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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휴일: 어느 우성 알파의 수상한 결혼

외전

마리밍 장편소설

목차

01. 후일담

02. 장거리를 대하는 신혼부부의 자세

01. 후일담

저거, 김태주 아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당황해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아르바이트 경력 십여 년, 마주친 손님 중 가장 유명해


보이는 사람이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도시락을 고르고 있었다. 그것도 애인으로 보이는 상대와 함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대라 발주만 정리해 놓고 카운터 뒤에서 반쯤 졸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봐도 커플로 보이는 남자 둘이 찰싹 붙은 채 꽁냥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유진아, 다른 맛있는 것도 많은데 왜 하필 편의점이야?”

“그냥 괜히 이런 게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 통 못 먹어서 걱정했는데 뭐라도 먹고 싶은 게 생겨서 다행이지.”

이 시간에 커플을 보는 일이 잘 없긴 하지만, 뭐 딱히 이상할 정도는 아니라 아르바이트생도 처음에는 건성으로


넘겼다.
손님들은 둘 다 키가 컸는데도 한쪽이 유달리 커서, 상대적으로 다른 쪽이 아담하게 보였다. 저런 경우는 높은
확률로 알파와 오메가라고 아르바이트생은 나름 예리하게 추리했다. 그녀는 제일 수가 많은 평범한 베타였기
때문에 페로몬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양쪽 다 키도 크지만 팔다리도 길고 날씬한 것이 스타일도 좋아, 그냥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었다. 둘


다 얼핏 편해 보이는 차림이지만 자세히 보면 백화점 명품관 브랜드로 휘감고 있었다. 캐리어 가방마저 그랬다.

왠지 얼굴도 훈훈할 거 같은데 둘 다 눌러쓴 모자 때문에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특히 큰 쪽은


모자 아래 얼굴을 다 가리는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지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는 거냐고, 건성으로 생각하며
아르바이트생이 그들의 등을 향해 하품을 할 때였다.

“태주 씨, 도시락 뭐로 살까요?”

작은 쪽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큰 쪽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큰 쪽은 자연스럽게 팔뚝에 힘을 줘 작은 쪽이


팔을 걸고 있기 쉽게 지탱해 주었다. 그러고는 작은 쪽이 내미는 도시락 중 하나를 무심하게 가리켰다.

“난 고기 많이 든 거.”

정작 눈은 도시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꿀 떨어지는 시선을 상대의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콧대가 얼마나 곧고
높은지 마스크가 얼굴 위에서 훌쩍 떠 있었다.

“좋아요.”

작은 쪽이 웃으면서 도시락 중 하나를 집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입가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눈길이 갔다. 거참 남자가 꽃같이 화사하게도 웃는다고 감탄하다 말고, 아르바이트생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키 큰 쪽, 김태주 아냐?’

커플 중 큰 쪽이 이상할 정도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다 했다. 김태주는 한국인이면 길 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면 10 명 중 9 명은 알 만한 유명한 배우였다. 안 그래도 얼마 전 그가 나온 영화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며 한동안 텔레비전만 틀면 얼굴이 나왔었다.

잘생긴 얼굴을 아무리 가리고 있어도, 익숙한 목소리와 특유의 분위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말랐는데도 뼈대가
무슨 조각상 같고, 어깨가 넓어서 대충 걸친 카디건이 너무 잘 어울렸다. 거기다 작은 쪽이 ‘태주 씨’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누가 봐도 대놓고 열애 중인데, 이거 주변에 알려지면 스캔들이 아닐까? 의심에 가득 찬 채


아르바이트생은 카운터 아래서 슬쩍 핸드폰의 최신 정보를 검색했다가, 김태주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공식 발표가 나오고 온 커뮤가 시끌벅적했고, 자신도 댓글을 달기도 했던 것 같은데 생업에 치여서 깜박 잊고
말았다. 스캔들은 무슨, 아무래도 옆에 있는 사람은 갓 결혼한 그의 오메가 남편인 듯했다.

그러고 보면 남편 이름이 무슨 무슨 유진이던가? 전에 기사를 봤을 때 여자 이름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쪽도 아예 일반인은 아니고 아버지가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기사에서는 결혼 상대방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김태주랑 갑자기 결혼할 정도니 평범하지는 않겠다고
생각은 했다. 확실히 실물을 보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나저나 알파와 오메가인 건 맞췄다. 자신의 촉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에 아르바이트생이 괜히 뿌듯해할 때였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유진이 몇 개나 되는 주먹밥을 태주가 들고 있던 쇼핑 바구니에


우르르 담으며 물었다.

“나 컵라면도 먹어도 돼요?”

“물론이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담아.”

바구니에는 이미 도시락과 샌드위치가 잔뜩 담겨 있었지만, 태주는 전혀 마음 두지 않는 태도로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편의점이 아니라 편의점이 있는 건물도 사줄 수 있는 그였다. 사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기는 했다.

“좋아요. 과자도 사야지.”

태주의 허락에 유진은 신이 나서 살랑살랑 과자 코너로 발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이 대놓고
웃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채우는 유진의 태도는 신중했다. 그는 아직 LA 의 한인 마트에 들어오지 않은 신상 과자를 몇 개나


고르고, 컵라면도 하나 골라서 한꺼번에 카트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이 막히지 않게 도와줄 음료수를
추가했다.

그제야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태주가 제 몫으로 설탕이 들지 않은 캔 커피를 하나 골랐다.

계산대에 올려진 쇼핑 바구니는 꽤나 그득했다. 너무 유명한 배우를 앞에 두고, 아르바이트생은 긴장해 덜덜


떨면서 계산을 했다. 드디어 합계가 나오고 그녀가 김태주가 내미는 카드를 받아 결제를 하려는데, 유진이 해맑게
요청했다.

“아, 여기 케이스 안에 있는 치킨도 주세요. 소시지도요.”

“데워 드릴까요?”

“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닭튀김과 막대가 끼워진 후랑크 소시지를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동안, 유진은 빠르게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그들이 많은 편의점 중 여기로 고른 이유는 내부에 앉을 자석이 많아서였다. 거기다 손님도 별로 없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사이 추가로 들어온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소중히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 유진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그 앞에는 방금
산 음식들이 가득히 놓여 있었다. 아침에 편의점에 가서도 커피 하나 사 들고 나온 설움을 이제야 푸는 그였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에서도 기내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해 놓고,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못 먹은


참이니 배가 고픈 것도 당연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떠나기 전에 한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 하기도 했다.

요 며칠 계속 식욕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태주였다. 그렇다고 그가 콕 꼬집어 뭘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태주와 다시 이렇게 함께일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유진은 간만에 배고프다는 실감이 났다. 뭔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는 느낌이었다.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실은 자신이 그동안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나 싶어 유진은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먹어.”

“아, 고맙습니다.”

그런 유진에게 태주가 주먹밥의 비닐을 까서 건넸다. 그는 모자는 그대로 쓰고 있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마스크를 턱까지 내려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

“유진아, 내가 까주니까 더 맛있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한 건 뭐야. 그거 맞지. 다음엔 뭐 먹을래?”

유진은 대답 대신 턱으로 소시지를 가리켜 보였다. 태주는 열과 성을 다해 소시지에 케첩과 머스터드를 예쁘게 두
줄로 올렸다. 그리고 주먹밥 하나를 먹어도 예뻐 죽겠다는 눈빛을 감출 생각도 않는 채, 유진의 손에 자신이
직접 소스를 뿌린 그 소시지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각도상 차마 피하지 못한 채, 멀리서 그 모습을 죄다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개인 SNS 에 이 목격담을 올리고 싶어 애가 탔다. 하지만 상황 자체가 너무 있을 법하지


않아서 글을 올려도 주작이라는 소리만 들을 것 같다는 점이 문제였다.

편의점에서 그 김태주의 시중을 받으며 그의 남편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다니, 자신도 인터넷에서 봤으면 안
믿었을 거다. 아니, 이제 유진은 도시락을 다 먹고 샌드위치를 먹는 중이었다.

물론 저 샌드위치의 포장지는 태주가 손수 벗겨 준 것이었다. 그 사이 그는 천천히 캔 커피 하나를 마셨을


뿐이었다. 유진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듯했다.

역시 사인이라도 받을까? 아르바이트생은 아직 SNS 목격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같이
사진이라도 찍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냥 몰래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하는 건 좀 그래서 고민에 빠져들
때였다. 마침 편의점 문이 열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

“이 녀석, 김태주!”

하지만 갑자기 사방으로 울리는 걸걸한 목소리에 그 인사는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 * *
몇 년 만이지만 태주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아버지?!”

짐작대로 거기 선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인 김황조였다.

그는 한국 재계 1 위 우진그룹의 회장이기도 했다. 얼굴만 보면 별 특징 없는 중년 남성이지만, 온화한 표정과


달리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

옷차림만 봐도 깐깐한 성격이라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지금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허튼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단, 나이에 비해 큰 키를 빼면 아들과 얼굴은 별로 닮지 않았다. 태주의
미모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었다.

한편,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가엾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김태주가 편의점에
왔다 정도의 이벤트와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재벌이라고 모두 유명하지는 않지만, 우진그룹의 김황조 회장은 달랐다.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 김황조 회장과 김태주가 부자간이라고? 둘이 같은 김 씨기는 하지만, 한국인 다섯 중 하나가 김 씨다.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김 회장의 실물이 인터넷에서 낄낄거리며 보던 웃긴 짤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실제는 키도 큰 데다,
본인 자체도 굉장히 카리스마가 넘치는 탓이었다. 비서인지 뭔지 뒤에 줄줄이 따르는 각 잡힌 양복 차림의
사람들에다, 그 주변을 둘러싼 경호원으로 보이는 검은 양복의 사람들도 있었다.

함부로 뭐라고 했다가는 바로 잡혀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스케일이 이쯤 되면 머리가 굳어서 목격담을 쓰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법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거나 사인을 요청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이미 한참 전에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솔직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안 울고 제대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마침 회장 바로 뒤에 서 있던 키가 큰 남녀가 태주에게 말을 걸었다.

“태주야, 우린 안 보이니?”

“이게 얼마 만이야. 너무너무 반갑다.”

김 회장처럼 그 두 사람 역시 각 잡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태주가 아버지 때와 달리


반가운 얼굴을 했다.

“형하고 누나도 같이 온 거야?”

그의 형인 창주와 누나인 미주였다. 첫째인 창주는 회장의 후계자로서 경영수업 중이었고, 미주 역시 그런 오빠를
도우며 계열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창주는 아버지인 김 회장을 쏙 뺐고, 미주는 태주와 많이 닮은 미인이었다. 그나마 미주 쪽은 김 회장의 인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는 점은 삼 남매가 모두 같았다.
간만에 형제들을 보니 태주는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집을 나올 때 연예계 활동을 반대하던 것에 대한 마음의 앙금이 아직 남은 탓이었다.

“아니, 잠깐만. 다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마침 태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때 태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지 확인해 보니 매니저인 재현이었다.

“이 녀석은 기껏 휴가를 줬는데, 왜 굳이…… 응, 왜 재현아?”

―형!

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재현이 버럭 소리부터 쳐서 태주는 깜짝 놀랐다.

“이 녀석, 살살 좀 말해라. 귀 떨어지겠다.”

―큰일 났어요. 회장님께서 형 어디 있는지 확인하셨거든요. 아마 좀 있으면 형 찾아갈 거 같은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태주는 이 녀석이 제 아버지에게 말해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걱정 마라. 이미 오셨다.”

―네, 네에?!

“우리 아버지 이미 내 앞에 와 계신다고. 괜찮아. 너 아니었어도 이 양반이 알아내려면 그거 하나 못 알아내실


분이냐? 어차피 나랑 유진이가 서울역 한가운데서 그 난리를 쳤으니 목격담도 이미 싹 돌았을 거고.”

사실 태주는 재현이 제 아버지에게 계속 연락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딱히 비밀도 아니라는 듯 종종 일부러


태주가 눈치챌 정도로 티 나게 굴곤 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재현은 한국에 가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몇 번이고 슬그머니 결혼도 했으니 회장님께 한 번
직접 말씀은 드려야 하지 않겠냐고 흘리기는 했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고도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냈을 정도니
말이다.

덕분에 태주는 이번에 한국으로 가면 아버지가 직접 움직일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당장 마주치는
것까지는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일단 알았으니까, 끊을게.”

―형, 형?

대충 상황을 파악한 태주는 황급히 전화부터 끊었다. 왜냐하면 김 회장이 유진에게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눈빛을 한 커다란 알파의, 작고 가냘픈 오메가는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아 보였다. 실은 유진도 키가


180㎝ 조금 안 될 정도로 큰 편인데 말이다.

아버지가 유진에게 해코지라도 하기 전에 말려야만 한다고 태주가 생각할 때였다.


“잠시만요, 아버지…….”

“네가 우리 막내 남편이냐.”

그러나 김 회장이 유진에게 이미 말을 걸어 버렸다. 태주는 유진이 놀라지는 않을지 혼자 긴장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놀라기는커녕 긴장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방긋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가 어르신 상대는 태주보다
유진 쪽이 백배는 더 능숙한 것이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태주 씨 아버님이세요?”

진짜 남에게, 특히 저 망할 영감에게 보여주기에는 아까운 예쁜 미소라는 생각에 태주는 괜히 애가 탔다. 하지만


의외로 김 회장 역시 비슷한 감상이었던 것이다.

“아, 아버님이라고?”

감동한 표정으로 김 회장이 제 왼쪽 가슴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주치의를 부를까요?”

창주와 미주가 바로 회장을 부축했지만, 그는 바로 손을 내저었다.

“너희들도 정말 눈치가 없구나. 나는 진짜 심장이 아픈 게 아니야.”

태주는 제 아버지가 뭘 말하는 건지 바로 이해했다. 유진이 그런 의미로 ‘아버님’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높여 말했을 뿐이라는 사실 또한 알았기에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아버님. 제가 태주 씨와 결혼하기 전에 먼저 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진은 김 회장의 그런 삐뚤어진 성격을 알지 못했다. 아니, 첫 만남인데 모르는 쪽이
당연한지도 몰랐다. 대신 해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뿐이었다. 또다시 ‘아버님’이라는 호칭은 덤이다.

그 웃는 얼굴이 또 꽃같이 예뻐서, 자신의 외모가 주변에 얼마나 인상적인지 유진도 조금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태주는 괜히 애가 탔다.

그러고 보면 아까 서울역에서 태주는 유진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이미 이야기했었다. 지금의 만남을
보아하니 유진은 확실히 그 사실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이 분명했다. LA 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생각해 보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긴 했다.

