영훈에게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에요?”


“귀한 사람이 될 여자입니다.”
“네?”
“옛날로 따지면 왕비가 될 사주라고 할까요?”
“집안도 별거 없다면서요?”
“옛날에도 빈이 중전의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애첩이 계속 첩의 자리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죠.”

< 유혹의 기술(4) > 끝

< 유혹의 기술(5) >

영훈이 고개를 돌려 카트리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성심성의껏 지원해줄 수 있습니다.”


“도대체 날 어떻게 지원해준다는 거죠?”
“그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 말해줘야죠.”
“네?”

뭐든 다 알고 모든 걸 다 해줄 것처럼 밑밥을 깔아놓고는 갑자기 원하는 걸 말해보라니 카트리나는 당황했다.

“돈이 필요한 일, 거대 기업의 힘이 필요한 일, 그러면서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도와달라고 할 수 없는 일.


사람을 죽여달라는 식의 도의에 어긋나고 위법적인 문제라면 도와드릴 수 없지만, 그 외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당신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영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카트리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이야기가 빙빙 도는 것 같은데, 이유는 서로 핵심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일어설까요?”
“······.”

바로 이야기를 꺼내도 되지만 영훈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주도권을 카트리나가 쥐게 된다.
그녀는 HS 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되니까.
그녀의 입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 게 된다.
상황이 아주 많이 다른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영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카트리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솔직히 조금 황당해요. 도대체 나에 대해 뭘 알고 이렇게까지 압박하는 거죠? 내가 당신들에게


빚이라도 졌나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별로 없네요. 라마누잔 차관은 내일 떠날 것이고 당신은 그
비행기에 동행하게 될 겁니다. 여유롭게 서로의 지난날을 꺼내볼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서요.”

카트리나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난 빈민가 출신이에요. 그러다 좋은 머리로 유력 가문 눈에 띄었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유학까지 다녀왔어요.


마치 서커스단에게 잡힌 코끼리처럼요.”
“그 서커스단 단장이 누굽니까?”
“에두아르 간디. 코임바토르 시장이자 인도 정치계를 주름잡는 사람이에요.”

순간 영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그림과 그녀의 말이 달라서였다.
그녀의 사주를 봤을 때 못해도 차기 총리 유력 후보의 사람이거나 현재 총리의 애첩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일개 시장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연희가 통역을 끝내고 말을 보탰다.

“네루-간디 가문은 인도 정치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에요. 미국의 케네디 가문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아···.”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트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당신이 가진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모르고 있는 건가요?”
“짐작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카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바보 되는 기분인데··· 혹시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당신들을 상당히 곤란하게 할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실수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후··· 마호디 총리가 내 뒤를 봐주고 있어요.”

역시나 총리였다.
그런데 총리가 뒤를 봐주는데, 아무리 힘이 있는 가문이라고 해도 총리를 이겨 먹을 수가 있을까?

“에두아르 간디라는 사람이 마호디 총리가 가진 힘을 넘어섭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인도의 정치 상황까지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뻔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영훈의 대답에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몇 년 전에 선거에 참패하면서 네루-간디 가문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줄어들었어요. 에두아르 간디는 반전을 모색하고 있었고 저를 마호디 총리의 곁에 보내면서 점차 권력을 잡기
위한 계획을 하나씩 이뤄나가고 있어요.”
“그렇군요.”
“내후년에 총리 임기가 만료돼요. 재선에 성공하려면 확실한 성과를 보이거나 간디 가문의 협력이 필요해요.
아직 그들은 정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코포레이트 그룹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니까요.”

연희는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코포레이트 그룹(Corporate Group)은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는 최고 지배그룹을 말해요. 모노폴리 하우스
(Monopoly House)라고도 불리는데 국내 재벌들과 아주 유사한 형태죠. 재벌인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하여튼 그래요. 여러 다양한 산업에 진출하고 높은 시장 점유율
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친족에 의해 경영되는 구조죠.”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서커스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간디 가문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난 간디 가문에게 은혜를 입었어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좋은 음식과 좋은 집은 생각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음··· 어쩌면 마호디 총리가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수준의 정치인
이었다면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지 몰라요.”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그를 사랑하는군요?”
“맞아요. 그를 사랑하고 그의 도덕성과 그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해요. 그래서 난 그가 연임하고 인도를
더 좋은 나라로 이끌기를 원하고 있어요.”

전에 뉴스를 통해 얼핏 인도 총리 얼굴을 봤었는데 적게 봐도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임창호 회장님과 호형호제할


것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럼 나이 차이가···.

“이거 완전 도둑놈··· 크흠··· 이건 통역하지 말아요. 어쨌든 좋은 정치인이군요.”


“솔직히 말해서 이번 대형 건설 프로젝트는 부정부패 천지예요. 인도 정치계는 곧 재계와 동일하거든요. 인도는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불쌍한 시민들은 아직도 비천한 처지를 못 벗어나고 있어요. 난 그를 도와주고 싶어요.”

말만 들어보면 스케일이 큰데 영훈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NJS 라는 회사가 있어요. 만약 당신들이 PM 을 하게 되면 이 회사에게 일을 맡겨줘야만 해요.”
“정확히 어떤 일을 말하는 거죠?”
“토지매입이에요.”

영훈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토지매입을 그 회사를 통해야만 한다···. 비자금을 만들려고 그러십니까?”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어요.”
“적정 한도 이상의 자금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른 회사를 선정한다고 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의 가격으로 매입하게 될 거예요. 오히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내가 한 얘기는 막상 일이 시작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받아들이죠.”
“조용히 잘 처리해주면 다른 곳도 맡을 수 있게 도와줄게요.”
“좋은 파트너 관계란 그런 것이죠. 결과는 언제 알 수 있을까요?”
“한 달 안에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을 거예요.”
“추가로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신의는 중요한 거예요. 말을 바꾼다면 앞으로 우리와 같이 일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그럼···.”

그녀는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카트리나가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병호 부장과 구호준 실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그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영훈은 대략적으로 축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박 부장은 황당하면서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건설 프로젝트든 토지매입 가격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공항을 세운다면야
과정도 간단하고 매입가격을 협상하는 것도 간단하겠지만, 만약 주거지역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할 때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한 번의 공사로 얻을 비자금이 아니라 더 큰 걸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NJS 라는 회사는 마호디와 관련된 회사일 거고, 만약 우리가 PM 을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끼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호준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구 실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매력적인 건 우리에게 차후 또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세계적인 건설사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 시킨 경험이 필요합니다.
대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는 HS 건설의 위상을 올려줄 겁
니다. 토지매입을 어느 정도의 적정가격으로 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공사 자체에 문제가 생길 만큼
악질적으로 가져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은 외부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야.”
박 부장이 쉽게 인정했다.

“저들이 원하는 건 합법적으로 돈을 끌어모을 기회가 필요하고 우리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마호디 총리를 움직여
딱 하나의 프로젝트만 우리가 따낼 수 있다면 HS 건설은 눈으로 보이는 수익 외에 더 큰 걸 가져온 거라고
판단해도 좋을 겁니다.”
“우명건설은?”
“설계 부분은 협력하고, 시공도 절반 나누어 가지면 됩니다. 만약 차후 프로젝트를 추가 수주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설계 부분만 참여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차피 PM 의 핵심역량은 설계와 관리니까요.”

결론은 내려졌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렇게 정리합시다. 우명건설이 어떤 소식을 들고 올지 지켜보고요.”

이때 박병호 부장에게 우명건설 김창훈 상무의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통화를 나눈 박 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명에서 라마누잔 차관 일행과 지금 묵고 있는 호텔에서 미팅을 가졌다고 합니다. 우명에서 긍정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데요?”
“뭐예요? 다 끝난 거예요?”

연희의 실망스러운 말에 박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기는 합니다. 일단 카트리나가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이 될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영훈이 말을 보탰다.
“조급해하지 말자고요. 구 실장님은 학교 동창들을 중심으로 스카웃 해올 수 있는 인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주세요.”
“연봉을 상당히 요구할 텐데요?”
“원래 세계적인 스포츠 구단들은 연봉을 많이 준다고 하던데요? 회사에 돈 부족한가요?”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혜성기업에서 HS 건설로 바뀐 지 1 년도 안 됐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 그렇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잘 풀릴 테니까.”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닌 현재 HS 건설 사장의 운 덕분에 돈이 물밀 듯이 들어올 거다.


그렇기에 이번 프로젝트가 잘 될 거라는 것에 한톨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거였다.

김창훈 상무는 윤희찬 부장에게 희희낙락한 얼굴로 말했다.

“야, 아까 라마누잔 차관 표정 봤냐? 시발, 남자들은 다 똑같아. 여자면 다 뻑이 가거든.”


“그래, 너도 똑같지.”
“인마, 난 로맨티시스트야. 그 사이에 만난 여자들은 내 사랑을 갈구한 게 아니었다고. 일종의... 윈윈이라고
할까?”
“윈윈?”
“그렇지. 난 그 여자들에게 완벽한 배경이 되어준 거고, 그녀들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 거지. 서로 윈윈이었어.
그 여자 중에 나를 원망하거나 억울하다고 한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는 줄 알아?”
“잘나셨다. 밖에 최 사장 기다리고 있으니까 칭찬 한마디 하고 빨리 보내. 다리 아프겠다.”
“아, 맞다.”

창훈은 얼른 방문을 열고 나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는 장년의 남자에게 다가섰다.

“오늘 고생했어요. 뵐 때마다 감탄하는데 정말 일 잘하시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제가 드릴 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주십시오.”
“아, 골프 좀 쳐요?”
“그냥 흉내만 냅니다.”
“에이··· 이런 사람들이 꼭 돈 털어먹더라. 주말에 라운드나 돕시다.”
“저녁에 애들 준비해 놓을까요?”
“그럼 좋고··· 오늘 일은 말 새 나가지 않게 단단히 주의 주는 거 잊지 마시고.”
“야무진 애들입니다.”

창훈은 최 사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엔터 업계의 사장이지만 고작 재벌 3 세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굴었다.

“나 최 사장 믿어요.”
“네.”
“그럼 주말에 봅시다.”

최 사장이 나가고 윤 부장이 가방을 챙겨 나오며 말했다.


“HS 물산 최영훈 상무 앞에서 잘 참았어. 난 너 사고 칠 줄 알고 졸라 쫄아 있었잖아.”
“나 이제 애 아니다. 확실한 약점을 보일 때까지 가드를 단단히 하고 노리고 있는 거지.”
창훈이 가드를 잡고는 상체를 슉슉 움직이며 쉐도우 복싱을 한다.
윤 부장은 폼 잡고 있는 그를 보고는 혀를 찼다.

“쯧쯧··· 이미 끝났어. 결혼한다잖아.”


“인마, 원래 결혼식장에 손잡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신혼여행 가서도 깨지는 커플이
한둘이야? 나 아직 포기 안 했다.”

창훈은 쉐도우 복싱을 하며 날카롭게 잽을 날려댔다.


물론 윤 부장의 눈에는 더없이 어설퍼 보였지만 적어도 눈빛만은 어설퍼 보이지 않았다.

< 유혹의 기술(5) > 끝

< 승진... 회사원의 모든 것(1) >

인도 공항 건설 프로젝트 건은 그렇게 넘어갔다.


이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박병호 부장은 이왕 이렇게 된 거 Nodri Clare 인수만 마무리되면 인도로 직접 날아가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영훈이 말렸다.
박 부장이 날아가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가 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HS 그룹에 손을 들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HS 그룹에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낫다고 여겼다.
구도일 사장이 가진 재운을 생각하면 계약이 안 된 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을 테니까.
어쩌면 라마누잔 차관이 인천공항으로 오게 된 일련의 과정이 전부 구도일 사장의 재운 덕일 수 있다고 보았다.
송은채 회장은 요 며칠간 진행된 일련의 사항을 영훈에게 보고 받고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라는 거잖아?”


“맞습니다.”
“그래, 지원해야 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오늘 출발이지?”
“맞습니다.”

본래 인도 건보다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이 Nodri Clare 인수였다.


중국에 있는 주췬이 가진 쇼핑 플랫폼에서 2/4 분기에 넣을 명품 브랜드 품목을 알려달라고 전해왔기 때문이다.
Nodri Clare 를 인수하지 못한다면 굳이 그 플랫폼에 넣을 이유가 없다.
시급히 Nodri Clare 인수를 결정짓고 중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했다.

“가서 너무 일만 하지 말고 간김에 하루나 이틀 정도 쉬고 와. 지금까지 일만 했잖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급한 일 없잖아. 선거는 끝났고 주우진 의원이 벌린 일은 사그러들었으니까. 참 재주도 좋아, 그치?”
“야당의 힘이 작용한 결과일 겁니다. 그래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게 앞으로 조재민 의원과 저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겁니다.”

송 회장이 피식 웃었다.

“최 상무도 순진한 구석이 있네.”


“순진한 생각인가요?”
“소위 쌍팔년도 시절에는 정치인들이 가진 권력으로 재벌들을 찍어 눌렀어. 나도 어렸을 때 보고 경험했었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해. 돈이 곧 권력이 돼버렸거든. 조 의원을 건들면 곤란하겠지. 그런데 우리를 건들면
그건 곧 정치적으로 기업을 죽이는 일이야. 수만 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지는데 쉽게 건들 수 있겠어? 법만 잘 지키고 살면 돼. 우리 최 상무가 또 그런 쪽은 절대 눈길도 안
주잖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그런 사람에게 그렇다고 하는 거지. 잘 다녀오고.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편히 쉬다 와.”
“네.”
“프로포즈 반지 예쁘더라. 연희가 골랐니?”

영훈이 쑥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제가 그 쪽으로 안목이 없는 걸 아는지 반지 호수랑 브랜드, 모델명까지 콕 찍어 주더라구요.”


“똑똑한 거야. 남자 헷갈리게 해서 피곤하게 하지 않잖아. 걔도 언제부터였는지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예전이었으면 주변 사람 엄청 피곤하게 했을 텐데 최 상무를 만나서 그런 걸까?”
“하하...”

영훈이 머쓱하게 웃으니 송 회장이 일어섰다.

“바쁠 테니 얼른 출발해. 연희 고게 또 최 상무 오래 붙들었다고 뭐라 하겠다.”


“아직 시간 여유 있습니다.”
“면세점 들를 거 아니야. 연희가 그냥 지나치겠어? 알아서 선물도 좀 사주고 그래.”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영훈이 기획조정실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추고 나가자 직원들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기조실의 장인 최영훈 상무도 떠나고 회장의 딸과 박병호 부장까지 모두 짐을 싸서 영국으로 떠났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아무리 최영훈 상무가 눈치주지 않고 임연희가 회장 딸로 갑질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되는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처럼 깐깐한 박병호 부장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직원들의 얼굴에 꽃이 피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민희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영훈과 같이 있을 때는 시키지 않은 일이라도 알아서 척척 해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노력한 그녀였다.
혹시나 영어가 필요한 순간이 올까봐 입사 후에 끊었던 영어학원까지 추가로 다니는 그녀였다.
출장을 떠나며 영훈이 추가로 지시한 일도 없었고 다녀올 때까지 쉬고 있으라는 말에 그녀는 오래간만에 쇼핑몰
사이트를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톡이 울렸다.
[안 바쁘면 커피 한잔 어때?]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내가 맛있는 커피집 알아놨는데 거기서 볼까?]
[좋아요.]

톡을 마친 민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자연히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기조실 직원 중에 유난히 말이 많고 발이 넓은 김문원 대리가 슬쩍 물어온다.

“어디 가요?”
“네. 잠시 외부에 다녀올게요.”
“바쁘시네?”
“대리님은 안 바쁘세요?”
“우리야 항상 바쁘죠. 조금 있으면 점심인데 먹고 들어오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오늘 어르신들도 없고 회식이나 할까 하는데 같이 한잔 할래요?”
“그래요.”

민희의 승낙이 의외였는지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나왔다.

“오~ 알겠습니다.”

기획조정실에 여자는 둘 뿐이었다.


그런데 연희는 회장님의 딸인데다가 기조실 최영훈 상무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쫘악 퍼져 있으니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감히 말 한번 붙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반면 민희는 평소 일 외적으로는 다른 사원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고 항상 바빴기에 다른 의미로 말을
붙이지 못했는데 회식에 참여한다니 좋아하는 거였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온 민희는 을지로에서 조금 떨어진 충무로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

“여기!”

오지환 부장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고 있다가 민희가 가까이오자 미리 시켜놓은 음료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요즘 젊은 여자들이 이거 좋아 하더라고. 괜히 음료 시킨다고 말 길어지고 어색할까봐 미리 시켜놨어.”


“센스 있으시네요.”
“내가 그래서 이 외모에 장가갔잖아. 우리 마누라 엄청 예뻐. 다 이 센스 덕분이지. 최 상무님 출장 가셧다던데
맞아?”
“네. 아까 출발하셨어요.”
“며칠 걸리시겠네?”
“일주일은 안 넘으실 거예요.”
“Nodri Clare 때문인가?”
“네.”

오 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사업성이 좋아? 영업팀에 물어보니까 매출이 좋긴 하지만 인수를 결정지을 만큼 뭐가 확실히 보이는
건 아니라던데?”

이미 회사 임원들은 Nodri Clare 인수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재무팀에서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임원들이 모를 수 없었던 거다.

“상무님은 이유 없는 사업 진행은 하지 않으십니다.”


“당연하지. 고작 입사 1 년도 안 된 쌩 신입이 상무를 달았는데 우리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난
그 이유가 궁금한 거지.”
“중국을 바라보고 계세요.”
“중국?”
“네.”
“인수 후에 중국에 진출한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닌데... 쉽지 않은데? 지금까지 중국에 들어갔던 수많은 사업들
중에 잘된 거 몇 없어. 중국인들이 영화 보기 시작하면 난리 날 거라고 극장 사업 진출했던 CS 그룹이 엄청나게
손해봤고 중국인들이 커피 마시기 시작하면 또 난리 날 거라고
들어갔던 커피브랜드들 박살 났지. 그나마 화장품이 좀 힘을 받았는데 그것도 이제 복제품들 다 돌고 있고 중국
브랜드 성장률이 상당해서 이제 고작 몇 년 안 남았다는 말이 돌아. 역사가 있는 명품도 아니고 신규 브랜드가
중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 부분은 이미 고려하고 계십니다.”
“고려했는데도 인수를 한다고? 7 천억이나 들여서? 뭐야? 우리가 모르는...”

오 부장은 거기까지 말하다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중국이 참여하는 건가?”


“맞습니다.”
“중국에서 핸들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거네?”
“네.”
“힘이 상당한 사람인가?”
“쇼핑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에요.”
“하... 그런 사람하고 이미 입을 맞추고 진행하는 거였어? 와... 완전히 바보 됐네? 지금 이것 때문에
아래에서 말들이 많았던 거 알아?”
“알고 있습니다.”

회사가 확장에만 열을 올리다 큰일 난다는 말이 이미 직원들 사이에 돌고 있는 걸 민희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론 한번 하지않고 그냥 흘려들었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니까.
오지환 부장은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생각이 다 있으신 거였네. 이래서 뱁새는 황새의 행동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 커피 두고
뭐해?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마셔. 마셔.”
“훗, 네. 잘 마실게요.”

민희가 쪼로록 커피를 빨며 한참 맛을 음미할 때 오지환 부장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럼 Nodri Clare 인수 마무리되면 중국이랑 협력하는데 주력하는 건가?”


“아마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럼 상무님도 계속 중국 오가시느라 바쁘시겠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왜?”
“이미 이야기는 어느 정도 끝낸 상태에서 진행하시는 거라 많아 봐야 한두 번?”
“그럼 실무쪽에서 진행하겠다는 거네? 기조실만 가지고 되나?”

민희는 미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아마 많은 업무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아요.”


“흐음... 그래?”

은근히 낙담하는 오 부장을 보며 그녀가 실망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상무님이 Nodri Clare 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우선순위로 두시는 건 해주조선해양
건이에요.”
“그건 이미 마무리됐잖아?”
“인수는 마무리됐지만 군산조선소 일감이 적어서 계속 신경을 쓰고 계시거든요. 얼마 전에 니폰유센과 노르웨이
UACC 에게 수주를 받게 된 것도 상무님의 그런 의중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어요.”
“그건 이해가 가. 그런데 거기서 또 수주를 받으려고 하신다고? 해주조선해양은 뭐하고? 걔네들도 노는 거
아니잖아? 일감 부족하면 거제에서 만들 거 군산으로 돌릴 텐데? 그리고 아직 수주잔량도 꽤 남은 걸로 알고
있고,”
“더 깊은 내용은 제 권한 밖이에요.”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말에 오 부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알려줄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이유라는 것이고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면 더더욱 흥미가 동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상무님이 추가 수주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거네?”


“네.”
“좋아. 이거 커피 한 잔으로 너무 비싼 정보를 들은 것 같아서 양심에 걸리네.”
“아니에요. 전에 도와주신 것도 있으니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그거 알아내려고 고생 꽤나 했어. 아유~ 말도 마. 고등학교 동창부터 처남 친구까지
달달 볶았다니까. 더 필요한 건 없고?”
“네.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언제든지.”
“아, 만약 상무님에게 조금 더 깊은 인상을 주고 싶으시다면요.”
“응?”
“니폰유센을 알아보세요.”
“니폰유센? 왜?”
“상무님이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 오케이. 접수했어. 아유~ 우리 김민희 씨 너무 야무져. 누가 데려갈지 참 부럽네. 어떻게... 남자친구
없으면 내가 소개팅 좀 해줄까? 내 아는 동생이 검사야. 솔로.”
“괜찮습니다.”
“하긴, 중매 잘못 서면 뺨이 석대라지? 민희 씨는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럼 나 먼저 일어설 테니까
천천히 마시고 나와.”
“들어가세요.”

오지환 부장은 커피숍을 나서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나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재작년에 러시아에 중고차 4 천대 날랐을 때 니폰유센 선박 이용했지?
그래. 그때 누가 핸들링했어? 걔 나한테 전화 좀 하라고 해라. 이유는 묻지 말고. 오케이.”
전화를 끊은 오 부장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회사 복귀하니까 모든 일 올스톱하고 니폰유센에 관해서 파악해놔. 매출실적은 당연한 거고 재무 상황


위주로 파악해. 특히 회사채 누가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 세세하게 파악해. 새끼... 점심은 도시락으로 때워.
28 분 정도 후에 들어간다.”

전화를 끊은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미미하게 퍼지는 그의 미소와 불끈 쥔 주먹은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 승진... 회사원의 모든 것(1) > 끝

< 승진... 회사원의 모든 것(2) >

“오늘 저녁에 모임 있는 거 알죠?”

이세준 부회장의 아내인 고명숙은 남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이상하게도 얼마 전부터 남편의 행동이 더없이 냉랭해졌기에 괜스레 말을 걸면서도 눈치가 보이는 거다.

“무슨 모임?”
“봉사 모임 있잖아요.”
“봉사? 돈 많은 여편네들끼리 모여서 수다 떨면서, 가끔 명절이나 겨울 되면 모여서 김치나 담그는 그 봉사?
진짜 봉사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가 차겠네.”
“그래도 종종 좋은 일 많이 해요. 한 달 전에 자선바자회 열어서 수익금 기부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리고 바자회에서 패션쇼 열어서 기부한 돈보다 옷 사는데 쓴 돈이 더 많았지, 아마?”
“요즘 왜 그렇게 삐딱해요? 당신도 다 아는 사람들이고, 은행동 윤숙언니 남편은 당신이 그렇게 친해지고
싶어하는 금융위원회 국장이잖아요.”
“······.”
“저녁에 시간 내요? 그런 걸로 알고 있을게요.”

명숙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얼른 방을 나왔다.


곧바로 뒤따라 나온 이세준 부회장은 아침도 먹지 않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누가 봐도 전날에 부부싸움을 굉장히 심하게 했구나 싶지만 명숙은 오히려 시원한 표정으로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아침은 간단하게. 그리고 주스도 줘.”


“네.”

아줌마에게 일을 시키곤 명숙은 부산스럽게 나갈 준비를 했다.


조금 있으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녀가 자신의 몸에 투자한 돈은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을 넘어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군살 없이 날씬한 몸을 유지하는 그녀는 아줌마가 준비한 아침을 빠르게 해치우고는 정성들여
자신을 꾸미고 집을 나섰다.

“종로 리츠 칼튼.”

운전기사에게 짧게 행선지만을 말한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미끄러지듯 움직인 차가 호텔 앞에 멈췄다.


명숙은 입구에서 내려 보무도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윤 작가~ 내가 늦었지?”
“아닙니다.”

서른 중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던 명숙과 비슷한 또래의 여인이 말했다.

“안 늦긴, 30 분이나 늦었잖아. 우리 윤 작가 바쁜 거 몰라서 그래?”


“알지~ 너무 미안해. 평소에는 새벽같이 일어나던 양반이 오늘따라 일하기 싫은 노인네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야. 넥타이 색깔 가지고 이건 이래서 싫다, 저건 저래서 싫다··· 아휴, 징그러워.”
“호호호. 네 남편이나 내 남편이나··· 윤 작가 배고파. 이대로 계속 굶길 거야?”
“말도 안 되지. 윤 작가는 뭐 좋아해?”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그럼 스테이크 괜찮지? 여기 안심 스테이크가 판타스틱 하거든.”

명숙은 윤 작가라 불리는 남자를 이끌었다.

* * *

민희는 회사 근처 유명한 이탈리아 브런치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빠르게 놀리는 중이었다.
지금쯤 테이블이 한 번 정도 회전했을 시간이라 얼른 가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이었다면 점심 가격에 망설여졌겠지만, 이제는 이 정도 금액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졌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과의 약속에서 가벼운 맥줏값 정도는 누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계산할 정도가 되었다.

현진물산에 입사하며 학자금 대출은 얼마 안 돼 상환했다. 신촌 부근에 전세로 얻은 원룸 이자를 생각하면 아직도
허리를 졸라야 했지만 그래도 씀씀이는 많이 커졌다.
어쩌면 그녀 내면에서부터 변화된 무언가가 그녀의 소비패턴까지 바뀌게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 걸어가던 그녀의 눈에 커다란 위용을 뽐내고 있는 리츠 칼튼 호텔이 들어왔다.
외국에서 온 비즈니스 손님과 국내 최상급 VIP 를 위한 5 성급 호텔로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 특별함이
더욱 부각되는 곳이었다.
평생 이런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 한번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이 호텔이 이제는 언제 어느 때고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괜히 뿌듯한 마음에 호텔 앞을 천천히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번 그룹 창립행사 때 최영훈 상무님 곁에 계시던 비서님 맞으시죠?”


“아, 네.”

민희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챘다.


리츠 칼튼 호텔 운영지원팀 조현민 과장이었다.
당시 창립행사의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회장 자리에 오른 송은채 회장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그룹 내 임직원들에게
주목받았던 사람은 당연히 최영훈 상무였다.
창립행사를 준비했던 조현민 과장이 최영훈 상무 옆을 항시 따라다니던 두 여자를 잊을 리 없었다.

“호텔 운영지원팀 조현민입니다. 호텔에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건가요?”

은연중에 긴장한 낯빛이 드러났다.

“그렇지 않아요. 날이 좋아서 미팅 끝나고 천천히 걸어가던 중이었어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창립행사 때는 핑거푸드밖에 없어서 호텔 음식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저희 양식당인 피에르의 통후추향 버터로 그릴드한 등심스테이크는 호텔의 자랑이거든요.”

순간 민희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조 과장은 놓치지 않았다.


5 성급 호텔 식사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기회.
남자건, 여자건, 지나온 인생이 어땠건 이런 기회를 쿨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게다가 그 식당이 심지어 미슐랭 2 스타라면 더더욱.
당연하게도 민희는 마치 홀린 것처럼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민희는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들어갔지만,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조현민 과장은 슬금슬금 올라오는 기대감을 애써
내리눌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그룹 내 최고 실권자의 비서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해서 눈도장을 찍겠다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걸로 크게
점수를 받지는 못할 거라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민희를 식당에서도 가장 뷰가 좋은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민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직원을 호출했다.

“여기!”

직원이 빠르게 다가오자 그가 말했다.

“풀 메뉴로 준비해주세요. 중요한 분이시니까 실수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민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어색한 상황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앞에 놓인 메뉴판에 적힌 인당 20 만 원짜리 풀메뉴 런치코스는 그런
어색한 상황을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걸어온 한 무리의 일행이 민희가 앉은 자리로 걸어왔다.

“거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자리 좀 옮겨줄 수 없을까?”

만약 손님으로 왔다면 어이가 없을 만큼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옷차림만 봐도 상류층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본 민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앉으세요.”

호텔의 손님은 곧 HS 그룹의 손님이었기에 조금 진상손님이라고 해도 자리를 버티고 있는 건 직원으로서


개념상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 과장은 당황했지만 민희의 빠른 대처에 바로 직원에게 다른 자리를 앉을 수 있게끔 해주었다.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한 장년의 여성이 민희에게 말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하네. 고마워. 젊으면 앞으로 이런 데 자주 올 수 있으니까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양보하면 그게 다 덕을 쌓는 거야.”
“네.”
“그런데 선 보러 왔나봐?”

뜬금없는 질문에 민희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자신의 옷차림이나 가방을 보고 순간적으로 견적을 낸 걸 거다.
하고 있는 행색이 이런 곳에 자주 올 것 같지 않아 보여 오늘 대단한 행사라도 있는 건지 물어보는 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식사하세요.”

민희의 어투에 조금 날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채서일까?


장년의 여자는 민희를 잠시 째려보고는 민희가 앉았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민희는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공짜로 가진 식사 자리였고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기에 기분
상해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때 조현민 과장이 혹시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슬쩍 민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자리는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좋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고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혹시 제가 고객이랑 싸울까
봐 걱정하셨어요?”
“하하, 그럴 리가요. 고객분께서 비서님께 함부로 대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가끔 예민한 반응으로 직원들을
곤란하게 만드시거든요.”
“응? 유명하신 분이신가봐요?”
“유명하다기보단 몇몇 VIP 분들은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구신데요?”

순간 조현민 과장은 멈칫하다가 별다른 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으로 대답했다.

“신영은행 이세준 부회장님 아내분이십니다.”


“아··· 네. 그렇군요. 어쨌든 알겠어요.”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민희는 깜짝 놀랐다.
아까 그 경우 없는 여자가 이형준 상무의 어머니였다니···.
아직 이형준 상무와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계일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민희는 아까 말할 때 그녀에게 기분 나쁜 티를 낸 걸 후회하며 어떻게 안 좋았던 첫인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조금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거만해져서 손님한테 인상이나 쓰는 짓을 한 걸 자책하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으니
자리에 앉기 전에 느꼈던 설렘은 아예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괜히 포크와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 이형준 상무 어머니의 손이 옆에 앉은
남자의 어깨를 자꾸 터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형준 상무 외에 또 다른 아들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고, 엄마와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그 분위기가
모자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자연스럽게 민희의 시선이 계속 형준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남자의 어깨, 등과 허리를 내려와 허벅지까지 터치했을 때 민희는 바로 직원을 호출했다.

“운영지원팀 조현민 과장님을 불러주세요.”

직원은 아까 조 과장이 민희 앞에서 깍듯하게 굴었음을 알고 있기에 이유도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의아한 얼굴의 조 과장이 도착했다.

“절 찾으셨다고요?”
“잠시 앉으실래요?”

아까까지만 해도 비싼 점심을 공짜로 먹는다는 생각에 설레는 표정을 한가득 짓던 여자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음을 느낀 그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민희는 미미하게 고개를 움직여 정면에 위치한 이형준 상무 어머니의 뒷모습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신영은행 부회장 사모가 확실한가요?”


“네, 그렇습니다.”
“옆에 앉은 남자는요? 저 남자도 호텔 VIP 인가요?”
“그건 저도 잘···.”
“음··· 그럼 부회장 사모가 호텔에 저 남자와 방문한 적 있는지도 알 수 있나요?”

조 과장은 당황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기획조정실에서 나왔다고 이런 질문을 막 하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비서분에게 제가 왜 이런 대답까지


해드려야 하는 거죠?”
“그냥 말씀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은데··· 아니면 영국에 계신 상무님께 전화해서 허락을 받으면 그때 협조해주실
건가요?”
“······.”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민희는 시계를 흘낏 보고 말했다.

“영국과 대략 9 시간 정도 차이가 나니까 지금 한창 새벽이긴 한데, 그래도 시차 적응이 안 되셔서 아마 잠은 못


주무시고 계실 수 있어요. 전화할까요?”

전화를 흔들며 협박하는 민희를 보면서 조현민 과장은 내심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세상 순진하게 굴던 아가씨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위협하니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그는 기조실 비서와의 기싸움을 포기했다.
“아닙니다. 저희도 남자와 얼마나 자주 방문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사모님이 호텔 스파와 피트니스
고객이시기 때문에 아마 스파 마사지 직원들은 같이 방문한 남자에 대해서 알지도 모릅니다.”
“옷차림을 보면 그냥 한량은 아닌 것 같은데, 저 남자가 누구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제 연락처로 알려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그렇게 해줄 수 있죠?”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조현민 과장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희는 그런 조 과장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이형준 상무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치듯 남자의 허벅지를 터치하는 그녀의 손길을 보며 민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과 어린 동생을 두고 바람나서 집을 나간 엄마의 기억.
아빠의 헌신적인 사랑으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처가 다시 드러났다.
재벌들이 그런 생활을 한다는 걸 말로만 들었는데, 막상 눈으로 보니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일까?
민희는 그 맛있다는 스테이크를 채 반도 먹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 승진... 회사원의 모든 것(2) > 끝

< 브라이튼 해변에서(1) >

영국에 도착해서 보니 사실상 영훈이 해야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이미 기조실 직원들이 Nodri Clare 영국 본사와의 계약서에 문제가 없다는 걸 서울에서 확인하고 온 상태였기
때문에 인사하고 도장 찍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던 거였다.
인수가격이야 오기 전에 확정된 일이었고 만약 본사에서 그 가격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영훈도 굳이 깎을
생각이 없었다.
인수가격을 깎고 싶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괜히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가 인수계약이 틀어질까 염려해서였다.
Nodri Clare 의 경영자이자 디자이너인 노드리 클레어는 자신이 제안한 인수가격을 깎지 않고 계약을 진행해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갈등이 없으니 할 일이 없어진 영훈은 이틀만에 계약서를 들고 서울로 날아간 박 부장을 떠나보내고 꿀 같은
휴식을 보낼 수 있었다.
영국 남부 브라이튼의 그림 같은 해변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는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연희는 그림같은 대서양 해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열두 살이었나? 열세 살이었나? 어릴 때 여기에 온 적이 있어. 엄마랑 같이 왔었는데 그때 엄마랑 아빠랑 엄청


크게 싸웠었거든. 지금도 기억나. 엄마는 미술관에 가고 싶어했는데 아빠는 귀찮다면서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쉬다가 그 다음날 스페인으로 가자고 하셨어. 스페인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면서.”
“부럽네.”
“후후... 맞아. 남들이 듣기에는 호강에 겨운 이야기야. 그런데 난 지금도 그 당시가 기억에 생생해. 그 별것
아닌 다툼이 감정싸움이 되었고 당시 아빠가 내뱉은 내 가슴을 헤집은 말들은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고
있거든. 동생을 죽인 년. 재수 없는 년... 웃기게도 아빠는 할아
버지의 외동아들인데도 그리 신뢰를 받지 못하셨대. 아빠가 젊었을 때 손대는 것마다 좋은 결과를 못 보셨다고...
아빠는 그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재수 없어서 일을 망친다고. 칫... 우리 할아버지 진짜 냉정하지
않아? 그깟 일 좀 못하면 어떻다고...”
“...”

영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그녀에게 위로가 될지 몰라서였다.
연희는 담담하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곳 브라이튼에서 크게 싸운 그 날, 내 유학이 결정됐어. 엄마는 내가 아빠 곁에서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난 그 어린 나이에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청 슬프진 않았어.
왜 어릴 때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고 하면 막 울어야 하잖아?
눈물이 나긴 했는데 회사에서 나온 직원과 비행기에 올랐을 땐 눈물이 싹 마르는 거 있지? 이것도 다 운명이었던
걸까?”
“맞아. 멀어져야 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야. 계속 가까이 살았다면 더 불행했을 거야.”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을 거야. 아빠가 저렇게 쓰러지고 나서 솔직히 전혀 슬프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쓰러졌을 때도
당황스러웠지 슬픈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아.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내가 나쁜 년이어서일까?
아니면 이게 정상인 걸까? 영훈 씨는 내가 못돼서라고 생각하고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해?”
“처음 나한테 했던 말, 아직도 기억해. 타고 나기를 오만하게 타고나서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인물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람을 가려 사귄다고. 그리고 본인보다 못한 사람이면 무시하기 일쑤라 친구, 선후배,
형제자매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
고 결혼하더라도 불행할 거라고 했었지.”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그 말이 내 머리를 때렸었어. 영훈 씨가 했던 말, 꼭 내 속을
훔쳐보는 말이라 놀랐었고 더 놀란 건 내가 아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였어.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아빠를 내가 따라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연수원에서 알았던 거지.”

연희는 마침 점원이 가져다 준 칵테일을 한모금 마시곤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웃겨. 왜 드라마 보면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러잖아. 영훈 씨가 한 그 악담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까 영훈 씨가 계속 남자로 보인 거 있지?”
“욕 먹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이구나?”
“히히... 그런가? 아니야. 그게 아니야. 영훈 씨한테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반대로 어쩌면 내 결혼생활이
그렇게 불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연희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로부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자신의 결혼생활 또한 그렇게 될 거라는 걸.

“그래?”
“응, 영훈 씨 옆에 있으면 그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 덕분에 나에게 닥쳐올 불행이 다 비켜갈 것 같았어.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지.”

영훈도 칵테일을 한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씁쓸한 음료가 목구멍을 화끈하게 달구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내 사주를 잊었어. 내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사주에 나무가 없는 여자를 만나야 하는
건 아직 기억이 나는데...”

연희가 말을 끊었다.

“내 사주에 나무가 없어?”


“응, 만약 나무가 있었다면 엄청 고민했을 거야.”
“후후, 우린 정말 인연인가 봐.”
“그랬으면 좋겠어.”
“우리는 행복할 거야. 내 감이 그래. 이곳 바다를 보니까 오기를 잘한 것 같아. 그때 꼬였던 내 인생이 이제
다시 자리 잡는 것 같아.”

연희는 바다내음을 맡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뱉었다.


가슴에 올려진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고 후련해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영훈 씨 이야기를 해줘. 듣고 싶어.”

영훈은 칵테일 잔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나를 키워준 스님이 계셨어. 내 인생을 구원해준 분이셔.”


“구원해줬다고?”
“네 생각과는 달리 본래 난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 운명을 타고 났어. 스님은 한눈에 그걸 알아보셨던 거지.
한눈에 내가 한 니라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인물이라고 보셨던 거야.”
“진짜?”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내 어릴 때의 생활은 사투와 같았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산속에 나를 꽁꽁 묶어놓은 스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렇게 태어나게 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까지 내 마음은 온통 칠흑같이 검었던 것 같아. 그 생각이 조금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기가 막히게도 사주를 배우면서였어. 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배운 건데... 그게 운명인 거지. 운명을 알고 나니까 분노도 원망도 다 사그라들었어. 그때부터
절의 생활을 받아들였어.”
“불자가 된 거야?”
“아니, 일종의 템플스테이 생활이었어. 스님은 내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고 난 절을 내 놀이터처럼
돌아다녔어. 다 좋았는데 딱 하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게 아쉬웠어. 스님은 내가 꼭 원하면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때는 나도 내가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했지. 대학
도 포기하고 게임만 했는데 나이 서른 넘어서 이렇게 잘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그러게, 이렇게 예쁜 여자랑 결혼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하하하, 맞아. 정말 그랬어.”

영훈은 문득 처음 취업했던 대부업체를 떠올렸다.


막 취업했을 때만 해도 어떡해서든 잘 적응해서 사회의 일원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또 다른 두려움 때문에
대부업체를 떠나서 대기업에 취업하게 되다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영훈 씨는 좋은 CEO 가 될 수 있을 거야.”

연희의 말에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CEO? 내가 CEO 가 되길 바래?”


“그럼? 안 하려고 했어? 엄마는 나이도 많고 내가 결혼하면 천천히 나한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할 텐데 그럼 그게
영훈 씨 것도 되잖아.”
“음...”
“왜? 그게 문제 될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눈앞에 보이는 일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난 목표가 없었던 것
같아.”

처음엔 그저 인정받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고 나니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부터 목표를 가져보는 건 어때?”


“글쎄, 무서워서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 목표를 가진다는 게 어쩌면 욕심을 부린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때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나요?”

영국 특유의 발음으로 말을 건네는 이는 넉넉한 덩치에 머리는 반쯤 벗겨진 장년의 남자였다.


그의 맞은 편에는 이제 중학교쯤 다닐 것 같은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딱 봐도 부녀지간이 분명해 보였다.
영어를 잘하는 연희가 대답했다.

“맞아요. 단번에 맞히다니, 혹시 한국을 잘 아세요?”


“물론이에요. 쏜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아... 저도 좋아해요.”

대한민국의 최고 스포츠스타인 쏜을 거론한 그는 한참동안 쏜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일장연설을 해댔다.


연희가 간간히 옆에서 통역했고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자 그는 신이 난 듯 열변을 토하다가 이내
물었다.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연인 사이인가요?”


“맞아요. 영국에 일하러 왔다가 일을 마치고 휴양지에서 쉬는 중이에요. 이곳은 참 조용하고 아름다운 지역이라
한국에 가서도 또 오고 싶어질 것 같아요.”
“브라이튼은 환상적인 곳이죠. 아름다운 해변,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끝내주는 축구팀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렇군요.”

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계속 화제를 축구로 끌고 갈 듯한 남자를 보며 서서히 지쳐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훈이 끼어들었다.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이즈 그레이트 팀.”

엄지를 치켜 세우는 영훈을 보며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좋은 팀이에요. 빅 6 에게는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 지역 사람들은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자부심을 느끼고 있죠.”

연희는 통역해주면서 의외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해외 축구도 즐겨 봤어요?”


“즐겨 보는 정도까지는 아니야. 가끔 재방을 하면 보는 수준이지. 절은 새벽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밤늦게 축구
보면 다음날 일어나질 못해. 대신 축구 게임을 좋아했지.”

이때 남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예요. 강등 당하게 되면 지역 주민들은 크게 실망할 겁니다.”

시즌이 마무리 되어 가는 프리미어 리그는 이제 고작 세 경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애초 강등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브라이튼은 시즌 막바지 10 연패라는 악몽 같은 흐름을 바꾸기 위해 감독을
교체하는 강수를 두었다.
세 경기 중에 최소 두 경기는 이겨야 남을 수 있다고 했던가?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새로운 감독이 온다고 하던데요? 쉐인 랄프 감독 맞나요?”


