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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동아리는 이미 반쯤 망했다.

하는 일이라고 는 잔소리밖에 없는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한 오비(0. B.)들을 막지 못한 게 큰 패인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80
년대에도 잡지 않았을 동아 리 내 군기를 운운하는 인간들이 뻔질나게 동방에 드나 드니 신입이
빠져나가는 건 당연지사. 그러니 동아리 전 체가 고인 물 판이 되는 것도 금방이다.

“야....... 그 정도는 아니다.”

“그건 네가 오비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박상희가 그 말에 죽상을 한다. 이번에 울며 겨자 먹 기로 오비 모임 회장을 맡더니 그새 약간의


책임감이라 도 생긴 모양이다.

"넌 여기까지 와서 꼭 그런 소리를 해야겠냐? 누가 보 면 네가 신입인 줄 알겠다."

얼씨구. 신규호는 성을 팍 내는 박상희를 보며 헛웃음

을 터트렸다.

"가라면 가고 갈까?"

이쪽이야 아쉬울 거 없다. 그렇게 말하며 뒷문을 가리 키자 박상희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 쪽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눈이 마주친다. 친구가 삐죽대 며 말했다.

“넌 활동 기수로서 최소한의 양심도 없어?"

동아리에 막 신입 부원까지 받았는데, 행사마다 자리 가 너무 비니 죽겠다는 현직 회장의 SOS


콜을 받자마자 이곳저곳 다 연락을 넣고 다닌 오비 회장다운 말이다. 하지만 별 설득력은 없었다.
규호는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무슨 양심. 넌 양심 지키려고 동아리 활동하

나보다?"

"아, 몰라, 앉아, 새끼야."

이제는 짜증까지 부리며 박상희가 옷을 끌어당긴다. 어차피 진짜 자리를 뜰 생각은 아니었던


터라 신규호는 키득대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행히 자리가 조금씩 차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사회를 맡은 현직 회장의 얼굴도 그와 함께 점차 밝아져 갔다.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게.

하기야 학기 초반, 이런 행사에서 동아리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이유야


뭐가 됐든 '필 참'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를 조성해 놓아야 그 나마 사람이 덜 빠져나가는
게 동아리다. 더군다나 이 자리는 이제 막 들어온 신입 동아리원들이 간단한 놀이 기획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적당한 수의 청자가 없다면 기운도 의욕도 쏙 빠질 법한.
필참 운운하는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역시 그런 분위기 없이는 도저히 굴러가지
않는 이 동아 리 체제를 어떻게든 굴려 보려는 임원진에게 약간의 연 민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지금 임원진 대부분은 그의 동기들이었고, 신규호는 대학교 내에 있 는 이런 작은
모임의 임원진이란 무릇 임기 내내 동기들 을 향한 배신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리기 마련이라는 사
실을 잘 알았다.

"3 조 기획안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총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이 기획안 발표 자리에 와 있을 이유가 없다. 박상희는 겨우


두 시간이 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관심도 없고 가지도 않을 여 행 기획을 들으며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글쎄. 그로서는 퍽 인류애적인 행위였다.

"저는 발표를 맡은 서윤건입니다."

연단 쪽으로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하나 올라왔을 때 '내가 지금 그 인류애에 대한 보답을 받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키가 큰 건지, 다리가 긴 건지, 아니면 얼굴이 작은 건 지. 그도 아니면 전부인 건지 모를 놈이었다.


하얀 맨투 맨에 위에 청 재킷을 입은, 별다를 것도 없는 코디가 그 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1
학년인가? 신규호는 발표를 듣는 척 발표자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피부가 군대를 다녀온
피부라고 보기 어려웠다. 근데 1 학년이 이 동아 리에 왜 들었지? 그것도 저렇게 생긴 사람이?

의문은 연쇄적으로 생겨났다. 여기가 밖에서 보기엔 그럭저럭 무난해 보이나? 그냥 심심풀이? 곧
나갈 건 가? 그러기엔 발표를 너무 열심히 하는데. 아직 분위기 가 어떤지 모르나? 아니면 설마
이런 걸 사회 경험의 기 회로 생각하는 호구?

“...야."

발표가 반쯤 지났을 때, 규호는 슬쩍 박상희를 건드렸 다. 폰을 두드리던 박상희가 움찔하며


이쪽을 본다.

“쟤 새로 들어온 애야?"

"누구, 발표자?"

"엉."

"아....... 어, 뭐, 거의, 예전에 활동하다 한 기수 하고 쉬었대. 그래서 지금 애들하고 동기처럼


지내.”

"쉬어? 나간거 아니고?"