반대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완전히 졸아든 것 같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그녀와는 관계도 없는 일인데 괜히 자신들이 여기 편의점으로 오는 바람에 성가시게 만들었다 싶어 태주는 괜히
미안해졌다.

정작 김 회장은 이미 유진에게 노글노글 완전히 녹아 있었다.

“아니다, 아니다. 분명히 우리 아들놈이 뭔가 잘못을 했겠지.”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제가 태주 씨를 매번 성가시게 만든걸요.”


“그럴 리 없다. 애비 앞이라고 우리 아들 편들 필요는 없다. 부족한 아들놈하고 결혼까지 해줘서 내가 다
고마워.”

그러고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귈 때도 첫눈에 반해서 덜컥 결혼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속을 엄청 썩였다고 했지.
본의 아니게 자신과 유진의 결혼이 어느 정도 제 집안 내력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주는 괜히 뜨끔했다.

“그래서, 태주야. 아비한테 말도 안 하고 결혼하니까 어떻더냐?”

갑자기 김 회장이 태주를 향해 물었다. 제풀에 찔린 태주는 잠시 삐걱댔지만, 곧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좋아?”

“그럼요. 신혼인데 좋죠.”

하지만 김 회장은 그게 허세인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흥, 그런데 싸우고 남편이 도망가는 바람에 비행기 타고 뒤쫓아 오기나 해?”

“오해입니다.”

“아, 그래? 풀기는 했다고?”

“그럼요. 이미 다 풀었어요.”

“화해했다는 소리구나. 잘했다.”

그제야 태주는 자신이 망할 영감의 유도 신문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와중에 김 회장이 다정한 눈빛으로
잘했다며 쳐다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유진 쪽인 것이 웃겼다. 아니, 안 웃겼다. 물론 태주도 그냥 지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야말로 자식의 결혼이 처음도 아니고, 저와는 인연을 거의 끊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신경
쓰시는 게 저는 영 어색합니다만?”

그러나 김 회장은 한술 더 떠 오히려 여유만만했다.

“무슨 소리. 이미 두 번이나 자식의 결혼을 치렀으니, 귀여운 막내의 결혼에 더 기대가 크고 그런 게
아니겠느냐.”

살면서 단 한 번도 저 말대로 귀여운 취급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태주가 남매 중 막내이기는 했다. 그 사실을
굳이 여기서 강조하는 부분이 태주는 꽤나 못마땅했다.

동시에 태주는 이제야 자신과 유진이 형제 관계가 똑같이 2 남 1 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한 여자 형제가
중간인 점도 같았다. 유일한 다른 점은 자신은 막내이고, 유진은 맏이라는 부분이었다. 이 상황과는 별도로 별거
아닌 그 공통점이 괜히 태주를 기분 좋게 했다.

아까부터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창주가, 차마 못 듣고 있겠다는 듯 결국 한마디를 했다.

“아버지께선 그냥 태주 네가 말도 없이 결혼해서 삐지신 것뿐이야.”


“그래, 오빠 말이 맞아. 태주야, 이렇게 된 거 오늘이라도 어서 약속을 잡아서 저녁은 다 같이 먹자. 서로
인사도 시킬 겸, 우리 남편이랑 새언니하고 조카들까지 다 모이면 좋잖아?”

미주도 못 참겠는지 끼어들었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창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대체 뭔 소리야? 하고 태주가 당황스러워하는데, 왜인지 김 회장의 기색이 확 만족스러워졌다.

“네 형과 누나가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너보다 확실히 나은 점이 있기는 하구나. 너야말로 겨우 한국에 와


놓고 남편한테 고작 편의점 음식이나 먹이지 말고.”

거기서 그는 유진과 태주 사이 테이블에 놓인 다 먹은 음식 껍질들을 가리키며 대놓고 혀를 찼다. 객관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태주는 살짝 억울했다. 다행히 유진이 바로 나서서 설명했다.

“태주 씨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먹고 싶다고 한걸요.”

하지만 김 회장이 귀담아들었는지는 불분명했다. 대신 그는 상냥하게 유진과 눈을 맞추며 이렇게 제안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 미주가 이야기했듯이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어도 좋지? 내가 제대로 된 한식으로


대접해 주마. 네 남편의 다른 형제들 가족들과 다 같이.”

“아버지, 유진인 아직…….”

괜히 유진만 불편하겠다 싶어서 태주는 반대부터 했는데, 의외로 유진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저야 물론 좋죠. 응? 태주 씨, 왜요? 나 한식 좋아해요.”

왠지 맥이 빠져 태주는 고개를 유진에게 다정히 웃어 주었다.

“아냐,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좋아. 새 가족도 동의했으니, 오늘 저녁은 가족들 다 모여서 같이 먹기로 하자꾸나. 창주야, 미주야, 너희
가족들도 모두 다 오도록 해라.”

김 회장은 대놓고 기분 좋아 보였다. 창주도 미주도 이미 다 예상했다는 듯 아버지의 이야기에 딱히 놀란 기색도


없었다.

태주만 괜히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자기 집에 데려가서 유진을 괜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정작 김 회장과 유진은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 새 가족은 한식은 뭐 좋아하니?”

“갈비찜이요.”

“잘됐다. 우리 집 요리사가 그거 잘해.”

“와, 기대된다. 근데 진짜 제가 가도 되나요?”

“당연히 와야지. 이제 우리는 가족이 아니냐.”

“그렇대요. 들었어요, 태주 씨?”


유진은 가족이라는 김 회장의 말에 살짝 감동한 듯했다. 태주는 그 얼굴이 또 너무 귀여워서 좋으면서도, 저
영감이 이번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의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태주 넌 아직 모르겠구나. 아버지 최근에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로 봤어. 너 나오는 거 보려고.”

그런 태주에게 창주가 슬그머니 귀띔했다. 미주도 지지 않고 끼어들었다.

“아버지 사실 네 영화는 극장 가서 다 보시고, 블루레이 같은 것도 예약까지 해서 다 구매하셔. 그거랑 별도로


OTT 에서 계속 돌려 보시기도 하고.”

설마 진짜인가 믿기지 않아 태주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제 아버지를 살폈다. 김 회장이 뭐가 찔리는지 갑자기
안 어울리게 헛기침을 했다.

“큼큼, 널 보려고 보는 게 아냐. 그냥 영화가 재밌어서 본 것뿐이다.”

“그죠! 태주 씨 나오는 영화 중에 명작이 많잖아요. 연기도 다 훌륭하고요.”

유진이 자신만만하게 자신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태주는 영 얼떨떨할 뿐이었다.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저 아버지가 자신의 연기 활동에 그렇게 관심을 가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집을
뛰쳐나오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을 줄 알았던 것이다.

문득 태주는 김 회장이 지금껏 재현을 사이에 두고 저에 대해 알아보던 것이 혹시 집안에 누를 끼칠까 봐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자신의 상황이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주의
결혼 소식에 재현이 계속 회장님 이야기를 꺼낸 것도 사실은 단어 그대로 태주와 결혼 상대를 보고 싶었을 뿐인
듯했다.

“아.”

그리고 태주는 문득 아버지의 눈가에 생긴 주름을 발견했다. 목소리와 행동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니 확실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훌쩍 세월이 느껴졌다.

어쩌면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제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태주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야말로 드디어 화해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 전화가.”

그때였다. 이번엔 유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라라예요. 한국에 드디어 도착했나 봐요.”

벌써 그럴 시간이 되었나 생각하는 태주의 앞에서 유진이 전화를 받았다.

“응, 응, 라라. 응, 응.”

별다른 말도 못 하고 계속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이, 태주는 귀여웠다. 들리진 않아도 맞은편에서는
라라가 속사포처럼 쏘아붙이고 있다는 장면이 상상이 되었다.

아까 비행기에서 그녀가 태주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와 똑같았다. 당시에도 상대의 말을 들을 생각도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쏘아붙인다고 바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도 딱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다고 저러는지, 태주가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였다.

“엄마, 아빠? 같이 오고 있어?”

생각지도 못한 유진의 말에 대번에 태주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만, 지금 누가 같이 오고 있다고?

그리고 태주의 놀라움에 쐐기를 박듯이 유진이 눈을 빛냈다.

“태주 씨!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라라하고 노아랑 같이 여기로 오고 있대요. 저도 몇 달 만에 뵙는 거라서…


….”

동시에 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렸다.

“제냐 오빠! 여기 있지?”

제일 앞서 들어온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라라였다. 오늘도 화려한 의상에 화려한 머리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뒤로 여전히 무채색인 노아가 보였다. 그리고.

“오빠, 전화한 대로 내가 누굴 데려왔는지 좀 봐!”

“안녕, 우리 아들! 아빠가 엄마랑 왔다.”

전 세계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등 뒤로는 당연하다는 듯 수많은 인파를 거느린 채였다. 일행이 아니라 그냥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자연스럽게 뒤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이건 또 뭔 일이냐고?!”

차라리 김태주 한 명을 알아보고 놀라워했을 때가 양반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안


그래도 진작부터 굳어 있던 불쌍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결국 카운터 뒤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 * *

결국 모두가 어영부영 김황조 회장이 원하던 대로 그의 집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처음 이야기가 나온 태주와 유진이나 형과 누나, 그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지막에 편의점으로 찾아온 유진의
가족들도 다 함께였다. 태주의 본가가 한국에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널찍한 저택이라 그 대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었다.

잔치 음식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준비했다기에는 양도 종류도 너무 많았다.


조만간 태주가 올 걸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비행기를 탔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요리를 시작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슬쩍 찔러 보니 태주가 결혼을 발표할 때부터 언젠가 남편을 데려오지 않겠냐면서 준비를
시작했단다.

만약 자신이 끝까지 집에 안 온다 그랬으면 어쩌려고 이런 건지, 태주는 살짝 어이없어졌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잘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김 회장이 자신한 대로 갈비찜이 일품이긴 했다.

유진은 마냥 즐거워했다. 특히 김 회장이 좋은 분 같다고 계속 칭찬했는데, 태주가 보기에는 그냥 자신의


아버지고 하니까 좋게 봐준 것 같았다.

그렇게 낮부터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계속 시달린 태주는 솔직히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본의 아니게
상견례에 결혼식과 피로연까지 한꺼번에 다 합쳐서 치른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장거리 비행기를 타기도 했고, 시차에다, 무엇보다 유진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신경이 곤두섰던 것도 있으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뜨는 인터넷 기사들도 문제였다. 그 난리를 쳤는데 소문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다. 서울역 주변은
항상 사람이 넘쳐나니 당연했고, 편의점에서도 처음부터 아르바이트생이 계속 같이 있었던 데다, 마지막에 유진의
아버지가 대놓고 사람들을 몰고 들어왔으니 말이다.

듣자 하니 재현은 결국 오후에 다시 회사로 불려갔다고 했다. 태주는 제 매니저가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히려 전화로 이런 상황에서 오전에라도 휴가를 줘서 고맙다고 말해줘서 감동했다.

―형이 그때 휴가 안 줬으면 우리 애인이랑 오늘도 제대로 못 만날 뻔했지 뭐예요.

“진짜 미안하다, 재현아. 넌 정말 좋은 놈이야.”

―하하, 뭘 당연한 걸 다시 말씀하시고 그러세요.

“그래서 지금 나도 바로 사무실로 갈까?”

미안한 마음에 바로 달려가려던 태주였지만, 재현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뇨, 제발 보안 확실한 회장님댁에 그대로 계세요. 기자들 연락 절대 받지 마시구요. 그사이에 이쪽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볼게요.”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이 모두 있는 이 부담스러운 현장을 조금이라도 일찍 끝내고 싶던 태주로서는 어떻게 보면


아쉬운 소식이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이죠.

“뭐, 뭐가?”

다행인 부분과 안 다행인 부분이 뒤섞였다고 생각하며 괜히 찔끔하는 태주에게 재현이 태평하게 대꾸했다.

―유진 씨 아버님께서 마지막에 관심을 다 끌어 주셔서요. 덕분에 저희가 인터넷 여론 관리하기가 훨씬 쉬워졌어요.
서울역에서 형하고 유진 씨 둘이 난리 친 게 죄다 묻혔다니까요. 단순히 부부 싸움을 크게 하고 화해한 걸로
적당히 넘어가는 분위기예요. 거기다 제일 좋은 게 뭔지 아세요?

“뭔데?”
―그중에 이 결혼 자체가 가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여론은 하나도 없어요.

“그거 다행이네.”

―그죠, 그죠.

그래도 태주의 아버지가 우진그룹 회장이라는 소식은 안 묻히고 있다고 했다. 아니, 알고 보니 끼리끼리 결혼한
거라고 더 화제가 되고 있다나?

거기에 대해서는 언제든 한 번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닥친 거라고, 재현은 각오하고
있었다며 웃어넘겼다. 태주로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이번 일까지 끝나면 관련해서 일단락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내줘야겠다고 새삼 생각했다.

바깥 상황과 별도로 김 회장의 저택은 평화로웠다. 저녁 식사를 핑계로 했지만 이른 오후에 시작된 모임은 밤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회장은 자연스럽게 하루 묵고 가라고 했지만, 태주는 자기도 간만에 한국에 온 거라 오늘은 집에 가 봐야 한다고
극구 거절했다. 다행히 유진의 가족들은 외가로 간다고 해서 같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태주는 유진도 그들과 같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그가 제 옆으로 와서 그제야
안심했다.

“하아, 우리 아버지가 널 놓아주지 않아서 고생 많았어.”

태주가 유진을 데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주변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뭘요. 신나서 같이 어울린 건 우리 가족들이 더했던걸요. 태주 씨야말로 고생하셨어요.”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는 태주를 유진이 오히려 위로했다. 태주는 사랑스러움에 그런 유진을 괜히 더 품에 꼬옥
껴안았다.

현관을 들어오자 재현이 미리 가져다 둔 짐이 보였다. 태주는 급할 것도 없으니 일단 내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주기적으로 들르는 가사도우미 덕인지 집 안은 오래 비워둔 것치고 깨끗했다.

아까 아버지가 자고 가라고 했을 때 솔직히 태주는 속으로 덜컹했다. 이 정도면 몇 년 분의 효도는 충분히 한 것


같고, 오늘은 더 이상 사양이었다.

“여기가 태주 씨 집이에요?”

유진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방 3 개짜리 아파트는 태주의 명성에 비하면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거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고
보안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혼자 살면서 일이 바빠서 거의 자러 들르기만 하다 보니 집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도 아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쓸데없이 크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과 같이 있으려면 더 큰 집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고집을 피워서라도 굳이 여기로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단둘이 있을 수 있어서였다.

