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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바게트 빵

지은이│양과람

펴낸곳│나인

투고메일│editor@studiod.co.kr

ⓒ 양과람, 2020

이 책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

슬아는 활달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늘 남들에게 잘 맞추는 편이었다. 고집도 별로 세지 않은 성격이라


다들 그녀를 좋아했다. 물론 그만큼 단순하고 귀가 얇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관에 있어서만큼은 매우 강한,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슬아의 기준에서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 ‘내면의 모습’이란 바지


속에 숨기고 다니는 성기를 의미했다. 이것이 슬아가 고집을 꺾지 않는 유일한 가치관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저급하고 정숙하지 못한 신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슬아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정숙이고 나발이고 남자의 성기 크기는 굉장히 최우선으로 고려할 요소였다.

이것을 깨달은 것이 바로 7 년 전, 슬아가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매우 철없고,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슬아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 늘 친구가 많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와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
덕에 늘 인기가 많았지만, 남자 친구를 만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또래의 유치한 남자애들과 연애 놀음을 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정말 멋지고 잘생긴


어른인 남자와 사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뒤, 그녀는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임지훈, 다섯 살이나 많은
복학생이었지만 그는 완벽한 남자였다. 겉보기엔 그랬다.

지훈은 조금 마른 편이었지만, 잔근육남이 유행하던 시기라 슬아의 눈엔 훌륭한 근육남이었다.

또한 준수하게 잘생긴 외모를 가졌고, 키도 큰 편인 데다가, 집도 잘사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활발하고


매너 있는 성격이라 남녀노소를 통틀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참석한 개강 파티에서 신입생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지훈에게 수많은 신입생 여자아이들이 첫눈에
반했다. 그건 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유의 밝은 성격과 적극적인 모습으로 슬아는 수많은 신입생 중에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행운을 얻었다.
행운인 줄 알았다.

“슬아야, 오빠 믿지?”

“응, 오빠. 나 떨려….”

대학교 근처의 한 모텔에서 슬아는 지훈과 첫 키스를 나누었다. 지훈의 침이 턱에 묻는 게 조금


지저분하다고 느꼈으나, 원래 이런 건가 싶어 지적하지 않았다.

키스가 끝나자마자 지훈은 애무도 없이 다짜고짜 자신의 옷부터 벗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첫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마다 성욕의 크기가 정해져 등급으로 나뉜다면 슬아는 가장 하이클래스, 톱클래스에 들 만한


인물이었다. 욕구만큼은 충만했다.

어릴 때부터 섹스라는 단어만 보면 음흉한 미소가 나올 정도로 조숙했다. 청소년 시절 처음 자위를 했던


때에는 신세계를 맛보았다.

이렇게 좋은 걸 내가 왜 모르고 살았지? 그렇게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섹스는 얼마나 좋을 거란 말인가.


19 세 미만 관람 불가의 영상들을 보며 슬아는 침을 삼켰다.

가진 욕구에 비해 첫 경험이 늦은 편이지만, 어쨌든 원하는 대로 멋지고 잘생긴 남자와 하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슬아는 인터넷 익명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한 글을 떠올렸다. 젊었을 때 많이 하라는 인생 선배의


조언이었다.

그래, 오늘 이후부터 진짜 지훈 오빠랑 미친 듯이 해야지. 미친 듯이 즐겨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지?’

저거, 저 작은 거. 설마 저게 고추인가?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저게 진짜 고추일 리가 없는데.


아니….

“슬아야, 오빠 너무 흥분돼…. 하아….”

“어….”

흥분하려던 슬아는 짜게 식었다. ‘오빠, 그거 고추야?’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봐, 오빠 지금 딱딱해졌어. 느껴져? 하…. 아프면 어떡하지, 우리 슬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오빠, 거짓말하지 마….

믿기 어려웠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심지어 발기한 상태인 것 같았다.

결국 그날, 슬아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고대하던 첫 경험의 순간을 미루었다. 꿈꾸던 순간인데….
저렇게 초라한 것과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음란 영상에서 보았던 서양인 남자와 차이가 날 거라는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날 이후로 그렇게 멋있게 보였던 지훈이 꼴뚜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헤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 오빠 찬 거 분명 후회할 거야! 하, 진짜 미치겠네. 대체 왜 헤어지자는 거야?”

“그냥…. 내가 미안해, 오빠.”

슬아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했다.


‘평생 혼자 산다 해도 후회는 안 할 것 같아. 미안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자를 사귀어 본 일이.

반대로 지훈은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신입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부피가 작아 가벼운 고추만큼 정말


가벼운 남자였다.

처음으로 섹스를 시도했던 그날의 일은 슬아에게 매우 커다란, 회생이 불가한 수준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때 깨달은 교훈이 바로 이것이었다.

남자는 겉으로 봐서 절대 알 수 없다.

아무리 키가 크고, 손이 크고, 콧대가 높고, 목소리가 낮고, 잘생겨도 거시기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7 년간이나 연애를 못 할 줄은 몰랐다.

물론 노력은 해 보았지만, 줄줄이 실패였다. 소개팅에서 아무리 멋진 남자가 나와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냥 다… 꼴뚜기처럼 보였다.

그렇게 외로움과 욕구 불만에 지친 어느 날, 슬아는 구세주를 만났다.

바로 성인용품이었다.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여 빠른 시간 안에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 주는 흡착식


성인용품과 초심자용 사이즈의 딜도만 있으면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남자 없이도 극상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초심자용 딜도는 평균에 비해 작은 크기라고 영어로 적혀 있었으나, 지훈의 성기보다 훨씬 컸다.

그 뒤로부터는 소개팅도 아예 하지 않았다. 가끔 고백해 오는 남자들도 매정하게 차 버렸다.

평생 비혼으로, 혼자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남자 따위 관심 밖이 된 지 오래였으니까.

그런데.

“으읏….”

“슬아 씨, 괜찮습니까?”

어떻게 이런 얄궂은 운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신은 자신을 버린 게 틀림없었다.

01

슬아는 2 년 차의 회사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반년 만에 본사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와


기념으로 팀원들과 회식을 한 날이었다.
슬아가 낸 프로젝트가 본사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운 좋게 떠오른 아이디어 덕분에 동료들의 축하도 받고,
회식비도 지원받은 것이다. 여기서 더 운이 좋다면 계열사의 본사 발령도 문제없었다.

활달하고 다정한 성격의 슬아는 여직원들을 택시 태워 보내는 역할을 도맡았다. 기분이 좋은 까닭에
오늘은 더 적극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제 나도 가야지. 어우, 어지러워.’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택시를 잡으러 가는 걸음걸이가 위태위태했다. 월요일이라는 것을 까먹고


부어라 마셔라 했다. 마지막 잔은 마시지 말걸. 별 차이 없는 것을 후회하며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손을 뻗을 때였다.

“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것을 누군가 강하게 붙잡았다.

“조심하셔야죠, 슬아 씨.”

“어…. 네, 괜찮….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 허리에 손 올라갔는데….

슬쩍 눈치를 주자 무진은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갑자기 놓는 바람에 슬아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무진이 함께 넘어져 몸을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

허리에 손을 얹는 것보다도 더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으읏….”

“슬아 씨, 괜찮습니까?”

“네, 괜찮….”

일단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슬아의 손이 이상한 곳에 닿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술에 취한 심신


미약 상태였으니까 정확한 위치 조절이 불가능했다.

‘어?’

슬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회사 동료인 이무진 씨의 허벅지에 무언가가 있었다. 엄청 거대한


무언가가.

‘이게 뭐지? 엄청 길고 굵은 것이….’

그 순간, 슬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게트 빵이 떠올랐다. 뭔가 느낌이 비슷한데…? 그 사이에 빵집에
가서 바게트라도 사 왔나? 어처구니없지만 술김에 그렇게 착각했다. 하지만 무진의 허벅지 위에 빵 봉투
따위는 없었다.

그 뒤에는 주머니에 프링글스 같은 과자 통이나 텀블러 같은 것을 넣었나 싶었다. 하지만 바게트 빵도,
과자 통도, 텀블러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소, 손 좀….”

“아, 네!”
무진의 말에 슬아는 깜짝 놀라며 무진의 허벅지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끌어당겼다.

얼굴이 벌게진 무진이 먼저 몸을 일으켜 슬아의 어깨를 잡아 부축했다.

슬아는 몸을 일으키는 무진의 하체를 눈여겨보았다. 예상했던 그것 같았다. 귓가와 목까지 붉어진 것을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와, 설마 이거 진짜…. 이게 말로만 듣던 수납인가? 이무진 씨는 오른쪽 수납인 건가?

살아생전 내가 수납을 목격하다니. 방금까지 해롱해롱했던 술이 전부 깨는 기분이었다.

당황해 하는 슬아에게 무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모셔다드리는 건 싫어하실 것 같고…. 택시만 잡아 드리겠습니다.”

“…네, 네.”

무진은 슬아와 입사 동기이자 같은 팀의 팀원이었다. 두 사람은 입사할 때부터 굉장한 화제를 몰고


다녔는데, 외모 탓이었다.

190cm 가 넘는 큰 키에 단단한 체격을 가진 무진은 대학교 때까지 아이스하키를 했다고 한다. 두툼한
가슴 근육과 허리 근육은 여사원들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얼굴은 또 어떤가. 그는 꼭 외국 배우처럼 선이 진한 미남이었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전생에 꼭


조선 시대의 무인이었을 것 같은, 아가씨를 지키는 멋진 호위 무사였을 것 같은 그대로의 이미지였다.

다른 팀의 여사원이 무진의 콧대와 턱선의 각도에 대해 찬사를 내뱉던 것을, 슬아는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심드렁했는데…. 이제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무진이 잡아 준 택시에 올라타며 슬아는 꾸벅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무진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낮은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면…. 저는 쓰레기인가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집에 도착한 슬아는 완벽하게 술이 다 깬 상태였다. 그래서 익명 커뮤니티에 글을


남겼다.

순식간에 댓글이 우수수 달렸다.

댓글

- 쓰레기 맞는 듯.
>>> 뭔 쓰레기래. 어그로 차단 좀.

- 쓰레기 아니니까 ㄱㄱㄱ 섹하고 후기 좀.

- 뭘 망설여? 그런 대물이 흔한 줄 앎?

- 나 같으면 벌써 잤다.

- 외않자?

“하….”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상대니 문제였다. 무진은 입사 처음부터 대놓고 슬아를 짝사랑하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무진이 어찌나 슬아에게만 다정한지…. 티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진 씨는 슬아 씨가 그렇게 좋은가 봐?”

한 직원의 장난스러운 말에 무진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회사에 쫙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무진이 따로 부탁한 모양인지, 슬아에게 대놓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몇몇 직원들은 은근히 그녀의 허리를 찌르며 말했다.

“솔직히 저 정도 남자 어디 가서 만나겠어? 한번 만나 보지 그래?”

“저는 남자 만날 생각이 없어서요.”


그때마다 정말 차갑게, 겨울 왕국의 공주가 나타나도 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대답했다.

정말 관심이 없었으니까. 저렇게 겉보기에 반지르르한 남자일수록 속 알맹이는 형편없다는 걸 이미 7 년


전에 깨달은 몸이었다.

물론 무진은 지훈과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수준의 외모였다. 남자는 얼굴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키가 크고
잔근육이 많았던 지훈도, 무진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그만큼 무진은 훌륭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은근히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면이 있는 것 같아 ‘그냥 한번 만나 볼까?’ 하고 흔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무 살 때의 엄청난 트라우마가 그녀를 괴롭혔다.

이무진 씨가 임지훈과 같은 크기의 거시기를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피가 식었다.

그래, 또 충격받지 말고 혼자 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래서 번번이 무진의 관심 어린 질문이나 행동들을 무시하며 차갑게 대했다. 그러기를 1 년이 훌쩍


지나고…. 심지어 두 달 전에는 그의 고백을 받기도 했다. 옥상으로 와 달라는 이무진 씨의 메신저
메시지에 옥상으로 향했다. 유독 피곤한 하루였기에 귀찮았지만 잠시 바람을 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일부러 부른 건가?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몇몇 남직원들을 피해 구석에 있는


이무진 씨에게 다가갔다. 일상 대화를 조금 나누다가, 슬아가 대체 왜 불렀냐고 캐묻기 시작하자 이무진
씨는 머뭇거리다 고백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좋아하고 있습니다, 슬아 씨.”

그때 내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솔직히 짜증이 났다.

“이무진 씨, 저는 무진 씨한테 단 한 번도 여지를 준 적이 없는 거로 알아요. 이제 그만 좀 하시면 안


될까요? 저한테 대놓고 티를 내는 직원들은 없지만, 슬슬 불편하네요.”

회사 분위기는 자유롭고 개인적이었다. 팀별로 자유롭게 업무를 하는 터라 애초에 마주치는 직원들도 별로


없었다.

무진에게 말한 것처럼 티를 내는 직원도, 불편하게 하는 직원들도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짜증이 났다.


하지만 대놓고 티를 낼 수 없기에, 최대한 꾹꾹 감정을 눌러 담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 슬아는 은근슬쩍 무진의 다리 사이를 힐끗거렸다. 보나 마나 뻔했다. 기대할 필요도 없는


수준일 것이다.

“미안합니다. 저는….”

“저 무진 씨 좋은 사람인 거 알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무진 씨 저한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아요.

“그래도 한번 기회를 주시면….”

“그만해 주세요. 상대방의 허락 없이 구애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고백은 못 들은


거로 할게요. 앞으로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좋은 동료로 지내고 싶어요.”

처음 직원들에게 마음을 들킨 뒤로, 무진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 사실은 슬아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늘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거절했는데 더 하면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역시 인생은 부메랑인 걸까?

“매력 없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인생이 참 얄궂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성인용품만 있으면 평생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첫 남자


친구였던 지훈과 다르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크기의 남자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이상했다.

물론 술에 취했던 상태였으니 조금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보다 조금 작다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크기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큰 남자랑 자면 어떤 기분일까.

거기가 크면 안에 넣은 것만으로도 압박감에서 오는 만족도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그 남자는 섹스할 때 어떤 표정을 할까? 어떤 소리를 내고 어떻게 움직일까? 짐승 같은 섹스를 할까?


아니면 다정하게?

그런 음란한 상상들이 자꾸만 떠올라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솔직히 첫 번째 댓글처럼 쓰레기가 맞았다. 귀찮다고 찰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어떡하지….’

한번 자자고 해 볼까? 거절하려나? 좋다고 하려나?


자 봐서 좋으면 어쩌지? 사귀어야 하나? 사귀다가 너무 좋으면? 결혼하고 싶어질 텐데?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상대방은 떡 줄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을 항아리로 들이켰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결혼까지 진행된 뒤였다.

그날 밤, 꿈속에서 슬아는 무진과 섹스하는 꿈을 꿨다. 무의식을 반영한 탓인지 꿈속의 자신은
성인용품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커다란 쾌감을 얻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단단한 데다 힘이 좋은 까닭에, 이리 눕혀지고 저리 눕혀지고 들리고 엎드려져서


한참을 시달렸다.

엄청난 꿈을 꾸고 일어난 다음 날, 결심했다.

‘이무진 씨가 아직도 나한테 미련이 있다고 하면, 한번 만나 보자!’

솔직히 밑져야 본전이었다. 만약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무진 씨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면….

괜찮으니까 한 번만 자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떡하지.

아쉽지만 그땐 정말 미련을 버려야겠지….

슬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출근길에 올랐다.

그녀는 대부분 편안한 면바지와 박시한 티셔츠를 즐겨 입었는데, 오늘따라 또 이상하게 예쁜 옷이 입고


싶었다. 심지어 평소에 하지 않던 화장까지 했다. 립스틱을 발랐다 지웠다 여러 번을 반복했더니 입술이
아플 지경이었다.

‘진짜… 추하다, 슬아야.’

슬아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거울 앞에 섰다.

‘네가 찬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이러고 싶니? 그것도 거시기가 크다고?’

추하긴 한데, 어쩔 수 없었다. 슬아의 인생에선 중요한 문제였다. 혹여 이무진 씨랑 잘되지 않더라도,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그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슬아는 가지고 있는 옷들 중 제일 예뻐서 아껴 입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평소보다 이르게 출근한 까닭일까, 엘리베이터는 한산했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슬아는 누군가 뛰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다.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어….”

“감사합…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무진 씨.”


슬아는 무진을 보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였음에도, 무진은 종종 저렇게 깔끔한 정장을 입곤 했다. 이무진 씨에게 세상 모든 조명이 몰빵된
스포트라이트가 따라다니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이쯤 되면 태세 변환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백을 거절한 이후, 무진은 최대한 슬아에게 거리를 두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아, 또 왜 이렇게 멋있어, 진짜 짜증 나게.’

원래도 멋있긴 했는데, 거기까지 대단하다고 생각하자 더욱 멋있게 보였다.

마음과 관심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관심이 생기고 나니 가려졌던 것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잘생긴 외모, 커다란 체격, 다정한 매너까지.

슬아는 무진의 오른쪽 허벅지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애꿎은 원피스 자락만 밑으로 당겼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물어 왔다. 이제 보니 목소리도 미친 것 같았다. 낮은 울림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지만, 목소리를 빨고 싶었다. 그만큼 좋았다.

“아, 네. 덕분에요. 무진 씨도 잘 들어갔어요?”

“네.”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단답형이었다. 슬아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 옆의 무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보니 무진과 자신이 꽤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슬아는 여자의 평균 키에 가까웠음에도 무진의


옆에 서 있으니 체격 차가 많이 나 할리우드 유명 커플처럼 보였다.

슬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무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층수가 올라가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망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목적지가 더 높은 층이 아닌 것이 원망스러웠다.

슬아는 무진과 함께 기획 1 팀이 사용하는 사무실로 향했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특장점인 이 회사는 휴게


공간을 비롯해 정해진 사무실 외에도 다양한 업무 공간이 존재했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 노트북을 들고
야외 테라스로 나가면 좋을 것 같았다.

“저는 오늘 오전은 야외에서 작업해야겠어요. 날이 참 좋네요.”

“아, 네.”

흘리듯 던진 말에 또다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전에는 다정하게 한마디씩 더 묻더니, 이제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슬아는 한번 원하는 것이 생기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인간이었다. 아무래도 메신저를


이용해서 말을 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진 씨,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 저 대신 일 처리 해 주신 것 때문에 밥 사기로 했잖아요, 오늘 사 드리고 싶은데….

슬아는 손을 떨 정도로 긴장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무진은 2 분이 지난 뒤에야 답장을 보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습니다.

아, 그럼 안 되겠네요. 알겠어요.

‘이건 부메랑이다.’

슬아는 자신이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는 심정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은 많아. 천천히 꼬시자.

그럴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정말 신은 자신을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무진 씨가, 뭐라고?”

“대표님 조카.”

“아…. 하하….”
점심시간, 친한 직원인 혜진 씨와 식사를 하던 슬아는 충격적인 소식에 그만 식욕을 잃고 말았다.

“뭐, 물론 조카니까 이 계열사를 물려받진 않겠지만, 그래도 집안 자체가 워낙 대단하잖아.”

“그… 그렇겠네.”

“아쉽다. 슬아 씨 무진 씨랑 잘돼서 재벌 사모님 됐으면 덕 좀 봤을 텐데.”

‘미치겠네….’

뭔데…. 왜 하필 그 이야기가 오늘 퍼진 건데?

왜 하고많은 날 중에서 오늘인데….

상황이 난감했다. 솔직히 무진이 재벌이건 돈이 많건 적건 상관없었다. 자신 또한 넉넉히 버는 편이었고,


지금의 금전 상황에 만족하는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무진 씨한테 관심을 보였다간….

“기획 1 팀 김슬아 씨 얘기 들었어? 이무진 씨 대표님 조카라는 거 알려지고 나니까 이제 와서


치근덕댄다며? 진짜 염치도 없어.”

“들었냐? 김슬아 닭 쫓던 개 된 거? 그러게 작작 도도한 척 좀 하지. 내가 진작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완전 속물인 거지.”

아…. 갑자기 술 생각이 밀려왔다.

“오늘 이무진 씨 메신저가 불이 났대. 죄다 저녁 같이 먹자고 난리였다던데?”

“하하하…. 그래? 힘들었겠네, 이무진 씨.”

진짜 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릴 때부터 욕을 전혀 하지 않는 슬아였음에도 속으로


상스러운 욕설이 절로 나왔다.

저녁 먹자는 말에 이무진 씨가 답장을 보내기 전, 2 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대표님 조카라니까 이제야 관심이 생긴 건가요? 김슬아 씨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었군요, 내가 왜


당신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왠지 힐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로 싸늘하게 내뱉을 걸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했다.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슬아는 결국 입맛이 뚝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까 처리 못 한 일이 있어서, 바로 가 봐야겠다.”

“응? 더 안 먹고? 배고파 죽겠다더니.”

“혜진 씨는 마저 먹고 와. 미안해, 내일 내가 커피 살게.”

인생은 부메랑이다. 슬아는 잔반을 버린 뒤 부메랑 어쩌고 하며 내내 중얼거렸다. 사무실에 돌아갔을 땐


텅 빈 책상들만 가득했다.

슬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챙겼다. 도저히 이무진 씨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자신이 없었다.

라운지에 있는 창가에서 오후 업무를 처리했다. 꽤 바빴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일을 했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내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지나가던 타 부서 직원들이 무진에 대해 떠드는 것도 들었다.

대개 무진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슬아에겐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훌륭한 집안보다 더 대단한, 최고의 성기. 최고의 자지를 가진


남자였다. 그래서 우울했다.

‘이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다.’

포기해야 마땅했다. 여기서 이무진 씨한테 더 관심을 표했다간 정말 리얼로 쓰레기가 된다.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데…. 자꾸만 떠올랐다. 그 어마어마했던 크기의 감촉이.

그래서 그날 밤, 슬아는 퇴근길에 맥주 캔을 잔뜩 사 가지고 와서는 오랜만에 숨겨 두었던 19 세 미만


관람 불가의 영상들을 꺼내 보았다.

엄청난 크기의 성기를 가진 외국 남자는 상대 여자를 아주 보내 버렸다. 넣자마자 오르가즘을 느낀 듯한


여자의 표정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

저게 연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

“하….”

슬아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맥주 캔을 들고 남은 맥주를 원샷했다. 내가 왜 그랬지. 이제 와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남들의 눈엔 이 후회가 그 후회가 아닌 다른 후회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차마 아침에


다짐했던 일을 행할 자신이 없었다.

성욕의 노예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일생일대의 고민이었다. 슬아에게 있어 성욕은 인생에서 꽤 중요한 문제였다.

맥시멈의 성욕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제일 점잖은 사람. 그게 바로 슬아였다. 그래서 무진을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또 그 성욕 때문에 쓰레기가 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후회할지언정, 쓰레기가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무진…. 잘 가라.

하루뿐이었지만, 미친 듯이 사랑했다. 잘 가라….

결국, 슬아는 쓰레기가 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보내 주려고 했다.

***

다음 날, 슬아는 다시 평소와 같이 편한 옷차림으로 출근했다.

어제 홀로 하루 만에 실연을 겪으며 과음을 한 탓에 속이 쓰렸다. 책상 위에 해장을 위한 생과일주스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자 뒤에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아 씨, 어제는 엄청 예쁘게 하고 왔던데 뭐야. 소개팅이라도 한 거야?”

“하하, 소개팅은 무슨. 아니야.”

“뭐, 약속도 없었는데 그렇게 하고 왔다고? 왜? 왜에? 어제 우리 회사 남직원들 다 난리 났던 거 알아?”

난리는 무슨. 딱 봐도 허풍이었다. 혜진과 사내 연애를 하고 있는 재호는 입만 열면 1 절, 2 절,


뇌절까지 서슴지 않는 인간이었다. 혜진과 재호는 슬아의 입사 동기로, 입사 초기에 슬아에게 비밀 연애
하는 것을 들킨 과거가 있었다. 슬아는 비밀을 지켜 주었으나, 두 사람의 방정으로 결국 회사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사실 하도 티를 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저 두 사람은 입이 문제였다.
특히나 재호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매우 즐겼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늘 그의 농담을 농담으로 안 듣고 진지하게 믿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무진


씨였다.

맞은편 자리에서 무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상상 속에서 이무진 씨의 속마음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와, 김슬아 씨 내가 대표님 조카라는 거 알고 이제 와서 잘 보이려고 옷도 차려입고 왔었나 보네.


그래서 저녁 먹자고 한 거야, 갑자기? 작정을 했었구나. 소름 끼친다, 진짜.”

물론 슬아 혼자만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이무진 씨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 당신 자지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느니 저렇게 오해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슬아는 뒷자리에 앉은 재호에게 닥치라고 말하며 멱살을 잡고 싶었으나 인내했다.

“소개팅 맞지? 맞지? 나 혜진 씨랑 내기했다고. 빨리 말해. 소개팅 맞지?”

혜진과의 내기에서 소개팅으로 돈을 건 모양이었다.

눈치 없는 재호는 신이 난 듯 계속 채근했다. 슬아는 이참에 무진의 오해를 풀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래그래. 뭐, 소개팅 맞아. 했어.”

아, 그런데 뱉고 보니 또 이상했다.

이번에도 이무진 씨의 속마음이 상상 속에서 들려왔다.

“와, 김슬아 씨 소름 끼치네. 나한테 저녁 먹자고 해 놓고 그새 소개팅을 했다고?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내가 왜 저런 여자를 좋아했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남자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하루뿐인 사랑을 끝냈는데도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 걸까.

하지만 어제 보았던 영상 속 여자를 떠올리면 정말 한 번쯤은 무진과 해 보고 싶었다.

7 년간 이런 대물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찾으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대체 어딜 가서 저런 자지를 가진 남자를 또 만난단 말인가.

그러나 무진과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퇴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퇴사는 단호하게
불가능했다.

이 좋은 회사를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절대 퇴사할 수는 없었다.

자유로운 업무 환경, 능력을 인정해 주는 시스템, 직급 없이 모두가 이름을 부르는 체계, 야근도 의무가
아닌 데다, 휴가도 길고 빵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급여가 셌다. 절대 퇴사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무진 씨를 퇴사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사장님 조카면 부자니까 이 회사 다닐 필요 없는 거 아닐까,


하고 잠시 이기적인 생각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한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왔는데 왜 최근 들어 갑자기 쓰레기 같은 인성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욕구 불만이 이렇게 무섭다.

“그치? 소개팅 맞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뭐 하는 사람인데?”

재호는 이제 대놓고 의자를 끌고 와 슬아의 옆에 앉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 같았다.

“어어? 과일주스 뭐야? 이거 슬아 씨 전용 숙취 해소 음료 아냐? 어제 그 남자랑 술도 마셨나 본데?


소개팅 잘됐나 보네?”

‘젠장….’

다시 속으로 욕이 절로 나왔다.

27 년간 욕 한 번 입에 달고 살지 않았는데…. 진한 현타가 밀려왔다.

“재호 씨, 나 일해야 되는데.”

“어제 급한 거 다 끝난 거 알거든? 빨리 말해 봐. 아니, 이러지 말고 우리 카페 가서 얘기할까?”

“아니….”

“카페 가시죠, 제가 커피 사겠습니다.”

맞은편에서 가만히 마우스를 달깍거리던 무진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무진이 슬아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은 모든 팀원이 전부터 알고 있는 상태였다.

“오, 우리 무진 씨, 쿨해. 가자, 슬아 씨.”

“아니….”

“좋은 아침!”

마침 출근한 혜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슬아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혜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슬아보다 재호가 더 빨랐다.

“혜진 씨! 슬아 씨 어제 소개팅 맞대. 내가 이겼어. 어제 그 남자랑 술도 한잔했나 봐. 아니, 한 잔이


아니지. 숙취 해소 음료 마시는 거 보면 찐하게 마셨나 봐! 지금 카페 가서 얘기해 준다는데, 빨리 가자.
응?”

“헉! 진짜야, 슬아 씨? 왜 말 안 해 줬어! 아, 생돈 날아가게 생겼네! 그래도 듣긴 들어야지. 나


컴퓨터만 켜고. 잠깐만 기다려!”

아…. 대표님,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복지 좋은 회사에서 직원들이 이렇게 농땡이를 피우고 있다는 것을….

슬아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혜진과 재호에게 이끌려 카페로 향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무진의 나직한
발소리가 가슴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왜 정녕 나는 아름다운 이별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역시 부메랑이 틀림없었다. 무진에게 상처를 준 대로 그대로 돌려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겸허히, 더욱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게 무진에 대한 미안함을 전할 길이었다.

저 사람의 거기가 그렇게 대단한지 끝까지 몰랐다면, 이런 미안한 마음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쓰레기였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벌을 받을 수밖에….

“자, 얘기해 봐. 어떤 사람이야? 먼저 직업은? 나이는?”

사실 소개팅한 거 아니야, 라고 밝힐 시기는 이미 지나쳐 버렸다. 기대감 가득한 혜진, 재호 두 사람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쟁반에 음료를 받아 온 무진은 슬아의 앞에 새 과일주스를 내려놓았다. 슬아가 해장할 때 늘 마시는


오렌지주스였다. 쓸데없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진은 슬아의 바로 맞은편에 앉았고, 때려 주고 싶은 재호는 왼쪽, 마찬가지로 재호처럼 눈치가 없는


혜진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슬아는 잠시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엄청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면 무진이 상처받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일말의 잘될 가능성도 모두 사라지지


않는가.

그러니 이상한 놈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생각을 마친 슬아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잘된 건 아니야. 망쳤지.”

“아, 술 마신 게 잘돼서가 아니라 깡소주였구나!”

“왜, 왜! 직업이 뭔데? 나이가 몇 살이길래?”

무진은 조용히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 넓고 단단한 어깨가 오늘따라 더욱 두툼해 보였다. 멋진 사람….

슬아는 무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갔다.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었음에도 오늘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어, 뭐, 그냥 회사원이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많고.”

말하다 보니 누군가 떠올라서 술술 나오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왜 별로였는데? 못생겼어?”

“키가 작았나?”

“아니,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는데…. 그냥 좀 실속 없는 사람 같아서. 바람둥이 같기도 하고….”

“아, 역시 까다로운 우리 김슬아 씨.”

“안타깝다, 슬아 씨도 연애 좀 하지. 눈이 참 높아서 문제야.”

“슬아 씨는 이상형이 대체 뭐야?”


“오, 맞아. 뭐야? 말 좀 해 봐.”

아니. 저기요…. 당신들은 진짜 인성이 없습니까? 슬아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무진을 힐끗거렸다.

솔직히 대놓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무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철없는 커플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가진 탐험가 체질의 인간들이었다.

또 정작 무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제 진짜 마음 접었나 보다.’

조금 씁쓸, 아니 좀 많이 씁쓸했으나 자신은 티 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 번뜩하고 다른 생각이 튀어나왔다.

‘어! 어쩌면 기회인가?’

이상형에 대한 질문이었다. 무진에 대한 특징들을 말하면 그가 다시 마음을 갖지 않을까?

“어, 음…. 난 일단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람?”

“그게 다야?”

“성격은 다, 다정하고…. 좀 진지하기도 한 그런 사람? 난 가벼운 사람은 싫더라.”

“슬아 씨, 눈 높기로 소문 자자하잖아, 이상형 말해 봤자지 뭐.”

“그렇긴 해. 아무튼 잘된 건 줄 알고 기대했더니.”

“사실 잘됐는데 부끄러워서 말 안 하는 거 아냐?”

재호의 의심 섞인 질문에 무진의 고개가 들렸다. 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슬아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어어, 지금 표정 봐. 뭐 숨기고 있어. 그치? 맞지?”

“아, 아니라니까….”

“김슬아?”

재호와 혜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고 있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슬아는 고개를 돌렸다.

와, 미쳤네.

“슬아 맞지? 여기서 다 보네. 하하.”

“어머, 누구….”

“안녕하세요. 저는 슬아의 대학 선배인 임지훈입니다. KM 홍보 팀에서 미팅 왔는데, 여기서 널 만날


줄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기어 나온다더니…. 너는 호랑이 크기도 아니고 아기 생쥐면서 왜 여길….

“슬아, 넌 여전히 예쁘구나? 아니,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남자 친군 있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개방적일까? 동료 직원들 다 있는 앞에서 왜 저런 걸 물어봐?

“에이, 우리 슬아 씨 남자 친구 없어요! 대학교 때도 없었죠? 연애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눈이


너무 높아 가지고 우리 슬아 씨가….”

재호의 말에 지훈은 조금 기쁜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하, 그래요? 눈이 높긴 했죠. 슬아 너, 그 뒤로 아무도 안 만났나 보네.”

“하하하…. 그만, 그만 좀 해….”

제발 닥치라고….

참다못해 웃으면서 말하자 지훈은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며 쐐기 골을 박았다. 진짜 배에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설마 너 나 못 잊은 건 아니지? 그럼 좋겠는데…. 언제든 연락해.”

‘젠장….’

벌써 오늘로써 몇 번째 욕인지 모르겠다. 정말 억울했다. 지훈이 간 뒤에, 재호와 혜진은 먹이를 문


짐승들처럼 신이 나서 슬아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무진은 내내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로 슬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빛이 소름 돋을 만큼


차가웠으나 착각인 듯싶었다. 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왠지 이번엔 진짜 속마음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김슬아 씨 완전 저질이네…. 인간쓰레기야, 쓰레기.”

***

임지훈이 건네준 명함은 파쇄기에 갈아 버렸다. 드르르륵 갈리는 명함을 보자 속이 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오전 업무, 오후 업무 내내 슬아는 좀처럼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맡은 바 일은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었다. 야근을 자처했단 소리다.

슬아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려 자리로 돌아왔다. 오랜만의 야근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계속 눈치를
보게 되는 무진과 전 남자 친구에 대해서 조잘조잘 묻던 그 빌어먹을 커플이 없기 때문일까.

“슬아 씨.”
“엄마야, 깜짝이야!”

불을 끄면 더 집중이 잘되는 성격이라, 불을 끄고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슬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놀라실 줄 모르고….”

“어, 무진 씨? 퇴근 안 했어요?”

“네, 처리할 일이 남아서. 슬아 씨도 야근하시는 건가요?”

“네. 저도 좀 남아서….”

“그렇군요.”

대답 후, 맞은편의 자리로 돌아간 무진은 퇴근할 준비를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괜히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슬아 씨.”

“네?”

“저녁 드셨습니까?”

아까 샌드위치를 먹긴 했는데 저녁… 까진 아니었다. 많이 먹긴 했지만, 어쨌든 저녁은 아니다. 무조건


아니다.

“안 먹었어요.”

“그럼 어제 제안하신 저녁 식사, 오늘 괜찮을까요?”

“네? 아, 네! 좋아요.”

와, 할렐루야. 오늘 하루 내내 쓰라렸던 속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기회를 주는 건가? 이렇게 쉽게? 나는 쓰레긴데? 더 벌받아야 할 것 같은데?

조금 찔렸지만 일단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빠르게 가방을 챙겼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도 좀 예쁘게 입고 올걸.’

검은색 면바지에 검은색 후드 티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사탄의 자식도 아니고 왜 이런 옷을


입었지. 하지만 후회하긴 늦었다.

뭘 입었든 어떠하랴, 원시인이 입을 법한 천 쪼가리를 입었대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슬아는 가방에 노트북을 구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생 같은 차림을 한 슬아와 달리 무진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정장 차림이었다.

‘운동선수가 정장 화보를 찍으면 저런 느낌일까.’

뒤태가 완벽했다. 왜 전에는 몰랐을까. 아니, 전에도 알긴 했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기대를 안 했던
것이다.
슬아는 앞서 걷는 무진의 엉덩이와 긴 다리를 힐끔거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가까운 거리에 주차해 놓은 무진의 세단이 보였다.

무진의 차는 외제 차가 꽤 많은 회사 주차장 내에서도 상당히 고가의 차였다. 그 탓에 전부터 부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무진은 친절하게도 직접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올라타자 무진이 즐겨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던 이 냄새가 왜 이렇게 섹시하게 느껴지는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무진이 차에 올라타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이렇게 가까이 단둘이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때였다.

‘와, 미친.’

무진이 갑작스레 슬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는 바람에 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이렇게 갑자기 키스를? 하고 생각하며 입술을 움찔거리는데 무언가 주욱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떠 보니 무진은 보조석의 안전벨트를 당기고 있었다.

‘귀도 잘생겼네.’

순간 보인 잘생긴 귀와 턱선에 슬아는 넋을 놓았다. 게다가 풍겨 오는 남성스러운 향수 냄새가 꼭


흥분제가 섞인 향수처럼 느껴졌다. 슬아는 냄새에 흥분하는 스스로가 짐승처럼 느껴졌다.

무진의 차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 타 볼 것을….


새삼스럽게 후회가 밀려왔다.