"아니. 그때 뭐 군대 다녀왔다던데. 그러고 복학해서 몇 학기 다니다가 이번에 이 활동 끝맺는다고


왔단다.”
이 활동을 굳이 왜 끝맺어……………? 황당한 기분을 눌러 담은 채 박상희를 보았으나 상대는
다시 핸드폰으로 고 개를 돌린 뒤였다. 규호는 다시 시선을 바로 했다. 군대 도 다녀왔다니, 이쪽
생각보다는 나이가 있나, 싶었다.

“근데 지금 보니까 쟤 좀 생겼네.” 문득 다시 고개를 든 박상희가 툭 내뱉는다.

"여자애들이 좋아하겠다."

그러면서 혀를 찼다. 또 오징어 되겠네... 한숨 같 은 말을 덧붙이며.

“딱히 쟤가 없다고 오징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자 박상희가 또 성질을 부린다. 머리에 떠 오른 생각은 더 고심한 뒤에 입 밖으로


내뱉으란다. 신 규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직설적인 편이었으나 그 렇다고 생각하는 걸 전부
내뱉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는 좀 전에 박상희가 한 말을 듣자마자 떠오 른 생각을
발설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상으로 발표 마치겠습니다."

잴 여자애들만 좋아하겠냐, 뭐 그런 생각.

***

규호가 동아리에 들어온 건 1 년 전 일이다. '여행부 대'라는 동아리명이 너무 촌스럽고 이상해서


한참 거부 했지만, 아는 형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라고 하도 유혹을 하기에 결국 넘어가
버렸다. 뭐, 그때는 정말 그 런 분위기였으니까 그 형이 사기를 친 건 아니다. 이쪽 을 그렇게 꼬셔
놓고 졸업과 함께 활동 기수가 끝나자마 자동아리에 발걸음을 뚝 끊어 버린 게 좀 괘씸하긴 했
지만, 이해한다. 혼자 남은 기분이라 좀 서운했던 것과 별개로, 객관적으로 보면 졸업까지 한
인간이 대학 동아 리에 들락날락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는 이거 추진 못 하고요. 기획이 너무 엉 성해요. 시간별로 딱딱 나눠서 정리해야죠."

달리 말해 이 동아리는 객관적으로 이상하다.

"저희가 비록 명목상 대학 동아리라고는 하지만, 지 금까지 나름대로 20 년을 이어 온 전통 있는


중앙 동아 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활동해 왔는데, 그걸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지…………….”

"제가 늦게 와서 전부 다 듣진 못했는데요. 제가 들은 것만 보면 이 부분이 좀…………."

신규호는 졸업한 지 한참 지난 사람들이 하나씩 자리 를 꿰차고 앉아 평론가라도 된 양 떠들어


대고 있는 풍 경을 보며 혀를 찼다. 누가 들으면 신입 부원들이 몇억, 아니 몇십억이 걸린
프로젝트에 지원하고 있는 줄 알겠 다. 늦게 와서 다 듣지도 못한 프레젠테이션에 굳이 굳 이
한마디 보태겠다는 그 의욕도 참으로 대단했다.
"표정 관리 좀 해라......."

옆에서 이쪽을 꼬집으며 박상희가 그런다. 규호는 건 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삐딱하게
틀었다. 그리 고 흘끔, 연단 쪽을 바라보았다.

"네, 선배님들. 말씀 감사합니다.”

당황한 기색이 있다면 슬슬 선배들 말을 끊어 볼 참이 었으나 발표자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낭패감을 숨기 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경직된 미소는 아닌 것 같았 다.

"먼저 마지막 질문 주신 선배님. 짚어 주신 부분에 대 한 답은 나눠 드린 유인물 2 쪽 하단에


기재되어 있습니 다. 일정이 바쁘시다 보니 말씀하신 대로 늦게 오셔서 미처 확인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확인 한 번만 부탁 드립니다."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 피드백 주신 선배님, 감사합니다. 다만 본래 받은 기획의 주제가 느슨한 힐링


여행이었고 그 틀 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안을 짰기 때문에 세부 일정보 다는 테마에
집중했습니다. 세부 일정 발표는 다음 주에 다시 한번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살 웃으면서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를 않는다. 아…… 옆에 앉은 박상희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리에 앉은 오비들의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동아리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 는 꼬투리…… 아, 죄송합니다. 피드백에 대해


답변드 리겠습니다.”

그즈음 되자 신규호도 정신이 멍했다. 혹시 자신이 이 분위기가 너무 싫어 어느 순간 망상을


시작했던가, 싶을정도였다.

"선배님, 피드백이라는 건 특정 부분에 대해 정확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더 긍정적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것을 주로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한 게 피드백인지 한 번 생각을 해봐 라, 이거였다. 이제는 이명이 들리는 거 같다.


