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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1. 서장

망한 삶이었다.

사십이 넘는 인생 중 유일한 성공은 사수 끝에 수능 대박이 나서 지방 의대에 합격한 것?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박이 나 얼떨결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그전에도, 그 뒤에도 계속 실패만 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왕따.

사수 끝에 변변치 않은 의대에 합격해서는 낙제를 간신히 면하는 최하위권 성적.

졸업 후에는 어느 전공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남들이 기피하는 외과를 반 강제로 선택.

그래도 외과를 전공하고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다.

무식과 무능이 환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잠 안자며,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일까?

국내 최고 대일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긴 했다.

‘그때 참 좋아했었지.’

그러나 실패의 굴레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실력과 무관하게 병원 내 경쟁에서 밀렸고, 빚을 내 차린 병원은 무참하게 망했다.

선을 봐서 결혼한 부인에게는 이혼당했고, 날마다 거친 빚 독촉에 시달려야만 했다.

홀로 남은 노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었으나, 효도는커녕 곧 길거리에 나앉을 예정이었다.

더구나…….

“하아…….”

며칠 전 암 말기를 선고받았다.

빌어먹을 일이다.

***

진현은 힘없이 앉아 텅 빈 병원을 바라보았다.


대일병원 내 경쟁에서 밀려 시작한 개인 병원은 실패를 거듭해 유령처럼 변해 있었고, 곳곳에는 차압 딱지가 수도
없이 붙어 있었다.

진현의 눈에 진료실 구석, 깨진 결혼사진이 들어왔다.

‘암이라고? 이제 길어야 3 개월이라고?’

“제기랄.”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빌어먹을!!!”

내가 죽게 되다니?

실패만 거듭했는데! 원하는 삶은 한 번도 살지 못했는데! 고생하는 어머니 효도 한 번 못했는데!

그러나 그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김진현 씨? 빚은 어떻게 할 거지?”

용역업체 직원, 즉 조폭이었다. 그들은 위협적인 태도로 진현에게 말했다.

“당신이 빚진 돈 어떻게 할 거냐고?!”

진현은 헛웃음이 나왔다. 사형 선고를 당한 마당에 빚 독촉을 당하다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해결? 웃기고 있네! 말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아나? 입만 산 놈. 이러니 마누라한테 이혼이나 당하지.”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내와는 병원이 망한 후 이혼했다. 아픈 상처를 후비는 주둥이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빚을 진 사람은 자신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가려주십시오. 빚은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흥! 어떻게? 너 곧 죽는다며?”

“……!!”

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들은 그가 암 말기를 선고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으면 좋겠어? 응? 빚도 다 털고 말이야. 참, 시원하겠어! 그런데 너 그거 몰라? 네 어머니 보증으로 2 억의


빚이 있다는 거.”

“그, 그건……!”

진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병원을 개업할 때 어머니 이름으로 보증을 받았었다.

당시만 해도 그 돈을 못 갚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오히려 그 돈을 바탕으로 성공해 효도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네가 이렇게 죽으면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제, 제발 어머니만은 건들지 말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결국 진현은 매달렸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죽고 홀로 그를 키운 어머니다.

자신은 길거리로 쫓겨나도 상관없지만 늙은 노모마저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는 없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무, 무엇입니까?”

그들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진현의 상복부를 가리켰다.

“의사니 잘 알겠지? 그쪽에 뭐가 있지?”

“간이…….”

“그러면 이쪽, 저쪽은?”

“심장, 신장…….”

대답하던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히죽 웃었다.

그것은 악마의 미소였다.

“간 4,000 만 원, 신장 하나에 2,000 만 원씩, 심장 4,000 만 원, 각막 3,000 만 원씩. 어때? 어차피 죽을


거 좋은 일 하고 죽으라고.”

진현의 장기를 팔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선심 쓰듯 말했다.

“모자라는 2,000 만 원은 우리가 특별히 에누리해줄게. 수술은 중국에서 할 거야. 요즘 중국에 수요가 워낙
많아서 말이지.”

하지만 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어떻게 자신의 장기를 팔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몇 개월 후 죽을 몸이라도.


“결정 못 하겠어? 좋아, 기다려주지. 하지만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암이 퍼져서 장기들 못 쓰기 전에.”

“…….”

그리고 그들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진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보고 장기를 팔고 죽으라고?”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며칠 뒤 건물 주인이 그를 찾아왔다.

“당장 빼주게.”

“…지, 지금 말입니까?”

“그래, 월세 못 낸 지가 며칠인지 아나? 빚쟁이들도 계속 드나들고! 새로운 사람 구했으니 당장 빼!”

그렇게 그는 거리로 쫓겨났다. 빚 때문에 모두 가압류돼 뺄 짐도 없었다.

그렇게 외투 한 벌에 거리에 앉아 찬바람을 맞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삶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띠리링!

하필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진현이니?

“아, 네. 어머니.”

-그냥 잘 지내나 전화해 봤다. 몸 안 좋은 데는 없고?

익숙한 염려.

어머니는 평생을 고생하며 살면서도 항상 그를 걱정했다.

진현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티 내지 않기 위해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네. 괜찮아요.”

-그래, 고생 많다. 일도 좋지만 무리하지 말고 건강 챙기렴.

어머니는 아직 그가 망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네, 어머니도 몸조심하시고요. 저… 급한 환자가 있어서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나중에 또 통화하자.

더 감정을 조절할 자신이 없어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 지갑을 뒤졌다.

정지된 카드와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어 진현은 아무 가게에 들어가 소주를 집어 들었다.

“9 천 원입니다.”

마지막 돈을 털어 소주를 잔뜩 샀다. 취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공원에 앉아 노숙자처럼 깡소주를 마셨다.

“빌어먹을.”

성공하고 싶었다.

좋은 의사가, 좋은 아들이,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그는 실패자일 뿐이었다.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그렇게 두 병쯤 마셨을 때였다. 흐린 정신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선생님?”

묘령의 여인이었다. 술로 뿌연 눈에도 확 들어올 정도의 미모였다.

“김 선생님 맞으시죠?”

“……?”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나세요?”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대단한 미녀였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인은 서운한 얼굴을 했다.

“아니, 저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에 저와 오빠를 모두 치료해 주셨잖아요. 김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희 모두


죽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래요. 2 년 전 대일병원, 기억 안 나세요?”

“아……!”
그제야 진현은 기억했다.

2 년 전, 칼에 찔려 죽어가던 남녀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연예인 같은 외모의 청년과 아가씨가 영화에서나 볼법한 커다란 검상을 입고와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특히 그녀는 내장이 여러 토막 나 있어서 대수술을 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으슥한 곳에 위치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공원이다.

부랑자나 자신 같은 실패자나 어울리는 곳이지 그녀처럼 화사한 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인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김 선생님을 뵈러 왔어요.”

“…저를요? 어째서?”

“‘씨앗’을 드리려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씨앗이라니?”

“말 그대로예요.”

진현은 눈가의 주름을 찌푸렸다.

“만나서 반갑기는 하지만, 저는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용무가 있다면 일 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향긋한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혼자 마시지 말고 저도 한 잔 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진현이 산 소주 봉지에서 종이컵을 꺼내 내밀었다.

진현은 황당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전히 그녀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하세요? 한 잔 주세요.”

그러고 보니 2 년 전 응급실에서도 그녀는 특이한 존재였다.

벌어진 배에서 토막 난 내장이 쏟아지는데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남의 상처를 보는 듯한 차분한 모습에 되레 의료진이 질릴 정도였다.

‘모르겠다.’

진현은 소주를 따랐다. 어차피 망한 인생인데 누구랑 술을 마시면 어떤가?


그렇게 둘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투명한 소주가 안주도 없이 오갔다.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정신이 흐릿할 때 그녀가 말했다.

“많이 힘드시죠?”

“…….”

그 물음에 가슴이 메었다.

힘드냐고?

이 감정을 단순히 힘들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알죠. 저와 오빠의 생명을 구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의사 선생님이시잖아요.”

진현은 씁쓸히 웃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변변치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성적은 하위권이었고, 왕따까지 당했었죠.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돌아가실 때도 괴롭힘을 당했었습니다.”

취해서일까, 답답해서일까?

그의 입에서 지난 삶이 흘러나왔다.

아무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김진현, 또 의대 꼴등이네? 유급 안 당하는 게 신기하다.

-이제 그만 우리 대일병원에서 나가주게. 자네는 더 이상 필요 없네.

-이혼해요, 우리.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돈 어떻게 할 거야, 돈!!! 망한 의사도 의사야? 돈 내놔!!!

-어차피 암에 걸려 곧 죽을 거 장기라도 팔아 좋은 일이라도 하고 죽지?

과거의 삶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제길.’

괜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실패의 한이 서린 눈물이었다.

진현이 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을 때, 여인이 말했다.

“2 년 전 저희를 구해주셨을 때 기억나세요? 하부(下府)와의 싸움 후 상부(上府)로의 연결이 끊긴 저희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하부(下府)? 상부(上府)?

알 수 없는 단어에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

“그 뒤 일이 해결돼 상부로 돌아간 저희는 선생님을 계속 살펴봤어요. 그때의 은혜를 꼭 갚고 싶었거든요.”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취한 건가?’

하지만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몽환적으로 가라앉았다.

“제 이름은 상부(上府)의 비(婢). 지금 이 순간, 그때의 답례를 할게요. 씨앗을 드리겠습니다.”

“씨앗이 뭡니까?”

“상부(上府)의 축복이에요.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규칙엔 어긋나긴 하지만 뭐든지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진현은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취한 것 같다. 아니면 머리가 이상하거나.

그래서 편히 말했다.

“어떤 소원이라도 괜찮습니까?”

“네, 어떤 거라도.”

“시간을 돌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로 돌아가 다시한 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여인, 비(婢)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인가요?”

“네, 원합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 들었다.

병에는 맑은 황주(黃酒)가 담겨 있었다. 언뜻 봐도 상품(上品)의 술로 보였다.

그녀는 진현에게 권했다.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이것은 무엇입니까?”

“씨앗주예요.”
우스운 이름이었다.

이미 머리끝까지 취한 진현은 거침없이 그것을 들이켰다. 부드러운 목 넘김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시야가 흔들렸다.

“아……!”

비틀거리는 그에게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안쓰러운 목소리였다.

“다시 삶을 살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가요?”

진현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거렸다.

“다, 다시 살면… 이번에는 성공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성공한 삶이요?”

“네… 부끄럽지 않은… 멋진 아들이. 멋진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이번에는… 잘나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그 소원 이룰 수 있길 기도해 줄게요. 이제 그만 주무셔도 돼요.”

그 말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그는 의식을 잃었다.

비(婢)는 머나먼 지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평을 넘어 시간과 공간을 통과했다.

진현은 과연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그녀는 속삭였다.

“축복받길. God bless you.”

그리고 그녀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하얀 깃털 하나가 벤치에 사뿐 내려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

02. 회귀 (1)
“진현아? 진현아?”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얇은 이불 밑 딱딱한 바닥이 등을 괴롭혔다.

“진현아! 일어나야지!!”

“으… 응?”

높은 목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언제까지 잘 거야? 늦었어! 빨리 학교 가야지!!”

웬 아줌마였다.

나이는 사십 대?

곱슬곱슬한 파마와 피로가 담긴 주름이 왠지 익숙하다. 아니, 익숙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뭐해? 빨리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그러나 진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턱 하고 입을 벌렸다.

“어, 어머니……? 어머니 맞으시죠?”

분명 어머니였다!

문제는 어머니의 얼굴이 30 년 가까이 젊어졌다는 것이다.

진현의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나 네 엄마다. 엄마 맞으니 빨리 일어나 밥 먹어!”

진현은 눈을 쓱쓱 비볐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꿈이 분명해.’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통증만 가득 느껴졌다.

‘꿈이 아니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가구, 좁은 방. 그가 어린 시절을 지냈던 월셋집이었다.

‘말도 안 돼! 어제 분명……?’

황급히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 이름은 상부(上府)의 비(婢). 그때의 답례를 하겠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뭐든지


이루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회귀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딱!!

“아악!”

진현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들이 하는 양을 보던 어머니가 꿀밤을 때린 것이다.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 밥 먹어!!”

허름한 나무 식탁에 간소한 밑반찬과 보리밥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 앞에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진현은 갑자기 목이 메여왔다.

“아, 아버지…….”

고 3 때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예의 무뚝뚝한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앉아라. 밥 먹자.”

그 목소리를 들으니 진현은 눈앞이 뿌예졌다.

저 무뚝뚝한 얼굴을,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학창 시절 속만 썩인 것을 사후에 얼마나 후회했던가?

조금만 더 오래 사셨으면 효도했을 텐데, 라고 덧없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한 줄 모른다.

“밥 먹자.”

서둘러 눈을 닦고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오늘 왜 그러니? 어디 몸이 안 좋니?”

“아, 아니에요.”

진현은 주저하다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응?”

“…사랑해요.”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가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정말 어디 아프니?”

아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사랑해요.”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우리도 너를 사랑한다. 빨리 밥 먹자. 식겠다.”

식사를 마친 진현은 교복을 입었다.

‘이 교복은 진선 중학교 교복인데… 정말로 내가 중학생 때로 돌아온 건가? 비(婢)란 여자의 말이


진실이었다니.’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생생한 감각은 그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정말로… 정말로 돌아왔단 말이야?’

갑자기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다니!

그는 항상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았다.

학창 시절, 성적은 바닥에 왕따였고 사수 끝에 들어간 의대도 적응을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유급을 면하는 것도 어려웠고 원하는 전공은 지원도 못 하고 그나마 떠밀린 외과의로서의 삶도 실패였다.

가난을 벗어난 적이 없고 그토록 바라던 효도도 못했다.

어렵게 시작한 결혼 생활도 결국 이혼당했고 병원은 망하고 종국에는 말기 암에 걸렸다.

이번 삶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해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부모님께도 효도하며 살 것이다.

“진현아!! 뭐하니? 학교 늦겠다!!”

“네, 어머니.”
그는 서둘러 책가방을 챙겼다. 촌스러운 백팩이 정겹게 느껴졌다.

***.

그런데 첫 등교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공부 많이 했지? 책가방 책상 가운데 올려라.”

진현은 놀랐다.

갑자기 책가방은 왜?

옆에 앉아 있는 짝이 말했다. 몇십 년 만에 보는 녀석이라 이름은 기억이 안 났다.

“진현아, 공부 많이 했냐?”

“…무슨 공부?”

“오늘 중간고사잖아.”

“…….”

진현은 말을 잃었다.

오늘이 중간고사라고?

“성적 떨어지면 교무실로 부를 테니 다들 잘 봐라. 특히 김진현!”

“…네?”

“또 전교 꼴찌 하면 죽을 줄 알아라.”

그 말에 반 전체가 키득거렸다.

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갱지에 적힌 시험지가 반을 돌았다.

시험지를 든 진현은 눈앞이 깜깜했다. 국사였다.

<육조 직계제 실시, 사병 혁파, 지방 8 도 개편, 지방관 파견과 연관된 인물은 누구인가?>

‘누, 누구였지? 태조, 태종? 세종?’

사수까지 했지만 수능에 손 뗀 지 이십 년이 넘는다. 당연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나은 것은 영어였다.

의대 공부와 의학지식은 모두 영어로 통용돼 독해 능력만큼은 원어민 못지않았으니까.

수학, 국어, 과학도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 개발새발 풀었다.


하지만 나머지 과목은 전멸이었다.

<백열전구의 유리구 안에 아르곤 가스의 원리는?>

<라디오 회로에서 검파회로의 적용은?>

이런 것을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시험이 끝마치고 그는 해부학 시험을 본 기분으로 터덜터덜 학교를 나왔다.

“야, 시험 잘 봤냐?”

짝이 그를 쫓아와 물었다.

진현이 기억하기로 이 녀석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바닥권이었다.

“오락실이나 가서 철권이나 때리자.”

그래도 중학교 때는 공부를 못할 뿐 어울리는 친구가 소수나마 있었었다.

본격적인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 ‘그놈’을 만나고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내년에 고등학교에 가면 그놈을 만나겠구나. 학군상 다른 학교에 배정될 리도 없고.’

‘그’를 떠올린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은 ‘그놈’ 때문에 망가졌다.

매일매일이 지옥이었고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머니, 아버지에게 짜증으로 풀었다.

훗날 그게 얼마나 후회되던지.

‘이번에는 절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야, 오락실 가자.”

“됐다. 난 집에 가련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서 뭐하게?”

“공부.”

짝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 네가? 너 어디 아프냐?”

“너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공부 좀 해라.”


“뭐, 뭐? 너 진짜 뭐 잘못 먹었냐?”

“진심이야. 친구라 생각하니 충고하는 거다.”

그리고 진현은 집으로 돌아갔다.

뒤에 남은 짝은 입을 벌렸다.

“뭐, 뭐야? 꼰대처럼.”

***

진현은 아버지가 어려운 살림에 마련해 준 책상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에게는 이전 삶의 기억이 존재한다.

잘만 이용하면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과거의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벌려면 투자할 종잣돈이 필요한데 중학교 3 학년인 그는 한 달에 만 원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가지고 있는 지식도 대부분 의학 관련 지식이니…….’

지옥 같은 의대생 시절과 인턴, 레지던트 시절을 겪고 나니 사회 상식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금전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상식은 향후 강남권 땅값이 미친 듯이 오를 거란 것과 대일 그룹을 포함한


몇몇 그룹의 주가가 열 배 정도 뛸 거란 사실 정도?

지금으로써는 그림의 떡 같은 정보였다.

‘일단 의대에 입학하자.’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의사로서 도움이 될 능력이다.

반면 의사가 되지 못하면 휴지쪼가리나 다름없었다.

‘그냥 의대가 아니라 한국대 의대에 입학하자.’

한국대 의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의대이다.

과거에는 언감생심 바라보지도 못했지만 지금의 그는 가능했다.

앞으로 수능까지는 4 년이나 남았으니까.

이미 전의 삶에서 사수까지 해 수능 공부는 지겹도록 해봤다.


앞으로 4 년을 더 피나게 공부하면 한국대학교 의대가 아니라 그 할애비 의대도 합격 가능할 것이다.

‘한국대 의대를 졸업해 성공한 의사로서의 삶을 살자.’

전의 삶에서 선망했던 것을 떠올렸다.

한강이 보이는 강남의 고층 재건축 아파트, 고급 외제차, 빌딩.

이전에는 닿을 수 없는 꿈이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가능했다. 아니, 꼭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힘내자, 진현!’

그렇게 그는 수학 교과서를 펼쳤다.

그런데 도형 공식을 보는 순간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수험 시절뿐 아니라 의대 공부, 인턴, 레지던트, 군대까지 다시 해야 하는 거잖아?”

지옥 같던 과거들이 떠오르며 진현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젠장, 망했다. 어떻게 그 시절을 다시 보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했다.

‘망할, 성공하면 반드시 포르쉐를 몰아주마.’

***

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진현의 부모는 아들의 바뀐 모습에 깜짝 놀랐다.

평생 책이라고는 만화책도 들여다보지 않던 아들이 밤 12 시가 넘도록 교과서를 놓지 않다니!

“어머니, 아버지. 꼭 효도해 드릴게요.”

“됐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빨리 자렴.”

그들은 진현의 모습에 감동했다.

발육이 늦는지 진현은 또래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외모뿐 아니라 항상 어린 모습만 보여 그들은 아들 걱정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히 공부뿐이 아니라 철든 어른처럼 태도 자체가 성숙해졌다.

“오늘부터는 저도 식당 나가서 도울게요.”

“아니다, 됐다.”
“괜찮아요. 공부만 하기 지겨워서 그래요.”

진현의 아버지는 몇 번의 장사 실패 끝에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전히 장사는 신통치 않았지만 진현은 아버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완강히 거절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식당에 얼씬거릴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어쩔 수 없이 진현이 물러섰다. 그는 다음에 기회를 봐서 식당 일을 돕기로 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담임이 진현을 부른 것이다.

“김진현! 교무실로 따라와!!”

“……?”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뭐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는데?’

담임은 기다란 나무회초리로 책상을 두들기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너 이놈. 공부는 못해도 착한 놈으로 봤는데 이런 짓을 저질러?”

“무얼 말입니까?”

담임은 버럭 화를 냈다.

“커닝을 해? 이 자식이 죽으려고!”

“……?!”

진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커닝이라니?”

“이놈 봐라?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고개 빳빳이 들고? 당장 부모님 데려와!”

진현은 차분히 말했다.

“선생님, 제가 아무리 학생이라도 막무가내로 화내는 것은 부당한 것 같습니다. 제가 커닝을 했다면 그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이 자식이……!!”

담임은 씩씩거리며 성적표를 꺼냈다.


“이것 봐라!”

“……??”

“영어, 국어가 만점이잖아! 수학도 90 점이고! 네가 이런 성적을 어떻게 받아?”

정말로 성적표에는 영어, 국어 100 점, 수학 90 점이 적혀 있었다.

반면 나머지 과목들 성적은 극도로 초라했다. 누가 봐도 의심할 성적표긴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

03. 회귀 (2)

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선생님, 그건 커닝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직접 풀기라도 했단 말이냐??”

“네, 제가 푼 것입니다.”

“이 자식이 계속 거짓말을!!”

회초리라도 휘두를 기세다.

“제가 커닝했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뭐?!”

진현은 나직이 말했다.

“화내지 말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순간 움찔한 담임은 눈을 찌푸렸다.

‘이 녀석 요즘 따라 태도가 왜 이러지?’

과거 진현은 위축된 어깨에 말도 더듬거리는 자신감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의젓하고 차분해졌다.

나쁘게 말하면 애늙은이 같고, 좋게 말하면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선생님이 제가 커닝한 증거가 없듯이 저도 커닝을 안 했다는 증거를 보이진 못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뭘 어떻게?”
“다음 시험 때 성적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커닝을 한 게 맞는다면 다음 시험 때는 이런 성적을 받지
못하겠지요.”

합리적인 말이었다.

“그래, 네가 반에서 중간에만 들어도 컨닝 안 했다고 인정해 주마. 대신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각오해.”

그러면서 담임은 비웃었다.

천생 꼴찌가 성적을 올리겠다고?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진현은 교무실을 나갔다.

그 당당한 모습에 담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기말고사 때 보자.’

***

한편 성적표를 받은 부모님은 크게 기뻐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100 점이라니!! 그것도 두 과목이나!”

어머니는 당첨된 로또마냥 성적표를 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리 들고 저리 들고 하는 것이 액자에 보관해 가보라도 삼을 기세다.

물론 전체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이다. 다른 과목들이 죽을 쒀도 개죽을 쒔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이 난생처음으로 받아본 100 점에 어머니는 눈물까지 글썽했다.

진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저 정도 성적에도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난 참 못난 놈이었구나.’

아버지도 별말은 안 하셨지만, 신문 너머로 힐끗힐끗 성적표를 보는 것이 기쁘긴 한 모양이다.

“너 근데 컨닝한 건 아니지? 어떻게 국어, 영어만 만점 맞았어?”

어머니가 갑자기 눈을 흘겼다.

“아니에요. 다음 시험 때는 다른 과목들도 100 점 맞을게요.”

“아이고, 말만 해도 고맙다. 꼭 그래다오!”

어머니는 신 나 하며 요리를 준비했다.

진현은 미소 지었다.

괄괄할 정도로 활달한 어머니지만 진현에게는 그 괄괄함이 각별히 소중했다.


나중에,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간 후 어머니는 미소를 잃고 생활고에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번에는 그렇게 만들지 않겠어. 내 손으로.’

진현은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이번 기말고사 때 성적이 더 오르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어요?”

“뭐냐?”

“저도 아버지 식당에서 도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버지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된다.”

“그러지 말고…….”

“네가 반에서 1 등이라도 하지 않는 한 절대 안 된다.”

완강한 불허였다.

꼴찌인 애가 1 등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고, 얘가 1 등을 어떻게 해요? 반에서 20 등 안에만 들어도 소원이 없겠구먼!”

어머니가 요리하며 웃었다.

“자, 다 됐다. 진현이, 너도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말고 밥이나 먹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

금방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고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자, 책상 가운데 가방 올려라. 컨닝할 생각하지 말고.”

긴장된 고요가 흘렀다.

담임은 회초리로 교단을 쳤다.

“다들 양심껏 보고, 컨닝하면 죽을 줄 알아.”

그러면서 진현을 바라봤다. 걸리기만 해봐라, 는 눈빛이다.

진현은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종소리가 울리고 시험이 시작됐다.


첫 과목은 중간고사와 마찬가지로 국사였다.

“으… 이거 뭐야?”

시험지를 받아본 아이들이 신음을 흘렸다.

국사 선생은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그 성격이 시험지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첫 문제부터 고난도가 속출했다.

담임은 다시 진현을 봤다.

진현은 무심한 눈으로 시험지를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휴머니즘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는 듯 평온한 눈빛이다.

그러면서 쓱쓱 OMR 마킹을 해갔다.

‘하, 이놈. 그러면 그렇지!’

진선 중학교의 국사 시험은 난이도 높기로 교무실에서도 유명했다.

그런 문제를 저 속도로 풀다니.

담임은 진현이 다 찍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국사, 수학, 영어, 국어 등의 시험이 지났다.

모든 시험을 보며 진현은 50 분 중 반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고 담임은 회심의 이를 갈았다.

‘그래, 성적만 나와 봐라. 허벅지에 불을 내주마.’

진현 주위에 앉아 있던 아이들도 생각했다.

‘꼴찌 녀석, 이번에 시험 한번 제대로 포기했구나.’

모두가 진현이 시험을 포기해 대충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성적이 나왔다.

***

“아, 아니……?”

담임은 입을 벌렸다.

떨리는 손에는 학급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이 선생님?”

영어 선생이 물었다.
“이거 잘못 인쇄된 거죠?”

“네……?”

담임은 OMR 채점을 담당한 젊은 수학 선생에게 말했다.

“김 선생, 이거 어떻게 채점을 한 거야? 애들 성적이 얼마나 중요한데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해?”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이거 말이야, 이거.”

그러면서 담임은 성적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다 잘못됐잖아.”

수학 선생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도 이상하게 생각해서… 손으로 다시 채점했는데… 맞아요.”

“…맞다고?”

“네, 맞아요. 전부 제대로 채점된 거예요.”

담임은 다시 학급 성적표를 쳐다봤다.

성적표가 제대로 됐다면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3 학년 2 반 23 번, 김진현 평균 97.3 점. 반 석차 1 등, 전교 석차 3 등]

성적표에 쓰여 있는 내용이었다.

***

푹푹 찌는 쉬는 시간, 진현의 짝이 교과서로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진현아, 오늘 뭐할 거냐? 끝나고 시원하게 오락실이나 가자.”

“됐어.”

“왜?”

“공부할란다.”

짝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너 요즘 왜 이러냐? 우리 같은 애들은 해도 안 돼. 공부는 될 놈이나 하는 거야.”

그 말에 진현은 짝의 눈을 바라봤다.
이름이 황문진이었지?

그와 짝, 황문진은 중학교 때 공통점이 많아 제법 친했었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고, 다른 애들과 잘 못 어울리고, 싸움 못하고, 운동 못하고, 공부 못하고. 석차는 진현이
뒤에서 1 등, 황문진이 뒤에서 2 등이었다.

“문진아.”

“왜?”

“정말 너도 공부해라.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진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공부가, 대학 합격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미래는, 진현을 비롯한 아이들이 맞이할 사회는 수능 좀 잘 봤다고 장밋빛이 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학창 시절 공부는 그 전쟁 같은 사회에서 최소 유리한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게는 해준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하지만 황문진은 입술을 내밀었다.

“너 진짜, 자꾸 꼰대처럼 이야기할래?”

그런데 그때 교실 문이 열리더니 담임이 들어왔다.

“어, 도덕 시간 아닌데요?”

아이들이 담임에게 말했다.

하지만 담임은 대답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진현에게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만 이리로 와라. 할 말이 있다.”

“……??”

진현은 담임을 따라갔다.

“…….”

담임은 말없이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창고 옆이라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이다.

진현이 물었다.

“무슨 말이십니까?”
담임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4

04. 회귀 (3)

“미안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난번, 널 의심했던 것 미안하다.”

진현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담임의 교과목은 도덕이다.

하지만 성격은 다혈질이고 체벌에 특화된, 도덕적이지 않은 선생으로 유명했다.

과거에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하긴 성격이 더럽긴 해도, 이유 없이 체벌하진 않았지.’

진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라도 의심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담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곤 헛기침하며 되물었다.

“그래, 솔직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네, 맞습니다.”

“어쨌든 미안하고 성적 오른 거 축하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성적을 팍 올린 것이냐?”

담임은 이해가 안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성적이 오르는 아이는 많다.

하지만 전교 꼴찌에서 반 1 등, 그것도 전교 3 등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진현은 잠시 고민했다.

‘뭐… 아무리 까먹었다 해도 결국 중학교 공부니까.’

전의 삶에서 수능 공부를 장장 사수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 아무리 기억이 안 난다 해도 중학교 시험을 보는 것은 어른이 아이와 경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량의 차이.


‘의대생 때는 정말 힘들게 공부했지.’

의대생들은 정말 ‘죽을 듯’ 공부한다.

단 2 학점의 중간시험을 위해 4 일을 통틀어 단 2 시간만 자고 공부하는 녀석도 있고, 구내식당 갔다 오는 단 20


분의 시간이 아까워서 시험 기간 내내 라면으로만 때우는 녀석도 있다.

한 번 배웠던 내용을 그렇게 공부하니 성적이 안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지.’

담임이 궁금해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게 그렇게 성적을 올린 것이냐?”

진현은 짧게 답했다.

“정신 차렸습니다.”

***

꼴찌 김진현이 전교 3 등 했다!

진선 중학교 전체가 요동쳤다.

“어, 어떻게……?”

아이들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김진현을 바라봤다.

놀라움은 짝, 황문진이 가장 컸다.

“…너… 너?”

진현은 말했다.

“너도 공부해라. 너도 하면 할 수 있다.”

“…그, 그래!”

그들에게 두꺼운 검은 안경을 쓴 소년이 다가왔다. 항상 반 1 등을 도맡아하던 반장이었다.

“김진현?”

“왜 그러지, 반장?”

반장은 손을 내밀었다.

“1 등 축하한다.”

진현은 마주 손을 잡았다.
반장은 도전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번 같지 않을 거야. 다음 1 등은 나다. 각오해.”

그 오글거리는 말에 진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군.’

“얼마든지.”

집도 난리가 났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니니, 진현아?”

어머니는 성적표를 한참 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진현은 당황했다.

“아, 아니. 어머니 왜 눈물을 흘리세요?”

“내 생애 이렇게 좋은 날이 올 줄 몰라서. 우리 아들이 1 등을 하다니!”

진현이 달랬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진현은 속이 쓰렸다.

‘결혼 후 좋은 날이 없었으니.’

아버지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지만 불행히도 장사 수완이 부족했다.

행복하게 시작한 결혼 생활은 몇 번이나 거듭된 장사 실패로 점점 수렁에 빠졌다.

그나마 지금 하는 백반집은 근근이 장사가 되지만 그간 쌓인 빚을 생각하면 깊은 한숨만 나오는 지경이었다.

하나 있는 아들도 맨날 꼴찌에 학교에 잘 적응도 못해 기쁠 일이 없었는데 떡하니 1 등 성적표를 가지고 온 것이다.

진현의 어머니는 진현이 마치 한국대 수석 합격을 한 것처럼 기뻤다.

아버지도 크게 기뻐했다.

무뚝뚝한 성격답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그날따라 만취를 해서 들어온 것이다.

“아니, 아버지? 무슨 술을 이렇게?”

진현은 놀라 아버지를 부축했다.

전의 삶을 살 때는 아버지가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적은 처음이었다.

“딸꾹! 어… 내가… 내가 김 관장이랑 좀 마셨다.”

“몸 상하시게 왜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


“그래, 내가 좀 마셨어. 마셔야지. 이렇게 좋은 날인데.”

취한 아버지는 평소보다 말수가 많았다.

진현은 아버지를 눕혔다.

“푹 주무세요.”

조심이 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진현아… 고맙다.”

“……!!”

진현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뭐가 고맙단 말인가?

“아니에요. 제가 나중에 꼭 효도해 드릴게요. 푹 주무세요.”

***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사회에 나가면 누리지 못할, 학생만의 꿈같은 특권이었다.

골목 어귀, ‘진현 백반집’이라 쓰인 음식점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집에 가서 쉬어.”

“괜찮아요. 많이 쉬었어요.”

“그러면 가서 공부라도 해.”

“방학인데 저도 머리 식혀야죠. 이게 머리 식히는 거예요.”

진현은 방학 때 아버지의 가게를 도왔다.

부모님은 모두 진현이 일을 돕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도 완강했다.

“저 1 등 했으니 약속대로 말리지 마세요.”

진현의 마음에 어머니는 감동해 말했다.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낳지.”

그 말에 아버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아들이야.”

“아니, 뭐라고요? 진현인 저를 닮았어요!”


그 유치한 다툼에 진현은 미소 지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 더 부탁이 있어요.”

“뭐냐?”

“저, 김 관장님 도장에서 운동하면 안 될까요?”

김 관장은 아버지의 친구로 킥복싱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킥복싱은 왜?”

“그냥… 나중에 고등학교 가면 체력도 많이 필요할 텐데 미리 운동 좀 해두려고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

“오랜만이다, 진현아.”

“네, 관장님.”

“성적 많이 올랐다고 아버지가 좋아하더라. 에휴, 우리 아들내미도 공부 좀 해야 하는데. 네가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진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킥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네.”

아버지의 친구인 김 관장은 중년의 나이에도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가운데가 벗겨진 대머리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게임인 철권의 캐릭터 같기도 했다.

“이유는? 체력을 단련하고 싶어서?”

“네, 그런 것도 있긴 한데…….”

진현은 김 관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전… 그러니까, 실제 싸움을 가정한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

김 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고 싶지 않은 상대가 있습니다.”


진현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하지만 그의 굳은 눈빛을 본 김 관장은 대충의 사연을 짐작했다.

“그래, 알겠다. 너는 스포츠가 아닌, 격투기로서의 킥복싱이 배우고 싶은 거구나.”

“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하지만 친구의 아들이라고 봐주는 것은 없으니 각오해!”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하드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입학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진현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연습했다.

독종도 기가 질릴 진현의 연습에 김 관장은 혀를 내둘렀다.

“허, 너 내가 아는 진현이 맞는 거냐? 좀 쉬엄쉬엄 해라. 그러다 몸 상하겠다.”

“아직 괜찮습니다. 스파링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안 돼. 얼굴 더 부으면 네 아빠한테 내가 맞아 죽을 거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김 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연습한 진현의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운동 감각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링 위에서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여튼 안 된다. 무슨 격투기 대회라도 나갈 생각이 아니면 쉬엄쉬엄 해.”

어쩔 수 없이 진현은 샌드백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 자식.’

진현의 고등학교 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그놈’.

‘내년에 반드시 만나게 돼.’

물론 킥복싱 몇 달 한다고 해서 싸움의 귀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현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어차피 고등학생들 싸움은 이종격투기 시합이 아니라 개싸움이다.

일진이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깡과 독기.
기본적인 운동 능력을 제외하면 깡과 독기가 승부를 결정한다. 진현은 그걸 키우는 중이었다.

‘이번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진현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놈은 왜 일신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지? 집도 잘살면서.’

그놈의 집은 부자였다.

그것도 그냥 부자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상대적으로 낙후한 동네의 일신 고등학교가 아닌, 강남 8 학군, 아니, 재벌가가 모인 한남동 쪽이 어울릴 집안의
자제였다.

‘성적도 한국 외고나 한국 과학고를 진학할 수 있잖아?’

그놈은 성적도 좋았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 1 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고, 결국 전국 수석에 가까운 점수로


한국대 의대에 합격했다.

한마디로 집안 좋고, 머리 좋은 외계인 같은 놈이었다.

‘어쨌든 이번엔 그때 같지는 않을 것이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퍼억!!

샌드백이 터질 듯 출렁거렸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 5

05. 회귀 (4)

1 등을 탈환하려던 반장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진현은 그 다음 시험에도 1 등, 그것도 반 1 등이 아닌 전교 1 등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 1 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진현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전과 같은 일신 고등학교였다.

“진현아, 반가워!! 또 같은 반이네?”


중학교 때 짝, 황문진이 히히, 웃으며 인사를 했다.

녀석은 고등학교 교복으로 갈아입은 것 외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 반갑다.”

진현은 반 안을 둘러보았다.

고등학교 첫 등교로 긴장된 얼굴의 학생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르륵!

낡은 문이 열리며 배 나온 중년 아저씨가 들어왔다.

“자, 조용히 주목! 난 너희의 담임인 이문호라고 한다. 일신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환영한다. 우리 일신
고등학교는 역사가 깊은 전통의…….”

그리고 새로운 담임은 첫 만남부터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록 입시 성적이 떨어졌지만 일신 고등학교는 과거 명문이었고 너희는 반드시 열심히 공부해서… 불라불라.

진현은 지겨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저 담임은 여전하구나.’

전의 삶 때도 저 담임의 잔소리를 듣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자, 그러면 다들 열심히 하고!”

그런데 그때였다.

드르륵.

교실 뒷문이 소음을 내며 열렸다.

다들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교복을 입은 소년이 느긋한 태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까마득히 지각을 했음에도 입가에는 차분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미안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옅게 파마한
머리가 갈색으로 빛났다.

담임은 손을 떨며 분노했다.

“너… 너… 이 자식이……!!!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리고 머리 꼬락서니는 그게 뭐야!!!!!”

지각생은 태연히 답했다.

“길이 막혀서 늦었습니다. 혹시 남는 자리는 없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너 이름이 뭐야, 이 자식아!!”

“이상민입니다.”

“이상민? 그래, 너 이리와 봐라! 내가 너 같은 양아치를 놔두면 사람이…….”

그런데 담임이 일순 말을 멈췄다.

“자, 잠깐. 이상민? 너 지금 이상민이라고 했니? 구민 중학교 졸업한 이상민?”

“네, 맞습니다.”

담임의 태도가 갑자기 양처럼 부드러워졌다.

“진즉 이야기하지 그랬니? 차가 많이 막혔나 보구나.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저기 빈자리 가서 앉으렴. 혹시 앉고


싶은 자리는 없니? 저쪽 자리가 햇볕이 들어와서 좋을 텐데.”

안쓰러울 정도로 친절한 목소리였다.

“괜찮습니다. 저쪽 빈자리에 앉겠습니다.”

그리고 소년, 이상민은 뒷자리로 향했다.

훤칠한 키, 싱그러운 외모. 화보에 나오는 모델 같은 발걸음이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저 녀석이 구민 중학교의 이상민?’

‘소문대로 잘생겼구나.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는데.’

‘집안도 엄청 좋데. 담임 설설 기는 것 좀 봐.’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진현은 얼굴을 굳혔다.

‘역시 같은 반이구나.’

그는 이상민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과거 그를 지옥에 빠뜨렸던 놈이니까!

하필 자리도 바로 뒷자리였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싱긋 웃었다.

“안녕? 난 이상민이라고 해. 잘 부탁해.”

그 웃음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마주 인사했다.

“그래, 난 김진현이라 한다. 반갑다.”

***
처음 며칠은 의외로 별일 없이 지나갔다.

‘금방 시비를 걸 줄 알았는데?’

과거에는 등교 이틀 만에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왕따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상민은 딱히 진현을 신경 쓰지 않고 껄렁한 친구들과 담배나 피울 뿐이었다.

오히려 다른 학우들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안녕? 난 김진우야. 좀 있다 점심시간에 축구나 하지 않을래?”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어떻게 성적을 올린 거야? 나도 좀 가르쳐 주라.”

다들 진현과 친해지고 싶은 눈치였다.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성적이 올라서인가? 이상하군.’

하지만 단순히 성적 때문에 아이들이 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진현의 의젓한 태도와 말투가 아이들에게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탓이다.

또래보다 더 앳되고 동글동글해, 잘못 보면 초등학생 고학년으로도 보이는 얼굴에 말투는 애늙은이니


기이하면서도 귀여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담임의 종례 후 하교시간이었다.

그놈, 이상민이 말을 걸었다.

“잠깐, 김진현? 오늘 저녁에 시간되니?”

“무슨 일이지?”

“특별한 것은 아니고… 같이 어디 갈까 해서.”

진현은 시선을 돌렸다.

이상민의 입가에는 예의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친해지잔 건가? 설마.’

짧게 답했다.

“싫은데.”

“왜?”

“내키지 않아서. 난 가볼 테니 잘 놀아라.”


그리고 진현은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이상민은 여전히 가면 같은 미소를 띠운 채 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누군가 이상민에게 다가왔다.

“상민아, 뭐하냐?”

김철우. 이상민의 친구이자 똘마니였다.

중학교 때부터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지만 이상민의 보호로 별 탈 없이 무사했다.

“쟤 알지?”

김철우의 눈이 이상민의 시선을 따라갔다.

“알지, 진선 중학교 졸업한 김진현이잖아.”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진현은 일신 고등학교 신입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꼴찌에서 단숨에 전교 1 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것도 그렇고, 당시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 입학 성적도
학년 1 등이었던 것이다.

“김진현, 저놈은 왜?”

이상민은 나른히 답했다.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김철우가 웃었다.

“왜? 너 제치고 1 등해서?”

이상민은 항상 전교 1 등이었는데 그 기록이 이번에 깨졌다.

이상민의 연합고사 성적은 김진현의 뒤를 이은 2 등이었다.

티는 안 내지만 이상민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지는 것이었다.

불공평한 재능을 타고난 이 천재는 비틀린 승부욕을 가지고 있었다.

“글쎄…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깔까?”

김철우가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저런 꼬마 범생이 따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피 떡으로 만들 수 있다.

“아니야, 나름 입학 1 등인데… 직접 손을 쓰는 것은 좋지 않아.”

“그러면?”
“주변부터. 그게 낫지 않을까?”

김철우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큭, 간만에 재미있겠군. 그놈 제일 친한 친구가… 황문진이란 땅꼬마였나?”

“글쎄… 하여튼 알아서 잘해줘.”

이상민은 여상이 말했다.

김철우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에 곧 왕따가 되어 질질 짤 김진현의 얼굴이 그려졌다.

‘불쌍한 놈. 하필 천하의 이상민에게 찍히다니!’

***

진현은 고등학교에 입학 후에도 공부에 열중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계가 올 거야. 미리 최대한 공부를 해놔야 해.’

전의 삶 때 사수까지 했으니 중학교 수준의 공부는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진도가 나가고 학년이 올라가면 현재의 성적을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목표는 그냥 의대가 아닌, 한국대 의대가 아니던가?

한국대 의대!

모든 입시의 정점에 위치한 곳으로 수십만 수험생 중에서 100 등 안에 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나귀 몸에 바늘귀였다.

“진현아, 쉬엄쉬엄해라.”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

진현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시 수학 문제집에 열중했다.

다음 날 학교에 등교한 진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중학교 때부터 짝, 황문진이 안 보였던 것이다.

‘웬일이지? 공부는 못해도 지각은 한 번도 안 하던 녀석인데?’

개인 핸드폰이 있는 시절도 아니라 연락할 수도 없었다.

황문진은 4 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등교했다.


“너 왜 늦었냐?”

진현의 물음에도 황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황문진의 왼쪽 볼이 부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볼뿐이 아니다. 펑펑 울었는지 양 눈도 빨겠고 옷 사이로 희끗희끗 멍 자국도 보였다.

“뭐야? 너 누구랑 싸웠냐?”

“…….”

대답이 없자 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문진, 묻잖아. 누구랑 싸웠냐? 아니… 누가 때렸냐?”

“…진현아.”

황문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한데… 이제 나한테 말 걸지 말아주라. 미안… 정말 미안…….”

마지막 목소리는 숫제 울먹거리는 듯했다.

“……!!”

진현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상민이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황문진과 진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너냐?”

“뭘?”

진현은 이상민에게 걸어갔다.

“황문진 건든 것, 네 짓이냐고.”

“……!”

이상민은 부정하지 않았다.

“글쎄… 그러면 어쩔 건데?”

그러곤 비웃음을 띄웠다. 네까짓 게 어쩔 거냐는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교실이 싸해졌다.

“어쩔 거냐고?”

진현은 주먹으로 답했다.

퍼억!

(다음 편에서 계속)

# 6

06. 회귀 (5)

이상민의 얼굴이 뒤로 홱 꺾였다. 망치 같은 스트레이트였다.

“…어?”

이상민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일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림처럼 그린 코에서 주룩 코피가 흘렀다.

진현은 재차 주먹을 날렸다.

퍼억!!

“컥!”

이상민은 꼴사납게 넘어졌다.

우당탕!!!

책상이 휩쓸려 쓰러졌다.

진현은 불같이 분노했다.

“개 같은 자식. 그렇게 잘났으면서 약한 애들이나 괴롭혀? 쓰레기 같은 놈.”

지옥 같은 과거가 떠올랐다. 너무 괴로워 자살을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제발 그만 괴롭혀! 도대체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어느 날 그렇게 울부짖었다.

이상민은 천진하게 답했다.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단다.

사람의 삶을 지옥에 빠뜨려놓고.

그리고 이놈은 회귀 후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엄살 부리지 말고 따라 나와.”

일갈한 진현은 등을 돌려 교실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벼락같은 고함이 꽂혔다.

“따라 나오긴 뭘 따라 나와?! 이 시벌 놈아!!”

퍼억!

이상민의 똘마니, 김철우였다. 솥뚜껑 같은 주먹이 진현의 뒤통수에 꽂혔다.

진현이 휘청거리자 김철우가 득달같이 주먹을 날렸다.

“이 빌어먹을 범생이 자식. 범생이면 범생이답게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어딜 감히!”

퍽! 퍽! 퍽!!

얼굴, 배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것 아니야? 저러다 다칠 거 같은데.”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진현의 눈과 김철우의 눈이 마주쳤다.

진현의 눈빛은 얻어맞는 약자의 것이 아니었다. 섬뜩한 투기가 가득했다.

“……!”

김철우가 흠칫한 순간, 카운터가 꽂혔다!

어퍼컷이었다.

“큭!”

다음엔 로우킥!

킥복싱 도장에서 피 떡이 되도록 실전 같은 연습을 한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이!!!”

김철우가 분노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진현은 더 이상 당하지 않았다. 왼팔로 가드한 진현은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퍼벅!!

“이 자식이!! 죽여 버리겠다!!!”
주룩 코피를 흘린 김철우는 곰처럼 외쳤다.

그러나 진현은 왼팔로 잽을 날려 중심을 흐트러뜨리고 이어 스트레이드를 날렸다.

원 투 블로우(One two blow), 해머 같은 주먹이 김철우의 인중에 정확히 꽂혔다!

“커억…….”

급소를 강타한 강렬한 일격에 김철우는 결국 뒤로 벌렁 쓰러졌다.

“마, 맙소사. 김진현이 김철우를…….”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철우는 1 학년 일진 중에서도 차기 짱으로 꼽히기도 하는 주먹이었다.

그런데 둥글둥글 순하고 어려 보이는 얼굴에, 마냥 공부벌레인 줄만 알았던 김진현이 김철우를 꺾다니?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일진이니 뭐니 해도 어차피 고등학생 막싸움.

이종격투기시합이 아닌 한 가장 중요한 것은 깡과 베짱이다.

그걸 키우기 위해 진현은 매일같이 킥복싱 도장에서 얻어맞고 싸웠다.

그리고 악바리 같은 의지에 필사적으로 연마한 킥복싱 기술이 얹어졌다. 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프긴 아프군.’

진현은 통증으로 울리는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엉거주춤 서 있는 이상민을 바라봤다.

이상민의 얼굴에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냐? 넌 가만히 있을 거냐?”

“……!”

이상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장기는 뒤에서 친구들을 부리는 것이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다.

김철우가 당했는데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진현이 이렇게 싸움을 잘하는지 알면 애초에 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벅저벅.

진현이 걸어오자 이상민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진현은 이상민의 멱살을 잡았다.

“사과해.”
“……!!”

“황문진 건든 것 사과하라고, 이 자식아.”

진현은 무겁게 이상민을 노려봤다.

이상민은 이를 악물었다.

반 모든 아이가 침을 삼키며 멱살이 잡힌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닥쳐!!”

이상민은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진현이 빨랐다.

퍼억!!

이상민의 얼굴이 돌아갔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익!!”

발악하는 듯한 공격을 왼팔로 차단한 진현은 재차 주먹을 꽂았다.

퍽! 퍽! 퍽!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느새 이상민의 곱상한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그, 그만…….”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쌍코피에, 찢어진 입술로 피를 흘리며 이상민은 빌었다.

진현은 다시 멱살을 잡았다.

“사과해.”

이상민의 부운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는 못했다.

반 아이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황문진.”

“어… 어, 어?”

진현의 부름에 황문진이 놀라 답했다.

“이리로 와라.”

황문진은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황문진의 얼굴은 전날 이상민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해 엉망이었다.

진현은 물었다.

“왜 황문진을 때렸지? 너에게 잘못한 것이라도 있었나? 대답해.”

“…….”

이상민은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진현은 알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이상민, 이놈은 원래 이런 놈이니까!

“황문진에게 사과해.”

“…….”

“지금 당장!”

“미, 미안하다…….”

마지못한 목소리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사과해.”

“하, 하지만…….”

“야, 이상민.”

진현은 불같은 눈으로 노려봤다.

“넌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거냐? 나 정말 엎어버리기 전에 제대로 사과해!!”

그 기세에 이상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황문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저, 정말…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그런 이상민의 굴욕을 보며 반 아이들은 속이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상민은 종종 약한 애들을 괴롭혔었다.

하지만 전교 1 등의 성적과 집안의 재력으로 누구의 터치도 받지 않고 지내다 오늘 임자를 만난 것이다.

땡! 땡!

그때 수업 시작 10 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진현은 멱살을 놓으며 경고했다.


“이런 일… 다시 한번 있으면 그때는 이 정도로 끝내지 않겠어. 명심해.”

“…아, 알겠어.”

이상민은 김철우를 데리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무단 조퇴해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진현에게 모여들었다.

“진현아, 정말 대단해! 이상민 그놈 꼴 봤어?”

“이상민, 그놈. 중학교 때부터 재수 없었는데. 너 덕분에 속이 다 시원하다!”

평소 이상민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진현을 영웅처럼 추켜세웠다.

황문진이 면목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고, 고마워, 진현아. 그리고… 미안.”

그는 이상민의 협박을 받아 진현을 외면하려 했는데, 진현은 오히려 황문진의 괴롭힘을 갚아주었다. 미안함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황문진이 어쩔 수 없음을 이해했다.

“괜찮아. 이해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몸이나 잘 살펴라.”

“우… 우리 계속 친구인 것이지?”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언젠 친구 아니었냐?”

황문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정말 고마워. 앞으로 나 네 말대로 열심히 할게.”

***

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담임이 진현을 부른 것이다.

“김진현, 교무실로 따라와!”

평소 담임은 입학 성적 1 등인 진현에게 호의적이었으나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진현은 이유를 짐작했다.

‘이상민 때문이군.’

과연 담임은 교무실 책상을 두드리며 호통을 쳤다.


“김진현 이놈. 그동안 좋게 봤는데 이런 사고를 쳐?!”

“무얼 말입니까?”

“죄 없는 반 친구를 일방적으로 폭행해? 네가 조폭이야, 임마?”

담임은 얼굴이 빨개져 화냈다.

진현은 사정을 대충 짐작했다.

‘학교 이사회에서 이야기가 들어갔나 보군.’

그가 아는 담임은 학생들의 다툼이나 폭행에 신경 쓰는 위인이 아니었다.

과거에 괴롭힘 당해 선처를 부탁해도 담임은 이상민에게 쓴 소리 한 번 한 적 없었다.

그저 쉬쉬 모른 척할 뿐이었다.

담임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굽실거리는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진현은 굽힘없이 말했다.

“황문진이 이상민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했습니다. 그건 왜 아무 말 없으십니까?”

“뭐, 임마? 남자애들끼리 주먹다짐 좀 할 수 있지.”

“이상민은 단지 재미 삼아 황문진을 폭행했습니다. 황문진은 전신에 피멍이 들 정도로 다쳤고요. 완전한 학교


폭력인데 이건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 이놈이……!”

진현은 단호히 말했다.

“전 친구로서 대신 나섰을 뿐입니다.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상민은 계속해서 황문진을 폭행했을 게


뻔하니까요.”

담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이전처럼 호통을 치진 못했다.

다른 놈이었으면 싸대기를 날렸겠지만 진현은 입학 성적 1 등으로 학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어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애초에 이번 일은 이상민이 잘못이 컸다.

약한 학생을 왕따시키려다 되레 당한 것이니까.

결국 담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이놈아. 넌 이상민의 집안이 어딘지 몰라서 그래.”


“…그놈의 집안이 어디기에 그렇습니까?”

진현은 의아했다.

담임뿐 아니라 교장, 이사회 전체가 이상민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부자인 것만 알지 이상민의 집안이 어딘지는 정확히 몰랐다.

“내가 말해줄 수는 없어. 하지만 어쨌든 이사회에서 난리야. 너한테 중징계를 내리라고. 그리고 오늘, 교감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이 논의 끝에 너한테 정학 처벌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말에 진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싸움 한 번에 정학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싸움 한 번에 정학이라니요? 그러면 이상민은 어떤 처벌을 받는 것입니까?”

“이상민의 처벌은 없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놈은 지금까지 그토록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꾸지람 한 번 안 듣고, 자신은 단 한 번에 정학인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저를 정학시키려 한다면 이상민도 같이해 주십시오.”

“그렇게는 안 된다.”

“선생님, 우리 일신 고등학교의 정학 규정이 무엇입니까?”

“그건…….”

담임은 답을 못했다.

진현이 또박또박 말했다.

“여러 규정이 있지만 일회성 싸움은 봉사활동에 해당되지 정학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규정도 있지요. ‘타 학생을 의도적으로 괴롭히거나 따돌리려 할 경우 정학이나 퇴학의 징계를 받는다’. 이
규정에 따르면 정학을 당해야 하는 사람은 이상민입니다.”

어린 몸을 가지고 있지만 산전수단을 다 겪어봤다.

이런 불합리한 처벌을 받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

07. 의학의 천재? (1)


“그, 그… 하여튼 시끄러워, 이놈아! 버릇없이 선생님한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고! 정학을 당하는 것은
네놈이야!”

논리에서 안 되니 담임은 화를 내었다.

하지만 진현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해결되었다.

진현이 입을 열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만하십시오.”

“……!!!”

담임과 진현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이상민이었다.

“그만하십시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이니, 상민아?”

담임은 이상민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이상민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이번 일은 제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그만하십시오.”

“……!!”

담임은 눈을 껌벅거렸다.

“그, 그래……? 하지만……?”

“정말입니다. 제 잘못이니 정학을 시키려면 저를 시키십시오.”

담임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네가 정학이라니? 친구들끼리 다툴 수도 있지.”

김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인 것이지?’

하지만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이상민의 얼굴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 말씀처럼 그저 친구들끼리 다툼이니 너무 신경 안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래. 알겠다.”

그렇게 교무실의 소동은 이상민 때문에 일단락되었다.


교무실 유리문을 닺고 나온 진현은 이상민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이지?”

“뭘?”

“왜 나를 도와준 거냐고.”

하지만 이상민은 흘리듯 답할 뿐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진현을 돌아보지도 않고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진현은 찝찝한 기분에 인상을 썼다.

‘뭐야? 무슨 생각인 것이지? 기분 나쁜 녀석.’

***

그 뒤 이상민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벽을 친 듯 자신의 친구들하고만 어울릴 뿐이고 덕분에 진현은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민이 진현을 신경 안 쓰는 것은 아닌 듯했다.

가끔 고개를 돌리면 주시하고 있었던 듯, 계속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하든가. 기분 나쁘게.’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중간고사를 봤다.

“하아… 다 찍었다. 잘 봤니, 진현아?”

황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최근 진현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름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어려웠다.”

“히, 거짓말하지 마. 중학교 때처럼 금방 다 풀고 나가놓고선. 또 전교 1 등 할 거지?”

“글쎄,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르니까. 어렵지 않을까 싶다.”

“성적 나와 보면 알겠지. 또 1 등 하면 떡볶이 쏴!”

황문진은 진현이 전교 1 등을 할 거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하지만 진현은 확신은 없었다.


‘정말로 중학교 때와는 다르니까. 그저 열심히 할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적이 나왔다.

담임은 반 전체 아이들의 성적과 등수가 나온 인쇄용지를 뒤 게시판에 떡하고 붙였다.

“성적 확인해라! 앞으로 이 등수 기준으로 더 떨어지는 놈은 가만히 안 놔둔다.”

종이에는 1 등부터 꼴등까지가 내림차순으로 좌르륵 적혀 있었다.

남들이 자신의 성적을 알게 하는, 악질적인 방법이었지만 아이들을 자극시키기 위해 종종 사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등. 김진현 평균 97.5 점 전교석차 1 등.

2 등. 이상민 평균 96.8 점 전교석차 2 등.

3 등. 장철민 평균 93.2 점 전교석차 27 등.

……

“히히, 맞잖아. 또 1 등 했어. 떡볶이 쏴!”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았어.’

2 등, 이상민과 평균은 고작 0.7 점 차이다. 이 정도면 거의 비슷하다 봐야 했다.

“그런데 나는 39 등이네. 해도 안 되나 봐, 나는.”

“그래도 43 등에서 조금 오르긴 했잖아. 더 노력해 봐라. 쑥쑥 오를 것이다.”

“그렇겠지? 히히.”

그러면서 진현은 이상민을 살폈다.

그도 석차를 보고 있었다.

1 등. 김진현 평균 97.5 점 전교석차 1 등.

2 등. 이상민 평균 96.8 점 전교석차 2 등.

그 부분에서 이상민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지만 주먹을 움켜쥐는 것을 진현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민은 교실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툭하면 하는 무단조퇴였다.

‘기분 나쁜 녀석.’
진현은 혀를 찼다.

***

고등학교에서도 1 등을 하는 진현 때문에 부모님은 크게 기뻐했다.

“아이고, 내 새끼. 누굴 닮아 이렇게 기특할까?”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진현이는 날 닮았어.”

“아니, 뭐라고요? 당신이 진현의 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구만 무슨 말이에요?”

그날 아버지는 다시 취해 들어왔다. 진현이 1 등 할 때마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 건강에 안 좋으니 술을 좀 줄이세요.”

“그래, 고맙다.”

아버지는 아들의 걱정에 흡족한 표정으로 답했다.

“진현아, 그거 알지?”

“뭘요?”

“우린 너밖에 없다.”

“저도 그래요. 그러니 꼭 술 줄이세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는 2 년 뒤, 고 3 때 말기 위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이렇게 술을 마시면 그 시기가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부터 집이 엄청나게 기울었지.’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구나. 더 늦으면 시기를 놓칠 수도 있어.’

날짜를 계산한 진현은 말했다.

“아버지,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있으세요?”

“우리 아들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뭔데 그러느냐?”

“내일 술 깨시고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는 의아한 얼굴을 했으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말씀드릴게요. 일단 주무세요.”

***

다음 날 이른 아침, 어머니는 콩나물국을 차려주었다.

“속 좀 괜찮아요? 술은 왜 그렇게 먹어가지고…….”

“…….”

아버지는 말없이 해장국을 먹었다. 아들 때문에 기뻐 과음하긴 했다.

문득 아버지는 진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현아, 너 어제 나한테 부탁할 것이 있다 하지 않았냐?”

“일단 식사 먼저 하세요. 식사 끝나고 말씀드릴게요.”

“……??”

계속 뜸을 들이자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다시 물었다.

“도대체 부탁이 뭔데 그래? 어려운 부탁인 거냐?”

진현은 말없이 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30 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이게 웬 돈이니?? 어디서 돈을 구했어?”

부모님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틈틈이 모은 돈이에요. 고등학교 들어오기 전 마지막 방학 때 신문 배달 같은 거 해서 모은 거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 돈을 왜? 용돈도 모자랄 텐데 너 쓰지.”

어머니가 봉투를 진현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제 부탁 들어주신다 했죠?”

“그래, 도대체 무슨 부탁인 거냐?”

아버지는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탁을 한다면서 돈 봉투를 건네고… 아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 돈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주세요. 그게 제 부탁이에요, 아버지.”


“……!”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진현아? 갑자기 건강 검진이라니.”

“다른 건 아니에요. 요즘 위내시경 한 번 안 받아본 사람이 없는데… 아버지도 이제 건강 챙기실 때 되셨잖아요.


제가 효도 한 번 하려고 그러니 받아주세요.”

사실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2 년 뒤 아버지는 말기 위암으로 사망한다.

그 말은 지금쯤 위에 암세포가 생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위암은 말기에 발견하면 무조건 사망하지만 초기에 발견하면 높은 확률로 완치가 돼. 지금 검사 받아 발견하면
아버지는 살 수 있어.’

어머니가 기특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벌써부터 기특하기도 해라. 그런데 이 엄마는 검사 받을 필요 없니?”

내심 바라는 목소리에 진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모진 고생을 하긴 했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어디 크게 아프진 않았었다.

“어머니는 제가 나중에 시켜드릴게요.”

“그래, 나도 아들 덕분에 호강해 보자. 호호.”

진현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검사 받으실 거죠, 아버지?”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돈 봉투를 진현에게 돌려주더니 고개를 저은 것이다.

“됐다. 나는 검사 받을 생각 없다.

“……?!”

진현은 놀라 물었다.

“아니, 어째서요?”

“난 아직 젊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는데 검사 받을 이유가 없다. 또 네가 어렵게 번 돈을 검진 같은데 낭비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다운 말이었지만 진현은 속이 탔다.


‘초기가 지나면 치료시기를 놓친다고요!’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다.

암은 대부분 초기에 증상이 없다.

아버지 말대로 증상이 나타난 다음 검사를 하면 손도 못 쓰고 돌아가실 것이다.

진현은 강하게 말했다.

“안 돼요. 어제 약속했으니 꼭 들어주세요.”

하지만 아버지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진현아, 네 마음은 고맙지만 굳이 지금 검사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나중에… 좀 더 식당 사정이


나아지면 그때 받겠다. 그리고 너도 공부에 집중하고. 이런 돈 버는 일은 아비한테 맡겨라.”

진현은 속이 터졌다.

논리적으로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진현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한 번 정하면 쉽게 바꾸는 성격이 아니신데…….’

결국 진현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이전부터 남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죠. 그렇지 않나요?”

“…그랬지.”

“약속한 것이니 꼭 건강 검진을 받아주세요. 제 소원이에요.”

진현의 눈과 아버지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들의 눈에 담긴 간절함에 아버지는 마침내 항복했다.

“그래, 알겠다. 네 말에 따르마.”

진현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러면 제가 바로 병원에 예약을 잡을게요.”

“대신 돈은 네가 번 돈이 아닌, 우리 돈으로 하겠다.”

“네, 알겠어요.”

그 정도야, 뭐.

진현은 신나서 전화 예약을 위해 방 안에 들어갔다.

그 모습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바라봤다.

“좋겠어요, 효자 둬서.”
“크음. 필요 없다는데 그러네. 괜히 쓸데없이.”

하지만 말과 다르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자신을 위해 아들이 저렇게 마음 쓰는데 싫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

진현은 위암 검진 전문 병원에 위내시경 예약을 했다.

‘혹시 벌써 암이 악화되어 있지는 않겠지?’

막상 예약을 하고 나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2 년 뒤에 말기였으니 지금쯤 위에 암세포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미 진행된 상태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진현은 스스로를 달랬다.

‘초기일 거야. 초기면 간단한 내시경 시술이나 수술만 하면 거의 완치되니까.’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 기간만큼은 수업도 교과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시경 검사 당일.

“오늘 검사 꼭 잘 받고 오세요.”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같이 병원에 가고 싶었으나 예약된 오후 2 시에 수업을 빠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등교를 하고, 정신없이 시계만 보며 오전, 점심,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종례 종이 치자마자 그는
아버지의 식당으로 달려갔다.

“아니, 진현아? 벌써 끝났니?”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맞았다.

진현은 다급히 물었다.

“아버지는요?”

“응?”
“아버지 검사 결과는요?”

“아, 그거…….”

진현은 침을 삼켰다.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별거 없다는데?”

“…네?”

진현은 반문했다.

그때 마침 아버지가 주방문을 열고 나왔다.

“내시경 검사는 위에 염증만 조금 있고 별것 없다더구나.”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모님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니, 진현아?”

“아, 아니에요.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

그리고 진현은 가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골목을 오가는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며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 이상 없다고? 2 년 뒤에 말기 암이 되는데… 정말로?’

가능성은 두 가지다.

정말로 아버지의 위가 깨끗하거나, 아니면 내시경을 본 의사가 오진을 했거나!

어느 쪽인지 확인을 해야 했다.

진현은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검사를 받은, 검진 병원 쪽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

08. 의학의 천재? (2)

“어머, 어떻게 왔니?”


접수처 간호사가 진현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암 검진 전문 병원에 십대 중반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귀엽게 생긴 소년이 홀로 온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소아과는 저쪽 건물에 있는데.”

“진료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김상민 씨 보호자로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김상민 씨?”

아버지의 함자였다.

“네, 오늘 오후 2 시에 내시경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네가 보호자라고?”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현의 현재 나이는 17 살.

그런데 얼굴이 워낙 동안이라 훨씬 어려 보였다. 잘 봐줘야 중학생?

그런데 동글동글 어린 외모로 어른처럼 이야기하니 부조화스러우면서도 귀여웠다.

“검사 결과는 의사 선생님이 어른들한테 이야기해 줬어. 너무 걱정 마렴.”

애를 타이르는 듯한 말에 진현은 속이 답답했다.

‘앳된 외모라서 더 그러는구나. 빨리 나이를 먹어야 하는데.’

전의 삶 때는 어려 보이는 외모에 자신감 없는 태도가 겹쳐 종종 업신여김을 당했다.

지금은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으나 정신 연령과 어울리지 않는 앳된 외모가 갑갑했다.

‘나중에 서른이 넘기 전까지는 계속 지독한 동안인데 큰일이구나. 삭아 보이게 안경이라도 써야 하나?’

진현은 말했다.

“그 검사 결과 때문에 그럽니다. 이상한 점이 있어서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의를 드리고 싶으니 연결


부탁드립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 지금 바쁘신데… 한 번 말씀드려 볼 테니 기다리렴.”

뚜뚜.

신호음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선생님? 오늘 오후에 검사 받은 김상민 씨 보호자가 와서 검사 결과를 상의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아, 지금 바쁜데. 그분 검사상 특별한 것 없었으니 대충 설명하고 돌려보내세요.

귀찮아하는 목소리가 진현에게까지 들렸다.

간호사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지금 바쁘셔서. 검사 결과는 특별한 것 없었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대. 나중에 부모님이랑 같이


오면 자세히 설명해 줄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바쁘신데 시간을 뺏는 점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지금 검사 결과를 상의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지만 진료를 받은 환자의 보호자, 가족으로서 면담을 요청할 권리가 있으니 다시 한 번만 선생님께
말씀해주십시오.”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진현의 말투와 태도가 너무나 확고해 어린애 대하듯 돌려보낼 수 없었다.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저, 선생님? 아까 말씀드렸던 보호자가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해서…….”

-에이, 귀찮게. 그러면 얼른 들어오라고 해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진현은 진료실 앞으로 안내받았다.

“잠시만 기다리렴. 곧 부를 거야.”

하지만 그 말과 다르게 한참 동안 소식이 없었다.

1 시간이나 경과 후, 진현을 불렀다.

“김상민 씨 보호자분, 들어오세요.”

안에는 더벅머리의 삼십 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흰 가운을 입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진현이 들어왔음에도 한참을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가 힐끗 눈을 돌렸다.

“뭐야, 어린애잖아? 보호자라고 안 했나?”

짜증 섞인 혼잣말에 진현이 말했다.

“아들입니다.”

젊은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 아버지 검사 결과는 약간의 염증 외에는 특이 소견 없었다. 검사 후에 다 아버지에게 설명했는데?”


왜 귀찮게 하냐는 말투였다.

“정확히 어떤 염증 소견이었습니까?”

“뭐?”

의사는 그걸 말해주면 아냐는 듯 건성으로 답했다.

“만성 위염이었어. 너희 아버지에게 다 설명한 내용인데?”

하지만 진현이 물어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란성(Erosive)이었습니까? 화생성(Metaplastic)이었습니까? 전암(前癌) 병변을 의심할 소견은


없었습니까?”

앳된 학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문 용어에 의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터넷이라도 검색했나 보군, 이라고 생각했다.

‘어쭙잖게 알고 와서 귀찮게 하긴.’

의사는 일부러 전문 용어를 사용했다.

“Antrum(전정부)과 body(체부)에 diffuse(미만성)한 hyperemic change(적색 변화)가 보이는


typical 한 erosive gastritis (미란성 위염)소견이었다.”

의사는 뻣뻣하게 진현을 바라봤다.

그러나 진현은 차분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체부, 후벽 쪽도 보신 거죠?”

“그건…….”

의사는 흠칫했다.

체부 후벽 쪽은 내시경이 잘 닿지 않은 곳이다. 꼼꼼히 보지 않으면 잘 안 보인다.

‘내가 잘 봤던가?’

진현이 재차 물었다.

“위약성, 자발 출혈, 비정형 경계 소견은 없었습니까?”

“……!!”

의사의 안색이 굳었다.

“그, 그건…….”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진 못했다.


진현이 말한 소견은 암을 시사하는 하는 소견이지만 위염이 심하면 관찰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없었던 것 같은데…….’

의사는 고민하다 답했다.

“…그런 건 없었다.”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젊은 의사의 말이 신뢰가 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위내시경 사진을 보여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의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말한 소견은 정말로 없었다. 그게 궁금한 거면 걱정할 필요 없으니 다른 사람 진료 더 안 밀리게 이제 그만


나가봐라.”

하지만 진현은 물러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그는 전의 삶에서 위암 환자를 수도 없이 본 외과의였다.

내시경 사진은 그 누구보다도 잘 해석할 수 있었다.

“부탁입니다. 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사진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의사는 오히려 간호사에게 말했다.

“다음 환자 들어오게 해주세요.”

안 좋은 분위기에 간호사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저 학생. 이제 다음 환자 진료 봐야 하니…….”

결국 진현은 강하게 말했다.

“현행 의료법상 제 21 조 2 항에 의하면 환자의 직계 존속 또는 비속이 요구할 경우 환자에 관한 기록의 열람이나


사본 발급에 응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저를 강제로 내보내면 의료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

의사는 얼굴을 구겼다.

물론 진현이 말한 법령은 환자의 직계존속, 비속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거야 동사무소만 가면
금방 떼올 수 있다.

“알겠다! 그렇게 원하는 사진, 실컷 보여주마.”

그리고 마우스를 클릭하더니 영상을 확대했다.

“이리로 와서 봐라!”
진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마우스를 따라 붉은 내시경 사진이 넘어갔다.

‘상부, 중부, 하부…….’

의사가 보면 아냐는 듯, 무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빨갛게 보이는 것이 염증이다. 전반적으로 염증 외에 다른 소견은 없었어.”

의사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염증만 보였다.

‘정말로 암이 없단 말인가?’

그런데 위의 중부에서 상부로 다시 넘어가는 사진에서였다.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만! 잠시만 다시 이 사진을 보여주십시오.”

“뭐?”

“18 번 사진 말입니다.”

“그건 왜?”

“보여주십시오.”

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섞인 손짓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자, 봐라.”

“……!”

“다 봤으니 이제 됐지. 나가봐라.”

그리고 의사는 내시경 사진을 종료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이건 뭡니까?”

“응……?”

진현은 눈동자를 화면 구석에 고정한 채 말했다.

“이건… 위암 아닙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9

09. 의학의 천재? (3)

“……!”

의사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진현이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켰다.

“이것 말입니다.”

“……!”

그것을 본 순간, 의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말로 붉은 염증 사이로 위암을 의심할 만한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시야가 잘 닿지 않는 곳의, 3㎜도 안 되는 작은 병소여서 미처 못 봤던 것 같다.

의사는 급히 둘러댔다.

“그, 그건… 염증의 일종이다.”

진현은 갑갑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똑바로 의사를 바라봤다.

“정말입니까?”

“그… 그, 그래.”

“정말로요?”

“…….”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추궁에 의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비정상적 위 주름 소견에 경계도 좋지 않고, 희미하지만 출혈까지 보입니다. 전형적인 IIc 형 위암인데…
염증이라고요?”

“……!!”

의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그건…….”

진현의 말은 100% 옳았다.

그런데 이제 중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학생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어, 어떻게 그걸? 너 ,너는 누구……?”


의사는 횡성수설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방금 진현이 언급한 내용은 내시경을 교육하는 대학교수의 입에서나 나올 수준이었다.

내시경이나 위암에 조예가 있지 않는 한 의사들도 모르는 내용이다.

“제가 누군지가 지금 중요합니까? 저는 고등학교 1 학년 학생입니다.”

진현의 싸늘한 대답에 의사는 환장할 것 같았다.

똑같이 붉게 변한 소견이라도 내시경적 특징에 따라 정상 염증인지, 단순 종괴인지, 위암인지 구별할 수 있다.

단 그것을 알아볼 의학적 식견이 있다는 가정하에.

‘커다란 위암은 아무도 놓치지 않지만 저런 안 좋은 위치에, 작은 위암은 내시경 의사들도 놓칠 만큼 어려운
거라고! 이걸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래 놓고 고등학교 1 학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시경 사진 복사해 주십시오. 다른 병원 가서 치료 받겠습니다.”

“…그, 그래.”

의사는 허겁지겁 서류를 챙겼다.

간호사가 정리를 도우며 진현을 바라봤다.

뒤에서 보고 있던 간호사도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일개 고등학생이 이런 의학 지식이라니?

‘처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도 안 돼.’

내시경 사진 및 기록을 받은 진현은 등을 돌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의사가 주저하며 말했다.

“이, 일부러 놓친 것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인데 실수도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안 좋은 옛 생각이 떠올라 충고했다.


“공부는 좀 더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환자를 위해서,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서도.”

“……!”

의사는 흙빛으로 변한 얼굴을 숙였다.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

진현은 위암 치료의 권위자인 한국대학병원 최대원 교수에게 진료 예약을 했다.

아버지를 최고의 전문가에게 치료받게 하고 싶었다.

“지, 진현아, 괜찮은 거겠지? 암이라니…….”

어머니가 노래진 얼굴로 진현의 팔을 잡았다.

아버지는 짐짓 성을 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호들갑 떨지 마.”

“그, 그래도… 암일 확률이 있다고 하잖아요.”

“어허.”

아버지는 자신이 암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다.

진현도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만 하고, 암이 확실하다고는 이야기하진 않았다.

한 번에 강하게 이야기하면 너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고등학생인 내가 말해도 믿지 않겠지.’

금방 예약 날짜가 다가와 한국대학병원이 위치한 대학로로 향했다.

이번엔 아버지 혼자가 아니라 진현과 어머니도 함께였다.

‘이곳이 한국대학병원.’

한국을 대표하는 병원답게 크고 웅장했다.

오래되어 낡은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마저 고풍스럽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후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진현은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래, 그래도 내가 우리 아들 덕분에 살지. 네가 있으니 정말 듬직해.”

그녀는 항상 어리던 진현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가슴이 벅찼다.


진현이 내시경을 권하지 않았으면 안 좋은 병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피하며 걷는 중이었다.

주차장에 익숙한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BMW 스포츠 세단. 흰 색상으로 그가 자주 보던 차다.

‘이상민? 그 녀석 차잖아.’

재수 없는 그 녀석은 고등학생 주제에 스포츠 세단을 직접 운전하고 다녔다.

그것도 수시로 차를 바꿔가며.

‘그냥 같은 차종이겠지? 그 녀석이 여길 올 이유가 없으니.’

그렇게 생각한 진현은 부모님을 모시고 곧바로 본관 건물로 향했다.

이상민 따위, 이곳에 오든 말든 그가 관심 가질 바는 아니었다.

하얀 카운터에 접수를 하고 진료를 기다렸다.

옆에 앉아 있는 수척한 얼굴의 환자들을 보자 어머니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김상민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아버지를 불렀다.

담이 큰 아버지도 긴장이 되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진료실 안에는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의사가 앉아 있었다.

위암의 대가(大家), 최대원 교수였다.

‘최대원 교수님…….’

그의 얼굴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진현과 최대원 교수는 전의 삶 때 구면으로, 수년 뒤 국내 최대의 병원으로 성장하는 대일병원에서 여러 차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여러 번 혼났었지. 이렇게 젊을 때도 있었구나.’

기분이 묘했다.

“어서 오십시오. 내시경상 위암이 의심되어 오셨다고요?”

굵직하지만 친절을 담은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최 교수는 동료 의사에게는 엄격한, 하지만 환자에게는 따뜻한 ‘좋은’ 의사였다.

“네, 여기 내시경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진현은 사진을 복사한 CD 와 의무 기록을 건넸다.

“학생은?”

“보호자입니다.”

최대원 교수는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이 성인 보호자처럼 행동하자 기이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전 의사처럼 무시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흐음…….”

컴퓨터가 버벅거리며 내시경 사진을 불러왔다.

“어, 어떤가요, 선생님?”

어머니가 가슴이 타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최 교수는 나직이 답했다.

“위암이 맞습니다.”

“아……!!!”

어머니가 절망적인 신음을 토했다. 아버지도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어떻게 하죠, 선생님? 그럼 이이는 주, 죽는 건가요?”

그런데 절박한 물음과 반대로 최 교수는 의외의 반응을 하였다.

싱긋 웃은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저, 정말요?”

“위암은 초기와 말기로 나뉩니다. 말기 위암은 무조건 사망하지만… 초기의 위암은 치료하면 완치가 됩니다.
특히 남편분은 초기 중에서도 매우 빠른 편으로 치료하면 90% 이상 완치됩니다.”

“아……!!”

부모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위암이 워낙 작아 증상이 전혀 없었을 텐데… 내시경 검사는 어떻게 받았습니까?”

어머니가 진현을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우리 아들이 걱정된다고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요. 안 그랬으면 이이 성격상 평생 검사 안 받았을
거예요.”

“아드님이 남편분을 살렸군요.”

아버지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시경 검사를 받았으니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시경 검사를 안 받았으면 1, 2 년 뒤에


암세포가 자라 손도 못 댔을 것입니다. 효심 깊은 아들이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

아버지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감정이 차올랐다.

“그리고 이런 초기의 위암은 의사라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내시경 검사를 했던 의사의 실력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젓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닙니다. 의사가 진단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발견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머니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병원에서 의사는 단순히 염증이라고 오진했는데… 이 아이가 병원에 찾아가 내시경 사진을 보고
알아냈다니까요!”

최대원 교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부모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들 자랑이 심하군.’

의사도 맞추기 어려운 병을 저런 아이가 어떻게 잡아낸단 말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 10

10. 의학의 천재? (4)

“어쨌든 이제 치료를 해야 하는데… 이게 고민입니다.”

“……??”

“치료는 가능한데 위치가 안 좋아… 위 전체를 잘라야 할 것 같습니다.”

“저렇게 조그만데 위 전체를… 말입니까?”

“네, 위의 해부학적 특성상 저 위치의 암은 위 전체를 잘라야 합니다.”


“…큰 수술이군요.”

“네.”

의사의 말이 무거워지자 부모의 얼굴도 다시 무거워졌다.

평생 잔병치레도 안 했는데 위 전체를 잘라내야 하다니. 얼마나 큰 수술일지 짐작도 안 됐다.

“부작용은 없습니까?’

“당연히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위를 조금이라도 덜 잘라 일부라도 남기면 좋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어려울 듯합니다.”

대화가 오갈수록 수심이 깊어졌다.

가만히 듣던 진현이 말했다.

“저… 교수님.”

“왜 그러나, 학생?”

“ESD… 아니, 내시경으로 점막을 잘라내는 시술은 안 됩니까?”

“……!”

최 교수의 눈이 커졌다.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올 용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현은 서둘러 둘러댔다.

“제가 따로 공부해 본 바로는… 내시경으로 치료하면 칼로 배를 가르지 않아도 되고, 부작용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치료 성적도 위를 자르는 수술과 거의 비슷하고요.”

최 교수는 안경을 고쳐 썼다.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내시경 치료는 위암이 정말 얕게 위치한 경우밖에 적용할 수 없어.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내시경 사진상 주름이 끌려왔는데, 그럴 경우 위암이 점막 밑까지 파고들었을 확률이 높아.”

말을 끝낸 최 교수는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텐데 고등학생한테 왜 이런 설명까지 했나 후회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주름이 얕고 병소의 크기가 워낙 작아 암의 깊이가 얕을 확률도 높다고 봅니다. 내시경 초음파로 깊이를
확인하고 CT 로 원격 전이를 확인한 후 내시경 치료를 시도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만약 깊이가 깊다면 이후에
수술적 치료를 다시 시도해도 되니까요.”

“……!!!”

최 교수는 경악해 입을 살짝 벌렸다.

날카로운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놀랐다.

“아니… 학생이 어떻게 그런 내용을?”


진현은 자신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둘러댔다.

“병원에 오기 전 공부했습니다. 혹,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공부했다고?”

하지만 최 교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진현이 말한 내용은 위암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의 입에서나 나올 말이었다.

상황에 맞춘, 적합한 임상 판단은 어떤 책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날 닮아 머리가 좋아요! 공부를 시작한지 한, 두 달 만에 꼴찌에서 전교 1 등을 했다니까요!”

아버지가 나직이 말했다.

“거참, 날 닮았다니까.”

“아, 아버지. 어머니…….”

진현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최 교수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말을 했다.

“어쨌든 저도 아드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큰 수술은 피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 그러면 아드님의 말처럼
진행을 할 테니 입원을 하십시오.”

***

그 뒤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입원 후 여러 검사를 시행했고 다행히 암이 깊이 파고든 흔적이 보이지 않아 위를 자르지 않고 내시경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괜찮겠지, 진현아?”

“네, 괜찮을 거예요.”

내시경 치료를 받는 동안, 진현과 어머니는 초조하게 밖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대부분 성공적으로 치료가 끝나지만 아버지의 일인지라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2 시간… 진현에게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내시경 수술을 집도한 최 교수가 그들을 찾았다.

“선생님, 어떤가요? 잘됐나요?”

어머니가 다급히 물었다.


진현도 답을 기다렸다.

최 교수가 날카로운 눈을 살짝 웃었다.

“성공적으로 치료됐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진현도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네. 그리고 자네는…….”

말끝을 흐리는 최 교수에게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최 교수는 뭔가를 말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네.”

“……?”

이후 아버지는 순조롭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좀 괜찮으세요, 아버지?”

“괜찮다. 난 이제 다 나았으니 너도 병원에 그만 나와라.”

“아니에요. 배를 칼로 째는 수술보다야 낫다지만 내시경 시술도 큰 치료니 몸 관리를 잘해야 해요. 그리고 저
여기서도 공부하고 있으니 성적은 걱정 마세요.”

진현의 고집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부자가 대화를 나누던 중, 누군가 병실 침상으로 다가왔다.

최 교수였다.

특별한 문제없이 잘 회복되고 있는가를 확인 차 회진 온 것이다.

“배에 통증 같은 것은 없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내시경 치료 때 확인한 최종 조직 검사 결과도 깨끗이 잘 치료된 것으로 나왔습니다. 앞으로 정기검사만 잘


받으면 문제없을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한 최 교수는 진현을 바라봤다.


“자네…….”

“네?”

그는 주저하다 물었다.

“처음 진료 때 했던 이야기는 정말로 책에서 공부한 내용인가?”

“네, 그렇습니다.”

흔들림 없는 답이었지만 최 교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뿐이 아니었다.

입원 후에도 진현은 종종 나이를 초월한 지식과 언행을 보여줬었다.

‘나이를 뛰어넘는 천재인 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진현이 들고 있는 문제집을 보고 물었다.

“공부하는 중?”

“아… 네.”

“공부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어느 대학에 갈 생각인가?”

진현은 머쓱한 얼굴로 답했다.

“일단… 한국대학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랑 잘 어울리는군. 어떤 전공으로 가고 싶은가?”

“…의과대학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래?”

최 교수의 눈이 깊어졌다.

진현은 얼떨떨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꼭 한국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내 제자가 됐으면 좋겠군.”

“……!”

“왜, 싫나?”

진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싫은 것은 아닌데… 너무 급작스러워서…….”

“자네는 생명을 살리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 입학하면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렇게 이야기한 최 교수는 병실을 나섰다.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자가 되라고?’

최대원이 말하는 ‘제자’는 단순히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전공으로 이끌어
도제(徒弟)로 그를 가르치며 키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들의 싫은 기색에 아버지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교수님인데 싫어? 나는 네가 최 교수님 같은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것도 좋긴 한데… 전 따로 하고 싶은 의학 전공이 있어서요.”

“뭔데?”

생명을 살리는 의사.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의사.

좋다. 아주 좋다. 과거에 그가 추구했던 삶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피부과요.”

***

늦은 밤, 진현은 병실을 빠져나왔다.

주말이라 오늘은 병원에서 자고 갈 계획이다.

“중환자실 환자 안 좋대요, 선생님!”

“지금 가고 있어요!”

의사와 간호사가 급한 표정으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분주한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나며 아련해졌다.

그는 로비를 나와 밤하늘을 바라봤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라… 이전에 참 열심히 했는데.’

씁쓸히 웃었다.
별빛 하나 없는 어둠을 보니 간만에 소주와 담배가 당겼다.

과거 그는 술과 담배를 참 좋아했다. 술, 담배뿐 아니라 노는 것은 다 좋아했다.

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가 이제 인생이 풀린 줄 알고, 모든 의사가 성공하는 줄 착각해 철없이 놀았고, 어려운
의대 공부에 적응 못할 때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과 담배를 했다.

‘그땐 집안이 어려워도 졸업만 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 의사는 다 떼돈 버는 줄 알고.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지만.’

그러다 정신 차린 것은 레지던트 1 년 차 때 자신의 실수로 환자가 죽었을 때였다.

다행히 고소당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자신이 한심해 참을 수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무식과 무능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후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쌓았고 국내 최고라는 대일병원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실력과 무관하게 여러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경쟁에 밀려 쫓겨났다.

그리고 등 떠밀리듯 한 개업은 철저히 망했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

잘나가는 강남의 피부과 의사.

이번 삶의 목표였다.

이번에는 사회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성공할 것이다.

그래서 포르쉐도 타고, 빌딩도 사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며 효도도 할 것이다.

“응……?”

그런데 상념에 빠져 있던 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외의 인물을 본 것이다.

‘이상민?’

잘못 봤나 눈을 깜박거렸지만 분명했다.

훤칠한 키, 모델 같이 그린 듯한 얼굴, 이상민이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혼자가 아니라 의사 가운을 입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젊은 의사였는데, 이상민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얼굴선이 굵다는 것 정도?

‘가족인가? 형?’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멀어서 정확히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았지만 간간히 고성이 오갔고, 형으로 추정되는 의사의 얼굴에는 분기가
가득했다.

이상민도 평소의 가면을 쓴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퍼억!

진현은 깜짝 놀랐다.

‘뭐야?’

형으로 보이는 의사가 이상민에게 주먹을 날린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이상민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의사는 일갈했다.

“천한 놈!”

진현의 귀에 세 글자가 똑똑히 박혔다.

이상민이 이를 갈며 뭐라 말했지만 그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의사는 등을 돌려 가운을 펄럭이며 사라졌다. 이상민도 입술을 쓱 닦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

의외의 장면을 목격한 진현만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1

11. 나선의 변곡점 (1)

아버지는 문제없이 퇴원했다.

최 교수는 앞으로 규칙적인 검사만 받으면 특별한 문제는 안 생길 것이라 말했다.

“진현아, 정말… 정말 고맙다.”

아들의 효심 덕분에 생명을 건지다니! 부모님들은 목이 메워 감사를 표했다.

진현도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에요, 아버지. 앞으로도 꼭 건강하셔야 해요.”


“진현아! 이 엄마는? 엄마도 검사 받아볼까?”

진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검사 받아서 나쁠 거야 없지만, 어머니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별다른 잔병치레 없이 건강할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나중에 대학 가면 알바해서 받게 해드릴게요.”

“호호, 됐다. 내가 무슨 네 돈으로 검사를 받니?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

그리고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진현은 여전히 열심히 공부했고, 몇 번의 모의고사를 거쳐 1 학기 기말고사까지 끝났다.

“아아……! 지겹다. 진현아, 시험 잘 봤니?”

“그냥, 뭐.”

항상 포커페이스인 진현에게 단짝 황문진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너야 보나마나 또 1 등이겠지. 어떻게 1 학기 내내 전교 1 등을 한 번도 안 놓치냐?”

“이번엔 잘 모른다. 어려웠어.”

황문진은 뻥치지 말라는 얼굴을 했다.

“거짓말하지 마! 지난번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으면서!”

아이들의 등수는 시험을 볼 때마다 엎치락뒤치락하게 마련이지만, 변하지 않는 2 명이 있었다.

전교 1 등 김진현과 전교 2 등 이상민이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항상 같은 등수를 기록했다.

“이번에도 그놈 눌러줘.”

황문진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자 진현은 피식 웃었다.

“글쎄… 성적이 나와 봐야지. 그런데 넌 잘 봤냐?”

“나? 히히. 글쎄, 잘 모르겠어.”

표정이 밝은 것이 못 보진 않은 것 같았다.

만년 꼴찌 황문진도 진현 덕분에 정신 차리고 최근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모의고사 때는 15 등까지 올랐다. 물론 뒤에서 15 등.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다들 들뜬 얼굴로 담임을 맞이했다.

담임은 크음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 여름방학 동안에도 놀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라. 그리고 여기 기말고사 성적표


가져왔으니 전부 확인하고! 지난번에 비해 많이 떨어진 몇 놈은 교무실로 따라와라.”

낮은 야유가 들렸으나 담임은 막대기로 칠판을 몇 번 후려쳐 불만을 잠재웠다.

“다들 시끄럽고! 성적표 뒤에 붙여놓을 테니 확인해. 개인 성적표는 각자 집으로 부칠 테니 부모님 보여드리고.”

“우우…….”

다시 야유가 터졌다.

하지만 담임은 콧방귀도 안 뀌고 반 아이들의 성적이 등수 순으로 열거된 종이를 게시판에 붙이더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에이, 방학 날까지 저러냐.”

“진짜 싫어, 꼰대.”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게시판으로 몰려갔다.

“아아! 또 떨어졌다. 난 엄마한테 죽었다.”

“오오, 찍은 것 다 맞았네?”

희비가 엇갈리는 웅성거림 뒤로 황문진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봐! 또 1 등 했잖아!”

“그러냐?”

“그래, 뭐라도 좀 쏴!”

진현은 얕게 웃었다.

“너는 성적 잘 나왔냐?”

“응! 나 무려 23 등이야!”

그 말에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23 등이면 중간이다. 한 학기 만에 꼴찌에서 20 등이나 성적을 올린 것이다.

“축하한다.”

“히히. 그래, 나도 노력하면 너처럼 성적 올릴 수 있겠지?”

“그래, 하면 다 된다.”
그러면서 진현은 다른 아이들, 아니, 이상민의 성적을 바라봤다.

-이상민 전교 2 등, 평균 97.8.

평균 98.4 점인 진현과 0.6 점 차이였다.

‘간발이군.’

매번 이런 식이었다. 항상 이상민은 몇 문제 차이로 진현에게 뒤졌다.

‘이번에도 분해하겠군.’

항상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민이지만 성적이 나오는 날이면 분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원래 승부욕이 이렇게 강했었나?’

하긴 매번 간발의 차로 2 등을 하면 열 받을 만도 할 일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1 등 축하한다, 김진현.”

“……!”

그놈, 이상민이었다.

진현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무슨 생각이지?’

그날의 싸움 이후 이상민이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처음이다.

이상민은 그린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거야?”

“별말을. 너와 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아니야. 1 등과 2 등은 차이가 크지. 하늘과 땅만큼.”

뭔가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면 같은 표정 뒤로 분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맨날 공부만 하나 봐? 쉬지는 전혀 않고. 난 그렇게는 못하겠던데 대단해.”

“…….”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황문진이 진현의 옆에 바싹 붙었다.


똘마니 김철우도 이상민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상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 마침 방학도 했는데 게임방에 가서 게임이라도 하지 않을래? 아, 너는 맨날 공부만 해서 게임 같은 것은


할 줄 모르라나?”

비웃음 섞인 말에 황문진이 발끈했다.

“진현이는 그런 쓸데없는 것 안 해.”

“아, 그러겠지. 만년 1 등님이 게임방 같은 데를 갈 리가 없겠지.”

똘마니 김철우가 말을 받았다.

“상민아, 이런 꼰대 데리고 가면 게임방 분위기 흐려져. 그냥 우리끼리 가자.”

이상민이 짐짓 김철우를 나무랐다.

“꼰대라니. 전교 1 등한테.”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큭.”

“하여튼 좋은 방학 되고. 우린 이만 가볼게. 방학 동안 공부 열심히 해.”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현이 입을 열었다.

“가자.”

“…뭐?”

“가자고. 게임방.”

“……!”

이상민은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피식 웃었다.

“진심이야?”

마우스는 만질 줄 아니? 란 얼굴에 진현은 답했다.

“일대일, 아니면 팀플이든, 뭐든 원하는 대로 덤벼라. 다 상대해 주지.”

“……!”

이상민과 김철우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듣고 있던 황문진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지, 진현아… 너 게임할 줄 모르잖아.”

김철우가 크게 비웃었다.

“이 범생이 놈. 공부랑 게임이 같은 줄 아나 보지?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 아작을 내주마!”


진현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게임방으로 향했다.

***

담배 연기 자욱한 게임방에 앉으니 추억이 몰려왔다.

‘몇 년 만이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 마우스를 잡으니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담배만 있으면 딱 좋겠는데.’

방학 첫날이어서 그런지, 나름 긴장이 풀리며 담배뿐 아니라 술도 당겼다.

‘빨리 성인이 되어야지.’

김철우의 거친 목소리가 아련한 과거를 깼다.

“이거, 마우스는 움직일 줄 아는지 모르겠네. 재미없게 하나하나 가르쳐 주며 해야 하나?”

“접속이나 해라. 스타크래프트로 할 거지?”

진현은 인터넷에 접속해 방을 개설했다.

의외로 능숙한 모습에 김철우는 살짝 놀랐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맨날 공부만 하던 놈이 게임을 할 줄 알 리가 없다.

‘이번 기회에 콧대를 눌러주마. 재수 없는 녀석!’

클릭질과 함께 검은 화면이 나타났다.

당시 혁명적으로 유행하며 e-스포츠의 발전을 주도한 스타크래프트였다.

“그냥 하면 재미없는데… 내기라도 하는 게 어때?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쫄리면


말고.”

김철우가 비아냥거렸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단, 지면 약속 지켜라.”

그 대답에 김철우는 쾌재를 불렀다.

‘바보 녀석! 게임이 공부인 줄 아나 보지? 두고 봐라.’

그는 게임이 끝난 후 김진현에게 어떤 무리한 부탁으로 모욕을 줄지 즐거운 고민을 했다.


그렇게 이상민과 김철우가 한 팀, 김진현과 황문진이 한 팀을 맺고 게임을 시작했다.

진현은 종족으로 ‘Random’을 선택했다.

황문진이 말렸다.

“진현아. 처음 할 때는 그나마 프로토스 종족이 나을 거야. 맷집이 좋아 그나마 조작하기 쉽거든. 그냥 기본


유닛만 쭈욱 뽑으면 그 뒤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게임 매니아인 황문진은 스타크래프트도 한 실력 했다.

하지만 진현은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아.”

황문진은 ‘망했다’란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당부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어떤 종족이 걸리든 기본 유닛만 뽑아야 해. 알았지?”

5, 4, 3, 2, 1……!

게임이 시작됐다.

‘황문진 먼저 공격하자.’

김철우는 이상민에게 계획을 알렸다. 이상민도 동의했다.

어차피 왕초보인 김진현 따위 있으나 마나이다.

황문진만 쓰러뜨리면 게임 끝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황문진 못지않은 실력자였다.

얼마 후, 땅을 기는 괴물과 총을 든 우주해병의 연합 병력이 황문진의 기지로 쳐들어갔다.

“아……!”

황문진은 안타까운 소리를 뱉었다.

그가 아무리 게임을 잘해도 2 명의 연합 공격을 혼자 막기는 무리였다.

그런데 그 순간,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

12. 나선의 변곡점 (2)

“크아악!!”

모니터에서 시끄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웬 광전사(질럿)와 용기병(드라군) 무리가 나타나 김철우와 이상민의 후면을 공격한 것이다!

한 부대도 넘는 숫자로 이상민과 김철우의 부대는 졸지에 황문진과 새로 나타난 부대에 포위돼 버렸다.

더구나 마이크로 컨트롤!

새로 나타난 부대는 숫자도 숫자였지만 유닛 하나하나가 살아서 움직였다.

일점사, 체력 빠진 유닛 뒤로 빼기 등 그 현란한 컨트롤에 이상민과 김철우의 부대는 한줌 핏물로 변해 사라졌다.

“아,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설마……?”

설마가 아니었다.

김진현이었다.

황문진은 입을 벌리며 그를 바라봤다.

진현이 짧게 말했다.

“3 시 방향, 이상민의 기지로.”

“어… 어어!”

그 뒤로는 일방통행이었다.

아악! 콰쾅! 화면에는 이상민과 김철우의 유닛 죽는 소리와 건물 터지는 소리만 잔뜩 울려 퍼졌다.

“마, 말도 안 돼!”

패배 메시지를 보며 김철우는 입을 벌렸다.

“이, 이건 아니야. 다시 해!!”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김철우는 이를 깨물었다.

‘두고 보자!’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진현의 우주 해병들이 화염방사기와 총으로 그들의 병력을 몰살시켰다.

상대가 안 되는 실력이었다.

황문진이 옆에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 진현아… 너 언제 스타크래프트를?”


“예전에 잠깐 해본 적 있다.”

그러나 황문진은 믿지 못했다.

“자, 잠깐이라고……? 잠깐이 아닌 것 같은데……?”

진현의 실력은 인터넷 초고수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마치 막 방송에 나오는 게이머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너… 공부만 했던 것 아니었어?”

“공부만 한 것 맞다. 예전에 잠깐 해봤다.”

잠깐… 그러니까 한 10 년 정도?

김진현은 속으로 웃었다.

과거… 특히 재수, 삼수, 사수 시절 그는 게임방 광이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해,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스타크래프트로 풀었다.

의대에 입학해서는 뜸했지만 그래도 간간히 손을 풀어 실력을 유지했다.

‘이전 전적이 3,500 승, 700 패였던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진현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기겠지만, 초창기인 지금은 인터넷 최강급의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연전연패에 김철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약속. 지킬 거지?”

“이익!”

진현의 물음에 김철우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동글동글한 소년은 주먹에서도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이상민이 말했다.

“한 번만 더 하자.”

미소가 사라진 얼굴이 기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열 내는군. 그렇게 날 이기고 싶은가?’

뭐,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매번 간발의 차로 시험에서 뒤졌으니 만만해 보이는 게임으로라도 뭉개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풀리니 성질이
나리라.

“얼마든지.”

진현은 느긋하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런데 게임 시작 얼마 뒤, 의외의 상황이 일어났다.

이상민과 김철우의 부대가 우루루 몰려온 것이다.

일꾼까지 몰려온,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막장 공격이었다.

게임의 승패를 떠나 김진현만큼은 몰살시키겠다는 의지였다.

‘어지간히 지기 싫었나 보군.’

그래도 살짝 감탄했다.

확실히 현 상황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이런 극단적 방법 외에 그들이 진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진현은 이런 류의 공격을 수도 없이 상대해 봤다.

진현도 일꾼을 포함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방어했다.

피해가 크겠지만 어차피 한 번만 막으면 승리였다. 그리고 이런 류의 전투는 진현처럼 정교한 컨트롤을 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곧 승패가 갈렸다. 당연히 진현의 승리였다.

“…말도 안 돼.”

김철우는 할 말을 잃었다.

맨날 공부밖에 안 하면서 이런 게임 실력이라니?

그러고 보니 싸움 실력도 상당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약속. 지킬 거지?”

“이익……! 그래, 말해봐라.”

“애들한테 돈 좀 그만 뺏어라. 최소한 반 애들한테는.”

“……!”

김철우가 얼굴을 쓰레기처럼 구겼다.

“쓸데없는 참견 말아라.”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김철우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진현을 노려봤다.


“공부 잘한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하지만 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약한 애들을 괴롭히는 모습이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었다.

그때 의외의 말이 들렸다.

“그래, 그럴게. 철우야, 그럴 거지?”

이상민이었다.

“…왜, 왜?”

당황한 물음에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끼리 괴롭히고 그러는 것 썩 좋은 것은 아니잖아.”

“하, 하지만! 상민아.”

이상민이 웃으며 김철우를 바라봤다.

“철우야, 내 말대로 하자.”

“……!”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김철우는 찍소리도 못했다.

김진현은 살짝 놀라 물었다.

“그 말 빈말 아니지?”

“그래.”

“…….”

왠지 쉽게 믿음이 안 갔다.

“왜 안 믿어? 나 최근에는 나쁜 짓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현에게 혼쭐이 난 후, 이상민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양아치인 김철우가 독자적으로 약한 애들을 괴롭힌 것일 뿐으로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이런 애들 게임 말고 제대로 놀아볼래?”

“무슨 말이지?”

“아… 아직 너는 무리 일려나.”

“뭘 말하는 거냐?”
“술 말이야. 마실 줄 아니?”

황문진이 깜짝 놀랐다.

“수, 술이라고? 우린 미성년이야.”

“그러니까. 무리겠지?”

그러면서 이상민은 진현을 바라봤다. 내리까는 듯한 시선이었다.

진현은 실소했다.

어떻게든 그에게 이겨 보려는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군.’

김철우가 비웃듯 말했다.

“그래, 상민아. 범생이랑 무슨 술이야. 한 잔만 마셔도 픽 쓰러질 텐데. 그러지 말고 애들 불러서 우리끼리
마시자.”

“그래, 내가 생각해도 무리긴 하다.”

그런데 진현이 말했다.

“네가 낼 거냐?”

“…뭐?”

다들 진현의 말을 이해 못했다.

“술값 네가 낼 거냐고.”

“……!”

“참고로 난 소주를 좋아한다.”

놀람도 잠시, 이상민은 짐짓 걱정하듯 말했다.

“괜찮겠어? 괜히 무리하지 말고. 한 잔에 취하면 우리도 곤란하니.”

황문진도 말렸다.

“그, 그래… 진현아. 술이라니. 우린 미성년이야. 그냥 나랑 여기서 게임이나 더 하자.”

진현은 피식 웃었다.

괜찮겠냐고?

당연히 괜찮다! 회귀 후 술을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의도야 어쨌든, 재수 없는 놈이 처음으로 예쁜 제안을 했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안내나 해라. 술은 확실히 구할 수 있는 거지?”

***

이상민은 그들을 BMW 스포츠 세단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황문진은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 안을 살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테헤란로. 금방 도착해.”

“면허는 언제 딴 거냐?”

“잠깐 미국에 있을 때?”

BMW 는 도로를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속도로 돌진해 순식간에 테헤란로에 도착했다.

이상민은 유리로 도배된 고층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고급 술집으로 들어갔다.

지배인이 이상민을 보고 급히 달려왔다.

“아, 오셨습니까, 도련님?”

“네, 안에 방 남는 것 있죠?”

“네, 들어가십시오.”

진현은 들어가며 내부를 살폈다.

검고 하얀 테마로 인테리어 된 실내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움이 흘렀다.

주로 칵테일과 양주를 취급하며 안주 하나에 10 만 원에 육박하는 고급 바였다.

‘잠깐, 쥬피르? 여기 대기업 식품 계열사가 운영하는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과거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무슨 대기업 계열사였지? 그리고 도련님이라니?’

생각을 더듬는 모습을 긴장한 것으로 착각한 김철우가 비웃었다.

“왜 막상 술집 오니까 겁나냐?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이야기해. 버스비는 줄 테니까.”

“시끄럽고. 들어가기나 해라.”

“익! 술에 취하기만 해봐라. 길바닥에 버려주겠다.”

지배인이 안내한 방은 소형 룸이었다.


단정한 분위기가 일품으로 창밖으로 역삼을 너머 한강을 낀 강남, 강북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 한 가지 흠이라면 아직 대낮인지라 창밖이 너무 환했다.

‘낮술이라니. 부모님이 알면 난리 나겠군.’

지배인이 물었다.

“뭐로 준비할까요, 도련님?”

“일단 목마르니 맥주 먼저 주세요. 안주는 늘 먹던 걸로 넉넉히.”

곧 각선미를 살린 곡선의 잔에 맥주가 가득 따라 나왔다.

잔 위에 유려하게 떠있는 하얀 거품이 맥주의 격을 말해주었다.

황문진이 신기한 눈으로 입을 댔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으엑, 이게 무슨 맛이야? 그냥 쓰잖아.”

이상민이 웃으며 권했다.

“못 마시겠으면 여기 콜라 있으니 마셔. 필요하면 과일 주스도 있고.”

“그, 그래.”

의외로 친절한 제안에 황문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모습만 보면 전의 삶에 비해 개과천선하긴 했다.

“김진현, 너도 못 먹겠으면 콜라나 사이다 시켜줄게.”

아, 개과천선했다는 말은 취소.

황문진을 볼 때와 다르게 진현을 향한 이상민의 눈빛은 어떻게든 눌러보겠다는 심리가 훤히 보였다.

김철우도 무시하며 말했다.

“그래, 괜히 만용 부리다 쓰러지면 귀찮으니 너 같은 애들은 콜라나 먹어라.”

김진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목마르다. 술이나 빨리 먹자.”

(다음 편에서 계속)

# 13

13. 나선의 변곡점 (3)

“……!”
어색한 건배를 한 그들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황문진은 콜라 잔이었다.

“자, 시원하게 들이켜라고.”

그렇게 말하며 이상민은 김진현을 바라봤다.

지배인이 가져온 술은 일반 맥주가 아니다.

독일에서 생산된 파울라너 살바토르(Paulaner salvator)로 알코올 도수가 8 도, 즉, 일반 맥주의 두 배에


육박하는 도수를 가지고 있다.

알코올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고등학교 1 학년 학생이 제대로 마실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진현이 단번에 맥주를 들이켠 것이다. 원샷이었다.

“크, 시원하군.”

이게 몇 년 만의 맥주인지 모르겠다. 그 청량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아이들에게 진현이 말했다.

“너희는 안 마시냐?”

“……!”

김철우는 표정을 굳혔다.

“허세 부리긴!”

“첫 잔인데 꺾지 말고 한 번에 마시기나 해라.”

김철우는 코웃음 친 후 호기롭게 들이켰으나 곧 사레가 들려 꺽꺽거렸다.

반면 이상민은 절대 지지 않으려는 듯 진현처럼 한 번에 들이켰다.

“자, 더 마셔야지?”

종업원들이 맥주를 다시 날랐다.

그때 진현이 고개를 저었다.

“맥주 말고 다른 술은 없냐? 소주라든지.”

“여기에 소주는 없어.”

“그래?”

“대신 다른 술은 있는데 마실래? 맥주보단 독한데. 네가 마시긴 힘들 거야.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맥주나


마시고.”
의도적으로 자극하는 말투였다.

진현은 흔쾌히 도전을 받았다.

“얼마든지.”

“이전에 마시던 걸로 가져다주세요.”

곧 종업원이 어두운 병에 담긴 위스키를 가져왔다.

그 술을 본 진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발렌타인 30 년산이다.

이런 술집에서 30 년산은 한 병에 100 만 원을 호가한다.

‘나도 기껏 해봐야 12 년산이나 17 년산밖에 못 먹어봤는데 이제 고등학교 1 학년생이 30 년산을 먹어? 망할


놈.’

기가 찬 노릇이다.

“정말 마실 수 있겠어?”

“따르기나 해라.”

“언더 락? 스트레이트?”

“스트레이트.”

유리잔에 갈색 위스키가 졸졸 차올랐다.

“무리하지 말고.”

딱!

건배 후 한 번에 들이켰다. 기분 좋은 목 넘김과 알싸한 느낌이 달아올랐다.

‘좋긴 좋군. 역시 30 년산인가?’

확실히 고급술이긴 했다. 싸구려 위스키와는 느낌이 달랐다.

“잘 마시네?”

“한 잔 더 줘라.”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러다 정말 쓰러져.”

말과 다르게 이상민은 다시 술을 따르고 있었다.

진현이 굽히지 않는 이상, 아예 술로 말아버리려는 듯했다.


건배 후 원샷. 건배 후 원샷.

빠르게 술이 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김철우가 신음을 흘렸다.

“웁! 자, 잠깐.”

안색이 하얀 게 영 불안해 보였다.

“힘들면 좀 천천히 마셔라.”

“우, 웃기지마! 끄떡없다.”

그러나 이미 혀가 꼬여 있다.

‘많이 마시긴 했으니.’

벌써 독한 위스키를 몇 잔이나 마신지 모르겠다. 황문진은 호기심에 한 잔 마셨다 기절한 지 오래였다.

반면 이상민은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살짝 빨개진 얼굴 외엔 술 마신 게 티도 안 났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만 쉬어라, 김철우.”

“다, 닥쳐! 내가 너만큼은 이기고 죽는다!”

욱한 김철우는 오기로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일진이라도 고작 고등학교 1 학년생에게 질 진현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야만적으로 술을 마셨었는데.’

의대의 술 문화는 지극히 야만적으로 신입생 OT 때 20%에 육박하는 신입생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지방 의대도
있었다.

바로 진현이 다녔던 지방 의대가 그랬다.

‘불의에 상황에 대비해 졸업한 선배 의사들까지 OT 에 나와 있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런 OT 를 왜 하는지,


참.’

결국 김철우는 눈을 까뒤집고 장렬히 전사했다.

“크르륵.”

괴상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뻗은 김철우를 옆 소파에 눕히며 이상민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잘 마시네?”

“너야말로.”
벌써 얼마나 마신지 모르겠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황혼에 물드는 서울 전경을 보니 알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나도 취하는구나.’

이상민이 웃었다.

“너도 힘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마셔.”

내용은 걱정하는 말투지만 표정은 영 아니었다.

너도 겨우 여기까지가 한계구나, 란 비웃는 눈빛이다.

그 눈을 보자 오기가 솟았다.

‘그래,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놈에게 질 수는 없지.’

딱!

다시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마시고 또 마셨다.

커다란 발렌타인 병이 비워지고 고풍스러운 병에 담긴 로얄 살루트로 종목이 바뀌었다.

“도, 도련님. 이제 그만 마시는 것이…….”

지배인이 조심이 말렸다.

“괜찮아요. 안주 좀 더 가져다줘요.”

태연한 말투와 다르게 이상민의 안색은 창백했다. 힘들지만 의지로 버티는 것이 훤히 보였다.

진현도 죽을 맛이었다.

‘빌어먹을 녀석. 왜 나한테 이렇게 이기려 들어?’

이미 즐겁게 마시는 수준은 지났다.

둘 다 오기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입에 들어가는 술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천장이 천천히 돌았다.

‘한계야.’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정신은 더 버틸 수 있지만 문제는 육체였다.

술을 처음 접하는 고등학생의 몸은 이미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취한 진현은 물었다.
“하, 하나만 묻자. 왜 이렇게 나한테 이기려 드는 거냐? 어차피 1 등, 2 등이라고 해봤자 매번 두세 문제 차이로
큰 의미도 없는데.”

이상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곧 다시 미소를 지으며 술을 졸졸 따랐다.

“글쎄? 술이나 먹자.”

결국 진현은 화장실에 가서 와락 토했다.

“우엑!!”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잔 더 마시다 쓰러진 것 같긴 한데… 단 하나 떠오르는 것은 환하게 승리의 미소를 짓는 이상민이었다.

처음 보는 진실된 웃음이었다.

‘썩을 놈. 그렇게 좋냐? 네 똥 굵다.

그렇게 첫 대작(對酌)은 진현의 패배로 끝났다.

***

“으응……?”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진현은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여, 여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시야로 진현의 집보다도 더 큰 방이 들어왔다.

원목 블라인드 사이로 진현이 사는 동네와 한강의 전경이 비쳤다.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 이상민이었다.

“여긴……?”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져 인상을 썼다.

이상민이 웃으며 잔을 건넸다. 꿀물이었다.

“…고맙다. 여긴 어디지?”

“우리 집이야. 속은 괜찮아?”

“…괜찮진 않아.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취해 뻗어서 여기로 데려온 거지. 너네 집이 어딘지 몰라서 어쩔 수 없었어. 아,


잠깐 기다려봐. 라면 끓여줄게.”
“…….”

이상민이 방을 나가자 진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저 재수 없는 놈의 집에서 자다니?

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방을 나가니 운동장 같은 거실이 나왔다.

최소 80 평은 될 듯한 집이다.

‘이 녀석 사는 곳이 주상복합의 펜트하우스였나?’

그때 이상민이 불렀다.

“라면 다 끓었어.”

대리석 식탁에 라면 두 개가 올려 있었다.

“자, 먹어. 해장엔 라면이 제일 좋더라.”

“…그래, 고맙다.”

젓가락을 든 진현은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내가 이놈이 끓여준 라면을 먹게 되다니?

시간을 회귀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먹을 만해?”

“먹을 만하다.”

솔직히 제법 맛있었다.

“그래, 잘됐네.”

적응이 되지 않아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은? 집에 너밖에 없나?”

“아, 나 원래 혼자 살아.”

“혼자?”

의외의 말에 반문했다.

이상민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5 년 전 본가에서 나와 어머니랑 둘이 살았는데… 3 년 전부터 어머니가 병원에 쭉 입원해 있어서 혼자 산


지 꽤 됐어. 어머니는 지금 한국대 병원에 있어.”

진현은 얼마 전 한국대 병원에서 이상민을 봤던 것을 떠올렸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보지?”


“몸은 괜찮아. 마음이 안 좋지.”

“무슨 말이지?”

“정신분열병(Schizophrenia)이거든. 현실을 분간 못하고 계속 자살을 시도해 감금 치료 중이야.”

“……!”

의외의 가정사에 진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라면을 깨작거리다 물었다.

“…오래 혼자 있으면 힘들지 않나?”

“뭐,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본가로 가봤자 반기는 사람도 없고.”

남의 일을 말하듯 무심한 목소리였다.

진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상민의 얼굴을 봤다.

그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가면 같은… 아니, 본인의 마음을 가리는 미소다.

그 미소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 녀석이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됐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상처가 있다고 비뚤어지는 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했다.

“힘내라.”

“……!”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힘내라.”

가면 뒤에 가려진 이상민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마음을 숨기고 싶은 걸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그때 진현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의 스쳐 가는 대화를 훗날 얼마나 되뇌게 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있을지.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나선의 변곡점(變曲點)이었다.
***

이후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방학이 끝나고, 여러 번의 시험을 친 후 다시 방학을 하고, 그것이 몇 번을 반복했다.

그 시간 동안 진현은 계속해서 이상민과 경쟁했다.

결과는 항상 아슬아슬한 1 등.

간발의 차로 진현에게 패한 이상민은 학기가 끝날 때마다 게임 비무와 대작을 신청했다.

그것을 몇 학기 동안 반복하니 그와 이상민은 친하다고 하기도 그렇고 안 친하다고 하기도 뭣한 묘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아니, 친한 건가? 몇 번이고 술을 먹고 그놈 집에서 잤으니까. 세상 참 웃긴 일이군.’

심지어 그와 이상민을 베스트 프렌드로 여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황문진이 입술을 내밀며 질투했다.

“이제 이상민하고만 놀고, 나하고는 안 노는 거야, 진현아?”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고등학생 때는 이런 우정에 민감한 시기긴 하지.’

“걱정하지 말아라. 난 그놈보다 너와 훨씬 친하다.”

“그렇지? 네 제일 친한 친구는 나지?”

“그래, 그래.”

황문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뭐, 아무렴 어떨까?

중년의 삶을 겪은 진현은 우정이 삶에 중요한 요소임을 알지만 연연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쭈욱쭈욱 흘러, 이윽고 고등학교 3 학년 겨울이 되었다.

운명의 수능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지긋지긋한 수험 생활… 이전 삶의 4 년, 이번 삶의 4 년을 합쳐 통합 8 년 수험 공부의 결실을 거둘 때가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

14. 수능 (1)
한기가 도는 고 3 교실은 조용했다. 코앞에 다가온 수능으로 모두 긴장된 얼굴이었다.

“으… 추워. 공부 잘되니, 진현아?”

3 년 동안 키가 부쩍 큰 황문진이 말을 걸었다. 땅꼬마 같던 이 녀석은 이제 키가 180 이 넘었다.

성적도 계속 올라, 이제는 무려 명문대를 노릴 정도였다.

‘세상에 해서 안 될 게 없다더니.’

진현은 황문진을 보며 혀를 찼다.

공부를 하라, 격려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성적이 오를지는 몰랐다.

“그냥저냥 그래.”

“치, 또 말만 그런다. 이제 수능이 며칠 안 남았는데 넌 긴장도 안 돼?”

“긴장돼.”

“또 거짓말한다. 그런데 왜 넌 수시는 안 쓴 거야?”

“한국대에는 안 되니까.”

내신 1 등이니 어지간한 곳은 지원할 수 있다.

하지만 진현이 목표하는 곳은 한국대 의대다.

특목고, 자사고 1 등 혹은 국제 올림피아드 수상자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어차피 너는 모의고사도 안정권이니. 좋겠다. 하아…….”

전의 삶을 포함해 8 년째 주구장창 수능을 파고 있는 진현의 모의고사 성적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아 최근에는
전국 50 등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이상민도 마찬가지로 원래 입시가 약한 일신 고등학교는 생각지도 않은 학생 복에 잔치 분위기였다.

“모의고사와 수능은 달라. 실제 성적은 시험을 쳐봐야 알 수 있어.”

황문진은 콧방귀를 꼈다.

“헹, 또 그래 놓고 잘 볼 거면서. 이러다가 정말 전국 수석 하는 것 아니야?”

“아니야. 정말 수능은 쳐봐야지 아니까.”

진현의 말은 진담이었다.

평소에 잘하다가 수능 날 미끄러진 학생이 얼마나 많던가?

사소한 실수 하나만으로 노력이 물거품으로 날아갈 수 있다.


사실 고등학생 시절 전체의 노력이 고작 하루로 결정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불의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뭐 마셔?”

“이상민이 준 한방 차다. 뜨뜻한데 마셔볼래?”

황문진은 차를 살짝 마셔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크, 엄청 쓴데? 너 많이 마셔라.”

진현은 살짝 웃고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화장실을 가는데 이번엔 김철우, 이상민을 만났다.

“여, 범생이.”

김철우가 손을 흔들었다.

면도를 안 해 수염이 덥수룩한 녀석은 고 2 말부터 정신을 차리고 양아치 짓에서 손을 뗐다.

녀석들과는 이제 격의 없을 정도로 친해졌다.

참, 세상모를 일이다.

“공부는 잘돼?”

“잘되겠냐? 난 재수 확정이다.”

“담배 피우러 가나?”

“어, 답답해서.”

“같이 가자.”

그 말에 김철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왜? 또 간접 흡연하게?”

간접흡연은 진현이 술만큼 좋아하는 거였다.

직접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남들이 태우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 하는 것이다.

‘직접 피우는 것보다 몸에 안 좋지만… 자주 하는 것은 아니니.’

체육관 뒤에서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진현은 끽연의 그리움을 달랬다.

“공부 잘돼?”

이상민이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진현이 너도 한국대 의대에 지원한다 했지. 같이 입학하겠구나.”

이상민은 본인과 진현, 모두 떨어질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진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민, 이놈은 확실히 한국대 의대에 입학할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성적으로.

‘이전 삶에서 이놈이 수능 전국 5 등이었나? 서울시 통틀어서 2 등이고……?’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그랬다.

문제는 진현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결과는 까 봐야 안다.

수능은 원체 여러 운과 불의의 요소, 당일 컨디션에 많이 좌우되니까.

“진현이, 너는 수능 끝나고 대학가면 뭐 할 거야?”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에게 설레는 질문이었다.

장밋빛 대학 생활, 연애, 동아리, 음주가무… 수능에 찌든 학생들은 여러 희망을 안게 마련이다.

진현도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돈 벌 거다.”

“뭐……?”

황당한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벌 거다. 번 돈으로 주식에도 투자할 거고. 땅도 사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주변을 둘러보면 강남의 땅, 대일 IT 의 주식… 등, 널려 있는 노다지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투자할 돈도 없고, 딱히 돈을 벌 방법도 없는 고등학생의 신분이라 입맛만 다셨는데, 대학교에


들어가면 최선을 다해 종잣돈을 마련 후 돈을 벌 것이다.

“…그래.”

그들이 떨떠름하게 답할 때 수업 예비종이 울렸다.

“들어가 봐야겠다. 공부 잘해라.”

이상민이 마주 인사했다.

“그래, 수능 잘 보고.”

“너도.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라. 아, 참. 한방 차 잘 마셨다.”


“뭘.”

옆의 김철우가 물었다.

“한방 차? 웬?”

“아, 그냥… 집에 한방 차가 좀 있어서 진현이 줬어.”

“내 건?”

“이제 없어.”

“없어?”

김철우가 아쉽게 물었으나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제는.”

***

그런데 감기 조심하라는 말이 씨가 된 걸까?

그만 진현은 감기에 걸려 버렸다.

창백하게 질린 진현의 얼굴에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아들 괜찮아?”

“괘, 괜찮아요.”

하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몸이 달달 떨렸다.

‘이런. 독감인가? 안 그래도 아비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Avian influenza virus)가 유행한다더니. 조류


독감은 아니겠지?’

진현은 현기증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한창 조류독감이 유행 중이었다.

‘며칠 쉬면 낫긴 나을 텐데…….’

문제는 시기였다.

수능이 모레였던 것이다!

‘빨리 낫길 바랄 수밖에 없구나.’

어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아들, 그냥 오늘은 학교 쉬어. 안 되겠어.”


“아니에요. 등교는 해야죠.”

고개를 젓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갔다.

아이들이 진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진현아, 괜찮아?”

“괘, 괜찮어.”

흐리게 답한 진현은 책상에 엎드렸다. 담임도 진현을 보고 놀라 말했다.

“아니, 진현아? 이게 무슨? 빨리 양호실로 가서 쉬어라.”

아이들의 부축을 받고 진현은 양호실로 갔다.

해열진통제를 먹고 누워 있는데 아무래도 단순한 독감이 아닌 것 같았다.

윗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지? 감염성 장염? 아니야, 여름도 아니고 상한 음식을 먹은 적도 없어. 그냥 독감? 아니면… 설마
복막염? 위궤양?’

가능한 진단이 좌락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단 좀 쉬자. 자고 나면 낫겠지.’

원래는 수능 직전 최종 마무리를 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그렇게 하루가 몽롱하게 지나갔다.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진현아, 괜찮니?”

“네, 괜찮아요. 저 일찍 잘게요.”

부모님의 걱정에 진현은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짓고 잠자리에 누웠다. 좋아져야 하는데…….

“병원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감기는 병원 가봐야 소용없어요. 그냥 푹 쉬는 게 제일이니 일찍 잘게요.”

진현의 말처럼 감기는 잘 먹고, 푹 자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병원에서 주는 약은 그저 증상을 완화시킬 뿐, 감기 자체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진현은 낭패한 얼굴을 했다.

‘더 안 좋아졌어.’

물먹은 솜이 된 듯했다.
멍한 정신을 털기 위해 타이레놀 2 알, 진통 소염제도 한 알 먹었다.

배도 아파 위장 보호제도 2 알 먹었다. 과량 복용이지만 일단 컨디션 회복이 우선이었다.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다른 곳보다 배가 쓰리듯, 찢어질 듯 너무 아팠다.

‘단순 감기가 아닌가? 내일까지 나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등교했더니 진현의 얼굴을 보고 담임이 난리를 피웠다.

“아니, 진현아! 당장 조퇴해 푹 쉬어라. 내일이 수능인데 하필 감기를……!”

진현은 일신 고등학교의 희망이었다.

교무실에서는 혹시 전국 수석은 못하더라도 서울시나 구(區) 수석 정도는 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때 독감이라니!

그렇게 진현은 전의 삶 때도 해본 적 없는 조퇴를 했다.

부모님들은 가게에 나가 집엔 아무도 없었다. 허름한 이불을 피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으…….”

그리고 오후 4 시경, 진현은 배가 너무 아파 잠에서 깼다. 이불은 흘린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왜 이렇게 통증이…….”

뭔가 이상했다.

독감이어도 배가 아플 수 있지만… 이렇게 복통이 심하진 않다.

거짓말 안 하고 찢어질 듯한 통증이다.

결국 그는 병원에 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본인이 아픈 것은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근처에 있는 조그만 개인 병원의 의사는 진현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열나고 배가 같이 아프다고?”

“네.”

“감기랑은 좀 다른데… 일단 누워 볼래?”

진찰대에 누운 진현의 배를 의사가 만졌다. 그런데 상복부를 누르는 순간이었다.

“윽!”

강렬한 통증이 작렬했다.


그 통증에 진현도, 의사도 놀랐다.

진현은 창백한 얼굴로 생각했다.

‘맙소사. 압통(Tenderness)이잖아! 배 안에 문제가 생길 때 나타나는 징후인 압통이 왜?’

그냥 복통과 눌렀을 때 유발되는 압통은 달랐다. 배 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뭔가 심상치 않은데? 소견서 써줄 테니 큰 병원 가서 입원해야겠어.”

진현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은 안 됐다.

재수를 할 수는 없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15

15. 수능 (2)

“저, 그냥… 해열제, 진통제, 위장 보호제, 항생제 처방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입원할 사정이 안 돼서…
….”

의사는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물론 그냥 장염일 수도 있지만 위치상 위궤양 천공, 복막염, 담낭염도 가능한데, 만약 안 좋은 경우면


늦게 갈 경우 큰일 날 수도 있어.”

의사의 말이 옳았다.

외과의사였던 진현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병원에 가서 한가히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수능을 못 보기 때문이다.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데 응시도 못해보고 재수를 해야 하다니!

‘절대 안 돼. 지난 삶을 포함해 8 년 넘게 문제집을 본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1 년 더 하라니! 절대 못해!

진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가 수험생이라서… 만약 조금 더 안 좋아지면 바로 병원으로 갈 테니 일단 약으로 처방해 주십시오.”

“하지만…….”

내일이 수능이란 말에 의사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제가 책임지고요. 부탁드립니다.”

빌다시피 부탁해 약을 받아왔다.

진통제와 항생제를 먹은 진현은 자리에 누웠다.

“진현아, 정말 괜찮니?”

“네, 괜찮아요.”

부모님들의 얼굴을 보니 괜히 가슴이 찡했다.

부모님들에게 효도하고 싶다.

정말 성공한 의사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모시고 싶다.

그러기 위해 회귀 후 모지게 노력해 왔건만 이런 난관이라니!

‘약한 마음 먹지 말자. 괜찮을 거야. 병원은 수능 끝나고 가면 돼.’

그리고 밤이 지났다. 배가 아파 끙끙거리며 문득 생각했다.

‘이거… 혹시 위궤양 천공인가?’

가능성이 있었다.

처음에 쓰리듯 아픈 배, 상복부의 통증, 압통까지.

위궤양 천공과 증상이 일치했다.

그리고 위궤양 천공은 수능을 앞둬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인 수험생들 사이에서 꽤나 흔한 질환이기도 하다.

‘그런데 난 스트레스를 그렇게 많이 안 받았는데? 평소 위궤양 증상이 있지도 않았고.’

위궤양 천공은 말 그대로 위궤양이 악화돼서 생기는 질환이다. 평소에 위궤양 증상이 없었는데… 왜?

‘뭐지? 왜 갑자기 이런 게 생겼지? 혹시 그때 한방 차?’

이상민이 준 한방 차가 얼핏 떠올랐다. 꽤나 독하긴 했었는데…….

‘설마. 독약도 아니고. 한방 차를 먹고 간이나 신장이 나빠진 경우는 많아도 위궤양 천공이 생겼단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수능은 수험생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니까.

아무리 진현이라도 무의식중에 몸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다.

‘위궤양 천공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하나?’


위궤양 천공이 맞다면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 게 맞긴 했다.

위궤양 천공은 스트레스 등의 여러 원인으로 위에 궤양이 생겼다 구멍이 뚫리는 급한 질환이었으니까.

‘지금 새벽 4 시. 어떻게 하지?’

고민했다.

‘아니야. 아직까진 괜찮아. 패혈증 상황도 아니고 버틸 수 있을 거야.’

진현은 방에서 주무시고 계신 부모님을 떠올렸다.

전의 삶에 아버지를 여의고 진현 때문에 홀로 고생한 어머니의 얼굴이 그려졌다.

물론 그들은 진현이 당장 병원에 가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진현은 그럴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성공해 효도하고 싶었다. 재수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버텨보자. 아직 팔팔한 젊은 몸이니 버틸 수 있어.’

똑같은 중병이라도 젊으면 버티는 정도가 달랐다.

노인보다 훨씬 몸이 강하니 수능 보는 한나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위궤양 천공이 맞다 해도 그나마 복통이 약하니…….’

위궤양 천공은 데굴데굴 굴러다닐 정도로 아픈 경우가 대부분인데, 진현은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엄청 아픈 정도?

진통제를 과량 복용하면 수능 때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어. 한국대 의대. 반드시 합격할 거야. 반드시.’

진현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곧 날이 밝았다.

운명의 수능 날이었다.

***

진현은 걱정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수능시험장에 도착했다.

‘아… 추워.

수험생들을 위해 난방이 단단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진현은 몸을 살짝 떨었다.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버티자. 버틸 수 있어. 재수만큼은 죽어도 안 돼.’


곧 시험을 볼 교실에 수험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

긴장된 얼굴의 그들은 자리에 앉아 각자의 방법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요약집을 보는 학생도 있었고, 머리를 깨우기 위해 초코바를 먹는 학생도 있었다. 기도를 하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진현은 진통제와 항생제를 들이부었다.

“진현아, 괜찮아? 몸 안 좋은 것 아니야?”

같은 학교 아이들이 그를 걱정했지만 진현은 일일이 응대하지 못했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1 교시 언어영역이 시작되었다.

“자, 책상에 있는 것 다 내려놓으세요! 시험지 나눠 드릴 테니 듣기 방송 나올 때까지는 보지 마세요.


부정행위는 절대 금지입니다.”

감독관으로 온 젊은 교사가 주의사항을 안내했다.

교사는 설명을 하다 한 소년이 시체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말을 멈췄다.

“아니, 학생?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진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시험 진행해 주십시오.”

“하, 하지만…….”

“정말입니다. 만약 힘들면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교사는 주저했지만 다른 시험도 아닌, 수능을 접고 병원에 가라 할 수는 없었다.

“만약 힘들면 바로 이야기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깐의 대화만으로 피로가 밀려와 진통제를 한 알 더 먹었다.

과량 복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1 교시 언어영역, 듣기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 강의에서 활용한 그림 자료가 아닌 것은?>


첫 번째 듣기 문제였다.

진현은 한 단어도 빠지지 않고 집중하여 들었다.

언어 듣기는 외국어 듣기에 비해 방심하기 쉽지만 생각지도 못한 고난도 문제가 나올 때가 있다.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분명 이번 수능은 언어와 수리영역이 전반적으로 어려웠어. 듣기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고.’

어렴풋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20 년도 더 지난 기억이라 정확히 무슨 문제가 나왔는지 까지는 기억 안 났다.

그게 기억났으면 애초에 수능 공부를 안 했을 것이다.

3 번 보기까지 들은 후, 답이 명확해지자 진현은 시험지를 넘겨 미리 첫 번째 지문을 훑었다.

그렇게 듣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재수는 싫어. 절대로.’

도합 8 년을 넘게 수능 공부를 했다.

그걸 1 년이나 더하라고?

절대 못 한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다.

진현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서 꿈을 달성하고 효도도 하고 싶었다.

‘할 수 있어. 힘내자.’

그렇게 필사의 의지와 함께 시간이 지났다.

2 교시 수리영역이 끝나고 점심시간 때는 엎드려 잠만 잤다.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은 손도 못 댔다. 어차피 위에 구멍이 뚫려 음식이 들어가면 위 근처 복막이 제대로 상할
것이다.

“진현아, 정말 괜찮아? 지금이라도 병원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래, 안 좋아 보이는데 너 그러다 큰일 나겠어.”

같은 학교 아이들이 수능을 포기하고 병원에 가보라고 할 만큼 진현의 상태는 안 좋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이
시체 같았다.

진현은 힘없이 답했다.


“…괜찮아.”

진현이 판단하기에 아직은 괜찮았다.

그런데 3 교시 외국어를 시험을 볼 때였다.

‘큭!’

배가 아까보다 더 아파왔다.

창백한 그 얼굴을 보고 감독관이 다가왔다.

“왜 그러니? 괜찮니? 학생?”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진현은 급히 고개를 젓고 시험지를 보며 고민했다.

‘위궤양 천공에 따른 패혈증이 오는 건 아니겠지?’

위궤양 천공이 급한 질환인 이유는 염증이 악화될 시 패혈증을 동반할 수 있어서이다.

‘균이 전신에 퍼지는 패혈증은 심하면 혈압이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이 될 수 있어.’

그렇게 될 때까지 버티는 것은 의지가 아닌, 미련이었다.

수능이 아무리 중요해도 몸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그냥 병원에 갈까? 그래도 이번 수능을 못 본 것 같진 않은데…….’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필사의 의지덕분일까?

최악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못 본 느낌은 아니었다.

시험 도중 어렴풋이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 덕도 컸다.

몇 문제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중에 최상위권을 감별하기 위한 초고난이도 문제도 몇 개 있었다.

초고난이도 문제는 기출 중요 문제로 사수를 하면서 숱하게 다시 풀어봤으니, 이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어렴풋이


답이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정확한 결과는 열어봐야 알겠지만, 포기하기 너무너무 아쉬웠다.

‘이제 외국어만 지나면 한 교시만 더 버티면 되는데.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그는 급히 자가로 몸 상태를 검진했다.

가장 중요한 바이탈 사인(생체 징후:Vital sign)을 살폈다. 바로 혈압과 맥박, 호흡수이다.

‘호흡수는 괜찮고, 맥박은 분당 130 회. 정상 맥박이 100 회 정도니 빠르긴 엄청 빠르구나.’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중요한 혈압은? 혈압은 혈압계가 없어 직접 측정을 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손가락으로 동맥압을 느꼈다.

응급 상황에서 의사들이 혈압을 대략적으로 가늠하는 방법이다.

‘경동맥, 대퇴동맥은 비교적 잘 느껴지고… 문제는 요골 동맥, 족배 동맥인데…….’

경동맥(Carotid artery), 대퇴동맥(Femoral artery)은 숨이 붙어 있다면 무조건 느껴진다.

중요한 건 손목과 발등에 위치한 얇은 동맥인 요골 동맥(Radial artery), 족배 동맥(Dorsalis pedis


artery)이다.

요골, 족배 동맥을 촉진한 진현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팔딱팔딱 잘 뛰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구나. 쇼크는 아니야.’

진현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문제를 풀었다.

‘외국어만 지나면 마지막 시간이야. 이제 정말로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리고… 기적처럼 마지막 과목이 지나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수능이 끝났다.

마지막 답지를 걷어간 후, 아이들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진현아, 괜찮아?”

“…….”

대답이 없었다.

“진현아? 김진현?!”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진현이 책상에 엎드리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앰뷸런스 좀…….”

“…!!!”

“빨리…….”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 어! 조금만 기다려! 야! 누가 119 좀 신고해!! 너는 시험본부의 선생님들 좀 불러오고!!”

시험장에 난리가 났다.


부산스러운 소란을 느끼며 진현은 눈을 감았다.

다섯 번의 수능 중 가장 고된 수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6

16. 수능 (3)

진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창틈으로 햇살이 눈을 따갑게 했다.

‘여긴……?’

몸을 일으키던 진현은 날카로운 복통에 신음을 삼켰다.

“윽…….”

배 위쪽에 하얀 거즈로 덮인 상처가 보였다. 수술자국이었다.

‘이건?’

그런데 그때, 침대를 감싼 커튼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진현은 당황했다.

“어, 어머니……?”

“진현아! 이 바보 같은 놈아!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해!!”

어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회귀 후 처음 듣는 꾸지람이었다.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능이야 다음에 보면 될 것을! 어쩌자고 이런 미련한 짓을. 네가 잘못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정말로.”

***
얼마 뒤 회진 온 중년의 의사가 진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생,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알고 있어?”

“…….”

“위궤양 천공에 복막염까지 진행된 상태였어. 조금만 늦었으면 패혈증으로 큰일이 났을 거야. 젊어서 살았지…
….”

의사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 진정한 어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다음부터 또 이러기만 해봐. 아주 혼낼 줄 알아. 그렇죠, 여보?”

며칠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듯한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엔 네가 잘못했다, 진현아.”

집중 공격 당한 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생각해도 무모하긴 했다. 그도 다시는 이런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잘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의 말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수술은 잘 됐으니 며칠 쉬면 금방 회복될 거다. 그때까지는 절대 안정하고. 다음부터 이런 일 있으면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바로 병원으로 와.”

“네, 감사합니다.”

몸이 더 안정된 후 황문진이 병문안을 왔다.

“진현아, 몸 괜찮아? 어쩌다가 이렇게…….”

“그러게 말이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수능 직전에 이런 중병에 걸린 것인지 모르겠다.

수능 직전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인가?

“그래도 많이 나았다.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리고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진현은 문득 물었다.

“수능은 잘 봤어? 가채점 해봤어?”


“어…….”

황문진은 말끝을 흐렸다.

못 본건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표정이 제법 밝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 나를 배려하는 거군.’

진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문진은 자신이 시험을 망쳤을 거라 추측하고, 진현의 기분을 배려해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본 건지 모르겠군.’

시험장에서는 열심히 풀긴 풀었는데… 쓰러지고 일어나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시험을 보다 보니 과거에 풀었던 문제들이 몇 개 기억나긴 했는데…….”

원래 그는 수능 문제를 하나도 기억 못했다.

사수까지 하며 기출 문제로 여러 번 풀어보긴 했지만 이십 년 넘게 지난 터라 깨끗이 잊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수능 문제를 직접 다시 풀다 보니 전의 삶에서 봤던 문제가 몇몇 떠오르긴 했다.

덕분에 초고난도 문제 몇 개를 포함해 몇몇 문제를 거저 풀 수 있긴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

그때 다른 방문객들이 병실을 찾아왔다.

이상민, 김철우였다.

“여… 범생이. 이게 무슨 꼴이냐?”

김철우가 껄렁하게 손을 흔들었다.

녀석은 수능이 끝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회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상태였다.

“몸은 어때?”

이상민이 물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 와줘서 고맙다.”

“아니야, 몸조리 꼭 잘하고. 원래는 수능 끝나고 다 같이 어디 놀러 갈까 했는데 힘들겠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끼리 놀아라. 수능은 잘 봤냐?”

이상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말을 흐렸지만 잘 봤을 게 뻔하다. 이번에도 전국구급의 성적이겠지.

반면 김철우는 숨김없이 말했다.

“난 망했다. 재수 확정이야. 진현이 너도 재수할 거면, 같이 하자.”

그 말에 황문진과 이상민이 놀라 주의를 줬다.

“철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성적도 안 나왔는데 재수라니.”

“아니, 그렇게 몸이 아팠으면 아무리 이 괴물이라도 수능을 잘 봤을 리 없잖아. 그리고 재수가 뭐 어때서? 수능
날 성적이 안 나오면 할 수도 있지.”

진현의 기분을 배려 않는 말에 황문진과 이상민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진현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만약 재수를 하게 되면 같이하자.”

***

퇴원 후, 진현은 다시 등교를 시작했다.

물론 형식뿐인 등교였다.

교실에서 영화를 보거나, 오전에 한 시간 정도 얼굴을 비친 후 바로 하교였다.

아이들은 진현이 당연히 수능을 망쳤다 생각하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렇게 잘했는데 아깝다.”

“그러니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면 뭐해. 수능을 망쳤는데. 운도 없지.”

교무실의 선생님들도 안타까워했다.

“하아, 정말 안타까워요. 하필 그때 아파가지고.”

“그러니까요. 우리 일신 고등학교의 위상을 높일 인재였는데.”

“그래도 이상민 학생이 있으니 기대해 봅시다. 그리고 진현 군도 내년에는 잘 보겠지요. 이런 불상사가 또
생기진 않을 테니.”

선생들은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하기로 했다.


재수생이어도 시험을 잘 보면 그 학교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한편 진현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런 변화 없이 일상을 지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뒤에는 하교 후 부모님들 일을 도와주고, 일이 끝나면 편히 쉬었다.

몇 년 만에 찾아온 여유를 푹 즐겼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었다.

“내년에는 어떻게 할 거냐?”

“뭘요?”

“재수 말이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재수는 생각 없어요, 아버지.”

아버지는 담담히 말했다.

“혹여라도 집안 사정을 걱정해 아무 대학이나 가진 말아라. 네가 지금까지 들인 노력이 얼마인데… 난 내 아들이


노력에 걸맞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이 아비, 그 정도 뒷바라지할 능력은 있으니 걱정 마라.”

아버지의 마음이 감사해 진현은 말했다.

“감사해요, 아버지.”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능 점수가 발표됐다.

***

수능 점수는 각 개인 별로 직접 나누어 주었다.

진현은 느지막이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는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과 기쁜 표정이 교차했다.

“아, 진현아!”

황문진이 뛰어왔다.

“나 엄청 잘 봤어!! 백분율 1%야!”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시 자연계 1%면 최고의 명문 한국대 공대나 지방대 의대를 지원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원래 황문진 성적이 5~7% 정도를 왔다 갔다 했는데 대박이 난 것이다.

‘정말 노력하면 다 할 수 있구나. 만년 꼴찌 황문진이 한국대라니.’

진현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아니야, 다 네 덕분이지!”

“어디에 지원할 거냐?”

“글쎄, 아버지랑 상의해 봐야지. 이렇게 잘 나올 줄은 몰라서. 히히. 가채점보다 7 점이나 올랐어.”

신 나게 떠들던 황문진은 입을 뚝 다물었다. 너무 자신 생각만 한 것 같았다.

“너는… 혹시 성적표 받았어?”

“아니, 아직 안 받았다. 이제 가서 받으려고.”

“어… 성적표 받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 내가 살게.”

진현은 슬쩍 웃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교실의 문이 열리며 담임이 들어왔다.

“김진현! 진현이 아직 안 왔어?”

아이들이 놀라 담임을 봤다.

진현이 손을 들었다.

“저 왔습니다,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담임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덥석 어깨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7

17. 조금은 다른 예과생 (1)

“이놈아! 이 예쁜 놈아!”

그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담임이 크게 외쳤다.


“네가 이번 수능 전국 수석이란다!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

아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김진현, 수능 망한 것 아니었어? 수석이라고?”

황문진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진현아……?”

진현도 놀랐다.

“정말입니까?”

“그래, 교육청에 확인한 사실이야. 정말 축하한다! 너는 우리 학교의 자랑이야!!”

하지만 진현은 쉽게 믿지 못했다.

‘내가 수석이라고?’

가채점을 전혀 해보지 않아 수능을 잘 봤는지 못 봤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수석이라니?

하지만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교무실로 끌려가 선생님들의 단체 축하를 받았다.

“김진현, 축하한다!!”

“일신 고등학교에서 전국 수석이라니!!!”

“이 장한 놈!!”

쭈글쭈글 할아버지 교장도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허허, 진현 군. 정말 장하네. 내 진현 군이 입학했을 때부터 눈 여겨 봐왔는데…….”

그리고 교장은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축하인지 정신 공격인지 모를 연설을 1 시간이나 듣고 나서야 진현은 교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교무실밖에는 황문진과 김철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범생이. 그렇게 아프고도 전국 수석? 하여튼 괴물이라니까. 축하한다.”

김철우가 혀를 차며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내년에 나 재수할 때 과외 좀 해달라고.”

진현은 마주 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그런데 이상민은?”

“아…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어디 갔지? 하여튼 상민이도 엄청 잘 봤어. 물론 너보다는 못 봤지만.”

“그렇군.”

“어쨌든 이런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소주나 한 병 빨러 가자. 이번엔 네가 사, 범생이!”

그 말에 황문진이 질색을 했다.

“에엑? 또 술 마시게? 그냥 게임방이나 가자.”

진현도 이번엔 손을 저었다.

“미안하다. 술은 다음에 마시자.”

“왜? 아직 속이 다 안 나아서?”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은 부모님과 같이 보내고 싶다.”

***

집… 아니, 동네가 난리가 났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우리 아들이 전국 수석이라니.”

어머니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왜 우세요? 이제 대학 가면 제가 더 잘해 드릴게요.”

“아니, 그냥 기뻐서… 아이고,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어머니는 활짝 웃으면서도 좀처럼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위암 치료 후 끊은 술을 다시 마셨다.

친구들이 축하주를 흠뻑 건네주었다.

“아이고, 축하하네. 도대체 비결이 뭐야?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좀 알려줘.”

“우리 아들놈은 웬수인데. 내 아들이 진현이 반의반만 닮아도 소원이 없겠어!”

아버지가 거하게 취한 얼굴로 답했다.

“특별한 이유랄 것이 있나? 다만…….”

“다만?”

친구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나를 닮아서 그런 거야.”

“에이, 이 사람아. 장난하나? 진현이만큼 아비와 안 닮은 자식이 어디 있다고!!”

야유가 해일처럼 터져 나왔지만 그는 꿋꿋했다.

“진짜라니까. 다 나를 닮아서 그런 거야.”

“에이, 진짜! 술이나 마셔!!”

분노의 술 폭탄이 작렬했지만 진현의 아버지는 모든 잔을 받아 마셨다.

그가 태어난 이후로 최고로 기쁜 날이었다.

진현은 언론사와 인터뷰도 했다.

그의 수석은 특히나 언론사에 관심을 끌었다.

중학교 때 꼴찌에서 단숨에 1 등, 그리고 위 천공이 있었음에도 의지로 버텨낸 점 등, 이야깃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수능 수석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김진현 학생?”

매년 반복되는 상투적인 질문에 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설마 수능 수석 인터뷰를 하게 되다니.’

회귀 후 열심히 노력하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사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하던데… 비결이라도 있나요?”

비결이라… 한 가지 있긴 했다.

‘8 년 동안 수능 공부하면 사교육 따위 필요 없긴 하지.’

하지만 그런 말을 언론에다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수능 수석은 그의 온전한 실력만은 아니었다.

‘수능 당일에 몇몇 문제의 답이 떠올랐어. 그 덕분이 클 거야.’

주로 쉬운 문제들의 답이었지만 상당히 고난도 문제의 답도 몇 개 떠올랐다.

그리고 최상위권에서 고난도 몇 문제는 하늘과 땅과도 같은 차이를 낳는다.

물론 수석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회귀 후의 노력과 고통 중에도 수능 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이다.

하지만 고난도 몇 문제를 번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진현은 언론이 가장 좋아하는 대답을 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

그는 자신이 지망하던 한국대 의대에 지원했다.

전문 지식을 물어보는 적성 면접을 무난히 본 후, 인성 면접을 보았다.

인성 면접에는 한국대 의대의 여러 교수가 참석했다.

어차피 진현은 합격이 확실했기 때문에 까다롭지 않은 무난한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다.

“의대에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지?”

상투적인 질문에 진현은 생각했다.

‘성공한 의사. 돈 잘 버는 의사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살고 싶어서.’

강남의 잘 나가는 피부과, 삐까뻔쩍한 외제차, 으리으리한 건물들.

삶의 목표가 떠올랐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면접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환자의 몸과 마음을 다 같이 치료하는 참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환자의 질환뿐 아니라 고통받는 마음까지
함께하는 의사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면접 대비책에 나오는 모범 답안 같은 답변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수의 학생이 진현과 비슷한 답을 했으리라.

그런데 면접장 구석에서 가만히 턱을 괴고 있던 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도 익히 알고 있는, 아버지의 위암을 치료해 준 위암의 대가, 최대원 교수였다.

최대원 교수는 몇 년 전, 진현이 보여준 뛰어난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까지 함께하는 참된 의사라. 좋은 말이군. 그렇지만 마음은 따뜻하지만 실력 없는 의사는 어떻게


생각하나?”

최대원 교수의 물음에 진현은 주저 없이 답했다.

“의사에게 환자를 치료하는 실력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의사에게 실력은 정말 중요하지. 왜인지 아나?”

“다른 직업과 다르게 환자에게 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답에 최대원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의사에게는 여러 중요한 것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환자에게 해를 주지 않는 것이지. 자네는


실력과 마음을 겸비한 참된 의사가 될 수 있겠나?”

“노력할 것입니다.”

최대원 교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잘할 것이라 믿네. 입학한 후 보게.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길에 입문한 것을 환영하네.”

진현을 바라보는 최 교수의 눈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그 눈빛을 받으며 진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생명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며 고생하는 것은 지난 삶으로 충분하다.

이번 삶에선 그저 돈 잘 버는 의사, 잘나가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잘못 찍힌 것은 아니겠지?’

진현은 최 교수의 깊은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

얼마 뒤, 합격자 발표가 났다.

진현은 한국대 의대에 합격했다. 그것도 전액 장학생이었다.

이상민도 마찬가지로 한국대 의대에 합격했다.

황문진은 지방대 의대에 합격했고, 김철우는 재수 학원을 등록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진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했구나.’

솔직히 지긋지긋한 기간이었다.

8 년이나 거듭한 수능 공부를 내려놓을 수 있는 기쁨이 가장 컸다.

“진현아, 이제 자주 못 보겠구나. 아쉽다. 학교 입학하면 뭐할 거야?”

의대생도 처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본격적인 전공 공부를 시작하기 전의 기간인데, 이를 의예과라 불렀다.

진현은 지난번과 동일하게 답했다.

“돈 벌 거다.”

낭만 없는 그 대답에 황문진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진현은 빈말이 아니었다.


돈을 벌 거다.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그렇게 진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입학했다.

진정한 시작이었다.

***

이후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 진현이 의대에 입학한 뒤 1 년이 지났다.

의대는 살인적인 학업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의과대학 6 년이 모두 끔찍한 공부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입학 후, 첫 2 년, 주로 교양과 기초 과학을 배우며 보내는 의예과(醫豫科) 기간에는 의대생도 많은 여유가


있었다.

심지어 이 기간의 성적은 향후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고생을 미리 보상받고자 탱자탱자 노는
의대생이 많았다.

의예과의 예(豫)를 ‘놀 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진정한 의대생의 길이 시작되는 것은 3 년째, 본과(本科), 의학과(醫學科) 때부터였다.

물론 의과대학이 아닌, 타 대학을 졸업하고 진학하는 의학전문대학원은 앞의 의예과 과정을 생략한 채 본과


과정만 진행한다.

어쨌든 본과 때는 밤낮으로 공부만 해도 상대를 따라가기 벅차다.

그렇게 황금보다 소중한 예과 기간의 중간에서 진현은… 과외를 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이 공식을 사용해서… 그리고 이 문제는 이 함정에 빠지면 안 돼.”

차분한 진현의 설명에 단발머리의 여학생은 정신없이 필기를 했다.

무려 전국 수석의 일대일 과외다.

특히 지난 1 년간 진현은 지도 학생의 수준을 고려한 과외로 많은 학생의 성적 향상을 이끌어 강남 대치, 도곡동
일대에 인기 최고의 과외 강사였다.

‘꼴찌부터 시작했으니 수준을 맞출 수 있지.’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그도 처음부터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전의 삶을 포함하면 공부를 잘할 때보다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수준에 맞춰 눈을 맞출


수가 있었다.
덕분에 하도 여러 곳에서 찾다 보니 과외비도 쑥쑥 올라, 2 시간씩 주 2 회에 130 만 원을 넘은 지도 오래였다.

심지어 몸은 하나인데 오라는 곳은 많아, 주 2 회에 월 200 만 원을 부르는 학부모들도 있었다.

당시 일반 한국대생 과외비가 40 만 원이 시세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7 시 50 분. 이제 끝낼 시간이군.’

진현은 시계를 봤다.

8 시 10 분에 같은 아파트에 또 다른 과외를 뛰어야 하니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러면 다음에 보자. 숙제 잘해놓고.”

“저… 음… 오빠. 하나 질문이 있는데요.”

여학생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오빠가 아니라, 선생님.”

여학생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너 대학 진학하면 오빠라고 부르도록 해주마. 하여튼 무슨 질문인데?”

“저… 음…….”

“뭔데?”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되세요?”

질문을 한 여학생은 조심스럽게 진현의 눈치를 살폈다.

볼 끝이 살짝 붉어졌다. 마치 사과처럼 앳되고 귀여운 얼굴이다.

“왜? 금요일 약속된 과외 주말로 옮기게?”

“그, 그게 아니라… 혹시… 저… 저 영화 티켓이 두 장 있는데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요? 이번에 잘나가는…


….”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더니 홍당무처럼 변했다.

소녀는 조마조마하게 답을 기다렸다.

이 이야기를 위해 몇 주를 고민했던가?

오늘은 특별히 화장도 정성껏 하고 옷도 갖춰 입고 과외를 받았다.

진현은 짧게 답했다.

“나 영화 싫어한다.”
“어… 그러면 영화 말고…….”

진현은 피식 웃었다.

“놀고 싶은가 본데 이제 곧 1 학기 기말고사니 좀 참아라. 금요일 날 보자. 숙제 꼭 해놓고.”

그리고 그는 소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집을 나갔다. 다음 과외가 늦을 까 봐 바쁜 걸음이었다.

홀로 남은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데. 맨날 하나도 눈치 못 채고. 이 바보 선생님!”

(다음 편에서 계속)

# 18

18. 조금은 다른 예과생 (2)

‘좀 늦을 수도 있겠는데?’

진현은 핸드폰 시계를 보며 도곡동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걸었다.

워낙 대단지라 같은 아파트인데도 한참 걸어야 했다.

띠리링!

그런데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번호에 진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용건이 짐작되었다.

과연 핸드폰을 키니 높은 고음이 울려 퍼졌다.

-진현아! 왜 안 와?!

“무슨 얘기냐?”

-오늘 종강 파티잖아! 빨리 와!!

이혜미.

휴대폰 음성의 주인으로 한국대학교 의과대학의 학년 대표, 과대였다.

의대는 지극히 보수적인 면이 많아 여자가 학년 대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얼마나
성격이 활달한지 알 수 있었다.

모두와 친한 그녀였지만 유독 진현과 많이 친하고 그를 챙겼다.

진현과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이상민을 제외하면 가장 친한 동기였다.

‘챙겨줘서 고맙긴 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

한탕 더 뛰어야 한다.

“오늘은 시간이 안 돼.”

-왜? 또 과외하지?! 야, 오늘 1 학기 마지막 날이란 말이야. 맨날 빼지 말고! 이 누나랑 헤어지는데 아쉽지도


않아? 와서 한잔하자.

“안 된다. 시간 없으니 끊는다.”

전화기 건너편으로 뭐라뭐라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현은 무시했다.

‘나도 놀고야 싶지.’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그라고 왜 가서 놀고 싶지 않겠는가?

사실 그 누구보다도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진현이었다.

하지만…….

진현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황금이 덩어리로 널려 있는데… 배 아파서 놀진 못하지.’

이전의 삶을 경험한 그는 돈을 넝쿨째 버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당장 이 아파트 단지만 해도 10 년이 지나면 재건축을 거쳐 가격이 3 배 가까이 오른다.

그뿐인가?

몇몇 대기업의 주식은 십수 년 뒤 현재보다 주가가 10 배 넘게 오른다.

대표적인 기업이 재계 1 위인 대일 그룹이다.

물론 그는 과거에 병원에만 틀어박혀 지내 시사에 비교적 약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눈만 돌리면 투자할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한 가지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이지.’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돈을 벌려면 투자할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안이 풍족하지 못한 그는 투자할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는 손가락만 빨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돈이 없으면 벌면 되지.’

그는 돈이 들어오면 무조건 주식에 투자했다.


따라서 그가 하는 과외는 단순한 과외가 아니었다.

버는 족족 십 년 뒤 10 배로 뻥튀기될 황금알로 2 시간 주 2 회에 130~150 만 원이 아니라 1,300~1,500 만


원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노다지를 놔두고 놀러 다닐 수는 없지.’

뭔가 과외 말고 획기적으로 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의사 말고 장사 한번 해본 적 없는


그로서는 고액 과외가 현시점에 가장 나았다.

‘기다려라. 재건축 아파트.’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멘트가 벗겨진 낡은 아파트들이지만 곧 재건축을 통해 으리으리하게 변하게 된다.

아직도 월세방에 사시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돈을 모으면 가장 먼저 이사부터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나중에 시세가 오를 목 좋은 아파트로.

***

과외가 끝난 후 결국 진현은 종강 파티 장소로 향했다.

끝없이 전화가 울려댄 탓이다.

-어디까지 왔어? 빨리 와! 오빠도 기다리고 있어.

“거의 다 왔다.”

-이제 3 차로 옮기고 있으니 빨리 와! 오빠랑 기다리고 있을게.

이혜미의 독촉에 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놀 친구도 많으면서 왜 이렇게 자신을 찾는지 모르겠다.

11 시가 다되어 진현은 대학로에 도착했다.

종강 파티 시즌이라 거리는 술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으로 가득했다. 토사물도 곳곳에 보였다.

‘좋을 때군.’

곳곳에서 신나게 젊음을 불태우는 청춘들을 보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좋을 때다. 사회를 나가면, 아니, 졸업만 다가와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젊음을 불태우기 쉽지가 않다.

물론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 고뇌와 고통이 가득 있겠지만 어쨌든 청춘이다.

문득 그의 눈에 길거리 저 멀리 서 있는 한 앳된 여인이 들어왔다.

TV 브라운관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듯, 엄청난 미인이었는데 하얀 얼굴이 청초하게 빛났다.


이제 이십 대 초반? 얼굴만 보면 이슬만 먹을 듯 청순한 느낌으로 짧게 자른 단발덕분에 이지적인 매력도
느껴졌다.

주변을 지나는 다른 남자들도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하얀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현은 여인의 웃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여인은 그가 익히 잘 하는 이였다.

그녀도 진현을 알아봤다.

“아, 김진현! 왜 이렇게 늦었어!”

그녀의 이름은 이혜미.

진현을 술자리로 부른 과대였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쁜 얼굴이 진현의 눈에 클로즈업되었다.

급하게 뛰어온 것이 숨 차는지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는 외쳤다.

“하아, 하아. 이 누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혼 좀 나야겠어.”

“누가 누구의 누나냐?”

진현은 혀를 찼다.

그녀는 몇 달 일찍 태어났다고 동안인 진현을 자꾸 동생취급 했다.

“많이 마셨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취하진 않았어. 우리 동생 기다렸지.”

“네가 술을 참았다고? 설마.”

“진짜야!”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분명 진탕 마셨겠지.

이슬밖에 안 먹게 생긴 얼굴로 그녀는 엄청난 주당이었다.

‘이슬을 좋아하긴 하지. 참이슬.’


원피스를 입고 가지런한 자세로 홀짝홀짝 참이슬을 몇 병이고 마시는 줄 모른다.

그래도 취하지 않았단 말은 진실인 것 같았다.

말술 중의 말술인 그녀는 어지간해선 취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진현도 주량이 강한 편인데, 그녀는 진현보다 최소 두 배는 주량이 셌다.

‘지난번 소주 4 병까지 마시다 항복하고 뻗었지?’

그녀가 진현을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입술의 곡선이 화보처럼 그려졌다. 술 냄새만 아니면 참 예쁠 것 같았다.

“어쨌든 반갑네. 우리 진현이는 누나 보고 싶지 않았어?”

“웃지 마라. 정든다.”

“정들라고 웃는 건데?”

“퍽이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리로 빨리 와. 오빠도 기다리고 있어.”

이혜미는 진현의 손을 잡고 급하게 호프집으로 이끌었다.

한편 그들을 본 동기들이 낄낄 웃었다.

“여, 과대. 남친 왔네?”

“뭐야, 장난하지 마.”

이혜미가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게 보였지만 장난을 건 동기들은 과장되게 겁먹은 제스처를 보였다.

그 유치한 모습을 보니 진현은 과외로 쌓인 피로감이 몰려왔다.

‘집에 가서 쉬고 싶군.’

하지만 진현은 애써 그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의 강권이 아니라도 동기들과의 적당한 사교는 의대 생활에 꼭 필요하다.

‘의사는 혼자 일하는 직업이 아니니.’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생긴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넌 남자친구 안 사귀냐?”
“뭐?”

“남자친구 안 사귀냐고.”

그녀는 답했다.

“난 그런 것 안 키워.”

진현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인기는 참 많은데 이상하군.’

인기가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연예인 뺨치는 미모에 성격도 활달하고 좋아 그녀에게 달려드는 남자가 몇 트럭은 되었다.

농담 삼아 하루에 한 번씩 고백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백을 받을 때마다,

-미안. 나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진현이 알기로 그녀는 딱히 좋아하는 남자가 없었다.

짝사랑이라니. 그녀에게 그것만큼 안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이 녀석을 거부하는 남자는 없겠지.’

외모면 외모, 성격이면 성격, 학벌이면 학벌.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집안은…….

“오빠!”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보고 모델처럼 매끈하게 생긴 한 남자가 맥주를 마시다 고개를 들었다.

진현도 익히 잘 아는 남자였다.

“어, 왔구나. 진현이도 왔네.”

남자, 이상민이 말했다.

***

그녀는 다름 아닌 이상민의 친동생이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이상민이 동갑인 동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닮은 것이라곤 붓으로 그린 듯한 외모 정도?

“앉아라, 진현아. 한잔하자.”

이상민, 이 녀석은 대학에 오더니 날카로운 면이 확 꺾였다.

좋게 말하면 부드러워졌고, 나쁘게 말하면 속을 더 알기가 어려워졌다.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가끔 발끈해서 귀여운 면이 있었건만. 이젠 속을 알 수 없으니.’

뭐, 그래도 여자들한테 인기는 만점이었다.

모델 같은 외모에 부드러운 에티켓. 여자들이 반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 마시자.”

남매가 소주를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주당 남매의 공격에 진현은 급히 손을 저었다.

“잠깐, 천천히 마시자.”

그도 막강한 주력(酒力)을 가졌지만 이들 남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슬만 마실 것 같은 얼굴로 소주병을 들었다.

그리고 참이슬을 맥주 글라스에 가득 부으며 수줍게 웃었다.

“누나가 주는 술인데 원샷 할거지?”

“…잠깐. 소주는 소주잔에 주라고.”

그렇게 왁자지껄한 종강파티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런 진현의 모습을 아니꼽게 보는 이가 있었다.

“김진현, 재수 없는 놈.”

두꺼운 뿔테 안경의, 비대한 몸을 가진 비만 청년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했는데 몸에 휘감은 옷은 죄다 명품이었다.

수백 만 원을 호가하는 오메가 시계가 돼지 목의 진주처럼 번뜩였다.

그는 이혜미와 어울리는 진현의 모습을 이를 갈며 바라봤다.

옆에 앉아 있던 이가 그에게 술을 따랐다.

“강민아, 저놈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먹자.”


돼지, 김강민은 짜증을 내었다.

“이혜미는 왜 저놈이랑 같이 다니는 거지?”

친구가 돼지의 비위를 맞춰졌다.

“글쎄? 불쌍해서 같이 다니는 것 아닐까? 저놈 돈 없어서 맨날 과외만 하고 지내잖아. 혜미가 원체 착하니


불쌍해 놀아주는 거겠지.”

“젠장.”

김강민은 두꺼운 입술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는 이전부터 김진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똥물이 나오게 가난한 주제에 운 좋아 수석 한 놈.’

차석으로 한국대 의대에 입학한 그는 쟁쟁한 의사 집안의 아들로 아버지가 심지어 한국대 의대 교수였다.

항상 남을 무시하는 게 몸에 배어 있는 그는 가난한 김진현이 자신을 제치고 수석을 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난한 놈 주제에 이혜미랑 어울리다니. 혜미는 아무리 착해도 저런 놈이랑 노나?’

그는 자신의 고백을 몇 번이고 거절한 이혜미가 김진현과 어울리는 게 눈꼴이 시려 참을 수가 없었다.

“저런 놈 신경 쓰지 마.”

김강민의 눈치를 보며 주변의 친구들이 김진현을 욕했다.

사실 진현은 과외에 매진하면서도 나름 인맥 관리를 해 동기들 사이에 평이 나쁘지 않았다.

단 돼지와 그 주위의 친구들만 진현을 싫어했다.

“저놈 입학할 때만 수석이고, 지금은 별것 없잖아.”

“그래, 강민아. 저런 놈 전공 과정 들어가면 적응도 못하고 바닥에서 놀다 유급 당할 거야.”

“입학한 다음 이상민이랑 같이 계속 1 등만 하는 너랑은 다르지. 신경 쓰지 마.”

그들의 말처럼 진현은 교양이 주를 이루는 1 학년, 2 학년 과정 때 별다른 부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2 학년, 의예과까지 성적은 폐기처분 돼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쓴 탓이다.

진현은 의대생의 공부는 3 학년, 본과과정부터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현의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을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김진현 같은 놈 신경 쓸 필요 없지. 술이나 먹자.”

김강민이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9

19. 조금은 다른 예과생 (3)

다음 날 진현은 깨지는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종강파티는 4 차까지 이어졌고, 술자리가 끝난 후에도 아쉽다고 이상민의 오피스텔로 옮겨 술을 더 마셨던 것이다.

‘하여간 이놈의 남매와 술을 마시면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니까.’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선 이상민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일어났어? 그렇지 않아도 깨우려 했는데.”

“혜미는?”

“김 기사가 와서 본가로 데려갔어.”

“그렇군.”

밖에 나와 홀로 사는 이 녀석과 다르게 이혜미는 아버지와 한남동 저택에서 살았다.

“다 끓었다. 먹자.”

고등학교 때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이 녀석은 라면 하나는 잘 끓였다.

특히 술 마신 다음 날 먹으면 시원하게 내려가는 맛이 일품이었다.

“시험은 잘 봤니?”

“뭐, 글쎄.”

진현은 이상민의 눈을 바라봤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은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같이 부대껴온 수년의 시간 덕분에 속마음이 짐작돼 그가 원하는 답을 해줬다.

“잘 못 본 것 같다.”

“그래? 이제 곧 3 학년, 본과에 올라가는데 이제 슬슬 너도 공부해야지.”

걱정하는 말투에 진현은 웃었다.

“그러게. 나도 너나 돼지처럼 공부해야 하는데.”

이상민과 돼지, 김강민은 지난 1 년 반 동안 과 수석을 번갈아 가며 차지한 수재다.


‘뭐, 교양 성적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지금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3 학년에 올라가 본과 공부가 시작되면 성적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뀐다.

신나게 놀던 아이들도 모두 눈에 불을 키며 공부에 달려든다.

진정한 의대생활은 그때부터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잘 먹었다. 다음에 보자.”

“벌써 가게? 오늘 뭐해?”

“학교에 가야 해.”

“학교에는 왜? 종강했잖아.”

“일이 있어서. 넌 뭐하냐?”

“나야 뭐…….”

이상민이 살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근 이상민이 취미를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여자였다.

진지하게 사귀는 것은 아니고, 마음은 가볍고 몸은 깊게.

짧은 터울로 여러 여자를 바꿔 치웠다. 오늘도 또 누군가와 놀아나겠지.

“적당히 하고. 나 간다.”

그런데 문을 나가기 전, 진현은 평소 보이던 이상민의 강아지가 안 보여 물었다.

“그런데 강아지는 어디 갔냐?”

“죽었어.”

“죽어? 또?”

“응.”

이상민의 강아지는 몇 달 전에도 죽어 새로 입양한 것이었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길게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알겠다. 다음에 보자.”

“어, 잘 가.”

진현은 지하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술기운이 빠지지 않아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후 몇 번을 갈아탄 끝에 진현은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가 향한 곳은 의대 건물이 아닌, 한국대 의대 병원이었다.

“최 교수님 뵈러 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는 아버지를 치료해 준 최대원 교수를 만나러 온 것이다.

경비에게 확인을 받고 진현은 교수실로 들어갔다.

한창 서적을 뒤적이며 논문을 집필 중인 최 교수가 진현을 반겼다.

“어서 오게, 진현 군. 오랜만이지?”

“네, 교수님.”

“그래, 아버님은 잘 지내시고?”

“네, 건강하십니다.”

최 교수는 입학하기 전부터 진현을 주시했다.

우연인지 조작인지 입학 후에는 아예 정식 지도교수가 되어 진현과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담스러운데.’

물론 진현은 최 교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바라는 길은 최 교수처럼 생명을 다루는 게 아닌, 강남의 번듯한 피부과였기 때문이다.

“시험은 잘 봤나?”

“못 봤습니다.”

진현은 일부러 강하게 답했다.

최 교수가 자신의 낮은 성적에 실망하도록.

“그래? 그래도 늘 그렇듯 분자세포생물학(Molecular biology)이나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


의학물리학(Medical physics) 같은 과목은 A+ 나올 것 같던데?”

진현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또 언제 확인한 거야?’

최 교수의 말처럼 진현은 향후 의학 공부와 연관된 과목은 항상 A+을 독차지했다.

교양 점수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체 성적이 낮았던 것이다.

최 교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교양을 배우는 2 년, 의예과 기간에 공부만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어차피 내년부터 죽어라 공부만 할 텐데.
물론 자네처럼 꼭 필요한 공부는 확실히 해놔야겠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해 진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서 불렀네. 자네 방학 때 뭐하나?”

“저야…….”

진현은 방학 계획을 떠올렸다.

단순했다.

오로지 과외!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하면 이렇게 돈을 버는 것도 무리니 방학 때 최대한 뽑아야 한다.

“특별한 것 없으면 하나 아르바이트나 해보지 않겠나?”

“아르바이트 말입니까?”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알바?

최 교수가 권하는 것이니 편의점이나 호프집 알바 같은 것은 아닐 텐데?

“그래, 내가 아는 사람이 이번에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바이오 벤처를 차렸는데. 인력이 너무 모자라 단기간 일할
사람을 좀 구해달라고 해서. 어떤가? 돈을 떠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은데.”

진현은 잠시 생각했다.

‘바이오 벤처라.’

경험 삼아 일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의학 관련 경험은 과거에 질리도록 했다.

더구나 이제 막 시작하는 바이오 벤처니 단기간 알바생한테 많은 돈을 줄 리가 없었다.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이었다.

“교수님…….”

그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최 교수가 말을 이었다.

“회사 이름은 마인 바이오인데? 어떤가?”

“……!”
진현의 눈이 커졌다.

“회사 이름이 마인… 바이오라 하셨습니까?”

“그래.”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네. 자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네.”

최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진현은 그의 미소를 볼 정신이 없었다.

‘마인 바이오라고?’

그는 마인 바이오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후에 국내 바이오 기업 1 위가 되는 곳이니까!

과거 대일병원에서 일할 때 몇 번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한 적도 있었다.

진현은 왠지 모를 예감을 느꼈다.

물론 그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이날의 결정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

마인 바이오 벤처는 구로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엔 구로에서 시작했군.’

마인 바이오를 찾아가는 진현은 감회가 새로웠다.

마인 바이오는 후에 몇 건의 진단 키트 개발과 신약 개발에 성공하며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루었다.

대규모 공장도 2 개나 건립하며 본사를 인천으로 옮겼다.

‘사장님은 여전할까?’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던 장 사장을 떠올렸다.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며 그와 몇 차례 술도 마신 적 있는 장 사장은 포부와 비전이 장대한 기업인이었다.

“무슨 일이니?”
회사에 도착하자 추레한 남방의 아저씨가 귀찮은 얼굴로 진현을 맞았다.

원채 동안인 진현을 고등학생으로 생각해 말도 반말이었다.

“최 교수님 소개로 왔습니다.”

“최 교수?”

“한국대학교 의과대학 최대원 교수님입니다.”

“아…….”

추레한 차림의 아저씨는 놀란 얼굴로 진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연락을 받긴 받았는데… 너라고?”

너같이 어린애가 일하러 왔다고? 하는 표정이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리로 와라. 사장님은 저쪽에 있다.”

그는 진현을 웬 창고 같아 보이는 방에 안내했다.

“사장님.”

“응?”

서류에 둘러싸여 한숨을 내쉬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장익기 사장이었다.

창업 초창기라 힘든지, 이전 진현이 기억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는데 주름살에 고뇌와 피곤이 가득했다.

장 사장은 진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웬 학생이지?

“방금 한국대학교 최 교수님이 연락한 알바생이랍니다.”

“…얘가? 정말로?”

“그렇다는데요.”

중년의 남자, 장익기 사장은 추레한 남방의 아저씨와 진현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네가 최 교수님이 추천한 학생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데… 너… 몇 학년이니?”

“2 학년입니다.”

그 대답에 장 사장의 얼굴이 그나마 펴졌다.

“아, 본과 2 학년? 그래도 얼굴이 어려서 그렇지 학년은 좀 있구나.”

예과 2 년을 넘어 본과 2 학년이면 입학 4 년차, 즉, 타학과의 졸업반 정도였다.

하지만 진현은 본과생이 아니었다.

“본과가 아니라, 예과 2 학년입니다.”

장 사장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예과? 본과가 아니라?”

“네.”

장 사장은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 좀 쓸 만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니까. 이런 핏덩이를…….”

작은 음성이었지만 방이 원채 좁아 진현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장 사장은 속으로 한국대학교 최 교수를 욕했다.

‘아니, 보내기 싫으면 보내지 말 것이지. 이런 핏덩이를 보내? 그간 연이 있는데 날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건가?
그렇지 않아도 손이랑 돈 모두 모자라는데. 정말 너무하잖아.’

그는 의과대학 체계를 잘 알고 있었다.

의예과 2 학년이면, 실제 환자 보는 임상은 물론 전공에 대해서 전혀 모를 시기다.

영어회화, 인문사회 교양이나 대충 끄적거려 본 놈을 데리고 뭘 하라고?

“너 일반 화학 실험은 해봤니?”

“해봤습니다.”

장 사장은 진현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얼굴에 비해 나름 의지가 굳세고, 믿음직해 보이는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 봤자 짐만 될 핏덩이다.

‘하아, 그래도 최 교수가 직접 연락하고 보낸 건데 쫓아낼 수도 없고. 곤란하군. 대충 잡무나 시켜야겠다.’

“연구소 안내해 주고. 피펫 쓰는 법부터 가르쳐 줘.”

남방의 아저씨에게 대충 지시를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가 힘든데 견학생을 쓸데없이 가르쳐야 하다니. 장 사장은 똥 밟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진현이 물었다.

“제가 담당할 업무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빈혈 진단 키트 개발업무다.”

“빈혈이요?”

“그래, 빈혈의 여러 원인을 구별하는 키트의 개발이다.”

장 사장은 얼굴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네가 설명해 주면 아니? 란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바쁘니 이쪽으로…….”

사장의 불편한 심기를 배려한 남방 아저씨가 그를 끌어내려 했다.

그런데 진현이 다시 물었다.

“빈혈을 진단하는 키트를 왜 개발하는 것입니까?”

장 사장은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학생을 교육하는 마음으로 답했다.

“너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빈혈은 몸 안의 혈액이 모자란 것으로 많은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환이다. 원인도
여러 가지인데 각각을 구분하는 명확한 진단 키트가 없는 상태라 이번에 우리 마인 바이오가 첨단기술로 개발을
하려는 거다.”

나름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진현은 그런 의도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피검사와 체내의 철분 양을 반영하는 페리틴(Ferritin) 수치만 있으면 대부분을 감별 진단할 수


있는데 굳이 진단 키트를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까?”

“뭐? 페, 페리틴……?”

예과생의 입에서 나온 전문적 용어에 장 사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물론 몸 안의 혈액이 모자란 빈혈의 원인은 수도 없이 많지만 실제 환자들이 앓고 있는 빈혈은 몇 종류 안


됩니다. 그런 대표적 빈혈들은 간단한 피검사와 페리틴 수치만 알면 구분이 가능하므로 굳이 진단 키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장 사장은 눈을 껌뻑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어린 학생에게 지적당해서다.

“페… 리틴이라고?”

한편 진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빈혈을 구별하는 키트를 개발한다라… 가능한지나 모르겠군.’

빈혈의 원인이 얼마나 많은데 현대 의학 기술상 각각의 원인을 명확히 구별하는 키트를 개발하는 건 불가능하다.

가능하면 노벨상 감이겠지.

아마 장 사장이 말하는 진단은 대표적인 몇 가지를 구별한다는 뜻일 거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이전에 없던 신선한 아이디어긴 하지만 이미 다른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개발해 봤자 그걸
누가 쓴다고? 직접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개발을 하니 이런 문제가 생기지.’

실제로 이건 당시 바이오 업체에서 흔하게 생기는 문제였다.

소규모 개발 업체에 의사가 없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개발의 디자인 자체를 잘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다행히 장 사장은 진현의 의견을 어리다고 면박 주지 않았다.

과거에 비해 어깨가 많이 좁긴 했어도 후에 마인 바이오를 업계 1 위로 키우는 기업인이다. 충고를 듣는 귀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현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어린 예과생의 한마디일 뿐이니까.

대신 그는 진현의 의견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자신보다 전문가를 불렀다.

“김 박사님을 불러와.”

김 박사는 진단 키트를 개발하는 총책임자였다.

남방 아저씨가 허겁지겁 사라졌고 신경질적인 눈매의 김 박사가 들어왔다.

오면서 대충 설명을 들었는지 김 박사가 매섭게 진현을 노려봤다.

“뭐, 진단 키트가 의미가 없다고? 네가 한 말이냐?”

(다음 편에서 계속)

# 20

20. 조금은 다른 예과생 (4)

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발해도 아무도 안 쓸 것입니다.”

“……!”

김 박사는 와락 인상을 썼다.

“이봐, 학생. 네가 국내 최고 명문 한국대 의대생이라고 뭐라도 되는지 아나 본데, 고작 의예과생이 빈혈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아나? 난 생물학 석사 논문으로 빈혈의 면역 반응을 쓴 사람이야. 어리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는 게 아니니 잘 모르면 입을 조심해.”

“빈혈 중 정확히 어떤 빈혈을 구별하는 것입니까? 모든 빈혈을 구별하는 것은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할 텐데…
….”

“우리 진단 키트는 여러 빈혈 중에서도 만성질병성 빈혈을 구별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보일 거다.”

“만성질병성 빈혈을 구별한다고요?”

“그래, 너는 잘 모르겠지만 만성질병성 빈혈은 오랫동안 여러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빈혈로 명확히


진단하는 키트가 없어. 이런 진단 키트를 최초로 개발하면 잠재적 상품 가치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

“상품 가치는 없을 거라 봅니다.”

“뭐?”

이번엔 진현이 물었다.

“박사님은 왜 지금까지 빈혈을 구별하는 진단 키트가 개발 안 됐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지금까지 이쪽으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돈만 되면 뭐든지 달려드는 다국적 제약 회사들이나 바이오 기업들이 정말 생각을
못했을까요?”

김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진현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만든 것입니다.”

“……!”

“박사님은 빈혈을 진단하는 방법을 압니까?”

“당연히…….”

김 박사의 입에서 빈혈의 분자유전학적 매커니즘과 면역 반응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여러 복잡한 전문 용어가 김 박사의 깊은 조예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현은 그런 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 환자를 볼 때는 그렇게 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피검사 한 번이면 됩니다. 일반적인 혈액 검사들과 체내의 철분 저장량을 반영하는 페리틴(Ferritin) 수치만
확인하면 빈혈의 대표적인 원인은 대부분 감별할 수 있습니다.”

김 박사는 떠듬떠듬 말했다.


“하지만… 빈혈에는 여러 원인이… 지중해성 빈혈이나…….”

김 박사의 입에서 교과서에나 나오는 희귀한 원인들이 주저리주저리 나왔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빈혈들은 국내에 거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빈혈의 원인들은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일반적인 혈액들로
구별이 가능하고요. 철 결핍성 빈혈은 적혈구 용적(MCV), 적혈구 혈색소(MCHC), 페리틴만으로 구별이 되고,
거대세포성 빈혈은 혈액 도말 검사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만성 질병성 빈혈은 임상 상황과 페리틴으로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특수한 빈혈들을 이야기하셨는데, 그런 빈혈들은 진단 키트 하나 있다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일반 혈액 검사에서 의심되는 이상 소견이 나올 때 특수 검사를 추가하는
게 더 정확하고 합리적입니다.”

김 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환자를 보는 임상을 모르지만 나름 빈혈의 이해가 깊어 진현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 사장이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래도 진단 키트가 개발되면 많이 사용하지 않겠나?”

진현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개발을 시작 전 빈혈 관련 의사에게 한 번이라도 연구 디자인을 상의했으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다.

“진단 키트가 개발되면 가격이 얼맙니까? 결과가 나오는 데는 얼마나 걸리죠?”

“한 7 만 원… 그리고 한 3 일…….”

“일반 혈액검사 가격은 몇 천 원 정도밖에 안 합니다. 여러 검사를 추가해도 2, 3 만 원 수준이고요. 결과도 몇


시간만 지나면 바로 나오는데 더 비싸고 오래 걸리는 진단 키트는 아무도 안 쓸 것입니다.”

진현의 말을 끝으로 사장실이 침묵에 잠겼다.

장 사장과 김 박사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 어쩌지… 이미 1 억 5 천이나 투자받은 상태인데…….”

이전 삶에서 친분이 있던 장 사장이 좌절한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이전 삶에서 마인 바이오는 빈혈 진단 키트에 잘못 투자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장 사장은 술자리에서 여러 번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했었다.

“개발이 많이 진행된 상태입니까?”

“아니, 아직은… 초기 단계네.”

“그러면 지금이라도 접으십시오. 그게 회사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입니다.”

“……!!”

장 사장의 얼굴이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어두워졌다.


진단 키트 연구를 총괄하던 김 박사는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세한 마인 바이오는 한 번의 실수가 곧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먼저 고려를 해봤어야 하는데…….”

“아니네. 아이디어를 물어온 내 책임이지. 하아…….”

장 사장은 그래도 오너답게 마음을 추리며 진현에게 인사했다.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문제를 알 수 있게 해줘서 고맙네. 최 교수님이 자네를 추천한 이유가 있었구만. 자네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만약 진현의 충고가 없었으면 시간은 시간대로, 연구 인력은 연구 인력대로 날리고 1 억 5 천만 원을 꼬박 다 꼴아


박았을 것이다.

가난한 마인 바이오가 그 피해를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십중팔구 파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어린 학생인 진현의 말만 듣고 프로젝트를 접을 수는 없으니 혈액 전문 의사에게 컨설팅은 받아볼 예정이다.

하지만 장 사장은 상담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천재라더니.’

그는 문득 최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최 교수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대단한 학생이니 잘 일해보라고만 했다.

그는 천재란 말을 이해했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진현은 침울해진 분위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마인 바이오에 한 가지 선물을 주기로 했다.

“혹시 빈혈 진단 키트 말고 마인 바이오가 연구하는 프로젝트는 없습니까?”

“RI84 프로젝트라고 있는데… 그건 왜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RI84. 진단 키트의 잘못된 투자로 곤경에 빠진 마인 바이오를 구원해 준 프로젝트였다.

마인 바이오는 RI84 의 성공으로 국내 최고 바이오 기업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RI84 프로젝트는 미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마인 바이오는 실마리를 못 찾고 있는 상태였다.

“혹시 염증 관련 진단 연구 아닙니까?”

장 사장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건 어떻게?”

“최 교수님께 얼핏 들었습니다.”

진현은 장 사장의 눈을 바라봤다.

“제가 프로젝트의 내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프로젝트 내용을?”

장 사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진현에게 두툼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RI84 프로젝트의 기획안과 진행 보고서였다.

진현은 빠른 속도로 서류를 읽었다.

“효소 연쇄반응까진 문제가 없는데, ELISA 를 적용하는데 막혔군요.”

장 사장은 진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이는 의대 고학년생, 아니, 일반 의사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장 사장은 진현의 정말로 예과생인지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오래전부터 막혀 있었는데, 도무지 답이 안 보이고 있네.”

장 사장은 내심 RI84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있었다.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RI84 프로젝트에서 생긴 손해를 빈혈 진단 키트로 만회하려 했는데… 하아…….’

보아하니 빈혈 진단 키트도 빛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회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그때 진현이 입을 열었다.

“유도시간과 단백 항원의 정제 과정 문제 아닙니까?”

“……!”
장 사장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변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 그건 어떻게?”

“보고서에 ELISA 시 나타나는 문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장 사장에게 진현이 나직이 제안했다.

“저에게 이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막힌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들어보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장 사장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다고 무시하던 생각은 어느새 사라졌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프로젝트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대박이었다.

RI84 는 빈혈 키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잠재 상품성을 가진 프로젝트로 마인 바이오는 모든 자금난을 해결하고


날개를 얻을 것이다.

“말씀드리기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제 조언이 프로젝트에 도움이 된다면 그에 상승하는 사례를 해주십시오.”

진현은 공짜로 마인 바이오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지금 하려는 것은 기술 이전이나 다름없는 컨설팅이다.

원래대로라면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

‘물론 내 신분상 그런 대가까지 받을 수는 없겠지만. 공짜로 해줄 수는 없지.’

“만약 제 조언이 도움이 안 된다면 당연히 아무런 사례를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에 고민하던 장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혈 키트의 문제를 지적해 더 큰 피해를 미연에 막아준 거만으로도 엄청난 빚이었다.

그리고 RI84 프로젝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몇 푼이 아깝겠는가?

“그런데 사례는 정확히 얼마를 말하는 건가? 우리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큰돈은 어렵네만…….”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스톡옵션을 주십시오.”

“…스톡옵션이라고?”

“네, 어렵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대신 만약 도움이 된다면 단순한 조언뿐 아니라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장 사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톡옵션은 회사가 임직원에게 주는 주식이었다.

그러나 현재 마인 바이오 주식 가치는 형편없어 속된 말로 휴지조각보다 좀 비싼 정도였다.

“우리 회사 주식은 큰 가치가 없을 텐데…….”

“어차피 큰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을 도와드리는 동안, 제 회사인 것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지만 장 사장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마음으로… 정말 고맙네.”

진현은 아예 정식으로 계약서를 썼다.

대략 4%의 지분. 그의 도움으로 RI84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현 시점에서 1,500 만 원의 가치에 상당하는
주식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서다.

1,500 만원.

학생에게는 큰돈이지만, 정말로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헐값이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진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현재 그의 신분상, 그리고 마인 바이오의 경제 사정상 더 큰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1,500 만 원의 가치도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스톡옵션으로 받기로 해 계약 가능했던 거다.

장 사장도 공수표를 날리는 마음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는 설마 정말로 진현의 도움으로 프로젝트가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 자신 회사의 주식이 10 년 뒤 2,600%나 오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2,600%, 26 배의 증가다.

진현은 1,500 만 원이 아니라, 4 억짜리 계약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내 도움이 아니라도 1 년 뒤쯤, 마인 바이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니까. 이 정도의 도움은
상관없겠지.’

진현은 속으로 웃었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1

21. 의대 공부 경쟁 (1)

그리고 의예과 마지막 학기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한국대 의대생들은 진정한 공부가 시작하기 전, 마지막 여유를 최선을 다해 즐겼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다양했는데 음주가무, 동아리 활동, 여행, 연애…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나름의 시간을
보냈다.

그중 진현은 과외와 마인 바이오의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학기가 지나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RI84 프로젝트는 결실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마인 바이오의 장 사장은 진현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전 작은 도움만 줬을 뿐입니다.”

“아니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회사는 망했을 거야. 정말 고맙네.”

진현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마인 바이오는 그의 도움이 없어도 1, 2 년 뒤쯤 프로젝트를 성공했을 거다.

‘왠지 공을 가로챈 것 같군. 그리고 어차피 돈을 바라고 한 일인데.’

하지만 그 생각과 다르게 진현이 도움을 준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마인 바이오는 무척 힘겨운 1, 2 년을 보냈을 테니까.

꼭 과거처럼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쩌면 정말로 부도가 났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장 사장은 진현의 겸손이 대단해 보였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성격도 참 바르구나.’

큰 도움을 줬으니 우쭐해할 법도 하건만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그와 대화하며 지내다 보면 이제 고작 이십 대 초반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항체를 면역 크로마토그래피 분석 방법에 접목시킨 게 유효했습니다. 이제 많이 진행됐으니 조금만 더 하면 될
듯합니다.”

“그래, 그런데 이제 곧 본과가 시작되는데 계속 프로젝트를 맡아줄 수 있는 건가?”

장 사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3 학년부터 시작되는 의학과-본과는 예과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공부량을 자랑한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잠 안 자고 공부만 해도 부족했다.

“아마 본과가 시작되면 더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가?”

장 사장은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반년 동안 진현에게 너무 많이 의지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조언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구체적인 공정부터 해서 진현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RI84 프로젝트의 진정한 총괄팀장은 진현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이전에 한번 의대 공부를 해 유리한 면이 있다 해도 다른 일과 병행하면서 할 수는 없지.’

그의 목표인 피부과를 하려면 의대 내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대 의대는 전국 최고의 수재들만 모이는 곳.

평범해 보이는 학생들 하나하나가 어느 지역 수석이 아닌 이들이 없었다.

진현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들과 경쟁해 어떤 성적을 받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겨울방학이 끝날 때까지 중요한 부분은 다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어도 이후 부분은
진행에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럴 수 있겠나?”

장 사장은 반색했다.

진현은 달력을 바라봤다.

겨울 방학은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으니 빠듯하게 시간이 맞을 듯했다.

“네, 가능할 듯합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진현은 생각했다.

‘계약한 주식을 다 받으려면 마무리를 잘 지어야지.’

그렇게 겨울방학이 지나가 2 월 중순, 본과 개강 1 주 전이 다가와 골학(骨學)이 시작됐다.

골학(骨學).

진정한 의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이었다.

***

“으… 추워.”

이제 본과 1 학년이 될 한국대 의대생들은 하얀 숨을 뱉으며 의대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곧 시작할 골학(骨學)때문이었다.

“엄청 힘들겠지?”

“다 못 외우면 밥도 안 먹이고, 잠도 안 재운다는데.”

“그런데 그걸 어떻게 다 외워? 이틀 만에.”

“그러니까 이렇게 강제 합숙시키는 거 아닐까?”

“하아…….”

모두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악명 높은 골학 때문이다.

과대, 이혜미가 인원체크를 했다. 뽀얀 얼굴이 추위에 빨갰다.

“이제 출발할 건데, 다 모였나요?”

“다 온 것 같은데… 진현이가 안 왔어. 그런데… 개인적 일이 너무 바빠서 못 온다는데?”

그 말에 이혜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진현이 얘는 골학을 빠져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골학은 의대 공부에 가장 기본이란 말이야.”

“그러게. 뼈에 대해 미리 배우는 골학을 마치지 않으면 해부학을 공부할 수 없을 텐데.”

“뼈만 배우나? 골학은 단순히 뼈를 넘어 여러 기본적인 용어와 기초 사항을 다 배우는 거라서 절대 빠지면 안 될
텐데.”

그들의 말처럼 골학(骨學)은 뼈와 여러 기초적인 사항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다.

하지만 여타 과목과 골학이 다른 점은 학점이 들어가는 정식 과목이 아니라 예비 본과 1 년 차 학생들이 신입생


OT 처럼 단체 합숙을 하며 선배들이 가르친다는 점이다. 의대의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도대체 골학을 빠져서 어떻게 하겠단 거야? 안 되겠어.”


이혜미는 입술을 깨물며 핸드폰을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이었다.

-여보세요?

“진현아! 정말 안 올 거야?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못 갈 것 같아. 필참은 아니니…….

“필참은 아니지만 누가 골학을 빠져?!”

골학의 참가는 전적으로 자유였지만 아무도 빠지지 않는다.

중요한 기초를 가르치는 골학을 참가 안 하면 본 공부에서 뒤처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도 좋지만 골학을 빠져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냥 빨리 와!”

-신경 써주는데 미안. 거의 끝났으니 일 마무리되면 늦게라도 따로 갈게.

“야, 야! 김진현!!”

그리고 뚜뚜 하는 신호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아,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야!”

이혜미가 울상을 지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엔 받지 않았다.

그때 비대한 몸집의 남자가 다가왔다.

2 학년 때까지 수석, 김강민으로 아침햇살에 까르띠에 시계가 반짝였다.

김강민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 모인 것 같은데 출발하자, 혜미야. 전국 수석 김진현 그놈은 알아서 하겠지.”

비꼬는 음성이다.

이혜미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오빠, 이상민도 말했다.

“그래, 마냥 더 기다릴 수는 없으니 일단 출발하자. 진현이에겐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해 볼게.”

어쩔 수 없이 이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 바보. 어쩌려고. 쭈욱 뒤처져 유급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녀는 진현을 걱정했다.

‘본과 때는 다들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너무 쳐지면 유급을 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고등학교와 학제가 비슷한 의대에는 타 학과에는 없는 유급제도가 있었다.

다들 열심히 하는 와중에, 골학을 빠져 시작부터 뒤진 진현이 그 꼴이 나지 않으란 법이 없었다.

“빨리 출발하자, 혜미야.”

김강민이 재촉했다.

유독 진현을 싫어하는 그는 속으로 웃었다.

‘건방진 놈. 수능 전국 수석이래 봤자 의대 공부는 전혀 다르다고.’

곧 단체 버스들이 한국대 의대생들을 태워 서울 근교의 숙소로 출발했다.

***

결국 진현은 2 박 3 일의 골학 기간이 끝날 때까지 참가하지 못했다.

“아, 진짜 힘들었다.”

“그러게. 그래도 많이 배웠어.”

“많이 배웠지. 이틀 동안 꼬박 밤을 새웠으니.”

“난 밥도 거의 못 먹었어.”

학생들은 지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정말 많이 배웠다.

이틀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뼈와 기본적인 의학 사항들을 익혔으니.

범위를 못 외우면 밥도 잠도 없었다.

“근데 이거 안 배워도 나중에 공부 따라갈 수 있나? 김진현, 그놈은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이걸 나중에 따로 따라잡진 못할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인 거지? 괜찮나?”

그 대화를 들으며 과대, 이혜미는 예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진현이 걱정되었다.

‘안 되겠어. 나중에 내가 따로 과외라도 해줘야지.’

그녀는 진현을 위해 개강 전 시간을 내어 일대일 과외라도 해주기로 결심했다.

반면 진현의 불참을 기뻐하는 이도 있었다. 돼지, 김강민이었다.

그는 비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김진현, 그놈은 결국 안 왔네?”


“그러게. 미쳤지.”

“뭐, 수능 수석이니 대학 공부도 잘할 줄 아나 보지.”

“그놈 유급당하면 참 볼 만하겠다.”

김강민과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진현을 비웃었다.

그는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는 이상민을 보고 말을 걸었다.

“이상민. 골학 잘했냐?”

“뭐. 그냥.”

이상민은 살짝 웃으며 어깨를 으슥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김강민은 그가 누구보다도 우수하게 골학을 마친 것을 알고 있었다.

‘뭐, 그 정도는 돼야 내 라이벌이라 할 수 있지.’

이상민은 김강민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라이벌이었다.

김진현, 그 천한 놈과 다르게 집안도 대단했다.

유명한 의사집안인 김강민의 가문도 이상민의 가문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었다.

더구나 이상민은 그가 좋아하는 이혜미의 친오빠 아닌가?

“앞으로 본과 생활 잘해보자. 본과 때는 꼭 너한테 지지 않겠어.”

“그래, 잘해보자.”

둘은 훈훈하게 서로의 건투를 빌었다.

***

한편 그때 진현은 구로동 마인 바이오에서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장 사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골학을 빠져서 어떻게 하나?”

“괜찮습니다.”

진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으나 장 사장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장 사장은 골학이 처음 의학 공부를 시작할 때 얼마나 중요한 단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 개인적 공부보다야 계약한 업무를 마무리 짓는 게 더 중요하죠.”


그러면서 진현은 생각했다.

‘뭐, 꼭 골학을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기초이긴 하지만 어차피 그는 골학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

물론 안 듣는 것보단, 듣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에겐 프로젝트를 완수해 주식을 받는 게 더 중요했다.

‘이제 며칠 안에 끝나겠군.’

