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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보는 회사원1-182
운명을 보는 회사원1-182
1996 년 경남 통영.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끼끼끽~
“아저씨는 누구야?”
“난 스님이란다.”
“스님이 뭔데?”
“부처를 따르는 사람이지.”
“부처는 뭐야?”
“허허...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단다.”
“에이~ 엉터리.”
“맞습니까?”
“그걸 어찌 아싰는데예?”
“아이의 사주를 보니 초년에 부모가 두 번 바뀔 팔자였습니다. 그런데 보살님의 관상을 보니 중년이 어렵긴 해도
자식을 잃을 운은 없다고 봤습니다.”
스님은 안타까워했다.
영순 엄마는 크게 놀랐다.
“영훈이의 팔자는 소용돌이와 같습니다. 그릇이 너무 커 일반 사람은 감당할 수 없어요. 건강이든 재물이든
아니면 재주든지 간에 다 가지려 할 겁니다. 또한 보살님께서 지금은 조금 어렵다고 하나 콧망울이 두텁고 얼굴
빛이 곱고 윤택하니 재복이 없을 팔자는 아닙니다. 아이를 제게 주시고 나면 곧 재운이 들어올 겁니다.”
그게 내 나이 7 살 때였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주지 스님은 평온한 얼굴의 영훈을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잘 지킬 수 있겠니?”
“네.”
“이게 뭡니까?”
“윤 보살 알지?”
윤 보살이라면 매년 절에 가장 많은 시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타고나기를 지역 유지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사는 그녀였지만 항상 자식들 문제로 애를 태우며 절을 자주
찾았다.
“그럼요. 알죠.”
“윤 보살이 소개해준 사람이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데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연락처를 받아놨다.”
“네?”
더군다나 서울이란다.
“옷도 사 입어라.”
“설마 이 옷으로 면접보러 가겠습니까? 저 애 아닙니다.”
“허허... 맞구나. 이제 아이가 아닌 것을... 이제 가라.”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좁은 계단을 타고 뚜벅뚜벅 올라가니 4 층에는 딱 하나의 회사만이 영훈을 반기고
있었다.
[명일금융]
아무리 세상을 처음 경험하는 영훈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껏 TV 와 인터넷으로 경험한 지식이 있으니 눈앞의 회사가
무슨 회사일지 딱 봐도 견적이 나왔다.
“대부업체라... 윤 보살이 어떤 회사를 운영하는 지는 잘 모르셨나 보구나. 그런데 참으로 운명이란 게 얄궂구나.
날 시험하기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있을까.”
“그러니까 스님이시라구요?”
이 자그마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람은 쉰은 넘은 것처럼 보였는데 관상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그의 두툼한 뱃살과
기름진 얼굴, 그리고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 돈걱정 없이 살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전혀 자랑할게 아닌 내용을 가지고 뭐라도 되는양 뻔뻔스럽게 말하는걸 보면서 송 사장은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난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군요.”
“사실 우리가 정말 필요한 직원은 채권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사무직이 아니라 부실한 채권으로 원금을 받아올 수
있는 추심 직원이 필요합니다. 요즘 사무직 직원 구하는건 월급 150 만 줘도 지원자가 넘쳐나거든요.”
“그런가요?”
“그럼요. 대졸은 기본이고 워드 자격증에 심지어 토익 점수 커트라인까지 올려도 다들 못해서 안달인데 추심직
직원은 다들 안 하려고 해요. 참 이상하죠?”
“왜 이상한 겁니까?”
“영업직원 회수한 원금의 일정 부분을 보너스로 주거든요. 남들 150 만원 가지고 갈 때 능력이 좋은 추심 사원은
월 천만 원, 그 이상도 넘게 가지고 간단 말이에요.”
“와...”
그녀는 불쾌한 듯 코를 막으며 식당을 나갔고 주인 아주머니는 미안한 얼굴로 신경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영훈은 그녀의 눈빛에게서 경멸의 기운을 읽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받는 시선이 이런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 생각지도 못한 첫 직장(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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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는 피할 수 없다(1)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한 영훈은 작은 사무실에서 터줏대감처럼 껌을 딱딱 씹으며 자신을 반기는 경리 여직원에게
가장 먼저 인사했다.
바로 대뜸 반말을 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보니까 나보다 1 살 어리던데 말 놔도 되지?”
“그럼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맞습니다. 촌이죠.”
“그런데 어째 사투리가 하나도 없네?”
그는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마티즈에 몸을 구겨 넣으며 영훈에게 조수석에 타라고 손짓하곤 말을 이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딱 하나야. 원금을 받아내는 것. 이자도 받아낼 수 있으면 땡큐지. 가능하다면
말이야.”
“그렇군요.”
“돈 빌려준 사람은 애가 타는데 빌린 사람은 뻔뻔하게 안 갚겠다는 게 우리가 만날 사람들이야.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잘 생각해야 돼. 우리가 무슨 쌍팔년도 사채업자인 줄 알면 안 된다고. 신입 중에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우리가 무슨 악의 근원이라고 착각하는 것들 말이야. 넌 아니지?”
“아닙니다.”
“말은 다들 그렇게 하더라. 여기 계약서 있으니까 가는 동안 잘 살펴봐.”
“서일저축은행? TV 에서 본 것 같은데.”
“맞아. 서민들을 대상으로 대출 많이 나가는 데야. 소득 대비 비교적 승인금액이 커서 많이들 거기서 빌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서일저축은행 고객들이고.”
“아...”
“이번에 가서 또 돈 없다고 하면 법원에서 강제집행 명령 받을 예정이다. 그런데 모든 채권자들한테 전부 법의
힘을 빌리려고 하면 또 돈이 들어요. 채권자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니면 또 채권자들끼리 얼마 없는 돈을 가지고
내가 더 가지겠다고 경합을 벌여야 하니까 이게 또 골치 아프거든. 가장 최선은 뭐겠어?”
“서로 좋게좋게 돈을 갚는 거?”
“그렇지. 우리 일은 그거야. 추심팀이 가서 최대한 상환을 유도하는 거고 그게 안되면 법조치를 하는거지.
그런데 그렇다고 계속 오냐오냐 기다려주면 어떻게 되겠어? 다른 채권자들이 다 달려들어서 뼛조각 하나 안
남겠지?”
“그렇겠네요.”
“정보력이 핵심이야. 눈치도 빨라야겠지. 결국 이거야 이거.”
“누구세요?”
아주머니는 양태평이 찬바람을 뿌리며 일어서자 옆에 가만히 서있던 영훈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하지만 영훈이라고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신 갚아준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냥 갈 수밖에.
그런데 이때 또 하나의 손이 영훈의 팔을 붙잡았다.
“도와주세요.”
이제 초등학교에나 들어갔을까?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엄마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초등학교만 다니고 절에서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했으니 군대는 자연스럽게 면제가 되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영훈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명동에서 홀로 이곳까지 오면서 곰곰히 이주희와 그녀의 딸인 조은지의 사주를 계산해보았다.
이주희의 사주는 기구한 인생 바로 그것이었다.
사주에 돈도 없고 학업도 인연이 없으며 남편복도 없는 지지리 복도 없는 팔자라고 해야 할까?
처음 이주희를 봤을 때 그녀의 상도 그리 복이 있어 보이는 상이 아니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마가 좁고 끝이 뾰족해 초년운도 따르지 않고 재복도 없으며 눈썹도 희미해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어
보였다.
젊었을적 미인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을지 몰라도 가난하게 사는 게 이해가 되는 상이었고 사주를 봐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조은지의 사주를 보니 기가 막혔다.
관상에서 본 것처럼 초년의 사주 역시 무척 좋았던거다.
보통 유년기의 사주는 잘 보지 않는다.
개인의 운은 가정의 운에 영향받고 가정의 운은 국운에 영향받는다.
개인이 아무리 잘나봤자 전쟁이 나거나 imf 처럼 국가에 큰 위기가 오면 휘청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렇기에 유년기의 어린아이는 부모를 따라가기 때문에 볼 필요가 없는 것인데...
하나만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사주 뿐만 아니라 관상까지 같으니 뭔가 이상한 건 분명했다.
그래서 영훈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주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사정을 듣긴 했었다.
평범한 가정인 이집이 왜 어려운 사정이 됐는지.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으니 계속 빚을 지다가 이리된 거였다.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지 3 년도 넘었다던가?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몰라요. 저도 몰라요.”
“모른다구요? 아이 아버지와 연락이 닿지 않는 겁니까?”
“몰라요.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만나면 애를 지우라고 할 거라서...”
“흐음...”
“이래도 되는 건지...”
“싫다면 하지 마세요. 저도 억지로 권했다가 굳이 일 만들기는 싫으니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보는건데 경리 여직원은 그게 기분이 나빠서 비꼬는 것이라고 느꼈는지 인상을 팍
일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사장실의 문이 열리며 송병창이 영훈에게 손을 까딱였다.
“일단 들어와.”
미친놈을 보는 표정.
영훈도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네. 역시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지금 키우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현재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 아빠를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게 되겠어?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렇게 주변 사람 찾아내서 돈 달라고 하는 세상이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아이 아빠한테 억지로 돈을 받아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예 돈 달라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럼?”
“그저 보려는 겁니다. 아이 아빠가 어떻게 반응할지. 여유가 있다면 도와주려 하겠고, 없다면 모른척 하겠죠.”
“잘 맞는데 왜 그만두게?”
“때로는 잘 맞는 일도 그만 두어야 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일을 정리하고 송 사장이 영훈에게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사람을 찾아봤을 때 딱 이틀이 지나
지은 아빠의 종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지은 아빠의 정체는 놀라웠다.
“백순데?”
“그런가요?”
“어. 그런데 이 인간 아버지가 강남에 건물을 세 개나 가지고 있다. 이 인간 앞으로도 하나가 올라가 있네.”
맞는 말이다.
“생각해보니 보험영업이 저에게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미래에 다가올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니, 정말 뜻깊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보험업을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대단한 걸 하려는 것처럼 퇴사한다고 해놓고 기껏 한다는 게
보험영업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대답이었다.
하지만 막상 반박하려니 할 말이 궁했다.
따지고 보면 채권추심이 사람들에게 더 험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 뭐라고 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그놈의 발걸음이 어찌나 경쾌한지 10 년 묵은 숙변이라도 해결한 놈 같았다.
“그렇게 희한해?”
“그렇다니까. 난 지금까지 세상 저렇게 쿨한 놈을 본적이 없어. 중이라서 그런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없지?
내가 이번에 회수한 돈에서 10%를 준다고 하는데도 극구 거부하더라고. 많이 배웠으니까 자신이 받을 보너스는
앞으로 돈을 갚지 못할 사람들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래나? 이건 좀 미친놈 같지?”
“희한하긴 하다. 그래서 무슨 일 할거래?”
“이것도 걸작이야.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어디 이력서를 내볼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또 물었지.
절에서 공부하다가 서른 넘어서 나오셨는데 뽑아줄데가 있을 것 같냐고. 그랬더니 글쎄...”
“뭐라는데?”
“보험 영업을 해보겠다는 거야.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어디 보험 영업이 쉬워? 그런데 짜증나는
게 그놈은 되게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내가 찍었는데 뭘 그런걸 걱정하고 그래. 내가 면접에서 보고 결정하면 되지. 서류야, 내 말 한마디면 그냥
통과니까.”
“진짜 그렇게 하게?”
“왜? 나 주기 아까워?”
“그런건 아닌데...”
“너 진짜 아까워 하는구나?”
“솔직히 아깝다기보다 걘 영업을 해야 하는 애야. 그 성격에 잘못하면 괜히 오해나 받고 아주 힘들어질걸?”
“기껏해야 한 달 봐놓고 그렇게 챙기는 거야?”
“챙기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딱 봤을 때 그렇다는거지. 누나는 몰라도 아래 직원들은 걔 컨트롤 못해. 우리 양
과장 알지? 걔도 이번 사건 다음에 괜히 어려워서 일부러 피해 다녔다니까? 걔가 은근히 사람을 쪽팔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윗사람이 대범하지 못하면 갈구고 못살게 굴걸?”
“됐고, 일단 이야기나 해봐. 우리도 보험회사 있으니까 일단 보험회사에 이력서 넣어 보라고 해. 내가 면접 봐서
괜찮다 싶으면 물산에서 써보고 아닌것 같으면 생명사로 보내버리게.”
“그러네. 현진생명이 있었지.”
“네? 현진생명이요?”
영훈은 자기가 그만둔 회사의 사장이 보험회사를 소개시켜준다고 하니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대부업체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달동안 있으면서 그래도 나름 적응해서 인간관계를 잘 쌓은 게 돌아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현진물산 인사팀.
작년에 공채로 입사한 막내인 김학주 사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저 신경질적인 오 대리는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냐고 타박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김학주 사원은 여자친구와 싸워서 기분이 팍 가라앉은 오 대리에게
어정쩡한 자세로 다가갔다.
“저기...”
“왜?”
“그... 말씀하셨던 사람이 현진생명에 이력서를 내서 우리쪽으로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요.”
“누구?”
“그 최영훈이라고 하는...”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오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학주 사원의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문제의 이력서를 보고 난 뒤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미친놈인가 이거? 미친거 아니야? 아니, 이 새끼가 지금 우리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과장님!”
영훈은 자신 때문에 현진물산 인사과가 뒤집어진 줄도 모르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웹툰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걱정 하나 없이 말이다.
“우리를? 왜?”
“아무리 사장님이 대권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양철기 전무님의 힘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오 대리는 민 과장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어투인 ‘그건 그렇지’에 욱하고 올라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사장님께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이건 사장님의 말을 거역하려는 게 아니라 다시 체크하는 거야. 문제될 게
없다고.”
“뭔데?”
“어머. 하하하하!”
너무 황당해서일까?
송은채 사장은 이력서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민 과장은 따라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가 한참 뒤 송 사장이 웃음을 그치고 나서야
물었다.
“이 친구가 맞는 겁니까?”
“응, 맞아. 이 친구가 맞을 거야. 주소도 경남 고성 맞네.”
“그거 좋네.”
의아했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전에 동대문에서 샀던 정장을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수선할 뿐이었다.
그렇게 서류합격 문자가 온지 사흘 뒤 종로구 을지로에 위치한 현진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와...”
이렇게 큰 건물이라니.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빌딩을 앞에 두고 보니 산 속 절에서 평생 살았던 삶이 속세와 너무 달랐다는 자각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본사 건물에 들어서니 TV 에서만 봤던 보안요원들과 아름다운 안내원이 눈에 들어왔다.
영훈은 당당하게 걸어가 말했다.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면접이요? 지금요?”
“네. 5 시까지 오라고 했는데요.”
“뭔가 착오가 있지 않으실까요? 면접은 오전 9 시부터 시작이었는데요. 그리고 이곳이 아니라 저쪽 신관으로...”
그렇게 그 남자를 따라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잠자코 따라갔다.
건물 5 층에 내려 어딘가로 깊숙이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이 층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영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의 여성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뭔가 예상했던 그림과 달랐지만 일단 면접에 들어가면 어찌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을 하려 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각종 자격증과 어학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진물산이 뭘 하는 회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대기업에 취업하려면 상당한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람을 잘 봅니다.”
“사람을 잘 본다?”
“네. 사람을 많이 잘 보는 편입니다.”
그녀의 관상을 보니 대략 그녀의 성격이 가늠이 되었고 그 이야기를 해주면 그녀가 더 신뢰할 거라는 건 알지만
말하지 않았다.
관상으로 사람을 잘 본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그저 관상쟁이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못 믿으시겠죠?”
“솔직히 그래요.”
“당연합니다.”
“끝인가요?”
“네. 제가 남들보다 유일하게 나은 게 있다면 사람을 잘 본다는 정도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신다면
저보다 다른 직원을 채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영훈은 현진물산 입사가 욕심이 나긴 했지만 그보다 부담스러움이 컸기에 그냥 보험회사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송은채 사장은 영훈이 저 정도로 자신만만하니 이제는 호기심이 돌기 시작했다.
“다 끝나신 건가요?”
이것 보라지.
금방 함박웃음으로 좋아하더니 다시 전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감히 사장에서 부탁까지 한다.
이쯤되면 궁금해서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뭐죠?”
“제가 한 달 인턴이라는 걸 직원들이 알면 금방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가 능력을 발휘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회사를 나갈 때까지는 비밀을 유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송 사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는 영훈에게 잘해보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터치하고 면접장을 먼저 나가려고 할 때
다시 영훈이 물었다.
“그런데 저...”
“네? 또 뭐죠?”
“저를 뽑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데.”
“이 회사가 지금까지 뽑았던 인재들 중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아직 회사는 정체되어 있어요. 그래서 한
명 쯤은 사람을 잘 보는 사람을 뽑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회사는 변화를 필요로 해요. 이해됐죠?”
“네.”
그게 뭐 문제 있냐는 태도.
면박을 주기 위해 질문했는데 오히려 더 세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와서인지 순간 오재준 대리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훈은 그런 오 대리에게 재차 물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봅시다.”
“네. 수고하세요.”
“야! 어땠어?”
“사장님이 합격시켰습니다.”
“진짜? 이야~ 도대체 뭐지? 무슨 끈이 있는 거야? 설마...”
“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그 ‘설마’는 아닙니다. 사장님하고 생긴게 완전히 달라요.”
“그래? 그럼 뭐지?”
“일단 인턴으로 채용하고 보시겠다고 하니까 완전히 금수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금수저면 경남 고성 절에 틀어박혀 있을 리가 없지. 씨발, 존나게 궁금하네.”
“이거 인턴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써야 하는거 아닙니까? 애가 뭔가 무서운게 없던거 같던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일단 평소 하던대로 해. 스님이었는데 뭐 눈에 보이는게 있었겠냐? 부처님 말고는 다
공평한 중생들이지. 설마 사장님 앞에서도 부처 앞 중생을 대하는 태도로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십대 그룹이 어디야! 거기가 얼마나 큰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거기 지원하려면 대학도 엄청 좋아야 하고
영어도 엄청 잘해야 한다던데?”
“조윤희 씨!”
“김은중 씨!”
“강경훈 씨!”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불려지고 가장 마지막 영훈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불려졌다.
“최영훈 씨!”
“네!”
“최영훈 씨?”
“아, 네. 안녕하세요.”
“잠깐 저 좀 볼까요?”
그렇게 뒤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 지도 모르고 영훈은 오 대리에게서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사장님께 따로 면접을 봐서 들어왔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을 때 영훈씨는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신에 대해 적당히 부풀릴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혹시 이번 오티에 가서 동기들이 예전에 어느 대학을 나왔고
무슨 공부를 했냐고 물을 때 산속에서 철학 공부했다고 말할 건 아니시죠?”
‘주의해서 봐야겠어’
“최영훈 씨!”
“네.”
짝짝짝!
조원들은 심리학과가 합격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잡스런 질문을 해댔는데 예전에 봤었던 심리학책
내용을 적당히 읊어가며 상황을 모면했다.
이후 각 조들은 자기 조의 이름과 구호 따위를 만드는 시간을 보냈다.
정말 이 따위 것들을 왜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영훈은 이런 시간이 회사원이 되기 위한 절차라고 생각하며
나름 충실히 임했다.
자기 소개시간에 가장 인상적인 친구는 92 년생 남자인 박찬기라는 사원으로 고대 경영학과 출신에 영어나 각종
스펙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런 박찬기도 조원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할 때 겸손해하며 다른 조의 조원을 가리키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게 끝.
그리고 다음으로 인상깊은 친구가 바로 막내인 이윤지였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연신 웃으며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그녀는 영훈에게도 서슴없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친해지려 했다.
성인 여자라고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찾아오는 나이 지긋한 불자들밖에 없었기에 영훈으로서는 확 부담스럽고
자신도 모르게 경직됨을 느꼈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남중‧남고를 나와 처음 여자와 대화해 본 대학생 마냥 설레는 것이 아무래도 그녀를 가까이
하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 커피 안 드세요?”
이건 뭔 상황인지...
“전 어떤 사람 같아요?”
“엄마는 또 누굽니까?”
“이 회사 사장되시는 분이 우리 엄마예요.”
“자신감이 과하시네요.”
“특정 부분에서는 그런 편입니다.”
“그럼 증명해보세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왜 용한 점쟁이들이 그렇다면서요? 무슨 고민이 있는지 척척
알아맞히는 그런거. 당신도 그런가요?”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해야 할 걸요? 오리엔테이션을 무사하게 끝마치고 우리회사 직원이 되고 싶다면요.”
어찌해야 할까?
그냥 안 해주겠다고 하는 순간 돌팔이, 사기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여기서 신입 오리엔테이션을 못 받겠다고 뛰쳐 나가면 그건 그것대로 레전드다.
한숨을 푹 쉰 영훈이 입을 열었다.
“훗, 태어난 시각을 어떻게 기억해요. 아, 엄마는 알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난 몰라요. 그런데 웃기네. 사람 잘
본다면서요? 만나는 사람마다 태어난 시각을 물어볼 거예요?”
“후... 그럼 됐고, 우리 악수 한번 해봅시다.”
“네?”
“네, 뭐...”
그나마 다행이다.
회사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없다면 회사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거다.
“우선 재복과 인복을 타고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 한 번 없었을 테고 총명해서 뭘 배우든 잘했을 겁니다.
음악을 해도 잘했을 거고 공부를 해도 잘했을 겁니다. 도화살이 적당하니 미인으로 타고나 어딜가나 주목받고
인기도 많았겠죠. 능력이 출중해 사업을 하면 명예를 얻고 직장인이라면 승진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부러워할 사주입니다.”
“내가 누구 딸인지 아니 그 정도는 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외모야 지금 보고 있는대로고.”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안 좋은 이야기 해드려도 됩니까?”
“계속 해봐요.”
“타고 나기를 오만하게 타고나서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인물은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람을 가려
사귑니다.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공과 사의 구별이 심해 때로는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
자기가 정한 기준이 철저해 그 틀을 깨는 사람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던 연희는 영훈이 말을 이어가지 않자 재촉했다.
“그리고요?”
“아닙니다. 대략적으로 종합하면 당신은 부귀를 타고났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남들을 힘들게 하는 팔자를 타고 났습니다. 맞습니까?”
“아까 하다 못한 말 계속 해봐요.”
“별거 아닙니다. 사주풀이는 다 끝났습니다.”
“다 못했잖아요. 계속 해봐요.”
“편관이 과다하니 본인보다 못하면 무시하기 일쑤라 친구, 선후배, 형제자매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좋은
인연을 만나기 어렵고 특히 결혼하더라도 그 생활을 지속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리고요?”
“비견이 공망이라 서른 이전에 부모 중 한 명을 잃을 수가 있고 월주도 공망이니 초년에 형제를 잃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네?”
“우리 아빠 아픈 거 세상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내 동생 어렸을 때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구요.”
“아버지가 편찮으시군요.”
“이봐요!”
“좋아요. 인정할게요. 그 사주라는 거 솔직히 지금도 믿지 않아요. 어디서 우리 집안 사정을 알아내서 아는척
하려는 것 같지만 그걸 알아낸 것 역시 본인의 실력이겠죠. 그 실력 인정할게요.”
오후 시간은 회사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예의와 신입사원으로서 적응을 잘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
선배가 나와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영훈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로 집중해서 들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을 안고 살았던 만큼 이런 교육이 그로서는 새롭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훈을 남몰래 주시하는 두 인물이 있었다.
“아저씨,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수업 내내 인상을 쓰며 괴로워하는 걸 본 이윤지가 살갑게 다가온 것이다.
물론 저 아저씨라는 단어는 조금 어감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이차이가 너무 나서 차마 누구누구 씨라고 하기
미안하다는 말에 그럼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아주 그냥 좋아 죽던데요?”
“뭐가 말입니까?”
“회사에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연애하러 왔나봐요?”
“아~ 윤지 씨요?”
“저기 저 인간 어때요?”
“왜요?”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상에 대한 설명도 어제 한 이야기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더 알려 하지
마세요.”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내 나름대로 정보력을 동원한 거예요.”
“그 정보력을 어떻게 동원했길래 태어난 시각까지 알아낸 겁니까? FBI 도 힘들 것 같은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어쨌든 말해봐요. 저 사람 어떻냐구요.”
“음...”
“말 돌리지 말고 끝까지 말해봐요.”
영훈은 이왕 꺼낸 이야기 끝까지 해주기로 했다.
“정확한 건 당신 아버지의 사주를 봐야 해요. 안 되면 어머니라도. 하지만 대개 당신처럼 재성이 고립된 사주를
타고 나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죠. 당신이 유학을 다녀왔던 것, 그것도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서 헤어질
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속 돈 문제와 재산 문제로 골치를 썩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다예요?”
“당신 사주를 당신이 직접 듣는 것이기 때문에 흉살에 대해 말해주었던 거지 남에 대한 흉살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은 초년에 흉살이 낀 경우고 저쪽은 말년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어째서요?”
“어째서긴요. 사주가 그러니까요. 물론 타고난 성정이 그 연유가 된다고 유추할 수 있겠네요.”
“타고난 성격?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구분이 명확해 마음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 받는다는 거요?”
“그건 사주에 나온 건데 저 사람 관상이 더 정확히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어떤 부분으로요?”
“누굽니까? 저 사람.”
“아까 내 사주를 말해주면서 돈 문제랑 재산 문제로 골치를 썩을거라고 했죠? 아무래도 내 느낌에 저 인간이 내
재산에 흠집을 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그 정도 감이면 저 대신 돗자리를 펴도 되겠는데요?”
연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영훈을 돌아보았지만 영훈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정면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도 두 분만 여기 남아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5 조 조장 맡고 있는 양준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연희야. 인사 좀 받아줘라.”
“어?”
“아시는 분이세요?”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까 보니까 연희랑 많이 친해지신 거 같던데.”
“아니요. 전혀 안 친합니다.”
“아이!”
하필 영훈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된장국을 얼굴에 뒤집어 썼다.
찝찌름하게 올라오는 된장국의 냄새...
임연희가 미안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가는 걸 양준기는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좀 미인 앞에서 친한 척 해보려다가 개쪽만 팔린 모습이었다.
영훈의 조원들은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버티는 상황.
막내인 이윤지는 수저를 쥔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고 고대 경영학과 출신이자 스펙이 빵빵한 박찬기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됐습니다.”
“그런데 아까 좀 심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걔가 속이 넓은 편은 아닌데.”
“전 당신 믿고 그런 건데요?”
“절 믿구요?”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아닙니다. 저도 온지 5 분 밖에 안 됩니다. 후우... 긴장되네요.”
“헉헉... 아직 안 늦었죠?”
“네. 저희도 계속 기다리는 중이에요.”
“후... 다행이다.”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검은색 정장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인터넷에서만 보던 섹시한 여사원
바로 그 모습이었다.
땀을 닦고 있던 장가람이 말했다.
윤지가 눈을 반짝인다.
“그 사람 기획조정실로 들어갔대요.”
“헐~ 정말요?”
“네. 임원 중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대요.”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장가람 씨, 철강 1 팀입니다.”
“이윤지 씨. IT 영업팀입니다.”
“영훈 씨도 영업 2 팀입니다.”
“네? 아, 그럼 같은 팀이...”
“엑셀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엑셀 못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른건 몰라도 엑셀은
완전히 마스터해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리고 영어 공부 열심히 하세요. 특히 무역용어 모르시면 가장 기본인 운송장 하나 작성하기 힘듭니다.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혹시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치면 나한테라도 연락을 하던지 찾아오세요. 사장님 귀에 당신이 사고 친
내용이 다이렉트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끝인가요?”
“후... 네. 끝이에요. 가보세요.”
“그런데 질문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임연희 씨는 뭡니까? 사장님 딸이라면서요? 저랑 같은 부서에 일하도록 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
“따님 분께서 직접 말씀하시던데요?”
“당신 말고 아는 사람 있나?”
“그 연희 씨 친구라는... 누구더라? 안경끼고 홀쪽하게 생긴 사람 있지 않습니까?”
“양준기? 그 친구 말고.”
“없습니다.”
“임연희가 왜 자네 앞에서 사장님 딸이라고 밝혔지?”
“건방 떨지마. 자네에 대한 평가는 임원이 하는 거야. 대신 업무에 필요한 지식이 부족한 자네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도움을 줄거야. 임연희씨 말고 그럴 수 있는 신입사원이 어디 있겠어? 다들 본인 살기도 힘들텐데.
그래서 임연희씨가 옆에서 도와주면서 주관적인 견해를 사장님에게 전달하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네. 알겠습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신입사원에게 도와달라 말하는 건 열심히 달리는 사람
발목을 잡는 것과 같으니까.
이런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사장 딸 말고 누가 있을까.
어쨌거나 결론은 주관적인 평가는 연희가, 업무적인 평가는 임원이 내린다는 말이다.
영훈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오 대리가 황당한 얼굴로 인사과 문을 가리키고는 영훈 특유의 무덤덤한 말투를
흉내냈다.
민 과장은 빡빡한 영업팀에서 과연 연희와 영훈을 데리고 어떤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낼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해줄 일이 하나 있어요,”
“벌써부터 업무지시를 내리는 겁니까?”
“맞아요.”
엄밀히 말하면 같은 신입사원 주제에 일을 준다고 하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임연희는 신입사원 이전에 사장의
딸이었다.
어쩌면 송 사장이 자신을 채용한 이유도 단순히 실적을 잘 올리라는 뜻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뭘 해주면 됩니까?”
“영업팀 윤성우 부장과 본부장인 차지열 상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세요. 추가로 알려드리면 이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지시한 거예요.”
“오~ 신입!”
고일주 과장이라는 사람은 키가 작지만 탄탄한 체격으로 조금 과장하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샘을 닮았다.
그리고 고 과장의 말에 연희와 영훈의 자리를 알려주고 전산실에 전화를 거는 노형석 대리는 반대로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연희를 보고 첫눈에 반했는지 연신 연희를 힐끔거렸다.
성격이 오만하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쁘긴 하지...
그리고 자리에 없는 사람은 이은성 사원으로 작년에 입사했으며 현재 출장을 나가 있다고 했다.
“고 과장아, 잠깐 나와봐.”
전산이 세팅되는 동안 연희와 영훈이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익히고 있을 때 영업 1 팀의 김승규 과장이 고일주
과장을 슬쩍 부른다.
김승규 과장과 고일주 과장이 복사실 안 탕비실로 들어서니 담소를 나누고 있던 직원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김승규 과장이 고일주 과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스펙은 어때?”
“빵빵해. 스펙으로는 홍보팀에 있기 아까울 수는 있는데 일단 물어봐야지. 영업을 지원해서 온건지 말이야.”
“딴건 몰라도 출근할 맛 나겠는데? 너 아침에 눈이 번쩍번쩍 떠지겠다. 이제 알람도 안 맞추는거 아니냐?”
“그럴거면 네가 데리고 갈래?”
“아니, 난 싫어. 쟤 데리고 있으면 어디 술이라도 마음껏 마시겠냐?”
“새끼, 밝히기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저 폭탄이다. 아직까지 자기소개서도 보여주지 않아.”
고일주 과장이 그렇게 김승규 과장과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영훈도 열심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침 노형석 대리가 전화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연희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왜요?”
“굉장히 잘 어울려서요. 어린 나이에도 작명 솜씨가... 깜짝 놀랐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긴 그만하고 우리팀 매출내역이나 회의자료 살펴보세요. 혹시 복사기 다룰 줄은 아세요?”
“아니요.”
“후... 이따가 점심 먹고 와서 쉬는 시간에 알려드릴게요. 아마 처음에는 복사하는 일이 주가 될 거예요.
영어를 못하니까 전화 받는 건 나중에 할 것 같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많이 들었으니까요. 아빠... 하여튼 많이 들었어요.”
“네...”
“사주에 칼이 있다고 다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본성을 잘 알고 노력한다면 검사나 경찰이 될 것이고
짐승처럼 막 산다면 살인자가 되는 거니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잘 알고 다스리려 노력하면 대범하고
카리스마 있는 기질로 바뀔 수도 있겠죠. 정해진 사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난 여기에 있을 수도 없을
겁니다.”
“당신의 정해진 사주는 무엇이었는데요?”
“비밀입니다.”
“좋은 인연은 찾는다고 막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말했듯이 본인을 변화시켜야 좋은 인연이 찾아오는 겁니다.
당신 사주의 문제는 운이 없어서 나쁜 남자를 만날 확률이 높은게 아니라 당신이 좋은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 고일주 과장이 자리로 돌아왔고 때마침 통화하러 나갔던 노형석 대리도 돌아왔다.
노 대리는 고 과장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갔다.
“과장님, 런던에서 연락이 왔는...”
“뭐해요?”
“아, 네.”
[왜 그래요? 뭐 있어요?]
[아닙니다]
[저도 좀 알죠]
[알 필요 없습니다]
[(화난 이모티콘)]
회식은 회사 근처 삼겹살집이었다.
삼겹살...
스님도 한 번 고기를 맛보면 그 맛을 잊어버리기 힘든 법인데 스님이 될 생각도 없는 영훈이 1 년에 몇 번 못 먹는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라 영훈은 상사들이 점심 안 먹었냐고 놀랄만큼 흡입해댔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지방 출장을 갔다가 막 도착한 이은성 사원은 말끔하게 생긴 청년으로 나이는 영훈보다 1 살이 어리다고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중요한 건 나이보다 직급과 경험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감히 맞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영훈이었다.
지금 영훈은 이런 작은 회식자리에 참석해서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중간에 연희가 ‘그렇게 재밌어요?’라고 물어볼 만큼 말이다.
드라마나 웹툰에서 보던 직장인들의 생활, 그것도 대기업 직원으로 갖는 첫 회식에 감개가 무량하고 속세를 떠나
절에 있던 외로운 시간이 보상받는 기분까지 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다섯명의 팀원중 유일하게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상사의 꽃은 영업이니까요. 남들은 회사의 얼굴이 되라고 하지만 전 회사의 얼굴이 아닌 회사의 손발, 머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야~ 배짱이나 야심이 장난 아닌데? 자, 한잔해.”
“아니 근데... 난 자네가 너무 궁금해. 인사과에서 정보를 하나도 안 주네. 그래, 학교에서는 뭘 배웠고 특기는
뭐야? 영어를 하나도 못한다는데 맞아?”
언젠가 이런 시간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퇴근하기 전 인사과 직원이 최신 업데이트해준 정보들을 쭉 나열했다.
“충북에 있는 태평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건 맞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평대학교? 그런 데가 있었나?”
“오호~ 그래서?”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라서 그저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면접에서 잘 봐주셨습니다.”
“그래? 면접에서 잘 봐줬어? 그랬구만.”
“그거? 기름야자 열매를 쪄서 압축시키면 나오는 기름을 팜 오일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식량자원산업이라고 할 수
있어. 인도네시아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들이 팜 농장을 운영하고
있기도 해. 그런데 2018 년도부터 인도네시아에서 환경문제 때문에 새로운 팜농장 개발을 3 년간 금지시켰거든.
그래서 새로운 농장 설립이 불가능한데 거기 엄청 큰 농장을 운영하는 현지기업주 하나가 큰 빚을 졌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 농장을 사려고 하는 건가요?”
“그런거지.”
“그럼 런던의 사업은 뭡니까?”
“어? 그거... 별거 아니야.”
“난 지하철로 간다. 내일 보자고. 최영훈이라고 했지? 모르는 거 많다고 기죽지 말고,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영훈 씨는 집이 어디세요?”
“저는 동대문 쪽입니다.”
“그럼 지하철?”
“네.”
“근데 왜 노 대리님이랑 같이 안 갔어요?”
“같이 타고 가면 왠지 어색할 것 같아서요.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하하, 그렇긴 하죠. 그럼 이제...?”
어서 가라는 눈빛.
어차피 가려는 마음이었는데 왠지 저 눈빛을 보니 연희에게 한 잔 더를 권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하고 싶지 않아 인사를 하고 지하철로 가려는데 연희가 이은성에게 물었다.
“전 늦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다.
송 사장님이 지시한 내용이 있었으니.
“나 왔어요.”
“왜?”
“입사기념 회식이었니?”
“응.”
“난 너 회식 안 가고 그냥 들어올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회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칫, 내가 그럼 보스가 회식 하자는데 첫날부터 싫다고 빼겠어?”
“너 그런 성격이잖아.”
“아빠는 어때?”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희가 이해되지 않은 송 사장은 몇 번이고 다시 물었지만 연희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어쨌거나 송 사장은 요 근래들어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제발 내일 돼서 딸래미의 마음이 바뀌지만 않기를 기도하며 와인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네. 찾았습니다.”
“그래. 그거 5 부 복사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음...”
“뭐, 보고 있어요?”
“아, 노 대리님이 작성하신 보고서예요. 오늘 오전에 회의 있으니까 이거 말고 이거 복사해서 회의실 세팅하라고
하셨어요. 고 과장님께서.”
“근데 왜 이거 말고 그거를 보고 있어요?”
“이게 노 대리님께서 준비하셨던 사업 같아서요.”
연희를 따라 복사실로 들어가 복사하는 법을 배우고 회의자료와 탕비실에 비치된 음료수를 가지고 작은 회의실에
깔아두었다.
그리고 나가려는데 연희가 슬쩍 물었다.
“너무 칼 대답 아닌가요?”
“일에 흥미가 생기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실적을 나눠 갖고 싶지 않습니다. 뭐, 그런데 고려는 해보죠.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으니까.”
“어째 안 한다는 말보다 더 성의없어 보이는데요?”
“연희 씨?”
“네?”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들었을 때 생각할 시간을 주는 습관을 길러보도록 하세요. 너무 급하게 상대를
재촉하고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거. 그거 문제입니다. 내가 말했죠? 세상을 너무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면 나중에 결혼... 크흠, 아닙니다.”
“와... 나 진짜 황당한거 알아요?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다가 아니라고 하는거...”
“연희 씨, 여기 있었구만.”
“네. 좋은 아침입니다.”
“흐흐, 그래. 좋은 아침이지. 아침에 출근하는데 뭐 불편한 건 없었어?”
“네, 없었습니다.”
“아침은 먹었고? 안 먹었으면 뭐 샌드위치라도 배달 시켜줄까? 요즘 배달 안 되는게 없어요. 샌드위치, 커피,
팥빙수 이런것들도 배달 된다니까. 세상 너무 좋아졌어.”
신입사원이 뭐 했다고 점심시간도 아니고 오전부터 샌드위치를 배달시켜주겠다는데 연희도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때 영훈이 나섰다.
30 여분 후 바로 아침회의.
노트북으로 회의록 작성은 연희가 하고 노 대리는 회의자료를 가지고 브리핑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누가 알고 있냐?”
“아직 조용합니다만 삼강물산에서 눈독을 들인다는 말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주재원이랑
통화하면서 체크하겠습니다.”
“은성이는 노 대리 옆에서 서포트하고 연희랑 영훈이는 노 대리가 바쁘니까 OJT 는 힘들거든? 그러니까 신입사원
대상 실무교육에 집중하면서 노 대리 오면 은성이랑 같이 서포트할 준비하자고.”
“알겠습니다.”
“과장님, 노 대리님께서 출장갔다 오실 때까지 영업 2 팀에서 드랍한 아이템을 살피면서 공부해도 될까요?”
“좋지. 연희 씨가 봐서 괜찮다 싶으면 디벨롭 해봐도 괜찮겠고 말이야. 기대가 돼.”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팀원들 각종 기념일이랑 연락처는 은성이 책상에 가면 있으니까 그거 보고 확인하면 돼.”
“알겠습니다.”
영훈은 이은성 사원의 자리로 가서 슬쩍 팀원들 전원의 생일을 확인하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래도 계산을 잘못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계산을 하곤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된통 걸려버렸다.
하필 걸려도 이런 곳에 걸릴 줄이야...
영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영훈을 기다리고 있던 연희는 영훈 뒤에 따라 오는 사람이 없는지 슬쩍 살피곤 아주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뭡니까?”
“뭐겠어요?”
“차지열 상무님?”
“고맙군요.”
“그런데 아까 고 과장님이 뭐라고 하시던데.”
“별거 아닙니다.”
“비밀 참 많으시네요.”
“저기...”
“네?”
“혹시 부서 옮기는 거 가능합니까?”
“왜요?”
“우리 부서 망할 것 같아서요.”
영훈은 갑자기 딴청을 피웠지만 연희는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대운(大運)이 충돌하다(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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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운(大運)이 충돌하다(2) >
“아저씨!”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네. 앉아, 앉아.”
신입사원들과 한명씩 악수를 나누고는 주르르 앉자 차지열 상무가 흐믓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사원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연희와 영훈을 볼 때는 아주 잠깐 눈꼬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무슨 생각일까?
관상으로 보면 차지열 상무의 상은 눈이 가늘고 길어 지혜가 엿보였고 하관이 발달했으며 턱이 두툼해 말년에
고생없이 장수할 상이었다.
다만 하관이 너무 발달해서 욕심이 과하달까?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건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툭 튀어나온 사각형의 뾰족한 턱에서 보인다고 할
수 있었다.
이후 차지열 상무는 자신이 회사에 입사해서 이뤄냈던 여러 가지 사업을들 열거하며 자기 자랑(?)을 신나게 1
시간 가량 했다.
허리를 꽂꽂히 펴고 듣고 있던 신입사원들도 점차 허리가 굽어갈 때쯤에 상무는 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끝냈고 그
질식하듯 잠이 쏟아지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 커피 한잔 사서 들어갈게요.”
“다 같이 먹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니는 학생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이렇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부러움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훈은 즐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영업 2 팀의 팀원들을 떠올렸다.
사실 영훈은 어떻게 하면 이 회사 생활을 오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을 잘 보는 것으로 사장에게 어필한다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 알려주고 나면 자신의
쓸모가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게 마음에 안 들어 회사를 나가면 어떻게 될까?
보험이나 부동산 영업을 하면 전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만나는 고객마다 설득하고 계약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니 결국 어딜가나 똑같을 거다.
그렇다면 결국 일회용 인간이 아닌 지속 가능한 능력있는 사원이 돼야 한다는 것인데 사주나 관상 보는 것 말고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이 그럴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밤잠을 줄여가며 영어를 비롯한 무역실무 공부에 매진하고 있지만 그렇게 공부를 한들 동기들과의 차이는
좁힐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묻혀 살아가려하는 자신에게 힘껏 기지개를 피고 살아가라는 듯 말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거래 실무 교육은 영훈에게 있어서 정말 황금같은 시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영훈은 그 시간을 통해 이 회사에서 쓰는 언어를 조금씩 이해해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육에 참석할지 안 할지는 신입사원의 재량에 맡겼기에 연희를 비롯해서 신입사원 중 1/4 정도는
참여하지 않았다.
“교육 잘 받고 있어요?”
“네. 잘 배우고 있습니다.”
연희의 표정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짐작했기에 영훈은 윤지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고 말하고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녀를 따라 올라간 건물 옥상에는 몇몇 무리가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놀랄만한 변화다.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고작 부족한 점을 지적 받았다고 쉽게 바뀔수 있는 것이던가?
게다가 질문을 한 인물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임을 감안하면 진정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영훈을 보며 연희는 척추에 서늘한 기운이 짜르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입사원이 회사를 관두겠다는데 이상하게 협박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는 타고난 사주에 맞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사주로 보면 그는 회사를 이끄는 사장으로 타고난 사람입니다.
남의 밑에서 평생 2 인자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에요.”
“타고난 사주는 그저 길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개의 길을 보여주죠. 만약 사주만
보여주고 이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으면 난 백퍼센트 정확하게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맞출 수 없을 겁니다.”
“그럼 현재 직업과 직급이 해석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가 완전히 똑같이 살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주는 같은데 왜 그럴까요?”
“성격이 달라서?”
“성격만 다르겠습니까? 생긴것도 조금 다르죠. 결정적으로 자라오면서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취향이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지면 친구도 달라지겠죠. 취향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집니다. 만나는 여자가 달라지고
배우자가 달라지며 자식들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삶을 살 수 없죠.”
“그럼 사주를 왜 봐요?”
“말했듯이 여러개의 길 중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러다 현재 그 사람의 직업이나 배우자의
사주를 알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주변을 한번 살피곤 물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을까?
연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고마워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무섭습니까?”
“네?”
“운명을 무서워하는 것 같거든요.”
“내가요?”
“음... 처음에는 당신이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건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두려움이 생긴다면 다르겠죠.”
“...”
“두려워하는 거 나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거든요. 좋은 모습입니다.”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연희를 지나쳐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연희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 아가씹니다.”
“미안, 늦었지.”
“들어가자.”
“네가 웬일이냐?”
영훈이 보는 건 노 대리가 하다가 고 과장이 보류시킨 ‘Nodri Clare 의 국내시장 전략’이라는 보고서였다.
이미 고 과장이 연희에게 보고 디벨롭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지시까지 내린 아이템이었다.
“그렇다면요?”
“그럼 이거 잡으세요.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형석 대리를 잡으시면 됩니다.”
“그럼 당신은요?”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렵니다.”
“일은 우리가 하고 당신은 배우면서 실적 올리고?”
“아직 한창 배워야 할 시기 아닙니까. 서로 윈윈이죠.”
“그럼 고 과장님은요?”
“과장님과는 조금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고일주 과장님, 아마 올해 안에 회사를 관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저는요?”
“토정비결 본 적 없습니까?”
“토정비결이요? 매년 새해에 보는 거?”
“네.”
“난 아니지만 엄마는 볼걸요?”
“내가 방금 해준 얘기가 그거랑 비슷합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엄마가 매년 보기는 하는데 그렇게 잘 맞지 않던데요? 당신이 말한 고 과장님의 미래도 잘 안 맞을 수 있는
건가요?”
연희의 말처럼 영훈이 보고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자못 진지하고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확신하고 있나요?”
“좀 떨어지세요. 부담스럽습니다.”
연희는 순간 당황해 얼굴이 빨개졌다.
나르힘푸난이 자신이 소유한 팜 오일 농장의 가격을 20%나 올렸다는 것만 제외하면 좋은 소식이 확실했다.
무려 가격이 100 억이나 올랐다는 말에도 고 과장은 주먹을 불끈 쥐며 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곧바로
영업팀 윤성우 부장에게 진행사항을 보고 했다.
“잘했어, 고생했어!”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야! 너 제대로 확인한거 맞아? 자원팀 애들이 확인하니까 팜 나무가 다 20 년 이상된 늙다리 밖에 없다는데?”
“너 현지 농장 관리인 없이 혼자 간 적 없지?”
“...”
“농장 관리인이 어린 나무들 있는데만 보여주면서 쑈한건데 거기에 홀랑 넘어가? 주재원이랑 대충 둘러보다가 술
처먹고 놀다 온 거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이거 접어. 계약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지 돈 넘어간 다음에 발견했으면 너나 나나 한강물 마시면서 온도 체크할
뻔 했다.”
차 상무가 영업팀을 완전히 박살내놓고 돌아간 후 다들 고 과장에게 운이 없었고 악독한 놈들에게 당할 뻔했다며
위로를 건넸지만 이틀이 더 지나자 고 과장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갔다.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와는 반대로 영훈과 연희는 크게 충격받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직장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형프랜차이즈 커피숍에 앉아 점심시간의 여유를 즐기다 홀로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연희를 힐끔 쳐다봤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운일까? 아니면 누가 나한테 몰래카메라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중이었어요.”
“...”
“다음에는 또 누구 목이 날아갈 것 같아요?”
“모르죠.”
“회사 직원들 명부 가져다 드려요?”
“됐습니다.”
“아, 태어난 시각을 몰라서 안 되려나?”
“진지하게 얘기하는거 아니죠?”
“뭐 때문이랍니까?”
“근데 난 좀 이상해요.”
“뭐가 말입니까?”
“아니,,, 노 대리가 건드린 그 Nodri Clare 라는 브랜드.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안 꾸미고 다녀서 이렇지 나 장난 아니에요. 내가 소싯적에는 학교앞에 남자애들 줄서고 길거리
캐스팅에... 됐어요. 말해 뭐하나. 어이가 없어서 정말...”
“큼큼... 아닙니다. 어쨌든 브랜드가 많이 부족합니까?”
“많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디자인도 독특하고 가죽의 패턴도 보면 볼수록 눈을 끌기도 하는데 이걸
임원들에게 설득하려면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어야한단 말이죠. 그런데 아직 영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정도는 아니라서 매출로 접근하면 얻어 맞을게 분명하고... 하여튼 뭔가 애매하다고 해야 하나?”
“애매하다... 그럼 노 대리님한테 한번 들어보죠. 전에 고 과장님한테 이거 무조건 먹힌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참 신기하죠? 그 자신감이 왜 보고서에 없었을까.”
“그거? 내 감이지.”
물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했지만 노 대리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요즘 영국의 젊은 애들이 여기에 꽂혔거든. 그거 알아? 명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연령층이 어딜거 같아? 30
대? 40 대? 50 대? 아니야. 바로 20 대거든. 웃기지? 걔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명품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아니야. 20 대 명품 소비율이 전체 대비 40% 가까이 돼. 돈이 썩어나서 명품을 사는게 아니라 한푼두푼 모아서
명품을 사려고 하거든.”
“그렇군요.”
“영국도 비슷해. 그리고 그런 애들 사이에서 요즘 이게 인기란 말이야.”
“한류스타?”
“맞아.”
연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고 영훈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이걸 하겠다고?”
“Nodri Clare 의 매출 성장 추이입니다. 그리고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Nodri Clare 가 EU 지역에서 얼마나
거론되고 있는지 분석한 자료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성장률이나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호감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Nodri Clare 는 젊고 독특하며 새롭다는
느낌을 소비자들에게 주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국에 들어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브랜드라고 생각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네?”
“어. 최영훈이나 아무나 데리고 가. 대신 수익비율 철저히 지켜. 30% 이하로 떨어지면 이 사업 할 이유가 없는
거야. 알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연희 씨는 어느 백화점 뚫을 건지 전략 세워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다 잊고 파이팅 해.”
그렇게 툭툭 팀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아준 윤 부장이 나가자 이은성 사원이 물었다.
“저 가는 겁니까?”
노 대리가 잠깐 머뭇거린다.
연희는 그 모습에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회사에 연희가 송은채 사장의 딸이라는 소문이 쫙 퍼진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임원들과 직원들 몇몇은 알고
있었다.
영업 2 팀이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고.
연희는 양준기를 연신 씹어댔지만 이미 퍼진 소문을 어쩔 것인가?
“어려울까?”
“네.”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당신의 가정이 맞다고 치면 아마도 난 회사에서 나가지
않을까요? 아참, 사장님은 별 말 없으십니까?”
“당신에 대한 칭찬을 좀 했어요. 그래서 당분간 계속 지켜보시겠대요.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에 사람을
평가하기는 힘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시면 될 거예요.”
“걱정은 안 합니다. 다만 어째 그 말이 이번 노 대리의 사업이 실패하면 그 책임을 저한테 돌릴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농담입니다. 정색하긴...”
“어이, 바쁘셔?”
“뭘 그렇게 봐요?”
“그랜드 백화점 BM(브랜드 매니저)에게 메일 보냈었잖아요? 한 번 만나자는데요?”
“어? 만나자고 해요?”
“네. 뭐지? 노 대리님은 다 까였다고 했는데?”
“고 과장님 때가 더 소름 돋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소름 돋았어요. 지금도 그렇고... 사람 참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 있으시네요.”
“민망하게 했으면 미안합니다. 신기해서요.”
“내가요?”
“네. 처음 만났을 때랑 비교해서 상이 좀 변한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요?”
“아닙니다. 잊어버리세요. 어떻게 할까요? 내일 미팅할까요?”
“당연하죠. 샘플북 챙기고 갈색 가방 있죠? 그거 가지고 갈게요. 아, 그리고 정장 그거 한 벌이에요?”
“한 벌은 아닙니다.”
“미안해요. 말을 잘못했네. 오늘 입은 정장 말고, 소매랑 바짓단 길게 나온 검은색 정장 말고, 또 원 버튼의
빛깔나는 회색 정장도 제외하고 다른 건 없어요?”
“돈이 없어요?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요? 아, 식사야 식당이 있겠고, 빨래는요? 샤워실은 따로 있어요?”
“큼... 거 참 궁금한 것도 많으시네. 평생 산에서 살았는데 돈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있다고 해도 아껴 살아야지.”
주지 스님이 모아주신 돈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비싼 서울에 괜찮은 전세방 얻을 정도는 아니었다.
요새 5 백만 원 가지고 얻을 전세방이 어디 있겠는가?
“와, 그런데 삼촌한테 듣기로는 보너스까지 다 거부하셨다면서요? 왜 거부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무시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연희는 잠깐 자신이 옷을 사주겠다고 말하려했지만 괜히 그게 영훈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마음을
접었다.
다음날 그랜드 백화점 입점 브랜드 심사를 주관하는 박운호 BM 과의 만남을 위해 본사 4 층을 방문한 연희와
영훈은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약속시간 30 분이 넘도록 미팅할 관계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슬 연희의 얼굴이 붉어지며 화가 치밀어 올라갈 때쯤 미팅룸 문이 덜컥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연희가 흠칫 놀랐다.
“어?”
“왔어? 내가 좀 늦었지. 미안~”
“어머, 은진 언니...”
“반갑다, 얘. 넌 어쩜 정장을 입어도 그렇게 예쁘니?”
“제가 올 줄 아셨어요?”
“왜? 어렸을 때부터 네 가방 들어줬던 애잖아. 예쁘게 봐줘. 지금도 너 도와주려고 한 거잖니.”
“준기 얘기는 그만하고, 그럼 내가 무슨 얘기할지 아는 거네요?”
“아, 맞다, 맞다. Nodri Clare. 우리 직원들이 다들 그거 찾아보느라고 한동안 난리였잖아. 아~무도 몰라.
하하하.”
“하필 가지고 와도 왜 그런 걸 가지고 왔니? 어쨌든 다들 반응이 안 좋았어. 그래서 나도 밀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서 어떡하지?”
“언니는 이게 웃기나 봐요? 난 하나도 안 웃긴데.”
“어? 뭐 그냥...”
“그 얘길 하려고 직접 나온 거예요?”
“우리 직원들이 너한테 안 된다고 하면 좀 그렇잖아. 네 체면도 있는데... 그래서 직접 왔지. 내 마음도
몰라주고 너무한다.”
“아, 내가 소개를 안 했네. 이 언니가 그랜드 백화점 소유주인 대명그룹 송주훈 회장 손녀분이에요. 나랑 네
살차이. 생일도 나랑 몇 달 차이 안 나요. 7 월 8 일 맞지?”
“어? 어... 그런데 갑자기 생일은 왜 얘기하니? 뜬금없다.”
“한 달 뒤에 1 층 메인 라인에 자리 하나 날 거야.”
“매출 15 억 넘어서 어렵다며?”
“그 자리 말고 다른 자리.”
“아니야. 됐어. 직원들 반발 있을거 아니야. 억지로 하고 싶지가 않네. 수고해.”
“속 시원합니까?”
“알겠어요.”
“난 산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 회사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롭습니다. 회사 생활이
즐겁고 내가 하는 일을 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로 내가 할 사업에 도움이
되는데 거리낌은 없지만 기껏 사주를 봐주고 당신 기분이나 채워줄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뭔데 그럽니까?”
“언니 남편이 예전에 나한테 고백했었거든요. 날 싫어할만 하지. 돈으로 들이민 것도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무릎꿇고 울면서 고백했던 남자인데 나한테 차이고 자기랑 정략결혼 했으니 얼마나 내가 꼴보기
싫었겠어요.”
“아~”
“솔직히 부모님이 돈 많은 여자들은 많지만 돈도 많으면서 나처럼 예쁘기 힘들거든요. 내 말 한마디면... 흠...
하필 백화점 쪽에 나랑 친한 애들이 없네.”
“결국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제부터 친해지면 돼죠. 얼른 가요. 아침부터 기운 뺐더니 배고프네. 뭐 드실래요? 혹시 파스타 좋아해요?
내가 죽이는 파스타 집 아는데. TV 에 나오는 스타들이 먹는 파스타 맛 궁금하지 않아요?”
회사로 돌아온 연희는 한동안 양준기와 통화로 격렬한 대화(?)를 하고 난 뒤 다른 백화점 입점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 뛴다는거지 아직 재벌 3 세의 자존심이 단단하게 가슴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인지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되는 이유를 갖다대며 어영부영 했다.
억지로 만나라 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영훈은 그저 노 대리만 믿으며 계약을 지원하는데 주력했다.
노 대리가 보내달라는 서류나 요청하는 일에 주력하면 알아서 대어를 물어주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노형석 대리가 드디어 Nodri Clare 와의 독점유통계약을 계약함에 이르렀다.
아직 입점할 점포도 못 구했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건 당연했다.
“뭐랍니까?”
“올해 말에 계약이 끝나가는 매장이 있는데 아직 협의중이래요. 임대료와 수수료 문제 때문에 해당 매장하고
재계약을 할지 안할지 아직은 결정을 못 내린 상태라고 하는데 말이 길었지만 결국 우리 브랜드를 못 믿겠다는
거죠.”
“이거 참...”
“여기요!”
“많이 기다렸지?”
“아니에요. 축하드려요. 고생하셨어요, 대리님.”
“하하하, 고마워.”
그렇게 게이트 앞에 서서 축하와 걱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나왔다.
그리고 달려드는 카메라들.
“몰라. 연예인 누가 탔다는 얘기는 있는데 정확히 듣지는 못했어. 비즈니스나 퍼스트 타고 왔나보지. 그건 신경
끄고 이따가 올 제임스 노튼은 한식을 상당히 궁금해 했거든? 괜찮은 한식당 섭외했지?”
“괜찮으십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버럭 화를 내는 이은성.
남자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다친거 아니시죠?”
“아, 네. 괜찮습니다.”
이 상황에 괜찮으니 그냥 가시라는 듯 쿨하게 넘어가는 노 대리를 보고 영훈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사업의 가장 핵심이 한류스타라는걸 알텐데 아무래도 눈앞에서 스타를 직접 보고 있으니 머리가 하얗게
됐나보다.
보아하니 저러다 아무것도 없이 이대로 헤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서가은이 누군가의 명함을 받아 노
대리에게 건넸다.
“혹시 나중에 불편한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보시다시피 보는 사람이 많아서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어?”
“네. 수고하세요.”
“네. 노형석 대리가 우연찮게 경호원과 부딪혀 날아가면서 죄송하다고 연락처를 줬습니다. 매니저 연락처긴
한데...”
“당연히 매니저여야지. 연애할거야? 개인 연락처 받아서 뭐해? 연예인들 어차피 지들 맘대로 하는거 아니야.
협찬도 다 회사에서 받아주는 거거든. 우린 서가은 비위만 잘 맞춰주면서 회사랑 잘 얘기하면 만사 오케이야.
이거 노 대리한테 운이 따르는 건가? 아니면 연희 씨한테 운이 따르는건가? 신기해 죽겠네?”
“저도 참 신기합니다.”
“그래, 고생했고 서가은 소속사랑 빨리 연결해서 이거 빨리 띄워봐. 그리고 바이어 지금 식사하고 있다고?”
“아마 지금쯤 식당에 도착했거나 식사중일겁니다.”
“이후 스케줄은 어떻게 돼?”
“세종백화점 본점이랑 명동을 노 대리와 같이 살펴보고 다시 뉴월드 백화점 에비뉴엘관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모든 스케줄이 마무리되면 대략 저녁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저녁 식당은 어디 잡았지?”
“뉴월드 백화점 8 층 식품관에 있는 양식당을 잡았습니다.”
“음... 그러지 말고 을지로 풍월관 알지? 모르나? 투플러스 고깃집 있어. 잘 모르면 검색해서 예약해놔.”
“알겠습니다.”
“수고했어, 가 봐.”
“가서 밥 안 먹었습니까?”
“영훈 씨 혼자 식사할까봐 전 그냥 왔죠.”
“허허... 왜 그럽니까? 불안하게?”
“당신은 나 같은 미인이랑 밥 먹는게 기쁘지 않은가 봐요?”
“부럽네요, 그 자신감.”
“당신이 그 능력에 대해 가지는 자신감만큼? 솔직히 이것도 힘들어요. 얼마나 피곤한데. 이게 진짜 겪어보기
전에는 몰라요. 조금만 잘해줘도 ‘사랑한다’, ‘보고싶다’, ‘나 죽는다’. 별의 별 얘기를 다해. 웃는것도
마음대로 못한다니까요?”
“그런 말하는 것치고 되게 잘 웃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무표정하더니.”
사실 영훈도 똑같았다.
“저도 그랬습니다.”
“영훈 씨도요?”
“그 운이 부럽더라구요.”
“하여튼, 이게 정말 다행인게 만약 정상적인 절차 밟아서 신청했으면 배우가 보고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는
경우도 있고 회사내에서 브랜드 따져가며 받는 경우도 있거든요.”
“잘 아시네요.”
“사실 노 대리님한테 들었어요. 아, 그런데 오면서 궁금한거 생겼어요.”
“연희 씨 은근 말 많은 거 알아요? 얼음공주라는 거 거짓말 아닙니까? 무슨 얼음공주가 이렇게 말이 많아?”
“허... 누군 나한테 말도 못 붙여서 난린데...”
“물어봐요.”
“영훈 씨는 자신의 대운이 언제 들어오는지 알잖아요? 그럼 그때 어떻게...”
“모릅니다.”
“네? 왜 몰라요?”
“내 사주는 좀 특이한 편입니다. 그게 내 인생의 족쇄가 되기도 했고... 하여튼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내 사주를
보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보지 않았다고 아예 기억이 안나는 건 아니지만 몇 살에 대운이 들어오고 몇 살에
건강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따위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 정확히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잊었다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왜 안 봤어요? 언제 들어오는지 잘 알면 좋은거 아닌가요?”
“그 얘긴 넘어갑시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영훈 씨, 뭐 드실거예요?”
“네? 네 뭐... 카라멜마끼아토 먹겠습니다. 연희 씨는요?”
주인집 딸은 물론이고 그녀의 동료들도 연희를 향한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들은 이 황당하고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빠르게 커피를 주문하고 모습을 감췄다가 나온 커피를 들고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뭐가요?”
“아까 그 여자한테 한 말이요. 잘 부탁드린다니... 내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거야... 그럴수도 있죠.”
“소문 돌 거 걱정 안 했습니까?”
“고작 그 얘기 한 걸로 당신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거요? 후후... 난요 아주 어렸을때부터 나와 상관없는
소문들에 둘러싸여 살았어요. 누구랑 사귄다더라. 누구랑 잤다더라. 남자가 한둘이었게요? 그렇게 십년 넘게
살았는데 이깟 회사에서 그런 소문 정도에 신경 쓰겠어요? 그것도 우리 엄마 회산데?”
그녀는 엄마 회사라는 말을 할 때 누구도 듣지 못하게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때 풍겨오는 이름모를 꽃향기.
그녀가 즐겨 쓰는 향수 냄새인 듯 했다.
영훈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왜 그럽니까?”
“솔직히 조금 무섭거든요.”
“무섭다... 당신 답지 않은데요?”
“나라고 뭐 무서운거 하나 없는줄 아세요? 그리고 굳이 꼭 들어야 할게 아니면 당신 이야기를 듣고 선입견을
가지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노 대리님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고. 그렇다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건 아니에요. 이런 마음이 얼마나 갈지 나도 모르죠.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말해주세요. 그냥 지금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에요.”
“좋은 자세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울 것 없어요. 서로 줄건 주고 받을건 받는 거니까. 그런 만큼 당신의 능력이 발휘되길 바래요.”
“할 수 있다며?”
“죄송합니다. 준기가 잘 알지는 못해도 건너건너 인맥이 있다고 워낙 자신만만해 하기에 보냈는데 생각보다
이형준 본부장이 강하게 나와서... 아무래도 연희 양과 이 본부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본부장이 연희 양한테 크게 망신스러운 상황을 겪었고 연희 양의 사과 없이는 일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 이거 뭐지?”
“뭔데 그럽니까?”
“우리 회사가 혜성기업을 인수한다는 루머기사가 떠서요.”
“혜성기업? 그런 회사도 있구나...”
“어? 영훈 씨...”
“네?”
“오늘 저녁에 엄마가 저녁 같이 하자는데요?”
< 알바? 부업? 투잡?(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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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부업? 투잡?(2) >
“천천히 먹으면서 들어요. 연희에게 듣기로 일을 잘 따라간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업무적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언어적인 문제만 제외하면 생각보다 잘하신다고 해서 다행이에요.”
“과찬이십니다.”
“오늘 영훈 씨를 보자고 했던건 조금 민망하긴 한데 부탁할게 있어서에요.”
“네? 저한테요?”
“동생은 당신에 대해 말하기를 단순히 채권회수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려 할 때 수많은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는데 당신은 단 한번도 채무자와 트러블을 일이킨 적이
없다구요. 맞나요?”
“맞긴 합니다.”
이때 연희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사장님 말씀은 그 이형준 본부장에게 회사를 인수하라는 말을 포기하게 해달라는 말씀입니까? 아무
뒤탈 없이?”
“맞아요.”
“제가 그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안하시는 건가요?”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법무팀이나 기조실 모두 설득에 실패했어요. 법적으로나 합리적인 설득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어요. 당연히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행태를 띠진 않지만 우리가 거부한다면 분명 우리 주식을 다른 곳으로
넘길 거예요.”
“이형준이라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연희에게 따로 물어보면 될 거예요.”
“벌써 가려구?”
“넌 이 친구 도와줘. 어차피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어쩔 수 없어. 네가 수습해야 해.”
어찌보면 냉정할 수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송은채 사장이 나가자 연희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영훈은 말없이 남은 음식을 먹었다.
대략 5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연희가 입을 열었다.
“이형준 본부장을 거기서 만났어요.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인가? 많더라구요. 얼굴도 제법 괜찮게 생겼고 매너도
있고... 사귀자더라구요. 뭐 이런 일이 한 두번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솔직히 갈등했어요. 이형준 본부장이
신영금융그룹 회장의 손자거든요. 그것도 하필 장남.”
“오호~ 갈등할 만 한데요?”
“그러니까요. 흐음... 몇 번 만났어요. 근데 나 너무 속물인가요?”
“남자는 여자 외모 보고, 여자는 남자 경제력을 보는게 자연스러운겁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내가 왜 변명해야하는건지 모르겠는데 변명 하나만 하자면 상대방이 경제력이 너무 없으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쪽에서 기가 죽어요. 괜히 미안해하고 자격지심 때문에 별것도 아닌 걸로 화내면서
무시하냐고 하고. 하나같이 끝이 좋지 못했어요.”
“굳이 뭐 나한테... 그런말 안해도 됩니다.”
다음날, 출근한 영훈은 연희가 보너스 이야기를 꺼내며 전의를 북돋으려는 마음을 왕창 깨뜨렸다.
“왜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돈은 훨씬 쉽게, 많이 벌 수 있습니다. 돈만 생각했으면 대기업 안 왔어요. 명일금융에서
못 갚은 돈 받아내고 있었지.”
“아니면 돗자리를 깐다거나 하겠죠?”
“...”
“이제 어떡할거예요?”
“이런데 처음 와보죠?”
“나도 인터넷 합니다. 이런데 있는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와보는건 처음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거 지금 촌놈 취급하는 거 아닙니까?”
“으흥~ 발끈하니까 좀 귀엽네. 일단 서류 봐봐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준다고 해도 당신이 본 내용을
내가 다시 설명해주는게 이해를 더 쉽게 할거예요.”
“그러죠.”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엄청 반했으면 딱 알아챕니까? ‘아, 이 인간이 완전히 나한테 껌뻑 넘어갔다’, ‘나
아니면 죽겠구나’, 뭐 이런거.”
“지금 나 놀리는거죠?”
“진짜 궁금한건데... 크흠.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 악성채권같은 회사를 넘기려고 하고 이걸 우리가 안 받으면
회사 주식을 다른 곳에 넘기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인거죠?”
“당연히 대놓고 협박은 아니에요. 계속 운만 띄우고 있을 뿐인 거지. ‘우리 손에 니네 주식 5%가 있는데 이걸
누구한테 팔면 좋을까?’하면서 계속 약올리는 중이니까. 아... 근데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막막하네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
“그럼 한번 가서 말해봐요. 결혼해주겠다고.”
연희가 빽 소리지른다.
“미쳤어요?”
“아니...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면서요? 그럼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하... 진짜 절망스러운건 정말 그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회사를 고모한테 넘길수도 없고, 그
인간과 결혼할 수도 없고... 가능할까요?”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다른 준비한 거나 보여주세요.”
난감했다.
이형준 본부장이야 만나면 어찌어찌 알아낼 수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기업오너의 사주를 모르니 답답했다.
그렇게 간단히 회의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 둘은 서가은 협찬 건과 뉴월드 백화점 입점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까지 빡세게 일하고 난 토요일, 연희는 영훈을 붙잡고 신라호텔을 찾았다.
“차 좋네요?”
“내 애마예요. 눈치 때문에 회사엔 못 타고 오지만.”
“뭘 그렇게 봐요?”
“아, 별거 아니에요. 갑시다.”
“다들 결혼식에는 관심 없어요. 어차피 신영금융 이세준 부회장이나 오늘 참석한 사람들과 인맥을 넓히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또는 각자 다른 목적이 있거나.”
“우리처럼요?”
“맞아요. 그리고 우리랑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이 저기 오네요.”
연희가 웃으며 시선을 한곳에 두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훤칠한 남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큰 키, 날렵한 몸매까지 완벽에 가까운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왔구나.”
“어. 오랜만이네?”
“그러게. 그 때 이후로 얼마만이지?”
“한... 넉달 지났나? 그때 내가 좀 미안했어. 원래 내가 흥분하면 앞뒤 안 가려서.”
“손 맵더라. 그 때 그 얼얼한 감각이 사흘을 가더라고. 나 여기 앉아도 되지?”
“그런데 이분은...”
“안녕하십니까.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악수 안해?”
“아니, 그냥 당황해서 그랬지.”
연희가 말을 이어갈 때 키가 작고 옆으로 딱 벌어진 체격의 남자가 다가와 이형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고 보니 이형준의 부친이었나보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그는 한 기업의 오너가 아니라 체육관 관장이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이긴 했다.
물론 관상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 당황해하며 슬쩍 손을 뺐다.
어디 일반 직원이 자신의 손을 잡느냐는 듯 노한 눈빛이 살짝 엿보였지만 영훈은 신경쓰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현진물산의 주식을 우리에게 양도할 것. 그러면 혜성기업의 인수를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인수를 고려해보겠다? 당신 뭔가 굉장한 착각을 하는거 아니야? 우린 당신네들이 안 사겠다면 안 팔면
그만이야.”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형준 본부장님, 본부장님은 우리한테 주식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하는게 본부장님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테니까요.”
“이런 미친 새끼가...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
“부회장님과 참 다르십니다. 키도 크시고 굉장히 미남이시고... 어머님이 미인이신 것 같네요. 아, 동생은 좀
다른가요?”
“주식을 왜 산다고 했어요?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 인간이 저렇게 놀래요? 설마 우리한테 현재
시장가에 팔거라고 생각해요?”
“거 운전에 집중합시다.”
“아니... 집중하고 있으니까 천천히 말해봐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에 한번 말했는데 본래 사주를 볼 때 중요한 건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그랬죠.”
“그런데 이형준 본부장은 운명보다 성격이 조금 더 중요했습니다.”
“왜요?”
“재벌 3 세로 태어났으니 재복이야 말할게 없고 흉살이 들어와 투옥되거나 일찍 죽지 않는 이상 당장 그의 사주로
뭔가 특별한 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내가 뭘 안다고 우리가 주식을 산다고 했겠습니까? 회사 자금 사정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살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데도 아까 그런 얘기를 한 건 주식을 가져 와야지만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번 만큼은 운명보다 성향이 중요하다고 한 겁니다.”
“어차피 결과가 중요한거 아닙니까? 우리한테 주식 넘겨준다고 하면 받을지 안 받을지 위에서 결정할 문제고
인수하라는 말을 안 해주면 감사한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야 하잖아요?”
“모른다고 하세요. 그냥 내가 알아서 했다고.”
“하... 엄마가 그럼 알겠다고 하면서 넘어가겠어요?”
