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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마리밍 장편소설
목차
01. 후일담
01. 후일담
“그냥 괜히 이런 게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난 고기 많이 든 거.”
정작 눈은 도시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꿀 떨어지는 시선을 상대의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콧대가 얼마나 곧고
높은지 마스크가 얼굴 위에서 훌쩍 떠 있었다.
“좋아요.”
작은 쪽이 웃으면서 도시락 중 하나를 집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입가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눈길이 갔다. 거참 남자가 꽃같이 화사하게도 웃는다고 감탄하다 말고, 아르바이트생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키 큰 쪽, 김태주 아냐?’
잘생긴 얼굴을 아무리 가리고 있어도, 익숙한 목소리와 특유의 분위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말랐는데도 뼈대가
무슨 조각상 같고, 어깨가 넓어서 대충 걸친 카디건이 너무 잘 어울렸다. 거기다 작은 쪽이 ‘태주 씨’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공식 발표가 나오고 온 커뮤가 시끌벅적했고, 자신도 댓글을 달기도 했던 것 같은데 생업에 치여서 깜박 잊고
말았다. 스캔들은 무슨, 아무래도 옆에 있는 사람은 갓 결혼한 그의 오메가 남편인 듯했다.
기사에서는 결혼 상대방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김태주랑 갑자기 결혼할 정도니 평범하지는 않겠다고
생각은 했다. 확실히 실물을 보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나저나 알파와 오메가인 건 맞췄다. 자신의 촉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에 아르바이트생이 괜히 뿌듯해할 때였다.
태주의 허락에 유진은 신이 나서 살랑살랑 과자 코너로 발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이 대놓고
웃고 있었다.
“데워 드릴까요?”
“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닭튀김과 막대가 끼워진 후랑크 소시지를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동안, 유진은 빠르게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그들이 많은 편의점 중 여기로 고른 이유는 내부에 앉을 자석이 많아서였다. 거기다 손님도 별로 없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사이 추가로 들어온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소중히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 유진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그 앞에는 방금
산 음식들이 가득히 놓여 있었다. 아침에 편의점에 가서도 커피 하나 사 들고 나온 설움을 이제야 푸는 그였다.
태주와 다시 이렇게 함께일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유진은 간만에 배고프다는 실감이 났다. 뭔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는 느낌이었다.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실은 자신이 그동안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나 싶어 유진은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먹어.”
“아, 고맙습니다.”
그런 유진에게 태주가 주먹밥의 비닐을 까서 건넸다. 그는 모자는 그대로 쓰고 있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마스크를 턱까지 내려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
유진은 대답 대신 턱으로 소시지를 가리켜 보였다. 태주는 열과 성을 다해 소시지에 케첩과 머스터드를 예쁘게 두
줄로 올렸다. 그리고 주먹밥 하나를 먹어도 예뻐 죽겠다는 눈빛을 감출 생각도 않는 채, 유진의 손에 자신이
직접 소스를 뿌린 그 소시지를 쥐여 주었다.
편의점에서 그 김태주의 시중을 받으며 그의 남편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다니, 자신도 인터넷에서 봤으면 안
믿었을 거다. 아니, 이제 유진은 도시락을 다 먹고 샌드위치를 먹는 중이었다.
역시 사인이라도 받을까? 아르바이트생은 아직 SNS 목격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같이
사진이라도 찍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냥 몰래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하는 건 좀 그래서 고민에 빠져들
때였다. 마침 편의점 문이 열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
“이 녀석, 김태주!”
* * *
몇 년 만이지만 태주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아버지?!”
한편,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가엾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김태주가 편의점에
왔다 정도의 이벤트와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재벌이라고 모두 유명하지는 않지만, 우진그룹의 김황조 회장은 달랐다.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김 회장의 실물이 인터넷에서 낄낄거리며 보던 웃긴 짤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실제는 키도 큰 데다,
본인 자체도 굉장히 카리스마가 넘치는 탓이었다. 비서인지 뭔지 뒤에 줄줄이 따르는 각 잡힌 양복 차림의
사람들에다, 그 주변을 둘러싼 경호원으로 보이는 검은 양복의 사람들도 있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거나 사인을 요청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이미 한참 전에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솔직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안 울고 제대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태주야, 우린 안 보이니?”
그의 형인 창주와 누나인 미주였다. 첫째인 창주는 회장의 후계자로서 경영수업 중이었고, 미주 역시 그런 오빠를
도우며 계열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창주는 아버지인 김 회장을 쏙 뺐고, 미주는 태주와 많이 닮은 미인이었다. 그나마 미주 쪽은 김 회장의 인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는 점은 삼 남매가 모두 같았다.
간만에 형제들을 보니 태주는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집을 나올 때 연예계 활동을 반대하던 것에 대한 마음의 앙금이 아직 남은 탓이었다.
―형!
―큰일 났어요. 회장님께서 형 어디 있는지 확인하셨거든요. 아마 좀 있으면 형 찾아갈 거 같은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네, 네에?!
안 그래도 재현은 한국에 가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몇 번이고 슬그머니 결혼도 했으니 회장님께 한 번
직접 말씀은 드려야 하지 않겠냐고 흘리기는 했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고도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냈을 정도니
말이다.
덕분에 태주는 이번에 한국으로 가면 아버지가 직접 움직일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당장 마주치는
것까지는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형, 형?
대충 상황을 파악한 태주는 황급히 전화부터 끊었다. 왜냐하면 김 회장이 유진에게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가 우리 막내 남편이냐.”
그러나 김 회장이 유진에게 이미 말을 걸어 버렸다. 태주는 유진이 놀라지는 않을지 혼자 긴장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놀라기는커녕 긴장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방긋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가 어르신 상대는 태주보다
유진 쪽이 백배는 더 능숙한 것이다.
“아, 아버님이라고?”
“아버지 괜찮으세요?”
“주치의를 부를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진은 김 회장의 그런 삐뚤어진 성격을 알지 못했다. 아니, 첫 만남인데 모르는 쪽이
당연한지도 몰랐다. 대신 해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뿐이었다. 또다시 ‘아버님’이라는 호칭은 덤이다.
그 웃는 얼굴이 또 꽃같이 예뻐서, 자신의 외모가 주변에 얼마나 인상적인지 유진도 조금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태주는 괜히 애가 탔다.
그러고 보면 아까 서울역에서 태주는 유진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이미 이야기했었다. 지금의 만남을
보아하니 유진은 확실히 그 사실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이 분명했다. LA 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생각해 보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긴 했다.
