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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한 나의 후배님[합본]

벚꽃그리고

윤이아 직작 (뉴토끼)

공금 갠소 교불

- 목차 -

1.

2.

3.

4.

5.

6.

1.

“선배.”
말간 웃음과 함께 천천히 밀려 올라가는 매혹적인 입술 사이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에요.”

가슴이 녹아내릴 것같이 부드러운 음성임에도 바닥으로 떨어지면 와장창 깨져 버릴 것같이 심장이 꽁꽁
얼어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

꾹 눌러 문 입술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자잘하게 떨리는 손끝은 꼭 말아 쥔 손바닥 사이로 숨겼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차마 감추지 못했다.

피식-

작게 들려오는 웃음소리.

이 와중에 시선을 단숨에 빼앗는 눈부신 미소.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이건 꿈일 거야.’

그것도 지독하게 끔찍한 악몽.

차마 도리질 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춘 얼굴이 창밖에 쌓인 눈처럼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좀 서운할 거 같은데.”

“…….”

여유로운 음성에서 이질적인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마주할 때마다
억지로 누르고 애써 감추려 했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

용기 내 벌린 입술 사이로 차마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던, 아니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마주 보고 있을 뿐인데 급격하게 빨라지는 심박 수와 거칠어지는 숨결에 애써 제대로 잡으려는


정신이 자꾸만 자리를 벗어났다.

“지안 선배.”

흡.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날 밤 거친 호흡과 함께 셀 수 없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던 자신의 이름.

“보고 싶었어요.”

세상이 무너진 게 분명해. 순식간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 ◆ □

“죽어야지! 죽어야지!”

“야. 그렇게 해서 죽겠냐. 더 세게 박아. 어디 보자. 저기 뾰족한 모퉁이! 저기가 딱이다.”

“야!”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배까지 잡고 깔깔 웃어 대는 최하은 덕에 안 그래도 예민해진 신경이 점점 더


뾰족해졌다.

“넌 지금 이게 즐겁냐?”

“야. 생각을 해 봐.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니?”

“그만 웃어라.”

“그럼 울까?”

끌어 오르는 웃음을 참을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에 잔뜩 날이 선 눈빛을 날려 보았지만 웃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너 같은 걸 내가 친구라고…….”

“에이. 왜 그래. 난 네가 내 친구여서 너무 기쁘다. 지안아. 자, 한잔해.”

앞에 놓인 빈 맥주 캔을 친절하게 치워 주고 내미는 맥주 캔을 신경질적인 손길로 낚아채듯 잡았다.

뒤엉킨 머릿속이 도통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긴 그동안 온전히 정리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될 리가


없지. 그저 남의 일인 친구는 밀려올라 간 입술을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쁜 년. 좋냐? 좋아?”

작게 터진 한숨과 함께 짜증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야. 나 오늘 회사에서 위에서 깨지고 아래서는 덤비고 엄청 우울했거든. 근데 친구야. 네


덕에 그 우울함이 아주 싹 사라졌다.”

“나 정말 죽을까?”

“에이. 뭐 그런 일로 죽어.”

“그럼 어쩌지?”

“조금 기다려 봐. 혹시 알아?”

“혹시 뭐!”

“쪽팔려서 죽을지도 모르지……. 크크.”

“이게 진짜!”
휙 날아오는 휴지를 가뿐히 받아서 눈물까지 닦는 시늉을 마친 하은이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어떻디?”

“……뭐가.”

“오석한. 어때? 여전히 잘생겼어?”

“지금 그게 중요해? 지금 그게 궁금하냐고!”

“당연하지! 우리 학과 10 년을 통틀어 그런 인물 없었다. 얼굴로 아주 학교를 씹어 먹던 앤데. 어떻게


그게 안 궁금해.”

“학교 10 년도 안 다녔으면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몰라!”

“어때? 여전히 보기만 해도 찌릿찌릿해?”

“소름이 돋아서 찌릿찌릿하더라.”

“아니. 그런 거 말고 너 그날처럼…….”

“악. 몰라! 그만 말해.”

하아- 하아-

“야! 유지안. 한숨 좀 그만 쉬어!”

“나 회사 그만둘까 봐.”

“얘가 미쳤나. 어떻게 들어간 회사인데 그만둬. 이게 돌았나.”

“지금 확실히 결정해야 해. 회사를 그만두는 게 더 미친 짓일까. 아니면 그냥 걔를 보면서 회사에 다니는
게 더 미친 짓일까.”

“둘 다 뭐 정상은 아니지.”

도움 안 되는 것.

아무리 한숨을 쉬고 걱정을 한가득 해 봐야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내가 진짜. 왜 그랬을까.”

조금만 더 하면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머금은 지안의 어깨 위로 톡톡 위로의 손길이 닿았다.

“친구야.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위로는 전혀 위로되지 않았고, 취하라고 정신없이 넘기는 술에 취하기는커녕 점점 정신은 또렷해져만 갔다.

오지 말았으면 했던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 왔다.


휴가를 내야 할까.

새벽까지 마신 술이 채 깨지도 않았는데 정신은 여전히 또렷했다.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들마저 너무나 또렷해 뜨고 있던 눈을 질끈 감았다.

술을 더 마시고 출근해야할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 녀석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후우…… 그래. 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가자!”

묻었던 얼굴을 번쩍 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이미 3 년이나 지난 일이 아니던가.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그래. 유지안. 넌 할 수 있어.”

대체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을 향해 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굿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로운 인사를 건네며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아직 안 온 건가.’

전혀 여유가 없는 마음이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곳저곳을 살피던 눈동자가
팀장실 창문을 향했다.

‘헉.’

정면으로 마주친 까만 눈동자.

분명히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빛의 속도로 몸을 숙여 책상 위로 바짝 엎드렸다.

‘젠장. 왜 저렇게 일찍 왔어. 쓸데없이 부지런해.’


갑작스럽게 들리는 문소리에 재빠르게 책상에서 일어나 아무 일 없는 듯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뚜벅. 뚜벅. 뚜벅.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쿵쿵쿵 여러 번 크게 뛰었다.

팀장실에서 나온 석한이 온화한 눈빛으로 사무실 내부를 한 번 가볍게 훑었다.

“유지안 대리.”

머금은 눈빛만큼 온화한 목소리로 사무실 안에 퍼지는 자신의 이름.

심장이 뚝 떨어진 것처럼 가슴이 세게 쿵 하고 울렸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사무실 직원들의 눈빛에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팀장님.”

“잠깐 팀장실로 오세요.”

뭐 해. 들어오라잖아.

석한이 팀장실로 다시 들어간 후에도 멍하니 자리에 서 있는 지안에게로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살장 소 끌려가듯 무거운 걸음으로 팀장실을 향했다.

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걸음을 멈추었다.

책상 위에 두 팔을 세워 그 위로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석한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오묘한 시선을 담은 까만 눈동자가 지안의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마치 자신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겨서 손으로 쓰다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뜨거운 눈빛.

순식간에 번진 뜨거운 열기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날도 그랬다.

저 눈빛.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는 순간, 석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 닫고 잠깐 이쪽으로 오세요.”

일부러 열어 놨는데…….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직원들 다 들어도 괜찮겠어요?”

지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고 그는 역시 웃었다.

‘이 자식아, 무슨 말 하려고.’

결국,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문을 닫고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팀장님.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슥- 하고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지안이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에 그녀가 책상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털썩 책상 위에 엉덩이를 기대고 앉아 물끄러미


지안을 바라보았다.

선이 매끄러운 이마 위에 모양 좋은 눈썹. 어찌 보면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날카로워 보이는 긴 눈매와


일부러 깎아도 저렇게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뚝 솟은 남성스러운 콧날.

그리고 그 아래 바로 문제의 입술.

손을 뻗어 당장 만져 보고 싶을 만큼 촉촉함을 머금은 관능적이고 매끈한 입술.

하지만 모양과 상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

“…….”

“예쁘다.”

“……!”

“난 긴 것도 좋긴 했는데. 단발도 마음에 드네요.”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모든 말.

그것이 문제였다.

“늘 느낀 건데. 선배는 목선이 너무 예뻐요.”

“……야.”

“당장 물고 빨고 싶을 정도로.”

“야!”

순간적으로 조절되지 않은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열기를 가득 머금은 얼굴 위로 관찰을 하듯 세세하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머물렀다.

여기가 회사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이곳을 향한


시선은 없었다.
큭 소리를 내며 웃는 석한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차마 크게 말하지 못하고 속삭이듯 날을 세웠다.

“여기 회사야. 장난 그만해.”

“장난?”

못 들을 이야기를 들은 듯 잠시 굳었던 그의 얼굴이 금세 여유를 찾았다.

“또 서운하려고 그러네. 장난이라니요. 내가 설마 선배한테 그럴 사람인가요?”

“너. 지금 이러는 것도 장난 같아 보여.”

“그래요?”

“응!”

“장난 아닌데 선배가 장난이라고 그러니까……. 자! 이제 그럼 진지하게 얘기 좀 해 볼까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 얼굴.

감히 말을 걸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에 지안의 몸은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어 갔다.

천천히 기울어진 그의 상체가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멈추었다.

연한 남자 스킨 향기와 오묘하게 뒤섞인 그의 체향이 공기와 함께 지안의 온몸으로 퍼졌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곳이 회사이고, 다른 직원들이 볼 수 있는 오픈된 공간이라는 것도 잊었다.

오로지 숨 막히게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그의 시선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꾹 닫혀 있던 매혹적인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선배가 내 소원 들어줄 차례인가?”

“……!”

나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 석한이 사무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탐색하든 번지는 시선은 여전히 지안에게 머무른 채로.

마치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요한 눈빛이었다.

“커피?”

“…….”

“지금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표정인데. 끝나고 한잔할까요?”

의자에 앉은 석한이 아- 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선배 혹시, 나랑 한 약속 잊어버린 건 아니죠?”


잊었을 리가 없다. 물론 그가 잊길 바라긴 했지.

어차피 모른 척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지안은 알고 있었다.

“야, 오석한…….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제 와서.”

대충 좀 넘어가자. 눈빛에 마음을 담아 힘주어 전했다.

“이미 3 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건 이상하지 않니? 그때 말했으면 몰라도 이건 조금…


….”

“지안 선배.”

“응?”

책상 위를 두드리는 하얗고 유난히 기다란 그의 손가락으로 시선이 쏠렸다.

톡톡 두드리다 살살 책상 위를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끝.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3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이상하리만큼 마주치기만 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몸에 전율과 짜릿함이 퍼졌다.

‘하아. 여기가 좋아요?’

‘선배 여기 만지면 좋아하는구나.’

생생하게 재생되는 기억과 함께 눈앞의 기다란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들었던 감각이 순식간에 떠올라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을 주어 꼭 붙였다.

“아직 소원이 뭔지 말도 안 했는데. 들어 보지도 않고 너무 냉정하다.”

“……뭐? 뭐라고?”

흩어졌던 눈의 초점이 겨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새하얀 피부 위로 붉은 홍조가 물들었다.

얼굴 위로 느껴지는 열기에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저 눈빛을 마주하면 그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 했어요?”

“…….”

“되게 야한 생각 한 거 같은 표정인데.”

지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그와 마주 앉았다.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이니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

“소원이 뭔데?”
꾹 다물어진 그의 입술로 시선을 집중했다.

남자치고 선명한 색을 띠고 있는 붉고 매혹전인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느긋하게 밀려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낯설지 않은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테이블에 살짝 기댄 석한이 얼굴을 기울이며 지안을 내려다보았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선을 가진 얼굴이었지만 내려다보는 눈빛은 지독하게 뇌쇄적이다.

“아…….”

지안이 급습해온 선명한 감각에 몸을 움찔거렸다.

책상 위에 놓인 지안의 손등 위를 부드럽게 스치는 손가락.

툭 튀어나온 손등 뼈에서부터 가느다란 손목을 지나 점점 위로 올라왔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얀 피부 위에 감각을 새기며 솜털을 훑어 나가듯 조심스러운 움직임.

“자…… 잠깐만…….”

어느새 턱까지 훑어 올린 손가락이 귓불을 야릇하게 비볐다.

뜨겁게 달궈진 숨결이 흐르며 얇은 입술 위로 자신의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혹감이 차오른 지안의 눈이 순식간에 창문을 향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 여기 사무실이야.”

“이 각도에서는 안 보여요.”

“그만해.”

“싫으면 피해도 되는데.”

탁.

재빨리 그의 손을 손바닥으로 쳐 내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치지 마. 왜 자꾸…….”

“나랑 자요.”

“……뭐?”

토끼처럼 크게 뜬 눈에 석한이 고개를 돌려 살짝 웃었다.

“나랑 자요. 선배.”


“…….”

“딱…… 열 번만.”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표정.

지안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다시 그녀를 향해 뻗어가던 손끝을 거둔 석한이 여유롭게 책상으로 걸어갔다.

“유 대리. 나가 보세요.”

결재 서류를 가지고 팀장실로 들어온 직원을 흘깃 바라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혹여나 자신의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킬까 봐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머금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지안 대리.”

“……네.”

시선을 옮기자 얄밉게 입술을 끌어 올린 그의 얼굴이 보였다.

“방금 내가 얘기한 사안. 내일까지 제출하세요.”

“……네.”

“나가 보세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향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책상에 털썩 주저앉아 재빨리 귀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직도 귓불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길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긴장한 나머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쳐 대는 심장을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한 손으로 셔츠를 부여잡고 뭉근하게 가슴을 문질렀지만, 정신없이 뛰는 심장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 ◆ □ 윤이아

정신적으로 고단한 하루였기에 그저 쉬고 싶은 마음에 샤워를 마치고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다.

사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여겼다. 이미 3 년이나 지난 일, 거절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아. 근데 불편해.”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워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나이도 어린데 무슨 팀장이야.”

팀원이라도 되면 그냥 없는 사람인 척 지내면 될 텐데.

지이잉.

[선배. 어디예요?]

모르는 번호의 문자였다. 하지만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손도 대지 않고 핸드폰 액정에 떠 있는 문자를 노려보았다.

답변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이잉.

하지만 그도 기다릴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곧바로 도착한 문자에 지안의 눈매가 가득 구겨졌다.

[나 선배 집 앞인데.]

“뭐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잡았다.

Rrrrrr Rrrrr.

시끄럽게 벨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많이 당황했어요?

웃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에 작게 한숨 쉬었다.

-집 앞이에요. 잠깐 나와요.

“왜?”

-그럼 벨 눌러도 돼요?

“야.”

-나야 그럼 좋은데. 선배가 싫어할 거 같아서요. 집앞에서 기다릴게요.

진짜 찾아오고도 남을 녀석인 걸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 대충 껴입은 티셔츠와 바지.

한참을 거울 앞에서 고민했다.

작은 한숨이 흘렀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그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됐어. 잘 보여서 뭐하게…….”

□ ◆ □

주차장에 내려가자 자동차 보닛에 기대어 있는 석한이 보였다.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초점이 흩어져있던 석한의 눈동자가 지안을 향했다.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왔어요?”

“응.”

역시나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해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타세요.”

보조석 문이 열렸다.

잠시 망설이던 지안이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 올라탔다.

자동차 앞을 둘러 운전석으로 향하는 석한이 피식 웃음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슬그머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동자.

“왜…… 왜 왔어?”

“자고 있었어요?”

“아니. 자려고 그랬지.”

“선배한테 좋은 향기 난다. 샴푸 뭐 써요?”

순식간에 귓가에 다가온 그의 손가락에 흠칫 몸이 떨렸다.

석한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비비자 바짝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면 살 냄샌가?”

“야……!”

목덜미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빠르게 다가온 그의 입술이 지안의 하얀 목 위로 아슬하게 내려앉았다.

“자, 잠깐…… 흐읏…….”

휘두르려던 손이 그의 커다란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꼭 잡아 자신을 향해 당기는 그의 행동에 그녀의 몸이


넓은 가슴 안으로 하릴없이 끌려들어 갔다.

쪼옥-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며 지나갔다.

“으읏. 오석한…… 하지 마.”

“진짜 하지 마요?”

“그래. 으, 으…… 하지 마…….”

내뱉는 말과 다르게 온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과 함께 그의 귓가로 내뱉어졌다.

그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었다.

여전히 아찔하게 붙어 있는 그의 품에서 몸을 빼려고 비틀었지만, 오히려 더 단단하게 잡는 강한 힘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었다.

“야. 오석한. 뭐 하는 짓이야.”

“선배.”

파르르 떨려 오는 눈꺼풀 아래, 당혹감에 물든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후- 하며 새어 나오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자극적으로 입술에 닿았다.

“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읍.”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지안의 입술을 삼킬 듯 덮었다.

밀어낼 틈 없이 말캉한 혀가 깊숙이 침투했다.

파고들어 성마른 움직임으로 입 안을 정신없이 훑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치솟는 열기에 휘감겨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지안의 혀를 강하게 휘감아 빨아 당기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흐응…….”

“하아…… 선배.”

키스 하나에 지안은 몽롱해져 버렸다.


버릇처럼 부르는 선배 소리에 온몸이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살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가 움찔거려 허벅지를 재빨리 모았다.

젖어 드는 몸이 당황스러워 그의 가슴팍에 머물던 주먹으로 그를 세게 밀었다.

“그만해.”

“거짓말.”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행동에 지안이 거부할 수 없이 빨려들어 몽롱하게 젖어 가고 있다는 걸.

“아앗.”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파고든 손이 지안의 풍부한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3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어루만지는 손길이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져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지나칠 정도로 들뜨기 시작하는 온몸의 감각이 차마 제어가 되지 않고 몸이 뒤틀렸다.

검은 망사 브래지어 하나를 두고 그의 손바닥으로 단단하게 일어선 그녀의 유실 끝이 느껴졌다.

“으응…….”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하아. 너무 좋다. 부드러워.”

“흐읏…….”

뜨거운 숨결과 함께 터지는 지독히 낮은 음성.

“선배도 기대하고 나온 거…… 아니에요?”

“아, 아니야…….”

“난 옛날 생각 하면서 기대하고 왔는데…….”

한 손으로 허리를 강하게 당겨 안으며 유두 끝을 살살 문지르는 손바닥 감각에 눈앞이 몽롱해졌다.

“벌써 이렇게 섰으면서.”

“아, 아니…….”

“난 솔직한 게 좋아요.”

“으흣…….”

손 안에서 가득 느껴지는 풍성한 감각에 석한의 숨이 점점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옷을 벗기고 곳곳을 다 빨아 물고 핥고 싶은 마음을 있는 힘껏 꾹 눌렀다.

브래지어 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정점을 꾹 누르더니 원을 그리듯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작은 돌기를 스칠 때마다 데워진 숨결이 자잘하게 터졌다.

“아앗. 잠깐…….”

작은 동작 하나에 온몸을 파고드는 전율이 말도 안 되게 짜릿했다.

그날 느꼈던 그 느낌.

생전 느껴 본 적 없던 황홀하고 야릇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감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야릇하게 데워진 그의 숨이 귓가에 뜨겁게 퍼졌다.

“하아…… 선배…… 지금.”

“…….”

“젖었어요?”

“……흐읏…….”

치사한 자식.

질문하면서도 강하게 유두 끝을 문지르는 손끝에 그에게 감겨 있는 허리가 야릇하게 튕겨 올랐다.

차오르는 쾌감이 마치 견뎌야 할 가혹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면 결국 또 말려 버릴지 모른다.

퍽. 찰싹.

둔탁한 소리와 칠진 소리가 연이어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악!”

“아오! 이 자식 아직 이 못된 버릇 못 버렸네.”

“선배!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때렸지! 아프라고 때렸지! 그럼 안 아프라고 때렸겠냐?”

찰싹찰싹. 가슴, 어깨, 목 언저리를 쳐 대는 지안의 행동에 석한이 방어에 나서자 지안의 몸이 그제야
자유를 찾았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뜨거운 숨결을 뱉어내며 재빨리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내렸다.

훅 하고 두 팔로 어깨를 밀어내는 지안의 행동에 순간 뒤로 밀린 석한의 뒤통수가 운전석 창문에 쿵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상체를 일으키는 석한의 얼굴 위로 날카로운 지안의 시선이 닿았다.

몇 대를 처맞고도 뭐가 좋다고 빙긋 웃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야. 웃지 마.”

“선배. 여전하네요. 아닌가? 더 매력적으로 변한 건가?”

“쓸데없는 소리 하면 입도 한 대 친다.”

“에이. 설마 이렇게 잘난 얼굴에 상처 내려는 건 아니죠?”

저 잘난 건 저도 잘 아는지 매력이 넘치는 미소 위에 장난기가 담긴 눈빛으로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똑바로 떨어지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던 예전의 감정들이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이제는 동하지 않을 거야. 애써 꾹 누른 감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야. 너 경고하는데. 이제 회사에서 네 방으로 나 부르지 마. 알겠어?”

“그건 왜요?”

“질문 금지. 다시 말할게. 나 부르지 마.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물고 빨고 어쩌고저쩌고


알겠어?”

그녀의 말에 말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석한이 스르륵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기분이 찝찝한 미소에 지안이 눈빛에 날을 더 강하게 세웠다.

“회사 아니면 괜찮다는 거네. 나 지금 막 선배 물고 빨고 싶어서 미치겠어.”

“야. 너 그런 말도 이제……. 야! 잠깐! ”

뭐가 이렇게 빨라.

구렁이 담 넘어오듯 허벅지 위를 모양 좋은 손으로 스윽 쓸어 올리며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석한이


지안의 목덜미를 노리며 얼굴을 기울였다.

“아오! 해석 능력도 좋다.”

“악! 아파요.”

“회사든 아니든 하지 말라고!!”

“선배.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요. 회사라면서요.”

유들유들한 그의 말투에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넌 더 맞아도 돼! 아니 더 맞아야 해!”

탁.

무차별 난타를 날리던 그녀의 손이 단숨에 그의 손에 막혔다.


“어…… 어…….”

손목을 확 당기는 강한 힘.

불가항력의 상황에 거침없이 딸려 간 그녀의 몸.

촉-

도톰하고 매력 터지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아주 감질나고 아주 간지럽게.

지안의 눈꺼풀이 끝까지 밀려 올라갔다.

저 멀리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는 그의 짙은 눈동자에 시선이 꽂혔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남자다. 아니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늘 저 눈빛에 꼼짝없이 지금처럼 사고가 멈추곤
했다.

아마도 내가 이상한 거겠지.

미세하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주한 눈빛에 담기는 오묘한 빛으로 보아 그에게 또 생각이 읽혔음이
분명하다.

“선배. 나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거 같은데.”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이 하나만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뭐…… 뭐?”

“나 맞는 거 좋아해. 그것도 선배가 때리는 거면 더 좋고…….”

“야 이…….”