“알고 있군요. 좋은 감독이니까 아마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잘 되길 바랄게요.”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금했던 연희가 물었다.

“왜?”
“아... 그 새로 온다는 감독 있잖아.”
“응.”
“아마 팀을 더 망쳐 놓을 거야.”
“어떻게 알아?”
“얼굴에 덕이 없거든.”
“서양사람들 관상도 보는 거야?”
“다 맞는 건 아닌데 그래도 특징적인 면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 같아. 서양 사람들이 다 코가 크다고 해서 그
모양이 비슷한 건 아니거든. 나도 이게 맞을까 생각해봤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냥 보여.”
“와... 그럼 이제 브라이튼 앤... 하여튼 그 팀은 떨어지는 거야?”
“그럴걸? 덕이 부족한 건 둘째치고 기가 부족해. 원래 뭐든지 흐름이라는 게 중요하거든. 게으른 사람이
한순간에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하려면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지. 부모님이 쓰러진다든가,
사랑하던 여자가 떠난다든가, 뭐 그런... 회사도 팀도 마찬가지인 거야.
무너지려는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아주 강한 기를 가진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하는데 침침한 눈을 보면 기가
약한 사람이야.”
“정말?”
“그리고 턱이 약해서 아랫사람을 다스리지도 못할 거고, 천창이 약해서 명예운도 없어. 좋은 감독이 되지 못할
거고 아마 브라이튼은 강등 당할 거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고작 해봐야 남의 나라 축구팀이기에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옆에서 갑자기 어설픈 한국말이 들려왔다.

“진짜로 브라이튼이 강등 당할 거라고 생각해요?”

영훈이나 연희나 둘 다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리니 남자의 딸로 보이는 여자애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 한국말... 할 줄 아니?”


“전 ATS 팬이에요. 한국말 배웠어요. 진짜 쉐인 랄프가 그런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영훈은 마음이 아팠다.


좋아하는 팀이 떨어진다는 말이 어린 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테니.

“아니야. 그냥 우리끼리 추측한 거야. 원래 영국에서도 내기 많이 하잖아. 그것처럼 아마추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까 신경쓰지 마. 브라이튼은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여자아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영훈을 보았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천천히 한국어를 내뱉었다.

“우리 아빠는 브라이튼의 구단주예요. 강등은 안 돼요.”


“어?”
“아까 한 말 진짜인가요?”
“아니야. 그냥 허풍이었어. 여기 언니한테 잘 보이려고 허풍 친 거야. 허풍, 그러니까 거짓말인 거지.
진짜야.”
“거짓말.”
“응?”
"아빠! 저 사람이 우리 팀 강등 당할 거래."

영훈은 입이 방정이라는 말을 다시금 실감했다.

< 브라이튼 해변에서(1) > 끝

< 브라이튼 해변에서(2) >

평소 ATS 의 국위 선양에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끼던 영훈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ATS 가 원망스러워졌다.


한국도 아니고 영국의 음식점에서 옆자리에 앉은 영국 여자아이가 한국말을 알아들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 강등당할 거라고 말한 구단의 구단주라면 이건 정말 운이 없어도 더럽게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당신, 브라이튼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군! 어디 팬이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아니면 설마 크리스털
팰리스인가? 아, 맞아. 크리스털 팰리스에 한국인 선수가 있었지? 리였나?”

관상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훈은 암담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전 어느 팀의 팬도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쏜이 소속된 토튼햄을 조금 응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브라이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런 말하면 믿을지 모르겠지만 브라이튼이 싫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쉐인 랄프 감독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거라
고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그저 흔한 축구팬의 생각이라고 여겨주세요. 축구팬들은 다 자신만의 전략이 있고
선호하는 선수가 있으니까요.”
“······.”

그는 연희의 통역을 듣고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는 뭐라 하지 않은게 원래 어떤 스포츠든 팬들은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해대니까.

감독의 전술이 어떻고 어떤 선수가 월클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싸우는 팬들의 말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 이유가
없기는 했다.
본래 스포츠 팬들은 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의 딸이 또다시 냉큼 끼어들었다.

“저 사람이 쉐인 랄프가 뭐가 약하대요. 그리고 브라이튼은 쓰러지는 회사처럼 무너질 거라고 했어요. 또, 선수
관리가 형편없을 거고 그는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래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연속해서 폭탄을 뻥뻥 터뜨리는 여아자이를 보고 연희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얘, 이 사람이 한 말은 선수 관리가 형편없을 거라는 게 아니라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 힘들 거라는 말이었어.
그리고 명예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명예를 얻기 힘들다는 말이야. 명예운, 명예를 얻기 힘든 운을 타고
났다는 거지.”
“그럼 약하다고 한 건 뭐였어요? 기? 아까 뭐가 약하다고 했죠?”
“그건 음··· 스타워즈 봤지? 거기에 포스라고 나오잖아. 쉐인 랄프 감독은 그 포스가 부족하다는 말이야.
동양에서는 그걸 기라고 말해. 게다가 쓰러지는 회사처럼 무너질 거라는 말은··· 음··· 매출이 떨어지는 회사든
계속 패배를 당하는 스포츠팀이든 반전의 기회를 맞으려면 리더가 아
주 강한 포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다는 말이었어. 이해했니?”

연희는 여기까지 하고 브라이튼의 구단주에게 말했다.

“들었다시피 조금 황당한 내용이죠? 원래 동양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중요시해서 사람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을 유추하고는 해요. 그리고 이 사람은 그런 부분에서 아주··· 대단한 사람이고요.”
“얼굴에서 운명이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고? 그게 무슨···.”

어이없다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연희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동양에 흔히 있는 그런 학문 중 하나니까요.”


그제야 남자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굉장히 특이하고 독특한 학문이군요. 허··· 이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K-POP 이라는 걸 듣더니 한국말을 제법
하기 시작했는데 당신들 말을 알아들으니 공부를 허투루 하진 않았나 보네요.”
“한국말을 너~무 잘하네요. 자랑스러우시겠어요.”
“하하,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굉장히 똑똑해요. 어쨌든 잘 알았습니다. 동양에는 참 다양한 학문이 있군요.
재미있었어요. 브라이튼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입니까?”
“너무 예쁜 동네라 한 사흘 정도 머물면서 쉴 것 같아요. 오늘 뜻하지 않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네요.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즐거운 식사 하세요.”

영훈과 연희는 이때다 싶어 얼른 가게를 나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저 나이의 여자애가 한국말을 저렇게 잘 할 줄이야.”

영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영국은 인종차별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어서 괜한 봉변을 당할까 걱정했었다.

“그러게. 그래도 잘 알아들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웃기긴 하네. 영국에서 관상을 설명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영훈 씨도 이제 외국이라고 한국말로 크게 떠들면 안 되겠다.”
“맞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 좋은 거겠지?”
“좋은 일이지. 영훈 씨만 조금 조심하면 되잖아.”
“하하, 그건 그래. 좋은 자리 놓쳐서 아깝네. 아까 그 자리 진짜 좋았는데.”
“나 거기 말고도 좋은 곳 알아. 영국에서 몇 안 되는 맛있는 음식점인데 여기서 한 10 분 걸리나? 하여튼 안
멀어.”
“그럼 거기로 갈까?”
“응. 그런데 브라이튼인가 하는 그 축구단 강등되면 많이 안 좋은 거야?”
“엄청난 손실이지. 프리미어 리그는 강등 안 당하고 유지만 하고 있어도 1 년에 천억 넘게 들어오거든.
강등당하면 십 분의 일로 줄어든다고 했었나?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비슷할 거야.”
“그럼 엄청 걱정되겠다.”
“구단주라고 하잖아. 부자야. 아마 너보다 돈 많을걸? 자고로 재벌이랑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래? 그럼 됐고.”

둘은 해변길을 따라 손을 꼭 잡고 걸었다.

“허풍쟁이들이었어. 아직도 저런 미신을 믿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네. 설마 아직도 무술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와호장룡이라고 아니? 굉장히 유명한 홍콩 무술 영화였는데 아빠도 그 영화를 봤단다. 그냥 상상
속의 무술 영화였어. 차라리 그런 영화보다 반지의 제왕이 훨씬
더 영화 같단다.”
“아빠는 그 아저씨의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설마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
“한국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내용이 더 심오했어요. 그리고 아주 진지했단 말이에요. 듣고 있던 그
여자도 마찬가지고요. 나중에 설명할 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꼭 아빠랑 엄마랑 싸운 뒤에 내가 왜
싸우냐고 물어보면 ‘넌 알 필요 없단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어요.”
“착각이야, 앨리. 그리고 세상에는 저런 믿음직한 허풍이 상당히 많단다. 그걸 가려낼 수 있어야 해. 알겠니?”
“네, 알았어요. 그런데 내일 경기 이기겠죠?”
“당연하지. 이길 거야. 노리치는 강등 확정인 꼴찌잖아. 경기력이 형편없다고. 게다가 홈이야. 반드시 이길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알겠어요.”

그렇게 그림 같은 해변을 배경으로 오붓하게 식사를 즐긴 부녀는 곧장 브라이튼의 홈구장인 American Express
Community Stadium 으로 이동했다.
내일 꼴찌인 노리치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구단 관계자들은 어두운 표정 속에서도 한 줄기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내일 경기만 확실히 잡으면 나머지 두 경기 중에 한 경기만 이겨도 강등 탈출이 확실하니까.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훈련장에 도착한 구단주 맥스 크롤리는 아주 신경질적인 고함소리를 들었다.

“이런 젠장,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풀백이 튀어나간 자리를 커버해줘야 한다고. 왜 어슬렁거리는 거야!
너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치고 나가라고! 모페이! 집중하라고! 눈을 어디에 두는 거야!”

맥스 크롤리의 눈에 감독이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며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아마 그 이상한 동양인 커플을 만나지 않았다면 분명 저 모습이 선수들을 독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 그 동양인 여자의 말이 귓가에 맴돌면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게 아니라 마음대로 안 되는
선수들을 보며 대책 없이 짜증 내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았다.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다가 조금만 실수하는 선수를 보면 가차없이 비난을 퍼붓는 감독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양인 여자가 했던 말 중에 하나하나 들어맞지 않은 말이 없었다.
게다가 선수들을 비난할 때 쓰는 용어들에는 어린 딸인 앨리가 듣기 민망한 표현들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온 맥스 크롤리는 훈련하는 모습을 다 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빠, 왜 그냥 가는 거예요?”
“내일 중요한 경기잖니. 아빠가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걸 알면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가 괜히 더 긴장해서
훈련을 제대로 못 할 수도 있고.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치솟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감독을 불러 한마디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거다.
그렇게 부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지우며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여기 브런치 괜찮다고 했는데 막상 먹으니까 다른 데랑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치?”

영훈이 한식을 좋아하는 걸 알기에 연희가 슬쩍 눈치를 본다.

“어쩔 수 없잖아. 영국이니까. 조식도 지겹고.”

브라이튼 해변에서의 휴식은 꿈만 같았다.


그림 같은 해변과 아름다운 여인이 함께하는 휴식은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음식 맛이 없기로 유명한 영국에서도 미슐랭 별이 찍힌 곳만 돌아다녔지만, 한국을 떠난지 5 일 째에 접어드니
한식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된장찌개, 부대찌개, 알이 꽉 찬 간장게장과 불맛이 가득한 매콤한 제육볶음, 그리고 뜨끈한 돼지국밥과 뼈다귀
해장국이 당겼다.

“히히··· 내가 비행기 표 알아볼게. 우리 너무 일찍 돌아가서 엄마가 싸운 줄 아는 거 아니야? 아, 그런데


한국 돌아가자마자 일하기 없기. 나랑 놀아.”
“그래. 나라고 일만 좋아하는 건 아니야. 내가 얼마나 노는 거 좋아하는데.”
그 노는 것이 게임에 상당히 치중돼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영훈이 고개를 돌리다가 풀이 팍 죽은 가게 주인의 얼굴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다.
저 얼굴은 영훈이 현진물산에 입사하기 전에 숱하게 보아왔던 표정이다.
대출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하는 날 채무자를 찾아가면 항상 저런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왜?”
“어··· 가게 주인 보니까 뭐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어서.”

연희가 고개를 돌려 가게 주인을 살피고 난 뒤 말했다.

“그러네. 장사가 잘 안되나 보다. 우리 입맛에는 느끼한데 현지인이 먹었을 때도 별론가? 그런데 여기 별점
높았는데? 평도 좋았고?”
“대출이 많은가봐.”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가게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런데 이후 가게 주인과 친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더니 똑같이 죽상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어차피 음식도 거의 먹었겠다, 배에 더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아 둘은 얼른 가게를 나왔다.
음식을 먹었으면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은 커피숍.
해변을 바라보며 오붓하게 커피를 즐기려고 가게를 방문하니 점원들과 주인의 안색이 똑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혹시 무슨 기사 난 거 있어? 왕실 사람이 죽기라도 한 건가?”


“그런 거 없었는데?”

연희는 음료를 시키고 영훈은 자리를 잡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있었군!”

놀랍게도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온 이는 브라이튼의 구단주 맥스 크롤리였다.


그는 연희가 음료를 들고 영훈의 자리로 오는 걸 잠시 지켜보더니 다가와 말했다.

“찾고 있었어.”
“우리를요?”

연희가 물으니 그가 일단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

“맞아. 이 주변 상인들에게 젊고 아름다운 동양인 커플에 대해 수소문을 했더니 운 좋게 찾을 수 있었어. 솔직히


여길 떠났을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르네.”

이쯤 되니 영훈이나 연희는 왜 자신들을 찾았을지 짐작이 되었다.


핸드폰으로 경기결과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꼴등인 노리치에게 4 대 0 으로 패배한 기록과 함께 브라이튼의
경기력을 비판한 기사들이 보였다.
영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제가 강등권에서 탈출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이번 시즌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어. 노리치와의 경기에서 못해도 비겼어야 했고 져도 이렇게 큰 점수 차로
지면 안 됐거든. 남은 경기는 리버풀과 번리야. 더 이상 감독을 바꿀 수도 없는 상황에서 두 게임을 다 이길
수는 없겠지. 우린 끝난 거야. 완전히.”
그의 눈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그런데 왜 찾으셨습니까?”
“투자자들은 데이터를 좋아하고 선수들은 미신을 좋아해. 난 투자자로서 미신 같은 루틴에 얽매이는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사람이 절박한 곳에 몰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매달리게 된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요?”
“쉐인 랄프의 언행, 선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선수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 같은 부분들··· 전부 자네가
한 말에 포함되어 있었어. 마치 신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네.”

절절한 그의 말에도 영훈의 뚱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봤자 남의 나라 축구팀 이야기였으니까.
축구단을 운영하는 건 관심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도와준다고 마음먹어도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게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 이유인가요?”

영훈의 모습에 맥스는 잠시 코를 문지르더니 말했다.

“프리미어 리그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군. 그래, 그렇다면 말이야 혹시 크루즈 여행 좋아하나? 언제든 말만
하게. 최고급 크루즈 선을 타고 전 유럽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겠네.”
“크루즈요? 혹시 여행사를 운영하십니까?”
“하하, 여행사가 아니라 크루즈선사를 운영하고 있네.”
“아··· 그래요? 크루즈선···.”

때마침 일감이 부족한 군산조선소를 떠올린 영훈은 그제야 관심이 조금 생기기 시작했다.

< 브라이튼 해변에서(2) > 끝

< 브라이튼 해변에서(3) >

그럼에도 영훈의 뚱한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크루즈선 한 척에 얼마인데 고작 조언 좀 해줬다고 덜컥 발주를 할까.
그런데 그 모습이 크루즈 여행에 영 관심 없어 하는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맥스는 조금 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꿈이 있나?”
“네?”
크루즈선사를 운영하는 구단주가 저런 걸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꿈 말이야. 난 꿈이 있어. 난 어려서부터 아주 부유하게 살아왔지만 항상 외로웠네. 제대로 된 친구가 없었거든.


그렇다고 나빴던 건 아니야. 좋은 여자를 만났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들을 얻었지.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을 인수하게 됐네. 그때는 그저
챔피언십에 있던 구단을 프리미어 리그에 올려놓고 비싸게 팔려는 생각이었지.”
“그런데요?”
“막상 프리미어 리그에 올려놓으니까 팔기 싫어졌어. 클럽을 프리미어 리그에 올려놓았을 때 모든 지역민이
하나가 돼서 기뻐하던 그 순간, 그때부터 브라이튼은 그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축구단 이상의 것이
됐거든.”
“······.”
“혹시 어제와 오늘 다니면서 지역민들의 얼굴을 본 적 있나? 아마 상당수의 얼굴이 어두웠을 거야.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클럽이 강등당했거든. 축구클럽은 그저 공놀이를 즐기는 선수단에 끝나는 게 아니네. 구장을
관리하는 인부와 선수를 관리하는 의료진, 그리고 스낵코너에서 음식
을 파는 상인들··· 셀 수가 없네. 내 꿈은 별거 아니야. FC 바로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 같은 팀을 만드는 게
아니라, 브라이튼이 프리미어 리그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 되는 거라네.”
“그렇군요.”

그의 진심 어린 표정에도 사실 영훈은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진 건 아니었다.


그가 정말 매년 천억이 넘게 들어오는 중계권료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지역민을 생각해서 그런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영훈은 생각이 깊어졌다.
그를 꼬셔서 크루즈 선을 수주받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하필 이 시기에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진물산을 HS 그룹의 중심으로 올려놓고 어쩌면 회사원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때였다.
연희는 좋은 CEO 가 될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좋은 CEO 가 어떤 CEO 인지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도 많고, 지금부터 배운다고 해도 수십 년 동안 경영과 경제를 배워왔던 다른 훌륭한 기업인들에 비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말했듯이 이번 시즌은 끝난 거나 다름없어. 난 다음 시즌을 준비하려고 해. 그거 아나?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당한 클럽이 다음 시즌 바로 승격을 해내지 못하면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한다네. 선수들을 헐값에 넘겨야
하고 선수를 사 오며 생긴 부채는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렇
게 무너진 클럽이 한둘이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시즌에 반드시 승격을 이뤄야 하네. 그런데··· 혹시 자네가 말한 그거 말이야. 얼굴을
보고 정말 운명과 성격을 유추할 수 있나?”

영훈은 조금 고민하다 말했다.

“결국 원하는 건 앞으로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고 싶은데 저더러 봐달라는 말이군요?”
“맞네.”
“고작 몇 마디의 말을 믿고 구단을 운영하실 겁니까?”

영훈이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걸 보고 맥스 크롤리가 말했다.

“자네가 한 말이 아닌가?”
“동양인도 아니고 영국 사람이 그 말을 믿는 게 신기해서 그럽니다.”
“사실 나도 백 프로 확신하는 건 아니네.”
“백 프로 믿지 못하면 결국 제 의견을 신뢰하지 못할 테니 도움을 드린다고 해봐야 결국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어쨌든 구단주님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부디 훌륭한 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


이건 밀당이 아니었다.
내심 크루즈선 건조가 욕심나긴 했지만 스케일이 너무 컸고, 괜히 나섰다가는 나중에 동양인 주술사가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올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선을 긋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을 열고 맥스의 딸이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과 헐떡이는 걸 보니 급하게 뛰어왔나 보다.
그녀는 아빠와 동양인 커플을 확인하고는 다가왔다.

“아빠! 헤이즐 언니가 이 사람들을 찾았다고···.”


“그래, 흥분하지 말고. 아빠가 찾았단다.”
“대단해요. 아빠가 찾을 줄 알았어요. 뭐라고 해요? 도와준다고 하죠?”
“물론이지. 도와준다고 하셨단다.”

맥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딸에게 확언을 한다.


연희는 물론이고 이제 아주 기초적인 리스닝을 할 줄 아는 영훈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적어도 확신 어린 표정의 ‘오브 콜스’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왜 오브 콜스라고 하지?’라고 혼자 고민할 때 연희가 나섰다.

“구단주님?”
“원하는 걸 말해보게.”

연희가 영훈을 돌아보았다.


영훈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말했다.

“전화 한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영훈은 바로 가게를 나와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주조선해양 송유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합니다. 저녁 시간일 텐데 급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크루즈선 수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루즈선이요? 갑자기 크루즈선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어쩌다 보니 영국에서 크루즈선사를 운영하는 대표를 만나게 됐거든요. 혹시 친해져서 뭐 하나 건질 수 있나
싶기는 한데 뭘 아는 게 있어야 제안을 하든 협박을 하든 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음··· 일단 우리는 크루즈 선을 만들기 힘듭니다. 일단 크루즈 선은 사람을 싣고 다녀야 하기에 진동이 적어야
하고 부자들을 태워야 하기 때문에 높은 퀄리티의 자재가 필요합니다. 진동을 줄이는 기술은 개발하고자 하면 못
할 건 없는데 내장 인테리어는 단순히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
서 되는 게 아닙니다.]
“안목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고급 크루즈선에 들어가는 자재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수입해와야 하는데 그렇게 수입해와야
하는 자재들은 운송하는 비용도 엄청납니다. 한두 척 만들고 끝낼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요가 있다고 한다면
비용은 떨어뜨릴 수 있는데 그 정도로 발주를 할 회사는 없을
거라는 게 문젭니다.]
“으음··· 문제가 많군요.”
[한국에서 한번 시도했다가 결국 망했고, 일본에서도 크루즈선을 만들려다가 조선소 하나가 휘청거렸습니다. 납기
지연 때문에 2 척을 척당 2 조 원 넘게 손해를 보고 넘겼거든요.]
“그럼 할 필요가 없는 거네요?”
[하··· 이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크루즈선박은 일단 기술을 획득하고 어느 정도 경험과 신뢰도를 얻게 되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부가가치를 안겨줍니다. 국내 조선업체들 어디도 현재는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지만 크루즈선박을 건조하는 꿈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꿈이죠.]
“그렇군요. 축구를 하는 사람들은 다들 유럽에서 뛰고 싶은 것처럼.”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미안했습니다.”
[아닙니다. 이런 전화는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이 다시 가게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 기업인입니다. 자원을 사고팔며, 건설회사와 호텔 체인, 그리고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맥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니 도와달라고 하셔야 할 게 아니라 거래를 하자고 하셔야 맞습니다. 합당한 거래에는 응할 생각이
있으니까요.”
“허허··· 이런···. 한국에서 온 커다란 사업가를 고작 크루즈 여행으로 꼬시려고 했으니 창피하기 그지 없구만.
좋네. 거래하지. 그런데 거래를 하려고 하니 자네 쪽 상품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네.”

영훈이 미소 지었다.
가지고 있는 선박을 이용해 여행 좀 시켜주며 싸게 몇 마디 들어보겠다는 의도였던 거다.
들어보고 신뢰가 갈 것 같으면 이후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 추가적으로 고려하는 사항 정도로 점수를 반영했을
거다.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는군요. 맞습니다. 고작 전해 들은 몇 마디로 구단 운영을 결정짓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럼 거래를 포기하는 건가?”
“도움이라면 모를까 거래를 포기할 순 없지요. 따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앨리라고 부르게.”
“좋습니다. 앨리의 생년월일을 아십니까?”
“그거는 왜?”
“상품에 불량이 있는지 체크하는 거라고 생각하시죠.”

맥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2007 년 2 월 6 일에 태어났네.”

영훈은 이제 앨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반갑다. 악수 한번 할까?”
앨리는 한국말을 알아듣기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영훈과 악수를 나누었다.
대낮의 뜨거운 열기가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영훈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하다가 말했다.

“앨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테니 틀린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응? 내 딸에 대해서 말인가?”
“네. 그러니까 잠깐 앨리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 좀 하겠습니다.”
“싫어요.”

앨리는 싫다고 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맥스가 한참 달래자 못 이기고 가게를 나갔다.


물론 창문 너머로 무슨 이야기를 하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저 나이에 한국말까지 알아듣는 똑똑한 아이니 혹시나 입술만 보고 말을 알아챌까 괜히 무서워져 영훈은 슬그머니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상당히 똑똑했을 겁니다. 말도 빨리 배웠을 테고.”


“뭐, 그렇긴 했네.”

맥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어진 영훈의 말에 서서히 얼굴이 굳어갔다.

“음악을 해도 잘했을 테고 미술을 해도 잘했을 겁니다. 춤도 잘 췄을 거예요. 운동신경이 뛰어나 체육도


잘했겠죠. 성적도 좋았을 겁니다. 대신 자라면서 부모를 힘들게 할 겁니다. 음··· 앨리의 엄마가 둘 이상으로
보이는데 맞나요?”
“둘 이상이라고?”
“맞습니까?”

맥스는 충격을 받았는지 손끝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게··· 엄마가 둘이라는 표현은 난생처음 듣는군. 그런데··· 맞네. 앨리의 생모는 따로 있어.”
“역시 그렇군요. 아마 태어날 때부터 힘들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난산이었네. 의사가 그러더군. 2 차대전 이전이었다면 앨리 엄마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초년에 물과 상극이니 아마 물로 인해 사고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앞으로 물놀이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맥스는 얼빠진 표정으로 답했다.

“다섯 살 때 호수에 빠져 죽을 뻔했네. 브라이튼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사고 이후로 바다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어.”
“앞으로도 종종 힘들게 할 일이 생길 텐데 아빠가 가진 부가 앨리를 지켜줄 겁니다. 다만···.”
“다만?”
“남자를 보는 눈이 없고 마음이 여리니, 생각이 어린 이십 대 초반에 이상한 남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맥스는 목이 말랐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 가더니 맥주 한 병을 사가지고 와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야기가 대충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앨리는 밖에서 문을 두드려댔고 맥스는 그녀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비밀 이야기했죠?”
“나중에 이야기해주마.”

맥스는 소란을 피우려는 앨리의 입을 막고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생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끝내주는 상품이었네. 가격이 비쌀 테지?”
“아마 그럴 겁니다.”
“불러보게.”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한국에 군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군산이라는 지역은 브라이튼과 달리 내세울 수 있는 축구클럽도 없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도 아니에요. 그런 군산이라는 도시를 이끌어가는 산업 중 하나가 조선소입니다.”
“자네 회사겠군.”
“맞습니다. 가동이 중단됐던 조선소를 우리가 매입했고 고통받던 군산 시민들은 다시 가동을 시작한 조선소
덕분에 활력을 찾아가고 있죠.”

맥스 크롤리는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 그러니까 선박을 하나 주문해달라는 말인가?”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나가 아니라 앞으로 꾸준히 주문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하하하, 이봐. 크루즈선박 하나가 얼만지 아나? 럭셔리급 크루즈선은 6 억 파운드가 넘네. 그런 선박을 경험도
없고 기술도 없는 자네 회사에 맡기라는 말인가?”

연희는 6 억 파운드가 약 9 천억이 넘는다고 알려줬다.


약 2 천억이 넘는 LNG 선을 세척 수주하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영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렵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렇게 큰 크루즈선을 발주한다고 해도 우리는 받을 여력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기간을 두고 서로 잘 협력하면 못 할 거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제 상품의 가격은
그렇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축구 선수 한 명을 길러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을 생각하십시오. 유소년 축구단부터 2 군을 거쳐 하위
리그에 임대로 다녀옵니다. 그러고 나서 1 군에서 뛸 수 있지요.”
“일리가 있기는 한데,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줘야 할 이유는 없어. 가격이 너무 높아.”
“이런··· 전 아까 당신의 이야기를 진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역 축구클럽이 지역 주민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에요. 솔직히 우리 회사가 저가 크루즈선을 수주한다고 우리한테 많은 이익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손해만 안 봐도 다행일 겁니다. 아니, 초반에는 상당한 손해를 볼
겁니다. 게다가 만약 상품에 하자라도 발견되면 당신은 이후 추가적인 발주를 하지 않을 테고 우리는 아주 큰
손해를 보겠죠.”
“······.”
“핵심은 이겁니다. 당신은 브라이튼 주민의 행복을 언급했고, 난 거기에 군산 주민의 행복을 올려놓은 겁니다.
불공평한 거래라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아까 저에게 한 말은 전부 구단의 가치 상승과 중계권료를 얻기 위한
거짓이었군요.”

맥스 크롤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사람을 궁지에 모는 재주가 있군.”


< 브라이튼 해변에서(3) > 끝

< 브라이튼 해변에서(4) >

“당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꿈이 있지 않습니까?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지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맥스는 앨리를 옆에 앉혀 놓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울의 무게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니 그래, 그 주장 받아주지. 아직 누가 더 이익일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누가


더 이익이냐고 주장하는 순간 서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일 테니까.”
“맞습니다.”
“크루즈선을 잘 모르지?”
“아직 한번도 건조해보지 않았습니다.”
“크루즈선은 몇가지 등급이 있네. 그중에 가장 낮은 등급을 콘템포러리라고 하는데 선박의 크기는 콘템포러리가
가장 크네. 대략 7 만 톤 급부터 크게는 22 만 톤에 이르는 초대형 선박도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하겠나?”
“낮은 등급의 선박이라고 막 발주할 순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높은 등급인 디럭스나 럭셔리급 선박은 3 만 톤에서 7 만 톤 정도야. 어떤게 만들기 쉬울까?”
“낮은 등급이겠죠?”
“그렇네. 등급이 올라가면 크기는 작아지지만 신경써야 할 부분은 더 많아. 그래서 작은 크루즈선이라고 해도
고작 앞바다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배가 아니라면 상당한 모험을 해야 한다네.”
“그렇군요.”

영훈이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참 속을 모르겠군. 결국 급한 건 나라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을 재촉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까 그렇게 말해놓고? 내가 말을 되돌리는 순간 앨리 앞에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인데도?”
“모든 부모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거짓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항상 진실을 말하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인생이라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요.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도 선박 한두 번 발주하고 말 거라면 좋은 거래는
아닙니다.”
“그렇겠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이 크루즈선을 수주했다가 망했다지 아마?”
“꾸준히 발주를 받을 수만 있다면 손해 조금 보는 건 괜찮습니다. 우리 회사는 납기는 지연시킬지 몰라도 원하는
수준의 배를 건조할 겁니다. 그게 몇 번 반복되면 납기 지연 없이 원하는 수준의 배를 인도할 수 있을
겁니다만... 이것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군산조선소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신과 당신 회사에게 큰 고마움을 느낄 거라는 겁니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자네는 참 말을 잘 하는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입장에서 원하는 수준의 선박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야
문제될 건 없네. 인도 시기가 늦어지면 그게 골치 아프지만 조금 일찍 주문하면 되는 일이지. 금융 부분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건 장기적인 파트너 관점에서 서로 조금씩 양
보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거야.”
“훌륭한 생각입니다.”
“우리 직원들은 무척 까다롭네. 자네 회사 직원들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 거야. 처음에는 상당한 손실을 볼
거네. 말했듯이 대충 적당히 작은 선박을 발주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거든.”
“알고 있습니다.”

맥스는 영훈의 눈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예전에는 크루즈선의 주요 고객들이 유럽과 미국의 부자들이었네. 하지만 근래 들어 그 중심축이 아시아 쪽으로
변화하고 있어. 아마도 중국 때문이겠지. 그 때문에 3 년 전에 싱가포르에 새로운 법인을 세우고 운행을 시작했어.
결과는... 나쁘지 않더군.”
“축하드립니다.”
“올해 말에 약 12 만 톤 규모의 프리미엄급 선박을 발주할 생각이었네. 가능하겠나?”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는 씨익 미소짓더니 말했다.

“직원들을 보내게. 회사에서 최대한 협조해줄 테니까.”

협상은 끝났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직 우리 거래는 끝난 게 아닌 거 알지?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나?”
“일단 한 가지를 반드시 지켜주셔야 합니다.”
“또 뭔가?”
“그 어디에도 제가 가진 상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아야 합니다. 외부에 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다면
모든 계약은 무효입니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멍청한 놈으로 불리고 싶지 않네. 걱정하지 말게.”
“그럼 이렇게 하시죠.”

영훈이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야 간단했다.


직접 만나는 것.
지금은 시즌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구단주와 같은 감독을 만나러 다니는 건 어려웠다.
시즌이 끝나고 5 월 중순 경에 다시 영국으로 오겠다는 말로 1 차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그때 다시 영국에 올 때는 영훈 혼자가 아니라 해주조선해양 기술자들이 대거 같이 움직이게 될 거다.
이후 맥스 크롤리는 영훈에게 한국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 호텔 체인은 무엇이고 건설회사는 어느
정도 규모냐 등등 많은 것을 물었다.
그는 특히 조선소에 관심이 많았는데 군산조선소가 왜 가동이 중단됐고 중단된 조선소를 왜 매입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물었다.

“이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세. 내가 식사를 대접하지.”


“영국 가정식 말인가요?”

멈칫하는 영훈을 보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방장은 프랑스 사람이라네.”
“아~”

해주조선해양 본사 대회의실.
긴급 소집된 회의에 십여 명의 임원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들을 향해 송유철 사장이 입을 열었다.

“방금 영국에서 연락이 왔어. HS 물산 기조실 최영훈 상무가 업무차 영국을 갔다가 큐나드 크루즈 사장하고
우연찮게 만난 모양이야.”
“큐나드 크루즈 말입니까? 갑자기 큐나드 크루즈 사장은 왜 만난 겁니까?”

김상중 최고재무책임자이자 부사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크루즈선을 수주할 생각인 것 같아.”

김상중 부사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다 죽어가던 회사에 겨우 산소호흡기 달아놨는데 6 백만 불의 사나이 만들겠다고 가슴 열겠다는 거


아닙니까? 절대 안 됩니다.”
“잘 생각해, 큐나드 크루즈야. 다른 허접한 곳도 아니고 큐나드 크루즈라고. 영국 왕실 여왕의 이름을 딴 6 성급
크루즈를 운영하는 회사의 수주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더욱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뭐가 있습니까? 예전에 페리 몇 척 만들어 봤다고 덤벼들 수 있는
사이즈입니까? 선박에 놓을 탁자 하나, 소파 하나까지 최고급이어야 합니다. 배 안에 수영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연회장에 심지어 오페라 하우스까지 넣어야 한다고 할 텐데, 우리 그
거 만들어 본 경험은 있습니까?”

송유철 사장은 그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네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그런데 우연찮게도 HS 그룹이 가진 계열사를 보면 말이야... 참 공교롭지


않나?”

김상중 부사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송 사장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찬찬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HS 건설이 가진 설계인력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인도에 인천공항 급
국제공항을 수주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 게다가 HS 관광은 어때? 국내외 5 성급 호텔들을 가지고 있지.
그들이 가진 인프라와 경험을 바탕으로 호화 객실을 꾸미는 게 과연 불가
능한 걸까?”
“미쓰비시 중공업의 실패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알아. 안다고. 그래서 의견을 들어보자고 모인 거야. 양준영 상무는 어떻게 생각해?”

특수선사업부 양준영 상무는 김 CFO 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다가 말했다.

“시도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이긴 한데...”

김 부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양준영이! 이거 손실규모가 조 단위로 나올 수 있어. 네가 이거 책임질 수 있어?”
“아니,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시도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이긴 한데 어렵지 않을까... 설계도도 없고. 여간
까탈스럽게 굴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송유철 사장이 빙그레 웃었다.

“큐나드 크루즈에서 협조해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협조해준다는 말입니까?”
“우리쪽 기술자 불러서 교육시켜줄 수 있다고 하던데?”

양준영 상무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계도는 아닐 테고, 싹다 훑어보게 해준다는 겁니까? 어떤 선박을...”


“퀸 엘리자베스호라고 들었어. 9 만 톤 급이라던가? 원한다면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다고 전했어. 하지만
그래도 품질검사는 굉장히 빡빡할 거야.”
“그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 선박에 들어가는 자재들과 인테리어만 협조해줘도 엄청난 기회가...”
양 상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부사장이 소리쳤다.

“협조해주면 배가 뚝딱 나와? 사장님, 이거 받으면 1 년만 지나도 감당 못 합니다. 10 만 톤 규모면 1 조짜리


프로젝트인데 선수금으로 얼마나 주겠어요? 고작 2 천억? 많이 받으면 3 천억? 그거 가지고 인도 못 합니다.
당장 은행에서 최소 5 천억 땡겨 와야 이거 마무리해요. 그것도 납기 지
연 안 됐을 때 상황입니다. 미쓰비시가...”

이번에는 송유철 사장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우리 재무팀 입장은 불가하다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그건 오케이. 이제 다른 부서 의견도 들어보자는 거야. 특수선사업부 입장은 한번 해볼 만하다는 거 맞지?”

양준영 상무는 부사장의 눈치를 보다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네...”

물론 아주 미약한 목소리였다.

“이석진 상무 생각은 어때?”

생산지원본부의 이석진 상무는 냉큼 대답했다.

“큐나드 크루즈가 그 정도로 협조적이면 상당한 기회가 되긴 할 겁니다. 납기를 어느 정도로 잡는지가 일단
중요할 텐데 충분히 준비하고 시작한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부사장님 말씀대로 이건 배를 만들
수 있다 하는 거지, 이 프로젝트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줄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뭐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기조실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구요?”
“발주는 올해 말로 생각하고 있고 만약 우리가 맡게 되면 그 전까지 최대한 협조해볼 생각이라고만 들었어.”
“계약은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만약 우리가 오케이 하면 메일로 계약조건 확인하고 5 월 중순에 영국으로 가는 거야. 가서 계약 확정짓고
기술자 데리고 크루즈 여행 한번 하는 거지.”
“여행을 한다구요?”
“그럼? 그 큰 배를 놀리겠어? 지중해 한바퀴 도는 동안 기술자들은 배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바닥은 뭘
깔았는지, 식탁은 뭘로 했는지, 벽면엔 뭘 발랐는지, 엔진 소음은 어떻게 잡았는지 눈치껏 배워 오는 거야. 누가
갈지는 모르겠지만 졸라게 부럽네. 하여튼 지금까지 최 상무가 전해
온 말로는 그래. 어떻게 생각해?”

이석진 상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정도 조건이면 더 좋을 수 없죠. 그러고보면 최 상무가 재주는 참 좋아. 괜히 미인을 얻는 게 아니라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그럼 생산지원본부도 오케이네? 배 전무 생각은 어때?”

기술연구원 배강준 전무는 빙그레 웃었다.

“뭘 물으십니까. 우리 부사장님이 걱정이지 저야 좋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저도 가도 됩니까? 나 배울 거


무지하게 많을 것 같아.”
“시끄러. 넌 가서 포커치고 애들 시켜서 배우라고 할 거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난 순수한 호기심입니다.”
“됐고, 기술연구원도 오케이 했으니... 하... 재무적인 리스크만 해결되면 할 만하다는 말인데...”

김상중 부사장은 단호하면서도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반대입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회의 마무리하자고.”

김 부사장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이대로 드랍하는 거예요?”


“내가 힘이 있나? 기조실에다가 토스 해야지. 재무적으로 리스크 해결 안 되면 못한다고.”
“그럼...?”
“윗분들이 해결해주지 않겠어? 어른이 그런 거 해결하니까 어른이지, 애한테 맡겨 놓고 해결하라고 하면 그게
어른이야?”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자 김상중 부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한민국 최초 10 만 톤 급 초호화 크루즈선.
발주처인 큐나드 크루즈가 저렇게 협조적이라면 손해가 있더라도 미쓰비시 경우처럼 엄청난 손실은 없을 게
확실했다.
향후 조선업계를 이끌어갈 LNG 기술에 크루즈선 기술까지 확보한다면...
지금까지 회장님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회사를 나와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저 해주 김상중입니다.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브라이튼 해변에서(4) > 끝


< 태풍의 눈(1) >

5 년 전이었다.
평소 말 없고 공부만 열심히 하던 둘째 녀석이 그날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의 재촉에 그 녀석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리고 들이닥친 경찰.
성폭행이란다.
어려서부터 사고 한 번 안치고 공부만 하던 녀석이 성폭행이라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남들은 가고 싶어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녀석이 평소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에게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암, 실수지.
실수가 아니면 말이 되질 않았다.

여자아이는 계속 스토킹을 해왔다고 주장했지만, 공부만 하느라 여자를 대할 줄 모르는 녀석이라서 그런


것뿐이었다.
문제는 실수건 아니건 간에 이대로 학교에 입학했다가 유죄로 판결 나는 순간 아들녀석은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 담당검사와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이 바로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이었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평소 스토킹 짓을 했다는 여자의 진술은 아들녀석이 사랑하는 마음을 과하게 표현한 것으로 바뀌었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까지 이루어졌다.
물론 합의 과정에서 돈이 조금 깨지긴 했지만,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정호균 회장이 부장검사까지 움직여주며 신경 써준 이후 사건은 유야무야 덮였고, 그 여학생은 이사까지
갔다고 했다.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고 집도 넉넉하지 않았다고 하니 평소 행실이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아내는 남의 아들 인생 조질 뻔하게 했다고 그 여학생을 욕했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고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자신은 아들이나 그 여학생이나 둘 다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정 회장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무진중공업과의 합병에 최선을 다했지만 갑자기 상황이
틀어지며 합병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렇기에 마음 한구석에 항상 은혜를 갚아야 할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유, 오셨습니까.”

김상중 부사장이 벌떡 일어났고 정호균 회장은 인자한 얼굴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날씨가 좋아. 오면서 길에 꽃 핀 거 봤나? 눈이 즐거워. 내가 이래서 봄을 좋아해.”


“하하, 회장님은 지금도 감성이 충만하시네요.”
“이게 다 늙어서 그래. 젊었을 적에는 어디 꽃이 눈에 들어오나? 여자만 눈에 들어왔지.”
“식사가 회장님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입맛이 없어서 6 천 원짜리 순대국밥이나 30 만 원짜리 코스 요리나 다 똑같아. 어디 식사가 중요한가?
대화가 중요한 거지.”
김상중 부사장은 기껏 불러놓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김 부사장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표정을 바로 했다.
바뀐 분위기에 정 회장이 그를 빤히 바라본다.

“아무래도 해주에서 크루즈선을 시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루즈선? 하하하! 진짜?”

정호균 회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 전부터 노려왔던 해주조선해양을 이상한(?) 놈들에게 놔주고 얼마나 분노를 삭였던가.
그런데 갑자기 크루즈 선이라니···.
제발 다시 망해달라고 고사도 지내기 전에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그런데 김상중 부사장은 정 회장의 웃음에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게··· 무작정 덤벼드는 모양새가 아닙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크루즈선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주제도 모르게 무작정 덤벼드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제야 정 회장이 얼굴의 미소를 지웠다.