안전벨트를 매 주는 이 모습을 봤으면 진작 반했을 텐데.

무진이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안전벨트를 한 뒤에,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조절하는 것이 보였다.
속으로 박수가 나왔다.

그리고 핸들을 잡는데, 손등 위에 유난히 도드라진 푸른 핏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이 인간은 뭐 저런 것까지 섹시하지?’

정말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거시기 한 번 만져 보고 이제 와서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지만 막을 방도가 없었다.

파도에 휩쓸려 떠밀리듯, 중력이 작용해 추락하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진 씨에게 당신한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제일 후회스러웠다. 이무진 씨는 숨 쉬는 것도


매력이고 섹시한 인간이었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 좁게 봐서 외면했던 것이다.

도착한 곳은 인근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슬아는 생각했다.


‘이거, 된 건가? 된 건가?’

호텔 레스토랑에 간 거면, 식사 후에 바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아닌가?

오만 가지 착각을 하면서 무진의 뒤를 따랐다. 레스토랑의 조용한 룸으로 안내받은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주고받은 대화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슬아 씨.”

“네, 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올 무렵, 무진이 의미심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슬아는 긴장감에 떨리는 손을
숨기려 무릎 위로 올렸다.

“어제 저에게 식사를 제안하신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될까요?”

“어…. 그러니까, 그게….”

한참을 대답을 망설이자 무진이 다시 물었다.

“저에게 보낸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도…. 무방한가요?”

슬아가 깜짝 놀라 무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진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은 색으로 느껴졌다. 어딘가 위험하면서, 어쨌든 엄청나게 섹시했다. 슬아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용기 내서 대답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나, 일단 당신의 배경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믿어 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달라지신 이유가, 혹시 제 배경 때문인가요?”

“네?”

“그게 아니라면, 어떤 이유입니까?”

식은땀이 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 대답이 오늘 밤, 호텔로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것 같았다.

물론 ‘당신의 자지를 만져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호텔 방으로 갈 확률이 높긴


했으나 쓰레기라는 이미지에 변태 색마라는 이미지까지 덧씌워질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맞아요.’라고 대답한다면….

변태 이미지는 벗겠지만 일단 쓰레기 이미지는 확정이었다.

두 가지를 마음속 저울로 재며 고민하던 슬아는 그냥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변태라는 이미지는 아직
두려웠다.

“네, 조금은….”
말하고 보니 후회스러웠다. 비난이 밀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역시 당신은 그런 인간이었군요, 소름
끼칩니다.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올까 두려웠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생각한 것과 정반대였다.

“다행입니다.”

“네?”

“저의 배경이 슬아 씨에게 매력적인 요소라면, 진작에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

뭐지, 얘.

슬아는 붉어진 무진의 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은 없지만, 그것 외에도 저에 대한 매력을 더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

“이미 한 번 거절하셨던 슬아 씨에게 또 부담을 드리는 것은 아닐까 고민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됐다. 이건 된 거다.

슬아는 단 하루 동안 반성했을 뿐인데 이런 행운을 안겨 준 하늘이 감사했다.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아야지, 이 사람한테 더는 상처 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게요.”

침착하게 대답하자 무진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수줍게 웃는 모습이 끝내주게 잘생겼다. 초콜릿 광고에
나오는 핫한 모델 같았다.

“그럼 딱 2 주간 주말에 한 번씩 저에게 시간을 내 주세요.”

“네…?”

뭐? 사귀자는 게 아니라?

“저와 데이트를 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번의 데이트 이후에도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때는


정말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

“슬아 씨의 말을 듣고 제 마음이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이 반성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려 해도


아쉬운 마음이 커서, 쉽게 접어지질 않네요. 그러니 딱 한 번 더,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설마… 대표님 조카라는 거, 직접 소문낸 건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무진의 표정이 살짝 긴장으로 굳어졌다.

“네. 그 사실이 슬아 씨에게 점수를 딸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주 자신을 속물로 보고 있던 모양이다. 속물은 속물이었다. 돈이 아니라, 다리 사이가 중요한 속물.

“제가 평소에 그런 이미지였나 보네요….”

이거 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변태 색마보다 나을 것 같긴 한데….

슬아의 떨떠름한 대답에 무진은 아차 싶었는지 손까지 저어 가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저, 그런 것을 어필해 보라는 조언을 들어서….”

“그랬군요.”

누군지 몰라도 훌륭한 조언가는 아니었다. 저 훌륭한 자질을 가진 남자한테 재력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씁쓸함에 찬물을 들이켜는데 무진이 물었다.

“아까 그분은….”

“네?”

“전 남자 친구인가요? KM 에서 온 사람이요.”

“아…. 아, 뭐…. 네, 맞아요.”

슬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새끼가 워낙 확실하게 말하는 바람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상당히 미남이시던데. 그런 취향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미남이라고요? 누가 누구더러 미남이라는 거야, 지금.

솔직히 대학교 때는 봐 줄 만한 외모였다. 그녀의 학교에서 제일 잘생겼었으니까. 하지만 오랜만에 보니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어깨도 더 좁아지고…. 형편없었다.

“설마요. 딱히 미남도 아니고…. 그런 느끼한 타입 완전 싫어해요. 그때는 철없을 때니까 만났죠. 스무


살 때였는데요.”

“아, 그렇군요. 스무 살…. 그럼 슬아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십니까?”

“아까 말했잖아요. 체격 좋고, 다정하고, 진중한 사람이요.”

슬아의 대답에 무진은 잠시 머뭇했다.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는데, 저와 조금 가깝게 느껴져서요. 근데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네?”

“저는, 슬아 씨의 취향이 아니니까요. 정말 슬아 씨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그 정도 힌트는


알려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아…. 왜 진작 몰랐지. 이 남자가 이렇게 귀엽다는 걸.

수줍게 묻는 얼굴이 깨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다 벗기고 묶어 놔도


저렇게 부끄러워할까 궁금했다.

이런 취향은 없었는데…. 상대가 이무진 씨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을 뻔하던 슬아는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대답했다.

“무진 씨 같은 스타일 맞아요. 다만….”

어… 고추가… 아니, 성기가…. 아니, 자지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남성적인… 그런 매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매력을 보여 드려야겠군요.”

오, 그래그래. 맞아. 슬아는 무진의 대답에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수영장 데이트나 단둘이
하는 활동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바로 침대로 가거나.

무진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모습이 또 기가 막히게 야했다.

“그럼, 저희 오늘은….”

무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자고? 지금?

아, 나 오늘 속옷 뭐 입었지? 아, 토끼 그려진 건데. 아…. 아! 안 되는데! 아!

“이만 들어가고, 토요일에 데이트 괜찮으신가요?”

“네?”

굉장히 아쉬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가 그려진 속옷을 보이는 것보다는 심기일전하여 토요일을
노리는 것이 나을 듯했다.

무진의 차를 타고 집까지 가는 동안, 슬아는 계속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클래식 좋아하시나 봐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을 들으며 슬아가 물었다. 클래식과 이무진 씨라니, 왠지 잘 어울렸다.

평소의 슬아라면 자장가라고 생각했을 만한 음악이었다. 그녀는 잔잔한 클래식보다는 귀를 꽝꽝 죽일 듯이


때리는 시끄러운 음악을 선호했다.

“네, 좋아합니다. 슬아 씨는요?”

“저도 좋아해요.”

아, 꼭 연애하는 것 같다.
슬아는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낯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담스럽던 남자가 이렇게 멋있게
보일 줄이야. 세상은 참 신비롭다.

평소에 개무시하던 클래식도 이 순간만큼은 아름답게 들렸다.

“좋아하는 곡이 있으십니까?”

“어….”

뭐라고 하지? 아는 게 없는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슬아가 대충 내뱉었다.

“캐, 캐논이요!”

“아, 저도 좋아합니다. 가끔 연주하기도 하고요.”

“피아노 치실 줄 아세요?”

“네, 어릴 때 배웠습니다.”

“와, 하키만 하신 줄 알았는데, 피아노도… 칠 줄 아시는구나.”

피아노를 치는 무진을 떠올리자 무진장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 손등에 핏줄이 돋아난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뚜들기다니. 건반 대신 내 몸도 뚜들겨 줬으면….

슬아는 오늘 자신이 매우 금사빠라는 것을 7 년 만에 느낄 수 있었다. 그간 트라우마로 인해 봉인되어


있던 금사빠력이 폭발한 것이다.

스무 살 시절, 지훈과 연애했을 당시에도 매우 금방 빠져들었었다. 그리고 불같이 사랑했고…. 고추


때문에 빠르게 식었다.

고등학교 때 아이돌 가수를 좋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TV 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보는 순간 입덕했다.


그리고 그들이 해체하는 순간까지 미친 듯이 사랑했다.

금사빠인 것에 비해 빠르게 식는 편은 아니었으나, 한 가지 핀트가 상하면 완벽하게 마음을 접는 편이었다.

따지자면 화끈한 성격이었다. 한 번 빠지면 완벽하게 마음을 내어 주고, 또 아니다 싶으면 꽁꽁 언 겨울


바다처럼 차갑게 밀어 낸다.

한번 아니면 절대 아닌 것이다. 이 점은 부친을 꼭 닮은 고집이었다.

그래서 지훈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여태 아무 남자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세월이 원망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괜히 다른 남자를 더 만났다가 또 작은 고추에 실망하고 아예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어쨌든 무진과의 단순한 그 접촉으로 인해, 7 년간 봉인되었던 금사빠의 자질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밀려오는 욕구 불만에 의해 차오르는 성욕이 더욱 컸는데, 지금은 꼭 연애하는 것처럼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가슴속에서 민들레가 봄바람에 흩날렸다. 첫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요동치는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낯설었으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음에 한번 들려주세요.”
의미심장한 말을 전하며 무진을 슬쩍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네, 알겠습니다.”

낮게 들리는 묵직한 대답이 꼭 그녀가 좋아하는 록 음악이 귓가를 때리듯, 심장을 때려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남자는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겠지.’

그 생각을 하면 현타가 밀려왔다. 하지만 솔직하게 성기 때문이라고 했으면, 더 큰 현타가 밀려왔을


것이다. 후회해도 늦었다.

슬아는 깔끔하게 후회를 마무리하며 집 앞에서 내렸다.

그녀가 사는 곳은 회사 근처의 신축 아파트였다.

“혼자 사시는 겁니까?”

차에서 따라 내린 무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무진 씨는요?”

“저도 혼자 삽니다.”

“그렇구나.”

어, 어쩌면 이거 찬스인가?

“저 혹시….”

“네. 말씀하세요.”

“커피, 아니 라면 드시고 갈래요?”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아뇨, 라면은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보다….”

“네?”

“우연이네요. 마침 저도 이 아파트에 이사 올 예정이었는데. 몇 동 사시나요?”

“아, 정말요? 저는 108 동 17 층에 살아요. 언제 이사 오시는데요? 몇 동, 몇 호요?”

너무 적극적이었나? 슬아는 대답을 기다리며 잠시 긴장했다.

“…그건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전 이만.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슬아 씨.”

뭐야…? 뭔데? 라면을 어떻게 안 좋아하는데?


세상에 라면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있는 건데…? 안 들어갈 거면서 동, 호수는 왜 묻는데…?

슬아는 빠르게 차에 올라타는 무진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진이 탄 차는 쌩하고 빠르게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슬아는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이사 오면 자주 마주칠 텐데. 또 기회가 오는 건가? 집들이라도 해 주려나?

아니면…. 갑자기 물이 끊겼다고 찾아가 볼까? 이런저런 희망적인 생각이 솟아났다.

그날 밤, 슬아는 주말에 입을 옷을 찾아보다 포기했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당장 쇼핑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입을 옷이 없었다.

그런데 이무진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할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02

‘나한테는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봤으면서, 이무진 씨한테도 좀 물어봐 주지.’

다음 날, 슬아는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게 조용히 일을 하는 재호와 혜진을 힐끔거렸다.

무진에게 직접 물어보기에는 그렇고, 누가 대신 물어봐 줬으면 싶은데….

오전 업무를 하던 중, 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회의에 들어갔고, 공교롭게도 동기 네


명만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기회였다.

“제가 커피 쏠게요, 쉬고 오실 분?”

“어, 나!”

“나도 갈래.”

거절하는 법이 없는 재호와 혜진을 보다가 슬아는 무진에게 시선을 건넸다.

“저도 가겠습니다.”

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당황하는 무진을 보며 슬아는 깨달았다. 그에게 한 번도 웃어 준 적이 없었음을.

‘아, 얼마나 속물 같을까. 진짜… 슬프다.’

오해받고 있음에도 오해를 벗길 수 없는 기분은 상당히 처참했다.

하지만 슬아는 기운을 내며 입사 동기 세 명과 카페로 향했다.

자기가 내겠다는 무진을 자리에 앉히고, 슬아는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잠시 테이크아웃 존에 서서 무진을 훔쳐보는데 뒤에서 남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저기, 이거 잘못 나온 것 같은데. 저 휘핑 빼 달라고 했는데요.”

“아, 정말요? 죄송해요. 어떡하죠. 다시 해 드릴게요.”

“아니에요, 그냥 마실게요.”

“아, 감사합니다.”

슬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잘생긴 알바생에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맹세코 사심 없는


미소였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무진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차가운 눈동자가 꼭 저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어…. 또 들리는 것 같은데. 마음의 소리.

“김슬아 씨는 잘생긴 남자만 보면 환장하나 보다. 돈 많은 남자면 더 환장하고.”

제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머리통을 내가 깨부술 수도 없고.

왜 자꾸 쓸데없는 상상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슬아는 네 잔의 커피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무진이 일어나 트레이를 받아 주었다.

전엔 의식하지 못했던 이 사소한 매너가 환장하게 좋았다.

“슬아 씨, 오늘도 예쁜 옷 입었네. 설마 어제 본 그 전 남친 만나는 거?”

“아니야. 안 만나, 그 사람.”

“엄청 잘생겼던데, 왜 헤어졌어? 응? 스무 살 때라며? 물어봐도 되잖아.”

또 시작이었다. 이 지옥의 주둥아리 커플….

슬아는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 조금 남자답지 못하고… 조금… 조그만…. 조금… 아무튼 그랬어.”

“아, 슬아 씨 그런 스타일 싫어하는구나?”

“그럼, 그럼.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나처럼!”

재호가 능글맞게 말하자 혜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그냥 가끔은 이런 옷도 입어야지 싶어서. 기분도 낼 겸…. 나, 남자들은 이런 스타일 좋아하나?”


너무 노골적이었나? 슬아의 물음에 혜진이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좋아하지. 자기는 어때?”

“나는 혜진 씨가 입으면 다 좋지.”

“아, 뭐야. 회사에서 그러지 말라니까.”

패고 싶다, 진짜….

슬아는 눈치 없는 두 사람을 보며 볼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그때였다.

“무진 씨는 어때? 어떤 스타일 좋아해?”

오, 재호 씨, 웬일이야. 궁금하던 질문을 대신 해 준 재호에게 슬아는 속으로 환호를 보냈다.

슬아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무진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시선은 커피 잔에 두고 관심 없는


척했다.

“저는 딱히 좋아하는 스타일은 없습니다.”

“그래, 우리같이 잘생긴 남자들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그런데, 슬아 씨는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럼 그럼, 우리 슬아 씨는 우리 회사 공식 미녀 아니야. 후줄근한 옷을 입어도 빛이 나잖아? 물론


우리 혜진 씨만큼은 아니지만.”

“아, 그만해. 재호 씨!”

눈치는 없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잘 살리는 커플이었다. 슬아는 무진을 힐끗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하지, 얼굴 빨개질 것 같은데….

다 잘 어울린다니…. 어떻게 저런 말을. 좋아서 죽어 버릴 것 같다.

그럼 토요일에는 좀 섹시한 스타일로 입어 볼까.

그래, 어필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슬아는 오늘 퇴근 후 쇼핑할 옷의 스타일을 확정 지었다.

오늘은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슬아는 노트북을 들고 가 라운지에서 오후 업무를


마쳤다. 무진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 사랑이란 원래 이런 걸까.’

슬아는 사무실로 돌아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무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을 때만 해도 손톱만큼 작은 마음이었다. 그러다 다음 날 야구공만큼


불어나더니 어제는 농구공만큼 불어나 있었다. 주변을 잡아 삼키고 몸집을 불려 나가는 블랙홀처럼, 점점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농구공만 한 크기였던 마음이 오늘은 짐 볼만큼 커진 기분이었다. 내일이 되면 더 커져


있을 게 분명했다.
무진과의 거리는 그대로인데 마음만 쭉쭉 커지고 있으니…. 혼자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의 속도는 줄인다고 해서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속력을 올리면 올렸지, 줄이는
법이 없는 성격인 슬아에게는 더욱 불가능했다. 폭주 기관차 못지않은 추진력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답은 직진뿐이었다.

“어? 무진 씨는 벌써 퇴근한 거야?”

퇴근 시간 무렵, 사무실로 돌아온 슬아는 비어 있는 무진의 자리를 보며 물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니 퇴근한 모양이었다.

“오늘 일 있다고 반차 썼던데.”

“이사 어쩌고 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아우, 힘들어. 우리도 퇴근합시다!”

아차,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온다고 했었지.

슬아는 이제 동네를 다닐 때도 눈곱은 떼고 다녀야겠다 싶었다.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른 슬아는 그동안 바빠서 쓰지 못했던 통장의 잔고를 탕진했다. 카드를 긁을 때마다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 역시 이 맛. 퇴사는 절대 불가능하다.

고민 끝에 구매한 옷들은 모두 잘 어울렸다. 이번 주말 데이트 때 입을 옷은 크림색의 원피스였다.


유치하게 옷차림으로 유혹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도움이 되면 뭐든 해 보자 싶었다.

또 기분 전환 삼아 립스틱도 구매했다. 연한 립스틱을 즐겨 바르던 평소와 달리, 조금 과감한 색을


선택했다. 피부가 흰 편이라 진한 립스틱도 잘 어울렸다.

다음 날, 슬아는 바로 내일이 데이트를 약속한 토요일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떨렸다. 예상한 대로 무진을 향한 마음은 조금 더, 아니 많이 커진 듯했다.

정말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도 너무 간사했다. 바로 지난주 금요일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던 주말이


이렇게 떨릴 줄이야.

그냥 자신에게 들이대는 동기 1 이었던 무진이 꼭 사귀고 싶은 남자가 될 줄이야.

물론 무진에게 관심이 없던 때에도 잘생겼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다. 그때보다 훨씬 잘생겨 보이니까


문제지.

‘아 근데, 왜 주말에만 데이트를 해야 하지.’

야근 없는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평일에는 왜 안 되는 걸까. 슬아는 출근길에 고민했다. 심지어 오늘은


불금인데…. 오늘 술이라도 마시자고 해 볼까?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좋은 아이디어였다. 오늘은 편한 면바지에 니트 차림이긴 했지만, 속옷만큼은


자신 있었다.

오늘의 개수작이 잘 먹히길 바라면서, 슬아는 하루 종일 무진을 힐끔거리며 일을 시작했다.


“무진 씨, 파일 다 검토하셨어요?”

“네, 방금 메일 전송했습니다.”

“아, 고마워요.”

메일함을 들어간 슬아는 ‘이무진’이라는 글자를 보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어떻게 이무진 씨는 이름도
이무진이지? 멋있다, 진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무진을 힐끔거렸다. 그는 집중한 채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는 둘뿐이었다. 다들 회의에 갔거나 다른 곳에서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기회였다.

슬아는 용기를 냈다.

“저 무진 씨,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오늘도 저녁 같이 먹자는 메신저 메시지가 많았으려나.

속물 같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물처럼 보일 테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었다. 대를 얻기 위해선 소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강하게 나가야 했다.

“아, 네. 왜 그러십니까?”

“그때 저녁 무진 씨가 샀잖아요. 원래 제가 사려고 한 건데…. 오늘은 제가 사 드릴게요.”

“…네, 저는 좋습니다.”

때마침 사무실로 들어오는 직원들을 보며 슬아는 그와 대화한 적이 없는 척, 일에 집중했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

퇴근 후, 무진과 간 곳은 슬아의 집 근처에 있는 조용한 맛집이었다. 식사는 깔끔했고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한 번씩 가슴 한쪽이 쿡쿡 쑤셔 온 것만 아니라면 최고의 저녁이었다.

통증의 원인은 ‘이 사람은 내 관심이 돈 때문인 줄 알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이 아니라 성기 때문에 이러는 것도 어쨌든 속물적인 것에 해당하였다. 그러니 감당해야 했다.

“무진 씨, 어제 반차 쓰고 어디 갔던 거예요? 아…. 혹시 너무 사적인 질문인가요?”

“아닙니다. 이사 때문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동 몇 호로 이사 오시는지 아직 말 안 해 주셨는데…. 이사는 언제 오시는 거예요? 제가


이삿짐 나르는 거 도와드릴까요?”
슬아가 적극적으로 물었다.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핑계를 삼아 무진의 집에 가 볼 속셈이었다.

“이사는 오늘이었습니다. 제가 가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해 주시는 분이 계셔서요.”

“아, 그러시구나.”

맞다. 이 사람 부자였지. 당연히 그런 건 직접 안 하겠구나.

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력에 대한 걸 떠올릴 만한 대화는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돌려야 했다.

“아, 무진 씨, 아이스하키는 왜 그만두신 거예요? 저도 예전에 아이스하키 경기 본 적 있는데 엄청


재밌었어요.”

“부상 때문에 그만뒀습니다.”

“아, 그렇구나….”

분위기가 싸해졌다.

뭔가 대화가 자꾸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대화를 나눌 때 늘 이무진 씨가 질문하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관심의 차이겠지….

예전처럼 도도하게 굴고 싶었으나, 이 사람을 놓쳐선 안 된다는 마음 때문에 쉽지 않았다. 마음을


조절하려고 해도 입이 먼저 폭주 기관차처럼 뛰어나갔다.

왠지 무표정한 무진의 속마음이 또… 들리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 아주 돈에 환장한 여자구나. 내 배경이 그렇게 탐나나?”

물론 저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100% 슬아의 추측일 뿐이었다.

그래도, 배경 때문에 하루아침에 적극적으로 변한 걸 보며 넌덜머리가 나겠지…? 하지만 집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성기 때문이라고 하면 더 싫어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이무진 씨가 예전과 달리 거만해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진 씨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다만,


자신이 질문을 퍼부으며 이무진 씨의 말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약간 침울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슬아에게 무진이 질문했다.

“내일은 영화를 예매해 놨는데, 괜찮으신가요?”

“아, 좋죠. 영화 오랜만에 보는데…. 몇 시에 만날까요?”


“오후 4 시쯤 괜찮으신가요?”

새벽 4 시여도 좋다. 슬아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영화보다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데이트하면


좋을 것 같았지만, 그 희망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벌써 집에 가자고?

안 되는데…. 뭐라도 진척을 시켜야 하는데.

천천히 하라는 머릿속의 명령과 다르게 마음이 자꾸만 급해졌다.

안 그래도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집안 배경에 대한 것이 소문난 이후로는 더욱 떠들썩했다. 고백을 준비


중인 여직원들이 수십이나 대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와중에 이 남자가 최고의 자지를 가진 남자란
것까지 알게 된다면…!

이무진 씨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남아 있을 때 일을 진행시켜야 했다. 이건 옳은 선택이었다.

슬아는 오늘 밤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진에게 먼저 제안했다.

“저, 무진 씨. 혹시… 술 한잔 안 하실래요?”

라면은 거절했어도, 술은 거절 안 하겠지.

“…….”

무진의 침묵에 슬아가 조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일 출근도 안 하고, 저희 약속도 오후 늦게니까요…. 가볍게 한 잔만….”

“…좋습니다.”

됐다. 오늘은 됐다.

슬아는 음흉한 미소를 숨기며 무진과 함께 근처의 바(bar)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하하하… 이무진 씨, 무진 씨는 학교 다닐 때 별명이 그럼 리무진이었어요? 하하하하하….”

“…별명은 없었습니다.”

무진은 슬아의 주정 섞인 질문도 진중하게 대답해 주고 있었다. 슬아는 오늘 무진을 유혹할 생각으로
평소에 마시던 것보다 도수가 높은 술을 선택했다. 자신이 만취할 거라고는 계산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무진은 딱 봐도 눈빛이 맛이 간 슬아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슬아 씨.”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매운 안주를 시켜 한입 먹더니 몸이 뜨거워져 취기가 훅 올라온
모양이었다.

무진의 만류에도 슬아는 기분 좋은 듯 실실 웃고 있었다.

“무진 씨, 그거 알아요?”

“네?”

“오른쪽 수납인 남자가 왼쪽 수납인 남자보다 더 섹시하대요.”

“네?”

“제가 지어낸 이야기예요…. 그래도 이무진 씨 보면 진짜인 것 같은데…. 어…. 이무진 씨가 엄청


섹시하다는 얘기예요.”

말이 횡설수설했다.

“슬아 씨?”

아, 이거 말해도 되나. 슬아는 실실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미 다 말하고 있었다.

“무진 씨, 사실, 저 그때 진짜… 진짜 놀랐어요.”

“…….”

술에 취한 슬아는 평소보다 더 거침이 없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꾸 술술술 입이


나불거리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커요? 무진 씨는 공중목욕탕 가면 막 어깨가 막 이렇게 으쓱거리고….


자랑스러우시겠다.”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니 속이 시원했다. 세상이 핑핑


도는데, 그 사이에서 이무진 씨만 선명했다.

슬아가 또 술잔을 들어 올릴 때였다. 무진이 잔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슬아 씨, 지금 굉장히 취하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 진짜…. 손 안 치워요? 아직 덜 마셨는데….”

“슬아 씨.”

“어쭈…. 이무진 씨, 너 내가 너네 집 돈 많다고 해서 이러는 줄 알지? 내가 그렇고 그런 속물로 보이지,


너는?”

슬아는 지금 술을 더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이무진 씨가 커다란 손으로 술잔을 막고 있었다. 원하는
행동을 막으니 자동적으로 공격적인 성향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무진은 놀란 눈치였다. 저도 모르게 무진의 손에서 힘이 빠졌을 때, 슬아는 빠르게
술잔을 들이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라도 저에게 매력을 느껴 주신 거라면….”


무진은 슬아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야…. 아니야 너. 너, 아니야.”

“예?”

슬아는 술에 취해 혀가 꼬불꼬불해진 모양인지,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진심이야. 네 배경 때문이 아니야, 네 다리…. 다리 사이 때문이지.”

“무슨 말씀입니까?”

슬아는 뜨거운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눈앞에는 순진한
표정의, 엄청 잘생긴 무진이 있었다. 짜릿했다.

슬아는 망설임 없이 옆에 앉은 무진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오른쪽 허벅지였다.

“이거. 이 바게트 때문이라고…. 넌…. 이거 때문에…. 아, 이 와중에 또 엄청 크네…. 좋다….”

그 뒤로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와중에 손바닥에 닿는 묵직한 것이 기분 좋았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임지훈은 잘생겨서 작은 고추를 가졌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이 공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진을 보니 신은 매우 불공평했다. 얼굴도 지훈보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 거기까지
컸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눈을 떴다.

어, 세상이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핑핑 돌지….

동시에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 왔다. 또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쓰려 왔다.

슬아는 전날 원했던 대로, 침대에서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진의 집, 무진의 침대에서.

다만 혼자라는 것이 원하던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

똑똑.

낯선 천장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는데,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슬아 씨, 깨셨습니까?”

“아….”

무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젯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했던 그 망언들이.

***
어젯밤 바에서, 슬아는 무진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는 섹시하다는 둥 커서 좋다는 둥의 개소리를
떠들다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었다.

당황한 무진은 슬아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동과 호수는 아는데,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진은 취해서 흐물거리는 슬아의 부드러운 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슬아 씨, 정신이 드십니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셔야 합니다.”

“아…. 집에 가기 싫은데…. 아, 나 집에 가기 싫은데!”

고운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아이처럼 떼를 썼다. 무진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귀엽긴 한데….

무진은 슬아의 가방이나 주머니에서 마스터키를 찾아보려다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술에 취한 그녀를
더듬거나 가방을 뒤질 수는 없었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슬아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

“아…. 어깨, 좋아….”

슬아는 무진의 어깨에 매달려 어깨가 넓다는 둥 단단하다는 둥의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무진은 어쩔 수


없이 갓난아기 안듯 슬아를 안은 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무진의 집은 슬아의 집의 바로 옆집이었다.

매매를 해 둔 것은 오래전인데, 마침 기회가 좋아 슬아에게 이사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다.

집은 말끔하게 이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워낙 깐깐하고 결벽증이 있는 터라 사용인들이 신경 쓴 티가 났다.

무진은 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 위에 슬아를 올려 두었다. 옷을 갈아입힐 수 없어 이불만 덮어 주고


나가려는데, 슬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진 씨…. 무진 씨, 한 번만….”


“슬아 씨, 괜찮습니까? 물이라도 드릴까요?”

슬아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것들은 짤막한 단어들이었다.

나랑 섹스, 당신 자지, 허벅지, 수납 등등. 슬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문장으로 들리는 말도 몇 개 있었다. ‘너 자지 왜 그렇게 커. 그거 뽕 아니고 진짜야?’ 하는 질문이었다.

종종 만취하거나 수면 마취에서 깨어날 때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런 경우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쯤 되니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회식 자리가 끝난 뒤 슬아의 손이 허벅지에 닿은 적이 있었다. 그때 슬아는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거짓말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고, 오늘 했던 말들을 조합해 보면….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잘된 건가 싶으면서도, 무언가 찜찜했다. 그동안 열심히 관심을 얻어 보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전부 우습게 느껴졌다. 이걸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어필할 걸 그랬네.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

슬아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필름은 끊기지 않는 편이었다. 전부 다 기억한다는 말이었다.

슬아는 무진을 보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시점이었으나, 절로 입에 손이


갔다.

“너 자지 왜 그렇게 커. 그거 뽕 아니고 진짜야?”

질문했던 것이 떠오를 시점에는, 혀를 깨물기 직전이었다.

“씻고 나오시겠습니까?”

“아…. 네…. 네.”


다행히 혀를 깨물려던 행동은 무진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중지되었다.

무진은 꿀물을 건네주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슬아는 일단 손에 있는 꿀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침착해야


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주정을 부릴 거면 차라리 눕히기라도 했어야지. 뭘 하기라도 했으면 덜 부끄러웠을


텐데….

슬아는 절망적인 얼굴로 방 안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일단


헝클어진 머리부터 가다듬고 새 칫솔을 꺼내 양치를 시작했다.

세수할 때쯤에는 제정신이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 수습할 거냐가 문제였다.

‘일단…. 기억 안 나는 척하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만 그만큼 얼굴이 두꺼워야 했다.

슬아는 거울을 보며 몇 번 어색한 웃음을 연습해 보다가 방에서 나왔다.

무진의 집은 자신의 집과 비슷한 구조였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국을 퍼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 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면상이 두꺼워지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조금 어려웠다.

무진은 말없이 식사를 권했고, 슬아는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지, 직접 하신 건가요?”

슬며시 묻자 무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진이 직접 차린 밥상이라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는 아침


식사였다.

근데 또 맛이 기가 막혔다.

콩나물국의 간이 완벽했다. 쓰라린 속을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었다. 밑반찬들도 하나같이 정갈하고 간이


세지 않아 입맛에 맞았다. 밥도 고슬고슬하니 엄마가 해 준 밥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요리도 잘하다니, 역시 완벽한 남자였다.

근데 이제는 정말 틀린 것 같았다. 무진의 얼굴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다. 자신에게 있는 정 없는 정 모두


떨어졌을 게 틀림없었다.

‘이건 최후의 만찬인가.’

슬아는 씁쓸한 마음이었지만 밥이 너무 맛있어서 한 공기를 전부 비우고 말았다.

“저…. 오늘 데이트는… 무리겠죠.”

이제 자신과 데이트할 마음이 전혀 없을 테니까.

만약 무진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더라면…. 어젯밤 슬아가 섹스해 보자는 등의 개소리를 지껄였을 때
승낙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모든 옷을 차려입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아예 건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네? 아뇨, 저는 괜찮은데….”

“저도 괜찮습니다.”

“네…? 아, 그럼, 네.”

아직은 희망이 있는 건가? 분명 어제 무진에게 속내를 전부 털어놓은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


돌아오니 이상했다.

설마 꿈인가? 그럼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식사를 마친 뒤, 무진이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것을 보며 일어났다. 차를 마시겠냐는 권유를


거절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정말 정이 다 떨어졌나.’

무진은 데려다줄 생각도 없는지 반팔 티셔츠를 입은 차림으로 따라왔다.

그나저나, 평소와 달리 편하게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으니 정말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하키를
했을 때는 얼마나 멋있었을까…. 굵직한 팔뚝을 보자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술이 원수지.

“저…. 그럼 이따 연락드릴게요.”

“네.”

‘엘리베이터까지라도 배웅해 주는 걸 보니 아직 희망이 있나.’

슬아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데 무진이 따라나서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어….”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했는데.

문을 열고 나오자 맞은편에 익숙한 숫자가 보였다.

“저, 설마 저거 저희 집인가요?”

멍청한 질문이었다. 다정한 이무진 씨는 비웃지도 않고 상냥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집으로 이사 오신 거였어요?”

“네, 우연히.”

“와…. 네, 그러네요. 우연….”

아직 희망이 있다면 좋은 우연이긴 한데…. 왠지 없는 것 같아서 문제였다.

만약 이무진 씨와 잘 안된다면…. 매일 집 앞에서도 마주칠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이무진 씨한테 여자 친구가 생기기라도 하면…. 집에 놀러 올 테고, 그럼 또 마주치면 나는
이무진 씨가 그 우람한 물건으로 여자 친구와 하는 것을 떠올리며….

끔찍했다.

슬아는 일단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스스로에게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타격감이 상당했다.

슬아는 일단 샤워를 한 뒤,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마음은 괴로운데 이무진 씨가 끓여 준


콩나물국으로 해장을 하고 나니 속이 풀려서 졸렸다.

알람 소리에 깼을 때는 오후 3 시였다. 약속이 4 시였으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슬아는 얼마 전 구매한 예쁜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어제 그런 모습을 보여 줬는데, 이런 옷을 입는다고 예뻐 보일까? 잠시 고민이 들었으나, 그럴수록


당당한 게 좋을 것 같았다.

영화는 최근 개봉한 것으로, 평이 좋은 로맨틱 첩보 영화였다. 하지만 슬아는 편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영화 중간,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좁은 옷장에서 공동의 적을 처치하기 위해 몸을 숨겼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총을 꺼내다가 그만 남자 주인공의 허벅지를 만진 것이다.

이런. 제임스, 당신 오른쪽이었군요.

그렇게 만지면 곤란한데, 셀리.

적나라한 자막을 본 슬아는 죽고 싶었다. 아니, 왜 하필 영화에서…. 이런 우연이. 이런 끔찍한 우연이


다 있나.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더 이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낯짝이 두꺼워도 정도껏이지….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무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무진의 얼굴만 보면 어제의 실수가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저녁 식사 또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또 맛은 있어서 열심히 먹었다.

중간에 오늘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급격히 입맛이 떨어졌으나,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입맛이 돌았다.

그리고 차를 타고 돌아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저, 슬아 씨.”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데 무진의 낮은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슬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나 이제 차이겠구나.’

이제는 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 겸허히 받아들일 때였다. 그나마 부유한 배경 때문에 관심 가진 게


아니라 성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켰기 때문일까. 속은 편했다. 역시 속물보다는 변태 색마 이미지가 나은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제가 혹시라도 오해를 하고 있는 거면 말씀해 주세요. 저로서는 그쪽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아서….”

“네?”

“슬아 씨는.”

“…….”

“제 성기에 매력을 느끼신 겁니까?”

무진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놀라, 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낮은 목소리로 성기라는 단어를
말하다니, 너무 야했다. 아니, 그것보다….

“그….”

“실례되는 대화라는 걸 알지만, 아무래도 헷갈려서요. 제가 잘못 이해한 거라면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지. 슬아는 일단 수습하기로 했다.

“오, 오해예요.”

“오해입니까?”

낮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반문했다.

무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럼 어제 했던 그 말들은 뭐냐고.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긴 한데… 오해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네…. 사실, 맞아요.”

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이키기엔 늦었다. 그냥 솔직하게 나가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고백하고 마음이라도 편해지자 싶었다.

“그래요.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제, 제가 무진 씨 허벅지를 만져 보고, 무진 씨 같은


크기의 사람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생겼어요.”

“…….”

“제가 무진 씨 걸 만져 보고 너무 탐이 나서 그만. 성희롱인 건 알지만 미안해요.”

“그럼 슬아 씨에게는….”