곧 26 배나 오를 주식을 받는단 사실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그런데 그때, 장 사장이 말했다.

“진현 군,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않겠나?”

“말씀하십시오.”

“잠깐만 사장실로 오게.”

“……?”

새삼스런 모습에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실로 간 장 사장은 손수 끓인 커피를 진현에게 내주었다.

“왜 그러십니까?”

장 사장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사실 자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무엇입니까?”

장 사장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나중에 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우리 마인 바이오에 올 생각은 없나?”

진현은 놀라 장 사장의 눈을 바라봤다. 장 사장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우리 마인 바이오가 크진 않지만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네. 언젠간… 꼭 내 손으로 마인 바이오를 국내


최고의 바이오 업체로 키울 테니 우리 회사와 함께하지 않겠나? 천천히 잘 생각해 보게. 대우는 임원급으로
최고로 해줄 테니.”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부장급이나 임원급으로 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인 바이오라.’

나쁘진 않다.
지금이야 영세한 벤처지만 몇 년 만 지나면 무시무시한 성장을 거듭해 국내 최고의 바이오 업체가 되는 마인
바이오다.

후에 임원급 대우를 받는다면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2

22. 의대 공부 경쟁 (2)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쁘진 않지만, 그가 바라는 길은 아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바이오 회사 쪽 일은 저와 맞진 않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가?”

장 사장은 실망한 눈을 했다. 하지만 그는 진현의 거절을 이해했다.

마인 바이오처럼 영세한 회사에 진현 같은 천재가 뭐가 아쉽다 오겠는가?

애초에 무리한 제안이었다.

“알았네. 하지만 졸업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잘 생각해 보게. 언제든 문을 열고 기다리겠네.”

하지만 장 사장은 진현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인 바이오를 크게 일으켜 세우면 그때 다시 진현을 설득하기로 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도 종종 연락하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진현은 예의상 고개를 끄덕인 후 사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고 약속한 스톡옵션을 받았다.

후에 4 억 원 상당으로 뻥튀기 될 황금알이었다.

일을 마친 후, 마인 바이오를 나온 진현은 은행을 들렀다.

-1 억 1500 만 원.

그가 2 년 동안 놀지 않고, 쓰지 않고 악착같이 과외하며 번 돈이었다.

진현은 그 돈을 후에 재계 1 위로 성장하는 대일 그룹의 한 계열사 주식에 모조리 투자했다.

10 년 뒤면, 그의 돈은 10 배가 넘게 뛸 것이다.
마인 바이오에서 받은 스톡옵션까지 합하면 15 억이 넘는 거액이다.

-15 억.

누구에게는 가벼운 돈이겠지만, 그에겐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 15 억이란 액수를 생각하니 지금까지의 고생이 보상받는 듯했다.

솔직히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도 남들처럼 놀고 싶고, 쉬고 싶고, 편하게 쓰고 싶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진현은 그날 부모님께 한옥으로 된, 근사한 음식점에서 꽃등심을 대접했다.

부모님은 비싼 가격에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기뻐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또 취했다.

언젠간 이런 음식점에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라고 진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학기가 개강되었다.

본과(本科), 의학과(醫學科)의 시작이었다.

***

진현은 본과 생활을 시작하며 자취방을 얻었다.

원래 집에서 학교에 오려면 지하철로 1 시간 넘게 가야 해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아이고, 우리 아들. 앞으로 고생해서 어떻게 해?”

“걱정 마세요, 어머니.”

“밥 꼭 잘 챙겨먹고? 응?”

항상 듬직한 아들이지만 품 안에서 나간다 생각하니 걱정이 되는 듯했다.

아버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 꼭 잘 챙겨라. 이제 네 덕에 가게도 잘되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아버지의 음식점은 인테리어를 바꾸고, 메뉴를 개발하는 등, 진현이 여러모로 힘쓴 덕에 제법 매출이 올랐다.

진현은 미소 지었다.
“네, 아버지도 술 드시지 마시고요.”

“그래요, 이이는 본인 몸이나 챙기지. 며칠 전에도 그렇게 취하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버지는 겸연쩍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 어쨌든 난 네가 좋은 의사가 될 거라 믿는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치료해 준 최대원 교수 같은 의사가 되길 원하는 듯했다.

진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 꼭 좋은 의사가 될게요.”

속으로 생각했다.

‘좋은 의사가 꼭 생명을 살리는 의사는 아니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낡은 냉장고에 김치와 밑반찬을 가득가득 채운 후 집으로 돌아갔다.

진현은 낯선 방에서 잠을 청한 후, 일찍 일어났다.

본과 개강 첫날이었다.

‘이제 드디어 진짜 의대 공부를 시작하는구나. 이걸 어떻게 또 하지?’

긴장도 됐지만 한숨이 먼저 나왔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의대 공부는 끔찍한 기억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무한 경쟁, 끝없는 공부, 끝없는 시험, 스트레스… 수험생도 아닌 대학생 주제에 공부하다 자살하는
학생이 종종 나오는 게 치열한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다.

‘나중에 성공하면 밑에 페이 닥터를 고용해 한없이 빈둥거려야지.’

막막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실없는 생각을 했다.

꼭 그런 날이 오게 만들 것이다.

***

첫날이라 진현은 일찍 등교했다.

아침 6 시 30 분도 안 된 시간인데 강의실에는 이미 학생들이 꽤 있었다.


“어, 진현아 안녕?”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자리를 살펴보니 이미 첫 줄과 둘째 줄에는 자리가 없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들 빨리 왔군. 의대는 강의실을 이동하지 않고 쭈욱 한 곳에서 수업을 들으니.’

긴장된 공기에 내심 한숨을 내쉬며 진현은 적당히 중간쯤 짐을 풀었다.

“흥!”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김강민이 진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천한 놈. 어디 얼마나 하는지 보자.’

김강민은 진현이 한심하게 허우적거릴 모습을 기대했다.

물론 진현은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이혜미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차분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는 진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김진현, 왜 계속 전화 안 받았어? 골학 내용 알려주려 했는데.”

“아, 미안. 계속 바빴다.”

“진짜… 난 몰라.”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앞으로 공부 뒤처지면 어떻게 하려고?”

“열심히 해야지. 어쨌든 신경 써줘 고맙다.”

“몰라. 알아서 해.”

붉은 입술을 삐쭉삐쭉거리는 게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진현은 살짝 웃었다.

그녀는 진현 옆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옆에 앉은 사람 없지?”

“앉은 사람은 없지만… 저쪽 앞에 앉아라.”

“왜?”

“네가 옆에 있으면 집중하기 힘드니까.”

“왜? 이 누나가 신경 쓰여서?”


이혜미가 은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진현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말 많잖아. 시끄럽다.”

“아, 뭐야! 옆에 앉는다.”

그렇게 그녀는 마음대로 옆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한편 그녀의 오빠, 이상민은 수업 시작하기 직전에나 나타나 제일 뒷자리에 어슬렁 앉았다.

뭐, 지각은 안 했으니 고등학교 때보단 장족의 발전이다.

곧 8 시가 되어 첫 수업, 해부학 강의가 시작되었다.

흰 가운을 입은 노교수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본과에 진학해 환영한다는, 열심히 하라는 류의 쓸데없는 덕담 따윈 없었다.

노교수는 파워포인트로 팔을 횡, 종단면으로 자른 도해도를 띄워놓고 쭈욱쭈욱 진도를 뽑기 시작했다.

피부를 들어내고 시뻘건 근육과 힘줄이 보이는 사진을 빔 포인트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깨를 움직이는 회전근개(Rotator cuff)를 이루는 근육은… 인대와 힘줄은… 그걸 지배하는 신경과 이
부위의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이 쉼 없이 튀어나왔다.

뼈는 아예 설명도 없었다.

골학 내용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뭐, 뭐야 이게?’

한국어건만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설명을 들으며 학생들은 입을 벌렸다.

이건 지옥처럼 느껴졌던 골학보다 심했다. 아니, 골학은 강압적이어도 그나마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 설명이라도
해줬지 이건 알아들으라고 하는 설명이 아니었다.

그냥 진도를 나갔으니 알아서 공부하라고 폭격하는 수준이었다.

두 시간을 숨도 안 쉬고 조곤조곤 떠든 노교수는 짧게 이야기하고 강의실로 떠났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건 다 외우십시오.”

“…….”

학생들은 다들 멍하니 노교수의 뒤를 바라봤다.


‘뭘 외우라고?’

뭐라고 떠들었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뭘 외우라고?

일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녹음한 거라도 다시 들어봐야 하나?”

“그러게.”

꽤 많은 학생이 수업을 녹음했다. 다시 수업을 들으며 복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진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다시 못 듣지.’

녹음을 다시 들을 시간 따윈 없었다. 앞으로 모든 수업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패닉에 빠진 학생들을 보며 진현은 옛 생각을 했다.

그도 처음 본과 수업을 들었을 때 저들과 같은 반응이었다.

‘뭐, 이런 식의 수업도 나중엔 다 익숙해지긴 하지만.’

문득 옆에 앉은 이혜미를 바라봤다.

그녀는 집중한 얼굴로 수업 내용을 강의록에 정리하고 있었다.

활달한 평소와 전혀 다른 이지적 모습이었다. 얼핏 보니 다른 학생과 다르게 수업 내용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한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꽤 유명한 내과 교수가 되지.’

사실 그는 이전 삶에서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일했던 국내 최고 대일병원에서 그녀는 미모의 여교수로 유명했었다.

당시만 해도 그녀와 이렇게 가깝게 지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진현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커다란 눈을 돌렸다.

“응? 왜?”

“아니야.”

“수업 어려웠지? 필기 못했으면 말해. 보여줄게.”

“괜찮아.”

곧 조직학, 태생학 수업 후 짧은 점심시간이 끝났다.

모두의 얼굴에 새로운 긴장감이 떠올랐다.


“드디어…….”

“어떻게 하지?”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특히 여학생들의 얼굴은 울상에 가까웠다.

다들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 칼을 들고 의대의 깊은 지하로 향했다.

주차장보다 더 밑의 지하 4 층, 사람의 왕래가 금지된 곳에 시커먼 철문이 닫혀 있었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안의 정경이 펼쳐졌다.

“……!”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는 시퍼런 철제 침대 위에 수십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모형이 아닌 진짜 시체였다.

“아…….”

어지간히 담이 큰 학생들도 시체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일부 여자들은 눈물을 글썽했다.

살이 썩는 내음과 특수 약물 향이 섞여 고약한 냄새를 자아냈다.

이번 수업시간은 다름 아닌 해부학 실험이었다. 이제 직접 칼을 대어 저 시체들을 모두 해체해야 했다.

“자자! 모두 안으로!! 시간 없으니 빨리 들어와!”

조교가 머뭇거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다. 안으로 들어오니 매캐한 냄새가 화끈 눈을 찔렀다.

“아까 수업시간에 다 배웠지? 아까 배운 내용으로 해부를 진행하면 된다. 직접 카데바(시체)를 보며 치는 해부학


시험도 있으니 다들 열심히 하도록!!”

어깨에서 팔 윗부분까지 배웠으니 그 부위에 칼을 대어 해체하면 된다.

하지만 학생들 모두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볼 뿐 쉽게 칼을 들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은 모두 실제 사람의 시체를 처음 보는 거다. 시퍼렇게 부릅뜬 눈이 가슴 떨리게 섬뜩했다.

진현은 같은 실습조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3 인 1 조였는데 하필 김강민과 이혜미가 같은 조다.

‘김강민이랑 같은 조군.’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돼지가 자신에게 비딱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컴퓨터로 랜덤으로 돌린 건데 왜 이따위로 조가 편성된 거지?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김강민도 진현에게 시비 걸지 못했다. 시체를 보고 놀란 탓이다.

“내가 먼저 할게.”

둘 모두 칼을 들 생각을 하지 않자 진현이 메스를 먼저 들었다.

은색 메스를 들고 시체 앞에 서자 진현은 짙은 감흥을 느꼈다.

‘오랜만이군.’

과거의 그는 외과의사였다.

메스를 들고 환자의 피부를 수도 없이 열었었다.

그 안에 질병을 치료하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스를 놀리던 기억이 그의 가슴을 휘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3

23. 의대 공부 경쟁 (3)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생엔 수술을 할 일은 없겠지.’

외과의사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는 생각을 떨치며 어깨의 피부를 주욱 그었다. 갈색 피부가 갈라지며 누런 지방이 새어 나왔다.

그 끔직한 모습에 주변의 일부 여학생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진현은 아랑곳 않고 메스를 쉬지 않고 놀렸다.

피부와 지방을 벗기고 근막을 자르고 근육의 힘줄을 끊었다.

너무나 능숙해 보이는 모습에 김강민과 이혜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진현아?”

진현이 흰 힘줄을 들며 이혜미에게 설명했다.

“이게 가시위근육(Supraspinatus muscle)인 것 같다. 이건 가시아래근육(Infraspinatus muscle)


이고.”

“아……!”

그 모습에 김강민의 눈에 불꽃이 터졌다. 시체에 얼었다가 질투에 정신을 차린 거다.


김강민은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흥, 고작 그런 것 가지고. 누가 그런 것 못한다고!”

진현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면 네가 해볼래?”

“그래!!”

김강민은 씩씩거리며 진현의 자리를 뺏어 앉았다.

진현은 군말 없이 자리를 비켜줬다.

해부는 과거에 지긋지긋하게 해봤다. 남이 대신해 준다면 두말할 것 없이 환영이다.

아니, 사실 그런 것보다 메스를 움직이니 자꾸만 옛 생각이 나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수술장의 고요한 분위기… 흐르는 피와 목숨이 걸린 긴박한 긴장…….

진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죽을 고생을 다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엔 성공을 하고 싶어.’

속물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삶은 그저 물질적, 사회적으로 성공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알콩달콩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사실 속물적인 게 아니라 누구나가 원하는 일반적인 목표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의 삶의 목적이 그렇잖아?’

생각을 마무리한 진현은 김강민이 어깨를 해부하는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흠칫 놀랐다.

“잠깐!”

“왜?”

“지금 뭐하는 거냐?”

“보면 모르냐? 해부하고 있잖아?”

김강민이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김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양을 보존하지 않고 그걸 왜 다 자르는 거지?”


해부실습은 무조건 다 자르고 해체하는 게 아니었다.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며 해체작업을 해 그 내부를 직접 눈으로 보며 익히는 거다.

따라서 조심조심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몸의 일부를 해부하는데도 반나절이 넘게 걸린다.

그런데 지금 김강민은 그런 주의도 없이 닥치는 대로 자르고 있었다.

진현에 대한 반감과 이혜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한 탓이다.

‘맙소사.’

진현은 김강민이 벌여놓은 참사를 보고 머리를 짚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많이도 헤쳐 놓았군. 혈관이랑 신경다발도 다 잘랐잖아. 일부러 망치려고 작정하지 않은 한


손가락보다 굵은 혈관을 자르기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한 거야? 이걸 어떻게 정리하지?’

진현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안 돼. 잠깐만 비켜봐라.”

그러나 김강민은 발끈할 뿐, 비킬 생각을 안 했다.

“뭐? 네까짓 놈이 뭘 안 다고?”

“아니… 카데바(시체)를 그렇게 훼손시키면…….”

하지만 김강민은 말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메스를 휘저었다.

어차피 죽은 시체라 생각했는지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조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잘하고 있나? 음? 이건 뭐야?”

김강민이 해부해 놓은 모습을 본 조교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씩씩하게 답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야! 이걸 다 자르면 어떻게 해?”

“……!”

“이거 나중에 시험으로도 내야 하는데 이렇게 망가뜨려놔? 너희들 모두 장난하냐? 점수 깎이고 싶어?”

김강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교는 김강민뿐 아니라 도매급으로 진현과 이혜미도 탓했다.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하긴 하지만 같은 조원으로서 분명 연대책임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진현은 급히 메스를 들고 김강민의 자리를 뺏었다. 김강민은 어어, 하며 뒤로 물러섰다.

“똑바로 해!”

조교가 눈을 부라렸다.

그때부터였다.

진현의 메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로 잰 듯 근막을 다듬고, 뼈에 닿은 힘줄을 정교하게 잘랐다. 그리고 지방과 연조직에 파묻힌 혈관과
신경다발을 깔끔히 파냈다.

“……!”

그 모습을 본 조교의 눈이 전구만 하게 커졌다.

마치 수공예 장인이 조각을 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카데바(시체)의 어깨가 근육을 벗으며 해부학 정식 교재로
써도 손색이 없을 듯한 단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현은 김강민이 잘라놓은 신경다발과 대혈관도 얼추 배열을 맞춰놓았다.

과거 현미경을 보며 진행하는 미세혈관수술(Microsurgery)도 숱하게 경험한적 있으니 실만 있으면 혈관을 꿰매


놓을 수도 있었을 거다.

조교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너… 예전에 해부를 해본 적 있니?”

있지만 반대로 답했다.

“없습니다.”

“그, 그래? 그런데 어떻게? 대, 대단하구나.”

조교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진현이 만들어놓은 단면을 봤다.

벌써 몇 년째 해부학 실습을 감독하고 있지만 첫날 이런 능숙한 모습을 보인 학생은 처음이었다.

‘손재주가 좋은 건가? 아니, 단순히 그런 정도가 아닌데.’

주변에 다른 학생들도 김진현의 해부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진현이가 한 것 좀 봐.”

“장난 아니네. 어떻게 저렇게 한 거지?”

“그러게. 난 지금 근육도 못 잘랐는데.”


다들 진현에게 붙어 도움을 요청했다.

“진현아, 다 했으면 우리 조에 와서도 좀 도와주라. 더 못하겠어.”

“우리 조에도!”

그렇게 진현은 팔자에도 없이 여러 조에 불려 다니며 해부를 도와주었다. 이혜미도 같이 따라다녔다.

홀로 덩그러니 시체 옆에 남은 김강민은 이를 깨물었다.

무시하던 진현이 자신보다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존심이 팍 상했다.

‘빌어먹을. 고작 백정같이 해부 잘하는 게 뭐라고?’

그는 짓씹듯 생각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성적. 시험만 봐봐라.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마.’

그는 의대생에게 가장 중요한 시험 성적으로 진현을 발라주기로 결심했다.

***

몇 주 지나지도 않았는데 첫 시험이 다가왔다.

“아직 3 월인데 무슨 벌써 시험 기간이야?”

학생들이 한탄했다.

“망할 쿼터제 때문이지, 하아.”

“그러게. 아무리 과목이 많아도 그렇지, 1 년에 4 학기를 쑤셔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중간, 기말을 한 학기에 4
번이나 봐야 하잖아.”

“중간, 기말만 보냐? 3 번, 4 번씩 보는 과목도 얼마나 많은데. 이러니 시험 기간이 끝이 없지.”

“하아, 이 공부를 언제 다 하냐?”

학생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첫 시험은 태생학. 사람이 자궁에서 완성되는 과정을 공부하는 과목이다.

1 학점밖에 안 되는 주제에 시험 범위는 두툼한 원서 반 권이다.

일주일에 몇 시간도 수업 안 했으면서 벌써 이만큼 진도를 나간 것도 놀랍고 다 공부하란 것도 놀랍다.

한편 여유만만한 사람도 있었다.

돼지, 김강민이었다.

‘흥, 한심한 것들. 고작 1 학점 태생학 가지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한국대 의대 선배인 친형에게 미리 과외를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다.

‘본과 1 등도 내 거야.’

그는 김진현을 바라봤다. 김진현은 항상 말없이 책을 보고 있었다.

조용한 모습이지만 김강민에겐 그것마저 재수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열심히 해봐라. 어차피 너 같은 놈, 해봤자 안 될 테니.’

한편 진현 옆에서 공부를 하던 이혜미가 물었다.

“진현아, 시험 끝나면 뭐할 거야?”

“글쎄? 공부해야지? 어차피 곧바로 또 시험 기간일 텐데.”

“하루도 안 쉬어?”

“글쎄, 하루는 쉬겠지.”

“그러면 같이 놀지 않을래?”

“그래, 뭐… 마음대로.”

진현이 별 생각 없이 답하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약속한 거다?”

“그래, 그런데 뭐하고 놀려고?”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술은 안 마시고?”

“술도 좀 마시고.”

그녀는 헤헤하고 웃었다. 가볍게 웃는 그 모습이 화보처럼 예뻤다. 모르는 남자가 보면 반해버릴 만큼.

하지만 진현은 그 웃음에 넘어가지 않았다.

조금은 마시긴 무슨? 또 왕창 마시겠지.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네 오빠한텐 내가 말할까?”

보통 놀 땐 3 명이 같이 놀았다.

하지만 이혜미는 아기처럼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빠한텐 이야기하지 마.”


“왜?”

“그냥 단둘이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 싶어 그렇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지만 진현은 대충 흘려들었다.

“퍽이나.”

“아잉. 진짠데?”

“실없는 농담 말고 공부나 해라.”

진현은 책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혜미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훔쳐본 김강민은 질투에 손을 떨었다.

‘빌어먹을 놈!’

***

며칠 뒤 첫 시험이 시작했다.

“자, 떨어져 앉고. 컨닝하다 걸리면 무조건 F 다!”

학생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첫 시험의 문제를 받아 들었다.

두툼한 시험지를 펼친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게 뭐야?”

수능 문제도 아니고 7 장 가까운 시험지에 빼곡히 70 문제가 적혀 있었다.

“이거 어떻게 풀라고.”

학생들은 울상인 얼굴로 문제를 풀었다.

의대 공부의 필수지침서인 ‘족보’, ‘야마’와 유사한 문제도 많았지만 황당한 난이도의 문제도 많았다.

시험장 내에 괴로운 공기가 가득 찼다. 높은 난이도에 모두들 시험을 망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었다. 돼지, 김강민은 여유롭게 문제를 풀었다.

‘흥, 이 정도는.’

한국대 의대 선배인 친형이 찍어준 문제가 대거 나왔다.

뭐, 그게 아니라도 이런 시험 정도야 그의 능력이면 가벼웠다.

그는 1 등으로 문제를 풀고 시험장을 나갔다.

그 빠른 속도에 놀란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즐기며 김진현을 바라봤다.


김진현은 깊은 눈으로 문제를 푸는 중이었다.

‘아무리 풀어봐라. 잘 풀리나.’

비웃음을 흘리고 완전히 시험장에 나갔다.

공기가 상쾌했다.

***

그 뒤 몇 과목의 시험이 끝나고 첫 시험, 태생학의 성적이 나왔다.

전체 공개가 아닌, 각 개인에게만 성적과 등수를 알려주는 형식이었다.

김강민은 기대하며 성적표를 받았다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김강민, 78 점, 2 등.

성적표에 적힌 내용이다.

100 점 만점에 78 점, 총 석차 2 등으로 굉장히 뛰어난 성적이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누가 1 등인 거지? 이상민인가?”

그는 1 등의 주인공이 이상민일 거라 생각했다. 이상민이라면 인정할 만했다.

건물 뒤에서 담배를 피우던 이상민을 보고 그는 축하를 건넸다.

“여, 1 등 축하한다. 다음엔 지지 않겠어.”

“나 1 등 아닌데?”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김강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가 아니라고? 너 몇 점인데?”

“78 점.”

78 점이면 그와 동점으로 공동 2 등이다. 그러면 1 등은?

‘누구지?’

물론 비슷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누구나 1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만한 김강민은 자신이 인정한 이상민 외에는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1 등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조교를 찾아갔다.


“아……. 남의 성적은 알려주면 안 되는데.”

조교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안 되는데…….”

그러나 김강민은 막무가내였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아버지한테 제가 잘 이야기할 테니 알려주세요.”

그 말에 조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강민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한국대 의대 교수로 무려 의대의 부학장이었다.

“알겠다. 다른 사람한텐 절대 이야기하지 말고.”

그리고 조교는 전체 학년의 성적이 입력된 엑셀파일을 클릭했다.

“이거다.”

엑셀에는 위에서부터 내림차순으로 등수와 점수가 적혀 있었고 그와 이상민의 이름은 2 번째 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위에 칸에는…….

“……!”

(다음 편에서 계속)

# 24

24. 의대 공부 경쟁 (4)

김강민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써져 있었다.

“이, 이건 진짜인가요? 잘못 채점한 거 같은데?”

“응, 아닌데? 제대로 채점한 건데?”

하지만 김강민은 믿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이놈이?’

엑셀의 제일 위 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진현 90 점 1 등.

1 등. 그것도 2 등과 압도적 점수 차가 나는 1 등이었다.


“말도 안 돼.”

김강민은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엑셀에 명확히 써져 있는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라, 그 뒤 다른 성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생들의 성적은 과목마다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오로지 김진현의 성적만 동일했다.

부동의 1 등.

그게 진현의 성적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김진현의 성적뿐 아니라 김강민 본인의 성적도 이변이 있었다.

2 등을 한 건 첫 시험일 뿐, 다른 과목은 등락이 컸다.

심지어 중간 정도밖에 못한 과목도 있다. 그 혼자만의 라이벌인 이상민이 꾸준히 김진현의 뒤를 이어 2 등을 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인정할 수 없어.”

김강민은 머리를 뜯었다.

항상 1 등만 하던 그는 성적 추락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는 진현의 옆자리에서 밝게 미소 짓는 이혜미를 바라보며 두툼한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와 스트레스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래서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이제 고작 첫 시험일 뿐이야. 다음 시험을 어떻게든 잘 보면 돼. 어차피 티도 안 날 거야.’

그는 김진현을 노려봤다.

‘두고 보자.’

***

“강민아, 이거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

뿔테 안경을 낀 삼십 대 초반의 남자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형. 저만 믿어요. 저희 아빠 아시잖아요.”

뿔테 안경의 남자는 김강민의 머나먼… 한, 사돈의 팔촌쯤 되는 친척 형으로 나름 나쁘지 않은 서울의 4 년제


대학을 졸업 후 한국대학교 의대에서 기초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네 아버지야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이건…….”

“괜찮아요. 제가 다 책임질게요. 그리고 엄연히 말하면 이건 부정행위도 아니잖아요? 그냥 후배가 선배한테


힌트만 받는 건데.”

그는 ‘힌트’란 말에 악센트를 넣었다.

뿔테 남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하지만 절대 입 밖에 내면 안 돼.”

“당연하죠. 뭐, 그리고 문제를 직접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힌트’인데요, 뭐.”

“그래, 인트라넷이 아닌, 외부 메일로 보낼 테니 보자마자 삭제해. 꼭.”

김강민의 친척 형인 뿔테 남자는 5 학점 생리학의 조교로 곧 치를 시험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었다.

‘생리학만 1 등하면 다른 과목은 만회할 수 있어.’

김강민은 초반 시험 때 다른 과목보다 생리학을 특히 망했었다.

김진현과의 점수 차는 무려 20 점. 5 학점인 생리학을 C 를 맞으면 만회가 안 된다.

“분명 말하지만, 이건 시험 문제가 아니라 힌트야. 힌트. 꼭 다른 범위도 공부해야 해.”

시험문제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게 그거다.

어차피 문제는 뿔테 남자가 보내준 자료에서 전부다 나올 거다.

하지만 김강민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고마워요, 형. 꼭 이 은혜는 갚을게요.”

“그래, 가봐라.”

“저… 그런데.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돼요?”

“뭐?”

뿔테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리학 실험 점수도 형이 관리하죠?”

“왜? 네 점수 만점으로 처리해 주라고? 이미 그렇게 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김진현이라고 아세요?”

“응? 김진현?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지난 시험 1 등이니까.

“혹시 실험 태도가 불량하진 않나요?”

“그렇진 않은데?”
뿔테 안경은 김진현을 떠올렸다.

시험성적뿐 아니라 실험 태도도 성실하고 리포트도 훌륭해 불량과는 거리가 우주 끝 정도로 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잘 생각해 보세요. 불량하진 않나요?”

“그렇지는…….”

답하던 뿔테 안경은 입을 다물었다. 김강민의 의도를 깨달은 거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성실한 학생의 점수를 깎으라니.”

“어차피 실험 점수는 전적으로 형 소관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실험보고서나 레포트가 모두 완벽할 수는 없을 테니 충분히 깎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흠을 잡자면 뭐든 못 잡을까?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적당히 해도 만점을 줬는데, 가장 성실한 실험을 한 우등생의 점수를 깎으라고?

“안 된다. 그건 못 해.”

“형.”

김강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박사 논문 심사 있지 않아요?”

“……!”

“곧 임용도 신경 써야 하고요. 제가 아버지께 잘 말씀 드려줄게요.”

뿔테 안경의 눈이 흔들렸다.

임용까진 몰라도 확실히 박사 논문은 김강민의 아버지가 힘을 써줄 수 있었다.

사실 친척이라곤 해도 남이나 다름없이 먼 사이라 따로 부탁을 할 수도 없는데, 김강민이 직접 이야기해 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부탁해요.”

결국 뿔테 안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

김강민은 그걸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족보편찬위원회’에 찾아갔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착실한 인상의 남학생, 이현민이 그를 맞았다. 별로 김강민을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커다란 복사기와 수많은 인쇄물이 난잡하게 날아다니는 부서실을 보며 김강민은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 너무 좁지 않냐? 명색이 의대에서 가장 중요한 족보편찬위원회인데.”

“좁기야 하지. 이전 시험기출문제랑 요약집을 인쇄하는 기계도 낡았고.”

“그러니까.”

‘족보’ 혹은 ‘야마’라 불리는 시험문제 기출요약집은 의대 공부의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의대의 시험은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막상 중요한 내용과 시험에 나오는 내용은 매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데 중요한 건 몇 년이 지나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에 출제되었던 기출문제집인 족보의 중요성은 굉장히 커 과목에 따라 적게는 30~50%, 많게는
80~90%가 족보의 내용을 응용해서 시험이 출제된다.

“고생이 많다. 너희 족보편찬위원회가 아니었으면 우린 시험도 제대로 못 봤을 텐데.”

김강민은 공치사했다.

족보편찬위의 남자, 이현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돼지가 무슨 꿍꿍이지 하는 얼굴이다.

“이제 곧 새 족보 나오지?”

“응, 곧 나눠줄 거야. 기다려.”

“근데 여기 너무 좁은데.… 너희 부서실 바꿀 생각은 없냐?”

“바꿀 수 있으면야 좋지. 바꿀 수가 없어서 그렇지.”

이현민은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버지께 이야기해서 바꿔줄 수도 있는데. 그래 줄까?”

족보편찬위 남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강민의 아버지는 무려 의대 부학장이니 그가 부탁하면 부서실을 바꿔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현민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뭔가 기분이 찝찝했다.

“갑자기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제일 고생하는데 이런 데서 일하는 건 좀 그렇잖아.”

“정말로?”
김강민은 헛기침을 했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것만 들어주라.”

“무슨 부탁?”

“별건 아니야.”

“말해봐.”

“마지막에 나올 족보… 김진현한테만 안 주면 안 돼?”

“……!”

이현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김진현? 왜?”

“그냥.”

이현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김진현이 티를 안내서 아직 다른 학생들은 그가 시험 성적이 좋은 걸 모르고 있었다.

“그건 안 돼.”

“왜?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 녀석,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수업만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가
공부하니 늦은 시간에 족보를 나눠주면 모를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

이현민은 혐오스런 표정을 지었다.

김진현을 싫어하는 건, 김강민 혼자다.

이현민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김진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설혹 감정이 있다 해도 그런 짓은 해선 안 된다. 이건 성적을 놓고 벌이는 왕따다.

그런데 그때 김강민이 말했다.

“너, 나중에 정형외과 하고 싶다 안 했냐?”

“……!”

이현민은 굳은 얼굴로 김강민을 바라봤다.

김강민은 탐욕스런 돼지처럼 웃었다.

“내가 나중에 잘 이야기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이현민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이야기해 준다 해도 과연 큰 도움이 될까?”

“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여러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야.”

김강민은 ‘나쁜 쪽’에 강조를 했다.

이현민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경쟁이 치열한 정형외과에 붙여주는 건 어려워도, 훼방하는 건 간단했다. 그냥 안 좋은 이야기 몇 번이면 끝이다.

“이 자식… 이번이 마지막이다.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어.”

이현민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김강민은 이미 결정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김진현. 지금을 즐겨라. 좋아하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니.’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어도 망망대해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족보가 없인 공부할 수 없다.

사하라사막을 맨몸으로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강민은 무너질 김진현의 성적을 기대하며 미소 지었다.

***

진현은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깊은 어둠 속, 그는 이전 삶의 일을 떠올렸다.

과거 그는 푸른 꿈을 안고 일했었다.

환자의 생명을 위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몸을 돌보지 않으며 일하고 또 일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해고와 파산, 이혼뿐이었다.

병원이 망해 막대한 빚을 지고 아내와 이혼할 때, 그는 얼굴을 들지 못했었다.

-이 방법밖에 없겠죠? 나 그래도 노력 많이 했었는데.

단아한 미모의 그녀는 마지막에 쓸쓸히 말했었다.

그녀와 이혼한 건 사실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 그가 결혼 후 제대로 된 사랑과 정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매로 결혼한 남편과 가까워지려 나름 많이 노력했지만 일에 치여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거리를
좁힐 수는 없었고, 긴 외로움 끝에 둘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아무리 바빠도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줬으면 그리 쉽게 이혼하진 않았을 텐데.’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사랑했어요.

“……!”

그 말과 함께 진현은 번뜩 눈을 떴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허름한 자취방이었다.

곰팡이 슨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하다 잠깐 잠든 모양이다.

“안 좋은 꿈이군.”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남긴 말이 가슴을 찔렀다.

애틋했던 결혼생활은 아니다. 오히려 사무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그런 관계가 된 것은 다
그의 잘못이었기에.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자신이 망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금만 가정을 챙길 시간이 있었으면.’

외과의사로의 삶이 너무 바빴다.

항상 병원에 살았고 가뭄에 콩 나듯 가끔 퇴근을 해도 집에선 쌓인 피로로 잠만 자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 다 핑계지.’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바빠서, 란 말은 핑계였다. 바쁜 의사들이 모두 결혼 생활을 실패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다 그의 잘못이었다.

경제적 파탄은 그저 도화선이 됐을 뿐, 이혼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악화였다.

아무리 병원 일이 바쁘더라도 조금만… 조금만 그녀에게 신경을 써줬다면 이혼까지 하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때, 주룩 코피가 흘렀다.

“아…….”

그는 급히 휴지로 코를 막았다.

“하아, 피곤하네. 잠을 너무 안 잤나?”

본과가 시작하고 하루에 3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거기에 툭하면 치는 시험 전날마다 꼬박 날을 새야 하니 피로가 엄청났다.


‘뭐, 어쩔 수 없지. 난 이상민처럼 머리가 좋진 않으니까.’

물론 과거에 한번 한 공부지만, 수재들만 모인 한국대 의대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그냥 다 때려 치고, 1 년 정도 푹 쉬고 싶네.’

이전 삶 때도 그는 참 열심히 살았다.

물론 고등학생, 사수, 의대생 때는 설렁설렁이었지만 외과의사가 된 뒤로는 환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기


위해, 외과의사로서 성공하기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회귀 후에도 끝없이 노력했으니 휴식 없이 달리는 삶이 거의 이십 년째였다.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나중에 피부과 의사가 되어 성공하면 건물에서 세나 받으며 와이프랑 휴양지나 놀러 다녀야지.’

후에 누구랑 결혼할지 모르지만, 이번엔 정말 잘해줄 거다.

궁극적 삶의 목표를 떠올리며 그는 미소 지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더 열심히 해야지. 힘내자.’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친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코피는 금방 멎었다.

그렇게 곧 다가올 1 쿼터, 기말고사를 한창 준비하던 그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제 새 족보 나올 때 되지 않았나? 범위가 많아서 기출요약집인 족보 없이는 공부하기가 어려운데.”

이미 나올 시간이 지났건만 이상하게 소식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5

25. 의대 공부 경쟁 (5)

그도 족보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학기 초에 일괄적으로 받은 구식 버전, 즉, 옛날 족보였다.

최신 족보가 있고 없고는 시험공부에 엄청난 차이를 준다.

‘예전에 다니던 의대에서 하위권인 애가 혼자만 몰래 족보를 입수해서 1 등을 한 적도 있지.’

그만큼 족보의 위력은 컸다.

어차피 범위는 많고 시간은 부족하니 중요한 내용이 집중돼있는 족보를 얼마나 깊게 이해하냐가 시험의 승패를
좌우했다.

심지어 족보에 수록된 문제에서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문제를 내는 교수도 많았다.


‘다음 주가 시험이니 나올 테면 이미 나왔을 텐데? 혹시 나왔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

항상 수업만 끝나면 곧바로 자취방에 와서 공부하니 못 받았을 수도 있다. 그는 족보편찬위원회인 이현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현민아? 나 진현인데.”

-…어? 어. 진현이?

뭔가 목소리가 이상해 진현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새로 족보 나온 것 없냐? 나올 때가 지난 것 같아서.”

-…….

대답은 잠시 후 들렸다. 이상하게 어두운 목소리다.

-아니, 나온 것 없어. 이번엔 새 족보 안 나올 거야.

“그래?”

-…응.

목소리가 계속 이상해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현민아, 너 무슨 일 있냐? 목소리가 계속 안 좋다.”

-아, 아니.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이제 곧 시험이니 감기 조심해라.”

-…어, 어. 진현아, 나 바빠서 전화 끊을게.

“그래, 조심하고.”

급하게 전화가 끊기자 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어디 아픈가?”

진현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새 족보가 안 나온다면 이전 구식 족보를 기반으로 정리를 해야 했다.

스멀스멀 또 새어 나오는 코피를 막으며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

조직학, 생화학, 생리학, 해부학, 태생학, 신경해부학…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과목의 시험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진현아, 잘 봤어?”
아이들이 진현에게 물어봤다.

진현은 본인의 성적을 떠벌린 적이 없지만, 어떤 경로인지 그사이 그의 성적에 대한 소문이 쫘악 퍼진 상태였다.

“잘 모르겠다. 어렵던데.”

“에이, 엄살은. 또 그러면서 1 등 하려고?”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려웠다.

심지어 극악한 난이도에 시험지 한 페이지를 전부 찍은 과목도 있었다.

‘문제 한번 정말 극악하게 내는군. 이건 풀라는 건지, 블랙잭을 하라는 건지.’

진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웬만한 실력이면 직접 푸는 것보다 오지선다를 찍는 게 고득점이 나올 것 같은 과목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시험은 맞추면 2 점, 틀리면 마이너스 2 점인데 평균이 마이너스여서 백지로 내면 상위권인 과목도 있었다.

‘성적이 나와 봐야 알겠군.’

첫 시험을 잘 봤다고 계속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들 뛰어난 수재, 미끄러지는 건 한 순간이다.

한편 예과 때까지 수석을 다투던 김강민은 쾌재를 불렀다.

‘이번 1 등은 내 거다.’

지난 시험과 다르게 모두 쉽게 풀렸다.

인체의 신비를 시험지로 밝히려는 듯, 가장 어렵게 나온 생리학은 이미 조교를 통해 문제를 입수한 상태여서
문제없었다.

그는 진현을 노려봤다. 항상 겸손한 진현이건만, 그 겸양도 재수없게 느껴졌다.

‘건방진 놈, 코를 짓밟아주마.’

그는 성적이 나온 후, 좌절할 진현을 상상하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얼마 뒤, 성적이 발표됐다.

그는 기대되는 마음으로 인트라넷에 접속해 1 쿼터 성적을 확인했다.

-김강민, 총 학점 3.08/4.5, 등수 67/130

“……?!”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학점 3.08 에 등수는 1 등이 아니라 무려 67 등? 이 내가 중간도 못했다고?


전산오류인가? 몇 번을 클릭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그는 비명을 지르고 당장 행정실로 달려갔다.

“이거 성적 잘못됐어요. 확인해 주세요!”

성적을 담당하는 교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제대로 입력한 건데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뭔가 오류가 있어요. 그래, 다른 사람 성적이 저한테 입력된 게 틀림없어요!”

그는 행정실을 뒤집어엎어 성적을 일일이 다시 확인하게 하였다.

무례하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행동이었으나 충격에 이성을 잃었다.

“자, 됐죠?”

교직원은 불퉁하게 말했다.

“이, 이럴 리가 없어! 다시,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벌써 2 번이나 확인했잖아요. 이상 없고, 저희 다른 일도 해야 하니 그만 나가주세요.”

“전 분명 시험도 잘 봤다고요. 다 잘 푼 느낌이었는데… 이런 점수라니? 말도 안 돼요.”

“착각했나 보죠. 원래 시험 후에 느낌은 성적이랑 별개인 거 몰라요?”

아무리 확인해도 변함은 없었다.

조교에게 문제를 입수한 생리학 빼곤 C~B 의 그저 그런 성적만 가득했다. 심지어 D 도 있었다.

김강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봐,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다시 확인해! 확인해달라고!!”

거친 말에 교직원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보다 20 살은 어린 학생에게 반말을 들은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네 아버지가 부학장님인 건 알아. 네가 지긋지긋하게 드나들었으니까! 그래서 뭐?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걸


부학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 일 바쁘니까 나가!!”

그렇게 김강민은 행정실에서 쫓겨났다.

복도 구석으로 걸어간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1 등인 내가 이런 성적을 받았다고.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절대로!’

하지만 그의 좌절과 다르게 예과 때 1 등이 본과에 와서 추락하는 일은 각 의대마다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

다들 설렁설렁 노는 예과 때와는 다르게 본과 때는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도너머로 걸음 소리가 울렸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김진현이었다. 하필 이혜미도 옆에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괜찮아.”

“이 누나가 맛있는 것 사줄게. 뭐 먹고 싶어, 동생?”

“됐어. 너나 많이 먹어라.”

뭘 도와준 건지, 이혜미가 진현에게 바짝 달라붙어 활짝 웃고 있었다.

꽃보다 화사한 미소였고, 그 미소가 김강민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저렇게 웃은 적
없었다.

“야, 김진현.”

“응?”

진현은 김강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김강민은 두툼하게 내려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너… 컨닝했지? 솔직히 말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냐?”

말도 안 되는 시비에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김강민은 버럭 화를 냈다.

“컨닝한 것 맞잖아! 안 그러면 고작 너 같은 놈이 그런 성적을……!”

그는 방금 행정실에서 확인한 진현의 성적을 떠올렸다.

-김진현, 총 학점 4.40/4.5 등수 1/130

첫 시험과 다르게 모든 과목이 1 등인 것도, A+인 것도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과목이 1 등이었고 1 등이 아닌


과목도 대부분 상위 5%, 즉 A+의 성적이었다.
물론 의학윤리 같은 과목은 B+도 이었지만 그 모든 과목들을 종합한 성적은 총합 A+에 가까운 4.40 으로
압도적인 전체 1 등이었다.

2 등인 이상민이 4.08 이었으니 얼마나 뛰어난 성적인지 알 수 있다.

한국대 의대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뛰어난 점수였다.

‘말도 안 돼. 인정할 수 없어.’

김강민은 자신과 다르게 압도적 성적을 받은 김진현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연모하는 이혜미가 손만 안 잡았지, 연인처럼 옆에 바싹 붙어 있는 것도 이성을 마비시켰다.

“솔직히 말해. 컨닝했지? 이 쓰레기 같은 놈.”

“…….”

진현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이 황당한 일에 옆에 이혜미도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진현은 차갑게 그를 노려봤다.

“왜 내가 컨닝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야 너 따위가…….”

그래도 한 가닥 이성이 남아 있어서 ‘넌 족보도 없었으니까’란 말은 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현은 김강민의 나머지 말을 짐작했다.

“이걸 말하는 거냐?”

진현은 가방에서 A4 에 인쇄한 자료집을 꺼냈다. 거기엔 ‘신(新) 족보’라고 적혀 있었다.

김강민은 소름 끼치게 놀랐다.

“어, 어떻게 그걸?”

“어떻게 이걸 구했냐고? 모든 학생이 똑같이 받는 자료인데 왜 나만 이걸 구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

“……!”

차가운 진현의 말에 김강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 그건…….”

“야, 김강민.”

김진현이 싸늘한 눈으로 김강민을 바라봤다.

“너 죽을래?”
“……!”

오싹한 한기에 김강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김진현은 한걸음 다가갔고, 김강민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장난을 칠 게 없어서 이런 장난을 쳐?”

“……!”

턱.

김강민의 등에 복도의 벽이 닿았다.

진현은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생리학 실험 점수도 건드리려 하다니. 넌 도대체 얼마나 쓰레기인 거냐?”

“…그, 그건 어떻게?”

김강민은 당황해 반문했다.

그 모습에 김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하나…….’

그는 족보를 시험 전전날에 입수할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긴 이현민이 다시 연락을 주었던 덕분이다.

덕분에 이현민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생리학 실험 점수가 이상하게 나와 조교를 차분히 추궁하니 역시 추악한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무리한 일을 매끄럽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김강민이 바보천치로, 사람이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불러 이야기를 하려 했건만, 이렇게 생 시비를 걸어?’

뻔뻔한 추악함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 어떻게…….”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이혜미가 입을 가렸다. 둘의 대화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거다.

“진현아, 김강민이 네 족보를 빼돌리고, 조교를 움직여 실험 성적도 못 나오게 했단 거야?”

“그래.”
그녀의 눈이 차가운 분노를 띄었다.

평소 활달한 모습으론 상상하기도 어려운, 싸늘한 눈빛이었다.

“이건 이렇게 그냥 넘길 수준의 일이 아니야. 족보는 물론이고, 조교랑 결탁해 성적을 조작하다니. 정식으로
학교에 이야기하겠어.”

“……!”

김강민은 이를 깨물었다.

학교 행정부 측에 이 일이 정식으로 회부되면 아무리 그라도 무사할 수 없다.

아니, 그런 것보다 짝사랑하는 이혜미가 자신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이혜미! 나, 난……!”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싸늘할 뿐이었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이런 애 더 상대하지 말고 가자, 진현아. 학장님께는 지금 내가 직접 이야기하겠어. 이건 학교가 뒤집어질


일이야.”

그녀는 과대다. 아니, 과대인 것을 떠나서 그녀의 집안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버지가 의대 부학장? 우습다. 이 한국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 중, 그녀의 가문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렇게 학생으로 재학 중이어서 그렇지, 그녀가 만약 환자의 신분으로 한국대 병원에 입원한다면 난리가 날 거다.

실제로 작년에 그녀의 사촌이 입원했을 때, 온 교수들이 신경을 곤두섰었다.

물론 사촌은 그녀보다 좀 더 가문(家門)의 본류(本流)에 가까웠지만, 이혜미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직접 말하면 김강민은 중징계를 피할 수 없다. 최소 유급, 잘못하면 제적을 당할 수도 있다.

“멈춰!!!”

하지만 혜미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사단이 터졌다.

징계에 대한 공포, 진현에 대한 질투, 분노, 혜미에 대한 서운함이 이성의 끈을 잘라 버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이혜미! 멈추라고!!!”

“꺄악!!”

이혜미를 거칠게 잡더니 뺨을 날린 것이다!!


탁!

하지만 다행히 그 손찌검은 진현에게 제지당했다.

“놔! 이거 놔!!”

이혜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김강민을 바라봤고, 김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자식이 정말……!”

퍼억!!!

그의 주먹이 정통으로 김강민의 얼굴에 꽂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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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 2018 년 03 월 26 일

ISBN | 979-11-6202-153-8(05810)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 26

26. 교차점 (1)

“악!!”

이젠 그만둔 지 오래지만, 한때 킥복싱으로 단련한 주먹을 운동이라곤 한 번도 안 해본 김강민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김강민은 필사적으로 팔을 허우적대며 반항했고, 덕분에 더 맞았다.

퍼억! 퍼억!

결국 스트레이트를 연달아 맞은 김강민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스륵 쓰러졌다.

진현은 손을 털고, 이혜미를 돌아봤다.

“괜찮아?”

“어, 어.”

이혜미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은 혀를 찼다.

“그나저나 학교에서 주먹을 썼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많이 놀랐을 텐데, 빠르게 마음을 추린 그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

학교에 폭탄이 터진 듯한 소문이 퍼졌다.

족보 빼돌리기! 성적 조작!

족보 빼돌리기야 비도덕적일 뿐 불법은 아니지만, 성적 조작은 차원이 달랐다.

중징계를 받아도 모자랄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징계를 떠나, 원래부터 비호감이었던 김강민은 완전히 의대 학생들 사이에서 매장당했다.

“그 녀석, 원래 재수 없었어. 공부 잘하고, 돈 많다고 다른 애들 무시나 하고.”


“그래, 맞아.”

학생들은 김강민을 욕했다.

“그나저나 김진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1 등을 했네?”

“정말 대단하다.”

그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1 등을 한 김진현에게 모두들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모두의 머릿속에 진현은 확고한 1 등으로 자리매김했다.

얼마 뒤, 진현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인데?’

-김진현 학생입니까?

“네, 김진현입니다.”

-잠시 부학장실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부학장께서 뵙자고 합니다.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학장이면 김강민의 아버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으나 겁을 먹진 않았다. 잘못을 한 건 김강민, 그 녀석이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네, 지금 가겠습니다.”

부학장실은 의대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가니 대학로를 넘어, 강북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 아래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한국대 의대의 부학장, 김주흥 교수였다. 파랗게 멍든 얼굴의 김강민도 옆에 있었다.

“김진현입니다. 부학장님을 뵙습니다.”

김강민의 일과는 별개로 까마득히 윗사람이다. 진현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의과대학의 부학장은, 단순히 명망만 높은 타 단과대학의 부학장과는 위상이 달랐다.

보통 대학 병원의 핵심 권력자들이 역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대의 부학장은 학장, 병원 고위 행정직, 병원장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코스였고, 실제로 애들 놀이터인
의과대학보다는 병원 내 권력이 주 관심사인 경우가 많았다.
“자네가 김진현 군인가?”

“네.”

“그래, 지도교수인 최대원 교수에게는 이야기 많이 들었네. 역시 듣던 대로 똑 부러져 보이는군.”

부학장, 김주흥 교수는 김강민과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일단 몸매가 날카로울 정도로 말랐고, 눈빛은 부드러움 속 싸늘함을 담고 있었다.

의사라기보단 정치인 같은 이미지.

입가에 포장용으로 걸린 미소가 그런 인상을 더욱 진하게 했다.

“그래,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지?”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김강민은 연신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김주흥 교수는 김이 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돌려 이야기해서 무엇하겠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미안하네.”

그러면서 그는 진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뜻밖의 행동에 진현은 깜짝 놀랐다.

“아들을 못나게 키워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진현은 당황해 답했다.

한눈에 봐도 권위의식이 가득해 보이는 병원의 실세 교수가 고작 학생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김주흥 교수는 김강민에게 말했다.

“너는 뭐하냐? 네 잘못이니 너도 사과해라!”

“……!”

김강민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짜악!

김주흥 교수가 아들의 뺨을 날린 것이다.


“제대로 사과하지 못해?! 한심한 놈!”

김강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허리까지 숙이며 진현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하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다. 정말로…….”

뭔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과였다.

한심한 얼굴로 혀를 찬 김주흥 교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정말 미안하네. 정말로.”

“아닙니다.”

“이 녀석은 잘못에 맞게 정당한 처벌을 받을 거네.”

“아닙니다. 처음 저지른 잘못이니 너무 중징계를 내리진 말아주십시오.”

사실 김강민은 중징계보다 훨씬 가혹한 벌을 받았다.

원래의 잘난 척하는 태도와 비호감까지 겹쳐 학생들 사이에서 매장당했으니까.

폐쇄적 의대 사회에서 매장당하면 의대 생활은 끝이라 할 수 있었다.

본인이 부단히 노력하면 만회할 수 있겠지만… 글쎄, 오만한 김강민 성격으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하여튼 다시 한 번 미안하고, 그만 가보게. 부학장으로서 1 등인 자네에게 기대가


많네.”

“네, 감사합니다.”

진현이 부학장실을 나가자, 김주흥 교수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아, 아버지…….”

김강민은 고개를 숙였다.

“한심한 놈, 이 아비에게 이런 치욕을 겪게 해?”

“죄,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

“…….”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혜미를 때리려 하다니! 이혜미가 어느 집안 사람인 줄 몰라?!”

김강민은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는 잘못이었다.

“당장 휴학계 제출해.”


“아, 아버지!”

의대는 학년제라서 한 학기 휴학을 하면, 1 년을 꿇어야 했다.

즉 유급을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네가 지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거냐! 제적을 안 당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있어!”

김강민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부학장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김주흥 교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를 뿜으며, 방금 전 만났던 소년을 떠올렸다.

“김진현이라…….”

묘한 음색이었다.

햇빛에 그의 의사 가운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의 가운의 앞주머니에 달린 명찰표에는 다음과 같은 명칭이 적혀 있었다.

<한국대 의대 부학장, 피부과 김주흥 교수.>

진현이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명찰표다.

***

1 쿼터가 끝나고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물론 그래 봤자 토, 일요일? 짤막한 주말의 휴식이지만 이때는 진도를 나간 과목도 없고, 시험 예정도 없었기에
진정으로 맘 편히 쉴 수 있는 때였다.

‘어차피 주말 끝나면 곧바로 2 쿼터지만.’

진현도 간만에 늦잠을 잤다.

12 시가 넘어 이불에서 일어난 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또 꿨네.”

또 과거 아내의 꿈을 꿨다. 이전엔 한 번도 꾸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는 반복적이다.

‘몸이 허한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를 닦은 그는 시계를 봤다. 아직 12 시 30 분, 늦진 않았다.

‘이 녀석은 그냥 학교 앞에서 보지 왜 광화문까지 가서 보자는 거야?’

오늘은 이전에 약속했던 이혜미와 놀기로 한 날이었다.


진현은 그녀의 오빠이자 친구인 이상민도 같이 부르려 했지만 이혜미가 극구 거절했다.

‘오늘은 그냥 둘이 데이트해!’

진현은 피식 웃었다. 데이트는 무슨?

세수를 하던 그는 문득 손을 멈췄다.

‘잠깐 이거 데이트인가?’

남녀가 단둘이 만나 시간을 보내니 넓은 의미로 보면 데이트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 한쪽이라도 감정이 있어야 데이트지.’

사실 그는 과거에 제대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여자 친구와 정식으로 교제한 적도 없었고, 중매 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한 전(前) 부인과도 따로 시간을


내 데이트를 일도 드물었다.

‘좀 잘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진현은 씁쓸히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이전 아내의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후회랄까? 이전의 아내를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 입지? 중간에 공연 보자고 했던가? 이 녀석 어울리지 않게. 그냥 술이나 마실 것이지.’

공연장에 추레하게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고민하다가, 처음 의대에 들어올 때 저가 상품을 취급하는


아울렛에서 샀던 세미 정장을 입었다.

‘음… 괜찮나?’

나름 차려 입으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괜찮긴. 고등학생으로 안 보이면 다행이겠지.’

진현은 피식 웃었다. 언제나 심각한 동안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얼굴은 어려 보이지만, 눈빛이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보여 뭔가 그에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흘렀다.

“늦겠네. 빨리 나가자.”

광화문이 대학로에서 멀진 않지만 진현은 서둘러 자취방을 나왔다.

그런데 반지하를 올라오자 빠앙 하고 차 경적이 울렸다.


골목에 빨간 벤츠가 한 대 서 있었다.

“진현아!”

혜미가 창틈으로 진현을 불렀다.

“여기까진 웬일이냐?”

“우리 동생 빨리 보고 싶어서 왔지.”

혜미는 방글 웃으며 말했다. 짙은 속눈썹이 보기 좋은 곡선을 그었다.

“빨리 타. 누나 배고파.”

“그래, 그런데… 이건 웬 차냐?”

“아, 예전에 오빠가 몰던 차야.”

“오빠? 상민이?”

“아니, 범수 오빠.”

“아…….”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예전,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한국대 병원 앞에서 이상민을 때렸었지?

“그런데 너 운전은 할 줄 아냐?”

그녀와 2 년 넘게 같이 다녔지만 운전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응.”

“정말?”

“…예전에 해봤어.”

“언제?”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남자가 소심하면 매력 없어.”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벤츠니 다른 차들이 막 들이대진 않겠지.’

그가 옆에 타자 그녀는 웃으며 외쳤다.

“자, 출발하자!”
끼이잉!

그런데 갑자기 바퀴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당황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차를 살폈다.

“어, 어? 왜 이러지? 오빠가 차 멀쩡하다 그랬는데?”

“…사이드 브레이크 먼저 내려라.”

“아!”

재차 한숨을 내쉰 진현은 안전벨트가 제대로 매졌는지 다시금 확인했다.

‘벤츠의 내구성을 믿을 수밖에. 이건 알루미늄 호일은 아니겠지?’

그가 대신 운전하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진현은 장롱면허도 없었다.

***

그들은 제법 일반적인 데이트 코스를 따랐다.

모던한 분위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고, 뮤지컬 공연을 본 후, 호젓한 삼청동 거리에서 커피를
마셨다.

“우리 이러니까 연인 같다. 그치?”

혜미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계속 실실 웃었다.

“퍽이나.”

핀잔을 주긴 했지만 진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파스타는 맛있었고, 공연은 멋졌으며, 커피의 향도 훌륭했다.

혜미의 차를 타며 죽을 위기를 몇 번 넘기지 않았으면 완벽한 휴일이었을 거다.

진현은 혜미가 중앙선을 침범해 돌진할 때,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했다.

‘이렇게 죽을 줄 알면, 실컷 즐기기나 할걸.’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Vanity of van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라는 전도서의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운전 끝에 그들은 결국 남산까지 도착했다.

“아, 좋다.”

차에서 내린 혜미는 상쾌하게 기지개를 켰다.

진현은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좋냐?”

“응!”

그들은 슬슬 산책로를 올라갔다.

날씨도 선선하니 좋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좋네…….”

“그래.”

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숲 속에서 느긋하게 걷고 있으니, 확실히 기분이 좋았다. 도시 속 여행을 온 느낌이다.

곧 남산타워 밑에 도착하자 진현은 물었다.

“올라갈까?”

“응!”

티켓을 끊은 그들은 아파트 10 층 높이 정도의 전망대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미는 감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진현도 감탄했다.

밑으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해질녘이라 황혼 빛으로 물든 서울이 가슴을 떨리게 했다.

혜미는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낮은 햇살이 그녀의 하얀 원피스를 환하게 빛나게 했다.

“아…….”

순간 진현은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원래도 예쁜 얼굴이지만 지금은 뭐랄까?

아름다웠다. 그것 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하얀 얼굴이, 검은 눈동자가, 붉은 입술이 황혼에 물들었다. 축복으로만 빚어진 듯한 하나님의 조각품처럼


찬란히 빛났다.

“고마워.”

혜미가 진현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른 잔잔한 미소였다.


진현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뭐가?”

“나 여기 와보는 게 소원이었거든.”

“왜? 가족들이랑 오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나 가족 없어.”

“응?”

“그런 것 없어.”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서울의 전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히 말했다.

“있잖아. 우리 3 남매는 모두 엄마가 달라.”

“……!”

“웃기지?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엄마가 없고 아버지가… 그래, 아버지라 부르기 힘든 아버지를 가진 것 따위…
뭐, 흔하게 있는 가정 문제니까. 물질적으론 엄청나게 풍요롭기도 하고.”

말을 마친 그녀는 밝게 웃었다.

“하여튼 그래서 고마워. 여기 오고 싶었는데 같이 올 사람이 없었거든. 헤헤.”

“…….”

진현은 일순 답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꿈틀했다.

그래서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며 말했다.

“힘내라.”

“……!”

“…힘내라.”

그녀는 살짝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웃었다.

“응, 고마워.”

(다음 편에서 계속)

# 27

27. 교차점 (2)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혜미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한 것도 그렇고 생각지도 않은 그녀의 아픔을 들었던 것도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곧 있을 일에 비할까?

예지몽 따위 믿지 않지만, 어쩌면 최근의 꿈들은 곧 있을 일을 예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커피 먹고 가자.”

“또?”

“목마르잖아. 먹고 가자.”

“그래, 사주마.”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혜미는 강아지처럼 그의 뒤에 붙어 남산타워 밑의 위치한 카페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

무심코 주문하던 진현은 말을 멈췄다.

주문을 받던 아르바이트 여대생이 단아한 미모로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

“…….”

혜미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현아?”

“…….”

“진현아?!”

“아, 어…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놀란 진현은 황급히 주문했다.

“네, 8,000 원입니다.”

지갑을 여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넋이 나간, 평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혜미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진현아, 괜찮아? 갑자기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아… 괜찮다. 괜찮아.”


테이블에 앉은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혜미가 뭐라 말을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였다. 저 아르바이트생은 과거의 그의 부인과 똑같이 생겼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냥 닮은 거겠지. 이전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단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커피를 받으며 그는 그녀를 살폈다.

‘그래, 안 닮았어.’

애써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 닮았다.

165 정도 되는 키에 잔잔한 미소, 하얀 피부, 부드러운 이마, 조각같이 단아한 외모, 오른 눈 밑의 애교점,
왼쪽 아래 귀엽게 튀어나온 송곳니, 조용한 목소리… 그것 외엔 닮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안 닮은 거다.

“손님?”

웬 앳된 청년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혜미도 의아한 얼굴로 진현을 불렀다.

“진현아, 뭐해?”

“아, 아니.”

순간 진현은 큰 갈등을 느꼈다.

‘이름을 물어볼까?’

물어봐? 그런데 물어봐선? 물어봐선 어떻게 할 건데?

‘그냥 조금 닮았을 뿐이야. 그녀란 보장도 없잖아.

그는 고개를 젓고 혜미와 카페를 나왔다.

혜미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진현아, 정말 괜찮아?”

“…아.”

“안 되겠다. 그냥 돌아가자. 데려다 줄게.”

“그래.”
진현은 집에 돌아가는 거에 동의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낫겠다.

혜미가 태워준다 했으나 그건 사양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

끼이익!

재벌가들이 모여 사는 한남동.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커다란 저택 앞에 날렵한 포르쉐 스포츠카가 거칠게 멈춰 섰다.

검은 문이 위로 열리며 모델 같은 인상의 남자가 내려섰다.

이상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네, 오랜만이에요.”

마중을 나온 경호원에게 그는 싱글 웃었다.

“‘그 사람’은 안에 있나요?”

“도련님.”

‘그 사람’이란 말에 경호원은 얼굴을 굳혔다.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맞다. 아버지였지. 거의 보질 않으니 자꾸 잊어버려서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한테 아버지라 부르는 건 좀


넌센스 아닌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요.”

넓디넓은 정원과 몇 채의 건물을 지나자 커다란 저택이 나타났다.

“휘유, 여기는 올 때마다 느끼지만 참 넓네요. 한낱 방계(傍系)의 저택도 이런데 본가(本家)인 할아버지 집은
축구 경기장만 하겠어요.”

경호원은 답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네, 오랜만이에요.”

집사 역할을 하는 노인이 이상민을 맞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노인은 그를 저택 안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 ‘그’, 이상민과 이혜미의 아버지가 있었다.

“왔구나.”

인자한 얼굴과 자애로운 목소리를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와인 잔을 들고 있던 그는 이상민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앉거라.”

“아니, 그냥 서 있을게요.”

“왜?”

“제가 앉는 것 싫어하잖아요. 더러우니까.”

그 말에 중년 남자의 인자로운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풀렸다. 하지만 이상민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네, 핏줄 때문에 불렀다.”

핏줄, 이상민의 어머니를 뜻한다.

이 남자는 절대 그녀를 연인, 이상민의 어머니 같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더러우니까.

“왜요? 어차피 몇 년 전 자살해 죽었는데 무슨 일로요? 별 관심 없으셨잖아요?”

이상민은 되물었다.

“네가 화장터에 종종 가고 있다 들었다.”

“그런데요?”

“그런 더러운 곳, 이제 가지 마라. 주변에 보기 안 좋다.”

“……!”

이상민의 그린 듯한 미소가 일순 없어졌다. 그의 주먹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죠. 이제 할 말씀 더 없으시죠?”

“그래.”

이상민은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그가 문득 말했다.

“아, 이번에 성적은 봤다.”

“…….”

“고등학교 때도 그렇더니 언제까지 2 등만 할 거냐?”

“……!”

남자는 혀를 끌끌 찼다.

“병원을 물려줄 생각이야 없지만, 그래도 네 몫은 해야 할 것 아니냐?”

이상민은 빙긋 웃었다.

“뭐, 피가 더러워서 그런가 보죠.”

그리고 그는 답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러 가고 있는데, 반갑지 않은 또 한 명의 인물과 마주쳤다.

그와 똑 닮은 배다른 형, 이범수였다.

이범수는 경멸 어린 얼굴을 했다.

“천한 놈!”

가타부타 없이 내뱉은 그는 이상민을 스쳐 지나갔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이범수는 벌써 한국대 의대에 내과 교수로 발령이 난 상태였다.

한국대 의대에서 교수로 적당히 경력을 쌓으면 가문의 병원으로 옮기겠지.

다른 자, 귀한 자.

자신은 천한 자.

이상민은 더욱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부르릉!

스포츠카의 엔진이 거칠게 울렸다.

그는 간선도로, 강변북로를 미친 듯이 달렸다.

지붕이 없는, 컨버터블 스포츠카라 맞바람이 광폭하게 몰아쳤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속도는 점점 올라갔다. 그렇게 달리면 달릴수록 그의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곧 그는 어머니와 이전부터 살던, 자신의 오피스텔에 들어왔다.


물론 정신분열병에 시달리느라 그의 어머니는 오피스텔보다 정신병원에 있을 때가 많았지만.

멍! 멍!

작은 강아지가 그의 기척을 느끼고 달려 나왔다. 이 세상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그를 반가워하는 존재였다.

그는 현관 근처에 아무렇게나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그의 다리를 핥았다.

이상민은 여전히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상이 참 편하지 않아, 그치?”

멍! 멍!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상민은 강아지의 목을 잡더니 천천히 자신의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끼잉?

이제 갓 몇 달도 안 된 새끼 강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상민을 바라봤다.

그의 미소가 찢어질 듯 짙어져 낫을 든 광대처럼 변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끼잉!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강아지가 힘겨운 듯 낑낑거리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강아지가 괴로워할수록, 그의 미소는 더욱더 진해졌다.

뚝.

결국 강아지의 목뼈가 부러지며 몸이 추욱 늘어졌다. 소변이 주륵 새어 나왔다.

이상민은 자신이 죽인 강아지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하나 더 사야겠군.”

심연(深淵)처럼 차가운,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목소리였다.

***

진현은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만 남산타워 밑 카페에서 만났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름을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야, 물어봐서 어쩌게?”

곧 이 감정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 2 쿼터가 시작해도 열병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현아, 몸이 계속 안 좋은 것 같아.”

“아… 그래.”

진현은 건성으로 답했다.

공부도 잡히지 않고, 뭔가 허공에 붕 뜬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교수가 면역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NK T cell 은… lymphocyte 는… B cell 이 항원(antibody)을……. Th 가 CD4 와….”

한국어와 영어가 합쳐져 생성된 외계어에 학생들이 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젊은 교수는 분필로
칠판을 쾅쾅 때렸다.

“자자, 졸지 말고! 정신 차려요!”

그런데 그때였다!

김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현 학생? 왜 그러나?”

교수는 1 쿼터 1 등인 진현이 벌떡 일어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그렇게 칠판을 세게 때렸나?

“질문이라도? 아니면 수업에 무슨 문제라도?”

“…죄송합니다.”

“응?”

“나가보겠습니다.”

“응? 응? 진현 학생?”

“진현아?”

교수와 혜미가 불렀으나 진현은 듣지 않았다. 무작정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택시를 탔다.

“남산타워요.”

택시가 도로를 달려 남산타워에 정차하자 그의 머리는 하얗게 비워졌다.


왜 온 거야? 와서 뭐하게?

하지만 백지 같은 머리와 다르게 몸은 저절로 움직여 그때의 카페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듣는 순간, 맥이 풀렸다.

그녀가 아니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미소 짓는 알바생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이전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은 어디 갔습니까?”

“알바생이요? 사장님 말고는 여기 알바생은 저밖에 없는데…?”

“일주일 전, 주말에 일하던 여자 알바생 말입니다.”

“아…….”

알바생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알바생은 지금 일 안 해요. 애초에 제가 몸이 아파서 그때 주말에만 땜빵으로 일하기로 한 거여서…….”

“……! 그러면 연락처나 이름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사장님도 모르십니까?”

“글쎄요?”

알바생은 손수 사장에게 전화해서 물어봐 주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애초에 주말 이틀만 단기로 일한 거였고, 계좌이체도 아닌 현금으로 당일에 수당을 지급해서 이름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이 씨… 라고는 하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대요.”

“아… 네.”

김진현은 카페에서 나왔다.

그는 울창한 나무 아래서 고개를 저었다.

‘잘됐어. 어차피 지난 인연, 뭘 하려고 한 거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은 씁쓸한 허전함만을 남겼다.


***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1 년… 2 년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한국대 의대 학생들은 힘겨운 공부를 하며, 수없이 많은 시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2 년 동안,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석과 차석의 이름이었다.

김진현 1 등, 이상민 2 등.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

그리고 본과 3 년차 중반이 되어 Poly-Clinic, 한국대 의대생들의 임상실습이 시작되었다.

실습생의 신분이긴 하지만, 드디어 진현이 다시 하얀 의사가운을 입는 순간이었다.

회귀 후, 8 년 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8

28. PK – Patient Killer (1)

본과 3 년 차, 고된 관문을 지나 드디어 병원에 임상실습을 나가게 된 학생들은 설렌 표정을 지었다.

“야, 나 괜찮냐?”

“괜찮긴? 산적이 가운 입은 것 같은데?”

학생들은 와이셔츠에 하얀 가운을 입으며 서로를 돌아봤다.

아직 학생이지만 뭔가 한걸음 더 나아간 기분이다.

-한국대 의대 김진현.

진현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먼 길을 돌아와 드디어 병원에 발을 디디게 되다니.

‘좋아할 게 아니라, 진짜 고생길이 열린 거지만.’

실습, 의사국가고시 준비, 인턴, 레지던트… 쭈욱쭈욱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을 떠올리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꼭 피부과에 합격해야지.’

피부과에 들어가면 레지던트 생활도 편하게 할 수 있다.

돈도 많이 벌고, 레지던트 생활과 후에 전문의가 된 이후의 삶도 편하고… 이보다 어떻게 좋겠는가?

더구나 진현의 현재까지의 성적은 부동의 1 등으로, 특별한 이변만 없는 한 피부과 합격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고생스럽긴 했지만,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전에 사놨던 주식은 4 배가 넘게 올라, 총 가치가 5 억 원이 넘었고 이대로 좀 더 지나면 마인 바이오의


스톡옵션과 합쳐 순조롭게 15 억 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였다.

‘좀 더 고생하자, 김진현.’

그때 이혜미가 진현의 앞에 나타나 가운을 펄럭였다.

“진현아, 나 어때?”

그녀는 흰 가운 아래, 단정한 블라우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느덧 어깨까지 자란 단발이 흰 의사 가운과 더불어 이지적 매력을 강하게 주었다.

블라우스 위쪽에 언뜻 드러난 쇄골 라인이 자극적 향기를 풍겼다.

하지만 진현은 퉁명스레 답했다.

“안 어울린다.”

“아, 뭐야. 맨날!”

진현은 슬쩍 웃었다.

“늦었다, 빨리 가자.”

“응.”

컴퓨터의 장난인지, 하필 둘은 임상 실습도 같은 조였다.

“우린 내과 실습부터지?”

“그래.”

“근데 우리 조원은 전부 몇 명이지?”

“5 명. 병원 지하, 컨퍼런스 룸에서 오리엔테이션 있으니 빨리 가자.”

“그래.”

진현과 혜미를 비롯한 조원들은 나무 책상과 커다란 슬라이드 모니터가 놓인 컨퍼런스 룸에 도착해 교수를
기다렸다.

한 10 분쯤 지나자 젊은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진료가 늦게 끝나. 다들 내과 실습을 나온 걸 환영합니다.”

듬직한 인상의 미남 교수였다.


이제 삼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나이도 엄청나게 젊었다.

“전 내과 이범수 교수라 합니다. 여기 구면도 있죠?”

그러면서 그는 혜미를 돌아봤다.

혜미는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은 당연히 구면이었다. 친오빠, 친동생이니.

진현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젊은 교수, 이범수를 바라봤다.

‘저 사람이 이범수…….’

확실히 이상민과 꼭 닮은 얼굴이다.

단 이상민이 좋게 이야기하면 꽃미남, 나쁘게 말하면 기생오라비처럼 호리호리한 스타일이라면, 이범수는 우직한
훈남 스타일이었다.

‘생각보다 인상이 좋군. 성격도 좋아 보이고.’

어릴 적, 그가 이상민을 때릴 때를 떠올렸다. 굉장히 오만하고 권위적인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하긴 혜미가 집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이범수라 했지.’

이범수가 말을 이었다.

“길게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니 간단히 몇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이제 병원에서 여러분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조원 중 누군가 답했다.

“PK 실습생입니다.”

“그렇죠. 병원에 여러 위치의 의사가 있는데, 여러분은 그중 PK 실습생이죠. 그런데 왜 실습생을 PK 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아까 답을 한 학생이 우물쭈물 답했다.

“Poly-Clinic 의 약자로 알고 있습니다. 독일의 영향을 받아서 PC 가 아닌, PK 로 부른다고…….”

“맞습니다. 그런데 반만 맞았습니다. 다른 이유를 아시는 분?”

그러면서 이범수는 다른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쭈욱 한 바퀴 돈 이범수의 눈이 진현의 눈과 마주쳤다.

‘넌 아니? 알면 말해봐.’

란 눈빛에 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Patient killer(환자 살인자)라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이범수는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진현의 답은 병원의 오래된 농담 겸 진담이다.

“정답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몇 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실제로 환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죠.
초중고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도, 실제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죠. 따라서
무지한 지식으로 섣불리 접근하다 보면 환자를 잡을 수도 있어 Patient killer(환자 살인자)라 하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은 실습생이니 관찰만 할 뿐 환자에 대해 전혀 결정권이 없어 실제로 환자를 잡을 일은 없겠지만…
주의는 해야겠죠. 모든 면에 있어서 겸손한 태도로, 배우는 자세로 실습에 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범수는 간단히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말하고, 혜미를 바라봤다.

“혜미야, 궁금한 것 있니?”

“아니, 오빠… 아, 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편하게 답하려다 급하게 말을 수정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는지 이범수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질문 없으면 일어나죠. 실습을 나온 기념으로 커피 한 잔씩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진현과 혜미들은 짧게 커피를 마신 후, 이범수 교수와 헤어졌다. 가벼운 담소 외엔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아, 하필 그때 이상민이 병원 카페 앞을 지나가, 이범수 교수의 표정이 일순 굳고, 이상민은 환하게 웃은 일이


있긴 했다.

‘둘이 사이가 안 좋긴 하군. 그나저나 이상민, 그놈은 점점 더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분명 친한 사이인데 검은 안개가 낀 듯, 속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엔 병동으로 가야지?”

“응, 거기서 레지던트 선생님 만나야 해.”

혜미가 조원들을 이끌었다.

내과 병동 안 의사 전용 업무실에서 2 명의 레지던트가 그들을 맞았다.

“너희가 실습생이니?”

말끔한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난 치프, 이준성이라고 한다. 여기는 1 년차 주치의, 민호성이고.”


차트에 처박혀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꾀죄죄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못 감은 건지, 잠을 못 잔 건지, 머리에는 거친 제비집이 만들어져 있었다.

치프는 친절히 설명했다.

“실습 나온 거 환영하고. 교수님 앞으로 병원에 환자가 입원하면, 실제 환자 진료는 여기 주치의 선생님이 하게
된다. 교수님들은 각 전문 분야에 대해 큰 의사 결정만 해주고 자잘한 부분들은 전부 주치의 선생님이 처리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할 수 있지.”

“네.”

“그러니 너희는 여기, 병원에서 가장 많은 진료를 하는 주치의를 따라다니며 환자 진료하는 것을 배우면 된다.”

그 말에 지저분한 주치의, 민호성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 바쁜데요.”

“그래도 해야지. 네가 안 하면, 그럼 이런 꼬꼬마들 챙기는 걸, 말년에 내가 하리?”

그 말에 민호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치프의 말처럼 대학병원의 모든 일은 주치의이자 1 년차인 그의 몫이었다.

“아, 바쁜데… 웬 애새끼들이 몰려와 가지고. 귀찮게.”

나름 조용히 한 말이지만, 다 들렸다.

치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실습 잘하고. 야, 너는 실습생들한테 적당히 환자 배정 좀 해줘. 그럼 난 일이 있어서 가보겠다.”

지저분한 주치의가 눈만 들며 물었다.

“또 어디 가시게요?”

“담배 피러 간다.”

“이제 곧 교수님 회진인데…….”

“야 임마, 회진 준비는 네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거냐?”

면박을 준 치프는 룰루루 밖으로 나갔다.

주치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진짜 못 해먹겠네. 원래 학생 챙기는 건 널널한 치프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무슨 나한테 보모


역할까지 하라 그래…….”

그리고 그는 학생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갈 수도 없고, 있기도 어색한, 뭔가 곤란한 분위기에 학생들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렇게 20 분 정도 지났을 때, 주치의 민호성이 고개를 들었다.

“야, 너희는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냐?”

“……!”

“이리로 와봐라. 어떻게 생긴 애들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학생들이 조르륵 가자, 그는 품평하듯 그들을 살폈다.

남자들을 건성으로 본 그는 혜미 앞에서 고개를 멈추고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뭔가 불쾌한 눈길에 혜미의 표정이 굳었다.

“흐음……! 너 진짜 예쁘게 생겼구나. 너 남자 친구 있니?”

“……! 아니요. 없는데요.”

“그래? 많을 것 같은데… 하여튼 너희 실습 점수는 잘 받겠네.”

“……?”

“이렇게 예쁜 애 있어서. 노래방에서 교수님들이 아주 좋아하겠어.”

“……!”

혜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파일철을 든 그녀의 손이 떨렸다.

완전 성희롱적 발언이었다. 그녀를 노래방 도우미랑 비교하다니.

하지만 신이 난 민호성은 경박한 입을 멈추지 않았다.

“너희, 학생 실습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공부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윗사람들 비위 맞추는 거야. 특히 예쁜


여학생들은 술자리나 그런 데서 술 잘 따라주고…….”

다시 성희롱 발언이 나오려 했고, 이혜미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더욱 붉어졌다.

그때 김진현이 나섰다.

“선생님.”

“…응?”

“충고 감사합니다만, 말씀이 지나칩니다.”

“뭐?!”

“방금 발언은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남자들끼리 있다면 모르지만, 여학생이 있는 만큼 주의


부탁드립니다.”
진현은 공손한 태도로, 하지만 딱 부러지게 말했다.

“지, 진현아.”

혜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현을 바라봤다.

고마움과 윗사람에게 대든 진현을 걱정하는 마음이 눈동자의 섞여 맺혔다.

물론 민호성은 진현의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수는 생각도 않고, 고작 실습생이 하늘같은 선배에게 대들었단 사실에 분노했다.

“학생 주제에 건방지게. 넌 뭐야, 이 자식아?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뭐, 누가 이름을 물었어?!”

그런데 그때, 삐리리 민호성의 전화벨이 울렸다. 안 받을 수 없는 병동의 콜(Call)이었다.

“네, 왜요?!”

거칠게 대답한 민호성의 표정이 상대의 말을 듣고 굳어졌다.

“아, 최대원 교수님 회진 오셨다고요? 네, 금방 갈게요.”

그는 허겁지겁 서류를 챙겼다.

그리고 이를 갈며 진현을 노려봤다.

“너, 회진 끝나고 보자.”

***

진현을 비롯한 실습생들도 회진을 따라갔다.

민호성을 따라다니긴 싫었지만, 교수 회진을 따라 돌며 교육을 받는 건 중요한 일과였다.

혜미가 뒤에서 진현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진현아, 나 때문에 찍혀서 어떻게 해?”

“괜찮다.”

진현은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걱정되면서도 듬직해 혜미는 고개를 떨궜다.

“고마워.”

병동의 중심, 스테이션에 최대원 교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치의, 민호성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대원 교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치프는?”

“아… 연락은 했는데…….”

오면서 전화를 했지만 어디서 뭘 하는지, 치프는 연락두절이었다.

최대원 교수는 혀를 찼다.

“하여튼… 이준성, 그놈은 치프가 되서도… 어쩔 수 없군. 그럼 우리끼리 회진 돌지.”

고개를 돌린 최대원 교수는 학생들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학생 실습을 나올 때가 됐나?”

“네,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혜미가 답했다.

“그래, 열심히 하고.”

최대원 교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학생들을 살폈다.

그런데… 그의 눈이 진현에 닿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 변화에 주치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환자에겐 친절하지만 동료의사에겐 무서운 최 교수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진현 군?”

“네, 교수님.”

“아버님 몸은 괜찮고?”

최대원 교수는 이전 진현의 아버지를 치료해 준 위암, 그중에서도 내시경 점막 절제술의 대가로 소화기내과의
교수였다.

당시 어린 진현의 천재성을 알아본 최 교수는 지도교수란 명목으로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진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 건강하십니다.”

최대원은 감회 서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어렸던 자네가 벌써 이렇게 병원에 실습을 나오게 되다니. 세월이 참 빨라.”
기대 가득한, 부담되는 목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29

29. PK – Patient Killer (2)

“그러고 보니 마인 바이오, 장 사장이 계속 연락을 하던데. 자네를 좀 보고 싶다고.”

“저를요?”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스카우트 이야기도 있고 새로운 프로젝트 이야기도 있는 것 같은데… 자네 바이오 업체에 갈 생각이
있나?”

최 교수는 은근히 물었다.

“없습니다.”

“그래, 마인 바이오가 나쁘진 않지만 자네 같은 인재가 가긴 아깝지.”

그러면서 그는 눈을 깊게 빛냈다.

마치 그 눈이, ‘자네 같은 인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지. 내과나 외과 같은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진현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프로젝트라면 어떤……?”

“글쎄? 신약 개발이라 하던데 자세히는 모르겠군.”

신약 개발, 그 한마디에 진현은 깨달았다.

‘아, TC80 프로젝트군.’

진현이 도운 RI84 프로젝트로 한차례 도약한 마인 바이오가 유수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와 같이 진행하는
신약 개발이다.

‘RI84 랑 다르게 TC80 은 진짜 대규모 프로젝트인데. 시장 가치만 최소 몇 백억 아닌가? 가만. 지금쯤 TC80
진행에 문제가 생길 때긴 한데… 설마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겠지?’

한편 남은 사람들은 최 교수와 진현의 대화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주치의 민호성은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니, 천하의 최 교수님이 저렇게 친근하게 대하다니?’

최 교수는 환자에겐 친절하지만 같은 동료의사에겐 한없이 무서운 사람이었다.


얼마나 무서운지, 레지던트들은 그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다.

최 교수는 다시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치의 민호성을 바라봤다.

“자, 회진 시작하지.”

교수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대개 환자를 만나기 전, 현재까지의 상태와 향후 치료 계획을 상의 후 환자를 보러


간다.

주치의, 민호성이 긴장된 얼굴로 환자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위막성대장염으로 치료 중인 분입니다. 증상이 심해 중증 감염에 준해 강력한 항생제 반코마이신으로 치료


중입니다.”

“반코마이신? 주사? 먹는 약?”

“주사의 효과가 좋아, 주사로 사용 중입니다.”

1 년차 민호성은 당당히 답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던, 최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사?! 너 제정신이야? 너 의사고시는 어떻게 패스했어?!”

“……!!”

민호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째서……?’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눈을 껌뻑였다.

최 교수가 학생들을 바라봤다.

“너희는 뭐가 잘못됐는지 알겠나?”

“…….”

최 교수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물어봤다.

“너는?”

“…….”

“너는?”

“…….”

하지만 학생들은 아무도 답을 못했다. 환자 살인자(Patient killer)인 그들은 주사약과 먹는 약의 임상적


차이도 몰랐다.

그렇게 아무도 답을 못하자, 최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 수업 시간에 뭐 배운 거야?”

그러고 그는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먹는 약입니다.”

“어째서지?”

진현은 잠시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최 교수님에게 눈에 띄긴 싫은데…….’

하지만 최 교수가 너무 빤히 바라봐 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위막성대장염의 경우엔 다른 질환과 다르게 반코마이신은 주사가 아닌, 먹는 약으로 치료하는 게 표준


(Standard) 원칙입니다. 여러 대규모 연구에서 주사제는 효과가 없는 걸로 입증되었습니다.”

그 대답에 민호성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러고 보니 의사고시를 준비할 때 그런 내용을 공부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맞아. 그러면 먹는 약의 경우, 용량을 어떻게 해야지?”

이번엔 민호성에게 한 질문이다.

당연히 그는 답하지 못했다.

최 교수의 시선이 다시 진현에게 향했다.

진현은 속으로 주치의를 욕했다.

‘아, 이건 기본적인 건데… 아무리 1 년차 초반이라도 왜 하나도 모르는 거야. 자꾸 최 교수님한테 주목받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또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대답 안 할 수도 없었다.

“125㎎ 하루에 4 번입니다.”

“기간은?”

“증상 호전 여부에 따라 10-14 일입니다.”

“그래, 그렇지.”

완벽한 대답에 최 교수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민호성에게 말했다.

“알았나?”
“네, 네?”

“어떻게 치료하는지 알았냐고. 까먹지 않게 적어.”

“네, 네!”

이런 사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환자 프레젠테이션을 들은 최 교수는 다시 역성을 내었다.

“뭐야? 이 항생제는 왜 쓰고 있어?”

“복강 내 농양이라…….”

머리를 싸맨 최 교수는 다시 학생들을 바라봤다.

“너희는 뭐가 문젠지 알겠나?”

“…….”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 알 리가 없다.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일단 입을 열지 않았다.

“…….”

“진현 군, 자네도 모르겠나?”

“…….”

“정말로?”

정말 몰라? 정말로? 하는 눈빛이다.

결국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생각이지만… 3 세대 세파(Cepha)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어째서?”

“균이 확인되었고 이런 경우, 여러 균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어서…….”

“그래, 그래!”

그렇게 그들은 문답을 거듭했다.

항상 마지막에 진현에게 질문의 화살이 날아왔고, 진현은 최대한 모른 척 대답을 회피하려 했으나 최 교수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진현의 답을 들을수록 최 교수 눈에 흡족함은 계속해서 짙어졌다.


마치 믿음직한 사위를 보는 듯한 눈빛에 진현은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난 피부과가 하고 싶다고…….’

이러다간 강제로 ‘간택(揀擇)’당하지 않는단 보장이 없었다.

한편 혜미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과 주치의, 민호성은 진현을 괴물처럼 바라봤다.

부동의 1 등인 건 알고 있지만 이런 임상적 식견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1 시간여의 회진 후, 드디어 마지막 환자 앞에 도착했다.

이번 환자는 대가인 최대원 교수도 고민되는 문제를 가진 환자였다.

“조기 위암으로 입원한 환자입니다. 위암은 워낙 초기라 큰 문제가 없는데… CT 상 복강 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임파선이 커져 있습니다.”

“흐음… 임파선이라.”

“네, 문제는 이게 4 년 전에도 있던 임파선인데 큰 변화는 아니어도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흐음…….”

최 교수는 또다시 진현을 바라봤다.

“복강 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임파선이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전과는 다른 뉘앙스의 질문이었다.

이전까지가 마치 구두시험(Oral test)을 보듯 물은 거였다면, 이건 진정으로 진현의 의견(Opinion)을 구한


것이다.

마치 조언을 구하듯-

그런 최 교수의 마음을 읽고 진현은 뭉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안 돼. 더 이상은 절대 안 돼. 더 눈에 띄면 곤란해.’

그렇게 그는 입을 열기를 주저했으나, 최 교수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가만히 진현의 답을 기다렸다.

“말해보게.”

결국 진현은 백기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 교수가 고민하듯 쉽지 않은 문제였다.

“조금씩 커지고 있다면, 반드시 암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암을?”
“위암 환자니, 위암의 임파선 전파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원체 초기라 이건 사실 확률이 떨어집니다. 임파선의
위치도 위암이 처음 전이될 때와는 조금 다르고요.”

“그러면?”

“다른 종류의 암, 즉, 임파선 암도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임파선 암이라… 정말 임파선 암이 맞으면 4 년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큰 변화 없이 얌전히 있었을까? 그냥 암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임파선 비대는 아닐까?”

최 교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저 임파선이 암인지, 아무것도 아닌지는 수술로 직접 꺼내보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나?”

“확실하진 않지만, 수술로 확인을 해봐야 한다 생각합니다. 만약 저 임파선이 암인데 확인을 안 하다 때를


놓치면 환자는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수술을 했는데 암이라고 안 나오면? 불필요한 수술을 받은 환자의 고통은 누가 보상하지? 만약
수술이 잘못돼서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그렇긴 하지만, 놓쳤을 경우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꼭 확인을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꼭 메스로
배를 열지 않고 복강경 수술로 충분히 접근 가능할 거로 보입니다.”

진현은 과거에 숱하게 집도했던 복강경 수술을 떠올렸다.

복강경 수술은 칼로 배를 째는 게 아닌, 작은 구멍으로 내시경을 집어넣어 하는 수술을 뜻한다.

‘저런 수술 따위, 간단하지.’

과거의 기억들이 아릿하게 떠오르는 것을 애써 내쫓으며 말을 이었다.

“복강경으로 수술을 진행하면 위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최 교수는 짙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모든 이들은 입을 쩍 벌리고 진현을 바라봤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최 교수는 결국 진현이 가장 두려운 질문을 하였다.

“자네, 내과 해서 내 제자 될 거지?”

***
실습 시간이 끝나고 짐을 놔둔 강의실로 돌아온 혜미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진현아, 너 내과 할 거야? 나도 내과 할 건데.”

진현은 강한 어조로 답했다.

“절대로. 절대로 안 한다.”

“그래? 내과 좋지 않아?”

“좋지. 외과만큼, 아니… 외과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더 많이 살리는 과니까.”

감기만 본다는 일반인들의 시선과 다르게 종합병원에서 내과의 역할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과에서 다루는 심장, 폐, 간, 신장 등은 뭐 하나라도 장애가 생기면 생명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병원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죽는 것도 내과고,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싸우는 것도 내과다.

‘외과든, 내과든 그 고생을 또 할 순 없지.’

혜미가 입술을 내밀며 물었다.

“그래? 그러면 넌 무슨 과하고 싶은데?”

진현은 답을 할까 고민했다.

뭐, 이 녀석이면 괜찮겠지.

“피부과 하고 싶다.”

“에엑?!”

혜미는 경악해 외쳤다.

뭔가 못 들을 이야기를 들은 반응이라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니, 그냥 놀라서. 너라면 뭔가 내과나 외과 같은 뜻 있는 과를 할 줄 알아서.”

“피부과도 뜻 있는 과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만… 뭔가… 뭔가…….”

“뭔가?”

“아까운데.”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랄까. 가우스급 수학의 천재가 미술을 하는 느낌? 아니면 뉴턴급의 물리학의 천재가 신발 장사를 하는 느낌?”
진현은 피식 웃었다.

“됐다. 나중에 피부과 하다 내과 문제로 환자 안 좋아지면, 잘 봐줘라.”

이래 봬도 진현과 이상민에게 가려서 그렇지, 그녀의 성적도 1 등급, 즉, 10 등 안의 최상위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후에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내과 교수가 된다.

그것도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명망 높은 여교수가.

‘그러고 보니 이상민은 어떻게 되더라?’

시간이 지나서일까? 외과의사가 되는 건 기억나는데… 정확히는 기억 안 난다. 대일병원 쪽은 아니었는데…….

‘뭐, 상관없지. 어차피 과거처럼 흘러가는 것도 아니니.’

그는 최 교수를 떠올렸다.

‘조심해야겠어.’

최 교수의 눈빛이 날이 갈수록 심상치 않아지고 있다. 이러다 정말 내과로 끌려갈 판국이다.

과거에 비해 강압적인 문화가 많이 없어졌다 해도, 명망 높은 교수가 찍어서 계속 끌면 학생 입장에서 안 갈


도리도 없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어차피 최 교수는 곧 대일병원으로 스카우트되니 조금만 잘 버티자.’

전의 삶에 따르면, 위암의 대가 최 교수는 실력을 인정받아 거액을 받고 국내 최고 대일병원으로 스카우트된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참, 진현아.”

“응?”

그녀는 주저하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까 고마워.”

“뭘?”

“그… 선생님한테 대신 나서준 것.”

“뭘. 신경 쓰지 마라.”

“…아니야, 정말 고마워.”

평소답지 않게 의기소침하게 말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해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뭘. 우리 사이에 신경 쓰지 마라.”


그런데 부드러운 검은 머릿결이 손끝에 미끄러지는 중에, 진현은 흠칫 멈춰 섰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다. 거의 터질 듯한 붉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0

30. PK – Patient Killer (3)

진현은 놀라 물었다.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아… 아… 아니야.”

그녀는 멍하니 말을 더듬다, 퍼뜩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옆의 가방을 서둘러 챙기더니 등을 돌렸다.

“나, 나 가볼게. 미안!”

“어…? 자, 잠깐만.”

하지만 그녀는 멈춰 서지 않았다. 재킷은 챙기지도 않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진현은 중얼거렸다.

“왜 그래, 저 녀석?”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 쓰다듬는 게 그렇게 싫었나?”

***

다음 날 실습을 돌며 진현은 혜미에게 진지하게 사과했다.

“어제 일 미안하다.”

“뭘?”

“머리 쓰다듬은 것. 기분 나빴을 것 같다.”

밤사이 진현은 왜 혜미가 그렇게 반응했을까 깊게 고민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불쾌해서, 였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조심했어야 하는데. 내 잘못이지.’

그런데 혜미의 반응이 이상했다. 다시 얼굴이 빨개진 것이다.

“혜, 혜미야?”

화난 게 아니라… 부끄러움에 가까운 표정이었지만 불행히 눈썰미가 원시인에 가까운 진현은 그걸 분간할 수가
없었다.

“왜, 왜 쓰다듬은 건데?”

혜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야…….”

그는 생각했다.

뭔가 위로를 해주고 싶어서였는데, 어제의 성희롱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라 좋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귀여워서.”

그녀는 그에게 동생 같은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그 대답을 듣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빨개졌다.

사과가 익다 못해, 터질 듯한 얼굴이다.

진현은 당황했다.

‘아니, 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러는 거지?’

혜미가 아무도 못 듣게,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바보…….”

그런데 그때, 그들이 있던 회의실에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진현과 혜미, 둘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저분한 주치의, 민호성이었다.

그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뭔가 불만이 가득하지만, 최대원 교수 앞에서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한 뒤라 권위를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과제가 있다. 각각에게 환자를 배정해 줄 테니 그 환자의 상태에 대한 요약과 진단 방법, 향후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리포트에 써서 제출하도록 해. 점수에 들어가는 거니 열심히 하고.”

“네.”

그러면서 그는 혜미에게 먼저 환자를 지정해 줬다.

“장염 환자니 장염의 원인과 감염성 장염일 때 치료를 위주로 정리하면 돼.”

어렵지 않은 주제다.

혜미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성은 불쾌함이 가득한 어조로 진현에게 말했다.


“넌 이 환자를 하면 된다.”

특별한 설명도 없이 환자번호만 딱 던져주었다.

진현은 곧바로 옆의 컴퓨터에 접속된 병원 전산으로 환자 번호를 입력했다.

-강 O 연 남자 / 52 세

그리고 전산 차트에 짤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암 치료 후 발견된 전이로 항암, 방사선치료 중 원인 불명의 폐 기능 악화로 중환자실 치료 중. 폐색전증,


호흡부전, 폐렴 전부 감별 안 됨. 현재는 폐렴으로 간주해 치료 중이나 계속 악화 중.

-동반 질환력 : 당뇨, 고혈압, 만성신부전증, 심방세동(Delta wave?, R/O WPW?), 심장 부전, B 형 간염,
간경화…….

“…….”

옆에서 같이 차트를 본 혜미가 입을 살짝 벌렸다.

한글로 써 있긴 한데… 이게 중국어야, 일본어야, 불어야, 외계어야? 하는 표정이다.

주치의, 민호성이 비릿하게 웃었다.

“어때? 1 등인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지? 성적에 들어가는 거니 잘하라고.”

“평가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진단에 대한 접근, 치료 계획을 보고 평가할 거다.”

그 말에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의도인지 훤히 보이는군.’

실습생의 학점은 교수가 아닌, 레지던트가 관리한다.

일부러 어려운 과제를 내어 점수를 팍 깎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문제는 이게 보통 어려운 과제가 아니란 건데…….’

이런 환자의 경우 명확한 답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모르고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답을 구하겠는가?

‘수학의 영원한 난제, 페르마의 정리를 과제로 내고 못 풀었다 점수를 깎는 격이지.’

코에 걸면 코에 걸었다 혼나고, 귀에 걸면 귀에 걸었다 점수를 깎을게 분명했다.

‘내과 실습 점수는 한 과목임에도 무려 14 학점. 여기서 C 라도 맞으면 지금까지의 공이 무너져.’

실제로 이전 진현이 다니던 의대에서 내과 실습에서 C 를 맞아 1, 2 등을 다투다 단숨에 10% 밖으로 밀려난
학생이 있었다.
물론 과제 하나로 C 가 나오진 않겠지만 작정하고 깎으면 가능했다.

남들이 최고점 20 점을 받을 때 홀로 0 점을 맞으면 C 나 D 로 직행이다.

“잘해보라고.”

민호성이 비웃었다.

진현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에 깃든,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민호성은 흠칫 놀랐다.

“왜, 왜? 못하겠어?”

“아닙니다.”

진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성 후 제출하겠습니다. 언제까지 제출하면 되겠습니까?”

그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민호성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주말까지.”

‘흥, 아무것도 모르니 저러는 거겠지.’

그는 진현이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 저리 자신만만하다 생각했다.

‘최대원 교수 앞에서 몇 개 대답하고, 학생 1 등이라고 지가 잘난 줄 아나 본데. 각오해라.’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는 이를 갈았다.

***

“진현아, 이거 할 수 있겠어? 너무 어려운 환자 같은데…….”

“뭐, 해봐야지.”

혜미의 커다란 검은 눈에 걱정이 가득 맺혔다.

“이 과제 굉장히 중요할 텐데… 잘못해서 14 학점이나 되는 과목의 성적이 잘못 나오면…….”

14 학점.

의대의 보통 한 학기 학점이 30 학점 조금 못 미치니 반 학기에 해당하는 학점이다.

쿼터로 치면 한 쿼터 분량의 학점. 만약 C 정도의 성적이 나오면 지금까지의 공들여 쌓은 탑은 우르르 무너지고
말 거다.

‘피부과도 날아가겠지.’
혜미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같이 도와줄게.”

“아니, 괜찮아. 너도 네 과제에 집중해.”

“하지만…….”

“정말로 괜찮다. 어차피 이런 류의 과제는 여러 명이 같이 해도 큰 도움 되지 않으니.”

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미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게?”

“중환자실.”

“아… 바로 과제 시작하게?”

“그래.”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간은 목요일 늦은 오후, 주말이 되기 전까지 이틀도 안 남았다.

그전에 완벽하게 과제를 완성해 제출해야 했다.

‘지금까지 노력한 게 얼마인데, 이런 일에 발목 잡힐 수는 없지.’

그는 곧바로 자신이 배정받은 환자가 위치한 중환자실로 향했다.

***

“하아, 하아.”

진현이 배정받은 환자는 중환자실 구석에 누워 있었다.

고농도의 산소마스크를 적용 중인데도 숨이 차는지 호흡이 거칠었다.

“환자분, 환자분?”

간단한 문답을 위해 말을 걸었으나 답을 못했다.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데, 몸의 상태 악화로 의식이 처진 것이다.

“저기 누구세요?”

무뚝뚝한 인상의 담당 간호사가 진현에게 물었다.

“실습 학생입니다. 환자를 보러 왔습니다.”


“그래요? 이 환자분 지금 많이 안 좋은데.”

귀찮으니, 대충 보고 빨리 가란 말투다.

푸대접에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학생이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진현은 크게 개의치 않고, 꼼꼼히 환자를 살폈다.

‘신체 검진 먼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보고, 만지고, 듣고, 두드려보았다.

‘폐 소리가 많이 지저분하군. 그런데 가래가 찬 소린 아니야. 폐렴이면 가래가 많아야 하는데… 폐렴은 아닌 것
같은데?’

폐가 위치한 부위에서 청진기를 떼며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온몸이 부어 있지? 이거 그냥 단순히 폐가 안 좋은 게 아니라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환자를 자세히 살핀 진현은 병원 전산에 접속해 검사 결과를 열람했다.

‘폐 엑스레이 사진이랑… CT 랑…….’

그는 엑스레이와 CT 사진을 보며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 삐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치의, 민호성이었다.

“잘하고 있어?”

그는 진현이 영상 사진을 보고 있는 걸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거 보면 아냐? 란 표정이다.

민호성은 환자에게 다가가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환자분, 항생제 쓰면서 금방 좋아지실 거니 조금만 힘내세요!”

“어… 어…….”

하지만 환자는 신음만 흘릴 뿐, 전혀 답하지 못했다.

민호성은 하이에나같이 웃으며 말했다.

“잘해보라고. 점수에 크게 들어가는 과제니까.’

‘빵점을 주마.’
그리고 병동으로 올라가려는 그에게 진현이 물었다.

“저… 선생님.”

“왜?”

“혹시 폐렴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 외에 다른 약은 쓰는 것은 없습니까? 예를 들면… 폐에 찬 물을 빼기 위한


약이라든지…….”

“그걸 왜 써? 폐렴 확률이 가장 높으니 항생제를 써야지.”

민호성은 인상을 쓰고 병동으로 올라가 버렸다.

뒤에 남은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폐렴이 아닌 것 같은데… 염증 수치도 별로 안 높고… 가래도 없고…….’

전신이 탱탱 부어 있는 것도 이상하다.

엑스레이나, CT 도 전형적인 폐렴과는 거리가 멀다.

‘이거 폐렴이 아니라, 폐에 물 찬 것 아니야? 원래 심장이 안 좋은 환자니 그게 가능성 높을 것 같은데?’

해부학적으로 심장과 폐는 곧바로 연결되어 있어 심장이 안 좋으면 폐에 물이 차 호흡 곤란이 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염증이 생긴 폐렴과 물이 찬 경우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으나, 여러 임상적 상황이 물이 찬 가능성을 더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거 아무래도 이야기해야겠는데? 이대로 항생제만 잘못 쓰고 있다간 환자 넘어가겠어.’

민호성이 성질을 낼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환자가 잘못된 치료로 점점 나빠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아, 나서긴 싫은데. 그냥 잘들 하지.’

진현은 한숨을 내쉬며 민호성을 만나러 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눈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맥박수가?”

옆에 있던 간호사도 보았다. 그녀는 당황해 외쳤다.

“어, 어?! 맥박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분당 80 회 정도로 안정적으로 뛰던 심장이 갑자기 분당 180 회로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만한 사이에 일어난, 불과 1 초도 되지 않아 생긴 변화였다.

“저, 선생님? 빨리 와보세요. 큰일 났어요!”


갑자기 발생한 응급 상황에 간호사가 급히 주치의를 콜(Call)했다.

‘어떻게 된 거지?’

진현은 급히 모니터 상에 나타난 심장 리듬을 분석했다.

‘심장 리듬이 흔들리는 부정맥! 큰일인데.’

다행히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탓에 민호성은 금방 도착했다.

“아, 왜 또 부르고 그래요? 귀찮게…….”

투덜대던 그는 맥박수를 보고 깜짝 놀라 당황했다.

“어, 어… 저거 왜 이러지? 방금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그때 환자가 꺽꺽거렸다. 의식이 넘어가려는 징후다.

“어, 어떻게 하지?”

이래저래 거만한 척하지만 그는 이제 고작 1 년차 초반이다.

즉, 제대로 환자를 보기 시작한지 몇 달도 안 된 상태로 응급 상황 대처 능력에 취약했다.

“치, 치프 선생님 전화번호가…….”

그는 급하게 치프 이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젠장! 이 치프는 도대체!!”

민호성은 욕설을 내뱉었다.

옆에서 간호사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지금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민호성은 하얗게 질려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폭주하는 심장을 빨리 손쓰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1

31. PK – Patient Killer (4)


“빠르게 뛰는 부정맥이니… 그래, 디곡신! 디곡신 주세요!!”

“네!”

이런 응급 상황에 대비해 중환자실에 항상 비치되어 있는 약이다.

간호사는 숙련된 동작으로 재빨리 약을 주사에 채웠다.

그런데 생각에 잠겨 있던 진현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반적으로 옳은 약물 선택이지만, 지금 저 환자한테는 적합하지 않다.

“선생님. 심장 리듬 모양상 델타 웨이브가 의심됩니다. 디곡신은 위험할 수 있으니 1A 형 약물이 어떻습니까?”

“뭐? 델타 웨이브?”

민호성은 뻐끔뻐끔 눈을 깜빡였다.

진현은 급히 말했다.

환자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델타 웨이브가 있는 환자에서 발생한 부정맥에 디곡신을 주면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1A 형 약물을 쓰십시오.”

“…….”

하지만 민호성은 알아듣지 못한 눈치다.

하긴, 심장 리듬의 델타 웨이브는 책에서나 볼 수 있지 원채 드문 질환이라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진현도 이전 대일병원에서 일할 때 접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다.

그때 심장내과 전문의랑 같이 정말 어렵게 환자를 살렸었다.

그때 간호사가 외쳤다.

“선생님, 혈압 떨어지려 그래요!”

심장의 폭주로 120 정도로 유지되던 혈압이 스물스물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민호성이 외쳤다.

“빨리 약 주세요!! 빨리!!”

“네!”

깜짝 놀란 진현이 외쳤다.

“안 됩니다!!”

간호사가 놀라 멈칫했다.
민호성이 버럭 화를 냈다.

“넌 뭐야? 학생 주제에 가만있어!! 빨리 주세요!!”

“델타 웨이브가 있을 때, 디곡신을 주면……!”

진현이 급하게 말했으나, 늦었다. 간호사가 약을 투약해 버렸다.

‘아……!’

진현은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약을 준 민호성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모니터의 심장 리듬을 바라봤다.

약을 준 후, 보통 금방 반응을 나타낸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 리듬이 변화를 보였다.

그것도 최악으로.

“어……?”

민호성이 멍하니 신음을 뱉었다.

채찍을 휘두른 듯 심장 리듬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노이즈처럼 심장 리듬이 엉망으로 요동을 쳤다.

“이게……?”

그와 동시에 혈압을 나타내던 모니터가 100, 80, 60, 40, 20… 으로 떨어지더니 0 에서 멈췄다.

1 초도 되지 않아 생긴 변화였다.

진현은 머리가 하얘지는 듯했다.

‘제길, 빌어먹을.’

하지만 당황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브이핍(V.fib)! 심장 정지입니다! 전기 충격기 가져와 주세요!!”

멍하니 있는 민호성을 제치고 진현은 환자 침대에 올라가 심장 마사지를 시작했다.

간호사가 비명을 질렀다.

“여기 심장 정지, 심폐소생술이에요!! 전기 충격기 가져와주세요!!!”

중환자실이 난리가 났다.

민호성은 아수라장 속에서 넋을 잃었다.

‘이, 이게…….’
다른 간호사들이 10 초도 안 돼 전기 충격기를 가져왔다.

심장 마사지를 하며 진현은 외쳤다.

“선생님, 전기 충격을!!”

“어, 어…….”

하지만 민호성은 완전히 얼어붙어 반응을 못했다.

‘이런 제길……!’

나서기 싫고, 말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심장이 멈춰 뇌에 피가 1-2 분만 안 가도, 환자의 뇌는 죽는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환자는 죽거나, 살아도 식물인간이 된다.

“여기 누가 심장 마사지 대신 해주세요!”

간호사에게 심장 마사지를 맡긴 진현은 전기 충격기를 낚아챘다.

“차지(Charge)!”

찌이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기가 충전되었다.

“클리어(Clear)! 다들 떨어지세요!”

전기 충격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간호사들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쇼크(Shock)!”

200J 의 전기가 심장을 가로질렀다.

모든 심장의 리듬이 전기 충격에 지워졌다. 심장을 마비시킨 난폭한 부정맥도 쓸려 지워졌다.

“아…….”

그리고… 틱. 틱.

가뭄에 싹이 나듯, 전기 신호가 하나씩 생겨났다. 이전과 동일한 정상 리듬이었다.

“하아…….”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호사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다.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네. 그런데 선생님은……?”


간호사들이 진현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선생님은 누구지?

“실습생입니다.”

“네, 실습생이요?”

간호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쓴웃음을 짓고, 아직도 멍하니 있는 민호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 선생님. 피검사나 다른 검사를 해서 원인을 찾는 것은 어떻습니까? 체내의 전해질 이상의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아… 아! 그, 그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민호성이 이리저리 오더를 내렸다.

얼마 후, 뒤늦게 연락된 치프 이준성이 와서 상황을 정리했다.

“야, 임마! 델타 웨이브가 있는 사람한테 디곡신을 주면 어떻게 해?!! 미쳤어?!”

“죄, 죄송합니다.”

그는 민호성을 호되게 깼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현은 슬며시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아, 소문나면 안 되는데. 괜히 나섰나?’

하지만 환자가 눈앞에서 죽으려 하는데 안 나설 수도 없었다.

***

병원의 일과는 빨리 시작한다.

다음 날, 실습을 위해 일찍 등교한 진현은 새벽같이 최대원 교수한테 호출을 받았다.

-진현 군, 나 최대원인데 지금 내 방으로 올 수 있겠나?

‘아직 오전 6 시 15 분밖에 안 됐는데? 무슨 일이지?’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전날 중환자실 환자 때문인가?’

어쨌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곧 병원의 교수실에 도착한 그는 다른 손님을 발견했다.

주치의, 민호성이었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제 일 들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현은 용건을 깨달았다. 어제 중환자실 환자 때문에 불렀구나.

“환자 처치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확인을 하러 불렀네.”

민호성은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부정맥이긴 했지만, 어제 일은 분명한 그의 실책이었다.

만약 진현이 재빨리 처치하지 않았으면 그 환자는 죽었을 것이다.

“어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나?”

최 교수는 평소 진현을 바라볼 때와 다르게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환자에게 따뜻한 그는 의사의 잘못에 엄격했다.

진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래?”

최 교수는 의외란 얼굴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디곡신이 투여된 후, 심장 마비가 오긴 했지만… 사실 그건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델타 웨이브가


명확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호성이 놀란 눈으로 진현을 돌아봤다.

당시 진현은 델타 웨이브를 정확히 짚었었다. 하지만 진현은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확실한가?”

“네.”

“그러면 그 뒤에 처치는? 학생인 자네가 전기 충격을 했단 이야기가 있던데?”

“그건 당시 그 자리에 의사가 민호성 선생님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전체적인 상황을 총괄하였고,
저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전기 충격을 줬을 뿐입니다.”

민호성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 진현은 그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나는 계속 못되게 굴었는데… 이 녀석은…….’


진현은 민호성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못나고 미운 놈이지만… 그도 저렇게 어리벙벙할 때가 있었다. 아니, 민호성과 진현뿐 아니라 모든 의사는
저렇게 미숙할 때가 있다.

“정말인가?”

추궁하듯 묻는 질문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날카로운 긴장감이 교수실에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 교수는 이전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겠네. 민 선생.”

“네, 네?!”

“어제 수고했네.”

“네, 네? 네!!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칭찬의 말에 민호성은 허리를 숙였다.

최 교수는 진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수고했네. 실습하면서 놀랐겠군.”

그러면서 그는 진현과 눈을 마주쳤다.

“……!”

그 깊은 눈을 본 순간, 진현은 깨달았다.

‘다 알고 있구나.’

하긴 최 교수가 어떤 사람인데 어제 상황을 모르고 있을 리가 있나?

면밀한 조사를 끝낸 후, 그들을 불렀으리라.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냥 넘어가겠네. 수고했어.

진현은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만간 밥이나 한번 먹지.”

절대 먹기 싫었지만,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와 민호성이 교수실을 나가는데 최 교수가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환자를 통해 배우게 되지. 미안함을 잊지 말고, 끝없이 정진하게.
그건 환자를 보는 의사의 의무니까.”

***

둘은 병동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엔 아침이라 둘밖에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5 층에서 12 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아무 말 없던 민호성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담배 피냐?”

“지금은 안 피웁니다.”

“그래?”

진현이 재빨리 다시 말했다.

“하지만 간접흡연 하는 건 좋아합니다.”

그 말에 민호성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잠깐 담배 피우러 가자.”

건물 전체가 금연구역인 병원 내에 흡연자들을 위한 은신처인 너구리굴로 향했다.

물론 여기도 금연구역이지만, 병원 측에서 알고도 눈감아주고 있는 곳이다.

“하아…….”

민호성은 깊게 담배연기를 내뱉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짧게 타 들어갈 때 즈음, 그는 진현에게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크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미안해.”

“……!”

“정말 미안해. 그리고… 정말로 고맙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다.

진현은 속으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야, 지금까지 정말 미안했어. 나도 원래 그렇진 않은데… 바쁜데 학생이 나오니 짜증이 나서. 그리고 난
이전부터 공부 잘하는 애들을 싫어 했어서… 하여튼 정말 미안하다.”

왠지 안 바쁠 때도 밉상이었을 것 같긴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한테 내준 리포트는 걱정하지 마. 백지로 내도 만점을 줄 테니.”

그건 반가운 소리다.

“감사합니다. 하여튼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리고 고개를 든 민호성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네?”

“너 어떻게 어제 그럴 수 있었지?”

민호성은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이제 처음 병원 실습을 나온 학생이 그런 대처를 하다니?

부정맥으로 심장마비가 왔을 때 전기충격을 줘야 하는 건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당황한 그는 지식으로 알아도 행동을 실천할 수 없었다.

진현은 순간 고민했다.

‘뭐라고 답하지?’

이전에 외과의사의 삶을 살았다고 답할 수도 없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책에서 배웠습니다.”

“정말로?”

이왕 내뱉은 말, 그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네, 정말로 책에서 배웠습니다.”

“…괴물 같은 놈.”

민호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진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 괴물 중의 괴물이다.


***

그렇게 내과 실습이 흘러갔다.

얼마 뒤, 진현은 병동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이전 중환자실에서 문제가 생겼던 환자가 병동을 걸어 다니고 있었던 거다.

‘아… 좋아졌구나.’

당시 진현은 조심히 폐의 물을 빼보라 조언했었고, 그 말을 따른 결과 여러 전신 상태가 좋아진 듯했다.

환자는 수척한 얼굴로 가족들과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니, 진현은 가슴에 설명하기 어려운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의 정체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보람이었다.

하지만 진현은 그 감정을 모른 척했다.

‘됐어. 지난 삶으로 충분해. 난 피부과 의사가 될 거야. 이제 더 이상은 나서지 말아야지.’

그는 다짐했다.

***

한국대 의대 중간층엔 교수들을 위해 마련된 층이 있었다.

그중,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한 교수실에서 젊은 교수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흠, 피곤하군.”

누구나 호감을 가질법한, 굵은 선의 얼굴. 이혜미와 이상민의 배다른 오빠, 이범수였다.

젊고 유능한 그는 항상 일에 치여 있었다.

지금도 그의 책상엔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고된 업무에도 그는 항상 친절을 잃지 않아, 환자와 동료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실습 나온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 1 위에 랭크될 정도였다.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그런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생각지도 못한 이였다.

선이 호리호리한 매끄러운 얼굴, 항상 입가에 맺혀 있는 부드러운 미소, 이상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2

32.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 (1)

이범수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학생이 교수님 뵈러도 못 오나요?”

“난 네놈을 볼 이유가 없어. 빨리 꺼져!”

이범수는 으르렁거렸다.

이상민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전 형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나를 미워하실까?”

콰앙!!

분노를 못 이긴 이범수가 책상을 내려쳤다.

“그걸 말이라고! 네놈의 핏줄인 창녀가 우리 집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하는 이야기냐?! 그년 때문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어!!”

“흐음.”

이상민은 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교수실이 좋긴 좋네. 레지던트들은 이거 반만 한 방에서 6 명씩 끼어 살던데. 그런데 어차피 형은 여기보다


더 좋은 아버지 병원으로 갈 거죠?”

“그 더러운 입으로 더 지껄이지 말고 나가라.”

이상민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신다면. 아, 나 사실 교수님한테 뭐 하나 물어보러 왔는데 순수한 학생의 질문도 외면하진 않을 거죠?”

“뭐냐?”

“몸 안에 칼륨 수치가 많이많이 높아지면 무슨 일이 생기나요, 교수님?”

이범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기본적인 걸 지금 왜 물어보는 거냐?”


“질문은 학생의 특권이잖아요. 그리고 이 분야는 교수님이 전문이시니까.”

이범수는 벌레를 내쫓듯 답했다.

“심장마비가 온다. 됐지? 들었으면 꺼져라!”

“네에, 네.”

이상민은 짙은 미소를 흘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병원 복도에 나온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심장마비라…….”

지난번 강아지를 죽일 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

진현은 오랜만에 원래 살던 동네에 돌아왔다.

‘여기는 정말 변화가 없군.’

회귀 후 10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다른 구(區)는 재건축이다, 뭐다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진현이 사는


동네는 세월이 비껴간 듯한 인상이다.

건물들은 여전히 낡았고 그 흔한 고층 건물 하나 찾기 어려웠다.

‘돈이 더 모이면 이사 먼저 해야지.’

나름 정감이 가는 동네긴 하지만, 부모님을 좀 더 좋은 곳에 모시고 싶었다.

진현은 교차로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약속 장소가…….’

지금 그는 집으로 가는 게 아닌,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골목골목을 한참을 들어간 그는 이 근처치고는 제법 번듯한 실내 형 포장마차 집을 찾았다.

‘여기군.’

끼이익.

문을 여니 누군가 그를 불렀다.

“진현아, 여기야!”

멀대 같이 큰 키에 순둥이 같은 얼굴.

진현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오랜만이다.”
“그래, 이게 얼마만이야? 진현이 너는 하나도 안 변했네?”

“너는 키가 더 큰 것 같다?”

순둥이 같은 인상의 멀대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 황문진이었다.

황문진은 히죽 웃었다.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미소였다.

“진짜 오랜만이네. 이게 얼마만이야?”

“글쎄? 대학 초반에 보고 못 봤으니…….”

“그러니까! 좀 보자니까!”

“네가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못 봤잖아.”

“그런가?”

황문진은 실실 웃었다.

고 3 때 수능이 대박 난 그는 KTX 를 타고도 몇 시간은 걸리는 지방에 위치한 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자, 한 잔 하자. 반가워.”

그는 조르르 진현의 잔에 소주를 따른 후 서로 시원히 들이켰다.

“크, 좋다.”

“이제 술 좀 마시나 보네? 예전 이상민, 김철우랑 술 마실 때는 죽으려 하더니.”

“선배들이 워낙 야만적으로 퍼 먹여서… 마시다 보니 늘더라. 그런데 어떻게 지냈어? 여자 친구는 없어?”

여자 친구 없냐, 는 물음에 진현은 일순 이혜미를 떠올렸다. 그때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

그러나 그는 여자 친구 없냐는 질문에, 자신이 혜미를 떠올렸단 사실에 퍼뜩 놀라며 당황했다.

‘무슨…….’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다.”

“에에? 그러면 지금까지 여자 친구 한 번도 없었던 거야?”

“그래.”

황문진은 희귀한 천연동물 보듯 진현을 바라봤다.

“정말? 우리 이제 이십 대 중반이야. 빨리빨리 여자 친구 만들어야지. 너 그러다 마법사 된다?”

“마법사?”
“그래, 이십 대 중반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 너 그러다 큰일 나.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어.
운석 떨어뜨리는.”

시답지 않은 농담에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런데 김철우는?”

오늘 자리는 그들만 만나기로 약속된 자리가 아니었다.

황문진은 핸드폰 시계를 바라봤다.

“곧 올 때가 됐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곧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 범생이. 오랜만이다.”

듬성듬성 안 깎은 수염, 껄렁껄렁한 말투. 한때 이상민과 함께 불량한 일진이었던 김철우였다.

진현은 슬쩍 웃었다.

‘이 녀석도 이전의 삶에 비해서 참 사람 됐지.’

김철우는 삼수 끝에 인서울은 못하고, 경기도의 대학에 다니고 있다.

입학하자마자 총알같이 입대해 군대도 다녀온 상태다.

“이상민은?”

이번 모임의 주최자인 황문진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연락 안 되던데. 진현이 너는 같은 학교잖아? 연락 안 돼?”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요즘엔 잘 못 본다. 바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바쁜 건지, 뭐하는 건지…….’

이상민, 그 녀석은 고등학교, 대학 동창에 무척 친한 사이이건만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가면을 대고 이야기를 하듯, 너무 속을 알 수 없어서 가끔 옆에 있다 보면 섬뜩할 때도 있었다.

“그래? 하여튼 이상민, 이놈은 연락도 없고. 서운하다니까. 술이나 먹자.”

이상민과 제일 친했던 김철우가 투덜댔다.

그렇게 그들은 반갑게 회포를 나눴다.


각 한 병 이상씩 마셔 알싸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 황문진이 물었다.

“진현아, 너는 나중에 뭐할 거야?”

“피부과 할 거다.”

“에엑?”

황문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 그냥… 잘 안 어울려서.”

“안 어울리는 게 어디 있냐?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너는 뭐할 건데?”

황문진은 눈을 반짝였다.

“난 대일병원에 가서 사람을 살리는 내과나 외과를 할 거야.”

“대일병원?”

“응.”

진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문진을 바라봤다.

의대 내에서도 제법 성적이 좋은 모양이다. 국내 최고의 대일병원은 각 의대 내에서도 최상위권의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

옆에서 김철우가 소주를 털어 넣으며 투덜댔다.

“아, 공부 못하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난 앞으로 뭐 먹고 살지가 막막한데. 부러운 녀석들.”

“넌 뭐 생각하고 있냐?”

“글쎄, 내 스펙으로 대기업 취직은 애초에 무리고… 꿈의 직장이라는 공무원이나 할란다.”

“공무원?”

“응, 나 경찰시험 공부 중이다.”

그 말을 들은 황문진이 푸웁 마시던 소주를 내뱉었다.

“뭐, 뭐? 네가 경찰시험 공부 중이라고? 정말? 진짜 안 어울리는 데?”

김철우가 버럭 화를 내었다.

“뭐, 내가 경찰이 어때서? 황문진, 네가 의대 간 것도 웃기거든?”

“아니… 그래도 네가 경찰이라니… 그건 좀…….”

그건 진현도 공감했다. 일진으로 잘나가던 놈이 조폭도 아니라 경찰이라니.


‘세상 참 요지경이군.’

그들의 시선에 김철우는 성을 내며 술을 가득 따랐다.

“이 자식들, 두고 봐. 나중에 의료사고 나면 내가 네놈들 잡으러 간다.”

진현은 피식 웃으며 술을 받았다.

“그래, 나중에 문제 생기면 살살 잘 부탁한다. 민중의 지팡이 씨.”

“그래! 나중에 두고 보자고!”

김철우는 가슴을 두드렸고, 진현과 황문진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그들은 진탕 술을 마셨다.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였다.

그때만 해도 진현은 모르고 있었다.

이들과 후에 어떤 인연으로 얽힐지.

***

“끄억, 한 잔 더 하지 않을래?”

2 차까지 달린 후, 10 시쯤 되었을 때 김철우가 비틀거리며 물었다.

“됐다. 많이 취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라.”

한 잔 더 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미 김철우는 많이 취했다. 황문진도 반 시체였다.

“괘, 괜찮은데…….”

“미래의 민중의 지팡이 씨가 더 취해서 비틀거리면 안 되지. 들어가자.”

“그, 그래.”

그렇게 친구들을 돌려보낸 진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잔 더 하고 싶긴 하군.’

적당히 마시긴 했으나, 딱 한잔이 아쉬운 상태? 문득 항상 술을 같이 마신 혜미가 떠올랐다.

‘혜미랑 마실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집에나 가자.’

터벅터벅 걸어 집에 도착했다.

“우리 아들 왔어?”
“네.”

“아이구, 이게 웬 술 냄새야? 빨리 씻고 들어가서 쉬어라.”

부모님과 인사 후, 간단히 샤워한 진현은 오랜만에 자신의 방에 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군데군데 곰팡이 슬어 있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낡긴 낡았구나. 이사를 해야 하는데…….’

진현의 가족은 한눈에 봐도 허름해 보이는 빌라에 세를 살고 있었다.

집이 좁은 것은 둘째치고, 여기저기 가득한 곰팡이와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벌레들, 통풍이 안 돼 퀴퀴한 냄새,
쇳물 섞인 수돗물… 여러모로 최악인 집이었다.

‘집을 하나 살까…….’

진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과외로 번 주식이 제법 올라 강남은 무리여도 어지간한 동네, 번듯한 아파트는 살 수 있었다.

더구나 아직 집값이 상승할 시기이니 투자목적으로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아니야, 아직 안 돼. 가지고 있으면 몇 년 뒤에 추가로 3-4 배는 오를 텐데 지금 팔면 너무 손해가 심해.’

물론 집도 사면 값이 오르기야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대일그룹의 주식만큼 오르진 않을 거다.

이미 집값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중이어서 올라봤자 끽해서 2 배 정도다.

‘돈이 조금만 더 생겼으면 좋겠군.’

진현은 문틈으로 거실을 내다보았다.

부모님들은 소파도 없이 낡은 바닥에 앉아 구식 TV 를 보고 있었다.

평생을 허름한 집에서 고생해 온 부모님을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짠했다.

‘나중에 돈 생기면 꼭 호강시켜 드려야지.’

***

구로동에 위치한 마인 바이오는 최근 엄청난 상승세를 보이는 바이오 회사였다.

진현이 도운 RI84 의 성공으로 기틀을 닦은 마인 바이오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회사 규모도 엄청나게 커져 확장 이전 및 공장 설립도 고려할 정도였다.

하지만 회사를 성공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장익기 사장은 최근 얼굴이 좋지 않았다.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와 합작으로 진행하는 TC80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사장님, 또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는 보고입니다.”

“그런가? 큰일이군, 하아.”

TC80 은 우울 증상에 작용하는 신약으로 이전까지 진행한 프로젝트들과는 규모자체가 달랐다. 이미 투자된 금액만
천문학적으로 프로젝트에 성패에 마인 바이오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

장익기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완벽했는데… 어째서 자꾸 이상 반응이 나오는 거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안 돼. 이미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갔어.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우리 마인 바이오는 파산할 거야.’

장 사장은 성공을 확신하고 TC80 프로젝트에 마인 바이오의 모든 것을 투자했다. 외부에서 끌어들인 투자도
어마어마했다.

“왜 이렇게 이상 반응이 나오는 걸까요? 이렇게 이상 반응이 계속되면 프로젝트 자체를 백지화해야 할 수도
있는데…….”

마인 바이오의 핵심 멤버, 김박사의 우려에 장 사장은 시름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이 프로젝트에 우리 회사의 모든 것을 걸었어. 절대 실패하면 안 돼!!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게.’

하지만 이미 백방으로 노력해 봤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깊은 수렁에 빠진 느낌이다.

그때 한 직원이 말했다.

“사장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구?”

“헤인스의 에이미입니다.”

“……!”

장익기 사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에이미는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의 한국 지부 부사장이었다.

“에이미 부사장이 직접? 어서 들어오라 하게.”

곧 서늘한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여성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지적인 아름다움을 가득 품고 있는 미녀였다.

검은 정장이 그녀의 인상을 차갑게 만들어 도도한 매력이 흐르게 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이미.”


장 사장은 유창한 영어로 에이미 부사장을 환대했다.

하지만 에이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안 좋은 일을 상의하고자 왔습니다.”

그 말에 장 사장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시점에서 안 좋은 일이란 단 하나밖에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3

33.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 (2)

역시나 에이미는 장 사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을 하였다.

“연이은 이상 반응으로 본사에서 TC80 프로젝트의 폐기를 검토하는 중입니다. 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

장 사장은 급히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겨우 몇 건의 이상 반응으로 폐기라뇨. 아직 이상 반응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소화기 계통에 여러 차례 동일한 이상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복통과 설사가 심한데… 안정성을 시험하는
1 상에서 이러면 뒤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본사 차원에서 폐기를 검토 중입니다.”

장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TC80 프로젝트가 좌초되면 우리는 파산이야.’

장 사장의 머리에 지금껏 일궈온 마인 바이오가 무너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곧
닥칠 현실이었다.

“제발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희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습니다.”

“저희 헤인스도 다방면으로 분석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무리입니다.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해결을
하겠습니까?”

에이미는 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프로젝트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애초에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처음 추진했던 사람으로 이번 실패 때문에 경력의 상당한 흠집을 남기게 되었다.

“저도 어떻게든 TC80 프로젝트를 살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후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지금이라도 폐기를 하는 게 상책입니다.”

장 사장은 아득한 마음으로 생각을 굴렸다. 어떻게든 폐기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렸다.

몇 년 전, 마인 바이오를 구해준 어린 학생.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마인 바이오를 이 위치까지 끌어올린 1 등 공신은 장 사장도, 김 박사도 아닌, 바로 그


어린 학생이었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보겠습니다.”

“전문가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한국대 의대의 학생입니다.”

“네? 뭐라고요? 학생이라고요?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에이미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저희 헤인스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이미 자문을 마친 상태입니다. 그런데 고작 학생에게 의견을


구한다고요?”

Are you kidding me?

그녀는 장 사장에게 당신 나 놀리는 거지? 란 표정을 지었다.

장 사장은 에이미의 반응을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황당할 것이다.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에 고작 학생의 의견을 묻자니.

하지만 장 사장은 RI84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진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보여준 전문가적인 식견과 아이디어, 창의력은 고작 나이와 학생이란 신분으로 편견 지을 게 아니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 학생은 정말로 저희 프로젝트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 세계적인 천재가 여기 한국에 있었나 보군요.”

에이미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장 사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재가 맞습니다.”

“뭐라고요?”

장 사장은 진지한 눈으로 그녀의 푸른 눈을 직시했다.

천재.

그 말 외에 무엇으로 진현을 설명할 수 있을까?

“네, 천재가 맞습니다. 그러니 속는 셈 치고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학생에게 자문을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하…….”

그녀는 황당한 마음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물론 그녀도 프로젝트가 잘되길 기원한다.

하지만 학생에게 자문을 구하다니? 차라리 별똥별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게 낫겠다.

그녀는 붉은 입술로 장 사장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쨌든 마음이 아프지만… 뾰족한 수가 안 나오면 저희 헤인스는 TC80 프로젝트를 폐기할
겁니다.”

“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장 사장은 진현을 믿었다.

아니, 진현 외엔 잡을 지푸라기가 없었다.

만약 진현마저 답이 없으면 마인 바이오는 파산할 것이다.

장 사장은 절박한 마음으로 진현에게 연락했다.

***

띠리리.

울리는 벨에 진현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장익기 사장.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전화가 오네.’

RI84 프로젝트 후에도 진현은 여러 번 장익기 사장과 술 만남을 가졌었다.

그런데 취할 때마다 계속 마인 바이오로 취직을 강권해서 요즘은 슬슬 피하고 있었다.

띠리리.

계속 벨이 울려 진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진현 군, 나 장익기야.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입니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후, 진현이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혹시 최근에 바쁜가? 잠깐 만났으면 좋겠는데…….

진현은 생각했다.

‘술 마시잔 건가?’

그는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장 사장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요즘 신약을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자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

진현은 눈을 살짝 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최 교수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마인 바이오의 신약이면 TC80 인데… 그걸 왜 학생인 나한테?’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더구나 TC80 은 마인 바이오 독자 개발이 아니라 무려 헤인스와 합작으로 진행하는 약품이다.

어쨌든 그는 정중히 말했다.

“신약 개발의 수준의 일이면 학생인 제가 도움을 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아니야, 그래도 한번 만나서 이야기만이라도 들어보게. 내가 근사한 밥이라도 살 테니 꼭 부탁하네.

“죄송하지만 제가 큰 도움이 못될 것 같습니다.”

진현의 계속된 거절에 장 사장은 무겁게 말했다.

-사실 우리 마인 바이오가 많이 힘드네. 이번 일을 잘 못 넘기면 부도가 날지도 몰라.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우리에게 도움을 주게. 아니, 도움을 못 줘도 상관없으니 와서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주게.

“……!”

결국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요.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래 주겠나? 하하, 고맙네. 고마워.

진현의 승낙에 장익기 사장은 신이 나서 약속을 잡았다.

오늘 당장에라도 만나려는 걸, 과제를 핑계로 간신히 늦춰 주말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전화를 끊은 진현은 생각에 잠겼다.


“TC80 이라…….”

그는 TC80 프로젝트의 결말을 알고 있다.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인데… 이전의 삶 때도 마인 바이오가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결국엔


실패했지.’

아무리 미래를 경험한 진현이라도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수는 없다.

약물 분자 구조의 특성상 이상 반응이 오는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애초에 시작부터 실패한 신약 개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마인 바이오 주가가 한창 치솟다가 주춤 떨어지던데… 정말 많이 힘든가?’

이전 삶 때는 TC80 프로젝트의 실패에도 불과하고 주가가 고공행진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빠르게 올라가던 주가의 추이가 최근 주춤 심상치 않았다.

이전 삶 때와 다르게 장 사장이 TC80 에 무리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테마주 마인 바이오의 무리한 투자와 실패.’

이런 소문이 벌써 증권가에 돌고 있었고, 신약 개발이 좌초되면 분명 큰 폭으로 주가가 떨어질 거다.

그러면 정말로 장 사장의 말처럼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

‘안 돼, 부도가 나면.’

진현은 현재 상당한 양의 마인 바이오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스톡옵션으로 받은 그 주식은 현재 1 억 원 정도로 상승했고, 이전 삶처럼 마인 바이오가 성장하면 4 억 원


이상까지 오를 것이다.

하지만 마인 바이오가 이번 일로 꼬꾸라지면 4 억으로 성장은커녕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4 억을 날릴 수는 없어. 어떻게든 도움을 줘야겠군.’

어려운 과제를 안은 진현은 고심에 잠겼다.

***

며칠 뒤, 진현은 고급 한정식 집에서 마인 바이오의 장 사장을 만났다.

“진현 군, 어서 오게.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장 사장은 반갑게 진현을 맞았다.

장 사장의 얼굴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상태였다. 눈가에 짙은 시름이 가득했다.


“이리로 오게. 아,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 소개할 분이 한 명 있네.”

미닫이문을 열고 예약된 방에 들어가니 검은 정장을 입은 백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이지적인 미녀였지만, 도도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녀를 본 진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저 여자는? 헤인스의 에이미?’

장 사장이 그녀를 소개했다.

“헤인스의 에이미 부사장이라고 하네.”

소개가 없어도,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물론 지난 삶, 대일병원에서 일할 때 잠깐 만난 거긴 하지만. 당시 그녀는 헤인스의 한국 지사 부사장이 아닌,


사장이었다.

“반갑습니다, 김진현이라 합니다. 미스터 김이라 하면 됩니다.”

진현은 영어로 말했다.

장 사장이 에이미에게 그를 소개했다.

“미스 에이미, 김진현 학생입니다.”

“에이미라고 해요.”

에이미는 눈만 살짝 까닥했다. 파란 눈에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했다.

장 사장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나온 그녀는 바쁜 내가 왜 이런 학생을 만나고 있어야 하지? 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힐끗 진현을 훑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였다.

장 사장이 극찬한 김진현이란 남학생은 다른 일반적인 동양인 학생들보다도 더 어려 보였고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 눈빛이 기이하게 깊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우유냄새 나는 애송이일 뿐이다.

“장 사장님, 당신 부탁대로 나오긴 했지만… 저는 무척 바빠요.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그녀의 까칠한 재촉에 장 사장과 진현은 자리에 앉아 음식도 나오기 전에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이유는 TC80 프로젝트라고 우리가 헤인스와 합작으로 진행하는 신약 개발 때문이네.
최근 계속해서 이상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원인과 해결책을 알 수가 없어서 혹시나 자네에게 좋은 생각이 있을지
물어보려 만나자 한 거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먼저 연구의 개요를 볼 수 있을까요?”

장 사장은 TC80 의 분자식과 작용 기전, 1 상 연구 계획 진행 사항, 향후 2 상, 3 상 계획이 적힌 보고서를


진현에게 건네주었다.

진현은 빠르고 자세하게 보고서를 읽었다.

‘마인 바이오를 살려야 해.’

이 자리에 오기 전, 나름의 조사를 통해 마인 바이오가 정말로 위기란 것을 알았다.

이대로 진행하면 TC80 프로젝트의 실패로 마인 바이오는 무너질 것이고, 그의 4 억은 공중으로 날아갈 거다.

한편 에이미는 진현이 보고서를 빠르게 읽어 나가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내용을 이해는 하고 훑는 건가?

“내용이 이해는 되나요?”

날이 선 목소리에 진현은 에이미를 바라봤다.

“5-HT 수용체에 작용하는 우울 증상 개선 약물이군요. 정신분열병 및 조울증에도 효과를 기대했으나… 1 상 실험


결과 원인 불명의 이상 반응이 계속 보고되고 있는 듯하군요.”

정확히 핵심을 꿰뚫는 말에 에이미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 정도를 알아보는 건, 관련 분야에 지식이 있다면 대단한 일은 아니다.

“5-HT 중 정확히 어떤 수용체죠?”

“5-HT7 입니다.”

“5-HT7 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지는 아시나요?”

“5-HT7 의 메커니즘은…….”

진현은 5-HT 7 의 메커니즘을 완벽히 설명하였다.

그 한 치의 막힘도 없는 대답에 에이미의 눈이 살짝 커질 때, 진현이 가만히 에이미를 바라봤다.

“미스 에이미, 뭔가 오해가 있나 봅니다.”

“네?”

“전 TC80 의 문제점을 상의하기 위해 온 거지, 시험이나 면접을 보러 온 것이 아닙니다. 테스트하는 듯한 질문은


삼가주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

# 34
34.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 (3)

에이미의 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시험하듯 물은 건 미안해요. 그러면 미스터 김은 TC80 이 어째서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나요?”

당연히 알고 있었다.

TC80 이 폐기된 원인이었으니까.

진현은 보고서 중, 분자식을 나타낸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끝부분을 가리켰다.

“이곳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미스 에이미는 이 부분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에이미는 눈썹을 찌푸렸다.

“전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예요. 당연히 알고 있죠. 그 부분은 5-HT7 에 작용하는 핵심적인 부분이에요.”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반만 맞았습니다.”

“뭐라고요?”

“이 부분은 5-HT7 에 강력한 결합성을 보이죠. 그래서 다른 기존 약들보다 강한 효과가 기대되는 거고요.”

“그런데요?”

“하지만 이런 구조식은 5-HT7 이 아니라 다른 수용체에도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 구조식이 뜻하지 않게 다른


수용체를 강하게 자극해 이상 반응이 나타날 확률이 높습니다.”

“……!”

그 말에 에이미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진현이 한 말은 기존 헤인스의 전문가들이 분석한 내용과 일치했다.

실제로 헤인스는 해당 부위가 다른 수용체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약리학, 생물학의 최고 전문가들이 혼신을 기울여서야 알아난 내용을 고작 분자식만 보고 유추하다니?

‘말도 안 돼. 그냥 룰렛 던지듯, 찍은 것 아니야?’

에이미는 진현이 정말 알고 한 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정확히 어떤 수용체에 작용할 것이라 보는 거죠?”

“지금 단계에서 정확한 수용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단 임상 양상을 보았을 때, 또 다른 5-HT 인 5-HT4 일


가능성이 높다 봅니다.”

“……!”

에이미는 입을 벌렸다. 이것도 헤인스가 분석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어떻게… 그걸? 분자식만 보고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닌데…….”

“이전 실패한 약물들의 사례를 통해 짐작한 것입니다. 비슷한 종류 중 5-HT4 에 작용하며 이상 반응을 일으킨
약물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에이미는 놀란 눈을 거두지 못했다.

말이야 쉽지, 고작 분자식과 몇 사례 가지고 원인을 유추하는 건, 관련 분야의 대가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이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장 사장이 화색을 띠우며 물었다.

“역시 진현 군이네. 대단해! 그러면 앞으로 이상 반응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겠나?”

장 사장은 진현이 마술처럼 해결책을 내놓을 거라 믿었다.

에이미도 처음에 무시하던 마음은 어느새 잊고 진현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진현은 그저 식은 요리를 뒤적일 뿐, 좀처럼 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나? 기다리다 숨넘어가겠네. 좋은 생각이 있으면 빨리 말해보게.”

장 사장은 다급한 얼굴로 재촉했다.

결국 진현은 그들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응?”

“애초에 설계 자체가 잘못된 분자식입니다. 현재로서는 어떤 방법을 써도 이상 반응을 피하며 우울 증상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

장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현의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 그런……. 그럴 수가…….”

장 사장은 말을 더듬었다. 찻잔을 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에이미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인스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분석 결과와 동일한 의견이야. 그래, TC80 은 무슨 수를 써도 살릴 수 없어.’

처음 프로젝트를 추진한 그녀도 속이 쓰렸지만, 문제가 있는 신약 개발은 최대한 빨리 폐기 하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이런 지식과 식견이라니. 대단해.’

그녀는 진현이 허황된 말을 하지 않고 프로젝트의 폐기를 제안한 걸 오히려 높게 보았다.

‘한국대 의대생이라 했나? 앞으로 어떤 과의 의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지내서 나쁘지 않겠어.’

헤인스는 한국대 의대와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벌써 이 정도의 실력이면 후에는 좋은 협력자가 되리라.

장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 정말… 프로젝트를 살릴 수는 없겠나? 이 프로젝트가 폐기되면… 우리 마인 바이오는…….”

“없습니다.”

“아…….”

장 사장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진현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단, 프로젝트는 폐기해야겠지만 TC80 을 살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

그 말에 장 사장과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프로젝트는 폐기하고 TC80 은 살릴 방법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이미 구조부터 잘못 설계된 TC80 을 살리다니? 불가능한 일이에요.”

에이미는 허튼소리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현이 물었다.

“만약 정말로 TC80 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저희 헤인스는 미스터 김에게 억만 불이라도 지불하겠어요.”

“그 말 정말입니까? 억만 불이라도 지불한다는 말, 믿어도 됩니까?”


그 확고한 목소리에 에이미는 진현의 눈을 바라보았고 깜짝 놀랐다.

지금 이 동안의 동양 청년은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깊은 눈은 믿을 수 없게도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로 TC80 을 살릴 수 있다고? 어떻게?’

옆에서 장 사장이 답답한지 끼어들었다.

“진현 군, 도대체 무슨 방법인데 그런가? 나 숨넘어가겠네.

하지만 진현은 쉽게 입을 열지 않고 다시 물었다.

“정말로 TC80 을 살릴 수 있으면 억만 불이라도 지불하겠습니까?”

그는 에이미의 푸른 눈을 직시했다.

진현의 확고한 눈빛을 받은 에이미는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억만 불까진 못 드려요. 하지만 정말로 TC80 을 살릴 수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진현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2 억.”

“네?”

“최소 2 억, 제 아이디어의 가격입니다. 만약 이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방안을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에 장 사장은 입을 떠억 벌렸다.

아이디어 하나에 2 억을 달라니? 그는 진현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지, 진현 군? 이게 무슨…….”

그러나 진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에 무료 봉사를 할 이유는 없지. 그리고 훗날 확인된 TC80 의 시장가치를
생각하면 2 억은 헐값이나 마찬가지야.’

진현이 지금 제안하려는 아이디어는 단순히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미래에 장기간 임상실험을 통해 입증된 사실로, 그 가치는 상승을 초월했다.

‘2 억이 아니라, 10 억을 받아도 모자라지만… 미래에 입증되었단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런 점을 감안해도 2 억 이하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2 억도 억울할 정도로 헐값이다.

진현은 에이미를 바라봤다. 에이미도 진현을 노려보듯 바라봤다.


“당신이 무슨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이에요.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그걸 실제 현실에 적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예요.”

고작 아이디어만 가지고는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진현은 말했다.

“만약 아이디어가 가치 있다 생각하면 모든 아우트라인을 총괄하는 스터디 디자인을 기획해 드리겠습니다. 단


스터디 디자인을 기획해 주는 대가로 1 억을 추가로 지불하셔야 합니다.”

장 사장의 턱이 빠질 듯 떨어졌다. 앉은 자리에서 3 억을 요구하다니?

“…….”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에이미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당돌한 요구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TC80 의 시장가치를 생각하면 헐값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거죠?”

진현은 주저없이 답했다.

“이 자리에서 일어나 클라인으로 간 후, 동일한 제안을 할 것입니다.”

“……!”

클라인은 헤인스와 경쟁 상대인 거대 다국적 제약회사였다.

장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현이 다른 제약회사의 손을 잡는다면 마인 바이오는 그대로 파산이다.

“지, 진현 군…….”

“물론 장 사장님과의 인연도 있어, 전 가급적 마인 바이오, 헤인스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판단은
부사장께서 하십시오.”

진현의 말을 끝으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똑딱똑딱.

에이미의 시계만 초침을 움직일 뿐, 방 안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식탁에 올려진 고급 음식들이 차갑게 식었다.

그 음식들을 보며 진현은 말했다.


“음식이 식습니다. 드시면서 생각하시죠.”

그리고 진현은 젓가락을 들었다.

그 편안한 태도를 보자 에이미는 갑자기 너털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장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에이미가 웃는 걸 처음 봤다.

“미스터 김,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죠?”

“진현 김입니다.”

“실례지만 나이는?”

“한국 나이로 24 살입니다.”

“한국식으로 24 살… 어리군요.”

에이미는 미소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얼음 위에 핀 꽃이랄까?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녀의 미소는 생각보다 예쁘고 부드러웠다.

“실제 아이디어의 가치완 별개로, 그 당당한 태도는 대단하군요. 나이를 떠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예요.”

그 의외의 말에 진현이 살짝 당황하는 순간, 에이미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좋아요. 우리 헤인스에 큰 피해를 준 TC80 을 살릴 수만 있다면 고작 그 정도의 돈이 뭐가 아깝겠어요? 당신의


조건에 응하겠어요. 단! 당신의 아이디어가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동전 한 푼도 기대하지 마세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이디어의 가치는 미스 에이미가 듣고 판단해 주십시오.”

“알겠으니 빨리 말해보세요.”

장 사장도 귀를 쫑긋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우울증 치료제 등의 신경정신약으로 TC80 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작용이
심하기 때문이죠.”

“그러면요?”

진현은 바로 답하는 대신 한 가지 질문을 하였다.

“TC80 의 부작용이 무엇입니까?”

“주로 소화기계통이잖아요. 개중 복통과 설사가 심하죠.”

“그러면 왜 복통과 설사가 올까요?”


“아까 당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쪽 수용체에 작용하기 때문이죠.”

“네, 맞습니다. TC80 은 우울 개선 효과뿐 아니라 다른 수용체에 작용해 복통과 설사를 유발시키죠. 그러면 그
수용체는 어떻게 복통과 설사를 유발시킬까요?”

“그야…….”

이번엔 에이미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진현이 설명했다.

“장운동 기능이 지나치게 자극되어서 그렇습니다. 얌전히 있어야 할 장의 기능이 항진되어 무리하게 날뛰니
복통이 일어나고 설사가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요? 그거랑 TC80 을 살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에이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현은 나직이 말했다.

“장운동 기능을 지나치게 자극시킨다는 말은… TC80 이 소화기능 촉진제로도 사용할 수 있단 뜻 아닐까요?
그것도 강력한.”

“……!!”

에이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진현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그, 그 말은……?”

“네, 이상 반응을 오히려 약으로 이용하잔 거죠. TC80 은 강력한 소화기능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특히 기존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변비 환자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에이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지만, 어마어마한 아이디어다.

수백억 손해를 줄 뻔한 TC80 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바꿀 만한.

‘더구나 소화기능 시장은 우울증 시장보다 훨씬 커. 만약 상용화만 된다면…….’

그녀는 한국 지사의 부사장이 아니라 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본사에 간부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말처럼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신의 아이디어는 잘 들었어요. 하지만 치료약으로 쓰기에는 복통과 설사가 너무 심해요. 독약을 약으로 팔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신경정신계통에 작용하던 약을 소화제로 팔다가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르고요.”

옳은 지적이었지만 진현은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5

35. 외과의사 (1)

“용량을 낮추면 됩니다.”

“용량을요?”

“네, 5 분의 1 정도로요. 물론 처음에 임상 실험을 할 때는 안전하게 29 분의 1 이상 낮춰서 시작해 점차적으로


증량하면서 적절한 용량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자식과 각각의 수용체의 특성상 신경계통에는 전혀
작용을 안 하고, 소화계통에만 적절한 정도로 작용할 것입니다. 복통은 소화제가 되고, 설사 반응은 변비
치료약이 되겠지요.”

“……!”

그 말에 에이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맞는 말이었다.

용량을 낮추면 복통은 소화제로, 설사는 변비 치료제가 될 거다.

“제 제안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에이미가 갑자기 진현의 손을 잡더니 바싹 진현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아찔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에 진현이 당황하는 순간, 에이미가 파란 눈을 불태우며 말했다.

“스터디 디자인 정말로 기획해 줄 수 있나요?”

“네?”

“최대한 빨리. 가능해요?”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3 억짜리 계약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헤인스의 한국지부 부사장 에이미는 TC80 이 소화 계통 약으로 거듭날 경우의 시장가치를 단숨에 파악해 강한
추진력으로 일을 진행했다.

새롭게 찾은 TC80 의 활로에 마인 바이오의 주식도 다시 상승가로 돌아왔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진현 군.”

“아닙니다.”

장 사장의 감사에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순히 선의로 장 사장을 도운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금전적 대가를 주고받았다 하더라도, 진현이 다시 한번 마인 바이오를 구한 건 엄연한 사실이라 장 사장은
연신 진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편 진현이 스터디 디자인을 기획하는 걸 보고, 에이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 당신……? 어떻게 이런……?”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완벽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녀의 말처럼 진현의 스터디 디자인은 한 치의 흠도 없이 완벽했다.

고작 학생이 이런 스터디 디자인을 구상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경탄에 진현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완벽하지. 도용한 거니까.’

사실 이 아이디어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TC80 이 폐기된 후, 몇 년 뒤 발상의 전환을 한 헤인스의 누군가가 제시한 아이디어였다.

진현은 과거 대일병원에서 헤인스의 TC80 의 3 상 임상 실험 진행을 도왔었다. 따라서 스터디 디자인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공을 가로챈 느낌이군. 어쩔 수 없지.’

그 사실을 모르는 에이미는 진현을 인간이 아닌,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는 병원 실습을 나가면서 TC80 프로젝트를 병행했다.

이미 답을 알고 문제를 푸는 격이어서, 어려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빨리 디자인 기획을 마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TC80 프로젝트로 받은 돈의 사용을 고민했다.

‘그냥 대일그룹 주식에 투자할까?’

이미 많이 올라서 이전처럼 10 배의 수익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아직 오를 여력이 많이 남아 있다. 4 억을


투자하면 최소 3 배는 오르리라.
‘좀 더 다른 종목들도 알고 있으면 좋을 텐데.’

진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전의 삶 때 병원에만 처박혀 살아 시사, 경제지식이 너무 약했다.

분명 지금도 10 배 이상 오를 종목들이 있을 텐데… 문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냥 대일그룹에나 투자하자. 그래도 3~4 배가 어디야.’

그렇게 모두 주식에 투자하려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 허름하게 살던 집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니야. 이번엔 주식에 투자하지 말고 집을 사자.’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인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번엔 이 돈을 투자가 아닌, 부모님의 효도를 위해 쓰기로 했다.

“어머니, 우리 괜찮은 아파트로 이사 가요.”

“응? 얘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우리가 돈이 어디 있다고.”

부모님은 진현의 말을 가볍게 흘러들었다.

낡은 집에서 벗어나고야 싶지만 돈이 어디 있는가?

진현은 가만히 통장을 열어 보여주었다.

“이것 보세요.”

“응? 이게 뭔데?”

“제가 번 돈이에요.”

“아니, 공부로 바쁜데 무슨 돈을 벌었어?”

그리고 통장을 확인한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모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아니? 이게 0 이 몇 개야? 내가 나이가 들어 눈이 잘못 됐나?”

“당신도 그래요? 이거 뭔가 잘못 찍혀 있는 것 같은데…….”

진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거 맞아요. 전부 합쳐서 3 억이에요. 제가 이번에 제약회사랑 일해서 번 돈이에요.”

다른 통장엔 예과 때 번 돈을 몇 배로 불린 돈이 추가로 있었지만,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

그들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현아, 너 설마 나쁜 방법으로 돈 번 건 아니지?”

“그래, 제약회사랑 리베이트라든지…….”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학생이 어떻게 리베이트를 받아요. 이번에 미국의 제약회사와 큰 프로젝트를 진행 후 받은 거예요.”

그는 마인 바이오와 헤인스의 일을 설명했다.

부모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아들이 리베이트 같은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단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면 정말 이게 네가 번 돈이란 거니?”

“네, 이 돈으로 우리 집 사서 이사 가요.”

“아이구, 이게 웬일이야?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장한 아들을 낳았을까?”

아버지도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이사를 하잔 말에는 반대했다.

“이건 네가 번 돈이다. 우리를 위해 쓰지 말고, 나중에 너를 위해 쓰도록 해라.”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들. 우리들은 굳이 이사할 필요 없으니 나중에 아들이 써.”

그들은 아들이 이렇게 큰돈을 벌었단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러나 진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돈은 나중에 또 벌 거예요. 이 돈으로는 이사해요. 그리고 집은 일단 사놓으면 계속 오르니 투자 목적으로도


은행에 가지고 있는 것보단 집을 사는 게 이득이에요.”

아직까진 부동산 불패 신화란 말이 통하고 있을 때였다.

실제로 강남권은 이미 많이 오른 상태지만, 강북은 상대적으로 상승폭이 더뎠다.

한강이 인접한 곳에, 위치 좋은 곳을 물색하면 최소 1.5 배, 많게는 2 배 가까이 오를 곳이 꽤 있었다.

진현의 계속된 설득에 부모님들은 결국 항복했다.

“그래, 알겠다. 대신 아파트를 사면 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가져가야 한다. 알았지?”

진현은 웃었다.

“걱정 마세요. 나중에는 더 돈 많이 벌거니까.”


부모님들이 평생 식당을 하며 모은 5,000 만 원을 추가로 보태 3 억 5 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아파트를 봤다.

본인이 살던 낡은 빌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파트들의 번듯함에 어머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어머, 우리가 정말 이런 데 들어가서 살 수 있다고?”

“네, 더 좋은 데도 많으니 다른 데도 가봐요.”

진현은 몇 년 뒤 집값이 폭등할 동네, 그중에서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위주로 매물을 알아봤다.

부모님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좋구나.’

세상 사는 게 뭐 있겠는가?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부족하지 않게, 풍요롭고, 안락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그의 꿈이었다.

***

그런데 학업과 TC80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무리한 탓일까?

진현은 그만 감기에 걸려 버렸다.

“진현아, 괜찮아? 얼굴이 뜨거운데…….”

“괜찮다.”

“오늘부터 외과 실습 시작인데 어떻게 해?”

혜미는 진현의 이마를 짚어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반년간의 내과실습이 끝나고 외과실습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제 진현도 몇 달만 있으면 본과 4 년 차, 졸업 학년이 된다.

“내과 때와 다르게 외과 실습 때는 수술장에 들어가야 해서 몸을 많이 써야 하는데… 왜 아프고 그러냐.”

혜미는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다.”

“오늘은 꼭 빨리 쉬어. 또 무리하면 이 누나한테 혼난다? 알았어?”

“누가 누나냐? 하여튼 알겠다.”

“힘들면 바로 이야기하고.”
마치 연인을 챙기는 듯한 모습에 진현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오버는.

“빨리 외과 회의실로나 가자. 늦겠다.”

외과 실습 첫날로 치프에게 회의실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듣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10 분 일찍 도착한 진현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프긴 하군.’

화끈화끈 열감이 강했다. 독감일까?

‘그나저나 외과 실습이라… 싫은데.’

진현은 속으로 쓴웃음 지었다.

회귀 전, 지난 삶에서 그의 직업은 외과 전문의였다. 그것도 나름 국내 최고 대일병원에서 일하던.

‘옛날 생각나는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안타깝게 놓치기도 했다. 욕을 듣기도 했으며, 감사하단 말도 많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으나 결국엔 실패한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과가 싫었다. 실습이나마 외과를 돌아야 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빨리 외과 실습이 끝났으면 좋겠군.’

곧 회의실 문이 열리며 흰 가운 아래 파란 수술복을 입은 삐쩍 마른 남자가 들어왔다.

“난 치프 남기택이라고 한다. 다들 왔어?”

외과 치프 남기택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살이 없는 얼굴에 다크 서클이 진했다. 성실한 인상이지만 딱 봐도 피로가 가득했다.

“네, 다 왔습니다.”

혜미가 대표로 답했다.

“그래, 시간 없으니 바로 시작하자. 내과 실습은 다 돌고 왔을 거고… 너희는 외과와 내과의 차이를 아니?”

아이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외과 치프 남기택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말이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 안 했어. 흠… 어디 보자, 김진현? 누가


김진현이지?”
그는 인적 사항을 적은 종이를 훑어보다, 당당히 1 등이라 표시되어 있는 김진현을 호명했다.

“네, 제가 김진현입니다.”

진현은 감기 때문에 힘없이 답했다.

“네가 1 등이지? 내과에서 칭찬이 자자하던데. 그래, 너는 내과와 외과의 차이를 뭐로 생각하지?”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이다.

진현은 한 단어로 답했다.

“수술입니다.”

치프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외과는 수술을 하는 과지. 내과가 약으로 사람을 살리면, 외과는 수술로
사람을 살린다.”

그는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따라서 내과의사가 똑똑해야 한다면, 외과의사는 수술을 잘해야 한다. 즉, 손재주가 좋아야지.”

그 말에 진현은 속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손재주? 본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진현과 남기택은 이전의 삶에서 구면이었다.

한국대 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남기택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후에 대일병원의 외과 교수가 되었었다.

하지만 그는 성실성과 별개로 손재주가 지독히 없어 수술 중 여러 번의 의료사고를 냈다.

‘뭐, 부단한 노력 덕분에 나중에는 좀 나아지긴 하지만.’

치프 남기택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외과 실습은 수술 위주로 돌아갈 거고, 지금까지의 공부와는 완전히 다를 거다. 그러니 김진현.”

남기택이 진현을 바라봤다.

“네?”

“공부 잘하는 거랑 수술 잘하는 거는 전혀 별개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술장에 들어와. 너처럼 공부만 하던
애들이 수술장에서 적응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 다들 열심히 하도록.”

학생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외침 속에서 진현은 남기택의 말을 생각했다.

‘수술장에서 적응이라…….’

속으로 실소했다.

그는 과거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수술장에서 보냈다.

‘하지만 이젠 싫어.’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수술은 이미 지난 삶 때 지긋지긋하게 해봤다. 더 이상은 싫었다.

‘정말로 싫어. 정말로.’

(다음 편에서 계속)

# 36

36. 외과의사 (2)

독감인 걸까, 감기는 점점 더 악화됐다.

39 도가 넘는 고열이 지속되었고, 옷을 겹겹이 껴입고도 추위에 몸이 떨렸다.

“진현아, 정말 괜찮아?”

“괘… 괜찮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되겠어. 선생님께는 내가 말할 테니 집에 가서 쉬어. 아니, 이거 집에 가는 게 아니라


입원해야 하는 것 아니야?”

“집은 무슨… 정말 괜찮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모를까, 고작 감기로 병원을 빠지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아, 왜 아프고 그래. 속상하게.”

혜미는 마치 본인이 아픈 것처럼 속상한 얼굴을 했다.

진현은 책상에 손을 받쳐 엎드렸다.

“괜찮으니 걱정 마라. 조금만 잘게.”

“그래, 푹 자. 수술장엔 못 들어간다고 내가 이야기해 놓을게.”


확실히 지금 몸 상태로 수술장은 무리긴 했다.

혜미가 치프에게 말하러 나가고, 진현은 강의실에 혼자 남았다.

엎드려 있으니 잠은 안 오고, 머리는 망치로 두드리듯 아프고, 최악이었다.

‘그래도 수술장 안 들어가는 거는 좋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수술장에 들어가는 것보단 아픈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는 수술장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지난 삶의 경험으로 지긋지긋해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거부감이 너무 컸다.

‘모르겠다. 안 들어가면 좋지. 어차피 피부과 의사가 되면 앞으로 평생 수술을 할 일은 없을 테니까.’

***

열흘 가까운 시간이 지났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보통 감기가 5~7 일이면 낫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폐렴 같은 이상한 감염증은 아니겠지?’

진현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고열에, 으슬으슬하고, 머리 아프고, 전신 근육통, 복통이 있긴 했지만 다른 질환이 의심되진 않았다.

‘하아… 열병도 아니고, 힘들군.’

병원을 빠지진 않았지만,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덕분에 수술장은 계속 피할 수 있었다.

“김진현, 너 진짜 몸 괜찮냐? 이상한데…….”

같은 조원 중 한 남자가 말했다.

다른 조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미 나을 때가 한참 지났는데… 차도가 없으니.”

“…괜찮다.”

진현은 고열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답했다.

다른 한 조원이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며 걱정했다.

“그나저나 진현이 너 수술장 계속 못 들어가서 어떻게 하냐? 너도 수술장에 들어가서 좀 배워야 할 텐데.”
“그러니까. 수술도 의학에 중요한 분야인데 들어가서 좀 배워야 할 텐데. 책으로 공부한 거랑 실제 수술은 아예
다르더라고.”

“그래, 역시 남자는 내과보단 외과인 것 같아.”

조원들은 다소 흥분해서 떠들었다. 그 모습에 진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처음 수술장에 들어가 들떴군.’

그도 학생 때 그랬다.

‘수술장에 들어가면 그냥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수술을 해볼 수 있으니 들뜰 만하지.’

학생들은 수술장에서 인턴을 대신해 세컨드(Second) 혹은 써드(Third) 어시스트의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중고등학생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역할밖에 시켜주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뭐, 다 한때지.’

“난 어차피 외과 할 거 아니니, 수술장에 안 들어가 봐도 된다.”

조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김진현 너는 얌전하게 생겨 수술이랑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다. 수술장에 들어가서 잘못하면 엄청
혼나니 그냥 여기서 쉬어.”

“맞아. 공부랑 수술은 전혀 다르니까. 어시스트도 손재주가 있어야 잘할 수 있더라고.”

진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말이 맞다.”

그리고 아이들이 수술장으로 떠난 후, 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어찔했다.

“진통제를…….”

그는 진통제를 구하기 위해 병원 지하에 위치한 직원 약국으로 향했다.

“뭐 드릴까요?”

“진통제… 최대한 많이요.”

그리고 진통제를 받아 들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진현은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어, 김진현 학생?”

누구나 호감을 가질법한, 반듯한 외모의 젊은 교수. 이범수가 진현을 불렀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잘 지냈어요?”

혜미의 친오빠인 그는 진현을 친근하게 대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얼굴이 반쪽 된 게 별로 잘 안 지낸 것 같은데? 어디 들어가서 커피 한 잔 안 할래요? 사줄게요.”

대화를 하고 있으니 머리가 망치로 두드리듯 아파, 빨리 돌아가고 싶었으나 교수가 권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요, 저기로 들어가죠.”

그들은 병원 내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직원이 친절하게 그들을 맞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 진현 학생은? 몸 안 좋은 것 같은데 따뜻한 걸로 마셔요.”

진현은 따뜻한 걸로 아무거나 시켰다.

별로 카페 취향이 아니어서, 뭘 시켜도 똑같았다.

커피를 받고 자리에 앉은 그들은 담소를 나눴다.

이범수 교수는 말했다.

“이전부터 김진현 학생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네? 어째서입니까?”

“우리 혜미를 항상 잘 봐주고 있잖아요.”

“아…….”

이범수 교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혜미가 진현 학생 이야기를 자주 해요. 잘 봐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친하게 지내는 것은 맞지만 잘 봐준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최근만 해도 진현은 혜미에게 해준 게 없고, 오히려 아픈 진현을 혜미가 돌봤다.


집까지 찾아와 간호하려는 걸 간신히 말렸을 정도다.

“진현 학생은 우리 혜미 어떻게 생각해요?”

이범수 교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둔한 진현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좋은 친구라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좋은 친구라…….”

왠지 아쉬워하는 목소리라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범수 교수는 시계를 봤다.

“어쨌든 좋아요. 진현 학생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우리 혜미와 앞으로도 잘 지내주세요.”

그 부탁에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걸 뭐하러 부탁하는 거지?

“네, 혜미랑은 앞으로도 잘 지낼 것입니다.”

“정말로 잘 부탁해요. 밖으로 티를 전혀 안 내서 그렇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불쌍한 아이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이범수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회의가 있어 먼저 가볼게요. 커피 아직 남았으니 천천히 마시고 일어나세요.”

홀로 카페에 남은 진현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의 김을 바라봤다.

‘이범수 교수라…….’

혜미는 진현에게도 이범수 교수 이야기를 자주했었다.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는 유일한 사람이라 그랬지?’

정확히 그녀의 가정사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상민만 봐도 범상치는 않았을 것 같다.

이범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도 혜미를 향한 마음이 가득했다.

멋진 외모, 유능한 실력, 다정한 성격… 배만 다를 뿐, 만화에나 나올 듯한 오빠다.

진현의 친구, 이상민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진현도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너무 아파 도저히 시끄러운 카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카페를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외과 치프 남기택이 카페에 들어오며 진현과 마주쳤다.

“너……? 김진현?”

진현을 본 남기택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너 아프다고 계속 수술도 빼주고 그랬는데,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있어?”

“……!”

진현은 남기택의 오해를 샀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지금은 학생 실습이 한창인 시간으로 학생 혼자 카페를 올 시간이 아니다.

“이놈, 이제 보니 아픈 게 아니라 꾀부린 거구만. 너 공부만 1 등이면 다인 줄 알아? 공부보다 중요한 게


성실이야, 이놈아.”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수술장을 한 번도 안 들어온 것 때문에 치프 남기택은 진현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프다고 해서 넘어가 주었건만, 수술장도 못 들어올 정도로 아프다고 한 놈이 카페에 와서 혼자 노닥거려?

진현은 오해를 풀 필요성을 느꼈다.

“선생님, 카페에는 저 혼자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내과의 이범수 교수님과 왔습니다.”

남기택은 다크 서클 가득한 눈을 찌푸렸다.

“이범수 교수님이랑? 없는데?”

“방금 가셨습니다.”

“이범수 교수님이랑은 왜 왔는데? 뭐 같이하는 일이라도 있어?”

“그냥 개인적인 일로 이야기를 하자고 하셔서…….”

남기택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봐라? 너 내가 평소에 웃고 다닌다 해서 만만해 보이냐? 그 바쁜 이범수 교수님이 너랑 왜 개인적인


대화를 해? 혜미의 친오빠라고 네 친구인 줄 아냐? 어디서 거짓말을 해?!”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단단히 꼬인 남기택은 진현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남기택은 화가나 말했다.


“너 앞으로 1 주일 동안 응급 당직이야. 새벽에 뜨는 응급 수술은 이제 전부 네가 들어와!”

응급 당직.

병원에 대기하며 밤중에 불시에 발생하는 응급 수술에 들어가는 당직을 뜻한다.

***

늦은 밤, 퇴근도 못하고 병원에 남아 당직을 서게 된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단히 오해를 사버렸군.’

아무래도 수술장에 계속 안 들어가면서, 뒤로 톡톡히 미움을 샀던 모양이다.

그는 수술장 한편에 마련된 탈의실의 일렬의자에 누웠다.

학생이라도 당직은 당직이라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딱히 아픈 몸을 누일 만한 곳이 없었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탈의실에는 진현 혼자밖에 없었다.

‘익숙한 공기구나.’

수술장 탈의실의 담배 섞인 매캐한 냄새를 맡으니 이전 삶이 떠올랐다.

‘여기서 참 담배도 많이 피웠는데.’

원칙적으로 병원 전체가 금연이지만, 바쁜 수술 사이, 5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어떻게 밖에까지 나갔다 오겠는가?

다들 탈의실에 마련된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물론 훗날 정부 차원에서 금연 정책이 강화되면서 그것도 어려워지긴 했지만.

‘수술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밤 동안 수술이 하나도 없긴 어렵겠지?’

무리한 바람이었다.

한국대 병원은 하루 밤에도 응급수술이 수없이 터진다.

그래도 진현의 바람 덕분이었는지, 밤 12 시가 넘어갈 때까지 응급수술이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새벽 1 시가 되었을 때, 그 행운도 끝났다.

띠리리.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외과 치프 남기택이었다.

-김진현? 병원에 있지?

“네, 수술장 근처에 있습니다.”

-그래, 급성 담낭염 환자다. 곧 수술 시작할 테니 7 번 방 쪽으로 와.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현은 수술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서늘한 푸른 수술복을 몸에 걸치는 순간,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회귀 후 처음이었다.

그는 고열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세수를 했다. 그리고 탈의실 문을 열고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두근.

나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건… 외면하고자 하는, 심장의 울림이었다.

두근.

기계로 이루어진 도시처럼 삭막한 수술장 복도를 보니 가슴이 떨렸다.

그래,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다.

감성이라곤 한 치도 들어올 수 없는, 이 차가운 공간에서 그는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싸움을 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수술장에 오기 싫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떨리는 가슴을, 두근거리는 심장을.

바로 그걸 느끼기 싫었다.

치열하고 아릿했던 이전 삶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7

37. 외과의사 (3)

‘됐어. 어차피 담낭염 수술은 길어야 2 시간. 빨리 하면 30 분 안에 끝나.’

진현은 고개를 저어 가슴의 떨림을 털고, 수술이 예정된 7 번 방으로 향했다.

7 번 방 앞에는 치프 남기택이 미리 와 있었다.

“왔어?”

목소리가 쌀쌀맞았다.

“네.”
“환자 마취 중이니, 손 닦고 들어와.”

남기택은 마취 유도 중인 환자를 살피러 들어갔고, 진현은 방 앞의 세면대로 향했다.

발로 밑에 위치한 스위치를 누르니, 쏴아 물이 흘러내렸다.

수술 상처 부위의 감염을 막기 위해선 손 닦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현은 무균적으로 소독약을 꺼내,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닦아 내렸다.

손에 존재하는 상재 세균의 수치가 제로에 수렴하도록 1 분 이상을 소독약으로 꼼꼼히 닦았다.

“너 깨끗이 닦았어?”

“네.”

“정말로? 손 잘못 닦아 수술 부위에 감염 생기면 알아서 해.”

남기택은 따닥따닥 물었다.

수술 부위 감염이 걱정이 되어서이겠지만, 진현에 대한 미움 때문에 더 그러는 것 같았다.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수술 가운 입어.”

수술 방 간호사가 소독된 기다란 막대로 수술 가운을 건네줬다.

무균 처리된 수술 가운은 아무렇게나 옷 입듯 걸치면 안 된다.

그렇게 입으면 균이 다 묻어 오염되기 때문에 철저히 무균적 원칙(Aseptic technique)에 맞춰 착의해야 했다.

“수술 가운 입는 법은…….”

치프가 그 방법을 설명하려는 순간, 진현의 몸이 움직였다.

오염되어도 되는 부위로 손이 들어가고 차르르 가운이 밑으로 펴진 후, 몸을 한 바퀴 돌아 끈이 저절로 감기게


했다.

그리고 매듭이 봉해진 종이 부위를 무균적으로 간호사에게 건네 마무리를 한 후, 소독 장갑을 끼었다.

“……!”

너무나 능숙한 가운 착의에 치프의 눈이 살짝 커졌고, 진현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아…….’

다른 의학적 지식과 다르게 이런 실무적 내용은 의학 서적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데 너무 능숙하게 처리해


버렸다.

익숙한 수술 가운을 받아 들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 탓이었다.


“수술 방 처음이라 하지 않았나?”

“네.”

“그래? 정말로?”

“…네.”

의아한 치프의 눈빛을 받으며, 좀 조심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러면 나 손 닦고 올 테니 환자 소독하고 있어.”

치프는 수술 침대에 마취된 채 누워 있는 환자의 상복부를 가리켰다.

젊은 여자 환자였다.

“네.”

그는 짙은 갈색의 소독약으로 소독을 하며 생각했다.

‘인턴은 없군. 나랑 치프 둘이서만 진행하는 건가?’

원래 수술 전 소독은 인턴의 몫이다.

하지만 치프 외에 다른 외과의사는 보이지 않는 게 이번 수술은 치프와 진현 둘만으로 진행하는 듯했다.

‘뭐, 담낭염 수술이야 원래 학생이랑 치프 둘이서 자주하니.’

늦은 밤이나 새벽에 응급으로 발생하는 담낭염 수술은 치프와 인턴 혹은 치프와 저년차 레지던트 둘이서 하는 게
보통이지만, 치프와 학생 둘이서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어차피 이런 수술은 특별한 문제만 안 생기면 집도하는 사람의 실력이 중요하지, 어시스트가 누구냐는 크게 안
중요하니까.’

그도 이전 삶에서 치프 때 학생 데리고 많이 했었다.

‘담낭염 수술은 진짜 많이 해봤지.’

옛 생각이 다시 떠오르려 하자,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소독이나 하자.’

넓게 동심원을 그리며 3 회 이상 소독을 한 후, 간호사가 펼쳐놓은 방포를 들었다.

‘이쪽으로 접근할 거니 방포는…….’

그는 멍하니 방포를 칼을 댈 부위를 중심으로 붙여 다른 피부의 노출을 막았다.

“소독 다했어?”

“네.”
손을 소독하고 들어온 치프는 진현이 해놓은 양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원래 어수룩하게 해놓으면 혼쭐을 낸 후, 본인이 다시 하려 했는데… 이건 뭔가? 완벽한 소독 아닌가?

“너 정말 수술방 처음이야?”

진현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조심했어야 했는데, 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입니다.”

‘조심하자, 조심.’

남기택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여튼 그래, 수술 시작하자.”

수술 침대의 옆에 서자, 치프가 설명을 해줬다.

“급성 담낭염 환자로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을 할 건데, 우린 환자의 배를 메스로 열지 않고 복강경으로 진행할
거다. 복강경 수술이 뭔지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복강경 수술은 배 안으로 망원경 같은 내시경과 기다란 집게발을 집어넣어 진행하는 수술을 뜻한다.

“배를 여는 일반 수술보다 복강경이 나은 점이 뭐지?”

“수술 흉터가 거의 남지 않고 회복이 빠릅니다.”

“그래, 배에 칼을 최소한으로 대니 통증도 적고, 회복도 빠르지. 이런 젊은 여자 환자의 경우, 흉터도 거의 안


남는다는 점도 큰 장점이고.”

“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맞는 말이다.

‘배를 직접 여는 것보다 수술 난이도가 높다는 것 빼고는 여러모로 복강경 수술이 좋지. 특히나 담낭염 수술은.’

남기택은 상복부 피부에 메스로 1㎝ 정도로 복강경이 들어갈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을 통해 기다란 복강경을 집어넣었다.

“자, 들고 있어.”

진현이 어시스트할 일은 바로, 복부 안을 원격으로 비추는 복강경을 들어 시야를 밝히는 것이다.


“담낭 쪽으로 들어봐.”

화면을 옮기니 수술을 할 담낭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그런데 모니터를 본 치프 남기택은 신음을 흘렸다.

“이런…….”

진현도 인상을 찌푸렸다.

담낭의 염증이 너무 심했다.

염증 때문에 주변 조직과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이럴 경우 필연적으로 수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큰일이군.’

남기택은 이빨을 깨물었다.

진현의 옛 기억처럼 그는 고난도 수술에 약했다.

‘배를 열어야 하나?’

내시경을 들여다보며 원격으로 수술하는 복강경 수술보다 배를 여는 수술이 난이도는 훨씬 쉽다.

기다란 집게발을 통해 하는 바느질보다 손으로 직접 하는 바느질이 쉬운 것과 같은 원리로, 이런 경우엔 배를


여는 게 답일 수도 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젊은 여자의 배를 여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지.’

환자는 이제 이십 대 중반이다.

메스로 배를 열면 상복부에 10㎝이 넘는 흉터가 평생 남는다.

치프는 전기 칼이 부착된 집게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현은 생각했다.

‘그냥 진행하는 건가? 하긴 젊은 여자의 배를 칼로 째면 평생 흉터가 남으니.’

남기택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다. 어려운 수술이라도 잘 끝내면 된다.

문제는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현은 약간의 불안함을 담아 치프의 집도 모습을 지켜봤다.

‘잘해야 하는데…….’

진현은 솜씨를 드러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은 접고, 최선을 다해 어시스트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수술이니 어시스트가 옆에서 버벅거리면 안 된다.


이런저런 사정보다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건, 무조건 환자이니까.

찌잉! 찌이잉!!

조용한 수술장에 전기칼이 고열을 뿜었다.

고열을 머금은 전기칼이 담낭 주위를 조금씩, 조금씩 벗겨냈다.

진현의 어시스트 덕분일까?

다행히 남기택은 순조롭게 수술을 진행해 갔고 살짝 여유를 되찾았다.

“너, 손재주가 좀 있구나?”

그는 진현의 어시스트에 놀랐다.

마치 동료 외과의사와 수술을 하듯, 정확한 어시스트였다.

그런데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모니터를 보던 진현이 급히 말했다.

“조심……!”

“응?”

파앗!

전기칼이 염증 부위를 깊게 가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모니터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

진현은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동맥을 건드렸어. 담낭동맥인가?’

염증이 심해 동맥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남기택은 급히 외쳤다.

“석션(Suction)!”

석션(Suction), 외부에서 음압이 피를 빨아올려 모니터의 시야가 확보됐으나, 순간일 뿐이었다.

곧 피가 다시 차올랐다.

덕지덕지한 염증에 피까지 묻어, 어디서 피가 나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이런.”
당황한 남기택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리저리 지혈을 시도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때 진현이 최대한 조심이 말했다.

“저, 선생님.”

“응?”

“오픈(Open)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오픈(Open). 복강경 수술을 포기하고 배를 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남기택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젊은 여자의 배에 기다란 흉터를 남기는 게 꺼려졌던 거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진현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으나 집도의는 그가 아니라, 남기택이었다.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만히 마취를 담당하던 마취과 의사가 경고했다.

“남기택 선생님, 출혈로 혈압 떨어지려 합니다.”

“……!”

남기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초조함 때문에 그의 손이 떨렸다. 수술은 갈수록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안 돼.’

진현은 이를 깨물었다.

인간의 몸은 자로 잰 듯 만든 모형이 아니기 때문에 수술을 하다 보면 수도 없이 위기의 순간이 닥친다.

그때마다 어떤 응급 상황이 오더라도 외과의사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를 잃지 않는다.

“선생님, 오픈(Open)을!”

마취과 의사도 말했다.

“혈압 떨어집니다!”

남기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주저하다 말했다.

“메스 주세요.”
메스. 오픈(Open)을 결정한 것이다.

복강경을 내려놓은 남기택은 메스를 피부에 갖다 대었다.

찌익.

날카로운 날에 피부가 갈라졌다.

이윽고 배가 완전히 열리자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석션(Suction)!”

기다란 철제 호스가 피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출혈이 심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물을 뿌려 봐도 마찬가지다.

“선생님, 혈압 더 떨어져요!”

“……!”

계속되는 상황 악화에 남기택의 손이 다시금 떨렸다.

“어, 어떻게 하지. 지금 병원에 다른 선생님들은 없을 텐데…….”

밤 11 시만 되어도 다른 외과 전문의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새벽 2 시로 온 병원을 통틀어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치프인 그 혼자뿐이다.

물론 이런 돌발 상황에 대비해 백업을 해주는 교수 당직도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 연락을 하면 최소 30 분은 넘게 걸려야 병원에 도착할 거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진현이 나직이 말했다.

“선생님.”

“응?”

“석션 팁(Suction tip)을 조금 더 낮추는 것이 어떻습니까?”

“뭐? 네가 뭘 안다고?”

버럭 화를 내려는 순간, 진현이 남기택의 눈을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눈에 남기택은 입을 다물었다.

“주제넘은 것은 압니다. 그래도 한 번 해보십시오.”

남기택은 반사적으로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출혈 속도보다 더 빠르게 피가 흡수되며, 시야가 확보된 것이다.

“……!”

남기택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진현은 속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서기 싫었는데 결국 나서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환자가 나빠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

“피를 빨아들이는 석션은 제가 맡아 시야를 확보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혈을 해주십시오.”

“그, 그래.”

남기택은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8

38. 엇갈림 (1)

진현이 석션을 쥐자 거짓말처럼 시야가 확보되었다.

남기택은 허겁지겁 출혈 부위를 확인했다.

‘저기!’

담낭 뒤편 깊은 곳에 위치한 담낭 동맥에서 펌프처럼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출혈 원인을 찾았음에도 남기택의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주변의 염증도 심한데다 사각에 가까운 위치였다.

‘저걸 어떻게 지혈하지?’

뚝. 뚝.

남기택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지혈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는 사이 혈압은 점점 더 떨어졌다.

결국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저 선생님… 잠시만 석션을 잡고 있어주시겠습니까?”

“응?”
남기택이 멍하니 석션을 넘겨받자, 진현은 재빨리 혈관을 잡는 기구인 모스키토를 집어 들었다.

그 돌발행동에 남기택이 놀란 표정을 짓는 순간, 진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으며 마치 저격수가 목표를 바라보듯


혈관을 살폈다.

‘여기……!’

그 피가 솟구치는 혈관을 보자 오래전 잊고 있던 감정이 진현의 가슴에 치밀어 올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긴장과 흥분이었다.

“너, 지금 뭐하는……?!”

남기택이 화를 내려 할 때, 진현의 손이 움직였다!

얇은 철제 막대기가 염증 조직을 뚫고 사각에 위치한 혈관에 도달했다.

철컥!

나직한 소리와 함께 철제 막대가 혈관을 틀어막았고 펌프처럼 치솟던 피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 놀라운 술기에 남기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는 자신이 헛것을 봤나 싶었다.

진현은 아무 일도 안 한 듯 거짓말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곧 마취과 의사가 말했다.

“혈압 올라갑니다!”

“……!”

남기택은 지혈된 혈관과 진현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떻게……?”

“그냥 우연이었습니다.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진현은 사죄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남기택의 눈이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너…….”

그는 뭐라고 더 물으려다 아직 수술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이후엔 별일 없이 수술이 끝났다.

***

수술 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뒷정리를 한 남기택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진현은 수술 장에서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하지만 눈앞에서 환자가 안 좋아지는 걸 어떻게 외면한단 말인가?

곤란한 일이었다.

진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너도 수고했는데… 그런데…….”

남기택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급히 말했다.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한 게 아니라… 어떻게?”

“우연이었습니다.”

“…그래?”

“네, 사실 완전히 우연은 아니고… 이전에 외과 실습 돌기 전에 동영상으로 수술법을 공부해서…….”

“동영상으로 공부했다고?”

하지만 남기택은 인상을 찌푸릴 뿐 전혀 납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게 브라질 삼바 춤도 아닌데 수술 테크닉을 동영상으로 공부했다고?

진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진현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냥 넘어가주길 바라며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주제넘게 나서 죄송합니다.”

“…….”

남기택은 잠시 말없이 진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학생이 그런 술기를 보였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의심해 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 학생인 네가 이전에 수술을 해볼 일은 없었겠지. 부럽구나. 네 타고난 손재주가.”

노력에 비해 실력이 부족한 남기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아닙니다.”

“몸은 괜찮나?”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진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진현은 머리가 두드리듯 아파왔다.

수술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던 통증이 갑자기 몰려온 듯하다.

“아까 전엔 정말로 이범수 교수님이랑 카페에 갔던 거냐?”

“네.”

“그래, 내가 오해한 거구나. 하긴 너같이 성실한 애가 농땡이를 피우진 않았겠지. 내가 고깝게 생각해서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치프의 진심 어린 사과에 진현은 손을 저었다.

“그러면 수고했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봐라.”

그 말에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직은……?”

“됐다. 학생이 무슨 당직이냐? 앞으로 의사가 되면 질리도록 설 텐데. 몸도 안 좋은데 가서 쉬어라.”

“감사합니다.”

진현은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3 시.

6 시까지 다시 나와야 하니 빠듯이 2 시간은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탈의실에서 나가려는 순간, 남기택이 물었다.

“참, 너 무슨 과 지망한다고?”
“피부과입니다.”

“그래?”

“네.”

“좋지, 피부과. 그래, 알겠다. 가서 쉬어라.”

남기택은 진현의 재능이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의사만 하면 금전적으로 성공한단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필적 옛말이다.

망하는 의사도 이제 제법 많고 외과의사는 개중에서도 더 열악하다.

즉, 외과는 가시밭길같이 고되게 일하면서 후에 경제적으로 보상은 더 적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외과 치프 남기택은 진현에게 외과를 권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말 재능이 있고, 관심이 있다면 스스로 지원할 거니까.

외과는 그런 열정이 있는 사람이 해야 했다.

***

3 시 30 분에야 자취방에 들어온 진현은 이불에 쓰러지자마자 잠이 들었다.

보일러를 틀었음에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고열에 시달리며 진현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대일병원에서 외과의로 일하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저년차 때 실수로 환자를 잃은 그는 절치부심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어
많은 이의 인정을 받았다.

수술, 수술, 수술, 수술.

환자, 환자, 환자, 환자.

이전의 삶처럼 꿈에서도 그는 환자에만 매진했다.

비록 꿈이지만 그의 노력에 많은 환자가 삶을 찾았고 보람을 느꼈다.

비록 지독히도 고생스러웠으나 가치 있는 고생이었다.

꿈속에서 쭈욱쭈욱 시간이 흘러 전처럼 외과 교수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이전 삶과 다르게 그는 경쟁에서 승리했고 대일병원의 외과 교수가 되었다.

이후 많은 환자를 보며, 많은 삶을 살리며,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리고 진현은 그 꿈의 끝에서 행복을 느꼈다.


“……!”

거기까지 꿈을 꾼 진현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 꿈은? 다시 외과의사가 되는 꿈이라니. 꿈을 꿔도 무슨 개꿈을…….’

군대 두 번 가는 것만큼 끔찍한 꿈이었다.

‘몇 시야?’

새벽 4 시 30 분.

한 시간밖에 못 잤다.

‘쓸데없는 개꿈을… 좀 더 자자.’

그는 좀 더 자려 하였으나 그때 하필 전화벨이 울렸다.

혜미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지, 진현아… 혹시 지금 와줄 수 있어?

그런데 혜미의 목소리를 들은 진현의 얼굴이 변했다.

평소 혜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울고 있었다.

진현은 놀라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흐윽. 버, 범수 오빠가… 범수 오빠가!

“이범수 교수님이?”

-흐흐윽, 범수 오빠가 죽었어!

“…뭐?”

진현은 반문했다.

혜미는 전화기 너머로 울음을 터뜨렸다.

-범수 오빠가 자살했어.


이범수.

한국대 의대에 신망 받는 젊은 교수이자 혜미의 친오빠였다.

그가 자살을 했다고?

오늘 오전만 해도 그에게 친절하게 커피를 사주던 그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진현은 뻣뻣이 굳었다.

전화기를 통해 혜미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

빈소는 한국대 병원이 아닌 대일병원에 마련됐다.

진현은 택시를 타고 이전 삶에서 익숙한 최신식 병원 건물들을 스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마침 혜미가 밖에 나와 있었다.

“진현아?”

그녀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하얀 상복이 흠뻑 젖어 있었다.

“지, 진현아… 범수 오빠가…….”

그녀의 커다란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더니 뚝뚝 떨어졌다. 절망과도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진현은 가만히 다가가 가슴으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힘내라.”

“……!”

“힘내.”

혜미는 끄윽끄윽 참더니 결국 그의 품 안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슬픔에 진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범수 교수는 혜미의 단 하나 있는 진정한 가족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유일한 가족을 잃은 것이다.

그 슬픔을 어떻게 말로 위로할까?

그저 그는 그녀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이범수 교수의 사인(死因)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자살 방법이 의사답게 독특했는데 본인의 혈관에 칼륨 약을 주사해 체내의 칼륨 농도를 높여 심장마비를
유발시킨 것이다.

“범수 오빠가 자살하다니. 믿을 수 없어.”

혜미는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기에? 나한테 한마디의 말도 없이? 믿을 수 없어.”

그녀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진현은 말없이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그도 이범수 교수가 자살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하루도 지나기 전에, 동생을 걱정하며 친절히 웃던 그가 자살을?

‘믿을 수가 없구나.’

***

한편, 장례식장 뒤편에 검은 상복을 입은 한 매끄러운 외모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상민이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들을 잃은 탓인지, 평소의 인자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형의 장례식장인데 동생이 당연히 와야죠.”

“돌아가라.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이상민은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담배를 손으로 튕겨 버렸다.

“그러게요. 제가 주제도 파악 못하고 잘못 왔네요. 그런데 아버지께선 많이 슬프시겠어요. 병원을 물려받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자살했으니. 여자인 혜미한테 줄 수도 없고, 다른 친척들한테 주긴 싫을 거고.”

그의 아버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빨리 돌아가라. 나중에 따로 부르겠다.”


“네에, 네에.”

이상민은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타 시동을 킨 이상민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벌레 같은 놈들…….”

그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그린 듯한 웃음이 아닌 얼음보다 차가운 섬뜩한 미소였다.

이상민은 고개를 돌려 옆에 늘어선 건물들을 바라봤다.

재계 1 위 대일그룹의 투자를 받아 건축된 고층 유리 건물들은 흡사 병원이 아닌 고급 호텔과도 같은 외양이었다.

국내 1 위, 대일병원.

그들 가문의 병원으로, 자살한 이범수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병원이었다.

부르릉.

그의 스포츠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일병원을 빠져나가 올림픽대로에 진입했다.

그런데 올림픽대로를 고속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속도가 과했던지 차 한구석에 매달려 있던 액자가 툭하고 떨어졌다.

액자에는 아름다운 인상의 젊은 여인과 5 살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상민과 자살한 그의 어머니였다.

액자 속 이상민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과 다르게.

빛바랜 사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9

39. 엇갈림 (2)

경찰은 재계 1 위, 대일그룹의 손자였던 이범수 교수의 사망을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자필로 쓴 유서도 발견되었고, 무엇보다 사망 당시 타살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전혀 없었다.

사건 당시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자신의 방에서 홀로 시체로 발견되었었고, 본인의 지문만 묻어 있는 칼륨


주사기가 덧없이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대일 그룹 가문 내의 복잡한 사정이 겹쳐 그룹 측에서도 장기간의 수사를 원하지
않아, 사건은 곧 자살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혜미는 이전의 활달한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슬픔을 잊은 것은 아닌지 보이지 않는 그늘이 느껴졌다.

하긴. 어떻게 잊겠는가? 다만 티 내지 않을 뿐이다.

‘혜미를 잘 부탁해요. 밖으로 티를 전혀 안 내서 그렇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불쌍한 아이니까.’

이범수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혜미가 밝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 진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느 날 진현이 그렇게 말하자 혜미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괜찮아. 정말로. 이런 일 처음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아플 만큼 텅 빈 목소리였다.

그녀는 지나가듯 물었다.

“진현아.”

“응?”

“너는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거지?”

“그래, 네가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할 때까지는 옆에 있어주마.”

그 말에 혜미는 방긋 웃었다. 아픈 미소였다.

“너는? 너는 나중에 결혼 안 할 거야?”

“결혼은 무슨… 여자도 없는데.”

혜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이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를 어루만졌다.

“어쨌든 고마워. 그리고…….”

그녀는 한마디 말을 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은 너무나 작아 진현의 귀에 닿지 않았다.


***

이제 병원 실습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고,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되었다.

진현이 도는 마지막 실습은 피부과였다.

이제 피부과 실습만 끝나면 공식적인 학과 수업은 모두 끝이 나고, 의사국가고시를 치른 후 졸업이다.

‘드디어 피부과. 꼭 잘해야 해.’

진현은 피부과 실습을 돌기 전 의지를 다졌다.

그가 회귀 후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은 전부 다 한국대 의대 피부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합격하겠지만 그래도 윗사람이 될 선배들이니 잘 보여야지.’

진현은 그냥 수석도 아닌 단 한 학기도 1 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은 부동의 1 등이고 병원 실습 때도 착실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평이 대단히 좋았다.

따라서 이변이 없는 한 피부과에 무난히 합격할 것이다.

과연 피부과 레지던트들도 진현을 좋아했다.

“너 우리 피부과 지망한다고?”

“네.”

“그래, 환영한다. 실습 잘 돌고. 나중에도 잘 부탁한다.”

레지던트들은 이미 진현이 피부과에 합격한 것처럼 대했다.

진현도 미래의 윗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실습을 돌았다.

그렇게 아무런 문제도 없는 순탄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피부과의 한 여자 선배가 진현을 불렀다.

“진현아, 뭐해?”

“아침 소독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거 놔둬. 넌 학생이니 우리가 해야지.”

“괜찮습니다.”

“됐고, 이리로 와서 도넛 먹어.”

선배는 진현의 손을 잡아 구석에 위치한 회의실로 끌었다.

회의실에는 이미 여러 피부과 레지던트들이 둘러앉아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말이지…….”
“아, 진현이도 왔네. 이리 와서 도넛 먹어.”

그 여유로운 모습에 진현은 훈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좋구나. 이게 내가 바라는 삶이지.’

확실히 피부과 의사들의 삶의 질은 다른 과와는 차원이 달랐다.

입원도 없고, 수술도 없고, 피부질환만 보니 삶에 여유가 흘렀다.

물론 피부질환과 미용도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과에 비해 일이 적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 보니 과의 분위기 자체도 굉장히 부드러웠다.

원래 환경이 사람의 성격을 만든다고, 다른 과들은 툭하면 욕설에 심하면 주먹이 날라 다니는데, 피부과 의사들은
어찌나 성격이 유한지 싫은 소리 하나 잘하지 못했다.

이렇게 편하면서 돈은 나중에 다른 과보다 훨씬 많이 번다.

정말 천국 같은 과가 아닐 수 없다.

‘성형외과도 피부과 이상으로 돈을 벌지만 삶의 질은 피부과가 최고야. 꼭 피부과 의사의 삶을 살아야지.’

진현이 그렇게 다시금 다짐할 때였다.

회의실 밖에서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선생님! 김주흥 교수님 오셨어요! 빨리 나오세요!!”

“……!”

그 말에 피부과 레지던트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랗게 질렸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전(前) 과장님이? 학장님으로 올라가셔서 요즘엔 행정만 보시지 환자 진료는 거의 안
보시잖아? 웬일이지?”

“몰라요. 어쨌든 빨리 나가봐요. 김주흥 교수님 진짜 무서운데…….”

그 말에 진현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김주흥? 김주흥 학장?’

레지던트들이 사색이 되어 밖으로 나갔고, 진현도 따라 나갔다.

“오셨습니까?!”

레지던트들은 마치 사병들이 장군에게 인사하듯 뻣뻣하게 얼어 허리를 숙였다.

날카로울 정도로 마른 몸매에 싸늘한 눈을 가진 중년의 교수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교수의 싸늘한 눈을 본 순간, 진현의 가슴이 떨어질 듯 놀랐다.


그는 저 교수를 알고 있었다.

“진료 볼 VIP 환자가 있어서. 진료실 비어 있지?”

“네, 학장님. 비어 있습니다.”

싸늘한 눈매의 교수의 이름은 김주흥.

바로 현(現) 한국대 의대의 학장이자, 이전 진현과 악연이 있었던 돼지 김강민의 아버지였다!

‘왜 김주흥 학장이 피부과에? 설마 피부과 교수였단 말인가?’

진현의 머리가 하얘졌다.

그는 김주흥 학장이 피부과 교수였단 사실을 몰랐다.

김주흥 교수의 아들, 돼지 김강민과 그는 보통 악연이 아니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김강민의 잘못이었지만, 그때의 일로 그의 아들은 유급까지 당했다.

더구나 분위기를 보니 김주흥 교수는 피부과 내에서도 보통의 파워를 가진 게 아닌 듯했다.

당연한 것이 전(前) 피부과 과장이자, 현(現) 의대 학장인 김주흥 교수는 병원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핵심 권력자로 현재의 피부과 과장도 그의 밑 사람에 불과했다.

그때, 김주흥 교수가 시선을 돌려 진현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흐음? 김진현 학생이군. 잘 지냈나?”