“근데 섹스할 때 맞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어때요. 생각 있어요?”

이게 진짜.

“없어! 없어! 없어! 없다고!”

“아. 왜 없어요!”

날아오는 손을 피하며 그가 맞아도 좋다고 웃었다.

하아하아- 뭔가 억울함에 가빠진 숨을 내뱉으며 지안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그만할게요.”

오늘은?

“확인하고 싶은 건 했고…….”

뭘 확인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통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기에 애써 참았다.

“결정은 했어요?”
“결정? 아…… 싫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내가 너랑 왜 자.”

“왜라…….”

음- 소리를 내며 미간을 잠시 찌푸리던 석한이 뒷좌석에 놓인 가방을 뒤적거렸다.

“명분이 필요하신 거였구나.”

응? 명분?

너랑 자는 데 명분까지 필요해?

“에이. 그럼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요. 선배.”

이미 말투가 불안하다.

“아! 찾았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가 지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 이거면 되겠어요?”

“이게 뭐…… 악! 야! 너 그거 이리 줘!”

어림도 없다는 듯 그의 손에 잡힌 하얀 종이가 위로 쑥 올라갔다.

“이거면 되는 거죠?”

“너 그거 이리 안 줘? 이리 내놔!”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와 다급한 목소리가 번갈아 차 안에 울렸다.

“어우. 야!!”

다급한 몸놀림으로 그의 무릎에 올라타다시피 덤벼들어 겨우 빼앗은 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가슴팍에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

“이렇게 안겨 주면 나야 좋죠.”

허리를 꼭 끌어안고 불룩한 가슴 위로 얼굴을 비비는 그의 행동에 결국 찰진 소리가 또 한 번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야. 너 이걸…… 왜…….”


자세를 바로 잡은 지안이 하얀 종이 위 빼곡한 자신의 글씨를 바라보며 사색이 되었다.

시트에 편하게 머리를 기댄 석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긴요. 선배가 나한테 써 준 건데. 그 소중한 걸 어떻게 버려요.”

이런 건 좀 버려. 이 자식아…….

하얀 종이가 단숨에 지안의 손에 구겨졌다.

“이런 법적으로 아무 효력 없는 문서 가지고 뭘 어쩌겠다고.”

석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자는 데 법적 효력도 필요해요?”

야…… 말이 그렇다고.

“거기 선배가 써 놨잖아요. 선배랑 하루 자면 소원 들어주겠다고.”

근데 왜 그래? 억울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석한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쓰긴 했지. 그런데 이건……. 한숨을 흘리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건, 술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그래서 나랑 안 잤어요?”

“…….”

“잤으면서. 먹튀인가?”

“야!”

“명분도 만들어 줬는데. 그래서 나랑 안 잘 거예요?”

이런 건 명분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협박이라고 하는 겁니다. 팀장님.

“이게 무슨 명분이야! 그냥 술 취해서 한 주사야, 주사.”

“그럼 그날 밤 나한테 안겨서 좋다고 흥분한 것도 주사였어요?”

주사 한번 가슴 떨리게 하네. 작게 읊조리며 빙긋 웃는 석한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아. 맞다!”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석한이 지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지 않았음에도 불안함이 밀려왔다.

“백우 선배. 우리 회사던데…….”

아이씨…….

“선배가 술 한잔하자고 하더라고요.”


윤백우.

서울에서 그에게 전해진 말은 다음 날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서 들을 수 있게 만든다는 남자 아니던가.

백우가 얼마 전에 동창회 총무를 맡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에게 어떤 이야기가 들어가면 퍼지는 건 시간문제.

“동창회도 한번 오라고 하던데.”

“야, 오석한. 백우 마…… 만나서 어쩌려고.”

“아, 맞다. 두 사람 잘 알죠? 그런데 뭘요? 제가 뭐 한대요?”

이번에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동하지 말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지안이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왜 나야?”

“뭐가요?”

“너 여자 많잖아.”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이야기.

그 외모에, 그 집안에, 그 능력이면 차고 넘치는 게 여자일 텐데.

소문에 의하면 그와 한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지안이 생각하기에 자신과 소위 격차가 많이 나는 여자들이


줄을 서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나야?

“그 여자들은 안고 싶지 않으니까.”

“…….”

“선배는 안고 싶고.”

“…….”

“더 무슨 이유가 필요한 거죠?”

간단 명료. 그 자체였다.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열 번이야?”

왜 그가 횟수를 정해서 불렀던 걸까.

잔뜩 찌푸려진 눈매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거야…….”

잠시 생각하던 그가 빙긋 웃었다.

“선배가 백 번 자자고 하면 안 잘 게 뻔하니까.”

하아-

맞잖아요. 안 그래요? 순수하게 물어 오는 석한을 바라보다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저거 치면 깨지겠지.

자신이 너무 깊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이 자식은 정말 말 그대로 단순하게 나랑 자고 싶은 거였다.

지안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와의 섹스는 완벽했다. 그도 그렇게 말했었다.

서로를 품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고, 서로에게 충실했다.

아마도 지금 그의 행동을 끌어낸 원인은 자신일 것이다. 단순히 종이에 적힌 몇 마디 약속 때문이 아닌,
그날의 자신 때문일 것이다.

순간 머리카락 속을 파고드는 감촉에 지안의 작은 몸이 들썩였다.

머리 속을 파고든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돌렸다.

“선배…….”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그에게서 은은하게 익숙한 향기가 퍼졌다.

여전히 같은 화장품이나 향수를 사용함이 분명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타이르듯 조용조용 부드러운 음성이 차 안에 퍼졌다.

“자신한테 조금 솔직해져 봐요.”

“…….”

“날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그거 하나면 되잖아요?”

스르륵, 그의 손이 머리카락 속을 빠져나갔다.

나는 선배 원해요. 빙긋 웃으며 듣기 좋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지안의 손 위로 살며시 얹어졌다.

손끝이 닿은 것만으로 또 몸이 반응했다.

“어……! 내놔.”
구겨진 종이가 방심한 지안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석한의 손에 잡힌 종이가 완벽히 더 구겨졌다.

“……!”

“이거 사본이에요.”

“아…… 진짜!”

큭큭 웃는 석한의 모습에 지안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석한이 시계를 확인하고 창밖의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늦었다. 가서 쉬어요. 선배.”

“…….”

“대답은 내일 들을게요. 알겠죠?”

재빨리 내린 석한이 보조석 문을 열고 내리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차에서 내린 지안이 차와 차 문에 두 팔을 대고 있는 석한의 안에 갇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선배. 나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생겼는데.”

그의 얼굴이 지안의 귓가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의 향기와 함께 온기가 귓가와 목덜미에 퍼졌다.

“아까……. 젖었어요? 안 젖었어요?”

□ ◆ □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다가 이불을 냅다 걷어찼다.

뱉어도 뱉어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젖었어요? 안 젖었어요?’

이 또라이 자식…….

지안의 입술이 윗니에 살며시 비틀렸다.

“술이 문제지, 술이 문제야…….”


얼굴을 베개에 묻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뱉으면서도 술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지안은 알고 있다.

그 날의 지나쳤던 자신의 감정이 문제였음을. 그저 모든 것이 자신의 문제였다.

지나치려던 그를 잡았던 것도 자신이고, 묻었던 감정을 다시 꺼낸 것도 자신이었다.

그날 뭐에 홀려서 그렇게 밀쳐 내던 그에게 그렇게 들이댔을까.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실마저 꺼내 보여 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긴 어차피 떠날 사람인 줄 알지 않았던가.

“근데 왜 하필 또 나타나서는……”

***

출근하자마자 팀장실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오늘 팀장님 회의 가셨다가 점심시간 지나서 오실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가득 담겼던 긴장을 빼어 내고 천천히 업무를 시작했다.

“유 대리, 그거 알아?”

지안의 뒷자리인 한 과장이 의자를 가깝게 끌어와 속삭였다.

“우리 팀장님.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팀장 자리에 앉았나 궁금했었거든.”

“아아…….”

아마도 지안이 아는 이야기일 것 같았다.

“어? 알고 있었어?”

“아, 저도 들었어요…….”

원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와의 관계를 노출하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오앤아트 대표 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니 저 나이에 팀장이지.”

오앤아트.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과 어깨를 함께하는 가구 회사.


2 년 전 지안이 몸담은 ‘프리웰’을 인수한 모회사이기도 하다.

처음에 혹여나 석한을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지만, 그는 미국에 있었고 사업을
번창시키며 오앤아트가 인수한 회사가 적지 않던 터라 마음을 놓았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어쩌면 얼굴은 한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적지 않은 회사 중에 우리 회사, 그것도 우리 부서에 오게 될 줄은 지안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여자는 있으려나?”

“……네?”

“오 팀장. 얼굴 봐. 나 처음에 깜짝 놀랐잖아. 무슨 모델이 걸어오는 줄 알았어. 저 외모에 저 집안이면


여자가 있겠지? 없으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러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왜 자꾸 저한테 들이댈까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 여자들은 안고 싶지 않으니까.’

‘선배는 안고 싶고.’

고민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뱉어 내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가볍게 던진 그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어 더없이 무겁게 자리 잡았다.

너는 그냥 안고 싶은 거겠지.

나는 그게 아닌 걸 알면서.

한 과장이 자리로 돌아가고 초점이 사라진 지안의 눈빛이 의미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다시 너를 밀어낼 수 있을까?’

가느다란 숨결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 □ 이아

점심시간 이후에 들어온다던 석한은 퇴근 시간이 되어 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안은 그의 부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도 부산한 하루였다.

밀려 있던 일들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야근은 필수불가결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사무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업무에 집중하던 지안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웬일이야. 박은준 아니야?”

박은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다시 돌렸던 지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에 웬일이래! 대박. 오늘 완전 계 탔다.”

남다른 신체 비율을 자랑하는, 걸음걸이마저 남다른 남자.

185cm 는 넘는 키에 떡 벌어진 드넓은 어깨.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선글라스를 벗은 그가 보기 좋게 휘어진 눈매로 사무실을 한 번 훑었다.

선글라스 하나 벗을 뿐인데 뭐가 저리 고급진지. 그가 착용하면 무엇이든 판매 1 위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녹아내리는 여직원들의 눈빛을 뒤로 지안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 바짝 다가간 지안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은준씨. 여기는 무슨 일로…….”

여전히 여유롭게 사무실을 둘러보던 은준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유지안 씨 보러 왔는데요?”

아, 망했다.

“아하하. 아, 이번 광고 촬영 때문에 그러신 거죠? 콘셉트랑 관련 자료들 제가 소속사 통해서 다 보내


드렸는데. 미팅 취소된 거…… 모르셨나 봐요?”

적당히 알아듣기를 바라며 유난히 말끝을 올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아, 알아요. 그냥 유지안 씨 보러 온 거예요. 퇴근 안 해요? 나가요. 차 한잔하게…….”

싱글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에 올라오는 한숨을 꾹 밀어 내렸다.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지금 업무가 많이 밀려 있어서.”

“저보다 바쁘신가요?”

아참. 상대는 박은준이지.

현재 광고계 러브콜을 가장 많이 받는, 떠오르는 신예 배우 박은준.

그 앞에서 바쁘다고 말을 던진 지안의 얼굴로 정신 차리라는 듯한 눈빛을 장착한 수많은 시선이 닿았다.

가느다란 숨이 입술로 흘러나왔다.


“네. 나가요. 차 마시러 가죠. 그런데 매니저분은요?”

“그냥 저 혼자 왔어요.”

매니저도 없이 나 만나러 혼자 왔다는 말이지. 고맙다 고마워.

“아, 네. 가시죠. 여기 앞에 카페로 갈까요?”

“네. 저는 아무 데나 좋아요.”

박은준은 이번 프리웰 신제품의 광고 모델이었고, 광고 관련 업무는 지안이 맡고 있던 터라 업무적으로


만난다면 이상한 것이 없을 테지만, 매니저 없이 지안을 보러 왔다는 그의 말에 직원들의 눈은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빨리, 나가죠.”

지안이 재촉하자 수고하세요, 짧은 말을 남긴 은준이 빙긋 웃으며 지안의 뒤를 따랐다.

승강기에 올라타자 지안이 재빨리 은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빠! 뭐야!”

“왜에?”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해!”

“왜. 내가 못 올 곳 왔어?”

잘생긴 얼굴로 뻔뻔하게 답하는 은준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나 완전 모른 척했단 말이야! 근데 이러면 어떡해! 오빠랑 나 사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에이, 왜 그러실까. 근데 정말 바빠?”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는 승준의 손을 가차 없이 쳐 내리고 눈을 흘겼다.

“바빠! 엄청!”

“나 배 엄청 고픈데. 맛난 거 먹으면 안 될까? 너도 저녁은 먹을 거 아니야.”

“아, 몰라.”

“응? 먹자. 지안아.”

“근데 오빠 안 바빠? 오늘 스케쥴 없어?”

“우리 지안이 보고 싶어서 비웠지.”

또다시 어깨를 끌어안는 손을 가볍게 제압했다.

“어디서 약을 팔아.”

“어라? 진짜인데?”

잘생긴 얼굴 위로 결백의 눈빛을 담으니 더는 따질 수가 없었다.


“알았어. 대신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아무튼, 유지안 냉정한 건 알아줘야 해…….”

“나 지금 돌아가면 변명할 게 산더미거든? 머리 아프게 하지 마라. 응?”

“그래서, 밥은 먹는다는 거지?”

결국, 회사 앞 한정식집을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은준을 돌려보내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차라리 다들 퇴근한 것이 낫겠다 싶다.

안 그러면 수도 없는 질문이 쏟아질 테니.

“아우, 갑자기 왜 찾아와서는.”

사무실에 도착한 지안이 조심스럽게 사무실 내부를 살폈다.

조용한 사무실.

“유 대리 왔어?”

다행히 모두 퇴근하고 박 차장님만 남아 있는 상황.

평소에 말수 자체가 없는 사람이기에 마음이 놓였다.

“다들 퇴근하셨어요?”

“응. 나도 이제 가. 야근이야?”

“네.”

은준이 나타나는 바람에 더 늦어졌다.

“수고해.”

박 차장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하아- 뭐가 이렇게 많냐.”

입으로 연신 은준을 욕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딸깍.

조용한 사무실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지안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 대리.”

“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반쯤 불이 꺼진 어두운 사무실에 어른거리는 익숙한 실루엣에 숨을 삼켰다.

석한이었다.

문에 비스듬히 기댄 그가 지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아무도 없음에도 괜히 주변을 살피며 팀장실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로 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

그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선배, 잠깐 나 좀 볼까요?”

“……응?”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도 없으니까, 내 방에서 봐도 되죠?”

대답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석한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지안이 걸음을 옮겼다.

“왜?”

“문 닫아요.”

“아무도 없어.”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앞에 멈춰 선 석한. 그리고 스치는 은은한 향기.

자신을 향해 직설적으로 떨어지는 그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밀려왔다.

“흡…….”

반걸음.

자신을 끌어안을 듯 좁혀 오는 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반걸음 그가 다시 멀어졌다.

잠시 파악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위에 놓인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물어왔다.


“이번 신제품 광고 담당자가 선배 맞아요?”

“응.”

“광고 콘셉트를 조금 바꿨으면 좋겠는데.”

“……뭐?”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

이미 모든 윗선의 허락이 다 떨어진 상태에다 섭외며, 광고 촬영 날짜까지 다 잡힌 마당에…….

“아니. 왜?”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조심히 원래 자리로 내려놓고 지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창밖 도심의 불빛이 어스름히 투영되는 창문을 등지고 걸어오는 석한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위협적이었다.

살며시 내리뜬 눈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어둠이 느껴졌다.

왜…… 왜 저래.

이 광고가 그렇게 잘못됐니?

그 광고 기획서 컨펌한 인간들 다 쓰레기야?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반걸음은 금세 따라 잡혔다.

톡 하고 지안의 구두 끝에 석한의 발끝이 닿았다.

“엄마야…….”

상체가 뒤로 순식간에 휘었다.

배와 허벅지 위로 선연하게 단단한 그의 몸이 느껴졌다.

허리를 휘어감은 그의 팔에 힘이 점점 더해지고 밀려난 거리만큼 석한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짙은 눈동자가 이쪽저쪽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곧바로 날카롭게 그녀의 눈동자 앞에 멈추었다.

뜨거운 숨결이 지안의 입술 주변에 번지는가 싶더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그에게서 느꼈던 정염과는 다른 느낌의 열기.

지독하게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둘이 무슨 사이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지안의 눈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둘? 무슨 둘?

너랑 나? 그러게? 너랑 나랑 무슨 사인데. 빌어먹을 왜 이렇게 붙어 있니.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광고도 그렇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면 차라리 낫지, 왜 갑자기 그 밥상을 죄다 엎어 버리려는 건지.

그래 놓고 다짜고짜 왜 끌어안는데?

생각해 보니 이게 아주 지 마음대로다.

“무슨 소리야, 대체! 광고 얘기나 다시 해! 아우! 이것 좀 놔 봐.”

놓기는커녕 더욱 옥죄어 오는 그의 팔.

덕분에 그의 다리 사이에 맞닿은 골반 근처에서 느껴지는 적나라한 감촉에 몸 어디에선가부터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캉한 느낌이었는데 자꾸 단단해지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이냐?

“그 자식이랑 둘이 무슨 사이냐고요.”

고요하고 음습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예민하게 느껴졌다.

맞닿은 눈동자를 다시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말한 그 자식이 눈앞의 이 자식은 아니라는 사실은.

“박은준.”

“…….”

“박은준이랑 무슨 사이인데 회사에서 좋다고 끌어안고 가는데요?”

“아…….”

“말해 봐요. 응?”

물음이 아닌 추궁에 가까운 말투.

또 다른 깨달음.

그 짙고 음습하고 적당히 공격적인 눈빛은 시기, 질투, 샘.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낸 집합체였다.

어이가 없어서…….
“너 지금 나랑 오빠, 아니 박은준 보고 이러는 거야?”

“……오빠?”

오빠 소리에 크게 거슬린 석한의 눈빛이 점점 뾰족하게 변해 갔다.

지안이 고개를 내리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난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턱 끝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밀어 올리는 힘에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

대답을 원하는 눈동자에 그녀가 입을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 사이가 너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

“나랑 박은준 사이가…… 흡, 잠깐만……!”

급박한 외침과 함께 그의 품에 안긴 지안의 몸이 휘청였다.

순식간에 블라우스 속으로 밀려들어 온 손끝이 단숨에 브래지어 안 풍성한 가슴을 그러잡았다.

“야…… 읍.”

예민한 돌기 끝에 닿는 뜨거운 열기에 놀라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졌다.

빠르게 들어온 물컹한 혀가 가볍게 입 안을 훑더니 쑥 빠져나갔다.

유독 오늘따라 붉은빛을 띠는 그의 혀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지안의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나른한 움직임을 타고 흐르는 야릇한 감촉에 숨어있던 감각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하아....이러지 마.”

윗입술에서 아랫입술로 이어지는 나른한 움직임이 목선을 타고 흘러갔다.

그리고 귓가로.귓바퀴를 핥아 내는 척척한 소리.

목 끝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몸을 바스락거렸다.

감질나는 혀끝의 움직임과 함께 바짝 선 유두를 강한 감각으로 누르던 손가락이 느슨하게 그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너무 느렸다. 아니 감질났다.

금세 그의 의도가 느껴졌다.

달아오르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아…… 그, 그만…….”
아래에서 잔뜩 크기를 키운 그의 물건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축축함도 함께.

그저 키스와 가슴 애무일 뿐인데 울컥 액체를 흘리는 자신의 몸이 우습다 못해 신기했다.

귓불을 강하게 빨아 당기며 가슴을 꾹 움켜쥐던 그의 동작이 멈췄다.

천천히 그녀의 귀에서 얼굴을 떼어 내는 그의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사르르 얼굴을 스쳤다.

거친 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는 한껏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그 흥분이 무엇에 의해 파행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과 은준의 사이에 대한 질투인 것인지, 자신을 향한 단순한 성적 욕망 때문인지.

톡톡.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가 빠르게 풀렸다.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하얀 살결과 대비되는 검정 브래지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으로 탐스럽게 솟아
있는 그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석한아…….”

작은 떨림이 얹어진 목소리는 그의 행동에 아무런 제지를 주지 못했다.

채 다 풀리지도 않은 블라우스 사이로 그의 두 손이 들어와 양쪽 가슴을 단단하게 잡았다.

조금 전 그의 손에 의해 눌러졌던 젖가슴 위로 빨갛게 남아 있는 그의 손자국. 입술이 예민한 살결을


누르듯 삼키며 빨아당겼다.

“앗…….”

이를 세워 살결에 빨갛게 자국을 남기고 다시 강하게 빨아 당겼다.

야릇한 동작을 멈추지 않은 채 눈동자를 추어올려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서 치고 들어오는 자극이
너무 강했다.

울컥. 쏟아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라면 그에게 몸을 맡길지도 모른다.

“흐읏. 자, 잠깐만…… 하앗…….”

조금의 생각도 이어지기 힘들 정도로 그가 밀고 들어왔다.

어느새 풀어진 브래지어가 가슴 둔덕 위로 밀려 올라가고 그 자리를 그의 혀가 차지했다.

혀끝은 빠르고 뜨거웠다.

위아래로 핥아 내리고 빨아 당기는 탓에 가슴에서 시작된 짜릿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가슴을 잡고 주물럭거리는 그의 손동작에 위로 치솟은 살점이 먹히고 또 먹혔다.

온몸을 휘감아 치는 자극에 몸이 뜨겁게 반응했다.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감고 있던 눈을 뜨기 무섭게 엉덩이 아래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지안을 올려놓은 석한이 입술을 강하게 겹쳐 와 상체가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아 그의 목을


빠르게 팔로 감았다.

“흐읏…….”

“하아…….”

벌어진 다리. 마구 구겨져 허벅지 위로 가득 밀려 올라간 치마. 색정적이고 자극적인 자세였다.

그 아래 적당히 살집이 자리 잡은 허벅지를 손으로 꽉 쥐었다.

순간 함께 터진 지안의 신음과 숨결.

그 또한 뜨거운 숨결을 터트렸다.

손 아래 까끌까끌한 스타킹 감촉. 당장 찢어 버리고 그 안의 보들보들한 살결을 헤집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눈이 마주쳤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간격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부딪혔다.

욕망에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마 자신의 모습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몸이 움찔거려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째깍째깍.

사무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컸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공존하는 공간.

몇 년간 업무를 하며 일상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간에서 차마 새어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야릇한


소리를 흘렸다는 생각에 민망함과 함께 이상하리만큼 몸이 달아올랐다.

마치 금기의 공간에 둘만의 비밀스러움을 남기듯…….

그 짜릿한 긴장감이 온몸을 맴돌았다.