“…….”
잠시간의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무진 씨의
눈빛이 조금 뜨거워서….

기분 탓인가?

“제 배경이 아니라, 성기가 매력으로 다가간 것이 맞습니까?”

적나라한 질문이었다. 슬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예…. 뭐, 맞아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

“조금 더러우시죠?”

소심하게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슬아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무진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저에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네?”

“제 매력을 어필할 기회 말입니다.”

“어….”

무슨 말이지? 슬아는 고개를 들어 무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 부분은 자신이 있어서요. 저에 대한 매력을 더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무진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아니, 좀 과장하자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동공이 살짝 풀려 있는 게….

동시에 얼마 전 무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없지만, 그것 외에도 저에 대한 매력을 더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때와 달리 자신 있다는 말에 뺨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순간 덜컥 겁이 났으나,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머릿속이 요동쳤다. 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다 무심코 무진의 허벅지로 시선이 닿았다. 유난히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오른쪽 바지를
보자, 목구멍이 바짝 조여 왔다. 긴장감으로 인해 심장이 무섭게 쿵쿵거렸다.
***

이렇게 열심히 씻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슬아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보디 미스트에 보디로션까지 꼼꼼히 발랐다.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27 년 만에 드디어 경험다운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격이 차올랐다.

슬아는 바로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무진의 말을 거절하고 한 시간 뒤에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한 뒤,


집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뒤엔 바로 옷을 벗고 샤워실로 향했다.

스무 살 때, 멋모르고 임지훈과 첫 경험을 하려고 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떨렸다.

보디로션을 촉촉하게 바른 슬아는 옷장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이 검은색 속옷은 너무 오버 같고, 저 분홍색 속옷은 또 너무 밋밋했다. 결국, 적당한 느낌을 주는


속옷을 들어 올렸다.

‘이건 좀….’

그런데 이 살구색의 속옷을 입자니, 레이스가 상당히 과했다. 너무 신경 쓴 느낌이라 찜찜했다. 작정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슬아는 노브라에 노팬티, 맨몸 위에 당당하게 커다란 니트 원피스를 입었다.

어차피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늘 속옷을 입지 않고 품이 커다란 옷을 입고 있었다. 왠지 이렇게 입으니


과하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고, 조금 쿨해 보이는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다.

슬아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집을 나섰다. 현관 벨을 누르며 기다리는데, 금방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마찬가지로 씻고 나왔는지, 무진은 하얀 반팔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장이나 깔끔한 옷차림을 입은것만 주로 보다가, 이런 편한 스타일을 보니 역시 새로웠다.

아침에는 너무 민망해서 코 박고 밥만 먹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사실 대학생이라고 하기보다는, 운동선수가 화보를 찍는 것같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무진의 말에 슬아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에는 제대로 보지 못한 집 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리저리 물건이 어질러져 있는 자신의 집과 다르게 깔끔했다.


‘괜히 속옷 안 입고 왔나.’

막상 무진의 집에 들어오고 나서 거실을 거닐다 보니, 잘못된 선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니트 안에서 도톰하게 부풀어 있는 가슴의 정점이 스치는 느낌이 매우 거슬렸다.

‘팬티는 입고 올 걸 그랬나….’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이제 와서 집에 갔다 온다고 말할 수도 없고….

슬아는 머릿속으로 후회를 하며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이며, 치즈, 과일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준비가 꼼꼼한 이무진 씨와 달리 자신은 속옷도 입지 않고…. 여기 앉아서 후회를 하고 있었다.
멍청한….

“슬아 씨.”

“아, 네네.”

“혹시, 후회되시나요?”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무진이 묻는 후회는 그 후회가 아니었다. 슬아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슬아 씨에게 어떤 행위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혹시 제가 두려우시거나…. 걱정이 되신다면 저를


묶어 두셔도 좋습니다.”

“예?”

묶어 놓고 성기만 구경하라는 뜻인가? 그런 취향이었나요. 이무진 씨?

혹시 그렇다면 때려 주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거부감이 조금 들긴 했으나, 하라고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깜빡거리며 바라보자, 무진은 자신이 말을 이상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부끄러운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모습이 또 엄청나게 섹시하게 보였다.

“말이 조금 이상했군요. 저는 그저…. 슬아 씨가 원하지 않는 행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슬아는 용기 내서 묻기로 했다.

“매력 어필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직관적인 물음이었다.

“원하시는 걸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무진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뭐지, 방금 전에 쑥스러워했으면서….

너무 뻔뻔한 표정에 도리어 그걸 물은 슬아 본인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또 갑자기 이상한


승부욕이 돌아서, 왠지 지기 싫었다.

슬아는 잠시 입을 닫고, 대각선의 소파에 앉은 무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 티셔츠는 그의 넓은 어깨와 팔 근육을 더 근사하게 보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대고 있는 자세라 다리 사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웠다.

상대방이 이렇게 나오니, 슬아의 입장에서는 음흉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바로 섹스할 생각으로 왔는데, 상대방은 단순히 보여 주고 매력을 어필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원하시는 걸 보여 드리겠다….’라니. 참 순진해도 정도껏 순진하셔야지. 그냥 보여 달라고만 할 줄 알고?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온 이상,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슬아는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대범하게


물었다.

“자위해 보셨어요?”

슬아의 과감한 물음에 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눈은 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뭐지…?’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무표정한 모습에 슬아는 자신이 방금 뭐라고 말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설마
자위가 뭔지 모르나…?

“네.”

곧이어 돌아온 대답에 슬아는 조금 멍해졌다. 그 순간, 마치 ‘무슨 말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대결을 하는 기분이 되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슬아는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 보, 보여 주세요.”

“그걸로 되겠습니까?”

뭔가 조금 이상하지만, 어쨌든 보러 온 건 맞으니까….

“네.”

슬아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내렸다. 팬티와 함께 쑤욱 내리는데 퉁! 하고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놀라운 광경에 슬아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했다.

무진은 정말 태연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무진의 성기는 꼿꼿하게 서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슬아는 자신이 만졌던 허벅지의 일부는 정말 일부였음을 깨달았다. 이런 걸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나….
커도 너무 컸다. 확실한 것은 가느다란 편인 그녀의 손목보다 굵었다.

무진은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무진의 시선이 없었다면, 정말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다리 사이의 물건을 쓰다듬었다.

낮은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시선은 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 술 드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진은 조금의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마치 혼자 있는 양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슬아는 지금 이 자리에서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으나, 이상한 승부욕 때문에 참기로 했다.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살며시 내려놓고 마찬가지로 뻔뻔한 얼굴로 무진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뭔 말 좆도 아니고….

즐겨 보던 서양 야동의 남자들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심지어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보니 강직도도


엄청났다. 너무나 경악스러운 크기에 슬아는 마음이 조금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까까지는 ‘이렇게 큰 남자가 있다니. 절대 놓쳐선 안 된다.’였다면, 지금은 ‘어…. 이거 조금….


너무 큰데. 지금이라도 발 빼야 될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내 인생은 극단적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무 살 때 만났던 놈은 너무나 작아서


문제였다면, 무진은 너무 거대해서 문제였다.

자위하는 걸 보여 달라고 말했던 조금 전의 당당한 태도와 달리, 슬아는 조금 겁먹어 풀이 죽은 상태였다.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무진은 작고 여린 초식 동물처럼 어깨를 움츠린 슬아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흥분되는 상황에, 무진은 자신의 눈빛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만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슬아에게 고스란히 닿았다.

슬아는 무진의 눈을 슬쩍 바라봤다가 이를 꽉 깨물고 성기로 시선을 내렸다.

뭐지…? 눈빛으로 껍질부터 뼈까지 해체되는 기분이었다. 동공이 살짝 풀린 무진의 눈은 왠지 위험해


보였으나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무진 씨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무진은 슬아에게
안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금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무진의 커다랗고 굵은 손이 마찬가지로 더 커다랗고 굵은 성기를 쓸어내렸다.

쑤욱쑤욱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니, 꼭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애초에 들어가긴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서운 크기와 달리 색은 연한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조금 어색했다. 생긴 것만


보면 검붉은 색이 어울릴 것 같은데….
무진의 성기는 귀두 또한 매우 굵었는데, 기둥은 귀두로 갈수록 조금 위로 휘어진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 한 곳을 미친 듯이 긁어 댈 것 같은 생김새였다. 그런 상상을 하자 절로 뺨이


달아오르고, 다리 사이가 움찔거렸다.

좋아, 첫 경험 간다! 하고 야무진 마음으로 들어왔던 것과 달리, 슬아는 매우 소극적이고 하찮은 자세가
되었다.

무진은 능숙해 보였다. 투명한 프리컴이 줄줄 흘러내리자, 그것을 윤활제 삼아 굵은 기둥에 발랐다.
그리고 엄청나 보이는 악력으로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슬아는 소심한 태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젠가 저 손을 잡으며 악수한 적이 있었는데….

문득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보여 달라고 한 거라, 이제 와서 멈추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또 멈추라고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여전히 겁이 났지만, 슬아는 야동보다 음란하고 적나라한 그의 모습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리 사이가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팬티를 입었어야 했는데…. 슬아는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무진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아….”

눈이 마주치자 무진의 숨소리가 조금, 아니 많이 격해진 것 같았다. 슬아는 다시 눈을 내려 성기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성기를 보는 게 눈을 보는 것보다 덜 부끄럽고 덜 민망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무진의 눈빛이 진득하고 뜨거웠다.

얼마 전, 이 남자는 섹스할 때 어떤 눈빛을 할까 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꽤 로맨틱하고 다정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반대였다. 포악한 짐승이나 할 법한 눈빛이었다.

“하…. 읏….”

무진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지더니, 움직이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슬아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하….”

이윽고 하얀 정액이 꿀럭꿀럭 배출되었다. 너무나 적나라한 장면에 눈을 감고 싶었다. 꽤 멀리까지 튄 것


같았다. 어디까지 튀었는지 궁금했지만 확인하자니 너무 민망할 것 같았다.

“어떠셨나요?”

민망함에 잠시 고개를 숙였는데, 평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아는 고개를 들어 무진을 바라보았다. 꽤 오래 함께 직장 생활을 해 오던 동기였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었나?

그러고 보니 무진이 자신을 짝사랑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뒤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능숙하고 뻔뻔한 걸까?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슬아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물었다.

“아, 안 부끄러우세요?”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거짓말…. 전혀 안 부끄러워 보였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의 성기는 민망할 정도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꺼떡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불에 덴 듯 머리가 어질했다.

“혹시….”

“예.”

실례되는 질문일 순 있겠으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무진 씨는 마지막으로 여성과 잠자리를 가진 게 언제인가요?”

“없습니다.”

“네?”

“경험, 없습니다.”

“어…. 거, 거짓말. 지금 나이가 몇인데요.”

“어린 나이에 성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는 것처럼, 늦은 나이까지 경험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시 너무 커서…. 그래서 전 여자 친구한테 차이시거나 한 건가요?”

“여자 친구도 있던 적 없습니다.”

“어, 왜요?”

“사귀고 싶다고 생각한 여성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귀까지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럼 내가 처음이라는 건가? 솔직히 믿기 어려웠지만, 듣기 좋은


립서비스였다. 슬아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미안해요. 혼자 하시는 게 능숙해 보이셔서요.”

“자주 하진 않습니다. 오늘은 눈앞에 슬아 씨가 계셔서…. 조금 흥분했습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흥분한 것 같았다. 슬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슬아 씨니까, 슬아 씨를 좋아해서. 부끄럽지만 참고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부끄럽다는 건 믿기 어려웠지만, 제 입으로 그렇다니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더 자세히 보시겠습니까?”

“네?”

무진의 질문에 슬아의 시선이 다시 그의 성기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제 좆이 궁금하셨던 것 아닌가요?”

“어….”

맞긴 맞는데. 단어 선정이 꽤나 적나라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어서, 슬아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매력을 어필하고 싶으니 좀 더 봐 주셨으면 합니다.”

“…….”

“혹시 부끄러우신 거라면, 제 눈을 가리셔도 좋습니다.”

무진의 말에 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렇다면….

“그 그럼, 그래도 괜찮을까요?”

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진의 눈을 가리자 한결 부끄러운 것이 줄어들었다.

산속에서 호랑이와 눈을 마주치면 꼼짝할 수 없다더니, 슬아는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 무진의 눈빛은 꼭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동공 풀린 눈빛이었다.

장소를 옮겨, 이곳은 무진의 침대 위였다. 오늘 아침에 슬아가 눈을 뜬 곳이기도 했다.

무진은 바지를 벗고 눈은 가려진 채 손목까지 결박되어 누워 있었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운 무진을 보니


절로 침이 넘어갔다.

입고 있는 흰색의 반팔 티셔츠까지 벗길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솔직히 손목까지 묶을 생각은 없었는데, 무진이 묶어도 된다고 말하자 충동적으로 저질러 버렸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끈이 끊어질 게 분명하지만, 무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슬아 씨가 허락하기 전까진 절대 눈을 뜨지 않겠습니다. 손을 풀지도 않을 거고요.”

“네….”

이런 플레이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SM 플레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저 무진의 배려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조금 더 편해져 보기로 했다.

실내 온도는 딱 적당했는데, 무진의 자위 모습을 본 뒤부터는 너무나 열이 올라 더울 지경이었다.

허락하기 전까지는 절대 눈을 뜨지도, 손을 풀지도 않겠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슬아는 입고 있던 니트 원피스를 벗어서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어차피 섹스할 생각으로 온 것이긴


했지만, 무진의 눈을 가린 채로 알몸이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슬아 씨, 혹시 옷을 벗으셨습니까?”

“아…. 네. 조금 더워서….”

“네.”

단정한 대답과 달리 무진의 성기에 힘이 들어갔다. 꺼떡거리는 모양새가 적나라했다.

“그, 그럼 조금 자세히 봐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며칠 전부터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네.”

무진의 대답에 슬아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무진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슬아는 먼저,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힌 무진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하….”

낮은 신음이 들려오자 슬아는 아차 싶어 손을 뗐다. 그리고 물었다.

“미안해요, 만지는 건 허락하지 않았는데. 만져도 될까요?”

“만지셔도 좋습니다.”

“고, 고마워요.”

허락도 받았겠다, 슬아는 이제 당당히 그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성기를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목격했던 남자의 성기는 이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새삼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연한 분홍색의 성기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크고 굵었다. 자신의 손과 비교해 보니 차이가 엄청났다.


애초에 무진과는 손 크기부터 차이가 상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생긴 것은 흉흉했으나, 색감이 워낙 예쁜 터라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슬아는 용기를 내 손을 뻗어 성기를 만져 보았다.

“어….”

생각보다 너무 단단한 질감에 깜짝 놀라 소리가 나와 버렸다. 손이 닿자 무진의 몸이 움찔거렸다.

자신의 손에 이렇게 하나하나 반응하는 남자의 몸이 신기하면서도 흥분감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세게 쥐어 보았다. 한 손에 잡히지 않는 크기였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너무 단단했다.

뼈도 아닌데 이렇게 단단할 수가 있나. 콘크리트로 만든 쇳덩이나 돌덩이 같았다.

힘을 줘 쥐어 보니 손에 잡힌 채로 성기가 꺼떡거렸다. 꼭 의지가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자신의 손아귀보다 힘이 더 셀 것 같았다.

기둥 부분에 불거진 또렷한 핏줄 또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반면, 귀두 부분의 표면은 말랑말랑하니


부드러웠다.

순간적으로 한번 빨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진 씨, 저 혹시 한번 입에 넣어 봐도….”

“안 됩니다.”

“왜, 왜요?”

“…슬아 씨에게 그런 행위를 하게 할 순 없어서요.”

“해 보고 싶은데….”

슬아의 말에 무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안 됩니다. 입 안에 넣자마자 못 참고 사정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사정하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걸까? 무진의 말에 슬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액을 입으로 받고


싶진 않았다.

그 대신, 귀두 위에 맺힌 투명한 쿠퍼액을 만져 비벼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의


정액이 튀어나왔다. 무진이 참지 못하고 사정한 것이다.

“하….”

자신의 손길에 신음하고, 흥분해서 사정하고, 움찔거리는 무진의 몸을 보자 급격하게 흥분이 밀려왔다.

다리 사이는 아까부터 말도 못 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시트가 젖을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슬아는 무심코 자신의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흥건한 애액에 손가락이 푸욱 미끄러졌다.

뺨은 이미 뜨겁게 익어 버린 지 오래였다. 뇌까지 녹진녹진하게 녹아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슬아는 술에 취한 것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무진 씨, 혹시… 만져 보실래요? 아니, 만져 주세요.”

가는 끈으로 묶여 있는 무진의 손은 그의 배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슬아는 그 위로 올라타 무릎을


세웠다.

무진이 당황해서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슬아는 대범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침대 헤드를 잡고 살짝 몸을 기울였다. 대답 없이 망설이던 무진은 묶여 있는 팔목을


살짝 비틀더니 오른손을 편하게 만들었다.

“아….”

이윽고 굵고 기다란 무진의 가운뎃손가락이 슬아의 젖은 다리 사이를 스쳤다.

질퍽하게 젖어 물이 고인 곳에 손가락이 닿자, 무진의 손가락을 타고 애액이 흘러내렸다.

“하….”

무진이 어이없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 소리에 슬아는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으나, 남자의 손이 처음


닿는 곳이 소름 끼치게 기분 좋았다.

“저 때문에 이렇게 젖으신 건가요?”

“흐읏….”

“대답해 주세요, 슬아 씨. 제 좆 때문에 이렇게 젖으신 거냐고 물었습니다.”

단정한 얼굴로 음탕한 단어를 잘도 내뱉는다. 하지만 늘 매너 있는 말투와 목소리를 가진 무진이 그런


말을 하니 더욱 흥분이 밀려왔다.

“네…. 아, 앗!”

무진의 가운뎃손가락이 느리고 부드럽게 클리토리스를 비볐다. 살살 건드린 것뿐인데 절로 신음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분 좋았다.

“속옷은 어디 있습니까. 설마 입지도 않고 오셨나요?”

조금 전, 옷을 벗는 소리는 분명 겉옷만 벗는 소리였다. 직접적인 질문에 슬아는 차마 부끄러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꼴을 하고 있으면서 겨우 그게 부끄럽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슬아 씨는 제 좆이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런 방식으로 매력을 어필할
걸 그랬네.”

“흐읏…. 그, 그러게요. 진작에 알았으면….”

“혹시, 큰 좆만 보면 발정하십니까? 이렇게?”

“아, 아니에요!”

무진의 손가락이 조금 더 깊이, 안쪽으로 향했다. 잔뜩 젖어 풀어진 구멍 입구를 안달 나게 건드렸다.

“원래 저에게는 관심이 없으셨지 않나요? 그러니 제가 오해할 수밖에요.”

“그, 그게 아니라…. 으응!”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무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엄청나게 음탕하고 야한 여자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큰 좆만 보면 발정하는 거냐고 타박하는 말투에 수치심이 밀려오는데, 또 이상하게 흥분되었다. 원래
이런 취향이었나? 전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진이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빠르게 비비며 말했다. 손으로는 음탕한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낮고 평이했다.

“하…. 으응!”

“그래서 어떠셨습니까. 이렇게 젖으신 걸 보면 제가 바라던 대로 매력 어필이 된 것 같은데. 맞나요,


슬아 씨?”

“읏, 네…. 네, 좋아…. 아!”

질 입구를 간지럽히며 안달 나게 하던 가운뎃손가락이 쑤욱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성인용품을 가지고 놀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무진으로 인해 흥분한 까닭이다. 이전에 관심도 주지 않았던, 자신을 짝사랑하던 무진과 이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도 흥분으로 작용했다.

손가락을 밀어 넣는 행위가, 클리토리스를 비비는 행위가 전부 음탕한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 배덕감이 미치게 기분 좋았다. 더, 더 몰아붙여 줬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 흐응….”

굵은 손가락이 내부를 휘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가끔 사용하던 평균 사이즈의 딜도보다 더욱 안을 꽉


채우는 기분이었다.

쿨쩍쿨쩍, 입구를 들락거리는 야한 마찰음이 들려오자 더욱 수치심이 밀려왔다.

“아흣, 아!”

무진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듯이 내부를 뭉그적거렸다. 손가락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저 커다란 좆이 들어오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아랫배가 아려 왔다.

“흐응…. 읏!”

어느 한 부분을 누르자, 허리가 튕겨 올랐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슬아는 힘을


주어 무릎을 곧추세웠다.

“슬아 씨, 제가 더 만져 드리길 바랍니까?”

“흐읏…. 응, 네….”

“허락하신다면, 입으로 만져 드리고 싶습니다.”

“네, 네?”

“제 입으로, 슬아 씨 보지를 만져 드리고 싶습니다.”

그,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런 것에 민망해할


상황이 아니었다. 되레 적나라한 그 말투가 더 흥분되는 것 같았다.

“손목을 풀어도 될까요?”

“네….”

대답이 끝나자마자,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진의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이 떨어져 나갔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무진은 슬아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어….”

그대로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다리 사이로 그의 머리가 자리를 잡았다.

이런 자세로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저, 저기….”

“편하게 앉으세요, 슬아 씨.”

말하는 어조가 평이했다. 아무렇지 않게 손님에게 소파를 내어 주는 듯한 말투였다.

무뚝뚝한 어조로, 그러나 어쩐지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자신의 얼굴 위에 앉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슬아가 머뭇거리자, 무진이 슬아의 양쪽 허벅지를 잡고 끌어당겼다. 슬아는 여전히 침대 헤드를 붙잡은
채, 무진의 머리를 두고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강하게 허벅지를 억누르는 힘에 의해 슬아는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아…!”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진의 높은 코끝이 자신의 음부에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광경이
지나치게 음란해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무진은 그대로 슬아의 허벅지를 붙잡고, 혀를 내밀어 클리토리스를 슬쩍 건드렸다.

“아, 앗!”

혀끝이 닿았을 뿐인데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했다. 손으로 해 줄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았다.
다만 시각적인 자극 때문에 지금이 더 흥분되었다.

무진은 입술을 모아, 혀끝으로 음순을 벌리고 비집고 들어갔다. 애액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흘러내린 애액은 모두 무진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흐응…. 아, 안 돼…. 아!”

춥, 춥 추릅. 듣기 민망한 소리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두꺼운 혀가 질구를 꾹꾹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안으로 밀려들어 올 것 같아 두려웠다. 무진은


혀를 말아 올려 부어오른 클리토리스를 건드리다, 질구까지 끌어당겨 흘러내리는 애액들을 받아먹었다.

“아앗, 아! 아아, 흐응!”

입술에 힘을 주어 쭙쭙 빨아들일 때는 그대로 모든 힘이 빠질 것 같았다. 슬아는 최대한 허벅지에 힘을


주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꼭 키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무진은 입술로, 자신은 아래로 할 뿐이었다. 문득 키스도 하지 않은
상대와 이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흐읏…. 아, 아읏….”

자신의 엉덩이 아래에 깔려서 음탕하게 혀를 움직이는 남자가, 얼마 전까지 자신을 내내 짝사랑하던
지고지순한 남자라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더, 더 자극적인 것을 하고 싶었다.

슬아의 바람이 들렸는지, 무진의 혀는 점점 더 강하고, 게걸스럽게 음부를 휘저었다. 중간중간 무진은
벌벌 떨리며 힘이 들어간 허벅지를 끌어당겨 편하게 앉게 만들었다.

쭈웁쭙 하는 노골적인 소리가 민망했다. 질구를 쪽쪽 빨던 무진은 혀끝을 내밀어 클리토리스를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아, 으응! 아, 안…. 흐응.”

일순간 몸이 바짝 긴장되면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절정이 오는 느낌이었다. 슬아는 한쪽 손을 내려


무진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무진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 안 돼. 놔, 놔 주…. 흐응, 아아! 아!”

놓아 달라는 말이 완성되지 못한 채 흩어졌다.

완성되지 않은 말이지만, 알아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무진은 강하게 허벅지를 움켜쥔 채로, 혀를
움직이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슬아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침대 헤드에 몸을 의지했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끈이 뚝 끊어진 느낌이었다. 슬아는 그대로 힘이 빠져 무너져 내렸다.

무진의 혀는 여전히 벌벌 떨리며 수축하는 음부를 게걸스럽게 파고들고 있었다.

오르가즘의 여파로 헐떡일 여유가 없었다. 무진의 혀가 질척이며 애액을 쏟아 내는 구멍을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슬아는 또다시 자극적인 느낌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흐으…. 아, 이상, 아…. 아!”

아, 안 돼.

이번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무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혀가 집요하게 따라왔다.

처음 겪어 보는 경험이었다. 슬아는 요도에서 무언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을 느꼈다.

투명한 물이 소변처럼 흘러내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무진의 얼굴에 쏟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상황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슬아는 젖어 버린 무진의 하얀 티셔츠를 보며 아연해졌다.

영상에서만 봤지, 실제로 경험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치심이 강하게 밀려와 눈가가 시큰했다.

“슬아 씨.”

낮은 음성이 제 이름을 부르자 이성이 돌아왔다. 슬아는 어떡하지, 중얼거리며 무진의 젖은 티셔츠를
벗겨 냈다.

무진은 슬아가 하는 대로 얌전히 상체를 일으켜 티셔츠를 벗었다. 완벽하게 알몸이 된 무진을 바라보며,
슬아는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미, 미안해요…. 이게, 그러니까….”

소변과 달리 투명한 색이었으나, 다 큰 성인이 되어 남자의 옷에 실례를 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오르가즘의 여파와 수치심으로 눈물이 핑 돌아 줄줄 흘러내렸다.

무진은 그사이, 한 번 더 사정한 것인지 성기 끝에 하얀 정액이 맺혀 있었다.

“이거, 벗어도 괜찮을까요?”

무진은 조금 흥분한 듯,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눈을 가린 것을 의미했다. 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무진의 눈과 마주쳤다. 불을 끄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들어오는 거실의


희미한 빛에 눈이 부신 듯했다.

“미안해요…. 그….”

슬아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무진은 눈물까지 흘리며 사과하는 슬아를 보다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쉬이, 괜찮습니다.”

무진은 놀라 불안정한 슬아를 끌어안아 등을 고른 속도로 토닥여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슬아의 눈가에
닿았다. 무진은 쪽쪽, 입을 맞추며 흘러내린 슬아의 눈물을 빨아 먹었다.

커다란 손이 규칙적으로 주는 안정감에 불안한 마음이 급속도로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다만, 부끄러움은
여전했다.

“그게, 소변은 아닌데….”

“그렇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다 받아 마셨을 테니까.”

“그런 말을….”

“그보다, 조금 더.”

“예?”

“이 이상 더, 해도 괜찮을까요?”

슬아는 무진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진의 검은 눈은 동공이 풀려,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덜컥 겁을 먹게 하는 눈빛이었으나, 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2 차전으로 흘러갔다. 무진이 다가와 입을 맞추려던 순간, 슬아는 슬쩍 그의 얼굴을
피했다. 자신의 애액으로 잔뜩 젖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민망했다.
무진은 슬아의 뜻을 알아채고 세수를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사이, 슬아는 자신의 애액으로 젖어 있는
시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숨고만 싶었다. 시트를 직접 갈고 가겠다고 말하면, 거절하겠지.

어느새 다가온 무진이 슬아의 몸을 돌려세웠다. 동시에 물기가 어려 촉촉한 입술이 급하게 다가왔다.

“음…!”

이런저런 짓까지 벌써 한 사이에, 새삼스럽지만 부끄러웠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봐


두려웠다.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슬아는 숨을 쉬기가 버거워 뒤로 물러났으나, 무진의 손이 뒤통수를 잡고 끌어당겼다.

급하고, 거칠게 몰아붙이는 혀를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무진의 반대쪽 손이 슬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정신없이 세수를 했는지, 무진의 젖은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그 점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입술 사이로
피식하고 웃음이 흘렀다. 무진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왜 웃으십니까?”

쪽쪽, 잘게 입을 맞추며 무진이 물었다.

“그, 그냥….”

무진의 손이 가슴 위로 올라왔다. 무진은 동공이 풀린 눈으로 시선을 내렸다. 두껍고 커다란 그의 손바닥
안에 탄력 있는 가슴이 가득 들어찼다.

“왜 속옷도 안 입고 오신 건가요, 슬아 씨?”

검지 끝으로 유두를 비비며 무진이 물었다.

“흐읏….”

갑작스러운 질문에 웃음이 싹 가시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슬아는 슬쩍 무진의 어깨를 밀치며 눈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순순히 밀려나지 않았다.

무진이 집요하게 다가와 다시 입술을 쪽쪽거렸다. 검지는 여전히 유두를 빙글빙글 굴리며 만지고 있었다.

“말해 주세요. 왜 입지 않고 오셨는지.”

“그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구구절절했다. 속옷들이 전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무진은 슬아를 눕히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저와 이런 짓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건가요?”

“아…. 읏!”

무진이 혼내듯 슬아의 유두를 가볍게 꼬집었다. 슬아의 시야에 흥분해서 꺼떡거리는 그의 성기가 들어왔다.
저 큰 걸 품을 생각을 하니, 흥분과 함께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다.

무진의 시선이 슬아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집요할 정도로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탁, 하고 풀린 무진의


눈동자를 보자 아득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무진이 고개를 내려 슬아의 뺨 위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꼭 도장을 찍듯 꾹꾹 누르는 입맞춤이었다.


무언가를 새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흐으…. 아!”

무진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가득 담겼다. 슬아는 신음을 흘리며 몽롱한 눈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슬아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가슴을 모아 쥐며 쪽쪽거리고 있었다. 쭙쭙, 하고 살을 빠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욕심껏 가슴을 베어 물고 빠는 모습에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흥분으로 애액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더 시트를 젖게 하고 싶지 않은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 으응…. 아!”

내내 입 안을 버겁게 침범했던 혀가, 이번에는 젖꼭지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혀끝으로 꾹꾹 누르며


자극하자 묘한 기분이 샘솟았다.

이로 살짝 깨물고는 또 살살 달래듯 혀로 쓸어내렸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감각에 슬아는 그대로 파도에


휩쓸리듯 헐떡거렸다.

무진은 배꼽과 아랫배, 허리에도 집요하게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가 꿇어앉아 성기를 움켜쥐고 통통한 슬아의 음부 위를 두드렸다.

“아…!”

“이 좆이, 그렇게 탐났습니까, 슬아 씨?”

“으응…. 하, 네. 탐, 탐났어요….”

슬아는 몽롱해진 눈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 뭉툭한 귀두가 때리듯 클리토리스 위를 툭툭 건드렸다.

“슬아 씨가 이렇게 야해 빠진 사람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

지지 않으며 대꾸하자, 무진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근사하고 어딘가 모르게 야해서, 슬아 또한 따라 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진은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콘돔을 꺼냈다. 껍질을 벗기는 손길이 느긋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까 사 두길 잘했네요.”

“…….”

콘돔을 씌우는 모습을 보며, 슬아는 흥분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진 또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다는 게, 굉장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밀려오는 흥분으로 숨이 가빠 올랐다. 그때였다. 강한 마찰음이 들려와, 슬아는 고개를 들었다. 버거울
정도로 벌어졌던 콘돔이 끝부분부터 시작해 찢겨져 버린 듯했다.

“어….”

슬아는 조금 당황해서 무진을 바라보았다. 무진은 다시 새 콘돔을 꺼내 씌우기 시작했다. 서투른


손길이었다.

근데 이거, 손길이 서툴러서라기보다는….

“서, 설마 콘돔이 작아서 그런 건가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콘돔이 이렇게 쉽게 찢어진다고…? 아무리 커도 그렇지….

또 한 번 콘돔이 찢어지고, 세 번째 시도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꽤 정상적으로 씌워진 듯했다. 뒷부분이 많이 모자라 보이긴 했으나 어쨌든 성공이었다.

“제가 서툴러서 죄송합니다, 슬아 씨.”

“아니에요….”

무진은 부끄러운 듯한 모습으로 슬아의 뺨에 몇 번 더 입술을 문질렀다. 쪽 하고 떨어지는 사랑스러운


행위가 기분 좋았다. 다정한 입맞춤과는 별개로, 무진의 손은 슬아의 허벅지를 잡고 벌리고 있었다.

무진이 슬아의 음부로 귀두 끝부터 조금씩 밀어 넣을 때였다. 쑤욱 압박하는 느낌과 함께 성기가 밀려들어
오는데….

“아!”

슬아는 깜짝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빼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괜찮습니까?”

무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묻는 목소리나, 뺨을 만지는 손길이 다정해서 잠시 멍해졌다.

“어…. 너무 아픈데.”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슬아는 살짝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무진의 성기가 과하게 컸다. 귀두부터 너무
굵어서…. 아래를 불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마침 또 마찰음과 함께 콘돔이 찢어진 것이 보였다. 섹스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슬아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제가, 처음이긴 한데….”

“처음입니까?”

“네, 사람이랑은 처음…. 아니 그게, 그러니까.”


또 말실수를 해 버렸다. 슬아는 아차 싶어 뱉어 버린 말을 주워 담으려 노력했다.

“아, 그게…. 그러니까 그게 아니고. 사람이랑은, 그러니까…. 전 남자 친구랑은 안 해서요….”

무진은 대답 없이, 말간 얼굴로 슬아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동공이 탁 풀려서 미친 사람


같았는데, 이제 와서 순진한 표정을 짓다니…. 환장할 것 같았다.

“그게, 딜도를 사용해 본 적은 있는데, 그게 평균 사이즈라고 했거든요. 초심자용이라고….”

“네에.”

돌아오는 대답이 순수했다. 슬아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내뱉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 그러니까 경험은 있는데….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너무 아픈데요.”

결론은 그랬다.

딜도를 처음 사용했을 때도 이렇게 아프진 않았다. 그때는 손가락을 처음 써 보다가 그보다 조금 큰,


초심자용 작은 사이즈의 딜도를 구매했었다.

얼마 전까지 사용에 지장이 없었는데, 그보다 훨씬 큰 무진의 것을 넣으려니…. 아래를 불몽둥이로


쑤시는 것처럼 입구가 아려 왔다. 제대로 넣은 것도 아닌데 아직도 아래가 화끈거렸다.

“괜찮습니다. 슬아 씨가 아픈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미안해요….”

넣기 무섭다는 슬아의 뜻을 알아챈 무진이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볼까 고민하던 슬아는 아연할 정도로 더 크게 부풀어 올라 꺼떡거리는 성기를 보며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콘돔도…. 콘돔이 불량인지, 저 성기가 불량인지 어쨌든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제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무진이 커다란 손으로 슬아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다정한 왼손과 반대로, 반대쪽 손가락은 슬아의 질 입구 언저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순진한 척하던 그의 눈빛이 어느새 또 탁하게 풀려 있었다. 무진은 조금 화난 듯한, 약간 쉬어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딜도로, 이 작은 구멍을 쑤신 건가요?”

“아…. 잠까…. 하윽! 아!”

“슬아 씨는 볼수록 의외인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딜도가 어디까지 쑤셔 주던가요, 여기까지?”

“아, 아앙! 흐윽…. 아!”


아까 집요하게 문질렀던, 가장 자극되는 부위를 굵은 손가락이 빠르게 쑤셔 댔다.

슬아는 그대로 누워 헐떡이며 눈을 감았다. 무진의 입술이 집요하게 따라와 혀를 얽어 왔다.

“흐아, 아! 아앗!”

버겁게 밀려오는 두꺼운 혀 때문에 신음 소리에 바람이 샜다. 손가락이 쑤시는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반복해서 어느 한 부분을 계속 두드리는 바람에, 몸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바르르 떨려 왔다.

“흐으, 아아…. 아!”

무진은 부들부들 떨며 신음하는 슬아의 뺨에 느리게 입술을 문댔다. 쪽쪽 입을 맞추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딜도가 이곳도 잘 쑤셔 주던가요, 슬아 씨?”

“아, 흐응, 아아! 안…. 아!”

빠르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갑자기 멈추더니 느리게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손가락이 긴 탓에 쑤욱쑤욱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 이상했다. 갈고리처럼 휜 모양으로 쑤셔 대니, 특정 부분이 더욱 자극되었다.

“손가락도 기가 막히게 꽉꽉 물어 대는데, 딜도가 사람 좆이었다면 수백 번은 안에 사정했겠네요.”

“흐으, 아니…. 응!”

“여기는 딜도가 긁어 주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맞습니까?”

슬아가 느끼는 부분을 꾹꾹 밀어 올리며 물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부분이 그쪽에 있는지, 지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진작에 알았다면


애초에 휘어져 있는 딜도를 구입했을 것이다.

“흐응…. 아! 흐윽….”

손가락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질꺽질꺽,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물기 고인 소리가 들려왔다. 슬아는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시트가 다 젖었어요, 슬아 씨 보짓물 때문에.”