“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피부과 실습 중인가?”

“네.”

“실습 잘 돌게. 공부 열심히 하고. 1 등인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커.”

김주흥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순간, 진현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따뜻한 덕담과 달리 김주흥 교수의 입가에 맺힌 건, 뱀처럼 싸늘한 조소였다.

***

실습이 끝난 후, 자취방에 돌아온 진현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회귀 후,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중 3 때부터 필사적으로 수능을 공부했고, 의대에 입학하고부터는 학과 공부도 피 터지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이유는 단 하나, 한국대 의대 피부과에 입성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노력이 보상받을 순간이 다가왔건만, 하필 돼지 김강민의 아버지가 피부과 교수라니!

어리고 힘없는 교수도 아니다. 현 피부과 제일의 권력을 가진 실세다.

‘어떻게 하지?’

딱 보기에도 김주흥 교수는 호인은 아니다.

호인은커녕, 권력을 탐하는 뱀 같은 인물.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게 뻔했다.

‘김주흥 교수가 기침만 해도, 난 피부과에 들어갈 수 없어. 젠장. 내 잘못도 아닌데.’

그때의 일은 전적으로 김주흥의 아들, 김강민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 더러운 세상에서 그런 것은 원래 중요하지 않다.

‘젠장.’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전의 삶에서 대일병원에서 외과 교수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실력이면 실력, 논문 실적이면 실적, 모든 면에서 상대에게 우세했음에도 경쟁에서 밀렸다.

다 더러운 세상 때문이다.

‘생각을 하자, 김진현. 이대로 피부과를 놓칠 수는 없어.’

진현은 고민을 거듭했다.

어차피 세상이 더러운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더러운 세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뿐이다.

***

그렇게 진현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심할 때 회식이 잡혔다.

피부과의 모든 교수가 참석하는 큰 회식으로 병원 일로 바쁜 김주흥 교수도 얼굴을 비췄다.

종로에 위치한 고급 소고기 집에서 피부과 사람들은 술잔을 나눴다.

진현은 피부과 선배들의 술을 받으며 눈치를 살폈다.


‘차라리 잘됐다. 기회를 봐서 이야기를 하자.’

며칠 동안 고민해 봤으나 뚜렷한 방책이 없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정면 돌파가 답일 수도 있으니 기회를 봐 술을 받으며 좋게 이야기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미운 털이 박혔어도 진실된 모습을 보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고기를 먹고 배가 차 다들 돌아다니며 술을 나눌 때 기회가 왔다.

김주흥 교수가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진현은 술잔을 들고 찾아갔다.

“응? 김진현 학생인가?”

“네, 인사드리려 왔습니다.”

“앉게.”

김주흥 교수는 진현의 잔에 소주를 졸졸 따라주었다.

“그래, 피부과 지망한다고 했나?”

진현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현은 긴장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주흥 교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농담하나?”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그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

술잔을 받은 진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자네라면 피부과 한다는 이야기는 못할 것 같은데. 농담이 심하군.”

김주흥 교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네같이 뛰어난 인재는 내과나 외과 같은 사람을 살리는 메이저 과를 해야지. 우리 피부과 같은 마이너 과가
아니라.”

그리고 그런 김주흥의 눈은 이런 뜻을 품고 있었다.

-네가 감히?

“…….”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었나? 알아들었으면 거기 가만히 있지 말고, 술 마시고 가보게.”


“…네.”

그 뒤로는 회식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취방이었다.

“하…….”

진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언가 터져 나오려는 걸 이를 악물며 참았다.

“젠장.”

최악이었다.

***

끼이익!!

타오르는 듯한 붉은 스포츠카가 한남동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문이 위로 열리며 이상민이 내려왔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경호원이 그를 맞았다. 이전에 비해 한결 공손해진 태도다.

“아버지는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숲처럼 펼치진 정원을 지나자 인자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이상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혜미의 아버지, 재계 1 위 대일그룹의 삼남(三男)이자 대일병원의 이사장인 이종근이었다.

“어서 와라. 밥은 먹었느냐?”

“아직이요.”

“그래? 식사를 거르면 안 되지. 뭐라도 들어라.”

그 안 어울리는 걱정에 이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그래.”

그의 아버지, 이종근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그들은 꼭 필요한 용건이 없으면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용건은 대체로 불쾌한 것일 경우가 많았다.

“몇 가지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뭔데요?”

“졸업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

“준비랄 게 있나요? 때 되면 하는 거지.”

여상스러운 대답에 이종근은 주름을 찌푸렸다.

그의 입가에서 인자한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그런 식이니까 계속 2 등만 하는 거다. 이 한심한 놈아.”

(다음 편에서 계속)

# 40

40. 대일병원 (1)

“……!”

“고등학교 때부터 이게 뭐냐? 도대체 한 놈한테 10 년 동안이나 지고 있다니.”

이종근은 혀를 끌끌 차며 보고서를 읽었다.

“김진현? 조사해 보니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별 볼 일 없는 놈이건만, 이런 평범한 놈을 10 년 동안이나 못


이겨? 한심한 놈! 네 형 범수는 한 번도 1 등을 놓친 적이 없어!”

그 말에 이상민의 미소가 짙어졌다.

“뭐, 저는 핏줄부터 다르니까요. 범수 형보단 못할 수밖에 없죠.”

“핏줄이 더러우면 능력이라도 있어야지. 한심한 놈.”

그 말에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따라 더 그러시네. 삼촌들 모임 가서 기분이라도 나쁘셨어요? 하긴 굵직굵직한 것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삼촌들 만나면 배는 아프시겠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야 꼴랑 대일병원 하나니까.”

그 조롱에 이종근은 노성을 토했다.

“이놈! 닥쳐라!!”

“아, 맞다. 아버지 이 얘기 싫어하시지. 눈치 없이 말해서 아주 죄송합니다. 피가 더러운지라…….”


“닥치라고! 이 더러운 놈!!!”

파창!!

고함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이종근이 옆에 있던 유리잔을 이상민의 머리에 던져 버린 것이다.

주륵.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이상민은 입을 다물고 웃었다.

“하아, 그 더러운 창녀를 꼭 빼 닮았어. 빌어먹을 놈.”

이종근은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피 흘리는 아들에게 말했다.

“이놈아, 잘 들어라. 네가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가문의 사람들이 너를 호적에서 파라고 난리야. 내가


그걸 막으며 널 보호하느라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아?”

그 말에 이상민은 속으로 조소했다.

보호해? 설마?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가문에서 쫓겨나면 대일병원의 후계를 다른 형제들에게 뺏길까 봐 그런 거겠지.

“그러니 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계속 이렇게 만년 2 등이면 곤란해. 우리 가문에 이인자는 필요 없으니까.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그에 걸 맞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특히 너처럼 더러운 피를 가졌다면,
더더욱!”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말씀 끝났나요?”

“그래,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한심한 모습만 보이면 나도 널 보호해 줄 수 없다.”

이상민은 입술을 옆으로 찢어 웃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샹들리에 불빛에 그로테스크하게 빛났다.

“네, 알겠습니다.”

이종근은 한마디 더했다.

“졸업하면 대일병원으로 와라.”

“대일병원으로요?”

“그래, 대일병원으로 와 외과를 해라. 나중에 교수 자리는 하나 만들어놓겠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아들이 너 하나 남았다고 해서 네가 대일병원을 무조건 물려받을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라. 최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너한테 돌아갈 몫은 없어. 꼭 명심해라.”

***

진현은 그 뒤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냈다.

“진현아, 어디 또 아파?”

평소와 다른 진현의 모습에 혜미가 걱정했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아픈 곳은 없었다. 그저 열심히 달리다 목표를 잃은 느낌이다.

그냥 모든 게 싫증이 났다. 다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었다.

그렇게 설렁설렁 피부과 실습이 끝나고 의사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전 잠깐의 휴식 기간에 그는 의외의 전화를
받았다.

띠리리.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수화기를 갖다 대니 이상한 발음이 들려왔다.

-여… 보… 세용?

“네?”

-여보세용?

해괴한 발음이었는데, 아는 목소리였다.

미국 유수의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의 부사장 에이미 엔더슨였다.

“미스 엔더슨? 영어로 말해도 됩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미스터 김.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뭐지? 진현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최근에 시간이 남으니까.’

“네, 괜찮습니다. 편하신 데서 보도록 하죠.”


그들은 며칠 뒤, 저녁시간에 이태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약속시간이 다가와 진현은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은 처음이구나.’

흑인, 백인, 한국인… 다양한 인종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해밀턴 호텔 앞, 터키 케밥집 앞에서 사람 구경을 하며 에이미를 기다렸다.

‘여행이나 다녀올까?’

나른한 무력감에 진현은 생각했다.

피부과는 이제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10 년 동안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해 온 목표가 없어지자, 그 자리를 무력감이 채웠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냥 대충 졸업하고 과외 전문 선생이나 할까?’

무기력한 마음에 실없이 하는 생각들.

‘잘되긴 하겠군. 엄청.’

이전에 경력도 풍부하고, 수능 수석에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이니 잘되긴 할 거다.

편하게 충분히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겠지.

‘아니면 그냥 대충 아무 병원에나 취직할까? 그러다 적당히 결혼하고… 나쁘지는 않군.’

뭐,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이니 오라는 데는 많을 거고…….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허전했다. 어떤 미래를 떠올려도 공허했다.

‘성형외과를 지원해볼까?’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또 싫었다.

성형외과가 피부과보다 레지던트 트레이닝이 백배 정도 힘든 것을 떠나서 이상하게 성형외과는 마음에서 끌리지가


않았다.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회색 정장을 입은 푸른 눈의 백인 여인.

이태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지적이고 도도한 매력이 돋보였다.


진현에게 다가온 에이미가 먼저 인사했다.

한국어로.

“안녕… 하… 세용?”

“…….”

그 어색한 한국어에 진현은 잠시 침묵했다.

에이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게 아닌가용?”

“…영어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왜 갑자기 한국어를…….”

영어로 말하라는 말에 에이미는 납더미라도 던진 듯 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한국에 오래 있게 될 것 같아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엄청 어렵네요. 차라리 분자생물학이 100 배는


쉽겠어요.”

진현은 슬쩍 웃었다.

외국인이 배우기에 한국어가 어렵긴 할 거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보자고 하신 것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식사는 하셨나요?”

고개를 젓자, 에이미가 그를 이끌었다.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제가 대접할게요. 고마운 일도 있고.”

“……?”

***

에이미가 향한 곳은 북유럽 풍의 모던한 스타일로 꾸며진 키친이었다.

유럽 정통 요리와 스테이크를 주로 취급하는 메뉴판을 본 진현은 심음을 삼켰다.

‘뭐가 이렇게 비싸?’

다른 테이블을 보니 양은 손가락만 한데 가격은 어마어마했다.

참으로 착하지 않은 식당이지만 에이미는 태연히 말했다.

“부담 없이 시켜요. 어차피 회사 돈으로 살 테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쓱쓱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차를 가져온 것 같은데 와인도 시켰다.


“자동차 가져오신 것 같은데 술 마셔도 됩니까?”

“조금은 괜찮아요.”

보르도 산 적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는 답했다.

“뭐, 알딸딸하면 운동 좀 하다 들어가도 되고요.”

“운동이요?”

“네, 이태원에 클럽 많으니까. 좀 놀다 들어가죠, 뭐. 미스터 김은 클럽 싫어하나요?”

“전 안 좋아합니다.”

같이 가자는 듯한 물음에 급히 손을 내저었다.

진현은 클럽이나 나이트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그나저나 평생 일과 서류 외엔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은 이지적이고 도도한 얼굴로 클럽이라니. 뭔가 깼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일 외에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으니.’

TC80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자주 얼굴을 보긴 했으나 사적으로 만난 건 처음이다.

업무 밖에서 만난 그녀는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이 만남을 사적이라 할 수는 있나? 왜 보자고 한 거지?

“그런데 저를 왜 보자고 하신 것입니까?”

“한 가지의 감사와 한 가지의 제안이 있어서요.”

“감사, 제안이요?”

“네.”

진현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에이미는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긴 후, 입을 열었다.

“저, 승진했어요. 한국 지부 사장으로.”

“……!”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축하합니다.”

저 나이에 한국 지부 사장이라니. 어마어마한 고속 출세다.

물론 이전의 삶 때도 그녀는 한국 지부 사장이 되긴 하지만 그때보다 이번이 5 년은 더 빨랐다.


“아니에요. 전부 미스터 김 덕분이에요.”

“저 때문이라고요?”

“네, TC80 때문에 승진한 것이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미스터 김의 말대로 TC80 의 효과는 놀라워요. 1 상을
끝냈고, 이제 2 상에 들어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국식대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듣기 괴로운 한국어 발음에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영어로 말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냥 영어로 말하십시오. 하여튼 다행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네, 사실 저 TC80 의 실패로 회사 내에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미스터 김이 아니었으면 잘리거나 저기
베트남쯤으로 좌천됐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 진심 어린 감사에 진현은 미소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미래의 누군가의 공을 가로챈 것이지만. 뭐, 어떻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제안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엇입니까?”

그때, 진현의 잔이 빈 것을 보고 종업원이 쪼르르 와인을 따라주었다.

풍성한 붉은빛이 잔에 차르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에이미는 입을 열었다.

“사실 이게 본론이에요. 미스터 김은 졸업 후 무엇을 할 건가요? 이전에 말했던 Dermatologist(피부과


의사)?”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피부과 의사의 길이 막힌 진현은 쓰린 마음으로 답했다.

“저희 헤인스로 오지 않을래요?”

“네?”

그녀는 파란 눈을 들어 진현의 눈을 마주했다.

“직급은 이사, 연봉은 2 억 5 천만 원,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마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 추가. 어때요?”

“……!”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물론 의대를 졸업 후, 여러 다른 능력을 인정받아 제약회사나 바이오 업체에 부장이나 임원급의 좋은 조건으로


취직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장 사장의 마인 바이오만 해도 틈만 나면 진현을 꼬시려 했으니까.

하지만 마인 바이오를 비롯한 다른 업체와 헤인스는 달랐다.


그들과 비교하는 게 모욕일 만큼, 헤인스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초거대 제약회사다.

그런 헤인스의, 비록 한국 지부의 임원이지만 이사 직급에 연봉 2.5 억이라니.

이 정도 조건이면 대학병원에 정식 교수로 재직 중인 사람에게나 할 법한 제안이다.

“진심입니까?”

“진심이죠. 그리고 이 제안은 제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본사에서 나온 거예요.”

“본사요?”

“네, 본사의 어떤 높은 분이 미스터 김이 기획한 TC80 프로젝트의 스터디 디자인을 보고 홀딱 반해서요.


어떻게든 미스터 김을 스카우트하라고 저한테 난리를 치셨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미스터 김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Yes or No?”

“…….”

“지금 당장 대답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졸업할 때까지는 몇 달 남았으니. 기다릴게요.”

진현은 와인이 담긴 잔을 바라봤다.

매혹적인 붉은빛이 그를 유혹했다.

***

에이미와 헤어진 후, 진현은 정처 없이 발을 옮겼다.

고즈넉한 독서당 길을 밟으며 생각했다.

‘헤인스라.’

이전 마인 바이오 장 사장의 꼬심과 달리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헤인스의 이사 직급에 연봉 2.5 억, 프로젝트를 달성하면 인센티브.

‘미래를 알고 있으니, 프로젝트 달성은 쉽겠지.’

그의 머리에는 몇 년 뒤 개발 성공할 약품 목록이 주르륵 들어 있었다.

그 지식을 이용하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으리라.

최연소 한국 지부 사장, 혹은 본사의 핵심 간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쁘진 않은데, 혹하진 않는군.’

분명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외제차,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빌딩… 크게 성공하면 그가 원하는 풍요로운 삶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땡기지가 않았다.

이전 삶 때도 환자를 보는 의사였고, 이번 삶 때도 의사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그런데 그때, 다시 띠리리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긴 한데 묘하게 전화번호가 익숙했다.

몇 번 전화벨이 울리자 진현은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 대일병원 전화번호인데?’

이전 삶에서 숱하게 받았던 전화번호였다.

‘대일병원에서 왜 나에게 전화를?’

(다음 편에서 계속)

# 41

41. 대일병원 (2)

핸드폰을 들자 친절한 음성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혹시 김진현 선생님 핸드폰인가요?”

“맞습니다. 무슨 일이죠?”

-네, 저희는 대일병원의 인사팀입니다. 혹시 잠깐 말씀 가능하신가요?

“말씀하십시오.”

진현은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인사팀이 왜 자신에게 전화를 한 건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뭐지?

-바쁘실 테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김진현 선생님께서는 졸업 후 저희 대일병원에서 일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대일병원이요?”

-네, 저희 대일병원에서는 각 대학의 최우수 졸업생 선생님들을 모시기 위해 새롭게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이에 대해 만나서 설명을 드리고자 하는데, 혹 생각이 있으신지요?

그 말을 들은 진현의 가슴이 갑자기 요동을 쳤다.

대일병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김진현, 이 바보 같은! 한국대 병원이 아닌 대일병원에서 피부과를 해도 되잖아!’

김진현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지금 모든 문제의 원인은 김주흥 교수 때문이다.

하지만 피부과는 꼭 한국대 병원에서 해야 하는 게 아니다.

‘대일병원이면 오히려 한국대 병원보다 나아. 현재 병원 랭킹이 대일병원 1 순위, 한국대 병원 2 순위, 광혜
병원 3 순위, 기독 병원 4 순위니까.’

이전엔 전통과 명문의 한국대 병원이 1 위였지만 최근엔 달랐다.

재계 1 위의 공룡, 대일그룹의 막대한 지원을 업은 대일병원이 1 순위로 오른 지 오래였다.

-저, 김진현 선생님? 혹시 관심이 있으신가요? 생각이 있으시면 따로 만나서 설명을 드릴까 하는데…….

진현은 곧바로 답했다.

“저는 지금도 괜찮습니다. 언제 만날까요?”

***

진현은 곧바로 약속을 잡아 대일병원의 인사팀 직원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김진현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인사팀 직원은 대일병원에 대한 소개를 했다.

“저희 대일병원은 대일그룹 산하의 병원으로…….”

물론 이전 삶에서 꽤 오랜 시간 대일병원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진현은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

인사팀 직원도 영양가 없는 내용을 오래 끌지 않고 곧 본론을 꺼냈다.

“선생님께서 대일병원에 오시게 되면 다른 동료들에 비해 100% 많은 연봉을 받게 됩니다. 즉, 2 배를 받는


거죠.”

“동료라면 같은 인턴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네, 일단 수련의(修練醫), 인턴으로 취직하셔야 하니까요.”

이건 협의하고 자시고할 내용이 아니었다.

현 대한민국 제도에서는 무조건 의대, 인턴(수련의), 레지던트(전공의)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가 될 수 있다.

2 학년을 생략하고 3 학년이 될 수 없듯 이건 확고한 원칙이었다.

따라서 갓 의대를 졸업할 예정인 진현은 인턴 외에 다른 직급으로 취직할 수 없었다.


‘물론 일반 회사의 인턴과 달리 의사로서 일을 하지만.’

대일병원 직원이 말했다.

“참고로 저희 대일병원 인턴 선생님들은 다른 대학 병원에 비해 월등히 많은 연봉을 받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대일병원의 봉급은 전국 최고였고, 진현에게는 그것의 2 배를 주겠다는 제안이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그는 의문이 생겼다.

‘좋기는 좋은데… 왜 고작 인턴한테 이런 혜택을? 의사로서 일을 하긴 하지만, 인턴은 사실 그렇게 병원에서


높은 직급이 아닌데.’

높기는커녕 엄청 낮다.

“저 말고 다른 인턴들도 이런 혜택을 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이 제도는 금년에 처음 생긴 걸로, 대상자는 김진현 선생님이 유일합니다.”

김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저에게만?”

“국내 최고 명문, 한국대 의대의 수석 졸업자니까요. 후에 다른 의대의 수석 졸업자들에게도 혜택을 확대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데…….

‘뭐, 주는 돈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몇 마디 말을 더 나누고 대일병원 직원은 친절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엔 졸업 후 대일병원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일병원 직원은 먼저 대화를 나누던 카페에서 나갔다.

홀로 카페에 남은 진현은 생각에 잠겼다.

‘대일병원… 이렇게 다시 돌아가게 되는군.’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전문의로 취직해 교수 자리를 다투던 그때와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이번엔 조용히 인턴 생활을 하다가,
피부과에 합격해야지.’

그 뒤로는 원하는 삶을 살 거다. 환자를 진료하되, 여유롭고 풍요롭게.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 국내 최고 대일병원 피부과 출신, 이 정도 타이틀이면 전국 어디를 가나 먹힐 것이다.


***

한편 진현과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대일병원 인사팀 직원은 운전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분’은 고작 인턴 따위한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자라 해봤자 고작 인턴이다.

인사팀 직원은 자신에게 내려진 업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진현을 무조건 대일병원으로 데려오라니. 모르겠다. 나 같은 월급쟁이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뭐,


위에서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겠지.”

부르릉.

그의 자동차가 속도를 높여 동부간선도로를 달렸다.

그때만 해도 인사팀 직원은 물론, 이 일을 지시한 ‘그’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떤 인턴을 병원에 끌어들인 것인지.

진현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괴물인턴의 출현이었다.

***

목표를 찾아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자취방에 돌아가려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오늘 찾는 사람이 많군.’

이번엔 아는 번호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이상민이었다.

“오랜만이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임에도 최근엔 도통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응, 진현아. 지금 바빠?

“아니, 괜찮다. 왜?”

-술 한잔할래?

진현은 시계를 바라봤다.

10 시였다.

“그래, 어디서 볼까?”

-늘 마시던 데서.
“대학로?”

-아니, 테헤란로.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려라.”

테헤란로 고층 빌딩 숲엔 그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애용하던 고급 술집이 있었다.

대일그룹의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쥬피르였다.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현의 얼굴을 알아본 지배인이 안내했다.

‘처음 여기 온 것도 10 년 전이구나.’

이상민은 안쪽에 위치한 VIP 룸에 있었다.

그는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서 위스키를 마셨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강남, 한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응, 그러게. 너도 잘 지냈어?”

이상민이 그린 듯 웃으며 물었다.

“나야 뭐. 그런데 왜 여기서 보자고 했냐? 그냥 대학로에서 보지.”

최근에는 쥬피르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아니, 이상민이랑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응, 고등학교 때. 그때 좋았는데.”

그 말에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좋았나? 하긴 그때는 이 녀석도 제법 귀여운 면이 있었지.

“혜미는? 혜미는 안 불렀어?”

“응,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마시자.”

이상민은 잔에 위스키를 따라 진현에게 건넸다.

“자, 마셔.”
“그래.”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피곤한지 진현은 술기운이 평소보다 빨리 올라왔다.

‘이상하게 어지럽군.’

그때 이상민이 물었다.

“진현아, 너한테 나는 뭐야?”

새삼스런 질문에 진현은 툭 답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질문이냐? 친구지.”

“친구?”

“그래, 친구.”

“그렇구나…….”

뭔가 신기한 듯한 목소리에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넌 아니냐?”

“아니, 맞지. 우린 친구지.”

이상민은 미소를 지으며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아.”

“왜?”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오늘따라 왜 그러냐? 뭔 일 있냐?”

“아니, 그냥.”

“친구끼리 그러면 친하게 지내지, 나쁘게 지내냐? 이상한 말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그렇게 몇 잔 더 술을 마시니 진현은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왜 이렇게 취하지? 이상하다?’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 그런 것치고도 너무 어지러웠다.

그때 이상민의 목소리가 울리듯 들렸다.


“진현아, 힘들면 잠시 자.”

“아…….”

이상민은 진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도 괜찮아. 좀 자…….”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목소리에 진현의 눈이 감겼다.

진현은 테이블에 엎드려 쓰러졌다.

“친구라…….”

이상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진현의 목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파닥파닥.

그의 손끝에서 맥동하는 경동맥이 느껴졌다.

“난 네가 좋아. 그러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면 좋겠는데. 너도 그렇지, 진현아?”

***

시간이 흘러 진현과 이상민, 이혜미는 한국대 의대를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당연히 김진현 1 등, 이상민 2 등이었다.

10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의사가 된 그들은 모두 한국대 병원을 떠나, 대일병원에 취직했다.

***

의사국가고시를 마치고, 새내기 의사가 된 예비 졸업생들은 졸업식을 치르기도 전에 병원에 끌려갔다.

의사 자격증을 땄으니, 곧바로 인턴, 수련의로 일을 시키려는 거다.

“좀 쉴 시간도 안 주고.”

혜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가 될 때까진 끝없는 고생의 시작이다.

이런 일은 익숙해져야 한다.

‘그나마 대일병원은 대우가 좋으니.’


대일그룹에서 전격적으로 후원하는 대일병원은 근무 여건이 타 병원에 비해 훨씬 좋았다.

“진현아, 2 박 3 일 워크샵 끝나면 곧바로 근무를 시작할까?”

그들은 정식 근무 시작 전, 대일병원의 신입 의사 워크샵에 참가 중이었다.

“아마도. 처음 한 달 동안은 거의 퇴근도 못할 거다.”

그 말에 혜미는 울상을 지었다.

“안 되는데.”

“뭐, 처음 몇 달 지나면 그래도 일주일에 1, 2 번 정도는 퇴근할 수 있겠지. 정말 많으면 일주일에 3 번까지도…
….”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아!!”

큰 키, 순한 얼굴, 활달한 목소리.

고등학교 때 친구 황문진이었다.

지방대 의대에 다니던 그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후 대일병원에 입사한 거다.

“오랜만이다.”

‘이 녀석이 의사가 되다니. 정말 세상 다시 살아볼 일이야.’

만년 꼴찌이던 놈이 의사가 되어 대일병원에 취직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래, 진현이 너도 정말로 대일병원에 왔네. 반가워! 앞으로 이전처럼 같이 다니자.”

그런데 황문진은 진현 옆에 서 있는 혜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TV 에서나 볼 수 있는, 아니, 그보다도 더한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을 담은 듯한 커다란 눈동자,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하얀 얼굴 속 붉은 입술… 꽃 같은, 아니, 꽃보다도


더 청초한 얼굴이 황문진의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이, 이분은 누구야, 진현아?”

그는 진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한국대 동기다. 같이 일할 거니, 인사해라.”

그 무뚝뚝한 소개에 이혜미는 안 보이게 입술을 씰룩했다.

“안녕하세요, 진현이와 아주 친한 친구, 이혜미라고 해요.”


“아, 아, 네. 저, 저는 황문진이라고 합니다.”

황문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혜미에게 긴장된 목소리로 인사했다.

진현은 그 뻣뻣한 모습에 속으로 실소했다.

그때, 강당에서 누군가 외쳤다.

“워크샵 시작하니 다들 들어오세요!”

그 말에 그들은 강당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황문진은 이혜미를 연신 힐끗거렸다.

눈치를 보니 본인이 혜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저 녀석이 예쁘긴 하지.’

혜미는 김진현이 보기에도 예쁘게 생기긴 했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이전 삶에서 아내 말고는 이혜미보다 더 예쁘게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황문진이 계속 이혜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자 진현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뭔가 살짝 불쾌한…….

‘뭐지?’

진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다음 편에서 계속)

# 42

42. 수련의(修鍊醫) – 인턴 (1)

“대일병원에 취직한 걸 환영합니다. 의사로서 처음 일하게 되어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될 텐데요. 여러분은 앞으로
…….”

지루한 강의가 이어졌다.

2 박 3 일의 워크샵은 다른 모든 워크샵이 그렇듯 무의미하고 지루한 프로그램으로 가득했다.

2 박 3 일 동안 강의를 들으며 머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 강사로 초청된 현직 레지던트의 한마디였다.

“먼저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레지던트는 농담 아닌 진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은 이제 인턴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 내에서 인턴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

“재단의 이사장님이 있고, 병원장님이 있고, 교수님들이 있고, 밑의 레지던트들이 있고, 간호사도 있고….
간호조무사도 있고, 미화원 분들도 있고… 이 중 어디에 있을까요? 어차피 곧 경험하면 알 테니 대답은
생략하겠습니다. 단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여러분은 이제 의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업무들을 할 거란 것입니다.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업무들로 의사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고도 볼 수 있죠. 이제 갓 졸업해 의사로서 처음 일을
시작하는 거니, 미숙하고 두려운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항상 노력하고,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그 레지던트의 설명처럼 인턴의 업무는 의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거다.

따라서 직접 환자를 보며 진료를 하는 것보단 보조적인 업무, 즉 몸으로 쓰는 허드렛일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시해선 안 되는 게 환자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일이고, 이런 여러 과정을 통해


한 명의 진정한 의사로 성장하게 된다.

황문진이 물었다.

“진현아, 넌 어느 과부터 돌아?”

“내과.”

“아, 그렇구나. 우리 1 달에 한 번씩 각각 다른 과를 돌아가며 로테이션 근무하다 1 년 뒤 전공할 과를 정해


레지던트가 되는 거지?”

“그래.”

워크샵이 끝나고 대일병원으로 돌아오자 각 과의 레지던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니, 말이 좋아 마중이지 곧바로 자기들 과로 데려가 부려먹으러 하는 거다.

“이번 달 외과로 배정받은 사람 이리로 오세요!”

“이번 달 비뇨기과인 사람들은 이쪽으로 와요!”

이번엔 혜미가 물었다.

“진현아, 나 이번 달 내과 배정받았는데 넌 무슨 과야?”

“나도 내과다.”

“아, 같은 과구나. 그래도 내과는 다른 과보단 좀 편하겠지?”

혜미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내과가 편하다, 라. 글쎄.’

처음 일을 시작하고 고생할 그녀의 얼굴을 떠오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달에 내과 배정받은 분들은 이쪽으로 와요!”

한 내과 레지던트가 인턴들을 찾았다.

대학 병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과인 내과답게 무려 10 명에 가까운 신규 의사가 모여들었다.

“다 모였나요?”

“네.”

“여러분이 다 같이 모여 일하는 건 아니고, 내과는 병동이 여러 군데여서 각각 한 명씩 다른 병동에 배정되어


일할 겁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병원인 대일병원은 내과 병동만 10 병동이 넘었다.

“다들 할당된 병동으로 가서 바로 일 시작하고, 김진현이 누구지?”

진현은 손을 들었다.

“저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와라.”

레지던트는 진현을 이끌었다.

“내 이름은 이윤성이라 한다. 넌 내 밑에서 일하게 될 거다. 잘 부탁한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며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윤성…….’

그는 이윤성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전 삶의 경험 때문에 대일병원에서 일하는 웬만한 주요 의사들과는 모두


안면이 있었다.

‘남자다운 척하는 성격과 다르게 소심한 놈. 하필 첫 윗사람이 이 녀석이라니.’

이전 삶에서 그와 이윤성은 별로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이번엔 다르길 바랄 수밖에.

“네가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자라고?”

레지던트, 이윤성은 진현의 인적 사항을 알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한국 최고의 명문 한국대 의대의 수석이라 그렇다.

이윤성은 짐짓 생각하듯 충고했다.

“수석이라고 자신은 남들과 다르단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금물이다. 병원의 업무와 공부는 전혀
다른 거니까. 네가 아무리 한국대 수석이라도 실제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꼭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들은 대기업 오피스를 연상시키는 통유리 건물의 중간층에 내려섰다.

엘리베이터를 나오자 한국대 병원과는 다른 깔끔한 스타일의 병동이 나타났다.

“이곳이 네가 일할 병동이다. 주로 소화기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입원하고 있으니, 잘해야 해. 저기 장부에 써져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되고. 나중에 문제 있으면 나랑 상의해라.”

처음 업무를 시작하는 신입에게 하는 설명치고는 굉장히 간략한 설명이다.

그냥 달랑 장부에 써진 일을 하라니.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학생 때처럼 친절함을 기대하면 안 되지.’

이제 돈을 받는 이상 미숙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처음이어서 그렇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으므로 무조건 잘해야 했다.

‘물론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래서 이전 삶 땐 참 많이도 혼났지.’

장부를 보니 그가 해야 할 일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채혈, 관장, 복수 천자, 동맥 검사, 소독, 간기능 검사… 종류도 많았다.

“인턴 선생님이세요? 처음 근무하시는 거죠?”

주근깨 가득한 간호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네.”

그녀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 다시 지옥의 3 월 인턴이 돌아왔구나. 이것 먼저 해주세요.”

탁!

간호사는 검사통을 진현 앞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뭘 해달라는 설명도 없었다.

그녀는 깔보는 시선으로 힐끗 보고는 사라졌다.

그녀 말고도 병동에서 일하는 다른 간호사들도 진현을 훑었다.


이제 처음 근무를 시작한 진현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관찰하는 눈길이다.

진현은 상황을 파악했다.

‘간 보는 거군.’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병원도 사람 사는 사회여서 직급에 따른 무시와 존경이 교차한다.

의사이지만 밑 사람인 인턴은 병원 내에서도 참 애매한 위치여서 이렇게 간호사들이 처음에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옛 생각나는군.’

진현은 피식 웃었다.

뭐, 어차피 덧없는 일이다.

그는 검사통에 붙은 바코드를 바라봤다.

‘Ascite. 복수 천자군. 그런데 이제 처음 근무를 시작한 인턴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너무 막 시키는 것


아니야?’

복수 천자. 즉, 배에 찬 물을 뽑는 술기다.

엄청 어려운 것까진 아니어도, 인턴의 업무 중 제법 고난도에 속하는 업무다.

진현은 스테이션에서 쓱쓱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한 십 년쯤 일해 본 사람처럼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주사와 거즈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 저기요.”

옆에서 진현이 하는 양을 놀란 눈으로 보던 간호사가 답했다.

진현은 그렇게 물품을 챙기고 환자에게로 떠났다.

병실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일을 시킨 간호사들이 당황했다.

“저, 정말로 그냥 하러 가는 거야?”

“어떻게 해? 말려야 하는 것 아니야?”

간호사들은 정말로 무작정 복수 천자를 하라고 시킨 게 아니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인턴이 무리한 업무에 당황하면 나름 혼도 내고, 기도 죽이면서 일을 가르칠 생각이었던 거다.

레지던트 이윤성도 그 모습을 봤다.

‘그냥 갔어?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원래 이윤성은 적당히 눈치를 보다 진현에게 시범을 보이며 일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처음 시작한 놈이 겁도 없이 복수 천자를 하러 가다니?

‘이 자식이,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이면 다인 줄 알아?’

그는 진현이 수석 졸업이라 오만한 마음에 겁도 없이 나섰다 생각했다.

“지금 저 인턴이 복수 천자 하러 간 곳, 어디에요?”

“73 호실이요.”

이윤성은 사고를 막기 위해 진현을 뒤쫓아 갔다.

일을 시킨 간호사도 급히 따라갔다.

그들은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야,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쪼르륵.

복벽을 뚫고 안정적으로 꽂힌 플라스틱 관에서 노란 복수가 졸졸 흘러나왔다.

살짝 기운 환자의 자세, 거즈로 고정된 플라스틱 관.

“무슨 일입니까?”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이윤성은 진현이 해놓은 양을 살폈다. 뭐 하나 나무랄 것 없는 복수 천자였다.

환자도 말했다.

“아이고, 이 새로운 선생님. 참, 잘하는 고만.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안 아프게 복수 뽑아주는 선생님은


처음이야. 고마우이.”

“…….”

이윤성과 간호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윤성은 얼떨떨하게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무리하지 말고. 환자는 모형이 아니니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

진현은 장부에 써진 일을 쭈욱쭈욱 해나갔다.

채혈, 소독, 동맥 검사, 간기능 검사… 처음 인턴 일을 시작한 신입 의사들에겐 어려운 일이겠지만 진현에겐
밥을 떠먹는 것만큼 간단한 일들이다.

수술을 집도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환자를 보는 것도 아니니 쉬울 수밖에.

‘너무 잘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좀 조절하자.’

그러나 못하는 걸 잘하는 척하는 것도 어렵지만 잘하는 것을 못하는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인턴 업무들은 의사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에 해당돼 아예 몸에 배어 있었다.

나름 못하게 보이려 신경을 썼지만 남들이 보기엔 엄청나게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였다.

‘곤란하군. 그렇다고 일부러 실수를 할 수도 없고.’

그의 업무는 모두 환자에게 처치를 하는 건데, 일부러 실수를 하면 환자가 피해를 입는다.

그것만은 안 됐다.

한편 레지던트 이윤성과 간호사들은 그런 진현의 모습을 경악해 바라봤다.

이윤성 본인이 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능숙한 것 같다.

‘뭐, 뭐지? 이 괴물은? 처음 근무하는 것 아니었나?’

이윤성이 물었다.

“김진현 선생.”

“네?”

“이전에 다른 병원에서 인턴 일을 해본 적이 있어?”

가끔 타 병원에서 인턴을 하다 그만두고 다시 재입사하는 경우가 있다.

“아닙니다.”

“그러면……?”

진현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곤란해. 몸에 밴 것을 버릴 수도 없고.’

시험 문제야 일부러 틀리면 되지만, NBA 농구 선수가 초등학생처럼 농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물론 억지로 연기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환자가 불편을 겪는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한데.’

그래서 진현은 이윤성을 이해시키기로 했다.

“대학 실습 도중 여러 번 해봤습니다.”

“이걸 실습 도중 해봤다고?”

“네.”

이윤성은 그게 말이 되나 고민했다.

물론 같은 학생들끼리 한두 번은 주사로 연습 삼아 찔러볼 수 있겠지만 이건 그 수준이 아니다.

“네, 여러 번 해봤습니다.”

“그래……?”

이윤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대 의대라서 그런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어쨌든 진현은 점심도 되기 전에 일을 끝내 버렸다.

원래는 저녁은 되어야 끝날 거라 예상되던 분량이었다.

“더 일이 있습니까?”

“아, 아니요.”

전체적인 업무를 조율하는 간호사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만약 추가적인 일이 생기면 곧바로 콜(Call) 해주십시오. 제 콜


(Call) 번호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진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간호사들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저, 저 선생님 뭐지? 정말 신입 인턴 맞아?”

“내가 지금 헛것을 봤나?”

(다음 편에서 계속)

# 43

43. 수련의(修鍊醫) – 인턴 (2)

인턴 휴식 장소 및 숙소는 병원 건물 지하에 위치했었다.


인턴 숙소에 들어가니 몇몇 인턴 동기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는 일 할만 해?”

“아, 아니. 엄청 혼났어.”

대답을 하는 여자 동기의 눈이 시뻘갰다. 처음부터 엄청 혼나 울음을 터뜨린 듯했다.

“내가 하도 못하니까. 위에 선생님이 화내면서 잠시 쉬고 오라고. 그래서 왔어. 하아, 어떻게 하지?”

그 대화를 들은 진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들 고생이 많군. 처음엔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렇지만 다들 금방 익숙해진다.

의대 때 배웠던 내용이 탄탄한 기본이 되고, 애초에 너무 어렵거나 위험한 업무는 인턴에게 안 시키기 때문이다.

조금 둘러보니 혜미도 있었다.

평소와 달리 풀 죽은 얼굴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진현은 옆에 앉았다.

“할 만해?”

“…….”

“처음엔 다 그런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힘내라.”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애써 웃었다.

“응, 힘내야지. 진현아.”

“응?”

“고마워.”

“됐어.”

그때 누군가 혜미를 불렀다.

제법 예쁘장한 여자 인턴이었는데, 혜미와 비슷한 병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혜미야, 늦었어. 올라가서 일하자.”

“응.”

혜미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그녀를 따라갔다.

동료 인턴, 김수연은 혜미와 뒤에 남은 진현을 힐끗 보고 응큼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소재 여대 소속 의대를 졸업한 그녀는 지난 인턴 워크샵 때 혜미와 친해졌다.

“너희 둘이 사귀지?”

“뭐, 뭐? 아니야!”

혜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정말로?”

“응,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사귀는 것 같은데…….”

“저, 정말 아니야.”

점점 더 빨개진 혜미의 얼굴은 건들면 푹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김수연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

“서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안 사귀어?”

“아, 아니야.”

“응?”

“나만 좋아해. 진현인 나 안 좋아해.”

혜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애한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뭐, 사실 그녀의 짝사랑은 김진현 본인만 모를 뿐, 한국대 의대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하긴 했다.

한국대 최고 퀸카의 짝사랑.

안 유명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진현과 붙어 있는 혜미를 보면 티가 너무나 눈치를 못 채는 게 불가능했다.

김진현 본인이 눈치 못 채는 게 오히려 신기해 한국대에선 김진현 고자란 소문도 있었다.

“거참, 신기하네. 너같이 예쁜 애를 거절하다니. 아니, 고백은 해봤어?”

“뭐?”

“고백해 봤냐고.”
“아, 아니…….”

고백이라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혜미는 지금의 관계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그 순수해 보이는 반응에 김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너… 예쁘게 생겨가지고 안 되겠구나.”

“응?”

여대 여우들 사이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김수연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너 정도 애가 꼬시면 안 넘어올 애가 없을 텐데.”

“나, 나 그런 것 잘 못해.”

“그러면 고백이라도 해봐. 혹시 알아? 쟤도 너 좋아하고 있을지? 아니더라도 원래 고백받으면 없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고.”

“…….”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혜미는 빨개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진현에게 고백하라고?

***

대일병원은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장소 중 하나인 청담동에 위치하고 있다.

부지도 어마어마하게 넓어 대일그룹의 넘치는 부(富)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대일병원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이사장실에 한 남자가 들어갔다.

빳빳한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는 의사라기보단 모델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모의 비서가 남자, 이상민을 맞았다.

병원 내 직급을 보면 이사장의 비서가 이제 갓 신입 의사가 된 이상민보다 훨씬 높았지만 그녀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이사장님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니 인자한 인상의 남자, 이상민의 아버지 이종근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왔느냐?”

“네.”
“그래, 일은 할 만하고?”

“그럭저럭이요.”

인턴 업무가 시작 된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처음 울음을 터뜨리던 신입 의사들도 슬슬 적응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상민의 업무 처리 능력은 놀라워 벌써부터 진현과 더불어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장, 이종근은 이상민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럭저럭 이라니. 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럭저럭이 아니라 잘해야 해. 그것도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닌,
누구보다도 잘해야 해.”

“네에, 네.”

이상민은 아버지가 앉아 있는 의자의 뒤편을 바라보고 슬쩍 웃었다.

아버지의 등 뒤에는 벽면을 다 차지하는 거대한 통유리가 있었고, 청담동을 포함한 서울 전체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사장이니 누릴 수 있는 전망이다.

“내가 외과에는 넌지시 이야기를 해놨으니 적당히 봐서 네가 직접 인사를 하러 가라.”

“네.”

이종근은 간략한 보고서를 펼쳤다.

“그리고 아직 짧은 기간이지만, 네 업무 보고를 받았다. 처음치곤 나쁘진 않더구나. 단, 김진현 그 아이보단


못해. 김진현, 그놈은 왜 대일병원에 온 건진 모르겠군.”

이종근은 혀를 끌끌 찼다.

“어쨌든 잘 알고 있겠지만, 김진현이고, 누구고 절대 지면 안 된다.”

“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우리 가문에 2 등은 필요 없어. 특히 너처럼 안 좋은 피가 섞였으면 더더욱. 너도


자존심이 있으면 10 년 동안 진 상대한테 또 지고 싶진 않겠지. 잘해라.”

이상민은 미소 지었다.

“네.”

“가서 일봐.”

이상민이 나가자 이종근은 보고서를 펼쳤다. 거기에는 김진현에 대한 보고서가 적혀 있었다.

“확실히 대단하긴 해. RI84 와 TC80 도 이 녀석 작품이라니. 그것도 학생 때.”

무려 10 년 동안 만년 2 등이지만, 이상민이 못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이상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다만 상대가 너무 나빴을 뿐이다.

대일그룹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아니, 능가하는 헤인스도 이 어린 인턴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가 있을
정도였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인 건가?’

1700 년대의 작곡가였던 살리에르는 당대의 천재였지만 모차르트란 벽을 넘지 못했다.

살리에르가 못나서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너무 뛰어나서였다.

그러나 이종근은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 봤자 학생 때 일이지. 실제 환자를 보는 진료는 전혀 다르니까.’

학생 때 두각을 드러내는 이는 많다. 천재라 불리는 이도 몇 년에 한 명씩은 꼭 있다.

그러나 막상 그 대단한 학생들이 병원에 입사해도 두각을 보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책상머리 공부와 실무는 완전히 다른 법이고, 의학은 특히 경험이 쌓이지 않으면 죽은 지식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상민이 오히려 낫지.’

천한 핏줄을 타고 났지만, 그의 아들의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단순히 공부를 떠나서 모든 면에서.

그저 공부만 탁월한 바보들과 달라, 환자를 보는 실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일게 분명했다.

‘이상민, 그놈은 반드시 탁월한 능력을 보여야 해. 가문의 다른 놈들의 입을 막으려면 반드시!’

천한 핏줄 때문에 이상민을 병원 후계로 세우는데 반대가 많다.

그 반대를 잠재우려면 최고의 실력을 보여야 했다.

‘젠장, 범수만 있었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는데. 왜 자살을 해가지고.’

이종근 본인도 천한 핏줄을 타고난 이상민을 병원 후계로 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할 패가 없었다.

‘절대 가문의 다른 놈들의 사람을 병원 후계로 세울 수는 없어. 다른 놈들의 사람으로 후계를 세우면 차후 병원의
경영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거야. 그러니 반드시 이상민을 후계로 세워야 해.’

이종근도 곧 은퇴할 나이가 가까워온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아들을 후계로 세운 후, 막후에서 병원을 조종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민, 그놈이 창녀의 핏줄을 타고 난 것을 만회하려면 반드시 최고의 실력을 보여야 해. 김진현이고, 뭐고
반드시.’

2 등은 필요 없다. 가문의 잡음을 없애려면 최고가 되어야 했다.

생각을 마친 이종근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잘하겠지. 매번 김진현한테 졌다고는 하지만… 학생 때 1 등이야, 책상물림 1 등이고 병원에서의 일은


완전히 다르니까.’

그는 아무리 김진현이 학생 때 천재라도 병원에서도 계속 천재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책상에서의 공부와 직접 환자를 보는 일은 다른 법이니까.

실제로 학생 때 1 등이 병원에 와서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

인턴들이 대학병원에 취직해 고된 일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원하는 과의 전문의가 되는 것이다.

인턴 휴게실에서 인턴들이 휴식을 취하며 투덜거렸다.

“하, 우린 언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전문의가 되냐.”

“그러게. 전문의 자격증을 안 딸 수도 없고. 이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행세하고 살려면 전문의 자격증은 필수니.
전문의 자격증 없어도 되는 나라도 많다는데.”

번듯한 직장에 가려면 4 년제 대학졸업증이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

“헤유, 그런데 아무 과 전문의나 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하고 싶은 과를 해야지.”

“인턴 때는 소속이 없다지만, 1 년 뒤 레지던트가 될 때는 원하는 과에 들어가서 수련을 받아야 할 텐데…….”

원하는 과에 들어가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것도 경쟁이었다.

진현도 피부과에 가기 위해 한국대 병원을 떠나 대일병원에 온 것 아닌가?

한편 고등학교 동창, 황문진이 인턴 숙소 침대에 누워 진현에게 물었다.

이전부터 친했던 둘은 일부러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진현아, 너는 무슨 과 할 거야?”

“피부과.”

진현이 짧게 답했다.

“너 지금 뭐해?”

“책 봐.”
“책?”

“그냥 공부할 게 있어서…….”

황문진이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너는 어째 고등학교 때랑 하나도 변하질 않았냐? 중학교 때부터 항상 1 등만 하더니, 심지어 한국대 의대에서도
수석. 하여튼 괴물이라니까.”

황문진은 혀를 찼다.

“그런데 너같이 뛰어난 애의 종착점이 피부과라니. 뭔가 아깝다.”

“뭐가 아깝냐? 다 이렇게 사는 거지.”

“하긴, 너만 그런 게 아니지. 내가 다닌 대학 수석도 성형외과 한다더라.”

미국은 성적 뛰어난 의사들이 흉부외과, 외과 같은 생명을 다루는 과를 많이 선택하는 반면, 한국은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 같은 과를 많이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의대생들이 미국보다 비도덕적이어서 그런 걸까?

설마. 미국 의사들이 얼마나 돈을 많이 밝히고 쓸어 담는데.

전부 다 돈 때문이다.

미국 같은 나라들은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다른 과보다 돈을 많이 벌지만, 한국은 대접이 형편없다.

어쩔 수 없었다.

외과, 흉부외과 같은 과들은 의료 행위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보험수가가 인도(India)보다 낮게 책정돼
있고, 심지어 치료에 들어가는 재료비보다 보험수가가 낮은 경우도 있어 대우가 나쁠 수밖에 없다.

“내 종착점은 피부과가 아니다.”

“그러면?”

진현은 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44

44. 수련의(修鍊醫) – 인턴 (3)

“임대사업자.”

“…뭐?”

황문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농담을 다하네?

진현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농담이긴 하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꿈이 집값 올라 부자 되고, 빌딩 산 후, 월세 받으며 사는 임대사업자 아니겠는가?

“어디가?”

“병동.”

“늦었는데? 아직 일 있어?”

“안 좋은 환자가 있어서. 처치할 게 많아.”

“아… 그래, 수고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동에 도착 후 진현은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를 치료해 준 최대원 교수였다.

“아, 진현 군. 잘 지냈나? 오랜만이네.”

“네, 교수님.”

최대원 교수는 반가운 얼굴을 했고, 진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최대원 교수는 그와 시기를 맞춰 대일병원에 스카우트되었다.

‘최 교수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부담돼.’

그 친근한 눈빛을 보면 항상 먹이를 노리는 매가 떠올랐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 환자가 안 좋아서. 고민이군.”

최대원 교수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담당 레지던트인 이윤성이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께서는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나머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환자가 안 좋은데, 어떻게 맘 편히 쉬나?”

그 모습에 진현은 떠오르는 환자가 있었다.

‘김시민 환자 때문이군.’

최근 이 병동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은 환자였다.


“위암 치료는 별문제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도대체 나빠지는 이유를 모르겠군. 다른 선생님들께 협진을
해봐도 뚜렷이 답이 나오지도 않고.”

김시민 환자는 성공적으로 위암 치료를 한 후, 순조롭게 회복 중에 상태가 나빠졌다.

‘최대원 교수님이 잘못 치료해서 생긴 합병증은 아니야. 분명 다른 원인이 있어.’

진현은 생각했다.

최대원 교수는 레지던트 이윤성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음… 더 나빠지지 않을지 잘 모니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정보로써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의견에 최대원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 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위암의 대가로 스카우트된 이름 높은 최대원 교수가 별 볼 일 없는 인턴에게 의견을 묻자 이윤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현도 당장은 할 말이 없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최대원 교수는 미소 지었다.

“그래, 부탁하네. 같이 생각해 보자고.”

“교, 교수님. 이 아이는 인턴입니다.”

이윤성은 최대원 교수가 뭔가 착각하나 싶어 말했다.

최대원 교수는 차갑게 대답했다.

“환자를 치료하러 고민하는데, 교수인지, 레지던트인지, 인턴인지가 뭐가 중요한가?

”……!”

“직급에 따른 의무와 책임은 물론 중요하지만, 쓸데없는 권위의식은 도움이 되지 않네.”

“…네.”

이윤성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인턴은 의사사회에서 가장 하층민일 뿐이다.

이제 갓 의대만 졸업한 풋내기들의 의견이 뭐가 도움이 되겠는가?

“하여튼 진현 군은 앞으로 내과를 할 인재니, 위 선배인 자네가 잘 돌봐주게.”


“……!”

그 말에 이윤성과 김진현은 깜짝 놀라 최대원을 바라봤다.

‘내가 언제?!’

김진현의 말없는 비명은 신경 쓰지 않고 최 교수는 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그러면 난 교수실에 가 있을 테니, 혹 환자가 안 좋아지면 곧바로 연락하게.”

최 교수가 사라진 후, 이윤성은 묘한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눈빛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호의를 가진 눈빛은 아니다.

왠지 이유도 없이 미움을 산 듯하다.

“나중에 내과를 하고 싶다고?”

“…….”

“그러면 잘해.”

그 아니꼬운 말에 시켜줘도 안 해! 란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내과 로테이션을 돌면서, 당신 과에 관심 없어! 라고 선언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짓이라 진현은 그저


침묵했다.

‘이번 달이 지나 내과 순환근무가 끝나면 이 근처엔 다시는 얼씬거리지도 말아야지.’

그때 간호사가 진현에게 말했다.

“김진현 선생님, 김시민 환자분한테 소변 줄 좀 넣어주세요.”

이전보다 훨씬 공손해진 태도다.

뛰어난 일 처리로 진현은 병동 간호사들은 물론, 환자들한테까지 모두 인정받고 있었다.

“소변이 안 나오나 보죠?”

“네, 상태가 점점 안 좋네요.”

사람의 몸은 끊임없이 소변을 만들어 방광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소변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물품을 챙겨 병실로 들어가니 70 대쯤 돼 보이는 노인이 꺽꺽거리며 누워 있었다.

김시민 환자분이었다.

“아, 인턴 선생님 오셨어요?”


김시민 환자의 보호자, 딸이 진현을 맞았다. 벌써 여러 번 이런저런 처치를 해서 안면이 있었다.

“네, 소변 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왜 아버지는 안 좋아지는 걸까요?”

딸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도 섞여 있었다.

너희가 치료를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

위암 치료와 현재 상태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치료를 받은 후 이렇게 됐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긴 했다.

사실 이 정도면 굉장히 신사적인 반응이다.

‘도대체 왜 안 좋아지는 거지? 이대로라면 며칠을 못 넘길지도 모르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군.’

괴질이 따로 없었다.

“소변 줄을 넣겠습니다.”

진현은 요도에 고무 튜브를 넣었다. 교본 동영상을 보듯 차분하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런데 튜브를 넣었는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피처럼 새빨간 오줌이 소변 줄로 새어 나왔던 것이다.

“어, 왜 피가 나오죠? 상처가 났나?”

딸이 놀라 물었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피가 아닌데? 뭐지?’

일단 그는 피가 나오도록 거칠게 소변 줄을 넣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적인 피와는 양상이 달랐다.

진현은 그 사실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이건 피가 아니라…….”

그런데 그때, 병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레지던트 이윤성이 들어왔다.

“소변 줄 잘 넣었어?”

딸이 이윤성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거 괜찮은 건가요?”

이윤성은 소변 줄에 맺힌 빨간 소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피잖아? 소변 줄을 어떻게 넣은 거야?”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낸, 그는 친절히 웃으며 말했다.


“이건 소변 줄이 들어갈 때 상처가 생겨서 그런 것입니다. 시간 지나면 금방 저절로 멎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아… 그러면 다행이고요.”

“환자 분 상태도 금방 좋아질 거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윤성과 진현은 병실에서 빠져 나왔다.

이윤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진현에게 역정을 냈다.

“야, 너는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환자한테 피를 나게 하면 어떻게 하냐? 함부로 하지 말고 좀 조심히 해.”

그는 제대로 정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진현의 잘못으로 몰아붙였다.

진현은 차분히 답했다.

“피가 아닙니다.”

“뭐? 그러면 저 새빨간 게 피가 아니면 뭔데?”

“피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오히려 다른 게 소변에 섞인 듯한 양상입니다.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진현은 깊이 생각했다.

‘절대 피는 아니야. 뭔가 이상해. 이유 없이 안 좋아지는 환자와 빨간 소변이라. 새빨간 소변이 뭔가 단서가 될


것 같은데.’

오랜 임상 경험에 근거한 감이 외쳤다.

이유 없이 새빨간 소변이 나왔을 리가 없다. 원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윤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턴 나부랭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건방지다 여겼다.

“너, 네가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이라고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책상 앞에서 하는 공부와


실제 진료는 전혀 달라, 임마. 앞으로는 또 이런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해! 다시 한번 이러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러면서 이윤성은 사라졌다.

근처에 있던 간호사가 진현을 위로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인턴 선생님. 이윤성 선생님 원래 성격 안 좋잖아요.”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뭐, 기분이 좋다면야 거짓말이겠지만, 좁쌀 같은 놈이 짜증내는 것에 반응할 필요야 없다.


“혹시 컴퓨터를 좀 써도 되겠습니까?”

“네, 여기 쓰세요.”

간호사는 친절히 컴퓨터를 비켜주었다.

첫날 병동에 왔을 때 텃세를 부리던 거를 생각하면 상전벽해 같은 태도변화였다.

‘김시민 환자분…….’

컴퓨터 앞에 앉은 진현은 병원 전산에 접속해 김시민 환자의 차트를 열었다.

‘위암 치료 후 원인 모르게 계속 신장 기능과 간기능 악화 중…. 이제 더 나빠지면 중환자실에 가서 치료 받아야


할 중한 상태. 그런데 빨간 소변은 왜 나오는 거지?’

책이 펼쳐지듯 진현의 머리에 적색 소변의 원인이 촤르륵 펼쳐졌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경험이 동반되지 않은 의학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학창시절 책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실제 환자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진현은 이전 삶에서 겪은 풍부하고 깊은 임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임상 경험에 한국대 의대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한 의학 지식이 얹혀졌다.

그것도 그냥 의학 지식이 아닌,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을 할 정도의 지식이다.

그 깊은 지식이 임상 경험과 어우러져 생명을 얻어 숨을 내쉬었다.

따라서 이전의 삶에서도 뛰어난 외과의사였던 그는 광활한 지식이 더해져 이전의 삶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뭐, 어차피 나중에 피부과 할 거니 쓸데없는 지식이긴 하지만.’

그는 머릿속 도서관 한편에서 가능성이 있을 법한 진단들을 골라냈다.

***

‘용혈성 빈혈, 이건 아니야. 가능성 없어. 패혈증, 이것도 아니야. 안 맞아.’

쭈욱쭈욱 넘어가던 그는 유력한 범인을 드디어 찾아냈다.

‘근육 융해증(다양한 원인으로 체내의 근육이 깨지는 상태)! 그래, 이거면 현재 환자의 상태가 모두 설명이 돼.
새빨간 소변도 설명되고.’

드물지만 정말 가끔씩 병원에서 접할 수 있는 질환이다.

하지만 콕 집어 의심하지 않으면 진단할 수 없는 어려운 질환이었다.

진현은 병동에서 일하고 있는 이윤성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선생님.”
“응, 왜?”

피곤 때문인지 이윤성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어제 밤을 샜고, 지금 시간이 저녁 11 시를 넘어가니 피곤할 만은 하다.

“김시민 환자분은 혹시 근육 융해증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응? 근육 융해증?”

이윤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웬 헛소리야, 하는 얼굴이다.

“너 한국대 수석이라고 뻐기는 거냐? 그 환자랑 무슨 상관…….”

말을 하던 이윤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증상이 꼭 맞긴 했다. 마치 책에 나온 것처럼.

하지만 이윤성은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긴 하지만. 비슷한 증상을 가진 질환은 많고 무엇보다 너무 갑작스러워. 갑자기 그런 질환이 생길 이유가
없어.”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됐다. 가능성 떨어지는데 괜히 쓸데없는 검사해서 환자 힘들게 할 필요 없어.”

“피검사 한 번이면…….”

그때 이윤성이 버럭 화를 냈다.

“야, 인턴!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너 자꾸 나 귀찮게 할래? 공부자랑은 네 학교에나 가서 해!”

“…….”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직급이 낮으니 답답하군.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괜히 피곤이 몰려왔다. 어차피 이렇게 신경 써봤자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더구나 김시민 환자의 담당 의사는 진현이 아니라 이윤성으로 환자가 나빠져도 모든 책임은 그의 몫이었다.

‘하아, 그래도 안 봤으면 모를까, 눈앞에서 환자가 안 좋아지는 걸 모른 척할 수도 없고.’

하지만 도와주고 싶어도 인턴인 진현은 권한이 없었다.

피 몇 방울이면 진단할 수 있을 텐데.


더구나 근육 융해가 맞으면 진단이 늦어질 경우 치명적 결과를 유발할 수도 있었다.

‘어쩌지?’

고민하던 그는 결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45

45. 수련의(修鍊醫) – 인턴 (4)

간단히 주사기와 검사통을 챙긴 그는 병실로 찾아갔다.

딸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환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 인턴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피검사를 하러 왔습니다.”

“피검사요? 아까 했는데… 이윤성 선생님이 시키든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제 판단입니다.”

“인턴 선생님 판단이요?”

“네, 현재 환자 분에게 강하게 의심이 가는 질환이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피검사가 필요합니다. 만약
검사에 동의하시면 검사를 진행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보호자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인턴 선생님 생각이라고요?”

“네.”

사실 진현은 보호자가 검사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다.

누가 이제 갓 의사가 된 인턴의 생각을 존중하겠는가? 자신이라도 불신할 거다.

그런데 보호자는 의외의 답을 했다.

“김진현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검사해야죠. 여기 피검사하세요.”

진현은 살짝 놀라 물었다.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보호자는 웃었다.

“저, 선생님. 환자들이랑 보호자들은 진료를 받다 보면 다 알아요. 이 선생님이 정말로 나를 위하고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인지, 아닌지… 다 느껴져요.”

“…….”

“김진현 선생님은 지난 며칠 동안 계속 저희에게 잘해줬어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선생님이 환자를 위하는


의사인건 알 수 있어요. 그런 김진현 선생님이 권하는데 해야죠. 뭐, 그리고 고작 간단한 피검사니.”

그 말에 진현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가슴을 채우는 그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면 검사하겠습니다.”

간단히 피를 채혈한 그는 곧바로 검사실로 향했다.

“누구세요?”

늦은 시간에도 일하고 있던 당직 검사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피검사를 의뢰하러 왔습니다.”

“그냥 오토 트랙(Auto track)으로 내리지 왜 직접 오셨어요? 무슨 검사 돌려드릴까요?”

“근육 효소입니다.”

“네, 이리로 주세요.”

“얼마나 걸립니까?”

“급한 거예요?”

“네, 최대한 빨리 해주십시오.”

“응급으로 돌리면 30 분 정도 걸릴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티각티각, 검사기가 피를 넣고 돌아갔다.

진현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병동에서 눈을 비비며 일하던 이윤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응, 이게 뭐야?”

김시민 환자의 검사 결과에 못 보던 항목이 떠 있었다.

“뭐야, 근육 효소? 나 이런 처방 낸 적 없는데?”


담당 의사인 그가 모르는 검사라니?

뭐지? 아직 검사가 진행 중인 듯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거 뭐예요?”

그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간호사도 아는 바는 없었다.

“어, 그러게요. 이게 뭐지? 웬 근육 효소?”

그 순간, 이윤성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김진현?’

김진현은 불과 한 시간도 되기 전에 근육 융해 질환을 이야기했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죽으려고!!’

그는 급히 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어디야?”

-검사실입니다.

역시 범인은 김진현이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인턴 나부랭이 주제에 네 판단으로 검사를 돌려? 주치의인 내가 우스워?!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빨리 뛰어 올라와!”

이윤성은 벼락처럼 화를 토했다.

전화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현이 나타났다.

이윤성은 다시 소리를 쳤다.

“너 임마! 누가 네 마음대로 검사하래? 네가 주치의야? 교수야? 환자 보는 게 네 장난인 줄 알아?! 이 건방진


자식이!! 너 인사평가는 최하점 나올 줄 알아!!”

그런데 하필 그때 이윤성의 전화가 삐리리 울렸다.

그는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네, 검사실인데요. 방금 전 김시민 환자분 검사 의뢰하셨죠?

“아, 그거 취소할게요. 인턴 새끼가 제멋대로 한 거여서.”

-취소한다고요? 정말요?

“네, 취소해 주세요.”


그러고 이윤성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검사실 직원이 말했다.

-검사 결과상 수치가 5 만이 넘어서 한계치를 초과했는데 취소하신다고요?

“네, 취소… 아니, 지금 뭐라고요?! 수치가 5 만이 넘었다고요?”

이윤성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상 수치가 50 미만인데 5 만이라고?

“그거 잘못 검사한 것 아니에요? 근육 수치가 5 만처럼 높게 나올 리가…….”

-검사 제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5 만이 아니라, 5 만 이상이에요. 너무 높아서 검사기의 한계상 더 높은 수치는
측정이 안 돼요.

“…….”

이윤성은 이 현실감 떨어지는 수치에 입을 다물었다.

‘근육 효소가 5 만 이상이라고?’

이 세상에 근육 효소가 5 만 이상으로 증가하는 질환은 단 하나였다.

근육 융해.

김진현의 생각이 정확히 맞았던 거다.

‘마, 말도 안 돼.’

이윤성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인턴이 근육 융해를 진단하다니? 그것도 쥐꼬리만 한 실마리만 가지고?

“선생님, 처치를.”

진현의 나직한 말에 이윤성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

그는 급히 처방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최대원 교수였다.

“네, 교수님.”

-자네. 검사 결과 봤나?

“아… 네.”

최대원 교수는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퇴근을 안 하고 환자를 고민하고 있었던 듯하다.


-지금 바로 병동으로 가겠네.

곧 가운을 펄럭이며 최대원 교수가 나타났다.

“대단하군. 어떻게 근육 용해를 생각했지?”

“아… 그게…….”

이윤성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생각해 낸 게 아니니까.

머리를 긁적이다 순간적으로 못된 생각이 떠올랐다. 공이야 가로채면 된다.

“환자가 붉은 소변을 봐서 추측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추론한 듯한 당당한 목소리였다.

“정말인가?”

최대원 교수가 이윤성의 눈을 바라봤다. 검은 장막을 뚫는 듯한 깊은 눈에 이윤성은 순간 움찔했다.

“그… 네.”

“검사 접수가 자네 아이디(ID)가 아닌, 진현 군의 아이디(ID) 번호로 되어 있던데?”

“……!”

이윤성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미 최대원 교수는 다 알고 온 것이다. 다 알고 온 사람 앞에서 거짓으로 공을 가로채려 하다니.

최 교수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 레지던트는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윗사람 앞에서 큰소리만 뻥뻥 치지, 잘하는 것도 없고, 권위의식만 가득했다.

“말만 하지 말고, 잘 좀 하게. 응?”

“…네, 죄송합니다.”

이윤성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최대원 교수가 김진현을 돌아봤다.

“정말 고맙네, 진현 군. 자네 덕분에 환자가 살겠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가?”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늘 그렇듯,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최대원 교수는 감탄을 넘어 경탄의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고, 진현은 식은땀이 흘렀다.

난 피부과를 할 건데, 어째 자꾸 늪에 발을 집어넣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근육 융해가 온 거지?”

이윤성이 신뢰를 만회하기 위해 재빨리 대답했다.

“위암 치료 후 온 게 아닐까요?”

최대원 교수는 다시 한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육을 건들지도 않은 내시경적 위암 치료 후 왜 근육 융해가 와? 자네, 이거 안 되겠군? 도대체 공부를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생각을 좀 하고 답하고, 모르면 공부 좀 하게. 쓸데없이 권위의식만 가지고 일하지 말고!”

“……!”

최대원은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드는 행태를 보였던 이윤성을 작심한 듯 나무랐다.

“앞으로 잘하게. 응? 인턴도 아니고, 레지던트가 되어서 이게 뭔가? 인턴 선생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자넨


오다리가 아니라 환자를 보는 의사야. 앞으로는 좀 잘해!”

호된 꾸지람이 계속 이어졌고, 이윤성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쌤통이군.’

진현은 쌤통인 마음이 들어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애써 참았다.

“진현 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정확한 원인이야 알 수 없지만… 최근에 추가된 스타틴 약물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최대원 교수가 손뼉을 쳤다.

“그렇군, 스타틴이면 드물지만 근육 융해를 일으킬 수 있지. 가능성이 충분히 있겠어. 정말 대단해.”

아무리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미궁을 풀어낸 진현에게 최 교수는 계속 경탄의 찬사를 했다.

물론 진현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그 칭찬이 불편했다.

어쨌든 진현 덕분에 늦지 않게 치료가 시작되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났었겠지만, 다행히 아주 늦은 시기는 아니었다.

적절한 치료 끝에 김시민 환자의 상태는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진현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상태가 호전된 후 딸이 진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이 저희 아버지를 살려주셨어요.”

진현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좋아져서 다행입니다.”

“나중에 선생님이 수련을 마쳐 전문의가 되시면 그때는 선생님께 진료받고 싶네요.”

그 말에 진현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피부과를 할 거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뭐, 피부 치료 받으러 오는 거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의사로서 환자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현은 그렇게 말했으나, 보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진현에게 감사의 말을 표현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병원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 감사의 편지를 올린 것이다.

<감사한 김진현 선생님께.>

이런 제목으로 시작한 감사의 편지엔 평소 진현의 친절한 태도, 불이익을 감수하고 검사를 시행해 목숨을 살린 일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진현은 그 편지를 읽고 아연한 마음이 들었다.

병원 홈페이지에 올리면 그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읽게 된다.

‘이, 이게 뭐야. 주목받기 싫은데.’

진현이 급히 게시된 글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평소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던 병원 홍보팀이 오랜만에 발견한 일감에 눈을 번뜩이며 번개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감사의 편지를 베스트 게시물로 만들어 병원 대문에 띄어버렸다.

덕분에 대일병원 홈페이지 배너에 그 감사의 편지가 올라와 버렸다.

그걸 보고 진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원채 눈에 띄는 곳에 올라가 이대로라면 병원장부터 미화원은 물론, 거제도에 사는 환자까지 다 볼 기세였다.

“안 돼.”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친 사고(?)였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국내 1 위 대일병원에 김진현이란 이름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인턴이라 불릴 이름이었다.

***

한편 대일병원 꼭대기 층, 이사장실.

이사장 이종근도 병원 홈페이지에서 그 게시물을 봤다.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김진현? 이놈 뭐야? 인턴이 어떻게 이런 일을?”

전직 외과 교수였던 그는 김진현이 얼마나 어려운 진단을 해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학생 때 공부를 잘했어도 인턴이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교수도 알아내기 어려운 질환을 정확히 찾아내다니.

경탄을 터뜨릴 만한 일이었다.

항상 이상민을 압도하는 라이벌만 아니면, 불러서 칭찬을 해주고 싶을 만큼.

이종근은 민 비서에게 물었다.

“김진현 선생님의 다음 근무 스케줄이……?”

“다음 스케줄은 외과입니다.”

이종근은 눈썹을 찌푸렸다.

외과.

이상민이 자리를 잡아야 할 과였다. 하필 다음 달엔 이상민도 외과를 돌았다.

김진현과 함께.

(다음 편에서 계속)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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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 2018 년 03 월 26 일

ISBN | 979-11-6202-153-8(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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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46. 외과의 유망주? (1)

인턴 숙소 방에서 노트북으로 병원 홈페이지를 보며 황문진이 감탄을 토했다.

“정말 대단해, 진현아. 한국대 수석은 역시 다르구나.”

“다르긴 뭐가 다르냐…….”

진현은 난감한 얼굴을 하며 침대에 추욱 늘어졌다.

시작부터 이런 사고를 치다니.

그는 이제부턴 무조건 가만히 잠자코 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과연 그 뜻대로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너 내과 한다며?”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리냐?”

“그런 소문이 파다하던데?”

“…….”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의 소문인지 뻔했다. 분명 최대원 교수일 거다.


‘아니, 평소엔 그렇게 근엄하면서 왜 이렇게 팔불출처럼 떠들고 다니는 거야?’

까마득한 교수의 입을 코르크로 틀어막을 수도 없고,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방문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황문진이 문을 열자, 하얗고 예쁜 얼굴이 빼꼼히 나타났다.

혜미였다.

혜미의 얼굴을 본 황문진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김진현 선생님 안에 있어요?”

아직 안 친한 둘은 서로 존대를 했다.

“아, 안에…….”

진현이 2 층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무슨 일?”

혜미가 웃으며 말했다.

“진현아, 너 오프지?”

오프, 당직 없이 쉴 수 있는 간만의 퇴근 날을 뜻한다.

“응, 그런데?”

“나가서 맛있는 것 먹지 않을래? 근처 논현동에 괜찮은 파스타집 있던데.”

“술은 안 먹고?”

“술도 마시면 좋고. 헤헤.”

진현은 피식 웃으며 완전히 일어섰다. 기분도 답답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그래, 가자. 지금?”

“응, 바로 나가자.”

이미 그녀는 외출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꽃잎처럼 그녀를 단장시켰다.

그런데 황문진이 떠듬떠듬 말했다.

“나, 나도 오픈데.”
“응?”

“나도 가면 안 돼?”

“그래, 너도 같이 가자.”

진현은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그 대답에 혜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진현은 보지 못했다.

가볍게 옷을 갈아입고 그들은 인턴 숙소를 나왔다.

“오, 오랜만에 나가니까 좋네요. 그렇죠?”

“그러네요.”

뻣뻣한 질문에 영혼 없는 답변이었다.

황문진은 계속 뭐라 긴장한 채 말을 걸었고, 혜미는 힐끗 진현만 바라봤다.

그리고 진현은 항상 그렇듯 혜미의 시선을 눈치 못 챘다.

그렇게 그들은 근처 논현동으로 가기 위해 병원의 복도를 걸었다.

그때만 해도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적당히 밥을 먹고, 간단히 술을 마신 후, 잠을 자겠지.

하지만 진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곧 자신이 누구를 만날지.

많은 극적인 사건이 예고를 하지 않고 일어나듯 그날의 만남도 그랬다.

복도를 걷다 그는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바라봤다.

우연히, 그러니까 우연이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 탄 한 여인을 본 순간, 진현의 세상이 멈춰 버렸다

“……!”

그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머리가 하얗게 질리며, 손이 떨렸다.

“…진현아?”

갑자기 멈춰선 그를 혜미가 부르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진현은 엘리베이터로 달려들었다.

머리가 시킨 게 아니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잠깐!!”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고, 위로 올라가버렸다.


그 돌발 행동에 혜미와 문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계단이 어디지?!”

“저, 저기?”

진현은 곧장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지, 진현아!!”

당황한 외침이 울렸으나 들을 정신이 없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따라잡기 위해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어째서 여기에?’

터질 듯한 의문이 머리를 흔들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그녀였다.

이전 삶의 아내였던 그녀, 이연희가 분명했다!

‘어째서 대일병원에?’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대일병원과 분명 연관이 없었는데?

그런데 정신없이 뛰어 올라가던 그는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지금 뭐하는 거냐, 김진현.’

대일병원은 35 층이다.

각 층의 넓이도 굉장히 넓다. 그녀가 어느 층에 내릴 줄 알고 따라간단 말인가?

‘그리고 만나면? 만나면 뭐할 건데?’

이전 삶의 기억이 없는 그녀는 그를 모른다.

그리고 설사 기억이 있으면? 있으면 뭐할 건데?

이전 삶에서도 쓸쓸히 헤어졌는데, 만나서 손이라도 잡을 건가?

“진현아!!”

그때, 밑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멍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무슨 바보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진현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혜미가 걱정 어린 얼굴로 그를 쫓아 올라오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지친 숨이 가득했다.

진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바보 같을 정도로.

그렇게 그는 거짓말하듯 생각했다.

***

간단한 식사와 술자리 후, 혜미는 집에 돌아왔다.

오빠인 이범수 교수의 자살 이후 그녀는 따로 삼성동 주상복합오피스텔에 방을 얻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힘없는 손길로 옷을 벗었다.

곱게 차려 입은 옷들이 떨어지며 하얀 알몸이 드러났다.

쏴아아!

혜미는 멍한 표정으로 샤워를 했다.

뽀얀 피부에 묻은 거품이 씻겨 나간 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넋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뾰족한 물줄기가


그녀의 피부를 때렸다

방금 전 헤어진 진현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와 만나고 헤어지면 항상 함께했다는 행복과 다시 떨어졌다는 상실감이 교차했다.

‘좋아하면 고백하라고?’

새로 사귄, 친구 김수연의 말을 떠올렸다.

‘진현에게 고백을? 하지만…….’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진현이 좋았다. 그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를 사랑했다.

그 무뚝뚝한 얼굴이, 말투가, 그러면서 말없는 깊은 배려가 좋았다.

아니, 이런 저런 이유를 떠나 그냥 그가 좋았다. 벌써 오래된 짝사랑이다.

‘고백했다가 지금의 관계마저 어색해지면.’

그녀는 지금의 관계에 만족했다.

물론 그를 만지고 싶고, 안기고 싶고, 항상 함께하고 싶긴 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이 든다.

영원히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고백 후 지금의 관계마저 멀어진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유일한 정신적 가족인 이범수마저 자살한 지금,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진현밖에 없었다.

만약 그와 멀어진다면 그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속마음을 숨기는 것은 잘하니까.’

아버지와 이상민의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했을 때도, 그리고 아버지에게 어린 몸에 학대를 당할
때도 그녀는 항상 속마음을 숨겼다.

속마음을 드러낼 상대도 없었고, 드러내면 채찍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 마음을 숨기고 웃는 것이었다.

‘물론 이 관계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겠지. 그건 알아.’

분명 진현도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친근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그래도… 그때까지만이라도.’

그녀는 슬프게 웃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한다 생각하니, 갑작스레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초조하고, 슬프고, 화가 났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난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생각을 마친 그녀는 샤워기의 물을 껐다.

물줄기가 잦아들며, 그녀의 백옥 같은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조물주가 조각하듯 아름다운 그녀의 등줄기에는 섬뜩한 흉터가 가득했다.

“사랑해.”

그녀는 닿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

그 뒤에는 별다른 문제없이 내과 순환근무가 끝났다.

떠나는 진현을 잡으며 최대원 교수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 동안 수고했네.”

“아, 아닙니다.”

“술이라도 한 잔 사줘야 하는데.”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걸, 진현이 이리저리 피했다.

왠지 술과 함께 잡혀 들어갈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다른 과에 가서도 잘하고. 뭐, 말 안 해도 잘하겠지만.”

그렇게 진현은 삐질 땀을 흘리며 내과를 떠났다. 당연히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뭐야? 산 너머 산이구나.’

진현은 다음 순환근무 스케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무려 내과도 아닌, 외과였다.

대일병원 외과.

이전 삶에서 그가 일하던 곳이다.

‘조심하자, 조심.’

다른 인턴들과 함께 인사를 하러 가자 무뚝뚝한 얼굴의 외과 레지던트가 맞았다.

“너희가 이번 달 인턴들?”

“네.”

“그래, 열심히 하고. 뭐, 난 인턴들한테 크게 바라는 것 없다. 어차피 이제 갓 의사가 된 너희들이 뭘 잘하겠냐?
단 하나!”

레지던트는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사고만 치지 마라. 난 사고 치는 것 제일 싫어한다.”

“네!”

“그리고 김진현이 누구냐?”

“네, 저입니다.”

난데없는 호명에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렇게 일을 잘한다며? 우리 외과에서도 수고해줘라.”

“……!”

칭찬이 섞인 독려였다. 내과 때의 일이 여기까지 퍼진 게 분명하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레지던트는 또 다른 인턴을 호명했다.

“이상민은 누구냐?”

“네, 저입니다”

옆에 서 있던 매끄러운 외모의 이상민이 손을 들었다.

그도 이번 달에 진현과 같이 외과에 근무할 예정이었다.

“너도 잘해라.”

그뿐이다.

호명도 김진현보다 한 발짝 늦었고, 칭찬도 없었다.

나름 일을 잘한다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으나, 김진현에 관한 소문보다는 떨어진 탓이다.

이상민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번 달 외과 스케줄인 인턴은 총 7 명.

그들은 외과 사무실, 의국(醫局)에서 나와서 각자 근무할 곳으로 흩어졌다.

진현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걸어가는 중, 누군가 그를 불렀다.

“진현아.”

“응?”

이상민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번 달 잘해보자.”

“그래.”

진현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

***

‘이번 달엔 꼭 조용히 지내야지. 지난 내과 때처럼 사고 터뜨리면 안 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업무 배정이 수술 방이 아닌, 병동 업무 처리였다는 거다.

수술 방에서 일하면 좋든 싫든 몸에 밴 실력을 보일 수밖에 없으니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진현은 모르고 있었다.

다행이 아니란 사실을.

일을 시작한 지 이틀째, 사단이 일어났다.

마침 그때 그는 새벽같이 병동에서 환자 소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제 왔어?”

삼교대 중, 오전 근무조 간호사들이 이른 시간에 출근을 시작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어서 진현은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일에만 묵묵히 신경 썼다.

“어, 인턴 선생님 바뀌셨네요?”

“응, 어제 부로 로테이션해서 바뀌셨어.”

“아, 벌써 4 월 1 일이구나.”

내과 병동에 비해 외과 병동 간호사들은 훨씬 친화적이었다.

한 간호사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녕하세요, 인턴 선생님. 처음 봬요.”

묘하게 익숙한 친절한 목소리에 진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시간이 멈춰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 47

47. 외과의 유망주? (2)

무기질의 벽도, 옆에서 일하던 다른 간호사도, 째각째각 흘러가던 시계도 모두 사라졌고, 진현의 망막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맺혔다.

그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단아한 인상의 미녀가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려요.”

“아…….”

진현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진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니야. 그냥 닮은 걸 거야. 그녀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실례지만 성함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이연희라고 해요.”

“……!”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진현의 머리가 하얘졌다.

이연희.

이전 삶의 그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

진현의 이상한 반응에 이연희는 조각같이 단아한 얼굴을 다시 한 번 갸웃했다.

***

“저, 연희야.”

“네?”

선임 간호사가 근무 중 그녀를 불렀다.

이연희가 다가오자 선임간호사는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저… 인턴 선생님… 너한테 관심 있는 것 아니니?”

“설마요. 오늘 처음 보는걸요.”

“에이, 아니야. 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데. 마치 이전에 헤어진 아내라도 보는 눈빛이야. 그리고 남녀
감정이 시간이 지나야 생기나? 첫눈에 보고 반할 수도 있지.”

“무슨 저한테 한눈에 보고 반하겠어요? 말도 안 돼요.”

연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단아한 인상의 그녀는 병원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녀라 인기가 많았다.

그녀에게 대시한 의사들의 숫자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흐흐, 기집애. 하여튼 좋겠네. 내가 내과 병동에 물어보니 저 인턴 선생님 참 사람 괜찮다는데. 착하고,


착실하고, 일 잘하고, 환자들한테 친절하고. 한번 잘해봐.’

“무슨… 아니에요.”

그때 다른 간호사가 지나가며 호통을 쳤다.

“자자, 잡담하지 말고 일하세요!”

“아, 네!”

그리고 그들은 일에 집중했다.

한편 진현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런 막장 아침 드라마 같은 일이?’

이전의 아내를 대일병원에서 만나다니. 그것도 그녀가 간호사라고?

‘이전 삶 때는 분명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어떻게 간호사가 된 거지?”

물론 간호사가 될 수도 있다.

홍콩의 나비가 날개 짓만 해도, 런던에서 태풍이 불 수 있거늘, 수많은 변수가 있는 인생에서 이전의 삶과
똑같은 직업을 가지란 법칙은 없으니까.

실제로 그의 주위만 해도 바뀐 게 얼마나 많은가?

일진인 김철우가 경찰을 지망하고, 꼴찌인 황문진이 의사가 되었는데, 그녀가 간호사를 못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하필 간호사를 해도, 이곳 대일병원에서 일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것도 외과 병동에서!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못난 결혼생활 후 미안함만을 남기고 헤어졌으니까.


‘됐어. 이전 삶의 인연일 뿐, 지금은 전혀 상관없는 남남이야. 신경 쓰지 말자.’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만 이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이 방법밖에 없겠죠? 나 그래도 노력 많이 했었는데.’

‘그래도 사랑했어요.’

이혼할 때 그녀가 남긴 말들.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이 가슴을 흔들었다.

조금만 잘해주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씁쓸한 후회가 남지 않았을 텐데.

다시 만난 그녀는 조금 더 앳된 외모를 제외하면 이전과 똑같았다.

단아한 외모에, 차분한 태도, 부드러운 말투. 그와 결혼생활을 할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사귀기라도 할까?

어차피 그녀는 자신을 모른다.

더구나 이전 삶에서 행복한 인연도 아니었으니 그냥 이대로 각자의 삶을 살면 된다.

‘집중하자. 집중해.’

그는 최대한 그녀를 외면하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병동이란 게 원체 좁아 그녀와 싫든 좋든 계속해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그의
속도 모르고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잘 웃는 것도 똑같구나.’

이전 삶 때도 그녀는 친절한 웃음을 달고 살았었다.

그렇게 이전 생각이 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그녀에게 갔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순간이었다.

선반에서 무거운 물건을 내리던 이연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

키가 안 닿아 발끝으로 서서 박스를 꺼내던 중, 손이 미끄러진 것이다.

무거운 박스가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려는 순간!


탁!

누군가 그 박스를 대신 받아줬다.

놀란 이연희는 고개를 돌렸다.

김진현이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고 도와줬지?

김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별다를 것 없는 일이었지만, 그 후부터는 이연희도 진현의 눈길을 의식하게 되었다.

선임 간호사가 키득 웃으며 이연희에게 말했다.

“봐, 너 좋아하는 것 맞다니까?”

“아니에요.”

“에이, 기집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면 나오는구만. 하여튼 괜찮아 보이는데 잘해봐!”

“아, 아니라니까요.”

이연희는 고개만 저었다.

그런 그녀의 하얀 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

그리고 시시껄렁하게 시간이 지났다.

이상민은 외과 수술장에서 탁월한 어시스트 실력을 보이며 두각을 드러냈다.

“역시 한국대 차석이구나! 대단해.”

매끈한 외모, 뛰어난 실력, 윗사람에게 착실한 태도, 친절한 행동.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이상민은 짧은 시간 만에 외과의사들에게 인정받았다.

반면 한국대 수석이신 진현은 존재감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큰 사고 없이, 남들 눈에 안 띄게, 적당히 괜찮은 인상으로, 란 그의 모토에 맞는 일상이다.

단, 평탄한 일상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선생님, 안에 과일 있으니 드시면서 하세요.”

이연희였다.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좀 드세요. 아까 점심도 못 드셨잖아요.”

“바빠서…….”

“그러면 안에 과일 주스라도 드세요.”

그녀는 친절히 웃으며 말했다.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친절이 아닌, 누구에게나 베푸는 일상적인 친절임을 안다.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전의 아내였던 그녀가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 이러면 예전 생각이 난단 말이지.’

‘여보, 아침 먹고 가요. 시간 없으면 과일이라도 먹고 가요.’

그녀는 이전 삶 때도 과일을 많이 권했었다.

씁쓸한 기억에 진현은 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닙니다. 72 호실 환자분 빨리 소독해야 해서…….”

도망치듯 떠나는 그를 보고 이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빠르게 걸으며 진현은 생각했다.

‘곤란해. 빨리 외과 순환근무가 끝나야지.’

1 달간에 순환근무가 끝나고 후에 피부과를 전공하면 이 넓은 대일병원에서 더 이상 그녀를 볼 일도 없다.

‘어차피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인연. 각자의 삶을 사는 게 나아.’

그는 되뇌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은 그가 원하는 것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어느 날, 병동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작스레 고성이 울려 퍼졌다.

“빨리 해주라고, 이년아! 우리가 우습게 보여?!!”


“그런 게 아니라 주치의 선생님이 지금 수술장에 계셔서…….”

“수술장이고 나발이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아침부터 계속 기다렸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한 보호자가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고 있었고, 이연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했다.

‘무슨 일이지?’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소독해달라고! 진물로 다 젖었는데 언제 해줄 거야, 이놈들아!! 환자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수술장에 들어가 있어서… 금방 나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대충 보니 소독을 할 의사가 수술장에서 나오지 못해 벌어진 일로 보호자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 몰라! 그렇지 않아도 상처가 안 좋다면서, 이렇게 놔두면 어떻게 해? 빨리 처리해!!”

보호자는 빨갛게 흥분하며 외쳤고, 이연희는 쩔쩔맸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으면 지금 당장 해드리겠는데… 복합 상처여서 외과 선생님이 아니면


소독을 할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

보호자가 다시 소리를 치려는 순간, 누군가 그들 사이에 끼어 들였다.

“제가 소독해 드리겠습니다.”

김진현이었다.

이연희는 놀라 말했다.

“단순 수술 후 상처가 아니라, 감염과 장액종이 심하게 겹쳐 선생님께서 소독할 수 없는 상처예요. 봉합을 다
풀어놔 내부 장기가 다 보이는 상태라 레지던트 선생님도 자신 외에 아무도 건들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감염과 장액종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이 건드릴 상처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거즈와 철제 드레싱 세트, 소독약 준비해 주세요.”

“하, 하지만…….”

“어차피 레지던트 선생님 수술 끝나려면 멀지 않았습니까? 진물에 다 젖었다면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

“만약 소독 잘못되면 주치의 선생님이 크게 화내실 텐데…….”

“괜찮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차분한, 알 수 없는 신뢰를 주는 목소리였다.

이연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현이 부탁한 물품을 준비해 주었다.

“여기 준비됐어요. 그런데 저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괜찮은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염려 가득한 목소리였다.

어려운 상처에 소독을 잘못해 진현이 징계라도 먹을까 걱정되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짧게 답한 진현은 물품을 들고 병실로 들어갔다. 연희도 뒤따랐다.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에 다가가니 썩는 듯한 냄새가 화악 밀려왔다.

“소독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런데 인턴 선생님 아니세요? 상처가 안 좋은데 인턴 선생님도 소독할 수 있어요?”

보호자는 미심쩍은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해드리겠습니다.”

그러고 그는 조심스레 거즈를 벗겨, 상처를 드러냈다.

‘상처가 정말 안 좋긴 하군.’

살이 문드러진 듯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피하 조직은 염증이 심해 새빨갰고,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뿐 아니라 상처의 전장에서 샛노란 진물이 새어 나왔고, 고육지책으로 배를 열어놔 상처 뒤로 시뻘건 내장이
보였다.

더러워진 거즈를 조심스레 모두 제거하며 생각했다.

‘조금 더 제대로 소독하는 게 좋을 텐데.’

나름 주치의가 신경 써서 소독한 듯했지만, 완벽한 소독은 아니었다.

‘이런 상처엔 저런 방법보다 패킹(Packing)을 다른 식으로 하는 게 나은데.’

그는 먼저 붉은 소독약으로 상처를 꼼꼼히 닦았다.

환자가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으…….”

진현은 환자를 달랬다.

“네, 살짝 아픕니다. 금방 끝나니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그리고 상처를 살피다 그의 눈에 검게 변한 조직이 들어왔다.

‘완전히 조직이 죽었구나. 이거 그대로 놔두면 문제가 될 텐데 어떻게 하지?’

못 본척하면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상처 회복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괜히 건드렸다 또 이상한 소문이 나면 어떻게 하지?’

괴사된 조직을 제거하는 인턴이라. 누가 봐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다 결정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도 아니니. 소문이 나진 않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

# 48

48. 외과의 유망주? (3)

진현은 연희에게 부탁했다.

“여기 조직이 검게 죽은 것 같아, 좀 쳐내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블레이드(Blade) 부탁드립니다.”

블레이드. 조그만 칼을 뜻한다.

“아, 네!”

급히 연희가 블레이드를 가져오자 진현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이렇게 검게 변해 괴사된 조직은 회복을 방해합니다. 가만히 놔두면 안 좋을 가능성이 높으니 제가 살짝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죽은 조직들을 쳐내는데, 손놀림이 범상치 않다.

그 손놀림에 연희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어떻게 저렇게?’

외과 주치의보다도 훨씬 능숙한 움직임이다.

그렇게 몇 분도 안 돼 검은 조직들을 쳐낸 진현은 소독약에 거즈를 적신 후 벌어진 상처에 채워 넣었다.

“다 됐습니다.”

환자는 고마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원래 선생님보다 훨씬 소독 잘하시네요. 지금 참 시원합니다.”

보호자도 옆에서 말했다.


“그러게요. 앞으로도 그냥 선생님이 소독해 주면 안 돼요? 주치의 선생님보다 훨씬 친절하고 소독도 잘하시네.”

진현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닙니다. 저 같은 인턴보다는 주치의 선생님이 훨씬 잘하시니 앞으로도 소독 잘 받으세요.”

“아닌데… 선생님이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소독 받으면 상처도 금방 나을 것 같아요.”

“그래, 지금 주치의는 불친절하고 소독도 빨리 안 해주고! 차라리 인턴 선생님한테 받는 게 낫겠어.”

이대로 있다가는 주치의를 바꿔달라고 할 기세라, 진현은 급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보호자가 주치의한테 쓸데없는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걱정을 하며 다른 일을 처리하러 가려는데, 연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 김진현 선생님.”

“네?”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크게 곤란할 뻔했어요.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다 같이 환자를 보는 일인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연희는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니에요. 감사의 의미로 제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나중에 괜찮으세요?”

“……!”

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단아하게 웃으며 그를 마주봤다.

‘무슨 생각이지? 식사를 같이하자니?’

물론 의사랑 간호사랑 따로 병원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랑 식사를 한다고?

단둘이?

“정말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

그때 그녀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선생님은 저랑 식사하기 싫으세요?”


“……!”

“지금까지 여러 일들 많이 도와주셔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아쉬운 목소리에 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젠장.’

이전 삶의 아내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할 방법이 없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그러니까 나중에 먹읍시다.”

“네, 좋아요. 그러면 다음에 연락할게요.”

연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돌아섰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웬 식사야? 밥만 딱 먹어야지.’

***

그런데 그날 저녁, 누군가 진현을 콜(Call)했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 지금 바로 외과 의국(醫局)으로 올 수 있나?

“아, 네. 지금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외과 레지던트인데? 무슨 일이지?’

뭔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기분 나쁜 예감을 받으며 진현은 외과 의국으로 향했다.

의국은 의사들이 업무를 처리하며 휴식을 취하는, 의사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답게 컴퓨터, 서류, 수술복, 음식 쓰레기 등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김진현입니다.”

“왔나?”

진현을 불렀던 외과 레지던트, 이기성이 등도 안 돌린 채 까닥까닥 마우스를 클릭했다.

“거기서 잠깐 기다려.”

뭔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진현은 보이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뭐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 봐도 심기를 거슬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한 10 분 정도, 진현을 옆에 세운 채 본인의 일만 보던 외과 레지던트 이기성이 의자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진현을 바라봤다.

“야, 내가 처음에 너희 인턴들 보고 뭐라고 말했냐?”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이기성은 짜증을 내었다.

“내가 너희 처음에 만났을 때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바라니 사고만 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

사고? 내가 사고를 쳤다고? 그런 일은 없었는데?

“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어떤 일? 몰라서 물어? 누가 복합 감염 상처를 네 마음대로 건들래? 넌 그 상처가 인턴 나부랭이가 건들 상처라


생각해?”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하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었는데?

오히려 완벽한 상처 소독에 환자와 보호자도 굉장히 만족했었다.

“네가 쓸데없이 잘못 소독해 놔서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보호자랑 환자가 나한테 인턴보다 소독을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엄청 컴플레인(Complain)했어. 이제 의사 된 지 2 달도 안 된 놈이 소독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딴
식으로 해놔?”

자존심 상한 목소리다.

그 말에 진현은 사태를 짐작했다.

‘컴플레인 들어 짜증났구나.’

진현의 깔끔한 소독에 보호자가 레지던트에게 불평을 한 듯하다.

인턴 선생님보다 소독을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패킹(Packing)을 너무 느슨하게 하니까 그렇지. 죽은 조직도 하나도 손보지 않고.’

진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본인이 평소에 잘못 소독해서 불평을 들어놓고 나에게 짜증이라니?

“듣자니 칼로 죽은 조직도 쳐냈다고? 너 환자가 네 마루타인 줄 알아?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옳은 일을 해놓고도 듣는 부조리한 꾸지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끼익 의국 문이 열리며 너저분한 머리의 레지던트가 들어왔다.

이기성과 같은 파트의 치프인 최수호였다.

“뭐하냐?”

“아, 치프. 여기 인턴이 잘못을 해서 혼내고 있었습니다.”

“잘못? 김 선생이잖아. 김 선생 일 착실히 잘하던데. 무슨 잘못을 했어?”

이기성은 진현이 복합 상처를 소독한 일을 이야기했다.

치프 최수호가 턱을 만졌다.

“아, 그 상처. 나도 봤는데.”

“네, 제가 마저 혼내겠습니다.”

“잘했던데?”

“네?”

이기성이 멍하니 반문했다. 뭐라고?

“잘했더라고. 아주 훌륭하게. 난 이기성 네가 한 건 줄 알았는데, 김진현 선생이 한 거였어?”

그러면서 최수호는 진현을 돌아봤다.

“김 선생, 아주 잘했어. 어떻게 그렇게 복합 상처를 깔끔히 처치한 거야? 난 인턴 때 꿈도 못 꾸었는데. 내가


처치한 것보다 나아 보이던데?”

치프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이기성이 떠듬떠듬 말했다.

“하, 하지만… 칼로 조직도 자르고…….”

최수호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버럭 화를 냈다.

“야, 인마! 죽은 조직을 잘라야지, 그러면 그냥 놔둬? 썩어 들어가 감염 심해지면 어떻게 하려고!”

“……!”

이기성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네가 지금까지 소독을 제대로 안 해서 상처가 그렇게 안 좋아진 것 아니야, 새 X 야! 그렇지 않아도 언제 날
잡아 한번 혼내려 했건만, 이놈이 자기 잘못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고 있네. 인턴이 너 대신 조직을 칼로 쳤으면,
부끄러워해야지 오히려 혼내고 있어? 네가 지금까지 소독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거지? 엉? 네가
그러고도 외과의사야?!”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답게 터프한 나무람이었다.


이기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내일까지 복합 상처 소독법에 대해서 다시 공부해 와! 제대로 공부 안 해오면 각오해!”

“네, 네!”

치프 최수호는 숨을 크게 내쉰 후, 진현을 돌아봤다.

그리고 아까 전과는 딴판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복합 상처 소독이 참 어려운데… 김 선생의 소독은 완벽했어. 훌륭해. 한국대 수석이라 그런가?”

“아,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는데…….”

치프 최수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김 선생도 수술장에 들어오는 건 어때?”

“네?”

“아니, 병동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손재주인 것 같아서. 조만간 수술장에 들어와.”

진현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저… 수술방은… 제가…….”

“왜?”

진현은 고민했다.

수술 방은 무조건 싫은데 어떻게 하지?

“수술방은 제가 잘 안 맞아서… 죄송합니다.”

치프 최수호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수술방이 처음부터 맞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수술방 힘들어. 그래도 다 좋은 경험이니 들어와봐.
그리고 김 선생 잘할 것 같은데?”

진현은 똥 씹은 마음이 들었다.

‘수술 방에 들어오라고?’

곤란한 일이었다.

***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사장실.

이사장 이종근은 민 비서의 보고를 받았다.

“이상민 선생님은 외과에 순조롭게 적응하신 듯합니다. 위의 인사 평도 굉장히 좋고, 여러 업무 처리 능력도


탁월하다는 평가입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외과는 이상민이 자리를 잡아야 할 과였다.

적통인 이범수가 죽어 이상민밖에 병원을 물려줄 자식이 없는 지금, 가문의 다른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반드시 병원에서 압도적인 두각을 드러내야 했다.

‘쯧, 이범수 그놈은 왜 자살을 해가지고. 그놈만 살아 있었으면 이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텐데.’

이상민의 일을 챙기려니 짜증이 났으나 어쩔 수 없다.

호시탐탐 대일병원의 소유권을 노리는 형제들을 견제하기 위해선 후계자인 이상민이 완벽한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했다.

“김진현이란 인턴 선생님은요?”

“내과 때와 달리 특별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단, 얼마 전 병동에서 수술 방으로 근무처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래요?”

“네.”

이종근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김진현이 수술까지 잘하진 않겠지?’

“김진현 선생은 누구의 수술에 배치될 예정인가요?”

“아마 파트상 강민철 교수님의 수술에 배치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종근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참 김진현 선생한테 불행한 일이군요. 처음 수술장에 들어가는데, 강민철 교수 같은 까다롭고 힘든 집도의
(執刀醫)의 수술에 배치되다니.”

강민철 교수는 간이식의 전문가로, 국내에서 첫손에 꼽히는 대가(大家)였다.

한국대 병원이든, 광혜 병원이든, 기독 병원이든, 어디를 둘러봐도 간이식 하나만큼은 강민철 교수가 최고였다.

단, 뛰어난 실력에 걸맞게 성격이 외골수였는데 수술할 때 지독히 무섭기로 유명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쫓겨난 보조 외과의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김진현도 눈물 좀 쏟겠군. 날 때부터 메스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한, 강민철의 수술을 견딜 리가
없으니.’

아무리 날고 기는 인재라도 인턴은 인턴.

수술 장에 처음 들어가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그건 재능의 차이가 아닌, 경험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49

49. 외과의 유망주? (4)

‘얼마 만에 쫓겨 나오는지 한번 지켜봐야겠군.’

이종근은 느긋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

한편 그때 대일병원 지하 깊숙이 위치한 회의실에 두 명의 인영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인영이 공손히 말했다.

“일단 시키신 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네, 좋아요.”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다른 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실례지만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인지?”

그 물음에 인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한 인영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물어서.”

“아니에요. 하여튼 가급적 김진현 선생님이 외과를 전공할 수 있도록 잘 유도해 주세요.”

“네.”

“이후 기획실장님의 수고는 제가 잊지 않을게요.”

그 말에 공손한 말투의 인영, 기획실장이자 대일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핵심 실력자인 송병수는


고개를 숙였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병원 높은 곳에서 김진현을 가운데에 놓고 일들이 진행되어 갔다.


물론 오로지 피부과만을 바라는 진현은 전혀 모르는 일들이다.

***

“진현이, 너도 이제 수술방 들어오기로 한 거야? 병동보다는 수술장이 훨씬 힘든데.”

이상민이 웃으며 진현을 맞았다.

“그래.”

“어쨌든 같이 수술장에서 일한다니 좋네. 잘해보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해보자.”

이상민은 수술장에 능숙히 적응한 듯했다.

뭐든지 척척 잘하는 놈답게 벌써 외과 선생님들에게 일 잘하는 인턴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인정이고 나발이고… 수술장이라…….’

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성을 일체 배제한 무뚝뚝한 공간이 눈에 들어찼고, 무기질의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추억과도 같은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며 아릿한 기분이 들었다.

병동과는 또 다른… 집에 온 듯한 편안한 느낌.

그의 의식은 부정하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이전 삶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살며시 떨리는 가슴이 그것을
증명했다.

진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이전의 삶이 아릿하게 떠오르기에. 그래서 그는 수술방이 싫었다.

‘됐어. 다 이전 일들. 이번 한 달만 잘 버티자.’

이번 달 외과 순환근무만 끝나고, 피부과를 하게 되면 영원히 수술 방에 들어올 일이 없다. 이번 한 달만 잘


넘기면 된다.

그때 복합 상처 소독으로 치프에게 잔뜩 깨진 레지던트 이기성이 다가왔다.

“김진현 왔냐?”

“네.”

“잘 인계받았지? 수술방에서 어리바리 까면 안 돼. 여기 이상민이처럼만 해.”

꼭 잘하라고 당부하는 목소리다.


처음 수술장에 들어온 진현이 실수를 남발할까 걱정되는 듯했다.

“저는 오늘 어느 수술에 들어가면 됩니까?”

“너는 오늘 나와 같이 강민철 교수님의 간 이식 수술에 들어갈 거다.”

그 말에 진현은 놀라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강민철 교수의 수술에 들어가는 것을 오늘 처음 들었다.

“강민철 교수님의 수술에 말입니까?”

“그래, 그렇게 배정이 됐어. 너도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강민철 교수님은 인턴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
들어가면 무조건 잘해야 해.”

진현은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대학 병원의 수술은 집도의인 교수, 첫 번째 어시스트인 레지던트, 그리고 말단 어시스트인 인턴으로 진행하는 게
기본이었다.

간이식 분야 최고의 대가(大家)인 강민철 교수의 수술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조건 인턴 한 명은 말단 어시스트로
들어가야 했고, 자신이 배정되었다면 따라야 했다.

“너 때문에 수술장 분위기 안 나빠지게 꼭 잘해.”

걱정이 되는지 이기성은 여러 번 당부했다.

간 이식 수술이 진행될 수술 방에 들어가니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아, 오늘 수술은 별일 없이 넘어가야 할 텐데.”

“오늘도 화 많이 내시겠지, 교수님?”

“난 강민철 교수님 수술 들어오는 날에는 전날 저녁부터 굶고 와. 수술 중에 너무 욕 들어 체한다니까.”

수술을 준비하며 간호사들은 걱정을 했다.

레지던트 이기성도 긴장이 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이번 달 내내 강민철 교수님과 매칭인 레지던트였는데 수술 중 좋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얼마나 욕을 먹는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이전이랑 똑같구나.’

그 모습에 진현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뭔가 익숙한 긴장감이다.

나도 예전에 저랬었지.

‘그나저나 하필 첫 수술 어시스트가 강민철 교수님이라니… 인연은 인연이구나.’


이전 삶에서도 그는 강민철 교수와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다.

‘지금은 건강은 괜찮으신가? 심장이 안 좋으셨는데.’

이후 환자가 도착하고 진현은 이기성과 함께 수술 준비를 했다.

마취과 의사의 마취를 돕고, 소독을 하고, 방포를 덮고…….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간호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강민철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님, 수술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짤막한 대답 후, 곧 수술 방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반백의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커다란 덩치,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 국내 간 이식 최고의 권위자, 강민철 교수였다.

***

“준비 다 끝났나?”

“네, 교수님!”

레지던트 이기성이 뻣뻣이 굳어서 대답했다.

강민철 교수는 옆에 서 있는 진현을 바라봤다.

“인턴 선생님인가? 간이식 수술은 처음이지?”

“네.”

“수술을 할 땐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니 잘해.”

가슴을 내려 앉힐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진현은 묵묵히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됐다.

***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 수술이 진행됐다.

“메스.”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간호사가 번개같이 메스를 건넸다.

“보비.”
절개와 응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전기 칼을 쥐고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찌잉! 찌잉!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복벽이 한 겹, 한 겹 열렸다.

“잘 잡어.”

퍼스트 어시스트인 레지던트 이기성이 철제 기구로 복벽을 고정했다.

그러나 그때 강민철 교수가 가만히 이기성을 바라봤다.

“야.”

“……!”

“똑바로 못하냐? 하나도 안 보이잖아.”

“죄, 죄송합니다!”

이기성은 침을 삼키며 각도를 조정했다.

아직 제대로 수술을 시작도 안 했건만 분위기가 살얼음판보다 날카로웠다.

이윽고 배가 완전히 열리고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되었다.

“인턴 선생, 아미 들어. 아미 들어서 시야 확보해.”

기역자 모양의 ‘아미’는 복벽이나 장기를 잡아당겨, 수술 시야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집도의와 첫 번째 어시스트가 수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야를 확보하는 게 말단 어시스트인 인턴의 주요 업무였다.

“네, 알겠습니다.”

진현이 아미를 들자 이기성을 비롯한 간호사들은 침을 삼켰다.

지금이 중요했다.

만약 인턴이 시작부터 제대로 시야를 확보 못하면 수술장은 불지옥으로 변한다.

턱.

다행히 진현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각도로 시야를 확보했다.

날카로운 강민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술 포커스가 변할 때마다 진현은 그것에 맞춰 적절히 시야를 조절했다.

마치 자동으로 카메라가 따라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어느 순간, 강민철은 메스를 멈추고 진현을 바라봤다.

“인턴 선생, 오늘이 처음이라고 안 했나?”

“네, 처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하지? 웬만한 외과의사들보다 훨씬 낫군. 계속 이렇게만 하라고.”

그 칭찬에 이기성을 비롯한 수술장의 모든 사람은 혼비백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화산 강민철 교수가 남을 칭찬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럴 수가. 강민철 교수의 칭찬을 받다니. 고작 인턴 주제에. 그것도 수술 장에 처음 들어왔으면서?’

레지던트 이기성은 수술 마스크 뒤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숱하게 강민철 교수의 어시스트를 섰었지만 칭찬은커녕 욕만 산처럼 얻어먹었다. 심지어 얻어맞고 쫓겨난
적도 많다.

그때 강민철 교수가 이기성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흠칫 놀라는 순간이었다.

“너… 죽고 싶냐?”

“……!”

“제대로 집중 안 해?”

이기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네, 죄송합니다.”

“똑바로 해.”

이기성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중했다.

하지만 강민철 교수의 욕을 듣지 않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 최고의 실력자답게 손놀림이 지나치게 뛰어나 그것을 따라가는 것부터 벅찼고, 조금이라도 박자를 못 맞추면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똑바로 안 해!!”

“죄, 죄송합니다.”

“뭘 꾸물대고 있어? 빨리 타이(Tie)해! 빨리!!”

역시나 수술장 분위기는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쌍시옷 섞인 호통이 수술장에 난무했고, 진현이 한 치의 실수도 안 하는 바람에 모든 욕설은 이기성에게


집중되었다.

“너는 인턴보다도 못하면 어떻게 하냐? 제대로 좀 해라!!”


“죄, 죄송합니다.”

창백하게 질려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저거 저러다 수술장에서 쫓겨나는 것 아니야?’

진현은 걱정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창 수술을 하던 중 이기성이 실수를 했다.

너무 긴장을 해서 혈관을 잡는데 실패를 한 거다.

“야! 너 뭐하는 거야?!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나가!”

이기성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재차 시도했다.

하지만 극도의 긴장 때문일까? 또 실패해 버렸다.

강민철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나가!!”

화를 내자 심장이 아픈지 강민철 교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병으로 있었던 협심증 증상이었다.

한편 간호사들은 질끈 눈을 감았다.

레지던트가 쫓겨나는 건 흔하게 있는 일이어서 평소처럼 대처했다.

‘어서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 불러. 빨리 손 바꿔주지 않으면 큰일 나.’

‘누굴 부르지? 다들 다른 수술방 들어가 있는 것 같던데.’

‘몰라. 빨리 스케줄 빈 선생님 찾아서 불러.’

그런데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던 강민철이 외쳤다.

“야! 차라리 인턴이 하는 게 낫겠다. 인턴, 네가 해봐!”

“……!!”

모두가 놀라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도 놀랐다.

“저 말입니까?”

“그래, 인턴이 너 말고 또 있어?! 빨리 해!”

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인턴이 할 일이 아닌데 어떻게 하지?


강민철은 재차 독촉했다.

“빨리 안 하고 뭐해?!”

어쩔 수 없이 진현은 이기성과 자리를 바꿨다.

퍼스트 어시스트 자리에 서자 수술 시야가 한눈에 들어왔고 얇은 동맥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혈관 잡아.”

진현은 고민했다.

이걸 해야 하나?

머뭇거리자 강민철의 눈꼬리가 올라갔고, 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 머뭇거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하아, 모르겠다. 성질 좀 죽이시지. 이전이랑 변한 게 없으시네.’

간호사가 건네준 수술용 실을 받은 그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교본 동영상을 보는 듯한, 원 핸드 타이(One handed tie)였다.

정교한 손동작 끝에 실이 동맥을 묶었고, 거짓말처럼 피가 멎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50

50. 외과의 유망주? (5)

“……!!”

쫓겨난 이기성이 눈을 부릅떴다. 옆에서 간호사들도 경악했다.

이게 무슨?

강민철은 덤덤히 말했다.

“그래, 그렇게 따라와.”

“네?”

“거기서 잘 따라오라고.”

“……!”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인턴인 나보고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라고?


“저는… 인턴입니다.”

“그래서? 저 멍청한 놈보단 잘하는구만.”

“…….”

“잔말 말고 똑바로 따라와!”

강민철은 한 치의 배려도 없이, 뚝딱뚝딱 수술을 진행했고 진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퍼스트 어시스트를 섰다.

간이식 수술은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뉜다.

처음 환자의 간을 전부 들어내는 파트, 그리고 이후 다른 사람의 간을 이식하는 파트.

지금은 처음의 간을 들어내는 파트를 진행 중이었다.

강민철은 마치 맹장을 떼듯, 간단히 간을 절제해 나갔다.

‘이런 젠장. 레지던트도 아닌 내가 왜 퍼스트 어시스트를.’

진현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그러나 못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렇게 했다간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켈리! 그렇게 거기 잡고 있어.”

“네.”

마음속 곤란함과는 달리 진현의 몸은 반사적으로 강민철의 수술을 따라갔다.

혈관을 잡으면 켈리(수술용 가위 형태의 집게)를 주고, 아미(시야를 확보하는 도구)로 사각을 밝히고, 포셉(
수술용 집게)으로 처치를 도우며, 피가 나면 지혈을 했다.

그 믿지 못할 어시스트에 강민철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수술방의 다른 모든 이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인턴이 저런 어시스트라니?

그냥 레지던트가 아닌, 치프 레지던트도 저런 어시스트는 불가능했다.

마치 주니어 교수, 아니, 그 이상이 어시스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네, 정말 잘하는군. 이름이 뭐지?”

“김진현입니다.”

“인턴이 맞나? 다른 병원에서 파견 나온 외과의사 아니야?”

“인턴입니다.”
진현은 이를 깨물었다.

‘곤란해. 일부러 실력을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초고난도의 간이식 수술에서 어떻게 실력을 감춘단 말인가?

만약 그가 실력을 감추려다 실수라도 해서 수술이 꼬인다면?

그건 의사로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의사의 양심을 떠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 교수님… 인턴인 저보다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이 저보다 어시스트를 잘할 텐데… 손을 바꾸는 것은…….”

진현은 조심히 말했다.

“자네 정도면 충분해!”

강민철은 딱 잘라 말했다.

실제로 충분했다.

진현의 활약 덕분에 수술장에 온화한 평화가 찾아 들었다.

진현은 마치 마음을 읽는 듯 강민철이 필요한 모든 부분을 보조했다.

그것도 한 걸음 앞서서.

말을 꺼낼 필요도, 손을 내밀 필요도 없었다.

다음 단계에 진행될 모든 내용을 읽듯 탁탁 보조를 맞췄다.

‘어떻게 저럴 수가?’

수술 필드에서 쫓겨나 옆에 엉거주춤 서 있던 이기성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꿈을 꾸나 싶었다.

저 정도면 단순 어시스트의 수준이 아니다.

수술 전체를 깊게 이해해야 저런 보조가 나올 수 있는데… 고작 인턴이?

여러 사람의 경악을 뒤로하고 진현도 점차 수술에 빠져들었다.

잡념이 사라지고 모든 정신이 수술 필드에만 집중되었다.

고도로 집중된 의식 속, 둘은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수술을 진행해 갔다.

적막 속 서전(Surgeon)들 간의 깊은 교류가 수술장 위에 흘렀다.

‘옛날 생각나는군.’

진현은 흐릿하게 생각했다.

이전 삶 때 강민철 교수와 수도 없이 수술했었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그 와중에 많이 배워 강민철 교수는 진현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요히 간 절제가 끝나갔다.

그때 수술 문이 조심히 열리며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간이식 파트의 다른 교수, 유영수였다.

“교수님, 공여자의 간 절제가 끝났습니다.”

간이식은 총 2 개의 수술 팀, 이식을 받을 사람을 수술할 팀과 이식을 할 사람(공여자)의 간을 절제할 팀이


필요했다.

강민철 교수가 이식을 받을 사람의 간을 들어내는 동안, 다른 팀은 공여자의 간을 절제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도 다 끝났네. 준비된 간을 가져오게.”

“네, 앞으로는 제가 어시스트 하겠습니다.”

간이식 수술은 지금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타인의 간을 몸 안에서 연결시켜야 하므로 미세 혈관 봉합술 등의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고, 이때부터는 같은


교수가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는 경우가 많았다.

손을 닦고 수술 가운을 착의한 유영수 교수가 진현의 자리로 들어왔다.

“이제 내가 하겠네. 그런데 자넨 누군가? 못 보던 레지던트인데?”

처음 보는 진현의 얼굴에 유영수 교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턴입니다.”

“인턴? 인턴이라고?”

유영수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턴이 강민철 교수의 퍼스트 어시스트를 섰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수술장에서 물러나며 진현은 그 눈빛에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도 이 상황이 난감하긴 마찬가지이다.

‘어쩌다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가지고.’

한숨이 나왔지만 어차피 돌발적인 일일 뿐이다.

이제 강민철 교수의 수술에 들어올 일도 거의 없을 테니 이런 일은 없겠지.

그런데 그때 강민철 교수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거기, 김진현 인턴이라고 했나?”


“네?”

“앞으로 내 수술은 네가 전담해서 들어와.”

“…네?”

진현은 입을 벌렸다.

“저는 레지던트가 아니라 인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아까 잘하던데 잔말 말고 앞으론 내 수술엔 네가 계속 들어와.”

“……!”

그 강력한 지목에 모두들 깜짝 놀랐고 진현은 속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제길, 잘못 걸렸다.’

***

외과 레지던트들 사이에 폭풍 같은 소문이 돌았다.

“야, 너 그 인턴 소문 들었어?”

“뭐?”

“김진현이라고. 강민철 교수님의 퍼스트 어시스트를 섰다는 인턴.”

“뭐? 그게 말이 돼? 인턴이 다른 사람도 아닌, 강민철 교수님의 퍼스트 어시스트를 섰다고? 거짓말하지 마.
강민철 교수님 어시스트는 치프 레지던트 선생님도 제대로 못하는데 고작 인턴이?”

“거짓말 아니야. 나도 안 믿었는데 진짜인가 봐. 퍼스트 어시스트를 너무 잘 서서 강민철 교수님이 앞으로는 그


인턴보고 전담해서 들어오라 했대.”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외과 레지던트들은 그 소설 같은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상민 그놈도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비교가 안 되네. 김진현 선생도 우리 외과 지망한대?”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그래도 그 정도 재능이면 수술에 관련된 과를 지망하지 않을까?”

“외과로 꼬셔봐야겠는데?”

원래 외과의사들의 관심사는 이상민이었다.

빼어난 외모, 뛰어난 실력, 한국대 차석.

더구나 외과를 지망하고 뭔가 배경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관심이 단번에 진현에게 옮겨갔다.

이상민이 잘해봤자 인턴 수준에서 잘하는 것이지 진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소문들을 들으며 진현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이상민이 웃으며 말했다.

“좋겠네.”

“뭐가 좋으냐?”

“위 선생님들한테 인정받아서.”

“하나도 필요 없다. 너나 많이 가져가라.”

진현은 고개를 저으며 푸념했다.

물론 윗사람에게 잘 보여 나쁠 건 없지만 과도한 주목은 사양이었다.

‘어차피 외과를 할 것도 아니고, 난 그냥 피부과를 지원하는데 불이익이 안 갈 정도의 인사평가만 받으면


된다고.’

진현은 깊이 고민에 잠겼다.

‘내과 때처럼 외과를 한다는 쓸데없는 소문은 안 돌겠지? 이상한 소문 돌기 전에 피부과에 인사를 가야겠어.
언제쯤 갈까?’

그때 이상민이 말했다.

“어쨌든 진현이는 항상 잘해서 좋겠어.”

“뭘.”

생각에 잠긴 진현은 건성으로 답했다. 그래서 그는 보지 못했다.

미소 띤 이상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뱀이 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 뒤로 끔찍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진현은 강민철 교수의 수술에 전담으로 불려 다녔다.

“오늘도 잘해보게, 김진현 선생.”

“…네.”
강민철 교수는 간만에 마음에 드는 어시스트를 찾아 신이 나는 듯했다.

수술도 늘려 잡고 손놀림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저녁에 할 일 있나, 김 선생?”

“…예?”

“요즘 고생 많은데 이번 수술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지.”

“괜찮습니다. 오늘 당직이어서…….”

진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회피했다.

어째 강민철 교수님의 눈빛이 최대원 교수님을 닮아가는 것 같은데… 그냥 착각이겠지?

한편 원래의 매칭 레지던트인 이기성은 죽을 맛이었다.

“야! 너는 똑바로 좀 해라!!”

강민철은 진현에게만 따뜻할 뿐, 이기성에겐 불처럼 혹독해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곧바로 벼락같은 호령을
떨어뜨렸다.

이기성은 이를 악물었다.

호통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인턴이 퍼스트 어시스트인데 윗사람인 자신이 말단 어시스트를 서고 인턴보다


못한 실력을 보이고 있단 사실이다.

속된 말로 쪽팔림의 극치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어시스트를?’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임을 떠나서 김진현의 어시스트는 그가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랄까.

단순히 손놀림을 떠나서 진현의 어시스트에는 깊은 연륜과 경험이 엿보였다.

‘하! 인턴에게 경험과 연륜이라니.’

이기성은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없는 발상이라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의사가 된 지 두 달도 안 되는 인턴에게 경험과 연륜이라니?

하지만 그런 착각이 들 만큼 진현의 어시스트는 놀라웠다.

강민철 교수도 똑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자네는 도대체 이 수술을 어디서 배운 건가?”


“…….”

진현은 할 말이 없었다.

교수님께 직접 배웠습니다… 라고 답할 수는 없으니.

“외과를 돌기 전에 동영상으로 공부했습니다.”

“…….”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동영상으로 공부했다고?

진현도 본인의 설명이 궁색함을 알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나?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더 좋은 답변이 없는걸.

그때 마침, 누군가 수술방에 들어와 진현을 구해주었다.

젊은 외과의, 유영수 교수였다.

“교수님, 하베스트(Harvest) 끝났습니다.”

하베스트. 공여자의 간을 절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제 유영수 교수가 손을 바꿔줄 테니 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술방을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강민철이 진현을 잡았다.

“어디 가나? 계속 수술해야지.”

“……!”

유영수 교수가 놀라 물었다.

“교수님? 제가 들어오겠습니다.”

“아니, 됐네. 이번 수술은 김진현 선생이랑 같이하지.”

“네? 하, 하지만 현미경을 보면서 혈관 봉합술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턴이랑?”

유영수 교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진현도 그 말에 동감했다.

인턴이 현미경 혈관 봉합술을 어시스트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날 그냥 놔달라고!’
물론 수술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한때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술대 위에서 적색 필드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스를 다루던 기억들.

그 아릿한 기억들이 자꾸만 가슴을 자극해 수술대 위에 서 있기 힘들었다.

그때 강민철 교수가 태연히 답했다.

“어려운 난이도의 환자도 아니고, 시간도 넉넉하니 슬슬 가르치면서 하겠네.”

“…가르치신다고요? 인턴을요?”

그 황당한 말에 수술장의 모두가 입을 벌렸다.

진현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인턴인 나한테 그걸 왜 가르쳐?’

(다음 편에서 계속)

# 51

51. 외과의 유망주? (6)

유영수 교수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만약 문제가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곧바로 달려오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아, 교수님. 요즘 혹시 가슴은 괜찮으십니까?”

강민철 교수는 지병으로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웃었다.

“요즘은 김 선생 덕분에 화를 덜 내서 그런지 괜찮네. 걱정 말게.”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그래, 괜찮으니 나가 보게.”

수술장에 남은 진현은 유영수 교수의 말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강민철 교수님의 심장이 문제를 일으킬 때가 되긴 했구나. 이맘때쯤 심근경색이 와 쓰러지셨다고
들었는데. 별문제는 없겠지?’
그때 강민철이 진현을 바라봤다.

“앞으로도 계속 잘해보자고, 김 선생.”

“…네.”

진현은 내키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

그 뒤 더욱 놀라운 소문이 퍼졌다.

간이식 최고의 대가인 강민철 교수가 인턴인 김진현을 직접 가르쳤다는 소문이었다.

현재 주니어 교수인 유영수가 강민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들였던 노력을 생각하면 경천동지할 이야기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문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란 거였다.

“강민철 교수가 김진현을 후계자로 삼았다며?”

심지어 이런 이야기도 돌았다.

덕분에 외과의사들의 관심은 오로지 김진현에게 쏠렸다.

처음에 반짝 주목받던 이상민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너 인턴한테 비교당해서 힘들겠다?”

동료 레지던트가 맨날 깨지는 이기성을 위로했다.

“그래, 죽겠다.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인턴이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는데, 윗사람인 나는 말단 어시스트를
서면서 구박이나 당하고…….”

이기성이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동료가 조언했다.

“그냥 네가 말단 어시스트를 서지 말고, 인턴 들여보내. 어차피 시야만 확보하면 되는 말단 어시스트를 네가 설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괜찮을까? 아무리 그래도 강민철 교수님의 수술에 인턴만 들여보내기가…….”

“어차피 김진현 그놈이 레지던트 이상의 몫을 한다며? 그리고 말단 어시스트로 인턴 중 빠릿빠릿한 놈을


들여보내면 되지. 이상민이 그나마 잘하지 않을까?”

이기성은 이상민을 떠올렸다.

확실히 맨들맨들한 얼굴에 일 잘하는 이상민이라면 말단 어시스트로 부족함이 없을 거다.

“그래, 앞으로는 이상민을 말단 어시스트로 들여보내야겠다.”

물론 괴물 인턴 김진현이 아닌 한, 욕은 작살나게 듣긴 할 거다.


이기성은 김진현 옆에서 비교당하며 욕을 바가지로 들을 이상민이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더 이상 욕먹기 싫었다.

그렇게 이상민과 김진현이 강민철 교수의 어시스트로 결정되었다.

***

“네가 강민철 교수님의 세컨드 어시스트(Second assist)로 들어온다고?”

진현은 이상민에게 물었다.

“응, 그렇게 들어가기로 했어. 잘 부탁해.”

웃음 띠운 얼굴로 말하는 이상민에게 진현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놈이 괜찮을까?’

항상 가면 같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진현은 어렴풋이 이상민의 속을 느끼고 있었다.

같이 지낸 시간이 벌써 10 년이니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이 녀석은 자존심이 강했다.

그것도 극도로.

이런 녀석이 강민철 교수님의 수술에 들어와서 꾸지람을 들어도 괜찮을까?

‘모르겠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긴장 속 수술이 시작되었다.

강민철 교수는 이상민을 보고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데? 인턴 선생님인가?”

“네.”

“이름이?”

“이상민입니다.”

“그래?”

강민철은 ‘이상민’이란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상민’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최근에 이사장 측 비서실에서 외과의 높은 교수들에게만 넌지시 알린 이름이다.


“난 네가 누군지 신경 안 쓴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수술대 위의 환자뿐이니 잘해.”

뼈가 담긴 말이었다.

긴장된 공기 속 수술이 시작되었다.

진현은 이상민이 호통을 듣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욱 집중하여 수술을 어시스트하였다.

사각사각. 찌잉!

묵빛 고요한 공간에 수술도구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민철이 이상민의 손에 수술도구를 쥐여 주었다.

“잘 잡아. 시야 잘 보이게 확보하고.”

짧은 목소리.

김진현은 괜히 자신이 긴장이 되었다.

‘잘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이상민은 진현이 놀랄 정도로 멋지게 세컨드 어시스트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대단하구나.’

진현은 감탄했다.

김진현, 본인이 할 생각은 아니긴 하지만 이상민 이놈은 진짜 타고난 천재였다.

별로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못하는 것이 없었다.

“크흠! 이번 인턴들은 훌륭한 선생이 많군.”

강민철도 다소 놀란 눈치다.

처음의 걱정과 다르게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티끌 하나만 어긋나도 벼락을 터뜨리는 강민철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창 수술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크윽……!”

돌연 강민철이 움직임을 멈추며 신음을 흘렸다.

진현은 놀라 물었다.

“괜찮습니까?”
“괘, 괜찮네.”

하지만 식은땀이 주륵 흐르며 얼굴이 창백한 게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설마 협심증 악화?’

강민철은 원래 심장병인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엔 성질을 내거나 흥분해야 증상이 생겼고, 잠깐 그러다 가라앉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교수님, 협심증 악화는 아닐까요? 빨리 치료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협심증이 악화되면 심근경색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심근경색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중한 질환이다.

하지만 강민철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걱정하지 말게. 늘 그랬으니, 이러다 금방 좋아지겠지.”

“하지만…….”

“괜찮네. 그리고 환자의 배를 열어놓고 어디에 가겠나? 치료를 받으러 가더라도 수술을 끝내고 가야지.”

맞는 말이다.

한창 수술 중에 집도의인 그가 치료를 받으러 갈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게 미리 치료를 좀 받으시지. 맨날 괜찮다, 괜찮다 그러시다가.’

원래 남을 고치는 직업인 의사들이 본인의 건강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강민철처럼 바쁘고 술 담배 좋아하며 성격 급한 사람은 심장병의 위험이 높았다.

‘괜찮으시겠지?’

진현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딱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저 별일 없길 바랄 수밖에.

다행히 별일 없이 쓱쓱 시간이 지나고, 수술이 절반 정도 진행됐다.

늘 그렇듯, 유영수 교수가 때에 맞춰 방에 들어왔다.

“교수님, 부산 기독 병원에서 카데바 도너(Cadaver donor)의 간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들어갈까요?”

이번에 이식할 간은 무려 부산에서 절제 후, 헬기를 타고 대일병원에 도착했다.

뇌사자가 항상 서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 헬기를 타고 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특히 이번 간은 원래 부산에서 이식 받을 대상이 수술 준비 중 사망해 상당히 지체 후 전달된 경우였다.


“아니, 됐네. 지금 참 좋군. 이 아이들 데리고 계속하겠네.”

만족스런 강민철의 말에 유영수 교수는 진현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강민철 교수님의 수술을 이렇게 잘 맞추다니…….’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교수님…….”

“왜 그러나?”

“병동에 환자 중 한 분이 문제가 생겨서 제가 응급 수술을 열어도 될까요? 지금 간 학회 기간이라 다른


교수님들도 안 계셔서…….”

원래는 강민철 교수의 어시스트를 서야 하니 따로 수술을 진행할 수가 없지만, 최근엔 저 괴물 인턴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담을 해줘 유영수 교수가 할 일이 없었다.

“그래, 지금 간 학회 기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으니 응급 상황이면 자네라도 수술을 해야지. 그런데 무슨


문제인가?”

“문합 부위의 담즙이 새어 나와 복막염이 생겼습니다. 현재 중증 패혈증 상태로 곧 쇼크가 올듯합니다.”

“그래, 알겠네. 수고하게.”

강민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혈증 쇼크는 사망률 40%에 육박하는 중증 질환이다.

간 수술 받은 환자에게서 오는 패혈증 쇼크는 더욱 위중하므로 당장 응급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

그 뒤로도 간이식 수술은 별문제 없이 진행됐다.

공여자에게서 하베스트(Harvest)한 간을 이식 받을 환자에게 옮겼고 필요한 처치를 하나하나 진행했다.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하며 강민철 교수가 물었다.

“김진현 선생, 자네 외과 전공할 거지?”

당연한 것을 확인하는 듯한 말투였다.

곁에서 이상민이 묘한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

하지만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외과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피부과니까.

그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찰나, 강민철이 다시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이렇게나 빼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동영상을 보고 연습했다는 자네
주장은 일단 말이 안 되고, 타고난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돌발 상황에서 연륜이 묻어 나오고… 아무리 봐도
자네 실력은 경험 많은 외과의사의 솜씨를 보는 것 같아.”

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제 인턴인 자네가 많은 경험을 쌓았을 리가 없지. 그래서 자네 실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있네.”

“…무엇입니까?”

“자넨 수술을 좋아한단 거야.”

“……!!!”

***

진현의 눈 끝이 흔들렸다.

도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민철 교수는 말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자넨 나와 동류야. 수술을 하는 게 좋지 않나? 이 수술장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메스의 감촉이 좋지 않나?”

“…….”

“자넨 천생 외과의사야. 그러니 외과를 하게.”

강민철 교수의 말이 진현의 가슴을 찔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진현은 수술이 좋았다.

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의 긴장감이, 차가운 메스의 감촉이 좋았다.

그래서 지난 삶의 모든 것을 수술을 위해 바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번에도 바라는 삶은 아니었다.

이번엔 지난 삶에서 못 누린 행복을 누리고 싶었고, 남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닌 나와 주변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얼굴을 굳힌 진현은 입을 열었다.

“교수님.”

확고한 목소리였다.
“저는 외과에 생각이…….”

진현은 설사 호통을 듣더라도 본인의 뜻을 확실히 표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크윽……?”

강민철 교수가 돌연 신음을 내뱉은 것이다.

“교수님?”

“크…….”

“교수님?!”

“괘, 괜찮네. 신경 쓰지… 크윽…….”

강민철 교수의 턱 끝이 덜덜 떨렸다.

갑작스레 전신이 땀에 젖어 들었고 숨이 차는지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진현은 깜짝 놀라 수술도구를 내려놓았다.

“안 되겠습니다. 빨리 치료를……!”

“괘, 괜찮아. 수술을…….”

“수술을 할 상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진현의 머리에 한 진단이 스쳐 지나갔다.

심근경색!

‘설마 심근경색? 하필 수술이 한창인 지금!!”

하지만 수술도 문제지만 강민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로 심근경색이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옆의 간호사들도 그를 염려했다.

“교수님, 일단 앉아서 휴식이라도…….”

한 간호사가 소독포에 덮인 의자를 가져왔다.

하지만 강민철은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 걱정 안 해도…….”

그러면서 그는 전기칼인 보비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때,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

“크윽!!!”

챙!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전기 칼이 떨어졌다.

시체처럼 질린 얼굴의 강민철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는 외마디 신음과 쓰러졌다.

“교수님!”

“꺄악, 교수님! 여기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진현은 급히 쓰러진 강민철 교수에게 뛰어가 맥박과 호흡을 체크했다.

‘아직 심장은 뛰지만, 맥이 약해!’

갑작스러운 소란에 밖의 인원들이 수술장으로 들어왔다.

진현은 급히 외쳤다.

“심근경색입니다!! 빨리 심장 응급 진료팀에 연락을!!”

한 외과의사가 그에게 물었다.

“심근경색이라고?!”

“네, 협심증 증상을 호소하다가 쓰러지셨습니다. 심근경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과의사의 눈이 심각해졌다.

심근경색은 사망률이 굉장히 높은 질환으로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빨리 교수님을 이리로!”

사람들이 급히 강민철 교수를 업고 사라졌다.

‘괜찮으셔야 하는데.’

그 뒷모습을 보며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심근경색이라니.

그나마 병원에서 쓰러져 초동 조치가 잘 이루어진 게 다행이었다.

‘이전 삶에서도 심근경색으로 굉장히 고생하셨지.’

진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옆에서 이상민이 말했다.

“이 환자 수술은 어떻게 하지?”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간이식 수술장에 인턴 두 명밖에 안 남다니…….

(다음 편에서 계속)

# 52

52. 외과의 유망주? (7)

진현은 화급히 말했다.

“유영수 교수님에게 연락해 주겠습니까? 강민철 교수님이 쓰러지셔서 이 뒤는 유영수 교수님이 집도해야 할
듯합니다.”

“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걸었다.

“저 교수님, 7 번 수술 방인데요. 강민철 교수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교수님께서 뒤의 수술을 진행해 주셔야 할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간호사는 사정을 설명했다.

전화기 너머로 뭐라 대답이 들렸고, 간호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간호사는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아… 그래요? 1 시간 반이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와주세요, 교수님.”

진현이 물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지금 응급 수술 중인데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최소 1 시간 30 분은 있어야 올 수 있대요. 어쩌지…….”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선생님들은 없습니까? 전임의나 레지던트라도…….”

“하필 다음에 현미경으로 혈관을 연결해야 할 차례라 교수님들 아니면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지금 간 학회
기간이라 유영수 교수님 말고 다른 교수님들은 병원에 없고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유영수 교수 외에 수술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도 몸을 못 빼는 상황이다.

‘1 시간 30 분을 기다려? 안 돼. 그러면 피가 공급되지 않은 시간이 너무 길어져 새로운 간의 타격이 너무 클


거야.’

다음 단계는 간이식에서 가장 중요한 혈관을 연결하는 처치였다.

혈관을 연결해야 새로운 간은 피를 공급받을 수 있고, 산소가 담긴 피가 흘러야 새 생명을 얻는다.

진현은 고민했다.

‘혈관을 연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새로운 간은 저산소증으로 인한 손상을 입게 돼.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타격이 커지게 되고. 부산에서 지체하다 온 간이라 지금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보존액에 담겨 있는
상태도 아니라서 1 시간 30 분을 더 기다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

심한 경우 새 간이 죽어버릴 수도 있고, 그러면 환자도 죽는다.

진현은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기다리다간 환자가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유영수 교수를 끌고 올 수도 없다. 그러면 그쪽 환자가 죽을 것이다.

간호사도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죠? 너무 오래 걸리시는데…….”

“다른 교수님들이 가신 간 학회 장소는 어디입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전이라 들었어요.”

같은 서울이면 모를까 대전이면 너무 늦다.

‘하필 이때 쓰러지셔 가지고.’

여러모로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래, 진현아?”

이상민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있으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

아니, 단 하나 있었다.

환자를 무사히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하지만…….’
진현은 짧은 순간, 수십 번도 넘게 갈등했다.

그 방법은 부담이 너무 컸다.

그러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환자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외면하겠는가?

‘젠장.’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한다.”

“뭐?”

“내가 집도한다고.”

“……!”

이상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이 수술을 집도한다고? 그건 아무리 김진현, 너라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조롱이 섞인 듯한 목소리다.

하지만 진현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민아, 너 내 친구 맞지?”

“…….”

답은 없었으나, 진현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같이하자.”

“……!”

“마이크로(Micro), 수술용 현미경을 가져와줘.”

이상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을 믿지 못해 그런 거라 생각한 진현은 그의 눈을 직시했다.

“상민아, 할 수 있어. 그러니 같이하자.”

“……!”

잠시의 정적 후, 이상민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너라면 뭐든 할 수 있겠지. 너라면 뭐든지, 말이야.”


뭔가 거슬리는 뉘앙스였지만 둔감한 진현은 착각이라 여겼다. 그리고 말투 따위를 따질 상황도 아니었다.

“수술용 현미경을 가져와줘.”

“그래.”

옆에는 공장의 로봇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수술용 현미경이 준비돼 있었다.

이상민은 소독포로 무균처리를 한 후, 수술 필드에 현미경을 가져왔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간호사가 놀라 제지했다.

“처치를 하려고 합니다.”

“네?!”

간호사는 얘네들이 지금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리도 아니다.

인턴이 혈관 봉합술을 하려고 하다니?

“안 돼요. 그만두세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턴 선생님이 강민철 교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뛰어난 건 알아요. 그래도 이건 다른 이야기예요. 혈관


봉합술, 특히 현미경을 이용한 혈관 수술은 관련 교수님들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고급 테크닉이에요.”

백번 지당한 말이다.

현미경 혈관 문합(Microscopic vascular anastomosis)은 관련 분야의 외과의가 아니면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수술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고작 인턴이 혈관 문합을 하겠다고 나서다니?

똥개가 웃을 일이다.

진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도 하고 싶지 않다고.’

지금까지 벌인 일로도 시끄러운데 현미경 혈관 문합술까지 성공시키면 무슨 후폭풍이 터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폭풍이 무서워서 환자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수 있는 위인도 있겠지만, 진현은 그렇지 못했다.

‘모르겠다. 일단 지금 닥친 일을 해결하고,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하자.’

그는 차분히 말했다.

“이미 부산에서부터 오랫동안 지체된 간이어서 1 시간 30 분이나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랬다간 간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고 저는 이번 달에 여러 번 현미경 혈관 봉합술을 어시스트하여 수술 방법 자체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시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안 되면 곧바로 중단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그 설득에 간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진현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책임은 저 김진현이 지겠습니다.”

“……!”

옆에서 듣던 이상민이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모든 책임은 네가 감수하는 거지?”

“그래.”

비록 잠시라도 수술을 집도할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간호사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뭇거리자 진현은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그러면 진행하겠습니다.”

집도의의 자리에 선 진현은 순간 말 못할 감정을 느꼈다.

두근.

맥동하는 혈관이, 시뻘건 간이, 수술 필드에 흐르는 피가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십 년… 무려 십 년 만이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수술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이상민에게 부탁했다.

“여기를 잡아줘.”

이상민은 말없이 진현의 지시에 따랐다.

“실… Prolene 3/0 주십시오.”

간호사는 머뭇거리며 실을 건네주었다.

진현은 극도로 집중된 정신으로 첫 번째 목표를 바라봤다.

‘상대정맥… 간 정맥과 연결시켜야 해.’

고도로 절제된 손놀림이 상대정맥과 간 정맥을 오갔다.

그 손놀림에 곁에서 지켜보던 간호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놀라 멍하니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진현은 간호사의 반응을 신경 쓰지 못했다.

아니, 간호사의 반응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잊었다.

그의 눈과 정신은 오로지 간의 혈관에 집중되었다.

“…….”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진현의 손이 움직였다.

“디바이스(Device)를.”

다행히 강민철 교수가 쓰러지기 전 일부 혈관들을 연결했었다.

그러나 연결해야 하는 혈관은 하나, 두 개가 아니다.

더구나 작은 혈관의 경우 수술용 현미경을 써야 한다.

‘다음엔 간 동맥… 그다음엔 간 문맥…….’

어시스트 간호사는 진현의 집도 모습을 눈을 깜빡이며 지켜봤다.

그녀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싶었다.

‘인턴 선생님 아닌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이상민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항상 가면처럼 속마음을 숨기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놀람을 완벽히 가리지 못했다.

그만큼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인턴이 혈관 수술을 하다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진현이 말했다.

“혈관을 다시 연결합니다 (Revascularization).”

Revascularization.

혈관 문합이 끝났단 의미였다.

죽어 있던 간에 붉은 피가 흘러들었다.

산소를 머금은 적색 피가 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

진현은 말없이 환희와도 같은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휘저었다.

긴장 속, 삶과 경계를 가르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이전 삶에서 숱하게 느꼈던 감정이었다.

한편 간호사와 이상민은 경악해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 믿기지 않는 일에 너무 놀라 입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그 경악 속, 진현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 쳤다.”

뒷일을 생각하니 가슴에 차오르던 감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간이식 수술, 그것도 혈관을 연결하는 인턴이라니. 말이 안 돼도 너무 안 되잖아.’

환자를 위해 무작정 나서긴 했는데 뒷수습이 막막했다.

아니, 이게 뒷수습이 가능하긴 한가?

지금까지야, 타고난 재능… 어쩌구 등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건 달랐다.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드르륵, 수술방의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 유영수 교수가 들어왔다.

“강민철 교수님이 쓰러졌다고?! 환자는 괜찮나?!”


진현은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젠장, 어떻게 하지?’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아직도 불신에 가득한 목소리다.

“화, 환자는 괜찮아요. 여기 인턴 선…….”

진현은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환자는 괜찮습니다. 강민철 교수님이 중요한 처치는 다 끝내놓고 쓰러지셔서.”

“……!!”

간호사는 놀라 진현을 돌아봤다.

진현은 간절한 눈빛으로 간호사의 눈을 바라봤다.

‘제발! 조용히!’

그 눈빛이 통한 걸까? 아니면 직접 봤지만 본인도 믿기지 않아서일까?

다행히 간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유영수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아까 분명 혈관을 연결해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부산에서 오래 보관 후 가져온 간이라 급하다고.”

“부산에서 가져온 간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강민철 교수님께서 혈관 연결을 다 하고 쓰러지셨습니다.”

“그래?”

유영수 교수는 환자의 복부를 바라봤다.

깔끔하게 연결된 혈관들이 보였다.

유영수 교수는 그 깔끔한 테크닉에 감탄했다.

‘역시 강민철 교수님 솜씨답군.’

“어쨌든 너희가 수고했다. 많이 진행했으니 뒤의 수술은 나와 진행하자.”

천만다행으로 유영수 교수는 진현의 거짓말을 믿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진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론 강민철 교수가 깨어나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단박에 밝혀질 거짓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수술의 경과를 꼬치꼬치 캐물으시면 안 되는데. 심근경색으로 많이 힘드시니 자세히 안 묻고 유영수 교수님이
해결했다고 짐작하지 않을까?’

물론 강민철 교수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기보단 자세히 물어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미 친 사고.

그냥 유야무야, 잘 넘어가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53

53. 의사(醫師). 그 이유 (1)

무사히 수술이 끝난 후, 유영수 교수는 허겁지겁 심장 중환자실로 향했다.

강민철 교수를 보기 위해서다.

‘나도 가볼까?’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의식을 못 차렸을 가능성이 높지만 혹시나 의식을 찾고 수술의 경과를 물어보면 끝장이었다.

‘조용히 있자. 제발 아무 말 안 나왔으면.’

뭐랄까.

대형 사고를 친 후 안 들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목격자인 간호사에겐 입을 다물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상태다.

진현이 워낙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해서인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입을 다물지는 의문이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다음엔 이상민이었다.

고된 수술 끝, 수술 장 탈의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 녀석을 기다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흠뻑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이상민이 진현을 바라봤다.

촉촉이 젖은 모습은 TV 광고에서나 볼 법한 외모다.

좀 전 진현의 집도에 분명 놀랐을 텐데 무표정한 얼굴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
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탈의실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나가서?”

“응, 잠시만 나가자.”

“그래.”

그들은 병원 밖 흡연구역으로 나왔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치익.

담뱃불을 붙이며 이상민이 물었다.

“왜……?”

진현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상민아, 정말로 미안한데… 아까 전 일… 비밀로 해주면 안 되겠냐? 부탁한다.”

“비밀?”

“그래, 제발 부탁한다.”

이상민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건…….”

진현은 머뭇거렸다.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이전에 외과의사로 살다가 회귀를 해서?

그때 이상민이 낮게 말했다.

“싫어.”

미소 속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

그 눈빛에 진현이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끼는 순간, 착각처럼 그 한기는 사라졌다.

이상민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농담이야. 그래, 알겠다. 얼굴 굳히지 말고.”

담배를 털며 말을 이었다.

“우린 친구니까. 더 안 물어보고 네 말대로 할게. 아까 전 일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래, 걱정하지 마. 할 말 끝났으면 들어가서 쉬고. 나는 좀 더 담배 피우다 들어갈게.”

진현이 병원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릴 때, 이상민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현아.”

“응?”

“우리 둘 친구 맞지?”

“그래, 우린 친구지.”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서 잘 쉬어.”

홀로 남은 이상민은 깊게 담배를 들이마셨다.

깊게 깔린 어둠이 그에게 내려앉았다.

“후우… 친구라… 김진현, 너는 정말… 항상 나를 자극하는구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

다행히 그 뒤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강민철 교수의 상태가 생각보다 위중했었던 탓이다.

안 좋은 일이었지만 진현에겐 어쨌든 다행이었다.

인턴인 자신이 혈관 봉합을 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강민철 교수님은 곧 회복되겠지.’

불굴의 의지인지, 이전의 삶에서도 곧 건강을 되찾으셨다.

이번엔 초기 응급 처치도 잘 이루어졌으니 큰 문제 없이 회복되긴 할 거다.

‘회복된 후 그때 수술 경과를 물어보진 않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진현은 안 그러길 다시 한 번 기원했다.


그리고 일주 정도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외과 순환근무가 끝났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체감상으로 굉장히 긴 듯한 시간이었다.

“진현아, 고생 많았지?”

“그냥, 뭐.”

혜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지만 실제 고생을 많이 하긴 했다.

어쨌든 별 탈(?) 없이 끝내서 다행이다.

“아, 이제 응급실(ER)이라니 걱정돼.”

혜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현과 그녀의 다음 근무처는 악명이 자자한 응급실(ER, Emergency room)이었다.

“큰 문제없어야 할 텐데. 조심하자, 우리.”

“그래, 조심해야지.”

기본적인 업무만 수행하는 다른 근무처와 다르게 대학병원 응급실은 인턴이 일차적으로 환자를 담당한다.

물론 대일병원은 타 병원에 비해 위 의사들의 백업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만 부담감이 덜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병원에서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장소가 응급실이니까.

‘이번엔 정말로 사고(?) 치지 말아야지.’

진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쳤던 사고들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더 이상은 곤란했다. 정말로.

그들은 다음 근무처인 응급실에 인사를 했다.

“다음 달 인턴입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응급실은 난리법석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 피를 흘리는 사람.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비규환 속에서 치프 레지던트, 오형석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로 올 인턴이라고? 수고해라.”

“네.”

“근무 스케줄은 24 시간 일하고, 24 시간 휴식이다. 근무 24 시간 내내 하나도 못 쉬어 힘들긴 해도 끝나고 푹


쉴 수 있으니 스케줄 자체는 나쁘지 않을 거다.”

치프의 말대로였다.
이 정도면 굉장히 배려 깊은 스케줄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짤막한 저녁 퇴근만 주는 과도 많았기 때문이다.

혜미의 얼굴도 밝아졌다.

진현과 같이 근무하니 휴식 시간도 동일하다.

그녀는 휴식 시간에 진현과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할 기대를 했다.

“근무 시작할 때 차질 없도록, 미리 인계 잘 받고. 그러면 내일부터 근무니 그때 보자.”

“네.”

그들이 돌아서서 나가는데, 응급실 치프 오형석이 말했다.

“참, 네가 김진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진현은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흠.”

오형석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내일 보자.”

오형석은 고개를 저을 뿐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진현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으나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

‘뭐지?’

진현은 찝찝한 마음에 생각했다.

‘특별히 응급실 쪽에 잘못한 것은 없는데?’

혹시나 나쁜 소문이 돈 걸까 고민했지만 대일병원 내 진현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긴커녕 과도할
정도로 좋았다.

그때 혜미가 물었다.

“진현아, 곧바로 수술장 들어가 봐야 해?”


그들은 근무 중 살짝 틈을 내 인사를 간 상태였다.

시계를 보니 다음 수술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조금은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잠깐 커피 사서 들어가자. 목말라.”

“그래.”

대일병원 내에는 그룹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위치한 스타벅스로 향했다.

“진현이는 뭐 마실래?”

“아무거나. 아이스로.”

스타벅스든, 동네 다방이든, 아라비아카든, 뭐든 간에 그에겐 그냥 쓴 물이었다.

시럽 타면 달달한 물이고.

고작 씁쓸한 검은 물을 이렇게나 비싼 돈을 내고 먹는 게 이해가 안 됐지만 혜미는 제법 좋아했다.

“진현아, 혹시 응급실 근무 중간에 쉴 때 특별한 계획 있어?”

“왜?”

“아니, 그냥… 가끔씩 놀러 다니자고. 이렇게 시간이 날 때가 별로 없으니…….”

그녀는 뭔가 쑥스러운지 말끝을 흐렸다.

“안 되는데?”

“아, 그래?”

기대에 찬 얼굴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에 귀여운 마음이 들어 진현은 슬쩍 웃었다.

“농담이다. 그래, 시간이 나면 어디 놀러 가자.”

그 말에 혜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왜 장난을 하고 그래. 꼭 놀러 가는 거야?”

“그래.”

그런데 하필 그때, 핸드폰이 띠릭 소리를 내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진현 선생님, 한 달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 달엔 혹시 시간이 괜찮으세요?


메시지의 주인은 놀랍게도 이연희였다.

‘한 번 보기로 했었지.’

이전 삶의 아내와 따로 만난다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미 여러 번 시간을 미룬 상태라 더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진현은 메시지를 보냈다.

-네, 괜찮을 듯합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러면 제가 조만간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그때 봬요! 쫑쫑.

밝게 미소 짓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섞인 답장이 돌아왔다.

진현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지?

‘그냥 빨리 밥만 먹고 들어오자.’

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현아, 갑자기 왜 그래? 누구야?”

“아니다.”

마침 커피가 나와 쭈욱 들이켰다.

단숨에 커피를 비우는 그의 모습에 혜미가 눈을 크게 떴다.

“처, 천천히 마셔.”

“가자.”

그러고 혜미와 헤어진 후, 수술장으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진현은 병원 로비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미스터 김! 오랜만이에요.”

익숙한 목소리, 무뚝뚝하지만 어색한 한국어 발음.

헤인스의 한국지부 사장 에이미 엔더슨이었다.

그녀는 사장으로 승진하더니 훨씬 젊어진 듯했다.

이십 대 후반? 기껏해야 삼십 정도로 보였다.

“아, 오랜만입니다.”

“네, 반가워요. 이제 닥터(Doctor) 김이네요.”

진현은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물었다.


“대일병원에는 무슨 일입니까?”

“업무 때문에 왔어요. 대일병원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몇 개 있거든요.”

뒤를 보니 에이미와 같이 있던 여러 교수가 놀란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하필 최대원 교수와 간이식의 유영수 교수도 자리에 있었다.

교수들 모두 저 인턴은 누구기에 헤인스의 한국 지부 사장과 아는 사이지? 하는 눈치다.

그 시선에 곤란함을 느끼는 찰나, 에이미가 교수들에게 입을 열었다.

“아, 저희 프로젝트에 큰 도움을 준 닥터 김이에요.”

“헤인스에 큰 도움이요?”

인턴이 전 세계에서도 꼽히는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에 도움을 줬다고?

“네, 닥터 김은 TC80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기획한 책임자거든요.”

그 설명에 말없는 경악이 교수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TC80 이라면 최근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그 신약을 말하는 건가?”

“마인 바이오의 주가를 3 배나 띄운 그 신약?”

“그걸 인턴이 기안했다고?”

모두들 TC80 을 알고 있었다.

탁월한 소화 기능 개선효과와 강력한 변비 치료로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신약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웅성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한 한국대 의대 학생이 프로젝트를 살렸다는 이야기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긴 한데… 그게 저 인턴


선생님이었던가?”

한 교수의 말에 최대원 교수가 놀란 헛기침을 했다.

“진현 군, RI84 뿐 아니라 TC80 도 자네 작품이었나?”

감탄이 가득 담기다 못해 넘치는 목소리다.

진현은 생각지도 못한 교수들의 주목에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냥 돈 벌려고 한 일인데.

물론 교수님들께 좋게 보여서 나쁠 것은 없지만, 다들 내과와 외과 쪽 교수들이었다.

“그게…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약간의 아이디어 제공만 했고 별로…….”


하지만 그때 한국어 발음 어눌한 눈치 없는 백인 여자가 초를 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하셨죠. 핵심적 아이디어 제공과 스터디 디자인을 전부 기획하셨으니.”

“……!!”

(다음 편에서 계속)

# 54

54. 의사(醫師). 그 이유 (2)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이 여자가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과연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스터디 디자인을 기획했다고? 인턴… 아니, 그러니까 그때는 본과 학생이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거요,
미스 엔더슨?”

“맞아요. 확실해요.”

“하, 정말이오?”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진현은 침을 삼켰다.

특히 원래 진현의 비범함을 알고 있는 최대원 교수와 유영수 교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번뜩였다.

‘안 되겠다.’

이 자리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진현은 급히 인사했다.

“저… 수술장에 들어가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술장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교수들이 바라봤다.

***

이상민의 아버지인 대일병원의 이사장 이종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놈은 대체 뭐야?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

처음엔 아무리 뛰어나도 고작 인턴 주제에, 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점 진행되어 가는 꼴을 보니, 고작 인턴이 아닌 것 같았다.

천재.

정말 이놈은 진정한 천재였다.


물론 이상민도 뛰어났지만, 김진현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살리에르도 뛰어난 천재였지만 결국 더 뛰어난 모차르트의 벽을 넘지 못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상민도 그 꼴이 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안 돼. 그렇게 되어선. 이상민은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해.’

창녀의 핏줄을 타고난 이상민이 가문의 반대를 이겨내고 병원의 후계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 최고가 되는
것뿐이다.

‘이러다간 김진현, 그놈만 계속해서 주목받겠어. 차라리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겠군.’

이사장이나 되어서 인턴 나부랭이에게 손을 쓰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쓸데없이 과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괜히 손 놓고 있다가 후에 크게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종근은 민 비서를 불렀다.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띤 그는 부드러운 존댓말로 부탁했다.

“민 비서, 김진현 인턴 선생님에 대해 다시 한 번 조사를 해주시겠어요?”

“조사요?”

“네, 이전보다 좀 더 자세히. 가급적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최대한 자세히.”

총명한 그녀는 금방 말뜻을 알아들었다.

확실히 김진현은 단순한 인턴이라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최대한 자세히 조사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이상하거나 수상한 점은 없는지도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민 비서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검은 안경이 햇살을 받아 지적으로 빛났다.

“그리고 김진현 선생의 다음 근무지가 어딘가요?”

“응급실입니다.”

“그렇군요. 응급실이면 중환자가 참 많겠어요. 그렇지요?”

묘한 뉘앙스.

민 비서는 이사장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김진현 선생에게 중환자를 주로 배치시켜 실수를 유도할까요? 실수를 하면 그 빌미로 파면을…
….”

민 비서는 섬뜩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단번에 자르면 편하겠지만 인턴, 레지던트는 직급의 특수성상 해고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턴, 레지던트는 인권침해에 가까운 과중한 일을 하면서도 학생처럼 피교육자의 신분을 겸하기 때문에 채용도 일
년에 단 한 번 협회에서 정해준 인원밖에 뽑지 못하고, 중간에 사표를 낼 시 충원도 거의 불가하다.

또한 의사 중 가장 밑바닥 직급이어서 부당한 대우를 수없이 당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전공의협의회
등 수많은 보호 장치가 존재한다.

차라리 전문의를 자르는 것이 쉽지, 아무리 이사장이라도 아무런 핑계 없이 인턴 레지던트를 해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일병원의 역사를 통틀어도 인턴 레지던트가 해고된 적은 한 번도 없기도 했고.

따라서 눈엣가시를 내보내려면 그에 맞는 핑계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종근은 고개를 저었다.

“실수를 유도한다라… 나쁘지는 않지만 그만두세요.”

“어째서입니까?”

“인턴에게 일부러 중환자를 몰아주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왠지 중환자를 아무리 배치해도 별로 실수를 안 할 것 같았고, 오히려 중환자를 치료하는 인턴이란 거창한 소문만
퍼질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다른 안을 생각했다.

“차라리 현대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그러니까 말기 암 환자같이 연명 치료를 하는 사람을 배치토록


하세요. 그런 환자는 어떤 치료를 해도, 의사의 실력과 상관없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으니.”

민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김진현 선생이 진료 후 안 좋아진 사람을 골라 문제를 뒤집어씌우도록 하죠.”

벗어날 수 없는 술수였다.

의학적으로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 사람의 책임을 덮어씌우면 그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어떤 명의라도 불가능했다.

한편 이종근은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사장인 내가 하찮은 인턴 때문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야 하지?

‘빨리 치워버려야겠어.’

불쾌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는 민 비서를 바라봤다.

하얀 블라우스 안의 육감적인 몸매가 그를 자극했다.

“민 비서.”

“네?”

“지금 바쁜가요?”

민 비서는 뭔가를 열망하는 그의 눈빛을 눈치챘다.

그녀는 천천히 안경을 벗고, 고혹적인 눈매로 그에게 다가갔다.

“안 바빠요.”

***

외과를 마친 밤, 진현은 오랜만에 꿈을 꿨다.

-자넨 외과를 해야 해.’

깊은 어둠 속, 강민철 교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수술이 좋지 않나? 자넨 천생 외과의사야. 자신을 속이지 말게.

강민철 교수의 말이 옳았다.

그는 수술이 좋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삶과 죽음이, 그 환희가 좋았다.

못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보람이 가슴을 떨리게 했다.

하지만… 분명 좋지만… 그가 바라는 삶은 아니었다.

이번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그게 뭐 나쁜가?

이 세상 모두가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안락하고,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게 뭐가 나쁜가?

-외과의사를 한다고 꼭 힘들게 사는 건 아니네. 자리를 잡고 잘사는 사람도 많아.’


강민철의 말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자리만 잘 잡으면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다시 그


괴로운 길을 걷고 싶지가 않습니다. 수술이 좋고, 사람을 치료하는 건 분명 좋으나… 이번 삶엔 그저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진현의 대답에 강민철은 입을 다물었다.

노이즈가 일 듯, 세상이 흔들렸다. 그리고 가면이 바뀌듯 강민철의 얼굴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앳된 얼굴에 굳은 눈매. 이번에 나타난 이는 바로 김진현 본인이었다.

-거짓말.

“…뭐?”

-너는 그저 두려운 거야.

또 다른 자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실패할까 봐. 이전 삶의 실패가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어 널 붙잡는 거야. 그렇지 않아?

진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어쩌면 맞을 수도.’

정신적 상처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본인도 눈치 못 채는 사이 삶을 얽맨다.

진현은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인데?”

-……!

“어쨌든 내가 바라는 것은 안락하고, 물질적으로 행복한 삶이야.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라고 해도 좋아. 난 나를


위한 삶을 살겠어.”

그 말과 함께 어둠이 걷혔다.

진현은 침대를 흠뻑 적신 채로 잠에서 깼다.

‘꿈… 개꿈이군.’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개꿈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응급실로 출근을 할 시간이다.

그는 대충 씻고, 중간에 병원에서 혜미를 만나 응급실로 향했다.

***

응급실에 도착하니 전날 인사한 치프 레지던트, 오형석이 진현들을 맞았다.

“응급실은 다들 처음이지?”

친절한 목소리였다.

“인계는 들었겠지만, 응급실 의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최초의 응급 처치를 하고, 필요에 따라 각 전문 과에
연결을 해주는 거다.”

“네.”

“너희 인턴은 채혈, 소변줄, 복수 천자 등의 기본적인 업무를 하면서 환자도 같이 볼 거다. 물론 안 좋거나
어려운 환자는 전부 우리가 보겠지만, 간단한 환자들도 너희 인턴에게는 쉽지 않을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환자의 안전이니 모든 결정을 할 때는 윗사람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반드시다.”

“네!”

설명을 들으며 진현은 생각했다.

‘합리적이군.’

환자와 초보 의사 둘 모두를 위한 조치다.

실력이 안 되는 인턴이 환자를 보다 문제가 생기면 그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니까.

복잡하고 안 좋은 환자는 숙련자가, 간단한 환자는 인턴이.

물론 아무리 간단한 환자라도 인턴에겐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턴이 처음 진료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긴? 아파서 왔지!”

“그러니까 어디가 아파서…….”

“아, 몰라. 인턴 말고 위에 선생님 데려와 줘!”

과연 동료 인턴들은 쩔쩔 거리며 환자를 봤다.

혜미도 진땀을 흘리긴 마찬가지였다.

반면 진현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이전 삶에서 그가 봤던 응급 환자들은 수술이 필요한 중한 환자들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인턴들에게 맡겨지는 환자들은 솜털같이 가벼웠다.

‘지난달보다 훨씬 편하구나.’

넘어져 살이 까진 아기를 소독하며 진현은 생각했다.

찢어진 상처, 피부 알레르기, 가벼운 어지럼증… 이런 환자들만 보니 살 것 같았다.

‘역시 난 편한 피부과를 해야 해.’

그때 아기가 아픈지 울음을 터뜨렸다.

“앙앙!”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으렴.”

진현은 살살 달래가며 소독을 마무리했다. 보호자가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잘하시네요.”

“아닙니다. 특별히 꿰매거나 그럴 상처는 아니니 집에서 잘 소독하면 될 듯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너도 잘 가고.”

진현의 인사에 아기가 해실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혜미가 난처한 얼굴로 진현에게 다가왔다.

“진현아, 시간 괜찮아?”

“응. 왜?”

“어지럼증 환자인데 잘 모르겠어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위 선생님 계시잖아.”

초보 인턴들을 위해 모든 고민되는 사항이나 의사 결정은 위 선생님을 통해 하도록 정해져 있다.

“선생님들, 다들 안 좋은 환자한테 몰려 있어서.”

그 말에 슬쩍 중환자 존(Zone)을 보니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바글바글했다.

교통사고 환자인 듯했는데, 피를 철철 흘리는 게 한가히 질문을 할 분위기가 아니긴 했다.

‘이 정도는 도와줘도 티 안 나겠지?’

그가 그동안 친 사고(?)들에 비하면 단순 어지럼증 환자 정도야 애교긴 했다.


“아, 어지러워! 다들 손 놓고 뭐하는 거야?! 빨리 치료해줘!”

한 젊은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구토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응급실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병동이나 진료실에선 얌전한 환자들이 다들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양성 어지럼증(BPPV)이군.’

진현은 남자의 흔들리는 눈을 본 순간, 진단을 짐작했다.

“환자분, 힘드시겠지만 잠시만 저를 바라봐주십시오.”

진현은 추가적인 검진을 실시했다.

차분한 그의 진찰에 환자는 금방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현의 지시를 따랐다.

간단히 신경학적 검진을 끝낸 다른 질환을 배제한 진현은 혜미에게 말했다.

“양성 어지럼증 같으니 이비인후과에 연락하면 될 것 같은데? 이비인후과 진료 보기 전에 항 구토제 먼저 주고.”

그리고 혜미가 연락을 하는 사이, 진현은 환자에게 설명했다.

“귀의 평형을 담당하는 반고리관의 문제로 생긴 어지럼증입니다. 반고리관을 안정시키는 간단한 물리 치료로
호전되는 경우가 많으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

# 55

55. 의사(醫師). 그 이유 (3)

“아,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혜미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비인후과 선생님 지금 다른 환자 안 좋아서 시간이 걸리신다는데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과나 외과처럼 커다란 과가 아닌 한, 각 과의 응급실 담당 의사는 응급실만 전담하는 게 아닌 병동과 다른


파트를 같이 맡기 때문이다.

의사 한 명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응급실 환자만 대기하고 있기에는 대학병원의 인력이 너무 모자랐다.

환자가 진현에게 말했다.

“그 물리치료… 선생님이 해주면 안 돼요?”

그 말에 진현은 고민했다.
‘내가? 할 수야 있지만. 해도 될까?’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치료할 수 없다면 모를까, 능력이 되는데 괴로워하는 환자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또 물리치료, 에플리 법은 어려운 치료가 아니어서 능숙한 인턴이면 가능하기도 한 술기다. 따라서 주목받을
부담이 덜했다.

“알겠습니다. 놀라지 말고 머리에 힘 빼십시오.”

진현은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환자의 머리를 움직였다.

45 도 오른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뒤로 확 젖히고, 왼쪽으로 90 도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반고리관의 이석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거짓말처럼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아, 좋아졌어요!”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죽을 것 같은 어지럼증에서 해방된 환자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양성 어지럼증은 후에 재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이상이 있으면 다시 병원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환자는 만족한 얼굴로 귀가했다.

“진현아, 역시 대단해.”

“아니다. 너도 익숙해지면 쉽게 할 수 있는 술기다.”

진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시간은 누구보다 좋은 스승이어서 지금은 어리벙벙한 인턴이지만 다들 조금만 지나면 금방 익숙해진다.

하지만 다른 초보 인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환자를 봐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진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

더구나 진현은 국내 최고 명문 한국대의 수석이자, 병원 내의 소문도 장난이 아니지 않은가?

또 그런 주제에 잘난 티는 전혀 내지 않는다.

동료 인턴들이 하나둘 진현에게 모여들었다.

“진현아, 이 환자는 어떻게 할까?”


“피부 발진 환자인데…….”

위의 선생님들이 있었지만 지옥 같은 응급실에서 항상 바쁘고, 아무래도 윗사람보단 같은 동기인 진현이 질문하기


편하다.

“나도 잘 모르니, 위 선생님들에게 물어봐라.”

“에이, 너 알잖아. 그리고 선생님들 지금 다 바쁘셔서.”

처음엔 튕겼지만 자꾸 물어보니 계속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치프 인턴’이 되어 있었다.

“이 환자는 이렇게 처치하고… 이 환자는 신경과에 노티하고, 이 환자는 내과에…….”

진현 덕분에 응급실의 경한 환자들이 깔끔히 정리됐다.

그런데 한창 바쁜 시간을 지나 늦은 저녁때였다.

치프 레지던트인 오형석이 그를 불러냈다.

“김진현, 이리로 좀 와봐라.”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지?’

오형석은 진현을 응급실 으슥한 곳에 위치한 의국(醫局)으로 끌고 갔다.

“거기 앉아라.”

진현은 먼지 쌓인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너… 누가 너보고 치프 노릇 하래?”

진현은 그 말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주제넘게 나선 점 사과드립니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특별히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일부러 의도했던 것도 아니다.

동기들이 계속 물어보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진행된 것이고, 오히려 진현 덕분에 응급실의 환자가 훨씬 쾌적하게
정리됐다.

하지만 결과를 떠나 그의 행동은 조직의 체계화된 시스템을 무시한 것이었다.

“앞으론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치프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는 웃음을 터뜨린 후 말했다.

“아니, 뭐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고. 오늘 너 덕분에 솔직히 많이 편하긴 했다. 네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줬으니까. 내과랑 외과에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역시 대단하구나.”

“…….”

오형석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죽을 것처럼 바쁜데 네가 지금처럼 수고해 주면 우리야 좋지. 앞으로도 이렇게 해줄 수 있겠니?”

진현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계속 이렇게 하긴 싫은데?

“만약 잘만 해주면 네 인턴 인사평가는 만점을 줄게.”

“…알겠습니다.”

윗사람이 시키는데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턴들이 보는 환자야 다들 간단해서 문제될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고민되거나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꼭
나랑 상의하고.”

“네.”

“그러면 나가봐.”

진현은 인사 후 의국을 나갔다.

그런데 홀로 남은 오형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김진현… 착실하고 유능한 것 같은데… 위에선 왜 그러는 거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얼마 전 들은 비밀스러운 명령을 떠올렸다.

“저 녀석에게 안 좋은 환자를 배치하라고? 그것도 임종 직전의 말기암 환자처럼 상태가 안 좋고, 회복이
불가능한?”

그런 환자를 인턴에게 배치하면 사고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고가 나길 바라는 이상한 지령이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치프인 그도 병원의 일개 부속품 중 하나.

위의 압력에 따를 수밖에 없다.

***
시간이 지나면서 초보 인턴들도 조금씩 응급실에 적응을 했다.

“진현아, 내일은 뭐해?”

혜미가 처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물었다.

“글쎄? 잠이나 자야지.”

24 시간 내내 환자를 보다 인턴 숙소로 들어가면 녹초가 되어 그대로 뻗는다.

그러다 오후 늦게 일어나 저녁을 먹고 멍하니 있다 다음 날을 위해 취침, 이게 진현의 일과였다.

“가로수길 가지 않을래? 맛있는 브런치 집 있다던데.”

“가로수길?”

최근 압구정을 밀어내고 떠오른 강남의 가장 핫(Hot)한 번화가였다.

뭐, 이 녀석이랑 잠깐 기분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답을 하려는 찰나, 띠링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응급실에서 고생 많으시죠? 내일은 시간 괜찮으세요? 답변 기다릴게요, 쫑쫑.

이연희였다.

역시나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였다.

그 메시지에 진현은 고민했다.

‘어쩌지? 이쪽이 선약이긴 한데.’

이연희와는 이미 한 달 전부터 이야기된 약속이라서 시간을 내려면 이쪽이 먼저긴 했다.

“왜? 누구야?”

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어쩐다?

고민하던 때, 치프 오형석이 진현을 불렀다.

“김진현, 이리로 와봐.”

“아, 네.”

진현이 다가오자 오형석이 물었다.

“환자 보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고?”


“예, 괜찮습니다.”

“그래, 네가 잘해줘서 한결 편하다. 인사평가는 만점 줄 테니 걱정 말고.”

비록 간단한 환자들이긴 하지만 진현이 깔끔히 처리해 주니 위 레지던트들은 한결 편했다.

특별한 문제도 안 생기고.

그를 응급실로 스카우트해야 한다는 레지던트들도 있어 진현은 진땀을 흘렸다.

‘응급실은 내과나 외과보다 더 싫어.’

이 지옥 같은 데서 평생을 보내야 하다니. 그것만은 못한다.

그때 오형석이 살짝 주저하다 말했다.

“미안한데…….”

“…말씀하십시오.”

“전광판에 뜬 저 환자 네가 좀 봐줄 수 있을까? 인턴이 볼 환자가 아니긴 하지만, 다들 일손이 없어서.”

오형석은 뭔가 미안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린 진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명]

전광판에 표시된 이름이었다.

이름이 무명(無名)일리는 없으니 신원미상이란 의미였다.

신원미상.

보호자와 환자 둘 중 한쪽만 이름을 알아도 신원미상이 되지 않으니, 환자가 의식도 없는 중환이고 보호자도
존재하지 않는단 뜻이었다.

이런 환자는 상태도 안 좋고, 의사 결정을 할 보호자도 없어 처치가 굉장히 어렵다.

“지금 다들 패혈증 쇼크 환자에 매달려 있어서… 미안하다. 보기 어려울까?”

오형석은 이상할 정도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뭐, 지난 삶 때 다른 병원에서 인턴 할 때는 저것보다 더한 환자들도 응급실에서 봤으니.’

국내 1 위 대일병원이니 인턴을 배려해 주는 거다.

인력이 부족한 다른 병원에서는 인턴이라고 간단한 환자만 보지 않는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중환자를 인턴이 담당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그만큼 사고도 많이 나고.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다들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대화를 마친 후 진현은 환자를 보러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오형석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치프인 그는 119 에서 연락을 미리 받아 ‘무명’이란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절대 인턴이 볼 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나,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

“빌어먹을. 저 착실한 애한테 자꾸 왜 그러는 거야? 더러워서 병원을 떠나든지 해야지.”

오형석은 욕설을 내뱉었다.

***

“이런.”

진현은 진찰대에 누운 환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았다.

“알코올 간경화인가? 뭐지?”

50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환자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꼬집고, 강하게 자극을 줘도 간신히 눈을 뜨는 게 고작이었다.

“으으…….”

샛노랗게 변한 피부와 눈동자, 술 냄새와 오줌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영양실조인지, 복수인지 깡마른 몸에 배만 올챙이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어떻게 발견되신 것입니까?”

진현은 옆에 서 있는 119 대원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희도 신고 받고 간 거여서. 노숙자인데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어요.”

상태 안 좋은 노숙자.
안 좋은 느낌이 진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곤란한데.’

119 대원이 바쁜 얼굴로 종이를 내밀었다.

“저희 가봐야 해서. 여기 사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인을 받은 119 대원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제 이 환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주치의인 진현의 몫이었다.

‘잘못하면 이거 전부 뒤집어쓰는데.’

지난 삶 때 주변에서 목격한 몇몇 안 좋은 경우들이 떠올랐으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환자를 살리는 게 먼저지. 그런 일들은 우선 환자를 살리고 생각하자.’

혼수상태라 대화가 안 되니 몸을 만지며 빠르게 검진을 했다.

‘간이 안 좋아 생긴 혼수가 확실해.’

황달로 인한 샛노란 피부, 얇은 피부 밑으로 만져지는 커다란 간, 어마어마한 복수, 숨 쉴 때마다 퍼지는 썩은
오줌 냄새.

이 모든 것이 간성혼수를 시사했다.

“여기 처방한 피검사 좀 해주세요. 수액도 달아주시고요.”

진현은 필요한 처방들을 낸 후 오형석에게 갔다.

“응?”

오형석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진현을 바라봤다.

“응급실의 초음파를 써도 되겠습니까?”

“아, 그거야 마음대로. 그런데 초음파는 왜?”

“간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인턴이 초음파를 본다고 하자 오형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초음파 볼 줄 알아?”

초음파는 관련 전공 의사가 아니면 보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진현은 이것저것 생각 않고, 초음파를 환자에게 가져갔다.

그가 초음파 끝을 환자에게 갖다 대니 간의 화면이 깔끔하게 나타났다.


그 명확한 솜씨에 뒤에 서 있던 오형석 및 다른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인턴들은 감탄을 토했다.

“너 어떻게?”

“학생 때 조금 배워서…….”

그게 말이 되나? 하는 그들의 표정에 뭔가 또 실수한 것 같지만 진현은 신경 쓰지 못했다.

초음파에 보인 간의 상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56

56. 의사(醫師). 그 이유 (4)

“이런… 이건.”

쪼그라들고 오돌토돌한 간.

전형적인 간경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거의 간 전체에 걸쳐 정체불명의 혹이 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10㎝은 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HCC(간암)…….”

진현은 신음을 흘렸다.

간암.

그것도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의 거대 간암이었다.

주요 혈관을 다 침범하고 있고, 이 정도 크기면 원격 전이가 동반된 말기 간암이라 봐야 했다.

그리고 그때, 간호사가 말했다.

“김진현 선생님, 이거 보세요. 응급으로 돌린 피검사 결과 나왔어요.”

컴퓨터를 확인한 진현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간의 기능을 반영하는 황달 수치 48, 응고 수치 4.3?”

황달 수치 48 에 응고 수치 4.3 이면 간의 기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봐야 했다.

이 경우 환자는 며칠… 아니, 어쩌면 오늘 안에 사망할 수도 있다.

‘이런…….’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

무조건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진현은 일단 내과에 연락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내과 레지던트는 난색을 표했다.

“그게 입원은 곤란한데…….”

“어째서입니까?

“어차피 곧 사망할 환자이고… 신원이 확실하지 않으니.”

진현은 말뜻을 이해했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노숙자를 입원시킬 순 없다.

돈을 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병원이 자선사업기관도 아니고 100% 돈을 안 낼 사람을 입원시킬 순 없다.

“알겠습니다.”

“너도 괜히 고생하지 말고, 대충 다른 곳으로 보내.”

내과 레지던트는 말했다.

야박하게 들리지만, 진현을 생각한 말이었다.

이대로 응급실에서 진현이 보고 있다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주치의인 진현의 몫이기 때문이다.

“너 이런 환자 괜히 잘못되면 곤란하다. 죽을 때까진 코빼기도 안 비치던 보호자가 나타나 책임지라고 하면 진짜


골 아파.”

“네, 감사합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 병원이 이런 환자를 받아주겠는가?

만약 보낸다면 그냥 죽으라고 내쫓는 거다.

‘어쩔 수 없군.’

혜미가 옆에서 걱정스레 물었다.

“진현아, 어떻게 해?”

“봐야지.”

“응?”

진현은 말했다.
“입원이 안 되면, 내가 응급실에서 데리고 치료해야지.”

“하, 하지만…….”

“돈이 없다고, 보호자가 없다고 치료를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담담한 목소리에 혜미는 입을 다물었다.

***

그 뒤 진현은 최선을 다해 신원미상의 ‘무명남’을 치료했다.

간기능 보호제를 쓰고, 혼수를 깨게 하기 위해 관장을 하고…….

그러던 중, 원무과에서 전화가 왔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 원무과입니다.

“네.”

-현재 진료 중이신 무명(無名) 환자분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여러 약이 들어가고 있는데… 환자분이 보호자도 없고, 신원도 확인할 수 없어서 약을 쓰는 족족 병원


손해입니다.

“그러면 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런 뜻은 아니지만, 100% 병원 손해란 것을 말씀드리려 전화한 것입니다. 어쩌면 김진현 선생님께 문책이 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약을 쓰지 말라는 뜻이다.

기가 찬 전화였다.

병원 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런 이야기는 환자분이 좋아진 다음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진료가 바빠 끊겠습니다.

-어, 선생님? 선생님?

뚜우- 뚜우-

진현은 핸드폰을 닫았다.

정말 곤란한 일이다.

‘그렇다고 치료를 안 할 수도 없잖아.’

그는 무명의 환자에게 다가갔다.


볼록하게 튀어 오른 배.

‘제길.’

이전 삶에서 그의 아버지가 말기 위암으로 투병할 때도 저런 모습이셨다.

암세포가 복막에 드글드글 퍼져 끝없이 배에 물이 찼다.

당시 그의 집은 기울 대로 기울어 마지막엔 제대로 된 치료도 못 해드리고 괴롭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진현은 도저히 이 환자를 내쫓듯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진현의 정성 때문일까?

계속 의식을 못 차리던 환자가 눈을 떴다.

“으… 여긴……?”

“정신이 드십니까?”

진현은 놀라 물었다.

“으…….”

명료하진 않았으나 확실히 호전된 의식 상태였다.

“사, 살려주세요…….”

환자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진현은 환자의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

밤을 꼬박 새는 24 시간의 근무 후에도 진현은 쉬러 들어가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혜미와 이연희와의 약속은 무기한 연기됐다.

“좀 쉬어야지, 진현아.”

혜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현은 눈을 비볐다.

“괜찮아. 아까 의국에서 잤다.”


“얼마나?”

“글쎄… 한 시간?”

혜미는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너도 나중에 내과 전공하면 자주 이럴 거다.”

“그땐 그때고. 너 못 자면 속상하단 말이야.”

진현은 피식 웃었다.

“고맙다. 너라도 가서 쉬어.”

그런 진현의 노력 덕분일까?

환자는 믿을 수 없게도 점차 호전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환자는 드디어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을 차렸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진현은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좋아져서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원래 간성혼수가 심할 때의 일은 기억이 안 나게 마련이지만, 환자는 놀랍게도 대충의 기억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연신 진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어떻게 쓰러지셨던 것입니까?”

그 물음에 환자는 깊은 한숨을 토했다.

“제 이름은 김성민이라고 합니다.”

말문을 연 환자는 간단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다.

직장을 다니다 명예퇴직, 이후 몇 번의 창업 실패 끝에 빚에 못 이겨 노숙자 신세, 가족들과는 모두 헤어지고,


간경화에 간암 말기.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실패한, 너무 평범해 슬픈 이야기다.

왜 이 세상은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못할까?

“저… 선생님, 저는 오래 살지 못하겠지요?”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기적적으로 호전을 보였지만, 일시적인 호전일 뿐이다.

곧 다시 나빠질게 뻔했다. 그건 의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힘없이 웃었다.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오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미 직감하고 있던 탓일까? 남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사실 아들내미가 하나 있는데… 죽기 전에 한 번만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연락이 되는 상태입니까?”

“지난번에 한 번…….”

“온다고 했습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현은 상황을 짐작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진한 게 피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돈이 없으면 혈육의 정이 유지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진현은 답했다.

“네,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

하루, 이틀…….

남자는 계속 호전을 보였다.

응급실의 다른 사람들은 이러다 괴물 인턴 김진현이 기적이 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고 쳐다봤다.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일시적인 호전일 뿐이야.’

회광반조(回光返照)란 말이 있다.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는 것을 뜻하는 말로, 실제 의료 현장에서도 그런 일이 나타난다.

지금 남자의 상태는 그 회광반조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늦은 새벽에 다른 환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김진현 선생님!!”

응급실 간호사가 급한 얼굴로 진현을 불렀다.

“김성민 환자가 피를 토했어요!!!”

“……!”

진현은 김성민 환자의 자리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랐다.

침대는 물론 주변이 완전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꺼억, 꺼억…….”

연신 피를 토하는 남자는 눈알이 하얗게 뒤집어져 있었다.

“혈압은 어떻습니까?”

“50/30 이에요.”

정상이 120 정도니 끔찍하게 떨어진 거다.

진현은 재빨리 오더(Order)했다.

“빨리 수액 투입해 주십시오. 혈액도 올려주시고요. 간암, 간경화에 동반된 정맥류 출혈 가능성이 높으니
SB(Sengstaken-Blakemore) 튜브와 혈관 수축제도 주세요.”

중환자를 많이 경험한 레지던트의 입에서나 나올 빈틈없는 오더에 간호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현도 자신의 오더가 인턴이 내릴 수준의 것이 아님을 알지만 따질 때가 아니다.

혈압이 더 떨어지면 죽는다.

간호사가 처치하는 사이, 진현은 두꺼운 SB(Sengstaken-Blakemore) 튜브를 환자의 코를 통해 식도까지


밀어 넣어 지혈을 시도했다.

“수혈 빨리 해주세요.”

“네, 선생님!!”
그렇게 새벽 내내 매달린 덕분에 해가 뜰 때쯤 환자는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아니, 안정은 아니다.

혈압은 잡혔지만 의식은 코마였다. 그래도 다행히 피는 멈춘 듯했다.

‘내시경을 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어렵군.’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때 반갑지 않은 전화가 왔다.

요즘 하루에 몇 차례씩 통화하는 원무과였다.

-김진현 선생님, 저 원무과장입니다. 지금 원무과로 오실 수 있으십니까?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원무과장이 직접 전화한 적은 처음이다.

피 묻은 장갑을 벗고, 원무과로 향했다.

대머리 원무과장은 진현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앉으세요. 노숙자 환자 때문에 불렀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병원 손해가 얼마인지 아세요? 더구나 이번 새벽에는 SB-튜브와 혈관
수축제에 수혈까지 하다니. 그게 전부 얼마인지 아십니까?”

원무과장은 으름장을 넣으며 협박했다.

“이제 더 이상은 용납 못합니다.”

“…….”

진현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병원에 손해 끼치지 않겠습니다.”

원무과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 생각했습니다. 빨리 퇴원 수속을…….”

그때 진현이 탁자에 거칠게 무언가를 올렸다.

신용카드였다.

원무과장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얼마입니까?”

“네?”

“지금까지 얼마 나왔냐고요. 이걸로 계산하십시오.”

“……!”

원무과장은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건… 안 됩니다.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금액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현은 딱 잘라 말했다.

“제 돈입니다. 제 마음대로 쓰겠습니다.”

그가 회귀 후 열심히 일하고, 투자한 돈은 나날이 불어나 이제 20 억에 가깝다.

상부(上府)의 비(婢)란 여인 덕에 회귀하여 거저나 다름없이 번 돈이니 조금쯤 이렇게 써도 상관없었다.

“모자라면 말씀하십시오.”

원무과장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

원무과에서 나오는데, 이번엔 치프 오형석이 그를 불렀다.

“김진현, 잠깐 좀 이야기하자.”

“……?”

진현은 피로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것인지 모르겠다.

오형석은 그를 허름한 의국으로 끌고 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형석은 무거운 얼굴로 진현을 바라봤다.

“그만해라.”

“네?”

“저 환자 치료 그만하라고.”

“……!”

단순한 시비가 아니었다.


오형석은 걱정을 담아 말했다.

“어차피 나빠질 수밖에 없는 환자야. 이렇게 병원에서 끌다가 사망하면 너한테 좋을 것 하나도 없어. 자의퇴원서
서약 받고 퇴원시켜.”

“하지만…….”

“환자가 말한 그 아들 때문에 그러는 거냐?”

치프인 오형석도 대충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너도 알 만큼 알 테니 물어보는 건데, 너는 정말로 그 아들이 올 거라 생각하는 거냐?”

“…….”

“올 거면 벌써 왔겠지. 아들은 안 와.”

그 말이 맞았다.

아들은 안 올 것이다. 아마도.

“이번 일을 응급의학과 교수님들은 물론이고, 위에서도 안 좋게 보는 사람이 많아. 책잡히기 전에 빨리 퇴원시켜.


자의퇴원서 받고 퇴원시키면 그 뒤 일은 내가 책임져주겠다.”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빨리 결정해.”

진현은 차분히 말했다.

“…길거리에서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

진현은 오형석의 눈을 바라봤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의사가 되셨습니까?”

“……!”

오형석의 눈이 흔들렸다. 의사가 된 이유라….

그는 환자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 의사를 했었다.

의대에 들어온 후, 삶에 치여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진현은 말을 이었다.

“저는 어쩌다 수능 대박이 나 점수에 맞춰서 의대에 왔습니다. 처음 의사가 되려고 한 이유도 단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였죠.”

진현은 이전 삶을 떠올렸다.

그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됐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삶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전 돈을 벌기 위해 의사질을 합니다. 의사질을 해서 그냥 적당히 버는 정도가 아닌 떼돈을 벌고


싶습니다.”

“…….”

진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아무리 돈을 벌기 위해 의사질을 한다 해도… 의사는 의사(醫師)아닙니까? 전 최소 제가


보는 환자에게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

오형석의 눈이 요동을 쳤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제넘게 말한 것도 사과합니다.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진현은 의국을 나갔다.

남은 오형석의 가슴에 진현이 남긴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 57

57. 의사(醫師). 그 이유 (5)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노숙자, 김성민 환자는 의식을 회복 못하고 간기능 악화로 사망했다.

주치의인 진현 외에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쓸쓸한 죽음이었다.

“5 월 10 일 15 시 30 분, 김성민 환자분 사망하셨습니다.”

진현의 사망 선언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지, 진현아… 괜찮아?”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혜미가 눈물을 글썽였다.

진현은 살짝 웃었다.

“괜찮다.”
“정말?”

“정말로.”

진현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혜미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너도 나중에 익숙해질 거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보면 하룻밤 사이에 4 명의 환자가 죽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죽음은 익숙했다.

중요한 것은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눈앞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

노숙자, 김성민 환자의 사망은 곧바로 이사장실로 보고됐다.

이사장 이종근은 부드럽게 웃었다.

“잘됐군요. 여러 행정적 문제가 겹친 노숙자의 사망이니 더욱 좋아요.”

민 비서는 대답했다.

“네.”

“이 노숙자는 다른 의사의 개입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김진현 선생님만 본 것이죠?”

“네, 그렇게 손을 썼습니다.”

이종근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죽 의자의 몸을 기댔다.

“아주 좋아요. 응급실에서 인턴이 진료 중 사망한 ‘사고’ 케이스니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네요. 조사 팀을
꾸려보세요.”

그는 ‘사고’에 악센트를 넣었다.

민 비서는 살포시 웃었다.

“네, 지금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이런 류의 환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뒤지면 먼지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어떤 조치를 해도 나빠지는 말기 환자기 때문이다.

이전의 저명한 외과의사였던, 대일병원 외과의 과장, 병원장자리까지 역임했던 이종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귀찮은 파리를 쫓을 수 있겠군.’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

“수고해주세요.”

***

민 비서는 신속히 조사팀을 꾸렸다.

해당 분야의 전문 교수들이 조사위원을 맡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흔한 일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인턴이 혼자 진료하다가 응급실에서 환자가 사망한 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인턴이 혼자 진료하도록 놔둔 응급의학과의 책임 아니야? 치프가 누구야?”

조사위원을 맡은 교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같이 옳은 지적이었으나 민 비서는 차갑게 말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따로 참작을 할 것입니다. 교수님들께서는 김진현 인턴 선생님이 진료 중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검토해 주십시오.”

의문점이 많았으나 민 비서의 싸늘한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고작 비서이지만, 그녀는 이사장 직속 기관인 창조기획실의 실장이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나선다는 것은 이 일에 이사장의 모종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인턴이 무슨 일로 이사장님께 찍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야 시키는 대로 따라야지.’

아무리 교수라도 이사장이자, 대일 그룹의 삼남(三男)인 이종근의 눈 밖에 나면 병원 생활은 끝이었다.

“꼼꼼히 검토해주세요.”

“알겠소, 민 실장.”

교수들은 그녀를 창조기획실의 직책인 민 실장으로 높여 불렀다.

어두운 회의실에서 그들은 김진현의 처치를 샅샅이 복기했다.

“흐음…….”

“처음에 피검사와 초음파로 진단했군.”

“간성혼수에 관장…….”

민 비서가 물었다.
“어떤가요?”

그녀는 유능한 인재지만, 의학지식은 없다.

차트를 봐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한 교수가 말했다.

“대단하군요.”

“네?”

“완벽한 처치예요.”

“……!”

다른 교수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처음에 CT 가 아닌, 초음파를 봤지?”

“콩팥 수치가 높아서 그런 것 아니겠소? 그리고 항암 치료를 할 것도 아니고, 말기암 노숙자한테 CT 를 그때


찍어도 돈만 들지 딱히 얻을 정보도 없고…….”

“하긴 그냥 다른 환자였으면 CT 가 답이지만, 저 경우 초음파도 훌륭한 선택이군.”

이번엔 젊은 교수가 물었다.

“응고 수치가 높아 지혈이 안 될 텐데 관장은 위험한 치료 아니었을까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인턴 선생님이 차트에 직접 기록했군. 다른 방법이 없고, 출혈에 주의해 최대한 조심히
시행했다고. 실제로도 의식이 깬 다음엔 곧바로 먹는 약으로 바꿨고. 허허, 이거 인턴 맞아? 무슨 인턴이 이렇게
노련해?”

그 뒤 여러 고비의 처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시경을 안 한 게 아쉽군요.”

“그렇긴 하지만 피가 났을 때는 혈압이 너무 낮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그 뒤에는 SB 튜브로 지혈이 된


상태고. 돈도 없는 노숙자인데 나라도 안 했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인턴 도대체 누구지? 김진현?”

누군가 말했다.

“아, 들은 적 있습니다. 한국대 수석 졸업자라고 하더군요.”

“아, 나도 최대원 교수한테 들은 적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 후배잖아?”

대일병원 교수의 90%는 국내 최고 명문 한국대 의대 출신이다.

비공식 청문회장이 감탄의 장으로 바뀌었다.


“요즘 애들은 다들 이렇게 잘하나? 나도 한국대 수석 졸업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에이, 형님보다 훨씬 낫죠. 그런데 형님 수석 졸업이셨습니까?”

“에헴, 이 사람아. 나 이래 봬도 수석 졸업이야.”

“그런데 저 인턴 우리 내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간이식의 주니어 교수, 유영수 교수가 말했다.

“아닙니다, 외과 할 것입니다.”

“뭐? 아니야, 내과야.”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민 비서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들 지금 뭐하시는 거죠?”

“…….”

“쓸데없는 잡담은 삼가고 문제를 찾아주세요.”

잠시 후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외과 간암 파트, 윤석호로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한 교수여서 병원 고위 행정층과 마찰을 빚은 적이 많다.

“없소.”

“네?”

“문제없다고.”

민 비서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무슨……?”

“이보시오, 민 실장!”

“……!”

윤석호가 낮게 말했다.

“우린 이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자들이오. 이사장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없다고 판단하면
없는 거요. 알겠소?”

“……!!”

“검토 끝난 것 같으니 다들 일어납시다.”

그 말에 교수들이 하나, 둘 민 비서의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이만 가보겠소. 미안합니다. 그래도 문제가 없는데,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다들 각 분야에서 명망 높은 대가들.

이사장의 눈치를 안 볼 순 없지만 그렇다고 개처럼 생각 없이 핥진 않는다.

선배 의사로서 까마득한 후배 인턴에게 칭찬은 못할망정 없는 죄를 만들어 덮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은 민 비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못을 만들어야 해.’

최근 이사장 이종근의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몸까지 섞은 사이지만, 그녀는 이종근이 무서웠다.

민 비서는 응급의학과 치프 오형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창조기획실 실장 민소영입니다.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내키지 않은 대답이 전화기로 들렸다.

그녀는 붉게 립스틱을 칠한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을 거야. 의학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면… 다른 쪽으로 덮어씌우면 돼.’

그리고 그건 김진현의 책임자였던 치프 오형석이 적당히 말을 맞춰준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김진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뭡니까?”

오형석이 삐딱한 태도로 답했다.

민 비서는 당황했다.

‘뭐지? 지난번만 해도 이런 태도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김진현 선생님이 노숙자 환자를 볼 때 잘못한 점은 없었는지…….”

“정확히 무슨 잘못을 말하는 겁니까?”

호의적이지 못한 말투에 민 비서는 떠듬떠듬 말했다.

“그러니까… 태도가 안 좋았다든지…….”

“태도가?”
“아니면 중환자를 보는데 신경을 덜 썼다든지… 노숙인이라서 무시를 했다든지…….”

오형석은 짧게 답했다.

“없습니다.”

“네?”

“다시 한번 말하지요. 김진현 선생의 진료의 문제점을 알고 싶은가 본데, 없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인 제가
부끄러울 정도의, 오로지 환자를 위한 진료였습니다.”

“……!!”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오형석은 냉정히 등을 돌렸다.

민 비서는 눈꼬리를 올리며 외쳤다.

“이이!! 저는 이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온 거예요. 이런 식으로 대답하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외침에 오형석은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어차피 전 이번 년도만 지나면 레지던트 끝나고 군대 가는데…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

“뭐, 군대 제대 후 대일병원에 발을 비벼볼까도 생각했는데… 됐습니다. 더러워서 그냥 다른 병원 취직하죠.


안녕히 잘 지내시길.”

홀로 남은 민 비서는 분노에 주먹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비서실로 돌아온 그녀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안 돼. 절대로. 이런 식으로 끝나면.’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죄를 덮어씌워야 해. 노숙자, 간암으로 사망 환자. 무엇으로 트집을 잡을 수 있을까?’

칠흑 같이 검은 머리가 흘러내려 눈동자를 가렸다.

그 어두운 시야 사이로 그녀는 고민했다.

‘그래, 의학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보호자도 없고, 가망이 없는 말기 암 환자한테 지나친 처치를 한 것 아닐까?
그것에 중점을 맞춰 문제를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없는 죄를 머리에서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의아한 물음을 뱉었다.

“이게 뭐지?”

그녀의 모니터는 한 포털사이트의 메인 페이지를 띄우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상한 문구가 떠 있었다.

[대일병원의 따뜻한 의사, 노숙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달래다.]

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뉴스였다.

이게 뭐지?

대일병원의 따뜻한 의사?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며 다음과 같은 기사가 떠올랐다.

