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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차상] 비행 하고 싶던 우리
강태훈 / 선유고등학교 / 3학년

달을 향해 날아가는 우주선에게도 비행한다는 표현을 쓰는 건 이상하지 않아? 비


행은 비행기가 하는 거잖아. 우주선에게는 조금 더 색다른 표현을 써야지. 현은 내
질문에 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것 같다고 말했어. 형은 가장 잘 웃는 사람이었지. 민
증 사진을 확대해서 영정사진으로 썼던 형의 장례식에서도 그랬어. 형은 늘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으니까. 우는 부모님 앞에서 사진 속 형만 밝은 미소를 짓고 있
었지.
형의 부대가 뉴스에 나왔을 때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처음 봤어. 상상이 가? 그
모습은 한 편의 싸구려 코미디 영화 같았어. 어디서 웃어야 할지 눈에 훤히 보이지
만 하나도 웃기지 않은 것들 말이야.
어려서부터 난 조종사가 되고 싶었지. 탁 트인 하늘에서 새하얀 구름 사이를 지
나다니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볼 수 있었던 구름이라곤 날 괴롭
히던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피우던 담배연기뿐이었어. 그 무서운 구름 속에서 날 꺼
내 준 건 형이었잖아. 녀석들은 패 주고 형 동생을 건들지 말라고 했지. 다음날 경
찰서에서 연락을 받고서도 형은 당당했어. 그 뒤로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고
다시 하늘 속의 새하얀 구름을 꿈꿀 수 있었어.
형에 대한 소식은 점점 무거워져. 뉴스에서 형에 대해 애기하는 사람들의 말은
날 감싼 구름처럼 자꾸 바뀌어. 형의 부대는 형이 사고로 죽었다고 했지만 형이 자
살했다고, 음식이 목에 걸려 죽었다고 말이 바뀌었어. 엄마는 점점 말라가. 의사는
거식증이라고 했어. 엄마는 애써 웃음 오십 킬로 밑으로 몸무게가 내려가는 건 스
무 살 이후로 처음이라고 말했어. 무거운 진실이 마음속을 채워버리면 음식이 들어
갈 틈이 사라지는 걸까. 엄마는 자꾸 먹은 걸 토해.
형의 동기라는 사람이 집에 찾아온 건 며칠 전이었어. 너구리처럼 다크서클이 지
한 그 남자는 울면서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어. 엄마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 해달라고 했어. 남자가 형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엄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어. 남자가 떠난 자리는 엄
마의 토사물이 채웠어. 엄마가 계속 가벼워질까 걱정돼. 너무 가벼워져서 하늘로 날
아가 버리면 내가 조종사가 될 때까지 찾지 못할 거니까.
형에 대해 조사하던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형의 선임이 형에게 강제
로 음식을 먹이고 때리자, 음식이 목에 막혀서 죽었다는 거였지. 그걸 발표하는 사
람은 너무 차분해 보였어. 시 낭독회라도 하는 것처럼. 형의 죽음은 그 차분한 몇
마디의 말로 정리되었어. 누군가 형을 그렇게 때렸다는 사실만큼 이상했어. 형을 그
만큼 미워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형이 누굴 때리는 걸 본 건 딱 한 번이었어. 날 괴롭히던 아이들을 혼냈을 때 말
이야. 형도 선임의 동생을 괴롭혔던 걸까? 하지만 그 선임에겐 동생이 없었어. 참
이상했어.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괴롭힌다는 게. 형의 선임도, 나를 괴롭히던 아이
들도.
형을 둘러싼 그 무거운 진실들이 모두 밝혀지자 엄마가 사라져버렸어. 엄마와 내
가 상담 받는 날이었지. 상담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나왔는데 대기실에 있어야
할 엄마가 없는 거야. 나 다음은 엄마 차례였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 엄마마
저 내게서 사라질까봐.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며 온 건물을 뒤졌지.
내 눈에 마지막으로 옥상이 들어왔어. 나는 뛰면서 계단을 올라갔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괴로웠어. 엄마는 역시 옥상에 있었어. 나는 달려가 엄마를 안았어. 엄마가
차가운 밤바람에 날아가 버릴까봐. 하지만 엄마는 뛰어내리려던 게 아니었어. 엄마
는 달을 보고 있었지. 보름달이었어.
엄마, 하고 나는 입을 열었어.
“달을 향해 날아가는 우주선한테 비행한다는 표현을 쓰는 게 이상하지 않아? 비
행은 비행기나 하는 거잖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어. 갑자기 눈물이 흘렀어. 우주선한테만 쓸 수
있는 그 색다른 단어를 모른다는 게 너무 분했어. 엄마는 나를 안았어. 나는 비행이
라는 단어 이상의 무언가를 앞으로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가
벼운 엄마는 여전히 따뜻했어.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차하] 비행소녀의 키스
박승주 / 압구정고등학교 / 2학년

짙은 검은색의 시멘트 위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겹쳐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


층 짙어져 작은 밤하늘이 되었다. 하얀 입김이 구름이 되고 힘을 주어 뜬 두 쌍의
눈동자가 별이 되었다. 소녀는 하늘을 날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되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소년은 제 앞에 부서진 홍시를 내려다보며 그 계절을 실감했
다. 노을과 같은 다홍색을 머금은 홍시가 흩뿌려진 보도블럭 위에 쭈그리고 앉은
소년은 책가방을 고쳐 매고 새끼손가락을 펼쳤다. 얼음장 같은 추운 기운이 그의
손가락을 감싸자 그가 움찔 몸을 편 채 다홍빛을 머금게 된 둥금 손끝을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단내가 났다. 소년은 제 손가락이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듯 핥으며
길을 걸었다. 매섭게 불어오는 초겨울의 바람 덕에 그의 손가락에서 풍겨오던 단내
는 금세 사라졌고 소년의 입속에는 곧 막대사탕 하나가 올려졌다. 소년의 몸에선
단 한시도 단내가 나지 않는 순간이 존재하지 못했다.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소녀
는 그것을 좋아했다. 사탕을 문 소년의 입가에서 단물이 주륵 흘렀다. 저 먼발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소녀를 보았다. 그는 되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맞
은편 벤치에 앉아버렸다. 소녀의 집요한 시간이 그를 끊임없이 따라갔다. 소녀와 마
주 앉은 소년은 그것을 좋아했다. 그녀의 시야에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을
욕망하였다. 소녀는 소년의 바람대로 하였다. 소년이 사진 아파트의 한가운데를 가
로지르는 공원에 언젠가부터 앉아있기 시작한 소녀의 온 곳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공원에서 5분 거리의 시장통 속 트럭 뒷칸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먹을래? 소년은 그녀가 막대사탕을 좋아한다는 것과 가끔 걸을 때 절
뚝거린다는 것, 그리고 뽀얀 얼굴이 겨울에서야 빛난다는 것만을 알았다. 서로의 이
름은 물은 적이 없다. 소녀는 입가의 미소를 띄우고 사탕을 물었다. 잔인한 추위에
발갛게 색이 오른 소녀의 코끝에 짧게 키스했다. 안 춥니? 소년은 그녀의 얇은 옷
차림이 못내 신경 쓰였다. 가늘게 떠는 소녀의 하얀 어깨가 헤진 외투 사이로 드러
났다. 소년은 시퍼런 멍을 보았다. 왜 그런 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제
몫의 목소리를 소녀의 목에 둘러주고 나서야 안심이 된 소년은 막대만 남은 것을
아쉬운 듯 내려다보는 소녀에게 물었다. 홍시 좋아해? 소녀는 홍시가 뭔지 모른다
고 했다. 단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다고. 아버지가 먹는 건 봤어. 그런데 아빠 등이
굽어서 안 보였어. 다 가리고 있었어. 소년은 왜 달라고 묻지 않았냐고 했다. 아빠
가 먹을 거 달라고 하면 죽여 버린댔어. 우리 아빠는 방망이 들고 다녀서 맞으면
아파.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먹고 싶었는데 참았어. 벤치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대
는 소녀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아빠 등은 무덤 같아. 난 아빠가 죽여버린다고 말하
면 정말 죽을 것 같아. 아빠 등은 뭐든지 너무 많이 죽여서 그렇게 굽은 거라고 등
을 갈라보면 죽은 영혼들이 쏟아져나올지도 모른다고 했어. 우리 트럭 옆에 사는
할머니가 그랬어. 소녀의 얼굴 위로 노을의 그림자가 졌다.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소녀가 말했다. 할머니가 날아서 도망치라고 하셨어. 너무 높아서 손을 뻗어
도, 몽둥이를 던져도 날 건들지 못할 곳으로 가라고 했어. 그래서 난 나는 게 꿈이
야. 날아가 버릴 거야. 소년은 때마침 켜진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내
려본 소녀의 얼굴이 까맣게 비워졌다. 빛의 흔적이 오래도록 그녀의 얼굴에 머물자
그는 오래도록 그녀의 얼굴에 머물자 그는 눈을 다시 감고 힘주어 떴다. 점점 형체
를 찾아가는 소녀의 얼굴에서 그는 올곧게 뻗은 시선을 마주했다. 그다음에는 코,
그다음에는 입술, 다음에는 빨간 볼이… 짙은 시멘트 바닥에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두 그림자가 겹쳐질 때, 아주 작은 밤하늘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하얀 입김이 구름
이 되었고 힘주어 뜬 두 쌍의 눈동자가 별이 되었다. 소녀는 하늘을 날아 그 속을
비행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의 바람대로 되었다고.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차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박효진 / 계산여자고등학교 / 3학년