“그, 그런 말…. 아앗! 앙!”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짓누르자, 쾌감이 불꽃처럼 펑펑 터져 왔다. 더 크고 굵은 걸로 쑤셔 줬으면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손가락을 쑤셔 대는 무진은 슬아의 한쪽 허벅지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고 있었다.

“흐앙! 아! 하읏!”

워낙 굵고 단단한 탓에 허벅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쾌락이 더욱 컸다.

“아, 안 돼, 아! 아아, 아!”

어느 순간, 슬아의 몸이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허리가 제멋대로 휘는 것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무진의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슬아가 느끼는 부분을 비벼 댔다.

또다시 투명한 물줄기가 나와 무진의 손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흐으…. 아, 안 된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슬아는 자신이 오르가즘을 느낄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만큼의 쾌락을 느껴 본 것이


처음인 탓이다.

쾌감의 여파도 있지만, 수치심 때문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연달아 실수한 기분이라 끔찍했다. 슬아는
너무나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고 흐느꼈다.

“괜찮습니다, 슬아 씨. 저 보세요.”

커다란 손이 슬아의 얼굴을 돌려세웠다.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니 더욱 수치스러웠다. 무진은 슬아가 다시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뺨을 감싸고 눈가에 입술을 쪽쪽거렸다.

무진은 아까와 같이 슬아의 눈가에 입술을 맞추며 눈물을 핥아 먹었다.

쪽쪽쪽. 눈가와 뺨에 잘게 입을 맞추는 무진의 행위는 꼭 참새가 입을 맞추는 것같이 느껴져 간지러웠다.

더불어 다정한 손길이 규칙적으로 등이나 허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덕분에 금방 진정이 찾아왔다. 무진의
말대로 정말 괜찮은 것만 같았다.

슬아의 흐느낌이 멈추자, 무진은 슬아를 똑바로 눕히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뭐 하는…. 이, 이제 더 못 해요.”

“상처가 났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프진 않습니까, 슬아 씨?”

“괜찮은데….”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긴 했는데…. 제가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진은 내내 슬아의 음부를 쑤시던 가운뎃손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빨았다. 그 적나라한 행위에 수치심이 다시 밀려오는 듯했다.

단정히 정리된 그의 손톱을 보자,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걱정과 달리 다행히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삽입의 시도로 질 입구가 쓰라리긴 했으나, 다른 부분은 멀쩡했다.

그것보다, 내내 물에 담겨 있던 것처럼 불어 버린 그의 손가락을 보는 것이 민망했다.

민망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슬아와 달리, 무진은 혹시라도 슬아가 삽입을 실패해 만족하지 못했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기분 좋으셨나요?”

“…….”

그걸 뭘 묻지. 슬아는 입술을 깨물며 잔뜩 젖어 버린 시트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두기도 민망했다.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제가 씻을게요.”

“…알겠습니다.”

슬아는 협탁 위에 올려 둔 니트를 끌어안고 도망치듯 그가 가리키는 화장실로 향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무진이 젖어 있는 시트를 정리할 거라 생각하자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

반면, 삽입에 실패했음에도 이렇게 큰 쾌락을 느꼈다는 게 놀라웠다.

며칠 동안 저 성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삽입을 하지 않았음에도 심각하게 느껴 버린 것이다.


본게임도 하기 전에 지쳐 버린 게 어이없으면서 또 아쉽기도 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면서, 슬아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무진은 분명 2 주 동안 자신과 데이트를 한 뒤에, 다시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꼭 2 주 동안 기다려야 하나…? 솔직히 지금 당장 대답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신이 왔다.

지금이야 조금 아프지만, 언젠가는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무진은 분명히 아프지 않게, 기분 좋게 해 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다만, 귀를 의심할 정도로 부끄러운 말들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뻔뻔한 그 태도에 오히려 더 흥분했으니.

꼭 섹스뿐만이 아니었다. 무진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처음이라니…. 무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무진 씨가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실망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은 걱정되는 문제였다.

역시나 씻고 나오자 무진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시트를 깔끔하게 갈아 놓은 뒤였다. 속옷을 입지 않은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기에는 많이 늦은 타이밍이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하나? 가기 싫은데.

거실로 나온 슬아는 다른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하고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진이 호텔에서나 입을 법한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왔다. 새삼스럽게 그 모습이


자극적이라, 슬아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앉았다.

“슬아 씨.”

“…네?”

새침하게 앉아 있던 슬아는 옆의 소파에 무진이 앉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제가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일 년 넘게 회사에서 마주쳤던 입사 동기와 이런저런 짓을 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이무진 씨는 내내 자신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던 남자였다.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더불어 새삼 얼굴을 마주 보려니 부끄러워 잘 익은 벼처럼 고개가 꾸벅꾸벅 내려갔다.

무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원하시는 걸 생각보다 제대로 보여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네요.”

충분히 보여 주신 것 같은데요….

슬아는 민망함에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목 언저리에서 무진의 뜨거운 눈길이
느껴졌다.

차마 무진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슬아는 자신의 손등만 내려다보았다.

무진은 슬아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집요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슬아가 봤다면 기겁했을 만큼
음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그는 잠시 탐욕스러운 자신의 눈빛을 갈무리하고 슬아에게 물었다.

“한 번 더, 보여 드릴 기회가 있을까요?”

“어….”

당연히 있죠. 슬아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대답에 무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변모해 있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콘돔과 핑거 콘돔도 준비하겠습니다.”

“어…. 네.”

그렇다면 자신도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가장 급한 문제는…. 저 엄청난 크기의 성기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가끔 사용하던 딜도보다 조금 큰 사이즈를 구매해서 적응해 보는 게 나을까?

사실 성인용품 사이트에서 가장 커다란 크기의 딜도를 구매해 적응한다 하더라도, 무진의 크기는 여전히
버거울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그보다 엄청난 오르가즘을 느꼈기 때문일까, 급작스럽게 졸음이 밀려오면서 허기짐까지 느껴졌다.

자고 가도 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슬아의 핸드폰이 눈치 없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엄마
무진과 눈이 마주친 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왜?”

- 왜긴, 너 집이지? 내일 승연이 결혼식이잖아.

“아, 맞다.”

슬아는 친척 언니의 결혼식이 내일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하필 이때….

- 엄마 오늘 부부 동반 모임을 서울에서 했는데 지금 끝났거든. 내일 아침에 서울 오려면 차 막힐 테니까


아예 지금 너한테 가려고. 집이지?

“어, 어…. 알겠어.”

- 그래, 방 좀 치워 놓고.

전화를 끊으며, 슬아는 아쉬운 눈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예, 들렸습니다. 부모님께서 지방에서 지내고 계신 건가요?”

“아뇨, 지방은 아니고 판교에 사세요.”

슬아의 부모님은 서울과 아주 가까운 경기도에서 살고 계셨다. 평소에도 가끔 서울에 모임이 있을 때면


차가 막힌다는 핑계로 하나뿐인 딸의 집에 오시곤 했다. 하필 그날이 오늘이라는 게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넉넉한 평수를 택했다. 하나뿐인 딸이기에 부모님께서 이것저것 아끼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저,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요. 집을 치워야 해서…. 엄마가 잔소리를 하시거든요.”

“네에.”

웃음기 머금은 대답이 다정했다. 슬아는 괜스레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무진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입꼬리가 근사하게 말려 올라간 무진과 눈이 마주쳤을 때, 새삼스럽게 이 남자의 미소가 이렇게
멋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짓던 그 미소는 평소보다 굉장히 야릇해 보여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03
다음 날, 슬아는 부모님과 함께 친척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슬아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친척 언니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솔직히 결혼식을 보는
내내 이무진 씨랑 결혼하고 싶었다. 엄청난 김칫국이었다.

예식장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는 인근의 카페로 향했다. 직원이 커피를 내려놓고 돌아서자마자 슬아의
엄마는 물었다.

“너는 누구 결혼할 남자 없니? 아직 급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엄마의 말에 슬아는 무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너무 김칫국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당신, 지금 애 서른도 안 됐는데 무슨 소리야. 우리 애가 보통 앤가? 무슨 결혼 스트레스를 줘,


애한테.”

슬아는 엄마를 나무라는 아빠를 보며 앞에 놓인 주스를 쪼로록 빨아 먹었다.

“그래도, 애가 연애한다는 소리도 영 안 하는 게…. 너 설마, 그 예전에 만났다던 지훈인가, 지호인가


하는 애 못 잊었니?”

“아, 엄마, 미쳤어?”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슬아는 짜증이 팍 밀려왔다.

“어머, 얘는.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하, 진짜 이 사람 답답하네. 우리 애는 평범한 놈팡이 만나서 결혼할 만한 애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우리 딸이 누군데. 대학 내내 얼마나 공부를 잘했어? 지금 들어간 회사도 얼마나 좋은 회사인데 그래.
우리 딸은 지금 그 회사에서 임원까지 하고, 나중에 대통령 선거 출마할 애야, 왜 이래.”

“또 시작이네, 이 양반. 대통령은 무슨….”

“기억 안 나? 슬아 초등학교 때 꿈 대통령 적어 냈던 거? 나는 아직도 슬아 너 믿는다. 우리 딸은 대통령


할 애야. 청와대 갈 애라고.”

슬아는 티격태격하는 부모님을 보며 입술을 꾹 닫았다. 아빠의 저 대통령 타령은 익숙했다. 하지만 누가
듣고 비웃을까 봐 두렵긴 했다.

“대통령이 되든 말든 연애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지금 나이가 얼마나 청춘인데.”

“여보, 얘가 우리한테만 말 안 하는 거지, 알아서 다 잘할 거야. 요즘 애들 다 부모한테 비밀로 하고 할


거 다 하고 살아. 우리 딸이 연애를 안 할 리가 있어? 이렇게 예쁜데. 안 그러냐, 슬아야?”

“…응, 아빠.”

아빠, 아니야. 사실 나 스무 살 때 이후로 한 번도 연애 못 했어….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슬아, 너는 아무 걱정 말고 일만 해. 응? 별 볼 일 없는 놈은 만날 필요가 없어, 죄다 시간 낭비지.


만날 거면 말 잘 듣고…. 거 뭐야, 너 대통령 되는 데 내조 잘할 만한 놈만 만나라고. 아빠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응….”

대통령의 꿈이 없는데, 대통령을 위해 내조해 줄 남자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으나
슬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슬아는 부모님과 저녁 식사까지 한 뒤,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슬아를 내려 준 뒤


그대로 자택으로 향했다. 슬아는 연애 좀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한 채 손을 흔들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서, 슬아는 굳게 닫힌 옆집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집에 있나? 연락해 볼까? 근데 왜 나한테 연락이 없지?

슬아는 가방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

연락이 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연락이 와 있었다.

슬아는 실실 웃으며 무진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슬아 씨, 결혼식은 잘 다녀오셨나요?

식사는 잘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족 모임이 있어서 부모님 댁에 잠시 왔습니다.

슬아는 고심해서 답장을 보냈다.

메시지를 늦게 봤어요. ㅠㅠ 저는 밥 잘 먹었고, 방금 집에 왔어요.

그리고 메시지를 보낸 뒤,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전화가 울려 왔다. 무진이었다.

“여보세요?”

- 네, 접니다. 슬아 씨, 지금 집에 오신 건가요?

“방금요. 무진 씨는 아직 부모님 댁이에요?”


- 네. 조금 있다가 출발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저녁은 먹었어요?”

- 네, 먹었습니다.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까지 좋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 결혼식은 잘 다녀오셨나요?

“아, 네. 뭐, 결혼식이 다 거기서 거기죠 뭐. 그것보다….”

혹시 늦게라도 만나는 거 어떠냐고 물어보려 할 때였다.

- 아, 잠시만요, 슬아 씨.

핸드폰 너머로 누군가와 작게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족 모임이면, 대표님도 있는 건가?

- 슬아 씨, 죄송하지만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아, 네, 네. 괜찮아요.”

- 혹시 이따 늦지 않으면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꼭 해 주세요, 라는 말은 할까 말까 고민하다 덧붙이지 않았다. 너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엔


민망했다.

아무래도 무진의 눈에는 자신이 변태로 보일 테니까….

전화를 끊은 뒤, 슬아는 씻고 나와 냉장고에 있는 맥주 한 캔을 땄다. 그리고 노트북 앞에 앉아 성인용품


사이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무진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했다. 그 큰 걸 처음부터 받아 내기란, 역시 무리였다.

사용 중이던 딜도의 후기를 보니 작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하니


정말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그렇다면, 임지훈은 대체 얼마나 작다는 걸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슬아는 고민 없이 제일 큰 딜도를 구매했다. 다만 생긴 것이 좀….

이전에 사용했던 딜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딜도들은 그냥 무난하고 깔끔하게 생긴 디자인이었다.

물론 정말로 남자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딜도들도 판매했으나, 슬아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일 큰 사이즈의 딜도는 그 디자인밖에 없었다.

슬아는 떨떠름했지만, 일단 구매하기로 했다. 무진의 것보다 크진 않은 것 같고, 조금 작을 듯했다.


그래도 미리 적응하기에 딱 좋은 사이즈였다.

그리고 그날, 무진은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슬아 씨, 시간이 늦어서 주무시고 계실 것 같아 따로 전화드리지 않았습니다.

출근할 무렵, 연락을 해서 같이 출근할까 고민하던 슬아는 이내 마음을 접고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혹시라도 같이 출근하는 것을 회사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소문이 날 게 분명했다.

여태까지 이무진 씨를 거절하더니, 집안이 밝혀지니 이제 와서 저런다는 등 하는 소문 말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당분간 출, 퇴근 시간에는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니 꼭 사내 비밀 연애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두근두근 스릴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

“이무진 씨 오늘 월차래.”

“어?”

월차라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지?

슬아는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왜? 하는 혜진 씨의 물음에 아니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왜 무진이 월차인 것을 미리 말해 주지 않았는지 궁금한 한편, 말해 줄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놀라웠다.

그랬다. 놀랍게도 이무진 씨와 자신은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제 결혼식을 보고 와서인지, 마음만큼은 이미 결혼 약속까지 한 것 같은데….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니.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이라도 사귀자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무진에게
사귀자고 대답하려니, 마음이 찜찜했다.

무진에 대한 마음을 바꾼 것이 성기 때문이라는 것이 은근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미 죄책감을 갖기엔 매우 늦은 시기인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무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이 순수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인


듯싶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슬아는 혜진, 재호 커플과 함께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옆자리에는 영업 팀에서 꽤 친한 직원인 지윤도 함께였다.

“슬아 씨, 다음에 언제 또 우리 영업 팀이랑 회식해야지. 안 그래? 솔직히 우리 팀이 기획 1 팀보다


재미있잖아. 성격상 슬아 씨는 우리 영업 팀이 딱인데…. 이번 주 신입 사원들 첫 회식 때 한잔 어때?”

영업 팀의 지윤이 슬아의 어깨를 꾹 찌르며 말했다. 지난번 회식 2 차 때 노래방에서 함께 놀았던 것이


어지간히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회식 자리의 분위기 메이커까진 아니었으나, 슬아는 밝고 쿨한 성격 덕에 늘 주변에 찾는 사람이 많았다.


술자리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슬아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혜진이 어허, 하며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신입 사원들 첫 회식은 팀끼리 해야지, 팀끼리.”

“그래, 그래. 여기까지 우리 팀. 거긴 그쪽 팀.”

혜진의 말에 재호까지 테이블에 금을 긋는 시늉을 하며 거들었다. 지윤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치사하기는. 근데 그쪽 팀의 이무진 씨는 오늘 왜 안 보여?”

“아, 이무진 씨? 오늘 월차.”

“아, 맞다. 이무진 씨 소개팅한다고 했지? 아니, 선인가?”

“푸읍.”

슬아는 물을 마시다 그만 뿜을 뻔했다. 턱으로 줄줄 흐르는 물을 닦으며 지윤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이무진 씨랑 어차피 안 된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갑자기 사레들린 거야.”

슬아의 변명에 지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식사를 이어 갔다. 하지만 호기심 충만한 혜진, 재호 커플은
이 먹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나저나, 무슨 말이야? 선이라니? 언제? 누구랑?”

지윤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나도 주워들은 건데, 무진 씨가 대표님 조카잖아. 아, 맞아! 회사 물려받을 수 있단 소리가 들리던데,


그건 들었어?”

“어머, 진짜로?”

“어, 아무튼 그래서 그런 건가, 선본다는데? 임원진들 회의 때 대화하는 거 들었지. 말은 소개팅 어쩌고
하던데 선이지 뭐.”
“와, 대박이다. 이무진 씨 결혼하려나?”

“임원 입에서 나온 거면, 무조건 선이지. 솔직히 그런 집안 사람들이 무슨 소개팅을 해? 무조건 결혼


생각하고 만나는 거지.”

결혼…. 선….

슬아는 태연한 척 음식을 입에 넣다가 그만 혀를 씹을 뻔했다.

문득, 어제 보았던 친척 언니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낯선 여자와 팔짱을 끼고 행진하는 이무진 씨라니….
안 돼…. 그 자지는 내 거야….

제대로 해 보지도 못했는데….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나를 두고….

어떻게 선을 볼 수가 있지?

국을 들어 올리는 수저가 벌벌 떨렸다. 들키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입에 넣어 버렸다.

“그거 확실한 거야?”

혜진이 묻자, 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날짜도 월요일 어쩌고 하던데. 오늘이잖아.”

“근데 무슨 월차까지 내고 선을 봐?”

“몰라. 돈 많은 사람들이니까 집안끼리 볼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냐? 드라마에서 봤는데.”

“와, 그런가 보네. 이무진 씨 결혼하면 축의금 얼마 내야 하지? 재벌 결혼식 처음 가는 거라 모르겠네.”

“초대해 줄 거라고 생각해, 재호 씨?”

“아, 당연히 해야지! 입사 동긴데!”

웃으며 떠드는 말을 들으며, 슬아는 억지로 웃었다.

밥을 먹는 내내 머릿속에는 이무진 씨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리고 같이 식사를 하던 이들과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던 중, 이 모든 게 이무진 씨의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무진은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것이다.

1 년간 마음을 받아 주지 않다가 이제 와서 변태 짓을 하려는 자신에게…. 매우 커다란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후회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 목적인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속이 쓰려 왔다. 분명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식도가 뜨거웠다.

한편으로는 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그녀가 알고 있는 이무진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무진 씨, 저는 무진 씨한테 단 한 번도 여지를 준 적이 없는 거로 알아요. 이제 그만 좀 하시면 안
될까요? 저한테 대놓고 티를 내는 직원들은 없지만, 슬슬 불편하네요.”

“미안합니다. 저는….”

“저 무진 씨 좋은 사람인 거 알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무진 씨 저한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아요.

“그래도 한번 기회를 주시면….”

“그만해 주세요. 상대방의 허락 없이 구애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고백은 못 들은


거로 할게요. 앞으로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좋은 동료로 지내고 싶어요.”

자신이 했던 거절의 말들은 정중하긴 했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복수당하기 충분할 만한 말들이었다.

“뭐? 그 사람이 슬아 씨 구 남친이야? 대박이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대화의 주제는 슬아가 되어 있었다. 슬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재호, 혜진
커플을 바라보았다. 저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인간들….

“그래, 스무 살 때 만났대. 대박이지?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남자를 사귄 적이 없다는 거지.”

“어머, 설마 못 잊은 거?”

“아니야….”

슬아가 작게 부정하자 지윤은 못 믿겠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슬아 씨가 은근히 순정파네. 이무진을 찰 정도로 그 남자를 못 잊었다는 거야?”

“아니라고….”

줘도 안 가진다고, 그 새끼….

슬아는 험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답답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쭉쭉 빨아 마셨다.

“아, 맞다. 우리 팀의 김채민 씨가 슬아 씨한테 소개팅 안 할 거냐고 물어보라고 했는데…. 당연히 안


하겠구나?”

“에이, 우리 슬아 씨 얼마 전에도 소개팅했지. 근데 잘 안됐대. 아, 소름! 첫사랑을 아직도 못 잊는


순정파라 그랬던 건가 보네. 그래서 소개팅 파투 난 거네.”

“와, 그러네. 대박이다, 슬아 씨. 다시 보인다! 순정파 김슬아!”

그만해라, 제발….

슬아는 재호와 혜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빌었다.

“그래? 뭐, 그럼 할 수 없고. 그럼 그 남자랑 다시 만나는 거야?”


지윤은 그런 재호와 혜진이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말했다. 슬아는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대답했다.

“아니라니까? 안 만나. 그놈 최악이었어. 그러니까 무슨 첫사랑이니, 못 잊느니 그런 말 그만….”

“그래? 그럼 소개팅할래?”

“아니, 소개팅은 별로….”

“이거 봐. 못 잊었네! 순정파네!”

“아, 그래! 할게, 할게!”

순식간에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재호와 혜진은 벌써부터 결혼 축하한다며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그래, 이무진 씨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게 있나.

선도 아니고 소개팅인데….

게다가 계속 임지훈을 못 잊었냐는 둥 순정파라는 둥의 헛소리를 들어 가면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거절하면서 아니라고 해 봤자 안 믿을 테니까.

하지만 대답한 뒤, 오후 업무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

이무진 씨한테 사실을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판단한 것이 찜찜한 데다가…. 홧김에 소개팅 약속까지 잡아
버렸다.

그래도, 계속해서 임지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저 사람들의 입에 주먹을 꽂을


수도 없었으니까….

슬아는 자신의 충동에 대해 변명하며 오후 업무를 마쳤다. 내내 이무진 씨에게 연락이 없는 게 불안하고,
불편했다.

왜 연락을 하지 않을까. 먼저 해 봐야 하나? 진짜 선보냐고 물어볼까?

이런저런 고민 덕분인지, 시간은 빨리 갔다.

퇴근 직전, 영업 팀의 김채민 씨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슬아 씨, 잘 생각했어! 연락처는 미리 안 주고 그냥 약속으로 잡았어. 내일 7 시인데 괜찮지? 장소는 A


호텔 커피숍이야.

빠르기도 하셔라…. 시간도 알아서 정해 주시고…. 어마어마하게 친절하셔라….

그래, 어차피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슬아는 울적한 기분으로 빠르게 퇴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우울감이 극에 치달았다.
저녁도 먹지 않고 씻은 뒤 빈속에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지잉 울며
진동했다. 무진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슬아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하루 종일 연락 하나 없더니, 이제 와서 전화하는 건 뭐야?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쿵쾅대고 뛰었지만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되레 퉁명스럽게 나갔다.

- 슬아 씨, 지금 집에 계신가요?

“네. 왜요?”

-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슬아 씨 집으로 가겠습니다.

슬아는 잠시 고민하며 물건이 널브러진 거실을 바라보았다. 쓰레기장 수준은 아니었지만, 무진을 초대할
수준도 절대 아니었다.

“어…. 제가 무진 씨네 집으로 갈게요.”

- 알겠습니다. 그럼 편하실 때 오시면 됩니다.

“네.”

전화를 끊은 슬아는 잠시 고민했다.

이무진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선을 본다고 한 주제에 계속 나를 만날 셈인가? 정말 복수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게 또 확실한 게 아니라, 만나자는 말을 마냥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래, 물어보자.

슬아는 결심한 뒤, 잠옷으로 입고 있던 편한 반소매 티 위에 후드 티를 꺼내 입었다. 하의는 수면 바지를


입은 차림 그대로였다.

이 예민한 와중에 예쁜 옷을 갈아입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싫으면 말라지 뭐, 하는 불만 가득한


생각이었다.

띵동.

옆집 앞에서 현관 벨을 누른 뒤, 슬아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관리하려 애써 보았다. 하지만 이래저래


마음이 상한 터라 표정이 곱게 지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기랑 결혼까지 생각했는데 말이야, 선을 본다는 소리나 듣게 하고…. 심지어 하루 종일 연락도


없어?

물론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내가 불순한 이유로 이무진 씨한테 관심을 가진 게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슬아 씨.”

현관문은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무진은 샤워한 지 얼마 안 되는 듯 머리끝이 젖어 있었다. 이 와중에


관능적이어서 짜증이 났다.

슬아는 무진이 안내해 준 대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무진의 집은 이틀 전과 같이 여전히 깨끗했다.

원래 깔끔한 성격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집에서도 흐트러짐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무진이 테이블 위에 따뜻한 차를 올려 주었다.

슬아는 차를 내려다보다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늘 왜 월차 썼어요?”

“병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이 없어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혹시 기분 상하셨습니까, 슬아


씨?”

“아, 아닌데요? 그나저나 병원은 왜…. 어디 아파요?”

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아파 보이는 데는 없는데….

“아픈 건 아니고…. 확인증을 받으러 갔었습니다.”

“그렇구나…. 근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진과 눈이 마주쳤다. 슬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진의 시선이 집요하게 슬아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기다리셨습니까?”

“…뭐, 그건 아닌데. 어제 너무 늦어서 연락 안 했다는 말만 남기고…. 오늘은 회사도 안 나왔으면서,


아무 말도 없으니까 당연히 걱정이….”

“제 걱정을….”

“…….”

“하셨던 거군요, 슬아 씨.”

무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기쁜 듯 보였다. 슬아는 괜히 그 모습이 얄미워 입술을


깨물다 대답했다.

“걱정까진 안 했고요.”

슬아가 말을 바꾸자, 무진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사실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슬아 씨가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요.”

“네?”

“저를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슬아 씨가 지금 제게 관심을 보여 주시는 것도…. 정확히는 저


때문이 아니니까요.”
“어….”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드리는 것도, 허락 없이 구애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슬아 씨가


저에게 주신 기회는 주말에 한해서니까요.”

에이 씨. 뭐가 이렇게 복잡해?

진짜 환장하겠네….

솔직히 무진이 자신을 비꼬고 있는 것인지, 진심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저 순수한 얼굴을
보면 비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허락해 주신다면, 평소에도 연락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일단 그것보다. 이무진 씨,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건 아니죠?”

“네?”

“다, 다 들었거든요? 소개팅, 아니 선본다는 말이요.”

“선이요?”

“왜 이제 와서 시치미예요…. 오늘 사실 선본 거 아니에요? 임원들이 그런 얘기 했다던데.”

슬아의 말에 무진은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저런 표정은 처음이라 이 와중에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안을 받은 적은 있지만, 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진짜예요?”

내내 불안하던 마음이 그 한마디에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었다.

슬아는 하루 종일 무진을 의심했던 것은 싹 잊은 채 안심했다.

“네, 제가 슬아 씨를 두고 그런 것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여전히 슬아 씨를 좋아하니까….”

“…….”

이런 고백을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직접적인 말을 들으니 괜스레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슬아 또한 말해 주고 싶었다. 물론 처음에는 당신의 거시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제는


아니라고. 정말 순수하게 당신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강하게 슬아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내일 7 시. A 호텔 커피숍. 소개팅.

이런 미친….

아….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강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내가 왜 그랬을까…. 너무 어리석어서 할 말이 없었다.

무진이 선을 본다는 말에 홧김에 지른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 따지자면 임지훈 때문이었다.

자꾸만 임지훈을 못 잊은 거냐느니, 순정파라느니 떠들어 대니까 열이 받아서….

난감한 상황이었다.

만약 이무진 씨가 자신이 소개팅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오랜만에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와, 김슬아 씨 내 성기 보고 좋다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또 소개팅을 해? 진짜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지?


정이 확 떨어지네.”

아…. 진짜… 미쳐 버리겠다.

슬아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사이, 무진은 방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슬아는 서류 봉투에서 종이들을 꺼내는 무진을 보며 물었다.

“그때 말씀드린 것 외에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때 말한 거라면, 콘돔이랑 핑거 콘돔 말하는 건가?

근데 웬 종이들이….

“첫 번째는 정관 수술 이후 검사 확인증입니다.”

“네? 정관 수술이요? 오늘 정관 수술 한 거예요?”

슬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무진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새삼 쑥스러워하는 이무진 씨의 표정이 낯설었다.

이틀 전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뻔뻔하게 눈앞에서 자위를 하고 야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남자였다.

그런데 왜 겨우 이런 거에 부끄러워하는 거지…? 기준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수술은 석 달 전에 했습니다.”

“석 달 전이요?”
그 대답에, 슬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설마 석 달 전부터 나와 이런 일을 할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 이게 바로 이무진 씨의 큰 그림이었나?

아니면 역시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건가?

“왜, 왜 했는데요? 나랑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 있었던 건가 보죠? 아니, 석 달 전이면 고백하기도 전


아니에요? 다른 여자 친구 있었던 거예요? 없다고 해 놓고….”

“아닙니다. 다른 여자 친구라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안심이 됐다. 그래, 확실히 석 달 전이라면 고백하기 전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니, 자신을 짝사랑하던 때라면 미리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미혼 남자가 정관 수술이라니….

“네. 사실 그때 우연히 여직원들끼리 피임에 관해 대화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 바로 앞 테이블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진의 말에, 슬아는 몇 달 전 점심시간에 여직원들끼리 식사를 하면서 피임에 대해 성토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 그때 들었어요?”

“바로 뒤 테이블에서 재호 씨랑 같이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슬아는 자신의 뒤에 이무진 씨가 있었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슬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획 2 팀의 진경 씨가 혼전 임신으로 결혼한 뒤의 일이었다.

진경 씨는 피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임신했던 것을 떠올리며 여직원들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나처럼 코 꿰여서 후다닥 결혼하지 말고, 다들 조심해. 뭐, 나야 원래 그 전부터 결혼 날짜만 잡으면


되는 상태였긴 하지만…. 그래도 피임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닌데 생기니까 억울하더라.”

“저도 예전에 그게 빠진 적 있어요. 얼마나 아찔하던지…. 그 뒤부터는 약 먹잖아요.”

대부분 20 대 후반에서 30 대의 여직원들끼리 식사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꽤 친한 사이들끼리 모인 것이라


그런지, 대화의 내용은 거침이 없었다. 여직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슬아는 그렇게 말했다. 100% 진심이
담긴 성토였다.
“아니, 저는 정말로 궁금한데…. 솔직히 임신 위험은 여자한테만 있잖아요. 근데 그걸 감당할 정도로….
잘하는 남자가 있긴 해요? 정말로?”

슬아의 말에 다들 웃음보가 터져 깔깔거렸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힐끔거릴 정도였다.

다들 슬아 씨가 너무 웃긴다며 즐거워했지만, 슬아는 진심이었다. 스무 살 때 임지훈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더 흥분했다.

그런데 그때 뒷자리에 이무진 씨랑 재호 씨가 있었구나….

슬아는 무신경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진은 기억을 떠올린 듯,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슬아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그런 부분에서 조금 섬세하다면 슬아 씨가 좋게 봐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했다고요? 저한테 잘 보이려고?”

“네…. 말씀드릴 기회는 없었지만.”

차갑게 무진을 거절하고 밀어 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슬아는 미안한 마음에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이게 확인증이에요?”

“네. 수술 이후 남아 있는 정자가 모두 배출되었다는 확인서입니다.”

“아, 그거 수술하고 나서 몇 번 빼야 되는 거 아니에요, 혼자…? 인터넷에서 봤는데….”

“네. 자위요.”

아…. 무진의 입에서 또 뻔뻔하게 자위라는 단어가 나오자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슬아는 이틀 전, 무진이 자신의 눈앞에서 자위했던 장면과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건 성병 검사 결과지입니다.”

“이건 또 왜….”

“제가 처음이라고 말씀드린 걸 증명하고 싶어서요. 안타깝게도 따로 확인 절차가 없어서 이걸로라도….”

“의, 의심한 건 아니에요.”

“예. 그래도 혹시 슬아 씨가 불안해하실 수 있으니까요.”

“…저도 검사해서 드려야 하나요?”

“아뇨, 슬아 씨는 어느 것도 증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네….”
슬아는 무진이 내민 서류들을 바라보며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었는데….

소개팅…. 어떡하지, 나?

“그리고 핑거 콘돔과 콘돔은 직수입해서 배송시켜 두었습니다. 며칠 뒤에 도착할 겁니다. 아무래도


크기도 크기지만, 여성에게 좋은 것으로 찾아보느라 좀 늦게 주문했네요.”

“네….”

슬아 또한 준비한 것이 있었으나,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당신과 하기 위해 미리 적응하려고


제일 큰 딜도를 사 놨어요! 잘했죠?’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은 그것보다 소개팅이 문제였다.

빌어먹을…. 그 지옥의 주둥아리 커플이랑 지윤 씨만 아니었어도…. 아니, 애초에 임지훈 그 자식이 다시


나타난 게 문제였다.

회사에서 알은척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전에 사귀었다는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자신을 엿 먹이려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다시 만나면, 진짜 배에 주먹을 꽂아 버려야지….

슬아는 다짐하며, 무진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따라 미소 짓는 무진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죄책감이 밀려왔다.

무진은 슬아가 좀 더 머물다가 가길 바랐지만, 슬아는 도망치듯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무진에게 건네받은 서류들을 보며 고민했다.

소개팅은…. 일단은 이무진 씨에게 비밀로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일단 약속은 잡혔으니, 내일 그 자리에 나가서 직접 거절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지윤 씨와 지옥의


주둥아리 커플에게 잘 안되었으니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입조심을 시키면 된다.

조금 위험하긴 했으나, 그 방법뿐이었다.

자신을 위해 이런 서류까지 준비해 온 무진에게 차마 ‘준비 잘했네요! 근데 무진 씨, 저 내일


소개팅해요!’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래저래 무진에게 비밀을 많이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
다음 날, 회사는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신입 사원들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슬아는 신입


사원들보다 더욱 우왕좌왕했다.

“김슬아 신입 사원, 정신 안 차립니까?”

“맞아요. 어제 술이라도 마셨습니까?”

점심시간 이후, 슬아는 장난을 치는 혜진과 재호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아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 마시는 게 커피인지 주스인지 미각도 잃은 상태였다.

“슬아 씨, 괜찮으세요?”

옆자리에 앉은 무진이 물었다. 슬아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네에’ 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점심 식사 후, 신입 사원들은 팀장의 호출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갔다. 슬아를 포함한 동기 4 인방은 늘


그렇듯,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슬아가 어제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 오늘 소개팅 때문이었다. 사실 소개팅 때문이라기보다는….

“아, 오늘 날씨 좋다. 그치, 슬아 씨?”

“맞아. 오늘 날도 좋은데 왜 그렇게 우중충하게 입고 왔어! 화사하게 좀 입지!”

슬아는 눈앞의 얄미운 커플을 노려보았다. 제발 입 닥쳐라, 진짜….

저 커플이 무진에게 소개팅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봐, 그것이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먼저 고백하고 사과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민되었다.

오늘 오전, 슬아는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재호와 혜진에게 소개팅에 대한 내용을 함구할 것을 당부했다.

“왜? 아, 설마 그 첫사랑한테 얘기 들어갈까 봐? 아, 알지, 알지! 알겠어. 꼭 비밀 지킬게! 아무한테도


말 안 해!”

“나도 안 해! 우리 입이 좀 무거워? 걱정하지 마, 슬아 씨!”

입이 무겁긴 개뿔….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 인간들이 지금 이러고 있으니 불안한 것이다.

분명히 확답을 받았는데도 불안했다. 저렇게 티를 내니까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아는 힐끔거리며 무진의 눈치를 살폈다. 무진은 아무 내색 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나저나, 신입 사원 두 명 어때? 슬아 씨는 어땠어? 이소미 씨 말이야.”

슬아는 자신이 교육을 담당한 신입 사원 이소미 씨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음…. 뭐, 조금 말이 없긴 하지만…. 똑 부러지는 것 같던데?”

“맞아. 되게 무뚝뚝하더라? 조용하고. 원래 말이 없는 편인가 봐.”

기획 1 팀의 신입 사원은 두 명이었다. 하필 또 신입 사원의 교육을 담당한 터라 더욱 정신이 없었다.


신입 사원들의 교육을 맡기로 한 사수는 슬아와 재호였다.

슬아는 여자 신입 사원인 이소미 씨의 교육을 맡았고, 재호는 남자 신입 사원인 최대웅 씨의 교육을


맡았다.

“슬아 씨, 힘드시면 제가 교육하겠습니다.”

무진의 말에 슬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이소미 씨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런 예쁜 신입 사원의


교육을 무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그래, 무진 씨는 교육에 안 맞지. 둘 다 말이 없어서 한두 마디 하고 끝날걸?”

“그러게. 완전 웃기겠다! 그나저나 나는 우리 입사 때 생각나서 기분 좋더라. 워크숍 빨리 가고 싶다.


그치?”

재호와 혜진이 떠드는 것을 들으며, 슬아와 무진은 조용히 음료만 마셨다. 평소에는 이 떠드는 분위기에
슬아도 포함되었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하루 종일 슬아는 오늘 저녁의 소개팅을 이무진 씨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고 있었다.