반대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완전히 졸아든 것 같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그녀와는 관계도 없는 일인데 괜히 자신들이 여기 편의점으로 오는 바람에 성가시게 만들었다 싶어 태주는 괜히
미안해졌다.
그러고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귈 때도 첫눈에 반해서 덜컥 결혼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속을 엄청 썩였다고 했지.
본의 아니게 자신과 유진의 결혼이 어느 정도 제 집안 내력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주는 괜히 뜨끔했다.
“좋습니다.”
“좋아?”
“흥, 그런데 싸우고 남편이 도망가는 바람에 비행기 타고 뒤쫓아 오기나 해?”
“오해입니다.”
“그럼요. 이미 다 풀었어요.”
그제야 태주는 자신이 망할 영감의 유도 신문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와중에 김 회장이 다정한 눈빛으로
잘했다며 쳐다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유진 쪽인 것이 웃겼다. 아니, 안 웃겼다. 물론 태주도 그냥 지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야말로 자식의 결혼이 처음도 아니고, 저와는 인연을 거의 끊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신경
쓰시는 게 저는 영 어색합니다만?”
“무슨 소리. 이미 두 번이나 자식의 결혼을 치렀으니, 귀여운 막내의 결혼에 더 기대가 크고 그런 게
아니겠느냐.”
살면서 단 한 번도 저 말대로 귀여운 취급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태주가 남매 중 막내이기는 했다. 그 사실을
굳이 여기서 강조하는 부분이 태주는 꽤나 못마땅했다.
동시에 태주는 이제야 자신과 유진이 형제 관계가 똑같이 2 남 1 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한 여자 형제가
중간인 점도 같았다. 유일한 다른 점은 자신은 막내이고, 유진은 맏이라는 부분이었다. 이 상황과는 별도로 별거
아닌 그 공통점이 괜히 태주를 기분 좋게 했다.
괜히 유진만 불편하겠다 싶어서 태주는 반대부터 했는데, 의외로 유진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좋아. 새 가족도 동의했으니, 오늘 저녁은 가족들 다 모여서 같이 먹기로 하자꾸나. 창주야, 미주야, 너희
가족들도 모두 다 오도록 해라.”
“갈비찜이요.”
“그래, 태주 넌 아직 모르겠구나. 아버지 최근에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로 봤어. 너 나오는 거 보려고.”
설마 진짜인가 믿기지 않아 태주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제 아버지를 살폈다. 김 회장이 뭐가 찔리는지 갑자기
안 어울리게 헛기침을 했다.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저 아버지가 자신의 연기 활동에 그렇게 관심을 가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집을
뛰쳐나오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아.”
그리고 태주는 문득 아버지의 눈가에 생긴 주름을 발견했다. 목소리와 행동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니 확실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훌쩍 세월이 느껴졌다.
어쩌면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제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태주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야말로 드디어 화해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 전화가.”
별다른 말도 못 하고 계속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이, 태주는 귀여웠다. 들리진 않아도 맞은편에서는
라라가 속사포처럼 쏘아붙이고 있다는 장면이 상상이 되었다.
제일 앞서 들어온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라라였다. 오늘도 화려한 의상에 화려한 머리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뒤로 여전히 무채색인 노아가 보였다. 그리고.
등 뒤로는 당연하다는 듯 수많은 인파를 거느린 채였다. 일행이 아니라 그냥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자연스럽게 뒤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이건 또 뭔 일이냐고?!”
* * *
처음 이야기가 나온 태주와 유진이나 형과 누나, 그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지막에 편의점으로 찾아온 유진의
가족들도 다 함께였다. 태주의 본가가 한국에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널찍한 저택이라 그 대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낮부터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계속 시달린 태주는 솔직히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본의 아니게
상견례에 결혼식과 피로연까지 한꺼번에 다 합쳐서 치른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장거리 비행기를 타기도 했고, 시차에다, 무엇보다 유진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신경이 곤두섰던 것도 있으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뜨는 인터넷 기사들도 문제였다. 그 난리를 쳤는데 소문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다. 서울역 주변은
항상 사람이 넘쳐나니 당연했고, 편의점에서도 처음부터 아르바이트생이 계속 같이 있었던 데다, 마지막에 유진의
아버지가 대놓고 사람들을 몰고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죠.
“뭐, 뭐가?”
다행인 부분과 안 다행인 부분이 뒤섞였다고 생각하며 괜히 찔끔하는 태주에게 재현이 태평하게 대꾸했다.
―유진 씨 아버님께서 마지막에 관심을 다 끌어 주셔서요. 덕분에 저희가 인터넷 여론 관리하기가 훨씬 쉬워졌어요.
서울역에서 형하고 유진 씨 둘이 난리 친 게 죄다 묻혔다니까요. 단순히 부부 싸움을 크게 하고 화해한 걸로
적당히 넘어가는 분위기예요. 거기다 제일 좋은 게 뭔지 아세요?
“뭔데?”
―그중에 이 결혼 자체가 가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여론은 하나도 없어요.
“그거 다행이네.”
―그죠, 그죠.
그래도 태주의 아버지가 우진그룹 회장이라는 소식은 안 묻히고 있다고 했다. 아니, 알고 보니 끼리끼리 결혼한
거라고 더 화제가 되고 있다나?
거기에 대해서는 언제든 한 번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닥친 거라고, 재현은 각오하고
있었다며 웃어넘겼다. 태주로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이번 일까지 끝나면 관련해서 일단락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내줘야겠다고 새삼 생각했다.
바깥 상황과 별도로 김 회장의 저택은 평화로웠다. 저녁 식사를 핑계로 했지만 이른 오후에 시작된 모임은 밤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회장은 자연스럽게 하루 묵고 가라고 했지만, 태주는 자기도 간만에 한국에 온 거라 오늘은 집에 가 봐야 한다고
극구 거절했다. 다행히 유진의 가족들은 외가로 간다고 해서 같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태주는 유진도 그들과 같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그가 제 옆으로 와서 그제야
안심했다.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는 태주를 유진이 오히려 위로했다. 태주는 사랑스러움에 그런 유진을 괜히 더 품에 꼬옥
껴안았다.
“여기가 태주 씨 집이에요?”