“넘어갈 겁니다. 자꾸 하기 싫은거 시키면 회사 나갈려니까.”
“좋습니다. 전에도 얘기했겠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본인 사주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사주 역시
중요합니다. 특히 금수저로 태어난 당신 같은 사람들은 부모 사주가 굉장히 중요하죠.”
“그 금수저 이야기는 그만하면 안 될까요? 꼭 내가 죄 지은 것 같잖아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누구는 못 생기게 태어나고, 누구는 똑똑하지 못하게 태어납니다. TV 예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못 생겼다, 멍청하다 놀리는데 그깟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하는 걸로 상처를 받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연희는 간혹 이런 개막장 집안의 이야기를 가끔 들어 왔기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영훈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건 조금 신기하긴 했다.
“아... 이해했어요.”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더군요. 아마 내가 제시한 조건을 따를 겁니다.”
“확신해요? 이미 그가 알고 있었다는거?”
“내가 한 말이 헛소리라고 확신했으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조용히 넘어가겠습니까?”
“어?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만약 경찰이라도 불렀으면 어쩔 뻔했어요?”
“조용히는 있지 않더라도 경찰은 못 부릅니다.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다만 이렇게 쉽게 보내진
않겠죠. 어쨌거나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습니다. 전 인사과에서 연락만 기다리면 되는 거겠죠?”
“정규직 전환 연락 말하는거죠?”
“당연한거 아닙니까?”
“진짜 알겠는거지?”
“네 삼촌도 그랬단다. 돈을 어떻게 받아왔냐고 물으니까 그냥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잘 해결해서 받아왔다고
했다는거야. 내가 말했지? 얼마나 황당하게 일을 했는지. 그런데 둘이 잘 해결했다고 하니 뭘 하긴 했겠지.
알겠어. 쉬어라.”
“우... 난 요즘 내가 바보가 된 거 같아.”
강남의 한 일식집.
차지열 상무는 어두운 얼굴로 들어서는 이형준 본부장을 보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별거 아닐 거라고
여기곤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적대감에 차 상무는 양손을 저으며 오해하지 말라는 말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뭘 말씀하시는 건지...”
“됐습니다. 오늘 자리는 큰 의미가 없겠어요.”
송은채 사장은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장인 홍승대 실장으로부터 당황스러운 소식을 듣게 됐다.
홍승대 실장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기가 힘든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치를 보았다.
“15,500 원? 현재 얼마죠?”
“동시호가 16,300 원에 걸린 것까지 확인했는데 9 시에 얼마로 시작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의 시장가나 마찬가지네? 조건은?”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혜성기업을 인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를 가볍게
물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며칠 전만해도 당장이라도 혜성기업을 인수하지 않으면 우리 지분을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에게 넘기겠다고 이리저리 돌려 말하면서 협박했었는데, 뭔가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 그게 뭘까요?”
“그건... 일단 임원 회의 소집할까요?”
“아니요. 그럴필요 없어요. 재무팀 오재식 상무만 불러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어떤게 남았나요?”
“혜성기업을 인수할거냐고 의향을 물어본 것은 어떻게...”
“알겠어요. 나가보세요.”
“넵! 다녀오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따라올겁니까?”
“전 다른데 가려는 거예요. 인사과 가세요.”
연희를 보내놓고(?) 인사과에 들어선 영훈은 자신을 기묘한 표정으로 보라보는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오재준 대리는 이럴 리가 없다는 듯 똥씹은 얼굴로 영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요?”
“아, 미안합니다. 여기 쓰면 되는 건가요?”
“네. 그런데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러세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 크흠... 도대체 사장님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그러니까 무슨 먼 친척이시라거나 아니면 회장님 일가의 장학금을 받으셨다거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사장님이 절 스카웃 하셨습니다.”
“스카웃이요?”
전에는 이 말을 하기 꺼려졌었다.
분명 송 사장이 스카웃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자신의 모습에 당당히 스카웃 당했다는 말을
못했는데 이번 일로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물론 인사과 직원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본다.
똑똑...
“어, 왜?”
“영업팀 차지열 본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차 상무? 들어오라고 해.”
“안녕하십니까.”
“말씀하신대로 맛이 깊습니다.”
“내가 그래서 비싸게 주고 사왔지.”
“혹시 신영에서 날아온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뭐 말인가?”
“전 사장님의 손이 닿았을까?”
“임지훈 사장님은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긴, 그 양반도 좀 고지식한 스타일이긴 하지.”
“아마 임지훈 사장님이었다면 신영그룹 회장을 만나 일을 처리해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럼 뭘까...”
“우와...”
“뭐야? 이거 진짜야?”
“아, 이것 때문에?”
아무래도 금액이 적으면 회사돈으로 처리하고 큰 금액을 달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줄 모양인 것 같았다.
“됐습니다. 돈은 필요 없어요.”
“우움... 이럴 것 같아서 생각해놓은 게 있는데. 혹시 이건 어때요? 내 이름으로 된 오피스텔이 몇 군데 있는데
지금 한 군데가 공실이거든요. 그거 쓰실래요?”
“어째 내용이 좀 이상한데, 나만 느끼는거 아니죠?”
“이상한 생각하지 말구요. 돈도 싫다 하고 고시원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렇죠. 나중에 대출 받아서 집 얻을 때
나가면 되잖아요. 정규직 됐다고 바로 은행에서 몇 억 대출해주는거 아니니까.”
“좋습니다.”
“다행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은성 씨랑 외부 미팅 좀 다녀올게. 수고들 하고 있어.”
“월요일 아침에 재무팀 오재식 상무를 단독으로 만날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날 결정한 것
같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양 전무의 방에 찾아온 차지열 상무는 뒤통수를 후드려 맞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대로 지켜만 볼거야? 그래서 그 자리에 제대로 붙어있을 것 같아? 나나 자네나 이 자리까지 올랐으면 칼 끝에
서 있는 거야. 임지은 사장 라인 탔으면 목숨 걸고 일이 되게 해야지, 어디 자기 목 걸지 않고 반정에 성공한
이가 있었어? 잘 생각해. 반정을 성공시켜 공신이 될지, 아니면 박쥐처럼 눈치만 보다가 목 잘리고 나가서
치킨집이나 차릴지.”
“죄송합니다. 연락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현진물산 비서실 소속인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인수를 결정하기 전에 최고 경영자인 구도욱 사장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비서실 임연희입니다.”
“비서실에서 오셨다구요?”
“회사 직원들 얼굴 봤죠? 다들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다니던데. 그리고 구내식당 식단이 그게 뭔지... 영훈
씨는 어떻게 봤어요?”
“구도욱 사장의 나이가 이제 오십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재신이 돌봐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주가 좋은게
맞는 건가요?”
“한 사람의 인생을 전체로 보면 나이 오십이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닙니다. 특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일가를 이루려면 나이 마흔이 넘는건 대수로울 것 없지요. 구도욱 사장의 사주는 만약
혜성기업의 사장이라는 말을 못 들었다면 중간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로요?”
“이 사람은 나이 마흔 지나서 모든 어려움이 술술 풀리고 사방에서 도움이 밀려오는 대운이 들어와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게 지금쯤이면 돈방석을 깔고 앉아도 한 두 개 깔고 앉은게 아닐 텐데 저러고 있는게 이상합니다. 진짜
생년월일이 잘못된 게 아닙니까?”
“잘못된 건 없어요.”
“흐음, 이상하다...”
“후... 그렇긴 해요. 영훈 씨의 의견이 그렇다고 해도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인수는 불가능에
가까울거예요.”
“그럼 괜히 온거 아닙니까?”
“으음~ 괜히 왔다기 보다는 어차피 인천 오는 김에 왔다고 생각하면 되죠.”
“사장님께는 어떻게 보고할겁니까?”
“당연히 모른척 할 생각이에요. 알고 보니 혜성기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일 수도 있다고 영훈 씨가 그랬다고 하면
엄마가 ‘정말 그러니?’ 하면서 회사를 인수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임원들이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
올릴 걸요? 대신 최대한 돌려서 말해볼게요.”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어머? 영훈 씨가 아니라 우리 현진물산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죠. 엄마한테 혜성기업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고 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조사하다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시든가요. 그런데 오피스텔은 어디에 있습니까?”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마침 조금 있으면 쉬는 시간이라 딱 맞춰서 오셨네요.”
“박현승 실장님은 어디 계세요?”
“아하, 네...”
연희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는 박현승 실장에게 남자용 장지갑을 건넸다.
“으음... 지금 확답을 드리긴 어렵고 회사에 물어보고 말씀 드릴게요. 그런데 초대해주신다는건 저희랑 가은
씨가 전속계약을 맺는데 아무 문제 없다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전속계약이야 다른 브랜드들도 하고 그러는데요. Nodri Clare 정도면 저희야 환영이죠.”
“아닙니다.”
“전속계약 얘기 하고 있었죠? 제가 오빠한테 이거 괜찮을 것 같다고, 하면 좋겠다고 말해놨어요.”
“어머, 고마워요.”
“제가 좋아서 협찬 받겠다는건데요. 오빠는 들어가, 이제.”
“어? 어, 그래...”
“어머, 이거 예쁘다.”
“예쁘긴 한데 가은 씨가 하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 이 컬러가 이렇게 잘 받기 힘든데.”
“그런가요?”
“그럼요. 이 역삼각형의 독특한 클로져와 나선형의 스트랩은 어지간한 사람이면 뭘 저런걸 했나 싶거든요. 딱
서가은 씨 것 같아요.”
영훈은 연희가 그렇게 열심히 브랜드를 홍보할 때 탁트인 송도의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지 얼마 안 된 높은 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그 사이에 잘 조성된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엄마가 무당이 되지 않았다면 나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았을까?
“영훈 씨.”
“네?”
“뭐해요? 그 숄더백 주세요.”
“아, 미안해요.”
“지루하신가봐요?”
“아닙니다. 다만 명품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으니 제가 끼어들면 대화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습니다.”
“되게 솔직하시네요?”
“좀 그런 편입니다.”
“그럼 솔직한 생각을 말해봐요. 이게 정말 나한테 어울리나요?”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네.”
“솔직히 동네 보세 옷가게에서 아무 옷을 걸쳐 입으셔도 어울릴 겁니다.”
“어머,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요? 칭찬 맞는거죠?”
영훈은 사실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본래 뛰어난 미인이 이런 상을 타고 나면 남자들은 겉만 보고 도도하거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데 알고 보면 천상 여자가 따로 없다.
남자들에게 이보다 좋은 배우자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장래희망이 현모양처일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특히 전에 노 대리가 서가은을 만나러 회사에 갔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면서도 별다른 악세서리를 하고 있지 않아 놀랐다는 말에 그녀의 성격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화려한 다른 것들보다 단순한 패턴의 깔끔한 지갑 하나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맞았는지 그녀가 놀라는걸 보면서 영훈은 스스로가 더 놀랐다.
“총각, 왔어?”
“네. 안녕하세요.”
“우리 딸이랑 인사했다며?”
“네.”
“회사는 좋지? 인턴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해. 그러면 혹시 알아? 정규직이 될 수 있을지?”
“지금 짐 챙기려구요.”
“아니 아직 기간 많이 남았는데... 벌써 간다고 해도 환불 안 돼. 알지?”
“어?”
“안녕하세요.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마지막이요?”
“네. 이제는 고시원 생활 정리하려구요.”
가볍게 츄리닝 차림의 그녀는 오늘도 그녀 엄마의 심부름으로 냉장고에 김치를 채우러 온 것 같았다.
“갈 데는 정하셨구요?”
“네.”
“잘 지냈습니다.”
“그래, 총각. 잘 지내고. 혹시 갈데 없으면 또 와.”
“안녕히가세요.”
씁쓸해 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택시로 연희가 찍어준 주소에 도착하니 아주 으리으리한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30 층은 넘어 보이고 주변에 식당과 편의점 등 각종 편의시설이 넘쳐났다.
공동현관을 통과하자 정중히 인사하는 경비원과 엘리베이터부터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괜히 수락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특히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꼈던 충격은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거실 가운데 화이트톤의 소파와 50 인치가 넘는 TV, 커튼을 열자 보이는 한강과 여의도의 야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영훈은 캐리어의 짐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20 년간 산에서 수양한 보람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평생 꿈꾸던 좋은 오피스텔에 왔음에도 들뜨지 않는 걸 보면.
그렇지 못했다면 저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모두 가지고 싶었을 거다.
날 무시한다고 고시원의 두 모녀에게 호통을 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그립다는 것.
그렇게 영훈은 커튼을 잡고 한참 동안 야경을 바라보았다.
“어이쿠, 오셨습니까?”
“욕심이 많으시네?”
“본인의 것을 찾는 건데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씀이 과하시군요.”
“이봐요, 전무님. 거래를 하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고 들이밀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내가 지금
협상의 ABC 도 모르는 사람하고 앉아있는건가?”
“회사 전 직원이 내 시야에 있습니다. 비서실, 기조실이고 전부 말입니다. 말씀만 해주시면 본부장님께서
원하시는...”
“하하하!”
"비서실장 이 개새끼가..."
휘문중-휘문고-연세대.
서울대에 진학을 못한게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양철기 전무는 자신의 출신학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과정을 밟으며 입사한 친구가 바로 홍승대였다.
얼마나 예뻐했던가?
좀 된다 싶은 사업은 밀어주고 리스크가 큰 사업은 다른 팀을 주면서 최대한 경력에 흠집이 없도록 도왔다.
하지만 서운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돌봐줬는데도 비서실장이 된 후에는 어느 선 이상의 정보는 결코 주지 않으면서 임지훈 사장에게 철저하게
충성했으니까.
하지만 임지훈 사장이 쓰러지고 송은채 사장 취임 이후 홍승대는 완전히 돌아섰다.
아니, 돌아섰다고 생각했다.
양 전무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고민했다.
이걸 바로 전화해서 조져야 하나, 아니면 모른척 넘어가야 하나...
양 전무는 차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엄마가 저녁에 한번 보자고 하세요. 그런데 어제 잠 못 잤어요? 왜 그렇게 아침부터 하품을 쌕쌕하고
그래요?”
“어제 잠을 좀 못 잤나봐요.”
“왜요? 오피스텔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행여 누가 들을까 소리 죽여 묻는다.
“어쨌든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죠?”
“네, 다행히도.”
“다행히도라니 솔직히 좀 그렇다. 보통 우리 회사 정도 되는 큰 회사 사장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있던 약속도
취소하는게 보통인데.”
“원래 내가 보통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연희는 그가 지방에서 올라와 가족도 없이 고시원에 살고 있는걸 아는데 약속이 많다니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늘은 또 뭔 일이라니?”
“요즘 우리가 뭐 실수할 일이 있었나요?”
“그럴 일이 어디어? 며칠 전에 신영투증한테서 주식 사오는 이후로 사장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거 너
못봤어?”
“봤죠.”
“그런데 왜 불러모은거야? 짜증나게...”
“...”
“난 우리 비서실은 다른 부서와는 달리 가족같은 분위기를 지향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다.”
가'좆'같은 분위기겠지.
“가족이라는 게 뭐야?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야. 적어도 이 비서실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어. 그래서 난 지금 참을 수가 없다.”
“...”
“저번 토요일, 점심 때 아가씨와 같이 신라호텔 결혼식장 간 사람. 여기서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 없지?”
당연히 모를 수가 없다.
연희가 입사하기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고 입사하고 나서는 어느 부서에 배치돼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누이 설명 들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연희랑 결혼식장을 갔냐니...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다른 일반적인 결혼식장도 아니고 무려 신라호텔 결혼식장이다.
재벌이나 톱스타들의 결혼식에 갈 일이 뭐가 있을까?
민희는 괜한 오해를 받는 이 상황이 억울하기만 했다.
“없어?”
“네.”
“좋아. 그럼 저번 토요일 점심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사람? 사진이나 카톡, 또는 영수증
같은 걸로 증명 가능한 사람.”
똑똑...
“들어와.”
“사장님.”
“응? 왜?”
“실은 오늘 홍승대 실장님이 토요일에 아가씨와 같이 신라호텔 결혼식장에 갔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는데요.”
“그런데?”
“홍 실장님은 우리 비서실 직원들 중에 아가씨와 같이 간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명함에 대해...”
“말했니?”
“아닙니다. 말해야 할지 몰라서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잘했어. 앞으로 모른척 해.”
“알겠습니다.”
역시나 물어보는게 현명했다고 생각한 민희는 송 사장의 이어진 말에 척추에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업무를 끝내고 연희와 헤어졌다가 다시 광화문에 있는 포시즌 호텔에 들어선 영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음식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하면 즐겁기 그지 없었다.
회사의 오너를 만난다는 부담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호텔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도 눈이 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눈이 갔다.
눈이 호강하는 느낌으로 식당에 들어서니 역시나 이번에도 송 사장님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난 뭐 보이지도 않아요?”
“30 분 전까지도 같이 있었지 않습니까.”
“에휴...”
해외명품팀 이윤재 팀장은 지금까지 어정쩡했던 포지션에서 확실히 긍정적인 포지션으로 바뀌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톱스타 중 하나인 서가은이 샤넬 계약을 끝내고 바로 다음 계약한 브랜드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니까.
“감사합니다. 서가은 씨가 우리 브랜드의 느낌을 굉장히 잘 살려주셨고 브랜드 가치도 충분히 이해하고
계셨어요.”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 특수를 누리려면 늦어도 12 월 중순에 들어가야 하는데 12 월 초에 계약이 종료되는 건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참... 저도 이럴줄은 몰랐는데 그쪽에서 임대료와 수수료를 더 올리는 조건으로 계약
연장을 요청했습니다.”
“네?”
“입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시기에 있어서는 조금 여유있게 생각하시는 게 어떤지 하는데요.”
본래도 백화점 매출에서 해외 명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줄어드는 소매 매출 때문에 해외명품팀에 대한 매출의 압박 역시 강해지는 상황.
그런 면에서 이윤재 팀장은 뉴월드 백화점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백화점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해외명품팀의 팀장을 맡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그의 눈으로 보건데 Nodri Clare 의 브랜드 자체 퀄리티나 매력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어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가 이번 서가은과의 전속모델계약 체결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입점계약 허가를 올렸고 윗선에서 오케이가 내려왔다.
모든게 순조롭게 진행되던 상황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계약 종료를 앞둔 브랜드의 계약연장 요청이 들어온 거다.
백화점 입장에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매장이 임대료와 수수료까지 올리며 계약 연장을 요청하니 거부하기가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상무님이시라면 누굴 말씀하시는거죠?”
“손혜수 상무님입니다. 잡화팀과 해외명품팀을 맡고 계십니다.”
“정확하게 말씀해주실래요? 저한테 손혜수 상무님께 요청을 해달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저와 만나고 싶다고
하시던가요?”
영훈은 본래부터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대화하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온 건 연희였음에도 그녀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연희가 말했다.
“선배님, 제가 먼저 말 걸었는데요.”
“그래? 연희 씨도 영훈 씨를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러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 연희 씨야 다 잘한다지만 영훈 씨는
아직 한참 부족하잖아.”
엄밀히 말하면 계약하기로 마음 먹고 나서 영훈을 만난 것이지만 어쨌든 은성으로서는 처지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박이야 할려면 할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와 싸우자는 것이고 그럼 연희에게 잘 보이겠다는 그의 계획은
물건너 가기 때문이다.
순간 연희가 멈칫한다.
“11 월 25 일이요.”
“한참 뒤긴 하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네? 왜요?”
“당신 사주가 아무리 잘나봤자 당신 아버지 사주가 길바닥에 나앉을 사주면 길바닥에 나앉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사가 아무리 경쟁력이 좋아도 IMF 맞으면 휘청이죠.”
“부르셨습니까?”
“요즘 홍 실장 어떠니?”
“어떻게?”
“평소 퇴근이 늦어질 때면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다 같이 먹는데 그 날따라
안 드시겠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퇴근할 때 뒤따라 갔습니다. 시키신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잘못된
행동이었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계속해.”
김민희는 안도한 듯 옅은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모름지기 대기업 비서실장인데 법인카드 결제내역 가지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지는 않는다.
송 사장은 내심 감탄했다.
눈치만 빠른줄 알았는데 의외로 똑똑하고 꼼꼼하기까지 하다.
“뭐야?”
“네?”
“왜 놀라고 그래?”
“갑자기 그렇게 서 계시니까 놀랜겁니다.”
“사장님이 왜 불렀어?”
“별 다른거 없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새로 나왔다는 허브차 직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셔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래? 무슨 허브차?”
“에몬스 사에서 나온 쟈스민 차를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회사가 있어?”
“네.”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널 찍어서 불렀지? 보통 그냥 직원 들어오라고 하잖아?”
홍승대 실장은 뭐 하나라도 허점이 보이면 물어뜯을 기세로 민희의 표정을 살폈다.
민희는 그 살벌한 기세에 떨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협박을 왜 합니까?”
“네? 그럴 생각 아니었어요?”
“미쳤어요? 말했잖아요, 그냥 물어본다고.”
“헐... 그럼 정말 순수하게 물어볼 생각이에요?”
“내가 뭐 바봅니까? 그래서 자료 모아 달라고 했잖아요?”
“그럼요?”
“연희 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면 손해본 쪽은 원한을 가집니다.
아무리 손해를 본 쪽이 약자라고 해도 원한을 많이 사면 그 악의가 언제 어느 순간 강자에게 닥칠지 모르는
거예요. 이건 당신이 언젠가 회사를 이끌어 갈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명심해두세요.”
“그래? 뭐, 그럴수 있지. 순순히 알려줄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근데 졸라 궁금해. 씨발, 우리 아빠도
모르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그것 때문에 술과 여자가 없으면 잠이 안 와.”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는 사람 몇 없으니까.”
“그거 듣고 닥치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진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연희 씨랑 사장님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날 뻔질나게 찾아왔겠지. 송 사장이 내 목에 개목걸이를 채운지도 모르고 말이야.”
“개목걸이라니요. 자학이 심하십니다.”
“개목걸이가 아니다? 좋아, 만나자고 했으니 이제 용건을 꺼내보지?”
“우리 회사 직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기는 하는데 남는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수익창출을 위해
자원개발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격이 급해서 본래 이런 잡설은 안 듣는데 오늘 내 처지가 처량하네? 큰 소리 한 번 못 치고...”
“하하. 그럼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한다고?”
“어? 아셨습니까?”
“뻔질나게 드나드는 인간 하나가 말해주긴 했지. 그래서?”
“뭐라고?”
“부회장님 동생분이 신영카드 사장님이시죠? 들어보니 그 자제분 능력이 출중하다고 소문 났다고 하던데.
신영카드의 시장점유율을 얼마나 올렸다더라? 하여튼 본부장님이랑 사촌 되시는 분이죠? 그래서 본부장님이
부실한 혜성기업을 우리한테 넘기려 한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래서?”
“당신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착각한 겁니다. 전 지금 본부장님을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다만
그냥 도와드리면 서로간에 신뢰가 쌓이지 않으니까 하나씩 주고 받으면서 상부상조하자는 말입니다.”
“이세준 부회장님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통하고 남자다운 성격이지만 굉장히 섬세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취미도
예술쪽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자식이 자신과 아주 다르게 생겼다면 한 번 쯤은 의심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심한 분이 이렇게 자신과 다른 미남의 아들을 보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보십니까?
평소에도 사람을 잘 안 믿으시는 분이?”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단순히 심부름 센터를 고용해서 알아냈다고 하지마. 그런 쓰레기들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그런건 아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영업비밀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앞으로 본부장님이 어떻게 하시느냐가 중요한 거죠.”
“씨발, 혀에 기름이라도 발라놓은 것 같군. 그런데 아버지가 알면서 왜 가만 뒀지?”
영훈은 말하지 않고 형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더 이상 이야기하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실례가 아닌 것 같은가?”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남의 비밀을 자꾸 들춰내봐야...”
“가식 그만 떨어. 도움을 준다고 했지? 그럼 도움을 줘. 내가 궁금한 건 왜 알면서 티를 내지 않았냐는 거야.”
“하나 뿐인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면 신영금융그룹 회장님이 본부장님의 아버님을 부회장에 앉혔을까요?
누군지도 모르는 핏줄이 그룹을 물려받을지도 모르게 될 텐데?”
“그럼 그룹 내 권력을 위해서 내가 친아들이 아닌줄 알면서 그냥 뒀을 거라고?”
형준은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들어서 그런지 지금 이 상황이 자신에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영훈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닐겁니다.”
“뭐?”
“솔직하게 물어보겠습니다. 부회장님께서 본부장님이 회사 내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십니까?”
“알고있듯이 난 신영은행이 아니라 신영투증 사람이야. 그래서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금액이 5 천억 이상은
안 돼.”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요?”
“대신 혜성기업 받아야 해. 나도 명분이 있어야지.”
“전부 제 손을 떠난 내용입니다.”
“뭐야? 전권 가지고 온 거 아니었어?”
“비서실에서 왔지 않습니까?”
“하... 이상한 놈이네. 뭐 그래. 이것까지 다 하면 부사장 달고 있어야 정상이지. 권한 있는 놈이 누구야?”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한도는 5 천억이야. 혜성기업을 받는 조건이고 돌아오는 5 천억
만기 채권은 연장해줄 수 있어. 다른 걸 원하면 그쪽 실무자들 협의해서 연락해, 당연히 나한테. 멍청하게
신영은행에 문의하지는 않겠지?”
“그 정도 머리도 없겠습니까?”
“너 아니고 다른 놈은 믿을 수 있어야지.”
“전 믿을 수 있습니까?”
형준이 씨익 미소지었다.
“넌 나 믿을 수 있냐?”
“전 본부장님 믿지 않습니다. 본부장님의 권력을 향한 욕심을 믿을 뿐이죠.”
“씨발, 협박하는 수준 보게?”
“오늘 즐거웠습니다.”
“잠깐만.”
“얼마 받아?”
“뭘 말입니까?”
“다 알아 들었으면서 모른 척하긴... 지금 얼마 받는지 몰라도 내가 거기서 0 하나 더 얹어줄게. 내 밑으로
와.”
이건 좀 놀랐다.
욕심 많기로는 그 한도를 측정하기 어려운 인간이 그인데 연봉 수십억을 제안한다니 그 배포가 놀랍기는 했다.
“죄송합니다.”
“졸라 비싸게 구네. 어쨌든 당장 옮길 생각이 없다는 거지,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잖아? 오케이.
알아두지.”
형준은 웨이터가 타 온 꿀물 한 컵을 순식간에 들이키고는 직원들이 싹 청소를 마치고 나가자 들어온 라면까지 싹
비웠다.
그가 휴지로 입을 닦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나이가 마흔 전후로 보이는 그는 늦은 시간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로 인사하며 형준의 옆 자리에 앉았다.
강주현 전무.
아버지인 이세준 부회장의 오른팔이자 복심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형준이 어렸을 때는 아저씨로 불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룹을 이끌 황태자를 뒤에서 보필해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 형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10 분 전까지만 해도...
이제는 모든게 달라졌고 형준은 살아남아야 했다.
형준의 분위기가 일변했고 강 전무는 단순히 술에 취해 강짜를 부리는게 아니라 사안이 심각함을 느끼고 있었다.
“본부장님.”
“강 전무 딸이 이번에 줄리어드 음대 합격했다면서? 학비 많이 들겠네?”
“아, 네 뭐...”
“그런데 강 전무가 횡령으로 검찰에 들어가면 명문대에 들어간 딸 어떡하나?”
“본부장님...”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저... 부회장님이 본부장님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정도만... 살려주십쇼. 전
시킨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습니다.”
“그럼 칼 가지고 와. 단번에 쳐낼 수 있는 날카로운 칼. 당신도 나도 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어.”
“설마 부회장님을...?”
“그래,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아버지를 날린다. 지금 골골하시니 몇 년 안에 가시겠지. 그럼 당신이 부회장
자리에 앉는거야. 어때? 할 만한 도박 아니야?”
“당신 영혼, 나한테 팔아. 그럼 부와 권력을 줄거야. 배신하면 지옥보다 더 큰 고통을 겪게 해준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
“충성하겠습니다.”
“엄마! 엄마!”
“뭐라고?”
“대신 조건이 있대요. 혜성기업 인수해야 한다는 조건. 대신 그거 받으면 내년 5 천억 만기 채권
연장해주겠대요.”
“진짜야?”
“이런걸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혜성기업을 얼마에 인수하는 조건이라니?”
“전에 인수제안 금액보다는 조정 가능하지만 정확한 가격은 실무자와 협의해보래요. 그리고 부채 일부 탕감에다가
말을 잘하면 더 얻어올게 있을 거래요.”
“왜? 이형준 본부장이 왜 우리한테 돈을 빌려주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것도 5 천억이나? 만약
우리 회사가 잘못되면 만기될 채권까지 합해서 신영은행에서 물어야 할 자금만 1 조 원인데?”
“그건 나도 모르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이형준 본부장이 장난 치는거 아니니? 신영그룹을 물려받을 손자가 왜 이런 거래를 해?”
“...”
“일단 내일 되면 정확히 알게 되겠지. 진짜인지 거짓인지...”
“입점제안서랑 PPT 자료 챙겼지? 샘플은 가방 하나만 챙기고 서가은 화보파일 잊어먹지 마.”
노 대리는 윤성우 부장의 격려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미래백화점 강남점으로 향하려 할 때 윤 부장이 영훈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최영훈이 맞지?”
“네, 맞습니다.”
“야, 얘도 데리고 가야 하냐?”
노 대리는 영문을 몰랐지만 영훈이 회의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심부름 하나 시켜도 되지?”
“물론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가 봐.”
“너 힘 좀 쓰냐?”
“솔직히 힘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래 보이긴 한다. 그런데 가야 해. 너 ‘레이디 로렌’이라는 브랜드 알지?”
“네.”
“그거 우리 거거든. 이번 가을 신상으로 코트 하나가 나왔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래서 공장에서
지원을 요청했는데 각 팀의 막내들이 가야 할 것 같아. 연희는 로열패밀리인 거 너도 안다며?”
“알고 있습니다.”
“원래 그쪽 사람들이 허드렛일 시키면 죽는줄 알아. 해본적도 없을 테니까 가도 도움도 안 될거야. 네 동기들 다
갈 테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괜찮습니다. 가야죠.”
“그래, 1 층에 버스 불러놨으니까 가서 고생 좀 하고 와.”
“아저씨!”
“늦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버스 10 분 뒤에 출발한대요.”
“그런데 그 옷 입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이윤지는 무릎 위 허벅지로 올라오는 타이트한 치마를 입고 있어서 아무래도 일을 하기에는 적합한 복장이 아닌 듯
보였다.
장가람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영훈은 그들을 데리고 회사 건너편에 위치한 푸드트럭으로 향했다.
“그냥 느낌이 그래. 사장님이 돌려서 말하긴 했는데 결국 결론을 내보면 모른다는 말이더라고. 왜 모를까?”
“왜 모를까요?”
“씨발, 그러니까... 신영은행 애들이 미친 건가?”
“은행 애들 보통 똑똑한거 아닙니다. 돈 굴려서 돈 버는거에 미친 애들이에요.”
“내가 그걸 모르겠냐? 어쨌든 이거 들고 올라가보면 알겠지.”
어떻게 말해주겠는가?
지금 평택 공장에 내려가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신입사원 중 하나가 이 엄청난 딜을 이끌어낸 담당자라는 걸
말이다.
띵띵 띠딩띠!
“그거 안 받으시면 거래 안 됩니다. 무조건 받아야 해요. 대신 너무 비싸서 걱정이시면 천억만 주고 나머지
금액은 분할납부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세요.”
분할납부라니...
이 정도면 신영은행을 거의 벗겨 먹겠다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이! 최영훈 씨! 농땡이 치지 말고 이거나 날라. 그리고 젊어서부터 전화로 막 허세 부리고 그러면 안 돼.
천억이 뉘집 애 이름인 줄 아나...”
뚜... 뚜...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다 같이 버스 타고 왔는데 늦는게 당연하죠. 앉아요.”
“어떻게 됐나요?”
“잘 해결됐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천억 지불하고 나머지 1.500 억은 3 년간 500 억씩 분할납부하기로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형준 본부장이 그런 딜을 받아줄 수가 있죠? 이건 은행 입장에서 대단히 부담스러운
대출이에요. 게다가 혜성기업 인수대금 분할납부를 허락한다는건...”
“이게 알고 보니까 혜성기업에 신영은행에서 많은 돈을 집어 넣었고 앞으로도 회생 가능성이 안 보이다보니까 돈
먹는 하마가 되기 전에 빨리 털어버리는 게 낫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쉽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죽을 뻔한 이형준 본부장을 살려줬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그래서 조금 유리한 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설마 죽고 산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 진짜는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형준 본부장에게는 이게 비유만이 아닐 겁니다. 그에게는 죽음이나 다름 없거든요.”
“도대체 그게 어떤 일인데 그러죠?”
“앞으로 신영그룹에서 후계자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이형준 본부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구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은 이게 답니다.”
“그러니까 누가 이형준 본부장을 밀어낼 생각이었고 본부장은 그걸 모르고 있다가 당신이 알려준 거군요.”
“맞습니다.”
“미안해요. 돈에 연연하지 않는걸 깜빡했어요. 이걸로 식사나 교통은 물론이고 사고 싶은게 있으면 언제든지
보고 없이 사도 괜찮아요.”
“이건 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돈을 최고로 알고 살아와서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게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부서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왠지 이 말은 나올 것 같았다.
“비서실로 말인가요?”
“그래요. 오늘처럼 중요한 상황에서 갑자기 불려나가 일하는 사태는 없어야 하니까요. 솔직히 굉장히 당황했어요.
직원이 내 전화를 먼저 끊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거든요.”
“아, 그건...”
“아니에요. 책망하는게 아니라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영업 2 팀 신입사원의 신분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라구요.
당신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봤어요. 하나의 사업부서에서 잡일을 하며 천천히 배울 사람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에요. 꼭 영업 2 팀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옮겨 줬으면 하는데, 어때요? 싫다면 더 말하지 않겠지만
이건 부탁하는 거기도 해요.”
“알겠습니다.”
“직급은 과장급으로 하되 승진 속도가 기형적으로 빨라서 외부에는 알리지 않도록 할게요.”
과장이라니...
직장인의 성공으로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나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산에서 지내온 세월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주와 관상이라는 건 곧 사람의 인생을 말함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통달하지 못한다면 사주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번 일도 이형준 본부장과 이세준 부회장의 희로애락애오욕을 완전히 꿰뚫어 보지 못했다면 아마 술집에서
어설프게 대화하다 얼간이 취급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20 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을 공부했던 건 결코 낭비한 삶이 아니었음에 영훈은 뿌듯하고 감사함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기조실로 보내서 회사의 컨트롤 타워를 맡게 해주고 싶지만 임원들 생각이 다 나 같지는 않아.
그리고 아마 기조실로 보내놓으면 견제한다고 아무것도 못하게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비서실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면 될거야.”
“제가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십니까?”
“무리한 건 원하지 않아. 자네 능력껏 회사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주면 돼. 거기에 필요한
지원은 내가 해줄게.”
“알겠습니다.”
[인사발령 공고]
“야! 이거 뭐...”
비서실 직원들도 연희가 사장의 딸인 걸 알고 있기에 그가 높임말 하는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희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웃음으로 대답을 넘길 때 갑자기 사장실 문이 열리며 송은채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자 송 사장이 말했다.
연희가 인사하자 비서실 직원들은 박수를 치면서도 허리도 같이 숙이는 재밌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리고 여기는 최영훈 씨. 임연희 씨와 같은 신입사원이지만 임연희 씨와는 다르게 과장급으로 대우 부탁해요.
외부에는 비밀이고 공식적으로는 사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안녕하세요. 김민희라고 합니다. 짐은 여기다 내려놓으시면 되구요. 성함을 부르긴 그러니까 주임님으로 불러도
될까요?”
“네, 그래주세요.”
“식사 못하셨다고 하니까 샌드위치라도 시켜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주임님?”
홍 실장은 3 년이나 먼저 입사했음에도 거리낌 없이 주임님이라고 불러대는 민희를 보며 멍청한 년이라고 속으로
욕하곤 바로 비서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인사과에 가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런 홍 실장의 행동을 영훈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웬일이냐? 나를 다 찾고?”
홍승대 실장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쪼개는 민 과장을 보며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새끼... 너 몰랐구나?”
“어.”
“비서실장이 모르는 인사였다 이 말이지?”
“그게 끝이야?”
“그래, 끝.”
“고맙다. 충고 가슴에 새길게.”
“그리고 너...”
“왜?”
“잘 생각해. 바람이 바뀌고 있어. 바람이 바뀌면 돛을 조정해야 해.”
“왜 저래요?”
“뭘 말입니까?”
“저 김민희라는 여자요. 언제 봤다고... 저러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건 그렇고... 비서실 온 거 후회 안 합니까?”
“당연히 안 하죠.”
“왜요?”
“당신 옆에 있는게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홍 실장님은요?”
“그분은 좀 지켜봅시다.”
“왜요?”
“직책이 직책이다보니까 단순히 상으로 판단하기 그래서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몰라요? 지금 처음 들어요?”
“죄송합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회사에서 5 억만 펑크나도 줄줄이 경위서를 올리고 관련자 책임소재 파악해야 하는데,
경영지원본부장이 회사에서 5 천억 대출을 신청한 것도 모르면서 죄송하지 않으면 월급 너무 날로 먹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연한 소리는 그만하고... 왜 죄송한 상황이 생겼는지 설명이라도 해야 내가 당신을 계속 믿을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싹다 잘라버릴지 결정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아, 나 머리 아파. 아줌마! 나 시원한 냉수 좀
줘.”
거절될 상황이었으면 임지은 사장이 이리 난리를 치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당황한 마음에 급하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다가 크게 실수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연매출이 7 조원이 넘는 거대 기업이 은행에 대출신청을 할 때는 이미 실무자와 협의를 다 하고 진행한다.
어느 대기업이 서민들처럼 대출 신청해놓고 나오면 좋고 안 나오면 망한다는 마음으로 기도나 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심사는 요식행위나 다름없는 것.
결국 대주주나 경영자가 태클을 걸지 않는 이상 대출이 진행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임지은 사장은 냉수를 마시고 치솟는 화를 잠시 가라앉혔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건 일리가 있네. 올케네 집안이 정치권과 인연이 깊었지, 아마? 어디보자... 여당 이건호 사무총장이
올케 부친 동창이지?”
“맞습니다.”
“접촉해봐. 진짜 이건호 의원이 손을 쓴 건지. 아니면 여당 다른 의원이 움직인 건지 말이야.”
“기조실 통해서 움직여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이형준 본부장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하더니 빈 손으로 밥만 먹고 눈뜬 장님 됐잖아. 그리고
주식을 시장가 그대로 사왔었지? 그래.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럼 그것도 오재식 상무
작품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갑자기 혜성기업을 인수하라는 압박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혜성기업을
우리가 사고 대신 대출을 받는 제안을 했다면 어쩌면...”
“아닙니다.”
“홍 실장은 뭐 아는거 없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너 다른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시기야. 임지은 사장님이 마음을 굳게 잡수셨어. 여기서 실수하면 너나 나나 앞으로 치킨집 사장
되는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습니다. 전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이자고.”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어때?”
“민희 들어와.”
잠시 후 들어온 김민희에게 송 사장이 미소지으며 물었다.
“어제 새로운 식구가 왔기 때문에 간단하게 회식자리를 가졌습니다. 홍승대 실장님도 참여했는데 회식 중간에
갑자기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래서 또 따라갔어?”
“네.”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논현동 고급빌라 단지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혹시 따라가다 들킬까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돌아왔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체크해보니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님 댁에 가까웠습니다.”
“너 따라가면서 안 무서웠니?”
“긴장되긴 했는데 짜릿하더라구요.”
“고생했네.”
“감사합니다.”
“나가서 최영훈 과장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민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훈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긴장 하나 없이 들어온 그는 사장실을 한번 둘어보고 싱긋 웃었다.
“왜 웃어?”
“좋네요.”
“마음에 들어?”
“그냥 인테리어가 고급 같아서 그랬습니다.”
“앉아.”
“네.”
“홍승대 실장이 임지은 사장 집에 갔었다고 해. 그냥 불렀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 신영은행 5 천억 대출에 대해
알아내지 않았을까 싶어. 뭐, 홍 실장 뿐만 아니라 다른 임원들 몇몇도 같이 갔겠지. 어떻게 생각해?”
“처음부터 저한테 너무 무거운 질문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거 물어보려고 과장급으로 올려준거야. 꼭 엄청난 비밀이나 제갈공명이 울고갈 비책을 듣고자 하는것도
아니야. 앞으로 이런 질문은 그냥 편하게 대답해주면 돼. 부담없이.”
“알겠습니다. 부담없이... 홍승대 실장님은 조금 지켜보시죠?”
“왜?”
“뭘 꾸미고 왔다기에는 아침부터 너무 근심이 많아 보였거든요.”
“확실히 사장님의 걱정이 일리가 있습니다. 전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임지은 사장님 쪽에서 어떤 방법을
쓸지 모르니 함부로 단정 지으면 안 되겠네요.”
“대출이 중단된다고 해도 최 과장을 탓할 생각은 없어. 어차피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왕
일이 진행된 마당에 설사 대출이 안 되더라도 내년에 돌아올 5 천억 만기 채권은 연장해야 해. 그것만 연장하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도 문제는 없을 테니까.”
“그건 걱정마세요. 아무리 큰 압박을 받아도 이형준 본부장이 본인 살기 위해서라도 만기 연장은 잡아줄 겁니다.
그것보다...”
“응?”
“현진고속이라는 회사에 대해 알고 싶어요. 사장님 입장에서 가장 큰 적인 거잖아요.”
영훈은 양 손을 들었다.
송 사장은 계열사 몇 개 떼어준다는 말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영훈의 모습에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아닌 척하는게 아니라 진짜 눈꼽만큼도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임지은 사장이 가진 기업체는 두 개야. 하나는 현진고속, 하나는 현진관광. 현진고속은 여객운송업을 하는
회사야. 많은 고속버스를 보유하고 있고 터미널도 몇 개 가지고 있어. 상장된 업체가 아니라서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걱정이 없지. 그 현진고속이 현진관광 지분을 50% 가지고 있어. 주로 국내외 호텔을 다수 보유하고 있고.”
“그 두 개 회사는 큰 어려움 없습니까?”
송 사장이 눈을 빛냈다.
사장실을 나온 영훈은 자신을 은근슬쩍 훔쳐보는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희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 임연희 씨. 비서실로 옮겼다는 거 들었어. 앞으로 자주 보겠어?”
“하하, 네...”
“할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이름이 뭐라고?”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학교가 어딘가?”
“말해도 잘 모르실 지방대를 나왔습니다.”
“말해도 잘 모르는 지방대를 나와서 비서실로 왔다고? 특이하군.”
연희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내가 말하는 여자 문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따로 집 해주고 차 사주고 그런 첩같은 걸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럼요?”
“양 전무님의 눈을 보면 검은자위가 몽롱하면서 눈꺼풀이 두텁고 눈 전체가 어둡습니다. 이런 눈을 관상에서
돼지눈, 저안(猪眼)이라고 하는데 성품이 거칠고 흉폭한 경우가 많죠.”
“네? 그렇게 보이지는...”
“그래서 저 눈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저 자리까지 오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거칠고 흉악한 성정을
자제하지 못하면 저 자리까지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
“그럼요?”
“저안의 또다른 특징 하나가 음욕이 강하다는데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풍족하게 살았다면 여자가 부족하지
않았을 테고 자신의 거친 성향을 음심으로 풀면서 달래왔을 겁니다.”
“아~ 그래서 여자가 많을거다?”
“단순히 많을 거다라는게 아니라... 어쩌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지금도 자신의 음욕을 풀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떡합니까? 사실 사주를 봐야 정확하지만 아까 당신을 쳐다볼 때 흘리는 음심으로 보건데 아마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니 당신이 알아서 방법을 강구해야죠. 뒤를 밟든 은밀히 수사를 하든.”
“날 볼 때 음심이 흘렀다구요? 진짜?”
“보기보다 감이 없으시네. 그런데 계속 여기에 서 있을겁니까?”
“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멸치국수 국물 끝내주게 하는데 있는데 어때요?”
“국수만 먹기에는...”
“그 집 왕만두도 죽여요.”
“갑시다.”
양철기 전무와 차지열 상무는 회사에서 좀 떨어진 관철동 먹자거리의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룸이 나눠져 있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하고 음식 맛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감사하다구요?”
“그럼요.”
“그럼 절 만나자고 한 건 무슨 이유입니까?”
“그거야...”
“5 천억 대출이 어떻게 진행된거냐 물어보시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괜히 없는
시간에 찔러보느라 시간낭비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죠.”
“나갑니다.”
“5 천억 전부?”
“1 원 한 장 안 빼고 다 나갑니다.”
“누가 개입한 겁니까?”
“위에서 내려온 겁니다. 전 정확히 누가 개입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위? 어느 위를 말하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가 개입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양 전무가 봤을 때 누가 이 대출을 주도했는지
알아내는건 힘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회사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요. 같은 회사 사람에게 이렇게 혜성기업 인수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진행할 줄이야.”
*
“흐음... 짐작도 안 가네. 아 정말 생년월일 확실한 거예요?”
영훈은 혜성기업 리포트를 계속 들여다보았지만 애초부터 어떤게 어느만큼 가치가 있는지 볼 줄 아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을 게 없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들여다 본다고 뭐 알아낼게 있을까.
자신이 알아낼 정도면 이미 전문가인 다른 사람들이 진즉 알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거라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유, 모르겠다.”
양철기 전무는 불편한 점심 이후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고심중에 있었다.
일단 혜성기업을 천억 플러스 분할납부 형식으로 인수하기로 결정난 걸 들은 이상 임지은 시장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임 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듣는 거야 좀 참으면 그만이지만 이 이야기가 회장님 귀에 들어간다면 이후에 현진물산이 임
사장 손에 들어가도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게 뻔했다.
대출을 막든, 혜성기업에 폭탄을 하나 더 얹어서 회사에 부담을 주는 방법을 만들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 도 부장이 자신도 잘 모르는 윗선이라고 한 걸로 보아 오너가 직접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결국 돌고돌아 이형준 본부장의 손에 닿았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형준 본부장을 다시 만나야 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온 신경이 머리로 곤두서는 느낌이 그의 가슴을 옥죄여 왔다.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거지?”
“안녕하십니까. 감사실 조영주 과장입니다. 간단한 설문조사 후 다시 부서로 복귀하셔서 근무에 열중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빠르게 작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영지원본부장님 비서 말이야?”
“맞습니다.”
“왜?”
“야, 너 나와.”
조 과장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영훈을 데리고 나가려는데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연희가 다가왔다.
“과장님?”
“어?”
“사장님께서 감사실 지원 부탁하셨던거 기억하시죠?”
“아무리 사장님이라고 해도...”
“싫으시면 그냥 가시면 됩니다. 저희는 사장님이 시키신 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연희 씨... 아무리 연희 씨가 사장님...”
“아닙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 합니다. 경영지원본부장님 비서를 성희롱 의심으로 감사실로 부르면 일이 커집니다.
자칫 잘못하면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박운재 부장은 또 다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맞은편에서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 전무의 고함소리가 끝나자 말했다.
“들었지?”
“네.”
“악셀 밟을거면 제대로 밟아라. 아니면 너 내일 바로 퇴사야. 그냥 퇴사도 아닐걸? 그냥 넘어갈 분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이 양철기 전무님 스타일이 어떤지 알고 있다고? 자신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거야. 오만도 적당히 부려야지.”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어쨌든 하실 말씀은 다 끝나셨습니까?”
“후... 들어가.”
“알겠습니다.”
“왜 다시 나와?”
“연희 씨가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야, 벌써 끝난거야?”
“분위기를 보니 제가 있어서 좋을 것 같지는 않고, 벌써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뭐 그러든지. 빨리 끝내면야 좋지.”
홍승대 비서실장은 오늘 갑자기 시행된 여직원 대상 성희롱 예방교육 이야기를 듣고 뒷덜미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신영투자증권에서 주식을 시장가 가까운 가격에 가져올 때만 해도 그저 운이 좋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5 천억 대출을 진행시킨 걸 알았을 때 지금까지 가졌던 송은채 사장에 대한 모든 편견을
거두어들였다.
애초부터 송은채 사장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임지은 사장이 현진물산을 인수해서 경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지은 사장보다 송은채 사장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송은채 사장을 싫어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것만 가지고도 송 사장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오늘 이루어진 기습적인 성희롱 예방 교육.
그리고 감사실에 경영지원본부장 비서가 조사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은밀히 전해 들은 직후 송은채 사장이 양철기
전무의 치명적인 약점을 제대로 저격했음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그런 행각은 자신과 몇몇 말고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는데...
홍 실장은 이 모든 행동이 송 사장의 실력인지 아니면 새로 온 최영훈이라는 놈의 실력인지 궁금했지만 이내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한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송 사장의 실력이 아니면 어떤가?
송 사장이 오른팔로 생각하는 직원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건 곧 송 사장의 능력이 뛰어난 것 아니겠는가?
홍 실장은 얼른 자신의 서랍에서 비밀열쇠를 사용해야만 열 수 있는 칸을 열었다.
안쪽 깊숙이 잠자고 있었던 USB.
그걸 쥐는 홍 실장의 손이 조금 떨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홍 실장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부르셨습니까?”
“응, 그래. 앉아.”
영훈은 이런 대화를 하는 상황이 의외이긴 했지만 어차피 홍 실장에 대한 평가는 조금 두고 보기로 했기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약 증거가 나오면 양 전무를 날릴 수 있겠지만 어설픈 증거로는 오히려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야.”
“일은 좀 복잡해도 됩니다. 중요한 건 옷을 벗기는 거라서요. 아무리 뒷배경이 좋아도 일단 옷 벗기면 힘 못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법무팀이 비서의 억울한 일을 다 밝혀낼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도와달라는 말입니까?”
“하하하, 역시 사장님이 자네를 과장에 단 이유가 있군. 그래, 난 양철기 전무와 동급으로 엮이고 싶지 않아.
난 내가 지금껏 일해온 이 회사가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랄 뿐이야.”
“알겠습니다. 증거를 보고 판단하죠.”
“이런 씨발,,,,”
“전무님.”
“야, 너 뭐야!”
“죄송합니다.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너 이 새끼가 지금...”
“죄송합니다. 모셔.”
“뭐, 뭐라고?”
“위력을 이용한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굉장히 심각한 범죄입니다. 회사에서는 이 일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 대한 민‧형사상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그렇기에 있었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피해자와...”
양철기 전무는 참지 못했다.
“이 개새끼가!”
짝!
“일단 알겠습니다. 해당 내용은 법무팀에 인계하겠습니다. 전무님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출근하실 수 없습니다.
가지고 계신 핸드폰 반납 부탁드립니다.”
“이... 이 새끼...”
“꺼내.”
“지금 이대로 회사를 나가시면 됩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옷가지 등 당장
가지고 나와야 할 게 있으십니까? 직원 올려보내서 가져오겠습니다.”
“...”
“없으면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논현동으로.”
“씨발...”
“왔어요?”
“늦었습니다.”
“퇴근시간도 전에 출발했는데 늦을게 있나. 그나저나 차 상무?”
“네.”
“그, 그건...”
“모르겠지? 차 상무는 우리 양 전무가 그렇게 정정한지 알았어?”
“몰랐습니다.”
“왜? 룸싸롱도 자주 다녔을거 아니야?”
“그쪽으로는 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의외네? 뭐 어쨌든 차 상무도 잘 모르는 일을 올케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빠르게 처리했을까? 나도 우리
양 전무가 이렇게 이팔청춘처럼 살고 있는지 몰랐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다.
임 사장의 말에 틀린게 없었다.
“맞습니다. 분명 이상합니다.”
“그래~ 설마 성희롱 예방 교육을 했다가 우연찮게 걸려서 양 전무 목을 날렸다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랬으면 지금까지 수많은 성희롱 교육에서 말이 안 나왔을 리 없습니다. 특히 감사실장은 양 전무님과 무척
가까웠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인간입니다. 작년에 김장 담글 때도 감사실장
부인이 찾아와 도와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 정도야? 그런 감사실장이 우리 양 전무 모가지를 직접 날려버렸네? 그 감사실장이 양 전무한테
원한이라도 품어서 그럴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결론은 우리 깜찍한 올케님께서 양 전무가 경우 없이 허리를 막 놀린다는 걸 알고 그 빌어먹을
교육인가 뭔가로 목을 날렸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알아와, 그게 뭔지. 올케 옆에서 옆구리 찔러대는 놈. 그놈이 누군지 알아오라고. 그걸 알아야 뭔가 대책을
세울거 아니야? 안 그래?”
“알겠습니다.”
“제대로 알아오지 못하면 차 상무도 여기 이 인간처럼 이러고 있게 될 거야.”
“저런 걸 믿고 내가...”
“관상은 우리처럼 배운 사람들만 보는게 아니라 당신이나 사장님도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꼭 보려고
노력한다기보다 살아온 세월을 통해 경험적으로 까칠할 것 같다, 위험하다, 또는 가까이 지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죠.”
“뭐, 주는 것도 없이 보면 좋은 사람이 있고 말도 섞기 싫은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아요.”
“그게 다 맞다거나 틀리다는게 아니라 그 살아온 세월 동안 겪었던 경험들이 축적돼서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봤을 때 양 전무 같은 인간 쓰레기도 사람을 볼 때 본능적으로
건드려도 될 것 같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판단하게 될 겁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지만요.”
“어쨌든 그래서요?”
“대개 눈이 크고 동그라며 귓볼이 두툼하고 광대가 살아 있으면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마련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착하게 생겼다는 말로 평가되며 실제 감정이 섬세하면서 인정에 약하고 애착과 미련이 많은 편에
속합니다. 특히 눈동자가 까맣고 깊으면 눈물이 많은데 이런 분들은 뭔가 꼭 억울한 일을 당할 것 같고 슬픔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왜요?”
“당신은 마음에 안 들면 바로바로 말해야 직성이 풀릴 테니 적어도 말 못해서 생기는 홧병은 안 걸릴겁니다. 대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부족하니 크게 다툴 가능성이 있죠.”
“허... 와... 이렇게 멕이는 거예요?”
“자신의 성격을 아는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신을 모르면 본인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도
모르죠.”
“아, 예~ 그러겠죠.”
“나도 따로 연락해보지는 않았어요. 어차피 집에서 만나면 물어보면 되니까. 모르긴 몰라도 엄청 좋아하겠죠.”
“지금 가는 거예요?”
“네. 지금 나가야 얼추 시간을 맞출 것 같습니다. 일 더 하다가 갈겁니까?”
“그래야죠. 오늘 일도 그렇고 당신이 나한테 준 일거리도 다 체크해야 하니까. 한동안 빡세겠어요.”
“수고해요.”
“예약하셨습니까?”
“이형준으로 예약돼있을 겁니다.”
“아, 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왜 이렇게 늦어?”
“퇴근 시간이니까요. 누구처럼 퇴근 전에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나 안 그래. 나도 출퇴근 칼 같이 지키기로 했어.”
“지금까지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고기는 내가 알아서 시켰어. 괜찮지?”
“얻어 먹는 입장에서 그런거 따지겠습니까?”
“내가 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건 그것대로 좋죠. 선물 한 가득 안겨주고 고깃값 계산하라고 하면야 그거 못하겠습니까?”
“내가 내 돈 빌려주고 밥 사라는 소리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엄밀히 말하면 신영은행 고객의 돈임에도 그는 당연히 자신의 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툴툴거리다가 직원이 고기와 음식, 숯불을 세팅하고 나가자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고기는 제가 구울까요?”
“됐어. 이런건 원래 을이 해야 하는 거거든.”
“거 참, 상하관계 확실하게 정해놓으시네요?”
“그래야 언제고 내가 너 제대로 부려먹을거 아냐? 원래 엎드려야 할 때는 어설프게 엎드리면 안 되거든. 너도
언젠가 그 때가 오면 내 앞에서 납작 엎드려야 한다. 크크크...”
농담인지 진심인지...
그런데 이형준 본부장의 얼굴을 보니 전에 룸싸롱에서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어째 결혼식 때만큼이나 활력이 돌아 보인다고 할까?
“뭐 좋은일 있습니까?”
“그래 보여?”
“네.”
“그래 보이면 다행이고. 사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다. 씨발, 언제 눈뜨고 일어나면 납치돼서 통통배 타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도 편히 못 자.”
“그건 좀 너무 가신 것 같은데요? 누가 보면 조폭하다가 배신하는줄 알겠습니다.”
“둘 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인데 다를게 없지. 한 잔 해.”
형준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영훈을 바라보다가 웃는건지 우는건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싹 정리하고 나면 이제 네 세상 되는건가?”
“전 그런거 관심 없습니다.”
“씨발, 도 닦았나.”
“뭐 그런 이야기는 됐고,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진짜 고기 먹을 친구가 없어서 만나자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하하, 진심이십니까?”
“장난 같냐?”
“장난은 아닌 것 같지만... 설마 그걸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습니다. 양 전무처럼 여자를 밝힌다거나 했으면
하는 마음이겠죠?”
“솔직히 쉽게 마무리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부회장님 쉬운 분 아닐 겁니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맞아. 지금 아버지 오른팔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단번에
승부를 볼만한게 안 나와.”
“상환계획 먼저 들어볼까요?”
“너 양철기 전무 날린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너 임창호 회장한테 경고한거야. 현진물산 넘보지
말라고. 크크크큭... 너 이 새끼, 네가 눈치만 보던 형제들 싸움에 불을 질렀어.”
“그래서요?”
“내가 친구가 돼주지.”
“일단 한 잔 하시죠.”
“뭘 해줄까?”
“지금 당장은 됐습니다.”
“뭐야? 방금 전에는 말로는 안 된다며?”
“더 빌려줄 수 있는 돈도 없다면서요?”
“그랬지.”
“그럼 가지고 있는 주식들 가지고 도와주겠다는 말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상환계획을 물어본건 본부장님의 진심이 어느정도일지가 궁금해서 그랬던 겁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뭐라도 해줄 마음인 걸 알았으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사실 영훈도 뭐라도 요구하고 싶지만 당장 회사에 5 천억 대출이 들어오는 마당에 크게 도와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임창호 회장의 심경을 긁었다는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오버해서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웃기다.
그룹 지분에 관한 사항과 계열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섣불리 이야기를 꺼냈다가 괜히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형준에게 당장 엄청난 비밀이야기를 해줄 것도 아니었다.
“부회장님은 섬세하고 꼼꼼하신 성격이며 남을 믿지 않는 분이라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쉽게 내보일 사람이
아닙니다.”
“맞아.”
“주변에 여자는 있을지 몰라도 고작 그 문제로 회사에서 내보낼 순 없겠죠.”
“당연하지.”
“말이 쉽지. 무슨 수로? 그 사람들 못해도 10 년 넘게 아버지랑 지지고 볶던 사람들이야. 강 전무야 내가 약점을
틀어쥐고 있으니까 넘어왔지,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를 배신할 리가...”
“본부장님.”
“왜?”
“부회장님 스타일이 아랫사람들 다 포용하면서 덕장처럼 끌고가는 스타일인가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 말은 진심일 거다.
그의 가슴 밑바닥에 깔린 공포심이 아니라면 그가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하나 말씀드리자면 언제고 본인 성격을 못 이기고 급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내 성격이 어떤데?”
“딱 봐도 느긋하고 차분해 보이는 성격은 아니시잖아요?”
“훗, 그렇지.”
“참으세요.”
“그게 쉬울까?”
“어려우면 본부장님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두시든지.”
“네가 옆에 있으면 안 되냐?”
“원래 친구끼리 동업하면 의 상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식사는 하셨어요?”
“그럼요. 식사하셨죠?”
“물론입니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니 연희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어제 무슨 얘기했어요?”
“어제는 특별한 이야기 없었습니다. 그냥 이번 대출에 대해서 문제될게 있는지에 관해서 대화했으니까요.
사장님은 어떠십니까?”
“엄마는 좋아하던데 아빠는 무척 걱정하셨어요.”
“어제 전 사장님 만났습니까?”
“네. 요즘 가끔 가서 만나긴 해요. 뭐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 앞으로 회장님이 우리 회사에 개입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더라구요.”
“그건 미리 걱정해봤자 소용 없으니 우리 일에만 집중합시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영훈은 다시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달력을 집어 들었다.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훈을 보며 연희가 불만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금 불쑥 머리를
들이밀고 달력을 가리켰다.
“바쁜가?”
홍승대 실장이다.
“괜찮습니다.”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네.”
“담배 하나?”
“아닙니다.”
“담배하셨습니까?”
“비서실장이 되고 나서부터 몸에 냄새가 배일까봐 하지 않고 있었지.”
“담배를 다시 한다는 말씀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다는 말씀인가요?”
“거짓은 아닌 것 같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좌천시키시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인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이번에 실장님의 공이 컸으니까요. 다만 이번 일로 공석이 꽤 생길 겁니다. 아마 그
자리에 실장님을 앉히려고 할 수도 있죠.”
“빈 말이라도 기분이 좋군.”
“전 이런 일로 빈 말 하지 않습니다.”
전 직원이 살 떨리는 심경으로 지켜보는 이 상황을 ‘고작 이런 일’로 치부하는 영훈을 보면서 홍 실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갈수록 자네가 좋아지는 것 같아. 적어도 내 뒤에서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거든. 그런데 혹시...”
“저기, 홍 실장!”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평소의 홍승대 실장이라면 당연히 자리를 피해 따로 이야기를 나눴을 테지만 지금 상황이 참으로 얄궃었다.
홍 실장이 생각했을 때 사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영훈이었고 자신과 강 실장은 양철기 전무와
상당히 친했던(?) 사람이었다.
아마 양 전무가 남기고 간 핸드폰에 강 실장과의 수많은 대화와 기록이 남아 있을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홍 실장으로서는 절대 영훈 앞에서 자신을 의심할만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특히나 방금 전에 좌천이 아니라 핵심 부서 임원으로 계약을 하게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은 상황 아니던가?
자중하고 또 자중해야 할 때였다.
“그럼요.”
강 실장은 홍 실장이 그대로 그 자리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걸 보고 ‘이 새끼가 왜 저러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얘기 좀 해.”
“네, 하세요.”
그제서야 강노식 실장은 홍 실장이 지금 다른데 정신 팔려서 개념 없이 행동한게 아니라 일부러 이러는 것임을
알았다.
강 실장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친구는...?”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에 비서실로 발령받은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아, 그런가?”
고작해야 신입사원.
사실 강 실장으로서는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는게 당연했다.
연희가 비서실로 올라가고 바로 양 전무가 날아가면서 이 모든 일을 비서실에서 주도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그 모든
일을 송 사장이 주도했다고 생각했지 설마 신입사원 하나가 주도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혹시나 홍 실장이 배신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가 신입사원의 눈치나 보는 처지라고 생각하는게
오히려 비상식적이었다.
당연히 강 실장으로서는 이제 홍 실장과의 대화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왜? 이상한가?”
“아닙니다. 그저 조직의 장에게 충성한다는 그 마음이 특별해 보여서요.”
“너도 사장님께 충성하는거 아니었나?”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니라고?”
“전 충성하는게 아니라 회사를 위해 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고, 그저 이 회사가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계속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양 전무는 그런 환경을 해치려고 했다, 이 말이지?”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렇군.”
“어서 와, 앉아.”
“어제 일 때문에 걱정 많으시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연희가 그래? 현재 사장이 아니고 전 사장. 하하, 연희 아빠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사장님은 걱정 없으십니까?”
“걱정 왜 없겠어? 그런데 난 기분 좋아. 솔직히 일방적으로 얻어 맞다가 끝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눈엣가시
같던 양 전무를 쫓아냈잖아.”
“양 전무를 안 좋아하셨군요.”
“시아버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었거든.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었지. 어쨌든 고생했어. 난 무슨 마술 보는
것 같아. 이렇게 단번에 양 전무를 잘라낼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운이 좋았습니다.”
“혹시 아니었습니까?”
“사실 고민을 하기는 했어. 이번에 양 전무를 쳐내는데 그 공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날 밀어내려고
했던 사람이잖아. 고민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건 이해합니다.”
“그래서 홍 실장은 곁에 둘만한 사람이다?”
“곁에 두기 찜찜하시면 말씀드렸던대로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고 홍 실장님 같은 사람은 남의
밑에서 묵묵히 돕는 일을 잘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장을 맡으면 더 좋은 성과를 낼만한 사람 같은데요.”
“그래, 최 과장이 봤을 때 그렇다는 거지? 음... 또 물어보고 싶어. 양 전무가 저렇게 가고 이제 조직 개편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람을 잘 본다는 이유로 채용됐기에 어쩌면 지금 이 질문은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적합한 질문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최 과장이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꾸미면 훨씬 보기 좋을거야. 그리고 이제 홍 실장이 다른 부서로 가면 비서실장
자리가 비는데 혹시 최 과장이 맡아볼래?”
“부담스럽습니다.”
“그래? 흠... 난 좋을 것 같은데. 아니다. 나랑 계속 같이 있어야 하면 최 과장이 따로 움직여야 할 때
불편하겠구나. 어쨌든 비서실장 아니라고 해도 앞으로 나랑 외부에 자주 나가야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고 쇼핑 좀 해.”
“알겠습니다. 조만간 면허도 따겠습니다.”
“그래. 그럼 낮에 별 다른 일 없으면 백화점이라도 다녀와.”
“네.”
“어디 가요?”
“오전에 딱히 스케줄 없어서 백화점이라도 다녀올까 합니다.”
“아...”
“그럼요. 괜찮습니다.”
“가요, 그럼.”
“저기로 가요.”
김민희는 요즘들어 무료했던 인생에 뭔가 새로운 엔진이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밀려오는 카드값과 월세, 공과금, 그리고 이제는 점점 지쳐가는 남자친구와의 싸움으로 그저 쳇바퀴처럼 의미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 단 한 번, 호기심으로 한 행동이 그녀의 무언가를 깨웠음을 느꼈다.
이전까지 회사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나를 옥죄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개안을 한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흘러가던 삶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능동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자 죽었던 세포가 살아난 것처럼
몸에 활력이 돌았다.
단순한 업무 지시로 보였던 것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스치듯 지나가는 질문에도 깊은 의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민희 씨, 요즘 어때?”
“비서실이요? 음... 솔직히 좀... 아니다. 아유, 뭘 이런걸 얘기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뭔데? 응?”
“그게... 아니에요.”
“노 대리님!”
“회당 1 억.”
“와... 보통 미니시리즈가 16 회 정도 하니까 그럼 16 억이나 달라는 거죠?”
“아니야. 요즘 1 회 방송을 중간광고 넣겠다는 꼼수로 2 회로 나눴거든. 그러니까 회수로 보면 32 회야.”
“어머, 진짜요?”
“대작 드라마인 것 같아. 제작비가 300 억이 넘는대. 요즘 드라마 시장이 미쳤다면서 꼴랑 10 억 PPL 로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민희는 신나게 말을 하다가 조금씩 인상이 굳이지는 영훈을 보면서 점점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왜 그랬어요?”
“네? 그, 그건... 죄송합니다.”
“왜 그런거죠?”
“나중에는 어차피 밝혀질 테니까. 그럼 당신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될 겁니다.”
“아... 제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경남 거제시.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조선소에는 육중하고 거대한 장비들이 옮겨지며 엄청난 크기의 선박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건물 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고령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가 있음에도 키는 상당히 크고 힘이 부치는 듯 지팡이를 짚고 있음에도 눈빛이 호랑이처럼 강렬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진그룹을 이끌고 있는 임창호 회장이 바로 그였다.
“그래, 코발트 광산인가 뭐시긴가 하는 그거... 그거 어찌해본다고 애쓰다 지 몸 상하는 줄 몰랐지.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제가 곁에서 건강을 계속 챙겼어야 했습니다.”
“자네가 우리 지훈이 마누란가? 그걸 왜 챙겨? 에이...”
“사람이라는게 말이야, 내 동냥 바가지를 걷어찬 대갓집 주인보다 집에서 내쫓은 부모를 더 원망하는 법이다.
지금이야 며늘아기에게 원망을 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 실수는 잊고 평생을 충성했다 생각한 나를 원망하게 될
거다. 그리고 나를 향한 원망은 바로 너를 향하겠지.”
“그깟 원망, 뭐가 두렵습니까?”
“이 기사 뭐야? 찌라시야?”
“한국일보잖아. 찌라시일 리가 없지.”
“검토중인게 아니라 확정 난 거 같은데?”
“진짜 5 천억 들어오는거야?”
이 기사만으로도 놀랍기 그지 없었는데 성주훈 부사장이 인청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한 그 시각, 추가 기사가
터졌다.
그야말로 빅딜이다.
공항에서 출발한 차 안에서 성주훈 부사장은 핸드폰으로 뜨는 기사를 확인하고는 경영기획총괄부서의 박재윤
부장에게 물었다.
걸걸한 목소리의 성주훈 부사장은 호탕하고 화끈한 성격이지만 그게 조금 과해 욕설도 서슴치 않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부사장이 돼서 조금 덜해졌지만 예전 팀장급 시절에는 툭하면 개새끼, 소새끼, xx 새끼가 난무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고 인권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했기에 그의 이런 성격이 흠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주 화나야 욕설이 튀어나오는 정도라지만 그래도 박재윤 부장은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번 신영은행 대출은 임원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파다했습니다. 퇴사 처리된 양철기
전무님 역시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양 전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그럼 이 대출을 누가 준비해서 신청한건데? 사장님이 신영은행 찾아가서 대출 서류
작성했겠냐? 사장님이 번호표 뽑고 기다렸대?”
“기조실에서?”
“네.”
“홍승대가 그렇게 파이팅 있는 스타일이 아닌데... 새로운 사장님이 기를 많이 불어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에 양 전무님 퇴사에 관여한 곳이...”
“그것도 흥승대라고? 야!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 홍승대가 양 전무한테 얼마나 비벼댔는데 뒤를 깠다고?
그것도 기조실 쪽에서 나오는 소문이야?”
“네.”
똑똑...
“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양 전무가 그렇게 쫓겨난 뒤로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것처럼 죽상으로 다니던 그는 오늘 아침부터 그나마 생기가
돌고 있는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조사가 끝나면 아버지를 그룹 계열사 고문으로 위촉시켜주겠다는 회장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준기야.”
“네.”
“이번에 아버님 그렇게 되시고 마음 고생 심했을거야.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양 전무님도 회장님께서 잘
봐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일에 집중해야지.”
“네? 아, 네. 그런데...”
“너 아직 신입 딱지도 못 뗐어. 지금까지 전무님 아들이라고 많이 배려해준게 있었지만 이제는 선을 지켜야지.
감히 대리도 못 단 사원이 임원 인사에 왈가왈부한다는게 말이나 돼?”
“죄송합니다.”
“그런 얘기 할 거면 나가.”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양 전무를 비롯한 회장파에 힘이 실리던 상황에서 이제는 임원 면접 통과를 위한 과반수가 사장쪽에 힘이
실리게 될 수 있었다.
회장님이 양 전무를 살려줬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검찰 조사가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거다.
이럴 때 호주에 있어야 할 성주훈 부사장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도 송 사장이 원하는 인사에 손을 들어준다면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으로 송 사장을 밀어내는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후... 죽겠구만.”
“제가 뭐 한게 있겠습니까. 오면서 신영은행 5 천억 대출 이야기 들었습니다. 뒤에서 이렇게 서포트 해주시니
이번 인수전에서 크게 힘을 받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는 와중에 오시라고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까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아닙니다. 오면서 대략적인 상황을 들으니 제가 한가하게 외부에 나가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빨리 들어올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양철기 전무는 어쩌다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하던가요?”
“어휴, 모르겠어요. 일단 법무팀에서 심각한 범죄라는 사실이라고 전해듣고 알아서 진행하라고 했어요. 자세히
듣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 전무가 나가면서 경영지원본부장 자리가 공석이 됐어요. 그리고... 양 전무가 놓고간 업무용 핸드폰에서
회사에 해가 될만한 내용이 몇 개 파악됐다고 해요.”