아까는 ‘말하는 게 좋다’라고 결론이 났는데, 또다시 생각해 보니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냥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제일 베스트이긴 한데….

사실 슬아는 오전에 영업 팀의 김채민 씨에게 오늘 약속을 취소하면 안 되냐는 메시지를 보내긴 했었다.

아, 슬아 씨, 당연히 안 되지…. 당일에 취소하는 매너가 어디 있어? ㅡㅡ; 그럼 내가 뭐가 돼;; 그냥


가서 직접 거절해 줘. 나도 어렵게 만든 자리라 그래. ㅠㅠ

묻지도 않고 바로 약속 잡은 주제에 매너 타령이라니…. 조금 열이 받았지만 꾹 참았다.

결국 슬아의 마음속에선 약속 자리에 직접 나가 빠르게 거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슬아가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사이, 혜진과 재호는 여전히 조잘조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최대웅 씨는 어떤데?”

혜진이 묻자, 재호는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일은 괜찮은데, 모르겠어. 좀….”


“왜, 왜? 어떤데?”

“약간 허세 있는 느낌? 집안이 금수저인가 봐.”

“아, 진짜? 대박. 어쩐지 옷 입은 거 명품 같더라.”

그러다 문득, 대화를 나누던 재호와 혜진은 이 대화의 핑퐁 사이에 슬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전한
듯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슬아를 향했다.

“엉?”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슬아가 왜 그러냐는 듯 물었다.

“슬아 씨, 오늘 진짜 수상하네. 무슨 일 있어?”

혜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슬아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일은 무슨, 그냥 뭐…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슬아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평소처럼 굴어야 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헛기침을 한 뒤, 무진을 슬쩍


쳐다보고는 밝은 소리로 재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금수저라고? 왜, 왜? 티 내?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았나?”

“아니, 대놓고 그런 건 아닌데 좀 은근히 티 내는 거 있잖아. 차 키 일부러 보여 주고.”

“차 키? 차가 무슨 차래? 외제 차인가? 뚜껑 열린대?”

슬아는 평소처럼 격하게 리액션을 하며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내가 그래서 슬쩍 물어봤더니 기다렸다는 듯 술술술 말하는 거야. 배기량은 얼마고, 마력이 얼마고,
가격이 얼마고 하면서 아빠가 취직 선물로 사 줬다는 둥….”

“은근한 게 아니라 대놓고 자랑인데?”

“와, 그래도 진짜 부자인가 보네! 그럼 내일 커피 사 달라고 하자!”

슬아는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때였다.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커피는.”

무진이 슬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슬아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재호와 혜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다른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다행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한테 사 달라고 하세요, 슬아 씨.”

낮은 목소리가 다시 꽂혀 왔다.
솔직히 이상하게 보일 만큼 적극적인 대화는 아니었으나 눈빛이 문제였다. 무진은 슬아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꼭 이 자리에 슬아밖에 없는 것처럼.

슬아는 손등을 내려 테이블 아래로 무진을 툭툭 건드렸다.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이러니까 진짜 꼭 비밀 연애 하는 기분인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엄마야!’

갑작스레 커다란 손이 슬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테이블 아래로 무진이 슬아의 손을 꽉 잡은 것이다.

슬아는 소스라치며 무진의 손을 털어 냈다. 다행히 무진의 손은 반항 없이 금방 떨어졌다.

뺨으로 열이 확 올라왔다. 긴장하고 당황한 슬아와 달리, 무진은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슬아 씨, 왜 그래?”

혜진의 질문에 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재호와 혜진이 나누던 대화에 열심히
참여해 떠들었다.

슬아가 시끄러운 대화에 참여하니 분위기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네 사람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슬아와 혜진, 재호 커플이 신나게 떠들면 무진은 조용히 듣는 그림이었다.

무진은 테이블 아래로 슬아의 손을 잡았던 손을 몇 번 쥐었다 펴 보았다. 잠시 닿았을 뿐인데도 슬아의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

정신없는 만큼 퇴근 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퇴근 직전, 무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슬아는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며 확인했다.

슬아 씨,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

아아…. 어떡하지. 돌아 버리겠네….

지금이라도 말할까? 미치겠다, 진짜….


하지만 도저히 입도, 손도 떨어지지 않았다.

슬아는 주저하다 결국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ㅠㅠ 대신 밤에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저는 언제라도 상관없으니 그럼 이따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

‘그래, 소개팅 자리에서 빨리 거절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슬아는 빠르게 퇴근 준비를 마치고, 혹시라도 무진이 붙잡을까 엄청난 속도로 회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가면서 속으로 소개팅 상대에게 할 말을 연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약속을 잡아 버렸습니다. 김채민 씨에겐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보다 더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랄게요.’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아니, 여기 왜….”

임지훈,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호텔 커피숍에 도착하자, 직원은 ‘김채민’ 이름으로 예약된 자리로 슬아를 안내했다. 그리고 슬아는
점점 테이블에 가까워져 올수록 표정이 굳어 갔다.

다시 마주치면 배에 주먹을 꽂아 버릴 거라 다짐한 인간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름지게 머리를 넘긴 지훈은 여유롭게 한 손을 들어 슬아에게 인사했다. 느끼했다.

“뭐야?”

“뭐긴. 일단 앉아, 슬아야.”

슬아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지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훈은 여유롭게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너 아직도 라테 마시지? 시럽 없이 마시는 거 좋아했잖아. 아이스 라테 두 잔 주세요.”

아닌데. 나 이제 시럽 세 번은 넘게 눌러 마시는데….

말대꾸하고 싶었으나 말하기도 짜증 났다. 어차피 커피가 나오기 전에 일어날 생각이었다. 일단 그 전에,
확실히 해 둘 것이 있었다.

“김채민 씨랑 무슨 사이야?”

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슬아야, 너는 아직도 그렇게 성격이 급하구나? 그냥 오빠 고등학교 동창이야.”

“그래서 부탁한 거야, 이 자리?”

“어. 바로 네 연락처 물어보려다가…. 조금 특별하게 만나고 싶어서.”

특별은 개뿔…. 슬아는 빠르게 본론부터 꺼냈다.

“저기, 미안한데. 그때 오빠가 오해한 거야. 나 오빠 못 잊어서 연애 안 한 거 아니야.”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게 네 마음이 편하다면.”

짜증 나….

지훈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 오빠 안 보고 싶었니?”

보고 싶었겠냐?

지훈은 슬아에게 있어 트라우마를 준 구 남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슬아는 목 끝까지 욕이 차오른 것을 겨우겨우 막아 냈다.

“전혀. 그리고 직원들 앞에서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사람들 오해하게…. 매너 좀 지키자.”

“뭐, 너는 매너가 있고? 솔직히 너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을 때 진짜 매너 없었어.”

슬아의 미간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아니, 뭐 언제 적 얘길 지금 하고 앉아 있어…. 게다가 헤어지자마자 다른 여자 친구 사귀어 놓고 뭔


매너 타령이야.”

“하하, 서운했어? 질투했구나? 너도 후회했지? 나랑 안 잔 거.”

“…뭐?”

슬아는 지금 지훈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더 길게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나 지금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러니까 먼저 일어날게.”

슬아가 벌떡 일어나자, 지훈이 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가방을 챙기려는 슬아의 팔목을 지훈이 강하게 붙잡았다. 아까 무진이 잡았던 그 손이었다.

“놔.”
손을 빼내려 애썼지만, 힘없이 떨어져 나갔던 무진의 손과 달리 지훈의 손은 슬아의 팔목을 강하게
옥죄었다.

“아파. 이거 놓으라니까?”

“너, 나 만난 이후로 다른 사람 안 만났으면 아직 아무랑도 안 잤겠네?”

“…진짜, 미쳤어?”

예전엔 이 정도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고추만 작을 뿐이지, 매너는 좋은 남자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

“너도 나 못 잊었잖아. 나도 7 년 동안 늘 네 생각 났어. 다른 여자들이랑 잘 때마다 너 상상하면서 한


적도 있고….”

“…….”

커피숍 내부에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슬아는 수치심을 느끼며 지훈을 쏘아보았다. 붙잡힌
손목에는 여전히 강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슬아는 힘으로 잡힌 팔목을 빼내려는 것을 포기하고 힘을 빼
버렸다.

“진짜 아파. 그만 놔.”

부탁하듯 말했다. 나긋해진 슬아의 태도에 지훈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랑 호텔로 올라가.”

“…술 마셨냐, 진짜?”

“남자들이 제일 못 잊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아니? 안 자 본 여자래.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인가 봐. 그래서 자꾸 네가 잊히지를 않아. 솔직히 지난주에 너 다시 만난 이후로는….”

“…….”

“다른 여자한테 안 서. 그러니까 너한테 책임이 있다고. 내가 불능이 아니란 걸 확인해야겠으니까, 나랑


올라가.”

“와, 진짜 대박이다.”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내가….”

“안 서는 게 아니라 작아서 티가 안 난 거 아냐?”

“뭐, 뭐라고?”

“진짜 소리 지르기 전에 놔라.”

“이게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네. 너 나 책임 안 질 거야? 너 때문에 다른 여자랑…. 못 한다니까?”

“야, 발기 부전이면 병원을 가.”

슬아는 잡힌 손목을 들어 올려 지훈의 손가락을 꽉 하고 깨물어 버렸다.

“으아악!”
“다시 나타나기만 해 봐. 너 고추 요만한 데다 발기 부전인 거 너네 회사에 다 소문내 버린다.”

“너, 너…!”

지훈은 슬아가 손가락 한 마디를 강조하는 것을 보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슬아는 가방을 챙겨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손목에 난 빨간 자국과 욱신거리는 통증이 불쾌했다.

***

“진짜 별것도 아닌 게…. 씨발, 내가 그때 어떻게든 했어야 하는데.”

혼자 남은 지훈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슬아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주에 슬아를 만난 뒤로 지훈은 꼭 20 대 초반 때처럼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첫사랑을 다시 마주한


느낌이었다.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뒤로 슬아만 떠올랐다. 명함을 줬으니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슬아가 자신을 만난 이후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말에 은근한 쾌감과 보상 심리를 느끼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때 이후로 아무도 안 만났으면, 아직 처녀일 수도 있겠네? 하는 조금 저급한 생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자신은 매너 있는 남성이니 그런 것을 티 내며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고 했다.

지난주 일요일, 지훈은 공을 들이며 만나고 있던 연하의 여자 친구와 섹스를 실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김슬아 때문이었다.

솔직히 바로 전날인 토요일에도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섹스할 때 슬아를 떠올리며 했었다. 덕분에 굉장히
흥분했고, 아주 잘 섰고, 척추가 저리도록 잘 느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지? 지훈은 연하의 여자 친구 앞에서 곤란한 듯 변명했다.

“오빠가 피곤해서 그런가 봐, 어제 술도 많이 마셨더니…. 오늘은 그냥 쉬었다 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 친구를 보며, 지훈은 등에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내내 김슬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일요일 밤까지도 슬아가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주말엔
무조건 올 줄 알았는데….

어린 여자 친구를 슬아라고 생각하며 성기를 세우려고 해도, 이상하게 세워지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 도도한 척하며 연락을 하지 않는 김슬아 때문이었다. 나를 못 잊어서 여태 연애 한 번 안 한


주제에, 왜 연락을 안 하지?

그래서 지훈은 슬아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연락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7 년 전에 하지 못했던 슬아와의 섹스를 꼭 하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슬아를 약속 장소까지 불러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슬아의 입에서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욱해 버렸다.

나는 지 때문에 여자 친구랑 제대로 섹스도 못 하고 있는데, 지는 뭐?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어?


억울하고 분했다.

예전처럼 매너 있게 대하고 싶었는데…. 김슬아의 첫 경험을 다른 놈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슬아의 처음은 무조건 자신이어야 했다. 7 년 전 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야 했다.

시발, 그나저나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남자라니…. 도대체 어떤 새끼지?

슬아가 카페에서 나가 버린 뒤, 지훈은 그녀를 따라가려다 말고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지금은 화가 난 상태이니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가 봤자 손해였다.

내일 퇴근 후에 슬아네 회사 앞으로 찾아간 다음, 집을 알아내야지. 그 다음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슬아는 마음씨가 착하니 조금만 반성하는 척하면 금방 용서해 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용서를 받은 뒤에는 최대한 매너 있게, 이성적으로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하면 된다.

슬아도 아직 자신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큭큭큭.”

지훈은 능글맞게 웃었다. 자신이 짰지만 완벽한 계획이었다. 지훈은 자신을 힐끗거리는 한두 테이블의
사람을 째려보다가 호텔 커피숍을 나왔다.

집 근처에 도착한 뒤, 지훈은 동네의 골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매일 퇴근할 때마다 이 골목에서 꼭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곤 했다. 지훈이 좋아하는 장소였고,
나름대로 명당이었다.
명당인 이유는 여고 근처이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이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교하는 근처 여고생들을
바라보곤 했다.

가끔씩 골목 안의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여고생들을 볼 때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근처 여고의 여학생들을 보며, 지훈은 또다시 슬아를 떠올렸다.

스무 살 때의 슬아는 저 여고생들처럼 풋풋하고 귀여웠다. 솔직히 그때 슬아와 하지 않은 것이 평생에


가장 크게 후회되는 일이었다.

7 년이라는 세월 동안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술에 취하면 보고 싶기도 했다.

슬아의 생각이 날 때마다 지훈은 아, 그때 했어야 되는데…. 하며 후회했다. 그때 했으면 어땠을까,


김슬아는 어떻게 신음을 냈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자위도 했었다.

그런데 바로 지난주, 오랜만에 만난 슬아는 여전히 예뻤다. 아니, 솔직히 그때보다 더 예뻐졌다. 묘하게
색기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아쉬움에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나 못 잊은 거 아니지?’라는 질문에 멍해졌던 슬아의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설레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나는 설레서 죽는 줄 알았는데….

못된 계집애가 남자의 순정을 짓밟아? 짜증 나네, 진짜….

씨발, 그나저나 어떡하지.

지훈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손으로 아랫도리를 툭툭 만져 보았다. 교복을 입은 김슬아를 떠올려 보니


반응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자 친구 앞에서만 안 되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클럽을 다시 가든가 해서 다른 여자랑도 해


봐야 할 듯싶었다.

‘차라리 약을 써 볼까?’

좋은 생각인 듯했다.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이야? 나야. 그때 그 약 남은 거 있어? 나 좀 가져다줘. 왜긴 왜야, 김슬아라고 알지? 내가


말했던 애. 어 걔 다시 만났거든. 약효 좋은 거로 준비해야 된다? 돈은 더 얹어 줄 테니까. 어어. 그냥
확 자빠뜨려 버리려고. 김슬아 그 건방진 년 내가 진짜 이번에 꼭 따먹는다.”

지훈이 실실 웃으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다시 내쉴 때였다.

퍽!

“아악!”

뒤에서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았다. 그대로 벽에 머리가 부딪쳤다.

씨발, 뭐지?

지훈은 이마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소리를 내질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꿈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가로등 불 때문에 자신을 때린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아마도 반대쪽 골목 입구에서 온 듯했다. 그런데 왜 나를? 의문이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이마를 만진 손을 확인하는데 피가 묻어났다.

“아, 씨발! 이 미친 새끼야! 너 뭐야!”

“원래는 대화를 나누려고 했습니다만 부득이하게 이렇게 됐네요.”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벌떡 일어나고 싶었는데 머리가 어질해 불가능했다.

그것도 모자라 눈앞의 남자는 구둣발로 지훈의 상체를 밀어 눕혔다. 지훈은 욱신거리며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변에 CCTV 가 있는지 눈을 굴렸다.

“여기 CCTV 없는데.”

지훈의 의도를 읽었는지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 씨발, 너, 너 누구야!”

쓰러진 지훈의 앞으로, 남자가 몸을 굽혀 왔다. 가로등의 역광이 사라지자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누구…. 너!…. 너, 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남자는 상당히 잘생긴 미남이었다. 게다가 보기 드물게 좋은 체격이었다.

스포츠 선수인가? 아니면 뭐, 어디 헬스장에서라도 봤나? 기억을 더듬는데 문득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랐다.

“씨발, 야 너 김슬아, 아니 그 회사에서 마주쳤던 새끼지?”

지훈은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멱살을 잡는 것은 시도만으로 끝이 났다. 남자는
강한 힘으로 지훈의 팔을 잡아 기괴한 모양으로 꺾어 버렸다.

“으아아악!”

팔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지훈은 냅다 소리를 질러 댔다.

팔이 뒤로 꺾인 각도가 위험했다. 자칫했다가는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끄으으…. 씨발…! 씨발!”

“네. 기억하시네요.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임지훈 씨.”

남자는 정말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지금 이 상황이 거짓말인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픈 와중에도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뭐? 반갑? 씨발, 새끼가 진짜…. 이거 안 놔? 으아악!”

발악하며 몸을 움직이자, 팔을 꺾는 힘이 더욱 거세졌다.

“저는 슬아 씨 회사 동료인 이무진입니다.”

이 와중에 자기소개까지 했다. 제 입으로 술술 부니 잘됐구나 싶었다.


“씨발! 너 개새끼, 너 고소할 거야, 너 씨발, 내가 누군 줄 알고…. 이 새끼가….”

쯧. 무진은 잘게 혀를 차고 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으아아악!”

뚜둑!

소름 끼치게 둔탁한 소리였다. 그 소리와 함께 지훈의 커다란 비명이 골목을 울렸다.

지훈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으니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 거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럴 게 분명한데도
무진은 여유로웠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멀쩡한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주제에 말도 안 되게 여유롭고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너무 심해, 지훈은 꺽꺽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자연스럽게 눈가에서 눈물이 줄줄
샜다.

“임지훈 씨? 정신 차리세요.”

말하는 것만 보면 지나가다 도와주는 사람인 줄 알겠네. 지훈은 이 와중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이 새끼 뭐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불현듯 김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훈은 고통을 참으며 이를 꽉 깨문 채로 무진에게 물었다.

“너, 으윽…. 씨발 새끼…. 너 설마 김슬아 때문에 이러는 거야?”

“네, 맞습니다.”

무진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하, 씨발. 이럴 줄 알았어. 그 예쁜 얼굴로 살살 웃고 다닐 텐데 남자가 꼬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미친…. 개새끼, 너 걔 좋아하냐? 너 이러는 거 걔도 알아? 김슬아 걔도 아냐고! 미친 스토커 새끼가


….”

무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금 부러뜨린 지훈의 오른손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씨발, 지금 또 뭐 하는….”

지훈의 오른손은 조금 전, 슬아의 팔목을 움켜쥐었던 그 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른손인 것이다.

빠각!

“끄아아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다.

지훈의 입에서 끅끅거리는 이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진은 그런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당연히 모르죠, 슬아 씨는.”

알아서도 안 되고. 뒷말을 내뱉으며 무진은 지훈의 다른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꺾어 버렸다. 왜 당연한 걸 묻지? 무진은 지훈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으아아악! 씨발!”

지훈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악했다. 무진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런 지훈을 내려다보았다.

벌레같이 몸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내뱉는 모습은 썩 흥미로웠으나 유쾌하진 않았다.

지훈은 이제 말을 할 기운도 없는지, 꺽꺽거리며 흐느끼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리고 임지훈 씨, 여자 손목을 함부로 움켜쥐는 것은 폭력입니다.”

듣고 있습니까? 무진은 지훈의 뺨을 가볍게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지훈은 씩씩거리며 숨만 내쉬었다.

‘씨발. 폭력? 폭력은 지금 네가 하는 게 폭력이지, 미친 새끼야.’라고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통으로 인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훈은 눈물로 흐려진 시야 사이로 무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친 새끼, 사이코 새끼.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새끼는 미친놈이었다. 슬아의 곁에 있어선 안 되는
놈이었다.

사람의 머리통을 깨고, 팔을 부러뜨리고, 손가락을 아작 낸 주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소름 돋았다.

위험한 놈이었다. 심지어 이러고 있는 주제에 제 입으로 폭력이란 단어를 내뱉다니, 돌아도 보통 돈
새끼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김슬아의 스토커가 분명한데….

슬아를 구해야 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뿐이니, 슬아에게 알려 그녀를 지켜야 했다.

지훈은 이 와중에 슬아를 떠올리며 젖 먹던 힘을 끌어올렸다.

무진의 멱살을 잡으려던 지훈의 왼손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무진은 날벌레처럼 발악하는 지훈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왼손도 필요 없습니까?”

“으윽…. 미, 미친… 개새끼…. 슬아한테….”

지훈의 입에서 슬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무진의 한쪽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구겨졌다. 무진의 감정
동요는 오로지 전부 김슬아, 그 여자 하나 때문이었다.

“끄윽…. 씨발, 너, 너, 내가 고소할….”

“그리고 하나 더.”

“으으윽…. 씨발….”

“자신의 것이 아닌데 탐을 내는 건, 절도입니다. 임지훈 씨.”


어이가 없었다. 지훈은 끝끝내 견디고 있던 통증으로 인해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를 너무
꽉 깨물어서 잇몸이 전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무진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폭력, 절도에 불법적인 약까지… 쯧. 당신같이 위험한 사람은 슬아 씨 옆에 있으면 안 됩니다.”

몸을 일으킨 무진은 가볍게 손을 털고 구겨진 옷을 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이 없던 사람처럼 골목을 빠져나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골목 어귀에서 무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남자는 무진의 뒷모습을 보다가 몇 초 뒤, 지훈이 쓰러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

슬아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무진과 슬아가 처음 만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무진은 대학생 때 슬아를 처음 만났다. 인근 대학교 팀과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러 갔을 때였다.

경기는 압도적인 차이로 무진의 팀이 이기고 있었다. 기뻐하는 팀원들과 달리 무진은 담담했다. 그는 늘
감정 표현에 무덤덤한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타고나길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무뚝뚝한 부모님
아래서 자란 환경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독 감정 표현에 솔직한 슬아가 무진의 눈에
들어왔다.

심각한 차이로 지고 있음에도 슬아는 실실 웃으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함께 온 여자는 지쳐서 앉아


있는데, 술을 마신 것처럼 혼자 신난 모습이었다.

무진은 관중석에서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고 있는 게 저렇게 즐거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저렇게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웃는 사람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이 보고 자랐다. 애초에 무진에게 적대시하는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날 때부터 부유했고, 타고나길 뛰어난 외모였다. 무뚝뚝한 성격임에도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다.
물론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은근한 의도로 접근하는 이성도 많았다. 그랬는데 왜 유독 저
여자가 눈에 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무진은 아예 그녀를 잊고 지냈다. 그의 인생은 늘


그렇듯 무덤덤하고 평온했다.

다시 만난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슬아를 다시 마주쳤을 때, 무진은 자신의 인생이 꽤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로 슬아를 만난 장소는 무진의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그는 슬아를 본 순간 처음 그녀를


보았던 기억을 바로 떠올렸다.

그날은 면접을 보러 온 것인지 그녀는 단정한 정장을 입은 차림이었다. 정장을 입었음에도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모습이나 동그란 이마 때문인지 앳되어 보였다.

집안일로 작은아버지를 만나러 왔던 무진은 이곳에 온 목적을 잊고 슬아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면접을
마치고 나온 슬아는 화장실 옆 자판기 앞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던 과거와 달리 당시는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인 무진의 눈에는 당연히 두 번째 만났던 그때의 모습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 몰라. 면접 망한 것 같아. 나 어떡해…. 나 이 회사 진짜 들어오고 싶었는데….”

그녀는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이내 뚝뚝


떨어졌다.

“아니, 대답은 잘했지. 근데 아쉬워서 그렇지 뭐…. 아, 붙으면 좋겠는데.”

무진은 괜히 관심도 없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왜 자신이 저 여자를


관찰하고 있는지 의아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슴에 달린 면접자의 이름표가 눈에 띄었다. 무진은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제는 헤헤 웃기 시작했다. 무진에게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치? 붙겠지? 그래, 내 성적이 얼마나 좋은데. 면접도 사실 그렇게 나쁘게 본 건 아닌데. 아,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여태까지 취업 준비했던 거 떠올라서 눈물이 다 나네.”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게 해 주었다. 그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마저


무진에게는 생소하고 신기했다.

잘 웃고, 잘 울고. 무진은 슬아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먹지도 않을 음료수를


만지작거렸다.
그 뒤로는 전부 충동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충동적인 선택을 해 본 적 없던 그에게는 낯선 변화였다.

충동적으로 작은아버지에게 부탁해 그녀의 합격 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합격했다는 것을 알고는
충동적으로 입사를 시켜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왜 네 아버지 회사가 아니라 이 회사에 들어오려고 하냐는 말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답이었다.

슬아와 같은 부서에 입사한 뒤로도 그는 늘 슬아를 관찰했다. 그렇다고 퇴근 이후의 행적까지 샅샅이
살피며 스토커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슬아는 그의 예상보다 더 감정 표현이 솔직한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화를 내다가도 활짝 웃고,


무표정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울상을 지었다.

그때까지도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슬아에 대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더 많은 표정이 궁금했고 매사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마음이 간 것은 당연했다. 지루한 그의 일생에 겨우겨우 찾은 보석같이 느껴졌다. 겨우


찾은 내 건데, 나에게만 특별하게 보였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슬아가 관심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나 슬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거슬렸다.

스스로 이런 감정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감정이 얼굴에 전부


드러나는 슬아가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웠다.

그러기를 한참, 그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것은 슬아가 아는 대로 1 년 전부터였다.

여전히 그는 감정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감정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는 길에 함박눈이 내렸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노을이 져 하늘색과 주황색이 섞인 하늘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듯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도 보였다.

무진은 그 장면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 첫눈이 내리는 장면을 보면


슬아 씨는 행복한 미소를 짓겠지, 하고. 그러자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슬아가 웃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순간, 무진은 슬아에 대한
마음이 바로 책에서만 읽었던 그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깨달았다.

그 뒤로 무진은 슬아를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웃으면 따라 웃음이 났고, 인상을 쓰면
따라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신기한 변화였다.

나름대로 지고지순한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비록 두 달 전에 차였지만.

고백하면 그녀가 당연히 받아 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진은 당연히 거절을 예상했다.
슬아는 도통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물론 슬아가 자신의 배경에 대한 소문을 듣고 관심을 가진 것은 의외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배경이 아니라 우연히 스치듯 만진 성기 때문이라는 것은 더 의외였다. 어이없다기보다는
잘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 있었다.
04

집 근처까지 도착한 슬아는 바로 무진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임지훈이 나온 탓에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 그래도 잘 해결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역시


무진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열이 받았다. 그 정도로 최악인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스무 살 때 그런 놈을 만났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또 한 번 나타나거나 연락하면 진짜 소문을 내


버려야지.

영업 팀의 김채민 씨에게도 확실히 말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열받는 와중에 무진의 얼굴을 떠올리니 빠르게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역시, 힐링 그 자체인 남자였다. 무진의 매력을 알아채지 못하고 평생의 과오를 만들 뻔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제는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였다.

슬아는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보고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누가 볼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택배


상자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택배의 물건은 일요일에 주문했던 딜도였다.

‘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슬아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바로 무진에게 연락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저걸 사용해서 준비를 마친 뒤, 무진과 해 보고 싶었다.

무진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이것저것 열심히 준비했는데 나도 분발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자신이 딜도를 사용해 무진의 엄청난 크기에 적응하려 노력한 것을 알면, 무진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생각 외로 무진은 감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늘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의외인 면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슬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택배 상자를 뜯어보았다. 솔직히 실물 크기를 보고 구매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 궁금했다.

예상외로 무진의 것보다 크다면 반품하고 다시 주문해야 하니 바로 확인을 해야 했다.


“엥.”

예상대로 딜도는 무진의 것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나 이전에 슬아가 사용하던, 평균 사이즈라고 하지만
작았던 그 딜도보다는 확연히 컸다.

무진의 성기가 100 이라고 친다면…. 최대 사이즈라고 해서 구매한 이 딜도는 70, 예전에 사용하던
딜도는 30, 지훈의 성기는 5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물론 체감상의 비율이었다.

어쨌든 원래 의도한 대로 무진과의 관계 전, 미리 적응하기에는 좋은 크기인 듯했다.

다만 생긴 것이 너무 적나라해서 민망했다.

약간 거무죽죽한 색의 딜도는 핏줄까지 도드라져 꼭 실제 성기처럼 보였다.

친절하게도 바닥에 붙이고 사용할 수 있는 흡착식 딜도였다.

살짝 위로 휘어진 무진의 것과 달리 딜도의 모양은 매끄러웠다. 비교하려는 의도는 없으나,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고 있었다.

굵기를 비교하자면 무진의 것이 말도 안 되게 훨씬 굵었다. 게다가 무진의 것은 색상도 아주 예쁜


핑크색이었다.

꼭 인조로 만든 핑크색처럼 예쁜…. 생각할수록 무진은 정말 최고의 자지를 가진 남자였다.

슬아는 딜도를 사용해 볼 생각으로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딜도를 깨끗하게 소독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

슬아는 잠옷 원피스 아래로 팬티를 입지 않고 있었다. 실험 삼아 거실 바닥에 딜도를 붙여 보았다.

착 붙였을 뿐인데 완벽하게 고정되었다.

흡착력이 대단한데…? 딜도는 툭툭 건드려 보았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흡착만큼은 확실한 성능을
보였다.

예열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삽입을 해 보기 위해 슬아는 손바닥 위에 러브젤을 짜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띵동. 띵동.

현관 벨 소리와 함께 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아 씨!”

무진의 목소리였다. 너무 깜짝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슬아는 잠시 뇌가 정지한 것처럼 멍하니 서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놀란 상태였다.

어, 어떡하지.

일단 딜도를 숨겨야 했다.


슬아는 우선 바닥에 붙여진 딜도를 뜯어내 어디로든 숨기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아, 미치겠네. 이거 왜 이렇게 안 떨어져! 뭔 본드로 붙인 것도 아닌데….”

이 와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며 슬아 씨! 하고 부르는 무진의 목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뭐 급한 일이


있나? 왜 저렇게 급박하게….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무진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진짜 미칠 지경이었다.

슬아는 여러모로 노력해 보았으나 딜도는 바닥에 딱 들러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발로 한번 차 보았는데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이런, 미친….”

환장할 지경이었다.

슬아는 결국 소파 위에 올려진 담요를 딜도 위로 던져 버리고 재빨리 현관문으로 향했다.

“무, 무진 씨, 왜 이렇게 급하게….”

현관문을 연 슬아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놀라 눈만 깜빡였다.

“슬아 씨….”

무진은 절박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절박했다. 물론 슬아가 진짜 소개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슬아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 왔다. 화가 난 것이었다면 아까 그 자식을 때려눕혔을 때
화가 풀렸어야 하는데… 여전히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슬아가
자신을 두고 소개팅 약속을 잡고, 그 자리에 나갔다는 자체만으로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슬아는 언제라도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와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쓰레기이든 좋은


사람이든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슬아와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슬아는 당황해서 눈만 깜빡였다. 무슨 일인 건지, 무진은 눈가에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왜, 왜 울어요, 무진 씨? 무슨 일 있으셨어요?”

“슬아 씨가….”

“네?”

“슬아 씨가 소개팅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 이럴 줄 알았어, 진짜…. 그 지옥의 주둥아리 커플….

슬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횡설수설하는 무진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소개팅에 대한 일을 들켜서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그것보다….

무진이 이렇게 무언가에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서러운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이었다.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우, 우는 거예요? 무진 씨 지금 제가 소개팅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설마?”


슬아는 손을 들어 굵은 무진의 팔뚝을 툭툭 두드려 진정시켰다.

이렇게 덩치 큰 남자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잘생긴 얼굴이 순진한 표정을 짓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니…. 솔직히 좋았다. 역시 자신은 변태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소개팅을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우는 거라지 않는가. 환장하게 귀여웠다.

왜 이렇게 순진하지, 이무진 씨? 실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슬아 씨, 막상 실제로 보니 제 좆이 별로였습니까? 그래서 소개팅을 하신 건가요?”

“네?”

하지만 그 순진한 얼굴에서 나온 단어가 너무 적나라해서, 조금 괴리감이 느껴졌다.

“막상 해 보려니까…. 너무 아파서, 너무 커서, 그래서…. 저랑은 섹스가 불가능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시려는 겁니까?”

“아, 아니에요!”

슬아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일단 무진 씨가 선본다는 소리를 듣고 홧김에 그랬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이 매우


신경 쓰였다.

서럽게 울면서 좆이니 섹스니 하는 말을 하는 무진을 보다가, 슬아는 일단 무진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일단 들어와서 말해요. 위층이나 아래층 현관에서 누가 들으면 어떡해요.”

한 층에는 두 집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슬아는 무진을 들여보내고 비상계단 쪽의 위, 아래층을
한번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 인적도 없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슬아 씨…. 이게 뭔가요?”

아, 젠장…. 잊고 있었다.

슬아는 거실 바닥에, 담요 위로 수상하게 솟구친 딜도를 보며 아연해졌다.

무진은 그 앞에 서서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며 슬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게…. 아, 안 돼!”

슬아가 천천히 다가가자, 무진이 빠르게 담요를 들춰냈다.

“…….”

무진의 표정은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슬아는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싶었다. 진짜 뒈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살고 있지,


나는? 그런 자학스러운 회의감도 들었다.

“저를…. 슬아 씨는 이제 저를 버리실 생각인 거군요….”


“네? 그게 아니라….”

“막상 벗겨 보니 제 좆은 형편없고, 섹스도 불가능해서. 그래서 소개팅도 하시고 이런 장난감까지


사용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진, 진정….”

무진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아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취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저를 버리시려고….”

“그런 게 아니….”

“안 됩니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슬아 씨.”

“아니라니까….”

“슬아 씨….”

무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슬아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깨를 두드려 주며 아니라고, 오해라고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진은 안아 줄 거라 오해했는지, 슬아를 그대로 끌어당겨 안았다.

커다란 몸이 슬아의 품을 파고들며 안겨 왔다. 남성적인 향수 냄새가 훅 풍겨 왔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무진은 몸을 한참이나 숙이고는 슬아의 목덜미에 젖은 얼굴을 비볐다.

“슬아 씨,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버리지 마세요.”

아니,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치만 소개팅도 하셨고… 이 딜도도 사용하신 거 아닌가요?”

무진은 슬아의 허리에 단단하게 팔을 감아 끌어안았다.

꼭 덩치 큰 코알라에게 몸을 잡혀 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큰 남자가 자신의 품에 안기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조금 귀엽기도 하고…. 대형견 같기도
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슬아는 무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끌어안아 주고 싶으나, 무진의 등은 슬아의 팔로 다 안기에는


너무 넓었다.

“소개팅은…. 오해고, 딜도는 아직 사용 안 했어요. 그것도 오해긴 오해인데….”

자세가 불편했다. 슬아는 떨어지기 싫어 머리를 어깨에 비비적거리는 무진을 밀어 내고 소파에 앉혔다.
얌전하게 밀려난 무진은 여전히 서럽게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소개팅 문제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소개팅 문제는…. 미안해요. 그게, 어제 영업 팀 지윤 씨가 그러는데, 그 팀에 있는 김채민 씨가
저한테 소개팅하겠냐고 물어보라고 그랬다는 거예요.”

“…….”

“저는 진짜 안 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자꾸 옆에서 저보고 첫사랑을 못 잊었냐는 둥, 순정파라는 둥


하면서 놀리는 거예요. 그때 만났죠? 임지훈이라고 소개했던…. KM 홍보 팀 사람 기억하죠?”

슬아의 질문에 무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슬아 씨가 스무 살 때 만났다고 하셨던 남자….”

“맞아요, 사실 첫사랑도 아닌데…. 그냥 스무 살 때 잠깐 만났던 거예요. 근데 자꾸 첫사랑 못 잊은


순정파라고 놀리니까 열이 받아 가지고….”

“…….”

“그리고 이무진 씨가 선본다는 말을 들어서… 약간 화가 나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수락을 해


버렸어요.”

무진은 제 앞에 서 있는 슬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양손으로는 슬아의 손을 얌전히 잡은 채였다.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무진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무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흐를 때마다 슬아의 마음에는 죄책감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슬아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닌 것 같아서…. 오늘 김채민 씨한테 취소하면 안 되냐니까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직접 가서,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사람 있다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

“진짜 환장하게 그 구 남친이 나왔어요.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오는 길이에요. 김채민 씨랑


동창이라서 부탁했나 봐요. 그러니까 소개팅은….”

“그랬군요. 그럼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람은, 혹시 저인가요?”

“당연하죠. 저 바람둥이 아니거든요?”

“그럼….”

무진의 시선이 여전히 바닥에 붙어 있는 딜도로 향했다. 진짜 끔찍하게 흉흉했다.

“저건 뭔가요, 슬아 씨?”

“이, 이것도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후기에 혹평 남겨야지….