[간암 말기의 노숙자 환자를 마음으로 치료한 의사가 있어서 세간에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의 내용을 살피니 노숙자 환자가 화장을 치르기 직전 품에 간직하고 있던 유서 겸 편지가 발견되었고, 그
편지에는 돈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자신을 마음을 다해 치료해 준 젊은 의사에 대한 감사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한다.

기사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았다.

[대일병원의 김진현 의사는 고인을 마음을 다해 치료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고인을 위해 모든
치료비를 자비로 부담하였다.

하지만 김진현 의사는 자신은 특별히 한 게 없다며,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해 더욱 감동을 주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태도로, 각박한 요즘 세상을 따뜻하게 달구는
일화이다.]

그녀는 헛웃음을 뱉었다.

이젠 수습불가였다.

더 최악인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란 점이다.

이사장의 높은 뜻은 짐작도 못하는 할 일 없는 홍보팀이 또 사고를 쳤다.

병원 대문, 그것도 팝업 창까지 띄워 진현의 일을 홍보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대일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물론이고, 방문하는 모든 환자까지 진현의 일을 알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58

58. 험난한(?) 피부과 (1)

그리고 여기 인터넷 기사를 보며 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안 돼!!!”

김진현이었다.

조금 전, 인턴 숙소에서 시체처럼 자던 그를 황문진이 깨웠다.

“진현아, 이것 봐봐!! 대박이야!”

“뭔데? 나 요즘 환자 때문에 며칠째 계속 못 자서 그냥 잔다…….”

“아니야, 꼭 봐야 해!!”

그리고 바위처럼 무거운 눈을 들고 인터넷을 본 진현은 자신의 시력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그러고 보니 아까 잠결에 인터뷰 어쩌구 하는 전화를 들었던 것 같기도… 귀찮아서 끊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현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젠장, 왜 맨날 이런 일이?’

또 이런 사고를 치다니. 아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아, 몰라. 나 그냥 잔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진현은 침대로 돌아갔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왜 뭘 하나 해도 항상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자자. 피곤해. 이것도 어쩌면 꿈일지도.’

침대에 누운 진현은 횡설수설 생각했다.

꿈일 거다. 아니, 꿈이어야 한다.

그는 그렇게 기원했다.

하지만 그 기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진현은 두 달 사이에 대일병원 홈페이지 대문에 두 번이나 출현하는 인턴이 되었다.

대일병원의 모든 사람에게 김진현이란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

이후 응급실 생활은 평온했다.

가끔 ‘따뜻한 의사 김진현’에게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모두 인터넷 기사 때문이다.

‘나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기사를 쓰다니.’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부모님이 기사를 보고 너무 좋아하셔서 마음을 달랬다.

아들의 멋진 기사에 부모님들은 동네잔치라도 연 듯하다.

‘그래, 이런 기사도 나중에 피부과 개업할 때 액자로 만들어 벽에 붙여두면 광고가 되겠지.’

진현은 애써 좋게 생각했다.

한국대 의대 수석, 대일병원 피부과 출신의 따뜻한 의사 김진현의 피부과!

선전 효과는 확실히 좋겠다.

‘그러려면 피부과에 합격해야지. 더 끌지 말고 이번 주쯤 인사를 드려야겠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날 24 시간 근무를 끝내고 아침부터 잠을 잔 진현은 오후 4 시쯤 일어났다.

‘더 자고 싶다.’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일어나야 했다.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이전 삶의 아내인 이연희와.

‘무슨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군. 빨리 밥만 먹고 들어와야지. 그런데 뭐 먹지? 가로수길…….’

이전 삶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점이 떠올랐다.

이번 삶에서도 좋아하려나?

뭐, 싫어하진 않겠지.

씻고 대충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숙소 근처 휴게실에서 혜미를 만났다.

“아, 진현아!! 준비하고 있어?”


혜미는 활짝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뛰어왔다.

진현은 그녀를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예뻤다.

원래도 예쁜 얼굴이지만, 오늘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덧 어깨까지 자란 부드러운 머리칼이 하늘거렸고 붉은 입술이 고혹적으로 빛났다.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는 원피스는 윗부분이 파여 하얀 살결을 드러냈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주변을 지나가던 남자들이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두근.

진현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너… 어디 가냐?”

“응?”

“소개팅?”

그 말에 환한 그녀의 웃음이 사라졌다.

진현은 갑자기 변한 혜미의 얼굴에 당황했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왜 그러냐?”

혜미는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어버리고 있었어?”

“응?”

“우리 오늘 놀러 가기로 했잖아.”

“……!!”

진현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5 월 27 일.”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
진현은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했다.

‘이런, 약속을 겹쳐 잡았구나.’

이연희와는 5 월 27 일이라 약속하고, 혜미와는 넷째 주 목요일이라 약속한 것이다.

노숙자, 김성민 환자를 진료하며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 녀석 이전부터 나랑 놀러 가는 것을 기대했었는데.’

왜 남자친구도 아닌 자신과 놀러 가는 것을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혜미는 고개를 흔들어 서운함을 떨치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뭐, 바쁘니까 잊어버릴 수도 있지. 준비해. 나가자.”

“…….”

“왜?”

진현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혜미야.”

“응?”

“미안해. 오늘은 안 될 것 같다. 선약이 있어서.”

“……!!”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연희와의 약속이 훨씬 전부터 잡힌 선약이니까.

“아… 그, 그래?”

“응, 미안하다. 다음에 보자.”

“…그래.”

혜미의 커다란 눈에 투명한 물기가 차올랐다.

눈물이었다.

진현은 놀라 말했다.

“혜, 혜미야?”

그녀도 자신의 눈물에 당황해 급히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 아니야. 내가 왜 이러지? 미안. 피곤해서 그런가 봐. 오늘 잘 쉬고 다음에 보자.”

“자, 잠깐!”

하지만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진현은 손을 뻗은 채 굳었다.

“저 녀석 왜 이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그런데 혜미의 뒷모습을 떠올리자 진현은 가슴에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욱씬.

그것은 아릿함이었다.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진현은 알지 못했다.

***

기분이 찝찝한 진현은 약속장소에 빨리 도착했다.

‘너무 빨리 왔나?’

약속시간까지 아직 1 시간이나 남았다.

‘가로수길은 진짜 오랜만이구나.’

회귀 후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 10 년이 넘었다.

‘여전히 사람은 많네.’

압구정의 상권을 밀어내고 강남 최고의 번화가로 떠오른 가로수길은 어마어마한 사람들로 벅적댔다.

원래 호젓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뜬 번화가인데,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데 건물 하나 있으면 좋겠구나.’

건물임대업자, 그의 궁극적 목표였다.

이런 번화가에 건물을 사서 세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돈으론 무리겠지?’

진현은 피식 웃었다.

예과 때부터 악착같이 모아 투자한 그의 재산은 어느덧 20 억에 가깝게 불었다.


원래 15 억을 예상했었는데, TC80 의 성공으로 마인바이오의 주가가 예상보다 더 뛴 탓이다.

TC80 을 진행하며 산 아파트도 점점 오르고 있다.

대일 그룹의 주식도 예상보다 더 올랐다.

아직 3-4 년은 더 오를 거라 감안하면 돈이 어디까지 불지 모르겠다.

’20 억… 진짜 많이 모았구나. 대일 그룹의 주식이 3-4 년 뒤, 피크(Peak)까지 오르면 25 억… 어쩌면 30


억까지도 가능할지도.’

그의 나이가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큰돈이었다.

아니, 나이를 떠나 웬만큼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만지기 어려운 액수였다.

‘부자들에겐 큰돈이 아니란 것이 함정이지.’

일반 사람들은 평생을 가도 못 모으지만 이 액수를 껌 값으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았다.

부익부 빈익빈의 간극이었다.

있는 사람은 더 가지고, 없는 사람은 몸을 누일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다.

‘이런 번화가는 세가 얼마나 할까?’

호기심에 진현은 부동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세를 확인 후 눈이 튀어나오게 놀랐다.

“아니, 저 조그만 곳이 월 1,000 만 원이 넘는단 말입니까?”

“저 정도면 싼 편이야. 건물 가격이 150 억이 넘는데. 더 비싼데도 많아.”

진현은 혀를 찼다.

테이블 몇 개 들어가지도 않을 코딱지만 한 샌드위치 가게인데, 월세가 1,000 만 원이 넘는다고?

이건 뭐, 열심히 일해 집주인에게 갖다 바치는 꼴 아닌가?

‘대한민국 하늘 아래, 건물주와 세입자라는 새로운 계급이 있다더니.’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다.

능력과 노력만으론 아무리 해도 가진 자를 따라갈 수 없다.

그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러니 다들 건물임대업자가 꿈이지. 뭐, 됐어.’

현실이 이런데 어쩌겠는가?


바꿀 능력도 없었고,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나도 된다, 건물주.’

진현은 다시금 꿈을 불태웠다.

그러기 위해선 꼭 피부과에 합격해야 했다.

‘내일 피부과에 인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진현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단아하게 웃고 있는 이연희가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셨어요?”

환한 인사였다.

***

한편 그때, 대일병원 내과 회의실.

여러 내과 의사가 모여 컨퍼런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부드러운 내과의 분위기와 달리 컨퍼런스의 공기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다음 환자의 사망 원인은 패혈증 쇼크 당시 정확한 포커스를 찾지 못한 것으로…….”

그도 그럴 것이 컨퍼런스의 주제가 최근 사망하거나 문제가 되었던 환자들의 리뷰(Review, 검토)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항생제만 쓸 게 아니라 CT 를 찍었어야지. 그러면 농양을 놓치지 않았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해 해서 뭐하나? 환자에게 미안해하게.”

한 교수의 지적에 레지던트가 진땀을 흘렸다.

사망 환자 리뷰, 모탈리티(Mortality) 컨퍼런스는 의과대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전통이다.

이 은밀하고 무거운 컨퍼런스를 통해 의사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되돌아본다.

모형이 아닌 환자에게 행해지는 치료이기에 실수나 잘못된 판단이 없어야겠지만, 의사가 사람인 이상 완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 환자는…….”

몇몇 환자의 증례가 추가로 검토되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가 안 좋았던 경우도 있었고, 피할 수 있는 실수도 있었다.

참석한 교수들은 모든 잘못을 꼼꼼하고 엄격하게 지적했다.

컨퍼런스 명단 중에는 이전 진현이 내과에서 진단했던 근육융해, 김시민 환자의 증례도 있었다.

“근육융해를 진단하기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군. 놓칠 뻔한 환자를 살렸어.”

설명을 들은 교수들은 감탄했었다.

컨퍼런스의 성격상, 주치의가 아닌, 인턴 김진현이 한 일이란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 그러면 마지막 환자입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응급실의 김 O 민 환자입니다.”

컨퍼런스 때는 환자의 본명을 노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김 O 민.

진현이 봤던 노숙자 환자이다.

컨퍼런스 룸에 앉아 있던 교수들은 모두 자세를 고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컨퍼런스 중 가장 요주의 환자였다.

“저 환자는 우리 내과 환자가 아니지 않았나? 그런데 왜 우리 내과 컨퍼런스에서 다루지?”

사정을 모르는 한 교수가 물었다.

위암의 대가, 최대원 교수가 답했다.

“그것 때문입니다.”

“응?”

“저 환자는 알코올성 간경화, 간암 말기의 전형적인 내과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인턴 혼자 진료했죠.


그 사안을 논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원 교수는 눈을 낮게 가라앉혔다.

발표를 맡은 레지던트는 식은땀을 흘렸다.

“환자분은 간성혼수로 처음 응급실에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김진현이 했던 처치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음 없이 교수들은 설명을 경청했다.


“…이상입니다.”

발표가 끝난 후 곧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연락(Notify, 노티)을 받았을 텐데 왜 내과로 데려오지 않았지? 왜 인턴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질 상황을


만들었지?”

“그, 그… 노숙자 환자여서 입원이 불가했고, 어차피 곧 사망하거나 퇴원할 환자였어서…….”

“그래서?”

“…….”

“사망하거나 퇴원을 시켜도 그건 우리 내과에서 해야지. 그걸 왜 인턴한테 맡겨놓고 모든 책임을 떠맡겨?”

최대원 교수는 차갑게 질책했다.

레지던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응급실의 치프 오형석은 이사장실의 압력을 받았지만, 내과는 아니다.

당시 인턴에게 환자를 맡긴 건 분명 그의 잘못이었다.

“잘 들어.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은 윗사람이 지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에게 던져놓는 게 아니라.
저런 문제 소지가 있는 환자는 인턴 혼자 진료하는 게 아닌 우리가 보는 게 맞았어.”

백번 옳은 말이다.

레지던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가만히 상석에서 컨퍼런스를 듣던 노교수가 입을 열었다.

“너무 뭐라고 말게. 우리 내과 아이들도 힘들고 고되지 않나?”

노교수의 말에 최대원 교수는 고개를 숙였다.

“네, 과장님.”

온화한 인상의 노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 인턴은 그냥 인턴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인턴이 어떻게 저렇게 깔끔하게 치료했지? 흠잡을
게 전혀 없어.”

다른 교수들도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저 정도면 전문의가 진료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인터넷에 칭찬 기사도 나지 않았나?”

(다음 편에서 계속)


# 59

59. 험난한(?) 피부과 (2)

어느덧 대일병원의 유명인이 된 괴물인턴 진현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학생 때 지도교수였던 최대원은 마치 팔불출처럼 아들이 칭찬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교수들이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를 더 말했다.

“아까 검토했던 근육융해 환자도 사실 저희가 아니라 그 김진현 인턴 선생이 진단한 거였습니다.”

“허? 그게 사실이오?”

“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보호자를 설득해 피검사를 돌려 진단했지요.”

그 말에 교수들은 다시 감탄을 토했다.

“허, 저 어려운 질환을 인턴이 진단해?”

“난 놓쳤을 것 같은데.”

상석에 앉아 있던 온화한 인상의 노교수가 최대원 교수에게 물었다.

“저 인턴 선생은 천상 내과 감인데. 내과를 한다고 하던가?”

최대원 교수는 일순 고민했다.

진현이 내과를 할 거라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사실 그가 자신에게 내과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래도 말했다.

“네, 김진현 선생은 내과를 할 겁니다.”

“그렇군. 좋아.”

컨퍼런스가 끝나 노교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께 조만간 나에게 인사를 하러 오라고 하게. 이런 뛰어난 인재는 무식한 수술과나 돈만 버는
피부과 같은 과 말고 우리 내과를 해야지.”

온화한 얼굴의 노교수가 말했다.

정영태.

대일병원 전체 내과의 전(前) 과장이자 현(現) 대한내과협회의 회장인 그는 모든 과 중에서 내과가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 대원로(大元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대일병원 다른 곳에서도 진현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외과였다.

간이식 분야의 최고 대가, 강민철 교수가 드디어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

대일병원 심장 중환자실, 간이식 분야 국내 최고의 대가, 강민철 교수가 힘겹게 눈을 떴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마침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니어 교수, 유영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괜찮네.”

강민철은 고개를 저었다.

진현이 마지막에 봤을 때에 비해 그의 얼굴은 반쪽으로 줄어 있었다.

“내가 얼마나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은 거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갑니다. 심장 자체는 금방 좋아지셨는데 의식 회복이 더뎌서… 많이 걱정했었습니다,


교수님.”

“심장? 아… 그때 수술 중에…….”

강민철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었는데….

“심근경색이었나?”

“네, 중간에 심장마비까지 오셨습니다.”

“하, 믿을 수 없군. 그런데 심근경색에 심장마비까지 왔는데 생각보다 몸이 괜찮은 것 같군.”

강민철은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수척하긴 하지만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심근경색에 심장마비면 죽거나 살아도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심장 부전의 증상인 몸이 붓거나 숨이 차지도 않았다.

유영수 교수가 설명했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 덕입니다.”

“김진현?”

강민철이 굉장히 아끼던, 제자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는 인턴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무슨?


“그 인턴 선생이 교수님의 쓰러질 당시의 상황만 보고, 심근경색을 곧바로 추측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굉장히
급했는데 그 인턴 선생 덕분에 빠르게 치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치료에 들어가던 중, 심장마비가 일어났는데
5 분이라도 지체됐으면…….”

유영수 교수는 말끝을 흐렸다.

만약 김진현의 추측이 없어 10 분… 아니, 5 분이라도 처치가 늦어졌으면 강민철 교수는 죽었을 것이다.

살아도 식물인간이 됐거나.

강민철 교수는 신음을 흘렸다.

‘김진현… 그 아이가 내 생명을 구했군. 이 보답을 어떻게 한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했단 아찔한 안도감과 김진현에 대한 감사가 가슴에 차올랐다.

‘꼭… 꼭 외과를 시켜야겠어.’

외골수인 그에게 최고는 무조건 외과였다.

김진현, 그 아이도 수술을 좋아하니 외과를 시키면 좋아할 것이다.

환자와 수술만 생각하는 강민철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그런데… 내가 수술하던 환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누가 강민철 아니랄까 봐, 그는 환자의 안위를 물었다.

유영수는 명쾌히 답했다.

“아, 특별한 문제없이 수술 잘 마쳤고 벌써 퇴원했습니다.”

“그래, 고맙네. 혈관까지 다 이어야 했을 텐데 자네가 고생했군.”

그런데 유영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혈관은…….

“혈관 문합(Vascular anastomosis)은 교수님께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혈관 문합을 해? 쓰러졌는데.”

“…혈관 문합을 마치고 쓰러지셨던 것 아닙니까?”

“아니야, 혈관 문합하기 전에 쓰러졌어.”

“하, 하지만… 제가 갔었을 때는 이미 혈관 연결이 끝난 상태였는데…….”

“…….”

둘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진현은 자신을 향해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가로수길을 걸었다.

“식사 뭐할까요? 김진현 선생님은 뭐 좋아하세요?”

좁은 길에 사람이 많아서일까, 연희는 바짝 진현에게 붙어 걸었다.

하얀 팔이 스치며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 이렇게 많이 걸었는데.’

그녀가 워낙 좋아하는 거리라 여러 번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나름 부부라 팔짱을 끼고 걸었었는데…….

진현은 생각을 떨치며 주변을 살폈다.

‘이쯤인데.’

그는 사실 소고기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고기를 별로 안 좋아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가게가…….

‘아, 저기 있군.’

“저기 어떻습니까?”

진현은 카페 형식의 샌드위치 가게를 가리켰다.

연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저 여기 엄청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모를 수가 있나.

그래도 명색이 부부였는데.

진현은 머리를 긁적인 후 말했다.

“들어갑시다.”

***

새로 거처를 마련한 삼성동의 오피스텔에서 혜미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보.”

나직한 중얼거림.

“바보. 김진현, 정말 바보.”

아니, 아니다.

바보는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바보같이.”

혜미는 연신 눈물을 닦았다.

그녀도 왜 자신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그냥 다음에 놀면 되잖아.”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인데… 왜 이렇게 서운한 걸까?

그와 단둘만의 데이트를 몇 달 전부터 기대했었다.

바보같이 오늘만 기다리며 행복해했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 가장 예쁜 옷을 입었다.

그래서 서운한 걸까?

이런 내 마음은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취소해서 서운한 걸까?

사실 친구 간의 약속 따위 취소할 수도, 펑크낼 수도 있는 건데.

정말 바보같이 서운하다.

“정신 차려, 이혜미. 진현이는 날 좋아하지 않아.”

혜미는 쓸쓸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다.

난 그를 사랑하고, 그는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난 이런 사소한 약속을 바보같이 기대하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취소할 수 있는 거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서운해서도 안 된다.

그를 사랑한 건 나니까.

“괜찮아, 혜미야.”

혜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정말 괜찮아. 나한텐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그러고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즐비하게 널어선 테헤란로의 건물들이 삭막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

‘혹시 진현이?’

그녀는 또 바보같이 기대했다가 실망했다.

정말 난 구제불능의 바보다.

“여보세요? 수연아?”

전화벨의 주인은 인턴 친구인 김수연이었다.

서울 소재 여대를 졸업한 그녀는 어느새 혜미의 단짝이 되었다.

-혜미야, 지금 뭐해?

“특별히… 그냥 있어.”

-나 지금 가로수길인데 나올래?

“가로수길?”

-응! 할일 없으면 술이나 먹자. 여기 다른 친구들도 있어.

혜미는 고민했다. 내키지는 않은데…….

“글쎄…….”

-왜? 할일 있어? 이 언니가 사줄게. 빨리 나와!

강한 독촉에 혜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있어도 우울하기만 할 것 같긴 하다.

“응, 알았어. 금방 갈게.”

***

샌드위치 집에 들어간 진현과 연희는 샌드위치를 시켰다.

“여기 어떻게 아세요?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인데…….”

“그냥…….”
진현은 말끝을 흐리며 생각했다.

‘아, 여전히 맛없구나. 이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폭신폭신한 치아바타 안에 바비큐 소스에 적셔진 버섯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전 삶에서 그녀와 왔을 때도 항상 생각한 것이지만 이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또 가격은 빵 쪼가리, 풀, 버섯 주제에 12,000 원이 넘는다.

왜 이리 비싸?

‘하긴 월세가 1,000 만 원이 넘으니 비싸긴 해야겠군.’

진현은 실없이 생각했다.

그래도 그의 박한 평과 다르게 가게는 벅적벅적했다.

여성 손님들과 그녀들을 꼬시기 위한 남성 손님들로.

연희도 만족해하는 듯했다.

다만 진현이 깨작거리기만 하자 걱정스레 물었다.

“입맛에 안 맞나 봐요? 별로 맛없으세요?”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안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왜 여기 오자고 하셨어요?”

“그냥 좋아할 것 같아서…….”

별 생각 없이 말하던 진현은 아차 했다.

다행히 그녀는 진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다른 쪽으로 이해했다.

“아, 저 생각해 준 거구나. 고마워요. 그래도 저 아무거나 다 잘 먹는데. 다음엔 우리 선생님 좋아하는 걸로
먹으러 가요.”

“괜찮습니다. 지금도 먹을 만합니다.”

진현은 빵을 들어 우적우적 뜯어먹었다.

그 모습이 웃긴지, 귀여운지 연희는 입을 가리며 말없이 웃었다.

진현은 등을 의자에 기댔다. 딱딱한 원목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전이랑 똑같구나.’
빵의 맛도, 음식점의 분위기도… 그리고 그를 보며 웃는 그녀의 모습도… 모두 똑같았다.

“응급실은 힘들진 않으세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집은 어디세요?”

그 뒤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일상적인 대화들.

불편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어색함은 없었다.

아니,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와의 대화는 편했다.

특별한 주제가 없음에도 물처럼 흘렀고, 익숙한 동반자와의 소통처럼 편안했다.

흡사 이전의 삶으로 돌아왔다고 착각이 들 정도여서 진현은 살짝 당황했다.

그녀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빨대로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입술이 탄산수에 젖어 반짝였다.

“저… 저희 혹시 이전에 만난 적은 없죠?”

“네, 없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보는 것입니다.”

굳이 시간 관계를 따지면 미래이니 이전에 만난 적은 없다.

“그러게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까요? 마치 이전에 오랫동안 함께했던 것처럼…….”

“……!”

진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착각입니다.”

그녀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렇겠죠? 그런데 이상하다? 이전에 분명 만난 적이 있는데… 음… 어디지…….”

그러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고민하다 손뼉을 쳤다.

“아! 떠올랐다. 우리 만난 적 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 60

60. 험난한(?) 피부과 (3)


“네? 언제……?”

“남산이요!”

“……!!”

진현은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있었다.

그녀와 만난 적이.

거의 4 년 전, 남산타워에 갔을 때,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그녀와 마주쳤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이고 정말 잠깐 스친 것에 불과한데 기억하다니?

“그때 선생님 맞죠?”

“아… 네.”

연희는 반가운지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지우며 얼굴을 불쑥 진현에게 가져갔다.

조각을 한 듯, 단아한 하얀 얼굴이 가까워지자 진현은 살짝 가슴을 두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때 왜 그러셨어요?”

“네?”

“왜 그렇게 넋 놓고 저를 바라보셨어요?”

“…….”

진현의 얼굴이 민망함에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랬었지.

연희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워낙 열렬히 저를 바라보기에,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줄 알고 두근거렸는데…….”

“그, 그건…….”

그는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뭐라 할 말이 없다.

항상 딱딱한 진현답지 않은 모습에 연희는 풋 미소 지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너무 당황하니 제가 미안하잖아요.”


“…….”

“하여튼 4 년 만에 뜻하지 않게 재회해 반가워요. 그런데 남산에서 정말 반했던 것은 아니죠? 저 그때 나름


두근거렸었거든요.”

계속 장난이다.

진현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니었습니다.”

“아쉽네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곤란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지난번 병동에서 도와준 일로 고마워서 저녁을 대접하려 한 건데, 진현 씨가 워낙 맛없게 먹어서 이걸로는 제
마음이 안 차는데요?”

“아… 괜찮습니다.”

진현은 손을 저었으나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진현의 손을 잡으며 끌었다.

“따라오세요. 제가 2 차 사드릴 테니. 우리 오랜만에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가볍게 술이나 한잔해요.”

***

“혜미야, 이쪽이야!”

가로수길 구석에 위치한 퓨전 주점에 들어오니 누군가 혜미를 불렀다.

인턴 친구 김수연이었다.

그 외에 진현의 친구인 황문진과 다른 남자 인턴 동기도 있었다.

인턴 동기들끼리 조촐히 회식자리를 마련한 모양이다.

“이리 와서 앉아. 밥 먹었어? 여기 음식들 맛있는데, 뭐 먹을래?”

“소주.”

“응?”

“밥은 됐고 그냥 소주.”

“어, 어…….”
이슬밖에 안 먹을 것같이 청초한 얼굴로 소주를 달라는 말에 김수연은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미는 주점을 둘러보았다. 기분이 우울했다.

‘분위기는 좋네.’

목조로 인테리어한 술집이었는데 은은하고 세련됐다.

각 테이블마다 담장처럼 두른 나무가 은밀한 공간을 허락했다.

연인들이 좋아할 분위기고, 실제로 손님들 중 남녀 커플이 꽤 많았다.

‘진현이랑 이런 곳에 오고 싶었는데.’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사귀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고작 약속하나 거절당한 것 가지고 그만 청승 떨자.

“아, 안녕, 혜미야.”

황문진이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응, 안녕. 잘 지내니?”

“으, 응. 너는?”

“나는 그냥그냥. 우리 술 먹자.”

“어, 어.”

가득 소주를 따른 혜미는 한번에 잔을 들이켰다.

가녀린 공주 같은 외모로 소주를 마시는 모습에 인턴 동기들은 당황했다.

그녀의 친구, 김수연이 물었다.

“혜미야, 너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없어. 왜?”

“그냥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아니, 특별한 일은 없어. 우리 술이나 먹자.”

특별한 일은 없다.

그냥 그녀가 바보 같은 것일 뿐이지.

그렇게 그들은 술을 마셨다.


인턴 생활을 하며 고생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주점엔 사람이 가득 찼고, 분위기도 시끌벅적해졌다.

황문진 옆에 앉아 있는 남자 동기가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얘 이름이 뭐였더라?

“혜미야, 이렇게 봐서 반갑다. 응급실 힘들지?”

“아니, 많이 익숙해졌어. 이제 환자 보는 것도 할 만하고.”

“다음엔 뭐야? 내가 뭐 도와줄까? 힘든 것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이름 모를 남자 동기가 가슴을 치며 이야기했다.

그도 그렇고, 황문진도 그렇고, 예쁘게 생긴 혜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인 눈치였다.

이전부터 그랬다.

벌이 꽃에 꼬이듯, 그녀에게는 항상 많은 남자가 접근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녀에게 관심도 없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쉴 때, 황문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김진현이네?”

놀라 황문진의 시선을 따라간 그녀는 얼음처럼 굳었다.

“……!!”

김진현, 그였다.

그가 단아한 인상의 미인과 함께 주점에 들어왔다.

***

“여기 어때요? 분위기 괜찮지 않아요? 음식도 맛있어요.”

“네, 괜찮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의 취향은 길거리 포장마차였지만 이곳도 나쁘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몇 번 왔던 곳이어서 아릿한 향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이연희와 함께였었다.

‘나쁘진 않군.’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방문한 추억의 장소는 그의 마음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아, 저기 창가 자리 비어 있네? 우리 저기 가서 앉아요.”

그녀는 조금 신난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나며 진현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더 신경 써줬으면, 그때 이혼할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전에도 그녀는 그와의 외출을 즐겼었다. 아니, 그와 같이 있는 것 자체를 행복해했었다.

그런 그녀를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한 건 바로 그였다.

‘외과를 하면서 바쁘긴 정말 바빴지.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돌아가려고만 하면 응급 수술이 터지고.’

아니, 아니다. 그건 전부 핑계다.

그냥 그가 그녀를 신경 못 써줬을 뿐이다.

진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왜 자신이 연희를 만나기 싫었는지, 왜 피하고 싶었는지.

이 감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미안함과 씁쓸함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뭐 먹을래요? 아까 제대로 못 드셨으니 맛있는 것 시켜요. 제가 살게요.”

진현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시켰다.

“치즈 베이컨 감자전에 필스너(Pilsner) 생맥주.”

연희의 눈이 커졌다.

“어머? 저 이거 제일 좋아하는 조합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좋아합니다.”

진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 하루 정도… 그래, 오늘 딱 하루.

이전 삶의 미안함을 풀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한편 그 모습을 저 멀리 다른 테이블에서 지켜보고 있던 혜미의 가슴이 떨렸다.

“진현이를 또 여기서 보네. 가서 인사라도 해야겠다. 진… 읍!”

진현과 가장 친한 친구인 황문진이 큰 소리로 그를 부르려는 순간, 혜미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황문진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 그냥 아는 척하지 말자. 뭔가 중요한 만남 같은데.”

그녀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문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모를 남자 동기가 의문을 표했다.

그도 병원 제일 유명 인턴인 김진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진현, 쟤가 여기는 웬일이지? 저 여자는 누구고? 소개팅하나?”

황문진이 말을 받았다.

“아, 나 저 여자 누군지 알아.”

“누구?”

“외과 병동의 간호사야. 수술과에서 되게 유명한 간호사야.”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얼핏 본 적 있는 것 같다. 작년에 병원에서 이벤트로 개최한 미스 대일 선발대회 우승자


아니었나? 우리 병원에서 제일 예쁜 간호사 중 하나잖아. 그치? 예쁘긴 진짜 예쁘네.”

그 말이 혜미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가 보기에도 진현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아름다웠다.

신이 직접 다듬은 조각이 저럴까?

혜미가 꽃처럼 청초하고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이면, 저 여자는 그녀에게 없는 차분한 단아함이 있었다.

종류가 다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황문진이 말했다.

“그런데 왜 진현이랑 같이 있는 거지?”

남자 동기가 답했다.

“뻔하지, 뭐. 남자 의사랑 간호사랑 밖에서 따로 만날 일이 뭐가 있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김진현 그렇게 안 봤는데 능력 있네. 그것도 병원 제일의 미녀 간호사랑.”

친구, 김수연이 혜미의 눈치를 보며 주의를 줬다.

“얘, 무슨 말이 그래. 그냥 친구로 만날 수도 있지. 남녀가 꼭 마음이 있어야 만나나.”

진현에게 마음이 있는 혜미를 생각한 말이었다.

하지만 혜미는 바보가 아니었다.

한창 나이의 남자 의사와 여자 간호사가 사심 없이 밖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꼬리를 치듯, 눈웃음치는 여자는 둘째치고 진현의 얼굴.

‘진현…….’

혜미는 진현의 저런 표정은 처음 봤다.

항상 무뚝뚝하던 그가 저런 편안한 얼굴과 미소라니.

저릿.

다른 여자를 향한 진현의 미소를 본 순간, 그녀의 가슴이 찢어졌다.

“혜미야?”

김수연이 혜미를 걱정스레 불렀다.

혜미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아니야. 우리 그냥 술이나 먹자. 괜히 방해하지 말고.”

다행히 거리가 멀고 손님이 많아 진현 자리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테이블의 소란 때문에 소리도 안
들렸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 진현이의 얼굴을 마주하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으니까.

‘됐어. 어차피 나같이 나쁜 여자한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가슴이 아팠다.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니까.

***

최근에 응급실 근무로 피로했던 탓일까?

아니면 진현이 다른 여자와 있는 것을 본 탓일까?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혜미는 평소보다 취기가 일찍 올라왔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아, 같이 갈까?”

김수연이 물었다.

“아니, 금방 갔다 올게. 우리 이제 슬슬 일어나자.”


“그래, 딴 데 가자. 2 차 갈까?”

아직 시간이 일렀다.

9 시 30 분? 숙소로 들어가기 아쉬운 시간이었다.

혜미는 살짝 웃었다.

“그래, 나가서 다른 데로 가자.”

이곳만 아니면 상관없으니까.

혜미는 깔끔하게 단장된 화장실로 가서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정신 차려, 이혜미. 뭘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어차피 진현이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그러니 그가
다른 여자와 사귀든 무얼 하든 상관없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에 진현을 만나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야지.

웃는 건 제일 잘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화장실을 나왔다.

하지만 왜 항상 이런 일은 꼬이는 걸까?

화장실의 문을 연 순간, 그녀는 지금 가장 만나기 싫은 남자와 마주했다.

“……!”

진현이었다.

그도 뜻밖에 자신을 만나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혜미야? 여긴 어떻게?”

혜미는 연습한 대로 웃었다. 괜찮다.

“안녕, 그냥 술 마시러…….”

그런데 자연스럽지 않았나 보다.

진현이 당황해 자신을 불렀다.

“혜, 혜미야?”

그녀도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깨달았다.


뚝. 뚝.

바보같이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던 것이다.

“아…….”

“혜미야? 왜 그래?”

“아, 아니야. 미안.”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눈물이 더욱 흘러나왔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혜미야… 무슨 일이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진현은 영문도 모르고 놀라 혜미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탁!

하지만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팔을 뿌리쳤다.

평소답지 않은 그 모습에 진현도 놀라고, 혜미 자신도 놀랐다.

“아, 아… 미, 미안. 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 그만 가볼게. 좋은 시간 보내.”

그리고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사라졌다.

“혜미야!”

진현은 그녀를 불렀으나 혜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예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혜미야!”

(다음 편에서 계속)

# 61

61. 험난한(?) 피부과 (4)

그는 건물 밖으로 따라 나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급히 주변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로 진현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왜 그러는 거지? 무슨 일이 있나?”

항상 밝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다니.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현은 자리로 돌아왔다.

연희가 술기운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하는 순간이었다.

욱신!

진현의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왜 이러지?’

혜미의 눈물이 떠오르며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뒤로도 연희와 술을 몇 잔 더 마셨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

[어제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봬요, 쫑쫑!]

다음 날 응급실에 출근해 일을 하는데 이연희가 쪽지를 보냈다.

답장을 보내려는데 진현은 혜미와 마주쳤다.

“아, 진현아. 안녕.”

혜미가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그 미소를 보자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욱신 가슴이 아팠다.

‘왜 이러지?’

혜미가 사과했다.

“어제 놀랬지? 미안.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술에 취해 눈물이 났나 봐. 놀라게 해서 미안해.”

“…아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라.”

“응, 고마워. 힘낼게. 오늘 하루도 파이팅.”

그러고 그녀는 진료대에 대기하고 있는 환자를 보러 갔다.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인데… 이상하게 자신과 그녀 사이에 벽이 놓인 느낌이다.

‘그냥 느낌이겠지?’
하지만 진현은 깊은 생각은 못했다. 조금 후 중요한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 긴장하지 말자.’

그는 평소답지 않게 긴장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정이니까.

피부과 인사.

오늘은 피부과 과장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

약속된 시간에 가니 먼저 피부과 치프 이승태가 진현을 맞았다.

“네가 김진현이구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네, 선배님.”

잘빠진 인상의 미남, 피부과 치프 이승태는 한국대 의대 선배였다.

“네가 한국대 수석졸업이라고?”

“네.”

“왜 한국대 병원에서 피부과 안 하고?”

“그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국내 최고라는 대일병원에서 피부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굳이 학창 시절, 돼지 김강민과 연관된 이전 일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치프 이승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한국대 병원에서 피부과를 못해서 여기 대일병원으로 왔지. 하여튼 반갑다. 병원 내 평판도 좋고,
한국대 수석이니 너 정도면 피부과에 합격하는 데 큰 문제 없을 거야.”

그는 진현 같은 인재가 피부과를 하기에 아깝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당장 이승태만 해도 한국대 4 등 졸업이었다.

당시 같이 졸업한 동기들 중 1, 2 등이 모두 한국대 병원 피부과에 지원해 대일병원으로 온 것이다.

의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피부과, 성형외과 등 편하고 돈 잘 버는 과로 몰리는 일은 흔하다 못해,


상식적인 일이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었다.

“노크하고 들어가 봐. 과장님 좋으신 분이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피부과 과장 민석형.

진현은 교수실 앞에 써진 명패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노크를 했다.

“네, 들어오세요.”

끼이익.

진현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널찍한 방안에 신사적 외모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피부과 과장 민석형이었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인가요?”

“네, 교수님. 피부과에 지원하고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진현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과에 지원하기 전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은 모든 병원의 전통이었다.

민석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가워요. 김진현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도 많이 들었어요. 한국대 수석 졸업에, 대일병원
내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던데.”

“감사합니다.”

민석형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최대원 교수한테도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내가 한국대 졸업생인데 학창시절 최대원 교수의 동아리 선배였거든.
그런데 내과 지원 아니었나? 최 교수는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최 교수님 정말…….

“아닙니다. 저는 학창시절부터 피부과만 지망했습니다.”

“그렇군요. 김진현 선생님은 몇 기 졸업인가요?”

“57 기입니다.”

“내가 35 기이니, 딱 22 년 선배이군. 반가워요.”

민석형 교수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치 영국 신사 같은 동작이었다.

“그런데 그거 알죠? 우리 피부과는 단지 한국대 수석 졸업이나 평판이 좋다고 뽑아주지 않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피부과 과장 민석형은 다른 과처럼 진현에게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 년도에 저희 피부과 전공의(專攻醫) TO 는 1 명이에요. 모든 지원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리는 각 항목의 총점을 계산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선생님을 뽑을 거예요.”

각 항목이란 출신학교, 학교성적, 면접, 인턴 인사평가, 마지막 지원 시험 성적을 뜻한다.

피부과에 지원하는 다른 이들의 면면이 만만할 리 없고, 그중에 1 등을 해야 하니 바늘구멍과도 같은 길이었으나


진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괜찮아. 다 이길 수 있어.’

그는 최고 명문 한국대 출신, 그것도 학교 성적 1 등이고 인턴 인사 평가도 압도적이다.

마지막 지원 시험도 실제 환자 진료와 연관된 임상을 위주로 문제가 출제되니 깊은 경험이 있는 그가 못 볼 리가


없다.

공정하게만 경쟁한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을 떠나서 무조건 이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수고해 주시고, 좋은 결과를 빌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진현은 교수실을 나갔다. 나쁘지 않은 인사였다.

한편 진현이 나가자 피부과 과장 민석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김진현이라… 곤란하군.”

예년이었으면 고민 없이 선발할 인재였다.

하지만 이번 년도엔 달랐다.

민석형은 인트라넷에 접속해 메일을 열었다.

내용이 구구절절 길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을 가급적 피부과에서 불합격시키기 바랍니다.]

병원 내 핵심실력자 기획실장 송병수가 보낸 권고였다.

“왜 기획실장이 이런 메일을 보낸 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획실장의 권고가 아니라도 김진현을 뽑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었다.

“곤란하군. 곤란해.”

민석형은 고개를 저었다.


***

대일병원 이사장실.

짜악!!!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민 비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심한 놈.”

들끓는 이종근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릿하게 눈을 뜨니 이사장 이종근의 아들인 이상민이 뺨을 얻어맞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지난번 가문 모임에 갔을 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아? 이 못난 놈아?!”

이종근의 얼굴엔 평소 짓던 온화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역시 천한 피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 이 거지 같은 놈아, 가문의 모든 사람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헐뜯고 끌어내리려고!!”

사실 이상민이 못하고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훌륭했다.

단 한 명, 김진현을 제외하면.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이상민이 천한 창녀의 핏줄을 타고 났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적통인 이범수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무도 손톱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문의 주인이자, 이종근의 아버지, 대일그룹의 전체 회장 이해중은 천한 핏줄을 싫어했다.

이미 오래전, 이종근은 이상민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문의 다른 형제들은 조금의 흠이라도 보이면 이상민을 하이에나처럼 찢을 것이고, 병원의 후계를
자신들의 사람으로 세운 후 궁극적으로 대일병원의 경영권을 뺏어갈 것이다.

‘그것만은 안 돼. 이 병원은 오로지 내 것이야. 절대로!’

이종근은 이를 갈았다.

가문 내 모든 경쟁에서 밀리고, 단 하나 대일병원만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뺏길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어. 무조건 김진현을 밀어내라. 겨우 그것마저 못하면 넌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어.”

이종근은 내뱉듯 말을 맺었다.

“알아들었으면 그렇게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나가봐!”


이상민은 말없이 이사장실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이종근은 한참을 씩씩거리다 민 비서를 바라봤다.

“민 비서.”

마치 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민 비서는 긴장했다.

“네, 이사장님.”

“김진현, 그놈의 정체는 알아봤나?”

민 비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특별한 점이…….”

“그게 말이 돼?! 간 혈관 문합도 그 녀석이 했다는 소리가 있어. 인턴이 그걸 해내는 게 말이 되냐고! 정말
내가 화나는 것 보고 싶어? 혼을 내줄까?”

민 비서는 공포에 질려 바짝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꼭… 꼭 조만간 만족할 만한 조사 결과를 알아오겠습니다.”

“내가 정말로 화나는 것 보고 싶지 않으면 잘해!”

그 말에 민 비서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종근이 분노하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한편 이사장실 밖으로 나온 이상민은 창밖을 바라봤다.

도산대로를 따라 사람들이 깨알같이 지나다녔다.

그 모습이 작은 벌레들 같아 보여 그는 미소 지었다.

“김진현…….”

그는 오랜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며칠 뒤, 응급실 근무도 끝났다.

진현은 병리과로, 혜미는 신경과로 찢어졌다.

간만에 편한 스케줄에 진현은 기지개를 켰다.

‘환자를 직접 안 보는 서비스 파트니 확실히 편하긴 하군.’

진료과는 대체로 3 개의 분류가 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처럼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메이져’과.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처럼 생명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마이너’과.

그리고 영상의학과, 병리과, 진단검사의학과처럼 환자를 안 보는 ‘서비스’ 파트.

물론 서비스 파트라도 업무가 만만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진현 같은 인턴의 일은 확실히 적었다.

평화로운 여유에 진현은 혜미에게 쪽지를 보냈다.

[이번 주에 시간 날 때 볼래?]

지난번 펑크 냈던 것도 미안하고, 요즘 왠지 그녀가 침울해 보여 진현은 맛있는 거라도 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장이 왔다.

[다음에 보자. 미안…….]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이지?

그녀가 그의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은 처음이었다.

‘신경과가 많이 바쁜가?’

그런데 그때, 병원 인트라넷에서 메일 알림이 울렸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메일이 2 개나 와 있었다.

누가 보냈나 발신인을 살피니,

[내과 최대원 교수.]

[외과 강민철 교수.]

라고 적혀 있었다.

‘왜 나한테 메일을?’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최대원 교수야 그렇다 치지만, 강민철 교수의 메일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전 혈관 문합한 것을 들킨 것은 아니겠지?’

인턴이 간이식 환자의 혈관 문합을 해내다니.

그것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사고(?)는 사고 측에도 못 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보니 내용은 둘 다 간단했다.


[한번 보자.]

(다음 편에서 계속)

# 62

62. 험난한(?) 피부과 (5)

각설하고, 둘 다 이런 내용이었다.

‘보기 싫은데.’

진현은 진땀을 흘렸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강민철 교수는 아예 오늘 오후 3 시에 보자고 정확히 시간, 장소까지 명시했다.

‘싫은데… 그리고 오후 3 시면 1 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내가 메일을 못 봤으면 어떻게 하려고.’

강민철다운 급한 성격이다.

진현이 혀를 차는데 전화가 울렸다.

피부과 치프인 이승태였다.

‘무슨 일이지?’

“네, 선배님.”

-진현아, 나 피부과 치프 이승태인데.

이승태는 후배인 진현에게 친근히 반말을 썼다.

“네, 선배님.

-지금 잠깐 볼 수 있을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아, 네.”

진현은 시계를 봤다.

잠깐 만나는 거면 강민철 교수한테 늦지는 않겠지?

***

그리고 피부과 외래 앞에서 이승태를 만난 진현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진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들은 대로다.”

“…….”

진현의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가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이승태는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원래 병원이 더럽잖냐…….”

“…그러면 피부과 말고 다른 과를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네가 억지로 우리 과를 지원한다면… 강제로 말릴 수야 없겠지만… 아마 안 될 거다.”

“…….”

진현이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대일병원까지 왔던 것인가?

“대일병원 피부과 교수의 아들이… 이번에 대일병원 피부과를 지원한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래, 만약 TO 가 2 명이면 너도 같이 뽑아주겠지만… 이번 년도엔 TO 가 1 명이라 어쩔 수가 없다.”

고귀한 자, 로열(Royal).

병원의 은어 중에 로열(Royal)이란 말이 있다.

교수의 직속 친인척이나 병원에 영향력이 있을 정도로 좋은 가문의 사람들을 뜻하는데, 피부과 핵심 교수의
아들이면 피부과 입장에선 로열 중의 로열, 그냥 성골이 아닌 왕족이라 할 수 있었다.

‘하하.’

진현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병원의 절대 법칙 중 하나가 평민은 로열을 이길 수 없다는 거였다.

예외는 없었다.

그 어떤 뛰어난 평민이라도 왕족보다 밑이었다.

“그… 로열은 누구입니까?”

“신라대 의대 출신으로 인턴은 지금 신라대 병원에서 하고 있다더군. 학교 성적은 중간보다 못하고, 인턴 평판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로열이니…….”

그 말에 진현은 맥이 빠졌다.

뛰어난 경쟁자면 모르겠다.


지금까지… 10 년을 넘게 노력해 왔건만, 자신의 반도 못 미치는 경쟁자에게 밀려야 하다니.

고작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단 이유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안하다. 혹시 피부과 말고 성형외과는 어떠냐? 네 스펙이면 성형외과도 무난할 것 같은데
…….”

“…네, 감사합니다.”

복도에 홀로 남은 진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환자용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젠장.”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김진현은 마음을 추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오랜만이네, 김진현 선생. 어디인가?

“……!”

강민철이었다.

간이식 분야 국내 최고의 대가인 그가 진현을 불렀다.

-지금 교수실로 오게.

***

진현은 비어버린 고철처럼 허무한 마음으로 강민철 교수의 교수실에 도착했다.

강민철 교수가 환자복을 입은 채 그를 맞았다.

“어서 오게. 오랜만이지?”

“아, 네. 그런데…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은 것입니까?”

어째 빨리 퇴원했다 싶었는데, 퇴원한 게 아니었다.

강민철 교수의 팔에는 약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다 나았네.”
“하지만…….”

“이 약은 심장 보는 의사 놈들이 계속 달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퇴원해도 되는데, 에잉.”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더 누워 있으셔야 할 것 같은데.’

마지막에 봤을 때 비해 얼굴이 반의 반쪽이었다.

‘이전엔 완전 삼국지의 장비 같은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음, 그래도 반의 반쪽이어도 여포 정도는 되겠구나.


마른 여포.’

마음이 허해서일까 진현은 실없이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무리 마십시오.”

“괜찮네. 그런데 자네는 내가 부르기 전에 한 번도 안 찾아오나? 서운하게.”

“죄, 죄송합니다.”

지은 죄가 있어서 못 찾아간 진현은 속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강민철 교수는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고맙네.”

“네?”

“자네가 내 생명을 구했다며. 정말 고맙네. 자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빈말이 아니었다.

만약 진현이 곧바로 심근경색을 추측하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도 식물인간이 되었을 거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한 것이 없으니, 정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대답에 강민철 교수는 미소 지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이다.

“그나저나 자리를 좀 옮기지 않겠나? 계속 병실에만 있다 보니 갑갑해서 넓은 곳이 좋군.”

“아, 네.”

강민철 교수는 자신의 방을 나와 옆에 위치한 전망 좋은 교수용 회의실로 향했다.

교수용 회의실 앞에 있던 여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회의실 쓰시려고요, 교수님?”

“응.”

“저… 곧 내과에서 회의실 쓸 건데…….”


“내과?”

“네.”

“됐어. 조금만 쓰고 나갈게.”

강민철은 신경도 안 쓰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흥, 내과 쫌생이들.”

천상천하 외과 제일주의인 그는 약만 깨작거리는 내과를 무시했다.

남자라면 외과지! 란 생각이었다.

“자네에게 하나 물어볼 것이 있네.”

강민철은 한강에서 이어지는 탄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진현은 무척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무슨 질문이지? 설마…….’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닐 거야.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항상 적중한다.

“그때 환자, 혈관 문합은 어떻게 한 건가?”

“……!”

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다.

뭐라고 이야기하지?

진현은 머리가 하얗게 질려 생각했으나 어떠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변명이 가능한 사안이 아니었다.

간이식 혈관 문합을 할 줄 아는 인턴이라니.

말이 안 되도 너무 안 되지 않는가?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왜 그런 사고를…….’

한탄이 나왔다. 과거를 돌리고 싶었으나 이미 늦은 상태다.

“자네가 한 것 맞지? 어떻게 된 건가?”

강민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흠……!”

강민철은 눈썹을 찌푸렸으나 진현은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변명이 통할 내용도 아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10 년 동안 바란 피부과에서도 쓴소리 들었겠다 진현은 반쯤 포기하는 마음이 되었다.

“흐음!”

숨 막힐 듯,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강민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됐네. 됐어.”

“……?”

“내 생명을 구해준 자네인데, 뭐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어떻게 한 일인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날 그 자리에서 나와 환자, 2 명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추궁하듯 물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단!”

강민철이 다시 눈을 빛냈다.

“자네 외과 할 거지?!”

“……!!”

진현은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그건…….”

“뭘 그렇게 주저하는 거지? 수술을 좋아하지 않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보람이 느껴지지 않나?”

“…….”

강민철 교수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과를 해. 그리고 내 후계자가 돼.”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강민철 교수는 보통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현의 미래가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의 제안이었다.

“심근경색과 안식년 때문에 아마 올해와 내년까진 내가 쉬어야겠지만, 내년이 지난 후 돌아오면 자네를


본격적으로 키워주겠네. 그러니 외과를 해.”

진현은 고민했다.

‘강민철 교수님의 제자… 간이식의 계보라…….’

국내 간이식 최고의 권위자이자 대한이식협회 회장인 강민철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평범한 의미가 아니었다.

‘나쁘진 않지만…….’

그 순간, 진현의 마음에 든 생각은 ‘싫다’였다.

강민철 교수가 한 가지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분명 그는 수술도 좋아하고, 환자를 살리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삶을 중시했고,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바랐다.

물론 간이식 하는 의사가 되어 자리를 잡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겠지만 안락함과는 평생 거리가 먼 삶을


살아야 한다.

48 시간 연속으로 수술하는 것은 예사고, 주말 근무는 기본, 추석 설날에도 일해야겠지.

심지어 해외에 학회 중에 응급 간이식이 생겨 돌아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가 바라는 삶과는 백만 광년 정도 먼 삶이었다.

평소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피부과에서 그를 밀어낸 게 마음에 걸렸다.

피부과를 안 하면 무슨 과를 하지?

강민철 교수의 말처럼 외과를? 그것도 내키지 않는데…….

“외과 할 거지?”

진현의 침묵을 승낙으로 생각했는지 강민철이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저는…….”

진현이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안에 사람이 있나?”

그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내과의 최대원 교수였다.

“……!”
하필 이때 최대원 교수를 만난 진현은 당황스런 마음이 들었다.

최대원 교수는 진현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옆에 강민철 교수를 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교수님?”

최대원도 정교수지만, 강민철에 비하면 연배와 직위 모두 밑이었다.

깍듯한 인사에 강민철은 코웃음 쳤다.

“자네는 여기 무슨 일인가?”

“아… 저희 내과 회의가 있어서.”

“흥, 내과 회의?”

그런데 그때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군, 강 교수. 몸은 괜찮나?”

“……!”

온화한 인상의 노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전(前) 내과과장이자, 현(現) 대한내과협회 회장인 정영태였다.

정영태 교수를 보고 강민철 교수는 인상을 구겼다.

겉모습만 보면 10 살은 차이가 나 보이지만 강민철 교수가 정정해서 그럴 뿐, 실제로 연배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그들은 서로 내과가 최고다, 외과가 최고다 이러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형님께선 무슨 일이십니까?”

“나도 회의에 참석하러 왔지, 이 사람아.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누군가?”

노교수는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갑작스러운 거물들의 출현에 인사했다.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인턴입니다.”

“아, 김진현.”

놀랍게도 정영태는 김진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네가 그 내과 한다는 친구지? 환영하네.”

“……!”

강민철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아이는 외과를 할 것입니다.”

“무슨. 딱 보니 천생 내과감이구만. 어딜 무식한 외과로 끌어가려고.”

“이! 무식한?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외과가 무식하다니요?”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강민철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영감탱이가!

아랫사람이었으면 당장 주먹이 날아갔겠지만 이 노교수는 병원 내에서 자신보다 높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간이식 국내 최고의 권위자이자 대한이식협회 회장인 강민철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위치는
아니긴 하다.

“하여튼 이 아이는 외과를 할 거니 그렇게 알고 넘보지 마십시오.”

“무슨. 내과라니까. 그렇지 않나, 최 교수?”

고래들의 다툼에 새우가 끼듯, 최대원 교수가 말했다.

“…네, 진현 군은 내과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뭐? 어딜 소심한 내과에 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이 아이는 외과야!”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분위기에 진현은 입을 벌렸다.

지금 나를 놓고 뭐하는 거야?

“저…….”

진현은 곤란히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63

63. 험난한(?) 피부과 (6)

“넌 가만히 있어!”

“자넨 가만히 있게!”

강민철 교수와 정영태 교수가 동시에 외쳤다.

뭔가 이제 진현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 자존심 대결로 돌입한 느낌이다.

‘하하.’
진현은 웃음이 나왔다.

하늘같은 거물 교수님들이 나를 놓고 이렇게 싸워주니 참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피부과는 로열 때문에 자신을 튕겼는데 말이다.

갑자기 마음이 안정되며 가슴이 차분해졌다.

그래, 피부과에서 튕기면 어떤가?

잠잠한 마음으로 그는 자신의 길을 결정했다.

“그만 싸우십시오. 저는 지원할 과를 결정했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진현의 입을 바라봤다.

강민철 교수는 당연한 것을 확인한다는 듯 물었다.

“외과지?”

최대원 교수는 강민철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당연히… 내과지, 진현 군?”

진현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답했다.

“피부과입니다.”

***

그 뒤로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하나, 최대원 교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것은 기억났다.

“피, 피부과? 하지만 피부과 과장 민 교수님이… 이번에 자네를…….”

피부과 과장 민석형 교수와 동아리 선후배였던 그는 대충의 사정을 미리 전해들은 듯하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제가 써도 떨어뜨리겠지요.”

“그러면?”

“그래도 쓰겠습니다. 로열이든 뭐든 실력으로 뚫겠습니다.”

“……!”
그래, 로열이든 금수저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10 년 동안 바랐는데.

원칙적으로는 교수의 아들이라고 무조건 붙여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선발 방식이 점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하산으로 붙일 때는 로열의 면접 점수는 만점, 다른 지원자들의 면접 점수를 최하점을 준다.

그렇게 해서 총점의 합산을 1 등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진현은 다짐했다.

‘면접을 빵점 맞아도 붙을 수 있는, 압도적 시험 점수를 받겠어.’

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다.

시험, 레지던트 선발 고사는 매년 100 점 만점으로 환산 시 85 점 정도가 각 병원의 수석을 차지한다.

평균은 65 점 정도.

그 시험을 만점 가까이 맞으면 면접을 빵점 맞아도 붙을 수 있다.

로얄이든 금수저든 다 상관없다.

‘할 수 있어. 무조건 해내겠어. 내 스스로 뚫고 말겠어.’

지금까지 10 년 동안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 노력에 미안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

‘로얄? 금수저? 다 필요 없어. 여기까지 두 손만으로 올라왔다. 반드시 해내고 말겠어.’

진현은 굳게 생각했다.

***

난장판이 된 교수 회의실을 떠나 병리과로 돌아온 진현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지하에 위치한 숙소로 돌아갔다.

오전에 많이 해놨고 인턴이 할 자체가 별로 없는 병리과여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공부해야지.’

그냥 전국 수석이 아닌, 만점에 가까운 수석을 해야 한다.

그것도 평균 수석 점수가 85 점인 시험에서.

‘가능해. 아니, 가능하게 만들겠어.’

숙소로 들어가려면 인턴 휴게실을 거쳐야 문을 열어 먼저 휴게실에 들어왔다.


한창 일할 때라서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이상민이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여, 진현. 안녕.”

이상민이 빙긋 웃으며 진현을 맞았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 뭐하냐?”

“왜?”

“뭐 마시냐고?”

“아, 이거?”

이상민은 손을 흔들었다. 캔에 담긴 맥주가 달랑 소리를 냈다.

“근무 중에 술이라니. 음주 운전보다 최악이야. 치워라.”

진현은 정색해서 말했다.

대낮 근무 중에 술을 마시다니.

지난 삶을 통틀어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다.

아무리 망종 의사라도 이러진 않는다.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한 캔인데. 내 주량이 있는데 이 정도는 취하지도 않아. 그리고 일도 대충 다 끝났고.”

이 녀석 주량이 소주 5 병이 넘으니 맥주 한 캔으로 티도 안 나겠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그래도 안 돼. 치워.”

“네에, 네에.”

이상민은 장난스레 답하고 캔을 버렸다.

그걸 보고 진현은 숙소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이상민이 그를 잡았다.

“잠깐, 진현아.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

“앉아봐.”
진현은 의아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냐?”

“그냥… 잘 지내나 해서. 우리 친구인데 이야기한 적도 오래됐잖아.”

그렇긴 한다. 외과가 끝나고 이상민과 대화한 적이 아예 없었다.

“뭐, 나야 그냥 그렇지. 넌 잘 지내냐?”

“응, 나도.”

그 뒤 둘은 시시껄렁한 잡담을 했다.

하지만 진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말 특별히 할 이야기 없어?”

이상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현아.”

“응?”

“너 의사 왜 한다고 했지?”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거 물어보려 잡은 거냐? 지난번에 말했듯이 돈 벌려고 한다.”

“그래, 그렇지… 그랬었지.”

이상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음미하듯 말했다.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 왜이래?

“왜? 내가 너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돈 벌려 의사질 하는 게 당연하잖아.”

“진현아.”

“응?”

이상민은 짙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이전 애완동물들을 죽일 때만큼 짙게.

“내가 100 억 주면 의사 그만할래?”

“뭐??”
진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100 억 줄게. 내가 너한테. 그러면 의사 그만할래?”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 맥주 한 캔에 취했냐? 그만하고 들어가서 한숨 자라.”

“진담인데?”

진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고맙네. 100 억이라니… 100 억이라…….”

중얼거리다 돌연 와락 이상민의 멱살을 잡았다.

“……!”

진현은 낮게 말했다.

“야, 이 새끼야. 취했으면 그냥 들어가서 자. 멀쩡한 놈 거지 만들지 말고. 네가 부자면 다야? 내가 그렇게
거지같아 보여?! 어?!”

이상민의 미소가 사라졌다.

진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 나 돈 좋아한다. 그래도 너 같은 새끼한테 구걸 받고 싶을 만큼 좋아하진 않아! 취한 거라 생각하고 한


번만 봐줄 테니 다음부턴 입조심해. 다음에 또 이러면 말로 끝내지 않는다.”

거칠게 멱살을 놓은 진현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숙소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민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김진현… 너는 정말…….”

그런데 그때였다.

칸막이 쳐진 휴게실 반대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김진현이 왜?”

혜미였다.

그녀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반대편에서 걸어 나왔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아, 이런 있었니? 언제부터?”

“처음부터.”

“아아, 우연도 이런 우연이.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하구나.”

광대 같은 말투에 혜미는 비웃었다.

“그래,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봐. 내가 진현이를 많이 좋아하긴 하지. 그런데 오빠, 아니, 이상민.”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평소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하나 경고할게.”

“뭘? 우리 동생.”

“진현이는 건들지 마.”

“……!”

그 말에 이상민의 얼굴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여유 있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몰라? 네가? 하나만 말할게. 진현이를 건들지 마. 분명히 경고했어.”

“싫다면?”

이상민의 미소에 혜미는 차갑게 말했다.

“널 매장시키겠어.”

“……!”

“난 너와 다르게 가문의 적통이야. 그럴 힘 하나 없는 줄 알아? 쫓겨나기 싫으면 알아서 조심해.”

이상민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러나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원치 않을 텐데?”

“아아… 아버지? 결벽증에, 가정폭력에, 여자만 밝히며 비열한 그 남자? 물론 이 대일병원 내에서는 그 남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긴 하지. 하지만 그룹 전체에서, 가문 내에서도 그럴까? 그 잘난 아버지가 너를 지켜줄 수
있다 생각해?”

이상민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혜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리고, 범수 오빠.”

“……!!”

“네 짓인 것 다 알고 있어. 모를 줄 알아?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참고 있을 뿐이야.”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군.”

“몰라? 그래, 모르겠지. 기다려. 널 결코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상민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큭큭 웃었다.

“그래, 그래. 우리 동생이 생각보다 매섭구나.”

“…….”

“그런데… 그거 알아?”

그리고 이상민이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왔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마!”

“조용히 해.”

그녀는 뒷걸음쳤으나 벽에 등이 닿았다.

탁.

이상민은 한쪽 팔로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벽을 짚었다.

“이……!”

그녀가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차가운 감촉이 목에 닿았다.

손톱만 한 작은 칼날이었다.

이상민은 나직이 웃었다.

“조용히 해.”

“……!”

그는 장난하듯 칼날을 움직였다.

피익. 하얀 살결이 갈라지며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상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의사니 알잖아? 여기 경동맥이야. 내가 혹시라도 힘을 더 주면 넌 바로 죽어. 그러니 조용히 해. 우리


동생, 말 잘 듣지? 응?”

그러면서 그는 좀 더 힘을 주었다.

주르륵. 살이 베이는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피가 계속 흐르며 혜미의 하얀 옷을 적셨다.

“이런, 힘이 더 들어갔네. 이러다 잘못해서 피부를 넘어 경동맥을 베면 어떻게 하지?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생
말라 피부가 얇은데. 응?”

혜미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그녀의 눈이 눈물에 젖어 들어갔다.

“우리 동생, 울면 안 되지. 응?”

이상민의 눈이 희번덕거렸고, 혜미는 공포와 소름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 응? 김진현은 내 유일한 친구라서 지금까지 봐줬지만… 넌 이종근, 그 개자식의 피가 섞인


것 외에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는 공포에 질린 혜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그의 눈은 지극히 차가웠다.

“응? 죽고 싶어?”

혜미는 벌벌 떨며 답했다.

“…그래.”

“뭐?”

그녀는 두려움과 분노로 눈물 흘리며 외쳤다.

“그래, 이 자식아! 차라리 죽여! 흑흑. 지금 나를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너를 지옥에 떨어뜨릴 거야!
후회하기 싫으면 지금 죽여!!!”

그러고 그녀는 펑펑 울었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이 악마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친오빠의 원수를 알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것도,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모두 지긋지긋해서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다.

이상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재미없군.”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너 앞으로 조심해.”

그러고 피 묻은 칼날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며 그는 휴게실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그녀는 갑자기 몸에서 힘이 풀려 바닥에 주륵 주저앉았다.

“하, 하.”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흐흑, 흑, 흑.”

그녀는 울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입을 가렸다.

“웁웁, 흑흑.”

정말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죽고 싶을 만큼.

(다음 편에서 계속)

# 64

64. 하늘의 외과의사 (1)

이후 6 월, 7 월, 8 월, 9 월… 달력이 무미건조하게 넘어갔다.

전반부의 폭풍 같았던 나날과 다르게 그 뒤로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내과와 외과에서는 여전히 그를 꼬셨고, 피부과에선 지원해도 떨어뜨릴 것이라 했으며, 진현은 그냥 귀를 막고
시험공부를 했다.

자신에게 이런 고집이 어디 있었는지 놀라면서.

그 외에는… 그는 여전히 종종 병원에서 사고(?)를 쳤고… 음, 이상민은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황문진과는 여전히 친했고… 그리고… 아, 고등학교 때 친구, 일진 김철우가 경찰 시험에 합격했다.

“너희들 의료사고 생기면 다 잡아넣을 거야!’

라고 말한 김철우는 형사가 되었다.

그리고… 음… 이전 삶의 아내, 이연희와는 많이 친해졌다. 어쩌다 몇 번씩 만나다 보니, 이제 그녀는…….

[진현 씨, 오늘 저녁에 맛난 것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쫑쫑.]

하며, 그에게 서슴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혜미는…….

욱신.

혜미를 떠올리자 진현은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픔이다.

“진현아, 나 회 많이 먹고 올게. 건강히 잘 지내!”

그녀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9 월부터 울산에 위치한 자매병원으로 파견근무를 떠났다.

그녀는 9 월, 10 월 모두 파견이고, 11 월, 12 월은 진현이 파견근무이니 총 4 개월이나 못 보게 되는 것이다.

떠나기 전까지 그녀와는 이상하게 어색했다.

친하고 밝게 잘 지내는데… 이상하게 어색했다.

정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4 개월이라… 이 녀석이랑 이렇게 떨어져 있다니.’

그러고 보니 지난 6 년 동안 이 녀석이랑 떨어져 지냈던 적이 없었다.

항상 같이였는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하자 공허한 느낌이 들어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울산에서 잘 지내나? 연락도 없이. 회는 잘 먹고 있나?’

보나마나 회 조금에 소주 왕창, 이렇게 먹고 있겠지.

그녀가 소주를 마시는 얼굴이 떠올랐다. 밝게 웃는 모습도 생각났다.

그래…….

진현은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10 월 말, 날씨가 싸늘해지고 인턴들의 분위기도 변했다.

전공을 정하는 레지던트 선발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 황문진도 공부에 열중이었다.

“아, 어렵다. 진현아 이 문제 답 뭐야?”

“심폐소생술 3 분째니 에피네프린(Epinephrine).”


“요건?”

“삼각형 모양 절개니… Mercedes benz incision.”

“이건?”

“카바페넴(Carbapenem) R… 이런 항생제 감수성이면… 첫 번째 선택(First choice) 항생제는 콜리스틴


(Colistin). 부작용은 급성 신손상(Acute kidney injury).”

막힘없는 대답에 황문진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걸 다 알아? 나도 의대 다닐 때는 공부 좀 했는데. 이건 뭐 비교도 안 되네. 역시 한국대 수석이


다르긴 다르구나.”

“뭘, 아니야.”

“하아, 나는 이러다 합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황문진은 대일병원 외과에 지원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정도면 무난히 합격할 거야.”

“그럴까?”

“그래, 엄살 부리지만 공부도 많이 했잖아.”

“그건 그래. 네가 너무 괴물 같은 거지, 나도 제법 괜찮다고!”

그렇게 말한 황문진은 히죽 웃었다.

진현도 같이 웃었다.

만년 꼴지 황문진이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외과의사라니.

본인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말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다.

“진현이 너는 정말 피부과 쓸 거야?”

“그래.”

“정말로 괜찮겠어?”

황문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기적 같은 점수를 맞지 않으면 합격할 수 없으니.

하지만 진현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냥 나랑 같이 외과를 하는 것은 어때? 외과 좋잖아. 의미도 있고.”

그렇게 묻긴 했지만, 진현이 피부과를 지원하는 것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의사들이 외과, 내과, 산부인과 등 생명을 다루는 과를 기피하는 현상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의사들이 타 직종에 비해 특별히 이기적인 사람들만 모여서가 아니다.

편하고 돈 잘 버는 직업을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희망이니까.

물론 외과를 한다고 다 궁핍한 것은 아니다.

자리만 잘 잡으면 꽤 윤택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진현의 지난 삶처럼 가시밭길이었고, 다른 돈 잘 버는 과들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돈 잘 버는 과들, 특히 진현이 희망하는 강남의 잘나가는 피부과는 한 달에 1-2 억 순이익이 기본이니까.

매출이 아니라 순이익이.

1 년이 아니라 한 달에.

일반인들이 들으면 못 믿을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렇다.

그리고 그러면서 외과, 내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편하다.

물론 강남에 개업한다고 꼭 성공하란 보장은 없지만, 최고의 최고를 달리는 진현 정도의 스펙이면 쪽박차기도
어렵다.

편하고 돈 잘 벌고 싶으면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를 가면 되지 않냐고?

그것도 고려 사항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어마어마한 스카우트 조건을 제시받으면서도 각 대학병원의 교수들이 다국적 제약회사에 안 가는 것은


이유가 있다.

아무리 조건이 좋고 임원이 되면 뭐하는가?

말이 좋아 임원이지 결국 월급쟁이이고, 실적 안 좋으면 잘릴 신세인걸.

그리고 환자를 보길 원하는 의사는 의사일 때 가장 빛이 난다.

그게 외과든 피부과든 말이다.

더구나 다국적 제약회사의 메디컬 디렉터(Medical director)는 결코 편하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거액의 연봉을 주면서 편하게 굴리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주는 만큼 골수를 뽑아내는 것이 다국적 기업들이다.


그런 사유로 각 대학의 능력 있는 최상위권들은 피부과, 성형외과… 그 외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에 몰린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진현이 피부과를 지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외과를 지원하는 입장이지만 황문진도 진현이 피부과를 지망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황문진이 짜증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에휴. 세상 참 더럽지. 공정한 경쟁에 도대체 로열이 뭐냐?”

“…….”

“에이, 몰라. 너 진짜 콱 시험 만점 받아서 덜컥 합격해 버려라.”

황문진은 답답한 마음이 들어 홧김에 이야기했다.

진현은 살짝 웃었다.

“그럴 생각이야.”

진현의 대답은 빈말이 아니었다.

‘쉽진 않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과목으로 구성되는 선발 시험은 특히 외과가 지옥처럼 어렵게 나온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문제를 출제하는 것인지 외과 전문의가 아니면 맞출 수 없는 문제가 70~80%여서


최상위권의 변별력은 외과 과목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난 이전에 외과를 전공했으니까.’

따라서 진현은 이 시험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아예 불가능한 도박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너 최근에 공부 많이 못했는데… 그건 어떻게 하냐?”

황문진의 걱정처럼 진현은 최근 공부를 많이 못했다.

“괜찮다. 뭐… 이제 곧 자매병원 파견이니 파견 가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울산이랑 부산 가는 거잖아. 거기는 일손이 모자라 더 힘들다던데?”

“그렇긴 하지.”

“에휴, 나라도 스케줄 바꿔줄 수 있으면 좋은데 나도 11 월, 12 월에 너랑 같이 자매병원 파견이니.”

“됐다. 너도 공부해야지.”

“진현이, 너 피부과 말고 다른 과는 싫어? 그러니까… 성형외과라든지. 성형외과는 쌍수 들고 널 환영할 텐데.”


“글쎄…….”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대안이 될 수 있고 무척 좋은 과이나… 그냥 싫었다.

내과, 외과는 물론이고 모든 과를 통틀어 최악에 꼽히는 업무량도 그렇지만 뭔가 자신과 잘 안 맞는 느낌이다.

황문진이 화제를 돌렸다. 그는 음흉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잘 진행되고 있냐?”

“뭘?”

“뭐긴, 이 녀석. 얌전한 얼굴로 더 한다니까. 작년 미스 대일 대회 우승자인 이연희 간호사 말이야!”

“아…….”

진현은 이연희를 떠올렸다.

만나면 편하다 보니 확실히 최근에 자주 만나고 있긴 하다.

“사귀는 거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다.”

“에이, 아니긴. 네가 이연희 간호사와 여러 번 계속 만나는 것 알고 혜미가 얼마나… 읍.”

떠들던 황문진은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진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혜미가? 그게 무슨 말이냐?”

“아, 아니야.”

“응?”

그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황문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니야. 그냥 혜미 보고 싶어서 말이 잘못 나왔어. 혜미랑 술 한잔하고 싶다.”

“뭐야, 실없긴.”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때, 진현의 전화가 울렸다.


“콜인가?”

하지만 근무하는 병동 전화번호는 아니었다.

누구지?

“네, 김진현입니다.”

-아, 김진현 선생님? 대일병원 교육수련부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교육수련부는 인턴 수련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으로 얽히면 좋은 일보다 귀찮은 일이 많다.

역시나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업무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교육수련부에 올 수 있으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곧 교육수련부에 도착해 업무 설명을 들은 진현은 놀라 반문했다.

“그러니까 환자 이송을 하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자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환자 이송이야 늘 하는 것이지만… 이건…….”

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환자 이송이야 인턴의 업무니 숱하게 해봤지만 이건 다르잖아?

“평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환자 이송을 하는 것이 어떻게 다르지 않단 말입니까?”

진현은 기가 차 반문했다.

대화내용처럼 그가 제안 받은 업무는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환자 이송이었다.

분명 인턴의 업무는 맞지만 문제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의 병원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중국이나 일본도 아니다. 무려 아랍권, 아부다비였다.

‘아부다비가 어디야? 아프리카야, 중동이야?’

진현은 곤란함에 혀를 찼다.

‘물론 안 좋을 수 있는 환자는 이동 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의료진이 동반해야 하긴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그 먼 곳까지 갔다 오라니… 이건 좀. 그리고 난 비행기를 거의 타본 적도 없단 말이야.’
교육수련부 직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밀었다.

“곤란한 것은 압니다. 어려우시겠습니까?”

진현은 물었다.

“그런데 다른 인턴도 많은데 왜 하필 저입니까?”

“그야 당연히 선생님이 제일 뛰어나시니까요. 이송할 환자가 아랍에미레이트를 구성하는 토후국(土侯國)의


왕자라서 진료과에서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봅니다. 꼭 선생님이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

진현은 똥 씹은 마음이 들었다.

사고 좀 작작 칠걸.

그런데 그때 직원이 귀가 솔깃할 이야기를 했다.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추가 수당이 있습니다.”

“추가 수당이요?”

“네, 일이 끝나면 왕가 측에서 300 만 원을 선생님께 지불할 것입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50 만 원을 드리고요.


총 350 만 원입니다.”

“……!”

진현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중동까지 왔다 갔다 하면 넉넉잡고 2 일. 2 일에 350 만 원이라. 나쁘지 않군.’

큰돈은 아니지만 한 푼의 보상도 안 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틀 이송의 보상으로는 굉장히 큰
대가였다.

특별한 사고만 안 난다면 말이다.

‘별문제 없겠지? 하늘에서 문제가 생기면 손쓸 방법도 없는데.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진
않을 테니까.’

뭐, 싫다 해도 월급 받는 입장에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환히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네, 감사합니다. 유사시를 대비해서 선생님 말고도 또 다른 인턴 선생님 한 분과 간호사 한 분이 동행할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진현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동행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름 첫 해외여행이군.’

물론 공항에서 아랍에미레이트 의료진에게 환자 인수 후 곧바로 되돌아와야겠지만 말이다.

‘공항 면세점… 아부다비란 곳에도 있겠지? 돌아올 때 부모님 선물이나 사야겠구나.’

350 만 원 공돈이 생기니 면세점에서 부모님 선물을 사드리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한 가지 확인은 해야 했다.

“혹시 환자 상태가 안 좋지는 않지요? 그렇다면 곤란합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VIP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형식적인 환자 이송입니다.”

그렇다면야.

공중에서 환자가 안 좋아져도 문제지만 그걸 다행히 해결해도 문제다.

지금까지 친 사고(?)만으로도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짜 조용히 살아야 해. 더 사고(?)를 치면 사람들은 정말 내가 외과나 내과를 할 거라 생각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이전 사고(?)들 때문에 그가 사람을 살리는 외과나 내과를 할 걸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대형 사고라도 한 번 더 치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형식적인 이송이라니. 이번엔 별문제 없겠지.’

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네, 알겠습니다. 출발할 때 연락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사고(?)와는 비교도 안 되는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초유의 대형 사고였다.

훗날 진현의 인생 항로에 영향을 줄 정도로.

(다음 편에서 계속)

# 65

65. 하늘의 외과의사 (2)

출발 일정은 며칠 뒤, 10 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부다비에서 돌아오자마자 울산으로 파견근무를 가야 하니 최악의 스케줄이었다.

‘어쩔 수 없지. 돈 벌기 쉬운 게 아니니.’

그리고 시간이 흘러, 출발 날이 다가왔다.

-인천공항까지는 다른 의료진이 동행할 것이니, 선생님은 따로 먼저 공항에서 대기하고 계십시오. 오전 11 시 30


분에 출국 게이트 앞에서 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현은 병원에서 제공해 주는 차량을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접대용 차량이라 나름 에쿠스였다.

“여기가 인천 공항…….”

인천 공항을 본 진현은 살짝 감탄했다.

‘김포 공항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

평생을 통틀어 이전 삶의 아내인 이연희와 신혼여행을 갈 때 김포 공항으로 제주도에 간 것 외엔 공항에 와본


경험이 없는 진현이다.

‘그런데 같이 동행할 인턴과 간호사는 누구지? 물어볼 것을 그랬나?’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올 것이다.

‘아직 예정시간까지 1 시간 30 분이나 남았군. 뭐하지? 공항구경? 아니야, 시험공부나 하자.’

처음 보는 공항을 구경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에티하드 항공의 출국 게이트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피부과에 합격하려면 반드시 만점에 가까운 시험 점수를 받아야 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해내고 말 것이다.

진현은 책을 넘기며 생각했다.

간절한 마음 때문일까 책을 한 자, 한 자 읽자 주변의 소음이 잊혀지고 금방 집중이 됐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진단법과 치료법이 다시 정리되어 머릿속에 쌓였다.

그렇게 얼마나 공부를 했을까?

저 멀리… 어디선가 흐릿한 소리가 들렸다.

“…현아.”

“…….”

진현은 자신을 부르는 거라 생각 못하고 책에 열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현아!!”

익숙한 목소리에 진현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그녀가 있었다.

“……!”

하얀 얼굴, 어느새 어깨를 넘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청초한 꽃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움.

급하게 뛰어왔는지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아하아, 반가워. 잘 지냈어?”

혜미였다.

“…….”

두근.

두 달, 무려 두 달 만에 그녀를 보자 진현은 알 수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감정이 당황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냈냐?”

“응! 울산에 회 맛있더라. 그런데 일은 진짜 힘들어. 거의 잠도 제대로 못 자.”

“그런데 여긴 어떻게?”

“환자 이송 때문에 왔는데? 너도 환자 이송 때문에 온 거잖아.”

“아… 다른 인턴이 너였구나.”

진현의 반응에 혜미는 불만스레 볼을 불렸다.

“뭐야? 모르고 있었던 거야?”

“응, 몰랐어. 그런데 하필 우리 둘이라니 우연도 대단한 우연이네.”

가장 친한 친구 둘이 같이 아랍에 가게 되다니.

대단한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혜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연 아닌데…….”

작은 소리라 제대로 못 들은 진현이 반문했다.


“응? 뭐라고?”

“아니야. 이제 곧 출발이지? 급하게 왔더니 목마르다. 여기 커피 맛있어?”

“글쎄? 어차피 나한테 커피는 그냥 검고 쓴 물이라서.”

진현의 답에 혜미는 큭큭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강아지처럼 귀여웠다.

“앉아 있어라. 내가 사줄게.”

“응, 아니야. 내가 사먹을게. 있어.”

혜미는 금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빨대로 커피를 쭈욱 빨아먹으며 말했다.

“진현이, 너는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냥그냥.”

그녀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이제 곧 전공 지원해야 하는데… 정말로 피부과 쓸 거야?”

진현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써야지.”

“그래…? 그냥 다른 과 쓰는 게 낫지 않아? 외과 강민철 교수님이 네가 외과 하는 거 간절히 원하신다는데.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를 놓칠 수 없다고. 사실 다들 네가 피부과 말고 외과나 내과 같은 생명을
살리는 과를 하기를 바라고 있어.”

혜미의 걱정이 옳았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외과 강민철 교수는 계속 진현에게 러브 콜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외과뿐이 아니다. 내과도 열렬하긴 마찬가지다.

모두가 진현이 사람을 살리는 과를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과 해야지.”

“그래도…….”

“괜찮다. 꼭 합격할 거니 걱정하지 마라. 낙하산 따위한테 지지 않을 거다.”

강한 의지가 담긴 말에 혜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야 네가 하고 싶은 과를 했으면 바라지만…….”

걱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송 팀의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지 알아? 간호사라고 하던데…….”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저도 앉아도 될까요? 대일병원 환자 이송 팀이죠?”

“……!”

익숙한 목소리.

진현과 혜미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단아한 인상의 미녀가 그들에게 살포시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진현 씨. 저도 이번 이송 팀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그녀, 이연희는 혜미에게도 인사했다.

“이연희라고 해요. 이혜미 선생님이시죠? 우리 진현 씨의 친한 친구라 들었어요. 반가워요.”

우리 진현 씨.

그 친근한 호칭에 혜미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풀렸다.

그녀도 웃으며 답했다.

“네, 반가워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

“대장암 환자로 수술 후 합병증이 있었으나, 전부 좋아지셨으니 비행 중에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진현은 환자 인계를 받았다.

환자는 머리 벗겨진 아랍남자였는데 히죽 웃으며 진현에게 인사했다. 미소 사이로 금니가 번뜩했다.

“Hello.”

마주 인사한 진현은 생각했다.

‘다행히 나빠 보이진 않는군.’

VIP 여서 신경 쓰는 것인지 특별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이진 않았다.

사실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비행기에 태울 리는 없으니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이틀 동안 350 만 원 벌어와야지. 부모님께 뭘 선물해 드릴까?’

이런 한가한 생각도 하며 그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랍에미레이트의 왕족인 환자는 퍼스트 클래스에 눕고, 이송 팀인 그들은 근처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았다.

“저 비즈니스 클래스 처음 타 봐요. 진현 씨는요?”

“저도 처음입니다.”

진현이 자리에 앉자 이연희가 그 옆자리에 앉았다.

“……!”

혜미는 그런 둘을 보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따로 혼자 앉았다.

그런 혜미에게 연희가 친근하게 물었다.

“이혜미 선생님은요? 이혜미 선생님은 비즈니스 클래스 타 봤어요?”

“저도 처음이에요.”

혜미는 짤막하게 답했다.

그녀도 비즈니스 좌석은 처음이었다.

항상 퍼스트 클래스만 탔으니까.

물론, 그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뭔가 가라앉은 혜미의 모습에 진현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까진 안 그랬는데? 왜 그러지?

“혜미야, 혹시 몸 안 좋아?”

“…….”

혜미는 잠시 침묵했다 웃으며 말했다.

“응,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어제도 병동에서 밤새고, 오늘 울산에서 올라오느라 몸이 안 좋네. 신경 쓰지
마.”

이연희가 걱정스레 말했다.

“이혜미 선생께서는 좀 주무세요. 만약 환자한테 문제가 있으면 저희가 말씀드릴게요.”

“네.”

혜미는 좌석을 조정해 눕기 좋게 만들어 눈을 감았다.

평소와 다른 그 모습에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렇게 피곤해 보이진 않았는데?

-Ladies and gentleman…….

그때 안내방송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비행기가 궤도에 안정적으로 안착하자 스튜어디스들이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클래스답게 풀코스 요리였다.

“진현 씨, 이것 봐요. 스테이크도 있어요. 이것 드세요.”

옆 좌석의 연희가 찰싹 달라붙어 메뉴를 가리켰다.

“아… 네.”

“저 고기 별로 안 좋아하니 스테이크는 제 것까지 드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드세요. 그나저나 이렇게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 해외에 가다니, 환자 이송 중이라지만 좋네요.”

진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전 삶에서 그녀와는 신혼여행 때 제주도를 가본 것 외엔 한 번도 여행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좋아하면 한 번쯤 다른 곳을 가도 좋았을 텐데.

그때 문득 진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미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들리는지 식사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눈을 감고 있었다.

“혜미야?”

“…….”

“이혜미?”

“…왜?”

짧은 대답.

진현은 걱정스레 말했다.

“몸 많이 안 좋아?”

“아니, 그냥…….”

“이제 식사 나오는데 밥 먹고 자.”

“됐어. 생각 없어. 많이 먹어…….”


그러고 피곤한지 혜미는 고개를 돌렸다.

***

다행히 비행은 평온했다.

진현은 매 시간마다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으나 아랍 왕자는,

“I am okay.”

라고 말할 뿐이었다.

실제로도 괜찮아 보여서 진현은 마음을 놓았다.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진현은 영어로 이야기했다.

아랍 왕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어눌한 영어로 답했다.

“오케이. 고마워요. 닥터도 좀 쉬세요.”

진현은 자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부러운 팔자군. 암에 걸린 것은 안 되긴 했지만.’

석유 부자 나라들은 땅에서 어마어마한 수입을 얻기 때문에 힘든 직업인 의사를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따라서 중한 질병에 걸리면 의료 선진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는 일이 흔하다.

가까운 유럽으로 많이 가지만, 최근에는 유럽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을 지닌 한국으로도 많이 왔다.

‘유럽 사람들은 아랍 사람들 진료하는 거 싫어하니까.’

인종차별이 아니라 해외로 진료 받으러 나가는 아랍 사람들이 안하무인인 격이 많아서 그렇다.

‘자기 집에서 받던 대우를 다른 나라에서도 받으려고 하니 그렇지. 의료진인 간호사한테 시중을 들며 발을


닦으라고 요청하질 않나.’

뭐, 이 환자는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다들 자나.’

비즈니스 석으로 돌아온 진현은 혜미와 연희를 돌아보았다.

비행이 시작된 지 거의 7 시간째라 둘 다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혜미…….’

혼자 따로 앉아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얕은 어둠 속 하얗게 가라앉은 얼굴.

그는 무심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이 녀석도 여자긴 하구나.’

그런데 진현은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이 흉터는 뭐지?’

머리카락이 뒤로 젖혀지니 목 한쪽에 얇은 흉터가 나타났다. 마치 칼로 베인 듯한 상처다.

‘이전에도 이런 상처가 있었나? 뭐지?’

최근에 항상 머리로 가리고 있어서 몰랐다.

그런데 그때 당황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 진현아? 뭐해?”

혜미였다.

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떠 그를 바라봤다.

“……!”

진현은 서둘러 손을 뗐다. 그의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머리를 쓰다듬었지?

“미, 미안하다. 그런데 목의 상처는?”

“아, 아… 응, 아, 목의 상처?”

혜미는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손길이 떠오르자 목덜미까지 화끈거리며 달아올랐고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안 됐다.

“이, 이거 그냥 긁힌 거야.”

“긁힌 거라고?”

“응, 신경 쓰지 마.”

“그, 그래. 괜히 깨워 미안하다. 좀 더 자라.”


“으, 응. 너도 피곤할 텐데 자.”

혜미는 붉어진 얼굴을 보이기 싫은지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66

66. 하늘의 외과의사 (3)

이후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후로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관계자들과 의료진들이 진현을 맞았다.

한 나이 지긋한 백인 의사가 물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죠?”

“네, 괜찮으셨습니다.”

환자도 뭐라뭐라 말했다.

아랍어여서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나쁜 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백인 의사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잘 살펴주셔서 감사하답니다. 특히 닥터 김의 꼼꼼한 진료에 감동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진현은 머쓱한 마음이 들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잘 얻어먹은 것 외에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백인 의사는 싱끗 웃었다.

“감사의 표시로 원래 약속했던 것보다 두 배의 금액을 사례하라고 하시는군요. 한국의 은행 계좌로


입금하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300 만 원의 두 배니 600 만 원이다.

대일병원에서 받기로 한 50 만 원을 더하면 650 만 원이니 비즈니스에서 노닥거린 대가치고는 너무 과했다.

하지만 돈이 넘쳐나는 석유국의 부호답게 그 정도 푼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괜찮으니 부담 안 가져도 됩니다. 그러면 저희는 가볼 테니 편히 귀국하십시오. 귀국 편 비행기는 5 시간


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르르 사라졌다.

연희가 다가왔다.

“아, 그래도 별일 없이 끝났네요. 다행이에요. 조금 걱정했었는데.”

“네,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제 뭐할까요, 진현 씨?”

연희가 눈을 반짝거렸다.

“글쎄요? 조금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시간 뒤에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하니…….”

“그렇긴 하네요. 배도 고프고… 샤워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어렵겠죠?”

진현도 모른다. 애초에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와 본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얀 외벽의 공항 안에 중동인과 백인들이 바글바글했다.

규모만 보면 인천국제공항에 절대 못하지 않은 크기였다.

연희는 간단히 요기를 위해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 갔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왔다.

“이상하게 카드가 안 되네요. 진현 씨 혹시 달러 가지고 있는 것 있으세요?”

“저도 달러는 없습니다.”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라 원화 말고는 환전해 온 돈이 없었다.

“어쩌지…….”

그런데 그때 가만히 뒤에서 둘을 바라만 보고 있던 혜미가 말했다.

“있어요. 돈 안내고 씻고 밥 먹을 만한데.”

“아, 그래요? 어디에요, 혜미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

혜미가 그들을 데리고 간 것은 플래티넘 라운지였다.

VIP 고객 외에는 입장이 불가능한 고급 라운지였지만 그녀가 카드 한 장을 보이자 모든 게 오케이였다.

“전부 마음껏 이용하시면 됩니다. 편히 쉬십시오.”

정장을 입은 매니저가 친절히 말했다.

라운지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과 음료, 커피, 맥주, 와인 등이 비치돼 있었고, 안에는 샤워실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와, 진현 씨. 가서 먹어요. 그렇지 않아도 배고팠는데. 고마워요, 혜미 선생님.”

혜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연희는 진현의 팔을 잡고 끌었다.

진현은 끌려가며 혜미를 바라봤다.

“혜미, 너는?”

혜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별 생각 없어. 씻고 쉴 테니 둘이 같이 잘 먹어.”

진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비행기에서도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정말 괜찮아?”

“응, 입맛이 없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혜미는 더 진현이 잡기 전에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기분이 나빠 보이는데. 혹시 내가 아까 머리 만져서 그런가?’

진현은 기회를 봐서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싸아아.

혜미는 떨어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맞으며 쓴웃음 지었다.

‘도대체 난 뭘 기대했던 거야?’

보고 싶었다. 정말로.

그와 이연희가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파 일부러 파견 근무를 갔다.

하지만 파견 근무를 갔음에도 가슴의 아픔은 덜어지지 않았다.

떨어져 있으면 떨어져 있을수록 밀어내려 하면 밀어내려 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이번 환자 이송도 일부러 신청했는데 이런 꼴이라니.

“나 너무 바보 같아.”

아랍에미레이트까지 와서 그와 이연희가 같이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다니.

‘진현…….’
문득 아까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손길이 떠오르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왜 머리를 만졌던 걸까? 그냥 목의 흉터 때문에? 아니면 혹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들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다.

혼자만의 바보 같은 기대인 것을.

샤워를 마친 그녀는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침 이연희도 샤워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혜미 선생님. 씻으셨어요?”

“네.”

길게 대화하기 싫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연희가 말을 걸었다.

“저, 선생님.”

“네?”

“우리 진현 씨 좋아하시죠?”

“……!”

혜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연희는 방긋 웃고 있었다.

“무슨 말이죠?”

“질문 그대로예요. 좋아하지 않나요?”

“…….”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래요. 좋아해요, 진현이. 그것도 아주 많이.”

대답을 하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적에게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시 그런 것 같았어요.”

“어째서요?”
“티가 워낙 많이 나니까요. 그런데 어쩌죠?”

연희가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저도 진현 씨 좋아하는데. 아주 많이. 양보할 수 없어요. 절대로.”

연희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미 선생님이 언제부터 진현 씨를 좋아했는지는 몰라요.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저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요. 절대로.”

“…….”

혜미는 연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항상 부드럽게 웃고 있는 단아한 그 눈매에는 질 수 없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혜미는 깨달았다.

아, 이 여자도 진현을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그와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참을 수 없는 질투심과 괴로운 안도감.

이 여자라면 나 대신 진현이 옆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겠구나. 내가 아니라도.

“그래요. 알겠어요.”

혜미는 씁쓸히 대답했다.

그리고…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입을 염과 동시에 가슴이 찢어졌으나 억지로 참았다.

“전 둘의 사이를 방해할 생각이 없어요. 아니, 잘됐으면 좋겠어요. 대신 하나만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의외의 말에 연희의 눈이 커졌다.

“무슨 부탁이죠?”

혜미는 담담히 말했다.

“진현이한테 잘해주세요. 그게 제 부탁이에요.”

“……!”

연희의 눈이 흔들렸다. 혜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연적에게 이런 부탁이라니?

혜미는 아프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진심이니까요.”


말을 마친 혜미는 한없이 슬퍼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진현이는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사랑한다 해서 꼭 이뤄지라는 법은 없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잠깐의 휴식 후 곧바로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똑같은 에티하드 항공이었는데 이번엔 이코노미 클래스였다.

‘이왕 쓸 거면 좀 더 쓰지.’

물론 왕복 비행 모두를 비즈니스 클래스로 접대받는 것은 욕심이었다.

체격이 큰 편이 아니라서 좌석도 넓이도 그렇게 불편하진 않았다.

단 이코노미라서 정말로 불편하고 곤란한 것이 있었으니… 이혜미, 이연희 한가운데에 앉게 된 점이다.

‘거참, 대일병원의 최고 미녀라고 꼽히는 여자들 사이에 앉아서 가게 되다니.’

다른 남자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진현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좁은 공간이라 양팔로 두 여자의 살결이 느껴졌다.

이쪽으로 피하면 이쪽에 살이 닿고, 저쪽으로 피하면 저쪽에 살이 닿는, 진퇴양난의 곤란이었다.

“진현 씨, 많이 불편하시죠?”

연희는 진현의 곤란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오히려 조금 더 몸을 붙이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반면 혜미는 비행기에 탄 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헤드폰을 시끄럽게 틀고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재미라고는 먼지만큼도 없는 영화들에 집중했다.

‘얘는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피곤한가 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혜미는 계속 저기압이었다.

‘정말 내가 머리 만진 것 때문에 그런가?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해가지고.’

진현은 후회했다.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옆에 연희가 있어서 말을 꺼내기가 그랬다.


다른 사람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 ‘네 머리 쓰다듬어서 미안하다’란 말을 하기가 민망하고 실례되지 않겠는가?

‘기회를 봐서 사과해야지.’

그렇게 불편한 비행이 지속되었다.

진현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외과를 전공하는 악몽을 꾸고 눈을 뜨니 시간이 제법 지나 있었다.

‘몇 시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시계를 보니 인천 도착까지 2 시간 30 분 정도 남았다.

‘꽤 많이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많이 남았구나.’

도착 시간보다 30 분 정도 연착 예정이었다.

기체가 간간히 흔들리는 게 난기류를 만난 듯했다.

‘한국 도착해서 곧바로 울산으로 가야 하는데… 피곤하다.’

그런데 그때 연희가 옆에서 말했다.

“진현 씨.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아, 네.”

오래 앉아서 불편한 건지 아니면 화장실을 가려는 것인지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연희가 조심히 둘 사이를


빠져나갔다.

연희가 나가자 진현은 급히 혜미를 돌아봤다.

혜미는 여전히 영화에 열중 중이다.

별로 재미도 없어 보이는데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이혜미.”

“…….”

“혜미야?”

재차 부르니 혜미가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으로 눈을 쓱쓱 닦은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냐?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냐?”

혜미는 그 물음에 가슴이 턱 막혔다.

자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눈치가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그런 것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하지만 그 대답이 진현은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너 때문에 기분 나빠!’로 들렸다.

“미안하다.”

“뭐가?”

“머리 쓰다듬은 것. 불쾌했을 것 같은데 정말로 미안하다.”

혜미의 얼굴이 폭발하듯 빨개졌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진현의 손길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왜 쓰다듬었는데?”

말을 꺼낸 그녀의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물론 별 의미 없는 행동이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을 하니 다시 바보같이 기대하게 된다.

질문을 받은 진현은 말문이 탁 막혔다.

왜냐고?

‘왜 쓰다듬었지?’

그도 모르겠다.

어둠에 잠긴 얼굴이 예뻐 보여서? 홀로 누워 있는 게 안쓰러워 보여서?

“왜 쓰다듬었는데? 대답해봐.”

“그건…….”

진현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혜미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삐잉! 비상상황입니다. 혹시 기내에 의사 선생님 있으십니까?

“뭐지?”

진현과 혜미는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

방송이 이어졌다.
-비상상황입니다. 긴급환자 발생으로 기내에 의사 선생님이 있으시면 비즈니스 클래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혜미가 물었다.

“어떻게 하지?”

“가봐야지.”

“무슨 일일까?”

“글쎄… 보통은 별것 아닌 경우가 많은데… 일단 가보자.”

진현과 혜미는 일어났다.

방송에 놀란 연희도 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저도 같이 가요, 진현 씨.”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를 진료할 때 간호사와 의사는 업무의 분담이 달랐다.

간호사 고유 영역의 일은 의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가 같이 가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별것 아니어야 할 텐데…….’

정말 간단한 경우가 아니면 하늘에서 환자가 안 좋아질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별로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67

67. 하늘의 외과의사 (4)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바람은 어긋났다.

“이런…….”

비즈니스 석으로 들어간 그들은 신음을 흘렸다.

누가 환자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승무원들이 한 동양인 노인을 중심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어떻게 하지? 의사는 없나?”

“방송은 했는데…….”

진현은 급히 끼어들었다.
“방송을 보고 온 의사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Doctor!”

의사란 말에 승무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랍 국적의 중년의 여성 스튜어디스가 대표하여 설명했다.

“한국 국적의 승객인데, 방금 전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 말에 진현은 환자를 살폈다.

오십 대 후반, 육십 대 초반쯤 됐을까?

노년에 가까운 남자였는데 의식이 전혀 없었다. 부르고 자극을 줘 봐도 으으 하는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것입니까?”

스튜이어디스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희도 정확히 잘 모르겠어요. 늦은 시간이라 다들 주무시고 계셔서 이분도 수면 중이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의식이 없는 것이라곤… 간식을 서비스하려고 깨우지 않았다면 지금도 몰랐을 거예요.”

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 좋았다.

‘그러면 언제부터 의식이 없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건데… 좋지 않군.’

별일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은 산산이 부숴졌다. 이 정도면 중환자 중의 중환자였다.

‘어째서 의식을 잃은 것이지? 의식이 없는 노년의 남자 환자라…….’

가능한 원인이 머릿속에서 촤르륵 펼쳐졌다.

하지만 의식이 안 좋아지는 원인은 너무 많았다. 용의자를 오백 명쯤 놓고 수사를 시작하는 격이라 단서를 얻어
범위를 좁혀야 했다.

“이 환자분의 신원을 알고 계십니까? 평소 앓고 있던 질환이라든지…….”

하지만 아랍 승무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승객 정보에 공무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부다비에는 가족 방문으로 왔다고 되어 있고… 혼자 탑승한 거여서
그 밖의 사항은 저희도 전혀 모르겠어요.”

진현은 생각했다.

‘공무원이라고?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다니는 공무원이라…….’

직급 있는 회사원의 경우 출장 시 비즈니스 클래스를 종종 이용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로 중동에 왔다가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귀국하는 중년의 공무원은 흔하지 않다.

뭔가 평범한 공무원이 아니란 느낌은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곤란해. 의식이 없으니 무슨 질환을 앓고 있었는지, 병력(病歷)을 얻을 수도 없고. 머리 CT 같은 검사를 할
수도 없고.’

머리 CT 는커녕, 간단한 피검사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진현은 연희에게 부탁했다.

“일단 바이탈(Vital)을 측정해 주세요.”

연희는 혈압계를 가지고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랍 왕자의 이송할 때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꽤 많은 처치 도구와 약을 챙겨왔다는


점이다.

쓱쓱. 커프를 감고 공기를 주입해 혈압을 측정한 연희의 얼굴이 하얘졌다.

“혈압이 재지지 않아요.”

“뭐라고요?”

진현과 혜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제가 측정해 보겠습니다.”

진현은 본인이 직접 혈압을 측정했다. 이번엔 혈압이 재지긴 했다.

수축기 혈압 50.

‘맙소사. 정상이 120 인데 50? 그냥 의식을 잃은 게 아니라 쇼크(Shock)잖아. 심장은?’

그는 급히 맥박을 측정했다.

맥박수는 분당 160 회. 무섭도록 빠르지만 맥 자체는 약했다.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낮은 혈압을 만회하기 위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상태. 하지만 맥이 너무 약해. 이러다 곧 심장마비가
오겠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심장마비가 오면 죽는다.

진현은 급히 승무원들에게 말했다.

“가장 가까운 공항이 어디입니까? 어디든 빨리 착륙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대표인 중년의 스튜어디스가 곤란히 답했다.

“목적지가 아닌 곳에 착륙하기는…….”

“네?”

“몇만 불대의 손해가 나서…….”


진현은 기가 찬 마음이 들었다.

“지금 고작 돈이 문제입니까? 조금만 지체하면 이 환자분은 사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책임은 항공사에서 질
것입니까?”

그 날카로운 말에 승무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환자분이 그렇게 많이 안 좋나요?”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사망할 확률이 높습니다.”

“오, 맙소사. 얼마나 시간이 있는 거죠?”

진현은 환자를 힐끗 봤다.

정확한 시간이야 알 수 없지만 저런 상태면 지금 당장 심장마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야 합니다.”

“알겠어요.”

스튜어디스가 급히 기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곧 난감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쩌죠? 지금 태평양 상공이라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공항은 인천인데 2 시간은 더 걸릴 거예요.”

“꼭 한국으로 안 가도 됩니다. 아무 데라도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국도 상관없습니다.”

“심한 기상악화 때문에 기존의 항로를 벗어난 상태여서 중국도 빨리 도착할 수 없어요.”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어떻게 하지? 그때까지 못 버틸 것 같은데.’

꺽꺽 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환자는 2 시간은커녕 30 분도 못 버틸 것 같았다.

‘시간을 벌어야 해. 비행기 안이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자. 왜 쇼크가 왔지?’

진현은 환자를 꼼꼼히 살폈다. 혜미도 같이 살폈다.

자세히 검진을 하자 다행히 금방 쇼크의 원인이 보였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최악의 원인이었다.

***

“진현아, 이것…….”

“음…….”

혜미의 말에 진현은 신음을 삼켰다.


‘출혈성 쇼크…….’

창백한 피부, 핏기 없는 공막… 전형적인 출혈 사인(Sign)이었다.

출혈의 원인도 찾기 어렵지 않았다.

옷을 들추니 왼쪽 아래의 배가 볼록이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쪽에서 피가 난 게 분명하다.

“왜 배에서 피가 났지? 가만히 있는 배에서 피가 날 이유가 없는데…….”

진현은 승무원에게 물었다.

“혹시 비행 중에 사고가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까? 부닥치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승무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진현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생각했다.

가만히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누워 있던 환자가 다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때 혜미가 말했다.

“약 때문은 아닐까?”

“약?”

“내가 알기로 이분… 뇌졸중을 앓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말에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이 환자분 알아?”

혜미가 오히려 반문했다.

“넌 이분 몰라?”

“모르는데?”

눈치를 보니 연희도 아는 것 같다. 누구지?

“아… 너는 TV 나 뉴스 안 보지… 하여튼 나도 당연히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야. 그냥 기사에서 몇 번


봤어. 뇌졸중을 앓고 있는 것도 기사에서 본 거고.”

무슨 공무원이기에 개인 질병사가 기사에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진현은 급히 환자의 짐을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알약과 피하용 주사가 발견됐다.

‘피를 묽게 해 출혈 성향을 만드는 항혈소판제인 아스피린과 항응고제 에녹사파린(Enoxaparin)!’


진현은 이제 모든 원인을 깨달았다.

뇌졸중은 피가 굳어 뇌혈관이 막히는 질환이다.

따라서 피를 묽게 하는 아스피린과 에녹사파린이 중요한 치료제로 쓰인다.

단 이 치료약들의 문제는 피를 묽게 해 출혈 성향을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문제가 없고 있어도 경미한 출혈이지만 극히 드물게 이렇게 심하게 오는 경우가 있다.

‘약에 의한 자발 출혈이야. 그것도 굉장히 심하게 왔어. 동맥 출혈이 분명해. 왜 하필 비행기 안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하지?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의 배는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더 불러 올랐다. 피가 계속 나고 있는 거다.

“이연희 선생님, 일단 혈압을 올리기 위해 가져온 수액을 급속 주입해 주십시오.”

“네!”

연희가 혈관을 잡고 수액을 투입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피가 계속 나는데 수액이나 수혈을 해 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이럴 경우 동맥을 타고 들어가 피가 나는 혈관을 확인해 색전술로(Embolization) 막으면 되는데 비행기


안에선 불가능해.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 방법은 너무 위험이 커. 무모해.’

그런데 그때였다!

“꺄악!”

한 승무원이 비명을 질렀다.

급히 환자를 보니 눈을 뒤집어 까고 전신을 덜덜 떨고 있었다.

간질 발작!

전신의 피가 모자라 뇌에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간질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경련은 금방 멈췄으나 사태는 심각했다.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입술을 깨문 진현은 고민했다.

‘그 방법을?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큰데? 시도한다고 해도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아. 하지만…….’

진현은 환자를 바라봤다.

‘이대로 놔두면 환자는 죽을 거야.’


너무 위험한 시도지만 가만히 놔두면 무조건 죽는다.

그 사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젠장, 왜 나는 가는 곳마다 이런 일이. 피부과 해서 편하게 살고 싶은데 왜 뜻대로 놔두질 않는 거야.’

진현은 자신의 주위에 항상 궂은 일이 일어나게 하는 조물주가 원망스러웠다.

“진현아, 어떻게 하지? 곧 심장마비 올 것 같은데.”

혜미가 말했다.

진현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대론 안 돼. 지혈을 시도하자.”

“어떻게? 복강 안쪽이라 불가능해. 병원이면 몰라도 여긴 비행기 안이란 말이야.”

혜미의 말은 옳았다. 일반적으론.

하지만 진현은 말했다.

“수술하자. 내가 집도할게.”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혜미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연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현은 차분히 설명했다.

“가능해. 내가 집도하고 혜미, 네가 어시스트하면 되니까. 간단한 도구들은 아랍 환자 이송을 위해 챙겨 와서


준비돼 있고.”

“……!”

하지만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네가 아무리 천재라 불린다지만… 이건 불가능해.”

“그래도 해야 해. 안 그러면 이 환자는 죽어.”

진현의 단호한 말에 혜미의 눈이 흔들렸다.

“아, 안 돼. 이건 네가 아니라 강민철 교수님도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 가지고 온 도구는 정말 간단한 처치밖에
할 수 없는 도구들이란 말이야.”

이런 열악한 도구들로 비행기 안에서 배를 열고 지혈을 시도하는 것은 물에 빠진 핸드폰을 드라이버 하나 가지고


고치겠다고 나서는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네 말대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가장 좋은 것은 이대로 착륙해 병원에 가서 지혈을 시도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고, 그때까지 이 환자는 못 버텨. 무조건 죽을 거야.”

처음엔 저혈압이라도 혈압을 측정할 수 있었지만, 이젠 아예 측정이 안 됐다.

손목 동맥에선 맥이 안 느껴졌고, 대퇴동맥의 맥은 약했다.

곧 Arrest(사망)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붉은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무모해.”

(다음 편에서 계속)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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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 2018 년 03 월 26 일

ISBN | 979-11-6202-153-8(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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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68. 하늘의 외과의사 (5)

“알아.”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잘되면 다행이지만 잘못되면 네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그냥 놔뒀다 사망하면 불가피한 사망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출혈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수술을 시도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만약 실패하면 환자의 사망 책임을 전부 뒤집어쓸 수도 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잘해주려다가 살인죄로 소송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보호자라도 있으면 위험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알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해야 해.”

아예 못하면 모를까 살릴 가능성이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혜미는 답하지 않았다.

진현의 얼굴을 외면하고 땅만 바라봤다.

진현은 부드럽게 달랬다.

“만약 잘못돼도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걱정하지 마. 넌 그냥 어시스트로 도와주기만 해.”

혜미의 입에서 비틀린 말이 새어 나왔다.

“…그게 문제야.”

“응?”

“그게 문제라고! 이 바보야! 네가 혹시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피부과 하고 싶다며? 피부과 해서
편하게 살고 싶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을 안 사리는 거야?! 이 분이 누군지 알아? 잘못되면 그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의사 가운을 벗는 것으로 안 끝나. 살인죄로 소송 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계속 감정이 복받쳐 있어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혜미는 곧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이연희 때문에 쌓인 감정 때문인지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감정이 차올라 눈물이 흘러나오려 해 급히 고개를 돌려 눈을 비볐다.

“혜미야…….”

진현은 처음 듣는 혜미의 호통에 놀라 말을 멈췄다.

항상 밝고 착한 혜미가 이렇게 화를 내다니?

“혜미야.”

“…….”

진현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 사실 나도 위험을 감수하며 수술하기 싫어. 내가 이런 일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그래도…


상황이 어쩔 수가 없으니 한 번만 도와줘. 피부과 전공하면 이런 일은 더 없을 테니. 그러니 이번 딱 한 번만
도와줘.”

거듭된 부탁에 혜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 동작으로 눈가를 다시 닦은 그녀는 말했다.

“난 몰라. 잘못되면 네가 알아서 해.”

내키지 않는 승낙이었다.

진현은 이연희에게도 말했다.

“이연희 선생님도 어시스트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진현과 혜미의 대화를 어딘가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진현은 승무원에게 부탁했다.

“환자 처치를 해야 합니다. 다른 승객이 있는 이곳에서 할 수는 없으니 밀폐된 공간은 없습니까?”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 비어 있어요.”

“환자를 옮겨주십시오.”

석유 부자국의 항공기답게 퍼스트 클래스는 호텔 방만 했다.

“시작하자. 이연희 선생님은 가져온 수액이 떨어질 때까지 모두 투입해 주세요.”

“네, 진현 씨.”

진현은 커다란 왕진 가방을 펼쳤다.


아랍 환자가 외과 환자여서 상당히 많은 처치 도구를 가지고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 봤자 기본적인 도구들이지만. 절개와 응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보비(전기 칼)가 없는 게 아쉽군.’

일반인들에게는 메스가 외과의사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수술 장에서 가장 많이 쓰는 것은 고주파 전류를


이용한 전기 칼, 보비(Bovie)이다.

메스와 다르게 절개와 동시에 지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 가능한 것은 메스와 실, 그 밖에 몇 가지 도구뿐. 할 수 있을까?’

담담히 이야기했지만 진현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고 무엇보다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이렇게 외부에서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배 깊은 곳에서


나는 출혈은 아니야. 복벽… 아니면 배 얕은 곳이야.’

그러면 충분히 지혈이 가능하다.

단 출혈 혈관을 찾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먼저 소독을 할게.”

진현이 고민하는 사이에 혜미가 수술 부위를 소독약으로 넓게 소독했다.

진현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어느 혈관일까? 혈관을 못 찾으면 절개를 넓게 하고 내부를 뒤져야 하는데… 환자의 상태가 나빠 기회는 많지
않아. 최대한 빨리… 가급적 한 번에 찾아야 해.’

배가 튀어나온 모양을 살폈다.

‘에녹사파란에 의한 자발 출혈, 복벽이야. 복벽이니 저렇게 피부 아래로 동그랗게 피가 고인 걸 거야. 그러면


복벽의 어느 혈관?’

좌측 순환 동맥? 하부 복벽 동맥? 하부 늑간 동맥?

가능성 있는 혈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CT 조영 검사나 혈관 투시 검사를 하지 않는 한 어느 동맥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지금은 내가


판단해야 한다.’

진현은 의지를 다졌다.

‘한 번에 찾아야 해. 한 번에.’

혜미는 말했다.
“준비됐어.”

진현은 장갑을 끼고 메스를 쥐었다.

절개를 시작하기 전, 혜미가 말했다.

“진현아.”

“응?”

“하나만 약속해줘.”

“뭘?”

“제발 잘해줘. 환자를 위해서나 너를 위해서나.”

낮은 목소리였지만, 진현은 혜미의 간절한 걱정을 느꼈다.

그녀는 무리한 치료를 시도하는 진현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간절한 마음이 진현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래, 약속할게.”

그러나 진현도 확실한 자신은 없었다.

짐작 가는 혈관은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100%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제발…….’

진현은 고개를 들어 천장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며 절개를 시작했다. 혜미와 연희도 모두 침을 삼켰다.

찌이익.

메스에 얇은 피부가 갈렸다. 근막을 지나니 검게 죽은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지만 병원에서 숱하게 이런 모습들을 봐온 혜미와 연희 모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역시 복벽 출혈이야.’

“거즈를 주십시오.”

피를 빨아낼 석션(Suction) 도구가 없으니 수작업으로 피를 닦아내야 했다. 다행히 거즈는 넉넉했다.

“혜미야, 시야가 확보되게 복벽을 고정해줘.”


혜미가 진현의 말에 따랐다.

항상 활달한 모습만 보이지만 그녀는 이래 봬도 장래에 명망 높은 내과 교수가 될 몸으로 의사로서의 실력도


빼어났다.

더구나 지금은 인턴 생활이 끝나가는 시기라 그녀의 어시스트 실력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진현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시간이 이 수술의 성패를 결정지을 것이다.

‘하복벽 동맥…….’

굳기 시작하는 피 덩어리를 닦아내며 메스와 도구들을 이용해 근육을 열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첫 번째 목표 동맥인 하복벽 동맥에 근처에 도달했다.

‘제발……!’

진현은 간절한 마음으로 외쳤다.

그리고……!

“아!”

찾았다!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에 펌핑하며 피를 쏟는 하복벽 동맥이 들어왔다.

한 번에 출혈 동맥을 찾은 것이다.

“하아…….”

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히 굳은 혜미의 눈도 풀어졌다. 출혈 혈관을 찾았으니 지혈은 간단했다.

“실을 주세요.”

이연희가 수술용 실을 건네주었다.

진현은 가뿐히 양손을 움직여 타이를 묶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피가 멈췄다.

“하아…….”

“정말 다행이에요, 진현 씨.”


진현은 소매로 땀을 닦았다. 긴장이 풀렸다.

“네, 다행입니다. 그래도 아직 저혈압 상태니 수액은 전부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둘의 대화를 보며 혜미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바보…….”

물론 진현은 듣지 못했다.

“다시 봉합하겠습니다. 봉합용 실을 주세요.”

“네.”

금방 혈관을 찾아 절개를 넓게 하지 않았다. 봉합도 곧 순조롭게 끝날 것이다.

‘다행이야. 나머지 치료는 서울에 도착해서 하면 되겠지.’

물론 지혈을 했다 해도 환자가 좋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고비는 넘겼으니 비행기에서 적절히 수액 치료를 하고, 한국에서 정밀 치료를 받으면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근육을 꿰매려는 순간, 진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잠깐? 이걸로 끝일까?’

오랜 경험을 통한 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뭔가 이상했다.

‘정말 이걸로 끝일까? 복벽에 고인 피의 양에 비해 혈압이 너무 떨어졌어. 혹시 다른 부위의 출혈이 더 있는


것은 아닐까?’

자발 출혈의 경우, 가끔씩 다른 부위에서도 피가 나는 경우가 있다.

‘복벽에 고인 피의 양에 비해 배가 너무 튀어나왔어. 배 안쪽에서도 피가 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현은 이를 깨물었다.

‘만약 피가 더 나고 있다면 이걸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 혈관도 지혈을 해줘야 해.’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데? 이 안쪽을 확인하려면 배를 더 절개해 환자에게 무리를 줘야 해.’

그냥 배를 닫으면 환자에게 무리도 안 주고 간단히 수술이 끝나지만 만약 안쪽에서 피가 더 나고 있다면


끝장이었다.
결국 진현은 자신의 오랜 감을 믿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메스 다시 주세요.”

“네?”

“출혈량에 비해 혈압이 너무 많이 떨어졌습니다. 복벽이 튀어나온 양상도 이상하고요. 배 안쪽의 출혈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연희는 주저하며 말했다.

“저, 진현 씨… 그럴 가능성은 낮을 것 같은데. 그냥 이만 배를 닫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진현도 이걸로 수술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수술을 확대하고 싶지 않았고 환자에게 더 무리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안에서 피가 더 나고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진현 씨, 잘 지혈했으니 그냥 이걸로 마무리해요. 피가 더 나진 않을 거예요.”

연희는 더 수술을 확대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진현도 확신이 없으니 일순 고민이 됐다.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해 수술을 종료했다가 만약 피가 안쪽에서 나고 있으면?

그때 혜미가 물었다.

“진현아.”

“응?”

“네가 판단하기에 이 안쪽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그 대답에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확인해봐. 집도의는 너잖아. 어시스트할게.”

신뢰가 담긴 말이었다.

“……!”

그 믿음에 진현은 고마움을 느꼈다.

“알겠다. 그리고… 고맙다.”


“아니야. 수술을 시작 안 했으면 모를까,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내야지. 그리고 어차피 배 안쪽에 피가 고여
있는지 여부만 확인하면 되는 거잖아.”

진현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그건 그렇지.”

좀 더 메스를 누르니 찌익 복막이 절개되며 배 안쪽이 드러났다.

그러자 진현의 예상대로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배를 열자 주르륵 피가 흘러나왔다.

“……!”

연희의 얼굴이 하얘졌다.

진현은 혀를 찼다.

“이런…….”

그래도 피가 나는 혈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천만다행으로 절개한 곳 주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완벽히 지혈을 끝낸 진현은 배를 봉합했다.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비행이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끝나서 다행이지만 다시는 비행기 따위 타고 싶지 않았다.

***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그들을 맞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처치하겠습니다.”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인천 소재의 대학병원의 진료 팀이었다.

“항응고제 사용에 따른 복강 내 자발 출혈이었습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비행기 안에서 간단히 절개해 출혈


동맥을 지혈했습니다. 급한 처치는 전부 끝냈으니 보존적으로 치료하면 좋아질 것입니다.”

그 말에 상대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 의사는 놀라 입을 쩍 벌리며 물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믿을 수 없군요. 비행기 안에서 수술을 해 지혈을 하다니. CT 나 혈관 조영 검사도 없이


어떻게 지혈 동맥을 찾으셨습니까?”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진현은 그렇게 말했으나 상대 의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만큼 이번에 진현이 한 일은 대단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69

69. 전공 최종 결정 (1)

“하… 정말 미라클(Miracle)이군요. 대단합니다. 저는 그런 상황이었으면 치료를 시도하지도 못했을 텐데.


선생님이 이 환자분을 살렸습니다.”

상대 의사는 부담될 정도로 감탄한 눈빛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실례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디의 외과 선생님이신지?”

외과의사… 그것도 굉장한 실력의 외과 전문의가 아니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외과의사는 아닙니다.”

“그러면?”

“인턴입니다.”

“네?!”

상대 의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턴이 비행기 안에서 수술이라니. 나라도 안 믿겠다.

‘뭐, 안 믿어도 상관없고. 아니, 안 믿었으면 좋겠군.’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친 사고들도 감당이 안 되는데,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기다, 저기! 빨리 사진 찍어!”

그런데 진현의 눈에 기자들이 들어왔다.

‘아니,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기자들이?’

물론 작은 일은 아니지만 공항에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오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 환자가 누구기에?

‘정말 고위 공무원이긴 한가 보구나.’

일순 그의 머리에 이전 노숙자 환자를 치료해 인터넷 기사에 실려 엄청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를 찍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만, 휘말리면 골치 아프다.’

마치 쥐가 고양이를 보고 도망치듯 진현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어? 어? 선생님?!”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지만, 무시했다.

물론 그런다고 기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기자들은 그가 목적이 아닌지 따라오지 않고 구조용 침대에 누워 있는 이름 모를 환자에게 모여들었다.

***

인천 공항의 버스 정류장에서 연희가 진현에게 말했다.

“진현 씨, 그냥 이렇게 내려가도 돼요? 기자들이 인터뷰 요청할 건데…….”

연희의 말에 진현은 끔찍한 마음이 들었다.

그 환자가 누구기에 인터뷰를 요청한단 말인가?

진현은 단호히 말했다.

“인터뷰는 안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아는 연희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곧바로 울산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같이 밥 한 끼 먹고 가면 안 돼요?”

연희는 헤어지기 서운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도 많이 늦어… 곧바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현은 시계를 봤다.

그도 좀 쉬고 내려가고 싶지만, 이미 시간이 늦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아부다비에 갔다 오느라 생긴 공백은 다른 동기 인턴들이 메우고 있을 거다.

늦게 내려갈수록 그들의 고생이 커진다.

짐은 택배로 미리 부쳐놔 몸만 곧바로 가면 된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선생님도 들어가십시오.”

“앞으로 두 달이나 못 본다니 아쉽네요. 중간에 진현 씨 보러 한번 내려가도 되죠?”

진현은 당황했다.

날 보러 내려온다고? 울산까지?

“아… 제가 이제 곧 중요한 시험이 코앞이라…….”

그 말에 연희는 샐쭉한 얼굴을 했다.

“치, 서운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엇입니까?”

“진현 씨가 저 부를 때, ’이연희 선생님’이란 호칭 싫어요. 앞으로는 저 부를 때 연희라고 불러주세요. 말도


편하게 놔주시고요.”

“……!”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혜미를 바라봤다.

그녀는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5 미터쯤 떨어진 기둥에 기대서 스마트 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연희가 물었다.

“그것도 싫어요?”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뭐, 손을 잡는 것도 아니고 이전 삶에서 부인이었던 여자한테 말을 못 놓을 것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요.”

“아, 알겠어.”

연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려가서도 연락 자주하세요. 알았죠?”

“…그래.”

버스에 오르기 전, 진현은 고개를 돌려 혜미를 바라봤다.

“혜미야?”
그녀는 진현이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열중 중이었다.

‘뭘 보는 거지? 평소엔 핸드폰 잘 보지도 않으면서.’

빨간 트렌치코트를 입고 핸드폰을 하는 모습이 토라진 소녀 같기도 했다.

“이혜미?”

“왜?”

혜미는 여전히 핸드폰을 바라보며 답했다.

진현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 간다.”

“응, 잘 가.”

“잘 지내. 두 달 뒤에 보자.”

“응.”

짧은 대답이었다.

진현은 뭔가 모를 서운함을 느꼈으나 마지막으로 인사 후 울산행 버스에 올라탔다.

“잘 지내라.”

“응.”

곧 부르릉 시동이 켜지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현의 얼굴이 안 보이자 그제야 혜미는 고개를 들었다.

“…….”

그녀는 말없이 진현이 탄 버스를 바라봤다.

그 버스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모습에 연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혜미 선생님? 우리도 갈까요?”

“먼저 가세요. 전 따로 갈 테니.”

혜미는 답했다.

연희는 떠나기 전 물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에 우리 진현 씨한테 쌀쌀맞게 대한 거예요? 이제 두 달이나 못 볼 텐데.”


혜미는 가만히 연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다 알면서 이런 걸 물어보지? 놀리는 건가?

“감정을 못 참을 것 같아서.”

“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혜미는 무표정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로 넘어가는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 꿀꿀하기 그지없었다.

‘날씨 한번 진짜 꿀꿀하네.’

혜미는 생각했다.

정말 꿀꿀한 날씨였다.

정말로.

마치 그녀의 마음속 날씨처럼.

***

아랍 아부다비까지 비행기를 타고 왕복한 후 곧바로 울산에 내려간 진현은 몸이 부서질 듯 피곤했지만 곧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진현아, 좀 쉬어. 안 피곤해?”

“괜찮아.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

피곤하긴 했지만, 쉴 수는 없었다.

울산 자매병원의 인턴 파견 인원은 총 3 명인데 진현이 없는 동안 각자 1.5 배의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미리 울산에 도착해 있던 황문진이 물었다.

“환자 이송하면서 별문제는 없었어?”

“이송할 땐 특별한 문제는 없었어.”

아랍 환자를 이송할 땐 별일 없었다. 돌아올 때가 문제였지.

업무를 시작하기 전, 황문진이 물었다.

“참, 진현아. 너 연락 안 되던데? 핸드폰 배터리 없어?”

“응, 비행기 타고 오면서 충전할 시간이 없어서 꺼졌다.”


“그러면 어떻게 연락하지?”

“병원 응급실에 계속 있을 테니 만약 필요한 일 있으면 응급실로 전화해.”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수고해.”

그렇게 진현은 곧바로 일을 시작하며 비행기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또 소문나면 어떻게 하지?’

공항에 몰려들던 기자들이 떠올랐다. 엄청 고위 공무원인 것 같은데…….

‘그래도 병원 내에서 사고 친 것은 아니니까. 크게 소문은 안 나겠지.’

진현은 그렇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항상 어긋난다.

한창 자매병원 응급실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 황문진이 그를 불렀다.

“지, 진현아.”

“왜?”

“이리 좀 와봐.”

“왜? 급한 거야? 지금 환자 기록 챠팅 중인데.”

“와서 봐야 할 것 같아. 빨리 와봐!”

“……?”

진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황문진을 따라갔다.

황문진이 그를 데려간 곳에는 응급실 구석의 LCD TV 였는데 9 시 뉴스가 한창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든 진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사의 제목은 이러했다.

[총리 후보, 김창영 전(前) 대법관(大法官)을 구한 하늘의 외과의사.]

‘서, 설마……?’

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TV 에서는 기자와 아나운서가 한창 떠들고 있었다.

-유력한 총리 후보이신 김창영 전(前) 대법관(大法官)이 금일 아부다비에서 인천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편에서
자발 출혈로 중태에 빠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안소희 기자, 말씀 전해주시죠.

차분한 인상을 가진 여성 기자에게 화면이 돌아갔다.


-네, 김창영 전 대법관이 개인적인 일로 아부다비에 방문했다가 홀로 귀국하던 중 일이 일어났는데요. 당시
비행기 내에서 출혈이 너무 심해 심장마비 직전의 중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나운서가 기자에게 물었다.

-김창영 전 대법관이 수행원 없이 혼자 비행기에 탑승하셨었습니까?

-네, 평소 청렴하기로 유명한 전 대법관은 개인적인 일이라 아무도 동행하지 않고 홀로 아부다비에 갔었습니다.
따라서 비행기 안에서 발견이 더욱 늦어져 상태가 안 좋았는데, 마침 우연히 같이 동승했던 외과의사가 응급
수술을 해 대법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합니다.

-비행기 내에서 수술을 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군요.

-네, 현장 의료진의 의견 듣겠습니다.

이번엔 인천 소재 대학병원의 외과 교수의 인터뷰였다.

-다행히 총리 후보이신 김창영 전 대법관은 고비를 넘겨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심장마비가 왔을지도 모를


정도로 중한 상태였는데 모두 비행기 내에서 응급 처치가 잘 이루어진 덕분입니다. 비행기 내에서 이런 수술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동승한 선생님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여성 기자가 말을 받았다.

-대법관을 치료한 외과의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아무런 답례도 바라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더욱
감동을 줬는데요. 수소문한 결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인가요?

-대일병원의 김진현 의사라고 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진현은 머리가 하얘졌다.

‘이게 뭐야? 그 환자가 전직 대법관에 유력한 총리 후보라고? 아니, 내가 아무리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놈이라도 이건 좀 심하잖아?’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한텐 맨날 이런 일이?’

9 시 뉴스에 나왔으니 대일병원의 모든 사람들, 아니, 전 국민이 진현을 알게 생겼다.

그것도 비행기 안에서 수술을 해 전직 대법관이자 유력한 총리 후보의 생명을 구한 외과의사로.

‘아무리 핸드폰이 꺼져 있어도 그렇지, 이런 기사를 내기 전엔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리고
하늘의 외과의사라니? 난 피부과를 전공할 인턴이라고!’

저 기사를 보고 대일병원 사람들, 특히 외과의 강민철 교수님이 또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이런 망할.’
***

진현의 걱정대로 대일병원은 난리가 났다.

홍보팀은 또 잽싸게 해당 뉴스를 메인에 팝업창으로 띄웠고, 그게 아니어도 워낙 대형 뉴스여서 병원의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퍼졌다.

“총리후보를 치료한 김진현이가 누구야? 우리 외과라고? 우리 외과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우리 외과 사람은 아니고… 그 인턴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인턴?”

“왜 있잖아. 괴물인턴이라고 불리는.”

“아, 그 괴물인턴 김진현! 그런데 아무리 괴물이라도 인턴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비행기 안에서 수술을 해
출혈 동맥을 잡다니.”

“그러니까. 하여튼 진짜 괴물이야.”

“김진현이는 그러면 우리 외과 전공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손재주가 좋은데. 원래 지망했던 피부과는 교수 아들을 뽑기로 한 상태니까.”

다들 괴물인턴 김진현이 무슨 전공을 할지 관심이 많았다.

“그래, 우리 외과 말고 다른 과를 하면 하늘이 준 재능을 썩히는 거지. 김진현이는 우리 외과를 해야 해.”

“걔가 우리 밑으로 들어오면 좋긴 하겠다. 일 엄청 잘하니 우리가 편할 것 아니야?”

“그러게. 태도도 착실하고 예의 바르고.”

모두 빼어난 실력과 흐뭇한 예의, 성실함을 갖춘 김진현이 외과를 전공하길 바랐다.

강민철 교수는 자식의 일처럼 흐뭇해했다.

“역시 김진현, 그놈은 생명을 살리는 외과를 해야 해.”

(다음 편에서 계속)

# 70

70. 전공 최종 결정 (2)

그리고 대일병원뿐 아니라 진현의 부모님들도 크게 기뻐했다.

“여보, 저 기사 보세요. 우리 진현이가 총리후보인 김창영 전 대법관을 치료했대요.”

부모님들은 진현이 마련해 준 새 아파트에서 기사를 봤다.

“김창영 전 대법관이면 청렴하다고 소문난 그분 아닌가?”


“네, 맞아요. 그나마 다들 기대하는 그분이에요.”

김창영 전 대법관은 구질구질한 사람들만 가득한 정치계에서 대중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경 받는 인물.

부모들은 진현이 그런 대단한 인물을 구한 것을 가슴 벅차게 자랑스러워했다.

“누구 닮아서 저렇게 잘났을까?”

“크흠, 당연히 날 닮은 거지.”

아버지는 가슴을 피며 말했다.

어머니가 핀잔을 줬다.

“진현이가 뭘 당신을 닮아요? 날 닮았지.”

“아니야, 날 닮았어.”

그들은 아들이 서로 자신을 닮았다고 주장했다. 행복한 다툼이었다.

“그런데 이제 곧 진현이 전공 정할 때 되지 않았나요?”

“난 피부과 말고 진현이가 외과 했으면 좋겠는데…….”

위암을 앓았던 경험 때문일까? 아버지는 진현이 사람을 살리는 과를 하길 바랐다.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아들이 피부과를 워낙 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 당신도. 물론 외과를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진현이가 하고 싶은 것 해야죠.”

“크흠,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진현이는 무슨 과를 해도 다 잘할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날 닮았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아들의 전공 결정을 기다렸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덧 겨울로 전공의 최종 선발 시기가 코앞이었던 것이다.

이제 곧 진현이 평생을 할 전공이 결정될 것이다.

정말로 곧.

***

물론 진현은 외과를 할 생각이 없었다.

들리는 모든 소문에 귀를 막고 오로지 피부과만 바라고 시험을 준비했다.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으면 돼. 할 수 있어.’

그러나 잠 잘 시간도 부족한 인턴 업무를 하며 공부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진현의 공부를 더욱


방해하는 복병이 있었다.

“저… 여기 대일병원에서 파견 온 김진현 선생님이란 분이 계신다던데…….”

한 환자의 물음에 접수처의 원무과 직원이 되물었다.

“네, 그런데요?”

“그분께 직접 진료를 받을 수는 없을까요?”

김진현은 정식 진료과장이 아닌, 파견 온 인턴에 불과하다.

원무과 직원은 당황해 다른 의사를 권유했다.

“김진현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들 계신데 그분들께 진료 받으시죠?”

“그렇긴 하지만… 몸이 안 좋아서 용한 분께 치료받고 싶어서… 저 일부러 김진현 선생님한테 진료 받으러 온


거예요.”

몇 번 더 권유해도 환자는 완강했다.

“아, 네. 그러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결국 원무과는 진현에게 연락을 했고, 연락을 받은 진현은 입을 벌렸다.

“아니, 전 인턴입니다. 다른 전문의 선생님들의 진료를 받게 하시죠.”

“설명했으나 너무 완강하셔서……. 어려울까요?”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으나, 찾아온 환자를 박정히 쫓아낼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진현은 그 환자를 담당해 치료했다.

“설사가 많이 심하십니까?”

“네, 배도 아프고요.”

“제가 누를 때 아프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진현은 청진기로 배를 청진 후 부드럽게 배를 눌러 압통(Tenderness)를 확인했다.

“네, 누를 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요.”

진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급성 장염으로 보입니다. 수액 치료를 받으면 금방 호전을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검진 결과 급성 장염 환자로 특별할 것은 없었고, 수액 치료 후 금방 좋아져 퇴원했다.


“감사합니다. 역시 용하시네요. 선생님 덕분에 좋아져 퇴원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환자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진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음엔 조심하세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총리 후보를 치료한 명의(名醫), 김진현 외과 선생님을 찾아 꾸역꾸역 환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여기 그 용한 선생님이 있다며?”

“그렇게 치료를 잘한다던데?”

“옆집 사는 김씨도 금방 좋아져서 퇴원했어.”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네.”

“내 조카가 대일병원에 직원으로 근무하는데 원래 대일병원에서 유명한 천재래.”

그렇게 환자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울산의 병원은 뜻하지 않은 호황에 희희낙락했다.

진현에게 아예 진료실까지 따로 마련해 주고 파견 근무하는 동안 추가 보너스까지 약속했다.

하지만 진현은 죽을 맛이었다.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보너스 필요 없어! 그냥 다른 의사한테 진료받으라고! 난 공부해야 해!’

울산의 병원은 대신 진현의 인턴 업무를 빼주었지만 결국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

진현이 인턴 업무를 안 하면 황문진 등이 고스란히 손해를 봐야 하니 안 할 수도 없다.

그렇게 인턴 업무에 추가로 환자까지 진료하니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제길, 공부해야 하는데.’

피부과에 합격하려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찾아온 환자들을 쫓아낼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진현은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복도를 걸어 다닐 때, 밥을 먹을 때… 정말 필사적인 의지로 공부했다. 잠을 잘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보름 넘게 지내자 진현은 머리가 핑 돌았다.


‘아, 진짜 힘들구나.’

최근에 가장 많이 잔 시간이 2 시간인가? 그것도 쪼개서 잔 거다.

‘연속해서 4 시간만 잤으면… 그러면 소원이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코 안이 화끈 뜨거워지더니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급히 휴지로 코를 막으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곧 시험이야.’

선발 시험은 12 월 초다. 이제 11 월 말이니 정말 얼마 안 남았다.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 피부과만 합격하면 이런 삶도 끝이야.’

그는 희망의 낙원을 꿈꾸듯 피부과를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그렇게 지내던 중이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다 잠깐 시간이 남아 책을 보던 때 누군가 똑똑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진현이 문을 열자 원무과장이 흥분한 얼굴로 들어왔다.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입니까?”

“김진현 선생님, 선생님을 뵈러 귀한 손님이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시죠?”

“아, 네. 괜찮습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그것도 귀한 손님이라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원무과장의 안내와 함께 곧 노년에 가까운 반백의 남자가 휠체어에 탄 채 들어왔다.

‘누구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을 더듬다 진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였다!

총리후보인 김창영 전(前) 대법관!

그가 진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직접 울산까지 내려온 것이다.


***

“아…….”

진현이 당황하여 입을 못 여는 사이 김창영 전 대법관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진현 선생님이시죠? 김창영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하셨죠?”

“아,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김창영 전 대법관이 고작 인턴에 불과한 진현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생명의 은인을 뵈러 왔습니다. 제 부족한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진현은 급히 마주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겸양에 전 대법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록 당시 의식은 없었지만, 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김진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전 죽은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진현이 아니었으면 국민의 신망을 받는 김창영 전 대법관은 그때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당시 만약 진현이 아닌 다른 외과의사가 비행기에 있었다면 김창영 전 대법관을 구할 수 있었을까?

글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퇴원은 며칠 전에 했지만, 의료진이 절대 안정을 요구해서…….”

“안 내려오셨어도 되는데… 정말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현은 고개를 저으며 겸양했다.

김창영은 슬쩍 웃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은혜를 잊으면 안 되죠. 그래도 김진현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사실 휠체어도 안
타도 되는데, 워낙 주변 사람들이 뭐라 그래서 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높은 직위의 사람에게 이런 감사를 받다니.

진현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고마워서 그렇습니다. 제 직업이 법관이라 그때 아무의 동의도 없이 수술을 결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잘 압니다. 만약 잘못되면 살인죄를 덮어쓸 수도 있었는데 김진현 선생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를 구해준 것입니다. 그 은혜는 고작 말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 말은 조금의 과장도 아니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 않고 상관없는 자신을 구해준 진현에게 김창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김진현 선생님.”

“……?”

김창영은 잔잔히 진현을 바라봤다.

“말로만 감사를 표하기에는 제가 너무 마음이 불편합니다. 혹시 제게 원하는 것은 없으신가요? 비록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겠습니다.”

“……!”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는 김창영이면 무엇을 요구해도 다 들어줄 수 있으리라.

그가 간절히 원하는 피부과 합격도.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제가 있었을 뿐입니다. 특별히 감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니 정말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말이었다.

그런 진현의 태도에 김창영은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젊지만 정말 대단해.’

그는 법조계의 판사로 오래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경험했다.

그래서 진실된 사람됨을 보는 눈 같은 게 있었다.

그런 그가 봤을 때, 이 앳된 청년은 그저 환자를 생각하는 참된 의사였다.

진정한 참된 의사.

‘하나님의 축복이군. 같은 비행기 안에 이런 참된 의사를 동승시켜 주다니.’

김창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테니,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김창영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쨌든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것 같군요. 바쁘실 테니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참, 김진현 선생님. 제가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진현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총리 후보인 김창영이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혹시 다음에 또 몸이 안 좋으면 그때도 선생님의 진료를 부탁해도 될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

# 71

71. 전공 최종 결정 (3)

진현은 싫었지만 거절을 할 근거가 없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어차피 피부과에 합격하면 볼 일 없겠지. 피부미용 받으러 올 일은 없을 테니.’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창영 전 대법관은 인사를 하고 휠체어를 끄는 비서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의전용 차량에 탑승한 김창영은 서울로 출발했다.

“곧바로 청와대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몸은 정말 괜찮으십니까?”

비서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네. 이제는 그냥 걸어 다녀도 될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다 저 김진현 선생님 덕분 아니겠나.”


김진현은 보답을 거절했지만, 법조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김창영은 원한은 잊어도 은혜를 잊는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 꼭 보답을 해야지.’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 젊은 의사 선생님이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저런 의사 선생님이 어찌 마음에 안 들 수 있겠나?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저도 나중에 저런 의사 선생한테 진료받고 싶더군요. 조사를 해보니 근무하는 대일병원 내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습니다. 나이와 경험을 초월한 천재에, 성품, 환자를 대하는 태도… 모두 최고의 평입니다.”

“인턴이라고 했지? 이제 곧 전공을 결정하겠군. 무슨 과에 지원한다고 하나?”

무슨 과더라?

병원 내에 김진현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워낙 많아서 비서는 잠깐 생각을 더듬은 후 답했다.

“외과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 어울려. 참된 의사야, 참된 의사.”

김창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과.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과였다.

저런 참된 의사가 외과를 해야지, 누가 하겠는가?

“지금도 이렇게 훌륭한데… 나중에는 어떤 외과의사가 될지 기대가 되는구만.”

김창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한편 참된 의사 김진현은 최후의 공부 스퍼트를 올렸다.

11 월이 끝나고, 12 월이 되자 진현은 부산의 자매병원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다행히 이번엔 진현을 찾는 환자들이 많이 없어서 그는 공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원서 접수기간이 다가왔다.

‘부산에서 원서 접수하러 서울까지 갈 순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겠구나.’

누구한테 부탁할까 고민했다.


황문진은 지금같이 지방에 있고…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친구인 이상민?

‘이상민… 됐어.’

이상민을 떠올리자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의 일이 떠올랐다.

‘100 억 줄 테니 의사를 그만두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이냐?’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지만 정말 속을 모르겠다.

아니, 친하게 지내오긴 한 건가?

이제 와서는 그가 자신을 친구라 생각하는지도 의문이었다.

‘혜미에게 부탁해야겠구나.’

어차피 자신의 원서를 접수할 때 같이 써서 내주면 되는 일이라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결정한 진현은 곧바로 전화를 했다.

띠리리.

몇 번의 전화벨과 함께 혜미가 전화를 받았다.

-진현아?!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밝은 톤의 목소리를 들으니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파견근무를 온 다음, 처음 듣는 목소리다.

자신은 바빠서 못했고, 혜미는… 그냥 연락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서운한 마음이 첨가 진현은 물었다.

“잘 지내냐? 연락도 한 번도 없고.”

-치이, 너도 한 번도 연락 안 했으면서. 잘 지냈어? 힘들지?

“응, 나야 잘 지낸다. 너는 별일 없고?”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났다. 20 분은 지난 것 같다.

‘아, 벌써 시간이.’

시계를 보고 진현이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혜미야,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싫어. 뭐 해줄 건데?

장난기 담긴 목소리다.

진현은 웃으며 답했다.

“밥 사줄게. 소고기.”

-또 소고기?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잠시 티격태격 후 혜미가 말했다.

-그래, 돌아오면 밥 꼭 사줘야 해. 무슨 부탁인데?

“나 피부과에 원서 좀 대리접수 해줘.”

-…….

그 말에 혜미는 잠시 답을 하지 않았다. 곧 수화기 너머로 걱정 담긴 답이 들렸다.

-피부과? 정말 괜찮겠어?

그녀는 그가 헛되이 낙방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현은 담담히 답했다.

“응, 괜찮다. 접수해줘.”

-…알았어. 대신 꼭 합격해야 해?

“걱정 말아라. 꼭 합격하마.”

-그래, 합격해서 소고기 사줘. 꼭. 꼭.

“그래.”

그 뒤로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했다.

용건은 진즉 끝났건만 왠지 통화하는 게 즐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응급실 복도에서 누군가 그를 불러 진현은 말했다.

“혜미야, 이만 끊어야겠다. 잘 지내고. 나중에 보자.”

진현은 옅은 아쉬움을 느끼며 전화를 끊고 업무를 처리하러 갔다.

한편 서울에서 진현과 통화를 끊은 혜미도 아쉬운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더 통화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멀어져야 하는데… 잘 안 되네.’

안다.

진현이 좋아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다.

진현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걸…….’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가 보고 싶었다.

***

이윽고 시간이 흘러, 대망의 레지던트 선발 시험이 다가왔다.

3,000 여 명의 전국의 모든 인턴은 마치 수능을 보듯 고등학교 시험장에 모여 시험을 쳤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로 구성된 시험은 매년 그렇듯 극악의 난이도였다.

이 시험의 결과에 따라 평생을 함께할 전공이 결정되니 다들 필사적으로 문제를 풀었다.

진현도 최선을 다해 풀었다.

‘이전 수능 생각나는군.’

7 년 전, 수능 때도 참 힘들었다.

난데없이 위궤양 천공이 생겨 죽을 뻔했으니까.

그래도 그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무려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훨씬 조건이 좋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레지던트 선발 시험은 실제 환자를 진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진현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특히 레지턴트 선발 시험의 가장 고난이도 과목은 외과다.

이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매년 그랬다.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는 그나마 책을 보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나오지만 외과는 실제 외과의사가 아니면 손도


못 대는 문제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실제 외과 과목 문제를 풀고 있다 보면 ‘외과 전문의 시험’에 낸 문제를 잘못 갖다 붙인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할 수 있어.’
그는 피부과 합격을 위해 굳은 의지로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4 과목의 시험이 끝난 후, 어린 의사, 인턴들은 불안, 초조, 기대, 후련함이 공존하는 얼굴로 시험장을
나왔다.

“진현아, 잘 봤어?”

황문진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그냥… 잘 모르겠다.”

“맨날 또 그런다.”

고등학교 때도 진현은 항상 이렇게 말하며 전교 1 등을 독차지했다.

“잘 봤을 거면서.”

“그냥 잘 봐선 안 되니까.”

황문진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당연히 진현은 시험을 잘 봤을 거다.

하지만, 그냥 잘 보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

압도적인 전국 수석을 해야 한다.

그는 급히 말했다.

“지, 진현이 너는 잘 봤을 거야. 만점일 거야.”

진현은 슬쩍 웃었다.

“그래, 고맙다.”

“오늘 우리 대충 일하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 시험 친 날이니 병원에서도 오늘은 특별히 오프를 준다고 했어.”

오늘은 인턴들에게 가장 뜻깊은 날이다.

병원마다 과마다 다르지만 적당히 근무를 빼주는 경우가 많고 진현과 황문진이 일하는 파견 병원도 그들에게 저녁
오프를 약속했다.

“그래, 술이나 먹자. 소고기랑.”

“내가 살게!”

황문진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울산을 떠나 부산에서 파견근무 중인 그들은 그날 저녁, 해운대로 술을 마시러 갔다.


“부산에선 회를 먹어야 하는데.”

“그래도 난 소고기가 좋다.”

“그래, 소고기 먹자. 내가 다 살게!”

황문진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는 아무래도 시험을 잘 본 표정이다.

해운대 해안가 뒤쪽에 위치한 유명한 암소갈비 집에 도착한 그들은 술잔을 기울였다.

“크… 쓰다.”

“너무 무리해서 먹지 마라.”

“아니야. 오늘 같이 시험 끝난 날 마셔야지. 고기도 맛있네.”

야들야들한 고기와 소스에 끓여먹는 면 요리는 나름 해운대 주민들의 명물이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둘은 고기를 먹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황문진이 술잔을 내려놓고 한참을 주저하다 말했다.

“진현아.”

“왜?”

“…….”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만약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야?”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글쎄.”

시험 성적을 떠나 붙을 확률보단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병원의 레지던트 선발은 수능으로 붙는 대학 지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공의 선발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출신 학교도, 대학 때 성적도, 시험 성적도, 인턴 인사평가도 아니다.

바로 선발하는 교수의 마음이었다.

다른 게 모두 훌륭해도, 선발을 하는 교수가 면접 같은 주관적인 점수 항목에서 최하점을 줘 떨어뜨리면 끝이었다.


이유야 대기 마련이다.

부조리가 가득한 병원의 한 단면이었다.

단 하나, 입맛에 안 맞아도 못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모든 점수의 총합이 압도적일 경우다.

그러면 떨어뜨리고 싶어도 뽑을 수밖에 없다.

진현이 노리고 있는 경우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기다릴 수밖에.’

정말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무려 11 년 동안이나.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차례다.

황문진이 위로하듯 말했다.

“잘 될 거야. 오늘은 다 잊고 술이나 먹자.”

“그래.”

둘은 건배를 하고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수능 때와 달리 전공의 선발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시험 뒤 형식적인 대일병원 원장단 면접을 거치고 일주일도 안 되어서 결과가 발표된다.

“진현아, 들었어?”

“뭐?”

“우리 부산에 근무 중이라 면접은 안 와도 된대. 그냥 인턴 인사 평가로 대체해 주겠데.”

“그래? 이상하군.”

원래 파견 근무 중이라도 면접은 전부 참석해야 한다.”

“아마 여기 병원에서 요청했나 봐. 우리가 서울 왔다 갔다 하면 진료공백이 생기니까. 요즘 이 병원 좀


어수선하잖아.”

그렇긴 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유행처럼 생기는 바이러스성 폐렴과 다중 충돌 사고들로 중한 환자는 넘치는데, 마침 의사 한
명이 사표를 냈다.

만약 인턴들이 면접으로 서울로 빠지면 병원은 완전히 마비될 것이다.

‘뭐, 예외적인 일인 것 같지만, 어차피 면접은 형식적인 거고. 인턴 인사평가로 대체해 주면 나쁠 것은 없지.

황문진과 진현 둘 모두 인턴 인사평가는 최고점에 가까웠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드디어 결과 발표 날이 다가왔다.

먼저 황문진이 컴퓨터로 결과를 확인했다.

<대일병원 외과 황문진 합격.>

예상대로 합격이었다.

“축하한다.”

“응!”

황문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환호성을 지르려다 진현을 의식해 자제했다.

“진현아, 너 확인해봐.”

“그래.”

진현은 컴퓨터로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마우스 커서가 모레시계로 변했다.

1 초도 남짓한, 짧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화면이 바뀌었다.

결과 발표 화면이었다.

진현과 황문진은 침을 삼키며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 계속)

# 72

72. 전공 최종 결정 (4)

<김진현>

전공의 선발 시험 점수 : 48/50
석차 : 1/2987

50 점 만점에 총점 48 점!

정말 거의 만점에 육박하는 점수를 받은 것이다.

석차는 당연히 전국 1 등이었다.

그런데… 둘은 신음을 흘렸다.

“진현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너 피부과 쓴 것 아니었어?”

“피부과 쓴 것 맞다.”

“그런데…….”

황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거 왜?”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일병원 외과 김진현 합격.>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눈이 잘못 됐나 슥슥 비비기도 하고, 화면을 새로고침 했다.

하지만 똑같았다.

피부과가 아니라 외과.

이 두 글자만 화면에 나타났다.

“이, 이게 무슨……?”

진현은 급히 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진현아?

“혜미야, 너 내 원서 피부과로 접수했지?”

-응, 피부과로 접수했는데? 왜?

“피부과가 아니라 외과로 접수가 되어 있어.”


-뭐?!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 분명 피부과로 접수했어!

진현은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혜미가 잘못 접수했을 리는 없을 거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알겠다. 내가 확인해볼게. 끊는다.”

-어, 나도 확인해볼게!

진현은 이번에는 원서 지원을 담당하는 교육수련부에 전화를 걸었다.

합격 발표로 문의 전화가 많은지 통화 중이었다.

‘이런.’

진현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고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에나 전화가 연결되었다.

-네, 대일병원 교육수련부입니다.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합격 발표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그는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분명 외과로 접수되어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희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진현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확인해서 뭐한단 말인가? 이미 합격자 발표가 다 나왔는데!

‘제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외과라고?’

“문진아, 정말 미안한데. 나 오늘 하루만 내 업무를 맡아주면 안 되겠냐?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응, 빨리 가봐.”

황문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외과라니!
***

“죄송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야 당연히 선생님이 외과에 지원한
줄 알고…….”

교육수련부 직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진땀을 흘리며 설명했다.

무슨 문제가 생겼던 것인지 중간에 진현의 지원과가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외과로 전산에 접수가 됐는데, 담당자는 유명인인 진현이 당연히 외과에 지원하는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넘겼단 거다.

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자신의 지원과가 바뀌다니?

전무후무한, 초유의 사고였다.

더구나 교육수련부는 어떤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전 외과가 아니라 피부과 지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낙방하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꼭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선발 시험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런 착오로 낙방하게 되다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교육수련부 직원은 고개를 숙일 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미… 전부 합격자 통보가 전달돼서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쪽에서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이런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꼭 책임져서 조치를
취하십시오.”

진현은 평소답지 않게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당연했다. 평생을 함께할 전공과 관련된 일이다.

고작 이런 일로 꿈을 꺾을 위기에 처하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직원도 답이 없었다.

“일단 피부과와 이야기해서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김진현 선생님을 합격시키려면, 이미 합격한
다른 선생님을 불합격시켜야 해서…….”

레지던트 선발은 대학 입학시험이 아니다.

각 학회에서 병원별로 배정해 준 TO 대로 전공자를 뽑는 것으로 대학 입학시험처럼 추가 합격을 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피부과에 들어가려면 기존 합격자를 떨어뜨려야 해. 하지만…….’

진현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피부과에 합격한 다른 선생님이라면, 신라대 의대 출신의 피부과 교수의 친아들이다.

과연 피부과에서 친아들을 떨어뜨리며 진현을 구제해줄까?

“하하.”

교육수련부에서 밖으로 나온 진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길!”

최선을 다했건만 왜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빌어먹을 일이었다.

***

별 소득 없이 부산으로 내려온 진현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부산 파견 병원 당직실에 누워 멍하니 생각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

교육수련부에서는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고 했으나, 진현은 기대하지 않았다.

잘 해결될 리가 없었다.

물론 법원에 고소해 구제 요청을 해볼 수 있겠으나, 처리하는데 2 년은 넘게 걸린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 난 결국 피부과를 할 운명이 아니었던 건가.’

한국대 병원에서도 억울하게 피부과 교수에게 찍혀 쫓겨나듯 대일병원으로 왔는데 또 이런 꼴이라니.

보이지 않는 운명이 피부과에서 그를 밀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더구나 다른 과도 아니라 외과에 합격하다니.’

착오가 생겨도 하필 외과에 합격하다니.

그것도 웃겼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외과를 권유할 때 완강히 거부했건만 결국 외과에 합격한 것이다.

‘하. 그냥 외과를 해야 하는 건가…….’


물론 외과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은밀한 곳에 위치한 그의 깊은 본마음은 수술과 사람을 살리는 외과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함으로 짊어져야 할 고된 삶이 막막했다.

고된 길을 걸어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가능성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실제로 지난 삶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건만 결국 경쟁에서 밀리고, 개업 실패로 파산하지 않았던가?

‘하아… 모르겠다. 결국 난 외과를 할 운명인 것인가…….’

물론 정 피부과를 하고 싶다면 이번 년도에 외과 합격을 포기하고, 다음에 피부과 재수를 하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원하는 과를 위해 재수를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재수를 한다고 해도… 피부과에 붙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의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 피부과에 떨어진 게 아니었다.

그저 운명같이 떨어진 것이다.

왠지 진현은 재수를 해도 똑같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근거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지원과가 바뀐 걸까? 도대체 왜? 정말로 전산 오류?’

교육수련부는 아마 전산 사고가 생겼던 것 같다고 하지만… 정말일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는데 하필 자신에게?

‘누가 조작이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답답한 마음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누가 조작을 한단 말인가?

교육수련부를 포함한 레지던트 선발의 일련 과정에 손을 쓸 수 있는 인물이 개입했다면 모를까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 정도의 인물이 고작 인턴인 자신의 지원과를 조작할 리도 없고.

그러면 원서를 접수한 혜미?

‘아니야. 혜미는 절대 아니야.’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리도 없다.

“하아.”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진현은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혹시 김진현 선생님 핸드폰입니까?

“네,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총리실의 이윤서 비서라고 합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파견 근무 중인 부산 성희병원 앞인데 혹시 잠깐 뵐 수 있으십니까?

그 말에 진현은 깜짝 놀랐다.

총리면 이전 인연이 있던 김창영 전(前) 대법관을 뜻한다.

그런데 총리실의 비서가 왜 나를?

***

“네, 잠깐 기다리십시오.”

가운을 입은 채 병원 로비 밖으로 나오니 이전 김창영을 모시고 울산에 온 비서가 눈에 들어왔다.

“김진현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총리실의 이윤서 비서는 깍듯한 태도로 진현을 맞았다.

“안녕히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진 못했지만 진현은 대충 대답했다.

“아, 네. 그런데……?”

비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외과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

진현은 속으로 입을 벌렸다.

설마 여기까지 온 게?

“네, 총리께서 공무로 직접 오시지 못해 저를 대신 보냈습니다. 외과 합격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
그러면서 그는 두툼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작은 마음의 선물입니다. 이전 은혜도 제대로 갚지 못해 총리께서 많이 속상해하셨으니, 부디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

부담스러운 얼굴로 상자를 여니, 확대경이 달린 안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술용 확대경, 루뻬(Loupe).’

수술용 확대경인 루뻬는 수술 필드를 2.5 배에서 5 배 정도 확대해 보여주는 외과의사의 필수품이었다.

이전 삶에서 진현도 루뻬를 썼었다.

몇 십만 원짜리 보급품으로.

하지만 총리가 선물로 산 루뻬는 예전의 그가 쓰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독일제 최상품이었다.

정확한 가격은 몰라도 수백만 원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고가의 선물이다.

더구나 총리는 그저 잠깐 스쳐 간 인연일 뿐 자신의 부모도, 친척도, 스승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비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총리께서는 선생님의 외과 합격 소식에 정말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이전 도와주신


것도 보답을 하지 못했는데 이 선물도 안 받으시면 많이 실망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루뻬를 통해 더 많은 환자를 구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안


받으시면 제가 서울에 가서 혼납니다.”

“…….”

몇 번 더 거절했으나, 비서는 완강했다. 결국 진현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외과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

비서는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홀로 남은 진현은 멍하니 선물을 바라봤다.

‘이 루뻬를 통해 더 많은 환자를 구하라고?’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진현아.”

“……!”

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지금 충격으로 환청을 듣는 건가?

하지만 환청이 아니었다.

“진현아. 어떻게 해… 피부과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떨리는 목소리.

혜미였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현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너 보려고 급하게 내려왔어. 미안… 내가 접수한 후 제대로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

그녀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현의 접수 오류를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야.”

어떻게 그게 그녀의 잘못이겠는가?

굳이 따지면 확인을 안 한 자신의 멍청한 잘못이지.

“아, 아니야. 내가 확인했어야 하는데……! 너 그렇게 피부과를 하고 싶어 했는데 내가 확인을 안 해서……!”

혜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자신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진현은 울컥 가슴이 흔들렸다.

실제로 혜미의 잘못이라도 어떻게 내가 그녀를 원망할까?

“괜찮아. 정말로.”
“하, 하지만……!”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결국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방울로 시작한 그 눈물은 두 방울, 세 방울… 점차 봇물 터지듯 터졌다.

“미, 미안… 내가 잘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그 울음에 진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현아?”

그가 갑작스레 가까워지자 혜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순간 진현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지, 진현아?”

“정말 괜찮아. 그러니 울지 마라.”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저 자신을 달래기 위한 의미 없는 가벼운 포옹임을 알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박동 소리가 새어 나가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진현은 다시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자신의 귀에 닿는 목소리에 혜미는 별이 명멸하듯 수천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으나, 단 한마디의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

“으, 응…….”

그녀가 진정된 듯하자 진현은 손을 풀고 다시 떨어졌다.

“…….”

갑작스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혜미는 빨갛게 변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진현의 얼굴도 보이지 않게 붉어졌다.

‘그냥 달래려고 한 것인데…….’

아니, 그냥 달래려고 한 게 맞나?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자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손끝에 남아있는 그녀의 감촉이 떠올라 진현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미, 미안. 달래려고 한 건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그, 그… 하여튼 이번 접수 오류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내가 꼭 확인할게!”

마치 교과서를 읽듯 딱딱히 굳은 목소리다.

뭔가 어색함이 더 깊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진현의 귀에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온 것 같군.”

“……!”

진현과 혜미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서 있었다.

간이식의 국내 최고의 대가이자 진현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강민철 교수였다.

“잘 지냈나, 김진현 선생?”

그는 우람한 얼굴로 인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3

73. 그 이름의 시작

무려 강민철 교수님까지 왔는데, 밖에 세워놓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장소를 이동했다.

마침 오늘 진현의 저녁 근무는 오프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식사를 한 사람이 없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내가 사지!”

그렇게 이야기한 강민철 교수는 자신이 아는 부산의 고급 횟집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1 인당 몇십만 원을 가뿐히 넘는 가격답게 음식은 입에서 살살 녹았지만 진현은 마음이 불편했다.

강민철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외과 합격을 축하하러 왔구나.’

하늘같이 높은 교수가 고작 인턴에 불과한 자신을 축하하러 부산까지 오다니.


감동스러운 마음이 일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강민철이 혜미를 바라봤다.

“자네도 술 먹나?”

“아, 네. 교수님.”

졸지에 같이 따라온 혜미가 공손히 정종을 받았다.

그런데 강민철이 그녀를 보고 흐뭇한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군. 그때 그 조그만 녀석이 이렇게 예쁘게 크다니.”

“네?”

혜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 아시나?

강민철은 술을 털어놓고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네 애비 이종근이랑 의대랑 외과 의국(醫局) 동기야. 너 어렸을 때 내가 목마도 태우고


했었어.”

“아…….”

그의 말처럼 강민철과 이사장 이종근은 의대 동기였고 한때는 제법 친한 사이였다.

물론 지금은 사이가 벌어질 데로 벌어진 상태지만 말이다.

“범수 그놈도 참 똘똘했는데 말이야. 에잉.”

강민철은 자살한 혜미의 오빠, 이범수도 알고 있었다.

단, 그도 밖에서 자란 이상민에 대해선 몰랐다.

혜미는 속으로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얼핏 생각이 나는 것도 같다.

아주 어렸을 적, 그녀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행복한 때였다.

그때는 어머니도 살아계셨고, 아버지 이종근도 지금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행복일 뿐이었다.

이상민과 이상민의 어머니의 존재가 드러나고 모든 것이 변했다.

아버지 이종근은 감춰온 여성편력과 폭력성을 숨김없이 드러냈고, 그녀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자살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그녀의 할아버지가 개입했으나, 몸과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상태로 너무나
늦은 때였다.

그때 강민철이 물었다.

“그런데 둘은 무슨 사이인가? 사귀는 사이?”

진현과 혜미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아, 아닙니다.”

“…….”

진현은 급히 부정했고, 혜미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강민철은 호탕하게 웃었다.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래. 좋을 때군. 잘해보게.”

푹 숙인 혜미의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같이 변했다.

진현은 곤란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강민철은 주름을 찌푸렸다.

“어떻게 왔냐고? 몰라서 물어? 김진현 선생, 당신 축하해주려고 무거운 몸 끌고 온 거잖아.”

진현은 눈을 감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였다.

“뭐, 아예 자네 때문에 온 것은 아니고. 심근경색 요양을 위해 휴직 중인데 할 일도 없고, 자식 놈이 이 근처에


취직을 해서 겸사겸사 볼까 해서 왔지. 그나저나 자네는 외과에 합격했으면 나한테 진작 연락했어야지. 이 늙은
몸이 먼저 오게 만들어?”

강민철은 서운하다는 듯 질책했다.

진현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아직 외과를 하겠다고 결정한 게 아니다.

강민철이 진현의 잔에 정종을 가득 따랐다.

“하여튼 어울리지도 않는 피부과를 한다고 그렇게 내 속을 썩이더니… 늦게라도 외과를 결정한 것 축하하네. 암,
자네 같은 사람은 피부과 같은 과가 아니라 우리 외과를 해야지.”

강민철은 진현이 외과를 스스로 결정해서 지원했다 알고 있었다.

진현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교수님, 사실 저는 외과를 지원한 게 아닙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게…….”

진현은 자신에게 벌어진 접수사고를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강민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 그러면 그냥 접수 사고였다고?”

“네, 죄송합니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고작 인턴에 불과한 자신의 합격 소식에 이렇게 달려와 주었는데 면목이 없었다.

‘화내시겠지?’

진현은 그가 실망감에 버럭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강민철은 의외의 반응을 하였다.

담배를 꺼내 물더니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이다.

“잘됐군.”

“네?”

“이건 뭐, 자네가 외과를 하라는 하늘의 뜻이구먼. 그러니 잔말 말고 그냥 외과를 하게.”

진현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데?

담배 연기를 뿜은 강민철은 말을 이었다.

“자네 한국대 병원 피부과에서도 잘못한 것도 없이 쫓겨났잖아. 그 쪼잔한 김주흥이 눈에 찍혀서.”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녀 강민철 교수는 한국대 김주흥 교수를 알고 있었다.

강민철이 김주흥 교수보다 의대 2 년 선배였다.

“한국대 병원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팔자에도 없는 피부과를 하려니 계속 그 꼴이 나는 거야. 잔말


말고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외과를 하게.”

“하, 하지만…….”

갑자기 난데없이 무슨 놈의 하늘의 뜻?


진현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으나 강민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네는 도대체 왜 팔자에도 없는 피부과를 하려는 건데?”

“그건…….”

진현은 답을 못했다.

좋아해서?

아니, 그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는 피부과란 전공 자체에 관심도, 끌림도 없다.

피부과를 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싶어서다.

물론 속물적인 생각인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게 뭐?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게 뭐가 나쁜가?

강민철은 화내지 않았다.

본인은 외과 외골수지만 진현의 생각을 이해했다.

대신 설명했다.

“피부과 하면 편할 것 같아?”

“네?”

“피부과 하면 다 성공할 것 같아?”

“…….”

강민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나 이야기해 줄까? 내가 경험상 봤을 때, 원래 의대 때 공부 잘하던 놈은 돈 벌려 개업하면 망해. 공부


못하던 놈이 개업해서 성공하지. 이런 말 미안하지만 자넨 피부과랑 하나도 안 어울려. 개업하면 망할 거야.”

완전 망하라고 저주하는 말투였다.

“…….”

진현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니, 뭐. 해보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이야기할 것은 뭐람?

“그리고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피부과 개업하면 하나도 안 편해. 결국 개인 사업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거든. 휴가도 제대로 못 가.”
“…….”

“그리고 생각보다 외과도 별로 안 힘들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외과가 별로 안 힘들다니.

진현의 의아한 얼굴을 강민철이 설명했다.

“아, 물론 처음에 레지던트 과정은 무척 힘들지. 그리고 레지던트가 끝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힘들고.
하지만 자리를 잡으면 별로 안 힘들어. 잘하면 돈도 잘 벌 수 있고.”

“…….”

“나 봐. 한 번 심장병 앓았다고 지금까지 쉬고 있잖아. 이제 곧 요양하러 미국으로 1 년 교환 교수로 파견 가.


교환교수 가서 뭐하겠어? 놀지. 개업하면 이게 가능할 것 같아? 정확히 말하긴 그래도 월급도 적지 않아.
정년퇴직하면 교직원 연금도 나오고.”

확실히 그렇긴 하다.

그리고 강민철 교수의 수입은 웬만한 개업 의사보다 못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건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교수이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이전 삶에서 그렇게 노력하고 경쟁했지만 실패한.

그런데 강민철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외과로 와. 너는 내가 끌어주겠다.”

“……!”

“그렇지 않아도 네가 수련을 마칠 때쯤 교수 자리가 하나 날 거야. 너 정도면 자격이 충분해. 내가 너 내


후계자로 만든다. 계집애 같은 걱정은 접어두고 잔말 말고 따라와.”

“……!”

진현의 눈이 떨렸다.

호언장담보다도 자신을 향한 강민철의 마음이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강민철은 간이식 분야 국내 최고의 대가이자 그 탁월한 실력 때문에 병원 내에서도 아무도 못 건드리는 인물이다.

이사장 이종근도 강민철에게만큼은 함부로 못했다.

그렇게 대단한 그가 인턴에 불과한 자신을 이렇게나 챙기다니.

고작 축하 인사를 하러 부산까지 내려오고…….

진현은 고마움에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식사를 마친 후, 혜미는 서울로 올라가고 강민철 교수는 아들의 집으로 향했다.

진현은 홀로 해운대 해안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외과라…….’

강민철이 떠나기 전 한 말이 떠올랐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자넨 수술과 사람을 살리는 걸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걸 해야지!’

그 말이 옳았다.

그는 수술을 좋아했다.

그 사선 속 긴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안락한 삶인데.’

외과를 선택하면 그런 삶과는 까마득히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때였다.

띠링!

핸드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구지? 최대원 교수님?’

-진현군, 외과 합격을 축하하네. 물론 내과를 안 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난 자네가 피부과보단 외과에 더


어울린다 생각하네. 좋은 외과의사 될 거라 믿네, 스승 최대원이.

모르는 사이 문자가 더 와 있었다.

부모님이 보낸 문자도 있었다.

-아들, 외과 합격 축하해! 이 엄마는 아들이 외과에 합격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단다! 항상 사랑해.

-외과 합격을 축하한다. 네가 내 아들인 게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사랑한다. 애비가.

짧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문자들에 진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외과를 전공하길 원했었지…….’

부모님이 기뻐하는 문자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아…….”

그는 백사장 근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직이 파도치는 겨울바다를 바라봤다.

찰싹찰싹.

고요한 바다에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넌 외과를 좋아하잖아.’

그 말이 다시 한번 가슴에 울렸다.

기억 속 이전의 삶들이 떠올랐다.

힘들고 괴로웠던 나날들… 그러나 동시에 보람찼던 시간들.

당시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들 때문이었다.

강민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시 가슴을 울렸다.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외과잖아.’

진현은 중얼거렸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

하지만…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정말로 그런 것일까?

진현은 씁쓸히 웃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답은 ‘아니’였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만 원했다면 병원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고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고생스럽게 의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과거의 지식을 가지고 제약회사들을 돌아다니며 돈을 쓸어 담고 건물을 샀겠지.

그래, 이 순간 그는 인정했다.

마음속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외과였다.

애써 외면했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

찰싹찰싹.
바닷가에 고요한 파도가 들락거렸다.

진현은 그 파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성공만 한다면 외과도 나쁘지 않아. 아니, 좋아. 하지만…….”

문제는 성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 삶의 기억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이번엔 또 다른 기억이었다.

‘우리 병원에서 나가주게.’

‘빚은 어떻게 갚을 거야?!’

외과의사의 삶을 살면서 좋았던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삶의 끝은 비참했다.

이번에도 그런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닐까?

이전의 실패가 자꾸만 상처로 그를 붙들었다.

어쩌면 그가 피부과를 원했던 것도, 억지로 외과의 길을 외면했던 것도 이전 삶에서 각인된 트라우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김진현,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냐? 지난번 실패는 지난번 실패고. 이번엔 달라.”

그는 강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성공해버리면 되잖아? 난 이전 삶의 내가 아니야. 성공하자. 그것도 그냥 성공이 아닌 최고로 잘나가는


외과의사가 되자. 그러면 되잖아?”

그는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바다 위 밤하늘은 끝없이 광활했다.

그래, 잘나가는 외과의사가 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모두 해결이다.

‘피부과의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자리를 잡기 전, 처음 레지던트 과정은 끔찍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진현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 과정만 버티면, 그래서 성공한 외과의사로 자리만 잘 잡으면 좀 나을 거야.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면 어쩌면
개인사업자인 피부과 의사보다 더 나을 수도 있어.’

물론 아무리 대학병원의 교수라도 피부과 의사보다 편할 가능성은 적었다.


잘나가면 더욱더 바쁠 확률이 높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거 뭐, 아무렴 어떤가?

그는 웃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힘내자, 김진현. 할 수 있어.’

그렇게 어느 겨울날, 잔잔한 바닷가에서 그는 결심했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 외과학계의 역사를 바꿀 결심이었다.

동시에 ‘미라클(Miracle) 김.’

그 기적 같은 이름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4

74. 신입 레지던트 (1)

대일병원 이사장의 아들 이상민도 외과에 합격했다.

진현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상민도 평판이 굉장히 좋았다.

뛰어난 실력, 빼어난 외모, 착실한 태도… 평판이 안 좋으면 그게 이상하다.

“외과 합격했다며? 축하해. 앞으로 고생하겠네.”

근무하는 과에서 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이상민은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고생하겠네.”

“잘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뭐, 이상민 선생은 워낙 다 잘하니까. 외과에서도 잘하겠지. 하여튼 수고해.”

“감사합니다.”

덕담을 들은 이상민은 다시 업무를 하다 담당 의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어디 잠시만 다녀와도 될까요?”


“어, 갔다 와. 지금 시간 좀 남으니.”

자리에서 일어난 이상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지하 4 층 깊은 곳에 위치한 간부 회의실.

이미 한 사람이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중년의 남자는 이상민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기획실장님.”

“네.”

중년 남자, 대일병원의 핵심 실력자이자 기획실장인 송병수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 무리가 있었을 텐데 이번 일 감사해요.”

“아닙니다. 어차피 간단한 조작이었습니다.”

이상민은 깊은 미소를 지었다.

“혹시 따로 더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송병수는 과할 정도로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당연했다.

이상민은 이종근의 친아들로 향후 빠른 속도로 대일병원의 후계자로 자리 잡을 자이니 미리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특별히… 지금은 괜찮아요.”

“네.”

“병원 이사회의 동태는요?”

“그게…….”

송병수는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비슷합니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대일 그룹 가문의 일원들로 이루어진 이사회는 이상민에게 적대적이었다.

더구나 요즘엔…….
“이혜미 이사께서 특히 적대적이십니다.”

“흐음…….”

이상민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이혜미는 서자인 그와 다르게 대일병원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권한을 가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특히 이혜미, 내 착한 동생은.”

그는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그 침묵이 불편한지 송병수가 주저하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어째서 굳이 김진현 선생을 외과로 오게 손을 쓰라 하신 건지…….”

송병수는 이상민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김진현은 병원 내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물로 외과를 전공하게 될 시 필연적으로 이상민과 경쟁하게 된다.

이상민도 탁월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김진현이 지금까지 벌인 일들을 살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정말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만약 경쟁에서 밀리면 이사회에서 또 트집을 잡을 텐데. 차라리 피부과로 보내거나 불합격을 시키지. 왜?’

이상민의 얼굴에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

가면 같은 미소가 없어진 후 나타난 차가운 표정에 송병수는 흠칫 놀랐다.

“내가 왜 친구 김진현을 외과에 오게 했는지 궁금하십니까?”

“…….”

“기획실장님은 혹시 누군가에게 11 년이나 져본 적이 있습니까?”

송병수는 답하지 못했다.

이상민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괜한 것을 물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그만 가보세요.”


“네.”

기획실장은 깍듯이 인사하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상민은 치익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왜 김진현을 데려왔냐고? 간단하지.”

망가뜨리려고.

이상민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김진현을 만나고 나서 한 번도 그를 이긴 적이 없다. 항상 졌다.

그런데 그게 11 년이나 반복되다 보니 삶의 목표가 하나 생겨 버렸다.

“반드시 이기겠어.”

그는 나직이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래서 그를 처절히 짓밟고 망가뜨려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겠다.

“그런데 김진현, 네가 피부과로 가면 난 영원히 너를 이길 기회가 없잖아? 응? 짓밟고 망가뜨려야 하는데. 다른


곳으로 도망가면 반칙이지. 안 그래?”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뒤 인턴 생활이 빠르게 저물어 갔다.

2 월 말이 되어 이제 레지던트에 접어들기 직전, 강민철 교수는 교환교수로 미국을 향해 출국했다.

“조심히 갔다 오십시오.”

진현은 공항에서 강민철을 배웅했다.

“바쁜데 뭘 이렇게 나오나? 얼른 들어가서 일해.”

“오프입니다.”

어차피 주말이고, 항상 자신을 챙겨준 강민철이니 이런 배웅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강민철도 말과 다르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잘 배우고 있고. 돌아오면 죽도록 굴릴 테니.”

진현은 웃었다.

“네, 교수님도 건강하십시오. 특히 술, 담배 조심하십시오.”


강민철은 심근경색 후에도 술, 담배를 줄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재발의 고위험군이다.

“어차피 쉬러 가는 거니 걱정 마. 교환교수로 가면 할 일 아무것도 없어.”

강민철이 가는 병원은 세인트 죠셉 병원.

메사추세츠 제너럴(하버드), 메이요, 엠디엠더슨, 존스홉킨스과 더불어 미국 최고로 꼽히는 병원 중 하나다.

대일병원 외과는 그 세인트 죠셉 병원과 협약을 맺어 정기적으로 서로 교환교수를 파견하고 있었다.

기한은 1 년.

강민철은 1 년 뒤에 돌아올 것이다.

“자네도 교환교수로 나중에 가야지.”

진현은 어색히 웃었다.

“그럼 금방 갔다 올 테니 열심히 배우고 있게.”

강민철은 흡족한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1 년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간다.

‘갔다 오면 잘 가르쳐야지.’

강민철이 생각하는 진현은 한마디로 ‘천재’였다.

그것도 천재 중의 천재.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원석이라도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강민철은 기꺼이 원석을 다듬는 세공사가 될 생각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지만 비행기가 한국을 벗어날 때까지 강민철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 짧은 1 년 동안, 진현이 대일병원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정말로.

***

그리고 인턴이 끝나기 전, 이런 일도 있었다.


황문진이 혜미에게 고백을 했다.

“조, 좋아해. 혜미야…….”

병원 근처를 흐르는 탄천(炭川)에서 황문진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어, 어… 응.”

혜미는 말을 더듬었다.

다른 사람에게 받는 고백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학생시절부터 무수히 많았다.

인턴 생활 중에도 몇 번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답은 7 년째 항상 같았다.

“미안, 나는…….”

그런데 황문진이 급히 그녀의 대답을 가로챘다.

“아, 알아! 말하지 않아도.”

“…….”

“진현이 좋아하지?”

“…응.”

그녀는 미안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문진은 한숨을 푹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알고 있어. 네가 진현이 좋아하는 것… 그래도 고백하고 싶었어. 앞으로 인턴 생활 끝나 전공이 갈리면
지금처럼 자주 보진 못할 테니까… 내가 아쉬움이 남아서.”

그는 밝게 웃었다.

“차일 줄 알고 고백한 거니 신경 쓰지 마.”

“…응, 미안.”

“앞으로도 불편한 없이 친하게 지내자. 알았지?”

혜미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도 괜찮겠어?”

그녀도 벌써 7 년째 해봐서 그 고통을 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저 친구로 친하게 지내는 것은 고문처럼 괴롭다.

그 고통을 알기에 그녀는 가급적 자신에게 고백한 사람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희망고문은 정말정말 나쁘니까.

‘그러니까 진현이가 나빠.’

결론이 어째서 그렇게 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진현이가 나빴다.

“그러면 먼저 가볼게. 다음에 술이나 먹자. 네가 좋아하는 소주로.”

“…응.”

황문진이 먼저 등을 돌렸다.

그는 탄천을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진현, 이 나쁜 놈.’

가장 친하고, 둘도 없는 친구지만.

이번엔 그가 나빴다.

‘이연희 간호사랑 사귈 거면 사귈 것이지. 왜 혜미는 안 놔줘서.’

김진현의 생각을 모르겠다.

이연희와 썸을 타는 것은 확실한데 사귀지는 않는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아무리 실력이 좋으면 뭐해.’

황문진은 속으로 김진현을 욕했다.

‘모르겠다. 술이나 마셔야지. 김진현 그 나쁜 놈보고 쏘라 해야겠다.’

황문진은 김진현에게 잔뜩 얻어먹기로 결정했다.

그가 잘못한 날이니까.

그리고 인턴 생활이 끝나고 레지던트 생활이 시작됐다.

***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시절 친한 4 명 중, 일진 김철우를 제외하고 김진현, 이상민, 황문진 모두 대일병원


외과에 들어갔다.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형사 일하다 다쳐도 걱정 없겠네.

경찰시험을 통과해 새내기 형사로 일하는 김철우가 전화 너머로 키득거렸다.


-다들 친하게 잘 지내라고. 다음에 놀러 갈 테니.

하지만 그 말과 다르게 3 명은 친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상민이 문제였다.

“진현아, 앞으로도 잘하자.”

이상민은 생글생글 웃으며 진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 그래. 잘하자.”

진현은 인사를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해.’

특별히 싸운 것은 아니고 만나면 대화도 잘하고 그러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속에 시커먼 것을 감추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느낌인가…….’

그것 외에 외과 생활은 특별히 문제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좋았다.

어차피 한 번 다 해봤던 내용이어서 따로 적응할 필요도 없었고, 위의 선생님들 분위기도 따뜻했다.

“진현아, 처음이라 힘들지?”

같은 파트의 고년 차 레지던트, 강석훈이 따스하게 물었다.

“처음엔 다 힘들어. 힘내고.”

“괜찮습니다.”

“그래도 네가 잘해주니 내가 편하다.”

병원마다, 과마다 다르지만 보통 교수 밑에 저년 차 레지던트와 고년 차 레지던트가 한 팀을 이루어 진료한다.

저년 차 레지던트가 궂은일을 하고, 고년 차 레지던트는 저년 차 레지던트가 못 하는 일을 커버해 주는 형식이다.

따라서 저년 차 레지던트가 일을 잘하면 고년 차 레지던트는 꿀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 보배 같은 녀석.’

고년 차 레지던트 강석훈은 보물을 보듯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과 한 팀을 이루니 자신은 할 일이 전혀 없었다.

인턴 때부터 괴물이라 소문난 녀석답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더구나 태도도 무척 겸손하고 환자들에게도 친절했다.


칭찬을 하면,

“아닙니다. 다 선생님께 배운 덕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겸양했다.

덕분에 다른 고년 차 레지던트들은 강석훈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다른 신입 레지던트 1 년 차를 데리고 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럽다. 내 아래 레지던트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데.”

“원래 처음 1 년 차가 그렇지, 뭐. 김진현 그놈이 대단한 거지.”

그래서 대학 병원은 3, 4 월에 진료를 피하란 우스갯소리도 있다.

진료의 핵심 축을 담당하는 저년 차 레지던트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난 아래 레지던트가 아무것도 몰라 모든 일을 혼자 다 해야 해. 1 년 차로 돌아간 기분이라니까. 힘들어


죽겠다.”

따라서 다른 고년 차 레지던트들이 진현과 한 팀인 강석훈에게 항의했다.

“야, 너만 독차지하지 말고 나도 김진현 좀 데려가자.”

“안 돼. 이번 달은 내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번 달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놀려고?”

“에헴, 놀기는. 나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고충은 개뿔. 맨날 누워서 잠만 자더만. 월급을 받았으면 일을 해!”

“팀은 일심동체 몰라? 김진현이 일하니 내가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고년 차 레지던트들은 진현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5

75. 신입 레지던트 (2)

한편 진현은 뒤에서 그를 두고 벌어지는 쟁탈전은 까마득히 모르고 맡겨진 일에만 충실했다.

‘외과 1 년 차 생활을 다시 하려니 힘들긴 힘들구나.’

일은 어려울 것이 없는데 몸이 힘들었다.

‘대일병원에도 100 일 당직이 있다니.’


이전 삶 때도 경험했던 지옥의 100 일 당직.

100 일 동안 단 하루도 퇴근하지 못하고 당직을 서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처음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니, 100 일 동안 퇴근하지 말고 배우라는 의미인데… 몸이 엄청 힘들다.

그렇게 100 일이 끝나면 휴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2 주에 한 번 정도?

저녁 8-9 시 넘어서 짧은 퇴근만 준다.

출근은 다음 날 아침 5 시까지.

앞으로 최소 2 년 동안은 출근하지 않고 하루 종일 쉬는 휴일은 꿈도 못 꾼다.

공휴일?

그게 어느 나라 단어인가?

휴일에도 환자는 아프다.

심지어 추석과 설날에도 집에 못 가고 병원을 지켜야 한다.

‘혜미도 100 일 당직을 서겠지?’

혜미는 내과를 선택했다.

내과도 100 일 당직이 있었다. 아니, 중환자가 많은 내과답게 더 혹독했다.

몸이 고달프다 보니 편한 피부과 생각이 났다.

‘피부과 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접은 길이다. 미련 가지지 말자.

그래도 고생스럽긴 했지만 보람은 있었다.

“아휴, 이번 주치의 선생님은 참 친절하고 좋아.”

“그러니까. 믿음직스럽고.”

모든 환자와 보호자들이 진현을 좋아했다.

실력도 좋고, 친절하고, 믿음직스럽고…….

무엇보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귀신같이 눈치챈다.

이 의사가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는지 어쩔 수 없이 의무감으로 대하는 것인지.


환자들 모두 김진현이란 이 어린 의사가 자신들을 정말 위하며 진료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동 말고 수술장에서도 진현은 예쁨을 받았다.

“그래, 그렇게만 어시스트하라고.”

외과 저년 차의 역할은 수술을 어시스트하는 것이다.

옆에서 어시스트하며 수술을 눈으로 배운 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직접 집도를 하게 된다.

“김진현 선생이 어시스트하니 한결 수월하구만.”

교수들은 1 년 차답지 않은 어시스트 솜씨를 보이는 진현을 예뻐했다.

분명 익숙하지 않은 수술일 텐데도 뛰어나다 못해 탁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슬슬 시간이 지났다.

나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한 달이 지나며 파트, 즉, 팀이 교체된 것이다.

진현이 새롭게 맡게 된 것은 외과 외상 분야의 고영찬 교수의 파트였다.

‘고영찬 교수…….’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 삶에서 대일병원 외과에서 일했던 그는 당연히 고영찬 교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고영찬 교수는 실력보단 정치력으로 교수가 된 자로, 성격도 무척 안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기 외과 과장 자리를 놓고 이사장 이종근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진현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

대일병원 최상층의 이사장실.

“잘 지내나, 고 교수?”

이종근이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네, 이사장님.”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남자, 고영찬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요즘 고생이 많다 들었네. 수고가 많아.”


이종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격려했다.

참으로 부드러운 미소였다. 마치 이상민이 늘 짓고 다니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서로 경멸하면서도 이상민과 이종근은 닮은 점이 많았다.

가면 같은 표정 속에 시커먼 뱀을 숨기고 있는 것이 특히 그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특별한 일이라도?”

“아, 별건 아니고…….”

이종근은 잠시 뜸을 들였다.

차기 외과 과장 자리를 놓고 이종근에게 줄을 대고 있는 고영찬 교수는 공손히 말을 기다렸다.

“김진현이라고 아나?”

“아, 네. 압니다.”

당연히 안다.

이번 달 그의 환자를 담당할 파트 레지던트였으니까.

‘왜 고작 레지던트 따위를?’

고영찬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저런 대단한 소문이 많긴 해도 고작 레지던트일 뿐이다.

권위적인 고영찬은 밑의 레지던트를 같은 동료이자 의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레지던트는 대학병원에서 가장 많은 고생을 하며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일꾼이지만, 고영찬에게 있어선 그저


허드렛일을 하는 아랫사람일 뿐이다.

“아, 뭔가 그 선생은 외과와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이종근이 지나가듯 말했다.

“……?”

고영찬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김진현이 외과와 안 맞아?

호나우두는 축구와 어울리지 않다, 라고 말하는 꼴이다.

“그렇지 않나?”

“네, 맞습니다.”

하지만 고영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 이종근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자네가 레지던트 담당 주임교수지?”

“네.”

“잘 안 맞는 의사를 우리 대일병원에서 품을 필요는 없지.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게.”

“……!”

그 생각지 못한 지시에 고영찬은 흠칫 놀랐다.

‘어째서? 뭔가 개인적인 이유가 있으신가?’

고영찬은 의문이 들었으나 드러내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오로지 이종근만 붙들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이종근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고. 다음 과장 자리는 내가 다 염두에 두고 있으니. 강민철이가 교환교수에서 돌아와


쓸데없는 소리 하기 전에 해결해.”

그 말에 고영찬이 눈이 빛났다.

속이 시커매도 이종근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이 일을 잘 처리하면 다음 과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다.”

고영찬은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레지던트 따위를 신경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김진현은 레지던트 1 년 차 초반.

즉, 외과란 광활한 대지에 처음 발을 디딘 상태니까.

‘물론 김진현에 대해 이런 저런 대단한 소문이 많긴 하지만……. 그래 봤자 1 년 차는 1 년 차겠지.’

고영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의학은 경험이 없으면 완성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니다.

‘적당히 트집을 잡으면 되겠군.’

***

그렇게 고영찬 교수가 나간 후,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김진현, 이놈을 언제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정말 지긋지긋했다.

왜 병원의 이사장인 자신이 고작 레지던트 따위를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문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병원 이사회에서 벌써 이상민을 향후 외과 교수로 임명하는 데 반대 이야기를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을 단지 그의 아들이라고 교수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가문의 다른 인물들로 이루어진 이사회에 목적은 뻔했다.

이상민을 내치고 자신들의 사람으로 후계를 세우려는 것이다.

‘범수 그놈만 있었으면 이런 걸 신경 쓸 이유도 없었을 텐데.’

물론 딸인 혜미도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선택사항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이종근이 내세울 수 있는 후계라고는 이상민밖에 없는데, 서자인 그가 가문의 인정을 받으려면 최고가
되어야 했다.

그것도 아무도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최고가.

‘그러기 위해선 이대로는 곤란해.’

이상민도 뛰어났지만 김진현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이상민은 최고는커녕 영원히 만년 2 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김진현을 내쳐야 했다.

‘그런데 이것도 여러모로 번거롭군. 아무런 핑계 없이 무턱대고 자를 수도 없으니.’

대일병원이 소규모 중소기업도 아니고, 아무리 이사장이라도 이유 없이 직원을 해고할 수는 없다.

특히 인턴과 레지던트는 직급의 특수성상 이유 없는 파면이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착취로 부림받는 그들을 부당하게 해고할 시 전공의협의회 등을 비롯한 여러 단체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뭔가 그럴듯한 핑계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 1 년 동안, 흠집을 잡기 위해 틱틱 건드려 보았으나 모두 김진현의 명성만 쌓아주는 용도로 쓰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젠 다를 거다. 여긴 외과니까.’

그의 생각처럼 이젠 달랐다.

제한적인 영향만 끼칠 수 있는 인턴 때와 다르게 외과는 그의 텃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장, 이사장에 오르기 전 외과 교수와 외과 과장을 역임했었다.

김진현 본인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외과에 들어온 순간 그는 호랑이 아가리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종근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런 수작들이 향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

4 월로 넘어가며 파트가 바뀌어 고년 차 치프 레지던트도 바뀌었다.

“네가 김진현이지?”

“네.”

“내가 이번 달 너와 같이 일할 치프 강형석이라 한다. 잘 부탁한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영찬 교수의 파트는 1 년 차 한 명과 3 년 차 한 명이 팀을 이룬다.

파트의 치프 역할을 할 3 년 차 강형석은 지난달 고년 차인 강석훈과는 인상이 전혀 달랐다.

마치 얼굴에 ‘성실’이라고 적어놓은 듯하달까?

굳게 다문 입술이 성실하면서 완고한 그의 성격을 보여줬다.

착실한 군인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는 과연 이렇게 입을 열었다.

“네가 대단히 뛰어나단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지난달 강석훈이랑은 성격이 좀 다르다. 넌 우리가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레지던트를 하는 이유?

당연히 전문의 따고 돈 벌려는 거지.

하지만 이런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강형석은 친절히 웃으며 설명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길을 걸어온 선배들 밑에서 배우기 위해서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1 년 차 때는 윗사람들 밑에서 열심히 배우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김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배우는 게 제일 중요하지. 이전에 다 배웠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러니 너도 처음 배우는 입장이니만큼 절대 혼자 하려 하지 말고, 배우는 자세로 나와 함께하자. 치프로서


나도 열심히 가르쳐 줄 테니.”

좋은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한마디로 혼자 나대지 말라는 이야기다.

원칙주의자인 새로운 치프는 전현이 홀로 진료하다 실수라도 할까 걱정인 듯했다.

당연한 걱정이다.

경험이 부족한 의사는 아무래도 놓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잡아주는 게 선배 의사, 치프의 몫이다.

‘나야 고맙지.’

솔직히 지난 치프인 강석훈은 너무 그를 방목했다.

치프로서 해야 할 몫이 있는데 그것까지 자신이 다하려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사람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너무 완고해 보이는 게 걱정이긴 하지만.’

그렇게 김진현은 강형석과 짝을 이루어 다녔다.

강형석은 캥거루가 아기를 데리고 다니듯 진현을 데리고 다녔다.

“이럴 경우엔 이렇게 소독하고, 저런 환자는 이 약을 써야 돼.”

그는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하나 전부 진현을 가르쳤다.

“네, 감사합니다.”

진현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티 내지 않고 설명을 경청했다.

“네가 지난번에 해놓은 처치도 좋았지만, 다음엔 이렇게 하라고.”

“네, 선생님. 다음번엔 주의하겠습니다.”

뭔가 강형석이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역시 진현은 티 내지 않았다.

일단 아랫사람에게 뭔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다.


관심 없이 성질만 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단, 문제는 저년 차의 생각이라고 진현의 의견을 너무 무시한다는 것이다.

“김진현, 이 환자는 왜 이 약을 썼지?”

“교통사고 수술 후 폐가 안 좋아져서입니다.”

“폐? 폐렴 같은데 항생제를 썼어야지. 왜 이런 약을 썼어?”

“폐에 물이 찼거나 급성 폐 손상(Acute lung injury)을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강형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급성 폐 손상?”

“네.”

그는 못 들을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차분한 성격답게 화를 내진 않았다.

“이제 1 년 차가 급성 폐 손상이 무슨 질환인지나 알아? 급성 폐 손상은 제대로 오면 사망률이 40%가 넘는 중한


질환이야. 열심히 고민하는 것은 기특하지만 책에서 보던 거랑 임상은 달라.

“…….”

“폐렴에 준해 항생제나 처방해.”

어쩔 수 없이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폐렴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진현도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바랐다.

강형석의 말처럼 급성 폐 손상은 사망률이 엄청나게 높다.

‘뭔가 불안해.’

진현은 안 좋은 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급성 폐 손상이 맞더라도 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추측이 틀리고 강형석의 생각이 맞기를 기도할 수밖에.

***

곧 회진 시간이 돼 고영찬 교수가 나타났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현을 훑었다.

“잘하고 있나? 환자는 괜찮고?”

“네, 교수님.”

옆에 서 있던 강형석이 대신 답했다.

“김수민 환자는?”

“그 환자는…….”

치프가 진현 대신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1 년 차는 프레젠테이션 경험이 부족해 혼쭐이 나는 경우가 많아 대신 설명하는 거다.

특히 고영찬 교수는 성질이 나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가만히 듣던 고영찬이 말했다.

“강 치프.”

“네?”

“난 자네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주치의에게 물어본 거야.”

“……!”

주치의는 1 년 차 김진현을 뜻한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강형석은 식은땀이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주치의가 다시 설명해.”

고영찬은 뱀 같은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김수민 환자분, POD(Postoperative day, 수술 후) 4 일째. 수술 상처 양호하며… 그리고…….”

그의 입에서 완벽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염증 수치는?”

“8.34 입니다.”

“백혈구 수치는?”

“13,400 입니다.”
“빈혈 수치는?”

“9.8 입니다.”

고영찬은 트집을 잡기 위해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진현은 소수점까지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흠잡을 게 전혀 없었다.

“이성중 환자 JP 드레인(Drain)은?”

“이성중 환자 JP 드레인은 8 시간 동안 장액성(Serous color)으로 120㏄…….”

그 뒤로도 고영찬은 집요하게 물어봤으나 진현은 모두 완벽히 답했다.

옆에 서 있던 치프 강형석은 감탄으로 입을 벌렸다.

고영찬의 눈도 살짝 커졌다.

도저히 1 년 차라곤 상상 못할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6

76. 신입 레지던트 (3)

하지만 고영찬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흠잡을 게 없잖아.’

이사장 이종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선 트집을 잡아야 하는데, 며칠 지켜본 이 녀석은 빈틈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놈이 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쉽지 않겠군.’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생각보다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사장의 명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러면 회진 시작하지.”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회진을 돌기 시작했다.

회진을 돌며 고영찬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진현의 잘못을 찾았다.

물론 별 성과는 없었다.

‘젠장.’

그런데 마지막 환자의 회진이 끝났을 때였다.


고영찬은 눈썹을 찌푸렸다.

“환자 상태가 안 좋군.”

“네, 폐가 안 좋습니다. 폐렴 가능성으로 항생제 투약 시작한 상태입니다.”

아까 진현과 치프가 논의하던 환자였다.

교통사고 후 수술은 잘 끝났는데 폐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잘 봐야겠는데? 저러다 넘어갈 수도 있겠어.”

그 말에 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느낌이 안 좋았다.

“네, 알겠습니다.”

***

좋은 의사라도 자주 만나면 안 좋다.

그 말은 진리였다.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자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현은 폐가 안 좋아지는 교통사고 환자에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아휴, 선생님. 좀 쉬엄쉬엄하세요.”

교통사고 환자의 이름은 김성복이었다.

50 대의 남자환자였는데, 아내로 보이는 보호자는 비슷한 또래의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아, 선생님 오셨어요? 하아하아…….”

환자도 진현을 보고 반색했다.

보호자와 환자 모두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얼굴을 비치는 진현을 좋아했다.

하지만 몇 마디를 하고 숨이 찬지 헉헉거렸다.

산소마스크를 하고 있음에도 안 좋은 모습에 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숨차니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숨이 차네요. 하아하아…….”

진현은 침상 옆에 놓인 체내 산소 측정기를 바라봤다.

측정결과 92%.
‘안 좋아.’

정상인은 아무런 산소 공급 없이도 97% 이상을 기록한다.