“자세히 말해봐.”
“영국 최대 크루즈선사인 큐나드 크루즈사가 협력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아직 계약에 관한 사항을 협의중인데 10
만 톤 규모 프리미엄급 라인을 발주 준비중이고 퀸 엘리자베스호에 기술자 파견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10 만 톤? 그럼 8, 9 천억 하겠네?”
“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큐나드 크루즈사가 왜 그런 짓을 해?”
“이것 역시 HS 물산 기조실에서 움직인 것으로,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전 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논의했을 뿐입니다.”
“그렇구만. 알겠네. 내가 참 우리 김상중 부사장한테 고마운 게 많아. 전에 합병 때도 많이 고마웠는데 이제는
남의 식구가 됐는데도 이렇게 날 생각해주니 얼마나 고마워?”
“회장님께서 배려해주신 게 있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내 걱정 말고 식사나 들자고. 아, 아들녀석은 공부 잘하고 있지?”
“네. 사고 안 치고 열심히 공부중입니다.”
“그래, 사내새끼가 한 번 정도는 실수할 수도 있는 거야. 어깨 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 되라고 해.”
“녀석도 회장님에 대해서 항상 감사함을 품고 있습니다. 언제고 회장님께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아. 그게 날 위하는 거야. 어서 드세.”

그렇게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고 정호균 회장은 해주조선해양의 크루즈선 수주에 대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김상중 부회장은 의아했지만 회장이 이미 관심을 꺼버린 이후라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쨌든 자신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김 부사장은 조용히 식사를 마칠 뿐이었다.

“오늘 즐거웠네. 다음에 또 보세.”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상중 부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준 정호균 회장은 수행비서와 함께 음식점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차에는 수행비서 말고도 정 회장의 아들인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이 앉아 있었다.

“넌 여기서 뭐해?”
“근처에서 사람 좀 만나고 있다가 아버지가 여기에서 식사하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기사는?”
“밖에 있기는 한데, 따로 갈까요?”
“됐다. 가는 김에 같이 들어가자.”
“해주 김상중 부사장 만났다면서요? 그 인간이 밥값을 하던가요?”

아들의 물음에 정 회장이 말했다.

“해주조선해양이 크루즈를 건드린다고 하더구나.”


“크루즈선을요?”
“정신 빠진 놈··· 고작 그것 때문에 헐레벌떡 달려와 일러바치는 꼴이라니···.”
“그래도 기특하지 않습니까?”
“이거 이거··· 너는 여태 뭘 배웠냐? 일러바치면 뭐가 달라져?”
“네?”
“근호야, 사람은 말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성과를 들고 와야 하는 법이다. 사촌이 땅을 사는 걸
보면 배가 아파할 주인한테 사촌이 땅을 샀다고 일러바치기만 하면 주인이 종놈을 예뻐할 것 같으냐? 너는? 너는
예뻐할 거냐?”
“아닙니다.”
“그럼 네가 종놈이라면 어찌할 거냐?”
“사촌이 땅을 못 사게 하든, 주인에게 사촌이 산 땅보다 더 좋은 땅을 사게 하든 해야 합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종놈이 주인 눈에 드는 방법이다. 공부만 할 줄 아는 놈은 한계가 분명한 법이야.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놈보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을 옆에 둬야 하는 거지. 숫자만 가지고 주물럭거리는 놈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그런데 누가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인지 판단을 못 하니··· 쯧쯧쯧···.”

혀를 차는 정 회장의 태도에 아들인 정근호 사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내가 이번에 절실하게 느꼈다. 밥값을 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너도 밥값해!”
“예.”

정 사장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불만스럽다는 티를 팍팍 풍기던 정 회장이 나직이 말했다.

“해주조선해양이 정말 크루즈선을 욕심내고 있는지 계속 주시해. 조금 모자란 종놈이라도 티내지 말고 신경


써주고.”
“김상중 부사장 말입니까?”
“그래, 이제 네가 관리해라. 밥값 못하는 놈 밥값하게 만드는 것도 다 능력이다. 애비가 못했으니 너라도 해야
회사가 흔들리지 않는 게야.”
“네. 그리고 해주조선해양 좀 흔들어보겠습니다. 이 상황에 크루즈까지 건드린다고 하면 주가가 볼 만할
겁니다.”
“흥! 주제도 모르는 놈들···.”

정호균 회장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긴 휴가를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영훈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회장실로 불려갔다.


“잘 쉬다 오라니까 무슨 일을 그렇게 해와?”
“일하려고 마음먹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말 몇 마디 한 게 전부인데요.”
“누구는 그 말 몇 마디 못해서 될 일도 그르치는데 우리 최 상무는 아무것도 아닌 걸 참 잘도 엮어내네.”
“Nodri Clare 인수는 어떻게 됐습니까?”
“최 상무 영국에 있을 때 검토 끝냈고 다음주에 자금 집행할 거야. 오자마자 또 중국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괜찮겠어?”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요. 괜찮습니다.”
“크루즈선은 뭐야? 진짜 할 거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해주조선해양쪽 사람들이랑 얘기를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해주조선 송 사장이 나한테 하소연을 하던데? 크루즈 할 거면 돈 쥐어달라고. Nodri Clare 인수할 돈
자기네한테 주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더라니까.”
“하하, 그랬나요?”
“최소 현금 5 천억은 쥐고 있어야 마음 놓고 할 수 있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구. 5 천억도 부족하대. 아이고··· 돈
들어갈 데 천지다. 그치?”
“그럼 하지 말까요?”
“우리 최 상무가 돈 벌어다 줄 거잖아. 아니야?”
“전 능력 없습니다. 능력 있는 직원들이 Nodri Clare 대박낼 겁니다.”
“능력이 없긴··· 어쨌든 그래야 할 것 같아. 내부에서도 지금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초기에 무수한
기업을 빨아들이면서 확장했던 몇몇 기업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마음 쓰지 마.
지금껏 최 상무가 했던 모든 일이 최 상무만 좋자고 했던 일들이
아니었던 것 아니까. 군산조선소는 특히 그랬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잘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응, 그리고 결혼식 말이야.”
“네? 네···.”

살짝 긴장하는 영훈을 보고 송 회장이 미소 지었다.

“긴장하긴? 최 상무 생각해서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할까 생각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 꽁꽁 싸매고


결혼시키는 것도 그렇고 외부에서 보기에도 조금 그래.”
“그럼요. 당연합니다.”
“결혼식 전부터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결혼식이 많이 불편할 수 있을 거야. 이해 좀 해줘.”

부모님 자리도 비어있을 테고 친구들도 없으며 부를 친척도 없었다.


당연히 주변에서 수군거릴 테고 귀에 들려오기라도 하면 기분이 안 나쁠 수는 없을 거라고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영훈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회장님이 난처하실 게 걱정이네요.”


“나? 후후··· 고작 그런 걸로 내가 난처해할까. 연희는 그 성격에 욱할지도 모르니 최 상무가 잘 돌봐줘.”
“알겠습니다.”
“그럼 고생하고.”

영훈은 그렇게 송 회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기획조정실로 돌아오니 박병호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한국 온 사이에 또 일을 만드셨다구요?”
“그렇게 됐네요.”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까?”
“이건 해주조선해양과 의논해야 할 일이라서요. 부장님은 Nodri Clare 인수만 신경써주시면 됩니다. 회의는
10 분 뒤에 하죠. 민희 씨는 나 좀 보구요.”

박 부장에게 회의가 있음을 알리고 들어오니 민희가 바로 따라 들어온다.

“별 일 없었습니까?”

민희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실장님이 안 계실 때 종로 리츠칼튼을 지나가다가 거기 직원이 저를 알아봐서 호텔에서 식사를 하게


됐었습니다.”
“그래요? 맛있게 했어요?”
“음··· 거기서 신영금융 이형준 실장 어머니를 만나게 됐습니다.”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계속해봐요.”
“이형준 상무 어머니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분과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어떻게 심상치 않았는데요?”
“불륜 같았습니다.”
“흐음···.”

이형준 상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지금도 바람을 피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참 세상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세준 부회장인데···.
안쓰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희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전에 이형준 상무님을 한번 만나보라고 하셨던 거···.”


“아, 미안해요. 만약 민희 씨가 싫다고 하면 나 때문에 억지로 만나지 않아도 돼요. 난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혹시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영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정말 잘 어울려 보였을 뿐이니까. 다만 민희 씨는 남들이 느끼는 부담감과 중압감을
오히려 즐길 것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유는 없어요, 그냥 느낌이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알고 있잖아요?”
“네?”
“만약 아예 만나지 않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까 민희 씨라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놨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 맞습니다.”
< 태풍의 눈(1) > 끝

< 태풍의 눈(2) >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떤 계획이냐고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는 명심하세요. 이세준 부회장이나 그 사모나 둘 다 보통
사람들은 아닙니다. 민희 씨의 상상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민희는 평온한 표정이 되어 실장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영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본디 궁합이란 서로 간에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관계를 좋은 궁합이라 한다.
한쪽이 거칠면 한쪽이 부드러워야 하고, 한쪽이 튕겨내면 한쪽이 받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고 화합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형준 상무와 민희는 궁합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더욱이 이형준 상무는 양기가 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을 지녔다.
지금이야 단단히 목줄을 채우고 있으니 친절하고 합리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목줄이 해체되는
순간 언제 어느 순간 달려들어 목을 물려고 할지 모른다.

위기에서 구해준 은혜가 있으니 갚아야 한다?


그런 건 평범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일 뿐이다.
상황이 변하면 그런 은혜 따위는 머릿속에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민희를 곁에 두고 싶었다.


민희가 가진 음울한 카리스마는 그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고, 그녀는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놓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형준 상무 어머니의 추태를 보고 마음을 접지 않은 건 오히려 그게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계획?
안 들어봐도 뻔하다.

문제는 그게 좋은 쪽으로 가게 될지, 아니면 더 안 좋은 쪽으로 가게 될지가 보이지 않았다.


민희야 결혼운이 들어왔고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가 보일 뿐이고, 이 상무는 별다른 흉살이
없다는 게 그나마 안도하게 한다는 정도?
어쨌거나 앞으로 지켜보는 재미는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HS 물산 패션 브랜드 Nodri Clare 인수한다]


[7 천억 상당의 대규모 인수 또다시 성공시킨 HS 물산]
[HS 물산 호텔, 건설, 조선에 이어 패션까지?]
[여성 CEO 송은채 회장, 재계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다]
[신생브랜드 Nodri Clare, 과연 7 천억 가치 있을까?]
[빌린 돈으로 쇼핑하는 HS 물산, 저러다 STS 꼴 날라]

HS 물산이 Nodri Clare 를 인수한 이후 또 며칠 간 기사가 오르내렸다.


예상치 못한 인수에 초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부정적인 여론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한때 조선업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보였으나 마구잡이로 인수합병을 진행하며 덩치를 키우다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STS 그룹을 거론하는 언론사도 있을 정도였다.
아직 한국에 매장을 두 곳밖에 열지 않은 브랜드를 무려 7 천억이라는 거액으로 인수한 결정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HS 물산의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Nodri Clare 인수 확정 기사가 뜨고 나서 근 일주일간 20%나 하락하며 시장에서 어떤 시선으로 이번 인수를
보고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여기서 또 터진 기사.

[해주조선해양 10 만 톤급 초호화 크루즈 수주 임박]


[크루즈선 건조, 이번에는 과연···.]

기사들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지만 주식시장의 반응은 한쪽으로 급격히 치우쳐 있었다.


무려 장중에 마이너스 15%까지 빠졌다가 조금 회복해 12%가 빠진 채로 마감했으니까.
각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해주조선해양의 목표가를 일제히 하향 조정했고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변경했다.

“야, 이 새끼들 이거 완전 골로 가겠는데?”

김창훈 상무가 태블릿을 바라보며 비서이자 친구인 윤희찬 부장에게 말했다.


그간 영 죽상을 하고 다니던 그가 오랜만에 생기발랄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윤 부장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좋아?”
“싫을 게 있겠어? 해주조선해양에 3 조 원 들어갔어. 이거 휘청이는 순간 HS 그룹 넘어가는 거야. 바~로 STS 꼴
나는 거지. 그 기자 참 내 생각이랑 똑같더라고. 인사이트가 있어.”
“그게 인사이트가 있는 거냐? 그리고 크루즈선 수주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공시에 올라온 것도 아니고.”
“인마, 이거 감 완전히 떨어졌네. 야, 생각을 해봐. 주가가 15% 급락하고 있는데 홍보팀에서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지금 한창 계약이 목전에 다가왔으니까 부정을 못 하는 거지.”

창훈의 주장에 윤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난 그게 이상해.”
“뭐가?”
“주가가 저렇게 떨어질 걸 몰랐겠어? 지금 회사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네 말대로 크루즈선을
수주한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제 발등 찍는 일인 걸 경영진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알아도 크루즈선이라니까 눈이 뒤집혔겠지.”
“단순히 눈이 뒤집혔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아. 노드린지 뭐시긴지 패션 브랜드도 7 천억이나 들여서 샀으니
통장에 현금도 많지 않을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
“겁나냐?”

윤 부장은 창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넌 안 나냐?”
“왜? 내가 왜 겁나야 하는데?”
“봉선동 때 한번 데어 봤잖아. 초반에는 저 새끼들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너랑 나랑 얼마나 무시했어?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어떻게 됐지?”
“새끼, 재수 없는 소리는··· 지난 일이잖아.”
“넌 역사를 왜 배운다고 생각하냐?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암기하기 위해서 배운다고 생각해? 아니야.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배우는 거고, 실수한 역사가 있다면 반복하지 않으려고 배우는 거야.”

창훈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알았어, 인마. 회사에서 선생질은···.”


“다시 돌아와서, 무진중공업이 군산에 그 깽판을 쳐놓을 정도로 한입에 홀랑 해버리려고 했던 해주조선해양까지
먹었어. 그렇게 잘 해놓고 갑자기 여기서 똥볼을 찬다고? 왜?”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지.”
“그 ‘왜’가 중요한 거라고. 차라리 홍보팀에서 ‘이 기사가 진짜다 또는 거짓이다’라는 반응이 나오면 무슨
생각인지 추측이라도 해볼 텐데 이건 뭐··· 인천에서도 그래.”
“인천?”
“그래. 인천공항에서 만났을 때.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했지만 그놈들도 머리가 있을 텐데 그냥 다 수긍하고
넘어갔잖아.”
“그건 지들도 지네 수준을 아니까 그런 거지. 설마 우리를 제치고 PM 을 하려고 하겠어? HS 건설이 가진 게 뭐가
있어? 경험은 뭣도 없고, 기술력이나 인프라도 우리가 훨씬 많은데. 우리가 주는 공사 받아먹는다는 자체가
이번에 큰 경험이 될 거라고 판단했을 거야.”
“나도 HS 건설이 다른 일반 건설사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최영훈
상무는 좀 느낌이 달라. 너는 연적이라서 그를 무시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가 커다란 벽같이 느껴져.”
“지랄···.”

윤 부장은 애써 무시하는 창훈의 마음을 이해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차관 일행을 인도로 보내고 나서 다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래서
알아봤어.”
“뭘?”
“HS 건설 쪽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말이야. 너도 들었잖아, 인천 한옥 호텔에서 식사하면서 꼬드긴 거.”
“라마누잔 차관이 그랬었지. 제법 감동적인 제안이었다고 말이야.”
“왠지 그게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텔에 알아봤는데 HS 건설 사람들이 호텔을 나온 건 차관
일행하고 식사를 마친지 몇 시간이 지난 후였대.”

창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 부장을 바라보았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일단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낸 뒤에 말하려고 했지. 그런데 젊은 인도 여자를 만났다는 거 외에는 알아낸 게
없어.”
“젊은 인도 여자? 수행원 중에 하나겠네?”
“그렇지. 그런데 그때 젊은 여자 수행원이 몇 명이었는지 기억나?”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 명? 맞지?”
“다시 찾아보니까 다섯 명이더라고. 그중에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겠어.”
“야! 걱정하지 마.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인도야.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 우리는 차관을 꽉 잡고 있다고. 그때
라마누잔 그 인간이 여자 둘에 정신 못 차리는 거 못 봤냐? 아주 그냥 천국을 본 것 같았잖아. 크크큭···.”
“그렇긴 한데··· 그래도 계속 불안하네. 아무래도 인도 한번 가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오케이, 스케줄 잡아보자. 단속해놓는 게 마음 편하면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메일 온 거 있지?”

윤 부장은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올려진 서류를 가지고 와 창훈의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거야. 마두라이(Madurai)에 추가적으로 국제공항을 지을 생각인 것 같아. 위치는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풀리유르 지역인데 일단 위치상 주민들 숫자도 많지 않고 산지도 없어서 공항을 짓기에는
나쁘지 않아.”
“지가는?”
“토지매입 예상 비용으로 저쪽에서는 대략 천억 정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우리가 직접 가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
“건설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해야겠고, 장비는?”
“이건 우리가 손댈 수 있지. 우리 계열사인 우명종합기계에서 중장비 구매하기로 하자.”
“좋지. HS 건설한테 시공은 어느 정도나 맡길까?”
“50% 이상 줘야 할걸? 우리가 전체 사업이익의 50% 넘게 가져가는 걸 알 텐데 시공까지 다 가져가면 반발할
거야.”
“그래, 뭐··· 주자. 아깝긴 하지만 존심 한번 세워줘야 나중에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겠지. 총 사업이익은
어느 정도 보고 있어?”
“계산해보니까 대략 4 천억 정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
“해외 발주 공사에서 4 천억이나 남겨 먹으면 역대급이지. 지금까지 물 밖을 벗어난 사업치고 손해 안 본 게
몇이나 돼? 아마 진짜 4 천억 넘게 벌어 오면 우리 아버지가 내 볼에 뽀뽀를 해줄지도 몰라.”
“그건 그렇겠다. 4 천억 벌어다 줘, PM(Project Management) 경험치 올려줘. 만약 추가로 사업 따내면 넌
바로 차기 회장감이다.”

창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흐흐··· 그래도 우리 형님 젖히기 힘들다. 알지?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우리 형.”


“알지. 만약 태양광 판넬이 지금보다 가격이 조금만 더 높았으면 네가 감히 회장 자리를 꿈꿀 수 없었을 거라는
것도 알지.”
“태양광··· 말만 그럴듯하지 앞으로도 언제 수익 낼지 깜깜해. 저거 수익 낼 때가 되면 아마 내가 결혼하고 애가
셋은 낳은 상태일걸? 흐흐··· 당연히 와이프는 연희고 말이야.”
“에휴··· 난 어째 네가 우명그룹 회장이 되는 것보다 연희라는 여자랑 결혼하는 게 더 안 그려지나 모르겠다.”
“질투하는 거 알아. 솔직히 예쁘지? 너도 남자니까 그건 이해할게. 그러게 내가 결혼 조금만 늦게 하라니까.
그걸 못 참고 결혼을 하냐?”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웃기고 있네. 네가 무슨···.”

창훈이 윤 부장을 놀리려는 순간, 윤 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윤 부장은 손을 들어 창훈의 입을 막고는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뭐?”


떨리는 윤 부장의 동공.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에 창훈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부장은 전화를 끊고 말했다.

“일 났다.”
“뭔데?”
“라마누잔 차관이 신항공 건설 사업에서 빠지게 됐단다.”
“뭔 소리야 그게?”
“마호디 총리가 중요 사업이라고 직접 관여하기로 결정했대. 이거··· 느낌이 좋지 않아.”

창훈은 벌게진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 인도행 비행기표 끊어. 가장 빠른 걸로. 현지에 우리 쪽 사람 있나?”


“찾아볼게.”

바로 움직이던 창훈이 순간 멈칫했다.

“왜?”
“혹시 이거 HS 건설이 수작 부린 건 아니겠지?”

윤희찬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그렇겠지?”
“당연하지.”

윤 부장은 창훈에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심 자신의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발 이번만큼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 태풍의 눈(2) > 끝

< 태풍의 눈(3) >

우명건설 김창훈 상무와 그의 비서인 윤희찬 부장이 인도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영훈은 하얼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Nodri Clare 의 인수가 완료되었으니 주췬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훈이 또다시 한국 땅을 떠났을 때, 조재민 군산시장은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희가 감탄하며 들어왔다가 이형준 상무 어머니를 보고 입맛을 떨어뜨렸던 그 식당의 조용한 룸에서 송은채
회장과 마주했다.
창밖의 대로변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송 회장에게 말했다.

“정치계에 입문한 뒤로 요즘 많은 것이 바뀐 걸 느낍니다.”


“본인이? 아니면 주변이요?”
“내가 달라진 건 알겠는데 주변은 내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반응한다고 할까요?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경험하니
또 느낌이 다릅니다. 새롭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우리 시장님 의외로 센치하시네.”
“나 원래 센치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문학소년이었어요. 가방에 작은 시집을 항상 넣어두고서 짬짬이 읽고는
했습니다.”
“어머, 그러셨어요?”
“의외지요?”
“네. 그렇게 문학소년이었던 분이 정치는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원래 난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학교와 근처 라이벌 학교가
축구로 한판 붙게 됐습니다. 우린 자신이 있었죠. 영석이라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볼을 기가 막히게 찼거든요.
얼굴도 잘~ 생겼어. 공부도 잘했지. 왜 같이 다니면 든든한 친구
있지 않습니까? 걔가 딱 그랬죠.”
“그런데요?”
“우리가 2 대 0 으로 이기고 있을 때였나? 상대 학교의 한 녀석이 영석이한테 아주 거친 태클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자칫 잘못했으면 다리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아주 악랄한 태클이었어요. 그러니
어찌 됐겠습니까? 축구고 나발이고 주먹으로 한판 세게 붙
었더랬습니다.”
“조 시장님이 소싯적에 패싸움까지 하셨었군요?”

조재민 시장은 그때 당시가 기억나는지 아련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릴 때야 싸움질하면서 크는 거라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흔히 있었던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그때 영석이가


심하게 얻어맞아서 불구가 됐습니다. 너~무 화가 나고 분을 풀 수 없었는데 학생이었으니까 우리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영석이 부모님이 진짜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그런
데 더 힘들게 한 건 그때 영석이를 그렇게 죽어라 팼던 녀석이 겨우 훈방 조치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겁니다.”
“부잣집 아들이었나요?”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 그 새끼··· 아니, 그 녀석의 당숙이 검사였던 거예요. 차라리 부모님이 검사라면 이해라도 하는데,
공사도 다망하신 검사님이 참 인정도 많으시지···.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세상 참 더러운 거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법대를 가서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의를 세우고 싶었던 거군요?”

조 시장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정의는 무슨··· 내가 안 당하려고 그런 겁니다. 적어도 내가 힘이 있으면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한팔


걷고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때 불구가 된 영석이 부모님이 화병으로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내가 두 번 다시
그 꼴 보지 않으려고 정치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정치를 시작
하니까 이게 또 눈치 볼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거예요.”
“실망하셨겠네요.”
“실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 한 다리 건너면 ‘내가 힘이 어느 정도네’, ‘내가 누구를 좀 아네’ 하는
허풍들이 들려옵니다. 그것뿐인가요? 좀 말이 통한다 싶으면 ‘내가 널 키워 주겠다’. ‘나만 따라와라’ 등등
별소리를 다 합니다.”
“호호··· 그중에서 강주원 의원에게 가셨던 거군요?”
“강주원 의원이 전라도에서는 힘 좀 쓰거든요. 내 잘 알지. 영석이 사건 무마시켰던 검사가 바로 강주원이거든.”

이번에는 송은채 회장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그건···.”
“예상하지 못했죠잉? 흐흐··· 내가 그 인간 밑에 들어갔을 때 영석이 부모님 무덤 앞에 가서 한 시간을
울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어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디 경상도 가서 출마하겠습니까? 전라도에서
정치하려면 그 인간이 최고의 선택인데···. 왜 살면서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까? 딱 그때 같아요. 그때부터 내가 국회의원이 됐는데도 가슴이 답답해.
남들은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떠받들어 주는데도 그냥 답답한 거예요.”
“인생 참 쉽지 않아요. 난 조 시장님께 그렇게 절절한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이 사연 아무나 못 듣습니다. 오죽하면 마누라도 모르겠어요, 흐흐···.”

조 시장은 목이 타는지 화이트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강주원 의원을 날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 상무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전국구 의원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하··· 이게 또 막상 기대를
가져보니까 그 유혹을 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빨가벗고 달
려드는 가시나들 앞에서도 참아본 적 있는데, 최 상무가 그려주는 미래는 못 참겠더라고요.”
“최 상무가 그래요. 생각지 않았던 목표를 제시하고 이루어 나가죠.”
“그렇게 최 상무가 준 과일을 받아먹고 이 자리까지 오니 당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평생 전화 한 통 안 줄 것 같던 중진 의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이 와요. 내가 귀찮아
죽겠어.”
“호호, 무슨 자랑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회장님 앞이니까 자랑하는 겁니다. 다른 데 가서 이런 말 하면 재수 없다고 욕먹어요.”
“알긴 아시네.”
“이게 다 회장님과 최 상무 덕분입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참 복도 많습니다. 그런 인재를 옆에 두시고··· 아예
사위로 만드신다면서요?”
“딸자식이 이런 식으로 효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래서 인생 모른다고 하는 건가 봐요.”
“하하하! 회장님 농담도 잘 하시네. 내가 회장님한테 한 소리 듣고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또 꿍한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땐 내가 실수했지. 정신 번쩍 났습니다.”
“정신 번쩍 나라고 그렇게 말한 거예요, 큰일 하실 분인데···.”
“촐싹댔죠?”
“호호호.”

송 회장이 웃자 그가 씁쓸해하며 말했다.

“쯧··· 내가 그때 회장님한테 제대로 배웠습니다.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해주시니 내가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장님이 아니면 감사를 크게 받고 싶은데 그냥 말로 넘어갈게요.”
“하하하! 이거 말로는 못 당하겠습니다. 회사를 경영하기 전에는 전업주부셨다고 하던데 지루해서 어떻게
참으셨어요?”
“저도 나름 놀라는 중이에요. 생각보다 더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언제고 올라오실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뭐, 용건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크게 별다를 건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부탁할 게 하나 있고, 또
궁금한 게 하나 생긴 김에 올라와서 회장님한테 감사도 드리고 그러는 거죠.”
“말씀하세요.”
“요즘 해주조선해양에서 크루즈선을 수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가가 많이 빠졌던데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그가 놀리려고 물어본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네, 괜찮아요. 그게 왜 궁금하셨을까요?”


“조선소 노조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미 무진중공업 때문에 한차례 크게 데어 본 사람들이에요. 일감이
생긴 건 좋은데 그것 때문에 또 조선소가 문을 닫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인 겁니다. 노조 간부 하나는 직접
찾아와서 제발 좀 말려달라는 말까지 했어요. 회사에 요청해야지, 나
한테 요청하는 상황이니 웃기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들은 조선소가 돌아가게 된 게 제가 일에 상당 부분을 개입해서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게 꼭 말이 안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저 역시 대외적으로 쌓은
이미지가 있으니까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기도 하
고.”
“그래서요?”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해주조선해양의 뜻이 뭔지 알아야 내가 손발을 맞춰줄 수 있어요. 건조할 생각이
있다면 내가 저들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밀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다른 뜻이 있다면 대외적으로 발을
맞춰줄 수도 있어요. 어떤 의미입니까?”

송 회장은 잠시 숨을 내쉬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수주를 받을 수도 있어요. 가능성은 꽤 큰 편이에요.”


“으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왜 수주를 받는 건지는 안 물어보시나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 결과가 우리 군산 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죠?”
“물론이에요.”
“그러면 됐습니다. 제가 잘 달래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건 일도 아닙니다. 그런 일도 처리 못 하면 시장직 내려놓아야죠. 뭐, 그건 됐고. 하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처음 말씀드렸듯이 요새 저한테 쉬지 않고 전화가 걸려 옵니다. 그중에 참 난감한 요청이 있어요.
송 회장님 만나게 다리 좀 놔달라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부러운 모양입니다. 기업 하나 잘 물어서 전국구로 올라서니까 다들 뭐라도 하고 싶은 거지요. 다 거절할
수 있는데 딱 한 명은 거절을 못 하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이라고 아시지요?”
“알죠. 서울에서 3 선 하신 양반이죠?”
“네. 사무총장이고 당 대표고 다 거절할 수 있는데 이 양반한테는 거절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주 큰 빚을
졌거든.”
“물어보면 대답해주실 건가요?”
“내가 나중에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가능하겠습니까?”

송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절할게요.”
“어째 느낌이 딱 왔습니다. 정치랑 더는 엮이기 싫어서 그러십니까?”
“네.”
“하··· 이거 난감하네요. 그럼 회장님이 아니라 최 상무는 어떻습니까?”
“최 상무만 말인가요?”
“예.”
“흠··· 날씨가 좋아요. 오신 김에 하루 푹 쉬시고 가세요. 시장님의 제안은 최 상무에게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송 회장은 송구스러워하는 조 시장을 보고 복잡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송구스러워하지 않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송구스러워한다는 게 그녀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렵게 만난 라마누잔 차관이 창훈을 보자마자 한 말이다.


정말 어렵게 만났다.
쉽게 연락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도로교통부를 통한 연락은 전달이 되지 않았고 핸드폰은 아예 꺼진 상태였다.
결국 본사를 움직여 하루 꼬박 라마누잔 차관 집을 찾았고, 문을 두드려 사람을 불러낸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라마누잔 차관은 서울에서 봤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호의적인 웃음이나 호탕한 언변은 사라지고 창훈과 희찬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윤희찬 부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아예 탈락한 겁니까? 총리님이 주관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떤 곳을 밀어주려는 겁니까?”

자국 건설사를 밀어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던 윤 부장은 라마누잔 차관의 대답에 혼란을 느꼈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당신들의 컨소시엄이 탈락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하지 않지만 총리는 당신들의 컨소시엄을 나쁘게 보지 않고 있어요.”
“그럼 도대체 왜 미안하게 됐다는 겁니까?”
“컨소시엄에 선정된다고 해도 당신들이 원하는 결과는 아닐 테니까.”
“예? 그게 무슨···.”
“PM 주관사가 당신네 회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창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한국말로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째 느낌이 더럽더라니까. 그 새끼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니까!”

윤희찬 부장은 창훈이 뭐라 씨불이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총리님 입에서 직접 나온 이야기입니까?”


“나도 알지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합니까?”
“총리관저에서 도는 소문은 진실보다 더 강력한 법입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곧 사실이 될 테니까요. 그게
총리의 의도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HS 건설에서 총리와 연결된 줄을 잡았다는 것.
윤 부장은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는 창훈을 잡아 차관의 집을 나왔다.

“어떻게 하지? 한번 알아보자. 총리한테 접근하기만 하면 돼. 우리도 잘하면···.”

윤 부장은 창훈의 말을 끊었다.

“한 달도 안 남았어. 여기서 잘못하다간 프로젝트 전체가 날아갈 거야.”


“그럼 어쩌자고?”
“어쩌긴? 최영훈 상무한테 한번 숙이고 들어가야지.”
“미쳤어? 난 못해.”
“그럼? 너 이대로 포기할 거야? 형한테 다 넘겨줄 거야?”
“······.”
“정신 차려, 인마. 똑바로 못 할 거면 말해. 나도 인생 편하게 살게. 이기고 싶어?”

입술을 깨물고 갈등하던 창훈이 말했다.

“숙이면? PM 주관사 가지고 올 수 있냐?”


“가지고 올 수 있으면? 숙일 거야?”
“씨발··· 그래. 가지고 올 수 있으면 내가 그 새끼한테 엉덩이라도 대줄 수 있다.”

윤 부장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래,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지. 그런데 표정 실감난다. 진짜 누구한테 대준 적 있냐?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
“닥쳐, 이 새끼야! 미친 새끼!”

윤 부장은 날아오는 창훈의 손길을 피하며 얼른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태풍의 눈(3) > 끝

< 태풍의 눈(4) >

현진중공업의 CEO 가 된 김태민은 요즈음 단 한 번도 주변에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직원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진그룹에서 현진물산의 계열사 분리, 그리고 현진관광의 이탈, 마지막으로 해주조선해양의 충격적인
인수과정까지.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부하직원이 회사를 나가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과정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사촌이 땅만 사도 배가 아픈 법인데, 그 사촌이 산 땅이 하필 개발 전 판교 땅이었다고 생각하면 석 달 열흘을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김태민과 그의 엄마가 딱 그랬다.

“요즘 주연이는 만나는 거니?”

이제 전업주부로 전락한 임지은 현진관광 전 사장이 물었다.

“몰라요.”

태민은 회장실 상석에 앉아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처음 이 의자에 앉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조선회사의 CEO 가 됐다고, 이제 모든 세상이 자신을 주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회사가 혼란한 틈을 타 회사 지분을 매입해 흔들려는 외부 세력에게 빅베스를 행하면서 통쾌한 역공을 날렸다.
그 결과 해외 투기세력은 상당한 손실을 떠안은 채 떠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현진중공업 새 경영자인 자신의
이름이 뉴스에 한동안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때뿐, 작년부터 올해 내내 경제면을 장식한 회사는 HS 그룹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패배.

“왜 몰라? 너 주연이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답답한 엄마의 호통에 태민이 한숨을 푹 쉬었다.

“후··· 엄마, 연애라는 게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왜? 걔가 너 싫다고 하니?”

급기야 엄마의 눈이 뒤집힌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흥분 좀 하지 마.”


“내가 흥분을 안 하게 됐어? 어제 기사보니까 인천공항 면세점 매출이 사상 최대를 달성했단다. 그거 다 네 거야.
네 거 될 수 있다고.”
“내가 그거 모를 것 같아요? 그런데 주연이도 알아. 내가 지네 회사 보고 만나는 거. 그게 무슨 말인지 알죠?
나보다 더 조건 좋은 남자 생기면 얼마든지 갈아탈 수 있는 애예요.”
“걔 남자 생겼니?”
“모르지.”

태민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부터였다.
갑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려졌다고 느낀 게 말이다.
항상 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잡아야 할까?
하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비싼 여자이긴 하지만 자신을 떠난 여자는 결코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나 다른 여자 만나고 싶어요.”
“누구?”
“우명그룹에 패션 공부하는 여자 있잖아요? 지금 부장급이라던가? 하여튼 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데.”
“우명?”

임지은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명그룹 애랑 만나겠다고? 너 진심이니?”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이런 개새끼가 없다며 욕했던 곳이 바로 우명그룹이다.


회사가 흔들릴 때 치고 들어와 날로 삼켜 먹으려고 했던 곳이 바로 우명그룹이었으니까.
하지만 태민은 뭐 어떠냐는 듯 말했다.
“오히려 잘 됐죠. 지금 우리한테 물린 자금도 있고 우리한테 미안한 것도 있을 테니 말해보기 나쁘지 않잖아요?”
“네가 가진 거 훔치려던 작자들이다.”
“그런 생각 가지고 있으면 더 좋지 않아요? 적어도 패션 부문은 딸한테 넘겨줄 테니까.”
“너 진짜 진심으로 말하는 거니?”
“난 떠난 여자 잡지 않아요.”

태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연에게 가끔 이런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그녀도 긴장감이 생길 테니까.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


음식을 앞에 두고도 한 젓가락도 들지 않는 윤 부장과 벌써부터 잔에 술을 채운 창훈은 초조한 표정이 역력했다.
창훈은 한입에 술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내가 숙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자존심 다 버려가면서 숙였는데도 얻지 못하면 나 오늘


쪽팔려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래도 최소한 안 됐을 때의 경우를 가정해서 대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참모의 역할이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 최영훈 상무를 협박해볼까 하면서 뒤를 캐보려고 했는데,
하··· 뭐 나오는 게 없네. 회사, 연희 씨랑 데이트, 집 이게 다야. 지금 사는 집도 최 상무 것이 아니고,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뭘 했는지도 파악이 안 돼. 정확한 신상정보가 있
으면 뭘 더 파보기라도 할 텐데 그게 없잖아.”
“그러고 보면 옛날이 좋긴 했었어. 우리 어릴 땐 주민번호 귀한 줄 몰랐는데···.”
“우리 초딩 때나 그랬지. 하여간에 인도는 잘못 건드렸다가 뒷감당이 안 될 것 같고 저쪽 핵심 브레인인 최
상무를 흔들 수 없으니 빌 수밖에. 원래 급할 땐 비는 게 최선이야.”
“진짜?”
“응, 너도 알잖아. 우리 아빠도 그래서 죽다 살아난 적 있는 거.”
“씨발, 옛날 얘기는···.”

다시 창훈이 술을 털어 넣을 때 문이 열리고 영훈이 들어왔다.


창훈은 급히 술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이 달아서 먼저 마셨는데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앉으세요.”

영훈이 앉으니 창훈이 그의 앞에 엎어놓았던 잔을 바로 하고 영훈에게 따라주었다.

“전에 안주가 별로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서 이 집으로 모셨습니다. 여기가 술은 몰라도
안주는 괜찮거든요.”
“비싸 보이는 집이니 당연히 맛있겠죠.”

여유로운 안색의 영훈을 보며 창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왜 뵙자고 한지 아십니까?”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궁금하군요. 어떤 일로 불렀다고 생각하는지.”

영훈은 술을 마시고 안주로 나와 있는 메로구이를 한 점 집어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는 제스처였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인도에서 소식을 들으신 거겠죠?”

창훈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욕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역시 제대로 알고 계셨군요.”


“한국에 오기 전에 마호디 총리가 신공항 건설 사업을 주관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명건설 쪽에서 미팅을 가지자고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주셨네요. 출장 갔다
복귀한 첫날에 연락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자리에 없다고 한 게 출장을 다녀오셨던 거였네요? 혹시 인도에?”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일로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으음···.”

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윤희찬 부장이 끼어들었다.

“중국에요?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패션 브랜드 때문에요.”
“얼마 전에 인수하셨다던 Nodri Clare 라는 패션 브랜드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중국에 진출하려고 계획 중이신가 봅니다?”
“네.”
“지분을 백 프로 인수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중국으로부터 지분을 내주고 투자를 받는 형태인가요?”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우리 회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요즘 하도 HS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투자가
들어오면 시장에 퍼져있는 재무적 리스크 공포가 상당히 가라앉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주식이 그렇게 많이 떨어졌는데 부담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건 제 전문분야가 아니니까요. 전 일이 되는지 아닌지만 신경 씁니다.”
“일이 되느냐··· 의미심장하네요.”
윤 부장이 궁금한 걸 해결하고 한 발 빠지자 창훈이 나섰다.

“총리에게 선을 댄 겁니까?”
“비슷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럼 컨소시엄이 사업을 따낼 확률은 무척 높다는 거겠네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후후··· 재밌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끼리 김칫국을 얼마나 마셨는지··· PM 을 하실 생각입니까?”
“네.”
“양보해달라고 하면 양보하실 의향이 있습니까?”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에 창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물었던 것인데 대답이 의외였다.

“조건에 따라 다르겠죠?”
“조건이요?”
“그럼 설마 그냥 달라고 하는 겁니까? 초등학생도 친구한테 아이스크림 한 입만 달라고 할 땐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과자 하나 정도는 건네는 법입니다. 그냥 달라고 해서 주는 건 가족뿐 아닙니까.”

창훈이나 윤 부장의 눈이 반짝였다.


마음이 급해진 창훈이 말했다.

“혹시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급해진 그를 보고 영훈이 찬찬히 타이르듯 말했다.

“상무님?”
“네?”
“제가 봉선동 사업을 어떻게 따냈는지 기억하십니까?”
“······.”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릴 때 윤희찬 부장이 나섰다.

“조재민 당시 국회의원을 구워삶았었죠.”


“하하, 맞습니다. 구워삶았었습니다. 그런데 전 그에게 뭘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재민 의원도 뭘
받고자 해서 나왔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난 그저 주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냥 준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이 필요한 걸 준 거죠.”

종합하자면 난 당장 생각나는 게 없으니 뭘 줄 수 있냐는 말이었다.


윤 부장이나 창훈 모두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했다.
뒤를 캤었음에도 별다르게 나온 게 없으니 도대체 저 인간이 뭘 갖고 싶어 하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훈은 그런 둘을 보고 그저 미소만 짓고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혼자서만 젓가락을 움직이고 다른 둘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묘한 상황.
대략 5 분여가 흘렀을 때, 창훈이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반포지구 재건축 사업에라도 껴드리고 싶지만 주민들 반대 때문에···.”


“정답이 아닙니다.”

영훈은 칼같이 자르며 식사를 이어갔다.


창훈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이라크 바스라 정유공장 건설에는 참여시켜줄 수···.”
“정답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창훈이 참지 못했다.

“어째서죠? 사업 규모만 해도 8 억 달러가 넘는 큰 사업입니다.”


“저는 거래를 할 때 주로 저울을 이용하고는 합니다. 상무님은 제게 신항공 사업 PM 주관사를 올려놓으라고
하셨죠? 그럼 그에 맞는 무게를 올려놓아야 거래가 성립되는 겁니다.”
“PM 주관사로 얻는 이익만큼 다 달라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HS 건설은 경험도 없고 인력도 부족할 겁니다.
설계 기간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벅찰 겁니다. 그럼 당연히 하청을 많이 줘야 할 테고, 그럼 PM 이라고는 해도
가져가는 이익이 줄어들 거예요. 아무리 많이 쳐줘봐야 2 천억 내외
일 겁니다. 바스라 정유공장만 해도···.”
“계산을 잘못하고 계시네요.”
“뭐라구요?”
“PM 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이번 사업에서 얻는 이익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이력 때문 아닙니까? 왜 이번 사업에서 얻는 순이익만 보십니까? 계산을 다시 해보셔야겠네요.”
“좋습니다. 더 양보하죠. 인도네시아 신도시 건설 사업과···.”

영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꾸 힌트를 드리는데도 방향을 못 잡고 계시네요.”

열 받은 창훈이 움찔하는 순간 윤 부장이 그의 허벅지를 잡고는 대신 나섰다.

“도대체 어떤 계산을 원하는 겁니까? 욕심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는 PM 을 하려는 목적이 있어요. 좁디좁은 한국에서 아파트 건설이라는 한정된 사업으로 아웅다웅하지 않고
해외사업으로 진출해서 더 큰 회사로 발돋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명건설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우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윤 부장이 무슨 그런 뻔한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말하자 영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한 가지가 더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명이 원하는 것 말고 상무님이 원하는 것. 저는 우명과 거래를 하는 게 아니라 상무님과 거래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런 걸로 알고 있었는데···.”

윤희찬 부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상무님이 곧 우명을 대표해서 나온 겁니다.”


“아닐 텐데요? 상무님이 PM 을 하고자 하는 이유, 우명그룹 회장님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PM 주관사 이전은 단순히 사업 이익이 아니라 우명그룹 후계자만큼의 값어치로 올려놓는
것일 테고요. 내가 계산을 잘못하고 있는 거였나요?”

< 태풍의 눈(4) > 끝

< 태풍의 눈(5) >

양인살이라는 것이 있다.
흉살 중 하나인 이 양인살은 연월일시(年月日時) 중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그 흉함이 다르게 나타난다.
김창훈 상무 같은 경우 양인살이 월지에 가 붙어 있는데, 이건 곱게 표현하면 형제덕이 없고 나쁘게 표현하면
형제를 극하는 살이 붙어 있다고 봐도 좋다.