레스토랑에 도착한 뒤 휴게실에서만 세 시간째 앉아있던 준은 참다못해 매고 있


던 나비넥타이를 풀어헤쳤다. 벽에 붙어있는 TV 속에서도 세 시간째 바이러스 감염
자가 증가했다는 속보다 여러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도 귀 축소 바이러스 감염자가 30명이나 증가했습니다. 더 이상 귀가 안 들
린다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모두 필히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절대 귀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뉴스를 더 이상 보기 싫어진 준은 TV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12시, 여러 사람들이 붐벼있을 샐러드 바 주변은 허전했다. 계속 쉬기만 해
서 지루해진 준은 청소라도 해야겠다 싶어 대걸레를 쥐었다. 설렁설렁 걸으며 바닥
을 닦다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6번 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춘 준은 이내 한숨
을 내쉬었다. 우리 단골 학생들은 이제 안 오네. 가장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만 매일
앉았던 두 학생을 떠올리자 그들이 나누던 내화도 생각났다. 준이 6번 테이블에 있
는 접시를 가지로 올 때면 두 학생은 연예인 얘기를 자주 하곤 했다. 준은 그들이
아이돌 K군과 H양이 사귀는 것 같다고 떠들 때마다 옆에서 웃음을 꾹 참았다. 하지
만 이젠 그들의 그런 귀여운 수다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준이 테이블 위를 닦으려던 찰나였다. 휴게실로부터 수지와 연미도 걸레를 들고
는 준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준은 수지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수지는 오자마
자 6번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학생들이 말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애들이 저번에 K군과 H양이 사귄다고 했던 말, 사실 같지?”
수지는 흥분하며 6번 테이블을 가리키자 준은 코웃음을 내며 수지를 한심하게 쳐
다보며 답했다. 그 말을 믿냐.
그 때, 수지 뒤에 서있던 연미가 빼곰 얼굴을 내밀었다. 준은 갑자기 눈이 마주친
연미를 보며 적잖아 당황하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준은 연미와 썩 사이가 좋진 않았다. 연미는 항상 생기발랄한 수지와는 달리 얼
굴이 어두침침하며, 표정은 늘 굳어있었다. 준은 그런 연미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하
면서도, 혹시 유행하는 귀 축소 바이러스 초기 증상을 보이는 건지 의심도 됐다. 연
미가 조용히 테이블 위를 닦고 있을 때, 준은 조심히 말을 떠봤다.
“요즘 바이러스 너무 무서워. 귀가 안 들릴수록 고치기 힘들다던데.”
그 말에 연미는 잠깐 몸을 움찔거리다 준을 쳐다봤다. 연미는 읽을 수 없는 표정
을 지으며 작게 속삭이듯 답했다.
그러게요. 빨리 바이러스가 끝났으면…….
그 때, 준이 옆에 있던 수지가 갑자기 준이와 팔짱을 끼더니 부엌으로 끌고 갔다.
같이 설거지해요. 수지는 준에게 고무장갑을 내밀며 말했다. 준은 그릇도 별로 없는
싱크대를 보며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그러자 수지는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
스크를 내리고는 준 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들짝 놀란 준은 팔꿈치로 수지를
살짝 밀쳤다. 뭐하는 짓이야. 귀에 그 어떠한 이물질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짜증을 부리는 준을 보던 수지는 손가락으로 짧게만 얘기하겠다 표현하며 준에게
속삭였다.
“연미, 무당 딸이래요. 그래서 평소에도 귀신이 씌인 듯 표정이 무서웠던 거였나
봐요.”
그 말을 듣자마자 준은 눈을 휭둥그레 뜨며 연미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 때,
연미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아서 저절로 시선을 피하게 됐다.
설거지를 끝마친 뒤, 수지와 준은 아까 연미에 대해 했던 얘기를 계속 이어 말했
다.
그 때 입구에서 실장이 들어와 준과 수지에게 그만 퇴근하라며 손을 휘저었다.
신이 난 둘이서 은빛 도는 명찰을 떼려던 참이었다.
“아, 맞다. 연미 오늘까지 일하고 그만둔대. 요즘 우울증에 걸려서…….”
준과 수지는 멍하니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준은 귀를 때리고, 수지는 귓구멍을
파며 말했다. 실장님 뭐라고요?
실장은 다시 연미에 대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준은 연미, 라는 이름만 들
릴 뿐 그 뒤에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수지는 마스크를 내리고는 또 준에게 속
삭였다.
실장님도 연미가 무당 딸인 걸 알았나봐.
준은 계속 귀를 때리고 잡아당겼다. 이상하게도 준에겐 실장이 말해준 연미에 대
한 진실보다 수지가 한 말만 귀에 들어왔다.
그 때 실장은 손에 쥔 신문을 보며 말했다. 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 놈에
바이러스. 준은 빨개진 자신의 귀를 매만지다가, 테이블 유리에 비춰지는 자신의 얼
굴과 마주하자 표정이 굳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귀가…… 작아진 것 같아.”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차하] 비행
이서진 / 평촌고등학교 / 3학년

마당 위로 높게 솟아오른 돌담은 다른 주택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어린


로봇은 자신의 정수리와 나란히 하는 돌담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돌담을 딛고 올
라서면 분명 하늘을 자유로이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출돌 위의 사모기둥
은 팔작지붕의 기와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굵은 대청기둥은 고택의 운치를 더해주
는 듯했다. 돌담 앞에 모여 있는 장독대는 고택의 면모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지붕
에 줄줄이 달려있는 연어 무늬의 풍경들을 밀려오는 바람에 따라 하늘거렸다. 깨질
듯한 얇은 유리에서는 고여있는 시냇물의 파동처럼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
로봇은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었다. 오늘도 의뢰받은 폐품을 받고 오는 길일뿐
인데, 어쩌다 로봇은 자신이 알던 인간 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에 발을 들인 셈이
었다. 로봇은 담장 너머의 고택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로봇은 관찰 기능
의 일정 시간이 초과도어 자동으로 뒤돌아섰다. 로봇은 높은 담장과 고택에 대해
좀 더 살피고 싶었다. 그러나 로봇은 조금이라도 늦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까닭
으로 어쩔 수 없이 폐품을 가득 실은 트럭에 다시금 올라야했다.
어린 로봇은 하나 뿐인 팔로 운전대를 돌렸다. 아까의 고택의 풍경이 로봇의 눈
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렸다. 로봇은 고택 안에 있을 무언가를 상상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그 고택은 분명히 인간적인, 어떤 형태든 인간적인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
고 생각했다. 고택에는 개량 한복을 차려 입고 하얀 머리를 정갈하게 다듬어 이마
가 말끔한 노인이 살고 있을 거야. 손님이 오면 작은 소반에 줄 무화과 차와 장미
꽃 한 송이를 담아 대접할 거야. 마당에 널린 게 꽃이니까 말야. 로봇은 고택의 모
습을 머릿 속으로 그려내었다. 폐품처리소에 가까워지자, 로봇은 있는 거라곤 고작
배터리 뿐인 자신의 방을 떠올렸다. 고택에 사는 사람들이 알까. 이 동네에서 몇 마
일만 더 나가면 편하게 누울 침대 하나 없는 집도 있다는 것을. 그들이 밟고 있는
마당 아래엔 그런 집 같지도 않은 집들이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린다는 것을 알까.
로봇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다가도 창문을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했다. 로봇은 온몸
이 물에 젖은 듯 무겁게만 느껴졌다.
폐품처리소에 도착하자마자 강렬한 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바닥에 널브러진
쇳덩이들은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다가 밀쳐내기도 했다. 쇳덩이들 사이로 인력거꾼
로봇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린 로봇은 인력거를 끌고오는 로봇에게 달려가
아까 보았던 아름다운 고택에 대해 일러주었다. 어린 로봇은 눈을 반짝이며 고택의
모습 그대로를 전해주었다. 자기가 상상한 고택의 내부까지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
다. 인력거꾼 로봇은 어린 로봇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 프로그래밍을 한
그대로 따르는 듯 보였다. 어린 로봇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인력거꾼
로봇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이럴 때마다 우리가 상품화 된 로봇이라는 게 새삼 잘
느껴진다니까요.
네가 말하는 고택 같은 건 없어. 죄다 허황된 사실이야. 그리고 우리 같은 노동
로봇들은 평생 남들 밑에서 걸레짝처럼 바닥만 닦을 뿐이지. 네 하나뿐인 팔을 봐.
너 비행 실험체에 올랐다가 사고로 잃은 거라면서. 우린 날고 싶어도 날 수가 없는
거야. 어린 로봇은 인력거꾼의 말이 가시처럼 느껴져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요! 어린 로봇은 인력거꾼 로봇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울
부짖었다. 인력거꾼이 이렇게 된 건 몸에 달린 녹슨 쇳덩이들 때문이라고. 어린 로
봇은 언젠가 인력거꾼 로봇에게 광이 나는 새로운 쇳덩이를 구해주리라고 다짐했
다.
새로 걸려 온 의뢰 전화는 낮고 품격있는 어투였다. 어린 로봇이 직접 위치를 찾
아보니 저번에 보았던 그 고택이 있는 자리였다. 그 고택에서 폐품이 나왔다는 것
이 조금 의구심이 들었으나, 어린 로봇은 그마저도 고택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어린 로봇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트럭에 올랐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침내 도착한 고택에는 정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어린 로봇은 트럭에서 내려 정
문 앞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 순간 로봇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오랫동안 가꾸지 않고 방치한 나무들은 이곳저곳 돋아 나 있었다. 마당 구석에는
굵은 목줄을 한 늙은 개가 죽은 듯 앉아있었다. 개는 어린 로봇을 보고 짖지도 꼬
리를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는 듯했다.
어린 로봇이 한참을 멍하니 서있자, 목이 길게 늘어진 티를 입고 있는 여자가 고
태에서 나왔다. 그 뒤를 이어 여자보다 두어 살 정도 많아보이는 듯한 여자도 나왔
다. 둘은 간이 침대를 들어 올려 어린 로봇 앞에다 내려놓았다. 어린 로봇은 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안주인 분은요? 저희 어머니는 병상에 오래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더 이상 캐묻지 마세요. 언니로 보이는 여자가 어린 로봇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
다. 어린 로봇은 간이 침대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왜요, 이런 집안 처음 봐요?
어린 로봇은 간이 침대를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멀어져가던 인력거꾼 로봇의 뒷
모습을 떠올렸다. 인간적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건가봐요. 나도 이 지긋
지긋한 허물을 벗고 하늘 높이 비행할 줄 알았는데. 적어도 저 돌담을 딛는다면. 어
린 로봇이 폐품처리소로 돌아가는 길은 길게만 느껴졌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그 아이
곽다연 / 서울여자고등학교 / 1학년