방 3 개짜리 아파트는 태주의 명성에 비하면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거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고
보안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혼자 살면서 일이 바빠서 거의 자러 들르기만 하다 보니 집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도 아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쓸데없이 크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과 같이 있으려면 더 큰 집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고집을 피워서라도 굳이 여기로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단둘이 있을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오지를 않나, 그 뒤에 유진의 가족들이 나타나지를 않나. 거기서 저녁을 먹자며 그대로
다 같이 본가로 들어갈 때, 태주는 거의 속으로 울었다. 왜냐면 그때 시간이 아직 이른 오후라서 저녁까지 꽤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태주가 냉장고 쪽을 향할 때였다. 그날 밤처럼 코코아라도 타 줄까 생각하니 입가에 저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때의 굿나잇 키스는 아직도 그에게는 마냥 귀여운 기억이었다.
“태주 씨.”
“유진아?”
태주의 겨드랑이 사이로 양팔을 넣어 허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키 차이도 있는 데다 답삭 붙들어 반쯤 매달린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제 겨우 둘만 됐어요.”
“유진아, 너.”
태주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유진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마주 보게 했다.
“응? 싫어요?”
“읏, 흐응!”
“응, 응, 으응…….”
태주는 유진을 제 품에 가두듯 으스러지듯 껴안았다. 유진의 팔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태주의 목을 감고 있었다.
결국 입술이 떨어졌을 때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쓰러지는 그를 태주가 가볍게 받쳐
안았다.
그 단단한 팔 안에서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는 유진은, 태주의 그 말이 싫으냐는 자신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방금 나눈 격렬한 키스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여전히 숨이 진정되지 못한 채 유진이 태주를 향해 수줍게 눈을 빛냈다. 흥분으로 하얀 얼굴에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실은 나도 그래요.”
“그 말 후회해도 난 몰라.”
태주의 장난스러운 말에 유진이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방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자, 아무것도 없이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사이즈의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어떨 때 사용하는지 용도가 너무도 명확한 공간이었다.
“침대밖에 없어요?”
“응, 여기 잘 때만 쓰니까.”
“그렇구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침대에 유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조금 전과 다르게 가볍게
성적인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태주 씨.”
당연하다는 것처럼 태주의 몸이 유진의 위로 겹쳐졌다. 넓은 어깨가 조명을 가리고, 그 윤곽이 제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만큼 유진의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유진의 스웨터가 벗겨져 나가고, 태주도 자연스럽게 제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날씬한 체형으로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편이지만 드러난 상체 어디에도 여백이라고는 없었다.
덕분에 유진은 태주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성난 어깨 근육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태주의
아래에서, 제 셔츠의 제일 아래 단추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응…….”
태주는 부드럽게 혀를 섞으며 천천히 유진의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유진의 손이 움찔움찔 그런 태주의 손에
겹쳤지만,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돕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흥분했어?”
그 말대로 유진의 속옷 앞쪽은 불룩한 채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유진은 괜히 부끄러워 허벅지를 오므렸지만,
이미 다 들통난 다음이었다. 바지를 벗은 상태라 가릴 방법이 없었다.
“당신도.”
“원하신다면.”
어쩌면 돌아온 대답이 과하게 여유롭다는 사실에서 유진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
태주가 지퍼를 내리는 순간, 유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커다란 성기가 속옷을 꿰뚫을 기세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색의 심플한 디자인이라 드러난 성기의 윤곽이 더 노골적이었다. 그렇다고 다 발기한 것도 아니었다.
“나 때문에?”
와중에 유진이 마지막 수줍음을 걷어내지 못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순진한 의문을 입에 올렸다.
“아니면 왜겠어?”
태주는 참지 못하고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그 뺨에 입 맞추었다. 하지만 속삭이는 목소리는 흥분으로 쉬어 있고,
살짝 찡그린 눈매가 대놓고 섹시했다.
“아.”
“유진아.”
그대로 태주가 유진의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단번에 내려버리고, 드러난 성기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가볍게 손으로 자극해 오자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유진이 끙끙 달뜬 숨을 내뱉었다.
“으응.”
“같이 한 번 뺄까?”
민감한 부분에 직접적으로 닿는 강렬한 자극에 유진이 자지러졌다. 무엇보다 스치는 태주의 성기가 너무도
뜨거웠다.
“아, 흣, 너무…….”
하지만 그걸로는 확실히 부족했다. 뭔가가 아쉬워 유진의 허리가 꼼지락거렸다. 지금 느끼는 것보다 좀 더 안쪽,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왜애……?”
갑자기 태주가 제 허벅지를 크게 벌려 와 유진이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태주는 손을 떼기보다 오히려 더
밀착하며 유진의 허벅지를 더 크게 벌리게 했다
갑작스러운 부끄러운 자세에 유진은 반사적으로 신음했지만, 그대로 태주가 그 위로 혀를 가져다 댔다.
“아, 흑, 안 돼.”
부끄러운 부위를 뜨거운 혀가 핥아 내리는 것만으로 유진은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쾌감이 그의 이성을 흐트러트렸다.
혀가 노골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참지 못하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유진의 손가락이 태주의 머리를 감쌌다.
한껏 달아오른 유진은 그것만으로도 자지러졌다. 발기한 앞쪽이 금방이라도 절정에 닿을 것처럼 움찔거렸다.
“흑, 안 돼.”
유진이 못 견디겠다는 고개를 저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반대로 성기는 오히려 더
빳빳해졌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젖은 구멍이 야하게 움찔거리는 모습에 태주는 다리 사이로 바로 자극이 왔다. 하지만 괜히 여유만만한
척 허세를 부렸다.
“그래, 맞아.”
“흑!”
한껏 발기해 흉흉한 기색을 뽐내는 커다란 성기가 아랫배를 빠듯하게 압박해 왔다. 아까 유진이 태주가 바지
지퍼를 내렸을 때 보고 놀랐던 것은, 지금과 비교하면 장난이었다.
“아파?”
실제로 그 말대로였다. 아까부터 태주를 기다리던 구멍은 좁으면서도 쑤걱쑤걱 잘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응…….”
“합쳐졌어.
“아, 태주 씨…….”
덕분에 그는 박은 것만으로 사정해 버릴 것 같은 감각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낮부터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데 적당히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너무 커요.”
이 와중에 그런 유진을 보는 태주의 성기가 그의 안에서 더 커졌다. 유진이 순수한 놀라움으로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더.”
태주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벽에 길을 들이듯 하자,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유진이 작게
신음했다.
“흐응, 응.”
위로는 귓가에 울리는 태주의 목소리에 아래를 채우는 그의 성기에 유진은 어쩔 줄을 몰랐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민한 몸과 달리, 경험이 부족해 아직 수줍음이 남아 있었다.