이것만 해도 좋지 않은데 비견이 공망을 더했다.


형제 사이에 원한이 생길 사주다.
형제 둘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은 형을 두고 있는 상황.
때로는 극도로 치솟는 감정의 표출이 권력 욕망을 넘어서기도 한다.

창훈이 바로 그렇다.
애초에 사주에 화개가 있는 창훈은 양인살이 없었다면 교수나 예술가가 되었을 인물이다.

물론 창훈은 모르겠지만.
오래전 김창훈 상무를 광주에서 처음 보았을 때, 악수를 하며 그의 사주를 계산했었다.
당시에는 봉선동 사업을 따내는 것에 주력했었고 그와 중요한 거래를 할 것도 아니었기에 연희에게도 창훈의
사주에 관해서는 뭐라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 인도 신공항 공사를 같이 하게 되면서 결국 예전의 기억을 꺼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네요? 우명그룹을 이끌어 갈 후계자는 도훈이 형입니다.”

김창훈 상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당황한 표정만 봐도 그가 지금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상무님?”
“······.”
“전 의미 없는 싸움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좁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전 세계에서
많은 가치를 창출하면서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이게 다 사장 돈 벌자고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전 그렇습니다. 회사가 돈 많이 벌면 보너스 많
이 줘서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브라이튼에서 맥스 크룰리를 만나며 더욱 구체화되었다.
지역 축구 클럽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경제를 살리고 주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습.
그 모습을 군산에서 보면서 회사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금 뜬금없는 말이지만 하여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회사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언제든지 거래에 응할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거짓 없이.”

영훈의 마지막 언급에 창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당신. 도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는 겁니까?”

영훈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거래할 의향이 없다는 말이군요. 그럼 할 수 없죠. 오늘 식사 잘 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걸 보자 윤희찬 부장이 몸을 날리듯이 다가오며 소매를 붙잡았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이렇게 협상을 깨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밤은 길고 할 이야기는 많습니다. 서로


간에 의견 차이는 있지만 그건 대화를 하면서 좁혀 가면 될 일 아닙니까?”
“윤희찬 부장님이라고 하셨나요?”
“네, 맞습니다.”
“때로는 적과도 거래를 해야 할 때가 있겠죠. 또는 손해를 봐야 하는 때도 있을 겁니다. 그게 최선이라면
해야겠죠. 그런데 오늘 상무님께서 우리에게 달라고 한 품목은 그저 얼마의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값어치가
아닙니다. 어쩌면 HS 건설의 미래를 조금 늦춰달라고 요청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럼 난 뭘 달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얼마의 수익이 날지 계산이 안 되는 몇조 원에 달하는 공사?
아니면 한국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재건축 개발 사업권? 글쎄요, 전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힌트도 드릴 만큼 다 드리지 않았나요?”

윤희찬 부장은 아득해져 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도와주십시오.”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창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이 새끼가 왜 그러나 싶어 일단 윤 부장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고 하는데, 윤 부장은 오히려 그의 팔을
잡아끌고는 말했다.

“창훈아.”

강렬한 그의 눈빛이 창훈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김창훈 상무는 바보가 아니다.
다만 억지로 피하고 있었을 뿐.
고냐 스톱이냐 갈림길에 선 창훈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릎 꿇어도 내가 꿇어. 바로 앉아.”

그 말에 윤 부장이 다시 창훈의 옆에 바로 앉았다.


창훈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는 말했다.
“앉읍시다, 고개도 아픈데. 나도 쇼 그만 할 테니 그쪽도 쇼는 그만하시죠.”
“그럽시다.”

영훈이 다시 앉자 그가 말했다.

“건설, 엔지니어링, 화학, 기계는 안 됩니다. 우리 그룹의 정신이자 본체니까요. 태양광 역시 안 됩니다.
아무리 지금 어렵다고 하지만 역시 그룹의 장기적인 미래나 다름없으니까요.”
“······.”
“보험과 증권은 그룹을 유지하기 위한 현금흐름 창구입니다. 이것 역시 안 됩니다.”

영훈도 창훈이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술을 비웠다.

“우명패션 어떻습니까? Nodri Clare 라는 명품 브랜드를 인수하셨지만 패션업은 기존에 하시던 사업과 많이
다를 겁니다. 매년 변화하는 고객의 취향 변화를 파악해야 하고, 전국에 촘촘하게 퍼진 영업점들과 영업사원들이
발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명패션이 가진 아웃도어, 이너웨어,
SPA 브랜드의 매출은 몇 년간 계속 성장세를 타고 있습니다.”

영훈은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엄청난 결심을 한 듯 제안하고 있지만, 실은 예전부터
우명패션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데 당연히 가장 쓸모없는
것을 던져주는 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고작 흥미로운 정도라고?”

너무도 어이가 없어 창훈은 존대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흥미로운 정도죠. 원래 난 이 자리에 나올 때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나왔다고 했지 않습니까? 마치


그때의 조재민 의원처럼요.”

창훈은 영훈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윤 부장은 달랐다.
그는 바로 영훈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아웃도어가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매출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브랜드가 힘을 내고는 있지만


아웃도어에서 본 손실이 너무 커서 작년 순손실만 230 억이었죠. 물론 그렇다고 회사가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는 선택과 집중으로 방향을 잡고 밀고 나가야 할 때입니다. 불필
요한 사업은 정리하면서요.”
“내부적으로 반발이 있을 텐데요?”
“원래 사업을 하다 보면 계열사 하나, 둘 정리하는 거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똑똑한 친구다.
영훈이 강주원 의원에게 군산버스터미널을 갖다 붙일 때 억지로 가져가게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끔 자연스럽게 떠 먹여준 모양새였던 걸 알아차리고 바로 그렇게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영훈은 솔직히 김창훈 상무보다 윤희찬 부장이 더 마음에 들었다.

“좋군요.”
“이제 저울의 무게가 평형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까?”
창훈의 말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지만 영훈은 개의치 않았다.
가진 걸 눈앞에서 강탈당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그런 순수한 면이 좋게 보이기도 했다.

“그건 됐고, 그럼 이제 진짜 협상을 해봅시다.”


“뭐라고요?”
“내가 양아치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기업을 강탈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럼 왜···?”

김창훈 상무나 윤 부장 둘 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앞에서 웃는 척하고 뒤에서 꿍꿍이 수작을 부리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는 겁니다. 적어도 항복을 할 때는
호주머니 싹 까놓고 손을 들어야 우리도 당신들을 믿지 않겠어요?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난 쓸데없는
싸움하는 거 싫어한다고. 우리 서로 잘 해보자는 말입니다.”
“······.”

아직도 믿지 못하는 창훈을 보며 영훈이 빙그레 웃음 짓고 말을 이었다.

“대신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 PM 주관사를 완전히 넘길 수 없어요. 그대가 당장 경영권에 목숨을 건 것 이상으로
우리도 HS 건설의 미래를 이곳에 걸고 있으니까. 단, 외부에 PM 주관을 우명건설로 하는 건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는 PM 주관사를 우명건설로 하고 실질적인 설계와 관리, 업체선정은 HS 건설이 맡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수익은 많이 줄어들겠지만 가장 중요한 명분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건 어쩌면 창훈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선택지일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HS 건설이 무얼 원하느냐였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한 셈이니 우리야 나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양보할 필요가 없는데 양보해준다는 건 다른 걸
원한다는 말과 같은 거겠죠?”
“이제는 말이 쉽게 통하는군요.”

창훈은 어째 영훈과 대화할수록 불안해짐을 느꼈다.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말해보시죠.”
“혹시 여수에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들어간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들어본 적 있습니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영민주택이라고 작은 건설사 하나가 참여할 것 같아요.”
“영민주택이요?”
“네. 우리는 딱히 그 사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이제는 국내 아파트 건설로 아웅다웅하기 싫거든요.”
“그래놓고 봉선동을 잘만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까?”
“하하, 곧 쓰러질 회사 산소호흡기 달고 살아난 거라고 치시죠. 어쨌든 그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에는 관심이
없는데 우명건설도 그렇겠죠?”

창훈이 윤 부장을 돌아보았다.


윤 부장은 즉시 입을 열었다.
“여수는 인구도 작고 지방 아파트 건설에 자주 참여한다는 건 회사 브랜드에도 그리 좋지 않아서 참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요. 참여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창훈은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이유나 물어봅시다. 왜 우리가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까? 영민주택 때문인가요?”


“네.”
“거기가 어쨌는데 그럽니까?”
“우리한테 이빨을 드러냈거든요. 저는 적의를 드러낸 맹수를 그냥 두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강윤기 사장의 사업운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기업이라고 해도 국운이 흔들리면 버틸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재운을 타고났다고 해도
초년에는 아버지 운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대기업이 이빨을 벌리고 달려들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의 운이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영민주택을 린치해달라, 그 말인가요?”


“린치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공평하게 펀치 하나씩 주고받는 정도입니다.”
“HS 건설이 한 대 맞기는 한 겁니까?”
“맞을 뻔했죠. 용케 피하긴 했지만.”

이때 윤희찬 부장이 뭔가 알아차렸는지 중얼거렸다.

“그때 그···.”
“아마 그게 맞을 거예요. 어쨌든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 부디 우명에서 홀랑 다 드시길 바랍니다. 적어도
영민주택은 그 사업에 이름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죠. 거 참, 무서운 분이시네.”
“자꾸 무섭다고 하지 마세요. 전 평화주의자입니다. 단지 맞고 가만히 있으면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바보일
뿐인 거겠죠.”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따라 일어나는 둘.
영훈은 그 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역시 비싼 집이라 다르네요. 그런데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른 곳에서 봅시다. 여기···


인테리어가 너무 왜색이 짙어서···. 아, 그리고 윤희찬 부장님이시라고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영훈이 손을 내밀었고 윤 부장은 양손으로 영훈의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창훈 상무님은 보니까 표정관리가 잘 안 되시는 것 같습니다. 부디 형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혹시···.”
“걱정하지 말아요. 나만 알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죠?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줄 수 있을지?”
“······.”
김창훈 상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영훈이 나가자 창훈은 진이 빠진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저 새끼 뭐야?”
“그러게··· 귀신인가? 어떻게 안 거지?”
“혹시 네가··· 아니다.”
“설마 내가 떠들고 다녔겠냐?”
“그건 그래.”
“아직도 연희 씨랑 결혼하려는 마음 변함없는 거냐?”
“하··· 놓아줄란다, 씨이발··· 졸라 억울한데 아까 눈빛 봤지? 그때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무섭더라.”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어.”
“흐흐··· 크크큭···.”

윤 부장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창훈을 보고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웃고 지랄이야? 무섭게?”


“아니, 갑자기 웃기잖아. 크크큭···.”
“뭐가?”
“영민주택 사장. 그 새끼 좆됐네. 크크큭···.”
“그러게 말이야.”

윤희찬 부장은 이 상황 자체가 너무 황당했지만 이내 창훈을 따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태풍의 눈(5) > 끝

< 이빨을 드러낸 대가(1) >

근 일주일간 하락세를 거듭해 전주 대비 30% 이상 빠진 HS 그룹 주가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한 건, HS 그룹은 전혀 주가를 관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내부적으로도 부족한 자금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 때 시장에 공시 하나가 떴다.

[중국 온라인 최대 플랫폼 하이잔, HS 물산이 소유한 패션브랜드 Nodri Clare 에 5 천억 투자 확정. 30% 지분
취득.]

막혔던 구멍에 숨통을 틔워주는 5 천억 수혈.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인 건 중국 온라인 플랫폼이 투자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공시 이후 주가는 급격한 V 자 반등을 시작했고 15% 상승이라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지금까지 하락폭에 비해 많이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시장은 이번 공시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이번 투자유치로 회사 내부에서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에 대한 신뢰도는 다시 한번 상승했다.
지금 송은채 회장이 이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걱정을 쏟아내던 임원들 지금 입 싹 다문 거 알아? 역시 최 상무야.”


“감사합니다.”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이제는 그런 영훈에게 적응한 송 회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고생했어. 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거 있지?”


“주가 떨어지는 거 보고 걱정하셨나 봅니다.”
“하하, 아주 식겁했지. 30%나 빠지는데 어떻게 평정을 유지해? 게다가 은근히 최 상무 무시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알지?”
“그런가요?”
“그럼. 겉으로는 상무님, 상무님 하겠지만 속으로는 온갖 뒷얘기들을 하고 있을 거야. 없는 데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는데, 사장 딸내미랑 결혼해서 고속 승진하는 남자 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기쁜 마음으로 욕먹겠습니다.”
“그런 거 보면 참 이상해. 최 상무는 그런 거 정말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아? 원래 사람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장 힘들어하는 건 사람 때문이거든.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나, 쟤가 분명 내
욕했을 텐데···. 이런 생각 안 해?”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
“그냥 인정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욕을 한다고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하아··· 진짜 스님 같다. 우리 연희 두고 갑자기 출가하는 건 아니지?”
“전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연희 씨 같은 미인을 두고 산에
들어간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우리 최 상무는 말도 참 잘해. 그건 그렇고 최 상무 없을 때 조재민 시장 왔다 갔어.”
“조 시장이요? 왜 올라온 겁니까?”
“해주조선해양 크루즈선 건조 때문에 군산 노조가 불안해한다는 거야. 본래대로라면 노조가 불만을 제기해도
본사에 해야 하는데, 군산조선소 노조는 조금 특수하게 다시 만들어졌잖아? 시장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흐음··· 그렇게 생각할 법하네요.”
“우리가 어떻게 할지 알려주면 같이 손발을 맞춰주겠다고 하더라고. 확실히 간이 조금 작긴 해도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방향만 잡아주면 곧잘 따라오는 사람이야.”
“맞습니다. 무엇보다 추진력이 상당히 좋아서 일에 성과를 내는 사람입니다. 같은 편이라면 믿고 일을 맡겨도 될
사람이에요.”
“그러게. 일단 그래서 크루즈선을 건조하게 될 거라고 말해뒀어. 노조가 불안을 느끼겠지만 알아서 정리할 거야.
그리고···.”
“그리고요?”
“나더러 정치인 한 명을 만나달라고 부탁했어.”
“정치인이요?”
“기업 하나 잘 물어서 전국구 스타 됐으니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정치인들이 얼마나 부럽겠어? 아마 나
같아도 부러웠을 거야. 만나달라는 사람은 천보윤 의원이라는데, 자기가 사무총장이나 당대표나 다 거절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거절할 수가 없다고 하네.”
“무슨 사연이 있나 보네요?”
“그런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사연인지는 말을 안 해. 일단 안 된다고 거절하니까 최 상무라도 만나게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최 상무한테 물어본다고 하고 끝냈지. 어때? 만나볼 거야?”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은 몰라도 전 모른 척할 수가 없으니까요.”
“괜히 만났다가 발목이나 잡으려고 할 것 같아서 불안해서 그래.”
“잡으려고는 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옴짝달싹 못 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니 그런 사람과 가까이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도 저도 아니게 엉겨 붙으려고 할까 봐 걱정입니다.”
“발목이 잡혀도 능력이 있으면 괜찮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군산버스터미널처럼.”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럼 최 상무가 조 시장한테 연락할 거야?”
“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영국은 언제 갈 거야?”

영훈은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한 뒤 말했다.

“다음 주에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솔직히 나도 걱정스럽기는 해. 그래도 잘 할 거라고 믿어. 최 상무도 그렇고 해주조선해양도 그렇고.”
“믿으세요.”
“그래야지. 영국 갔다 오면 결혼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어지간한 건 연희가 알아서 할 테지만, 그래도
사진도 찍고 가구랑 전자제품 같은 것도 봐야 하잖아. 너무 연희에게 맡겨놓지 마. 그거 같이 고르는 것도
재미니까.”
“네, 알겠습니다.”
송 회장은 영훈의 미소에 적잖이 마음을 놓았다.

무령왕릉 근처 사람들이 은밀히 운명을 보러 오는 화옥당 대기석에는 항상 빽빽하게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빽빽하게 앉아 있어야 할 대기줄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오늘 예약자들을 모두 다른 날짜로 미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방문할 사람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여당의 당대표인 민구상 의원이 손자 이름을 짓겠다고 찾아온다 했기 때문이다.
작명에 관해서는 임복희 스스로도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자부하는 바였고, 그만큼 정치권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자부한다고 해서 그만큼 능력이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명우도사는 그녀의 사주보는 법과 작명하는 걸 보며 항상 비난을 퍼부었으니까.
아무렴 어떤가?
사람들이 그녀가 능력이 있다고 여기고 있으면 되는 것인데.

“어떤가?”

후덕한 살집을 자랑하는 민구상 대표는 곱게 싸온 종이에 손자의 사주를 적어 내밀고 말했다.

“보자~”

임복희는 사주팔자를 찬찬히 살피며 만세력을 뒤적였다.


그리고 한참을 계산하고 빈 종이에 적어 내리다 말했다.

“금동자네. 복이 많아. 우리 대표님 사주만큼이나 큰~ 사람이 될 거야.”


“그게 정말인가?”
“천덕귀인이야. 성격이 인자하고 복이 있어. 이게 다 대표님이 평소에 덕을 잘 쌓아서 그런 게지.”
“뭐 안 좋은 건 없고?”
“굳이 찾자면 고집이 세고 잘못된 걸 보면 그냥 넘어가지를 못해.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지.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 사주야.”
“그래?”

민구상 대표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한다.

“왜? 싫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쪽 같은 선비치고 권세 오래 누리는 사람 보지를 못했어. 예전이야 대쪽같으면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만, 지금은 SNS 다 뭐다 해서 조금만 꼬투리 잡히면 오히려 더 욕하는 세상이거든. 오히려
적당히 흠 있고 적당히 빈틈이 있는 사람이 오래 가는 법이야.”

임복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아니 내가 더 설명 안 해줘도 알겠네. 시기 질투가 심해서 관직을 얻으면 오래 가지 못할 수 있어.”


“그거야 하기 나름이지. 어디 사주대로만 살아가든가?”
“그럼. 그래서 이름을 좋~은 걸 지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뻗칠 이름을 지어주지.”
“얼마면 돼?”
“오백.”

민구상 의원이 미간을 꿈틀거린다.


비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임복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비싸면 다른 데서 해. 평생 한 번 쓸 이름인데 오백이 비싼가?”


“내 말이 그 말이야.”

민구상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있는 보좌관에게 현금 오백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좌관이 오만 원짜리 백 장이 담긴 하얀 봉투를 들고 왔고, 민 의원은 그걸 받아 임복희에게
건넸다.
임복희는 그 자리에서 바로 봉투를 열어 하나하나 꼼꼼하게도 백 장을 세어봤다.

“왜? 내가 틀리게 넣었을까 봐?”


“아니. 그런데 내가 전에 점을 봐주는데 복채를 절반도 안 넣어준 이가 있었다오. 그래서 그래.”

마지막 백 장을 손가락으로 탁 튕긴 임복희는 봉투 안에 현금을 고이 넣어 내려놓고는 말했다.

“대표님.”
“왜? 무섭게 뭘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
“내 눈빛이 무서워?”
“눈화장을 그렇게 해놓고 안 무서워하길 바라는 거야? 무서우라고 한 화장 아니야?”
“그 센스로 장가는 어떻게 갔대?”
“우리 나이 때 장가가려면 센스가 필요했던가? 흰소리 그만하고 뭔데?”
“총선도 끝났고 이제 대선 준비하겠네?”
“당연한 걸 뭘 물어?”
“직접 나가시려우?”
“날 몰라서 묻는 거야? 난 가늘고 길게 가는 게 목표인 사람이야. 5 년 해 먹고 뒷방 늙은이처럼 살아야 하는 건
관심 없어.”

임복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았다.


대권에 관심이 없다는 정치인의 말은 미녀에 관심이 없다는 남자의 말과 같았으니까.

“정말? 그럼 할 수 없고.”
“뭘 할 수 없는데?”
“난 대권에 관심 있으면 도와줄까 했었지.”
“거 이야기를 꺼냈으면 말이라도 해봐. 이대로 집에 가면 궁금해서 잠이라도 자겠어?”
“옥동자 같은 손자 볼 쓰다듬어 주면 다 잊어먹을 텐데?”
“흰소리 그만하고 얼른 속에 있던 거나 꺼내 봐.”
“대권이 뭐야? 최고 권력자 아니야? 예로부터 최고 권력자는 곧 신과 동일하다고 했어. 하늘과 같았다고.
하늘이 곧 뭐야? 태양. 대표님은 양기가 부족해.”
“양기가 부족하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양기가 가득한 사람을 주변에 둬야지. 배우들 반사판 쓰는 게 왜 쓰는 건데? 빛이 부족하니까 반사판으로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거잖아. 반사판이 될 사람. 대표님 옆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직행이야.”

괜스레 목이 말라진 민구상 대표는 주변을 둘러보다 결국 보좌관을 찾았다.

“야! 경식아! 밖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 좀 떠와.”

보좌관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와 종이컵에 담긴 물을 건네주고 나갔다.


민 대표는 한 번에 물을 들이켜고는 물었다.

“그게 누군데?”
“대권 도전도 안 할 사람이 뭐가 궁금해?”
“그냥 알아만 두게. 혹시 알아? 알아두면 쓸 데라도 있을지?”
“됐어. 괜히 옆에 뒀다가 봄바람에 싱숭생숭해진 처녀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면 어째?”
“안 그래도 저혈압인데 콩닥거리는 거 나쁘지 않네.”
“어이쿠? 말하는 것 보게?”
“자꾸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털어놔. 복채 줘야 해?”
“그럼? 시커멓게 흐린 하늘에 햇볕 쬐게 해준다는데 공짜로 하려고 하셨어? 우리 민 대표님 이렇게 안
봤는데···.”
“얼마가 필요한데?”
“천만 원.”
“아니, 여기는 십만 단위는 아예 취급을 안 하는 거야? 최하 단위가 백만 원부터인 거지?”
“서민들한테는 복채 30 만 원에 해. 그런데 대한민국의 여당 당 대표한테 30 만 원 받으라고? 우리 신령님 놀라
뒤집어지셔.”
“말은···.”
“내가 가격을 높게 부른 건 그만큼 지위가 있다는 뜻인 거야. 남들은 천만 원 내고 싶어도 내가 안 불러.”

그렇게 임복희가 큰소리를 떵떵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세단이 화옥당을 빠져나갔다.


추가로 5 만 원권 200 장이 담긴 봉투를 매만지던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이번에는 당 대표야. 또 실수하면 내가 전라도 내려가서 죽여버릴 테니까 똑바로 해. 알겠어?”

전화를 끝낸 그녀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씨발···.”

확실히 용하긴 용한 점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이미 몇몇 기자들로부터 난도질당하듯 당했던 자신이 어떻게 당 대표 측근으로 다시금 추천될
수 있을까.
물론 이번에는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안도하고 있었다.

“좋았어. 좋았어!”

그는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의 옆 벽면에는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계획도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3,500 여 세대 대단지 조성이라 다른 곳이었다면 만만치 않았겠지만, 이번 사업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미 여수 일대에는 전부 자신의 사람들이 쫙 깔려있다고 봐야 하니까.
이번 사업으로 다시 한 몫 당기면 이제 자신의 앞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 이빨을 드러낸 대가(1) > 끝

< 이빨을 드러낸 대가(2) >

여수시 여서동에 위치한 한 룸싸롱.


여수시 도시시설사업단장인 오정규 단장은 옆에 앉은 룸싸롱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잠시 내보내고는
말했다.

“내가 참 우리 강 사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요로코롬 세심할 수가 있는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막말로 요새 집 하나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내 말이 그 말 아닌가.”
“결혼을 하고 싶어도 집이 한두 푼이라야 결혼을 하지요. 젊은 사람들이 집 걱정 안 하고 결혼해야 애도 많이
낳고 인구가 늘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부 부동산입니다, 부동산.”

오정규 단장은 무릎을 쳤다.


“그게 정답이여!”
“조카님이 결혼하신다는데 제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누가 도와드립니까.”
“근디 말이여. 우리 조카님이 낮은 층은 그렇게 싫다고 하드만. 온갖 사람들 지나가다가 한 번씩 쳐다본다고.
하긴 나도 그런 적이 있응께. 젊은 처녀 총각들한테는 거시기하긴 혀.”

강윤기는 쌍욕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삼켰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을 따내기 위해 수많은 곳에 돈을 찔러줘야 했다.
공사비만 수천억에 달하는 거대 사업에 고작 얼마의 돈만 찔러줘서 일이 진행될 리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돈, 그것은 바로 부동산 아니겠는가?


국가에서 개발하는 택지지구에 들어서는 아파트.
그곳에 당첨만 된다면 그 이익은 지방이라고 해도 상당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공무원인 사업 관계자들이 미쳤다고 직접 준공, 분양되는 아파트에 청약을 넣을까.


당연히 타인 명의로 당첨을 해주겠다고 슬쩍 찔러보자 오정규 단장은 단박에 받아들였다.
오정규 단장과는 이미 알고 지낸 지 10 년도 더 된 사이다.
그간 수많은 성의표시(?)와 대가가 오고 간 사이였지만, 만흥지구에 들어서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게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해주고서 이번 사업을 따낼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할 것이건만 대놓고 로얄층을 달라고까지 하니 속된말로 빡이 칠 수밖에···.

“물론이죠. 좋은 층으로 챙기겠습니다.”


“나중에 문제 생기는 일은 없지?”
“그럼요. 제가 언제 문제 생기게 하는 거 봤습니까?”
“으잉~ 그려, 그려···. 흐흐흐··· 바쁘지? 얼렁 가 봐.”

이제 볼일 끝났으면 얼른 가라는 말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가씨를 다시 부르는 그를 보며 강윤기 사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밖에 잠시 나가있던 여종업원이 다시 들어오고 그녀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낸지 10 분 정도가 흘렀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뭐, 뭐여!”
“안녕하십니까. 좋은 시간 보내시는데 방해드려 송구스럽지만 잠깐 대화 좀 합시다. 아가씨는 잠깐 나가
있을까?”
“······.”
“아,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전 우명건설 주택사업본부 윤희찬이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지만 부장 달고 있으니
그래도 단장님과 같은 자리에 앉을 자격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그런데 아직 안 나갔니?”

여종업원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가는 여종업원을 부르지도 못한 오정규 단장은 허겁지겁 녹차를 마시며 겨우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우, 우명건설 직원분이 어떻게 여까지 오셨소?”


“여수가 어떤 지역입니까?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도시에다가 그림같이 아름다운 관광지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대단위 택지지구를 개발한다는데, 우리 우명건설이 어려운 여수시를 위해 한 몫 거드는 게 어떤가 하는 마음에
직접 내려왔습니다.”
“우명건설에서? 아따 우명에서 뭐 먹을 게 있다고 숟가락을 얹어 분다요? 동네 아들 코 묻은 돈 빼앗는 거
맹키로?”
“말씀드렸잖습니까? 우명건설에서 여수시의 발전을 위해 한 팔 거들기로 했다고요.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어디
지방이나 전전하는 코딱지만 한 건설사가 분양하는 아파트에 사람이 몰리겠습니까 아니면 우명건설에서 지은
아파트에 사람이 몰리겠습니까? 딱 견적 안 나오세요?”
“모라고라? 무슨 그런 그짓부렁을··· 나도 대굴빡이 안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여. 여까지 왔으니께 딱 까고
얘기해 보쇼. 뭐 땀시 그란다요? 원하는 게 있으니께 그런 거 아니오?”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이번 사업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어쩔 수 없으면?”
“그냥 포기할 겁니다. 평양감사도 지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않아요? 선의로 도와주겠다는데
단장님이 싫다고 했으니 어쩌겠습니까? 손 털고 나가는 수밖에. 우리 주민들이 좀 아쉬울 뿐이겠죠. 많이 아쉬울
거야.”

윤 부장의 태연한 말투에 오정규 단장이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아따 당황스러워 디져불겄네.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나 오정규가 우명건설을 제꼈다고 소문이라도


내시게?”
“우리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예수님 같은 사람들 아닙니다. 좋은 일은 널리 알려야죠.
시장님한테도 알리고, 주민들한테도 알리고···.”

우명건설이 참여한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할 사람은 아마 이곳 여수시장일 게 분명했다.


만약 우명건설이 스스로 참여한다는 제안을 했는데 도시시설사업단장이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내 모가지도 날리고? 아따 겁나게 무섭네잉.”


“그런데 궁금하네요? 단장님은 왜 싫어하는 겁니까? 다른 데서는 우리가 참여한다고 하면 두 손을 꼬옥 잡고
죽은 조상님이 돌아온 것처럼 눈물을 흘리시던데. 제발 집값 좀 올려달라면서요. 막말로 우리가 서울에서나 누가
잘났냐고 싸워대지, 이런 시골까지 내려와서 찬밥 취급이나 당
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신기하네?”
“그, 그거야···.”
“영민주택 사장이 돈다발이라도 드린다고 했습니까?”

오 단장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따 뭔 개소리여!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윤 부장은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귀청 떨어지겠네. 그런데 왜 그런 일 많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돈 봉투


안겨주고 일감 따오는 거 대한민국에서 우리보다 잘하는 곳 몇 없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원조 아닌가?”
“······.”

황당한 소리에 오 단장이 눈만 꿈뻑했다.


윤 부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쌍팔년도 이후로 돈 봉투보다 다른 쪽으로 많이 도움을 주고는 했는데, 이를테면 개발지역 주변 땅을 저렴하게
살 수 있게 해준다거나, 아니면 친척 명의로 청약을 넣으면 당첨을 시켜준다거나···.”

이때 오 단장이 움찔하는 걸 보고 그가 빙그레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거였어요? 별거 아니네. 이렇게 합시다. 우리도 하나 당첨시켜드릴게. 말했듯이 영민주택 아파트보다는
우명건설 아파트가 훨씬 비싸지. 안 그래요?”
“거참 궁금해 디져불겄네. 도대체 뭐 땀시 그러는지···.”
확실히 아파트 하나 당첨시켜준다는 소리에 오 단장의 목소리가 확 줄었다.
그걸 보고 윤 부장이 짜증이 난다는 듯 쇳소리를 냈다.
평소 김창훈 상무 옆에서 화 한번 내지 않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 씨··· 이유를 왜 알려고 그래요? 단장님이 뭐 경찰이야? 아니면 검찰이야? 주민들 좋고, 시장님 좋은 일
아니에요? 아니 왜 도와준다고 해도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보지?”
“아니··· 찜찜하니까 그냥 궁금시려워서 그러쟤.”
“뭐 어떻게 해 그럼? 하지 말까요? 지금 당장 시장님한테 달려가서 우리 안 한다고 할까요?”

오 단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윤 부장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유아유, 알겄으니까 그만 하드라고.”


“그럼 나 해요?”

방금 전 빽 소리를 질렀던 오 단장은 백팔십도가 달라진 모습으로 말했다.

“천하의 우명건설이 나서겠다는데 어느 누가 반대하겄능가? 해부러! 나가 팍팍 밀어불 것잉게.”


“나 오정규 단장님 믿어도 되는 거죠?”
“그렇당께!”
“그럼 저 다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정식으로 사업제안서 보낼 테니까 그 전까지 확실하게 처리 좀 해주세요.
그리고 이상한 날파리들 달려드는 거 정리 좀 해주시고.”
“날파리? 3,500 세대를 혼자 해불게?”
“그럼 그 꼬딱지만 한 걸 나눕니까? 우리가 도움주러 왔다니까 진짜 기부천사인 줄 아시나?”
“크흠··· 미안혀.”

윤희찬 부장은 오 단장을 빤히 보다가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단장님, 우리 이거 확실하게 합시다. 우리 단장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오신 인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눈치도 보고 챙겨도 줘야 하는 거··· 그거 인정해드릴게요. 받은 게 있으면 챙겨주는 게 도리지.
그런데 그중에 영민주택은 끼어 있으면 안 됩니다.”
“영민주택이 그짝한테 겁나게 큰 실수를 했는가보네잉?”
“그건 묻지 마시고. 정리 잘 해주실 수 있죠?”
“아이고~ 걱정 말드라고.”
“그럼 믿고 올라갑니다.”

윤희찬 부장은 그에게 허리를 90 도로 꾸벅 숙이고는 룸을 나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당연하게도 김창훈 상무였다.

“나야.”
[어. 얘기 잘 됐어?]
“강윤기가 길을 잘 들여놨더라. 주고받는 게 거리낌이 없어. 아파트 하나 주기로 하고 마무리했다. 알아서
정리할 거야.”
[믿을 만해 보여?]
“뇌물 받고 사업자 몰아주려는 인간이 믿을 만하면 얼마나 믿을 만하겠냐? 믿을 만해서 접근한 게 아니라 접근한
뒤에 일을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지.”
[하여간 잘난 척은···.]
“인도에서 아직 연락은 없고?”
[아직··· 최영훈 상무가 허튼소리는 하지 않겠지?]
“그러지 않기를 빌어야지.”
[야, 아까는 일을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라며?]
“그것도 우리가 상대 머리 위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최 상무는 우리 머리 위에서 놀고 있잖아. 그럴
때는 가만히 순종하면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야. 너는 이번 일이 생경할지 모르겠지만 원래 직장인 인생이
그래. 열심히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거.”
[어째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뭐, 네가 듣고 찔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는 언제까지 직장인일 것 같아? 너, 내가 우리 형 제끼면 개국공신이야.]
“아무렴요. 내가 그거 하나 바라보고 주말에도 아빠 기다리는 토끼 같은 자식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
[너, 나한테 잘해야 한다. 알지?]
“아이고, 나만큼 하는 사람 찾아봐. 어디 있나.”
[하하하! 그건 그래.]
“끊자. 나 운전해야 해.”

윤희찬 부장은 전화를 끊으며 룸싸롱 앞에 대놓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지금 서울로 출발하면 아마도 새벽에나 도착할 듯 싶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창훈은 저녁이 한창 차려지고 있을 부엌으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 있는 도훈을 보고 멈칫 굳어버렸다.

“퇴근했었어?”
“어? 어··· 형은 언제 왔어?”
“나 방금 왔지. 저녁 먹으려고?”
“응.”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는 거야? 안에서 신나게 통화하던데?”
“들었어?”
“그냥 웃는 소리가 막 들리길래.”

창훈은 싸늘한 공기가 자신을 에워싸는 느낌을 받았다.

“별거 아니야. 윤 부장이 인도 건 잘 마무리하는 것 같아서. 요즘 내가 뭐 하면 되는 일이 없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좀 잘 풀리는 것 같아서.”
“좋은 일이네. 그런데 요즘 너 여자 안 만나냐? 엄마가 걱정하던데?”

순간 창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치솟는 격동을 애써 누른 창훈이 말했다.

“엄마는 내가 언제 말했는데 아직도 연희랑 약속 한번 안 잡아주는지 몰라.”


“여자가 한둘이냐? 얼른 골라서 결혼해.”
“그래야지.”
“혹시 아직도 옛날 여자 못 잊는 건 아니지?”
“옛날 여자? 옛날 여자 누구?”
“왜··· 니들이 경기상고 여신이라고 그렇게 찬양하던··· 이름이 뭐더라?”
“아~ 지원이? 잊었지. 언제 일인데.”
“그럼 다행이고. 먼저 내려가. 난 씻고 내려갈 테니까.”

도훈은 창훈을 의미심장한 미소로 바라보고는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창훈은 이를 악물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래, 저 악마새끼라면··· 진짜 기억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창훈은 이내 표정을 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엌으로
내려갔다.

< 이빨을 드러낸 대가(2) > 끝

< 이빨을 드러낸 대가(3) >

늦은 밤, 강윤기 영민주택 대표는 거실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이제 제법 날씨가 따뜻해져 밤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선선한 바람이 기분을 살랑이게 만들었다.
살포시 오른 취기에 기분 좋은 봄바람을 느끼며 여유를 즐기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찾은 그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가 화옥선녀인 임복희였기 때문이다.

“네, 선녀님.”
[아직 연락 없어?]

여당의 당대표인 민구상에게서 연락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다.

“아직 없습니다.”
[그래? 이 능구렁이가 머리를 굴리고 있나 본데? 그러게 진즉 잘했으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 안 하잖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겁니다.”
[회사는? 사고 처리하느라고 돈 좀 썼을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 여수 택지개발 사업 들어가면 만회될 것 같습니다. 선녀님도 걱정하지 마세요.”
[내 땅 앞으로 메인상가 위치하는 거 맞지?]
“그럼요. 설계 완벽하게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시에서 원하는 게 있다고는 해도, 일단 땅 파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는 융통성 있게 인정해주지 않습니까.”
[그래. 언제 민구상 대표한테 연락 올지 모르니까 항상 긴장해야 해. 야당에 한 번 붙었다가 괜히 사고 친 거
귀에 들어가서 고민하고 있는 게 확실하니까, 절대 말실수나 성급하게 들이대는 거 안 돼. 그 사람 신중한
사람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신령님이 강 사장 앞날이 구만리래. 그런데 그놈의 성급한 성격이 꼭 초를 친다고 하니 내 말 꼭 명심하고.]
“예.”

화옥신녀는 강윤기가 대답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어찌보면 매정하다 싶을 정도지만 오히려 강윤기는 그런 그녀가 카리스마 있게 느껴졌다.
그런 카리스마가 있기에 지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여당의 당대표를 붙여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은 더더욱 중요했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은 여당에서 주도하는 사업이었고 여수, 광양, 남해 일대는 민구상 대표 라인이 쫙
깔려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좋은 성과를 보이면 민구상 대표에게 기분 좋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거다.
기분 좋은 미래가 눈앞에 보여서일까?
안 그래도 달콤한 와인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쉬지 않고 와인을 마시다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린 그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눈을 떴다.

발신자는 오정규 도시시설사업단장.


어느새 밝은 햇빛이 집안에 가득 들어와 있는 걸 보고 늦잠을 자버렸음을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9 시 반이다.
황급히 일어나며 일단 전화부터 받았다.

“네, 단장님.”
[목소리 들으니께 이제 일어났능가?]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그게··· 내가 참 죄송시럽네.]
“뭐가 죄송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이구 참··· 이 일을 우짜스까···.]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말을 좀 하세요. 뭔데 그럽니까?”
[아무려도 영민주택은 이번 사업에 선정되기 어려울 것 같으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안하네잉. 나도 어쩔 수가 읎어. 다른 곳도 아니고 우명건설에서 떡 치고 들어오니 이건 뭐 가만히 있는데
호박이 냅다 굴러들어온 상황 아니겠는가?]

강윤기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명건설이 왜 여수에 손을 댑니까? 여기서 분양해봤자 먹을 게 얼마나 된다고?”


[근디 말이여, 혹시 우명건설이랑 뭐 안 좋은 일 있었당가?]
“제가 우명건설이랑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습니까? 저 우명건설이랑 사업 선정으로 붙어본 적도 없어요.”
[하··· 참 요상허네. 그짝에서 꼭 영민주택이 안 됐으면 하는··· 여튼 영민주택이 그짝한테 징하게 못이 박힌
것은 틀림없당께. 그니께 가서 빌어보등가 하더라고. 참말로 미안하네잉.]

오정규 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것인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방에서는 부산 정도의 대도시에서나 활약하는 우명건설이 광주광역시도 아니고 인구가
30 만 명도 안 되는 촌구석에 무슨 지랄이 났다고 내려오냔 말이다.
아무래도 오정규 단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아무 이유 없이 만흥지구에 손을 대지는 않을 거다.
그 이유가 자신이라면 그깟 무릎 수십 번도 꿇을 자신이 돼 있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샤워부스로 향했다.
오늘 아무래도 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온 영훈은 회사에 들어가다 갑자기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 있는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었다.


하도 외국을 들락거리는 상황이라 회사에 있어도 기조실 외의 사람들과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민희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지나갈 때마다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었다.

“커피는 하셨어요?”

마셨다고 하면 왠지 다른 핑계를 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요. 요 앞에서 살 예정이었습니다.”


“그럼 잠시 커피 한잔 어떠십니까?”
“좋아요. 가죠.”

연희는 뒤에서 다가오다가 눈치껏 빠졌고 기조실의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박병호 부장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오지환 부장을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넓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도착한 둘은 조금 외진 자리에 앉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온 오 부장이 말했다.

“몇 번 인사드린 적은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원개발팀에서 중동,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는 오지환 부장이라고 합니다.”
“기획조정실 최영훈입니다.”

영훈은 그 틈에 손을 내밀었고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눴다.

“결혼 준비에 한창이시라고 들었는데 제가 귀한 시간 뺏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회사 인트라넷에 공지라도 올렸는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연희가 범인일 거라 생각하지만 굳이 왜 퍼뜨렸냐고는 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일하는 시간에 결혼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저를 따로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실은 상무님께서 니폰유센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요?”

영훈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감히 상무님의 뒤를 캐고 다니거나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상무님이 입사하신


지 오래되시지 않았고, 굉장히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계시지만 모든 걸 다 아실 수 있는 게 아니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 알아본 것뿐입
니다.”
정말 필사적으로 추켜세우는 통에 뭐라 하기도 그랬다.

“아, 네···.”
“혹시라도 불편하시다면 앞으로는 절대 상무님의 업무를 외부에서 조력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일단 어떤 이야기인지 먼저 들어보고 판단하면 되겠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앞으로 이렇게 불러내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오지환 부장은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우리 HS 물산이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면서 우려 섞인 시선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가동이 중단됐던 군산조선소를 다시 움직이면서 엄청난 규모의 고정지출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해주조선해양은 거제조선소만을 돌리기에도 힘겨운 상황입니다. 그렇
기에 니폰유센에서 LNG 자동차운반선을 수주하신 건 굉장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요?”

본론은 지금부터이리라.
“상무님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기실 겁니다. 그래서 영국 큐나드 크루즈와 접촉하면서 크루즈선까지
수주를 노려보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상무님은 단순히 몇 척의 수주를 더 받아서
회사의 매출을 올리려는 걸 넘어, 앞으로 군산조선소의 안정적인
운영까지 같이 생각하고 있다고요.”

민희에게 어디까지 들어서 하는 말일까?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 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사실 원청과 하청은 갑과 을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조선소는 항상 선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그런 수직적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근원적인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해운사를 인수하는
거지요. 상무님은 그중에서도 자동차운반 시장에서 세계 톱 3
안에 드는 니폰유센에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관심이 없었다면 추가 LNG 선 계약 때 선박 인도 시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 동일한 가치의 주식으로
양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이건 꽤 놀랐다.
해당 조건은 비공개였고 심지어 해주조선해양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력 많이 하셨네요. 만약 그렇다면요?”