“심각한 일이군요.”
“부사장님의 조언이 필요해요.”
이미 증거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잘라낼수 있으면서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보면서 성 부사장은 사장이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도움이 있어야 임원면접에서 원하는 사람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 부사장은 회사로 오는 내내 고민을 했다.
과연 이 상황에 송은채 사장을 도와주는게 맞는 건지, 아니면 회장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양 전무 라인을
밀어주는게 좋을지 말이다.
“그럼요, 도와드려야죠.”
“임원회의라는데 안 따라가십니까?”
“사장님 수행해야 하지 않냐고? 지금 상황에 그럴 필요가 있나? 뭐, 원한다면 가서 공개적으로 다구리 맞아줄
수는 있어.”
안 그래도 오늘 기사로 모든 관심이 홍승대 실장에게 쏠렸을 텐데 회의에 얼굴을 드러낸 순간 질문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질 거라는 말이었다.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났다.”
“네? 왜 그러십니까?”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골든 브릿지라는 사모펀드랑 손잡고 이번 코발트 광산 인수전에 뛰어든다는 기사가 떴어.”
“갑자기 왜요?”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는 임지은 사장 남편의 동생이 운영하는 펀드야.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가격을 절대
헐값에 사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
“그럼 돈이 얼마나 더 들거라 생각하십니까?”
“글쎄... 만약 정말 경쟁이 붙게 되면 못해도 3~4 천억 정도는 더 들어갈걸? 게다가 세원 인터내셔널은 몽골
구리광산이랑 호주 철광석 광산까지 가지고 있어. 옆구리는 골든 브릿지가 찔렀을지 몰라도 세원 인터내셔널은
진짜로 욕심을 낼 수도 있지.”
“이거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뭐?”
“이거 광산업체 꼭 인수 해야하는 거냐구요.”
“이거 인수에 매달린 기간만 6 개월이 넘고 호주 현지에 나간 직원들 숙식이랑 업무에 쓰인 비용만 수억이야.
그런데 그냥 엎자고?”
“수억이 개인에게는 굉장히 큰 돈이 맞긴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푼돈 아닙니까? 우리회사 영업이익이 수백억이
넘는데 그깟 수억이 아까운가요?”
“순수하게 손해가 된 비용만 그렇다는거야. 그 시간에 다른 사업에 매진했다면 들어왔을 기회비용까지 생각하면
단순히 푼돈이니까 엎자는 말이 나올 수 없을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불리한 싸움을 자처하는 겁니다.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어쩌게?”
“사장님과 대화를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임원회의에 들어가서 이 사업은 무효라고 외칠 수도
없으니까요.”
“하... 그러면 볼만은 하겠네.”
“자리 비켜드릴까요?”
“걱정하실 일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잘 알겠어.”
“어쩌려고 그래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큰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이형준이 그랬다.
양 전무를 쫓아낸 건 임창호 회장의 콧털을 건드린 셈이라고.
형제 간의 싸움에 불을 지폈다고 했으니 고작 인수가격 조금 올리고 그만둘 리가 없다.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고 부장, 나 홍승대인데.”
“아, 네. 실장님.”
“다른데 알리지 말고 조용히 비서실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어서와.”
“안녕하십니까.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골든 브릿지라는 사모펀드 운용주체가 김우진이라는 사람인데 임은진 현진고속 사장님 남편의 동생분 되신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퇴사하신 양철기 전무님이 그간 김우진과 몇 차례 연락한 정황이 있구요. 당연히 우리가 가진
정보가 흘러들어갔을겁니다.”
“그게 진짜인가?”
“네.”
“그럼 인수가격을 최소 1 조를 써야 한다는 말인데 골든 브릿지가 그정도 자금력이 된다고?”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1 조 원을 쓸 수 있다면요?”
“그럼...”
고승현 부장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헛소리냐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려다가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졌다.
설마...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승대 실장은 생각지도 못한 영훈의 발언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예상을 뛰어넘는다지만 현진관광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거론할 줄이야...
하지만 여기서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반응하면 고승현 부장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짓이기에 허벅지를
틀어쥐며 표정을 관리했다.
반대로 고승현 부장은 자신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갈수록 기가 차고 코가 막힌다.
자기가 입사했을 때를 생각하니까 한창 선임을 따라다니며 보고서 작성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있을 때다.
꿀꺽...
“얼마나?”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분 13%에 추가 4 천억 가능하다고 확답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신영은행이 무슨 현진관광 주식을 13%나 가지고 있어?”
“신영은행에서 2%, 신영투자증권에서 3%, 신영생명에서 4%, 신영모건스탠리 자산운용에서 4%, 총 13%가
맞습니다.”
“그게 끝이야?”
“모건스탠리에서 운용하는 아시아코어펀드에서 현진관광 주식을 8%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확실해?”
“신영금융지주 사외이사 중 한 명이 모건스탠리 일본 현지법인 CEO 라고 하던데요?”
“할 겁니까?”
“사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성주훈 부사장님이 가만 있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프록시아 인수 가능하겠어? 어차피 같은 해외자원사업부라 정보는 다 파악하고 있을 거잖아?”
“세원 인터내셔널이 정말 입찰에 참여하면 장담하기 힘듭니다.”
“4 천억 들어온거 물론 좋긴 한데 그거 이자도 생각해야지. 1 년에 금융비용만 얼마인지 감이 오지? 그리고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혜성기업 때문에 신영은행에다가 매년 500 억씩 상환해야 해. 그거 못 갚으면
가진 자산 다 팔아치워야 하고.”
“그걸로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고 부장은 최영훈이라는 인간이 사장과 인척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 비서실장 이상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회사가 사력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고 그룹 계열사를 적대적 인수합병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도
송은채 사장이 미친놈 취급하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훈이 물었다.
“혜성기업을 엮자.”
“어떻게 말입니까?”
“광주 봉선동에 추가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겠다는 얘기가 있어. LH 공사가 부지 매입 끝냈고 시공사 선정만
남았는데 알다시피 봉선동 아파트 값이 미쳤거든. 고급 단지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선정만 되면 엄청난
이익이 생길 거야. 전에 기사 보고 그냥 넘겼는데 여기에 혜성기업을
끌어들이자고. 건설업체 인수해서 알맹이만 쏙 빨아먹고 팔거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보여주기에는 더 없이 좋지.”
“좋긴 한데... 그럼 혜성기업에서 단독으로 들어가도 되는거 아닙니까?”
“아니지. 도급능력 39 위가 어딜 끼어들어? 이거 평당 분양가가 최소 3 천은 넘어야 해.”
“우리는요?”
고 부장은 피식 웃었다.
“우리한테도 옛날이잖아.”
“내년에 막아야 할 5 천억 채권도 연장한게 이 친구야. 아, 이 내용은 모르고 있었지? 기사로 안 나갔던데.”
“...”
*
임원회의에 들어갈 때 만면에 미소를 띠었던 송은채 사장의 얼굴은 회의가 끝나고 돌아왔을 땐 무척 굳어져 있었다.
송 사장의 앞에는 홍승대 실장이 작성한 ‘봉선동 시공사 선정을 위한 TFT 조직안’이라는 결재서류가 올라와
있었다.
“오늘 기사 봤어요.”
“아~ 나도 봤어. 축하해. 신영은행에서 5 천억 대출 받았다며? 굉장하다. 어떻게 받았어? 나도 그 노하우 좀
받아보자. 나 이번에 페이먼트 인수한다고 자금줄 꽉 막혔잖아. 나도 올케 덕에 막힌 자금줄 좀 뚫었으면
좋겠는데?”
“뭐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혜성기업인가? 그것도 인수한다면서? 천억에 홀랑? 어머... 이제 보니까 지훈이보다 올케가 더 능력있었나봐.
괜히 지훈이가 현진물산을 경영한다 어쩐다 할 필요도 없었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냥 아버님께 제가 받았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텐데...”
순간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에 뼈가 있네?”
“뼈 있는 말은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말 나온 김에 할게요.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요? 연희 10 년 동안
해외에서 돌아다니느라 엄마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랐어요.”
“왜 나한테 그래? 연희 내쫓은거 아버지랑 지훈이야.”
“그런가요? 그때 아버님께서 연희 앞으로 주신 호텔 가지고 가셔서 현진관광 만드셨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여보, 그만해.”
“후... 그래, 옛날 일 말해 뭐해.”
“그래요. 지나간 일 말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요. 죽은 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호주 코발트 광산 업체요. 우리가 입찰에 참여하려고 굉장히 오래 공을 들이고 있던거 모르셨어요? 연희 아빠가
처음 추진했던 사업이니까 모를 리 없지 않아요?”
“내가 다른 회사 사업을 어떻게 다 알아?”
“그런가요? 아주버님은 아시죠?”
“어? 어... 난 알고 있지.”
임 사장도 거들었다.
“아니면 할 수 없지.”
임 사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니면 말고’의 태도를 취했지만 송 사장은 그녀가 자기 마음대로 저럴리 없다는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유, 깜짝이야!”
“제가 더 놀랐습니다.”
[인사발령 공고]
[봉선동 시공사 선정을 위한 TFT 조직안에 의해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을 TFT 팀장으로 발령한다.]
“후...”
“어? 부장님 이거 뭡니까? 저희 모르게 무슨 프로젝트 진행하는게 있었습니까?”
“나도 모른다.”
“야, 이거 뭐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몰라? 몰랐다고? 나도 모르는데 이런 인사를 했다고?”
“네.”
“봉선동은 뭐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 이 새끼, 구라 칠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진짜 모르는거지?”
“정말입니다.”
“네, 실장님.”
“어때? 햇볕 잘 드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제가 눈 부신걸 안 좋아하는데 귀신같이 고르셨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어두운색 블라인드 달아달라고 해.”
“그래야겠습니다.”
“누구 고를지 생각해뒀어?”
“네.”
“누구 붙여줄까?”
“법무팀에 경력직으로 새로 온 직원 있죠? 법무법인 동해 다니다가 여기 왔다고 하던데...”
“그건 또 어떻게 들었어? 대학원 때 M&A 를 배웠다고는 하던데... 그런데 그 친구 가지고 되겠어? 나이가 서른
밖에 안 돼. 경력으로 왔지만 사실 경력이라고 할게 별로 없거든.”
“실력 있는 놈들은 많지만 믿을 수 있는 놈이 없잖아요. 이거 끝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 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긴 가장 중요한건 보안이지.”
“나머지는 알아서 세팅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뭔데?”
“이거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현진관광이 끝입니까? 아니면...?”
“알면서 뭘 물어? 지금은 먼 미래 걱정하지 마. 당장 앞의 일만 생각해.”
“씨발...”
고 부장은 이제 공신이 아니면 역적이 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줄타기에 올라탔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담배를 다시 펴야 할 것 같았다.
“처음 보네?”
“네. 이번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영업 2 팀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비서실로 이동했습니다.”
“홍 실장님은 많이 바쁘시지?”
“아무래도 요즘 정신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다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아니다. 이 사업 내용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광주 봉선동에 LH 공사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려고 추진중인데 우리 회사가 혜성기업과
합병한 후 첫 프로젝트로 시공사 선정 경쟁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와중에? 하필 프록시아 입찰 때문에 펑크난 해외자원사업부 인력까지 빼내면서까지 해야할
일인가?”
“어머...”
“안녕하세요.”
“여기 어쩐 일이세요?”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정혜숙 부장님께서 박세영 씨에게 업무 설명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아... 네. 일단 앉으세요.”
“그런데 어떤 일이에요?”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섭니다. 혜성기업을 인수한 우리 현진물산은 이 사업에 참여해서
사업권을 따낼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부실한 건설회사를 인수해서 알짜배기 자산을 매각할거라는 세간의 예상이
있는데 우리는 앞으로 혜성기업을 현진건설로 바꾸고 새
로운 프로젝트로 사업을 확장할거라는 식의 보도자료를 뿌려주시면 좋겠어요. 최대한 깔끔하고 그럴듯하게.”
“그럴듯하게요?”
“네. 현진물산과 현진건설이 역량을 총 동원해 진행할 예정이라고 해주세요.”
“역량을 총 동원이요?”
“네.”
“음... 진짜 맞는 거죠?”
“맞습니다. 박세영 씨가 만든 자료로 위에 올려서 결재 받아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만들어서 올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직접 왔잖아요. 가이드라인 잡아주려구요. 제가 잡은 가이드라인이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모르는거 있으면 비서실로 전화해서 김민희 씨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줄 겁니다.”
이 사업의 진짜 목적을 아는 건 아니지만 모든걸 혼자서 처리할 수 없기에 민희에게 대략적인 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오케이]
“야, 윤재야.”
“넵.”
“지금이 90 년대도 아니고 정치인 몇몇이 기라성 같은 건설사 다 제끼고 우리를 잡아 준다고? 우리야 좋지만 이거
선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사실 신영은행 대출건도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지. 따지고 들면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하지. 그런데 이것과 그건 경우가 달라. 은행 대출이야
은행장 마음이지만 시공사 선정은 민감한 문제거든. 몇 명 구워삶아서 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흠... 이것도 홍승대가 설계했을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홍승대가 이 정도 능력자였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야, 봉선동 TFT 팀이 쓸 사무실 어디라고 했지?”
“15 층에 마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홍 실장더러 15 층으로 내려오라고 해라. 삼자대면 한번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박윤재 부장은 곧장 전화를 돌렸고 성주훈 부사장은 거침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5 층으로 내려갔다.
분명 자신 모르게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건데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걸
깨닫게 해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15 층에 내려 새로 붙은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니 창밖을 향해 서 있는 고승현이 보였다.
“훤하고 좋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여기가 네 책상이냐?”
“네, 그렇습니다.”
“책상도 좋고, 경치도 좋고... 내 방보다 좋다.”
“하하, 어떻게 부사장님 방보다 좋을 수 있겠습니까. 앉으시죠. 제가 혹시 몰라서 소파는 직접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반질반질하네. 너도 앉아봐라.”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 진짜 네가?”
“네. 혹시 부사장님께서 이번 코발트 광산 입찰에 걸릴돌이 될까 염려하실 수 있는데 전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진짜야?”
“물론입니다.”
“가능합니다.”
“자세히 설명해봐.”
“지방이라고 못 사는 사람들만 있는거 아닙니다. 저들도 돈 많지만 서울처럼 최고급 주거 단지가 안 들어서니까
그들만의 고급 단지로 몰리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 전라도 최고 부자들만 입주할 수 있을 것 같은 환경을 만들
생각입니다. 고급 휘트니스와 골프연습장, 사우나 같은 시설과
호텔급 조식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호텔급 조식 서비스라... 그거 먹히겠냐?”
“현진관광이 있지 않습니까? 종로 리츠 칼튼 뷔페는 대한민국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뷔페입니다. 그런 호텔 몇
개를 가진 현진관광이 같은 계열사라는 점을 어필하면 충분히 먹힌다고 봅니다. 적어도 현진이라는 두 글자는
이번 사업을 관심있게 보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겁
니다.”
“몰랐다면서 준비 많이 했네?”
“제가 팀장으로 발령날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다만 홍 실장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이러면 괜찮겠다고
생각해둔게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걸 듣고 저를 팀장으로 추천한 것 같습니다.”
“일리 있네. 잘 만들어봐.”
홍 실장은 바로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래. 하필 딱 호텔이지.”
“현진관광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조식서비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같이 엮어 들어가면...”
“이것도 명분이 되는 건가?”
“원래 역사라는게 승자가 주장하기 나름 아닙니까.”
“요즘 많이 바빴지?”
“응, 정신 없어. 홍보팀도 정신 없지 않아?”
“어, 그렇지.”
“이번 일 끝나면 조금 줄어들 거야. 혹시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긴 하지만 조금만 참아. 그리고 이번 네가
홍보하게 된 프로젝트 잘 되면 보너스 기대해봐도 좋을걸?”
“보너스? 진짜?”
“아직 확정된건 아니지만 요즘 회사 분위기 좋잖아. 나올지도 모른다 그거지.”
“너 요새 기분 좋은 일 있구나? 되게 기분 좋아 보여.”
“내가? 으흥~ 요즘 좀 생각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런가봐. 계속 안 좋은 생각을 해봤자 바뀌는게
없으니 나를 바꾼다고나 할까?”
“대단한데?”
“그런데 오늘 무슨 할 말 있어? 오늘 정신 없어서 점심시간이라도 시간 내기 힘든거 아니야?”
“최영훈... 씨?”
“어.”
“얼마 전에 우리 비서실로 온 사람이야. 왜?”
“아니, 사실 그 사람 우리 고시원에 살았었거든.”
“그랬었구나...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인턴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몇 달만에 정규직이 됐다는 거야. 그러더니 바로
고시원을 나간거 있지? 이게 말이 되는 거니?”
“응, 아까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프로젝트 가이드라인 잡아주러 왔었잖아. 되게 황당하던거 있지?”
“그래?”
“일은 좀 하는 사람이니?”
“일은 좀 하냐구? 으흥... 잘하는 정도가 아닌데? 일적으로는 완벽하다고 할까? 그런데 어쨌거나 그럼 우리
회사에서 네가 최영훈 씨를 가장 먼저 만난셈이구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 정도로 일을 잘해?”
"그렇지."
“나 잠깐 일어나볼게.”
“어? 어디가?”
“미안... 급하게 가볼 데가 생겼거든.”
“좋으시겠습니다?”
“좋지. 그런데 계산은 확실하게 하자. 난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마음인거야. 여기서 얻는 부가수익은 터치하지
않기.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많이 드십쇼.”
“크크큭...”
“왜 그러십니까? 불안하게?”
“내가 은행에 들어가야겠다. 사람들 움직여서 일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
“저한테 바라는게 있습니까?”
“고향에 돌아가는데 그냥 빈손으로 가기는 그렇잖아. 못해도 부모님 내복이라도 한 벌 사 가야 손이 안
민망하지.”
기가 차서 풋 웃었다.
“하하, 언제 사드려보기는 했습니까?”
“말이 그렇다는거야, 인마.”
“그래서 원하는 내복이 뭔데요?”
“현진물산 주거래 은행 좀 바꿔주라.”
“예?”
“그냥 거래 은행 바꾸는거야. 어려울 거 없어.”
“물론 우리의 일방적인 예상일 뿐입니다. 어제부로 현진건설로 직장이 바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선정에
평가되는 항목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그런데 어차피 상관없는거 아닙니까?”
홍 실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넌 너 할 일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중에 억울한 일 생기면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 난 너 원망
안 할거니까.”
“각오하셔야 할 걸요? 절대 떨어지지 않게 꽉 잡을 겁니다.”
“흐흐... 그러시든지.”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마실 것도 안 줄거야?”
“좋은 일로 찾아왔으면 마실거 내드리구요.”
“됐다. 여기선 물 마셔도 체할라.”
“형님 사정은 알지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절박해요. 그러게 골든브릿지 가지고 왜 장난 치셨어요? 지금이라도
세원 인터내셔널이 이번 입찰에서 빠진다면 고려해볼게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검찰에서는 연락 왔어요?”
“네, 조만간 출석하라고...”
“참, 어렵게 사시네. 그건 그렇고 올케가 내가 알던 그 순둥이가 아니던데? 양 전무가 있을 때도 이랬어요?”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 보는 것도 능력이에요. 그러고 보면 양 전무 능력에 대해서 나나 우리 아빠나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거
아닌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지 한번 예상해봐요.”
“본래도 자금력이라면 상사 업체들 중 최고였습니다. LS 화학이 배터리에 목숨을 건 상황에서 코발트 광산을
확보한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에서 충분할만큼 자금 지원을
못해주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서라도 이기려고 할 겁니다.”
“그 정도로 자금력이 큰가?”
“세원에서 가진 부동산과 주식만 가지고도 마음만 먹으면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 도움 없이 입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었다가 프록시아가 가진 코발트 광산의 매장량과 생산능력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습니다.”
“마음만 확실히 먹어준다면야 그보다 좋을 수 없지. 어쨌든 양 전무는 지금도 세원 쪽이랑 계속 채널 유지하는 건
맞아요?”
“그럼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세원 대표이사도 사장님과 만남을 연결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러시는데요?”
“현진건설을 고급 브랜드 전략화 해보려고. 서가은이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이미지잖아?”
“그렇긴 하죠.”
가끔 나오는 예능에도 차분한 말투와 어떤 옷을 입어도 고급스럽게 소화하는 모습 때문에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가볍거나 싼티나지 않았다.
“현진건설 모델로 쓰고 싶은데 소속사에다가 공식적으로 제안할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안면 있는 최 과장이나
연희 씨가 가서 말 좀 해주면 어떨까 하고. 바쁘면 그냥 현진건설쪽에서 제안 해보고.”
“말해보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 좋은 이유가 있나요?”
“지금이야 현진건설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 혜성기업이었던게 어디 가는게 아니거든. 규모도 작았고 아파트도
지방에서나 짓던 수준인데 서가은 소속사가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아. 물론 모델료를 퍼부어주면야
가능하겠지만 나중에 좋은 이야기도 안 나오고.”
“그럼 전 먼저 나갑니다.”
“의심되면 따라오실래요?”
“아니에요. 그럼 이따가 봐요.”
“그럽시다.”
“어머~ 너무 반가워요~”
“하하, 네, 뭐...”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영훈은 얼른 현진건설의 새 모델을 구하고 있으며 고급스럽고 지적인 그녀가 딱이라고 줄줄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어졌다.
“그게 누굽니까?”
“죄송한데 이분은 우리 회사 모델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서요. 그런데 오른쪽
분은 누굽니까? 연예인인가?”
“전에도 느꼈지만 감이 좋으신 것 같아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예서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따지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저녁 같이 하실래요?”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로 사무실을 나오니 연희가 운전석에 앉으며 재잘대기 시작했다.
말로는 저렇게 해도 애처러운 눈빛을 보내며 도움 한번 주는게 어떠냐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생년월일은요?”
“혹시 물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안 물어봤어요. 대신 어느 회사인지 알아냈죠. 그것만 알면 대표 생년월일
알아내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하... 어렵네...”
“맞습니다. 나도 이걸 이십대 초반에서야 깨달았으니 일반 사람들은 어려운게 당연한 겁니다.”
“그 때 알았으면 예서 씨가 그 작품 출연한다고 했을 때 말리고 싶었겠네요?”
“마음이야 굴뚝 같았죠.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기사에 댓글도 달았었습니다. ‘안 돼~~~!’라고요.”
“하하하하! 왠지 그때의 영훈 씨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회사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는 홍승대 실장에게 간단히 결과를 보고했다.
이후 영훈은 다시 강의를 받으러 갔다가 6 시가 돼서 칼퇴근한 연희의 차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연희는 가는 중에 그동안 파악했던 가은의 남자친구에 대해 줄줄이 설명해댔다.
간략히 말하면 서울공대와 대학원 박사 과정을 거친 엘리트 출신 사업가로 반도체 설계 회사를 설립한지 이제 1
년이 조금 안 됐다고 했다.
잘 되면 세계를 선도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업종이라고 했던가?
삼호전자가 몇 십조를 투입해가면서 키워가려는 분야가 바로 그 분야라고 덧붙였다.
어느새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선 영훈과 연희는 미리 도착해 있는 가은과 의외로 조금 평범해 보이는 듯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일어나서 인사하는 그는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체격도 호리호리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서가은이 손해본다고 말할 것 같았다.
“네, 반갑습니다.”
“반도체 설계라는게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과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몇몇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유치중입니다.”
본래 이 남자의 사주가 별로였다면 적당히 웃어 넘기며 자리를 모면했을 테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가만히 있는데
금덩이가 스스로 날아와 안기는 격이었다.
“화났습니까?”
“난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단 말이에요.”
“친구 없어요?”
“10 년 넘게 외국에만 있었어요.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친구를 사귄다기보단 그냥 한국에서
휴가를 즐기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남들이 말하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주변에 없어요.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지.”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나보다 낫네요.”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습니다.”
연희는 입을 떡 벌렸다.
“네? 그 정도예요?”
“네. 저도 지금까지 배우기만 했지 실제 이런 사주를 타고난 사람은 처음 만납니다. 만약 관에 뜻을 두고 있으면
능히 장관까지 갈 사람인데 벤처 사업가가 됐으니... 수백억 이상의 투자 가치는 충분할 만큼 대단한 인재는
맞습니다.”
“와... 가은이 좋겠네. 그럼 당신도 투자할래요? 아마 당신이 원한다고 하면 당장 엄마가 십억... 아니다,
만약 빌려달라고 하면 당장 수십억 정도는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됐습니다. 전 돈에 욕심 없습니다.”
혹시나 투자를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능력을 알려줄까 걱정돼 그렇게 말하니 연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일단 엄마한테 말하기 전에 김학수 씨 회사에 대해 알아보자구요. 여기 알아온 내용은 그냥 회사 설립 연도나
대표이사 생일 정도고 진짜 뭘 하는 회산지, 얼만큼 유망한 업종인지 등등.”
“그럽시다.”
“이걸 설명하려면 우선 비메모리와 메모리 반도체 차이를 알아야 해. 쉽게 설명하면 비메모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CPU 나 그래픽카드 같은걸 말하는거야. 메모리는 RAM 같은 걸 말하고.”
“아,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죠?”
“일단 알겠어요.”
“연희 씨, 이 회사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 이십억이 들어가는 간단한 투자가 아니야. 아무리 몇
명의 천채가 이겨먹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회사를 더 키우려면 인력을 추가 스카웃해야 할 건데 여기에 들어가는
돈만 수십억일걸? 만약 정말 투자하고 싶은 회사면 혼자 결정
하지 말고 회사에 맡겨보는게 어때?”
“인사이동을 서둘러야겠군.”
결국 결론은 하나. 이대로 회사의 엘리트 조직 하나를 괴사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혹시 이번 투자 때문에...”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전 솔직히 이 투자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네. 제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여러분들의 몫이죠.”
“늦었습니다.”
“어? 아니야.”
“그럼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고작 이 말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이왕이면 최대한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씨발...”
“어떻게 알았지?”
“이제 현진물산은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회사는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진 능력만 믿고 회사에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가장 먼저 이것부터 정리하고 가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뒷조사를 하셨다?”
“뒷조사라기보다는 혹시나 업무에 매진할 수 없는 환경이 있을지도 몰라 배려했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휴가 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겠군.”
“주말 포함해서 일주일 휴가 다녀오시죠. 해외 출장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기조실 인사이동은
없을 겁니다.”
강 실장은 기가 찼다.
고작 신입사원 주제에 자신의 휴가를 제멋대로 결정해버리면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사이동은 없을 거라고 배려하듯이 말하는데 가장 열받는 건 이놈이 왜, 어떻게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거였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건가?”
“회사를 위한 일입니다. 고맙다고 말씀하실 건 없습니다.”
“내가 갑자기 회사를 비우면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사장님에게는 어떻게
보고할 셈이지?”
“홍 실장님이 알아서 보고하실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내가 나갔다 왔을 때 내 자리가 비워져 있다면?”
“그런 걱정을 하실 수 있다는 것 이해합니다. 사실 실장님이 굳이 미국에 가지 않으셔도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착각하실까봐 다시 말씀드리면 현진물산은 강노식 실장님께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저는 얼굴도 뵌 적 없는 나이 많으신 누군가가 아니라 수
많은 가정의 행복이 걸린 이 회사를 위해서요. 불필요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회사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면 굳이 미국까지 갈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외통수로군.”
“인사이동에 관한 부분은 제가 아니라 홍 실장님하고 말씀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아, 제가 방금 한 이야기는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홍 실장님께 말씀하시는건 전적으로 강 실장님 마음입니다. 그럼 오늘 반가웠습니다.
언제 기회 되면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너도 내 뒤 밟고 다니냐?”
“굳이 밟고 다니지 않아도 모를 수 없지 않습니까? 저와 양 전무님, 차 상무님, 그리고 실장님...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논현동에 모였겠죠.”
“역시... 네가 양 전무님 날렸구나.”
“이제 와서 누가 어떻게 했는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양 전무님은 나갈만 했으니까 나간 겁니다. 강 실장님은
있을만 하니까 있는 거겠죠. 우리 이제 쓸데 없는 일로 힘 빼지 맙시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냐?”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이나 임지은 사장님에 대한 약점을 캐오라고 하는 등의 지시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기조실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시면 됩니다. 오로지 현진물산을 위한 자세로. 그렇게만 하신다면
임직원 평가에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정도면 되나?”
“사실 이 정도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기조실에 CCTV 도 달고 감청장치도 달고 싶지만
그렇게 믿지 못하면서 일하면 지금까지 우리의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네도 배신하고 전향한 사람인데 참 철저하군.”
“원래 배신한 사람들이 더한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양준기는 어떻게 할까?”
“인사이동 조치할 겁니다.”
“어디로?”
“어디가 좋을까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기분이 참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실장님이 회사에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최 과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군.”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개뿔... 난 내려가서 휴가 준비나 해야겠어. 알아서 보고할거라고 하던데 그게 맞지?”
“걱정 마십시오.”
“그럼 믿고 가지.”
“오셨습니까.”
“너... 이거 알았냐?”
“진정 그렇게 생각하니? 주식을 교환해서 그 돈으로 채권을 막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최선의 방책은 무엇이었냐?”
“팔았어야 했습니다. 이미 매입한 페이먼트 호텔이든 아니면 가지고 있는 다른 호텔을 매각해서라도 채권을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래, 그게 맞는 거다. 네 어미는 큰 실수를 했어. 이제 현진물산을 집어 삼키려고 할 때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칼을 쥐게 됐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겁니다. 어차피 현진물산은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입찰에 현금 8 천억과 현진관광 지분을
넣을 겁니다. 현진관광 지분은 현진물산의 손에 고작 몇 달 정도로 잠시 머물게 된 것일 뿐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찾아올 겁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임 회장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창밖 조선소를 바라보았다.
다시 조선소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임 회장을 뒤에서 바라보며 태민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잘 지냈어요?”
“내가 좀 무심했죠?”
“아닙니다.”
차 상무는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태민의 말 중 틀린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진물산은 현진그룹 계열사 중에 중공업 계열을 제외하고 가장 탄탄한 조직과 매출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현진물산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나 될 소린가?
역시 태민은 얼굴빛을 바꾸고 태연히 말을 바꿨다.
“농담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가족도 아니고 주고 받는게 확실하지 않는 관계에서 신뢰라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상무님께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상무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예?”
“좀 도와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적당히 몸 사리고, 적당히 눈치 보면서 도와주시지 말고, 상무님 한 몸 던져서... 네? 상무님 몸이 상무님
것이 아니잖아요. 토끼 같은 자식들도 있을거고, 집에 바가지 긁는 마눌님도 있을거고... 그런 가족 위해서 좀
던져 보시라구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됐어요, 그게 뭐라고...”
“네? 입찰에 성공한다면 회장님께...”
“아유 씨발,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신영은행에서 우리 엄마 목을 조일게 뭐람.”
“그럼...?”
“우리 어머니가 급한 마음에 실수를 했어요. 돈 급하다고 현진관광 주식을 주면 안 되는 건데... 현진물산에서
입찰에 실패하면 현진관광 주식을 손에 그대로 들고 있게 될 거 아닙니까? 골치 아파진 상황이긴 한데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쩌겠습니까. 좋게 생각해야지. 입
찰에 실패하면 회장님한테 밉보일거고 입찰에 성공하면 넘어간 주식을 다시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거니까.”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프록시아 인수하고 나면 현진물산이 가진 부채가 얼마죠?”
“신영은행 건만 1 조 원에, 다른 금융권 부채를 더하면 3 조 원이 넘습니다. 매년 소모되는 이자만 700 억이
넘습니다. 프록시아를 인수한다고 해도 거기서 뽑아내는 돈이 현진물산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겁니다.”
“입찰에 실패하면 할아버지한테 찍힐거니 그것도 나쁘지 않고, 만약 입찰에 성공하면 곳간이 텅텅 빈다는
말이죠?”
차 상무는 그가 현진물산이 프록시아를 최대한 한계가격까지 끌어올린 가격으로 가져가게 할 생각임을 알아챘다.
“맞습니다.”
“그럼 지금 진행 중인 사업 몇 개 날아가면 회사 휘청이는거 아닌가요? 어디 보자... 아! 차 상무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유연탄 가져오는 거 주도했죠?”
“강노식 실장님 아내분이 바람 피우는 장면을 딱 목격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만약 미국까지 갔는데 증거도 없고
허탕으로 돌아오면 어떡해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와... 너무 무대뽀인거 아니에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그럼요?”
“사람이 살면서 계획대로 되는게 많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살다 보면 여러 사정이 생기고 또 계획한
스스로가 마음이 변할수도 있죠. 물론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추어 노력하는 사람들이야 많겠지만 이 사람은
여자를 대할 때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놓고 행동하는 사람일 정도로
감성보다 이성이 앞선 사람입니다. 그 말이 곧 무슨 뜻일까요?”
“아! 저렇게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면 아내와 따뜻한 감정 교류를 못했을 거라는 말이란 거죠?”
“맞습니다. 고진살을 피하고 싶었다면 자신의 차가운 성격을 바꿔보려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살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사주는 어떻게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주어진 숙명 같아도 그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면 무척이나 촘촘한 인과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
“그런데 영훈 씨가 사주를 계속 공부했기 때문에 잘 아는 건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거예요? 산에서 여자를 많이 사귀었던 것도 아닐 테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연예 팁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아마 저일 겁니다. 연애를 유튜브로 배웠다고나
할까요?”
“아~”
“와~ 대단하네요.”
“국회의원 출판기념일이니까요.”
“임연희 맞지?”
“어? 창훈아! 반가워!”
“그렇습니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네 손에 쥔 사업인지는 전혀 몰랐고. 정말이야. 나도 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네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사업이었다면 미안하게 됐다.”
“아직 결정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미안해할 건 없어.”
“글쎄, 난 벌써 미안한데? 실은...”
“연락해.”
“나도 여기.”
“경험이 많으시네요?”
“말해 뭐해요? 장담하건데 나만큼 청혼 많이 받아본 여자는 많지 않을걸요? 그냥 예쁘기만 했으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예쁜데다가 집에 돈까지 많으니 날 가만 둘 리가 없었던 거죠. 당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인생
역시 쉽지는 않았답니다.”
“흠... 아까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 귓속말 한거요? 조재민 의원이랑 저녁 약속을 잡았다고 하던데요?”
“빠르네.”
“오늘 와서 후원금 전달한 건 그냥 의례적인거고 이미 며칠 전에 약속을 잡아두었을 거예요. 정치인들 목이
뻣뻣해서 당일에 약속 잡는 건 힘들거든요.”
“그럼 이미 이야기가 많이 진행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거예요. 보는 사람도 많고, 많은 이권이 걸려 있어서 정치인 한, 둘로는 결정적 힘을 쓸 순
없을 테니까.”
“우리도 그거 알고도 온 거 아닙니까? 한, 둘로는 힘들지만 셋, 넷이 되면 또 다르니까.”
“더군다나 조재민 의원 사촌동생이 LH 공사 임원이기도 하고... 다 알고 왔을 거예요. 광주에서 조재민 의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아마 우리보다 더 잘 알 거예요. 일단 우리는 우리 할 일 합시다. 약속장소
찾아가서 깽판칠 수도 없으니.”
“하핫! 진짜 그래볼까요?”
“봤냐? 졸라 멋있었지?”
창훈이 호텔 로비의 거울을 보며 자뻑에 빠져있는 사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윤희찬 부장이 옆에서 초를 쳤다.
“나 말고 도대체 누가 연희의 기대감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 외모와 배경과 여자를 배려하는 나 같은
신사 말고 누가 연희 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구?”
“재수 없긴 하지만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한데...”
“이건 인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그런데 하필 우리랑 붙는게 문제네. 아니, 뜬금없이 현진물산에서
아파트 시공 사업을 왜 욕심 내는 거야? 꼴랑 도급능력 39 위 인수해놓고 이렇게 대규모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진짜 따낼 수 있다고 믿는건가?”
“그래도 이번에 저쪽에서 내민 한 수가 담당자들이나 주민들의 귀를 간지럽힌 건 사실이야. 아파트 단지 전체에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는 전라도 부동산 일대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인데 이걸 틀어막고 들어가려면 고생 좀 할
것 같아.”
“조재민 의원 부친부터 우리랑 맺은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니야. 게다가 우리 아버지랑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었어. 아, 그때는 국민학교였지? 어쨌든 절대 우리가 미끄러질 수가 없는 일이야.”
“지방 부동산 시장이 들썩인지 얼마 안 됐어. 지방 사람들은 서울이나 수도권 집값 올라갈 때 남 이야기로만 알고
살았거든. 이런 분위기를 계속 타고 싶을거야.”
“이거 왜 이래? 우리 브랜드도 만만치 않아.”
“알지.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도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오늘 현진물산 외동딸까지 직접
내려왔어.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흥, 그래 봤자지. 지네가 언제부터 건설회사였다고 조 단위로 남겨먹는 아파트 시공권을 따려고 해?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야. 어쨌거나 난 이번 일 걱정 안 한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연희를 만나게 된 건 하늘의
뜻이다. 이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봐. 연희를 여기서 만
날 줄 알았으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하는 거였는데... 아까 너무 건조하게 말했나?”
“축하드립니다. 잘 읽을게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의원님, 너무 멋지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출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젊은 분들이 찾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오늘 이렇게 미인이 찾아주시고 눈까지 호강하는군요.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현진물산을 경영하시는 분이 제 어머님 되십니다.”
“오~ 현진그룹 자제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일전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떴었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네? 제가요?”
“심장이 안 좋으시면 추위를 조심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저기, 잠시만요.”
“혹시 의사분이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눈가가 항상 짓물러 있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심장이 안 좋으셨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심장이 안 좋은 분들이 다 그런 걸 보고 괜히 눈가가 짓물러 있고
실핏줄이 눈가로 가늘게 퍼져 있는 분을 보면 심장이 안 좋으
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건강하시다면 괘념치 말아주세요.”
상을 보면 오장육부가 안 좋은 것이 티가 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마다 ‘너는 어디가 안 좋고’, ‘너는 어디를 조심해야 하고’ 따위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상으로 보이는 건강의 이상은 대부분 본인들도 알고 있는 데다가 말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경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심한 증상이 뚜렷이 보임에도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굳이 알려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도 아닌데 괜히 알려줬다가 어떻게 알았느니, 앞으로 내가 뭘 조심하면 되겠느니 따위의 쉴새 없는 질문을
해오면 피곤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조재민 의원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해준건 상을 봤을 때 건강이 안 좋을망정 말년까지 큰 고생 없이 살
팔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볍게 말하고 표정을 살피는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실은 얼마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기는 했어요. 그래서 혹시 의사분이 아니신가 물어봤죠. 아유, 이거 참 병원을
가봐야 하는 건지...”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오늘 고마웠어요.”
“조재민 의원의 사주를 보니 전형적으로 밖에서는 신사여서 주변사람들에게 칭찬이 자자한 사람인데 집에서는
그렇지 못할 사람입니다. 돈 좀 생기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서 보낸다거나 비싼 술을 사면서도 집에는
짠돌이처럼 군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게 아내를 미워해서가 아
니라 밖에서 보여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아...”
“그러다보니 겉으로는 표현을 못해도 평소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누가
아내에게 잘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 고마움을 가지게 됩니다. 아, 그렇다고 어설프게 도와주면
아내를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
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중시하지만 쉽게 믿지도 않습니다. 참 전형적인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주입니다.”
“조 의원은 가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냥 친구랑 술이 좋아서 밖을 나도는 남자들도 많아요.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렵네.”
“한 사람의 성격과 인생을 아는게 쉬울 리 있겠습니까. 그냥 그때그때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요. 난 당신이 해설하는거 듣고 내가 해줄 것만 해주면 되니까. 그럼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요.”
“빈손으로 오기 영 찝찝하네.”
“회장님이 어설프게 뇌물 쓰지 말고 능력껏 따오라고 했잖아. 그리고 회장님 친구 분이나 마찬가진데 뇌물이
통하겠어?”
“뇌물이라기보단 너무 빈손으로 와서 민망하니까 그렇지.”
“벌써 와 있었네?”
“실력 좋네.”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너 너무 자신감이 심하다니까. 일단 앉을까? 상석은 비워둬야겠지?”
“오셨습니까.”
“앉아요, 앉아. 우명건설은 좀 놀랐죠? 미안해요. 내가 미리 말을 못 했어요.”
“하하, 손님이 더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괜찮습니다.”
“원래는 그쪽하고만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어차피 따로 만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할 바에는 같이 만나는게 나을 것
같아서 자리를 마련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응?”
“제가 원래 안주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낮에 의원님을 만나고 저녁까지 기다리면서 심심해서 기사를 보다보니 군산버스터미널이 낙후돼서 지역 주민들이
많이 불편하다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의원님께서 예산을 많이 못 타서 현대화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는 기사를
봤는데, 맞습니까?”
“그러고 있기는 합니다. 공사대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업이 지연되고 있지요. 그런데... 설마 그걸 하겠다는
말입니까?”
“대규모 초고가 아파트 단지를 짓는 게 서민들에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돈 있는 사람들에게나 좋은
일이지.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현진건설이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없어서 못 먹습니다.”
“내 최고의 홍어집을 알고 있지. 자리 한번 만들 테니 시간 내 보게.”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의원님. 잠시만...”
“무슨 문제? 현진물산이 군산 시민들을 위해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 버스터미널을 현대화 하겠다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너희가 하면 되잖아.”
“...”
“우린 이만 가볼게. 우리 상황이 저녁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잖아? 더덕구이는 나중에 먹어야겠다.
가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시발, 뭐가 뭔지 엉망진창이네.”
“그럼 대책을 세워야 해. 진짜 강주원 의원을 노린 거라면 우리도 조재민 의원이나 강주원 의원을 사로잡을
뭔가를 제시해야 한다고. 막말로 강주원, 조재민 의원이 LH 간부들 모아놓고 요즘 호텔급 조식 서비스가 그렇게
좋다더라고 칭찬 한 마디만 해도 게임 끝나는 거야.”
윤희찬 부장은 확실히 일이 성사되는지에 주목했던 자신과 다르게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심을 가지는
창훈을 보고 사안을 보는 시야가 다름을 느꼈다.
“약혼자? 그게 말이 돼?”
“그게 아니면? 외동딸인 연희 씨의 약혼자라면 현진물산 차기 경영자잖아. 그럼 이 모든 판단을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지.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말이 돼. 협상이라는 건 자리에 앉은 사람의 판단을 믿고
도박하는 거니까.”
“그럼 네가 호텔에서 연희가 그 놈 눈치를 봤다는게 진짜 그 뜻인건가?”
“아무래도 둘 사이가 그냥 직원 사이 같지 않아. 현진물산 외동딸이 이 중요한 자리에서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안
했어. 고작 과장 따위한테 발언을 넘기면서까지.”
“씨발...”
“그럼 뭐가 걱정이에요? 그거 받아서 아무것도 안 된다면 모를까 봉선동이 된다면 걱정할게 하나도 없죠,
히힛...”
“현진물산 최영훈입니다.”
“조재민 의원님 보좌관입니다. 조금 늦었지만 군산항의 벽란도라는 음식점에서 뵐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광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서울의 현진물산 사옥에서는 긴급 임원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말고 일단 상황을 설명해봐요!”
“갑자기 흑룡강성 대표회의에서 유연탄 광산의 개발과정 문제점을 들고 나오면서 작업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럼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요?”
“성급 인민정부에 보고가 올라간 상황이라 국무원에서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제 인맥으로도 막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작업이 얼마나 중지될 것 같아요?”
“최소 6 개월에서 최대 1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임원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송은채 사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재서류를 탁자에 내리쳤다.
탕!
“현진물산을 인수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영훈 과장이 방향을 틀어버린 건 정말 신의
한 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프록시아 입찰을 반드시 따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했을 테고 계속 저들에게 휘둘려야 했을 겁니다.”
“맞아요.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제는 프록시아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그건 현진관광이 프록시아보다 훨씬 매력적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겠죠. 그럼 일단 지켜보자는 말인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차 상무가 정말 이 일에 관련이 없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소방수일 테니까요.”
“광주에 내려간 애들한테서는 연락 왔나요?”
“아까 정신이 없어서 오래 통화는 못했는데 조재민 의원하고 오늘 밤 만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밤?”
“네. 아마 밤 10 시는 넘어서 만날 예정이라 미팅 결과 브리핑은 내일 오전이 돼야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왜 군산까지 가서 조 의원을 만난다고 하던가요?”
“그게, 최 과장이 조 의원에게 군산 버스터미널을 현진건설에서 현대화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네? 군산 버스터미널을요? 갑자기 무슨...”
“저도 그래서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왔냐고 물으니까 정확한 건 저녁 미팅이 끝나야지 결정 날 것 같다고
합니다. 군산 버스터미널은 그냥 미끼였다고 하면서 다른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결국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게 결론입니다. 일단 내일 오전에 브리핑을 받아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저녁에 따로 연락해보시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간 것도 아니고 일하러 갔으면 정식 보고를 받아야죠. 내일까지 기다려볼게요.”
“알겠습니다.”
군산항의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자리에 위치한 벽란도라는 횟집에는 늦은 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횟집 앞에 주차된 차량 두 대는 딱 봐도 높으신 분들이 타고 다닐 만한 고급 차였고 음식점 입구에는 종이로 대충
써갈긴 [영업 끝났습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영훈과 연희는 그 글귀를 보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는 큰 소리 때문에 주인장이 입구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높으신 분들이 기다리는
손님이라는 걸 눈치챘다.
“늦었습니다.”
“아이고~ 오늘 두 번 만나는구만. 여기 이분들이 제가 말했던 분들입니다. 인사드리게, 강주원 의원님일세.”
영훈이 굳이 정식으로 인사하면서 악수를 청하지 않은건 이미 연희가 강주원 의원에 대한 사주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인, 또는 연예인들은 생년월일시가 정확히 나온 사주가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광주에서 군산까지 오는 동안 강주원 의원에 대해 여러 가지를 확인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주였다.
사주를 본 영훈은 오면서 연희에게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했고 연희는 영문을 몰랐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될 테고 택시기사까지 있는데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재민 의원이 호탕하게 같이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자 강주원 의원이 홍어를 한 점 입에 넣으며 말했다.
“고맙군.”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혹시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시죠.”
“광주 월곡동에 초등학교를 하나 지었는데 건설업체에서 공사대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학교 상태가 영
안 좋아.”
“부실건설이군요.”
“조사를 시작했는데 그런 곳이 몇 군데가 더 있더군. 큰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들어가야 할 돈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서 영 곤란하기가 이를 데 없지 뭔가. 요새 인공지능
중심 산업융합단지다, 광주형 일자리다, 군 공항 이전까지...
사실 이 모든게 다 중요하고 보통 예민한 사업들이 아니거든. 그래서 혹시 도와줄 수 있겠는가?”
“좋은 일이군요.”
“맞아. 좋은 일이면서도 중요한 일이지.”
“알겠습니다. 현진건설에서 이 부분까지 도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고맙군, 한 잔 받게.”
원래는 대놓고 물어볼 생각이 없었는데 강주원 의원이 참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조 의원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만약 내가 안 줄 걸 알았다면 버스터미널은 왜 해주는 건가?”
“조재민 의원님께서 강 의원님께 확언하고 말씀드렸을 텐데 체면을 구기게 해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사실인가?”
“대기업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여의도에서 모르는 정보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죠.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요.”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네. 다음 총선까지 현진건설에서 특별히 의원님께 뭘 원하는 바는 없습니다. 솔직히 봉선동의 아파트 시공을
우리쪽으로 밀어주셨으면 하는 바는 있지만 안 되더라도 의원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드린
것 이상은 해주시겠죠.”
“맞네. 이번에 들어가는 수많은 사업 중에 현진건설로 몇 개 정도는 밀어줄 수 있어. 사람들은 아파트를 어느
기업에서 짓는지 관심 있어도 지나가면서 흔히 볼수 있는 빌딩을 어느 건설회사에서 지었는지는 관심이 없거든.
그래서 편히 밀어줄 수 있는 거지.”
“그거면 됩니다.”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저울이 기울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이 정보를 들은 이상 하나씩 주고 받았다고 하기는
어려웠음이리라.
조 의원의 말에 영훈이 미소 지었다.
“뭐가 말인가?”
“오면서 기사를 보니까 군산의 자살률이 급증했다고 하더군요.”
“경제가 무너지면서 일어나는 참담한 상황이지.”
“하필 이럴 때 군산 시장님이 선거법 위반으로 시장직을 잃었다고 하고... 참 공교로운 상황입니다.”
“응? 그래, 안타까운 상황이지.”
“이런 군산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지... 오늘 홍어는 잘 먹었습니다. 저울에 홍어 값은 올려주실 수 있으시죠?”
“이를 말인가?”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만 말하고 연희와 함께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조재민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에 김시원 보좌관이 다가와 물었다.
“안 가십니까?”
“자네 나랑 몇 년째지?”
“올해가 3 년째입니다.”
“내년이 4 년차 들어가는구만.”
“그렇습니다.”
“내년에도 내가 광주 갑에 출마한다면 당선이 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의원님이 딱 버티고 계신데 누가 광주 갑에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공천 문제
없습니다.”
“그렇겠지. 공천으로 올라올 다른 인재도 안 보이고 일단 공천만 되면 당선이야 문제없을 거야. 그래서
중앙에서는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지역의 정치인 정도로 평가하겠지. 국민들도 마찬가지겠고.”
“그건 그렇지만 이곳에서 공천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당장 의원님도 처음에 공천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잊을 수가 없지. 그런데 내가 아직 젊어서 그런가? 누가 내 마음속에 불을 질러넣는구만.”
“아까 그 청년 말씀이십니까?”
“통찰력이 있는 청년이야.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려. 그런 친구가 도대체 왜
군산으로 가라고 하는 걸까?”
“군산 말씀입니까? 군산에는 강주원 의원님이 계시는데...”
“아니아니, 국회의원이 아니라 시장을 언급했어. 아무 생각 없이 언급한게 아닐 텐데 도통 그 청년의 생각을
읽을 수 없어.”
“군산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굳이 이미지 손상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대로 그 고난을 뚫고 일어났을 때 내 입지는 어떻게 될까?”
“...”
“여기서 많이 먹어요.”
“그런데 강... 의원이 어떻기에 아까 그런 거예요?”
“많이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생깁니다. 천진하고 환하게 웃을수록 주름이 예쁘게 지는데 그런 주름을 가진 이들은
여자면 좋은 남편을 만나고 남자면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지요.”
“남자는 왜 그래요? 그런데 결국 웃음이 많은 남자는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네요?”
“사주라는게 옛날에 만들어졌으니 남녀에 대한 설명이 현대와 차이가 있지만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다는
내용은 동일합니다. 옛말에 나이 마흔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다 자신의 마음
씀씀이가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흠... 어디가 바뀌었지?”
영훈은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연희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쾅쾅쾅!
“영훈 씨! 문 좀 열어봐요!”
“뭡니까?”
“큰일났어요! 아...”
“아... 급한 일입니까?”
“네...”
“잠깐만 있어봐요. 나 옷 좀 입고 문 열어 줄 테니까 그때 말해요.”
“큰일났어요. 우리가 흑룡강성에서 유연탄 광산을 채굴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게 이제 채굴을 앞두고
막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중국 정부에서 개발진행 과정을 문제로 걸고 나섰어요. 현재 작업은 중단됐고 해당
내용이 증권시장에 퍼진 상황이에요.”
“지금 몇 십니까?”
“7 시 20 분이요. 이제 1 시간 40 분이 지나면 주식시장이 열리는데 오늘 폭락할 건 기정사실일 것 같아요.”
“또 만나쟤요? 왜요?”
“모르겠습니다.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제랑 또 딴소리 하는건 아니겠죠?”
“모르죠.”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보좌관이 말한 오동근린공원이라는 곳에 도착해 주차하고 전화하니 바로 보좌관이 달려왔다.
“시장이야 아무나 될 수 있지요. 하지만 망해가는 군산을 일으키려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의원님.”
[어제 잘 들어갔나? 술 많이 마셨던거 아니야?]
“의원님 들어가시고 그 어린놈 버릇 좀 고쳐주느라고 잠시 지체하다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랬어?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젊으니까 객기에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객기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단단히 주의 줬습니다.”
[그러다 마음 상해서 괜히 했던 말 돌리는거 아니야?]
“원래 호텔 커피는 맛이 없어요. 5 성급 최고급 호텔에서 파는 커피도 그냥 먹을만 하다는 정도? 그래서 내가
차를 마시는 거예요.”
평소 식사를 하고 난 이후에는 언제나 커피를 즐기던 그녀가 왠일로 커피 대신에 아침부터 차를 마시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어차피 주식이야 오르고 내리는게 당연한건데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시장이 반응하면
회사를 운영하는데도 큰 차질이 오거든요. 주주들도 이 사태를 그냥 지켜보지 않을 테고... 어쩌면 회장님이
직접 사태의 원인을 알아본다며 경영에 참여하려고 하실지도 몰라
요.”
“여깁니다!”
“우명건설에서 나왔었다고?”
“주택영업본부장이라는 김창훈 상무와 그 비서가 내려왔었습니다.”
“내용은 내가 전달받은 게 전부고?”
영훈은 상황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확실히 코발트 광산 인수를 포기한게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현진물산을 노리는 자들이 이토록 공격적이고 저돌적이라면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이제 고승현 부장이 물었다.
고 부장은 기대어린 얼굴로 상체를 확 앞으로 당겼지만 이내 이어진 영훈의 말에 실망어린 얼굴로 바뀌었다.
“왜? 뭐 문제 있는거야?”
“솔직히 전 봉선동 사업권 대신 다른 걸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알고 보니 광주광역시에서는 지역
발전을 위해 꽤 많은 사업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그중에 몇 개를 줄 생각이었던 것 같거든요.”
“정말?”
고 부장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도대체 요 며칠 사이에 얼마나 만났다고 조재민 의원을 그렇게 구워삶았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유는 묻지 마시고 어쨌든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와... 기가 막힌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그럼 이 이야기도 조 의원 귀에 들어갔겠네?”
“네.”
“그렇군. 그래서 이렇게 쉽게 마음을 돌릴 수 있었겠어. 보스가 날라간다고 하니 이제 자신을 위로 이끌어줄
사람이 없어진 셈이겠지. 그런데 쉽게 믿던가?”
“쉽게 믿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꼼꼼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제부터 제가 말했던 내용이 맞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움직이겠죠.”
“잠깐, 잠깐... 그러니까 뭐야? 조재민 의원이 봉선동 사업권을 주겠다는 건 그냥 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는
거네?”
“맞습니다. 조 의원은 봉선동 사업권을 줄 테니 군산을 일으켜 세워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로서는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죠.”
영훈이 이 사업을 받아왔으면서도 계속 얼굴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다.
“방법이 있다면 찾아주는 게 이익이긴 합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우리가 조 의원을 키워주게 된다면...”
“대권 주자 급 정치인을 키워준 회사가 된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지.”
“게다가 우리는 어려운 지역 경제를 살린 회사로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되겠죠.”
“방법이 문제네.”
“맞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요?”
“별거 있나? 우리는 먹어 봐야 기술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다 가진 현진중공업에 비싸게 넘기는 거지.”
“이거... 현진관광처럼 미끼를 던지는 거냐? 현진관광이 당하는걸 보고 또 주식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뭘 주든 그 이상 받아내면 되겠죠. 굳이 꼭 뭘 가져야 한다고 단정지을 필요 있습니까? 안 그래도 가진게 많은
분한테.”
“하하, 맞다. 굳이 지금부터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우리는 상사인이야. 시베리아에서 냉장고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 우린데 죽은 조선소 살려서 갖다 파는게 뭐 이상할게 있나. 그런데 이건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혼자 괜찮겠어?”
“모르겠습니다. 해본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일이 쉽게 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처리될 일이었으면
이미 정치권에서 쉽게 해치웠겠죠.”
“그야 정치적으로만 처리하려고 해서 그렇지. 우리처럼 저 조선소를 탐낸 사람이 없었잖아. 그리고 전주(錢主)도
없었고.”
짝!
“아! 아퍼!”
“야, 일어나봐.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조재민 의원 쪽에서 우리랑 약속을 안 잡아. 아예 피하고 있다고. 아무래도 현진물산으로 넘겨주려고 작정한 것
같아.”
“확실해?”
“그게 아니면? 조재민 의원하고 동창인 회장님 아들인 널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는게 말이 돼? 그것도
버스터미널 이야기에 횃까닥 해서 현진건설 그 애송이 홍어 먹이겠다고 데려간 그 양반이?”
“우리가 뭘 준비했는지 이야기는 꺼내 봤어?”
“그 보좌관이 하도 이야기가 안 통하는 것 같아서 슬쩍 이야기를 꺼내 봤어. 조재민 의원 지역구에 어린이집을 몇
개 지어주겠다고. 평소 같았으면 당장 만나자고 해도 모자랄 사람인데 그 보좌관이 잠시 후에 연락을 준다고
해놓고 나중에 전화와서 뭐라고 했는줄 알아?”
“뭐라는데?”
“마음은 너무 고마운데 정말 순수하게 시민들을 위해 기증하는게 맞는지 물어보더라고. 봉선동 사업에는 절대
도움을 줄 수 없다면서 말이야. 이거 선을 너무 긋고 있잖아.”
“이상하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조재민 의원이 이렇게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나? 회장님이 뭐라고 하신 말씀이 있을 거 아니야?”
“그 정도로 청렴한 사람이었으면 우리 아빠가 날 보내면서 잘 해보라고 말했을 리가 없지.”
“그럼 이유가 뭐겠어?”
창훈은 침중한 얼굴로 생각에 빠지더니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갔다.
“희찬아! 짐 챙겨!”
“그러게 진즉 회장님한테 도움 요청하자니까. 그런데 전화로 하면 안 되나?”
“오전에 경제인 만찬에 오후엔 우명솔라 충북사업장 시찰 있어. 전화 통화할 상황이 아니야.”
“충북? 여기서 그렇게 안 머네?”
“다행이지.”
똑똑...
“들어와.”
창훈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리에는 우명솔라 사장이자 창훈의 큰형인 김도훈과 우명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태현
회장이 앉아 있었다.
김태현 회장은 창훈을 보자마자 물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말씀 좀 드리고 싶은게 있어서 왔어요.”
“앉아.”
“형 오랜만이네.”
“인마, 그러게 이제 한국 왔으면 집에 자주 들러. 어머니가 너 얼굴도 안 비춘다고 많이 섭섭해 하신다.”
“바쁘니까 그렇지.”
“클럽인지 뭔지에서 노느라 바쁜건 아니고?”
“아버지, 저도 이제 마음 다잡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 왜 왔어? 조재민 의원이 말 안 들어?”
“네...”
“그럴 것 같았어. 쉬운 친구 아니거든. 내가 직접 간 것도 아니고 아들래미 보내놓고 그 큰 걸 달라고 하니 쉽게
내줄리 없지.”
“됐어, 네 친구 같이 왔지?”
“네.”
“들어오라고 해.”
“이 녀석한테 들으면 이 녀석 주관적인 의견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서 불렀어. 조재민 의원이 현진건설한테
봉선동 사업을 넘긴다고?”
“돌아가는 상황이 그럴 것 같습니다.”
“의견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 진행사항 빠짐없이 보고해.”
“최영훈이라는 놈 알아?”
“처음 듣습니다.”
“계속해봐.”
“네? 분명 강주원 의원까지 만났을 텐데 강 의원이 지시했다면 충분히 일이 이루어질 만하지 않아요?”
“흥, 그 여우가 고작 버스터미널 하나에 봉선동 사업권을 넘겨줬을거라고 생각해? 열을 줘도 하나를 받기
어려운게 강주원이야. 그 여우한테 줄 댔다가 손해 본 기업이 한둘인 줄 알아?”
“그럼 조재민 의원이 어떤 기업으로부터도 청탁을 받기 싫어서 피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냐?”
도훈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이 부분은 물어본 김태현 회장도 짐작이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
김 회장은 안절부절하는 창훈에게 말했다.
“약속 잡을 테니 잘 해봐.”
“감사합니다.”
“어떻게 생각해?”
“현진물산이요?”
“그래.”
“송은채 사장이 현진중공업에게서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질문은 내가 했다.”
아무리 일적으로 왔다고는 해도 남들의 이목이 있는데 둘이서 장기 출장을 한다는 건 영훈에게도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고 부장이 서울로 올라갈 때 연희도 같이 보내고 영훈만 광주에 남았다.
영훈을 도와주기 위해 민희를 내려보내주겠다는 홍 실장의 제안을 연희가 칼같이 자른걸 제외하면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저 광주 시내에서 맛집 투어를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게 영훈의 일과였다.
그러다 사흘 정도가 흘렀을 때 영훈이 조재민 의원에게 광주 외곽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간판도 잘 안 보일 곳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토종닭집은 인터넷이
아니었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곳이었다.
“1 조 원이 넘을 텐데? 그 만한 돈은 있고?”
“공짜로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현진물산에서 가져갈건 아니겠고, 현진중공업?”
“아마 그렇겠죠.”
“아마 그럴거다...? 어감이 묘하군.”
“세상 일은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거니까요. 중요한 건 지금 죽어있는 군산조선소를 우리가 돌려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군산시의회에서 군산조선소를 매각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기는 해. 그들은 군산조선소 재가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거든. 무진중공업이 해주조선해양을 합병한다고 군산조선소를 거들떠도 안보고
있지 않나? 군산조선소를 매각하는게 어려모로 자연스럽
기는 하군.”
“우리 짠 한번 하세.”
“그러시죠.”
쨍.
“오셨습니까.”
“회사는 어때?”
“흑룡강성 유연탄 광산 작업이 중지된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뭐라고?”
강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민희는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아는 만큼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강 실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최 과장은?”
“광주에서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 관련해서 출장 가셨다가 오늘 올라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 출근하실
겁니다.”
“거길 최 과장이 직접 가야 할 이유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건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아침에 출근한 영훈이 송은채 사장에게 광주 출장건을 보고하려고 할 때 강노식 실장이 아침부터 비서실로
올라왔다.
그는 영훈을 보자마자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휴가는 잘 보내셨습니까?”
“잘 보냈지. 내 평생 그렇게 다이나믹한 휴가는 처음이었어. 인생의 밑바닥까지 파 들어간 기분이었거든.”
혼자 사는 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추세에서 이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이혼은 인생의 커다란 실패로 다가온다.
정신적인 충격에 그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찾아 성격을 바꾸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특히 자식이 있고 그 자식에게 애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심한 충격으로 다가오는게 이혼이다.
그래서 살(煞)이라는 글자가 붙는 것이다.
고진살은 사람이 죽고 사는 살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살이라는 글자를 붙일 만큼 당사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예민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살아왔던 강노식 실장에게 이번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민희를 보낸 건 그가 심적 충격에 운전이라도 실수할까봐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랬군요.”
“어제 회사로 와서 몇 가지 확인한게 있어.”
“유연탄 건에 관한 일인가요?”
“그래.”
“그럼 차 상무님에 관한 일이 맞습니까?”
“알고 있었나?”
“아닙니다. 그저 차 상무님일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죠. 저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다만 이야기를
못하고 있었을 뿐인겁니다. 뭘 찾았습니까?”
“끈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신영은행에도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있구요. 그런데 실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재벌가와 혈연 관계 같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상황에 중요한 문제인가요?”
“중요하지. 현진물산이 바람 앞의 등불인 상황에서 같은 배 승객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바람 앞의 등불이라... 저랑 보는게 많이 다르시네요.”
“아니라고? 지금 유연탄 광산 작업 중지 된 거 보면서 아무것도 못 느끼나?”
“예상 못 한 일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배가 뒤집힐 만큼 큰 파도가 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일파일 뿐이야. 이파, 삼파가 몰아칠거라고.”
“그래서요? 제 백그라운드에게 임창호 회장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장난처럼 남의 집 싸움에 껴서 대충 놀다가 언제고 몸을 빼려는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뿐이야.”
“아... 그게 걱정이셨군요?”
“아니라면 다행이군.”
“출장은 잘 다녀왔어?”
“법인카드 덕분에 잘 먹고 잘 다녀왔습니다.”
“최 과장 보고는 나중에 듣고 방금 강 실장이 차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거든. 같이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흑룡강성 인민대표로 주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구성과정이 복잡하지만 쉽게 우리나라로 따지면 국회의원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췬이라는 사람이 차지열 상무와 인연이 깊습니다. 이 사람이 개발허가는
물론이고 사업체를 연결시켜 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이
주췬이라는 사람은 저 역시 안면이 있습니다. 어제 출근해서 연락을 취해보니 저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자꾸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요?”
“이 주췬이라는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건지 정말 우리와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한다면 이 사태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강 실장님은 그만 나가보세요.”
“알겠습니다.”
“준기 안 됐네.”
준기가 울듯한 얼굴로 애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강 실장의 대답에는 한 가닥 자비심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회장님은 무서운 분이야. 아직 단 한 번도 우리 연희한테 살가운 표정을 지어준 적 없었어. 친정이 어려워지고
내가 동생을 도와줄 때도 명동 사채시장 따위에 현진그룹 냄새도 안 나게 하라고 불호령을 내렸었지. 그때는
어찌나 서럽던지... 연희 아빠가 저렇게 되고 내가 이 자리에 앉
을 때 말씀하셨어. 회사에 단 1 원이라도 손해를 보게 하면 당장 사장을 교체하겠다고.”
송 사장은 이번일을 잘 처리하면 보너스를 두둑하게 준다고 하려다가 연희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며
그만두었다.
속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일을 맡겨놓으면 그처럼 안심이 되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송 사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우명그룹의 제안을 받는 순간 이상하게 최 과장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선 중국에 출장을 보냈으니 생각할 시간은 생긴 셈이었다.
송 사장은 그동안 연희에 대한 생각도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광주 건 보고 했어요?”
“네. 아마 저랑 중국으로 가게 될 겁니다. 준비하세요.”
“중국이요? 갑자기? 둘이서만요?”
“아니요. 기조실 강노식 실장님과 같이 가게 될 겁니다. 며칠 다녀올지 모르니까 준비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우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영훈의 안색을 살피는 그녀는 지나가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엄마가 무슨 말 안해요?”
“무슨 말 말입니까?”
“아니 뭐... 아니에요. 언제 출발할 거예요?”
“나야 언제 떠나도 상관없을 사람이라 강 실장님과 의논해보고 떠나려고 합니다. 강 실장님은 미국 다녀온지 얼마
안 되셨는데 또 나가게 돼서 그게 좀 걱정이네요.”
“그럼 바로 떠난다는 말이네요? 저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요.”
“다녀올 필요 없습니다. 준비 되고 연락하면 바로 나 데리러 오면 됩니다.”
“아... 차가 없으시죠?”
“다음 주에 필기시험입니다.”
“요즘 필기 어렵다는데... 그리고 예전하고 달라져서 도로주행 힘들어요.”
“제가 안 해서 그렇지 운동신경이 제법 됩니다.”
“아~ 그 도끼질?”
“그거 운동신경 없는 사람이 했다간 바로 허리 나가...”
“네네~ 알겠구요. 전 이만 출장 준비하러 가볼게요.”
양 전무, 이제는 퇴직해서 자연인 신분인 그는 뻘개진 얼굴로 달려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준기를 보고 너무
놀라 화도 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노식 실장이 자신의 아들을 다른 곳도 아닌 인도 오지 주재원으로 보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승대 실장이 돌아섰고 이제 강노식 실장 역시 돌아섰다.
이제 현진물산에 임지은 사장과 연결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지경이고 그 중에서 회사에 막강한 힘을 발휘할
사람으로는 차 상무만이 남았다.
양철기는 분노를 토하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일단 논현동으로 향했다.
자신들을 구제해줄 사람은 임지은 사장밖에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다행히 논현동 자택에 임지은 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임 사장이 양철기 전 전무를 살갑게 대한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임지은 사장은 가정부가 가져다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서성거렸다.
당황스러웠음이 틀림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양철기 전무가 날아가고 홍승대 실장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차 상무가 뭔가 일을 벌이는 이 와중에 갑자기 강 실장이 마음을 돌렸으니 상황이 심각해졌음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임창호 회장이 이 사태를 알게 되면 그녀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게 분명했다.
사장이 된 이후에 아랫사람을 완전히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송은채 사장의 수완에 완전히 당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현진관광이 다가오는 2 천억 채권을 막기 위해 현진물산과 현금, 주식을 교환할 걸로 크게 실망한
상황이니 말해 무엇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임지은 사장은 양철기에게 말했다.
흑룡강성의 하얼빈시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 그리고 강노식 실장은 두꺼운 점퍼를 더욱 여미며 미리 예약한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후... 엄청 추운데요?”
영훈이 으슬으슬 몸을 떨며 말하자 강 실장이 말했다.
“그렇군. 저녁에 주췬이 신바이(新百) 백화점 개장 축하 행사에 모습을 보인다고 알고 있어. 일단 그곳에서
만나서 추후 약속을 잡기로 하지.”
“어? 저기 저 사람.”
강 실장이 얼른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건네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반갑습니다. 현진물산에서 나온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전권을 가지고 나왔으니 불만이 있다면 제가 다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영훈이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기다리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이번에는 주췬의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역시 이번에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한명씩 악수를 하더니 주췬의 아내에게 말했다.
“아, 그런가요?”
“어떻게 할 거예요?”
“아들이 문제인 집안이네요. 문제는 쉽게 풀리겠습니다. 다만... 강 실장님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네요.”
“네? 왜요?”
“회사에 한중교류 유학 프로그램 하나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원래 회사마다 장학생 제도는 하나씩은 있는데요, 뭐... 그 정도 만드는 건 문제 없어요. 그런데 어느 학교를
보내려고요?”
“사실 학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일단 기다려봅시다.”
“크흠...”
“평소 가족분들과 오붓하게 나오시는 편이신가 봅니다. 가족분들 얼굴이 좋던데...”
“뭐, 그렇소.”
“그런데 아드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양쯔엉은 결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돈을 받지 않네. 그런데 이번에 전달해야 할 사람이 오질 않았어.
그럼 둘 중 하나지. 전달할 사람에게 사고가 생겼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다른 마음을 먹었든지.”
“저희는 결코 아닙니다.”
“그럼 중간에서 문제가 생겼겠군.”
“거래가 잘못되면 중간책을 바꾸는 거야 언제든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사후처리를 확실히 할 수 있느냐일 겁니다.
우린 이 사태를 일으킨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금 원래대로 돌려놓길
원합니다.”
“내 아들 얼굴 어디가 안 좋아 보이던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시각을 넓히게 될 겁니다.”
“하긴 한국으로 유학가서 사고 치는 놈이 많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 최영훈이라고? 눈이 날카롭군.”
“계산은 빠르지 못해도 사람은 잘 봅니다. 그래서 전권을 맡고 여기에 온 겁니다.”
“사람을 잘 본다? 크게 될 인재군. 어느 호텔에서 묵나?”
“아들은 뭐야? 아들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주췬이 아들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그냥 짐작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아까 들으셨잖아요? 표정이 달랐다고.”
“고작 표정 좀 안 좋았다고 이걸 그렇게 연결시킨다고?”
“어쨌거나 잘 된 건 맞지 않습니까?”
“...”
“가끔 당신에게 소름이 끼칠 때가 있어요. 사람이 아니라 도사를 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배운게 다르고 보는게 달라서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저 사람을 보지만 난 그 사람의 인생을 봅니다.”
“만약 나도 당신처럼 된다면 지금보다 더 싸가지가 없어 지겠죠?”
“하하,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호텔에서 조식을 마친 일행은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뿌연 대기를 뚫고 하얼빈 시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향했다.
말이 조금 벗어난 곳이지 네비게이션으로 2 시간 반이나 걸려 사실상 서울에서 강원도 홍천 즈음까지의 거리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그런가보다 마음먹어야 했다.
주췬이 초대한 집은 고속도로를 한참 타고 가다 국도로 빠져 고풍스럽고 으리으리한 철제 대문이 눈에 들어왔을
때에야 도착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으리으리한 대문을 통과하고서도 5 분여를 더 들어가자 그림 같은 저택 정문이 나왔다.