그를 만났다. 녹음이 만연한 8월의 일이었다. 방학식으로 설렘이 가득했던 날, 푸


른 잎 나풀거리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그는 서 있었다. 내가 가면 길을 멈춘 것은
그의 옷차림과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입고 있던 흰색 반팔 티는 누런빛과
회색빛 무질서한 자국이 가득했다. 저걸 가지고 집에 간다면 엄마는 어디서 걸레를
주워왔냐 화를 낼 정도의 처참함이었다. 그가 입고 있었기에 옷이란 것을 겨우 알
아볼 수 있었다. 바지는 또 어땠나? 우리 집 건조대에 널려 있는 아빠 팬티만큼 짧
았다. 그와 거리가 조금만 더 멀었다면 그 팬티같고 볼품없는 바지는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신발은 신지도 않았다. 발을 자세히 보지 않았어도 피투성이에 피딱지
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갈길에서 맨발이라니…. 하지만,
그의 추레하고 볼품없는 옷차림보다 더 눈을 끌었던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 설렘으
로 가득했던 기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 밑바닥 어딘가에 보낼 수 있는 위력이었
다. 음울, 저번 주 학교 국어 선생님께서 알려주는 감정과 비슷해 보였다. 축 처진
눈썹, 늘어져 바닥을 향하는 입꼬리, 무엇보다도 저 생기 없는 눈동자! 엄마가 사온
생선에서 봤던 죽은 눈이었다. 그림자가 없었다면 귀신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눈을
깜빡여 그 눈을 숨기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의 몸이 서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눈이 마주친 순간 주춤 뒷걸음쳤다. 눈이 조금만 더 길게 마주쳤다면 뒤돌아 도
망갔을 테지만, 그저 눈을 잠깐 마주했다고 도망가는 것은 자존심 상했다. 그 애는
내 상한 기분을 한순간 바닥으로 내팽개쳤으니 말이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들이고 소리쳤다.
“야!”
큰소리에 그 애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쌤통이었다. 나는 달리며 그 애와의 거리
를 단숨에 좁혔다. 달려드는 나를 보고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좁았던 거리가 멀
어졌다. 등에 있던 무거운 책가방을 버리고 그 애를 따라 달렸다.
우리가 달리기를 멈춘 것은 어이없게도 내가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자갈길은 상
상했던 것보다 더 딱딱했고 아팠다. 내 울음소리는 그 애를 겨우 멈추게 만들었다.
그것을 본 나는 더 크게 울었다. 내 소리가 커질수록 주춤거리고 망설이던 그 아이
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 우리 둘 사이의 공백을 걱정으로 채웠다. 그의 그림자가 날
반쯤 가렸을 때, 그가 물었다.
“왜 쫓아왔어. 다쳤잖아.”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화가 났다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린아이
같아 보일 것 같았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그 아이는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혔
다.
“많이 아파?”
그제야 잊고 있었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흙이 묻은 피가 다리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찢어진 살 사이로는 찔끔찔끔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그의 발을 보고 멈추었다. 맨발로 달렸던 그는 나보다 심할 것이 분명했다. 고
개를 저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아파보였다. 넘어졌을 때나 생기는 멍이 보이는 팔과 다리에
울긋불긋하게 새겨져 있었다. 시들어가는 꽃잎이 몸에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푸른
색,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제각기 다른 색은 어울리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내미
는 손도 피가 굳어 딱지가 있었다. 불긋한 손자국이 나 있는 목을 보다 나도 모르
게 물었다.
“아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달짝이던 입술 사이로 소리가 새어나오
는 일은 없었다. 그때서야 그의 눈이 죽은 생선과 다르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 다름
이 무엇인지 영영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피투성이인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
기 미안했다. 검지를 잡고 일어났다. 무릎을 움직이자마자 따끔함이 몸 전체를 휩쓸
고 사라졌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아픔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릴 것 같았
다. 난 이렇게 아픈데 저 발바닥은 얼마나 아픈 걸까?
우리는 일어나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침묵이 불편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안녕, 나는 채원이야. 김채원인데 친한 친구는 원아라고 불러.”
내가 소개를 했으니까 이제 그의 차례였다. 그게 예의라고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나는 아직 어색할 그를 위해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다섯 걸음, 열 걸음, 서른 걸음
이 넘어가도 답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랬다. 답이 없는 것은 부끄럽고 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알겠다. 너 부끄럽구나. 우리 담임 선생님이 그랬거든.”
나는 친절하게, 그가 부끄러움이 사라질 수 있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오
늘 설렜던 이유, 아빠가 어제 피자를 사와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 선생님께서 잘했
다고 칭찬해주신 이야기, 작년에 놀이공원으로 가족끼리 여행 간 이야기…. 그 아이
에게서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가지고 싶고 바라는 것을 물었다. 이것마
저 답이 없다면 나는 그와 친해지는 것을 포기할 것이라 다짐했다.
“넌 뭘 가지고 싶어? 어제 티비에서 본 인형이 너무 가지고 시퍼라 엄마는 일주
일 전에도 사주었다고 하시지만, 벌써 일주일 된 장난감은 재미없다고.”
그 애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와 더 대화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침
묵으로 돌아갔다. 눈을 마주쳤던 곳에서 너무 멀리 왔나 후회도 스멀스멀 나타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내가 버린 책가방이 보였다. 책가방이 반가웠다. 책가방을 향해
달려가려는 그때, 그 아이가 입을 열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나는 의문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네가 물었잖아. 내가 뭘 바라는지.”
그의 설명에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나를 이미 여러 번 무시했던 그에게
보여줄 친절함은 더 없었다. 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가방을 잡으러 뛰어갔다.
그 아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 정도 심술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까 아프
냐고 물어봤을 때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던, 그때 그 눈이었다. 책가방을 줍고 다시
돌아봤을 때, 그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 주에도 그 아이는 우리가 눈을 마주친 그곳에 없었다. 그
애는 무엇이 끝나길 바랐던 것일까? 가끔이지만 그곳을 지날 때면 그가 바란다고
했던 끝이 궁금해진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센트럴 파크
곽소현 / 고양예술고등학교 / 2학년

은재는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택시 조수석에 앉아 있다. 할아버지는 테가 주황색