산소마스크로 산소를 제공함에도 92%라니.

90%가 넘는다고 좋아할게 아니다.

이건 곧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란 뜻이었다.

환자를 살핀 후, 진현이 병실을 나가니 보호자가 따라 나왔다.

“저… 선생님, 좀 어떤가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다.

진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좋지는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폐가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진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치프 강형석의 꾸지람을 각오하고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환자는 안 좋아졌다.

“아…….”

보호자의 눈이 흔들렸다.

“안 좋아진단 말은… 혹시 사망할 수도 있단 뜻인가요?”

진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정말 안 좋을 경우엔… 그럴 수도 있습니다.”

“……!”

보호자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 안 돼요. 이제 겨우 다시 만났는데… 아이들도 아빠 얼굴 몇 번 보지도 못 했는데… 이제 겨우 잘해주려


했는데… 흑.”

진현은 보호자와 환자 간에 모종의 사정이 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사정인지 알 수는 모르지만… 가슴 저린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하긴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슬픔을 느끼자 아버지가 위암으로 임종했을 때가 떠올랐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은 너무나 슬프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선생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좋아져야 하는데…….’

진현은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정말 슬프게도 최선을 다함에도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 환자가 그러했다.

***

새벽 3 시 30 분.

진현은 지친 몸을 당직실에 뉘었다.

‘소독하고 아침 수술 준비하려면 5 시 전에 일어나야 하니… 1 시간 30 분 정도 잘 수 있겠군.’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팔자가 고생할 운명인 것을.

너무 고되다 보니 피부과 생각이 다시 떠올랐지만, 이미 접은 길이다.

그리고 그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런데 10 분 정도 지났을까?

띠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천근보다 무거운 눈꺼풀로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

“…김진현입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

-김진현 선생님!

연희였다.
그런데 평소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아니다.

숨 넘어 갈 듯 다급한 목소리에 잠이 번쩍 깼다.

-김진현 선생님, 큰일 났어요! 교통사고 나셨던 김성복 환자분 산소수치가 80%예요!”

“……?!”

진현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당장 동맥 검사(ABGA) 좀 해주세요.”

진현은 병동으로 뛰어올라갔다.

“서, 선생님! 제발 우리 이이 살려주세요!”

보호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발을 구르며 진현을 맞았다.

진현은 급히 환자를 살폈다.

“하아, 하아…….”

환자는 마치 전력으로 100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산소를 최고로 주입 중임에도 수치는 80% 초반에서 왔다 갔다 했다.

“환자분 괜찮으십니까?”

가슴을 두드리며 자극을 줘도 대답을 못했다. 의식을 잃은 거다.

‘호흡 실패(Respiratory failure)!’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온 것이다.

전력으로 오랫동안 달리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호흡 근육은 움직임에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숨을 쉬지 못한다.

“선생님, 여기 동맥 검사예요!”

“……!”

-pH7.2 O2 45 CO2 65

최악의 결과였다.

특히 pH 가 7.2 인 것과 몸 안의 이산화탄소가 65 나 되는 것이 나빴다.

폐가 산소, 이산화탄소 교환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산화탄소가 더 적체돼 pH 가 7.1 정도까지만 내려가도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

그러기 전 조치를 취해야 했다.

“기관 삽관 준비해주세요.”

“기관 삽관이요?”

연희가 놀라 물었다.

진현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관 삽관 후 중환자실에 내려가 인공호흡을 시작하겠습니다.”

스스로 숨을 못 쉬면 기계로 인공호흡을 해주는 방법밖에 없다.

“빨리 준비해 주십시오. 급합니다.”

“네, 알겠어요!”

이럴 땐 1 분 1 초가 급하다.

다급한 응급 상황에 연희를 비롯한 간호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완고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뭐하는 거냐?”

치프인 강형석이었다.

어떻게 연락을 받은 건지 급한 얼굴로 병동에 나타났다.

그도 환자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사태를 파악했다.

“이런…….”

“호흡부전이 와 기관 삽관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현은 빠른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런데 강형석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런데 김진현. 잠깐만 나 보자.”

“네?”

“이리로 와봐.”

병동 밖에서 강형석이 잔소리를 했다.


“이렇게 환자가 안 좋으면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왜 혼자서 보려고 그래?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김진현은 속으로 입을 벌렸다.

물론 이제 막 레지던트가 된 1 년 차가 혼자 볼 환자는 아니긴 하지만, 굳이 이 급한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다음부턴 조심해.”

“…네.”

그런데 그때 병실 안에서 연희가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님, 산소 수치 더 떨어져요! 빨리 와줘요!”

“……!”

강형석이 급히 말했다.

“다음부턴 이러지 말고,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 기관 삽관은 내가 진행한다. 너는 잘 보고 배워!”

그리고 둘은 병실로 들어갔다.

산소수치 73%.

환자는 간헐적으로 경련하듯 헐떡거릴 뿐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호흡근육이 지칠 대로 지쳐 마비가 온 거다.

73%니 반 넘게 산소가 있다 생각하면 안 된다.

실제로는 필요한 산소에 반도 없는 상태다. 더구나 수치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앰부 주세요. 김진현 너는 여기 앰부 좀 짜.”

진현은 밖에서 강제로 산소를 밀어 넣어주는 앰부 마스크의 공기 주머니를 짰다.

“뇌는 1-2 분만 피가 안 가도 손상이 가. 그러니 다른 처치와 다르게 기관 삽관은 한번에, 신속히 성공해야 해.
안 그러면 큰 문제가 생긴다.”

강형석은 환자의 목을 뒤로 젖혀 입, 성대, 기도로 향하는 길을 일(一)자로 만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절대 당황하지 말고. 당황하면 실수해. 기관 삽관 튜브 준비해주세요.”

연희가 다급히 되물었다.

“사이즈는 몇으로 줄까요?!”

“8.0 으로 주세요.”

강형석은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분명 칭찬할 만한 태도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했다.

“선생님, 산소수치 65%입니다. 앰부 호흡이 효과가 없습니다. 더 떨어집니다.”

“그래, 지금 바로 하자. 후두경주세요!”

기관 삽관은 기도로 직접 관을 밀어 넣는 술기다.

기도에 관을 넣으면 환자가 숨을 쉬지 않아도, 외부에서 고농도의 산소를 넣어줄 수 있게 된다.

후두경으로 후두덮개를 젖힌 후 튜브를 밀어 넣으면 되는 술기라 복잡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과정이 간단하다고 쉬운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기관 삽관은 분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에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잘 안 풀리면, 환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후두덮개를 젖히고…….’

치프 강형석은 능숙히 후두경을 쥐었다.

레지던트 3 년 차는 병원에서 기관 삽관을 가장 많이 시행하는 직급이다.

그도 풍부한 경험이 있었고 기관 삽관 하나만큼은 교수보다 잘했다.

그런데 환자의 입안을 후두경으로 젖힌 그의 얼굴이 갑작스레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입안이 퉁퉁 부어 기도로 향하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도 보이지 않아! 왜 이렇게 부어 있지?’

전혀 예상 못한 고난도 기도(Difficult airway)로 입에서 성대, 기도로 향하는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커멨다.

‘이런, 젠장!’

그때 다른 간호사가 외쳤다.

“산소수치 50%예요, 선생님!”

50%!

90%만 되도 몸은 저산소증에 시달린다.

이대로라면 1 분도 안 돼서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이다.

저산소증으로 심장마비가 오면 환자는 죽는다.


차분하던 강형석의 얼굴에 초조함이 올라왔다.

***

그는 손을 움직여 후두경을 조작했다.

하지만 불 꺼진 동굴 같을 뿐 성대로 통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안 보여.’

간호사가 다시 외쳤다.

“선생님, 40%! 빨리요!”

3 초에 10%씩 떨어졌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결단을 내려야했다.

‘지금은 이 자리에 나 말고 기관 삽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지 않고 넣는다!’

어차피 입에 구멍은 두 개다.

식도와 기도!

안 보고 밀어 넣어도 둘 중 하나에는 들어간다.

특히 기도는 입 뒤쪽 천장에 접해 있으니 그쪽을 긁으며 밀어 넣으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다.

“넣습니다!”

쓰윽!

이윽고 튜브가 밑으로 내려갔다.

‘제발!’

그 자리의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산소 연결해 주세요!”

진현이 앰부를 기도 튜브에 연결해 공기를 주입했다.

제대로 들어갔으면 이제 산소수치가 오를 것이다.

모두 침을 꿀꺽 삼키고 산소 수치를 바라봤다.

2 초도 안 되는, 하지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30%에서 수치가 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7

77. 신입 레지던트 (4)

20%!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튜브 다시 빼십시오! 폐가 아니라 식도로 들어갔습니다!”

정말로 공기를 주입할 때마다 폐가 위치한 흉곽이 아니라 식도 밑에 위치한 윗배가 들썩거렸다.

강형석은 급히 다시 기관 삽관을 시도하며 외쳤다.

“김진현, 너는 빨리 이태수한테 전화해! 빨리!”

이태수는 지금 병원에서 당직을 서는 다른 고년 차 레지던트로 도움을 요청하는 거다.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건물에 당직을 서고 있다 해도 오는데 최소 2 분은 걸린다.

하지만 이제 환자는 30 초도 못 버틴다.

아니, 30 초가 뭔가?

15 초 안에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

“제가 하겠습니다.”

“뭐?!”

“제가 하겠습니다.”

치프 강형석은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걸 1 년 차인 네가……!”

하지만 진현이 급히 말을 잘랐다.

평소처럼 예의와 경우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간 환자는 죽는다.

“제가 하겠습니다! 많이 해봤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너……!”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진현의 간절한 눈빛에 강형석은 흠칫했다.

진현의 눈은 할 수 있다고, 아니, 반드시 해내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진현은 환자의 머리로 급히 이동해 후두경을 잡았다.

“김진현 선생님, 10%예요!”

연희가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한편 후두경으로 혀를 젖힌 진현은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망할!’

고년 차인 강형석이 실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난도 중의 고난도의 기도였다.

기관 삽관이 어려운 이유는 가끔 예상치 못하게 이런 고난도 기도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고난도라도 무조건 해내야 해.’

못 해내면 환자가 죽는다.

2 번의 기회도 없다.

단 한 번 만에 해내야 했다.

그래도 진현의 경험이 좀 더 많아 힘들게 조작하니 기도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보여도 문제였다.

‘길이 너무 좁아. 어떻게 하지?’

목안이 퉁퉁 부어 목, 성대, 기도로 통하는 길이 한없이 좁아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기도라면 그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 아니, 누가 와도 성공보단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선생님, 산소수치 0%예요!”

0%!

체내에 산소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진현은 자신의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심장마비가 일어날 때까지 5 초도 안 남았다.

반드시 그 안에 성공해야 했다.


‘제발!’

좀 더 얇은 튜브가 있으면 좋겠지만, 시간 안에 준비할 수가 없다.

진현은 곡선으로 휜 튜브를 일직선으로 폈다. 그리고 튜브를 고정하는 철사(Stylet)을 밀어 넣었다.

그 동작만으로 2 초가 흘렀다.

그 순간, 병실에 모여 있던 간호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심장 맥박 늘어져요!”

“코드(Code) 방송해! 빨리! 빨리!”

마치 임종할 때처럼 심장의 리듬이 일직선으로 쭈욱 늘어졌다.

심장마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희미하게 리듬이 있긴 했지만 미약했다.

곧 Arrest(사망)다.

병원 전체에 심폐소생술(CPR)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코드(Code)가 방송됐다.

반면 모두가 비명을 지를 때, 진현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면 환자를 잃는다.

두근!

자신의 심장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기회는 단 한번이다.

모든 지각을 잊었다.

오로지 눈 끝의 성대와 손끝의 튜브만을 느꼈다.

‘제발!’

빛이 명멸하듯, 그 찰나의 순간.

보호자의 말이 떠올랐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선생님.’

보호자와 환자 사이에 무슨 한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도와주고 싶었다.

반드시!

진현의 손이 움직였다.

모두가 그의 손끝을 바라봤다.

퉁퉁 부운 점막의 저항을 통과한 튜브가 무언가를 통과했다.

시야가 너무 안 좋아 튜브가 기도를 통과한 것인지 식도를 통과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앰부 연결해 주세요!

푸슉!

앰뷰를 통해 산소가 공급됐다.

그 자리의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산소수치를 바라봤다.

띠익- 띠익-

0%.

1 초, 2 초, 3 초…….

시간이 지나도 수치는 0%에서 올라가지 않았다.

치프 강형석이 질린 얼굴로 외쳤다.

“수치가 회복이 안 되잖아! 폐로 안 들어가고, 식도로 들어갔어!”

그는 다급히 튜브를 다시 빼려고 했다.

하지만 진현이 말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치는 조금 늦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다르게 폐가 위치한 흉곽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말처럼 산소를 주입할 때마다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튜브가 제대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산소수치는 여전히 0%다.

4 초, 5 초…….

피가 말리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수치가 변했다.

10%, 20%, 30%…….

“아!”
누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튜브가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한번 오르기 시작한 수치는 쭉쭉 회복돼 곧 100%까지 올라갔다.

튜브를 통해 공기를 교환해 주자 체내 가스 균형이 회복되며 심장의 움직임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진현은 땀을 닦고 말했다.

“거기 인턴 선생님, 앰부 짜주세요. 치프 선생님, 저는 중환자실에 연락해 인공호흡기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 그, 그래.”

치프 강형석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됐다.

그런데 그때, 병실 밖이 요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입니까?!”

“환자는 어떻습니까?”

코드(Code)방송을 듣고 심폐소생술을 위해 달려온 내과의사들이었다.

보통 심폐소생술 경험은 내과나 응급의학과 의사가 가장 많기 때문에 그들이 병원 내 심폐소생술을 전담한다.

이제 내과 1 년 차인 혜미도 뒤쪽에 있었다.

전문의나 고년 차가 리더 역할을 하면 밑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진현아.’

긴장으로 땀에 흠뻑 젖은 진현을 본 혜미의 눈이 흔들렸다.

진현도 그녀를 봤다.

하지만 지금은 사담을 나눌 시간이 아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심폐소생술 팀의 리더인 내과 당직 전문의가 물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강형석을 대신해 진현이 차분히 설명했다.

“호흡부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심장마비가 일어나기 전 기관 삽관에 성공해 심장마비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내과 전문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비 직전과 심장마비. 그 차이는 천지차이다.

일단 심장마비를 막았으면 환자 장기의 큰 타격은 없을 거다.

“흠…….”

내과 전문의는 빠르게 환자를 훑었다.

환자의 얼굴을 본 그는 신음을 흘렸다.

“큰 턱, 짧은 목, 전체적으로 부운 몸… 이런 경우 저희 호흡기 내과의사도 기관 삽관이 굉장히 어려울 것


같았는데 대단하군요. 치프신가요?”

“1 년 차입니다.”

그 말에 내과의사의 눈이 커졌다.

고작 1 년 차가 이런 어려운 환자의 기관 삽관을 성공했다고?

그는 크게 감탄했다.

“역시 외과 선생님이시군요. 대단합니다. 혹시 저희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이제 중환자실에 내려갈 것이니 저희가 보겠습니다.”

“그러면 수고하십시오. 만약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그런데 그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형석이 급히 내과 전문의를 불렀다.

“저 선생님, 죄송한데 호흡기 내과 선생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환자분 X-ray 좀 봐주실 수 없으십니까? 폐렴으로 치료 중인데… 계속 안 좋아져서.”

호흡기는 폐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내과다.

즉, 모든 의사 중에서 폐를 가장 잘 본다.

중환자실 내려갈 채비를 하는 사이, 호흡기 내과의사는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봤다.

“여기 폐렴이…….”

“폐렴은 아닌데요?”

“네?”

“물론 X-ray 에서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지만 폐렴보다는 폐에 물이 찬 폐울혈 같은데요? 교통사고 후 스트레스
상황의 환자니 급성 폐 손상(Acute lung injury) 가능성도 있고요.”

치프 강형석의 눈이 커졌다.
폐울혈, 급성 폐 손상.

모두 1 년 차 김진현이 주장하던 내용이다.

“혹시 항생제만 쓰셨어요?”

“아…….”

치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호흡기 내과의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전산을 열어봤다.

최근 처치 내용이 좌르륵 펼쳐졌다.

“그래도 이뇨제도 쓰시고… 폐울혈이나 급성 폐 손상에 준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는 다 하셨네요. 이렇게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하셨는데 안 좋아진 것은 어쩔 수 없죠.”

강형석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난 항생제만 쓰라고 했는데. 저걸 언제 다 한 거지?’

진현이 그 몰래 한 처치들이다.

“저 그러면… 인공호흡기는 어떻게……?”

아무래도 인공호흡기는 호흡기 내과의사가 더 전문이다.

내과 전문의는 가르쳐 주기 위해 진현을 불렀다.

“저, 주치의 선생님?”

“네?”

주치의, 김진현이 답했다.

“인공호흡기는 어떻게 조절하실 건가요?”

“압력조절환기 모드(Pressure control ventilation 로 Low tidal, High PEEP 으로 할 것입니다.”

“수치는요?”

“적정몸무게(Ideal body weight)를 고려했을 때 350㎖ 정도로 하고 조정하려 합니다.”

“압력은요?”

“PEEP 테이블에 맞춰서 조정할 것입니다.”

완벽한 답변에 내과의사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다 아시네요. 그렇게 하면 될 것입니다. 혹시 선생님이 김진현 선생님인가요?”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지?

내과 전문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아니, 너무 잘 알기에 혹시나 해서요. 선생님, 괴물인턴으로 엄청 유명했잖아요. 우리 내과로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우린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도와드릴 테니.”

그러고 그는 등을 돌려 아직 남아 있는 혜미에게 말했다.

“이혜미 선생, 우린 이만 갑시다.”

“아, 네.”

멍하니 진현을 바라보던 혜미는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려, 이혜미. 이런 응급 상황에서, 무슨.’

이런 상황에서도 두근거리는 주책맞은 자신의 심장이 한심스러워 그녀는 몰래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잖아. 한 달 만에 보는 것인걸.’

고생이 많았는지 오랜만에 만난 진현은 비쩍 말라 있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중환자를 처치하는 모습이 멋지게 보여 가슴이 살짝 떨렸다.

참으로 주책스러운 마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때 한 간호사가 진현에게 말했다.

“선생님, 중환자실에서 준비 끝났대요. 내려가면 될 것 같아요.”

“네,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러고 진현은 다른 의료진과 함께 환자 침대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기관 삽관을 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아니, 인공호흡기를 달았으니 진정한 치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선생님, 환자의 산소 수치 떨어져요!”

“압력(PEEP)을 올려주십시오.”

“인공호흡기의 산소농도는요?”

“50%로 고정해주십시오.”

폐가 안 좋으니, 몇 분 간격으로 상태가 계속 변했다.


중간에 치프 강형석은 병동에 다른 환자가 문제가 생겨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진현 홀로 환자 옆에 딱 붙어 계속해서 인공호흡기를 조정했다.

잠은 당연히 한 잠도 못 잤다.

‘해 뜨는구나.’

진현은 눈을 비볐다.

환자 옆에서 맞는 일출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상쾌… 할 리가 있나?

엄청 피곤했다.

그래도 그의 노력 덕분일까?

환자는 점점 호전을 보였다.

“김진현.”

그런데 어느덧 중환자실로 돌아와 굳은 얼굴로 진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강형석이 입을 열었다.

“네?”

진현은 인공호흡기의 레버를 조정하며 반문했다.

집중하느라 시선은 돌리지 못했다.

산소농도는 좀 더 낮추고, 일단 압력은 유지하고… 좋아, 이렇게만…….

그런데 의외의 말이 들렸다.

“고맙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8

78. 신입 레지던트 (5)

“……!”

진현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뻣뻣한 강형석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아니.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진현은 당황해 말했다.


“너 덕분에 환자가 살았어. 정말로 고맙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강형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말로 너 아니었으면 환자를 잃을 뻔했어. 정말 고맙다.”

“…….”

“그리고 처음 네 의견 무시한 것도 미안하다. 1 년 차 생각이라고 흘려들을 게 아니라, 꼼꼼히 고려해 봤어야


하는데. 그래도 네가 필요한 조치는 다 했더구나. 고맙다.”

진현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야. 너를 다른 1 년 차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동기들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노골적 칭찬에 진현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으나 치프의 말은 조금도 빈말이 아니었다.

단지 기관 삽관 성공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환자를 접근할 때 보여줬던 식견, 그리고 특히 인공호흡기를 다루는 실력.

이건 도저히 1 년 차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인공호흡기 조작 실력은 나보다 훨씬 나아. 이걸 언제, 어디서 배운 거지?’

인공호흡기를 다루는 것은 고도의 숙련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치프인 그도 인공호흡기는 어려움이 많은데 이 녀석은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실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미스터리지만 김진현, 이 괴물 놈을 상식으로 보지 말라는
동료들의 말이 옳았다.

‘한국대 수석이라 그런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도저히 모르겠군.’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이 녀석은 단순한 1 년 차가 아니었다.

괴물.

인턴 때 불리던 것처럼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강형석의 마음에서 진현이 가르쳐야 할 아랫사람에서 불가해한 괴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 진현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까마득히 부족합니다. 선생님 같은 선배님들이 많이 가르쳐 주고 이끌어주셔야 하니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강형석은 별로 가르침이 필요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런 자세는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나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아침이 되자 담당 교수인 고영찬이 중환자실에 나타났다.

그는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환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원인은?”

진현이 답했다.

“급성 폐 손상(Acute lung injury)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 같습니다.”

“급성 폐 손상?”

“네, 교통사고 후 스트레스 반응으로 염증 반응이 왔을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

고영찬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급성 폐 손상이면 사망률이 무척 높다.

“그런데 그런 것치곤 환자 상태가 나쁘진 않군. 새벽에 연락 받았을 때는 굉장히 안 좋은 줄 알았는데.”

그건 치프 강형석이 대신 답했다.

“여기 주치의, 김진현 선생님 덕분입니다. 김진현 선생님이 적절히 조치한 덕분에 밤사이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김진현 선생이?”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답변이다.

고영찬은 컴퓨터로가 전산을 켰다. 그리고 간밤의 처치와 차트를 꼼꼼히 살폈다.

환자가 무사한 것은 다행이지만… 고영찬에겐 이사장의 임무가 있었다.


‘1 년 차가 실수를 안 했을 리가 없어. 분명 문제가 있었을 거야.’

그는 김진현의 잘못을 찾기 위해 마치 논문을 정독하듯 모든 내용을 확인했다.

환자가 나빠지기 전, 나빠진 후, 기관 삽관 과정, 중환자실에서의 처치.

그러나 문제가 없었다.

모두 완벽했다.

뭔가 놓쳐서 환자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과정 중에 처치도 훌륭했다.

기관 삽관 중 환자 상태가 잠깐 안 좋긴 했으나 그건 잘못이라 보기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젠장, 치프가 기관 삽관을 실패했는데, 1 년 차가 대신 성공해? 이게 무슨?’

고영찬의 얼굴이 똥 씹은 듯 변했다.

김진현이 기관 삽관을 실패했으면 그 흠이라도 잡겠는데…….

하지만 살피면 살필수록 감탄이 나올 뿐이다.

질책은커녕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이사장님한테 빨리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데.’

이사장 이종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고영찬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리 뛰어나도 고작 1 년 차야. 특히 이런 안 좋은 환자를 볼 때 완벽할 리가 없어.’

물론 그러면서 환자가 안 좋아지면 안 되겠지만 나빠지기 전에 적절히 개입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김진현의 실책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매의 눈으로 진현의 잘못을 살폈다.

***

하지만 이후에도 진현은 실책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그의 헌신 덕분인지 환자는 호전을 거듭해 결국 인공호흡기도 떼고 일반


병실로 돌아갔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보호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좋아지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쯤엔 퇴원도 고려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 훈훈한 모습에 고영찬 교수는 인상을 썼다.

‘어떻게 하지?’

트집을 잡아야 하는데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파면시키면 동료 레지던트는 물론이고, 레지던트의 집합체인 전공의협의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젠장.’

아무리 고민해 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이사장실에 불려가 언짢은 소리를 들었다.

“김진현 선생은 잘 지내는 것 같군. 자네가 잘해주나 봐? 고영찬 교수?”

언중유골(言中有骨).

부드러운 말이었으나 뼈가 담겨 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빠,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고영찬은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뭔가 건수가 있어야 일을 벌이지! 본인이 직접 하든지!’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고민했다.

뭔가 수를 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없는 죄를 덮어씌울 수도 있겠지만…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 가급적 피해야 해.’

요즘 주당 140 시간은 가뿐히 일하는 레지던트의 권익 신장이다 뭐다 말이 많았다.

턱도 없는 누명을 씌우면 모진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잠깐 꼭 벌을 줄 필요는 없잖아? 어떻게든 쫓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는 김진현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나이와 직급을 초월한 불가해한 천재.

-천재임에도 편안한 피부과를 지망. 하지만 전산오류로 외과 합격.

그는 진현이 편안한 피부과를 지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우리 대일병원에서 가장 힘든 근무처인 응급실로 보내 버리자.’

국내 최고인 대일병원의 외과 응급실은 말도 안 되게 높은 강도의 업무량으로 유명하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리기 때문인데, 가히 지옥을 연상시킬 정도이며 매년 응급실을 돌다 여러 명의 레지던트가


사표를 쓰고 도망갈 정도다.

‘한번 버텨봐라.’

또 업무 강도 외에도 응급실에는 치명적 단점이 더 있었다.

응급실이란 장소의 특성상 중환자가 수도 없이 몰린다는 것이다.

그런 중환자들을 계속해서 보다 보면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다.

이건 의사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근무처의 특성이다.

‘사표를 안 써도 돼. 어차피 버티다 보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 테니. 문제가 생기기만 해봐라. 그땐 바로.’

고영찬은 칼을 갈았다.

결정을 한 고영찬은 치프 강형석을 불렀다.

“강형석입니다, 교수님?”

곧 치프 강형석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고영찬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아니, 자네를 부른 것은 레지던트 담당 주임교수로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강형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필요할 때는 하나도 관심을 가지지 않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요즘 응급실 인력이 모자라지 않나?”

“네, 그렇긴 합니다. 응급실을 담당할 2 년 차의 숫자가 부족해서.”

10 명으로 시작한 대일병원 외과 2 년 차는 현재 5 명밖에 안 남아 있다.

응급실 등이 힘들어서 반이나 사표를 쓴 것이다.

원래 매년 나가는 사람이 있으나 2 년 차는 특히 심했다.

레지던트와 인턴은 그 제도의 특성상 누군가 사표를 쓰면 충원이 안 된다.

남은 사람이 나간 사람의 몫까지 억지로 다 해내야 했다.

“5 명이서 10 명의 일을 하고 있으니 2 배의 업무량이어서 많이 힘들긴 합니다. 응급실 근무도 손이 모자랄


정도로 빡빡하고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생각이 있는데.”

고영찬은 생색을 내듯 말했다.

“김진현 선생을 응급실로 보내면 어떻겠나?”

“네?”

치프 강형석은 놀라 반문했다.

“하지만 이제 1 년 차 초반인데…….”

“뭐, 내가 보름 동안 지켜온 바로는 김진현 선생님 정도면 전혀 문제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강형석은 그 말에 동의했다.

기관 삽관 사건 이후 치프인 그는 김진현의 진료에 큰 간섭을 안 했다.

그러면서 가만히 지켜봤는데 역시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김진현 이놈은 응급실이 아니라 우주 끝에 갖다 놓아도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굳이 김진현을 응급실에?’

물론 김진현이 응급실로 빠지면 업무 분담이 비교적 편해지길 할 거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일까?

지금까지 레지던트 업무 부담에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위인이 갑자기 이러니 의문이 들었다.

“하여튼 그러면 그렇게 진행하겠네. 김진현 선생한텐 자네가 말 좀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뭔가 이상했으나 주임교수의 결정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러면 김진현 선생의 응급실 근무는 언제까지로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고영찬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건 내가 상황을 봐서 결정하겠네. 바쁠 텐데 자네는 신경 안 써도 되네.”

그런데 고영찬과 이종근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중환자가 몰리는 응급실이야말로 진현의 능력에 가장 적합한 장소란 것을.

그렇게 진현은 지옥의 입구, 헬 게이트(Hell gate)라 불리는 응급실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

“내가 왜 응급실을?!”

진현은 비명을 질렀다.

뛰어난 능력과 별개로 그의 입장에선 난데없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 삶에서 외과를 하며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 바로 응급실이다.

그건 비단 진현뿐 아니라 모든 의사가 마찬가지일 거다.

응급실은 정말 지옥이었다.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물론 외과를 선택한 이상 응급실은 피할 수 없는 의무긴 했다.

하지만 정식 스케줄이 아닌 모자란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 투입돼야 한다고?

‘아니, 2 년 차 인원이 모자라면 다른 사람을 투입하지. 왜 하필 나야?! 1 년 차가 나 한 명인 것도 아니고!’

진현은 물었으나, 답변은 이러했다.

“네가 제일 잘하니까.”

“…….”

진현은 똥 씹은 마음이 들었다.

말단 중의 말단, 1 년 차의 입장에서 시키는 일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생각지도 않은 응급실 근무를 시작했다.

‘젠장.’

응급실에 내려가자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진현을 반겼다.

다들 인턴 때 응급실에서 좋은 인상을 줬던 진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 오랜만이네. 잘 부탁해, 외과 선생님.”

“외과 힘들지?”

“김진현 선생님이 내려오니 든든하네.”

걔 중에는 진현이 외과를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 사람도 있었다.

진현보고 응급의학과를 하라고 꼬시던 이들이다.

“응급의학과 하라니까.”
“오면 잘해줬을 텐데.”

진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응급실에 평생 살라니.

농담으로라도 싫었다.

어쨌든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응급실 시스템 자체가 최초 응급의학과에서 환자를 진료 후, 외과적인 문제가 있으면 진현에게 연락을 하는
프로토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진현은 응급실을 둘러보았다.

“여기 도와주세요!”

“아악!”

“야, 이놈들아! 뭐하는 거야?!”

앉을 자리도 없는 혼잡함, 간헐적으로 터지는 비명,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

응급실은 여전히 아비규환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진현의 응급실 근무가 시작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

# 79

79. 뜻하지 않은 유명세 (1)

한편 이사장 이종근은 고영찬 교수의 보고를 받았다.

“그래, 김진현 선생을 응급실로 보냈다고?”

“네.”

이종근은 턱을 쓰다듬었다.

‘과중한 응급실 업무를 통해 사표나 실수를 유도하자고?’

나쁘지 않은 수이긴 한데…….

그 괴물 녀석에게 통할까? 그게 걸렸다.


“하여튼 잘해보게. 더 이상 내 귀에 김진현 선생의 이야기가 안 들어오도록 잘해.”

이사장인 자신이 별것도 아닌 인턴… 아니, 레지던트 나부랭이를 언제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가 찰 지경이다.

“네, 이사장님.”

고영찬 교수의 입장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김진현이 뭐라고.

고작 레지던트 때문에 이사장에게 미운 털을 박힐 순 없다.

고영찬은 생각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여도 의사의 실력은 임상 경험이 좌우한다.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실책을 할 수밖에 없어.
기다려라. 실수만 하면…….’

***

그러나 그들에겐 불행히도 김진현은 임상경험이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장기간 대학 병원에서 일했던 그는 이런 응급 중환자를 보는데 특화돼 있었다.

진현이 응급실에서 일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으나, 특별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김진현 선생이 외과 쪽 응급실을 담당하니 아주 좋네.”

“그러게. 계속 김진현 선생님이 전담을 했으면 좋겠어.”

“맞아. 아예 건의를 해볼까?”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입을 모아 진현을 칭찬했다.

물론 진현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였다.

환자를 향한 친절함, 동료 의사에 대한 존중,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

그야말로 완벽하다.

칭찬이 없으면 이상할 정도다.

실제로 응급의학과 의사들 말고도 환자들의 칭찬도 많았다.

<감사한 김진현 선생님께>

이런 제목의 감사 편지들이 고객의 소리에 꽂혔다.

보통 혼잡하고 바쁜 응급실에선 칭찬은커녕 불평, 컴플레인(Complain)편지만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아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진현 본인이 너무 힘든 것이다.

‘죽겠다…….’

진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의 응급실 근무에 만족했지만 진현 본인은 죽을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잔 게 언젠지 모르겠다.

수도 없이 환자들이 오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제발 3 시간만 이어 잤으면… 아니, 근처에 기독병원도 있고 한국대 병원도 있잖아. 왜 여기로만 오는 거냐고!’

더 끔찍한 것은 그를 알아보는 환자도 있다는 것이다.

이전 김창영 총리를 치료하며 매스컴을 탄 탓이다.

“아, 김창영 총리를 치료하신 의사 분이죠? 저 선생님한테 진료 받을래요.”

이러며 달라붙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죽고 싶을 지경이다.

퇴근은 일주일에 딱 한 번.

토요일 저녁 8 시부터 다음 날 아침 7 시까지뿐이다.

그때도 중환자가 겹쳐오면 못 쉬었다.

‘조금만 버티자. 나중에 성공하면 건물도 사고 한껏 게으름 피워줄 거다.’

진현은 자신의 꿈을 중얼거리며 좀비처럼 응급실을 배회했다.

***

그렇게 이사장이 진현의 실수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대일병원 근처 강남의 청담동에 위치한 한 화실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남자가 붓을 들고 있었다.

너무 헤져 누더기 같은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노숙자로 착각할 외양이었다.

“이게 아니야.”

고개를 젓는 남자의 이름은 김종현.

걸인을 연상시키는 볼품없는 외양과 다르게 그는 국내 최고의 동양화가 중 한 명이라 꼽히는 당대의 화백(畵伯)
이었다.

하지만 뭇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김종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게 아니야. 빈껍데기야.’

그의 눈앞에는 본인이 직접 그린 산수화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멋들어진 그림이건만 김종현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기운생동(氣韻生動). 그림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는데… 빈껍데기야.’

아무것도 모르는 남들이 환호하면 뭐하는가?

그림이 텅 비어 있는데.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던 그는 돌연 화선지를 북북 찢어버렸다.

“서, 선생님?”

옆에서 작업하던 제자, 이수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어디 가시려고요?”

“산에 가서 막걸리나 마시고 오려고.”

“산이요? 하지만 시간이 늦었는데…….”

제자, 이수훈은 밖을 바라봤다.

그림이 안 풀릴 때마다 산에 올라 약주 한 잔 하는 것은 김종현의 습관이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

벌써 어둠이 끼고 있어 산에 도착하면 한밤중일 것이다.

그리고 검은 구름이 잔뜩 낀 게 날씨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일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비도 올지도 모르고.”

하지만 기인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김종현 화백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한다.

“뉴스에서 오늘 비 안 온다고 했어. 다녀오마.”

김종현은 짧은 말만 남기고 산으로 향했다.

제자 이수훈은 혀를 찼다.

“별일 없으시겠지?”

왠진 불길한 느낌이 들었으나 말린다고 들을 김종현이 아니었다.

‘그림이 많이 안 풀려서 그런가? 요즘 따라 특히 힘들어하시네.’


뭐, 저래 봬도 국내 최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대화백(大畵伯)이니 말단제자인 그가 걱정할 일은 아니긴 했다.

그는 빈 화방을 주섬주섬 정리 후 퇴근했다.

***

김종현이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서울 남단에 위치한 청계산이었다.

어둠이 짙었지만 그는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휘적휘적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장막 속 보석처럼 빛나는 서울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쌀쌀한 바람과 더불어 가슴이 탁 트일 만큼 시원한 풍경.

그러나 김종현의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

‘풀리지 않아.’

화실에 있나, 산에 있나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그림 생각뿐이었다.

‘어째서 풀리지 않는 걸까?’

그는 준비해 온 막걸리를 쭈욱 들이켜며 자신의 그림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산에 올라도, 술을 마셔도 답답함은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답답함에 비례해 술병을 비우는 속도로 빨라졌다.

‘아, 취하는군.’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뚝뚝.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이런. 내려가야겠군.”

김종현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함에 생각보다 많이 마셨는지 하늘이 핑 돌았다

하필 빗줄기도 점점 거세졌다.

김종현은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겼다. 취기 때문인지 손전등 불빛이 흐릿했다.

“거기 아저씨! 조심하세요!”

비틀거리는 그를 보며 다른 야간 등산객이 소리쳤다.

‘뭐? 조심?’
“거기 조심하라고요!”

김종현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퍼석!

흙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하늘이 크게 흔들렸다.

“……!”

김종현은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어, 어?”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벼랑과도 같이 깎아지른 언덕 아래로 그의 몸이 추락했다.

한참을 떨어진 후에야 그의 몸은 나무와 바위에 걸려 멈추어 설 수 있었다.

“아니! 이봐요! 이봐요! 여기 사람이 떨어졌어요!”

저 위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며 그의 의식이 스르르 꺼졌다.

그런 그의 복부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왔다.

***

곧 구조용 헬기가 출동했다.

구조대원들은 혀를 찼다.

“아니, 어쩌다 여기서 떨어진 거야?”

“술 냄새 나는데? 술 마시고 미끄러진 것 같아.”

“복부 쪽 부상이 심해. 어디로 이송하지?”

그들은 급히 응급처치를 했다.

하지만 응급처치로 해결될 부상이 아니었다.

대형 병원으로 이송해 정밀 검사 및 수술을 받아야 했다.

“강남고속터미널 근처 기독병원이 제일 가깝지 않아?”

“거기 오늘 안 돼. 터미널 앞쪽에서 다중 추돌 사고 환자들이 몰려가서 손이 없을 거야.”

구조대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 그다음 가까운 곳이 어디지?”


“대일병원도 가까워. 대일병원으로 가자.”

“그래, 네가 대일병원 응급실에 미리 연락 좀 해놔.”

그렇게 대화백(大畵伯) 김종현을 태운 헬기가 대일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혼자 등산 온 건가? 보호자는 없나?”

“혼자 온 것 같아. 떨어지면서 잃어버린 것인지 지갑이랑 핸드폰도 없는데?”

“그래? 골치 아프네. 병원에서 싫어할 텐데…….”

신원 미상의 환자라… 병원에서 싫어할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더구나 한눈에 봐도 중환자였다.

“노숙자는 아니겠지? 생긴 게 좀…….”

길게 기른 수염과 누더기 같은 옷.

평소에도 걸인 같은 인상인데 엉망으로 다친 지금은 완벽히 노숙자처럼 보였다.

“노숙자 같기도 하고… 이런 야밤에 산에서 술 먹은 것도 이상하고…….”

“몰라. 노숙자든 말든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병원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니 대일병원으로 가자.”

***

진현은 당직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못 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본 황문진이 딱한 표정을 지었다.

황문진도 고된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김진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너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

“으… 응?”

진현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반문했다.

“내가 좀 바꿔줄까? 너무 고생하는 것 같은데…….”

황문진이 걱정하며 물었다.

진현은 힘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위에서 정한 거니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답한 진현은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피곤에 푹 절은 그 모습에 황문진은 혀를 찼다.

정말 바꿔라도 주고 싶지만, 주임교수가 직접 정한 스케줄을 밑에서 임의로 바꿀 수도 없다.

“그렇게 졸지 말고 잠깐이라도 누워 자.”

“곧 다시 응급실 내려가야 해.”

“내가 10 분 뒤에 깨워줄게. 조금만 자.”

황문진의 권유에 진현은 시체처럼 침대로 들어갔다.

“그러면 10 분만…….”

하지만 10 분이라도 자려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 분도 안 돼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본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급실이다.

“네, 외과 김진현입니다.”

전화를 받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진현 선생님? 응급실에 환자 왔는데요.

“무슨 환자입니까?”

-등반사고환자인데 많이 안 좋아서 지금 바로 응급실로 와줄 수 있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진현은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문진이 안 된 목소리로 말했다.

“또 환자야?”

“응.”

“에휴, 어떻게 하냐. 힘내.”

“그래…….”

힘없이 답한 진현은 터벅터벅 응급실로 내려갔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털었다.

‘정신 차리자. 아무리 피곤해도 환자 앞에서 졸 수는 없잖아.’


그는 애써 환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환자지? 많이 안 좋은가? 오늘 당직 교수님이 누구더라…….’

응급실의 진료 프로토콜은 먼저 응급의학과에서 진료 후 환자에게 외과 쪽 문제가 있으면 진현한테 연락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진현이 진료 후 수술이나 입원이 필요하다 판단이 되면 당직 교수한테 연락을 하게 되어 있다.

오늘 당직은…….

‘고영찬 교수님이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응급실에 처박은 것을 떠나 여러모로 안 좋은 면이 많은 교수였다.

“아, 김진현 선생. 여기예요.”

응급실에 도착하니, 응급의학과 의사가 그를 반겼다.

진현은 그를 따라 처치실에 들어갔다.

“……!”

짙은 피 냄새에 진현의 잠이 싹 달아났다.

“이건…….”

“등산하다 낙상한 환자예요.”

“무슨 이런 날씨에 등산을…….”

어느덧 밖에는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있었다.

등산을 해도 하필 이런 날씨에 하나?

“복부 검사를 해보니 장출혈이 심해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머리에 뇌진탕이 있고 왼발에 미세한 골절이
있긴 한데… 다 급한 것은 아니어서.”

응급의학과 의사는 CT 촬영 결과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진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흠…….”

추락하며 뾰족한 돌에라도 찔린 것인지 소장 쪽이 찢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출혈이 심해 보였다.

“바이탈(Vital)은 괜찮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80

80. 뜻하지 않은 유명세 (2)

“혈압은 95 정도로 간당간당해요. 맥박이 130 으로 빠르고요.”

혈압 95, 맥박 130.

쇼크(Shock)로 진행하기 직전의 단계이다.

“혈액 수치는요?”

“빈혈 수치 9.3 이에요. 정상이 13 이니 굉장히 떨어졌어요.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더 떨어질 거예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할 것 없이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저희 외과에서 응급 수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을 해야 하니 보호자 불러주십시오.”

모든 수술은 하기 전에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동의 없이 수술을 진행했다 무슨 법적인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런데 응급의학과 의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

“왜 그러십니까?”

“추락 과정 중에 잃어버린 것인지 신분증이나 핸드폰이 없어서 신원이 확인이 안 돼요. 보호자 없는 노숙자
같기도 하고…….”

진현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노숙자처럼 생기기도 했다.

삐쩍 마른 체구, 다듬지 않은 수염, 개량 한복인지 누더기 옷인지 정체불명의 복장.

“경찰에는 연락했습니까?”

“연락은 했는데, 아마 신원을 확인하는데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보통 이런 경우 빨리 찾아도 하루 이틀은 걸린다.

하지만 환자의 배에서 계속 피가 나고 있는 중이라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이런 어쩌지?’
그러나 고민할 사안은 아니었다.

신원 미상이든 노숙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일단 살려놓고 보는 거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상황이 급하니 일단 수술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진현은 핸드폰을 꺼냈다.

당직 교수에게 전화해 수술을 진행하려는 거다.

‘병원의 시스템상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대일병원의 시스템상 수술은 진현이 하는 게 아니라 당직 교수나 전문의가 나와서 집도를 해야 한다.

‘오늘 밤 당직이… 고영찬 교수님…….’

진현은 고영찬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필 그때, 고영찬 교수는 늦은 밤임에도 여러 일을 논의하기 위해 이사장 이종근과 함께 있었다.

***

“요즘 고생이 많지?”

“아닙니다.”

“그때 그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연구 제의가 들어와서…….”

둘은 여러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차기 외과 과장으로 유력시되는 고영찬은 이사장의 신임 하에 많은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네가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전부 이사장님 덕분입니다.”

대부분의 일은 순조로웠고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김진현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데 그 김진현 선생은 어떻게 하고 있나?”

“…….”

고영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김진현은 응급실에 던져놨더니 사고는커녕 날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빠져 죽으라고 물고기를 물에 던진 듯한 격이었다.

“자네가 너무 잘해주는 것 아닌가? 응?”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고영찬은 식은땀이 흘렀다.

웃음 뒤 도사리는 한기가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이사장님은 왜 이렇게 김진현에게 신경을 쓰는 거지? 아무리 뛰어나도 레지던트일 뿐인데.’

그리고 김진현처럼 재능 넘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대일병원 입장에서도, 이사장입장에서도 나쁜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 잡아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이종근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

고영찬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

그런데 그때,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고영찬은 급히 전화를 끄려 했으나 이종근이 말했다.

“괜찮으니 받게.”

“아닙니다.”

“아니야. 받아.”

고영찬은 곤란한 얼굴로 전화를 봤다.

응급실 담당 레지던트인 김진현이었다.

“왜? 빨리 말해.”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교수님. 김진현입니다. 응급실에 수술 필요한 환자가 와서 전화 드렸습니다.

“수술? 지금? 무슨 환자인데?”

전화기 너머로 진현은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고영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보호자한테 수술 설명 다했어?”

-그게…….
진현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보호자가 없습니다.

“뭐, 보호자가 없어?”

-등산 중 추락한 환자인데 신분증도 핸드폰도 다 없어서… 차림상 노숙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고영찬은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이 밤에 신원 미상의 환자를 수술해야 한다고?

그것도 노숙자일지도 모르는 환자를?

“아니, 자네 지금 제정신이야? 지금 나한테 보호자 동의도 없이 수술을 하라고 전화한 건가? 노숙자일지도
모르는데?”

-…….

고영찬의 짜증에 진현은 침묵했다.

교수 입장에서 짜증이 나는 것은 이해하지만 신원 미상의 환자가 온 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수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어서….

그런데 그때, 옆에서 둘의 통화를 듣고 있던 이종근이 말했다.

“고영찬 교수.”

“잠깐 있다 전화할 테니 기다려.”

이종근의 부름에 고영찬은 급히 전화기를 껐다.

“네, 이사장님?”

이종근은 온화하게 웃었다.

“그냥 수술하지 말게.”

“네?”

고영찬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짜증이 나긴 했으나 짜증은 짜증이고 수술을 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신원 미상의 환자라며? 노숙자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다 병원 손해야. 보호자를 찾고 수술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라고 해.”

“하지만… 그러다…….”

고영찬은 주저주저 말했다.


김진현의 설명대로라면 지금 수술을 안 하면 이 환자는 죽을 수도 있다.

“뭐, 잘되든 잘못되든 우리의 훌륭한 김진현 선생이 알아서 하겠지.”

고영찬은 이사장의 뜻을 눈치챘다.

혹시 환자가 잘못되면 이 일을 빌미로 김진현을 쳐내려는 것이다.

물론 이럴 경우 김진현의 잘못이 아니라 수술을 미룬 고영찬의 잘못이지만 그 정도는 조작해 덮어씌울 수 있다.

이종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걱정 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김진현은 황망한 얼굴로 고영찬과의 전화를 끊었다.

‘수술을 진행하려면 보호자를 찾으라고?’

그가 경찰도 아니고 이 밤에 보호자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못 찾으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기가 찼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김진현 선생님, 수술 준비하면 될까요?”

응급의학과 의사가 물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외과 사정상 수술을 진행 못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러면?”

응급의학과 의사는 화들짝 놀랐다.

수술을 안 하면 방법이 없는데?

진현도 똑같은 마음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병원 시스템상 수술을 진행하려면 반드시 교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길.’

진현은 욕설을 삼키며 늦은 밤에 다른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대일병원에서 수술을 못하면 다른 병원에라도 보내서 수술을 받게 해야 했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기독병원응급실입니까?”

-네, 기독병원인데요.

“전원(Transfer)할 환자가 있는데 혹시 외과 선생님과 연락할 수 있습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김진현은 기독 병원 외과 당직 의사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했으나 상대는 난색을 표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다중 추돌사고로 응급환자가 너무 많이 와서 저희도 수술을 진행할 인력이 부족합니다.

사정이 그러면 어쩔 수 없다.

진현은 입술을 깨물고 인근 수술이 가능한 병원들에 전화했다.

광혜 병원, 모교인 한국대 병원, 강북 기독 병원…….

하지만 다들 사정이 비슷했다.

-지금 응급 간이식이 있어서…….

-대동맥류 파열 수술이 있어서…….

-저희는 다들 학회 중이에요.

날씨가 궂어서일까?

하필 그날따라 여유 있는 병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런 어떻게 하지?’

그러는 사이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분침이 이동할 때마다 진현의 가슴도 타들어가는 듯했다.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데.’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배 안에서는 피가 나고 있을 것이다.

그때 응급실 간호사가 진현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환자분 혈압 떨어져요!”

“……!”

급히 노숙자로 추정되는 환자에게 가보니 정말 수축기 혈압이 60 으로 떨어져 있었다.

피가 없어서인지 안색도 파리했다.

진현은 급히 지시했다.
“수혈 더 해주세요. 수액도 급속 주입해 주시고요.”

더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것도 위험했다.

핸드폰을 들어 다시 당직인 고영찬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호자는?

“보호자는 아직…….”

-내가 뭐라고 했어? 보호자 찾으라고 했지?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화기너머로 고영찬이 역정을 냈다.

-자넨 수술이 장난인 줄 아나? 신원 불명의 노숙자를 수술할 수는 없으니 책임지고 보호자를 구해와!

그러고 뚜우뚜우 전화가 끊겼다.

“…….”

진현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곤란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떻게 하죠, 김진현 선생님? 빨리 수술을 해야 할 텐데.”

순간 진현은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꼴이란 말인가?

눈앞에 환자가 있는데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너무하는 것 아니야?

진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술 진행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당직 교수님이 보호자 없이 수술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수술을?”

진현은 짧게 답했다.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네?”

응급의학과 의사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누가 수술을 진행한다고?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제가 집도하겠습니다. 수술 준비해 주십시오.”

***

“하, 하지만…….”

응급의학과 의사는 말을 더듬거렸다.

물론 그도 김진현이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단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이건…….

하지만 김진현은 짧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수술 안 하면 환자를 잃습니다. 제가 전부 책임질 테니 준비해 주십시오.”

솔직히 더 이야기하기 짜증났다.

눈앞에 환자가 있는데 이 무슨 한심한 상황이란 말인가?

‘됐어. 그냥 내가 수술하겠어.’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당직 교수의 확인하에 수술을 진행하는 거겠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이 너무 늦어 당직 교수 외에는 부탁할 전문의도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수술도 아니고.’

지난 삶에서 이런 외상 환자의 수술은 숱하게 해봤다.

더구나 이 환자의 경우 간이 찢어진 것도 아니고, 비장이 파열된 것도 아니고, 대동맥이 터진 것도 아니다.

상한 소장만 손보고 나오면 된다.

그렇다고 1 년 차가 진행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지만,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게 뭐 대단한 수술이라고. 젠장.’


일단 결정이 되니 응급에 걸맞게 수술준비는 착착 이뤄졌다.

“저, 김진현 선생님. 그런데 수술 후 입원은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그 말에 진현은 잠시 고민했다.

원래는 당직 교수인 고영찬 앞으로 입원장을 내야 하지만…….

“그냥 제 이름으로 입원시켜 주십시오.”

“네, 선생님 이름으로요?”

교수도, 전문의도, 치프도 아닌 1 년 차 앞으로 입원을 시키다니?

진현도 곤란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고영찬 교수가 받겠는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해주십시오.”

***

예상대로 수술은 어렵지 않았다.

진현은 메스로 배를 열은 후 피가 흐르는 동맥을 지혈했다.

그리고 손상된 장을 절제 후 정상 장의 끝과 끝을 연결했다.

마지막으로 오염된 부분을 깨끗이 세척 후 배를 닫았다.

“바이탈(Vital) 괜찮나요?”

수술을 마무리하며 물었다.

“네, 혈압도 회복됐고 좋습니다.”

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배를 닫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치료가 끝났으니 앞으론 순조롭게 회복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신원미상인 게 걸리긴 하지만…….’

날이 밝으면 빨리 보호자를 찾아야겠다.

이후 회복실로 환자를 퇴실시킨 후 이런저런 조치들을 취했다.

가장 급한 게 장출혈이었을 뿐, 전신에 이런저런 상처가 수북해 필요한 조치를 끝내고 나니 새벽 3 시가 지나


있었다.

그제야 진현은 토막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1

81. 뜻하지 않은 유명세 (3)

그리고 이른 아침, 이종근은 한남동 자택에서 출근하자마자 민 비서에게 김진현의 소식을 물었다.

“밤사이 응급실에 신원 미상의 환자가 왔는데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 보세요.”

민 비서는 오래 걸리지 않아 상황을 보고했다.

“출혈 환자였고, 수술을 위해 다른 병원으로 전원(Transfer)하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환자는 어떻게 됐나요?”

이종근은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만약 문제가 생겼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진현의 책임으로 덮어씌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 비서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김진현 선생이 직접 수술을 집도해서 현재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뭐라고요?”

이종근은 잘못 들은 듯 되물었다.

누가 뭘 했다고?

“…김진현 선생이 직접 수술을 집도했다고 합니다.”

“…….”

이종근은 잠시 침묵했다.

장출혈 환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걸 직접 수술했다고?

이제 1 년 차 초반인 레지던트가?

물론 고난도의 수술은 아니었고, 오히려 간단한 쪽에 속하는 수술이었다.

그래도 그건 전문가의 입장에서 간단하단 거지, 1 년 차가 할 수 있는 수술이란 뜻은 결단코 아니었다.

‘도대체 이놈은……?’

아무리 규격 외의 괴물이라 불린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더구나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비행기에서 총리를 구한 적도 있고,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이전 강민철 교수가 쓰러진 간이식 수술 때 혈관을
문합한 게 김진현이란 이야기도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이종근은 지난 1 년간 숱하게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의사의 실력엔 지식과 재능 외에도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환자를 진료해 본 경험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경험이 없으면 전부 죽은 재산이다.

그런데 김진현, 이놈은 경험이란 항목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의학실력에 의문을 가지고 지난 1 년간 숱하게 뒷조사를 했으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노력으로 의대에 왔다.

심지어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기 전엔 꼴찌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딱히 다른 곳에서 임상 경험을 한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 불가해한 천재성에 기가 질렸으나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종근은 민 비서에게 다시 물었다.

“1 년 차가 수술했는데 환자한테 문제는 없나요?”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조그마한 문제라도?”

“…….”

민 비서는 눈치를 볼 뿐 대답하지 못했다.

이종근은 헛웃음이 나왔다.

일순 이런 갈등이 생겼다.

자신과 혜미가 사이만 좋았다면 데릴사위로 삼을 것도 고려해 볼 만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냥 나중에 교수자리 하나 줄까?’

이상민과의 대립만 아니면 ‘그의 대일병원’에 큰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너무 뛰어나서 안 돼. 이상민이 너무 비교돼.’


가문의 인물들로 이루어진 이사회는 적통이 아닌 이상민을 끌어내릴 핑계만 찾고 있었다.

자신들의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러다간 차후 이상민을 위해 준비해 놓은 교수 한 자리도 김진현에게 주라고 할 판이었다.

물론 무리를 하면 교수 자리야 하나 더 만들 수 있지만, 또 그 과정에서 이사회가 무슨 잡소리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젠장. 처리할거면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벌써 이리 뛰어난데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짐작도 안 갔다.

이종근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그 신원 미상의 환자는 수술도 김진현 선생이 했고, 입원도 김진현 선생 앞으로 해 있는 건가요?”

“네.”

“그건 우리 대일병원 시스템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민 비서는 답했다.

“네, 그렇긴 합니다. 지금까지 개원 이래 1 년 차가 수술을 하거나 입원을 시킨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물론 레지던트라고 수술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었다.

응급 수술은 환자의 상황과 능력에 따라 재량껏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런 수술을 1 년 차가 홀로 진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별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번에야 ‘요행히’ 별문제 없었지만,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군요.”

이종근은 ‘요행히’에 힘을 주었다.

민 비서는 이종근의 뜻을 눈치챘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런 독단적인 행동은 환자에게 큰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더구나 신원 미상의 환자를 마음대로 수술하다니.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라고 봅니다.”

“네, 이사장님. 상황을 검토 후 징계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그래요. 민 비서가 알아서 ‘공정히’ 조사해주세요.”

민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억지스러운 트집이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꼬투리를 잡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민 비서는 머릿속으로 징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번엔 철저히 이사장 이종근의 말에 따르는 인물들로만 위원회를 짤 생각이었다.

***

진현에게 원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그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늘 그렇지만 원무과에서 의사에게 좋은 일로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여보세요? 김진현 선생님입니까?

“네, 김진현입니다.”

-아, 네. 선생님. 원무과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어제 입원한 신원 미상의 환자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그 노숙자로 추정되는….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였다.

‘뭐, 입장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원무과에서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 보호자는 못 찾으신 거죠?

“경찰이 조사 중이니 연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비용 처리에 문제가 있지는 않겠지요?

“순조롭게 회복 중이라서 조만간 의식을 차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식을 차리면 보호자와 연락이 될
겁니다.”

-노숙자란 이야기가 있던데…….

그건 진현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멀쩡한 행색은 아니긴 했다.

뭐, 그래도 돈이 없다고 치료를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우선이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기다려 보십시오.”

그런데 원무과에서 말했다.

-만약 비용 처리에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도 문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진현은 어이가 없었다.

단지 환자를 치료했을 뿐인데 무슨 문책이란 말인가?

확 짜증이 나 쏘아붙였다.

“알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면 됐죠?”

그러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들의 걱정이 무색한 일이 생겼다.

신원 미상의 환자가 생각보다 빨리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

신원 미상의 환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여긴?”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간호사는 그가 눈을 뜨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환자분? 괜찮으세요?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아… 네. 병원입니까?”

전신이 몽둥이찜질을 당한 듯 아팠지만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급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진현 선생님? 환자분 깨셨어요.”

-아, 네. 지금 가보겠습니다.

곧 병실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가 들어왔다.

젊다 못해 앳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깊은 느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환자분?”

“아… 네. 여긴 병원인가요?”

“네, 대일병원입니다. 통증은 괜찮으십니까?”

그 질문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 않고 온 전신이 찢어지듯 아팠다.

“아프군요.”

“진통제를 좀 더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그만하긴 다행입니다. 어제 일이 기억은 나십니까?”

그의 머리에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야밤에 산속에서 술을 마시고 걷다 미끄러져 살아 있는 게 다행일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장출혈 외엔 큰 부상이 없었고, 장출혈도 수술이 잘 끝났습니다. 좀 더 쉬시면 전부 나을 것입니다.”

“수술은 어느 선생님께서 해주신 것입니까?”

그는 어느 감사한 의사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것인지 물었다.

“제가 했습니다.”

그는 놀랐다.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수술을 집도했다고?’

의아했으나 진현의 깊은 눈을 보자 왠지 이해가 되었다.

묘하게 연륜이 느껴지는 의사였다.

나이와 동안의 외모를 떠나서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저를 구해주셨군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만하길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네?”

진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연락할 만한 보호자는 없습니까?”

“보호자라면?”

“부인이나 자식, 형제… 아니면 친척이라도. 혼자 오셔서…….”

하지만 환자는 고개를 저었다.


“가족이나 친척은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대신 가까운 사람이 한 명 있으니 그 친구한테 연락하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환자분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고 보니 환자의 이름도 모르고 대화하고 있었다.

“김종현, 김종현입니다.”

김종현.

국내 최고의 동양화가 중 한 명인 대화백(大畵伯) 김종현은 답했다.

***

신원 미상 환자의 신분은 곧 밝혀졌다.

민 비서가 실장으로 있는 창조기획실에 한 통의 전화가 왔던 것이다.

“저, 실장님. VIP 환자 때문에 전화가 왔는데요.”

김진현을 어떻게 징계할 것인지 한창 고민하던 민 비서는 의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창조기획실 실장 민소영입니다.”

-한국대학교 동양학과 학장실입니다. 대일병원에 입원하신 김종현 화백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네?”

창조기획실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다.

이사장 이종근의 개인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과 대일병원을 방문하는 VIP 를 모시는 것.

‘김종현이면 국내 최고로 꼽히는 대화백이잖아. 그런데 우리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은 적 없는데?’

김종현 대화백 정도의 명망 높은 인사가 입원하면 창조기획실에 연락이 온다.

그들이 불편하지 않게 챙기는 게 창조기획실의 중요한 업무니까.

뭔가 저쪽에서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그녀는 공손히 물었다.

“죄송한데 김종현 화백께서 저희 병원에 입원하신 게 맞나요? 저희는 따로 연락 받은 게 없는데…….”

-그런가요? 이상하다. 분명 대일병원으로 입원했다고 하는데… 한번 확인해 줄 수 없으신가요?


민 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그녀는 전화를 끊지 않고, 병원 인트라넷에 접속해 검색어를 입력했다.

김종현… 김종현… 마우스 커서가 모레시계로 바뀌며 전산을 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검색 결과가 나왔다.

수많은 대일병원의 입원환자 중 김종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런데…….

“……!”

마우스를 쥔 민 비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 설마… 아니겠지?

그때 전화기 건너편에서 소리가 울렸다.

-어제 등산하다 낙상해서 입원했다 하던데 아닌가요? 장출혈로 수술도 하셨다던데…….

전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환자: 김종현, 책임담당의사: 김진현]

신원 미상 환자의 정체가 대화백 김종현이었다고?

민 비서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2

82. 뜻하지 않은 유명세 (4)

그 시각,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던 진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기자들에게 끌려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김종현 화백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화백(畵伯)이면 화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행색이 추레하더라니… 화가였구나. 그래도 노숙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도 진현은 입원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유명한 사람인가? 웬 인터뷰야?’


교양과 시사에 까막눈인 진현은 김종현이란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환자 보느라 바쁜데.’

진현은 응급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 때문에 빠르게 답했다.

“낙상으로 장출혈이 심했는데, 현재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장출혈 외에 큰 부상은 없었나요?”

“뇌진탕과 발목의 골절이 있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닙니다.”

그 밖의 여러 질문이 이어졌고 진현은 답해도 되는 선 안에서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허락한 인터뷰여서 어느 정도의 정보 공개는 상관없었다.

“네, 인터뷰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응급실의 다른 환자 때문에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진현은 급히 사라졌다.

인터뷰하던 두 명의 기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요, 선배.”

“그렇지?”

“명찰 보니… 저 선생님 레지던트 아닌가요? 교수 아니죠?”

“교수 아니야. 확인해 보니 1 년 차래.”

“김종현이면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국내 최고로 꼽히는 대화백인데, 고작 레지던트 1 년 차가 전담해


치료하다니.”

기자들은 의문을 품었다.

대일병원은 광혜병원과 더불어 VIP 를 착실히 챙기는 병원으로 유명했다.

창조기획실이라는 VIP 를 챙기는 부서가 따로 있을 정도니.

물론 김종현이 힘있는 권력자나 기업가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이름 높은 명사로 충분히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상하네요. 무슨 생각이지?”

“그러게.”

그들은 이사장의 추악한 음모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이사장 이종근도 상상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설마 신원 미상의 환자의 정체가 대화백 김종현이었을 줄이야.

“그런데 저 레지던트 선생님 왠지 낯이 있네. 어디서 봤지?”

고민하던 후배 기자가 어느 순간 손뼉을 쳤다.

“아!”

“왜?”

“김창영 총리요.”

“뭐?”

“저 선생이 그 의사잖아요. 비행기 안에서 김창영 총리를 수술한 천재 외과의사 김진현!”

“아! 그렇네?”

선배 기자도 떠올렸다.

한때 떠들썩한 이야기였다.

“그러면 일부러 저 젊은 의사한테 김종현 화백을 맡긴 건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총리도 치료했던 유망한 의사니.”

그들은 멋대로 추측했다.

선배 기자가 눈을 빛냈다.

“가만 봐라? 이거 제법 스토리가 나오는데?”

“뭐가요?”

“작품의 영감을 위해 산에 갔다 낙상한 대화백. 그리고 그 대화백을 치료한 젊은 천재의사. 뭔가 드라마 같지


않냐?”

후배 기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네티즌들도 좋아하겠네요.”

“그래, 사실 단순히 김종현 화백이 다쳤단 이야기에 누가 관심 있겠어? 이 정도 스토리는 있어야 관심을
가지지.”

그들은 머릿속에서 기사를 구상했다.

당연히 그 기사의 주인공은 두 명이었다.

대화백과 대화백을 치료한 천재 외과의사.


물론 진현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

[중태에 빠진 대화백(大畵伯)을 구한 천재 외과의사 김진현.]

다음 날 이런 제목의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기사에는 대화백이 작품의 영감을 위해 야밤의 산을 배회하다 추락사고가 났고 극적으로 그를 구한 김진현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적혀 있었다.

기사의 흥행을 위해 김진현이 이전에 비행기에서 총리를 구한 하늘의 외과의사란 사실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

그 기사를 마주한 이사장실의 분위기는 뭐랄까… 전투에 진 패잔병 같다고 해야 할까?

“이게 도대체…….”

이종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이놈은 항상…….”

뒤로 자빠질 때마다 코가 깨지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황당할 지경이다.

김진현 이놈은 하늘이 지켜준단 말인가?

한편 고영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종근의 지시였지만 그는 당직의사로서 김종현 화백을 방치했었다.

의문을 가지고 파고들면 엄청난 후폭풍이 생길 문제였다.

그나마 김진현이 살려서 망정이지 잘못됐으면 의사 가운을 벗어야 할 수도 있었다.

“괘, 괜찮을까요?”

“뭘?”

“고작 1 년 차가 수술을 하게 놔뒀으니…….”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명백한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것도 추악한.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지.”


“그러면?”

“늦었지만 담당의사를 김진현 그놈한테서 다른 교수로 바꿔야 하지 않겠나? 퇴원할 때까지 김진현 혼자만 보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자네가 진료하게.”

고영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회복된 지금에 와서 담당 의사를 바꾸는 것도 참 추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

한편 김진현도 응급실에서 그 인터넷 기사를 봤다.

환자가 이야기해 준 거다.

“선생님이 그 김진현 선생님이세요?”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기 기사가…….”

그리고 기사를 읽은 김진현은 아연한 마음이 들었다.

‘이, 이게 뭐야……?!’

그의 마음에 든 생각은 또? 였다.

간만에 친 대형사고였다.

‘왜 맨날 이런 꼴이야.’

물론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의 마음속 목표는 돈 잘 벌고, 잘나가는 외과의사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상식적인 선 안에서 인정받고 싶다고!

그러던 중, 고영찬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깐 볼 수 있나?

진현은 지난밤이 떠올라 불쾌한 마음이 들었으나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연구실에 도착하자, 고영찬이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목소리다.


“자네에게 하나 양해할게 있어서 그러네.”

“무엇입니까?”

“김종현 화백의 진료는 앞으로 내가 담당해도 되겠나? 자네도 1 년 차 입장에서 VIP 환자를 보는 게
부담스럽지?”

진현은 고영찬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권력욕이 있는 의사 입장에선 VIP 환자를 하나라도 더 많이 진료하는 게 좋다.

그게 차후 다 힘이 되고, 명예가 되기 때문이다.

뭔가 한심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데려가 주면 진현 입장에선 고맙긴 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김종현 화백에겐 내가 직접 말하겠네.”

고영찬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김종현이 고영찬의 진료를 거부한 것이다.

“그냥 김진현 선생의 진료를 받겠습니다.”

“네? 하지만… 김진현 선생은… 이제 고작 1 년 차로…….”

그러나 김종현은 고개를 저었다.

“1 년 차여도 실력이 부족해 보이진 않더군요. 무엇보다…….”

그는 고영찬의 뱀 같은 눈을 빤히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지만, 김진현 선생은 참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더군요. 몇몇 다른 의사들과 다르게요. 그렇지
않습니까?”

며칠간 김종현은 김진현이 진료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이와 실력을 떠나서 이 어린 의사한테는 ‘마음’이 있었다.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고영찬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김종현이 그날 밤의 추악한 수작을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러나 지은 죄 때문인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김진현 선생님한테 계속 진료를 받을 것입니다.”

“…….”

“볼일이 없으면 그만 가보십시오. 마침 그림을 그리려던 중이어서….”

“…알겠습니다.”

고영찬은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병실에서 나갔다.

***

시간이 지나자 기사의 후폭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응급실에 방문한 환자들이 김진현의 진료를 요청한 것이다.

“여기 응급실에 김진현이란 용한 젊은 선생님이 계시다던데…….”

“저도 김진현 선생님 진료받게 해주세요.”

진현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특히 김종현 화백의 갤러리가 청담동, 즉, 근처에 위치한 것이 직격타였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천재 의사 김진현의 진료를 위해 몰려든 것이다.

‘다른 병원 가라고!’

원래도 바빴던 진현은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 뒤, 김종현 화백이 퇴원할 때가 되었다.

김종현은 여전히 노숙자를 연상시키는 행색으로 인사를 했다.

원래 기인 같은 성격의 그이지만 자신을 치료한 김진현에겐 항상 얌전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좋아져서 퇴원합니다.”

“…네, 다행입니다.”

그렇게 답하면서도 김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 죽을 것처럼 환자 복이 터진 것은 모두 이 김종현 화백 때문이었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청계산은 기독 병원이 더 가까운데. 왜 하필 우리 병원으로 와서.’

그렇다고 김종현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늘이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진현과 인사를 한 후, 김종현은 제자 이수훈의 부축을 받고 퇴원했다.

발목 골절로 한 팔에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이제 괜찮으세요?”

“응, 많이 좋아졌다.”

“그림도 그리시던데.”

“그래,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어.”

제자 이수훈의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최고로 꼽히는 김종현이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니?

“역시 죽을 위기를 극복하니! 이게 무협소설에서 말하는 절벽 기연이군요. 나도 그러면 절벽에서……!”

그 말에 김종현은 불편한 몸으로 이수훈의 꿀밤을 먹였다.

“아야, 왜 때려요?”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니 느껴지는 게 있어서… 그러고 보니 선물로 준다는 걸
까먹었군. 네가 병동에 좀 가져다 줘라.”

그러면서 김종현은 한 폭의 화첩을 건네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틈틈이 그린 그림이다.

“그냥 병원에 주시려고요?”

“왜?”

“아니, 그냥…….”

제자 이수훈은 말끝을 흐렸다.

김종현 입장에서야 그저 본인이 그린 그림에 불과할 테지만 그의 그림은 부르는 게 가격이라 그 금전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도 최소 1 억은 넘을 텐데… 아깝다.’

하지만 빼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병동에 고이 그림을 전달했다.

“이게 뭐예요?”

병동의 간호사가 그림을 받았다.

“입원 기간 동안 고마웠다고 저희 선생님이 병원에 전하는 선물입니다.”


“어머, 감사해요.”

김종현의 이름값을 알고 있는 간호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사를 표했다.

“특히 김진현 선생님께 감사했다고, 말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네, 그럴게요.”

병동 간호사들은 함께 그림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

그들은 놀람에 입을 가렸다.

인물화였다.

한 앳된 얼굴의 젊은 남자의사가 마음을 담아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형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담아야 한다는 인물화의 궁극적 목표, 전신사조(傳神寫照).

김종현의 인물화는 그 전신사조를 극명히 담아 얼핏 봐도 의사가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한 간호사가 떠듬떠듬 물었다.

“이거 우리 김진현 선생님 맞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은데요…….”

초상화처럼 완전 똑같진 않지만 김진현을 아는 사람이 보면 충분히 그를 연상할 그림이었다.

“이 그림 어쩌죠?”

“김진현 선생님 줘야 하나?”

“그런데 이거 김진현 선생님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리고 김진현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준 선물은 아니잖아.
우리 병동에 준 것이니…….”

“그렇다고 우리 병동에 걸어두기에는 너무 대가의 명작 아닌가요?”

원래 환자의 기분 전환을 위해 병동마다 아마추어들의 그림을 걸어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럴 수준이 아니다.

병동을 담당하는 수간호사가 말했다.

“이런 명작은 우리만 볼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유해야지. 우리 병동 말고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는 데 걸자.”

“그러면?”
“병원 행정과에 이야기해 1 층 로비에 거는 게 어때? 거기가 사람들 제일 많이 다니니.”

좋은 의견이었다.

이 정도 명작은 로비에 걸어 많은 사람이 공유해야 했다.

병원 전체적으로도 좋은 일이다.

“김진현 선생님도 좋아하겠지?”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나라면 엄청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간호사들은 신 나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진현을 모티브로 그린 듯한 김종현의 인물화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로비에 걸렸다.

그리고 환자 및 병원의 직원들은 김종현의 그림을 보고 감탄을 토하며 서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3

83. 인스턴트 도시락 (1)

“이야. 역시 대화백은 다르긴 다르구나. 인물이 살아 있는 것 같네. 저런 의사를 만났으면.”

“그러게요. 그런데 김종현 화백이 자신을 진료했던 의사를 모티브로 저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정말이야? 누구지?”

“외과의 김진현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김진현?”

“그… 있잖아. 인턴 때부터 괴물이라 불리던.”

“아, 그 천재!”

병원의 모든 사람들이 그림을 보며 김진현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늘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홍보팀이 오랜만에 찾은 일거리에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병원 홈페이지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진현의 인물화를 찍어 올렸고 덕분에 대일병원과 연관된 모든 사람이 그
인물화를 보게 되었다.

김진현.

레지던트에 불과한 그 이름이 대일병원 모두의 머리에 다시 한 번 깊숙이 각인되었다.


***

그렇게 대일병원의 외과 파트 응급실은 평온하고 행복했다.

단 한 명, 진료를 담당하는 김진현만 빼고.

‘죽겠다…….’

김종현인지 뭐시긴지, 그 화가를 치료한 이후로 환자가 부쩍 늘어났다.

이전에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나한테 무슨 원수를 져서… 조금만 쉬자… 제발…….’

물론 힘든 것은 김진현 혼자뿐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행복했다.

“김진현 선생 덕분에 외과 쪽 문제가 있는 사람은 걱정이 없어.”

“그러게. 계속 응급실에 있었으면 좋겠어.”

진현이 들으면 복장이 터질 이야기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간이식 파트의 주니어 교수 유영수가 응급실에 왔다가 진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아니, 김진현 선생? 여기서 무슨?”

다들 김진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유영수는 소문을 전혀 못 듣고 있었다.

강민철이 미국에 교환교수로 떠난 후, 그의 몫까지 처리하느라 수술장에서 살다시피 한 탓이다.

세상과 격리된 채 수술만 하던 유영수는 김진현이 응급실에서 고생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일하는 김진현의 몰골이 보통이 아니었다.

반의 반쪽이 된 김진현의 얼굴에 유영수가 물었다.

“자네 괜찮은가?”

“…….”

진현은 침묵했다.

당연히 괜찮지 않다.

“그런데 왜 자네가 응급실에 있는 건가?”

원래 대일병원 외과는 1 년 차 초반에 응급실을 담당하지 않는다.

“2 년 차 선생님들 업무가 과중하다 해서…….”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응급실에 있었던 건가?”

“이제 2 달째입니다.”

“2 달? 그러면 다음 달은?”

“다음 달도 응급실입니다.”

유영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2-3 달 연속으로 응급실을 전담하는 게 없었던 사례는 아니지만, 이제 막 외과에 걸음마를 시작한 애한테
너무한 것 아닌가?

‘강민철 교수님이 잘 챙기라고 당부했었는데.’

유영수는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고 생각했다.

바빠도 좀 신경을 썼으면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안 되겠네. 자네가 죽겠어.”

“…….”

“내가 주임교수님께 이야기하겠네. 응급실에서 빼달라고.”

“정말입니까?”

진현의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유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잘 이야기해 주겠네. 싫나?”

진현은 그답지 않게 빠른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

드디어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한 지도 100 일이 지났다.

그 말은 지옥의 100 일 연속 당직이 끝났단 뜻이었다.

이제 근무처에 따라서 짧으면 2-3 일에 한 번, 길면 1-2 주에 한 번씩 ‘오프’를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오프라고 하루 종일 쉬는 게 아니다.

보통 저녁 8-9 시 넘어서 퇴근해 새벽에 돌아오는 것을 오프라고 한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병원 밖에 나갈 수 있는 게 어딘가?


“아아. 진짜 힘들었다. 오늘은 꼭 나가서 술을 마실 거야.”

혜미와 같이 내과를 전공한 김수연은 내과 당직실에서 녹초가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혜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친구 안 만나?”

“100 일 당직 서면서 깨졌어.”

“아… 괜찮아?”

김수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괜찮아. 어차피 이런 걸로 깨질 거면 지금 깨지는 게 나아. 그리고 나만 깨졌나? 새로 생긴 솔로 동지들이랑


술이나 먹어야겠다.”

그녀 말고도 100 일 당직을 서면서 솔로로 돌아온 이들이 많았다.

“너는 어때? 김진현 그 나쁜 놈이랑 진전이 좀 있어?”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도 솔로, 그것도 모태솔로였으니까.

이게 다 김진현 때문이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래?”

“진현이는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해.”

“그 이연희인가 하는 여우 간호사?”

“…응.”

“에휴. 남자란 것들은. 그런 불여시가 뭐가 좋다고. 그런데 김진현, 걔는 이연희랑 사귀는 거야?”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마지막에 만났을 때까지는 아니었는데…….

‘지금쯤 사귀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김진현은 외과 전공이었고, 이연희는 외과 병동의 간호사니까.

일하며 수도 없이 마주치겠지.
서로 마음이 있으니 지금쯤 사귀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참 가슴이 아팠다.

그때 김수연이 의문을 표했다.

“근데 김진현이 이연희를 좋아하는 게 맞긴 맞아?”

“뭐?”

“이연희가 김진현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데… 김진현이 이연희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야.”

“맞을 거야.”

“아니야. 이 언니가 여대 여우들 사이에서 자라서 감이 좋잖니? 난 김진현이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

그 말에 이혜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진현이 날 좋아한다고?

문득 이전에 진현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게 떠올랐다.

정말로 설마?

하지만 혜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다. 괜한 자신의 기대일 뿐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하지 마. 진현인 나 안 좋아해.”

하지만 김수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러서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너 이렇게 가슴만 졸이고 있을 거야? 나 같으면 고백이라도 해보겠다.”

“나 그, 그런 것 못해.”

진현에게 고백이라니. 못 한다.

김수연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큰 문제는 천하의 나쁜 놈 김진현이지만, 그녀가 보기에 혜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너 그나마 친구 사이도 멀어질까 봐 그러는 것은 아는데… 어차피 걔가 다른 여자랑 사귀어도 멀어져. 차라리
그럴 바엔 고백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혹시 알아? 너랑 김진현이랑 둘이 사귀게 될지.”

“…….”

진현이랑 사귄다고?
혜미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 끝까지 붉어졌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엔 김진현이 너한테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아. 이 언니의 감은 꽤 정확한 편이니 믿어봐.”

“…….”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고백해 보라니까.”

혜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

그때 간이식 파트의 주니어 교수 유영수는 연구실에서 주임교수인 고영찬을 만나고 있었다.

“김진현 선생의 응급실 근무는 너무 과중합니다. 조정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게. 유 교수… 다 알고 있네. 내가 알아서 하겠네.”

고영찬은 고개를 저었으나 유영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김진현 선생의 다음 달 스케줄을 보니 또 응급실 근무이던데… 세 달 연속 응급실 근무는 전례에 없는


일입니다. 조정을 해주십시오.”

고영찬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현재 김진현의 응급실 근무는 부당한 면이 많았다.

그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김진현 선생의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이러다 과중한 업무로 사고가 날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알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대체인력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다른 2 년 차의 투입이 가능한데 왜 김진현 선생을 응급실에 삼 개월이나


연속으로 근무시키려는 것입니까?”

유영수의 말은 모두 옳았다.

애초에 부당한 배치이니 고영찬은 논리적으로 할 말이 없었다.

‘곤란하군.’

고영찬은 표정을 굳혔다.

“유 교수.”

“네?”

“주임교수인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자네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강민철 교수님께 김진현 선생을 잘 돌보란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영찬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난 뭐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나?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게.”

유영수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더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니까. 괜히 이렇게 나서다가 자네가 다칠 수도 있어.”

경고였다.

그러나 유영수도 강민철만큼은 아니어도 강직한 인물이었다.

‘뭔가 있어.’

썩은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유영수는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도대체 어째서입니까? 말씀해 주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고영찬은 역정을 냈다.

“유 교수! 주임교수인 내가 말하잖아. 알아서 한다고! 빨리 돌아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러다 자네도 크게 다칠 수 있어!”

“……!”

유영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대체 김진현을 놓고 누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교수님, 레지던트, 즉, 전공의(專攻醫)들은 저희의 제자 아닙니까? 그것도 그냥 제자가 아니라, 저희를


대신해서 대학병원을 지탱하고 있는 감사한 제자들입니다.”

“뭐?”

레지던트들을 하찮은 소모품으로만 생각하는 고영찬을 찔리게 하는 말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유영수의 눈에 서린 각오를 마주한 고영찬은 그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음을 깨달았다.

‘젠장, 강민철도 그렇고. 이놈도…….’

수장(首將) 강민철 때문인지 간 파트에는 강직한 교수들이 많았다.


“자네. 정말 다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나?”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어. 대신 약속하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만약 함부로 입을 놀리면 힘들게 오른 교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고영찬은 고개를 돌려 주변에 혹시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 후 내키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

그날 저녁, 혜미는 레지던트가 된 후 첫 퇴근을 했다.

100 일 만에 퇴근이다 보니 옷이 계절에 전혀 맞지 않았다.

‘코트를 입고 출근했는데, 이젠 반팔을 입고 있는 사람도 보이네.’

이른 더위 때문인지 반팔을 입고 있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뭐하지?’

3 개월 만에 병원밖에 나오긴 했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냥 김수연이랑 술이나 먹으러 갈 걸 그랬나?

‘진현이는……?’

문득 김진현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100 일 당직이 끝났으나 응급실 근무인 그는 퇴근은커녕 잠잘 시간도 없었다.

‘더 말랐던데… 밥은 잘 먹나…….’

바보같이 걱정이 되었다.

오늘도 제대로 밥 못 먹었겠지?

‘도시락이나 싸다 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무슨 도시락이야, 이혜미.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분명히.’

그러나 진현의 마른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해준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고,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맨날 밥을 거르는 친한 친구가 불쌍해서 해주는 거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진현이와 나는 그래도 엄청 친한 친구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민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할 일도 없는데… 그래, 이건 그냥 친한 친구끼리 밥을 해주는 거야. 특별히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침 그때 그녀의 눈에 마트가 나타났다.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트에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4

84. 인스턴트 도시락 (2)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요리를 잘 못했다. 아니, 재능을 떠나서 요리란 것 자체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글지글.

열심히 지지고 볶고는 했으나…….

“읍.”

혜미는 자신이 만든 고기볶음의 맛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이, 이게 뭐야. 분명 인터넷에서 본 대로 했는데 왜 이런 맛이 나는 거지?’

다른 요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장을 잔뜩 봐왔는데… 요리가 아닌, 괴상한 창조물만 잔뜩 만들어졌다.

가히 연금술사에 버금가는 창조였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차라리 심폐소생술을 하지…….’

가사와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살아온 그녀는 요리가 심폐소생술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장을 봐온 덕에 건질게 있긴 했다.

스팸, 프랑크 소시지, 고추 참치, 김, 햇반으로 돌린 밥.

‘다 인스턴트잖아.’

그녀는 자신이 싼 도시락을 보고 좌절했다.


그나마 직접 만든 것은 타버린 계란 프라이 정도?

‘이연희는 요리도 잘하겠지?’

왠지 그 여우는 요리도 잘할 것 같았다.

패배감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 몰라. 정성이 중요한 거야.”

정성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도시락을 만들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

그녀는 인스턴트로 범벅된 도시락을 들고 다시 병원에 도착했다.

늘 살다시피 하는 병원이지만 예쁘게 원피스를 차려 입고, 도시락을 들고 진현을 만난다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진현아. 나 혜미인데 지금 뭐해? 바빠?”

-아니, 당직실에서 잠깐 눈 붙이고 있었어.

“그러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13 층 외과 병동 뒤쪽이지?”

-무슨 일인데?

“별건 아니고. 만나서 이야기할게.”

전화를 끊은 그녀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뭐라고 이야기하며 도시락을 주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도시락이 맛없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당직실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니 진현이 반쯤 감은 눈으로 나타났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얼굴에 혜미의 가슴이 또 바보같이 뛰었다.

“아, 안녕. 잘 지냈어?”

“어… 응. 그런데 무슨 일?”

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하면서 주지?

짧은 순간 숱하게 고민했으나 애초에 그녀는 이런 일에 재능이 없었다.

그녀는 도전장을 전하듯 불쑥 도시락을 내밀었다.

“이, 이거! 이거 주려고 왔어!”

“응? 이게? 웬 도시락?”

진현의 눈이 커졌다.

혜미는 부끄러움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하얀 얼굴이 주책없게 빨개졌다.

“너, 너! 요즘 계속 밥도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 누나가 선심 써서 싸온 거야! 고, 고, 고맙게


먹어!”

너무 민망해 그녀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도 이연희, 그 여우처럼 부드럽게 꼬리치듯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 맛은 좀 없을지도 몰라. 하, 하여튼 잘 먹어. 난 가볼게.”

그러고 그녀는 등을 돌렸다.

심장이 너무 뛰어 도저히 그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급히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려는데 팔목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진현이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다.

“……!”

팔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느낌에 그녀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녀는 더듬거렸다.

“…왜, 왜? 머, 먹기 싫어? 그러면 그냥 가져갈게.”

“아니, 그게 아니라…….”

진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그래? 오랜만인데 잠깐만 앉았다 가. 지금 당직실에 아무도 없어.”

두근.

당직실에 그와 둘이?
그녀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황문진이랑 둘이 쓰는데, 지금 문진이는 오프 나갔어. 들어와.”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당직실을 살폈다.

익숙한 전경이다.

그녀가 사용하는 당직실과 똑같이 생겼다.

닭장만 한 크기에 이층 침대 하나, 캐비닛, 샤워실 겸 화장실.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침실로 쓰는 좁은 공간에 그와 단둘이 있어서인지 맨날 보는 풍경인데도 안정이 안 됐다.

‘정신 차려. 이혜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털었다.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 아니야.”

진현은 웃었다.

“너 오늘 이상하다.

“…….”

너 때문에 이상한 거잖아!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진현은 당직실을 둘러보다 침대를 가리켰다.

“그런데… 의자가 없네. 그냥 여기 옆에 앉을래?”

그렇게 둘은 좁은 2 층 침대 밑에 나란히 앉았다.

진현은 별 신경 안 쓰는 듯했으나 혜미는 무척, 엄청엄청 불편했다.

이 좁은 방에서 침대 위에 딱 붙어 앉아 있다니.

“그런데 웬 도시락이야?”

“아니, 그냥… 요즘 밥도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진현은 크게 고마운 얼굴을 했다.

“고마워. 사실 오늘도 한 끼도 못 먹었는데… 혜미, 역시 나한텐 너밖에 없네.”

너밖에 없네, 란 말에 혜미는 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별 의미 없는 말인 것 알지만, 또 주책없게 뛰는 바보 같은 가슴이었다.

진현은 도시락을 열었다.

예쁜 통 안에 인스턴트만 가득한 음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현은 잠시 침묵했다.

혜미는 진현이 볼품없는 도시락에 실망했다 생각하고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 원래 요리 못해. 그, 그러니 그냥 먹어. 그래도 계란 후라이는 내가 한 거야.”

진현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응?”

“정말 고마워. 정말로. 잘 먹을게.”

깊은 감사의 마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마, 맛은 없을 거야. 그래도 그냥 먹어…….”

“아니야. 정말 잘 먹을게.”

진현은 수저로 한 움큼 밥을 퍼 입에 가져갔다.

“맛있어.”

“거, 거짓말.”

“정말 맛있어.”

진현은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아니, 사실 다 인스턴트인데 맛이 없을 수가 있나?

물론 그녀가 직접 한 계란 프라이는 간이 안 맞긴 했다.

그것 빼곤 다 맛있었다.

“정말 맛있어. 정말로. 고마워.”


“처, 천천히 먹어.”

진현은 순식간에 도시락을 비웠다.

“맛있게 잘 먹었다. 요리도 잘하네, 이혜미?”

“농담하지 마. 다 인스턴트인데.”

진현은 웃었다.

“농담 아니야. 맨날 먹고 싶을 정도인걸?”

“맨날…….”

맨날 해줄 수 있는데.

무심코 말하려던 혜미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결혼할 사람한테 맨날 해달라고 해.”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가 비운 도시락을 바라봤다.

이런 도시락쯤 맨날 해줄 수 있는데, 아니, 해주고 싶은데.

그가 맨날맨날 내가 해준 밥을 먹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

이후에도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혜미는 단둘이 좁은 공간에 있는 게 부끄러웠고, 진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 없었다.

불편하면서 가슴이 간질간질한 침묵이었다.

***

시간이 지난 후, 결국 혜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급실 많이 힘들지?”

“…….”

“힘들어도 밥은 잘 챙겨먹고.”

“…….”

답이 없다.

의아한 마음이 들 때였다.

툭.
그녀의 어깨에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

“……!”

그의 머리였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댄 것이다.

“지, 진현아?!”

그녀는 놀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혹시……?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그러나…….

“쿨…….”

그녀는 맥이 빠졌다. 잠이 든 것이다.

“뭐야…….”

한숨을 내쉬었다 뭘 기대한 거야.

‘계속 못 자서 피곤하겠지.’

그녀는 그를 침대에 눕히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욕심이 들었다.

‘잠시만… 잠시만 더…….’

어깨에 닿는 그의 느낌이 좋았다. 은은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잠시만 이 느낌을 더 느끼고 싶었다.

‘사랑해. 정말로.’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완전히 잠이 든 것인지, 그의 머리가 스륵 앞으로 미끄러지더니 그녀의 가슴을 스쳐 무릎으로 떨어졌다.

의도치 않게 그는 그녀의 허벅지 끝을 베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

허벅지 맨살에 느껴지는 그의 감촉에 그녀는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얼굴이 붉어지는지 모르겠다.

‘좀 더 긴 치마를 입고 올걸.’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진현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 바보.’

그녀는 가만히 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바보. 바보.’

그녀는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난 왜 진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7 년을 넘은 짝사랑이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의 얼굴을 보면 눈 녹듯 사라졌다.

같이 있고 싶다.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

오빠의 원한 따위는 잊고 그냥 그와 함께하고 싶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숙여 그의 귀볼 쪽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사랑해.”

깊게 잠든 진현은 깨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정말 사랑해. 이 바보야. 넌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진현의 입술을 살짝 덮었다.

무의식적인… 충동적인 입맞춤이었다.

“……!”

그녀는 본인이 한 행동에 스스로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미, 미쳤어.’

천만다행으로 진현은 깨어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진현과 첫 입맞춤을 했다.

아무도 모르는 입맞춤으로 둘 모두 처음이었다.

***

진현은 부스스 잠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저녁 11 시였다.

‘뭐지? 언제 잠든 거지? 혜미는 간 건가?’

인스턴트 가득한 도시락을 먹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깜빡 잠들었는지 그 뒤가 생각 안 난다.

‘혜미가 뭐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는데…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네.

방금 봤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또 보고 싶었다.

또 보고 싶고 옆에서 이야기하고 함께 있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런 감정들에 당황했다.

‘뭐, 뭐야.’

고개를 저었으나… 자꾸만 그녀가 떠올랐다.

꽃처럼… 아니, 꽃보다 예쁜 얼굴, 수줍게 도시락을 건네는 모습, 하얀 뺨이 붉어진 모습.

그 모습들이 자꾸만 떠올랐고, 진현은 자신의 감정에 당황하며 한 가지 생각을 하였다.

‘설마 내가……?’

그런데 그때였다.

띠리리.

전화벨이 그의 상념을 깨웠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응급실인가?

“네, 김진현입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의외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진현 선생? 나 유영수인데 잘 지내나?

“아, 네. 교수님.”

-지금 잠깐 시간 괜찮나?

“아… 네. 응급실에 당장 봐야 할 환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병원 근처에서 잠깐 볼까?

“아, 네. 알겠습니다.”

-병원 정문에서 보게.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전화기 너머 유영수 교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

유영수 교수가 진현을 데려간 곳은 역삼동에 위치한 한 순댓국밥집이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손님은 거의 없었다.

“김진현 선생은 식사했어?”

“아… 네. 그래도 먹을 수 있습니다.”

최근엔 밥을 먹을 때보다 거를 때가 많아 몇 끼든 몰아먹을 수 있었다.

“그래, 여기 국밥 맛이 괜찮더라고. 야간 수술 끝나고 잠깐 와서 소주랑 같이 먹으면 참 좋아.”

그러면서 유영수는 진현에게 졸졸 소주를 따라줬다.

진현은 당황해 말했다.

“저… 응급실 근무라… 술은…….”

“괜찮아. 오늘은 그냥 한잔하고 쉬어.”

“하지만…….”

새벽이라고 응급실에 환자가 안 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긴장해야 할 때다.

그 새벽에 잠을 깨 응급실에 올 정도면 꾀병은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영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간이식파트 치프한테 미리 이야기해 놨어. 오늘 너랑 술 좀 마실 테니 네 대신 응급실 근무 설 사람


구해놓으라고.”

“아… 네.”

그렇게까지 해줬으면 안 마실 도리가 없다.

진현은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평소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진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뭔가 일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5

85. 친구 (1)

하지만 유영수는 진현에게 술을 주며 일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놨다.

“술은 마실 줄 알아? 싫어하진 않고?”

“싫어하진 않습니다.”

“모든 파트에서 김진현 선생 칭찬이 아주 자자해. 오늘 알아보니 동양화 쪽의 대가(大家), 김종현 화백도 네가
치료했다며? 수술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유영수는 집요하게 묻지 않았다.

진현에겐 다행히도 외과엔 현재 이런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괴물 김진현이니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계속해서 벌이니 이젠 그러려니 하는 거다.

괴물 김진현이니까.

“모든 교수님이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지금도 벌써 이 정도인데 나중에는 얼마나 잘할지. 김진현 선생은
나중에 어떤 서브 스페셜을 전공하고 싶어?”
서브 스페셜(Sub special).

외과 내에서도 세부 전공을 뜻한다.

전문의를 따기 전엔 두루두루 배우다가 교수에 뜻이 있으면 세부 전공을 정해 그 한길을 깊게 파게 된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직 1 년 차니까. 지금 정하기엔 빠르지. 간은 어때? 강민철 교수님은 김진현 선생을 무조건 간 이식
파트를 시킬 생각인 것 같던데.”

진현은 어색히 웃었다.

나쁘진 않았다.

이전 삶에서 그의 서브 스페셜도 간, 담도(Hepatobiliary)이었으니까.

‘대일병원에 오기 전엔 혈관(Vascular) 쪽이 서브 스페셜이었지만.’

이전 삶에선 두 개의 길을 팠었다.

처음엔 혈관, 대일병원에 오고 나서는 간담도 파트.

이번 삶에서도 머지않아 결정해야 하리라.

“김진현 선생은 뭘 해도 잘하겠지. 강민철 교수님의 뜻처럼 나도 네가 우리 파트를 하면 좋긴 하겠는데.”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소주를 비웠다.

‘유 교수님도 성격이 좋단 말이야.’

이전 삶에서도 느낀 거지만 유영수는 참 온화했다.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워 거친 외과와 안 맞을 것 같은데 수술 실력과 환자를 보는 마음이 뛰어났다.

존경할 만한 윗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영수가 말을 멈췄다.

진현이 조심히 물었다.

“그런데 오늘 어째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냥… 고생하니 술이나 사주려고 불렀지.”

하지만 대답과 다르게 그런 눈치가 아니었다.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유영수가 물었다.


“김 선생.”

“네?”

“혹시 이전에 이사장님과 무슨 일이 있었어?”

“이사장님이요?”

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장이면 대일병원의 소유주를 말하는 건가?

혜미와 이상민의 아버지인?

말단 레지던트인 자신이 그런 높은 사람과 연관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전혀 없습니다. 그건 갑자기 어째서……?”

“그렇지?”

유영수는 쭈욱 소주를 들이켰다. 그러고 말없이 빈 소주잔만 쳐다봤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건 어째서 물어보는 것입니까?”

“하아.”

유영수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할지 말지를 고민했는데… 당사자인 너는 알고 있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

“네가 왜 응급실로 배치된 줄 알아?”

“그거야 인력이 모자라서…….”

“아니야. 이사장님 때문이야.”

“……?!”

진현의 눈이 커졌다.

이사장님 때문이라니?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유영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유영수의 입장에서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불의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너를 외과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야. 다른 사람도 아닌, 이사장님이 그걸 바란다고 하더군.”

“……!”

***

진현은 입을 벌렸다.

너무 놀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일병원의 이사장이 날 쫓아내고 싶어 한다고?’

황당하다 못해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자신과 이사장은 계약직 사원과 회장 같은 격차가 있었다.

그 높은 사람이 아무런 면식도 없는 자신을 왜 쫓아내려 한단 말인가?

“그게 정말입니까?”

“주임교수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야.”

유영수 교수가 이런 일로 농담을 하진 않을 거니 거짓은 아닐 거다.

하지만 진현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 이사장이 나를?

그럴 이유가 있나?

이혜미와 이상민 말고는 이사장 이종근과 그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삼류 드라마처럼 딸과 친하단 이유로?

그러나 이범수의 죽음 이후 혜미는 아버지와 형식적인 연 외엔 교류가 없다.

그러면 혹시 이상민 때문에?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저를?”

“그건 모르겠어. 다만…….”

“……?”

“정확한 것은 아니고… 단지 추측이지만… 최근 이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이사장님의 아들 때문일 수도 있어. 김


선생도 이상민 선생이 이사장님 아들인 것은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다. 나름 친한 친구였으니까.

“이종근 이사장님은 한국대 의대를 졸업 후, 대일병원 외과 교수, 과장, 병원장의 과정을 빠르게 거친 후
이사장이 되었어. 이상민 선생이 외과에 들어온 것도 아버지와 똑같은 코스를 밟기 위해서야.”

그것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게 저와 무슨……?”

“김 선생이 너무 뛰어나니까 방해가 되는 거지. 이상민 선생이 김 선생 때문에 전혀 빛을 못 보니까.”

“……!”

“대일 그룹 가문 내의 문제라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병원 이사회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은가 봐. 김 선생과


이상민 선생을 비교하면서.”

“…….”

김진현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뒤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물론 뭔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유영수 교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이 착하고 성실한 김진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막강한 실력자, 강민철이라도 있으면 방패막이되었을 텐데 미국에서 뭘 하는지 연락도 안 된다.

“지금 강민철 교수님과 연락이 안 되는데… 어쨌든 나도 이래저래 최선을 다해볼 테니 김 선생도 몸을 사려.”

“…….”

하지만 진현은 답하지 못했다.

이사장이 나를 쫓아내려 한다고?

너무 황당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뚝. 뚝.

밖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과 함께 진현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

그 뒤로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너무나도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다.

진현의 어두운 표정에 당직실을 같이 쓰는 황문진이 물었다.


“진현아, 괜찮아?”

진현은 멍하니 답했다.

“아… 아. 괜찮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야? 몸 안 좋은 것 같은데… 지금 시간 있으면 좀 자.”

사정을 모르는 황문진이 걱정했다.

“아니, 괜찮다.”

“좀 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참. 진현아 다음 주에 곧 하례식인데 너는 못 가지?

하례식.

대일병원 외과의 최대 규모 행사로 응급실근무자를 제외한 모든 외과 소속 의사가 모이는 회식이다.

“나는 못 갈 것 같다.”

“아쉽네. 네가 제일 고생하고 있는데. 네가 못 가다니. 비싼 소고기 집에서 한다던데.”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소고기야 먹고 싶지만 그럴 정신이 아니다.

‘하례식이면 이사장도 오겠군.’

이상민의 아버지, 이사장 이종근은 전(前) 외과 과장으로 외과의 중요행사에 가끔씩 얼굴을 비췄다.

“나 응급실 환자 보러 나가야겠다. 수고해라.”

“어, 응. 몸 안 좋은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말고.”

진현은 터덜터덜 내려가 환자를 진료했다.

다행히 특별한 것은 없는 환자라 간단한 처치 후 퇴실시켰다.

잠시 시간이 나 그는 병원 뒤편의 벤치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하지?’

허탈이 생각했다.

‘외과를 그만둬야 하나?’

이전의 삶에서 겪은 풍부한 임상 경험과 한국대 의대에서 쌓은 의학 지식의 소유자인 그는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이사장이 그를 찍었는데.
기업으로 치면 회장이 계약직 사원을 찍은 것이다.

그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젠장. 난 왜 맨날 이런 식이지?’

회귀 후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수능 공부, 돈을 벌기 위한 과외, 의대 공부, 인턴 생활, 외과 레지던트 생활.

뭐 하나 노력하지 않은 것이 없다.

편하게 쉰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원하던 피부과에선 두 번이나 운명적으로 밀려났고, 기껏 마음을 붙인 외과에서도 이런 꼴이다.

그냥 높은 교수도 아니고 이사장이라니.

천재지변 급이다.

이 정도면 극복이고 자시고 할 수도 없었다.

‘하, 빌어먹을.’

항상 이런 시련을 마주하게 하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화도 났다.

그저 열심히 살고, 남부럽지 않게 성공하고 싶어 노력했을 뿐인데… 왜 세상은 항상 불합리하고 부당한가?

도대체 이사장이 뭐라고?

‘정말 이상민 때문인 거야? 확인해 볼까?’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상민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하지만 뭔가 마음속에서 꺼려졌다.

의뭉스러운 이상민은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젠장,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때려치우고 다른 병원으로 가버릴까?’

대한민국에 병원이 대일병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갈 수 있는 곳이야 많다. 모교인 한국대 병원만 해도 그가


간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리라.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도망가야 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일병원을 포기하는 것이 아쉽다기보단 화가 나고 오기가 생겼다.

이전의 삶 때도 자신의 노력과 실력과는 상관없이 쫓겨나야 했는데, 이번 삶에도 그래야 한다고?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이사장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 이거 범생이 아니야?”

진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 생각 못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야, 야. 범생이. 김진현!”

“……?!”

진현이 고개를 돌리니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왠지 조폭을 연상시키는 험한 얼굴이었다.

누구지?

“…누구십니까?”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뭐야. 나 못 알아보는 거야? 작년에 봤잖아! 나 김철우야, 김철우!”

“……!”

진현은 화들짝 놀랐다.

김철우라고?

고등학교 때 일진?

“아니, 김철우? 수염은 어디로 가고?”

심볼 같은 수염을 깔끔히 밀어 못 알아봤다.

김철우는 시원하게 웃었다.

“야, 나도 이제 경찰이잖냐. 그래도 깔끔히 다녀야지. 하여튼 반갑다. 잘 지냈냐?”

수염이 있을 땐 딱 산적 같았는데, 깔끔히 미니 지금은… 음, 조폭 같았다.


호탕한 조폭.

김철우가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진현도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놀라긴 했지만 간만에 친구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반갑다. 그런데 대일병원엔 웬 일이냐? 뭐 수사할 거라도 있어?”

경찰시험에 합격한 김철우는 인근 강남 쪽에 위치한 경찰서에서 죽어라 일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아버지가 여기 다니셔서. 모시고 왔어.”

“아버지? 너희 아버지 어디 안 좋으시냐?”

“나도 몰라. 아버지랑 난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의사가 수술해야 한다고 난리를 피워서. 방금 상담하고 온 거야.
아버지는 지금 CT 검사하러 가셨고. 잠시 담배 피우러 나왔는데 어떻게 딱 너를 만났네. 반갑다.”

“어디가 안 좋으신데?”

“나도 잘 몰라. 무슨 대동맥 쪽이라던데… 이름도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동맥이면 혹시 트리플 A(AAA)?

“복부 대동맥류(Abominal aorta aneurysm, AAA)?”

“어,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짜식. 범생이답게 척하니까 딱 나오네.”

김철우는 진현을 만난 게 반가운지 연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진현은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동맥류면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데?’

김철우가 물었다.

“그런데 그 뭐시기… 동맥류가 무슨 질환이냐? 교수가 뭐라 이야기해 줬는데… 영어 섞어서 이야기해서 잘


모르겠더라고. 꼭 수술해야 한다고만 하고. 안 그러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거참, 뭐가 위험하단 건지.”

“동맥류는 대동맥의 혈관벽이 점점 늘어나는 질환이다.”

“그래? 늘어나면 뭐가 안 좋은데?”

“터질 수도 있다.”

“뭐?”

김철우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대동맥이 터져?

진현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웃으며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다.


대동맥이 늘어나 터지면 사망률이 90%에 달한다.

제대로 치료받아도 그렇다.

거의 다 죽는다고 봐야 했다.

대동맥류 파열의 치료는 정말 뛰어난 혈관 외과 전문의(Vascular surgeon)가 아니면 손도 댈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6

86. 친구 (2)

“뭐, 대동맥이 늘어난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만약 많이 늘어났으면 위험이 올라가.
그래서 예방적으로 수술을 해야 해.”

“그래?”

김철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껄렁껄렁해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똑같다.

아버지가 안 좋을 수도 있다니 걱정이 됐다.

“너 지금 시간 괜찮냐? 우리 아버지 검사 결과 좀 봐줘라.”

“그래.”

진현은 근처에 위치한 응급실로 가 전산에 접속해 김철우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

방금 찍은 CT 를 확인한 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뭐 안 좋아?”

“교수님께서 수술 언제 하자셔?”

“빨리 하자고 하시던데. 아버지 회사 일 때문에 미뤄졌어.”

“최대한 빨리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현은 CT 를 보며 말했다.

‘크기가 너무 커. 5.5㎝만 넘어도 위험하다 하는데… 대동맥 직경이 8㎝가 넘어. 8㎝가 넘으면 50%가 넘게
터지는데.’

1㎝ 남짓한 크기의 대동맥이 8㎝이 넘게 늘어나 있었다.

풍선만 한 것이다.
그것 말고도 안 좋은 점이 있었다.

크기가 최근 급속도로 커졌다.

1 년에 0.5㎝ 이상 커지면 안 좋은 징후로 보는데, 거의 2㎝ 가까이 커진 것 같다.

“그렇게 안 좋아? 아버지 회사일 때문에 수술 빨리 못 받으신다는데… 작은 수술도 아니고…….”

“그래도 최대한 빨리 수술받도록 해라. 최대한.”

이전 삶에서 대일병원에 오기 전 그의 세부 전공이 바로 이 대동맥을 보는 혈관 파트였다.

이렇게 위험한 대동맥이 터졌을 때, 살린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죽었다.

“그래, 알겠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범생이 네 말이니 믿어야지. 혹시 다른 주의할 것은 없냐?”

딱히 주의할 것은 없다.

다만…….

“만약 갑자기 아파하시거나 이상한 점이 보이면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와. 늦으면 절대 안 돼.”

“바로?”

“응, 바로. 절대로 늦으면 안 돼.”

그때 김철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아버지. 검사들 다 끝나셨나 보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김철우는 급히 검사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진현은 걱정했다.

‘괜찮으셔 할 텐데…….’

친한 친구의 아버지여서 그럴까? 괜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겠지?’

진현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길 바랐다.

***

“다음 주가 벌써 하례식인가요?”

“네, 이사장님.”
민 비서가 공손히 답했다.

하례식은 대일병원 외과 최대의 행사로 이사장 이종근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장소는 다 섭외했나요?”

“네, 예년과 동일하게 이태원 쪽으로 준비했습니다.”

매년 외과의 하례식은 이태원에 위치한 고급 고깃집에서 진행했다.

“그래요. 잘했어요. 이태원… 그렇게 멀진 않은데…….”

이종근은 문득 물었다.

“김진현 선생은 요즘 잘 지내나요?”

“…….”

민 비서는 눈치만 볼 뿐 답하지 못했다.

워낙 잘 지냈기 때문이다.

김진현은 응급실이 체질인지 날아다니다 못해 비상(飛上)하고 있었다.

실수는 무슨?

환자들의 만족도도 극히 높았고 심지어 천재 외과의사로 소문난 그에게 진료받으러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천재 외과의사.

어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김진현을 보고 ‘응급실 전담 외과 교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직 제대로 수련도 받지 않은 1 년 차에 불과한 그한테.

너무 뛰어난 탓이다.

그를 궁지로 몰기 위해 응급실로 보낸 고영찬 교수의 계략은 확실히 어긋났다.

오히려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이제 대일병원에서 김진현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례식엔 김진현 선생도 오나요?”

“응급실 근무자여서 못 옵니다.”

“저런. 가장 고생이 많은데 빠지게 되는군요.”

이종근은 마음에도 없는 이야길 했다.


“김진현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는 거죠?”

“네, 응급수술팀도 일단 다 참석은 합니다.”

원래 회식 때는 응급수술을 대비한 수술팀을 남겨놓는 경우가 많으나 하례식은 예외였다.

대일병원 외과 최고의 행사여서 응급수술팀도 모두 회식에 참석한다.

단 술은 마시지 않고 응급 상황이 생기면 곧바로 병원에 복귀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을 때 중환자라도 왔으면 좋겠군.’

이종근은 불쾌히 생각했다.

물론 아무리 혼자 있다 해도 김진현이 웬만한 중환자로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김진현이 보여준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다.

그 괴물 놈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을 수 없는 능력으로 돌파구를 마련했으니까.

오죽하면 레지던트 1 년 차 주제에 ‘응급실 전담 외과 교수’란 별명으로 불리겠는가?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와가지고. 조금의 틈도 찾을 수 없으니.’

이종근은 혀를 찼다.

***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례식 날짜가 다가왔다.

레지던트 고년 차들을 비롯한 외과 사람들은 진현이 불참함에 아쉬움을 표했다.

“제일 고생 많이 하는데 못 가서 어떻게 하냐?”

“그러게. 술 한잔 줘야 하는데.”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한잔 사주십시오.”

소고기를 못 먹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현은 걱정하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병원에 저 혼자 남는 것인가요?”

“응. 그래도 술은 안 먹고, 문제 생기면 곧바로 뛰어올 테니 걱정하지 마.”

워낙 큰 회식이니 수술팀도 참석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복귀하면 되니까.


다른 대형병원에서도 정말 중요한 회식 때는 응급수술팀도 빠짐없이 참석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진현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사장이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

이사장 이종근 때문이다.

정말 급한 환자가 왔을 때, 이사장이 조금이라도 수작을 부리면 큰일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이런저런 핑계로 수술팀이 출발하는 것을 지연시키기만 하면 되니까.

‘설마 그러진 않겠지. 그리고 그렇게까지 급한 환자가 올 확률도 거의 없을 거고.’

부산과 서울 거리도 아니고 이태원과 청담이니, 이사장이 수술팀이 출발하는 것을 아무리 훼방을 놓아도 최소 1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아무리 응급환자라도 그 잠깐을 못 버틸 정도로 급박한 상태의 환자는 거의 없었다.

일부의 경우만 제외하면 말이다.

진현의 걱정스런 안색에 수술팀의 치프 레지던트가 웃었다.

“너무 걱정 말라고. 정말 금방 달려올 테니. 그리고 별일 있겠어? 밤사이 동안 그렇게 안 좋은 환자가 오진


않겠지.”

“네, 감사합니다.”

치프의 말처럼 별일 없을 확률이 더 높았다.

매 밤마다 중환자가 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최악의 경우 웬만한 환자들은 김진현 스스로 전부 해결이 가능했다.

문제는 인력의 문제상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중환자가 올 때였다.

‘괜찮겠지.’

진현은 그러기를 바랐다.

***

저녁 7 시 50 분.

후두둑.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자주 오는 느낌이다.


‘유비무환인데…….’

병원에 유비무환이란 말이 있다.

있을 유, 비, 없을 무, 환자 환.

비가 오면 환자가 안 온다(有雨無患), 뜻으로 실제로 폭우가 오는 날은 환자가 적었다.

‘쭈욱 환자가 없었으면. 이런 날 오는 환자는 중환인데…….’

대신 폭우를 뚫고 올 정도의 환자는 중환자가 많았다.

“아, 빨리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

옆에서 황문진이 초조한 얼굴로 처방을 냈다.

그는 아직 일이 남아 하례식에 못 간 상태로 먼저 도착한 선배들한테서 빗발같이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이미 다들 회식 장소에 도착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중이었다.

-야, 황문진! 빨리 처리하고 와!

“아, 네. 네!”

진현은 옆에서 슬쩍 웃었다.

“대충하고 가.”

“아직 처방(Order)을 못 내서.”

“대신 내줄까?”

“아니야. 이건 주치의인 내가 해야지.”

성격이 가벼워 보이지만 황문진도 책임감이 깊었다.

“하아, 그냥 일도 많이 남았는데. 가지 말고 너랑 병원에 있을까?”

“그래도 제일 큰 행사인데 가야지.”

그런데 그때 띠리리 핸드폰이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응급실이 그에게 전화를 할 용건은 단 하나다.

새로 환자가 온 것이다.

‘무슨 환자가 온 건지?’


괜찮은 환자여야 할 텐데.

진현은 그렇게 바라며 전화를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항상 어긋난다.

전화기 너머로 죽을 듯이 급한 목소리가 터진 것이다.

-김진현 선생님! 빨리 응급실로 오세요! 대동맥류 파열(AAA rupture) 환자 왔어요!

“……!”

진현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동맥류 파열은 사망률 80%에서 90%에 육박하는 초응급 질환이다.

그 순간 머리에 고등학교 때 일진이었던 친구 김철우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가 대동맥류를 앓고 있었는데…….

‘설마?’

진현은 가운을 들고 뛰어 내려갔다.

***

“지, 진현아…….”

진현은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김철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현을 불렀다.

“아, 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갑자기… 크흑.”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그때 응급의학과 의사가 급히 진현을 불렀다.

“김진현 선생! 여기에요, 여기! 빨리 와요!”

소생실 안에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고 그 가운데 핏기가 하나도 없는 피부로 의식을 잃은 채
헐떡거리고 있는 중년 남자가 누워 있었다.

김철우와 똑 닮은 얼굴.

그의 아버지였다.

“동맥류 파열이에요.”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한눈에 봐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바이탈(Vital)은 어떻습니까?”

“수축기 혈압 50 이에요. 맥박은 140 이고.”

“응급 피 검사는요?”

“pH 7.15 예요. 빈혈 수치는 7 이고.”

그 설명에 진현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Arrest(사망) 직전의 단계였다.

“수혈, 빨리 수혈해 주세요. 응급으로 최대한 많이. 수액도 최대한 빨리 주시고요!”

“중심정맥관 잡고 있습니다.”

“중심정맥관으로 안 돼요. 레벨 1(Level one) 써주세요. 무조건, 무조건 빨리 해주세요!”

진현은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급했다.

“바로 수술 들어갈 테니 수술 준비 좀 해주시고 빨리 수혈하고 있어주세요!”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는다.

김철우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위중함을 느낀 김철우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어, 어때? 괘, 괜찮으신 거지?”

“…….”

“네… 네 말 듣고 바로 수술을 했어야 하는데… 크흑. 고집부리시더라도 억지로라도 수술을 시켰어야 하는데…
크흑.”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살 수 있어.”

“저, 정말?”

“응,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봐.”

김철우를 내보낸 진현은 핸드폰을 들어 응급수술팀에 전화를 했다.


‘이태원이니 최대한 빨리 오면 20 분 안에 도착할 수 있어.’

동맥류 파열은 외과 응급수술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수술 중 하나다.

지난 삶에서 한때 혈관 세부 전공을 했던 진현은 동맥류 파열을 집도한 경험들이 있었지만, 혼자의 몸으로는
진행할 수 없다.

전문적인 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지금 수술장에 들어가서 내가 절개를 넣고 기본적 처치를 하고 있으면 때에 맞춰 도착할 거야. 그러면 살릴 수
있어.’

물론 그렇게 해도 살릴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었다.

동맥류 파열은 제대로 된 치료를 해도 사망률이 80%를 넘으니까.

특히 저렇게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이 없을 정도로 심한 상태면 예후가 더 안 좋았다.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반드시 살릴 거야. 살릴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 김철우의 아버지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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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 2018 년 03 월 26 일

ISBN | 979-11-6202-153-8(05810)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 87

87. 친구 (3)

전화벨이 울리고 응급수술팀의 담당 치프가 전화를 받았다.

-어, 김진현 선생? 무슨 일 있어?

“응급 환자입니다.”

-무슨?

“대동맥류 파열 환자입니다. 쇼크(Shock)가 심해 Arrest(사망) 직전으로 매우 안 좋습니다. 지금 바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전화기 너머로 신음이 들렸다. 하필 이럴 때 최악의 환자가 온 것이다.

-잠깐 기다려 봐. 교수님께 이야기하고 바로 갈게.

대동맥 파열은 외과 영역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의 수술이다.

치프나 일반 외과 전문의들은 손도 댈 수 없고, 반드시 해당 혈관 분야에 고도의 수술 테크닉을 가진 교수 급의


외과의가 필요하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오늘 당직인 김수현 교수가 마침 혈관 파트의 전문가란 것이다.

진현은 응급의학과 의사들에게 외쳤다.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갈 것입니다. 수술장 어레인지할 테니 바이탈(Vital) 좀 잡아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저 김진현 선생?

“네?”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굉장히 곤란한…….

-우리… 지금 당장은 못 갈 것 같아.

“네?!”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남들의 눈치를 보듯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지금 도저히 갈 수 있는 상황이…….

“어째서입니까?”

-그게…….

전화기 너머로 치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단 목소리였다.

-취하셔서.

“네? 그, 그게 무슨?”

-교수님께서 좀 취하셔서…….

진현은 입을 벌렸다.

응급수술팀 당직 교수가 취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교수님도 안 마시려 했는데… 이번에 교수님이 담당하던 국책 프로젝트 성공 건으로 이사장님이 계속 술을


권하셔서. 한 잔 두 잔 계속 마시다 보니 지금은… 하아. 그래서 정말 급한 환자면 옆에 기독 병원으로 전원
보내라고 하셔.

진현은 다급히 말했다.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전원을 보낼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길. 이사장님도 원래 술을 권하시는 성격이 아니신데 오늘 따라 왜 그러시지? 담낭염이나 맹장염


같은 간단한 수술이면 모를까, 대동맥 파열처럼 고난도 수술은 교수님이 안 가면 우리들은 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텐데.

“그러면 당직 아니시더라도 오실 수 있는 혈관 파트의 다른 교수님은 안 계십니까?”

-지금 원채 큰 회식이라 당직 아니신 교수님들도 다들 취하셔서… 일단 내가 더 알아보고 전화 줄게.

그러고 전화가 끊겼고,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사장이 왜 당직 교수에게 술을 강권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설마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어서 아닐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얼마 전 이사장의 시커먼 속내를 이야기한 유영수
교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정말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일단 김철우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다.

‘어떻게 하지? 무조건 교수님이 와야 하는데.’

그냥 교수도 안 된다. 무조건 혈관 파트의 교수가 와야 한다.

그래야 사망률 90%의 대동맥 파열을 손이라도 써볼 수 있다.

‘당직 교수님 외에 혈관 파트 교수님들은 총 2 분. 하지만 그 교수님들도 지금쯤 다들 취해 있으실 텐데…….’

진현은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치프의 전화를 기다렸다.

-띠리링!

곧 다시 벨 소리가 울렸고, 진현은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하지만 전화 통화 결과는 역시나였다.

다른 두 명의 혈관 외과 교수들도 다들 취해서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옆의 기독 병원 쪽으로 전원을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한시가 급하니 내가 기독병원


외과에 연락을 해놓을게.

“하지만… 도저히 그럴 상태가…….”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반적인 경우면 전원을 보내는 것이 맞다.

실제로 진료 현장에서 여러 사정으로 수술을 못 하게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고, 그럴 땐 근처 병원으로


이송하게 된다.

아무리 응급 환자라도 대부분의 경우 이송하는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까.

하지만 환자… 철우 아버지의 경우는 달랐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니, 지금 당장 수술을 진행해도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소생실에서 한 의사가 그를 불렀다.

“김진현 선생님! 빨리 이쪽으로 와보세요! 혈압 더 떨어져요!”

“……!”

급히 가보니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달려들어 안간힘을 쓰며 바이탈(vital)을 잡고 있었다.

“저, 김진현 선생. 곧 Arrest(사망) 날 것 같은데…….”

그러면서 한 의사가 피검사 결과를 보여줬다.

레벨 원(level 1)으로 대량 수혈 중이지만 수치는 더 나빠졌다.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지 응급의학과 의사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수술 진행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지금 당장 수술을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진현은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이게 정말로… 정말로 이사장과 이상민, 당신들 수작이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절대로!’

분노로 주먹이 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진현은 터질 듯한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김철우 아버지의 생명보다 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노를 하더라도 친구의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고 해야 했다.

‘무조건 살릴 거야. 살리고 나서 확인하겠어. 이게 정말로 이상민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집도할 교수가 못 온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였다.

“수술은 지금 곧바로 진행할 것입니다.”

“그렇죠? 회식으로 다들 나갔다던데… 수술팀 들어오는 거죠?”

“수술팀은 오지 않습니다.”

“네?! 그러면?”

지금 병원에 외과의사라고는 김진현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하겠습니다.”

“네?”

응급의학과 의사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진현이 천재라고 해도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보호자한테 설명 후 곧바로 진행할 테니 마취과 연락해서 환자분을 수술장으로 올려주십시오.”

그리고 황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진아. 회식 갔냐?”

-이제 나가려고. 왜?

그 말에 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 가지 말고 지금 바로 수술복 입고 수술장으로 와라.”

-엥? 그게 무슨 말이야?

“김철우의 아버지가 응급실로 왔어. 지금 바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손이 없어. 도와줘라.”

-…아,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그러고 진현은 김철우에게 다가갔다.

김철우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철우야.”

“진현아? 우리 아버지 살 수 있는 거야? 응?”

김철우는 간절히 진현을 바라봤다.

친구의 눈물에 진현도 가슴이 흔들렸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의사가 흔들리면 환자를 잃는다.

“이미 설명을 들었겠지만, 너희 아버지는 동맥류 파열이야.”

“…….”

“지금 곧바로 수술을 해야 해.”

“…수술하면 살 수 있는 거야?”

진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김철우의 아버지는 일반 동맥류 파열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잔인한 설명이었다.

“수술 안 하면 100%로 돌아가시고… 수술하면 10% 정도 살 수 있어.”

“……!”

거의 죽는단 뜻이었다.

김철우의 검은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현도 이전 삶에서 아버지를 잃은 적이 있기에, 그의 마음을 짐작했다.

가슴이 아팠다.

“철우야.”

“…응?”

“통계적으론 그래. 그런데… 그런데… 살릴게. 꼭. 반드시.”

“……!”

김철우의 눈이 흔들렸다.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숫자놀음 같은 통계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김철우의 아버지가 죽냐 사느냐였다.

반드시 살리겠다. 반드시.

“너희 아버지 반드시 살릴게. 내가.”

김철우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부, 부탁한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그때 이사장 이종근은 이태원의 최고급 고깃집에서 민 비서가 챙겨온 로얄 살루트를 마시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이사장님.”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교수가 와서 듣기 좋은 말을 건넸다.

“기분 좋지요. 앓던 이가 빠질 것 같아서요.”

“저런. 앓던 이가 있으셨나요? 우리 병원 치과 과장을 혼내야겠군요. 이사장님 이도 신경 안 쓰고.”


이종근은 피식 웃었다.

그가 앓던 이는 김진현이었다.

‘대동맥 파열 환자가 응급실에 오는 일은 1 년에 몇 번 없을 정도로 정말 드문데, 오늘 응급실에 오다니.’

그는 술자리 한 구석에서 빨갛게 취해 있는 당직 교수를 바라봤다.

사실 이종근도 오늘 대동맥 파열처럼 중한 환자가 올 줄 알고 당직 교수에게 술을 권한 것은 아니다. 적당한


환자가 오면 혼자 끙끙대게 하다 실수를 유도해 보려고 한 일인데… 대동맥 파열 환자가 와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중한 환자가 와버렸어. 뒤처리가 번거롭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정리는
되겠군.’

물론 당직 교수의 회식 때문에 수술에 차질이 빚어져 환자가 잘못되면 그건 김진현의 책임이 아니라 수술팀의 연대
책임이었다.

사실 김진현이 책임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응급실 당직 레지던트로서 1 차적으로 진료를 완벽히 했는데, 교수가
안 와 수술을 못한 것이니까.

‘하지만 김진현이 환자에게 섣불리 손을 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종근은 술을 들이켰다.

‘김진현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무언가 환자를 살리려 용을 쓰겠지. 무모하게.’

이종근은 김진현이 무언가 무모한 용을 쓸 것이라 생각했다.

비행기 안에서도 수술을 시도했던 놈이니까.

얼마 전에는 혼자서 김종현 화백의 장출혈을 수술했던 적도 있고.

원채 상상을 초월하는 놈이니 절대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종근이 노리는 바였다.

‘대동맥 파열은 단순한 장출혈과는 다르지. 혈관외과의 전문의가 수술해도 사망률이 90%에 육박하는 중한 질환.
김진현 그놈이 아무리 괴물이라도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리고 만약 김진현이 혼자 수술을 시도하는 만행을 저지르다 환자가 사망하면?

그때는 100% 책임을 덮어씌울 수 있다.

‘설마 김진현이 수술을 성공하진 않겠지.’

이사장은 진현이 수술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혈관 외과 전문 교수가 아닌 한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도 대동맥 파열 환자를 살릴 수 없었다.

‘좋군.’
로열 살루트가 꿀처럼 넘어갔다.

“자, 1 년 동안 고생하셨는데 다들 같이 한잔하시죠.”

이사장의 말에 수많은 외과의사가 같이 잔을 들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이종근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술자리에 없단 사실을.

***

수술장에 올라간 진현은 급히 수술준비를 했다.

‘사망률을 낮추는 EVAR 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황도 안 되고, 해부학적으로도 어려우니. 개복 수술밖에
답이 없어.’

“지, 진현아? 이게?”

곧 뒤따라 도착한 황문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동맥류 파열이야.”

“그걸 우리 둘이서 수술한다고?”

“하례식 때문에 수술팀은 지금 당장 아무도 못 와. 우리 둘밖에 없어.”

“하, 하지만…….”

황문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동맥류 파열은 혈관을 전공으로 하는 외과 전문의가 수술해도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걸 1 년 차 2 명이서 진행하자고?

진현이 깊은 눈으로 문진을 돌아봤다.

“문진아.”

“응?”

“안 하면 무조건 죽어. 김철우의 아버지야. 반드시 살려야 해. 나를 믿어줘. 우리 둘이서 살릴 수 있어. 아니,
반드시 살릴 테니 따라줘.”

그 결연한 목소리에 황문진의 눈이 흔들렸다.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네가 천재라도 이전의 간단한 수술들과 대동맥류 파열은 다르다고.

그런 목소리가 성대 끝까지 올라왔으나 문진은 고개를 저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다.

“그, 그래. 지, 진현이 너만 믿을 테니… 우, 우리 꼭 해내자.”

“고맙다.”

하지만 걱정하는 것은 황문진뿐이 아니었다.

마취를 끝낸 마취과 의사가 걱정스레 말했다.

“마취 끝났습니다. 외과 선생님, 그런데 정말 수술 진행할 건가요? 너무 안 좋은데… 아무리 선생님이 괴물이라
불리는 김진현 선생이라지만…….”

마취과 의사는 지긋한 나이의 남자교수였다.

이 시간대의 응급수술은 대부분 레지던트급이 담당하는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안 좋으니까.’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수술 중 마취과의 임무는 마취뿐 아니라 환자의 바이탈(Vital)을 잡아 목숨을 살리는 것도 있다.

그런데 환자의 상태가 너무나 안 좋다 보니 마취과 교수가 직접 수술장에 들어온 것이다.

“네, 수술 바로 진행할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8

88. 친구 (4)

“테이블 데스(Table death)할 것 같은데…….”

테이블 데스(Table death).

수술 중 사망하는 것을 뜻한다.

“벌써 적혈구만 30 팩이 넘게 들어갔어요. 병원 안에 피도 거의 안 남았고… 정말 괜찮겠어요?”

그 말에 진현은 신음을 삼켰다.

적혈구만 30 팩이면 몸의 피가 거의 3 번은 교환된 것이다.

하지만 선택사항이 없다.

안 하면 무조건 죽는다.

“네, 진행하겠습니다.”
“하아.”

마취과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더 만류하진 않았다.

“알겠어요. 어떻게든 우리 마취과가 버텨볼게요.”

“감사합니다.”

“단 오래는 못 버텨요. 최대한 빨리 잘해주세요. 꼭!”

최대한 빨리.

그 말이 진현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10 분? 20 분?’

모른다.

단 1 분도 못 버틸지도 모른다.

그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시작합니다.”

진현은 메스로 배를 가운데 방향으로 갈랐다.

찌익.

피부가 벌어지고 근막과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르면 배 안이다.

“배 열 것입니다. 혈압 확인 잘 부탁드립니다.”

“네.”

배를 열면 피가 터져 나오며 순간적으로 혈압이 확 떨어질 수도 있다.

마취과는 굳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지켜봤다.

“엽니다!”

찌익.

메스가 복막을 완전히 열었고 피가 뱃속에서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파앗!

피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 진현의 얼굴, 목, 몸이 환자의 피로 점철됐고, 모니터의 혈압이 쭈욱쭈욱 떨어졌다.
띠잉! 띠잉!

쇼크(Shock)를 나타내는 경고음.

진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혈압 괜찮습니까?”

“떨어져요! 혈압은 우리 마취과가 잡을 테니 선생님은 수술에 집중해 주세요!”

진현은 이를 악물고 복강을 헤쳤다.

그리고 깊은 곳, 풍선처럼 늘어난 대동맥에 터진 부분이 보였다.

“문진아!”

“으, 응?”

황문진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이제 외과의 길에 접어든지 몇 달 되지 않은 그는 이런 급박한 수술은 난생처음이었다.

가슴이 멎을 것처럼 긴장됐다.

“이걸로 이 피나는 부분을 손으로 막아줘.”

“어, 어?”

“이걸로 막아달라고.”

진현은 다급히 부탁했다.

황문진이 부랴부랴 따랐다.

‘잘 따라줘야 하는데…….’

상황이 급하다 보니 그런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처음 대동맥류 수술을 접하는 황문진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황문진이 손으로 압박하자 벌컥벌컥 쏟아지는 피가 잠시 잦아들었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대동맥을 위에서 집게로 집어야 해. 최대한 빨리.’

물이 흐르는 고무관이 터졌을 때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터진 곳 위에서 집게로 틀어막는 것이다.

파열된 대동맥도 똑같은 방법으로 지혈하면 된다.

문제는 시간과 난이도다.


‘대동맥은 우리 몸에서 가장 깊숙이 있는 혈관. 주변의 모든 장기를 박리해야 집게로 집을 수 있어.’

진현은 초조한 눈으로 혈압을 살폈다.

수축기 혈압 60!

심각한 쇼크 상태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가 일어날게 뻔했다.

‘침착하자, 김진현. 할 수 있어. 이전에 많이 해봤잖아. 할 수 있어.’

“문진아.”

“으, 응?”

“내가 하라는 대로 잘 따라줘. 부탁할게.”

“으, 응!”

대동맥을 다른 장기와 박리하려면 혼자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능숙한 어시스트의 도움이 필수다.

“여길 이렇게 당겨주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황문진이 생각보다도 진현의 지시에 잘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아, 아니. 그렇게가 아니라… 이렇게.”

황문진이 실수를 할 때마다 진현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외과 선생님?! 아직 안 됐습니까?! 얼마 못 버텨요!”

얼핏 혈압을 다시 보니 이젠 40-50 대다.

정말로 심장마비가 임박한 것이다.

“미, 미안.”

황문진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노력했다.

하지만 능력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진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평소에도 수술장에서 손이 둔하다 교수님들께 구박을 심하게 받았었다.

그때, 마취과 교수가 외쳤다.

“심장 리듬 늘어져요! 거기 간호사! 다른 마취과 의사들 빨리 불러와! 빨리!”


“……!”

진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곧 수술장 입구가 열리며 5 명 정도 되는 마취과 의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중 교수 급이 1 명, 치프 급이 2 명이나 됐다.

“심장 부정맥이야. 전기충격 준비해줘! 빨리!”

“준비됐습니다! 차징(Charging)! 쇼크!”

찌직!

전기충격과 함께 멈춰가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회복일 뿐이다.

“수혈 더 해! 거기 손으로 피 직접 쥐어짜!”

“이제 병원 안에 피 다 떨어졌어요!”

“기독병원에서 오기로 한 피 아직도 안 왔어?!”

곧 심장마비가 일어날 상황에 난리가 났다.

마취과 의사들이 진현을 향해 외쳤다.

“외과 선생님, 아직 멀었습니까? 이제 정말 더 못 버텨요!”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그러나 빠른 시간 안에 지혈을 하려면 능숙한 어시스트가 필수로 진현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 진현아. 미안… 철우 아버지인데… 크흑. 내가 잘못해서.”

황문진은 눈물까지 흘리며 사과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황문진의 잘못이겠는가?

진현은 분노하며 속으로 외쳤다.

‘이게 정말로… 정말로……! 이상민, 네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그런데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드르륵.
수술장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온 것이다.

“……?!”

진현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지금 급한 나머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이제부턴 내가 도와주겠네. 늦어서 미안.”

부드러운 목소리.

유영수 교수였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진현은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유영수 교수는 혈관 파트 교수도 아니고 응급수술팀도 아니다.

즉, 이번 수술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다.

유영수는 수술장갑을 끼며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아니… 응급 수술팀 치프가 곤란해하는 걸 봐서. 당직인 김수현 교수님이 이사장님 때문에 완전 취해 있더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나라도 도와주려고 뛰어왔지.”

“…가, 감사합니다.”

“김 선생이 감사할 게 뭐 있나? 다 환자를 위한 일인데. 그나저나 이런 사담을 나눌 때가 아닌데…….”

유영수는 간당간당한 혈압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해야겠군. 곧 Arrest(사망)나겠어.”

그러고 수술 필드에 다가온 유영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술이 생각보다 많이 진척되어 있었던 거다.

“아니, 이거 누가 한 거지? 김 선생이 여기까지 진행한 건가?”

“네.”

“하… 아무리 천재라지만… 대단해. 정말 대단해.”

유영수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 혈관 파트 교수가 직접 집도한 듯한 흔적이다.


시간만 넉넉히 있으면 홀로 마무리까지 지었을 듯했다.

하지만 대동맥류 파열의 수술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마취과 교수가 다급히 외쳤다.

“외과 선생님들, 유 교수님! 서둘러 주십시오! 혈압 더 떨어집니다!”

“알겠습니다!”

시원하게 답한 유영수 교수는 진현을 바라봤다.

“김 선생, 어떻게 할래?”

“어떤……?”

“자네가 계속 집도할래, 아니면 내가 집도할까?”

“……!”

진현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고작 1 년 차고, 유영수는 정식 교수이다.

그런데 집도를 물어보다니?

유영수는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 없으니 한번만 더 물어볼게. 사실 난 간이식 전문이라 혈관 수술을 잘 몰라. 그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온
거지. 할 수 있으면 네가 집도해. 만약 못하겠으면 나한테 넘기고. 어떻게든 내가 해볼 테니!”

사실 유영수는 당연히 자신이 집도를 하려 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대동맥류 수술은 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현이 벌여놓은 수술 흔적은 그의 생각을 흔들었다.

이 정도면 유영수 그보다 더 뛰어났다.

“……!”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겸양을 떨 때가 아니다.

친구 아버지의 목숨이 달려 있다.

“…지혈을 할 때까지만 제가 하겠습니다.”

곧바로 수술이 진행됐다.

1 년 차인 김진현이 집도의, 정식 교수인 유영수가 퍼스트 어시스트, 황문진이 세컨드 어시스트인 해괴한
조합이었다.

“외과 선생님, 빨리요!”

마취과 의사들이 외쳤다.

진현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황문진이 어시스트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간이식 파트가 전문이라 해도 유영수는 강민철의 뒤를 잇는 수술의 달인이다.

김진현, 유영수.

두 서전(Surgeon, 외과의)은 척척 손을 맞췄다.

대화도, 눈빛의 교환도 필요 없었다.

진현의 손이 가면 그 자리에 유영수가 이미 있었다.

간을 젖히고, 인대들을 제거하고, 손가락으로 대동맥 뒤를 박리하고… 이윽고!

“클램프 주십시오!”

클램프(Clamp). 대동맥을 집는 도구이다.

두르륵.

철컥!

철제 클램프가 대동맥을 집었다.

“클램프 했습니다! 바이탈(Vital)은 어떻습니까?”

“아직 낮아요. 아! 아니다. 혈압 좀 올라가요!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수술 진행해 주세요!”

마취과 쪽에서 외쳤다

“하아…….”

진현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지혈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장 급한 부분은 어떻게든 해결했다.

한편 유영수 교수는 그런 진현을 보며 경악했다.

‘어떻게 이렇게?’

믿고 집도를 맡기긴 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솜씨였다.


이 정도로 훌륭하게 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인턴 때는 간이식 환자의 혈관을 문합했지.’

강민철 교수가 쓰러졌을 때 환자를 살린 것도 진현이었다.

“김 선생, 이전에 대동맥 수술 집도해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진현은 찔끔하며 답했다.

유영수는 혀를 찼다.

당연히 없겠지. 1 년 차가 무슨 대동맥 수술 집도인가?

‘정말…….’

하늘이 내린 천재.

아니, 그런 말로도 부족했다.

몸의 모든 유전자가 오로지 수술을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꼭 우리 대일병원에 남겨야 해.’

그는 강민철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런 인재는 반드시 외과 교수로 남겨 빛을 보게 해야 했다.

“교수님, 이제 뒷부분을 부탁합니다.”

아직 수술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밑에 부분을 결찰하고, 풍선처럼 늘어난 대동맥을 자르고 인공 혈관을 연결해야 했다.

각각이 하나도 만만하게 없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도 시간과의 싸움이란 점이다.

‘최대한 빨리 해야 해. 대동맥을 집어놨으니 이 밑의 부분은 한 방울도 피가 안 흐르고 있어. 늦으면 다리, 척추,
내장… 전부다 썩을 거야.’

그런데 유영수 교수가 의외의 말을 했다.

“김 선생이 해.”

“네?”

“잘하던데. 그냥 잘하는 김 선생이 해.”

“하, 하지만…….”
진현은 말을 더듬었다.

아까야 너무 급해서 자신이 했다지만 어떻게 정식 교수를 어시스트 삼아 뒤의 수술을 진행하겠는가?

한숨 돌리자 방금 전 유영수를 어시스트 삼아 수술을 진행했던 것도 엄청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나 유영수가 사람 좋게 웃었다.

“아니, 사실은 궁금하기도 하고.”

“……?”

“네가 얼마나 잘할지. 기대도 되고.”

마치 수술을 위해 태어난 듯한 말도 안 되는 천재.

그 김진현이 이 뒤의 고난도 수술은 어떻게 해나갈지 유영수는 궁금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89

89. 친구 (5)

“그것 말고도 난 10 년 동안 간이식 수술만 죽어라 했고 대동맥 수술은 평생 동안 한 번도 집도해 본 적 없어.


그러니 김 선생이 하는 게 나을 거야.”

그의 말처럼 혈관 파트를 세부 전공하지 않는 한 대동맥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김진현은 전기 칼을 들었다.

이 뒤의 과정도 굉장한 고난도의 수술이다.

그는 집중해 손을 움직였고, 유영수가 어시스트했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수술이 끝났다.

제한시간을 넘기지도 않아 장이 썩지도, 다리가 마비되지도, 척추가 상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수술이었다.

***

수술이 끝났다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대동맥류 파열 환자는 수술 중에도 많이 죽지만, 수술이 끝난 다음에도 많이 사망한다.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삼분의 일 이상이 죽는다. 그만큼 상태가 위중하기 때문이다.

진현은 수술이 끝나고 한잠도 못 자고, 한숨도 못 쉬고 김철우 아버지 곁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정성 때문일까…….

김철우의 아버지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 선생 덕분이야. 김 선생이 기적을 만들었어.”

유영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 환자는 김진현이 아니었으면 무조건 죽었을 거다.

“아닙니다. 교수님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다 김 선생이 했지.”

유영수는 연신 김진현을 칭찬했다. 그만큼 이번에 진현이 해낸 일은 대단했다.

‘대동맥류 파열 환자를 살렸어. 그것도 1 년 차가.’

아무도 안 믿을 이야기다.

물론 진현은 수도 없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을 해내왔다. 그러나 대동맥류 파열은 격이 달랐다.

대동맥류 파열 수술은 외과 전문의, 그중에서도 혈관을 세부 전공하지 않으면 손댈 수 없는 초고난이도의


수술이다.

‘오죽하면 세계적 가이드라인에 전문적인 혈관 외과의사가 없으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라고 되어 있겠나.’

그런데 그런 수술을 해내다니.

대일병원을 넘어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될 이야기다. 유영수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거다.

‘강민철 교수님이 틀렸어. 이 아이는 다듬지 않은 최고의 원석이 아니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존재야.
이런 하늘이 내린 천재를 쳐내려 하다니.’

그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바이탈(Vital)이 안정되지 않아 걱정입니다.”

유영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단순히 수술 실력뿐 아니라 수술 후의 치료(Postoperation care)도 세심했다.

볼수록 감탄이 나온다.

“워낙 안 좋았으니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너무 걱정 마. 좋아질 거야.”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잠도 못 자지 않았나? 아니, 어제는 잤나? 지금 몇 시간 깨어 있는 거야?”

“…….”
글쎄……?

진현은 얼추 계산해 봤다.

오늘 못 자고, 어제도 못 잤으니 40 시간?

그래도 겨우 이틀 못 잔 거니 최악은 아니었다. 더 못 잘 때도 많았다.

유영수는 혀를 찼다.

“가서 좀 자. 내가 대신 볼 테니.”

“아닙니다.”

“왜? 내가 보면 안심이 안 돼?”

그 말에 진현은 당황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가서 쉬어.”

“…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늦게 돌아와도 돼. 나도 일 있으면 우리 간 파트 치프한테 보고 있으라 할 테니.”

유영수는 웃으며 말했다.

***

하지만 진현은 쉬지 못했다.

보호자, 김철우를 만나야 했다.

“고, 고맙다. 진현아…….”

김철우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응급수술을 하는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 이제 우리 아버지 괜찮으신 거지?”

“큰 고비는 넘겼어. 그래도 아직 며칠은 집중적으로 봐야 하지만…….”

“범생이 네가 치료하니 괜찮아지시겠지. 고맙다. 정말 고마워. 넌 우리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야.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항상 껄렁하던 녀석이 극진히 감사를 표하니 진현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고비를 넘기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닌 친구의 아버지 아닌가?

“뭘 그렇게 고마워하냐? 그래도 우리 친구잖아. 나중에 나 힘들면 그때 너도 도와줘라.”


“그래! 네가 살인죄를 저질러도 내가 너 도와줄게.”

그 말에 진현은 기겁을 했다. 누가 김철우 아니랄까 봐 그다운 말만 한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고.”

“너무 고마워서 그렇지. 제일 친하다 생각한 이상민 이놈은 코빼기도 안 도와주고…….”

서운함 가득한 말에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연락해 봤었어?”

“당연하지. 그런데 제대로 듣지도 않고 끊어버리더라. 빌어먹을 놈.”

김철우는 욕설을 내뱉었다.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되고. 그런 놈이랑 친하게 지낸 내 고등학교 시절이 아깝다. 범생이, 너 같은 진국이랑


친하게 지냈어야 했는데.”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상민…….’

그래, 지금 다른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상민을 만나야 했다. 그래서 확인해야 했다.

‘내 짐작이 정말로 맞는 거라면…….’

***

김철우를 돌려보낸 김진현은 이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 5 시 30 분.

환자 상태 파악, 수술 부위 소독 등, 아침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니 병원에 있을 거다.

“이상민?”

-왜, 진현아?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간신히 참으며 이야기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나 환자 소독해야 하는데?

“중요한 이야기야.”

-흐음, 바쁜데 꼭 지금 봐야 해?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다. 병원 뒤편으로 내려와.”

-……!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려와. 지금 당장.”

진현은 핸드폰을 끊고 병원 뒤편의 정원으로 내려갔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고, 시간도 일러 아무도 없었다.

진현은 벤치에 앉았다.

‘담배가 땡기는군.’

싸늘한 공기가 수풀 사이에 내려앉았다.

오랜 친구 이상민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전 삶에서 즐겨 피우던 담배가 간절히 생각났다.

‘이제 곧 암 검진도 받아야 하는데, 자제해야지.’

아직 한참 남긴 했지만 40 대에 그는 암에 걸린다. 하지만 이젠 담배를 안 피우니 이번 삶에선 안 걸릴지도?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하냐? 암 검진이야 나중에 받으면 되지. 조기에 발견하면 거의 100% 치료 가능하고.’

새벽 공기를 맞고 있으니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긴장되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그럴 수밖에.

이상민, 그와 파국을 맞을 순간이었으니까.

“오랜만이네, 진현이. 잘 지냈어?”

곧 생글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입가엔 11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면 같은 미소였다.

‘저놈은 나한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속마음을 보여줬던 적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도 고등학교 땐 귀여운 면이 있었다. 항상 나를 이기기 위해 발버둥을 쳤었지.

하지만 그런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어느 순간 친구 같지 않은 친구만 남아 있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제 와서 이런 것 하나도 안 중요해.’

지금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

“어제 일.”

“어제?”

“몰라서 물어? 김철우 아버지. 철우가 너한테도 연락했다고 하던데.”

이상민은 태연히 말했다.

“아, 어제 김철우 아버지가 응급실에 왔었지? 그건 왜?”

그 목소리를 들으니 진현은 속이 미칠 듯이 끓어올랐다.

“김철우는… 네 제일 친한 친구 아니었어? 그런데 왜 전화를 받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지? 이사장의 아들인


너라면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수술팀 사정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어차피 너 잘하잖아. 친구인 네가 알아서 다 잘해낼
것이라고 믿었지.”

“친구?”

“응, 우리 친구잖아.”

진현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니 모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너무 화가 나 헛웃음이 흘러나오고 손이 떨렸다.

“그래, 우리 친구지. 친구… 날 정말로 친구로 생각하면 하나만 더 묻자.”

“뭘?”

“어제 일. 아니, 지금까지 나한테 일어났던 불합리한 일들. 넌 알고 있었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모른다고? 어제 일을 포함해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난 일들. 너와 네 아버지가 날 병원에서 쫓아내려고 벌인 게


정말 아니라고?”

이상민은 웃음 띤 낯으로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대답해.”

“아닌데?”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너무 과민반응 하는 것 아니야?”

“아니라고?”

“응.”

진현은 낮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으마. 정말 아니야?”

“응.”

“그래, 그래. 오해해서 미안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이 개자식아!”

퍼억!

진현의 주먹이 이상민의 웃는 낯을 그대로 강타했다.

***

“크윽?!”

콧잔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하지만 진현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흔들리는 이상민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퍼억!

“이 자식아! 김철우의 아버지가 죽을 뻔했어! 그런데 뭐?! 과민반응?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반반한 이상민의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진현은 그의 멱살을 잡은 채 물었다.

“다시 한번 묻자. 왜 그랬어, 이 자식아?!”

“놔.”

“뭐?”

“놓으라고, 김진현.”

이상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피 섞인 가래를 뱉더니 힘으로 멱살을 풀었다.


“……!”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왜 그랬냐고? 궁금해?”

“…….”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아버지가 바라는 건 조금 다르지만 난 널 대일병원에서 쫓아내려고 한 게 아니야.”

“그러면?”

“널 망가뜨리려 한 거지.”

“……!”

이상민은 담배 연기를 뿜었다.

“이유가 궁금해? 간단해. 난 언제나 네 뒤였어. 그래서 항상 내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널 망가뜨려 보고 싶었어.
철저히. 비참하게!”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널 반드시 망가뜨릴 거야. 조만간.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

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민은 비웃음을 지었다.

“왜? 무서워? 무서우면 내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데로 100 억 받고 의사를 그만둬. 그러면 이전처럼 친한 친구로
널 대해줄게.”

진현은 너무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하하하… 이상민.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거냐?”

이상민이 뭐라 답하기 전, 진현이 소리쳤다.

“고작 이따위 이유로 이런 추악한 일을 저질렀냐고?! 이 개자식아!”

퍼억!

진현의 주먹이 다시 한번 이상민의 얼굴을 강타했다. 이상민의 반반한 얼굴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진현은 이상민의 멱살을 움켜쥔 채 말했다.

“그래, 날 망가뜨리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단! 하나만 명심해.”

“……!”
“절대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알겠어, 이 개자식아?!”

진현은 바닥에 이상민을 팽개쳤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빌어먹을, 개자식.’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이사장이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외과를 그만둘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저렇게 추악한 놈들에게 꼬리를 말고 떠날 수 없다.

‘후회하게 해주겠어.’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

한편 이상민은 바닥에서 일어나 앉아 주먹으로 피를 닦았다.

“그래, 김진현.”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치익.

담배가 타 들어갔고, 그가 나직이 숨을 내뱉자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 90

90. 대가(大家)를 향한 첫걸음 (1)

한편 진현이 대동맥류 파열 수술에 성공한 일은 곧바로 대일병원 외과 전체를 흔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교수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 그럴 수가 있나? 말도 안 돼.”

“아무리 천재라도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대동맥류 파열이라니…….”

물론 김진현이란 천재가 말도 안 되는 솜씨들을 보여 온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대동맥류 파열은 달랐다.

지금까지 김진현이 해냈던 일들은 사실 교수들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일들은 아니었다.


착실히 외과 수련과정을 거쳐 전문의를 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으니까.

다만 제대로 교육도 받지 않은 1 년 차가 해냈기에 놀라웠고 천재라 불렀을 뿐이다.

그러나 대동맥류 파열은 혈관(Vascular) 파트의 전문가가 아니면 손댈 수 없는 초고난도 수술이다.

더구나 그냥 손만 댄 것이 아니라 살렸다.

사망률이 90%에 육박하는데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유 교수, 자네가 한 거 아니야? 김진현은 어시스트하고?”

혈관 파트의 교수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영수 교수에게 물었다.

“저는 한 것 없습니다. 모든 집도는 김진현 선생이 했습니다.”

“하, 그게 말이 되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에 교수들은 수술 과정을 꼼꼼히 살폈다.

도대체 이게 가능한 건가?

그러나 수술 과정 중 문제는 없었다.

교과서에 기록된 대로 정석적인 술기가 사용됐고, 모든 과정이 완벽했다.

“아니, 김진현 선생 정말 1 년 차가 맞는 거야? 어디 다른 데서 수술을 하고 왔던 것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가 의사면허 없이 돌팔이 진료를 할 수 있는 3 세계도 아니고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결론은 또 이렇게 났다.

-하늘이 내린 천재.

가끔 인류사(人類史)를 보면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이는 타고난 천재들이 있다.

그런 류의 천재 말고는 진현의 실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주로 예술 쪽의 천재이고. 의술은 경험이 없으면 완성될 수 없어. 타고난 천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물론 이렇게 반박하는 교수도 있었다.

백 번 지당한 말이다. 의술은 깊은 경험이 없으면 완성될 수 없다.

문제는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단 것이다.

“그러면 김진현 선생의 실력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아니라 우길 수도 없고…….

그리고 유영수 교수는 비밀로 숨어 있던 일을 끄집어냈다.

“김진현 선생이 해낸 일은 대동맥류 파열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무슨 일을 했는데?”

“인턴 때 간이식 수술의 혈관 문합을 해냈습니다.”

“뭐? 레지던트도 아니라 인턴 때?!”

그 말에 또 외과가 뒤집어졌다.

인턴은 사신이란 이야기가 있다.

내내 졸아서 잠신, 먹을 것만 보면 환장을 해서 걸신, 환자 보는 덴 병신, 눈치 보는 덴 등신.

이렇게 사신인데… 처음 환자 진료를 시작하는 인턴의 무능함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런 인턴 때 간이식 혈관 문합을 해냈다고?

“역시 하늘이 내린 천재…….”

어쨌든 대일병원 외과의 대부분 교수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저렇게 훌륭한데 나중에는 얼마나 뛰어나 질까?’

‘저런 천재는 꼭 대일병원에 교수로 남겨야 해.’

이제 김진현을 노리는 게 간이식 파트의 강민철만이 아니게 됐다.

췌담도 파트, 위 파트, 대장 파트, 육종 파트, 갑상선 파트, 유방 파트… 모든 과가 진현에게 눈독을 들였다.

“혈관 수술 그렇게 잘하는데 우리 혈관 파트 할 거지?”

“무슨 말이야. 그게? 자네 같은 인재는 우리 갑상선 파트 해야지.”

“에헤. 남자가 좀스럽게 무슨 갑상선? 대장 파트를 하게. 고통받는 암 환자를 치료해야지.”

대일병원은 국내 최고의 병원이다. 각 파트마다 학회에 내로라하는 대가(大家)가 무수히 많다.

간이식의 강민철 교수 못지않은 대가들이 진현에게 손을 올렸다.

“그게…….”

진현은 까마득히 높은 교수들의 권유에 진땀을 흘렸다.

이제 1 년 차 겨우 초여름인데 전문의 끝나고 시작하는 세부 파트를 정하라 하는 것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강민철의 직속 수하인 유영수가 그를 감쌌다.


“김 선생은 우리 이식 파트를 할 것입니다.”

“뭐? 무슨 이식 파트야? 강민철 그 성격 더러운 놈 말고 내 밑으로 와.”

“그래, 우리 쪽으로 오라고. 잘해줄게. 교수 자리도 보장해 주고.”

하지만 진현은 곤란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후로는 응급실 진료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 후, 진현이 당직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님, 김진현입니다.

-아, 김진현 선생. 잘 지내나?

호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급성 담낭염으로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아, 담낭염? 담관에 돌은 없고?

“네, 담낭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 수술해야겠군.

“네,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균이 몸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교수는 의외의 답을 했다.

-자네가 해.

“네?”

김진현은 반문했다.

뭐라고?

그러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자네가 해.

“저… 제가 말입니까?”

-자네 잘하잖아. 뭐, 어려운 수술도 아닌데 그냥 자네가 해.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물론 담낭염 수술이야 어려울 것 없지만 1 년 차인 나한테 하라니?

그러나 당직 교수는 신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동맥류 파열에 비하면 담낭염 수술은 애들 손장난이지. 그렇지 않나? 하여튼 잘 부탁하네. 어차피 나 병원
근처에 있으니 수술 중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고. 10 분 안에 달려갈 테니.

“…….”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당직 교수들도 웃으며 말했다.

“맹장염? 뭘 그런 걸 연락하나? 김 선생이 해.”

“장출혈? 위치가 어려운가? 에이, 어려운 부위도 아니네. 지난번에 해봤잖아. 그 정도는 그냥 김 선생이 해.
우리 집 병원 바로 옆이니 잘 안 풀리면 연락하고.”

김진현을 믿고 당직 때 술을 마시는 교수도 있었다.

“어, 나 술 먹었는데? 자네가 해. 아, 그리고 수술 끝나면 이리로 안 올래? 한잔하지.”

“…….”

머지않아 응급실에 도착하는 대부분의 환자의 수술을 진현이 도맡게 되었다.

응급의학과, 김진현, 당직 교수로 이어지는 프로토콜이 응급의학과, 김진현, 김진현으로 바뀐 것이다.

농담 삼아 이야기했던 ‘응급실 전담 외과 교수’나 다름없는 역할이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김진현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김 선생 덕분에 요즘 참 편하네. 아, 김 교수님이라 불러야 하나? ‘응급실 전담 교수님’ 평생 응급실에 있을


거지?”

“…농담으로라도 그런 저주는 하지 마십시오.”

항상 그렇지만, 덕분에 모두가 행복해했다.

환자는 양질의 치료를 받아 행복했고, 응급의학과는 깔끔, 신속, 정확한 일 처리에 행복했고, 당직 교수는 몸이
편해 행복했다.

단 한 명, 김진현만 불행했다.

‘제발 살려줘. 너무 힘들어.’

이상민에게 큰소리쳤는데… 이거 이상민을 응징하기 전에 몸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설마 이것도 이사장의 계략은 아니겠지?’

너무 힘들어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주임교수 고영찬과 이사장 이종근도 진현만큼 불행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이종근은 불편한 얼굴로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고영찬, 민 비서… 이사장실에 모인 모두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종근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 교수.”

“네, 네! 이사장님.”

주임교수 고영찬은 허겁지겁 답했다.

“어떻게 할 건가, 그 김진현이란 놈은.”

“…….”

고영찬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네 일 처리 이렇게 할 거야?”

“죄, 죄송합니다.”

고영찬은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나보고 어쩌란 거야?’

그는 충실히 이사장의 명에 따랐다. 하지만 상대가 괴물 같은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냥 처음부터 무리수를 둬서 확 자르든지.’

인턴과 레지던트는 병원 내에서 위치가 굉장히 묘했다.

직급은 계약직에 불과한데 담당하는 업무는 병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일반 직원과 다르게 충원과 파면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레지던트를 뽑는 것은 단 한 번, 선발 시험밖에 기회가 없고 만약 뽑은 레지던트가 사표를 쓰고 나가면 ‘가을


턴’이란 일정 기간 외에는 충원이 불가했다.

또 노동착취를 훌쩍 넘는 업무량 때문에 각 계에서 부당한 처우에 굉장히 예민했다.

합당한 이유 없이 파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바엔 그냥 무리해서 자르는 게 나을 뻔했어.’

이젠 손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다.

김진현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전엔 외골수 강민철 혼자만 김진현을 주목했지만, 지금은 외과의 교수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부린 술수들이 탄로 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종근은 답답한지 말했다.

“민 비서, 위스키 가져와.”

대낮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민 비서가 유리장에 놓인 발렌타인을 가져와 이종근에게 따랐다.

발렌타인을 스트레이트 잔에 한 번에 들이켠 이종근은 고영찬과 민 비서를 돌아봤다.

“자네들은 이만 나가봐. 이상민 너만 남아.”

“네, 네!”

고영찬과 민 비서는 도망치듯 이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이종근은 자신의 아들 이상민을 노려봤다.

“넌 뭐하고 다니기에 그렇게 다친 거냐?”

이상민의 반반한 얼굴은 형편없이 붓고 멍들어 있었다. 진현에게 맞은 자국이다.

“넘어졌어요.”

“한심한 놈.”

이종근은 혀를 찼다.

“네가 그러니 김진현 그놈을 못 이기는 거야! 이 바보 같은 놈아!”

“…….”

그 욕설에 이상민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종근은 발렌타인을 다시 잔에 가득 따라 한 번에 마셨다.

‘이제 김진현은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어.’

대동맥 파열 수술을 성공시킨 하늘이 내린 천재!

모든 외과 교수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는데 어떻게 무리한 수작을 부려 생트집을 잡겠는가? 아무리 이사장이라도
그건 무리다.
‘빌어먹을.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이 나타나서…….’

사실 이종근이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으면 김진현은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유능한
레지던트 정도였겠지.

하지만 그의 수작들은 모두 김진현의 날개가 되어버렸고, 김진현은 레지던트 주제에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

자승자박의 진수를 보여준 이종근은 자신의 아들에게 짜증을 내었다.

“너는 핏줄이 천하면 능력이라도 뛰어나야지. 만년 2 등이라니. 바보 같은 놈. 내가 이사회에 가서 할 말이 없어.


너같이 한심한 놈을 병원 후계로 삼을 수 없다는데 내가 뭐라고 해?! 네 때문에 만든 교수 자리도 김진현한테
주라더라. 응?!”

어떻게 보면 이상민에게 무척 억울한 이야기다.

김진현이 불가해한 괴물일 뿐 그의 능력도 출중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진정한 천재는 김진현이 아니라 이상민이었다.

진현처럼 과거의 경험이 없음에도 대단한 실력을 보이고 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91

91. 대가(大家)를 향한 첫걸음 (2)

그러나 천재면 뭐하는가?

만년 2 등에 불과한데.

“한심한 놈.”

이종근은 다시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런데 그때 이상민이 낮게 말했다.

“이기면 되는 거죠?”

“뭐?”

“제가 이기면 되는 거죠?”

이종근은 이상민이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나 인상을 찌푸렸다.

이기긴 뭘 이겨?

이상민이 김진현을 이기는 것은 해가 두 쪽 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상민은 찢어진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는 다시 물었다.

“제가 김진현을 이기기만 하며 되는 거죠?”

“…그래. 네가 할 수만 있다면.”

이상민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 알겠어요.”

***

이후 진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꽤 시간이 지났으나 예상과 다르게 이상민과 이사장 측에선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네가 너무 주목받아 이사장측도 별 수작을 못 벌일 거야.”

유영수는 진현이 좋아하는 한우를 사주며 말했다.

“그러면 소문을 퍼뜨리신 게?”

“응, 일부러 그런 거야.”

유영수가 빨간 소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고급 한우집은 아니지만 정육식당으로 가격 대비 맛이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강민철 교수님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고. 강민철 교수님이 오시면 아무도 너 못 건드려.”

일반 기업과 대학 병원은 달랐다.

영리 집단이 아닌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집단이고, 교육부 소속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 회장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과는 달랐다.

특히 강민철 정도 되는 최고의 대가는 이사장도 못 건드렸다.

“그런데 뭘 하시기에 이렇게 연락이 안 되지? 메일이라도 열어보시지.”

유영수는 혀를 찼다.

진현도 고개를 갸웃했다.

‘몸이 안 좋으신가?’

그러고 보니 이전 삶에서 교환교수로 요양할 때 잠깐 세인트 죠셉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큰 문제는 아니고 금방 회복했지만.


“어쨌든 더러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김 선생은 열심히 하기만 해. 우리가 알아서 막아줄 테니.”

진현은 가슴 벅차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정식 교수라도 이사장에게 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되는 일일 거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부담을 드리는 것은 아닌지…….”

“어차피 나 이사장 측과는 사이 안 좋아. 나뿐 아니라, 강민철 교수님 밑에 교수들은 다 안 좋을걸? 불순분자로
찍힌 지 오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으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았다.

‘정 일이 안 풀리면 때려 치면 되니까.’

진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처음엔 이사장 측과 맞선다는 것이 무척 부담됐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아쉬울 게 있어야 무섭지.’

세상에 병원이 대일병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 일이 안 풀리면 때려 치고 나가서 다른 병원 가면 된다.

진현 정도의 능력이면 오라는 데는 차고도 넘칠 거다.

‘어차피 나 같은 인재를 놓치면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라 대일병원 아니야?’

농담같이 한 생각이지만,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진현은 아쉬울 것 없었다.

그가 간다고만 하면 모교인 한국대 병원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다.

그러니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

해볼 만큼 해보고, 정 안 되면 침 딱 뱉고 떠나면 된다.

다만 대일병원에 남기로 한 것은 추악하고 더러운 이상민과 이사장의 행태에 열 받고 오기가 생겨서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고. 이 병원을 나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야, 이상민.’

그때 유영수 교수가 말했다.

“고기 익었다. 먹자.”

“아, 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가져가니 소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아, 그리고 대일병원에 남기로 한 이유가 또 있긴 했다.


그에게 소고기를 사주는 좋은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다음엔 나 말고, 다른 교수랑도 먹자고. 젊은 교수들이 응급실 당직 때 도움 많이 받는다고 김 선생한테 한턱


사고 싶어 해. 소고기 좋아하지?”

“네.”

***

그렇게 지내던 중이었다.

진현은 평소처럼 응급실에서 진료를 하고 있었다.

그때 친해진 응급의학과 의사가 건들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여, 응급실 교수님이네. 김 교수님, 그 환자는 어때?”

진현은 손을 내저었다.

김 교수님이라니.

곤란하기 짝이 없는 농담이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 환자분은 좋아져서 퇴실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입원 안 해도 되고?”

“집에서 항생제만 먹으면 좋아질 것입니다.”

“김 교수님 말이면 맞겠지. 그래, 그러면 퇴실시킬게.”

그런데 그때 덥수룩한 머리의 인턴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저… 김진현 선생님. 노티(Notify)할 환자가 있는데요.”

노티(Notify).

김진현에게 외과 문제가 있는 환자가 왔다고 알리는 거다.

“무슨 환자인데요?”

“그게…….”

인턴은 굉장히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일 뿐 말을 못 했다.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지? 내가 무섭나?

노티(Notify)를 받는 중 아래 인턴들에게 성질을 내는 의사가 많다.


바쁘고 짜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편히 말해봐요. 뭐라고 안 할 테니.”

“그냥 단순 찰과상 환자인데…….”

“단순 찰과상이면 외과 문제가 아닌데?”

“그렇긴 한데… 꼭 김진현 선생님의 진료를 받고 싶다고 해서…….”

진현은 상황을 이해했다.

또 ‘명의(名醫)’ 김진현 선생한테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인 듯했다.

김창영 총리와 김종현 대화백으로 매스컴을 탄 후 그를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소독만 하면 되는 찰과상으로 날 찾나?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죠. 환자 어디에 있어요?”

소독만 대충하고 집에 보내야지.

“저쪽 외상실에 있는데… 외국인이에요.”

“외국인?”

“네, VIP 외국인이에요.”

VIP 외국인이 날 찾는다고?

진현은 고개를 갸웃하고 외상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아니?”

“반가워요, 미스터 김.”

도도한 인상의 백인 미녀.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의 한국지부 사장, 에이미 엔더슨이었다!

“아니, 여기는 어떻게?”

그녀는 스커트 밑의 자신의 늘씬한 다리를 가리켰다.

“다쳐서.”

“아…….”
크게 넘어진 것인지 살이 형편없이 벗겨져 있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다.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다 다치셨습니까?”

에이미는 어눌한 한국어로 답했다.

“술 먹고 클럽에서 춤추다 넘어졌어요.”

“…….”

클럽에서 어떻게 넘어지면 이렇게 다칠 수 있는 거야?

무슨 광란의 춤이라도 춘 건가?

더구나 클럽이라곤 눈길도 안 줄 것 같은 도도한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하니 부조화의 극치였다.

심지어 말은 어눌한 한국어다.

뭐, 술기운에 살짝 빨개진 뺨과 더불어 귀여워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조심하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클로로헥시딘 소독약을 꺼내 들었다.

“소독해 드리겠습니다.”

투명한 소독약이 닿자 에이미는 신음을 흘렸다.

“아, 아야…….”

“좀 아픕니다.”

“아… 미, 미스터 김… 살살…….”

“잠깐 참으십시오.”

진현은 타박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이게 뭔가?

그는 흙이 묻고 더러워진 상처를 박박 문질렀다.

“다 끝났습니다.”

“아아… 하아… 끝난 건가요?”

“네, 소독약 챙겨줄게요.”


“집에 가서 소독하면 되나요?”

“네, 집에 가서 매일 소독하세요.”

소독하는 법을 설명해 준 후 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에이미는 상처를 바라볼 뿐,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왜요? 계속 아프세요?”

“아니…….”

“……?”

에이미는 주저하다 말했다.

“미스터 김.”

“네?”

“저 입원하면 안 돼요?”

“입원할 상처는 아닙니다만? 그냥 소독약 가지고 집에서 치료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 에이미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저 정말 입원하면 안 돼요? 부탁할게요.”

“……!”

진현은 놀랐다.

에이미가 푸른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던 것이다.

“미, 미스 엔더슨?”

“잠시만 입원하고 싶어요. 안 될까요?”

***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진현은 에이미에게 입원장을 발부했다.

원래 국내 최고 대일병원은 전국에서 환자가 몰려와 항상 병실이 모자라 개인적인 이유로 입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에이미의 경우는 달랐다.

대일병원과도 연이 깊은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의 한국 지부 사장이었고, 하룻밤 숙박료만 100 만 원이 넘은


VIP 병실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망이 좋네요.”
VIP 병실은 이사장실이 위치한 꼭대기 층 바로 밑에 있어 한강과 강북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야경을 보니 에이미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냥… 그냥요. 조금만 쉬다가 퇴원할게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일을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듯했다.

“사실은…….”

“……?”

띠리리!

그런데 그때 하필 진현의 전화가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네, 김진현입니다.”

-김진현 선생! 급한 환자 왔어요. 지금 올 수 있어요?

목소리가 다급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러고 에이미에게 말했다.

“응급실에 환자가 와 내려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아, 네.”

그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홀로 남은 에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나니 날이 밝아 있었다.


응급 수술이 연달아 터져 결국 진현은 한숨도 못 잤다.

당직교수들의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김 선생이 대신 수고 좀 해줘. 수술 잘하잖아? 문제 생기면 부르고. 어차피 우리 집 근처니 10 분 안에 갈게.”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 일은 본인이 직접 하라고!’

아무래도 다들 맛들인 게 분명했다.

물론 이해는 했다.

퇴근했다 응급수술을 위해 밤에 다시 나오는 게 오죽 귀찮은 일이 아니니까.

실제로 교수들은 진현을 보배처럼 여겼다.

‘김진현 선생이 응급실에 있으니 엄청 좋은데? 진짜 소문처럼 응급실 전담 교수로 발령을 내버릴까?’

이런 농담들을 서로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현은 죽을 맛이었다.

“하아, 도대체 이 응급실 스케줄은 언제 끝나는 거야? 설마 평생 응급실에 박아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도 아침에 잠깐 시간이 나자, 그는 회진을 돌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입원한 환자들을 살피는 것이다.

원래 규정상 레지던트는 자신의 이름으로 환자를 입원시키지 못한다.

그건 대일병원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병원이 마찬가지다.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 치프 급은 돼야 자신의 이름으로 입원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진현은 하도 수술을 해대고, ‘명의(名醫) 김진현 선생’을 찾아온 사람이 많아 입원을 마구 시키고
있었다.

체계가 무너진 요지경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다.

‘나 이래도 되는 거야?’

심지어 그가 입원시킨 환자의 수가 일부 교수들의 환자 수를 넘을 때도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별일 없었다.

환자, 다른 의사, 심지어 외과 교수들도 다 만족해하고 있고.

“아이고, 김 선생님은 참 얼굴도 미남이네. 내가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거여.”

“아닙니다.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화기애애한 회진을 마친 그는 VIP 실로 향했다.

마지막 환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 차갑고 도도한 백인 미녀.

에이미였다.

“아, 미스터 김.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일은 잘 해결됐나요?”

“네.”

몸이 죽을 것처럼 피곤해서 그렇지 잘 해결되긴 했다.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살짝 웃었다.

차가운 인상의 그녀가 미소를 지으니 확 밝아지는 느낌이다.

“미스터 김이 소독해 줘서 그런지 나아지는 느낌이에요. 아, 물론 소독은 좀 거칠었지만.”

“그렇군요.”

“그나저나 여기 참 좋네요. 전망도 예쁘고… 간호사도 친절하고… 아침밥도 주고…….”

진현은 웃었다.

하루에 100 만 원짜리 방이니 당연히 좋지.

시설도 인근에 위치한 오성 급 호텔, 인터컨티넨탈이나 하야트에 못하지 않다.

“며칠만 더 있다 가도 돼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불편한 것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요.”

그러고 진현은 방을 나가려 했다.

어차피 에이미는 상처가 심해서가 아니라 지친 심신을 달래러 휴가 차 입원한 것이니, 의학적으로 신경 써줄 것은
없다.

그런데 그때, 진현은 흠칫 놀랐다.

“……?!”

에이미가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다.


“미스터 김, 잠시만요. 잠시만 앉았다 갈 수 없어요? 할 말이 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 92

92. 대가(大家)를 향한 첫걸음 (3)

에이미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진현은 뭔가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의자를 침대 쪽으로 가져와 앉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에이미는 주저하다 말했다.

“미스터 김.”

“……?”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저 잘릴 것 같아요.”

“……?!”

진현은 입을 벌렸다.

‘잘려? 한국어가 익숙지 않아 잘못 말한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지난번에 친척 중에 헤인스의 대표이사가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희 집안은 그런 것 전혀 신경 안 써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그녀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다 제 잘못이에요. 미스터 김이 도와준 TC80 프로젝트의 성공에 다른 프로젝트들을 너무 무리하게


진행했어요. 그러다 그 프로젝트들이 전부 좌초되며… 본사에서 책임을 묻기 시작했어요.”

“프로젝트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제일 큰 문제는 SD54 프로젝트예요.”

그 말에 진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전 삶이랑 다르잖아?’


SD54 프로젝트면 그도 알고 있었다.

면역 쪽에 작용하는 약으로 몇 년 뒤 대단한 돌풍을 일으키는 프로젝트다.

그런데 이전 삶에선 별문제 없이 성공한 프로젝트로 아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1 상 실험에서 문제가 생겨서… 저, 미스터 김.”

“네?”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혹시 이 프로젝트를 검토해 줄 수는 없나요? 만약 해결책을 찾아주시면 억만 금이라도 사례할게요.”

“……!”

“어려울까요?”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전 그가 도와준 TC80 프로젝트와는 달랐다.

그때는 답을 알고 갔지만, 이번엔 왜 문제가 생겼는지 모른다.

“그래도 한번 봐주기라도 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어느새 가져온 건지 침대 한편에 두툼한 서류가방이 있었다.

그녀는 두꺼운 서류 더미를 진현에게 건네었다.

“기획서와 중간 보고서들이에요.”

“흠…….”

진현은 신중히 서류를 살폈다.

“천천히 봐주세요.”

에이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진현의 답을 기다렸다.

물론 그녀도 진현이 아무리 천재라도 한 번 본 것만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 TC80 프로젝트를 해결할 때의 천재성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희망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탁.
그런데 이십 여분 지났을 때 진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왜 그런가요, 미스터 김? 역시 어려운가요?”

그녀는 실망감이 들었다.

진현이 서류의 내용을 보고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구나. 그래, 아무리 천재라도 이 프로젝트도 해결할 수 있을 리는 없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진현이 말했다.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습니다.”

“…네?!”

에이미는 깜짝 놀랐다.

고작 몇 분 보고 문제점을 파악했다고?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진현은 농담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네, 큰 오류가 있더군요. 왜 1 상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요?!”

그러나 진현은 답을 하기 전 물었다.

“그런데…….”

“……?”

“아까 전 말씀하신… 억만 금이라도 사례하겠다는 말. 진심입니까?”

“……!”

에이미의 눈이 요동을 쳤다.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해결책을 발견했다는 거다.

진현의 눈은 진중했다.

SD54 프로젝트의 시장가치는 상상을 초월해 TC80 을 가볍게 능가한다.

이런 내용을 공짜로 알려줄 수는 없다.

지난번엔 학생의 신분이라 2-3 억이란 헐값에 계약을 했지만 이번엔 그렇게 헐값에 해줄 수 없었다.
‘현 단계에서는 입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불과할 뿐이니 지분까지 요구할 순 없지만.’

지분은 너무 어마어마한 대가라 에이미가 승낙해도, 헤인스 본사에서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공정, 제조, 연구 등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채 현 단계에서 입증되지 않은 아이디어 하나로 지분까지


요구할 수는 없다.

‘그래도 최소 5 억은 받아야지.’

그렇게 생각한 진현은 입을 열었다.

“최소 5 억입니다. 여기에 5 천만 원을 추가로 주시면 스터디 디자인까지 모두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에이미는 단번에 대답했다.

“드리겠어요.”

“…….”

그 고민 없는 대답에 진현은 자신이 너무 약하게 불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확실한 해결책이어야 해요. 그래야 저도 자금을 끌어올 수 있어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다.

“용량이랑 용법의 문제입니다. 용량도 너무 높게 디자인 됐고, 용법도 분자 구조상 잘못됐습니다.”

“네? 그럴 리가요? 분명 연구팀에서…….”

“1 상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심장 부정맥 쪽으로… 대신 효과는 없고요. 용량을
30mcg 정도로 낮추고 식후가 아닌, 식전에 복용해 위의 산과 반응을 시키면 원했던 효과가 나올 것으로
봅니다.”

“……!”

같은 약이라도 용법, 용량에 따라 완전히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지금 프로젝트는 완전히 잘못된 용량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진현은 그걸 지적한 것이다.

“이 약은 분자구조식상 최소 30mcg 정도까지는 용량을 낮춰야 원하는 G protein 수용체에 작용할 것입니다.”

“…….”

의외의 지적에 에이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분자구조식상 분명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에이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미스터 김은 어떻게 그런 내용을 짐작한 것이죠? 보고서만 보고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닌데…….”

약의 용량을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의 용량만 해도 고도의 면밀한 연구 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물론 이상반응이 나왔을 때, 용량을 조정해 봤지만 30mcg 까지 파격적으로 용량을 낮출 생각은 못했다.

진현은 속으로 답했다.

‘그야 지난 삶에서 다 봤던 내용이니까.’

그는 이전 삶에서 이 약을 사용해 본 것은 물론, 연구 과정을 기술한 논문도 여러 차례 봤었다.

이유야 모르지만 지난 삶에 비교할 때 지금 프로젝트는 용법, 용량 면에서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차피 인류의 인체 구조가 변하진 않았을 테니 지난 삶처럼 프로젝트의 내용을 바꾸면 기대했던 약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뭐, 내 능력이라기 보단 지난 삶을 경험했다는, 게임의 치트 키나 다름없는 컨닝이지만… 서로 좋으면


그만이니까.’

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한편 에이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진현의 조언대로 하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가능성이지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인체는 직접 적용해보기 전엔 알 수가 없으니까.

그 고민에 진현은 말했다.

“한번 따로 확인을 해보십시오. 제 말이 맞는 것이 확실하면 계약금은 그때 지불해도 좋습니다.”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해요. 가서 곧바로 검토를 해볼게요.”

확실하진 않아도 충분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였다.

소규모로 확인만 해보면 되니 틀려도 손해 볼 것 없었고 맞는다면 대박이었다.

“혹시 다른 프로젝트들도 검토해 줄 수 있나요?”

에이미의 요청에 진현은 핸드폰 시계를 봤다. 당장 급한 환자가 없으니 어려울 것은 없다.

‘급한 환자가 있어도 해야지.’

진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나하나가 수억 단위의 알바이다.

몇 개를 못하겠는가?
더구나 그는 이미 답을 전부 알고 있다.

상용화된 이전 삶과 비교해 다른 부분만 찾아내면 되니까.

초등학교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리고 돈보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고.’

이런 프로젝트들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실적이 쌓인다.

그런데 단순히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니, 어마어마하단 단어도 부족한 엄청난 실적이 될
것이다.

‘이상민.’

일순 진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이사장이 수작을 부린 이유는 모두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좋다.

실력으로 눌러주겠다.

무슨 수를 써도 건드릴 수 없게.

“이 프로젝트는 이런 부분을 고치면 될 것 같고…….”

진현의 입에서 술술 답이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이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이런 내용들을 다 떠올릴 수 있는 거죠? 미스터 김, 당신은…….”

진현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컨닝하고 칭찬받는 느낌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총 3 개의 프로젝트를 계약하는 걸로 하죠.”

에이미가 보여준 프로젝트는 총 4 개였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진현도 모르는 프로젝트여서, 3 개를 계약하기로 했다.

“지금 바로 계약서를 쓰죠.”

“네.”

아이디어 제공뿐 아니라 스터디 디자인까지 모조리 해주는 걸로 해서 총 계약 금액은 12 억 5 천만 원.

뒤의 두 개 프로젝트는 첫 번째 언급한 프로젝트나 TC80 만큼 획기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어서 계약 금액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도 입증되지도 않은 아이디어 3 개를 슬쩍 말해준 대가로 12 억이라니.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에이미가 진현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면 체결될 수 없는 액수였지만, 아이디어가 가치가 없는 걸로


판단되면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어서 헤인스 측에도 부담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아이디어로 프로젝트를 살릴 수 있으면 고작 몇 억이 문제겠는가?

하나라도 성공하면 몇천 배를 뽑고도 넘쳐흘렀다.

‘제발 하나라도 성공했으면…….’

에이미는 간절히 바랬다.

진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신약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대신 어려운 만큼 열매도 달아, 어마어마한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다.

하나만 성공해도 모든 실패를 만회하고 본사로 승진까지 할 수 있으리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스터 김이 그녀에게 제시한 아이디어는 그만큼 뛰어났다.

가능성이 있었다.

‘설마 3 개 다 성공하진 않겠지?’

에이미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피식 웃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정말로 3 개를 다 성공한다면?

에이미는 그럴 때의 파장을 생각해 봤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 세계의 의학계가 미스터 김의 이름을 알게 되겠지.’

파급력 있는 신약은 성공적으로 개발될 때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에 기재된다.

-NEJM(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JAMA(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Lancet!

세계 3 대 의학 저널들.

인용 지수가 무려 NEJM 은 53, JAMA 는 31, Lancet 28 이다.


인용 지수 3 점만 넘어도 세계 상위 25%에 해당하고, 이공계 최고의 저널인 네이쳐, 사이언스가 대략 30 점인
것을 생각하면 위 학술지들의 위용을 알 수 있다.

대일병원이 아무리 한국 최고이고 대가(大家)가 많다 해도 이 저널들에 논문을 기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탈탈 털어도 3 명?

전통의 명문이라는 한국대 병원도 마찬가지다.

‘우리 헤인스는 프로젝트들이 성공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저널들에 기재할 생각이니…….’

스터디 디자인을 하면 못해도 1 저자가 되니… 프로젝트가 전부 성공하면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의 앳된 청년이


NEJM, JAMA, Lancet 논문 3 개를 기재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1 저자로!

아니, 이전 그가 디자인한 TC80 프로젝트도 곧 JAMA 에 기재될 것이니 4 개다.

‘1 년 만에 4 개. 인용지수로 치면 최소 120 점 이상. 의학 교과서를 리뷰하는 세계 최고의 대가도 이렇게는


못해.’

인용지수 10 점짜리 논문만 한 편 기재해도 각 대학에서 모셔가려고 한다.

그런데 30 점짜리 4 편이라.

그렇게만 되면 교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전 세계가 진현의 이름을 알게 되리라.

나이와 직급을 넘어 세계적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모두 이 프로젝트들이 성공할 때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딱 하나만 성공해도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에이미는… 아니, 진현도 모르고 있었다.

고작 첫걸음이란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

# 93

93. 진현의 마음

그렇게 진현은 아무도 모르게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야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 귀찮은 리포트를 하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워낙 바빠서 시간이 잘 안 나는구나. 그래도 해야지.’

리포트(?)들을 끝내면 무려 12 억 5 천만 원이다.

그리고 이제 곧 대일 그룹과 마인 바이오의 주식이 피크를 치면 최소 30 억이 훌쩍 넘는 돈을 모으게 된다.

‘이거 이런 식으로 몇 번만 더하면 강남의 건물도 사겠는데?’

진현은 피식 웃었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런데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오늘 저녁 늦게 이전 삶의 아내 연희를 만나기로 했다.

-할 말이 있어요.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되세요?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할 말이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늦은 저녁이 되고 진현은 병원 뒤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그는 벤치에 앉아 약속한 사람, 이연희를 기다렸다.

원래는 잠깐 밖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응급 환자가 생겨 장소를 바꿨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진현 씨?”

“아니.”

곧 조각처럼 단아한 미녀, 이연희가 나타났다.

근무 외 시간인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할 말?”

연희는 입술을 내밀었다.

“진현 씨는 오랜만에 봤는데 용건부터 묻는 거예요? 오랜만인데 저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진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무뚝뚝하다니까. 오늘도 또 밥 못 먹었죠? 여기 먹을 것 챙겨왔어요.”

그러고 그녀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정성이 가득한 샌드위치였다.

진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

“그러지 말고 빨리 드세요. 아.”

직접 손으로 먹여주려는 것을 진현은 곤란한 얼굴로 피해, 손으로 건네받았다.

연희는 입술을 내밀었다.

“치. 빨리 먹어봐요.”

“응. 천천히 먹을게.”

진현은 물었다.

“그런데 왜 보자고 했어?”

“보고 싶어서 보자고 했죠.”

당돌한 말이었다.

진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싫어요?”

“아니…….”

“치.”

연희는 다시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보자 했어요.”

“어떤?”

연희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진현 옆에 붙어 앉았다.

매혹적인 향수 냄새가 진현을 감쌌다. 그리고 연희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

진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희는 진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촉촉이 빛났다.

“연희야?”

“그거 알아요, 진현 씨?”

“…어떤?”
이윽고 연희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좋아해요.”

“……!”

“아니, 사랑해요. 진현 씨를. 진현 씨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요.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요. 진현


씨는 제가 어떤가요?”

고백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생각지도 못한 기습 고백에 진현의 눈이 커졌다.

“나, 나는…….”

이연희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계속 기다렸는데 진현 씨가 아무 말 없어서 먼저 고백하는 거예요.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건데.”

진현은 침묵했다.

과거의 아내인 연희와 사귄다라.

나쁘진 않았다.

이번 삶에선 과거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안.”

“……!”

연희의 눈이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거절이었다.

“어, 어째서죠?”

“나는…….”

그래, 연희와 사귀어서 결혼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이전에 한 번 경험했으니. 맞추기도 쉽고 나쁘지 않은 결혼 생활이 되겠지.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왜냐하면…….

“나…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미안해.”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오랫동안 바보처럼 계속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는 혜미를 좋아했다.

***

그리고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불쾌한 긴장과 다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 깊어지는 어느 날, 진현은 곤란한 환자를 만났다.

‘아, 더워. 에어컨 좀 세게 틀어주지.’

더위에 녹초가 되어 있을 때, 응급의학과 의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저, 김진현 선생님. 시연이라고 알아요?”

“시연이요?”

“박시연. 아, 모르겠구나. 최근엔 응급실 온 적 없으니… 워낙 잘해서 선생님이 1 년 차인 걸 자꾸


까먹는다니까요.”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박시연 환자가 누구입니까?”

“소아 환자인데… 방금 막 와서.”

그 말에 진현은 전산을 확인했다.

박시연.

7 살의 여아였다.

그런데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혈우병(Hemophilia)?”

혈우병.

피를 멎게 하는 응고인자의 문제로 지혈이 되지 않는 희귀병이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혈우병은 치료가 굉장히 까다롭다. 수술을 해도 지혈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급의학과 의사는 그런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닌 듯했다.

“시연이는 착한데… 보호자가 문제예요.”

“네?”

“애가 계속 병원에 왔다 갔다 하니까… 성격이 좀 이상해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응급의학과 의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굉장히 유별나요. 망상증 비슷한 증상도 있어 꼭 조심해야 해요. 교수님 중 고소당한 분도 여러 명이에요.”

“…….”

진현은 침음을 삼켰다.

‘치료가 어려운 소아 혈우병에 망상증이 의심되는 보호자라… 쉽지 않겠군.’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억 소리 날 정도로 어려웠다.

물론 정말 망상증인지 아니면 그저 유별난 것인지는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그런데 응급실엔 왜 온 것입니까? 이번에도 출혈입니까?”

“아니, 출혈은 아니고… 급성 담낭염이 왔어요.”

“……!”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담낭염은 수술이 필요한 질환이다.

수술 없이 항생제만 쓰면 패혈증으로 환자를 잃을 수도 있다.

별로 어려운 수술은 아니지만, 문제는 혈우병이었다. 수술 후 지혈이 쉽지 않았다.

“담낭염이 맞습니까? 항생제만으론 안 될까요?”

진현은 가급적 수술을 피하고 싶었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담낭염이 맞아요. 물론 담낭염도 경우에 따라 항생제나 배액관으로 치료할 수도 있지만, 원래 약한


애여서 그런지… 열도 심하고… 가만히 놔두면 패혈증으로 갈 것 같아요.”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수술하면 피 많이 나니 모자란 Factor(혈액응고 인자) 좀 충분히 보충해 놔주십시오.”

그는 환아가 누워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침대에 누워 진현을 빼꼼히 바라봤다.

“의, 의사선생님이세요?”

“응, 안녕.”

“시, 시연이 괜찮아요. 주, 주사 안 맞아도 돼요.”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혈우병 환아는 수도 없이 수혈을 받아야 한다.

“많이 아프진 않니?”

“괜찮아요.”

아이는 귀엽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나 대답과 다르게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 팔팔 끓는 고열, 자발 출혈로 파랗게 멍든 팔다리…….

‘아직 어린데…….’

진현은 딱한 마음이 들었다.

하필 이런 불쌍한 애가 또 담낭염에 걸려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아, 응급실 외과의사입니다.”

소문의 그 보호자로 신경질적인 눈매가 인상적인 삼십 대 중반쯤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진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레지던트? 몇 년 차?

“1 년 차입니다.”

그 말에 그녀는 불신의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이 아이 무슨 아이인지 아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1 년 차인데 혈우병이 무슨 질환인지는 아시나요?”

“여러 번 진료한 적 있습니다.”


물론 자주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원채 희귀병이라 그렇지 다른 전문의들에 비해 경험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경계 어린 표정이었다.

“담낭염으로 수술해야 한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가급적 안 하면 좋겠지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1 년 차인 당신 생각인가요? 아니면 위의 치프나 교수님께 여쭤본 건가요?”

수도 없이 병원을 들락날락한 보호자답게 병원의 체계를 잘 알고 있다.

진현은 살짝 피곤한 마음이 들었다.

“교수님께는 지금 연락드릴 것입니다.”

“교수님? 오승태 그 인간한테요?”

오승태는 소아담당 교수이다.

보호자는 오승태 교수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좋아하는 말투는 절대 아니지만.

‘이전에 문제가 있었나? 곤란한데…….’

소아환자 수술을 다른 사람한테 연락하기도 곤란했다.

진현은 침상에서 빠져 나와 오승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김진현입니다.”

-어, 김진현 선생. 반갑네. 무슨 일인가?

오승태는 호의가 섞인 목소리로 외과의 보배, 김진현의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에 박시연이라고 교수님 진료 보는 환아가 와서 전화 드렸습니다. 급성 담낭염으로 수술이 필요할


듯합니다.”

-…….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끊겼다.

“교수님?”

-…저, 김진현 선생.

“네?”
-정말 미안한데 잠시만 따로 볼 수 있을까?

“……?”

진현은 의아한 얼굴로 오승태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실에 들어가자 오승태가 면목이 없는 얼굴로 진현을 맞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말 미안한데, 김진현 선생.”

“……?”

오승태 교수는 한참을 주저하다 말했다.

“그 아이 자네가 대신 봐줄 수 없을까?”

“……!”

오승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 박시연이 여러 번 봤었네. 그런데… 보호자. 자네도 만나봤지?”

“…네.”

“박시연이 치료 자체는 항상 문제없이 끝났는데… 별 이상한 것을 트집 잡아 나한테 고소를 2 번이나 걸었어.


지난 3 년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거네.”

진현은 입을 벌렸다.

오승태는 인품도 훌륭하고, 실력도 뛰어난 ‘좋은 의사’였다. 그런데 2 번이나 고소를 당했다고?

“보호자도 나한테 진료받는 것을 원치 않을 거네.”

진현은 곤란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런데… 1 년 차인 저한테 진료를 받으려 하지는 않을 것 같던데…….”

보호자의 성격상 대단한 의사가 아니면 진료를 안 받으려 할 게 뻔했다.

“자네가 꼭 볼 필욘 없으니 다른 교수한테 넘겨줄 수 없을까?”

하지만 이 분야의 제일 뛰어난 의사는 오승태였다. 그런 오승태도 2 번이나 고소당했는데 누가 대신 진료하러


하겠는가?

“…알겠습니다.”

어쨌든 상황이 그런데 오승태한테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진현은 고민하며 응급실로 내려왔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응급실에 내려오니 박시연의 보호자가 진현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이 김진현 선생님이세요?”

“아, 네.”

“김창영 총리와 김종현 화백을 치료했다는?”

그가 잠시 교수실에 갔다 온 사이 뒷조사를 한 듯했다.

보호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요청했다.

“그러면 선생님이 우리 시연이 치료해 주세요.”

“……!”

“오승태 그 인간은 못 믿겠어요. 잘해주실 수 있죠?”

진현도 인간인지라, 순간 싫은 마음이 들었다.

누가 좋겠는가? 치료도 어렵고, 간신히 잘 치료해 놔도 고소당할 확률이 높다면.

그러나…….

진현은 고열에 신음 흘리는 박시연 환아를 바라봤다.

전혀 모르는 자신이 봐도 저렇게 딱한데, 어머니인 그녀 마음은 어떻겠는가?

생각해 보면 다 안 된 사람들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94

94. 혈우병 (1)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지혈이 비교적 어렵긴 했으나 미리 응고인자를 충분히 보충해 놓아 큰 출혈은 생기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언제든 자발출혈이 터질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수혈과 약물로 출혈을 예방해야 했다.

“수술은 잘 끝난 건가요?”
환아의 어머니가 물었다.

“네, 다행히 잘 끝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아무런 문제 없는 거죠?”

그건 아니다.

염증 자체도 심했고 수술 뒤에도 잘 살펴야 한다.

“일단 수술 자체는 잘 끝났지만 시연이 같은 경우엔 혈우병 때문에 수술 뒤에도 출혈이 있을 수 있어 앞으로도 잘
봐야 합니다.”

“잘 봐주세요. 꼭.”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의 부탁이 아니라도 잘 볼 생각이었다.

시연이는 금이 간 유리와 같아서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금세 나빠질 수 있으니까.

아이의 조그만 팔목은 잦은 수혈로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이틀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진현은 수시로 박시연 환아를 살폈고 그런 정성 때문인지 아이는 별문제 없이 차도를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다.”

“이제 배 안 아프니?”

계속 얼굴을 마주하니 시연이와도 많이 친해졌다.

“아파요. 저 이제 피 그만 맞으면 안 돼요?”

“아직은 더 맞아야 해. 시연이 착하지? 선생님 말 잘 들을 거지?”

“히히, 네. 대신 저 다 나으면 같이 놀아주시면 안 돼요?”

“그래, 선생님이 놀아줄게.”

시연이는 밝게 웃었다.

참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병원에 원채 자주 들락날락해서인지 보채는 일도 없었다.

‘아기라…….’

이전 삶에서 진현은 아기가 없었다.


그와 연희의 몸에 문제가 있다기보단 금실이 나빠서였다.

아니, 금실을 떠나 집 자체를 거의 안 들어갔는데 무슨 아기가 생기겠는가?

임을 봐야 별을 따든지 말든지 하지.

‘이번 삶에선 반드시 좋은 가정을 꾸려야지.’

순간 혜미가 떠올라 실소했다.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무슨 가정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혜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긴 했으나 진척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호자가 침상에 들어왔다.

“선생님, 오셨어요?”

“아, 네.”

“검사 수치는 괜찮나요?”

“네, 현재까지 별문제 없습니다.”

“감사해요. 김진현 선생님 덕분이에요.”

호전을 보이고 있어서인지 어머니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진현이 봤을 때 그녀는 망상증은 아니었다. 그저 딸 때문에 유별날 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 음료수인데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어머니는 진현에게 과일 음료 한 병을 내밀었다.

진현은 손을 저었다.

“아, 괜찮습니다.”

“별것 아니니, 받으세요. 제가 감사해서 그래요.”

어쩔 수 없이 진현은 음료를 건네받았다.

“또 오시나요?”

“네,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그러고 병실에서 나왔는데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진현, 안녕?”

이상민이었다.

그는 셀프 회진을 돌고 있던 듯했다.

김철우 아버지의 일 후로 특별히 수작을 부리는 것은 없었지만 항상 불쾌했다.

특히 저 가식적인 미소를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여기가 그 유명한 환자 병실이구나?”

“유명한?”

“그 혈우병 아이 있잖아. 네가 잘 치료하고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역시 김진현이야. 대단해.”

“아직 잘 봐야 한다.”

“그러겠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러다 확 안 좋아서 죽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진현은 얼굴을 구겼다. 마치 그렇게 되라고 저주하는 말투였다.

“닥쳐. 입조심해.”

“뭐, 천하의 김진현 선생이 보시니 별문제야 없겠지. 수고해.”

이상민은 손을 휘저으며 사라졌다.

진현은 그의 등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재수없는 녀석.”

한편 이상민은 병동을 빠져나가며 중얼거렸다.

“별문제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진현?”

***

그날 밤, 응급실에서 진현은 또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아니, 의외는 아니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 중이라 자주
보는 게 당연하니.

혜미였다.

“어, 안녕?’

“어… 어, 응.”

둘은 서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혜미는 검은 정장에 흰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이지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도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맨날 보던 사이건만 진현은 괜히 설레었다.

“응급실에는 무슨 일?”

“아… 환자 보러.”

대일병원 내과는 응급실 당직을 1 년 차 중반부터 시작한다.

“그렇구나.”

“…응.”

서먹한 단답형의 대답 이후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진현은 자신의 마음 때문에 어색했다.

둘 모두 옆에 뻣뻣이 서서 컴퓨터로 전산 차트를 열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런 척할 뿐 서로가 신경 쓰여 차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혜미는 진현을 힐끗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얼마 전 그녀는 연희가 한 고백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친구 김수연이 외과 병동의 친한 간호사를 통해 정보를 물어온 것이다.