“하윽!”
돌기를 붙잡고 가볍게 손끝으로 비틀자 유진은 자지러졌다. 이미 온몸이 한껏 달아오른 그에게는 뭘 하든 그저
흥분을 북돋는 역할일 뿐이었다.
“좋아, 유진아?”
이어진 부분이 진작에 녹아내린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태주는 더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커다란 성기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이어진 부분에서 살 부딪히는 소리와 애액의 젖은 소리가 함께 울렸다.
“난 좋아.”
“흑, 으응!”
쾌감과 압박감이 뒤섞인 채 유진은 흐트러졌다. 어떻게 여기서 더 흥분하는 건지 막연히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랑해.”
* * *
“더는 못 해요.”
“응.”
확실히 어른스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자신은 항상 이런 식이기는 했다.
“아랫배가 꽉 찬 것 같아요.”
“……미안.”
그런 알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태주의 가슴에 고개를 비비고 좀 더 몸을 붙여 왔다. 크림과
연유의 달콤한 향 같은 페로몬이 여전히 태주를 두근거리게 했다.
“물론 나도 좋았어요.”
“졸리면 한숨 자.”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하지만 유진이 이렇게 대답해 살짝 놀랐다. 보아하니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 전 마지막으로 속삭인 듯했다. 곧
숨소리가 평화로워졌다.
태주는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 앞으로 평생을 바라보아도 절대 질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바빠서 매일같이 새벽에야 잠드는데, 피곤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커피를
내밀었다.
“설탕 둘, 밀크 듬뿍 맞죠?”
“아니야, 괜찮아.”
전통적으로는 한쪽의 성씨를 따르는 것이 보편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쪽 성씨를 합쳐서 사용하거나,
아예 바꾸지 않기도 했다. 딱히 규칙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필요성에 따라 정하거나, 아예 별 의미 없이 적당히
예뻐 보이는 조합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유진의 부모님들은 두 사람의 성씨를 같이 붙여서 사용했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이름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유진은 왠지 태주의 성씨를 사용하고 싶었다.
태주와의 결혼 소동이 일단락되고 양가의 허락을 받았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유진을 기다리는 것은 대학원
복학이었다. 지도 교수가 대놓고 전화로 이제 슬슬 연구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학위를 보장할 수 없을 거라는
으름장을 놓는 데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름 교수도 다 알고 일부러 연락한 것이기도 했다. 유진이 박사과정 중반이라 한참 바쁠 시기도 맞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에서 자신만 성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점은 대학원에 진학한 지금도 변함없었다.
그렇다고 동기나 선후배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모두 유진에게 친절했다.
아버지가 워낙에 유명인이라 과 전체의 관심을 끈 것은 맞았다. 공대답게 문화 예술이나 연예계 쪽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학과기는 했다. 하지만 더 화제가 된 쪽은 다른 부분이었는데.
‘실은 나 이번 신입생 환영회 때 데이트 신청해 보려고.’
‘너도? 실은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과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유진에게 고백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대신에 누구나 그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암묵적인 합의였다. 어차피 고백해도 거절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그걸로 모두가 평화를 얻게
되었다.
그 와중에 유진이 휴학 중 갑작스럽게 결혼했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상대가 또 전
세계에서 인지도도 높고 인기도 많은 미남 우성 알파 배우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로 다시
의견이 모아졌다. 현재는 연구실을 포함한 모두가 뒤에서 조용히 부부의 행복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의외로 결혼 소식과 함께 전해진, 유진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에는 대부분 역시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이기도 했다. 애초에 신입생 시절 베타라는 사실에 오히려 모두가 놀랐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커피를 마시는 유진을 지켜보는 연구실 동료들의 마음은 간질간질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방금도
그저 커피가 뜨거워 숨을 불어 식히는 것뿐이지만, 그 한숨에 모두의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복학한 뒤로 유진은 미국에, 태주는 한국에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드디어 태주가 미국에 영화
촬영을 오게 되면서 같은 국경 안에 있는 만큼 전보다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케이티는 바쁜 두 신랑을 대신해 자신에게 전적으로 맡겨 달라고 했다. 하지만 유진은 태주가 한국에 있을 때,
얼굴도 못 보는데 결혼식 준비라도 자신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하겠다고 나섰다.
다들 일이 많다 보니 겨우 맞이한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태주 씨 촬영이 이번 주말에 쉰다는데, 나도 주말이라고 할 일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주중보다는 자리를 비워도
덜 눈치 보이니까. 간만에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제니퍼의 말이 맞아요.”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제니퍼와 토니에게 잘 알고 있다며 유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때였다. 문득 유진의
핸드폰이 알람이 울렸다.
“미스터 김?”
“무슨 일이세요?”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는 유진의 기색이 갑자기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제니퍼도 토니도 깜짝 놀랐지만, 그럴
줄 알고도 유진은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돌아온 유진의 대답을 들은 제니퍼도 토니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 *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월요일이지만 토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씩씩했다. 연구실의 선배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고 들어오던 그는,
마지막으로 제 바로 옆자리의 유진에게 시선을 향했다.
토니가 유진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연구실의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정도의 호감은 품고
있었다. 막 그와 뭘 어떻게 하겠다기보다 그냥 옆에 있으면 눈이 즐겁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나 할까?
“미스터 김도 안녕하…….”
“헉, 대체 무슨 일이래요?”
“아…….”
그러나 유진은 어릴 때부터 배우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촬영장을 지켜본 기억이 많았다. 촬영 현장이란 주연
배우 혼자가 아니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많은 스태프가 협조해서 만들어 간다. 저 하나 때문에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주말이 지나갔으니 하는 말인데,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자신에 비해 태주는 별로 섭섭한 것
같지 않은 듯한 것도 못마땅했다. 물론 그도 좋아서 취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예정된 날짜에 결혼식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유진의 실험도 잘 진행되고 태주의 촬영도 기간 내에
무사히 끝나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꾸 그 시기가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유진은 약간, 아니 꽤나
스트레스를 느끼는 중이었다.
태주의 촬영이 자꾸 밀리는 것부터 일단 걱정이지만, 그 와중에 학교도 솔직히 만만치 않았다. 주말에 했던
실험도 결과부터가 엉망이었다.
문제는 거기다 유진은 결혼식 준비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하겠다고
나선 일이었다. 지금 와서 못 하겠다고 중간에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기는 그의 성격상 쉽지 않았다.