이고 정면의 풍경을 비추는 렌즈라서 값이 꽤 나가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은재
는 방금 에어백이 안에 들어 있을 범퍼에 발을 얹었다가 할아버지에게 된통 혼이
난 뒤 입을 다물었다. 이들은 아파트 단지 내 반상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다. 반상
회는 지금껏 부녀회장의 집이나 반장의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새로이 취임한 반장
의 주도로 근처 횟집으로 장소가 잡혔다. 은재는 입을 댓발 내밀고 불평한다. 그리
고 댓발 내민 입술에 꼼꼼하게 틴트를 바른다. 휴대폰 카메라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춘다. 할아버지의 택시는 횟집 건물 뒤편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진입한다.
이번 반상회도 어김없이 잡담과 안부인사로 시작한다. 장소가 바뀌어도 전반적인
풍경은 여전하다. 은재는 회를 몇 점 먹고는 가게 밖으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건
다. 다른 지역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을 부모에게 은재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많은 이야기 중에서 추리고 추려 솎아낸 주제를 머릿속
으로 되새긴다. 그리고 지금 혹시 바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잠시 망설인다. 이내 열
한 자리 번호를 입력한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은재는 전화가 끊기자마자 도착
한 문자메시지를 찬찬히 읽는다. 은재야, 조금 이따 엄마가 전화할게. 은재는 두어
번 더 읽는다. 휴대폰을 교복 자켓 주머니에 넣고 후련한 얼굴로 소란한 가게 안으
로 들어간다.
중구난방 오합지솔. 은재가 아는 몇 안 되는 사자성어로도 이 상황을 충분히 설
명할 수 있다. 그때, 얼굴이 시뻘건 젊은 반장이 소리를 지른다.
“여러분! 회의합시다. 회의 좀 해봅시다.”
그제야 사람들은 목을 가다듬고 곧 침묵한다. 반장이 안건으로 내세울 의견이 없
느냐고 묻는다. 아까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듯 다들 조
용하다. 그때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손을 든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왜, 공원이 있잖아요? 그런데 운동 기구도 없고 조깅할
만한 트랙도 없어서요. 어떻게 우리 새 반장님께서 우리 새 반장님께서 만들어주시
면 안 될까요?”
말을 마친 아주머니는 홍조로 인해 얼굴이 붉다. 반장은 손뼉을 치며 훌륭한 안
건이라 말한다. 한 명이 말을 시작하자 모두 입을 열기 시작한다. 좋아요, 산책로부
터 깔아요. 그럽시다, 운동 기구도 들이고 이왕 갈아엎는 김에 분수대도 놓죠. 여름
에 애들 수영도 하고……. 회는 비쩍 말라가고 있다.
“공원 이름을 바꾸는 건 어때요? 좀 있어보이게요. 대림공원이라니 조금 촌스럽
잖아요. 아닌가요?”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아빠가 말한다. 아기는 소란 속에서도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촌스럽다는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한층 상기된 목소리로 새롭게 바꿀 공원
이름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말한 ‘센트럴 파크’가 반장이 가져온 작
은 화이트 보드에 적힌다. 모두들 손뼉을 치고 이거네, 이거다 하며 바짝 마른 회를
집어 먹는다. 도착한 이래로 한 마디도 없던 은재의 할아버지가 그제야 입을 연다.
“이보시게. 점잖게 있으려 했더니 고마 안 되겠소. 이 대림공원이라 카믄, 내가
사십 년 전에 통영에서 올라와가 택시 끌고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아파트 단
지 안에 멋들어지게 있어가지고, 아파트의 자랑이자 상징, 빛과 소금 같은 역사 깊
은 공간이었는데 이 무신 센트럴 파크입니꺼? 살면서 내는 처음 들어보오. 공원 이
름을 바꾸면 우째 되는가 생각은 해보셨수? 일단은 빠스 정류장 이름부터 싹 바까
야 된다 아입니까. 그리고 이래 택시를 싹 몰고 댕기다가 손님이 딱 타가지고, 아이
씨, 센트럴 파크로 가주이소, 하면 혼동이 와요. 젊은 사람들맨키로 나같은 노인네
들은 이름이 바뀌면 빨리 생각이 안 나.”
할아버지가 열을 올리며 말할수록 은재의 얼굴에도 열이 오른다. 할아버지는 말
하는 내용에 맞춰 운전하는 제스처나 본인의 머리를 검지로 두드리는 둥 정신없이
양손을 움직인다. 분위기와 함께 회가 차갑게 식어간다. 사실 회는 처음부터 얼음에
담겨져 나왔다. 은재의 할아버지가 반상회에 나와서 이렇게 안건에 반대하는 일은
잦았지만 새로 취임한 반장은 당황하여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가온다. 할아버지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고 어르신, 고정하세요. 어르신. 하고 타이른다.
그렇게 처음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벗어나 고급 횟집의 단체방에서 진행된 반
상회가 끝이 났다.
그날 밤 센트럴 파크가 될 뻔한 대림공원의 담벼락이 무너졌다. 반상회가 끝나고
따로 모여서 술을 마신 사람들이 운전을 하다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담벼락으로 향했다. 그 다음 날 새로 취임한 반장의 집에서 이루어진 긴급 반상회
에서 정해진 바는 이와 같다. 공원의 개발은 처차하고 음주운전 근절부터 힘씁시다.
주말을 맞아 은재를 은재의 부모님이 사는 지역으로 데려다주는 할아버지는 택시
안에서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공원 안에 고양이 새끼들이나 비둘기
놈들이나 치우라고 해야 했는데……. 은재는 내심 센트럴 파크가 되지 못한 공원이
아쉬웠다. 대림공원이 센트럴 파크가 되고, 아파트 근처에 노래방과 피시방과 우체
국이 생기고, 회사가 생기면 부모님과도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를 주겠다
고 한 은재의 엄마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이틀간의 일이다. 은재가 범퍼 위에 발을
올리고 얼굴에 미네랄 파우더를 칠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반상회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되새기느라 여념이 없다.
버스 정류장 이름을 바꾸는 것도 인력 낭비고, 이름을 함부로 바꾸는 행위는 전
통과 역사를 무시함과 다를 바 없다고…….
은재는 범퍼에서 발을 내리고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공원은 둘째 치고
단지 안에서 애들 좀 뛰어놀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어야 했어. 정말이지 시험기간이
고 뭐고 이 아파트 사람들은 배려가 없단 말이야.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빛
나는 선글라스를 치켜 올린다. 해가 저문 지도 오래된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일 듯싶
지만 택시는 쭉 뻗은 도로를 잘만 나아간다. 한편, 대림아파트의 경비원 박씨는 센
트럴 파크가 될 뻔한 대림공원을 홀로 청소하며 포대자루에 나뭇잎과 고양이 밥을
쓸어담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공원
권수민 / 진주여자고등학교 / 3학년

군홧발에 짓밟힌 청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곤봉에 맞아 멍든 마음들은 다 어


디에 묻혔을까. 나는 오늘도 추모 공원 한 켠에 세워진 <평화의 벽> 앞에 앉아 오
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힘없는 손끝을 세워 오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
니다. 힘없는 손끝을 세워 오빠의 이름을 가만히 적어봅니다. 그러나 벽에는 아무것
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쓰이지 못했습니다. 쓰일 수 없었습니다.
서울서 대학 다니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요. 어여 들어가셔요. 아직 날이 추운
께. 그렇게 말하며 멋쩍게 머리를 긁던 오빠는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한 막내 여
동생의 일곱 번째 생일에 돌아왔습니다. 눈도 내리지 않았는데 차디찬 시신이 되어
돌아온 오빠는 아무리 부둥켜안아도 녹지 않았습니다. 흙투성이 맨발로 뛰쳐나온
엄마는 장남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통곡했습니다. 서울로 갈 때 쑥스럽다는 듯 긁적
였던 뒤통수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였습니다. 생일날 돌아온 오빠의 모습은, 내 가
슴에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물푸레 나무 아래에 앉아 오빠가 가르쳐 주었던 글씨
를 적어봅니다. 그해 가을, 문을 닫은 학교와 각종 청사 건물에서는 시위가 한창이
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와 평화를 원했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했던 오빠 역
시 몸에 국기를 두르고 이마에 흰 띄를 묶었습니다. 오빠는 물푸레나무 가지를 주
워다 흙바닥에 자유, 민주주의, 평화를 쓰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네 살배기 꼬마
였던 나는 그 세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오빠의 세상을 빛내는 말
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말들이 세상에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돌아온 날 밤, 엄마는 오빠를 잠자리에 눕혔습니다. 그러고는 원아, 잘
자… 하고 오빠를 재웠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었습니다. 엄마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그게 꼭 떨어지는
물푸레나무의 하얀 꽃잎 같았습니다.
교문을 막아선 학생들과 대치하던 공수부대는, 단단한 쇠를 박아넣은 물푸레나무
곤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습니다. 오빠가 자유와 민주주의와 평화를 썼던 그 물푸
레나무 가지는 악의 몽둥이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진 상처를 안기고 있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맞서자 공수부대는 막무가내로 최루탄을 던져대
기 시작했습니다. 시위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는 도망
쳤고, 다른 누군가는 끌려갔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빠는 어째서 그렇게 돌아왔을까.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왜 멍하니 날아드는 최루
탄을 피하지 못했을까. 왜 영영 채울 수 없을 것만 같은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내
게 왔을까. 도대체 왜.
나는 오빠를 화장하던 날, 마을 가운데의 물푸레나무로 달려갔습니다. 물푸레나무
의 잎사귀를 치마폭에 차곡차곡 따담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또 냅다 달려 집의 마
당에 도착하니, 엄마는 여전히 말라붙는 눈물 위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
니다. 원아, 원아, 애타게 불러도 오빠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얀 천이 미처 다 가
리지 못한, 푸릇한 멍을 매단 오빠의 얄쌍한 발목이 보였습니다. 오빠는 검은색 운
동화를 신은 채였습니다. 예쁜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였으나, 오빠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모아온 잎들을 오빠의 머리맡
에 헤쳐놓고, 양손으로 오빠의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숭숭 뚫린 구멍들에 물푸
레나무 잎을 꾹꾹 눌러 담아 주었습니다. 모두들 채울 수 없는 구멍이라고 말했지
만. 나는 오빠의 세상을 비춰 주었던, 자유와 민주주의와 평화를 오빠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불어온 바람에 잎들이 오빠의 발치에, 마당에 흩어지더니,
어느새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오빠가 사랑한 세상의 하늘을 보
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어디에도 오빠는 없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86학번 공원도, 임
미향의 아들 공원도, 공은영의 오빠 공원도, 민주화 열사 공원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평화의 벽>을 뒤로 한 채, 추모 공원을 빠져나왔습니다. 묘역 근처에 물푸레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 있었습니다. 나는 그 높고 커다란 물푸레나무 한 그루를
있는 힘껏 걷어찼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울음이 그치지 못한 채로 오빠의 무
덤 앞에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다시 아무것도 몰랐던 다섯 살배기
꼬마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살아지고 사라진 오빠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박단비 / (영월)석정여자고등학교 / 3학년