“……선배…….”

입술이 다가와 강하게 빨아 당기고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지안 선배…… 하아…….”

다시 한번 다가와 이번에는 깊숙하게 혀를 밀어 넣고 음미하듯 빨아 당기다가 떨어졌다.

마치 애원하듯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너를 가지고 싶다는 감정에 충실한 움직임.

그의 흥분은 이제 오롯이 욕정에 의한 것이었다.

시작은 작은 질투심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녀의 안에 자신의 것을 박아


넣고 흔들고 싶다는 충동뿐이었다.

이미 주체할 수 없이 부풀어 있는 남성에 엉덩이까지 뻐근한 느낌이 번졌다.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짧게 물었다 놓아주던 키스가 헉헉거리는 숨결과 함께 계속 이어졌다.

반복되는 석한의 행동에 지안의 얼굴이 입술을 받아 내느라 오르락내리락 정신없이 움직였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함.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더욱 활짝 벌렸다.

“자…….”

잠깐만이라는 말은 그의 입술에 바로 막혔다.

“으음…… 읏…….”

강하게 하체를 붙여 오는 행동에 뒤로 밀리는 지안의 엉덩이를 그의 커다란 손이 꽉 쥐어 잡아 앞으로


당겼다.

얇은 몇 겹의 천을 가운데 두고 그의 남성과 그녀의 축축해진 곳이 바짝 맞닿았다.

그가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선배…… 선배…….”

부르고 입술을 물고 허리를 움직이고 또 그녀를 불렀다.

주체하지 못한 흥분에 그의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출렁이는 가슴을 단숨에 쥐어 잡고 손끝으로 잔뜩 솟은


유두를 비틀었다.

“하앗……!”

순간 지안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어지던 자극의 흐름 사이, 그 어떤 시점에 몸에 전기가 흐르듯 강한 충격이 일었다.

“흐으으읏…….”

흐느끼듯 신음을 뱉으며 애원하듯 그의 목을 강하게 감아 당겼다.

그것이 신호인 듯 벌어진 허벅지를 빠르게 쓸며 올라온 그의 손이 스타킹을 단숨에 무릎까지 내렸다가
다시 한번 발목까지 거칠게 끌어 내렸다.

거침없는 움직임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활짝 벌어졌던 허벅지가 발목에 걸린 스타킹 때문에 다시 공간을 좁혔다.


“다리 더 벌려요.”

존대하고 있었지만 엄연한 명령이었다.

채 다리를 벌리기도 전에 그녀는 신음했다.

이미 그의 손길이 닿을 때부터 젖어 버렸던 속옷 안으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밀려들었다.

순간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잔뜩 흥분해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 그를 바라보는 것이


창피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작은 살점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안의 감은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하아…….”

눈꺼풀 위로 그가 내쉬는 숨결이 뜨겁게 번졌다.

멈추었던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톡 튀어나온 살점을 부드럽고 아주 느리게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자 허리가 뒤틀렸다.

“선배…….”

낮은 음성이 부드럽게 귓가를 스쳤다.

“이러면…… 안 넣을 수가 없잖아요.”

“아앗…… 흣…….”

그녀의 꽃잎 사이를 야릇하게 어루만지던 손가락을 천천히 세웠다.

살짝살짝 맑은 액이 흘러나오는 입구를 건드리는 손길에도 신음이 흘러나왔고 욕정에 물든 몸은 그의


손가락을 당장에라도 물어 삼킬 듯 움찔거렸다.

욕망이 이성을 삼키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음에 그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당장 넣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자꾸만 밀려 나와 그의 단단한 어깨를 잡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하앗!”

세워진 손가락이 단숨에 그녀의 촉촉한 곳으로 쑥 밀려 들어왔다.

맞닿은 다른 살결과는 확연하게 다른 뜨거운 온도가 손가락을 감싸며 순식간에 조여 왔다.

“하…… 미치겠네.”

이렇게 조여 오는 곳에 자신의 것을 밀어 넣을 생각을 하니 아래의 뻐근함이 허벅지 아래로 번졌다.

“아흐흣…….”

손가락이 앞뒤로 천천히 흔들렸다.


그저 손가락 하나에 온몸이 뒤틀리고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찌르고 들어오는 짜릿한 감각에 지안의 허리가 뒤로 휘었다가 다시 앞으로 넘어와 그의 몸에 매달리듯
안겨 왔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몸 안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던 손가락이 좀 더 깊숙이 파고들어 내벽을 진하게


긁으며 내려갔다.

“하앗…… 자, 잠깐…….”

몸이 저절로 튕기며 반응했다. 번지는 감각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느낌.

“하아…… 여기…….”

쑥 빠져나갔던 손가락이 빠르게 들어와 같은 곳을 강하게 찔렀다.

“으읏, 으읏…….”

“여기…….”

그의 팔이 강하게 허리를 조여 왔다. 그리고 더 깊숙이 찔렀다.

“흐으읏…… 그만…….”

“선배는 여기 만져 주는 걸 좋아하죠.”

“그만…… 읏…….”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흐느끼는 자신의 신음이 민망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입 벌려요.”

한시도 멈춤이 없는 자극에 정신이 몽롱했다.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아 눌러 내렸던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몽롱한 빛이 가득 찬 촉촉한 눈동자가 파르르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 벌리라고. 유지안.”

“흐읏!”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신음을 그의 입술이 삼켰다.

깊숙이 넣은 혀끝이 여린 살을 부드럽게 매만지는가 싶더니 인정사정없이 입 안을 헤집어 놓으며 점점


움직이는 손의 속도를 높여 갔다.

여전히 몸 안을 들쑤시는 손가락 속도에 맞춰 내지르는 신음이 고스란히 그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철커덕철커덕.

지안을 지탱하고 있는 책상이 그녀의 흔들림에 맞춰 정신없이 흔들렸다.

쇠가 바닥을 긁으며 맞닿는 소리마저 색정적으로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커다란 덜컥임과 함께 어느 순간 그녀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아…… 아앗!”

하얀 젖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살며시 들려 있던 허벅지가 가슴에 닿을 정도로 크게


밀려 올랐다.

순식간에 커다란 파도가 자신을 덮치듯 눈앞에 하얀 물결이 쏟아져 내렸다.

파르르 일어나는 온몸의 경련과 함께 아랫배가 정신없이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울컥울컥 그의 손 위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스르륵 힘이 빠져 무너져 내리는 몸을 석한이 한쪽 팔로 곧추세워 가슴으로 가득 안았다.

절정에 이르게 만들었던 손가락이 제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져 또다시 작게 신음을 흘렸다.

눈을 꼭 감았다.

‘창피해.’

손가락 하나에…….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눈을 꼭 감았다.

당장에라도 몸을 밀쳐야 하나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정신없이 몰아친 감각에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선배…….”

부르지 마. 제발.

그의 품에서 흥분에 물들어 뜨겁게 숨을 터트려버린 자신이 너무나 창피해 어디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역시나 그를 밀어내는 건 자신에게 역부족인 걸까.

이미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올 말이 예상되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호흡을 내쉬며 살며시 눈을 떴다.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

토닥토닥 두드리다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가라앉아야 할 심장이 오히려 더 빠르게 뛰었다.

좋았어요? 흥분했네요. 분명히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쓰러지듯 맞붙어 있던 몸을 그가 천천히 떼어 내며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흥분이 빠져나갔지만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허벅지 안쪽에 맞닿은 그의 남성은 여전히 몸집을 키운 상태였다.


그의 손이 허벅지에 다시 닿았다.

작게 움찔거리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밀려 올라오는 전율에 정신없이 몸이 덜컥이며 구두가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조심스럽게 지안의 발목을 들어 올린 석한이 그녀의 발목에 걸린 스타킹을 완전히 벗겨 냈다.

“어쩌죠? 찢어져서 못 신고 가겠어요.”

“괘…… 괜찮아. 이리 줘.”

갑작스럽게 스타킹을 향해 지안이 손을 뻗었다.

“왜요? 신게요?”

“아니.”

“…….”

“사무실 쓰레기통에 이런 거 버리기가…….”

혹여나 청소하는 분이 발견하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기에 재빨리 그의 손에서 스타킹을 빼앗았다.

흣- 하고 그가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바라보자, 그의 손이 눈앞으로 다가와 이마 위에 흐트러진 지안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며시 넘겨 주었다.

“……지금 그런 것까지 생각했어요?”

“……응.”

“속옷.”

“응?”

“속옷 채우라고요.”

“아…….”

지안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지그시 응시하며 손을 뒤로 넘겨 브래지어를 재빨리 채웠다.

이마에서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손이 천천히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채워 갔다.

움직일 때마다 손등에 붉어진 핏줄이 선명하게 비치는 남자다운 손.

조금 전까지 자신을 절정에 치닫게 만들었던 손의 움직임이 지금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꼼꼼하게 목 아래 단추까지 채워 준 그의 손이 말려 올라간 치마를 끌어 내렸다.

“됐어. 내가 할게.”

훤하게 드러난 허벅지 살이 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창피해 재빠르게 손으로 치마를 내리자 비스듬히
입술을 끌어 올린 그가 바닥에 떨어진 구두를 들어 그녀의 발에 조심스럽게 넣어 주었다.
“읏샤!”

겨드랑이 사이로 두 팔을 밀어 넣더니 힘주어 번쩍 드는 그의 행동에 그에게 안긴 채 바닥에 발이 닿았다.

팔을 빼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며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움직이는 그녀를 석한이


바라보았다.

빼꼼하게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예쁘게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두 볼, 제 품에 안겨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던 작고


붉은 입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잠시 식었던 피가 다시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만 같다.

저 작은 입술을 벌리고 혀를 끝까지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 내며 입술을 옴짝거렸다.

밀려 나오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팔을 내렸다.

인내심이 묻어 있는 한숨에 지안은 그가 여전히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적과 함께 밀려오는 민망함과 여전히 식지 않은 열기에 지안이 고개를 내렸다.

“선배, 나 봐요.”

짧게 끊기지만 부드러운 음성.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서 내려다보는 짙은 눈동자가 잠시 얼굴을 이리저리 훑더니 지안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딴 질투 따위로 충동적으로 안고 싶지 않아.”

“…….”

“선배가 원할 때…….”

“…….”

“그때 안을 거야…….”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도로를 함께 걷고 있는 그녀와 박은준을 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는 격 없는 모습과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이는 모습에 순간 정방향으로


흐르던 피가 역방향으로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꾹꾹 눌러 담는 그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지안은 그저 놀라웠다.

은준과 자신 사이에 그럴싸한 무언가가 있어야 질투를 할 텐데,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사무실에 찾아와서 자신을 찾고 식사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그가 흥분했다는 것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같은 눈빛으로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의 눈매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하아…….”

짜증이 섞인 한숨과 함께 지안을 향한 눈빛이 더없이 예민해졌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빠…….”

거칠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손이 다가와 지안의 턱 끝을 살며시 위로 쳐들었다.

“나…… 누가 내 거 건드리면.”

서슬이 퍼런 눈빛과 함께, 어금니를 꽉 눌러 문 음성이 천천히 입술 사이로 밀려 나왔다.

“완전히 미쳐 버리거든.”

말을 내뱉고도 당장 그 당사자가 나타나면 한 대 냅다 쳐 버릴 것 같은 눈빛을 머금은 석한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살펴보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얘가 왜 이러나 싶다.

자기가 자고 싶은 여자가 다른 남자랑 밥도 먹는 게 싫다는 말인가.

지안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없어.”

“……네?”

“질투. 뭐 그런 거 할 거 없다고.”

“…….”

“오빠, 그러니까 박은준.”

오빠 소리에 또 석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진지하게 말을 이으려던 지안이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갑자기 웃음이 밀려 올라왔다.

밀려 올라온 웃음에 입을 꾹 다물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왜 웃어요. 그러니까 그 오빠랑 뭐요? 응? 뭔데?”

석한의 눈썹이 완벽히 찌푸려졌다.

“오석한.”

“네.”

“너 완전 질투쟁이구나?”

“…….”

“무슨 사이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질투야, 질투는.”


찌푸려져 있던 눈썹이 다시 모양 좋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몰랐어요? 나 원래 그런 놈이에요. 질투도 강하고 집착도 강하고…….”

가볍게 던진 말에 순간 눈을 번뜩이는 그의 모습에 지안이 흠흠- 소리 내며 잠시 시선을 돌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너 그것 때문에 지금 광고 엎으려는 거, 맞아?”

“네.”

당연하다는 아주 간결한 대답.

아오, 이 양아치.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무슨 팀장이 이래? 그거 너무 사심 가득한 거 아니야?”

“팀장은 사람 아닌가요? 사심 좀 담아서 일하는 게 이 세상에 어디 나 하나뿐인가?”

말이라도 못하면.

“사촌 오빠야.”

“…….”

“박은준 우리 사촌 오빠라고!”

“……사촌?”

“그래. 회사에 얘기하면 시끄러워지니까 절대 모른 척하랬는데. 저 오빠가 원래 저렇게 사람 골리는 걸


좋아해서 오늘도 나 놀라게 하려고 다짜고짜 찾아온 거야. 이제 됐지?”

“뭐가요?”

아 그랬어요? 하며 빙긋 넉살 좋게 웃어 올 줄 알았더니 여전히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사촌 오빠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만져?”

“……응?”

“이상한 거 아니야? 사촌 동생을 막 끌어안고 그래도 되는 건가? 그것도 엄연한 공인께서.”

와. 무서운 놈.

잘못하면 잘나가고 있는 연예인 한 명 저 멀리 골로 보내고도 남을 눈빛.

그리고 만지는 거로 치면…….

너만 하겠냐.

“적당히 해라. 오석한.”

꿈틀거리는 주먹을 애써 꾹 누르고 눈을 흘기는 그녀의 모습에 일자로 다물어졌던 석한의 입술이 비스듬히
밀려 올라갔다.
미소를 머금고 지안을 한참 바라보던 석한이 그나마 조금 떨어졌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꼭 맞닿아 있기를 여러 번 경험해서인지 지안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있을 텐데. 살며시 얼굴을 기울이며 석한이 물어 왔다.

그가 기다리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부드럽게 허리에 밀려 들어오는 감촉.

두 손으로 지안의 잘록한 허리를 잡은 석한이 이마를 콩 하고 부딪혀 왔다.

“아까 선배도 사실 끝까지 하고 싶었잖아요.”

“너 진짜 치사해.”

“왜, 또 뭐가요?”

몇 센티 떨어지지 않은 눈매가 곱게 접히더니 촉- 하고 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다 알면서…….”

“제가요? 뭘요? 아아아…… 내가 선배 안고 싶어서 잠도 못 자고 일도 못 하고 온종일 선배 생각만 하는


거요? 그거 사람 미치죠.”

“…….”

“사람 살려 주는 셈 치고 소원 좀 들어줘요, 선배. 응?”

“알면서 또 이런다.”

그가 선하게 빙긋 웃었다.

“네. 잘 알아요. 선배가 아직도 나 때문에 흥분한다는 사실.”

아직도 정돈되지 않은 머리로 선한 웃음을 맞이했다.

“또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말하며 달래듯 또 입술을 부딪쳐 온다.

응? 작게 속삭이는 말에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싫어.”

다시 밀려 올라가던 그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 따위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듯한 눈빛이 번졌다.

작게 숨을 삼킨 지안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무실에서는 싫다고…….”
“하아…….”

움직임이 멈춘 석한의 입술 사이로 감탄과 같은 숨결이 밀려 나왔다.

얼굴에 가득 올라오는 열기.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는 순간.

낚아채듯 손목을 잡아 올리는 동작에 지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가요.”

다급한 목소리가 흘렀다.

손목을 당기며 몸을 문으로 돌리던 그가 다시 지안을 향해 몸을 돌려 빠르게 얼굴을 내렸다.

“읍…….”

겹쳐진 입술이 도망가지 못하게 지안의 머리를 그의 손이 단단히 고정했다.

가볍게 겹쳐 온 입술이 흥분을 견디지 못하고 진하게 그녀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부드러운 키스가 질척거리며 섞이는 타액과 함께 농염하게 변해 갔다.

길게 머물렀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어느새 감았던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가요. 당장.”

“어디……?”

“어디든…….”

“…….”

“나 더 미치기 전에.”

□ ◆ □

띠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안이 긴장했다.

미치기 전에 가자는 그의 말에 따라오긴 했는데, 이게 맞는 건지 여전히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그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은 자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조용한 차 안에서 들리지 않을까 숨까지 참았을 지경이니.

“선배, 들어와요.”

자상하게 손목을 잡아끄는 그의 행동에 걸음을 옮겼다.

“……실례할게.”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고개를 돌려 집 안을 살폈다. 남자 혼자 사는 집답게 아기자기하기보다는 그저 깔끔한 인테리어. 익숙한


가구들이 보였다.

“많이 보던 거죠?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사 올 때 회사에서 다 넣어 주더라고요. 한잔할래요?”

목이 탔는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 그가 단숨에 들이켰다.

비스듬히 올린 얼굴 아래, 맥주를 넘길 때마다 꿀렁이는 목울대에 시선이 머무르던 지안이 괜한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긴장돼요?”

어느새 다가온 그가 지안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 씻을래.”

마르긴 했으나 여전히 축축하게 느껴지는 속옷이 찝찝했다.

공중에 멈춘 손을 거둔 그가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잠깐만요. 갈아입을 옷 줄게요.”

샤워를 마치고 그에게 건네받은 샤워 가운을 입고 잠시 거울 앞에 섰다.

왜 이리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그래. 처음도 아니잖아.”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이 느껴져 다시 차가운 물로 세수를 마쳤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자 공기 중에 퍼진 좋은 향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비어 있는 거실.

지안이 조심스럽게 집 안을 살폈다.

“선배. 이리 와요.”
그의 목소리를 따라 방에 도착하니 좋은 향기가 더욱 강하게 밀려들었다.

불이 꺼진 방.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향초.

“어때요? 내가 좋아하는 향인데.”

“응. 좋아.”

그도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끝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천천히 너울거리는 촛불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마른침을 삼키며 침대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엄마야…….”

푹신한 감촉이 등에 닿았다.

침대 위에 떨어진 주먹 쥔 그녀의 손 위로 그의 손이 얹어지더니 기다란 손가락이 하나씩 파고들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자신의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둔 채 한참 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망설임이 스며든 눈동자, 좋은 향기가 짙게 흐트러져 나오는 작은 입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미소가 번졌다.

“꿈 같다.”

“…….”

“다시 내 품에 선배가 있다는 게. 꿈만 같아요.”

순식간에 그가 입술을 삼켰다.

“흐음…….”

무방비 상태에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밀려들어 오자 지안이 작게 신음했다.

들이마시는 숨에 밀려드는 좋은 향기와 함께 황홀한 감각과 황홀한 자극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깊숙하게
밀려드는 키스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성급한 움직임에 놀라기도 잠시, 지안이 입술을 벌려 그의 혀에 반응하며 움직임을 맞추었다.

격렬한 키스에 거칠어진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가 차분하다고 생각했던 건 지안의 착각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석한은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마음껏 맛보고픈 충동을 아주 강하게 눌러야
했다.

입술을 떼어 낸 석한이 벌어진 샤워 가운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젖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읏…… 자, 잠깐만…….”
새하얀 목선을 타고 그의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의 등으로 파고든 손이 브래지어 후크를 재빠르게 풀었다.

거추장스러운 듯 그녀의 팔을 빠르게 가운에서 빼어 내고 브래지어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헐떡이는 숨에 그녀의 탐스러운 가슴이 출렁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치밀어 오르는 욕망에 그녀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고 흥분에 솟아오른 유두를 입
안으로 삼켰다.

그의 성마른 움직임에 사무실에서 느꼈던 짜릿한 감각이 고스란히 온몸에 다시 퍼졌다.

온몸이 빳빳해질 정도로 퍼져 있는 긴장감과 그의 격렬한 움직임에 미칠 것같이 흥분이 밀려왔다.

“으읏…….”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모습에 점점 흥분이 차올랐다. 손끝으로 단단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한쪽 핑크빛
유두를 문지르며 입으로 집어삼킨 유두 끝을 혀끝으로 이리저리 돌리며 빨아 댔다.

“하앗! 으응…….”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쉴 새 없이 뒤틀렸다.

뜨거운 혀가 희롱하듯 젖꼭지를 핥아 올리며 떨어져 나갔다.

온몸에 피어오르는 쾌감에 그녀의 허리가 들썩였다.

쾌락의 노예가 된 듯 그의 손끝과 혀끝에 지배당한 그녀의 몸이 또다시 울컥거리며 맑은 액을 흘렸다.

그가 스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을 거칠게 토해 냈다.

방 안에 은은하게 퍼진 빛과 함께 그와 자신의 움직임이 정신없이 엉켜 들었다.

“하아…… 석, 석한아…….”

쪽쪽 살결이 빨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한 곳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온몸을 혀로 핥고 입술로 빨아 댔다.

신음하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야릇하게 튕겨 오르며 출렁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배를 가르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가리는 속옷이 보이자 그가 배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벗을 건데 뭐하러 입었어요.”

순식간에 허전함이 느껴지고 그의 손끝에 걸린 그녀의 속옷이 침대 아래로 빠르게 떨어졌다.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힘이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잡더니 살결을 거슬러 점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지안이 거친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톡 하고 건드리더니 훑어 내듯 스쳐 지나갔다.

“흐응.”

간질거리면서도 작은 살점에서 느껴지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신음이 절로 흘렀다.

“……하아, 선배.”

그가 상체를 일으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머리 위로 빠르게 벗어 던졌다.

매력적인 구릿빛 피부와 모양 좋게 자리 잡힌 단단한 가슴 근육, 그리고 그 아래 만지고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탄탄한 복근까지.

몽롱한 눈빛이 그의 몸을 훑어 내리며 미세하게 움직였다.

3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그의 탄탄하고 매력적인 몸은 지안을 설레게 했다.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석한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두 팔 안에 가둔 채 고개를 내렸다.

“왜요……. 만지고 싶어요?”

웃음을 머금은 눈동자로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모습에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죠…….”

“…….”

“오늘은 내가 만지기도 바빠서!”

“읏…….”

목선 위로 떨어진 그의 입술이 짧고 빠르게 여린 살을 빨아 당기자 짜릿한 느낌과 함께 작은 고통이


일었다.

“하…… 하지 마…….”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에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내 거라는 표시는 하나 정도는 남겨 둬야죠.”

이미 많이 남겼으면서. 회사에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앗……!”

자국에 대한 걱정을 채 마치기도 전에 밀려온 강한 감각에 허리가 튕겼다.

짧은 감각이 남았던 그녀의 클리토리스 위를 그의 손바닥이 나른하게 쓸어 올렸다.