“나도 참, 사춘기 남자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저도 모르게 그런 유진의 뒤를 눈으로 좇다가, 태주는 괜히 머쓱해져서 혼잣말을 했다.

솔직히 아까 서울역에서 유진을 보자마자 태주의 머릿속에는, 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 해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고파하는데 밥부터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대신에 밥만 다 먹으면 바로 어디든 구석진 데로
데려가 버리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오지를 않나, 그 뒤에 유진의 가족들이 나타나지를 않나. 거기서 저녁을 먹자며 그대로
다 같이 본가로 들어갈 때, 태주는 거의 속으로 울었다. 왜냐면 그때 시간이 아직 이른 오후라서 저녁까지 꽤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단둘이 되었다고 해도 유진이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비친다면, 자신이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태주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LA 의 아파트에서 실컷 경험하기도 했다. 그 뒤로 또다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보낼 거라는 사실은 덤이다.

태주는 하루 종일 유진을 곁에 두고 그런 생각만 하는 자신이 낯설기도 했지만, 이런 기분 자체가 절대 싫지는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안에서 유진이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좀 마실래? 한참 비워둬서 아마 물 정도밖에 없을 테지만.”

그렇게 말하며 태주가 냉장고 쪽을 향할 때였다. 그날 밤처럼 코코아라도 타 줄까 생각하니 입가에 저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때의 굿나잇 키스는 아직도 그에게는 마냥 귀여운 기억이었다.

“태주 씨.”

“유진아?”

갑자기 유진이 등 뒤에서 끌어안아 오는 바람에 태주는 깜짝 놀랐다.

태주의 겨드랑이 사이로 양팔을 넣어 허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키 차이도 있는 데다 답삭 붙들어 반쯤 매달린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제 겨우 둘만 됐어요.”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굳은 태주를 향해 유진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물론 태주도 계속 이러고 싶었지만, 유진 쪽에서 먼저 이러는 건 그의 예측 밖이었다. 제 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에 그는 제 아랫배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아, 너.”

태주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유진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마주 보게 했다.

아랫배와 가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고개를 묻은 채 유진이 살짝 눈만 들었다. 크고 순진한 눈이 반으로 휘며


자연스럽게 태주를 향해 졸라 왔다.

“응? 싫어요?”

태주는 제 안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다음 순간, 태주는 그대로 유진을 제 품으로 끌어안고 미칠 듯이 덤벼들었다.

“읏, 흐응!”

부딪히듯 맞닿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지체 없이 유진의 입술을 깨물고 혀를 갈라진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말 그대로 먹어 치울 기세의


입맞춤이었다.

키스 정도는 아까 서울역에서도 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이 둘러싼 한가운데에서였다.

하지만 확실히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노골적인 접촉이었다. 혀가 상대의 혀에 뒤엉키고 빨아당기고 입 안의


뜨겁고 여린 점막을 훑어 내렸다. 누구랄 것 없는 타액이 서로 간에 뒤섞였다.

“응, 응, 으응…….”

조용한 공간 한가운데 혀와 혀가 섞이는 야릇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진은 지난번과 달리 이제는 숨을 잘 내쉴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어떻게 하는지 완벽히 습득한 것이


틀림없었다.

태주는 유진을 제 품에 가두듯 으스러지듯 껴안았다. 유진의 팔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태주의 목을 감고 있었다.

키스는 길었다. 끊어질 듯 끊기지 않은 채 이어지며, 태주는 빈틈없이 유진의 입 안을 제 혀로 자극했다. 마치


한 부분도 빼먹지 않고 모두 자신이 먹어 치우고 싶다는 기세였다.

결국 입술이 떨어졌을 때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쓰러지는 그를 태주가 가볍게 받쳐
안았다.

“사실 아까 역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부터 나는 이러고 싶었어.”

그 단단한 팔 안에서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는 유진은, 태주의 그 말이 싫으냐는 자신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방금 나눈 격렬한 키스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여전히 숨이 진정되지 못한 채 유진이 태주를 향해 수줍게 눈을 빛냈다. 흥분으로 하얀 얼굴에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둘 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상대에 대한 사랑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은 나도 그래요.”

“그 말 후회해도 난 몰라.”
태주의 장난스러운 말에 유진이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어떻게 후회하게 해 주실 건데요…… 앗.”

그대로 태주가 번쩍 유진을 안아 올려 그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허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받친 채 옆으로 안아 든


것이었다.

소위 공주님 안기에 유진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작진 않을 텐데, 어쩜 이렇게 힘이 세요?”

그런 순진한 반응이 되레 상대를 더 흥분시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태주는 몸으로 대답한다는 듯 한술 더 뜨듯 유진을 안은 채 너무도 가볍게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이동에 태주의 목을 감은 팔에 좀 더 힘을 준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망설임 없이 태주가 향한 곳은 집의 제일 안쪽이었다.

방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자, 아무것도 없이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사이즈의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어떨 때 사용하는지 용도가 너무도 명확한 공간이었다.

“침대밖에 없어요?”

“응, 여기 잘 때만 쓰니까.”

“그렇구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침대에 유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조금 전과 다르게 가볍게
성적인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참고로 늦잠 자는 나를 깨우느라 재현이가 몇 번 들어온 거 말고, 누가 이 방에 들어온 건 네가 처음이야.”

태주가 그런 유진을 아주 조심스럽게,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침대 위로 소중히 내려놓았다.

“태주 씨.”

“쉿, 이제부터는 부부의 시간이야.”

당연하다는 것처럼 태주의 몸이 유진의 위로 겹쳐졌다. 넓은 어깨가 조명을 가리고, 그 윤곽이 제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만큼 유진의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유진의 스웨터가 벗겨져 나가고, 태주도 자연스럽게 제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날씬한 체형으로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편이지만 드러난 상체 어디에도 여백이라고는 없었다.

덕분에 유진은 태주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성난 어깨 근육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태주의
아래에서, 제 셔츠의 제일 아래 단추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응…….”

멍하니 있는 사이 입술이 다시 맞대어 왔다. 유진은 움찔거리며 그 키스를 받아들였다.


이미 달아오른 몸은 뭘 해도 뜨거웠다. 이렇게 침대 위에서 끌어안고 있는 자신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태주는 부드럽게 혀를 섞으며 천천히 유진의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유진의 손이 움찔움찔 그런 태주의 손에
겹쳤지만,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돕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바지까지 다 벗겨버리고 나서야, 입술을 떼며 태주가 속삭였다.

“흥분했어?”

그 말대로 유진의 속옷 앞쪽은 불룩한 채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유진은 괜히 부끄러워 허벅지를 오므렸지만,
이미 다 들통난 다음이었다. 바지를 벗은 상태라 가릴 방법이 없었다.

“당신도.”

유진은 태주도 어서 바지를 벗으라며 졸랐다. 그 역시 이미 바지 앞섶이 불룩한 걸 보면 분명 흥분하고 있는데,


뭔가 자신만 안달 난 거 같아서 창피했다.

“원하신다면.”

의외로 대답은 선뜻 되돌아왔다. 철컥철컥 바지 벨트를 푸는 소리가 선명했다.

어쩌면 돌아온 대답이 과하게 여유롭다는 사실에서 유진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

태주가 지퍼를 내리는 순간, 유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커다란 성기가 속옷을 꿰뚫을 기세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달라붙는 재질의 작은 삼각 브리프는 그 아래 커다란 우성 알파의 성기를 버티기에 한껏 부족해 보였다.


흉흉해 위협적인 성기가 금방이라도 얇은 천을 찢을 기세였다.

검은색의 심플한 디자인이라 드러난 성기의 윤곽이 더 노골적이었다. 그렇다고 다 발기한 것도 아니었다.

“너무 자극하지 마.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가 버릴 것 같아.”

태주로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낮부터 계속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지 않은가?

“나 때문에?”

와중에 유진이 마지막 수줍음을 걷어내지 못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순진한 의문을 입에 올렸다.

“아니면 왜겠어?”

태주는 참지 못하고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그 뺨에 입 맞추었다. 하지만 속삭이는 목소리는 흥분으로 쉬어 있고,
살짝 찡그린 눈매가 대놓고 섹시했다.

“아.”

유진은 이미 발기한 성기는 물론 자신의 뒷구멍까지 한꺼번에 젖는 것을 느꼈다.


흥분으로 흘러나온 애액에 팬티가 다 축축해지다 못해 시트를 적시기 직전이었다.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낯선 몸의 변화가 두려우면서도, 유진의 흥분은 본능을 따라 착실히 고조되는 중이었다.

“유진아.”

그대로 태주가 유진의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단번에 내려버리고, 드러난 성기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가볍게 손으로 자극해 오자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유진이 끙끙 달뜬 숨을 내뱉었다.

“으응.”

“같이 한 번 뺄까?”

태주는 제 성기와 유진의 성기를 겹친 채 문지르기 시작했다.

민감한 부분에 직접적으로 닿는 강렬한 자극에 유진이 자지러졌다. 무엇보다 스치는 태주의 성기가 너무도
뜨거웠다.

“아, 흣, 너무…….”

하지만 그걸로는 확실히 부족했다. 뭔가가 아쉬워 유진의 허리가 꼼지락거렸다. 지금 느끼는 것보다 좀 더 안쪽,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본인보다 더 먼저 태주가 그런 유진의 기색을 눈치챘다.

“왜애……?”

갑자기 태주가 제 허벅지를 크게 벌려 와 유진이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태주는 손을 떼기보다 오히려 더
밀착하며 유진의 허벅지를 더 크게 벌리게 했다

“역시 부족한 거 같길래.”

엉덩이가 위로 올라가며 안쪽 깊이 감춰져 있던 은밀한 구멍이 태주의 시야 바로 앞으로 드러났다. 흥분으로 흠뻑


젖은 채 수줍게 빠끔거렸다.

“아, 안…… 흣!”

갑작스러운 부끄러운 자세에 유진은 반사적으로 신음했지만, 그대로 태주가 그 위로 혀를 가져다 댔다.

“아, 흑, 안 돼.”

유진은 그대로 녹아내렸다. 지금은 손도 대지 않고 있는 앞쪽 성기가 흥분으로 바짝 섰다.

부끄러운 부위를 뜨거운 혀가 핥아 내리는 것만으로 유진은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쾌감이 그의 이성을 흐트러트렸다.

혀가 노골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참지 못하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유진의 손가락이 태주의 머리를 감쌌다.

“거기, 안 돼. 그만. 이걸로는, 싫…….”

밀어내려는 것이었지만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더 끌어안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상대의 그런 반응에 더 자극받은 태주가 더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까지 가 보자는 기세였다.

“당신을…… 넣어줘요. 같이…… 응.”

하지만 이어지는 유진의 말에 그는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입가가 웃고 있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왜? 네 여기는 이걸로도 좋다고 엄청 움찔거리고 있는데.”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애액과 타액으로 젖은 구멍을 슬쩍 훑었다.

한껏 달아오른 유진은 그것만으로도 자지러졌다. 발기한 앞쪽이 금방이라도 절정에 닿을 것처럼 움찔거렸다.

“흑, 안 돼.”

유진이 못 견디겠다는 고개를 저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반대로 성기는 오히려 더
빳빳해졌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젖은 구멍이 야하게 움찔거리는 모습에 태주는 다리 사이로 바로 자극이 왔다. 하지만 괜히 여유만만한
척 허세를 부렸다.

“지난번에 하면서 네가 핥았을 땐 솔직히 좀 서툴렀어.”

“그, 그거에 흥분했던 게 누구신데요?”

유진이 조금 약이 올라서 끙끙댔다. 올려다보는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 맞아.”

어차피 참을 수 없는 쪽은 태주였는지도 몰랐다. 실은 아까부터 지나친 흥분으로 아랫배가 팽팽해질 지경이었다.

“흑!”

그대로 태주가 성기 끝의 제일 굵은 부분을 단번에 박아넣자 유진은 신음했다.

한껏 발기해 흉흉한 기색을 뽐내는 커다란 성기가 아랫배를 빠듯하게 압박해 왔다. 아까 유진이 태주가 바지
지퍼를 내렸을 때 보고 놀랐던 것은, 지금과 비교하면 장난이었다.

눈가를 적신 채 쌕쌕 가쁜 숨만 내쉬는 유진을 태주가 다정히 쓰다듬었다.

“아파?”

“아, 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단순히 그렇다기보다…….”

실제로 그 말대로였다. 아까부터 태주를 기다리던 구멍은 좁으면서도 쑤걱쑤걱 잘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응…….”

뿌리까지 받아들이자 유진이 긴 숨을 내뱉었다. 호흡에 흥분과 달콤함이 뒤섞여 있었다.

너무 커서 압박감에 손끝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듯 성기는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빳빳하게 발기한 채였다.

“합쳐졌어.

“아, 태주 씨…….”

“네가 날 감싸고 있어.”

유진의 하얀 온몸이 핑크색으로 달아올라 있는 것이 태주는 사랑스러웠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 생각하니


더 그랬다.

덕분에 그는 박은 것만으로 사정해 버릴 것 같은 감각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낮부터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데 적당히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느껴져? 네 안이 내 모양으로 길이 들었어. 여기로 내 걸 받아들였던 걸 기억하고 있는 거야.”

지난번에 하고 아직 며칠 지나지도 않았던 것을 괜히 상기시키려는 태주였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것을 생각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너무 커요.”

한숨 같은 긴 호흡을 내쉬며 유진의 손이 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끝까지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고 이 부피와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삽입한 대로 유진의 얇은 뱃가죽


아래로 성기의 윤곽이 제법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와중에 그런 유진을 보는 태주의 성기가 그의 안에서 더 커졌다. 유진이 순수한 놀라움으로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더.”

“윽, 보채지 마. 나도 힘드니까.”

태주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벽에 길을 들이듯 하자,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유진이 작게
신음했다.

“흐응, 응.”

“난 아까부터 계속 이렇게 하고 싶었어.”

“흣, 아아, 몰라.”

위로는 귓가에 울리는 태주의 목소리에 아래를 채우는 그의 성기에 유진은 어쩔 줄을 몰랐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민한 몸과 달리, 경험이 부족해 아직 수줍음이 남아 있었다.

“아, 거기만…… 너무, 흑.”

태주가 느끼는 부분만 듬뿍 찔러 올리자 유진이 흐느꼈다. 너무 느껴서 그런 것이었다.

이제는 태주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낮은 신음과 함께 그의 허리 짓이 급격히 거칠어졌다. 이제는 사정을


봐주지 못하겠다는 듯, 유진이 반응하는 대로 거칠게 허리를 찔러 넣을 뿐이었다.
“으응, 응, 응.”