언제인가 아무 의미 없이 틀어놓은 방송에서 제3차 세계대전은 바이러스 전쟁일


거라는 말을 들었다. 전염병은 그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
산되었다.
어느 직장인이 원인불명으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돌연사, 그러니까
심장마비 때문일 거라고 말했지만 어쨌든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었기에 그의 시신
은 부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다.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렇습니다. 어떻게 발생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사람
이 죽었습니다. 현재까지 완성된 현대기술로는 도저히 해결해낼 수 없는 문제입니
다. 그렇게 확정지었다.
소문은 발 빠르게 전해졌다. 또 사람이 죽었대. 그 바이러스 때문이야. 어쩜, 이제
는 누굴 만나지도 못하겠어. 뉴스에서는 방역의무에 대해 고지했다. 외출을 삼가고
부득이하게 외출할 경우 마스크를 꼭 착용해야……. 누군가는 전염병의 원인이 스
트레스 때문이라 했고, 다른 이는 인간이 천벌을 받는 것이라 했다. 사람이 거의 없
는 거리에서 회개하세요, 외치는 이들이 어디에나 존재했다. 어찌됐든 말은 늘 있었
고 그래서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와전되었다. 사람은 입을 가리고도 말을 할
수 있는 종족이었으므로. 그러니 눈과 입과 귀를 막고도 여태 살아올 수 있는 사람
이 있었겠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아무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시끄러워졌다. 더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고 고등학생 3학년의
신분은 나날이 사라져만 갔다. 돈을 벌러 나가겠다고 한 가족의 소식은 알 길이 없
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할머니는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폐지와 유리병을 주웠
다. 살기 어려워질수록 더 고통 받는 사람은 저런 이들이다. 온종일 거리를 누비겠
지만 식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생계를 이어나가겠지.
학교에 가는 꿈을 꿨다. 갑자기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과목이었는지 기억나
지 않았으나 예전에 인과관계와 순환구조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스템
이란 그런 것이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인과관계가 아주 분
명해요. 인간이 뿌린 것은 결국 인간이 거두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간만에 입을 열었지만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 이젠 인간이 말을 하지 않으니 이렇게도 퇴화하는군. 나는 가래
침을 몇 번 내뱉고 침을 삼켰다. 목이 다시 부드러워질 때까지.
시선을 돌리니 책장에 꽂히다 만 책이 하나 보였다. 정의란 무엇인가. 알 수 없었
다.
창밖으로는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송은 이미 끊긴 지 오래다.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바이러스는 어떻게, 폐지를 줍던 그
할머니는 살아 있을까. 이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다만 한 가지, 바
라는 게 있었다.
나는 너무 오래 전에 사용해 이젠 아주 오래 전의 것처럼 느껴지는 언어를 입밖
으로 뱉었다. 목구멍과 입안에서 싸한 쇠의 맛이 맴돌았다. 아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비행
박수현 / 권선고등학교 / 3학년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찢어버릴 기세로 파고들었다. 나는 두꺼운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너 정말 엄마랑 안 가 줄 거야?”
얇은 면티와 가디건을 겹겹이 껴입은 엄마는 빨갛게 얼어붙은 코를 훌쩍이며 말
했다. 여행은 무슨. 겨울옷 사 입을 돈도 없으면서. 퉁명스러운 나의 말을 듣고도
엄마는 그저 입술을 깨물 뿐 아무런 변명도 늘어놓지 않았다. 맞물린 입술과 밯왕
하는 동공. 나는 빛바랜 기억 속에서도 엄마의 같은 표정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
다. 이제 학교에서 엄마 불러도 찾아오지 마. 나는 그대로 굳어버린 엄마를 두고 교
문을 빠져나왔다. 나를 버린 엄마라면 나도 필요 없었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던 엄마는 유학을 위해 오른 비행기에서 아빠를 처음 만났
다고 했다. 비행기 조종사인 아빠에게 한눈에 반했던 엄마는 쉼 없는 구애 끝에 연
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삼 년이란 긴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린 엄마와 아빠는 앞
으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할머니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고아였던 엄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손자인 내가 태어난 뒤에도 달라
지지 않았던 할머니의 마음은 매년 명절마다 엄마를 몸져눕게 했다. 엄마는 아빠랑
태호가 있으니까 괜찮아. 엄마는 손목에 붙인 파스와 함께 이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엄마는 얼마 뒤 엄마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장
기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아빠는 차에 치여 죽었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여섯이
었다. 할머니는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내쫓았다. 내 아들 잡아먹은 죽일 년.
엄마는 할머니에게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아빠의 발인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 할머니는 나를 찾아왔다. 아들을 빼앗아
갔으니 손주라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막무가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는 나를 보고 있던 엄마는 그 어떤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
다. 맞물린 입술과 방황하는 동공. 엄마는 나를 잃던 그 순간에도 그 표정이었다.
하느님과 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엄마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뒤로 평생을 엄마 없는 자식으로 자라왔다. 할머니에게 나는 아빠의 잔상이었
을 뿐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를 때리면 나도 주먹을 들었
다. 그렇게 자라고 보니 비행 청소녀이었다.
한순간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던 엄마는 작년부터 내 보호자로 학교에 불려왔다.
할머니가 나를 데려갈 땐 순순히 보냈으면서. 자식 버린 엄마 주제에 낯짝도 두껍
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함께 떠나자고 했다. 할머니 없는 곳에서 둘
이 살자고. 비행기 타고 멀리 가 버리자고. 나는 이제 와 엄마 노릇을 하려는 엄마
가 우스웠다. 그렇게 엄마를 놓쳤다.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더 이상 날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엄마의
주소지가 쓰인 편지 박스를 건넸다. 그곳에는 그동안 엄마가 보낸 수많은 편지들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가장 위에 있는 편지를 뜯어 빠르게 읽어 내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엄마 양육권 소송 이겨냈어. 저번에 학교에서 했던 말, 엄
마는 진심 아닌 거 알아. 비행기 티켓 넣었어. 우리 아들, 이제라도 엄마 노릇 하게
해 줄래?
나는 모든 편지의 입구 부분을 확인했다. 모두 한 번도 뜯겨 본 적 없는 모습이
었다. 편지 뒤에 들어 있던 비행기 티켓에는 14:00이 적혀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얼추 맞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어디에서도 엄마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공항 유리
창 너머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보였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심정으로 하늘 위로
끝없이 올라가는 비행기를 발보았다. 그때 저 머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방황하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그 얼굴이 두 입술을 벌려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공원을 삼킨 블랙홀


박태현 / 남강고등학교 / 3학년

블랙홀이 공원을 집어 삼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이월 말, 나를 비롯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대학 원서를 쓰기 시작할 때 즈
음 전국에 있는 공원에서 블랙홀이 생겼다. 그 블랙홀은 벤치와 벤치 사이의 공간
에 있었고 방석만한 크기였다. 사람들은 버리고 싶은 물건을 버렸다. 구청장도 쓰레
기를 블랙홀에 버리자고 공원 근처 이곳저곳에 현수막을 걸었다. 나는 하굣길에 공
원에 들러 망한 모의고사 시험지를 찢어 블랙홀 안에 넣었다. 내 친구는 공부에 집
중해야 한다며 휴대전화와 게임기를 블랙홀에 넣었다. 사람들은 블랙홀 안에 이것
저것 넣기 시작했고 결국 사람까지 들어갔다.
블랙홀 안에 들어간 사람은 공원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3 남자아이였다. 그
는 본인이 다니던 학교 교실 본인 책상 서랍에 문제집 맨 뒷장을 찢고 유서를 적어
넣어 두었다.
그곳에는 무하한 휴식만이 있습니다. 현실은 끝없는 경쟁인데 도대체 어디가 블
랙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유서가 공개된 후 방석 크기의 블랙홀은 축구장만큼 커져서 공원을 삼켜버렸
다.