그의 엄지가 흥분이 차오른 통통한 살점을 톡톡 건드리는가 싶더니 뭉근하게 비비기 시작했다.

“으…… 으…….”

손끝이 비벼질 때마다 끈적한 액체가 찰박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호흡이 가라앉을 새도 없이 거칠어졌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가 중지를 세워 작은 구멍 안으로 짧게 밀어 넣었다가 빠르게 빼내었다.

“흐읏…… 흣…….”

“흐음…… 아직 안 되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찌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맞춰 왔다.

금세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 안을 헤집어 놓으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정신없이 그의 입술을 받아 내느라 움직이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래를 가르고 들어오는 이물감에 그의 입 안으로 신음과 숨결을 토했다.

그녀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찔러 넣은 그 또한 작게 신음했다.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조여 오는 쫄깃한 감각에 그의 남성이 꿈틀거리며 몸집을 키웠다.

잠시 빠져나갔던 혀가 부드럽게 밀려들어 왔다.

핏줄이 붉어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아래에서 앞뒤로 느린 움직임을 시작했다.

“으읏…… 으읏…….”

그녀의 고개가 젖혀지며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입술을 삼켰다.

앞뒤로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자극적인 손짓에 허리가 튕겨 오르고 풍만한 젖가슴이 흔들리며
단단하게 솟은 그녀의 유두 끝이 그의 몸에 부딪혔다.

강한 자극에 그녀의 작은 구멍에서 울컥거리며 토해 내는 액체가 그의 손 위를 축축하게 적셔 갔다.

찌꺽찌꺽 야한 소리가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앓는 듯한 신음이 입술을 타고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귓가에 울리는 색정적이고 야릇한 그녀의 신음만으로도 석한의 숨이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졌다.

“핫…….”

갑작스럽게 쑥 하고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그녀의 입술이 탄식과 가까운 숨결을 토해 내며 함께 벌어졌다.

손가락 하나 빠져나갔을 뿐인데 공허함이 몰려들었다.

물밀듯 몰려오던 자극이 멈춤과 동시에 온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후우- 후우- 그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아…… 선배, 미안한데…….”


“…….”

“……내가 너무 급해서요.”

허벅지를 움켜잡고 올리는 강한 힘에 지안이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잠깐…… 흐읏…….”

올라섰던 상체가 그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침대 위로 떨어지며 등이 휘었다.

말캉한 혀가 자신의 젖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혀끝에 닿는 뜨겁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각을 가득 느끼며 천천히 원을 그리듯 그녀의 안을 핥았다.

민망한 자세에 어찌할 줄 몰라 공중을 방황하던 지안의 손이 침대로 떨어져 흐트러진 이불을 긁어내듯
감아쥐었다.

“으읏…… 하. 자, 잠깐…….”

그녀가 자지러지듯 몸을 떨었다.

집요하게 안을 파고들던 혀가 빠져나와 볼록 솟은 돌기 위로 내려앉았다.

작은 살점을 나른하게 핥아 내리는가 하면 입술로 강하게 빨아 당기고 놓아주기도 했다. 수도 없이


반복하는 그의 행동에 순식간에 몰려든 쾌락이 몸속 깊은 곳에서 꽃망울 터지듯 활짝 펼쳐져 온몸을 점점
잠식해 갔다.

“으…….”

석한의 두 손이 동그랗고 하얀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더욱 활짝 벌렸다.

그의 움직임에 놀란 듯 꿈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어림도 없다는 듯 단단히 잡고 그녀의 분홍빛 속살을


천천히 음미하듯 들여다보았다.

거뭇한 수풀 사이로 핑크빛 작은 돌기, 그 아래 자신의 타액과 그녀의 애액이 뒤엉켜 반짝이며 벌름거리는
야한 움직임에 그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밀려 올라갔다.

“그…… 그만 봐…….”

색정적으로 벌어진 다리 사이에 멈춰 있는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던 지안이 민망함에 애원하듯


말했다.

“왜요…….”

“으읏…….”

혀끝이 다시 한번 야릇하게 작은 살점을 핥아 올렸다.

“이렇게 예쁜 건 많이 봐 주고 많이 어루만져 줘야죠.”

평소처럼 능청스러운 음성을 흘린 그가 다시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흐으으…… 제, 제발…….”

도톰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살점을 가볍게 물고 부드럽게 비비기 시작했다.


그 감각 하나만으로도 허리가 비틀릴 만큼 온몸에 전율이 퍼져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뭉툭한
감각이 몸속을 치고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를 부드럽게 밀어 넣은 그가 다시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하악…… 야, 야…….”

“선배…… 아파요?”

여전히 아래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그가 속삭이며 물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아래에 퍼지자 지안이
고개를 모로 빠르게 저었다.

아프지 않았다. 그저 말로는 표현 못 할 감각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너무…… 좁아. 아플지도 몰라…….”

걱정하듯 그가 속삭이며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그의 전희는 길었다. 부드러움과 거침이 공존하는 손길로 그녀가 충분히 젖어 들도록 오랜 시간 그녀를
정성스럽게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당장에라도 욕정을 풀어내고 싶은 눈빛을 머금고서도 오랜 시간 그는 한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치밀어 오르는 감각에 정신없이 뻗은 지안의 손이 여전히 아래에 머무는 그의 손을 빠르게 잡았다.

“하아…… 그만…….”

이대로라면 사무실에서처럼 또 한 번의 절정을 맞이하고 말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촉촉하게 젖어 든 몽롱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리질 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채색한 듯 붉게 물든 볼이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느릿하게 그녀의 내벽을 문지르며 손가락을 빼어 냈다.

반들거리는 손가락을 허벅지 위로 천천히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밭은 숨을 뱉어 내는 붉은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다 결국 못 견디고 자잘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을 떼어 내자 초점이 희미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오석한…….”

따스한 숨결과 함께 짙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왜 나야?”
흣, 하는 웃음과 함께 그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게 아직도 궁금해요? 속삭이듯 묻는 그의 물음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를 맞닿은 채로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촘촘하게 박힌 속눈썹 아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빠져들 것처럼 깊었고 그 빛은 오묘했다.

눈을 깊게 맞춘 채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래서…….”

입술이 내려와 짧게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름만 불러도…….”

촘촘한 속눈썹 위로 다시 한번,

“이렇게 가슴 설레고…….”

붉은색으로 예쁘게 물든 볼 위로 한 번,

“바라만 봐도…….”

동그스름한 코끝에 한 번 짧은 감촉을 남기고…….

“사람 미치게 만드니까…….”

다시 그녀의 입술 위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생각해 보지 못했던 느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맞춰진 입술이 전해 주는 떨림이 고스란히 가슴까지 이어진 듯 잔물결이 넘실거리는 느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만 해도 여러 번 맞추었던 그의 입술이 질리지도 않는지, 호흡은 다시 거칠어졌고 몸은 다시


달아올랐다.

왜 하필 나인지. 그런 생각 따위는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와 마찬가지로 지안도 그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상체를 빠르게 일으켜 침대 옆 좁은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찌익 소리와 함께 찢어진 콘돔 껍질을 입에 문 채로 그가 바쁘게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단숨에 바지와 속옷을 벗어 버린 그의 행동에 잔뜩 솟은 그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작은 바스락거림이 끝나고 단단한 몸이 자신을 다시
타고 올랐다.

허벅지 사이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남자의 몸.

닿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갑작스러운 기억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자…… 잠깐만…….”

순간 내지르는 지안의 음성에 그녀에게 들어갈 준비를 하던 석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 아팠다.

맞아. 아팠었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의 한 손이 거머쥐고 있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크다. 힘들 거 같은데.

“저…… 저기…….”

두려움이 슬금슬금 차오르는 그녀의 눈빛

픽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고개를 숙였다.

민망함에 온몸이 붉게 물드는 느낌이다.

“하아…….”

깊은 숨을 내쉰 석한이 다시 그녀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왜요. 무서워요?”

“그게…… 내가 기억하기로…….”

“맨 처음에 아프다고 막 나 여기 때리고 할퀴고 치고 난리였잖아요.”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어땠더라…….”

그에게 매달려 목이 쉴 정도로 자지러지게 신음을 토해 내며 격렬하게 온몸을 바르르 떨었던 그녀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요. 응?”

알겠죠? 우는 아이 달래듯 부드럽지만, 인내심을 가득 담은 꾹꾹 눌린 음성이었다.

가슴팍에 지안을 가둔 채 석한이 하체를 뭉근히 움직였다.

뭉툭한 남성의 끝이 톡톡 그녀의 젖은 입구를 건드리고 슬그머니 밀려 들어왔다.

“읏…….”

“하앗…….”

동시에 신음이 터졌다.

짧은 진입에도 가차 없이 조여 드는 그녀의 속살에 석한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석한이 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커다란 두 손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어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리자
자신의 끝을 머금고 움찔거리는 분홍색 속살이 활짝 벌어졌다.
그대로 허리를 튕기며 그녀의 안으로 흥분한 남성을 단숨에 밀어 넣었다.

“아아아…… 으…….”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온몸이 두 쪽 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질구를 가르고 들어온 그의 물건이 틈 없이 자신의 안을 꽉 채웠다.

“후우…….”

삽입만 했을 뿐인데 사정감이 몰려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시선을 차례로 내렸다.

가느다란 목선 위에 자신이 남긴 붉은 자국, 가쁘게 내쉬는 숨을 따라 오르내리는 탐스러운 젖가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경치를 구경이라도 하듯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훑어 내리며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흐읏…… 읏…….”

단단하고 커다란 물건이 천천히 빠져나갔다가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모든 신경이 아래로 몰린 듯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 꽂아 내리는 듯한 강한 자극이 번졌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젖어 있었음에도 처음 여러 번의 삽입은 적당한 힘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다. 뻑뻑하던


입구가 조금씩 열렸다.

조금의 힘으로도 그녀는 그의 물건을 수월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윽…… 하앗…….”

그의 손이 그녀의 골반을 잡아 아래로 빠르게 내리며 강하게 허리를 치댔다.

치고 들어왔다가 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자 그녀가 몸을 들썩이며 정신없이 신음을 내질렀다.

자신에게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가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파고드는 날카롭고 짜릿한 감각에 모든
신경을 쏟아 냈다.

귓가에 퍼지는 야릇한 신음과 함께 점점 더 강하게 조여 오는 그녀의 속살에 석한의 이성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정신없이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새하얀 그녀의 살결 위로 땀방울이 톡톡 떨어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읏, 핫…….”

격렬한 몸 사위가 더해질수록 서로의 거친 호흡이 공기 중에 정신없이 터졌다.

퍽퍽 치대는 소리와 함께 지안의 몸이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렸고, 점점 밀려 올라가는 그녀의 몸은 금세


그의 손에 아래로 당겨졌다.

아찔하게 밀려오는 쾌락이 몸과 정신을 지배했다.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기에 급급했다.

그가 다급하게 입술을 겹쳐 오자 입술을 벌리며 그를 맞이한 그녀의 혀가 정신없이 그의 혀와 뒤엉켰다.

성마른 손길이 출렁이는 젖가슴을 움켜쥐고 손끝으로 도도록한 돌기를 강하게 슥슥 문지르자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강한 자극을 견디기 힘든 듯 그녀가 온몸을 비틀며 파르르 떨었다.

그가 다시 상체를 세웠다.

몽롱하게 흐트러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날카롭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눈앞의 먹이를 노리는 며칠을 굶주린 맹수의 눈빛을 머금은 그가 그녀를 집어삼킬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하앗…… 하앗…….”

촉촉한 땀방울이 석한의 잘 갈라진 등 근육을 지나 움직일 때마다 수축하며 움푹 패는 탄탄한 엉덩이를
따라 흘렀다.

탁탁탁탁.

“으으으으으…….”

석한이 짧고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며 입술 사이로 짓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흣, 흐읏…… 흐읏…….”

절정의 순간이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욕정을 단숨에 쏟아부을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부피를 최대로 키운 그의 물건과 맞닿아 부딪히며 눌리는 속살 위로 전류가 흐르는 듯 짜릿한 감각이
스쳤다.

그가 뒤로 한 번 길게 빠졌다가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강한 충격과 함께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가


뜨거운 숨과 함께 모든 것을 쏟아 냈다.

“하아…… 하아…….”

“흐으…….”

그녀의 뜨거운 속살이 자잘하게 경련했다.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음에도 경련과 함께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황홀한 감각에 꼭 감은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했다.

그의 상체가 그녀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거친 숨에 들썩이는 몸이 하나로 겹쳐져 함께 들썩였다.

맞닿은 살 위로 서로의 정신없이 뛰는 심장 소리가 하나로 뒤엉켰다.


사르륵, 이마를 스치는 감각.

밀려오는 고단함에 오랫동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지안의 위에서 내려와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석한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비스듬히 입술을 밀어 올렸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와 눈을 맞추고 가만히 호흡했다.

“머리 언제 잘랐어요?”

한층 호흡이 가다듬어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한 3 개월 전에?”

“그러면 그동안 계속 긴 머리였어요?”

침대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을 그가 손가락으로 살살 비비며 물었다.

“……중간에 자르기도 하고 기르기도 하고…….”

그랬구나. 작게 읊조리던 그가 다시 눈을 맞춰 왔다.

“일할 때 보니까 안경 쓰던데, 눈 나빠요?”

“응? 아. 나쁘진 않고 난시기가 있어서.”

“렌즈는 안 껴요?”

“응.”

그렇구나. 또다시 그가 읊조렸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지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내렸던 눈을 크게 뜬 그가 물었다.

“왜 웃어요?”

“그런 게 궁금해?”

“네.”

“……왜?”

“난 선배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싶은데. 선배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몸을 좀 더 틀어 바짝 다가오며 묻는 석한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있어.”

“뭔데요?”
기대에 찬 눈빛이 어둠 속에 지나치게 반짝였다.

“네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난 그게 아주아주 궁금한데?”

“에이. 난 또 뭐라고.”

털썩 침대에 머리를 다시 묻은 석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옆모습도 어쩜 저렇게 잘 다듬어 놨을까. 그냥 보고 눈을 감고 떠서 다시 보고 다른 곳을 바라봤다가 다시


봐도 너무 잘난 외모를 가진 남자.

가진 것보다 안 가진 것을 찾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 남자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잠시 침묵을 하던 석한이 빠르게 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났다.”

“……응?”

“화났다고요.”

뭐래.

“뭐야. 당연한 걸 물었는데 왜 화가 나.”

석한이 몸까지 완벽히 그녀를 향해 돌려 그녀의 몸으로 바짝 붙었다.

“어…….”

지안의 눈꺼풀이 천천히 끝까지 밀려 올라갔다.

“나 말고, 얘가 지금 선배 얘기 듣고 화났어요.”

허벅지 사이를 꿈틀거리며 파고들어 크기를 키우는 단단한 물건.

걔가 귀도 없는데 설마 듣고 화났겠냐. 이 자식아.

“엄마야!”

금세 지안을 올라탄 그가 그녀를 다시 팔 안에 가두었다.

“어쩌지? 화가 많이 난 거 같은데?”

“야…… 야, 야…….”

으스스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

“그러니까 선배가 책임져요!”

딱 맞붙인 허벅지 사이로 단단한 물건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안에서 격하게 느껴지는 존재감.

……보통 화난 게 아닌데……?
내가…… 무슨 큰 죄 지었니?

난감하고 당황한 표정의 지안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이 얄궂게 밀려 올라갔다.

책임져요, 응? 속삭이며 뜨거운 혓바닥이 그녀의 귀를 야릇하게 쓸고 지나갔다.

“으으응…….”

지안이 어깨를 움츠리며 꿈틀거렸다.

말릴 틈도 없이 허벅지를 파고든 손가락이 톡 튀어나온 살점을 살며시 스치고 지나가 질구 언저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뽀얀 젖가슴을 잡고 톡 튀어나온 유두를 향해 입술을 들이미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야…… 야, 잠깐…….”

통하지도 않을 말을 던져 보았더니 역시 통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 유실 끝에서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허벅지를 빠져나온 손이 나머지 가슴을 움켜잡았다.

가운데로 몰린 가슴 사이로 야릇하게 파인 가슴골을 바라보던 석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손 안에


탱탱하게 자리 잡은 살들을 핥고 빨기 시작했다.

쪽쪽 소리가 방 안 가득 퍼졌다.

“하앗…… 야…….”

어느새 허둥거리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의 탄탄한 허벅지가 점점 더 예민해지기 시작한 살결에
바짝 다가와 붙었다.

가슴 위를 노니는 자유스러운 그의 손과 아래를 뭉근하게 비벼 오는 그의 허벅지가 주는 야한 감각에 결국


뜨거운 숨결이 터져 버렸다.

“흐응…….”

“……선배.”

“…….”

“……좋아요?”

반쯤 실눈을 뜬 지안의 눈앞에 말갛게 눈을 뜨고 자신을 살피는 석한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신비스러운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

“……응? 좋아? 선배?”

그런 눈으로 물어 오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니.

몽롱한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력적인 입술이 화사하게 밀려 올라갔다. 호기심을 담았던 눈에는 즐거움만이 남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녀석…….

예전부터 그랬다.

2.

겨울 향을 머금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향기가 가득한 캠퍼스.

지안이 여기저기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니는 풋풋한 커플들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을 향했다.

[야. 너 어디야?]

하은의 문자였다.

[넌 어딘데? 나 강의실이야.]

[나 지금 일어났어. 이미 지각. 망했다.]

[여기 대출도 안 된다. 알지?]

[알아. 이따가 전공 시간에 보자.]

3 학년 첫 학기가 시작되며 하은과 함께 쉽게 가자고 선택한 ‘성과 사랑’이라는 교양 과목 시간이었다.

수업 시간보다 제법 일찍 도착한 지안이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어…….’

지안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강의실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남학생.

‘오석한이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짧은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대며 나부꼈다.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은 느낌.

그림 같은 장면을 한참 동안 눈에 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왜 다들 오석한. 오석한 그러는지 알겠네.’

비주얼만으로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능력 아니겠는가.

같은 과 1 년 후배인 오석한. 늘 많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수업 특성상 워낙 남학생이 적은 이유도 있었지만, 아마 남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는 수업이었더라도 그는
외모만으로 충분히 눈에 띄었을 것이다.

잘생긴 외모 덕에 그의 주변은 늘 여학생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와의 친분으로 여학생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고 갔다.

그저 남의 일인 듯 지켜만 보던 지안은 그와의 친분이 없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한 여학생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석한아, 일찍 왔네.”

“응.”

“음료수 먹을래?”

“아니. 너 먹어.”

그의 딱딱한 말투에도 앞에 선 여학생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말을 다시 건넸다.

“나 여기 앉아도 될까?”

“아니.”

“……아. 누구 오기로 했어?”

“아니.”

“…….”

“귀찮아.”

어이쿠.

‘내가 민망하네. 내가 민망해.’

지안이 재빨리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 한다는 소리의 적절한 예를 직접 목격한 지안이 픽 웃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곧 봄꽃 잎이 마구 날릴 것만 같은 따스하고 평온한 날씨.

똑똑.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아!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눈앞에 가깝게 나타난 비정상적인 비주얼에 지안의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휘었다.

“조심.”

손목을 당기는 힘에 뒤로 넘어가는 참사는 넘길 수 있었다.


“아…… 노, 놀랐잖아!”

스르륵 손목에서 풀려 나가는 길쭉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던 지안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한 손으로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는 오석한.

얘가 대체 여기 왜 이러고 있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

“……어?”

“같이 앉아도 되죠?”

잠시 생각했다.

방금 같이 앉자던 여학생에게 냉기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독설을 날리던 그가 아니던가.

그래 놓고 저리 다정하게 웃으며 같이 앉자고 하는 이유는 설마…….

날 묻어 버리려는 건가?

벌써 주변의 시선들이 따갑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괜한 미움을 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친구 오기로…….”

“어. 교수님 오셨다.”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의자를 당겨 자세를 바로잡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조용해진 강의실.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지안이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꾸 옆에서 흘깃거리는 불편한 시선이 느껴져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살피기라도 하듯 이곳저곳 얼굴 위를 돌아다니는 그의 시선.

그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수수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생각에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얘 돈 필요한가?

다단계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그가 볼펜을 잡고 지안의 노트 위에 쓱쓱 무언가 써 내려갔다.

[그날 고마웠어요. 덕분에 안 젖었어요.]

며칠 전 소나기가 무섭게 내리던 날. 우산이 없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학과 건물 앞에 서있는 그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별거 아닌데 뭐.]

지안의 대답에 그가 다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선배 나랑 밥 먹어요…….]

노트에서 시선을 올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응? 작게 속삭이며 지어 보이는 미소가 지안의 등 뒤로 스며드는 봄 햇살과 어우러져 더없이 아름다웠다.

남자의 미소가 저렇게 예쁠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던 지안이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날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괜찮아. 다른 사람이라도 그랬을 거야.]

난 원래 주목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그가 가볍게 네 글자를 적고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강의가 끝났다.

“선배, 저 갈게요.”

“어, 그래.”

간단한 인사를 마친 석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강의실 문을 바라보다가 노트 위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 나랑 밥 먹어요.]

“고마우면 고마워서 밥 산다고 하면 되지, 나랑 밥 먹어요는 뭐야?”

그저 한 문장인데, 신경 안 쓰면 되는 문장인데…….

그가 남기고 간 한 문장에서 오묘하고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뒤의 점 세 개도 거슬린다.

가만히 노트 위를 바라보던 지안이 픽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유지안. 너도 눈이 있는데. 그지? 그리 잘생겼으니 뭐라도 한번 엮여 보고 싶겠지. 미련 갖지


말아라!”

지안도 눈 달린 사람인지라 예쁘고 멋진 것을 보면 탐이 나는 게 당연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다가 체하면 답도 없지.”

가벼운 마음으로 툴툴 털어 버렸다.

며칠 후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무슨 교양 수업인데. 팀별 과제야. 짜증 나게.”

“야, 그냥 누가 대충 써서 제출하면 안 되냐? 이렇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야 해?”

지안 역시 그다지 밝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충 학점이나 받아야지 생각했던 ‘성과 사랑’이라는 과목에서 팀별 과제까지 해야 하니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한창 불만을 토로하던 강의실 안이 조용해지고 여학생들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적당히 미안한 표정과 넘치게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석한이 강의실로 들어오자, 우중충했던 강의실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괜찮아. 빨리 와.”

“바쁘면 늦을 수 있지.”

“네, 감사합니다.”

여학생들은 웃었고, 몇 안 되는 남학생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빠르게 눈으로 훑은 석한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지안의 옆에 앉았다.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안녕.”

친근하게 다가와 인사하는 그의 행동에 살며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입술은 웃고 있지만, 눈빛에 날을 세운 여학생들의 모습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그렇게 보지 마. 나 얘랑 안 친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야야.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가서 치킨이나 먹으면서 토론하자.”