박아넣을 때마다 유진의 가느다란 온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만지지도 않은 가슴의 작은 돌기가 바짝 서 있었다. 태주가 당연한 것처럼 그 위로 손을 올렸다.

“하윽!”

돌기를 붙잡고 가볍게 손끝으로 비틀자 유진은 자지러졌다. 이미 온몸이 한껏 달아오른 그에게는 뭘 하든 그저
흥분을 북돋는 역할일 뿐이었다.

태주가 더 거칠게 허리를 흔들며 한껏 흥분해 물었다.

“좋아, 유진아?”

이어진 부분이 진작에 녹아내린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태주는 더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커다란 성기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이어진 부분에서 살 부딪히는 소리와 애액의 젖은 소리가 함께 울렸다.

어차피 유진 역시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 모, 몰라…… 몰라요.”

“난 좋아.”

최후의 스퍼트라는 듯 태주가 더 거칠게 유진을 몰아붙였다.

“흑, 으응!”

쾌감과 압박감이 뒤섞인 채 유진은 흐트러졌다. 어떻게 여기서 더 흥분하는 건지 막연히 신기할 지경이었다.

유진도 물론이었지만, 태주의 숨결도 한층 거칠어져 있었다. 이제 둘 다 절정이 멀지 않았다.

잠깐 숨을 멈추며 태주가 유진을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삽입이 깊어지며 둘은 더 깊게 밀착되었다.

“사랑해.”

그리고 다음 순간, 태주는 깊은숨을 토하며 유진의 귓가로 속삭였다.

태주가 유진의 안에 사정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진의 성기 또한 정액을 토해냈다. 묽은 유백색의 액체가


누구랄 것 없이 두 사람의 배와 가슴 위로 튀었다.

* * *

“더는 못 해요.”
“응.”

태주는 제 품 안에서 반쯤 눈을 감은 채 칭얼대는 유진의 뺨에 쪽 입 맞추었다.

유진은 태주의 팔에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시달린 걸 생각해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목덜미부터 가슴까지는 온통 태주가 물고 빤 키스 마크로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시트


아래로 가리어진 허벅지 안쪽이나 엉덩이도 딱히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태주는 자제하지 못한 자신을 조금 반성했다. 원래도 사랑스러웠지만, 그 사랑스러움이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올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흥분해 버렸다.

확실히 어른스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자신은 항상 이런 식이기는 했다.

“아랫배가 꽉 찬 것 같아요.”

유진은 손으로 제 배꼽 근처를 쓰다듬으며 끙끙댔다. 태주가 제 안에 너무 많이 사정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미안.”

“농담이 아니라고요. 누르면 아래로 나올 것 같아.”

차마 쉽게 대꾸를 못 하는 태주를 향해 유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 왔다.

엄청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본인이 자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저런 말도 순진하니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태주는 불편하면 욕실에서 빼줄까 하는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 알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태주의 가슴에 고개를 비비고 좀 더 몸을 붙여 왔다. 크림과
연유의 달콤한 향 같은 페로몬이 여전히 태주를 두근거리게 했다.

유진은 눈이 거의 감긴 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임신 확률이 낮은 시기라지만 너무 마구,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베타 남녀가 이렇게 하면 벌써 애가


생겼을 거라고요. ……사실 잘 모르지만요.”

“미안해. 내가 너무 과했던 건 반성할게. 네가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거의 잠이 든 상태에서도 유진은 태주의 마지막 말에 반응해 반짝 눈을 떴다.

“물론 나도 좋았어요.”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태주의 가슴으로 다시 고개를 묻고 말았다. 이제 눈은 다 감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습이 또 너무 귀여워서 태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졸리면 한숨 자.”

역시 피곤한가 보다고 생각하며 태주는 그런 유진의 등을 토닥였다. 몸을 닦아주는 건 그 뒤에 자신이 혼자서


해도 될 일이었다.

그 말에 안심한 듯 유진의 기색에 편해졌다. 이제 거의 잠에 빠져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태주는 끌어안은


손에 살짝 힘을 더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하지만 유진이 이렇게 대답해 살짝 놀랐다. 보아하니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 전 마지막으로 속삭인 듯했다. 곧
숨소리가 평화로워졌다.

태주는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 앞으로 평생을 바라보아도 절대 질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02. 장거리를 대하는 신혼부부의 자세

유진은 어떻게 해도 하품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바빠서 매일같이 새벽에야 잠드는데, 피곤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커피를
내밀었다.

“설탕 둘, 밀크 듬뿍 맞죠?”

연구실 옆자리 후배인 제니퍼였다. 그녀의 뒤쪽에서 다른 후배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피곤하신가 봐요, 미스터 메드.”

하지만 유진이 대답하기보다 한 박자 먼저 제니퍼가 그를 타박했다.

“이제 김이라니까, 토니.”

“맞다! 몇 년을 미스터 메드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결혼하시니까 자꾸 깜박하네요.”

“어후, 토니 이 녀석은 제가 나중에 혼낼게요.”

“아니야, 괜찮아.”

유진은 너무 졸려서 반쯤 멍한 채 그런 후배들의 대화를 지켜보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제니퍼도 토니도 장난이지 진지하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 중으로 봐야 할 데이터가 산더미였다. 유진은 생명수 같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고마워. 커피 잘 마실게, 제니퍼.”

“천만에요, 미스터 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유진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지만, 이 나라에서는 결혼 후 누구의 성씨를 사용할지가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전통적으로는 한쪽의 성씨를 따르는 것이 보편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쪽 성씨를 합쳐서 사용하거나,
아예 바꾸지 않기도 했다. 딱히 규칙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필요성에 따라 정하거나, 아예 별 의미 없이 적당히
예뻐 보이는 조합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유진의 부모님들은 두 사람의 성씨를 같이 붙여서 사용했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이름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유진은 왠지 태주의 성씨를 사용하고 싶었다.

부모님들은 약간 서운해 보이기도 했지만, 유진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태주와의 결혼 소동이 일단락되고 양가의 허락을 받았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유진을 기다리는 것은 대학원
복학이었다. 지도 교수가 대놓고 전화로 이제 슬슬 연구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학위를 보장할 수 없을 거라는
으름장을 놓는 데에는 방법이 없었다.

지난 학기, 유진이 개인적인 방황으로 앞뒤 생각 없이 휴학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예 학업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휴학 중에 어쩌다 보니 태주도 만나고 결혼도 하는 등 많은 일이 있었고, 그 결과 개인적으로도 많이
안정된 것도 사실이었다.

나름 교수도 다 알고 일부러 연락한 것이기도 했다. 유진이 박사과정 중반이라 한참 바쁠 시기도 맞았다.

사실 유진은 몇 년 전, 처음 집에서 떨어진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이번에야말로 부모님의 배경을 떼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에서 자신만 성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점은 대학원에 진학한 지금도 변함없었다.
그렇다고 동기나 선후배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모두 유진에게 친절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할리우드 스타라서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유진은 아쉬워했다.

그 정확한 이유를 여전히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그답기는 했다.

실은 유진이 처음 신입생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이번에 1 학년 신입생 중에 엄청 미인이 있던데.’

‘걔, 유명하잖아. 실은 걔 아버지가…….’

아버지가 워낙에 유명인이라 과 전체의 관심을 끈 것은 맞았다. 공대답게 문화 예술이나 연예계 쪽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학과기는 했다. 하지만 더 화제가 된 쪽은 다른 부분이었는데.
‘실은 나 이번 신입생 환영회 때 데이트 신청해 보려고.’

‘너도? 실은 나도!’

‘너희 둘 다 늦었어. 이미 같은 신입생들이 줄줄이 고백했대.’

‘내가 듣기에는 걔네들이 다 차였다더라.’

‘뭐야, 눈이 엄청 높은가? 물론 외모나 배경 보면 그러고도 남을 거 같기는 한데.’

‘그게 아니고 고백했는지도 잘 모르는 거 같다던데. 그런 쪽으로는 신경 하나도 안 쓴다고.’

남녀 불문, 알파 베타 오메가 할 것 없이, 같은 과의 대부분이 한 번씩 유진에게 반하고 지나갔다. 문제는 정작


유진은 그중 아무에게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고백을 받았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유진에게 고백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대신에 누구나 그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암묵적인 합의였다. 어차피 고백해도 거절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그걸로 모두가 평화를 얻게
되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유진 역시 평화로운 대학 생활을 계속했다.

그 와중에 유진이 휴학 중 갑작스럽게 결혼했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상대가 또 전
세계에서 인지도도 높고 인기도 많은 미남 우성 알파 배우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로 다시
의견이 모아졌다. 현재는 연구실을 포함한 모두가 뒤에서 조용히 부부의 행복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의외로 결혼 소식과 함께 전해진, 유진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에는 대부분 역시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이기도 했다. 애초에 신입생 시절 베타라는 사실에 오히려 모두가 놀랐었다.

“후우, 커피가 뜨겁네.”

그런 이유로 지금 커피를 마시는 유진을 지켜보는 연구실 동료들의 마음은 간질간질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방금도
그저 커피가 뜨거워 숨을 불어 식히는 것뿐이지만, 그 한숨에 모두의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정작 당사자만이 그런 자신의 매력을 모른 채 무심하게 할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솔직히 유진은 요즘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자신의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곤란하게도 남편인 태주였다. 일단은 자주 보지 못해서 우울했다.

복학한 뒤로 유진은 미국에, 태주는 한국에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드디어 태주가 미국에 영화
촬영을 오게 되면서 같은 국경 안에 있는 만큼 전보다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근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생각만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정작 촬영을 시작하니 바빠서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한국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니 같았던 것이다.
아니, 한국에 있을 때야 멀어서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어서 참은 건데, 가까이 와서도 제대로 만날 수 없게 되니
오히려 더 속상했다.

그 와중에 유진은 결혼식 준비로도 바빴다. 사실 혼인 신고는 처음 만난 날 바로 했던 두 사람이다. 이제 와서


꼭 식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해요? 그때 맞춰서 선물해야겠다.’

‘결혼식 하면 꼭 초대해주는 거예요.’

‘결혼식 너무너무 기대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할게.’

하지만 아예 안 하고 넘어가기에는, 가족들도 그렇고 주변인들도 기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단 날짜는 지금 진행 중인 태주의 영화 촬영이 끝나고, 유진의 학기가 끝난 시기로 정했다.

케이티는 바쁜 두 신랑을 대신해 자신에게 전적으로 맡겨 달라고 했다. 하지만 유진은 태주가 한국에 있을 때,
얼굴도 못 보는데 결혼식 준비라도 자신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정작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해야 할 시기에 학업도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도 힘든 와중에 태주를 못 봐서 화가 나는데, 결혼식 준비도 하려니 몇 배로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번 주말에는 남편분하고 보기로 하셨다면서요.”

토니의 말이 맞았다. 샌드위치를 씹다 말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휴일이 잘 맞았어.”

다들 일이 많다 보니 겨우 맞이한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식당에 가기도 다들 귀찮아 적당히 샌드위치나 사 와서 먹는 중이었다. 먹는 것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 그대로


앉은 채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불쌍한 대학원생들은 이런 삶이 다들 하도 익숙해서 딱히 불편한


줄도 몰랐다.

“태주 씨 촬영이 이번 주말에 쉰다는데, 나도 주말이라고 할 일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주중보다는 자리를 비워도
덜 눈치 보이니까. 간만에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쑥스러워 굳이 말로 대놓고 표현을 안 하고 있을 뿐, 지금 유진의 얼굴은 대놓고 기뻐 보였다. 들뜬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제니퍼와 토니 역시 흐뭇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됐네요. 엄청 간만인 거죠?”


“그래서 바쁜 와중에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그런 후배들을 향해 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의 한 달 만이라서. 어쨌든 최대한 시간 비울 수 있도록 주중에 최대한 많이 해 두려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잠은 주무시면서 하세요.”

“제니퍼의 말이 맞아요.”

“당연하지. 이러다 만약 아프기라도 하면 못 만날 수도 있는걸.”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제니퍼와 토니에게 잘 알고 있다며 유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때였다. 문득 유진의
핸드폰이 알람이 울렸다.

“미스터 김?”

“무슨 일이세요?”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는 유진의 기색이 갑자기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제니퍼도 토니도 깜짝 놀랐지만, 그럴
줄 알고도 유진은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게, 태주 씨한테서 메시지가 왔는데.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 보는 거 힘들 거 같다고.”

그리고 겨우 돌아온 유진의 대답을 들은 제니퍼도 토니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 *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월요일이지만 토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씩씩했다. 연구실의 선배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고 들어오던 그는,
마지막으로 제 바로 옆자리의 유진에게 시선을 향했다.

토니가 유진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연구실의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정도의 호감은 품고
있었다. 막 그와 뭘 어떻게 하겠다기보다 그냥 옆에 있으면 눈이 즐겁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나 할까?

오늘은 또 얼마나 예쁘실까 생각하며 그가 두근두근 인사를 건넬 때였다.

“미스터 김도 안녕하…….”

유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제대로 문장을 끝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며칠 밤을 새운 건지 다크서클이 심한 것도 심한 거지만, 눈빛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바로 해치우겠다는 듯


이글이글 호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다크서클조차 미모를 가리지 못하고 있기는 했으나, 눈빛이 무시무시한
건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니는 다급히 반대편 옆자리의 제니퍼에게로 몸을 숙였다.

“헉, 대체 무슨 일이래요?”

“몰라? 주말에 남편 보기로 한 거 취소됐었잖아.”

“아…….”

하지만 제니퍼의 한 마디에 그 역시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꾹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유진은 지금 매우 우울했다. 누구나 짐작하는 대로, 지난 주말 태주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그의 촬영


스케줄 문제로 취소된 탓이었다.

간만에 둘 다 휴일이 맞아 여유롭게 만날 수 있던 기회였는데, 고대로 날려야 했다. 대신에 유진은 주말 내내


실험실에 틀어박혀 커다란 장비와 씨름하며 날밤을 새웠다. 이제부터는 거기서 뽑은 데이터와 씨름할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 쪽에서라도 찾아가 보고 싶었다. 태주라면 자신이 언제 가든 분명 반겨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어릴 때부터 배우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촬영장을 지켜본 기억이 많았다. 촬영 현장이란 주연
배우 혼자가 아니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많은 스태프가 협조해서 만들어 간다. 저 하나 때문에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주말이 지나갔으니 하는 말인데,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자신에 비해 태주는 별로 섭섭한 것
같지 않은 듯한 것도 못마땅했다. 물론 그도 좋아서 취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예정된 날짜에 결혼식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유진의 실험도 잘 진행되고 태주의 촬영도 기간 내에
무사히 끝나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꾸 그 시기가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유진은 약간, 아니 꽤나
스트레스를 느끼는 중이었다.