너 그 유서 봤냐? 등교를 하자마자 먼저 와 있던 창준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봤지. 이제 블랙홀에 뭐 버리지도 못하겠어. 찜찜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볼 거 아니
야. 그치. 지금쯤이면 내가 버린 휴대전화와 게임기를 하며 공원을 천천히 걷고 있
을지도 몰라. 그거 정말 다행이네. 나는 창준의 말에 심드렁하게 답한 뒤 문제집을
펼쳤다. 문제집에 있는 문제는 끝없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것을 풀다보면 블랙홀에,
아니 그가 말했던 휴식이 존재하는 공터에 가고 싶었다.
나는 결국 문제집을 다 풀지 못했다.

블랙홀이 공원을 집어 삼킨 지 일주일이나 지났을 무렵 수능은 디데이 62일이 되


어 있었고 나는 문득 블랙홀이 보고 싶었다. 조금 충동적인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없이 가고 싶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원래를 천체학자가 되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 그딴 쓰잘데기 없는 짓은 네 혼자 시간 내고
해라, 라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대학 원서도 대충 성적에 맞춰 넣고 혹시 몰라 수
능을 준비하던 나에겐 블랙홀은 공원처럼 휴식의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 가는 도중
편의점에 들러 500ml짜리 물병 하나를 샀다.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까. 나는 어두운 블랙홀 안에 버려진 쓰레기 봉투, 휴대전화, 게임기 사이 둥둥 떠
다니고 있는 공원을 상상했고 거기서 쉬고 있을 그를 상상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
르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이 생겼던 건 그가 나와 같은 수험생이었기 때문일까, 아
니면 요즘 사람들처럼 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마 두 번째 이유 때문일 것이
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으니 어느새 공원을 삼킨 블랙홀을 만났다. 나는 물병을 블
랙홀에 집어 던지고 소리쳤다.
거기는 살만 합니까? 그때 블랙홀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예! 여기는 살만 합
니다. 내가 놀라서 살아 있으십니까? 나오실 수 있나요? 하고 물었지만 아무런 답변
도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난 창준이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공부에 집중하


기 위해 소설책과 인문학책, 시집 모두 블랙홀 안에 던져버렸어. 나는 창준을 안쓰
럽게 여기며 말했다. 언제 쉴라고. 몰라. 공부해야지. 그 사람은 블랙홀 안에서 책을
읽을라나? 라고 창문이 농담조로 말했다. 어. 아마 공원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으실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끝도 없는 문제지의 문제를 풀었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그를 위한 사회는 없다
이고은 / 전남여자고등학교 / 2학년

“삐 소리 이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노인은 허망하게 청년의 손에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가슴이 먹먹하였다. 일부러 남의 것으로 하였는데. 어찌 자식이 되어 아비에게
연락 한 번을 하지 않는 건지. 노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락이 안 되나 봐요? 그 나이 땐 다 그러니 상심하지 마세요.”
사람 좋아보이는 청년이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에 노인은 그가
차라리 자신의 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노인은 대답 대신 허탈한 웃음을 지
으며 청년의 손에서 도시락과 생수 하나를 받았다. 푸석푸석한 밥알은 입맛은커녕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웃으며 밥을 삼킨 뒤 뚜껑을 닫아 버렸다. 신발까
지 내려오는 바지의 밑단을 끌면서.
노인은 엄지에 침을 묻히며 지폐를 세었다. 분명 3만원은 넘을 양이었는데 그의
손에는 만 팔천 원만 들려 있었다. 노인이 주인을 쳐다보자 주인은 손을 들어 가득
쌓인 페지를 가리켰다. 값이 줄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노인은 주인 몰래 침을 뱉
으며 그래도 오늘은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빨리 아들과 만나
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생활비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 돈을 꽉 쥐며
아들과 사이가 멀어졌을 때를 생각했다. 그가 201호 아저씨가 아닌 2 나 2034로 불
리던 그 당시를.
그는 여학생을 강간한 혐의로 15년을 구형받았었다. 콘크리트 벽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차가웠고 그를 관리하는 교도관의 눈은 더 매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
서웠던 것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아들의 행방이었다. 그는 아직 구치소에 있던
당시 뉴스에 나오던 아들을 보았다. 그는 확신 없는 눈동자에 대비되게 강한 어조
의 피켓을 들고 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판사의 망치가 떨어지던 날부터
아들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은 사회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회로 돌아가
아들의 앞에서 당당한 아버지의 노릇을 다시 하고 싶엇다. 그러나 발목을 옥죄이는
전자발찌의 LED 앞에서 교도소에서 배웠던 기술은 쓸모없었다. 혐오의 시선이 더해
지는 동안 그는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도망쳤다. 굶주림은 더 이상 문제가 되
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찾아야 했다.
신호가 간다. 통화의 연결을 기다리며 노인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이
녀석에게 목 매달린 개처럼 헐떡여야 하는 건지, 그 녀석의 몸에 들어간 탄수화물
들은 자신이 벌어다 준 것일 텐데. 아들의 몸을 가를 수만 있다면 혈관 가득 들어
찬 아비의 사랑을 보일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통화음이 끊겼다. 아들이 전화를 받
았다.
“진아, 너 왜 그동안 연락 한 번이 없었냐. 내가 교도소에 들어갔다고 가족인 너
마저 무시하는 거냐? 그건 그저 실수였을 뿐이라고 했잖아. 난 아무 짓도 하지 않
았어. 그 판사가….”
노인은 목소리를 원했다. 이 공허함을 끊어줄 목소리를. 그게 원망이든 비난이든
동정이든 말이다. 그러나 전화기에선 낯선 여자의 익숙한 말만 반복되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이후….”
노인은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았다. 눈이 떠져 있든 아니든 그에게는 다를 것이 없
었다. 아들을 찾아갈 순 없다. 찾아가는 순간 전자발찌의 소음이 그를 더 몰아넣을
것이다. 그는 그저 하루 빨리 이 기간이 끝나기를 빌며 다시 바지의 밑단을 잡고
걸었다. 살아야 할 시간이었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비행
이예리 / 원광고등학교 / 3학년

운동장 한가운데 헬멧을 쓴 여자가 서 있었다. 두루미 속에 숨어든 까마귀처럼


한눈에 띄였다. 나는 재빨리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헬멧을 쓴 여자의 손에 들린 공
책을 뺐은 뒤 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다. 여자는 여전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
뻔했다. 다시는 닿지도 못할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일이 여자의 유일한 취미였
다.
매일같이 하늘을 가르며 나는 것이 이모의 일이었다. 밖에서 전투기 비행 소리가
들리면 웅성대는 아이들 사이로 나는 이모를 떠올렸다. 고장 난 전투기의 핸들을
뽑아다 선물하며 알려줬던 조종법을 흉내냈다. 이모의 헬멧을 훔쳐 쓰고 거실을 누
볐다. 이모가 조종을 할 때 쓰는 헬멧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태양처럼 느껴졌다. 해
가 좋아 하늘을 난다는 말처럼 그 헬멧을 쓰고 하늘을 날고 싶었다.
이모는 여전히 헬멧을 쓰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나는 그런 이
모를 바라보며 헬멧을 벗지 않아 비행을 그만 둔 것인지, 비행을 그만둬 헬멧을 벗
지 않는 것인지 고민했다. 이모가 일을 관둔 지 2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모가
헬멧을 벗게 하기 위해 엄마와 내가 갖은 수를 다 썼음에도 이모는 헬멧을 벗지 않
았다. 그 헬멧 안에 자신의 하늘과 비행이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이모가 일을 그만 둔 것은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걷는 일보다 조종하는 일을
더 잘한다는 말을 듣던 이모가 비행을 그만 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모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이모를 따라 비행장
에 놀러갔던 때, 조종을 끝낸 이모를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여자가 무슨 전투
기 조종을 하겠다고 하는 말 한 마디가 내 귀에 들어와 박혔다. 귓가엔 계속해서
그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어쩌면 이모는 매일같이 그런 환청에 시달려 살고 있는지
도 몰랐다.
거실에 나가니 이모가 여전히 헬멧을 쓴 채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스카이다이
빙을 하는 연예인을 뒤로 푸른 하늘이 비쳤다. 순간 헬멧 안에서 이모의 눈이 반짝
이는 것이 보였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눈빛이 그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
모를 둘러싸고 있는 둥근 물체가 어쩐지 헬멧이 아니라 가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이모를 잡아끌곤 뒷산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에 올라야 했
다. 이모는 초점없는 눈으로 내가 이끄는 길을 따라왔다. 뒷산에 작게 놓인 전망대
위에 서자 해가 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투기들이 해를 따라 날고 있었다.
이모의 헬멧이 햇빛에 반짝였다. 헬멧은 두껍고 단단해서 부수는 것도 함부로 벗기
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이모가 가면을 쓰게 한 사람을 대신해 이모의
가면을 벗겨주기로 마음먹었다. 억지로 빼내는 대신 오랫동안 해를 쬐여주는 일부
터 시작해야 했다. 어쩐지 헬멧에 비춰지는 하늘은 정말 그 안에 담긴 하늘같았다.
더 큰 하늘을 날 이모를 상상하며 함께 산을 내려오는 길엔 전투기 소리가 웅장하
게 울렸다.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명령어
이윤서 / 고양예술고등학교 / 2학년