슬아는 원망스러운 듯 딜도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했다.

“…….”

무진은 말간 얼굴로 슬아를 올려다보았다.


슬아가 알고 있던 무진은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표정 하나 안 바뀔 것 같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쓰럽고 미안했다.

일단 변명하기 전에, 슬아는 무진에게 잡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끝이 닿자 살짝 눈을 감는 모습이…. 솔직히 말해 꼴렸다. 이 와중에 이렇게 잘생길 일인가? 눈썹은 또


왜 이렇게 짙고 예뻐?

슬아는 우는 사람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쓰레기 같은 자신을 욕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요일에, 그러니까 우리가 실패하고 나서요…. 무진 씨가 사이즈 맞는 콘돔이랑… 준비한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서 저도 뭘 준비하면 될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무진 씨의 그게 너무 큰 것 같아서…. 제가


나름대로 적응을 좀 해 보려고….”

스스로 내뱉고 있지만 진짜 이상한 변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논리로 저걸 샀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의뢰인을 변호하는
변호사처럼 기계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게 그러니까요, 과학적으로…. 더 큰 걸 받아들이기 전에는, 그거보다 작은 거로 시도하고 적응해


보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무진 씨랑 꼭 해 보고 싶어서…. 근데 너무
아프니까, 그래서 이걸 산 거예요.”

“…….”

슬아는 슬쩍 무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느새 자신의 손은 다시 무진에게 잡혀 있었다.

“그래서…. 무진 씨를 위해서…. 제가 너무 아파하면 무진 씨도 싫잖아요?”

“…….”

“무진 씨를 위해서였어요.”

진짜 쓰레기 같지만, 슬아는 무진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그래, 너 때문에 그랬다는데 어쩔 거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저 인공 좆은 잘 들어가던가요?”

“어…. 네?”

어느새 눈물을 그친 무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사용해 보신 겁니까?”

“아, 아뇨. 사실 해 보려고 했는데… 무진 씨가 와 가지고….”

“그럼,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순진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눈빛이 조금
탁하게 변해 있었다.

다시 잡힌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뜨거웠다.

***

“흐앗….”

슬아는 숨을 헐떡이며 무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조금 전, 무진의 제안에 슬아는 용기를 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씻고 오겠다며 화장실로 향했고, 슬아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무진을 기다렸다.

손을 씻고 돌아오는 무진의 표정은 조금 무서웠다. 화가 난 듯한 얼굴이라 의아했는데,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입술이 먼저 부딪쳤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소파에 앉은 채로 무진을 끌어안고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꺼운 혀가 억세게 입 안을 휘저었다. 부드러웠던 첫 입맞춤과 달리 버거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잠옷 원피스는 이미 오래전에 한참 위로 말려 올라갔다.

무진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슬아의 젖꼭지를 검지로 꾹 누르면서 뺨에 잘게 입을 맞췄다.

“그럼 제 좆이 마음에 안 들어서 소개팅을 하신 건 아니군요.”

“그럴 리가요….”

누군가에게 알몸을 전부 내보이고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이 슬아는 여전히 익숙지 않았다.

무진은 부끄러워하는 슬아를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어떠셨나요? 솔직한 평가가 궁금합니다.”

“네? 그, 그걸 어떻게 대놓고….”

무진은 자세를 바꾸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슬아 씨는 제 좆 때문에 저에게 관심을 보이신 거니까요, 막상 까고 보니 별로라고 느끼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소파에 앉은 슬아의 다리를 M 자 모양으로 만든 채 아래로 내려가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 다리 사이를 빤히 보는 무진의 시선이 따가웠다.

이렇게 밝은 데서 음부를 타인에게 낱낱이 내보인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흥분감으로
들뜬 것도 사실이었다.
“형편없었나요? 인공 좆을 구매할 만큼?”

다리 사이를 바라보던 무진이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물었다. 눈빛이 워낙 뜨거워 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며 내리깔았다.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반대로 빨리 먹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마음에 드셨나요?”

“…….”

맞는 말이긴 한데 슬아는 그렇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꼭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물어야


하는 걸까? 부끄러운 말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뻔뻔한 무진의 얼굴을 보니 조금 억울해졌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또 슬아 씨에게 차이고 싶진 않으니까.”

“…….”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당신이랑 꼭 해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아까 분명 말했는데,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또 듣고 싶은 건가? 무진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슬아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마음에 들었어요. 그, 근데 너무 아파서….”

“마음에 드셨군요.”

무진은 슬아의 다리 사이에 시선을 둔 채 읊조렸다.

“…….”

“허벅지 잡아서 직접 벌리세요.”

“네?”

“슬아 씨가 원하는 대로 저 인공 좆으로 구멍을 늘려 드릴 테니 벌려 보세요.”

이미 민망한 포즈로 다리 사이를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벌리라니.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자신이었다.

키스를 나눌 때부터 이미 다리 사이는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이제 와 부끄러우니 그만두자고 할 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여자가 딜도를 꺼냈으면 뭐라도 해야지.

슬아는 입술을 깨물며 안쪽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젖어 든 음부를 빤히 바라보는 무진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애무를 받는 것처럼 아래가 움찔거렸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무진이 낮게 속삭였다.

벌써 젖었다는 뒷말은 하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슬아는 부끄러운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진은 슬아가 애처롭게 부여잡은 안쪽 허벅지 위에 손을 겹쳐 올렸다. 그러고는 슬아의 다리 사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붉게 달아올라 움찔거리는 음부에 당장이라도 코를 처박고 핥아 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무진은 충동을


억제하며 천연하게 말했다.

“구멍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으…. 네?”

“이렇게 작은데 저 큰 걸 바로 쑤셔 넣으려고 하신 건가요?”

“젤… 발라서….”

슬아가 머뭇거리며 변명하자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젤을 바르지 않으면 확실히 찢어지겠네요.”

무진이 검지 끝으로 음핵을 톡톡 치며 말했다.

드디어 손이 닿았다. 간단한 접촉만으로 슬아는 절정을 느낄 뻔했다. 정전기가 오른 듯 음핵 주변으로


찌르르한 느낌이 척추까지 타고 올라왔다.

평소보다 더 흥분한 탓일까, 엉덩이 쪽으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슬아는 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무진은 새하얀 슬아의 안쪽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제 다리를 잡고 발발 떨고 있는 슬아의 모습이 덫에


걸린 초식 동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달콤한 향기와 애액이 흐르는 곳으로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아…!”

음핵을 빨아들이듯 가볍게 입을 맞추자 슬아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신음이 터졌다. 무진은 본격적으로
슬아의 음부를 벌리고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아깝게 흘러내린 물을 빨아 마셨다. 움찔거리며 제 존재를 어필하는 구멍을 보며 혀끝으로


클리토리스를 톡톡 건드렸다.

“아, 흐읏…. 으응!”

붉게 달아오른 구멍은 그의 물건은커녕 저 딜도도 삼키지 못할 것처럼 자그마했다.

그는 두꺼운 혀로 구멍 주변을 넓히듯 꾹꾹 눌러 댔다. 누를 때마다 달콤한 물이 쭉쭉 흘러나오는 게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였다.

“흐응, 앗!”

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허벅지를 잡은 손을 풀어 무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흥분이 밀려왔다. 이 정도의 쾌락은 난생처음이었다. 슬아는 무진의 혀와 입술에 더 가까이
음부를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더 깊이, 안쪽으로. 무진의 혀 대신 지난번처럼 손가락으로 쑤셔 줬으면 싶었다.


그런 슬아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무진이 천천히 가운뎃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아…. 읏!”

“이거 봐요, 손가락도 겨우 삼키면서.”

“으응, 아…! 무진 씨…. 아….”

무진은 이것 보라는 듯 그녀를 탓하며 클리토리스를 혀끝으로 굴려 댔다. 손가락이 밀려들어 가자 안쪽


살이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었다. 그의 손가락이 안쪽을 넓히듯 입구 주변을 둥글게 움직였다.

“아…. 흐읏.”

이미 제정신을 차리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슬아는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다음 행위를 기대했다.

무진은 축축하게 젖은 가운뎃손가락을 빼내어 쪽 빨더니 이번엔 검지까지 한 번에 밀어 넣었다.

“흐앗! 아!”

“제가 볼 때 슬아 씨는 손가락 두 개가 한계입니다.”

무진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가자 내벽이 빠듯하게 채워졌다. 슬아는 빨리 움직여 달라는 듯


허리를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무진은 혀를 차더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손가락을 굽혀 천천히 움직였다.

“하아, 아!”

“안이 꿈틀거리면서 미친 듯이 달라붙어요.”

“으응, 아…. 아!”

기다란 손가락이 쑤욱 밀려왔다 빠져나가기를 느리게 반복했다. 그러다 입구를 늘리듯 둥글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흐윽…. 아!”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살살 만져 주자 슬아의 몸이 발작하듯 튕겨 올랐다. 무진은 무너지려는 슬아의


자세를 다시 고정시키며 손가락의 왕복 운동을 반복했다.

“슬아 씨는 여기를 만져 주는 걸 좋아하시네요.”

그 말 뒤로 무진의 혀가 클리토리스에 닿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슬아는 음핵을 자극해 주며 삽입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혀가 빠르게 움직이자 절정은 금방 찾아왔다.

슬아는 또 저번처럼 투명한 물이 줄줄 흘러내릴까 봐 두려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워낙 자극이 강렬한


탓에 이내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어 자극하자 벼락에 맞은 것처럼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손가락은


내부를 거침없이 휘저으며 문질렀다.

“아, 아앗 아! 그만, 아!”

혼자 할 때보다 몇 배는 강한 절정이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무진의 손을 통해 느끼는 절정은 그녀가


아는 느낌보다 훨씬 강력해 두려울 정도였다. 슬아는 눈꼬리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발발 떨었다.
무진의 손가락이 쑥 하고 빠져나갔다. 근육이 경련하듯 달달 떨리는 다리 사이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슬아는 소파 아래로 힘없이 다리를 늘어놓고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진은 슬아의 안에 들어갔던 손가락을 거리낌 없이 쪽 빨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가 향한 곳은 여전히


흉물스럽게 바닥에 붙어 있는 딜도 앞이었다.

“그거 절대 안 떨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딜도는 똑 하고 바닥에서 떨어졌다. 슬아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딜도와 무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저 딜도가 사람을 가리나….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무진은 슬아의 앞에 앉아 손바닥 위에 젤을 듬뿍 짜기 시작했다.

“엄마야!”

그리고 순식간에 다리가 들어 올려졌다. 무진은 젤이 닿지 않은 오른손으로 슬아의 발목을 잡고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이전의 자세가 힘드시면 이렇게 잡아 보세요.”

게다가 친절하게 팔까지 당겨 자세를 잡아 주었다.

슬아는 양팔로 무릎 안쪽 오금을 감싸 안은 자세가 되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부끄러운 자세였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음부에 차가운 젤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

무진은 슬아의 음부 주변과 딜도에 젤을 정성스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슬아는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도 직장 동료인 이무진 씨와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뻔뻔하게 흉물스러운 딜도를 만지는 무진의 모습이 낯설었다.

눈이 마주치자 무진은 젤이 범벅된 딜도를 들고 말했다.

“그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는 처음의 의도를 잊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별수가 없었다. 슬아는 부끄러움을 참아 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 이무진 씨의 손에 들려 있으니 저 딜도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애초에 상당히 큰 사이즈의


딜도였으니 당연했다.

무진은 천천히 딜도의 끝을 슬아의 음부에 맞춰 입구를 문질렀다.

“아…. 흐읏….”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며 입구를 문지르자 금방 몸이 달아올랐다. 방금 전 절정의 여운으로 감각이 더욱


예민했다.
“아프면 말하세요, 슬아 씨.”

“흐읏…. 네….”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딜도가 밀려들어 왔다. 무진은 작은 구멍이 벌어져 딜도를 삼키는 모습을 눈에
똑똑히 담아냈다.

“슬아 씨 보지는 참 탐욕스럽네요, 한계까지 벌어져서 기어코 삼키는 걸 보니.”

“흐읏…. 아….”

아래가 꿰뚫린 것처럼 빠듯하게 벌어졌다. 슬아는 다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면 제 것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무진이 나긋하게 말하며 입술을 겹쳐 왔다. 슬아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리며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흐응…. 아….”

동시에 무진이 딜도를 깊게 밀어 넣으며 물었다. 입술이 가깝게 맞닿은 채로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갔다.

“아프진 않나요?”

“흐응…. 네….”

무진이 손가락으로 늘려 놓은 탓인지, 아니면 젤의 효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생각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무진의 것도 무리 없이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욕구가 샘솟았다.

이런 딜도보다는 이무진 씨와 직접 하고 싶었다. 서로 몸을 겹치고, 키스를 나누고 쾌락을 느끼고 싶었다.

“흐읏…. 저 무진 씨, 아프지 않으니까 다시 시도해 보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콘돔이 아직 배송되지 않았습니다.”

무진이 슬아의 입술에 쪽 하고 입 맞추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 딜도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안쪽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하아…. 그, 그냥 하면….”

“…….”

“어차피 정관 수술도 했으면서….”

슬아가 그를 탓하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정관 수술 확인증까지 받았는데 굳이 그에게 맞는 콘돔이 배송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와 몸을 겹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무진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표정은 그대로인데 눈빛만큼은 어딘가 모르게 화난 것처럼
느껴졌다.

“제 좆이 그렇게 탐나십니까?”

“으읏…. 그게 아니라.”

“그런데 왜요, 이 인공 좆으로 충분히 쑤셔 드리고 있는데 뭐가 부족한 건가요.”


“…….”

무진은 기어코 대답을 들을 셈인지 슬아를 재촉했다. 흥분에 취한 탓일까, 이제는 그렇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슬아는 그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무진 씨랑, 무진 씨와 하고 싶어요.”

“…콘돔도 없이요?”

무진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슬아의 얼굴을 탐색했다. 속마음마저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이었다. 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못 참고 이 안에 사정할 수도 있는데 어쩌시려고.”

무진이 슬아의 안에 쑤셔 넣은 딜도를 빼내고는 그녀의 아랫배를 더듬으며 말했다.

“사, 상관없어요….”

정관 수술도 했고, 서로 병도 없는데 안에 사정한다고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슬아는 손을 뻗어 옷 위로


무진의 가슴을 더듬으며 재촉했다.

무진은 대답 없이 바지의 지퍼를 풀기 시작했다. 슬아의 눈에 두툼하게 솟아오른 그의 바지춤이 들어왔다.


이윽고 속옷과 함께 벗어 내리자 단단하게 서 있는 그의 성기가 나타났다. 대체 어떻게 저런 게 바지에
숨겨지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왜요, 직접 보니까 또 생각이 바뀌셨나요?”

슬아의 겁먹은 얼굴을 보며 무진이 물었다.

“아, 아뇨.”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배꼽까지 단단하게 솟아오른 성기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처음 무진의 성기를 만졌을 때 바게트 빵이라도 사 온 줄 알고 착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확실히


길쭉한 바게트는 아니더라도 팔뚝만 한 바게트와는 착각할 만했다.

무진은 다시 젤을 들어 손바닥에 주욱 짜내더니 딱딱한 성기에 바르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슬아는 미묘한 그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무진 또한 지금 굉장히


흥분한 상태라는 것을.

그가 허리를 숙여 슬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슬아는 긴장감을 숨기며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꼭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기 직전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진은 자신의 성기로 슬아의 음부 위를 툭툭 가볍게 때렸다. 가볍게 때렸으나 슬아에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저걸 끝까지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샘솟았다. 명치까지 닿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 무진은 젤로 젖은 귀두 끝을 슬아의 음핵에 비비기 시작했다.

“흐읏….”

야릇한 접촉에 흥분감이 밀려왔다. 무진과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의 쾌감이 기대되었다. 지난번처럼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 더욱 그랬다.
“아프면 말하세요, 슬아 씨.”

“네, 네….”

그 말을 끝으로 무진의 성기가 작은 구멍을 벌려 침범하기 시작했다.

“흐아….”

끝만 조금 삽입되었을 뿐인데 딜도가 들어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훨씬 굵고 단단한


탓일까, 꿰뚫리는 느낌이 상당했다.

슬아와 마찬가지로 무진 또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조여 왔다. 안쪽 살이


좆을 뜯어먹을 것처럼 미친 듯이 달라붙었다.

워낙 안이 좁은 탓인지, 안쪽 살이 그의 성기를 밀어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진은 천천히 조금씩,


슬아가 아프지 않도록 성기를 구겨 넣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여드는 느낌은 강해졌다.

“끊어지겠어요. 힘 빼세요.”

“흐…. 아, 아….”

슬아는 입만 벌린 채로 숨을 버겁게 내쉬고 있었다. 무진은 들썩거리는 슬아의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으아…. 흐읏.”

몸을 숙이자 압박감이 더욱 상당해졌다. 각도가 기울어져 더 깊게 들어온 기분이었다. 슬아는 허벅지를


달달 떨면서도 무진의 목에 팔을 감아 왔다.

“처, 천천히….”

슬아의 말대로 무진은 천천히 나머지를 삽입하며 입을 겹쳐 왔다. 혀끝을 목구멍 쪽으로 밀어 넣자 슬아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무진은 입천장의 점막을 혀끝으로 살살 건들며 그녀의 입 안에 있는 침을 빨아 먹었다. 달콤했다. 이


몸에서 나오는 체액은 전부 빨아 먹고 싶을 정도로 달았다.

“괜찮아요, 슬아 씨?”

입술을 떼자 땀으로 젖은 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빠듯하긴 했으나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았다.

“드디어 원하시는 대로 제 좆을 먹어 보셨네요.”

“흐으…. 아….”

무진은 몸을 일으켜 빠듯하게 벌어진 슬아의 질구를 확인했다. 젤을 발라 풀어 놓은 덕인지 찢어지진 않은


듯했다.

제 것의 모양대로 찢어지듯 벌어진 구멍이 야했다. 어쩌면 이렇게 음탕하고 탐욕스러운 구멍을 가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떤가요?”
“흐읏….”

천천히 엉덩이를 뒤로 뺀 뒤에 다시 느리게 삽입했다. 슬아는 바르르 떨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올렸다.

“소감이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무진이 재촉하듯 엄지로 슬아의 음핵을 건드리며 물었다.

슬아 또한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싶었으나 정신이 없었다. 아래가 빠듯하게 땅겨 오는 느낌이


낯설었다. 그가 허리를 빼면 몸이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으응, 아아…. 흣.”

무진은 대답해 주지 않는 슬아가 야속한지 허리를 뺐다가 강하게 찔러 넣었다.

“흐아앗!”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슬아의 입이 벌어졌다. 동시에 그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다리가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위로 살짝 휘어진 그의 성기가 정확히 느끼는 부위를 찌른 까닭에 단숨에 절정이 찾아온 것이다.

“으응, 아!”

안쪽에서 무언가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묘한 방뇨감을 느끼며 바르르 떠는데 무진의 성기가
빠지더니 퍽 하고 다시 박혀 왔다.

“흐으…. 이, 이상…. 아!”

“대답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무진은 슬아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작게 웃더니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짧게 키스했다.

“흐읏…. 아…. 아아, 자, 잠깐….”

무진이 슬아의 허리를 감더니 삽입한 채로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침대로 가도 될까요?”

“으응, 네…. 아! 천천히….”

삽입한 상태라 그가 걸을 때마다 성기가 안쪽을 찔러 왔다. 슬아는 무진의 목에 팔을 감은 채로 힘껏


매달렸다.

무진은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는 다른 손으로 닫혀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제야
정리되지 않은 방의 상태가 떠올랐으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진은 슬아를 안은 채로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친절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베개까지 받쳐


주었다. 물론 슬아는 안쪽을 파고드는 성기 때문에 그의 배려를 눈치챌 정신도 없었다.

슬아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는 무진의 목에 팔을 감고 정신없이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느리게 빠져나간 성기가 다시 천천히 안쪽으로 삽입되었다. 어느 한 부분을 느리게
문지르는 감각이 미칠 것같이 좋았다.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좋은데, 빠르게 움직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척추가 저려 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무진 또한 원하던 것인지 그가 물어 왔다.

“조금 빠르게 움직일 건데, 힘들면 말하세요.”

“으응…. 네, 빠, 빨리….”

슬아가 재촉하자 무진이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슬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양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흐읏….”

그러고는 쥐어짜듯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빠르게 삽입했다. 쩍쩍쩍 젤과 애액에 젖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아앙, 아! 아! 흐으…. 아!”

거침없이 밀어 올려 처박는 힘이 상당했다. 슬아는 무진의 목을 감싸 안은 채로 흐느꼈다.

“아아, 악! 흐읏, 아!”

영상에서나 보았던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비명 같은 신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쾌락이었다. 슬아는 엉엉 울며 흐느꼈다.

아래에서 뭔가 터져 물이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팡팡 터지는 무언가가 만든 상상일지도


몰랐다.

“하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무진의 낮은 신음 또한 그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좋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진작에 알았다면 좋았을걸.

음란하기로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슬아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무진을 꽉 끌어안았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사이 무진의 허릿짓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못 참겠는데.”

낮은 목소리에 슬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속삭였다.

“흐으, 더, 더 해 줘요, 무진 씨.”

그 말에 무진이 어이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에다 사정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

슬아는 막무가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빼지 않고 조금 더, 더 강하게 박아 줬으면 싶었다.

무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것을 전부 삼키고 있는 슬아의 음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좋습니까?”

“흐으…. 아…. 좋, 좋아요.”


겨우 신음하며 대답하자 무진이 슬아의 손을 당겨 접합부로 가져갔다.

“직접 만져 봐요, 얼마나 벌어졌는지.”

“아….”

그 말을 듣자 정말 궁금해졌다. 정말 그 큰 게 다 들어왔을까? 슬아는 손가락을 더듬더듬 움직였다. 가장


먼저 딱딱한 성기의 뿌리 끝이 느껴졌다. 그 아래로 한계까지 벌어진 자신의 음부가 만져졌다.

“보고 싶어요?”

“…네?”

“직접 봐요, 그럼.”

어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는데 무진의 성기가 쑤우욱 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워낙


큰 탓인지 빠져나가는 데도 한참이었다.

내내 품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새삼 얼마나 커다란 게 들어왔던 건지 실감이 났다.

무진은 침대 끝에 걸터앉더니 슬아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가볍게 안아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로 오게


했다.

그의 의도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무진이 앉은 곳은 거울 앞이었다.

그녀의 방에는 얇고 기다란 전신 거울 하나가 있었다. 정말 직접 보라는 걸까? 사실 별로 보고 싶진


않았지만 궁금하긴 했다. 무진은 슬아의 엉덩이를 들어 올려 꾹 닫힌 입구에 다시 귀두를 문질렀다.

“아, 아아!”

안을 한 번에 파고드는 성기 탓에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허벅지에 걸쳐진 다리가 덜덜 경련하듯 떨려


왔다.

그는 슬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거울을 향해 각도를 맞췄다. 그 모습이 거울을 통해 고스란히 슬아의
눈에 들어왔다.

무진의 커다란 손이 슬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음란한 광경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찢어질 듯 벌어진 음부는 커다란 성기를 욕심껏 삼키고 있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음핵과 그 아래로 단단한 그의 기둥이 보였다.

“슬아 씨가 직접 만지세요. 원하는 만큼 박아 드릴 테니.”

“네?”

무진은 슬아의 손을 당겨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슬아의 음핵이었다.

슬아의 손끝에 젖은 클리토리스가 느껴졌다. 무진은 확실하게 슬아에게 속삭였다.

“직접 만져 보세요, 좋아하잖아요, 거기 만지는 거.”

“으…. 아!”

그와 동시에 무진의 성기가 깊게 파고들었다. 무진은 한 손으로는 슬아의 허벅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직접 허리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성기를 처박기 시작했다.

“아, 하읏…. 으응 아! 잠깐…. 이상…. 아!”

슬아는 클리토리스를 비비라는 그의 말도 잊은 채 정신없이 흔들렸다.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광경이었다. 그 와중에 무진이 다시 친절하게 슬아의 손을 음부로 가져다주었다.

직접 만지라는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슬아는 결국 중지 끝으로 클리토리스를 비비기 시작했다.

“아아…. 흐, 아! 싫…. 으앗! 앙!”

아래에서 위로 찔러 올리는 힘이 상당했다. 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문질렀다.


굵고 기다란 성기가 안을 쑤걱쑤걱 쑤시는 광경이 전부 눈에 담아졌다. 그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까,
아까보다 더 큰 흥분이 밀려왔다.

쩍쩍 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애액과 젤이 늘어져 붙었다 떨어지는 모습 또한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으응, 아! 흐…. 아아!”

치받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슬아는 결국 무진의 팔을 붙잡고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흐느꼈다.


이윽고 무언가 팍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무진의 성기가 이전보다 더 깊게 안을 쑤셔 박았다.

본능적으로 그가 사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짐승처럼 사정하는 와중에도 거칠게 안을 쑤셔 댔다.


절정을 느낀 것은 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이 팡팡 터지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무언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흐아…. 아….”

그의 성기가 쑤우욱 하고 빠져나갔다. 슬아의 음부에서 투명한 물이 하얀 정액과 함께 줄줄 흘러내렸다.

사정했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인 크기인 무진의 성기도 보였다. 쾌감을 느끼며 흐른 눈물로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전부 눈에 담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질어질했다.

슬아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무진에게 기대 몸을 숙였다.

무진은 힘을 쭉 뺀 채로 벌어진 슬아의 다리를 오므려 안았다. 그러고는 슬아의 뺨과 귓가에 쪽쪽거리며
입술로 도장을 찍었다.

슬아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무진은 젖은 슬아의 이마를 닦아 주며 침대 위에 눕혔다.

온몸에 기력이 다 빠져 꼼짝도 하기 싫었다. 슬아는 숨을 내쉬며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서 더 하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다행히 꼿꼿한 성기와 달리, 무진은 더 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요.”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느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탓에 더욱 진이 빠졌다.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까지 좋을 필요는 없지 않나….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반면 무진은 전혀 힘든 기색이 없어 조금 억울했다. 무진은 슬아의 허리와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섹스 후의 이런 자잘한 접촉마저 너무 좋았다.

“아프진 않나요, 슬아 씨?”

무진이 다정하게 물었고 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뇌가 미쳐 버린 걸까,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진은 의아한 듯 슬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너무, 너무 좋았어서….”

“좋으셨습니까?”

“네…. 호, 혹시 무진 씨는 별로였어요?”

“아뇨, 저도 좋았습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슬아 또한 그랬다. 그의 대답에 혹시나 자신만 좋았던 거면 어쩌나 싶었던 마음이 금세 사라졌다.

피식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계속 웃음이 났다.
자위를 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쾌락이었다. 만족감이 엄청났다.

비록 체력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으나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좋았다.

역시 임지훈 같은 놈과 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조금 늦었으나 앞으로 인생에 즐거운


섹스 라이프가 추가될 거라 생각하니 행복함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슬아 씨는 체력을 기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겨우 한 번에 이렇게 기진맥진해지다니…. 하지만 상대는 저렇게 커다란


성기였다. 심지어 처음이라 온몸의 근육이 잔뜩 긴장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그래, 앞으로 체력을 길러서 무진 씨랑 진짜 많이 해야지. 질리도록 해야지.

슬아는 힘든 와중에도 신이 나서 생각했다. 그 생각은 잠시 후, 무진이 직접 몸을 씻겨 주고 함께 잠들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무진은 늘 그렇듯 다정했으나 이렇게까지 다정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더 다정했다.

손 하나도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애액과 땀으로 뒤덮인 몸을 깨끗하게 씻겨 주었고, 젖은 침대와 바닥도
그가 전부 해결했다.

심지어 무진은 자신의 몸을 씻은 뒤에도 슬아의 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놀랐을 허벅지 근육부터 허리와
어깨까지 주물러 주는데 온몸의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손이 크고 손아귀 힘이 센 탓인지 어깨를 주물러 줄 때는 소리까지 질러 댔다. 중간에 은근하게 분위기가


바뀌어 키스까지는 나누었으나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간단하게 음식을 시켜 먹은 뒤 그녀의 침대에 함께 누웠다. 짧은 수다를 떨기도 했다.


“아까 손은 왜 잡았어요? 카페에서요.”

나란히 누운 상태로 슬아가 물었다. 문득 회사에서 재호, 혜진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떠올랐다.

조심하라는 뜻에서 건드린 건데 다짜고짜 손을 잡아서 깜짝 놀랐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손을 잡아 달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조심하라고 그런 건데…. 그 두 사람 눈치 빠르단 말이에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까 조심해요, 당분간은….”

‘집안이 좋다니까 태세 변환을 하고 이무진 씨에게 들이대는 김슬아’라는 타이틀은 사양이었다. 슬아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무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섞었기 때문인지 한층 더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슬아는 무진의 단단한 가슴 근육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이게 내 거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가슴을 간지럽히는 슬아의 손 위로 무진의 손이 겹쳐졌다. 그때 슬아의 눈에 그의 손등에 난 작은 상처가


들어왔다.

“어? 이 상처 뭐예요? 어디서 다쳤어요?”

무언가에 긁힌 듯 붉은 상처였다. 슬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무진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듯 미간을 구겼다.

“그냥, 어디서 긁힌 것 같습니다.”

조금 전, 바닥에 긁혀 난 상처인 듯했다. 무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음에도 슬아는 걱정스러운 듯 상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진은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행복’임이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슬아 또한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침대에 무진과 함께 누웠을 때, 슬아는 이사 오면서 침대를 큰 것으로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들 때까지는 정말 행복했다.

“…뭐지.”

하지만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살짝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근육통으로 비명이 먼저 찾아왔다. 그것도 모자라 목까지 잔뜩 쉬어


있었다.

“목소리가 왜 이러지….”

마치 문어 괴물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해도 쉰 목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것보다 어젯밤 분명히 옆에서 함께 잠들었던 무진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방문이 열리고 무진이 들어왔다.

“슬아 씨, 잘 잤어요? 식사 준비 때문에 집에 다녀왔습니다.”

무진은 출근 준비까지 마친 상태인지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슬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식사하고 출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저희 집으로 함께 가요.”

“…네. 저, 근데.”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무진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 모습이 이 와중에 좀 귀여웠다.


슬아는 큼큼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목소리가 이상해요. 그리고 몸이….”

“네?”

“안 움직여져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과 다리의 근육이 파들파들 떨리며 경련했다.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근육통이었다.

결국 슬아는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무진의 도움으로 겨우 식사를 한 뒤에는 양치를 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무진은 슬아의 가슴 위까지 이불을 얌전히 덮어 주며 당부했다.

“반차 내고 올 테니 슬아 씨는 조금 더 자는 게 좋겠습니다.”

“아, 안 그래도 되는데….”

“금방 올게요, 슬아 씨.”

“네, 네….”

무진은 슬아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춘 뒤 회사로 향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긴 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바쁘게 보냈을 오전 시간, 슬아는 모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한숨 더 잔 뒤에는
그나마 몸을 움직일 기운이 생겨났다.

혜진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난 슬아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다. 그러다 혜진의 말 한마디에 잠이 홀딱
깨 버렸다.

- 어.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이소미 씨 교육 무진 씨가 대신 해 줬어. 은근히 잘 맞나 보던데, 두 사람?

“어…? 왜?”

- 그냥, 둘이 한마디도 안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전화를 끊은 슬아는 불안감이 솔솔 샘솟는 것을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근육통으로 괴롭긴
했으나 걸을 수는 있을 정도였다.

근육통도 근육통이었으나, 걸을 때마다 아래가 너무 아팠다. 전체가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큰 게 드나들었으니…. 예상했던 통증이었다.

그나저나 무진 씨와 이소미 씨라니,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걸 상상만 해도 불안감이 밀려왔다. 대충


떠올려도 너무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얼마 전까지는 이무진 씨가 누구랑 뭘 하든 전혀 신경 쓴 적 없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유치한


질투심이 샘솟았다.

슬아는 겨우겨우 몸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녹이고 나니 근육의 통증이
한결 줄어들었다. 덕분에 잡생각도 사라졌다.

무진은 슬아에게 미리 말한 대로 반차를 쓰고 일찍 퇴근했다. 퇴근하자마자 무진이 향한 곳은 당연히


슬아의 집이었다.

슬아는 아침보다 한결 편안한 몸 상태로 무진을 맞이했다.

“슬아 씨, 몸은 좀 어떠세요?”

무진의 물음에 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어젯밤에 이 남자와 내내 뒹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기분이 미묘했다.

그가 차려 준 점심을 먹으며, 슬아는 은근슬쩍 무진을 관찰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과
단정한 옷차림. 저 옷 속에 있는 근육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의 속살을 본 여자가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하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눈이 마주치자 슬아는 머릿속의 생각을 들킬까 봐 빠르게 말을 꺼냈다.

“아, 그나저나 오늘 이소미 씨 교육 무진 씨가 대신 해 줬다면서요? 미안해요, 무진 씨.”

“별말씀을요. 식사는 입에 맞으시나요?”

“아, 네. 맛있어요! 요리는 언제 배운 거예요?”

무진이 차려 준 밥상은 조금 싱겁게 먹는 편인 그녀의 입맛에 딱 맞았다. 반찬이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운동할 때부터 입맛이 예민해서 직접 해 먹어 버릇했습니다.”

“아, 그랬구나.”

다행히 이소미 씨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지나갔다. 슬아는 별다른 내색 없이 평소처럼 타인에게 무관심한


듯한 무진의 말투에 안심했다.

“아, 오늘 회의에서는 다음 주 워크숍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네, 고마워요.”

식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커피를 마실 무렵이었다. 대뜸 이무진 씨가 말을 꺼냈다.


“어제 저는 슬아 씨에게 충분한 어필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크흡…. 네?”

예고 없이 꺼낸 화제에 하마터면 무진의 앞에서 커피를 뿜을 뻔했다. 무진은 노골적인 눈빛으로 슬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행히 슬아 씨도 만족하신 것 같고요.”

“그…. 네.”

“말씀드린 것처럼, 주말 데이트 이후에 다시 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 대답이라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YES’란 답을 바로 내놓는다면 너무 밝히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사실이긴 했지만, 사실인 것과는 상관없이 무진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슬아는 무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놓친다면 영영 놓칠 것만 같았다. 그만큼 욕심나는


사람이었다. 물론 무진은 그것도 훌륭한 남자였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꽤 난폭했던 어젯밤과 다르게 그는 오늘 하루 내내 정중하고 또 다정했다. 평소에도 다정하긴 했지만,


몸을 섞은 뒤에는 유독 더 다정했다. 그와 사귀게 된다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충분히 상상될 정도였다.
얼마나 다정할지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슬아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말한 대로 주말이 지난 뒤, 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다음


대답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게 여태까지 자신을 짝사랑한 이무진 씨에 대한 예의였다.

***

다행히 다음 날이 되자 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래쪽의 통증은 아직 남아 있었으나 일상생활은 충분히


가능했다. 어제 무진이 한 차례 더 마사지를 해 준 덕에 회복이 빨랐다.

또 분위기가 야릇하게 형성되면 어쩌나 고민한 것과 달리, 무진의 손길은 건조하고 성실했다. 마치
음란한 생각을 한 것은 자신뿐인 것처럼.

같은 침대에서 잤던 그저께와 달리 어제 무진은 저녁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할 생각인 듯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그래도 주말 데이트 이후면 바로 좋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하고 싶었으나, 그의


몸만 원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기에 슬아는 조금 더 버티기로 했다.

상쾌하게 출근길에 오르며 슬아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비록 미세 먼지에 뒤덮였으나 마음만큼은
구름이 선명히 보일 만큼 맑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 점의 불안감도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회사에 도착한 슬아는 동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노트북을 켰다.

“슬아 씨, 몸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

“갑자기 몸살이래서 얼마나 놀랐다구. 소개팅한 다음 날 몸살이 웬 말이야. 그나저나 어땠어,


소개팅은?”

아차. 그 생각을 떠올리자 속에서 열이 뻗쳐올랐다.

다행히 이무진 씨는 자리에 없었다.

슬아는 입술을 깨물며 혜진, 재호 커플을 노려보았다. 찔리는 게 있긴 한지 두 사람은 슬슬 눈을 피했다.

“무진 씨한테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슬아의 말에 혜진이 입을 쭉 내밀며 주변을 살피더니 작게 속삭였다.

“이무진 씨가 바로 물어봤어?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근데 뭐 어때. 이무진 씨 이제 슬아 씨 안


좋아한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안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봤더니 단호하게 슬아 씨 안 좋아한다고 말하길래 알려 준 거야. 우리끼리만


비밀 얘기 하는 게 좀 미안해서.”

“…무진 씨가 그랬어?”

“그래, 슬아 씨.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우리가 미안해.”

슬아는 사과하는 두 사람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재호와 혜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나저나 소개팅은?”