“지금 왜 내가 결혼식장에 무슨 케이크를 놓는지 그걸 결정하고 있어야 하지? 어차피 케이크 종류가 뭐든 맛만
있으면 다들 잘 먹을 거면서.”
“제니퍼, 토니.”
“아, 네!”
갑자기 유진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에 제니퍼와 토니가 자세를 바로 했다. 유진은 심기가 한껏 불편해도
여전히 예쁘기만 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아, 저는 초코 케이…….”
해맑게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하는 토니의 어깨를 꾹 눌러 자리에 앉히며, 제니퍼가 유진을 위로했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유진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질 때였다. 마침 라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안녕? 잘 지내고 있어? 오늘도 연구실에 음침하게 앉아 있으려나? 월요일이라고 또 기운 빠져서
골골대고 있는 건 아니지?
영상 통화도 아니고 핸드폰을 통해 목소리만 들려오는 건데도, 명랑한 에너지가 퐁퐁 솟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귀엽구나 하고 적당히 넘겼을 이런 통화가, 상황이 이래서 그런가 유진은 괜히 더 기운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다들 잘 지내시지?”
―아빠, 역시 은퇴 번복한 거 알지? 오빠한테 배우인 남편이 생겨서 약간 경쟁의식 느끼나 봐. 지금 신작 때문에
맨날 미팅 다닌다더라. 나이도 있는데 아직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근데 각 잡고 옷 입고
머리하니까 또 한창때 얼굴이 좀 보이긴 하더라고. 클라스 어디 안 가. 아, 노아도 새 영화 준비하느라 바빠.
둘이 세트로 그러고 있으니까 엄마랑 케이티도 덩달아 바빠졌다니까.
“그렇구나.”
―바?
“아냐, 말이 잘못 나온 거야.
“뭐야, 싱겁긴.”
실제로 라라에게는 살짝 꿍꿍이가 있었지만, 유진은 본인의 일로 머리가 꽉 차 미처 거기까지 깨닫지 못했다.
“응, 나도 사랑해.”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유진은 괜히 더 한숨이 났다. 이유야 물론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태주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유진은 주변에 무거운 공기를 흩뿌리며
하루를 보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자신에게 작은 쿠키나 초콜릿, 사탕 따위를 건네주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은 했다. 딱히 유진이
주변에 뭘 했다기보다, 다들 그가 우울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약간의 당분이 유진의 기분에
조금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미스터 김! 손님이에요.”
전달하는 토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들떠 있었지만, 한창 복잡한 연산을 처리하느라 바쁜 유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는 신경 쓰지 않았던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차피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거기 선 사람은 유진이 예상한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자신이 이 목소리를, 가을 아침의 숲 같은 시원한 페로몬을 헷갈릴 리가 없었으니까.
“태주 씨!”
장소 대여 문제로 원래 월요일로 예정되었던 촬영이 주말로 당겨진 것이었다. 안 그대로 주중 촬영이 밀리는
중이라 주말에 예정된 휴일이 가능할지 불투명해 걱정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멀어 봐야 고작해서 서울 부산, 아니라도 제주 정도인 한국에 비해 미국의 땅덩이는 너무도 넓었다.
거기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 다 뺄 수 없는 자신의 일이 있었다. 특히 태주는 이번 촬영 때문에 미국까지 온 거라
책임감이 막중했다.
재현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갓 결혼한 새신랑을 몇 달이나 외국에 데리고 나올 수 없다고 태주 쪽에서 강하게
거절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 자신의 결혼 소동 때 본의 아니게 재현을 LA 에 장기체류하게 만드는 바람에
미안했다. 대신에 촬영 시작할 때 일주일, 끝날 즈음 일주일만 재현이 직접 와서 챙기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로 대화를 시작해도 결국 유진에 대한 화제로 흘러가 버렸다. 애초에 태주의 머릿속 지분
대부분을 유진이 차지하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재현은 진즉 포기한 상태였다.
“그건 그렇지.”
자신이 나서서 오지 말라고 했던 주제에, 태주는 벌써 재현과 입씨름하던 때가 그리웠다. 특히나 이렇게 유진과의
일이 답답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지금처럼 전화로도 이야기는 가능했지만, 역시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은 못했다.
결혼식과 관련해서는 태주는 재현의 조언을 많이 참고했다. 혼인 신고는 태주와 유진이 먼저 했지만, 예식과
관련해서는 그쪽이 선배였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절반 정도는 그러했다.
―유진 씨가 있는 지역이 형 촬영장에서 멀긴 하지만, 반나절 정도만 비어도 물리적으로 다녀올 수는 있어요.
제가 계산해 봤거든요. 물론 거기 머무르는 건 고작해야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되긴 하겠지만요.
“그건 상관없어.”
“알겠어.”
“왜 아무 말도 없이 온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나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올 수 있을지 확신을 못 했어. 주말처럼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왜?
와서 싫어?”
“그럴 리 없잖아요.”
마지막에 짓궂은 질문에 유진은 뾰로통 입을 내밀었다. 여전히 태주의 양팔 안에 안긴 채였다. 태주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그 입술에 쪽 입 맞추었다.
장소가 장소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깊은 키스를 나누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유진은 주변의 시선을 깨닫고
조금 멋쩍어하며 태주의 품에서 나왔다.
“라라에게요?”
그제야 유진은 오늘 오전에, 라라가 뜬금없이 전화를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중에 따로 추궁해 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맞아.”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대답과 함께 뺨을 붉히는 유진을 향해, 제니퍼도 토니도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마지막 토니의 부탁을 듣고서야 유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예상외로 친밀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태주가
조금 뻣뻣해진 것은 전혀 생각도 못 한 채였다. 유진은 웃으며 태주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 * *
소개의 시작은 가볍게 바로 옆자리의 제니퍼와 토니였다.
하지만 곧 다른 학생들도 줄줄이 찾아왔다. 지금 연구실에 있는 모든 학생과 죄다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에는 교수님과 면담 아닌 면담까지 하게 된 태주였다.
태주는 자신이 너무 마음의 준비 없이 연구실을 찾은 것은 아닌가 살짝 후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유진이
졸업할 때까지 분명 계속 드나들게 될 텐데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지, 그지.”
그렇게 모두가 태주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한 데는 그가 유명한 배우라서기도 했지만, 다들 유진의 남편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잘 어울려.”
“엄청 보기 좋다.”