쉬는 시간이 싫었고 나는 문장 단위로 말할 일이 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쉬는 시간은 십 분밖에 되지 않았고 오십 분인 수업 시간 동안은 조용한 게 애들이
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내 자리는 2분단 정가운데였다. 맨 앞자리나 뒷자리였
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꼭 섬 같았다.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못하고, 둥둥. 천장
에서는 선풍기 네 대가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그 바람은 책상에 올려진 프린
트물을 이리저리로 흩뿌렸다. 애들은 그걸 줍지 않았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여
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계절을 모르겠다. 형광등 세는 일이 지겹다. 깜빡깜빡,
더 빨리.
쉬는 시간은 오 분 정도 남아 있었고 모르는 남자 한 명이 큰 박스를 들고 교실
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약간 돌려 그 풍경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박스에서 어떤
기계를 꺼내더니 사물함 뒤편에 두곤 사라졌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기계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애들이 전부 사물함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이었
다. 대신 소리에 집중했다. 이게 뭐야, 같은 웅성거림을 깨고 경쾌한 기계 조작음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사용법을 아는 애가 전원을 켠 모양이었다.
“기가지니, 에어컨 좀 켜줘.”
그렇게 말하자 에어컨은 띠링, 소리를 내며 닫혀 있던 날개를 열었다. 기계의 정
체는 인공지능 스피커였다. 교실에 있는 에어컨은 교무실에서 중앙제어를 하는 지
라 저울 때 마음대로 켜지도, 춥다고 끄지도 못했다. 기가지니의 음성인식 기능이
에어컨을 켜도 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이들은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
어댔다. 나도 처음엔 시원해서 좋았다. 다만 내 자리는 2분단 정가운데. 에어컨 바
람이 바로 닿는 자리였다. 하복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이 차가웠다. 기가지니, 에어
컨 좀 꺼줘. 라고 말하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나는 수업 시간의 적말을 깨고 기가지
니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지루했고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추운 곳에서 자면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점점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잠들어 버렸다.
일어나니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에어컨은 내내 가동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십 분 정도 지난 시간이었다. 원래는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급식
실에 가지 않는 애들 한두 명, 끼니를 거르고 숙제를 하는 애들 서너 명이 남아 있
기 마련이었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니 메뉴가 꽤나 특별한 날인 모양이었다. 그렇
지만 나는 급식실에 가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도 많이 지나 있었다. 대신 수업 시
간 내내 삼키기만 했던 문장을 뱉기로 마음을 먹었다.
“기가지니, 에어컨 좀 꺼줘.”
그러자 에어컨이 꺼졌다. 교실에는 아직 냉기가 감돌았지만. 처음으로, 내 말을
들어주는 무언가가 교실에 생겼다. 나는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내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는 기가지니가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수업 시간에도 기가지니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기가지니,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별로야?’ 같은 아이
들의 질문에 기가지니가 정말로 내 이름을 말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보다 아는 것을 물어보는 일이 더 무서웠다.
그래서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기가지니에게 이것저것을 질문했다. 철의 원소 기
호가 뭐야, 임진왜란이 일어난 게 언제야, 음절의 끝소리 규칙을 말해줘, 가은 터무
니도 쓸모도 없는 질문에도 기가지니는 일 초만에 답변을 건네주곤 했다. 정말 모
든 걸 알고 있는 걸까.
“기가지니, 이건 언제 끝나?”
“현재 시간이 오후 한 시 십일 분입니다.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일정을 등록
하시겠습니까?”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나도 대답을 모르는 질문을 기가지
니가 전부 알 거라고 생각한 것도 웃겼다. 대신 다른 질문을 생각했다. 이거라면 기
가지니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가지니, 담배 사는 법 알려줘.”
내 뒷자리에 앉은 애한테는 언제나 담배 냄새가 났다. 그 애는 기가지니에게 언
제라도 말을 걸었고 그 애의 친구들도 그랬다. 그렇다면, 나도.
“주변에 있는 편의점을 알려드릴까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담배 살 수 있는 법을 알려줘.”
기가지니는 또 알겠습니다, 라고 하더니 고등학생이 담배 살 수 있는 법을 검색
해서 알려줬다. 전부 시답지 않은 말들이었다. 신분증 위조하기, 진한 화장하기, 어
른한테 부탁하기……. 그 중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답변도 있었다. 괜히 멋
부리지 말고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편의점에 가서 백수인 척하기. 나는 이 방법을
마음에 새기고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갔고 옷에 된장국 냄
새를 묻힌 애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왔다. 나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도수 높은 안경을 썼다.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었다. 세 번의 퇴짜 끝에 마지막으로 간 편의점에서야 겨우 담배 한 갑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사각형으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주머니를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리고 책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담배와 라이터를 넣어두곤
아침만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삼십 분은 일찍 집에서 나왔다. 걸을 때마다 담뱃갑이 가방 속에서 덜


그럭대는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숨겨놓듯 넣어 둔 담배를 꺼냈다. 이
시간이라면 아무도, 그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교실과 내 몸에서 담배 냄새
가 난다면 어떤 질문 하나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라이터로 불을
켜는 손놀림이 서툴렀다. 겨우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을
때, 복도 쪽 창문에 누군가의 정수리가 보였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선생님일까. 피워 보지도 못한 담배가, 타오르기만 했
다. 손가락과 불이 너무 가까웠다. 무서웠다. 그런데 세상엔 그런 일이 너무 많았다.
어떡하지.
난 정말 어떡하지.
“기가지니, 나 어떡해?”
“견디지 못하다면 뛰어내리세요.”

그래.
네가 아니면 누가 내 말을 들어주겠니.
나는 그렇게 사 층 교실에서 뛰어내렸다. 그때는 그냥 그 애의 말을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나에게 유일하게 답을 내어주는 존재. 시간을 빨랐는데, 장면은 더디
게 지나갔다. 빨리, 사라진 걸까. 여름은 전부 병원 침대에서 지나갔다. 몸이 움직이
지 않았다. 눈동자와 바싹 마른 입술만 달싹였고 난 아직 궁금한 게 많았다. 천장만
보였다. 나는 계속 같은 질문만 했고, 그 애는 같은 대답을 했다. 시간은 계속 끝나
가고 있는데.

