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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관하여

송슬인
*작품 개요*
늘 그래왔듯 딸을 보살피려는 엄마와 엄마의 보살핌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필요로 하는 딸의
내적인 모순
*장면 설명*
과로로 쓰러질뻔한 딸의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와 딸의 외적 갈등

“아, 안녕하세요. 임혜씨랑 같이 일하고 있는 랩실 동료에요. 따님 걱정되셔서 나오셨구나. 임혜씨, 사랑받


는 딸이네?” 좋은 인상의 여자가 딸과 함께 서 있었다. 임혜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표정에서는 아픈 티
를 내지 않으려는 듯 간신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 왜 왔어. 나 혼자서도 갈 수 있다니까.” 임혜가 평소보다 약하고 조금 떨리는 목소로말했다. 얼핏
들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임혜 특유의 미묘한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얘, 그래도 내가 멀리 타지에 사는 것도 아닌데… 서울 사는 엄마가 서울에서 딸이 아프다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혜원이 아픈 딸의 얼굴을 정신없이 살피며 말했다. 혜원의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딸의 동료
라는 여자가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임혜씨 정말 좋겠다. 아직 아프다고 하면 걱정해주는 엄마도 있고.”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잔뜩 실려있었
지만 그녀의 눈빛은 얼마간 ‘웬 호들갑이야’라는 느낌이 실려있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딸의 팔에 두르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참, 임혜씨, 아픈 사람에게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내일이나 - 너무 아프면 모레 나와도 돼 - 모레
에 랩실에 있는 병가 서류 작성해서 다음주까지는 교수님께 내야 해. 우리 교수님이 출결에 좀 까다로우
셔. 우진 선배는 작년에 맹장으로 급하게 응급실 실려가서 수술 받았는데 그 다음 날 메일로 엄청 뭐라고
하셨나봐. 가족 중 누구라도 연락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가족 중에 누가 대학원 실험실 교수님한테 수
술 연락을 할 생각을 했겠냐만은…” 딸의 동료는 곁눈으로 대학원 건물로 들어가는 두어 명의 사람을 쫓
으며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다다음주에 세미나가 진짜 중요하거든. 그래서 다음주에 특히 교수님 심기가 불편할거야. 그러니까 꼭,
출결 체크해줘.” 여자는 다소 민망한 듯 입꼬리가 살짝 내려간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서현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그 세미나 때문에 이 꼴이 났는데, 어떤 이유로든 그게 잘못
되면 안되죠. 병원 갔다가 링겔이라도 맞을게요.”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 교수라는 작자의 비위를 맞추는
게 더 중요해보이는 동료에게 딸은 속 없는 소리를 했다.
“그거 임혜꺼죠? 제가 들게요. 임혜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혜원이 서현 언니라는 손에 들려있던 딸의 소
지품을 손을 들어 가르켰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 아래 자신의 못마땅한 심정을 노련하게 숨겼다.
“아, 네, 맞아요. 여기요. 어머님, 그럼 안녕히계세요. 임혜씨, 잘 가.” 서현 언니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혜원 모녀에게 눈길을 준 뒤 뒤돌아서 대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바쁜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며 딸은 괜히 시간을 끌었다.
“얼른 병원 가자. 다행히 대학 안에 병원이 있네.” 임혜가 재촉했다.
“무슨 이런 걸로 대학 병원까지 가. 그냥 동네 내과 가면 돼.” 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너, 쓰러질 뻔 했다며. 요 며칠 잠도 거의 못 잤잖아. 아까는 링겔 어쩌구 하더니, 갑자기 왜 이래?” 임
혜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딸에 대한 걱정이 어느새 익숙한 짜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거야… 그냥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진짜 쓰러진 것도 아닌데, 대
학병원 가서 뭐라고 그래. ‘아, 제가 어지러움을 좀 느껴서요.’ 라고 말하면 의사들도 엄청 짜증낼걸? 그리
고 좀 있으면 생리할 때여서 컨디션이 더 떨어져서 그래. 좀 쉬면 괜찮아져.” 딸이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혜원는 잠자코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라면서 잔병치레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딸의 얼굴이 지금은 피
로와 스트레스로 누렇게 떠 있었다. 화장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다크써클이 눈 아래에 짙게 자리 잡고
있었고 며칠 동안 푹 잠을 못 잔 얼굴은 까칠했다. 입은 허옇게 각질이 나 있었고 무엇보다 볼 살이 쪽
빠져서 광대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그럼 새봄 병원이라도 가. 거기 내과 선생님에게 가서 제대로 된 진료라도 받아.” 혜원이 조금 누그러