“제가 니폰유센의 지분구조와 회사채 보유 현황을 파악했습니다. 매출 흐름은 견고했고 큰 문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야 오키노리가 그룹 총수의 딸과 결혼해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3 년 전부터 회사의
순이익이 계속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작년에는 60 억 엔이 넘는
당기 순손실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60 억엔이라···.”
“아무래도 이상해서 사업 내역을 꼼꼼히 살펴보니 배를 운행해서 번 돈으로 이상한 곳에 투자하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AEI 라는 글로벌 투자 펀드였습니다.”
“번 돈을 주식에다가 붓고 있었다는 말인 거죠?”
“맞습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데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등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투자하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근 몇 년 동안 이 펀드가 상당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손실규모가 상당한 데다가 중국에서 건조 중인 자동차운반선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에 또 한번 타격을
입었습니다. 계속 지켜보면서 회사 자금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지분을 매입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영훈의 대답에 오 부장이 움찔 놀란다.

“네? 어째서···?”

영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중요한 부분에서 필요 없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난 거다.


자고로 직장인은 윗사람에게 쓸모없는 사람으로 찍히면 승진하기 힘들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어진 영훈의 말은 오 부장으로서는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것 말고 그 펀드 회사에 대해 좀 알아보시죠?”


“AEI 말입니까?”
“네.”
“어떤 식으로 알아보면 될까요? 펀드를 운용하는 회사를 알아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운용하는 주 펀드매니저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가야 오키노리는 펀드 투자 같은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을 사람입니다.”
“네?”
“남는 회사 자금을 펀드로 굴려서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배를 잘 운영해서 수익을 많이
창출하겠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오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얼빠진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야 오키노리를 도대체 얼마나 자주 봤고 대화를 나눠봤다고 사람을 단번에 저렇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영훈은 계속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그는 노력파입니다. 굉장히 성실해요. 한 방에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건 그의 성향과 맞지 않아요.”

단지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AEI 에 상당한 자금이 들어간 건 확실합니다. 상무님께서 뭔가 착각을 하고 있으신 건 아닌지요?”
“그러니까 알아보라고 하는 거예요. 대박을 노릴 사람이 아닌데 엄청난 자금이 펀드로 빠져나갔다? 그렇다면
대박을 노리는 게 아닌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결론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그 결론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확실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보고 그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까?

“혹시 가야 오키노리에 대해 알아보셨습니까?”


“가야 오키노리요? 사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니요.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와이프는 어떤지 모르시겠네요?”
“네? 아, 네···.”
“보통 재력가의 외동딸과 결혼하는 남자라고 하면 돈을 좇아서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겠죠?”
딱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영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오 부장은 그게 신기한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대개 그런 결혼을 한 남자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옛사랑을 만난다든지,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운다든지 하던데.”
“드라마를 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요.”
“그리고 대개 드라마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하더라고요.”

그제야 오지환 부장은 영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혹시 가야 오키노리가 바람을 피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알 수 없지요. 그런데 궁금하네요. 뜬금없이 왜 회삿돈을 거기에 투자했을지···.”

< 이빨을 드러낸 대가(3) > 끝

< 이빨을 드러낸 대가(4) >

영민주택 강윤기 사장이 서울로 올라와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은 당연하게도 우명건설이었다.


처음에는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몰라 일단 다짜고짜 주택영업본부에 연락해서 혹시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에
진출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여자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대답 대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영민주택에서 연락한 거냐고 묻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하니 연락처를 알려주면 조만간 전화가 갈 거라는 대답을 들은 강윤기는 우명건설 본사가 있는 강남역
일대에 잠시 차를 세워 놓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차 안과 주변 커피숍을 오가며 기다리기를 한참···.
그러고도 저녁 시간까지 지나고 밤 10 시가 넘어가면서 가까운 호텔에 방은 잡은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님 되십니까?]
“맞습니다.”
[어디십니까?]
“강남역입니다.”
[잘 됐군요. 3 번 출구에서 300 미터 직진하다보면 왼편에 초콜릿이라는 바가 있습니다. 거기서 뵙죠.]
“알겠습니다.”

전화는 끊겼고 강윤기는 바로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고 이동했다.


초콜릿이라는 바는 찾기 어렵지 않았다.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바에 들어선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직원이 다가왔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강윤기라고 하는데···.”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바로 가게 가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었다.

“혹시···.”
“영민주택 강 사장?”

둘 중에 딱 봐도 조금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대뜸 하대를 한다.


이 자리의 주인이 그 자인 것이 확실했다.

“네? 예, 맞습니다.”
“앉아요.”

턱짓으로 앞자리를 권한다.


건방지기 그지없지만, 행동의 자연스러움을 보면 그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적어도 우명그룹 회장의 피가 섞인 사람이리라.
아무리 자신이 지방에서 나름 힘 좀 쓰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명그룹은 한국을 넘어서 대형
규모의 해외건설까지 수주하는 수준이다.
감히 넘볼 수도 없는 클래스였다,
그 남자는 말 없이 앞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강윤기가 서둘러 잔을 받을 때 그가 말했다.

“놀랐죠?”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무얼 묻는 건지는 알았다.

“네? 네. 놀랐습니다.”
“우리 윤 부장도 그날 여수에 처음 갔었다고 해요. 그렇게 뽈뽈거리고 돌아다녔으면서 여수는 처음 가봤다니 그건
좀 웃기다니까. 강 사장님.”
“네?”
“여수 그림자도 못 밟아봤던 우리 윤 부장이 굳이 거기까지 간 건 다 당신 때문이야.”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때문이요?”
“그럼 우리가 뭐 먹을 게 있다고 여수까지 가서 그 지랄을 했겠어요? 기껏 똥 싸며 아파트 올려 봐야 분양가
얼마나 나오겠어? 평당 천? 잘하면 천오백?”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핀잔하듯 말했다.

“천오백 안 나오지.”
“들었죠? 천오백도 안 나온다네. 그럼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왜 그 지랄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저 때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술 안 좋아해요?”
“아닙니다.”

강윤기는 단번에 글라스잔에 가득 담긴 술을 원샷으로 들이켰다.


목구멍에 불이 날 것 같았지만 그는 억지로 그 고통을 삼켰다.

“술 잘하네요. 깡이 있나 봐? 그런데 아무리 깡이 좋아도 그러면 안 되지.”


“제가 누구에게 실수한 건지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면? 복수라도 하게?”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알아야 실수를 만회라도···.”

창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끊었다.

“흥! 만회는 무슨··· 당신 이미 찍혔어. 그것도 아주 독하게. 건드려도 하필 왜 그 인간을 건드려 가지고는···.
당신 때문에 우리도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당신 때문에 돈도 안 되는 공사 억지로 맡아서 해야 하잖아.”

처음에는 중간중간 존댓말도 섞던 창훈은 아예 말을 놓고 비난을 퍼부었다.


참담한 상황이었지만 강윤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감히 반항하는 티도 내지 못했다.
상대가 될만한 사람이라야 꿈틀이라도 해볼 텐데, 대한민국에서 재벌 3 세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얼마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재벌 3 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자신이 건드렸다?
사람을 못 알아본 자신의 눈깔을 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만 제가 무슨 잘못을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신다면 앞으로 이런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해봐. 요새 누구한테 뭘 잘못한 것 같지 않아?”

창훈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강윤기는 천천히 과거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그 생각은 조재민 시장에서 멈춰졌는데 강윤기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조재민 시장님이···?”

군산시장이 되기 전만 해도 광주에서만 놀던 지역 정치인이 바로 그였다.


안 그래도 전라도 지역에서 발이 넓은 강윤기인데 조재민 시장이 어느 정도 되는 인물인지 모를 수 있을까?
군산의 터줏대감인 강주원 의원 밑에서 겨우 얼굴이나 들고 다녔던 조 시장이 우명그룹 핏줄을 움직였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알 필요 없고··· 그런데 맥락이 비슷하긴 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네.”

확인사살이다.
결국 조 시장을 건들면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강윤기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냥 여수에서 손을 떼고 끝난다면 후일은 도모해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수에서 끝나지 않을 경우였다.
앞으로 공공부문 사업공고가 날 때마다 이렇게 잡아먹겠다고 달려들면 지방의 소규모 건설사는 죽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상황인 거다.

“나도 그쪽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나한테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는 없어요. 딱 한 가지만 주의하고
살자고요. 내가 건드려도 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하면서 삽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잔 더 해요.”

창훈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강윤기는 이번에도 단번에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창훈이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여수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보도록 해요.”

한번 호되게 혼내주고 끝내겠다는 말에 강윤기는 저승 구경 한번 하고 돌아온 안도감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에 들어간 비용이 아깝긴 했지만 일단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면 버리는 셈 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다음에는 혹시 보더라도 기분 좋게 봅시다. 가보세요.”

강윤기는 90 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가게를 나갔다.


멀어져가는 강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여유롭던 창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 이제 하나 처리했네.”
“회장님은 뭐라고 해?”
“뭐라고 하긴. 나한테 여수에 자신 모르게 땅 사놨냐고 물어보시더라.”
“크크큭···.”
“아니라고 해도 잘 안 믿으시던데? 하긴 씨발 나라도 못 믿지. 갑자기 돈도 안 되는 여수에 아파트 올린다는 데
꿍꿍이가 있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내가 아버지 설득하려고 어젯밤에 여수시 관계자한테 자료 얻어서 앞으로 10 년 치 개발 계획 공부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그거 계속 읽다 보니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공부를 하는 건지 세뇌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버지한테 땅 안 산 거 증명하려고 무려 30 분을 브
리핑했다.”
“오오··· 회장님이 수긍하셔?”
“아니, 그냥 ‘땅 산 거 숨기느라고 열심히 노력하는구나’하는 딱 그 표정?”
“그래서 결론은 승낙해줬다는 거지?”
“응, 아들이 만흥지구 주변에 땅 산 거 같은 느낌이 들 텐데 어떻게 말려? 미심쩍어하면서도 잘 해보라고
하시더라고. 게다가 우리가 이번 인도 건에서 확실히 점수 벌었잖냐.”

인도까지 가서 라마누잔 차관을 만난 것까지 회장의 귀에 전부 들어갔다.


단지 김태현 회장은 창훈이 인도에 가서 일을 잘 마무리해 신공항 건설에 차질이 없도록 능력을 발휘했다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니 여수에서 아들이 조금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넘어가는 것이리라.

“하긴···.”

윤희찬 부장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창훈이 갑자기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형이 나 선 안 보는 거 가지고 아직도 지원이 못 잊었냐고 하더라. 씨발, 이름은 기억도 못하대?”
“개새끼···.”
“내가 진짜 나중에···.”

그때 그들이 앉은 자리로 누군가가 스윽 다가왔다.

“앉아도 되죠?”
“아, 그럼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최영훈 상무였다.


영훈은 바를 주욱 둘러보고는 말했다.

“가게 분위기 좋네요. 강윤기 사장과는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창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네. 단단히 일러뒀습니다. 그래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놈은 아닌지 상황 파악 못 하고 날뛰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앞으로 상무님 앞에서 건방지게 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대신 교육시켜 주느라고 고생했습니다.”
“고생은요. 제가 뭘 했다고, 하하하!”

윤 부장은 여수까지 다녀온 건 자신인데 말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자화자찬하는 창훈을 보며 눈을 흘겼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말씀드렸듯이 이번 계약은 우명건설이 주도하는 것으로 하되 설계 부분에서


우리 기술자가 합동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두 회사의 이익이 어긋나는 부분이 생긴다면 HS 건설의 제안을
우선으로 합니다. 그에 관한 계약서는 상무님과 저만 가지고 있는
거고요. 아시겠죠?”

창훈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인도 신공항 건설에 필요한 중장비 계약 업체는··· 우명건설기계로 하기를 원하시죠?”

창훈은 긴장감을 토하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중장비 계약을 우명건설기계로 하지 않으면 그룹에서 저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럼 우명건설기계를 선정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중장비 생산업체 현진기계는 HS 그룹 계열사도 아니었고 현진기계 김대영 사장은 임지은 사장의 남편이었다.

사실 창훈도 그 부분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내심 중장비업체 계약은 우명건설기계로 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갑이 자신이 아니었기에 가슴 졸이며 긴장하고 있었던 거였다.

“감사합니다.”
“대신 그···.”

영훈은 살며시 두 사람의 눈길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대신 어떤 걸···?”
윤 부장이 물어보자 영훈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 말씀하셨던 인도네시아 신도시 건설 있지요?”


“아~ 네.”
“그걸 좀 같이 하고 싶은데···.”

전에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차게 까놓고선 다시 말하려니 민망했던 거다.


신공항 건설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HS 건설 관계자들에게 들으니 만약 참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공사든 다 참여하는 게 좋다는 말에 슬그머니 다시 카드를 내밀어본 거였다.
어차피 중장비 업체를 우명그룹 계열사로 할 테니 뭐라도 하나 건져야 할 것 같았다.

“네.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밀어붙여서 협력업체로 선정 마무리 짓겠습니다.”

창훈이 전혀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저렇게 말해주니 영훈으로서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우리가 처음에는 만남이 조금 이상했지만 원래 남자들은 어렸을 때 치고받고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저랑 여기 윤 부장도 고등학교 때부터 1, 2, 3 학년 전부 같은 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그러다 이렇게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습니다. 그런 의
미로 오늘 거하게 마셔보는 거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저 역시 나쁘지 않죠. 그런데 두 분은 어렸을 때 왜 그렇게 싸웠습니까?”

창훈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좋아하는 여자가 같았거든요. 서로 차지하겠다고 무지하게 싸웠습니다.”


“아··· 그렇군요.”

영훈은 더 말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안쓰러운 것도 미안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맞은 편의 둘은 영훈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 이빨을 드러낸 대가(4) > 끝

< 결혼(1) >

“이래도 되는 거야?”
“그럼요.”

늦은 밤 연희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청담동의 한 쥬얼리 샵에 영훈을 데리고 왔다.


다 늦은 시각이라 주변 명품 가게 몇몇은 아예 불이 꺼진 곳도 있었다.
지금 찾은 가게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불이 꺼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 꺼진 가게 앞에 차를 대고는 정문을 향해 걸어가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나타났고 연희는 짧고 간략하게 한마디 했다.

“예약했어요.”

점원은 대답 없이 얼른 문을 열고는 허리를 90 도로 숙였다.

“들어가자.”
“어? 어···.”

영훈이 연희의 뒤를 쫓아 들어가니 놀랍게도 여러 명의 점원과 가운데에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맞았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제가 말했던 건요?”
“준비했습니다.”

연희의 물음에 매니저가 상자를 꺼내 하나씩 진열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눈이 번쩍 떠지는 액세서리들이었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등···.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의 향연에 평소 보석에 초연하던 영훈도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을 정도였다.

“잠깐 대화 좀 할게요.”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점원들은 일시에 자리에서 흩어졌다.


영훈은 연희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장난 아니네?”
“영훈 씨가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이런 거 되도록 줄이고 싶은데 그래도 내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이잖아. 그리고 이제 영훈 씨도 이런 거 한 번쯤은 경험해봐도 될 것 같았어. 별로면 그냥
취소하고.”
“아니야. 괜찮아.”
“영훈 씨가 하나씩 골라줘. 나도 영훈 씨 거 골라줄게. 그런데 이거 문제 되는 거 아니지? 영훈 씨가 억지로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그냥 선물해주는 거잖아. 다 내 돈으로.”
“그래. 전부 네 돈이라니까 든든하다.”
“히히··· 더 매력적이지?”
“응.”
“그리고 말이야···.”
“어?”

연희는 영훈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뭔데?”
“나중에 말할게. 오늘은 기분 좋게 고르자.”
연희는 거울에 목걸이를 대보기 시작했고 영훈은 궁금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은 꺼내 봤는데 보좌관들도 그렇고 주변 반응이 다들 안 좋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고. 아이고, 바빠서 이만 끊음세.]
삐-
“대표님! 대표님! 아유! 내가 속 터져 진짜!”

윤복희는 전화를 끊으며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기껏 당대표와 연결시켜 줬는데 이번에는 여수시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에도 탈락해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민구상 당대표는 안 그래도 강윤기의 지난 행실 때문에 고민하던 차에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윤복희에게 전화를 걸어 대차게 까버린 거다.
그렇게 장담하기에 만흥지구 근처에 작은 땅까지 사놓았는데 이제 그 땅이 요지가 될지 아닐지도 모르게 되었다.

어디 이것뿐인가?
강윤기의 말을 믿고 신도시로 예정된 지역 곳곳에 땅을 사놓은 그녀였다.
안 그래도 땅을 사느라 많은 돈을 쓴 상황에서 남은 돈을 싹 다 레버리지 주식에 투자했다가 원금 손실은
물론이고 빚까지 진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대출과 빌린 돈으로 해결했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땅값이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믿었던 건설업자인 강윤기마저 나가리가 된 상황이니 그녀로서는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내가 이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마음 단단히 먹은 그녀는 6 시까지 이어진 손님을 받고 나서 바로 서울로 향했다.


다급한 그녀가 갈만한 곳은 한 곳뿐이었다.
명우도사가 머무는 청계산 자락.
그런데 막상 늦은 저녁이 되어서 도착해보니 그곳은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그녀가 바로 전화를 하니, 놀랍게도 그는 강남역에 있다며 자신을 보고 싶으면 강남역으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긴 머리에다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는 그가 강남역에는 무슨 일일까?


곧장 강남역 근처 외벽 인테리어가 그림 같은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게 누구야? 오라버니, 이제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멋 좀 부렸다. 나 다음 주에 선보러 가거든.”

짧게 자른 머리를 스프레이와 왁스로 적당히 멋을 내고 청바지에 명품 재킷을 입은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디로? 그때 내가 소개해 준 사람이 연결해준 거예요?”


“어. 나 베트남 간다. 내 님이 거기에 있을 거야.”
“허··· 먼저 간 언니한테 미안하지도 않고?”
“그걸 알면서 소개해줬냐?”
“설마 진짜로 이럴 줄은 몰랐지.”

그런데 마냥 좋은 듯했던 명우도사는 말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얼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다.”


“언니한테서?”
“그래. 내 생에 그만큼 나를 옭아매는 것도 없었다. 명자를 만나고 그녀를 향한 질투를 버리는 데만 십 년이
걸렸어.”
“뭐··· 언니가 대단하기는 했지.”
“몹쓸 짓도 많이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아. 그래서 잊고 싶다. 내가 했던 잘못을 잊고 싶고 명자도
잊고 싶어.”
“새 출발 하는 마음가짐이 참으로 단호하슈.”
“신령님이 나에게서 멀어진 이후부터 했어야 했지. 애초에 명자와 난 악연이었어. 명자를 만나고 그녀도
불행해졌고 나도 불행해졌지. 이제 난 행복하고 싶다.”
“왜 이렇게 사람이 변했지? 죽을 때라도 된 거예요? 혹시 건강검진 받으니까 암이라도 나왔어요?”
“멀쩡하단다. 아직 30 대 몸이래. 그래서 건강한 몸으로 새장가 가려는 거다.”
“좋겠수. 머리는 어디서 한 거예요? 옷은 어디서 사고?”
“요즘 모든 정보는 유튜브에서 얻는 거 몰라? 헤어, 메이크업, 패션 같은 거 전부 유튜브 가면 다 있더라.
거기에 나온 미용실 가니까 이렇게 해주던데? 막상 하니까 지금까지 왜 거추장스럽게 머리를 길렀나 싶다.”
“보기는 좋네. 진짜 그래서 그렇게 바꾼 거예요? 오라버니 옛날에 제자들 옷에 주름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잖아. 자세가 조금만 비틀려도 어찌나 잡아댔는지···.”
“내가 그랬지? 하나에 미쳐서 그런 거였다.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고 경주마처럼 하나만 봐서 그래. 놓으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
“정말 점 놓고 살아도 되겠어요?”
“그래. 놓아야지. 그런데 웃기게 말이야, 점을 놓고 마음을 가라앉히니까 더 잘 보여. 사람의 인상을 봐도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이고 지금 하는 걱정이 뭔지가 보여. 참 신기해.”
“그럼 내가 여기 온 이유도 알겠네요?”
“알다마다. 너는 아직 못 놓고 있는 게 아니냐. 이해한다. 사람이 어떻게 일순간에 바뀔까.”
“오라버니는 바뀌었잖수.”
“난 이유가 있었지.”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뭔데 그래요?”

명우도사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빤히 바라보는 임복희의 눈빛을 보고 쑥스럽게 말했다.

“어디를 좀 가고 싶어서 그런다.”


“어디를?”
“그냥 그런 데가 있다. 허락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꼭 가고 싶어. 가서 보고 싶다.”
“거기가 어디기에 그래요?”
“됐다. 그만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네가 아니니 한마디만 해주마.”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때 한번 한 이야기를 되돌리는 적 없는 그였다.


임복희는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세요.”
“통일평화당 도수연.”
“도수연? 전 법무부장관 도수연?”
“그래.”
“갑자기 왜 도수연이에요?”
“며칠 전부터 왠지 네가 조만간에 날 찾아올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 잘 안 보던 뉴스를 보는데 사흘 전인가?
도수연이가 나오는 거야.”
“그래서요?
임복희의 눈이 반짝였다.

”그날 밤에 도수연이가 대선후보가 돼서 내 앞에서 연설을 하는 꿈을 꿨다.


“정말?”
“아직 신기가 다 날아간 건 아니니 내 꿈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게다.”
“당연하지. 예전부터 꿈은 언니보다 오라버니가 더 정확했잖수. 그 정도면 예지몽이나 다름없지. 그런데
도수연이라··· 그 여자 우리한테 온 적 없지 않아요?”
“아마 그럴걸? 특이하게 어디 점 보러 다닌다는 소문은 못 들었다. 정치인이 점 안 보기 힘든데 말이야.”

명우도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 정치인뿐인가?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에 연예인까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 애쓴다.
물론 그중에서 정치인들의 점에 대한 집착은 조금 과할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기독교라 점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조차 다음 선거에서 당선될지 알려달라는 인간들 천지였으니까.

“그럼 어째? 방법이 없을까요, 오라버니?”

명우도사는 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그녀를 대단한 점쟁이로 보겠지만 명우도사에게 임복희는 딱한 여동생 같았다.
어려서 스승님의 눈에 들어 신내림을 받고 평생 점쟁이로 살았다.
점쟁이 눈에 일반인은 그저 가르침을 주어야 할 상대이자 은행 ATM 기처럼 돈 나오는 구멍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사귈 수 있을까, 마음 터놓을 상대를 만날 수 있을까.
남자도 못 만나고 평생 외롭게 살았고 지금도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불쌍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거다.

“방법을 알려 주면? 하나 약속할 수 있냐?”


“무슨 약속 말이에요?”
“약속할 수 있으면 알려주마.”

임복희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인가?


그녀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약속할게요. 신령님을 걸고 맹세할게요.”

점쟁이가 신령님을 내세웠으면 내줄 거 다 내준 거나 마찬가지다.


명우도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무리 미신에 의지하지 않아도 대선은 다르다. 국회의원 선거와는 그 무게감이 달라. 그리고 대선 경선 역시
지금까지 겪어 온 치열함과는 그 궤를 달리해. 그거 견디려면 무신론자도 신을 찾게 된다. 그럼 점쟁이 안
찾을까?”
“날 찾을 거라는 거지요?”
“그냥은 안 찾지. 지금까지 점쟁이와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 단박에 널 찾으려고?”
“그럼요?”
“올해 도수연의 운이 북쪽을 향해 있다.”
“북쪽?”
“그래. 거처를 북한산 인근으로 옮겨라. 그럼 자연스럽게 도수연이가 널 찾게 될 게다.”
“진짜예요?”
“모르지, 개소리인지··· 그냥 그럴 것 같다.”

사실 명우도사도 엄청난 확신이 들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도수연이라는 정치인의 운이 그려질 듯 보였고, 냄새 풍기는 거라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임복희니 그녀가 풍긴 냄새에 도수연이 홀리듯 찾아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뿐이다.
게다가 임복희는 한번 문 손님은 사냥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놓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말빨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내가 지금 자리에서 15 년이나 버틴 거 알지요?”


“알지.”
“점쟁이가 한번 터를 잡은 자리를 옮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요?”
“무슨 말꼬리가 그렇게 길어? 못 믿겠으면 하질 말든가.”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결정했는지 탁자를 때리며 말했다.


“에이, 알았어요. 신령님께 기도드리고 영험한 자리 찾아서 모실게요.”
“그래라.”

이제 임복희는 슬며시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제 조건을 말해보세요.”


“네 그릇은 딱 수십억 정도다. 그 이상의 부는 가질 그릇이 안 돼. 그러니 욕심을 부려도 그 이상 부려서는 안
된다. 욕심이 그릇을 넘치면 넘친 복이 화가 될 게야.”
“수십억? 조금 더 쓰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쓰고 싶다고 늘까? 그냥 보이는 게 그런 것을··· 왜? 수십억이 부족하냐?”
“난 오라버니보다 더 잘 벌고 싶어요. 부자가 되고 싶다고요.”

명우도사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평생 그녀 옆에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돈이라도 곁에 두어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는 것이리라.

“쯧쯧··· 사람의 그릇은 타고나는 것인즉, 점쟁이인 네가 왜 그걸 몰라?”

명우도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요?”
“할 이야기 다 끝났잖아?”
“한가한 양반이··· 조금 더 말동무라도 해주고 가요.”
“나 바쁘다. 베트남 여자 만나려면 베트남어는 못 해도 영어는 조금 배워둬야 할 게 아니야?”
“설마 영어학원 끊은 거예요?”
“그래.”
“허··· 그 나이 먹고 뭐 하는 꼴이래?”
“나도 처음엔 조금 남사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젊은이들과 같이 배우니 좋더라. 다들 저렇게 사는 것
아니겠냐? 나도 동참해보련다.”

명우도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가게를 나가버렸다.

“진짜 죽을 때라도 된 건가···?”

임복희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명우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자신의 차를 세워둔 공용주차장으로 갔다.
임복희를 기다리던 제자가 깜짝 놀라 시동을 걸자 그녀가 차에 타면서 재촉했다.
“삼청동으로 가.”
“갑자기 삼청동으로요?”
“그래. 그리고 너, 서울에서 살 수 있지?”
“네?”
“잔말 말고 너도 이제 서울에 집 구해. 뭐해? 출발 안 하고?”

임복희는 자신의 손목에 걸린 염주를 꼬옥 잡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 결혼(1) > 끝

< 결혼(2) >

[충격의 13 연패, 누구의 책임인가?]


[강등된 브라이튼, 떠날 선수와 남을 선수는?]
[악수가 된 시즌 막바지 감독 교체]

영훈의 눈앞에는 스포츠 지역신문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도 맥스 크롤리가 남긴 흔적들이리라.
연희와 결혼준비를 한창 하는 중에 어제 영국으로 온 HS 그룹 임직원들 중 해주조선해양 기술자들은 포츠머스로
떠났고 영훈과 해주조선해양 특수선사업부 양준영 상무는 맥스 크롤리의 저택에 초대됐다.
양준영 상무는 이번 크루즈선 수주의 기술자들을 총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것과 동시에 영훈의 통역까지 맡고
있었다.
맥스는 영훈과 양준영 상무를 앉혀 놓고 커다란 와인과 와인잔을 들고 오더니 말했다.

“아마 자네한테 미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충격 받아서 쓰러졌을 지도 몰라. 로마네꽁띠
좋아하나?”

맥스는 양준영 상무에게는 형식적으로 인사하고는 계속 영훈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전 와인 모릅니다. 하지만 주는 건 아무거나 다 잘 마십니다.”


“나쁘진 않을 거야.”

로마네꽁띠 리쉬부르그를 내오며 고작 나쁘지 않을 거라 말하는 맥스 크롤리를 보고 양준영 상무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전에 곁에 있던 아가씨는?”
“한국에 있습니다. 같이 오고 싶었는데 결혼이 코앞이라 한창 바빠서 올 수 없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맥스는 양 상무의 통역을 듣고 놀라워했다.

“결혼이 코앞이라고? 이런... 선물이 필요하겠군.”


“선물은 군산조선소에서 받은 걸로 치겠습니다.”
“그건 회사와 회사의 거래 아니었나? 난 개인 자격으로 자네한테 주고 싶은데?”
“정 선물을 주고 싶으시면 내년 시즌이 끝났을 때 결혼 1 주년 기념으로 주시면 됩니다.”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하면 선물을 달라? 그거 멋지군. 뭘 가지고 싶나?”
“전 아직 당신들처럼 부유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뭐가 좋은 선물인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아서 달라는 말이지? 좋네. 기대해도 될 거야.”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마치 막걸리를 따라 마시는 것처럼 거칠게 마시고는 말했다.

“다음 시즌 봐야 할 예상 손실이 2 천만 파운드(한화 약 300 억 원)가 넘는다네. 이것도 작년 관중수를


유지한다는 전제로 한 계산이야. 만약 다음 시즌에 승격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 대부분을
내보내야 하겠지. 그럼 승격은 포기해야 할 테고. 그래서 내년이 아주 중
요해.”
“그 말은 현재 데리고 있는 선수들은 다 지킬 수 있다는 말이군요?”
“빅클럽에서 원하는 선수가 없거든. 어쩌면 이게 우리팀의 현실인지도 모르지. 빅클럽에서 원하는 선수가 하나도
없는 팀이라니... 형편없어. 아주 형편없는 팀이야.”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시는군요?”
“강등당한 팀의 선수들이니까. 하지만 내 선수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자네가 욕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 선수 하나하나까지 지적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나야 해주면 감사한데 그게 조건은 아니었지. 아, 토마스 맥킨지라는 사람을 아나? 3 년 전에 도르트문트의 2
군 감독인데...”

양준영 상무는 통역을 하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크루즈선 건조를 위해 어느 정도의 협상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왔었기 때문이다.
이번 협상을 잘 마무리 짓기 위해 영국으로 오기 전 얼마나 공부했던가?
큐나드 크루즈 선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선박들의 특성과 앞으로 크루즈선을 어떤 방향과 어떤 철학으로 건조하게
될지 수많은 브리핑 연습을 통해 익혀왔는데...
오자마자 큐나드 크루즈 사의 선주는 마치 옆집에서 놀러온 사람을 반기는 것처럼 와인과 안주를 대접하며
시종일관 축구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이쯤되니 맥스 크롤리라는 선주가 발주를 하기 싫어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의심까지 했었다.
그런데 본사 최영훈 상무는 오히려 한 술 더 떠 맥스가 한 명, 한 명 꺼내는 사진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의견까지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선박 한 척의 가격이 최소 7 천억에서 많게는 9 천억까지도 볼 수 있는 상황에 이 둘은 오늘 만남의 목적을 아예
잊어버린 듯해 보였다.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양 상무는 차마 영훈을 밖으로 불러내지 못했다.
문제는 이게 시작이었다는 거였다.

“오케이! 그럼 움직여볼까?”

맥스는 이때부터 한국인 두 명을 데리고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본머스, 쉐필드, 도르트문트, 뮌헨, 발렌시아, 사라고사...
근 일주일 내내 유럽을 투어했다.
그리고 그동안 크루즈선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답답한 양준영 상무가 도대체 크루즈선 계약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물음에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잘 되겠
죠’라는 말로 속을 더 뒤집어 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투어 마지막 날 브라이튼으로 돌아온 영훈은 지금까지 만나고 다닌 사람 중 한 명을 찍어주었다.

“조던 마일스? 쉐필드 2 군 감독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최고라는 말이지? 어째서?”


“이유는 묻지 마세요.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영훈이 팔짱을 끼며 맥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맥스 크롤리는 영훈이 지목한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스무살 때였나?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서 처음으로 주식을 시작했어. 어려서부터 세계적인 투자자가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난 투자에 관한 서적도 많이 봤었고 많은 전문가로부터 조언도 받았지. 그런데 옆에서 내가
주식투자 하는 걸 본 여동생이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하더
군. 고작 열 다섯 살짜리가 말이야. 웃기지 않나?”
“그럴 수 있죠.”
“그래서 아버지는 여동생에게 내가 받은 돈의 절반을 주셨지. 난 그 아이의 콧대를 눌러주고 실컷 놀려주려고
했었네. 게다가 그 녀석이 산다는 주식을 전해 듣고는 앞에서 한참을 비웃었더랬지. 요즘 자기가 맛있게 먹는
초콜릿이 있는데 그 주식을 사겠다는 거였어. 당연히 난 그 초콜
릿이 뭔지도 몰랐었고. 그런데 반년 뒤에 난 내가 받은 돈의 대부분을 날리고 말았네. 여동생은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말씀을 듣고 있자니 꽤 수익을 올렸을 것 같은데요?”
“맞네. 당시 열 다섯 살인 여동생이 올린 수익이 백만 파운드(한화 약 15 억 원)가 넘었어. 수많은 전문가들의
추천과 전문지식은 여동생의 초콜릿 앞에 무력했지.”
“하하하! 좋은 경험 하셨습니다.”
“그래. 내 생에 첫 패배였고 아직도 쓰린 기억이네. 지금도 여동생은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 나를 부끄럽게
하니까. 좋아. 때로는 충분한 근거 없는 직감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어.”
“1 년 뒤,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그래야 할 거네. 내 선택은 이곳 브라이튼 지역 주민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기도 하니까.”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맥스 크롤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언제 주문하면 되지? 늦어도 11 월을 넘기면 선박 인도시기가 늦어져서 손해를 볼 수도 있어.”

영훈이 양준영 상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양 상무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현재 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견학중인 저희 직원들 말로는 8 월부터 가능할 것 같다고 알려왔습니다. 생각보다
선내 직원들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줘서 기술적으로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8 월이라... 그러지. 대신 다른 회사보다 기간을 여유롭게 주니 선박 인도는 기한 내에 이루어져야 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상 어느 정도 기한이 늦어질 수 있다는 대답이었지만 어차피 시도할 때부터 각오한 바였다.
선주가 이렇게 지원해주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크루즈선 건조 기술을 완벽히 마스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자세한 계약조건은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 그리고 정확한 결혼식 날짜는 어떻게 되나? 우리 딸이 한국을
궁금해하는데 마침 ATS 콘서트가 코앞이라고 하더군.”
“정말 오시려구요?”
“내가 거짓말을 하겠나?”
“오시면 영광입니다. 청첩장 영어로 찍어 보내드리기로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결혼식까지 참석하게 되니 기대가 크네.”

이제 고작 36 살의 쉐필드 2 군 감독이었지만 영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복숭아와 자두가 만나 꽃을 활짝 피는 시기에 들어선 그는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대성할 운이었다.
게다가 침착하고 머리가 좋은데다 인망이 따를 사람이니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고르기는 힘들 것이리라.
다음 시즌부터 브라이튼의 성장세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거 결혼 앞두고 바쁘실 텐데 어렵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을 사흘 앞두고서야 조재민 시장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영국에서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결혼 준비를 마루리하는 와중에 겨우 시간을 짜내서 잡은 스케줄이었다.

“아닙니다. 더 빨리 시간을 냈어야 했는데 회사 일로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뵙게 됐네요. 속으로 괘씸하다고
생각하셨죠?”

천보윤 의원은 예순을 바라보는 완숙에 이른 정치인이었다.


정치에 입문한지는 무려 20 년이 넘었지만 3 선밖에 못했다는 게 조금 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나쁘지 않을 정도의 인자한 인상과 차분하고 선을 넘지 않는 언행들로 나름 인기를 얻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영훈은 그에게 관심이 없으니 아직 그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아니에요. 기업인이 기업 일을 하느라 바쁜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요. 그런데 참


놀랐습니다. 이렇게 젊은 분이 HS 그룹의 실세라고 들어서요. 듣자하니 입사한지 1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 겸손하기까지... 하하하. 조재민 시장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대단하시다구요. 사실 전부터 송은채
회장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무님을 만날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루어져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어떤 이유로 절 만나고자 하셨는지...”

천보윤 의원은 먹이를 찾는 매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영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재민 시장은 내가 10 년 전부터 봐 온 친구예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생이 정치인처럼 태어났는지 곧잘


배워서 키워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강주원 그늘에 있기는 했지만 마음은 나와 가까워서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는 했는데 한 가지. 시야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인은 모든 게 부족해도 딱 두 가지만 있으면 크게 갈 수 있는데 하나가 국민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과
대국을 넓게 볼 수 있는 시야거든요.”
“그런가요?”
“그 친구가 어느 샌가 갖지 못했던 시야가 생긴 겁니다. 갑자기 군산엘 가더니 군산조선소로 전국구 의원이
되어버렸네요? 그 친구는 그런 판을 짤 시야가 없어요. 그 판은 당신이 짜준 게 아닙니까?”

영훈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의원님도 제가 판을 짜주길 원하시는 겁니까?”


“만약 내가 원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거절하겠습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옛말에 장사하는 사람은 정치인과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게도 지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충분히
가깝습니다. 더 이상 가까워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천 의원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현명한 생각입니다만 그거 아십니까? 무진중공업이 차기 잠수함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크루즈선
건조로 인한 해주조선해양의 부실한 재무를 약점 잡아 이번 사업을 따내겠다는 의도 같은데...”

그것만 가지고는 쉽게 따낼 수는 없으리라.


해주조선해양의 잠수함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은 송유철 사장에게서 몇 번 듣기도 했었다.
다만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가요?”
“무진중공업을 비롯해 현재 HS 그룹의 급격한 성장을 경계하며 보는 기업과 정치인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조재민
시장과 그대들이 아주 깊게 연결된 정황이 이번에 나오기도 했고... 지금이야 수면 아래로 들어갔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지요.”
“그걸 의원님께서 막아주시겠다는 겁니까?”
“하하, 전 아직 능력이 없습니다.”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의도를 가감 없이 표현했다.


아직 능력이 없으니 키워달라.
그가 대통령감이냐 하고 묻는다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와 악수를 하고 사주를 계산하고 나서 솔직히 많이 놀랐다.
다만 이게 맞는 것인지 그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대권을 바라보지만 그릇이 부족한 정치인과 이제 막 날개를 펴려는 대붕(大鵬).
그릇이 부족한 조재민 시장이었기에 도와주는데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진짜 대권을 잡을 정치인이라면 욕심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쿵쾅거리는 심장과 왠지 모르게 더운 공기가 가슴을 죄어왔다.
영훈은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지금...”

당황한 그를 보며 영훈이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힘이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진짜 도움을 원하신다면 힘이 없을 때도 일을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세요. 조재민
시장은 안 될 것 같은 일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다음에 진지하게 앞날을 고민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만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의가 아님을 알지만 그렇게 영훈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결혼(2) > 끝


< 결혼(3) >

6 월의 첫 토요일.
신라호텔 입구에는 여느 때처럼 최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송은채 회장은 곱게 한복을 입고 하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HS 그룹 회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그녀의 말투와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작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확실히 느낀 사람은 전 현진관광 사장이었던 임지은이었다.

“남편은 다 죽어가는데 어째 올케는 더 젊어진 것 같네?”

마음에 쌓인 울분이 커서인지 결혼식 날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형님 왔어요? 형님은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네요. 마음고생이 심하신 것 같은데 이제 편히 내려놓고 쉬시는게
어때요?”

송 회장도 이제는 옛날과 달리 참지 않았다.

“말하는거 보니까 옛날에 어떻게 집에서 살림만 했나 몰라? 답답해서 어떻게 견뎠어?”
“젊었을 땐 전업주부가 꿈이었는데 막상 소질은 경영에 있었나 봐요. 안에 연희 아빠 있으니까 가서 인사
나누세요.”

더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는 투의 송 회장 태도에 임지은 전 사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뒤를 이어
줄줄이 송 회장에게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반면 신부석에 대기하고 있는 연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못 긴장한 채 친구들을 반기고
있었다.
한동안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연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예쁘네.”

창훈이 쑥스러운 듯 인사했다.


우명그룹의 둘째인 김창훈 상무는 언제나처럼 윤희찬 부장을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다.
“고마워, 와줘서.”
“최영훈 상무, 좋은 사람 같더라.”
“웬일이야? 남 칭찬을 다 하고?”
“그렇다고 좋아서 칭찬하는 건 아니야. 분하지만 어쩌겠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 널
가졌잖아.”

창훈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축의금은 많이 들고 왔어?”
“아무렴. 대신 너한테는 안줄 거다. 남자 쪽에 넣어야지.”
“그 돈은 내 돈 아니고?”
“남자도 때로는 비상금이 필요해. 넌 돈 많잖아.”

그렇게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해대던 창훈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

“행복해라.”
“고마워.”

그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신부대기실을 나왔다.

“괜히 인사하다가 눈물 보이고 그런 거 아니지?”

윤 부장이 다가와 놀리듯 말한다.

“미쳤냐? 눈물은 무슨... 조금 씁쓸한 정도지.”


“새끼... 그런데 대단하긴 하다. 아무리 HS 그룹이 커졌다고는 해도 정·재계에서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왔어. 조재민 시장이 주례를 서서 그런가?”
“단순히 주례를 봐주기 때문은 아닐 거야. 저기 최 상무 쪽 봐봐.”

윤 부장은 입구 한 쪽에서 한창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최 상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 많네.”
“그렇지?”
“들리는 말로는 어느 대학 나왔는지, 어디 출신인지도 전부 비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또래 사람은 없네.”
“내가 열 살 때였나? 하여튼 초등학교 때일 거야. 작은 고모 결혼식이었는데 당시 결혼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전부 우리 아버지에게 저런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해대곤 했는데, 나이도 많은
어르신들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우리 아버지한테 고개를 숙이고
잘 보이려고 하더라고. 그 어린 나이에도 저들이 어떤 마음인지 대략 짐작이 갔었어.”
“오~ 권력 DNA 인가? 조기교육이 이래서 중요한 거라니까.”
“맞아. 당시 큰아버지가 떡하니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기가막히게 우리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었어.”
“아... 큰아버지... 그랬겠네. 큰아버지가 우명식품 가지고 독립했었지?”
“말이 독립이지, 거의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큰아버지가 쫓겨나기 전인데도 사람들은
귀신같이 누가 권력을 잡을지 알았던 것 같아. 지금처럼...”

창훈의 말처럼 턱시도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최영훈 상무의 앞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한 하객들의 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HS 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청업체 대표는 물론이고 타 기업 핵심 관계자와 정치인들까지 최영훈
상무에게 전부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창훈이 어렵게 발걸음을 떼고 다가갔다.
몇 명의 사람이 최 상무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난 뒤 그의 차례가 되자 영훈의 조금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와서 놀랐습니까?”
“조금은요. 일은 일이고 이건 사적인 거라서 안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안 좋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내 짝은 또 찾으면 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축의금은 남자 쪽에 낼 테니까 나중에 그만큼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 이상 보답하도록 하죠.”
“그럼...”

창훈은 그의 말처럼 그리 마음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꼭 가져야 할 장난감을 뺏긴 기분일 거라는 걸 영훈은 알고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축하해요.”
“아, 오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사람은 천보윤 국회의원이었다.