태주의 촬영이 자꾸 밀리는 것부터 일단 걱정이지만, 그 와중에 학교도 솔직히 만만치 않았다. 주말에 했던
실험도 결과부터가 엉망이었다.

이럴 때면 차라리 한 학기 더 쉴 걸 그랬다 싶으면서도, 그러면 복학했을 때 더 힘들었을 거라 어차피 답이 아닌


것은 유진도 알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는 반드시 복학하라고 했던 교수님의 마음은 이해가 갔다.

문제는 거기다 유진은 결혼식 준비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하겠다고
나선 일이었다. 지금 와서 못 하겠다고 중간에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기는 그의 성격상 쉽지 않았다.

“피로연 케이크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하지만 새로 온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혼자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예쁜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화면에는 딱 봐도 화사해 보이는 여러 종류의 결혼 케이크 사진들이 있었다. 웨딩 플래너는 정성스럽게 결혼


피로연 케이크 후보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정리한 파일을 메일에 첨부해 놓았다.

“지금 왜 내가 결혼식장에 무슨 케이크를 놓는지 그걸 결정하고 있어야 하지? 어차피 케이크 종류가 뭐든 맛만
있으면 다들 잘 먹을 거면서.”

가뜩이나 태주를 못 봐서 우울한데, 거기다 또 주말 내내 뽑은 데이터는 별로고, 그 엉망인 실험을 하느라 주말


내내 쉬지도 못하고 거의 밤새워서 피곤한데, 그 와중에 이런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데에
울컥하는 유진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일일이 직접 결정하겠다고 예전에 정한 쪽은 자신이었다. 어차피 대충 찍어서 답해도 전문가인


플래너가 알아서 잘 맞춰 줄 게 틀림없었다. 그걸 또 하겠다고 말한 이상 대충 넘기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말을 못 꺼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는 했다.

“제니퍼, 토니.”

“아, 네!”

“네, 미스터 김.”

갑자기 유진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에 제니퍼와 토니가 자세를 바로 했다. 유진은 심기가 한껏 불편해도
여전히 예쁘기만 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그래서 너희들은 무슨 케이크가 좋아? 만약에 결혼식에 갔을 때 말야.”

말은 귀찮다고 하면서도 일단은 성실하게 알아볼 작정인 듯했다.

“아, 저는 초코 케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케이크는 원래 다 맛있잖아요.”

해맑게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하는 토니의 어깨를 꾹 눌러 자리에 앉히며, 제니퍼가 유진을 위로했다.

“그렇지. 어차피 케이크는 다 맛있긴 한데.”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유진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질 때였다. 마침 라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안녕? 잘 지내고 있어? 오늘도 연구실에 음침하게 앉아 있으려나? 월요일이라고 또 기운 빠져서
골골대고 있는 건 아니지?

영상 통화도 아니고 핸드폰을 통해 목소리만 들려오는 건데도, 명랑한 에너지가 퐁퐁 솟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귀엽구나 하고 적당히 넘겼을 이런 통화가, 상황이 이래서 그런가 유진은 괜히 더 기운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지 않고, 최대한 태연한 척 꾸미며 답했다.

“월요일이 다 그렇지 뭐. 너야말로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이야?”

―그냥 오늘 스케줄이 좀 심하게 일찍 시작해서 오빠 생각이 났어. 요새 어때? 복학하니까 역시 바쁘지?

“뭐, 예전으로 돌아간 거지.”

―괜찮다고 말 안 하는 거 보니까 힘들긴 하구나.

하지만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이미 라라에게 다 들킨 다음이었다. 그래도 힘든 내색은 역시 하기 싫었기에


유진은 굳이 명확한 대답은 피한 채 살짝 말을 돌렸다.

“다들 잘 지내시지?”

말하기 좋아하는 라라답게 바로 긴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 역시 은퇴 번복한 거 알지? 오빠한테 배우인 남편이 생겨서 약간 경쟁의식 느끼나 봐. 지금 신작 때문에
맨날 미팅 다닌다더라. 나이도 있는데 아직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근데 각 잡고 옷 입고
머리하니까 또 한창때 얼굴이 좀 보이긴 하더라고. 클라스 어디 안 가. 아, 노아도 새 영화 준비하느라 바빠.
둘이 세트로 그러고 있으니까 엄마랑 케이티도 덩달아 바빠졌다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유진이 잠시 방심하는 사이, 화살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김태주 씨도 잘 지내는 거 같던데? 뉴스 보니까 이쪽에서 영화 촬영도 시작했다며? 엄청 열렬한 기세로 촬영


중인 거 같더라. 하여튼 그 영화 기대작이라고 주변에서 아주 난리야, 난리. 촬영 컷 한두 개 떴는데 실시간
트렌드 장난 아니었잖아.

“다들 관심 가져주면 고마운 일이지, 뭐. 그것 때문에 바…….”

바빠서 지난 주말 못 만나는 바람에 섭섭하고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유진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바?

“아냐, 말이 잘못 나온 거야.

―흠, 그렇구나. 그래서 오늘도 하루 종일 우중충하게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거야?

“그냥 평소대로 일하는 거뿐이야. 연구실인 건 맞고. 내가 다른 데 갈 일이 뭐 있겠어.”

한숨을 내쉬는 유진에게 라라가 마치 제 일처럼 명랑하게 반박했다.

―왜? 가끔 학회나 이런 걸로 자리 비울 때도 있잖아. 실험한다고 실험실에 처박힐 때도 있고.

실험 이야기를 들은 유진의 한숨이 더 커졌다.

“실험은 주말 내내 했고 오늘은 그 데이터 분석 때문에 계속 연구실에 있어야 해. 근데 그건 왜?”

―응? 으응…… 쉬엄쉬엄 쉬어 가면서 하라고.

“뭐야, 싱겁긴.”

실제로 라라에게는 살짝 꿍꿍이가 있었지만, 유진은 본인의 일로 머리가 꽉 차 미처 거기까지 깨닫지 못했다.

―김태주 씨 촬영 끝나는 대로, 오빠 학기도 끝나면 바로 결혼식이지? 나도 노아도 케이티도 가족들 모두


기대하고 있을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유진은 난감한 기분에 살짝 버벅대고 말았다.


“으응, 그렇지.”

그때 전화기 반대쪽에서 누군가 라라를 부르는 기척이 났다.

―앗, 나 이만 가 봐야 한다. 그럼 오빠도 잘 지내.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가족끼리 늘 하는 사랑한다는 인사와 함께 통화는 끝났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유진은 괜히 더 한숨이 났다. 이유야 물론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태주 때문이다.

“정신 차리자. 라라가 잘못한 건 없어. 할 일도 많고.”

유진은 도리도리 크게 고개를 젓고서, 모니터를 향해 다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유진은 주변에 무거운 공기를 흩뿌리며
하루를 보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자신에게 작은 쿠키나 초콜릿, 사탕 따위를 건네주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은 했다. 딱히 유진이
주변에 뭘 했다기보다, 다들 그가 우울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약간의 당분이 유진의 기분에
조금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슬슬 시간은 흘러 벌써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연구실 전체가 오늘도 제시간에 집에 가긴 글렀구나


포기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미스터 김! 손님이에요.”

전달하는 토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들떠 있었지만, 한창 복잡한 연산을 처리하느라 바쁜 유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는 신경 쓰지 않았던 쪽에 가까웠다.

“토니, 오늘 오기로 예약한 장비 업체면 나랑 상관없이 교수님께 바로 연결해 드리면 돼.”

“혹시 예약하지 않았으면 못 만나는 거야?”

그러나 이어지는 낮고 달콤한 목소리에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바로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컨트롤+s 키를


눌러서 저장한 건 어쩔 수 없는 대학원생의 본능이기는 했다.

유진은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지금 자신의 예상이 어긋났을 때, 조금이라도 덜 실망하고 싶다고


속으로 소원을 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거기 선 사람은 유진이 예상한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자신이 이 목소리를, 가을 아침의 숲 같은 시원한 페로몬을 헷갈릴 리가 없었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태주가 촬영장이 아닌 유진의 연구실에 서 있었다.

“태주 씨!”

그대로 자신의 품으로 달려드는 유진을 태주는 꼬옥 껴안아 주었다.


* * *

사실 주말 촬영 스케줄이 추가되었을 때, 굳이 유진에게 시시콜콜 말은 안 했지만 태주도 꽤나 낙담했었다.

장소 대여 문제로 원래 월요일로 예정되었던 촬영이 주말로 당겨진 것이었다. 안 그대로 주중 촬영이 밀리는
중이라 주말에 예정된 휴일이 가능할지 불투명해 걱정하던 중이었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태주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바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유진이 너무


대놓고 실망해서 자신까지 그런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섭섭한 마음은 일단 뒤로 미룬 채 사랑하는 귀여운 남편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태주 역시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 오면 좀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같은 나라에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만나기 쉬워질 거라고.

그러나 멀어 봐야 고작해서 서울 부산, 아니라도 제주 정도인 한국에 비해 미국의 땅덩이는 너무도 넓었다.
거기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 다 뺄 수 없는 자신의 일이 있었다. 특히 태주는 이번 촬영 때문에 미국까지 온 거라
책임감이 막중했다.

―무슨 소리예요? 최대한 빨리 다른 날짜를 잡아야죠!

덕분에 약간 자포자기한 태주의 생각에 바로 태클을 건 사람은 의외로 매니저인 재현이었다.

이번에 미국에서 촬영하는 동안 회사에서는 재현이 같이 가는 대신, 따로 현지 매니저를 고용했다. 영어 문제도


있었고, 체류가 길어지는 만큼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표면적인 이유였다.

실상 가장 큰 이유는 재현이 최근에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결혼하기로 했던 오래 사귄 애인과 별문제


없이 예정대로 최근에 식을 올렸다.

재현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갓 결혼한 새신랑을 몇 달이나 외국에 데리고 나올 수 없다고 태주 쪽에서 강하게
거절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 자신의 결혼 소동 때 본의 아니게 재현을 LA 에 장기체류하게 만드는 바람에
미안했다. 대신에 촬영 시작할 때 일주일, 끝날 즈음 일주일만 재현이 직접 와서 챙기기로 했다.

덕분에 지금 그는 한국에 돌아간 지 한참이었다. SNS 를 보면 신혼생활을 잘 보내고 있는 듯했다. 대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태주와 이렇게 통화로 해결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로 대화를 시작해도 결국 유진에 대한 화제로 흘러가 버렸다. 애초에 태주의 머릿속 지분
대부분을 유진이 차지하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재현은 진즉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 촬영 하루 빠지고 보러 갈까?”

지금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대놓고 지껄이는 걸 보면 이미 판단력이 많이 흐려진 게 분명하다고, 재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촬영을 빠지란 소리가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7 일 하루 24 시간 내내 촬영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아무리 이번 영화에서 형의 비중이 높다고 해도 다른 배우들 촬영하는 부분도 있긴 할 거구요.

“그건 그렇지.”

자신이 나서서 오지 말라고 했던 주제에, 태주는 벌써 재현과 입씨름하던 때가 그리웠다. 특히나 이렇게 유진과의
일이 답답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지금처럼 전화로도 이야기는 가능했지만, 역시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은 못했다.

결혼식과 관련해서는 태주는 재현의 조언을 많이 참고했다. 혼인 신고는 태주와 유진이 먼저 했지만, 예식과
관련해서는 그쪽이 선배였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절반 정도는 그러했다.

―유진 씨가 있는 지역이 형 촬영장에서 멀긴 하지만, 반나절 정도만 비어도 물리적으로 다녀올 수는 있어요.
제가 계산해 봤거든요. 물론 거기 머무르는 건 고작해야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되긴 하겠지만요.

“그건 상관없어.”

바로 돌아온 태주의 대답이 꽤나 단호해 재현을 웃음 짓게 했다.

―그나저나 유진 씨가 학생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저도 알 만한 그런 명문대 학생인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그냥


대학생도 아니고 박사과정 대학생이라면서요. 학생은 학생인데 엄청난 학생이네요. 원래라면 요 몇 년간 LA 에
거의 있지도 않았다는데, 형을 만날 운명이었나 봐요. 어떻게 그렇게 절묘하게 둘이 딱 타이밍 맞게 만나서
결혼까지 했대요.

하지만 그런 재현의 이야기에도 태주는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유진이 원해서 하는 공부니까 상관은 없는데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긴 힘든 게 속상해.”

―좋아요. 일단은 지금부터 언제 갈 수 있을지 계획을 잘 짜 보세요.

“알겠어.”

그리고 그런 재현의 조언을 바탕으로 태주는 지금 유진의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원래라면 월요일까지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주말 촬영 내내 최대한 NG 가 없도록 조절하며 감독과 조율한


결과 어떻게 일요일에 태주의 촬영분을 끝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겨우 반나절이 조금 넘는 짧은 여유 시간이었고 평소라면 휴식을 취하기에도 부족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소중했다. 남은 것은 한달음에 유진에게 날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무리해서 온 것이었지만, 자신을 발견하고 웃는 유진을 보자 힘든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왜 아무 말도 없이 온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그대로 자신의 품으로 달려드는 유진을 태주는 꼬옥 껴안아 주었다.

“나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올 수 있을지 확신을 못 했어. 주말처럼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왜?
와서 싫어?”

“그럴 리 없잖아요.”
마지막에 짓궂은 질문에 유진은 뾰로통 입을 내밀었다. 여전히 태주의 양팔 안에 안긴 채였다. 태주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그 입술에 쪽 입 맞추었다.

장소가 장소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깊은 키스를 나누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유진은 주변의 시선을 깨닫고
조금 멋쩍어하며 태주의 품에서 나왔다.

하지만 서로 껴안듯 한쪽 팔로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은 풀지 않았다. 얼마 만에 만났는데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너무 좋죠. 혹시 엇갈릴 뻔했을까 봐 그러죠.”

“실은 그래서 네가 오늘 연구실에 있을지 네 여동생에게 미리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

“라라에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간단히 사정 이야기하고 혹시 못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내가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살짝 떠봐 줄 수


없느냐고.”

그제야 유진은 오늘 오전에, 라라가 뜬금없이 전화를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중에 따로 추궁해 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미스터 김, 남편분 맞죠?”

조심스럽게 말을 건 사람은 제니퍼였다. 그녀의 옆에 토니도 서 있었다.

유진은 자신들이 둘이서만 알아듣도록 한국어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대답과 함께 뺨을 붉히는 유진을 향해, 제니퍼도 토니도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잘됐다. 주말에 못 보고 계속 우울해하셨잖아요.”