중국의 권력가라고 해서 오래된 저택을 상상했는데 의외인건 꽤나 모던한 현대식 건물이었다는 거다.
마치 경기도 외곽의 타운하우스가 훨씬 더 커졌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다만 그 현대식 건물에 어울리지 않은 건 집사처럼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가 내려와 안으로 안내했다는 정도.
“어서 오시오.”
주췬은 마침 가족들과 담소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지 과일 몇 가지와 차를 함께한 채 식탁에 모여앉아 있었다.
그 식탁이 대략 열 명 정도는 둘러앉을 만큼 크다는 것만 빼면 겉으로 보아서는 굉장히 화목한 집안처럼 보였다.
“현재 우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 아드님에게 맞는 대학을 맞춰 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아드님 성적표와
학생기록카드 같은 게 있다면 저희 쪽으로 주시면 빠르게 진행될 겁니다.”
“하하하! 그렇지. 남들하고 똑같은 기준으로 유학을 보낸다면 뭐하러 내 앞에서 그런 자랑을 했겠어? 당신은
걱정할게 없다니까!”
강 실장은 주췬이 아내 앞에서 턱하니 배를 내밀고 자랑하는걸 보면서 최 과장이 그 짧은 순간에 제대로 약점을
찔렀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주췬의 아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강 실장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잘생긴 친구.”
눈치 빠른 강 실장은 얼른 대답했다.
“손님이 와서 늦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를 사업차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마작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를 옆에 두고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마작을 두겠다고 해요.”
“이거 참 별 경험을 다 하네.”
“원래 우리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장이 되는게 꿈이었소. 낙후되고 가난한 하얼빈의 시장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게 꿈이었지.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게임에만 빠져 살기 시작했지. 그 잘했던 공부는
아예 손을 놓았어.”
“안타까운 일이군요.”
“안타깝지. 어릴 때는 수재라고 다들 칭찬들이었다니까? 반에서도 1 등을 놓치지 않았었지. 한 때는 말이야...”
연희는 깜짝 놀라 말했다.
“네. 한국 현진물산의 임연희라고 합니다. 사업차 이곳을 방문했는데 마작 구경은 처음이라 무척 신기하고
진귀한 구경을 하는 것 같네요.”
“북경어도 꽤 수준급이네? 하고 있는 옷이나 악세서리를 보니까 단순히 직장인 같지는 않고... 있는 집
자제인가?”
연희는 그녀의 눈썰미에 감탄했지만, 명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생긋 웃으며 답했다.
“광산 문제로군요.”
“맞습니다.”
“이야기는 얼핏 들었어요. 주췬이 상당히 곤란해 하더라구요.”
“끝났습니다.”
“앉게.”
"사람의 본성을 알게 하기에 도박보다 좋은게 없지. 내면 깊숙한 곳에 내재 된 밑바닥까지 끄집어내게 만든다네.
자네는 도박 좋아하나?”
“즐기지 않습니다.”
“사업은 돈을 잃고 끝나지만 정치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지. 한국은 그렇지 않겠지만 이곳
중국에서 정치를 한다는 건 천길 낭떠러지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네. 누구 손을 잡느냐가 나와 내 가족의
수십 년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어.”
“아까 중년의 여인 때문에 고민입니까?”
“그래서 아까 돈을 잃어주셨군요?”
“방금 주 대표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사업은 돈을 잃고 끝나지만 정치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당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돈이라는 것도 회사에서는 굉장히 중요시하기에 어느 하나 확실하지 않으면 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데이터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주관적인 의견은 데이
터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말이군.”
“아니면 누가 주 대표님의 눈과 귀를 가리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나?”
아들의 상태를 단번에 파악한 능력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한번 물어본 거였는데 오히려 걱정만 한 짐을 가슴에
얹혀놓게 생겼다.
“도와드릴 일은 이제 끝인 겁니까?”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그렇지.”
“지금 잠시 언짢으신 기분은 시간이 지나면 곧 가라앉을 겁니다. 남은건 주 대표님의 결정 뿐이죠. 아, 그런데
양쯔엉 씨는 언제 연결해주실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야 한가롭게 하얼빈을 여행해도 상관없지만, 서울에서
밤낮없이 퇴근도 못하며 고생하는 동료를 생각하면 일단 정
지된 광산은 돌리고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럼...?”
“내가 연락해 놓을테니 숙소에서 기다리게.”
“감사합니다.”
“아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면 이제 현진물산과 자주 연락하게 되겠군.”
“직원들이 최고의 유학 프로그램을 제공할 겁니다. 물론 현진물산과 주 대표님이 앞으로도 더욱 끈끈한 관계가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네들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관계야 문제 될 게 없겠지.”
이번 광산 문제의 실수를 언급한 것 같으면서도 영훈의 조언에 관해서 경고한 것 같기도 했다.
“앗싸! 대박!”
“어제랑 완전히 달라졌어요. 어제는 시큰둥하더니 오늘은 양쯔엉이 계속 돈을 받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전달자를
마련할 거라고 단정짓더라구요. 일단 숙소에 가서 기다리면 연락을 주기로 했어요.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더 세심하게 하는걸 보니까 완전히 우리한테 마음을
연 것 같아요.”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냥 조언 몇 가지 해줬습니다.”
“그 조언이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건가?”
“죄송하지만 주췬과 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서로 다른 곳에서 꺼내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서포트하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진짜 회사로 돌아가서 최 과장 서포트 잘 하고 왔다고 보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뭐라도 손에 하나 쥐고 돌아가야 강 실장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겠는가?
양쯔엉 문제까지 자신이 손 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강 실장은 영훈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잔잔히 미소지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
영훈 일행을 내보낸 주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서재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금고를 열어 수십 다발의 현금 뭉치 중에 두 개를 꺼내고는 다시 아까
마작을 하던 곳으로 갔다.
“어머? 다시 오신 거예요?”
“아아악!”
주췬은 그녀의 머리를 놓으며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상체를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딸이 있다고?”
“네? 네...”
“다리 치료하고 딸이랑 같이 이곳으로 짐을 옮겨. 마침 내 딸과 나이가 비슷하니 친구가 되겠군.”
기분 좋게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 실장은 생각할 게 있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레 남은 영훈과 연희는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 호텔 라운지에서 한잔하기로 했다.
둘은 조금 전까지 강 실장이 곁에 있어서 말하지 못하고 참아왔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라운지에서 이어지는 바깥 정원쪽으로 향하자 연희는 후다닥 화장실로 향했다. 술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진짜 얼굴이 발그레해 보였다. 거울을 보며 손 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메이크업을 다시
손보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
조재민 의원은 요즘 아침에 눈을 뜨는게 예전처럼 어렵지 않았다.
대개 일반인들은 국회의원들이 일은 안하고 탱자탱자 놀면서 세비만 축내는 세금벌레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일의
효율과는 별개로 굉장히 바쁘게 살고 있다.
아침 7 시 조식 모임부터 시작하려면 새벽 5 시에 일어나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고 10 시 전에 집에 들어간적이
없으니 하루에 자는 시간이 5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즘엔 한창 군대에서 구르던 이십대 초반처럼 새벽에도 눈이 번쩍번쩍 떠지는게 마치 젊을적 호기가
다시 차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본인도 자신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강주원 의원이 자신의 앞길을 잘 닦아줄 수 있게끔 보좌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현진물산의 그 이상한
친구를 만난 이후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거다.
이런 조 의원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당연하게도 김시원 보좌관이었다.
요즘 얼마나 여의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서울대 동창과 선
그런데 오늘 아침 같은 당 사무총장의 보좌관을 하고 있던 선배에게서 카톡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의원님!”
“아는 사람은?”
조 의원은 자신 있었다.
봉선동 시공권 정도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고 군산조선소를 이용해 군산경제를 다시금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장님...”
“어휴...”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차 상무는 김태민 상무의 지시가 있었기에 한 일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문제를 일으키라고만 지시했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하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더러운 일을 시킬 때 하는 수법이다.
나중에 지시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충성심에 한 일이라고 대충 둘러대기 위해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거다.
결국 문제 생기면 자기가 책임지기 싫어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니 자신더러 멍청한 놈
취급하는 것에 차 상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부사장님이었어도 화가 났을 거예요. 영업본부장을 자르는데 부사장의 의견도 묻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잘라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거네요?”
“맞아요. 이번 광산 영업 중단건에 차 상무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정황증거가 있어요. 하지만 이걸 드러냈다간
중국에서 우리를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정황 증거라서 법적으로 처벌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해직으로
그친거예요.”
“흐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골치 아픈 상황이 맞았군요.”
“야, 이리 와봐.”
“앉아봐.”
“네.”
“직원들 다 어디갔어?”
“다들 어제 회식 때 무리한 것 같아서 1 층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고 정신 좀 차리라고 내려 보냈습니다.”
“너 뭐 들은거 있냐?”
“어떤거 말씀이십니까?”
“프록시아 인수 관련해서 비서실이나 기조실에서 뭐 들은거 없냐고.”
“비서실이랑 기조실 말씀입니까? 음... 떠도는 소문 같은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도 궁금하다.”
“이유를 말 안해주셨습니까?”
“말해줬어. 세원 인터내셔널이랑 골든브릿지 사모펀드 컨소시엄에서 최소 1 조 원을 쓸 거라고 하면서 그 이상의
자금은 회사에서 부담스럽다고 하시네.”
“진짜 세원 인터내셔널 컨소시엄에서 1 조 원 이상을 쓸거라고 합니까? 얘네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한테
프록시아 따위는 관심도 없다고 했었습니다.”
“알지. 네가 그 이야기 한두 번 하냐? 그런데 일단 저쪽에서 가지기로 작정했나봐. 그런데 그건 그거고... 1 조
넘으면 이거 포기해야 하는 거냐?”
“그렇네요. 만약 혜성기업... 아니, 이제 현진건설이 됐으니까 하여튼 거기에서 은행에 담보 잡힌게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오면서 재무팀 들려서 확인해봤어. 깨~끗해. 그런데 이거 나만 알겠냐?”
“당연히 사장님도 알고 계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럼 뭐야? 그 2 천억이 아까워서 못 던지겠다는거 아니야!”
또 목소리가 커진다.
부사장의 미심쩍은 눈빛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민통~ 바쁘신가?”
“바쁩니다.”
“혹시 알고 있었어?”
“뭐 말입니까?”
“프록시아 건.”
“프록시아요? 그게 왜요?”
“모르고 있구나.”
“뭐 있습니까?”
박 부장은 잠시 말을 아꼈다가 재차 물었다.
“어떤거?”
“반도체 회사라고 하던데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기조실 전체가 달라붙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기조실 전체가 달라붙어?”
“네. 지금 기조실 가면 전화 받을 직원 한, 둘 빼고 아무도 없을 걸요?”
“민통~”
“왜 또 그러십니까? 불안하게?”
“강 실장님이랑 요즘 어때?”
“실장님 바빠서 얼굴도 못 봅니다. 그리고 알잖아요? 강노식 실장님이 양철기 전무님 라인이었던거. 요즘 그것
때문에 기조실 애들이 불안해서 죽으려고 해요.”
“그래?”
“뭘 모른척하고 그러세요? 다 알면서.”
“난 정치에 관심 없어.”
“관심 없으신 분이 부사장님 옆에 딱 붙어 계십니까?”
민 과장이 기가 찬 듯이 물었다.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였다.
“평생 집에서 살림만 했다고 알고 있는데 강단 있는 분입니다. 아까 저를 찾아와서 분위기 묻고 갔다는 사람,
라인 바꿔서 사장님께 붙었습니다.”
“그게 누군데?”
“뭘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아마추어 같이... 어쨌든 그런 판국이라 이건데, 놀라운건 그룹 회장님이신 임창호
회장님이 손수 키운 양철기 전무, 차지열 상무 다 날아갔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알겠습니까?”
“나더러 조심하라는 이야기야?”
“네. 혹시나 사장님이 하고 계신 일에 태클을 걸까봐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죠.”
“결과는 어땠는데?”
“사장님에게 붙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죽을뻔 했다가 아직 잘 살아 계십니다.”
“섬뜩한 소리 하지 마라. 가슴 떨리니까.”
“공포영화에 조연들이 왜 죽는지 아십니까?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부득불 호기심을 해결하겠다고 어두운 곳에서
혼자 나돌다가 칼에 맞는 겁니다. 가슴이 떨릴 땐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게 맞아요.”
“네 말도 맞긴 한데, 이건 가만히 있을 건이 아니야. 조 단위 금액이 걸린 일이고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고.”
“부장님이 어련히 잘하겠지만 부사장님께 보고하려고 할 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겁니다. 자칫하면
부사장님과 세트로 묶여서 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조실에 들러본 박 부장은 민 과장의 말마따나 여직원 둘밖에 없는 모습을 보고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민 과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 법인카드로 유혹해 회식이라도 시켜주며 꼬셔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박
부장을 본 여직원 하나가 일어서며 말했다.
여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기획조정실을 나온 박윤재 부장은 바쁘게 걸음을 놀려 엘리베이터 15 층을 눌렀다.
반도체 회사 하나를 싹 털어가며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조사하던 그가 갑자기 왜 봉선동 TFT 로 향했을까?
생각해보니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TFT 역시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혜성기업을 거의 날로먹다시피 했다지만 아파트 미분양으로 워크아웃을 벗어나지 못했던 회사가 어디
가겠는가?
그런데 또 아파트 시공권을 따내겠다고 우리 회사가 직접 TFT 를 만든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것도 해외자원사업부 에이스라고 인정받는 고승현 부장을 팀장으로 앉혀 놨다는 건 이걸 따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영은행에서 들어온 5 천억과 혜성기업. 그리고 봉선동 사업이 진행된 이후 프록시아 입찰을 다시금 생각한게
틀림없었다.
강노식 실장과 고승현 부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TFT 부서 문을 여는데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부서를 둘러보다가 안쪽 회의실에 다가가니 안에 세 명의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
몰래 엿듣는 건 괜스레 치사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놀랍게도 고승현 부장과 강노식 실장 그리고 얼굴이 익지
않은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부장님?”
“뭔데? 사적인 거야? 아니면 공적인 거야? 사적인 거면 조금만 기다려줘. 한... 20 분 정도?”
“사적인건 아닙니다.”
“그럼 말해봐. 뭔데?”
“부사장님이 말했군.”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실은 나도 안지 얼마 안 됐어. 너나 나나 그리 큰 차이는 아닐거야. 그래서 만약 코발트 광산
입찰에 관해 궁금한게 있으면 내가 아니라 여기 고 부장에게 묻는게 나을걸?”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박 부장은 반도체 회사를 들쑤셔 놓은게 기조실이면서 안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악의가 있을 거라는게 아니라 합당한 이유를 듣고 싶은 거야. 혹시 반도체 회사에 투자하려고 그러는 거야?”
“반갑습니다. 최영훈입니다.”
“어, 그래. 나 경영기획총괄 박윤재 부장이야. 경력직이면 전에 다니던 회사가 어디였어? 세원 인터내셔널은
아니지?”
“채권회사였습니다. 말씀드리긴 그렇구요.”
“아... 은행권? 엘리트구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왜 그러세요?”
“여기에 도청장치 돼있지는 않은지 조사하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드라마나 영화 보니까 무슨 기계로 방을 막
훑던데.”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저도 농담하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농담으로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혼란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리죠.”
“차지열 상무님이 나가면서 영업본부장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조직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사람을 빨리 채워 넣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제가 정할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사장님께 추천을 해드리는 거죠.”
“아니,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전 추천만 할 뿐 결정권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부장님이 거절하신다면 굳이 강권할 생각 역시 없습니다.”
민홍기 과장 앞에서야 임원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대기업 직장인인 이상 임원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제 직원이라면 달 수 있는 가장 높은 부장을 달았다.
여기서 임원 진급이 안 되면 결국 언젠가는 명예퇴직을 당할 시점이 온다는 이야긴데 만약 임원 승진 후 능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엄청난 연봉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장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게 진짜 기회라면 말이다.
“이게 지금 맞는 이야깁니까?”
“솔직히 난 이유야 어찌 됐든 당신이 영업본부장이 된다고 상상해보니까 나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리고 빙빙
돌리지 마. 최 과장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우리를 보면 알 수 있는거 아니야? 설마 최 과장이 우리
앞에서 농담하려고 바쁜 사람 붙잡아 두겠어?”
“...”
“돌다리 그 만큼 두드렸으면 이제 답을 해. 생각해보겠으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든지.”
이때 영훈이 말했다.
“자랑하는 것 같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당시에 좀 억울했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나쁘지 않았던 제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부장님도 그럴겁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부사장과 부딪히며 울고 웃었던 경험이 없기에 그의 사주 하나만 보며 냉정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영훈은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졌다.
마치 자신이 컴퓨터가 된 기분이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때그때 쉽게 판단하며 결정했는데 이게 다시 생각해보니 남들과 공유한 추억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던 거다.
이 상태로 10 년이 지났을 때 과연 사주만 보고 냉정히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앞날이 어떠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면 잘 될 거라고 응원하면서 밀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래서 무당이 될 팔자였나 하는 생각에 괜히 우울해진다.
“왜? 벌써 가려고?”
“부장님도 영업본부장 자리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제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실장님과 부장님이 알아서
작전 짜셔서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장님?”
“어? 왜?”
“어차피 많은 고민을 해봤자 결론은 하나 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지 말고 어떤 게 회사를
위한 일인가만 생각하세요. 성주훈 부사장님을 위한 일과 다수의 현진물산 직원을 위한 일. 이 둘만 고려하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영훈이 나가고 벙찐 얼굴의 박윤재 부장을 보며 고승현 부장이 키득거렸다.
“졸라 웃기죠? 저도 그랬습니다. 당황스럽고 그런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어떻게 되는데?”
“왜, 재벌그룹 회장이 일 년에 몇 천억을 벌었다고 하면 별 감흥이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 산
아파트가 엄청 올라서 몇 억 벌었다고 하면 배가 엄청 아프죠. 그 차이입니다. 아예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방금 같은 상황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돼
요.”
“나도 한 긍정하는 사람이라 아마 너처럼 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당황스러운건 어쩔 수 없네. 그런데
실장님, 나 진짜 우리 보스한테 미끼 던져야 합니까?”
“들었잖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거예요?”
“시키는대로 안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걸? 아마 임원이 못 되고 저~기 인도나 알제리 같은 곳으로 발령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아, 우리 팀에 있던 양 전무님 아들 있었잖아? 걔, 내가 날려 보냈어.”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요?”
“그냥 기분이 다운돼서 그럽니다.”
“그럽시다.”
둘이 잠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미소를 띤 채 탕비실을 나오는데 누군가 영훈을 불렀다.
"최영훈 씨?"
영훈과 연희가 뒤돌아보니 예전 고시원 집 딸인 박세영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영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훈은 세영의 뒤에 서있는 민희를 보며 그녀가 어떻게 비서실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았다.
세영은 순간 당황했다.
솔직히 전화를 받고 최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잘됐다는 생각에 얼른 비서실로 올라갈 생각밖에 없었다.
평상시라면 이런 실수는 결코 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 영훈이 고시원에 있을 때의 어수룩한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에
일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했던거다.
괜히 더 말을 걸기 전에 후다닥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딱 마주치는 연희와의 시선.
아무래도 방금 전의 선택이 훌륭했던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실 연희는 아까 세영이 인사하는 와중에 빠르게 자신을 스캔하는 눈빛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눈빛이 그냥 예뻐서 쳐다본 게 아님은 그 동안의 숱한 견제와 질투를 받아오던 경험으로 알았다. 게다가
남자를 유혹해보겠다고 작정하고 온 차림새까지.
눈치를 보니 이 남자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 난 잠시 15 층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연희는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하며 회의실에서 나와 민희와 인사하고 비서실을 나가는 세영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최 과장님.]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홍보팀에 터미널 조감도를 요청하셨다구요?”
[의원님께서 상당히 놀라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정보를 미리 알고 계셨는지 말이에요.]
성격이 느긋한 편이 아닌건 알고 있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그의 행동을 부채질 했음이 틀림없었다.
강주원 의원이 날아갈 거라는 정보를 듣고 바로 움직이는 걸 볼 때 이번 군산 시장에 자신의 정치 인생 전부를 걸
모양이다.
전화를 끊은 영훈이 15 층 봉선동 TFT 로 들어서자 가장 안쪽에서 누군가와 통화중이던 고승현 부장이 손을
흔든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는 영훈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간 후 블라인드를 내렸다.
이제는 부서 직원들이 종종 영훈이 내려오는 걸 봐서 익숙해하는 것도 같지만 아직 누구도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뭔데 그럽니까?”
“부사장님이 만약에 날아가면... 혹시 네가 부사장 할 거냐?”
이건 좀 놀랐다.
설마 자신을 부사장까지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훈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경영기획총괄 박윤재 부장을 상무에 추천하는 걸 보고 아무 생각이 안 들었을 리 없다는데 생각이 이르렀다.
“정말?”
“당장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싶은건 아니실거 아닙니까?”
“아유 그러면 도둑놈 심보지. 나 그렇게 계산 안 되는 사람 아니다.”
“네. 사장님께 잘 말씀드려볼게요.”
“정말?”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럼... 당연히 잘해야지.”
묵묵히 일만 하던 사람이 임원 승진이라는 눈에 보이는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왜?”
“일단 앉아봐. 앉으면 얘기할건데 뭘 묻니?”
“최 과장 사람 좋은거 알아.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그 사람 우리랑 달라. 너 결혼식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신랑 부모님 석에 아무도 없이 텅 비워둘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여기 말 많이 도는거 몰라서 그러니? 네가 고아랑 결혼했다는 걸 누구 한 명이라도 아는 순간 세상 모두가 알게
될걸? 이게 너 쪽팔리는 걸로 끝나는 것 같니? 최 과장이 너랑 결혼하는 순간 온 매스컴에서 쫓아와서
취재하려고 할 거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서 너랑 결혼했는지.”
“후... 나도 최 과장 싫어서 이러는거 아니야. 그런데 잘 생각해야해. 결혼은 되돌릴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니까.
나중에 마음 바뀌어서 좋은 자리 알아봐달라고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럼 나 올라갈게.”
“그런데 너 최 과장이 부담스럽다고 프로포즈 안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인사이동이 휘몰아쳤다.
차지열 상무가 떠난 자리엔 놀랍게도 경영기획총괄의 박윤재 부장이 앉았다.
이제 박윤재 상무가 된 그는 자신의 승진은 모두 성주훈 부사장 덕분이라고 덕담을 건네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고
한다.
박 부장이 떠난 경영기획총괄의 성주훈 부사장은 새로 발령받아 오게 된 윤찬일 부장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고.”
수행기사도 알고 있다.
자신을 생각해서 일찍 보내려는게 아니라 수행기사에게도 목적지를 알려주기 싫기 때문에 혼자 운전하려는 것임을.
그렇기에 계속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다.
운전대를 바꿔 잡은 성주훈 부사장은 목적지를 경기도 양수리의 오래된 카페로 잡았다.
마치 한가한 오후에 유유자적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처럼 한강변을 운전하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카페에 들어선 부사장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타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시벌놈... 내가 그 놈 박쥐 같은 건 알고 있었지.”
“박쥐 같았다기보다 속을 잘 내보이지 않는 친구니 가능했을거야. 여하튼 윤정환이 그것도 한 칼 있기는 해도
간이 작아서 전무 할 놈은 못 되는데...”
“부사장님께 인사에 관련해서 논의도 안 했습니까?”
“회장님은 어떠신가?”
“아직 정정하십니다. 저한테 직접 변호사 소개시켜주시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직접 전화로
물어보십니다.”
“자네한테 신경을 많이 쓰는구만.”
“선배님이나 저나 회장님하고 쌓은 정이 보통 아니지 않습니까?”
“정? 그래봤자 우린 일꾼일 뿐이야. 착각하지 마. 자네는 일은 잘하는데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어. 그 선만 잘
지켰어도 부사장 자리는 내가 아니라 자네 게 됐을 거야.”
“크흠... 거 지난 일 그만 좀 이야기 하시지.”
“그러지.”
“찾으셨습니까.”
“아침은 먹었나?”
“네.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든든하게 채웠습니다.”
“잘했다. 모름지기 아침이 든든해야 하루가 활기차다.”
“명심하겠습니다.”
“현진물산 이야기는 들었고?”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왜? 이제 현진물산이 재미없나 보지?”
재미없냐고 묻는 건 현진물산에 흥미가 떨어졌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탈이 난다고 하셨던 회장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기에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자세다. 하지만 안테나는 놓지 않고 있어야지. 곤충들이 더듬이를 세우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다.
더듬이를 세우지 못하는 곤충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네, 할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태민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어제 저녁 양철기 전 전무에게서 걸려왔었던 전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을 내주면 어떻겠냐는 말에 바쁘다는 말로 넘어갔었던게 생각났다.
퇴사 이후 몇 번 만나봤지만 쓸 만한 이야기는 얼마 없고 순 자기 구제해달라는 이야기만 했었기에 어제 연락도
크게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서 잘못 키웠어. 너무 오냐오냐 키우니까 떠받들여 질줄만 알았지 남을 존중해줄 줄 몰라.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리 오래되고 능력있는 직원이라도 무시하고 깔아뭉개기 일쑤지.”
“네...”
“너도 그러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양철기가 왜 나한테 이야기한 걸 너한테 입 꾹 다물고 있었겠어?”
“죄송합니다.”
“밟을 때는 확실하게 밟아라.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게 밟아서 네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게 만들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면 품어라. 이도 저도 못할거면 그룹 오너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
절대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현진물산이 코발트 광산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이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양철기 전 전무가 회장님께 헛소문을 전했을
거라는 거였다.
투자전문 은행이나 사모펀드도 쉽게 할 수 없는게 반도체 회사 투자인데 기껏해야 자원 투자나 하던 회사가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다는 건 완전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다.
“아무래도 쉽게 믿기 힘든 내용입니다.”
“나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투자 움직임이 회사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건
주목해야겠지. 내가 현진물산을 그냥 내버려둔건 스스로 잘 하기 때문이었다. 은행 돈까지 끌어와서 얼토당토않은
곳에 쓰려는 꼴을 보려고 한게 아니었어!”
“만약 사실이라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두고 보지 않으면 가서 깽판이라도 칠 게냐?”
“지금 바로 그 반도체 회사를 낱낱이 해부한 다음 현진물산이 해당 반도체 회사에 투자 결정시 대표이사의 투자가
중대한 실수임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대표이사 해임 건의를 올리겠습니다.”
“명심해라. 조용히 숨어 있다가 삽시간에 목덜미를 물어뜯는 호랑이가 무서운 거지 지나가는 사람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개새끼가 무서운게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양철기 그 친구한테 섭섭해하지 마라.”
“네?”
“네가 품을 그릇을 보여줬다면 서울에서 예까지 달려와서 보고했을 친구다. 워낙 경험이 많고 발이 넓은 친구니
잘 살펴서 네가 품어라.”
“알겠습니다.”
“나가 봐.”
“물었다.”
“어떻게 됐답니까?”
“두 회사 모두 투자 제안이 들어왔다고 해. 그리고 두 군데에 투자 제안한 사모펀드가 골든브릿지고.”
“그쪽에다가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투자받아 볼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고 했지. 어쨌든 투자자를 못 구해서 쩔쩔매던
회사들이었고 돈 많은 사모펀드에서 코를 벌름거리니까 마침 딱 기회잖아.”
“투자 잘 받았으면 좋겠네요.”
“마음은 그런데 잘 되겠어? 아무래도 간만 보다가 싹 빠지지나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AMA 시스템’은 잘
가렸어.”
이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승현 부장... 아니, 이번에 특수영업본부장으로 승진한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후... 긴장되는군.”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내일 오전에 현진관광 주식 3%를 가지고 있는 고성저축은행 은행장 만나기로 했다. 그것부터 시작이야.”
나흘 뒤, 15 층 회의실.
“예상보다 늦게 뜨긴 했네요.”
“굳이 소문을 내야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우리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 떠보려고 뿌린걸 거야.”
“부사장님은 어때요?”
“어제는 출근하자마자 사우나에서 쉬다가 오후에 올라와서 대충 시간만 때웠다고 하던데? 아예 의욕을 잃은 것
같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난 20 년 가까이 부사장님을 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최 과장이 부사장이랑
만나본 시간이 고작 몇 시간 안 되지 않나?”
“짧은 순간의 만남이라고 해도 사람을 깊게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겁니다.”
“비밀엄수야 걱정하지 마.”
인천항에 들어와야 할 유연탄이 당장 막혔으나 영업팀이 발로 뛰며 구해와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박 상무 발령받으면서 유연탄 때문에 정신없다고 회식도 못 했잖아. 잘 처리됐으니 박 상무 승진기념 겸해서
회식하겠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 현진관광 인수전이 코앞이니까 우린 우리 일만
집중하자고.”
현진관광 사장실.
임지은 사장은 여유 있게 홍차를 즐기며 경제 뉴스를 시청 중이었다.
사실 임 사장은 경제 뉴스를 그다지 재미있게 보지 않았지만 사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경제 돌아가는 걸 모르는 안
되기에 억지로 보는 거였다.
그래도 경제 채널 중에 재밌게 보는게 있다면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해 궁금해하는 시청자가 전문가와 직접
통화하면서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는 아파트를 얼마 대출을 끼고 샀는데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아서 고민이라거나 주식을 얼마에 샀는데 물려서
고민이라는 등의 사연을 보고 있으면 은근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런 안타까운 사연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임 사장은 마침 오늘은 자신의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로운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근 몇 년간 계속 지지부진하던 주가가 몇 주 전부터 조금씩 상승중이었기에 임 사장도 요새 주식 오르는 맛을
느끼는 중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사실 현진관광의 주식이 반등하는 건 어떤 모멘텀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대표적인 경기방어주인데다가
저평가주이기 때문입니다. 실적이 꾸준하면서 얼마 전에 인수한 페이먼트 호텔 때문에 생긴 부채를 상환하면서
재무적으로도 상당히 건전해졌어요. 때문에 기관에서 현진관광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
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이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뭔데?”
“사장님, 지금 우리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방금 8% 돌파하는 것까지 보고 왔습니다.”
“8%? 정말?”
“무슨 일이야?”
“그게... 지금 신영모건스탠리 아시아코어펀드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요청했습니다.”
“뭐? 무슨 이유로?”
“임지은 사장의 무능력한 경영과 전년과 이번년도 배당률을 문제삼았습니다. 실적이 떨어지는 호텔을 매각해
주식을 부양하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지급하라고...”
“미친놈들이네?”
임 회장이 끼어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무기삼아 회사를 위협해 주식을 비싸게 처분하려는 수작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아니면 갑자기 저렇게 나올 이유가 없지. 지금까지 저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잖아.”
“그렇긴 합니다. 저렇게 소동을 벌이고 가진 주식 가격의 몇 배를 챙겨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으니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국내와 관계가 전혀 없는 외국 자본이었는데 신영모건스탠리는 신영은행과 관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라. 내가 신영금융 이경호 회장을 만나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한 거고, 너희 쪽도 잘 끌어모았네. 막판에 부족한 주식 채운다고 급하게 흔들어서
괜히 손해만 보고 주식 확보도 못하는가 싶었는데 말이야.”
“능력있는 분들이 알아서 잘 하셨습니다.”
“아마 그렇겠죠.”
“이제 어떡할 거야? 1 조에 다 먹어치우면 깔끔하긴한데 그러면 진짜 현진중공업하고 전쟁이야. 알지?”
“전쟁은 이미 시작한거 아닙니까?”
“대국적인면에서 보면 이 정도는 국지전이라고 봐야지. 여기서 물러나면 서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열사 분리를 하든가.”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손에 들어온 걸 토해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현진중공업이나
현진관광은 그 주식 살 돈도 없을 겁니다.”
“휴전은 하더라도 깃발 꽂은 데까지는 우리 거다?”
“양보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회사 경영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페이먼트 호텔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채는 전부 해결됐으며
재무구조는 건실합니다. 때문에 오늘 임시주총에서 건의할 안건은 무의미한게 아닌가...”
“그렇기에 현진물산은 현진관광 주식 16%를 보유하고 34.1% 지분의 위임을 받은 대주주의 권한으로 대표이사
해임을 건의하겠습니다.”
임창호 회장이 붉은 가죽 소파에 몸을 실으며 퉁명스레 말하자 이경호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마시게.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자네랑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허나...
자네나 나나 이제 곧 물러날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보면 젊었을 적에 참 힘들었어. 그 가난했던 시절에 살아보겠다고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며 식당일에,
조금 근육이 생기고 나서는 공사장 잡부까지 안 해본 게 없었지. 그 때는 삶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살만했었던 것도 같아. 힘들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왔거든.
희망이 있었지.”
“갑자기 옛날 일은 꺼내 뭐해?”
“그렇게 상고를 나와 은행일을 시작한 이후부터 내 세상이었어. 뭘 하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자네도 그런
때가 있었잖아. 한창 팔팔했을 땐 조선소 확장해보겠다고 나한테 돈도 꾸었었던 게 기억나네.”
“이 양반아, 내 자네 말 듣다가 숨 넘어가겠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일 넘기세. 이제 손자가 재롱을 어떻게 떠나 구경만 하고 살아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자네 아들은 재주가 많아 믿고 맡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새끼들은 아직 부족한게 많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가르쳤음에도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애들 같아. 뭘 하든 똑바로 하는게 없는데 내가 어떻게 손을 놓나?”
임창호 회장의 성격상 빈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기억나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안타깝군. 내가 우리 형준이 자랑하는 맛으로 요즘 지내는데 말이야. 어쨌든 형준이 녀석이 현진관광 투자 건을
물고 왔어.”
“신영모건스탠리도 그렇고 신영투자증권도 요즘 실적이 부족해서 굉장히 난감한 상황인 건 자네도 알거야.
미국하고 중국하고 싸우는 통에 주식이 영 재미가 없거든. 회사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긴 한데... 한국
사람은 ‘정’이라는 게 있어서 자네 뒤통수를 친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네.”
“그런데도 눈 딱 감고 신영모건스탠리에 넘기려고 한 건가?”
“아니야.”
“뭐가 아닌데?”
“넘기려는 데가 신영모건스탠리가 아니라고. 현진물산이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지금 이 판을 다 짠 게 현진물산이었다고. 우린 거기에 같이 좀 어울려서 놀아주고 품삯 좀 받은거라네.”
“그럼 지금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해임 건의를 했을 거네, 현진물산에서.”
“그 애가 그런 배짱이 있다고?”
“그걸 왜 우리한테 묻나? 자네 며느린데 자네가 더 잘 알 거 아닌가?”
“몰랐으니까 묻지!”
“알지.”
“우리 그룹이 가진 현진관광 주식이랑 본인이 가진 주식을 가지고 현진관광을 먹으려고 판을 만들었네. 이미 한참
전부터 소액주주들을 설득하고 위임장을 받아왔을 거야. 대표이사 해임은 막을 수 없을 거네.”
“허허...”
“난 이만 가보겠네.”
“정말 그냥 가도 되겠어?”
“그냥 안 가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려들랑 하지를 말게. 그리고 차가 영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구만. 돈
있으면 좀 바꾸게.”
“클클클... 입맛이 영 까다로우이.”
“어디로 모실까요?”
“현진관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아빠!”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올케가 나 끌어내리려고 대표이사 해임 건의 올렸어요. 위임장만 어떻게 해주면... 신영은행에서 어떻게
해준다고 해요?”
“들어가자.”
“오셨어요.”
“앉아라.”
“아침은 챙겨 먹고 왔나?”
“네, 아버님.”
“코발트 광산인가 뭐시긴가 그거 안 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원인이 되기는 했습니다.”
임창호 회장을 쫓아와 뒤에 서 있던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아버지를 믿고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야? 판을 짠 놈이 누구야?”
“이 자리에 없는 직원입니다.”
“그래? 성주훈이는 아니겠고... 누군데?”
“말씀드려도 모르는 직원입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직원이라서요.”
“아버님...”
“나올 거 없다. 내가 왔으니 기자들이 이상한 이야기는 못 쓸 게다. 그리고 넌 날 따라와라.”
“아주 행복하시겠어?”
“상무님은 안 좋으십니까?”
“나야 수익률로 어깨에 뽕 좀 세웠지만 넌 다르잖아. 할아버지한테 전화로 이야기 들으니까 니네 회장님이 완전히
포기 했다고 하던데? 난 또 니네 회장님이 니네 사장님을 죽이네 살리네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거 보면 참 노인네들
생각은 읽을 수가 없어.”
“그게 되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겠습니까? 금수저에다가 키도 크시고... 사람 마음까지 읽으려고 하는건
좀...”
“왜? 그런건 너만 해야 하냐?”
“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사는게 걱정되면 우리 회사로 올래?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안 하고 살게 해줄 수 있는데.”
“됐습니다.”
“얼마나 줄지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하지만 물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알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회사를 옮길 생각도
없구요.”
“왜? 아침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서 상사한테 욕 처 들으면서 일하는 목적이 돈 아니야?”
“알았어. 뭔데?”
“연희 씨랑 사귀기로 했습니다.”
“임연희?”
“네.”
“하하핫! 내가 그거 가지고 섭섭해할 줄 알았어?”
“알겠습니다.”
“좋겠다, 연희랑 사귀고... 그럼 현진물산도 이제 네 꺼네? 안 오는 이유가 있구만.”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사실이 그러니까. 그럼 이제 다음 스텝이 어떻게 되나? 현진중공업? 현진기계? 현진고속은 상장회사가
아니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입찰에 관여했구나.”
“그냥 될 것 같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와... 씨, 귀신 같은 놈이네. 그래서 뭘 지원해주면 돼? 공사 자금도 필요할 거고... 분양할 때 집단대출을
우리 은행에서 나가주면 될까?”
“그래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인수로 회사 자금이 바닥을 보이는지라 앞으로 있을 대형공사에
은행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거든요.”
“들어가서 한 번 알아보지. 공사규모나 시기와 법적인 문제까지. 그리고 또 다른 건 없어?”
“서비스 좋으십니다.”
“흐흐... 말했듯이 어깨에 힘 좀 들어간 상황이잖아. 이 정도야 뭐...”
“사실 하나 더 있는데, 이건 좀 예민한 거라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예민해? 설마 정치권과 연결된 사항인가?”
“맞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해. 정치인들은 우리랑 달라.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뭐든 하는건 비슷하지만 우린
협상이라는 게 먹히거든. 그쪽은 원하는 게 한번 어그러지면 협상 따위는 없어. 보복만 있을 뿐이지.”
“명심하죠.”
“어디 가냐?”
“회사 들어가야죠. 직장인 아닙니까?”
“그렇게 회사를 생각하는 놈이 지금까지 농땡이 친 거야?”
“상무님과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대화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끄럽고, 술이나 한 잔 하자.”
“안 됩니다. 저녁에 약속 있습니다.”
“데이트?”
“네.”
“흥! 가라 씨발... 난 모델들하고 놀거다.”
“일찍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회사로 돌아가자.”
“백화점 예약 해놨는데 어떻게 할까요?”
백화점은 형준이 주로 놀러가는 룸싸롱 이름이었다.
형준은 수행비서를 흘겨보곤 말했다.
형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어두운 바를 빠져나갔고 수행비서는 억울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
거의 쫓겨나다시피 논현동 집으로 들어온 임지은 사장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임창호 회장을
닦달했다.
“...”
“현진관광이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지 아세요? 수천억을 현금으로 따박따박 벌어들이는 캐시카우라구요.
매출도 지난 5 년간 꾸준히 오르고 있었어요. 그런 알짜배기를 이렇게 놓아줄 거냐구욧!”
“그런 좋은 회사를 왜 그렇게 힘들게 운영했어? 그렇게 벌어들인 자금은 다 어디가고? 조선업이 그리 힘들 때
다른 계열사들 최소 5 천억 이상 지원했다. 현진관광은 그때 얼마나 지원했냐?”
“저희도 5 천억 지원했어요!”
“그래. 일 년에 수천억 현금을 벌어온다고 자랑하는 현진관광이 다른 계열사랑 다른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호텔 인수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것만 있었냐? 호텔 지어보겠다고 부지 사느라 쓴 돈만 8 천억 아니었어?”
“...”
“그 자리에 지금 호텔 올라가 있냐? 결국 허가 안 나와서 그대로 묶인 자금 아니야? 그 돈 있었으면 현진물산에
2 천억으로 주식 교환할 필요가 있었을까?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 내가 그 자리에서 위임장 내용 엎게 해줬으면
온 세상이 현진그룹 산산조각날 거라고 떠들어댔을 게다. 내가 그 꼴을 봐야겠니?”
“위임장 내용 엎을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래. 신영그룹 회장하고 독대까지 했는데 빈손으로 왔을까? 그런데 위임장 내용 엎으면 현진물산에서 꼬리
말고 그냥 갔을 것 같으냐? 현진물산에서 가진 신영금융 지분 제외한 나머지만 가지고도 흔들기 시작하면
어쩌려고? 시장가 대비 최소 세 배는 주고 사와야 회사가 안정을 되찾을 게다. 그 돈 줄 수 있
는 능력은 있는 게냐?”
“설마 우리한테 세 배 씩이나 되는 돈을 요구할 거라고 보세요?”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네 등에 칼을 꽂았을 것 같으냐? 왜 이렇게 물러?”
“...”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낮에는 조금 당황하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편안해진 모습의 송은채 사장과 조금은 어려워하는 표정의 연희,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올리는 영훈이었다.
임 회장은 손을 들었다 내리며 수행비서에게 코트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연희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많이 컸구나.”
“네...”
“할애비 피해서 해외 돌아다닌다고 욕 봤다.”
“...”
“아버님 좋아하시는 농어 스테이크 주문했어요. 주방장이 아버님을 기억하고 있어서 간을 신경쓰겠다고 했구요.”
“잘했다.”
“그 전에 어느 회사를 다녔는데?”
“작은 채권회사에서 추심 업무를 했습니다.”
“사인? 무슨 사인?”
“현진물산을 현진그룹에서 제외해서 생각해 달라는 사인이었습니다.”
“사실 식사 자리라고 해서 왔지만 회장님 따님 회사를 뺏어놓고 같이 식사를 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자리는 가족분들이 오랜만에 모인 만큼 저는 그만 일어나려고 합니다.”
“영 자리가 불편한가?”
“왠지 불청객이 끼어서 할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하실 것 같아 그렇습니다. 아니라고 하셔도 그냥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실례지만 언제 내려가십니까?”
영훈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곤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송 사장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룸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임 회장이 송 사장에게 말했다.
“걸물이구나.”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처음부터 신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연희랑 같이 영업팀에 두었는데 신영투자증권이 가진
현진물산 지분을 저 친구가 물어오면서 신뢰를 가지게 됐거든요.”
“회사 지분을 되찾아 온 게 저 친구라고?”
“그것뿐이 아니에요. 신영은행에서 받은 5 천억 플러스 알파도 저 친구가 가져왔어요. 그걸로 과장에 올렸죠.”
“얼마 전에 연희한테 우명그룹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네 삼남(三男)하고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연희가 거부했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최 과장이라고 하니까 저도 더는 말리지
못했어요.”
“우명그룹? 김태현이가 관심을 가진다...”
“정말요?”
“입사한지 1 년도 되지 않아서 현진관광을 먹은 남자를 할애비에게 소개시켜줬는데 누군들 눈에 들어올까.”
“고놈이 한번 말하면 척척 알아들었어. 하나를 배우면 열이 뭐야? 스물, 서른을 알아내는 놈이었지. 성품은
얼마나 좋았는지 길거리에 주인 없이 지나가는 개, 고양이는 죄다 데려와 먹이도 주고 놀아주고는 했다.
허허허... 고사리 만한 손으로 제 덩치보다 큰 개한테 사료를 주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고놈이 컸
다면 아마 최 과장처럼 똑똑했을 게다.”
“아버님...”
“됐다. 옛 생각이 나서 그랬다. 늙으면 원래 주책없이 감상적이 되곤 한다. 밥은 언제 나오냐? 오늘 내내
정신을 쏟았더니 허기가 지는구나.”
“안내해라.”
“왜 이리 말랐누... 살이 쪽 빠졌네. 미안하다. 애비가 늦었다. 가슴에 화가 많아서 그랬다. 그러게 몸 생각을
했어야지. 아프면 쉬었어야지.”
“오셨습니까.”
“가게 전세 냈나?”
“할 이야기가 무엇인고?”
“혹시 군산조선소 관심 없으십니까?”
“그건 왜?”
“잘 포장해서 드리면 가질 생각 없으신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두려우십니까?”
“그렇군요.”
“할 이야기는 그게 끝인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그룹에서 엄연히 조선업을 하고 있는데 따로 조선회사를 세우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현진중공업은 그룹의 중심이자 핵심이며 정신이었다.
일단 임 회장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합작회사를 세우자고?”
“네.”
“왜? 지금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 다 빠진 죽은 조선소를 왜 끌어안겠다는 건데?”
조재민 의원은 대통령이 될 운명까지는 아니지만 가히 대권주자 정도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조 의원은 현진물산을 만나서 날아보려는 계획이지만 사실 현진물산도 조 의원 덕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조재민 의원은 뜨거운 여름의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 곁에 물이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은 사업을 해도 술, 또는 음료를 파는 일이 잘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군산조선소의 앞날에 대해서는 영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업이 욕심이 나서 이러는 건 전혀 아니다.
고승현 상무에게서나 매일 오후에 받는 수업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천지인 데다가
현진건설만 가지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합작회사를 세우는 계획 역시 고승현 상무가 며칠 동안 고심해서 내린 방안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계열사 분리를 위해서다.
임창호 회장 입장에서 굳이 계열사 분리를 해줄 이유가 없었고 김태민 현진중공업 경영기획 본부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계열사 분리를 해줄 수밖에 없는 미끼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손에 걸리는 게 군산조선소밖에 없었다.
물론 진심으로 조선업에 진출할 생각은 없다.
임 회장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가 인력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 시설이 낙후돼서 굶어 죽었냐고! 수주를 못 받아서 굶어 죽은 거 아니야?”
“IMO 규제(선박연료 황 함유량 기준을 현행 3.5%에서 0.5%로 강화)를 피하겠다고 스크러버(탈황장치)
달았다가 입항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아일랜드는 이미 시작됐고 내년부터 싱가포르랑
아랍에미레이트도 입항이 금지됩니다. 코트라에서도 2025 년에는 전체 선박 발주의 60% 이상
이 LNG 추진선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거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런데 어디 연구 결과대로만 가던가?”
“맞습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
볼 것도 없다.
군산 경제를 파탄낸 게 바로 무진중공업이다.
군산조선소를 돌리겠다고 하면 무진중공업보다 금액을 훨씬 덜 제시해도 아마 현진물산의 손을 들어줄 거다.
산업은행은 공기업이니까.
임창호 회장은 잔을 들어올렸다.
영훈이 한잔 가득 따라주니 벌컥 들이키곤 안주도 먹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넌 뭘 받았고?”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현진건설로 간판을 바꿔 단 혜성기업 말하는 게냐?”
“맞습니다.”
“그걸 진짜로 따냈다고?”
“거래조건이었습니다.”
“그만 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놈의 통보를 들었으니 회사로 돌아가서 전해야 할 게 아니냐?”
“그건...”
“걱정마라. 내가 아무리 늙었다고 한들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나돌게 하겠냐? 다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다.
네 놈 말대로 나도 통보라도 해줘야 할 게 아니냐?”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네, 보좌관님.”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다름 아니라 내일부터 본격적인 선거 준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군산조선소 관련 브리핑을 곧 받아볼 수 있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광주 인공지능 집적단지 공고가 날 예정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현진건설에서 입찰하면
어느 정도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의원님께서 군산조선소 문제를 잘 해결해달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조용한데로 갑시다.”
“후,,, 일단 그건 넘어가요.”
“그러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공을 넘겨 드렸으니 이제 답을 주실 겁니다.”
“어떤 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임창호 회장님은 지극히 실리적이면서도 현명한 분입니다. 또한 명분을 중시하고 외부의 이목에 신경을 쓰시죠.
한 그룹에 두 개의 조선업. 게다가 완전한 협업이 아니라 본인 사후에 같은 업종으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절대 현진물산의 해주조선해양 인수를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군산조선소를 받을 거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아실테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계열사 분리하면서 그들이 가진 주식을
우리가 사게 되니까 당장 현금이 들어와서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는데 큰 무리도 없을 겁니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엄마가 경영권 가지고 마음 졸이는 것도 보기 힘들거든요.”
“잘 될 겁니다.”
현진물산 본사 사옥 옥상.
본래라면 한창 일에 열중해야 할 시간이라 담배를 펴도 간혹 한두 군데에서 연기가 피어올라와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임직원들 덕분에 마치 대형 커피숍이라도 차려진 것처럼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 깜짝 놀랐습니다.”
“뭐가 그건 그렇냐? 나도 몰랐어.”
“진짭니까?”
“진짜야. 나도 뉴스보고 기함했다. 일단 어제 계속 이어진 임원회의 때 눈치 보니까 알고 있었던 쪽이
재무팀이랑 특수사업부밖에 없더라고. 다들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거지. 오죽하면 호주에 나가 있던 현지
직원들이 돌아오면서 얼마나 허탈해 했는지 모른다고 항변을 하더라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더니 진짜 너무 잘 속였네.”
“불 좀 줘봐라.”
“네.”
“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부사장님이야 나도 잘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인사 불이익 없을 테니까.
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고 사장님 기조가 그래.”
민 과장이 말을 받았다.
“그럼 전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응, 그래.”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현진건설이 이제 알짜배기가 될 거야. 만약 현진건설로 갈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마라. 너도 언제까지
인사과장에 머물고 싶지 않잖아? 현진건설로 가면 단번에 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방금 내용은 너만
알고 있어라.”
“그만 우세요.”
“흑흑... 내가 어떻게 안 울게 됐니? 엄마는 너무 속상해...”
귀청이 찢어질듯한 비명 소리에 태민은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렸지만 내용이 충격적인 건 확실했다.
이번 현진관광 인수에 할아버지의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것.
임지은 사장은 오후 즈음에 거제에 도착해서 계속 이렇게 울어대고 있었다.
“그치? 엄마 말이 맞는 거지?”
“그럼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나봐야겠습니다.”
“회장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임 회장은 마침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딱 찾아오니 잘됐다고 생각하는데 붉게 달아오른 태민의 안색을 보고 왜
찾아왔는지 알아챘다.
“회장님.”
“그래. 네 엄마가 왔더냐?”
“네? 네...”
“또 너한테 울고불고 했겠구나.”
“위임장 내용을 뒤집을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너도 내가 거기서 뒤집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현진관광은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회사입니다.”
“크게 봐야 한다. 아직 그룹에는 많은 기업이 있어. 현진관광이 아깝기는 하지만 다른 좋은 기업들이 많아.
그리고 너도 이번 상황처럼 다른 기업을 사냥할 수도 있는 거겠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이번 같은 경우는 만에 하나도 나오기 힘든 운이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일생에 다시 오기 힘든 기회였어요.
숙모는 그 기회를 잡은 것 뿐이구요.”
“그게 단순히 운이었을 것 같으냐? 신영그룹 전체에서 이번 인수전에 참여했다. 신영은행에서 2 천억 대출 연장이
안 돼서 주식으로 교환한 일. 지금도 그게 운이었을 것 같아?”
“그럼 더더욱 이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회사를 노리고 그런 악독한 행태를 저지를 자들을
어떻게 그냥 둡니까?”
“그럼 계획을 짜와라. 가서 우는 소리만 할게 아니라 현진물산이 한 것처럼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짜 와. 그럼 내가 허락해주마.”
“그건...”
“어렵다고? 왜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만 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최 과장 들어오라고 할래?”
“부르셨습니까.”
“어, 앉아. 요즘 뭐 불편한 건 없고?”
“불편할 일이 없습니다.”
“면허는 땄어?”
“내일 도로주행 있습니다.”
“그래, 한사코 임원이 싫다고 하니 수행기사를 붙여줄 수도 없고 본인이 직접 운전하고 다녀야 하잖아.”
“나중에 임원이 된다고 해도 아직 누가 운전해주는 건...”
“부담스러워?”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는 것도 같아서 싫습니다.”
왜 없겠는가?
인터넷에서만 보던 그런 슈퍼카부터 벤츠, BMW 등등...
하지만 이제 면허 딴 초보운전자가 그런 차를 몰고 다닌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최 과장 내일 도로주행 있다고 하니까 잘 봐주고 면허 나오면 차량 지원해줘. 우리가 어디랑 계약하고 있지?”
“SI 렌트카입니다.”
“연락해서 BMW 5 시리즈급으로 하나 준비해. 초보운전이라도 차는 단단한 거 타고 다녀야 안심이지.”
“알겠습니다.”
“요즘 회사 분위기는 어때?”
“다들 긴장하면서도 회사가 계속 커지고 있으니까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연말 보너스도 작년보다 많았는데
회사도 외연 확장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올해 보너스를 더 기대하는 그런 분위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경영기획총괄쪽은?”
“뒤숭숭합니다. 며칠간 부사장님께서 출근하지 않으시면서 그대로 부서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말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잘 살펴봐. 그리고...”
“어머, 사모님.”
[송 사장~ 오랜만이야. 어떻게 연락 한 통이 없어?]
“요즘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 나도 뉴스 봤잖아. 너무 대단하더라.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호호호.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그럼 이제 연초도 됐고, 애들 얼굴도 좀 보게 해야지.]
“사모님, 죄송해요. 우리 애가 남자에 관심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계속 미루기에 혹시 남자가 있나 캐보니까
글쎄 사귀는 사람이 있었지 뭐예요. 에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좀 기다리라니까.”
[정말? 어느 집 자식인데?]
“그냥 회사 직원이래요.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부터 사귀나 몰라요.”
[이번에 입사했잖아? 너무 급하다. 그리고 회사 직원? 설마 결혼시키려는 건 아니지?]
“애가 워낙 자기 주장이 강하다 보니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지가 않아요. 기어코 하겠다고 하면 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럼 알겠어.]
“네, 사모님, 들어가세요~”
“송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우명그룹 사모인 우혜선의 불평어린 말에도 김 회장의 굳어진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비서의 안내를 따라 사장실에 들어서니 구도일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와요, 오랜만이에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허허... 그러지. 앉게.”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현진물산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어려운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직원들 급여까지 올려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장부상으로만 보면 아직 현진건설은 어려운 상황이고 매달 상환해야 하는 부채도 상당했다.
그러니 직원들 급여까지 올려준다는 이야기에 구도일 사장이 화들짝 놀란 것일 테다.
“당장 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올해 연말부터 현진물산 급여에 맞도록 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래야 하구요.”
“당장 일감부터 부족해.”
“조금 있으면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발표됩니다. 아직 결과 안 나왔으니까 지켜보시죠.”
“그거 진심으로 따내려고 하는 건가? 이번 현진관광을 인수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부서 아니었어?”
“그렇지 않습니다. 본사에서도 최대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으니까 지켜보시죠. 그리고 이번에 현진관광
인수하면서 호텔 조식 시스템을 전 세대에 공급한다는 계획도 훨씬 설득력을 얻게 될 겁니다. 본사에서는 이거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정말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그리고 조만간 광주광역시 인공지능 집적단지 조성
공고를 발표할 겁니다. 최대한 많이 지원하세요.”
“인공지능 집적단지? 잠깐... 그게 규모가 어느 정도였지?”
“약 1 조 2 천억 정도가 투입된다고 합니다.”
“원래 우리가 정부발주 공사에 자주 참여했기 때문에 여기 입찰에 들어가는 거야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단순히
공고에 현진건설의 이름만 넣는다고 다가 아니거든? 혹시 위에 끈이 있는 거야? 있다면 확실히 말해줘야 해.
입찰가격부터 내장재, 디자인 등등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
“흐음... 만약 끈이 있다면 입찰 가격을 올리고 내장재를 안 좋은 걸로 넣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이해가 되긴 했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이분은...?”
“아, 여기는 우리 막내야. 설계팀에서 일하고 있는 구호준이라고 해. 여기 이분이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이라고
비서실에서 근무하시는 분이야. 인사드려.”
“아, 정말요?”
구호준 실장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이야긴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능력이 좋다는 말이었고 그걸 떠나서 영훈은 그의 상 만으로도 충분히
인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간 무식한 것만 탄로날 것 같아 얼른 나왔다.
영훈은 회사를 나오면서 연희에게 구호준에 관한 인사자료를 요청했다.
연희가 바로 해당 내용을 찾아서 영훈에게 보내주자 비로소 영훈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왜 구도일 사장이 그토록
어마어마한 재복을 타고 났음에도 회사가 어려웠는지도 알수 있었다.
구도일이 큰 재복을 타고 났다고는 하지만 구호준은 구도일을 뛰어넘는 그릇을 가지고 태어났다.
속된 말로 기가 세다고 할까?
영훈이 어릴 때 욕심이 많아서 주변의 재복을 쓸어오는 사주를 타고 났다면 구호준은 그 반대였다.
그는 서른 전까지 들어오는 복을 전부 걷어차는 사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아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서른 전까지 극히 어려운 삶을 살았을 인물인데 구도일 사장의 재복 덕분에
유학까지도 다녀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지금 그에게 재운이 들어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다만 이제 그에게 들어온 악운이 물러가면서 구도일 사장의 재운이 다시금 들어올 길을 열어줬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며칠 뒤, 거제조선소.
현진중공업 임원회의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거제의 날씨 만큼이나 싸늘했다.
“안 됩니다! 이제야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면 당장 채용해야 할 직원만
최소 천 명을 넘어갑니다. 군산의 그 큰 도크를 다 채울 만한 수주를 받는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만약 카타르
수주전에서 예상한 만큼 따오지 못한다면 엄청난 손실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임원은 반박했다.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시장이 변하는 중입니다. 카타르가 대형 수주를 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외에도 수주를 따낼 만한 프로젝트는 여전히 많습니다.”
“못 따면? 당신이 책임질 건가?”
“왜 안 나가?”
“할아버지, 정말 군산조선소를 인수하셔야겠습니까?”
“아직 생각해보자니까.”
“항상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회장님 뜻대로 안 되면 항상 안건을 미루고 의견이 일치될 때까지
밀어붙이셨잖습니까!”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정말 너무하십니다. 현진관광이 그렇게 될 때까지 그냥 두고 보셨으면서 이제는 현진중공업까지 쓰러뜨릴
작정이십니까? 아니, 이제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겠습니다. 현진중공업이 군산조선소를 안고 허덕일 때
현진물산으로 하여금 도움을 받게 할 작정이시지요? 그래서 이 회사를 연희 그년에게 갖다 받칠 생
각이시지요?”
“뭐 인마!”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지르는 순간 뒷골이 뻣뻣해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임창호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 연희는 마치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당장 출발하려던 송 사장은 임지은 사장이 아빠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만류했기에 회사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그러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임원회의를 소집했고 영훈은 연희 옆에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영훈은 임창호 회장이 바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쓰러질 만큼 횡액을 당할 운이었다면 분명 상에 나타났을 것이다.
예전에는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다시 떠올려봐도 임 회장은 이렇게 당장 쓰러져 죽을
운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봐야 음력으로 내년 중, 후반이다.
아직 해가 가기도 전인데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김민희가 급히 다가와 말했다.
“네?”
“사장님이 준비하랍니다. 이제 곧 출발하신대요.”
“지금요? 부산으로요?”
“네. 갑시다.”
아무래도 부산에 도착하면 볼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녀는 외부 사람들의 눈보다 자신의 심적 안정을 택한 듯했다.
“회장님은 어떠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네가 처음 발견했다며? 어떻게 되신거야?”
임 사장이 끼어들었다.
“너, 지금 오빠한테 무슨 버릇없는 말이니?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한 거야. 넌 위 아래도 모르니?”
짝!
연희는 벙찐 임 사장의 옆을 지나치며 나아갔고 홍승대 실장이 얼른 송 사장을 이끌고 병실로 움직였다.
찬바람이 풀풀 풍기는 연희의 모습은 본래 그녀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영훈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변하려고 지금껏 노력했지만 본래 그녀는 태어나기를 자신이
정한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여자였다.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네,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나?”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다.”
“어머어머, 얘 왜 이러니?”
“상무님, 흥분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이제 현진중공업을 이끌어갈 분이 아닙니까? 흥분하지 마세요. 그리고
상무님의 결정은 현진중공업의 결정으로 알겠습니다.”
“무슨 결정?”
“군산조선소, 포기하시는 거 아닙니까?”
“...”
“현진중공업 잘 운영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왜? 아는 여자야?”
“재밌게 됐네요.”
“뭐가?”
“회장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초상은 다른 곳에서 치르겠어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이 아가씨가 다짜고짜 회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 시각, 임지은 사장은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조심해. 여기서 여자랑 애 때문에 발목 잡히면 이 좋은 기회 놓치는 거야. 당장 어제도 GK 그룹 여편네랑
통화했어. 너, 그 애 못 잡으면 안 돼. 알지?”
“알아요, 알아~”
임은진 사장이 몸을 돌려 나가자 태민도 따르는데 어디서 소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야? 저 여자 뭐지?”
“김태민 상무와 아는 사람 같아요.”
“조금 단촐하네요?”
“여기가 횟감이 좋아. 회장님도 종종 들르시는 곳이거든. 예전 사장님도 부산에 오시면 여기서 돌돔 한 마리를
꼭 드시고 가시긴 했어.”
“아... 그래요?”
“회도 그렇고 기본 반찬이 먹을만 할 겁니다.”
“아까 어떤 상황이었어?”
“김태민 상무의 숨겨둔 여자 같은데 회장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생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뱃속에 있는 건 아니고?”
“그건 모릅니다. 그런데 생각이 없는 여자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저런 태민의 행태가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님도 그렇고...
하여튼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다 그래와서 너무 익숙해졌는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우리 최 과장은 안 그럴 거라고 믿어.”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보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아버님이 유언장을 미리 써놓으셨다고 해도 우리에겐 얼마
남기지 않으셨을 거야. 솔직히 더 받고 싶지도 않고. 예전에 생각해 왔던 대로 그냥 깔끔하게 분리했으면
좋겠는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일단 손에 들어온 걸 쉽게 내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미 가지고 있던 것까지 뺏긴 마당이니 다시
찾아오리라는 각오가 상당할 겁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그룹의 전권을 손에 쥐면 피곤한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한데... 저쪽 입장에서는 불청객이 등장했으니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하네요.”
“태민이 아이 말하는 거지?”
“네.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깔끔한데 과연 그럴까요?”
“아니, 절대 그렇게 못해. 지금 태민이를 GK 그룹 손녀랑 이어주려고 하고 있거든. 이건 아버님이 직접 챙기셨던
일이었어. GK 그룹이 가진 면세점과 유통을 탐내하셨거든. 더 정확히 말하면 GK 그룹이 가진 현금동원력을
탐내셨지. IMF 때도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현금 부자인 데가 거기거든.”
“거긴 아들 없습니까?”
“있지. 그런데 적어도 면세점 만큼은 똑똑한 손녀한테 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어. 그 애가 똑똑하긴 하지.”
“아...”
“아버님은 한번 불황을 겪고 난 뒤 위기가 찾아올 때 자신을 도와줄 파트너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걸 느끼셨어.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아주버님쪽이 많은 도움을 주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셨지. 내 친가는 아무 도움도 못
됐고.”
“그래서 현금부자인 곳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는군요.”
“맞아. 그런데 갑자기 태민이 자식이 등장했네?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골치를 썩기는 해도 형님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군요.”
기억났다.
십 년도 더 전에 딱 두 번 봤었지만, 그 사람이 분명했다.
“응, 그래.”
노석춘 병원장은 환하게 웃으며 속세는 어떠냐는 둥, 회사 생활은 할 만하냐는 둥 물어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혹시...”
“네?”
“지금도 사주를 보십니까?”
“죄송합니다. 이제는 사주를 보지 않습니다.”
“허허... 이런...”
“힘드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주는 보지 못하지만, 회사원의 신분으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10 년도 더 된 오래된 이야기다.
영훈이 더 이상 칠흑 같은 산속 어둠이 무서워지지 않을 무렵, 괜히 자신의 능력을 뽐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주지스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사주를 본다고 말은 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기회를 보면서 괜히 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을 때였다.
대개 절에 불공을 올리면 생년월일을 적어 내기 때문에 태어난 시각만 알면 사주를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
불공을 올리고 내려가는 보살들에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곤 했다.
지금 외부에서 영훈이 사주를 볼 줄 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이때 영훈이 툭툭 던져준 이야기를 받아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노석춘의 아내가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당시 노석춘 아내에게 해준 이야기는 자식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내용이 심각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충고를 해주었는데 당시 노석춘의 아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 남편과
함께 영훈을 찾았었고 주지스님 몰래 사주를 풀어준 뒤 해답을 알려주었었다.
그게 너무 오래된 일이었고 또 노석춘이 당시에는 머리가 이 정도로 하얗게 센 편이 아니었기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어려움이 닥쳤으니 쉽사리 참고 넘기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래도 고민이 되시겠죠?”
“맞습니다. 잃을 것도 많고 챙겨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했던 딸도 장성해서 이제
남자를 만다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됐습니다. 저렇게 예쁘게 잘 자라주었으니 아빠 된 마음으로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말해보세요.”
“다름 아니고 제가 아주 오래전에 부모와 떨어져 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찾고 싶은데 아는 거라곤 이곳 부산
백병원에서 저를 낳았다는 것과 어머니 성함이 이명자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이름이 본명이 맞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고모 만나러 가셨어요.”
“갑자기?”
“갑자기 고모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거든요. 이왕 부산에 온김에 정리할 건 정리하자는 식으로 말씀하셨대요.”
“계열사 분리를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뻔하죠. 할아버지가 쓰러졌으니 현진중공업 회장직이 공석이 됐고 다음 정기주주총회가 3 월이니까 그때 김태민
상무를 밀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아... 도와주지 않으면 김태민 상무 쪽에서 불편한 상황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해외 쪽 주주들이나 국내 기관들도 현재 경영권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거든요. 아, 물론 지금까지는 그래요. 현진중공업 주식 10% 정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헤지펀드에서 갑자기
경영진에 대해 태클을 걸어오면 또 골치 아파지니까 미리 엄마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죠.”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공수가 바뀔 염려는 없는 거겠군요.”
“3 월까지는요. 김태민 상무가 회장직에 바로 앉기는 힘들겠고, 회장직을 공석으로 두고 부회장직에 올라 전권을
휘두르게 되면 또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안심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 때까지 뭐하고 있을까요?”
“확실해?”
“한 시간 뒤에 올라올 거라고...”
“이게 말이 돼! 다른 곳도 아니고 현진건설이라니! 작년만 해도 도급능력 39 위인데 아니었어?”
“아무래도 조재민 의원이 손을 쓴거 같습니다.”
“고작 군산 버스터미널 하나로? 그거 하나로 4 천가구가 들어서는 대단지 아파트 시공권을 내줘? 이거 현진건설이
분양가를 평당 4 천 넘게 매긴다고 하던데 그럼 도대체 얼마를 남기는 거야?”
“지방치고는 너무 고가라 미분양 확률이 큽니다. 자칫 잘못하면 절반 이상 분양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 현진물산이 현진관광 먹고 거기에 리츠칼튼 호텔 쉐프들 데리고 와서 조식 서비스 제공하겠다고 했다며?”
“네...”
“그럼 내가 지방에 살고 있더라도 혹하지 않겠냐?”
“그거야...”
창훈은 억울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애초부터 다 알고 있었음에도 설마 우명건설을 제끼고 현진건설을 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현진건설이
호텔급 조식서비스니 지랄이니 하는 걸 다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와서 왜 그 정도를 못하냐고 묻는다면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때 자리에 앉아 있던 큰형이 그를 도왔다.
“창훈이도 설마 현진건설이 따낼지는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호텔급 조식서비스에 LH 애들이 넘어갈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수도 있구요. 그리고 애초부터 조재민 의원이 손댔다면 조식서비스고 다른 부가적인 요소를
넘어서 처음부터 결론이 난 상황에서 입찰을 붙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조재민이가 고작 버스터미널에 넘어갔을 것 같아?”
“강주원 의원이 뇌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조재민 의원이 군산시장 보궐선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구요. 만약 작년 겨울부터 강주원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군산시장을 노리고 있었다면 고작
버스터미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 아니지... 공천만 된다면 누가 나오든 선거에서 당선되는 지역이 거기야. 강주원이 날아갈지 알았다면
둘 중 하나를 했어야지. 공천이 불확실했다면 여의도에 힘을 써서 공천을 확정 받든가. 공천이 확실했다면 그냥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선거에 나서든가.”
“그런데 이상하긴 해, 보궐선거를 벌써부터 떠들썩하게 준비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왜 군산시장을 노리지?
군산에 뭐 꿀 발라 놓은것도 아니고 말이야.”
“맞습니다. 군산 경제도 안 좋은 상황이고 작은 지방 시장보다는 국회의원을 더 하는게 나을 텐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직에 뛰어들려고 하는게 이해가 안 되긴 합니다.”
“그렇지. 잘 돼야 본전인 곳이 군산이야. 누가 봐도 험지인 곳에 왜 가는 걸까?”
“너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러대는 강주원 의원은 금방이라도 뭐 하나라도 집어서 던질 듯했다.
조재민 의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항변하자 그가 눈에서 불길이라도 토해낼 기세로 몰아붙였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김시원 보좌관을 내보낸 조재민 의원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강주원 의원을 소파로 이끌었다.
이거다.
군산시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나가리 된 순간부터 당연히 이번 차기 군산시장이 누가 될지에 대해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습니까?”
“이효창. 알지? 군산에서만 20 년 넘게 살았고 시의원 경력만 10 년이다. 누구보다 군산을 위해 열심히 일해온
사람이야. 그 보다 나은 사람 없다.”
당연히 도움 된다.
하다못해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오는데도 국회의원이었던 경력과 인맥이 당연히 더 도움이 될 걸
강 의원이라고 모르겠는가?
그저 억지를 부리는 거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소리 지껄이지 마. 그걸 네가 어떻게 돌릴 건데? 무진중공업이 해주조선해양 인수한다고 쳐다도 안 보는 걸
어떻게 돌릴건데?”
“이미 구상해 놓은게 있습니다.”
“뭔데?”
“죄송한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조 의원이 담담히 고개를 젓자 강 의원은 들고 있던 재떨이를 툭 던지듯 내려놓더니 그대로 조 의원의 면상을
후려쳤다.
퍽!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의원님, 피가 납니다! 어서 병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119! 119 불러야
합니다!”
“앉아.”
“네.”
“현진중공업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지금 당장 결론을 내달라고 해서 도움을 받으려고 불렀어.”
“다음 정기주총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런데 상황이 좀 복잡해졌어. 10% 정도를 들고 있는 외국계 헤지펀드가 다음 정기주총 때까지 주식을
추가 매입한 다음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압박할 것 같다는 거야.”
“그렇군요. 그럼 김태민 상무를 현진중공업 부회장에 임명되도록 지지해달라는 겁니까?”
“그렇지.”
“그게 무슨 말이지?”
“회장님께서 쓰러지셨고 그룹의 남은 임원들은 회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메디슨 펀드가 회사를 쥐고
흔들려고 할 테지만 의외로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그 판에 껴서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크게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나중을 생각하시죠.”
“그건 그렇지...”
임창호 회장은 이대로 그대로 숨만 붙어있다가 음력으로 올해가 지나고 바로 사망할 가능성도 있지만 설사
깨어난다고 해도 이제와서 계열사 분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거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운 좋게도 메디슨 펀드가 김태민 상무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었다.
여기에 우명그룹도 끼어들어 한 입만을 외치는 와중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김태민 상무는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현진물산과 현진관광의 지분을 넘겨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하자. 홍 실장은 강 실장이랑 협의해서 현진중공업과 실무 진행하도록 하세요. 가격은 최대한 잘
받아줬으면 좋겠네요.”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비싸게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자금이 얼마나 소모될까요?”
“우리가 가진 현진중공업 주식보다 저들이 가진 우리 주식이 더 많아서 못해도 2 천억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후... 돈 들어 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만약 해주조선해양과 군산조선소를 우리가 인수하게 되면 많이
힘들지 않을까?”