그리고 태주를 실제로 보니 듣던 것보다 더 잘생기고 멋있는 데다, 유진과 정말 사이 좋은 한 쌍이라는 사실에
매우 만족하며 돌아갔다.
모두가 친절하고, 유진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감출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노골적인 의도가 담긴 건
아니었지만, 알파로서의 본능과 유진에 대한 독점욕으로 태주는 질투심이 점점 커졌다.
“응? 태주 씨, 뭐라 그랬어요?”
“네, 좋은 후배들이에요.”
페로몬 컨트롤이 완벽한 우성 알파가 얼마나 집요하게 굴 수 있는지, 연구실의 모두가 본의 아니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반대로 태주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기분이 들뜨는 것이 빤히 보이는 유진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연구실에서의 소개 시간도 어찌어찌 무사히 끝이 나고, 유진은 태주를 제일
가까운 구내식당으로 데리고 왔다. 유진은 바쁘다 보니, 태주는 서둘러 오느라, 둘 다 이 시간이 되도록 점심을
거른 것이다.
애매한 시간이라 가능한 메인 요리가 몇 없어서, 유진은 냉동으로 보이는 피자와 조금 불어 있는 스파게티를
담았다. 후식으로 커다란 브라우니와 과일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주는 메인은 지나치고 샐러드바에 들렀다. 풀에 삶은 달걀, 그릭 요거트밖에 없는 식판을 보고 유진은 놀랐다.
“연구는 잘 되고 있나요?”
물론 일 때문에 바쁘기는 했지만, 바로 앞에 태주가 있었다. 나중에 며칠을 밤을 새워도 좋으니 지금은 일단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태주는 정말 맛없다는 얼굴로 야채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반쯤은 유진을 둘러싼 주변에 대한 괜한
질투심 덕에, 표정 관리가 힘들어서 더 표정이 심각한 것도 있었다.
“잠시만요.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여유로운 인상에 금테 안경을 쓴, 똑똑해 보이는 남자였다. 나이는 태주와 비슷하거나 조금 위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리고 이어진 유진의 인사에 자신이 왜 그렇게 느꼈는지 깨달았다. 학생이 아니라 교수였던 것이다.
태주는 반사적으로 그를 견제했다. 위협적인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눈치챈 교수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안녕하세요. 김태주입니다.”
저 교수라는 남자가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거기서 정색하고 내치면 그게 더 이상할 거라는 사실을
태주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그냥 유진이 저 교수와 이야기하는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나마 방금까지는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길래 그나마 상관없다고 넘길 수 있었다. 갑자기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태주는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물어오는 태주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진 데서, 그제야 유진은 눈앞의 우성 알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기분 나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뭐긴, 결혼 준비 관련이죠.”
“바빠서 나 만날 시간도 아깝다면서, 결혼 준비를 핑계로 주변 사람들하고 웃으며 떠들 시간은 있는가 봐?”
태주의 마지막 말에 유진의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굉장히 섭섭해 보이는 그 눈빛에 태주는 뭔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대단히 불길한 예감과 함께, 분명 이 비슷한 걸 언젠가 봤었다.
맞다. 그때 그 레스토랑에서였다.
그 전부터 삐걱거리는 상태에서 중심도 없이 주변의 의견에 휘둘리듯 갔던 것부터 문제투성이였다. 그리고 분명
이다음은.
“…….”
역시 이거였다.
유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 뛰쳐나가고, 태주는 테이블에 멍하니 혼자 남았다. 우습게도 이 모습까지 기억과 같았다.
* * *
어떻게 간신히 연구실로 돌아갔지만, 당연하게도 거기에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익은 작은
안경잡이 남자를 발견했다.
“토미!”
“토니입니다.”
“나 누군지 알죠?”
“물론입니다. 아까 인사드렸었잖아요.”
그 말대로 아까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뭣보다 아까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도 벌벌 떨릴 정도로 압박감을 뿜뿜 뿜어대는 바람에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실제로 우성 알파인 태주가 괜한 질투심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꽤나 견제를 해댔으니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제야 긴장을 풀고 바로 가까이서 제대로 바라본 알파는 역시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외모지만 쭉 뻗은 콧날이나 뺨의 직선,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입술 따위 하나하나의 요소가 모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우성 알파라서 그런지 키도 커서, 동양인은 키가 작다는 일반적인 편견을 멋지게 깨부수고 있었다. 토니 본인이
남성 평균보다 작아서 더 그렇기도 했다. 아까 유진과 나란히 있을 때도 확실히 둘 다 길쭉길쭉하게 키가 커서
보기 좋았다.
근데 잠시 사이에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진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한껏 무거운
표정으로 태주가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제가 잘못해서요.”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그 태도에 토니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반대로 태주는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에 당연히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토니는 괜히 멋쩍어서
손만 마구 흔들었다.
실제로 토니는 유진이 태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옆자리에서 그냥 대충 보고만 있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연구실 중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유진이 태주와
만나지 못하게 됐을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잘 알았다.
“그랬군요. 전 몰랐어요.”
“근데 요새 연구도 바쁜데 결혼식 준비까지 같이하시느라 많이 힘드신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최대한 자기 손으로
직접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시는 건, 역시나 그만큼 남편분이 소중해서 그런 거겠죠?”
토니의 맨 마지막 말이 태주의 뇌리에 박혔다. 유진이 바쁜 와중에 어떻게든 직접 결혼식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했구나.”
태주는 저도 모르게 한국어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제야 유진이 무엇 때문에 섭섭했는지 알 것 같았다.
힘든 중에도 둘을 위해서 애쓰던 유진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괜찮다고 안 해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태주는 자신의 배려가 부족했다고 진심으로 반성했다.
“그리고 미스터 김이면, 아마 이 시간이면…….”
“고맙습니다.”
돌아보는 미소가 싱그러워서 토니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히 그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 저 정도 얼굴을
눈앞에 뒀을 때 사람이라면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조건 반사였다.
* * *
“유진아.”
태주의 부름에 유진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가가 조금 빨개서 태주는 마냥 마음이 아팠다.
“아니, 사과하려고.”
“내가 얼마나 배려심 없고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너같이 착하고 사랑스럽고 훌륭한 남편을 화가 나게 했는지,
내 입으로 너에게 직접 알려 주고 싶었어.”
“태주 씨.”
어느새 태주는 어느새 유진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있었다. 얼마나 진실한지 판단하고 싶다는 듯 유진이 그의
표정을 곰곰이 살폈다. 다시 자신을 향하는 반짝이는 그 눈빛이 그저 좋다고 생각하며, 태주는 천천히 유진의
양손을 맞잡았다.