이연희와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그 간호사는 연희의 고백 결과를 다 알고 있었고 이렇게 말했다.

진현이 이연희의 고백을 거절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라.

‘누구일까? 진현이 좋아하는 사람이.’

혜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해 보면 진현도 건장한 성인 남자이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했다.

김수연은 진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거라 난리를 쳤지만 혜미는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데,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한테 반할 수도 있는 거고 힘든 레지던트 생활 중 새로 만난 간호사나 동료의사한테 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 만에 하나…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거면……?

그런 생각을 하니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진현이 말했다.

“혜미야.”
“으, 응?”

“지금 바빠?”

“아, 아니.”

“그러면 잠시 커피 한 잔 마실래? 사줄게. 아, 바쁘면 괜찮고.”

“아니. 안 바빠. 하나도!”

“어… 응.”

진현과 혜미 둘 모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말 혹시……?’

그저 커피 한 잔 마시자는 것이지만 혜미의 심장이 주책없이 뛰었다.

이러다 심장마비가 오는 것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삐리리 진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갑작스런 소리에 둘 모두 깜짝 놀랐고, 진현은 전화를 받았다.

박시연 환아가 입원한 병동이었다.

진현은 일순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병동으로 와주세요. 시연이가 이상해요.

“네? 증상이?”

-열나고 숨차하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혜미도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병원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환자 안 좋아?”

“응, 빨리 가봐야겠다. 미안.”

“아니야. 나중에 마시면 되지. 빨리 가봐.”

진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가 문을 나서는데 혜미가 그를 불렀다.

“지, 진현아!”

“응?”
“…나중에 커피 사줘. 꼭. 기다릴게.”

진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 그래. 사줄게. 꼭.”

별것 아닌 이야기임에도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병동에 도착하는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생각보다도 시연이의 상태가 더 안 좋았던 것이다.

***

“서, 선생님… 시연이 숨차요. 하아…….”

“가래는 안 나오니?”

“가, 가래도 노랗게 많이 나와요.”

시연이는 작은 몸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진현은 청진기로 폐 소리를 듣고 간호사에게 물었다.

“산소 포화도는 어떻습니까?”

“낮아요. 88%요.”

“폐렴인 것 같습니다. 코 줄(Nasal cannula)로 산소 공급해 주고 이동식 X-ray 불러주세요.”

간호사들이 신속히 움직여 산소 코 줄을 끼운 후 산소 공급이 시작됐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선생님?”

보호자가 다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진현을 바라봤다.

“수술이 잘못돼서 그런 것 아니에요?”

날카로운, 네가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목소리.

진현은 차분히 설명했다.

“병원성 폐렴입니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확률적으로 걸리는 감염증으로, 복부의 담낭염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병원성 폐렴은 병원 입원 중인 환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오는 감염증이다.

“적절한 항생제 치료를 하며 좋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어머니는 진현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진현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폐렴 자체보다도 혈우병을 앓는 아이의 몸이 원채 약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적절한 항생제가 투입되기 시작됐다. 빠른 조치 때문인지 폐렴은 더 악화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감염증 때문인지 아이 몸의 지혈 체계가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 시연이 피나요!”

“빈혈 수치는 어떻습니까?”

“9 예요. 오전보다 2 나 떨어졌어요.”

정상이 13 인데 9.

그리고 오전에 검사했을 때만 해도 11 을 유지 중이었다. 어딘가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팔다리를 살피니 근육 쪽이 퍼렇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런, 자발출혈!’

“빨리 수혈해 주세요. 적혈구, 응고인자 전부다 수혈해 주세요.”

진현은 다급히 오더(Order)한 후 피가 나는 부분을 손으로 압박했다.

“서, 선생님. 시연이 아파요.”

“응. 미안해, 시연아. 조금만 이렇게 누를게.”

조금이라도 피가 덜 나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보호자가 난리를 부렸다.

“아니, 왜 계속 애가 나빠지는 거예요? 선생님이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보호자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 역시. 1 년 차한테 환자를 맡기는 게 아니었어! 아, 어떻게 하지? 당신! 시연이가 잘못되기만 해봐! 절대
가만 두지 않겠어!”

당장에라도 진현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지혈을 하느라 보호자를 안정시킬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 엄마. 그, 그러지 마. 나 선생님 좋단 말이야.”

“……!”

“서, 선생님이 시연이 치료해 줄 거죠? 그렇죠?”


아이가 힘들게 미소 지으며 진현에게 말했다.

진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 마렴. 선생님이 반드시 좋아지게 해줄게.”

그러고 진현은 보호자에게 말했다.

“보호자 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만 믿어주십시오. 저도 시연이를 좋아합니다. 지금


제 가장 큰 바람은 시연이를 치료하는 것이니 잠시만 지켜 봐주십시오.”

“……!

진현의 진실된 눈빛에 어머니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뭐라 말을 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진현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까?’

그도 사람인지라 보호자의 저런 태도가 좋을 수는 없었다. 피곤하고 곤란했다.

그러나 시연이와 그녀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까? 이 순간 가장 힘들고 슬픈 사람들이다.

다행히 보호자가 안정되자 진현은 간호사들에게 처방했다.

“빨리 약 주세요. 피 검사 다시 해주시고요. 혈액원에 연락해 수혈도 빨리 진행해 주시고요.”

“네!”

그 뒤 전쟁 같은 밤이 이어졌다.

손으로 지혈을 하고 그러고도 빈혈 수치가 떨어져 CT 를 찍고.

같이 동반된 복강 내 출혈에 대해 무지막지한 수혈을 하고… 추가적으로 생긴 관절강 출혈에 대해 피를 뽑고…….

출혈이 너무 심해 혈압도 몇 번이나 떨어졌고 시연이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진현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시연이에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못했다.

응급실도 다른 레지던트한테 부탁해 맡겼고 잠은 당연하지만 한숨도 못 잤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시연이는 점차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안정이 되는 듯합니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며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보호자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진현을 바라보았다.

“저, 선생님. 잠시만 따로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
진현은 보호자를 따라 나왔다. 인적 드문 복도에서 보호자가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그리고 미안해요.”

진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사죄의 의미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저도 알아요.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시연이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시연이가 안 좋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안정이 안 돼서… 모든 게 의심스럽고…….”

(다음 편에서 계속)

# 95

95. 혈우병 (2)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에요.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애가 안 좋으면 안정이 안 돼요. 정말 미안해요.”

보호자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 시연이 아프면서 남편과도 이혼했어요. 직장에서도 해고당하고. 치료비 때문에 집도 팔고…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저한테 남은 것은 시연이밖에 없어요.”

“…….”

“선생님, 그거 아세요?”

“네?”

“우리 시연이가 이렇게 좋아하는 의사 선생님은,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보호자는 웃었다.

“어린아이도 선생님이 좋은 의사란 것을 느끼나 봐요. 그러니 잘 부탁드릴게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살짝 먹먹해졌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후에도 몇 번 고비가 있었지만 시연이는 잘 버텼다. 시연이와 보호자, 진현의 관계도 깊어졌다.

라뽀(Rapport).

프랑스어로 환자와 의사 간의 유대 관계를 뜻한다.


진료 현장에서 의사와 환자, 보호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으로, 시연이와 진현이 사이에는 깊은 라뽀가
흘렀다.

“시연이, 오늘 피 검사 수치가 안 좋네. 수혈 한 번 더 해야겠다. 잘할 수 있지?”

“웅… 싫은데.”

폐렴도 좋아져서 이제 시연이는 산소 공급도 중단한 상태였다.

보호자가 시연이를 달랬다.

“우리 시연이. 선생님, 말 따라야지. 응?”

“웅… 알았어. 대신 선생님.”

“응, 왜?”

“나중에 시연이 좋아지면 밖에서도 같이 놀아주면 안 돼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진현에게 무리한 부탁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러니 수혈하자.”

“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렇게만 좋아지면 곧 퇴원도 고려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진현은 시현이와 잠시 시간을 보낸 후, 환자가 와 응급실로 향했다.

그런데 응급실에 가니 또 기분 나쁜 녀석, 이상민이 있었다.

“안녕. 잘 지내?”

“…그래.”

진현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을 봤다. 더 이상 그와는 말도 섞기 싫었다.

그런데 이상민이 웃으며 물었다.

“그 혈우병 환아는 어때?”

“그건 왜 물어보지?”

“아니, 그냥. 좋아지고 있다 그러던데. 역시 대단해.”

이상민은 지나가듯 말했다.


“진현아,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뭐?”

“혈우병 환자한테 항응고제를 쓰면 어떻게 돼?”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질문이라 하는 건가?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

“응.”

“지혈을 방해하는 항응고제를 혈우병 환자에게 쓰면 당연히 피가 나겠지.”

항응고제는 응고인자를 방해해 피를 묽게 하는 약이다.

원래 응고인자의 문제가 있는 혈우병 환자에서 항응고제를 쓰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한국대 차석인 놈이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모르진 않을 거고 왜 물어보는 것인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놀리는 건가?

“그래, 고마워.”

이상민은 손을 휘저으며 사라졌고 진현은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녀석. 환자나 보자.’

그는 불쾌한 기분을 털며 환자에 집중했다.

그런데 감염 상처를 소독하는데 계속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왜 물어본 거지?’

혈우병 환자한테 항응고제? 두말할 것 없이 뻔했다.

독약이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닐 텐데.’

순간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상민이 인간 망종이라도 그럴 리는 없다.

‘지나친 생각이야. 혈우병 환자에게 항응고제를 투입하면 그건 살인이야.’

그때 진현에게 병동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시연이 다리에서 피나는데 어떻게 할까요?


“심합니까?”

-심하지는 않아요. 조금 압박하면 될 것 같은데…….

“수혈은 하고 있습니까?”

-네, 3 분의 1 정도 들어갔어요.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오늘 아침에 수치가 그렇게까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수혈까지 추가로 하고 있는데 왜 피가 나지?

-그냥 수혈 계속하면서 지켜볼까요? 수혈 더 하면 멎을 것 같긴 한데.

옳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느낌이 진현의 가슴을 자꾸 자극했다.

불안함. 의사로서의 감이었다. 그대로 지켜만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진현은 곧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시연이와 보호자는 놀라 진현을 맞았다.

“와, 의사 선생님이다.”

“선생님 오셨어요?”

시연이가 책을 읽다 환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비해 한결 부드러워진 보호자도 인사했다.

진현이 다른 의사와 다름을 느끼고 완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망상증을 앓았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병동의 간호사들은 ‘김진현의 기적’이 보호자를 변화시켰다
감탄했다.

“아,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다리에 피가 난다 해서 보러 왔습니다.”

“여기에요. 크게 나는 것은 아닌데…….”

“응, 선생님. 시연이 괜찮아요.”

시연이의 발목에 새롭게 멍이 들어 있었다.

확실히 별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과민한 건가? 그 자식은 왜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

진현은 시연이에게 들어가는 약을 일일이 체크했다. 시연이의 작은 몸에 주렁주렁 여러 수액이 매달려 있다.
당연히 항응고제 따위는 없다.

어느 정신 나간 의사가 항응고제를 처방해도 간호부에서 당연히 오더를 수행하지 않으리라. ‘당신


제정신이에요?’라고 하면서.

단 하나 새롭게 들어가는 제제가 있었다. 바로 응고인자가 들어간 혈액이었다.

만약 여기에 항응고제를 섞어놨다면? 그러면 독약이 들어가고 있는 거다.

‘설마… 아닐 거야.’

아무리 이상민이라 해도 그런 일을 저지를 리는 없다.

그리고 하고 싶다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혈액원에 들어가 항응고제를 섞어야 하니까.

“왜 그러세요, 선생님?”

보호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짧은 시간 수도 없이 고민했다. 자신의 과민반응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경우 그냥 과민반응을 하는 게 나아.’

다른 문제는 몰라도 환자의 안위와 관련된 것은 과민반응을 하고 나중에 안심하는 게 나았다.

과민반응을 하면 번거로울지 몰라도 최소 나중에 후회할 일은 없으니까.

“잠깐만 수혈을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

“네?”

“수혈을 하는데 추가적으로 출혈이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보호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추가적으로 출혈이 있으니 더더욱 수혈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역시 투병 기간이 길어 보호자도 보통이 아니었다.

일반적이라면 그녀의 말이 옳았다. 출혈이 있을수록 수혈을 더욱 해야 했다.

‘독약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 잠시만 멈추자고 할 수도 없고.’

진현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미친놈 취급을 당할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진현은 근거 빈약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제가 느낌이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일단 수혈을 멈추고 피검사를 확인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거절하면 진현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의심이 많은 성격의 보호자니 따르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들렸다.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확인해 봐야죠. 그럼 그렇게 하세요.”

“……!”

진현은 놀라 그녀를 돌아봤다.

선선히 답한 그녀는 신뢰의 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날 서 있던 그녀가 살짝 웃었다.

“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은 믿어요. 잘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시연이가 칭얼거렸다.

“그럼 나 또 피검사해야 해?”

진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뽑을게. 안 아프게.”

“안 아프게 뽑아줘야 해요?”

“응, 알았어.”

만약 정말로 항응고제가 수혈 팩에 섞여 있다면 피검사에서 이상소견이 나올 것이다.

진현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라며 몸 안의 지혈 상태를 확인하는 검사 처방을 하였다.

그 처방을 확인한 간호사가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이 검사는 뭐예요, 선생님?”

“확인해 보려 하는 것이니 꼭 응급으로 진행해 주세요.”

“응급이요?”

“네.”

간호사는 의문이 들었으나 더 토를 달진 않았다.


현재 외과 병동 내에서 진현의 말은 치프보다도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진현은 초조히 결과를 기다렸다.

‘아닐 거야. 설마. 절대 아닐 거야.’

그런데 30 분 정도 지났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십니까?”

-김진현 선생님? 혈액 검사실입니다.

그 말에 진현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혈액 검사실에서 그에게 전화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박시연 환아 혈액 응고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서 전화 드렸습니다. 상한치를 한참 초과해 결과 보고가 되지


않는데… 아무래도 오류 같습니다. 다시 검사해 드릴까요?

진현의 손이 떨렸다.

갑자기 멀쩡한 기계가 오류가 날 리가 있는가? 정말로 항응고제가 섞여 있었던 거다.

진현의 목소리가 분노로 흔들렸다.

“괘, 괜찮습니다. 그냥 상한치로 띄워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진현은 벽을 후려쳤다.

퍼억!

‘이상민, 이 개자식! 이런 일을?’

진현은 이를 바득 갈았다.

‘절대 가만 안 둔다. 살인죄로 반드시 처넣을 거야.’

그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독약이 들어간 시연이를 구하는 것이다.

마침 검사결과에 놀란 간호사가 뛰어왔다.

“기, 김진현 선생님! 검사 결과가!”

이 정도 수치면 자발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할 수도 있다.

진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항응고제의 해독제(Antidote) 주세요. 빨리!”

“네!”

급히 해독제를 투여한 탓에 별문제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이 조그만 아이가 뇌출혈로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걱정으로 다시 몸서리를 치는 보호자를 간신히 안정시킨 후 진현은 어딘가로 향했다.

‘절대 가만두지 않아.’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곧 도착한 곳은 14 층의 당직실.

벌컥 문을 여니 2 층 침대 위에 이상민, 그놈이 누워 있었다.

“어, 진현? 무슨 일이야?”

이상민이 생글 웃으며 물었다.

“내려와.”

“응?”

“내려오라고.”

이상민은 어깨를 으슥하더니 뛰듯이 내려왔다. 원채 호리호리해서 곡예를 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인데?”

“하나만 묻자.”

“뭘?”

“네 짓이냐?”

“그러니까 뭘?”

“박시연. 항응고제.”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야?”

이상민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상민 넌 모른다고? 그러면 아까 응급실에서 물어본 것은?”

분명 오늘 이상민은 혈우병 환자와 항응고제에 대해 물었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럴 리가.’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에 손이 떨렸으나 아직 아무런 증거가 없다.

“정말로 네 짓이 아니란 말이지?”


“무슨 이야기하는 줄 모르겠다고 그러네.”

“그래, 정말로?”

“응. 피곤한 것 같은데 가서 쉬어. 괜히 망상증으로 사람 의심하지 말고.”

“그래, 가마. 대신.”

진현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은 못 가지.”

“응?”

이상민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퍼억!

강력한 스트레이트가 이상민의 안면에 꽂혔다.

“크윽?! 너?”

이상민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의 코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진현은 벌레를 보듯 그를 내려봤다.

“그래, 가마. 지금은 증거가 없으니. 하지만 명심해.”

차갑게 일갈했다.

“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사가운 벗길 거야. 아니, 살인죄로 집어넣을 거야. 기다려. 이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

“……!”

그리고 진현은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는 코에서 흐르는 피를 쓱쓱 닦았다. 그러나 제대로 맞았는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아, 아프네. 역시 주먹이 매워.”

***

진현은 그 길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탔다.

그가 향한 곳은 강북에 위치한 한국대 병원 부설의 약학 연구원이었다.

“아니, 자네가 웬일인가? 잘 지냈나?”


약리학 교수가 진현을 반겼다.

교수는 학창시절 당시 빼어난 성적을 독차지하던 진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자네 대일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들었는데?”

간단한 안부를 나눈 후, 진현이 무겁게 말했다.

“사실은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진현은 응고인자가 담긴 혈액팩을 내밀었다.

“이 안에 어떤 성분이 섞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96

96. 혈우병 (3)

“응? FFP(Fresh frozen plasma:신선동결혈장)잖아. 당연히…….”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 안에 항응고 약물이 섞여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약리학 교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항응고약이 이 혈액 안에 들어 있을 리가 없잖아.”

“사고가 있어서 확인이 필요해 그렇습니다.”

“……!”

약리학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왜 대일병원 랩(Laboratory:실험실)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온 것인가?”

“모교인 한국대의 약학 연구원이 전국 최고여서입니다.”

진현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사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대일병원의 랩으로 갔다간 모종의 방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우리 랩에서 확인할 수는 있네. 다름 사람도 아닌, 자네의 부탁이니 해주겠네. 그런데 단 한 가지. 이거
잘못된 일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지?”
“그 반대입니다.”

진현은 짧게 답했다.

약리학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교수는 학창시절에 봤던 진현을 믿었다.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 주겠네.”

***

참담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예상대로라 해야 할까?

혈액엔 항응고제가 잔뜩 섞여 있었다. 농도도 상상을 초월하기 힘들 정도로 높았다.

별일 없이 버텨준 시연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 빌어먹을 자식.’

만약 그가 혈액 안에 독약이 들어 있다는 것을 놓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연이는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도 못하고.

진현은 굳은 표정으로 곧바로 대일병원의 모든 혈액을 관리하는 부서인 혈액원에 찾아갔다.

“김진현 선생님이라고요? 무슨 일입니까?”

혈액원의 부서장이 진현을 맞았다.

부서장 정도면 의사직은 아니어도 교수 급의 직위로 병원 내 상당한 권력자였다.

“제가 회의가 있어서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부서장은 진현이 귀찮은 눈치였다. 그러나 진현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혈액원에서 반출된 혈액의 문제로 제 환자가 사망할 뻔하여 왔습니다.”

“네? 그게 무슨?!”

진현은 혈액을 내밀었다.

혈액에는 ‘박시연, B+형’이란 바코드가 붙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제 환자인 박시연 환아에게 들어간 혈액입니다.”

“그런데요?”
“이 혈액을 맞고 갑작스런 응고 수치의 문제가 생겨 환아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국대
약학 연구원에 확인결과 혈액에 굉장한 고농도의 항응고제가 섞여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그,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되는……!”

부서장은 몸을 떨었다.

진현의 말이 사실이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럿이 옷을 벗어야 하는 대형 사고였다.

“그, 그 말 사실입니까? 농담하는 거면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부서장은 불신의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여기 한국대 병원 부속 약학 연구원 담당자 전화번호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잠시의 통화 후, 부서장의 얼굴이 시체처럼 파랗게 질렸다.

“아, 알겠습니다. 정말로 우리 혈액에…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진현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저희 혈액원이 잘못한 일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저희가 왜 혈액에 고용량 항응고제를


섞습니까?”

패닉에 빠진 목소리였다.

그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아닌 밤중의 날벼락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일병원 혈액원이 이런 잘못을 할 리는 없지요.”

“그렇죠?! 이건 분명…….”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던 부서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이건 누구 잘못이란 말인가?

혈액을 공급한 적십자에서도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저, 정말 우리 직원이 실수로……? 하, 하지만 누가 왜…….’

그때 진현이 말했다.

“혈액원에서 잘못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적십자에서 잘못하지도 않았겠지요.”

“그, 그러면……?”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면밀히 확인은 해봐야 한다 생각합니다. 제 환자에게 벌어진 일이니 제가 먼저


확인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네! 얼마든지요.”

혈액은 엄밀히 관리하기 때문에 거의 전 방위에 걸쳐 CCTV 가 놓여 있었다.

‘기다려라, 이상민.’

그의 소행이 맞는다면 분명 CCTV 의 한 자락에 흔적을 남겼을 거다.

진현은 응급실을 황문진 및 다른 동료에게 부탁하고 CCTV 에 매달렸다.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당 혈액이 반입한 시기부터, 반출될 때의 시기까지 모든 CCTV 를 확인했다.

티끌 하나 안 놓칠 집중력으로.

‘혈액이 반출된 후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을 거야.’

혈액은 중요도상 기계로 운반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운반 후 의료진에게 도착한다.

혈액을 운반한 이송원, 혈액을 건네받은 간호사는 이미 확인했다.

여러모로 확인결과 그들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런데… CCTV 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했는데 곤란한 점이 생겼다.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자신이 놓쳤나 다시 한번 재생해 보았지만 역시였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아무 곳에서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혈액에 독약이 타져 있는데, 독약을 탄 흔적이 아무 데도 없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었다.

***

그 뒤 진현은 여러모로 이상민의 죄를 밝히려 노력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혈액에 혹시 지문이 남았나 확인도 해보고 은밀히 수사도 부탁하고, 여러 방법을 썼으나 모두 무용했다.

그러는 사이, 시연이는 천만다행으로 좋아져 퇴원을 하게 되었다.

“김진현 선생님,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좋아져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음에… 또 병원 오면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또 오게 되면 그때도 선생님이 시연이 봐줄 거죠?”

혈액 문제는 일단 사고로 일단락 지어졌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진현에게는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보호자는 병원 측에 크게 항의했고 덕분에 혈액원 직원이
부서장을 포함해 3 명이나 사표를 썼다.

“하여튼 조심히 가십시오.”

“네, 선생님도 안녕하세요. 시연아,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시연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싫어! 선생님도 시연이랑 같이 가!”

떼를 쓰는 시연이에게 진현은 미소 지었다.

“시연이, 계속 건강하면 놀러 갈게. 그러니 꼭 건강해야 해. 응?”

“몰라! 안 가!”

울음을 터뜨린 시연이를 간신히 보호자가 달래 데려갔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폭풍 같았는데 좋아져서 퇴원해 다행이다. 하지만 진현은 곧 인상을 찌푸렸다.

풀리지 않은 추악한 죄가 떠오른 것이다.

‘이상민… 이 개자식.’

죄를 증명하진 못했지만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거다.

***

한남동의 저택에서 이종근과 이상민은 만남을 가졌다.

부자지간이건만 집에서 만남을 가진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이종근이 핏빛 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한 짓이냐?”

“뭘요?”

이상민은 반문했다.

“혈액원의 일 말이다.”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무리한 강수를 둘 거면 확실히 처리를 했어야지. 처리는 못하고 꼬리는 왜 잡힌 거냐? 어쨌든 별일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지만 다음부턴 꼭 조심해.”

“네.”

“잘해야 해. 이사회가 갈수록 시끄러워.”

이종근은 보르도산 와인을 신경질적으로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 신경을 거슬렸다.

“내가 병원 이사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어. 이런 추세대로라면 넌 레지던트만 끝나고 이 병원을


나가야 해. 방법은 단 한 가지. 네가 탁월한 실력을 보여 인정을 받아야 해.”

“네.”

이종근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영 미덥지 못했다.

“김창영 총리가 누군지는 알지?”

이상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前) 대법관이자 현(現) 총리를 모를 리가 없다. 이전 비행기에서 진현에게 치료받은 적도 있다.

“최근 담낭 쪽으로 건강이 안 좋으시다더라. 조만간 대일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하시는데, 그 수술 너한테
주마.”

“……!”

“물론 집도는 우리 쪽 사람인 민성수 교수가 할 거고, 너는 퍼스트 어시스트로 들어가도록 해.”

이종근이 아들에게 주는 특별한 기회였다.

퍼스트 어시스트에 불과하더라도 현(現) 총리의 수술에 참가하는 것은 대단한 명예로 항상 험담만 퍼붓는
이사회에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였다.

***

총리 김창영은 단순한 VIP 가 아니었다.

청렴한 이미지로 현 정국에서 국민들의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고, 이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욕만


먹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내 입지도 탄탄했다.

이대로 별문제만 안 생긴다면 향후 차기 대권을 노려볼 수도 있는 대한민국 정상의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수술에 앞서 이사장인 이종근이 수하인 민 비서와 함께 직접 총리실에 방문했다.

“총리께서 회의 중이시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총리실의 비서가 이종근을 안내했다.

이전 진현에게 수술용 현미경, 루뻬를 선물로 건네준 이윤서 비서였다.


“네, 감사합니다.”

이종근은 접객실에서 총리를 기다렸다.

아무리 대일병원의 이사장이라도 현 정국의 실세인 총리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분함이 괴로워질 무렵, 문이 열리며 김창영 총리가 들어왔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김창영입니다.”

김창영은 이전 진현과 만났을 때 비해서 훨씬 건강해진 모습으로 소탈하고 겸손한 이미지는 그대로였다.

이종근은 깍듯이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대일병원의 이름 높은 명의(名醫)인 이 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지요. 편히 앉으십시오.”

이 박사는 이종근이 한창 진료일선에 있을 때의 호칭으로 당시 그는 여러 언론을 통해 자신을 명의로 포장했었다.

“제가 만성 담낭염이 있어요. 가급적 나이도 있고 해서 수술 없이 치료해 보려 했는데, 계속 재발해서 꼭 수술을


받아야 한다더군요. 그래서 이왕 수술을 받을 거면 대일병원에서 받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이종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최고의 의료진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그의 충실한 아랫사람 중 한 명인 민성수는 담낭 수술의 이름난 전문가였다.

‘담낭 수술이야 어려울 것도 없고, 위험할 것도 없으니. 이상민을 끼워 넣으면 일석이조지.’

현 정권의 실세인 김창영의 수술. 비리비리한 이상민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될게 분명했다.

“그러면 저를 수술하는 의사 선생님은 누가 되는 것입니까?”

“해당 분야 최고의 전문가인 민성수 교수가 집도할 것입니다.”

김창영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제가 수술을 받고 싶은 의사 선생님이 있는데, 그렇게 해도 될까요?”

“……?”

이종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일병원에서 이쪽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민성수인데?

그런데 김창영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였다.

“이전 저를 치료해 줬던 젊은 의사. 김진현 선생께 수술 받고 싶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97

97. 총리의 의사 (1)

“……!”

김창영 총리의 말에 이종근은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김창영은 이종근의 속도 모르고 사람 좋게 웃었다.

“제가 그러고 싶으니 가급적 그렇게 해주십시오.”

“하, 하지만 김진현 선생은 교수는커녕 아직 전문의도 아니고 수련 중인 전공의일 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심이…….”

김창연은 담담히 답했다.

“담낭염 수술이 어려운 수술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알아보니 그간 김진현 선생님은 천재적인 실력을 통해 많은
수술을 훌륭히 해냈다고 하더군요. 저는 가급적 김진현 선생께 수술을 받고 싶습니다.”

사실 김창영이 젊은 천재 의사인 김진현에게 치료를 받고 싶단 뜻을 내었을 때 많은 반대가 있었다.

아무리 담낭절제술이 레지던트들도 많이 집도하는 간단하고 기본적인 수술이라지만, 명색이 총리인데 유명한
교수에게 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김창영도 다른 교수에게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왠지 이전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김진현이 끌렸다.

물론 이 수술이 암 수술처럼 생명에 영향을 주는 큰 수술이었으면 김창영도 다른 교수를 선택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고 김진현 선생도 대일병원 내에서 수술 잘하기로 유명한 천재 젊은 의사니 별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쩐지 한국대 병원을 놔두고 대일병원을 선택하더라니.’

이종근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애초에 김창영 총리는 이전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김진현을 염두에 두고 대일병원을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이상민의 캐리어를 쌓으려던 이종근의 계획은 단박에 어그러졌다.

김진현! 김진현! 김진현!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대일병원의 자금을 지원하는 대일 홀딩스의 본사에서 이사회가 소집돼 이종근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었다.

넓은 회의실에서 적대적인 목소리들이 날아들었다.

“이사장님, 병원의 상반기 실적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적자폭이 너무 큽니다.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말이 이사회지 모두 대일 가문의 형제, 친척들로 구성된 멤버들이다.

그들은 이종근의 속을 박박 긁어댔다.

“하하, 병원이 어디 돈만 볼 수 있습니까? 환자의 생명을 위하는 곳이니 가끔 손해 볼 때도 있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대일병원이 어디 돈만 바라보고 운영하는 곳입니까?”

이종근은 속내를 숨기며 답했지만 사람들은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손해가 심한 것 같은데요. 경영 차원의 문제가 아닐지 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대일병원이 그룹 차원에서 사회 환원을 목적으로 운영한다지만, 그래도 이런 경영은
곤란하지요.”

이사회 멤버, 즉, 가문의 친인척들의 공격에 온화한 미소를 띤 이종근의 얼굴이 씰룩씰룩 흔들렸다.

‘이 망할 것들이!’

그리고 늘 그렇듯 회의에 마지막에 이르러 병원의 후계자인 이상민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거, 이래서 이상민 선생이 차후 병원의 경영권을 넘겨받아도 괜찮을까요?”

“글쎄요. 전 단순히 혈연관계라고 경영권을 승계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무조건적인 혈족경영. 그거


주의해야 할 악습이에요. 아무리 혈연관계라도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물려받아야지요.”

이종근은 회의실 탁자 밑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기들도 그룹 회장의 핏줄이란 이유만으로 굵직굵직한 회사들을 물려받았으면서 말은 잘한다.

“이혜미 이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한 이사회의 멤버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가문의 중역들이 앉아 있는 그곳 젊은 여성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국내 최고인 대일병원은 후에 자격이 있는 사람이 물려받아야겠지요.”

꽃처럼 화사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그녀는 놀랍게도 이혜미였다.

그녀가 이사회의 멤버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년.’
이종근은 자신의 딸, 이혜미를 보며 주먹을 떨었다.

이상민 비난의 물밑 작업은 모두 그녀의 소행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이사회 내에서 발언권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사장인 이종근을 제외하면 수위에 꼽혔다.

후계자였던 이범수가 이사회 내 자신의 몫을 전부 동생에게 물려줘서이다.

‘이범수 이 자식은 왜 모든 몫을 저년에게 물려줘서.’

그런데 그때 이사회의 멤버이자 이종근의 동생인 이종범이 차갑게 말했다.

“어쨌든 저희는 능력 없는 이상민 선생이 병원의 후계는 물론, 병원 내 어떤 특혜를 받는 것도 반대합니다.


이상민 선생이 병원 내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뒷말을 잊진 않았지만, 뻔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대일병원에서 나가란 것이다.

이종범의 말을 끝으로 분통이 터지는 이사회가 마무리되었다.

모두 분분히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피를 나눈 가족들이지만 회의 끝 안부를 나눌 정 따위는 없었다.

혜미도 차분히 몸을 일으키는데 이종근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혜미야.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일이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물었다.

이사회의 멤버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이종근이 이를 갈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피곤하게 구는 거냐? 이상민은 네 오빠야! 오빠를 도와주지 못할망정!”

“오빠요?”

혜미는 기가 찼다.

오빠? 그 존속살인범이?

“제가 이러는 이유는 이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욕심에 눈이 먼 아버지와는 더 할 이야기 없어요.”

“너, 너!”

이종근이 눈을 부라리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저릿한 통증에 혜미는 비명을 질렀다.

“악! 놔요!”
“이사회를 움직이는 것 그만둬!”

혜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싫으면요?”

“뭐?”

“말을 안 따르면 어릴 때처럼 때릴 건가요?”

이종근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혜미는 손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전 반드시 범수 오빠의 원한을 갚을 거예요.”

“너, 너! 아직도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게냐! 누가 누구를 죽였단 거냐!”

그녀는 몇 번이고 진실을 호소했으나 이종근은 그녀를 미친년 취급할 뿐이었다.

혜미도 이제 이종근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이상민을 파멸시킴으로 오빠의 원한은 자신이 갚을 것이다.

“그만 가볼게요. 잘 지내세요.”

“너, 너! 거기서! 이혜미!”

곧 혜미의 뒷모습이 사라졌고, 홀로 남은 이종근은 노성을 터뜨렸다.

“젠장! 빌어먹을!”

이종근은 책상을 후려쳤다.

이대로는 안 됐다.

이대로 진행되다간 이상민은 병원에 자리도 잡지 못하고 쫓겨날지도 몰랐다.

***

곧 김창영 총리의 수술 소식이 진현에게 전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총리님의 집도를요?”

진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얼떨떨하게 물었다.

아니, 교수도 전문의도 아닌 내가 총리의 수술을 왜 집도한단 말인가?

하지만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총리실의 이윤서 비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총리께서 선생님께 수술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어려우실까요?”

“아니, 담낭염 수술 자체야 어려울 것은 없지만……. 그래도... 레지던트인 제가 어떻게…”

만성 담낭염 수술이야 기본적인 수술이니 어려울 것은 없다.

환자가 너무 VIP 여서 그렇지.

“비행기 안에서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때야 총리인지 모르고 한 거고.

이윤서 비서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총리께서는 가급적 김진현 선생님의 수술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진현은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정말로 다른 전문 교수님이 아니라 저에게 받길 원하시는지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총리께서 분명히 원하신 일입니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총리의 수술이 확정되었고 수술 스케줄도 급히 잡혀 다음 주 화요일로 결정됐다.

진현이 총리의 수술을 한다는 소문에 대일병원 외과가 난리가 났다.

외과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진현이 집도할 수술 이야기를 하였다.

“아니, 그 괴물 김진현이 김창영 총리의 수술을 집도한다고?”

“아무리 천재라도 이제 겨우 1 년 차인데?”

“그 김진현이면 못할 것은 없지. 그 괴물이면 말이야.”

“그건 그래. 하여튼 거참 대단하네.”

또 대형 사고를 치는 김진현에게 모든 이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진현의 위상은 의도치 않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또다시 치솟았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김진현 혼자 수술할 수는 없잖아? 누가 어시스트를 하지?”

“같은 1 년 차를 어시스트로 세울 수도 없고… 곤란하네.”


외과의사들은 고민했다.

아무리 1 년 차가 집도를 해도 명색이 총리의 수술인데 허투루 수술팀을 꾸릴 수는 없다.

많은 논의 끝에 집도는 김진현, 퍼스트 어시스트는 교수인 유영수, 세컨드 어시스트는 교수 발령을 기다리는
전문의 중 한 명이 맡기로 했다.

민망할 정도로 기형적인 팀 구성이었지만, 혹시라도 김진현이 실수를 할 시 곧바로 손을 바꾸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 분주한 소식들에 이종근은 불쾌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김진현이 하늘 끝도 모르고 치솟는 느낌이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이종근은 이상민을 타박했다.

“이대로 가다간 병원 후계가 물 건너가는 것은 물론 이사회에서 눈엣가시인 널 레지던트만 마치고 자매병원쯤으로


쫓아내라고 할지도 몰라. 그나마 총리수술로 네 경력에 도움을 주려 했는데, 그것도 김진현이 하게 생겼으니.
쯧.”

총리의 수술을 마치면 김진현 그놈이 또 얼마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총리의 수술을 집도한 천재 외과의사!

또 이런 제목의 기사가 나갈 게 뻔했다.

그리고 총리의 수술은 단순한 위상과 유명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수술을 성공하면 김진현, 그놈은 향후 김창영 총리의 전속 주치의가 될 수도 있어.’

원래 건강이 안 좋은 지체 높은 인사들은 유사시 연락하는 전속 의사들이 있었다.

의사로서도 굉장히 명예로운 일로 원래 한국대 병원, 광혜 병원이나 대일병원의 명망 높은 교수들이 그런 일들을


담당한다.

과거 비행기 안에서 김창영의 목숨을 구해준 진현이 이번 수술까지 성공적으로 마치면 향후 총리의 전속 주치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현 정권의 실세이자,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김창영 총리.

다음 대권의 강력한 후보자인 그의 전속 주치의라니.

의사로서 하늘의 별처럼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이 정도로 높은 인물의 전속 주치의는 한국대 의대의 명망 높은 교수나 넘볼 수 있는 건데, 젠장!’

김진현, 그놈이 그렇게까지 올라가면 이종근으로서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아니, 손을 쓰기는커녕 울며 겨자 먹기로 최고의 대접을 해줘야 할 판이다.


‘이러다 레지던트를 조기 졸업시키고 조기에 교수로 임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종근은 현재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런 생각도 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김진현이 하는 꼴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한국 의료계가 모범으로 삼는 미국 의료계에선 없었던 일도 아니고.

이종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이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

# 98

98. 총리의 의사 (2)

그런데 이상민이 말했다.

“아직 수술을 한 것은 아니잖아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김진현, 그놈이 수술을 하면 무조건 성공하겠지.”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상민은 그런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혹시 일이 생겨서 수술 시간에 맞춰서 못 올 수도 있고… 아예 참석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수술에 왜 늦어. 그것도 총리의 수술에. 제정신으로 하는……!”

짜증을 내려던 이종근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너… 설마?”

이상민은 특별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부탁했다.

“이사장님.”

“……?”

“혹시나… 정말 혹시나 김진현이 수술을 불참하게 되면, 그 수술 제가 진행할 수 있도록 손을 써주시겠어요?”

이상민은 말했다.

그답지 않게 무거운 표정이었다.

***

수술을 앞두고 진현은 비교적 편한 나날들을 보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시합을 앞두고 몸 관리를 하듯 선배들이 스케줄을 배려해 줬던 것이다.

“담낭염 수술할 줄 알지? 총리니 배를 칼로 열지 말고, 꼭 복강경으로 해야 해.”

“유영수 교수님이 같이 들어가니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곧바로 도움을 구하고.”

뿐만 아니라 여러 교수도 진현에게 조언을 해줬다.

“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겸손히 답하긴 했으나, 사실 쓸데없는 걱정들이다.

복강경 담낭염 수술은 셀 수도 없이 많이 해봐 모든 수술 중 가장 익숙했으니까. 환자가 VIP 인 것만 빼면 특별할


것도 없는 수술이다.

그렇게 비교적 편한 나날들을 보내고 김창영 총리의 수술 전날, 응급실에서 의외의 연락을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아, 진현아.

“혜미?”

-응, 환자 때문에 연락했어.

혜미가 환자 문제로 접촉한 것이다. 뭐, 내과 의사인 그녀가 환자 문제로 외과 응급실 의사인 진현에게 컨택
(Contact)하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긴 했다.

“지금 바로 가볼게.”

진현은 곧바로 환자를 보러 응급실로 향했고 혜미와 만났다.

“아, 안녕. 진현아. 잘 지냈어?”

“응. 무슨 환자야?”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진현의 가슴이 살짝 뛰었다.

혜미의 얼굴은 여전히 예뻤다.

하얀 꽃처럼 화사한 아름다움에 의사 가운이 지적인 매력을 더했다.

대일병원 통틀어 최고의 미녀라는 소문은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항암 치료 받는 환자인데. 이전 수술받은 부위에 장이 막혀서. 외과에서 봐줄 수 있어?”

외과 문제로 인한 전과(轉科) 문의였다.

“그래, 우리 과 문제니 외과에서 봐야지. 환자 소속 외과 앞으로 바꿔. 내가 가서 볼게.”

“응. 고마워.”
용무를 마친 혜미는 응급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혜, 혜미야!”

“응? 왜?”

혜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진현은 불러놓고도 주저했다.

부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하지? 아니, 내가 왜 부른 거지?

“그냥 가게?”

“그, 그냥 안 가면?”

“아… 아니, 그냥 오랜만인 것 같아서. 반가워서.”

진현은 본인이 한말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람?

‘왜 그래, 김진현? 정신 차려. 평소답지 않게.’

하지만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탓일까? 이상하게 가슴이 뛰며 안정이 안 됐다.

“자, 잠깐 커피라도 마실래? 네가 좋아하는 검은 물.”

“검은 물?”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줄게.”

두근.

진현의 가슴이 뛰었다.

그는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당황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혜미의 붉어진 뺨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 나… 지금은 안 되는데.”

“그래?”

“으, 응.”

“그러면 오늘 저녁은? 커피 한 잔 안 마실래?”

“퇴근이긴 한데… 8 시 30 분쯤 끝날 거야. 괜찮아? 너 내일 수술도 있잖아.”

“응, 근처에서 잠깐 보는 거니 괜찮아. 논현동 룽고 어때?”


그 말에 혜미의 뺨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논현동의 룽고(Lungo).

그윽한 분위기의 카페로 그녀가 이전 진현에게 좋아하는 사람과 오고 싶다고 말한 곳이다.

‘설마?’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 주책없게 뛰었다.

“싫어?”

“아, 아니야! 그때 보자.”

그렇게 둘은 오늘 저녁 약속을 잡았다.

평소와 조금은 다른, 특별할지도 모를 약속이었다.

***

“대박! 김진현이 너한테 고백하려 하는 거야!”

혜미의 말을 들은 김수연이 방방 뛰었다.

“아, 아니야. 고, 고백은 무슨. 그냥 오랜만에 보자고 한 것 아닐까?”

“에이. 지금까지 너 김진현이 그런 데서 보자고 한 것 봤어?”

“그건… 없었지만.”

진현은 항상 혜미와 만날 때 본인이 좋아하는 고깃집이나 술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이런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처음이다.

‘정말로?’

그때 김수연이 혜미의 손을 이끌었다.

“안 되겠다. 이리로 와.”

“어?”

“이 언니가 코디 좀 해줄게. 빨리 와.”

“아, 안 돼. 나 환자 골수 천자(Bonemarrow exam) 해야 한단 말이야.”

“지금 골수 천자가 문제야? 그딴 골수 검사 이 언니가 대신 해줄 테니 빨리 와!”

“어? 어? 잠깐만.”

새끼손가락 반만 한 굵기의 쇠침을 뼈 안에 박아 넣어야 하는 골수 천자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김수연은 혜미를


당직실로 끌고 들어갔다.
김진현의 당직실과 다르게 여자들이 쓰는 숙소답게 은은한 향기가 흘렀고 캐비닛을 여니 여러 옷이 쫘악 자태를
드러냈다.

“뭐 입고 갈 거야?”

“그냥 이거…….”

혜미는 단정한 원피스를 가리켰다. 그러나 김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그런 옷은 안 돼.”

“그러면?”

“이런 것을 입어야지!”

그러면서 그녀는 옷 두 벌을 골라주었다.

김수연이 고른 옷을 본 혜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걸 입으라고? 이건 좀…….”

허벅지의 반도 안 오는 미니스커트와 은은한 느낌의 흰색 블라우스였다.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산 옷들이지 입을 생각은 없었다.

“괜찮아. 입어봐.”

“하지만…….”

“어허! 그런 정신으로 남자 잡겠어? 빨리 입어봐.”

어쩔 수 없이 혜미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그녀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혜미는 어색하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냐고?

김수연은 입을 벌렸다.

이슬을 머금은 듯 청순하게 아름다운 얼굴 아래, 블라우스 속에서 몸의 실루엣이 은은히 드러났다.

뭐랄까? 청초하면서 이지적이었고, 동시에 색정적(色情的)이었다.

“가시나. 여자인 내가 다 덮치고 싶네.”

김수연은 중얼거렸다.

이런 여자를 앞에 두고도 반응이 없다면, 그놈은 남자도 아니었다. 남자도!


“응?”

“어쨌든 언니만 믿고 오늘은 이렇게 입어! 꼭!”

“어, 어.”

김수연은 오늘 역사가 이뤄질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

“문진아. 너 정장 있냐?”

“엥? 웬 정장? 있지만 너한테 안 맞을 텐데.”

황문진의 키는 180 을 훌쩍 넘어 진현보다 꽤 컸다.

“그렇지?”

그러면서 진현은 연신 캐비닛을 뒤적거렸다. 그래 봤자 걸려 있는 옷은 몇 벌 되지도 않았지만.

황문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시사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던 놈이 웬 바람이지?

“무슨 약속 있어?”

“어.”

건성으로 답한 진현은 그나마 깔끔한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를 골랐다.

“내일 총리 수술 날 아니었어? 나갔다 와도 괜찮겠어?”

“술 마실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잠깐 나가서 커피만 마실 건데, 뭐. 금방 들어올 거야. 그런데 문진아.”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백하는 게 맞겠지?”

황문진의 눈이 묘해졌다.

“누구?”

진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정확히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황문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바본가? 딱 보니 견적 나오는구만.

일순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으나, 진현은 그의 가장 소중한 친구다.

문진은 쓰린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고백해. 그게 맞지.”

“그렇지?”

“그래.”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도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마음을 깨달은 후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거니까.

그런데 그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아, 하필 지금.”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곧 혜미 만나러 나가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나가자.’

그는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당직실에 혼자 남은 황문진은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그는 쓸쓸히 중얼거렸다.

“망할 놈. 이제 혜미 울리기만 해봐라.”

그는 아직 혜미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

응급실의 일을 처리하고 나니 벌써 9 시 30 분이었다.

약속 시간에 1 시간이나 늦은 것이다.

카페 룽고는 논현동에도 으슥한 곳에 있어 도착하면 10 시는 될 텐데.

‘카페 룽고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서둘러 병원을 나서며 택시를 잡았다.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꺼져 늦는다고 혜미에게 연락을 해줄 수가 없다.

“논현역으로 가주세요.”

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이느라 진현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있었단 것을.

“김진현.”

그 무저갱처럼 무거운 눈빛이 입을 열었다.


“네가 조금만 덜 뛰어났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우습지만… 난 널 좋아했어.”

흐트러지는 목소리.

비틀린 애증이었다.

“하지만 난 영원히 널 넘지 못하겠지. 영원히.”

부르릉!

그리고 검은색 스포츠카가 진현이 탄 택시를 따라 움직였다.

***

한편 카페 룽고에서 혜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현을 기다렸다.

‘이제 곧 도착하겠지?’

김수연의 코디 덕분인지 카페 안의 모든 사람이 혜미를 바라봤다.

심지어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도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혜미는 그런 시선들을 의식할 정신이 없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오랜 짝사랑, 김진현만 들어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꾸 기대가 되었다.

그걸 떠나서 빨리 그가 왔으면 좋겠다.

보고 싶었다.

“논현역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카드를 찍고 진현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인적 없는 복잡하고 깊은 골목 속에 위치한 카페라 택시를 타고 갈 수가 없어 걸어가야 했다.

‘10 분은 더 걸릴 텐데.’

진현은 초조히 시계를 봤다. 고백을 할 작정이면서 지각이라니 최악이다.

‘빨리. 빨리.’

진현은 앞만 보고 걸었다.

카페 룽고는 숨은 명소답게 복잡한 골목을 통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점점
없어졌다.

그리고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일직선의 골목. 이제 저 끝에 가서 두 번만 더 꺾으면 도착이다.

부앙. 부앙!

멀리서 들리는 스포츠카 특유의 높은 배기음에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강남 거리답게 꼭 이런 골목에서 스포츠카 타고 과속하는 미친놈들이 있었다.

‘알아서 피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진현은 살짝 벽 쪽으로 붙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 99

99. 총리의 의사 (3)

부르릉! 부아앙!

그런데 진현의 눈이 커졌다. 차의 소리가 너무 가까워졌던 것이다.

“어?”

고개를 들리자 시야 가득 들어온 정체불명의 검은색 스포츠카.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퍼억!

스포츠카에 정통으로 충돌한 진현의 몸이 공처럼 날아가 벽에 부닥쳤다.

쿠웅!

그는 스르르 밑에 쓰레기 더미에 처박혔고 곧 시뻘건 선혈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사고를 낸 검은색 스포츠카는 곧 골목을 빠져나가 학동로로 향했다.

***

혜미의 얼굴이 점점 실망감에 젖어 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진현은 오지 않았다.

‘또 응급실에 안 좋은 환자가 생겼나?’

하필 진현은 병원에서 나올 때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혜미는 진현이 응급실 환자로 바빠 늦어진다 생각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수술하러 들어간 건가? 수술 중이면 전화 연락이 안 될 테니…….’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는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락이라도 한 통 주지.’

시계를 보니 벌써 11 시 15 분으로 곧 카페가 닫을 시간이라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현?!’

그러나 고개를 돌아본 순간, 그녀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상민이었다.

“이상민?”

“응, 잘 지냈어?”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본 혜미는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이 지극히 어두웠던 것이다.

‘뭐지?’

항상 가면 같은 미소를 짓는 이상민이 저렇게 어두운 얼굴이라니?

좋든 싫든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이상민에게 무슨 일이 있든 말든 자신이 알 바 아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아니,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데 네가 있어서 들어와 봤지.”

“우연히?”

“응, 우연히.”

혜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우연이라도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내 눈앞에서 사라져줘.”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너무한 것 아니야? 가문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내 뒷욕을 한다면서. 너 때문에 병원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
혜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그래, 넌 병원에서 쫓겨날 거야. 내 손으로 쫓아내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아니, 그냥 우연이라니까. 우연히.”

이상민은 일어섰다.

“별로 반가워하지 않으니 그냥 일어날게. 좋은 밤 되길. 그런데.”

“……?”

“누구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뭐?”

“계속 안 오면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혹시라도 늦지 않게.”

그리고 이상민은 홀연히 사라졌다.

카페에 홀로 남게 된 혜미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이라도 이상민을 만나다니. 너무 싫었다.

‘무슨 말이야? 혹시라도 늦지 않게 라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혜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여길 왜 온 거지? 정말 우연?’

그럴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굳이 이 시간에 여길 왜?

그런데 그 순간 번개를 맞은 듯한 공포가 등줄기에 작렬했다.

‘설마?!’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아닐 거야.’

이 자리에 오기로 한 사람은 그녀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진현이었다.
‘아닐 거야. 절대로.’

그녀는 이를 악물며 진현과 같은 방을 쓰는 황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는 시간이 천 년처럼 느껴졌다. 너무 무서워 눈물이 흘렀다.

-어, 혜미야? 무슨 일이야? 진현이랑 잘 만났어?

“진현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진현이 어디 있냐고?! 지금 병원에 있어?!”

-응? 너랑 있는 것 아니었어? 진현이 9 시 30 분쯤 당직실에서 옷 갈아입고 나갔는데?

그 말에 그녀는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진현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

이후 어떻게 밤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혜미는 미친 듯이 울며 진현을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황문진과 경찰의 도움까지 받았으나 종적이 묘연했다. 완전한 실종이었다.

혜미는 울부짖었다.

“아, 안 돼! 진현아… 안 돼!”

이범수에 이어 진현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황문진이 그녀를 달랬다.

“혜, 혜미야. 너무 걱정 마. 진현이 금방 돌아올 거야.”

하지만 혜미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하지만 덧없이 신호만 갈 뿐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민! 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

띠리링.

이상민은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을 붙이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하아.”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이상민과 혜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혜미가 몇 번이고 뒤졌지만 진현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내팽개쳐졌던 자리에는 아무도 쓰러져 있지 않았다.

쓰러진 사람은커녕 그곳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고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다음 날 오전 6 시 10 분.

대일병원 외과는 난리가 났다.

총리의 수술을 진행해야 하는데 김진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빨리 전화해봐. 7 시에 수술 시작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간 거야?”

“전화를 해봤는데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

같이 수술을 들어가기로 한 치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도대체 어디에 간 거야? 이제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부담감에 도망간 것은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외과의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김진현은 그럴 인물이 아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VIP 병실에서 김창영이 의문을 표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이윤서 비서가 상황을 알아봤다.

“김진현 선생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러나 김창영은 대인배답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곧 오겠지요. 아직 1 시간 가까이 남았으니.”


그러나 10 분이 더 지나 6 시 20 분이 되어도 김진현은 얼굴을 비추기는커녕 연락도 되지 않았다.

“아, 이제 곧 수술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외과의사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7 시 수술 시작인데, 집도의가 행방불명이라니!

한편 VIP 병동 바로 위에 이사장실에서 이종근은 놀란 눈으로 이상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짓이냐?”

“뭘요?”

“김진현. 행방불명된 것.”

이상민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종근은 괜히 소름이 돋았다.

‘내가 독사를 낳았어.’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이종근 본인도 마찬가지이니 타박할 입장은 아니긴 하다.

다만 술집 여자인 이상민의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았을 뿐, 심성 자체가 나쁘진 않았는데 어디서 이런 성격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웃기지도 의문이다. 이상민은 이종근의 세 자식 중 그를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니까. 이상민은


이종근의 판박이였다.

‘설마 범수도 이놈이?’

순간 혜미의 말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상민이 형인 이범수를 살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이상민의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혜미의 모함이라 애써 생각했다.

“김진현 때문에 총리의 수술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슬슬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래야지.”

혹시나 해서 자신의 사람인 민성수 교수를 대기시켜 놨다.

민성수 교수를 집도의로, 그리고 이상민을 퍼스트 어시스트로 수술을 진행하면 해피엔딩이다.

“내려가자. 총리에게 먼저 인사하고 수술을 진행해야지. 차기 대권 주자로 유력한 분이니 너도 이 기회에 얼굴


도장이나 찍어놔라.”
“네.”

그런데 그때 민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 이사장님.”

“왜요?”

“이혜미 선생님이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상민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귀를 기울이니 과연 이사장실 입구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이종근은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딸을 만날 때가 아니다.

“중요한 수술이 앞이니 돌려보내세요.”

“하지만…….”

“민 비서. 다시 한번 말하니 알아서 돌려보내세요.”

“……!”

민 비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종근은 이사장실 뒤편의 계단으로 향했다.

“우린 이쪽으로 가자.”

“네.”

김창영 총리가 대기 중인 병실과 이사장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1 분도 안 돼 그들은 총리의 병실 앞에 도착했고, 연락을 받아 미리 대기 중이었던 민성수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그래, 오늘 잘 수고해 달라고. 같이 들어가서 인사하지.”

시계를 보니 6 시 35 분.

아직 늦지 않은 시간으로 간단히 인사 후 수술장으로 이송하면 된다.

이사장을 필두로 민성수 교수와 이상민이 뒤를 따랐다.

“어서 와요.”

김창영 총리가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맞았다.

“밤사이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불편은요. 잘 대접받았지요.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뒤의 분들은?”

“수술을 집도할 민성수 교수와 퍼스트 어시스트인 이상민 선생님입니다.”

“집도요? 수술은 김진현 선생이 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요?”

이종근은 미소 지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했다.

그는 교묘한 말로 김진현을 최대한 깎아 내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도저히 그 자리에서 있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네, 수술은 제가 집도할 것입니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그’, 김진현이 서 있었다.

“……!”

이종근은 화들짝 이상민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눈빛.

그러나 이상민의 얼굴도 가관이었다.

평소 짓고 있는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다.

어떻게?

그런 사고를 당했는데?

이상민은 불신의 표정을 지었으나 눈앞에 이는 김진현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더구나 몸 어디에도 부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살짝 파리하긴 했지만 다른 부위는 멀쩡했다.

그때 김진현과 이상민의 눈이 마주쳤다.

“……!”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채색한 눈동자가 자신의 죄악을 질책하는 듯해 이상민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한편 이종근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진현에게 말했다.

“자네는 총리님의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이렇게 늦으면 어떻게 하나?”

진현은 가만히 이종근을 바라봤다.

“지금 시간 6 시 40 분이니 늦은 시간은 아닙니다만?”


“뭐?”

진현의 말이 옳았다.

연락이 안 돼 다른 의사들이 지레 걱정한 것일 뿐, 늦은 시간은 아니다.

오히려 수술 시간 20 분 전이니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정확한 시간이었다.

이종근은 본전도 못 찾고 벙어리가 돼 입을 다물었다.

김창영이 웃으며 진현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김 선생님께 신세지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한숨 주무신다 생각하시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현도 부드럽게 말했다. 수술을 앞둔 환자를 안심시키는 능숙한 말투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은가요?”

총리의 말처럼 진현의 안색은 살짝 하얬다.

그러나 진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

진현의 눈이 이상민의 눈을 직시했다.

“……!”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이상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수술장으로 향하는 진현의 뒷모습을 시체같이 창백해진 얼굴로 바라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0

100. 징벌

수술장에 들어가는 도중 혜미를 만났다.

안색이 파리할 뿐 생각보다 훨씬 무사한 모습에 혜미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지, 진현아. 흐윽.”

지난밤 동안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현이 범수 오빠처럼 됐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던가?

진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살짝 안았다.


“나 괜찮아. 울지 마.”

“으, 응. 흐윽.”

“수술 끝나고 연락할게.”

그러고 그는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혜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로.

***

진현은 굳은 얼굴로 손을 소독한 후 수술방에 들어섰다. 그를 보조하기로 한 유영수가 걱정스레 물었다.

“연락이 안 돼 걱정했어. 무슨 일 있었어?”

큰일이 있었으나 진현은 짧게 답했다.

“아닙니다.

“그래? 하여튼 얼굴이 안 좋은데 정말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니고? 안 좋으면 말해. 곧바로 손 바꿔줄게.”

“걱정해 주셔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수술가운을 착용 후 진현은 장갑을 끼며 말했다.

“그러면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유영수는 걱정스레 진현을 바라봤다. 컨디션이 살짝 안 좋아 보이긴 하는데…….

‘조금이라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면 손을 바꿔야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진현의 수술 모습에 유영수의 눈이 확 커졌다.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수술을 잘했나?’

모든 손기술이 그렇지만, 똑같이 복강경을 통해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이라도 수준의 차이란 게 있다.

그리고 진현의 손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깔끔하고 완벽해 담낭절제술의 전문가인 민성수 교수, 아니, 그 이상의 손놀림을 보는 듯했다.

찌잉! 찌잉!

고요한 수술방에 복강경 전기 칼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마치 손가락으로 코앞의 물건을 치우듯 간결하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

유영수는 입을 벌렸다.

서포트하려 했건만, 카메라로 배 안을 비추는 것 외엔 할 게 없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거짓말처럼 툭 담낭이 떨어져 나왔다.

그물로 담낭을 밖으로 꺼낸 진현이 말했다.

“끝났습니다. 수술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그래.”

배에 만든 포트(Port, 복강경 수술 기구를 넣는 통로) 밖으로 기구들을 꺼내고 간단히 마무리를 했다.

허탈할 정도로 깔끔한 수술이었다.

환자가 회복실로 나가 완전히 수술이 종결된 후, 유영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간이식에 비하면 간단하기 그지없는 수술이지만 상대가 워낙 VIP 니 긴장이 되었던 거다.

“김 선생, 정말 수고했어. 수술도 엄청 잘했고. 이렇게 잘 하다니. 역시 김 선생은…….”

칭찬을 하는데 김진현이 이상했다.

유영수가 눈을 크게 떴다.

“김 선생?”

하지만 답이 없다.

“김 선생?!”

놀라 외치는데 김진현의 몸이 크게 휘청하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웅!

“김 선생! 김진현! 다들 이리로 와봐! 김 선생이 쓰러졌어!”

유영수가 몸을 흔들었으나 진현은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

진현은 꿈을 꿨다.

깊은 어둠 속, 공허한 공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몽롱했다.

깊은 잠에 침잠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나 뺑소니 당했지. 여긴 어디지?’

진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심연처럼 짙은 암흑은 지독히도 차갑고, 허무했다. 마치 경험하지 못한 사후의 세계처럼.

‘설마 죽은 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진현은 실소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건만 뺑소니에 의한 죽음이라니.

슬플 정도로 허무했다. 아니, 뺑소니가 맞긴 맞는 건가?

‘피곤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냥 쉬고 싶다.

그렇게 그의 의식은 깊게 가라앉았다.

저 밑으로, 끝없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옆 공간이 흐릿하게 흔들리더니 한 존재가 나타났다.

묘령의 아름다운 여인.

그녀의 정체는 믿을 수 없게도 이전 진현을 과거로 회귀시켜준 상부(上府)의 비(婢)였다.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그녀는 천천히 진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의식을 잃은 진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상처 입은 자식을 바라보듯 그녀의 눈에 괴로운 빛이 흘렀다.

“눈동자처럼 지키리니. 항상 지켜보고 있어요.”

꿈속 세상이어서일까?

그녀의 등 뒤에서 하얗고 투명한 날개가 올라와 진현의 몸을 감쌌다.

파앗!
그녀에게서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와 진현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곧 빛이 잦아들며 진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슴 아픈 얼굴로 진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그렇게 한참을 안쓰러운 얼굴로 진현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공간을 넘어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이상민.

그녀는 진현을 위해 한 가지의 개입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의지’를 품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이상민에게 작용했다.

이건 일종의 ‘징벌’.

단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뉘우칠 때까지.”

이 징벌은 그가 죄를 뉘우치면 없어질 것이다.

반면 뉘우치지 않는다면 점점 더 그를 갉아먹게 될 것이다.

과연 그는 뉘우칠까?

그래서 이 ‘징벌’이 진현뿐 아니라 결국은 그에게도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그녀의 몸이 흐릿해졌고 곧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뒤, 어둠 속 공간에 하얀 깃털 하나가 내려앉았다.

***

진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꿈인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이상한 꿈을 꾸고, 몽롱한 정신 속 총리의 수술을 했다.

전부다 꿈인가? 아니면 전부다 사실?

정신이 멍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게 맞긴 한 건가?

그러나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전신에 통증이 몰려왔던 것이다.

“크윽!”
얼핏 보니 오른쪽 무릎과 복부, 가슴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의식이 없는 사이 대수술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부상이 심하진 않구나.’

얼핏 기억하기론 끔찍한 충돌이었는데, 부상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대충 견적을 내보니 무릎 관절 손상, 갈비뼈 골절, 장출혈, 이 정도?

당시 차가 돌진해 오던 속도가 무시무시했는데? 왜 이것밖에 안 다쳤지?

‘혹시 꿈 때문인가?’

몽롱한 정신 속 꾸었던 이상한 꿈을 떠올렸다.

자신을 회귀시킨 상부(上府)의 비(婢)란 여인이 나오고…….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꿈에서 상처를 치료받았을 리는 없지 않는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힘겹게 눈을 뜬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호자용 침대에 혜미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언제나.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고백도 못하고 죽을 뻔했네.’

진현은 힘겹게 손을 뻗어 혜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다행히 손은 안 부러졌다.

그런데 손길의 감촉 때문인지 그녀가 눈을 떴다.

“……!”

혜미는 멍하니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급히 손을 떼며 어색이 말했다.

“왜 거기에서 자고 있어? 불편하게.”

“…….”

혜미는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왜, 왜? 왜 울어?”

진현은 당황했다.

“…보.”

“응?”

“이 바보야! 내가 너 잘못되는 줄 알고! 흐윽!”

그녀는 빼액 외쳤다.

“아, 아니… 울지 말…….”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가 진현의 머리를 끌어안은 것이다.

뭉클 닿는 그녀의 감촉에 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혜, 혜미야?”

“흐윽. 내가 너 잘못되는 줄 알고. 흐윽. 나, 나는 너 없으면 못 사는데. 크흑.”

봇물처럼 터지는 울음에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자신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에 진현은 가슴이 파도를 쳤다.

진현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와 그녀의 얼굴이 움직이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혜미야,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

그녀는 펑펑 울며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은 숨을 들이켰다.

타이밍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거절당하더라도.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후회할 것 같았기에.

“나 너 좋아해.”

“……!”

“좋아해, 혜미야.”

타이밍 안 좋은, 멋대가리 없는 최악의 고백이었지만 혜미의 눈이 요동쳤다.

혜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난 너 싫어.”
“……!”

유사 이래 최악의 눈치를 가진 진현은 자신이 거절당했다 생각했다.

“아… 미안. 역시 차였네.”

그런데 혜미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샐쭉하게 말했다.

“누가 차였대?”

“응?”

“나 너 싫어. 지난 7 년 동안 맨날 내 가슴 두근거리게 하고, 떨리게 하고, 아프게 하고. 너 정말 정말 싫어.”

“……!”

진현의 눈이 커졌다.

이 말은?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난 7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현이 너무너무 싫었다.

짝사랑하느라 맨날 아프고, 기대하고, 지치고, 걱정하고… 그 때문에 가슴이 몇 번이나 찢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 싫어. 하지만… 사랑해. 이 바보야. 내 목숨보다도 널 사랑한다고.”

“……!”

혜미가 붉어진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래, 나도 널 사랑해. 이 바보야.”

진현의 얼굴도 붉어졌다. 몸의 부상도 잊고 벅찬 마음이 가슴에 차올랐다.

“으, 응. 나도 사랑해.”

둘의 손이 수줍게 겹쳐졌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7 년을 넘게 끌어온 그녀의 짝사랑도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

당시 충돌의 강도에 비하면 가벼웠지만, 진현의 부상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갈비뼈 골절로 흉강에 피가 찼었고, 장출혈로 장 절제도 해야 했다.


무릎은 복합 골절에 십자 인대 파열이었다.

“어떻게 이런 몸으로 수술을 했던 거야? 미련하게.”

유영수 교수가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거 없고. 네 몸에 미안해해야지.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너 쓰러지고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알아? 다시는 절대 그러지 마. 네 몸과 환자를 위해.”

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흉부외과, 외과, 정형외과가 모두 모여 수술을 했다.

“김창영 총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퇴원했지. 네가 수술을 워낙 잘해놔서.”

“아…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이지. 이런 몸으로 수술을 했는데 별일 없어서.”

유영수는 계속 타박을 줬다.

하지만 진현은 약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때 뭐에 홀린 듯 제정신이 아니어서 자신이 얼마나 다친 것인지, 아니, 다치긴 한 것인지 정신이 없었다.

“총리실에서 나중에 감사 표시를 한다더라. 수술 잘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앞으로도 문제가 있으면 잘


부탁한다고.”

잠정적이지만 김창영의 미래의 전속 주치의로 진현이 낙점되는 순간이었다.

유영수는 묘한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김창영 총리면 차후 대권의 가장 유력한 후보인데.’

뭐, 정치판이란 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그러했다.

진현은 하늘이 내린 실력도 실력이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다.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듯.

“그런데 교통사고는 어떻게 당한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래? 흠…….”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만 기억날 뿐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어디서 당한 것인지, 무슨 차종에 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푹 쉬어. 후유증 남을 수도 있으니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부상이 심해 최소 한 달은 휴직을 해야 했다.

사실 다른 직업이면 몇 달은 쉬어야 할 상황이지만, 노동착취 당하는 레지던트여서 한 달 쉬고 그 뒤에도 쉴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교통사고는 끔찍하지만 쉬는 것은 좋군. 무릎 때문에 군대도 면제될 수 있을 것 같고.’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경험이지만 애써 좋은 면을 생각했다.

유영수 교수가 방을 나가기 전 물었다.

“그런데 범인은? 경찰에선 뭐래?”

“아직은… 조사하고 있으니 기다려 봐야죠.”

“그래, 어쨌든 푹 쉬고 있어. 또 올 테니까.”

그가 나간 후, 곧 또 다른 방문자가 찾아왔다.

깔끔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얼굴, 김철우였다.

“몸 괜찮냐, 진현아?”

험악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진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놈이 날 이렇게 걱정해 주다니.

“어, 괜찮아. 시간 지나면 다 좋아질 부상이야.”

“괜히 무리하지 말고 다 나을 때까지 푹 쉬어라.”

“그래, 고맙다.”

“그나저나…….”

김철우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범인은… 조금만 기다려라. 지금 샅샅이 찾고 있으니. 내가 반드시 잡아서 네 앞에 끌고 온다.”

분노가 가득한 그 목소리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하지만 진현은 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정말 잡을 수 있을까?’

마침 관할 강남 경찰서에 김철우가 있어 필사적으로 수사하고 있지만, 범인의 행적은 묘연했다.


사고를 당했을 거라 가장 의심되는 장소 근방에 하필 CCTV 가 없었고 목격자도 없어 수사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을 떠나서… 이게 과연 단순한 뺑소니 사고일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진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몰라. 증거도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진현은 입을 열어다.

“철우야.”

“응?”

“너 내 친구지?”

“당연하지.”

김철우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답했다.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뭐든지. 말만 해라.”

진현은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다.

진현은 철우의 눈을 바라봤다.

“…이상민을 조사해 줄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 101

101. 승승장구 (1)

그리고 며칠 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병실 문이 열렸다.

“지, 진현아, 괜찮아?”

혜미가 살짝 붉은 얼굴로 들어왔다.

둘은 그날 이후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아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으, 응.”
진현도 어색이 답했다. 맨날 고기 먹고 술 마시던 친구와 사귀니 민망했다.

그렇다고 싫냐고?

설마 그럴 리가. 진현은 난생처음으로 기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사랑으로 인한 충만감이었다.

혜미도 어색하다 하면서 진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같은 병원 안이니 노트북을 들고 와 모든 일을 진현 옆에서 처리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아, 가게 일 때문에 가셨어. 내일 다시 오실 거야.”

“그렇구나.”

처음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부모님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아들인 진현은 삶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혜미와 더불어 하늘이 꺼질 것처럼 울며 진현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이제 진현이 안정이 되자 가게로
출근을 시작한 거다.

덕분에 그 과정 중 혜미는 사귄 지 삼 일도 안 돼 며느리 눈도장을 쾅 찍을 수 있었다.

“며느리 취급 민망하지 않아?”

“모, 몰라.”

혜미가 고개를 돌리며 진현의 곁에 앉았다.

진현이 물었다.

“피곤하지 않아? 어제 당직인데 좀 잤어?”

“못 잤어.”

“하나도?”

“응. 환자가 안 좋아서.”

진현은 혀를 찼다.

내과도 고생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중환자가 몰려 있어 당직은 외과보다도 더 힘들었다.

“여기 옆에 잠깐 누워.”

“네 옆에?”

진현의 침대 옆자리를 보며 혜미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지, 진현아… 그, 그건… 아직…….”

그 오해에 진현은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기 침대 넓으니까. 잠깐 누워 있으라고.”

병원에서 지원해 주는 일인 병실이라 침대가 무척 넓었다.

“진짜 그런 것 아니지?”

“그래! 절대 아니야!”

혜미가 가운을 벗고 조심히 진현 옆에 누웠다. 그의 곁에 누우니 긴장되면서도 편안했다.

진현은 멀찍이 떨어져 혜미에게 얼굴도 안 돌렸다.

정말 티끌만큼도 사심이 안 보여 그녀는 웃기게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김진현 그 나쁜 놈은 고자야! 란 김수연의 말도 떠오르고.

‘잠 오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잠들면 안 된다. 그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실 중요히 할 말이 있었다.

“진현아.”

“응?!”

그녀가 옆에 누워 있어서인지 긴장한 목소리로 진현이 답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혜미는 살짝 웃었다.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진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 침대 위에서 고개를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그녀의 가슴에 올라왔다.

이런 행복을 7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바라왔는가?

하지만 그녀가 할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추악하고 섬뜩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이야기야. 내 이야기를 듣고 네가 안 믿을 수도 있어. 하지만 믿어줘, 제발.”

“뭔데? 말해봐.”

진현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나 네 교통사고 누가 일으켰는지 알 것 같아.”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혜미는 또 한 번 고민했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이야기를 과연 진현이 믿을까?

하지만 믿지 않더라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의 안전을 위해서.

“누군데?”

“이상민이야.”

“이상민이?”

“응.”

혜미는 진현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사고 날 그녀를 도발한 것 외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도발도 애매하게 했을 뿐 명확히 집어 말한 게 없다.

그런데 진현이 의외의 답을 하였다.

“역시 그렇구나.”

“……!”

혜미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

“내 말 믿어?”

“응, 너 내가 사랑하는 혜미잖아. 그러니 믿어야지.”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 의심만 갈 뿐 증거는 없는데.”

“그냥… 나도 이게 우발적 뺑소니 사고가 아니면 그놈이 범인이겠구나 생각하고 있었거든.”

묘한 답변이다.

“진현이 너… 이상민의 정체를 알아?”

지금까지 혜미는 진현에게 이상민의 본 모습을 말하지 않았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고, 범수의 원한은 그녀 개인의 일일 뿐 그와는 연관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놈이 천하의 죽일 놈인 것은 알아.”

“……!”

그는 담담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혜미에게 말했다.

혜미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며 파랗게 질렸다.

“다 이상민이 한 게 맞을 거야. 그리고 너 수능 때 위궤양 생겼던 게 이상민이 준 한방 차 먹고 생긴 거라고?


그거 아버지가 취미 삼아 보관하던 중국 약일 거야. 희석해서 먹지 않으면 산도가 높아 위궤양을 유발하는
극약이나 다름없는데…….”

진현은 혀를 찼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였다. 그놈은 고등학교 어릴 때부터 개자식, 아니, 범죄자였다.

‘이 정도면 사이코패스잖아. 사이코패스 범죄자는 의외로 주변에 멀쩡히 가면을 쓰고 있다더니.’

“혜미, 너는 이상민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범수 오빠를 죽인 게 이상민이야.”

“……!”

진현은 경악했다.

이범수라면 그도 안면이 있었다.

그녀의 친오빠이자 친절한 한국대 의대 교수로 진현에게 커피를 사준 날 의문의 자살로 사망했다.

그녀의 몸이 분노로 떨렸다.

“오빠가 죽은 날, 이상민이 말했어. 고칼륨혈증으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고. 곧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날 범수 오빠는 칼륨주사로 자살했어. 아니, 타살당했어.”

“…….”

혈우병 박시연 환아 사건 때와 정황이 똑같다.

혜미는 원통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내가 조금만 빨리 눈치를 챘다면, 범수 오빠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흐윽.”

진현은 혜미를 감싸 안았다.

억울하게 죽은 오빠가 생각나 혜미는 그의 품 안에서 한참을 눈물 흘렸다.

‘이 죽일 놈을 어떻게 하지?’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온갖 끔찍한 살인죄들을 저지르고 다니는데 증거가 없어 손을 델 수가 없다.

섣불리 범인으로 몰면 무고죄나 명예훼손죄로 역고소를 당할 거다.

‘그렇다고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일순 충동이 일었으나 여기가 남아메리카도 아닌데 가능할 리가 없다.

“나 절대 이상민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꼭 원한을 갚을 거야.”

그녀는 오랜 다짐을 중얼거렸다.

오빠의 원한만이 아니다.

이번에 진현을 다치게 한 것까지 포함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살았지 진현도 죽을 뻔했다.

진현이 물었다.

“어떻게?”

“언젠가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 죗값을 물릴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언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이상민의 범죄는 모두 완벽해 증거를 찾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증거를 찾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내 방식대로 원한을 갚겠어. 이상민이 이 모든 일을 벌인 이유는 단 한 가지,


대일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니 난 그놈을 대일병원에서 철저히 몰락시킬 거야.”

“……!

그녀답지 않게 차가운 말이었다.

그만큼 원한이 깊으리라.

혜미는 진현의 손을 잡았다.

“진현아,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

“뭔데?”

혜미가 간절한 눈빛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정말 정말 중요한 부탁이야. 들어줄 거지? 아니, 꼭 들어줘야 해.”

“뭔데?”

“들어준다고 이야기하기 전에는 안 말해.”


“…그래, 말해봐.”

그리고 그녀는 상상도 못한 말을 하였다.

“대일병원을 떠나줘.”

“뭐?”

진현은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여기에 계속 있으면 이상민은 널 다시 노릴지도 몰라. 물론 경계하고 의심하고 있으면, 이상민도 특별한 수를
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네가 이런 위험에 다시 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걱정돼 참을 수가 없어.”

“…….”

“너 어차피 피부과하고 싶었잖아. 광혜 병원이나 기독 병원 쪽으로 가서 피부과하면 안 돼? 아니면 꼭 외과를


하고 싶으면 다른 병원에서 외과를 하든지. 네가 간다면 어디서든 환영할 거야.”

그를 생각한 걱정이었다.

“그러면 너는?”

“난 괜찮아.”

물론 이상민을 압박하긴 위해선 진현이 외과에서 계속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보다 그녀에겐 진현의 안전이 훨씬 중요했다.

진현이 또 위험에 처하면 그녀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상민을 몰락시키는 것 따위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어. 난 이 대일병원 이사회의 멤버니까.’

그래,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뒤에서 이상민을 몰아붙였던 것도 모두 그녀였다.

그리고 이종근, 이상민과 다르게 그녀는 가문 내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할아버지이자 대일그룹 전체 회장인 이해중도 그녀를 총애했다.

그러니 진현이 없어도 이상민을 몰락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낼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이사회를 움직이면 최소 대일병원에서 영원히 쫓아내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해.

그리고 그녀가 노리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상민이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든 움직일 거야. 아마 이사회를 움직이는 나를 죽이려 들겠지. 그때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내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물론 위험한 일이었다. 증거를 잡지 못하고 당하기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한만 갚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위험은 나만 감수하면 돼. 진현은 절대 휘말리게 하지 않을 거야.’

진현은 물었다.

“그 말 진심이야, 이혜미?”

화난 듯한 물음에 혜미는 눈을 감았다.

“난 네가 위험에 빠지길 바라지 않아. 그래서 그래.”

“너는? 너는 괜찮고?”

“난 괜찮아. 이상민만 몰락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다면.”

오빠 이범수를 생각하는지 그녀의 감은 눈에서 다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나왔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이상민도, 그의 아버지 이종근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혜미도!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면 나는? 널 좋아하는 나는 뭐가 되냐고?! 너만 여기 놔두고 머리 감싸고 다른 병원으로 도망가라고?”

“…….”

“절대 안 돼.”

“진현아.”

혜미가 제발 부탁한다는 듯 말했다.

진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생각만 같아선 위험할 수 있는 일은 다 때려 치라 하고 싶지만 그녀의 원한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상민에게 유감이 있는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몇 번이고 수작을 당하고 이번엔 죽을 뻔했다.

“절대 안 돼.”

“하지만…….”

그녀는 걱정되는 표정을 지었지만 진현은 단호했다.


“이상민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바보도 아니고, 똑같은 수작에 당하지 않아. 수작을
부리면 이번에야말로 증거를 잡아 감방에 집어넣겠어.”

그가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초능력자도 아니고, 뺑소니사고 같은 일을 또 저지르진 못할 거다. 그런 일들은


이상민에게도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모르고 방심하다 당하니 무서운 거지, 이상민이 일을 저지를 거라 아예 가정하고 대비하고 있으면 무서울 것도
없다.

“그놈의 최종 목적이 대일병원을 승계하는 것이라면, 네 말처럼 그놈을 몰락시키는 것도 복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나는 내 방식대로 그놈을 누르겠어.”

“어떤 식으로?”

진현은 답했다.

“최고가 되겠어. 이상민, 그 자식은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진현은 이전 김철우의 아버지를 치료 후 이상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날 망가뜨리겠다고? 웃기지 마.’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 때문에 병원 후계로서 이상민의 입지가 곤란하단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뺑소니 사건도 궁지에 몰린 탓에 저지른 것일 거다.

그러면 방법은 간단했다.

최고가 되면 된다. 이상민, 그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혜미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진현에 가려 이상민이 계속 빛을 보지 못한다면 이사회를 통해 그를 대일병원에서 축출할 수를 내는 것은 더욱더


쉬워진다.

혜미가 말했다.

“알았어. 대신 하나 조건이 있어.”

“뭔데?”

“꼭 조심해. 이번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야. 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하니까.”

진현은 웃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이혜미.”

말을 마친 둘은 침대에 누운 채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고요한 정적 속, 서로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고 둘의 입이 겹쳐졌다.


촉촉한 입맞춤이었다.

***

그 뒤 시간이 흘렀다.

이후의 시간들은 단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승승장구(乘勝長驅).

이전에도 천재의사로 유명한 진현이었지만 총리 김창영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한 것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레지던트?

의미 없는 직급일 뿐이었다. 모두 그를 규격 외의 천재로 대우했다.

그리고 그 추세에 쐐기를 박은 일이 일어났다.

계속 연락이 안 되던 간이식 파트의 국내 최고 대가 강민철과 드디어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는 진현의 소식을 듣자마자 남은 교환교수 일정이고, 뭐고 곧바로 귀국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2

102. 승승장구 (2)

강민철이 중간에 연락이 안 된 이유는 심장병이 재발한 탓이었다.

세인트 죠셉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연락을 못 받다가 몸이 회복된 후 이사장의 수작과 진현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고 받았다.

그 후 교환교수 일정이 남아 있었지만, 곧장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진현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강민철을 맞았다.

강민철의 말을 듣고 외과를 선택했다 지난 1 년 동안 무슨 일들을 겪은 것인지.

“그래, 오랜만이네. 김진현 선생. 그런데…….”

강민철은 굳은 얼굴이었다.

“미안하네.”

“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그런 일들이 있었을 줄은…….”


강민철은 말이 안 나오는 듯했다.

진현 자신도 강민철이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자신이 이런 시간을 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병원에 도착한 강민철은 곧바로 이사장실로 쳐들어갔다.

민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제지했다.

“저… 이사장님은 지금…….”

“바빠?”

“네, 다음에 약속을 잡고 오시면…….”

“닥쳐.”

“네?”

“닥치라고!”

강민철이 호통을 쳤다.

“나 뚜껑 열리는 것 보고 싶어? 이종근 그 자식 빨리 나오라고 해!”

강민철과 이종근은 의과대학, 인턴, 레지던트 모두 동기여서 거침이 없었다.

또한 간이식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그는 이사장이라 해도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곧 이사장 이종근이 나타났다.

“미국엔 잘 갔다 왔나, 강 교수. 돌아왔으면 좀 쉬지, 무슨 일인가?”

지은 죄가 있어서 이종근은 강민철의 눈치를 살폈다.

‘제길. 이놈이 돌아오기 전에 김진현을 처리하려 했는데.’

처리하기는커녕 김진현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교수보다도 유명하고 유능한 천재 젊은 의사. 이제는 너무 커서 그는 건들고 싶어도 못 건든다.

“잘 갔다 왔냐고? 잘 갔다 왔지.”

강민철은 피식 웃었다.

“우리 이사장님이 한 일들을 모르고 있었으니 푹 쉬었지. 참으로 푹 쉬었어. 바보같이.”

강민철은 이를 갈았다.

“이봐, 이사장님. 아무리 아들을 밀어주고 싶다고 해도, 사람의 일에는 정도란 게 있어. 응? 정도! 그딴
일들을 저지르다니 당신 미쳤어?!”

“……!”
“네가 한 일들은 김진현을 떠나서 환자를 죽일 수도 있는 일들이었어!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는
의사야?! 당신은 의사도 이사장도 아닌 살인미수범일 뿐이야!”

이종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저지른 죄악들이 있어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한마디만 경고하겠어. 한 번만 더 김진현이 근처에서 얼씬거리기만 해봐. 그때는 이사장이고 뭐고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어. 명심해. 알겠어?!”

강민철은 삿대질을 하며 외친 후 이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이종근은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러나 그는 욕설을 뱉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강민철이 돌아온 다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워졌다.

“김진현이는 내가 후계자로 키울 거야!”

진현은 천재 외과의사이자 그의 제자로 쭉쭉 나아갔다.

사실 말이 제자지, 이미 완숙한 수술 실력을 가진 진현이었기에 가르침과 더불어 주니어 교수나 다름없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

환자들도 김창영 총리의 수술까지 했다는 천재 의사가 자신을 치료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음 번 교수는 김진현이겠군.”

“군대도 면제니 레지던트 끝나자마자 정식 발령 나겠어.”

교수는 하늘이 내린단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뛰어나도 자리가 없으면 안 되니까.

마침 김진현이 레지던트를 끝날 때쯤 최고령의 원로가 은퇴해 교수 자리가 공석이 된다.

원래 이종근은 자신의 아들인 이상민에게 그 교수 자리를 주려 했지만, 현재 추세를 봤을 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그 자리는 무조건 김진현의 것이고, 만약 자리가 없더라도 서둘러 만들어주어야 할 분위기다.

더구나 김진현을 노리는 것은 대일병원의 교수들뿐이 아니었다.

어떻게 소문이 퍼진 것인지, 여러 대학에서 김진현에게 러브 콜이 쏟아졌다.

학생 때 진행했던 TC80 프로젝트가 세계 최고의 의학 학술지인 자마(JAMA)에 기재된 영향도 컸다.


자마(JAMA)는 인용지수 31 점의, 사이언스나 네이쳐와 동급의 학술지이다.

국내에서 JAMA 에 저널을 기재한 대가(大家)가 몇 명이나 될까?

의과대학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한 명도 없는 대학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고작 레지던트가 당당히 1 저자로 자마(JAMA)에 저널을 기재하다니.

각 대학이 눈이 뒤집어질 만했다.

기업의 평가가 매출과 이익으로 매겨진다면, 의과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평가는 학문적 성과로 매겨진다.

잠잘 시간도 없는 레지던트 때 자마(JAMA)에 저널을 기재했으니 교수로 임용되면 어떤 학문적 성과를 낼지


짐작도 안 됐다.

“저희는 경북 최고의 병원인 광동 대학병원입니다. 레지던트 수료 후 저희 병원으로 오시면 곧바로 정식 교수


임용에 최고 수준의 연봉을…….”

이런 문의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의과대학 병원 중에는 무려 국내 최고 명문인 한국대 의대와 있었고, 그 뒤를 잇는 명문인 신촌의
광혜 의대와 기독 의대도 있었다.

“자네도 모교를 빛내야 하지 않겠나? 마침 교수 자리가 있으니 레지던트만 끝나면 한국대 병원으로 오게.”

학생시절 발끝도 쳐다보기 어려웠던 한국대 병원의 외과 주임교수가 진현을 위해 직접 대일병원까지 내려왔다.

광혜 병원과 기독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스카우트 움직임에 강민철 교수는 성을 냈다.

“김진현 선생은 우리 대일병원에 남을 거야!”

대일병원에서 교수로 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다 결국 실패한 이전 삶을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시간 동안 진현은 자신의 커리어만 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증오스러운 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상민…….’

김철우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전 교통사고의 증거를 찾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김진현은 이상민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무슨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지. 추악한 술수를 부리지는 않는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레지던트 2 년 차 중반이 되었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있었다.

진현이 아무리 이상민을 주시하고 있어도 그는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

마치 무기력증에라도 빠진 것처럼.

그저 진현은 갈수록 높아졌고, 이상민은 갈수록 낮아졌다.

***

최근 이상민은 잠을 잘 때마다 꿈을 꾸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꿈을 꿀 때마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이 등장해 눈에서 피를 흘리며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

그들 중에는 그의 손에 죽은 이범수도 있었다.

그의 첫 살인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였다.

가문에 들어갔을 당시 이종근의 본처였던 혜미의 어머니가 대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살인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닿을 곳에 자살을 위한 도구를 쥐여 줬을뿐.

사생아인 자신을 구박하는 그녀가 미워 그랬던 것인데, 진실로 죽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이종근의 외도와 폭력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던 그녀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삶을 끊었다.

그렇게 죽은 그녀도 눈에서 피를 흘리며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

그리고 마지막 순간.

늘 그렇듯, 한 남자가 그를 바라봤다.

그 남자는 피를 흘리지도, 그를 탓하지도 않았다.

단지 모든 것을 꿰뚫어보듯 가만히 그를 주시할 뿐이었다.

모든 죄악을 알고 있는 눈동자.

“……!”

그 눈빛에 이상민은 번뜩 눈을 떴다.

전신이 땀에 물들어 있어 손을 들어 이마의 물기를 닦았다.

“웃기는군.”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1 년 전으로, 김진현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부터다.

어째서 그 뒤로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인지는 모른다.

더구나 마지막 남자의 얼굴은…….

이상민은 고개를 젓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찝찝한 기분을 털기 위해 술이나 마시러 밖으로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병원 근처의 바였다. 혼자 자주 가던 곳이라 바텐더가 그를 알아봤다.

“오랜만입니다.”

“네.”

“늘 마시던 걸로?”

이상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간단한 안주와 함께 위스키가 나왔다.

그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런 그를 보며 바텐더가 물었다.

“요즘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요.”

“계속 표정이 안 좋은데…….”

이상민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었다. 바텐더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저 손님도 그렇고 우리 가게에 안 좋은 일을 겪으신 분이 많네요.”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돌리니 의외로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텐더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같은 데서 일하시는 분 아니에요? 저분도 대일병원에서 일한다던데.”

그리고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크게 떴다.

“이상민 선생님?”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연희였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이상민을 바라봤다. 이미 잔뜩 마셨는지 얼굴이 붉었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에는?”


“그냥 잠이 안 와서 한잔하러 왔습니다.”

그녀와 그는 서로 아는 사이다. 같은 외과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의사였으니까.

“그래요? 저도 기분 탓인지 잠이 안 와서 왔는데. 신기하네요.”

이상민은 예의상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연희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안 좋은 일은요. 그냥 예전에 차인 남자가 아직도 안 잊혀져서 그렇죠. 1 년이나 지났는데 안 잊혀지네요.


바보같이.”

누군가를 생각하는 건지 그녀는 아릿한 눈을 했다.

그녀가 누구를 생각하는지는 뻔했다.

“미안해요.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했네요.”

“아닙니다.”

연희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병원 밖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술이나 마실래요? 혼자 마시기도 궁상맞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상민도 찝찝한 기분을 전환하러 나온 거니까.

“그러죠.”

***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뒤로 이상민과 연희는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졌다.

묘한 관계였다.

그리고 어느 날, 늘 그렇듯 이상민이 악몽을 꾼 후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가문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방에


들어와 말했다.

“도련님, 이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땀으로 절은 옷을 대충 갈아입고 아버지에게 향했다.

이종근은 독한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냐?”
“자고 있었어요.”

“지금? 아직 10 시밖에 안 됐는데?”

이종근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모자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쯧!”

김진현에게 밀릴 뿐이지 어느 면을 봐도 빼어났던 이상민은 최근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헛것을 보듯 늘 멍했고, 업무능력도 확연히 떨어졌다.

원래도 호리호리했지만 더 삐쩍 말라 마약중독자를 연상시키는 외양으로 변했다.

“무슨 일이죠?”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어 사람 속을 긁는 알 수 없는 미소는 여전했다.

“너 지금 병원에서 입지 알지?”

“…….”

이상민의 병원에서의 입지는 최악이었다.

술집 여자의 핏줄이란 사실 때문에 가문의 이사회에서 계속 배척당했고, 병원에 온 뒤에는 별다른 두각도
드러내지 못했다.

“원래 너를 위해서 준비된 교수 자리, 이사회에서 김진현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한국대 병원에서도 노리는
인재라 반대할 명분도 없어.”

“그런데요?”

“그 교수 자리가 김진현에게 넘어가면 넌 어떻게 되는지 알지?”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이런 식이라면 이상민은 영원히 병원의 후계로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아니, 후계는커녕 레지던트만 끝나고 쫓겨날 확률이 높았다.

이사회에서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종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절충안을 마련했다. 이번에 대일 의학연구상을 수상하는 쪽에게 교수 임용의 어드밴티지


(Advantage)를 주도록.”

대일 의학연구상은 대일그룹과 의사협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의학 논문상으로 매년 젊은 의사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은 연구실적을 낸 의사에게 상을 수여한다.

하지만 그런 상이면 김진현이 당연히 1 등일 텐데?


(다음 편에서 계속)

# 103

103. 승승장구 (3)

“내가 우리 쪽 교수들에게 논문들에 적당히 네 이름을 넣도록 했어. 그것들을 모두 합치고 내가 손을 쓰면


최우수상은 네가 수상할 수 있을 거야.”

한심하다면 한심한, 티 나는 몰아주기였다.

그래도 그나마 대세를 역전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어쩔 수 없었다.

‘환자를 보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의과대학 교수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학문적 연구 능력이야.’

대학병원은 환자도 보지만, 의학 연구도 하는 학문의 요람이기도 해 환자 보는 능력만큼 학문적 능력, 즉, 논문


실적이 중요했다.

‘논문 실적만큼 조작하기 쉬운 게 없지. 내 밑의 교수들이 논문을 낼 때 2 저자나, 공동 1 저자로 실어주면


되니까.’

그리고 이런 행위는 이사회에서도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등, 이상민이 해당 논문에 기여하면 당당히 2 저자나 공동 1 저자를 받을 수 있으니.

‘자마(JAMA)에 실은 TC80 프로젝트야 학생 때 우연히 한 거고, 김진현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일에 치이는


와중에 논문 실적까지 낼 수는 없을 거야.’

실제로 외과에 입국(入局) 후 그가 논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없다.

JAMA 에 실은 논문 한 편 따위 수많은 교수가 밀어주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다.

‘제길. 내가 이런 것까지 손을 써야 하다니. 한심한 놈.’

이종근은 못난 아들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김진현을 데릴사위로 삼아 후계로 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혜미와 벌어질 대로 벌어져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김진현을 눌러야 하니, 똑바로 해.”

“네.”

이상민은 퀭한 눈으로 답했다.

***

이사장의 그런 음모를 뒤늦게 깨달은 강민철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 빌어먹을 자식. 논문 실적을 이런 식으로 조작하려고 그래?”

하지만 해당 교수들이 자신의 논문에 이상민이 1 저자만큼 기여했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딱히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김 선생, 자네도 너무 일만 하지 말고, 논문 신경 좀 써. 내가 최대한 밀어줄게.”

강민철도 최대한 김진현을 밀어주었다.

간이식 국내 최고의 대가란 타이틀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도 탁월한 논문 실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기에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김진현은 이렇게 고개를 저었다.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큰 기여 없이 부당하게 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싶진 않습니다.”

환자를 잘 보는 게 중요하지 종이쪼가리에 의미 없이 이름을 올리는 게 뭐가 중요한가?

자신이 해당 논문을 쓰는 데 크게 기여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진현다운 생각이었지만 주변에선 속이 탔다.

혜미도 진현에게 권했다.

“진현아, 그래도 강민철 교수님과 같이 논문을 쓰는 게 좋지 않아?”

“괜찮아. 이식 수술을 하기도 바빠서.”

최근 진현은 간이식 수술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그의 천재성을 아는 사람들은 포스트(Post) 강민철을 넘어 새롭게 최고의 대가가 탄생하는 것 아닐까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번 주말에 뭐해?”

“토요일 저녁에 퇴근이긴 한데. 왜?”

“왜긴. 같이 밥이나 먹을까 그렇지.”

혜미가 장난스레 입술을 내밀었다.

“나 비싼 여자인데?”

“아이구. 그러면 비싸게 모시겠습니다. 한 번만 시간을 내주시지요.”

둘이 사귀기 시작한 지도 벌써 1 년이 넘었다.

어색한 시기도 잠시, 둘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커플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주말에 보는 거다. 고깃집 갈까?”


“고기 지겨워!”

한편 그런 김진현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었다.

“후우, 그래도 김진현 그놈이 논문까지 괴물처럼 안 써서 다행이군.”

이종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채 모든 면에서 괴물 같아서 논문 경쟁도 걱정했는데, 이런 추세면 마음을 놔도 되겠다.

‘논문으로 압도한 후, 다시 주도권을 이상민 쪽으로 가져와야겠어.’

가문 내에서 이상민을 치우고 대일병원에 제대로 된 후계를 세우라는 요구가 거세다.

‘빌어먹을 놈들. 자신의 사람으로 후계를 채우려고.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 이상민을 후계로 세워야 내가 은퇴
후에도 마음대로 대일병원을 주무를 수 있어.’

어느덧 은퇴할 나이가 가까워왔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상민을 후계로 세우고, 그를 뒤에서 주물러야 했다.

‘대일 의학연구상은 이상민이 자리를 잡기 위한 초석이 될 거야.’

그는 다소 안도하며 생각했다. 논문경쟁만큼은 이상민의 승리였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일병원의 의과대학, 논문 담당 부서 쪽으로 해외에서 연락이 왔다.

전화를 건 상대방이 영어로 말했다.

이전 해외에 거주경험이 있어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는 교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대일 의과대학에 닥터 김진현이라고 계시나요?

닥터 김진현?

전화를 받은 교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외과의 김진현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무슨 일이죠?”

-저희는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입니다. 닥터 김진현과 헤인스가 공동으로 투고한 저널의 기재
승인을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교직원은 잠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에 누구라고? 뉴잉글랜드 뭐시기? 그리고 뭐가 승인됐다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직원은 펄쩍 뛰듯이 놀랐다.


“뉴잉글랜드?! NEJM 이라고요?! 지금 대일병원에 전화 건 것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투고한 프로필에 Dae-il University 로 되어 있던데,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맞아요. 저희가 대일 의과대학입니다. 그런데 누가 NEJM 에 논문을 투고했다고요?”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학술지다.

인용지수(Impact factor)는 무려 53 점!

이공계 쪽 최고인 네이쳐, 사이언스가 30 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무지막지한 권위의 저널인지 짐작할 수
있다.

권위자가 무수히 많은 대일병원이지만 지금까지 NEJM 에 논문을 기재하는 데 성공한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나마 세계 2, 3 위인 자마(JAMA 나 란셋(Lancet) 학술지 정도?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도 NEJM 에 논문을 기재하는데 성공한 의과대학은 거의 없다.

100 년 역사에 가까운 한국대 의대나 광혜 의대 정도?

따라서 NEJM 의 논문을 기재하는 것은 국내 최고라는 대일병원의 오랜 숙원이었다.

“누구입니까? 논문을 기재한 의사의 이름이?”

상대는 교직원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제네랄 서저리(외과)의 닥터 김진현입니다.

***

그 소식은 곧바로 대일병원 전체, 아니, 한국 의학계를 흔들었다.

일개 레지던트가 세계 최고 학술지인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논문을 기재하다니!

천재적 아이디어로 틈새를 노려 기재한 것도 아니었다.

헤인스의 신약 프로젝트인 SD54 프로젝트의 스터디 디자인을 총괄한 대가급의 논문이었다.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논문을 기재하다니… 언제 이런 프로젝트를…….”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보듯 진현을 바라봤다.

진현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SD54 는 작년에 에이미가 해고당할 것 같다고 한 그 프로젝트였다.

‘유수 저널에 낸다고 하더니, 그게 NEJM 이었어?’

세계 최고를 다투는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다웠다.


진현은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프로젝트들은 어느 학술지에 낸 거지?’

그가 맡은 프로젝트는 SD54 만이 아니라 2 개가 더 있었다.

최근에 시작한 것도 하나 더 있었고…….

‘에이미가 그 프로젝트들도 다 유수 저널에 낸다고 했는데…….’

***

한편 기세 좋게 이상민을 밀어주던 이사장 이종근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NEJM 이라고……? 하하.”

너무 어이가 없어 화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이상민을 밀어주는 교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NEJM 에는 게임이 안 됐다.

아니, 대일병원 외과 전체가 1 년 동안 쓰는 논문을 합친 것보다 NEJM 논문 한 편의 가치가 높았다.

그리고 예상된 일이었지만, NEJM 이 끝이 아니었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들의 결과가 속속 나타났다.

헤인스의 영향력인지 다른 프로젝트들은 다음 학술지들에 기재가 됐다.

-자마(JAMA-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인용지수 : 31 점!

-란셋(Lancet)!

인용지수 : 28 점!

레지던트를 수료하기 전 인용지수 1-2 점짜리 국제학술지에만 논문을 기재해도 탁월하단 이야기를 듣는데, 진현은
벌써 143 점이다.

세계 3 대 의학 학술지에 1 년 사이 4 편이라니.

어지간한 대가, 아니, 세계 최고의 권위자도 이렇게는 못한다.

물론 모두가 단독 1 저자인 것은 아니다. 프로젝트 기여도에 따라 공동 1 저자도 있고, 란셋에 실린 프로젝트는 2


저자이다.

그렇다 해도 말도 안 되는 성과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수준으로 이제 대일 의학연구상 같은 조잡한 상은 문제도 아니었다.


세계 외과학회를 비롯한 국제 재단들이 초청 연자로 진현을 초빙했다.

비즈니스 비행기 티켓, 최고급 호텔 방, 고액의 강연료까지 주면서.

사실 그런 학회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강연자로 초청받는 것만으로 영광인 자리였다.

진현은 영광을 넘어 너무 많이 초청받아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닥터 김, 헤인스에 취직할 생각은 없어요? 최소 부사장급 직위, 최고의 연봉을 보장하겠어요.”

헤인스의 사장 에이미는 시간이 될 때마다 진현을 꼬셨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들의 성공으로 뉴욕 본사의 간부로 승진을 보장받은 상태다.

헤인스 말고도 세계 각국의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그에게 접근했고 억 소리 날만큼의 연봉을 제시한 곳도 다수였다.

하지만 제약회사의 취직은 진현이 모두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의사를 그만두고 제약회사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명세 덕분인지 이런 일도 일어났다.

진현은 진료 중 전화를 받았다.

“김진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KBC 방송국의 정용식 PD 라고 합니다.

“네, 방송국이요?”

놀라 물었다. 방송국이 왜 날?

-다름 아닌 저희 KBC 방송국에 메디컬 다큐멘터리 장르인 ‘명의(名醫)’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당연히 안다.

각 분야 국내 최고의 의사들을 소개시켜 주는 다큐멘터리 아닌가?

간이식 최고의 대가인 강민철도 해당 프로그램에 방송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저희 프로그램에서 다음 달에 방송할 명의로 선생님을 선정하였는데, 혹시 방문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

진현은 당황해 물었다.

“더 유명하고, 대단하신 교수님이 많은데 부족한 저를 선정한 이유가 있나요?”

답변은 간단했다.
-선생님이 더 유명하고, 더 대단하십니다.

“…….”

빈말이 아니라, 과거 김진현의 행보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학생 때 마인 바이오의 RI84 프로젝트와 헤인스의 TC80 프로젝트 성공.

인턴의 신분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성공시킨 것은 제외하더라도, 비행기에서 총리의 생명을 구한 일, 후에 김종현
화백을 구한 일, 대동맥 파열 수술 성공, 응급실에서 일으킨 수 없는 기적들… 금번에 학문적 성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4

104. 승승장구 (4)

“그래도 저 말고 더 연배 있는 교수님을 섭외하시는 것이…….”

진현은 너무 젊은 자신이 명의(名醫)에 출현하기 부담스러워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담당 정용식 PD 는 끝없이 진현을 설득했다.

‘이런 인간 같지 않은 경력이라니. 방송만 하면 무조건 대박이야.’

대박을 확신한 정용식 PD 는 끝없이 진현에게 매달렸고, 결국 진현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명의(名醫), 천재외과의사 김진현!

한 달 뒤 이런 낯 뜨거운 제목의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명의에 나간 의사는 굉장한 유명세를 타게 돼 심지어 거제도에서도 그 의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몰려온다.

“김진현 선생님께 진료받고 싶은데요.”

“제가 간이 안 좋은데…….”

몰려드는 환자들로 대일병원 측은 진현에게 아예 준 교수처럼 외래 및 입원 섹션을 마련해 주었다.

외과 학회에서는 김진현이가 굳이 레지던트 과정을 4 년이나 수련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나와 역사상 전무후무한
레지던트 조기 수료를 검토했다.

부모님들도 명의(名醫) 프로그램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진현이 사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명의 프로그램을 또 보고 또 재생해 봤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잘났지? 생긴 것도 참 잘생겼다.”


“이이는. 또 본인 닮았다 이야기하려 그러죠? 날 닮았죠. 당신은 하나도 안 닮았어요.”

“허어. 무슨 말이야.”

그러나 본인을 닮았다고 주장하기엔 너무나 잘난 아들이다.

“상가 옆의 김씨가 우리 진현이 진료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죠?”

“음, 내 아들 바쁠 텐데.”

“그렇죠? 그냥 다른 의사 진료 보라고 해야겠죠?”

“그래, 아무나 진료 볼 수 있는 우리 진현이가 아니지. 에헴!”

그들은 가슴 뿌듯한 대화들을 나눴다. 잘난 아들을 둔 특권이다.

그렇게 진현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이렇게 계속 성공해도 되나?’

이런 걱정이 들 정도로, 그는 거침이 없었고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 간이 안 좋은 환자를 응급실에서 치료 후 병실로 걸어가며 혜미와 통화를 했다.

“병원 로비라고? 잠깐 볼까?”

근처라는 이야기에 진현은 반색을 했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지긋한 나이의 노신사가 지팡이를 짚은 채 진현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게, 젊은 의사양반. 기자재실이 어딘가?”

기자재실?

로비 뒤쪽으로 구불구불 들어가면 있는데, 외부인이 거긴 왜?

“저쪽이긴 한데 무슨 일입니까?”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잃어서. 잠깐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나?”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자가 기자재실에서 일하기라도 하나?

문득 기자재실 근처에 위치한 엘리베이터가 떠올랐으나 머리에서 지웠다.

그 엘리베이터는 오로지 단 한 명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동 수단으로 대일병원에 그가 입사 후 한 번도 움직이는


것을 못 봤다.

‘마침 혜미도 기자재실 쪽에서 만나려고 했으니.’


병원 구석진 곳에 위치한 기자재실 앞은 인적이 드물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 혜미와 종종 만나는 곳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혜미에게 기자재실 쪽으로 오라고 메시지를 날린 진현은 노신사를 안내했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인데.’

선글라스가 워낙 커 정확히는 모르겠다.

사실 아무리 선글라스를 착용 중이라도 자세히 보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지만, 혜미를 만날 생각에 진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자재실이 멀고만. 잠깐 주변을 둘러본다는 것을 일행이랑 떨어져서.”

구불구불 들어가 기자재실 앞에 도착한 진현은 노인에게 길을 설명했다.

“여기 왼쪽이 기자재실입니다. 아는 분이 기자재실에서 일하나요? 불러드릴까요?”

“응? 아니아니.”

그러면서 노신사는 엘리베이터가 위치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현은 놀라 말렸다.

“아, 그 엘리베이터는 VVIP 전용이라 사용하면 안 되는…….”

그런데 그때 뒤에서 혜미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진현아!”

“아, 혜미야.”

그런데 ‘혜미’라는 소리에 노신사가 잠깐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혜미와 노신사의 얼굴이 마주쳤고 둘은 깜짝 놀랐다.

“아는 분이야, 혜미야?”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혜미가 노신사에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노신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귀염둥이. 오랜만에 보는구나.”

“할아버지!”

혜미가 노신사에게 달려가 안겼다. 노신사는 혜미의 등을 두드렸다.


“아이고,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이 할애비 서운하게.”

“미안해요, 헤헤. 할아버지도 항상 바쁘니까. 그런데 백 실장님은 어디로 가고 혼자 오셨어요?”

“아, 같이 왔는데 맨날 감시당하듯 따라다니니 답답해서 잠깐 따돌렸어. 지금쯤 난리가 났을 거야.”

노신사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혜미도 같이 웃었다.

“백 실장님 힘드시겠다. 예전처럼 길 잃진 않으셨어요?”

“잃었는데, 그래도 이 젊은 의사 양반 덕분에 쉽게 왔어. 병원 설계를 누가 한 건지 길이 엉망으로 꼬여 있어.”

혜미가 노신사에게 떨어진 후 진현에게 말했다.

“진현아, 인사해. 우리 할아버지셔.”

“……!”

진현의 눈이 커졌다.

혜미의 할아버지라면 단 한 명이다.

재계 1 위 대일그룹의 전체 회장 이해중.

한국 경제를 한 손에 움켜쥔 자!

바보같이 왜 못 알아봤을까?

생각지도 못한 거물과의 만남에 어지간한 진현도 뻣뻣이 굳었다.

“김진현입니다.”

“그래, 길 안내해줘서 고맙네.”

이해중은 김진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손녀의 얼굴에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미 바쁘니? 이 할애비 좀 병실로 데려가 줄래?”

“아, 네!”

그러면서 혜미는 진현에게 나중에 보자고 눈짓을 하고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홀로 남은 진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대일 가문의 손녀인 것이야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원채 하고 다니는 게 소탈해 실감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룹 회장인 이해중을 만나니 느낌이 확 와 닿았다.
‘잠깐. 나중에 혜미와의 만남 때문에 인사를 드리려면 이해중 회장을 찾아가야 하는 건가?’

아버지 이종근과 거의 의절한 사이니, 그녀와 가장 가까운 가족은 할아버지인 이해중이었다.

-손녀를 주십시오!

라며 대일그룹 회장인 이해중에게 이야기해야 한다니 갑자기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

“저 젊은 친구는 아는 사이니?”

엘리베이터에서 이해중이 물었다. 혜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아, 네.”

“그래, 왠지 느낌이 좋은 친구구나.”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기 민망해 혜미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가문의 못난 자식들만이 경합을 벌이고 있을 뿐, 대일 그룹 전체를 봤을 때 대일병원은 대단한 곳이 전혀


아니었다.

회장 이해중은 대일병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냥… 나이가 드니 몸이 여기저기 삐걱하는구나. 간도 안 좋아 좀 쉬려고. 그리고 입원한 김에 네 아버지가


잘하고 있는지도 좀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이종근 입장에서 가슴 철렁한 이야기였다.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답게 순식간에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래, 난 가보마.”

“네, 할아버지.”

“혜미야.”

“네?”

“아까 그 젊은 의사 친구 이름이 뭐였지?”

“아, 김진현이에요.”

“그래, 인상이 참 좋더구나. 이 할애비가 사람 얼굴을 좀 볼 줄 아는데 크게 될 상이야.”

혜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관상이야 믿을 게 못 된다지만, 할아버지가 남자친구 칭찬을 하는데 싫을 리가 없다.


“그렇죠?”

“그래, 그래.”

그러고 이해중은 이사장실 쪽으로 향했고, 중간에 회장을 놓쳐 혼비백산한 백실장이 달려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렇게 김진현과 이해중의 첫 만남은 별 의미 없이 지나갔다.

후의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싱거운 만남이 아닐 수 없다.

***

며칠 뒤, 중환자실 근무를 마친 혜미는 지친 얼굴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해.’

3 일을 모두 합쳐 3 시간도 자지 못했다.

69 시간을 깨어 있으니 눈을 떠도 뜬 게 아니었고, 어제는 그렇게나 고생했음에도 환자가 2 명이나 죽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고 싶다. 진현이.’

그의 품 안에 안겨 세상모르고 푹 자고 싶었다.

‘전화해볼까? 아니야, 아직 일하고 있을 거야.’

의사 커플은 서로 항상 바빠 시간이 맞을 때가 별로 없었다.

‘보고 싶은데.’

곁에서 그를 만지고 싶고, 그의 품을 느끼고 싶었다.

혜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데 오피스텔의 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파앗!

“……!

갑자기 복도의 전원이 한번에 꺼졌다!

혜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단순 정전인 듯 불빛이 곧 돌아왔다.

“뭐, 뭐야. 놀랐잖아. 갑자기 왜 정전이 됐지?”

놀란 탓인지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기다란 복도가 나락처럼 불길하게 느껴졌다.

혜미는 쓸데없는 불안감에 고개를 젓고 말했다.

“별일 없겠지. 빨리 들어가서 자자.”


불안감과 다르게 다행히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

“상민 씨, 오래 기다렸어요?”

강남의 한 호텔의 레스토랑.

단아한 얼굴의 미인, 이연희가 다가왔다. 삐쩍 마른 남자, 이상민은 미소 지었다.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밥 먹었어?”

“아니요. 상민 씨는?”

“나도 안 먹었어. 먹자.”

둘은 얼마 전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딱히 누가 먼저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래도 되는 건지.’

연희는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진현이 떠올랐다.

‘이제 괜찮아.’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팠으나 그는 자신의 남자가 아니었다.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민 씨,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이네.”

“그래 보여?”

“응, 오랜만에 표정이 좋아요.”

이상민은 웃음을 지었다.

“너랑 만나서 기분 좋은가 보지.”

“빈말은. 아닌 것 알아요.”

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알아요? 나랑 만난 다음, 한 번도 좋은 얼굴 한 적 없다는 거. 병 걸린 것 같이 몸도 계속 마르고. 잘


때마다 항상 악몽 꾸고.”
“악몽은 아니야.”

이상민이 꾸는 꿈은 항상 똑같았다.

악몽은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여. 안 풀리던 일이 잘 풀리나 봐요?”

“아아, 뭐. 이전과 다르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잘 풀릴 것 같긴 해.”

이상민은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 하여튼 힘내고 잘해봐요.”

“응, 잘해야지. 꼭.”

그러면서 이상민은 언제나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김진현.

그가 떠올린 인물이었다.

***

“웬 스팸 메일들이…….”

진현은 병원 전용 인트라넷의 메일들을 확인 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저런 언어로 된 메일들이 잔뜩 도착해 있었다.

스팸은 아니고, 세계 각지에서 보낸 스카우트 메일들이었다.

헤인스와 진행한 프로젝트 덕분에 온 세계에 이름이 퍼진 탓이었다.

“이런 걸 보낼 땐 최소 영어로 보내달라고.”

대체로 미국의 대학에서 보낸 메일이 많지만, 프랑스어, 독일어 등도 있고 심지어 러시아어, 중국어도 있었다.

‘졸지에 글로벌 인재가 되어버렸네.’

그때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간이식파트의 주니어 유영수 교수였다.

“네, 교수님.”

-김 선생, 수술 일정 때문에 상의할 게 있는데 잠깐 같이 강민철 교수님 뵈러 갈 수 있을까?

“아,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금방 보자고.
진현은 시간이 없어 메일들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하고 대충 훑어본 후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뭐, 러시아나 중국으로 갈 생각은 없으니…….’

그런데 그러는 과정 중 그는 한 가지를 실수했다.

무심코 버린 메일 중에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보낸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던 거다.

세인트 죠셉 병원(Saint Joseph Hospital).

존스홉킨스, 하버드, 메이요, 엠디엠더슨과 더불어 미국 최고의 병원 중 한곳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5

105. 더 높은 곳으로 (1)

“아, 김 선생. 어서 와.”

유영수가 사람 좋게 그를 맞았다.

반면 강민철은 뭔가 불편한 심기의 얼굴로 뚱하게 말했다.

“김진현 선생.”

“네?”

갑자기 왜 저러지?

“자네가 다른 병원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네?”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국대의 김 교수가 그러던데? 자네가 레지던트 졸업 후 모교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이전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한국대의 교수였다.

아니, 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그저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아닙니다. 아직 한국대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그러면 나중엔 간다는 건가?”

강민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현은 진땀을 흘렸다.

오늘 따라 왜 이래.
유영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교수님, 김 선생이 곤란해하지 않습니까? 교수님이 있으니 김 선생은 계속 대일병원에 있을 겁니다. 김 선생도
이해하게. 최근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워낙 화제여서.”

그럴 만도 했다.

한 편만 기재해도 가문, 아니, 의과대학 전체의 영광이라는 세계 3 대 의학 저널에 4 편이나 논문을 기재한
레지던트.

더구나 수술 솜씨도 천재적이다.

“크흠. 그래, 딴 데 갈 생각하지 말고. 그나저나 다음 주 수술 때문에 불렀어. 송영그룹이라고 아나?”

모르는 이름이라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고 유영수가 대신 설명했다.

“재계에서 20 위 안에는 못 들어도 100 위 안에는 드는 유수의 대기업이야. 역시 우리 김 선생. 환자만 보는


데만 열중해서 모르는구나.”

이전 삶이나 지금이나 시사 상식에 약한 진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송영그룹의 김중국 회장이 간암에 생겼는데, Milan stage 에 Child C 로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해.”

“공여자는 있습니까?”

간이식은 본인이 원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을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딸이 줄 거야. 다행히 회장의 체격이 작아 딸이 줄 수 있을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어시스트하겠습니다.”

진현이 아무리 천재로 주목받고 있다 해도 그런 VIP 의 수술을 집도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간 학회 기간과 수술 일정이 겹쳐 유영수 교수는 수술에 참여 못해. 김진현 선생, 자네와
나 둘이서 수술을 진행해야 해.”

“……!”

진현은 강민철이 왜 그를 불렀는지 깨달았다.

간이식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다르게 집도의가 2 명이 필요하다.

간을 기증할 환자를 수술할 집도의, 그리고 간을 받을 환자를 수술할 집도의.

진현이 불가피하게 간을 기증할 환자의 수술을 집도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정상 성인에게서 간 일부만 절제해 내면 되기 때문에 간을 기증할 환자의 난이도가 훨씬 쉽고 진현도 집도해
본 경험이 많다.

그래도 VIP 환자다 보니 부담이 되었다.

“수술 일정을 조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나도 그걸 권유했는데, 김중국 회장의 일정상 그게 안 된다더군. 유영수 교수도 원채 중요한 발표를 맡을
예정이라 학회에서 빠질 수가 없고. 무엇보다 김 회장 가족들이 김 선생, 자네에게 수술받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

“저한테 말입니까?”

“아마 명의(名醫) 방송을 보고 감명을 받았나 봐. 김창영 총리를 치료한 의사한테 치료받고 싶다고 하던데?”

명의는 의사를 미화하는 방송으로 의사를 정말 낯 뜨겁게 포장한다.

진현은 너무 민망해 본인의 방송을 끝까지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자네가 간을 기증할 환자를 집도해 줬으면 하는데.”

강민철 교수가 부탁했다.

사정이 그런데 거절할 수 있는 부탁도 아니라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실 VIP 인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수술도 아니었다. 집도 경험도 많고 문제가 생겼던 적도 없다.

‘이번에도 별문제 없겠지.’

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니, 문제라기보단 기분 나쁜 일이었다.

진현이 집도할 수술에 퍼스트 어시스트가 이상민으로 결정된 것이다.

‘하필 이상민이라고?’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시스트는 레지던트 일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강민철 교수급의 높은 직위가 아니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다.

“여, 진현. 잘 부탁해.”

이상민이 휘적 손을 저어 인사했다.

앙상한 팔다리, 홀쭉한 볼, 짙은 다크서클. 불과 1 년 만에 그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이전엔 호리호리한 몸매의 반반한 모델 같았다면 지금은 마약중독자 같았다.

그렇다고 흉물스러운 것은 아니고, 퇴폐적이고 위험한 매력이 흘렀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야지. 수술 잘 부탁한다.”

진현은 이상민과 악수를 했다. 그러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살폈다.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상민은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그래, 수술 잘하자.”

짧은 악수를 나누고 둘은 헤어졌다.

별 의심할 징후는 없었지만, 진현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이런 VIP 환자에게 술수를 부리진 않겠지만 눈여겨봐야겠어.’

고개를 털고 수술을 받을 환자를 만났다. 아니, 이 경우 간을 기증할 뿐 건강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니 환자라
지칭하기도 애매했다.

“안녕하세요. 수술받는다고 하니 떨리네요.”

몸집이 있는 젊은 여자가 진현을 웃으며 맞았다.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네, 명의 프로그램에서 봤어요. 천재라 불리는 명의시니 수술 잘해주실 거죠?”

농담 섞인 물음에 진현은 웃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술은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간을 기증받을 김중국 회장도 만났다.

그는 간암에 걸린 자신보다 딸이 걱정인 듯했다.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내 자식 중 유일하게 착한 아이예요. 난 이 아이 없으면 못 삽니다.”

간을 기증할 송영그룹 김중국 회장의 딸은 온통 탕아인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아버지를 착실히 돕는 기특한
딸이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간을 기증하기로 결심한 것만으로도 효심을 알 수 있었다.

“원래 난 간이식을 안 받으려 했는데. 그냥 안 받으면 안 될까? 네가 위험할 수도 있고.”

그 말에 간을 기증할 딸이 아버지를 타박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오래오래 사셔야죠. 기증 수술은 대부분 별 문제 없이 끝난다고 하니 아버지


본인의 몸만 신경 쓰세요. 그렇죠, 선생님?”

대화 속 깊은 부녀간의 사랑이 흘렀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민철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김진현 선생의 수술 실력은 참으로 뛰어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간이식 분야 최고의 대가인 강민철의 보증에 김중국 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감사합니다.”

***

수술을 며칠 앞두고 진현은 혜미와 짤막한 데이트 시간을 가졌다.

“웬일이야? 이런 데를 다 오고?”

“그냥 맨날 고기만 먹은 것 같아서.”

진현이 그녀를 데려온 곳은 삼성동 6 성(星)급 호텔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였다.

“여기 비쌀 텐데. 내가 낼까?”

혜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제일 저렴한 디럭스 룸의 방값만 60 만 원 정도 하는 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의 음식값은 1 인당 대략 15 만 원 선.


둘이 먹으면 30 만 원의 거금이다.

하지만 진현은 호기롭게 말했다.

“나 돈 많아.”

“치이. 많기는.”

진현의 보유 자산이 30 억이 넘으니 청년 부자라 할 만하지만 혜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일병원을 지원하는 이사회, 즉, 대일 홀딩스의 이사인 것을 떠나서 그녀는 재벌 3 세답게 이미 5 살 때 강남


10 층 건물의 건물주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진현은,

‘내 평생의 소원을 5 살 때 이루다니. 이런 불공평한.’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 오랜만에 이런 곳 오니 좋다.”

낮게 깔린 어둠 속으로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혜미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은은한 조명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아름다워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이 그렇게 예뻐?”

“퍽이나.”

혜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야. 난 네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는데. 그런데 정장은 갑자기 왜 빼 입었어? 정장 그렇게


싫어하면서.”

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냥 입어봤어. 밥이나 빨리 먹어. 안 먹으면 네 스테이크 내가 먹는다.”

“아, 뭐야. 고기 좀 그만 먹어. 고기 귀신아!”

티격태격 행복한 식사가 이어졌다.

곡물 빵, 샐러드, 프랑스식 스프, 이태리 파스타의 1 부를 마친 후 샤베트로 입을 가신 후 랍스타와 스테이크의


본 식사가 이어졌다.

스테이크를 썰며 진현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사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비싼 곳에 온 것은 아니다. 그는 주머니 끝에서 딱딱한 사각형의 물체를 만졌다.

다이아몬드 반지, 즉, 프러포즈 반지였다.

그는 프러포즈를 할 목적으로 이 스카이라운지에 온 것이다.

‘좀 이른가?’

이십 대 후반, 사귄 지 1 년.

결혼을 청하기에 이르다면 이른 시기이다.

하지만…….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걸.’

지난 세월 오랫동안 가까워서일까, 둘은 사귄 후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다. 그저 그녀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고, 인생을 같이 걷고 싶다.

그 마음이 중요하지, 사귄 기간이 뭐가 중요한가?

“응, 왜? 무슨 할 말 있어?”

혜미가 음식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해도 돼.”

그렇게 말하는 혜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진현과 다르게 완전한 바보가 아니다.

평생 카페도 가기 싫어하는 남자가 30 만 원대의 스카이라운지를 예약하고 정장을 빼 입은 채 주머니 속 딱딱한


뭔가를 계속 만지작거린다면 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진현이 프러포즈라니.’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혜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니.

그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을까? 그가 할 사랑의 고백이 기대되었다.

“아, 아니야.”

하지만 쑥맥 진현은 쉽게 고백을 하지 못했다.

막상 프러포즈를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몸이 뻣뻣이 굳었다.

“할 말 있으면 해도 된다니까.”

“아니야.”

혜미는 재촉했지만 진현은 계속 타이밍을 못 잡았다. 애초에 그는 이런 쪽에는 재능이 전혀 없었다.

결국 애매하게 시간만 끌다가 식사가 끝나 버렸다.

호텔을 나오며 혜미는 맥이 빠졌다.

‘이 바보, 뭐야! 프러포즈를 하려면 하든지!”

진현도 진현 나름대로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아, 타이밍을 못 잡겠어. 지금이라도 프러포즈할까?’

사람 우글거리는 테헤란로 삼성역 사거리에서 프러포즈를?

아무것도 모르는 그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삐진 혜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밥 잘 먹었어. 병원 다시 들어가 일한다고 했지?”

“응.”

“그러면 나 먼저 들어갈게. 어차피 이 근처니.”

“어, 조심히 들어가.”


끝까지 아무 말 못하는 진현에게 혜미는 속이 터졌다.

으이그, 이 쑥맥 바보!

결국 혜미는 이렇게 말했다.

“진현아.”

“응?”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부담 없이 해도 돼.”

“응? 그게 무슨?”

친절한 설명에도 진현은 멍하니 반문할 뿐이었다. 진현다웠다.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정말 연애 바보였다, 바보!

“들어갈게. 잘 쉬어.”

“응.”

혜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신호등을 건너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진현이 그녀를 잡았다.

“혜미야!”

“왜, 왜?”

그의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주책맞게 뛰었다.

지금 프러포즈하려고?

그런데 내가 아무리 쉬운 여자라고 해도 여긴 좀 그렇지 않나?

무드라곤 먼지 한 톨도 없는 오피스 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최소 옆 골목 스타벅스라도


들어가서 프러포즈하지?

그런 머릿속 생각과는 별개로 가슴이 끝없이 두근거렸다.

그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었고, 평생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진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6
106. 더 높은 곳으로 (2)

“다음에 또 밥 먹자.”

“…응?”

“저기서. 저기서 또 먹자. 꼭.”

그러면서 진현은 스카이라운지를 가리켰는데 다음엔 꼭 프러포즈를 하겠단 의지가 눈빛에서 일렁거렸다.

그 눈빛을 보자 혜미는 웃음이 나왔다.

참, 내가 콩깍지를 쓰긴 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다니.

“됐어. 저기 비싸.”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더니 입술을 겹쳤다.

진현의 눈이 커지며 얼굴이 붉어졌다.

“혜, 혜미야.”

짧은 입맞춤 후 혜미는 방긋 웃었다.

“나 가볼게. 프러포즈 꼭 저기 아니어도 돼. 고깃집만 피해줘.”

그러면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눈치챈 거야?”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 싫지는 않은가 보네.”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혜미에게 프러포즈하면 대일 그룹 이해중 회장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 건가? 손녀딸을 줄 수 없다


하면 어떻게 하지?’

드라마의 흔한 설정이 떠올라 진현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생각하고 병원에나 들어가자.”

그도 집에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을 떠올린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상민…….”
프러포즈를 위해, 그리고 혜미와 그를 위해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일로, 이상민과의 수술을 준비해야 했다.

혹시나 수를 쓰려고 할 수도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물론 1 년 동안 예의주시했으나 이상민은 아무런 이상 행동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귀신에라도 홀린 듯 무기력한


일상만 보냈다.

더구나 VIP 환자 아닌가?

아무리 인륜을 저버린 그라도 VIP 환자를 건드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일 것이다.

‘아니야, 그래도 경계를 늦추면 안 돼.’

환자와 자신을 위해 대비를 해야 했다.

‘이상민, 그놈이 어시스트 자체를 못 서게 하는 것이 최선이긴 하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강민철 정도 되는 급의 높은 교수면 모를까, 일반 교수들도 어시스트 레지던트를 입맛대로 고를 수 없는데 고작


레지던트 2 년 차인 자신이 그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진현은 수술 전날 늦은 밤, 병원에 남아 수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꼼꼼히 점검했다.

전기 칼의 출력, 들어갈 약품들의 이상 유무, 혈액들, 수술 도구, 수술 침대…….

이상민이 장난을 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살피고 또 살폈다.

‘아무런 이상 없어. 최소 장난은 치지 않았어.’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 그에게 당한 기억들 때문일까?

계속 기분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수술 중에도 잘 봐야겠어.’

수술 중에 혹시라도 수작을 부리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다음 날 아침, 7 시 첫 타임으로 수술이 시작됐다.

“잘 부탁해요, 김진현 선생님.”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딸, 김소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현이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것입니다.”

“네, 믿을게요.”

손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에 그녀의 마음이 안정됐다.


한편 옆의 침대에서 같이 수술을 대기 중인 아버지, 김중국 회장이 다시 한번 진현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우리 딸아이 잘 부탁합니다. 꼭 잘 해주세요.”

아버지의 사랑에 진현은 미소 지었다.

“네, 걱정 마십시오.”

김중국 회장은 강민철 교수가 집도하는 15 번 방으로. 딸, 김소현은 김진현이 집도하는 16 번 방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헤어지기 전, 김중국 회장은 연신 걱정되는지 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꼭 잘 받고 나와야 해.”

딸, 김소연이 김중국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버지 몸이나 걱정하세요. 다시 눈을 뜨면 건강해져 있을 거예요.”

간 이식 수술은 줄 사람보다 받을 사람이 훨씬 위험하다.

줄 사람이야 간의 일부만 떼어내고 배를 닫으면 끝이지만, 받을 사람은 자신의 간 전체를 자르고 새 간을


연결해야 하니 몸의 부담이 보통이 아니다. 수술 중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소연아, 이 애비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그냥 수술을 미룰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이번 기간을 놓치면 합작 문제 때문에 최소 세 달은 수술을 못 받아요.


그사이에 암이 커지면 어떻게 하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그러나 김중국 회장은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딸이 사지(死地)에라도 끌려가는 것마냥 마음을 놓지 못했다.

책임 집도의인 강민철도 김중국 회장을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은 회장님의 몸이 가장 중요하니, 새 간을 받을 생각만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 과민해서 그런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과에서 먼저 마취를 하고, 기관 삽관 후 목에 커다란 직경의 중심정맥관을 삽입했다.

준비가 마무리된 후, 진현은 전기 칼을 들었다.

“잘 부탁한다, 이상민.”

퍼스트 어시스트를 설 이상민이 맞은편에서 웃음을 지었다.

“나야말로. 수술장 공기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잘 부탁해, 집도의(執刀醫) 김진현 선생님.”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웬 공기? 수술장 공기가 답답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하지만 이상민은 그냥 지나가듯 한 이야기인 듯,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여튼 거슬리는 놈.’

진현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시작하자.”

지잉!

고요한 수술방에 전기 칼의 마찰음이 울렸다. 살 익는 냄새와 함께 찌익 배가 갈라졌다.

간 절제술.

쉽지 않은 난이도이나 이전 삶과 이번 삶에서 수없이 집도해봐 진현에게 익숙한 수술이다. 진현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하모닉 스칼펠(Harmonic scalpel) 주세요.”

진현이 손을 내밀자 간호사가 초당 55,000 회 이상의 초음파 진동을 통해 조직을 자르는 하모닉을 건네주었다.

티딩! 티딩!

악기를 연주하듯, 물이 튀는 하모닉 특유의 소리와 함께 간이 조금씩 잘라졌다. 초음파 절제의 특성상 출혈도
심하지 않았다.

수술에 집중한 상태로 진현은 이상민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묵묵히 어시스트를 설 뿐 수상한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뭐, 저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 저놈의 생각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집중하자.’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탁!

깔끔하게 절제된 간의 일부가 떨어져 나왔다.

강민철의 수술팀과 보조를 맞춘 마무리였다.


진현은 이식할 간을 보존액에 담그고 수술용 실로 배를 닫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수술방 문이 다급히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김진현, 선생님! 혹시 이식할 간 절제 끝나셨나요?”

강민철이 집도하는 15 번 방의 간호사였는데 표정이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진현은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네, 방금 하베스트(Harvet) 끝났습니다.”

“그러면 강민철 교수님께서 수술마무리 됐으면 지금 15 번 방으로 넘어 오래요, 빨리요!”

사색이 된 얼굴이 뭔가 수술이 잘 안 풀리는 듯했다.

“뭐가 안 좋습니까?”

“VIP 인데다 고령이고 간 기능 자체도 안 좋은 분이어서…….”

진현은 상황을 눈치챘다.

수술이 안 풀리고 퍼스트 어시스트가 잘 못하니, 자신을 찾는 거다.

“환자가 많이 안 좋습니까?”

“네, 바이탈(Vital)도 계속 흔들리고, 방금 전에는 간을 적출하는데 어레스트(Arrest, 심정지)도 날


뻔했어요. 마취과 교수님들 덕분에 간신히 테이블 데스(수술 중 사망)은 피했지만 굉장히 안 좋아요.”

진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종국 회장이 고령이어서 수술 전에 걱정하긴 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상태가 안 좋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네, 빨리 오세요!”

그러면서 진현은 자신이 수술한 환자의 모니터링 기계를 봤다.

‘혈압도 좋고, 맥박도 좋고, 이 환자는 아무런 이상 없군.’

시작부터 배의 봉합까지.

상쾌할 정도로 깔끔한 수술이었고 이제 환자를 회복실로만 이송하면 끝이었다.

‘빨리 회복실로 이송하고 강민철 교수님께 가야지.’

그런데 그때 이상민이 말했다.

“다 마무리됐으니 15 번 방으로 넘어가 봐. 내가 카 아웃(Car out)할게. 집도의인 네가 카 아웃까지 할 필요는


없지. 저쪽 수술방이 급한 것 같은데 빨리 가서 강민철 교수님 어시스트해.”

카 아웃(Car out).

회복실까지 환자를 이송하는 것을 뜻한다.

확실히 카 아웃은 집도의가 아닌, 어시스트나 인턴의 역할로 단순히 환자를 옮기는 것이니 진현이 있을 필요는
없다.

아니, 상황이 안 좋은 강민철 교수의 수술을 빨리 도우러 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금방 나갈 텐데 카 아웃까지 하고 가야지.”

“집도의 선생님이 카 아웃 같은 허드렛일도 직접 하게? 대단하네.”

뭔가 비꼬는 말투였지만 진현은 답하지 않고 묵묵히 환자 옆에 섰다.

강민철 교수의 수술방이 급해 보이긴 했지만, 이상민이 불안해서라도 환자가 회복실로 무사히 나가는 것을
봐야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진현이 오지 않자 15 번 방의 간호사가 다시 달려왔다.

“선생님, 아직 안 끝나셨어요? 급한 것 마무리됐으면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환자 상태가…….”

“…….”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마취과 의사를 돌아봤다. 환자를 빼려면 마취과의 준비가 끝나야 한다.

“카 아웃하려면 아직 멀었습니까?”

“정리하는데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요. 환자 괜찮고 별일 없으니 선생님은 15 번 방으로 가세요. 아까 마취과


사무실에 연락해 보니 안 좋긴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급한 상황일수록 누가 어시스트하냐가 중요하니 빨리
가보세요.”

마취과 의사는 말했다.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취과 의사의 말대로였다. 쉬운 수술이면 어시스트가 누구이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수술이 저렇게 꼬이면 누가 어시스트를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어떻게 하지?’

진현은 이상민을 놔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환자를 회복실로 뺄 때는 이상민만 가는 것이 아니라, 마취과 의사, 세컨드 어시스트, 간호사까지 도합 4 명이


움직인다.

이렇게나 이목이 많은데 허튼 수작을 부리진 못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VIP 환자니 이송 중에 문제없도록 잘 봐주십시오.”

그래도 안심이 안 돼 진현은 간절한 눈빛으로 마취과 의사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네에, 걱정 마세요.”

진현의 눈빛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마취과 의사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심이 안 돼 진현은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꼭 이송 중에 잘 봐주십시오.”

“네, 걱정 마시고 빨리 가보세요.”

15 번 방은 진현이 있는 곳의 바로 옆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과연 상황이 급박했다.

마취과 의사들이 혈압을 잡고 있었고, 수술 필드는 피로 흥건했다.

강민철이 진현을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 김 선생!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들어와!”

“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진현은 수술 가운을 갈아입고 강민철을 도와 피를 잡기 시작했다.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던 치프 레지던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뒤로 빠졌다.

“그래, 그쪽 모스키토(지혈용 도구)로 잡아!”

“네!”

후복막 근처에서 피를 쏟던 혈관을 진현의 모스키토가 철컥 지혈했다.

“그래도 김 선생이 오니 훨씬 낫군. 이대로 진행하자고.”

강민철이 살짝 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체 간경화가 심해서 쉽지가 않아. 그것 말고도 다 안 좋아.”

그의 말처럼 환자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굉장한 고난도 수술로 이런 경우 수술하다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


“자, 잘해보자고.”

“네, 교수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김진현은 수술에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강민철과 그는 피를 뿜는 혈관들을 지혈하며 간을 연결하기 전의 처치를 하나하나 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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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 2018 년 03 월 26 일

ISBN | 979-11-6202-153-8(05810)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 107

107. 더 높은 곳으로 (3)


그런데 그렇게 수술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천장에서 깜짝 놀랄 방송이 울렸다!

-코드(Code)! 회복실에 심폐소생술 상황입니다! 마취과 선생님들은 회복실로 와주세요!

“……!”

진현은 깜짝 놀라 천장을 바라봤다.

심폐소생술.

회복실에 환자 중 한 명의 심장이 멎은 거다.

강민철이 혀를 찼다.

“웬 심장마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누가 수술한 거지?”

‘설마?’

진현은 이유 없이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수술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카 아웃(Car out) 당시에 이상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 다른 환자일 거야.’

그런데 그 순간, 수술방의 문이 벌컥 얼렸다.

“뭐야?!”

강민철이 벌컥 화를 내는데 사색이 된 마취과 의사가 외쳤다.

“김진현 선생님?! 김진현 선생님 여기 있어요?!”

“……!”

“방금 수술한 김소연 환자 서든 어레스트(Sudden arrest:급작 사망) 왔어요!”

쨍그랑!

진현은 수술도구를 떨어뜨렸다.

그게 무슨?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거기 가슴 압박 잘해!”
“에피네프린 주세요! 빨리!”

정신없이 회복실로 뛰어와 보니 난장판이었다.

마취과 내과의사들이 모여 정신없이 심폐소생술을 하는 중이었다.

심장이 멎은 환자의 가슴을 의사들이 번갈아가며 압박했다.

심장이 안 뛰니 갈비뼈를 눌러 억지로 심장의 피를 돌려주는 것이다.

김중국 회장의 딸, 김소연 환자의 피부는 종잇장처럼 창백했는데, 이미 생명이 떠난 시체의 낯이었다.

아침만 해도 웃고 있던 얼굴인데!

“이게 무슨…….”

진현은 비틀거렸다.

말도 안 돼.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급히 카 아웃을 담당했던 마취과 의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르겠어요. 환자를 이송할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회복실에 와서 갑자기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더니 심장이
…….”

“혹시 저희 외과 어시스트가 카 아웃 도중 잘못한 것은 없습니까?”

진현은 이상민을 염두에 두고 다급히 물었다. 그러나 마취과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는…….”

진현의 얼굴이 하얘졌다.

‘안 돼!’

절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될 환자다.

‘원인을 찾아야 해. 원인을 찾아야 살릴 수 없어.’

그러나 절박한 마음으로 원인을 찾았으나 특별한 것이 없었다.

목에 꽂힌 커다란 직경의 중심 정맥관은 뚜껑이 열린 채 심장을 살리기 위한 온갖 약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취과 교수가 다가와 추궁하듯 물었다.

“자네가 수술한 의사인가?”

“네.”

“수술 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술 중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환자가 왜 이래?”

네가 잘못한 것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술의 문제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 하여튼 심폐소생술 반응을 봤을 때 살리기 어려울 것 같은데.”

마취과 교수의 말처럼 아무리 가슴 압박을 해도, 심장을 살리는 약을 투여해도 반응이 없었다.

진현은 간절히 말했다.

“절대 죽어선 안 되는 환자입니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최선이야 다하겠지만… 벌써 10 분이 넘었어.”

진현은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10 분 동안 머리에 피가 공급이 안 된 것이니 심장이 돌아와도 식물인간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안 돼!’

자신의 손을 붙잡던 부녀간의 사랑이 떠올랐다. 절대 이렇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현의 간절한 마음과 다르게 이미 환자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20 분, 30 분…….

마취과 의사들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이제 더 의미 없을 것 같은데요. 사망했어요.”

“……!”

천청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젊은 환자니 살아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덧없는 바람일 뿐, 진현도 가망이 없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안 돼! 제발…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절망에 쌓인 진현은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이 덧없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 시간… 1 시간 30 분…….

아무리 가슴압박을 해도 갈비뼈만 부러질 뿐, 심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간을 기증하려던 아름다운 딸은 덧없이 사망했다.

원인미상의 사망이었다.

하얀 목에 꽂힌 굵은 중심 정맥관이 뚜껑이 열린 채 덧없이 흔들렸다.

***

정말 원인미상의 사망이었다.

수술 중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이상민의 수작일 거라 의심하고 이송 과정을 살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사망.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최소 진현의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현의 책임이 아니란 것은 진현과 의사들의 입장일 뿐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어려운 간이식 수술 끝에 회복된 아버지, 김중국 회장의 슬픔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게 걱정했는데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은 것이다. 그것도 레지던트가 수술하다가.

“이, 이……! 아……! 안 돼!”

김중국 회장은 슬픔과 분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분명 수술 때문에 죽은 의료사고야!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어! 흐어엉. 소연아!”

김중국 회장을 비롯한 송영그룹의 가족들은 김진현을 살인죄로 기소했다.

물론 전후 과정을 살펴도 진현의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사망의 원인을 밝히지 못한 게 치명적이었다.

부검을 해도 뚜렷한 원인이 나오지 않았고, 가족들의 입장에선 그저 수술이 잘못되어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큰 문제였다.

누군가의 과실이라면 그 사람이 책임을 졌겠지만, 이럴 경우엔 원인을 떠나 총책임자가 죽음의 책임을 져야 했다.

“…….”

진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 끝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너무나 급격해 이게 꿈인가 싶었다.

물론 보통은 환자 한 명의 의도치 않은 죽음으로 모든 게 무너지진 않는다.

하지만 하필 죽은 사람이 재계 송영그룹의 가장 사랑받는 딸로 김중국 회장은 원한을 갚기 위해 죽기 살기로


진현을 몰락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럴 경우 병원에서 어느 정도 같이 책임을 지고 보호를 해줘야 하는데, 이사장 이종근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이종근은 김중국 회장의 편을 들 뿐이었다. 결국 진현은 홀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마침 관할 경찰서에 김철우가 있어 도움이 되었다.

“진현아, 네 잘못 아니지?”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내 잘못이 아니야.”

김철우는 가타부타 더 묻지 않았다.

“그래, 난 너 믿는다.”

이 범생이 놈이 살인죄라니. 말도 안 된다.

그는 진현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사망 전 이송을 담당했던 의료진의 실책은 없는지도 꼼꼼히 수사했다.

특히 이상민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민을 조사해도 진현에게 도움이 될 단서를 찾을 순 없었다.

“…….”

진현의 눈이 시커멓게 죽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기소 당하다니.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 잘못이 아니야.’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억울했다. 환자의 죽음은 절대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이상민……!”

증거를 못 찾을 뿐 이상민, 그놈의 짓이 분명했다.

‘그놈의 짓이란 증거를 찾아야 해.’

그러나 어떻게?

부검까지 했음에도 특별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미 장례가 끝난 상태라 추가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다.
이상민의 수작이 맞는다면 그야말로 완벽히 처리된 범죄였다.

진현은 절망과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환자를 죽인 것도, 그리고 자신을 나락에 빠뜨린 것도…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

중간에 혜미가 찾아와 계속 울음을 터뜨렸다.

“지, 진현아. 어떻게 해… 흐윽.”

“…….”

그녀의 눈물에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프로포즈를 하려고 했는데 범죄자가 되어버렸다.

“미안하다.”

혜미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이상민의 짓이 분명해. 절대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무고함을 증명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그러나 이미 부검이 끝나 장례식을 마친 상태에서 결백을 입증할 증거를 입수할 순 없었다.

결국 진현의 억울함을 풀 방법은 단 하나, 법정에서 승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혜미는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재판을 받기 전, 진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진현을 아끼던 강민철을 비롯한 교수들도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수술도 잘 끝났고 김 선생이 잘못한 것은 없어. 그저 원인미상의 사망일 뿐이야. 법원에서 자문이 오면 무죄라
강하게 어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강민철은 말했다.

의료사고의 경우, 판사가 의학적 과실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진현의 경우도 자문이 올 것이니 최대한 유리하게 답하면 무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현은 힘없이 답했다.

아무리 강민철이 힘써준다 해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의료 사고와는 경우가 달랐다. 재계에서 꼽히는 송영그룹의 딸의 사망이기 때문이다.

송영그룹의 김중국 회장이 딸의 원수인 자신을 몰락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일병원의 이사장 이종근도 진현에게 중벌이 떨어지도록 뒤에서 로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경우에 쓰는 말은 아니지만, 판사는 송영그룹의 편을 들어 불공정한 판결을 내릴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는 안 돼. 이상민!’

김진현은 주먹을 움켜쥐고 거친 걸음으로 이상민을 찾아갔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이놈이 분명했다.

“어, 진현?”

진현은 와락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상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슨 짓이야?”

“말해.”

“뭐?”

“말하라고! 수술 때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네놈 짓인 것 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상민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난 어시스트를 섰을 뿐이야. 괜히 생사람 잡지 말라고.”

“생사람?”

“그래.”

이상민은 멱살을 풀더니 진현을 스쳐 지나갔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머리 좀 식혀. 안 좋은 병원 공기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데 시비 걸지 말고.”

“이이!”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하고 사라지며 말했다.

“너도 나가서 바깥 공기 좀 쐬고 오든지. 혹시 알아? 맑은 공기를 쐬다 보면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날지.”

그가 사라진 후 진현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무슨 헛소리를…….”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진현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왜 자꾸 공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번만이 아니었다.

당시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도 이상민은 병원 공기가 안 좋다고 지나가듯 말했었다.

‘설마……?’

그리고 떠오르는 한 가지 병명.

“…거대 직경(Large bore) 정맥관을 통한 공기 색전증(Air embolism)?”

진현의 뇌리에 심폐소생술 당시 뚜껑이 열린 채 흔들리던 중심정맥관이 떠올랐다.

‘정말 공기 색전증?’

공기 색전증이면 모든 게 설명됐다.

어떻게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심장마비를 일으켰는지 말이다.

공기 색전증은 주사 혈관을 통해 공기가 들어가 혈관을 막아 문제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특히 중심 정맥관은 직경도 커다랗고 심장까지 관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량의 공기가 유입되면 단번에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들 눈에 안 띄게 살짝 조작하는 것도 손쉽다.

이송 중 살짝 손을 뻗어 남몰래 뚜껑을 열고 손톱으로 잠금(Locking)만 해제하면 된다.

또 약물을 주입하는 것도 아니고, 공기가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체에 증거가 남지 않아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

CCTV 라도 있었으면 확인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환자를 이송하는 수술장 통로에 CCTV 가 있는 병원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완벽하게 당한 것을 깨달은 진현은 분노에 외쳤다.

“이상민!”

절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재판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 것이라고 이를 갈며 다짐했다.

그런데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던 진현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추었다.

현(現) 총리이자 전(前) 대법관인 김창영이 진현의 소식을 접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8
108. 더 높은 곳으로 (4)

“그거 곤란한 일이군요. 원인미상의 사망이라.”

김창영은 집무실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인데 어쩌다 이런 곤란한 일에 휘말렸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김진현 선생의 과실은 없는 거죠?”

“의료진의 소견상 그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다만 사망 원인을 아예 모르는 상황이라 과실이 없다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좋지 않군요. 이런 종류의 의료사고가 생기면 의사 측에서도 과실이 없음을 입증해야 하니.”

대한민국은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가 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때문에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의료사고에서 피해자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항변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원인미상의 사망 사고의 경우, 실제로 의료사고 판례들을 보면 의사에게 억울할 정도로 불리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전 항생제를 맞는 도중 심장마비가 온 경우가 있다.

유족 측은 항생제에 의한 심장마비로 의사를 고소했지만, 실제로 그 항생제는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사용되며


단 한 번도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항생제다.

당연히 항생제의 의한 심장마비가 아닌, 돌연 심장사(Sudden cardiac arrest)의 확률이 훨씬 높아 의사


측은 항변했지만 재판부의 판결은 피해자 측 승소였다.

이유는 항생제에 의한 심장마비가 아님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사 측은 억울해했지만, 이런 사례는 굉장히 흔했다.

사망률 80%의 패혈증이 동반된 상태에서 아기가 죽었는데, 부모가 ‘간호사가 주사를 놓다가 잘못해서 통증 쇼크
(Pain shock)’으로 사망했다고 소송한 경우.

글쎄, 통증 쇼크(Pain shock)로 사망하는 경우가 전 세계에서 1 년에 몇 명이나 있을까?

하지만 그 경우에도 재판부의 판결은 피해자 승소였다. 이유는 똑같았고.

따라서 이런 원인미상의 의료사고, 특히 사망사고의 경우에는 의사도 책임을 확실히 면하려면 잘못이 없음을
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사건의 경우엔 이런 의학적인 사항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망자가 송영그룹 회장의 딸인 것이
치명적이었다.

분노에 가득 찬 송영그룹의 회장이 필사적으로 로비를 하고 있어, 판사가 진현에게 유리한 판결을 할 확률은
굉장히 적었다. 아니, 사건에 비해 훨씬 과중한 처벌이 내려질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여러모로 김진현 선생이 불리하겠군요.”


“네,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김창영은 난감한 얼굴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래도 과실이 없다면 김진현 선생에게 너무 억울한 것 같군요.”

“네, 더구나 피해자가 송영그룹 회장의 딸인 김소연 사장이어서 더 문제가 되는 듯합니다. 김중국 회장이 김진현
선생에게 무거운 형이 떨어지도록 로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서가 답했다.

확실히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사망자가 송영그룹 회장의 딸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흐음…….”

김창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말했다.

“정말 과실이 없다면 김진현 선생에게 억울한 것 같습니다. 재판을 담당할 판사에게 상황을 참작해 달라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김창영은 전(前) 대법관이자 현(現) 총리로 법조계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그의 말은 태산보다도 높은 권위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재판이 시작됐다.

***

악의에 찬 김중국 회장의 로비로 재판은 빠른 시일 안에 이루어졌다.

판사는 사건을 바라봤다.

이건 의료사건 자체보다 원고와 피고가 문제다.

원고는 재계의 대기업이고, 피고의 뒤에는 김창영 총리가 있으니.

결국 판결은 이렇게 났다.

<피고의 과실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살인죄는 성립하지 않음. 다만 수술 후 사망이란 측면에서 책임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음.

6 개월의 한시적 의료 면허 자격 정지를 판결함.>

땅땅땅!

김종국 회장 측이 주장하던 것보다 훨씬 약한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김중국 회장 측은 불복하였으나 판결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

“…….”

재판이 끝난 후 진현은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예상보다 훨씬 약한 처벌이었지만… 의료면허 자격정지라니.

그가 회귀 후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판결이었다.

물론 6 개월간의 일시적인 정지다. 6 개월만 지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의사 생활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리베이트만 받다 적발되어도 자격 정지 1 년을 선고 받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재계의 거물인 김종국


회장이 악에 받쳐 로비를 한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가벼운 처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이 판결 하나로 지금까지 그가 대일병원에서 쌓아온 모든 명성이 무너졌는데.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의사에서 의료사고로 사람을 사망하게 한 의사가 되어버렸다.

물론 원인미상의 사고였고, 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건 사정을 아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 명성 따위 아무래도 좋지만…….’

그래, 그런 헛된 명성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진현은 쓴웃음을 짓고 대일병원 교육수련부로 향했다.

“아, 김진현 선생님.”

직원이 놀라 그를 맞았다. 직원도 진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진현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사표입니다.”

“아…….”

진현은 쓰린 표정으로 말했다.

“면허가 정지된 상태에서 병원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진현의 말이 옳았다.

면허가 정지된 의사는 병원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강민철 교수님을 비롯한 외과의 여러 교수님이 선생님의 파면을 반대했다고 알고 있는데…….”
직원은 진현의 사표가 안타까운지 말했다.

이사장 이종근은 이번 불미스러운 일을 핑계로 어떻게든 그를 병원에서 파면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외과 교수들의
역풍을 맞았다.

특히 강민철 교수는 불같이 화를 내며 헛소리 하지 말라며 주먹다짐까지 하려 했었다.

하지만 진현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파면이야 면했지만, 6 개월이나 자격이 정지되면 레지던트 수료 자격을 충족하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건 강민철을 비롯해 진현을 아끼는 교수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복귀해 1 년 더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방법도 있다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럼…….”

그렇게 사표를 내고 밖으로 나오는 중 혜미와 강민철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현은
애써 외면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떠나는 길에 대일병원을 돌아보니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이번 삶에선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보란 듯이 성공해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삶에서도 그는 또 실패했다.

‘아니야. 이건 실패가 아니야.’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걸 어떻게 실패라 할 수 있는가? 추악한 술수에 당한 것일 뿐인데!

그리고 평생도 아닌, 고작 6 개월의 면허정지일 뿐이다.

‘6 개월 금방이야. 6 개월의 휴가라 생각하면 돼. 지금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살아왔잖아. 어차피 자격 정지만


풀리면 갈 곳은 많아.’

강민철 교수를 비롯해 진현을 아끼는 외과 교수들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후에 그가 대일병원 외과로 복귀하기를
바랐지만, 굳이 더러운 대일 병원이 아니어도 갈 곳은 많았다.

당장은 의사 자격 정지 때문에 스카우트 문의가 끊겼지만, 그의 실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니 정지만 풀리면
오라는 곳은 많을 것이다.

‘낙담하지 마. 내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다고?’

그래, 6 개월의 자격 정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 있었다.

‘이상민!’

진현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는 대일병원을 노려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집에 돌아가자 부모님이 따뜻하게 그를 맞아주었다.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막상 부모님을 보니 마음이 무너졌다. 자신만 바라보며 기대가 많았는데
너무너무 죄송했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전혀 상관없다. 의사든 아니든 무조건 넌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사랑한다.”

어머니도 말했다.

“그래, 진현아. 네가 속상할까 봐 그렇지 우리는 전혀 상관없어. 사랑해, 아들.”

사랑이 담긴 그 말에 진현은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았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었다.

***

그래도 진현은 빠르게 마음을 추슬렀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패배자처럼 낙담하고 있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

‘그래도 재판이 한 번으로 끝나서 다행이군.’

김창영 총리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중재로 송영그룹은 항소를 포기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차기 유력한 대권주자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없다.

‘이제 어떻게 하지?’

6 개월 뒤에 의사로 복귀한다고 해도,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 당장 일 안 해도


걱정은 없지만.
‘아니,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일단 과외라도 할까?’

진현은 피식 웃었다.

이래 봬도 그는 과거 수능전국수석에 한국대 의대 수석 졸업, 전공의 선발 시험 수석이었다.

손 놓은 지 오래됐지만 수석의, 수석의, 수석만 반복한 그가 다시 과외를 시작하면 구름같이 학생들이 몰려들리라.

열심히 하면 의사 못지않게 돈을 벌지도 몰랐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반대했다.

“아들, 뭘 벌써 일하려 그래. 조금이라도 쉬어.

“그래, 너무 일만 해도 바보 된다. 쉬어라.”

그 말에 진현은 빈둥빈둥 집에서 놀았다.

난생 처음 갖는 휴식이었다.

하지만 쉰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씁쓸하구나.’

괜찮다, 괜찮다고 애써 마음을 추스르지만 실제로 괜찮을 리는 없었다.

가슴이 뻥 뚫린 괴로움이 그를 힘들게 했다.

‘이상민.’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띠리링-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지?’

의아한 얼굴로 보니 헤인스의 사장 에이미였다.

“네, 김진현입니다.”

-미스터 김? 저 에이미예요.

“아, 네. 무슨 일입니까?”

특별히 나에게 볼일이 없을 텐데?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에이미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스카우트 제의를 하려 전화했어요. 연봉 40 만 달러. 어때요? 생각 있나요?

“……!”

진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봉 40 만 달러면 현재 환율상 한화로 5 억 정도다. 강남에 개업한 성형외과 의사면 모를까, 한국의 어떤 의사도
이 정도의 금액을 연봉으로 받진 못한다.

그는 에이미가 농담을 하는 것인가 했다.

“지금 그 말 사실입니까?”

하지만 에이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당연하죠. 관심 있으면 잠깐 보실래요?

***

늘 그렇듯 에이미가 좋아하는 이태원에서 만남을 가졌다.

세월이 비켜 가는지 에이미는 처음 봤을 때처럼 동안(童顔)의 도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앳되면서도 삼십 대의 농밀한 매력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오랜만이에요, 미스터 김.”

“네,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나요?”

여러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며 둘은 제법 가까워진 상태다.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적으로 만난 적도 많아 혜미가 질투를 한 적도 있었다.

“55 만 달러짜리 스카우트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의사 자격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네, 알아요.”

“헤인스에서 제시하는 연봉입니까?”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면허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김이 우리 헤인스에 온다면야 좋겠지만, 이번 스카우트는 헤인스의 제의가 아니에요.”

“그러면?”

에이미가 웃음을 지었다.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사람한테서 청탁이 들어왔어요. 본인들이 이전에 미스터 김에게 스카우트 메일을
보냈는데 차였으니, 내가 대신 미스터 김을 꼬셔달라고.”

“네? 어디서?”

이게 무슨 말인가?

에이미는 답을 하기 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미국 뉴욕에 위치한 세인트 죠셉(Saint joseph) 병원이에요.”

“……!”

경악한 진현에게 에이미가 물었다.

“세인트 죠셉 병원 아시죠?”

“당연히 압니다.”

세인트 죠셉 병원!

뉴욕 맨해튼 인근에 위치한 병원으로 존스홉킨스, 메이요, 엠디엠더슨, 메사추세츠 제네럴과 더불어 미국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병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09

109. 더 높은 곳으로 (5)

국내 최고라 불리는 대일 병원도 세인트 죠셉에 비교하면 동네 2 차 병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진현은 에이미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곳에서 나를 스카우트한다고?

“혹시 잘못 들으신 것 아닙니까? 세인트 죠셉에서 저를 스카우트하려 한다고요? 그것도 연봉 40 만 달러에…


….”

“미스터 김이 맞아요. 그리고 40 만 달러 가지고 뭘 그래요. 나중에 실적 봐서 더 줄 걸요?”

“하지만 저는 지금은 의사 면허도 정지된…….”

사실 이번 사망 사건이 있기 전까진 무수히 많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면허가 없으면 의사로서 자격이 상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은 거짓말처럼 제의가 없어진 상태다.

에이미는 태연히 말했다.

“의사 면허야 미국에서 다시 받으면 되죠. 뭐가 문제에요?”

“그게 됩니까?”
“제가 엉클한테 물어보니 가능할 것 같다고, 우수인재 유치차원에서 특별히 배려해 주겠다는데요? 아, 물론
USMLE(미국의사시험)는 합격해야겠지만, 그거야 미스터 김한테 문제도 안 될 거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엉클이 누구기에?

“아, 엉클…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삼촌이지. 하여튼 삼촌이 뉴욕 주지사이거든요.”

“…….”

진현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그러면 혹시 안면이 있다는 지인은?”

“세인트 죠셉 병원의 병원장(President)이에요.”

“실례지만 관계가……?”

“음… 한국식으로는 작은 아버지예요.”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에 친척 중에 헤인스의 대표이사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거 알면 알수록 이혜미를 능가하는 미국 귀족이다.

“혹시 미스 엔더슨이 저를 추천해 준 것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어째서?”

그 말에 에이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빤히 진현을 바라봤다.

“미스터 김.”

“네?”

“미스터 김은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

“당신이 최근 우리 헤인스와 이룬 성과들. 그건 단순히 천재의 성과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당신은


세계적인 대가도 할 수 없는 성과들을 남긴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1 년 사이에 세계 3 대 저널에 4 편의 논문을 실은 것을 떠나, 헤인스의 사장될 뻔한


프로젝트를 4 개나 살렸으니까.

진현 덕분에 헤인스가 얻은 금전적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고, 덕분에 헤인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에이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미스터 김과 함께한 프로젝트들을 의학 저널에 발표했을 때 미국 학회가 얼마나 요동을 쳤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김진현이란 이 동양인 청년이 도대체 누구냐고.

분명 이전에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스카우트 메일을 보냈을 텐데 못 읽어보셨나요?”

진현은 답하지 못했다.

그때 워낙 그런 메일이 많이 와 스팸 처리를 했던 것이다.

“가족 모임에서 미스터 김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제가 아니라, 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였어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각각 헤인스의 대표이사와 세인트 죠셉 병원의 병원장을 뜻한다.

“작은 아버지가 저한테 부탁하더라고요. 아카데믹 피지션(Academic physician)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해줄


테니 미스터 김을 반드시 꼬셔달라고. 처음 1 년은 현재처럼 레지던트 비슷한 신분으로 일을 하다가, 실적과 진료
성적을 봐서 정식 교수로 추가 계약을 할 거예요. 그때 연봉은 약속했던 것보다 더 오를 수도 있어요.”

“미국은 수련기간이 5 년인데 1 년 후에 교수로 임용될 수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수련을 인정한다 해도 2 년이 모자랐다.

“뭐, 월반하면 되죠. 거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전례가 없었던 사례도 아니고. 제가 사례를 알아보니 이전에
다른 한국인도 미국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월반한 적이 있어요. 닥터 원이었나? 그리고 사실 미스터 김한테
레지던트 수련 과정은 의미가 없잖아요?”

진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땅 끝으로 추락했다 생각했는데 세인트 죠셉 병원의 교수라니.

대일 병원의 교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리다. 단순히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영광스러운
직위였다.

특히 세인트 조셉 병원의 교수는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다.

대일 병원의 대가(大家)가 한국의 대가(大家)라면, 세인트 조셉의 대가는 세계의 대가였다.

한국이란 좁은 굴레를 넘어 세계의 학회를 내려다보는 위치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뭘요?”

“에이미가 많이 신경 써준 것 압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분명 에이미가 많은 도움을 줬으리라. 그녀가 아니었으면 특별한 혜택들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거야 뭐. 저 이제 곧 미국 본사로 돌아가거든요.”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미가 미국 돌아가는 거랑 자신을 도와준 거랑 무슨 상관?

“같이 미국가면 꼬시기 좋겠죠, 뭐. 난 미스터 김을 좋아하니까요.”

“……?!”

돌발 발언에 진현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에이미는 도도한 얼굴에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뭐지? 이게 무슨 뜻이지? 설마 진담은 아니겠지?’

무뚝뚝한 얼굴로 원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그녀인지라 진심인지 구별이 안 갔다.

그때 에이미가 말했다.

“미스터 김. 우리 잠깐 바람 쐬러 산에 올라가지 않을래요?”

“산이요?”

“네, 산. 도봉 마운틴(Mountain).”

***

도봉 마운틴(Mountain), 즉, 도봉산.

강북에 위치한 산이다.

“하아, 하아.”

생각보다 험한 산세에 진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산을 못 타네요?”

“미스 엔더슨은 생각보다 산을 잘 탑니다?”

진현은 투덜거렸다.

의사들은 병원에서 운동할 기회가 없으니 체력이 저질이었다.

반면 에이미는 밤마다 이태원 클럽에서 다져진 체력인지 다람쥐처럼 산을 탔다.

“아, 전 심심해서 등반 모임도 여러 번 나갔거든요. 산 정상에 가서 사람들이랑 소주 먹으면 맛 참 좋은데.


우리도 빨리 올라가서 소주나 먹어요.”

진현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외국인 아가씨가 솔로 아저씨들 득실거리는 등반 모임에 나갔다고? 참 알면 알수록 특이한 아가씨다.

‘한국에 발령 난 것도 본인이 자원해서라고 했지? 한국에 여행 왔다가 좋아서. 이젠 한국어도 수준급이고.’


열심히 걷는데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조금만 천천히 가주십시오.”

“힘들어요?”

도도한 얼굴로 왜 힘들지? 란 표정을 지으니 진현은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도대체 왜 산에 오자고 한 거야?’

이유를 물었으나 답을 해주지 않았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하아, 하아. 괜찮습니다.”

“정말이요? 정말 괜찮아요? 그러면 조금만 더 빨리 갈까요?”

“…먼저 가십시오. 따라가겠습니다.”

에이미가 바람을 받으며 웃었다. 하얀 피부의 흑발이 차르르 흔들렸다.

그러고 보면 그녀도 참 예쁜 얼굴이다. 무뚝뚝한 눈에 하얀 피부가 도도한 인형을 연상시켰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이 남자의 가슴을 흔드는 매력을 더하였다.

“바람이 참 좋네요. 그러면 저 먼저 올라갈게요. 천천히 올라오세요.”

그녀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엘프처럼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하아, 하아. 갑자기 웬 운동이야.”

진현은 땀을 닦았다.

중학교 3 학년 때 잠깐 킥복싱을 한 것 외엔 운동이라곤 연이 없는 그라 등반이 힘들기 그지없었다.

‘도봉산도 이렇게 힘든데, 지리산은 어떻게 오르는 거지?’

어찌, 어찌 시간이 지나 정상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에이미는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화보 속 도도한 요정과도 같았지만,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아, 왔어요? 소주 줄까요?”

병째 내미는 것을 기겁을 하며 거절했다.

“됐습니다. 그런데 왜 오자고 하신 겁니까?”

다시 물으니 에이미가 손짓했다.


“이쪽으로 올래요, 미스터 김?”

“…….”

그녀 옆에 도착한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

“참 좋죠?”

그녀의 말처럼 정상에서 바라본 밑의 전경은 장관이었다.

올라오며 고생스레 흘렸던 땀이 하나도 시원하게 씻겨나갈 정도로 가슴이 뻥 뚫렸다.

“참 좋아서 저는 산에 가끔 와요. 특히 답답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물론 클럽도 가지만.”

장난스레 웃더니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힘들죠, 미스터 김?”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힘드냐고?’

그는 애써 괜찮다고 생각했다.

좌절하긴 했으나 그의 잘못도 아니었고 어차피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정말 괜찮은 걸까?

진현은 속으로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대일 병원에서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렇게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왔으나 돌아온 것은 불명예스러운 의사면허정지였다.

그때 에이미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보세요, 미스터 김.”

“……?”

“저게 뭔지 아세요?”

한강 너머 건물이 보였다.

“저건?”

“대일 병원이에요.”
이렇게 보니 참 조그만 했다. 강남의 다른 오피스 건물에 가려 잘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저건 뭔지 아세요? 한국대 병원이에요. 저건 광혜 병원, 저건 기독 병원.”

흔히 빅 4 라 불리는 한국 4 대 병원들이다.

“병원들은 왜……?”

“저 병원들은 한국에서 가장 큰 병원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 참 조그맣지 않나요?”

“……!”

“국내 최고네 뭐네 하지만 이렇게 위에서 보면 저렇게 조그마해요. 옆에 오피스 건물들이랑 잘 구별도 안 될
정도로. 저 조그만 건물 안에서 다들 아웅다웅 다투고 하는 거예요. 네가 최고네, 내가 최고네 하면서.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진현의 가슴이 흔들렸다.

“미스터 김, 하나 부탁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에이미는 담담히 말했다.

“저런 조그만 곳에서 잠깐 미끄러졌다고 낙담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런 우물은 당신이 머물 곳이 아니에요.
당신이 머물 곳은 저런 곳이 아닌, 세계에요.”

“……!”

“전 제가 아는 미스터 김을 믿어요. 당신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세계에서 최고가 되어주세요.”

그녀의 위로와 믿음 섞인 격려에 진현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감사…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 저 조그만 대일 병원에서 미끄러진 것 따위 뭐가 대수겠는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자.

“그러면 미국으로 가실 거죠? 세인트 죠셉 병원에 연락할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세인트 죠셉 병원에 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시간이 지난 뒤… 정식 교수로 자리를 잡는다면, 최대한 빨리 한국 대일병원에 교환 교수로 파견 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교환 교수요?”

“네, 그 조건을 들어준다면 세인트 죠셉 병원과 계약하겠습니다.”

“뭐, 어려울 것 없으니. 그렇게 해드릴게요.”

이상민과 진현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에이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산 정상에서 대일 병원 쪽을 바라봤다.

‘기다려라, 이상민.’

에이미의 말처럼 세계 최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가 된 후 돌아와 그가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렇게 진현의 미국행이 결정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10

110. 세인트 죠셉 병원 (1)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 Step 1(기초), Step 2 CS, CK(임상)를 빠르게 패스했다.

의사도 영어는 필수라 지난 삶부터 영어 하나만큼은 완벽히 구사했던 진현이기에 Step 1, 2 패스는 어렵지
않았다.

당연히 점수는 초고득점.

최종 단계인 Step 3 는 일정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미루었다.

어차피 의사로 일하는데 자격 요건인 ECFMG certificate 를 얻었기 때문에 세인트 죠셉에서 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세인트 죠셉에서 일하며 내년까지만 따면 된다.

기타 비자나 여러 제반 문제는 세인트 죠셉 병원이 일괄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뉴욕 주지사라는 에이미의 친척의 도움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정말 감사합니다, 미스 엔더슨.”

진현이 감사를 표하자 에이미는 표정변화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미국 가면 꼬실 거라니까요? 밤에 조심하세요.”

“…….”

참 특이한 여자라고 진현은 생각했다.

‘진담은 아니겠지.’
혜미와도 작별을 준비했다.

그녀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이제 곧 떠나는 거지?”

“응, 미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현과 떨어져서 살아야 하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나는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미안. 기분 좋게 보내줘야 하는데 계속 눈물이 나오네. 흐윽. 앞으로 못 본다니 너무 슬퍼서.”

오랜 짝사랑 끝에 이제야 행복을 느끼고 있었는데, 미국이라니.

마음만 같아서는 같이 따라가고 싶었지만, 혜미의 사정상 그럴 수는 없었다.

“흐윽. 가서 바람 피지 않을 거지?”

“응, 걱정하지 마. 메일이랑 전화 자주 할게. 휴가 때마다 돌아오고.”

“꼭 그렇게 해야 해? 응?”

“응, 비행기 타면 하루면 올 수 있으니까.”

진현은 계속 눈물을 흘리는 혜미를 가슴에 안고 달랬다.

한참을 눈물을 흘린 후 간신히 진정하자 진현은 혜미의 눈을 바라봤다.

“혜미야.”

“응?”

“나 2 년 뒤에 돌아올 거야. 대일병원에 교환 교수로.”

“……!”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진현이 그사이 세인트 죠셉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 한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진현은 반드시 그렇게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정말로 돌아올 거지?”

“응, 꼭 돌아올 거야. 이상민에게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니. 그리고.”

그러면서 진현은 주머니에 보관하던 무언가를 꺼내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혜미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이거…….”

“나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 그때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 혜미야?”

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낭만도, 무드도, 멋대가리도, 뭣도 없는 최악의 프로포즈였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뭐야, 이게…….”

“좀 갑작스럽지? 형편없이 프로포즈해서 미안해.”

“바보, 진짜 바보.”

“싫어?”

혜미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바보야. 기다릴 테니 꼭 돌아와서 결혼해줘. 안 돌아오면 정말 원망할 거야.”

그리고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눈물에 젖은, 아쉬움 가득한 입맞춤이었다.

***

그렇게 진현은 미국으로 출국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이 미국에 가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좋은 기회를 찾아 가는 것이기에 마음을 달래며


축하해 주었다.

떠나기 전, 진현은 혜미를 걱정했다.

“이상민이 너한테 수작부리면 어떻게 하지? 그냥 너도 나와 같이 미국으로 갈래?”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이상민이 그녀에게 해를 끼칠까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일병원에서 내과 수련 중인 그녀는 미국에 같이 갈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 오빠의 원수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도 않고.

“할아버지가 적적하다고 계속 들어와서 살라고 해서. 일단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려고. 그러면 위험하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 대일 그룹의 회장인 이해중을 뜻한다.


아무리 이상민이라도 이해중의 비호를 받는 그녀를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방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꼭. 꼭 돌아와야 해? 안 그러면 내가 간다?”

“응.”

무조건 돌아와야 했다.

이상민의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상민…….’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진현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상민의 가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려라.’

돌아와 죗값을 받게 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진현은 이전 삶을 포함해 해외에 나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전 환자 이송 때문에 잠깐 아랍에미레이트에 간 적 있으나, 공항에만 머물다 돌아왔으니 실제로 타국을


방문했다고 하기는 그랬다.

그렇게 반도를 벗어나 본 적 없는 그에게 뉴욕의 국제공항, 존 에프 케네디(JFK) 공항의 전경은 압박을 주기
충분했다.

‘여기가 미국, 뉴욕…….’

다른 것보다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굳은 다짐을 하고 왔으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긴장이 아예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처음에 텃세나 차별이 있겠지?’

자유의 나라, 평등의 나라라 그러지만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부조리가 없을 리가 없다.

실제로 상류 사회로 진입할수록 인종에 대한 차별은 깊어진다.

특히 의사는 미국 시민권자들 사이에서도 최고로 선망 받는 직업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각 명문대의 수석들이 얼마나 피나는 경쟁을 하는지 모른다.

더구나 진현이 전공하는 외과(General surgery)는 한국과 다르게 높은 봉급과 대우로 넘버 탑의 인기


전공이어서 백인, 그중에서도 상류층의 앵글로색슨 족이 독점하다시피 한다.

그런 곳에 비시민권자 동양인이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고 들어가니 무턱대고 환영할 거라 기대하면 바보였다.

‘괜찮아.’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긴장이 안 된다면야 거짓말이지만, 상관없었다. 무슨 난관이 있더라도 다 극복할 것이다.

‘혜미…….’

한국에 남겨둔 연인을 떠올렸다. 벌써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인물.

이상민.

분노가 솟구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입국 심사대에서 흑인 여성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Korean? 비자.”

진현은 여권과 비자를 건네었다.

전문적인 지식으로 미국에서 일할 것임을 증명하는 H-1B 비자로 에이미의 도움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Okay, 지나가세요. 다음 사람!”

입국 심사대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니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진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맨해튼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지? 메트로(Metro)를 타면 되나?’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

“……?!”

“미스터 김!”

날 부르는 건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검은 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미녀가 진현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이미였다.
“아, 미스 엔더슨. 어떻게 여기를?”

“미스터 김 마중 왔죠. 뉴욕에 오신 걸 환영해요.”

회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그녀의 자태는 완벽한 뉴요커의 것이었다.

“오느라 고생했죠?”

“아닙니다. 그런데 회사 일이 바쁜 것 아니었습니까?”

에이미는 진현 덕분에 성공한 프로젝트들로 헤인스 뉴욕 본사의 이사로 승진한 상태다. 그런데 발령난 지 얼마 안
돼서 한창 바쁠 텐데?

“미스터 김 빨리 보고 싶어서 왔죠.”

진현은 웃으며 말했다.

“농담 마십시오.”

“농담 아닌데요?”

“네?”

진현은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하지만 에이미의 무뚝뚝한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업타운(Uptown)으로 가요.”

***

에이미의 크라이슬러를 타고 뉴욕의 도로를 갈랐다.

창문 사이로 바람을 맞으며 에이미가 물었다.

“뉴욕은 처음이죠?”

“네.”

“어떤가요? 세계 최고의 도시에 온 소감이.”

“글쎄요. 얼떨떨하군요.”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개인적으로 전 뉴욕보단 서울이 더 살기 좋더라고요. 유흥 문화도 좋고, 치안도
좋고.”

헤인스의 대표이사의 친척인 에이미가 한국 지부로 갔던 것은 본인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만큼 한국을
좋아했다.

“치안이 안 좋으니 꼭 조심하세요. 한국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치안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당연하죠. 여자 같은 경우엔 대낮에 혼자 조깅하다가 강간당하기도 하는 걸요. 밤 10 시 넘어서 나갈 거면 꼭
현금으로 20 달러 이상 갖고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줄 돈이 없어서 총 맞아요. 아, 강도한테 돈 줄 땐 꼭
손으로 주지 말고 턱짓만 하세요. 손을 주머니에 가져가면 총 꺼내는 줄로 오해 받아 죽을지도 몰라요.”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치안이 안 좋다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치안이 정말 그렇게 안 좋습니까?”

그의 굳은 표정에 에이미는 살짝 웃었다.

“당연히 과장이죠. 설마 전부 믿은 거예요?”

“…….”

뭐야?

“뉴욕도 이전보단 치안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특히 미스터 김이 거주할 맨해튼은 뉴욕에서 가장 괜찮은 편이니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하지만 그래도 한국 서울처럼 생각하면 안 되고 꼭 조심은 해야 해요. 늦은 밤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가는 것은 꼭 피하고요.”

미국도 지역마다 치안이 천차만별이다.

해지면 집밖으로 절대 나가면 안 되는 곳이 있는 반면, 맨해튼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치안이 안전한 편에 속했다.

“네, 감사합니다.”

퀸즈(Queens) 지역을 통과하며 이런저런 주의 점들을 듣다 보니 영화 등에서 자주 본 다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아…….”

“맨해튼이에요.”

다리 끝, 고층빌딩들이 끝없이 늘어선 섬이 나타났다. 마천루들의 스카이라인을 본 진현은 감탄을 터뜨렸다.

맨해튼.

세계의 중심인 곳으로, 세인트 죠셉 병원은 그 맨해튼에서도 중심, 업타운(Uptown)에 위치해 있었다.

***

병원에 방문하기 전 미국에 머물 숙소로 향했다.

먼저 짐을 풀어야 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에이미는 병원 근처에 고층 건물로 진현을 안내했다. 낡은 건물이 많은 업타운 내에서 눈에 띄게 깔끔한 최신식
건물이었다.

“여기가 미스터 김의 숙소예요.”

원룸 크기 정도 될까? 문을 여니 작지만 깔끔한 오피스형 주거공간이 나타났다.

에이미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좀 작죠?”

“아닙니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맨해튼의 월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업타운은 한국의 강남, 그중에서도 청담, 논현동 같은 곳으로 집세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정식 교수도 아닌, 레지던트에 불과한 자신에게 작으나마 최신식 숙소를 얻어주다니. 엄청난
배려였다. 분명 에이미가 신경 썼으리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번 년도에 실적을 인정받고 내년에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면 더 좋은 집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네.”

아직 진현은 정식으로 세인트 죠셉 병원에 임용된 것이 아니었다. 이번 년도의 실적에 따라 채용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정식근무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요. 그전에 병원장(President)과 외과 과장(Chairmain)한테 인사를 하고


병원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될 거예요. 한국이랑 아무래도 시스템적인 면에서 다르니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에이미가 주저하더니 말했다.

“저, 미스터 김?”

“왜 그러십니까?”

“처음에 좀 힘들 수도 있어요.”

“네?”

“그러니까… 음, 미스터 김을 스카우트하려 할 때 반대가 많았거든요. 어마어마한 실적을 낸 천재라도


시민권자도 아닌 동양인을 받을 수 없다고. 병원장인 작은아버지야 제 이야기를 들어 미스터 김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진현은 에이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세인트 죠셉은 병원 위치상 아무래도 까다로운 백인 상류층이 많이 오니 처음에 힘들게 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이해했다.

위치가 맨해튼 업타운, 한국으로 치면 강남 청담동이니 환자군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쉽지 않은 길이 예상되었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아시아 끝의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 청년이 세계 최고의 병원에서 쉽게 인정받을 수 있을 리 없지 않는가?

진현은 연이은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괜찮다.

다 극복할 수 있으니까.

아니, 반드시 극복하고 말 것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111

111. 세인트 죠셉 병원 (2)

감사의 표시로 진현은 에이미에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와 와인을 대접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그것도 꼭대기의 펜트하우스에.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같은 건물로 잡은 것인지 헷갈려 할 때 그녀가 말했다.

“일부러 저랑 같은 건물로 잡았어요. 꼬시려고. 밤에 조심하세요.”

“…….”

그러면서 살짝 웃음을 흘리고 사라지는 그녀였다. 늘 그렇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된다.

‘내일부터 병원에 가는구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싱숭생숭 잠이 오지 않았다.

핸드폰 메시지로 혜미가 보낸 문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진현아, 잘 도착했어? 걱정되니 조심하고. 사랑해.]


진현은 슬쩍 웃었다.

그도 문자를 보냈다.

[응, 나도 사랑해.]

[보고 싶어.]

짧지만 마음이 담긴 메시지.

혜미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응, 나도. 보고 싶어. 사랑해.]

***

다음 날, 진현은 세인트 죠셉 병원에 처음으로 출근했다.

‘여기가 세인트 죠셉…….’

병원 건물의 크기 자체는 대일병원과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외관을 보면 대일병원보다 낡은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낡음보단 역사와 전통으로, 실질적 내실은 대일병원과 비교하기 어려웠다.

첫 일정은 병원장과의 면담이었다.

진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닥터 김?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중년의 비서가 그를 안내했다.

맨해튼의 유일한 오아시스,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방에 병원장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닥터 김. 세인트 죠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병원장, 제임스는 당당한 풍채의 중년 백인 남성으로 활달하고 사교적인 인상이다. 얼굴선에서 얼핏 에이미와
닮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환하게 웃으며 진현을 환대했다.

“도대체 동양의 어떤 괴물이 1 년 만에 세계 3 대 저널에 4 편의 논문을 기재했는지 궁금했는데, 잘생긴


소년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제임스는 씽긋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스무 살은 넘은 거죠? 동양 청년들은 다들 나이가 어려 보여서.”

“넘었습니다. 스물여덟… 아니, 미국식으로 스물일곱입니다.”


“스물일곱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동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훨씬 어려 보이는데, 진현은 그중에서도 특히 동안이다.

물론 한국에선 진중한 태도와 세월이 담긴 깊은 눈빛 때문에 외모로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국에선
지내봐야 알 일이다.

“앉으세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원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가죽 소파에 앉으니 비서가 마실 것을 내왔다.

진현이 싫어하는 검은 물, 원두 커피였다.

“뉴욕에는 처음이시죠?”

“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짧게 나눈 후, 병원장 제임스는 계약 이야기를 하였다.

“개인적으로 저는 닥터 김이 저희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줘서 정말 기뻤어요. 닥터 김이 저희 세인트 죠셉에


와주길 간절히 바랐었거든요.”

그 말에 진현은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다 자신이 의도치 않게 대단한 실적을 내긴 했지만, 세인트 죠셉은 세계 최고의 병원 중 하나이다.

그런 만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가가 무수히 많았다.

각 분야에서 전 세계에 통용되는 의학 교과서를 집필, 편찬하는 세계 최고의 대가들도 다수 있었다.

그런 세인트 죠셉이 왜 자신을 간절히 바라지?

진현의 의문을 눈치챈 듯 제임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헤인스와의 프로젝트 해결 때 보여줬던 천재성 때문이에요.”

“……!”

“단순히 우수 저널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재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물론 논문 실적만으로도 기함할 만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닥터 김이 가지고 있는 크레이지(Crazy)한 재능이에요.”

제임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존스 홉킨스나 메이요, 엠디엠더슨 등은 닥터 김의 이런 능력을 몰라요. 그래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죠.
저도 처음 헤인스의 프로젝트 논문들에 닥터 김의 이름이 계속 실린 것을 보고도 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을 헤인스가 처리하고 일부만 도와줘 이름을 올렸겠지, 라고 생각했죠.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긴
하지만요.”

다국적 제약회사와 합작해서 내는 논문들이 대개 그렇다.


제약회사에서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내고, 스터디를 디자인하지만 의사는 큰 역할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1 저자나 교신저자에 유명 대가의 이름을 넣는 것은 이름값을 빌리기 위해서다.

“그러다 에이미에게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 프로젝트들의 핵심은 모두 닥터 김의 아이디어이고


스터디 디자인도 모조리 닥터 김이 고안했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 핵심적인 일들을 했기에 레지던트에 불과한 그가 논문에 단독 1 저자 혹은 공동 1 저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우리 세인트 죠셉의 이름 높은 교수들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동양의 일개 레지던트가


해내다니. 그것도 1 년 사이에 4 개나!”

제임스는 흥분하여 과장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열악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레지던트 환경에서도 이런 성과를 냈는데, 만약
좋은 자리를 잡는다면 어떤 성과를 낼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굉장히 초조해졌어요. 존스 홉킨스나 메이요,
엠디엠더슨 같은 곳에서 채가면 안 되는데.”

그제야 어째서 세인트 죠셉이 엄청난 혜택을 주어가며 자신을 스카우트하려 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진현이었다.

‘다른 세계 최고의 병원에서 채갈까 봐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했다니. 나야 고맙지만 부담되는 평가군.’

그러나 그건 진현의 겸손한 생각일 뿐이었다.

진현이 헤인스와 해낸 일들은 그야말로 미라클(Miracle),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진현을 극찬하던 제임스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저희 세인트 죠셉과 닥터 김의 계약서예요. 에이미를 통해 다 검토해 봤지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토를 하느라 고생 좀 했지.’

계약서는 한국어로 된 것도 검토하기 어렵다.

온갖 법률 용어가 난무하는 영문 계약서는 미 시민권자도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제 변호사를
통해 꼼꼼히 살폈다.

“뭐, 다 봤겠지만 요지는 하나예요. 지금은 임시채용이고, 1 년간의 진료, 학문 실적을 통해 정식 교수 채용을
결정하겠다는 것. 약속된 40 만 달러의 연봉은 실적에 따라 변동할 거예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수고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닥터 김의 활약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답니다. 꼭 잘해 주세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병원장의 말에 담긴 행간(行間), 숨은 뜻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허황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바보가 아니었다.

‘1 년 동안 어마어마한 실적을 쌓아야겠지.’

동양의 별 볼 일 없는 청년이 레지던트를 조기수료 후 세계 최고의 병원에서 정식 교수 발령과 더불어 거액의


연봉을 받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혜택을 받으려면 그에 맞는, 아니, 능가하는 실력과 실적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추지 않겠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최고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

“제네럴 서저리에서 근무를 할 것이니, 체어맨(과장)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세요. 제네럴 서저리의 체어맨도 같은
동양인이니 잘해주실 거예요.”

제네럴 서저리의 체어맨, 즉, 외과 과장은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으로 진현도 아는 인물이었다.

정길수.

진현의 모교인 한국대를 졸업 후 한국대 교수로 재직하다 탁월한 연구 실적에 스카우트를 받아 세인트 죠셉에 온
대가(大家)였다.

동양인은커녕 미 시민권자 흑인도 한 명도 없는 세인트 죠셉의 외과에서 과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예의 바른 인사에 제임스는 미소를 지었다.

“네, 수고해 주세요.”

그런데 진현이 나가자 제임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후우…….”

그는 피로한 얼굴로 비서에게 물었다.

“미셸, 담배 한 대 피워도 되나요?”

“병원 전체 금연 구역인데요. 벌금 내실 거면 피워도 돼요.”


융통성 없는 말에 병원장 제임스는 투덜거렸다.

“아니, 누가 그런 쓸데없는 규칙을 정한 거야? 미셸만 눈감아 주면 되잖아요?”

“제 입막음 비는 벌금보다 비쌀 텐데요.”

젠장.

고지식한 아줌마 같으니라고. 아무래도 다음엔 섹시한 여비서로 바꾸어야겠다.

물론 농담으로, 미셸의 일처리는 너무나 뛰어나서 도저히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가 서류를 펼치는데 미셸이 물었다.

“그대로 두어도 될까요?”

“뭘요?”

“코리아에서 온 닥터 킴이요.”

제임스는 답하지 않았다.

“배려를 해주지 않으면 분명 적응에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뚜렷이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의사 사회도 계층이 존재했다.

특히 외과는 부동의 연봉 1 위로, 미국 의사들 사이에서 최고 선망의 전공이었다.

세인트 죠셉의 외과는 애초에 레지던트를 선발할 때 미 시민권자, 그중에서도 백인이 아니면 받지를 않는다.

그런 곳에 동양인 청년이 엄청난 혜택을 받으며 떨어졌으니 환영받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게 걱정이긴 한데. 그건 닥터 김이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예요.”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 정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김진현이 자신의 생각하는 그런 존재라면 이 정도는 스스로 극복할 것이다.

만약 진현이 1 년 동안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러면 쫓아내야지.’

제임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앞으로의 모든 것은 진현의 손에 달려 있다.

‘미라클 김이라…….’
그의 조카 에이미는 닥터 김을 부를 때 종종 ‘미라클 김’이란 호칭을 썼다.

저 동양의 어린 청년이 정말로 미라클을 일으키는 ‘미라클 김’일지, 아니면 쭉정이일지는 지켜보면 알 일이다.

그때, 진현은 세인트 죠셉의 외과 과장 정길수를 만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정길수는 지긋한 나이의 외과의사였다.

대충 강민철이나 이사장 이종근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셋 다 한국대 출신인데 동기들은 아니겠지?’

이사장 이종근을 떠올리니 기분이 나빠졌다. 재빨리 생각을 지우며 한국어로 인사했다.

“김진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길수가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여긴 한국이 아니야. 영어로 말하게.”

“……!”

동향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이 단번에 사라지는 대답이었다.

“한국에선 간 파트였다고?”

“네.”

“그래, 열심히 하게.”

나가보란 뜻이었다.

짧은 인사 후 진현은 과장실을 나왔다.

‘뭐야.’

특별한 배려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상상 외의 냉담함이다.

‘뭐, 상관없지.’

진현은 고개를 털고 외과 의국 쪽으로 향했다.

한편 진현이 나간 후, 외과과장 정길수는 무감정한 얼굴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김진현이라…….”

(다음 편에서 계속)

# 112
112. 세인트 죠셉 병원 (3)

“한국에서 왔다고? 외과 전공?”

한국과 미국은 병원의 체계가 쌍둥이처럼 흡사했다. 애초에 미국을 모델로 세운 체계이기 때문이다.

외과의 치프인 마이클이 진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무 어려 보이는데? 실습 나온 의대생 같잖아. 의사가 맞긴 한 건가?’

그는 진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양 원숭이 따위가 우리 병원 외과에 들어오다니.’

마이클은 스탠포드 생물학과를 수석 졸업 후,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코넬 의학전문대학원을 최상위권으로 수료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리고 그건 마이클뿐 아니라 다른 외과 레지던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인트 죠셉 외과는 최고 중의 최고가 아니면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그런 성역에 동양 원숭이가 들어오다니. 그것도 실적에 따라 내년에 교수 임용? 말도 안 된다.

물론 외과 과장인 닥터 정은 동양인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닥터 정은 동양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젠장, 동양 원숭이 따위를.’

뿌리부터 백인 우월주의자인 마이클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그래도 교양 있는 상류 지식인답게 시비를 걸거나 하진 않았다.

“익숙하지 않을 테니. 처음에는 그냥 돌아다니면서 모자란 부분을 익혀.”

“어느 파트를 로테이션하면 되겠습니까?”

“그냥 네가 모자라다고 판단되는 파트에 가서 배워.”

그걸로 끝이었다.

시스템이 다르니 익숙해지기 전에 배우는 기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교수, 어느 파트에서 익히란
지시도 없었다.

‘곤란하군.’

그러나 꼬인 얼굴의 마이클에게 뭔가를 더 부탁할 수도 없었다.

‘알아서 해야지.’

이런 반응 따위 예상 못한 바 아니었다.
자리를 잡기 전 거쳐야 할 신고식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니까.’

연구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 한국이라고 미국에 비해 의학 수준이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 1 초도 안 되어 한국의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고 중요한 내용은 즉각 진료에


반영한다.

오히려 지난 삶에서 10 년 뒤의 의학 지식까지 모조리 알고 있고, 회귀 후 피나는 노력을 한 그는 미국


의사들보다 지식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터치 안 하면 나야 편하지.’

그렇게 진현은 마음 편히 병원을 돌아다니며 시스템을 숙지했다.

‘한국과 큰 차이는 없어. 큰 차이는 없지만 한국보다 의사가 훨씬 돈을 많이 받고 환자를 훨씬 조금 보는군.’

한국에서 대장내시경 가격이 한 번 하는데 10 만 원가량 하는 것에 비해 여기는 1,000 만 원이다.

진료 컨설트 가격이 한국은 1 만 원이라면 여기는 300 만. 이런 식으로 의료비용이 말도 안 되게 차이 났다.

더구나 레지던트가 5 명의 입원 환자로 힘들다고 징징대는 모습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한국에선 입원 환자 40 명도 우습게 보는데.’

진현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레지던트 현실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확실히 좋은 질의 의료 서비스 제공이 가능했다.

‘물론 돈 있는 사람한테만 좋은 시스템이지만. 돈 없으면 병원에 발도 못 디디니. 돈 있는 사람과 의사만 좋은


시스템이군.’

값비싼 의료비 덕분에 상상도 못할 숫자의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마냥 좋은 시스템은
아니다.

‘사실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공공성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시스템이 나쁘지 않은 편이긴 하지.’

그렇게 여러 사항을 숙지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제 슬슬 진료를 시작할 때인데 외과 측에서 그에게 아무런 업무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진현이 치프에게 물었다.

“저는 어느 파트에서 진료를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까? 원래의 서브스페셜(세부전공)인 간 파트에서 일을 하면


됩니까?”

하지만 치프 마이클은 고개를 저었다.


“좀 더 기다려.”

“아직도 말입니까?”

“벌써 진료를 시작하기 이르잖아. 좀 더 업무들을 숙지해.”

하지만 진현은 그런 이유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마이클의 아니꼬운 눈초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같은 동양 원숭이가 감히 어딜?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미 업무는 충분히 숙지했습니다. 파트를 배정해 주십시오.”

진현의 굳은 목소리에 자연 마이클의 얼굴도 딱딱해졌다.

“이봐, 미스터 김. 난 사실 의심이 돼.”

“뭘 말입니까?”

“아시아 끝의 촌구석 의대 딸랑 졸업해 놓고 제대로 진료를 할 수 있을지 말이야. 넌 모르겠지만 우리 세인트


죠셉에 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상류층으로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아. 코리아에서 제대로 수술을 해본 적이나
있나?”

그 말에 진현은 기가 찼다.

지난 삶을 포함해 15 년이 넘는 세월을 수술장에서 보낸 진현이다.

그리고 미국은 한 의사당 보는 환자의 수가 적고 수술 횟수도 적다.

미국 의사들이 한국에서 공장 돌아가듯 밤새가며 수술하는 것을 보면 기절할 것이다.

‘너보단 내가 최소 100 배는 넘게 집도해 봤겠다.’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아니, 미국의 문화의 특성상 저 오만한 백인은 실제 수술을 집도해 본 경험이 없을지도 몰랐다.

따라서 실제 수술 능력을 따지면 진현의 압승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상상도 못하는 마이클은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 건방 떨지 말고 좀 더 배우며 대기하고 있어!”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진현이 사라진 후,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동료가 마이클에게 말했다.


“마이클, 그렇게 대해도 되겠어?”

“뭐가?”

“그래도 제임스 병원장이 상당한 공을 써서 데려온 거라던데. 병원의 지주회사 중 하나인 헤인스와도 연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만약 내년에 정말로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면 우리보다 높은 직급이 돼.”

마이클은 코웃음 쳤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저 동양 원숭이가 내년에 병원에 남을 일은 없을 거야.”

“어째서?”

“실적이 있어야 남지.”

마이클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진료 실적, 학문 실적 모두 혼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팀으로 해야지.”

동료는 마이클의 말을 이해했다.

수술을 비롯한 진료야 당연히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논문 실적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지도 교수와 팀이 없으면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내년에 저 동양 원숭이는 모국으로 돌아갈 것이야. 뭐, 1 년 최첨단 의학을 경험하며 뉴욕 관광한 셈 치면 되니


저놈한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한 마이클은 기분 좋게 웃었다.

***

마이클과 대화를 마친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차피 텃세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당하니 기분이 무척 나빴다.

‘날 따돌리겠단 거지? 좋아. 해보자고.’

진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따돌림?

실력으로 깨부수면 된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진현은 충분히 가능했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연구 실적을 쌓아야 하니 지금 쌓자.’

따돌림 당하는 덕분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24 시간 모두 자유 시간이었다.


‘따돌리면 내가 논문을 못 쓸 줄 알았지?’

물론 좋은 논문을 쓰려면 팀을 이루어야 한다는 마이클의 생각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의학 연구 중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대규모 전향적 연구(Randomized prospective study, Randomized


controlled trial)는 대가의 밑에서 팀을 이루지 않는 한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의학 연구의 종류 중 대규모 전향적 연구만큼 인정받는 연구가 있었다.

‘메타 분석(Meta analysis)을 하면 돼.’

메타 분석(Meta analysis)!

지금까지 나온 발표된 연구 결과들을 고찰, 종합하여 작성하는 논문으로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서라도 작성할 수 있다.

단 기존 연구를 고찰, 종합해야 하기 때문에 각 분야를 아우르는 탁월한 식견, 패러다임을 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즉, 웬만한 전문가는 시도도 못하는 영역.

‘그러나 난 할 수 있어.’

진현의 머릿속에는 향후 1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적인 대가들이 작성한 메타 분석이 모조리 담겨 있었다. 즉,


컨닝 페이퍼가 있는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옮겨 적기만 하면 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야.’

미래에 그 논문들을 작성할 대가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NEJM, 자마(JAMA), 란셋(Lancet)에 기재된 메타 분석 위주로 작성하자.’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세계 3 대 의학 저널에 기재되었던 메타 분석들을 떠올렸다.