“바로 알아봤어요. 기사에서 본 거랑 얼굴이 똑같아서요. 소개해 주세요!”

마지막 토니의 부탁을 듣고서야 유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예상외로 친밀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태주가
조금 뻣뻣해진 것은 전혀 생각도 못 한 채였다. 유진은 웃으며 태주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태주 씨, 소개할게요. 저랑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는 후배들…….”

* * *
소개의 시작은 가볍게 바로 옆자리의 제니퍼와 토니였다.

하지만 곧 다른 학생들도 줄줄이 찾아왔다. 지금 연구실에 있는 모든 학생과 죄다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에는 교수님과 면담 아닌 면담까지 하게 된 태주였다.

태주는 자신이 너무 마음의 준비 없이 연구실을 찾은 것은 아닌가 살짝 후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유진이
졸업할 때까지 분명 계속 드나들게 될 텐데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 빈손으로 온 것만은 신경 쓰였다. 나중에 재현에게 부탁해서 뭔가 간식거리라도 택배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김태주 실물 잘생겼다.”

“그지, 그지.”

“영화 화면하고 똑같은데, 뭔가 분위기가 장난이 아냐.”

“우성 알파라서 그런가?”

그렇게 모두가 태주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한 데는 그가 유명한 배우라서기도 했지만, 다들 유진의 남편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잘 어울려.”

“엄청 보기 좋다.”

그리고 태주를 실제로 보니 듣던 것보다 더 잘생기고 멋있는 데다, 유진과 정말 사이 좋은 한 쌍이라는 사실에
매우 만족하며 돌아갔다.

정작 태주 혼자 그 사실을 모른 채 질투를 불태웠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유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야?”

실제로 유진이 그들을 소개하는 내내 그는 점점 더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유진에 대한 주변의 태도


때문이었다.

모두가 친절하고, 유진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감출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노골적인 의도가 담긴 건
아니었지만, 알파로서의 본능과 유진에 대한 독점욕으로 태주는 질투심이 점점 커졌다.

“응? 태주 씨, 뭐라 그랬어요?”

“아니, 친한 사람이 많구나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태주에게, 유진은 그 아래 깔린 의도는 생각도 못 한 듯 해맑게 웃어 보였다.

“태주 씨가 유명한 배우니까 궁금해서 다들 보러 왔나 봐요. 대부분은 저랑 인사만 하는 정도고, 자주


이야기하는 사이는 제일 먼저 인사한 제니퍼나 토니 정도예요. 자리가 바로 붙어 있거든요.”

그 말에 태주는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떻게 봐도 다들 유진에 대한 호의가 넘쳐나고 있는데 말이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자신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런 점이 또 귀엽고 어떨 때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가끔은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제일 친하다며 가장 먼저 소개한 남녀 후배 두 사람, 제니퍼와 토니가 베타라서 참을 수 있었다. 정작 그


두 사람을 향해서도 지금 태주는 대놓고 유진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듯, 대놓고 흉흉한 우성 알파의 압박감을
살벌하게 뿜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 둘하고 잘 지내야겠네.”

“네, 좋은 후배들이에요.”

귀신같이 티를 내지 않아서 정작 그 원인이 되는 유진만 전혀 몰랐다.

페로몬 컨트롤이 완벽한 우성 알파가 얼마나 집요하게 굴 수 있는지, 연구실의 모두가 본의 아니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반대로 태주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기분이 들뜨는 것이 빤히 보이는 유진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적어도 이 한 쌍의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에게 푹 빠졌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어차피 태주가 오기


전에도 유진은 그 사실을 감출 생각도 없기는 했다.

이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연구실에서의 소개 시간도 어찌어찌 무사히 끝이 나고, 유진은 태주를 제일
가까운 구내식당으로 데리고 왔다. 유진은 바쁘다 보니, 태주는 서둘러 오느라, 둘 다 이 시간이 되도록 점심을
거른 것이다.

“굳이 구내식당 말고 다른 데 가도 되는데.”

“네가 평소 종종 가는 식당이잖아. 가끔 이야기 들을 때마다 어떤지 늘 궁금했어.”

아쉬워하는 유진에게 태주는 아니라며 오히려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학교 구내식당이라 메뉴에는 별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뷔페식으로 되어 있어서 원하는 대로 골라 담을 수 있었다.

애매한 시간이라 가능한 메인 요리가 몇 없어서, 유진은 냉동으로 보이는 피자와 조금 불어 있는 스파게티를
담았다. 후식으로 커다란 브라우니와 과일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주는 메인은 지나치고 샐러드바에 들렀다. 풀에 삶은 달걀, 그릭 요거트밖에 없는 식판을 보고 유진은 놀랐다.

“그거만 먹고 어떻게 견디려고요? 실은 점심 먹고 온 거였어요?”

“지금 한창 촬영 중이라 관리해야 해.”

하지만 태주의 대답에 바로 감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자기 일에 관해서는 철저한 당신이 좋아요.”

두 사람은 곧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 입 제대로 먹기도 전에 주변에서 방해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식사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연구는 잘 되고 있나요?”

“미스터 김, 지난번 실험 말인데요.”


방해라는 것은 태주의 시선이고 실은 그저 인사였다. 단지 연구실에서부터 질투에 불타던 태주가 그렇게 넘길 수
없던 것뿐이었다. 거의 지나가는 사람마다 유진에게 말을 거는 듯한 분위기에 태주는 점점 더 심기가 불편해졌다.

정작 유진 쪽은 평소 항상 이랬던 만큼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밥 다 먹고 나면 태주랑 뭘 할지 생각하느라


들떠 있었다. 간만에 만났는데 1 분 1 초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일 때문에 바쁘기는 했지만, 바로 앞에 태주가 있었다. 나중에 며칠을 밤을 새워도 좋으니 지금은 일단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촬영 중에는 항상 그렇게 관리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카메라로 찍은 건 계속 남으니까, 최선의 모습을 담고 싶잖아?”

태주는 정말 맛없다는 얼굴로 야채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반쯤은 유진을 둘러싼 주변에 대한 괜한
질투심 덕에, 표정 관리가 힘들어서 더 표정이 심각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내일부터 바로 촬영 계속해야 해서, 오늘 마지막 비행기로 돌아가야 해.”

하지만 그 마지막 말은 유진으로서는 생각도 못 한 이야기였다.

“잠시만요.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 촬영은 겨우 뺐으니 내일은 촬영 들어가야지.”

“원래 주말 이틀 내내 쉬는 거였잖아요. 전 당연히 그게 뒤로 밀려서 오늘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평소였다면 태주도 유진의 기색이 좀 이상해진 것을 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유진에 대한


질투로 잠시 머리가 꽉 차, 그걸 티 내지 않는데 온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덕분에 유진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물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휴일은 진작에 없던 일로 됐잖아. 지난번에 이야기한 대로.”

마음보다 더 퉁명스럽게 대답이 튀어 나간 것은 역시 질투에 눈이 멀어서일 것이다. 여기까지 오고서 오히려


자신이 없어도 유진의 옆에는 사람이 넘쳐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고 만 것이다.

기분이 상한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이쪽도 말이 예쁘게 나오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얼마 만에 보는 건데 하룻밤도 같이 못 있어요?”

“나도 힘들게 온 건데 굳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기야?”

“나 역시 바쁜데 당신 왔다고 일도 잠깐 덮어 놓고 이렇게 나온 거거든요. 이러면 또 며칠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는데도요.”

“그거 꼭 내가 안 왔어야 했다는 말 같다?”

“태주 씨야말로 괜히 왔다고 하는 거 같은데요?”

말하고 나서 둘 다 이래서는 안 됐다고 아차 했다. 하지만 마침 타이밍 나쁘게 지나가는 또 다른 누군가가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제냐. 아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이름이 바뀌었던가? 아니, 이름 쪽은 똑같나? 무슨 점심을 지금 먹어?
아니면 이른 저녁인가?”

여유로운 인상에 금테 안경을 쓴, 똑똑해 보이는 남자였다. 나이는 태주와 비슷하거나 조금 위인 듯했다.

여태껏 인사를 나눈 학생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은 태주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리고 이어진 유진의 인사에 자신이 왜 그렇게 느꼈는지 깨달았다. 학생이 아니라 교수였던 것이다.

유진의 지도 교수는 나이 지긋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베타 할아버지였는데, 이쪽은 학생들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젊고 능력 있어 보이는 알파였다.

태주는 반사적으로 그를 견제했다. 위협적인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눈치챈 교수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근데 누구야? 우리 학생들 중에 이렇게 화려한 사람이 있었나?”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유진이 웃으며 두 사람을 서로 소개했다.

“교수님, 저희 남편이요. 태주 씨, 옆 연구실의 교수님이세요.”

“안녕하세요. 김태주입니다.”

“아, 그 배우라는! 죄송합니다. 제가 TV 를 잘 안 봐서요.”

TV 와 영화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 게 빤히 보여 태주도 적당히


웃으며 넘겼다.

유진은 교수와 잠시 태주가 보기에 시시덕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그것은 그의 편견이고, 실은 그냥


평범하게 실험과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었다.

저 교수라는 남자가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거기서 정색하고 내치면 그게 더 이상할 거라는 사실을
태주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그냥 유진이 저 교수와 이야기하는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애초에 유진이 누구랑 대화한다고 태주가 썩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다.

“맞다. 토니가 그러던데 웨딩 케이크 뭐가 좋냐고 물어봤다며? 난 그냥 하얀 스펀지케이크가 좋더라. 무난한 게


제일이지.”

그나마 방금까지는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길래 그나마 상관없다고 넘길 수 있었다. 갑자기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태주는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 남편분하고 같이 이야기하면 되는 건데 내가 쓸데없는 소릴 했나? 가족끼리 식 올리면 내가 참석할 일도


없을 테지만 말야.”

“아니에요! 의견은 여러 군데서 들으면 더 좋죠. 맞아요. 그냥 스펀지케이크가 평범하긴 하죠.”

“그래, 원래 결혼식 한 번 하려면 결정할 게 많더라.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식사 맛있게 해.”


교수는 올 때처럼 후다닥 사라졌다. 태주가 대놓고 위협한 것도 있지만, 원래 스타일이 그렇기도 해서 유진은
처음에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웨딩 케이크 이야기는 뭐야?”

테이블 맞은편에서 물어오는 태주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진 데서, 그제야 유진은 눈앞의 우성 알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기분 나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뭐긴, 결혼 준비 관련이죠.”

“바빠서 나 만날 시간도 아깝다면서, 결혼 준비를 핑계로 주변 사람들하고 웃으며 떠들 시간은 있는가 봐?”

“그런 식으로 말한 적 없어요. 그렇게 우길 거면 어차피 당신도 촬영 핑계로 하룻밤도 나랑 같이 안 있을


거잖아요?”

이미 그들 사이에 놓인 음식은 둘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식사를 하러 여기 왔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촬영은 어쩔 수 없잖아.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엮여있는 건데.”

한숨을 내쉬는 태주를 향해, 유진이 어이없어하며 쏘아붙였다.

“그럼 결혼식은 나 혼자 해요?”

“결혼식하고 결혼 준비는 다르잖아. 준비를 돕거나, 아예 대신해 줄 전문가들이 충분히 있을 거고.”

“내가 케이티한테 직접 하겠다고 한 거예요. 우리 결혼식이니까 일단 우리가 해 보겠다고요.”

“학교 일도 바쁜데 굳이 그래야 돼? 무리하지 말고 케이티에게 다시 넘겨.”

태주의 마지막 말에 유진의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굉장히 섭섭해 보이는 그 눈빛에 태주는 뭔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대단히 불길한 예감과 함께, 분명 이 비슷한 걸 언젠가 봤었다.

거기서 갑자기 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태주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난 그래도 우리 결혼식인데, 내가 직접 하나하나 챙겨서 준비하면 당신도 좋아해 줄 줄 알았어요.”

맞다. 그때 그 레스토랑에서였다.

유진과 결혼 발표를 하고 난 다음, 보여 주기 위한 데이트를 하기 위해 갔었다. 그날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정말 별것도 아닌 걸로 유진과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그 전부터 삐걱거리는 상태에서 중심도 없이 주변의 의견에 휘둘리듯 갔던 것부터 문제투성이였다. 그리고 분명
이다음은.

“…….”

역시 이거였다.

유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 뛰쳐나가고, 태주는 테이블에 멍하니 혼자 남았다. 우습게도 이 모습까지 기억과 같았다.
* * *

지난번보다 나은 점은 확실히 있었다. 태주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일어나 유진을 뒤쫓아갔다.

하지만 학교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바람에 이번에도 결국 유진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간신히 연구실로 돌아갔지만, 당연하게도 거기에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익은 작은
안경잡이 남자를 발견했다.

“토미!”

“토니입니다.”

갑자기 존경하는 선배의 남편에게 이름을 불려 토니는 긴장해 빠릿하게 대답했다.

“나 누군지 알죠?”

“물론입니다. 아까 인사드렸었잖아요.”

그 말대로 아까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뭣보다 아까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도 벌벌 떨릴 정도로 압박감을 뿜뿜 뿜어대는 바람에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실제로 우성 알파인 태주가 괜한 질투심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꽤나 견제를 해댔으니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제야 긴장을 풀고 바로 가까이서 제대로 바라본 알파는 역시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외모지만 쭉 뻗은 콧날이나 뺨의 직선,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입술 따위 하나하나의 요소가 모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우성 알파라서 그런지 키도 커서, 동양인은 키가 작다는 일반적인 편견을 멋지게 깨부수고 있었다. 토니 본인이
남성 평균보다 작아서 더 그렇기도 했다. 아까 유진과 나란히 있을 때도 확실히 둘 다 길쭉길쭉하게 키가 커서
보기 좋았다.

누가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의 조합이 아니랄까 봐 매우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베타인


토니로서는 그저 신기하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혹시 유진이 있을 만한 장소를 알 수 있을까요?”

근데 잠시 사이에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진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한껏 무거운
표정으로 태주가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네? 무슨 일이신데요? 같이 나가지 않으셨나요?”

“실은 사소하게 말다툼을 했어요.”


태주에 대답에 토니는 한 번 더 놀랐다. 대체 어쩌다 그랬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그리고 대체 토니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태주가 대놓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잘못해서요.”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그 태도에 토니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괜찮을 거 같아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반대로 태주는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에 당연히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토니는 괜히 멋쩍어서
손만 마구 흔들었다.

“사실은 평소 연구실에서 일하시면서, 선배님께서 남편분 좋아하시는 거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거든요.