“어느 부분이요?”
이제 유진은 더 이상 화를 내기보다 가볍게 툴툴대고 있었다. 그런 유진의 어깨를 태주가 가볍게 토닥거렸다.
두 사람은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유진의 머리가 태주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졌다.
유진이 가슴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태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거짓말하면 다 안다는 듯 짓궂게 웃었다.
“정말요?”
“나도 약간 보상 심리가 있었나 봐. 힘들게 왔으니까 그만큼 네가 좋아만 해 줄 거라고 기대했던 거 같아. 그걸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건데.”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끈적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미 서로의 존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어, 그러고 있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더 깊은 행위를 원하며 몸이 달아올랐다. 알파와 오메가의 진한 페로몬이 둘 사이를 한가득
채웠다.
“이런, 너무 하고 싶은데.”
결국 참지 못하고 태주는 한숨처럼 중얼거리고 말았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출발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지금으로선 여유롭게 숙박업소를 찾거나, 유진의 집으로 이동할 시간 같은 건 없는데 말이다.
“하면 되죠.”
“여기 이 시간쯤에는 이 근처로 아무도 안 와요. 그래서 원래는 잠깐 머리 식히고 싶을 때 여기로 오거든요.”
“어, 그, 그래?”
방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아무도 안 온다는 장소로 데려오다니, 솔직히 태주가 애도 아니고 뉘앙스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멋대로 기대해도 좋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뭘? 이라는 질문을 태주가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유진이 차 문을 열고 태주를 밀어 넣듯 조수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위로 올라타서는 태주에게로 몸을 붙여왔다.
차 문을 닫자 밀폐된 공간만큼 페로몬이 확 짙어졌다. 코를 찌르는 크림과 연유의 달콤한 향기가 태주를
흥분시켰다. 유진 역시 태주의 페로몬으로 한창 흥분한 상태였다. 바깥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져 있어서 윤곽밖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왠지 더 야하다고 태주는 생각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올려다보는 유진의 하얀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쯤은 흥분으로 반쯤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부부가 되고 나서 많이 익숙해졌다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나 아직 창피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자신 나름대로 최대한 적극적으로 나오는 유진이 태주는 마냥 예쁘고 야했다.
드디어 겨우 용기를 낸 듯 유진이 태주에게 입술을 마주쳐 왔다. 하지만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에는 실수로
살짝 턱과 가까운 부분에 입술이 부딪히고 말았다. 태주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런 유진의 입술이 제 입술과
겹치도록 했다.
“으응…….”
“응, 흣!”
갑자기 유진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대로 태주가 혀를 잡아뽑을 기세로 유진의 입안을 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도를 바꾸며 거칠게 혀와 혀가 뒤엉켰다. 태주가 혀를 움직여 까칠한 입천장을 핥아 내리자 그의 양팔 안쪽에서
유진의 몸이 떨렸다.
끌어안긴 상태에서 유진의 손이 머뭇머뭇 태주의 바지춤을 향했다. 어차피 태주의 성기는 아까부터 준비 완료
상태였다. 원래도 우성 알파답게 컸지만, 유진의 손이 옷 위를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도 금세 천 아래서도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낼 정도로 빳빳해졌다.
서로의 입술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태주도 지지 않겠다는 듯 옷 위에서 유진의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딱 쥐기 좋은 부드러운 살집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자, 키스하고 있던 입술이 가볍게 떨어지며 유진의 신음이 커졌다.
“흐응!”
얼굴과 얼굴은 여전히 가까운 채였다. 태주는 유진을 몸 전체로 덮치듯 제 품 안으로 가두며, 뜨거운 호흡을
턱에서 쇄골을 향해 미끄러트렸다. 유진이 당황하며 그를 말렸다.
“아, 흣. 안 돼요.”
태주가 입술을 제대로 떼지 않아 속삭일 때마다 닿아오는 숨결에 유진은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태주는 손으로는 거침없이 유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길고 단단한 손끝이 슬쩍슬쩍 골 사이로 미끄러지며, 얇은 천 위에서 엉덩이 사이 민감한 입구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흐응, 안 돼. 좋아…….”
하지만 아무래도 유진이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 쪽이 점점 더 태주에게 밀리게 되었다.
유진의 바지는 이미 거의 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허벅지에 어중간하게 걸려 오히려 그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싫어, 같이…….”
그렇게 조르는 유진은 귀여웠지만, 태주는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 말대로 어서 사정이라도 하라는
것처럼, 이미 축축하게 젖은 성기의 끝을 좀 더 집중적으로 자극할 뿐이었다.
하지만 유진도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는 자신의 자동차였다.
“응?”
그대로 유진이 태주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살짝 위로 들렸다. 덕분에 엉덩이 사이
안쪽의 은밀한 부분이 드러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엿보이자, 태주는 반사적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찌익. 조용한 가운데 유진이 입으로 태주의 바지 지퍼 내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겨우 답답한 바지 안에서 벗어난
발기한 성기가 배꼽을 향해 튀어 올랐다.
“윽.”
솔직히 유진의 구음은 꽤나 서툴러, 입으로 하는 것보다 눈앞의 시각적 자극 쪽이 오히려 태주의 흥분을 더
북돋울 정도였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뺨이 입 안에 머금은 성기 때문에 한쪽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집중이라도 했는지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든 채, 뺨에 흘러내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성가신 듯 귀 뒤로 쓸어 넘기는 하얀 손가락이
나긋했다.
희고 동그란 엉덩이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데, 정작 태주에게는 애매하게 멀어 입으로 직접 자극해
줄 수가 없었다. 대신이라면 이상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어 그 하얀 엉덩이를 꾸욱 움켜쥐었다.
“흑.”
예상치 못했다는 듯 유진의 입이 멈추었다. 태주의 커다란 성기는 아직 다 발기하기도 전이건만 좁은 입에는 쉬이
다 들어가지지가 않았다.
다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태주는 일부러 짓궂게 그 근처를 노골적으로 만졌다. 누르듯 슬쩍 꽉 조인 주름을 벌리자,
투명한 액체가 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핑크빛의 구멍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모습이 야했다.
“으흣.”
유진이 여전히 태주의 성기를 입에 물고서, 그러지 말라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성기가 버거웠는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흥분으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사실 지금 어떻게 할지 궁금해 한동안 유진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애초에 이 자세를 원했던 쪽도
유진이었다. 하지만 귀여웠기 때문에 일단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고,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시각적으로
야해서 그것만으로도 태주는 흥분하고 말았다.