연희는 입을 툭 내밀었다.
“반갑네.”
“일찍 왔네요.”
“소울 메이트가 오래 떨어져 있다가 왔다는데 지체할 수가 있나.”
“당신 원래 그렇게 능글맞았어요?”
“원래 내가 조금 그래.”
“고민 있습니까?”
“씨발, 뭐야. 너 관심법 쓰냐?”
“그게 아니라, 얼굴이 전에 봤을 때보다 어두워져서요. 순 술만 마시고 다닌 것 같은데? 조명이 이래서
그런가?”
“크흠... 그래서, 돈 빌려줘?”
“그건 됐고, 고민이나 먼저 털어놔 보시죠?”
“우리 사이에 간지럽게 ‘누구 씨’라고 부르지는 말자. 이름 부르기는 더 간지럽고. 어쨌든 알아?”
“전혀 모릅니다.”
“오케이. 나가라고 하기도 좀 그러니 우리 걸러서 이야기 하자고. 그때 네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내가 준비를 좀
하다가 마음처럼 진행이 잘 안 됐어. 그래서 부행장이 날아갔지.”
“그래서요?”
“새로운 부행장 인사가 진행중인데 아버지가 생뚱맞은 인사를 들고 왔어.”
“이름은 마석대. 졸라 촌스러운 이름인데 경력은 촌스럽지 않아. 예일대 출신 경제학 박사인데다가 JP 모건,
골드만 삭스등 투자은행에서 오래 근무했고 싱가포르 투자은행인 UOB 의 CFO 를 역임했었어. 이유는 하나야.
신영은행에 국제적 투자 감각을 익힌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건데, 내가 봤을 때는 그렇
지 않아. 너도 그렇지?”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를 끌거라고 그랬죠?”
“그래도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세심한 겁니다. 벌써부터 준비를 하는 거겠죠.”
“더 웃긴 건 이거지. 이 사람은 평소에 한국의 재벌구조가 한국경제를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훗... 할아버님께서 그걸 두고 보신답니까?”
“아직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는 몰라.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 할아버지 앞에서야 국제적인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됩니까?”
“섣불리 반대하고 나섰다간 찍히고 말거야. 그렇다고 두고 볼수도 없어. 외통수야.”
“묘수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맞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국할 사람은 상무님입니다. 제가 참여하면 반칙이 되죠.”
“알아. 훈수만 해달라는 뜻이야.”
“훈수를 하려면 상대하는 기사의 실력도 알아야 합니다.”
“엄살피지 말고 제대로 말해. 할 수 있어? 없어?”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차피 네 정보라인으로 알아보는 거 아니야? 꼭 만나야 하는 거야?”
“네 할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김태민 상무를 그룹 후계자로 보고
있는 건 알 테고. 그래서 이대로 계열사 분리를 끝내버리면 현진물산과 관광, 건설 쪽 투자자들은 이제 너를
주목할 수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내 남편이 될 사람을 주목할 거라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 너의 능력을 평가할 거라는 이야기야. 지금도 이미 물산과 중공업이 완전히 갈라섰다는 평가가
대부분인데 그래도 송은채 사장에 대한 평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는 쪽이야. 여자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재벌 기업을 맡았던 여자 CEO 치고 좋은 성과를 거둔 CEO 는 많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주식 떨어질까 봐 걱정이다?”
“이건 대주주로서 조언하는 거야. 당장 결혼을 발표하라는 건 아니지만 이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거라는
거야.”
“생각해보겠습니다.”
“전에 정치권이랑 엮어서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고 했지? 뭘 하든 잘해야 할 거야. 이번에 현진관광에 들어와
있는 주주들 중에 영향력이 상당한 사람들이 많아.”
“그 사람들 결국 우리 덕분에 돈 번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더 주목하는 거야. 내 돈을 더 불려줄 사람인지 아닌지 얼마나 궁금하겠어?”
“생각해보니 그렇겠군요.”
형준은 웃으며 술을 마시다가 장난식으로 연희에게 말했다.
“응, 창훈이는 나랑 대학동기였고 몇 번이나 프로포즈 했었거든. 우리 엄마 통해서 만나게 하자고 연락 왔었는데
내가 거절했어. 그런데 왜?”
“혹시 만나면 안 되냐?”
이때 영훈이 말했다.
“가실 겁니까?”
“그럼? 눈꼴시려운 커플 앞에서 혼자 술이나 계속 마실까?”
“훗... 알겠습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난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짠!”
“짠.”
둘은 잔을 마주치고 웃었다.
“캠퍼스를 걷고 싶었어요?”
“네, 많이 궁금했거든요.”
“여기는 현진물산 송은채 사장님의 따님인 임연희 씨입니다. 여기는 현진물산 비서실의 최영훈 과장님. 두 분다
마석대 씨의 강의를 무척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 이렇게 젊은 분들이 저를 알고 계셨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관상이 어때 보여요?”
이세준 부회장은 따스한 눈길로 형준을 바라보았지만 형준은 웃음을 보이면서도 솜털까지 곤두세우며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형준을 바라보던 이세준 부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형준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그럼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데요.”
“안 그래도 내가 자리를 만들어뒀다.”
“네? 은행에 온지가 얼마나...”
“우리가 지금 베트남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지 알고 있지? 앞으로 우리 신영은행의 미래는 베트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가 가서 신영은행을 베트남 제일의 은행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한 시간 전에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쁜 마음에 당장 만나자고 했겠지만 지금은 마석대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게 됐다.
당장 나부터 죽게 생겼는데 생판 모르는 남이 부행장이 되든 말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형준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또 룸싸롱 가시는 거 아니시죠?”
“내가 우리 지은이 두고 그런델 왜 가?”
“칫... 전에도 가셨잖아요?”
“일 때문에 간 거야~ 나 요즘 지은이 말고 다른 여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거짓말.”
“진짜야.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래.”
“왜요? 안 좋은 일인가요? 아까 부회장님이 불러서 다녀왔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
“오빠! 요즘 너무 뜸한 거 아니에요?”
“바빠서 정신 없었지.”
“안 늦었지?”
“네.”
“진짜요?”
“두말하게 하지 말고 얼른 나가.”
형준은 그렇게 말하다가 영훈이 지금까지 이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전혀 표정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지
않은 걸 보고는 눈빛을 반짝였다.
“왜?”
“아닙니다. 일단 제가 드리는 답이 결코 백프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상무님의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그나마 최선의 방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무슨 제갈량도 아니고 안 그래요?”
“그거야 그렇겠지.”
“어쩌면 상무님이 원하는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망하실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물건을 꺼내. 답답해 뒤지겄다!”
“그 마석대라는 분은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군데도?”
“선비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싫어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데 선을 넘는 법이 없을 사람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흠 잡을 만한 게 없으니 부친께서 자신있게 밀어붙이려는 것일 수 있겠죠.”
“뭐야? 그럼 어떡해?”
“선비 같다고 말씀 드렸죠? 본래 선비는 어설픈 협박이나 수작으로는 곤란하게 하기 힘듭니다 단, 한 가지의
경우에는 납작 엎드리죠.”
“그게 뭔데?”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됩니다.”
“감 잡으셨어요?”
“이슈를 만들라는 건가?”
“맞습니다. 정기인사 전에 상무님이 전면에 나서서 신영은행의 엄청난 실적을 이끌어 내면 됩니다. 그럼 설사
마석대가 부행장에 아무 문제없이 오른다고 해도 나중에 상무님을 지지할 겁니다. 단순히 재벌 3 세 혈연빨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죠.”
“가만, 가만... 그건 이해가 가는데 내가 살아날 만한 구멍이 있다며?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해서 그대로 베트남
가버리는 거 아니야?”
“그 이슈가 상무님이 빠지면 안 되는 이슈라면요?”
“그런 게 있을라고? 야, 대기업 일이라는 게 꼭 나만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전부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간다고 하지만 막상 빠져도 다 잘 돌아가.”
“세상 일에 반드시라는 건 없습니다. 예외가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이 뭔데?”
“군산조선소 산업단지입주계약이 곧 종료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입주계약 연장이 안 될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임대 계약이 종료된 광활한 땅에 설치된 한국 최대의 조선소. 매각주관사로 신영은행을 선정할 생각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상무님에게 맡기겠죠. 무진중공업은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안 그러면 엄청난 돈이 들어간 그
설비들을 제값도 못 받고 팔아야 할 테니까요. 상무님이 이거 잡고 중간에서 컨트롤 하고 있
으면 베트남 안 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하... 야, 그 애물단지를 누가 사?”
“우리가, 현진물산이 삽니다.”
형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랑 쇼부 본 거야?”
“조재민 의원. 이번 군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의원입니다.”
“그 인간 지역구가 광주였던가? 그런데 강주원 딱까리 아니었어?”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습니까? 그걸 다 아시고?”
“그 정도는 기본이지. 그런데 강주원 앞마당에 들어간다고? 허락은 받고 하는 거래? 군산에서 말뚝 하나라도
박으려면 강주원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돈데?”
“강주원 의원 검찰 조사받는 거 모르십니까?”
“정치인이 검찰 조사받는 게 뭐 대수로울 게 있어. 원래 그네들 정기행사처럼 때 되면 받는 게 검찰 조사야.
그리고 시간 지나면 유야무야되고. 판검사들한테는 조사받는 정치인들이 한 다리 건너면 다들 친구고 선후배라
결국 감싸주게 돼있어. 판검사 새끼들이 언제 지내 식구 조지는 거 본 적 있어?”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확실해?”
“네.”
“첫째, 매각을 진행하는 동안 시장선거에 불리한 사항을 언론에 퍼뜨리면 안 됩니다. 조재민 의원의 군산시장
당선은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기도 합니다.”
“조재민이랑 발을 맞춰가라? 명심하지. 또?”
“둘째, 가격을 가지고 줄다리기 할 수는 있어도 결국 군산조선소는 현진물산이 안아야 합니다.”
“돈은 더 먹어도 되지만 뒤통수 치지는 마라? 걱정마. 나도 멍청이는 아니야.”
“셋째,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일단 일이 시작되면 중간에 어떤 변수가 일어나든 결과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내부에서 난관이 생기면 상무님이 알아서 처리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현진물산의 부족한
현금에 대해 신영은행측이 도와주는 것에 관해 반발이 일어나도 책임져주셔야 합니다.”
“그것도 당연한 이야기지.”
“마지막 네 번째, 정보 공유 확실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격 외적인 문제는 다 해주십시오.”
“흠... 좋아.”
“좋습니다.”
“난 언제 이거 풀어도 되는 거냐? 늦게 풀면 입도 못 열고 인사서류에 도장 찍힐 수 있거든.”
“조만간 조재민 의원이랑 약속 잡겠습니다. 협의 끝내시고 할아버님께 말씀드린 다음 조 의원이랑 발을 맞추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넌?”
“전 그동안 산업은행장을 만나봐야죠.”
“씨발... 무진중공업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나...”
“부르셨습니까.”
“앉아요.”
“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선 강주현 전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강 전무가 흠칫 놀란다.
“네?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그럼 남은 가정은 하나.
아버지가 결국 자신의 측근도 거리를 두기 사작했다는 것.
그제야 이사회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일부분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음이 틀림없으리라.
영훈은 대쪽같은 선비 성향이라 실력으로 눌러주면 된다 했다. 그는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있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가족은 미국에 있다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요즘 어디서 지냅니까?”
“부행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호텔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임명되면 집을 구할 것 같습니다.”
“왜, 오빠?”
“너 잠깐 앉아 봐.”
태민은 자신 있었다.
오히려 전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대놓고 자신의 것을 빼앗겠다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하면 저들을 한 방 먹여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태민은 핸드폰을 잡아 들고 겉옷을 챙기며 말했다.
내려가니 늘씬한 미녀가 로비 한켠에 다리를 꼬고 앉아 유리벽 너머를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왔어? 어머님은?”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하지 말아요. 나는 내 남자가 그렇게 쉽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거든요.”
“그러지.”
“이번 주주총회에서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없어요. 아버지는 이번 위기를 당신을 평가하는 기회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잘 됐군. 본래 관객이 많을 때 자기 실력을 발휘해야 진짜 스타거든. 잘 보시라고 해. 내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인식시켜줄게.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라는 거.”
“잘할 수 있겠죠?”
“당연하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거야.”
“그런데 말이죠...”
“뭐?”
“혹시 뭐 다른 생각 합니까?”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주 미세하게 상이 변한 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눈치도 못 챌 정도여서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순간 형준은 뜨끔했다.
어제 강 전무와 했던 이야기를 알고 저러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 당연하지.”
“어련히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자신도 모르는 실수 하나 때문에 나중에 곤란을 겪을 수 있어요.”
“알았어. 조심한다니까.”
“다녀왔습니다.”
한남동 고급주택촌에 위치한 이경호 회장의 저택은 높은 담장과 수많은 CCTV 로 완벽하게 보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대식구가 같이 사는지라 형준은 항상 본가에 있을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는 했었다.
예전에는 그저 집에 있으면 놀지 못한다는 생각에 철없이 답답해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기에 어지간하면 집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이른 저녁부터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일찍 왔어요.”
“배 고프지? 아줌마! 형준이 왔으니까 형준이 좋아하는 갈비찜 좀 해줘요.”
“할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죠?”
“아니, 방금 오셨어. 아마 서재에 계실거다. 들어가서 인사해.”
“알겠어요.”
“오셨어요?”
“일찍 왔구나?”
“네. 한 번쯤은 일찍 들어와서 가족하고 같이 식사라도 하려고요.”
“잘했다.”
그렇게 이세준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와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형준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경계하고 있었다.
경계심이 분명했다.
맹수의 추적을 받는 초식동물이 된 것 마냥 소름이 돋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분명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되자 드는 공포심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우리 형준이처럼 젊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빠르게 변화를 이끌어야 시장 주도권을 선점할 수
있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전혀 매력적인 물건도 아니고 괜히 분란만 일으켰다고 역풍을 불러올 겁니다.”
“나한테도?”
“죄송합니다. 제가 손을 댄 일이고 제가 핸드링 하고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뉴스가 나오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겁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회장은 손자의 그런 배짱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짓는다.
“허튼 소리는 아니겠지?”
“할아버지, 저 어린애 아닙니다. 신영은행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판은 이미 짜놨습니다.
차기 군산시장은 군산조선소로 선거유세를 들어갈 테고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끝이냐?”
“네. 지금은 그저 뉴스 보도만 나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어떤 보도?”
“산업은행에서 무진중공업에게 해주조선해양 매각을 보류한다는 보도가 첫 단추입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에 그대로 출마하셨으면 무난히 공천받고 당선까지 생각했을 수 있는데 갑자기 군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 배경이라도 있으신가요?”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이철모 기자는 조재민 의원도 몇 번이나 술자리를 했을 정도로 잘 아는 기자였다.
광주 MBS 정치부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이철모 기자는 전라도 지역의 무수한 정치인들과 인맥을 쌓은 베테랑이었고
정치인들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기획 인터뷰에는 그보다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저라고 순탄한 정치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
수는 없겠죠. 십 년 넘게 제집처럼 누비던 월곡동은 이제는 구석구석 내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어, 새로 닦은
도로들과 개보수한 시장, 초등학교 담벼락 높이까지 전부 제가 신경을 썼어요. 우산
월곡시장 주변으로 해서 근방에 위치한 상인들 중에 저와 악수 한번 안 해보신 분이 없을 정도예요.”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이곳 군산으로 오기를 마음 먹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바로 우리 주민들. 나를 뽑아주고 믿음을
주었던 유권자들에게 이제 이번 총선에 나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 분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낙담하실지 눈에 뻔~했단 말이야.”
“심각한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내 지역구가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민망하네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요.”
“마음에 계속 걸려서 도저히 내 지역구에 다시 출마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의 군산시를 그대로 두기에는 내
정치적 양심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혹시 현재 절망적이라고 볼 수 있는 군산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안이 있으신가요?”
“군산 경제가 꽉 막힌 이유는 조선소 문제가 가장 크단 말이야. 그렇다면 반대로 조선소가 다시 가동된다면 이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철모 기자는 머릿속에 ‘대박 특종’이라는 느낌표가 불꽃이 터지듯 파바박 튀어 올랐다.
“이 기자.”
“네?”
“날 말이에요. 선거에서 한 번 이겨보겠다고 공수표나 날리는 그런 정치인들과 동급으로 엮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뭐,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드러나겠지만 말이야.”
“만약 이게 기사로 나간다면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조재민이야. 군산으로 올 때부터 쉽고 편한 길을 간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이에요. 하하하!”
무진중공업 대회의실.
“네, 회장님.”
“이거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근호야.”
“네.”
“조재민이랑 만나서 이야기 좀 해봐라. 원하는 게 정말 군산조선소 재가동인지 확인해 봐. 그리고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해. 중앙정계 진출이든 정치자금이든. 하지만 군산조선소는 안 돼. 그건
우리 거다.”
“물론입니다. 아마 우리를 자극해서 뭘 얻어내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인간들 이러는 거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근호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있게 나왔지만 정호균 회장은 찝찝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실수하지 마라. 자그마한 용접 실수가 배를 침몰시키는 법이다.”
“네.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 사장은 조재민이가 말한 그 회사가 어딘지 알아보도록 해. 정말 군산조선소를 사려고 마음 먹었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할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해주조선해양 합병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아직 유럽 쪽에서 답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회장님!”
“왜?”
“산업은행에서...?”
“산업은행에서 뭐?”
“해주조선해양 매각과 관련해 문제가 있는지 다시 검토해보겠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이게 뭐야?”
“확인해보겠습니다.”
“잠깐...”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다.”
날카로운 눈매에 굳게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 다부진 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현실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기사 보고 오는 길이야. 너무 놀라서 혼이 달아날 뻔했지 뭔가. 웃음이 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일단
자네한테 저간의 사정이라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으니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기사 내용이 사실인가?”
“맞습니다.”
“...”
“그거 투입하십시오. 그럼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밑천이네.”
“밑천을 투입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건 애당초 합의한 것과 달라. 기존 원안으로 가야 해,”
“공적자금만 10 조 넘게 투입한 회사가 해주조선해양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어떡해서든 넘겨야
했지만 꼭 전액이 아니라고 해도 현금을 주고 사겠다는 회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가 회장님께 이
회사를 넘기면 무진중공업과 뒷거래가 있을 거라는 말이 안 나올 거라고 보십니까? 전 회장
님처럼 두꺼운 벽이 되어 막아줄 돈도 백그라운드도 없습니다. 회장님을 위해 이 위기를 감당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누가 우리 먹이에 손대려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봐. 그리고 룸싸롱에 각 언론사 기자들 초청해서 배불리 먹여.”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화선진당 원내대표와 약속 잡아,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상무님.”
“응? 왜?”
“부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후... 알았어.”
“왔니?”
“네, 부르셨어요?”
“기사 봤다. 네가 말한대로 잘 진행되고 있더구나.”
“감사합니다.”
형준이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 앉는데 탁자에 너저분하게 서류가 어질러져 있었다.
뭔가 해서 보니 놀랍게도 그룹 임원 명부와 실적, 그리고 목표달성 성과율 따위를 종합해놓은 자료들이었다.
“이건...”
“어, 이번 정기인사 때문에 좀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이쪽입니다.”
“앉아.”
“뭡니까?”
“오늘은 여자 가지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진짜 큰일 났다고.”
“그러니까 뭔데요?”
“금융 일이라는 게 꼼꼼하고 세심하지 않으면 언제고 큰 사고가 터진다고 항상 이야기를 들었지. 꼬리가 긴
사람이었으면 아버지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승승장구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럼 강주현 전무의 실수는 아니라는 말이군요.”
“아버지가 강 전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알아냈을 수 있지.”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어째 그것보다 다른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무님과 강 전무 사이의 일을 아는 사람이 꼭 강 전무 뿐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야? 그럼 내가 실수했다는 거야?”
“어지간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상무님이 실수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그럼 더 의심 사지 않을까?”
“거 참 조심성 많으시네. 왜 이러세요? 그렇게 돌다리 막 두드려 보는 성격 아니시지 않습니까?”
“아니··· 나도 원래 이렇지 않은 거 아는데 상황이 그렇잖아. 최대한 조심해야지.”
“동요하지 말아요. 그리고 고작 그거 들었다고 룸싸롱 와서 술 마시고 이러는 거··· 의심에 확신을 심어줄
뿐입니다.”
“그, 그런가···?”
“어? 지은이네.”
“여자친굽니까?”
“응, 사실 네 말 듣고 이제 정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느 집안 딸인데요?”
“있는 집 딸은 아니고, 내 비서.”
“사내연애?”
“응. 일단 이것만···.”
“어?”
영훈은 대답을 구하는 형준의 표정을 무시하고 여비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흘이 걸렸다.
무려 사흘.
아무리 여당의 원내대표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지만 그래도 무진중공업과 그 계열사를 이끌고 있는
자신과의 만남을 무려 사흘이나 미뤄가면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찝찝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평화선진당 강금원 원내대표는 여당 원내대표치고 아주 젊은 편이었다.
이제 고작 마흔 여덟이라 아직 쉰도 안 된 나이에 원내대표를 달고 있으니 상당히 성공한 정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 운만 가지고 됐을까?
당연히 정치권, 법조계, 재계와 두루두루 안면이 있었고 야당 정치인들과도 크게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좋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람 좋다고 쉽게 보다간 큰코 다친다.
“그런 마음이셨군요.”
“군산조선소는 우리 겁니다. 흔들 게 따로 있지, 그건 안 되는 겁니다.”
“이봐요, 원내대표님!”
“압니다. 현실적으로 군산조선소 돌리다가 수주 못해서 휘청거릴 거 알고 있어요. 아마 몇 년 못 가고 다시
산업은행에 다시 맡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라고요?”
“······.”
“그건 당신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진들과 직원들이 할 일입니다. 회사를 망하게 할 정도로 경영을 못하면
망해야지 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 써줘야 합니까? 수주? 솔직히 해주조선해양이 수주 못 채워서
다시 군산조선소가 망한다 한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그냥 죽은 상태로 두는 것보다는 나
을 거 아닙니까?”
띵동!
“당분간 여기 못 올 거야.”
“왜?”
“바빠서. 새로운 프로젝트 맡아서 움직여야 해. 이번에 진짜 중요한 거라서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진짜?”
“응, 진짜야. 그리고···.”
“세원 인터내셔널.”
“세원 인터내셔널? 진짜?”
“응, 그쪽에서 준비하고 우리는 중간에서 절충만 해주는 거지. 거기 대표가 마음먹고 준비하는 작업이야.”
“와··· 말도 안 돼.”
“그렇지? 나도 놀랐다니까. 저녁은 시켜 먹을까?”
“나가서 안 먹고?”
“귀찮아. 너 배달어플 있지? 잠깐 좀 줘봐.”
형준은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한참 동안 만져대다 말했다.
“후···.”
역시 영훈의 말이 맞았다.
허탈하고 허무했으며 화가 치밀었다.
순정을 바쳤다고 하면 오버겠지만 적어도 지은이를 만날 때만큼은 다른 여자와 잔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띵동!
“내가 나갈게~”
형준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던 그녀가 초인종 소리에 부리나케 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녀를 반긴 사람은 찜닭을 배달해온 배달부가 아니었다.
“어? 누구세요?”
“신영은행 감찰부에서 나왔습니다. 회사기밀유출 혐의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와··· 아주 악을 쓰고 쏟아내는구나.”
“요즘 정신없지?”
“직장인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부담도 크고 그럴 거야. 신영은행 쪽은 어때?”
“며칠 전에 무진중공업하고 인사까지 나눴다고 하던데요? 정호균 회장이 뜨악했다고 하던데 일단 눈 마주치고
얼굴 익혔으니 조만간 본격적으로 가격 협상 들어갈 겁니다.”
“오늘 기사 보니까 쉽게 따라와 주지는 않을 것 같던데?”
“안 따라오려고 하겠죠.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네. 그들을 따라가게 하는 건 정치권에서 할 일입니다. 그 정도 능력도 안 되면 우리가 조재민 의원을 잘못
판단한 거겠죠. 아, 제가 잘못 판단한 거겠죠.”
“최 과장 실수일 수 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실수가 맞다면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참 최 과장답다. 그럼 이제 뉴스만 쳐다보고 있으면 된다는 거지?”
“네. 우리는 신영은행에서 제시한 가격으로 협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해주조선해양은?”
“군산조선소가 먼저입니다. 산업은행에서도 무진중공업과의 거래를 재검토하겠다고 했지, 깨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산업은행하고 단둘이 테이블에 앉으려면 군산조선소를 쥐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앉지도
못하게 하겠죠.”
“음··· 알겠어. 그리고 최 과장 오늘 스케줄 좀 널널하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나 따라갈래?”
“어디 가십니까?”
“그럼요. 괜찮습니다.”
“인도는 아주 중요한 시장이야. 중국 이상으로 커질 수 있는 시장이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사업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곳이야. 만약 주한 인도 대사와 친분이 생기면 굉장한 힘이 될 거야.”
“흐음··· 이걸 어쩐다···.”
“왜 그래요?”
“오늘 Nodri Clare VIP 초청 행사라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힘 좀 줬는데?”
“그럴 겁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형석 과장의 사주를 다시금 곱씹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어···.”
“왜요?”
“나 말고 다른 분을 보내죠.”
아무리 회사에서 힘이 세다고 하지만 Nodri Clare 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원을 보내서 무슨 협상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득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희에게 시선이 갔다.
맞다.
이 여자가 지금 비서실에 있기 때문에 자꾸 비서로 능력을 한정하고 있었다.
“가서 본인이 생각할 때 가장 회사에 이익이 되는 거래인지 생각해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잘 모르겠다면 나한테
연락하시고요.”
“궁금합니까?”
“당연하죠. 아까 그 자리에서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단 말이에요. 뭐예요? 노형석 과장님처럼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주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좀 불안정하다고 봐야죠.”
“왜 불안정해요?”
“본래 도전 지향적인 사주를 타고났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호기심이 많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실패할
확률도 높은데, 이 사람은 승부사 기질을 타고나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도 합니다.”
“민희 씨가 그런 성격이었어요?”
“본래 자기 자신도 자신의 성향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본래 자신의 성향을 발현시키려면 그만한 환경과 운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참에 한번 보도록 합시다.”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녀는 방긋 미소지었다.
그렇게 영훈과 연희가 회의실에서 나와 인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영업팀에 갔던 민희가 돌아왔다.
연희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감 때문인지 조금 얼어있는 그녀를 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가방을 들고 그대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촤라라락!
“갈 때 이 가방 들고 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깨끗하게 잘 쓸게요.”
“이미 중고라 그렇게 애지중지 안 하셔도 돼요.”
“한 가지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혹시 노형석 과장을 스카우트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요. 노 과장이 브랜드 담당자로 돋보이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네? 아, 네···.”
“무슨 이야긴지 잘 이해 못 하겠지만 명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어? 왔어요?”
“백화점 관계자들은요?”
그때 서가은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서가은 씨. 저 현진물산 비서실에서 나온 김민희라고 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최 과장님과 연희 씨를 찾으시는 건가요?”
“네.”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못 나오세요. 대신 제가 나왔습니다.”
“아···.”
이때 민희가 끼어들었다.
“가은 씨,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는데··· 벤자민 청이라고 에르메스 아시아 담당자. 가은 씨도 에르메스
좋아하지?”
“네? 네···.”
엄연히 기존 브랜드 담당자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리기에도 뭐한, 그런 상황인데 민희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바뀐 신분에도 컬렉션 아이템 몇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협력업체 직원 신분으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먼저임은 인지하고 있었다.
“도현 씨, 여기 인사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180 센티의 훤칠한 키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그는 가만히 입 다물고 서 있기만 해도 한
장의 화보와 같았지만, 민희는 지금 그런 그의 멋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형석 과장은 순식간에 도현을 어르고 달래는 민희를 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는 드넓은 저택 곳곳에 포진해있던 연예인들을 다 만나고 난 후 가은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노 과장은 목걸이의 가격을 생각하며 속으로 뜨악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무려 비서실에서 내려온 사람인 데다 자신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는 카리스마에 완전히 기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조금 냉정하다 싶은 말이지만 가은은 원래 민희의 성격이 그런 건가 하며 인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미안해요. 제가 오늘 너무 나댔죠?”
“아닙니다. 저였으면 오늘 연예인들 구경하는 것만 찍고 보도자료 냈을 겁니다.”
“아까 그거 뻥이었어요.”
“네? 진짜로요?”
“네.”
“그럼 왜 그렇게 말한 겁니까?”
“그래야 서가은이 감동할 테니까요.”
“그럼 진짜 사람을 가려가며 협찬한 이유는 뭔가요? 아까 보니까 누구는 급이 낮은 연예인이라고 해도 협찬을
주고 누구는 주연급 배우라고 해도 안 주던데.”
민희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 영훈도 오늘 컬렉션의 계약 여부보다 노형석 과장이 스카우트 당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으니까.
진심을 담아 말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미인의 말은 잘 믿는 건지 노 과장은 쑥스러운 얼굴로 괜히 시선을
돌린다.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었어요. 그리고 진짜 가방 몇 개···.”
인도 대사관저에 도착한 송은채 사장 일행은 인도 대사인 아미르 밧찬과 그 아내인 쿠잠의 환대를 받으며 식탁에
앉았다.
송은채 사장은 가장 먼저 자신의 옛 친구를 연희와 영훈에게 소개했다.
인도 대사인 아미르 밧찬은 비록 영어를 못하기는 해도 이 자리에 자신을 제외한 남자가 영훈 하나라 그런지
영훈과 악수도 하고 옆에 앉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사실 영훈은 그와 만나기 전에 포털 사이트를 통해 그의 생년월일을 확인하고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이었다.
“내가 듣기로 여기 한국은 신분의 차별은 없지만, 기업 재벌들은 재력을 상당히 많이 본다고 알고 있어요. 그걸
뛰어넘을 만큼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여기 아가씨와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당신의 능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별거 없습니다. 그냥 사람을 잘 보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잘 본다고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 사람을 잘 보는 걸 특기로 내세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한국
사람이 허풍을 잘 친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으니 참 새롭군요.”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할 겁니다.”
“혹시 점쟁이 같은 건가요?”
“하하, 아닙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 같습니까?”
영훈은 고민했다.
과연 자신이 알아낸 사주가 인도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건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결과일지.
그래서 본래라면 그냥 둘러대고 말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호기심 때문에 툭 던졌다.
“혹시 나에 대해 미리 알아보았나요?”
연희가 영훈의 눈치를 보며 화제를 피하려 했지만 아미르 밧찬 대사는 자신의 호기심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궁금하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주를 풀어줄 수 없으니 농담처럼 넘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연희의 어쩔 수 없는 통역에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몇 마디나 했다고 대사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습니까? 그냥 대사님의 얼굴과 말투, 몸짓 같은 것에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작은 재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를 궁금해서 죽게 만들려고 작정 하셨군요. 하하하! 이거 큰일났습니다. 당신이 가고 나면 난 한동안 당신이
어떤 트릭을 썼는지 궁금해서 아무 일도 못할 테니까요.”
“그러다 며칠 지나면 저와 만났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겁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서로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게 때문에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그냥 신기한 재주를 본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알아요. 아까 기업인들이 자신한테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데 속으로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아들이자 무진건설기계 사장인 정근호 사장에게 말했다.
“신영은행에서는?”
“5 천억을 제시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이게 될 일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어? 그놈이 경제를 알아? 조선을
알아? 평생 광주 바닥에서 구르던 놈이 갑자기 군산조선소를 왜 걸고 넘어져?”
“하긴 그렇습니다.”
“분명히 있다. 조재민이, 신영은행, 그리고 산업은행까지 쥐고 판을 짜놓은 놈이 분명히 있어. 아마도 그놈이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먹으려 하는 놈일 거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저들이 준비 다 끝내고 발표할 때서야 알아내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흘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밝혀내겠습니다.”
특이한 표현이다.
“무리 없이 잘 넘어갔다?”
“대화는 잘 풀렸지만 소속사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어서...”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상관의 의도를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캐치하는 사람이 있다.
민희가 바로 그런 부류다.
“잘했습니다.”
“왔어?”
“네, 찾으셨다구요?”
“그래. 일단 앉아. 매실음료 마실래?”
“주세요.”
“유연탄 광산이 생각보다 잘 되고 있어. 생산량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유연탄 값이 올랐거든. 알다시피 중국에는
석탄 발전소가 많아. 우리야 미세먼지 때문에 죽겠다, 어쩐다 하지만 10 억 넘는 인구의 전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요?”
“나쁜 일은 아니지. 우리가 짓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중국 내에서 소비하는
유연탄을 주췬 쪽에서 빠르게 공급해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어.”
“왜요? 중국업체들이 개발하는 유연탄 광산도 많을 텐데?”
“아, 맞다. 그때 주췬 아들 대학교 알아봐 준다고 해놓고 아예 신경을 못 쓰고 있었네요. 어떻게 됐어요?”
“기조실에서 연세대학교에 연결해줬어. 지금 어학당 다니고 있다는데?”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내가 그건 기조실에다가 물어볼게.”
“상무님 바쁘시니까 기조실 직원더러 저한테 보고해달라고 해주세요.”
“건너 듣는 것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전달할게. 어쨌든 주췬이 먼저 나서서 저래 하니 우리로서는 거절하기가
어렵게 됐어.”
“뭐 때문에 불렀는지는 모릅니까?”
“나야 알 길이 없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최영훈 과장이 중국으로 와주었으면 한다’라고만 했거든.
그것도 공식적인 채널은 아니었고 돈을 전달하는 사람을 통해서 전해졌어.”
“왜 그렇게 전달한 겁니까?”
“아주 조그만 기록이라도 남기길 싫어한 거지. 오로지 사람의 말만으로 전해지면 흔적이 남지 않으니까.”
“흐음··· 더 불안하네.”
“불안하면 안 갈래?”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되는 겁니까?”
“솔직히 가긴 가야 하는데 정 가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 회사에서 사장님 다음으로 몸값 비싼 사람이
자네잖아.”
“이번에도 연희 씨랑 같이 가기는 그렇고 통역 하나만 붙여주세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고승현 상무는 솔직한 마음으로 영훈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신영은행 라인을 알려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보통 예민한 문제인가?
이런 문제는 알려주면 고맙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절대 먼저 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영훈도 고승현 상무에게 이형준 상무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건 단순히 정보를 독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준과 자신과의 사이는 단순히 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극도로 예민한 사건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후··· 답답하네.”
“상무님께는 알려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현금이요?”
“법인카드를 쓸 수 없는 상황일 때 쓰시라고 준비했습니다. 50 만 위안으로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약 8 천만 원
정도 됩니다.”
“무슨 정보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데···.”
“한국은 치안이 상당히 좋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간혹 해외로 가는 사람 중에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낮이니까, 사람이 많으니까, 선량한 웃음을 지으니까 안전할 거라고 말이죠. 이건 협상에서 또 다른 무기로 쓸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 과장님을 구할 여벌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셔
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한국에 오면 식사라도 합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췬님이 보냈습니까?”
“맞아요. 제가 통역까지 같이하게 될 겁니다.”
“통역을 보냈습니까?”
“아무래도 중국 측에서 통역을 미리 준비한 것 같네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같이 가시죠.”
“만나자고 해서 비행기 타고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왔는데 말동무라도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요? 싫으면 바로 돌아가고요.”
“전화해보시든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댁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주췬님은 댁에 계시지 않아요. 이제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예약해놨으니까 일단 체크인부터 하세요. 두 분이
오게 될 줄 몰라 방을 하나만 잡았으니 불편하더라도 두 분이 지내세요. 그 정도는 괜찮으시죠?”
“양티엔이에요.”
“약혼자?”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저 자리에 참석할 수 없어요. 들어갈까요?”
“최영훈입니다.”
“중국어를 못하는구나?”
“내가 한국말을 잘하니 상관없어요. 그리고 결혼하면 중국에서 잠시 살면서 배운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벌써 그렇게까지 이야기했어?”
“그럼요. 요즘 결혼하려면 최소 1 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요. 호텔 결혼식 하기가 쉬운 줄 아세요? 여기
호텔만 해도 거의 1 년 치 예약이 다 잡혀 있을걸요?”
“정신이 없구나, 정신이 없어. 그래, 이 친구는 한국에서 뭘 한다고 하더냐?”
“회사원이에요.”
“회사원?”
“능력이 대단해요. 입사한 지 1 년 만에 과장을 달 만큼요. 그것도 작은 회사가 아니라 현진물산이라는
대기업이에요. 아, 잘 모르시죠? 1 년 매출이 500 억 위안이 넘는 큰 회사예요.”
이때 주췬이 나섰다.
“너무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말아요. 대부님이 소개해주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에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잘 생겼지, 집안 괜찮지. 뭐가 문제였어?”
“매력이 없었거든요. 그나저나 대부님은 제 생일 때 뭐 해주실 거예요?”
“신혼집을 어디로 정할 건데?”
“우와! 아파트 사주시게요?”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결혼하는데 그 정도 못 해주랴?”
“꺄약! 좋았어! 영훈 씨, 대부님이 우리 결혼하는데 아파트 해주신대요. 분명 엄청 좋은 곳일 거예요. 우리
대부님, 엄청 부자거든요.”
“중국인이었습니까?”
“그럼 한국인 같아 보였어요?”
“원어민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말을 무척 잘해서요. 교포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저는 한 번 배우고자 하면 끝을 보려고 죽어라 달려들어요. 한국말이 쉽지는 않았지만 2 년 동안 죽어라
배웠죠.”
“어디서 배웠습니까?”
“그건 왜요?”
“궁금하니까요.”
“고려대 어학당이요.”
“거기서 거의 수재였겠습니다?”
“뭐··· 그랬죠.”
“그런데 오늘 이 자리 도대체 뭡니까? 아니, 일단 이 자리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맞습니까?”
“맞아요.”
“표정 너무 굳었어요. 긴장하면 들킨단 말이에요. 우리 대부님 삼합회 간부예요. 눈치 없는 흐리멍덩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녀는 눈을 끄게 뜨며 손을 튕겼다.
“그래서요?”
“주췬 대표님은 이곳 흑룡강성에서는 힘이 있으시지만 크게 전국으로 보면 그리 주목받는 정치인은 아니세요.
하지만 딱 하나, 주췬님이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중국 모바일 공동구매 플랫폼인 메이홍이 바로 주췬님의 것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지분구조가 복잡하지만 하여튼 그래요.”
“그럼 혹시···?”
“맞아요. 난 메이홍의 도움을 받아서 내 화장품 회사를 키워 보려고 해요. 마침 주췬 아저씨도 굉장히 가까운
분이시고 황레이 대부님이야 거의 큰아버지 같은 분이시거든요.”
“그러니까 결혼할 사람을 소개해주는 자리를 만들면서 두 사람을 이어줬다?”
“두 분은 본래 아는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약속을 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리고 주췬 대표님은
인민대표인데 대놓고 삼합회 인물들을 만나기는 조금 그렇잖아요?”
“아···.”
“네···.”
“황레이는 중국의 연예기획사와 다수의 매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재벌이라고 할 수 있네. 물론 그
혼자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고 삼합회가 소유하고 있다고 봐야지. 당연하게도 그 연예기획사들을 가지고
정치인들과 수많은 커넥션을 이루고 있어.”
“그렇군요.”
“자네가 그때 말했지? 쓰임새가 많은 여자라고. 어지간한 여자들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무슨 수를 쓴 건지
황레이의 곁에 앉을 정도가 됐어.”
“그런데요?”
“어떤가? 황레이라는 인간 말이야.”
“어째서?”
“전 당신을 도와주러 왔지만 사실 당신이 유연탄을 처리해준 건 우리가 부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날
필요로 해서 불러냈다면 먼저 오늘처럼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됐습니다.”
“그러니 저와 대표님의 관계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전 대표님을 도와드리러 온 겁니다. 그러니 도움을 받고
싶으면 최대한 저에게 협조 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 지금 일어나겠습니다.”
황대출은 정말 이렇게 통역해도 되는 건지 영훈의 눈치까지 보았지만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통역하라고
지시했다.
역시나 주췬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황대출이 통역을 제대로 한 게 맞다면 지금 양쯔엉과 황레이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황대출은 통역을 하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통역한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할 정도였고 영훈은 황대출의 통역을 들으며
주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까 양티엔의 행동을 보면 굉장히 친한 큰아버지 같은 느낌이었지 않은가?
주췬은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양쯔엉과 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었네. 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지. 그래서
양쯔엉의 그런 사정도 모를 수 없었어. 문제는 양티엔이 황레이에게 접근하는 걸 알았다는 거야. 난 누가 내
앞길을 방해하는 걸 원치 않아.”
“전 관심법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역시 그랬군요.”
“자네는 속일 수 없는 사람이군.”
“아마 마지막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대로 한국에 갔을 겁니다.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아무리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부님 앞에서는 그 연극 제대로 해줘야 해요. 아, 주 대표님이 그건
이야기 안 하시던가요?”
“저 양티엔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조사해주세요. 양쯔엉도 같이요. 가족관계부터 성적, 교우관계 등등 알아낼 수
있는 건 모두 다요.”
“알겠습니다.”
“고대 어학당을 나왔다고 들었는데 진짜 거기 다녔는지도 확인해주세요.”
“오... 그거면 빠르게 확인 가능하겠습니다.”
“여보세요?”
[어, 중국에서 잘하고 있어? 주췬이 부탁하는 게 뭐야?]
고승현 상무였다.
“어머니가 있네요?”
“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는데 아마 주췬의 말이 맞다면 이후에 양쯔엉이 재혼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쯔엉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답니까?”
“주로 부동산과 대부업에 손을 대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거부는 아닌데 워낙 발이 넓고 사교
관계가 좋아서 우리도 유연탄 광산을 진행할 때 양쯔엉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음... 그렇군요.”
“벌써 계산 나왔습니까?”
[주췬이 흑룡강성 유통 업계를 꽉 잡고 있다는데?]
“그래요?”
[그 모드린가 노드린가 하는 브랜드 있지? 그거 우리가 중국에 넣어보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고승현 상무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노형석 과장의 운빨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이쯤 되면 걸어 다니는 로또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기다렸습니까?”
“네. 오늘 정신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요. 호텔 들어와서는 본사에 연락한다 어쩐다 하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는데 그대로 잘 수는 없잖습니까. 며칠 같이 지낼 건데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이라도 해야죠.”
정확한 나이를 밝히지 않고 서른 초반이라고만 하자 황대출은 최영훈이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알았지만 더
물어서는 안 되는 것도 알았다.
영훈은 낙하산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췬과 나는 적대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죠. 주췬은 내 도움이 필요하고 나는 주췬의
도움이 필요하니 서로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통역사였다.
영훈은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에 담담한 얼굴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거짓말을 해서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영훈의 모습에 오히려 황레이가
황당해했다.
“그 외에 다른 게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난 정치인을 믿지 않아.”
“한국에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건넌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게 떠오르네요. 왜 돌다리를 두드리고 계십니까?
흑룡강성은 당신의 본거지가 아니니 그냥 돌아가시면 될 일 아닙니까?”
“배가 고프군.”
“주췬이 현진물산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양티엔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사업에 중요한 파트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알아봤는데 크게 관련이 없더군. 이제 보니 주췬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진물산이 아니라 자네였던 것 같아.”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니, 양티엔의 엄마와는 상관이 없는 여자였어. 배우를 지망하는 어린 여자였는데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했네. 그런데 내가 없는 사이에 양쯔엉이 그녀를 강간하고 애인으로 삼았네. 거의 강제로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버린 거지. 난 분노했지만 참았네. 그를 죽이면 사업이 위태로웠거든.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거야.”
“한국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쉽게 폭력이 이루어진다네. 가볍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면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잊어버리시죠.”
“양티엔과 나 사이가 그렇게 티가 났나?”
“그런 편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난 예전에 못다 한 실수를 정리하려고 하네. 그런데 양쯔엉은 이곳
하얼빈에서 꽤 많은 인연을 맺고 있어. 주췬의 도움이 필요해.”
“공권력을 필요로 하시는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주췬이 날 위해 손을 써줬으면 좋겠어.”
“굳이 제게 부탁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난 양티엔 그 아이가 불안해. 굳이 자네를 데리고 오는 연극까지 해가면서 주췬에게 다가가는 이유. 그게
돈이라는 걸 알 것 같지만 왠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난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어쨌거나 난 해줄 게 많지 않네.”
“양티엔은 어떻게 생각하나? 내··· 하여튼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저 정도 미인은 흔치 않은데 말이야. 성격도
나쁘지 않고 한국말도 꽤 잘하지. 양쯔엉이 이곳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재산은 양티엔에게 갈 테니 어지간한
한국 부자들보다는 훨씬 부자가 될 거야.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
“전 여자가 있습니다. 설마 지금 양티엔으로 퉁치려는··· 아니, 양티엔을 조건으로 걸려는 건 아니겠지요?”
“여자가 있다니 아쉽군. 난 배짱 있는 남자를 좋아하거든. 공부만 한 놈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헛발질을 하곤
하지. 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나?”
“사람이 사람을 대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의 프로젝트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오랜 기간 맺어온 관계를 대신할 사람이라··· 전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둘 중 하나만 하시죠. 양쯔엉의 제거와 이곳 흑룡강성의 이권, 둘 중 하나를 원한다면 최대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둘 다 원하신다면 그건 우리 현진물산의 이익과 어긋납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그 여자, 주췬이 보낸 여자인지 알고 있었잖습니까?”
금(金)의 기운에 관성이 과한 사주를 타고난 황레이는 범죄조직의 간부이긴 하지만 마음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폭력성이 나타나는 사람이기는 해도 나름 순정파의 기질이
있었다.
게다가 허바이바이가 타고나기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이긴 하지만 본래 황레이는 그녀처럼 색기를 드러내는
여자보다는 보호심리를 자극하는 청순한 여자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황레이의 사주를 계산한 순간, 첫날 기계처럼 술을 따르던 허바이바이의 태도가 다시 머리에 떠올랐던 건 그런
이유였다.
“······.”
“첫날 당신을 봤을 때, 옆의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더군요. 대화에 집중하려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마음에 든 여자가 아니었겠지요. 맞습니까?”
“귀신이군.”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사람을 잘 본다고. 그럼 주췬에 대한 이야기도 믿을 수 있겠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전 마음 편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주췬은 피식 웃었다.
그는 아직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영훈은 곤란한 표정으로 미간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러니 그 여자는 그만 잊으시죠. 양티엔이 당신에게 접근하는 건 아무래도 황레이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거기에 같이 놀아줄 이유가 없습니다.”
“흠... 믿을 수가 없군.”
“전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양티엔은 위험한 여자입니다. 건들지 마세요.”
“알겠네. 이곳으로 불러서 제대로 대접도 못했군. 뭐 원하는 거라도 있나?”
“네?”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럼 물건만 가져다가 중간마진만 남기고 파는 그런 거 아닌가?”
“그것도 맞습니다.”
“그래가지고 돈이 되겠느냐는 거야. 나야 중국의 정치인이라서 신경쓸 건 아니지만, 자네는 본인이 가진
그릇보다 통이 크진 않군.”
“잠깐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러게.”
영훈은 고승현 상무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마음을 돌려 노형석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다만 문제는 Nodri Clare 의 가격이 얼마나 될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칫... 그놈의 사극 말투는... 일은 잘 됐어요?”
“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죠. 한국은 어땠습니까?”
이미 중국에서도 계속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통화를 했음에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였다.
당연히 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일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최영훈입니다.”
[나 김만석입니다.]
산업은행장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기사 나갈 겁니다.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부터 당신들이 잘
만들어가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위에서도 해주조선해양의 딜이 파토나니까 그 이유 때문에 계속 닦달을 해요. 물론 무진중공업이 압박했겠지만
계속 찌라시가 시장에 돌면서 계속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습니다.]
증권가에는 무진중공업과 해주조선해양 합병이 깨진 이유를 가지고 무수한 이야기가 파생되며 돌아다녔다.
청와대의 입김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은 기본이고 해주조선해양의 생각지 않았던 대규모 부채가 발견되며
무진중공업이 한 발 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온갖 의혹이 물리고 물리니 정치권에서도 그 이유를 캐고 들어온 것 같았다.
“누군데 그래요?”
“김만석 산업은행장이에요. 해주조선해양 합병 파토 때문에 압박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이제 곧 기사가 나갈
거라고 하니까 이제 우리 이름이 경제면을 뒤흔들겠네요. 심심하다고 했는데 벌써 이렇게 터져주네요. 이래서
사람이 입을 가볍게 놀리면 안 되는 겁니다.”
“입이 방정이라는 거예요?”
“도대체 뭐야? 도급능력 39 위 건설사 하나 공짜로 업어다가 이걸 만들어내? 우리도 건설 있잖아? 저게 쉬워?”
“아버지...”
정근호 사장의 안타까운 탄성에 정 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용도 없는 실시간 속보가 포털에 떴고 그 이후로 후속 기사가 연달아 포털 메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처음에는 대국적인 결정을 내린 무진중공업에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당장 조선회사 하나 없이 군산조선소를 인수하게 된 현진물산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확정된 이후 군산조선소를 인수한다는 방침이지만 일단 가격이 결정되었고,
해주조선해양 매각에 걸림돌이 될 것도 많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과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지불할 것인지였다.
“8700 억은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그치, 비싸다고 생각하지? 나도 깎아보려고 했어. 일단 앉아. 왜 서 있어? 목 아파, 자자···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들어 보라고. 자, 한잔 들이키고.”
당연히 알고 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아마 절벽 앞에 선 기분일 거다.
“알아. 비싼 거 알지. 그래서 일단 우리가 최대한 저리로 대출을 지원할 생각이야. 이건 잘만 되면 완전히
레버리지 효과로 남의 돈 빌려서 돈 벌어먹는 일이 될 거라고.”
“잘 된다면 말이죠.”
“우리 최 과장 손에 닿은 일 치고 어디 실패한 일이 있던가?”
“고작 몇 개 손댔다고 그러십니까? 흠··· 좋습니다. 가져가세요.”
“하하하! 역시 우리 최 과장, 화통해!”
“일단 기사 수정해서 다시 내라고 하세요. 매각금액 8700 억이 아니라 1 조라고. 그 정도면 무진중공업 뿐만
아니라 현진물산도 대국적으로 결정한 셈 아닙니까?”
“그, 그렇지. 원래 커미션 금액도 포함해서 보도자료를 돌렸는데 기사에서는 그 금액을 쏙 뺐더라고. 아무래도
조선소 건설비용 대비 매각금액을 적게 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좀 하고 싶었나 봐.”
“그런 것 같네요. 금액은 확실히 해야죠.”
“그럼, 그럼~”
“그리고 추가로 대출 하나만 더 해주세요.”
“대출? 해주조선해양? 그래, 안 그래도 8 천억 정도는 잡고 있었어. 게다가 내가 듣기로 삼분의 일은 산업은행이
대출 지원하고 8 천억 제외한 나머지는 올해 말부터 분할납부 하는 걸로 들었는데, 맞지?”
“맞습니다.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
“8 천억 정도만 더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이건 나라도 힘들어. 나간 대출이 너무 많아. 부채율이 너무 올라간 상태라고. 여기서
추가 대출? 위험해. 기업여신 쪽에서 당장 반대하고 나설걸?”
“지금 당장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일단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완료되고 총선 끝난 이후에 진행할 생각이니까요.”
“한 석달 남았네?”
“네. 그러니까 그때까지 자리 잡으시고 우리 뒤 좀 팍팍 밀어주셨으면 합니다.”
“씨발, 그러니까 결국 하라는 말이네.”
“할 수 있잖아요. 전 상무님 믿습니다.”
“아, 진짜요?”
“뭘 진짜요야? 네가 못 믿을 여자처럼 보인다며?”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쁘락치일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회사에 여자를 쁘락치로 넣습니까?”
화면에 뜬 그 비서의 얼굴은 이마가 좁고 윤택하지 못해 초년운이 좋지 못하고, 코끝과 귀 윗부분인 이각이
날카로워 복이 없으며, 남에게 정을 주는 성격도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그녀에게 복이 있다면 재벌인 형준과 결혼할 테지만 그런 복을 타고난 여자가 아니라는 거였고, 남에게 쉽게 정을
주는 여자도 아니니 형준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사이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 여자니 형준에게 조심하라고 했던 것인데 설마 이세준 부회장이 그녀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회사 경영 쪽에는 경험이 전무하던 송은채 사장이 직접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은 없고 아마
송 사장을 서포트하는 걸출한 인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떨떠름한 반응.
도훈은 주먹을 쥐며 강하게 말했다.
“대신 반대로 보면 지금 현진그룹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건 확실합니다. 차입금의 규모가 엄청나고
현진중공업은 현진물산과 거의 계열사 분리가 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 상황에 3 월 주총에서
우리와 헤지펀드가 흔들기 시작하면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입니다.”
“으음···.”
우명그룹은 현진중공업을 흔들어 주가 차익을 얻는다는 계획에 현진중공업 인수라는 가능성을 하나 추가했다.
“준비 많이 했구나.”
“오랜만이네.”
“축하드려요.”
“뭘?”
“그런가? 하긴··· 놀랍긴 하겠다. 넌 온전한 현진그룹을 보고 태민이를 만났을 텐데. 오죽 놀랐을까 싶네.”
“으음~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전 언니네 회사 전혀 탐나지 않아요.”
“넌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진심처럼 하니?”
“안 믿으시는구나?”
영훈이었다.
노형석 과장이 송은진 실장과의 만남에 영훈을 데리고 갔었는데 벌써 이야기가 끝났나 보다.
연희는 송은진 실장을 만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백화점을 둘러보고 있다가 주연과 만난 것이었다.
“아, 전화했어요? 미안해요. 무음으로 되어있어서 몰랐나 봐요. 여기는 한주연. 현진중공업 김태민 상무랑
만나는 여자예요.”
“GK 그룹 한재원 회장의 딸이에요. 나이 쉰에 낳은 막둥이인 데다가 보다시피 얼굴도 예쁘고 똑똑한 편이라
그룹에서 애지중지한다고 해야 하나? 나 이 정도면 설명 잘했니?”
“칭찬만 해줘서 오히려 당황스러운데요?”
“걱정하지 마. 뒷담화는 너 없는 데서 할 거니까.”
“둘이 싸웠습니까?”
“보다시피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왜요?”
“못 보던 얼굴인데 어느 집 사람이에요?”
“말해도 모를 겁니다. 그대들처럼 재벌 가문은 아니거든요.”
“어머, 그래요? 언니가 일반인하고 만난다고요? 이럴 수가··· 하하, 연희 언니가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네요.”
입을 삐쭉거리는 연희를 데리고 입점 행사장에 들어서니 전속모델인 서가은과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송은진
실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형석 과장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송은진 실장이 연희를 보고 다가왔다.
“왔어?”
“네. 가장 먼저 들어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두 번째로 들어오게 됐네요.”
“너 나 책망하는 거니? 그래, 솔직히 Nodri Clare 가 이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을지 그때는 몰랐잖아. 그건
인정.”
“그래도 조건 좋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너희 직원 능력 있더라. 사람 속 살살 긁으면서 약 올리는데 욕이 나올 뻔했잖아.”
“아~ 민희 씨? 그분 능력 있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좀 있나 봐요. 그래도 나중에 만나더라도 욕은
하지 마세요. 우리 직원이 욕먹으면 나 화낼 거예요.”
“무섭네? 해주조선해양까지 먹었다고 우리가 아래로 보이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도 나랑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백화점이 여긴데.”
“구라치지 마. 뉴월드를 제일 많이 가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사실 엄마가 뉴월드를 쪼~끔 더 좋아하긴 해요. 아휴, 난 거기 주차가 별로라서 잘 안 가게 되던데···.”
“그거 봤어?”
“네? 뭘 말입니까?”
“방금 현진중공업이 갑작스레 빅베스 날렸던데?”
“네? 빅베스요?”
노형석 과장은 ‘아차’ 하는 마음에 다시 설명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얼마나 들어갔어?”
“아직 7 천억 정도밖에···.”
“벌써 7 천억이나 들어가? 며칠이나 됐다고 그렇게 많이 샀어?”
“사채시장과 일본에 있는 큰손 중에 현진중공업 주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접 컨택해서 매수한 거라···.”
도훈은 입을 열지 못했다.
현진중공업에 대한 경영권 욕심은 주식상승에 대한 이익을 전제로 한 거였다.
경영권을 못 가진다고 해도 주가 차익을 얻고 나온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던 건데 이제는 그 가정이 쓸모없게 된
거다.
이 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다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이세준 부회장에게 말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이번에 형준이가 무진중공업 정 회장하고 담판 짓느라 고생 많이 했다. 그 고약한 늙은이 앞에서 기죽지 않고
결과를 냈어.”
“생각했던 가격에 비하면 과하게 비싸게 결정됐습니다. 현진물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와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굉장히 곤란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게야. 그 애가 정 회장이랑 급이 맞아야 제대로 목소리를 낼 거 아니냐? 어디 큰소리나 제대로
냈겠어? 본인이 원하는 가격을 고수할 수 있었겠냐고. 열심히 하려는 녀석 좀 밀어줘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끄음···.”
이경호 회장은 곧 죽어도 고려해보겠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이세준 부회장이 탐탁지 않았지만 불편한
기색만 내비쳤을 뿐 더는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부회장의 권위를 깎는 행위가 그리 좋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다시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이게 다 군산을 사랑하시는 의원님의 마음 때문이 아닙니까. 요즘 기사 나오는 거 보면서 군산
시민들이 정말 조선소가 다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희망 섞인 말들을 하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하, 네. 기대하십시오.”
“오후 일정은?”
“벽란도에서 1 시간 이내에 미팅을 끝내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빨리 움직이자고.”
“해봤는데 안 되면 어쩌는가?”
“최선의 노력을 다 했는데도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있습니까. 다만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가 문제겠죠.”
“내가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 삼천억 때문에?”
“그깟 삼천억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업의 자금이라고 해도 회사 직원들이 밤낮으로 고생하며 벌어들인
돈입니다. 그만큼 가치 있게 써야 하고요.”
“그래서?”
“의원님께서 내 일처럼 뛰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이게 의원님께 손해도 아닐 거고요.”
“지금 기사들을 보면 의원님에 대한 내용이 올라오고 있지만 솔직히 주인공이 의원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을 둘 다 인수하려는 현진물산에 대한 각종 기사가 넘쳐나는 상황이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그 당연한 게 의원님께서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럼?”
“딜을 한번 깨보는 게 어떻습니까?”
“깨자고?”
“다들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이 현진물산의 품에 안기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작 삼천억
때문에 딜이 깨지게 생겼습니다. 조선소의 부활을 기대하던 군산 시민들은 낙담하겠죠.”
“군산 시민들뿐일까? 전국의 국민이 분노할걸세.”
“그걸 의원님께서 되살리면 어떨까요?”
“해보지.”
영훈은 미소지었다.
어차피 이 생각을 떠올릴 때부터 조 의원이 거절할 거라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이걸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을지가 걱정일 뿐.
“좋은 선택입니다.”
“자네는 이 기상천외한 도박판을 깔아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했나? 고작
삼천억 때문에?”
“말씀드렸지만 고작 삼천억이 아닙니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회사에 현금이 많이 부족하게 생겼거든요.
이면지까지 아껴야 할 판입니다. 천오백억이라면 이 정도 쇼는 벌이고도 남죠.”
“알아봤어?”
“후속 기사 떴습니다.”
‘신영은행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일은 조재민 의원과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커미션은
그대로 받게 될 테니 그 부분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언론에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 흘리시면 안 됩니다. 저 믿으시죠?’
이게 영훈이 한 말이었다.
저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 못 믿겠는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알겠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은행 내부를 단속해야 하는데 가장 난적이 하필 자신의 상관이라는데 있었다.
비릿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빛처럼 느껴졌다.
형준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세웠다.
“자리 내놓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세준 부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 들어와.”
“아이고, 왔구만.”
“아주 훤칠하시군요. 회장님의 손자 사랑이 그렇게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우리 아버지가 형준이를 많이 아끼긴 합니다.”
“잘 생기기만 했다면 모르겠는데 능력도 대단하니 회장님이 아주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이번 군산조선소 매각
프로젝트는 외부에서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 취임은 안
했지만 곧 출근할 예정이니까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맞지요?”
“원만하게 처리될 예정입니다. 저 자세한 사항은 아직 외부인 신분이시기 때문에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허···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전 솔직히 1 시간 전만 해도 사태가 꽤 복잡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사가 심상치
않더라고요. 아, 지금쯤 한창 뉴스가 나올 때인데···.”
“형준아, TV 좀 틀어 봐라.”
조재민 의원이 아무도 없는 조선소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적막한 조선소를 바라보는 조재민 의원, 그는 지금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이 재밌게 됐네요. 어지간한 정치인이면 감히 겁나서 저런 소리를 못할 텐데···. 아무래도 뭔가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저런 무식한 짓을 하려고. 형준아, 넌 아니?”
“협상이 마무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이건 애초부터 기획된 것이니 결과는 정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영훈이 처음부터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말,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뭘 알고 있는 거야?”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지켜보고 있으면 됩니다. 딜이 깨지면 제가 책임질 겁니다.”
배부터 채우려는 생각에 술은 따지도 않고 라면부터 후루룩 해치우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강주현 전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식사했어요? 여기 라면 괜찮은데.”
“전 괜찮습니다.”
“하긴 나이도 있으신데 좋은 거 드셔야지.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했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엮은 다음에?”
“자연스럽게 관계를 진행 시킨 다음 증거를 잡아서···.”
“으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식상해요. 너무 뻔하잖아. 솔직히 젊은 여자가 갑자기 접근하면 나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그
나이라면 더 그러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겠지만 젊은 여자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너무 뻔해요.”
“어? 이분은···?”
“어~ 인사해. 여기는 우리 회사 강주현 전무. 내가 최고로 믿는 사람이야. 그리고 여기는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
요즘에 거의 뭐 내 소울메이트나 다름없지.”
“안녕하십니까. 강주현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최영훈입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봐요.”
“아니야, 아니야. 강 전무랑 할 이야기 다 했어. 이제 그만 가봐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조재민 의원의 사주를 알고 있기에 그가 앞으로 얼마나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으며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막말로 그가 그렇게 큰 정치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는 거니까.
“보통 다 그러던데요?”
“이건 다르지. 어쨌든 현진물산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겠어. 알고 나니까 나도 좀 마음이 놓이네. 술 한잔 하고
갈래?”
“약속 있습니다.”
“또 데이트? 이럴 거면 그냥 결혼해서 귀가를 해.”
“크흠···.”
찰칵! 찰칵!
“반응은 어때?”
“오셨습니까. 나 정호균입니다.”
“아이고, 회장님. 이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전북대병원 건립사업이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토지보상 때문에 계속 연기되다가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인데···.”
“바둑 좋아해요?”
“좀 둡니다.”
“궁하면 적에게 기대라 했습니다. 외로울 때는 같이 가야 살 수 있어요. 독불장군처럼 홀로 싸우면 언제고
쓰러집니다.”
“허허··· 잘 알겠습니다.”
“크흠...”
그토록 원했던 송 사장과의 만남이지만 정근호 사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던 송 사장은 군산조선소 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젊은 남자 한 명을 불러 앉혔기
때문이다.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악수를 청하던 그 청년은 송 사장의 옆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어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보라는 식으로 있으니...
게다가 직급이 겨우 과장.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인 건지, 아니면 이 거대한 딜의 실무진이 정말 저 젊은 청년인 건지 감이 오지를
않았던 거다.
“우리 최 과장이 직급이 과장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유능한데다가 우리 애와 약혼할 사이라서 직급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정 사장이 조금 놀란 눈빛으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할 말인가?”
“엄밀히 말하면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 둘 다 가진다는 건 여러모로 모험적인 일입니다. 막말로
무진중공업에서도 군산조선소 안 돌리고 해주조선해양만 먹겠다고 지금껏 그 고생을 해온 거 아닙니까? 솔직히
8,500 억도 우리는 굉장히 무리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더 가지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손을 터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제가 틀린말 했나요?”
“...”
“우리는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가격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우리 현진물산의 입장입니다.”
고작 과장 주제에 사장 앞에서 회사의 입장이 이렇다고 결론을 지어 버리는데 옆에 앉은 송은채 사장은 별말을
하지 않는다.
정 사장은 처음 송 사장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어차피 결론은 아버지인 정호균 회장이 내릴 것이기에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이라니...
산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이제 여자와 연애도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긴 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학력도 보잘 것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신 자신에게 딸을 내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희와 연애를 하면서도 어쩌면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렇게 송 사장이 직접 날짜를
거론하니 기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붉은 노을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아름다운 풍경을 생각하니 괜히 영훈도 기분이 설레어 왔다.
기사에 쓰인 사진은 조재민 의원이 현진물산 송은채 사장과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이 악수할 때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려놓은 모습이었는데 이게 꽤 임팩트가 있었는지 한동안 그 사진이 계속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순간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른 조재민 의원은 자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군산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흥분한 김시원 보좌관이 스케줄을 줄줄이 읊어 내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부사장은 부담스러운가?”
“제 나이에 부사장까지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예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도 않거든. 젊은 벤처 CEO 가 계속
나와주고 있고 외국이야 그런 CEO 들이 엄청난 실적을 이끌어 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내가 사장에
올라있기는 해도 실질적으로 회사를 움직이는 게 최 과장이라는 거 이미 핵심 임원들은 알고 있
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
“솔직히 연희와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나도 부사장 자리에 앉힐 생각은 없었어.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남에게 내 회사를 맡긴다는 게 아무래도 그러니까. 이제 가족이 될 거잖아?”
“그래도 부사장은 너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렇게 나올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러네? 원래 그렇게 욕심이
없는 거야?”
“이건 욕심을 떠나 아직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뭐... 그렇다면 좋아. 기조실 강노식 실장을 부사장으로 올리고 거기 맡는 건 어때? 그 정도는 괜찮지?”
“네?”
“이건 반대하지 마. 이 정도는 보기 나쁘지도 않으니까.”
“인사과장님이 찾으세요.”
“민홍기 과장님이요?”
“네. 올라오시라고 할까요?”
“아니에요. 과장님이 찾는데 내가 가야죠.”
말투가 바뀌었다.
“그 소문이 맞을 겁니다.”
“그런가?”
“네.”
“의견 고마워.”
“이제 정기인사가 끝나면 현진건설에서 뵙는 건가요?”
“사장님께서 허락 하셔야지.”
“그렇군요.”
“아, 이건 내 선물이야. 나중에 한 번 써먹을 데가 있을 거야.”
그는 작은 USB 를 건네고는 웃으며 자리를 떴다.
영훈은 그 USB 를 가만히 주머니에 넣었다.
과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거 봐. 내 말 맞지?”
“네. 제가 생각해도 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 쉽게 위기를 벗어나는 것
같아요.”
“말했잖아. 김태민이라는 이 청년은 앞길이 탄탄대로야. 산사태가 나도 김태민이 있는 곳은 돌이 비껴 굴러가.
홍수가 나도 딱 김태민이 고층 빌딩에 있을 때 물이 밀려 들어온다고. 어디 내 말이 틀린 것 봤어?”
“뉴스 보셨죠?”
“무슨 뉴스?”
“현진물산이 현진중공업에서 완전히 계열사 분리하는데 성공했어요. 같은 ‘현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도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됐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 낭군님 회사가 쪼그라들었다고?”
“네.”
“흐음...”
“쯧쯧쯧...”
“왜 그러세요?”
“잘 나가는 남자 앞길에서 살살 꼬리를 흔들어대는 여우 하나가 나타나서 홀랑 가져가버리고 있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한주연은 깜짝 놀라 물었다.
“정말 알고 싶어?”
“네.”
“그럼 나흘 뒤에 와. 신령님께 기도를 올려야 하니까.”
“기도요?”
“신령님께 방도를 물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안 들어주시니까 치성을 올려야지.”
“그럼 얼마나 필요할까요?”
“5 천.”
하지만 이건 순전히 현금으로 나가야 할 돈이라 오로지 자신의 돈을 써야만 했기에 5 천만 원이라는 돈이 결코
적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명우도사는 싫으면 관두라는 투로 말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도 기도를 올린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신령님이 기똥찬 대답을 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 아니야. 원하는 대답을 못 들을 수도 있으니까 괜히 부담스러우면 하지 마. 그냥 이대로 만족하고 살아도
가진건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을 거야.”
“그대로 가진 것만 만족해서 살 것 같았으면 김태민이라는 남자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뭐 그렇지. 내가 골라준 남자니까 잘 알지.”
“솔직히 남자를 잘 못 골라준 도사님의 책임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 깎자고? 그때 당시에는 이 남자 미래는 초원에서 보는 하늘처럼 맑고 탁 트였었어. 거리낄 게 없었거든.
뭐, 억울한 마음이 있는 건 이해하겠고 나도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기도비는 깎을 수 없어. 복비는 깎는 게
아니야.”
결국 그녀는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요. 드릴게요.”
“이해해. 나도 사흘간 손님 못 받고 예약한 손님들 다 뒤로 미뤄서 해주는 거야. 5 천이 비싼 게 아니야.”
“알겠으니까 잘 좀 부탁드릴게요. 전에 보내드렸던 계좌 거기로 보내면 될까요?”
“맞아. 나흘 뒤 이 시간에 오라고.”
“알겠어요.”
“다음 손님 모셔!”
“어디 갔다 와요?”
“잠깐 인사과에 좀 다녀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엄마···. 아니, 사장님이랑 무슨 이야기했어요?”
“표정 보니까 이미 다 아는 것 같은데?”
“그럴 때는 좀 자랑도 하면서 살아요. 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해요? 남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방방
뛰어다니다가 온갖 곳에 전화를 해댈 텐데?”
“전화할 곳도 없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알아요.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럼 오늘 끝나고 회식 어때요? 우리끼리라도 축하해야지. 내가 쏠게요. 대신 메뉴는 내가 고를게요. 영훈 씨
입맛은 너무 아저씨야.”
“그렇게 합시다.”
[최영훈 과장님, 과장님의 말씀을 듣고 오랜 시간 고민을 했습니다만 아직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이라 그런 듯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살던 곳의 주소를 찾아냈습니다. 언제 부산에 한
번 들르시지요.]
“뭔데 그래요?”
“미안해요. 전에 말했죠? 부산 백병원 노석춘 원장에게 부탁 하나 했다는 거.”
“그럼요. 기억하고 있어요.”
“주소를 찾았다고 해요.”
“어머! 그럼 가야죠.”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일 끝나고 출발하면 밤에 도착할 테니 내일 오전에 노 병원장을 만나면 될 것 같아요.”
“지금 출발하지 그래요?”
“병원장님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일하다 중간에 빠져야 할 정도로 급하지는 않아요. 다른 직원들은 반차
써가면서 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나갈 수는 없죠.”
“그건 뭐예요?”
“음··· 일단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민홍기 과장이 이걸 전해주기 전에 아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인사과장으로 회사 생활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절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평소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는데 회사가 커지면서 시야가 확장됐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건 꽤 유용할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고마워요.”
“같이 가준다니까 내가 고맙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나가는 거야?”
“네.”
“회사 들렀다가 퇴근해야 하는 거 알지?”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아니야. 택시 위험하지. 마침 나도 그쪽으로 가야 하는 길이었어. 타.”
“네··· 그럼···.”
민희가 조수석에 타 짧은 치마를 입은 다리를 코트로 가리는데 오 부장이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어쩔 줄 몰라 했을 거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진실을 말해야 할지, 거짓으로 회피하고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건지 말이다.
그런데 오지환 부장의 생각을 알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걸 느꼈다.
그 시각, 군산 앞바다에 위치한 횟집 벽란도에는 조재민 의원과 이형준 상무가 회를 곁들이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괜찮아요. 딱 두 잔만 마실 거니까.”
“왜 하필 두 잔입니까?”
“이번 협상에 큰 공헌을 세운 이형준 상무가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한 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한 잔만
마시면 사람이 정이 없잖아. 세 잔을 마시면 얼굴이 달라지니까 딱 두 잔이 적당해요.”