이 찰거머리들….

슬아는 두 사람을 밀어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끝났어. 기대할 거 전혀 없으니까 물어보지 마.”

“아, 왜? 이상한 사람 나왔어? 응?”

슬아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단호하게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탕비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호, 혜진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슬아는 혹시라도 두 사람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움직였다.

그나저나 이무진 씨가 이제 자신을 안 좋아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니 의외였다. 소개팅 이야기를 들으려고
거짓말을 한 건가? 직접 물어보고 싶었으나 물어보기가 모호했다.

애초에 그를 거절한 건 그녀였다. 아직 고백에 대해 대답도 하기 전인데 그걸 따져서 득 될 게 하나


없었다.

찜찜하긴 했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소개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을 무진을 떠올리자 실실
입꼬리가 올라갔다.

흥얼거리며 탕비실로 향하는데 안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있나?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거짓말처럼 안쪽에서 들려오던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뭐지?’

탕비실 안에 있는 사람은 이무진 씨와 신입 사원 이소미 씨였다. 서로 조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슬아에게 향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 네, 좋은 아침이에요.”

소미는 슬아에게 딱딱하게 인사한 뒤 커피 잔을 들고 그녀를 지나쳐 나갔다.

남아 있는 건 무표정한 얼굴의 무진이었다.

슬아는 애써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무진에게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 자연스럽게 올라가던 입꼬리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무진은 아무렇지 않게 슬아를 살피며 물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슬아 씨?”

“한결 괜찮아요. 덕분에.”

“다행입니다.”

슬아는 커피를 내리며 무진을 힐끗거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피를 내리며 슬쩍 물었다.

“이소미 씨랑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네?”

“아, 말소리가 들리길래….”

“어제 알려 줬던 걸 다시 물어봐서요.”

“…그래요?”

무진의 대답에 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내려진 커피 잔을 손에 쥐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 불안감은 뭐지?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탕비실 문을 열었을 때의 그 정적, 그 순간의 어색했던 공기, 방해꾼이 된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신경이 조금 예민한 탓이 분명했다. 슬아는 어제 내내 다정했던 무진의 손길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불안감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사소하게 시작된 불안은 적립금처럼 차곡차곡 쌓여 갔다.

다음 날, 팀원들과 간단한 회식이 있을 때였다. 신입 사원들을 위한 회식이었기에 전 팀원들이 전부


참여했다.

식사 내내 슬아는 먼 곳에 앉아 있는 무진을 힐끗거렸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이소미 씨도 한 번씩


살펴보았다.

대체 어쩌다 자리를 이따위로 앉게 된 걸까.

슬아는 자신의 옆에 앉아 신나게 떠드는 재호, 혜진을 보며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술자리는 늘 즐거웠다. 잠시 예민했던 슬아도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진과 소미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이런 추접스러운 질투심을 갖게 된 걸까. 며칠 전, 슬아는 무진과 기대하던 관계를 맺었고 그


이후로도 분위기가 좋았다.

그 뒤로 또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어제도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비어 있는 두 사람의 자리를 보다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지만 슬아는 고개를 저었다. 무진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슬아 씨, 뭐 해. 잔 비었네!”

“어….”

슬아는 재호의 호들갑에 얼버무렸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은데….

“나 화장실 좀.”

슬아는 변명 삼아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마침 무진과 소미, 두 사람은 화장실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서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다만 슬아를 보자마자
이소미 씨의 입이 굳게 닫혔다는 게 문제였다.

슬아를 등지고 서 있던 무진은 소미가 대화를 하다 말고 휙 가 버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술에 취해 뺨이 붉어진 슬아가 서 있었다.

“슬아 씨.”

“아…. 무, 무진 씨, 여기서 뭐 해요?”


슬아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소미의 뒷모습을 보다 무진에게 물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술을 좀 흘려서요.”

“아, 네….”

슬아는 가볍게 대답하며 무진을 지나쳐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 촉이 왔다. 대개 여자의 이런 촉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불안감에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대체 뭐지? 저 두 사람 뭐지?

하지만 아무리 확실하게 촉이 와도 함부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그날 이후로 슬아는 두 사람을 확실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온 신경이 그곳에 쏠려 있었다. 그 때문에
다음 날인 주말에 하기로 했던 데이트에서도 슬아는 탐정이 된 것처럼 무진을 관찰했다.

데이트는 평범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대화를 나누며 슬아는 한 번씩 소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소미 씨요? 글쎄요, 일은 잘하는 것 같은데.”

“그, 그래요?”

“네. 최대웅 씨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이소미 씨 이야기를 하다가 왜 최대웅 씨 이야기로 넘어간 건지 모를 일이었다. 확실히 무언가 있었다.
며칠 내내 슬아의 머릿속은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데이트가 끝난 뒤, 무진은 슬아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 술 한잔하지 않겠느냐 제안하려 했다. 검은 속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슬아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온종일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함께 보낸


시간이 별로였던 걸까.

무진은 닫혀 있는 옆집 문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이번에도 거절당할 생각은 없었다. 여태껏


슬아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실수한 점이었다.

단숨에 몰아붙이면 토끼처럼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일 년이 넘도록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알게 된 바로, 슬아는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것에 약했다. 충동적이고 약한 마음을
이용하면 더욱 쉬울 터였다.

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필요하다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데이트가 있던 토요일이 지나고 다음 날인 주말, 슬아는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생각을 정리했다. 마침


집에 일이 생겼다는 무진 덕분에, 주말 내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역시 함부로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했다.

차라리 무진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진 씨와 이소미 씨에 대한 생각에서


의심을 거두자 그 자리에는 오롯이 무진만 남았다.

무진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고백을 거절할 명분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섹스가 잘 맞는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긴 했으나, 그것보다 이무진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았다.

특히 일 년이 넘도록 자신을 좋아해 줬다는 점에서 신뢰가 무수히 샘솟았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 대단한 성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이 좋아졌다고. 어떻게 진심을 전해야 할까.

다시 생각해 봐도 애초에 당신의 성기가 마음에 들어요! 하고 접근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자고
그런 미친 짓을…?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그가 오해하지 않게 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설령 오해한다고 하더라도 꿋꿋하게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며칠 뒤 무참히 부서졌다.

워크숍 장소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슬아는 행복에 부풀어 있었다. 워크숍의 일정은 1 박 2 일이었다.
슬아는 모두가 잠든 밤에 무진을 불러내 진심을 담아 그에게 고백할 예정이었다.

멘트도 벌써 준비해 두었다. 거울을 보며 연습까지 했다.

문제는 저녁 이후에 터졌다. 밖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다들 먹고 마시고 정신이 없었다. 재호,
혜진과 함께 신나서 술을 마시던 슬아는 문득 무진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소미
씨도 없었다.

하지만 전과 같이 쉽게 의심을 품진 않았다. 애써 불안을 억눌렀다. 하지만 이미 적립되어 있던 불안감이


터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실내로 들어간 슬아는 구석 어귀에서 흘러오는 말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

그냥 지나쳐 갔어야 했던 걸까, 아니면 확인하길 잘했던 걸까. 전부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불안감은
존재감을 뽐내며 슬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슬아는 천천히 말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였다면 아주 잘 선택한 장소였다.
확실히 인적이 없었다.

벽 너머에 무진이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았음에도 낮은 목소리로 확신할 수 있었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라 누군가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노골적이었다.

“우리 관계 들키고 싶어서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오빠는?”

“…….”

“나는 우리 사이 사람들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 오빠.”

“…들킬 일 없어, 너만 입 다물면.”

“내가 지금 협박하는 것 같아? 들키는 건 내가 더 사양이야.”

“그래서 뭐 어쩌자고.”

무진은 짜증이 어린 말투로 대꾸했다. 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무진의 목소리가
확실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만 내밀어 두 사람을 확인했다.

대화에 열중한 탓인지, 평소보다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무진의 옆모습을 확인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피차 들키면 곤란하니까 입 다물잔 소리야. 그나저나 그 여자랑은 무슨 사이야? 김슬아? 오빠가
짝사랑했다느니 하면서 다들 떠들던데. 진짜야?”

“네가 관심 가질 일 아니야.”

“그 말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조만간 아빠랑 약속 잡을 테니까 시간


비워.”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세웠다. 이 와중에 들킬까 봐 발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어느 방향인지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억울함에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억울해 죽겠으면서도 억울해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어쩌면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담담했다. 터질 게 터진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쌓여


있던 불안감이 일종의 에어백이 된 셈이었다.

무진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복수할 마음이었던 게 분명했다. 언젠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인과응보였다. 그동안 무진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상처를 줘서 거절하고, 그의 몸이 마음에 든다는


쓰레기 같은 이유로 다시 받아 주고….

왜 진작 무진을 받아 주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부터 그의 마음을 받아 줬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반대로 끝까지 그를 거절할걸.

대체 무진은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복수하려던 걸까. 내가 당신의 마음을 받아 주겠다고 말하면, 그때


무참히 거절하려고 했던 걸까? 그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걸까.

정신없이 걷는데 문득 임지훈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자들이 제일 못 잊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아니? 안 자 본 여자래.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인가 봐.”

어쩌면 무진의 목적도 그것이었을지 몰랐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임지훈과 똑같은
놈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놈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바닷가였다. 철썩거리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은근히 위로되었다.

밤을 새울 작정으로 걷다 보니 피로감이 밀려왔다. 결국 숙소에 도착한 것은 12 시가 넘은 밤이었다.

“슬아 씨, 어디 갔다 왔어?”

“그냥, 산책.”

혜진이 슬아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여전히 술자리는 그대로였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슬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까 이무진 씨가 슬아 씨 찾던데.”

“왜?”

“계속 슬아 씨가 안 보인다고…. 내가 방에 간 것 같다고 했는데 계속 찾아다니더라. 못 만났어?”

“응….”

혜진과 대화를 나누며 슬아는 먼 거리에 앉아 있는 이소미 씨를 힐끗거렸다. 이소미 씨는 다른 팀 신입


사원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즐겁지 않은 것은 자신뿐인 듯했다.

“내가 느낀 건데, 이무진 씨 아직도 슬아 씨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뭘 아니야. 아까 찾아다니던 거 보면 그런 말 못 할걸? 다들 아까 엄청나게 쑥덕거렸어.”

슬아는 대답하지 않으며 혜진이 내미는 술을 받아 마셨다.

“그런 말 하지 마. 이무진 씨 따로 만나는 사람 있으니까.”

“뭐? 진짜야?”

“나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

슬아는 더 이야기해 달라며 붙잡는 혜진을 밀어 내고 숙소로 향했다. 혜진이 제조한 폭탄주가 효과가
있는지 다시 술기운이 밀려왔다. 술기운에 의존해서라도 잠을 자는 편이 나을 듯했다.

“슬아 씨!”
카드 키를 대고 숙소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복도 끝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이무진 씨가 달려오고 있었다.

“하, 슬아 씨….”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온 무진이 숨을 헐떡이며 슬아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슬아는 말없이 차갑게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무진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계속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산책 좀 했어요.”

“…….”

슬아는 무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것을 보니 여기저기 자신을 찾아 뛰어다닌 것 같았다.


뭘 그렇게까지 공을 들이나, 얼마나 큰 엿을 먹이려고.

생각이 온통 뒤틀려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슬아 씨.”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무진이 다시 슬아의 이름을 불렀다. 애틋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게
슬아는 짜증스러웠다.

“그만 하죠.”

“…….”

그래서 더 차갑고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어차피 이 정도면 복수는 할 만큼 한 거 아닌가요?


하고 대놓고 묻고 싶었으나 그것만큼은 꾹 참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슬아 씨.”

“무진 씨 말대로 막상 해 보니 좀 별로인 것 같아서요.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굳이


불편하게 티 내고 싶지도 않고…. 무슨 말인지 알죠?”

“…….”

“예전처럼 그냥 직장 동료로 지내잔 얘기예요.”

“…알겠습니다.”

예상외로 대답은 쉽게 나왔다. 그것마저 마음에 안 들었다. 소개팅했다는 말에 울며불며 와서 안길 때는


언제고…. 그것도 전부 연기였던 게 분명했다.

슬아는 묵묵히 서 있는 무진을 뒤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쾅 닫아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눈물샘이 터져 줄줄


흘러내렸다.

침대 위에 올려놓고 나갔던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 29 통이 찍혀 있었다. 발신자는 모두 이무진 씨였다.


그걸 확인하자 더욱 설움이 밀려왔다.

05

상당히 괴로웠다. 스무 살 첫 이별을 했을 때는 이렇게 괴롭지 않았는데. 그때는 오만 정이 전부


떨어져서 그랬던 걸까.

그런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사귄 것도 아닌데도 너무 괴로웠다. 이무진 씨한테도 오만 정이 다 떨어졌어야


마땅한데 눈을 감을 때마다 자꾸만 얼굴이 떠올랐다. 무표정하지만 다정한 눈빛, 말투, 목소리, 행동까지.

혹시 무슨 오해가 있던 건 아닐까 하는 구차한 생각마저 샘솟았다. 밤마다 눈물을 짜며 잠든 것은


당연했다.

워크숍에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슬아는 무진을 투명 인간 취급 했다. 시간만 나면 무진과 이소미 씨를


번갈아 노려보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회사에서 이무진 씨와 눈이 마주칠 때면 냉정하게 대놓고 피해 버렸다.

혹시나 주말에 집 근처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워크숍에서 돌아온 뒤, 주말이 지난 어느 평일 날.

“뭐라고?”

출근하자마자 혜진과 단둘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들은 충격적인 소리에
슬아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이소미 씨가 대표님 딸이래.”

“…….”

이런, 미친….

머릿속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빠바바 밤. 빠바바 밤. 망했어요….

“이무진 씨랑은 친척 관계인 거지. 어쩐지, 내가 진작에 그런 것 같았다니까? 둘 다 이씨잖아.”

세상에 이씨가 얼마나 많은데, 무슨 성을 가지고 어떻게 알아….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슬아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이무진 씨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한 건 뭐야? 왜 말 안 해 줘! 우리끼리 비밀 있기야?”

“그…. 그냥 내가 잘못 안 거였어. 나는 이소미 씨랑 만나는 줄 알고….”

“뭐? 슬아 씨도 참…. 어쨌든 둘이 별로 사이가 좋진 않은 것 같던데?”


“왜?”

“봐, 후계 구도가 이상하잖아. 이소미 씨가 친자식인데 대표님이 무진 씨를 후계로 염두에 두고 있으면


….”

“…아, 몰라.”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입을 열 때마다 소리를 빽 지르고 싶어졌다. 너무도 속이 시끄럽고 괴로웠다. 둘이 사귀는 사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럼 그 대화는 뭐야?

슬아는 워크숍에서 들었던 대화를 떠올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우리 관계 들키고 싶어서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오빠는?”

그 관계가 당연히 그 관계인 줄 알았지.

“나는 우리 사이 사람들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 오빠.”

“…들킬 일 없어, 너만 입 다물면.”

“내가 지금 협박하는 것 같아? 들키는 건 내가 더 사양이야.”

“그래서 뭐 어쩌자고.”

당연히 두 사람이 몰래 연애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하기에 충분한
대화였다.

“피차 들키면 곤란하니까 입 다물잔 소리야. 그나저나 그 여자랑은 무슨 사이야? 김슬아? 오빠가
짝사랑했다느니 하면서 다들 떠들던데, 진짜야?”

“네가 관심 가질 일 아니야.”

“그 말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네. 알겠어. 조만간 아빠랑 약속 잡을 테니까 시간 비워.”


당연히 부모님께 소개하려는 약속인 줄 알았다. 미래를 약속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어? 재호 씨, 무진 씨!”

이 와중에 멀리서 무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슬아는 일어서서 도망가야 하나, 그대로 앉아
있어야 하나 우물쭈물했다.

무진과 함께 카페로 들어온 재호는 신이 나서 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남은 자리는 슬아의
옆자리였다.

“둘이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재호가 혜진과 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그럼 내가 충격적인 얘기 해 줄까?”

혜진의 가벼운 대답에 재호는 실실거리며 말했다.

슬아는 옆자리에 앉은 무진의 눈치를 살피며 앞의 재호와 혜진만 바라보았다. 그들이 구원줄이라도 되는
양.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려고 저러는지, 재호는 한참 키득대더니 말을 꺼냈다.

“홍보 팀 신입 사원 채서윤 씨 알지?”

“어어. 왜?”

“글쎄, 채서윤 씨랑 최대웅 씨랑 사귄다는 거 아니야! 바로 사귀는 거 맞다고 딱! 인정해 버린 거지.”

“뭐? 진짜? 와, 대박. 요즘 신입들 패기 장난 아니다….”

혜진과 재호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아에게는 전혀 충격적이지 않았다. 이소미 씨가


대표님 딸이라는 이야기가 100 만 배는 더 충격적이었다.

“아 맞다, 무진 씨. 이소미 씨가 대표님 딸이라며?”

“…네.”

“그럼 무진 씨랑도 친척이겠구나?”

“네.”

재호는 이소미 씨가 회사를 물려받는 거냐며 무진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던 슬아는….

‘퇴사할까.’

죽고 싶었다. 이무진 씨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슬아 씨, 어디 아프십니까?”

“예. 에?”

무진의 나직한 음성에 슬아는 유독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반면 무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요.”

“그러게. 슬아 씨, 무슨 일 있어?”

“어제 또 술 마신 거 아니야? 그저께도 술 마셨다고….”

“아, 아니야!”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 슬아로 인해 정적이 찾아왔다. 슬아는 덜컹거리며 의자를 뺀 뒤 몸을 일으켰다.

“나,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다들 마시고 와.”

그러고는 도망치듯 사무실로 향했다.

“왜 저러지, 진짜? 무슨 일 있나?”

“그러게요.”

혜진의 물음에 무진은 나직이 대답했다.

혜진과 재호는 이내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진은 도망치는 슬아의
뒷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

텅 빈 사무실로 돌아온 슬아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후회스러웠다. 철면피를 깔고 무진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하나?

‘추하다, 슬아야. 이제 와서 어쩌려고? 두 번이나 차 놓고 어쩌게? 오해하고 차 놓고 이제 와서? 어?’

고통스러운 마음에 슬아는 책상에 엎드린 채 이마를 쿵쿵 박았다.

그때 누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뭐 하세요?”

“아, 아…. 아니에요.”

사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이소미 씨였다. 바로 어제까지 슬아가 틈만 나면 힐끗거리던 바로 그 이소미 씨.


슬아는 아무렇지 않게 일하는 척을 시작했다.

이소미 씨가 방금 목격한 것을 이무진 씨에게 말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들었다.

“김슬아 씨 또라이인가 봐. 자기 머리를 책상에 쿵쿵 박던데?”

역시 퇴사하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대출금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이보다 더 좋은 회사를 찾을


자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괴로웠다. 얼마나 괴로웠냐 하면 조퇴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오늘따라 일이


너무 많아 그럴 수도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슬아는 기운 없이 비실비실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 몇 병을 사고 나와 걸어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돌아가서 우산을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뛰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는 점점 굵어졌다.


아파트 건물 내부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온몸이 젖은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살걸. 슬아는 짜증스럽게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하필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맞닥뜨렸다.

이무진 씨였다.

“…….”

며칠 내내, 심지어 주말에도 아파트 내에서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

지하에 주차하고 온 걸까. 슬아는 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올라탔다. 오늘도 이무진
씨는 여전히 멋있었다. 늘 그랬지만.

무진이 가볍게 목례하자 슬아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색한 분위기였다.

“…….”

하필이면 마주쳐도 비 맞은 생쥐 꼴로 마주치다니. 되는 일이 없었다. 슬아는 검은 봉지에 잔뜩 사 온


소주를 반대쪽으로 숨겼다. 아직 소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술기운을 빌리고 싶어졌다.

망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7 층에 도착했다. 요즘 엘리베이터는 너무 빠른 게 문제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슬아는 느리게 걸으며 무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진은 자신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그리고 무진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철컥 열렸을 때.

“저, 무진 씨.”
슬아는 용기를 내 무진을 불러 세웠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뻔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난 지금 취했다. 이 술을 다 마셨다. 자기 최면을 걸며 천천히 무진에게 다가갔다.

무진은 고개를 돌려 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살짝 열린 문의 문고리를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저, 저기….”

“말씀하세요.”

“저…. 미안해요. 사실…. 저, 제가 무진 씨를 오해한 게 있어요….”

말이 더듬거려 헛나갔다. 이 와중에 추워서 젖은 어깨가 떨려 왔다.

“괜찮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차가운 반응에 코끝이 훅 시큰해졌다. 네가 무슨 오해를
하든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귀찮으니 빨리 말하라는 듯한 말투였다. 냉담한 말투에 기어코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슬아는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평생 낼 법한 용기를 쥐어짰다.

“좋아해요….”

“잘 안 들립니다.”

“조, 좋아해요. 무진 씨를 좋아해요. 워, 워크숍 때 말하려고 했는데…. 제가, 제가 오해를 해서….”

슬아는 중얼거리듯 고백하며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용기 내 고백했음에도 무진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표정을 확인한 순간 기분이 처참해졌다.

이제 자신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무진이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오해를요?”

“저는, 그러니까 이소미 씨랑 무진 씨가 하는 대화를 듣고…. 그래서 두 사람이 사귀는 줄 알고….”

무진은 풀이 죽어 어깨를 움츠리고 떠는 슬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슬아는 꼭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굴었다. 비에 젖은 모습이 주인 잃은 새끼 강아지 같아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온 뒤, 슬아가 자신과 소미의 관계를 의심해서 그랬다는 것은 금방 눈치챘다.
이유가 뭘까 내내 고민하던 것이 허무할 정도였다.

워크숍에서 슬아가 자신을 거절했을 때, 그는 수많은 충동을 억제해야 했다. 여태까지 꾹 참아 온 것들을
모두 짓뭉개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야속한 말만 내뱉는 저 작은 입에 좆을 물려 놓고 괴롭히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 작은 머리로 어찌나 생각이 많은지, 하루 종일 가둬 놓고 아무 생각도 못 하도록 좆질을 하고 싶었다.
내내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래야 답답함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늘 충동을 잘 억제하는 인간이었고, 이번에도 그랬다.

슬아를 대할 때는 늘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겁을 주지는 말아야 한다는 예전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달랐다. 확실할 때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편이 나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워크숍에서 돌아온 뒤, 슬아는 눈에 띄게 자신과 소미를 힐끔거렸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미를 보다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해졌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소미와의 약속을 어기고 소문을 냈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소문을 내? 오빠가 흘린 거지!”

소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무진은 무표정하게 화가 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소미를
지켜보았다. 소문을 내는 건 쉬웠다. 그저 재호에게 ‘이건 비밀인데요.’ 하고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입이 가벼운 재호와 혜진은 때때로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았다.

무진은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슬아를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그런 오해를 하셨군요.”

“미, 미안해요…. 그러니까….”

차가운 말투에 서러웠던 걸까, 슬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무진은 작은 입술을 깨물며 우물거리는 슬아를 바라보았다. 저 작은 입술이 빨개지도록 깨물리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어떡할까.’

무진은 잠시 고민했다. 더 이상 저 입술이 학대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 두면 감기에 걸릴


것 같기도 했다. 이쯤에서 달래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하지만 또다시 슬아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확실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상처받는 기분이란 무엇인지, 이번에 확 뼈저리게 느꼈다. 또다시 슬아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여겨져 버림받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저도 이제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그만하자는 걸까?’

슬아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 냈다. 이미 빗물로 손등이 젖어 있어 별 효과는


없었다.

그보다는 술기운을 빌리자며 자기 암시를 걸었던 게 효과가 있는 걸까, 정말 술에 취한 기분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멋대로 오해하지 않을게요.”

슬아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이 전해지도록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무진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슬아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나요?”

“…….”

“슬아 씨는 벌써 두 번이나 저를 버렸는데.”

“…….”

“그렇게 상처를 주시고, 또 믿으라는 건가요? 아무 담보도 없이?”

“그게….”

담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슬아는 술에 취한 것처럼


어지러워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다.

“확답을 받아야 저도 슬아 씨를 믿죠.”

무진이 손을 뻗어 젖은 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정한 손길에 설움이 더 크게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무슨 확답을….”

“저랑 결혼이라도 해 주신다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네?”

다짜고짜 결혼이라니. 슬아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슬아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하기도 전부터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 매일 그녀가 웃고, 울고 하는 것을 제일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다. 다소 멋없는
청혼이지만, 이왕이면 기회가 있을 때 확답을 받아 두는 편이 안전했다.

“평생 저를 받아 주지 않는 슬아 씨를 짝사랑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받아 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물론 참다못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는 했다.

“저, 저는 좋아요. 무진 씨가 용서해 주기만 한다면….”

슬아는 또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귀가 얇은 그녀는 늘 충동적인 선택을 하고는 했다. 그 점을 이용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기다리던 대답이 떨어지자 무진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당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슬아에게 턱짓했다.

들어오라는 뜻일까? 슬아는 그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쪼르르 그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나? 서러운 와중에도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기쁜 것도 잠시.
문이 철컥 잠기고, 무진은 현관에 서서 움찔거리는 슬아를 지나쳐 들어갔다.

빗물이 뚝뚝 떨어져서 함부로 들어가기가 애매했다. 슬아는 안쪽으로 들어간 무진이 수건을 가져다줄 거라
생각했다.

슬아는 잠시 무진을 기다리며 소주가 든 봉지를 내려놓았다. 무진은 예상대로 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하지만 수건보다 먼저, 그의 손이 옷 위로 올라왔다.

“벗어요.”

“네?”

“이대로는 감기에 걸릴 겁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 무진은 의아함 가득한 슬아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태연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젖은 외투를 벗은 다음엔 블라우스였다. 그가 목부터 단추를 풀려 하자 슬아가 멈칫했다.

“제, 제가 할게요.”

너무 당황해 목소리가 쉬어서 나왔다. 그러자 무진은 수건을 들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그래, 네가
벗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꼭 이렇게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등 좀 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얌전히 굴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블라우스와 롱스커트를 벗고 나자 속옷만 남았다. 이미 서로 알몸을 전부 보고 더한 짓도 한 사이였음에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저…. 등 좀, 돌려 주면 안 돼요?”

“왜요?”

무진은 뻔뻔하게 되물었다. 아니, 왜냐니, 이 사람아….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슬아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결혼하기로 한 사이인데 뭐가 부끄럽나요, 슬아 씨.”

“…….”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렸다. 실내 온도는 쌀쌀한 밖의 날씨와 달리


포근했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분위기가 무겁고 야릇했다.

슬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등 뒤로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었다.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진은 브래지어
컵이 가슴에서 떨어지자 그대로 손을 뻗었다.

“아….”

다짜고짜 가슴 위로 무진의 손이 올라왔다. 그는 손안에 담기는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며 슬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노골적인 욕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아름다워요.”

“…읏.”

무진은 입으로는 감미로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손은 그렇지 못했다. 젖꼭지를 살짝 꼬집는 손길에 슬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완벽하게 전부 차려입은 무진과 달리 자신은 거의 알몸이었다. 이 공간의 이질적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무진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팬티만 남았네요.”

마저 벗으라는 은근한 압박이었다. 슬아는 천천히 팬티를 끌어 내렸다. 이다음에 무슨 행위가 벌어질지
예상하니 숨이 가빠졌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내내 무진을 그리워하는 동안, 그와 한 섹스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다정한 태도가 그리웠던
만큼 그의 몸도 그리웠다.

“엄마야!”

무릎을 지나쳐 팬티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무섭게 몸이 들어 올려졌다. 슬아가 깜짝 놀라 무진의 몸에


매달렸다. 무진은 슬아를 짐짝처럼 달랑 안아 들고는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샘솟고 있었다. 아마도 수건을 가지러 가면서 물을 받아 놓은 듯했다.

무진은 물의 온도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슬아를 욕조 안으로 내려 주었다.

“고, 고마워요.”

목까지 물에 잠기자 따뜻한 기운이 속까지 퍼져 나갔다. 슬아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무진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감사 인사를 했다.

“옷은 세탁해 두겠습니다.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나오세요.”

“…네.”

무진이 문을 닫고 나가자 슬아는 물속에 잠겨 있던 손을 꺼내 얼굴을 마구 문댔다.

차근차근 오르던 계단을 갑자기 몇 계단씩 한 번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버겁고 벅차올랐다. 하루 동안 몇


가지의 일들이 몰아친 듯했다.

이소미 씨와 이무진 씨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안심되었다. 그리고 멋대로 오해하고 상처


준 것을 용서받은 일도.

따뜻한 욕조에서 씻는 내내 아까 무진이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저도 이제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슬아 씨 그 말을 어떻게 믿나요?”

“슬아 씨는 벌써 두 번이나 저를 버렸는데….”


상처받은 무진의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거리며 저며 왔다. 어리석은 오해 때문에 두 번씩이나
무진에게 상처를 줘 버렸다.

그나저나, 결혼이라니. 생각하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나야 좋긴 한데…. 물론 얼마 전까지 무진을


떠올리며 김칫국을 마셨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날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왠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괜찮을 것 같았다. 무진이 곁에 있기만
한다면 소용돌이도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마저 들었다.

물이 식을 때까지 몸을 녹이던 슬아는 샤워를 하고 욕실에 걸려 있는 가운을 걸쳤다. 무진이 사용하던


가운이라 그런지 그녀에게는 너무 커다랬다. 꼭 아이가 어른의 가운을 입은 것 같았다.

무진 또한 씻고 있는 모양인지 방 안쪽의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슬아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불안한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여러 번 와 본 장소인데도 낯설었다. 아직 무진의 화가 덜 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조금 전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고 한 뒤, 가슴을 만지던 무진의 표정이 워낙 살벌한 탓이었다. 뼈까지


발라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눈빛이었다.

다시 떠올리자 등골이 쭈뼛해졌다. 슬아는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무진이 거실로 나왔다. 가운만 입은 슬아와 달리 그는 부드러운 니트 티셔츠와 긴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가까이 다가온 무진은 슬아의 귀에 체온계를 대 정말 괜찮은지 확인까지 했다.

“컨디션이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

“오늘 밤은 안 재울 생각이라.”

“네?”

갑작스러운 말에 슬아는 눈만 깜빡였다.

슬아의 옆자리에 편한 자세로 앉은 무진은 손을 뻗어 슬아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아직 두려워서요. 슬아 씨가 그때처럼 또 제 손을 뿌리칠 것 같고.”

“…….”

“저는 슬아 씨가 그만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는,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니까.”


무진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죄책감이 두 배씩 불어났다. 슬아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밤새 슬아 씨와 섹스하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은데.”

당황한 탓에 슬아가 아무 말이 없자 무진은 다시 상처받은 얼굴로 물었다.

“왜요? 이제는 정말 제 좆에 흥미가 떨어지신 건가요?”

“아, 그 그럴 리가요!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

싫은 게 아니라 정말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다시 무진과 몸을 섞을 수도 있다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예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렇게 죄인처럼 몰아세워질 줄이야….

“저도 슬아 씨가 제 좆을 보고 싶다고 하셨을 때 매우 갑작스러웠습니다.”

“…….”

“그래도 슬아 씨가 원하니, 부끄럽지만 자위하는 모습도 보여 드렸는데.”

“아, 알겠어요!”

“네?”

“알겠으니까 그만해요, 내가 미안해요.”

슬아가 더 이상 듣지 못하겠다는 듯 무진을 만류했다. 천인공노할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슬아의 애원에 무진이 피식 웃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모습이 심장 떨리게 멋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슬아의 입꼬리도 자연스레 말려 올라갔다. 무진과 마주 보며 웃는 지금 상황이 슬아는 꿈처럼
행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밤새 하겠다는 그의 말이 허풍인 줄로만 알았다.

슬아를 침대로 데려간 무진은 먼저 다정하게 허리에 팔을 감고 키스했다

아랫입술을 다정하게 물었다 놓은 뒤에 천천히 혀가 침범했다. 전과 다르게 다정한 키스였다. 무진의


혀는 슬아의 입 안쪽 입천장을 간지럽히며 가쁜 숨을 토해 내게 했다.

자그마한 슬아의 혀를 살짝 깨물고 입술로 빨아 먹더니 아랫입술을 혀로 간지럽혔다. 애타듯 간지러운


자극에 슬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입술이 떨어지자 가느다란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무진은 그마저 쪽쪽 빨아 먹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말했다.

“엎드려 보세요, 슬아 씨. 구멍이 부어 있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네? 무슨…. 안 부었어요.”

“제 좆이 없는 동안 혼자 딜도로 쑤셨을지, 제가 모르는 일이지 않나요.”

“아, 안 했어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무진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무진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 엎드리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동안 그녀가 딜도로 했건 말건,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하지도 않았지만.

무진 또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그녀를 의심하거나 탓하는 말투가 전혀


아니었다.

“개처럼 엉덩이를 더 추켜올리세요.”

무진이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추켜올리며 슬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확인해야겠다는 말은 핑곗거리가


분명했다.

“그렇게 쑤셨는데도 여전히 좁네요.”

“으….”

무진의 커다란 손이 슬아의 엉덩이를 쓰다듬더니 안쪽을 벌렸다. 안쪽 살이 공기 중에 노출되는 느낌이


기이했다. 슬아는 눈을 꽉 감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수치심에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금방 젖고.”

그 말을 끝으로 무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슬아의 엉덩이를 잡고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 잠깐…. 아!”

말릴 새도 없이 안쪽으로 혀가 침범했다. 뱀의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혀가 보지 전체를 핥고 지나갔다.

무진은 새하얀 엉덩이를 잡고 양손으로 벌려 가며 제 욕심껏 탐했다. 그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슬아가 스스로 엎드려 음부를 추켜올리게 만드는 것. 무진은 만족스러운 듯 낮은 숨을 토해 내며 향기를
들이켰다.

내내 그리웠던 달콤한 향기였다. 엄지로 구멍을 벌려 혀를 꾹꾹 찔러 넣었다.

“으응, 아! 아, 흐읏….”

혀를 찌를 때마다 박자에 맞춰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줄줄 흐르는 애액도 함께였다. 무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새어 나오는 애액을 모두 빨아 먹었다.

“여기가 좋아요?”

“아읏!”

혀끝으로 클리토리스를 건드리자 자지러지는 신음이 들려왔다. 무진은 바르르 떠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혀를 움직였다. 도톰한 음핵을 빠르게 혀로 굴려 대자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싫…. 아! 흐응!”

입술로 살짝 물었다 놓은 뒤 다시 게걸스럽게 핥아 댔다. 절정이 찾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추켜올린 하반신이 경련이라도 난 듯 덜덜 떨어 댔다. 무진은 수축하는 작은 구멍을 보며 애액을 빨아


마셨다.

붉게 충혈되어 움찔거리는 구멍은 손가락도 겨우 삼킬 것처럼 작았다. 이 좁은 곳으로 자신의 성기를


어떻게 받았던 건지, 무진은 낮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흐으….”
고개를 파묻어 흐느끼고 있던 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쾌락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눈물이 줄줄
흐른 모습이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무진은 슬아의 위로 올라가 말캉한 가슴을 움켜쥐며 젖꼭지를 입에 머금었다.

“읏….”

혀끝으로 젖꼭지를 꾹꾹 찔러 누르자 슬아는 몸을 비틀며 무진을 밀어 냈다. 그녀가 밀어 내는 대로


밀려나며 무진이 입을 열었다.

“슬아 씨.”

“흐…. 네, 네.”

이름을 부르며 무진은 슬아의 다리를 잡아 들었다. 슬아는 자신의 양쪽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무진을 보며
곧이어 이어질 삽입을 예상했다.

아랫배가 간질거릴 정도로 기대되면서 두려웠다. 빳빳하게 서 있는 무진의 성기는 두려움을 먹게 할


정도의 크기였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 위협적이었다.

“슬아 씨는 질내 사정을 좋아하시니까 콘돔 없이 하겠습니다.”

슬아가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자 무진이 다시 물었다.

“왜요, 콘돔을 사용할까요? 그편이 좋으시면 사용하겠습니다. 그때 주문해 두었던 콘돔이


도착했으니깐요.”

“괘, 괜찮… 괜찮아요.”

어차피 정관 수술을 했으니 피임에는 문제가 없었다. 온전히 무진과 맨살로 이어지고 싶었다. 그래야만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해소될 것 같았다.

슬아의 대답에 무진은 천천히 귀두 끝을 맞추며 파고들었다.

“아…. 흐읏….”

잔뜩 젖어 있긴 했으나 지난번처럼 젤로 범벅된 상태가 아니었다. 생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또렷하게


전해져 왔다.

“아, 아프…. 흐읏….”