“아?”
덕분에 태주의 성기가 훅 더 커져 유진이 움찔하는데, 태주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엉덩이를 철썩 쳤다.
“흑!”
유진은 신음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픔보다 달콤함이 더 진하게 섞여 있었다. 다리 사이의 성기는 더 빳빳해지고
뒤쪽 엉덩이 구멍은 더 축축해졌을 뿐이었다. 그는 움찔움찔 몸을 떨며, 촉촉하게 젖은 눈을 하고 태주를
돌아보았다.
“왜? 너도 원하잖아?”
“너, 그거.”
“잠깐만, 유진아.”
그래도 유진이 그 예쁜 손으로 바로 콘돔의 껍질을 벗기는 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콘돔을 태주가 아니라 자신의 성기로 가져갔다. 사이즈가 커서 조금 애매했지만 어떻게 씌울 수는 있었다.
“그럼 그건…….”
그대로 유진이 아까부터 한껏 발기한 태주의 성기의 뿌리를 쥐었다. 태주는 솔직히 할 말이 많았지만, 급소를
붙잡힌 탓이 쉬이 반항하지 못했다. 유진이 그런 태주를 향해 고개만 돌려 시선을 맞추며, 눈을 반으로 접어
야하게 웃었다.
덕분인지 제 눈앞에서 부피를 더하는 태주의 성기를 보고, 유진이 순수하게 놀라움에 감탄했다.
“유진아, 너…….”
지나치게 야한 광경에 태주는 숨을 들이켰다. 좁은 구멍의 주름이 벌어지며 커다란 성기가 파고드는 모습이
그대로 다 보였기 때문이다. 체중만큼 자연스럽게 삽입이 깊어지며, 유진의 안에서 배어 나온 애액이 매끄럽게
삽입을 도왔다.
하지만 뿌리까지 완전히 들어가자, 압박감에 유진이 달콤한 숨을 내뱉었다. 호기롭게 제 쪽에서 허리를 내리는
것까지 좋았지만, 흉기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한 우성 알파의 성기는 확실히 버거웠던 것이다.
“흐으.”
유진은 꿰뚫린 채 어쩔 줄 모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한껏 긴장한 등줄기는 마냥 아픔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아픔보다는 압박감과 둔통, 그에 따르는 쾌감이었다. 어차피 태주의 눈에는 뻔히 다 보였다.
태주는 뒤에서 그런 유진의 모습을 흐뭇하게 실컷 감상했다. 하지만 곧 참기 힘들어졌다. 사실 유진이 올라타기
전부터 한껏 흥분한 상태기는 했다.
그리고 태주는 유진과 이어진 채 상체를 일으켰다. 어지간한 코어 근육으로는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이제는 마치
유진이 태주에게 안긴 채 그를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였다.
“앗, 흐응!”
갑자기 안쪽에서 각도가 변하자, 지나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유진이 사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액은 미리
씌워둔 콘돔에 가로막혀 주변으로 튀지 않았다.
태주가 움직이는 대로 유진의 허리도 흔들렸다. 아니 온몸이 통통 튀어 오르는 듯했다. 특히나 거칠게 쳐올리면
그대로 안쪽부터 허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으응, 응…….”
유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도 한결 달콤해져 있었다. 성기도 다시 발기하기 시작했다. 정작 본인은
지금 자신이 어쩌고 있는지 거의 자각이 없는 듯했다.
“제길!”
태주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대로 유진을 목덜미를 물어뜯듯이 빨아당기는 모습은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그의 오메가 페로몬에 완벽히 잠식되어 반쯤 이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정확한 표현인지도
몰랐다.
흥분한 두 사람이 좁은 조수석 위에서 뒤엉켰다. 과격할 정도로 거친 움직임에 자동차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밖에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면 꽤 티가 났을지도 몰랐다.
유진은 제발 평소 늘 그렇듯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조차 초반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태주는 한 번 거의 뺐다가 단번에 유진의 안으로 거칠게 자신을 박아 넣었다. 어느새 자세가 바뀌어서 유진이
태주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덕분에 태주는 더 안정적으로 유진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아, 태주 씨.”
익숙하게 태주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유진은 하아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지나친 흥분에 회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긴 속눈썹에 고인 물방울이 눈을 깜박이면 그대로 뺨으로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위에서 흔들리는 태주의 숨결이 좋았다. 뜨거운 만큼 자신을 원해 오는 것만 같았다. 내벽을 꿰뚫을
기세로 아래를 파고드는 커다란 성기만큼이나 열렬히 자신을 원해 오는 것이었다.
유진은 충동적으로 태주의 허리에 제 다리를 감으며 노골적으로 보챘다. 그 사랑스러운 오메가를 알파가 못
견디겠다는 듯 끌어안았다.
“하, 넌, 진짜.”
* * *
섹스를 끝낸 두 사람이 여운을 음미하듯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유진이 태주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였다. 중형
승용차의 조수석은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성인 남성 둘이 같이 앉기에는 확실히 너무 좁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이 말에는 자신이 분위기를 타고 태주에게 적극적으로 굴었던 것, 학교인데 야외나 다름없는 차에서 섹스한 것,
그 와중에 결국 마지막에는 태주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 마구 당한 것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왜? 난 좋았는데.”
태주는 그런 유진의 생각을 다 읽고 있으면서 즐거웠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유진의 생각을 읽고 있어서 더
즐거운지도 몰랐다. 그로서는 화해도 하고 섹스도 했으니 딱히 나쁠 것이 없기도 했다.
그걸 깨닫자 유진은 더 부끄러워, 자신과 달리 여유가 넘치는 태주의 얼굴을 괜히 흘겨보았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 태주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핀 건 덤이다.
“그래, 그래.”
그대로 태주가 유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귀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는지 유진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아, 태주 씨…….”
솜털같이 부드러운 키스가 목덜미로 쇄골로 턱 끝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섹스가 계속되는 것 같은 감미로운
키스였다.
체격에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 유진이 태주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어서 그렇게 자세를 바로 하니 거의 눈높이가
맞았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눈빛에 녹아내렸다.
“좋은 생각이야.”
“결혼식 기대된다.”
“나도요.”
마리밍 장편소설
지은이 : 마리밍
정가 : 1,500 원
제공 : 파란달
ISBN 979-11-404-65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