“그래도 두 잔이라도 같이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군산은 요즘 어떻습니까?”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지요.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마무리되면 이제 곧 조선소가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니
부동산이 벌써부터 들썩거립니다.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했던 기술자들이 기존에 유지되고 있던 노조에 가입하려고
엄청나게 전화를 한다고 해요.”
“다행입니다.”
“다행이긴 한데... 요게 잘 다뤄야지, 안 그러면 말썽이 될 수도 있어요. 기존에 일했던 인원 전부 고용하기는
쉽지 않을 테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많을 테니 또 여러 가지 소리가 나올 텐데 이게 참 어렵단 말이지요.”
“흥, 그 양반이 공짜로 양보했겠어요? 내가 전북대병원 건설 맡긴다고 하니까 억지로 양보하는 척한 게지.”
“그랬습니까? 공사 규모가...?”
“대략 1,800 억 정도가 되는 걸로 알아요. 그러니 계산이 섰겠지. 무진중공업에서 손해본 거 무진건설이 만회할
걸 생각하면서 위안 삼지 않았다면 그 양반이 쉽게 양보했을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상당히 우려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쉽게 협상장에 나타나서 저도
놀랐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많이 뛰었지만 신영은행도 고생했어요.”
“우리가 무슨 한 일이 있겠습니까. 전부 의원님 덕분에 손 안 대고 코 풀어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나 혼자서 다 하려고 했으면 여론이 쉽게 움직였겠어요? 국내 손꼽히는 대형은행에서 협상을 이끌어 내려고
했으니까 일이 수월했지.”
“우리 어머니가 우리 삼형제를 아버지도 없이 혼자서 키우셨어요. 음식 만드는 재주가 있으셨는지 곰탕을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됐지요. 그때 어머니는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싶어 돈을 모아 좁은 가게를 넘기고 큰
곳으로 옮기셨지. 그런데 웃기게도 큰 곳으로 옮겨서 장사를 하니 희한하게 손님이 줄어들
기 시작했던 말이오. 참 이상도 하지.”
“...”
“매달 들어와야 할 돈이 줄어들고 빚은 늘어만 갔지요. 그렇게 한 삼 년에서 사 년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그만
병으로 누우셨어요. 하루하루가 고통이셨던 게지. 진짜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형님께서 어머니에게 음식을
배우고 가게를 다시 일으키셨어요. 형님이 가게를 일으켜서 내 학비를 대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요.”
“그렇군요.”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하다가 지금까지 일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가정은 굉장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테지요.
그대가 좀 도와줬으면 해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무조건적으로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적어도 군산조선소에 다시 근무하게 될 사람들은 기존 대출이 있어도
추가로 저리 대출을 지원해줬으면 좋겠어요.”
말투가 달라졌다.
형준은 긴장했고 조 의원은 말을 이었다.
“걱정돼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그걸 보고 연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어요?”
“조금 웃겨서요. 사실 당신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모르지 않아요?”
“내가 열다섯 살 때였나? 그쯤일 거예요.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혐오스러울 때였죠.
날 외국으로 쫓아낸 할아버지와 아빠. 또 그런 상황을 막아주지 못했던 엄마. 그리고 그런 원인을 자초한
나까지... 그냥 다 미웠어요. 사는 게 너무 짜증나고 싫었어요. 그때 어떻게 버텼는지 알아요?”
“어떻게 버텼는데요?”
“잤어요. 억지로 자려고 노력했고 잠이 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졸린 책을 찾아서 읽으며 잠에 빠졌어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저녁에 했던 오만가지 나쁜 생각들이 괜히 유치한 생각인 것처럼 느껴지더라구요.”
“후후...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자라는 겁니까?”
“맞아요. 오늘은 조금 일찍 자요.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첫날밤의 극적인 긴장을 위해 자리를 비켜줄게요.
뭐... 원하면 옆에 있구요.”
“아닙니다. 그냥 머리를 비우고 누워야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잘 자요.”
“다행스럽게도 가명을 쓰지도 않았고 주소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름이 맞다면 주소는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가정집이 아니었습니다.”
“네? 그럼요?”
“연화당이라고...”
“연화당이요?”
“손님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일단 들어가요.”
“그럽시다.”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화를 하시지. 언제 예약하시게?”
“오늘 뵙고 싶은데요?”
“오늘은 안 돼. 오늘 도사님 기도드려야 해서 예약된 손님도 다 뒤로 미뤘는데 갑자기 와서 도사님을 만나겠다고
하면 되나? 그리고 우리 도사님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당일 와서 봐달라고 하려면 새벽부터 와서 줄 서야
해.”
그녀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저들 입장에서는 그 기도가 무척 중요한 의식일 테니까.
“이명자 씨를 찾고 있습니다.”
“이명자? 그게 누군데?”
“그 도사님께 이명자라는 분을 아시냐고 여쭈어 보세요. 만약 아신다면 날 만나야 할 겁니다.”
“어째서?”
“도사님~”
“······.”
“도사님~ 누가 찾아오셨어요.”
“이명자 씨를 아십니까?”
“아내이자 동반자였고 파트너였지.”
“영훈이냐?”
“맞습니다.”
“그렇군··· 네가 드디어 나를 찾아왔구나. 흐흐흐··· 언제고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네 애비다.
수십 년 떨어져 있었기에 아버지라고 말이 떨어지지 않으면 도사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뭐하는 겁니까?”
“장군님의 보우에 네가 총명을 잃지 않았구나. 어디서 배웠어? 누구에게 사사 받았느냐?”
“틀렸어요. 난 장군 따위를 모시지 않아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는 버럭 소리질렀다.
“헛소리! 신기가 하늘에 닿은 네 애미가 널 보고 감당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신통이 무서운 게냐?
걱정하지 마라. 일월장군을 모시면 네 신통은 씻은 듯 사라질···.”
영훈 역시 참다 못해 버럭 소리쳤다.
“개소리하지 마!”
“일월장군님이 널 당하지 못했던 게구나. 그럼! 그 정도 그릇은 되어야 내 아들이지! 날 따라와라. 절절한 한이
서린 녹두장군이라면 네가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개소리하지 말라니까! 난 신 따위는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눈앞에서 일월장군인지 뭔지 찢어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말해요. 당장.”
“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게냐? 네 운명이 바로 여기다.”
“아니, 내 운명은 여기가 아니야.”
“웃기는 소리. 일월장군님의 기를 감히 일반인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아니아니··· 아니지. 신을 받지
않고는 사지가 멀쩡할 수가 없지. 신이 아니라면 뭘 배웠지? 혹시 사주 따위를 배웠냐?”
“하하하! 역시 그렇지? 사주를 보는 게지? 좋아. 네 애미가 어디에 있을지 맞춰봐라. 계유에 태어나고 을미에
경자, 경신이다. 네 애미는 사주에도 뛰어나서 연월일시를 들으면 만세력도 보지 않고 줄줄 내뱉었다. 너는
어떠냐?”
평소에는 사람을 저렇게 막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지금 영훈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돌아가셨어요?”
“중년을 넘기기 힘든 사주예요. 태어났을 때부터 허약하게 태어났을 텐데... 어머니는 풀이나 꽃과 같은 사주를
타고 났어요.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커다란 나무가 아니라 풀이나 꽃이니 얼마나 약한지 알겠죠?”
“네.”
“그런 풀과 꽃이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려면 많은 정성이 필요해요. 물도 필요하고 적당한 온도도 필요한데
귀문관살이 강해 신을 받았어요. 보통 사람들은 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죠?”
“하늘이요.”
“맞아요. 일종의 태양이라고 볼 수 있어요. 태양의 강렬한 열기를 오래도록 받으면 말라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걸 버티려면 정기가 가득한 사람이 태양의 빛을 가려줘야 하는데 아버지... 아니, 그 도사는 정기가 강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정기요?”
“정신력이요. 귀문관살이 강하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기가 약하다는 말과 같아요. 기가 약한 사람이 헛것을
보기도 하고 가위에 눌리기도 해요. 그게 심할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로 궁합이 좋지 못한 남자와 결혼한 것이에요.”
“아...”
“궁합이라는 게 그래요. 꼭 잘난 남자, 잘난 여자를 만나야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완해줄 수 있는 인연을 만나야 서로에게 좋은 거죠.”
“그럼 우리는 어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사주를 알지만 난 내 사주를 잊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궁합이 완전한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도 나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내가 왜 내 사주를 잊었다고 생각합니까?”
“그야...”
“내 미래는 알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당신과 만나 결혼하고 안 좋은 인연 때문에 화를 당한다고 한들 그게
인생일 겁니다. 다행인 건 당신은 스스로의 성격을 돌아보았고 나아지려고 하니 우리 결혼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입에서 그런 바람이 나오니까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것도 듣기 좋아요. 나도 우리 둘이 앞으로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많이 슬픈 날도 있을 테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돌아가신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그게 맞다면 어머니 묘소를 찾아볼게요. 돌아가신 걸 알
았으니 제사는 지내 드려야죠.”
“고마워요.”
“아, 그런데 아까 그런줄 알았다고 했잖아요? 배신감 때문이 아니면 뭐였는데요?”
“죽였다는게 말 그대로 죽였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표현일 뿐이죠.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놈은 감히 내 근처에도 오지 못할 겁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데요?”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할 때요. 내 욕심이 내 스스로를 무너뜨릴 때 놈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럼 당신이 계속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맞아요. 난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저랑 결혼하잖아요?”
“당신의 배경을 보고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와... 이거 진짜 트루 러브네요. 나 지금 엄청 좋아해야 하는 거죠? 기쁘긴 한데... 하필 오늘 그런 소식을
같이 들으니까...”
“나 조금 누워도 돼죠?”
“네, 그럼요.”
“그냥 더 쉬지 그랬어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져서 출근한 거예요.”
“과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훈은 자신에게 있어 하늘에서 내려준 동앗줄 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사흘이나 아파서
병가를 냈으니 오죽 걱정됐을까?
“괜찮아요. 나 없을 때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어떻게 퍼졌는데요?”
“이번 정기인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승진을 할 사람이 바로 사장님 딸과 결혼할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브랜드 사업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구요.”
“뭐... 알만한 내용은 다 알게 된 거네.”
“좋습니다.”
“좋네요. 알겠어요. 일 보세요.”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데, 아까 한 이야기는 진짜예요. 내가 모든 걸 하나하나 컨트롤할 수는 없어요. 난 사람을 잘
보는 것 뿐이지 제갈공명 같은 천재 전략가는 아니니까요. 솔직히 군산조선소 관련한 것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소소한 사내 정치에 관련해서까지 굳이 알고 싶지가 않네요.”
“하긴... 영훈 씨 말이 맞아요. 근데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진짜라니까요. 씻은 듯이 나았어요. 그리고 나 원래 이렇게 막 아프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산에 오래 살았으면
되게 꾀죄죄하고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 1 년에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살았어요. 요 며칠 아팠던 건
인생에 몇 없는 이벤트라고 보면 됩니다.”
“알겠어요.”
“부르셨습니까?”
“그렇게 보이는군요.”
“네? 제가 잘 못 보고 있다는 뜻인가요?”
“난 내 아이가 능력은 부족하더라도 바르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소문이 조금씩 들려와요.
아무리 내 아이라지만 정확한 팩트 없이 의심만으로 몰아붙일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일단 한 가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말씀하시죠.”
“우리 아이를 잘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꼭 증거를 확보해서 나에게 가져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너무 걱정스러워요. 우리 애가 안 좋은 길로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소 인근 문을 닫았던 상가들은 어느새 새로운 주인과 계약을 맺고 인테리어 시공에 들어갔고 심지어 어느
자리는 권리금까지 생겨났다.
아직 식사하러 올 손님도 없는데 식당 먼저 생기는 상황이지만 그걸 보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군산 시민들은 조선소가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얼마나 사람들이 붐볐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말하기 싫은 거군.”
“저와 이형준 상무는 좋은 파트너입니다만 한 가지 룰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룰이라. 흥미롭군. 말해보게.”
“서로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거죠.”
“그게 룰인가? 난 또 뭔가 굉장히 섬뜩하고 대단한 룰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든지,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든지 말이야.”
“그렇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데 말입니다. 다르게 보면 꽤 특별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가족도 아니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요?”
조 의원이 눈을 빛냈다.
“의원님.”
“말해보게.”
“제가 의원님을 도와드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방적으로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섭섭하군. 나도 자네를 도와줬으니 우린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으음··· 그건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봉선동 아파트 단지, 그 외에 여러 개의 공사입찰에 관한 도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조선소를 인수하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의원님께 답례를
받은 것뿐이죠. 이걸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저희는 의원님과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배
신감 따위의 하찮은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의원님과 우리의 계산방식이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되시죠?”
“맞습니다. 그게 다예요. 전 의원님을 도와드리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의원님은 그에 대한 보답을 우리에게
주겠지만 그렇다고 선을 넘는 보답을 바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금을 깎아 달라거나 불법을 눈감아 달라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 쓸데없는 데 에너지 소비하지 말자는 말이
었습니다.”
“크흠··· 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잘 알겠네.”
“좋군요. 그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뭐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없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선거는 치르기도 전에 결과가 나와 있는 셈이니.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해주조선해양에 관해서 확답을 받고 싶은 것뿐이지. 잘 진행되고 있나?”
“네, 총선을 전후로 결과가 나올 겁니다. 아시다시피 야당 쪽에서 총선 전에 해주조선해양 인수 결론을 내는 건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산업은행장을 계속 압박하고 있거든요.”
“알지, 썩을 놈들···. 아, 그리고 보좌관에게 들었어. 이번에 정기인사 있다면서? 승진할 예정이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이제 임원이 되는 건가? 아니면 다른 계열사로 옮기는 건가?”
“현진물산 기획조정실에서 일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해주조선해양 사장 때문에 그렇습니까?”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지 않나?”
“어차피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완료되는 건 4 월이라 정기인사 끝나고 결정될 겁니다.”
“사장을 교체할 생각이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무턱대고 칼부터 내지르는 사람은 반대야.”
“의원님의 생각은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난 솔직히 자네가 해주조선해양 사장이 되기를 바랐어. 그건 어렵겠지?”
“욕먹기 딱 좋습니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가 없으니···.”
“기다려보시죠.”
“자네만 믿겠네.”
이제 고비는 거의 넘겼다.
조재민 의원은 조급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차를 들이켰다.
꽃샘추위가 한풀 가신 3 월 중순의 늦은 밤.
회식을 마치고 얼큰하게 취한 마석대가 도착한 곳은 본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합정동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꽤 비싼 오피스텔인 이곳은 마석대의 이름으로 계약된 곳이 아니었지만 그는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연정아!”
*
서초동의 한 와인카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이형준 상무는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 강주현 전무를 보고
말했다.
“빨리 왔네요?”
“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번 정기 인사 때 당신을 못 지켜줘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최대한 손을 써봤는데 아버지의 결정이
너무 확고하셔서···.”
“아닙니다. 한직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퇴직권고를 받지 않는 게 다행입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마석대 부행장에게 붙여놨던 여자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똑똑···.
“들어와요.”
순간 민희는 당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젠틀한 모습을 보여주던 영훈이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알아야 할 특별한 스케줄 있나요?”
“그룹 임원 회의가 3 시에 잡혔습니다. 반드시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 외 특별한 스케줄은 없습니다. 회식을 제외하면요.”
“알겠어요. 수고해요.”
민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영훈은 다시 방을 둘러보며 상념에 빠졌다.
주변 눈치만 아니었다면 연희가 와서 같이 수다를 떨어주며 이 기분을 만끽했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조금
아쉽기는 했다.
이때 형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입니다.”
[내가 안 찾으니까 아주 한가했지?]
“많이 바빴으니 한가할 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자 좋은 소리 들으니까 또 열불 나네. 오늘 승진했다며?]
“네, 상무로 승진했습니다.”
[송 사장이 은근 통이 작네? 고작 상무야?]
“상무가 어때서요? 전 좋아 죽겠는데?”
[송 사장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능력 있는 사람 찾는 것도 힘든데 저렇게 싸게 부릴 수 있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이야?]
“하하, 금칠 그만하시고 뭐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승진 축하하려고 전화하시지는 않았을 테고.”
[야, 넌 날 이상하게 보는데 내가 그 정도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 사이에 당연히 승진 축하
때문에 전화할 수 있지.]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이건 정말 절묘하게 시기가 딱 맞아떨어져서 그런 건데 말이야···.]
“알고 있었어요. 말하세요.”
[전화로는 그렇고 좀 만나자. 저녁에 블루문 알지?]
“오늘 기조실 직원들이랑 회식 있어서 안 됩니다. 첫날부터 회식에서 빠지면 직원들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아씨··· 그럼 내가 지금 나갈 테니까 밖에서 보자. 마침 딱 점심시간이잖아.]
“1 시간 뒤인데요?”
[나와서 인사하고 이야기 좀 하다 보면 12 시 아냐? 자꾸 빡빡하게 이럴 거야?]
“알았어요. 어디에서 볼까요?”
[주소 보낼게. 바로 나와.]
“그러죠.”
“어! 여기.”
“부대찌개 좋아하십니까?”
“왜? 나는 항상 초밥에 비싼 소고기만 먹을 줄 알았어?”
“그것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일부러 서민 코스프레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누구한테 보여주겠다고 서민 코스프레를 해? 나도 부대찌개 좋아해. 너 그거 아주 심각한 고정관념이야. 버려야
해.”
“예, 예~ 그래서 시켰어요?”
“방금. 승진해서 그런지 얼굴이 환해 보이네? 축하해.”
어째 얄밉다는 표정이다.
“감사합니다.”
“명함은 나왔고?”
“아, 여기요.”
“내가 여자 하나 붙여놨다.”
“네?”
“어차피 그 양반도 혼자 한국에 와서 쓸쓸할 거 아니야? 룸싸롱에서 여자 하나 붙여주니까 지가 좋아서 스폰
해주겠다고 껄떡대다가 아예 오피스텔까지 구해주더라고.”
“그게 다예요?”
“나도 이번엔 신중하게 움직였어. 혹시나 들킬 수도 있으니까 이상한 수작 부리지 않고 둘이 알아서 하게끔
해놓으니 알아서 붙더라니까.”
“그래서요?”
“붙여놓고 별일 시키지는 않았어. 그저 핸드폰이나 주머니 좀 뒤져서 나에 대해서 뭔가 알아내면 연락하고 그게
아니면 알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했거든. 그런데 얼마 전에 연락이 왔었어. 후··· 씨발, 지금도 이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
“뭐가 나왔는데요?”
“아니, 글쎄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있었다니까.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르고 철창
갈 뻔했다고.”
“헐···.”
외통수.
진정한 외통수에 걸린 격이다.
“골치 아픈 상황이네요.”
“그렇지?”
“그래도 일단 기다려보시죠?”
“기다려? 뭘 또 기다려. 너 전에도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그래도 뭔가 하려고 하지 마세요.”
다른 부서들은 그렇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기조실에는 여직원이 없어서 그런지 민희는 마치 여학생이 몇 없는
공대에 입학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특히 오늘은 연희가 마케팅 관련 업무 교육에 참석한다고 종일 부서를 비우는 날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오늘 주인공은 민희 씨니까 메뉴는 민희 씨가 고르세요.”
“김 과장은 파스타 같은 것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상무님은 어디 가셨나?”
“뭔데?”
“영업팀이 가져왔던 Nodri Clare 브랜드 아시죠?”
“그럼 알지. 그것 때문에 민희 씨가 영업팀 노 과장 밟았던 걸로 한동안 회사가 떠들썩 했거든.”
“어머, 그랬어요?”
“아 뭐, 밟았다는 게 꼭 나쁜 뜻이 아니라 그 만큼 비서실에서 힘을 주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지.
그런데 그걸 계속 신경쓰시고 있다고?”
“그런 것 같아요.”
“그걸 왜?”
“식사는 잘 했어요?”
영훈은 2 시가 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다.
“고맙네요. 음... 총선이 끝나고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게 되면 많은게 바뀌게 될 겁니다. 회사 이름부터
현진물산을 중심으로 한 그룹사로 탈바꿈하기 위해 지분이동도 있어야 할 거구요.”
“맞습니다.”
“우리는 그룹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네?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담당합니까?”
“특부사업부 고승현 상무님이 전담해서 처리할 겁니다. 부사장님도 그 부분에 도움을 주실 테구요. 우리가 왜 그
일에서 빠져야 하는지 궁금하실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납니다. 전 그런 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사실 관심도
없거든요.”
“이 일에서 빠진다는 건 사내 권력의 핵심 업무에서 빠진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건 곧 사내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꿈보다 해몽이 너무 좋은 편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일을 준비하면 될까요?”
“네. 영업팀 노형석 과장의 주도로 영국에서 들여온 명품 브랜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장력이 상당하고 브랜드
이미지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견고한 매니아 층을 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서 장기적으로 매력적인
아이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많이 아시네요?”
“우리 회사 상품이니까요.”
“미래는 긍정적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매출은 미미합니다. 이번에 그랜드 백화점과 입점계약을 맺고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연 매출이 백억 단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백억만 넘겨도
선방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매출이 그 정도면 마진은 더 볼게 없습니다. 최소한 3, 4 년
이상은 꾸준히 밀어줘야 의미있는 매출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 의미있는 매출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요?”
“최소 천억 단위를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3, 4 년 정도는 지나야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은 한국입니다. 한국이 가장 먼저 들여왔으니 당연한 상황이겠죠? 영국에서 발생한
브래드지만 아직 영국 매출도 3 천억을 조금 넘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생브랜드 치고는 괜찮은 편이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봅니다.”
“알고 있습니다.”
“부채비율도 높구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실위험 때문에 대출이 힘들 겁니다.”
“대출은 가능할 겁니다. 그게 안 된다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예요.”
박병호 부장은 강노식 실장이 부사장으로 영전하며 앞으로 회사 생활이 재밌어질 거라는 말을 남긴 것이 떠올랐다.
“이형준 상무가 마침 우연찮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페이퍼 컴퍼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걸 만들 이유가
없으니 누군가 몰래 그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형준이 애비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저도 이상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과정을 역추적해보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세준 부회장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형준 상무의 개인정보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영훈은 그의 말을 끊었다.
“마석대 부행장이 은밀히 부회장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형준 상무의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서요. 그런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어찌 된 것이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죠.”
“...”
“저게 맞는 이야기냐?”
“네... 어제 확인한 내용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부족한 것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검찰에 고발이라도 해야 할까요?”
“...”
“그렇다면 이세준 부회장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데 이형준 상무는 혹시 정말로 아버지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난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지만 그래도 모든 상황을
대비해야 했기에 그 선택지는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더러 대신 물어봐달라는 말인가?”
“맞습니다.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서로 간에 오해가 있다면 회장님께서 풀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이형준 상무가 이세준 부회장을 오해했다면 무릎 꿇고 빌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 확실한 증거도 아니고 그저 정황만 가지고 형준이 애비를 의심하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지? 만약 아니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형준 상무는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저와 회장님은 사실 오늘 보고 내일부터 안 본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잊은 거는 아니지?”
“우리 형준이를 살려주려고 얼간이 소리를 듣겠다는데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알겠네.”
“감사합니다.”
“감사를 받을지 사과를 받을지는 정황이 밝혀지면 그때 받도록 하겠네. 식사 마저 하게. 난 먼저 일어나야겠어.”
“넌 남아서 식사 마저 하고 오거라.”
“같이 가겠습니다.”
“됐다. 나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지. 파트너 하나는 잘 둔 것 같구나.”
“부회장님은 알고 있을 겁니다. 상무님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치부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 회장님의 관심이
부회장님의 동생분에게 돌아갈 거라는 걸. 이건 단순히 내 손자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견고한 성의 무너짐을 말하는 겁니다.”
영훈이 이경호 회장이 만나려고 했던건 과연 그가 혈연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그걸 알아보려는 마음이었다.
이세준 부회장이 폭탄을 터뜨렸을 때 아들의 편을 들어 손자로 위장(?)한 이형준 상무를 내칠 것인지, 아니면
이세준 부회장의 무능(?)을 더 문제 삼을지가 궁금했던 거다.
생년월일은 당연히 미리 알고 왔으니 이 회장과 악수한 후 사주를 계산하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일궈놓은 성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 성의 차기 성주가 될 손자가 너무도 자랑스러워 대외적으로 자랑하느걸 삶의 낙으로 삶고 있는 인물이었다.
혈육에 대한 자랑은 곧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에게 했던 그 자랑들이 전부 헛소리가 되고 스스로가 병신으로 전락하는 걸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김 부장.”
“네, 회장님.”
“집으로 가지 말고 회사로 가지.”
“알겠습니다.”
“어딜 갔다 왔어요?”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참 보기 좋은 한 쌍입니다.”
“회사에서 꼴불견이죠? 알고 있습니다.”
“아유~ 그런거 아닙니다. 선남선녀 아닙니까?”
“아니에요. 연희 씨가 지금 들떠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주세요. 아마 시간 지나면 안 그럴 겁니다.”
“하하하, 부부 싸움이라도 하시려구요? 큰일 납니다. 집에서 무슨 곤욕을 당하시려구요.”
“그건 좀 무섭긴 하네요. 그때 제가 말씀드렸던 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은밀히 살펴본 결과 홍콩에 이형준 상무의 이름으로 Diego System 이라는 IT 업체가 세워진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설립은 작년 말에 됐고 자본금은 20 만 홍콩달러, 한화로 약 3 천만 원 가량 됩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세준이 안에 있지?”
“네.”
“차는 마셨으니 들일 필요 없고 긴히 할 이야기 있으니까 들어오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단단히 주의를 준 이 회장이 부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세준 부회장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오셨어요?”
“놀랐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앉으세요.”
“차는 내오지 말라 했다. 하루종일 물로 배를 채우고 있는 기분이야.”
“그래도 좋은 차가 있는데...”
“됐다. 앉아라.”
이세준 부회장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자리에 앉았다.
이 회장은 한동안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네? 그게 무슨...”
“애비야. 난 오늘 평생을 살면서 너무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회사에 와서 확인해보니 그
이야기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버지...”
“네. 제가 그랬습니다.”
“왜? 어째서?”
“형준이는 신영을 물려받으면 안 되는 아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형준이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고를 치고 있었습니다. 걔가 데리고 놀다가 낙태시킨
여자만 셋입니다. 그것도 제가 알아낸 숫자만 셋이니 아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셋이나?”
“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현진물산 관련 문제로 나름 인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에 투자 실패로
인한 손실이 무려 삼천억이 넘습니다. 대표적으로 터키에 투자한 호텔은 지금까지 계속 적자를 일으키고 있어요.
매해 적자 규모만 삼백억이 넘습니다.”
“그, 그래?”
“그런 녀석이 이 큰 금융그룹을 이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겁니다.”
“네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야. 그런데 왜 홍콩에 회사를 세워?”
“이번에 형준이가 일을 진행하면서 저도 느낀 게 많았습니다. 형준이가 성격이 급하고 잔실수가 많아 은행업은
분명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지금처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야
하는 IT 업체를 경영한다면 의외로 좋은 성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그 여자는 오래전 형준이 홍콩지사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여자인데 똑똑하고 좋은 학교를 나온 재원은 맞지만 결코
좋은 집안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 똑똑한 머리로 좋은 집 자제들과 만나다 허영심이 들어 급기야 마카오에서 도박에 빠지기까지 했다.
딱 봐도 이상해 보이는 회사의 등기이사를 덜컥 맡을 리가 없다.
당연히 도박 자금을 준다는 말에 그녀가 승낙한 거다.
“그래?”
“저렇게 해도 싫다고 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형준이에게 신영금융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 이른 생각 아니냐? 만약 네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나도 이해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
이세준 부회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지만 가까스로 이 위기를 벗어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옥을 잠시 보고 온 것 같은 소름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나에게 상의하지 않았니? 이게 뭐냐? 난 또 형준이 이름으로 페이퍼 컴퍼니라도
만든 줄 알았다.”
“페이퍼 컴퍼니라뇨. 예전에 제 개인자금으로 만들어둔 돈을 자본 삼아 적당한 업체 하나 인수하게 해줄
생각이었습니다.”
“아예 신영과 선을 그을 셈이었구나?”
“선을 그어 놔야 나중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럼 신영은 누구에게 넘길 셈이었냐?”
“세민이가 있지 않습니까?”
“세민이? 허허··· 난 네가 그렇게 세민이를 끔찍이 여기는 줄 꿈에도 몰랐다.”
“싫든 좋든 세민이는 제 동생입니다. 그리고 세민이가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손에 들어온 건
잘 지키는 놈입니다. 맡겨 놓으면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해도 망하게 할 놈은 아닙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만 그래도 이건 네가 심했다. 법인 폐업하고 흔적도 남기지 마라. 혹시나 형준이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건 나 혼자만 알고 있으마.”
“후··· 알겠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세준이··· 뭔가 이상해.”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알아봐. 형준이도 그렇고 세준이에 대해서도 싹 다 조사해.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던
건지 싹 다.”
“회사 직원들을 이용하면 부회장이 알게 될 테고 외부에서 일을 진행하면 이야기가 새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안 새어 나가게 해야지.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은밀하고 철저하게 파악해. 그리고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네. 알지?”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해.”
“알겠습니다.”
“어머, 연희야!”
“왔어?”
“여기는 누구야?”
연희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송은진 실장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곧바로 연희를 발견하고는 대화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가왔다.
“왔어?”
“네. 준비하느라 고생하셨겠어요?”
“고생했는지는 이따가 쇼 보면서 판단해. 여기는 그때 같이 왔었던 그 직원?”
“네. 그리고 지금은 내 남자친구예요.”
“남친? 이번에 상무로 진급했다는 그 남친?”
“알고 있었어요?”
“우리 백화점에 입점했는데 그 정도 정보는 듣고 있어야지. 반가워요, 다시 인사해요. 나 송은진이에요.”
“최영훈입니다.”
“확실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때보다 더 멋있어 보이네요. 아, 마침 시작하니까 잘 구경하세요. 넌 갈 때
양손 무겁게 가길 바랄게.”
“봐서요.”
“어? 안녕하세요?”
“어머!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여기서 뵐 줄이야.”
“아주머니는 어떤 거 보러 오셨어요?”
“난 옷 몇 개랑 가방, 악세서리 몇 개? 호호... 너무 많지?”
“오늘 엄청 많이 쓰시겠는데요?”
“실은 얼마 있다가 남편이 있는 인도에 가야 하거든. 그래서 가기 전에 선물을 좀 사려구, 우리 딸 줄 것도 사고
아미르 밧찬네 부부 선물도 사고. 그리고 우리 아들 알지?”
“네. 우명그룹 다닌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어머~ 이분이...?”
그렇게 연희가 고개를 돌리니 영훈이 멀리서 다가오는 모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욱한 연희가 영훈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어, 왜요?”
연희는 영훈을 데리고 다른 음식을 찾는 것처럼 자리를 슬쩍 피했다가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서 주변을 살핀 후
말했다.
“말해봐요.”
“으음... 일단 사주를 보면 정확해질 텐데 일단 상만 보면 냉정하고 정확한 사람 같아요. 귓불이 없고 살이
없는데다가 눈보다 낮아서 학문적으로 대성할 사람이 아닙니다.”
“어? 아까 학생이라고 했잖아요?”
“미술 전공으로 학사나 석사 따위를 받으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부를 하려면
미술이 아닌 쪽을 공부할 확률이 높고 해도 그리 좋은 성취를 얻지 못할 상이라는 거죠. 그리고 일월각이라고
불리는 이마 양쪽이 실하지 못해요. 부모 복이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주머니가 상대쪽 집안을 보지 않고 결혼을 생각하는 거겠네요?”
“아마도? 그런데 아까 그 아주머니 성격이 참 좋아요.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자라서 곤란을 겪었던 적도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주머니 귀가 얇을 거라는 말이에요?”
“네. 뭐, 우리 일 아니니까 신경 끕시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할 정도면 돈도 상당히 많을 거고 조금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게 다 저 여자의 복 아니겠어요?”
“속아서 결혼한 거면 나중에 아주머니가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연희씨, 집안의 차이가 나서 뭘 얼마나 손해를 볼 것 같아요? 원래 집안의 복은 초년을 넘어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중년이 되면 어떤 부모를 만났든 결국 자신의 복은 자신이 만들어가기 때문이에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집안을 만난 것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저 여자가 좋은 복을 가졌나요?”
“하하, 상만 보고 어떻게 다 알겠어요? 사주를 봐야지. 우린 신경 끄고 옷이나 봅시다. 솔직히 오기 전에는 별
기대 안 했는데 와서 보니까 좋네요. 이래서 돈 많은 게 좋은 건가 봅니다.”
“많이 샀어?”
“하하, 아직 고민중이에요.”
“그래? 우린 이만 가려구.”
“어머! 괜찮아요?”
“아이고, 이를 어째...”
“금액이 너무 커요.”
“괜찮아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
다른 사람의 일에, 그것도 혼사에 섣부르게 끼어드는 일은 삼가야 하는 걸 모를 영훈이 아니기에 연희는
놀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우리 아들이...”
“으음... 미술 전공하는 건 맞는 건가요?”
“왜 그걸 물어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그럽니다.”
“어디서 봤기에 그래요?”
“아닙니다. 제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기 말을 잘 해줘야...”
“아니요, 확실하지 않은 걸 꺼내면 서로 기분이 안 좋을 겁니다. 말을 꺼내는 것도 실례인 상황이라서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기업 상무가 혹시 몰라 신원을 확인해보겠다고 하니 문숙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문숙도 그녀를 잘 모른다는데 있었다.
“생년월일? 그건 지금 나도 모르는데...”
“지금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되시면 연희 씨 통해서 문자로 보내주시면 확인해보겠습니다. 아,
혹시나 직접 물어보는 실수를 하시면 안 됩니다. 모른척 하세요.”
“그, 그럴게요.”
“오늘 우리는 현진물산에서 HS 물산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HS 물산은 그룹의 중심이 될 것이며 HS 관광, HS
건설, 그리고 앞으로 인수하게 될 해주조선해양은 HS 조선해양으로 이름을 바꿔 HS 물산의 지원 아래 더 큰
도전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으며 곧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영훈은 ‘HS 그룹 창립일’ 행사장 단상 위에서 조근조근 연설을 이어가는 송은채 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룹 핵심 사장단과 임원들, 그리고 외부에서 기념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송은채
사장을 향하고 있었다.
송 사장도 이 자리가 뜻깊겠지만 영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멋들어진 수트를 입고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옆에 여배우 뺨치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왜요? 심심합니까?”
“아니요, 난 좋아요. 우리 회사가 이렇게 커지는구나 싶기도 하고...”
“사장님 보니까 어때요?”
“난 우리 엄마가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아빠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우리 엄마 참 멋있다.”
“당신도 저 자리에 있으면 똑같이 멋있을 겁니다.”
“하긴, 내가 또 비주얼 하면 어디가서 꿀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말 돌리지 말고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진짜 이런저런 생각 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어머니가 있었다면 열심히 자랑했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아...”
“앞으로 회사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전에 만났던 주인도 대사 사모님이 데리고 왔던 며느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도 들고.”
“솔직히 나도 그게 궁금해 죽겠어요.”
“사실 심부름 센터가 맞긴 해요. 제가 예전에 아예 한국에 눌러 살겠다고 마음먹고 주저앉았을 때 그때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요?”
“어린 마음에 내가 여기서 눌러 앉아서 할아버지한테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결혼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든 꼬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남자만 잘 고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웃기죠?”
“솔직히 웃기긴 합니다. 아... 이거 뭐 거의 중학교 때나...”
“그 정도는 아니죠. 어쨌든 말했잖아요. 어린 마음이었다고. 그리고 자꾸 내 입으로 내 자랑하게 되는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더 대시 많이 받은 여자는 없을걸요? 아, 연예인 빼고.”
“연예인 안 빼고 말했으면 너무 양심 없었던 거 알죠?”
“칫... 어쨌든 내가 딱 찍은 남자가 아무 문제가 없기만 하면 난 그 남자에게 여지를 주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진행한다는 게 내 계획이었죠.”
“하하하, 그랬어요?”
“내가 그때 열 받아서 한동안 남자를 안 만났다니까요? 그러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한국에서 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한참 뒤에 만난 게 이형준 본부장이었어요. 왠지 그 인간도 그럴 것 같긴 했는데 계속
뒷조사를 하다간 결혼 못 하겠다는 생각에 뒷조사를 안 시켰거든요? 그런데 나한테 딱 걸린
거죠.”
“으흠~ 그렇게 같이 일하게 된 거였군요. 그런데 일을 잘하긴 하네요? 뒷조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걸
다 알아내오다니?”
“저도 처음엔 조금 놀랐어요. 흘려 듣기로는 예전에 형사를 하셨다는데 정보력이 대단했어요. 조금 시간이
걸릴지언정 원하는 정보는 끝까지 캐주더라구요. 하여튼 그런 사람이니까 적어도 어설프게 알아내오지는 않을
거예요. 그나저나 난 그게 아쉬워요. 적어도 사주 정도는 알아내면 좋을 텐데.”
“저도 궁금하긴 한데... 일단 기다려 봅시다.”
“연락 왔어요.”
“뭐랍니까?”
“여기 봐봐요.”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확인, 폭력전과 1 건 확인, 추가로 2017 년 합정동 반지하 화재사건 용의자였던 이력
확인. 자세한 기록 메일로 전송.]
“어?”
“대박... 이거 알려주면 문숙 아주머니 우리한테 절해야 하는거 맞죠?”
“아마도?”
“여기!”
“타세요.”
“어떻게 됐어요?”
다급하게 묻는 문숙에게 연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사실 폭력전과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요. 2017 년에 합정동 반지하에 화재사건이 있었대요. 저도 오면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확인해봤는데 그때 여대생 한 명이 화재로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며느리 될
분이...”
“며느리 될 여자라고 하지마. 아직 모르는 거잖아.”
“아, 그렇죠. 그 여자가 용의선상에 있었대요.”
“그게 정말이야?”
“오면서 다시 확인했어요. 용의선상에 있었던 게 맞는데 증거가 없어서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대요. 물론 이
여자가 진짜 무죄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폭력전과가 있다며. 알겠어, 고마워. 그런데 상무님은 우리... 아니, 그 애를 어디서 봤던 거예요?”
“제작년에 친구들과 간단히 술을 마시고 나오는데 길거리에서 엄청 크게 싸움이 났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거라 당연히 남자가 여자를 때릴 거라 생각해 말리려는데 오히려 여자가 남자를 폭행하고 있었죠.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눈에 익었나봅니다. 그리고 평소에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기도 하구
요.”
“고마워요.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일단 일이 처리되면 내가 어떡해서든 답례를 할게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최영훈 상무님 전화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반가워요. 나 해주조선해양 강일후라고 합니다.]
강일후 사장.
지금까지 계속 인수 협상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훈은 산업은행장만을 만나왔을 뿐 그와 대면한 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언제고 한번 만나자고 연락올 줄 알았는데 인수가 코앞까지 왔는데도 조용하시니 말이에요.]
“그런가요? 저는 괜히 인수 전부터 사장님을 부담스럽게 하는게 아닌가 해서 그랬습니다.”
[그래도 이제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언제 뵐까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가 느긋하게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에요. 오늘 봅시다.]
“그러시죠. 거제에 계시죠?”
[아니에요. 마침 서울에 올라와있습니다.]
“왜 보자고 하는 걸까요?”
“음... 아무래도 인수가 확정되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서 아닐까요?”
“그건 너무 뻔하긴 한데 그럴거면 진즉 보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또 그렇네.”
“으음...”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소문이요?”
“당신이 무진중공업 물 먹이고 우리 회사 인수하려고 작전 짰다면서요?”
“하하, 누가 그럽니까?”
“산업은행장이 그러던데요?”
“일단 한잔 받으시죠.”
“미안하지만 술은 됐네. 식사를 끝내고 바로 거제로 내려갈 예정이거든.”
“이유가 중요합니까?”
“그래, 중요하네. 그것도 아주. 십 년이 넘었네. 잘 나가던 회사가 고통의 시간 속을 헤매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어. 그런데 현진중공업을 멀쩡히 잘 가지고 있던 회사가 갑자기 계열 분리를 하더니 또 다른 조선업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어. 차라리 현진중공업이 사겠다고 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상사가 왜 우리
를 사려고 하냔 말이야.”
“그래서 뭐가 걱정이 되는 겁니까?”
“다! 모든 게 다 걱정이 돼. 오늘 기사 봤나? 카타르페트롤리엄에서 가스전 확장 사업을 연기했어. 이건 시작이
될지도 몰라. 아직 수주잔량은 남아 있지만 언제 수주가 끊겨서 다시 굶주림이 시작될지 모른다고. 그런데
자네들은 거기에 군산조선소까지 끼얹었어. 생각해봤나? 군산조선소에 인력을 몇 명이나 충
당해야 할지 생각해봤냐고.”
“최소 2 천 명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허··· 완전히 미쳤군. 2 천 명? 그 인원들 월급 제대로 나가려면 군산 조선소 도크가 계속 돌아가야 해.
거제에서 일감 빼서 군산에 박으면 최대 1 년이야. 1 년이 지나면 거제랑 군산 도크가 놀게 된다고.”
“그럼 그 전에 일감 열심히 받아오면 되겠군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 아니지?”
영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원하는 게 뭡니까?”
“믿음을 주게.”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일본 미쓰이 상선이 얼마 전에 LNG 추진 페리 2 척을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했다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조선회사들은 LNG 기술이 국내보다 많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야. 그러다 보니 크기가 작은 선박을
발주하면서 기술을 키워가려는 상황이지. 하지만 발주를 낸 미쓰이 상선이라고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야. 전 세계적으로 LNG 운임 가격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는 추세거든. 배를 발주하고
받고 난 다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면 이미 경쟁에서 뒤처진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요?”
“미쓰이 상선을 구슬려봐. 지금 돈을 쥐고 쓰지 못해 안달하고 있을 게 분명해. 아마 정치적인 문제까지
엮여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다른 해운사인 니센 카이운이 무진중공업에 LNG 선을 3 척 발주한 상황이야. 이대로
가다간 LNG 운송 시장을 잃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해주조선해양 직원들은요?”
“부끄럽지만 우리는 잘 안 됐네. 흔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한테 믿음을 주게. HS 물산의 식구가 된 후에도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는 믿음. 직원들은 그게 필요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받아들였다고 믿겠네.”
“너··· 어떻게···.”
“전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나겠죠. 아주 곤란한 상황일 텐데 뭐··· 그럭저럭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될까요? 다른 곳도 아니고 조세피난처에 5 백만 달러 규모면··· 아버지도 커버쳐주지 못할걸요?
아마 저보다 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룩셈부르크 은행에 들어간 돈 못 본 척 해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노후에 해외에 저택 하나 사놓으시고 편안히
여생 보내세요. 대신 나중에 아버지와 저, 이렇게 둘 중에 한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그 상황을 두고 보실까?”
“어쩌면··· 어쩌면 그냥 두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웃기는 짬뽕 아닙니까? 하하하!”
“강일후 사장? 왜? 좀 잘 봐달래? 그래도 소문을 빠른가봐?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걸 보면? 특별할
거 없어. 원래 인수당하는 회사 임직원들은 인수 전이 가장 피 마르거든. 적당히 잘 달래면 되기는 하는데 그게
또 사람 마음처럼...”
“자르라고 했다고?”
“네. 자기는 해주조선해양에 한평생을 바쳐왔다고 합니다. 동기들 잘려나갈 때 도와주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네요. 제대로 경영 못하고 또 수많은 사람 자르게 할거면 그냥 인수할 때 자기를 자르라는 식으로
나오던데요?”
“하핫! 그 양반 강단 있네?”
“군산조선소까지 가져온 마당에 그걸 움직일 만한 수완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하지 못하면? 노조라도 움직이겠대?”
“아니요. 언론을 움직일 것 같아요. 경영 능력도 없는 재벌이 마구잡이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또 대규모 실업을
유도할 거라는 식으로 할 것 같은데... 솔직히 무시해도 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굳이 무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기는 해요.”
“우리를 무진중공업이랑 똑같은 놈으로 만들겠다... 일리는 있네. 그래서 뭘 해주면 감동하면서 우리를
받아주겠대? 발주라도 따 오래?”
“네.”
“허... 말도 안 된다고 하자니 물건 팔아먹고 사는 상사인으로서 차마 그 이야기는 안 나오고... 어디서
받아오래?”
“일본 미쓰이 상선이 LNG 선을 발주하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정치적인 문제인지 쉽사리 결정을 못내리고 있다고
해요.”
“미쓰이 상선?”
“네. LNG 추진 페리 2 척을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하면서 미쓰비시중공업의 기술력을 끌어올려주려는 상황인데
마음을 바꿔서 우리쪽에 발주를 내도록 해줬으면 하더군요.”
“얼마나?”
“몇 척을 수주해달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진짜 딱 능력만 보여달라 그 이야기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강 사장은 물론이고 해주조선해양 직원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는 하겠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걸? 미쓰이 상선이면 우리도 잘 알지. 우리랑 거래도 꽤 했던 곳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선택지를 잘 골랐다고 할 수 있기는 한데... 난 반대야.”
“그런가요?”
“아마 사장님도 반대할걸?”
“이유가 뭡니까?”
“건방지잖아.”
“그게 단가요?”
“최 상무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의외로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해. 그렇게 걱정되고 우리의 능력이
궁금했으면 그런식의 협박 비스무레한 걸 할 게 아니라 부탁을 했어야지. 그래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감히 누굴
시험해?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리 엎고 나왔을걸?”
“흐음... 그렇군요.”
“그럼 최 상무는 어떡할건데?”
“굳이 반대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죠.”
“포기하게?”
“네.”
“쓰읍... 이러면 재미 없는데...”
“왜요? 내가 억지로 밀어붙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럴 줄 알았지. 최 상무 나이 때는 한번 결정한 일을 타인의 의견으로 되돌리는 게 쉽지 않으니까. 난 당연히
나서서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말겠다는 식으로 나올 줄 알았어.”
“사장님도 반대할 거라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네. 조금 웃긴 상황이었거든요.”
“웃겨요? 어떻게요?”
“글쎄 우리더러 배를 수주해오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배를요? 그네들도 영업조직 있잖아요?”
“군산조선소까지 떠안겼으니 그걸 돌릴 만한 영업력을 보여줘야 자기네들도 안심하고 인수를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어머,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다고? 신경 쓰지 말아요.”
“고승현 상무님하고 같은 말을 하네요.”
“상무님도 그러죠?”
“네, 그래서 신경 안 쓰겠다고 하니 상무님이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수주를 받아오면 그건 나쁜 게 아니니
해보자고 하시더라구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요?”
“대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면 자기만의 생각이 확고해서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데 이 사람은 금전적인
유혹이 있을 때는 쉽게 흔들릴 겁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탐욕을 부리다가, 또는 주변 사람을 너무 믿다가 큰
곤란을 겪기도 해요. 그리고 양인이 공망이라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잘합니다. 아마 그는 스
스로도 자신이 거짓말을 잘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잘 사지
않기도 해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그럼 회사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죠.”
“그럼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말했잖아요. 그는 귀가 얇고 탐욕을 부리는 성향이 있다고. 누가 그 자를 옆에서 흔든 겁니다.”
“누가요?”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빙그레 웃었다.
총선 하루 전,
군산시장 보궐선거를 하루 앞두고 조재민 의원 선거사무소는 선거를 앞둔 긴장감 대신 들뜨고 즐거운 분위기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자체 조사결과 지지율이 89%를 넘어가는 압도적인 상황이니 그저 빨리 내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좋네.”
“네?”
“신령님이 그러시네. 얼굴에 빛이 가득하대.”
“제가요?”
어머니는 대학 다닐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어느 종교를 믿고 있었는지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적이 없었다.
숨긴 게 아니라 어머니가 어떤 종교를 믿고 있었는지 물어본 사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러셨죠.”
지금도 기억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위해 쉼 없이 산을 오르던 어머니의 모습.
“당시에는 어리석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공덕 덕분에 앞길이 이렇게 순탄하게 펼쳐진 거야. 어머니에게 평생
감사하고 살아.”
“그럼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 즈음해서 자꾸 꿈에 조 의원님이 나오는 거야.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어지간해서는
손님으로 온 적도 없는 사람이 꿈에 잘 안 나타나거든. 그러다 뉴스 보고 알았어.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 당신이잖아, 글쎄.”
“······.”
“내가 그래서 조 의원님을 아주 유심히 살펴봤어. 그러니까 신령님이 답을 주시더라고.”
그녀는 슬쩍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조 의원님, 내 앞에서는 허세 부리지 말아요. 강금원 원내대표, 민구상 당 대표, 저기 통일평화당 사선, 오선
한 중진 의원들 전부 나한테는 거짓말 안 해. 왜 거짓말 안 할까? 거짓말하면 신령님이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
그것도 선불이란다.
갈수록 기가 찬다.
“전화 받았습니다.”
[조 의원?]
강금원 원내대표다.
설마 했는데 정말 강 대표와 전화통화까지 이렇게 편히 하는 사이일 줄이야···.
“네, 대표님.”
[임 씨가 자네를 좋게 봤나 봐? 잘해보라고. 안 그래도 자네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야. 내일 선거 잘 치르고 언제
서울 올라와서 당선축하주나 한번 쏴.]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 잘 잡아봐. 그 여자 기가 막히게 신통하거든. 그런데 돈 욕심이 좀 많아. 그게 단점이지만
그래서 뒤끝도 없어.]
“잘 알겠습니다.”
[고생해.]
“천만 원이에요.”
“보냈습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그러죠.”
“그리고··· 그 장자방이 누구야?”
“네? 왜 그러십니까?”
“궁금하니까. 내가 점쟁이이기는 해도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해. 다 알았으면 매주 로또 맞고 떵떵거리면서 살지
뭐하러 다리 아프게 여기까지 와?”
“회사원입니다.”
“직장인?”
“네.”
“언제 자리 한번 잡아봐. 내가 그 사람 제대로 봐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서울 시내의 한 고급 일식집.
인당 20 만 원이 넘는 고급 일식집이었지만 이상하게 영훈은 비슷한 가격대의 소고기를 먹는 것에 비해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승현 상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호노다 세쿠는 이 집 음식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감탄사를 뱉어댔다.
아무래도 고급 스시는 자신의 입맛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호노다 씨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이번에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게 됐어요. 듣기로는 미쓰이 상선도 LNG 선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아직 어떤 움직임을 보인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어떠십니까?”
“뭐가 어떠냐는 말인가요?”
그는 제법 유창한 한국말로 되물었다.
“해주조선해양이면 세계에서 손꼽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예요. 적당한 가격대에 발주할 용의가 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한국 상사인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돌적인 영업은 분명 일본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본사에서는 아직 외국에 LNG 선을 발주할 계획이 없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에 LNG 추진 페리선을 2 척 발주한 건 미쓰비시 중공업의 기술력을 올려주려는 계획 아닙니까?
지금 당장 발주해도 최소 2 년 후에나 인도받을 텐데 언제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실 생각인가요? LNG 운송 시장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될 게 걱정되지 않는 겁니까?”
“본사에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떤 의도로 나와 만나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전 그런 큰 프로젝트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사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허허··· 이것 참···.”
“다만, 아까 말씀하신 적당한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신다면 본사에 보고해볼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상무님, 2,300 억이면 굳이 급하지 않은 본사에 제가 제시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전 본사에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왜요? 강일후 사장을 부추기면 우리가 급해서 떨이로라도 팔 거라고 생각했나요? 강 사장은 얼마를 먹기로
했어요? 한 척당 한··· 삼십 억 되나?”
“본사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구요? 우리가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강일후
사장을 쥐고 흔드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이나 보죠?”
“오. 오해입니다.”
“으음~ 표정 보니까 그것보다 못해 보이네? 멍청하게 한 척에 삼십억도 못 받으면서 그런 구라를 쳤대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을 뭘 믿고?”
“네?”
“당신 발언권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나 힘이 없는지 방금 전에 말해놓고서 기다리라? 흥, 당신이 본사에
문의한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럼...?”
“당신네 사장, 한국으로 불러오세요.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사과해야 할 겁니다. 아주 정중하게. 그럼 다시
생각해보죠. 고 상무님, 가시죠.”
“어떻게 알았던 거야? 아니, 처음부터 강일후 사장이 그런 조건을 단 게 미쓰이 상선의 로비였던 걸 알아챈
거였어?”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이상했는데?”
“그냥 느낌이 그랬어요. 직원과 회사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말투가... 하여간 뭔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알아봤어요.”
“그랬더니?”
“강일후 사장은 생각 만큼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걸 알고 궁금한 게 생기더라구요.”
“미쓰이 상선.”
“맞습니다. 왜 하필 미쓰이 상선을 찍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니였습니다. 꼭
미쓰이 상선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백마진이지.”
“맞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호노다 세쿠를 만나기 전에는 당연히 LNG 선박에 대해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연가스 시장은 점차 커지고 있고 IMO 의 규제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적어도 선박 가격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리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딴 건 내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처럼 행동하
는 걸 보고 확신했습니다.”
“하하, 그렇지. 관심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건 블러핑이지. 그럼 미쓰이 상선 사장도
이 일에 관여됐다고 생각해서 부른 건가? 몸집이 굉장히 큰 회사의 사장이 쉽게 한국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말이야.”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수익을 적게 남겨도 일단 수주를 해서 일감을 늘려놔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데 제가 아직 전문가도 아니니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건지 정확하게 계산이 되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어수선한 틈을 타고 최고경영자를 구슬려 덤핑가격에 사려는 짓거리를 하
는 걸 보고 있자니 진짜 안 팔고 싶기도 하고...”
“그럼 어쩌게?”
“어쩌긴요. 나머지는 해주조선해양 관계자들에게 맡겨야죠. 아, 그리고 강일후 사장 사표 먼저 받아놓구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과연 미쓰이 상선에서 사과까지 하면서 배를 사려고 할지 모르겠어. 저들이
앞으로 LNG 운반 시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가 문제인데...”
“기다려보죠. 어차피 제 가격에 안 사려고 저런 꼼수를 썼으니 안 팔면 그만이니까요.”
“후... 그건 그렇지. 기다려보자고.”
“저돌적이라...”
“응? 뭐라고?”
“저들이 봤을 때 우리가 저돌적으로 영업을 하는가 봐요?”
“아... 상사인들은 그렇지. 항상 먼저 움직이고 구매자를 찾아서 그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야 하니까.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손가락 빨아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일본 상사들도 우리 못지 않아. 미쓰이 상선은 해운 회사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상무님, 저랑 일본 좀 갔다 오실래요?”
[조재민 의원 당선 확실 떴습니다.]
“와아아!”
“반갑네. 나 조재민일세.”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건설회사 한다고?”
“네.”
“임복희라는 점쟁이가 자네를 소개해주더군. 잘 알고 있는 여자인가?”
“실은 제가 한창 어려웠을 때 그 분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로 일이 잘 되고 나서 가끔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겸해서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직설적인 말이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로비를 했었다고 당당하게 소개할 줄이야.
“정직한 건가?”
“정직해야 할 때만 정직합니다.”
“날 만나고자 했으면 원하는 게 있나?”
“큰 기업인이 되고자 합니다.”
“야망이 대단하군.”
“대신 의원님을 큰 정치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를 큰 정치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충청의 만신인 화옥신녀가 저를 소하라고 소개했다고 들었습니다.”
“허... 화옥신녀라... 무협지에 나올법한 이름이네?”
“만신은 무당을 높혀 부르는 말이니 그냥 평소 부르던 대로 점쟁이라고 일컬으셔도 됩니다.”
“어쨌거나 그리 듣기는 했어.”
“말로만 소하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 의원님께서 가장 곤란해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자기소개 한번 화끈하군. 좋아. 군산조선소가 이제 곧 가동에 들어갈 텐데 해주조선해양쪽에서 말하는
임금조건과 기존 노조에서 주장하는 임금 조건에 차이가 있어. 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조선소에서 일하길
바라는데 노조에서 원하는 대로 하면 원하는 만큼 고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야. 난 서로 잘 타협했
으면 좋겠는데?”
“제가 힘써보겠습니다.”
“지켜보지.”
총선이 끝났다.
HS 물산의 기획조정실은 총선 며칠 전부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Nodri Clare 인수 때문이었다.
기조실 실장이 처음으로 내린 업무 지시였고 그 사이즈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매출실적부터 브랜드 컨셉과 시장
방향, 향후 발전성, 인수 후 마케팅 전략까지 수립하고 있었다.
[바빠?]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무실 유리벽 너머로 민희가 모니터를 보며 작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럼 저 대신 한 명 보낼게요.”
[임연희?]
“아니요. 제 비서예요.”
[내가 네 비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
“어차피 알게 될 사람이니까 오늘은 만나서 안면 좀 터놓는다고 생각하세요.”
[장난하냐? 내가 너한테 약점 하나 잡혔다고 내가 네 아랫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어디서 너 대신 비서를
보낸다는 소리를 해?]
“부르셨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제 출발할 테니까 점심 미팅 끝나고 특이사항 있으면 나한테 카톡으로 남겨요.”
“네.”
“약속시간이··· 10 분 전이네.”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도 미소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고기 좋아해요?”
“네. 비싼 고기는 더 좋아하고요.”
“잘됐네요. 일단 먹고 이야기합시다.”
묘한 말이었다.
너의 제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부족하지만 일단 전하기는 하겠다는 뜻.
형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왜?”
이쯤 되니 화도 안 나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안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스타일이 아니라면서요?”
“공적으로 실망할 뻔했다는 말이었습니다.”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ㅎㅎ 또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해.]
“어서 와! 하하하!”
“반갑습니다. HS 물산 최영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미세하게 굳어진 조 시장의 표정을 영훈과 강윤기 모두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영훈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조재민 시장 역시 영훈이 이런 상황을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한다는 걸 느꼈다.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짐을 느낀 조 시장이 말을 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시장실을 나가는 강윤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조재민 시장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의 영훈에게
말했다.
이게 다 일감 부족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실적 부진의 낭떠러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회사가 인원을 감축하는 것도 아니고 신규 인력을 천명
넘게 고용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비이성적이게 보일 수도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와 결합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조재민 시장도 무작정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요?”
“저 친구가 무슨 수를 썼는지 단박에 해결했어. 기존 노조가 해주조선해양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방금 연락이 왔어.
기본임금은 줄어들더라도 나중에 일감이 늘어나서 연장근무가 많아지면 근로자도 살고 회사도 산다는 말이 먹힌
거지. 이걸 설득하기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받아들여졌으니 이제 한숨 돌렸어.”
“축하드립니다.”
“자네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좋습니다. 많은 노동자가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한다면 시의 경제가 더 좋아질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 표정인가?”
“저 사람 어떻게 만났습니까?”
“응? 어떻게 만났냐니?”
“자연스럽게 알게됐습니까?”
“HS 건설과 의원님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알아도 상관없는 사람이겠죠. 얼마나 우리 회사를 무시하면
경쟁사 사람을 시장님 옆에 붙이겠습니까?”
“오해하는 거네. 자네가 그랬지 않나? 내가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장자방같은
자네도 필요하지만 소하처럼 묵묵히 뒤를 밀어줄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냐는...”
“내가 실수했군.”
“생각해보고 결과는 나중에 통보해주실 겁니까?”
“아닐세. 그럴 수야 있나. 아무리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군산조선소를 내 품에 안겨줄 능력이 있는
사람과는 그릇이 다를 게 아닌가? 고민할 이유가 없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잘 이야기할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게.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저녁이라도 사야 할 거 아닌가?”
“어떻게 만났습니까?”
“총선 하루 전날에 날 찾아왔네. 그리고는 내가 못 믿을까 봐 강금원 원내대표와 전화통화까지 하면서
안심시켰네.”
“원내대표까지 잡고 있는 점쟁이군요.”
“그래. 그러면서 좋은 사람을 소캐시켜줄 테니까 복채로 천만 원을 달라고 하더군.”
“주셨군요?”
“그랬으니까 저 친구를 만났지.”
“아까우시겠습니다.”
“까짓 천만 원 공부했다 치겠네.”
“쉽게 안 물러날 겁니다.”
“저 친구가?”
“네.”
“어떻게 아는가?”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욕심이 많아 보여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보내더라도 적당히 손에 쥐어주세요. 심부름 시켜놓고 머리만 쓰다듬어주는 건 부모나 가능한 겁니다. 남이면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쥐어 보내야 뒤탈이 없습니다.”
“흐음... 알겠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곤 시장실을 나갔다.
저 멀리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 강윤기는 영훈과 눈이 마주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영훈은 그를 보며 재빨리 핸드폰으로 강윤기 영민주택 사장을 검색했다.
다른 건 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생년월일만 알면 충분했다.
“그대는 조재민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군요. 하지만 난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난 조재민 시장을
선택했어요. 그 차이를 아십니까?”
“미안하네.”
‘난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떠난 HS 물산의 최영훈 상무가 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그래도 날 위해 좋은 일을 해줬으니 그냥 보낼 수는 없고, 시가 가지고 있는 조촌동 큰
필지를 매각할 계획이야. 자네가 받아서 아파트 하나 지어 보는 게 어떤가?”
강윤기는 깜짝 놀랐다.
그는 분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운전대를 후려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내려치던 그는 한번 크게 괴성을 지르고 나서야 화를 가라앉혔다.
“그 새끼···.”
“신녀님 뵈러 왔습니다.”
미리 예약한 손님이 한쪽 소파에 주르륵 앉아 대기하고 있음에도 당당히 말하는 강윤기를 보고 접수를 받는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했다.
잠시 후 나온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 말했고 30 여 분이 지나 안에서 상담을 받던 손님이 나오자 들어갈 수 있었다.
“신녀님이 잘못 보신 게 아니오?”
“내가 잘못 봤다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호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십시오. 더 야망 있고, 더 큰 정치인으로 클 수 있는 분. 그런 분들을 골라주시면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네가 선택을 하겠다고?”
“네.”
“부탁드립니다.”
고 상무는 그 말에 빵 터졌다.
“하하, 그런 셈입니다.”
가야 오키노리는 니폰유센 그룹의 후계자로 20 대부터 회사에 입사해 상당히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했다.
이제 갓 마흔을 넘었는데 전무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사실상 니폰유센의 실세 중의 실세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 척 주문할 건지 물어보세요.”
가야 오키노리가 말했다.
“2 척 주문할 생각이오.”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가?”
“저쪽에서 사고가 생긴 것 같아요. 한번 알아보세요.”
고 상무는 바로 알아들었다.
“니폰유센이 출자한 노르웨이 선사가 있어. UACC 라고 하는데 주로 유럽지역에서 자동차 운반을 위주로 운영하는
회사야. 그런데 작년에 이 회사에서 강남해운이라는 중국 조선사에 자동차 운반선 4 척을 발주했었다고 해.”
“그래서요?”
“문제는 일반 자동차 운반선을 발주한 게 아니라 IMO 규제 때문에 친환경 선박을 발주했다는 거야. 알려진 바로는
이원연료 엔진과 배터리를 결합했다고 하는데 아직 우리쪽에는 해당 선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해진 바가 없어.”
“흐음...”
부모의 운이 워낙 강하고 거대한 조직이 탄탄히 갖춰지면 성격적인 결함이나 조금 부족한 재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야 오키노리는 조금 달랐다.
그는 사주에 12 살 중에 최악이라는 겁살이 들어와 있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가지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고 주변에 좋은 인연이 들어오지 못하며 조상의 업적을 망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의 운이 서서히 기울어 가기 시작한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3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쯤 문제가 드러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까 그 자리에서 배를 사주겠다고 하는데도 일단 거부하고 자리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일부러 찾아온 영업사원에게 마침 잘 됐다는 듯 자신들이 먼저 선적을 지정해서 사겠다고 하는 건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민이 되는 것이고.
“최 상무 중국에 아는 라인 있지 않아?”
“있기는 있는데... 제가 중국어가 안 돼서 전화로 연락하기가 그래요.”
“나 있잖아.”
“물어보고 싶은 게 뭔가?”
“실은 중국 조선사 중에 강남해운이라는 곳에서 노르웨이 조선사에서 발주한 자동차 운반선 4 척을 건조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밀하게 전해진 소식통으로는 이들 선박건조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 이게
정확한 소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군?”
“맞습니다.”
“언제까지?”
“죄송스럽지만 최대한 빨리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이 급하거든요.”
“강남해운이라... 좋네. 알아봐 주지. 그리고 그 명품 브랜드는 어떻게 되어 가나?”
“현재 인수가격 협상을 위해 직원이 영국에 가 있습니다. 정확한 가격과 조건은 그들이 한국에 돌아오면 알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도쿄의 밤은 즐거우셨습니까?”
“좋았습니다.”
“HS 물산의 결정이 곧 해주조선해양의 결정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사실 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에 우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해주조선해양에 문의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가야 오키노리는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일어날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조건을 받아들이는 겁니까?”
“그대들은 2021 년까지 건조 가능한 겁니까?”
“LNG 추진 기술을 자동차 운반선에 적용하고 인증을 받는데 대략 6 개월에서 1 년정도 소모되기는 하지만 그 동안
도크를 놀리지 않고 나머지 부분을 건조하고 있다면... 빠르면 2021 년 말에서 늦으면 2022 년 초까지 건조
가능하다는 게 해주조선해양의 결론입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조건을 더 넣겠습니다.”
문제를 건다면 자동차 운반선이 부담이지 LNG 선은 그렇게 부담가는 부분이 아니긴 했다.
말 그대로 회사가 망할 정도로 휘청이지 않고서야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는 없으니까.
게다가 자동차 운반선은 LNG 추진 기술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17 만㎥급의 초대형 LNG 수송선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선금을 무려 70%나 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지만 정해진 기간 내에 선박을 건조해 인도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 해주조선해양이 유일했다.
가야 오키노리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
항상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기고 다니던 한주연은 웬일인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헐렁한 박스티와 청바지
차림으로 오래된 한옥집 앞에 서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눈을 끄게 뜨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개량한복을 입고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사님!”
얼마나 찾아다녔던가?
갑자기 그녀가 냈던 돈을 돌려주며 연화당을 정리하고 모습을 감췄던 명우도사였다.
대한민국에 점쟁이가 한 둘이던가?
조금 용하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점쟁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빨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그가 훌쩍 떠나버리고 나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기고 간 말.
‘이무기에 불과했는데 운 좋게 여의주를 물었어. 그래서 용이 돼버린 거야. 김태민은 죽어도 이 여자를 못
이길걸?’
HS 물산 회장이 된 송은채 회장에게 각계의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손길을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자신의 아들을 들이밀어 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여의주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고 있지만 연희와 결혼을 약속한 그 남자를 뺏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도 주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두 손 놓고 태민의 앞날이 구만리이기를 기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야망이 너무 컸으니까.
그녀는 결정해야 했다.
김태민을 믿고 그를 더 키워줘야 할지, 아니면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할지 말이다.
“물어물어 찾아왔어요.”
“용하네.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깔아야겠어.”
“나비효과라고 있어요. 나비의 날개짓 한번이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태풍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으로 변한들 네가 그대로인데 뭐가 바뀔 것 같으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원하는 것. 더 좋은 남자를 원하는 것이냐? 알려주면? 그 남자가 널 영부인이라도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넌 타고나기를 인덕과 인망이 부족하고 속이 좁다. 속이 좁으면 배짱이 있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부족하다. 좋은 남자도 네 옆에 있으면 좋은 기가 흩어질 게 분명한데 누구를 더 원해?”
“흐흐... 점은 옘병...”
“이게 누구야?”
“중요할 것 같은데?”
“어째서?”
“얼굴만 봐도 살이 가득해. 그냥저냥 권력자에 빌붙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고 살 사람이 아니야.”
“주우진이.”
“지역구가 평택인 그 주우진? 이제 고작 2 선인 주우진?”
“그래. 잘 맞겠어.”
“오빠가 주우진을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뉴스 봤으니까 알지.”
“진짜 잘 맞을까?”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못 믿는 건 아니고...”
“그건 됐고, 너도 이제 적당히 해 먹어. 그러다 탈 난다. 어째 수십 년이 흘러도 수법이 변하지를 않아?”
“대한민국에서 땅만큼 확실한게 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왜 계속 주식에 손을 대? 땅으로 재미 봤으면 계속 땅만 파면 될 게 아니야?”
“아이고! 오셨습니까.”
“이거 참... 생각지도 못하게 사장 자리에 앉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최영훈 상무님이 미쓰이 상선과
강일후 전 사장의 거래를 캐내셨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랬나요?”
“강 전 사장님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 먼저 차부터 드시죠.”
그때 비서가 차를 내왔다.
영훈이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을 때 송유철 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강일후 사장이 미쓰이 상선과의 뒷거래 때문에 사퇴한 것보다 어제 니폰유센과의 협상이 더
놀라웠습니다. 갑자기 UACC 에서 자동차 운반선 2 척을 따온 건 어떤 정보가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송 사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해주조선해양이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산조선소에 일감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일본으로 날아간 거였는데
마침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반기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꺼내지도
않은 자동차 운반선을 요구했습니다.”
“하하, 그런 우연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먼저 일본에 가기는 했지만 시기의 문제였을 뿐 그들은 언제고 해주조선해양에 자동차 운반선을
발주했을 겁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 UACC 가 중국 강남해운에 발주했던 자동차 운반선에 기술적 결함으로
건조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그건 그냥 위험을 대비한 것일 뿐입니다. 혹시 알아요? 니폰유센이 망하기라도 할지. 그때를 대비해 주식 교환
옵션이라도 넣은 겁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부산 백병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임창호 회장을 송은채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
시아버지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
둘 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은 오래 전에 명을 달리 했고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딸 하나 뿐이었다.
특히 시아버지는 아예 깨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 마음이 안 좋았다.
어차피 계열사 분리도 다 끝냈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딱 하루만이라도 몸을 일으켜 손녀딸 결혼식이라도 지켜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그냥 얼굴 좀 뵈려구요.”
“회장 취임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뭐라고?”
“나랑 연희 얼마나 무시했어요? 그것 뿐이에요? 현진물산 차지하겠다고 임원들 구워삶아 회사 조직이 엉망이
되게 만들었잖아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증거 있어?”
“소리 지르지 말아요. 아무리 아버님이 누워 계신다고 하지만 그래도 형님이랑 저 싸우는 거 다 듣고 계실지도
몰라요. 형님은 딸이라서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 며느리라 아버님 앞에서 고성 지르면서 싸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흥!”
임은진도 차마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린다.
송은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룹사 회장이 되니까 형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많이 사라졌어요. 그래, 그럴
수 있지. 욕심이 났을 수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형님을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네요.”
“아주 욕을 하는구나. 예전에는 속으로 엄청 욕했나봐?”
“오셨어요.”
“오랜만이다. 부회장 취임 축하해. 주주총회 때 가보지도 못했네.”
“아닙니다. 의결권 양도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얼굴 좋아보이네. 결혼한다며?”
“아직 이야기 진행중이고 날짜는 곧 잡을 예정입니다.”
“GK 그룹이라니 잘 됐네.”
“연희도 곧 결혼한다면서요?”
“그래.”
“날짜는 잡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잡지는 않았는데 여름 전에 하려고.”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상황이 상황인데 빨리 해야지.”
“오늘 기사 봤습니다. 해주조선해양이 니폰유센한테 LNG 선이랑 자동차 운반선 수주했다고 하던데 HS 물산에서
움직였다면서요?”
“갑자기 그건 왜?”
“확실히 할아버지께서 현진물산을 키우신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진물산의 영업조직력을
본격적으로 움직여서 수주를 따오는 그림을 옛날부터 그리셨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쉽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숙모에게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어요.”
“무슨 부탁?”
“이미 많이 가지셨으니까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좀 양보 해주셨으면 해서요. 지분정리도 다 됐겠다, 더 욕심낼
것도 없잖아요?”
“맞아. 사실 별로 원하는 건 없어.”
“그럼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우리 법무팀 직원들 요즘 정신 없는데 얼마 남지도 않은 유산 가지고도 싸우면 퇴근
못 합니다.”
“그러렴.”
혹시나 할아버지가 남길 유산을 욕심낼까 걱정했던 태민은 원하는 걸 얻었음에도 뭔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인당 40 만 원이 넘는 고급 일식집.