“네, 좋아요.”

결국, 과제고 뭐고 놀자는 소리인 듯했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저도 좋아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석한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안면이 그다지 많지 않던 사이라 어색하게 시작되었던 자리가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역시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석한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꼼꼼하게 그를 살펴보았다.

‘역시 잘생기니 눈이 절로 가는구나. 연예인 보는 게 이런 기분이려나? 그럼 뭐해. 성격이 별로인데.’

자기도 모르게 잘생긴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안도 그저 분위기에 맞추어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에 동참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고 한두 명씩 혀가 꼬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과제가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좋은 말로 표현하면 그중 목소리가 가장 큰 남자 선배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성 행동의 차이를 갖고 오는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과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게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번에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야. 당연히 남자들은 예쁘고 가슴 큰 여자 보면 꼴리고, 여자들은 잘생기고 그거 큰 남자가 만져 주고


하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순간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술이 과했는지 그가 헛소리를 시작했다.

“야, 안 그래? 야!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주변 남학생들이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에이, 선배 취했습니다. 그만하시죠.”

“네. 선배 그만 드세요. 취하신 거 같습니다.”

“맞잖아. 어라. 넌 안 그래? 너 가슴 큰 여자 안 좋아해?”

그가 가슴팍에 자신의 손을 동그랗게 만들어 가져다 대고 히죽 웃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말리던 남자 후배도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야. 우리 과목이 과목인 만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자. 오늘 수업 시간에 그랬잖아. 남자들은 시각에
약하고 여자들은 만져 주면 흥분한다고…….”

점점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작게 웅성거리던 여학생들이 불쾌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안이 한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보며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가 화장실을 가는 여학생 중 한 명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소리쳤다.

“야, 거기 가슴 큰 애. 너 어디 가! 대답하고 가라고!”

철썩.

순식간의 일이었다.

“악! 차가워! 야! 뭐야!”

강한 물 싸대기 소리와 함께 맥주를 얼굴에서부터 온몸에 뒤집어쓴 폭주남이 몸서리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탁!

지안이 손에 잡고 있던 빈 맥주잔을 강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야? 지금 네가 나한테 부은 거야?”

“그래! 왜 부족해? 한 잔 더 줘?”

“이씨…… 이게 어디서…….”

“야!”

남자보다 몇 배는 더 큰 목소리가 지안의 입을 타고 튀어나왔다.

순간 조용해진 술집.

“야, 이 개 쓰레기 자식아.”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지안이 발끝으로 남자의 발을 툭툭 찼다.

그래. 너! 너! 손가락으로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지안의 모습을 남자가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야, 너. 잘 들어.”

“……뭐?”

“술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어. 이 뭣같이 생긴 자식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남자가 주변 남학생들의 팔에 의해 제압되었다.

픽-

지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밀려 올라갔다.

“그리고 너 뭔가 되게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 같은 새끼가 백날 만져 봐야 안 꼴려! 알겠어?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 어디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여?!”
말을 다 뱉은 지안이 가방을 들고 문을 향해 몸을 돌리다가 다시 멈추었다.

“후우-”

크게 숨을 내뱉은 지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인상을 가득 찌푸린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 짜증 나. 그냥 신고해 버릴까? 성추행으로?”

지안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됐다, 됐어. 야. 내가 네 거기도 겁나 작아 보여서 참는 거야. 알겠어?”

그대로 지안이 술집을 나가 버렸다.

나머지 여학생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안을 따라 술집을 나갔다.

“푸하하하…….”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남은 학생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석한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 나 진짜……. 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석한을 본 폭주남이 미간을 가득 구겼다.

“야, 너 뭐야. 이 새끼가.”

“아. 아…… 선배 죄송해요. 그런데 어쩌죠? 자꾸 웃음이 나와서…….”

“이 새끼가.”

그가 화를 내든지 말든지 한참을 웃던 석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선배님들.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리던 석한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입술을 비스듬히 밀어 올렸다.

“아. 그리고 선배. 그렇게 아무나 보고 꼴리는 건…….”

“…….”

“너 같은 새끼나 그러는 거예요. 인생 똑바로 사세요. 아시겠죠?”

“뭐?! 저 어린 새끼가!”

뒤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석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술집을 빠져나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술집을 빠져나온 지안이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여자들은 잘생기고 그거 큰 남자가 만져 주고 하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의 말이 떠오르자 술기운이 오른 몸에 점점 더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뭐? 모든 여자가 만져 주면 다 흥분해? 지가 어떻게 알아?”

자리에 서서 격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흥분하던 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톡톡톡. 이마와 어깨에 떨어지는 물방울.

“어, 어…… 어…….”

갑자기 굵어진 물방울이 하늘에서 후두둑 정신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우, 뭐야!”

재빨리 가까운 가게 앞으로 뛰어가 비를 피했다.

잔뜩 먹구름이 낀 밤하늘과 바닥을 매섭게 내리치는 빗방울.

“에이 씨. 기분도 안 좋은데 무슨 비야…….”

짜증 나. 작게 읊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 그치려나.”

하염없이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머리 위에 가방을 올리고 찰박찰박 물방울을 튀기며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유, 그래! 그냥 가자. 그칠 거 같지도 않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지하철역이 있었기에, 조금만 뛰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머리에 가방을 얹고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자……! 엄마야!”

손목에 갑작스럽게 가해진 힘에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몸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며 순간 중심을


잃어 몸이 비틀거렸다.

털썩.

가슴팍에 닿는 단단한 느낌과 함께 좋은 향기가 촉촉해진 공기를 타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향기지 잠시 생각하던 찰나, 허리에 감겨 있는 감촉에 지안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놀란 마음에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몸을 움직였다.

“엄마…….”

바닥에 자작하게 남아 있는 물기에 발이 미끄러져 결국 엄마를 한 번 더 찾고 말았다.

여전히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어둡고 축축한 날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그저 맑고 화사한 미소.

오석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참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묘했다.

살며시 밀려올라 간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배, 나랑 밥 먹어요.”

왜일까?

그저 그 한마디에 지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소름이라기보다 처음 느껴 보는 저릿하고 생경한 느낌.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서도 오묘하고 신기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빠르게 흘렀다.

지안이 재빨리 몸을 바르게 일으켜 한 발짝 물러났다.

허리를 강하게 감았던 그의 팔이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스치며 천천히 풀려 나갔다.

“으…….”

순간 또 몰리는 감각에 지안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가만히 그런 지안을 살피던 석한이 입술을 살며시 밀어 올리며 웃었다.

“대답은?”

“……응?”

“밥 먹을 거예요? 안 먹을 거예요?”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여전히 비가 몰아치는 곳으로 손바닥을 천천히


내밀었다.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엉켜 축축하게 젖어 가는 길고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젖어요…….”

“……뭐?”

“선배 젖는다고.”

빗소리와 함께 축축하게 번지는 목소리.

“그냥 그대로 가면 다 젖어 버린다고요.”


그가 빗물이 가득한 손을 털고 가방에서 우산을 빼며 빙긋 웃었다.

“오늘 내가 선배 데려다줄 거고. 그리고 고마운 선배가 나한테 밥을 사는 순서인데.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아…….”

“선배는 괜찮다고 했지만, 난 데려다주고 꼭 밥을 얻어먹어야 해서요.”

선배가 뭐 후배 밥 한번 사 주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그의 행동에서 파생되는 느낌이 지극히


일반적이지가 않아 살며시 경계심이 생겼다.

“뭐 그렇게 간단한 걸 깊이 생각해요.”

생각을 읽은 듯 그가 가볍게 웃으며 우산을 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신세 좀 질게.”

후두둑.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 사이로 작은 우산 안에 나란히 자리 잡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흘깃 올린 시선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보였다.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그가 몸을 돌려 지안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그녀의 어깨로 내렸다.

그래도 젖었네. 콧등을 찡긋거리며 그가 지안의 어깨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저는 버스 타고 가요.”

“아, 데려다줘서 고마워.”

“내일 7 시. 여기서 봐요.”

“뭐?”

“이건 선배가…….”

“어, 어, 어…… 야! 야!”

찰박찰박 바닥을 내리치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자신의 손 안에 쥐여진 그가 놓고 간 우산을


바라보았다.

지안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가 저렇게 지 마음대로야. 나 내일 약속 있는데.”

냅다 약속 시간만 정해 버리고 사라진 녀석.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우산 손잡이가 여전히 따뜻했다.

□ ◆ □ 이아
“지안! 유지안!”

“어? 어?”

“무슨 생각 해! 몇 번 불렀는데.”

“아. 아니야. 뭐라고?”

잠시 놓았던 정신을 차리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영화 보고 뭐 먹으러 갈 거냐고. 지난번에 말한 커리 집 갈까?”

“아, 그래. 난 뭐, 아무 데나 좋아.”

“뭐가 이렇게 시큰둥해……. 재미없게.”

“아니야. 가자. 좋아!”

영화관에서 나오며 지안이 시간을 확인했다.

‘8 시가 넘었네. 설마 아직도 기다리지는 않겠지? 미리 연락할 걸 그랬나.’

핸드폰 번호도 알지 못했던 터라 따로 연락할 길이 없었다.

하은과 함께 유명한 인도 커리 집을 향하던 지안이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추었다.

“야, 최하은. 안 되겠다. 우리 여기는 다음에 가자. 나 급한 일이 생겨서.”

“응? 뭐?”

“미안. 다음에 내가 쏠게. 집에 가서 연락할게. 나 간다.”

“야! 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무거웠다.

설마 바보가 아니고서야 지금까지 기다리지는 않겠지. 만나지 못하더라도 확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지안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하아- 하아-

비 내린 다음 날 차가운 공기 위로 지안의 하얀 입김이 뿌옇게 번져 나갔다.

“저 자식 바보였어?”

지하철역 앞에 서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석한의 모습이 보였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앞에 다가서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왔어요? 늦었네요.”

곱게 접히는 눈매, 빠르게 밀려 올라가는 부드러운 입술. 환한 미소였다.

“야……! 너 왜…….”

“선배가 올 거 같았거든요. 가요. 밥 먹어야죠.”

“안 오면 그냥 가야지. 뭐하러…….”

“왔으니 됐어요. 선배, 나 배고파요.”

처량한 눈빛을 보내는 그를 바라보다 결국 입을 닫았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그런데 선배. 뭐하다가 늦었어요.”

“약속 있었어. 네가 묻지도 않고 네 마음대로 시간 정하고 가 버렸잖아.”

“아아…….”

“아무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누구랑요?”

“……응?”

물을 따르던 지안의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누구랑 약속 있었어요?”

지그시 내려앉은 목소리에 괜한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무언가 추궁당하는 느낌.

뭐지? 이 느낌은?

“친구랑.”

“친구 누구요?”

“말하면 알아?”

“남자예요, 여자예요?”

지안이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가 올렸다.

여전히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여자야. 원래 영화 보기로 되어 있었다고.”

“아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게 변했다.

지금 싸한 거 나만 느낀 거니?

기묘하게 파고드는 느낌에 지안이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손에 든 물통을 내려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 오석한. 하나만 묻자.”

“많이 물어봐도 괜찮아요.”

또다시 그가 빙긋 웃었다.

무언가 말릴 것 같은 느낌.

“너 나한테 왜 그러는데?”

“뭐가요?”

너 나한테 관심 있어? 이런 물음을 하기에는 너무 도끼병 환자 느낌이라 입을 열다 조용히 다시 다물었다.

“그냥 선배랑 밥 먹고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왜요?”

얘가 사람이 그리운가? 왜 이래.

“다른 사람이랑 하면 되잖아.”

“아니요. 선배랑 하고 싶어요.”

“나 그렇게 안 한가해.”

“저도 그렇게 막 한가하고 하지는 않아요.”

“장난 그만해. 일단 오늘은 어쨌든 나왔으니까 밥 먹자.”

더 말을 이었다가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그에게 휘말릴 것만 같아서 재빨리
말을 끊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지안을 기다리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밥 먹었으니까 됐지?”

“박하시네.”

“뭐가.”

“차 한잔 안 마셔요?”

늦은 시간이었기에 지안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늦었어. 그냥 가자.”

“너무하다. 나 오늘 아픈데도 선배 거의 두 시간 기다렸는데.”


“……뭐?”

놀란 눈으로 지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밥을 먹으며 유난히 그의 피부가 붉다고 느꼈었다.

“나, 열나는데.”

“야!”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들이미는 그의 모습에 재빨리 이마로 손을 얹었다.

손 안에 순식간에 퍼지는 뜨거운 열기.

어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뛰어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야, 너 미쳤어? 이렇게 열이 나는데 왜 기다려!”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약 먹었어?”

“밥 먹고 먹으려고요. 이제 먹어야죠.”

“빨리 가자. 가서 빨리 자. 뭐 타고 가. 버스? 아니다. 너 택시 타라. 택시.”

그의 손목을 강하게 끌어 잡고 도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근데 선배…….”

지안의 몸이 다시 그를 향해 돌아갔다.

“왜?”

“나 집에 데려다주세요.”

“…….”

어울리지 않게 처량하고 구슬픈 표정을 짓는 바람에 결국 집 앞에까지 오고 말았다.

제법 학교에서 떨어진 오피스텔.

“여기야?”

잘은 모르지만, 지안이 알기로 학생이 살기에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너 혼자 살아?”

그저 막연한 궁금함에 물었다.

갑작스럽게 얼굴 위로 내려앉는 그림자.

숨결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행동에 지안이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픈 사람치고 유난히 반짝이는 눈동자.

“왜…… 왜.”

“네. 혼자 살아요.”

“…….”

열기를 품어서 그런지 더욱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그의 입술이 색정적인 자태로 밀려 올라갔다.

작은 행동 하나에 말초 신경을 자극받은 듯 온몸에 찌릿한 감각이 일었다.

잠시 정신이 그에게 빨려 나간 사이, 그가 가까이 얼굴을 내렸다.

아픈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감 때문인지, 아니면 몸속에서 밀려 올라오는 열감인지 지안의 얼굴 위로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렀다.

“선배…… 같이 들어갈래요?”

부드러운 음성과 다르게 직설적으로 떨어지는 눈빛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또 시작되었다.

자꾸만 마주치면 온몸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감각에 석한을 향한 지안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그에게는 별명이 있었다.

오싹한 남자.

오석한, 그를 많은 여학생은 오싹한 남자라고 불렀다.

눈만 마주쳐도 가슴이 설레고 온몸이 오싹해질 만큼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둥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그저 흘려들었었다.

지안은 순간 깨달았다.

이래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구나.

지안의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지안이 잠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자신을 향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오석한…….”

“네, 선배.”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치고 나른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너…….”

“……응?”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으유! 진짜!”


“악! 아파요!”

“아파? 아파?”

그녀의 손바닥이 야무지게 그의 등짝을 내리쳤다.

“너 아직 덜 아프구나! 지금 열이 펄펄 나면서 어디서 개수작을!”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그는 그저 그녀의 손바닥을 맞으며 소리 내 웃었다.

한 번 더 석한을 향해 다가가던 그녀의 손목을 그가 강하게 그러잡았다.

“너무하시네. 아픈 후배가 병간호 좀 해 달라고 하는데……. 혹시 알아요? 언젠가 들어가 볼지 모르는데.


오늘 미리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잖아요. 아니 그냥 구경하라고요.”

“야……!”

“혹시 다른 생각 한 거 아니죠?”

“이게 진짜!”

그를 향해 날리던 한 손마저 그에게 잡혔다.

두 손을 잡힌 채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흘겼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너, 지금 말 위험했어. 너 봤지? 그날.”

“네. 그럼요. 시원하게 맥주로 그 새끼 얼굴에 원 샷 원 킬 하던 모습. 아주 똑똑히 봤죠.”

“그럼 됐어.”

그가 꼭 잡은 손목을 천천히 풀어 주며 얼굴을 기울여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또?”

“근데 나 조금 서운하네.”

“……뭐가.”

얘가 또 왜 이럴까. 뭔가 불안한 느낌이 맴돌았다.

“나랑 그날 그 개자식이랑 동일 선상에 두고 있는 건 아니죠?”

“…….”

“선배, 오해할까 봐 말해 두는데요.”

“…….”

천천히 귓가로 얼굴을 내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이러는 건…….”


“…….”

“유. 지. 안 한정이에요.”

“……!”

“저 들어가요. 조심히 가세요.”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

왠지 기가 빨린 듯한 느낌에 피로가 몰려왔다.

‘유지안 한정이에요.’

그리도 반듯하니 잘생긴 남자가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면 어떤 여자가 안 떨리겠는가.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자신에게 대놓고 들이대고 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굴려서 결론을 얻어 냈다.

‘바람둥이야. 바람둥이.’

이건 뭐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그리고 가슴속에서 잠시 내려앉았던 설렘을 지우고 눈을 감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 진동에 지안이 눈을 살며시 떴다.

여전히 방 안에 가득한 어둠.

“뭐야. 이 시간에.”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제가 유지안입니…… 네?”

□ ◆ □

“선배 왔어요?”
자다 나와 부스스한 지안의 얼굴 위로 어이없는 웃음이 얹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에게 다가갔다.

대학병원 응급실 침상에 앉아서 해맑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게 무슨 일인데?”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새벽에 갑자기 열이 너무 많이 올라서 약 찾으러 가다가 넘어졌어요.”

“근데 부러졌어?”

“뼈에 금이 살짝 갔나 봐요. 거기 하필 아령이 있어서…….”

“헐…….”

“미안해요. 자고 있었죠? 부모님도 다 미국 가 계시고 마침 생각나는 게 선배밖에 없어서요.”

뭐 아팠을 텐데 그럴 수도 있지, 작게 중얼거리던 지안이 눈을 번쩍 떴다.

“야…… 너 내 핸드폰 번호 알고 있었어?”

석한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어제 전화 안 하고 그렇게 기다렸어!”

그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도 그저 좋다고 웃는 속 모를 녀석.

말자, 말아.

‘혹시 알아요? 언젠가 들어가 볼지 모르는데.’

결국, 그의 말이 예언이나 된 듯 그의 집 현관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기분이 우울해졌다.

목발을 현관에 두고 소파로 콩콩 뛰어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털썩 소파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목발 여기에다가 둘게. 그리고 나 간다.”

“어? 벌써 가게요?”

벌써는 무슨…….

지금 새벽 5 시거든?

가볍게 손을 들었다가 내리고 몸을 돌렸다.


“선배!”

“왜 또?”

“내일 와 줄 거죠?”

“어딜?”

지안의 몸이 다시 재빨리 그를 향해 돌았다.

“나 이러고 학교 혼자 가라고요? 나 부모님도 미국에 계신데…….”

“너 친구 많잖아!”

“어라? 몰랐어요? 나 왕따예요.”

“야, 거짓말하지 말고 잠이나 자. 나 진짜 간다.”

“진짠데. 나 선배 안 오면 학교도 못 가요! 알겠죠?”

뒤에서 목청껏 소리 지르는 그를 내버려 두고 재빨리 집을 나왔다.

“뭐라는 거야. 말이 돼?”

맨날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주제에. 어디서 약을 팔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던지는 그를 두고 집을 나왔다.

며칠이 흘렀다.

“야, 오석한 요즘 왜 학교에서 안 보이냐?”

그의 추종자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책을 바라보던 지안의 귀가 쫑긋거렸다.

“몰라. 전화도 안 받고. 다쳤다고 했던 거 같은데 지금 며칠째 학교 안 오네.”

“수업도 안 왔어?”

“응. 나랑 겹치는 건 하나도 안 왔네.”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꾸 신경이 거슬렸다.

볼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지안이 핸드폰을 두드렸다.

[야. 너 어디야.]

[집이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답변이 왔다.

[왜 학교 안 오는데?]

[말했잖아요. 그런데 계속 집에만 있었더니, 먹을 것도 없고 배는 고프고…….]

처량한 문자였다.
[시켜 먹어.]

[체크카드도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현금도 없고.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하아…… 진짜…….”

괴롭게 한숨을 내쉰 지안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날 자신 때문에 비를 많이 맞고 아파서 일어난 일이기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찾으니 당황스러움에 미안함이 쏙 사라질 지경이다.

결국, 먹을 것을 두 손 가득 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친절하게 그가 미리 문자로 보내 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조용한 집 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다가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야, 나 왔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야, 오석한. 나 왔다고.”

역시나 답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탁 위에 사 온 것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문이 살짝 열려 있는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틈 사이로 침대 위 이불 밖으로 살짝 빠져 있는 그의 발이 보였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얀 이불을 가슴팍까지 덮고 살며시 옆으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카락 끝에 지안의 시선이 닿았다.

‘아직 아픈가? 식은땀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은 지안이 그의 이마로 손바닥을 얹었다.

열이 없음을 확인한 지안이 이마에서 손을 떼는 순간 작게 떠진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

“……어. 깨, 깼어?”

잠에서 깨서인지 아니면 아파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기운이 없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마저 관능적으로
느껴져 지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몽롱한 빛을 담은 눈동자가 지안의 얼굴 이곳저곳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더 자. 아니다. 배고프다며. 뭐 먹을래?”

밀려오는 민망함에 침대에서 일어나던 지안이 손목을 당기는 힘에 다시 털썩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지안의 눈꺼풀이 끝까지 밀려 올라갔다.

“……선배.”

“……응?”

그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가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나른하게 밀려 올라가는 그의 입술 사이로 나른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제 왔어요…….”

“…….”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더욱 꽉 말아 쥐었다.

지안이 순간 내쉬던 숨을 멈추었다.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기에 몽롱했던 눈빛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변해 있었다.

“야! 배고프지! 내가 죽이랑 이것저것…… 악!”

몸이 휘청이더니 푹신한 감촉이 등을 감싸 왔다.

순식간에 눈앞의 세상이 뒤집히고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단단한 남자의 몸이 굴곡진 그녀의 몸 가까이 와 닿았다.

손목을 감았던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점점 위로 올라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조금만 내리면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 그를 마주했다.

“……야. 지, 지금…….”

짙게 떨어지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머리로 생각한 말들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농염함이 가득 물든 목소리가 뜨거운 숨결과 함께 지안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선배…… 나 지금 그런 거 말고…….”

“…….”

“다른 게 더 먹고 싶어요.”

일렁이는 지안의 눈동자가 무엇인가를 강하게 갈구하는 그의 눈동자로 덮였다.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빠르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만 또렷하게 느껴졌다

촉-

천천히 내려온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입술을 감싸고 떨어져 나갔다.

가랑비처럼 내려와서 촉촉하게 입술을 적시는 입맞춤.

살결이 맞닿은 지안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다시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맞닿은 입술이 조금 전보다 오랜 시간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느릿한 움직임이 오히려 야하다고 느껴졌다.

키스가 원래 이런 거였나.