그래서 잘못하셨다면 솔직하게 사과하면 분명히 받아주실 거 같다고 생각했는…… 데. 앗, 죄송합니다! 제가
혼자 너무 나댔나 봐요.”

실제로 토니는 유진이 태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옆자리에서 그냥 대충 보고만 있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연구실 중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유진이 태주와
만나지 못하게 됐을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런 유진이 진심으로 저 알파에게 화가 났을 리 없다고 토니는 확신했다. 정작 본인만 모르는 거 같아서, 그


마음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전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 보니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될 입장인지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유진이가 평소에도 날 좋아하는 게 그렇게 주변에서 다 알 정도라고요?”

다행히도 태주는 대놓고 기뻐했다.

“네! 연구실 사람들이면 누구나요!”

“그랬군요. 전 몰랐어요.”

“근데 요새 연구도 바쁜데 결혼식 준비까지 같이하시느라 많이 힘드신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최대한 자기 손으로
직접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시는 건, 역시나 그만큼 남편분이 소중해서 그런 거겠죠?”

토니의 맨 마지막 말이 태주의 뇌리에 박혔다. 유진이 바쁜 와중에 어떻게든 직접 결혼식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했구나.”

태주는 저도 모르게 한국어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제야 유진이 무엇 때문에 섭섭했는지 알 것 같았다.

힘든 중에도 둘을 위해서 애쓰던 유진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괜찮다고 안 해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태주는 자신의 배려가 부족했다고 진심으로 반성했다.
“그리고 미스터 김이면, 아마 이 시간이면…….”

토니는 태주에게 이런 오후 시간대에 유진이 갈 만한 장소 몇 군데를 알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 혹시 이 중에 없으면 다시 오세요. 연구실의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찾아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왠지 이미 어디 있는지 알 것 같거든요.”

돌아보는 미소가 싱그러워서 토니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히 그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 저 정도 얼굴을
눈앞에 뒀을 때 사람이라면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조건 반사였다.

태주는 바로 연구실을 달려 나갔다. 제 남편을 찾을 생각에 마음이 급한 듯했다.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 채, 토니는 마음속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했다.

* * *

토니가 말해준 여러 장소 중 태주는 전망대로 향했다.

고민 없이 태주는 이곳을 선택했다. 예전 LA 에서 유진과 처음으로 제대로 키스했던 장소가, 바로 천문대 앞의


전망대에서였기 때문이다.

대학 한쪽에 조금 외따로 나지막한 언덕 같은 산이 있고, 거기에 만들어진 공원 한쪽에 캠퍼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그렇게 높지 않아서 부지 전체를 보기에는 한참 부족했고, 그래서인지 전망대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어 인적이 거의 없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주변이 어스름하게 윤곽이 흐릿해지는 시간이었다. 쉽게


고백하지 못하는 고집 센 마음이 진심을 말하기에 딱 적당한 때인지도 몰랐다.

“유진아.”

태주의 부름에 유진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가가 조금 빨개서 태주는 마냥 마음이 아팠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너희 연구실 후배인 토니에게 물었어.”

“토니가요? 걔한테 직접 물어봤다고요? 당신이?

“그래, 한시라도 널 빨리 찾고 싶었으니까.”

그 대답에 유진이 정색했다.


“날 찾아서 뭘 어떡하려고요? 당신이 얼마나 잘난지 나한테 따지겠다?”

“아니, 사과하려고.”

하지만 돌아온 태주의 대답에 허를 찔린 듯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태주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배려심 없고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너같이 착하고 사랑스럽고 훌륭한 남편을 화가 나게 했는지,
내 입으로 너에게 직접 알려 주고 싶었어.”

“태주 씨.”

어느새 태주는 어느새 유진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있었다. 얼마나 진실한지 판단하고 싶다는 듯 유진이 그의
표정을 곰곰이 살폈다. 다시 자신을 향하는 반짝이는 그 눈빛이 그저 좋다고 생각하며, 태주는 천천히 유진의
양손을 맞잡았다.

“미안해,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

그 한마디에 유진이 바로 마음을 풀지는 않았다.

“어느 부분이요?”

“결혼식 준비 관련해서, 내가 너한테 힘들면 하지 말라고 쉽게 말해 버린 거.”

드디어 태주가 정답을 말했는지, 겨우 조금은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맞아요. 그래도 우리 결혼식인데, 난 내가 직접 준비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당신도 좋아해 줄


거라고요.”

이제 유진은 더 이상 화를 내기보다 가볍게 툴툴대고 있었다. 그런 유진의 어깨를 태주가 가볍게 토닥거렸다.

“그럼, 네가 하는 게 나도 당연히 좋지.”

“근데 왜 아까는 그렇게 말한 건데요?”

“그냥 네가 힘든 게 싫었어. 그걸 말하려고 한 건데,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함부로


말하는 바람에 널 기분 상하게 만든 거야.”

두 사람은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유진의 머리가 태주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졌다.

“맞아요. 다짜고짜 케이티한테 다시 넘기라고 한 건 진짜 당신이 심했어요. 내가 듣고 무슨 기분이었겠어요?”

“정말 잘못했어. 미안해.”

태주는 유진을 끌어안은 채 달콤하게 뺨을 쓰다듬었다. 유진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곧잘 쫑알쫑알 말을 이었다.

“나도 잘못했어요. 멀리서 힘들게 온 당신한테, 하룻밤도 같이 못 있는단 걸로 섭섭하다고 했잖아요.”

“이해해. 너도 나랑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바쁜 와중에 일부러 시간 내서 오는 바람에 바로 가야 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말해서 당신도 섭섭했죠?”


“아냐, 안 섭섭했어.”

유진이 가슴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태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거짓말하면 다 안다는 듯 짓궂게 웃었다.

“정말요?”

“아니, 솔직히 나도 조금은 섭섭하긴 했지.”

“그니까요. 여기 와서 혼자 생각해 보니까, 당신도 내가 그래서 말이 이쁘게 안 나왔다 싶더라고요. 나도


미안해요.”

거의 닿을 듯 말듯 둘의 입술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렇게 얼마 못 있는데도 굳이 무리해서 올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어요?”

유진이 태주의 목에 팔을 걸며 물었다. 눈동자가 유혹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응, 그 몇 시간이라도 널 보고 싶어서 일부러 왔어.”

“나도 사실 보기만 해도 좋은데, 무리해서 온 게 뻔히 보여서 더 미안해서 말이 심하게 나왔나 봐요.”

“나도 약간 보상 심리가 있었나 봐. 힘들게 왔으니까 그만큼 네가 좋아만 해 줄 거라고 기대했던 거 같아. 그걸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건데.”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끈적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미 서로의 존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어, 그러고 있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더 깊은 행위를 원하며 몸이 달아올랐다. 알파와 오메가의 진한 페로몬이 둘 사이를 한가득
채웠다.

솔직히 더 뻣뻣하게 긴장한 쪽은 실은 태주였다. 사랑하는 오메가의 달콤한 페로몬에 그는 온통 어질어질했다.


다리 사이는 아까부터 계속 준비 완료 상태였다.

“이런, 너무 하고 싶은데.”

결국 참지 못하고 태주는 한숨처럼 중얼거리고 말았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출발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지금으로선 여유롭게 숙박업소를 찾거나, 유진의 집으로 이동할 시간 같은 건 없는데 말이다.

그 말이 섹스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챌 정도로 순진한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유진의 얼굴이 바로


빨개지며 슬쩍 제 허리를 뒤로 빼는 것만 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역시 안 되는 거라고 이성적으로 납득하며 태주가 한숨과 함께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라앉히려고 애쓸 때였다.


물론 이렇게 유진을 껴안은 상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하면 되죠.”

뭐, 뭐를? 어디서? 어떻게?

그러나 유진이 새빨개진 얼굴로 이렇게 대꾸해 와, 태주는 살짝 혼란해졌다.


* * *

바로 옆 주차장 제일 구석에 유진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 이 시간쯤에는 이 근처로 아무도 안 와요. 그래서 원래는 잠깐 머리 식히고 싶을 때 여기로 오거든요.”

“어, 그, 그래?”

그 말대로 넓은 야외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가 군데군데 있을 뿐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유진은 주머니에서 스마트


키를 꺼내 차의 시동을 켰다. 적당히 여기저기 낡고 찌그러진 평범한 중형 세단이었다.

방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아무도 안 온다는 장소로 데려오다니, 솔직히 태주가 애도 아니고 뉘앙스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멋대로 기대해도 좋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태주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듯 유진이 그의 손목을 꾸욱 붙들었다.

“그래서, 여기면 해도 안 들키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뭘? 이라는 질문을 태주가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유진이 차 문을 열고 태주를 밀어 넣듯 조수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위로 올라타서는 태주에게로 몸을 붙여왔다.

차 문을 닫자 밀폐된 공간만큼 페로몬이 확 짙어졌다. 코를 찌르는 크림과 연유의 달콤한 향기가 태주를
흥분시켰다. 유진 역시 태주의 페로몬으로 한창 흥분한 상태였다. 바깥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져 있어서 윤곽밖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왠지 더 야하다고 태주는 생각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올려다보는 유진의 하얀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쯤은 흥분으로 반쯤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부부가 되고 나서 많이 익숙해졌다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나 아직 창피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자신 나름대로 최대한 적극적으로 나오는 유진이 태주는 마냥 예쁘고 야했다.

드디어 겨우 용기를 낸 듯 유진이 태주에게 입술을 마주쳐 왔다. 하지만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에는 실수로
살짝 턱과 가까운 부분에 입술이 부딪히고 말았다. 태주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런 유진의 입술이 제 입술과
겹치도록 했다.

“으응…….”

이제 유진은 조심스럽게 태주의 입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고 있었다. 점막과 점막이 닿을 때마다 덥고 습한


감촉에 유진이 제 품 안에서 움찔대는 것을 태주도 느낄 수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오는 유진 때문에, 태주는 아까부터 다리 사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응, 흣!”
갑자기 유진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대로 태주가 혀를 잡아뽑을 기세로 유진의 입안을 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도를 바꾸며 거칠게 혀와 혀가 뒤엉켰다. 태주가 혀를 움직여 까칠한 입천장을 핥아 내리자 그의 양팔 안쪽에서
유진의 몸이 떨렸다.

끌어안긴 상태에서 유진의 손이 머뭇머뭇 태주의 바지춤을 향했다. 어차피 태주의 성기는 아까부터 준비 완료
상태였다. 원래도 우성 알파답게 컸지만, 유진의 손이 옷 위를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도 금세 천 아래서도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낼 정도로 빳빳해졌다.

서로의 입술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태주도 지지 않겠다는 듯 옷 위에서 유진의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딱 쥐기 좋은 부드러운 살집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자, 키스하고 있던 입술이 가볍게 떨어지며 유진의 신음이 커졌다.

“흐응!”

얼굴과 얼굴은 여전히 가까운 채였다. 태주는 유진을 몸 전체로 덮치듯 제 품 안으로 가두며, 뜨거운 호흡을
턱에서 쇄골을 향해 미끄러트렸다. 유진이 당황하며 그를 말렸다.

“아, 흣. 안 돼요.”

“왜? 먼저 시작한 건 너야.”

태주가 입술을 제대로 떼지 않아 속삭일 때마다 닿아오는 숨결에 유진은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태주는 손으로는 거침없이 유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길고 단단한 손끝이 슬쩍슬쩍 골 사이로 미끄러지며, 얇은 천 위에서 엉덩이 사이 민감한 입구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흐응, 안 돼. 좋아…….”

참지 못하고 유진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목소리는 이미 달콤하게 녹아 있었다.

사실 유진이 자고 가는 게 아니었냐고 실망했을 때, 섹스를 못 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태주가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워낙에 이런 쪽에 늦된 유진인지라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애써 별거 아닌 척
넘겼었다.

유진 쪽에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차로 태주를 데려온 것부터 그랬지만


이후에도 제가 먼저 올라타지를 않나, 키스도 서툴지만 유진 쪽에서 먼저 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원해 오는 그 모습에 태주도 더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유진이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 쪽이 점점 더 태주에게 밀리게 되었다.

“읏, 으흥! 안 돼…….”

유진의 바지는 이미 거의 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허벅지에 어중간하게 걸려 오히려 그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태주는 속옷에서 꺼낸 발기한 유진의 성기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뒤쪽 엉덩이골 사이로도 손을 넣을 듯 말듯


자극하기 시작했다.
“흣, 흑, 흐응.”

능숙한 손놀림에 유진은 거의 녹아내렸다.

정작 태주 쪽은 바지 지퍼조차 제대로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다리 사이에서 커다랗게 텐트를 친 바지가 답답해


보일 지경이었지만, 유진을 애무하느라 바빠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반응이 빠른 걸 보면 간만이지? 일단 한 번 뺄까?”

“싫어, 같이…….”

그렇게 조르는 유진은 귀여웠지만, 태주는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 말대로 어서 사정이라도 하라는
것처럼, 이미 축축하게 젖은 성기의 끝을 좀 더 집중적으로 자극할 뿐이었다.

하지만 유진도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는 자신의 자동차였다.

태주에게 끌어안긴 채 유진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카시트 옆쪽의 레버를 당겼다.

“응?”

그들이 앉아 있던 조수석 의자 등받이가 갑자기 휙 뒤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몸이 뒤로 넘어가며 태주가 살짝


방심하고 말았다. 끌어안고 있던 팔에도 살짝 힘이 풀렸다.

유진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벗겨진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걸리적거리기만 하던 제 바지를 속옷과


한꺼번에 휙 벗어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앉은 상태에서 몸의 방향을 뒤집어 태주에게 등을 보였다. 하필이면 배
위에 걸터앉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태주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

마침 시간이 됐는지 바깥에서 팟 하고 가로등이 켜졌다. 해 질 녘의 어둠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탓에 너무


눈부셨다.

밖에서는 어두운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을 테지만, 반대로 안에 있는 태주는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제 위에


올라탄 유진의 윤곽을 좀 더 확실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아직 상의는 입고 있었지만, 셔츠가 등 쪽까지 걷어
올려져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어서 괜히 더 야하기만 했다.

그대로 유진이 태주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살짝 위로 들렸다. 덕분에 엉덩이 사이
안쪽의 은밀한 부분이 드러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엿보이자, 태주는 반사적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찌익. 조용한 가운데 유진이 입으로 태주의 바지 지퍼 내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겨우 답답한 바지 안에서 벗어난
발기한 성기가 배꼽을 향해 튀어 올랐다.

“윽.”