그때 만남 이후 연락이 없었는데 예의상 보좌관에게 보낸 청첩장을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내가 이렇게 와서 보니 최영훈 상무 인기를 알 수 있겠어요. 대단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때 최 상무와 대화를 나누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는 팩트 폭행이라고 하죠? 하하하,
아주 팩트 폭행을 제대로 당했습니다. 내 조만간 답을 드리도록 하지요.”

무진중공업이 잠수함 사업에 손을 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바로 해주조선해양에 해당 이야기를 전달했다.

송유철 사장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대책회의를 소집하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해당 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지내온 세월과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반드시 사업을 뺏기지 않을 거라고 투지를
불태웠다.
3 조 원이 넘는 프로젝트고 이후 해외 수출까지 고려한다면 지금 그 가치를 책정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천보윤 의원은 이렇듯 해주조선해양에게 민감한 사안을 툭 던져줘 놓고 이제 자신이 해결해보겠다고 자신했다.
아직 해주조선해양에서 알아낸 정보가 없었기에 그가 진실로 무진중공업에서 알아낸 내용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쨌든 결론은 계속 인연을 이어가 보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조재민 시장의 입김이나 칭찬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 조재민 시장의 성장을 보고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조재민 시장님이 저에 대해 너무 좋은 말씀만 하셨나보군요.”


“허허, 이거 갑자기 왜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으실까 봐 그렇습니다.”

천보윤 의원은 가만히 미소 짓다가 물었다.

“최 상무는 주식투자 합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

“아니요. 아직 월급만 꼬박꼬박 모으고 있습니다.”


“주식을 하다 보면 말이에요. 주변에서 수많은 정보가 들려옵니다. 어디는 뭘 연구중이라더라, 어디서 뭘
개발했다더라, 아주 정신이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전부 날 잡아먹으려고 드는 귀신들 같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에요. 결국 투자는 내가 하는 겁니다. 정치인이 되면 옆에서
떡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는 거 당연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고 판단해서
선택하는 게 내 일입니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봤으면 오롯이 내 책임일 뿐이니 최 상무는 벌써부터 엉덩이 빼고
그러지 말아요. 엉덩이는 나처럼 잃을 게 많은 영감들이나 빼는
겁니다. 하하하!”

그는 그렇게 말하고 영훈의 팔을 툭 치고는 식장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끼는 순간 저 멀리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잠시 누구였는지 생각하다가 떠오른 얼굴.
영훈은 그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얼른 발길을 움직였다.
화장실 옆에서 오줌 마려운 강아지 마냥 서성이는 남자.
바로 멀끔하게 차려입은 명우도사였다.
그는 영훈이 쫓아온 걸 보고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놀랐지? 원래는 안 오려고 했는데, 그냥 궁금했다.”


“왔으면 인사라도 하지 뭘 도망가요?”
“염치가 없어서 그러지...”
“그만 둔 거예요?”

머리도 자르고 깔끔한 정장에 한껏 멋을 낸 그는 누가 보면 오늘 선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너 가고 싹 정리했다. 제자들 내보내고, 논현동에 아파트도 하나 얻었다.”


“뭐 하고 살려구요?”
“모아놓은 돈 많아. 그거 다 쓰고 죽으려고 해도 힘들어.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집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처가가
저리 대단하니...”
“처가 상황을 떠나서 내가 받지도 않아요.”
“뭐, 그렇겠지. 알고 있다.”
“식 보고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됐어. 난 스테이크보단 갈비탕이 더 좋아.”
“그래도 기왕 왔으니까 고기 한 점이라도 드시고 가요.”

다른 날이라면 그냥 보냈겠지만, 인생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매정하게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명우도사는 그게 고마운지 못이기는 척 수긍한다.

“그럼 그럴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어디 가서 티 내고 다닐 일 없을 거다. 앞자리에 앉을 욕심 안 부리니까


저 뒤에서 구경이나 하다 가마.”
“그러세요.”

영훈은 그렇게까지만 말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그가 올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들 결혼식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고 연희에게 연락했었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고 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었다.
연희도 영훈의 마음을 듣고 식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청첩장을 보내 조용히 보다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여~ 축하해!”

신영금융지주의 이형준 상무도 오늘 자리에 빠질 수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HS 그룹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인 그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결혼하면 인생 선배가 된다던데 최 상무도 이제 내 선배되겠네?”
“선배 노릇 해 드려요?”
“됐다. 안 그래도 가르침 많이 받고 있는데 선배 노릇까지 하면 귀에서 피나. 연희 아버님은?”
“서서 인사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셔서 식장 안에 앉아 계세요.”
“그래도 딸 결혼식은 보시겠네.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최 상무 비서는?”
“아... 민희 씨요?”
“안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축의금 안 냈습니까? 거기에 있을 텐데?”

일가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는 영훈이기에 축의금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혀 놓을 사람이 민희밖에 없었다.

“아 그래? 난 먼저 인사하고 축의금 내려고 그랬지. 그래, 어쨌든 축하하고. 잘 살아.”

그는 희희낙락하며 품에서 봉투를 꺼내 흔들어 보이고는 잽싸게 발걸음을 놀렸다.


축의금 받는 자리에 가서 사인을 하고 한동안 민희에게 말을 거는 걸 보니 결혼식 끝나고 또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왠지 그 모습이 더없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더 하객을 받고 나서 시작된 결혼식.
터질 듯 쿵쾅대는 심장은 신랑 입장 때 수위를 모르고 오르다 신부 입장 때 그 고점을 찍었다.
너무 긴장된 나머지 그 오래 걸린다는 주례도 순식간에 흘러갔다.
신랑 측 부모님 좌석이 썰렁하게 빈 모습 때문에 곳곳에서 수근댔지만 감히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결혼 축하하고... 미안했다. 애비를 용서해다오.”

몸이 불편한 임지훈 사장은 울먹이는 딸을 보며 용서를 구했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항으로 떠나는 차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대하게 결혼식을 끝내고 약 열흘 정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영훈 커플이 한국
도착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임창호 회장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산 백병원이었다.
겨우 숨을 이어가는 임창호 회장의 손을 연희가 꼬옥 쥐어주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임창호 회장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안 좋은 일은 연이어 겹친다고 했던가?
3 개월 뒤 연희의 아버지인 임지훈 전 사장 역시 세상을 떠났다.
HS 그룹은 연이은 악재에 더이상 회사를 확장하기보단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고 그렇게 시간을 흘렀다.
영훈과 연희의 결혼 1 주년의 시간은 그렇게 훌쩍 다가왔다.

< 결혼(3) > 끝


< 토끼를 노리는 자들(1) >

김태민 현진중공업 회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해요?”

태민의 물음에 이대준 전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석 달 뒤에 4 천 5 백억, 그리고 12 월에 7 천억입니다.”


“얼마나 부족할 것 같아요?”
“9 월에 옐로그에서 FPX(반잠수식원유생산설비) 대금 일부가 들어오기는 하는데 많이 부족할 겁니다. 최소 5
천억은 더 필요합니다.”

작년 회장으로 취임하며 발생한 경영권 분쟁을 획기적으로 방어하며 좋은 평판을 올렸지만 어쨌거나 그 때문에
주가가 떨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그룹에 안정적으로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현진관광이 날아간 상황에서 박살 난 해양 플랜트 경기가 도무지
돌아올 줄 몰랐다.
여기서 문제는 기존에 발주한 업체들이 도산하며 현진중공업에서 생산 중인 설비가 공중에 붕 뜨는 최악의
경우까지 겹치고 말았다.
작년의 좋던 분위기가 올해 접어들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받아야 할 설비대금만 1 조 6 천억이 넘었음에도 현진중공업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위기에 몰렸다.

“후···.”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
이대준 전무는 그의 눈치를 흘깃 보다 어렵사리 말했다.

“채권단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LNG 선의 경기가 계속 좋아지는 중이고 거제 조선소에 쌓인


일감만 최소 3 년치입니다. 충분히 해볼 만할 겁니다.”
“지금까지 빌린 돈이 얼만데, 차입금 규모가 너무 크잖아요. 카드 돌려막기도 아니고 빚 갚겠다고 돈 꾸겠다는데
이자는 또 얼마나 받으려고 하겠어요. 그러지 말고 이번에 계약하는 LNG 선을 선금 50%로 밀어보면 어때요?”

이대준 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금을 50%나요? 힘듭니다. 경쟁력이 없습니다.”

어차피 김태민 회장 역시 정말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럼 무슨 방법 있습니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계열사 자산을 매각하면 5 천억 정도는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게 태민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걸 이대준
전무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전 직원이 허리띠 졸라서 최대한 비용을 줄여보겠습니다만, 주 채권 은행과 대화는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후··· 해주조선해양 쪽은 어때요?”
“해주조선해양은 작년 HS 그룹이 인수하기 전부터 해양사업부 공장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HS 그룹이 인수한
이후에도 해양사업부 공장은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예 해양플랜트 사업은 손을 놓은 모양새입니다.”
“미얀마 가스전개발사업에 진출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작년 중순 즈음해서 미얀마 가스전개발사업에 EPCIC(설계와 자재 조달, 설비 제작, 설치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회사가 도맡는 계약)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쏙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아예 크루즈선으로 방향을 턴해서 해양사업부 대신 크루즈선을
차기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미친놈들··· 손댈 게 따로 있지···.”

작년 해주조선해양이 크루즈선을 수주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현진중공업 임직원 누구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워크아웃을 갓 졸업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회사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크루즈선 수주 기사가 공시로 뜨고 해주조선해양 주가가 폭락할 때 김태민 회장은 그걸 보고 배를
잡고 웃었던 게 고작 1 년도 채 되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는데, 이대준 전무는 침중한 얼굴로 다른 의견을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해주조선해양의 상태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해양사업부 공장을 닫고
그 인원을 전부 조선사업부로 돌리면서 생산량을 올렸습니다. 또 텅 빌 거라고 생각했던 군산조선소가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자동차 운반선이나 LNG 선 추가 건조로 자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큐나드 크루즈에서 선금을 20%나 주면서 초기 프로젝트는
손해를 보면서 기술을 확보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 수익이 날 수도 있다는 분위기까지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선박을 언제 인도할지가 관건이고 그걸 언제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데?”
“그게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확신에 차 있다는 말이 돌아서···.”
“전무님도 참··· 순진한 거예요? 아니면 답답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일단 알겠어요. 가보세요.”

이대준 전무가 고개를 숙이고 회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인 임지은이 들어왔다.

“이 전무가 뭐라고 하든?”


“어렵다고 하네요.”
“아휴~ 정말··· 현진관광이 있었으면 이런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현진관광이 가진 호텔과 현금동원력을 생각하면 그녀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는 했다.

“지나간 버스 손 흔들어봐야 뭐해요?”


“그러게 내가 주연이 걔랑 잘 해보라고 진즉 말했잖아. 이제 걔랑 아예 끊어진 거지?”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한주연과 어느 순간부터 거리가 생긴 이후 태민은 그녀의 마음을 붙잡고자 애써 노력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런
태민에게 다가서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진 둘은 이제는 거의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다른 남자를 만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태민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뿌리친 그녀에게 배신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걔 이야기는 더 꺼내지 말아요. 언제적 한주연이야?”


“안타까워서 그러지. 너 우명패션 걔··· 솔직히 엄마는 마음에 안 든다. 우명패션이 뭐 가지고 있니? 지금은 다
망한 아웃도어 브랜드 보니까 내가 가슴이 다 철렁하더라.”
“우명패션이 아웃도어만 있어요? 다른 것들 많아.”
“많아 봤자지. 아휴··· 내가 현진관광 뺏기고 가슴에 화병이 생겼는데 그 망할 것이 노드린가 뭔가 가지고 와서
대박 낸 거 보고 난 오래 살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 죽기 전에 네가 엄마 소원 풀어줘야 해. 내 소원
알지?”
“HS 그룹 밟아주는 거?”
“그래. HS 물산이랑 HS 관광 다시 찾아와야 한다. 그게 내 소원이야.”
“후··· 알겠어요.”

지금 회사가 죽느냐 마느냐 하는 판이었지만 어디 어머니의 눈에 그런 게 보일까 싶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너 요즘 회사 사정 안 좋잖아. 그럼 얼른 우명 걔라도 잡아서 결혼해. 솔직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지금 걔보다 나은 애를 언제 찾겠니?”
“결혼해서? 우명패션 가져와서 매각이라도 하려고요?”
“그러면 좋고, 아니라도 회사 재무건전성 좋다니까 거기서 자금이라도 끌어올 수 있지 않겠어? 게다가 우명건설
요즘 좋다며? 아마 패션은 쉽게 넘겨줄 거야.”
“하여튼 엄마 변덕은···.”

태민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머니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가 가질 기업이라면 남편이 일찍 가져서 그룹에 도움이 되는 게 나을 테니까.
태민은 조만간 만남을 가져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브라이튼, 챔피언십 우승으로 승격 확정]

국내에서 외국 2 부리그 구단의 승격 소식이 톱기사로 다루어질 리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HS 그룹 만큼은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특히 해주조선해양은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을 회사 SNS 계정으로 축하하며 신경을 썼을 정도다.

이유야 간단했다.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으로 작년 연말부터 군산조선소에서 시작된 크루즈선 건조에 투입된 근로자들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괜히 구단주가 돈이 없다는 핑계로 프로젝트를 파투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현장에 한가득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브라이튼의 승격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이 송유철 사장이라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하하, 아무래도 HS 그룹은 운을 타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2 부리그에서 승격되는 게 그렇게


어렵다면서요?”

송 사장은 영훈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웃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크루즈선 건조는 어떻게 돼갑니까?”


“순조롭습니다. 원체 선박 설계 이전부터 큐나드 크루즈에서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에 작업속도는 상당히
빠릅니다. 문제는 기본 골격이나 소음저감 등의 기술이 아니라 내장 인테리어죠. 잘 가르쳐줬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선박을 만드는 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군산에서 만드
는 건 우리만의 차별화된 컨셉과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HS 관광 쪽에서 도움을 받아도 힘들까요?”
“그 부분까지 고려했지만, 호텔 임직원들이라고 해도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도움이 되는 건
맞습니다. 특히 유럽과 미국 현지 직원들의 안목과 경험이 적지 않게 투입될 예정이긴 한데 그래도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잘 해낼 겁니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잘 해내긴 할 겁니다. 우리 직원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모자란 부분을 흡수하려는 집념만큼은 대단한
친구들이거든요. 다만 그 과정에서 회사가 감내해야 하는 자금 규모가 수천억 단위라는 게 문제일 겁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그건 경영진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겁니다.”

담담히 대답하는 영훈을 보며 송유철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잘하면 내 탓, 안 되면 남 탓으로 회사를 망하게 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반면 영훈으로서는 Nodri Clare 가 중국에서 대박을 터뜨리면서 자금적으로 상당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7 천억에 산 Nodri Clare 가 현재 5 조를 불러도 팔지 않는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다시 송유철 사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위사업청에서 차기 잠수함 사업을 공개경쟁입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한 겁니까?”
“야당 국방위원회 의원이 해주조선해양은 재무적으로 건실하지 않고 가격적으로 메리트가 없다면서 공개경쟁입찰을
진행해야 한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합니다. 여당에서는 굳이 그걸 거부하면서 우리로 진행해야 할 부담을 질
필요가 없을 테지요.”

이전 잠수함 사업을 따내면서 이후 차기 잠수함 사업에도 해주조선해양을 우선협상진행자로 선정해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전 사업을 진행하던 시기는 벌써 10 년도 더 지난 일이고 그때 해주조선해양과 계약을 조율했던
관계자들은 다들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서류로 남은 약속이 아니었기에 송 사장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무진중공업이 뛰어들겠네요?”
“그럴 겁니다. 1 차 잠수함 사업은 그쪽에서 했으니까요. 작년 이맘때 상무님이 우려했던 게 정확히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흐음··· 일단 지켜보시죠.”

천보윤 의원이 그렇게 자신했던 사안이 이렇게 쉽게 어그러진다?


적어도 안 될 일이라면 사인 정도는 줘야 했다.
만나서 물어봐야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으리라.

“조재민 시장을 통해서 여당 쪽에 압박을 넣으시려는 겁니까?”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입을 열지 않는 영훈을 보며 송 사장은 답답한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렸다.


이제 여러 번 겪어 본 바로 최영훈 상무는 한번 어떤 사안에 입을 다물면 좀체 열리지 않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알겠습니다.”
“자동차 운반선은 언제 인도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석달 안에 인도 가능합니다. 니폰유센에 인도될 LNG 선은 올해 말은 넘기지 않을 겁니다. 자동차 운반선이
인도되면서 확보되는 자금을 생각하면···.”

송유철 사장이 말하고 있을 때 영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발신자는 오지환 자원사업팀 부장이었다.

“여보세요?”
[상무님, 저 오지환 부장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괜찮아요.”
[니폰유센이 다이와 은행에 천억 엔 규모 차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천억 엔이요?”

무려 1 조 원 규모다.

[네. 아무래도 AEI 에 투자한 금액이 상당 부분 손실을 본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이와 은행에서 대출 진행할 것 같나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가야 오키노리의 올해 운은 토끼가 늑대를 만난 격으로 조만간 크게 낭패를 당할 수 있어 극히 조심해야 하는


시기였다.
영훈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일본으로 가겠습니다.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오지환 부장의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들떠있는 것 같았다.

< 토끼를 노리는 자들(1) > 끝

< 토끼를 노리는 자들(2) >

오지환 부장에게 전화를 받고 정확히 이틀 후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한 영훈과 오지환 부장은 곧장 도쿄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에서 공항을 거쳐 일본에 오기까지 오 부장은 일견 여유롭게 보이면서도 단단히 각오를 다진 모습으로 마치
눈에서 레이저를 발산하는 듯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여유를 가질 때에도 그는 영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살피며 목이 마른 건 아닌지, 어디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체크하는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까?
퉁퉁한 살집 때문인지 그리 덥지 않음에도 한 손에 손수건을 들고 연신 땀을 닦는 모습을 보면 만사 다 귀찮아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막상 그와 대화를 나눠보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고 있지 않았다.
호텔을 잡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짐을 풀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니폰유센의 동향을 체크했고 심지어 방의 청소상태까지 꼼꼼히 살피기까지 했다.
물론 영훈으로서는 그런 그의 행동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승진을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성공시키려는 모습이니 좋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니폰유센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의구심은 리소나... 아, 제가 전에 다이와 은행이라고 말씀드렸죠? 현재는


리소나 은행입니다. 어쨌든 리소나 은행을 제외하고도 다른 금융권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합니다.”
“AEI 라는 펀드에 대해서 말해봐요.”
“노무라 증권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투자 펀드 중 하나인데 우츠가 루미라는 여자가 운용하고 있습니다. 작년 펀드
평가 수익률이 –11%였는데 특히 동남아시아에 투자했던 자금이 상당히 큰 손실을 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지환 부장은 숨이 차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에 상무님께서 그의 여자관계를 주목하라고 말씀하셔서 일본에 있는 주재원에게 사람을 고용해 그의 뒤를


은밀히 파악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타국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이 어려워 최근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결과를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가 우츠가 루미라
는 펀드매니저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거든요. 상무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냥 그럴 거라고 느꼈습니다. 계속해보세요.”
“우츠가 루미는 니폰유센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된 자금으로 상당한 보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이너스 11%의
수익률을 기록하고도 작년에 보너스만 5 천만 엔을 넘게 받았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런데 이 상황에 니폰유센이 리소나 은행에 1 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AEI 에 들어간
자금이 크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당장 1 조가 들어오지 않으면 발주했던 선박 인도 결제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럼 바로 소송에서 부도로 이어질
겁니다.”
“다른 은행도 아니고 리소나 은행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오지환 부장은 멈칫하다가 말했다.

“현재 니폰유센의 채권 상당수를 리소나 은행... 아니, 노무라 홀딩스에서 보유하고 있습니다. 노무라 홀딩스는
투자 은행과 증권사를 보유한 지주회사이구요.”
“원래부터 밀접한 사이였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그럼 천억 엔 대출은 문제없을 거라는 뜻인가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현지에서도 니폰유센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기존에 가진 부채도 상당하기 때문에 그 큰
자금을 과연 대출해줄 수 있을지는... 일단 우츠가 루미와 약속을 잡을까요?”
“아니요. 우리는 그녀를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지환 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스캔들을 일으켜 추가 대출을 못 받게 하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게 먹힐지는 모르는 일이죠. 확실하지 않은 일로 우리가 가진 패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리소나 은행의 기업대출 담당자를 만나야겠습니다. 1 천억 엔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담당자요. 그와 약속을
잡으세요,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일단 알아보겠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오지환 부장에게 이번 출장에서 ‘안 된다’. ‘불가능하다’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서 있을 수 없었다.
남이 전부 어렵다고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 저곳에 정신없이 전화를 돌리던 그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영훈에게 진행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저녁 시간이 된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 약속을 잡아내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따위를 영훈에게 늘어놓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이미 너저분한 공치사로 자신의 실적을 과장하는 부하를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좋네요. 움직입시다.”
“알겠습니다.”

오지환 부장은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은 후 입을 열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이는 리소나 은행 도쿄지부장인 마쓰다 나오키로, 나이는 쉰이 넘었고 현재 은행에서만 20 년


넘게 근무했다고 합니다. 성향이나 인맥에 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생년월일은요?”
“생년월일이요? 일단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아내면 카톡으로 보내주세요.”

영훈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행태였지만 오 부장은 열심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약속장소는 도쿄 중심가의 한 술집.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생소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끄는 그곳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미리 와 있던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영훈 일행을 보고 벌떡 일어서서 하는 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일본에서 상무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절 아시나요?”
“대한민국에서 배 만드는데 종사하는 사람치고 요새 상무님 모르면 간첩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반갑습니다. 저
무진중공업 해외영업팀 채병진입니다.”

그가 꺼내주는 명함을 받으니 무진중공업 해외영업팀 채병진 상무라고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일본에 오기 전 방위사업청에서 주도하는 차기 잠수함 사업에 무진중공업이 엮여 있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만날 줄이야...
이건 영훈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반가워요. 최영훈입니다. 여기는...?”


“저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리소나 은행 마쓰다 나오키 도쿄지부장입니다. 일본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이
친구가 갑자기 통역을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기에 이 늦은 저녁에 뛰어왔는데, 여기서 최 상무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오지환 부장과 일본어로 약속을 잡아놓고 통역을 불렀다?


게다가 서로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중공업 회사를 같은 자리에 앉혔다는 건 아무 생각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훈은 묘한 미소를 띠고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쓰다 나오키입니다.”

어설프지만 한국말로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HS 그룹 최영훈입니다.”

영훈은 그렇게 문제의 두 명과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지환 부장은 마쓰다 나오키와 채병진 상무에게 명함을 주고 소개를 주고받은 다음 영훈의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했다.

“그런데 리소나 은행은 왜...?”

채병진 상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훈은 채병진 상무 역시 아직 상황을 파악한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는 니폰유센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을까?
영훈은 대답 대신 마쓰다 나오키를 향해 물었다.

“우리가 만남을 청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회사 임직원을 통역으로 데리고 오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마쓰다 나오키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마침 여기 채병진 상무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HS


그룹에서도 연락이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할 거라면 같이 들으시는 게 어떤가 해서
모셨습니다.”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다만 채병진 상무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나한테 할 이야기 말인가요?”


“정확히는 무진중공업에게 제안하는 것이지요.”
“무슨 제안 말입니까?”

마쓰다 나오키는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그 기분 나쁜 웃음에 영훈이 미간을 찌푸릴 때 그가 양쪽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폰유센의 재정상황이 상당히 악화됐습니다. 니폰유센은 우리에게 천억 엔 대출을 요청했고 우리는 내부에서 이
대출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 논의중이죠. 그런데 내부회의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니폰유센에게 천억
엔 대출이 진행된 이후 과연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채병진 상무가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요?”
“우리는 니폰유센의 이번 위기가 해운 환경의 변화로 인한 하락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재 니폰유센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가야 오키노리의 경영능력 때문에 위기를 자처한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우리는
니폰유센이 충분히 저력 있는 회사라고 평가하고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고 보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경영자와 충분한 자본이 투입된다면 말이에요.”
“그게 무진중공업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번에는 영훈이 물었다.

“그래서 일본 기업도 아닌 한국 기업에 넘기려고 한다는 말인가요?”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빌려준 돈에 충분한 이자를 더해 돌려받는데 주력할 뿐이에요. 하지만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제안을 몇 곳의 해운사에 전달했으니까요. 적정한 가격이 아니라면 욕심을 낸다고
해도 얻기 어려울 겁니다.”
“방법은요?”
“노무라 홀딩스가 보유한 니폰유센의 주식 27%를 매각할 예정입니다. 또한, 추가 대출은 니폰유센 주식을
타사에서 매입한 이후 이루어질 것이고요.”
“27%만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분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대 회사들이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세계 자동차 운반선 시장의 최고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니폰유센은 확실히 매력적이긴 했다.


특히 전기차 시장이 더욱 커지게 된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 시장의 자동차 운반이 지금보다 더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되고 있었다.
뻘짓만 안 한다면 안정적인 매출을 보장할 수 있는 회사임은 확실해 보였다.
군산조선소를 팔고 작년에 확보한 현금만 8 천억.
착실하게 LNG 선 수주를 이어오며 현금을 쌓은 무진중공업으로써는 탐나는 먹잇감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채병진 상무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저렇게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훈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마쓰다 나오키가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많은 시간을 드릴 수 없다는 점, 미리 사죄하겠습니다.”


“그거야 니폰유센에 관심이 있을 경우겠죠.”
“관심이 없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분명...”
“관심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개나 소나 다 달려드는 먹잇감이라면 그다지 흥미가 가진 않네요. 그럼...”

영훈은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왔고 오지환 부장은 허겁지겁 영훈을 따라 나왔다.


오 부장은 바짝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대로 포기하실 겁니까? 아직 가격도 듣지 못한 상황이라...”


“저들이 부르는 가격대로 안 살 건데 가격을 들으면 뭐 합니까?”
“네?”
“노무라 홀딩스는 이미 니폰유센이 망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좋은 물건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정말 좋은
물건이라면 저런 식으로 은밀하게 꼬시지 않습니다. 대놓고 광고로 때리겠죠. 우리가 모르는 악재를 저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더라도 공짜로 주워 먹지 않는 수준
이라면 우리도 건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영훈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했다.

“가야 오키노리는 요즘 뭐 합니까?”


“겉으로는 회사와 집을 오가는 성실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주말마다 골프와 등산을 통해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습니다.”
“현재 니폰유센의 실질적인 대주주는 누구죠?”
“야마시타 료타라는 사람으로 나이가 여든이 넘었는데 이제는 일에서 손을 뗀 상태입니다. 전권을 가야
오키노리에게 넘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납시다.”
“만나서 어쩌시려구요?”
“사위가 바람나서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하니까 정신 차리라고 알려주려구요. 그럼 사위를 조지든 회사를
정상화시키든 뭐라도 하려고 할 거 아닙니까? 숨겨진 악재는 그때 드러날 겁니다.”

마쓰다 나오키는 외나무 다리에 홀로 서 있는 위태로운 형국의 운에 들어서 있었다.


강한 바람이 들이치면 그는 끝을 모르게 떨어질 것이다.

< 토끼를 노리는 자들(2) > 끝

< 토끼를 노리는 자들(3) >

채병진 상무는 늦은 미팅을 끝내자마자 허겁지겁 문태범 사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무진중공업 문태범 사장은 일단 정호균 회장에게 보고하기 전 자신이 해당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늦은 저녁임에도 미래전략실 오기철 실장에게 연락해 해당 내용 검토를 지시했다.
아마도 퇴근했던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다시 회사로 들어와 밤새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부서 직원들이 다른 부서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 건 이런 일을 하기 위함이다.
역시나 아침 8 시에 출근했을 때 책상 위에는 열 장 정도 되는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문태범 사장은 그걸 찬찬히 정독한 후 정호균 회장에게 보고했고, 9 시도 되지 않아 임원 회의가 열렸다.
“현진물산에서 눈독 들였다고?”

정호균 회장은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그걸 물었고 문태범 사장은 바짝 긴장했다.


정확히는 HS 물산이지만 정 회장이 굳이 HS 물산보다 현진물산이라고 언급한 건 양반족보를 사서 신분이 상승한
평민을 바라보는 또 다른 양반의 시선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HS 물산은 정 회장에게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네. 리소나 은행 도쿄지부장에게 관심이 식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걸 완전히 믿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경쟁이 붙으니까 관심이 식었다···. 그럼 경쟁이 없었으면 홀랑 먹었을 거라는 말이고, 지금까지 매물로 나와
있지 않았음에도 계속 노리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맞습니다.”
“그럼 니폰유센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걸 현진물산은 알고 있었고 우리는 모르고 있었네?”

문 사장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니, 어젯밤 채 상무에게 전화를 받은 직후부터 회장님이 노여워할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침착하게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내놨다.

“니폰유센의 주력 사업인 해상 자동차 운반은 경기에 둔감한 분야인 데다가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상당한 점유율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니폰유센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흔들리고 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럼 현진물산은 귀신이 알려준 건가? 우리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고?”
“······.”
“그래서 그 마쓰다인가 마쎄이인가 하는 걔는 얼마를 불렀어?”
“니폰유센 지분 27%를 3 백억 엔에 넘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머지는?”
“대주주이자 니폰유센 회장인 야마시타 료타가 가진 지분은 21%라서 회사 경영권을 뺏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호지분은?”
“미쓰비시 UFJ 은행에서 가진 11%는 노무라 홀딩스에서 충분히 컨트롤 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총 38%네? 믿을 수 있는 이야기야?”
“믿을 수 없다고 가정해봐도 니폰유센 지분 27%를 3 천억에 확보하는 건 상당히 좋은 기회입니다.”
“언제고 니폰유센을 노릴 수도 있고. 그렇지?”
“맞습니다.”
“3 천억 좋고, 회사 나쁘지 않네. 다 좋아. 다 좋은데 현진물산의 그 어린놈이 여기서 손 털겠다는 거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놈 이름이 뭐였더라?”
“최영훈 상무입니다.”
“작년에 송 회장 딸이랑 결혼한 놈이지?”
“맞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 때문에 우리가 피 같은 군산조선소를 넘긴 거 아니야.”

문태범 사장은 작년 가을, 정호균 회장이 군산조선소를 둘러싼 내막을 여당 중진의원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허탈해하고 화를 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임원들은 그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었다.
이제 마흔도 채 안 된 어린놈에게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었다는 임직원들이 손 한번 못 쓰고 당해버렸으니 이런
창피가 어디 있을까.
그 뒤로 정 회장은 아들인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을 경영수업을 더 시켜야 한다며 한동안 외부에서 초빙한
교수까지 붙이기도 했었다.

“맞습니다.”
“흐음···.”

정호균 회장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펜을 탁자에 톡톡 두들겨댔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그 어린놈한테 노무라 쪽에서 먼저 접근한 건가?”


“아닙니다. 최영훈 상무가 먼저 접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니폰유센이 아니라 노무라 홀딩스에게 직접 지분을 얻으려고 했다고? 그럼 노무라 홀딩스와 미리부터
접촉이 있었다는 건데, 그 와중에 노무라는 우리를 이 판에 끼워줬다는 거지?”

문태범 사장은 그제야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상황임을 인지했다.

“그게···.”
“지금까지 조용히 짝짝꿍을 하고 있다가 이제와서 멤버 하나를 끼워주니까 현진물산이 열 받아서 판을 엎는다? 야,
문 사장.”
“네?”
“너 같으면 그 상황에 신사적으로 못 하겠다고 그냥 나오겠냐?”
“아마 멱살 잡고 흔들어댔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멱살만 잡는 게 아니라 죽통을 돌리지 않겠어? 그럼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문 사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입을 열었다.

“HS 물산 쪽에서 먼저 리소나 은행에게 접근한 게 맞다면 니폰유센이 아니라 반드시 리소나 은행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판에 멤버 하나가 끼어들었고, 현진의 그 어린놈은 일단 판을 엎고 나왔단 말이야.
그치?”
“맞습니다. 심지어 얼마에 팔겠다는 가격을 듣지도 않고 그냥 나갔다고 합니다.”
“가격을 안 들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채병진 상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마쓰다 나오키는 지분 27%에 대한 가격을 따로 이야기해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쓰다 나오키도 상당히 당혹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뭐야, 진짜 날로 먹으려고 한 거야? 어떻게?”

문태범 사장이 그걸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현진물산이 니폰유센과 맺은 계약이 뭐가 있지?”
“작년에 평택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중고차를 배달시킨 적이 있지만, 그것보단 해주조선해양에서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을 수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니폰유센에 관심을 가진 건가?”
“그랬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에 사람 보내고··· 아니다. 문 사장, 네가 가. 가서 채병진이 데리고 네가 현장에서 컨트롤 해.”
“알겠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두 눈을 부릅뜨며 문태범 사장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절대 지지마. 알았어?”


“알겠습니다.”

문태범 사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호텔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영훈과 오지환 부장은 도쿄에서 멀지 않은 요코하마로 향했다.


약속을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가는 것이어서 오 부장은 계속 불안해했다.
만약 가서 만나주지 않는다거나 아예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영훈은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듯 굉장히 평온한 안색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니폰유센 회장의 집은 한국의 여느 재벌들과 다를 바 없이 참으로 으리으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지환 부장의 걱정이 무색하게, 굉장히 쉽게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한국에서 찾아왔다는 말과 HS 물산이라는 말에 더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니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반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제 갓 서른 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반기는 게 아닌가?
당장 뉴스에 아나운서로 나온다고 해도 어울릴 것 같은 지적인 미인의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리로···.”

차분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입구에서 꼬치꼬치 묻지도 않고 일단 커다란 거실로 안내했다.

“예··· HS 물산 최영훈 상무라고 합니다.”

단순히 가정부라고 보기에는 옷차림이나 액세서리가 범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에 일단 손부터 내밀며 악수를 했다.

“HS 물산 오지환 부장입니다.”


“우리 회사와 작년에 자동차 운반선을 계약했던 해주조선해양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HS 물산이 맞죠?”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평생 힘든 일 한번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맞습니다.”
“내 생각이 맞았군요. HS 물산에서 왔다는 말에 바로 그 생각이 났더랍니다. 차는 뭘 드시겠어요?”
“차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야마시타 료타 씨는 안 계신가요?”
“우리 그이는 지금 몸이 안 좋아 안에서 쉬고 계시답니다. 다른 분들을 만날 형편이 되지 않아요. 그이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너무 죄송합니다.”

우리 그이···.
오지환 부장이 통역을 제대로 한 거라면 이 젊은 여자는 나이가 여든도 넘었다는 야마시타 료타의 부인이 되는
거였다.
이걸 부럽다고 해야 하나? 망측하다고 해야 하나?

“아··· 회장님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일어나서 외부인과 만남을 가질 만큼은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죄송하다는 그녀의 말만큼이나 표정도 미안해하고 있었다.
난감한 오지환 부장이 물었다.

“그냥 갈까요?”

회장이 자리에 없다는데 여기서 젊은 마누라 붙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하지만 영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천천히 차나 마시고 일어납시다.”

영훈이 그렇게 말하자 오 부장은 난감해하면서도 용감하게 아까 거부했던 차를 다시 내달라고 청했다.


한국 사람도 아니고 외국 사람에 대한 정보를 당장 알아낼 수도 없어 답답해하며 천천히 집을 둘러보는데 마침
한쪽 벽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야 오키노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는 아마 야마시타 료타의 딸이 맞으리라.
그런데 박색할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그녀 역시 꽤 미인이었다.
이런 여자를 두고 왜 바람을 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야마시타 료타의 젊은 아내가 차를 내왔다.
영훈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저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실 것 같습니다. 상당히 젊으신 것 같은데 맞나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 이제 서른셋입니다.”

오지환 부장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나이 차이가 무려 쉰이 넘는 커플은 헐리우드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게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아··· 그렇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앞으로 니폰유센그룹과 HS 그룹의 미래를 위해 회장님과 사모님께
해마다 선물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선물이요?”
“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HS 그룹이 작년에 Nodri Clare 라는 명품 브랜드를 인수했습니다. 그래서 VIP
분들께 선물을 보내드리고는 하는데 니폰유센그룹의 총수 내외분께 선물을 안 보내드릴 수 있겠습니까. 특히
사모님이 젊고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Nodri Clare 의 목걸이 세트가
분명 잘 어울리실 겁니다.”

세상에 공짜 선물 싫다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재벌은 돈이 많아서 공짜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돈 많은 사람 역시 없는 사람만큼이나 공짜를 좋아한다.
Nodri Clare 의 목걸이 라인은 기본 라인만 7 백만 원이 넘어가고 조금 비싸다 싶으면 천만 원을 훌쩍 넘긴다.
당연히 여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희의 성의니까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아, 회장님의 생신은 알고 있으니 사모님의 생년월일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사실 태어난 연도는 선물을 주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녀는 Nodri Clare 의 목걸이 세트에 흥분해서
자신의 생년월일을 다 말해주었다.
오지환 부장은 영문도 모르고 일단 남의 여자 생년월일부터 받아 적는데 영훈은 그가 적는 걸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혹시 사위분인 가야 오키노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성실하고 좋은 남자라고 생각해요.”
“그게 다인가요?”

그녀는 멈칫하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자상하고 섬세한 성격이에요. 가끔 거친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항상 자상하게 우리를 대해줘요.”

영훈은 오 부장의 통역을 듣다가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이런 미친 새끼···.
가야 오키노리는 펀드 매니저와만 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녀의 사주에는 도화살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도 하필 안 좋은 장외도화살이었다.
게다가 올해 기신운이 들어왔으니 색으로 망신당하거나 죽을 운명이었다.
흐드러진 꽃 같은 여자와 벌 같은 남자가 같이 있으니 연분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영훈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혹시 당신이 가야 오키노리와 바람을 피고 있다는 걸 야마시타 료타도 알고 있습니까?”

순간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 토끼를 노리는 자들(3) > 끝

< 토끼를 노리는 자들(4) >

처음 보는 대기업 재벌 사모님에게 사위랑 바람을 피우냐고 물어본다.


오지환 부장은 통역을 해주면서도 영훈이 제정신인지 심각하게 의심할 정도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
이런 말은 자칫 잘못하면··· 아니, 이런 말은 입 밖으로 내뱉는 즉시 X 되는 법이라는 걸 그는 오랜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은 생각과 달랐다.

“그, 그걸 어떻게 당신이···.”

사시나무 떨듯이 손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오지환 부장은 그녀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사, 상무님?”

영훈은 귀신 보듯 쳐다보는 오 부장의 눈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회사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말이죠.”

그 여자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영훈이 도와준다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았다.

“원하는 게 뭔가요?”
“니폰유센이 리소나 은행에게 천억 엔 대출을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회사가 많이 어려운 상황이라고요.”
“맞아요. 회사가 했던 투자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들어서···.”
“비슷하기는 한데, 제가 사모님이 알고 있는 내용과 조금 다른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우츠가 루미라고 노무라 증권의 AEI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있습니다. 그리고 AEI 펀드는 니폰유센이
투자한 곳이죠.”
“그런데요?”
“가야 오키노리가 왜 AEI 펀드에 회사 자금을 넣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역시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계셨군요. 가야 오키노리는 우츠가 루미와 주말마다 애인처럼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영훈을 바라보았지만 평온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조금씩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거짓일 거라고 믿고 싶다면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이니까 거짓은 아니겠죠. 웃기네요. 나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다면 다른 여자와도 불륜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 분을 삼키던 그녀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나요?”

영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가는 건가요?”
“당신은 지금 흥분해서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주세요.”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라는 거죠?”
“글쎄요. 그거야 당신이 알지 않겠습니까? 우린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야마시타 료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가정을 얼마나 지키고 싶은지, 가야 오키노리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만약 정리가 된다면요?”
“그럼 원하는 게 생기겠죠.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는 도쿄 하얏트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명함 하나를 놓고는 집을 나왔다.


뒤에서 반쯤 홀린 표정으로 따라 나온 오지환 부장은 영훈이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차에 오르는 걸 보고 얼른
운전석에 타며 물었다.

“아까 그 여자가 가야 오키노리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느낌이 그랬습니다.”

당연히 설명할 수 없었다.


도화살로 부족해 홍염살까지 들어 있는 그 여자는 가야 오키노리가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을 게
분명한 여자였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홍염살이 들어 있는 남자나 여자는 아무리 부귀한 가정에서 자라고 좋은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높으니까.
반면 오 부장은 그냥 느낌이 그랬다고 하니 더는 물어볼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대로 나오셨습니까? 가야 오키노리가 바람을 핀 걸 알고는 뭐든지 다 할 기세던데요?”


“바람기가 있기는 해도 똑똑한 여자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화가 난 마음에
그대로 따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가서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 부장은 최영훈 상무가 그녀를 왜 똑똑한 여자라고 확신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만날 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부장님, 사채업자들이 보통 채무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할 때는 얼마를 갚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얼마를 갚을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그야··· 사채업자의 입에서 일정 금액이 나오면 거기서 더 깎으려고 하니 그런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어요.”
“그게 뭡니까?”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올 것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생각지도 못하게 돈 나올 구멍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받아내야 할 채무자가 많아서 하나하나 속사정까지 파악하기 힘들죠. 그래서 먼저 물어보는
겁니다. 사채업자의 실력은 사전 준비를 얼마나 잘 하는
가, 그리고 이런 식의 떠보는 질문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짐작해낼 수 있는가로 평가됩니다.”

오 부장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상무님은 어떻게 그렇게 사채업자 세계를 잘 아십니까?”


“현진물산에 입사하기 전에 잠깐 그쪽 일을 했었거든요. 나름 실력도 좋았습니다. 말했던 두 가지 능력 중에 전
후자에 뛰어났거든요. 사전 준비는 사수에게 배운 그대로 하는 것도 벅찼습니다. 법률적 지식이 어찌나 많이
필요하던지···.”

다른 사람이라면 숨기고 싶을 과거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최 상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오 부장은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빨리 화제를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 그 여자가 만약 감쪽같이 연기를 한다면 상무님이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 앞에서 거짓말로 날 속여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세상을 살아오면서 오지환 부장은 많은 허풍을 들어왔었다.


우리 집이 부자라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하는 건 너무 흔했고, 조금 특이하다 싶은 건 밤일을 잘한다거나 3 대
500 을 친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황당한 허풍은 처음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조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게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처음 최영훈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자 잘 만나서 운 좋게 승진했겠거니 생각했는데, 곁에서
지켜볼수록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 그런데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혹시 이름 알고 있습니까?”

오 부장은 다시 한번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사위와 바람이 났냐고 채근했다니···.

하루 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영훈과 오 부장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그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우아한 검은색 모자를 쓰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후쿠하라 아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영훈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차를 주문했다.
그녀는 영훈과 오 부장을 힐끗 보고는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집으로 부를까 이곳으로 올까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여기는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괜한 염려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알게 되겠죠.”
“······.”
“남편은 위독해요. 당뇨 합병증이 심하게 와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예요. 당신도 내가 돈 때문에
야마시타 료타와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나요?”
“아닙니까?”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오 부장은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어제 그 충격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기에 그대로 통역했다.
후쿠하라 아이는 그걸 듣고 가볍게 웃었다.