의학 교과서와 가이드라인을 바꿀 만큼 워낙에 유명하고 대단한 연구들이라 지난 삶에서 숱하게 공부해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진현은 컴퓨터를 붙잡고 의학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두고 보자.’

백인들의 기분 나쁜 차별에 그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본때를 보여주겠어.’

그리고 그렇게 결심한 진현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며 논문을 작성해나갔다.

그렇게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진현이 작성한 논문의 수는 무려 7 편.

또 진현은 메타 분석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넘치는 시간을 이용해 헤인스의 에이미와 접촉해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각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짚어주고 스터디 디자인을 해주는 방식이다.

이미 닥터 김이 하는 조언의 가치를 알기에 헤인스는 건당 어마어마한 보수를 제공했다.

-마이더스의 손, 김진현!

김진현이 손을 대는 프로젝트마다 대박이 터지니 헤인스 내에서 붙은 별명이었다.

마이더스의 손, 김진현의 소문은 금세 미국의 제약업계로 퍼져 많은 제약회사가 그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진현은 그 프로젝트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돈도 벌고 실적도 쌓고.’

그는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으며 프로젝트를 해결해 갔다.

그렇게 미국으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통장이 넘칠 듯이 돈이 쌓였다.

‘이러다 금방 100 억대 부자 되겠군. 혜미와 결혼하러 돌아가면 건물부터 알아봐야겠어.’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래를 바꿀 정도의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도움을 주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할 프로젝트들이었으니까.

‘실패할 프로젝트는 나도 답을 모르니.’

그러니 진현은 미래에 어차피 성공할, 답을 아는 프로젝트만 계약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숫자여서 바닥에 떨어진 금을 줍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는 몇 달 사이, 진현은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냈다.

세인트 죠셉 병원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미라클 김’의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3 대 학술지인 NEJM, 자마(JAMA), 란셋(Lancet)을 포함한 유수의 학회들에서 세인트


죠셉으로 빗발치듯 문의가 쇄도했다.

모든 학회의 문의는 동일했다.

<닥터 김이란 동양인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NEJM 에 2 편, 자마(JAMA)에 2 편, 란셋(Lancet)에 1 편.

그리고 그뿐 아니라 3 대 학술지 바로 밑의 등급이자 해당 분야 최고 학술지인 헤파톨로지(Hepatology)등에도


여러 편 있었다.

“마, 마이클… 이 동양인…….”


세인트 죠셉에 외과 치프 중 한명인 존(John)이 떠듬떠듬 말했다.

유구한 세인트 죠셉 병원의 역사… 아니, 미국 전체의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연구 실적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게 인간의 탈을 쓰고 해낼 수 있는 일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 113

113. 세인트 죠셉 병원 (4)

진현을 차별하는 데 앞장을 섰던 마이클도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존이 물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다는 목소리였다.

“누군가 도와주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데…….”

같은 동양인이니 외과의 책임 과장인 정길수가 도와준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말이 안 됐다.

진현이 두 달 동안 낸 실적은 동양의 천재라 불리는 정길수의 1 년 실적의 5 배가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구나 전부 메타 분석(Meta analysis)이야. 이거 인간이 정말 맞는 거야?”

메타 분석은 해당 분야를 통찰하듯 꿰뚫지 않으면 접근도 하기 어려웠다.

그런 메타 분석을 두 달 사이에 7 편?

더구나 별 볼 일 없는 메타 분석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학회를 뒤흔들 발표였다.

헤인스와 연구를 진행 중인 한 백인 의사가 말했다.

“그 닥터 김, 본인 연구뿐만 아니라 여러 제약회사와 프로젝트도 같이 진행하고 있다는데? 손대는 프로젝트마다


잭팟을 터뜨려 제약업계에선 마이더스의 김이라 불린데.”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7 편의 메타 분석도 믿을 수 없는데, 홀로 제약회사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그 동양인의 아이큐가 500 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더구나 그 프로젝트들도 시간이 지나면 세계 유수 학회지에 발표될 것이다.

그러면 닥터 김의 실적은 하늘 끝이 아니라 우주 끝까지 치솟게 된다.

“믿을 수 없어. 미라클(Miracle)…….”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라클(Miracle).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단어였다.

***

진현은 오랜만에 병원장 제임스를 다시 만났다.

“부르셨습니까?”

“아! 어서 오세요! 뭐 마실래요? 커피? 티?”

병원장 제임스가 과장되게 그를 환영했다.

기대야 했었지만 단 두 달 만에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실적을 거두었으니 당연히 환영할 만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따돌림을 당했던 진현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시원한 물이면 됩니다.”

“아, 아이스 워터?! 미세스 미셸, 최고급의 아이스로 준비해 주세요.”

제임스의 호들갑에 미셸은 웃음을 짓고는 시원한 물을 준비해 왔다.

제임스는 감탄을 토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연구들을 고안하고 발표한 것입니까? 그것도 고작 두 달 만에.”

진현이 낸 논문들은 단순히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의학 가이드라인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파격적인 결과를 담은 연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현이 일부러 머릿속에서 그런 연구들만 끄집어냈으니까.

“지금 각 학회에서 다들 난리입니다. 닥터 김의 연구 결과 때문에 가이드라인을 바꿔야 할 판이어서요. 저도


왕년에 연구 좀 했는데, 이건 아예 게임이 안 되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 닥터 김은 인간이
맞긴 한 것입니까?”

제임스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보듯 진현을 바라봤다.

하나만 써도 세계적 대가라 인정받을 논문을 7 편이나 썼다.

이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었다. 불가해의 영역을 해낸 것이다.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에이미가 말한 대로 이 동양인 청년은 미라클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네?”

“시간이 무척 많았습니다. 외과에서 아무런 일도 주지 않았으니.”

진현답지 않게 불쾌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제임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 외과의 따돌림은 진현이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고 싶었던 제임스가 방조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따돌림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극복하다니?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하지? 불쾌하게 생각해 다른 병원으로 가면 안 되는데.’

벌써부터 미국 내 최고 병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임스라도 다른 병원의 동양인 레지던트 중 진현과 같은 성과를 낸 이가 있다면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넣을 것이다.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문제는 진현과 세인트 죠셉이 맺은 계약이 임시 고용이란 것이다. 진현이 떠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제임스는 만약을 대비해 정식 채용 계약을 미뤘던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하하, 닥터 김.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제가 신경을 못 쓴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제임스는 분위기를 만회하러 어색하게 웃었으나 진현은 짧게 답했다.

“저는 연구자(Researcher)가 아니라, 환자를 보는 의사(Surgeon)니까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제임스는 진현이 단단히 마음이 상했음을 눈치챘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그는 미셸에게 말했다.

“미셸, 닥터 김의 스케줄을 누가 관리했었죠?”

“치프 마이클입니다.”
“마이클 좀 이리로 불러주세요.”

“지금요?”

“네, 응급 환자 없으면 지금 바로 오라고 해주세요.”

진현은 제임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빤히 쳐다봤다.

곧 완고한 인상의 마이클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병원장의 갑작스런 부름에 놀란 눈치다.

“무슨 일입니까?”

제임스가 진현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치프 마이클.”

“네?”

“여기 닥터 김의 스케줄을 지금까지 어떻게 관리했죠?”

마이클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그는 진현을 없는 사람처럼 방치했고, 그건 명백한 따돌림에 인종차별이었다.

“그, 그건…….”

“정확히 말씀해 보세요.”

“…….”

그러나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젠장.’

제임스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마이클이 한 처사는 직장 내 따돌림과 인종차별에 해당됩니다. 알고 계시죠?”

“죄, 죄송합니다.”

결국 마이클은 고개를 숙였다.

미국이라고 직장 내 따돌림과 인종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곳인데 다 똑같았다.

그러나 문제가 불어질 경우의 처벌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됐다.

병원장이 작심하고 책임을 물면 외과 전공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저한테 미안할 것은 없죠. 여기 닥터 김에게 사과하세요.”

“그…….”
골수부터 백인우월자인 마이클은 머뭇거렸다.

내가 저 동양 원숭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다니!

“설마 사과하기 싫은가요?”

제임스의 눈썹이 찌푸려졌고, 어쩔 수 없이 마이클은 사과를 했다.

“미, 미안하다. 스케줄은 다시 재조정하겠다.”

누가 봐도 내키지 않아하는,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

제임스가 말했다.

“잘 안 들립니다, 마이클.”

“……!”

마이클의 얼굴이 화장실의 휴지처럼 구겨졌다.

“미, 미안하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앞으로의 스케줄만 신경 써주십시오.”

기분이 풀릴 사과는 아니지만, 저 백인우월주의자도 자존심이 팍 상했을 테니 이 정도면 될 듯했다.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사이에 너무 몰아붙여서 좋을 것도 없고.

“꼭 제대로 신경 써주세요. 닥터 김의 세부전공이 간(Liver)이니 고려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마이클은 사라졌다.

제임스가 다시 한번 그간의 따돌림을 사과했다.

“책임자로서 저도 사과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아, 네.”

“그리고… 원래 계약했던 연봉이 40 만 달러였는데…….”

제임스는 말끝을 흐렸다.

40 만 달러. 한화로 약 5 억.

연구를 겸하는 대학 병원의 연봉치고 낮은 액수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필드에서 활동하는 잘나가는 의사들의 평균 연봉과 이번에 낸 실적을 고려하면 높은 액수도 아니었다.
분명 다른 병원에선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리라.

‘일단 액수를 올려야 해. 하지만 아직 진료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는데?’

의사는 연구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환자 진료를 같이해야 한다.

특히 외과의 경우 수술 능력이 어느 정도 뛰어난가도 연봉의 중요한 요소이다.

‘연구 실력과 지식은 완벽하지만 수술 능력은 어떨까?’

물론 닥터 김의 실력이 한국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직급을 뛰어넘는, 괴물이라 불릴


정도의 재능.

그러나 의사의 실력은 옆에서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너무 어려 보이는 진현의 외모가 자꾸 의심이 들게 했다.

‘일단 연구적 재능과 의학 지식은 만점 이상인데. 수술 실력이 걸리는군. 수술은 많은 경험이 없으면 완성될 수
없으니.’

제임스는 진현이 아무리 천재라도 차마 수술까지 완숙한 경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닥터 김의 나이와 경력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뭐,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수술 실력을 보고 스카우트한 게 아니라 천재적 연구 재능을 보고 데려온 것이니.

닥터 김은 이미 자신의 자격을 차고도 넘치게 증명했다.

‘아카데믹 서젼(Academic surgeon)으로 임명 후, 연구 쪽에 중점을 맞추자. 수술 실력은 나중에 차차


키우면 돼.’

사실 연구에는 탁월하지만 수술은 못하는 외과 교수도 많았다.

특히 연구의 대가들에게 진료를 빼주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환경상 미국에 이런 의사가 많은데
흠은 아니었다.

연구와 수술은 전혀 별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잘하는 것을 해야지. 어차피 닥터 김 말고도 수술을 할 의사는 많으니.’

그렇게 결론을 내린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다시 정확히 액수를 정하겠지만, 40 만 달러보다는 훨씬 큰 액수… 최소 55 만 달러를 연봉으로


지급하겠습니다. 물론 이 액수는 추후의 실적에 따라 더 오를 수 있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하하.”

55 만 달러!
당시 환율상 한화로 7 억의 거액이다.

최고 수준의 연봉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의사의 천국이라 해도, 연구를 주로 하는 아카데믹 서젼이 이 정도의
연봉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둘의 면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병원장인 제임스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진현이 말한 것처럼 그의 적성은 연구자(Researcher)가 아니라, 의사, 그중에서도 서젼(Surgeon:외과의사)


이란 사실을.

***

본격적 근무를 시작하기 전 주말, 진현은 모처럼 대낮에 오피스텔에 누워 한적히 시간을 보냈다.

‘혜미는 뭐하지? 자고 있겠지? 아니면 당직인가?’

13 시간 시차니 한창 자고 있을 때다.

쓸쓸히 누워 있으니, 그녀가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옆에서 밝은 미소를 보며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문자를 보내볼까? 아니야, 자는데 깨울 거야. 그래도 문자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일어난 다음 봐도 되니
…….’

진현은 갈팡질팡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랑해.]

짧은 문자.

혹시나 답이 올까 멍하니 천장을 보며 기다렸다.

그러나 잠에 들어 못 본 것인지 혜미에게서 답은 없었다.

“…….”

진현은 힘없는 표정을 지었다.

주말에 집에서 쉬니 쓸쓸했다.

차라리 병원에 나가서 일하면 쓸쓸함이 덜하련만, 미국은 노동착취 보호측면에서 레지던트의 시간 외 근무를
엄격히 규제했다.

근무 시간 외에 병원에 머무는 것조차 금지하여 이를 위반 시 병원에 처벌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때 띠링 문자가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14

114. 한국의 닥터 김 (1)

혜미인 줄 알고 반가운 얼굴로 핸드폰을 보니 한국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 되면 우리 데이트나 할래요?]

“……!”

이게 무슨 말?

화들짝 놀라 문자를 자세히 살피니 발신인이 달랐다.

에이미였다.

그녀가 쓸쓸한 시간을 보내는 진현을 배려해 한국어로 문자를 보낸 것이다.

***

어차피 같은 건물에 사니 금방 만날 수 있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내 방은 옥탑방이여서 많이 춥네요. 미스터 김의 집은 괜찮나요?”

에이미의 집은 같은 건물 꼭대기, 즉, 펜트하우스였다. 그런데 펜트하우스를 옥탑방이라 하긴 그렇지 않나?

“저희 집은 괜찮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추울 때 미스터 김의 방으로 피신 가도 돼요?”

“…….”

아니, 그건 좀…….

어쨌든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며 둘은 업타운(Uptown)을 걸었다.

“맨해튼 살면서 주변 구경은 하나도 안 했죠? 구겐하임 미술관은 가봤나요?”

“그게 뭡니까?”

미국에 와서 자유의 여신상도 안 가본 진현이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요? 타임 스퀘어, 소호는요?”

“…센트럴 파크는 봤습니다.”

세인트 죠셉이 센트럴 파크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물론 그저 옆에서 힐끗 봤을 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에이미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김.”

“네?”

“그렇게 일만 하면 안 돼요. 스트레스로 죽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날로 목이 잘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러니 무척 실감이 났다.

“안 되겠어요.”

그러면서 에이미는 진현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인상과 달리 따뜻한 체온이 진현의 손에 전해져 그는 당황했다.

“자, 잠깐…….”

“이리로 오세요. 오늘 제가 맨해튼 속성 관광시켜 드릴게요.”

“소, 손은…….”

“빨리 오세요!”

***

어쨌든 진현은 에이미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로어 맨해튼, 타임스퀘어, 소호, 루즈벨트 섬…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제대로 가본 적 없는 진현에게


뉴욕의 관광지들은 가슴 설레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괜찮았나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맨해튼 서쪽에 위치한 미슐랭 3 스타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굉장한 고가의 음식점으로 하루 종일 얻어먹은 진현이 말했다.

“이건 제가 내겠습니다.”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다 살게요.”

“하지만…….”

“미스터 김 덕분에 회사에서 보너스를 엄청 받았거든요. 그 답례예요.”

헤인스와의 프로젝트는 전부 에이미를 통해 진행했다. 마이더스의 김이라 불리는 그 덕분에 에이미는 회사에서
계속 고공행진 중이었다.

“그래도…….”

“마음 불편하면 다음에 사주세요. 얻어먹을 핑계로 미스터 김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저야 좋죠, 뭐.”

“…….”

진현이 입을 다물자 에이미가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맞아?

곧 단정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최고급 요리를 서빙했다.

“음식 맛은 입맛에 맞아요?”

“괜찮습니다.”

사실 미슐랭 3 스타이든, 뭐든 진현의 촌스러운 입맛엔 다 비슷비슷했다.

삼겹살에 된장찌개가 먹고 싶지만… 그걸 주문할 수는 없으니…….

그는 아쉬운 대로 소고기, 스테이크를 입에 썰어 넣었다.

뭔가 못마땅한 진현의 얼굴에 에이미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걸 본 진현의 눈이 커졌다.

“그건?”

초록색 병의 투명한 액체.

소주였다!

“이거랑 같이 먹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여기 맨해튼 중부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서 팔던데요? 왜, 싫어요? 그냥 집어넣을까요?”

“아니, 좋습니다!”

진현은 그답지 않게 급히 답했다.

프렌치 음식에 소주라니, 해괴한 조합이었지만 진현의 향수를 달래는데 최고의 선물이었다.

“크. 좋군요.”

스테이크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켠 진현은 간만에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미슐랭 3 스타의 레스토랑 직원들은 소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에이미가 워낙 VIP 고객이어서
제지를 하진 못했다.

진현이 좋아하는 소고기 요리, 스테이크를 추가로 주문하고 한국에서처럼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셨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저 쓸쓸할까 봐 많이 신경 써주신 것 압니다.”

오늘의 나들이는 모두 에이미가 신경을 써준 거다. 덕분에 쓸쓸함이 많이 가셨다.

“뭘요. 이거 꼬시는 거예요.”

그녀의 농담에 진현이 웃으며 잔을 드는데…….

갑자기 가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부웅! 까앙!

자동차가 충돌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른 검은 자동차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고속으로 달렸고…….

탕! 탕!

진현은 깜짝 놀랐다. 총성이었다!

“이건?”

반면 에이미는 이러한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침착했다.

“마피아예요.”

“네?”

“맨해튼의 클랜시 패밀리일 거예요. 내부가 시끄럽다더니 반기를 든 조직원들을 정리하나 봐요.”

이게 무슨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

“마피아가 그 마피아를 말하는 것입니까?”

“네, 뉴욕에는 미국 최고의 마피아 중 하나인 클랜시 패밀리가 있거든요. 10 년 전부턴 당국과의 마찰 때문에
사채업, 포르노 사업, 카지노 등 합법적인 일만 주로 했는데 몇 년 전부터 다시 좀 시끄럽네요.”

전 세계에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폭력조직단들이 있다.

일본의 야쿠자인 야마구치구미, 중국의 삼합회인 칠성회,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패밀리 등이 그러한 전통의
폭력조직이고 클랜시 패밀리도 그중 하나였다.
“새 대부(大夫)인 매리가 반기를 든 조직원들을 대하는 방식이 거칠거든요. 뭐, 너무 걱정 마세요.
자기들끼리만 저러는 것이지 일반인들은 절대 안 건드는 것이 클랜시 패밀리의 원칙이니까.”

온건하고 합법적인 성향의 클랜시 패밀리가 뉴욕의 밤을 장악함으로써 오히려 범죄율이 낮아지는 효과도 있어서
뉴욕시에서도 웬만한 일로는 클랜시 패밀리를 건들지 않았다.

“정말 가끔 서로 총 쏘는 것 외엔 사채, 포르노, 카지노, 매춘, 유흥을 다루는 일반 기업에 가까워요. 마약도
취급 안 하고, 주식 상장도 했을 정도인걸요. 매리가 대부가 된 후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으니 조금 사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요?”

진현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무슨 일반 기업이냐?! 그리고 마피아의 주식을 사라고?

더구나 이해가 안 가는 말이 있었다.

“매리라면 여자입니까? 대부면 남자 아닙니까?”

“아, 매리는 여자예요. 그것도 젊은. 아, 참 귀엽고 예쁘게 생긴 아이인데 마피아의 대부(Godfather)… 아니,
대모(Godmother)가 되다니.”

뭔가 친근한 말투였다.

“아는 사이입니까?”

“옛날 클럽에서 알게 된 동생이에요. 당시만 해도 그저 노는 것 좋아하는 클랜시 집안의 공주님이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공주처럼 생기긴 했구나.”

“…….”

진현은 젊은 여자가 마피아의 대부가 됐다는 이야기보다 에이미의 인맥이 신기했다.

‘이 여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물과 가까운 거야.’

뉴욕 주지사, 헤인스의 대표이사,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그것도 모자라 마피아 두목도 친구라고?

하여튼 정말 특이한 여자였다.

그런데 에이미가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미스터 김은 상관있을 수도 있겠구나.”

“네?”

아무리 그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재수의 소유자라지만, 마피아와 상관있을 리가 있나?

“매리 취향이 좀 독특해서 동양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그것도 미스터 김 같은 지적인 느낌을 가진 동안(童顔)의
동양 남자를.”

“…….”
에이미는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러니 꼭 조심하세요. 특히 밤길. 납치당할 수도 있으니.”

뭐라고, 이 여자야?

***

어쨌든 진현은 다음 날부터 진료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간이식을 전공한 것을 고려한 간 파트(Hepatology division)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를 따돌렸던 마이클도 같은 파트였다.

“…….”

병동에서 둘은 말없이 교수를 기다렸다.

둘의 관계는 개와 고양이처럼 어색했다.

특히나 마이클은 진현에 대한 감정이 전혀 풀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동양 원숭이 놈.’

물론 그의 연구 실력은 인정한다. 이놈은 동양의 천재라 불리는 외과 과장, 닥터 정을 훨씬 뛰어넘는 괴물 같은


천재였다.

‘그러나 환자를 보는 진료는 달라. 아시아 촌구석의 의대 따위.’

의사는 환자를 보니 의사다.

‘흥, 아무리 연구를 잘해도 환자를 보는 실력이 없으면 진정한 의사라 할 수 없어.’

어떻게든 진현을 폄하하고 싶은 마이클은 아집에 차 생각했다.

곧 병동에 40 대 초반쯤으로 돼 보이는 금발의 잘생긴 교수가 나타났다.

간 파트의 교수 데이비드였다.

“오래 기다렸지? 환자 디스커션(Discussion:토론) 시작할까요?”

“네, 첫 번째 환자입니다. 모레 수술 예정으로…….”

한국과 다른 미국의 토론 문화가 환자 진료에도 여지없이 적용됐다.

한국도 교수와 레지던트가 토의를 하긴 한다. 그러나 그 방향이 무척 수직적이다.

설사 레지던트의 의견이 맞는다고 해도 교수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교수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이건 의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 사회 전체의 분위기였다.

밑의 사람은 윗사람의 의견에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이 환자는 왜 의식이 안 좋을까요?”

“간성 혼수로 보입니다.”

“혈소판이 낮은데 출혈 가능성은 생각 안 해도 될까?”

“그건…….”

말단 레지던트부터 치프까지 의견을 내는 데 주저가 없었다.

교수도 옳은 의견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직급이 낮아도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허튼 생각이라도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틀리다 해도 격려와 칭찬, 건전한 지적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건 확실히 좋은 점이군.’

더구나 의료비가 무지막지하게 비싸 한 환자당 엄청난 시간을 소요했다.

5 명의 환자를 토의하는 데 무려 3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한국이었으면 10 분 안에 끝냈을 텐데.’

진현은 피식 웃었다.

물론 시간 소모적인 면이 있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 가지고 몇십 분을 토의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5 명째 환자의 내용을 정리하며 데이비드 교수가 진현에게 물었다.

“닥터 김은 특별한 의견은 없나요?”

질문을 한 데이비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진현은 현재 세인트 죠셉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동양에서 온 기적 같은 천재로.

‘연구 실력은 미라클처럼 훌륭하지만, 환자 보는 능력은 어떨까?’

데이비드는 궁금했다.

기대도 들었다.

얼핏 한국에서 상당히 뛰어난 진료 능력을 보였단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진현은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저도 다른 선생님들 의견에 동의합니다.”

별로 어려운 환자도 없었고, 세인트 죠셉의 의사답게 다들 훌륭했다.


‘뭐, 다들 아는 내용을 필요하지도 않은데 나서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니.’

쓸데없이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진현의 성격다운 행동이었지만 미국 의사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연구 실적은 좋지만 역시 임상 능력은 떨어지는구나.’

특히 마이클은 대놓고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흥, 동양 원숭인 놈!’

그렇게 회진이 끝났다.

회진이 끝난 후 잘생기고 젠틀한 인상의 젊은 교수, 데이비드가 진현을 불렀다.

“닥터 김?”

“네?”

“내일 뭐하나요?”

교수 데이비드가 물었다.

“특별히는…….”

“그러면 내일 내 수술방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부분 간 절제술이 있으니.”

“……!”

진현은 살짝 놀랐다.

‘생각보다 빨리 수술방에 들어오라 하는구나.’

미국은 한국과 다르게 수술 같은 의학 기술 전수에 인색했다.

법정 소송이 워낙 많다 보니 미숙자가 수술을 하다 생길 문제에 대한 염려 때문인데, 레지던트가 끝날 때까지


집도는커녕 퍼스트 어시스트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다음 말에 진현은 맥이 빠졌다.

“옵저베이션(Observation)하도록 하세요.”

옵저베이션. 수술에 참가하지 않고, 그저 참관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에선 학생이나 하는 일이다.

데이비드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충분히 참관하면 어시스트 기회를 드릴게요.”

(다음 편에서 계속)


# 115

115. 한국의 닥터 김 (2)

진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데이비드, 부분 간 절제술은 당신보다 제가 더 많이 집도해 봤을 것입니다.’

부분 간 절제술은 이전 삶과 이번 삶에서 숱하게 집도해 본 수술이다.

더구나 미국의 대학 교수들은 수술을 일주일에 하나나 많아야 두 개 정도밖에 안 한다.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한국보단 확실히 적게 한다.

따라서 이제 40 대 초반의 젊은 교수인 데이비드보단 매일 공장 돌리듯 수술을 해본 그가 훨씬 많이 해봤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집도할 기회를 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부터 참관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 뒤로 진현은 데이비드를 비롯한 여러 교수의 수술을 참관했다.

“닥터 김, 부분 간 절제술의 경우 절제는…….”

데이비드는 친절히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데이비드뿐 아니라 마이클을 제외한 외과의 대다수의 사람은 진현에게 잘해주었다.

어마어마한 연구 실적을 낸 진현을 ‘연구자’로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수술이었다. 아무도 진현에게 수술을 맡기지 않았다.

‘못 미덥긴 하겠지.’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는 됐다. 자신이라도 저 멀리 미얀마쯤에서 의사가 오면 신뢰가 안 될 테니까.

더구나 미국 의사들은 툭하면 고소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술을 최대한 뛰어난 사람과 같이하고 싶어 했다.

물론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병원장 제임스에게 진현이 한국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의사란 것을 전해 듣긴
했으나, 단순히 이야기를 들은 것과 믿고 수술을 맡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진현은 마음을 달랬다.

‘수술을 안 하니 몸은 편하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미국에 왔는데 가만히 놀고 있기엔 손이 근질거렸다. 마치 벤치에 앉아 있는 축구선수가 된
기분이다.

‘기다리자.’

그렇게 몸은 편하지만 손은 근질거리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세인트 죠셉 위쪽에 위치한 맨해튼 끝자락의 음침한 골목에서 일단의 무리가 길을 걷고 있었다.

모두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시칠리아 놈들과 이야기가 잘돼서 다행입니다.”

“그래.”

일행 중 유일한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녀는 화사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장미와도 같은 고혹적 아름다움이
흘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실버 블론드의 머리가 찰랑거렸다.

하지만 여인의 정체를 아는 이라면 단순히 아름다움에만 정신이 팔릴 수는 없으리라.

여인의 이름은 매리.

흔히 피의 매리(Bloody Mary)라고 불리는 그녀는 뉴욕을 주름잡는 클랜시 패밀리의 대모(Godmother)였다.

주위의 남자들은 클랜시 패밀리의 간부였다.

매리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돌아가자.”

“네, 좋은 날인데 와인이라도 준비시킬까요?”

클랜시의 간부, 로버트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로버트는 몸은 곰, 얼굴은 사자처럼 험악하게 생긴 주제에 섬세한 면이 있었다.

또 건방지게 보스인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다. 깍듯한 태도 뒤 일렁이는 그의 열망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밉진 않기에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한잔하자.”
“네, 좋아하시는 보르도 산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보스, 저희도 같이 끼면 안 될까요?”

다른 조직원들이 끼어들었다.

다들 기분이 풀려 있었다.

시칠리아 마피아와 손을 잡고 조직을 배신한 배신자들도 다 처리를 했고, 시칠리아 놈들에게도 거액의 배상금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축제날이었다.

매리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나랑? 너희들 감히?”

“보스, 오늘은 좋은 날 아닙니까? 다들 고생했는데 같이 마십시다.”

클랜시 패밀리의 모두는 매사에 칼 같지만, 조직원들을 아끼는 이 어린 보스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래요, 보스. 같이 한잔합시다.”

매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그래, 어쩔 수 없지. 다 같이 마시자.”

그런데 그때였다.

그 자리에서 도저히 들릴 수 없는… 아니, 들려서 안 되는 소리가 들렸다.

탕!

“어?”

매리는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배가 화끈거렸다.

다시 한번 소리가 울렸다.

탕!

“쿨럭?!”

매리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보스!”

저격이었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신속히 매리의 몸을 감쌌다.

“저쪽이야! 잡아!”
로버트가 급히 지시했다.

몇 명의 조직원이 총소리가 울린 쪽으로 뛰어갔고, 그 방향에서 누군가 부스럭거리며 도주했다.

남은 이들이 급히 매리를 살폈다.

“보스! 보스!”

“쿨럭! 쿨럭!”

그러나 매리는 답하지 못했다. 연신 피를 토하더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보스! 안 돼!”

로버트를 비롯한 간부들의 얼굴이 하얘졌다.

쓰러진 매리의 복부가 빨갛게 물들었고 주변으로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다.

“아, 아…….”

매리는 뭐라 신음을 흘리다 털썩 고개를 떨어뜨렸다.

“안 돼! 보스! 정신 차리십시오! 보스! 매리!”

로버트가 매리의 몸을 안아 들었다.

“꼭 살려야 해! 절대 죽으면 안 돼! 여기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야?!”

“여기 바로 밑에 세인트 죠셉 병원이 있습니다!”

로버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세인트 죠셉은 뉴욕 시티 최고의 병원이다. 가면 살릴 수 있다. 아니, 살려야 한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보스!”

차에 탄 그들은 대모(Godmother), 피의 매리를 세인트 죠셉병원으로 데려갔다.

세인트 죠셉 병원 응급실의 접수원이 놀라 그들을 맞았다.

“아, 아니? 어떻게 오셨…….”

그러나 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로버트가 멱살을 잡으며 총을 들이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의사 나와!”

하필 그날은 진현이 치프 마이클과 더불어 응급실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

한편 그때 진현은 헤인스의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원채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아 지겨운 마음이 들었으나 진현은 쌓일 업적을 생각했다.

‘업적뿐 아니라, 건당 보수도 어마어마하고.’

프로젝트를 하나 해결할 때마다 그에게 들어오는 돈은 어마어마했다.

헤인스 입장에선 전혀 과한 것이 아닌 게 진현이 손만 대면 그 프로젝트는 대박이 난다.

프로젝트 하나하나의 가치가 상상을 초월하니 진현에게 얼마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았다.

‘뭐, 나야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그렇게 진현이 초고가의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Emergency room(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네, 말씀하십시오.”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째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환자 왔어요! 빨리 와주세요! 꺄악!

“……?!”

-의사 빨리 데려와! 빨리!

진현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전화기 너머로 간호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빠, 빨리 와주세요! 꺄악!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진현은 잠시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나 주저할 상황이 아닌 듯했다.

가운을 한 손에 챙긴 그는 응급실로 날듯이 뛰어갔다.

***

“……!”
응급실에 도착한 진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난장판이었다.

웬 양복 입은 놈들이 위협하듯 서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총까지 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간호사, 환자들 모두


비명을 질렀다.

‘환자 왔다고 한 거 아니었어? 웬 마피아 같은 놈들이.’

그러나 진현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의사 데려와! 빨리!

“꺄악!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양복 입은 남자들 사이로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 배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저 마피아 놈들이 환자와
보호자인 듯했다.

‘뭐야? 일반인들은 안 건든다는 거 아니었어?’

진현은 순간 에이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자기들끼리 싸울 때 말고는 절대 일반인들은 안 건든다 했는데……?

“보스, 정신 차리십시오. 보스!”

“제발!”

그런데 마피아 놈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들 한 여자를 중심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총을 든 남자는 이성이 마비된 듯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저 여자가 누구기에?

“여기 닥터 왔어요!”

진현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만 연락한 것이 아닌 듯 치프 마이클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평소의 오만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이, 이게 무슨?”

마피아들은 기다리던 외과의사가 오자 반색했다.

“닥터! 빨리 오십시오. 빨리 우리 보스를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마이클은 마피아들이 자신을 둘러싸자 두려움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보, 보스? 그러면 이 여자가 마피아의 대모(Godmother) 피의 매리?’


아무리 범죄와 상관없는 일반인이라도 뉴욕을 주름잡는 마피아의 두목 매리가 누군지는 알았다.

마이클은 눈앞이 컴컴해지며 몸을 떨었다. 그는 더듬더듬 매리를 살폈다.

“초, 총상을… 복부 쪽… CT 상 소장…….”

벌벌 떠는 그의 모습에서 평소 잘난 척하는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어리벙벙한 모습에 마피아의 눈이 점차 매서워졌다.

일분일초에 생명이 달린 상황인데 의사가 영 미덥지 못했다.

사랑하는 보스의 중상에 눈물을 흘리던 로버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네?

“너 직급이 뭐야?”

“치프…….”

“레지던트?”

“네, 네!”

“꺼져.”

“네?”

“꺼지라고!”

퍼억!

로버트의 주먹이 마이클의 얼굴에 작렬했고, 마이클은 비명도 못 지르고 나가떨어졌다.

로버트가 분노에 차 소리쳤다.

“지금 장난해?! 이런 놈 말고 외과 교수 데려와!”

다행히 그때 연락을 받은 잘생긴 외과 교수 데이비드가 나타났다.

데이비드의 얼굴도 흙빛이었다. 하필 자신이 당직 교수일 때 마피아 보스가 총에 맞아서 오다니.

‘젠장.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

데이비드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마피아들에게 다가갔다.

“제가 담당 교수입니다. 환자를 봐도 되겠습니까?”

“꼭 잘 봐주십시오.”
데이비드는 그 말이 잘 못 보면 가만 안 두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크게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재빨리 그녀를 진찰했다. 그리고 미리 시행해 둔 검사도 확인했다.

그런데 진찰을 하면 할수록 데이비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최악의 상태였던 것이다.

마피아 간부 로버트가 다급히 물었다.

“어떻습니까?”

데이비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응이 무서웠지만 사실대로 설명해야 했다.

“…어, 어렵습니다.”

“네?”

데이비드는 떨리는 손으로 CT 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손상된 부위가 큽니다. 소장, 대장 일부… 그리고 간도 상했습니다.”

“……!”

툭하면 총에 맞고도 살아나는 영화와 다르게 총상은 끔찍하리만치 무서운 상처이다.

총알이 지나간 경로 안에 든 장기가 모조리 찢어지고 터지기 때문이다. 손상된 장기는 모조리 자르고 새로 이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부위들은 사실 수술하면 큰 문제가 안 되지만 대동맥이 손상된 것이 치명적입니다. 내부에서 파편이
터지는 양상의 총알은 아니지만, 일부 조각이 대동맥 하부를 찢었습니다. 이럴 경우 수술해도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습니다.”

대동맥이 다친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16

116. 한국의 닥터 김 (3)

그 말에 마피아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뒤덮였다.

특히 그녀를 연모하던 로버트의 슬픔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야.”
“네?”

“아니라고! 이 돌팔이 자식아!”

“……!”

“살려내! 무조건 살려내!”

“꺄아악!”

로버트는 다시 총을 들어 사람들을 위협했다. 간호사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데이비드도 공포에 질려 양손을 들었다.

“하,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닥쳐!”

로버트의 눈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살려내지 않으면 너희들 다 죽은 목숨이야! 다 죽여버릴 거야!”

광기마저 느껴지는 모습.

“로, 로버트. 진정해.”

“닥쳐! 너 먼저 죽고 싶어!”

다른 마피아가 지나치다 생각했는지 그를 말렸으나 로버트는 버럭 화를 냈다.

데이비드는 벌벌 떨었다.

“하, 하지만…….”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왜 총 맞고 온 것을 여기서 화풀이야. 더구나 그냥 장기가 아닌 대동맥이 찢어졌는데 어떻게 하라고!’

물론 혈관 파트(Vascular part)의 전문가가 대동맥을 수술하면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10%도 안 되는 희박한 확률이고, 아무리 세인트 죠셉이라도 혈관 파트의 전문가가 항상 대기하고 있진
않는다.

‘혹시 대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총 들고 날뛰는데 수술하러 나오진 않겠지.’

데이비드도 당직만 아니면 코빼기도 안 비쳤을 것이다. 아니,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망갔을 것이다.

‘젠장. 어떻게 하지? 저 미친놈이 총을 쏘면…….’

다른 마피아들보다 저 곰 같은 인상의 미친놈이 문제였다.

마피아 동료들이 말리고 있지만,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날뛰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한 것도 저놈이었다.

“살려내! 당장! 죽고 싶지 않으면!”

타앙!

급기야 로버트가 총을 발사했다.

“꺄악!”

“살려주세요!”

다행히 허공으로 쏜 탄이었지만 응급실의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환자를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어린 동양의 청년이 흰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너는?”

로버트가 물었다.

“김진현이라 합니다. 닥터 김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진현이 답했다.

***

“다, 닥터 김?”

데이비드가 놀라 진현을 불렀다.

응급실 모두의 시선이 진현에게 꽂혔다. 그들의 눈은 한 가지 생각을 담고 있었다.

-저 어린 의사가 미쳤나?

대(大)세인트 죠셉의 교수도 살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서다니?

그것도 총 든 마피아에게.

이건 용기가 아닌 무식한 만용이다.

“닥터 김! 물러가요! 혈관 파트(Vascular part)를 전공하지 않는 한 손도 댈 수 없는 부상이에요!”

하지만 진현은 총을 든 마피아, 로버트의 눈만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환자를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

로버트는 입을 열지 않고 빤히 진현을 바라봤다.

응급실의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저 흉악한 마피아가 건방진 동양 청년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한다고
생각했다.

“너…….”

그런데 로버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정말로 보스를 살릴 수 있나? 살릴 수 있냐고!”

간절한 목소리.

진현은 답했다.

“살릴 수는 없습니다.”

“……!”

모두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총 든 마피아에게 저 따위 대답이라니?

진현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무조건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걸 원하면 병원이 아니라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야겠지요. 이런 부상의
경우, 통계학적으로 수술하면 10% 살고, 90%는 죽습니다. 즉, 치료해도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

“하지만 손 놓고 있으면 무조건 죽습니다. 일말의 확률일지라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선 수술을 해야 합니다.
수술에 동의해 주십시오.”

로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현의 말에 담긴 마음을 느낀 것이다.

이 어린 의사는 만용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그저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로버트는


진현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그걸 느꼈다.

“대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일분일초가 급하니 빨리 결정을 해주십시오.”

“…대동맥 수술은 해봤나?”

로버트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믿음을 주는 눈빛과 달리 얼굴이 너무 어렸던 것이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봤습니다. 많이. 이런 부상도 치료해 봤습니다. 살린 적도 있습니다.”

“……!”
의대생처럼 보이는 얼굴로 대동맥 수술을 많이 해봤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흔들림 없는 확고함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결국 로버트의 마음이 무너졌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달리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도 없었다.

“꼭… 꼭 보스를 살려다오.”

그러면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다고 총 들고 설친 게 용서가 되진 않지만.’

사실 진현도 많이 떨렸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의사일 뿐 범죄와는 전혀 연관 없는 일반인이었으니까.

솔직히 도망갈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그러나 살릴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게 도망을 가는가?

더구나 이 자리에 혈관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전 삶에서 혈관 파트(Vascular part)를 전공했던


자신밖에 없었다.

“대신 치료하기 전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총 집어넣어 주십시오.”

“……!”

응급실의 모두가 깜짝 놀라 진현을 바라봤다. 그러나 진현은 굽히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지방 대학병원에 근무할 때도 가끔씩 조폭들이 난리 친 적이 있다.

지방 거점 병원이라 근처에 제대로 된 응급실이 그가 근무하는 병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끌려다니기 시작하면 끝이야.’

물론 이들은 단순히 시골 조폭들이 아닌 세계적인 마피아지만 다 똑같았다.

폭력배들이 폭력으로 의료진을 위협하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다.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여기는 환자가 치료받는 응급실입니다. 그러니 총을 집어넣어주십시오. 그리고 총을 들고 있으면 저희가 치료에
집중할 수 없으니 환자에게도 안 좋습니다.”
로버트는 엉거주춤 총을 집어넣었다.

진현의 차분한 질책에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다, 다른 조건은 뭐냐?”

로버트는 두 가지 조건 중 나머지 하나를 물었다.

진현은 말했다.

“환자분이 살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뭐라고?”

“그 말 그대로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기적을 바라야 할 만큼 상태가 안 좋으니.”

로버트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진현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매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신은 밖에서 기도해 주십시오. 교회에 가도 좋습니다. 어쨌든 기도해 주십시오.”

***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어 곧바로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원체 상태가 중해 라이브 영상까지 찍는, 최고의 시설이 준비된 수술장 1 번 방으로 옮겼다.

우습게도 어시스트는 마이클의 몫이었다. 달리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내가 왜!’

마이클은 항의했으나 로버트의 눈짓 한 번에 찌그러졌다.

그런데 수술을 시작하려는데 데이비드가 진현을 말렸다.

“닥터 김. 난 이 수술 반대예요.”

“어째서입니까?”

“닥터 김은 이 환자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데이비드는 열변을 토했다.

“분명 죽을 거예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세요?”

옆집 똥개가 죽어도 의사에게 책임을 물리려는 미국인데, 무려 마피아의 대모다. 그 끔찍한 후폭풍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그래도 살릴 가능성이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

진현은 씁쓸히 웃었다.

“저도 이런 부담되는 환자 싫습니다. 편하고 확실히 좋아질 쉬운 환자만 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의사가 된 게 죄이지요.”

그래, 진현도 이런 환자 싫었다.

누가 좋겠는가?

하지만 원하는 환자만 볼 수는 없다. 이건 의사의 업보였다.

‘그래, 의사의 업보지.’

의사가 된 순간 생명에 대한 책임이 생긴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업보였다.

진현은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진현은 데이비드를 스쳐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수술장엔 마이클이 뻣뻣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전신 마취된 채 기관 튜브가 꽂혀 있는 매리를 보며 진현은 수술복과 수술 장갑을 착의했다.

‘수축기 혈압이 70.’

모니터를 본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간당간당한 쇼크 상태였다.

‘살릴 수 있을까?’

솔직히 진현도 회의적이었다. 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의사는 신이 아니니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진현도 지금껏 많은 환자의 생명을 놓쳤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뿐.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장장 16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시작됐다.

***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제임스는 아침에 출근 후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뭐라고요, 미셸?”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제임스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어제 마신 와인이 덜 깼나? 왜 환청이 들리지?

하지만 환청이 아니었다.

“뉴욕의 마피아, 클랜시 패밀리의 대모(Godmother, doyenne) 매리가 저격당해 우리 병원에서 수술


중입니다.”

“마피아 놈들이 얌전히 있었나요?”

“아니요. 응급실에서 총 들고 난리 쳤고, 지금은 수술장을 점거 중입니다. 수술이 진행 중인 1 번 방을 쥐도 못


들어가게 삼엄하게 경호하고 있어요.”

신문에 날 대형 사고였다.

“왜 이런 일을 이제야 저한테?”

“어제 밤에 연락 드렸는데, 전화 안 받던데요?”

Shit!

제임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제 금발의 샌디와 너무 열정적인 밤을 보낸 것 같다. 취해서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었나요?”

“큰 부상이었습니다. 죽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소장, 간, 대장은 물론이고… 대동맥도 찢어졌다 합니다.”

그 말에 병원장 제임스의 눈이 커졌다. 그 정도면 무조건 죽을 상처인 것 같은데?

“아니, 어제 몇 시에 온 거예요? 아직 살아 있나요?”

“네, 살아 있습니다.”

“어떻게?”

미셸은 설명하기보다 영상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녀도 처음에 믿기지 않았으니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나을
거다.
“수술장이 마피아에 점거돼 상황을 알 수 없어 카메라로 내부를 봤는데…….”

마침 수술이 진행 중인 1 번 방은 외부에서 조작되는 카메라로 수술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세인트 죠셉의 우수한 수술 실력을 라이브로 방송하기 위해 마련한 최고 시설의 수술방이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전산에 접속해 암호를 넣으니 병원장실의 대형 브라운관 화면에 치지직 수술 장면이 떠올랐다.

“이건……?”

“현재 수술 장면입니다. 수술 시각은 현재 10 시간이 경과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브라운관의 화면을 본 제임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저건?”

믿을 수 없는 솜씨의 수술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누가 저런 수술을?

미셸이 입을 열었다.

“원래 진즉 죽었어야 할 부상이지만… 매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수술장에선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임스가 경악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군가요? 저 말도 안 되는 솜씨의 주인공은?”

카메라의 각도상 집도의가 누군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저런 미라클(Miracle)한 수술을 한단 말인가?

미셸은 말했다.

“한국의 닥터 김입니다.”

한국의 닥터 김.

김진현을 뜻하는 호칭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17
117. 한국의 닥터 김 (4)

그리고 라이브 영상을 본 것은 제임스뿐이 아니었다.

세인트 죠셉의 모든 의사가 진현의 수술을 바라봤다. 당연했다. 마피아의 대모 매리의 수술이니까.

관심 없던 사람들도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상에 접속했다.

“팀, 보고 있어?”

“뭐가?”

“지금 빨리 전산에 접속해 1 번 방 수술을 봐봐.”

“왜?”

“빨리! 장난 아니야! 너도 봐!”

외과 레지던트인 팀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산에 접속했다.

‘뭐지? 원래 이렇게 남의 수술 장면을 보면 안 되는데…….’

그러나 수술 장면을 본 그는 뻣뻣이 굳었다.

그리고 그것은 팀뿐이 아니라 수술 장면을 본 모든 이가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렇게?”

“이런, 크레이지(Crazy)!”

모스키토가 허공을 갈랐다. 피를 뿜는 동맥을 한 손 타이가 지혈했다.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막힘없이 수술이 이어졌다.

그 엄청난 손놀림을 본 외과 의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솜씨였다.

“누구야? 지금 수술하는 집도의가?”

“잭슨? 로이? 노아?”

세인트 죠셉 내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 외과의사의 이름이 주르륵 올라왔다.

하지만 답은 아는 누군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러면? 저건 마스터 서젼(Master surgeon)급의 손놀림이라고.”

마스터 서젼(Master surgeon).

최고 권위의 외과 의사에게 주어지는 영광된 호칭을 뜻한다.

“한국에서 온 닥터 김이야.”
“닥터 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다 곧 무릎을 딱 쳤다.

“닥터 김? 그 닥터 김? 논문을 아이큐 500 의 외계인처럼 찍어낸다는?”

“그래, 그 닥터 김이야. 한국, 아니, 외계에서 온!”

“아니, 정말이야? 아무리 연구를 괴물처럼 잘한다지만… 저 수술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수술을?

“저 정도면 거의 마스터 서젼급인데…….”

그때 누군가가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미라클(Miracle)… 말도 안 돼.”

미라클(Miracle).

장내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단어였다.

***

한편 진현은 자신의 수술이 병원 내부의 전산으로 방송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영상 카메라는 외부에서 조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수술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지난 것이지?’

얼핏 10 시간이 지난 것은 확인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지난 것인지 모르겠다.

피곤했다.

그는 피로를 털기 위해 눈을 강하게 깜빡였다.

그러나 피로감과 별개로 집중도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외부의 모든 것을 잊었다.

마피아든, 대모든, 누구든.

그저 수술 필드에만 집중했고 몽롱한 정신 속에서 진현의 손이 끝없이 움직였다.

밖의 로버트의 기도 덕분일까?

피곤한 몸과 다르게 손은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마치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기적적으로 대동맥을 지혈하고, 간을 패킹(Packing)하고, 소장을 자르고, 대장루를 만들고, 썩어버린 간을
도려내고…….

일련의 과정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유수(流水)처럼 흐르는 수술 과정은 잘 정련된 아름다운 연주와도 같다.

옆에서 어시스트하는 마이클은 수술 내내 경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경외심이 들어찼다.

수술 1 시간쯤 뒤늦게 합류한 데이비드도 마찬가지다.

진현이 홀로 수술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이 집도하려고 들어왔다 진현의 솜씨에 압도당해 어시스트를 서고
있는데 경악이 끊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둘은 끊임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괴물 같은…….’

하지만 그들의 경악과 다르게 진현의 수술 솜씨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진현은 지난 삶을 포함해, 이번 삶까지 십수 년이 넘게 수술장에서 각고의 세월을 보냈다.

기나긴 시간, 피나는 노력.

그 결과 그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만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좋은 컨디션 덕분인지 지금은 평소보다도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노력으로 탄생한
그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철컥!

진현의 모스키토가 혈관을 집었다.

피를 쏟던 마지막 혈관이었다.

“후우.”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그래도 깔끔한 기분이 들었다.

‘고비는 넘겼어.’

진현은 마취과 쪽에 위치한 모니터링 기계를 바라봤다.


혈압 90/50 맥박 120.

정상 수치는 아니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살릴 수 있어. 아니, 살릴 거야.’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취과 교수가 진현을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대단한 수술을 보여준 진현에 대한 감탄이었다.

“Great!”

진현은 머쓱히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대수술의 끝을 마무리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때 영상으로 수술을 보고 있던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진현에게 박수를 쳤다.

저 한국의 어린 의사가 기적을 만들었다.

***

진현의 수술은 세인트 죠셉 전체를 흔들었다.

“미라클! 말도 안 돼!”

동양의 어린 의사로 무시하던 시선은 완전히 사라졌다. 세인트 죠셉의 의사 모두가 진현을 설명 불가의 괴물로
바라봤다. 대일병원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험악한 인상의 마피아의 간부 로버트가 진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다 당신 덕분입니다.”

“응?”

로버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피로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수술장 밖에서 기도해 준 거 아니었습니까? 그 덕분에 좋아진 것 같은데.”

“그, 그래! 기도했다. 기도했지.”

진현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로버트는 사과도 했다.


“그때 응급실에서 난동 부렸던 것… 정말 미안하다. 원래 우리 패밀리는 일반인들에게 절대 손을 안 쓰는데 그때
보스의 부상에 눈이 멀어서.”

그 말에 진현은 생각했다.

‘부상이 아니라, 사랑에 눈이 먼 것이겠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매리를 향한 로버트의 사랑은 열렬했다.

뭐, 그래도 용서가 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 절대 안 그러겠다. 아마 보스가 일어나면 날 엄청 혼낼 거야. 해고할지도 몰라.”

“그러면 꼭 환자분을 치료해야겠군요. 당신을 혼내기 위해서.”

“그래, 꼭. 반드시 보스를 살려다오.”

로버트는 진현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그들의 대화처럼 수술이 끝났다고 매리가 완전히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매리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마다 진현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살렸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녀는 극적으로 호전돼 중환자실을 벗어나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며칠 뒤, 매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퇴원했다.

아직 퇴원할 상태는 아니었지만 많이 좋아져 패밀리와 연관이 있는 병원으로 옮긴 듯했다.

“후우.”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의별 환자를 다 만난 진현이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특이하고 곤란한 환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데이비드가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데이비드?”

데이비드는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고마워요, 닥터 김.”

“네?”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고맙단 말인가?

데이비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그날 이후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많이 느끼기도 하고…….”

“……?”

진현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비드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말만 할게요. You are the best surgeon. 당신은 최고예요.”

“……!”

그리고 데이비드는 사라졌다.

“뭐야, 갑자기?”

진현은 황당해 중얼거렸다.

마피아 대모를 치료한 여파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수술장에 들어가니 집도하는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닥터 김? 자네가 닥터 김인가?”

“아, 네.”

“자네가 무슨 옵저베이션(Observation:참관)인가. 수술 엄청 잘하던데. 이리로 와서 수술에 참여하도록 해.”

여러 교수가 그에게 수술의 기회를 주었다.

처음엔 퍼스트 어시스트를 시키다 금방 그의 솜씨를 확인하고 본인의 참관, 감독하에 집도를 주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멋진 솜씨에 단독 집도까지 주었다.

완벽한 외과의(Surgeon)로서 세인트 죠셉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더구나 진현은 오랜만에 매스컴도 탔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신문이라는 뉴욕타임즈에!

<한국에서 온 영웅, 닥터 김! 마피아의 대모를 치료하다!>

한국의 찌라시 뺨치는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뉴욕타임즈는 진현의 수술 실력도 실력이지만, 마피아가 난동 칠 때 영웅적으로 나선 용기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모두가 벌벌 떨 때, 동양에서 온 닥터 김이 용감히 나섰다. 그만두라고! 내가 당신들의 보스를 치료하겠다고!>

미국의 기사들은 한국과 다르게 스토리텔링 형식, 즉, 소설 형식의 기사가 많다.


그의 기사도 완전한 소설 형식으로 기사만 보면 그는 총알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선 정의의 용사였다.

‘뉴욕 타임즈도 한국 기사랑 똑같네. 자기들 마음대로 과장이 장난이 아니야.’

진현은 쓴웃음 지었다.

기사 끝에는 그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1 년 사이 발표한 믿을 수 없는 연구실적, 세인트 죠셉의 최연소 교수 예정, 한국에서도 총리를 치료했던 일 등.

‘이력만 보면 나도 참 대단하구나.’

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력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는 대단했다. 본인이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을 뿐이지.

그런데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뉴욕 타임즈의 기사가 한국으로도 나가 혜미와 가족들에게 한바탕 곤욕을 치른 것이다.

-마피아한테 나서다니.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응? 난 너 없으면 못 사는데!

“미, 미안. 혜미야. 진정해.”

혜미는 펑펑 울며 화를 냈고, 진현은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부모님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들의 멋진 기사에 좋아하기 보단 걱정을 했다.

-진현아, 그 무엇보다 네 몸이 최우선이다.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말아라.

-그래, 네가 잘못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다음부턴 절대 이러지 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되는 마음에 진현을 질책했다. 그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고서야 부모들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병원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여, 잘 지냈나? 닥터 김.”

“……!”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곰 같은 몸, 사자 같은 얼굴. 마피아의 간부, 로버트였다.

“아, 무슨 일입니까? 혹시 환자분한테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무슨. 그렇게 치료를 잘해줬는데, 아무런 문제없지.”


“그러면 무슨 일로 저를?”

신사적으로 바뀐 로버트지만 처음 응급실에서의 난동이 떠올라 그와의 만남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로버트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언제 저녁에 시간되나?”

“저녁이요? 그건 왜?”

“초청하려고.”

“……!”

진현은 놀라 그를 바라봤다. 195㎝가 훌쩍 넘는 키라 백칠십 중반의 키인 진현은 한참을 올려봐야 했다.

로버트가 사자 같은 얼굴로 흉포하게 웃었다.

“보스의 초청이야.”

보스.

클랜시 패밀리의 대모(Godmother, doyenne)인 피의 매리(Bloody Mary)가 진현을 초청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18

118. 환각

한국 남산에 위치한 반얀트리 호텔.

이태원과 한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위트룸에서 모델처럼 매끄럽게 생긴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굉장히 잘생긴 외모였지만 온몸이 삐쩍 마른 것이 흠이었다. 얼굴에는 생기가 없어 마약중독자와 같은 퇴폐적인


느낌이 흘렀다.

남자의 이름은 이상민.

대일병원 이사장 이종근의 아들이자, 차기 병원장으로 지목받는 후계자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그였지만, 얼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행복은커녕 그의 눈은 깊은 심연을 헤매었다.

“김진현…….”

문득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항상 그의 앞을 가로막던, 하지만 이제는 눈앞에서 사라진 친구.

아니, 정말 사라진 것일까?


그때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민 씨, 무슨 생각해요?”

단아한 미모의 여인, 이연희였다.

그녀는 룸에 비치된 원두커피를 내려 이상민에게 다가왔다.

“씻었어?”

“네, 무슨 생각해요?”

“그냥…….”

이상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웃음.

“여기 커피 마셔요.”

“커피 말고. 다른 것.”

“뭘요? 술?”

“아니, 너.”

이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예요, 그게.”

“이리로 와봐.”

이연희의 입과 그의 입이 하나로 겹쳐졌다.

짧지만 긴 입맞춤을 끝낸 후 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의 키스는 달콤하기보단 썼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항상 그랬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냥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

이상민은 웃더니 말했다.

“우리 결혼할래?”

“……!”

이연희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나 싫어?”

“그건 아니지만…….”

그녀는 주저하다 말했다.

“상민 씨는 나 좋아하지 않잖아요.”

알고 있었다.

함께 있어도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그의 눈은 항상 공허했으니까.

그런데 이상민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상관없지 않아?”

“……!”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왜일까?

그 순간 그녀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어린 얼굴에 깊은 눈, 그녀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 남자. 김진현이었다.

‘상민 씨를 싫어하진 않아.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이상민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감정을 모르면서도 왜 그의 옆에 계속 있는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그녀는 아직도 가끔 김진현이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를 때마다 아팠다.

“그냥 해본 말이니, 너무 정색하진 말고.”

이상민이 룸의 홈 바(Home bar)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꺼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도 한 캔 주세요.”

이상민은 그녀에게도 맥주를 건넸다.

“그런데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계속 악몽도 꾸고. 깨어 있을 때도…….”

이연희는 조심히 물었다.

이상민이 악몽을 꾸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최근엔 뭔가 이상했다.


그는 씽긋 웃었다.

“신경 쓰지 마. 그러고 보니 참, 내가 헷갈려서 묻는 건데… 정신분열병(Shizophrenia)도 유전이 되던가?”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건 상민 씨가 더 잘 알지 않아요? 한국대 차석이잖아요.”

그녀는 그런 것은 왜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민은 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남산 터널을 지나가는 차들이 반짝반짝 불빛을 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재미없군.’

이상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뚝. 뚝.

피가 떨어진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들이 눈에서 피를 흘리며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악몽으로만 꾸었는데, 이제는 깨어 있을 때에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상민아, 엄마가 자꾸 헛것이 보여.’

정신분열병을 앓던 그의 어머니는 환각(Hallucination)으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했다.

이상민이 겪는 환각의 끝은 악몽과 똑같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나타났다. ‘그’는 피를 흘리지도, 저주를 퍼붓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었지만 이상민은 ‘그’가 어떤 사자(死者)보다도 싫었다.

꿈에서, 그리고 환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는 다름 아닌 김진현이었다.

일그러진 자의식(自意識)의 산물이었다.

‘재미없어.’

이상민은 홈 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마셨다.

알싸한 술기운이 올라왔다.

계속된 환각 때문일까?

대일병원의 완전한 후계가 되었지만 그에겐 모든 것이 재미가 없었다.

***
진현은 매리의 초청을 이리저리 피했다.

당연했다.

‘내가 왜 마피아의 소굴에 가?! 차라리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고 말지!’

그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마피아와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환자와 사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이런 핑계로 계속 거절했으나 로버트가 그 험악한 얼굴을 맨날 들이대니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얼굴만 보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로버트가 씨익 웃었다. 친근함을 표시한 것이지만 마치 사자가 사슴을 먹기 전의 웃음 같았다.

“너무 겁먹지 말라고. 고마워서 초청하는 것이니. 보스가 닥터 김을 무척 보고 싶어 해. 입원할 때 너무 몸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인사도 못한 것 같다고.”

“인사 안 해도 되는데…….”

로버트는 진현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차에 태웠다.

“자, 타.”

진현을 모시고(?) 가기 위해 가져온 차량은 무려 벤틀리였다. 최소 2 억에서 3 억은 하는 차를 보니 나름 위로가


되었다.

‘그래, 이왕 납치될 거면 좋은 차로 납치되는 게 좋겠지.’

검은 양복을 입은 마피아가 운전석에 앉아 진현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닥터 김.”

“네.”

마피아 간부 로버트도 진현의 옆에 앉았다.

앞에도 마피아, 옆에도 마피아.

늑대 우리에 갇힌 토끼의 기분이 되어 진현은 정자세로 앉았다.

“하, 하!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니 그러네.”

로버트의 말에 진현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지난번 응급실에서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안 긴장해?!’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벤틀리가 멈췄다. 그것도 매우 익숙한 동네에서.

“……?”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로버트가 말했다.

“다 왔어. 내려.”

“하지만 여긴?”

우리 집인데?

정확히는 그가 사는 오피스텔이 위치한 건물 앞이었다.

로버트가 손을 뻗어 진현이 사는 건물의 옆 건물을 가리켰다. 이 근방에서도 가장 높은 초고층의 빌딩이었다.

“저기야.”

진현은 말뜻을 이해 못했다. 저긴 다국적 기업인 레이드의 본사라고 들었는데 저기라니?

로버트가 친절히 한 번 더 설명했다.

“저기가 우리 아지트야.”

“하지만 저긴 다국적 기업인 레이드의 본사…….”

로버트는 진현이 뭘 헷갈려 하는지 깨달았다.

“아, 그 레이드가 우리 거야. 우리 클랜시 패밀리의 상장 기업 이름이 레이드거든. 우리 보스가 CEO 고.”

“…….”

로버트가 씨익 웃었다.

“뭐야, 시대가 어느 땐데 우리가 마약이나 팔면서 총 놀이 하고 있을 줄 알았어? 우린 글로벌 친환경 합법


마피아라고. 물론 탈세는 좀 많이 하지만.”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뭐야!

진현은 자신이 마피아 소굴 옆 건물에 살았다는 사실에 황당함을 느꼈다.

건물로 들어와 보니 대기업 뺨치는 규모의 화이트 컬러 노동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우리 조직원은 아니야. 정식 면접과 시험을 보고 들어온 직원들이지. 이래 봬도 우리 기업은 여러


사원 복지가 잘되어 있어서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다고.”

“원래 미국의 마피아는 다 이렇습니까?”

“아니, 우리만 그래. 전대 보스가 이렇게 바꿨어. 피 없는, 그러나 세계적인 마피아가 되자고. 뭐, 그 과정
중에 암살당하고 지금은 대모 매리가 열심히 그 뜻을 잇는 중이지. 결과는 성공적이고. 여기가 마피아인지,
기업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있는 게 좀 문제이지만. 그래도 마피아스러운 일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피의 매리란 별명은?”


“아, 그건 보스가 빨간 드레스만 좋아해서 그래. 그리고 마피아 보스의 별명으로 멋지잖아. 우리가 일부러
퍼뜨렸어.”

“…….”

그들은 간부 전용의 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보스는 꼭대기 층에 살고 있어. 저격을 피하려고 근처에서 제일 높은 층이야. 헬기를 타고 저격하지 않는 한


난공불락이지.”

어쨌든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착한 마피아든, 나쁜 마피아든 마피아는 마피아이니 얼굴만 보고 곧바로 돌아갈 것이라 진현은 다짐했다.

띠잉.

곧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

발아래로 뉴욕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와 진현은 잠시 압도당했다.

“가자. 보스 기다린다.”

로버트를 따라가니 주거 공간으로 보이는 펜트하우스 옆에 커다란 응접용 객실이 나타났다.

“왔습니다, 보스.”

로버트가 문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가슴까지 파이는 붉은 드레스. 하얀 피부에 장미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얼굴.

그녀, 피의 매리(Bloody Mary)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닥터 김.”

***

그들은 20 명은 충분히 수용할 커다란 탁자에 앉아 식사를 했다.

‘아, 바로 가려고 했는데. 식사라니.’

그러나 아무리 나쁜 마피아는 아니라고 해도, 마피아 보스가 권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몸 성히 보내주길
바랄 뿐.

“음식은 입에 맞으신 가요?”

매리가 스테이크를 썰며 물었다. 중세 귀족처럼 고상한 목소리였다.

“아, 네.”
“다행이네요. 에이미에게 고기를 좋아한단 이야기를 듣고 특별히 준비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정말 진현 취향의 음식이 많았다.

버섯을 얹은, 산채와 발사믹 소스의 감미로운 어쩌구… 이런 식의 이름만 특이한 샐러드 따윈 거의 보이지도
않았고, 주로 고기요리였다.

심지어 한국 요리사를 초빙했는지 갈비와 삼겹살 요리도 있어 진현을 감동시켰다.

‘소주만 있으면 최고일 텐데.’

매리가 다소곳이 웃으며 말했다.

“진작 초청했어야 하는데, 늦었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럴 순 없죠. 무려 제 생명을 구해주었는데. 다 들었어요. 닥터 김이 아니었으면 전 죽은 목숨이었다는걸.


늦었지만 저의 생명을 구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마피아 보스의 고개 숙인 인사에 진현은 급히 손을 저었다.

두 번 감사를 받으면 체할 것 같다.

“정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치료한 것은
아니니 개의치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진현은 물었다.

“그런데 수술 받은 부위는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워낙 부상이 심했던 상태라 아직은 무리하면 안 됩니다. 장을 이어 붙인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꼭
주의를 하십시오.”

“고마워요.”

매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특이한 남자네.’

마피아의 소굴에 들어와 긴장할 땐 언제고 상태를 묻고 걱정하는 건 완전 의사의 모습이다.

‘천생 의사야. 그러니 날 치료할 수 있었겠지.’

그녀도 자신의 부상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들어서 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살려준 게 바로 저 어린
의사였다.
‘매력적이야. 아주.’

동안에 동양 남자, 거기다 지적으로 생긴 것도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감추며 말했다.

“닥터 김은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지만 제 입장에선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로버트를 바라봤다.

“준비한 것을 가져와.”

“네, 보스.”

(다음 편에서 계속)

# 119

119. 대일 그룹의 회장 (1)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로버트가 작은 가방을 가져왔다.

“이게 뭡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한번 열어보기나 하세요.”

어쩔 수 없이 진현이 가방을 여니 안에는 통장 하나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스위스 은행에 닥터 김의 명의로 계좌를 하나 개설했어요. 250 만 달러를 넣었으니 원하는 대로 쓰도록
하세요.”

“……!”

진현은 입을 벌렸다.

250 만 달러면 현 환율로 30 억에 가까운 거금이었다.

“저를 살려준 보답이에요.”

진현은 굳은 얼굴로 가방을 앞으로 밀었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왜요? 너무 거금이라서요? 아니에요. 저 매리 클랜시의 목숨값에 비하면 헐값이에요.”

“아닙니다.”

“그러면요?”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저 응급실에 온 한 환자를 치료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신분이 중요해서 치료한 게 아니라, 그저 치료가
필요하니 치료한 것뿐입니다. 죄송하지만 그날의 일은 저에게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일상적인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도 돈이 좋다.

오죽 좋으면 회귀 후 삶의 목표가 강남 피부과 의사였을까?

지금도 돈이 좋아 각 제약회사와 닥치는 대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특별한 대가를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가지고 왜 특별한 대가를 받는단 말인가? 물론 정해진 보수는 받아야겠지만.

그의 말을 들은 메리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했다.

그걸 기분이 상한 것으로 생각한 진현은 아차 했다.

그래도 명색이 마피아 보스한테 너무 건방지게 이야기했나? 총이라도 쏘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매리는 화내진 않았다.

“닥터 김의 뜻은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네?”

“그거, 이제 저희는 찾을 수 없는데. 닥터 김의 계좌로 넘어가서 이제 닥터 김밖에 못 찾아요.”

“……!”

진현은 당황해 말했다.

“그러면 제가 그쪽으로 송금을…….”

“저희는 정체불명의 돈은 안 받아요. 이래 봬도 투명한 마피아를 표방하거든요.”

진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매리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닥터 김이 안 쓰겠다면 그 250 만 달러는 허공에 날아가겠네요. 스위스 은행만 좋겠어요. 저희는 그 돈에
신경을 끌 거고, 닥터 김도 안 가진다면… 이제 250 만 달러는 스위스 은행 것이지요, 뭐.”
“…….”

자기는 신경 끌 테니 갖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도 30 억 원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곤란하다고.’

지금까지 모은 돈에 이 30 억 원을 더하면 강남에 건물도 살 수 있을 금액이다.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좋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매리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제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 앞으로도 가끔 초대해도 될까요?”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병원 일이 바빠서…….”

“그래도 전 선생님이 수술한 환자인데 가끔 와서 안 봐주게요?”

“…….”

진현이 답을 못하자 매리가 웃었다.

“그러면 가끔 초대하도록 할게요.”

진현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싫다고!’

어쨌든 그 뒤로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매리가 주로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끌었고, 진현이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매리는 프랑스산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생각했다.

‘이 남자, 나쁘지 않네.’

일단 생긴 게 자신의 타입이었다. 동양의 동안(童顔) 청년, 인텔리적인 이미지. 독특한 자신의 취향에 딱
맞았다.

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며 나오는 성격도 진솔했다.

오랜만에 본 마음에 쏙 드는 남자였다.

‘한번 꼬셔볼까?’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진현은 떨떠름히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요. 그냥요.”

그러고 그녀는 고혹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와인을 머금은 입술이 장미처럼 물들었다.

“다음에도 또 이런 시간을 갖고 싶네요, 닥터 김.”

그 말에 진현은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

진현과의 만남 후, 매리는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이동해 뉴욕의 야경을 바라봤다.

“후우.”

“즐거우셨던 것 같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클랜시 패밀리의 최고 간부 중 하나인 로이드였다.

“간만에 완전 내 취향인 남자여서.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을 뺏겼네.”

“납치해 올까요?”

매리는 큭큭 웃었다.

“그럴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담배 좀 줘.”

로이드가 비단에 감싼 시가를 가져왔다.

“그렇게 계속 피다가는 폐암에 걸리십니다.”

“그럼 닥터 김이 치료해 주겠지.”

“닥터 김은 흉부외과가 아닌, 제네럴 서저리입니다.”

“아, 몰라. 잔소리하지 마.”

그러면서 그녀는 후우 담배 연기를 뿜었다.

가죽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로이드.”

“네.”

“닥터 김은 미국에 왜 온 거지?”


“세인트 죠셉에서 굉장한 조건으로 스카우트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닥터 김은 단기간 만에 그 이상의 성과를
내었고요.”

“아니, 그런 것 말고. 한국에서 의사 면허가 정지되었다고 했잖아. 그건 어떻게 된 일이야? 닥터 김이 의사


면허가 정지될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닥터 김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조사한 로이드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원인 불명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써 한시적 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다 합니다.”

“흐음…….”

그녀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범죄조직에 오래 몸담은 그녀의 감이 안 좋은 냄새를 맡았다.

“왠지 구린 냄새가 나는데. 우리도 가끔 쓰는 방법이잖아. 덮어씌우기. 그런 건 아니야?”

“네, 그럴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 의심 가는 자는 없고?”

“의심 가는 자는 없지만…….”

“없지만?”

“적대 세력은 있었습니다.”

“누구?”

“당시 근무하던 대일병원의 이사장입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네, 당시 닥터 김이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중벌이 떨어지도록 브로커를 통해 로비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자가 사건의 배후일 수도 있겠네.”

“가능성이 있습니다. 닥터 김이 1 년 뒤에 한국 대일병원에 교환 교수로 돌아가려 하는 것도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하지만 이미 시신을 처리해 당시의 정황을 더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매리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한 일이야, 안 그래?”

“그렇습니다.”
“한국이라고 했지? 혹시 그쪽에 우리와 끈이 있는 곳이 있나?”

“많습니다. 한 다리 건너면 누구든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상황과 이사장이란 자에 대해서도 조사해 볼래? 힘들까?”

“가능합니다.”

온건적이고 합법적인 성향으로 미국 FBI 와도 끈이 있는 클랜시 패밀리다.

대일 그룹의 전체 회장을 암살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그룹 내 병원의 이사장 정도를 조사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내 생명을 구해준 남자의 일이니 탈탈 잘 조사해 봐. 당시 상황뿐 아니라 이사장한테 구린 구석은 없는지,
비리는 안 저질렀는지. 모두.”

그녀의 입가에 얼음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혹시 알아? 내 생명을 구해준 은혜를 갚을 만한 정보를 얻을지.”

***

한편 한국의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대일병원.

정상에 위치한 이사장실에서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귀가 가렵군.”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충복인 외과의 주임교수 고영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닌데. 기분이 안 좋아.”

그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김진현.

‘김진현, 이놈은 정말…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최근 한국의 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다름 아닌 미국의 김진현이었다.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의 나이로 미국에 날아가 핵폭풍 같은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NEJM 에 2 편, 자마(JAMA)에 2 편, 란셋(Lancet)에 1 편.

세계 3 대 의학 저널에 5 편이라니.

한국의 지방 의과대학에선 개교 이래 1 편도 못 싣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런 논문을 5 편이나 기재했다. 그것도


고작 몇 달 만에!

더구나 한국에 있을 때 기재했던 것을 합치면 9 편이고, 이후로도 거대 제약회사와 합작하여 발표 날만 기다리는


프로젝트도 수두룩하다.

그뿐인가? 미국 마피아 보스를 영웅적으로 치료해 매스컴도 탔다.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한 행위였기에 한국의 언론도 뉴욕 타임즈의 기사를 다뤘다.

<한국의 닥터 김! 죽음을 무릅쓰고 마피아 보스의 생명을 구하다!>

이런 제목의 기사가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었다.

그 기사를 본 이종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봐도 멋진 모습이었다.

‘제기랄.’

물론 이제 김진현, 그 눈엣가시와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애초에 이상민 때문에 그놈을 적대시했던 것이니까.

‘그래도 기분이 나빠.’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김진현을 이대로 두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았다.

“고 교수.”

“네, 이사장님.”

“김진현이 지금 있는 곳이 세인트 죠셉 맞지? 그 정길수가 외과 과장으로 있는?”

“네, 맞습니다.”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길수 이놈은 도대체 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야?’

사실 김진현이 세인트 죠셉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종근은 곧바로 손을 썼었다.

세인트 죠셉의 외과 과장인 한국인 정길수에게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

“이사장님과 정길수 과장은 막역한 사이 아닙니까?”

고영찬의 말처럼 그와 세인트 죠셉의 정길수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의과대학 시절부터 동기였고, 둘 사이엔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친구라기보단 부하지. 학창시절부터 날 윗사람처럼 따랐으니까.’

이종근은 곧바로 세인트 죠셉의 정길수 과장에게 김진현에 대한 메일을 작성해 보냈다.

구구절절 거창하게 썼으나 내용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적당히 잘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길수는 그에게 큰 빚을 진 적이 있으니 부탁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발신 버튼을 누른 이종근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이종근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민 비서가 들어왔다.

“이사장님, 백중현 실장이 왔습니다.”

“백중현 실장이?”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백중현 실장은 대일 그룹 전체 회장인 이해중의 비서실장으로 회장의 양아들로 불릴 만큼 총애를 받아 그룹 내


막강한 실세였다.

“들어오라 하세요.”

곧 딱딱한 인상의 중년 남자, 백중현 실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백 실장?”

“제가 대일병원에 올 문제야 하나 아닙니까? 회장님의 건강 문제 때문입니다.”

원래 이해중 회장은 B 형 간염 보균자로 간이 안 좋았는데, 간경화가 악화되며 최근 들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회장님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안 좋아지고 계십니다. 간수치도 계속 불규칙하고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질책하는 말투였다.

이종근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노친네가 나이 들어서 그런 걸 어쩌라고.’

이해중 회장의 건강은 전적으로 대일병원에서 책임지고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호전을 보이지 않자 그룹 내에서 병원 이사장인 이종근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간 자체가 좋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종근은 궁색하게 말했다.

백중현 실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따지듯 물었다.

“그래도 너무 차도가 없으십니다. 대일병원에서 잘 봐주고 있는 것은 맞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120

120. 대일 그룹의 회장 (2)

“아니, 백 실장?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가 들으면 우리가 회장님 진료를 소홀하기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이종근은 불쾌히 답했으나 백중현은 꼼짝도 안 했다. 오히려 차갑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지금 안 좋아지면 대일 그룹은 산산조각 납니다.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셔야 하니 꼭 힘써주십시오.


만약 회장님에게 불의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대일병원 측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경고하듯 말한 백 실장은 뚜벅뚜벅 이사장실을 나갔다.

이종근은 버럭 짜증을 냈다.

“젠장, 우리가 하나님인지 아나. 노친네가 나빠지는 걸 어쩌라고! 나이가 들면 죽어야지!”

옆에서 듣고만 있던 고영찬이 조심이 말했다.

“회장님의 간 기능이 계속 나빠진다면 간 이식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

“그러면 늦기 전에 간 이식 준비를…….”

그런데 이종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수술하다 잘못되면?”

“네?”

“혹시라도 수술하다 잘못돼서 죽으면 그때는 수술한 사람 목으로 끝나지 않아. 나나 자네나 다 옷 벗어야 해.”

그게 문제였다.

그룹 회장이 대일병원에서 수술하다 죽으면 한두 명 옷 벗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구나 회장은 지극히 고령이라 간 이식 같은 대수술을 버티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회장님은 오래 못 버티십니다. 간부전(Liver failure)이 될 확률도 높아 보이고.


간부전이 오면 얼마 못 버티고 사망할 텐데…….”

고영찬의 말이 옳았다.

괜히 수술을 해 책임을 지고 싶지 않지만, 가만히 놔두면 오래 못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영찬이 묘안을 내었다.

“그럼 다른 병원에서 수술 받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른 병원? 간 이식은 우리 대일병원이 최고야.”

“아니,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 말입니다. 미국 같은.”

“……!”
이종근은 고영찬의 말뜻을 이해했다.

고영찬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보단 미국이 의료선진국 아니겠습니까? 회장님이야 우리 대일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을


고집하셨지만 미국 내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병원을 추천하면 그곳에 가서 수술을 받을 것입니다.”

이종근은 손을 쳤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미국에서 수술을 받게 하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미리미리 백 실장과 동민이를 통해 이야기를 해야겠군.”

이동민. 그의 막냇동생이자 대일 IT 의 사장으로 차후 대일그룹 전체의 후계자였다.

“원체 어려운 수술이니 간 이식은 미국의 손꼽히는 병원에 가서 받는 게 좋겠다고 하면 되겠군. 그런데 어느
병원을 추천하지?”

“이번 년도 미국 병원들의 간 파트 랭킹(Rankinig)을 통해 추천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은 매년 각 파트, 병원마다 랭킹을 매긴다.

모든 과의 1 위, 2 위, 3 위를 대일, 한국대, 광혜 병원에서 독차지하는 한국과 다르게, 미국은 파트마다 뛰어난


병원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게 좋겠군. 정말 좋은 생각이야. 하하.”

이종근은 간만에 크게 웃었다.

고영찬의 기발한 생각 덕에 가장 큰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번 년도 간 파트 랭킹은 지난해와 다르게 세인트 죠셉 병원이 1 위란 것을.

모두 ‘한국의 미라클(Miracle) 김’, 김진현의 무지막지한 논문 실적 때문이었다.

***

며칠 뒤, 한남동 이해중 회장의 저택으로 한 손님이 방문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사십 대의 남자, 이해중 회장의 막내아들이자 대일 IT 의 사장인 이동민이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십니다.”
이동민은 고용인을 따라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고령에도 정정한 이해중 회장이 아들을 반갑게 맞았다.

“동민이 왔느냐? 밥은 먹었고?”

“네, 아버지는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은데 의사 놈들이 자꾸 안정하라 그래서.”

재계 1 위의 회장과 후계자가 나누는 대화답지 않게 정겨운 분위기였다.

돈만 밝히는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막내아들 이동민 사장은 효심이 굉장히 깊었다.

그런 모습을 기특히 여겨 그룹 내 가장 핵심 사업인 대일 IT 의 사장 자리 및 후계 자리를 준 것이고.

“지난번 간수치도 안 좋으시던데. 안정하셔야죠.”

“안정은 무슨. 어제도 라운딩 한 번 돌고 왔다.”

이동민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버지!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흘흘, 괜찮다. 차나 한잔하자.”

탁자에 앉은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더냐?”

“아버지 보러 왔죠.”

“나야 네 얼굴 봐서 반갑긴 하지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또 어떤 놈이 괴롭혀?”

이동민을 괴롭힐 사람들은 단 한 부류다. 돈만 밝히는 가문의 형제들.

자신들을 제치고 막내가 후계로 선정됐을 때 얼마나 반대가 심했는지.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할 말이 있어요.”

“무슨?”

“아버지, 대일병원이 아닌 미국에서 진료를 받는 게 어떠세요?”

이해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무래도 대일병원보단 미국이 더 나을 테니까요.”

“됐다.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그리고 대일병원이나 미국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어.”


하지만 이동민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아직 괜찮지만… 만약 간 기능이 더 안 좋아지면 간 이식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요. 간은 제가 드릴


테니 수술은 미국에서 받는 게 낫잖아요.”

그 말에 이해중 회장은 버럭 화를 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내가 네 간을 왜 받아?! 죽으면 죽었지, 아들 간은 못 받는다. 그런


이야기 다시는 하지 마라!”

워낙 화를 내 이동민은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일병원 그 돌팔이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처음 이 제의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대일병원의 이종근이었다. 아버지를 더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셋째 형인 이종근을 경멸하는 이동민이었지만, 그 의견엔 동의했다.

쓰레기 집합소인 형제 중에서도 가장 쓰레기인 셋째 형 이종근이 이사장으로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일병원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반드시 설득해서 미국에서 치료를 받게 할 거야.’

대일병원 돌팔이들이 말하길 이제 1 년을 버티기 어렵다 한다.

하지만 지극한 효자인 그는 아직 아버지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아버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고령이어도 이렇게 정정하신데 10 년은 더 사셔야지.’

그런 그의 마음속에 한 병원이 떠올랐다.

뉴욕의 세인트 죠셉 병원.

미국 넘버 5 안에 드는 그 병원이라면 이해중 회장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지불하겠어.’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대일 IT 의 사장이자 대일병원을 지원하는 이사회, 대일홀딩스의 최고 대주주인 이동민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든 보답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버지를 구한 의사가 대일병원의 병원장 자리를 원하더라도 말이다.

***

다시 시간이 유수(流水)처럼 흘러갔다.


짙은 겨울에 미국에 도착했건만 시간은 한 바퀴 흘러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사이 진현은 무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면 승승장구(乘勝長驅)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간 진현이 이루어낸 일들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눈이 부실 정도로 뛰어나다’였다.

일단 세인트 죠셉의 모두가 진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냥 인정이 아닌, 최고로!

-미라클 김? 최고지. Great!

세인트 죠셉의 모두가 진현의 이야기만 나오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그만큼 진현은 뛰어난 1 년을 보냈다.

-연구 능력은 아이큐 500 의 외계인, 수술 능력은 마스터 서젼(Master surgeon)급. 한마디로 언빌리버블
(Unbelivable), 미라클(Miracle) 김!

이게 진현에 대한 객관적 평가였다.

진현은 마피아 보스 피의 매리를 수술한 것을 계기로 여러 수술을 집도하기 시작했고, 모든 수술을 훌륭한 솜씨로
성공시켰다.

따라서 한 달, 한 달 시간이 지날 때마다 세인트 죠셉에서의 진현의 위상은 수직상승했다.

대접도 최고가 되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능력을 몇 번이고 보여준 진현을 대우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세인트 죠셉은 그에게 개인 집무실까지 주었다.

지하의 구석진 곳이 아닌 센트럴 파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곳으로.

정식 교수, 그것도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의사로 대우해 주는 것이다.

더구나 진현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연구면 연구. 수술이면 수술. 다 완벽해. 인간이 아니야!

보통 최고의 의학 연구자는 임상 진료에 약하고, 최고의 임상 의사는 연구에 소홀한 면이 있었다.

인간이란 한계상 양측에 모두 탁월한 능력을 보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현은 그런 게 없었다.

연구면 연구, 환자 진료면 환자 진료, 수술이면 수술. 모두 완벽했다.

오죽하면 미국 의사 평가 사이트, RateMD 에서 세인트 죠셉 내 핫(Hot) 1 순위를 했을까?

-Doctor Kim, Score 4.79/5.00!

RateMD 에서 진현의 점수였다.


예약 시간을 지키는가, 친절한가, 설명을 잘하는가, 시술을 잘하는가, 논문 실적, 등등으로 의사들의 점수와
랭킹을 매기는 것인데, 진현에게 진료를 받은 환자들이 지극히 만족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몰아줘 저런
무지막지한 점수가 나온 것이다.

만약 동양인만 아니었다면 점수는 더 높았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중 이런 일도 있었다.

뉴욕 주지사가 그에게 수술을 받으러 온 것이다.

“저에게… 탈장 수술을 말입니까?

그때 진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물었다.

한국 도지사도 아니고 뉴욕 주지사가 나에게 수술을?

금발의 여 비서가 싱긋 웃었다.

“네, 주지사님의 조카인 에이미 양이 극구 칭찬을 해서요. 뭐, 탈장 수술이 큰 수술도 아니고 관련 교수님들이
마침 학회라 일정도 안 맞고요.”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탈장 수술이야 쓱쓱 하고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뉴욕 주지사는 좀…….

“부담 가지지 말고 잘 부탁해요, 닥터 김.”

거듭된 부탁에 진현은 어쩔 수 없이 뉴욕 주지사의 수술을 했다.

당연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수술하니 훨씬 편하군. 진작 받을 걸 그랬어. 에이미가 워낙 추천하여 닥터 김에게 받았는데, 최고의


선택이었어.”

에미이와 똑 닮은 외모의 뉴욕 주지사는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진현을 칭찬했다.

“Great!”

진현은 머쓱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별것도 아닌 수술인데 뭘 저렇게 감탄하나?

어쨌든 그 일로 진현은 다시 한 번 세인트 죠셉 내에서 유명세를 탔다.

“역시 대단해, 미라클 김. 뉴욕 주지사를 수술하다니.”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수술이었습니다.”

진현은 손을 저었다.

그 겸손에 데이비드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해. 어리지만 존경할 만해.’

사실 외모만 어릴 뿐, 진현에게선 깊은 연륜이 느껴졌다.

데이비드는 그게 오리엔탈의 신비인지, 진현 본인의 연륜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닥터 김은 나이와 직급을 떠나 존경할 만한 동료라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데이비드뿐이 아니었다. 세인트 죠셉의 모든 외과의사는 1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진현에게


깊이 매료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1

121. 대일 그룹의 회장 (3)

어쨌든 진현은 그렇게 무탈… 아니, 승승장구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병원장 제임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닥터 김?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무슨 일이지?

의아한 얼굴로 찾아가니 제임스가 두 팔을 벌리며 진현을 환영했다.

“어서 와요, 닥터 김. 아니, 미라클 김이라 해야 하나?”

“미라클… 농담하지 말아주십시오.”

진현은 질색을 했다.

미라클 김.

최근 들어 진현이 가진 별명이다.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진현의 실력을 새로이 볼 때마다 크게 감탄했고, 그 외계인 같은 연구 실적과 최고의
수술 실력에 경의를 표해 진현에게 미라클 김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한국에선 괴물이고, 여기선 미라클이냐.’

경의가 담긴 별명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제임스는 씨익 웃더니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벌써 닥터 김이 우리 세인트 죠셉에 온 지도 10 개월이 넘어가네요. 이제 내년의 정식 채용 계약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아…….”

“세인트 죠셉에 온 뒤 너무 잘해줘서 고마워요. 처음엔 닥터 김이 잘해줄까 반신반의했는데, 지금은 로또에라도


당첨된 기분이에요.”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잘못했으면 이런 대접이 아닌, 한국으로 짐을 쌌어야 했을 것이다.

제임스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회와 상의했는데 지금까지의 미라클한 실적을 고려해서 조건을 더욱 상향했습니다. 이리저리 세부 조건이 더
많지만, 간단히 말해 연봉 70 만 달러, 맨해튼 내 사택 제공. 어떤가요?”

연봉 70 만 달러면 한화로 대략 8 억 이상의 거금이다.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임대료가 비싼 곳 중 하나인 맨해튼


내 사택 제공과 자동차까지.

엄청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아무리 의사의 천국이라지만 이 정도 연봉과 대접을 받으며 지내는 의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데 진현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제임스는 진현이 크게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얼굴이 굳어 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가요, 닥터 김? 전 당신이 크게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병원에서 제시한 조건보다 조금 모자란걸.’

최근 진현은 미국 각지의 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었다.

그중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명문 병원도 있었고, 억 소리 날 만한 연봉을 제안한 곳도 있었다.

제임스가 금방 진현의 상황을 눈치챘다.

“이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이 있군요.”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방금 제시한 조건도 아카데믹 서젼, 즉 연구하는 의사로서는 최고 수준의 대우이다.


문제는 진현이 연구에만 치우친 의사가 아니란 것이다. 외계인 같은 연구 능력에 더해 최고 수준의 수술 솜씨도
가지고 있다.

필드에서 최고 수준의 서젼이 연봉으로 150 만 불까지 받는 것을 고려하면 70 만 달러도 많다고 할 수 없었다.

‘이런 어쩌지.’

제임스는 고심에 잠겼다.

이제 곧 닥터 김이 여러 제약회사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결실이 터져 나올 것이다.

다른 병원으로 닥터 김이 가면 그 연구 성과를 전부 빼앗기게 된다.

‘그건 절대 안 돼!’

결국 제임스는 강수를 두었다.

“80 만 달러. 이 정도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가 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

진현이 답을 하지 않자 제임스는 속이 탔다.

“85 만 달러. 안 되겠습니까? 더 이상은 정말 안 됩니다.”

진현은 속으로 슬며시 웃었다.

‘더 올려볼까?’

계속 그가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과연 연봉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90 만 달러. 더 이상은 저희도 무리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서운하지 않게 나중에 추가 인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제임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부탁하자 결국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티면 몇만 달러 정도 더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으나 더 중요한 사안을 위해 물러서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제임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 지금 승낙하신 거죠?! 잘 생각했습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미라클 김!”

진현도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부족한 저를 이렇듯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그건 겸양의 말이었다.

세인트 죠셉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시한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 위주의 대학이 아닌 돈을 끌어 담는 필드의 병원에서는 100 만 달러를 제시한 곳도 있었다.

‘100 만 달러의 사나이가 될 뻔했는데 말이지.’

진현은 웃음을 지었다.

의사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돈을 더 벌려면 다른 곳에 가는 게 좋겠지만.’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제 돈 많아.’

돈바라기 진현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이제 돈이 넘쳐났다. 마피아 보스 매리에게 받은 30 억 원을


제외하고라도.

이렇게 많이 벌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두 다국적 제약회사와의 수많은 프로젝트 때문이다.

‘그리고 돈보다 중요한 게 있어.’

“제가 세인트 죠셉에 남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진현이 말했다.

“뭡니까? 닥터 김? 개인 연구실이 필요합니까? 제가 제일 좋은 곳으로 물색해 드리겠습니다.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교환교수 때문입니다.”

“교환교수요?”

의외의 말에 제임스는 되물었다.

“세인트 죠셉 병원과 한국의 대일병원은 일정 시기마다 서로 교환 교수를 보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대일병원으로 보내는 교수는 병원장님이 정하는 것이 맞는가요?”

“네, 제가 정합니다.”

“다음 번 대일병원으로 갈 교환교수는 저로 지명해 주십시오. 대일병원 측에서 어떤 반대를 하더라도. 반드시!”

제임스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닥터 김이 처음 세인트 죠셉에 올 때 요구한 조건 중에 대일병원


파견이 있었다.

왜 굳이? 더구나 한창 상종가를 올리고 있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제임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을 생각이라도 하지 않는 한, 제가


지명하는 교수를 그쪽에서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부탁을?”

“그냥…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진현은 그렇게만 답했다.

그리고 문득 창가를 바라봤다. 센트럴 파크를 넘어 서쪽의 드넓은 창공이 펼쳐졌다.

저 멀리 그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민, 이종근.

그들이 죗값을 치르게 해야 했다.

***

병원장 제임스와 면담 후 밖으로 나오는데, 띠리링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네, 김입니다.”

-닥터 김? 나 정길수네. 잠깐 시간되나? 지금 볼 수 있을까?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길수면 세인트 죠셉 외과의 과장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따로 보자고 부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네, 알겠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병원장실과 정길수의 교수실은 멀지 않았다.

곧 방에 도착하니 수북이 쌓인 논문 서류 사이로 날카로운 인상의 정길수가 보였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정길수의
연륜을 보여줬다.

“부르셨습니까?”

“영어.”

“네?”

“병원 안에선 영어로 말하게.”

“아, 죄송합니다.”

진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만에 한국인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그는 이번엔 영어로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네. 앉게.”

진현은 엉거주춤 정길수 앞에 앉았다.

‘같은 한국인인데 어렵네.’

세인트 죠셉 내에서 가장 불편한 의사를 꼽으라면 정길수일 것이다. 못된 영감 같은 인상을 보고 있으면 절로


긴장이 됐다.

“왜 그렇게 했나?”

“네?”

“논문 말이야.”

진현은 정길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어떤 잘못을 한 것인지…….”

“네 논문에 왜 2 저자로 내 이름을 넣었냐고. 난 네 논문에 먼지 하나만큼도 도와준 게 없는데.”

“……!”

진현은 정길수의 말을 깨달았다.

‘그거야 관례적으로…….’

논문을 작성할 때 윗사람의 이름을 2 저자나 3 저자로 넣는 것은 의학계에 오래된 관례였다.

따라서 진현은 논문을 쓸 때 과장인 정길수와 각 분야 파트의 주임 교수들을 2 저자로 넣었었다.

정길수를 제외한 다른 교수들은 진현의 그런 예의에 크게 기뻐했었다.

숟가락 하나 안 얹고 큰 실적을 얻은 것이니까.

“예의상 그런 것은 아는데, 그건 좋은 관례가 아니야. 공동 저자는 논문에 기여한 사람으로 적어야지. 앞으로는
이러지 말게.”

“네, 죄송합니다.”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딱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존경할 만한 자세긴 했다.

“그리고…….”

또 무슨 쓴소리를 할지 진현은 긴장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들렸다.

“나쁜 이야기는 여기까지. 트집을 잡아야 하는데 이것 말고는 잡을 게 없군.”


진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진현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정길수가 그를 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 년 동안 수고했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부드러운 목소리.

진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정길수가 탁자에 놓인 물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간 나한테 서운했지? 같은 한국인인데 하나도 챙겨주지 않고.”

“아, 아닙니다.”

“원래 이런데 나와서 한국인들끼리 챙기고 뭉치는 건 좋지 않아. 그래도 계속 이야기는 듣고 있었네. 믿을 수
없는 연구 실적들, 탁월한 수술 솜씨. 정말 잘했고 수고했네. 딱히 한국에 애정이 없는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자네와 같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잘했어.”

뭔가 뭉클해지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길수는 잔잔히 웃더니 말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고, 다른 용건이 있네.”

“무엇입니까?”

“이종근이 자꾸 자네를 세인트 죠셉에서 파면시키라는 등, 미친 소리를 계속해서 말이야. 이종근 알지? 그
인간쓰레기 이종근.”

옆집 똥개 언급하는 듯한 목소리지만 엄청난 내용의 말이었다.

진현의 얼굴에 놀람과 분노가 동시에 떠올랐다.

‘이종근… 여기까지 그 추악한 술수를.’

너무 화가나 주먹이 떨렸다.

그런 진현에게 정길수가 말했다.

“원래 처음 세인트 죠셉에 왔을 때부터 자네를 처리 해달라고 나한테 연락을 했는데, 다 무시하고 있었거든.
메일이 오면 스팸 처리하고.”

“…….”
“그런데 어제 또 연락이 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길수가 담담히 말했다.

“닥치고 꺼지라고 했네. 추잡한 짓을 할 거면 네 병원에서나 하라고. 이 자식은 아직도 내가 30 년 전의 자기


꼬붕인 줄 알아.”

“…….”

진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근엄한 얼굴로 그런 욕을 했다고?

“왜 그런 표정 짓나? 잘했지?”

진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놈은 욕을 들어도 쌉니다.”

“그래, 욕을 들어도 싸지. 나랑 같이 학교 다닐 때도 그놈은 진짜 못된 놈이었어. 대일 그룹만 아니면 어디 가서


밥벌이도 못할 놈이 대일병원의 이사장에 앉아서 말이야. 온갖 찌질한 짓은 다 하고 있어. 그놈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봤을 때 편하게 못 죽고, 중풍 걸려 10 년 정도 똥오줌 못 가리며 고생하다 죽을 거야.”

진현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길수 과장은 생각보다 훨씬 특이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2

122. 대일 그룹의 회장 (4)

마주 웃은 정길수는 진현에게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받게.”

“이건……?”

“그간 이종근이 나한테 보낸 메일의 내용이네.”

파일 속 문서들을 확인한 진현의 얼굴에 다시금 분노가 떠올랐다.

무슨 누명을 씌워서라도 그를 파면시키라는 내용이 가득했던 것이다.

정길수가 말했다.

“이종근이랑 무슨 악연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종근이 무조건 잘못했겠지. 자네 다시 한국에 갈 거지?”

“…네.”

“그때 그 메일들을 쓰게. 뭐, 고작 그걸로 그놈을 잡아넣지는 못해도 망신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정길수는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이 메일을 한국 의학계에 공개하면 망신 정도가 아니었다.

의학계를 강타하고 있는, 세인트 죠셉 최고 유망한 의사 김진현을 누명을 씌워 파면시키라고 획책하다니.

그것도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이사장의 직책을 가지고.

그 후폭풍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리라.

“감사합니다.”

“뭘. 나도 그놈과 악연이 깊어. 자네가 제대로 한 방 먹여줬으면 좋겠군.”

“네, 기대해 주십시오.”

진현은 깊은 눈으로 답했다.

그러고 창가를 바라봤다. 어느덧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그래, 기대해도 좋다.

왜냐하면…….

***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났다.

해가 지나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진현은 가벼운 코트를 입고 늦은 저녁에 퇴근을 했다.

‘아직 춥네. 피곤해.’

전날 밤새 간 이식 수술을 집도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도 내일 오전은 쉬니.’

미국이 좋은 점은 밤새 일하면 휴식을 보장해 준다는 점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늦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집을 옮겨 걸어가긴 무리고, 택시나 타야지.’

세인트 죠셉은 정식 채용 계약을 마친 후 그에게 새로운 사택을 제공했다.

기존보다 훨씬 넓고, 최신식의 주거용 오피스텔이었는데 병원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차를 사야 하는데.’

통장에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아직 그는 뚜벅이였다.

차를 사러 갈 시간은 차치하고, 운전면허가 없었던 것이다.

‘아, 운전면허를 언제 따러 가지. 그런데 시간이 안 나는데.’

택시 승강장으로 이동하는데, 갑자기 빠앙 차 경적 소리가 울렸다.


“……?”

놀라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롤스로이스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진현의 드림카인 포르쉐보다 몇 배는 비싼 차의 창문이 스르륵 열리며 실버 블론드에 벽안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이에요, 닥터 김.”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야 닥터 김 보러 왔죠.”

여인이 고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남심(男心)을 뒤흔드는 미소였지만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왜 절 보러 오는 겁니까?”

“보고 싶으니까 보러 왔죠.”

그러니까 날 왜 보고 싶냐고! 그것도 마피아 보스가!

여인의 이름은 매리 클랜시.

뉴욕을 주름잡는 마피아, 클랜시 패밀리의 보스이자 촉망 받는 기업 레이드의 CEO 였다.

‘왜 자꾸 찾아오는 거야. 사람들 오해하게.’

오늘뿐이 아니었다.

매리는 처음의 만남 이후로 몇 번 더 진현을 초청했다.

코앞에 살면서 이리저리 피하는 것도 한계여서, 식사를 몇 번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천청벽력 같은 말을 했다.

-우리 사귈래요, 닥터 김?

-……!

도망치듯 거절했지만, 그 뒤 그녀는 잊을 만하면 찾아와 진현에게 작업(?)을 걸었다.

‘잘생긴 백인도 많은데 왜 나한테 작업을 거는 거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덕분에 세인트 죠셉에는 진현이 마피아 보스의 애인이라는 웃지 못할 소문도 돌았다.

“오늘 밤도 혼자 보낼 거예요? 쓸쓸히?”

“…하나도 안 쓸쓸합니다.”
“그러지 말고 타세요. 닥터 김이 좋아하는 한식 소고기 집 예약해 놨어요.”

한식 소고기란 이야기에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매리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가 후회하게 될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빠앙!

또 차의 경적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크라이슬러가 진현의 옆에 끼익 멈춰 섰다.

“에이미?”

창문이 열리며 도도한 인상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미였다.

에이미를 본 매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미,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미스터 김 보러 왔지.”

“닥터 김은 나와 밤을 보낼 건데? 너는 그냥 네 갈 길이나 가시지?”

“너야말로 미스터 김이 싫어하는데 너무 들이대는 거 아니야?”

“싫어해? 누가 그래?”

두 여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매리가 적극적으로 들이대자 에이미도 자극을 받은 것인지 진현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다.

원래 친한 사이였다는데, 둘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나의 닥터 김에 손대려 하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어, 에이미. 킬러가 집에 찾아온다든지.”

“그래? 난 그전에 네 기업이 부도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클랜시 패밀리의 기업이 잘나간다고 하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에이미의 집안은 정재계를 주름잡는 어마어마한 가문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시지? 닥터 김은 나와 행복하고 즐거운 밤을 보낼 거야.”

“누구 마음대로? 닥터 김은 나와 시간을 보낼 거야.”

두 여인의 다툼에 진현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 나는…….”

그러나 두 여인은 버럭 화를 내었다.


“닥터 김은 가만히 있으세요!”

“미스터 김은 가만히!”

“…….”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 두고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난 임자가 있다고!’

그냥 빨리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

한편 그렇게 진현이 곤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대한민국 재계 1 위 이해중 회장의 저택.

서울의 한남동 한가운데 위치한 그 저택은 어마어마한 크기와 호화로움, 그리고 삼엄한 경호로 대일 그룹의
넘치는 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저택 한편에서 꽃이 피는 듯 화사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혜미가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는 진현이 미국으로 떠난 후, 할아버지인 이해중 회장의 저택에 들어와 생활하는 중이었다.

“연락이 없네, 진현……. 자고 있을 시간은 아닌데…….”

혜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수술 중인가?’

혜미는 핸드폰을 눌러 메시지를 보냈다.

[바쁘지? 힘내고 사랑해. 보고 싶어.]

그래,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미국으로 날아가 그를 안고 싶고,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는 아릿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사랑해… 정말 보고 싶어…….”

그러고 혹시나 답변이 올까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했는데. 난 왜 이럴까?’

못 보면 못 볼수록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움이 갈수록 사무쳤다.


‘진현이가 나한테 마음이 식으면 어떻게 하지? 바람이라도 피면?’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를 믿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모르는 것이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지내는데 누군가 접근하면 흔들리지 않는단
보장이 없었다.

‘안 돼. 난 진현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생각하는 것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보고 싶어, 이 바보야. 바람피우면 절대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해…….’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저택을 관리하는 고용인이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혜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고용인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회, 회장님이 쓰러지셨어요!”

“……!”

혜미의 얼굴이 하얘졌다.

‘할아버지가?!’

혜미는 허겁지겁 이해중 회장의 방으로 뛰어갔다.

“할아버지!”

방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회장님이!”

“잠깐만요! 잠깐만 제가 볼게요!”

혜미는 사람들을 헤치고 이해중 회장에게 다가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녀도 치프급의 내과의사로 응급처치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급히 이해중 회장을 진찰한 혜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간 기능이 악화돼 노폐물이 쌓여 발생하는 간성 혼수야!’

입에서 나는 암모니아 냄새, 떨리는 손(Flapping tremor).

전형적인 간성 혼수의 모습이었다. 원래 안 좋았던 간 기능이 결국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간성 혼수예요! 빨리 병원에 가야겠어요. 앰뷸런스로 옮겨주세요. 빨리요!”

혜미는 다급히 말했다.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간성 혼수가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심각한 상황인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삐보! 삐보!

이해중 회장을 태운 앰뷸런스가 대일병원으로 향했다.

***

-이해중 회장이 쓰러졌다!

대일병원이 난리가 났다.

“반드시 살려야 해.”

회장을 살리기 위해 대일병원 최고의 의사들이 나섰다.

하지만 최고의 의사들이 나섰음에도 회장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간성 혼수인데… 좋지 않아.”

간 이식의 대가(大家) 강민철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간 파트의 또 다른 대가 공민기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좋지 않군요.”

두 대가(大家)의 심상치 않은 대화에 대일 그룹의 비서실장 백중현의 얼굴이 하얘졌다.

“많이 좋지 않습니까, 교수님?”

간 파트의 대가 공민기는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회장님이 의식을 잃은 이유는 간성 혼수 때문입니다.”

“간성 혼수요?”
“네, 원래 간은 몸의 노폐물을 해독하는 기관인데, 그 간의 기능이 악화되면서 해독 능력이 떨어져 노폐물이
몸에 쌓이면서 생기는 혼수입니다. 간성 혼수 자체는 치료하면 되는데… 문제는 회장님의 간이 결국 한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간과 더불어 콩팥의 기능도 같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

백중현의 얼굴이 크게 어두워졌다.

회장의 막내아들인 이동민이 다급히 물었다.

이동민은 회장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자, 효심 깊은 아들로 그룹 내 최고 계열사인 대일 IT 의 사장이었다.

즉, 차기 대일 그룹의 회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안 좋은 것입니까?”

“네… 간 기능도 최악의 상태고, 콩팥도 같이 나빠지고 있는데… 이럴 경우 보통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백중현과 이동민의 눈이 요동을 쳤다.

“아니, 일주일을 넘길 수 없다니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제가 지금 잘못 이해한 것이죠?”

간 파트의 대가 공민기는 주저하다 말했다.

“이렇게 간 기능 자체가 안 좋아지는 경우는 현대 의학으로도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아!”

효심 깊은 막내아들 이동민은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동민이 공민기에게 매달렸다.

“안 됩니다. 무조건 살려야 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습니다!”

백중현도 간절히 부탁했다.

“회장님은 절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대일 그룹은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제발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공민기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룹 회장이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

그 잔인한 선고에 이동민은 눈물을 흘렸다.

비서실장 백중현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간 기능이 안 좋은 게 문제면 간 이식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다른 사람의 간을 받으면 새 간을 갖게 되는 것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123

123. 대일 그룹의 회장 (5)

하지만 공민기는 고개를 저었다.

“간 이식은 이전부터 고려했었으나 회장님께 간 이식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이동민이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간이 없어서 그런 거면 제 간을 주겠습니다. 혹시나 몰라서 이미 예전에 매칭(Matching)


검사도 끝내놨습니다.”

그때 간 이식의 국내 최고 대가인 강민철이 나섰다.

“전 간 이식 파트의 강민철이라 합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먼저 회장님은 너무 고령입니다. 10 시간 이상 걸리는


대수술인 간 이식을 못 버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라면 일단 수술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으나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간에 연결되는 기관인 담관 쪽에 기형이 있습니다. 수술 중 담관을 연결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 굉장히


위험합니다. 수술을 받아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비서실장 백중현은 크게 좌절했다.

‘안 돼! 이대로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대일 그룹은 끝이야!”

백중현 본인도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확률이 높았다.

막내아들 이동민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회장 사후 벌어질 그룹 내의 이권다툼은 차치하고라도 사랑하는


아버지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국내 최고의 대가들이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의사들이 나간 후 대일 가문의 자제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너무 고령이잖아. 그냥 보내드리려 하지 않을까?”

“그래, 의사들도 방법이 없다고 하고.”

“오래 사셨지.”

이동민과 백중현을 제외하고는 어쩔 수 없지, 란 분위기였다.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막내아들 이동민과 백중현만이 유일했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면 형님은 어떻게 할 거유? 정유 쪽 먹었으면 이제 욕심 부리지 마시지?”

“너야말로 텔레콤 쪽 가지고 있잖아. 그만 양보해.”

다들 회장이 죽은 후, 그룹 내 재산싸움에서 자신의 몫을 챙길 생각만이 가득했다.

분통이 터지는 분위기에 이동민과 백중현은 밖으로 걸어 나와 담배를 피웠다.

“빌어먹을 놈들! 자식이란 놈들이 돈에 눈이 멀어서!”

이동민은 욕설을 내뱉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백 실장. 전 아버지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하아,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둘이 이야기해 본들 뾰족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동민이 이를 악물었다.

“난 사실 이 대일병원 의사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만 많으실 뿐 그렇게나 정정하셨는데 방법이


없다니요? 이놈들이 수술 후 잘못됐을 경우 책임을 지기 싫어 그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다른 병원에 가봅시다.”

백중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대일병원이 최고입니다. 특히 간 이식은 강민철 교수가 독보적이고요.”

“미국으로 갑시다.”

“……!”

“어차피 여기에 있어도 죽는다지 않습니까? 미국 최고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봅시다. 미국에서는 혹시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미국 어느 병원으로?”
“지난번 보니 미국 내 간 파트는 뉴욕의 세인트 죠셉 병원이 랭킹 1 위더군요. 그쪽으로 갑시다.”

사실 그들은 지금까지 이해중 회장에게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을 것을 계속 권유했었다.

그러나 회장 본인이,

‘무슨 미국까지 가나? 거기나 한국이나 거기서 거기지.’

이러며 대일병원에서의 치료를 고집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병원엔 연락도 못 해봤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치료를 받기 원하셨는데, 미국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일단 살아야 나중에 노여워라도 하시죠. 어차피 아버지는 지금 의식이 없으니 제 말대로 합시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결국 백중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형제분들도 그러면 같이 미국에?”

“됐습니다. 전부 아버지가 돌아가길 바라는 놈들뿐인데. 미국 가는 것도 반대할 것입니다. 저와 백실장 둘만


갑시다.”

그렇게 이해중 회장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어서 이송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곧 이해중 회장을 태운 전용기가 하늘을 날았다. 세인트 죠셉 병원이 위치한 뉴욕을 향해.

***

전용기 안에서 이동민은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 가득한 구름이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급하게 떠났군요.”

백중현 실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꾸물대다가는 그 돈만 아는 놈들이 미국으로 떠나게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들 자신의 앞으로 떨어질 재물에만 관심 있지, 아무도 이해중 회장의 소생을 바라지 않았다.

“같이 안 가서 혜미 아가씨가 서운하겠군요.”

이동민은 셋째 형 이종근의 딸인 이혜미를 떠올렸다.

그녀도 이해중 회장과 사이가 각별했었다.

그녀, 이혜미는 제일 쓰레기인 이종근에게서 태어난 게 신기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어쩔 수 없지요. 상황이 급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따로 최대한 빨리 따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이동민은 물었다.

“그나저나 세인트 죠셉 병원에는 면밀히 연락을 해놨죠?”

“네,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라인으로 연락을 해놨습니다. 회장님의 상태에 대해선 대일병원에서 전부 자료를
보내놨고요. 간 파트의 주임교수는 부재중이지만, 최고의 의료진으로 대기해 놓겠다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이동민은 전용기에 누워 있는 이해중 회장을 바라봤다. 의식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해중 회장의 얼굴은


황달로 샛노랬다.

‘몇 달 전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버지. 반드시 살려드리겠습니다.’

이동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인트 죠셉에 가면 방법이 분명 있을 거다. 아니, 있어야 했다.

***

가슴이 타는 초조한 비행 후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에 도착한 이해중 회장은 병원 측에서 미리 마련한 앰뷸런스를 타고 곧바로 맨해튼 세인트 죠셉 병원으로
이송됐다.

간 파트의 주임교수는 현재 연구 안식년으로 진료 부재중이라, 잘생긴 교수 데이비드가 대신 그들을 맞았다.

“세인트 죠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데이비드라고 합니다.”

“한국 대일 그룹의 이동민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잘 부탁합니다.”

이동민은 영어로 답했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는 이동민과 백중현은 의사소통에 지장이 전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환자를 보겠습니다.”

미리 비워둔 VIP 실로 이송 후, 진찰을 시작했다.

그런데 진찰을 하면 할수록 데이비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일병원에서 연락 받았던 것보다 상태가 더욱 안 좋았던 것이다.

“이런…….”

이동민은 가슴이 철렁하여 물었다.

“어떻습니까?”
“일단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데이비드는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후 억겁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응급 검사가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하나씩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할수록 데이비드의 얼굴은 무거워져만 갔다.

최악의 상태였다.

“좋지 않군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간 이식을 해야 하는데 나이도 고령이고 환자분의 췌담관 해부학적
구조에 기형이 있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간이식을 시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멀리까지 오셨는데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대일병원의 의사들과 똑같은 이야기다.

회장의 막내아들이자 대일 IT 의 사장인 이동민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데이비드의 손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데이비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대기업 회장이라고 해도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털썩!

이동민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데이비드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일어나십시오!”

“제발… 제발 부탁합니다! 일부러 한국에서 여기 뉴욕까지 왔습니다.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억만 금… 아니,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습니다!”

“하아…….”

데이비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다고 해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진 않는다.

그래도 이동민의 간절함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안 될 거라 생각은 하지만… 저보다 더 뛰어난 의사에게 한 번 더 문의는 해보겠습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이동민과 백중현의 눈이 번뜩 뜨였다.

“네,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입니다. 몇 번이고 기적을 선보인 의사이니 어쩌면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그 의사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같은 나라 사람이니 당신들도 알 수도 있겠군요.”

데이비드는 말했다.

“한국의 닥터 김이라고 합니다. 저희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는 미라클 김이라 부르는 세기의 천재이지요.”

“……!”

***

데이비드가 진현을 소개했다.

“한국의 닥터 김입니다.”

“……!”

이동민과 백중현은 진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어려 보이는 한국 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아니…….”

이동민은 떠듬떠듬 입을 벌렸다.

어떤 고명한 의사가 나타날지 기대했건만 이렇게 어린 청년이라니? 그것도 한국 국적의.

‘아니, 동양에서 왔다고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국 최고의 그룹 대일의 회장인데. 이런 핏덩이를 들여보내?’

백중현의 불쾌감은 더욱 컸다.

그는 진현을 알고 있었다.

‘저 청년은 대일병원에서 천재로 불리다 의사면허가 정지된 그 의사잖아. 아무리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해도
의사면허가 정지된 적이 있는 돌팔이를 소개해?’

한편 진현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곳 미국에서야 대일그룹? 이해중이 누구야? 이러지만 한국 재계에서 이해중 회장의 위상은 대통령 이상이었다.

더구나 연인 혜미의 친할아버지이지 않은가?

자신을 불신의 눈으로 노려보는 이동민도 혜미의 작은아버지였다.

그런 이해중 회장을 진료해야 하다니.

“이분이 그 대단하다는 미라클 김입니까?”

삐딱한 말투였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닥터 김, 여기는 한국 국적의 환자로
간경화가 악화돼…….”

데이비드가 진현에게 이해중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이동민이 돌연 말을 끊었다.

“그만두십시오.”

“네?”

“그만두란 말입니다! 지금 장난하는 것입니까?! 우리 대일 그룹의 회장에게 저런 핏덩이를 뛰어난 전문가라고


소개하다니! 우리가 한국인이라 무시하는 것입니까, 뭡니까?! 제 아버지는 이래 봬도……!”

그 말에 오히려 데이비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닥터 김이 왜요?”

“왜라니요? 저런 핏덩이를! 더구나 저놈은 한국에서 의사면허가 정지된 돌팔이 아닙니까?!”

데이비드의 얼굴이 갈수록 굳어졌다.

“사과하십시오.”

“뭐라고?”

“닥터 김은 제가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동료입니다. 당신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의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닥터 김은! 우리 세인트 죠셉의 닥터 김은 당신들에게 그런 평가를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쾌했는지 데이비드는 언성까지 높였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124

124. 대일 그룹의 회장 (6)


하지만 이동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애송이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이 먼 미국까지 온 것이 아니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하버드나 죤스홉킨스, 메이요, 엠디 엠더슨으로 가는 것인데. 이런 모욕이나


당하다니.’

아버지의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서 당한 모욕이라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이런 모욕을 줘? 빌어먹을 세인트 죠셉 놈들. 내가 대일 그룹의 회장이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설욕을


갚아주겠다.’

한편 그때 진현은 이해중 회장의 검사 결과를 깊은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담관 기형… 어려워.’

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다. 지난 삶에서도 이런 환자를 수술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담관의 연결이 불안정해 담즙이 밖으로 새어 나와 복막염으로 인해 사망했다.

‘한국의 강민철 교수님도 이 사실을 알기에 수술을 포기했겠지.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을까?’

이전 삶에서 그 환자가 죽은 후 진현은 깊은 실의에 빠졌었다. 반드시 살리고 싶었던 환자였기 때문이다.

보호자들은 최선을 다한 진현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했지만 이후 진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환자를 다시 만났을 때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궁구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시도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 그 방법을 쓰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거야. 물론 굉장히 위험하겠지만.’

진현은 이해중 회장의 모습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혜미의 할아버지였다.

살리고 싶었다. 살려서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한 가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모두 진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데이비드가 엄지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역시 미라클 김! 무슨 방법인가요? 담관의 변형이 심해 간 이식 자체를 시도하기가 어려운데요.”

“담관이 문제가 되니 아예 담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리가 문제가 되지만, 장을 절제해 루프를 만들어 간에 직접 연결하는 간-소장 연결술


(Hepaticojejunostomy)을 시행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Roux-en-Y 를 말하는 건가요?”

“그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T-stent 를 이용해…….”

진현의 추가 설명을 들은 데이비드는 감탄을 토했다.

확실히 그 방법이면 가능성이 있다.

어려운 수술이 되긴 하겠으나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명을 살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까.

데이비드가 거보라는 듯 이동민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동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떠드는 거지?’

저 애송이가 뭔가 기발한 발상을 떠올렸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애송이가 뭣도 모르고 소중한 아버지의 몸에 실험적 시도를 하려고 한다는 느낌만 받았다.

결국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두십시오! 지금 장난치는 것입니까?!”

“……!”

“내가 미쳤지. 이따위 병원에 아버지를 데려오다니.”

이동민은 백중현에게 말했다.

“백 실장, 하버드나 존스 홉킨스 병원에 당장 연락하세요. 이런 병원에 더 있다가는 살 사람도 죽겠습니다.


그쪽으로 옮깁시다.”

“네, 사장님.”

그러고 이동민은 데이비드와 진현을 노려봤다.

“당신들 감히 우리를 이렇게 농락하다니.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

***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단단히 마음이 상한 이동민과 백중현은 더 이상 세인트 죠셉 의료진의 진료를 거부했다.

“사장님, 존스홉킨스와 연락이 됐습니다. 곧바로 헬기를 타고 볼티모어로 가면 될 듯합니다.”

“거기서도 또 어중이떠중이가 진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간 파트의 최고 교수인 쿱스 박사가 진료하겠다고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출발합시다. 이 불쾌한 곳에서는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군요.”

“네, 사장님.”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침 뉴욕 상공에 미친 듯한 눈보라가 몰아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도저히 못 뜰 것 같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사정은 알지만… 무리입니다. 지금 헬기를 띄우면 전부 죽습니다.”

헬기 조종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눈보라였다.

‘하필 왜 지금 눈보라가!’

이동민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기상 상태를 봤을 때 오늘내일은 무리였고 최소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밤사이 이해중 회장의 상세가 더욱 나빠진 것이다.

“선생님, 혈압 떨어져요!”

진현과 데이비드가 급히 VIP 실로 들어와 응급처치를 하였다.

“수액 주시고 혈압 올리는 승압제 걸어주세요! 중환자실에 연락해서 빨리 환자 옮길 준비해 주세요!”

그렇게 한참을 부산을 떨고 난 후에야 이해중 회장의 상태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살얼음 같은 안정으로 언제 또다시 나빠질지 몰랐다.

병실도 VIP 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해중 회장의 모습을 보고 이동민은 고개를 떨궜다.


데이비드가 그에게 다가왔다.

“간 기능 악화로 인한 증세입니다.”

“좋아질 수는 있는 것입니까?”

데이비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무리입니다.”

물론 진현이 말한 방법으로 간 이식을 하면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번 이동민의 반응을 봤을 때, 확실하지도 않은 방법을 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동민이 의외의 질문을 하였다.

“지난번 김진현이란 의사가 말한 방법으로 수술해도 가망이 없는 것입니까?”

“……!”

데이비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워낙 고령이고 어려운 테크닉이라 성공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아니,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나…
….”

“안 하면 무조건 죽는다는 거죠? 이식을 하면 적은 확률이나마 살 가능성이 있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데이비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동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다시 말을 이었다.

“어렵고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지만… 저는 닥터 김을 믿습니다. 제가 환자라면 그에게 제 몸을 맡겼을


것입니다.”

“……!”

이동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홀로 남은 이동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환자실을 나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백중현이 다가왔다.

백중현의 얼굴도 침울했다.

간밤의 소란으로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느낀 거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 말에 이동민은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 이해중 회장은 그의 손을 잡고 종종 나들이를 갔었다.

그때의 따뜻한 손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돌았다.

탐욕만 가득한 가족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유일하게 그를 사랑해 준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은 걸까요? 보내줘야 하는데 미련을 못 버리겠습니다.”

백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효심에 이해중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물론 뛰어난 능력이 뒷받침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회장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럴까요?”

이동민은 눈물을 닦았다.

보내줘야 할 때라 생각하지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주책맞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라도 아버지를 살려만 준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텐데.

그때 이동민의 전화벨이 울렸다.

조카 이혜미였다.

욕심 가득한 괴물만 득실거리는 대일 가문에서 유일하게 착한 아이.

“어, 혜미야.”

-흐윽. 작은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할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한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이동민은 조카를 생각해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 괜찮으셔.”

-나, 나……! 지금 뉴욕으로 가려 하는데……!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안 떠서……!

“응, 괜찮아. 여긴 나와 백 실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하지만 그녀가 도착할 때까지 이해중이 살아 있을 확률은 낮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동민은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말 김진현이란 그 젊은 친구가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

절벽에 떨어졌기에 든 생각이었다.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혜미야.”

-흐윽. 네, 작은아버지.

“혹시 김진현이란 의사를 아니?”

-……!

갑작스러운 진현의 이야기에 전화기 너머로 혜미는 깜짝 놀랐다.

-왜, 왜요?

“그냥 어떤 의사인가 해서.”

-…어떤 의사인지 묻는 거예요, 아니면 어떤 사람인지 묻는 거예요?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어떤 의사인지 묻는 거야.”

전화기 너머 혜미의 답이 들렸다. 한 치의 주저도 없는 목소리였다.

-제가 아는 최고의 의사예요.

***

그 뒤 이동민은 김진현이 근무했던 한국의 대일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김진현? 최고입니다.

강민철 교수의 답이었다.

-최고 중의 최고이지요.

최대원의 답이었다.

누구에게도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진현을 평가하는 말은 단 한마디, 최고였다.

한 명, 진현을 나쁘게 평가한 사람이 있었다. 셋째 형이자 이사장인 이종근이었다.

-김진현? 그 녀석 별로인데… 의사면허도 정지되었잖아. 아버지의 상태는?

형제 중에서도 특히나 못난 이종근이 나쁘게 평가하자 역설적으로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앳된 동양인의 얼굴, 그러나 한없이 깊은 눈빛을 지닌 진현이었다.

진현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진다면?”

“오래 버티지는 못할 듯합니다.”

간은 심장과 폐와 마찬가지로 생명에 연관되는 생체 기관(Vital organ)이다.

이렇게까지 기능이 악화되면 무슨 약을 써도 버틸 재간이 없다.

방법은 단 하나.

진현은 조심이 말했다.

“간 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간 이식을 추천하진 않습니다. 너무 고령이고


수술해도 살아날 확률보다 안 좋아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지요.”

의사 입장에서도 이해중 회장은 최악의 환자였다.

일단 나이도 너무 많고, 힘들게 수술해도 안 좋아질 확률이 높다.

사실 순리대로 임종을 맞이하게 놔두는 것이 의사 입장에서는 가장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진현이 수술을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

‘환자가 대일 그룹의 회장이어서가 아니야.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아.’

대일 그룹의 회장? 그게 뭐? 어차피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그렇지만 그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보호자인 이동민이 환자의 소생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도 환자분을 살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

이동민이 놀란 얼굴로 진현을 바라봤다.

그래, 진현도 이해중 회장을 살리고 싶었다.

사랑하는 연인 혜미의 할아버지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수술해도 안 좋아질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그래도… 환자분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습니다.”

“…….”

이동민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젊은 의사를 믿어도 되는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이 한국의 젊은 의사는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아버지를 살릴 수 있습니까?”

“여러 번 말씀 드렸다시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수술을 해도 안 좋아질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늘 그렇듯 진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진심이 담긴 말이 결국 이동민을 무너뜨렸다.

이동민은 한 방울 눈물을 흘렸다.

“잘… 꼭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이해중 회장의 수술이 결정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5

125. 대일 그룹의 회장 (7)

곧바로 응급 수술이 결정되었다. 느긋하게 아침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간을 줄 공여자는 다름 아닌 아들인 이동민이었다.

이식을 위한 매칭(Matching) 검사는 이미 대일병원에서 완벽히 끝내놓은 상태여서 진행에 문제는 없었다.

간을 받을 이해중 회장의 수술은 ‘미라클 김’이 담당하고, 간을 줄 이동민의 수술은 데이비드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후 이동민의 간 일부를 떼어내고 이해중에게 그 간을 이식할 때는 진현과 데이비드 둘이 손을 합칠 것이다.

“잘 부탁합니다, 꼭. 세인트 죠셉에서의 별명처럼 꼭 기적(Miracle)을 이루어주십시오.”

이동민은 수술장에 들어가며 진현에게 말했다.

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동민이 말했다.

“만약 아버지만 살려주신다면 어떤 보답이라도 하겠습니다. 설사 한국의 대일병원의 병원장 자리를 원하신다 해도
드리겠습니다.”

진현은 대일그룹의 후계자답게 농담도 통이 크다 생각했다.


“지금은 수술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됐다.

***

수술 경과 4 시간 후, 진현의 수술방으로 데이비드가 들어왔다.

이동민의 간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이 끝난 것이다. 이제 그 간을 이해중 회장에게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공여자의 간 절제가 끝났네.”

“네, 이제 간을 환자에게 연결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십시오.”

“얼마든지.”

그러면서 데이비드는 진현에게 찡긋 웃었다.

“또 기적을 만들어 보자고, 미라클 김.”

하지만 진현은 마주 웃지 못했다.

곧 이어질 어마어마한 난이도의 수술이 걱정됐던 것이다.

‘잘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런 수술을 앞두고 성공을 확신할 수 있는 의사가 누가 있을까?

강민철도, 아니, 미국의 어떤 의사라도 그러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방법은 하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진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수술장 천장 너머로 있을 하늘을 바라봤다.

이런 환자를 볼 때마다 한계를 마주할 때마다 종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천재니 뭐니 해도 그는 미약한 인간일 뿐이니까.

“시작합니다.”

그 말과 함께 간 이식의 본격적인 부분이 시작됐다.

초고난도의 수술이었다.

***
이동민은 어스름한 빛에 깨어났다.

눈을 뜨자 메스로 갈랐던 배에서 격통이 느껴져 신음을 흘렸다.

“으윽! 아버지는?!”

“아직 수술 중입니다.”

백중현이 답했다.

“아직이요?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난 거죠?”

“수술 시작 후 13 시간째입니다.”

“13 시간이요?!”

이동민은 깜짝 놀라 외쳤다.

예상 수술은 원래 10 시간이었는데, 3 시간이나 경과된 것이다.

“그러면 수술은…….”

이동민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순조롭게 풀리는 수술이 예상 시간보다 오래 걸릴 일은 없다.

뭔가 수술장에서 문제가 생겼기에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간 이식이란 게 워낙 대수술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괜찮겠지요.”

이동민을 안심시키는 말을 한 백중현이지만 정작 본인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수술장에선 특별한 연락은 없었죠?”

“네.”

“하아… 잘되어야 할 텐데.”

이동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계속 시계만 보며 초초한 기색을 보였다.

보다 못한 백중현이 말했다.

“사장님도 큰 수술하셨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푹 쉬십시오.”

이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불안한 걸 어떻게 그럽니까?”

“혹시라도 회장님이 잘못되면 이제 대일 그룹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사장님입니다. 그러니 몸을 돌보십시오.”


그 말에 이동민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잘못되다니.”

백중현은 아차 실수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을 무르진 않았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회장님이 돌아가면 다른 형제분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 겁니다. 사장님이
확고히 경영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대일 그룹은 끝입니다.”

“그런 말 마십시오. 아버지는 일어나 10 년은 더 사실 것입니다.”

“사장님.”

백중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무리한 수술이었습니다. 계획한 대로 잘 끝나도 결과를 보장 못할 수술인데, 벌써 3 시간… 아니, 4


시간이 초과되고 있습니다. 앞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됐습니다. 일단 수술 결과를 기다립시다.”

이동민은 단호히 말했으나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 속에 째각째각 초침만 흘렀다.

수술 시작 후 14 시간을 지나 15 시간에 가까워올 때 결국 이동민이 말했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습니다.”

“네?”

“수술장에 가봐야겠습니다.”

“하,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어차피 수술장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사장님은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제 몸은 괜찮습니다. 진통제를 잔뜩 맞아 지금은 참을 만하고요. 이대로는 초조해 못 견디겠습니다. 수술장


근처로 데려가 주십시오.”

백중현뿐만 아니라 담당 간호사도 절대 불가하다 말했으나 이동민의 옹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문제가 생겨도 전부 이동민의 책임이란 사인까지 하고 나서야 휠체어에 탈 수 있었다.

수술장 입구에 도착하긴 했으나 안의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장님, 그냥 올라가시죠. 여기에 이러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본인 몸도 생각하셔야죠.”

“…잠시… 잠시만 있다가 올라가겠습니다.”

“하아… 그러면 딱 10 분입니다. 10 분이 지나면 병실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수술 종료 예정 환자가 표시되는 전광판의 리스트가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Hae Jung Lee]

드디어 이해중 회장의 이름이 수술 종료 예정 환자 전광판에 뜬 것이다!

“수술 끝나면 이쪽으로 나오는 것 맞죠, 백 실장?”

“네, 맞습니다. 저렇게 뜬 걸 보니 곧 나올 것 같습니다.”

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어떻게 됐을까?

일분일초가 억만 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짧지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 후, 드르륵 수술장의 문이 열렸다.

이해중 회장이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난 것이다!

“거기 비켜주세요!”

선두에 선 마취과 의사가 외쳤다.

진현과 데이비드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둘 모두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수술은?!’

이동민은 속으로 물었다.

안 좋은 대답이 돌아올까 봐 차마 입을 열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때 진현이 이동민을 바라봤다.

데이비드가 진현에게 눈빛을 보냈다.

자신이 중환자실로 데려갈 테니 수술 결과를 설명해 주라는 뜻이었다.

진현이 그들에게 걸어왔다.

“……!”

진현의 피로한 얼굴을 보자 이동민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수… 수술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고 이동민은 눈을 감았다. 결과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들렸다.

“잘됐습니다.”
“네?”

놀라 눈을 뜨니 그, 한국의 젊은 의사 김진현은 피로한 얼굴 속으로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잘 끝났습니다. 물론 정확한 경과는 아직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 수술 자체는
성공적입니다.”

“……!”

이동민은 가슴에 뭉클한 감정이 차올랐다.

수도 없이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한마디만 하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

간 이식 수술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상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식을 받으면 건강해지는 게 아니다. 이식을 받았다는 질병의 시작이다’란 말이 있다.

남의 장기가 몸 안에 들어가 있으니 몸의 부담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면역억제제도 써야 하고, 고령이니 합병증 발생도 눈여겨봐야 했다.

진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해중 회장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정성 때문인지 이해중 회장의 상태는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

이동민은 진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현은 겸손히 말했으나 이동민은 감사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 이 젊은 의사가 기적을 일으켰어.’

왜 미라클 김이란 거창한 별명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환자를 돌보는 정성도 상상을 초월했다.

이동민은 진현을 볼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그래도 합병증이 생길까 많이 걱정했는데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사장님의 효심 덕분인 것 같습니다.”

진현의 말에 이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찌 자신 때문이겠는가? 그가 치료를 잘해서지.

“아닙니다. 다 선생님 때문입니다.”

“사장님도 몸이 안 좋으신데 무리하지 마시고 병실에서 쉬십시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옆 병실인걸요.”

상태가 좋아져 이해중 회장은 중환자실에서 VIP 병실로 옮긴 상태다.

이동민 사장도 바로 옆의 병실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혹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셔도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일 IT 의 사장이자 대일병원을 금전적으로 지탱하는 대일홀딩스의 최고 대주주 이동민은 그럴 능력이


있었다.

더구나 이해중 회장이 정신을 차려도 간 이식까지 하고서 일선으로 복구할 수 있을 확률은 적었다.

후계 계승이 가속화될 것이고 조만간 그는 대일 그룹 전체 회장의 직위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진현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전 의사입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자꾸 그러시면 저 안 옵니다. 데이비드 교수에게 전담을 부탁할 것입니다.”

그 말에 이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보은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꼭 은혜를 갚아야지.’

모두가 포기했을 때, 아버지를 살린 은인이다. 반드시 그 보답을 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십시오.”

진현이 나가고 이동민은 백중현을 바라봤다.

“참 좋은 의사죠? 실력이면 실력, 친절이면 친절,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면 마음.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요.
왜 진즉 저런 의사를 못 만났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백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미라클 김이 한국에서 의사면허가 정지됐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게… 저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송영 그룹의 딸을 수술하다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흠… 무슨 문제입니까?”

“사실 수술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수술 후 원인 미상으로 사망했는데 그 책임을 뒤집어썼습니다.”

이동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니 저 천재 의사가 실수를 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뭔가 이상하네요. 백 실장이 한번 알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백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6

126. 대일 그룹의 회장 (8)

그리고 백 실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 앞으로 마음을 굳게 드셔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수술이 잘되긴 했어도 이해중 회장님이 일선으로 복귀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옳은 말이었다.

원체 고령인데다 대수술을 하고 난 뒤이고, 면역억제제를 써야 하니 그룹 경영을 이전처럼 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 대일 그룹의 회장은 당신입니다.”

“……!”

이동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군요.”

당분간 형제들 간 피 튀는 싸움이 있을 거다.

“그래도 회장님이 회복 추세여서 다행입니다. 의식만 돌아오시면 후계 승계에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저 천재


의사가 대일 그룹을 살렸습니다.”
만약 이해중이 그대로 죽었으면 대일 그룹은 공중분해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중의 의식만 돌아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동민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벌써부터 형제분들이 법적 공방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간단히 경고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고라면?”

“회장님이 회복 중임을 알려야겠지요.”

지금 한국에 남아 있는 형제들은 이해중 회장이 죽을 줄 알고 신 나서 재산 싸움을 준비 중이었다.

회복 소식은 그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최근 주가가 안 좋던데 이왕이면 언론사를 통해 그룹 회장의 건재를 알리도록
하세요.”

“네, 각 언론사엔 제가 연락을 하겠습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에 연락이 갔다.

지상파면 지상파, 신문이면 신문, 케이블이면 케이블.

수없이 많은 기자가 뉴욕의 세인트 죠셉으로 날아왔다.

모든 언론이 이해중 회장의 회복을 방송했다.

-네, 여기는 재계 1 위, 대일 그룹의 이해중 회장이 입원 중인 뉴욕의 세인트 죠셉 병원입니다.

-이해중 회장의 상태는 어떤가요?

-간부전으로 목숨이 위독한 상태였으나 간 이식을 받고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다행이군요.

-네,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수술이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곧 의식을 회복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언론들은 이해중 회장의 상태만 보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해중 회장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한국인이란 이야기가 있던데요?

-네, 한국입니다. 그것도 굉장히 젊은 한국 의사입니다.

-놀랍군요. 누구인가요?

-김진현, 이곳 미국에서는 미라클 김이라 불리는 천재 외과의사입니다. 김진현 의사는 이전 비행기에서 김창영
총리를 치료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 재계 1 위의 회장이 미국에서 천재 한국인의 손에 살아났다.

당연히 기사거리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리포터는 진현이 그간 이루어낸 만행에 가까운 업적들을 간단히 설명했다.

원채 놀라운 성과들이라 단순히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면 지금도 이해중 회장의 진료는 김진현 의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인가요?

-네, 이해중 회장은 김진현 선생의 치료로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김진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해중 회장이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

이해중 회장이 안 좋을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재산 싸움만 준비하던 형제들이, 그가 상태가 회복하니 하나둘
얼굴을 드러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저도 엄청 걱정했어요. 이렇게 좋아지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형제들이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었다.

그 가식적인 모습에 이동민은 기도 차지 않았다.

‘죽게 내버려 두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해중 회장은 말없는 미소로 그들을 바라봤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 그는 건강해 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이해중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만됐다.”

“네?”

“효도 잘 받았으니 동민이 빼고 다 돌아가 봐라.”

“……!”

다른 형제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 아니. 아버지 곁에는 제가 있어야지요. 야, 너희들 다 돌아가. 번잡해서 그러시잖아.”

“형님이야말로 돌아가슈. 전 아버지 곁에 있을 것이니.”

모두 자신의 목숨처럼 아버지를 아끼는 듯 나섰으나 이해중 회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모든 자식 중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는 이동민밖에 없었다.

손주까지 따지면 이혜미까지.

“됐다. 다 돌아가라.”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전부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결 쾌적해진 병실에 김진현이 들어왔다.

“몸은 어떠십니까?”

이해중이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다 선생님이 잘 치료해 준 덕분이죠.”

이해중은 손자뻘 되는 진현에게 지극히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회장님.”

“제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어떻게 그렇습니까?”

하지만 진현은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대일 그룹의 회장인 것을 떠나 그는 혜미의 할아버지였으니까.

‘혜미와 교제한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나?’

그러나 이제 간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같이 찾아가서 말해야지.’

하여튼 이해중이 깍듯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이해중은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평생 사업을 해왔는데, 한 가지 신조가 있습니다. 바로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즉, 자신이 이러는 것을 말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현이 한숨을 내쉬는데 이해중이 더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하였다.

“제 생명을 구해준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따로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이동민과 똑같은 이야기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계 1 위,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다.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럽니다. 이렇게 불편해서야 좋아지던 간도 다시 나빠질 것 같은데요? 그러니 저를
생각해서라도 보답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그런데 그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하십시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원하는 대로 안 해드리면 성나서 건강 나빠집니다. 고집이 엄청


세시거든요.”

대일 IT 의 사장 이동민이었다.

어느덧 수술 상처가 많이 회복돼 그는 퇴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퇴원해 봤자 보호자 입장으로 계속 세인트 죠셉에 머물겠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해중은 막무가내였다.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지 않으면 전 그냥 여기서 퇴원하겠습니다.”

“네?”

진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아버지 말 들으세요, 선생님. 이러다 아버지 병납니다.”

결국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그 승낙에 이해중은 눈을 빛냈다. 그는 램프의 요정처럼 말했다.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은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제일 사랑하는 손녀딸을 달라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이해중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이자 재계를 한 손에 쥐고 있는 그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진현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하지만 지금 말고 나중에 말씀하겠습니다.”

“……?”
이해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해중은 갑갑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번엔 진현도 확고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한국에 갑니다.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진현은 생각했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멀지 않았다.

***

진현이 나간 후, 이해중과 이동민은 대화를 나눴다.

“저 의사 선생님이 바라는 게 뭔지 아느냐?”

“글쎄요? 그래도 돈 같은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지?”

“네, 돈을 바라는 성격은 아닌 듯하니까요.”

진현이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이동민이 답했다.

이해중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우리 혜미를 달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바보 같은 손녀딸 사랑에 이동민이 웃음을 삼켰다.

“설마요. 아무리 혜미가 연예인보다 예쁘다고 하지만.”

“아니야. 이전에 우리 혜미와 대일병원에서 같이 일했었는데… 젊으니까 우리 혜미를 보고 반했을 수도 있지.”

“그래서 싫습니까? 전 저 선생님 정도면 괜찮다고 보는데.”

이해중은 고집 센 노인네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우리 손녀딸은 아무한테도 안 줘.”

이동민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몸은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수술을 얼마나 잘했는지 멀쩡해.”


물론 그건 과장이다.

원채 고령에 시행한 간 이식이고 면역억제제를 사용 중이기에 이해중 회장의 몸 상태는 이전에 비해 훨씬 쇠약해진
상태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어딘가?

죽을 운명에서 벗어났는데.

“그나저나… 참 탐난단 말이야.”

“미라클 김 말입니까?”

“세인트 죠셉 놈들은 어떻게 저런 보배를 뺏어갔지? 원래 우리 대일병원의 의사지 않더냐. 이종근 이 자식은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이해중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셋째 아들을 욕했다.

“대일병원으로 다시 데려올 수는 없겠느냐? 탐나는데.”

“흠…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도 스타급 교수의 대우를 하고 있어서…….”

“우리도 스타급 대우를 하면 되지.”

“하지만…….”

지난 1 년간 진현이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못해 기적적이었다.

그런 만큼 보장받은 연봉도 어마어마해 100 만 달러에 가까운 90 만 달러였다.

한국의 그 어느 의대교수도 그런 연봉을 받진 않는다.

“뭘, 광혜 병원은 존스 홉킨스의 오영수를 스카우트했고, 기독병원은 엠디엠더슨의 오스틴 김을 스카우트했잖아.


그것도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서. 우리도 그러면 되지.”

“……!”

존스홉킨스의 오영수, 엠디엠더슨의 오스틴 김.

둘 모두 한국계 미국인으로 각 분야에서 의학 교과서를 기술할 정도의 세계적 대가들이었다.

1 년 전, 광혜 병원과 기독 병원은 광고 효과를 위해 이들을 거액의 금액을 들여 스카우트했었다.

그것도 전속 교수가 아닌, 협약 교수로.

1 년의 몇 개월은 한국에서, 나머지는 미국에서 진료하는 식의 계약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우리가 걔네들에 비해 돈이 없어, 뭐가 없어?”

“네, 알겠습니다. 백 실장을 통해 알아보라 하겠습니다.”


이동민도 김진현 같은 의사가 대일병원에 오는 것에 대 찬성이었다.

더구나 진현은 단순히 수술 실력을 떠나 학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메이요의 오영수나 엠디엠더슨의 오스틴 김을
능가할 재능을 가진 외계인급의 천재이다.

한국대나 광혜, 기독병원에서 채가기 전에 미리 계약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이해중 회장은 다행히 무탈하게 퇴원했다.

“꼭 대일병원으로 오십시오. 항상 문을 열어놓겠습니다.”

퇴원할 때 그는 진현의 손을 잡으며 연신 부탁을 했다.

진현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지나갔다.

순록이 돋고, 잎이 우거지며, 이후 낙엽이 떨어졌다.

겨울, 봄, 여름, 가을이 그렇게 지나가며 다시 겨울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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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 기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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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 2018 년 03 월 26 일

ISBN | 979-11-6202-153-8(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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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127. 세계 외과 학회의 주인공 (1)

그사이 진현의 학문적 업적은 어마어마하게 쌓여갔다.

대부분 이전 삶의 기억을 활용한 업적이다.

의학적 이슈 중 어떤 내용이 후에 인정을 받고 진실로 여겨지며, 어떤 방법을 써야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지 이미


진현은 알고 있기에 학문적 성과를 내는 것은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더 쉬웠다.

하지만 그의 업적 모두가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데이비드, 이 주제로 연구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래의 누구의 아이디어도 아닌 진현 본인의 구상이었다.

설명을 들은 데이비드의 눈이 커졌다.

“이 주제를 말입니까?”

“네, 현재 간암의 병기가 바르셀로나를 따르긴 하지만 오쿠다 등 확립이 안 되어서 정립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데이비드는 진현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역시 미라클 김,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같이 진행해 보죠.”

연구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세계 3 대 저널은 아니어도 그 밑의 급의 유수의 저널에 게재가 확정되었다.

그 뒤에도 진현은 단순한 미래의 지식이 아닌, 자신의 아이디어로 연구를 구상하여 발표했다.

10 년 앞선 의학계의 정립된 이슈를 알고 있어서인지 그의 아이디어는 항상 궤를 달리하고 학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게 진현이 세인트 죠셉에 머무는 2 년 동안 이룩한 학문적 업적은 기함할 정도였다.

미국, 아니, 세계의 의학계가 이 동양의 천재를 주목했다.


그렇게 진현은 한 걸음, 한 걸음 진정한 대가(大家)가 되어갔다.

***

그리고 한국의 서울에 위치한 한 특급 호텔.

“상민 씨? 상민 씨?”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민 씨!!”

“……!”

이상민의 흐릿한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연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해요? 요즘 계속 멍하니 있고.”

“아… 아니야.”

이상민이 미소를 지었다.

갈수록 말라가는 그는 이제는 뼈만 앙상히 남아 마치 말기 암환자와 같은 외양이었다.

“담배 좀.”

“담배 이제 좀 끊어요. 몸도 계속 안 좋잖아요.”

“줘.”

“안 된다니까요.”

“주라고.”

짧지만 차가운 목소리.

“……!”

이연희는 흠칫 놀라 이상민을 바라봤다.

어느덧 만난 지 2 년이 넘어가는 그녀의 연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대체 저 미소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문득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항상 몸을 섞지만 그에게서 사랑 받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아니, 과연 그에게도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후우…….”

이상민은 담배 연기를 뿜었다.

“계속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병원? 맨날 출근하잖아.”

“그런 것 말고요. 진료를 받아보세요.”

“내가?”

“걱정돼서 그래요.”

이상민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그래, 그의 몸은 그가 잘 알았다. 지금 자신이 앓고 있는 질환의 병명도 알고 있었다.

‘환각(Hallucination)… 정신증(Psychosis)…….’

지난 죄악에 대한 징벌일까?

눈을 감으면… 아니, 눈을 뜨고 있어도 그들이 보였다.

그의 손에 죽은, 항상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

‘재미없군.’

자신에게 향하는 저주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재미없어.’

계속된 환각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모든 것이 무료하고 따분하고 재미가 없었다. 삶의 모든 것에서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서 어머니가 자살했던 건가?’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은 정신과적 응급 질환이다. 네거티브적 감정 때문에 자살의 고위험군이기 때문이다.

‘이 무료함은 정신분열증에 동반된 정서적 둔감(Obtundation), 쾌감상실(Anhedonoia)에 따른 것?’

그는 실없이 생각했다.

물론 현재 그의 증상을 정신분열증이라 진단하기에는 다소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그의


감정이 서서히 마모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문득 피식 웃었다.

‘내 친구는 잘 지내고 있나?’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떠올랐다.

김진현.

왜일까?

오늘따라 그가 보고 싶었다.

***

이연희와 헤어지고 그는 포르쉐 스포츠카를 몰고 간선도로를 질주했다.

빠아앙!

폭주에 가까운 그 속도에 여러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짧은 질주 후 그는 한남동 이종근의 저택 앞에 내려섰다.

“아버지는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용인이 그를 맞았다.

널찍한 방에 들어가니 이종근이 인상을 찌푸리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1 년 사이 굉장히 수척해진 이종근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뭘 하고 지금까지 돌아다니는 거냐?”

“그냥 밖에서 바람 좀 쐤어요.”

이종근이 버럭 화를 내었다.

“정신 좀 차려! 지금 네가 그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닐 때인 줄 알아?! 이 한심한 놈!”

“…….”

“멍청한 놈! 지 어미를 꼭 닮아서 한심하기 그지없어.”

이미 취했는지 이종근의 얼굴은 뻘겠다.

만약 어릴 때였으면 가정폭력이라도 휘둘렀을 것이다.

“왜 부르셨어요?”

“2 주 뒤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

“네, 특별한 일은 없는데요.”

“그러면 그때 시카고에 갔다 와.”


“시카고에는 왜요?”

“그때 시카고에 세계 외과 학회가 있잖아. 밥만 빌어먹지 말고 거기 가서 구연 발표(Oral presentation)


라도 하고 와.”

세계 외과 학회는 전문의만 수만 명이 참석하는 세계 최고의 외과의사들의 학술 대회이다.

그런 곳에서 구연 발표를 한다는 것은 레지던트, 교수를 떠나 굉장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종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영찬 교수가 본인 연구를 네 이름으로 발표했어. 발표 파일과 대본도 다 준비해 놨으니 넌 몸만 가서 발표하고
와.”

그렇게 이상민은 시카고의 세계 외과 학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

세계 외과 학회는 이상민만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주임교수… 아니, 이제 외과과장인 고영찬과 이종근도 같이 갔다.

고영찬은 자신의 연구 때문에 참석한 것이고 이종근은 최근 답답한 마음에 휴가차 갔다.

“가서 잘 배우고. 발표도 똑바로 잘해.”

이종근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말했다.

‘한심한 놈.’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민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

시카고에 도착한 그들은 6 성급 호텔에 짐을 풀고 학회장으로 향했다.

세계 외과 학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삼성동 코엑스의 4 배쯤 되는 컨벤션 센터에 외과의사가 바글바글했다. 족히 3 만 명은 될 듯한 인원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의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니 꼭 잘해야 해.”

무척 부담이 되는 자리지만 그만큼 영광스러운 자리기도 했다. 실적에도 도움이 되리라.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걸 일일이 챙겨줘야 하다니. 젠장.’

그때 고영찬이 물었다.

“어느 세션에 참가할까요, 이사장님?”

“그래도 오늘은 이놈이 발표하는 세션에 참가해야지. 학술 대회 내용을 먼저 보지.”


외과 최고의 학회답게 학술 대회는 한 구역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걸어서 10 분은 넘게 걸리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총 4 개의 구역이 있었다.

“이놈의 발표가 언제지?”

“B 구역의 오후 2 시 30 분입니다.”

“B 구역…….”

그들은 학술 대회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안내 서적을 펼쳤다.

그런데 내용을 살피던 그들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이름이 안내 서적에 가득 적혀 있었다.

<Professor, Jin Hyun Kim(진현 김), Saint Joseph Hospital!>

그런데 그 이름이 한 번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B 구역의 발표를 거의 도배하다시피 적혀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건?”

오늘만 7 회의 발표.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이건 거의 세계 외과 학회 B 구역을 진현을 위해 전세를 내준 느낌의 발표 일정이었다.

그것도 조잡한 내용의 발표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최근 외과계에 화두가 되고 있는 주제들이었다.

“이, 이게 뭐야? 왜 이놈이 이렇게?”

이종근이 당황해 짜증을 냈으나 질문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모두 2 년 동안 진현이 이룬 학문적 업적에 대한 발표였으니까.

중간에 이상민의 조잡한 발표가 끼어 있긴 했으나 진현의 굵직한 발표에 가려 몇 명이나 관심을 가질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 발표자들은 각 구역으로 늦지 않게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B 구역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본 것은 빛이 나는 진현의 위상이었다.

“거기 안 보이니 좀 비킵시다!’

“여긴 내 자리요!”
A, B, C, D 4 구역 중 B 구역이 가장 미어터졌다.

인종을 가릴 것 없이 전 세계에서 모인 외과의사가 세기의 천재, 진현의 발표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이다.

“다들 뒤에 사람 안 가리게 자리에 잘 앉아주세요! 자리 없으니 계단 사이에라도 앉아주세요!”

수용 인원이 넘치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진행 요원들이 외쳤다.

이종근과 고영찬은 엉거주춤 간이의자에 앉았다. 이사장 체면에 그나마 계단에 안 앉아서 다행이었다.

‘도대체 이 무슨…….’

이종근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드디어 첫 발표를 하기 위해 연자가 나타났다. 앳된 인상의 동양인, 진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세인트 죠셉의 진현 김이라 합니다. 먼저 밀란(Milan criteria)을 충족하는 간암 환자의 5


년 사망률, 그리고 MELD score(The Model for End-stage Liver disease score)에 따른 각 치료
방법에 따른 생존률과 합병증에 관한 사항을 메타 분석한 연구를 발표하고자 합니다.”

단순한 인사말임에도 불구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얼마 전 란셋(Lancet)에 발표된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논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 앞이어서 긴장이 되네요. 실수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농담 섞인 말을 한 후, 본격적 발표를 시작했다.

“42 개 센터에서 조사한 결과, 합병증이…….”

컨벤션 센터가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집중해 진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뿐 아니라 진현은 연달아 3 개의 발표를 하였다.

전부 다른 주제의, 하지만 세계 3 대 의학 저널에 기재된 최고의 이슈를 끄는 저널들의 발표였다. 당연히 모두


진현이 1 저자였다.

1 시간여가 지난 후, 연속 발표가 끝났다.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 후 사람들이 폭풍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는 영국 케임브리지 의대의 도널드입니다. 닥터 김의 연구는 매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센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저는 존스홉킨스의 로이드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감명 깊게 발표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의학자들이 진현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이종근이나 고영찬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분위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8

128. 세계 외과 학회의 주인공 (2)

그 모든 질문에 진현은 한 치의 주눅도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이종근 주위에서 누군가가 대화를 나눴다.

“하, 저렇게 어린데. 정말 대단해. 얼굴에서 빛이 나는군. 빛이 나.”

“세기의 천재라잖아.”

“지난 2 년간의 연구 업적을 보면 세기의 천재란 말도 모자라는데?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일본인인가?”

“아니야. 한국인이라는데?”

“그래? 하여튼 한국인들은 좋겠군. 저런 세기의 천재가 태어나다니.”

“뭘, 그래 봤자 지금은 반은 미국인인걸. 내가 세인트 죠셉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에서 쫓겨나듯 세인트
죠셉으로 온 것이라 던데?”

“하? 정말로? 누군지 모르지만 저런 천재를 쫓아내다니. 정말 바보 등신이군.”

그 수군거림을 듣고 있던 바보 등신, 이종근은 얼굴이 벌게졌다.

그때 누군가 진현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닥터 김,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 논문들을 모두 닥터 김 혼자서 연구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 질문에 모두가 김진현을 바라봤다.

여러 사람이 그런 소문을 듣긴 했다.

이 기적 같은 연구 업적은 세인트 죠셉의 공동성과가 아니라 김진현이란 괴물 한 명이 이룬 것이라고.

“글쎄요. 전 세인트 죠셉의 선생님들께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진현은 애매하게 답했다.

짝짝짝!

질문 시간이 끝나고 터질 듯한 박수가 울렸다.

그렇게 진현은 세계 외과의사들 사이에서 당당히 이름을 알렸다.


이종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젠장.’

중간에 이상민의 발표가 있긴 했다.

나름 나쁘지 않은 발표였지만 진현에게 가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엔 진현의 마지막 발표 시간.

“이번엔 담관 기형 환자에서 스텐트를 이용한 간 소장 문합술에 대한 수술을 발표하겠습니다.”

이미 몇 차례 발표를 진행한 진현은 다소 지친 얼굴로 발표를 이어갔다.

“해당 담관 기형은 드물긴 하지만 간 이식을 어렵게 하는 상황으로…….”

이번 것은 연구라기보단 담관 기형이란 특수한 상황 때 수술 술식에 대한 발표였다.

1 년 전 이해중 회장을 치료할 때 시도했던 방법으로, 그 아이디어에 감명한 데이비드가 같은 환자를 만날 때마다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데이터를 모아보니 성적이 굉장히 좋아 이렇게 세계 외과 학회에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데이비드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건 킴스 메소드(Kim’s method)라고 이름 붙여야 해!’

킴스 메소드(Kim’s method).

김진현의 수술법이란 뜻이었다.

진현은 자신의 이름을 붙일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학회에서 지식을 공유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만히 듣던 중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하버드의 대가, 저스틴이었다.

“닥터 김, 당신이 대단한 천재인 것은 알지만 지금 이 아이디어는 동의할 수 없소.”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네,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동영상을 준비해 왔습니다. 먼저 보십시오.”

커다란 화면에 진현이 수술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그 수술을 보는 전 세계의 외과의사들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Oh, my God!”
“지저스(Jejus).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동영상이 끝났지만 하버드의 저스틴은 수긍하지 않았다.

“닥터 김, 그 수술 방법에는 큰 단점이 있소.”

“무엇입니까?”

“훌륭한 수술 방법이긴 하지만, 너무 익스퍼트(Expert)한 실력을 요구하는 방법이오. 그 수술법을 성공했던


것은 당신이 익스퍼트이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들이 같은 수술을 하면, 글쎄? 실패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오.”

정확한 지적이었다.

수술법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가치가 있지, 일부의 뛰어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으면 가치가 없다.

진현은 머쓱히 웃었다.

“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개선점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수술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확실히 담관 기형이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오. 우리


하버드와 합작으로 개선점을 찾는 것을 연구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생각 있으면 연락 주시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

하버드의 저스틴이 웃으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우리 하버드로 옮길 생각은 없소, 닥터 김? 내가 내 연봉을 털어서라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소.”

농담 섞인 그 물음에 웃음 섞인 야유가 들렸다.

다른 병원의 의사들이 일어나 말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죤스홉킨스로 오시오!”

“아니, 이 사람들이 갑자기 학회장에서 왜 이러나? 차라리 우리 메이요로 오시오!”

진현은 난감하게 웃으며 응대했다.

“관심에 감사합니다. 여기는 학회장이니 나중에 따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진현의 발표가 열화와 같은 호응 속에 마무리되었다.

“많은 발표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 마치기 전에.”

진현의 얼굴이 한 방향을 향했다.

다름 아닌 이상민이 앉아 있는 쪽이었다.

진현의 눈이 깊어졌다.
“거기 한국에서 오신 의사 선생님은 따로 질문 없으십니까? 계속 말없이 계시던데.”

“……!”

이상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현은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질문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진현은 짧게 말했다.

“조만간 봅시다.”

“……!”

마지막 말은 한국어였다.

이상민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진현과 이상민.

항상 1 등과 2 등.

그 격차는 지금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 있었다.

세계적 대가(大家)와 일개 레지던트.

그게 진현과 이상민의 차이였다.

***

다시 날씨가 싸늘해졌다.

세계의 중심 뉴욕.

그중에서도 마천루가 치솟은 맨해튼도 겨울이 깊어졌다.

“꼭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닥터 김?”

맨해튼 센트럴 파크 인근에 위치한 뉴욕 최고의 병원 세인트 죠셉에서 병원장 제임스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시기를 좀 늦추었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약속대로 진행해 주십시오.”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앞에는 젊다 못해 어린 인상의 동양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최근 미국 의학계에서 떠오르는 신성(新星)으로 불리는 미라클 김진현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을 떠나서 우리 세인트 죠셉은 닥터 김의 한국행을 조금만 미루고 싶은데……. 닥터 김도


알겠지만 닥터 김이 지금 한국으로 떠나면 너무 손해가 커요.”

진현도 병원의 입장을 이해했다.

현재 그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다.

제약회사와 연계해 진행되는 프로젝트들, 기타 대규모 선행 연구(Multicenter prospective randomized


study), 그리고 미라클이라고까지 불리는 그의 수술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환자들…….

한마디로 진현은 세인트 죠셉 내에서도 손꼽히는 스타(Star) 의사였다.

세인트 죠셉 병원 입장에선 최고의 가치를 가진 의사를 극동의 한국으로 파견 보내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처음 계약할 때의 약속대로 저를 한국 대일병원에 교환교수로 보내주십시오.”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도대체 왜 굳이 한국에 돌아가려는 것인가요, 닥터 김? 고향이라서?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나요?”

“…….”

진현은 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굳은 얼굴은 굽히지 않을 의지를 나타내었다.

결국 제임스가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대신 교환교수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교환교수 기간은 1 년으로 그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세인트 죠셉 병원은 한국의 대일병원에 공문을 보냈다.

조만간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교환교수로 간 파트의 닥터 김이 파견 갈 것이라고.

***

그 공문은 한국 대일병원을 뒤집어엎었다.

“유 교수, 혹시 그 이야기 들었나?”

간이식 분야 국내 최고의 대가(大家) 강민철이 주니어 교수 유영수에게 물었다.

유영수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습니다. 교수님.”

강민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김진현, 그 친구가 대일병원으로 온다고 하네! 그것도 세인트 죠셉의 교수 자격으로 말이야! 하하!”

강민철은 마치 친자식이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기뻐했다.

유영수도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잘됐어, 정말로. 김 선생이 그렇게 떠났을 때 다들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이전 진현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대일병원을 떠날 때 다들 얼마나 낙심했는지 모른다.

특히 그를 후계자로 여기며 아꼈던 강민철의 상심은 상상을 초월해 한동안 술독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잘됐어. 정말 잘됐어.”

강민철은 기뻐 중얼거렸다.

더구나 단순한 금의환향 정도가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대가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년 사이 진현의 명성은 국내 최고라 불리는 강민철을 능가했다.

청출어람.

그것보다 스승을 기쁘게 하는 단어가 있을까?

“미국에 가서 수술 실력이 죽진 않았겠지?”

“설마요. 미국 내에서 미라클 김이라 불린다지 않습니까?”

“그래, 김 선생의 실력과 재능은 정말 미라클이란 단어에 어울리지. 어울리고말고.”

강민철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떠날 때 제대로 술도 못 사줬는데… 이번에 돌아오면 술이라도 사줘야겠어.”

“김 선생은 소고기 좋아합니다.”

“그래, 그깟 소고기. 백제 갈비라도 가서 사주지.”

강민철은 인근에 위치한 1 인 분에 10 만 원을 훨씬 넘는 최고급 소고기 집을 말했다.

그 마음에 유영수가 웃으며 답했다.

“네, 김 선생이 좋아할 것입니다.”

***

진현의 복귀에 기뻐한 이들은 강민철과 유영수만이 아니었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학생 때부터 연이 있었던 내과의 최대원이 웃음을 지었다.


최대원뿐 아니라 진현과 연이 있었던 모든 이가 크게 기뻐했다.

모두들 진현의 인품과 환자를 향한 마음, 그리고 그의 뛰어난 실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별같이 빛나던 그가 억울하게 떠났을 때 다들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하지만 진현의 복귀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사장 이종근 일당이었다.

“제길. 그놈의 김진현! 김진현!”

이종근은 왈칵 짜증을 내었다.

“왜 세인트 죠셉에선 다른 교수도 많으면서 하필 그놈을 교환교수로 보낸단 거야?”

외과 과장 고영찬이 조심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장님?”

사실 김진현이 오든 말든 그들과 큰 연관은 없었다.

이제 김진현은 세인트 죠셉 소속의 의사였고, 지난 2 년간 대일병원의 후계는 이상민으로 굳어졌으니까.

하지만 이종근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난 악연도 악연이고……. 괜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동민이와 아버지가 그놈을 협력 교수로 초빙하자고 하는 걸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피했는데… 교환교수로


온다고?’

대일 그룹의 전체 회장인 이해중과 확고한 후계자 이동민은 김진현, 그놈을 은인으로 여겨 거액을 들여서라도
대일 병원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29

129. 한국으로 (1)

“거절해. 그놈 말고 다른 교수를 보내 달라 그래.”

고영찬이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파견할 교수를 정하는 것은 그쪽의 권한인데…….”

대일병원과 세인트 죠셉 간의 교수 교류는 역사 깊은 전통으로 어느 교수를 보낼지 결정하는 것은 각 병원 고유


권한이었다.

“그리고 거절할 명분도 없습니다.”


무슨 명목으로 세인트 죠셉에서 제일 잘나가는 교수의 파견을 거절한단 말인가?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랄 판에.

이종근은 버럭 화를 냈다.

“명분은 자네가 알아서 생각해! 그 정도도 생각 못하나?!”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크윽!”

이종근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영찬이 놀라 다가왔다.

“이사장님!”

“크윽…….”

두통은 한참을 지속되다 멈추었다.

고영찬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크… 스트레스 때문인지 요즘 자꾸 편두통이 오는군. 민 비서, 물 좀 가져다 줘.”

민 비서가 시원한 물을 가져오자 이종근은 잔을 들이켰다.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편두통인 것 같은데 무슨 검사를 해? 어차피 MRI 를 찍어도 아무것도 안 나올 텐데.”

“그래도 혹시 다른 병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됐어.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래. 계속 안 좋으면 그때 검사해 보지.”

그래, 스트레스 때문이다.

막내 동생인 이동민이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승계받기 시작한 뒤로 그룹 내에서 대일병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무엇보다 그는 막내 동생 이동민과 어릴 때부터 좋은 사이가 아니어서 병원의 경영권을 시시각각 위협받고 있어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판국에 김진현 그 기분 나쁜 놈도 대일병원에 온다고 난리고. 제기랄.’

이종근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어쨌든 세인트 죠셉 측에 말해. 김진현, 그놈은 절대 안 된다고. 만약 반발하면 앞으로 교수 교류를 끊겠다고
전해.”

어차피 교수 교류야 학문적 상징성이 있을 뿐, 병원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사안이 아니므로 교류를 끊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김진현… 이 지긋지긋한 놈. 절대 다시는 내 대일병원에 발을 디디게 하지 않겠다.’

***

대일병원의 거절은 곧바로 김진현의 귀에 들어갔다.

“대일병원에서 거절했다고요?”

“네, 닥터 김.”

병원장 제임스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고작 동양의 조그만 나라의 병원에서 세인트 죠셉의 보물을 거절하다니?

물론 잘나가는 닥터 김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 가는 것을 반대하긴 했다.

그래도 막상 자신들의 소중한 보물이 대일병원에서 거절당하자 본인이 거절당한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대일병원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두 손을 들고 엎드려 절하며 부탁해도 시원찮을 판에


거절이라니. 만약 닥터 김을 계속 보낼 생각이면 오랜 전통인 교수 교류를 중단하겠다고 합니다.”

진현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사장 이종근의 수작이 분명했다.

‘이종근…….’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상민, 이종근… 둘 다 용서할 수 없었다.

“대일병원 측에 강하게 요청할 수는 없습니까?”

“아예 교수 교류를 끊겠다고 나온 상황이어서 어려울 듯합니다.”

제임스는 대일병원을 욕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그딴 곳에 갈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가지 마십시오. 닥터 김은 대일병원 같은 곳에


어울리는 인재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진현은 병원장실을 나왔다.

대일병원이 이런 식으로 강경히 나온다면 세인트 죠셉 측에서도 진현을 보내줄 방법이 없다. 아니, 별로 보내주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하지?’
진현은 자신의 교수실에 돌아왔다.

세인트 죠셉은 그에게 최고의 교수실을 마련해 주었다.

센트럴 파크와 맨해튼 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교수실은 혼자서 쓰기엔 지나치게 넓고 호화로웠다.

그는 원목 책상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는 프로젝트 서류를 보며 생각했다.

이종근, 이상민과의 악연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반드시 한국에 돌아가야 했다.

대일병원에 교환교수로 가면 가장 좋기야 하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야 했다.

‘꼭 대일병원의 교환교수로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풀렸다.

한국의 외과 학회에 진현에 대한 소문이 돈 것이다.

***

서울 강북 대학로에 위치한 한국 최고의 명문 한국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한국대병원 외과 과장 김민석이 물었다.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 교수가 교환교수로 파견 오는 것을 대일병원이 거절했다고?”

다른 교수가 답했다.

“네, 지난번 간 이식 학회에서 강민철 회장이 울분을 토하더라고요.”

“김진현이면 최근 미국 의학계에서 가장 떠오르는 그 스타 교수 아닌가?”

“네, 맞습니다.”

“거금을 주고 모셔 와도 시원찮을 판에 왜 거절한 거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대 외과 과장 김민석은 턱을 쓰다듬었다.

“김진현 교수가 우리 후배 맞지?”

“네, 72 기 수석졸업생으로 저희들 후배입니다.”

한 교수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72 기면 까마득히 어린 후배이다.

그런 어린 후배가 의학의 종주국 미국의 학회를 뒤흔들고 있으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과장 김민석이 새롭게 발령 난 젊은 교수 남기택을 바라봤다.


“남기택 교수, 자네랑 비슷한 연배인 것 같은데 김진현 교수와 같이 일해본 적이 있나?”

“네, 제가 치프일 때 외과 실습학생이었습니다.”

“어땠나?”

그 물음에 남기택은 깡마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김진현과 함께한 시간은 굉장히 짧았지만, 강렬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치프였던 그가 학생인 진현의 도움 덕분에 환자를 잃지 않았으니까.

“학생일 때도 천재였습니다. 그때도 최고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성장해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접촉해 볼까?”

“접촉이라 하면……?”

“대일병원이 아니라 우리 한국대병원에 교환교수로 올 생각 없는지 물어보자고. 김진현 교수 입장에서도 모교에


교환교수로 오면 좋지 않을까?”

외과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었다.

김진현 같은 스타 교수가 파견 오면 한국대병원의 학문적 위상에도 큰 이득이었으니까.

인사 담당자인 민 교수가 말했다.

“네,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그래, 민 교수가 책임지고 최대한 빨리 연락해 보라고. 광혜병원이나 기독병원에서 채가면 곤란하니까.

과장 김민석은 행정을 도맡고 있는 민 교수를 재촉했다.

“네, 최대한 빨리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래, 또 한국계 스타 교수를 광혜병원이나 기독병원 측에 뺏기면 안 돼.”

과거 광혜 병원은 존스 홉킨스의 오영수를, 기독병원은 엠디엠더슨의 오스틴 김을 부분 협력 교수의 형태로


스카우트했었고, 세계적 대가인 그들을 간판에 걸어놓음에 따라 막대한 홍보 효과를 누렸었다.

“서둘러. 김진현 교수는 꼭 우리가 데려오자고.”

과장 김민석은 민 교수를 다시 한 번 독촉했다.

***

한국대병원의 외과 과장 김민석의 걱정대로 광혜병원과 기독병원도 진현에게 접근했다.


“김진현이면 최근 미국에서 가장 뜨는 외과 교수잖아? 다른 병원으로 안 가게 꼭 책임지고 우리 쪽으로 데려와!”

김진현이 지난 몇 년간 학계에 남긴 업적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단하다고 평할 수준을 한참 뛰어넘어 그야말로 외계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업적들이었다.

단순히 NEJM 몇 편 기재… 이런 게 아닌, 의학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저널을 몇 편이나 쓴 것인지 모른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언젠가 김진현 교수는 노벨상 후보자 중 한 명이 될 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 해!’

김진현 정도 되는 스타 교수는 단순한 방문만으로도 학문적 의의와 홍보 효과가 있어 각 대학에서 초빙하러 기를


쓴다.

더구나 단순 강연이나 방문이 아닌 교환교수 파견이다.

따라서 대일병원을 제외한 대한민국 굴지의 병원들이 진현을 모셔오기 위해 기를 쓰고 접촉했다.

맨해튼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제임스는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대병원, 광혜병원, 기독병원에서 닥터 김을 교환교수로 보내줄 수 없느냐고 요청해 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임스는 여전히 안 갔으면 하는 표정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세인트 죠셉에 꽁꽁 보관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진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가겠습니다.”

제임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물었다.

“어쩔 수 없군요. 어느 병원으로 파견 가겠습니까?”

“그건 조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각 병원마다 제시한 조건이 달랐다.

모교인 한국대병원이 가장 끌리긴 했으나, 국립대의 특성상 혜택이 제일 박했다.

‘어차피 돈을 바라고 가는 것은 아니니.’

사실 대일병원이 아니면 어느 병원을 가든 다 똑같았다.

‘이종근과 이상민이 있는 대일병원에 가는 것이 제일 좋긴 한데. 어쩔 수가 없군.’

그런데 하늘이 진현을 살핀 것일까?

또다시 의외의 방향으로 일이 풀렸다.


한국 최고의 언론사인 KBC 에서 진현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명의(名醫) 후속 편을 찍고 싶다고요?”

진현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선생님.

“하지만 전 나이도 어리고… 다른 뛰어난 선배님에게 부탁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명의는 한국의 고명한 의사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의사에 대한 미화가 장난이 아니라 지난번 방송을 찍고
나서 얼마나 민망했던지 모른다.

하지만 KBC 방송국은 거듭 그를 설득했다.

-지난번 방영했을 때는 더 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방송했던 편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었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 한국의 의사가 아닌 미국에서 일하는 중입니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어떤 한국 의사보다 한국을 빛내고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한국인으로서 소개하고 싶어서 그러니 제발 부탁합니다.”

그 간절한 부탁에 진현은 하는 수 없이 승낙을 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너무 편파적으로 미화시키진 말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방영토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언론사 PD 는 전화기 너머 웃음을 지었다.

‘미화를 할 필요가 없지.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 방송만 해도 판타스틱할 텐데.’

진현이 지금까지 해낸 일이 너무나 많아 객관적인 사실만 담아도 방송 시간이 모자랄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번 방송도 대박이야. 분명히.’

그렇게 KBC 방송국에서 스탭들이 뉴욕으로 날아와 진현의 업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촬영 마지막에 기자가 인터뷰 형식으로 물었다.

“촬영 협조에 감사합니다. 김 교수님은 향후 한국으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없겠는가?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있는 한국이 안 그리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상황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의외의 질문을 하였다.

“만약 원래 일하던 대일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면 받아들일 것입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130

130. 한국으로 (2)

진현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이번에도 교환교수로 파견 가려 했으나 대일병원 쪽에서 거절했거든요.”

기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일병원에서 김 교수님이 오는 것을 거절했다고요? 어째서 거절한 것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촬영이 끝났다.

기자를 비롯한 촬영진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김 교수님과 대일병원 측에 무언가 문제가 있나 보지?”

“그런가 본데요? 한번 파고들어 볼까요? 이것도 이야깃거리가 나올 것 같은데.”

“아니야. 예민한 문제일 텐데 대일 그룹 측에서 별로 안 좋아할 거야. 그냥 간단히 언급만 하자고.”

촬영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의 프로그램에서 굳이 예민한 문제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곧 진현의 방송편이 방영되었다.

-미국 의학계를 뒤흔들고 있는 한국 천재 의사 김진현!

진현이 학계에 몇 년간 남긴 업적들, 마피아 두목을 치료한 이야기, 뉴욕의 명사들을 수술한 이야기, 그리고
대일 그룹의 회장인 이해중의 목숨을 살린 이야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판타스틱한 이야기들이 주르륵 펼쳐졌고 반응은 예상대로 대박이었다.

방송은 진현의 애국심(?)을 언급하며 끝을 맺었다.

-김진현 교수는 기회만 된다면 귀국해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한국 대일병원에 교환교수로
오려 했으나 병원 사정상 결렬되어 안타까워했습니다.

***
한국의 수많은 사람이 그 방송을 보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대일그룹의 회장인 이해중과 후계자 이동민도 있었다.

생명의 은인인 김진현의 방송이라 일부러 챙겨본 것이다.

“동민아.”

“네, 아버지.”

“김 교수가 우리 대일병원에 교환교수로 오려고 했었다고? 넌 알고 있었느냐?”

“…아니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거절을 해? 종근이, 그놈이 거절한 건가? 도대체 왜? 거금을 주고 모셔 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해중은 혀를 찼다.

“네 형, 종근이 놈 좀 오라고 해라. 병원 하나밖에 관리하는 게 없으면서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이놈은.”

“네, 아버지.”

이해중 회장의 저택과 이종근의 집은 같은 한남동으로 걸어서 10 분밖에 안 걸린다.

전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종근이 도착했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물어볼 게 있다.”

뭔가 불쾌한 아버지의 음성에 이종근은 바짝 긴장했다.

‘무슨 일이지? 병원 실적도 나쁘지 않고… 최근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종근은 머리를 굴렸으나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해중 회장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세인트 죠셉의 김 교수가 대일병원으로 오고 싶다 했는데 왜 거절했어? 그 정도 되는 스타 교수면 돈을 주고라도


모셔 와야 하는 거 아니냐?”

“……!”

이종근의 얼굴이 하얘졌다.

“왜? 병원에 무슨 사정이 있기에 거절한 거냐?”

“그, 그건…….”
이종근은 말을 더듬었다.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기분 나쁜 놈이어서, 라고 답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구나 이해중 회장은 김진현을 생명의 은인으로 극진히 생각했다.

“내가 예전부터 세인트 죠셉의 김 교수를 협력 교수로 초빙하자고 이야기했지? 그건 왜 소식이 없어? 김 교수가
거절한 거야? 아니, 연락을 해보긴 해본 거냐?”

이종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 그건… 병원 자금 사정상… 고액의 연봉을 제시할 수 없어서…….”

이해중의 눈썹이 올라갔다.

“돈이 없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대일 홀딩스에서 지원할 테니 얼마를 주더라도 초빙해 오라 했잖아!”

그의 언성이 점차 올라갔다.

이종근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세인트 죠셉 쪽에 연락해. 교환교수로 김 교수를 파견해 달라고. 그리고 김 교수가 오면 꼭
협력 교수 계약을 맺어.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좋으니! 알았느냐!”

이종근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으나 감히 티 내지 못했다.

“아, 알겠습니다.”

“가봐.”

“네, 네.”

이종근이 나가자 이해중은 역성을 냈다.

“에잉, 내 핏줄이지만 왜 저렇게 못났는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이동민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참 못난 형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이사장의 호출을 받은 고영찬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세인트 죠셉에… 다시 연락을 해 김진현 교수를 파견 보내 달라 부탁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고영찬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 세인트 죠셉 측에서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김진현을 받지 않겠다 했을 때 세인트 죠셉은 굉장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파견 보내달라니?

하지만 이종근은 버럭 화를 내었다.

“자네는 내가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뭘 그렇게 말이 많나?! 오늘 당장 세인트 죠셉 측에 연락해!”

그런데 지나친 흥분 때문일까?

격렬한 두통이 이종근의 머리에 작렬했다.

“크윽!”

“이, 이사장님.”

스트레스가 심해저서인지 두통의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한참을 괴로워한 뒤에야 두통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하지만 이종근은 고개를 저었다. 뇌에 종양이 있지 않는 한, 이런 류의 두통은 검사한다고 원인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차피 스트레스성 편두통일 게 뻔한데 검사 따위는 받으나 마나이다.

‘젠장. 아버지는 김진현 왜 그놈한테 수술을 받아가지고.’

이해중과 이동민이 김진현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대일병원이라도 선물로 줄 기세였다.

이종근은 말했다.

“하여튼 자네가 책임지고 진행해.”

“…네.”

대화가 끝난 후 자신의 교수실로 돌아온 외과 과장 고영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김진현은 왜 우리 대일병원에 오려고 하는 거야?’

과거 지은 죄가 있어서 고영찬도 김진현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사장 이종근도 김진현을 부르라는 게 본인의 뜻은 아닌 것 같았다.

‘하아,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고영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장의 뜻에 따라 매번 김진현을 괴롭히긴 했지만,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문득 이종근 밑에서 충성을 바치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사실 김진현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잘못은커녕 그처럼 훌륭한 의사도 찾기 어렵다. 못난 이종근 혼자 찌질하게 못 잡아먹어 안달일 뿐이다.

‘뭐라고 다시 대일병원으로 와달라고 요청을 하지?’

단 몇 년 사이에 김진현은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일개 대형병원의 과장인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세인트 죠셉에서 분명 싫어할 텐데.’

고영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스타 의사가 제 발로 온다고 했는데 거절할 때는 언제고, 다시 와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다니. 세인트 죠셉이
얼마나 역정을 낼지 막막했다.

‘젠장, 때려 칠 수도 없고.’

한참을 주저하던 고영찬은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요? 닥터 김을 다시 대일병원으로 보내달라고요? 지금 대일병원에서 우리에게 장난을 하는 건가요?

“아, 그게…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쪽이 착오가 있어서…….”

당연히 세인트 죠셉은 잔뜩 짜증을 부렸고, 고영찬은 전화기 너머로 굽신굽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진땀이 떨어지는 굴욕이었다.

***

한편 그런 진현의 복귀 소식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오랜 친우, 이상민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상민 씨?”

이연희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냥… 반가운 소식을 들어서.”

“반가운 소식?”

“응, 오랜 친구가 돌아온다 해서.”

“친구요?”
이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위험한 매력의 남자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랜 연인인 자신에게도.

그런데 친구라고?

‘혹시?’

그때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친구라면… 혹시?”

“응, 김진현이야.”

이상민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연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진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차인지 벌써 몇 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왜 또 그의 이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진현과 그녀는 상관없는 인연으로, 그녀의 연인은 이상민이었다.

연희는 이상민의 앞에 앉았다. 표정이 딱딱한 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네.”

“뭔데?”

연희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줘요.”

“……?”

이상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연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민 씨, 병원 가보면 안 돼요?”

“병원? 갑자기 무슨?”

“…다 알고 있어요. 환각증(Hallucination) 앓고 있잖아요.”


“……!”

이상민의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오래됐어요.”

“그래?”

“네.”

“괜찮아. 힘들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요.”

연희는 그의 손을 잡았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상민 씨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것 알아요. 항정신약(Anti-psyochotic drug)을


쓰면 환각증이 좋아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정신과에 가봐요.”

그러나 이상민은 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연희야.”

“네?”

“우리 결혼할까?”

“……!”

연희는 고개를 돌렸다.

“말 돌리지 마요.”

“말 돌리는 것 아닌데.”

“나 실제로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그런 말은 빈말로 하는 것 아니에요.”

말을 하면서 연희는 슬퍼졌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내는 다른 여자를 선택했고, 지금 함께하고 있는 연인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난 왜 상민 씨 곁에 있는 걸까? 아니, 상민 씨는 왜 내 곁에 있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도.

그의 마음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자신 모두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최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진현의 한국행이 결정됐다.

그의 한국행에 많은 사람이 기뻐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그래, 언제 온다고?!

“한 달 정도 있다 봄 되면 갈 것 같아요.”

-오면 얼마나 있는 거니?

“1 년 정도 쭉 있을 것 같아요.”

-아이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 난리를 폈다.

2 년 동안 못 본 아들이 돌아온다니. 기뻐할 만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소고기 요리를 잔뜩 해놓는다는 말에 진현은 진땀을 흘리며 말렸다.

“여기서 고기 많이 먹었어요. 하여튼 금방 갈 테니 그때 봬요.”

-그래! 그때까지 몸 건강하고!

그리고 부모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기뻐한 사람이 있었다.

혜미였다.

-교환교수로 온다고? 정말로?

“응. 이제 곧 갈게. 그때 봐.”

-…….

잠시 혜미는 말이 없었다.

“혜미야?”

의아하게 묻는 순간, 진현은 깜짝 놀랐다.

전화기 너머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진현이 당황해 물었다.


“혜, 혜미야? 혹시 울어? 왜?”

-…좋아서.

울먹거리는 목소리.

-흐윽. 보, 보고 싶었는데… 이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좋아서. 나 바보 같지?

진현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아니. 바보 같지 않아.”

그러면서 말했다.

“이제 돌아가면 나 너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다음 편에서 계속)

# 131

131. 한국으로 (3)

진현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아, 난 닥터 김이 한국에 안 갔으면 좋겠는데.”

병원장 제임스는 연신 투덜거렸다.

“죄송합니다.”

“아, 몰라요. 교류기간 끝나자마자 곧바로 돌아와야 해요. 알았죠?”

제임스는 진현이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되는지 당부하고 또 방부했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정리하는데 데이비드가 찾아왔다.

“곧 한국으로 가나, 닥터 김?”

“아, 데이비드. 네.”

데이비드 역시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와 진현은 어느덧 나이를 넘어 단짝처럼 친해진 상태였다.

“자네의 미라클한 솜씨를 못 본다 생각하니 아쉽군. 가기 전에 와인이나 한잔 마시자고.”

진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젠틀한 미남 데이비드는 와인 애호가였지만, 토종 한국 입맛인 진현은 와인이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늘 마시는 프랑스 와인 말고 한국 술 어떻습니까?”

데이비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 술? 한국에도 맛있는 술이 있나?”

“네, 소주라고… 맛이 끝내줍니다.”

“소주? So…ju?”

데이비드는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닥터 김이 마시자는데 마셔야지. 기대해보겠어.”

“네,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거한 술자리를 예약하고 사라졌고, 얼마 뒤 핸드폰이 띠링하고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국으로 가기 전 만날 수 있나요?

그런데 발신인이 두 명이었다.

에이미와 피의 매리.

두 명 모두 동시에 진현에게 만남을 신청한 것이다.

***

주말 늦은 저녁에 진현은 맨해튼 중심가에 위치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미슐랭 3 성의 스테이크 집으로 진현이
좋아하는 소고기 요리점이었다.

흑발의 창백한 피부의 미녀, 에이미가 진현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김.”

“무슨 일로 만나자 한 것입니까?”

“보고 싶어서 보자고 했죠. 특별한 일 없는데요?”

“…….”

이 여자가 지금.

바빠 죽겠는데.

진현의 곱지 않은 눈초리에 에이미가 미소를 지었다.

“따로 할 이야기도 있고요.”

“…??”
“일단 식사 먼저 하세요. 샐러드는 또 안 먹나요?”

취향에 안 맞는 에피타이저를 깨작거리니 스테이크가 나왔다. 진현이 좋아하는 큼직한 티본 스테이크였다.

“그렇게 고기만 먹다간 대장암 걸려요.”

“10 년에 한 번씩 내시경 받으면 괜찮습니다.”

“식성을 봤을 때 더 자주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5 년에 한번 받죠, 뭐.”

스테이크를 먹으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였다. 스테이크가 바닥을 드러낼 쯤, 에이미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사실 두 가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무엇입니까?”

“첫째는….”

에이미는 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 에이미는… 그리고 헤인스는 미스터 김의 편이라고요.”

“네?”

난데없는 말에 진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에이미는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가는 것, 대일의 누군가와 악연을 풀기 위해서 가는 것 아닌가요?”

“…!!!”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이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그래도 만약 누군가 괴롭히면 헤인스의 이름을 파세요. 대일 그룹도 최근 대규모로
투자하는 생명공학, 바이오 쪽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면 우리 헤인스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에이미는 싱긋 웃었다.

“미스터 김이 우리 헤인스에 도와준 게 너무 많아서 이렇게라도 도와주고 싶어서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냥 기억만 하고 계세요. 우리 헤인스는 지난 2 년간 미스터 김의 도움들에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진현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헤인스에 특별한 도움을 준 것은 없었다. 그저 금전적, 학문 성과를 위해 프로젝트를 같이 해결했을 뿐이다.

하지만 맡는 프로젝트마다 대박이 터지니 헤인스는 진현을 마이더스의 손처럼 귀하고 고맙게 여겼다.

“다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이야기는 별건 아니고….”

“……?”

에이미는 지나가듯 말했다.

“좋아해요.”

마치 ‘날씨가 좋네?’라고 말하는 듯한 말투여서 진현은 말뜻을 이해 못했다. 아니, 이해는 했는데 머리에서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진현의 말을 더듬었다.

“에, 에이미?

“왠지 한국에 다녀오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범죄가 될 것 같아서 미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좋아해요.
진심으로.”

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에이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자주 이야기하긴 했다.

하지만 늘 짓궂은 장난 같은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이런 고백이라니?

에이미가 진현을 빤히 바라봤다.

“대답은요?”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습니다.”

에이미는 의외로 쿨하게 반응했다.

“역시 그렇군요. 당연히 예상은 했어요. 그냥 후회가 안 남기 위해 한 고백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그러면서 에이미는 웃었다.

“한국에서 일 잘 해결하고… 혹시 결혼하게 되면 꼭 초청해주세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꼭 초청하겠습니다.”

***

에이미와 헤어지고 쌀쌀한 거리를 걷는데 빵하고 경적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벤틀리가 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탄유리가 살짝 열리며 화려한 인상의 미녀, 피의 매리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세요. 집으로 바래다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걸어도 금방입니다.”

“그러지 말고 타세요. 선물 줄 것도 있고.”

내키지 않았으나 거절해봤자 집까지 따라올게 뻔해 어쩔 수 없이 차문을 열었다.

“여, 잘 지냈나, 닥터 김?”

순애보 마피아 로버트가 반갑게 진현을 맞았다.

매리는 늘 냉랭한데 이 녀석의 짝사랑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오랜만입니다, 닥터 김.”

운전사도 인사를 건넸다.

진현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다들 오랜만입니다.”

지난 2 년간 원채 자주 봐서 이제 사실 어렵고 무섭다기보단 익숙했다.

진현을 태운 벤틀리가 부앙 RPM 을 올렸다.

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매리에게 말했다.

“제 집은 반대방향입니다.”

매리는 중세 귀족영애처럼 고상하게 웃었다.

“이렇게 가도 도착할 수 있어요.”

“…….”

도착할 수야 있겠지.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얘네들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라 진현은 잠자코 있었다. 적당히 드라이브를 하면 집에 보내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선물입니까?”

“아… 받으세요.”

매리가 고풍스러운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세요. 지금.”

의아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권총이었다. 그것도 무식하게 생긴.

“…이게 뭡니까?”

“한국에 가서 쓰시라고요.”

“…총을 말입니까?”

“네, 혼내주고 싶은 사람 있지 않아요? 그걸로 한방 먹여줘요. 안에 납을 잔뜩 담은 총알이어서 대충 맞혀도


치명상이에요. 닥터 김이 수술해도 못 살릴 걸요?”

“…….”

진현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가 지금 누굴 감옥에 보내려고!

그의 썩은 얼굴을 보고 매리가 쿡쿡 웃음을 참았다.

“장난이에요. 장난.”

“…재미없습니다.”

“난 재미있는데. 하여튼 진짜 선물은 따로 있어요.”

“이번엔 뭡니까?”

진현은 불퉁하게 물었다.

“받으세요.”

이번에 매리가 내민 것은 이태리제 명품 서류가방이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딴 것이,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싸 보여 진현은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니에요. 받으세요.”

“하지만…”
“이거 안 받을 거면 총이라도 받으세요.”

어쩔 수 없이 진현은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손으로 가방을 쥐는 순간, 두툼한 느낌이 들어 멈칫했다.

빼곡한 서류뭉치였다.

“이건?”

“그게 진짜 선물이에요.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나중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 선물, 분명 만족할 거예요.”

***

인천국제공항.

커다란 콩코드 여객기가 활주로에 내려앉고 비즈니스 객석 전용 통로의 문이 열렸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단정한 스튜어디스가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였고,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인사를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젊은 남자, 진현은 활주로 너머의 지평선을 보며 감회가 새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 돌아왔다.

드디어!

입국 수속 후 캐리어를 찾고, 게이트를 넘으니 바글바글 보이는 한국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좋구나.’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서 누구보다도 잘 나가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토종 한국인이다. 한국이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강남 쪽으로 가려면….’

리무진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생각지도 못한 음성이 들렸다.

“지, 진현아?”

“…!!!”
고개를 돌린 진현의 눈이 커졌다.

꽃이 피듯 아름다운 얼굴, 혜미였다.

그녀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 비해 수척해진 얼굴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

진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나 할 말이 많아서, 감정이 요동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인지인 듯했다.

한걸음. 한걸음.

둘의 거리가 말없이 가까워졌다.

서로의 체향이 느껴질 정도로 닿았을 때, 진현이 말했다.

“잘 지냈어?”

“…아니.”

“왜?”

“네가 보고 싶어서. 이 바보야.”

혜미의 눈에서 결국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현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도…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 몰라. 이 바보야. 흐윽.”

그녀가 울먹거렸다.

그녀의 떨림을 느끼며 진현은 힘을 주어 안았다.

“이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게. 절대로.”

진현은 약속했다.

그래, 이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공항에 진현을 마중 나온 것은 혜미 뿐이 아니었다.

둘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데 우렁찬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젊은 사람들 연애하는데 이 늙은이가 괜히 나온 것 같군.”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우람한 체구, 반백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간 이식 파트의 대가이자 진현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강민철이었다!

“교수님?! 바쁘실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진현은 허겁지겁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강민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왜? 제자가 왔는데 나와봐야지.”

저 멀리서 캐쥬얼 차림에 온화한 남자, 유영수 교수가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잘 지냈어, 김 선생?”

“아… 유 교수님.”

진현은 마음이 감동으로 차올랐다.

강민철과 유영수는 대일병원 외과 내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들인데 제자가 온다는 이야기에 만사 제쳐두고 공항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유영수가 싱긋 웃었다.

“김 선생, 자네 온다는 이야기에 강민철 교수님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오죽했으면 수술이 한 가득
밀려있는데 다 제쳐두고 여기까지 왔겠어?”

진현은 한 마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감사… 정말 감사합니다.”

강민철이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무슨…”

그러면서 그의 손이 진현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잘 왔네. 정말로. 자네가 이렇게 돌아와서 정말 기뻐.”

짧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

진현도 먹먹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32
132. 대가(大家) (1)

반가운 마음에 강민철이 낮술을 달리려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공항에서 간단한 식사만 한 그들은 유영수의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했다.

“조만간 꼭 술 한잔 먹자고.”

아쉬움 가득한 강민철의 목소리에 진현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이 조만간 인사불성으로 취하게 될 것 같다.

유영수도 웃으며 말했다.

“김 선생은 집에 먼저 들를래, 아니면 대일병원에 가서 일을 먼저 볼래?”

“병원에 먼저 가겠습니다.”

“그래? 피곤하지 않겠어?”

피곤하기야 하지만 쉬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병원에 들렀다 쉬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병원으로 갈게. 그런데 첫날부터 뭐 하게?”

“한국에 도착했으니 인사를 드려야지요.”

진현은 짧게 답했다.

부아앙!

속도를 올린 유영수의 차가 올림픽대로를 가른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전 삶부터 수없이 많은 인연을 겪었던 곳, 대일병원이었다.

***

미리 연락을 받은 한 남자가 진현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일병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 선생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자로 행정 업무를 총 관리하는 행정실 부장이었다.

“김 교수님이 머물 곳은…….”

부장은 이런저런 편의를 열심히 설명했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스타 교수가 자신의 병원에 교환교수로 온 것에 크게 감명한 눈치였다.

가만히 듣던 진현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무엇입니까?”

“근무를 시작하기 전 이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러면서 부장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스타 의사가 방문하면 의례적으로 이사장이나 그 밑에 급의 인물이 마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별 소식이


없었다.

마치 일부러 외면하는 것처럼.

남자는 전화로 비서실에 김진현의 방문을 알렸다.

“아, 아… 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말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1 시간 뒤에 방문해 달라 하는군요.”

“알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1 시간 뒤에 이사장실로 방문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전의 인연들과 인사를 하고 주변을 걸으며 향수를 풀다 보니 금세 1 시간이 지나갔다.

꼭대기 층에 위치한 이사장실에 도착하니 고혹적인 인상의 미녀, 민 비서가 진현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김 선생님.”

“네, 오랜만입니다.”

진현의 인사를 받는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진현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와의 악연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등을 돌린 그녀를 따라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이사장 이종근, 외과 과장 고영찬, 그리고 이상민도 있었다.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다들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미국에서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가 갈릴 정도였다.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들에게 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대일병원의 이사장 이종근이오. 세인트 죠셉의 명망 높은 김 선생의 방문을 환영하오. 앞으로 1 년간 잘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악수를 나눴다.

“여기는 우리 대일병원 외과의 과장 고영찬 교수라고 합니다. 업무나 일정은 고 교수와 상의하면 됩니다.”

“네, 반갑습니다. 고영찬 교수님, 오랜만이지요?”

진현은 고영찬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고영찬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과 고영찬은 이렇게 웃으며 인사를 할 사이가 절대 아니었다.

“네, 대일병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에 진현은 이상민을 바라봤다.

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상민 선생도 오랜만이군요. 잘 지냈습니까?”

이상민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오갔지만 더없이 냉랭한 분위기가 장내에 가라앉았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두 바쁘신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식 출근은 내일부터니 내일 고영찬 교수님을 다시 찾아뵈면


될까요?”

이종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초라도 빨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될 듯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푹 쉬시고 앞으로 수고해주십시오. 명망 높은 김


교수님에게 기대가 많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들으며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참.”


“왜 그러십니까, 김 교수님?”

이종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장님.”

“……!”

이종근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현은 이상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상민 선생도 다음에 봅시다. ‘이전처럼’ 잘 부탁합니다.”

이전처럼.

그 묘한 말에 이상민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김진현 선생님.”

***

진현이 나간 후 이종근은 짜증을 냈다.

“다시 찾아오긴 뭘 다시 찾아와.”

사실 김진현이 대일병원에서 교환교수로 근무하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1 년 동안 일하고 세인트 죠셉으로 돌아갈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마치 고양이가 개를 만난 듯 불쾌하고 짜증 났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큭!”

그 순간 이종근은 머리를 감쌌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다시 두통이 발작한 것이다.

“이, 이사장님.”

이번엔 꽤 통증이 심했다. 이종근의 손이 벌벌 떨렸고,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은데…….’

고영찬은 그리 생각했으나 이종근의 기분이 원체 나빠 보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두통이 가라앉은 이종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

교환교수로 왔지만 특별한 업무가 떨어지진 않았다.

업무를 조율하는 고영찬이 그를 불편해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교환교수라는 직위 자체가 학문적 교류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업무를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어서 그렇다.

그래서 처음 며칠간 진현은 편안한 시간들을 보냈다.

가족들과 회포를 풀고, 강민철과 술을 먹고, 그를 아끼던 사람들과 재회를 하고, 그리고 혜미와 못다 한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범생이의 귀국을 축하하며!”

고등학교 때 일진이었지만 지금은 형사가 된 김철우가 큰 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그는 친구의 귀국이 기쁜지 단숨에 소주를 들이켰다.