뜨거운 숨결이 차올랐다.

첫 키스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생경한 느낌.

이런 잔잔한 키스만으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러 지안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조금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욕망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선배…….”

“…….”

“싫으면 지금 말해요…….”

당장에라도 지안의 입술을 집어삼킬 듯한 표정으로 그가 인내하듯 속삭였다.

침대에 맞닿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석한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뭐라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주친 눈동자에 입술이 굳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싫지 않았다.

작은 감촉만으로 물밀듯 치밀어 오르는 야릇한 감각에 예민해진 몸은 기대감에 충만해져 있었다.

“하아…….”

그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턱 끝에 닿은 그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선배…… 타임 오버예요.”

시작을 뜻하는 그의 말과 함께 비교도 되지 않는 자극이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뜨거운 숨을 조금씩 내쉬느라 벌어진 아주 작은 틈을 벌리고 그의 혀가 깊숙하게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흐읏…….”

저도 모르게 작게 흘리는 신음에 입 안을 파고든 그의 혀가 잠시 동작을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깊게


파고들어 여린 살을 훑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얽혀 들면서 익숙하지 않은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혀가 몰아치듯 자신의 혀를 휘감을 때마다 옅은 숨을 헐떡거렸다.

지안의 머리를 단단하게 파고들었던 손이 목덜미를 타고 점점 아래로 흘러내렸다.

섬세하게 살결 위를 훑어 내리는 손가락 움직임에 지안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앗…… 흣…….”

어느새 티셔츠 안으로 파고든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전기라도 흐른 양 지안의 몸이 침대 위에서 작게 튀어 올랐다.

“자, 잠깐만…….”

한 번 잠식한 입술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파고드는 그의 입술을 겨우 떼어 내고 다급한 목소리를


흘렸다.

하아- 하아-

여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눈을 마주했다.

“저, 나…….”

“……괜찮아요.”

입속의 숨을 삼킨 그가 다독이듯 천천히 말을 뱉었다.

힘겹게 들었던 고개를 숙인 그가 지안의 하얀 목덜미를 입술로 빨아 당기다가 혀끝으로 부드러운 피부


위를 핥았다.

“끝까지 안 할 거야…….”

“흐으읏…….”

잠시 멈추었던 그의 손이 브래지어 속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손끝에 걸리는 도도록한 돌기를 손바닥 안에 두고 원을 그리듯 살살 비비며 그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괜찮다고 다독이던 그의 행동에는 갈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 지안의 입술을 찾았다. 마치 오랜 갈증을 해소하듯 정신없이 빨아 당기는 입술에 지안이
잠시 당황했다.

키스가 점점 깊어지고 야릇한 숨결이 정신없이 오갔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그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뜨거운 손길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야릇하게 쓸어내리던 손이 그녀의 배를 타고 내려와 거침없이
그녀의 바지 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흐으응…….”

파고든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단숨에 움켜쥐었다.

지안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하아…… 잠깐만…….”

더 이상의 다독임은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 위를 그의 엄지가 지그시 쓸고 올라가자 그녀가 앓는 듯 신음을 터트렸다.

어떤 느낌일까.

석한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녀로 가득 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만지고 물고 빨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욕망이 서린 손이 그녀의 팬티 속으로 파고들어 주저 없이 그녀의 은밀한 살 위를 점령했다.

“하악!”

축축한 감촉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끈거리고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

“……왜 이렇게…… 젖었어요…….”

“흐읏…….”

“하아…… 미치겠네.”

작게 읊조린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녀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옅게 헐떡이는 그녀의 숨결이 입 안으로 쉴 새 없이 들어왔다.

끊임없이 작은 살결 위를 움직이는 손끝에 온몸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생경한 감각에 순간 울컥거림이 밀려 올라왔다.

아마도 쾌락과 두려움의 경계선 그 어디쯤에서 시작된 감정인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있던 그녀의 작은 손이 풀썩이며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촉촉하게 젖어 있는 살결을 당장에라도 파고들 것처럼 문지르던 석한의 손가락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입술을 떼어 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감긴 눈 위로 촘촘하게 박힌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석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그녀의 얼굴 위를 움직였다.

“……선배.”

그녀의 바지 속을 파고든 손을 재빨리 빼어 내며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선배…… 눈 좀 떠 봐요…….”

다시 한번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지안의 눈꺼풀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흐르지는 않지만,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 안에 가득 고인 맑은 눈물.

석한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잃어버렸던 이성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요…….”

쫘악-

강한 마찰음과 함께 얼굴 위로 충격이 느껴졌다.

단단한 어깨가 밀려오는 힘에 침대로 풀썩 떨어졌다.

흐트러진 옷을 손으로 추스른 지안이 채 추스르지 못한 눈동자로 석한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파르르 떨리는 작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장난도 정도껏 해.”

“……지안 선배!”

빠르게 침대를 벗어난 그녀가 잡을 새도 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정적만이 남았다.

“하아. 미쳤지, 진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손끝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이 사라지기도 전에 강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 ◆ □

“야, 유지안. 천천히 마셔.”


소주잔에 담긴 맑은 액체가 담기는 족족 지안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말리던 하은도 결국 포기를 선언하고 그저 쉼 없이 들이켜는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인지 알고 너 술 마시는 것 좀 구경하면 안 될까?”

“최하은. 나 오늘 끝까지 갈 뻔했어.”

“무슨 소리야.”

“너 알지? 나 매번 실패한 거.”

“뭐를? 응? 너 설마?”

지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술 위로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대박. 대박. 대박.”

놀란 토끼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던 하은이 눈을 찌푸리며 지안에게 가깝게 다가와 속삭였다.

“야. 너 못 느낀다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대박. 야…… 대박. 축하라도 해야 하는 건가. 와…….”

지안이 초조한 듯 입술을 지분거렸다.

“야, 유지안. 잠깐.”

하은의 부름에 심각함을 담은 지안의 눈동자가 하은을 향했다.

“너 지금 남자 친구도 없는데. 대체…….”

“하아…….”

“너 말해! 누구야? 너 남친 생겼어? 말해!”

“그게 지금 중요해?”

“어. 굉장히! 누구야?”

지안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야한 소설을 읽거나 야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더라도 남들이 말하는 흥분은커녕 그저
무덤덤했다.

남들의 간접적 경험에 맞추어 자신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저 아무 문제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그저 가볍게 넘겼던 일이 점점 지안의 고민이 되어 갔다.

가슴이 떨려서 연애를 시작했다.

평범한 연애가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남자 친구와 스킨십이 이어졌다.


처음 만난 남자 친구와의 첫 키스.

짜릿함은커녕 밀려드는 술 냄새에 불쾌한 감정이 가득 밀려들었다.

그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더 좋아지면, 더 익숙해지면 남들처럼


황홀함이 밀려올 거로 생각했다.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만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좀 더 깊은 스킨십을 시도했지만, 지안은 늘 제자리였다.

정신없이 자신을 쓰다듬어 오는 애무에 모든 것을 맡기고 끝까지 가 보겠다고 다짐한 날도, 결국 삽입조차
하지 못하고 끝이 났다.

한 번도 흥분에 젖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안은 혼란스러웠다.

석한의 키스와 길지 않은 애무에 속수무책으로 흥분하고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

“야! 야! 그래서 그게 누군데! 응?”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다는 표정으로 물어 오는 하은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오석한.”

하은의 젓가락 끝에 걸려 있던 안주가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테이블 위에 떨어진 안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누구? 누구? 누구라고?”

“……오석한.”

“…….”

“오석한이라고.”

“……와, 유지안…….”

하은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눈빛을 머금고 입을 벌리며 지안을 바라보았다.

하은의 반응에 지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예상 못했겠지. 나도 걔랑 엮일지 예상도 못 했으니까. 어디 엮이다 뿐이냐.

생전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대, 대…… 대체 어쩌다가 오석한이랑 끝까지 갈 뻔한 건데.”

“……나도 몰라. 아무튼…… 아무튼.”

처음 느낀 감정과 쾌락에 충격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야, 유지안.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래도 되나 싶지만…….”


“…….”

“난 네가 왜 이렇게 부러운 거냐.”

“야!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 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하은이 앞에 놓인 술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술잔을 내려놓은 하은이 지그시 지안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복 받은 년.”

□ ◆ □ 이아

‘복 받은 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은의 목소리에 하얀 이불 속에 파묻힌 지안이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벌써 7 년 전인가.

그때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참을 생각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방 침대에서 뜨겁게 밤을 보내고 아직도 그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배. 무슨 생각 해요?”

“……어?”

석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지안이 재빨리 돌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석한이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로 침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밤새 자신을 가두었던 넓은 어깨와 자신의 몸 위로 겹쳐졌던 단단한 가슴, 모양 좋은 복근이 물기를


머금고 유난히 섹시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괜히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고며 다른 곳을 응시하는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풀썩이는 소리와 함께 침대 한쪽이 움푹 내려앉았다.

“왜요. 부끄러워요?”

지안의 목 끝까지 덮인 이불이 그의 손에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야! 하지 마!”

재빨리 이불을 손으로 붙잡고 다급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물기가 남은 그의 손이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동그란 어깨 위로 내려와 손끝으로 여린 살결을 살살


문질렀다.

그저 작은 움직임에도 지안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 밤새 그에게 적응된 신경들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나 좀 봐 봐요.”

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안의 얼굴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석한이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한참을 음미하듯 얼굴을 들여다보던 석한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침부터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순간 밀려오는 열감이 얼굴을 뒤덮었다.

……아침부터 이러는 건 네가 반칙이야…….

자신의 살결을 집요하게 빨아내던 야릇한 입술이 보기 좋게 밀려 올라갔다.

점점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내려오는 석한의 움직임에 천천히 눈이 감겼다.

그의 입술이 맞닿자, 학습이라도 된 듯 저절로 지안의 입술이 스르르 열렸다.

석한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파고든 혀끝으로 그녀의 입 안을 부드럽게 훑었다.

마음 같아서는 숨결을 모조리 빼앗을 만큼 강하게 파고들고 싶었지만, 더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서로의 혀가 감기고 또 감겼다. 질척이는 소리가 침대 위를 다시 점령하기 시작했다.

뜨거워지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맞닿은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

동시에 터져 나온 아쉬움이 담긴 숨결이 둘 사이에 퍼졌다.

석한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지금 선배 위험해요.”
그의 목소리에 지안도 천천히 눈을 떴다.

살며시 찌푸려진 미간과 금세 열기가 담긴 석한의 눈빛이 지안의 눈에 담겼다.

“뭐, 뭐가…….”

가만히 있어도 타오를 것만 같은 욕정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폭발할 듯 밀려 올라왔다.

그의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지안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 밑으로 흘러내린 이불을 재빨리 손으로 끌어


올렸다.

“너…… 너 벌써 두 번 했다.”

“……응? 지금 횟수 세는 거예요?”

“……당연하지. 열 번이라며!”

이럴 거면 백 번 부를걸. 작게 속삭이던 석한이 민망함에 얼굴이 더 붉어진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시 꾹 다물어졌던 입술을 올리며 빙긋 웃었다.

“알겠어요.”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상체를 일으킨 석한이 손을 뻗어 지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옷장을 열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단단한 상체 위에 새하얀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하나씩 잠그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주말인데. 어디 가?”

“왜요? 같이 갈래요?”

살짝 고개를 돌린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는지 알고 같이 가?”

“집이요.”

“집?”

지안이 알기로 그의 가족들은 모두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더는 묻지 않고 깃이 선명하게 살아 있는 검정색 슈트 바지를 입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넥타이를 꺼내던 그가 지안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더 안 물어봐요?”

“집에 간다며.”

“그러니까요.”
“…….”

넥타이를 목 위에 대충 걸친 석한이 침대로 다시 다가와 그녀의 앞에 앉았다.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의 눈썹이 천천히 휘었다.

“나에 대해 그렇게 궁금한 게 없어요?”

“아…….”

천천히 손으로 넥타이를 매는 그의 눈이 지안의 얼굴 위를 떠나지 않았다.

“집에 간다며. 내가 뭘 궁금해야 하는데.”

“집이 어딘지. 왜 가는지. 누구 만나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요?”

“집은 어디고, 왜 가는 거고, 누구 만나는데?”

“허…… 됐어요.”

침대에서 일어난 석한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선배. 씻고 나와요. 밥 먹게.”

식탁 앞에 앉은 지안이 크기를 키운 눈으로 식탁 위를 살폈다.

“별거 없지만, 많이 먹어요.”

그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별거 없는 밥상이 아니었다.

반찬 수만 해도 일곱 가지에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뭇국까지.

최근 먹어 본 집 밥 중 가장 근사한 상차림이었다.

“잘 먹을게. 너도 먹어.”

말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조용히 움직이던 지안의 젓가락이 결국 식탁 위에 올려졌다.

또 시작이다. 작은 한숨을 내쉰 지안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야, 오석한.”

“네? 왜요?”

마주친 그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밥을 먹을 수가 없잖아.”

“나 신경 쓰지 말고 먹어요.”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철철 넘치는 남자가 저렇게 번듯하게 입고 앉아 있으니 더욱더
부담스러웠다.

“물 줄까요?”

입 앞까지 들이미는 물 컵을 재빨리 손으로 잡았다.

“됐어. 내가 먹을게.”

“하아. 어제가 행복한 거였구나.”

고개를 살며시 올리며 한탄하듯 말을 내뱉는 석한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에 댄 물 컵을 천천히 기울였다.

“침대 위에서처럼 막 나한테 매달리면 좋겠다!”

“푸웁! 야!”

그가 소리 내 웃으며 재빨리 휴지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낚아챈 휴지로 입을 닦아 낸 지안이 석한을 노려보았다.

“이게 또 아침부터 맞아야 정신을 차리나.”

“될 수 있으면 침대 위에서 때려 주세요, 선배.”

“하아…….”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숟가락을 손에 잡았다.

“넌 안 먹어?”

“아! 저는…….”

“왜? 나 밥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

예상되는 답안을 내놓고 지안이 피식 웃었다.

“저 원래 아침 안 먹어요.”

하아- 여긴 어디지?

아침부터 두통이 밀려올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귀여워.”

“…….”

“선배 되게 귀엽다.”

“그만 놀려라.”

묵묵히 밥을 입에 넣는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은 시간이 안 되고, 내일 같이 점심 먹어요.”


“내일 약속 있어.”

“누구랑요?”

“…….”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 굳이 못 할 이유는 없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다시 물어 왔다.

“누구랑 약속인데 말을 못 해요?”

잠시 침묵하던 지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봐.”

“…….”

“내일 선보기로 되어 있어서.”

“아아아아…….”

“…….”

“그런데 요즘 시대에 스물아홉에 선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간단하게 소개팅으로 해요. 선배


소개팅하는구나.”

“……응.”

가볍게 대꾸하는 석한의 모습에 어디에선가 스멀스멀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얘 혹시 갑자기 나타나서 판 뒤엎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어제 은준의 일 하나만으로도 그러고도 남을 위인임을 지안은 알고 있었다.

불안한 지안의 표정을 알아챈 석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 걱정하지 마요.”

“……응? 뭐가?”

생각이 읽힌 지안이 눈을 크게 떴다.

“선 자리에 나타나서 깽판 치는 양아치 같은 짓은 안 하니까.”

“…….”

“어차피 나만 한 인물이 나올 리도 없고.”

와, 저 자신감.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빙긋 웃는 모습이 또 연예인 뺨 여럿 후려치고도 남을 만큼 멋있으니 할 말도 없다.


결국, 지안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어. 언제 나가?”

“이제 나가야 해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야. 괜찮아. 나 택시 타고 갈게.”

“그건 절대 싫어요.”

우겨봐야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자.”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지안은 말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격렬한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낯선 상황에 기분이 묘했다.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닿은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빙긋 웃었다.

늘 그렇듯 자신을 향해 닫는 눈동자가 자신과 다르게 꽤 여유로워 보인다.

“왜요?”

“아니야.”

“싱겁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지안이 그에게 짧은 인사를 마쳤다.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지안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온 지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선배, 몸은 괜찮아요?]

[답이 없네. 자나 봐요. 걱정돼서 문자 보내요. 오늘 푹 쉬어요.]

걱정이 가득 느껴지는 그의 문자를 한참을 바라보다 입술 끝을 씁쓸하게 밀어 올렸다.

답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격정적인 밤을 보낸 몸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게 되살아나는 기억.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을 야릇하게 만지던 손길과 온몸 구석구석 뜨겁게 훑고 지나간 그의 입술,
뜨거운 혀가 남기고 간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귓가에 터지던 그의 거친 숨결과 정신없이 흘려보내던 자신의 야한 신음.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속 어딘가에서 찌릿한 감각이 솟아올랐다.

“하아…….”

말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대체 뭐야…….”

유일하게 자신을 흥분시키는 남자.

그 남자가 작정한 듯 덤벼드니 당해 낼 방도가 없다.

‘이렇게 가슴 설레고…….’

‘사람 미치게 만드니까…….’

잔잔하게 내뱉던 그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자 작게 가슴이 진동했다.

만나지 못했던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늘 자신을 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는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며
행동하고 있다.

그저 뜨겁게 하룻밤을 보낸 것에서 끝이 나는 사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이라면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지 않을 텐데.

그냥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대로 설레도 괜찮은 걸까…….

생각을 담을수록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졌다.

□ ◆ □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마주 앉은 남자가 지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엄마 친구의 또 그 친구의 아들의 친구의 사촌이랬나?

훈훈한 외모에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 잘나가는 대기업 과장으로 성격도 모나지 않고 친절한 남자였다.

어쩌면 자신보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는 남자.

애써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주한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무리 조건과 성격이 훌륭한 남자가 나오더라도 지안은 늘 만남을 이어 가지 않았다.


늘 자신의 연애의 끝은 같았다.

좀처럼 깊은 스킨십에도 흥분이 되지 않는 자신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건전한 만남을 이어 가다가 바로


결혼할 수도 없는 일.

오히려 미리 차단함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문제로 상대까지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반복된 만남에 지쳐 있었고, 더는 자신도 상대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의 만남은 주선해 주신 분을 위해 예의를 갖춰야겠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고 그럭저럭 편안한 대화가 이어졌다.

“지안 씨는 취미가 뭐예요?”

“그냥 따로 취미라고 할 건 없고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저도 영화 보는 거 좋아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다음에 같이 영화 볼까요?”

“아…… 네.”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남자는 꽤 적극적인 대화를 건네왔다.

한참 대화를 이어 가던 중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잠시만요.”

잠시 양해의 말을 건네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선배, 어디예요?]

석한의 문자였다.

[어디긴. 선본다고 했잖아.]

짧게 답을 보내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아직도요? 오래 만나네요.]

지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금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됐거든.]

핸드폰을 내려놓고 지안이 앞에 앉은 남자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급한 일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 중이었죠?”


“회사에서는 어떤 일 하세요? 제가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요.”

“아, 저는…….”

핸드폰을 핸드백 안으로 넣어 버리며 신경을 끄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핸드폰 안에서 자꾸만 들리는 작은 진동에 도통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가던 지안이 여전히 거슬리는 소리에 결국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지안이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빠르게 향했다.

연속으로 도착해 있는 그의 문자에 핸드폰을 바라보던 지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언제 헤어져요? 근데 남자 뭐 하는 사람이래요?]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거죠? 키는 커요?]

[끝나고 차 마시러 가려나? 나보다 잘생기지는 않았을 거고. 훈남 정도인가?]

[원래 선보면 그냥 거기서 밥 먹고 헤어지는 거 아닌가? 이렇게 오래 있을 정도면 마음에 드는 건가


봐요?]

이럴 거면 네가 와서 나 대신 선보든가.

안면 까고 물어봐.

헛웃음이 터져 가늘게 뜬 눈으로 한참 동안 문자를 바라보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에 놀란 지안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어? 전화 받네!

아주 밝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헤어졌어요? 지금 어디예요?

“아직 거기거든. 그러니까 문자 보내지 마, 알겠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선배!

“왜?”
-근데 뭐 먹었어요?

하아- 한숨이 절로 흘렀다.

-오늘 옷은 뭐 입었어요? 대충 입어도 예쁜데, 엄청 꾸미고 나간 건 아니죠?

그럼 네가 와서 보든가. 이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 지금 잠깐 화장실 간다고 나온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네. 알겠어요. 집 앞이니까 천천히 와요.

“응. 그래…… 뭐? 어디라고?”

-선배 집 앞이라고요.

“거기 왜 있어!”

작은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

-왜긴요. 선배 보고 싶어서 왔죠.

조금의 거짓도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이야기 나누다가 와요.

거짓이 가득 담긴 목소리도 덤으로 흘려 주는 센스.

-그 자식 기다리겠네요. 빨리 가 봐요.

전화가 끊어졌다.

남의 귀한 아들 얼굴도 안 보고 그 자식 만들어 버리는 석한의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잔뜩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렀음에도 짜증이 전혀 묻어 있지 않은 표정.

예전에도 그랬다.

예고 없이 나타나 사람 당황하게 하고 이유 없이 파고드는 녀석이 싫지는 않았다.

너무 깊게 빠지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웠을 뿐.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던 지안이 생각을 지우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안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조금 오래 걸렸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식사도 끝났는데 차 마시러 다른 데로 이동할까요?”

“아…….”
지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안함을 가득 담은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한데 어쩌죠. 제가 급히 가 봐야 할 거 같아서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 건가요?”

화장실을 다녀온 후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상대가 물어 왔다.

“아! 그건 아니고요…….”

“…….”

“집에 개가 있어서요.”

에라, 모르겠다.

내일 엄마한테 전화 오겠지. 너 개 키우냐고.

“……네? 개요?”

“네. 개 아시죠? 그 멍멍 짖는 개.”

되게 집요하고 똘끼 충만한 개.

그런 개 있어요.

“개가 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어쩌죠?”

“주인 손이 필요하면 어쩔 수 없죠. 저도 예전에 개 키워 봐서 잘 압니다.”

눈앞에 남자가 공감을 해주니 괜히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

“네. 얘가 외로움을 많이 타서 혼자 놔두면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거 같아서요. 죄송해요.”

아쉬움이 담긴 남자의 얼굴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번호를 교환하고 짧은 인사를 마친 후 집을 향했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호의를 겨우 거절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자신의 이해 못 할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굳이 그 자리를 박차고 핑계까지 대가며 왜 나와야 했을까.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초조했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지안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그의 차를 찾았다.

“어? 집 앞이라더니.”

아, 그 집 앞이 설마.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한 손을 공중에 반갑게 흔들며 활짝 웃는 석한이 보였다.


꼬리만 없지 딱 주인 기다리는 개가 따로 없다.

“선배, 왔어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답 없이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되게 일찍 온 거거든? 핑계까지 대 가면서?

지안이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차에서 기다리거나 어디 들어가 있지.”