주우진 의원은 불편한 얼굴로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얼마나 많은 접대를 받아봤겠는가?
식사비가 비싸서 불편한 게 아니라 비싼 식사비를 내는 맞은편 남자의 의도를 모르기에 불편한 거였다.
그래서 강윤기가 술잔에 술을 따라도 받기만 할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네.”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라...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설회사라고 들었는데 나를 왜 찾아왔나?”
“전라도에서 주로 일감을 받아 일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 동네에서만 일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도, 사람도 자고로 큰 물에서 놀아야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치인에게 식사 자리는 꽤 예민한 자리라네. 더군다나 이렇게 비싼 식사는 특히 더 조심을 해야 하지. 아무런
사심이 없는 식사라고 해도 나중에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거든.”
“어떻게?”
“지금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와 주목을 받는 여당 의원의 약점이라면 어떨까요?”
“가장 많은 지지와 주목을 받는 여당 의원의 약점이라... 그게 누군가?”
“조재민 의원입니다.”
“아, 집값 급등 지역?”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정치인이 부동산에 둔하면 쓰나. 내 주변에도 봉선동 때문에 돈 좀 만진 사람이 몇 있거든.”
“아시다시피 봉선동은 광주에서도 유독 집값 급등이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봉선동에 LH 공사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시행한다며 시공사 선정 공고를 내지 않았겠습니까? 놓칠 수 없었습니다.”
“좋은 기회였겠군.”
“맞습니다. 사업권을 따내기만 하면 노다지였으니까요. 물론 토지매입과 공사대금 때문에 은행권에 상당한 규모의
차입이 있어야겠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 재무구조가 견실했습니다. 우리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권을 따낸 곳이 다름 아닌 현진건설이었습니다. 지금은 HS 건설이 되었고 그 전에는 혜성기업이라는
곳이었죠.”
“혜성기업? 들어본 것 같은데···.”
“도급업체 43 위인 저희랑 몇 단계 차이도 없는 작은 건설사였습니다. 워크아웃 중이었는데 주채권은행인
신영은행이 현진물산에 떨이로 넘긴 회사였죠. 그런 건설사가 간판 바꿔 달았다고 몇 달도 되지 않아 건설비만 6
천억이 넘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를 따낸 겁니다.”
“허··· 기가 막히군.”
“차라리 대기업인 우명건설이 그 사업권을 따냈다면 억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현진건설이라뇨? 더군다나
지방에 대규모 미분양을 일으켰다가 워크아웃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회사가 따낼 사업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 기다렸어요?”
“기다리긴 했는데 이렇게 좋아하니 기다리길 잘한 것 같습니다.”
“히힛. 당연하지.”
“얼굴 보니까 성과가 있었나 봐요?”
“맞아요.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은데 일단 가면서 이야기해요.”
“최고 경영자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노드리 클레어를 만나 봤는데 생각보다 자신의 브랜드에 대해 실망감이 큰 것
같았어요.”
“실망감이 컸다고요?”
“네. 이 사람 이력을 보니까 굉장한 사람은 맞아요. 세계 3 대 패션 스쿨인 세인트 마틴을 졸업할 때부터 디올,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그녀를 스카웃 하려고 했었대요. 그래서 그녀가 샤넬에서 10 년간 근무하고 나왔을 때
투자를 받는 건 어렵지 않았고, 그녀의 성공은 다들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었다는 거예
요.”
“지금 그렇게 되고 있잖아요?”
“이 정도 성장 속도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닌 것 같았어요. 노드리 클레어는 더 혁신적이고 열렬한 반응을
기대했던 것 같아요.”
“와··· 대단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네.”
“맞아요. 그리고 회사의 성장 속도보다 더 실망한 건 예상 외로 영국내 패션계에서 Nodri Clare 의 평가가
좋지 못하다는 데 있어요.”
“평가가 박해요?”
“네. 그녀가 기존에 샤넬에서 한 디자인에서 조금 더 캐주얼하고 모던해진··· 일종의 자기복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거든요.”
“자존심이 상할 만하네요?”
“그렇죠. 그래서 그런지 Nodri Clare 라는 본인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던 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계속
드러났어요.”
“회사의 성장성을 보면서도 계속 고민하던가요?”
“의미 있는 성장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직 한국에 오픈한 매장은 겨우 두 곳입니다. 말 그대로 아시아 시장은
이제 점 하나 찍은 거나 다름없고, 대부분의 매출은 영국 내에서 일어나는데 고가이긴 해도 초고가 브랜드는
아니고 지역 확장성이 두드러지지 않다 보니 이 브랜드가 실패한 브랜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각 의사에 긍정적이다 그 말인가요?”
“맞습니다. 생각보다 더 긍정적이었고 오히려 저희에게 인수 후 어떻게 브랜드를 발전시켜 나갈 건지 구체적으로
질문까지 해왔습니다.”
“흐음··· 상대 쪽에서 원하는 금액은요?”
“5 억 파운드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화로 7,700 억이 조금 넘는 수준이고요.”
“실망했다는 것 치고 너무 비싸게 받으려고 하네요? 실망했다는 말에 살짝 기대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그 이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네요.”
“하··· 그래요? 5 억 파운드라···. 뭐, 그 정도에 깔끔하게 인수할 수 있으면 나쁘지는 않네요.”
다시 연희가 끼어들었다.
“그렇죠? 직접 본사 가서 대화를 나눌수록 확신이 왔어요. 이 브랜드가 중국에 엄청난 프로모션과 함께 진출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서 살피니까, 본사에 비치된 가방이나 액세서리들이 다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보이는 거
있죠?”
“이게 뭐야!”
“일단 대응 전략을 잡아야 합니다. 기사 내용을 부정할 생각이면 철저하게 준비한 다음 대응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빠르게 수습해야 합니다.”
“발뺌하면?”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LH 공사 관계자를 채근한다고 해도 돈이 오간 것도 아니고 당시 호텔식
서비스에 관한 상당히 긍정적인 시민들 여론까지 있었습니다. 발뺌하고자 한다고 무조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거야 좋게 생각하면 그런 거지. 막상 시민들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의원님께서 전라도 지역에서만 의원 자리를 하신다고 한다면야 솔직히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경기도지사, 또는 서울시장 정도의 큰 선거나 이후에 있을 대권 경선 등을 생각할 때 대기업과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계속 남겨둔다면 언제고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수습한다면?”
“조금 타격은 있을지언정 길게 보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음··· 일단 최선은 봉선동 사업권을 HS 그룹이 포기하는 겁니다.”
“그건 안 돼. 대기업이 그렇게 물러빠진 놈들일 거 같아?”
“그렇다면 깔끔한 수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시공사 선정 과정에 문제가 남겨진 흔적을 찾아
지워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야, 이건 나 혼자 수습한다고 방방 뛸 문제가 아니야.”
“그럼···?”
“최영훈이를 불러. 아니, 내가 올라간다. 지금 출발할 테니까 차 준비해. 서울로 가자.”
“알겠습니다.”
“6 월 첫째 주 토요일 어때?”
“네?”
“결혼 날짜 말이야.”
“실수도 아니었어. 그저 운이 없었던 거야. 유독 누나를 따랐던 그 녀석이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어. 연희는
그것도 모르고 놀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았던 거지.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표현할 수도 없다고 하지? 연희
잘못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걔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어. 내가 아니더라도 시아버지
와 연희 아빠한테 넘칠 만큼 미움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어린 나이에 외국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연희가 난 무사히 자라준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하고 고마워. 그런 연희가
최 상무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난 기뻤어. 어디서 이상한 남자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고 할 줄
알았거든.”
“······.”
“그런 면에서 난 운이 참 좋아. 주변에 적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여기 최 상무가 나타나 줬잖아?”
“회장님만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저도 운이 좋았습니다. 회장님이 아니면 누가 절 이런 번듯한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뽑아주겠습니까?”
“그럼 우리 둘 다 운이 좋았다고 하자.”
“네.”
“그건 그렇고 기사 봤지? 조재민 시장 말이야.”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조재민 시장 보좌관입니다.”
“그래? 받아 봐.”
“최영훈입니다.”
“김시원입니다. 기사 보셨죠?”
“네, 봤습니다.”
“지금 시장님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4 시 전에는 도착할 것 같은데 시간을 내주셔야겠습니다.”
영훈은 슬쩍 송은채 회장을 돌아보았다.
송 회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이야기는 좀 통해요?”
“네.”
“잘됐네요. 그럼 박병호 부장에게 재무팀과 상의해서 회사채 발행에 관한 보고서 올리라고 할 테니까, 이형준
상무 만나서 7 천억짜리 회사채 발행하고 다음 달부터 판매 가능할지 확인해보세요. 적어도 4 천억 정도는
신영투자증권에서 사들여줬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영은행이 일본 쪽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니폰유센에 관해서 신영은행이나
신영투증, 신영모건스탠리 일본법인에서 얻은 정보를 우리와 공유해줬으면 한다고도 전해주세요. 이 부분은
신영은행 관계자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고요.”
“알겠습니다.”
“수고하고 박병호 부장님도 불러줄래요?”
“네.”
*
경부고속도로에서 교보타워 사거리 방면으로 빠져나오면 10 분 거리에 5 성급 호텔이 있는데 이게 딱 HS 관광이
소유한 켄싱턴 호텔이다.
조용하게 국회의원이나 국정 관계자를 접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셈이었다.
미리 하나의 엘리베이터와 통로만 통제하면 주차장에서부터 방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
조재민 시장 역시 호텔 그랜드스위트룸까지 들어오면서 철저하게 지켜지는 통제에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강남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뷰까지.
“좋군요.”
“처음에는 그냥 의혹을 제기할 겁니다. 그리고 그 의혹을 언론이 받아쓰겠죠. 받아 쓰는 게 아니라 심층취재까지
하며 제기된 의혹을 더욱 크게 부풀릴 겁니다. 사업 규모를 부풀리고, 사업권을 따낸 건설회사가 가지는 이익을
부풀리고, 나와 HS 그룹의 유착관계를 부풀릴 겁니다. 그럼 그걸 가지고 검찰이 칼을
들이대겠죠. LH 공사를 압수수색하고 시청을 압수수색 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나온들 그때 가면 나에게 무슨
이미지가 남을까요? 억울한 희생자? 난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검찰이 그 정도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최악의 경우를 말한 겁니다. 최악의 경우.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인데 이게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더욱 문제는 이 최악의 경우가 진행되면 중간에 막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장님이 원하는 건요?”
“HS 건설이 봉선동 사업권을 포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곤란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시장님이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도 불안해해요. 그리고
애초에 기사가 터졌다고 허둥지둥 서울로 올라오는 짓도 해서는 안 됐어요.”
“짓?”
“고작 의혹 하나 터뜨린 것뿐이에요. 증거도 없는 의혹 하나. 저들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불안한 건 이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무겁게 행동했어야죠. 정치인은 천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바위 같아야 한다는
거 모르시나요?”
“······,”
“기다리세요.”
“찾으셨습니까.”
“네. 다름 아니라 혹시 정치인들 정보도 기조실에서 관리하고 있는 게 있나요?”
“정치인들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왜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대기업 미래전략실 같은 데서 정치인들 관리도 하고
그러잖아요. 혹시나 우리 회사도 그런 게 있는지 궁금해서요.”
“부탁드립니다.”
“기다려봐.”
“어, 오랜만이다. 다른 건 아니고 너 우진이 연락처 알지? 주우진이. 그래, 84 학번 주우진. 국회의원 말이야.
갑자기 왜는··· 연락처 문자로 좀 찍어줘 봐. 새끼, 국회의원 연락처 민감한 거 내가 모르겠냐? 시끄럽고 빨리
보내줘. 응.”
“주 의원, 반가워. 나 강노식이야.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나? 놀라기는 우리가 더 놀랐지. 오늘 저녁 어때?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에헤이~ 빼지 말자고. 적어도 우리한테 주 의원을 도울 수 있는 기회라도 줘야지.
그럼그럼~ 오케이. 거기서 보자고.”
강 부사장이 전화를 끊자 영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삿일에 감사하고 말게 어딨나? 그런데 이 녀석 원래 학교 다닐 때부터 성격이 보통 아니었어. 지는 거
싫어하고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말도 못 해.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크게 고생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후··· 어떻게? 같이 가?”
“아닙니다. 저 혼자 만나겠습니다.”
“그래. 괜히 내가 후달리네.”
“오셨습니까.”
“자네는 누군가?”
“반갑습니다. HS 물산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라고 합니다.”
“팔 떨어지겠습니다, 의원님.”
“크흠···.”
[미팅은 끝났습니까?]
“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말씀하세요.]
“주우진 의원이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됐나요?”
[정확하지는 않은데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경기도 지역에서 압도적
당선은 사실상 힘드니까요.]
“그럼 혹시··· 선거 과정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는지 한번 알아봐 주실래요?”
[뭐 발견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한번 찾아봐 주세요. 혹시 모르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영훈은 전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형준이 눈을 빛냈다.
“절 곤란하게 하고 싶으신 거군요? 저는 내용을 전달하라는 지시만 받았지, 이형준 상무님과 친분을 유지하라는
지시는 받지 않았어요. 그러니 저를 더는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거 참, 농담 한번 못하겠네요. 뭐가 그렇게 빡빡합니까?”
“빡빡하게 하지 않으면 상무님의 그 느끼한 눈빛에 넘어갈까 봐 그래요.”
멈칫한 형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거짓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겠죠. 그런데 여자 앞에서 거짓말하는 남자는 멋 없어요. 상무님은 그런 남자
아니시죠?”
“크흠··· 뭐···.”
“오늘 맥주랑 골뱅이는 제가 살게요. 전에 소고기도 얻어 먹었는데 계속 얻어먹으면 염치 없잖아요?”
“이거 뭐 얼마 한다고··· 내가 사도 됩니다.”
“괜찮아요. 서로 법인카드로 긁는 건데 내가 내니, 네가 내니 하는 건 우습잖아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아침에 출근한 영훈은 민희에게 어제 미팅 관련해서 간단한 보고를 받고 박병호 부장을 만났다.
박 부장은 어제 저녁부터 고작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꽤나 의미있는 내용을 가지고 왔다.
참 절묘한 상황이다.
“정말요?”
“네. 식사 얻어먹은 건 부지기수고 과일에 고기에··· 선물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선거법 위반 아닙니까?”
“맞습니다.”
“딱 걸리긴 했네. 너무 쉽게 걸려서 당황스러울 정도인데요?”
“솔직히 저도 전화통화 몇 번에 이렇게 쉽게 잡을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지역구가 평택이 아니라
고양시나 포천 같은 곳이었으면 절대 이렇게 쉽게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폭로하실 겁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폭로하면 하청업체가 무척 곤란하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름 깊게 이어온 인연이었을 텐데 우리와의 갑을 관계 때문에 사실상 마지못해
폭로한 상황이니까요.”
“우리 쪽 기자 있죠?”
“네.”
“기사 하나만 냅시다. 적당히 추려서 주우진 의원이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는 수준으로
가볍게.”
“핵심은 비껴가게 말입니까?”
“네, 우리가 기사를 냈다는 정도만 티를 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주우진 의원이 쉽게 물러날까요?”
“물러나진 않더라도 대화는 하고 싶을 겁니다.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최영훈입니다.”
“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또 뵙는군요.”
“감히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협박해?”
“잠깐 나가 있으시죠?”
“내 보좌관은 나와 같아.”
“와··· 대단하시네요, 몇 시간 지났다고···. 그런데 선거 끝나고 캠프 본부장 아내가 현금으로 용인에 상가를
샀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도 선거법 위반 아닌가?”
“그 육감 틀린 것 같은데···.”
“맞을걸?”
“여기서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원님의 아름다운 두 따님과 아내분이 공중파 저녁 뉴스로 평생
모르고 살았던 의원님의 숨겨둔 아들 소식을 듣게 될 수가 있어요.”
“뭐, 뭐라고···?”
“사적인 거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억지로 빙빙 돌리고 있는데 자꾸 그러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로 관두자고요. 아시겠습니까? 그럼 의원님께서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육감··· 믿지 마세요. 제 앞에서는.”
얼빠진 얼굴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주우진 의원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트룸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좌관이 얼른 뒤를 따라나섰지만 주 의원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정신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할 뿐이었다.
그 서슬에 보좌관 역시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두 명만 존재할 때 주우진 의원이 말했다.
“너 당장 사람 하나 찾아.”
“네?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송미진이라고 78 년생이야. 2010 년까지 송파동에서 작은 바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어.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주소나 본적, 주민번호나 전화번호는 모르십니까?”
“주소는 잊어버렸고 누가 남의 주민번호 외우고 다니나? 전화번호는 찾아볼 텐데 10 년 전 번호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
“그거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굽니까?”
“확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내가 결혼한 상태였어.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었고, 그 여자는 애를 절대 지울 수 없다고 했었지. 그렇게
싸우다가 결국 미진이가 아기를 지웠다면서 병원에 입원한 사진을 보내왔어.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는데,
병원에서는 개인정보라 수술이 있었는지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겼어. 그
게 10 년 전이야.”
“그런데 왜 갑자기 그분을 찾으십니까? 설마···.”
“의원님!”
“그럴 수가···.”
“이대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입 싹 다물고 잠수하면 나만 미친놈이 된다. 정신병자도 아니고 제대로
밀어붙이지도 못하면서 상대 정당 의원에 대한 비리를 제기해? 그럼 이제 여의도에서 날 어떻게 볼까?”
“······.”
강윤기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대로 의혹 제기를 멈추게 되면 저격수도 아니고 그냥 얼빠진 놈이 될 뿐이라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못한다고 하는 순간 자신은 얼빠진 놈 옆에서 출세하겠다고 선, 또 다른 얼빠진 놈이 될 뿐이다.
그저 얼빠진 놈이 되면 끝일까?
그 순간부터 통일평화당과 자신은 여당과 야당 사이만큼이나 간극이 벌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건 한 번으로 충분해.”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사흘 주겠어.”
“알겠습니다.”
자식은 있는데 연희 같은 경우처럼 아빠가 딸을 극하는 운을 타고 나는 경우도 있고, 부모가 자식을 귀하게 키워
자식이 극진히 효도를 다하는 경우도 있다.
주우진 의원은 사주에 아들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론 보도 어디에서도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만나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바로 그의 가족관계였다.
두 딸과 아내가 전부인 그에게 아들이 없다는 건 영훈에게 있어 하나의 가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바로 사생아.
문제는 사생아의 존재를 주우진 의원이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거였다.
그조차 존재를 모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던져보고 반응을 보려고 했었다.
전혀 모르는 눈치라면 이쪽에서 먼저 찾아내려고 했으니까.
자식운과 애정운이 동시에 들어온 해에 그의 행적을 역추적하면 그와 연분이 있었던 여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유야무야 마무리된다는 거야? 기사 보면 야당 쪽에서 관심을 깊게 가지는 것 같던데? 언론에서도
지금쯤 심층 기사니 뭐니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알아서 막을 겁니다.”
“또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마법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이번 총선에서 불법적인 부분이 많았던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해?”
“빈집인 줄 알고 강도가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집주인이 총 들고 기다리는 상황인데 거기서 뭘 더 하겠습니까.
시간을 끌면 경찰이 올 텐데요.”
“문을 따고 들어갈 만큼 담력이 있다면 총을 들고 있어도 덤벼들려고 하지 않을까?”
“강도는 멍청하지 않습니까. 주우진 의원은 적어도 멍청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하긴··· 그 정도 위치에 있는데 동귀어진 같은 걸 할 리는 없겠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밝혀냈어?”
“박병호 부장이 평택에 있는 우리 하청업체 대표와 연락해서 주우진 선거 운동본부를 캤습니다. 평택이 우리
직원들도 많이 사는 곳이라서 크게 고생하지 않고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하필 평택이 지역구라니··· 우리가 운이 좋은 건가?”
“이번에는 좋았던 게 맞습니다.”
“그 하청업체 대표한테 상 좀 줘야겠네?”
“그러시죠.”
하청업체 대표가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도움이 있었던 건 맞으니 영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태산인데 괜히 정치인 하나가 튀어나와 분탕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저 상황만 잘 마무리하고 Nodri Clare 와 군산조선소의 일감 문제만을 신경 쓰고 싶었다.
“그럼 이제 조재민 시장 다시 불러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험하게 말하지 말 걸
그랬네.”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러십니까.”
“별거 아니야. 그냥 팔랑거리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엉덩이 무겁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아··· 별거 아니네요.”
“이게 뭐야?”
“아무래도 이 모든 게 다 이 새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그냥 물먹인 것도 아니고 꽤 큰 공사까지 물어줬는데 내 뒤통수를 친 거야? 그런데 갑자기 자수는
왜 해?”
진짜 자수를 했다는 게 아니라 의혹을 제기한 걸 스스로 밝혔다는 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강윤기의 기사는 봉선동 사업 의혹을 여전히 문제 삼고 있었지만, 그 의혹에서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국민들의 이목을 주우진 의원에서 강윤기 사장에게로 옮겨온 것일 뿐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히려 그 주장에는 허점이 가득했다.
HS 건설의 호텔식 조식은 현실성이 없다거나 영민주택보다 도급순위도 높은 HS 건설의 시공능력은 형편없다는 등의
일반인이 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주장이었던 거다.
당연히 기사를 본 사람들은 기사를 보고 의혹이 드는 게 아니라 강윤기 사장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문만
남는 기묘한 기사였다.
자살골도 이런 자살골이 없다.
아무리 강윤기 사장의 주장이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그에 동조해서 일을 키운 주우진 의원의 어리석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주우진 의원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게 위해 강윤기가 몸을 날렸는데 그를 안고 절벽에 떨어진
수준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왜 이렇게 하지?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 건 아니야?”
“이런 헛발질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모르니까 묻는 거 아니야? 뭐가 있으니까 저러겠지.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러겠어?”
“아무래도 최영훈 상무에게 연락을 해보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최 상무가 움직인 거다? 으음···.”
일리가 있었다.
송은채 회장의 기다리라는 말 때문에 당시 군말 없이 서울에서 내려왔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좋은 소식만 들려오길 기대했는데 어쩌면 이 황당한 기사가 그 좋은 소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재민 시장은 바로 최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그래. 잘 지냈나? 내가 서울에서 송 회장한테 제대로 혼나고 왔어. 들었지?”
[네. 많이 곤혹스러우셨겠습니다.]
“곤혹스러운 건 둘째 치고 송 회장한테 많이 놀랐어. 솔직히 송 회장이 여자라서 무시했던 것 같아.
전문경영인도 아니었고, 그저 결혼 잘해서 그 자리에 앉은 여자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
실수지.”
[강단 있는 분이십니다. 쓰러진 남편 대신 회사를 이끈다는 게 보통 뱃심으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송 회장이 나더러 진득하게 엉덩이 붙이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혹시 방금 뜬 기사가 엉덩이 붙이고 기다린
보답인가?”
[강윤기 기사 말이죠?]
“맞네.”
[맞습니다. 며칠 말들이 오가겠지만 앞으로 언론이나 검찰이 시장님을 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강윤기는 왜 저러는 거고?”
[일을 그냥 덮을 수는 없으니 자살골이라도 넣으면서 본인이 전면에 나선 것 같습니다. 바보 같아도 이미 언론과
입을 맞춘 상태일 거라서 자연스럽게 묻히게 될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언제 시간 내서 서울에 올라온 다음에
들으시죠. 회장님께서 너무 모질게 대한 것 같다고 살짝 후회하고 계십니다.]
“하하하! 솔직히 조금 꽁하긴 했네.”
[언제 시간 내서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주우진 의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 이번에도 신세 졌네.”
[그 신세 꼭 갚으시길 바랍니다.]
“자네는 빈말을 하지 않아 좋아. 내 꼭 기억하지.”
“제가 아는 피디가 있는데 이런 상황이면 다큐멘터리 하나 찍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귀뜸을 주었습니다. 시장님이
꼭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변화된 군산을 가지고 공중파에 다큐 하나 내보내면 시장님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긍정적으로 변할 겁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정치인들이 아무리 뉴스에서 좋은 이야기 떠들어 봐야 사람들 귀에 안 들어가. 그
다큐에 내 얼굴 딱 한 장면 스치듯이 나가도 좋지 않겠어?”
“맞습니다.”
“추진해봐. 우리 시에서 적극 홍보해준다고 하면서.”
“알겠습니다.”
어찌 보면 과하다 싶을 만큼 비난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고도 윤기는 마치 부모님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대항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신뢰가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가.”
“죄송합니다. 한 번만···.”
“뭘 한 번만이야! 일단 가 있어. 신령님이 아직 넌 운이 다하지 않았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겠어? 사업운이
다하지 않았으니 돈은 계속 벌 수 있다는 말이야. 이 사태가 진정되고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또 언제든 기회는 올
수 있어.”
“그럴까요?”
“사람 인생 모르는 거야. 온 세상 두려울 게 없다고 떵떵거리던 대감이 하루아침에 급사를 당해서 뒤질 수도 있고
그런 대감 밑에서 개처럼 구르던 하인놈이 마님 휘어잡아 재산 틀어쥐고 살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고. 하물며
정치판이야 어떻겠어? 돈 움켜쥐고 기다리다 보면 언제고 네 손 잡겠다고 벌떼처럼 몰
려들 수 있는 것들이 정치하는 인간들이야.”
“알겠습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점쟁이인 나도 알아.”
“알겠습니다.”
그는 임복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고 신당을 나갔다.
그가 나가는 걸 보고 임복희는 분통을 터뜨렸다.
“왜 자꾸 와?”
“오빠, 나 죽겠어.”
“뭘 죽어?”
“오빠가 알려준 주우진 의원한테 그 인간이 들이대다가 사고를 쳤지 뭐야.”
“뭔 사고?”
“아니, 오빠는 기사도 안 보고 살우? 아파트 사면 뭐해? 이렇게 상식이 부족한데?”
“왜 또 시비야? 무슨 기산데 그래?”
“여기 함 봐봐.”
“HS 건설?”
“응.”
“HS 물산이 인수했다던 HS 건설을 건드렸다고?”
“그렇다니까.”
“둘이 한 회사잖아.”
“인수했으니까 한 회사겠지.”
“허··· 이 녀석아. 거지가 동냥을 할 때도 집주인을 봐 가면서 하는 법이다.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호랑이
굴 앞에서 깝치고 있으니 물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우?”
“됐다. 넌 몰라도 된다. 어쨌든 얘는 이제 글렀다.”
“글렀다니?”
“호랑이한테 찍혔을 게 아니야? 자고로 개새끼는 호랑이 울음소리 한 번에 오줌을 지리고 꼼짝을 못 하는데,
다음에 기회를 준들 발톱 한번 내밀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마 발톱 내미는 순간 목덜미를 물려 죽을게다.”
“그러니까 HS 물산이 호랑이굴이라는 말이우?”
“그래.”
“그걸 왜 말 안 해줘!”
명우도사는 버럭 소리 질렀다.
“시끄러!”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바빴어요?”
“그렇죠. 재무팀하고 회의가 길어졌거든요.”
“재무팀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똑같아요. 회사 재정을 생각할 때 너무 모험이라고요. 우려가 많아요. 회사채 금리랑 만기를 생각할 때 내년에
돌아올 만기자금을 과연 무리 없이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대요. 자칫 잘못하면 HS 관광에서 호텔 매각한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박 부장님이랑 저랑 계속 설득했죠.”
아무리 회사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기획조정실 실장이 추진하는 일이라고 해도
재무팀으로써는 할 말을 한 셈이다.
그들의 우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수고했어요.”
“나 많이 안 늦었죠?”
“네. 안 그래도 연희 씨가 일찍 올 것 같지 않아서 음식은 일행 오면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히히··· 요즘 운전하는 건 어때요? 많이 안 무서워요? 사고 안 내는 것 보면 기특하긴 한데.”
“저 운동신경 좋습니다. 산에서 장작 패는 게 그냥 보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해보면 운동신경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 번에 장작의 중심에 도끼를 내리꽂으려면 균형감과 눈이 좋아야 하거든요.
어지간한 남자들은 도끼질 하라고 하면 겁먹어서 제대로 못 합니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누가 골랐는데. 고마워요.”
“작은 이벤트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이게 이벤튼데 뭐가 더 필요해요? 아··· 우리 신혼집은 어디로 할 거예요?”
“그냥 당신이 준 오피스텔에 신혼살림 차리면 되지 않아요?”
“거긴 혼자 살기 딱 좋아요. 그리고 신혼살림 들어갈 자리도 없어. 회사 근처가 좋을까요? 아니면 강변?”
“연희 씨 원하는 대로.”
“오케이. 대신 내가 몇 개 추려놓을 테니까 집은 같이 보러 가기에요. 알겠죠?”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예요? 결혼해서도 계속? 존댓말 하는 게 결혼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나는 그냥 좀 남처럼 느껴져요. 가족 같지 않아.”
“그럼 이제 서로 말 놓을까?”
“응! 좋았어. 아휴, 내가 원래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영훈 씨 앞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
“하하, 어떻게 참았어?”
“사랑의 힘으로? 히히···.”
“어? 문숙 아줌마네?”
“백화점에서 뵀던 사모님?”
“응. 무슨 일이지?”
“일단 받아.”
“여보세요?”
[연희니?]
“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그렇지. 그때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어떻게 됐어요?”
[말도 마. 아들 새끼는 믿을 수 없다고 자기가 그 애랑 얘기해본다 어쩐다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 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걔랑 직접 경찰서에서 범죄경력조회서를 떼어 오겠다고 하고서는 결국 못 떼어 온 거
있지?]
“어머, 정말요?”
[경찰서 앞에서 1 시간을 실랑이를 했대. 처음에는 날 못 믿는 거냐, 우리 사랑이 이 정도냐, 뭐 이랬겠지.
뻔해. 그런데 우리 아들이 내 성격 알거든. 내가 어설프게 넘어갈 사람이 또 아니잖니. 날 설득하려면
범죄경력조회 서류 떼어 가야 한다는 거 아니까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는데 글쎄 거기서 도망갔단다.]
“어떡해···.”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우리 집안 재산 거덜내고 집안
풍비박산될 뻔했던 거야.]
“결혼 전에 알았으니까 다행이에요.”
[청첩장 돌리기 전에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예식장 예약 다 해놓고 신혼집 구하는 중이었는데···.]
“취소비용은 생각하지 마세요.”
[취소비용도 취소비용이지만 우리 아들 지금 식음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다. 뭘 잘했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작정하고 속이는데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야지··· 바쁘니?]
“아니요, 바쁘지는 않아요.”
[이번에 너무 고마워서··· 내가 어떻게 감사를 할까 생각하다가 우리 바깥 양반한테 계속 속일 일도 아니라서
얘기를 했어. 그러니까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그러는 거야. 모레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 차관이 입국할
거래.]
“어? 그래요? 무슨 일로요?”
[정확한 내용은 주한 인도 대사관으로 연락을 달라고 하던데?]
“그래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한번 알아봐.]
“알겠어요, 아주머니.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지. 언제 남자친구랑 같이 저녁이나 하자. 너무 고마워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네, 영훈 씨 시간 맞으면 언제고 연락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영훈은 그동안 해외에 진출해서 공사를 따냈던 수많은 건설사가 왜 부실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다.
계열사 한 축을 건설사가 담당하는 만큼 건설사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존 건설사들이 해외 공사에서 저가 수주로 공사를 따내도 손해만 봐왔던 걸 알고 있기에 그런 식의 경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음식이 나왔다.
연희는 반지 케이스가 한쪽에 나오도록 구도를 잡고 스테이크 사진을 찍었다.
SNS 에 뭐라고 글을 남길지 안 봐도 이미 보이는 듯했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Nodri Clare 인수만으로도 정신없는 와중에 들어온 정보라 그냥 넘길까도
생각해봤는데··· 봉선동 있잖아요.”
“네.”
“국내 아파트 건설로 꽤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세계적인 건설사는 국내에서 아파트만
지어서는 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HS 건설은 작년만 해도 도급순위 39 위였습니다.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을 따낸 것도
대단한 일이었죠. 얼마 전에 그런 의혹이 불거졌을 정도니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계속 아파트만 지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저가 수주로 힘만 쏟고 손해 볼 상황만 아니면
HS 건설 쪽에서 한번 얼쩡거려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얼쩡거려 본다는 말이죠?”
“공개 입찰을 하겠다고 나온 상황도 아니고 그냥 공항을 둘러보러 왔는데 적극적으로 우리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웃기니까요. 클럽에 예쁜 여자가 보이는데 그냥 춤만 추러 온 건지, 아니면 남자도 만나러 온 건지
알아야 끝나고 소주 한잔 하자고 불러낼 거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찔러도 들어갈 구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인도 대사님이 우리한테 정보를 줬을까요?”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으니 정보를 줬을 텐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포기하기는 아쉬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얼쩡거려 볼까요?”
“HS 건설에 구호준 실장이라고 있을 거예요. 지금도 실장일지는 모르겠는데, 구도일 사장 동생입니다. 막내라
나이 차이가 많은··· 하여튼 그 사람이 능력 있다던데 부르죠.”
“구호준 실장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인도 쪽 라인 동원해서 말만 앞세우는 건지 진짜 신공항을 100 개나 세우려는 건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고 해외 건설사가 참여할 구석은 있는 건지, 100 개 만들 거라고 했으면
지금쯤 어디에 세울지 계획 정도는 발표하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우선순위도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바로 확보하겠습니다.”
“구호준 실장 바로 불러서 계획을 세워 봅시다. 비집고 들어갈 만한 구석이 있는지.”
“그런데 구호준 실장이라는 사람 능력이 괜찮은가요? 상대가 도로교통부 차관에다가 그 옆에 잘생기고 든든한
오빠들까지 같이 있을 텐데.”
“저도 잘 모릅니다. 벡텔에서 스카웃 하려고 했다고 하니 적어도 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추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인도 라마누잔 도로교통부 차관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당일, 영훈을 비롯한 기획조정실 직원들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적어도 점심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식사 후 공항 관계자들과 대화중인 라마누잔 일행과 얼굴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호준 실장은 이번 일이 생각보다 너무 큰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는지 아주 많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 이런 걸 생각해뒀습니까?”
“사실 이거 제가 대학생 때 만들어둔 겁니다. 스페인에서 신공항 공모전이 있었거든요.”
“아쉽게도 탈락했나보군요.”
“아니요. 공모전에 안 나갔습니다. 혜성기업에 취업하기로 정하면서 공모전은 그냥 포기했거든요.”
“아··· 그럼 이게 몇 년 전에 만든 겁니까?”
“4 년 전에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만족할까요? 저야 당시에도 최선을 다해서 짜내긴 한 거지만
그래도···.”
“어차피 이걸로 컨펌 받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말했듯이 저쪽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만 하려는
거니까. 한국 건설사를 끼워주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다시 제대로 만들면 됩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어?”
연희가 놀라 손을 들어 올렸는데 마침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다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걸 보니 그쪽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게 확실했다.
“어떻게 여기에···.”
“그러게요. 우명건설이 어떻게 알고 왔지?”
놀랍게도 라마누잔 차관과 조금 떨어져서 다소곳하게 기립해 있는 사람은 우명건설 주택영업본부장인 김창훈이었다.
“여기는 또 무슨 일이야?”
“그러는 너는 무슨 일인데?”
“설마 공항 건설을 따내보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해본적도 없잖아?”
“남이사 공항을 짓든 비행기를 만들든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은 그럼 처음부터 말이 됐고?”
“반가워요.”
“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훌륭한 인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약속된 일정이 있으니 언제 따로 시간을 잡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안 될 거 없죠.”
“뭡니까?”
“아··· 친구예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예쁘죠? 학교 다닐 때도 엄청 인기 많았어요.”
이렇게 좋을 수가···.
“아, 그래요?”
“그게 좋은 건가요?”
“손을 합칩시다.”
“손을 잡자고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게요. HS 그룹 수완 있는 거. 우리는 경험과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당신들의 수완과 자본이 더해지면 우리는 인도가 건설하는 상당한 규모의 공항건설에 한 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봐요, HS 건설이 이제 좀 커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들 입장에선 고작 한국에 있는 중소형 건설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공사를 따낸다고 해도 지방 소도시에 지어질 소규모 공항을 따내거나 대형 국제공항 건설에
일부분 참여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이건 그대들을 무시하
는 게 아니라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한 거예요.”
“그럼 우명건설은요?”
“우리도 아마 대형 국제공항 건설의 한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정도일 뿐일 겁니다.”
“그럼 우리 둘이 손을 합치면요?”
“세 개의 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면 PM(Project Management)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안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무려 100 개가 넘는 공항을 지으려고 한다고요. 그걸 한 개의 회사가 전부 맡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 얻어가는 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죠?”
“창훈이가 뭐래요?”
“손을 합치잡니다.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하는데요?”
“갑자기요? 왜?”
“자잘한 공사 따내서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PM 을 해보자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답은 구호준 실장이 했다.
“PM 이요? Project Management 인데 이게 쉽게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빌딩을 짓는다고 가정할 때 건물을
짓는 과정뿐만 아니라 토지 매입부터 건물의 설계, 시공, 감리까지 전반적인 사업을 총괄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이건 세계적인 건축회사가 주로 하지 주어진 공사 받아먹기만 하
는 우리나라 건설사는···.”
“못 하나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상당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국내에서 건설된 초고층 빌딩들도 전부
PM 은 외국 회사에서 맡은 겁니다. 삼전물산에서 지었다고 극찬받는 두바이 호텔 있죠? 그것도 다 외국회사가 PM
맡아서 삼전물산은 그냥 짓기만 한 거예요.”
“그럼 우리나라 건설사는 왜 PM 을 안 합니까?”
“경험을 쌓을 곳이 없거든요. 주로 대형 프로젝트는 국가에서 발주를 주고 관리하는 데다가 해외에서 경험을
쌓으려고 하면 경험이 많은 해외건설사만 찾으니까 경험을 쌓고 싶어도 쌓을 데가 없는 겁니다.”
“흐음··· 그래서 이번 기회에 PM 을 해보자는 건가?”
“아, 그럼요.”
“내일 차관쪽하고 미팅 잡고 나서 생각해보자고요. 아미르 밧찬 대사가 어느 정도나 우리를 도와줄지 모르는
상태인 데다가 우리는 아직 우명건설보다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태인 것 같으니 최대한 준비해봅시다. 그리고 구
실장님은 그 카트리나인가 하는 여자분하고 계속 연락해보시
고요. 가능하면 따로 약속을 잡아서라도 미팅할 수 있으면 하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카트리나라는 여자 집안에
대해 전부 파악해서 보고서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카트리나 인스타 아이디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와··· 집이 끝내주네.”
영훈이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붙이며 살펴보니 마치 궁전같은 저택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카트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동자에 웨이브진 머릿결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는데 그녀 옆에 세워진
슈퍼카를 보니 구 실장이 부자라고 얘기한 것이 이해가 됐다.
연희는 빠르게 사진을 넘겼고 카트리나가 지내는 집과 그녀의 방, 그리고 수많은 명품 사진을 홀린 듯이
훑어보고는 연신 저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인데 내거랑 같은 거라는 식의 자랑 아닌 자랑을 곁들였다.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연희가 구 실장에게 물었다.
영훈에게 반지를 받고 태그에 떡하니 프로포즈 반지라고 써놨으니 연희 주변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온갖 곳에서 축하 문자와 전화가 쏟아졌고 누구랑 하느냐, 언제 하느냐, 어디서 할거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등등 그날 연희는 새벽 2 시가 넘어서야 잘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연희에게 청혼까지 했던 그가 당연히 이 정보를 모를 리 있겠는가.
“철들었나? 예전 같았으면 절대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닌데··· 어쨌든 시커먼 속셈을 감추고 있을 거야. 뻔해.
자기네가 협상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는 시공사 역할만 하고 자기네가 PM 을 하겠다고 나서겠지. 지금쯤
어떻게 영훈 씨랑 나를 한 방 먹여줄까 고심하고 있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불안해. 봉선동에서도 크게 데인데다가 현진중공업에 투자 들어갔다가 지금까지 물려서 허덕인대. 마이너스 20%
라고 하던가? 이를 갈고 있을거야.”
“그래서 더 재미있을 수도 있지.”
“당연히 집안이지. 예쁜 여자는 지금까지 숱하게 만났어. 지금은 배경이 중요하니까. 안 그래도 몇몇 곳에서
만나보라고 연락 온다니까.”
“그럴 것 같았습니다. 상무님에게 좋은 배경은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의 배경,
굉장히 중요하긴 합니다. 그 여자가 가지고 올 엄청난 자본과 힘이 욕심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왜?”
“잘 생각하세요. 배경은 그 여자의 것이에요. 상무님의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이혼하면 다시 떨어져 나갈
힘이고 돈입니다.”
“그럼 네가 소개해준 그 여자는?”
“민희 씨가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감안하고 들을게.”
“아마 민희 씨가 상무님 옆에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는 눈치와 상황판단이 빠르거든요. 그냥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본능적으로 거짓인지 아닌지 잘 캐치합니다. 천부적으로···.”
“귀신이야?”
“그냥 촉이 뛰어난 겁니다. 사람은 타고날 때부터 다 다른 재능을 타고 납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이 있고, 손이
발달한 사람이 있죠.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이 있고, 계산에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민희 씨는 말투와 표정,
몸짓 등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잘 캐치하는 편인 겁니다.”
“귀신이네. 그런데 왜 비서나 하고 있대?”
“문서나 숫자로 드러나는 재능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주변에서 쟤 눈치 빠르다 정도로 표현됐을
거고 자신은 그게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알아봤다, 이 말이야?”
“네, 저 사람 잘 보는 거 아시잖아요.”
“···졸라 재수 없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는 욕했는데 왜 지가 칭찬으로 바꾸는 거야?”
“식사는 하고 오니?”
어머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누구야? 혹시 여자 만났니?”
“네?”
“너 빨리 말해. 너 만나자고 집 대문부터 버스정류장까지 줄 섰어. 아버님 말씀 아시지? 이상한 여자 만나고
다닐거면 빨리 제대로 된 여자 만나라고···.”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이야··· 좋네.”
“한국과 인도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지금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HS 그룹은
전 세계에 원자재, 식품, 철강, 석유제품 등을 거래할 수 있는 무역망을 갖추고 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건설장비 생산업체와 호텔, 세계적인 조선 회사도 소유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고 우리 회사가 한국 최고라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연락해봤어요?”
“네. 그런데 과연 올지···.”
“올 겁니다.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까 돌아가셔도 됩니다.”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당신과 우리 구호준 실장이 같은 학교였다는 말에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당신의
집안을 파악해낼 수 없었어요.”
구호준 실장이 인스타 주소를 알려줄 때만 해도 그녀의 집안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막상 알아보려고 파보기 시작하니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미국 사람인데 어느 곳에서도 어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없었다.
SNS 에 나온 그 휘황찬란한 집을 알아보니 집주인이 인도에서 엄청난 부자인 건 맞는데 그 사람의 자식은
카트리나가 아니었다.
구 실장은 그때부터 당황했지만 영훈은 이제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고 이번 프로젝트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요?”
“우리는 인도에서 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싶고 당신이 다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건가요?”
“네.”
“무슨 근거로 그러시죠?”
“사실상 이번에 입국한 일행의 가장 실세는 라마누잔 차관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아닌가요?”
바로 이야기를 꺼내도 되지만 영훈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주도권을 카트리나가 쥐게 된다.
그녀는 HS 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되니까.
그녀의 입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 게 된다.
상황이 아주 많이 다른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영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카트리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역시나 총리였다.
그런데 총리가 뒤를 봐주는데, 아무리 힘이 있는 가문이라고 해도 총리를 이겨 먹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당신이 서커스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간디 가문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난 간디 가문에게 은혜를 입었어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좋은 음식과 좋은 집은 생각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음··· 어쩌면 마호디 총리가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수준의 정치인
이었다면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지 몰라요.”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그를 사랑하는군요?”
“맞아요. 그를 사랑하고 그의 도덕성과 그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해요. 그래서 난 그가 연임하고 인도를
더 좋은 나라로 이끌기를 원하고 있어요.”
“어떤 건설 프로젝트든 토지매입 가격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공항을 세운다면야
과정도 간단하고 매입가격을 협상하는 것도 간단하겠지만, 만약 주거지역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할 때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한 번의 공사로 얻을 비자금이 아니라 더 큰 걸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NJS 라는 회사는 마호디와 관련된 회사일 거고, 만약 우리가 PM 을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끼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호준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들이 원하는 건 합법적으로 돈을 끌어모을 기회가 필요하고 우리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마호디 총리를 움직여
딱 하나의 프로젝트만 우리가 따낼 수 있다면 HS 건설은 눈으로 보이는 수익 외에 더 큰 걸 가져온 거라고
판단해도 좋을 겁니다.”
“우명건설은?”
“설계 부분은 협력하고, 시공도 절반 나누어 가지면 됩니다. 만약 차후 프로젝트를 추가 수주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설계 부분만 참여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차피 PM 의 핵심역량은 설계와 관리니까요.”
결론은 내려졌다.
영훈이 말을 보탰다.
“조급해하지 말자고요. 구 실장님은 학교 동창들을 중심으로 스카웃 해올 수 있는 인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주세요.”
“연봉을 상당히 요구할 텐데요?”
“원래 세계적인 스포츠 구단들은 연봉을 많이 준다고 하던데요? 회사에 돈 부족한가요?”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혜성기업에서 HS 건설로 바뀐 지 1 년도 안 됐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 그렇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잘 풀릴 테니까.”
“나 최 사장 믿어요.”
“네.”
“그럼 주말에 봅시다.”
송 회장이 피식 웃었다.
“다녀오세요.”
영훈이 기획조정실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추고 나가자 직원들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기조실의 장인 최영훈 상무도 떠나고 회장의 딸과 박병호 부장까지 모두 짐을 싸서 영국으로 떠났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아무리 최영훈 상무가 눈치주지 않고 임연희가 회장 딸로 갑질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되는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처럼 깐깐한 박병호 부장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직원들의 얼굴에 꽃이 피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민희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영훈과 같이 있을 때는 시키지 않은 일이라도 알아서 척척 해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노력한 그녀였다.
혹시나 영어가 필요한 순간이 올까봐 입사 후에 끊었던 영어학원까지 추가로 다니는 그녀였다.
출장을 떠나며 영훈이 추가로 지시한 일도 없었고 다녀올 때까지 쉬고 있으라는 말에 그녀는 오래간만에 쇼핑몰
사이트를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톡이 울렸다.
[안 바쁘면 커피 한잔 어때?]
[어디로 갈까요?]
[내가 맛있는 커피집 알아놨는데 거기서 볼까?]
[좋아요.]
“어디 가요?”
“네. 잠시 외부에 다녀올게요.”
“바쁘시네?”
“대리님은 안 바쁘세요?”
“우리야 항상 바쁘죠. 조금 있으면 점심인데 먹고 들어오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오늘 어르신들도 없고 회식이나 할까 하는데 같이 한잔 할래요?”
“그래요.”
“오~ 알겠습니다.”
“여기!”
오지환 부장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고 있다가 민희가 가까이오자 미리 시켜놓은 음료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생각이 다 있으신 거였네. 이래서 뱁새는 황새의 행동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 커피 두고
뭐해?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마셔. 마셔.”
“훗, 네. 잘 마실게요.”
“상무님이 Nodri Clare 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우선순위로 두시는 건 해주조선해양
건이에요.”
“그건 이미 마무리됐잖아?”
“인수는 마무리됐지만 군산조선소 일감이 적어서 계속 신경을 쓰고 계시거든요. 얼마 전에 니폰유센과 노르웨이
UACC 에게 수주를 받게 된 것도 상무님의 그런 의중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어요.”
“그건 이해가 가. 그런데 거기서 또 수주를 받으려고 하신다고? 해주조선해양은 뭐하고? 걔네들도 노는 거
아니잖아? 일감 부족하면 거제에서 만들 거 군산으로 돌릴 텐데? 그리고 아직 수주잔량도 꽤 남은 걸로 알고
있고,”
“더 깊은 내용은 제 권한 밖이에요.”
“어, 나야. 나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재작년에 러시아에 중고차 4 천대 날랐을 때 니폰유센 선박 이용했지?
그래. 그때 누가 핸들링했어? 걔 나한테 전화 좀 하라고 해라. 이유는 묻지 말고. 오케이.”
전화를 끊은 오 부장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무슨 모임?”
“봉사 모임 있잖아요.”
“봉사? 돈 많은 여편네들끼리 모여서 수다 떨면서, 가끔 명절이나 겨울 되면 모여서 김치나 담그는 그 봉사?
진짜 봉사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가 차겠네.”
“그래도 종종 좋은 일 많이 해요. 한 달 전에 자선바자회 열어서 수익금 기부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리고 바자회에서 패션쇼 열어서 기부한 돈보다 옷 사는데 쓴 돈이 더 많았지, 아마?”
“요즘 왜 그렇게 삐딱해요? 당신도 다 아는 사람들이고, 은행동 윤숙언니 남편은 당신이 그렇게 친해지고
싶어하는 금융위원회 국장이잖아요.”
“······.”
“저녁에 시간 내요? 그런 걸로 알고 있을게요.”
“종로 리츠 칼튼.”
“알겠습니다.”
“윤 작가~ 내가 늦었지?”
“아닙니다.”
* * *
민희는 회사 근처 유명한 이탈리아 브런치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빠르게 놀리는 중이었다.
지금쯤 테이블이 한 번 정도 회전했을 시간이라 얼른 가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진물산에 입사하며 학자금 대출은 얼마 안 돼 상환했다. 신촌 부근에 전세로 얻은 원룸 이자를 생각하면 아직도
허리를 졸라야 했지만 그래도 씀씀이는 많이 커졌다.
어쩌면 그녀 내면에서부터 변화된 무언가가 그녀의 소비패턴까지 바뀌게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 걸어가던 그녀의 눈에 커다란 위용을 뽐내고 있는 리츠 칼튼 호텔이 들어왔다.
외국에서 온 비즈니스 손님과 국내 최상급 VIP 를 위한 5 성급 호텔로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 특별함이
더욱 부각되는 곳이었다.
평생 이런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 한번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이 호텔이 이제는 언제 어느 때고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괜히 뿌듯한 마음에 호텔 앞을 천천히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민희는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들어갔지만,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조현민 과장은 슬금슬금 올라오는 기대감을 애써
내리눌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그룹 내 최고 실권자의 비서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해서 눈도장을 찍겠다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걸로 크게
점수를 받지는 못할 거라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민희를 식당에서도 가장 뷰가 좋은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민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직원을 호출했다.
“여기!”
“네, 앉으세요.”
“아니에요. 그냥 식사하세요.”
민희는 깜짝 놀랐다.
아까 그 경우 없는 여자가 이형준 상무의 어머니였다니···.
아직 이형준 상무와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계일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아닌가?
“알겠습니다.”
“절 찾으셨다고요?”
“잠시 앉으실래요?”
아까까지만 해도 비싼 점심을 공짜로 먹는다는 생각에 설레는 표정을 한가득 짓던 여자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음을 느낀 그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민희는 미미하게 고개를 움직여 정면에 위치한 이형준 상무 어머니의 뒷모습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영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그녀에게 위로가 될지 몰라서였다.
연희는 담담하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그랬을 거야. 아빠가 저렇게 쓰러지고 나서 솔직히 전혀 슬프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쓰러졌을 때도
당황스러웠지 슬픈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아.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내가 나쁜 년이어서일까?
아니면 이게 정상인 걸까? 영훈 씨는 내가 못돼서라고 생각하고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해?”
“처음 나한테 했던 말, 아직도 기억해. 타고 나기를 오만하게 타고나서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인물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람을 가려 사귄다고. 그리고 본인보다 못한 사람이면 무시하기 일쑤라 친구, 선후배,
형제자매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
고 결혼하더라도 불행할 거라고 했었지.”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그 말이 내 머리를 때렸었어. 영훈 씨가 했던 말, 꼭 내 속을
훔쳐보는 말이라 놀랐었고 더 놀란 건 내가 아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였어.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아빠를 내가 따라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연수원에서 알았던 거지.”
“그래?”
“응, 영훈 씨 옆에 있으면 그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 덕분에 나에게 닥쳐올 불행이 다 비켜갈 것 같았어.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지.”
“전에도 말했듯이 난 내 사주를 잊었어. 내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사주에 나무가 없는 여자를 만나야 하는
건 아직 기억이 나는데...”
연희가 말을 끊었다.
“내 어릴 때의 생활은 사투와 같았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산속에 나를 꽁꽁 묶어놓은 스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렇게 태어나게 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까지 내 마음은 온통 칠흑같이 검었던 것 같아. 그 생각이 조금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기가 막히게도 사주를 배우면서였어. 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배운 건데... 그게 운명인 거지. 운명을 알고 나니까 분노도 원망도 다 사그라들었어. 그때부터
절의 생활을 받아들였어.”
“불자가 된 거야?”
“아니, 일종의 템플스테이 생활이었어. 스님은 내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고 난 절을 내 놀이터처럼
돌아다녔어. 다 좋았는데 딱 하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게 아쉬웠어. 스님은 내가 꼭 원하면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때는 나도 내가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했지. 대학
도 포기하고 게임만 했는데 나이 서른 넘어서 이렇게 잘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그러게, 이렇게 예쁜 여자랑 결혼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하하하, 맞아. 정말 그랬어.”
처음엔 그저 인정받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고 나니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나요?”
이때 남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왜?”
“아... 그 새로 온다는 감독 있잖아.”
“응.”
“아마 팀을 더 망쳐 놓을 거야.”
“어떻게 알아?”
“얼굴에 덕이 없거든.”
“서양사람들 관상도 보는 거야?”
“다 맞는 건 아닌데 그래도 특징적인 면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 같아. 서양 사람들이 다 코가 크다고 해서 그
모양이 비슷한 건 아니거든. 나도 이게 맞을까 생각해봤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냥 보여.”
“와... 그럼 이제 브라이튼 앤... 하여튼 그 팀은 떨어지는 거야?”
“그럴걸? 덕이 부족한 건 둘째치고 기가 부족해. 원래 뭐든지 흐름이라는 게 중요하거든. 게으른 사람이
한순간에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하려면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지. 부모님이 쓰러진다든가,
사랑하던 여자가 떠난다든가, 뭐 그런... 회사도 팀도 마찬가지인 거야.
무너지려는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아주 강한 기를 가진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하는데 침침한 눈을 보면 기가
약한 사람이야.”
“정말?”
“그리고 턱이 약해서 아랫사람을 다스리지도 못할 거고, 천창이 약해서 명예운도 없어. 좋은 감독이 되지 못할
거고 아마 브라이튼은 강등 당할 거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영훈이나 연희나 둘 다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리니 남자의 딸로 보이는 여자애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야. 그냥 우리끼리 추측한 거야. 원래 영국에서도 내기 많이 하잖아. 그것처럼 아마추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까 신경쓰지 마. 브라이튼은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당신, 브라이튼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군! 어디 팬이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아니면 설마 크리스털
팰리스인가? 아, 맞아. 크리스털 팰리스에 한국인 선수가 있었지? 리였나?”
감독의 전술이 어떻고 어떤 선수가 월클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싸우는 팬들의 말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 이유가
없기는 했다.
본래 스포츠 팬들은 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의 딸이 또다시 냉큼 끼어들었다.
“저 사람이 쉐인 랄프가 뭐가 약하대요. 그리고 브라이튼은 쓰러지는 회사처럼 무너질 거라고 했어요. 또, 선수
관리가 형편없을 거고 그는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래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얘, 이 사람이 한 말은 선수 관리가 형편없을 거라는 게 아니라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 힘들 거라는 말이었어.
그리고 명예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명예를 얻기 힘들다는 말이야. 명예운, 명예를 얻기 힘든 운을 타고
났다는 거지.”
“그럼 약하다고 한 건 뭐였어요? 기? 아까 뭐가 약하다고 했죠?”
“그건 음··· 스타워즈 봤지? 거기에 포스라고 나오잖아. 쉐인 랄프 감독은 그 포스가 부족하다는 말이야.
동양에서는 그걸 기라고 말해. 게다가 쓰러지는 회사처럼 무너질 거라는 말은··· 음··· 매출이 떨어지는 회사든
계속 패배를 당하는 스포츠팀이든 반전의 기회를 맞으려면 리더가 아
주 강한 포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다는 말이었어. 이해했니?”
“굉장히 특이하고 독특한 학문이군요. 허··· 이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K-POP 이라는 걸 듣더니 한국말을 제법
하기 시작했는데 당신들 말을 알아들으니 공부를 허투루 하진 않았나 보네요.”
“한국말을 너~무 잘하네요. 자랑스러우시겠어요.”
“하하,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굉장히 똑똑해요. 어쨌든 잘 알았습니다. 동양에는 참 다양한 학문이 있군요.
재미있었어요. 브라이튼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입니까?”
“너무 예쁜 동네라 한 사흘 정도 머물면서 쉴 것 같아요. 오늘 뜻하지 않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네요.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즐거운 식사 하세요.”
“그러게. 그래도 잘 알아들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웃기긴 하네. 영국에서 관상을 설명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영훈 씨도 이제 외국이라고 한국말로 크게 떠들면 안 되겠다.”
“맞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 좋은 거겠지?”
“좋은 일이지. 영훈 씨만 조금 조심하면 되잖아.”
“하하, 그건 그래. 좋은 자리 놓쳐서 아깝네. 아까 그 자리 진짜 좋았는데.”
“나 거기 말고도 좋은 곳 알아. 영국에서 몇 안 되는 맛있는 음식점인데 여기서 한 10 분 걸리나? 하여튼 안
멀어.”
“그럼 거기로 갈까?”
“응. 그런데 브라이튼인가 하는 그 축구단 강등되면 많이 안 좋은 거야?”
“엄청난 손실이지. 프리미어 리그는 강등 안 당하고 유지만 하고 있어도 1 년에 천억 넘게 들어오거든.
강등당하면 십 분의 일로 줄어든다고 했었나?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비슷할 거야.”
“그럼 엄청 걱정되겠다.”
“구단주라고 하잖아. 부자야. 아마 너보다 돈 많을걸? 자고로 재벌이랑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래? 그럼 됐고.”
둘은 해변길을 따라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렇게 그림 같은 해변을 배경으로 오붓하게 식사를 즐긴 부녀는 곧장 브라이튼의 홈구장인 American Express
Community Stadium 으로 이동했다.
내일 꼴찌인 노리치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구단 관계자들은 어두운 표정 속에서도 한 줄기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내일 경기만 확실히 잡으면 나머지 두 경기 중에 한 경기만 이겨도 강등 탈출이 확실하니까.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훈련장에 도착한 구단주 맥스 크롤리는 아주 신경질적인 고함소리를 들었다.
“이런 젠장,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풀백이 튀어나간 자리를 커버해줘야 한다고. 왜 어슬렁거리는 거야!
너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치고 나가라고! 모페이! 집중하라고! 눈을 어디에 두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 그 동양인 여자의 말이 귓가에 맴돌면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게 아니라 마음대로 안 되는
선수들을 보며 대책 없이 짜증 내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았다.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다가 조금만 실수하는 선수를 보면 가차없이 비난을 퍼붓는 감독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양인 여자가 했던 말 중에 하나하나 들어맞지 않은 말이 없었다.
게다가 선수들을 비난할 때 쓰는 용어들에는 어린 딸인 앨리가 듣기 민망한 표현들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온 맥스 크롤리는 훈련하는 모습을 다 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빠, 왜 그냥 가는 거예요?”
“내일 중요한 경기잖니. 아빠가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걸 알면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가 괜히 더 긴장해서
훈련을 제대로 못 할 수도 있고.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치솟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감독을 불러 한마디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거다.
그렇게 부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지우며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왜?”
“어··· 가게 주인 보니까 뭐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어서.”
“그러네. 장사가 잘 안되나 보다. 우리 입맛에는 느끼한데 현지인이 먹었을 때도 별론가? 그런데 여기 별점
높았는데? 평도 좋았고?”
“대출이 많은가봐.”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가게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런데 이후 가게 주인과 친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더니 똑같이 죽상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어차피 음식도 거의 먹었겠다, 배에 더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아 둘은 얼른 가게를 나왔다.
음식을 먹었으면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은 커피숍.
해변을 바라보며 오붓하게 커피를 즐기려고 가게를 방문하니 점원들과 주인의 안색이 똑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여기 있었군!”
“찾고 있었어.”
“우리를요?”
“그런데 왜 찾으셨습니까?”
“투자자들은 데이터를 좋아하고 선수들은 미신을 좋아해. 난 투자자로서 미신 같은 루틴에 얽매이는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사람이 절박한 곳에 몰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매달리게 된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요?”
“쉐인 랄프의 언행, 선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선수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 같은 부분들··· 전부 자네가
한 말에 포함되어 있었어. 마치 신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네.”
“프리미어 리그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군. 그래, 그렇다면 말이야 혹시 크루즈 여행 좋아하나? 언제든 말만
하게. 최고급 크루즈 선을 타고 전 유럽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겠네.”
“크루즈요? 혹시 여행사를 운영하십니까?”
“하하, 여행사가 아니라 크루즈선사를 운영하고 있네.”
“아··· 그래요? 크루즈선···.”
때마침 일감이 부족한 군산조선소를 떠올린 영훈은 그제야 관심이 조금 생기기 시작했다.
“자네는 꿈이 있나?”
“네?”
크루즈선사를 운영하는 구단주가 저런 걸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원하는 건 앞으로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고 싶은데 저더러 봐달라는 말이군요?”
“맞네.”
“고작 몇 마디의 말을 믿고 구단을 운영하실 겁니까?”
“자네가 한 말이 아닌가?”
“동양인도 아니고 영국 사람이 그 말을 믿는 게 신기해서 그럽니다.”
“사실 나도 백 프로 확신하는 건 아니네.”
“백 프로 믿지 못하면 결국 제 의견을 신뢰하지 못할 테니 도움을 드린다고 해봐야 결국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어쨌든 구단주님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부디 훌륭한 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구단주님?”
“원하는 걸 말해보게.”
“전화 한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맥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니 도와달라고 하셔야 할 게 아니라 거래를 하자고 하셔야 맞습니다. 합당한 거래에는 응할 생각이
있으니까요.”
“허허··· 이런···. 한국에서 온 커다란 사업가를 고작 크루즈 여행으로 꼬시려고 했으니 창피하기 그지 없구만.
좋네. 거래하지. 그런데 거래를 하려고 하니 자네 쪽 상품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네.”
영훈이 미소 지었다.
가지고 있는 선박을 이용해 여행 좀 시켜주며 싸게 몇 마디 들어보겠다는 의도였던 거다.
들어보고 신뢰가 갈 것 같으면 이후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 추가적으로 고려하는 사항 정도로 점수를 반영했을
거다.
“2007 년 2 월 6 일에 태어났네.”
“반갑다. 악수 한번 할까?”
앨리는 한국말을 알아듣기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영훈과 악수를 나누었다.
대낮의 뜨거운 열기가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영훈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하다가 말했다.
“그게··· 엄마가 둘이라는 표현은 난생처음 듣는군. 그런데··· 맞네. 앨리의 생모는 따로 있어.”
“역시 그렇군요. 아마 태어날 때부터 힘들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난산이었네. 의사가 그러더군. 2 차대전 이전이었다면 앨리 엄마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초년에 물과 상극이니 아마 물로 인해 사고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앞으로 물놀이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맥스는 목이 말랐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 가더니 맥주 한 병을 사가지고 와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야기가 대충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앨리는 밖에서 문을 두드려댔고 맥스는 그녀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비밀 이야기했죠?”
“나중에 이야기해주마.”
“예전에는 크루즈선의 주요 고객들이 유럽과 미국의 부자들이었네. 하지만 근래 들어 그 중심축이 아시아 쪽으로
변화하고 있어. 아마도 중국 때문이겠지. 그 때문에 3 년 전에 싱가포르에 새로운 법인을 세우고 운행을 시작했어.
결과는... 나쁘지 않더군.”
“축하드립니다.”
“올해 말에 약 12 만 톤 규모의 프리미엄급 선박을 발주할 생각이었네. 가능하겠나?”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는 씨익 미소짓더니 말했다.
협상은 끝났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직 우리 거래는 끝난 게 아닌 거 알지?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나?”
“일단 한 가지를 반드시 지켜주셔야 합니다.”
“또 뭔가?”
“그 어디에도 제가 가진 상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아야 합니다. 외부에 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다면
모든 계약은 무효입니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멍청한 놈으로 불리고 싶지 않네. 걱정하지 말게.”
“그럼 이렇게 하시죠.”
해주조선해양 본사 대회의실.
긴급 소집된 회의에 십여 명의 임원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들을 향해 송유철 사장이 입을 열었다.
“방금 영국에서 연락이 왔어. HS 물산 기조실 최영훈 상무가 업무차 영국을 갔다가 큐나드 크루즈 사장하고
우연찮게 만난 모양이야.”
“큐나드 크루즈 말입니까? 갑자기 큐나드 크루즈 사장은 왜 만난 겁니까?”
“HS 건설이 가진 설계인력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인도에 인천공항 급
국제공항을 수주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 게다가 HS 관광은 어때? 국내외 5 성급 호텔들을 가지고 있지.
그들이 가진 인프라와 경험을 바탕으로 호화 객실을 꾸미는 게 과연 불가
능한 걸까?”
“미쓰비시 중공업의 실패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알아. 안다고. 그래서 의견을 들어보자고 모인 거야. 양준영 상무는 어떻게 생각해?”
김 부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양준영이! 이거 손실규모가 조 단위로 나올 수 있어. 네가 이거 책임질 수 있어?”
“아니,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시도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이긴 한데 어렵지 않을까... 설계도도 없고. 여간
까탈스럽게 굴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네...”
물론 아주 미약한 목소리였다.
“큐나드 크루즈가 그 정도로 협조적이면 상당한 기회가 되긴 할 겁니다. 납기를 어느 정도로 잡는지가 일단
중요할 텐데 충분히 준비하고 시작한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부사장님 말씀대로 이건 배를 만들
수 있다 하는 거지, 이 프로젝트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줄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뭐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기조실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구요?”
“발주는 올해 말로 생각하고 있고 만약 우리가 맡게 되면 그 전까지 최대한 협조해볼 생각이라고만 들었어.”
“계약은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만약 우리가 오케이 하면 메일로 계약조건 확인하고 5 월 중순에 영국으로 가는 거야. 가서 계약 확정짓고
기술자 데리고 크루즈 여행 한번 하는 거지.”
“여행을 한다구요?”
“그럼? 그 큰 배를 놀리겠어? 지중해 한바퀴 도는 동안 기술자들은 배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바닥은 뭘
깔았는지, 식탁은 뭘로 했는지, 벽면엔 뭘 발랐는지, 엔진 소음은 어떻게 잡았는지 눈치껏 배워 오는 거야. 누가
갈지는 모르겠지만 졸라게 부럽네. 하여튼 지금까지 최 상무가 전해
온 말로는 그래. 어떻게 생각해?”
“저는 반대입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회의 마무리하자고.”
5 년 전이었다.
평소 말 없고 공부만 열심히 하던 둘째 녀석이 그날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의 재촉에 그 녀석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리고 들이닥친 경찰.
성폭행이란다.
어려서부터 사고 한 번 안치고 공부만 하던 녀석이 성폭행이라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남들은 가고 싶어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녀석이 평소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에게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암, 실수지.
실수가 아니면 말이 되질 않았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평소 스토킹 짓을 했다는 여자의 진술은 아들녀석이 사랑하는 마음을 과하게 표현한 것으로 바뀌었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까지 이루어졌다.
물론 합의 과정에서 돈이 조금 깨지긴 했지만,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정호균 회장이 부장검사까지 움직여주며 신경 써준 이후 사건은 유야무야 덮였고, 그 여학생은 이사까지
갔다고 했다.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고 집도 넉넉하지 않았다고 하니 평소 행실이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아내는 남의 아들 인생 조질 뻔하게 했다고 그 여학생을 욕했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고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자신은 아들이나 그 여학생이나 둘 다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정 회장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무진중공업과의 합병에 최선을 다했지만 갑자기 상황이
틀어지며 합병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렇기에 마음 한구석에 항상 은혜를 갚아야 할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유, 오셨습니까.”
김상중 부사장이 벌떡 일어났고 정호균 회장은 인자한 얼굴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자세히 말해봐.”
“영국 최대 크루즈선사인 큐나드 크루즈사가 협력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아직 계약에 관한 사항을 협의중인데 10
만 톤 규모 프리미엄급 라인을 발주 준비중이고 퀸 엘리자베스호에 기술자 파견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10 만 톤? 그럼 8, 9 천억 하겠네?”
“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큐나드 크루즈사가 왜 그런 짓을 해?”
“이것 역시 HS 물산 기조실에서 움직인 것으로,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전 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논의했을 뿐입니다.”
“그렇구만. 알겠네. 내가 참 우리 김상중 부사장한테 고마운 게 많아. 전에 합병 때도 많이 고마웠는데 이제는
남의 식구가 됐는데도 이렇게 날 생각해주니 얼마나 고마워?”
“회장님께서 배려해주신 게 있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내 걱정 말고 식사나 들자고. 아, 아들녀석은 공부 잘하고 있지?”
“네. 사고 안 치고 열심히 공부중입니다.”
“그래, 사내새끼가 한 번 정도는 실수할 수도 있는 거야. 어깨 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 되라고 해.”
“녀석도 회장님에 대해서 항상 감사함을 품고 있습니다. 언제고 회장님께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아. 그게 날 위하는 거야. 어서 드세.”
그렇게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고 정호균 회장은 해주조선해양의 크루즈선 수주에 대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김상중 부회장은 의아했지만 회장이 이미 관심을 꺼버린 이후라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쨌든 자신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김 부사장은 조용히 식사를 마칠 뿐이었다.
그렇게 김상중 부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준 정호균 회장은 수행비서와 함께 음식점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차에는 수행비서 말고도 정 회장의 아들인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이 앉아 있었다.
“넌 여기서 뭐해?”
“근처에서 사람 좀 만나고 있다가 아버지가 여기에서 식사하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기사는?”
“밖에 있기는 한데, 따로 갈까요?”
“됐다. 가는 김에 같이 들어가자.”
“해주 김상중 부사장 만났다면서요? 그 인간이 밥값을 하던가요?”
“죄송합니다.”
“내가 이번에 절실하게 느꼈다. 밥값을 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너도 밥값해!”
“예.”
영훈은 그렇게 송 회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기획조정실로 돌아오니 박병호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한국 온 사이에 또 일을 만드셨다구요?”
“그렇게 됐네요.”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까?”
“이건 해주조선해양과 의논해야 할 일이라서요. 부장님은 Nodri Clare 인수만 신경써주시면 됩니다. 회의는
10 분 뒤에 하죠. 민희 씨는 나 좀 보구요.”
“별 일 없었습니까?”
“계속해봐요.”
“이형준 상무 어머니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분과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어떻게 심상치 않았는데요?”
“불륜 같았습니다.”
“흐음···.”
“다른 의미는 없어요. 정말 잘 어울려 보였을 뿐이니까. 다만 민희 씨는 남들이 느끼는 부담감과 중압감을
오히려 즐길 것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유는 없어요, 그냥 느낌이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알고 있잖아요?”
“네?”
“만약 아예 만나지 않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까 민희 씨라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놨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 태풍의 눈(1) > 끝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떤 계획이냐고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는 명심하세요. 이세준 부회장이나 그 사모나 둘 다 보통
사람들은 아닙니다. 민희 씨의 상상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계획?
안 들어봐도 뻔하다.
“좋아?”
“싫을 게 있겠어? 해주조선해양에 3 조 원 들어갔어. 이거 휘청이는 순간 HS 그룹 넘어가는 거야. 바~로 STS 꼴
나는 거지. 그 기자 참 내 생각이랑 똑같더라고. 인사이트가 있어.”
“그게 인사이트가 있는 거냐? 그리고 크루즈선 수주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공시에 올라온 것도 아니고.”