“크… 이렇게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 정말로! 네가 그렇게 미국으로 갔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어쨌든
성공해서 돌아온 거지?”

의료계의 문외한인 그는 진현이 어떤 위치로 돌아온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 곤란해 진현은 고개만 끄덕였다.

“뭐, 그냥.”

“그래, 난 네가 어딜 가도 성공할 줄 알았어. 아, 황문진 그놈도 같이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훈련소에 있지?”

“엉. 죽겠다고 연락 왔다. 자식이, 장교로 간 주제에 뭐가 힘들다고.”

올해 전문의 자격을 딴 황문진은 군의관 복무를 위해 훈련소에 간 상태다.

참고로 같이 전문의를 딴 이상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면제를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건강하시고?”

“엉. 누가 수술했는데. 멀쩡하시다.”

화기애애하게 술잔이 돌았다.

과거를 생각하면 김철우와도 참 묘한 인연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둘 다 얼굴이 빨개졌을 때 진현이 입을 열었다.

“철우야.”
“응?”

“너 내 친구지?”

“자식이, 그런 걸 왜 묻냐?”

김철우는 진현을 타박했다.

“취한 김에 이야기하는데 넌 내 마음속 가장 소중한 친구다, 임마.”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가장 친하다 생각했던 이상민과는 이미 절교했고, 진현은 깊은 우정에 더해 아버지의 은인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나중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그 나직한 목소리에 김철우는 술기운이 달아났다.

김진현, 이놈은 실없는 말을 할 놈이 아닌데?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

김철우는 소주를 쭈욱 들이켜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부탁인데. 걱정 마라. 내 목을 걸고라도 네 부탁은 들어주마.”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

그 꿀 같은 휴식은 금세 끝이 났다.

어디서 소문이 난 것인지, 진현에게 환자가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일병원에 세인트 죠셉에서 온 김진현 교수란 분이 계시다던데…….”

주로 다른 병원에서 곤란을 표한 난치성의,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미국의 유명 병원을 알아볼 정도로


간절한 환자들이 진현에게 몰려들었다.

“꼭 살려주세요, 선생님. 제발 부탁합니다.”

“쉽진 않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자신의 손을 잡는 환자들에게 진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현이라고 그들 모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의학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진현은 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진현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했다.

완치를 위해서도, 그리고 딱하고 슬픈 일이지만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도.

뛰어난 실력, 그리고 마음을 다한 치료에 그를 찾은 환자들은 모두 만족했다.

<미국 최고의 병원 중 한 곳인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 교수, 대일병원의 교환교수로 재직 중.>

이런 내용의 글이 인터넷 환우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진현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일복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저… 선생님.”

한 앳된 인상의 외과의사가 그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저는 외과 전공의 2 년 차 대표 김은성이라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김은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

그 어려워하는 모습에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2 년 차 대표면 나름 자신의 의국 후배로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네! 사실 다름이 아니라… 바쁘신데 정말 죄송하지만, 강연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강연이요?”

뜻밖의 부탁이었다.

“네, 사실 김진현 교수님이 미국에서 쓰신 논문들을 보고 감명받은 레지던트가 많아서… 꼭 강연을 듣고 싶다고
의견을 모아 이렇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아, 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부탁이긴 하지만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었다.

애초에 의대 교수란 직책엔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의무도 포함돼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일정을 본 후,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표 김은성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진현이 강연한다는 것에 크게 기대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강민철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강연한다고, 김 선생?”

“네.”

“잘됐네. 나도 가서 듣지.”

“네?”

진현은 황당이 되물었다.

레지던트 대상 강연에 국내 최고 대가인 강민철이 온다고?

하지만 강민철은 태연히 말했다.

“왜? 나도 자네 논문에 이전부터 궁금한 게 많았거든. 감탄도 많이 하고. 도대체 2 년 동안 어떻게 그런


논문들을 찍어낸 거야? 김선생, 자네 아이큐는 도대체 몇인가?”

유영수도 덩달아 말했다.

“나도 자네 논문들 감명 깊게 봤는데. 나도 가도 되지?”

교수실 근처에서 지나다니던 외과 교수들도 말했다.

“김 교수가 강연을 한다고? 나도 가지.”

“시간이 언젠가? 장소는?”

진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게 아닌데?

강민철은 아예 묘수를 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심포지엄(Symposium)을 열지.”

(다음 편에서 계속)

# 133

133. 대가(大家) (2)

“심포지엄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내가 회장으로 있는 간이식 학회에서 김 선생 강연 안 하냐고 자꾸 연락이 왔거든. 기회가
되면 초빙해서 강연 듣고 싶다고. 그냥 그러지 말고 아예 대일병원 컨벤션 센터를 빌려서 심포지엄을 열지?”
유영수도 신 나서 말했다.

“간이식 학회에는 제가 공지하겠습니다. 이거 몰려올 사람들 숫자를 생각하면 병원 내 컨벤션 센터가 좁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간이의자로 때워야지, 뭐. 늦게 온 사람은 서서 들으라고 하고.”

“차라리 힐튼이나 하얏트 호텔의 컨벤션 센터를 빌릴까요? 거기 넓고 깨끗하고 좋던데.”

“그것도 좋지. 비싸진 않나?”

“대충 스폰서 받고, 참가비 10 만 원씩 걷으면 됩니다. 더 걷어도 다들 들으러 올걸요?”

강민철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진행해 봐.”

“대표 좌장(Chairmain)은 누구에게 부탁할까요?”

“부탁하긴 누구한테 부탁해? 당연히 내가 해야지.”

말 한마디를 주고받을 때마다 스케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나갔다.

진현은 살짝 당황해 그들을 제지했다.

“저… 저는 그냥 레지던트 강연을 하려 한 건데…….”

“그 좋은 강연을 왜 레지던트만 듣나?! 가만히 있어봐. 우리가 알아서 진행할 테니.”

“…….”

그렇게 진현을 주인공으로 한 심포지엄이 결정됐다.

<세인트 죠셉의 천재 김진현 교수의 심포지엄!>

이런 공지문이 간이식 학회, 간 학회, 대한 외과 학회에 전달되었고 전국의 의과대학 및 병원에서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김진현 교수면 란셋의 그 논문을 쓴 그 사람 맞습니까?”

“날짜는 정확히 언제입니까?”

“여기가 경남이라서 늦을 것 같은데 몇 시에 시작이죠?”

지난 2 년간 미국 의학계를 뒤흔들었던 진현의 논문들은 한국 의학계에서도 초유의 관심사였다.

대한민국 외과 의학계와 관련 있는 수많은 의사가 진현의 강의를 듣기 위해 심포지엄 참가 신청을 하였고, 참석


희망자가 너무 많아 힐튼 컨벤션 센터의 좌석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심포지엄을 준비하는 이식 학회 직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우리 학회 창립 이래 이렇게 참석자가 많은 심포지엄이 있었나? 이건 뭐, 대한외과학회 총회와 비슷한
규모잖아.”

“강연하는 사람이 워낙 유명한 사람이잖아.”

“그 뉴욕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 교수?”

“응, 미국 내의 학회에서도 김진현 교수를 초빙하려고 난리라던데?”

“이거 참 준비를 잘해야겠군.”

강연자가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유명 인물이 강연하는데, 미진한 점이 있으면 학회 전체의 망신이었다.

간이식 학회 직원들은 온 정성과 힘을 다해 심포지엄을 준비해 갔다.

***

그렇게 진현이 드넓은 창공으로 끝없이 날아오를 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사장 이종근 일당들이었다.

“힐튼 호텔을 빌려 심포지엄을 연다고?”

“네.”

“지방에서 올라올 사람들 때문에 호텔 방 예약도 끝났고?”

“…네.”

고영찬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이종근의 눈치를 보았다.

진현이 가볍게 생각한 레지던트 강연은 그 스케일이 하늘 끝까지 커져 이젠 어마어마한 학회 총회 수준이


되어버렸다.

“고 교수, 자네도 심포지엄에 참석할 건가?”

“…….”

고영찬은 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진작에 사전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악연과는 별개로 진현의 기함할 논문들에 대한 강연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종근의 수족인 것을 떠나 고영찬도 의사이며 의과대학의 의학자였으니까.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놈이 잘나가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그저 불쾌함을 떠나 뭔가 기분이 불안했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자네도 심포지엄에 간다고?”

“네.”

“잘됐군.”

“…예?”

“이번 심포지엄 내용 중에 ‘간 우엽 절제를 통한 간이식 진행 중 Roux-en Y 루프 및 Stent’ 사용에 대한


강연도 있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공격을 받고 있는 내용이라던데.”

“그렇긴 합니다.”

이종근이 말한 주제는 진현이 지난번 발표한 연구로 기존 학설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내용의 주장이어서 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기존 학설과의 논란(Controversial)의 여지를 떠나 내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주장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렇진 않았다.

그 주제에 대한 진현의 논문은 향후 3 년 뒤 5,000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다기관 대규모 선행 연구로 진실이
밝혀지는, 시대를 앞선 주장이었으니까.

진실을 기반으로 했기에 이론적 근거도 탄탄했다.

하지만 고영찬은 이종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떨떠름히 답했다.

“네, 제 생각에도 무리수가 많은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기존 학설과도 상충되고요.”

“그렇지?”

“네.”

이종근이 은밀히 말했다.

“그러면 자네가 심포지엄에 가서 그 문제를 거론해 보게.”

“네?”

“기존 학설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잖아. 자네가 그 문제를 지적해서 망신을 줘보게.”

고영찬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망신을 주라고?

“그, 그건… 제가 학회에서는 큰 발언권이…….”

“왜? 자네는 이래 봬도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외과 과장이잖아. 그 건방진 놈에게 톡톡히 망신을 주라고.”

그가 과장이 된 것은 오로지 이종근의 충견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학계에서 명성의 관점으로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과 그를 비교하면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가 났다.

‘내가 어떻게 김진현을 망신 줘! 아무리 진료에 손 놓은 지 오래돼서 감이 떨어진다 해도 이건 너무 무리한


명령이잖아!’

강민철 정도 되는 간이식의 대가면 김진현의 주장에 면박을 주는 언급을 할 수 있다. 물론 상대의 주장에
김진현도 순순히 당하진 않겠지만.

하지만 고영찬이 괜히 어설프게 면박을 줬다간? 반대로 톡톡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물론 김진현의 주장이 턱도 없는 내용이었으면 얼마든지 망신을 줄 수 있겠지만, 그런 내용이었으면 최고 권위의


외과 학회지인 ‘Surgery’에 기재되었을 리가 없다.

고영찬은 거절도 못하고, 교수실로 돌아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치겠군.’

고영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했다. 스트레스에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심포지엄 당일.

“…….”

고영찬은 컨벤션 센터를 가득 채운 인원에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자리가 모자라 호텔의 진행 요원들이 간이의자를 나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메인 진행자를 자원한 유영수가 단정한 양복을 입은 채 마이크를 들었다.

“아아,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이


심포지엄의 좌장(Chairman)이신 강민철 교수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강연장 우측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강민철이 몸을 일으켰다. 몸이 워낙 커 검은 양복이 작은 듯한 느낌이다.

“간이식 학회의 강민철입니다.”

짝짝짝!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강민철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간이식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그에게 모두들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유영수가 주인공을 소개했다.

“다음은 이 심포지엄의 강연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 교수입니다.”

그 소개와 함께 중간 정도의 키,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짧은 인사말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외과 학회를 뒤흔드는 젊은 천재의 강연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 심포지엄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각 대학의 교수들, 학회의 대가들… 너 나 할 것 없이 진현의 얼굴만 바라봤다.

압도당할 만한 분위기였지만 진현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난 2 년간 이런 자리는 수도 없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간이식 후 합병증에 대한 메타 분석 결과…….”

차분한 음성이 컨벤션 센터를 울렸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란 전혀 없는 고도로 정제된 발표가 장내의 모두를 압도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주제를 연달아 발표 후 질문 시간이 되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손을 들었다.

“백제 의과대학의 강석형입니다. 방금 발표한 내용 중 질문이 있습니다.”

간 절제술에 한하여 전라남도 쪽 최고의 명의라 꼽히는 강석형이 먼저 질문을 하였다.

그 뒤에도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질문자들 모두가 학회의 내놓으라 하는 인물들이다.

논문의 핵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도 많았으나 지난 2 년간 수많은 학회를 다니며 미국의 대가들과 논쟁과 토론을
거듭한 진현이다.

일체의 당황 없이 차분히 답변을 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좀 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현재 세인트 죠셉과 엠디엠더슨, 홉킨스가 연계해 다기관
선행 연구(Multicenter prospective study)를 진행 중입니다. 파일럿 스터디(Pilot study) 결과,
현재 예상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한편 그의 발표를 보며, 고영찬은 한 단어를 떠올렸다.

대가(大家).
그래, 대가였다.

자신 같은 이와는 다른 의학의 대가.

바로 강민철 같은.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진현이 어리다 무시하는 이가 없었다.

오로지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볼 뿐.

순간 고영찬은 까닭 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은 자신 같은 이가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도 한때 저런 것을 꿈꿨는데…….’

처음 교수의 꿈을 꿀 때만 해도 환자를 위하는 마음과 의학을 추구하는 마음이 깊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파에 찌들고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권력만 탐하는 인물로 변해갔다.

병원 내 권력을 위해 추잡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까짓 권력이 뭐라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김진현…….’

어린 나이임에도 저 높은 곳에서 빛을 발하는 그를 보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고영찬은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쓰렸다.

이유 없이.

***

심포지엄은 성황리에 끝났다.

한국 외과 학회의 모두의 머리에 ‘김진현’이란 이름 석 자가 명확히 박혔다.

대일병원 내에서의 위상도 한없이 올라갔다.

“김 교수, 심포지엄 잘 들었네. 훌륭했어.”

“그래, 다음엔 우리 병원 안에서도 따로 한 번 더 부탁하네.”

미국의 의학계를 뒤흔드는 천재?

지금까지는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면 이제는 확고한 대가로 모두의 가슴에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다시 한 번 높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사장 직속의 창조기획실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민 비서가 다소곳이 전화를 받았다.

“네, 창조기획실의 민소영실장입니다.”

-백중현입니다.

짧은 소개.

그러나 민 비서는 뻣뻣이 굳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중현은 대일그룹 회장실의 비서실장이다!

“백 실장님? 병원에는 무슨 일로…….”

-아… 회장님 진료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회장이면 대일그룹의 총회장 이해중을 뜻한다.

건강문제로 경영권은 막내아들 이동민에게 대부분 할양된 상태지만, 막대한 입김은 여전했다.

“네, 실장님. 회장님 진료는 14 일 목요일로 잡혀 있는데, 변경하도록 할까요?”

-시간은 괜찮은데, 의료진을 변경했으면 합니다.

“의료진이요?”

-네, 지금 교수님도 훌륭하시지만 회장님께서 세인트 죠셉에서 온 김진현 교수님의 진료를 받고 싶어 하셔서요.
김진현 교수님의 진료로 변경해 주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

# 134

134. 몰락 (1)

“……!”

대일그룹…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권력자 이해중 회장의 주치의가 김진현으로 변경되는 순간이다.

***

주위의 시선 때문에 이해중 회장의 진료는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해중 회장은 통행이 통제된 검사실에서 최고 수준의 검사를 받고, 최고층에 위치한 VIP 병실로 이동했다.

남들의 시선을 피한 움직임이었지만, 원체 중대 사안이라 병원 내 주요 의료진들은 이해중 회장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해중 회장의 지정 주치의가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거 이러다 김진현 선생이 간 센터의 센터장이 되는 것 아니야?”

“회장님의 주치의인데 센터장이 문제인가? 앞으로 잘 보여야겠어.”

권력에 예민한 각 과의 핵심 교수들이 눈을 낮게 빛냈다.

국내 최고라 불리지만 대일병원은 이해중 회장의 개인 소유나 다름없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이해중 회장은 절대 은혜를 잊지 않아, 크든 작든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준 의사에게 큰 사례를
했었다.

10 년 전, 자신의 폐렴을 치료해 준 호흡기 내과 교수에게 부원장자리를 주었던 것이 대표적 사례였다.

당시 1 주일간 입원했을 때 담당 교수는 물론, 수발을 들은 간호사, PCD 소독 담당 레지던트, X ray 를 촬영한
방사선사… 모두 수천만 원 상당의 사례를 받았었다.

간단한 폐렴조차 그랬는데 불가능하다 일컬어진 간이식 수술을 성공해 목숨을 살려준 김진현이다.

병원 자체를 송두리째 선물한다 해도 이상치 않았다.

“이거 이러다 병원장 자리가 바뀌는 것 아니야?”

“우리 병원에 병원장 자리가 의미가 있나? 어차피 이종근 이사장이 다 해먹는데.”

대일병원에도 당연히 병원장이 있다.

재활의학과 교수인 김영후 병원장.

하지만 이종근의 꼭두각시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그때 한 교수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은 그거 모르나? 요새 대일그룹 내에서 이종근 이사장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많아. 대일그룹의 경영권을
승계 받은 이동민 사장이 이종근 이사장에게 이를 갈고 있다던데?”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이야기 듣긴 했어. 우리 병원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대일 홀딩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던데.”

한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진짜 김진현 선생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 아니야?”

지나가듯 한 목소리였지만 그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물론 김진현은 세인트 죠셉 소속의 의사이고, 대일병원에는 교환교수로 온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미국에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권력에 예민한 교수들은 김진현이란 이름을 머리 깊숙이 새겼다.


***

대일병원 꼭대기 층에는 오로지 대일그룹 일가족을 위한 병실이 놓여 있었다.

병동 하나의 크기만 한 그 병실은 최고급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는데, 병실이라기보단 동남아 호화 리조트의
스위트룸 같았다.

그 병실에서 이해중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김 선생님.”

“네, 안녕하셨습니까?”

김진현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대일병원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다.

어차피 세인트 죠셉 소속의 진현은 이해중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었으니.

이건 연인 혜미의 친할아버지에게 보이는 예의였다.

‘이종근이야… 이미 연을 끊은 가족이니.’

어린 시절 혜미를 포함한 자식들을 어떻게 학대했는지 알고 있는 진현은 그를 혜미의 아버지 취급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수없는 죄악들. 그는 존중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수술을 워낙 잘 받아서요. 선생님께 받은 새 생명, 정말 감사합니다.”

진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해중 회장의 감사는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진현이 아니었다면 그는 당시의 고비를 절대 넘기지 못했을 것이니.

그리고 이해중이 그렇게 죽었다면 대일그룹은 욕심 많은 자식들 손에 갈가리 찢어졌을 게 분명했다.

즉, 진현은 이해중 회장 개인의 은인이 아니라 대일그룹 전체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현은 검사 결과를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검사 결과는 전부 좋습니다. 간수치도 정상이고, CT 상 이상 소견도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단, 면역억제제인 MMF (Mycophenolate mofetil)의 수치가 미세하게 낮아 용량을 조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약을 먹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지요?”

“네, 괜찮습니다.”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면 감염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중간에 고열이 나거나 하면 곧바로 병원에 연락을
주십시오.”

그 뒤 진현은 차분한 어조로 진료를 이어갔다.

그런데 가만히 그의 설명을 듣던 이해중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이해중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 저에게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 했던 말 기억합니까?”

“……?”

“한국에 돌아오면 제게 한 가지 부탁을 할 것이라 했지요. 그 부탁이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이해중은 원망 서린 표정을 지었다.

“김 선생님은 늙은이들이 얼마나 궁금증이 많은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계속 궁금해했습니다.
도대체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나. 내가 아끼는 손녀딸이라도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김 선생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궁금증을 푸나 했는데… 계속 아무런 말씀도 없고. 궁금해죽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이해중은 ‘이제 좀 말해봐라’란 표정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옆에 서 있던 막내아들 이동민도 물었다.

“그래요. 저도 궁금합니다. 어떤 부탁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말해주십시오.”

이해중, 이동민, 그리고 백중현 비서실장 모두 진현의 입만 바라봤다.

진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답변은 아니었다.

“혹시 조만간 회장님의 댁으로 찾아 봬도 되겠습니까?”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히 되지요. 김 선생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진현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면 그때 찾아 봬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부탁일지 궁금하단 얼굴을 했으나 진현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

이상민은 무심한 얼굴로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접속한 사이트는 세계적 대가들이 모여 만든 의학 데이터 베이스였는데, 빽빽한 영어가 적혀 있었다.

[Schizophrenia is a psychiatric disorder involving chronic or recurrent


psychosis…….]

정신분열병(Schizophrenia).

이제는 조현병이라 이름이 바뀐 이 질환은 망상, 환각을 보며 와해된 언어나 행동, 정서적 둔마, 무논리증,
무욕증 등이 나타나는 질환으로…….

가만히 읽어보던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의 어머니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정신분열병을 앓다 사망했다.

어릴 적 환각에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재미없군.’

고개를 드니 흐릿한 영상이 지나갔다.

환각(Hallucination).

마치 악몽을 꾸듯 섬뜩한 환각.

이전에는 그의 손에 죽은 사람들만이 보였으나 이제는 달랐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그를 저주했다.

전형적인 정신증(Psychosis)으로 점점 증상이 악화되고 있었다.

‘DSM-IV 로 분류하면 어디에 들어갈까?’

여상이 생각했다.

싸이코시스(Psychosis)는 확실히 싸이코시스인데… 글쎄? 어디에 들어갈까?

일단 아직까지는 정신분열병은 아닌 듯했다. 현실지각능력과 와해된 행동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후에 더 증상이 악화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재미없군.’

그래, 재미없었다.

그때 누군가 이상민을 불렀다.

“선생님, 오기수 교수님 PPPD 수술 시작할 시간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가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기로 한 수술이었다.

이상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요와 긴장이 감도는 회색 빛 수술장.

고난도의 췌장암 수술, PPPD 를 집도하는 대일병원의 오기수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퍼스트 어시스트인 이상민이 영 수술을 못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민 선생?”

“…….”

“이상민 선생?! 뭐하나?”

짧은 외침 뒤에야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놀림.

“이상민 선생, 어디 몸이 안 좋은가?”

“아닙니다.”

수술 마스크 뒤 삐쩍 마른 이상민의 얼굴을 보며 오기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민은 대일병원 교수들 사이에서 유명인이었다.

이사장 이종근의 아들이자 대일병원을 물려받을 후계로 꼽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좀 이상한데? 어디 안 좋은 것 아니야?”

“괜찮습니다.”

이상민은 괴물 김진현에게 비교되었을 뿐이지 굉장히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명석한 상황 판단 능력, 재능이 넘치는 손 솜씨, 재빠른 위기 대응 능력.

임상의로서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요즘은 무언가 이상했다.

먼 허공을 바라보듯 흐릿한 눈빛.

“몸이 안 좋으면 말해. 다른 임상강사나 치프랑 손 바꾸게 해줄 테니.”

오기수 교수는 걱정해 말했다.

이상민은 수술 마스크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어기적어기적 시간이 지나고, 다행히 별문제 없이 수술이 끝났다.


수술복을 갈아입은 후 이상민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중환자실로 향했다.

수술실에서 중환자실로 향하는 짧은 거리를 걷는데도 환각과 환청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따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환자를 살피는데, 외과 중환자실 B-zone 에 위치한 다른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김 O 성, M/57, 간이식, 교수 : 김진현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는 자신의 천재 친구의 환자였다.

굉장히 고난도 수술의 환자였는지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누가 툭 건들기만 해도 스러져 생을 마감할 정도로.

물론 김진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환자를 살릴 것이다.

그게 김진현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의 손이 개입한다면? 그래도 김진현이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을까?

“…….”

이상민은 가만히 그 환자를 바라봤다.

환자의 쇄골정맥에 삽입된 중심정맥관에는 독한 약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저 약들 중 하나만 잘못된 속도로 들어가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저 환자는 생을 마감할 것이 분명했다.

“…….”

저벅.

이상민은 한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B-zone 과는 사각에 위치한 D-zone 의 환자의 상태가 급해 간호사들은 모두 D-zone 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CCTV?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병원 구석구석에 CCTV 가 모두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설치되어 있는 곳보단 없는


구역이 훨씬 많다.

지금 그가 서 있는 B-zone 에도 CCTV 는 없다.

저벅.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으으…….”

환자가 신음을 흘렸다.


곧 옆에 도착한 이상민은 환자에게 투입되는 약물들을 바라봤다.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KCL, 면역억제제…….

모두 과량투입 시 독이나 다름없는 약들이었다.

“김진현…….”

이 약물들에 손만 대면 이전과 같은 사고를 덮어씌울 수 있다.

그러면 한창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그는 다시 꼬꾸라지겠지.

“으으…….”

이상민의 눈이 신음을 흘리는 환자를 무채색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손이 올라가기 직전…….

흠칫!

이상민은 움찔하며 등을 돌렸다.

그곳엔 차가운 눈빛의 젊은 남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진현이었다!

이상민이 말했다.

“언제 왔어? 아니, 와 있었나?”

김진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멈추지?”

(다음 편에서 계속)

# 135

135. 몰락 (2)

“뭘?”

“몰라서 물어?”

“난 그저 환자를 보고 있었을 뿐이야. 세계에서 인정받는 천재 교수님의 환자가 어떤지 궁금했거든.”

김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고 그는 이상민을 스쳐 지나가 환자 옆에 위치한 중환자실 컴퓨터에 섰다.


“뭐, 좋아. 그래도 감옥에 처넣을 꼬리를 잡나 싶었는데 아쉽군. 하여튼 감도 좋아. 그러니 지금까지 그런
죄악을 저지르고도 무사한 거겠지.”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 뭐.”

진현은 중환자실 차트를 클릭했다.

바이틀 시트(Vital sheet)가 검은색, 빨간색, 초록색 선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2 년 동안 미국에서 많은 생각을 했었지. 넌 왜 그런 일들을 저질렀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상민은 혜미의 오빠를 죽이고, 자신을 궁지에 몰았을까?

어째서?

“고민을 하다 깨달았지. 이유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냥 넌 죽일 놈이야.”

이상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현은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면역억제제의 용량을 계산했다.

“뭔가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야. 곧 너를 대일병원에서 쫓아낼 생각이거든. 대일병원뿐


아니라 외과의사 사회 전체에서 널 매장시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마지막 발악을
하고 싶으면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야.”

도발이었다.

이상민의 미소가 짙어졌다.

“글쎄? 정말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그리고 그는 모니터 옆에 놓인 청진기를 챙겨 중환자실을 떠났다.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에 이상민의 미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그래, 재미있는 일이 하나 남아 있었지.”

모든 삶에서 흥미를 잃은 그였지만 재미있는 일이 단 하나 남아 있었다.


이상민은 작게 중얼거렸다.

“김진현…….”

***

그리고 이해중 회장이 퇴원한 후 며칠 뒤.

“많이 기다렸어?”

혜미가 병원 로비에서 진현에게 뛰어왔다.

“아니, 나도 막 도착했어. 타.”

진현은 부모님 집에서 매일 출퇴근이 어려워 국산 중형차를 하나 마련했다.

미국에서 번 돈으로 꿈에 그리던 포르쉐를 살 수도 있었지만, 그건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으로 미뤘다.

그녀가 차에 타자 진현은 나직이 물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

특별한 일.

단순한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상민의 일을 묻는 것이다.

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 할아버지 집에서 출퇴근하고 병원 밖엔 나가지 않으니까.”

이해중 회장의 자택.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조심해. 그 미친놈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너야말로. 절대, 꼭 조심해. 알았지?”

“응, 충분히 조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아무리 이상민이 범죄의 천재라도 경계를 곤두서고 신변을 주의하고 지내면 어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무작정 총을 쏜다거나 칼을 휘두른다거나 자동차를 들이박는다면 속수무책이겠지만, 서울이 무법지대도


아니고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부주의하게 홀로 인적 드문 곳에 가질 않는 한.

진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기다려라, 이상민. 그리고 이종근. 준비는 다 끝나 있으니.’

모든 준비는 한국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미 다 끝나 있었다.

그들이 무슨 발악을 해도 소용없을.


‘이제 멀지 않았어.’

그래, 정말 멀지 않았다.

그들의 죄악을 단죄할 때가!

그런데 혜미가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차려 입은 거야? 무슨 날이야?”

평소 패션에 신경을 쓰지 않는 진현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미국에서 마련한 말쑥한 정장으로 몸을 단장한 것이다.

독일제 고가 정장에 지적인 분위기, 깊은 눈빛이 얽혀서 인텔리한 느낌을 자아냈다.

“어디 갈 데가 있어서.”

“어딜?”

진현은 차에 시동을 켰다.

부르릉.

차의 시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너도 잘 아는 곳이야.”

“어딘데? 어디 가려는데?”

“금방 도착해. 20 분이면 도착할 거야.”

혜미는 볼을 부풀렸다.

진현은 웃으며 운전을 시작했다.

병원을 벗어난 자동차는 올림픽대로에 진입 후, 한남대교에서 방향을 꺾었다.

출퇴근할 때마다 다니는 길이 나타나자, 혜미의 눈이 커졌다.

눈치챈 것이다.

“진현아, 설마 지금?”

“응.”

진현은 답했다.

“우리 결혼하려면 인사드려야지. 따로 하나 더 드릴 말씀도 있고.”

한남대교를 건넌 자동차는 한남동 커다란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대일그룹의 회장, 이해중의 저택이었다.

***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백중현이 마중을 나왔다.

그룹 전체의 비서실장인 그가 마중 나온 것만으로도 이해중 회장이 진현의 방문을 얼마나 반기는지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김 선생님.”

그런데 보조석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백중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가씨?”

“아… 백 실장님.”

혜미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가씨가 김 선생님과……?”

“그게…….”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보고 백중현은 두 사람의 관계를 퍼뜩 짐작했다.

백중현은 새삼스레 두 사람을 바라봤다.

화사한 꽃 같은 혜미, 깊은 눈빛의 진현.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백중현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보기 좋은 커플이군.’

혜미를 끔찍이 아끼는 이해중 회장이 뭐라 반응할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은 커플인 것은 맞았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회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중현은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

작은 공원 같은 정원을 지나 저택 내 커다란 응접실에 이해중과 이동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

인사말을 건네다 이동민이 의외의 얼굴에 말을 멈췄다.

“혜미야, 네가 왜 김 선생님과 같이? 오다가 만난 거니?”

“아… 작은 아빠…….”

혜미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이해중과 이동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진현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시 한번 인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러면서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제가 혜미의 남자친구입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

이해중과 이동민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

넷은 커다란 식탁에 마주앉았다.

고용인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을 내왔지만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김 선생이 우리 손녀딸과…….”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대기업의 총수라 해도 손녀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진 않으니 혜미가 누구와 사귀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물론 다 큰 성인이니 누군가와 교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게 설마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김


선생이라니?

그때 이동민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김 선생이 우리 혜미의 남자친구라니? 둘이 언제부터 만난 것입니까?”

“처음 만난 것은 학생 때부터고, 교제를 시작한지는 3 년 정도 되었습니다.”

이동민은 둘의 사랑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김진현 정도 되는 남자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집안 수준에서 차이가 나긴 하지만 어차피 조카를 정략 결혼시킬 것도 아니고.

최고의 신랑감이다.

이동민은 뭔가 복잡한 심정의 이해중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왜 아무 말 없으십니까? 김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듭니까?”

짓궂은 질문에 이해중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게 아니라…….”

그건 아니다.
김진현이 왜 마음에 안 들겠는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미국 의학계를 뒤흔들 정도의 천재 의사에, 인품도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훌륭하다.

다만…….

‘허허, 아무에게도 안 주려 했건만… 김 선생이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딸이다.

특히나 못난 애비 밑에서 불우하게 자라서인지 다른 손주들에 비해 더 강한 애착이 들어 누가 와도 도둑놈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해중은 주책바가지 늙은이가 아니다.

그의 시선에 둘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이지만 애틋함이 느껴졌다.

아무에게도 주기 싫지만 그건 자신의 주책 같은 욕심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김 선생님이라면…….’

이해중은 입을 열었다.

“김 선생님.”

“네, 회장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이해중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을 놓았다.

“그래, 한 가지만 묻겠네.”

“말씀하십시오.”

“우리 혜미. 딱하고 착한 아이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나?”

진현은 굳은 얼굴로 답했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이해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는 자네도 날 할아버지라 부르게.”

할아버지.

처조부를 대면하며 호칭할 때 쓰는 단어였다.

진현을 손녀사위로 인정한 것이다.


***

그 뒤 화기애애한 식사가 이어졌다.

새로운 조카사위를 맞이한 이동민이 기쁜 얼굴로 집안에 귀히 보관 중인 꼬냑을 땄다.

“김 선생… 아니, 이제 김 서방이라 불러야 하나? 하여튼 한 잔 받으라고!”

혜미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대일 가문 전체의 내력인지 이동민도 주량이 장난 아니었다.

이해중 회장도 한잔 마시고 싶은 눈치지만, 간이식까지 받은 몸으로 술을 마실 수 없는 노릇. 마시고 싶은 만큼


손녀사위에게 술을 권했다.

“쭈욱 마시고 내 술도 한 잔 더 받게, 허허.”

“하, 할아버지. 진현이 취해요. 그만 좀 줘요.”

혜미가 말렸으나 흥이 오른 그들은 듣지 않았다.

원래부터 은인으로 여겼던 김진현이 손녀사위가 된다니!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할수록 기쁜 일이었다.

“남자는 원래 술을 잘 마셔야 해. 자, 김 서방 한 잔 더 받게!”

특히 이동민이 신이 나서 술을 권했다.

말술인 대일 가문 사람들에 비해 주량이 약한 진현은 죽을 맛이었으나 거절하지도 못하고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취하면 안 되는데.’

처가댁 어른들 앞에서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중요한 용건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방금 전의 용건보다 훨씬 중요한.

그런데 혜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이해중이 물었다.

이전과 다른 무거운 목소리다.

“저 아이의 가정사는 알고 있나?”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참 불쌍한 아이이지. 내가 바빠 저 어린 것을 챙겨주지 못했어.”

이해중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현은 눈을 감으며 그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이종근의 여성편력으로 어머니가 자살했고 어머니 없이 자라며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그 사실을 이해중이 눈치채 손을 쓰기 전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겼던 이범수의 죽음까지. 그녀의 과거는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네, 혜미는 제가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래, 그녀는 내가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래, 잘 부탁하네. 그리고 혜미가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안 좋지만 그래도 아버지니 가서 인사를 드리게.”

“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진현이 묘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곧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다.

장인어른께 하는 일반적인 인사와는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회장님.”

“허어, 할아버지라고 부르래도.”

진현은 머쓱히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십니까? 나중에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다는 것.”

“당연히 기억하지. 뭔데 그러나? 모든 말만 하게. 다 들어줄 테니.”

(다음 편에서 계속)

# 136

136. 몰락 (3)

이해중과 이동민,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이 세기의 천재 의사가 무슨 부탁을 할까?

그들은 김진현이 무슨 부탁을 하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생명의 은인인 것에 더해 이제 손녀사위가 될 사이였으니.

“그건…….”

진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진현이 이해중에게 인사를 올린 후,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이해중은 저택의 연못에서 금붕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 바람이 차니 들어가 계세요.”

이동민이 다가왔다.

하지만 이해중은 계속 연못을 바라볼 뿐이었다.

“동민아.”

“네?”

“김 선생님… 아니, 우리 손녀사위의 부탁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이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김진현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흐음… 공의에 맞는 처분을 부탁한다, 라… 이게 무슨 말이지?”

진현의 부탁은 간단했다.

공의에 맞는 처분을 부탁한다. 이게 다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으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고,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할 뿐.

“글쎄요. 빈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텐데.”

“대일병원과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김진현과 대일그룹과의 연관성은 대일병원밖에 없다.

“뭐,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 하니 기다려 보시죠.”

“흠… 그래도 궁금하잖아.”

이동민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뭘?”

“김 선생 말입니까?”

“사람을 찝찝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것만 빼면 최고지. 왜?”


“대일병원 때문에 말입니다.”

“대일병원? 대일병원이랑 손녀사위가 왜?”

이동민은 나직이 말했다.

“최근 대일병원 지표가 그다지 안 좋지 않습니까?”

“그거야, 뭐. 이종근, 그놈이 하는 게 다 그렇지.”

이해중은 투덜거렸다.

그래도 핏줄이라서 이사장 자리에 앉혀놓고는 있지만 이종근 그놈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슬슬 대일병원도 혁신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병원에 무슨 혁신?”

“대일병원은 너무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룹의 지원금으로 국내 1 위 자리를 지키곤 있지만,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별다른 발전도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이종근 이사장은 자신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이상민을 병원의 후계로 지목했지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병원을 지휘해도 모자랄 판에 말입니다.”

그 말에 이해중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민은 혜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주이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손주는 아니었다. 태생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룹의 병원을 외부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 핏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한국대 차석
졸업자이기도 하고. 후에 경험이 쌓이면 잘하겠지.”

물론 혜미도 후계 후보가 될 수 있겠으나, 보수적인 의사 사회에서 국내 1 위 병원의 이사장으로 여자를 선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훨씬 적합한 사람이 우리 가문에 생기지 않았습니까?”

“새로? 그게 무슨 말……?”

물으려던 이해중은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김 선생? 손녀사위?”

이동민이 눈을 빛냈다.

“네, 김 선생이 우리 집안의 손녀사위가 되면, 대일병원의 후계로 가장 걸맞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미 김진현은 최고의 의사이자 의학자로 세계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보다 뛰어난 의사를 어디서 또 찾을 수 있겠는가?

“흠… 그렇긴 하군. 좋은 생각이야. 아주.”

이해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연배가 어리지만 조금만 더 경험을 쌓으면 그보다 훌륭한 적임자는 없습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긴 해. 한번 고민해 봐야겠군. 그런데 손녀사위가 대일병원의 병원장 자리를 맡으려 할까?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도 스타 대우를 받으며 의학자로서 최고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이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김 서방도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일병원이라고


의학자의 길을 못 걷는 것도 아닌데 잘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뒤 둘은 김진현이 손녀사위로 들어오면 대일병원의 후계로 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만약 김진현이 승낙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적임자도 없기 때문이다.

***

대일병원의 이종근은 심기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원래도 기분이 좋을 때가 별로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는 정말 최악이었다.

막냇동생이자 그룹의 경영권을 이어받은 이동민과의 대화 때문이다.

‘빌어먹을.’

그는 이동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손녀사위가 될 김진현에게 병원을 물려줄 생각이라고? 아버지도 동의한 내용이고?

“누구 마음대로?”

이종근은 이를 갈았다.

“이 병원은 내 것인데? 누구 마음대로?”

통보하듯 말하던 이동민의 얼굴에 담긴 감정이 그를 분노케 했다.

비웃음과 통쾌함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엔 이런 함의가 담겨 있었다.

‘형님도 이제 대일병원에서 손을 뗄 때가 되지 않았소?’

피해의식에 따른 착각이 아니라 이동민과 이종근은 어릴 때부터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제기랄!”

그런데 그때, 민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 이사장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구?!”

“…김진현 교수입니다.”

이종근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이 순간 제일 꼴 보기 싫은 놈이었다.

“무슨 일인데?!”

“긴히 할 말이 있다고…….”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들어오라고 해.”

“…네.”

민 비서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물러갔고 곧 딱딱한 얼굴의 김진현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지금 조금 바쁩니다.”

이종근은 삐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빨리 할 말하고 꺼지란 음성이다.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이종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앉으십시오.”

진현이 앉자 민 비서가 커피 두 잔을 내왔다.

짙은 커피 향이 방 안에 맴돌았다.

“무슨 할 말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진현은 대답 대신 가만히 이종근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사장님.”

“……?”

“저에게 혹시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이종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김 교수님께 할 말이 있을 리가…….”

진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정말로 없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인턴, 레지던트 시절부터 저에게 많은 일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 할 말도


없습니까?”

“……!”

진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종근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잘 모르겠다고요?”

“그래요. 지금 난 김 교수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뭔가 착각을 하고 온 것 같은데. 계속 이상한 말을


할 생각이면 이만 나가주십시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부 다 알고 왔습니다. 저를 병원에서 쫓아내기 위해 뒤에서 한 일들을. 부정하실 것입니까?”

이종근이 버럭 화를 내었다.

“아니, 김 교수! 지금 도대체 무슨 황당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내가 당신을 쫓아내기 위해 수작이라도 부렸단


말입니까? 하! 세인트 죠셉의 교수라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나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막말을 하고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김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예상했던 반응이다.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길 바라지.

이종근이 순순히 죄를 인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계속 부정할 것입니까?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증거도 없으면서 계속 헛소리할 거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종근은 ‘증거’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김진현에게 부린 수작은 자신과 측근 외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유형의 증거가 남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죄를 입증할 수도 없다.


인턴 시절 어려운 환자를 진료하게 한 것?

응급실로 보내 과도한 업무를 통해 실수를 유발한 것?

위법도 아니고 병원 진료 로테이션상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하면 그만이다.

물론 이전에 응급 수술팀에 과도하게 술을 권해 수술에 차질이 빚어지도록 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나,


이것 역시 명확히 죄를 입증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김진현의 활약 덕에 아무런 피해자도 생기지 않았고.

“알겠습니다. 인정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근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가주시오. 이번 일 내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하지만 진현은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한 손에 들고 온 서류봉투를 열어 수북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뭐요?”

“한번 읽어보십시오.”

“바쁜데 자꾸 이러면…….”

“지금 안 읽으면 후회하실 겁니다. 읽어보십시오.”

이종근은 짜증나는 얼굴로 서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짜증나는 얼굴도 잠시.

이종근의 안색이 시체처럼 질리며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이건…….”

진현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이것조차 거짓이라 말씀하실 것입니까?”

그가 내민 서류.

그것은 매리의 클랜시 패밀리가 진현을 위해 심혈을 다해 마련한 선물로, 지난 10 년간 이종근의 죄악이 모조리
담겨 있었다.

병원 자금 횡령, 교수 임용과 관련한 뇌물 수수, 병원 약품 선정 시 제약회사에게 받은 리베이트… 등등, 수도


없었다.
심지어 7 년 전 강제 추행 후 내쫓은 개인 비서에 대한 자료도 수록돼 있었다.

이종근은 분노와 공포로 몸을 떨었다.

“가, 감히 어디서 이런 거짓 자료를……!”

“거짓 자료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종근은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어, 어떻게 저 자료를? 말도 안 돼.’

진현이 내민 서류에 적힌 내용들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저 서류가 밖으로 유출될 경우 그의 모든 것은 끝이었다.

병원에서의 직위, 재산을 잃는 것은 물론, 수없는 시간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저지른 죄악들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이 서류를 경찰에 넘기고 싶지만…….”

진현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마음을 다스렸다.

“당신이 혜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기에 단 한 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저런 아버지도 아버지라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혜미도 그를 아버지라 여기고 있진 않지만 핏줄이


이어졌음은 사실이다.

그래서 진현은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목석처럼 굳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이종근에게 말했다.

“모든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대일병원의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십시오. 그리고 대일병원과 대일그룹에 관련된 모든
지분은 이혜미에게 할양하고,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은 전부 사회에 환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서류를 경찰에
넘기지 않겠습니다.”

“……!”

진현의 말대로 하면 이종근은 거지가 된다.

그의 모든 재산은 대일병원과 그룹의 지분, 그리고 부정 축재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일평생 탐욕스럽게 모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최대한 자비를 베푼 것이다.

이종근의 죄악을 생각하면 평생을 감옥에 썩어도 시원치 않았다.

“이, 이놈……! 나, 나한테 이러고도……!”

이종근은 분노해 외쳤으나 추레할 뿐이었다.

진현은 냉소를 지었다.


“딱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결정하십시오. 만약 제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 서류를 이해중 회장님과
검찰, 양측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 솔직한 마음으론 당신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

# 137

137. 몰락 (4)

어린 시절 혜미에게 가했던 학대만으로도 진현은 이종근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혜미를 낳은 아버지이기에 일말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현은 이사장실에서 나갔다.

진현이 나간 후, 이종근은 부르르 손을 떨었다.

“어, 어떻게… 저 자료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 이……!”

곧 괴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제기랄! 빌어먹을!”

분노한 그는 닥치는 대로 주변의 가구를 던지고 부쉈다.

***

와장창!

진현은 이사장실 밖에서 고가의 장식품들이 깨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비웃음을 지었다.

‘추해.’

이종근.

정말 추하고 추레한 작자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일 인물이었으면 지금까지 이런 죄악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분명 또 무슨 술수를 부리려 하겠지.’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술수를 부려주었으면 좋겠다.

혜미를 낳아준 것에 대한 보답은 방금 전 제안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만약 술수를 부린다면 그 죄까지 합쳐서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 생각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그 다음은 이상민이다.

이상민은 이종근처럼 간단하진 않았다.

이종근과 다르게 뚜렷하게 잡아놓을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아놓고 기다리자. 분명 움직일 테니 그때가 놈을 잡아넣을 기회야.’

진현은 차가운 얼굴로 생각했다.

이상민.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다.

***

진현이 다녀간 후, 이종근은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지?’

그렇지 않아도 그룹 내에서 이미 눈 밖에 난 그이다.

김진현이 그 자료를 경찰이나 이해중에게 보내면 파멸이었다.

그렇다고 김진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막아야 해. 무조건.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입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모든 증거가 김진현 손에 있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순간, 머리에 통증이 작렬했다.

“크윽!”

최근 들어 통증이 더 자주, 더 강하게 오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일반적인 편두통과는 다른 양상 같아 뒤늦게 검사를 받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조함에 정신이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기랄!”

와장창!

그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이사장실을 뒤엎었다.

민 비서가 덜덜 떨며 그를 만류했다.

“이, 이사장님. 지, 진정을…….”

“닥쳐!”

짝!

“꺄악!”

눈이 시뻘개진 이종근이 애꿎은 민 비서의 따귀를 날렸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

외과 과장 고영찬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종근이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간간히 내뱉는 욕설만으로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자료가 경찰에 넘어가면 나도 끝장이야. 어떻게 하지?’

이종근의 죄악은 그 혼자만의 죄악이 아니라 심복인 고영찬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종근, 고영찬 둘 모두 파멸이었지만, 증거가 김진현에게 있는 이상 딱히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끝장이구나.’

고영찬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세월 어떤 삶을 산 것인지 모르겠다.

‘김진현…….’

문득 지난 심포지엄 때 김진현의 강연 장면이 떠올랐다.

한때 고영찬이 꿈꾸던, 지금은 포기했던 그 자리에서 김진현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떠오르자 고영찬은 지난 삶이 더욱더 허무해졌다.

“제기랄! 빌어먹을!”

파멸이 예정된 이종근은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추태를 부렸다.

이종근은 이를 악물었다.
‘수를 써야 해. 어떻게 해서든.’

하지만 어떻게?

‘꼬리라도 자를까?’

그가 저지른 일들은 측근들, 특히 외과 과장인 고영찬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특히 가장 치명적인 죄악인 약품 선정과 관련된 거액의 리베이트는 고영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병원 자금 횡령과 리베이트 건만 무마하면 돼. 나머지는 그룹 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물론 다른 일들도 심각한 중죄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병원 자금 횡령과 대규모 리베이트에 비할 수 없었다.

이 두 건은 무조건 무마해야 했다.

‘병원 자금 횡령은 그래도 그룹 내에서 눈만 감아주면 어떻게든 덮을 수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규모


리베이트야.’

국내 1 위 대일병원에서 사용하는 약물과 관련된 리베이트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그나마 천만다행인 점은 리베이트를 받을 때 모두 고영찬의 손을 빌렸고 3 국에서 자금을 세탁해 어떻게든
덮어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 교수?”

“네?”

고영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크흠, 그게…….”

이종근은 머뭇거리다 안면을 몰수하고 말했다.

“고영찬 교수, 자네 혹시… 지금까지 제약회사들에게 리베이트를 받은 것 있나?

“네?”

고영찬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이사장님께서……?”

“어허, 이사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갑자기 내 이야기를 왜 하나?”

고영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사장의 추한 의도가 훤히 보였던 것이다.

“자네도 알겠지만, 리베이트는 아주 큰 죄야. 아무리 자네가 나를 위해 많이 노력해 줬다 해도 리베이트를


감싸줄 순 없어.”

“…….”

“더 큰 문제가 생기기전에 자수하게. 그러면 지난 노력을 생각해서 자네 노후는 걱정 없이 챙겨주겠네.”

고영찬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종근은 자신에게 모든 죄를 덮어쓰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

고영찬은 다시금 깊은 허무함을 느꼈다.

권력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건만 결국 맞이하는 것은 이런 추악한 결말이란 말인가?

넋을 잃은 고영찬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이사장실을 나와 자신의 교수실로 돌아왔다.

“나보고 다 덮어쓰라고?”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는 자신의 교수실을 둘러보았다.

한강의 전경이 보이는 그 교수실은 인생의 모든 것이 담긴 곳이었다.

‘뭘 위해 산 것인지… 허무하구나.’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는 잠시 후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이종근이 말한 대로 경찰에 자수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김진현이었다.

“김진현 선생님? 나 고영찬 교수입니다. 잠시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영찬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가 아무리 이종근의 충복이었다 해도 바보는 아니다.

바보천치는, 버려져 죽임을 당할 개는 때론 주인을 물 수도 있는 법이란 것을 모르는 이종근이었다.

***

그리고 며칠간의 시간이 지났다.

병원의 후계자인 이상민도 이종근에 불려가 고함을 들었다.

“이대로라면 너도 끝장이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종근이 불의의 일로 몰락하면 이상민도 대일병원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


“그러니 무슨 수라도 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아! 알겠어?!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이사장실에서 나온 이상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상민 선생님? 수술할 환자분 수술장 입구에 도착했는데 수술장으로 오시겠어요?

“아, 네. 금방 가겠습니다.”

오늘은 그가 담낭염 수술을 집도하는 날이었다.

복강경 담낭 절제술.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는, 외과에서 가장 기본에 속하는 수술 중 하나였다.

이전 그의 친구 진현은 전공의 저년 차 때 총리의 담낭염 수술을 집도한 적도 있었으니까.

나름의 천재라 불리고, 병원의 후계로 꼽히지만 아직 그가 집도할 수 있는 수술은 이런 간단한 종류들밖에 없었다.

재능을 떠나 고난도 수술을 집도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필요하다.

이상민뿐 아니라 다른 재능 있는 외과의들도 전공의, 전문의 시절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에야 고난도 수술을
집도할 수 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진현.

그 재능과 연륜, 경험을 아득히 초월한 천재는 외과의 수술 중에서도 가장 초고난도로 꼽히는 간이식 수술을
수없이 집도하고 있었다.

“수술 시작합니다.”

수술복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장갑을 낀 이상민은 수술을 집도했다.

외과 전공의 한 명과 인턴이 그를 어시스트했고 담낭이 툭 떨어지면서 수술은 별문제 없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던 전공의가 인사를 했고, 이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환자를 회복실로 뺀 후, 이상민은 탈의실로 돌아왔다.

임상강사, 전문의 탈의실은 교수들과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레지던트 시절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다.

그런데 이상민은 옷을 갈아입던 중 탈의실 구석의 소파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김진현이었다.

수술복을 입고 있는 진현은 소파 구석에 기대 골아 떨어져 있었다.


“김진현 교수 아니야? 깨워줄까?”

이상민의 옆에서 가운을 챙기던 소아외과 파트의 젊은 교수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젊은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 둬. 응급 간이식이 계속 떠서 며칠째 한숨도 못 잤다던데? 저렇게라도 눈을 붙여야지.”

간이식 수술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응급 수술이다.

뇌사 환자의 간을 밤이라고 방치할 수도 없고, 간을 받을 간 부전 환자도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무슨 사단이 날지 모른다.

“하여튼 대단해. 저렇게 어린데 저런 실력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부끄러워진다니까. 나이는 내가 훨씬 많은데, 학문 성과나 수술 실력… 모두 비교할 수가


없으니.”

“어쨌든 우리는 그만 나가보게. 김 교수 깨겠네.”

젊은 교수들은 진현에게 감탄을 토하며 탈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탈의실엔 이상민과 김진현, 둘만이 남게 되었다.

“…….”

이상민은 진현을 바라봤다.

피로가 가득한 얼굴의 진현은 누가 건드려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상민은 진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하필 진현이 잠들어 있는 소파는 탈의실 구석이라 CCTV 가 닿지 않는 곳이었고, 이상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진현…….”

이상민은 오랜 친구의 이름을 읊조렸다.

둘 사이가 지척으로 좁혀졌으나 진현은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했다.

“김진현…….”

이상민의 시선이 진현의 경동맥에 닿았다.

손만 뻗으면 목에 닿을 거리.

“…….”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무슨 꿈을 꾸는지 진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이상민은 말없이 진현을 내려 봤다.


이사장 이종근과 그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상황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김진현을 제거하지 않는 한 풀릴 수 없는 상황.

이상민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늘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는 손톱만 한 칼날이 손끝에서 번뜩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움직인 그 손은 진현의 경동맥 근처로 향했고, 조금만 움직이면 개미를 눌러 죽이듯,
숨을 끊을 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멈칫.

이상민이 뻗던 손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 복잡한 눈으로 진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손을 내렸다.

“김진현…….”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렸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이상민을 잡았다.

“왜 그냥 가지? 좋은 기회 아닌가?”

진현이었다.

그가 서슬 퍼런 눈으로 이상민을 노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38

138. 몰락 (5)

“아아, 깨어 있었어? 아니, 일부러 자는 척한 건가? 어쨌든 피곤할 텐데 좀 더 자.”

진현은 피식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해주는군. 왜 그냥 가는 거냐고 물었어.”

이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

진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이상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쨌든 좋아. 너같이 미친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바 아니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명심해.”

“…….”

“네놈이 무슨 수를 쓰려고 해도 이미 늦었어. 이종근과 너. 모두 내가 철저히 몰락시킬 거야.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기다리고 있어.”

이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든지.”

그 대화를 끝으로 이상민은 탈의실을 나섰다.

진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노려봤다.

탈의실을 나온 이상민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김진현…….”

피식 웃은 그는 중환자실로 향하는 통로를 걸었다.

무채색 통로의 끝으로 시선을 옮기니 늘 보이는 환각들이 그에게 비명을 지르며 저주를 퍼부었다.

피에 젖은 그 환각들은 마치 지옥의 한 광경 같은 모습이었다.

***

한편 늦은 밤, 못나고 추잡한 인물의 대명사인 이종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리베이트 건은 고영찬이 뒤집어쓸 거니 됐어.’

그는 고영찬을 버림으로써 스스로가 자신의 무덤을 더욱더 깊게 팠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병원 자금 횡령은 어떻게 하지?’

이것도 리베이트 못지않은 큰 죄악이다.

특히 아버지인 이해중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 그날로 끝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김진현 그놈의 손에 증거가 있는 이상,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어.’

검찰에서 구형받을 형도 문제였다.

워낙 횡령 금액이 커서 관련 처벌 중 최고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막아야 돼. 무조건!’
김진현의 자료가 이해중과 검찰에 넘어가면 그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종근은 눈에 핏대를 세우며 고민했다.

‘그래도 동생인 동민이에게 부탁을 해볼까?’

그룹의 차기 회장인 이동민이 손을 쓰면 이종근의 죄쯤은 덮어줄 수 있을 거다.

‘아니야. 동민이 그놈이 나를 도와줄 리가 없어.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방에 넣으려고 하겠지.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다른 형제들을 떠올렸으나 역시 고개를 저었다.

이동민에게 밀려 그룹 내에서 별다른 영향력도 없었고, 형제가 위기에 빠졌다고 손을 내밀어줄 위인들이 아니다.
오히려 박수를 치며 기뻐하면 기뻐했지.

‘제기랄.’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중,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잠깐. 김진현 그놈이 혜미랑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실 이혜미와 그는 거의 의절한 것이나 다름없어 부녀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사이였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종근은 그런 사실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생각했다.

‘그래, 혜미를 설득하면 돼. 왜 이 간단한 방법을 못 떠올리고 있었지?’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해결책이다.

‘혜미는 예전부터 착했으니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혜미가 부탁하면 그놈도 한발 물러설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는 날이 밝자마자 이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뚜우…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하지만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연결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부재중 통화로만 연결되더니 나중에는 스팸 등록이라도 한 듯 아예 신호가 가질 않았다.

“빌어먹을! 이년은 아비가 전화를 하는데!”

분통을 터뜨린 이종근은 날밤을 새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이종근에게 맞아 한쪽 뺨이 퉁퉁 부운 민 비서가 그를 맞았다.

“민 비서, 이혜미 선생의 스케줄 확인해 봐요.”

“이혜미 선생님이요? 그건 왜……?”

이종근은 버럭 화를 냈다.
“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뭔 말이 많아! 지금 당장 알아봐!”

초조함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툭하면 소리를 지르는 이종근이었다.

민 비서가 벌벌 떨며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전 8 시 30 분부터 내시경 스케줄입니다.”

이혜미는 4 년간의 내과 수련 동안 위암의 대가 최대원 교수와 깊은 연을 맺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최대원의 뒤를 따라 소화기내과 분과를 선택했고, 한창 내시경 수련에 열중
중이었다.

이종근은 8 시 30 분이 되자마자 내시경실로 직접 내려갔다.

“아니, 이사장님?! 여기는 무슨 일로?”

난데없는 이사장의 행차에 내시경실 책임 운영자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이혜미는?”

“네?”

“이혜미 선생은 어디에 있냐고!”

이사장의 고함에 책임 운영자는 허겁지겁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2… 21 번 방에서 내시경 중입니다. 그런데 이혜미 선생은 어째서……?”

하지만 이종근은 대꾸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드륵.

거칠게 21 번 방문을 여니 가냘픈 몸을 가진 혜미가 파란 가운을 걸친 채 환자의 위 안에서 내시경 스코프


(Scope)를 움직이고 있었다.

혜미를 어시스트하던 내시경 간호사가 놀라 이종근을 바라봤다.

“이, 이사장님? 여긴 어떻게?”

이사장이란 말에 내시경을 하는 혜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뿐.

혜미는 내시경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혜미.”

이종근이 딸을 불렀다.

하지만 묵묵부답.
오히려 혜미는 비수면 내시경을 받는 환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하였다.

“환자분, 깊숙이 들어가니 놀라지 마세요. 트림하면 위험하니 조심하시고요.”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에 이종근이 이를 갈았다.

‘이년이!’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라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혜미야, 아비다.”

아비.

그 단어에 이혜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내시경에 집중했다.

기저부를 보기 위해 내시경 스코프를 비틀며 환자에게 차분히 말했다.

“이 부분 좀 불편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가냘픈 몸에 내시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인상임에도 그녀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비수면 내시경임에도 능숙한 움직임, 친절한 설명에 환자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이혜미,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이종근이 다시 한 번 딸을 불렀다.

하지만 혜미는 대꾸하지 않고 어시스트하는 간호사를 돌아왔다.

“EGC(조기 위암) 의심 소견이에요. 조직 검사 할 테니 포셉 주세요.”

간호사는 이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부드러운 말투와 다르게 이사장의 얼굴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선생님… 저기 이사장님이 기다리시는데…….”

혜미는 못 들은 듯 차분히 말했다.

“내시경 검사 중입니다. 조직 검사 포셉(Biopsy forcep) 주세요.”

간호사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사장의 눈치를 보며 기다란 포셉을 건넸다.

쓱쓱.

장갑을 낀 하얀 손이 철제 포셉을 내시경 스코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조직 검사합니다. 오픈(Open)해 주세요.”

날카로운 집게발이 조기 위암 의심 병변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클로즈(Close). 잡아주세요. 하나 더 합니다.”

결국 이종근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이혜미! 도대체 뭐 하자는 거냐?! 지금 장난해?!”

그 발작적인 외침에 간호사와 비수면 내시경을 받던 환자가 깜짝 놀랐다.

마스크 안으로 혜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사 중이에요.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뭐?!”

“그리고 관계자 외에는 검사실에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검사에 방해되니 나가주세요.”

이종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래도 필사적인 의지로 다시 한 번 화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혜미야, 이 아비가 할 말이 있다. 검사는 멈추고 따라와 봐라.”

“저는 당신과 할 말이 없어요. 검사에 방해되니 이만 나가주세요.”

“혜미야!”

혜미는 간호사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검사에 방해되니 외부인은 밖에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간호사는 이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종근이 또다시 폭발했다.

“이혜미! 그깟 내시경검사가 뭐가 중요하다고! 당장 일어나!”

그 말에 내시경을 움직이는 혜미의 손이 일순 멈췄다.

“그깟 검사라고요?”

“그래! 그깟…….”

“이 환자분은 지금 조직 검사 결과에 따라 평생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한 사람의 일생이 걸려 있는데 그깟


내시경 검사라고요? 그게 한때 의사 가운을 입었던 사람이 할 말인가요?”

“……!”

이종근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나가주세요. 검사에 집중해야 하니.”


결국 이종근은 맥없이 쫓겨나 내시경실 밖에서 혜미의 검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렇게 밖에서 딸의 내시경이 끝나길 기다리니 비루한 기분이 들며 분노가 솟구쳤다.

내시경실의 모두가 그를 힐끗힐끗 바라보는 게 분노를 더 돋우었다.

‘참자. 지금은 참아야 해.’

이종근은 억지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일어났다.

내시경 검사가 끝났는데 이혜미의 검사 방에 새로운 환자가 입실하더니 다시 검사를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

결국 이종근은 이를 갈며 내시경 방문을 열었다.

“이혜미!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내가 할 말이 있다 했잖아!”

“전 할 말 없어요. 그리고 이 환자분들은 2 달도 전부터 전에 예약을 해서 기다리던 분들이니 나가주세요. 검사에


집중이 안 되니.”

보아하니 이혜미는 그를 상대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이종근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거칠게 팔을 낚아챘다.

“꺄악! 뭐 하는 거예요?!”

탕!

고가의 내시경 스코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혜미!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희번득한 그의 눈빛에 혜미의 얼굴에 일순 공포가 스쳤다.

어릴 적 그녀를 학대할 때 이종근의 눈빛이 항상 저랬다.

“이리로 와!”

“꺄악! 놔요!”

이종근은 거친 힘으로 그녀를 내시경실 내 VIP 실로 이끌었다.

주변을 관리하던 이들은 둘의 분위기에 놀라 허겁지겁 자리를 비켰다.

“놔, 놔요.”

혜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살한 후 이종근의 모진 학대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깨닫고 개입한 후에는 학대에서 벗어났지만, 그때의 트라우마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크음, 흠.”

이종근은 그녀의 눈빛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렇게 강압적으로 행동하다니.

하지만 너무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두통도 그렇고, 원래도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최근에는 더욱더 감정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이종근은 최대한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일은 미안하구나.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랬단다. 내시경 검사하는 것은 힘들진 않고?”

갑작스레 친절한 말투로 말하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혜미는 시선을 피했다.

“무슨 할 말인데요? 당신과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빨리 이야기해 주세요.”

“크흠! 너와 결혼할 김진현 때문이다.”

그 말에 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현이는 왜요?”

“너는 그놈이 나한테 얼마 전 무슨 말을 했는지 아니?”

당연히 안다.

그때 진현은 혜미에게 허락을 구한 후 이종근에게 통보하러 갔던 것이니까.

이종근은 이를 갈았다.

“그래도 내가 네 아버지고, 그놈의 장인 될 몸인데 그딴 말버릇이라니!”

“…….”

“그래서 하는 부탁인데… 네가 김진현에게 말을 잘해줬으면 하는구나. 결혼할 사이이니 김진현도 네 말을 따를


것이야.”

“…무슨 말이요?”

“크흠! 무슨 말이긴. 그… 너도 알지 않느냐?”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의 죄악을 열거하기 민망했는지, 이종근은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그가 근본적으로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제가 왜요?”

이혜미는 그의 편이 아니란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39

139. 몰락 (6)

“뭐?”

“제가 왜 당신을 위해 그래야 하죠?”

“그, 그거야 당연히… 넌 내 딸이고…….”

“내가 당신의 딸이라서요?”

이혜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났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나 보군요. 당신이 저에게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하긴, 당신한테는 별것도 아닌
일이었을 테니까요.”

너무나 화가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혜미는 VIP 실 문을 잡았다.

일 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잠깐!”

하지만 그녀는 VIP 실을 나가지 못했다.

이종근이 그녀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놔요.”

“고작 어릴 때 몇 번 때린 것 때문에 그런 것이냐? 그래도 난 너를 낳은 아비야. 다 지난 옛날 일 때문에 너무


하는 것 아니냐?”

그 파렴치한 말에 그녀의 몸이 떨렸다.

“때린 거요?”

“그래, 그때 일은 내가 미안하다.”
“그래요. 사실 그건 별일 아니죠.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그래, 어렸을 적 가정폭력 따위.

그게 뭐라고. 몸에 새겨진 흉터 따위 남이 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녀의 한은 고작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요?”

“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러려 했지만…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 때문에 자살한 제 어머니는요?”

이종근과 결혼한 그녀의 어머니는 그의 여성편력과 가정폭력 때문에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혜미야. 사랑하는 내 딸.

지금도 어릴 적, 깊은 괴로움이 가득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렇게 딸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어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기를 잃었고, 결국 이종근이 이상민과 술집
여자인 그의 어머니를 집에까지 끌어들여 바람을 피우자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엄마? 엄마? 뭐해? 응? 엄마?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린 그녀가 매달렸지만 차갑게 식은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종근이 말했다.

“네 엄마?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냐? 네 엄마는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잖아.”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전혀 생각 않는 목소리.

천불이 떨어지는 소리였지만 혜미는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됐어.’

그래도 아비라고 어떻게든 용서하려고 노력하며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

배다른 오빠인 이범수가 그런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탱해 주었지만, 그마저 이상민 때문에 고혼이 되어버렸다.

혈육에 대한 정은 이범수의 죽음이 이상민 때문이란 것을 깨닫고, 이종근이 그 사실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외면하려고 할 때 바닥나 버렸다.

“이만 나가보겠어요. 더 이상 만나고 싶지도 않으니 저를 찾지 마세요.”


혜미는 문을 열려 하였고, 이종근은 다시 그녀를 잡았다.

“못 나가.”

“놔요.”

“못 나간다고, 이혜미! 난 네 아비야! 아비라고! 딸이면 딸의 도리를 다해! 당장 가서 김진현, 그 개자식을


설득하라고!”

이종근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기인 이종근은 미치기 일보직전의 심정이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할 말이 있으면 진현에게 직접 이야기하세요.”

“이이……!”

완고한 그녀의 태도에 이종근은 결국 이성의 끈이 끊겼다.

“이 년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아비한테! 죽고 싶어?!”

“꺄악!”

이종근이 손을 번쩍 들어 이혜미의 따귀를 날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분노에 찬 음성과 함께 VIP 실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이사장님?”

김진현이었다.

그는 지독히도 차가운 얼굴로 이종근을 노려보았다.

“너, 너는… 여기에 어떻게?”

진현은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다급한 사정을 목격한 혜미의 동료에게 연락을 받고 온 것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사장님.”

“이……! 딸과 이야기 중이었다.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 네놈은 당장 꺼져!”

“당신은 딸과의 대화를 폭력으로 하나 보군요. 이전에도 항상 이런 식이었던 것입니까?”

진현의 눈에 섬뜩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그 강렬한 눈길에 이종근은 움찔 주춤했다.

‘인간 쓰레기…….’
진현은 이를 갈았다.

이종근은 지금까지 그가 만난 인간 중 가장 한심하고 혐오스러운 사람이었다.

“진현아, 그냥 가자.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혜미가 진현의 손을 이끌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여기서 이럴 필요 없지.”

그리고 그는 이종근에게 말했다.

“원래는 일주일의 시간을 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모습을 보니 굳이 그런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군요.”

“……!”

“기다리십시오. 조만간 연락이 올 것입니다.”

이종근이 비명을 지르듯 진현을 불렀다.

“자, 잠깐! 잠깐만! 김 선생! 안 돼! 잠시만 기다려!”

하지만 진현은 듣지 않았다.

오랜 죄의 대가를 치를 때였다.

***

곧 이사장실로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민 비서가 놀라 막았다.

“당신들은? 여기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에요. 나가주세요.”

거친 인상의 사내가 가만히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

그것을 본 민 비서의 얼굴이 하얘졌다.

경찰 배지였다!

“경찰입니다. 이종근 이사장을 연행하러 왔습니다.”

“가, 갑자기… 무슨…….”

민 비서는 말을 더듬었다.
거친 인상의 사내, 김철우는 그녀를 비켜 지나가 벌컥 이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반쪽이 된 얼굴의 이종근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당신들 뭐야?!”

“경찰입니다.”

“경찰?!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당신들 제정신이야?!”

“이종근 이사장, 당신을 리베이트, 병원 공금 횡령, 뇌물 수수…….”

김철우의 입에서 이종근의 죄목이 술술 흘러나왔다.

김진현의 자료가 정말로 검찰로 넘어간 것이다.

이종근은 급히 말을 끊었다.

“닥쳐! 고작 그 따위 것들로! 내가 누군지 알아?!”

“알지.”

“나 대일그룹의 이해중 회장의 아들이야! 나한테 이러고도 너희들 말단 경찰들이 무사할 것 같아……?!”

“당신이 천하의 죽일 놈은 것은 알지.”

“…뭐?”

이종근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김철우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다 알고 왔어. 쓰레기 같은 자식.”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무고한 사람을……!”

그런데 그때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습니다, 이사장님.”

“…고영찬 교수!”

“제가 다 자백했습니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 고영찬이었다.

“이전 김진현을 곤란에 빠트리기 위해 했던 여러 일들… 모두 제가 자백했습니다. 특히 환자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데 일부러 방치하도록 했던 일들은 다행히 김진현 선생 덕분에 환자에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지만…
그것도 용서받지 못할 중죄입니다. 포기하십시오.”
“너, 너……!”

이종근이 손을 부르르 떨었으나 고영찬은 그저 허무한 표정일 뿐이었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이 덧없었다.

“고영찬 이 자식아……!”

그런데 거친 인상의 경찰, 김철우가 저벅저벅 이종근에게 다가왔다.

가라앉은 눈빛이 서슬 퍼랬다.

흠칫 놀란 이종근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뭐, 뭐야… 이놈아!”

김철우가 와락 이종근의 멱살을 잡았다.

“그만 짖어. 이 개자식아. 지금이라도 묻어버리고 싶은 것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이종근은 모르고 있었지만, 과거 김철우의 아버지는 대동맥 파열로 응급실에 왔을 때 이종근의 수작으로 죽을
뻔했다.

김진현이 아니었으면 무조건 죽었을 것이다.

김철우가 으르렁거렸다.

“대일그룹? 웃기지마. 넌 평생 감방에서 썩을 거야. 내가 무조건 그렇게 만들 테니 각오해, 이 개자식아.”

***

이종근의 죄악은 한남동 이해중과 이동민에게도 전달되었다.

이해중은 침통한 얼굴을 했다.

“이게 정말인가?”

김진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죄송할 것은 없지. 하… 아무리 못나도… 하…….”

이해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의 죄악에 말이 안 나오는 듯했다.

“미안하네. 내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오늘은 이만 가주겠나?”

“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김진현은 조용히 한남동 저택을 떠났고, 이해중은 분통을 터트렸다.


“이종근! 이놈이 기어코!”

못나고 못난 아들이어도 계속해서 감쌌다.

핏줄의 정을 못 이겨 자격이 안 됨에도 대일병원을 계속 맡겼건만… 결국!

진현이 떠난 후 곧 후계자 이동민이 이해중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래, 동민아. 네 형 이종근이…….”

이동민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검찰에서 연락을 받은 것이다.

“종근이 형이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죄목은 리베이트, 병원 공금 횡령, 뇌물 수수라 합니다.”

이해중은 앉은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이동민이 급히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 아버지!”

이해중 회장은 이를 갈았다.

“이종근, 내 이 자식을……!”

***

구치소에 수감된 이종근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자식들아?! 죽고 싶어?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빨리 이것 안 열어?!”

그 소란에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 차갑게 말했다.

“아, 거참. 조용히 합시다.”

“뭐?!”

“조용히 하라고, 이 새끼야. 피곤한데 더 시끄럽게 하면 죽여 버린다.”

섬뜩한 욕설에 이종근은 흠칫 기가 죽었다.

말을 뱉은 사내는 이마 한가운데 커다란 흉터가 있는 것이 사람 몇쯤은 담가본 듯한 인상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나가기만 하면……!’

구치소에 수감되었지만 이종근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자신은 대(大) 대일가문의 적통이다.

가문 내에서 미움 받는다고는 해도, 정이 많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야. 다 덮을 수 있어.’

대한민국 경제계를 넘어 정계, 법조계에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일그룹의 힘이면 아무리 큰 죄라도
흐지부지 없앨 수 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났다.

“동민아!”

이종근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잘 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빨리 이 형의 억울함을 풀어다오.”

그런데 이동민의 표정은 지극히 차가웠다.

“억울함을 풀어달라고요? 무슨 억울함을 말입니까?”

“도, 동민아?”

“아버지가 이번 일로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아십니까? 아들로 태어나서 효도는커녕 평생 동안 아버지의 속만


썩이더니, 또 이런 짓을…….”

경멸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해중과 이동민은 일이 터지자마자 따로 진상을 조사했고, 모든 것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리베이트, 병원 공금 횡령, 뇌물 수수뿐이 아니다.

이종근이 김진현을 음해하기 위해 벌였던 수작들도 샅샅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손녀사위가 될 김진현 선생께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아들을 못나게 키워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도, 동민아. 나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분위기에 이종근은 말을 더듬었다.

이동민은 한쪽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형님은 더도 덜도 말고 법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동민은 등을 돌려 사라졌다.

“동민아! 이동민! 거기 멈춰! 이동민!”

부질없는 부르짖음이었다.

***

대일병원 이사장의 비리!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 이슈였지만, 언론은 침묵했다.


이미지 하락을 걱정한 대일그룹의 언론 통제 때문이었다.

대신 이종근의 재판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피고의 죄는…….”

검사가 이종근의 죄목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지난 삶을 반영하듯 죄목은 참으로 많았다.

재판장엔 김진현과 이동민이 참석했고, 딸 혜미는 참석하지 않았다.

검사의 설명을 들은 판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종근을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0

140. 병원장 (1)

변호사가 이리저리 변호했지만, 명백히 드러난 죄여서 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피고 이종근에게 5 년의 징역을 선고한다.”

이종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다시 가라앉았다.

‘이렇게 끝나는군.’

진현은 피고석에 앉은 이종근을 바라봤다.

넋이 나간 그의 얼굴은 영혼이 떠난 듯 생기가 없었다.

징역 5 년보다 그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을 잃은 타격이 클 터였다.

부, 명예, 권력. 이제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판결을 들은 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민이 김진현에게 다가왔다.

“가지, 김 선생.”

“네.”

“대일병원의 일로 상의할 게 있는데 조만간 한남동으로 와줄 수 있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재판장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이종근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

수갑을 찬 채 경찰에 붙들려 있던 이종근의 눈이 김진현을 보고 갑자기 번뜩였다.

“너, 너……! 김진현!”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이종근은 바득 이를 갈았다.

저놈 때문이다!

김진현, 저놈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해 버렸다!

“거참, 가만히 있지 못해!”

경찰들이 이종근을 붙들었으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분노가 극에 달한 이종근이 어디서 온 힘인지, 놀라운 괴력으로 경찰을 뿌리치더니 수갑을 찬 채로 진현에게
달려든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 김진현!”

예상치 못한 돌진에 진현은 이종근의 손에 목을 내주었다.

“컥!”

“죽어! 죽으라고!”

경찰들과 이동민이 깜짝 놀라 달려들었으나, 이종근은 진현의 목을 놓지 않았다.

비뚤어진 분노로 몸의 잠재된 힘을 모두 끌어낸 것인지 요지부동이었고, 진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놓으라고! 이 미친놈아!”

경찰이 달려들수록 이종근의 얼굴에는 핏대가 섰다.

“죽어! 죽어!”

그런데 그때였다.

“아……?”

이종근이 돌연 신음을 흘리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아…….”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전신이 땀에 젖어 들며 창백하게 질려갔다.

“뭐 하는 거야, 이놈아?!”

경찰이 거칠게 제압하려는데 이종근의 몸이 휘청하더니 털썩 쓰러져 버렸다.


“이게 어디서 꾀병을?! 꾀병 부리지 말고 일어나! 당장!”

경찰들이 몸을 흔들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벌린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고, 전신이 파르르 경련하듯 흔들렸다.

진현이 굳은 얼굴로 이종근을 살폈다.

‘동공이!’

동공이 풀려 있는 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단순한 실신이 아니라 머리, 뇌(Brain)쪽에 갑작스레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 쪽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

대일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해보니 뇌경색이었다.

그것도 뇌종양에 동반된 출혈성 경색.

“원래부터 감정 억제를 조절하는 전두엽 쪽에 뇌종양이 있었는데, 이번에 출혈성 경색을 일으켰습니다. 뇌내압이
높고(IICP), 범위가 커서 당장 대뇌 절제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종근은 대뇌절제술을 받았고, 목숨은 건졌으나 눈을 깜빡거리는 것 외에는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전신마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사람의 욕심이 참 덧없군.’

진현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이종근을 보며 생각했다.

일평생 추악한 욕심을 위해 살아왔는데,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게 되는 처지가 되다니.

사형, 무기징역보다 더 끔찍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인과응보라 해야 할지, 하늘의 벌이라 해야 할지.’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이종근, 그는 일평생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것도 누구보다 비참하게.

욕심이란 참으로 덧없었다.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진현은 남산에 위치한 국내 최고의 특급 호텔로 자동차를 몰았다.


“김진현 선생님이십니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연락을 받은 것인지 나이 지긋한, 호텔의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진현을 맞이했다.

“아, 네.”

“어서 오십시오. 저희 호텔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극빈이라도 맞는 듯한 예의였다.

진현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대일그룹에서 운영하는 국내 최고의 특급 호텔이었고, 그는 그룹 회장의 은인이자 손녀사위가 될


몸이었으니까.

“사장님께서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진현은 시계를 봤다.

특별히 늦은 것은 아닌데 먼저 도착한 듯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호텔 책임자는 진현을 극진한 태도로 안내했다.

VIP 만 이용하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 후 잠시 기다리자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스카이라운지가


나타났다.

서울의 밤빛을 보며 칵테일을 마시던 중년 남자가 기척을 느끼고 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게, 김 선생. 며칠간 잘 지냈나?”

“네.”

진현은 남자, 이동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 와서 앉게. 혜미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쉬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네.”

이동민은 짐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란하긴 하겠지. 아무리 못났어도 아비가 그렇게 됐으니. 착한 아이니 더 그럴 거야.”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동민의 말대로였다.
부녀의 연을 끊고, 원망만 가득 아버지였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난 형님이 죗값을 받은 것이라 생각해.”

반면 이종근을 원수처럼 여기던 이동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자네도 너무 신경 쓰지 말게. 하필 그때 쓰러졌던 것도 형님의 잘못이니까.”

“네, 감사합니다.”

“술이나 한잔 받지.”

진현은 이동민이 따라주는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쭈욱 들이켰다.

“식사는 했나?”

“병원에서 간단히 샌드위치 먹었습니다.”

“샌드위치가 뭔가? 잘 먹고 다녀야지.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요?”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큰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동민은 빙긋 웃더니 다시 술을 따랐고 황금빛 위스키가 기다랗게 찰랑거렸다.

“김 선생.”

“네.”

“내가 오늘 자네를 왜 보자고 한 지 짐작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스카우트 제의를 하려고.”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스카우트제의라니?

“종근이 형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늘의 벌이라 생각하지만… 대일병원이 곤란하게 됐네. 종근이 형을 대신해 누군가
병원을 맡아줘야 하는데… 당장 마땅한 사람이 없거든.”

이동민은 술을 한 잔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러는데… 자네가 우리 대일병원을 맡아줄 수는 없겠나?”


“……!”

진현의 눈이 커졌다.

나보고 대일병원을 맡아달라고?

“지금 그 말씀은…….”

“자네가 이해한 대로야. 우린 자네가 대일병원을 맡아줬으면 좋겠네.”

진현은 지금 이동민이 농담을 하나 싶었다.

대일병원이 무슨 동네병원도 아니고, 자신처럼 어린 사람에게 맡기려 하다니?

하지만 이동민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고로 이건 나 혼자만의 의견은 아니야. 아버지도 기꺼이 찬성한 일이네. 우린 자네가 대일병원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제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병원의 장이 되기엔…….”

진현은 말끝을 흐렸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린 자네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

“누구보다도 뛰어난 실력, 세계를 울리는 학문적 성과, 더구나 이제 조만간 결혼식만 올리면 우리 가문의 사람도
될 거고.”

“하지만 전 너무 어립니다.”

“물론 자네 나이가 지나치게 어리단 점이 걸리긴 하지만 그것 빼고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은가?”

이동민도 진현의 나이가 걸리긴 했으나,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될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외모 말고는 그 나이대로 보이지가 않아. 나이 많은, 연륜 깊은 의사를 보는 것 같네.
이건 내 생각만은 아니야.”

모르고 한말이겠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회귀 이전의 삶까지 포함하면 진현의 나이는 현재 대형병원 병원장들에 비해 적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제가 부각을 드러냈던 분야는 의술과 학문적인 부분이지 병원 경영이 아닙니다.”

진현이 거듭 거절했으나 이동민도 만만치 않았다.

“자네가 뭘 모르는구만. 대일병원 같은 경우엔 경영을 서포트하는 전문 경영진이 따로 있어. 자네가 할 일은


세세한 병원 운영이 아니라, 의학적 식견과 비전으로 큰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야.”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세인트 죠셉 병원과의 계약도 제 마음대로 엎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일단 세인트 죠셉에서 경험을 쌓으며 대일병원을 맡는 일은 차차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동민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린 자네가 그냥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이종근 형님이 이렇게 되어서 당장 병원을 맡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혜미한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현이야 세계적 명망을 가진 의학자로 대일병원의 대표가 될 자격이 있었지만, 혜미는 상황이 달랐다.

그저 뛰어난 수재일 뿐 상대적으로 평범한 그녀가 대일가문의 일원이란 이유만으로 대일병원을 맡으면 반발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어린 여자인 점도 큰 단점이었고.

이동민이 워낙 아쉬워해 진현은 이렇게 말했다.

“차후 좀 더 경험이 쌓이면 진지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당장 대일병원은 누가 맡지? 가문 내에서는 맡을 사람이 없는데.”

대일병원을 탐내는 사람은 많지만, 막상 능력이 되는 사람은 없었다.

“추천할 분이 있긴 합니다.”

“누구인가?”

“현재 대일병원에서 일하고 계신데 누구보다도 환자에게 헌신적이고, 대일병원을 위해 일하실 분입니다.”

그 말에 이동민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진현의 추천이니 믿을 수 있었다.

가문의 사람이 아니란 점이 걸리긴 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동민은 다시 물었다.

“빨리 말해보게. 누구인가?”

진현은 짧게 답했다.

“간이식의 대가, 강민철 교수님입니다.”

***

이사장 이종근의 불의의 사건 이후로 대일병원에 폭풍 같은 변화가 몰아쳤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병원의 장이 바뀌었단 것이다.


“크흠, 이거 잘 어울리나 모르겠군.”

강민철은 몸에 꽉 끼는 양복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을 수술복에 와이셔츠만 적당히 입던 그는 이런 잘 차린 정장이 불편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임직원들 앞에서 병원장 취임 연설을 하는 날이니까.

“잘 어울리십니다. 병원장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진현은 웃으며 말했다.

강민철은 투덜거렸다.

“아, 몰라. 나는 그냥 수술이나 하는 게 어울리는데 병원장이라니. 몇 년만 하고 자네한테 넘길 테니 그렇게


알아.”

진현은 애매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강민철 교수님만큼 적격인 사람이 없지.’

실력이면 실력, 연륜이면 연륜,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면 마음, 병원을 위한 헌신…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시간됐습니다. 대강당으로 가시죠, 교수님.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영수 교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민철은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자네는 뭘 그렇게 웃나?”

“좋은 날인데 웃어야죠. 이런 날 안 웃으면 언제 웃습니까?”

“그래, 실컷 웃어둬. 곧 죽도록 부려 먹어줄 테니.”

하나도 안 무서운 으름장이었다.

병원장의 측근으로 일을 하면 할수록 병원 내 권력의 핵심에 가까워진다.

“네, 시켜만 주십시오. 하하.”

그리고 그들은 병원 내 대강당으로 향했다.

대강당은 새 병원장 취임을 맞아 병원 내 임직원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다들 인망 높은 강민철의 취임을 기뻐하고 있었다.

“크흠, 이번에 새로 병원장이 된…….”

그 취임연설이 시작이었다.
대일병원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다음 편에서 계속)

# 141

141. 이상민 (1)

진현의 예상대로 강민철은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병원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룹의 막대한 투자 덕에 국내 1 위라 불리는 대일병원이지만 손볼 곳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무엇보다 투자금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해 투자 대비 효율이 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먼저 이종근 개인의 욕심을 위해 낭비되던 부분을 깡그리 정리했다.

경영을 투명화했고, 능력도 없이 이종근에게 빌붙어 월급만 축내던 이들도 정리했다.

매너리즘에 빠져 효율적이지 않게 운영되던 부분도 혁신을 시도했고, 그런 그의 노력들 덕에 대일병원은 단 시일


내에 국내 1 위를 넘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단 하나,

“아, 난 수술이나 해야 하는데. 팔자에도 없이 병원장이라니! 김진현 선생, 빨리 이 자리 가져가!”

이러면서 강민철 본인이 투덜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없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는 인물이 있었다.

“이상민 선생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글쎄? 이종근 이사장도 그렇게 됐는데 나가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분위기 보니 차후 병원은 김진현 교수가
물려받게 될 것 같은데.”

사람들은 이상민을 두고 숙덕거렸다.

이종근이 스스로의 죄로 몰락한 상태니, 후계자였던 이상민이 더 이상 발을 붙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민도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미소 지었다.

“이상민 선생, 내일부터는 수술에 들어올 필요 없네.”

어느 날 외과의 수술 스케줄을 관리하는 주임 교수가 말했다.

외과의사에게 수술에 들어오지 말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상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임교수는 무언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하려는 듯 머뭇거렸다.

“괜찮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재단 측에서 자네와의 재계약을 거부했어. 늦지 않게 다른 곳으로 취업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네.”

“…….”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의, 임상강사는 레지던트, 교수와는 다르게 굉장히 짧은 기간을 단위로 계약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계약을 갱신하며 교수 발령을 기다리는 것으로 원래 그는 최소한의 시간만 채우고 대일병원의 정식
외과 교수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 덧없는 과거의 이야기.

이상민이 예약했던 교수 자리는 한국대 출신의 다른 능력 있는 이를 초청하기로 결정된 상태다.

“그동안 수고했네.”

그렇게 말한 주임교수는 이상민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병원의 후계자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해고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버지인 이종근이 추악한 죄로 비참한 말미를 맞았고, 이제 병원 내 실질적 최고 실권자라 할 수 있는 김진현


교수도 이상민에게 칼을 갈고 있는 상황.

즉, 반발을 해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만약 발 빠르게 움직였으면 다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김진현은 미국에서 귀국할 때 그들을 단죄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룹 회장과 후계자가 자신의 편이고, 모든 죄악의 증거를 가지고 왔는데 무슨 수를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김진현을 불의의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상민은
지난번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어쨌든 그의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허무한 몰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이상민이 말했다.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뭔가?”
“제 해고는 김진현 선생님의 뜻입니까?”

“……!”

주임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주저하며 답했다.

“지금 우리 대일병원에서 가장 큰 실권을 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진현 교수야.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충분한 답변이었다.

이상민은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주임교수의 방을 나온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교수실 복도의 난 창으로 한강을 바라보았다.

푸른 한강의 전경은 환각이 섞인 그의 시계(視界) 속에서 핏빛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김진현…….”

그는 자신과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진현…….”

의미심장한 목소리.

그런데 그때 그의 핸드폰이 띠링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민 씨, 오늘 저녁에 보지 않을래요?]

그의 연인, 이연희였다.

***

둘은 평소 자주 즐겨 찾던 논현동의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식사했어요?”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왜, 안 먹었어요?”

“그냥. 생각 없어.”

“바빠도 잘 챙겨먹어야죠. 뭐라도 시켜먹어요.”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런데 왜 보자고 했어?”

그러면서 그는 이연희의 단아한 얼굴을 바라봤다.

이유가 짐작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연희는 외과 병동의 간호사. 이미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게 분명했다.

‘헤어지자 하려나?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이상민은 따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응?”

“왜요? 우리 그래도 연인이잖아요. 이유 없이 만나면 안 돼요? 보고 싶어서 불렀어요.”

이상민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그는 늘 그렇듯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뭐가 고마워요? 상민 씨는 평소에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은 가봐요?”

“아니야. 나도 너 보고 싶었어.”

“피이, 거짓말은.”

이연희는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와 그녀, 둘이 교제를 시작한 것도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물론 정상적인 연인 관계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난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걸까?’

이연희는 속으로 자문했다.

그녀도 스스로의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밥이나 먹어요. 아니, 술이나 먹어요. 늘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녀는 그를 인근의 주점으로 이끌었다.

일본식 선술집으로 그녀는 정종과 안주를 잔뜩 시켜 그에게 내밀었다.


“제가 사는 거니 다 먹어요. 알았죠?”

그러고 둘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누었다.

주로 연희가 이야기를 하고, 이상민은 가만히 듣는 편이었다.

“오늘 우리 선임 간호사가… 상민 씨도 알죠? 그 못생긴 간호사.”

“응, 알지.”

“그러니까 그 못생긴 간호사가 병동에서…….”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정종 한 병이 바닥을 보일 때쯤이었다.

그녀가 술기운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상민 씨.”

“응?”

“힘내요.”

“…뭘?”

“힘든 것 알아요. 힘내요.”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표정에 이상민의 입가에서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

그녀는 슬픈 얼굴을 했다.

“우리 둘은… 잘 모르겠어.”

그래, 잘 모르겠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도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어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솔직히 말해… 원래는 안 그랬지만… 어느덧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
당신이 기운을 냈으면 좋겠어. 대일병원에서 나가면 어때요? 어차피 일할 데는 많고, 정 안 되면 저와 같이
병원이나 차리면 되니 힘내요.”

“…….”

“맨날 그렇게 혼자서 넘기려고 하지 말고요. 그래도 나 당신 곁에 있을 테니.”

이상민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답했다.

“고마워. 너도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의미 있는 사람이야.”


이연희는 입술을 내밀었다.

“두 번째요? 그게 뭐예요? 첫 번째면 첫 번째지.”

이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야. 서운해?”

“됐네요. 그래도 두 번째라도 돼서 기쁘네요. 원체 마음의 벽이 높아 한 자리도 못 차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뒤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이상민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게 봐요?”

“연희야.”

“왜요?

“이번 주말에 우리 여행 가지 않을래?”

“여행이요?”

“응, 여행. 근교에 내 소유의 별장이 있는데 쉬다 오지 않을래?”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왜, 싫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좀 갑작스러워서. 가서 프로포즈라도 하려는 것은 아니죠?”

“큭큭, 아니야. 그냥…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서. 같이 갔으면 좋겠어. 싫어?”

마지막?

연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이라니?”

“아, 그냥. 신경 쓰지 마. 별 뜻 아니니. 어쨌든 같이 갈 거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에요. 숨기는 것 있죠? 숨기지 말고 말해줘요.”

“아니야, 아니야. 어쨌든 주말에 보자. 재미있을 거야.”

이상민은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딱.

그녀와 그의 잔이 부닥쳤고, 둘은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올라와 연희는 그의 말을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술자리가 끝난 후 그녀와 헤어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재미있을 거야. 아마도.”

그리고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너도 재미있어야 할 텐데.”

그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김진현.”

***

그리고 금세 시간이 흘러 주말이 되었다.

늦은 밤, 진현은 주말임에도 병원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레지던트 처음 할 때처럼 바쁘구나.’

병원장에 취임한 강민철의 업무를 보조하며 덩달아 진현도 바빠졌다.

마치 레지던트 초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업무량이다.

‘오늘까지 이 일을 처리하고…….’

그런데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링.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진현의 눈이 커졌다.

‘이 번호는?’

이전 생의 부인이었던 이연희의 핸드폰 번호였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는 의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 진현 씨? 저 연희예요. 자, 잘 지냈어요?

“……?”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무언가 파르르 떨리는 듯한? 뭐지?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 아, 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윽! 크윽.

“……?!”

진현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죄, 죄송해요! 흐윽. 저, 정말 죄송한데… 지금 혹시 뵐 수 있을까요?

“지금 말입니까?”

-네, 흐윽. 제, 제발 부탁해요. 정말 죄송해요.

진현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전화를 한 이연희가 울면서 자신을 보자고 하다니?

‘이제 난 그녀와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부부였다지만, 그건 지난 삶의 인연일 뿐,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더구나 목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겁에 질린 듯한…….

거기까지 생각한 진현은 퍼뜩 섬뜩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가 아니었다.

비공개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이상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상민?’

진현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으며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지금 괜찮으신 것입니까?”

-…….

연희는 울먹일 뿐 답을 하지 못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정말 죄송해요. 흐윽. 지, 지금 제가 있는 곳으로 와줄 수 있으세요?

진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어디입니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전했다.

서울 외곽, 주변에 사람이라곤 찾기 어려운 곳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전화를 끊은 진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이상민… 드디어 움직였군.”

이 전화는 연희의 뜻이 아니라 이상민의 뜻이 분명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공포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를 볼 때 무언가 협박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연희를 끌어들인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이건 그의 초대가 분명했다.

‘뭐, 어쨌든 좋아.’

기다리던 바다.

이제 드디어 길고 긴 그와의 악연을 끝날 때가 됐다.

진현은 전화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뚜뚜.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 거친 음성의 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김철우였다.

-여보세요?

“철우야, 나 진현이다.”

진현은 짧게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부탁 기억하지?”

(다음 편에서 계속)

# 142

142. 이상민 (2)

김철우에게 연락 및 필요한 조치를 취한 진현은 연희가 말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이상민…….’

인적 드문 밤길을 지나고 있으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지난 삶부터 이상민과는 악연이었다.

고등학교 3 년 내내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회귀 후에도 거의 만나자마자 주먹다짐을 했었다.

‘그래도 잠깐 좋았을 때도 있긴 했지.’

쥬피르.

처음으로 그와 술을 마신 장소.

그때 이후로는 제법 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했었다.

한때 그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로.

‘쓸데없는 기억이지.’

진현의 눈이 무거워졌다.

그래, 쓰레기처럼 쓸모없는 기억이다.

이상민 그놈은 천하의 죽일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상민, 이제 네 죗값을 치를 때야.’

진현은 운명을 느꼈다.

이 만남이 끝나면 그와의 악연도 끝이 날 것이다.

‘물론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생각하면 이 초대를 외면하는 것이 현명하겠으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놈은 언제고 자신에게 마수를 뻗칠 것이다. 다음에는 분명 더 은밀하고 위험하게 다가오겠지.

그리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그놈의 죄악을 단죄할 수가 없다.


‘나도 대비를 안 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진현은 혼자 이상민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 갔다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사전에 부탁한 대로 김철우를 비롯한 무장경찰들이 은밀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만약 위험 상황이


발생하거나 이상민의 죄악이 확인되면 곧바로 개입할 예정이었다.

‘이 부탁을 하면서 꽤 애먹었지.’

원래대로라면 경찰을 이용한 이런 식의 작전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철우에게 했던 부탁과 대일그룹의 손녀사위가 될 지위 덕분에 가능했다.

‘왜 이런 허술한 수작을 것인지는 모르겠군. 그 녀석답지 않게. 설마 내가 눈치를 못 챌 거라 생각한 건가?’

이상민 그놈은 항상 증거가 남지 않는 완전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번 수작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연희를 협박해 그를 부른 것만 해도 그렇다.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밝히지 못한다 해도,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데려와 협박하는 것만으로도 콩밥을 먹이기
충분했다.

‘무슨 꿍꿍이지?’

진현은 양복의 안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묵직한 물건을 느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릉.

차량 없는 국도를 한참을 질주한 그의 차는 풍광 좋은 산에 위치한 조그만 별장에 도착했다.

이곳이었다.

과연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여, 왔네. 진현.”

“이상민.”

진현은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말기 암 환자처럼 삐쩍 마른 이상민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진현은 한가한 대화 따위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연희는?”

“안에서 자고 있어.”
“자?”

“응, 푹 자.”

진현은 미간을 좁혔다.

잔다고?

“약을 썼나?”

“난 나름 그녀를 아껴.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래, 왜 나를 부른 것이지?”

이상민은 가만히 미소 짓다가 답했다.

“너와 술 한잔하고 싶어서.”

“뭐?”

“그냥. ‘마지막’으로 너와 한잔하고 싶어서. 뭐,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헛소리를…….”

그런데 그때, 이상민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너도 나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 않아? 혹시 모르지. 술을 마시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지도.”

“……!”

진현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은… 지금까지의 죄를 자수라도 하겠단 거냐?”

“글쎄?”

이상민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반가워.”

***

언제 준비한 것인지 대리석 탁자 위에 간단한 안주들과 각종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연희는 벽난로 옆에 위치한 커다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동화 속 공주처럼 깊은 수면에 빠진 모습이 약에 당한 것인지 정말 자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녀는 왜 끌어들인 것이냐? 상관도 없는데.”


“글쎄? 왜일까? 그녀도 나름 의미가 있어서?”

이상민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진현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상민의 죄를 처벌하는 것이다.

“한잔 받아.”

이상민은 위스키를 빈 잔에 따라 내밀었다.

하지만 진현은 그를 노려볼 뿐 술을 받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할 이야기 있으면 빨리 해. 너와 술 따위 마시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너랑 한잔하고 싶었다니까. 독 안 탔으니 한잔해.”

“…….”

“안 마시면 나도 아무 이야기 안 한다?”

“마시면 이야기할 거냐?”

“일단 마셔.”

진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무슨 꿍꿍이지?’

하지만 이상민의 얼굴은 지난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그랬듯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좋아.”

어차피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굴에 들어온 상황이다. 술 한 잔 정도 못 마실 이유가 없었다.

만약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지금쯤 근처에 잠복했을 김철우를 비롯한 경찰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진현은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황금빛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켰다.

가슴을 태우는 듯한 위스키 특유의 독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진현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민의 눈빛이 묘했다.

뭔가 먼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

“지금 마신 술. 무슨 술인지 알겠어?”

이해할 수 없는 질문.
진현은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발렌타인 30 년산.”

“그래, 맞아. 이전에 너와 종종 마셨었지.”

둘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일그룹에서 운영하는 고급 주점 쥬피르에서 발렌타인 30 년산을 즐겨 마셨었다.

당시에는 시험만 끝나면 김철우, 황문진과 함께 술을 퍼 마셨었다.

물론 지금은 의미 없는 과거의 이야기지만.

“그거 알아? 우리 둘이 자주 가던 그 쥬피르. 3 년 전에 그룹에서 정리했어. 매출이 안 나와서.”

“그래? 그래서? 그 이야기를 왜 하지?”

진현은 이상민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나름 추억의 장소였는데.”

이상민은 지나가듯 미소를 짓더니 본인도 술을 마셨다.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빨리 본론을 말해.”

“그래, 본론. 본론…. 그래, 좋아.”

진현은 침을 삼켰다.

지금 그들의 대화는 은밀히 마련한 소형 장비를 통해 녹음 및 김철우에게로 전송되고 있었다.

이상민이 자신의 죄악을 실토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방심하면 안 돼. 이 미친놈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

그의 손이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바지 주머니 안엔 매리가 마련해 준 만년필 형태의 호신용 초소형 총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사용할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이 미친놈이 발작을 안 한단 보장이 없으니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그거 알아?”

“뭘?”

“난 네가 거슬렸어.”

“……!”

진현은 흠칫 이상민을 바라봤다.

“네가 거슬렸어. 엄청.”


이상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넌 나에게 의미가 있는 유일한 친구이긴 해. 술집 여자의 아들이라 나와 어머니는 가문에서 개돼지 같은
취급을 받았고, 그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머니가 정신분열병으로 미쳐 삶이 참 지긋지긋했거든. 그때 날 그나마
마음을 담아 위로해 준 것은 네가 유일했지.”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상민의 진심이 한마디, 한마디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난 네가 거슬렸어. 무척. 망가뜨리고 싶을 만큼. 왜인지 알아?”

“…네놈의 이야기 따위 듣고 싶지 않아.”

“그래,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조금만 들어봐. 우리 이제 마지막이니까. 길지도 않아.”

마지막.

계속해서 거슬리는 소리였다.

진현은 주머니 속 만년필형 총을 쥐었다.

이상민은 자신의 술잔에 위스키를 졸졸 따랐다.

그는 황금빛 위스키가 넘실거리는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내가 왜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았는지 알아? 배다른 형인 이범수를 직접 죽이면서까지.”

“……!”

진현의 눈이 커졌다.

스스로의 입으로 이범수를 죽인 사실을 꺼낸 것이다.

‘정말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지?’

진현은 굳은 눈으로 이상민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이상민은 쿡하고 웃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무 긴장하는 것 아니야?”

“…말해봐라.”

진현은 굳은 얼굴로 이상민의 말을 들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가문에서 개돼지 취급당하면서 어머니가 모진 구박으로 스트레스로 미쳐 정신분열병에 걸렸을
때 한 결심이 있지. 최고가 되자고. 최고가 되어 저들을 처참하게 눌러주자고. 넌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피 터지는 노력을 했는지 모를 거야.”

“…….”
이상민은 담배를 입에 물고 치익 불을 붙였다.

그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 많은 노력을 했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

그리고 그 결심은 정신분열병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자살한 날 바뀌었다.

그 잘난, 자신과 어머니를 쓰레기 취급하던 아버지와 형의 모든 것인 대일병원을 손에 넣자고.

그래서 나와 어머니를 개돼지 취급한 그들에게 복수를 하자고.

하지만 그 결심들은 모두 김진현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때 진현이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미워 혈우병 환자의 수혈팩에 항응공제를 섞고, 날 교통사고를 위장해 죽이려 하고, 송영
그룹 회장의 딸을 공기색전증으로 죽인 거냐?”

이상민은 피식 웃더니 답했다.

“맞아. 그땐 널 정말 망가뜨리고 싶었거든. 내 앞을 항상 가로막는 너를 파멸시키고 싶었지.”

“……!”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들의 대화는 특수 장비를 통해 그의 자백은 녹음 및 김철우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으니 법정에 서면


최소 무기징역 혹은 사형이었다.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지?’

진현의 의아한 얼굴을 본 이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해가 안 돼?”

“…그래, 무슨 꿍꿍이지?”

“마지막이니까.”

의미심장한 목소리.

“뭐?”

진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머니 안 초소형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한발 늦은 대처였다.

철컥.

이상민도 테이블 밑에 숨겨둔 총을 꺼내 진현에게 겨눈 것이다.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 만년필. 총이지? 바보가 아니면 호신용 총 같은 무기를 가져올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귀엽게 생긴 걸
가져왔네.”

진현은 이를 갈았다.

“닥쳐!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총 내려놔!”

“내가 왜?”

이상민은 진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악연. 이제 끝낼 때가 됐잖아. 너와 나,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끝나지. 안 그래?”

“이……! 미친놈!”

진현은 이를 갈았으나 이상민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이 상황이 유쾌한 듯했다.

“큭큭. 하여튼 재미있네. 이렇게 서로 총을 겨누다니.”

“닥쳐!”

“하여튼 어떻게 하지? 둘 다 한꺼번에 쏴야 하나? 그건 재미가 없는데.”

이상민은 생글생글 웃더니 말했다.

“이건 어때? 너한테 5 초 줄게.”

“뭐?”

진현은 그의 말뜻을 이해 못했다.

“네가 날 쏠 시간 5 초 준다고. 다섯을 셀 테니, 그 안에 날 쏴.”

“……!”

이상민은 마치 유희를 즐기듯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5 초를 줄 테니 날 쏴. 쏠 수 있다면 말이야. 그 안에 날 쏘면 너의 승리. 만약 쏘지


못하면 내가 널 죽일 거야. 어떻게 할래, 착한 내 친구?”

진현은 분노에 손을 떨었다.

“이… 개 자식……!”

“왜? 너한테 압도적으로 유리한 제안이야. 다섯을 셀 때까지는 절대 너를 쏘지 않겠어. 아, 물론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가까워지면 당장 너를 쏘겠지만. 경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너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잠시 가만히 있는 게 좋을걸?”

“……!”
진입을 시도 중인 경찰하게 하는 경고였다.

“이 미친놈! 왜 이런 짓을?”

“미친놈이니까. 몰랐어? 나 원래 미친놈이야.”

그러고 이상민은 미소와 함께 카운트다운을 시도했다.

“5.”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4.”

숫자를 세며 이상민이 조롱하듯 말했다.

“3. 착한 진현 씨. 이건 너한테 주는 기회야. 그나마 나한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었던 친구한테 주는 기회.
정말 안 쏠 거야? 죽는다?”

“……!”

그는 유혹하듯 말했다.

“망설일 필요 없어. 어차피 너도 날 증오했잖아. 살인죄로 처벌받기 싫어 그런 거면 할아버지인 이해중 회장의


손을 빌리면 돼. 더구나 정당방위니 간단히 빼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숫자를 다 세면 난
곧바로 총을 쏠 거야.”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 개자식!’

먼저 쏘지 않으면 이 미친놈은 정말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2.”

이상민이 2 를 세었다.

이제 2 초도 안 남았다.

죽음의 공포가 몰아닥치며 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개자식.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1 초.

억겁 같은 시간이 째각 지났다.

그리고… 이상민이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하였다.


“1.”

그리고… 잠깐의 정적 후.

타앙!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3

143. 성공한 삶. 끝을 바라보며 (1)

그리고… 그 단발마의 총성과 함께 악몽 같은 그날의 밤이 막을 내렸다.

강민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김 선생, 이제 괜찮나?”

“아… 괜찮습니다.”

진현은 그날의 일을 전해 듣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괜찮다.

악몽 같은 밤이었지만 다치지도 않았고, 나름 잘 해결됐다.

‘아니, 잘 해결된 것일까?’

진현의 눈이 그날의 일을 더듬었다.

그때 마지막 순간, 이상민이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끝낸 후 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그 총성은 이상민도, 진현의 것도 아니었다.

진현의 위기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철우가 다급히 총을 발사했던 것이다!

하늘의 도움인지 그의 총탄은 절묘하게 이상민의 손에 명중했고, 김철우와 경찰들은 그를 산 채로 체포했다.

납치, 총기 협박!

이전에 지었던 살인미수와 살인죄들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중죄였다.

진현에게 했던 자백을 근거로 이상민은 지금까지의 죄악들을 조사받았고, 그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판 결과는 무기징역.
“이제 끝났어. 잘됐어.”

진현은 중얼거렸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인연.

드디어 그 길고 긴 악연이 종지부를 찍었다.

이종근은 하늘의 심판을 받아 식물인간이 되었고, 이상민은 평생을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바라고 바라던 복수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때 마지막 순간…….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마지막 순간에… 쏘지 않았어.’

악몽 같은 그 밤의 마지막 순간, 이상민은 카운트다운을 끝냈음에도 총을 발사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카운트다운을 끝내고 김철우가 총을 쏠 때까지 분명 시간이 있었다.

1, 2 초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방아쇠를 당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에…….’

김철우의 총을 맞기 전, 찰나의 순간.

이상민의 표정이 바뀌었었다.

공허하고 씁쓸한… 그래, 슬픈 감정.

그와 십수 년을 지냈지만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었다.

늘 가면 같은 미소 뒤에 숨어 있던 게 저 얼굴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날 날 부른 것이……?’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하는 가정이 떠올랐으나 그건 지나친 생각이었다.


‘됐어. 그놈은 천하의 죽일 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이상민과 이종근, 둘 모두 죄의 대가를 받았다.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다 잘 해결됐으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그래, 다 잘 해결된 것이다.

정말로.

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덧없는 시간이 흘렀다.

***

시간이 흐르고 흘러, 1 년간의 교환 교수 기간도 끝이 다가왔다.

세인트 죠셉으로 돌아가기 전, 진현은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중요한 일을 마무리했다.

혜미와의 결혼식이었다.

‘그녀와 처음 만난 지 벌써 12 년째구나.’

시간이 정말 빨랐다.

12 년이라니.

바람처럼 스쳐간 그 시간 사이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상부(上府)의 비(婢).’

문득 진현은 이번 삶의 시작이자 이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지난 삶은 실패만 거듭한 삶이었다.

실패의 실패 끝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상부의 비라는 여인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벌써 회귀 후 16 년이다.

’16 년… 시간이 참 빨라.’

16 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어느덧 이 자리까지 서게 되었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김 선생, 정말 축하하네.”

수많은 사람이 그와 혜미의 결혼을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원래는 조용히 친인척들만을 초청하여 조촐한 결혼식을 하려 했으나 참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남산에
위치한 대일그룹 소유의 특급 호텔의 예식장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직접 와서 축하해 주길 원해, 예식장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우리 아들. 어떻게 이렇게 기특하게 자랐을까? 흑.”

“아니, 이렇게 기쁜 날 주책맞게 왜 울어?

“너무 기뻐서… 우리 아들이 이렇게 자라서 결혼까지 하다니.”

그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진현의 결혼을 기뻐하는 사람, 그들은 부모님이었다.

16 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그들의 머리에도 흰머리가 점차 늘어갔다.

회귀 후 처음 뵀을 때보다 부쩍 나이가 든 모습이지만, 이전 삶의 불행한 모습에 비할까?

그때 그들은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지도 못했다.

부모님의 행복만으로도 그의 회귀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껏 살아온 지난 삶의 가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없이 정말 많은 사람이 그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형식상,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축하였다.

모두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 그들이, 그들의 축하가 진현의 삶의 가치를 증명해 주었다.

“범생이, 정말 축하한다.”

이전 삶에서 지독한 악연이었던, 이제는 누구보다도 진현을 소중한 친구로 여기는 김철우가 큰 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던졌다.

그 외에도 황문진을 비롯한, 수많은 친구들이 참석했다.

“진현군, 정말 축하하네. 비록 내과를 하진 않았지만, 자넨 내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야.”

진현의 아버지를 치료한 위암의 대가, 어느덧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최대원이 잔잔히 웃었다.

“아니, 김 선생이 왜 최대원이 자네 제자야? 내 제자지.”

간이식 최고의 대가이자 현(現) 대일병원의 병원장인 강민철이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다.

“김 선생, 정말 축하해. 정말로!”

강민철뿐이 아니었다.

유영수를 비롯한, 대일병원의 외과 의사들 모두가 진현을 축하하러 왔다.

머나먼 땅 뉴욕의 세인트 죠셉에서도 사람이 왔다.


진현을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동료로 여기는 데이비드 교수였다.

“닥터 김, 정말 축하합니다.”

젠틀한 백인 미남인 그는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병원장께서도 꼭 참석하고 싶어 하셨는데, 일정이 바빠서. 죄송하다고 말씀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세인트 죠셉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더군요.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고.”

진현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병원의 대표답지 않게 자유분방한 제임스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내가 한국에서 돌아오지 않을까 봐 계속 걱정했었지.

그건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인 듯 조심이 물었다.

“혹시 한국에 남을 생각은 아니지요, 닥터 김? 그러면 곤란합니다. 계약기간도 남아 있고… 닥터 김만 기다리고


있는 프로젝트와 환자가 아주 많습니다.”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신혼여행 끝나고 곧 돌아갈 테니.”

미국에서 온 손님은 데이비드만이 아니었다.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의 에이미도 있었다.

“미스터 김, 정말 축하해요. 좋은 결혼 생활하세요.”

지난 고백 이후 마음을 정리한 걸까? 아니면 마음을 숨기는 것일까?

에이미의 눈에선 더 이상 진현에 대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쨌든 다행인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먼 길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닥터 김, 저도 결혼 축하드려요.”

고개를 돌린 진현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세 귀족처럼 고상한 외모의 백인 미녀, 뉴욕을 주름잡는 마피아의 보스 매리였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매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붉은 드레스가 하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 항상 입던 화려한 코르셋 드레스에 비하면 간출한 복장이었다.


“지난번 제가 말했잖아요.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그래도…….”

마피아 보스가 이렇게 무방비로 돌아다녀도 되나? 지난번 총도 맞았으면서.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생명의 은인의 큰 행사인데 참석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국의 갱들 따위. 눈치 볼 필요 없으니까요.”

“…….”

“제가 와서 싫으세요?”

진현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와준 성의를 떠나서 그녀의 도움으로 이종근과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하객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의업을 펼치는 중 특별한 도움을 받았던 자들도 자리를 빛내주었다.

“축하합니다.”

진현은 말끔한 중년 사내의 인사에 눈을 깜빡였다.

누구지?

남자는 머쓱히 미소를 지었다.

“김종현입니다. 선생님이 치료해 준.”

“아……!”

그제야 진현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동양화의 대가(大家) 김종현 대화백!

노숙자 같은 이미지였는데,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깔끔히 몸을 단장해서 못 알아봤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손님은 그만이 아니었다.

식장 안으로 한 노년의 신사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저분은?”
“저분도 결혼식에?”

진현의 눈도 커졌다.

“결혼 축하합니다, 김진현 선생님.”

부드러운 목소리.

김창영 전(前) 총리였다!

진현은 놀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제 생명을 구해준 김진현 선생님의 결혼식인데 당연히 축하드리러 와야죠.”

이 나라에서 최고로 존경 받는 정치인인 그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하하. 정말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진현 덕분에 또 한 번의 삶을 얻었던 이들이 수없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호텔 예식장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만약 진현이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의사였으면 이렇게 하객들이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현은 단순히 실력만이 아닌, 진정 환자를 위하는 의사였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신부 측 막내아버지인 이동민이 진현에게 다가왔다.

“이제 정말 우리 집안사람이 되는군.”

“네.”

“그나저나 정말 대일병원을 맡아줄 생각은 없나?”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동민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만날 때마다 저런 이야기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제가 그런 큰일을 맡기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쩝. 뭐, 강민철 교수님도 훌륭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래는 못 기다려 줘. 5 년! 5 년만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진현은 애매하게 웃었다.

그와 혜미는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나기로 한 상태였다.


진현은 세인트 죠셉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가고, 혜미는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 유학 공부를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은 무슨! 꼭 그렇게 해!”

그런데 그때였다.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결혼식 시작합니다! 신랑 입장해 주세요!”

정신없이 축하를 받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나 보다.

진현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식장으로 들어갔다.

***

주례는 대일병원의 병원장이자 스승인 강민철 교수가 맡았다.

“크흠, 신랑, 신부 모두 행복하게…….”

물론 급한 성격의 강민철답게 주례는 길지 않고 짧고 간단명료했다.

뭐, 긴 주례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서로 행복하라는 한마디 축복이면 충분하지.

아, 그리고 뽀뽀 타임.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진현과 혜미는 입을 맞추었다.

진현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랑해.”

길고 긴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사십여 분의 예식이 끝나고, 포토타임이 다가왔다.

“신랑 측 하객들, 앞으로 나와 주세요!”

대일그룹 소속의 유명 사진 기사가 소리쳤다.

그 외침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진 기사가 당황해 말했다.

“아, 아니… 너무 많은데… 한 번에 찍을 수가…….”

그래도 원체 식장이 넓어 어떻게 밀어 넣으니 간신히 공간이 나오긴 했다.


사진 기사가 웃으며 외쳤다.

“자, 신랑, 신부! 뽀뽀!”

다시 진현과 혜미가 수줍게 입을 맞추는 순간 찰칵 사진이 찍혔다.

16 년.

회귀 후 진현의 삶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4

144. 성공한 삶. 끝을 바라보며 (2)

그리고… 머나먼 하늘 끝에서 그 결혼식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지난 삶의 마지막 때 진현을 만났던 여인, 스스로를 상부(上府)의 비(婢)라 칭했던 이였다.

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진현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비(婢)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축복받길. God bless you.”

그리고 한마디를 더하였다.

“마지막까지.”

***

길고도 긴 사랑의 결실을 맺을 신혼여행 장소는 세이셀 공화국이었다.

유럽인들이 최상의 허니문 장소로 꼽는 세이셀 군도는 아프리카 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랑해.”

퍼스트 클래스에서 아늑한 비행을 즐기며 진현은 혜미의 손을 잡았다.

소파 같은 의자에 기대어 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피곤해?”

“아… 응.”
“도착까지 한참 남았으니 좀 자.”

“응, 미안. 좀 잘게.”

그는 혜미를 위해 조명을 껐다.

호텔방처럼 변한 퍼스트 클래스가 고요히 잠겨 들었고, 장기간 비행 끝에 그들은 세이셀 군도에 도착했다.

***

-너 그러다 마법사 된다? 그것도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대마법사.

황문진이 나이가 늦도록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한 진현에게 놀리며 맨날 하는 말이었다.

진현은 그때마다 그저 고개만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진현과 혜미는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보석 같은 인도양의 푸른빛이 보이는 스위트룸에서 그들은 깊고도 깊은 밤을 보냈다.

꿈결 같은 시간이 지나고, 둘은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진현은 침대에서 뒤척 일어났다.

‘아… 얼마나 잔 거지? 혜미는?’

아직 어두운 밤이었는데 침대 옆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혜미야?”

답이 없어, 의아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혜미?”

침실을 벗어나 거실에 나가니 흐릿한 실크 커튼 너머 발코니에 가녀린 몸매의 여인이 서 있었다.

“혜미야? 뭐하고 있어?”

“…….”

하지만 역시 답이 없다.

못 들은 것은 아닐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조심이 커튼을 열고 발코니에 나간 진현은 깜짝 놀랐다.

“혜미야?”
먼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혜미는 급히 눈가를 훔쳤다.

“아… 미안. 왜 벌써 일어났어? 더 자지?”

“…….”

“여기도 밤에는 춥네. 들어가서 좀 더 자자.”

혜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진현의 옆을 스쳐 거실로 들어왔다.

“무슨 생각했어?”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자자.”

진현은 고개를 젓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혜미야. 난 이제 네 가족이야. 좋은 일도 힘든 일도 함께할.”

“……!”

“그러니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같이 함께하고 싶어.”

혜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주저하더니 말했다.

“정말 별것 아니야. 그냥 엄마 생각했어.”

“아…….”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혜미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린 시절 자살했었다.

어머니뿐이랴?

오빠인 이범수도 살해당했다.

그리고 치가 떨린다지만, 그래도 아버지인 이종근도 식물인간이 된 상태다.

그야말로 슬픈 피로 점철된 가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괜찮다가… 이렇게 결혼까지 하고 나니 엄마생각이 나서. 잘 지내고 있겠지? 범수 오빠도?”

혜미는 쓸쓸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어둠을 머금은 인도양의 물결이 찰싹거렸다.

“…….”
진현은 그런 혜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녀의 몸이 진현의 팔에 감겨들었다.

“혜미야.”

“…응.”

항상 밝게 웃고 다니지만, 누구보다도 깊은 아픔을 숨기고 있던 그녀.

그녀의 아픔을 뭐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

고작 몇 마디 말로 그 아픔을 감쌀 수는 없다.

다만…….

“이젠 너한테 내가 있잖아. 이젠 내가 네 가족이야.”

“……!”

“행복하게 해줄게. 누구보다도. 하늘에 있는 가족들이 미소를 지을 만큼.”

혜미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그녀는 진현의 가슴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행복하게 해줘야 해. 안 그러면 엄마랑 범수 오빠가 나중에 화낼 거야.”

“응, 꼭. 약속할게. 애기도 많이 낳자.”

“애기?”

“응. 너랑 나 닮은 애기. 많이 많이 낳아서 행복하게 키우자.”

그제야 혜미가 미소를 지었다.

“응, 많이 낳자. 사랑해.”

12 년.

친구, 짝사랑, 연인.

그리고 이제 부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이 된 그들은 입을 맞추었다.

찰싹찰싹.

인도양의 파도가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듯 차분히 움직였다.

***

그리고 둘은 세이셀 군도에서 행복한 신혼여행을 보냈다.


세이셀 군도는 낙원이란 말이 어울리는 휴양지로 한평생을 치열히 달려오기만 한 진현은 진정한 휴식을 누렸다.

‘좋구나.’

햇볕 아래 누워 있으며 나른히 생각했다.

혜미가 시원한 과일을 진현에게 내밀었다.

“과일 먹어, 자기야.”

“응.”

둘은 좀 더 애틋하게 서로의 호칭을 바꾸었다.

친구로 지낸 기간이 워낙 길어 어색했지만 결혼까지 했는데 딱딱히 이름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신혼여행이 반쯤 지났을 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세이셀 군도의 거리를 걷는데 한국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마른 인상의 나름 잘생긴 남자가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자와 걷고 있었다.

“……!”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남자는?’

물론 그들이 세이셀 군도를 전세 낸 것도 아니니 한국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발리, 하와이, 몰디브보다는 드물지만 관광, 휴양으로 오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고.

문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단 것이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진현을 보고 화들짝 말했다.

“아니, 너는?”

마치 못 볼 사람이라도 만난 표정.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여인이 물었다.

“강민 씨, 아는 사람이에요?”

“아… 아니, 그냥… 저, 저쪽으로 가자.”

강민이라 불린 남자는 허겁지겁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데 날 보고 저러지?’

혜미에게 물었으나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알아?”

“어디서 봤던 얼굴인 것 같긴 한데… 누구지……?”

“강민……?”

진현은 여자가 말한 이름을 중얼거리다 남자가 누군지 갑자기 깨달았다.

“강민?! 김강민이야! 그 의과대학 같이 다니던!”

“에엑? 그 돼지 김강민이라고?”

돼지 김강민!

의과대학 본과 1 학년 시절, 성적 조작 등 추잡한 수작을 부리다 휴학한 김강민이었다!

그 뒤로 신경도 안 쓰고 살았는데, 갑자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살 많이 빠졌네…….”

“그러게.”

너무 많이 빠져 완전히 달라진 얼굴이다.

환골탈태?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뭐,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상관없는 놈이니.”

“응.”

진현은 그렇게 말했으나, 그 뒤로 그들은 계속해서 마주쳤다.

애초에 군도자체가 넓지 않았고, 관광 포인트가 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호텔도 같은 곳이었다.

‘뭐야, 신혼여행까지 와서.’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전처럼 시비를 걸거나 하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둘을 만나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비켰다.

진현과 혜미도 점점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김강민 따위에게 신경 쓰기엔 신혼여행이 너무 짧았다.

“좋다. 계속 이렇게 쉬고 싶다.”


그리고 신혼여행이 얼마 남지 않은 오후.

혜미는 파라솔에 누워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저 멀리 얼핏 김강민이 있었으나 서로를 향하는 그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진현이 웃었다.

“계속 이렇게 쉴까?”

“응?”

“나 돈 많은데. 이제 평생 놀면서 살아도 돼.”

빈말이 아니었다.

그가 미국에서 제약회사들과 제휴해 번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 적당한 건물들을 몇 채 사서 평생 월세나 받으며


살아도 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회귀 후 꿈이 피부과 의사 해서 번듯한 건물의 주인이 되는 거였는데…….’

한국대 의대를 졸업 후 인턴을 할 때만 해도 자신이 이런 길을 걸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때 혜미가 입술을 내밀었다.

“됐어. 돈은 나도 많아. 내가 자기보다 많을걸?”

“그야 그렇지.”

진현이 아무리 많이 벌었다 해도 재벌 3 세인 그녀에 비할까?

그녀는 초등학생 때 이미 강남 고층 건물의 건물주였다.

“나도 의사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

“어떤?”

하지만 그녀는 웃을 뿐이었다.

“비밀이야.”

“응? 그게 무슨 비밀이야.”

“몰라. 민망하니 알려고 하지 마.”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뭐야, 궁금하잖아.”

“몰라. 안 알려줘. 민망하단 말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파라솔 옆 수영장이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졌다.

“꺄악! Help me! 여기 누가 도와주세요!”

놀라 바라보니 중년의 백인 남성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다.

‘급성 심장마비(Sudden cardiac arrest)!’

진현과 혜미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쓰러진 남자에게 뛰어갔다.

정말로 심장마비라면 1 초라도 빨리 심폐소생술을 시행해야 환자를 살릴 수 있다.

‘아니, 무슨. 신혼여행 중에 심장마비 환자야! 내가 아무리 내공이 안 좋아 뒤로 넘어져도 환자가 나빠지는
사람이라지만!’

진현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은 신혼여행 중에도 그가 쉬길 원하지 않는 듯했다.

“컴프레션(Compression:가슴압박)!”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진현과 혜미는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번갈아 가며 가슴을 압박하고 인공호흡을 하고.

진현은 안전 요원에게 외쳤다.

“제세동기 좀 가져와주십시오!”

최고급 호텔의 수영장이라 다행히 제세동기가 있었다.

그렇게 심실 부정맥으로 전기 충격 후 심폐소생술을 진행하는데,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둘만으론 손이 모자라.’

제대로 된 심폐소생술을 진행하려면 5 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다.

5 명까진 못하더라도 3 명은 있어야 호흡, 가슴압박, 전기 충격 등을 수행할 수 있다.

둘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하지?’

진현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지만 생명이 걸린 일이다

지금 심폐소생술에 따라 이 남자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은 직원은 없나?’


한국만 해도 안전 요원들이 모두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지만, 여긴 아프리카다.

“아아, 제발 살려주세요!”

옆에서 부인으로 보이는 백인 여자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진현이 가슴을 압박하며 입술을 깨물 때였다.

의외의 도움이 나타났다.

“같이하자. 내가 가슴압박을 할게.”

“……!”

익숙한 한국어.

김강민이었다!

방금 수영하다 나왔는지 수영장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놀라 바라보니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외과의사야. 심폐소생술은 지긋지긋하게 해봤으니 같이하자.”

더욱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 찌질함의 대명사 김강민이 외과의사가 되었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순간이 아니었다.

“그래, 부탁한다.”

“ACLS(Advanced Caridiac Life Support - 전문심장소생술) cycle 대로 가자.”

서둘러 물기를 깨끗이 닦은 김강민이 합류했다.

인원이 3 명으로 늘자, 심폐소생술이 훨씬 견고해졌다.

단순 기본(BLS)에서 제대로 체계(ACLS)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분 뒤, 김강민이 외치며 전기 충격을 주었다.

외과의사란 말이 거짓이 아닌지,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차징(Charging)! 쇼크!”

퍼억!

거센 전기에 환자의 몸이 흔들렸고…….


뚝. 뚝.

다시 맥이 돌아왔다.

“하아… 다행이다.”

3 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부인이 울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가 더욱 중요한 때로 한가히 감사를 받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추가적인 응급조치 후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

“여기 빨리 병원으로 옮길 준비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다행히 환자는 헬기를 타고 병원까지 무사히 이송할 수 있었다.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혜미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뭐야. 신혼여행에서 심폐소생술이라니.”

“그러게. 그래도 늦지 않게 조처해서 다행이네.”

진현도 진땀을 닦았다.

그나마 환자가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한편 함께 병원까지 환자를 이송한 김강민은 별말이 없었다.

그저 어색한 얼굴로 먼 하늘만 바라볼 뿐.

“수고하셨습니다, 닥터. 다시 호텔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헬기 조종사가 깍듯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3 명은 헬기에 다시 올라타 세이셀 군도로 향했다.

“…….”

헬기 프로펠러 소리를 들으며 3 명은 뻘쭘한 얼굴을 했다.

학창시절 지독한 악연이다가 이런 식으로 좁은 헬기에 마주보고 앉아 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5

145. 성공한 삶. 끝을 바라보며 (3)

“…잘 지냈냐?”

“…응.”

김강민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잘 지낸 것 같긴 하다.

살도 빠졌고, 나름 미남으로 변했으며 무엇보다 아집으로 가득 차 있던 눈빛. 그것이 사라졌다.

다다다.

헬기가 나선으로 비단 같은 인도양을 갈랐다. 저물어가는 황혼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승강장에 내리니 어스름한 저녁으로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찰랑였다.

“호텔 방 들어갈 거지?”

“어, 여자친구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그때 같이 있던 여자가 애인이었나 보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수고했다. 고마웠고. 잘 쉬어라.”

뭔가 뜨뜻미지근한 헤어짐이었으나,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시 그를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가자, 혜미야.”

“응. 들어가서 쉬고 싶어.”

그러고 호텔 방으로 향하는데 의외의 외침이 그를 잡았다.

“잠깐, 김진현!”

김강민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그때… 미안했다.”
“……!”

진현이 눈이 커졌다.

김강민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많이 어렸지. 정말 미안했다. 한번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됐네.”

진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서렸다.

김강민이 사과하는 것은 본과 1 학년 때 일으켰던 사건에 대해서다.

참 추악한 짓거리였지만, 벌써 십여 년이나 된 이야기다.

그사이 강산이 변한다는 이야기처럼 이 녀석도 정말 많이 변했다.

“괜찮다. 벌써 10 년 전 이야기인데, 뭘.”

김강민은 혜미도 바라봤다.

“혜미, 너도 미안하고.”

“아, 아. 응.”

김강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이후로 나도 이런저런 일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거든. 그때 다 미안했다.”

완전히 딴판으로 바뀐 그 모습에 진현은 기분 좋은 따뜻함을 느꼈다.

10 년의 세월을 건너 이런 인연으로 재회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만남이리라.

그런데 왜일까?

그 순간, 진현은 한 인물을 떠올렸다.

이상민.

오랜 친구, 악연, 용서받지 못할 죄인.

그도 바뀔 수 있었을까?

‘됐어. 의미 없는 이야기야.’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제 다시는 만날 일 없는 놈이다.

그는 그가 저지른 죗값을 평생 동안 치를 것이고 이제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된다.

그때 김강민이 말했다.
“참, 나도 외과 선택했다. 지금 한국대 병원에서 레지던트 중이야.”

그건 정말 의외였다.

피부과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피부과를 전공할 줄 알았는데?

“왜 외과를?”

“의대 졸업하고 유학 와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한국의 한 의학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봤거든. 그때


주인공이었던 의사가 너무 멋져 외과를 하기로 결정했지. 그런데 그때 나온 외과의사가 누군지 알아?”

“글쎄?”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굿 닥터, 명의 같은 프로그램인가? 외과 의사야 워낙 멋진 분들이 많으니.

그런데 김강민은 지금까지 했던 말들 중 가장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너야, 김진현.”

“…뭐?”

“널 방송한 프로그램이었어. 같은 동기였는데 나와 달리 환자를 위해 사는 네 모습을 보고 외과의사가 되기로


결정한 거야.”

진현은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

김강민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 신청이었다.

진현은 얼떨떨하게 그 손을 잡았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또 보자.”

“…그래.”

“언젠가 너와 같은 외과의사가 되겠어.”

낯간지러운 이야기에 진현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왜 이렇게 변했지?

사람이 이렇게 변해도 되는 거야?

그 후 며칠이 지나고, 혜미와 진현의 신혼여행이 끝났다.

부부가 된 그들은 미국에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

진현은 세인트 죠셉의 교수로, 혜미는 유학생으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의 삶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성공한 삶.

외과의(Surgeon)로서도, 의학자(Academic physician)로서도 최고의 삶이었다.

1 년, 2 년이 지날 때마다 그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전의 그가 미국 의학계의 떠오르는 신성(新星), 슈퍼 루키에 불과했다면, 5 년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미국


… 아니, 세계에서도 꼽히는 진정한 대가(大家)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어린 동양인의 승승장구에 시기와 질투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진현은 그 모든 것을 꿋꿋이 이겨냈다.

서른 중반이 된 그는 최근 5 년간 가장 많은 의학적 업적을 남긴 의학자이자, 수술이 어려운 고난도 난치성 간암


환자의 희망인 마스터 서젼(Master surgeon)이 되었다.

아, 물론 아무리 그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비는 있었다.

결혼 후 2 년 만에 아이를 가진 혜미의 난산이었다.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

미국에서도 꼽히는 명문병원, 세인트 죠셉 병원.

그중에서도 최고의 산부인과 의료진이 달려들었음에도 아이와 산모, 둘 모두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난산이었다.

‘제발……!’

분만장 밖에서 진현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세계 최고로 꼽히는 외과 의사이면 뭐할까?

가장 사랑하는 이가 위급할 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데.

그간의 성공이 모두 덧없이 느껴졌다.

째각째각.

억겁 같은 몇 시간이 지나고, 분만장의 문이 드륵 열렸다.

흰 머리 지긋한 산부인과 주임교수가 진현에게 다가왔다.

마스크 너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떻습니까?”

산부인과 교수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다 잘됐네. 어려웠지만 건강하게 태어났어. 산모는 피를 워낙 많이 흘려 당분간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현은 크게 고개를 숙였다.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부러질 것 같이 여린 남자아이가 응애응애 울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 애기야.”

혜미가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진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응, 우리 아기야. 수고했어. 정말로.”

그의 손길을 느끼며 혜미는 눈을 감았다.

“잘 키우자. 행복하게.”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어렵게 낳았기에 더욱 금쪽같은 아들이었다.

그 뒤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하며, 재롱을 떨기 시작할 때 진현은 자신의 의학
업적에 획을 그을 전기를 마주했다.

“닥터 김,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젠틀한,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미중년 데이비드가 진현에게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감염내과(Division of Infectious disease)에서 컨설트가 왔는데 조금 이상해서요.”

그러면서 데이비드는 설명을 했다.

“원인 불명의 발열(Fever of unknown origin)로 치료 중이고, 장폐색이 심하게 왔어요. 간 수치도
이상하게 높고… 혈소판도 낮고… 뭔가 이상해요.”

옆에서 외과, 그 중에서도 대장 쪽 전문가인 로버트 교수가 말했다.


“발열에 동반된 장 폐색의 가능성이 높아 급하게 수술적 교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뭔가 좀 이상해.”

그 말에 진현은 고민했다.

‘발열, 장 폐색…….’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은 없었다.

고열에 동반해 장 기능이 떨어져 폐색이 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간 수치와 혈소판은 왜 안 좋은 거지? 중증 바이러스성 감염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진현은 퍼뜩 놀랐다.

‘가만. 그러고 보니 지금 시기가…….’

“혹시 환자 분에게 여행력은 없습니까?”

“여행력이라니?”

“그러니까 최근 아프리카를 방문했다든지…….”

데이비드가 손뼉을 쳤다.

“아! 이 환자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주재원이라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

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점점 느낌이 안 좋아진다.

‘설마 아니겠지? 아직 그 시기는 아니야.’

그의 머리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테노포 바이러스.

그가 사십 대 초반에 회귀 전, 사스(SARS), 조류독감, 신종플루처럼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전염병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테노포 바이러스의 가능성이 있어.’

테노포 바이러스는 원인불명의 발열과 장 폐색이 나타나는 질환으로 악화 시 장이 썩어 들어가며 사망하게 된다.

주로 남아프리카의 동물, 스프링복(Springbok)의 임파선 안에 머물다 드물게 인체 감염을 일으키며, 몇 년 뒤


RNA 돌연변이로 사람 간 전염성을 획득해 대유행을 겪기 전까지는 그저 남아프리카의 풍토병으로만 치부되던
질환이다.

‘과거 대유행한 사스(SARS)와 비슷한 경우지. 사스(SARS)도 중국 광동성 사향고양에 서식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돼 대유행 한 경우니까.’

사스(SARS)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숙주가 사향고양이인지 박쥐인지는 논란이 있었지만, 의학계 역학자
(Epidemiologist)들 일부는 사향고양이를 숙주로 생각했다.

사향고양이를 요리하는 요리사가 사스(SARS)에 감염 후, 그 환자를 진료한 광동성의 의사가 홍콩에 학회에 참여.

당시 같은 호텔에 머무는 투숙객들이 단체 감염된 후 전 세계로 퍼졌다는 설이다.

물론 이 환자의 증상이 테노포 바이러스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이 환자는 남아프리카의 질환인 테노포 바이러스의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테노포 바이러스?”

데이비드와 로버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아직까지 테노포 바이러스는 미생물 전공, 그중에서도 저명한 바이러스 학자(Virologist)가 아니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질환이니까.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가 바이러스의 존재를 규명한 논문을 발표한 것이 불과 1 년 전이었지?’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는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를 입증한 업적으로 대유행이 끝난 후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후보가 된다.

“테노포 바이러스는…….”

진현은 환자의 증상과 테노포 바이러스의 유사점을 설명했다.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흠… 생소한 질환이긴 하지만… 계속 발열의 원인을 못 찾는 불명열(Fever of Unknown Origin) 환자니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어요. 닥터 김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의심해 볼만 하고.”

솔직히 다른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으면 무시했을 수도 있다.

원체 드문, 들어본 적 없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는 진현의 의견이었다.

“확인하려면 어떤 검사를 해야 할까요?”

“대부분 바이러스혈증(Viremia) 상태이기 때문에 피를 채취 후 RNA(Ribonucleic acid. 리보핵산. DNA


와 함께 유전정보의 전달에 관여하는 핵산의 일종)를 확인하는 western blot(특수단백질검출검사),
PCR(Polymerase chain reaction:중합효소 연쇄반응) 검사를 해보면 됩니다. 하버드대의 웨슬리
박사님에게 부탁하면 검사를 진행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늦지 않게 CT 를 다시 찍어 장의 괴사가
진행하는지 여부를 확인해봐야 합니다.”
진현의 의견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다음 날 CT 를 찍으니 정말로 장이 썩는 괴사 소견이 확인되어 광범위 장 절제술을 시행하였고, 환자는 사경을 몇


번이나 넘긴 끝에 간신히 회복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6

146. 성공한 삶. 끝을 바라보며 (4)

“닥터 김, 역시 미라클! 어떻게 이런 희귀 질환을?”

늘 그렇듯 데이비드는 진현에게 감탄을 보냈다.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동료인 닥터 김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데이비드뿐 아니라 감염내과의 의사들도 감탄을 터뜨렸다.

이런 희귀 바이러스성 감염을 진단하는 것은 자신들도 어려운데 전공도 아닌 외과의사가 해낸 것이다.

하지만 진현은 겸손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환자가 좋아져서 다행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뒤에 테노포 바이러스 전염병이 유행하겠구나. 스페인 독감 때처럼은 아니어도 많이들 죽을


텐데… 치료제가 없으니.’

전염성 자체는 다른 호흡기 바이러스 전염병보다는 훨씬 덜했지만, 치료제가 없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당시 한국은 다행히 유행지역에서 비켜갔지만,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아프리카와 중동 쪽은 굉장한 피해를


입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외과의사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다 진현은 문득 이전 삶에서 읽었던 논문을 떠올렸다.

테노포 바이러스의 유행이 끝나갈 무렵에 발표된 논문으로 전공 외과 분야는 아니었지만, 워낙 중대한 질환의
발표라 기억이 났다.

‘RNA 바이러스를 타겟으로 하는 항바이러스제의 일부가 테노포 바이러스의 증식 억제에 효과가 있었다는
내용이었지? 장의 괴사로 진행도 막아, 사망률 감소에도 도움이 되었고.’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논문의 내용이 정말로 사실이면 앞으로 발생할 사망자를 극적으로 낮출 수 있겠지만… 신빙성이 떨어졌다.

대규모 선행 연구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후향적 연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몇 환자에게 적용한 사례를 정리해 리포트한 것으로 그저 가능성을 보여줄 뿐, 실제로 그 약제가 테노포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다고 입증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예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약을 사용하는 것인데 한번 임상 연구(Clicinal


trial)를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실패해도 손해 볼 것이 없고, 성공하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마침 오랜 파트너이자, 이제는 친한 친구처럼 지내는 에이미 엔더슨의 헤인스도 해당 약제를 생산, 판매한다.

생각이 정리된 진현은 에이미와 미팅을 잡았다.

-미스터 김? 무슨 일이에요?

“업무로 상의할 일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괜찮죠. 언제 볼까요?

진현은 헤인스에서 황금을 낳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통한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손을 대는 프로젝트마다 잭팟이 터졌기 때문이다.

***

세월의 흐름을 완전히 비껴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에이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과거 진현에게 마음을 주었지만, 지금은 깨끗이 정리한 모습으로 독신인 그녀는 성공을 향해 박차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헤인스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최연소 여성 CEO 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잘 지내셨어요?”

“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거예요?”

에이미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가 학생 때 TC80 프로젝트부터 오랜 기간 함께 일해왔다.

폐기 직전의, 문제가 생긴 프로젝트를 가져가면 진현은 마술사처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마치 그의 별명인 미라클(Miracle)처럼.

그런 그의 제안이라니. 어떤 프로젝트일지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었다.

“테노포 바이러스 감염의 치료제에 대한 프로젝트입니다.”

“테노포 바이러스요?”
에이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바이러스다.

진현은 말을 이었다.

“남아프리카에 주로 서식하는 스프링복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입니다. 최근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에 의해


증명되었고, 드물게 인체 감염을 일으키는데 30%의 높은 치사율을 보입니다.”

진현은 차분히 설명했다.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치사율 30%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사망률이다.

단일 질환으로는 거의 최고의 치사율. 패혈증 쇼크(Septic shock)에 맞먹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에 RNA 바이러스를 타겟으로 하는 헤인스의 항바이러스제로 임상연구(Clinical trial)를


해봤으면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분명 말씀하신 바이러스라면 분자구조식상 저희 회사의 RNA 바이러스를 타깃으로 한 항바이러스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군요. 물론 임상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으면 치사율도 낮출 수 있겠고요.”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만 하면 큰 의미가 있겠어요. 30%의 치사율을 크게 낮출 테니.”

분명 가능성 있는 이야기고 시도해 볼 만한 연구였다. 의학적 가치도 컸고.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떨떠름했다. 얼굴도 혹한 표정이 아니다.

에이미는 주저하더니 물었다.

“하지만… 이게 시장가치가 있을까요, 미스터 김? 제 생각엔 남아프리카에서도 원체 드문 질환이라 성공해도 큰


수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아! 물론 치사율을 크게 낮출 테니 의학적 가치는 크겠지만… 그래도…….”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당연한 물음이다.

헤인스는 수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제약회사, 그곳의 이사인 그녀로서는 시장성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지금으로선 시장가치가 별로 없지. 몇 년 뒤 돌연변이를 통해 인체 간 감염력(Human to human


infection)을 획득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무려 치사율 30%의 바이러스다.

유행을 시작하면 전 세계가 치료제를 사들일 것이다.

몇 년 뒤 생길 돌연변이는 공기 전염이 아니라, 체액 전염이라 감염력이 비교적 낮았지만, 치사율이 워낙 높아


전 세계가 한때 공포에 떨었었다.
‘카피(Copy) 약이라도 있으면 대일 바이오와 연구를 진행하면 될 텐데. 비교적 신약이라 아직 헤인스에서
특허권을 쥐고 있으니.’

진현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시장성이 크지 않지만… 의학적 가치는 굉장히 크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시장이 커질지도
모르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시장이 커질 수도 있다니?

에이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진현은 그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점쟁이도 아니고, 미래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이 약이 테노포 바이러스에 정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몇몇 사례에서 도움이 되었다지만, 실제로 그 약이 테노포 바이러스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실제 감염 환자와 대조군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다.

“…….”

에이미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잠시 침묵했다.

진현은 독촉하지 않고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그 아메리카노가 바닥을 보일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진행해 보죠.”

“……!”

진현은 놀라 에이미를 바라봤다.

“괜찮겠습니까?”

시장가치도 적고 실패할 수도 있는 프로젝트인데 이렇게 선선히 승낙하다니?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제안은 거절하는 게 맞죠. 수익이 날지도 모르고, 성공할지도 모르니. 아니,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은데.”

하지만 에이미는 살짝 웃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미스터 김의 제안이잖아요.”

믿음이 가득한 목소리.

그래, 그녀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다.


“저는 당신을 믿어요.”

그녀의 신뢰가 진현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녀는 싱그럽게 웃었다.

“뭐, 그걸 떠나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리는 미라클 김의 제안이잖아요. 이번에도 잭팟이 터지겠죠. 미스터 김의
말대로 의학적 가치가 크기도 하고. 새로 약을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터디 디자인해서 임상 시험만 하면
되니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장가치가 적을 뿐이지 의학적 가치는 컸고 기존에 개발된 약을 사용하는 것이니 헤인스 입장에서 큰돈이 들 것도
없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혹시 알아요? 미스터 김의 말처럼 시장이 커질지?”

진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과거처럼 테노포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획득하면, 단순히 시장이 커지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유행이 끝날 때까지 헤인스의 모든 공장을 항바이러스 약제를 생산하는데 돌려야 할지도 몰랐다.

헤인스의 최고 간부인 그녀가 동의하자, 프로젝트 진행은 급물살을 탔다.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를 입증한 바이러스학의 대가,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남아프리카의 테노포 바이러스의 감염자를 대상으로 항바이러스제의 효과를 확인하는 연구라고요?”

웨슬리 박사는 커다란 돋보기안경을 낀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전형적인 학자 형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 박사는 진현의 제안에 눈을 빛냈다.

“분명 RNA 구조상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임상실험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만약 성공만 한다면
치사율을 크게 낮출 수 있겠습니다.”

“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형 병원들과 연계하여 환자군을 모은 후 약효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다른
남아프리카의 대형병원도 섭외하고요. 환자군이 많을수록 연구의 신뢰도가 높아지니.”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 말고는 인프라가 열악해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그러면 다국적, 다기관 선행연구(Multi-center, prospective study)가 되겠군요.”

“네.”

다국적, 다기관 선행연구.


의학적으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연구로 이런 종류의 연구는 설사 실패하더라도 큰 업적으로 남는다.

실패 자체로도 의학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 진행에 큰 문제는 없었다.

진현은 이런 대규모 연구를 진행한 경험이 숱하게 있었고, 남아프리카측도 치사율 30%의 테노포 바이러스의
치료제의 연구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진현은 웨슬리 박사에게 물었다.

“저보고 이 연구의 치프 디렉터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치프 디렉터.

다기관 연구의 책임자를 뜻하는 것으로, 연구가 성공 시 가장 큰 공을 가져갈 수 있는 자리이다.

진현은 원래 치프 디렉터의 자리를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에게 돌리려 했다.

자신은 사실 바이러스 감염과 상관도 없는 외과의사이고,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 자체를 웨슬리 박사가 증명하지
않았으면 시도도 못해볼 연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슬리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치프 디렉터 자리가 탐나긴 합니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온전히 닥터 김의 것이고, 진행에도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치프 디렉터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감염내과 의사도 아니고, 사실 바이러스와 상관없는 외과의사인데 이런 대규모 연구의 치프를
맡기엔…….”

웨슬리 박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냥 외과의사가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빛나는 외과의사 중 한 명이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닥터 김의


이름값이면 치프를 맡기 충분한 것 같습니다.”

웨슬리 박사는 이전부터 진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전공은 다르지만, 워낙 의학계에서 유명한 이름이라 도대체 어떤 외계인일지 궁금했다고.

막상 만나보니 깍듯이 예의 바른 동양의 젊은 의사라 놀랐다 한다.

그렇게 진현은 연구의 치프가 되었다.

‘누가 총책임자가 되든 상관없으니 꼭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구나.’

애초에 학문적 업적을 바라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학문적 업적은 이제 질리도록 쌓은 상태다.


진현은 그저 좋은 결과가 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자신의 의학계에서 위상이 또다시 얼마나 오를지.

웨슬리 박사는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를 규명한 것만으로도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자가 되었다.

그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그리고 그 진현 덕분에 대유행시 사망률이


급감한다면 노벨 재단은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로 웨슬리가 아닌, 진현을 꼽을 것이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47

147. 성공한 삶. 끝을 바라보며 (5)

그렇게 진현은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성공으로 빛나는 시간들이 지났고, 그도 점점 나이를 먹어갔다.

서른 중 후반.

몇 년만 지나면 마흔을 바라볼 그때, 그는 응급 간이식 수술을 끝내고 지친 몸을 달래러 세인트 죠셉 병원 근처의
센트럴 파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음 수술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맨해튼의 대공원인 센트럴 파크에는 그 말고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득 벤치에서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누는 이십 대의 젊은 남녀를 보며 진현은 생각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자신도 저렇게 젊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서른 중 후반이다.

‘잘 살고 있는 거겠지?’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회귀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성공하겠다고, 이를 악물며 살았지.

그리고 이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 회귀할 때 삶의 목표는 전부 다 이루었다.

금전적 성공, 사회적 성공, 사랑하는 아내, 금쪽같은 아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흐르는 구름을 보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김진현 선생님?”

차분한 한국어.

놀라 고개를 돌리니 단아한 인상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희였다!

그녀가 왜 여기에?

“아, 뒷모습이 닮아서 혹시나 했는데…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아, 네.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는 대일병원의 간호사였다.

물론 이건 몇 년 전의 정보로,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미국에 올 일이 없을 텐데 왜?

“관광 왔어요. 휴가 시즌이라.”

“아…….”

그러고 보니 여행자 특유의 가벼운 옷차림이다.

센트럴 파크는 뉴욕 관광객들의 핵심 코스니 방문한 듯했다.

“잠깐 옆에 앉아도 돼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연.

그녀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여운을 주는 단어였다.

이전 삶에서 부인이었던 지금은 완전히 엇갈려 버린 인연.

뭐,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네, 앉으십시오.”

“고마워요. 관광해 보니 뉴욕이 좋긴 좋네요.”

연희의 말에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살기는 서울이 더 좋습니다.”


“그럴 것 같긴 해요. 그래도 관광하기에는 좋은 것 같아요. 쇼핑물가도 훨씬 싸고.”

“네.”

연희가 물었다.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똑같죠.”

뭔가 어색한 그 대화를 끝으로 말이 끊겼다.

연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센트럴 파크의 전경을 아련히 바라봤다.

진현은 침묵이 불편한 마음이 들어 입을 열었다.

“일행은 어디에 있습니까?”

“혼자 왔어요.”

그 말에 진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혼자 여행이라.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하나였다.

그 생각에 답하듯 연희가 말했다.

“저 혼자 지내거든요.”

“아… 네.”

의외의 일이었다.

그와 이상민, 몇 번의 연애 실패를 겪긴 했어도 그녀 정도의 외모라면 모셔갈 남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집안이나 직업이 나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인기도 엄청 많았다.

“그냥 환자를 위해 살고 있어요.”

“네.”

진현은 이유를 더 자세히 묻진 않았다.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이고, 그런 것을 물어볼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참, 그 이야기 들었어요?”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상민 씨 이야기 말이에요.”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회귀 후 이십 년이 넘는 삶 동안 가장 큰 악연으로 얽힌 남자의 이름이다.

“못 들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관심 없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놈의 이야기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렇군요.”

“이상민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가끔… 정말 가끔 면회를 가곤 해요.”

그것도 의외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이상민의 면회를 가끔이나마 갔다니.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험한 꼴을 당했으면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정말 가끔 가요. 마음이 남아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

“어쨌든 상민 씨 감옥에서 나왔어요.”

“……?!”

진현은 깜짝 놀랐다.

감옥에서 나왔다고? 그런 죄를 지어놓고?

하지만 연희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정신분열병이 너무 악화돼 감옥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폐쇄정신병원으로 옮겨 감금 중이에요.”

“…….”

진현은 답하지 않았다. 연희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침묵과 함께 바람이 그들 사이를 흘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힐끗 시계를 바라본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턴 행 버스 시간 때문에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좋은 여행되십시오.”

“고마워요.”

그리고 그녀는 등을 돌려 메트로 쪽으로 걸어갔다.

만남만큼이나 덧없는 헤어짐이었다. 그와 그녀의 지난 인연들처럼.

“…….”

진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늘 하던 것처럼 다음 수술을 집도했다.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다.

전혀.

***

이후 다시 시간이 흘렀다.

테노포 바이러스 치료제에 대한 연구는 다행히 대성공이었다.

헤인스의 항 바이러스제는 테노포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진 못해도, 감염된 사람에서 바이러스의 체내 증식을
억제했고, 그것은 치사율의 극적인 감소로 나타났다.

사망률 30%가 2%로 줄어든 것이다.

물론 2%도 높다.

그래도 30%와 2%는 천지차이였다.

과연 몇 년 뒤, 테노포 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획득해 유행을 일으켰지만 진현의 이전 삶처럼 치명적 피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진현의 연구덕분으로 전 세계 의학계의 모두가 진현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리고 그건 의학계뿐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고,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사사카와 보건상까지 수상했다.

“당신의 업적이 아프리카를 살렸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사무총장이 직접 진현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세계의 수많은 단체, 사람들이 진현의 공로를
치하했다.

노벨 재단도 진현을 주목했다.

그의 지난 삶에서는 하버대의 웨슬리 박사가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자가 되었지만, 단순히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보단 치료의 방안을 발견한 것이 당연히 더 뛰어난 업적이다.

웨슬리 박사와 진현 모두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자가 되었고, 단순한 학문적 업적이 아닌 수없이 많은
생명을 구한 업적이니 사람들은 그들이 머지않은 시일에 노벨상을 수상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성공한 삶이 흘러갔다.

***

인생의 시간은 휴지 두루마리와 같다는 말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빨리 흐르는 것이 휴지 두루마리의 종이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렇게 시간이 덧없이 흘러 진현의 나이도 벌써 마흔이 되었다.

의학자로서는 정상에 도달한 그때, 진현과 혜미는 한국행을 결정했다.

“아니, 닥터 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의 자랑인 진현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에 세인트 죠셉의 모두가 펄쩍 뛰었다.

“저희가 뭐 서운하게 한 것 있습니까?”

“혹시 연봉이 모자랍니까? 뭐든지 말씀한 해주십시오.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동료 외과의사, 병원장, 이사진… 모두가 달려들어 진현을 말렸다.

하지만 진현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하아, 닥터 김… 너무 아쉽군요.”

십여 년간 일하며 이제 정이 들대로 든 데이비드가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도 제 2 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세인트 죠셉을 떠나기 아쉬웠으나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지.’

그렇지 않아도 이해중 전 회장의 사후(死後) 대일그룹의 회장이 된 이동민이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와서 제발 대일병원을 맡아달라고.

그래도 그런 이유 때문에 귀국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어느덧 부모님들의 나이가 환갑을 훌쩍 넘어 칠순에 가까워져 온 것이다.

작년에 마지막에 봤을 때, 하얀 머리의 노인이 된 그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잘 지내고. 가서 몸 조심해야 해. 우리 손주도 학교 잘 다니고.”


아들과 손자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보던 부모님들의 모습이 왜 그리 눈에 밟히던지.

부모님들은 진현이 신경 쓸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며 아들이 그리운 눈치였다.

왜 안 그러겠는가?

아들의 성공이 기뻐도 하나뿐인 자식과 손주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성공은 할 대로 했어.’

물론 미국에서 빛나는 자리를 버리고 한국에 가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효도를 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가도 의학 연구나 진료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진현은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 소식에 대일그룹의 총수 이동민 회장이 크게 기뻐했다.

“빨리 오게, 빨리! 자리는 이미 다 마련해 놨으니!”

그의 오랜 바람대로 진현은 대일병원을 맡기로 했다.

‘내가 대일병원의 이사장이 되다니. 세상 참 묘하군.’

이제는 벌써 10 년도 넘은 과거가 된 먼 옛날이 떠올랐다.

그때 이사장이었던 이종근과 참 지독한 악연으로 얽혔었다.

한국에서 인연이 있던 이들도 모두 그의 귀국을 환영했다. 특히 스승인 강민철의 기쁨이 컸다.

“빨리 오게, 김 선생! 내가 주는 술 한잔 받아야지!”

다년간 대일병원의 원장으로 활약하던 강민철은 완전히 은퇴 후 유유자적 삶을 즐기고 있었다. 메스는 손에서
놓았지만, 여전히 정정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진현은 자신의 교수실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10 년이 넘었구나.’

정신없이 지낸 세월이었다.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는지,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진현은 고개를 젓고 남은 짐을 정리했다.

중요한 짐은 다 보낸 상태지만 10 년 동안 지내 정리할 것이 꽤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정리를 부탁해도 되지만, 자신의 손때 묻은 방이어서 그럴까?

왠지 직접 하고 싶었다.

그런데 늦은 밤이었다.

끼익.

교수실의 방문이 조심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니 데이비드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있었군요, 닥터 김.”

“네,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데이비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아쉬워서요. 이렇게 떠난다니.”

그 말에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세인트 죠셉에 왔을 때부터 데이비드는 한결 같은 호의로 자신을 대해줬다. 참 고마운 인물이다.

진현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주 오겠습니다.”

“정말이죠?”

“네, 학회 때마다 찾아오겠습니다. 그때 귀찮다 하기 없기입니다?”

데이비드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귀찮다니요. 우리 세인트 죠셉의 전설, 미라클 김의 방문인데요.”

미라클 김.

10 년 동안 들어도 민망한 별명이다.

서로 손을 마주잡으며 데이비드가 말했다.

“닥터 김, 떠나니까 말할게요.”

“네.”

“저 당신을 존경했어요. 비록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말이에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 148
148. 종장 (1)

진현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여유 있는 중년 신사 같은 인상이지만 데이비드도 미국 의학계에서 굉장히 인정받는 명의였다.

그런 이가 자신을 존경한다니.

하지만 데이비드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말이에요. 다른 무엇보다 환자를 위하는 그 마음. 그것을 보며 제가 스스로를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를


거예요.”

“…….”

더없는 극찬이었다.

“그러니 닥터 김.”

데이비드가 진현의 눈을 바라봤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은 우리 세인트 죠셉의 영원한 미라클이에요.”

순간 뭉클한 마음이 들어 진현은 답을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자신의 지난 세월은 가치 있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들의 가슴에 남을 정도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정말로.”

진현은 답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생활이 마무리됐다.

***

한국에 돌아온 진현은 대일병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내가 대일병원의 이사장이 되다니. 참 다시 살고 볼 일이야.’

미국에서 유학 후 연구 의사(Academic physician)로 나름 뛰어난 업적을 쌓아가던 혜미는 모교인 한국대


병원의 러브콜을 받고 한국대 의대의 내과 교수가 되었다.

대일병원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대일병원의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거절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제 완연한 노교수가 된 최대원이 진현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했다.

강민철과 더불어 은사라 부를 수 있는 최대원에게 진현은 고개를 숙였다.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도 이제 이사장님인데 그건 안 되죠.”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라도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세계적 의학자로 빛나고 있음에도 여전한 진현의 말투에 최대원은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네. 어쨌든 이렇게 돌아와서 진심으로 환영하네.”

진현을 마음으로 환영한 것은 최대원만이 아니었다.

그를 알던 모든 이들이 기뻐했고 특히 강민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날을 잡고 환영의 술을 마시는데, 심장도 안 좋고 이제 연세도 있으신 분이 이렇게 많이 마셔도 되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진현아, 정말 반갑다. 아니, 이제 이사장님이라 해야 하는 건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황문진도 기뻐했다.

그는 놀랍게도 대일병원의 교수가 되어 있었다.

대일그룹의 사위인 진현의 도움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실력과 노력만으로 이룬 성과였다.

‘참… 정말 다시 살고 볼 일이야.’

회귀 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가장 많이 변한 것은 황문진이 아닐까 싶다.

꼴찌에서 의대입학, 대일병원 외과의사, 심지어 이제는 교수.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앞으로 진료 스케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이사장님?”

강민철 교수와 더불어 그를 아꼈던 간이식 파트의 유영수 교수가 진현에게 물었다.

그는 현재 대일병원의 외과과장이었다.

진현이 대일병원에 있을 때만 해도 주니어 교수였지만, 이젠 누구보다도 연륜 깊은 중견 교수가 되어 있었다.

말을 편하게 해달라 했지만, 유영수는 요지부동이었다.

‘진료 스케줄이라.’

진현은 고민했다.
이사장의 주 업무는 병원경영이었다.

진료나 의학 연구는 본인의 뜻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됐다.

전 이사장이었던 이종근은 진료에선 완전히 손을 뗐었다.

진현은 말했다.

“진료도 같이 병행하겠습니다.”

유영수가 살짝 놀라며 물었다.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이사장이나 병원장 정도 되면 진료나 연구는 손을 떼는 것이 일반적이긴 했다.

하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진료를 안 보면 왠지 허전해서… 의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회귀 후 삶의 목표가 건물주에 진료 안보고 노는 의사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진현도 참 많이 변하긴 했다. 하긴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안 변하겠는가?

“시간이 부족하니 많이는 못 보겠지요. 최소한으로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 외과 쪽에서 스케줄을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병원 경영이 더 중요한 업무이니 진현은 진료는 최소한으로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세계적 의사인 그가 진료를 시작하자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등도가 떨어지거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질환의 환자들은 다른 간 파트의 교수들이 대신 진료를 봤지만, 그렇게
해도 상당한 숫자였다.

‘곤란하군. 오는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고.’

진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 그의 업보지.

덕분에 그는 환자 진료보라 이사장의 업무를 수행하랴,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레지던트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른 교수들이 최대한 분담을 해줘, 진료를 전담하는 의사들만큼 환자를 많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장의 일과 겹치니 압사할 것 같은 업무량이었다.

과거 한강의 전경을 보며 와인이나 홀짝이던 이종근과는 180 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야, 오늘도 늦게 들어와?

“응, 미안.”

-경태가 아빠 보고 싶어 하는데. 내일은 우리 아들 생일이니 꼭 빨리 들어와.

혜미의 말에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태는 혜미와 자신 사이에 금쪽같은 아들이었다.

최근 너무 바빠 집에 돌아가면 자정이 넘을 때가 일쑤라 아들과 대화를 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효도하러 돌아왔는데 일에 치여 죽겠군. 조만간 다 같이 모여 식사라도 해야겠어.’

그런데 그렇게 지내던 중이었다.

외과 병동에서 회진을 도는데, 한 간호사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 이사장님. 잠시 뭐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아, 네.”

일개 간호사가 개인적인 질문으로 이사장에게 말을 붙이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 간호사는 그래도 되었다.

다름 아닌 이연희였기 때문이다.

벌써 근속년수 십오 년이 되는 그녀는 현재 외과 병동의 수간호사였다.

“제가 아는 사람이 간암이 걸려서… 상의를 드려도 될까 해서요.”

“간암 말입니까?”

진현은 살짝 놀란 마음이 들었다.

‘누구지? 이맘때쯤 그녀 주위에 간암에 걸린 사람이 있던가?’

이전 삶에서 그녀 주위에서 간암을 앓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간이식과 간암에 관하여 국내 최고,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가였다.

당연히 상의해줄 수 있었다.

“5㎝의 간암인데 간정맥 침윤이나 원격 전이는 없는데 위치가 중앙이고 대동맥에 가까워서 수술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고주파 치료는 크기가 커서 안 되고… … .”

오랫동안 외과 병동에서 일해 그녀의 식견도 보통이 아니었다.

웬만한 의대생들보단 훨씬 나았다.


“수술이 불가능하면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암이 전신에 퍼져 사망할 텐데… 혹시나 수술이 가능할까요?”

근본적인 치료인 수술을 못하는 암의 말로는 다 똑같았다.

항암 치료를 하든 방사선 치료를 하든 시기를 늦추는 것일 뿐 원격 전이가 진행해 사망하게 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진현은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쉽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환자분의 CT 를 가지고 계십니까?”

“네, 가지고 있어요.”

“한번 제가 암의 상태를 보겠습니다.”

컴퓨터에 CD 를 넣고 로딩을 하니 곧 어두운 CT 화면이 떠올랐다.

“흠…….”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아 보였다.

“어려운가요?”

“네,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간암이 간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대동맥과도 가깝습니다.”

그 말에 이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이 안 된다고 하면, 이 세상 누구를 찾아가도 마찬가지다.

“아예 안 되는 건가요? 수술을 못하면 어차피 원격 전이나 간 부전이 진행해 사망할 텐데…….”

그녀의 말에 진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전 삶의 아내였던, 그리고 이번 삶에서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그녀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잘해주고


싶었다.

“무리하면… 가능은 합니다.”

그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네, 하지만 위험부담은 큽니다. 수술 후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수술을 안 받으면 몇 개월 뒤 암이 진행해 사망할 테니까요.”

옳은 말이다.

답은 없는 문제이지만, 이런 경우 환자와 보호자만 각오가 되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게 답일 수도 있다.


어려운 수술일지라도 성공하면 완치될 수도 있으니까.

연희가 주저하다 말했다.

“저… 이사장님, 혹시 직접 집도해 줄 수 있으신가요?”

현재 국내에서 간 파트 수술 최고의 대가는 다름 아닌 김진현이었다.

다만 워낙 바쁘다 보니 이런 부탁을 일일이 들어주기가 어려웠지만 진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환자를 뵌 후, 수술 일정을 잡죠. 제 외래로 환자분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고 진현은 등을 돌려 병동을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연희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 환자는 외래에 올 수가 없는 상태인데, 수술할 때 바로 입원을 하면 안 될까요?”

“그래도 수술 전에 환자 상태를 보아야…….”

“그렇긴 한데… 사정이 안 돼서…….”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환자분이 누구기에 그러십니까? 가족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친구?”

“그것도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

그리고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상민 씨예요.”

“……!”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상민이라고?

연희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정신병원에 면회를 갔는데 담당의사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상민 씨 친


보호자도 없고, 면회 오는 사람도 저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거든요. 그래서 유일하게 가끔이라도 면회를 오는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두면 곧 간암 진행으로 사망할 텐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워낙 고난도 수술이라 다른


교수님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그래서 말씀드린 거예요.”
“…….”

“정말 죄송해요, 이사장님. 미리 누군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그녀는 연신 사과를 했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특별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닌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가 떠나려는데, 그녀가 조심이 물었다.

“상민 씨 수술은 역시… 어렵겠지요?”

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의가 늦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

장장 4 시간에 걸친 지긋지긋한 회의가 끝난 후, 여러 업무를 처리하고 진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병원인근 삼성동에 위치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로 내부가 궁궐 같았다.

벌써 저녁 11 시가 훌쩍 넘어, 넓은 집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진현은 혜미와 아들, 경태가 깨지 않도록 조심이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떨어지는 물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진현은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들어간 곳은 혜미가 자고 있는 안방이 아닌, 거실 옆 편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작은 침대 위에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 경태였다.

“우웅…….”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자신보단 혜미를 더 닮은 얼굴. 그래서인지 진현의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잘생겨 보였다.

“…….”

진현은 그렇게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그저 고요히.

(다음 편에서 계속)

# 149
149. 종장 (2)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익.

작은 방의 문이 열리며 혜미가 들어왔다.

“자기야? 안 들어오고 뭐해?”

막 잠에서 깼는지 그녀는 눈을 부셨다.

그녀는 세월이 비켜 흘렀는지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냥 경태 보고 있었어. 잘 생겼지?”

“당연히 잘 생겼지. 누구 닮았는데.”

“초등학교에는 잘 적응해?”

“응, 한국 학교는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잘 지내더라고. 이제 곧 학부모 참가 운동회도 한다는데 자기는 못


오지?”

“한번 시간 내볼게.”

혜미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바쁜 것 알아.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리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들은 소중한 아들을 바라봤다.

“자기야?”

“응.

“혹시 무슨 일 있어?”

“……!”

혜미는 걱정스레 물었다.

“미국에서도 고민 있을 때마다 말없이 경태 바라보곤 했었잖아.”

“괜찮아. 별일 없어.”

“정말?”

진현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응, 일이 많아 피곤한 것 말고는 다 잘 풀리고 괜찮아.”

“그래?”

“응, 정말로. 걱정하지 마.”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들은 안방으로 돌아가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혜미야.”

“응?”

“나 이번 주 주말에 잠깐 양평에 다녀와도 될까?”

“양평엔 왜?”

“일이 좀 있어서.”

“그래요. 조심히 다녀오고.”

그리고 잠에 들기 전, 진현은 말했다.

“사랑해.”

혜미는 배시시 웃으며 진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 이야기 오랜만에 듣네. 잘 자요.”

***

그리고 주말.

진현은 양평으로 차를 몰았다. 블랙 색상의 BMW 가 바람을 갈랐다.

‘결국 포르쉐는 못 타봤군.’

회귀 후 삶의 목표 중 하나가 포르쉐였다.

나머지는 피부과 의사, 강남빌딩. 생각해 보니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일보고 돌아가서 포르쉐랑 강남빌딩이나 살까?’

진현은 실없이 생각했다.

돈이 없어서 못 산 것은 아니다.

그가 미국에서 제약회사들과 연계해서 벌어들인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단 단어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세월이 그를 바꾼 것일까?

바라던 모든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 그는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이른 주말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한 시간여를 달린 후에야 진현은 양평, 그중에서도 북쪽에 치우친 한적한 외곽에 차를 멈추어 섰다.

산 밑 휑한 들판에 흉물스러운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는데, 반쯤 헤진 간판에 이런 글씨가 써 있었다.

-효원 정신병원.

중증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아니, 말이 좋아 치료지 사실은 감금에 가까웠다.

더 이상 회복기미가 없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정신병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끼익.

문을 여니 낡은 교도소를 연상시키는 돌벽이 보였고, 늙은 접수원이 그를 맞았다.

“무슨 일이세요?”

“면회를 왔습니다. 며칠 전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 그 대일병원의! 정말로 오셨군요.”

접수원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나 진현을 안내했다.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이사장이 이런 곳에 방문해 놀란 눈치가 역력했다.

“4 층이에요. 엘리베이터에 문제가 있어 걸어서 올라가야 해요.”

“네, 상관없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엘리베이터만이 아닌 듯했다. 병원 전체가 낡고, 고장 나 보였다.

‘입원 환자가 있긴 한 건가? 아무도 안 보이는군. 인기척도 거의 없고.’

먼지 쌓인 계단을 오르며 진현은 물었다.

“이곳에 입원해 있는 동안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까?”

“누구요?”

“지금 면회 가는…….”

“전혀요. 음성 증상이 심한 정신분열병 환자들 대부분 조용하잖아요. 그냥 조용해요. 아주.”

정신분열병의 증상은 크게 두 종류로 나온다.


환각, 환청 같은 양성 증상.

감각의 둔화, 무의욕증, 와해된 언어 등의 음성 증상.

곧 4 층에 도착하니 커다란 철문이 나타났다.

노인은 달그락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고, 중증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동으로 들어갔다.

병동을 관리하는 간호사가 힐끗 그들을 바라봤다.

혹시나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것인지 경호원도 있긴 했다.

“무슨 일이에요?”

“면회 오셨어.”

“누구요?”

“19 호실.”

“여기 열쇠요.”

노인은 열쇠를 건네받고 구석에 있는 방으로 진현을 이끌었다.

“이곳입니다. 면회 끝나면 밖의 간호사에게 말씀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끼익.

노인은 문을 열어주고 사라졌다.

하지만 진현은 가만히 병실 안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난 이곳에 왜 온 걸까?’

두근.

이유 없이 심장이 뛰었다

지난 삶 동안 가장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 이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들이야. 난 그저 의사로서 환자를 보러 온 거고.’

마음을 굳히고 안으러 들어갔다.

그리고… 진현은 만났다.


먼 옛날 친구였던, 하지만 끔찍한 악연으로 변한 이를.

기억의 편린 속 자리하고 있던 이상민이 진현의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

이상민은 면회객이 왔음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의 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흐릿하게 바라볼 뿐, 초점이 없었으니까.

“이상민.”

이상민은 다 낡아 곰팡이가 설어 있는 침대에 목석처럼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서적 둔마, 무감동, 무언증, 무욕증… 음성증상을 앓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상민.”

“…….”

갑자기 맥이 딱 풀렸다.

그렇게나 추악한 죄악들을 저질러놓고 이런 모습이라니.

“도대체 뭐야.”

“…….”

“도대체 뭐냐고…….”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세월 누굴 증오했던 것인지.

“난 널 진료하러 왔다. 네 몸 속에 있는 간암은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손을 쓸 수가 없어.”

“…….”

당연히 답은 없다.

그래도 착각일까?

얼핏 눈동자가 진현 쪽으로 향한 것 같기도 하다.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사실 지금도 늦은 감이 있고 위험하다. 그래도 지금 수술하면 완치의 가능성이 있으니 의사로서 난 네가 수술을
받았으면 좋겠어. 간에 생긴 암을 그냥 놔두면 넌 얼마 버티지 못한다.”

이건 개인적 감정이 배제된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이야기.

솔직한 심정은 싫다, 였다.


하지만 이 세상 누구라도 치료받을 권리는 있으니까. 그리고 의사는 환자를 살릴 의무가 있고.

그게 한 평생을 살면서 가장 증오했던 인물이라도.

진현은 ‘의사’로서 ‘환자’에게 말했다.

“네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수술을 진행하겠다. 싫다면 지금 말해줘.”

아무리 음성증상이 심해도 간단한 의사표현은 할 수 있다.

진현의 솔직한 심정으로… 이상민이 거절해 주길 바랐다.

그도 인간인지라, 이상민을 치료해 주기 싫었다.

왜 안 그러겠는가?

자신의 지난 삶 동안 가장 추악하게 남은 기억인데.

하지만 이상민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게 수술이 결정됐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상태지만 입원 중 경찰만 동행하면 수술 진행에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

단, 환자 본인이 의사표현을 할 수 없으므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현재 이상민의 가장


가까운 친인척, 보호자는 다름아닌 진현이었다.

부인인 혜미가 그의 배다른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상민이 내 처남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수술장에 들어온 진현은 장갑을 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수술에만 집중하자.’

원체 고난도 수술이어서 아무리 그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놈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다니.’

거기까지 생각하고, 진현은 잡념을 지웠다.

됐다.

지금 이 수술장에서 자신은 의사이고, 이상민은 환자일 뿐이다.

그 외에 것은 밖에서 생각하면 된다.


“하모닉 스칼펠(Harmonic scalpel).”

티딕. 티딕.

마치 현을 타는 듯한 초음파 진동이 간을 갈랐다.

울컥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고, 긴장된 공기가 수술장을 갈랐다.

“이사장님 혈압 떨어집니다!”

“거기 노르에피네프린 걸어! 산혈증 진행하니 CRRT(Continuous renal replacement therapy:지속적


신대체요법) 준비해!”

예상했던 대로 수술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고비가 찾아왔고, 혈압과 맥박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보비(Bovie:전기소작기).”

하지만 진현은 묵묵히, 흔들림 없이 수술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툭.

종괴를 포함한 간의 절반이 툭 떨어져 나갔다.

수술을 성공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사장님.”

퍼스트 어시스트로 들어온 전문의가 감탄의 얼굴로 말했다.

이런 고난도 수술을 성공시키다니. 역시 김진현 이사장다웠다.

하지만 진현은 속 편히 기뻐할 기분이 아니었다.

“마무리해주게.”

“네!”

가운을 벗고 진현은 수술장을 벗어났다.

원래 그는 수술이 끝나면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고만 있는 보호자들에게 수술 경과를 직접 설명해 준다.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상민은 아무런 보호자도 없었다.

“바보 같군. 뭐 하는 건지…….”

진현은 고개를 젓고는 업무를 보기 위해 이사장실로 올라갔다.


***

이상민은 외과병동 1 인실에 입원하여 이후의 치료를 받았다.

무기징역 복역 중인 죄수로 경찰도 같은 방에 상주했다.

어려운 수술이었음에도 이상민은 순조로운 회복을 보였다.

남은 간의 부피(Volume)가 많지 않았지만, 간 부전으로 진행하지도 않았다.

‘며칠 뒤면 퇴원해도 되겠군.’

회진 시 수술부위상처를 확인하며 진현은 생각했다.

다른 환자의 회진과 다르게 이상민의 진료는 묘했다.

서로 한마디의 대화도 없었다. 상처를 보고, 상태를 검진하긴 하지만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음성 증상이 심한 정신분열병 환자와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할 리 없으니까.

뭐, 대화를 안 해도 신체 검진과 피 검사만으로 상태를 확인하는데 문제는 없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대화를 안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퇴원 전, 마지막 날.

진현은 입을 열었다.

“다 좋아졌어. 이제 내일이면 퇴원해도 돼. 재발하지 않는 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답이 있을 거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다.

그저 의사로서 환자에게 한 기계적 설명.

진현은 마지막 회진을 끝내고 등을 돌렸다.

이제 이 방을 벗어나면 남은 평생 동안 이상민을 만날 일은 없겠지.

그런데 방을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다.”

재회 후 처음 듣는 목소리.

“……!”

진현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상민은 여전히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을 움직인 흔적은 없었다.

‘뭐지? 잘못들은 것인가?’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 말, 네가 한 것이냐고 물어보려 하다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한마디를 했다.

“잘 지내라.”

***

이후 이상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아… 3 년 뒤쯤, 그가 입원 중이던 효원 정신병원에 화재가 났다는 뉴스는 본적이 있다.

엉망으로 관리되더니 결국 사단이 난 모양이다.

다행히 입원 환자가 많지 않고 조치가 잘 이루어져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단 4 층에 입원 중이던 환자 중 몇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생겼다는데…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50

150. 종장(3)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세월이 참 빨랐다.

진현은 마흔 중반이 되었고, 소중한 아들 경태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바쁘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찾는 사람이 많고, 할 일이 너무 많아 제대로 쉴 틈도 없었다.

그래도 성공한 삶보다 중요한 것이 주변의 가족이란 것을 알기에 진현은 일부러 노력하여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밥 됐어. 식사하자.”

혜미가 김치찌개를 내왔다.

“음…….”
진현은 수저를 입에 가져간 후, 신음을 흘렸다.

혜미가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냥…….”

“또 맛없어? 반찬 투정하지 말라니까.”

“아니야. 맛있어.”

진현은 손사래를 쳤다.

혜미와 결혼해서 모든 것이 행복하지만 한 가지 불행한 것이 있다.

바로 혜미의 요리솜씨.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질 않는다.

‘이렇게 못하는 것도 재능 아닌가? 어떻게 노력하는데 안 나아질 수가 있지?’

뭐, 소용없는 한탄일 뿐이다.

“경태는?”

“안 먹는대.”

“왜?”

“몰라. 속이 안 좋대.”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배고프면 나와서 먹겠지. 내버려 둬.”

진현은 설익은 밥과 밍밍한 찌개를 먹으며 생각했다.

혹시 엄마 밥이 맛없어서 안 먹는 것은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그도 먹기 싫었으니까.

혜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다음 주에 의료 봉사활동 가지?”

“응, 왜?”

그는 1 년에 한 번 정도 의료 소외지역에 소규모 봉사활동을 나갔다.


병원 홍보용은 아니고, 그냥 우연히 시작한 것인데 보람이 커서 남몰래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태 데리고 가지 않을래?”

“경태를?”

“응, 마침 방학이고. 걔 장래희망이 의사잖아. 마침 봉사활동 점수도 필요하니 같이 봉사활동도 한번 나가보면


좋을 것 같은데. 섬으로 가니 끝나고 물놀이를 하다 와도 좋을 거고.”

아들과 함께하는 봉사활동이라.

당연히 찬성이다.

진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 봉사활동 장소는 궁평항에서 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나타나는 서해안의 외딴 섬이었다.

원래 대일병원은 홍보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대규모의 봉사단을 여러 개나 운영했다.

하지만 진현이 가는 봉사는 그런 대규모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맞는 몇몇의 의료진과 남몰래 의술을 펼치고 오는 것이다.

병원 홍보팀이 여러 차례 진현의 봉사활동을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홍보를 하면 분명 큰 효과야 있겠지만.’

무려 국내 1 위 병원의 이사장, 그것도 세계 최고의 대가로 인정받는 진현의 봉사활동이니 적당히 홍보해도
엄청난 광고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그냥 개인적인 일이니.’

정확히 말하면 이건 지친 일상을 달래기 위한 진현 개인의 휴가였다.

봉사를 하면 상대보다 봉사자가 더 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는 이야기처럼 진현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 돌아오곤
했다.

대일병원을 위해서는 충분히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이런 마음의 휴가까지 홍보로 연결시키고 싶지 않았다.

“날씨 좋네.”

황문진이 배 갑판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진현과 늘 봉사활동을 같이 나오는 마음에 맞는 의료진 중 한 명이 그였다.

주변에 진현 외에는 아무도 없어 그는 편하게 말을 놓았다.

“네 아들 경태도 같이 가는 거야?”
“응, 의사가 되고 싶다 더라고.”

황문진은 갑판 앞쪽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진현의 잘생긴 아들을 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린데 기특하네. 내 아들은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데.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누굴 닮긴. 널 닮았지.”

진현은 웃었다.

중학교… 아니, 고등학교 때까지 황문진은 게임광이었다. 성적은 꼴찌였고.

“뭐야, 너도 중학교 때까지는 나랑 별반 다를 것 없었잖아. 성적은 내가 좀 더 좋았다? 네가 꼴찌. 내가


꼴찌에서 두 번째.”

그 말에 진현은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둘 다 꼴찌였지.”

황문진도 쿡쿡 웃었다.

다 추억으로 남은 옛날 일이다.

“봉사활동 끝나고 술이나 먹자. 좋은 술 가져왔어.”

“뭐?”

“발렌타인 30 년.”

진현은 미소 지었다.

“좋지. 한잔하자. 경태 자면.”

“왜? 너도 고 1 때부터 술 마셨잖아. 경태도 이제 한잔해도 되지 않나?”

“너라면 네 아들한테 술 주겠냐?”

바닷바람이 싱그러웠다.

이번 봉사활동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

봉사활동은 2 박 3 일로 진행됐다.

첫날에는 섬의 가장 큰 마을 회관을 빌려 진료를 했고, 둘째 날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직접 방문해 진료를
했다.

“요즘 맨날 배가 너무 아파서… 속이 쓰리고… 신물이 넘어오고…….”

평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섬사람들은 국내 최고 대일병원의 봉사단이 왔다는 이야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위식도역류증이나 궤양의 가능성이 있으니 위산억제제를 드리겠습니다. 약 복용 후에도 증상이 계속 안 좋으면
내시경 검사가 필요하니, 도시에 나가 검사를 받아보십시오.”

의료봉사를 온다고 거창한 의술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비와 약품의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들 경태는 옆에 앉아 진현의 진료를 참관했다.

“힘들진 않니?”

“괜찮아요.”

참 기특하게 자라준 아들이다.

아빠라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 잘생기고, 남들과 달리 말썽도 안 피우고, 생각도 깊으며 성적도 좋다.

중학교 당시 맨날 꼴찌만 하던 자신보다 훨씬 나은 아들이다.

“힘들면 들어가서 쉬렴.”

“괜찮아요.”

꿈이 아버지를 닮은 의사라는 경태는 진현의 진료를 하나, 하나 눈에 담았고, 진현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진료라니. 이보다 더 뿌듯한 진료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마을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쿨쿨…….”

피곤했는지 아들 경태는 코를 골며 바로 잠에 떨어졌고, 진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누워서 수면을 취하려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 그는 다시 일어났다.

‘잠이 안 오는군. 잠깐만 나갔다 올까?’

그는 아들이 걷어찬 이불을 다시 올려준 후,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지만 섬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싸늘했다.

그래도 상쾌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걷다 들어가자.”

손전등을 들고 바닷가를 따라 밤 산책을 했다.

찰싹찰싹.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고요한 파도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밤바다의 분위기에 취해 계속해서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나 걸은 뒤일까?

“응?”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 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곳에 허름한 가옥이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인가?”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손전등을 비췄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

진현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뒤편에서 노숙자 같은 인상의 삐쩍 마른 남자가 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해 정확한 생김새는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특별히 실례를 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남자는 답이 없었다.

‘기분이 상했나?’

그럴 수도 있다.

정체불명의 외지인이 자신의 집을 기웃거렸으니까.

다시 사과를 하려는데… 남자는 진현을 스쳐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으로 들어갔다.

“뭐야…….”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럴 리가.

그가 이 섬에 사는 사람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젓고 숙소로 돌아왔다.

***

둘째 날 경태와 같이 왕진을 다녔다.

주로 보호자 없이 홀로 지내는 독거노인들을 진료했고, 제한적이나마 해줄 수 있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봉사활동은 어땠니?”

두 번째 날이 저물어갈 때 진현이 물었다.

“좋았어요.”

“그래? 왜?”

“그냥…….”

경태는 자신의 느낀 점을 말하기 쑥스러운지 답을 피했고 진현은 미소 지었다.

“왜 의사가 되고 싶어? 의사는 힘든데.”

진현은 아들에게 의사의 길을 단 한 번도 권유한 적이 없다.

생명을 다루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길의 고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태는 누가 권유하지 않았음에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꿈을 정했다.

“그냥… 아빠 같은 삶을 살고 싶었어요.”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빠 같은?”

“네, 남을 위하는 삶이요.”

진현은 가슴이 살짝 뭉클해졌다.

아들에게 존경 받는 것만큼 아버지를 보람차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고생스러웠지만, 헛된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자, 조금만 더 돌면 끝이다.”

“네.”

그리고 마지막 환자에게 방문을 했다.

거동이 불편한 중증 욕창 환자였는데, 상처를 본 진현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르신.”
노인은 이빨 없는 입으로 답했다.

“응?”

“이 상처 혹시 치료받은 적 있으세요?”

굉장히 심한 욕창이었는데, 괴사된 부분이 깔끔히 정리돼있었다.

“아… 섬에 의사 양반이 며칠 전 치료해 줬어.”

“의사요?”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의사? 이 섬에 의사가 있었던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저기… 저 동쪽 바닷가 쪽에 의사가 한 명 있어.”

“동쪽 바닷가요?”

“응. 몇 년 전에 섬으로 들어온 외지인인데 사실 진짜 의사인지는 몰러. 행색이 추레한데 그래도 가끔 섬에 급한


환자가 있으면 그 양반한테 치료받아.”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동쪽 바닷가, 추레한 행색. 어젯밤 만났던 괴인이 떠올랐다.

‘의사였단 말인가? 의사가 왜 그런 몰골로?’

의문이 들었으나, 크게 관심 가질 일은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진료를 끝내고 진현은 경태와 숙소로 걸어갔다.

이틀간의 봉사활동이 의미가 있었는지 경태는 무언가를 느낀 표정이었다.

“아빠.”

“응?”

“며칠만 더 섬에 있으면 안 돼요?”

“왜?”

“좀 더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고…….”

오늘 봤던 몇몇 환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며칠 더 있으면서 물놀이도 하고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아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휴가를 추가로 며칠 내고 온 상태였다.

진현은 다른 의료진들을 먼저 보냈다.

황문진이 떠나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더 있고 싶은데. 기껏 준비해온 발렌타인도 못 마시고.”

마지막 날 술을 마시려 했는데, 황문진 본인이 갑자기 급성 설사병에 걸려 무산됐다.

“다음에 꼭 같이 마시자.”

“그래, 그래.”

“꼭!”

그런데 웃긴 게 그렇게 아쉬워했으면서 깜빡 잊은 것인지 술은 안 챙기고 떠났다.

“뭐야, 이거 왜 놔두고 간 거야? 마시고 싶게.”

진현은 발렌타인 30 년을 보며 입을 다셨다.

‘발렌타인 30 년.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종종 마셨던 술이지. 시험이 끝날 때마다.’

진현은 피식 웃고는 술을 숙소 구석에 보관했다.

‘혼자 마시면 삐질 테니. 나중에 갖다 주자.’

그리고 그는 아들과 오붓한 봉사활동 시간을 며칠 더 가졌다. 해수욕도 즐기고.

의사로서, 아버지로서 보람찬 시간들이었다.

***

그런데 그렇게 봉사활동을 하는데 약간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첫날밤에 만났던 괴인과 계속해서 마주쳤던 것이다.

섬이 작아서 그런 것 같은데… 괴이한 행색 때문인지 만날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제 떠나니까.’

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내일이면 봉사활동도 끝이다.

이 섬만 떠나면 저 괴인과도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쾌하지?’


진현은 의문이 들었다.

사실 행색이 추레할 뿐,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었다.

면허증을 가진 진짜 의사인지는 모르지만, 섬 주민들의 건강도 돌본다고도 하고.

그냥 고양이가 개를 만난 듯 이유 없이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151

151. 종장 (4)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 떠나니.’

하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일이 꼬였다.

밤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내일 떠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내일 봐야 알 것 같은데요. 잦아들면 출항할 수 있겠지만, 더 심해지면 며칠은 배가 못 뜰 듯합니다.”

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휴가도 끝이어서 병원에 일정이 밀려 있었다. 더 섬에 있을 수가 없는 처지인데 이렇게 발이 묶이다니.

‘비바람이 잦아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야속하게도 비바람은 더욱 거세만 져 당분간 출항은 꿈도 못 꿀 상황이 됐다.

‘곤란하구나.’

진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날씨를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지. 휴가가 늘어났다 생각하고 기다리자.’

비바람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진현은 마음을 달래며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평생을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이렇게나마 쉬는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황을 다시 한번 꼬아버린 것이다.

“선생님!”

늦은 밤, 마을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 벌컥 들이닥쳤다.


진현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큰일 났어요! 이장님이 다치셨어요!”

“……!”

“운전을 하다 차가 도로에서 미끄러져서! 빨리 와주세요!”

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작은 섬이라도 당연히 자동차는 있다.

하지만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구간들이 있는데 비바람에 미끄러져 사단이 난 듯했다.

‘하필 이럴 때 교통사고를!’

진현은 달려가며 크게 다친 것이 아니길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기원은 늘 그렇듯 또다시 어긋났다.

“이런…….”

진현은 신음을 흘렸다.

심각했다.

급히 진료를 해보니 다른 부위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우하복부에 큼직한 상처가 벌어져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사고 당시 무언가에 찍힌 듯했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마을 사람들이 진현에게 매달렸다.

진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수술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출혈이 심하긴 했어도, 위치상 간이나 췌장, 비장, 대동맥 등 중요장기가 지나는 부위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대장과 소장만 다쳤을 것이다.

배를 살짝 열고, 찢어진 동맥을 지혈하고, 손상된 장을 자른 후 이어 붙이면 된다.

문제는 이곳이 의료시설이 없는 섬이란 것이다.

‘도시로 나가야 해. 그래야 수술을 할 수가 있어.’


진현은 급히 말했다.

“구조대에 요청해 주십시오. 도시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연락을 했는데 비바람이 너무 심해서 당장 올 수가 없다고.”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말 비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헬기가 떴다간 줄초상만 날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출혈이 심해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은데.’

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들 경태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환자를 바라봤다.

진현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출혈만 지혈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니야. 출혈 동맥과 정맥만 찾아서 지혈하면 되니까. 그 뒤는
병원으로 옮겨서 처치하면 돼.’

다행히 봉사활동을 위해 챙긴 도구들이 잔뜩 있었다.

무리해서 진행하면 지혈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손이 없어. 나 혼자서 수술을 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하지?’

그가 아무리 세계적 대가라도 손이 두 개인 이상 수술을 혼자 진행할 수는 없다.

최소 한 명은 더 있어야 지혈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빨리 손을 써야 하는데.’

벌써 환자는 의식이 없었다.

머리 쪽 손상은 없으니 과량출혈로 혈액 손실이 심해 쇼크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이 애원했으나 진현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능력은 없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술을 도와줄 사람이 한 명만 있었으면… 그러면 살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문이 끼익 열리며 한 인물이 나타났던 것이다.

“……!”

눈앞을 가리는 앞머리, 덥수룩한 수염, 깡마른 몸매, 그 괴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부른 듯했는데,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정체는 모르지만, 저 사람이 날 도와준다면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어!’

그는 저 괴인이 싫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꺼질락 말락 하는 상황이니 개인의 불쾌한 마음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진현은 다급히 물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장출혈입니다! 병원으로 옮길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곳에서 응급으로 지혈을 시도해야 하는데


어시스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하지만 괴인은 그저 말없이 진현과 환자를 바라볼 뿐 답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이 바짝바짝 드는 순간, 괴인이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

어시스트를 서기로 한 것이다!

“치료를 하겠습니다. 다들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진현은 급히 수술 필드를 만들었다.

봉사단이 남기고 간 물품 중 방포로 무균적 공간을 만들었고, 수면 유도제를 통해 간이 마취를 하였다.

“피부를 절제 후 출혈 혈관을 찾아 지혈하겠습니다.”

“…….”

괴인은 답이 없었다.

진현은 순간 걱정이 들었다.

‘정체도 모르는 사람과 이런 수술을 해도 될까?’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술을 시도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환자가 죽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찌익.

매스로 피부를 절개 후 복강 안으로 들어갔다.

‘출혈이 심해.’

크게 찢어져 출혈 혈관이 하나가 아닌 듯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데, 지혈을 어떻게 하지?’

그런데 진현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스윽.

철제 수술도구를 든 괴인의 손이 움직이더니 턱하니 시야가 확보되었다.

“……!”

진현은 놀라 괴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같은 외과의사의 손놀림 같은 정확한 어시스트였다.

“감사합니다.”

“…….”

여전히 답은 없었다.

진현은 수술용 실을 가지고 하나하나 지혈을 해나갔다.

쉽지는 않았다.

지혈용 전기 칼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시야확보용 도구, 메스, 수술용 실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괴인의 정확한 어시스트가 진현의 집도를 도와주었다.

진현은 그 뛰어난 솜씨에 놀라 연신 괴인을 바라봤다.

수술 전체의 흐름을 읽지 않으면 이런 어시스트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수술의 흐름을 읽는 것은 비슷한 수술을 해본 외과의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혹시 외과의사십니까?”

“…….”

대답을 못하는 것인지 하기 싫은 것인지 계속 답이 없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 정체불명의 외과의사.

‘혹시……?’
순간 진현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그 이름.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수술에나 집중하자.’

그리고 머지않아 중요 혈관들의 지혈이 끝나고 간이 수술이 마무리됐다.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모두 괴인의 조력덕분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진현이 감사를 표했으나 괴인은 장갑을 벗고 말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

그 뒤 비바람이 살짝 잦아들어 헬기를 탄 구조대가 도착해 환자를 내륙으로 이송했다.

급한 조치는 성공적으로 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폭풍 같은 밤을 보낸 후, 진현은 경태와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래도 비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어 다행이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곧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하늘이 맑게 개었다.

“내일 아침에 배가 들어올 겁니다.”

그 말에 진현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서울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경태야, 집에 가고 싶지?”

“네.”

진현과 경태 모두 뜻하지 않게 길어진 외지 생활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섬 생활을 마무리하기 전날 밤, 진현은 숙소에서 잠이 안 와 뒤척거렸다.

피곤하지만 잠이 안 오는 느낌. 이상하게 가슴이 싱숭생숭했다.

진현은 쓴웃음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인… 누구일까?’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한때 친구였던, 그러면서도 가장 추악한 악연이었던… 인물.

왜 자꾸 그가 떠오르는 것일까?

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능성이야 있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그와의 악연도 벌써 15 년이 넘게 지났다. 그렇게나 시간이 빨랐다.

‘됐어. 술이나 먹자.’

그는 황문진이 남기고 간 발렌타인을 들고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잠도 안 오는데 밤바다나 보며 술이나 한 모금


마셔야겠다.

‘문진이한테 새로 한 병 사줘야지.’

그는 동쪽으로 덧없이 걸어 호젓한 바닷가에 도착했다.

찰싹찰싹.

그리고 차분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가에 앉으려는데, 한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괴인이었다.

그가 해변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진현은 주저하다 괴인 옆에 앉았다. 괴인의 눈이 힐끗 그를 향했다.

마음속에 다시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 괴인이 정말 그일까?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혹시…….”

하지만 진현은 질문을 삼키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물어보면?

정말 그가 맞으면 어떻게 할 건데?


대신 진현은 발렌타인 병을 따고 숙소에서 같이 챙겨온 술잔에 술을 따라 한 잔 들이켰다.

위스키의 싸한 느낌이 가슴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왜일까?

진현은 괴인에게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날은 감사했습니다. 한잔 같이하겠습니까?”

말을 뱉고 진현은 후회했다. 이 괴인과 왜 술을 같이 마신단 말인가?

‘어차피 대답도 없을 건데.’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괴인이 손을 내민 것이다.

“……!”

진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술잔에 위스키를 졸졸 따라 내밀었다.

괴인은 진현이 내민 잔을 한번에 들이켰다.

“술을 잘 마십니까?”

“…그냥 조금.”

잔뜩 갈라진 음성.

처음 듣는 괴인의 목소리였다.

괴인은 황금빛 위스키를 보며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술이군요.”

“그렇습니까?”

좋아하는 술…….

이 술을 좋아하던 누군가가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고등학생 어린 시절, 그와 이 술을 시험이 끝날 때마다 마셨었다.

진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닷가 위의 밤하늘은 서울과 다르게 온갖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더 마시겠습니까?”

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현과 괴인은 밤하늘의 별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혹시…….”

진현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하려 했다.

-당신은 혹시…….

그러나 다시 질문을 삼켰다.

구태여 확인해서 뭐할까?

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다고.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텐데.

그저 진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밤하늘 때문일까?

술 맛이 나쁘지 않았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밤이란 생각이 들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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