“후후··· 당신은 참 직설적이군요? 맞아요. 여자의 행복 따위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됐죠. 하아···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처연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영훈은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극도로 긴장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회사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하셨어요.”
“펀드에 투자했다가 손해 본 금액. 혹시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까?”

후쿠하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것 말고는 다른 문제가 없어요.”


“없다고요?”
“네.”
“정말입니까?”
“네. 그룹 재무부 이나모토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는 야마시타의 충신이라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아무래도 이상했다.
펀드 투자로 손실을 아무리 많이 봤다고 한들 주 채권은행에서 회사 지분을 팔아치우려고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그녀는 아주 순수하게 이번 사태가 끝나고 자신이 가져갈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전문적이고 똑똑한 임원들을 움직일 정치력이 부족했으니까.

“리소나 은행에서 무진중공업에 가지고 있는 지분을 팔려고 합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정말 회사에 문제가 없다면 리소나 은행에 신청한 대출을 중지하세요. 그리고 펀드 투자에서 손실을 봤다고
공시하세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일본 정치 상황을 잘 몰라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회사 주가는 폭락할 거고, 가야 오키노리는
퇴출당할 게 분명합니다.”
“가야 오키노리를 법적으로 옭아맬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당신이 경영권을 가지고 고소를 하느냐에 달렸겠죠. 난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일단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는군요?”
“니폰유센은 좋은 회사입니다. 펀드 투자 손실 말고 더한 피해가 없다면 아주 좋은 물건이죠.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요?”
“우리에게 좋은 가격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까?”
“내가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면 더 좋은 가격에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야마시타 료타의 딸이 당신이 자기 남편과 불륜을 벌였다는 걸 알게 되면 순순히 당신을
아버지의 아내로 인정할까요? 아마 아주 시끄러운 법정 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알게 될 거라는 그녀의 말.


그건 순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역시나 후쿠하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시끄러워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좋습니다. 그럼 우선 가야 오키노리부터 회사에서 쫓아내고 대출 신청을 중지하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영훈은 후쿠하라를 돌려보냈다.


그녀와 할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
대주주가 가진 지분은 이제 완전히 HS 그룹의 우호지분이 되었고, 이제 남은 건 노무라 홀딩스 뿐이었다.

영훈과 오 부장은 곧장 노무라 홀딩스 본사로 향했다.


오 부장의 전화를 받은 마쓰다 나오키는 깜짝 놀라 해당 사실을 보고했고, 최 상무 일행이 도착했을 땐 이미 몇몇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노무라 홀딩스의 에토 세이치 사장은 마흔도 안 돼 보일 정도로 젊었는데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아주 정중하게
안내했다.
그는 사무실로 가는 내내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앞장섰는데, 그의 사무실에는 놀랍게도 눈에 익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바로 가야 오키노리였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땅에 박고 있는 모습은 간혹 영화에서나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반갑습니다. HS 물산 최영훈입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에토 세이치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는 나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글쎄요··· 니폰유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맞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분을 무진중공업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3 백억 엔에 말이죠. 그 이상이라면 당신들에게 넘길
의향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계속 가야 오키노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영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가야 오키노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후··· 당신은 정말 정도를 모르는군요. 펀드매니저와 불륜을 저질렀던 것도 모자라 노무라 홀딩스 사장님의
사모님까지 건드렸던 겁니까?”

오지환 부장이 전한 영훈의 말에 깜짝 놀란 가야 오키노리가 고개를 쳐들 때, 영훈은 역시나 놀라는 에토


세이치를 향해 말했다.

“니폰유센을 팔아치우려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이 자 때문이었군요.”

< 토끼를 노리는 자들(4) > 끝

< 토끼를 노리는 자들(5) >

에토 세이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노의 눈빛으로 영훈을 쳐다보던 그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명패를 집어 들고 가야 오키노리의 어깨를 후려쳐
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그를 냉혹한 눈빛으로 몇 번이고 더 때리던 그가 잠시 숨을 고르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물! 물 가져와!”

비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냉수를 가져다주자 그가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번에는 컵을 가야 오키노리를 향해 집어


던지려고 할 때 영훈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뭐 하는 겁니까, 지금! 내 앞에서 사람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눈앞에서 사람 죽는 거 보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저 사람이 당신을 폭력으로 고소하면 난 못 본 척하지 않아요.”

그는 유리컵을 쥔 손을 부르르 떨다가 내려놓고 가야 오키노리에게 말했다.

“나가 있어.”

바닥에 피를 흘리며 나뒹굴고 있던 가야 오키노리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한동안 분노로 씩씩거리던 에토 세이치는 잠시 후 영훈에게 물었다.

“가야 오키노리는 감히 나를 고발하지 못할 겁니다. 아마 여기서 맞아 죽는다고 해도 당신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날 곤란하게 한 겁니다.”

그는 영훈의 불만스러운 말에 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표정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는 예전부터 가야 오키노리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펀드에 회사 자금을 투자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말이죠.”
“그래서 내 와이프와 그 짓을 하고 다니는 걸 알았다, 그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오지환 부장은 절로 손에 땀이 흥건해짐을 느꼈는데, 황당하게도 그의 보스인 최영훈 상무는
어쩔 거냐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에토 세이치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영훈을 노려보며 말했다.

“한국 기업이 니폰유센을 노리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무진중공업에 니폰유센 회사 지분을 팔아 치우려는 이유는 뭡니까?”
“한국 기업이든 일본 기업이든 상관없습니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렸으니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겁니다. 쓰러진
시체를 하이에나가 뜯어가든 바퀴벌레가 뜯어가든 난 상관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좋다.
노무라 홀딩스가 니폰유센을 팔아 치우려는 의도를 알아냈고 후쿠하라 아이의 도움으로 우호지분을 만든 것도
좋았다.

문제는 마쓰다 나오키다.


그의 사주를 보면 뭔가 큰 잘못을 해서 크게 곤란한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데···.
어찌 보면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훈은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반면 에토 세이치는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두고 딴 생각을 하는 영훈의 모습에 또 화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 모습이 더욱 고깝게 보인 것이다.

“지금 상황이 재밌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됐고, 무진중공업에 노무라
홀딩스가 가진 니폰유센 지분을 넘길 겁니까?”
“말했다시피 그게 탐나면 더 큰 금액을 부르세요.”
“글쎄요. 전 백억 엔도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에토 세이치가 고개를 모로 꼬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사실 3 백억 엔도 이익을 생각하며 정한 금액이 아니었다.
그저 그 정도면 손해 보지 않고 회사를 쪼개버릴 만하다고 여겨서 그렇게 진행한 건데 백억 엔도 비싸다고 한다.
이건 정도를 넘은 개소리일 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가 농담을 나눌 만한 자리라고 생각합니까?”
“전 비즈니스를 두고 농담을 즐기지 않습니다. 노무라 홀딩스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이 27%라고 하셨나요? 글쎄요.
과연 내일 니폰유센의 27% 지분이 3 백억 엔만큼의 가치가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무슨···.”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에토 세이치에게 귓속말을 했다.


에토 세이치는 깜짝 놀라며 영훈에게 소리쳤다.

“니폰유센이 대출 신청을 취소했습니다. 당신 짓입니까?”

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짓이 아니라 니폰유센 경영진의 뜻이겠죠.”


“큰 손실을 입은 니폰유센이 선박 유지와 주문 선박 인도를 위해서 현금이 필요한 건 당연한데 그걸 취소하는
경영진이 제정신이라고 보나요? 전부 당신의 짓 아닙니까?”
“물론 제가 조금의 의견을 내기는 했죠. 그럼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27%의 지분이 왜 백억 엔만큼의 가치도
없는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니폰유센을 법정관리로 보내겠다는 뜻입니까? 내가 그냥 두고 볼 거라고 봅니까?”

영훈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금액에 넘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협상을 해보려고 했는데 에토 세이치는 강경했다.
결국 영훈은 노무라 홀딩스가 가진 27%의 지분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3 백억 엔이면 회사 가치에 비해 결코 비싼 금액은 아니지만, 아직 비밀무기를 가진 HS 그룹으로써는 굳이 그
돈을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그대로 가겠다는 건가요?”
“서로 입장 차이가 명확한데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죠. 아마 고생 좀 하실 겁니다.”
“여긴 한국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겁니까?”
“다음 달이 되면 아마 생각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영훈은 웃으며 에토 세이치의 방을 나갔다.


최영훈 상무가 방을 나가자 분노로 몸을 바들바들 떨던 에토 세이치는 급기야 자신의 방을 뛰어나가 가야
오키노리를 찾았다.
사장실 옆 작은 휴게실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가야 오키노리를 찾은 에토 세이치는 다시 그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반 죽을 때까지 때린다는 게 뭔지 몸소 실천하던 그는 피가 묻은 자신의 구두를 닦으며 휴게실의 작은 의자에
앉아 말했다.

“내 아내를 어떻게 만나게 됐지?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이미 내 직원들이 네 뒷조사를 시작했으니까.”

가야 오키노리는 입안의 피를 뱉어내고 대답했다.

“노무라 호, 홀딩스 자선기념 행사에서···.”


“작년?”
“······.”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에토 세이치는 피 묻은 구두를 닦았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 니폰유센에 투자했던 지분이 당장 쓰레기가 되게 생겼어. 난 그걸
보면서도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게 됐고. 내 치부를 한국의 HS 그룹이 다 알고 있으니 말이야. 차라리 일본
회사였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완전히 병신이 된
기분이야. 이런 젠장! 내가 여기서 널 죽인다고 해도 분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아.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지.”
“제가 어,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난 손해 보고 못 사는 사람이야. 네가 가진 모든 거, 전부 나에게 가져와. 개인 명의로 된 부동산과 자동차,
채권, 주식 싹 다 나에게 바쳐. 그리고 네 펀드매니저인 애인까지.”

가야 오키노리는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여기서 대항했다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였다.

임원 회의를 마치고 당장 일본으로 향했던 무진중공업 문태범 사장 역시 가장 궁금한 건 이것이었다.

“니폰유센이 갑자기 휘청인 이유가 정확히 뭐야? 우리가 모르는 이슈가 있었던 거야?”

채병진 상무는 잠시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약속 시간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일설에 의하면 니폰유센이 회사 자금을 펀드에 투자했다가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게 다야? 손해를 얼마나 보면 주 채권은행에서 지분을 팔아치우려고 해? 넌 그런 경우 봤냐?”

채 상무도 고개를 저었다.

“이번 경우가 확실히 특이하긴 합니다.”


“특이한 거래는 그만큼 이상한 거래이기도 해. 그럼 물건에 하자가 있다는 뜻도 되지.”
“하자가 어떤 하자냐에 따라 아주 못 쓸 물건도 되고 적당히 손봐주면 멀쩡한 물건도 됩니다.”
“이제 그 하자가 어떤 하자인지 알아보자고.”

문 사장의 말이 끝나고 5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리소나 은행 도쿄지부장 마쓰다 나오키가 들어왔다.


그는 정중하게 90 도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리소나 은행 마쓰다 나오키입니다. 니폰유센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무진중공업 문태범입니다.”

문태범 사장은 능숙한 일본말로 인사했다.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 그리고 영어까지 4 개 국어에 능통했다.

“사장님께서 직접 일본에 방문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위에서는 귀사의 적극적인 대응에 감탄했습니다.”


“대략적인 조건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노무라 홀딩스에서 니폰유센 지분을 파는 이유 말이지요?”

너무 솔직하게 나와서인지 문 사장이 흠칫 놀랐다.

“맞습니다. 그 이유가 어떻게 됩니까?”


“이거 참 말씀드리기 어려운 내용인데···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 역시 위에서 니폰유센의 지분을 팔려는 이유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 그게 말이 됩니까?”
“저 역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니폰유센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분을 획득하시면 회계사들 데리고 회사 장부 다 까보셔도 됩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문 사장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정확한 건 아니지만 현재 니폰유센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가야 오키노리가 노무라 홀딩스 경영진에게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몇 시간 전에 회사 건물에서 피투성이가 돼서 빠져나가는 그를 봤다는 소리도
나왔습니다.”
“피투성이요? 아니 무슨 야쿠자도 아니고···.”
“이런 불미스러운 모습 보여드려서 참으로 송구할 뿐입니다. 그럼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경영진은 이 상황을
빨리 매듭지기를 바라고 있기에 일본 외 회사에도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약 선택의 시간이 길어진다면 더
빠른 결정을 내린 곳에 지분을 매각할 예정입니다. 이미 다수의
회사에서 흥미를 보였습니다. 다만 문 사장님처럼 무슨 숨겨진 악재가 있는 건 아닌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지요. 사장님은 어떻습니까? 다른 회사들처럼 눈치를 보시겠습니까?”

3 백억 엔에 니폰유센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는 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본사로 계약서 보내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문태범 사장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아직 검토 단계일 뿐이고 결국 결정은 회장님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회장님의 선택도 자신의 잘못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절로 손에 땀이 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호텔로 다시 돌아온 영훈은 곧바로 해주조선해양 송유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저 최영훈입니다.”


[아,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다름 아니라 연말에 니폰유센에 가야 할 LNG 선과 동일한 선박이 혹시 있을까요?”
[더 빨리 빼줘야 하는 건가요?]
“할 수 있다면요.”
[7 월에 UAE 에 인도할 LNG 선이 니폰유센에 가야 할 선박과 동일합니다. 탱크용량이나 적용된 기술 모두
똑같습니다.]
“그럼 그거 7 월에 빼줄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7 월 인도 선박도 원래 계약 기간은 내년 초였거든요. 조기 인도 보너스는 포기해야겠지만
말이에요.]
“잘 됐네요. 그 이상 얻는 게 있으니 아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직원들에게 일러 놓겠습니다.]

영훈은 전화를 끊고 오 부장에게 말했다.


“7 월에 니폰유센에 LNG 선박을 인도할 겁니다.”
“추가 대출이 없는 상태로 7 월이면 선박을 인도할 자금이 없을 겁니다.”

오지환 부장은 처음부터 니폰유센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최 상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회사를 부도 직전까지 몰아넣어 싼값에 회사를 얻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했다.

“못 내라고 빨리 인도하는 거예요.”


“네?”
“부장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LNG 선을 수주받을 때 알려지지 않은 계약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해당 LNG
선을 인도할 때 현금이 없으면 니폰유센의 주식으로 받기로 했어요.”
“흠··· 계약 기간보다 일러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텐데요?”
“잊었습니까? 지금 니폰유센 경영진이 누구 편인지?”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오지환 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바로 주식시세를 검색했다.
영훈은 그걸 보고 말했다.

“7 월이면 니폰유센 그룹의 주가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떨어져 있을까요?”


“적어도··· 절반 이하가 돼 있을 겁니다. 다만 후쿠하라가 공짜로 도와주지는 않을 겁니다.”
“니폰유센 그룹 계열사 중에 적당한 게 있나요?”
“NYK 유통이라고 일본 내에서 상당히 큰 물류업체가 있습니다. 일본 내 점유율이 상당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업체도 아닙니다. 비상장 업체고 현재 회사 가치는 백억 엔이 넘습니다.”
“그 정도면 만족하겠네요.”
“만약 그것도 부족하다고 거부하면···.”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로 뻔뻔한 여자라면 이미 처음부터 회사를 집어삼켰을 거예요. 그랬다면 우리가
더 힘들었겠죠. 아, 그리고 지금쯤 가야 오키노리도 아주 어려운 상황일 겁니다. 그러니 부장님이 가서 잘
달래주고 협조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마무리 짓게 도와주
세요. 적당한 선에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챙겨주시고.”
“니폰유센 그룹이 가지고 있는 자산 중에 법인소유 아파트와 리조트 몇 개 챙겨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네요. 거 참··· 아랫도리만 간수 잘했으면 그게 다 자기 건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오지환 부장은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김민희라는 끈을 잡았던 자신을 매우 칭찬했다.

< 토끼를 노리는 자들(5) > 끝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1) >


영훈이 일본에서 막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을 무렵, 연희는 청담사거리부터 갤러리아 백화점 사이의
명품로드샵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Nodri Clare 가 중국에서 소위 톱스타 마케팅과 공격적인 판매로 대박을 터트리면서 한국에 로드샵 매장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비록 영국이 본사이긴 하지만 한국기업이 인수한 상황이고, 속칭 신상이라 불리는 아이템은 한국에 먼저 풀리면서
중국에 풀려야 희소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월 매출 천억.
미친 듯이 성장하는 Nodri Clare 의 현 매출이었고 지금도 분기마다 성장률이 10%를 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명품 브랜드 로드샵이 밀집되어있는 이곳에 Nodri Clare 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땅값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중개법인 사무실에서 설명을 듣고 직접 와서 보니 생각보다 별로였다.
건물도 연식이 좀 되어서 유럽식의 화려한 양식은 되레 촌스럽게 보였는데, 아무래도 매입하게 되면 리모델링을
싹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8 백억이요?”

800 억이면 어지간한 대로변의 빌딩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이곳 강남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활동해왔다는 중개법인의 대표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지면적이 넓고 이 근방의 땅값은 매년 오르고 있습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결코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네, 뭐···.”

아무리 전월 매출이 천억을 돌파했다고는 하지만 로드샵 하나에 800 억이라는 말에 연희도 내심 헉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건물 매입이 아니라 그냥 임대로 들어갈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연희야! 너 여기서 뭐해?”


“어? 은진 언니. 승진했다며? 축하해.”

연희가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랜드 백화점에서 명품 브랜드 입점을 담당했던 송은진 실장은 얼마 전 이사로 올라섰다.
그랜드 백화점 소유주의 손녀였기에 능력의 유무를 떠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축하는 뭐···.”

그랜드 백화점은 대원그룹 계열사였고 대원그룹은 유통, 패션에 강했다.


예전에 송은진 실장의 기준에선 현진물산의 딸인 연희는 자신보다 많이 부족했지만,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곳까지 올라섰다.
특히 송 실장이 처음에 듣보잡이라고 깔보았던 Nodri Clare 가 중국에서 대박이 터지면서 HS 물산에서 소유한
Nodri Clare 하나의 가치만 그랜드 백화점의 시가총액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그래서 승진 축하를 받는 송 실장의 표정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난 로드샵 좀 보러 왔어.”
“매장 하나 내려고?”
“응.”
“좋은 데 소개해줘?”
“좋은 데라니? 언니가 좋은 데를 어떻게 알아?”
“들었거든. 본사 실적이 안 좋은 브랜드 하나가 한국 로드샵 매장을 뺀다는 소리가 있어서. 임대 들어가기
좋을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임대를 생각했던 연희는 괜한 자존심에 손사래를 친다.

“임대는 무슨··· 괜찮은 자리 사려고.”


“여길 사겠다고? 너희 진짜 잘 나가긴 하나 보다?”

부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담긴 송은진의 눈빛.


그걸 보며 연희는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스쳐감을 느꼈다.
Nodri Clare 를 처음 런칭하러 그랜드 백화점에 갔을 때 겪은 수모는 아직도 못 잊고 있었다.
그것뿐인가?
백화점 VVIP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은근히 자신을 빼고 진행했던 오래전 일들까지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니도 잘 알면서··· 그냥 운이 좋았지, 뭐. 그때 언니네 회사 직원들 반응이 별로였다고 했었잖아.”


“그, 그랬나?”
“그거 생각하면 진짜 운이 좋았지. 아, 대표님, 이거 계약할 테니까 건물주랑 미팅 잡아주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뚱한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던 연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지만, 중개법인의 대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마치 당연한 선택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희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고는 송은진에게 말했다.
“밥 먹었어요?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당연히 안 먹을 거라 대답할 줄 알고 물어본 거였는데 송은진의 대답이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럼 그럴까?”

연희는 순간 송은진이 ‘자신에게 뭐 부탁할 게 있나?’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갈까요?”

연희는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근처에서 식사하라며 10 만 원짜리 수표를 쥐여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 지리는 그녀가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바로 코앞에 무척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잡고 앉은 연희는 슬쩍 은진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나 은진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착 가라앉은 눈빛과 입술을 잘근 씹고 있는 걸 보면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을 눈치챘다.
주문했던 코스 요리가 하나씩 나오면서 계속 고민하던 은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너희 하남에 땅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하남?”

연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HS 물산이 가진 부동산 자산이야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하남에 땅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맞을걸? 예전 혜성기업이 가지고 있던 땅이라던데.”


“아~ 맞아, 기억나요. 그거 예전에 담보 잡고 대출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도 정확히 어디에 붙은 땅인지는
모르고 그냥 지역명만 들었었어요. 그런데 하남 땅을 왜요?”
“너 그 땅에 관심 없구나?”

연희도 하남에 3 기 신도시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HS 건설이 국내 아파트 건설보다 해외 공사에 더 주력하겠다고 경영방침을 선포한 것도 알고 있기에 더더욱
HS 건설이 가지고 있는 땅에는 관심이 없었었다.
물론 그렇다고 공짜로 막 퍼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난 관심 없지만 HS 건설은 관심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HS 건설 경영에는 내가 손대지 않으니까 몰라요.”


“혹시 그 땅 관심 없으면 우리한테 팔 수 없을까?”
“그럼 HS 건설에 문의해보지 그래요?”
“왜 이래? 그렇게 물어보면 의사결정이 얼마나 느린지 몰라서 그래? 실무자에서 부서장, 임원, 사장까지
올라가려면 몇 달 걸릴 거 아니야? 되든 안 되든 빨리 답을 듣고 싶어서 그러지.”
“으음~ 내가 한번 물어볼게요.”
“그래. 나도 지인 찬스 덕 좀 보자. 로드샵 하나 낸다고 800 억을 단번에 지르는 넌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물어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백화점 세우려고? 좋은 자리인지 잘 모르겠네?”
“어쨌든 알아만 봐줘.”
“그럴게요.”

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영훈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오늘 느낀 짜릿한 승리감을 빨리 영훈에게 늘어놓으며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느 국회의원이 다 그렇겠지만 천보윤 의원은 아침부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역구에 직원을 백인 이상 고용한 사업주들을 모아놓고 조찬모임을 한 걸 시작으로 점심 전 골프 약속, 점심 후
최고위원 회의 참석 등등 오늘 스케줄이 빡빡했다.
그런 빡빡한 스케줄 가운데서도 골프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건 그의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정·재계의
인사들과 골프를 치며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허··· 오늘 컨디션이 영 안 좋은가? 샷이 잘 안 맞네?”

천보윤 의원은 벙커로 빠진 골프공을 멀리서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매일 잘 치면 국회의원 말고 프로골퍼를 하셔야죠. 그게 인간적인 겁니다.”

국방위원회 소속이자 같은 당 후배인 이기찬 의원이 방긋 웃으며 시원하게 골프채를 휘둘렀다.


‘딱’하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쭉 뻗어나간 공이 그린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며 천 의원은 더욱 심술궂은 표정이
되었다.
골프는 기본적으로 약간의 사행성이 가미된다.
약간이라도 돈이 걸려야 재미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단 몇 만원이라도 손해 보면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더 악착같이 치게 된다.

“나 모르게 요즘 개인교습이라도 받나?”


“아이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의원님이 내준 숙제도 다 못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진짜 아니지?”
“그럼요.”
“거짓말하지 마. 요즘 김진희 프로랑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 있어.”

김진희 프로는 아직 서른이 안 된 미녀 골퍼로 실력보다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기찬 의원은 이미 아들이 둘인 유부남이었기에 천보윤 의원은 그에게 강한 경고를 보내는 거였다.

“크흠··· 그냥 골프 좀 배우는 걸로 몇 번 만난 게 답니다.”


“처신 조심히 해. 요즘은 옛날 우리 때랑 달라. 한번 실수하면 영영 배지 달 생각 말아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였나?”
“말도 마세요. 이미 무진중공업 측이 야당 의원들이랑 방위사업청에 얼마나 꿀을 발라 놨는데요? 방위사업청
애들이 무진중공업의 잠수함 기술력이 해주조선해양과 맞먹는다고 우선협상할 이유가 없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안
먹혀요.”
“그래?”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포기라··· 영 체면이 안 서서 말이야.”

처음에 최영훈 상무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예 이걸 꺼내지도 못했을 터.
문제는 그 1 년 사이 방위사업청장이 바뀌면서 사업청 내 여론이 급반전 됐다는데 있었다.
문제가 없었을 걸 문제인 것처럼 말해놨는데 진짜 문제가 됐으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쪽팔림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HS 그룹 때문에 그러시죠?”


“내가 큰소리를 뻥뻥 쳐놓은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럼 다른걸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어떤 거?”
“따지고 보면 HS 그룹도 건설업자 아닙니까? 3 기 신도시에 HS 건설 밀어준다고 하면 그래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천보윤 의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향이 달라. 내가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내 보좌관이 그러더라고. HS 건설이 인도 신공항 발주 이후로


국내 아파트 사업에는 아예 명함도 안 내밀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요?”
“주면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야. 차기 잠수함 사업 경쟁입찰은 급한 사안이고.”
“흐음··· 어렵네요. 그런데 꼭 HS 그룹을 도와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도와준다라··· 글쎄.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야겠지.”

이기찬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급히 전화기를 들고 달려오는 보좌관을 발견했다.

“왜?”
“방금 도수연 의원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현 행자부장관의 비리의혹을 터뜨렸습니다.”

반응은 옆에 있는 천보윤 의원이 더 빨랐다.

“뭘 어떻게 터뜨렸는데? 증거는 제대로 된 거 맞아?”


“이제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중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증거 신뢰도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에이··· 골프 다 쳤구만. 게임 취소니까 벌금은 없는 거야.”
“아, 예~ 그럼요.”

천 의원은 재빨리 샤워하고 바로 여의도로 출발하며 보좌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도수연 의원이 전용두 행자부장관의 교수시절 논문 표절과 조교 갑질 행위를 폭로한 건데 제대로 걸린 것
같습니다. 당시 논문에 같이 참여했을 때 제자와 나눴던 카톡대화가 그대로 실렸습니다. 언어폭력 수준이
조금··· 심한 편이라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허··· 미치겠네.”
“그래도 장관이니 전용두 장관이 물러나면 쉽게 누그러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르는 소리! 대선이 1 년도 안 남았어. 선거는 원래 분위기 싸움이고 프레임 싸움이야. 정권의 도덕성과
인사검증을 제대로 물었어. 그리고 시기가 안 좋아.”
“시기가 안 좋다니요?”
“말 그대로 1 년도 안 남았는데 이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야. 만약 손에 패가 하나밖에 없다면 이걸
지금 터뜨리겠어?”

보좌관은 천보윤 의원의 말을 이해했다.

“아닙니다. 대선 가까이 와서 터뜨렸겠죠. 지금 터뜨렸다는 건 이걸 시작으로 대선까지 계속 분위기를 끌고


가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는 거군요.”
“맞아. 이게 첫 시작이라면 도수연 손에 뭐가 들렸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해.”

천보윤 의원은 착참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며 옆자리에 꽃힌 생수만 연신 들이켰다.


검사 출신에 전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던 그녀였다.
10 년 넘게 특수부에서 검사 일을 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녀가 알고 있을 비밀이야 한두 개가
아닐 게다.
그중에 어떤 패를 쥐고 있을까?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1) > 끝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2) >

일본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온 영훈은 오지환 부장에게 뒷마무리를 지시하고 바로 회장실로 향했다.


어차피 일본 출장 결과 보고 때문에 회장실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회장실에서 호출이
있었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장모님이자 그룹 회장인 송은채 회장이 직접 찾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영훈은 궁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왔어? 중간보고를 받긴 했는데 잘 해결했다며?”

송 회장은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반겼다.


그녀는 작년 결혼식 이후 영훈을 아들처럼 가깝게 대해주었는데, 어머니가 없이 자랐던 영훈으로서는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뿐이었다.

“아직 마무리된 건 아닙니다. 무진중공업이 27% 지분을 가져갈 것 같아서요.”


“무진이 아직 니폰유센 상황을 잘 모르는거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눈치가 빠르면 손 떼고 물러날 테고, 아니면 조금
골치 아플지도 모릅니다.”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 오지환 부장은 어때? 제법 인사이트도 있고 업무 센스가 있다고 알려져
있던데, 눈치도 제법 빠르고 말이야.”

그녀가 말하는 눈치란 아마도 사내정치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네, 말씀하신 그대로던데요. 중간에 의아한 게 많았을 텐데 흐름을 끊지 않고 잘 따라와줘서 일하기


수월했습니다.”
“어떤 것 같아? 키워볼 만할 것 같아?”

영훈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대답했다.

“실무 타입입니다. 가진 야심은 크지만 그만큼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 조금 박하네?”
“박한 건 아닙니다. 실무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경영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으니까요. 서로
잘하는 게 다를 뿐입니다.”
“그래도 오 부장이 들으면 실망하겠는데?”
“그건 그렇겠네요.”
“오 부장이 아마 최 상무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할 텐데 잘 조절할 수 있겠어? 나도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 자리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사람 다루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느껴. 내가 보는 그 사람의 능력은 요 만큼인데 그
사람은 이 만큼을 바라거든.”

송 회장은 주먹을 쥐었다가 커다란 대야를 표현했다.

“이해합니다.”
“내가 잘 보는 건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저러니까 저것밖에 못 하지’하는 못된 생각도 들어.
흐음··· 쓸데없는 이야기지?”
“아닙니다.”
“아니긴··· 나보다 더 나이 든 사람처럼 생각하는 게 우리 최 서방 아니야? 일본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고,
천보윤 의원이 최 상무를 한번 만나고 싶대.”

영훈은 예전에 천 의원과 만난 이후 보좌관이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걸 받지 않았다.


볼일이 있으면 회사를 통해 연락하라고 단호하게 말한 이후 천 의원은 영훈에게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근 1 년 만에 개인적인 만남을 청한 것이다.
당연히 영훈의 표정은 굳어졌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가요?”


“최 상무가 한국 들어오기 전에 도수연 의원이 현재 행자부 장관에게 아주 큰 엿을 먹였거든. 그것 때문에 지금
청와대가 뒤집혔어. 아마 옷 벗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거야.”
“뭘 했기에 그럽니까?”
“교수 재직 시절에 조교한테 온갖 갑질을 다 했더라고. 대화 내용 보니까 욕은 아주 기본으로 달고 살면서 여자
대학원생한테는 성희롱에 집안일까지 시켰어.”
“어우··· 세네요. 인사검증을 어떻게 통과했을까요?”
“정치 시작하면서 뒷정리를 말끔하게 한다고 했나 봐. 예전에 냈던 책도 워낙 유명했고 야당에서도 재산이나 아들
이중국적으로 물고 늘어지다 보니까 교수 시절에 그런 만행을 하고 다녔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던 거지. 아니면
알고도 넘어갔던가.”
“알고 넘어갔다면 일부러 대선 전에 까려고 그랬다는 말씀이신가요?”
“도수연이 검사 출신이거든. 그것도 아주 유명한 특수부 검사. 뭐, 난 관심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싶은데
천보윤 의원은 애가 닳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아. 꼭 자기가 대선 나가는 것 같다니까?”
“아마 노리고 있을 겁니다.”
“노린다고? 그 사람이? 되겠어?”

송은채 회장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다.


영훈도 사실 천보윤 의원이 타고난 운이 있다고 생각할 뿐, 그가 정치적인 역량을 얼마나 보여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타고난 그릇이 크다고 한들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었다고 하지만 군을 부리는 건 한신만 못했고, 앞날을 내다보는 건 장자방에 미치지
못했다.

“만약 저에게 돈을 걸라고 하면 대선 출마하는 데 걸 겁니다.”

송 회장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허··· 그래? 그 양반 아주 꿈이 대단하시네? 그래서? 최 상무한테 대선 전략이라도 짜달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닐 겁니다. 도수연이라는 인물이 야당에서 치고 올라오니 자신도 뭔가 뚜렷한 인상을 주고 싶겠죠.
아마도 조재민 시장의 예를 생각하면서요.”
“지금은 조재민 시장 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고작 아파트 사업권 하나 내주면서 사또짓하려고 들지는 않겠지?”
“글쎄요. 정치인들의 계산법은 원래 좀 독특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래서 싫어해.”

송 회장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요코하마 시 외곽의 커다란 저택.


안주인인 후쿠하라 아이는 요 며칠 사이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별일 없었던 것처럼 저택의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혼자서는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주는 밥이나 먹고 자는 남편은 이제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결혼한 이후 남편이 경영권을 사위에게 넘기고, 가지고 있던 지분을 가족에게 나누어준 이후로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남편이 언제 죽음을 맞는지였다.
이빨도 거의 남지 않고 거동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의 수발이나 들어주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한창 젊은 여자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녀는 알지 못했었다.
그저 그가 가진 부와 미래에 자신이 가질 재산을 꿈꾸며 결혼했지만, 실제 삶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그런 그녀에게 40 대 건장하고 야심만만하며 때로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가야 오키노리의 접근은 유혹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더 젊고 부자인 야마시타 료타의 딸이 아닌 자신을 향한 그의 관심은 더 짜릿했고 자존감을 올려주었다.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마시타의 딸을 생각하면 자존감이 극대화되는 걸 느꼈었다.

그런데 그 은밀하고 짜릿했던 관계를 다른 사람, 그것도 외국의 사람이 알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망한 건 가야 오키노리지 그녀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아마 그와의 불륜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지 않았다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얻어터져서 본래의 남자다운 얼굴이 다 사라진 가야 오키노리는 나무를 손질하는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후쿠하라는 그런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나무를 손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야 오키노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던 그녀였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남보다도 더한 태도로 대하는 모습에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가야 오키노리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부어오른 그를 보고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모든 게··· 그냥 모든 게 미안합니다.”
“내 도움을 바라는 건가요?”
“한 번만 날 도와주세요.”
“어떻게 도와달라는 말이죠?”
“노무라 홀딩스의 에토 세이치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자입니다. 그에게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넘기지 않으면 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재산을 넘기면 되잖아요? 아무리 재산이 아깝다고는 하지만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으니까.”
“아내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아내를 조금만 설득해주세요.”

후쿠하라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내를 설득해 달라는 말.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아내가 가진 재산만큼 자신의 재산을 대신 빌려주어 목숨을 구해달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얻은 야마시타의 재산인데···.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확 차린 그녀는 지금까지 그에게 느껴졌던 모든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변해버렸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말이 거짓이 잔뜩 묻은 사탕발림이라는 것 또한 알아낸 것이리라.

“들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AEI 에 투자한 펀드 자금, 전부 그 펀드매니저인 여자


때문이라면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리고 노무라 홀딩스 사장에게 당신이 왜 끌려 다녀야 하는 건가요?
투자 손실을 본 건 우리인데 왜 당신 재산을 바쳐야 하는 거죠?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그건··· 아주 악랄한 계략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우리 회사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었어요.”
“노무라 홀딩스 말인가요?”
“맞습니다. 당신과 나의 재산을 탐내고 우리 회사를 쪼개 팔아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합니다. 우리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이 날 도와주어야 합니다.”
후쿠하라는 이를 꽉 물고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뺨을 후려쳤다.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계속 가야 오키노리의 뺨을 후려갈긴 그녀는 벌겋게 부어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 말했다.

“어리석은··· 당신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지금까지 나에게 속삭인 달콤한 말들은 하나같이 전부


거짓이었던 거예요? 당신은 행동도 말도 전부 거짓밖에 없는 사람인가요?”
“후쿠하라···.”
“여기서 나가요. 당장! 그리고 앞으로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말아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거예요!”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 나가는 그를 보고도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더는 보채거나 애원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준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탐내지 못하리라.
한국의 HS 그룹이 상당한 규모의 유통업체를 준다고 약속한 만큼, 이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정치인과의 만남은 항상 주의를 요하는 법이었기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보유한 호텔에서 천보윤 의원과
마주했다.
야당의 도수연 의원이 꽤 강펀치를 날려 곤란하다던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자네와 자네 회사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듣고 있었네. 아주 잘 나간다지?”


“그냥 그렇습니다.”
“그냥 그런 것 치고는 꽤 화제가 되던데? 듣다 보니 부럽더군. 나도 정치판에 뛰어들지 말고 기업이나 운영할 걸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아, 자네 그거 아나? 나도 예전에 자네처럼 데릴사위로 기업을 물려받을 뻔한 적이
있어. 태성그룹이라고, 지금은 TS 미디어로 이름이 바뀌었지.”
“아··· 그렇군요.”

TS 미디어는 케이블 채널과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미디어 그룹을 소유하고 있는 재벌이었다.

“낯부끄럽지만 내가 젊었을 적에 좀 날렸거든. 흐흐··· 그래서 당시 태성그룹 딸래미랑 대법원장 딸래미 둘


사이에서 엄청 고민했었지. 그러다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대법원장 딸과 결혼했네.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지만 나름 만족하고 있어. 만약 내가 그 당시에 태성그룹 딸래미
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자네 못지않은 사람이 됐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흐흐··· 농담이네. 자, 흰소리를 됐고, 내가 요즘 좀 곤란하게 됐네. 자네가 내준 숙제도 못하고 염치없이
부탁 하나만 하려고 해.”
“말씀하세요.”
“원래 상대방이 치졸한 약점 들출 때 변명을 하거나 나도 똑같이 마타도어를 하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그래서 상대방과 싸우기보단 능력으로 어필하겠다 뭐 이런 말씀이신가요?”
“맞네.”

영훈은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의원님.”
“그래, 말하게.”
“바둑에 아생연후살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십니까?”
“알지. 일단 생존을 도모하고 난 뒤 상대방의 집을 깨야 한다는 말 아닌가?”
“아생(我生)부터 하시죠.”
“나? 나부터 살라 그 말인가?”
“네. 혹시 집안에 문제는 없습니까?”

천보윤 의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봐, 최 상무. 자네 말이 백번 맞지만 난 전혀 문제가 없네.”


“그런가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제야 천 의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네 뭘 알고 있는 건가?”
“의원님께서 만약 진짜로 대선을 꿈꾸신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내분과 헤어지십시오.”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2) > 끝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3) >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천보윤 의원도 영훈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았다.


알면서도 물어본 건 자신이 생각할 때 이건 맨정신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다.

“의원님한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장난을 칠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내가 왜 아내와 헤어져야 하지? 난 지금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니까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기 바라네.”
“의원님께서 저에게 곁에 서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닙니다. 의원님
곁에 섰을 때 과연 회사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인지 그걸 알아봐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작년에 천보윤 의원을 만나고 나서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그의 과거를 알아보았다.
어차피 그에 대해서 다른 건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사주에 문제가 되는 건 아내뿐이었으니까.
정확히 한 지점을 찍어 파고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건 그렇겠지.”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과연 의원님이 앞으로도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의원직을
유지하지도 못한다면 그건 최악의 상황인 것이고, 자칫 HS 그룹의 브랜드 가치까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의원님이 이상한 추문에 휘말리고 우리가 의
원님을 보좌하는 모양새라면 굉장히 골치 아프겠죠.”
“······.”
“그러니 의원님에 대한 뒷조사를 안 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이해하시죠?”
“이해는 되지만 기분은 나쁘군.”
“기분 나빠하실 것 없습니다. 이것 참 정치인들 하나같이 자신들은 누구 뒷조사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막상 누가 자신 뒷조사를 한다고 하면 펄쩍 뛰더군요.”

천보윤 의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네. 비난은 그만하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게.”


“의원님에 대한 뒷조사를 하다 보니 가장 먼저 걸린 게 바로 의원님 사모님이었습니다.”
“내 아내가 어떻길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사모님께서 친정에 이것저것 도와주신 게 많더군요.”
“친정에?”
“결혼하셨을 당시에는 친정아버지가 대법원장까지 하셔서 굉장히 대접받았을 텐데 지금은···.”
“많이 기울어지긴 했지.”
“가장 큰 건 취업 관련으로 손을 많이 쓰셨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가?”
“우리가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면접 점수같이 세부적인 내용은 알아낼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런 세부적인 내용을 알아보지 않아도 의심스럽긴 했습니다. 조카들이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는 걸 아시긴
하시죠?”

천 의원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야기를 듣기는 했네.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


아내가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 따지고 보면 아예 관심도 없었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저야 아주 강하게 의심하는 것뿐이죠. 정확한 건 의원님께서 알아보셔야 하는 부분이고,
그 외에도 처가 재산 증식 과정이 아주 의심스럽다는 우리 기조실 직원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참 이거··· 부끄럽구만.”
“아직은 의혹일 뿐이죠.”
“문제는 자네가 의혹이라고 생각한다면 야당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날 의심하겠지. 잘 알겠네.”
“지금은 도수연 의원에 대한 대응보다 자중하고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점쟁이 같은 말을 하는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야. 그렇게 하지.”
“그럼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자네도 같이 들지 그러나? 주인 없는 곳에서 손님만 먹고 가기 영 불편해서 말이야.”
“원래 정치인은 외로운 법 아닙니까? 그리고 여기 식사는 아내와 같이 와서 먹어야지 남자 둘이 먹기는 좀
그렇습니다. 나중에 고기나 한번 같이 드시죠.”
“그러세.”

영훈은 그렇게 방을 빠져나갔다.


천보윤 의원은 룸서비스를 부르곤 그의 보좌관에게 말했다.

“아까 들었지?”
“네.”

그의 보좌관인 최승환은 그가 정치계에 입문할 때부터 따라다닌 수족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최승환 보좌관은 영훈의 이야기를 뒤에서 들은 순간부터 침도 제대로 못 삼키고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최 상무 말이 사실이야?”
“확인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천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 똑바로 해. 너 전혀 모르는 일이야? 아니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

최승환 보좌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모님께서 예전에 C&T 반도체 사장과 만난 건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걸 말 안 해!”
“사모님께서 극구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런데도 확인해봐야 알 것 같다는 말이 나와?”
“하지만 그냥 사모님의 부탁만으로 취업이 된 건지, 아니면 돈이나 다른 물품이 오간 정황이 있는 건지는 모르는
거라서···.”
“이거 이거··· 야 인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고 조카 새끼 취업 된 거면 아무것도 오간 정황이 없어도 문제가
되는 거 아니야? C&T 반도체가 양주에 시설 투자한다고 규제 풀어달라고 나한테 그렇게 만나자고 한 게 이거 때문
아니야?”
“그건 아닐 겁니다.”
“됐고, 가서 이 정신없는 마누라 사고 친 거 다 확인해서 나한테 가지고 와. 네가 아는 건 싹 다 적고, 네가
모르는 건 알 때까지 잠도 자지 말고 보고서 올려. 썩 꺼져!”
“알겠습니다.”

최승환 보좌관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방을 나가자 천 의원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혼?
말이 좋아 이혼이지 국회의원이 어디 이혼하는 경우가 흔한가?
천 의원은 식사고 나발이고 입맛이 뚝 떨어져 수행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어? 벌써 오셨어요?”