“인마, 이거 감 완전히 떨어졌네. 야, 생각을 해봐. 주가가 15% 급락하고 있는데 홍보팀에서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지금 한창 계약이 목전에 다가왔으니까 부정을 못 하는 거지.”
“난 그게 이상해.”
“뭐가?”
“주가가 저렇게 떨어질 걸 몰랐겠어? 지금 회사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네 말대로 크루즈선을
수주한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제 발등 찍는 일인 걸 경영진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알아도 크루즈선이라니까 눈이 뒤집혔겠지.”
“단순히 눈이 뒤집혔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아. 노드린지 뭐시긴지 패션 브랜드도 7 천억이나 들여서 샀으니
통장에 현금도 많지 않을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
“겁나냐?”
“넌 안 나냐?”
“왜? 내가 왜 겁나야 하는데?”
“봉선동 때 한번 데어 봤잖아. 초반에는 저 새끼들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너랑 나랑 얼마나 무시했어?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어떻게 됐지?”
“새끼, 재수 없는 소리는··· 지난 일이잖아.”
“넌 역사를 왜 배운다고 생각하냐?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암기하기 위해서 배운다고 생각해? 아니야.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배우는 거고, 실수한 역사가 있다면 반복하지 않으려고 배우는 거야.”
“그때 차관 일행을 인도로 보내고 나서 다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래서
알아봤어.”
“뭘?”
“HS 건설 쪽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말이야. 너도 들었잖아, 인천 한옥 호텔에서 식사하면서 꼬드긴 거.”
“라마누잔 차관이 그랬었지. 제법 감동적인 제안이었다고 말이야.”
“왠지 그게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텔에 알아봤는데 HS 건설 사람들이 호텔을 나온 건 차관
일행하고 식사를 마친지 몇 시간이 지난 후였대.”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일단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낸 뒤에 말하려고 했지. 그런데 젊은 인도 여자를 만났다는 거 외에는 알아낸 게
없어.”
“젊은 인도 여자? 수행원 중에 하나겠네?”
“그렇지. 그런데 그때 젊은 여자 수행원이 몇 명이었는지 기억나?”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 명? 맞지?”
“다시 찾아보니까 다섯 명이더라고. 그중에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겠어.”
“야! 걱정하지 마.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인도야.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 우리는 차관을 꽉 잡고 있다고. 그때
라마누잔 그 인간이 여자 둘에 정신 못 차리는 거 못 봤냐? 아주 그냥 천국을 본 것 같았잖아. 크크큭···.”
“그렇긴 한데··· 그래도 계속 불안하네. 아무래도 인도 한번 가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오케이, 스케줄 잡아보자. 단속해놓는 게 마음 편하면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메일 온 거 있지?”
윤 부장은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올려진 서류를 가지고 와 창훈의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일 났다.”
“뭔데?”
“라마누잔 차관이 신항공 건설 사업에서 빠지게 됐단다.”
“뭔 소리야 그게?”
“마호디 총리가 중요 사업이라고 직접 관여하기로 결정했대. 이거··· 느낌이 좋지 않아.”
“왜?”
“혹시 이거 HS 건설이 수작 부린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렇겠지?”
“당연하지.”
우명건설 김창훈 상무와 그의 비서인 윤희찬 부장이 인도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영훈은 하얼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Nodri Clare 의 인수가 완료되었으니 주췬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훈이 또다시 한국 땅을 떠났을 때, 조재민 군산시장은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희가 감탄하며 들어왔다가 이형준 상무 어머니를 보고 입맛을 떨어뜨렸던 그 식당의 조용한 룸에서 송은채
회장과 마주했다.
창밖의 대로변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송 회장에게 말했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 그 새끼··· 아니, 그 녀석의 당숙이 검사였던 거예요. 차라리 부모님이 검사라면 이해라도 하는데,
공사도 다망하신 검사님이 참 인정도 많으시지···.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세상 참 더러운 거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법대를 가서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의를 세우고 싶었던 거군요?”
“네? 그건···.”
“예상하지 못했죠잉? 흐흐··· 내가 그 인간 밑에 들어갔을 때 영석이 부모님 무덤 앞에 가서 한 시간을
울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어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디 경상도 가서 출마하겠습니까? 전라도에서
정치하려면 그 인간이 최고의 선택인데···. 왜 살면서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까? 딱 그때 같아요. 그때부터 내가 국회의원이 됐는데도 가슴이 답답해.
남들은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떠받들어 주는데도 그냥 답답한 거예요.”
“인생 참 쉽지 않아요. 난 조 시장님께 그렇게 절절한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이 사연 아무나 못 듣습니다. 오죽하면 마누라도 모르겠어요, 흐흐···.”
“처음에는 강주원 의원을 날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 상무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전국구 의원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하··· 이게 또 막상 기대를
가져보니까 그 유혹을 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빨가벗고 달
려드는 가시나들 앞에서도 참아본 적 있는데, 최 상무가 그려주는 미래는 못 참겠더라고요.”
“최 상무가 그래요. 생각지 않았던 목표를 제시하고 이루어 나가죠.”
“그렇게 최 상무가 준 과일을 받아먹고 이 자리까지 오니 당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평생 전화 한 통 안 줄 것 같던 중진 의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이 와요. 내가 귀찮아
죽겠어.”
“호호, 무슨 자랑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회장님 앞이니까 자랑하는 겁니다. 다른 데 가서 이런 말 하면 재수 없다고 욕먹어요.”
“알긴 아시네.”
“이게 다 회장님과 최 상무 덕분입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참 복도 많습니다. 그런 인재를 옆에 두시고··· 아예
사위로 만드신다면서요?”
“딸자식이 이런 식으로 효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래서 인생 모른다고 하는 건가 봐요.”
“하하하! 회장님 농담도 잘 하시네. 내가 회장님한테 한 소리 듣고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또 꿍한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땐 내가 실수했지. 정신 번쩍 났습니다.”
“정신 번쩍 나라고 그렇게 말한 거예요, 큰일 하실 분인데···.”
“촐싹댔죠?”
“호호호.”
“거절할게요.”
“어째 느낌이 딱 왔습니다. 정치랑 더는 엮이기 싫어서 그러십니까?”
“네.”
“하··· 이거 난감하네요. 그럼 회장님이 아니라 최 상무는 어떻습니까?”
“최 상무만 말인가요?”
“예.”
“흠··· 날씨가 좋아요. 오신 김에 하루 푹 쉬시고 가세요. 시장님의 제안은 최 상무에게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국 건설사를 밀어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던 윤 부장은 라마누잔 차관의 대답에 혼란을 느꼈다.
“몰라요.”
“전에 안주가 별로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서 이 집으로 모셨습니다. 여기가 술은 몰라도
안주는 괜찮거든요.”
“비싸 보이는 집이니 당연히 맛있겠죠.”
“왜 뵙자고 한지 아십니까?”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궁금하군요. 어떤 일로 불렀다고 생각하는지.”
“총리에게 선을 댄 겁니까?”
“비슷합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에 창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물었던 것인데 대답이 의외였다.
“조건에 따라 다르겠죠?”
“조건이요?”
“그럼 설마 그냥 달라고 하는 겁니까? 초등학생도 친구한테 아이스크림 한 입만 달라고 할 땐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과자 하나 정도는 건네는 법입니다. 그냥 달라고 해서 주는 건 가족뿐 아닙니까.”
“상무님?”
“네?”
“제가 봉선동 사업을 어떻게 따냈는지 기억하십니까?”
“······.”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릴 때 윤희찬 부장이 나섰다.
“한 가지가 더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명이 원하는 것 말고 상무님이 원하는 것. 저는 우명과 거래를 하는 게 아니라 상무님과 거래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런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양인살이라는 것이 있다.
흉살 중 하나인 이 양인살은 연월일시(年月日時) 중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그 흉함이 다르게 나타난다.
김창훈 상무 같은 경우 양인살이 월지에 가 붙어 있는데, 이건 곱게 표현하면 형제덕이 없고 나쁘게 표현하면
형제를 극하는 살이 붙어 있다고 봐도 좋다.
창훈이 바로 그렇다.
애초에 사주에 화개가 있는 창훈은 양인살이 없었다면 교수나 예술가가 되었을 인물이다.
물론 창훈은 모르겠지만.
오래전 김창훈 상무를 광주에서 처음 보았을 때, 악수를 하며 그의 사주를 계산했었다.
당시에는 봉선동 사업을 따내는 것에 주력했었고 그와 중요한 거래를 할 것도 아니었기에 연희에게도 창훈의
사주에 관해서는 뭐라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 인도 신공항 공사를 같이 하게 되면서 결국 예전의 기억을 꺼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창훈 상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당황한 표정만 봐도 그가 지금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상무님?”
“······.”
“전 의미 없는 싸움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좁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전 세계에서
많은 가치를 창출하면서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이게 다 사장 돈 벌자고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전 그렇습니다. 회사가 돈 많이 벌면 보너스 많
이 줘서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브라이튼에서 맥스 크룰리를 만나며 더욱 구체화되었다.
지역 축구 클럽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경제를 살리고 주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습.
그 모습을 군산에서 보면서 회사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와주십시오.”
“창훈아.”
영훈이 다시 앉자 그가 말했다.
“건설, 엔지니어링, 화학, 기계는 안 됩니다. 우리 그룹의 정신이자 본체니까요. 태양광 역시 안 됩니다.
아무리 지금 어렵다고 하지만 역시 그룹의 장기적인 미래나 다름없으니까요.”
“······.”
“보험과 증권은 그룹을 유지하기 위한 현금흐름 창구입니다. 이것 역시 안 됩니다.”
“우명패션 어떻습니까? Nodri Clare 라는 명품 브랜드를 인수하셨지만 패션업은 기존에 하시던 사업과 많이
다를 겁니다. 매년 변화하는 고객의 취향 변화를 파악해야 하고, 전국에 촘촘하게 퍼진 영업점들과 영업사원들이
발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명패션이 가진 아웃도어, 이너웨어,
SPA 브랜드의 매출은 몇 년간 계속 성장세를 타고 있습니다.”
영훈은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엄청난 결심을 한 듯 제안하고 있지만, 실은 예전부터
우명패션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데 당연히 가장 쓸모없는
것을 던져주는 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고작 흥미로운 정도라고?”
똑똑한 친구다.
영훈이 강주원 의원에게 군산버스터미널을 갖다 붙일 때 억지로 가져가게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끔 자연스럽게 떠 먹여준 모양새였던 걸 알아차리고 바로 그렇게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영훈은 솔직히 김창훈 상무보다 윤희찬 부장이 더 마음에 들었다.
“좋군요.”
“이제 저울의 무게가 평형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까?”
창훈의 말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지만 영훈은 개의치 않았다.
가진 걸 눈앞에서 강탈당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그런 순수한 면이 좋게 보이기도 했다.
“앞에서 웃는 척하고 뒤에서 꿍꿍이 수작을 부리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는 겁니다. 적어도 항복을 할 때는
호주머니 싹 까놓고 손을 들어야 우리도 당신들을 믿지 않겠어요?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난 쓸데없는
싸움하는 거 싫어한다고. 우리 서로 잘 해보자는 말입니다.”
“······.”
“대신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 PM 주관사를 완전히 넘길 수 없어요. 그대가 당장 경영권에 목숨을 건 것 이상으로
우리도 HS 건설의 미래를 이곳에 걸고 있으니까. 단, 외부에 PM 주관을 우명건설로 하는 건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는 PM 주관사를 우명건설로 하고 실질적인 설계와 관리, 업체선정은 HS 건설이 맡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한 셈이니 우리야 나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양보할 필요가 없는데 양보해준다는 건 다른 걸
원한다는 말과 같은 거겠죠?”
“이제는 말이 쉽게 통하는군요.”
“말해보시죠.”
“혹시 여수에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들어간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들어본 적 있습니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영민주택이라고 작은 건설사 하나가 참여할 것 같아요.”
“영민주택이요?”
“네. 우리는 딱히 그 사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이제는 국내 아파트 건설로 아웅다웅하기 싫거든요.”
“그래놓고 봉선동을 잘만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까?”
“하하, 곧 쓰러질 회사 산소호흡기 달고 살아난 거라고 치시죠. 어쨌든 그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에는 관심이
없는데 우명건설도 그렇겠죠?”
“그때 그···.”
“아마 그게 맞을 거예요. 어쨌든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 부디 우명에서 홀랑 다 드시길 바랍니다. 적어도
영민주택은 그 사업에 이름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죠. 거 참, 무서운 분이시네.”
“자꾸 무섭다고 하지 마세요. 전 평화주의자입니다. 단지 맞고 가만히 있으면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바보일
뿐인 거겠죠.”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창훈 상무님은 보니까 표정관리가 잘 안 되시는 것 같습니다. 부디 형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혹시···.”
“걱정하지 말아요. 나만 알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죠?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줄 수 있을지?”
“······.”
김창훈 상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아··· 저 새끼 뭐야?”
“그러게··· 귀신인가? 어떻게 안 거지?”
“혹시 네가··· 아니다.”
“설마 내가 떠들고 다녔겠냐?”
“그건 그래.”
“아직도 연희 씨랑 결혼하려는 마음 변함없는 거냐?”
“하··· 놓아줄란다, 씨이발··· 졸라 억울한데 아까 눈빛 봤지? 그때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무섭더라.”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어.”
“흐흐··· 크크큭···.”
[중국 온라인 최대 플랫폼 하이잔, HS 물산이 소유한 패션브랜드 Nodri Clare 에 5 천억 투자 확정. 30% 지분
취득.]
“어떤가?”
후덕한 살집을 자랑하는 민구상 대표는 곱게 싸온 종이에 손자의 사주를 적어 내밀고 말했다.
“보자~”
“왜? 싫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쪽 같은 선비치고 권세 오래 누리는 사람 보지를 못했어. 예전이야 대쪽같으면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만, 지금은 SNS 다 뭐다 해서 조금만 꼬투리 잡히면 오히려 더 욕하는 세상이거든. 오히려
적당히 흠 있고 적당히 빈틈이 있는 사람이 오래 가는 법이야.”
“대표님.”
“왜? 무섭게 뭘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
“내 눈빛이 무서워?”
“눈화장을 그렇게 해놓고 안 무서워하길 바라는 거야? 무서우라고 한 화장 아니야?”
“그 센스로 장가는 어떻게 갔대?”
“우리 나이 때 장가가려면 센스가 필요했던가? 흰소리 그만하고 뭔데?”
“총선도 끝났고 이제 대선 준비하겠네?”
“당연한 걸 뭘 물어?”
“직접 나가시려우?”
“날 몰라서 묻는 거야? 난 가늘고 길게 가는 게 목표인 사람이야. 5 년 해 먹고 뒷방 늙은이처럼 살아야 하는 건
관심 없어.”
“정말? 그럼 할 수 없고.”
“뭘 할 수 없는데?”
“난 대권에 관심 있으면 도와줄까 했었지.”
“거 이야기를 꺼냈으면 말이라도 해봐. 이대로 집에 가면 궁금해서 잠이라도 자겠어?”
“옥동자 같은 손자 볼 쓰다듬어 주면 다 잊어먹을 텐데?”
“흰소리 그만하고 얼른 속에 있던 거나 꺼내 봐.”
“대권이 뭐야? 최고 권력자 아니야? 예로부터 최고 권력자는 곧 신과 동일하다고 했어. 하늘과 같았다고.
하늘이 곧 뭐야? 태양. 대표님은 양기가 부족해.”
“양기가 부족하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양기가 가득한 사람을 주변에 둬야지. 배우들 반사판 쓰는 게 왜 쓰는 건데? 빛이 부족하니까 반사판으로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거잖아. 반사판이 될 사람. 대표님 옆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직행이야.”
“그게 누군데?”
“대권 도전도 안 할 사람이 뭐가 궁금해?”
“그냥 알아만 두게. 혹시 알아? 알아두면 쓸 데라도 있을지?”
“됐어. 괜히 옆에 뒀다가 봄바람에 싱숭생숭해진 처녀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면 어째?”
“안 그래도 저혈압인데 콩닥거리는 거 나쁘지 않네.”
“어이쿠? 말하는 것 보게?”
“자꾸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털어놔. 복채 줘야 해?”
“그럼? 시커멓게 흐린 하늘에 햇볕 쬐게 해준다는데 공짜로 하려고 하셨어? 우리 민 대표님 이렇게 안
봤는데···.”
“얼마가 필요한데?”
“천만 원.”
“아니, 여기는 십만 단위는 아예 취급을 안 하는 거야? 최하 단위가 백만 원부터인 거지?”
“서민들한테는 복채 30 만 원에 해. 그런데 대한민국의 여당 당 대표한테 30 만 원 받으라고? 우리 신령님 놀라
뒤집어지셔.”
“말은···.”
“내가 가격을 높게 부른 건 그만큼 지위가 있다는 뜻인 거야. 남들은 천만 원 내고 싶어도 내가 안 불러.”
“후··· 씨발···.”
“좋았어. 좋았어!”
그는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의 옆 벽면에는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계획도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3,500 여 세대 대단지 조성이라 다른 곳이었다면 만만치 않았겠지만, 이번 사업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미 여수 일대에는 전부 자신의 사람들이 쫙 깔려있다고 봐야 하니까.
이번 사업으로 다시 한 몫 당기면 이제 자신의 앞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내가 참 우리 강 사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요로코롬 세심할 수가 있는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막말로 요새 집 하나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내 말이 그 말 아닌가.”
“결혼을 하고 싶어도 집이 한두 푼이라야 결혼을 하지요. 젊은 사람들이 집 걱정 안 하고 결혼해야 애도 많이
낳고 인구가 늘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부 부동산입니다, 부동산.”
“뭐, 뭐여!”
“안녕하십니까. 좋은 시간 보내시는데 방해드려 송구스럽지만 잠깐 대화 좀 합시다. 아가씨는 잠깐 나가
있을까?”
“······.”
“아,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전 우명건설 주택사업본부 윤희찬이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지만 부장 달고 있으니
그래도 단장님과 같은 자리에 앉을 자격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그런데 아직 안 나갔니?”
“쌍팔년도 이후로 돈 봉투보다 다른 쪽으로 많이 도움을 주고는 했는데, 이를테면 개발지역 주변 땅을 저렴하게
살 수 있게 해준다거나, 아니면 친척 명의로 청약을 넣으면 당첨을 시켜준다거나···.”
“아~ 그거였어요? 별거 아니네. 이렇게 합시다. 우리도 하나 당첨시켜드릴게. 말했듯이 영민주택 아파트보다는
우명건설 아파트가 훨씬 비싸지. 안 그래요?”
“거참 궁금해 디져불겄네. 도대체 뭐 땀시 그러는지···.”
확실히 아파트 하나 당첨시켜준다는 소리에 오 단장의 목소리가 확 줄었다.
그걸 보고 윤 부장이 짜증이 난다는 듯 쇳소리를 냈다.
평소 김창훈 상무 옆에서 화 한번 내지 않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 씨··· 이유를 왜 알려고 그래요? 단장님이 뭐 경찰이야? 아니면 검찰이야? 주민들 좋고, 시장님 좋은 일
아니에요? 아니 왜 도와준다고 해도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보지?”
“아니··· 찜찜하니까 그냥 궁금시려워서 그러쟤.”
“뭐 어떻게 해 그럼? 하지 말까요? 지금 당장 시장님한테 달려가서 우리 안 한다고 할까요?”
“나야.”
[어. 얘기 잘 됐어?]
“강윤기가 길을 잘 들여놨더라. 주고받는 게 거리낌이 없어. 아파트 하나 주기로 하고 마무리했다. 알아서
정리할 거야.”
[믿을 만해 보여?]
“뇌물 받고 사업자 몰아주려는 인간이 믿을 만하면 얼마나 믿을 만하겠냐? 믿을 만해서 접근한 게 아니라 접근한
뒤에 일을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지.”
[하여간 잘난 척은···.]
“인도에서 아직 연락은 없고?”
[아직··· 최영훈 상무가 허튼소리는 하지 않겠지?]
“그러지 않기를 빌어야지.”
[야, 아까는 일을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라며?]
“그것도 우리가 상대 머리 위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최 상무는 우리 머리 위에서 놀고 있잖아. 그럴
때는 가만히 순종하면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야. 너는 이번 일이 생경할지 모르겠지만 원래 직장인 인생이
그래. 열심히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거.”
[어째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뭐, 네가 듣고 찔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는 언제까지 직장인일 것 같아? 너, 내가 우리 형 제끼면 개국공신이야.]
“아무렴요. 내가 그거 하나 바라보고 주말에도 아빠 기다리는 토끼 같은 자식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
[너, 나한테 잘해야 한다. 알지?]
“아이고, 나만큼 하는 사람 찾아봐. 어디 있나.”
[하하하! 그건 그래.]
“끊자. 나 운전해야 해.”
“퇴근했었어?”
“어? 어··· 형은 언제 왔어?”
“나 방금 왔지. 저녁 먹으려고?”
“응.”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는 거야? 안에서 신나게 통화하던데?”
“들었어?”
“그냥 웃는 소리가 막 들리길래.”
“네, 선녀님.”
[아직 연락 없어?]
“아직 없습니다.”
[그래? 이 능구렁이가 머리를 굴리고 있나 본데? 그러게 진즉 잘했으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 안 하잖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겁니다.”
[회사는? 사고 처리하느라고 돈 좀 썼을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 여수 택지개발 사업 들어가면 만회될 것 같습니다. 선녀님도 걱정하지 마세요.”
[내 땅 앞으로 메인상가 위치하는 거 맞지?]
“그럼요. 설계 완벽하게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시에서 원하는 게 있다고는 해도, 일단 땅 파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는 융통성 있게 인정해주지 않습니까.”
[그래. 언제 민구상 대표한테 연락 올지 모르니까 항상 긴장해야 해. 야당에 한 번 붙었다가 괜히 사고 친 거
귀에 들어가서 고민하고 있는 게 확실하니까, 절대 말실수나 성급하게 들이대는 거 안 돼. 그 사람 신중한
사람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신령님이 강 사장 앞날이 구만리래. 그런데 그놈의 성급한 성격이 꼭 초를 친다고 하니 내 말 꼭 명심하고.]
“예.”
“네, 단장님.”
[목소리 들으니께 이제 일어났능가?]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그게··· 내가 참 죄송시럽네.]
“뭐가 죄송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이구 참··· 이 일을 우짜스까···.]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말을 좀 하세요. 뭔데 그럽니까?”
[아무려도 영민주택은 이번 사업에 선정되기 어려울 것 같으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안하네잉. 나도 어쩔 수가 읎어. 다른 곳도 아니고 우명건설에서 떡 치고 들어오니 이건 뭐 가만히 있는데
호박이 냅다 굴러들어온 상황 아니겠는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온 영훈은 회사에 들어가다 갑자기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커피는 하셨어요?”
“몇 번 인사드린 적은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원개발팀에서 중동,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는 오지환 부장이라고 합니다.”
“기획조정실 최영훈입니다.”
“아, 네···.”
“혹시라도 불편하시다면 앞으로는 절대 상무님의 업무를 외부에서 조력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일단 어떤 이야기인지 먼저 들어보고 판단하면 되겠죠.”
본론은 지금부터이리라.
“상무님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기실 겁니다. 그래서 영국 큐나드 크루즈와 접촉하면서 크루즈선까지
수주를 노려보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상무님은 단순히 몇 척의 수주를 더 받아서
회사의 매출을 올리려는 걸 넘어, 앞으로 군산조선소의 안정적인
운영까지 같이 생각하고 있다고요.”
“사실 원청과 하청은 갑과 을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조선소는 항상 선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그런 수직적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근원적인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해운사를 인수하는
거지요. 상무님은 그중에서도 자동차운반 시장에서 세계 톱 3
안에 드는 니폰유센에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관심이 없었다면 추가 LNG 선 계약 때 선박 인도 시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 동일한 가치의 주식으로
양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이건 꽤 놀랐다.
해당 조건은 비공개였고 심지어 해주조선해양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어째서···?”
“하지만 AEI 에 상당한 자금이 들어간 건 확실합니다. 상무님께서 뭔가 착각을 하고 있으신 건 아닌지요?”
“그러니까 알아보라고 하는 거예요. 대박을 노릴 사람이 아닌데 엄청난 자금이 펀드로 빠져나갔다? 그렇다면
대박을 노리는 게 아닌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렇긴 합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대개 그런 결혼을 한 남자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옛사랑을 만난다든지,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운다든지 하던데.”
“드라마를 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요.”
“그리고 대개 드라마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하더라고요.”
“여보세요?”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님 되십니까?]
“맞습니다.”
[어디십니까?]
“강남역입니다.”
[잘 됐군요. 3 번 출구에서 300 미터 직진하다보면 왼편에 초콜릿이라는 바가 있습니다. 거기서 뵙죠.]
“알겠습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강윤기라고 하는데···.”
“이쪽으로 오시죠.”
“혹시···.”
“영민주택 강 사장?”
“네? 예, 맞습니다.”
“앉아요.”
“놀랐죠?”
“네? 네. 놀랐습니다.”
“우리 윤 부장도 그날 여수에 처음 갔었다고 해요. 그렇게 뽈뽈거리고 돌아다녔으면서 여수는 처음 가봤다니 그건
좀 웃기다니까. 강 사장님.”
“네?”
“여수 그림자도 못 밟아봤던 우리 윤 부장이 굳이 거기까지 간 건 다 당신 때문이야.”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때문이요?”
“그럼 우리가 뭐 먹을 게 있다고 여수까지 가서 그 지랄을 했겠어요? 기껏 똥 싸며 아파트 올려 봐야 분양가
얼마나 나오겠어? 평당 천? 잘하면 천오백?”
“천오백 안 나오지.”
“들었죠? 천오백도 안 나온다네. 그럼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왜 그 지랄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저 때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술 안 좋아해요?”
“아닙니다.”
“흥! 만회는 무슨··· 당신 이미 찍혔어. 그것도 아주 독하게. 건드려도 하필 왜 그 인간을 건드려 가지고는···.
당신 때문에 우리도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당신 때문에 돈도 안 되는 공사 억지로 맡아서 해야 하잖아.”
확인사살이다.
결국 조 시장을 건들면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강윤기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냥 여수에서 손을 떼고 끝난다면 후일은 도모해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수에서 끝나지 않을 경우였다.
앞으로 공공부문 사업공고가 날 때마다 이렇게 잡아먹겠다고 달려들면 지방의 소규모 건설사는 죽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상황인 거다.
“나도 그쪽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나한테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는 없어요. 딱 한 가지만 주의하고
살자고요. 내가 건드려도 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하면서 삽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잔 더 해요.”
“감사합니다.”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에 들어간 비용이 아깝긴 했지만 일단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면 버리는 셈 칠 수
있었다.
“하··· 이제 하나 처리했네.”
“회장님은 뭐라고 해?”
“뭐라고 하긴. 나한테 여수에 자신 모르게 땅 사놨냐고 물어보시더라.”
“크크큭···.”
“아니라고 해도 잘 안 믿으시던데? 하긴 씨발 나라도 못 믿지. 갑자기 돈도 안 되는 여수에 아파트 올린다는 데
꿍꿍이가 있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내가 아버지 설득하려고 어젯밤에 여수시 관계자한테 자료 얻어서 앞으로 10 년 치 개발 계획 공부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그거 계속 읽다 보니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공부를 하는 건지 세뇌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버지한테 땅 안 산 거 증명하려고 무려 30 분을 브
리핑했다.”
“오오··· 회장님이 수긍하셔?”
“아니, 그냥 ‘땅 산 거 숨기느라고 열심히 노력하는구나’하는 딱 그 표정?”
“그래서 결론은 승낙해줬다는 거지?”
“응, 아들이 만흥지구 주변에 땅 산 거 같은 느낌이 들 텐데 어떻게 말려? 미심쩍어하면서도 잘 해보라고
하시더라고. 게다가 우리가 이번 인도 건에서 확실히 점수 벌었잖냐.”
“하긴···.”
“어제 형이 나 선 안 보는 거 가지고 아직도 지원이 못 잊었냐고 하더라. 씨발, 이름은 기억도 못하대?”
“개새끼···.”
“내가 진짜 나중에···.”
“앉아도 되죠?”
“아, 그럼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인도 신공항 건설에 필요한 중장비 계약 업체는··· 우명건설기계로 하기를 원하시죠?”
“맞습니다. 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중장비 계약을 우명건설기계로 하지 않으면 그룹에서 저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럼 우명건설기계를 선정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중장비 생산업체 현진기계는 HS 그룹 계열사도 아니었고 현진기계 김대영 사장은 임지은 사장의 남편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그···.”
“대신 어떤 걸···?”
윤 부장이 물어보자 영훈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우리가 처음에는 만남이 조금 이상했지만 원래 남자들은 어렸을 때 치고받고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저랑 여기 윤 부장도 고등학교 때부터 1, 2, 3 학년 전부 같은 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그러다 이렇게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습니다. 그런 의
미로 오늘 거하게 마셔보는 거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저 역시 나쁘지 않죠. 그런데 두 분은 어렸을 때 왜 그렇게 싸웠습니까?”
“이래도 되는 거야?”
“그럼요.”
“예약했어요.”
“들어가자.”
“어? 어···.”
영훈이 연희의 뒤를 쫓아 들어가니 놀랍게도 여러 명의 점원과 가운데에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맞았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제가 말했던 건요?”
“준비했습니다.”
“잠깐 대화 좀 할게요.”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장난 아니네?”
“영훈 씨가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이런 거 되도록 줄이고 싶은데 그래도 내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이잖아. 그리고 이제 영훈 씨도 이런 거 한 번쯤은 경험해봐도 될 것 같았어. 별로면 그냥
취소하고.”
“아니야. 괜찮아.”
“영훈 씨가 하나씩 골라줘. 나도 영훈 씨 거 골라줄게. 그런데 이거 문제 되는 거 아니지? 영훈 씨가 억지로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그냥 선물해주는 거잖아. 다 내 돈으로.”
“그래. 전부 네 돈이라니까 든든하다.”
“히히··· 더 매력적이지?”
“응.”
“그리고 말이야···.”
“어?”
“아니야.”
“뭔데?”
“나중에 말할게. 오늘은 기분 좋게 고르자.”
연희는 거울에 목걸이를 대보기 시작했고 영훈은 궁금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은 꺼내 봤는데 보좌관들도 그렇고 주변 반응이 다들 안 좋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고. 아이고, 바빠서 이만 끊음세.]
삐-
“대표님! 대표님! 아유! 내가 속 터져 진짜!”
어디 이것뿐인가?
강윤기의 말을 믿고 신도시로 예정된 지역 곳곳에 땅을 사놓은 그녀였다.
안 그래도 땅을 사느라 많은 돈을 쓴 상황에서 남은 돈을 싹 다 레버리지 주식에 투자했다가 원금 손실은
물론이고 빚까지 진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대출과 빌린 돈으로 해결했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땅값이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믿었던 건설업자인 강윤기마저 나가리가 된 상황이니 그녀로서는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미신에 의지하지 않아도 대선은 다르다. 국회의원 선거와는 그 무게감이 달라. 그리고 대선 경선 역시
지금까지 겪어 온 치열함과는 그 궤를 달리해. 그거 견디려면 무신론자도 신을 찾게 된다. 그럼 점쟁이 안
찾을까?”
“날 찾을 거라는 거지요?”
“그냥은 안 찾지. 지금까지 점쟁이와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 단박에 널 찾으려고?”
“그럼요?”
“올해 도수연의 운이 북쪽을 향해 있다.”
“북쪽?”
“그래. 거처를 북한산 인근으로 옮겨라. 그럼 자연스럽게 도수연이가 널 찾게 될 게다.”
“진짜예요?”
“모르지, 개소리인지··· 그냥 그럴 것 같다.”
“어딜 가려고요?”
“할 이야기 다 끝났잖아?”
“한가한 양반이··· 조금 더 말동무라도 해주고 가요.”
“나 바쁘다. 베트남 여자 만나려면 베트남어는 못 해도 영어는 조금 배워둬야 할 게 아니야?”
“설마 영어학원 끊은 거예요?”
“그래.”
“허··· 그 나이 먹고 뭐 하는 꼴이래?”
“나도 처음엔 조금 남사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젊은이들과 같이 배우니 좋더라. 다들 저렇게 사는 것
아니겠냐? 나도 동참해보련다.”
임복희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명우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자신의 차를 세워둔 공용주차장으로 갔다.
임복희를 기다리던 제자가 깜짝 놀라 시동을 걸자 그녀가 차에 타면서 재촉했다.
“삼청동으로 가.”
“갑자기 삼청동으로요?”
“그래. 그리고 너, 서울에서 살 수 있지?”
“네?”
“잔말 말고 너도 이제 서울에 집 구해. 뭐해? 출발 안 하고?”
“아마 자네한테 미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충격 받아서 쓰러졌을 지도 몰라. 로마네꽁띠
좋아하나?”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전에 곁에 있던 아가씨는?”
“한국에 있습니다. 같이 오고 싶었는데 결혼이 코앞이라 한창 바빠서 올 수 없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오케이! 그럼 움직여볼까?”
“내가 스무살 때였나?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서 처음으로 주식을 시작했어. 어려서부터 세계적인 투자자가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난 투자에 관한 서적도 많이 봤었고 많은 전문가로부터 조언도 받았지. 그런데 옆에서 내가
주식투자 하는 걸 본 여동생이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하더
군. 고작 열 다섯 살짜리가 말이야. 웃기지 않나?”
“그럴 수 있죠.”
“그래서 아버지는 여동생에게 내가 받은 돈의 절반을 주셨지. 난 그 아이의 콧대를 눌러주고 실컷 놀려주려고
했었네. 게다가 그 녀석이 산다는 주식을 전해 듣고는 앞에서 한참을 비웃었더랬지. 요즘 자기가 맛있게 먹는
초콜릿이 있는데 그 주식을 사겠다는 거였어. 당연히 난 그 초콜
릿이 뭔지도 몰랐었고. 그런데 반년 뒤에 난 내가 받은 돈의 대부분을 날리고 말았네. 여동생은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말씀을 듣고 있자니 꽤 수익을 올렸을 것 같은데요?”
“맞네. 당시 열 다섯 살인 여동생이 올린 수익이 백만 파운드(한화 약 15 억 원)가 넘었어. 수많은 전문가들의
추천과 전문지식은 여동생의 초콜릿 앞에 무력했지.”
“하하하! 좋은 경험 하셨습니다.”
“그래. 내 생에 첫 패배였고 아직도 쓰린 기억이네. 지금도 여동생은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 나를 부끄럽게
하니까. 좋아. 때로는 충분한 근거 없는 직감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어.”
“1 년 뒤,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그래야 할 거네. 내 선택은 이곳 브라이튼 지역 주민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기도 하니까.”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현재 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견학중인 저희 직원들 말로는 8 월부터 가능할 것 같다고 알려왔습니다. 생각보다
선내 직원들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줘서 기술적으로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8 월이라... 그러지. 대신 다른 회사보다 기간을 여유롭게 주니 선박 인도는 기한 내에 이루어져야 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상 어느 정도 기한이 늦어질 수 있다는 대답이었지만 어차피 시도할 때부터 각오한 바였다.
선주가 이렇게 지원해주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크루즈선 건조 기술을 완벽히 마스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자세한 계약조건은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 그리고 정확한 결혼식 날짜는 어떻게 되나? 우리 딸이 한국을
궁금해하는데 마침 ATS 콘서트가 코앞이라고 하더군.”
“정말 오시려구요?”
“내가 거짓말을 하겠나?”
“오시면 영광입니다. 청첩장 영어로 찍어 보내드리기로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결혼식까지 참석하게 되니 기대가 크네.”
“아닙니다. 더 빨리 시간을 냈어야 했는데 회사 일로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뵙게 됐네요. 속으로 괘씸하다고
생각하셨죠?”
천보윤 의원은 먹이를 찾는 매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영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현명한 생각입니다만 그거 아십니까? 무진중공업이 차기 잠수함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크루즈선
건조로 인한 해주조선해양의 부실한 재무를 약점 잡아 이번 사업을 따내겠다는 의도 같은데...”
“그런가요?”
“무진중공업을 비롯해 현재 HS 그룹의 급격한 성장을 경계하며 보는 기업과 정치인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조재민
시장과 그대들이 아주 깊게 연결된 정황이 이번에 나오기도 했고... 지금이야 수면 아래로 들어갔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지요.”
“그걸 의원님께서 막아주시겠다는 겁니까?”
“하하, 전 아직 능력이 없습니다.”
“어? 지금...”
“힘이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진짜 도움을 원하신다면 힘이 없을 때도 일을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세요. 조재민
시장은 안 될 것 같은 일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다음에 진지하게 앞날을 고민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만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6 월의 첫 토요일.
신라호텔 입구에는 여느 때처럼 최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쌓인 울분이 커서인지 결혼식 날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형님 왔어요? 형님은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네요. 마음고생이 심하신 것 같은데 이제 편히 내려놓고 쉬시는게
어때요?”
“말하는거 보니까 옛날에 어떻게 집에서 살림만 했나 몰라? 답답해서 어떻게 견뎠어?”
“젊었을 땐 전업주부가 꿈이었는데 막상 소질은 경영에 있었나 봐요. 안에 연희 아빠 있으니까 가서 인사
나누세요.”
더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는 투의 송 회장 태도에 임지은 전 사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뒤를 이어
줄줄이 송 회장에게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반면 신부석에 대기하고 있는 연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못 긴장한 채 친구들을 반기고
있었다.
한동안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연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예쁘네.”
“행복해라.”
“고마워.”
“사람 많네.”
“그렇지?”
“들리는 말로는 어느 대학 나왔는지, 어디 출신인지도 전부 비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또래 사람은 없네.”
“내가 열 살 때였나? 하여튼 초등학교 때일 거야. 작은 고모 결혼식이었는데 당시 결혼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전부 우리 아버지에게 저런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해대곤 했는데, 나이도 많은
어르신들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우리 아버지한테 고개를 숙이고
잘 보이려고 하더라고. 그 어린 나이에도 저들이 어떤 마음인지 대략 짐작이 갔었어.”
“오~ 권력 DNA 인가? 조기교육이 이래서 중요한 거라니까.”
“맞아. 당시 큰아버지가 떡하니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기가막히게 우리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었어.”
“아... 큰아버지... 그랬겠네. 큰아버지가 우명식품 가지고 독립했었지?”
“말이 독립이지, 거의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큰아버지가 쫓겨나기 전인데도 사람들은
귀신같이 누가 권력을 잡을지 알았던 것 같아. 지금처럼...”
창훈의 말처럼 턱시도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최영훈 상무의 앞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한 하객들의 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HS 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청업체 대표는 물론이고 타 기업 핵심 관계자와 정치인들까지 최영훈
상무에게 전부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창훈이 어렵게 발걸음을 떼고 다가갔다.
몇 명의 사람이 최 상무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난 뒤 그의 차례가 되자 영훈의 조금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와서 놀랐습니까?”
“조금은요. 일은 일이고 이건 사적인 거라서 안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안 좋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내 짝은 또 찾으면 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축의금은 남자 쪽에 낼 테니까 나중에 그만큼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 이상 보답하도록 하죠.”
“그럼...”
“축하해요.”
“아, 오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천보윤 의원은 이렇듯 해주조선해양에게 민감한 사안을 툭 던져줘 놓고 이제 자신이 해결해보겠다고 자신했다.
아직 해주조선해양에서 알아낸 정보가 없었기에 그가 진실로 무진중공업에서 알아낸 내용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쨌든 결론은 계속 인연을 이어가 보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조재민 시장의 입김이나 칭찬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 조재민 시장의 성장을 보고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여~ 축하해!”
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몸이 불편한 임지훈 사장은 울먹이는 딸을 보며 용서를 구했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항으로 떠나는 차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대하게 결혼식을 끝내고 약 열흘 정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영훈 커플이 한국
도착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임창호 회장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산 백병원이었다.
겨우 숨을 이어가는 임창호 회장의 손을 연희가 꼬옥 쥐어주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임창호 회장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안 좋은 일은 연이어 겹친다고 했던가?
3 개월 뒤 연희의 아버지인 임지훈 전 사장 역시 세상을 떠났다.
HS 그룹은 연이은 악재에 더이상 회사를 확장하기보단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고 그렇게 시간을 흘렀다.
영훈과 연희의 결혼 1 주년의 시간은 그렇게 훌쩍 다가왔다.
작년 회장으로 취임하며 발생한 경영권 분쟁을 획기적으로 방어하며 좋은 평판을 올렸지만 어쨌거나 그 때문에
주가가 떨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그룹에 안정적으로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현진관광이 날아간 상황에서 박살 난 해양 플랜트 경기가 도무지
돌아올 줄 몰랐다.
여기서 문제는 기존에 발주한 업체들이 도산하며 현진중공업에서 생산 중인 설비가 공중에 붕 뜨는 최악의
경우까지 겹치고 말았다.
작년의 좋던 분위기가 올해 접어들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받아야 할 설비대금만 1 조 6 천억이 넘었음에도 현진중공업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위기에 몰렸다.
“후···.”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
이대준 전무는 그의 눈치를 흘깃 보다 어렵사리 말했다.
“그럼 무슨 방법 있습니까?”
“일단 전 직원이 허리띠 졸라서 최대한 비용을 줄여보겠습니다만, 주 채권 은행과 대화는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후··· 해주조선해양 쪽은 어때요?”
“해주조선해양은 작년 HS 그룹이 인수하기 전부터 해양사업부 공장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HS 그룹이 인수한
이후에도 해양사업부 공장은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예 해양플랜트 사업은 손을 놓은 모양새입니다.”
“미얀마 가스전개발사업에 진출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작년 중순 즈음해서 미얀마 가스전개발사업에 EPCIC(설계와 자재 조달, 설비 제작, 설치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회사가 도맡는 계약)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쏙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아예 크루즈선으로 방향을 턴해서 해양사업부 대신 크루즈선을
차기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미친놈들··· 손댈 게 따로 있지···.”
작년 해주조선해양이 크루즈선을 수주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현진중공업 임직원 누구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워크아웃을 갓 졸업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회사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크루즈선 수주 기사가 공시로 뜨고 해주조선해양 주가가 폭락할 때 김태민 회장은 그걸 보고 배를
잡고 웃었던 게 고작 1 년도 채 되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는데, 이대준 전무는 침중한 얼굴로 다른 의견을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해주조선해양의 상태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해양사업부 공장을 닫고
그 인원을 전부 조선사업부로 돌리면서 생산량을 올렸습니다. 또 텅 빌 거라고 생각했던 군산조선소가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자동차 운반선이나 LNG 선 추가 건조로 자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큐나드 크루즈에서 선금을 20%나 주면서 초기 프로젝트는
손해를 보면서 기술을 확보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 수익이 날 수도 있다는 분위기까지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선박을 언제 인도할지가 관건이고 그걸 언제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데?”
“그게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확신에 차 있다는 말이 돌아서···.”
“전무님도 참··· 순진한 거예요? 아니면 답답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일단 알겠어요. 가보세요.”
현진관광이 가진 호텔과 현금동원력을 생각하면 그녀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는 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한주연과 어느 순간부터 거리가 생긴 이후 태민은 그녀의 마음을 붙잡고자 애써 노력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런
태민에게 다가서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진 둘은 이제는 거의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다른 남자를 만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태민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뿌리친 그녀에게 배신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으로 작년 연말부터 군산조선소에서 시작된 크루즈선 건조에 투입된 근로자들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괜히 구단주가 돈이 없다는 핑계로 프로젝트를 파투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현장에 한가득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브라이튼의 승격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이 송유철 사장이라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확실한 겁니까?”
“야당 국방위원회 의원이 해주조선해양은 재무적으로 건실하지 않고 가격적으로 메리트가 없다면서 공개경쟁입찰을
진행해야 한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합니다. 여당에서는 굳이 그걸 거부하면서 우리로 진행해야 할 부담을 질
필요가 없을 테지요.”
“무진중공업이 뛰어들겠네요?”
“그럴 겁니다. 1 차 잠수함 사업은 그쪽에서 했으니까요. 작년 이맘때 상무님이 우려했던 게 정확히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흐음··· 일단 지켜보시죠.”
“알겠습니다.”
“자동차 운반선은 언제 인도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석달 안에 인도 가능합니다. 니폰유센에 인도될 LNG 선은 올해 말은 넘기지 않을 겁니다. 자동차 운반선이
인도되면서 확보되는 자금을 생각하면···.”
“여보세요?”
[상무님, 저 오지환 부장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괜찮아요.”
[니폰유센이 다이와 은행에 천억 엔 규모 차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천억 엔이요?”
무려 1 조 원 규모다.
오지환 부장에게 전화를 받고 정확히 이틀 후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한 영훈과 오지환 부장은 곧장 도쿄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에서 공항을 거쳐 일본에 오기까지 오 부장은 일견 여유롭게 보이면서도 단단히 각오를 다진 모습으로 마치
눈에서 레이저를 발산하는 듯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여유를 가질 때에도 그는 영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살피며 목이 마른 건 아닌지, 어디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체크하는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까?
퉁퉁한 살집 때문인지 그리 덥지 않음에도 한 손에 손수건을 들고 연신 땀을 닦는 모습을 보면 만사 다 귀찮아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막상 그와 대화를 나눠보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고 있지 않았다.
호텔을 잡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짐을 풀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니폰유센의 동향을 체크했고 심지어 방의 청소상태까지 꼼꼼히 살피기까지 했다.
물론 영훈으로서는 그런 그의 행동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승진을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성공시키려는 모습이니 좋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재 니폰유센의 채권 상당수를 리소나 은행... 아니, 노무라 홀딩스에서 보유하고 있습니다. 노무라 홀딩스는
투자 은행과 증권사를 보유한 지주회사이구요.”
“원래부터 밀접한 사이였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그럼 천억 엔 대출은 문제없을 거라는 뜻인가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현지에서도 니폰유센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기존에 가진 부채도 상당하기 때문에 그 큰
자금을 과연 대출해줄 수 있을지는... 일단 우츠가 루미와 약속을 잡을까요?”
“아니요. 우리는 그녀를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곳 저곳에 정신없이 전화를 돌리던 그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영훈에게 진행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좋네요. 움직입시다.”
“알겠습니다.”
“마쓰다 나오키입니다.”
“HS 그룹 최영훈입니다.”
“니폰유센의 재정상황이 상당히 악화됐습니다. 니폰유센은 우리에게 천억 엔 대출을 요청했고 우리는 내부에서 이
대출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 논의중이죠. 그런데 내부회의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니폰유센에게 천억
엔 대출이 진행된 이후 과연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채병진 상무가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요?”
“우리는 니폰유센의 이번 위기가 해운 환경의 변화로 인한 하락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재 니폰유센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가야 오키노리의 경영능력 때문에 위기를 자처한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우리는
니폰유센이 충분히 저력 있는 회사라고 평가하고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고 보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경영자와 충분한 자본이 투입된다면 말이에요.”
“그게 무진중공업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빌려준 돈에 충분한 이자를 더해 돌려받는데 주력할 뿐이에요. 하지만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제안을 몇 곳의 해운사에 전달했으니까요. 적정한 가격이 아니라면 욕심을 낸다고
해도 얻기 어려울 겁니다.”
“방법은요?”
“노무라 홀딩스가 보유한 니폰유센의 주식 27%를 매각할 예정입니다. 또한, 추가 대출은 니폰유센 주식을
타사에서 매입한 이후 이루어질 것이고요.”
“27%만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분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대 회사들이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리소나 은행 도쿄지부장에게 관심이 식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걸 완전히 믿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경쟁이 붙으니까 관심이 식었다···. 그럼 경쟁이 없었으면 홀랑 먹었을 거라는 말이고, 지금까지 매물로 나와
있지 않았음에도 계속 노리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맞습니다.”
“그럼 니폰유센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걸 현진물산은 알고 있었고 우리는 모르고 있었네?”
문 사장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니, 어젯밤 채 상무에게 전화를 받은 직후부터 회장님이 노여워할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침착하게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내놨다.
“니폰유센의 주력 사업인 해상 자동차 운반은 경기에 둔감한 분야인 데다가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상당한 점유율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니폰유센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흔들리고 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럼 현진물산은 귀신이 알려준 건가? 우리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고?”
“······.”
“그래서 그 마쓰다인가 마쎄이인가 하는 걔는 얼마를 불렀어?”
“니폰유센 지분 27%를 3 백억 엔에 넘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머지는?”
“대주주이자 니폰유센 회장인 야마시타 료타가 가진 지분은 21%라서 회사 경영권을 뺏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호지분은?”
“미쓰비시 UFJ 은행에서 가진 11%는 노무라 홀딩스에서 충분히 컨트롤 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총 38%네? 믿을 수 있는 이야기야?”
“믿을 수 없다고 가정해봐도 니폰유센 지분 27%를 3 천억에 확보하는 건 상당히 좋은 기회입니다.”
“언제고 니폰유센을 노릴 수도 있고. 그렇지?”
“맞습니다.”
“3 천억 좋고, 회사 나쁘지 않네. 다 좋아. 다 좋은데 현진물산의 그 어린놈이 여기서 손 털겠다는 거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놈 이름이 뭐였더라?”
“최영훈 상무입니다.”
“작년에 송 회장 딸이랑 결혼한 놈이지?”
“맞습니다.”
문태범 사장은 작년 가을, 정호균 회장이 군산조선소를 둘러싼 내막을 여당 중진의원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허탈해하고 화를 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임원들은 그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었다.
이제 마흔도 채 안 된 어린놈에게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었다는 임직원들이 손 한번 못 쓰고 당해버렸으니 이런
창피가 어디 있을까.
그 뒤로 정 회장은 아들인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을 경영수업을 더 시켜야 한다며 한동안 외부에서 초빙한
교수까지 붙이기도 했었다.
“맞습니다.”
“흐음···.”
“그게···.”
“지금까지 조용히 짝짝꿍을 하고 있다가 이제와서 멤버 하나를 끼워주니까 현진물산이 열 받아서 판을 엎는다? 야,
문 사장.”
“네?”
“너 같으면 그 상황에 신사적으로 못 하겠다고 그냥 나오겠냐?”
“아마 멱살 잡고 흔들어댔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멱살만 잡는 게 아니라 죽통을 돌리지 않겠어? 그럼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HS 물산 쪽에서 먼저 리소나 은행에게 접근한 게 맞다면 니폰유센이 아니라 반드시 리소나 은행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판에 멤버 하나가 끼어들었고, 현진의 그 어린놈은 일단 판을 엎고 나왔단 말이야.
그치?”
“맞습니다. 심지어 얼마에 팔겠다는 가격을 듣지도 않고 그냥 나갔다고 합니다.”
“가격을 안 들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채병진 상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마쓰다 나오키는 지분 27%에 대한 가격을 따로 이야기해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쓰다 나오키도 상당히 당혹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뭐야, 진짜 날로 먹으려고 한 거야? 어떻게?”
“······.”
“현진물산이 니폰유센과 맺은 계약이 뭐가 있지?”
“작년에 평택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중고차를 배달시킨 적이 있지만, 그것보단 해주조선해양에서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을 수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니폰유센에 관심을 가진 건가?”
“그랬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에 사람 보내고··· 아니다. 문 사장, 네가 가. 가서 채병진이 데리고 네가 현장에서 컨트롤 해.”
“알겠습니다.”
정호균 회장은 두 눈을 부릅뜨며 문태범 사장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차분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입구에서 꼬치꼬치 묻지도 않고 일단 커다란 거실로 안내했다.
“맞습니다.”
“내 생각이 맞았군요. HS 물산에서 왔다는 말에 바로 그 생각이 났더랍니다. 차는 뭘 드시겠어요?”
“차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야마시타 료타 씨는 안 계신가요?”
“우리 그이는 지금 몸이 안 좋아 안에서 쉬고 계시답니다. 다른 분들을 만날 형편이 되지 않아요. 그이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너무 죄송합니다.”
우리 그이···.
오지환 부장이 통역을 제대로 한 거라면 이 젊은 여자는 나이가 여든도 넘었다는 야마시타 료타의 부인이 되는
거였다.
이걸 부럽다고 해야 하나? 망측하다고 해야 하나?
“그냥 갈까요?”
“네. 이제 서른셋입니다.”
“아··· 그렇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앞으로 니폰유센그룹과 HS 그룹의 미래를 위해 회장님과 사모님께
해마다 선물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선물이요?”
“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HS 그룹이 작년에 Nodri Clare 라는 명품 브랜드를 인수했습니다. 그래서 VIP
분들께 선물을 보내드리고는 하는데 니폰유센그룹의 총수 내외분께 선물을 안 보내드릴 수 있겠습니까. 특히
사모님이 젊고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Nodri Clare 의 목걸이 세트가
분명 잘 어울리실 겁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희의 성의니까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아, 회장님의 생신은 알고 있으니 사모님의 생년월일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사실 태어난 연도는 선물을 주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녀는 Nodri Clare 의 목걸이 세트에 흥분해서
자신의 생년월일을 다 말해주었다.
오지환 부장은 영문도 모르고 일단 남의 여자 생년월일부터 받아 적는데 영훈은 그가 적는 걸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혹시 사위분인 가야 오키노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성실하고 좋은 남자라고 생각해요.”
“그게 다인가요?”
사시나무 떨듯이 손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오지환 부장은 그녀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사, 상무님?”
“원하는 게 뭔가요?”
“니폰유센이 리소나 은행에게 천억 엔 대출을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회사가 많이 어려운 상황이라고요.”
“맞아요. 회사가 했던 투자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들어서···.”
“비슷하기는 한데, 제가 사모님이 알고 있는 내용과 조금 다른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우츠가 루미라고 노무라 증권의 AEI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있습니다. 그리고 AEI 펀드는 니폰유센이
투자한 곳이죠.”
“그런데요?”
“가야 오키노리가 왜 AEI 펀드에 회사 자금을 넣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그게 정말인가요?”
“거짓일 거라고 믿고 싶다면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이니까 거짓은 아니겠죠. 웃기네요. 나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다면 다른 여자와도 불륜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이대로 가는 건가요?”
“당신은 지금 흥분해서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주세요.”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라는 거죠?”
“글쎄요. 그거야 당신이 알지 않겠습니까? 우린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야마시타 료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가정을 얼마나 지키고 싶은지, 가야 오키노리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만약 정리가 된다면요?”
“그럼 원하는 게 생기겠죠.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는 도쿄 하얏트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오 부장은 최영훈 상무가 그녀를 왜 똑똑한 여자라고 확신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 그 여자가 만약 감쪽같이 연기를 한다면 상무님이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 앞에서 거짓말로 날 속여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집으로 부를까 이곳으로 올까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여기는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괜한 염려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알게 되겠죠.”
“······.”
“남편은 위독해요. 당뇨 합병증이 심하게 와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예요. 당신도 내가 돈 때문에
야마시타 료타와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나요?”
“아닙니까?”
“후후··· 당신은 참 직설적이군요? 맞아요. 여자의 행복 따위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됐죠. 하아···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하지만 그녀는 아주 순수하게 이번 사태가 끝나고 자신이 가져갈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전문적이고 똑똑한 임원들을 움직일 정치력이 부족했으니까.
“반갑습니다. HS 물산 최영훈입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에토 세이치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는 나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글쎄요··· 니폰유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맞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분을 무진중공업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3 백억 엔에 말이죠. 그 이상이라면 당신들에게 넘길
의향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후··· 당신은 정말 정도를 모르는군요. 펀드매니저와 불륜을 저질렀던 것도 모자라 노무라 홀딩스 사장님의
사모님까지 건드렸던 겁니까?”
“물! 물 가져와!”
“나가 있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는 예전부터 가야 오키노리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펀드에 회사 자금을 투자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말이죠.”
“그래서 내 와이프와 그 짓을 하고 다니는 걸 알았다, 그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그대로 가겠다는 건가요?”
“서로 입장 차이가 명확한데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죠. 아마 고생 좀 하실 겁니다.”
“여긴 한국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겁니까?”
“다음 달이 되면 아마 생각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 니폰유센에 투자했던 지분이 당장 쓰레기가 되게 생겼어. 난 그걸
보면서도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게 됐고. 내 치부를 한국의 HS 그룹이 다 알고 있으니 말이야. 차라리 일본
회사였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완전히 병신이 된
기분이야. 이런 젠장! 내가 여기서 널 죽인다고 해도 분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아.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지.”
“제가 어,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난 손해 보고 못 사는 사람이야. 네가 가진 모든 거, 전부 나에게 가져와. 개인 명의로 된 부동산과 자동차,
채권, 주식 싹 다 나에게 바쳐. 그리고 네 펀드매니저인 애인까지.”
“니폰유센이 갑자기 휘청인 이유가 정확히 뭐야? 우리가 모르는 이슈가 있었던 거야?”
“일설에 의하면 니폰유센이 회사 자금을 펀드에 투자했다가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게 다야? 손해를 얼마나 보면 주 채권은행에서 지분을 팔아치우려고 해? 넌 그런 경우 봤냐?”
월 매출 천억.
미친 듯이 성장하는 Nodri Clare 의 현 매출이었고 지금도 분기마다 성장률이 10%를 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명품 브랜드 로드샵이 밀집되어있는 이곳에 Nodri Clare 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땅값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중개법인 사무실에서 설명을 듣고 직접 와서 보니 생각보다 별로였다.
건물도 연식이 좀 되어서 유럽식의 화려한 양식은 되레 촌스럽게 보였는데, 아무래도 매입하게 되면 리모델링을
싹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8 백억이요?”
아무리 전월 매출이 천억을 돌파했다고는 하지만 로드샵 하나에 800 억이라는 말에 연희도 내심 헉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건물 매입이 아니라 그냥 임대로 들어갈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축하는 뭐···.”
“난 로드샵 좀 보러 왔어.”
“매장 하나 내려고?”
“응.”
“좋은 데 소개해줘?”
“좋은 데라니? 언니가 좋은 데를 어떻게 알아?”
“들었거든. 본사 실적이 안 좋은 브랜드 하나가 한국 로드샵 매장을 뺀다는 소리가 있어서. 임대 들어가기
좋을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뚱한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던 연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지만, 중개법인의 대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마치 당연한 선택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희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고는 송은진에게 말했다.
“밥 먹었어요?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그럼 그럴까?”
“갈까요?”
연희는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근처에서 식사하라며 10 만 원짜리 수표를 쥐여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 지리는 그녀가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바로 코앞에 무척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방금 도수연 의원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현 행자부장관의 비리의혹을 터뜨렸습니다.”
“어떻게 됐어?”
“도수연 의원이 전용두 행자부장관의 교수시절 논문 표절과 조교 갑질 행위를 폭로한 건데 제대로 걸린 것
같습니다. 당시 논문에 같이 참여했을 때 제자와 나눴던 카톡대화가 그대로 실렸습니다. 언어폭력 수준이
조금··· 심한 편이라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허··· 미치겠네.”
“그래도 장관이니 전용두 장관이 물러나면 쉽게 누그러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르는 소리! 대선이 1 년도 안 남았어. 선거는 원래 분위기 싸움이고 프레임 싸움이야. 정권의 도덕성과
인사검증을 제대로 물었어. 그리고 시기가 안 좋아.”
“시기가 안 좋다니요?”
“말 그대로 1 년도 안 남았는데 이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야. 만약 손에 패가 하나밖에 없다면 이걸
지금 터뜨리겠어?”
“이해합니다.”
“내가 잘 보는 건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저러니까 저것밖에 못 하지’하는 못된 생각도 들어.
흐음··· 쓸데없는 이야기지?”
“아닙니다.”
“아니긴··· 나보다 더 나이 든 사람처럼 생각하는 게 우리 최 서방 아니야? 일본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고,
천보윤 의원이 최 상무를 한번 만나고 싶대.”
그런데 그 은밀하고 짜릿했던 관계를 다른 사람, 그것도 외국의 사람이 알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망한 건 가야 오키노리지 그녀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아마 그와의 불륜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지 않았다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얻어터져서 본래의 남자다운 얼굴이 다 사라진 가야 오키노리는 나무를 손질하는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후쿠하라는 그런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나무를 손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야 오키노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던 그녀였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남보다도 더한 태도로 대하는 모습에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정치인과의 만남은 항상 주의를 요하는 법이었기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보유한 호텔에서 천보윤 의원과
마주했다.
야당의 도수연 의원이 꽤 강펀치를 날려 곤란하다던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자네 뭘 알고 있는 건가?”
“의원님께서 만약 진짜로 대선을 꿈꾸신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내분과 헤어지십시오.”
“그건 그렇겠지.”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과연 의원님이 앞으로도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의원직을
유지하지도 못한다면 그건 최악의 상황인 것이고, 자칫 HS 그룹의 브랜드 가치까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의원님이 이상한 추문에 휘말리고 우리가 의
원님을 보좌하는 모양새라면 굉장히 골치 아프겠죠.”
“······.”
“그러니 의원님에 대한 뒷조사를 안 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이해하시죠?”
“이해는 되지만 기분은 나쁘군.”
“기분 나빠하실 것 없습니다. 이것 참 정치인들 하나같이 자신들은 누구 뒷조사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막상 누가 자신 뒷조사를 한다고 하면 펄쩍 뛰더군요.”
“아까 들었지?”
“네.”
“최 상무 말이 사실이야?”
“확인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 벌써 오셨어요?”
“너 잠깐 나 좀 보자.”
“네.”
역시나 이번에도 이은정 보좌관은 조금만 시동이 걸렸다 하면 이렇게 수다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일은 컴퓨터처럼 칼 같은데 입은 모터가 달렸다고 할까?
게다가 겁도 없어서 국회의원인 자신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하는 여자였다.
“너 잘할 수 있는 거야?”
“나도 오래 생각한 거야. 많이 준비하기도 했고.”
“후··· 그래, 네가 나한테 돈을 빌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직원들 시켜
알아보니까 강명저축은행이 괜찮은 매물이라고 하더라. 인수자금은 1,300 억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하네.
괜찮겠니?”
“500 억 정도 부족하긴 한데 그건 마련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사채 쓰는 건 아니고?”
“내가 사채업자인데 그런 고금리를 쓰겠어? 내가 가진 HS 물산 지분이랑 이 건물 내놓으면 대충 맞기는 할
거야.”
“최 상무 꼭 필요하니?”
“당연하지. 강명저축은행이 조치연 영감 것인 줄은 알지?”
“알지.”
“난 그 영감이 신줏단지처럼 끼고 도는 저축은행 내놓을 때 느낌이 싸했어. 좋은 기회인데 내가 먹어도 안 체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최 서방 의견이면 내가 한번 밀어보려고.”
“최 상무 바쁜데···.”
“거 참 비싸게 구네. 이럴 거야?”
“알았어. 얘기해놓을게. 그런데 넌 언제 애 가질 거니?”
“쓸데없이 애 타령은···.”
“아우··· 죽겠다.”
“콩나물국 괜찮지?”
“응, 맛있네.”
“여기 새로 생긴 반찬가게에서 사 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연세가 좀 있어서 그런가 음식 솜씨가 괜찮은 것 같아.
내가 결혼했다고 하니까 새댁이라면서 양념깻잎이랑 달래무침 많이 주셨어.”
“으음··· 그래?”
“어제 내가 송은진 실장이랑 만났던 얘기 했었나? 아니 청담동에 로드샵 보러 갔다가···.”
“하남 신도시?”
“어. 거기에 HS 건설이 땅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네한테 팔라고 하는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거기가 백화점
들어갈 자리인가?’하는 생각만 들어. 못해도 수천억 들어갈 텐데···. 오빠도 이상하지?”
“신도시 규모가 어느 정돈데?”
“그렇게 안 커. 내가 알아보니까 대략 3 만 가구 정도?”
“크지는 않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무슨 정보가 있나?”
“왜? 팔려니까 아까워서?”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모르겠는데, 괜히 팔라고 하니까 뭐가 숨겨진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 내가 옛날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뭔데?”
“땅은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 땅을 팔라는 사람이 나타난대. 그때 절대 땅을 팔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언제 팔아?”
“어! 조카사위!”
“안녕하셨어요?”
“너무 안녕해서 탈이지. HS 그룹은 조카사위 없으면 안 돌아간다며?”
“하하, 아니에요.”
“아니긴··· 내가 누님한테 조카사위 빌린다고 얼마나 눈총을 받았는데. 사위 유세가 장난이 아니야. 어디 나
아니었으면 이런 사위 얻을 수나 있었겠어? 안 그래?”
“하하하! 맞습니다.”
“연희하고는 싸우고 그러지 않지?”
“네, 안 싸워요.”
“그래, 결혼하면 금슬 좋은 게 최고야. 집안에 분란이 있으면 밖에서 일이 손에 안 잡히거든.”
“네···.”
간접적으로 본인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토로한 거지만 차마 맞장구를 칠 수 없어서 영훈은 멋쩍게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송 사장이 사소한 개인 일상을 이야기하다 본론을 꺼냈다.
“누구세요?”
“예! 명일금융 송병창입니다!”
“조카사위, 와서 인사드려.”
“조카사위? 조카가 결혼했는데 인사도 안 했냐?”
“아이고 어르신, 제 결혼도 아니고 조카 결혼을 어떻게 알립니까.”
“알리면 내가 축의금 좀 안 줬을까.”
“아이고 어르신, 살 날이 창창한 젊은이한테 점쟁이가 뭡니까? 우리 조카사위 시선이 조금... 분위기가 있기는
한데, 점쟁이는 너무 가셨습니다.”
영훈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감탄했다.
오래된 생강이 맵다고 했던가?
아니면 천부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것인가?
영훈은 애초부터 저축은행 인수를 시작으로 금융권의 큰 손이 되겠다는 송 사장의 포부에 그의 꿈처럼 크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송 사장의 그릇은 그 포부를 담을 만큼 크지 않다고 보았으니까.
그런데 조치연은 단박에 그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러시더니... 저, 어르신 밑에서 고생하고 나서 이제 명동에서 방귀 좀 뀝니다.”
“알아. 나는 무슨 눈 감고, 귀 닫고 사는 줄 아나? 너 내보낼 때 내 욕 많이 했지?”
“아유~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욕 엄청시레 했을 게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잘 됐지?”
“예, 어르신 말씀 듣고 열심히 해서 잘 이뤄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으니 내보낸 거다. 난 너를 쓸 수 있는 만큼 잘 썼고 너도 배울 만큼 배웠으니 서로 아쉬울 게
없었던 게야.”
“그래도 그때 너무 급하게 내보내셨습니다.”
“시끄러워. 계속 있었으면 나쁜 버릇이나 들었겠지. 네가 나보다 딱 하나 나은 게 있다면 돈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는 거다. 그런데 그 장점 하나 마저 날 닮아서 무뎌지면 넌 동네 일수방 운영하기도 힘들었을 게야.”
“...”
“거 봐. 배울 게 많잖아.”
“배울 게 많다구요?”
“잘 들어라, 어린놈아. 저축은행이 비록 1 금융권보다 덩치는 작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오히려 저축은행이나 3
금융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사람 장사라는 말입니까?”
“병창이보다 이해는 빠르구나. 돈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보면 돈이 보이는 거고 사람을
관리하면 돈을 관리하는 게야. 그 이야기는 뭐겠어? 저축은행은 1 금융권이 품지 못할 사람을 관리하게 되는 거란
말이다. 이해했나?”
“네, 이해했습니다.”
“요... 요 머리는 이해가 되는데 그 원리를 체득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네
녀석은 머리는 모르고 있으면서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구나.”
“제가요?”
“그럼. 알고 있으니까 그런 눈빛을 하고 있지.”
“제 눈빛이 그렇게 특이한가요?”
그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훈의 전신을 훑었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약자와 강자를 구분해내. 그래서 날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움츠러든다.
내가 자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걸 알거든.”
“잘 모르겠습니다.”
“흥! 그런 얕은 거짓말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얼른 속에 있는 걸 꺼내 봐. 안 그러면 여기 이놈하고 같이
내쫓아 버릴 테다!”
“그런가요?”
“검사는 아니고 그럼 점쟁이인데 점쟁이가 아니라는 게 더 놀랍네. 이래서 세상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나?
하여튼 내 밑에서 딱 10 년만 일해. 그럼 대한민국을 네 손으로 주무를 수 있을 게다.”
송 사장이 깜짝 놀란다.
“그래. 내 밑에서 똥싼 거 치운다고 그 고생하다가 홀로 나와서 멋지게 일어섰으니 하나쯤 챙겨주려고 그런다.
그래도 헐값에는 못 넘긴다. 얼마나 생각하고 왔어?”
“1,300 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50 억 더 얹어라. 애초에 팔 이유가 없는 물건, 가져갈 수 있는 옵션값이라고 생각해.”
50 억.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송 사장은 여기서 조치연의 계산법을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니까.
송병창 사장은 아쉬움이 역력했지만 더는 자리에서 뭉개지 못하고 영훈에게 살짝 윙크하고는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다 나오라는 뜻이다.
송 사장이 나가고 나서 조치연이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희주가 고등학교 때 친구를 하나 데리고 왔었다. 난 한눈에 그 아이가 가난하고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았지.
그리고 그 아이가 희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았다. 내가 그랬거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 친구를 사귈
때도 부자인 친구만 골라서 사귀려 했었다. 그래서 단박에
알아보았지. 나와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희주에게 뭐라고 했을 것 같으냐?”
“그 친구와 만나지 말라고 하셨겠죠.”
“맞았다. 그랬지. 그때 처음으로 희주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고 말이야. 난 거머리
같은 친구를 내 딸 옆에 붙여둘 수 없었어.”
“혹시 그 친구가 남자였습니까?”
“여자였다.”
“성격 유별나신 건 알고 있지만 생각보다 더 유별나시네요.”
“흐흐... 맞아. 유별난 걸 넘어서 괴팍하고 고약했지. 결국 강짜를 부려서 그 친구를 못 만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희주가 애비를 원망하더구나. 괜찮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본래 슬퍼졌다가도 또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잊어버린다고 생각했거든. 그때부터 잘못됐던 게야.”
“...”
“희주가 처음으로 손주를 낳아서 나에게 보여주러 왔을 때 아를 안고 그렇게 좋아했었다. 세상 그리 예쁠 수가
없다면서... 그때가 imf 때였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힘들어 죽겠다고 나자빠지는데 지만 이러 좋아도 되는
거냐고 그리 말했다. 그런데 그리 좋아하던 아들이 커서 지 어미를
때려 죽였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세상 사람들 돈 없다고 하찮게 보고 비웃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제일 등신이고 내가 제일 천치였다.”
“...”
“너는 답을 알고 있는 인생이 재미 없다고 했지?”
“네.”
“이래도 재미 없어 보이나?”
“그래서 인생은 고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저... 스님 한 명 앉아 있네. 절간에서 자랐나?”
“예.”
“허... 그래? 진짜로 절간에서 자랐어?”
“서른 넘어서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네 인생도 평탄하지는 않구나. 흐음... 내 대신 복수해줄 수 있다고? 누굴 상대해야 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누가 됐든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
“재산이 많든 적든 타고난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나 역시 그랬지. 한 가지만 더 물어보세. 내가 죽기 전에 그걸 볼 수 있을까?”
“사주를 불러보세요.”
“내 사주?”
“네.”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알겠어?”
“네.”
그는 입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대단한 인내력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겠다고 하면 단박에 물어볼 것인데 그는 가까스로 그걸 참아내고 있었다.
영훈이 물었다.
“왜 안 물어보십니까?”
“내 하나 남은 염원을 너에게 바라고 있는데 언제 죽는 걸 알면 뭐해? 내가 눈감기 전에 그것들의 절망에 가득찬
눈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한다.”
“다행입니다.”
“자, 이제 원하는 걸 말해봐.”
“없습니다.”
“없다고? 왜? 내 대신 복수해준다며? 죽음을 앞둔 늙은이 소원 하나 들어준 셈 치려고?”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고도 참고 볼 수만은 없어서 그럽니다. 아마 연화신녀도 그걸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연화신녀는... 아니다.”
“내 손주 사주는 보고 가야지.”
“일이 끝나면 봐드리겠습니다.”
“내가 거짓말하고 손이라도 쓸까봐 그러냐?”
“영감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 귀신이구나.”
“아, 깜빡할 뻔했는데 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가서도 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비밀무기는 혼자 알고 있어야 힘이 되지. 당연한 말이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