귀두가 전부 삽입되었을 때, 무진은 다시 성기를 빼내었다. 좁디좁은 구멍에 막무가내로 밀어 넣고 싶은


잔인한 충동이 일었으나, 슬아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무진은 협탁 안쪽에 넣어 두었던 젤을 꺼내 뜯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짜낸 뒤 슬아의 음부


전체에 바르기 시작했다. 간지러운 손길에 슬아는 다리를 오므리며 반항했다.

“간지러워요…. 아!”

“다치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무진은 단호하게 슬아의 다리를 양옆으로 찢어 벌렸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구멍 주변에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젤의 감촉에 슬아는 몸을 비비 꼬았다.
무섭게 발기한 성기에도 꼼꼼히 젤을 바른 뒤, 무진은 다시 구멍 입구에 귀두를 맞췄다.

“아아!”

그리고 슬아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급하게 찔러 넣었다. 단숨에 안쪽까지 파고든 탓에 슬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벌벌 떨렸다.

“흐으…. 아, 흑….”

하지만 꼼꼼히 바른 젤 덕에 상처가 나진 않았다. 단번에 가장 느끼는 곳까지 깊게 닿은 터라 난데없이


벼락에 맞은 기분이었다.

“하….”

무진의 입에서도 만족스러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발발 떠는 슬아의 다리를 위로 접어 올렸다. 몸이


접혀진 상태로 무진의 성기가 깊게 파고들었다.

“흐응, 아!”

반쯤 빠졌다가 다시 안쪽까지 콱 찔러 넣자 자지러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진은 간을 보듯 천천히 몇


번 움직이더니 몸을 숙였다.

“흐앗, 아! 아, 아아!”

폴더처럼 몸이 구겨진 상태로 무진의 성기가 쿵쿵 안쪽을 찍어 눌렀다. 쩍쩍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으응, 아아! 아, 하앗, 아!”

마치 절구질을 하듯 퍽퍽 박아 대자 박자에 맞춰 비명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박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헉하는 비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흐아, 아! 흐으, 천, 천천히! 아!”

천천히 하라는 말에도 박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가장 느끼는 부분만 집요하게 박아 대는 터라


오르가즘은 금방 찾아왔다. 아래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느낌에 슬아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무진은 자신의 것을 빠듯하게 삼킨 구멍을 기특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찢어지지도 않고 욕심껏 삼킨


것이 대견했다. 그는 상을 주듯 작은 구멍에 한참을 박고 문질러 댔다. 쩍쩍거리는 노골적인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참이 지났다.

“흐앗! 아! 아, 아!”

무진의 커다란 성기는 여전히 작은 구멍을 제집 드나들듯 빠르게 쑤셔 박았다. 슬아는 옆으로 누워 한쪽
다리가 들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뇌의 한 부분이 이상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심각하게 들기 시작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슬아는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자지러지듯


허리를 튕겨 올렸다.

“하, 아앗! 아!”


성기가 쑤우욱 하고 빠져나갔다. 워낙 크고 굵은 터라 빠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투명한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은 이제 수치스럽지도 않았다.

무진은 침이 흘러내리는 슬아의 입술을 쪽쪽 빨아 대며 아래를 확인했다. 자신이 싸지른 정액이 줄줄


흘러나오는 구멍을 보니 만족감이 차올랐다.

슬아는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사정했는데


저 무서운 성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첫인상만큼은 참 멋진 바게트였는데, 이제 보니 흉기가 따로 없었다. 말도 안 통하고 막무가내였다.

무진은 이미 온몸이 울긋불긋해진 슬아의 몸에 또다시 입술 자국을 만들며 다가붙었다.

허벅지에 눌어붙은 정액을 무시하고 다시 단단한 성기를 찔러 넣자 안쪽이 기다렸다는 듯 빨판처럼


달라붙었다.

“하, 슬아 씨는 제 좆이 그렇게 좋습니까? 미친 듯이 달라붙어서 아주….”

“으응, 아.”

무진은 느리게 성기를 박아 넣으며 슬아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이 안에 얼마나 사정했는지, 정관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애를 배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진은 납작한 아랫배에 손을 올리면 만져지는
제 성기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흐응, 아! 흐, 천, 천천히….”

슬아의 말대로 무진은 천천히 삽입하며 안쪽에서 달라붙어 대는 느낌을 즐겼다. 슬아 또한 가장 자극되는
부분을 긁어 대는 귀두를 느끼며 신음했다.

마치 발정기의 짐승 같은 섹스였다. 오늘 밤에 재울 생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오르가즘을 느낄수록 쾌락이 통증처럼 느껴졌다. 계속할수록 감각이 무뎌져야 맞는 것인데 이상하게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무진은 예민해진 클리토리스를 살살 문지르며 몸을 숙여 키스했다.

입술만 겹쳐지는 짧은 키스가 끝나자 무진은 다시 빠르게 허리를 추켜올렸다.

“아앗, 아! 흐읏, 아!”

그 뒤로도 슬아의 신음은 내내 흘러나왔다. 밤새 재우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과 달리, 그는 슬아가


기절하듯 잠에 빠지자 깊게 찔러 넣었던 성기를 빼내었다.

***

얼마나 많이 했는지, 슬아는 중간부터는 세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호기심 많은 청소년 시절 음란물을


여러 번 보았지만, 한 번에 여러 개의 영상을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이 했다.

얼마나 해 댔는지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 배 속에 그의 성기를 품고 있었다.

장소는 회사였다. 사람들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은 겁도 없이 몸을 섞고 있었다.


무진은 성기만 내놓은 채였고, 슬아는 치마만 걷어 올린 상태였다. 꿈이지만 참 미친 짓이라고, 꿈속의
슬아는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무진은 절대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할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아에게 무진의 첫인상은 꼭 인공 지능 AI 처럼 무뚝뚝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 생각은 점점 줄어들었다. 무진은 생각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었다. 일단 배려심이
넘쳤고, 가끔 자신을 따라 웃을 때마다 짓는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그려 낸 것처럼 예쁘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미소였다. 그걸 왜 진작 몰랐을까.

어쨌든 무진은 여전히 감정을 잘 읽기 힘들 정도로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침대 위에서는 꼭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는 게 특이한 점이었다.

늘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것 같은 눈빛이 침대에서는 화가 난 것처럼 사납게 변했다. 노골적으로 음욕을


품은 눈빛이었다. 슬아는 그 날것 같은 눈빛이 두려우면서 좋았다. 자신만 알고 있는 모습일 테니까.

어쨌든 몸을 섞을 때의 이무진 씨는 평소의 이무진 씨와 달랐다. 그러니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무진이라도, 순간 눈이 돌아 버리면 회사에서도 자신에게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다음 날, 슬아는 절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거라 예상했다. 그만큼 어젯밤의 섹스는 격렬했다.

아무리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출근은 해야 했다. 또 병가를 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몸이 가뿐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제 분명 잔뜩 젖어 있던 시트는 새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끈적거려야 마땅할 몸에는 어디에도 애액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잠든 사이 무진이 씻기고, 치웠을 게 분명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슬아는 가장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출근 준비를 하기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그때 귀신같이 문이 열렸다.

“슬아 씨, 일어나셨나요?”

“어, 음…. 네.”

몸은 멀쩡하지만 목은 조금 쉬어 있었다. 슬아는 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아침 준비를 해


두었으니 씻고 나오라는 말을 전하고 방을 나갔다. 방금 일어난 자신과 달리 무진은 산뜻하게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대체 얼마나 부지런하면 인간이 저럴 수 있나.

슬아는 씻고 나와 옷을 입고 식탁 앞에 앉았다. 아침부터 일어나 요리를 한 것인지 갓 끓인 국과 새로


지은 밥이 차려져 있었다.

얌전히 밥을 먹던 슬아가 물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6 시에 일어났습니다.”

“원래 그렇게 부지런해요?”


“휴일에도 6 시에는 일어납니다.”

“네….”

무진과 결혼하면 자신도 그래야 하는 걸까. 순간 겁이 났다. 하지만 무진은 자신에게 전혀 그런 것을


강요할 것 같지 않았다.

“몸이 생각보다 가볍네요. 어제는 죽는 줄 알았는데.”

“네, 그럴까 봐 따뜻한 물에서 씻기고 마사지를 해 드렸습니다.”

“…그래요?”

죄책감을 좀 느껴 보라는 의미에서 한 소리인데 별 소득이 없었다. 슬아는 얌전히 밥을 먹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꿈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다짜고짜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달려들던 무진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재생되었다.

“무진 씨.”

“네?”

“저 혹시….”

“네, 말씀하세요.”

슬아는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물론 스릴 있는 섹스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회사는 정말


위험하니까. 그것보다 무진이 달려든다면 거절하지 못할 스스로가 두려웠기에 미리 말하자 싶었다.

“무진 씨는 혹시 음… 그러니까.”

“네.”

“스, 스릴 있는 섹스를 좋아하시나요?”

“네?”

“가령 회사에서… 그런.”

네가 어제 너무 해 대서 그런 꿈까지 꿨다는 이야기는 생략했다. 슬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무진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슬아 씨.”

“네.”

슬아는 긴장한 모습을 티 내지 않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무진의 입에서 어떤 취향의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로 척추가 뻣뻣해졌다. 설마 옥상에서 하자고 하진 않겠지?

“가만 보면 슬아 씨는 참 취향이 저질이시네요.”

“뭐라고요?”

“변태적이고.”
아니, 무슨 그런…. 슬아는 세상 억울해졌다. 물론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조금 조숙하여 남들보다 빨리
성기 크기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 기절할 때까지 박아 대던 인간이 누군데.


엎드리라고 해 놓고 엉덩이를 추켜올리게 만든 저질이 누군데. 대놓고 질내 사정 어쩌고 한 변태가 누군데!

“괜찮습니다. 제가 다 받아 드릴 테니.”

“아니….”

“다만, 회사에서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본다면 슬아 씨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아니….”

“굳이 원하신다면 집에서도 그런 상황처럼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

결국, 슬아는 입을 다물고 밥만 먹기 시작했다. 무진은 귀엽다는 듯 슬아를 바라보다가 물이며 반찬을
챙겨 주었다.

***

슬아는 무진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 성격이 매우 급하다는 점이었다. 오해를 풀고 슬아가 먼저


고백을 한 지 며칠이 지난 후, 슬아는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받았다. 태어나서 실물로 처음 보는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와 함께였다.

결혼하자는 말이 진심이었나 싶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무진은 또 자신을 버릴 거냐며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슬아는 화들짝 놀라 전혀 아니라며 언제든 좋다며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세상이 자신을 위해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무진이 오해를 풀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다니.

애초에 원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던 슬아에게는 완벽한 진행이었다.

무진이 워낙 서두르는 터라 슬아는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내 무의식이 이무진 씨를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빨리 결혼하려고?’

그 정도로 무진은 결혼에 적극적이었고, 슬아는 대환영이었다.

대부분의 준비는 무진이 알아서 처리했기에 슬아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딱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진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러 갈 때가 되니, 자신이 누구와 결혼하려 하는지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무진의 부모는 간혹 뉴스에서 보았던 재벌가 경영자 부부였다. 각자 대단한 집안의 사람인 두 사람은
연애결혼이었으나 남들은 전부 정략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쇼윈도 부부처럼 보였다. 무뚝뚝한 성격
때문이었다.

애초에 무뚝뚝하길 타고난 부부였으니, 그 사이에서 나온 무진 또한 무뚝뚝하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두


사람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무진은 자연스럽게 무뚝뚝한 데다 감정이 결여된 아이로 자라났다.

“…….”

슬아는 식사 내내 조용한 테이블을 보며 침을 삼켰다. 무진의 부모님 댁은 TV 에서 나온 재벌 집처럼


실제로도 엄청난 크기의 저택이었다.

식탁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또 이미 슬아에


대해 보고를 받은 상태라 궁금한 것이 없는 게 문제였다. 예의상 무언가를 물어볼 법한데도 부부는 말이
없었다.

타고나길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슬아가 버티기에는 괴로운 자리였다.

평생을 인사이더로 살아온 터라 재호, 혜진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저, 아버님. 어머님.”

“…….”

“…….”

“…….”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보며, 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중에서 무진만 따라 웃었다.

“저, 결혼 날짜는 괜찮으세요?”

“그래.”

“그래.”

슬아는 어떻게 이 가족에게 적응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몇 번


식사 자리를 함께하고 나니 슬아의 입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잘 떠드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답을 듣는 빈도수가 많아졌다.

어쨌든 드라마처럼 격한 반대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한 것과 달리, 무진의 부모님은 결혼을 흔쾌히
승낙하셨다.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오히려 반대한 것은 슬아네 집안 쪽이었다.

“겨얼호온? 너, 너 미쳤어? 무슨 결혼이야 서른도 안 된 애가!”

“뭐가! 잘됐구만. 상대도 좋고!”

“아니, 상대가 재벌 아들이면 뭐! 우리 딸은 대통령이 될 인물인데 뭐!”

환영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배신을 당한 것처럼 굴었다.

슬아는 펄쩍 뛰는 아버지에게서 눈을 피했다. 애초에 대통령이 될 생각 따위 없었다. 하지만 무진에게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방법을 만들어서라도 그녀를 정치인으로 만들어 줄 것 같았다. 슬아는 절대 그런
꿈은 꾸지 않기로 했다.

“너, 너! 이…. 이 못된….”

아빠는 자신의 꿈을 짓밟혔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슬아는 이 남자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조금 우기자 금방 허락이 떨어졌다.

또 그쪽 부모가 환영한다고 하니 슬아의 아빠도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오히려 무진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대환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슬아는, 대통령이 될 애야. 자네도 알아?”

무진에게 술을 먹이고 술버릇을 보겠다던 아빠는 먼저 취해 혀가 꼬부라졌다. 애초에 이무진 씨는 술에


취하지 않는 인간임을 슬아는 잘 알고 있었다.

“네. 슬아 씨는 정치를 해도 잘할 겁니다.”

“뭐야? 아, 자네도 아는구먼. 큼….”

“네. 얼마 전에 본사와 협업해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았습니다.”

“뭐 그런 얘기를….”

슬아가 무진을 슬쩍 찌르며 말하자 아빠의 입꼬리가 대번에 올라갔다. 아이고, 그랬어? 무슨, 무슨
협업이라고? 하면서 자세히 묻자 무진은 아빠가 알지도 못할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했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박수까지 치는 모습에 슬아는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 자네, 우리 슬아에 대해 잘 아는군! 우리 애가 그런 애지! 자네 가만 보니 아주 진중하니 사람이


된 사람이구먼!”

태세 변환이 어찌나 빠르신지, 슬아는 자신이 아버지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이디어만 낸 거야….”

슬아가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본사 발령을 원하고 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는데….

“어머, 슬아 씨, 본사 발령 뭐야?”

“슬아 씨, 축하해요!”

“축하드려요!”

회사 전체 공지 사항을 확인한 순간, 슬아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사람 하나 잘 선택했을 뿐인데


인생이 이렇게 잘 풀리나.

그렇다고 그 전에도 딱히 심하게 꼬인 인생은 아니었다. 남자 복이 없다면 없었지만.

아이디어만 냈던 프로젝트에 총책임자로 발령이 나 있었다. 물론 세부 기획까지 전부 혼자 진행했던


것이지만…. 심지어 본사였다. 그리고 그 본사는….

슬아는 가장 먼저, 당연히 무진을 의심했다. 아니면 무진의 어머니라든가, 아버지를 의심했다.
슬아의 의심에 무진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결단코 아닙니다. 애초에 저 프로젝트는 반년 전에 진행되었던 거고, 슬아 씨의 아이디어가 뽑힌 것도


꽤 전이지 않습니까.”

“…….”

“일정 문제로 반려되었다가 다시 진행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본사 발령되는 경우는


꽤 많고요.”

그렇긴 했다. 애초에 아이디어가 호평받아 회식비를 지원받았을 당시, 최종으로 채택되면 본사로 옮기게
될 수도 있다고 예상한 상태였다. 시기상의 문제였다.

무진과의 관계 때문에 이 결과를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애초에 계열사인 이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데 굳이 자신을 그쪽에 꽂아 넣을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자의식 과잉일지도 몰랐다. 무진도 상당히 억울한 얼굴이었다. 무진의 말대로 반년 전에 결과가
난 문제였다. 슬아는 오롯이 이 기쁨을 즐기기로 했다.

“으아, 어떡해요? 나 너무 좋은데!”

“저와 떨어지는 게 좋은가 보네요, 슬아 씨는.”

“아, 그건….”

슬아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슬아와 마찬가지로 기쁜 얼굴이었다. 무진의


표정을 확인하며 슬아도 마음껏 기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무진이 말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물론 슬아가 본사로 발령 난 것에 그의 입김은 전혀


없었다. 부모님의 영향도 아니었다. 오롯이 그녀의 실력이었기에 자랑스러웠다.

다만 말하지 못한 것은 자신 또한 본사로 옮길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말했다간 슬아가


자신의 실력으로 거머쥔 행운을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무진은 슬아와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녀가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 기뻤다.

이제는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기쁨과 행복, 따뜻함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녀를 통해 느끼는 감정은 전부 좋은 것들뿐이었다.

여전히 무진의 감정 동요는 오로지 전부 김슬아, 그녀로 인해서였다.

에필로그 01

- 너 무조건 이무진이보다 빨리 승진할 생각 해! 임원까지 해야지!


“아, 알겠다니까.”

- 아빠는 슬아 너 믿는다, 응?

“네, 네. 대통령, 알아요.”

대충 아빠와의 전화를 끊은 뒤, 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대통령 타령, 이제는 지겹지도
않았다. 왠지 진짜 꿈꿔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기도 했다.

결혼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슬아는 본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낸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팀의 팀장이었다. 팀원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무진은 몇 달간의 휴식 뒤에 본사로 출근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 덕에 최근 몇 주간 슬아는 무진의


내조를 톡톡히 받고 있었다.

아침마다 갓 지은 따뜻한 밥과 국을 차려 주고, 가끔은 점심 도시락도 싸 주거나, 회사로 찾아와 맛있는


것을 사 주었다. 그리고 저녁때는 피곤한 슬아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고, 마사지까지 해 주었다.
대충 벗어 놓은 옷들은 알아서 세탁하고, 드라이까지 맡겨 주니 편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놔도 무진은 잔소리하는 법이 없었다. 계속 집에서 내조를 해 줬으면 하는 심정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뒤, 무진의 뜻대로 결혼식은 굉장히 빠르게 치러졌다.

두 사람은 새로 지어 들어가기로 한 집의 공사가 완료되기 전까지 다른 집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다만


장소가 조금 그랬다. 슬아와 무진이 지내는 곳은 무진의 부모가 살고 있는 커다란 저택이었다.

사실 무진은 아파트를 내놓지 말고 그곳에서 지내다 옮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굳이 저택으로 들어오겠다
한 것이 슬아였다.

솔직히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런 집에서 잠시라도 살아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진이 슬아와 함께 살기로 한 집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둘이 살기에 꽤 큰 전원주택이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짧은 기간이라도 무진의 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TV 에서나 보던 이런 회장님 집에서 언제 살아 보냐 싶은 마음에 결정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공사는 다음 달에 끝난대요, 어머님, 아버님. 결혼식 끝나고 바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렇군.”

이 불편한 집의 적막을 조금이나마 채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솔직히 시집살이를 자처할 때는 불편함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불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진은 여전히 그녀를 위해 내조를 해 주었고, 가끔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아주머니 대신 직접 밥을 차려


주었다.

시부모님은 그녀에게 구박은커녕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말도 걸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그래도 저녁은 꼬박꼬박 집에 와서 드시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엔 우물쭈물하던 슬아도 이제는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대답하건 말건 혼자 떠들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 무진이 받아 주기는 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버님, 혹시 무진 씨 어릴 때 별명 아세요? 정말 리무진 아니었어요?”

“푸흡….”

“큼….”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에 어머님의 웃음이 터졌고, 아버님도 당황한 듯 작게 웃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두 분의 웃음이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 이무진 씨가 부모님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셋이 아주


판박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슬아의 손에 블랙카드가 쥐어졌다.

“이게 뭐예요, 어머님?”

“필요한 게 있으면 사렴.”

간결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차마 긁을 자신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사용을 하지 않자 어머님은 아예 직접 슬아를 백화점으로 불러냈다.

“주말에 불러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어차피 무진 씨랑은 매일 붙어 있는데요 뭐.”

“그래.”

쇼핑하는 내내 어머님은 말이 없었다. 떠드는 것은 슬아 혼자였다.

“와, 이거 색깔 진짜 예뻐요. 어머님께 잘 어울리는데요?”

“그러니?”

“네. 아! 이건 우리 엄마한테 잘 어울리겠다.”

이건 무진 씨한테 어울리고, 이건 아버님한테 어울리고 어쩌고저쩌고 조잘조잘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너한테 어울리는 건 없니?”

“음, 저야 아무거나 다 잘 어울리죠.”

생각 없이 웃으며 대답하자 어머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은근히 대하기가 쉬운 타입이었다. 가식


없이 대할수록 반응이 좋았다.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슬아에게 이 집안은 최고였다.


비록 리액션이 조금 부족하긴 하나 무진이 그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었고, 어머님과 아버님도 점점
대답하는 빈도가 늘어 가고 있었다.

자신만의 전용 방청객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날 슬아는 태어나 가장 많은 쇼핑백을 보았다. 친절하게 방까지 배달된 쇼핑백들을 보며 슬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무진은 짧게 혀를 차더니 정리를 시작했다. 무진은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싫어했다.

슬아는 하나하나 정리하는 무진의 옆에서 도로 어지르며 물건들을 구경했다. 이게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집에 전시하기 위한 물건들 같았다.

어쨌든 어머님의 선물이라 기쁘긴 했지만…. 회사에 하고 다니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그 와중에 어머님을 위한 선물 하나는 직접 계산했다. 그걸 따로 드릴 때 어머님의 표정이 꽤나


인상 깊었다. 예상하지도 못한 선물이라는 듯 놀란 얼굴이 무진을 닮아 조금 귀여웠다.

“이건 무진 씨 선물이에요.”

어머님의 카드로 결제했지만 슬아가 고른 선물이었다. 슬아가 선물을 건네자 무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님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제 것도 있습니까?”

“당연하죠.”

무진은 예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기뻐했다. 선물보다는 자신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게 더욱 기쁜


듯했다.

마찬가지로 어머님의 카드로 결제한 아버님의 선물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슬아는 식사를 마친 후에 아버님에게 선물을 건넸다. 세련된 디자인의 넥타이였다. 금액이
눈 돌아갈 정도로 비싸긴 했지만, 어머님이 계산한 거라 그저 선물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슬아는 퇴근 준비를 하던 중 다짜고짜 무진의 아버지에게 호출을 받았다.

로비로 내려가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타자 무진을 똑 닮아 무표정한 얼굴의 아버님이 앉아 있었다.

“아버님, 무슨 일이세요? 저 저녁 사 주시려고요?”

무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물었고 아버님은 그저 ‘흠, 그래.’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슬아는 또 쉴 새 없이 입을 열어 떠들었다. 화제는 아버님이 하고 있는, 아침에 선물한 넥타이였다.

“어머님이랑 같이 골랐어요. 역시 어머님이 아버님한테 어울리는 색상을 잘 아시더라구요. 두 개 후보가


있었는데 그중에 제가 선택한 게 이거예요. 왜 이걸 골랐느냐면요.”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는 내내 아버님은 대답이 없었다. 슬아는 개의치 않고 떠들었다.

“그래도 결제는 어머니가 하셨어요. 생각보다 너무 비싸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무슨 넥타이 가격이….


어우. 나중에 제가 돈 많이 벌면 꼭 제가 번 돈으로 사 드릴게요.”

“그러렴.”
신나서 떠들다 보니 배가 고팠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식당이 아니라 외제 차 브랜드의 매장이었다.

“네가 탈 것 골라라.”

“네?”

아버님이 대충 턱짓을 보내자 직원이 친절하게 책자를 들고 다가왔다. 직접 차를 보여 주며 상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마력이 얼마고 디자인이 어떻고 색상은 뭐가 있으며….

“아버님, 저 차 사 주시는 거예요? 왜요?”

“골라 봐라.”

슬아는 그냥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신이 나서 차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가슴이


들썩거렸다.

‘무진 씨한테 자랑해야지!’

슬아가 고른 차는 회사에 타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이런 차를 타고 다니면 분명 차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다른 차를 고르고 싶지는 않았다.

감사하다며 좋아하는 슬아를 보며 무진의 아버지는 옅게 미소 지었다.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옅은 미소였다. 하지만 그런 쪽의 눈썰미가 좋은 슬아는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을.

***

본사의 팀원들은 대부분 무진과 슬아의 사이를 알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슬아의 아이디어가 워낙
좋았기에 낙하산을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팀 자체가 분리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일이
많지 않기도 했다.

가끔 혜진과 재호 커플이 그리웠으나, 우연히도 팀에 그들과 똑 닮은 커플이 있었다.

“팀장님, 오늘 회식 어때요? 1 차 컨펌도 끝났는데 달려야죠!”

“아,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진짜 서운하죠.”

“좋아요!”

혜진, 재호처럼 술자리와 노래방을 매우 좋아하는 커플이었다. 그리고 대개 그런 사람들은 슬아와 아주


잘 맞았다. 슬아가 술 약속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꼰대 같은 상사가 없는 회사는 생각보다 다니기 즐거웠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얼마 뒤, 슬아는 재호와 혜진을 만나러 전에 다니던 회사를 방문했을 때 이소미 씨와 마주쳤다.
차라도 한잔하자며 먼저 제안한 것은 이소미 씨였다. 전에는 슬아가 그녀의 사수였지만 이제는 소미가
사촌 시누이가 되었다.

슬아는 긴장하며 먼저 이전의 오해를 사과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하셨어요?”

“대화가 너무 그렇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뭐…. 그런가. 아무튼 이제 알겠네요. 오빠가 대체 왜 우리 회사에 들어왔는지.”

“네?”

“아니, 처음부터 이상했거든요. 우리 아빠한테 부탁까지 해서 입사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 뭔가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빠가 말해 주지
않더라고요.”

이소미 씨는 입사 전부터 무진을 견제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진과 같이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줄만


알았던 이소미 씨는 생각보다는 그리 과묵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대화가 잘 통하기도 했다.

어쨌든, 소미와의 대화에서 슬아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애초에 무진이 이 회사에 들어올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미는 그게 슬아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슬아는 의아했다. 애초에 입사 전에 무진과 접점이 없었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사를 앞둔 어느 날.

“우와, 이거는 무슨 상이에요? 아이스하키 경기 우승…. 어?”

저택에 있는 무진의 서재를 구경하던 슬아는 상패 하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상패에 쓰인 대학교의 이름이 굉장히 낯익었다. 게다가 결승전이면….

“와, 무진 씨 그때 그 아이스하키 경기장에 있었어요?”

“…네.”

“대박이다. 저 그때 친구가 하도 가자고 해서 구경하러 갔었거든요.”

무진은 조잘조잘 떠드는 슬아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표정은 딱딱했으나 눈빛만큼은 다정했다.

“와, 그때 이무진 씨 있는 줄 알았으면 우리 학교 응원 안 하고 무진 씨 응원했을 텐데!”

“글쎄요, 슬아 씨가 저를 거들떠나 봤을까요.”

무진의 말에 슬아는 입을 삐죽였다. 입사 후 그의 짝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다는 게 이럴 때는 굉장히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그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짝사랑해 준 무진이 고마운 마음이 더욱 컸다.

“설마 무진 씨 이때부터 나 좋아했어요?”

“…….”

대충 던진 낚싯대에 대어가 낚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들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은
없는 일이었다.
슬아는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무진이 침묵을 유지하자 혹시나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지, 이 정곡을 찌른 것 같은 기분은?

“진짜예요? 이때 나 봤어요?”

“…….”

“말해 봐요! 응? 진짜? 이때부터 나 좋아했어요? 아니, 이소미 씨가 무진 씨 회사 입사한 게 수상하다고


했는데…. 설마 내 스토커는 아니었죠?”

스토커는 아니었으나 비슷한 거라고 치면 비슷할 수는 있었다. 무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말해 봐요, 빨리. 응?”

“그런 거 아닙니다.”

드물게도 무진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잠자리에서 무진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꽤 오랜만이었다.

슬아는 즐거운 얼굴로 무진의 허리를 찔러 대며 캐물었다.

그러나 즐거운 건 잠시였다.

“으응, 아! 그만…. 흐읏, 아!”

“제가 슬아 씨 스토커였으면, 싫은가요?”

무진은 허리를 둥글게 움직이며 가장 느끼는 곳만 제외하고 찔러 댔다. 분명히 의도가 있는 움직임이었다.

“으응, 흐읏….”

느리게 성기를 삽입했다가 마찬가지로 느리게 뽑아내자 자지러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박을 때도
좋아했지만, 슬아는 유독 이렇게 성기를 느리게 뺄 때의 반응이 격렬했다.

무진은 자신의 손자국이 가득한 슬아의 엉덩이를 보며 엎드려 있는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하…. 무, 무진 씨, 잠깐만…. 흐읏!”

짓무른 눈가를 볼 때마다 가슴에 기이한 충동이 일었다. 더 몰아세우고 싶고, 더 울리고 싶었다. 잔혹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무진은 슬아의 몸에 더 깊게 자신을 새기며 해소하고는 했다.

그 결과로 슬아의 가슴에는 무진이 새겨 놓은 붉은 입술 자국이 선명했다. 충동을 해소하는 일환 중


하나였다.

자신으로 인해 흐트러지는 모습이 지독하게도 예뻤다.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대답해 보세요, 슬아 씨. 처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면 어쩌실 건가요?”

“흐아, 읏, 아아, 앙!”

무진은 슬아를 똑바로 눕힌 뒤, 하얀 다리를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발가락에 입을 맞추자 몸이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안쪽을 조여 오는 힘이 강해졌다.
“경기장에서 처음 슬아 씨를 봤을 때부터, 응? 그 하얀 빙상장에 이렇게 벗겨 놓고 박아 대고 싶었다면,
어쩔 건가요?”

“아, 흐윽, 그만, 아아!”

계속해서 애태우며 얕은 부분만 찔러 대자 슬아는 스스로 허리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충동질하는 슬아의 행위에 무진은 이내 쪽쪽거리던 발을 내려놓고 가느다란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작은 구멍은 한계까지 벌어져 커다란 제 성기를 삼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슬아 씨 전용 자지를 빨리 찾은 셈이니까, 분명 좋아했겠죠?”

“으흣, 아! 아아, 하!”

느리게 허리를 뺐다가 원하는 부위를 퍽 하고 찔러 주자 듣기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슬아는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 했으나, 무진이 찌를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터라 소리를 참기가 불가능했다.

몸을 숙인 무진은 슬아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 양옆에 팔을 고정시켰다. 단단히


고정된 팔 근육이 움찔거렸다.

무진은 눈 깜빡거릴 틈도 아깝다는 듯 노골적으로 슬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럴 때마다 슬아는 그의


시선에 갇힌 기분이었다.

“흐읏, 아! 흑….”

슬아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 냈다. 저 시선을 부끄러워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래를 지독하게 괴롭혀 오는 굵은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웠다.

쩍쩍거리며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됐다. 소리는 점점 빠르고 커져 갔다.

“으응, 아, 아! 아앙, 아!”

동시에 슬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도 마찬가지로 속도를 높여 갔다. 이윽고 슬아의 몸이 잘게
경련했다.

“으응, 아아, 아! 으응, 아!”

늘 무진보다는 슬아가 먼저 절정에 도달했다. 슬아가 쾌락에 경련하며 떠는 동안에도 성기를 처박는
속도는 그대로였다. 무진은 제 욕심껏 성기를 깊게 박아 넣으며 사정했다. 사정이 끝날 때까지 박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무진은 퓨즈가 나간 사람처럼 집요하게 성기를 쑤셔 댔다.

질꺽질꺽하는 노골적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무진은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사정을 마친 뒤, 느리게


안쪽으로 정액을 깊이 찔러 넣었다.

“으응, 흐으….”

슬아는 무진을 자극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냥 장난 한번 쳤을 뿐인데, 아마 다시는 이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예전부터 무진이 자신을 좋아했다면 그게 좋으면 좋았지, 싫을 리가 없었다.

다만 만약 그랬다면 자신을 바라보며 무진이 오랫동안 외로워했을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앞으로는 늘 두 사람이 함께라는 것이었다.

함께하는 시간 내내 무진은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며 더 행복하고 기쁜 감정을 배워 갈 것이다.

슬아는 입가와 목덜미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는 무진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덩달아 미소 짓는 무진을 보자 행복감이 절로 피어올랐다.

에필로그 02

“무진 씨, 무진 씨는 내가 왜 좋았어요?”

평화로운 어느 주말 오후, 슬아는 무진과 함께 TV 를 보다가 물었다. TV 속에는 유명 남자 배우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글쎄요.”

“글쎄요…? 아니, 나한테 왜 반했냐니까요?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녀 놓고, 글쎄요?”

“그런 게 아니라….”

“나한테 왜 반했는데요?”

“…음.”

무진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회사에서 다시 슬아를 마주쳤을 때. 면접을 본 뒤에 울고 있던 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는 모습이 신기해서요.”

“…신기해서? 예뻐서가 아니고?”

슬아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남자가 진짜…. 무진은 슬아의 반응을 의아한 듯 지켜보다가
말했다.

“예뻐서요.”

“지금 장난해요? 엎드려 절 받기 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울다가 다시 웃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니,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슬아는 미간을 구긴 채 무진을 바라보았다.

“다시 생각해 봐요, 왜 내가 좋았는지.”

그 말에, 무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기억 속 어느 날을 떠올려 보았다.


입사 초기의 일이었다. 무진은 하루하루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즐겁게 여겨졌다. 이유는 김슬아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흥미를 가진 것이 처음이라 생소했으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방은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진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그녀를 관찰했다.

“혜진 씨, 힘내. 응? 그 정도 실수 당연히 할 수 있지. 사람인데. 나도 저번에 실수해서 엄청 깨진 거


알지? 나에 비하면 혜진 씨 실수는 실수도 아니지 뭐.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오늘 한잔 어때, 응? 내가
쏠게!”

오늘 슬아는 노란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었다. 병아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또 삐약거리는
병아리처럼 혜진의 옆에 붙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무진은 의아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위로를 해
주는 건가 싶었다.

“고마워, 슬아 씨.”

혜진이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그제야 슬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슬아가 웃을 때마다 이상하게
그녀의 눈가 옆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무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마 심리적인 효과일 것이다.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진은 슬아의 위로를 받는 혜진을 보며 어쩐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부러운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랬다. 그래서 바로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이무진 씨 미쳤습니까?”

중요한 파일 하나를 백업해 둔 뒤 지워졌다고 보고했다. 혼이 나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고민하다 내린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무진은 윗선까지 불려 가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괜히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에 백업 파일이 있다고 하니 더 큰 소리를 들었다.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무진 씨, 괜찮아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슬아와 마주했다. 다른 팀원들은 회의에 들어갔는지 사무실이
비어 있었다.

“많이 혼났어요?”

“…네.”

슬아는 눈썹을 구긴 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무진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짓을
했으나 결국 원하는 상황을 얻어 냈다. 이제 자신이 왜 혜진을 부럽다고 느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어떡해요. 백업 파일 있었다면서요? 그럼 다행인 거지 왜 더 혼을 내 가지고 사람 기를 죽이나 몰라….”

“…….”

“밥은 먹었어요? 혼났다고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무진 씨 이렇게 기죽은 모습은 처음이네….”

슬아는 무진의 자리까지 다가와 안절부절 서성이며 무진의 등을 토닥거렸다.

“힘내요, 무진 씨. 저도 박 이사님한테 혼나 봐서 얼마나 서러운지 알긴 하지만… 그래도 무진 씨는


평소에 실수 한 번 안 하던 사람이잖아요.”

“그런가요?”

“그럼요! 지난번 프로젝트도 무진 씨 아이디어가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 정도 실수는 앞으로 더 조심하면


될 거예요. 기운 내요, 네?”

“…….”
슬아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가 다시 웃는 얼굴을 했다가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무진을 위로했다. 무진은
그런 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다. 가슴 한쪽을 시작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도 같았다.

정확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왜 슬아의 위로를 받던 혜진을 부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타인에게 호기심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첫 대상이 슬아 씨라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꾸 눈이 갔습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모습이 신기했고… 표정이 계속 바뀌는 것도 신기했고,


그러다 보니 다른 표정이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

“예뻤어요.”

“…….”

“슬아 씨가 웃을 때마다 여기가 반짝거렸습니다.”

무진은 슬아의 눈가를 손으로 정확히 가리키며 말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슬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까지 닭살스러운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랑합니다, 슬아 씨.”

“나도 사랑해요.”

무진은 이 감정이 사랑임을 확신했다. 슬아의 곁에 있으면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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