“비밀번호를 몰라서요.”

“누가 우리 집에 들어가 있으래!”

“몇 번이에요?”

어느새 지안의 뒤로 돌아와 어깨에 턱을 걸친 그가 빙긋 웃으며 빨리 누르라는 듯 턱 끝으로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공중에서 움직이던 지안의 손이 순간 멈추었다.

허리 위를 느릿하게 쓸면서 감아 당기는 힘에 자신과 그의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굴곡진 엉덩이 사이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단단함에 지안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야.”

“왜요? 엄청 오래 간절하게 기다린 게 막막 느껴져요?”

“참나…….”

“빨리요, 선배…….”

허벅지를 쓸고 내려간 그의 손이 치마 아래로 파고들어 야릇하게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점점 밀려


올라왔다.

“야…… 잠깐…….”

“빨리. 나 여기서 선배 벗기기 싫으니까.”

뒤에서 점점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에 지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다리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러는 거야.

석한이 천천히 눈을 내리자 지안의 짧은 머리 아래 드러난 하얗고 가느다란 목 위에 지난밤 자신이 남겼던
빨간 자욱이 옅게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석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숨결이 흩어짐과 동시에 붉은 혀끝이 하얀 살결을 아래에서 위로 야살스럽게 훑고 지나갔다.

“흐…… 잠깐만…….”

그에게 꼭 붙들린 지안의 몸이 작게 비틀렸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거슬러 올라와 적당히 도톰한 귓불을 살며시 깨물어 나른하게 비볐다. 그러자
지안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나지막하게 터져 나왔다.

“하아, 석한아…….”

“빨리요……. 네?”

지금 누구 때문에 못 움직이는데. 이 나쁜 자식.

복도 어딘가에서 작은 바스락거림이 들렸다.

혹여나 누가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조마조마해 재빨리 비밀번호를 눌렀다.

쾅.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의 몸 안에 거침없이 끌려들어 갔다.

“야! 너 치사하게 밖에서!”

“그래서 싫었어요?”

환하게 켜진 현관 등 아래 미소를 머금고 열기로 가득한 눈동자를 천천히 내려 그녀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하늘하늘한 소재의 핑크빛 블라우스, 보기 좋게 살이 잡힌 그녀의 엉덩이 선을 잘 살려 주는 적당히


피트되는 베이지색 스커트. 평소보다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그녀의 모습에 석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허리를 두른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지이익. 뒤에서 치마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나갔어요?”

말에 담긴 의미와는 이질적인 삐딱한 목소리.

그 모습을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가 봤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나빴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치마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안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잠깐만! 여기서?”

말리는 목소리는 듣지 않은 채 그가 몸을 점점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손끝에 힘을 주어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린 그의 손이 곧바로 스타킹 아래 팬티 안으로 침범해 그녀의


엉덩이를 꽉 잡고 천천히 주물렀다.

만지기 좋게 적당한 탄력, 손바닥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감촉과 감도에 저절로 입술이 밀려 올라갔다.
뭉근하게 비비며 자신을 바짝 끌어안는 그의 행동에 조금 전보다 더 단단해진 그의 남성이 고스란히 몸
위에 느껴졌다.

“흐읏…….”

엉덩이가 맞닿은 골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이제 막 흥분에 젖기 시작한 질구 끝을 가볍게 파고들었다.

살살 돌리다가, 기다란 손가락을 세워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얕지 않은 깊은 삽입.

“하앗…… 잠깐만…….”

호흡을 가르고 야릇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게 진동하는 몸이 그에게 안기듯 파고들었다.

혹여나 자신의 신음이 현관 밖 복도에 퍼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면서도 신음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여린 살결을 파고든 손가락에 지난밤 자신을 지배했던 쾌감이 떠올라 금세 몸이 달아올랐다.

이미 그가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이런 전개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늘 온몸에 감기는 자극은 예상을 벗어난다. 작은 애무에도 온몸이 하염없이 녹아내릴 듯 반응한다.

지독하게 파고들어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이 치고 들어오는 쾌감.

이미 숨결은 뜨거워졌고, 예민한 살결 안을 거침없이 휘젓는 손가락에 지안의 몸이 대책 없이 젖어 갔다.

“하아…… 들, 들어가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온몸이 휘청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한쪽 팔로 단단히 지안의 몸을 고정한 그가 대답 없이 그녀의 안을 빠르게 휘저었다.

투명한 액체가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기에 가득 젖은 살결이 부딪히며 질척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퍼졌다.

“예쁜 건 아무한테나 보여 줘도 되지만…….”

“…….”

“이런 야한 소리는…… 나만 들을 거야…….”

“흐응…….”

“……알겠어요?”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빼냈다.

여전히 자신에게 온몸을 맡긴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침대를 향했다.

그녀를 내려놓기 무섭게 티셔츠를 빠르게 벗어 내고 바지와 속옷까지 단숨에 벗은 뒤 침대로 성큼


올라왔다.

스타킹과 속옷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흘러나온 애액에 번들거리는 핑크색 살점을 바라보며 혀끝으로 입술을
나른하게 훔쳤다.

“만세.”

“…….”

“손 들라고요.”

“아…….”

단추를 풀어낼 여유조차 없어 머리 위로 단번에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겨 냈다.

두두둑 단추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치게 섹시하고 위험해 보이는 그가 단숨에 그녀 위로 올라탔다.

“하아, 예뻐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그녀의 몸. 정신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이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석한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비틀려 올라갔다.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자신만이 흠뻑 취할 수 있는 그녀의 몸.

소유욕에 치밀었던 격노가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탐스럽고 새하얀 젖가슴 위에 오늘따라 유난히 예쁜 색을 띠는 것 같은 유두를 가만히 바라보다 두 손으로


천천히 감싸 쥐었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동그스름하고 하얀 살이 이지러지며 작은 정점이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입술을


내려 끝을 얕게 쪽 빨아 당겼다.

“흣…….”

짜릿하고 좋은 기분이 퍼져 지안의 허리가 아치형으로 휘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출렁이는 가슴을 문지르면서 유실을 입으로 삼키듯 베어 물었다.

“아앙…… 응, 으응…….”

혀끝으로 날름거리며 집요하게 정점을 문질러 오는 행위에 찌릿한 전율이 흘러 그의 아래 갇힌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느리게…….

집요하게 물고 빠는 애무만으로도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진득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멈추지 않고 잇새로 터지는 신음이 민망해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입술을 떼어 냈다.

타액에 번들거리는 동그란 살점에 가볍게 입 맞추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선배. 눈 떠요.”

흥분이 묻은 음성을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오롯이 자신을 담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남성스러운 목선을 타고 내려가자 윤곽이 잘 잡힌 가슴과 단단한 복근, 그리고 그 아래 그의 남성이 바짝


솟아 꺼떡거리는 것이 보였다.

크게 가슴을 들썩거리며 숨을 내쉰 그가 짧게 말을 뱉었다.

“선배. 잡아요.”

천천히 내려오던 지안의 눈꺼풀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전히 단단하게 솟아오른 남성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그의 얼굴 위로 움직였다.

“잡으라고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안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한층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

지안의 위에서 내려온 석한이 그녀의 허벅지를 벌려 무릎을 꿇고 그 안에 자리 잡았다.

바로 눈앞에서 탄력 있게 흔들리는 그의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망설이던 손이 잔뜩 솟은 그의 단단한 남성을 조심스럽게 감아쥐었다.

“하아, 미치…….”

차마 다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석한이 숨을 참았다.

예민해진 살 위로 어설프게 맞닿은 손이 바스락거리는 것만으로도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지안의 발목을 잡고 무릎을 세웠다.

무릎을 타고 흘러내린 그의 손이 허벅지를 지나 활짝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흥분에 도톰하게 올라선 살점 위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지르자 그녀의 눈매가 작게 찌푸려졌다.

“움직여 봐요.”

흥분이 차오른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던 지안이 시선을 내리며 조금씩 손을 움직였다.

망설이는 눈빛으로 손 안을 꽉 채운 단단한 물건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앞뒤로 흔드는 자신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듯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읏…… 하아…….”

그녀의 손끝을 타고 시작된 아찔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조금 힘이 들어간 작은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을 타고 터질 것 같은 신음을 꾹 참느라 앓는 듯한 소리가 석한의 잇새로 흘렀다.

가만히 그녀가 주는 감각에 젖어 있던 그가 다급하게 그녀의 벌어진 다리를 더욱 활짝 벌렸다.

“흐흑…… 자, 잠깐만…….”

“움직여요. 계속.”

손가락이 그녀의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계속…… 빨리…….”

짙은 음색으로 말을 내뱉으며 파고든 손가락을 빠르게 빼고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세워진 무릎 아래로 그녀의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흐읏! 흣! 석한아…….”

“선배…….”

온몸에 번지는 쾌락에 자신처럼 흐트러져 신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얼굴 위로 흐릿한 눈동자를 고정하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선배는 모를 거야…….”

“…….”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

“선배 생각하면서…… 얼마나 많이 내 거 잡고 흔들었는지!”

감겼던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소유욕이 깃든 강렬한 눈빛.

당장에라도 자신을 삼킬 듯한 그의 표정에 지안이 다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거침없이 밀려드는 그의 손가락에 하염없이 온몸이 뒤틀렸다.

힘겹게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재빨리 잡아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잡아요.”

강인한 어깨 위를 여린 손끝이 꽉 눌러 잡았다.

속수무책으로 파고드는 그의 손가락에 맞추어 지안의 손이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동시에 교성이 터졌다.

탐욕이 물든 움직임에 야릇한 감각이 터져 온몸을 정신없이 휘감았다.


파고들어 흩어져 나오는 열기가 침대 위를 뜨겁게 물들였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진 지안이 허겁지겁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자신의 것을 꼭 잡고 품 안에서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몸짓에 석한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도 더는 한계였다.

품 안의 지안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힌 그가 다급한 손길로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들었다.

거칠게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빼는 손을 따라 콘돔 여러 개가 침대와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지안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한 번에 개수를 확인할 수 없는 콘돔들을 바라보았다.

……뭐 저렇게 많이…….

지안의 표정은 살필 겨를 없는 석한이 재빨리 콘돔을 자신의 남성에 씌우고 지안의 위를 점령했다.

입술이 겹쳐지고 그의 손이 살결 위를 움직였다.

질척하고 다급한 키스와 성급하게 온몸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타액이 섞이고 혀가 강하게 맞물려 신음조차 흐르지 못했다.

“하아…… 넣을게요.”

평소처럼 길게 이어지는 전희는 없었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그의 욕망에 물든 지안은 그 어느 때보다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다리가 들리고 자석처럼 그가 몸을 붙여 왔다.

“흡…….”

단숨에 그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흐읍…… 읏.”

안쪽을 파고든 뜨거운 열기에 배 속이 아릿하게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밀려든 감각을 채 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또 다른 감각이 온몸을 치받았다.

그녀의 다리를 잡은 팔 위로 툭 불거진 잔 근육이 꿈틀거렸다.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를 몰아쳤다.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린 질척한 액체와 그의 몸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이 뒤섞여 새하얀 시트 위를
축축하게 적셔 갔다.

“으읏! 읏! 하앙…… 하앗…….”

그와 몸을 섞을 때마다 조금은 남아 있던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지고 휘몰아치는 짜릿한 감각만이 남았다.

처음이었다.
그가 버릇처럼 내뱉는다고 생각했던 미칠 것 같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채워질 듯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에 지안은 애가 달아 미칠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 다급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더욱 강하게 파고들어 자신을 가득 채워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오롯이 남았다.

갈급하게 그에게 입을 맞추고 뜨겁게 숨결을 뱉어 냈다.

강하게 자신에게 매달려 정신없이 입술을 탐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의 허리짓이 점점 더 빨라졌다.

격렬한 몸짓을 받아 내는 여린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흐트러진 호흡을 귓가에 흩뿌리며 아스러지도록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가 치고 들어오자 엉덩이를 밀어 올렸다.

“읏…… 읏, 흐읏…….”

강하게 밀려드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경황없이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목을 꼭 끌어안은 그녀가 색정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신음하는 모습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그녀의
위를 맹목적으로 내달렸다.

“하아, 선배…… 선배.”

두 개의 몸이 맞물려 하나가 된 것처럼 정신없이 뒤엉켰다.

폭발하는 쾌락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정신없이 흐트러지는 낯선 모습이 이 순간만큼은 지극히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성이 사라지고 오로지 본능만이 남은 순간.

“흐윽…… 윽.”

“하앗, 으으으응…….”

그가 단숨에 모든 것을 쏟아 냈고, 그녀는 격렬하게 그를 받아 냈다.

하아- 하아-

겹쳐진 몸이 각기 다른 박자로 들썩거렸다.

진한 여운이 남은 숨이 서로의 목덜미를 타고 한참 동안 흘러내렸다.

목덜미 위로 느껴지는 작은 간지러움에 지안이 눈을 꼭 감은 채로 살며시 어깨를 움찔거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촉- 촉-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졌다.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몸을 겹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충만한 만족과 기쁨 외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

비스듬히 밀려 올라가는 그의 입술 움직임을 따라 지안의 시선이 움직였다.

침대에 푹 파묻힌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 그의 행동에 지안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하아. 유지안…… 너무 좋다.”

“…….”

“진짜.”

“…….”

“뭐가 이렇게 좋은 거냐, 대체…….”

거리낌 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지안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

늘 표현함에 있어서 솔직한 그의 모습에 또다시 가슴속에 몽글몽글한 느낌이 차오른다.

다시 파묻은 입술로 목을 타고 자잘한 입맞춤을 남기는 그의 행동에 지안이 작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다시 눈을 맞췄다.

“선배도 좋았죠?”

“……응.”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도 충실했고 말로는 표현 못 할 감각에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좋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선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뭐?”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그에게 반문하듯 물었다.

“말해 봐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막 아무거나 다 사서 주고 싶어. 미치겠어요.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못 말린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지안이 몸을 작게 비틀었다.

“됐거든. 그러지 말고 좀 비켜 봐. 무거워.”

“아, 말해 봐요.”

“없어. 갖고 싶은 거.”
“진짜? 하나도 없어요?”

“아우, 좀 내려가.”

어깨를 틀며 밀치는 지안의 동작에 그가 떡하니 버티고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아직 자신의 몸 안에 삽입된 그의 남성도 고스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저기…… 좀 빼 봐.”

“왜요?”

“응? 왜라니. 그럼 안 빼?”

“네.”

이게 무슨 소리야.

평생 이러고 살 거니?

당당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하는 석한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만 있으면 얘가 다시 살아날 거라서.”

“뭐? 야! 오석한! 빼!”

“싫어요!”

“아니! 왜!”

고집스러운 눈매를 여러 번 깜빡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안 빼면 한 번으로 치기. 오케이?”

오케이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안 빼면 한 번. 대체 이건 어느 나라 계산법이야.

어이가 없어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지안과 자신의 몸 사이를 파고들어 물렁물렁한 그녀의 가슴을 감아쥐었다.

스스슥, 소름이 돋게 스치는 손길.

“읏…… 야!”

“금방 다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힘들어!”

“나 체력 좋아요. 내가 뭐 이렇게 멋진 몸만 만들려고 운동을 하는 줄 알아요?”

석한의 자기 자랑이 끝나자 지안이 손으로 그의 등을 차지게 내리치며 외쳤다.

“아니! 내가 힘들다고! 내가!”


그렇게 휘몰아쳐 놓고 또 얼마나 더 휘몰아치려고.

정말 팔 하나 들기 힘들 정도로 체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 왔다.

“그러면 너무 빨리 끝난단 말이에요. 하루에 두 번이면 5 일이면 끝인데?”

그럼 하루에 한 번만 하면 되잖아. 이 자식아.

“읏…… 장난 그만하고 너 빨리…….”

입술로 장난스럽게 유두를 살살 빨아내던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고 얄궂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번 빼 줘요.”

“허…….”

“응?”

“…….”

“아니면 계속하고…….”

또다시 입술을 내리려는 그의 행동에 지안이 재빨리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알았어. 그만해.”

“읍, 읍…….”

“이번 한 번만이야. 알았어?”

눈매를 곱게 접은 그가 여전히 입술이 가려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아…… 진짜죠!”

손바닥을 치우자 가득 밀려올라 간 입술이 보였다.

“알았으니까. 빨리 내려가.”

못 믿겠는데. 장난치듯 중얼거리는 그의 등을 한 번 찰싹 내리치자 그제야 그가 틈 없이 맞닿아 있던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쑥 하고 안에서 사라지는 이물감에 지안의 눈이 반쯤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옆에 비스듬히 누워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흘겨보았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자신과 다르게 금세 회복이 된 듯 멀쩡해 보이는 석한.

“선배, 운동 좀 해야겠어요.”

“…….”

“앞으로 내가 무섭게 덤빌 텐데. 그거 다 감당하려면 이 체력으로는 곤란해요.”


“참나…….”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요.”

그냥 쓰러지고 말지.

내가 너랑 자려고 운동까지 해야 하냐?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마저 뱉기 힘들어 잠시 운동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겁게 누르던 몸이 가벼워지자 지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정신없이 들어와 서로를 탐하느라 차마 자신의 방의 상태가 어떤지 살피지 못했다.

혹시나 보여서 안 되는 물건이 있나 살피던 중 침대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많은 콘돔이 눈에 들어왔다.

“야. 근데 저거 왜 저렇게 많이 가져왔어?”

상체를 살며시 일으켜 콘돔을 바라본 석한이 빙긋 웃었다.

“아까 선배 선보러 갔을 때 열 받아서 저거 다 쓸 마음으로 왔거든요.”

무서운 놈.

“은근 열 받더라고요.”

유쾌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이야기하는 석한을 지그시 바라보다 결국 지안도 웃음을
짓고 말았다.

“조금 말과 매치가 되는 표정으로 얘기해 줄래?”

“응? 뭐가요?”

“그냥. 열 받는다면서 얼굴은 웃고 있잖아.”

늘 장난스러움이 묻어 있는 모습으로 그가 가끔 던지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깊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러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석한이 갑자기 엎드려 지안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돼요?”

“……뭐가?”

“내 마음 그대로 드러나게. 화나면 화내고, 싫으면 싫다고 그렇게 표정 지으며 말해도 괜찮아요?”

“……그게 내 허락이 필요한 거야?”

이해가 되지 않는 눈빛의 지안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뱉어 내려다가 말을 삼킨 그가 다시 입술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왜?”

동그란 눈 안의 맑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그를 살폈다.


말없이 눈을 맞추던 그가 지안의 어깨 아래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열기가 한참이나 식은 몸이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갑자기 끌어안고 한참을 아무 말 없던 그가 픽 하고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럼 아마 정신 나간 놈이라고 선배 도망갈걸요?”

지금도 그렇게 정상 같지는 않아, 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너처럼 나도 마찬가지이니까.

“피곤하면 조금 자요. 안아 줄게요.”

“……지금 되게 환한 낮이야.”

“아…… 그런가?”

“뭐가 그런가야. 비켜 봐. 일어나게.”

“왜요? 뭐 하게요?”

“그럼 계속 이렇게 붙어 있을 거야? 씻을래.”

다리까지 결박해 오는 석한의 행동에 빠져나오려고 움직이던 지안의 몸이 꼼짝없이 그의 품 안에 갇혔다.

“그냥 아침까지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

“흐음…… 계속 이러고 있고 싶다.”

지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흠뻑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신 석한이 눈을 감았다.

“근데 선배…….”

“응?”

“내가 너무 졸려요. 어제 한숨도 못 잤단 말이에요.”

“……뭐 하느라.”

잠시 공중에서 머뭇거리던 지안의 손이 점점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냥. 누가 멀쩡한 사람 놔두고 다른 사람 만나러 간다고 해서. 하암…….”

큭- 하고 작은 웃음과 함께 지안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새근새근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품에서 금세 잠든 그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 □

멀리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이 가득 찬 방.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과 작은 웅성거림.

침대에서 일어난 석한이 옆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자신의 옷을 입었다.

“선배.”

소파에 앉아서 TV 를 보던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깼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으음. 뭐 하고 있었어요?”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를 끌어안자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겼다.

“샤워했나 봐요. 좋은 냄새.”

귀 바로 아래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묻고 중얼거리는 그의 행동을 지안은 그저 말없이 받아 주었다.

“씻어. 집에 가야지.”

“나 오늘 자고 갈 건데요?”

“뭐?”

“오늘 자고 가려고 옷도 다 챙겨 왔어요.”

끌어안은 팔을 풀고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그래도 되죠?”

기대감을 품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만큼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또 약해진다. 이 녀석 눈은 하필 왜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늘 마주하면 머릿속 뇌가 잠시 파업이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는다.

어차피 가라 해도 먹히지도 않을 인물이기에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 가서 씻어.”

“네!”

무릎에서 급하게 머리를 떼어 낸 그가 입술에 작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가 휘파람까지 불면서 욕실을


향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방에서 들리는 진동 소리에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석한의 핸드폰.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윤서영 상무.]

지안도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프리웰의 여성 임원인 윤서영.

오앤아트가 프리웰을 인수한 후, 회사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그녀는 프리웰의 새 주인 윤주한 회장의 딸이었다.

지안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회사 일인가.”

주말에 전화를 걸 정도면 급한 일이 아닐까, 잠시 핸드폰을 전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선배, 뭐 해요?”

뒤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안이 빠르게 그를 향해 다가가 핸드폰을 건네었다.

“전화 왔어. 윤서영 상무님이신데.”

“아, 안 받아도 돼요.”

“응? 회사 일 아니야?”

가깝게 다가온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기가 났다.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지안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은 석한이 대충 침대 위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허리를 바짝 끌어안아 당기며
입술을 머금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그의 키스에 저절로 지안의 팔이 그의 목에 감겼다.

살며시 까치발까지 들고 능숙하게 입 안을 파고들어 혀끝에 감아 드는 혀를 반갑게 맞이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핸드폰 진동 소리에 지안이 입술을 떼어 내고 침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턱 끝에 닿은 석한의 손길과 함께 지안의 얼굴이 다시 그를 향했다.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선배.”
“응?”

“나랑 있을 때는 나한테만 집중하면 안 돼요?”

얼굴 위로 퍼지는 그의 숨결이 어느새 뜨겁게 변해 있었다.

온전하게 자신에게 집중한 눈빛이 보였다. 그의 손이 지안의 티셔츠 안을 파고들어 등을 타고 야릇하게


밀려 올라갔다.

뜨거운 손바닥이 밀려 올라오는 감촉에 등줄기를 타고 아릿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키스로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붉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돼.”

입술이 다시 겹쳤다.

침대 위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공기 중에 울리는 질척한 입맞춤 소리와 간간이 흐르는 낮은 신음으로
덮였다.

하아-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공간이 생기자 고개를 아래로 내린 석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응.”