진 목소리로 말했다. 새봄 병원은 동네에 있는 사설 종합 병원이었다. 딸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기말고사
준비를 한다며 이틀 밤을 새다가 결국 학교 복도에서 쓰러져 실려갔던 곳이었다. 딸은 그 때 진료를 해주
었던 의사가 친절하게 진료를 해주는 것 같다고 꽤 마음에 들어했었다. 심리 장벽이 낮은 병원이라면 딸이
그녀의 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알겠어.” 딸도 다행히 별 다른 투정 없이 쉽게 수긍했다.
혜원과 딸은 별다른 대화 없이 길을 걸어갔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대학교의 캠퍼스를 지나 정문을 통과
하고 온갖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활기찬 대학가를 지나면서도 모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중간에 딸
이 조심스럽게 임혜가 좋아하는 붕어빵을 먹을건지 물어봤지만 그녀는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저를 위한 걱
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짜증을 내는 딸을 혜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혜원은 딸과 반 걸음 정도 거리를 두며 걸었다. 한창 사춘기 시절을 지날 때도 괜찮았던 딸과의 관계가
딸이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하면서 오히려 더욱 멀어져 버렸다. 취업 준비의 일환으로 신청한 대학원 연구
실의 인턴이 되면서 딸은 본격적으로 공고히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청소년기 때
어설프게 만들어진 세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의미 없는 타인의 바람에 기둥이 흔들려 부서지지 않았고, 친
구들의 세상에 동화되어 시시각각 모습과 색깔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인 자신의 영향력은
단 한 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청소년기 때 딸이 필요한 것을 챙겨주며 들락거리고, 영양가 있는 밥을 해주
며 부디 임혜가 자신의 손길을 따스하게 느끼길 바라며 소중히 어루만져 주었던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세계는 그녀의 코 앞에서 완강히 문이 닫혔고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까 딸이 짜증을 냈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문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면서 외부인인 혜원이 문 밖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문 안의 세상을 시끄럽게 한 것.
“엄마, 아기들은 팔꿈치가 없네.” 한창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분노하고 있던 혜원의 뒤에서 딸이 말을
건넸다.
“무슨 소리야? 애기들이 왜 팔꿈치가 없어?” 혜원이 딸을 돌아보며 물었다. 딸은 두어 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저기, 엄마 앞에서 걷고 있는 남자 아기를 봐. 팔꿈치가 주름이 없고 분홍색이야.” 딸은 임혜의 앞에서
자기 엄마와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남자 아이를 가르켰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아이였
다. 갈색 칠부 카고 바지에 파란색 반 팔 티셔츠를 입은 그 남자 아이는 자기 엄마 손을 꼭 잡고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종종 걸음을 치며 자유로운 다른 팔 한 쪽을 이리 저리 휘휘 흔들었다. 엄마를 꼭 잡은 팔
도, 자유롭게 휘휘 흔들리는 팔도 모두 팔꿈치 부근이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끈하고 뽀얬다.
“아기니까 그렇지. 임혜 너도 어렸을 때 피부가 엄청 하얗고 투명했어. 저 남자 애보다 더 부드러운 팔꿈
치를 가졌어.” 혜원이 남자 아이의 팔꿈치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오동통한 팔뚝에 팔꿈치 부분이 아
주 작게 움푹 패여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갈색으로 침착이 되고 자글한 주름이 있는 어른의 팔꿈치와 다
르게 아이의 팔꿈치는 갓 태어난 태아의 피부처럼 붉은색에 가까운 분홍색 살덩이일 뿐이었다.
임혜는 지금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지만 어렸을 때는 분홍빛 속살을 가진 아이였다. 여자지만 구릿빛
피부를 가진 자신을 닮지 않길 바랐는데 결국 임혜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씩씩한 어린이가 되어 그대로 쭉 자라버렸다. 임혜는 종종 그 점이 못내 미안했다.
“쟤는 책상에 앉아서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턱을 괴고 책을 읽을 필요가 없나 보네.” 딸이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쟤가 대학원생이니?” 혜원이 픽 웃으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난 대학원생 아니야. 인턴이라고. 대학원에서 일하는 직원.” 딸이 굳이 임혜
의 말을 정정했다.
“그래, 대학원 인턴생. 얼른 가자.” 혜원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시계를 보니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에
걸릴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딸은 잠시 혜원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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