의원실에서 천 의원을 향해 이은정 보좌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국회의원은 두 명의 보좌관을 두는데 최승환 보좌관은 아주 오래 일해서 손발과 같은 사람이었고 이은정 보좌관은
천 의원의 사람이 된 지 3 년이 채 안 되었다.
이제 서른이 갓 넘은 그녀는 젊었지만 입이 무겁고 상황 판단이 빨라 은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네.”

천 의원은 작은 회의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밖의 비서들이 못 듣게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너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혹시 내 와이프가 나 몰래 사고 친 거 있냐?”
“아니요. 무슨 일 있었어요?”

천 의원은 더 채근하려다가 말았다.


오랫동안 손발이 돼준 최승환은 몰라도 이은정의 조금 융통성 없는 FM 적인 일 처리를 고려할 때, 적어도 알고서
모른 척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 겁 없고 당돌해서 문제일 녀석이니 말이다.
지금도 놀라서 긴장하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지 않는가?
천 의원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숨기고 혼자서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만약 HS 그룹 최영훈 상무의 의견이 어느 정도 맞다면 이혼할 생각이신가요?”


“이혼이 쉬워? 이혼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전부 가정도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이 무슨 국정운영을
하겠냐고 말을 할 거 아니야?”
“야당에서 더욱 그렇게 몰아갈 겁니다.”
“정치인이라고 부부 금슬이 좋아서 이혼하지 않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요. 사실 금슬은 어느 직업보다 안 좋죠. 바람 피는 건 기본에··· 제 동기가 그러는데 강무석 의원
있잖아요? 아니, 글쎄 점심시간에 비서랑 의원실에서 그 짓 하다가 제 동기한테 딱 걸린 거 있죠?
“크흠··· 그래?”

역시나 이번에도 이은정 보좌관은 조금만 시동이 걸렸다 하면 이렇게 수다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일은 컴퓨터처럼 칼 같은데 입은 모터가 달렸다고 할까?
게다가 겁도 없어서 국회의원인 자신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하는 여자였다.

“솔직히 국회의원처럼 많은 유혹을 받고 사는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어디 가기만 하면 뭘 그렇게 주겠다고


난리인데 그거 꾹 참고 할 일만 하는 사람이 대단한 거죠. 205 호에 있는 유근혁 의원도 국정감사에서 여배우 뒤
봐주다 걸리고···. 하여튼 전 이래서 국회의원인 남자랑은 결혼 안
할 거예요.”
“인마, 국회의원 와이프들은 그거 모르고 있을 것 같아? 다~ 알면서 넘어가는 거야.”
“알죠. 그래서 제가 우리 의원님 존경하잖아요. 제 동기들도 의원님은 여자문제 없다고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됐고, 어떻게 생각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대로 이혼해도 될 것 같아?”

이은정 보좌관은 잠시 눈을 껌뻑이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요즘은 옛날하고 달라서 이혼했다고 가정도 못 지키는 의원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냐는 식의 말이 국민한테 덜
먹혀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결국 국민들이 바라는 건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그건 맞아. 좋아. 일단 너 도수연 의원 동향 빠르게 체크해서 3 시간 단위로 보고해.”
“어디 가시려고요? 5 시에 최고위원 회의 있는데요?”
“집안 문제부터 처리해야겠다. 그리고 조용하게 우리 비서진들 혹시 어떤 문제 있는 건 아닌지 체크해. 이제부터
살얼음판 걷는다 생각하고 조심, 또 조심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은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명일금융의 송병창 사장은 요새 매일 채권 회수액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경리가 매일 영업사원들의 실적을 보고함에도 그는 대충 보는 척하며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때.
똑똑···.

“사장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어, 그래.”

경리가 나가고 바로 송은채 회장이 들어섰다.


그녀는 변함없이 조금은 우중충하고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인테리어를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사무실을 좀 옮기는 게 어떠니?”


“사채업 사무실이 너무 밝으면 손님들은 우리가 젠틀한 줄 알거든. 적당히 누리끼리해야 겁을 먹지.”
“아직도 그런 마인드로 일하니?”
“그냥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야. 사무실 옮겨봐야 직원 더 늘릴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게 내
건물인 거 잊었어?”
“하긴···.”
“그것보다 생각 좀 해봤어?”

송 회장은 그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너 잘할 수 있는 거야?”
“나도 오래 생각한 거야. 많이 준비하기도 했고.”
“후··· 그래, 네가 나한테 돈을 빌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직원들 시켜
알아보니까 강명저축은행이 괜찮은 매물이라고 하더라. 인수자금은 1,300 억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하네.
괜찮겠니?”
“500 억 정도 부족하긴 한데 그건 마련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사채 쓰는 건 아니고?”
“내가 사채업자인데 그런 고금리를 쓰겠어? 내가 가진 HS 물산 지분이랑 이 건물 내놓으면 대충 맞기는 할
거야.”

지은 지 40 년도 넘은 이 오래된 건물은 명동에 위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억 원이 넘어간다.


그가 가진 HS 물산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할 때, 이 건물의 값어치가 거의 500 억 원에 육박한다는
걸 송 회장도 지금에야 알았다.

“와··· 너 이거 150 억인가에 경매로 산 거잖아?”


“내가 원래 운이 좋잖아. 생각해봐. 누나가 지금 아끼는 그 사위, 내가 처음에 데리고 온 거야. 나 아니었으면
우리 예쁜 조카는 그만한 사위 못 얻었어.”
“그래서 연희가 항상 삼촌 챙기잖아. 이번에 너 저축은행 하나 인수할 거라고 하니까 가장 먼저 연희가 물건 찾고
그랬다.”
“흐흐··· 걔가 겉으로 봐서는 조금 냉정한 면이 있어도 속으로는 가족을 참 잘 챙겨. 최 상무는 언제 시간
된대?”

사실 송병창 사장은 영훈이 현진물산으로 가면서 얼마나 아쉬워했었는지 모른다.


1 년만 같이 일했으면 그가 벌어다 줬을 돈이 얼마일지 계산하며 그렇게 아쉬워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귀신
같은 놈이 조카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남모르게 쾌재를 불렀었다.
그 귀신같이 사람 보는 눈을 이제 빌려(?) 쓸 수 있게 됐다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최 상무 꼭 필요하니?”
“당연하지. 강명저축은행이 조치연 영감 것인 줄은 알지?”
“알지.”
“난 그 영감이 신줏단지처럼 끼고 도는 저축은행 내놓을 때 느낌이 싸했어. 좋은 기회인데 내가 먹어도 안 체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최 서방 의견이면 내가 한번 밀어보려고.”
“최 상무 바쁜데···.”
“거 참 비싸게 구네. 이럴 거야?”
“알았어. 얘기해놓을게. 그런데 넌 언제 애 가질 거니?”
“쓸데없이 애 타령은···.”

송병창 사장은 툴툴거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3) > 끝

< 돈의 기억(1) >

“오빠, 일어나. 콩나물국 끓였어.”

연희는 잠든 영훈을 살살 흔들었다.


어제 기조실 직원들과 회식한다고 늦게 들어온 영훈이 7 시가 다 됐는데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오늘 아침에 회의 있잖아. 얼른 일어나서 먹고 출근해.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식탁에 가 앉아 있기.”

그녀는 영훈을 억지로 흔들어 깨우고 씻으러 들어갔다.


영훈은 겨우 몸을 일으켜 시계를 확인했다.

“아우··· 죽겠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제 회식은 무작정 뺄 수가 없었다.


타 부서에서 선 좀 대보겠다고 없는 일도 만들어서 잘 보이려고 하는데, 같은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 상황에 회식까지 자꾸 빼면 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건 불문가지.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모습이었다.

영훈은 잠시 앉아서 잠을 깨고 식탁에 가 앉았다.


콩나물국과 각종 반찬에 갈치구이까지.
콩나물국이야 어제 미리 사다 놔서 끓이기만 했을 테지만 아침부터 힘들게 일어나 부산스럽게 생선을 구웠을
생각을 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한 숟갈 뜨니 시원한 국물이 속을 달래준다.
연희는 자신이 요리에 재능과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굳이 자신 없는 요리에 시간을 들이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반찬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이렇게 사다 놓는다.
이 점은 영훈도 아주 만족했다.
정성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맛없는 음식을 먹기는 싫으니까.
그리고 요리는 영훈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이렇게 사다 먹는 게 좋았다.

“콩나물국 괜찮지?”

연희가 씻고 나와서 물었다.

“응, 맛있네.”
“여기 새로 생긴 반찬가게에서 사 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연세가 좀 있어서 그런가 음식 솜씨가 괜찮은 것 같아.
내가 결혼했다고 하니까 새댁이라면서 양념깻잎이랑 달래무침 많이 주셨어.”
“으음··· 그래?”
“어제 내가 송은진 실장이랑 만났던 얘기 했었나? 아니 청담동에 로드샵 보러 갔다가···.”

연희는 아침이나 저녁이나 항상 쉬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산에서 꼭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하는 스님들과만 살다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그녀와 같이 있으니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와중 하나가 귀에 꽂혀왔다.

“하남 신도시?”
“어. 거기에 HS 건설이 땅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네한테 팔라고 하는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거기가 백화점
들어갈 자리인가?’하는 생각만 들어. 못해도 수천억 들어갈 텐데···. 오빠도 이상하지?”
“신도시 규모가 어느 정돈데?”
“그렇게 안 커. 내가 알아보니까 대략 3 만 가구 정도?”
“크지는 않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무슨 정보가 있나?”
“왜? 팔려니까 아까워서?”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모르겠는데, 괜히 팔라고 하니까 뭐가 숨겨진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 내가 옛날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뭔데?”
“땅은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 땅을 팔라는 사람이 나타난대. 그때 절대 땅을 팔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언제 팔아?”

연희는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딱 석 달. 이 석 달 동안 땅을 팔라는 사람이 두 명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땅을 팔아도 된다. 그런데 이 석 달


동안 땅을 팔라는 사람이 세 명이면 고민해보고 네 명 이상일 때는 절대 팔면 안 된다고 했어.”
“오호~ 그거 뭔가 심오해 보이는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어디 배만 팔아서 부자가 됐겠어? 부산 말고도 전국에 땅을 엄청나게 사놓으셨다가 그걸로
엄청나게 큰돈을 버셨거든. 어쨌든 그런 할아버지의 말이 딱 떠오르는 거야. ‘아! 그렇구나. 지금부터 카운트
들어가야겠다.’ 이렇게.”
“석 달 안에 몇 명이나 관심을 보이는지 한번 보자. 나도 궁금해지네?”
“그렇지?”
“그런데 왜 하필 석 달이라고 하셨대?”
연희는 오랜만에 영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생기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에헴! 잘 들어봐. 보통 땅은 정보 싸움이라고 하셨어. 그 정보는 대개 정부 주도 하의 개발 정보거든. 그런


정보는 은밀하기는 해도 완전한 비밀일 수가 없어서 누구 하나만 알기가 힘들대. 알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그
몇 명의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거지. 그럼 개발의 핵심 지역에 들어
가 있는 땅은 결코 한 사람만 노릴 수가 없다는 거야.”
“그렇겠네.”
“땅값이 왜 오를 때는 많이 올랐다가 떨어질 때는 많이 안 떨어질까? 그건 땅이 가진 고유의 특성, 바로
세상에서 그 땅이 유일한 땅이라서 그래. 두 개도 없고 세 개도 없는 유일한 그 땅을 가진 사람이 개인 혼자라서
안 팔면 안 팔았지, 올라간 가격을 결코 내리지 않기 때문이야.”

영훈은 그녀의 강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아파트는 땅하고 달라서 내릴 때는 조금이라도 내리는 거네?”


“그렇지. 같은 부동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파트는 땅하고 비교할 수가 없는 거거든. 어쨌든 만약 정말 중요한
땅이라면 못해도 석 달 안에 땅을 팔라는 사람이 셋 이상은 나타날 거라고 하셨어. 그럼 그 땅은 무조건 열 배
이상이고.”
“열 배?”
“응. 그것도 그냥 열 배가 아니라 못해도 열 배. 원래 돈 없는 서민들이나 아파트에 목매는 거야. 진짜 부동산을
아는 사람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땅을 사지.”
“그 아파트 가격 때문에 사람들이 웃고 우는 거야.”

영훈의 핀잔에 연희가 눈을 흘긴다.

“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알아. 그래도 항상 말조심해야 해.”
“알겠어. 아! 그런데 내가 준 이 오피스텔 얼마인지 알아봤어?”
“어? 안 알아봤는데?”
“치··· 내가 준 건데 얼마 하는지도 안 알아봤어? 오빠도 확실히 재벌 다 되셨네.”

결혼할 때 연희는 이 커다란 오피스텔 하나를 그냥 명의이전 해주는 통 큰 결정을 했다.


나름 결혼 선물이라는데 재벌들은 다들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오피스텔이 얼마나 하는지 지금까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게, 왜 안 알아봤을까. 내 연봉보다 훨씬 비쌀 텐데.”


“우리 엄마도 그래. 엄마가 사는 집이 얼마인지, 얼마나 올랐는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 그런데 HS 건설이 가진
땅 값은 궁금해하실걸?”
“오호라, 그게 재벌 마인드다 이거지?”
“말하자면 그렇지. 어쨌든 석 달 기다려보고 진짜 은진 언니 말고 찾는 사람이 없으면 파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오빠는 신도시에 아파트 건설하는 거 관심 없지?”
“그냥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지. 인도 신공항 때문에 다들 정신없으니까.”

신공항 공사 첫 삽을 뜬 지는 이제 3 개월도 채 안 됐다.


그동안 설계와 토지매입 등 사전 작업으로 보낸 시간이 한세월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사가 들어간 상황이었다.
특히 토지매입을 주도했던 NJS 사가 매입비용 가지고 장난을 조금 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번 인도 신공항 공사를 시작으로 HS 건설이 PM 을 처음 시도하는 만큼 배울 게 많기도 했다.


HS 건설의 핵심역량을 모두 그곳에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러니 국내 건설은 조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나, 그 말이나···. 아, 그리고 외삼촌이 오빠 좀 만나고 싶다고 한 거 알지?”


“어, 들었어.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시지. 안 그래도 오늘 출근할 때 뵙기로 했어.”
“오빠한테 직접 부탁하기 미안하셨나 봐.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 빌린다고 허락받은 거지. 안 그래도 오빠
바쁘잖아.”
“난 바빠도 괜찮은데.”

한평생 한가하게 살아온 삶이었기에 현진물산에 입사한 이후의 바쁜 삶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이러다 갑자기 회사가 망해서 백수가 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잘 좀 도와줘. 삼촌이 우리 신혼여행도 보내주시고 그러셨잖아.”


“알지. 걱정하지 마.”

결혼 당시 신혼여행은 꼭 자기가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경비 일체를 다 대준 게 연희 외삼촌인 송병창 사장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은근히 영훈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조카사위에다가 전에 직원으로 부리던 사람이었지만 어쩌면 영훈의 기이한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더 어려워하는 것이리라.
영훈은 식사를 마저 하며 화장기 없이 활짝 웃고 있는 연희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 조카사위!”

송병창 사장은 명동역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영훈이 타고 온 차에 올라탔다.

“안녕하셨어요?”
“너무 안녕해서 탈이지. HS 그룹은 조카사위 없으면 안 돌아간다며?”
“하하, 아니에요.”
“아니긴··· 내가 누님한테 조카사위 빌린다고 얼마나 눈총을 받았는데. 사위 유세가 장난이 아니야. 어디 나
아니었으면 이런 사위 얻을 수나 있었겠어? 안 그래?”
“하하하! 맞습니다.”
“연희하고는 싸우고 그러지 않지?”
“네, 안 싸워요.”
“그래, 결혼하면 금슬 좋은 게 최고야. 집안에 분란이 있으면 밖에서 일이 손에 안 잡히거든.”
“네···.”

간접적으로 본인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토로한 거지만 차마 맞장구를 칠 수 없어서 영훈은 멋쩍게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송 사장이 사소한 개인 일상을 이야기하다 본론을 꺼냈다.

“조치연이라고 한때 명동 사채시장에서 알아주는 걸물이 있었어. 그 영감이 가진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옛날에는 건달들 데리고 나쁜 짓도 많이 해서 같은 사채업자들한테도 그리 평판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그렇군요.”
“그러다가 IMF 때 다 쓰러져가는 저축은행을 하나 인수했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거야. 마가 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 영감탱이 입장에선 아주 분통 터뜨릴 일이지.”
“어떤 일이었습니까?”
“말도 마. 다양해. PF(Project Financing)로 올린 건물이 대규모 공실이 나와서 건물주가 자살하고 공매로
헐값에 팔린 일도 있었고, 회사채에 손댔다가 수백억인가? 하여튼 엄청 손해 봤다고도 들었고. 우리 조카사위는
손을 대면 다 성공이었는데 그 저축은행은 손만 대면 다 망하는 거
야. 그것도 참 신기해.”
“허··· 그렇네요. 신기하네요.”
“그 물건이 지금 나왔는데 요즘 저축은행이 매물로 잘 안 나와. 난 이제 사채업자 접고 금융권으로 진출하고
싶은데, 딱 적당한 가격에 나온 매물이 그거라서 우리 조카사위 의견을 좀 들으려고. 괜찮지?”
“그럼요. 그런데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거 없어. 우리 조카사위 예전에 채무자들 만나고 다닐 때 돈 나올 구멍이 있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냈잖아?
조치연 영감탱이 만나서 진짜 소문대로 거의 망한 상태인지 아니면 저축은행만 털어내려고 하는 건지 눈치만 좀
봐줘.”
“진짜 망한 거라면요?”
“흐흐··· 말했지? 그 영감이 가진 재산이 대단했다고. 아마 저축은행 말고도 헐값으로 내놓으려고 마음먹은 게
몇 개 될지도 몰라.”
“그렇군요.”

영훈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도착한 곳은 성북동의 한 저택.
높은 담과 곳곳에 자리한 CCTV 로 마치 낯선 사람들을 거부하는 성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삐!

“누구세요?”
“예! 명일금융 송병창입니다!”

우렁찬 고함소리에 문이 열리고 들어선 집은 부잣집임에도 조금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넓은 마당과 고풍스러운 문을 거쳐 눈이 휘둥그레질 가구들을 지나쳐감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적막한 집은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아이고, 어르신. 몸은 괜찮으십니까?”

송 사장이 황급히 발을 놀려 비쩍 마른, 나이 지긋한 영감에게 다가갔다.

“죽을 때 된 노인이 몸이 괜찮겠어? 아침마다 살아있으면 감사하고 사는 게지. 너도 늙었다.”


“저도 이제 한창때는 다 갔습니다. 어르신 옆에서 돈 버는 거 배울 때가 어제 같은데.”
“쟤는 누구냐?”

조치연이 손가락으로 영훈을 가리켰다.

“조카사위, 와서 인사드려.”
“조카사위? 조카가 결혼했는데 인사도 안 했냐?”
“아이고 어르신, 제 결혼도 아니고 조카 결혼을 어떻게 알립니까.”
“알리면 내가 축의금 좀 안 줬을까.”

영훈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HS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HS? 아··· 네 누나가 거기 주인이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내 은행도 네 누나 돈으로 사는 거냐?”
“아닙니다. 예전에 누님 도움받은 게 씨앗이 돼서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부 제 돈으로 사는 겁니다.”
“잘했다. 은행을 남의 돈으로 사면 결국 내 꼴 나는 법이거든. 그런데 이 아이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아··· 실은 제 조카사위가 손대는 것마다 항상 좋은 결과를 얻어서 좋은 기운 좀 받으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조치연은 송 사장의 말을 거의 듣지도 않은 채 영훈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어찌 얼굴이 꼭 점쟁이 같누? 야, 봐라. 저 눈이 어째 회사원이라고 할 수 있겠나.”

< 돈의 기억(1) > 끝

< 돈의 기억(2) >

송병창 사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아이고 어르신, 살 날이 창창한 젊은이한테 점쟁이가 뭡니까? 우리 조카사위 시선이 조금... 분위기가 있기는
한데, 점쟁이는 너무 가셨습니다.”

사실 송 사장 역시 영훈이 여느 점쟁이 이상으로 사람의 속을 뚫어보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어 그의 말에 일부


동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이런 말을 듣게할 수는 없었다.
남도 아니고 이제는 그 누구보다 끔찍이 아끼는 조카사위 아닌가?

“아니면 아니지,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나? 왔으니까 앉아. 목 아프다.”


“예.”

조치연 영감은 맞은편 소파에 앉은 송 사장과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특히 영훈의 얼굴을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던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

“너, 내 밑에서 함 일해보지 않겠나?”


“저요?”

깜짝 놀라는 영훈을 보고 조치연이 송 사장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그럼 내가 이놈한테 얘기했겠나?”


“왜 저는 안 됩니까?”
“넌 그만하면 됐어. 이미 네 그릇에 차고 넘친다.”

영훈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감탄했다.
오래된 생강이 맵다고 했던가?
아니면 천부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것인가?
영훈은 애초부터 저축은행 인수를 시작으로 금융권의 큰 손이 되겠다는 송 사장의 포부에 그의 꿈처럼 크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송 사장의 그릇은 그 포부를 담을 만큼 크지 않다고 보았으니까.
그런데 조치연은 단박에 그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러시더니... 저, 어르신 밑에서 고생하고 나서 이제 명동에서 방귀 좀 뀝니다.”
“알아. 나는 무슨 눈 감고, 귀 닫고 사는 줄 아나? 너 내보낼 때 내 욕 많이 했지?”
“아유~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욕 엄청시레 했을 게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잘 됐지?”
“예, 어르신 말씀 듣고 열심히 해서 잘 이뤄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으니 내보낸 거다. 난 너를 쓸 수 있는 만큼 잘 썼고 너도 배울 만큼 배웠으니 서로 아쉬울 게
없었던 게야.”
“그래도 그때 너무 급하게 내보내셨습니다.”
“시끄러워. 계속 있었으면 나쁜 버릇이나 들었겠지. 네가 나보다 딱 하나 나은 게 있다면 돈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는 거다. 그런데 그 장점 하나 마저 날 닮아서 무뎌지면 넌 동네 일수방 운영하기도 힘들었을 게야.”
“...”

조치연은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내 손에 들린 은행을 뺏을 놈이라는 거지?”


“네? 아닙니다. 전 은행에 관심 없습니다. 게다가 1 금융권 은행도 아닌데...”

비하하는 말임에도 그는 오히려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거 봐. 배울 게 많잖아.”
“배울 게 많다구요?”
“잘 들어라, 어린놈아. 저축은행이 비록 1 금융권보다 덩치는 작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오히려 저축은행이나 3
금융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사람 장사라는 말입니까?”
“병창이보다 이해는 빠르구나. 돈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보면 돈이 보이는 거고 사람을
관리하면 돈을 관리하는 게야. 그 이야기는 뭐겠어? 저축은행은 1 금융권이 품지 못할 사람을 관리하게 되는 거란
말이다. 이해했나?”
“네, 이해했습니다.”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킨 그가 말했다.

“요... 요 머리는 이해가 되는데 그 원리를 체득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네
녀석은 머리는 모르고 있으면서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구나.”
“제가요?”
“그럼. 알고 있으니까 그런 눈빛을 하고 있지.”
“제 눈빛이 그렇게 특이한가요?”
그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훈의 전신을 훑었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약자와 강자를 구분해내. 그래서 날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움츠러든다.
내가 자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걸 알거든.”

금방이라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몸에 비해 그의 눈은 맹수의 눈처럼 번뜩였다.


맹수... 그의 말처럼 그는 맹수였다.

“확실히 기세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흐흐... 그래. 보통이 아니지? 또?”

즐거운 듯이 물어보는 그를 보며 영훈도 장단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점쟁이로 낙인찍힐 것 같아 한발


물러섰다.

“잘 모르겠습니다.”
“흥! 그런 얕은 거짓말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얼른 속에 있는 걸 꺼내 봐. 안 그러면 여기 이놈하고 같이
내쫓아 버릴 테다!”

버럭 소리 지르자 송 사장이 움찔 놀라며 영훈을 돌아보았다.


난감한 영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막 소리 지르고 그러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라.”
“집안의 가구를 보니 영감님의 성격이 어느 정도 보이긴 합니다. 중국 황실에서 쓸 것 같은 가구는 다른 건
몰라도 돈으로 상대방을 윽박지르기 위함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영감님을 보기 전에 집의 인테리어에서
위압감을 느껴 고개를 숙일 것 같네요.”

조치연은 영감이라는 단어에도 기분이 좋은지 갑자기 실실 웃으며 말했다.

“흐흐... 봐라. 내 말이 맞지? 감히 내 앞에서 날 평가하는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딱 두 부류였다.


하나는 검사, 그리고 하나는 점쟁이.”

영훈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정말 대단한 노인네다.
이 노인네가 관상을 배웠으면 자신 못지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가요?”
“검사는 아니고 그럼 점쟁이인데 점쟁이가 아니라는 게 더 놀랍네. 이래서 세상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나?
하여튼 내 밑에서 딱 10 년만 일해. 그럼 대한민국을 네 손으로 주무를 수 있을 게다.”

송병창 사장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는 그릇이 안 되고 제 조카사위는 딱 봐도 그릇이 커 보입니까?”


“이놈아, 그릇이 큰 게 아니라 그릇이 안 보인다. 저 어린놈이 나랑 맞먹으려고 드는데 내가 가진 지식만
넘겨주면 이 조그마한 대한민국 하나 휘어잡지 못할까?”

큰소리를 뻥뻥 치는 조치연을 보며 송 사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영감이 정말 조카사위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건데 지금까지 그가 저렇게 사람을 욕심내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 욕심이 뭔가?
눈에 걸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벌레 취급하던 그였다.
죽을 때가 돼서 사람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조카사위에게 반한 것일까?

“어르신, 이미 조카사위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HS 그룹이에요. 그것도 그룹 기획조정실. 저야 누님에게 받을


게 없다지만 사실상 HS 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입니다.”
“그럼 더 나한테 배워야지!”

영훈은 흥분하는 조치연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영감님에게 배우는 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뭐? 어째서?”
“방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돈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제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사람은 좀 볼
줄 압니다. 그러니 조금 부족한 거야 회사 일을 하며 차근차근 배워가면 될 듯합니다.”
“내가 고작 사채나 굴려서 돈 벌었다고 무시하는 게냐? 대한민국 어떤 재벌도 내 앞에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전 돈으로 군림하는 재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의 공식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그게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실패도 해보고 좌절도 겪어 보고 깨달으며 살 때 인생이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미리 다 알고 있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리 재미있지는 않거든요.”

조치연은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순간적으로 멍하게 영훈을 바라보았다.

“재미없다고? 공식을 알면 인생에 재미가 없어?”


“어르신은 공식을 알고 나니 재미있으십니까?”
“재미라... 그래, 재미는 병창이 점마 오기도 전에 명동 바닥을 박박 긁고 다닐 때가 재밌었지. 그때는 오감이
열려 있었다. 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안테나처럼 세상을 온전히 느꼈지. 비참하고 또 환희에 가득 차 있기도
했었어.”

그렇게 말하던 조치연은 영훈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이미 알고 있구나. 아흔을 바라보는 나보다 인생을 알고 있어. 넌 점쟁이가 아니라 승려구나.”


“...”
“됐다. 내가 승려 데리고 돈 버는 법 가르친다고 용쓰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겠나? 병창아.”
“네.”
“강명저축은행을 내가 왜 파는 줄 아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보니 특별한 문제도 없는 것 같고...”
“너 줄라고 파는 게야.”
“저요?”

송 사장이 깜짝 놀란다.

“그래. 내 밑에서 똥싼 거 치운다고 그 고생하다가 홀로 나와서 멋지게 일어섰으니 하나쯤 챙겨주려고 그런다.
그래도 헐값에는 못 넘긴다. 얼마나 생각하고 왔어?”
“1,300 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50 억 더 얹어라. 애초에 팔 이유가 없는 물건, 가져갈 수 있는 옵션값이라고 생각해.”

50 억.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송 사장은 여기서 조치연의 계산법을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니까.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만 나가봐.”
“네?”
“네 볼일 끝났잖아. 난 이 어린놈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까 나가 있으라고. 왜? 더 욕심나는 게 있어?”
“하하... 오랜만에 와서 이렇게 나가는 게...”
“넌 그만 됐다. 더 가지면 탈 난다.”
“알겠습니다.”

송병창 사장은 아쉬움이 역력했지만 더는 자리에서 뭉개지 못하고 영훈에게 살짝 윙크하고는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다 나오라는 뜻이다.
송 사장이 나가고 나서 조치연이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왜 저 놈에게 저축은행을 넘겼는지 알겠나?”


“...”

고민하는 영훈을 보고 그가 웃었다.

“모르는 척 의뭉 떨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이 나이 먹고 다른 곳에 떠벌리겠나?”


“자식같이 생각하셨던 게 아닙니까?”

조치연의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저놈한테 몹쓸 짓을 했다. 저놈이 우리 희주 데려간다고 하길래 흠씬 패서 치도곤을 내줬다. 다시는 그런


생각 안 한다 하길래 그래도 곁에 두고 일을 가르쳤는데, 그게 마음에 한이 됐는지 얼마 못 버티고 나갔다.”
“송 사장님 집안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그래. 집안이 마음에 안 들었다. 온갖 재벌들이 내 돈 탐낸다고 달려드는데 다 쓰러져서 일어설 기미도 없는
정치인 가문에 뭐하러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넘겨준단 말이야? 그런데 남들 다 선망해 마지않던 재벌가에 보낸
딸이 죽어서 돌아왔다. 그것도 맞아서 죽었단다.”

회한이 가득한 그의 눈에는 눈물도 메마른 것 같았다.

“그래서 후회하고 계시는군요.”


“후회한다고?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고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거짓말 같은데요?”
“아니, 거짓이 아니다. 애초부터 잘못된 인생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길을 갔었던 거야.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그 지독한 쓴맛만큼 단맛도 맛보았으니까.”
“그런데요?”
“오래전에 점쟁이 하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른 점쟁이들은 하나같이 내 삶에 이런저런 참견을 하려고 들었어.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 되고... 난 부처도 하나님도 믿지 않았지만 지랄 맞게도 점쟁이 말을 들었다. 그
놈들이 꼭 안 믿으면 큰일 날 것처럼 협박을 해대니 부적도 꼬박꼬
박 사고 그랬지. 그런데 그 점쟁이는 나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럼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되돌릴 수 없다고 했어. 그 자비 없는 점쟁이는 내가 돈을 버는 만큼
업이 쌓여 자식들에게 간다고 했지. 그리고 그렇게 됐다. 맞아 죽어 돌아온 딸의 시신이 잊히지 않아. 아픔이
사그라들지 않고 한이 쌓였다. 이제 난 죽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그리고 하늘은 날 버리지 않았음이야. 병창이 녀석에게 죽기 전에 하나 주고 가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널 데리고 와줬으니 희주가 하늘에서 날 보고 있음이다.”
“제가요? 아직도 절 점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눈빛이 점쟁이 눈빛이라고 그랬지? 네 눈빛이 딱 그때 그 점쟁이를 닮았거든.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점쟁이였다. 이름은 모르고 다들 그녀를 연화신녀라고 불렀지.”

순간 영훈은 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조치연은 눈빛이 흔들리는 영훈을 보고 말했다.
“하나 남은 아들 녀석이 이제 손주를 얻었다. 하지만 난 복수를 하고 싶다. 내 업이 손주에게 갈 건지 그게
궁금하다. 넌 대답을 알고 있지?”

< 돈의 기억(2) > 끝

< 돈의 기억(3) >

이글거리는 눈빛이 바로 이런 걸까?


빼빼 마른 팔다리와 자글거리는 주름을 보면 걸어다닐 힘도 부칠 것 같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영훈조차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활활 타올랐다.
죽기 전 마지막 혼을 불태운다는 회광반조가 이러지 않을까 싶었다.

“따님의 죽음이 영감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잘못이 맞다. 내가 죽인 게야.”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죽였어! 내 욕심이 희주를 죽게 한 게야! 그러니 알아야 겠다! 내 업이... 내 복수가 손자 인생에
악업으로 돌아올 것인지... 그걸 알아야겠다.”

핏발이 서는 조치연을 보며 영훈은 일단 그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다가 복수고 자시고 이대로 쓰러지면 못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나이었으니까.

“일단 알겠으니 진정하세요.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안 쓰러진다. 아니, 못 쓰러진다. 몇 번이나 쓰러질 뻔했지만, 우리 희주 생각만 하면 꼼짝 못 하던 팔다리가
움직였다.”
“후... 그럼 연화신녀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연화신녀와 무슨 관계냐?”
“영감님이 아실 것 없습니다.”

조금은 매정하다 싶을 영훈의 말이었지만 조치연은 가만히 영훈을 보다 말했다.

“아주 용한 점쟁이었다. 점을 많이 보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 성정이


대단했지만 재벌이고 정치하는 인간들이고 연화신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요.”
“그녀는 돈을 많이 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적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 아, 돈은 항상 같이 다니는
남자가 더 챙기려고 했다. 물론 난 그 남자가 원하는 만큼 돈을 주었고. 성정이 대단하다는 건 괴팍하다는 것과
다르다. 그녀는 점쟁이인데도 희한하게 항상 존댓말을 했는데 그렇
다고 유순한 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인데도 난 그녀에게 내 속을 다 보여주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네가 처음 들어오면서 날 바라봤을 때 그 눈빛이 그랬다.”
“그렇군요. 그땐 젊었나요?”
“연화신녀가?”
“네.”
“그랬다. 아마 마흔은 넘지 않았을 때였을 게다. 그녀는 날 한번 보고는 그동안 쌓은 재산 절반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채업을 딱 끊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점쟁이들이 하나같이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녀만이 날 살려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해준 거였지. 그리고 난 그 말을 무시했다.”
“그게 영감님에게 한이 됐군요.”
“그래. 그 이야기가 황당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어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 들었어야 했다.”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쉽지 않아도 했어야 했어.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거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 남들이 어려워 하는 일을 해내야
남들이 쉽게 얻지 못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거다. 연화신녀의 말을 행하는 건 어려웠겠지만 만약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희주를 살릴 수 있었을 테지. 희주를 살릴 수 있다면 이까
짓 재산 절반 뭐가 아까울까? 난 연화신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쪽에 베팅했고 그 베팅에 내 세상 절반을 잃었다.”

이토록 처절한 후회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손주 때문에 복수하지 않은 겁니까?”


“아니, 내 욕심 때문에 복수하지 못했다. 복수를 하려면 내가 가진 장부를 넘거야 하는데 그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근간이자 재산이다. 내가 가진 재산을 모두 던져야 복수할 수 있었어. 그런데 그 재산이 뭐라고
지금까지 장부를 잡고 끝내 던지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진 건가요?”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니 희주가 눈에 밟혀서 죽을 수가 없다. 그 아이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내가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런데 마음을 다잡고 검찰에 장부를 가지고 가던 날 새아기가 손주를 가졌다는 연락을
해왔다. 희주가 죽고 계속 내 가슴을 옥죄어 왔던 연화신녀
의 말이 다시 날 붙잡았다”

영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 복수라는게 자신이 생각한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부만 있으면 복수할 수 있는 게 맞는 겁니까?”


“흥! 난 검찰 따위는 믿지 않는다. 장부는 그 새끼들을 검찰로 불러 들이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그 악마같은
놈들은 지 자식새끼가 밖에서 죽는 걸 뉴스로 보게 될 게다.”

영훈은 그제야 조치연이 왜 업을 두려워 하는지 깨달았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시는군요?”


“내 아이가 죽었다.”
“어르신!”
“내가 죽어 희주가 돌아올 수 있다면 수백 번도 더 죽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수백 번을 더 죽어도 희주는
돌아오지 않아. 난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악마 같은 새끼들도 용서할 수 없다. 그 년놈들이 내
딸을 때려 죽였어! 그것도 자식새끼들이 엄마를 때려 죽였다! 이게 사
람새끼들이냐!”
“...”

이번에는 영훈도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패륜인지...
“그러니 한 마디만 해주면 된다. 내가 모든 걸 다 안고 갈 테니 아이야, 너는 한 마디만 해주면 된다.”

영훈은 조치연의 처절하고 한 맺힌 부탁에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였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어르신의 뜻을 알았으니 미안하게도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놈이!”

버럭 화를 내려는 그에게 영훈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대신 복수할 수 있게 해주시면 사주를 봐 드리겠습니다.”


“뭐라?”
“자고로 한 번 부자로 살다가 가난을 겪게 되면 그 고통이 무엇보다 큰 셈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어르신
자손에게 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처음부터 업이라는 걸 믿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곧 손주에게 이 업이 간다는 말 아니냐?”
“사람의 운명이 어디 인과응보만으로 흘러가덥니까?”
“고얀 놈... 난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러니 제게 일을 맡기세요. 자신의 이익만 아는 부자들에게 무엇보다 큰 고통은 그 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손주의 운명을 알고자 한다면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

조치연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영훈은 다시 한번 대단한 사람임을 느꼈다.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극에 달했기에 저 욕심 많은 영감이 자신의 모든 걸 던지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눈물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슬품조차 눌러버린 것이리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눈을 뜬 그가 말했다.

“우리 희주가 고등학교 때 친구를 하나 데리고 왔었다. 난 한눈에 그 아이가 가난하고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았지.
그리고 그 아이가 희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았다. 내가 그랬거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 친구를 사귈
때도 부자인 친구만 골라서 사귀려 했었다. 그래서 단박에
알아보았지. 나와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희주에게 뭐라고 했을 것 같으냐?”
“그 친구와 만나지 말라고 하셨겠죠.”
“맞았다. 그랬지. 그때 처음으로 희주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고 말이야. 난 거머리
같은 친구를 내 딸 옆에 붙여둘 수 없었어.”
“혹시 그 친구가 남자였습니까?”
“여자였다.”
“성격 유별나신 건 알고 있지만 생각보다 더 유별나시네요.”
“흐흐... 맞아. 유별난 걸 넘어서 괴팍하고 고약했지. 결국 강짜를 부려서 그 친구를 못 만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희주가 애비를 원망하더구나. 괜찮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본래 슬퍼졌다가도 또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잊어버린다고 생각했거든. 그때부터 잘못됐던 게야.”
“...”
“희주가 처음으로 손주를 낳아서 나에게 보여주러 왔을 때 아를 안고 그렇게 좋아했었다. 세상 그리 예쁠 수가
없다면서... 그때가 imf 때였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힘들어 죽겠다고 나자빠지는데 지만 이러 좋아도 되는
거냐고 그리 말했다. 그런데 그리 좋아하던 아들이 커서 지 어미를
때려 죽였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세상 사람들 돈 없다고 하찮게 보고 비웃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제일 등신이고 내가 제일 천치였다.”
“...”
“너는 답을 알고 있는 인생이 재미 없다고 했지?”
“네.”
“이래도 재미 없어 보이나?”
“그래서 인생은 고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저... 스님 한 명 앉아 있네. 절간에서 자랐나?”
“예.”
“허... 그래? 진짜로 절간에서 자랐어?”
“서른 넘어서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네 인생도 평탄하지는 않구나. 흐음... 내 대신 복수해줄 수 있다고? 누굴 상대해야 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누가 됐든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
“재산이 많든 적든 타고난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나 역시 그랬지. 한 가지만 더 물어보세. 내가 죽기 전에 그걸 볼 수 있을까?”

영훈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주를 불러보세요.”
“내 사주?”
“네.”

조치연은 기대에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사주를 나열했다.


영훈은 머릿속으로 그의 사주를 단번에 계산해내고는 말했다.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알겠어?”
“네.”

그는 입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대단한 인내력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겠다고 하면 단박에 물어볼 것인데 그는 가까스로 그걸 참아내고 있었다.
영훈이 물었다.

“왜 안 물어보십니까?”
“내 하나 남은 염원을 너에게 바라고 있는데 언제 죽는 걸 알면 뭐해? 내가 눈감기 전에 그것들의 절망에 가득찬
눈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한다.”
“다행입니다.”
“자, 이제 원하는 걸 말해봐.”
“없습니다.”
“없다고? 왜? 내 대신 복수해준다며? 죽음을 앞둔 늙은이 소원 하나 들어준 셈 치려고?”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고도 참고 볼 수만은 없어서 그럽니다. 아마 연화신녀도 그걸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연화신녀는... 아니다.”

조치연은 이번에도 궁금한 걸 물어보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쓸데없는 말을 입에 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감님은 확실히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으시는군요.”
“어린 놈에게 칭찬 들으면 좋아할 것 같으냐? 됐다. 그것보다 대가가 필요치 않다고 하니 말해두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거무튀튀하고 두꺼운 책자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그걸 영훈에게 툭 던지듯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정·재계에 내 손이 안 닿은 놈 많지 않다. 여기에 있는 녀석은 네가 잘 관리하기에 따라서 네 수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야.”
“이건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없어? 이것도 없이 잡겠다고?”
“이걸 가지고 있으면 영감님 말씀대로 수많은 사람의 약점을 잡게 되겠죠. 그래봐야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엄청난 힘이 될 거라면 영감님이 왜 고작 이걸로는 복수할 수 없다고 했겠습니까? 절
시험하려고는 하지 마세요.”

조치연은 허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넌 정말 내 머리 위에 있구나. 고작 서른 넘은 어린놈이 내 머리 위에 있어. 그러니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다행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 알콩달콩 사는 재미는 얻었습니다. 그거 하나 보고 살고 있습니다.”
“잘 지켜라. 내꼴 나기 쉽상인즉. 뭐... 어련이 알아서 할까만...”
“장부는 영감님이 때 되면 알아서 검찰에 넘겨주시든지 하세요.”
“정말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제가 꼭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내가 이 장부로 놈들을 잡을 수 없다는 건 장부의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내가 유일하게 손을 대지 못하는
곳이 검찰이기 때문이다. 검찰이라는 족속들은 조금 잘 배운 머슴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서 나 같은 사채업자에게는 머리를 숙이지 않거든. 주인을 가
리는 종놈이라 할 수 있지.”
“딱히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나중에 제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다면 따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라고... 알았다. 내 정리해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복사해서
넘겨주마.”
“알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영훈을 보고 조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손주 사주는 보고 가야지.”
“일이 끝나면 봐드리겠습니다.”
“내가 거짓말하고 손이라도 쓸까봐 그러냐?”
“영감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 귀신이구나.”
“아, 깜빡할 뻔했는데 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가서도 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비밀무기는 혼자 알고 있어야 힘이 되지. 당연한 말이다.”
“그럼...”

영훈이 인사하고 가려고 할 때 조치연이 입을 열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전부 네 것이다. 다 가지거라.”

영훈은 열망에 가득찬 조치연을 뒤로 하고 집을 나왔다.


< 돈의 기억(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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