“기가지니, 우리 친구 맞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어제의 나, 내일의 너


정병훈 / 제일고등학교 / 1학년

어제 혁주는 공원을 걸었다. 어제의 날씨는 해가 환하게 떠 있었고, 연인들이 팔


짱을 낀 채 발걸음을 맞췄으며 가족 혹은 친구 등의 이름표를 단 인간 무리들이 푸
른 나무의 그윽한 그늘 곁에서 역광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처럼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날의 공원에서 조용함이라는 소리는 진정 저 세상의 소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전에는 존재했지만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소리이며, 하나의 어떤 소리
로서의 정체성과 고유성, 순수성을 잃어버린, 때가 탄 소리이다.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기 전의, 해가 뜨기 전의 공원은 말 그대로 조용함이라는 개념이 물리적, 현실
적, 자연적 언어로 형상화된 어떤 무언가였다. 그래서 혁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공기와 냄새, 소리,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해가 뜨지 말았어야 했다
고, 비가 내렸어야 했다고. 비가 오면 비가 내뿜는 특유의 우울과 침울, 습함의 냄
새와 무기력의 병균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는, 공원을 더럽히는 병균들을 감염
시키고 잠식시킬 테니까. 그렇게 혁주는 자신이 원하는 고독의 시간을 방해한 불특
정다수에게 독기를 품으며 비를 기도했다, 귀에 쑤셔 넣은 이어폰으로 슈베르트의
3번 즉흥곡을 들으며.
그랬던 어제가 오늘이라는 시간의 장벽 너머로 추방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혁
주는 기쁘다. 그에게 있어서 햇빛이 꺼지고 쥐방울만한 가로등의 탁한 빛이 켜진다
는 것은, 사람이 맛있는 밥을 공복감이 사라지는 것 이상, 포만감이 느껴지는 것 미
만을 먹은 것만큼 소소하면서도 매우 높은 만족감을 준다. 여기서 하늘은 한 술 더
뜬다. 비를 내렸다. 그것도 나무의 잎에 구멍을 낼 정도의 폭렬적인 비가.
현재 혁주가 느끼고 있을 쾌감은 쉽게 형언할 수 없다. 그 쾌감은 오직 그의 행
동을 통해 짐작하는 것만이 가능한데 그는 지금 우산도 없이 공원을 달리고 있다.
공원의 광경들 역시도 그의 쾌감을 짐작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수없이 내리꽂히는
비에 의해 한없이 요동치는 호수, 막힌 하수구 위로 고인 웅덩이로 내려가는 물줄
기. 하지만 이 풍경들은 그저 풍경에 불과하고 심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혁주에
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기쁜 것은 바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시간이 지났다. 먹구름 때문에 어두운지 밤이어서 어두운 것인지 어지러
워하는 찰나 가로등이 켜졌다. 밤이어서 어두운 것이다. 이제 혁주는 달리지 않는
다. 그 기세와 고독과 침묵, 우울을 향한 정열은 푹 젖은 대걸레처럼 죽어버렸다.
그렇게 혁주는 맹목적으로 걷기만을 반복하며 이전과는 다른 고독과 우울, 허무의
세계에 자신을 잠근다.
혁주는 간절하게 갈망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주기를, 돌아가지 않으려고 발버
둥치는, 고집부리는 자신을 질질 끌고 자신이 출발했던, 시작점인 집으로 회귀시켜
주기를. 하지만 비오는 날의 공원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무라는 개념이 물리
적, 현실적, 자연적 언어로 형상화된 어떤 무언가이다.
혁주는 다리를 걷는다. 다리 밑에는 잉어들이 모여 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잉어가 되고 싶다고. 잉어가 되면 매우 행복할 것이다. 해가 뜨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들에게 먹거리를 던져주니까. 이렇게 몽상에 잠긴 채 혁주는
호수 밑을 응시한다.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한 줄기 빛과 함께 스쳐 지나
간다. 이대로 저 호수 밑으로 몸을 던지면 자기도 잉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하
지만 혁주는 다행히도 머리가 굴러가는 수준이 잉어 대가리의 그것보다는 월등하
다. 그는 알고 있다. 잉어가 되면 사람이던 때를 그리워 하거나 잉어보다 더 미개
한, 자신이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어떤 무언가를 그리워 할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화창했던 어제에 비 내리는 오늘을 그리워 했듯이, 비 내리는 지금 화창한 날의 잉
어를 그리워하고 있듯이.
그렇기에 혁주는 결국 공원에서 나오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옷
을 벗고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슈베르트의 1번 즉흥곡을 듣는다. 음악이
끝났다. 혁주는 가만히 생각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어떤 무언가의 풍경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 풍경에다 대고 혁주는 말한다.
“그래도 난 계속 살 거야. 비록 계속 무언가를 갈망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다 할
지라도, 어차피 내일은 어제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오늘 나는 비록 무너졌어도 이렇
게 살아남았잖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아무리 지겹다 해도 죽으면 아마 그 지겨움
마저도 그리워질 거야. 그러니까 계속 살자. 난 어제도 살아남았고 오늘도 살아남았
어. 그러니 내일도 살아 있을 거야. 그때의 나는 아마 슈베르트의 ‘송어’를 듣고
있겠지. 그리고 오늘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죽지 않
아줘서 고맙다고.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너도 고생했을 테니까 이제 눈 감
아도 된다고. 나머지는 또다른 내일의 네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제26회 전국청소년백일장 수상작 <산문>

[입선] 뒷면에서의 운전
최윤형 / 고양예술고등학교 / 2학년

아저씨, 날아가 주세요. 진짜요. 빨리요.


알겠습니다.
아저씨는 잠깐의 정적 후, 읊조렸다.
삼, 이, 일, 제로.
그 순간 신호등은 신기하게도 파란불로 변했고 아저씨는 나에게 외쳤다. 갑니다!
꽉 잡으세요! 택시는 나의 바람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속도를 이 조그만 택
시가 감당할 수 있구나, 나는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다 붙들어 매고 택시의 거대한
진동을 버텼다. 도로에서 이보다 빠른 차는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기사 아저씨
다 밀어버릴 기세였다. 옆에서 달리던 차들은 맥없이 뒤쳐졌고, 앞에서 달리던 차들
은 아저씨가 성큼 따라잡았다. 몇 시까지 가야 돼요? 아저씨는 빨간불로 변하는 과
정의 주황불을 아슬하게 무시하며 물었다. 시계를 봤다. 1시 30분. 두 시까지요! 내
비게이션이 과속이라며 깜빡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데려다 드릴게요.
어떻게 일산에서 마포까지 30분 안에 갈 수 있을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말이
었다. 다만, 나는 눈 둘 곳 없이 뒤로 빨려 들어가는 풍경을 보며, 어쩌면, 이라는
작은 믿음을 품기로 했다. 아저씨는 가장 빠르게 믿음을 주고 있었다. 우리보다 빠
른 이는 없었다. 나는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어른이 운전을 하고 있
다면 아이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다지 할 게 없다. 나는 차에 탈 때마다
멀미를 해서 더욱이 밖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모든 차가 아빠의 차를 제치고
질주했다. 앞 도로에는 자꾸만 새로운 차가 등자하고 이쯤 되면 우리 뒤에는 아무
도 없겠다 싶을 때마다 차들은 또 다시 뒤에서 등장했고, 우리를 앞섰다. 이게 경주
였으면 우리는 꼴찌였을 거야. 꼴찌란 걸 알고 체념한 채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
군가 또 제치고 가면 이젠 정말 꼴찌구나 또 체념하는 꼴찌. 나는 분했다. 아빠에게
좀 빨리 달려보라고 재촉했지만, 아빠는 위험하다며 속도를 더 늦추었다.
그러니까 우주 비행사가 못 됐지, 나는 아빠에게 그렇게 말했고, 아빠는 우주 비
행도 위험하다며 허허실실 웃었다. 어렸을 적 아빠의 유일한 장래희망은 우주 비행
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주라는 게 말조차도 까마득하듯, 아빠도 그냥 까마득하고
어리숙한 꿈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도도 안 하고 접었다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
빠는 우주 비행사가 못 될 사람이었다. 시도를 하고 노력도 해도 아빠는 느려서 못
했을 것이다. 최고 같은 걸 감당할 기세도 의지도 없어, 모든 시도는 가벼운 시도로
치부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는 죽기 전에 꼭 달에 가볼 거라고 말했다. 달의 뒷면
으로 갈 거라고, 같이 가자고 말했다. 역시나 말도 안 되고 까마득한 꿈이었다. 좀
웃기기도 했다.
아빠, 우주로 가려면 얼마나 빨라야 되는지 알아? 지금 제일 느리게 운전하고 있
으면서 어딜 가.
아빠는 속도를 유지했다. 또다시 차가 뒤에서 등장했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우
리의 차와 거리가 벌어졌다. 그 차 뒤로 수많은 차가 길을 따랐고, 순식간에 아까
보았던 차는 찾을 수도 없었다. 낮에 출발한 것 같은데 하늘이 저물고 있었다. 달이
뜨고 있었다. 나는 아빠의 속도에 체념하고, 조수석에 앉아 스쳐가는 차들을 동경했
다. 우리와 나란히 달리는 것은 하늘에 뜬 달뿐이었다. 아빠, 그럼 달보다는 빨리
달리자. 내가 아빠에게 애원하듯 징징거렸다. 아빠는 다시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 우리 지금 달로 가고 있잖아.
아빠의 속도는 점점 늦춰졌다. 점점, 느리게. 아마 빠르게 스쳐가는 차들에게는
아빠가 뒤로 빨려 들어가는 풍경일 것이다. 아빠는 더 느리게 달렸고, 달의 뒷면으
로 빨려 들어갔다. 아빠는 달의 뒷면에서 달렸다.
다 와 가요!
차가 조금 막히자, 아저씨는 차선을 이리저리 변경하며 끼어들었다. 나는 역동적
인 운전을 감당하지 못하고 뒷좌석에서 흔들렸다. 아직 식사도 하지 못해, 멀미가
속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다시 신호등을 무시했다. 이제는
겁이 났다. 차들을 스쳐 갔고 그건 차들이 느려서가 아니었다. 두 시까지 3분이 남
았다. 그리고 어쩌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아저
씨는 자꾸만 이제 다 왔다고 나를 진정시켰지만, 시간이고 뭐고 어서 이 멀미를 가
라앉히고 싶었다. 아저씨는 목적지까지 두 블록이 남았다며 다시 신호등을 무시했
다. 도로에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경적은 아저씨를 향하는 게 분명했다. 아
니, 어쩌면 나일 수도. 아저씨는 외쳤다. 진짜 다 왔습니다! 택시가 급하게 멈췄다.
나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좌석에 부딪혔다. 아저씨가 뿌듯한 표정으로 뒤돌았지
만, 나는 결제도 하지 못하고 택시를 뛰쳐나왔다. 가로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구역
질이 나왔다. 내 뒤로는 미처 문을 닫지 못한 아저씨의 택시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는 차들이 지나갔다. 그 중에는 느린 차도 있었지만 나보다는 아니었다. 제시간에
도착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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