유진이 태주의 성기를 덥석 입에 물어, 태주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유진의 구음은 꽤나 서툴러, 입으로 하는 것보다 눈앞의 시각적 자극 쪽이 오히려 태주의 흥분을 더
북돋울 정도였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뺨이 입 안에 머금은 성기 때문에 한쪽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집중이라도 했는지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든 채, 뺨에 흘러내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성가신 듯 귀 뒤로 쓸어 넘기는 하얀 손가락이
나긋했다.

희고 동그란 엉덩이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데, 정작 태주에게는 애매하게 멀어 입으로 직접 자극해
줄 수가 없었다. 대신이라면 이상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어 그 하얀 엉덩이를 꾸욱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살결이 손가락이 누르는 대로 자국을 만들었다.

“흑.”

예상치 못했다는 듯 유진의 입이 멈추었다. 태주의 커다란 성기는 아직 다 발기하기도 전이건만 좁은 입에는 쉬이
다 들어가지지가 않았다.

태주는 주무르던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은밀한 입구 주변을 손끝으로 지분거렸다.


여태까지 몇 번이고 자신을 머금었던 바로 그 구멍이었다.

흉기처럼 커다란 태주의 성기를 무리 없이 머금을 수 있는 것이 거짓말처럼 지금 그곳은 꽉 다물려 있었다.


하지만 오메가답게 둘러싼 주름이 살짝 부푼 것처럼 오동통하게 부어 있었다.

이미 그 주름은 촉촉하게 젖은 채였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안에서 배어 나온 오메가의 애액이었다.


사랑하는 알파의 곁에서 자연스럽게 몸이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다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태주는 일부러 짓궂게 그 근처를 노골적으로 만졌다. 누르듯 슬쩍 꽉 조인 주름을 벌리자,
투명한 액체가 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핑크빛의 구멍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모습이 야했다.

“으흣.”

유진이 여전히 태주의 성기를 입에 물고서, 그러지 말라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성기가 버거웠는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흥분으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태주는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손가락을 꾸욱 밀어 넣었다.

“아, 그만. 할 수가 없잖아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유진이 고개를 들며 눈을 흘겼다. 좁은 입에서 튀어나온 태주의 크고 단단한 성기가 그런


유진의 뺨에 문질러지는 모습이 도착적이었다.

사실 지금 어떻게 할지 궁금해 한동안 유진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애초에 이 자세를 원했던 쪽도
유진이었다. 하지만 귀여웠기 때문에 일단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고,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시각적으로
야해서 그것만으로도 태주는 흥분하고 말았다.

야한데 순진하고 거기에다 예쁘고 귀엽기까지 하니 그대로 잡아먹어 버리고 싶은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만져져 입으로 잘 못 하겠다고 화내는 유진의 모습조차, 태주에게는 달아오르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었다.

“아?”

덕분에 태주의 성기가 훅 더 커져 유진이 움찔하는데, 태주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엉덩이를 철썩 쳤다.

“흑!”

유진은 신음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픔보다 달콤함이 더 진하게 섞여 있었다. 다리 사이의 성기는 더 빳빳해지고
뒤쪽 엉덩이 구멍은 더 축축해졌을 뿐이었다. 그는 움찔움찔 몸을 떨며, 촉촉하게 젖은 눈을 하고 태주를
돌아보았다.

제 손길에 명백히 느끼는 유진을 보는 태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왜? 너도 원하잖아?”

솔직히 그 말대로다. 실제로 유진은 지금 태주의 손길에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그렇다고 인정하기에는, 태주 역시 분명 흥분하고 있으면서 혼자 여유로운 척하는 점이 유진은


괜히 얄미웠다. 이미 한계 이상으로 발기해 있는 그의 다리 사이 성기만 봐도 다 보이는데 말이다.

“언제까지 혼자 그렇게 여유만만할 수 있을지 보자고요.”

태주에게 등을 보인 채 엉덩이만 내민 자세 그대로 유진이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그 엉덩이의 하얀 살결에 자신의 손자국이 옅게 보이는 것이 태주에게는 괜히 도착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야한


광경에 움찔하는데, 유진이 갑자기 허리를 들었다. 그 손에 들린 물건을 본 태주가 당황했다.

“너, 그거.”

“네, 태주 씨 바지에서 빌렸어요. 이런 걸 넣어 다니다니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그것은 태주의 바지에서 꺼낸 콘돔이었다. 물론 태주가 그걸 챙겨온 이유는 뻔했다.

“나도 기대했단 말야. 널 만나는데 어쩔 수 없잖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더라도 말야.”

“걱정 말아요. 나도 기대했어요.”

“잠깐만, 유진아.”

그래도 유진이 그 예쁜 손으로 바로 콘돔의 껍질을 벗기는 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콘돔을 태주가 아니라 자신의 성기로 가져갔다. 사이즈가 커서 조금 애매했지만 어떻게 씌울 수는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나한테 안 씌우고.”

“싫어요. 오늘은 내 안에다 직접 하라고요.”

“그럼 그건…….”

“이건 자동차를 더럽히기 싫어서 한 거고요.”

콘돔을 씌운 제 성기를 가리키며 유진이 배시시 웃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차를 더럽히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할 터였다.

그대로 유진이 아까부터 한껏 발기한 태주의 성기의 뿌리를 쥐었다. 태주는 솔직히 할 말이 많았지만, 급소를
붙잡힌 탓이 쉬이 반항하지 못했다. 유진이 그런 태주를 향해 고개만 돌려 시선을 맞추며, 눈을 반으로 접어
야하게 웃었다.

“걱정 말아요. 안전한 날이니까.”


어차피 남성 오메가는 자신이 히트거나, 상대 알파가 러트가 아닌 이상 임신 확률이 거의 제로였다. 유진의 말이
거의 말장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태주는 너무 흥분해 아랫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덕분인지 제 눈앞에서 부피를 더하는 태주의 성기를 보고, 유진이 순수하게 놀라움에 감탄했다.

“아, 더 커졌다. 어떻게 더 커질 게 남았어요?”

“유진아, 너…….”

태주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조금 쉬어 있었다. 유진이 자세를 바로 하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제 넣을게요. 흐읏!”

그리고 태주에게 주도권을 주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그에게 등을 향한 채 엉덩이를 내렸다.

지나치게 야한 광경에 태주는 숨을 들이켰다. 좁은 구멍의 주름이 벌어지며 커다란 성기가 파고드는 모습이
그대로 다 보였기 때문이다. 체중만큼 자연스럽게 삽입이 깊어지며, 유진의 안에서 배어 나온 애액이 매끄럽게
삽입을 도왔다.

“아, 흑…… 너무 커…….”

하지만 뿌리까지 완전히 들어가자, 압박감에 유진이 달콤한 숨을 내뱉었다. 호기롭게 제 쪽에서 허리를 내리는
것까지 좋았지만, 흉기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한 우성 알파의 성기는 확실히 버거웠던 것이다.

“흐으.”

유진은 꿰뚫린 채 어쩔 줄 모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한껏 긴장한 등줄기는 마냥 아픔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아픔보다는 압박감과 둔통, 그에 따르는 쾌감이었다. 어차피 태주의 눈에는 뻔히 다 보였다.

“언제까지 혼자 그렇게 여유만만할 수 있을지 본다며?”

“할 거예요. 자, 잠시만 익숙하게, 흐응.”

유진은 입으로는 기세 좋게 이렇게 받아치면서도, 제 안의 태주가 너무 커서 쉬이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너무 느껴서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평소와 다른 체위에 조금 다른 방향으로 찔러와
새롭게 더 자극적이었다.

태주는 뒤에서 그런 유진의 모습을 흐뭇하게 실컷 감상했다. 하지만 곧 참기 힘들어졌다. 사실 유진이 올라타기
전부터 한껏 흥분한 상태기는 했다.

정확히는 아까 연구실에서 유진을 보자마자 이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그를 볼 때면 항상 머리


한구석에서는 이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정말 보기 좋긴 한데. 유진아, 나도 슬슬 한계라서.”

그리고 태주는 유진과 이어진 채 상체를 일으켰다. 어지간한 코어 근육으로는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이제는 마치
유진이 태주에게 안긴 채 그를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였다.

“앗, 흐응!”
갑자기 안쪽에서 각도가 변하자, 지나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유진이 사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액은 미리
씌워둔 콘돔에 가로막혀 주변으로 튀지 않았다.

하지만 여운은 무슨 제대로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태주가 다시 거칠게 유진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너무, 강……. 흑.”

두 사람의 이어짐 틈에서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야한 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과격한


움직임에 유진은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태주가 움직이는 대로 유진의 허리도 흔들렸다. 아니 온몸이 통통 튀어 오르는 듯했다. 특히나 거칠게 쳐올리면
그대로 안쪽부터 허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으응, 응…….”

유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도 한결 달콤해져 있었다. 성기도 다시 발기하기 시작했다. 정작 본인은
지금 자신이 어쩌고 있는지 거의 자각이 없는 듯했다.

“하아, 태주, 씨…… 흐응.”

“제길!”

태주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대로 유진을 목덜미를 물어뜯듯이 빨아당기는 모습은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그의 오메가 페로몬에 완벽히 잠식되어 반쯤 이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정확한 표현인지도
몰랐다.

흥분한 두 사람이 좁은 조수석 위에서 뒤엉켰다. 과격할 정도로 거친 움직임에 자동차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밖에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면 꽤 티가 났을지도 몰랐다.

유진은 제발 평소 늘 그렇듯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조차 초반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태주는 한 번 거의 뺐다가 단번에 유진의 안으로 거칠게 자신을 박아 넣었다. 어느새 자세가 바뀌어서 유진이
태주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덕분에 태주는 더 안정적으로 유진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응, 너무. 흑.”

이제 유진은 태주의 움직임에 맞춰 그가 밀어붙이는 대로 온몸 전신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조금 전


태주의 위로 올라타던 기세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달콤한 숨을 내뱉느라 바빠, 그 사실을 깨달을
여유도 없어 보였다.

“하아, 태주 씨.”

익숙하게 태주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유진은 하아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지나친 흥분에 회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긴 속눈썹에 고인 물방울이 눈을 깜박이면 그대로 뺨으로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느껴, 유진아? 좋아?”

“아, 좋아. 좋아요…… . 더어, 더…… 태주 씨!”


태주의 성기가 거칠게 유진의 내벽을 희롱했다. 이어진 아래에서 유진의 애액과 태주의 쿠퍼액이 뒤섞여 거품이
만들어지는 듯했다.

유진은 마치 제 안이 노글노글 녹아 없어지는 거 같다고 생각하며 태주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안도 밖도 할 것 없이 온통 태주와 하나로 합쳐지고 싶다는 기세였다.

자신의 위에서 흔들리는 태주의 숨결이 좋았다. 뜨거운 만큼 자신을 원해 오는 것만 같았다. 내벽을 꿰뚫을
기세로 아래를 파고드는 커다란 성기만큼이나 열렬히 자신을 원해 오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사정할 것 같았다. 사실 이미 너무 흥분해 사정을 하고 말고가 중요하지 않은 상태기는 했다.


온몸 어디랄 것 없이 발끝까지 흥분으로 저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주의 숨이 한결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역시 절정이 멀지 않은 거였다.

“태주 씨, 내 안에, 안에다 해줘요.”

유진은 충동적으로 태주의 허리에 제 다리를 감으며 노골적으로 보챘다. 그 사랑스러운 오메가를 알파가 못
견디겠다는 듯 끌어안았다.

“하, 넌, 진짜.”

이미 한참 전에 한계를 넘긴 듯한 성기가 사정하는 것과 함께였다. 태주의 정액을 제 안에서 느끼며, 거의


동시에 유진의 성기도 처음보다 한껏 묽어진 정액을 토했다.

* * *

섹스를 끝낸 두 사람이 여운을 음미하듯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유진이 태주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였다. 중형
승용차의 조수석은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성인 남성 둘이 같이 앉기에는 확실히 너무 좁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유진은 하의만 벗었고, 태주는 한술 더 떠 지퍼만 내린 상태였다. 둘 다 그 정도만 옷이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더더욱 방금 그들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알리는 것 같아, 다 벗은 것보다 어딘가 더 노골적이었다.

자신이 올라탄 덕에 형편없이 구겨지고 뭔지 알면 큰일 날 듯한 얼룩까지 있는 태주의 셔츠를 보며, 유진은 차


트렁크에 갈아입을 만한 여분의 옷이 있는지를 멍하니 생각했다.

그나마 아까 제게 콘돔을 끼워두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훨씬 더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 뻔했다. 거기까지 떠올리고서야 유진은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뒤늦게 얼굴이 새빨개졌다.

“와, 내가 미쳤나 봐요.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말에는 자신이 분위기를 타고 태주에게 적극적으로 굴었던 것, 학교인데 야외나 다름없는 차에서 섹스한 것,
그 와중에 결국 마지막에는 태주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 마구 당한 것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왜? 난 좋았는데.”

태주는 그런 유진의 생각을 다 읽고 있으면서 즐거웠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유진의 생각을 읽고 있어서 더
즐거운지도 몰랐다. 그로서는 화해도 하고 섹스도 했으니 딱히 나쁠 것이 없기도 했다.

그걸 깨닫자 유진은 더 부끄러워, 자신과 달리 여유가 넘치는 태주의 얼굴을 괜히 흘겨보았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 태주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핀 건 덤이다.

“빨리 촬영 다 끝내고 매일같이 올게.”

“거절할 거거든요! 나도 할 일이 많거든요!”

유진은 바로 반박했지만, 태주는 오히려 그의 허리에 감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

그대로 태주가 유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귀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는지 유진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아, 태주 씨…….”

솜털같이 부드러운 키스가 목덜미로 쇄골로 턱 끝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섹스가 계속되는 것 같은 감미로운
키스였다.

그때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체격에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 유진이 태주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어서 그렇게 자세를 바로 하니 거의 눈높이가
맞았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눈빛에 녹아내렸다.

유진이 마음을 정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주 씨, 나 결심했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구분하려고요. 결혼식은 과감하게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어요. 대신에 학교에 더 집중하게요. 그리고 당신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릴 거예요.”

“좋은 생각이야.”

태주도 동의한다는 듯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의 눈이 반으로 접히며 휘었다.

“그쵸?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결혼식 기대된다.”

“나도요.”

물론 키스를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맞닿을 뿐이었던 입술이 깊은 입맞춤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결국 태주가 아슬아슬 마지막 비행기를 놓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외전 완결>

할리우드의 휴일: 어느 우성 알파의 수상한 결혼

마리밍 장편소설

지은이 : 마리밍

발행인 : 권태완, 우천제

전자책 발행일 : 2023-03-30

정가 : 1,500 원

제공 : 파란달

주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31 길 38-9, 401 호

ISBN 979-11-404-6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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