이게 만약 방송이면 저건 방송 사고 아닌가? 그러나 서슴없이 폭 탄을 던져 대는 남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평온하다 뿐인 가. 그는 사르르 웃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태연하게 제 발표에 마침표를 찍으며.

***

"그 오빠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라던데."


고기를 철판 위에 올리자 치익, 소리가 난다. 소민이 그대로 고기를 집게로 꾹 눌렀다.

"오빠? 걔가 너한테 오빠야?"

"몰랐어요? 걔랑 오빠랑… 아, 걔래. 그 오빠랑 오빠 랑 동갑이에요."

"아, 그래? 그렇게 안 보였는데."

군대 다녀왔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이쪽보 다는 어리지 않을까 했다. 얕잡아 본 게


아니라, 피부가 말간 게 영 어려 보여서. 동갑…… 신규호는 속으로 스 물다섯, 하고 중얼댔다.

“오늘은 근데 좀 의외긴 했어요. 난 처음에 막 무슨 말 을 들어도 웃길래 와, 사회성 진짜 좋다,


했는데 그게 진 짜그냥 웃는 거였나. 생각해 보면 약간 같잖아서 웃긴 다, 이런 느낌으로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 말도 잘하더라."

"처음엔 헐, 저러고 그냥 동아리 뜨려나 보다. 했는데 또 보면 그건 아닌 거 같죠? 동아리 활동 꽤


열심히 하기 도 하고…………. 뭐, 그래서인지 뭔지, 보니까 자기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 많던데요.
오늘 그런 것도 위쪽을 좀 싫 어해서 그런 거지, 동기들한텐 말 절대 그렇게 안 한대 요. 다정한
편이라던데."

“하긴, 오늘 선배랍시고 나온 놈들이 하던 꼬라지를 봐라. 좋은 말이 나오겠나."

그렇게 말하며 규호는 소주병을 땄다. 그 말에 소민이 낮게 웃는다. 그러고는 목을 다듬었으나,


이미 그 옆에 앉은 박상희의 눈총을 받은 뒤였다.

"너넨 대체 누구 편이냐?"

잔뜩 뿔이 난 어조로 박상희가 묻는다. 누구 편이긴. 규호는 헛웃음을 쳤다. 맞은편에 앉은 소민이


슬쩍 눈치 를 준다. 꽁해 앉아 있는 박상희를 곁눈질하며 소민이 고개를 잘게 저어 보였다.

"아, 개새끼 진짜 그 새끼 때문에 오비들은 존나 난리 났다고. 괜히 나한테 화풀이하고…... 아오,


썅. 누군 할 말 없어서 조용히 있냐? 어? 누구는 등신이라 참냐고."

"...어, 뭐. 그러게."

그럼 그냥 말을 하든가, 소리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 랐지만 소민이 갑자기 집게를 넘기며 눈을


부리부리하 게 뜨는 바람에 신규호는 그 말만 겨우 내뱉었다. 적당 히 익은 고기를 싹둑싹둑
자르자, 그사이 핸드폰을 확인 한 박상희가 다시 우는소리를 해 댔다.

"그렇게 지 할 말 다 하고 살 거면 사회생활을 왜 하 냐? 다 같이 사는 세상에…… 동아리를


나오지 말든가. 꾸역꾸역 얼굴 디밀고, 씨발."
눈물 나, 진짜…… 그러면서 눈물 훔치는 시늉까지

한다. 후폭풍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 신규호는 고기만 뒤집으며 눈치를
살폈다. 맞 은편을 훔쳐보니, 소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야. 울지 마."

결국 박상희의 등에 먼저 손을 올린 사람은 신규호였 다. 집게를 넘겨받은 소민이 어색하게 ‘오빠


울지 마세 요'하고 고기를 상희의 접시에 올려 준다.

"아, 그러니까 오비 회장 그거 감투 아니라고, 쓰지 말라니깐 괜히 발목 잡혀서는."

“그땐 그냥 막 사람들이 하라고 하고 그러니까 한 거 지! 개새끼들 맨날 나한테만 지랄이야. 정작


그 서윤건 인가 뭔가한텐 입도 벙긋 못 하면서. 세 보이니까."

"그게…… 그렇긴 하지. 야, 울지 말고 좀 먹어라.

어?"

"진짜 속상하다고……"

박상희가 겨우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훌쩍 댔다. 신규호는 한숨만 작게 내쉬었다.


동갑이지만 일찍 동아리에 든 편이었던 박상희가 오비 회장 후보로 추천 받았을 때 말려야 했다.
그냥 들고 일어나서 철천지원수 인양이 새끼가 무슨 회장감이냐고 따지고 들 것을.

좀 비굴한 면은 있지만, 박상희는 천성이 못된 놈은 아니다. 도리어 속이 여리고 남 눈치를


지나치게 봐서 + 본인만 손해 보는 타입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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