“일부러 그러는 거죠?”

“……응?”

“이거…….”

“흣. 아! 아, 아니야.”

새하얀 티셔츠 위로 드러난 그녀의 동그란 가슴. 그리고 그 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유두가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에 집에서 속옷을 잘 입지 않는 그녀였기에 버릇처럼 속옷을 착용하지 않았다.

“흐응…….”

얇은 천과 함께 그녀의 유두가 그의 손끝에 잡혀 살살 비벼졌다.

살결이 맞닿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 쓱쓱, 예민해진 살 위로 비벼지는 까슬함과 적당한 힘에 또
다른 자극이 온몸으로 번졌다.

지안이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눌러 물었다.

또 너무 빠르게 젖어 버렸다.

그가 손을 대면 자동 반응하는 스위치가 있는 것처럼 몸이 무방비 상태로 흥분해 버린다.


“……선배, 젖었죠……?”

귓가에 퍼지는 그의 축축한 목소리에 민망함이 몰려와 감은 눈을 더 꾹 눌렀다.

“괜찮아요……. 나도 또 섰으니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그녀의 귓바퀴 안으로 축축한 혀를 집어넣어 야릇하게 훑어 냈다.

추르릅, 축축하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자신의 허리를 감은 채로 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털썩.

침대에 앉은 석한이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지안의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한 후 재빨리 그녀의 티셔츠를 벗겼다.

급하게 밀려드는 허전함에 지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들썩임에 출렁이는 가슴 끝 동그란 유실을 석한이 중지로 꾹 눌렀다.

“으응…….”

꾹 눌렀다가 떼어 내고 다시 꾹 눌러 살살 돌리자 흐으읏 소리와 함께 그녀가 무너지듯 상체를 붙여 왔다.

단단한 가슴 끝에 선연하게 느껴지는 단단한 돌기에 온몸이 불끈거리며 힘이 들어갔다.

살짝 그녀의 몸을 떼어 내며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살살 문지르다가 손바닥 가운데로 작은 유실을 가두고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돌렸다.

“흐읏……. 서, 석한아.”

작은 움직임에도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뭉글해 한참을 지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살며시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가 몽롱한 빛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가녀린 팔이 또다시 자신에게 매달려
왔다.

그녀만 보면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에 너무 괴롭히는 것만 같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참는


것보다 그녀가 힘든 것이 마음을 더 성가시게 괴롭힐 것 같다.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유순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 피곤하니까……. 끝까지 안 해요.”

“…….”

“조금만…… 조금만 할게…….”

조금만? 조금만이라는 기준을 알지 못하는 지안이 그를 바라보다 목 위에 닿는 찌릿한 감각에 눈을 꼭


감았다.

욕망을 절제한 입술이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새하얀 눈이 쏟아져 내린 도로 위에 발자국을 새기는 것처럼 하얀 피부 위로 붉은 흔적을 남겼다.
자신의 입술 움직임에 따라 눈을 꼭 감고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그녀의 모습에 매끈한 입술이
느릿하게 밀려 올라갔다.

평소와 다르게 느릿느릿하게 자신을 더듬고 핥는 행위.

격렬하게 파고드는 자극이 아닌 잔잔하게 밀려드는 감각에 지안의 감은 눈매가 천천히 찌푸려졌다.

힘없이 보드라운 감촉이 스치고 간 자리가 간질거려 작게 몸이 틀렸다.

잔뜩 촉각을 세워 한층 예민해진 그녀의 몸 위로 나른한 감각을 짙게 물들였다.

“흐으응…….”

길고 가늘게 퍼지는 신음.

축축하게 젖은 속옷 아래 크기를 키운 그의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안이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움직였다. 생각에 의한 움직임이 아닌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움직임처럼 느릿하게, 하지만 맞닿은 강도는 점점 더 강하게.

조금씩 자신의 몸을 아래로 눌러 오는 그녀의 행동에 참을성이 바닥을 보일까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느렸다.

그가 너무 느렸다.

이상하게 느린데 또 그게 좋았다.

그런데 또 애가 달아 말로는 표현 못 할 괴로움이 몰려왔다.

조금만…… 이라고 할 게 아니라 느리게…… 할게, 라는 말로 정정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조금만이든 느리게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살짝 뜬 실눈 사이로 입술을 꾹 눌러 물고 참아 내는 석한의 모습이 보여 움직이려던 지안의 입술이 다시


다물어졌다.

“으읏, 읏…….”

괴로움을 견디며 꾹 다물어졌던 석한의 입술이 탐스럽게 솟아 있는 젖가슴을 담뿍 물어 삼킬 듯 빨아


당겼다.

물고 빨고, 당기는 입술에서부터 자신을 탐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 느껴졌음에도 그는 성급하게 덤벼들지


않았다.

온몸을 구석구석 누비는 뜨거운 손길에 꾹 눌러 물었던 그녀의 입술이 단숨에 터졌다.

“하아…… 석한아…….”

흥분에 겨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목소리에 가슴을 빨아 물던 입술을 떼어 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칠게 숨결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 위로 고통스러움과 짜증이 느껴졌다.

순간 그녀를 꼭 끌어안았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타액이 가득 묻어 번질거리는 뾰족한 젖꼭지가 그녀의 들숨과 날숨에 위아래로 흔들렸다.

석한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욕심 그만 부리고 여기서 멈춰야지.

더 이상 하면 난 쓰레기야. 속으로 읊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선배, 미안해요.”

“하아…….”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채워서…….”

여전히 그녀가 같은 표정을 머금은 채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무언가에 지쳐 있는 듯하면서도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니.”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지안의 빨간 혀가 밀려 나와 그녀의 작은 입술 위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 하고 싶어…….”

하아- 작은 탄식을 뱉으며 그녀가 천천히 눈동자를 내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석한의 눈매가 살며시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하고 싶어. 조금 말고…… 그냥 하고 싶다고…….”

민망함에 아래를 향한 눈동자.

조금씩 말을 뱉을 때마다 그녀의 온몸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지안은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욕망에 물들어 잠시 너무 과감해졌다.

뱉어 놓고 나니 너무 심각하게 민망함이 몰려와 도저히 감당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안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혹시 너 힘들면 안 해도…….”


말을 내뱉던 지안이 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멈추었다.

언뜻 봐도 본능만이 남아 있는 위험한 수컷의 눈빛임을 알 수 있었다.

“꺄악!”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드는 감촉과 함께 몸이 번쩍 들렸다.

어느새 그가 침대 위에 누운 자신의 위를 점령한 채 희열이 넘치는 표정을 머금었다.

“누가요?”

“으…… 응?”

“누가 힘이 드냐고요.”

“아. 그, 그러니까. 혹시 너 힘들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거리며 당황한 지안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밀려 올라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내가?”

“……어. 너.”

“선배, 잊었어요?”

“무…… 뭘?”

“나 오석한이에요, 선배.”

이 와중에 또 저 자신감.

그래, 너 오석한이지.

선 한 번 봤다고 눈에 날 세우면서 주머니에 콘돔 세지도 못할 만큼 한 움큼 가져온.

그 오석한이지.

어느새 목덜미 위를 더듬던 그의 손가락이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살결을 부드럽게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빨리 말하지 그랬어요.”

“…….”

1 초 만에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는 재주를 보여 준 그가 빙긋 웃었다.

“그럼 괜히 나도 안 참았잖아요.”

“흐읏…….”

어느새 허벅지까지 내려가 안쪽 여린 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은밀한 곳을 찌르며 밀려들어 갔다.

“아앗. 흐읏, 읏…… 읏.”

곧게 펴진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빈틈없이 조여 오는 속살을 문지를 때마다 잠시 멈추었던 그녀의 신음이


터졌다.

빠르게 치닫는 그의 손놀림에 애가 달아서 어쩔 줄 모르던 그녀의 몸이 만족감에 충만해졌다.

허리가 야릇하게 휘어지고 그녀의 손에 닿은 하얀 이불이 이지러졌다.

감각이 치달아 오르는 어느 한 시점.

“아앗! 흣!”

뜨거운 액체로 휘감긴 손가락 위로 자잘한 진동이 퍼졌다. 그와 함께 그녀의 잇새로 단마디 날카로운
신음이 터졌다.

호흡이 멈추고 쾌락을 맞이한 몸이 어쩔 줄 몰라 그의 품 안에서 비틀어졌다.

“흐으으응…….”

눈을 꼭 감은 그녀가 앓는 듯한 신음을 길게 흘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석한의 입술 사이로도 흥분이 묻은 숨결이 길게 흘러 나갔다.

느릿하게 속도를 줄인 그의 손가락이 자잘한 경련이 이는 그녀의 안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움직였다.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지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고,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몽롱해진 눈동자 안으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석한의 얼굴이 보였다.

뭐지?

정신이 너무 없는데도 순간 느껴지는 이 불안함은?

지안의 눈매가 불안하게 찌푸려졌다.

다시 한번 그가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 위를 점령하고 있던 그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풀썩이는 소리와 함께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은 선배가 격하게 원하는 거니까…….”

“…….”

신나는 일을 앞둔 사람처럼 기대와 기쁨이 가득 찬 표정으로 그가 속삭였다.

“선배가 올라와요.”

“…….”

빨리요. 작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입술을 꾹 눌러 물고 천천히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았다.

괜한 어색함에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훌렁 자신의 티셔츠를 벗어 바닥으로 던진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배, 뭐 해요.”

“……응?”

눈앞에 펼쳐진 보기 좋은 몸을 멍하니 감상하던 지안이 그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맞추었다.

“나. 벗겨야죠.”

“아…….”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천천히 그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굳이 벗기지 않아도 이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바지를 붙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허리춤에 닿는 그녀의 손길에 석한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완벽히 그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 불쑥 올라서 있는 그의 것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해 지안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한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단단한 팔이 자신을 감싸는 동시에 아랫배를 찔러 오는 단단한 느낌에 지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커다란 손 안으로 동그란 가슴을 넣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미소를 담은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하아…….”

그의 키스에 반응하듯 여전히 온도가 높은 숨이 터져 나왔다.

“엉덩이 좀 들어 봐요.”

작게 속삭이고 그가 다시 입술을 붙여 왔다.

천천히 엉덩이를 들자 그가 자신의 물건을 잡고 촉촉한 물기가 흘러내리는 곳으로 뭉뚝한 끝을 맞추었다.

끝이 닿았을 뿐인데 긴장감과 함께 야릇한 감각이 몰려왔다.

“하아……. 천천히 앉아 봐요.”

“흐으읏…….”

느릿하게 몸을 내리자 밀려들어 오는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좁은 공간을 꽉 채우며 파고드는 감각에 지안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부드럽게 등줄기를 따라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자신의 것을 품고 있는 그녀의 말랑한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지안이 몸을 살며시 뒤틀자 석한의 눈매가 작게 찌푸려졌다.

“흣…… 선배. 움직여요.”

엉덩이를 살며시 밀어 주는 그의 손놀림에 맞추어 느릿하게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평소보다 깊은 곳까지 그가 느껴졌다. 깊은 곳에서부터 짜릿하게 솟구치는 감각에 그녀의 몸이 잠시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그가 다시 그녀의 골반을 잡고 앞뒤로 움직임을 이어 갔다.

“으응…… 읏, 하…….”

지안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를 가녀린 팔로 끌어안고 몸을 기댄 채 무언가를 쫓듯 허리를 흔들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가득 채워졌다고 생각했던 욕망이 몸을 섞을수록 더욱 강해져 점점 강한 감각을 원한다.

자신의 몸이 그를 만나고 점점 야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야한 움직임에 그가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모양 좋은 그의 눈매가 강하게 찌푸려졌다.

작은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에게 정복당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몸이 그를 정복하고 있었다.

“읍…….”

강한 기세로 그의 입술을 삼킬 듯 베어 물었다.

작은 움찔거림과 함께 그가 입술을 벌리자 깊숙이 혀끝을 밀어 넣어 그의 입 안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적극적인 그녀의 움직임에 석한의 몸이 거침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잠재된 욕망을 풀어내기에는 부족한 움직이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자신의 입술을 탐하던 그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며 거친 숨결이 터졌다.

찌푸려진 눈매 안에 오묘하면서도 몽롱한 빛을 담은 눈동자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괴로운 건지 좋은 것인지 자신도 판단하기 어려운 듯한 표정을 머금고 그녀가 여전히 허리를 강하게
움직였다.

“하아…… 석한아…….”

“네. 선배.”

“흐읏…… 나 미쳤나 봐.”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각에 뇌를 거치지 않은 진심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석한의 눈이 점점 크기를 키우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몽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색정적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그리고 흥분에 물들어 내뱉는 뜨거운 숨결.

“흐읏!”

자신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만 하던 그의 허리가 크게 한 번 치솟았다.

탁 터지는 그녀의 신음과 함께 뚝 하고 석한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가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 당장에라도 온몸이 타오를 것만 같았다.

“유지안…….”

나지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상당히 탁했다.

“걱정하지 마요.”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처럼 미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으읏, 흐읏…….”

그가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동안의 움직임에는 그의 친절함이 가득 묻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과는 비교되지 않는 움직임.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밀어 오는 그를 정신없이 터지는 신음과 함께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또 한 번 거칠게 몸을 섞었다. 언제나처럼 욕망에 충실한 섹스였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를 품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 따위는 이 순간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촉촉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베개를 끌어안아 동그랗게 말려 있는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석한이 작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넌 지치지도 않니.”

온몸에 힘이 빠져 침대 위에 파묻혀 있던 그녀의 물음에 그가 대답 대신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나, 힘들어요.”
하나도 안 힘든 것 같은 밝디밝은 목소리.

한 살 차이인데. 뭔가 나만 되게 늙은 느낌인데?

“진짜 자고 갈 거야?”

지안의 어깨에 턱을 대고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집에 가서 자.”

“왜요?”

“……그냥.”

“걱정하지 마요. 나도 양심은 있어요. 더는 안 건드려요.”

그녀가 대답이 없자 상체를 살며시 일으킨 그가 지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왜요? 나 여기서 자는 거 싫어요?”

“…….”

“아아, 혹시 선배가 나 또 덮칠까 봐 그러는구나?”

“야!”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와 함께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은 저는 안 하겠다고 했는데 선배가 하자고 했으니, 카운트 안 하는 거죠?”

응? 하며 베개에 묻었던 얼굴을 빠르게 드는 그녀를 보고 그가 다시 웃었다.

“맞잖아요. 난 분명히 안 하려고 했다고요. 선배가 막 나한테 안겨서…… 읍.”

“야! 알았어! 그만해! 알았다고!”

떠오르기 민망한 상황을 다시 재현해 주려는 그의 입을 재빨리 막았다.

손바닥 안의 히죽거리는 그의 입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째 오늘 조금 이상하다.

편의점에 가도 원 플러스 원을 좋아하는 지안이었다.

어째 원 플러스 원이 0 이 되어 버리는 상황.

까칠한 고객이면 민원을 넣고도 남을 상황인데 대충 봐도 따져 봐야 하나 얻을 거 없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악덕 업주 스타일이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지안이 가슴팍의 이불을 손으로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흐뭇하게 입술을 끌어 올린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지안이 다시 물었다.


“진짜 집에 안 가?”

“네. 나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싫어요?”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이 더욱 강하게 맞물렸다. 생각이 담긴 눈동자가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가득 밀려 올라갔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무언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편해서. 그냥 맨날 혼자 자잖아. 누구랑 자면 당연히 불편하지.”

마주친 시선을 피하고 심각함을 지운 그녀가 가볍게 말을 던졌다.

“……정말, 그게 다예요?”

조금 무거워진 목소리에 지안이 입술을 살며시 밀어 올렸다.

“어. 너 불편해. 막 자다가 만질 거 아니야, 또!”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살피며 표정을 굳혀 가던 석한이 다시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오늘은 더 안 만져요. 그러니까 자고 갈게요. 알겠죠? 응?”

“……그래.”

“…….”

“밥 먹자. 나 배고프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지안이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하나씩 몸 위로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시켜 먹자. 옷 입고 나와.”

그녀가 방을 나가자 그가 다시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흐음…….”

얼굴에 담았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고요함이 그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뭐 해. 안 나오고. 뭐 먹을래?”

거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하나씩 입었다.

“뭐 먹을 거냐고.”

다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재빨리 입술을 밀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지금 나가요. 선배.”


3.

창밖에서 푸른 새벽빛이 번지는 어스름 속에 지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잠이 묻은 눈동자로 눈앞에 마주한 석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쁘게 시작되는 바깥세상과는 다른 평온한 표정의 얼굴.

작게 코웃음이 났다.

남의 집에서 잘도 잔다.

지안은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지금껏 혼자만이 누리던 공간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기도 했고,
가슴속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에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격렬하게 몸을 섞을 때는 떠오르지 않던, 무언가 공허한 느낌이 자꾸만 가슴 한쪽에서 잔잔하게 느껴진다.

“……일어나.”

“…….”

“오석한. 일어나. 회사 가야지.”

“……으음.”

그녀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채 실눈을 뜬 그가 그녀를 발견하고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몇 시예요?”

“지금 6 시 조금 넘었어.”

“조금만 더 자요, 우리. 응?”

끌어당기는 힘에 반항할 새도 없이 그의 품에 끌려들어 갔다.

“으음. 좋다. 10 분만. 10 분만 이러고 있을게요.”

“……그래.”

가만히 그가 내쉬는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한참을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목 위로 자잘한 키스를 남기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안 피곤해요?”

새벽과 어울리는, 부드럽고 진한 목소리에 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데는 없어요?”
사실 이틀 사이 그와 가진 여러 번의 관계로 여기저기 근육이 뭉치고 그가 파고든 여린 살 주변이 살며시
아렸다.

차마 창피하고 민망한 마음에 말을 던지지 못하고 그저 괜찮다고만 말했다.

“내가 너무 괴롭힌 거 같아서요.”

“알긴 알아?”

핀잔을 주듯 말을 던지고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움직이자 그의 단단한 팔이 더욱 강하게 그녀를


조여 왔다.

“안 일어나?”

“오늘 회사 가기 싫다. 우리 휴가 낼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팀장이잖아요. 어차피 내가 휴가 승인하는데. 해 줄게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전혀 없습니다, 팀장님. 일어나시죠?”

“아, 그럼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오는 덕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10 분 지났어. 일어나.”

“왜 이렇게 부지런해요. 사람이 조금 여유로움도 있고 그래야지.”

“아, 이것 좀 놔 봐.”

“그럼 뽀뽀 백 번 해 줘요.”

“뭐?”

“다른 건 하자고 못 하잖아요. 나 양심은 있는 놈이라. 빨리요.”

그 양심 참 빨리도 찾았다.

“아! 잠깐만!”

선배가 안 하면 내가 해야죠. 음흉한 속삭임과 함께 그녀의 몸 여기저기 자잘한 입맞춤을 시작하는 그의


행동에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침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이아
“아침 못 먹어서 어떡해요?”

여유로운 자세로 핸들을 돌리며 석한이 물어 왔다.

그러게 누가 침대에서 잡고 있으래?

“뒤늦게 걱정하지 말아 줄래?”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뭐 해요?”

“……응?”

“오늘 저녁에는 뭐 해요?”

설마 또 오려는 건 아니지?

대답 없이 정색하는 지안의 표정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슬쩍 바라본 석한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선배! 그 표정은 뭐예요.”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오늘 밤에 뭐 하려고? 응?”

“뭐 기대한 거 있어요?”

“야아…….”

“실망하게 해 드려 어쩌죠? 저 오늘 출장 가요.”

“아…….”

아침에 그가 휴가 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자기는 출장 가면서 혼자 당할 뻔했네.

지안이 입술을 다물고 다시 앞을 바라보자 그가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나 회사 근처에서 내려줘.”

괜히 다른 사람 눈에 띄어 버리면 곤란할 상황이 생길 게 뻔했다.

“안 물어봐요?”

“뭘?”

어디쯤 내려야 할까 생각하던 지안이 초점이 흐트러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출장.”

“응. 너 출장 간다며.”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는 석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아니에요. 회사 근처에서 내려 드릴게요.”

회사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석한이 차를 세웠다.

Rrrrr, Rrrrr.

“네. 오석한입니다.”

전화를 받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갈게’ 입으로 작게 속삭이며 안전띠를 풀었다.

“네. 상무님. 어제 제가 핸드폰을 놓고 나갔다 와서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윤서영 상무인 듯했다.

문을 열며 잠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핸드폰을 받은 채로 한 손을 살며시 들어 보였다.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네. 혼자 있어요.”

탁.

통화하느라 지안이 내리고도 출발하지 않는 차.

걸음을 옮겼다.

잠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통화하는 그의 모습이 차 앞 유리로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다시 걸음을 옮겨 회사를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안이 사무실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석한이 사무실을 들어왔다.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팀장실로 향하는 석한에게 신 차장이 다가가 물었다.

“팀장님, 오늘 출장 가시죠? 언제 출발하십니까?”

“윤 상무님 외부 갔다가 들어오시면 출발합니다.”

“두 분이 가시는 거죠?”

“네.”

아. 윤서영 상무랑 둘이 가는구나.

작은 깨달음에 지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일정이 생각보다 길던데 언제 오시는 거죠?”


“일단 일주일인데 조금 더 길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해 주시고 받지 않으면
메시지 남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30 분 후에 전체 회의하겠습니다.”

그가 팀장실로 들어가고 뒤에서 여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본 가는 거지? 길게 가네.”

“이번 사업 건이 크긴 큰가 보네. 우리 회사 대표 비주얼 둘이 출동하고.”

“지난번에 둘이 식사하는 거 봤는데, 분위기 좋던데? 나 그때 딱 느꼈잖아. 아, 저 둘 사이는 내가 낄


수 없구나. 부러우면 지는 건데. 이미 졌어.”

“아, 맞다. 유 대리. 울 팀장이 학교 후배라 했었나?”

지안이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친했어요?”

“……아니요.”

“같은 과였다면서? 안 친했어?”

석한에 대한 궁금함이 가득한 그녀들의 시선이 심각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네. 그냥 인사만 하는 정도였어요. 나중에 자퇴하고 미국으로 가셔서, 부딪힐 일이 별로 없었어요.”

“아아, 그렇구나. 근데 어땠어? 인기 많았어? 그때도 카리스마 넘쳤어?”

카리스마라…….

그 시절의 그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소년의 느낌이 강했던, 가는 선을 가졌던 남자였다.

카리스마라기보다는 선하게 웃는 눈웃음에 마음이 훌러덩 넘어가게 만드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남자


쪽이 더 맞는 것 같다.

추억같이 떠오른 그의 모습에 작게 웃음이 났다.

“어? 유 대리 왜 웃어?”

“아, 아니에요. 네. 그때 인기 많았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팀장실에서 나온 석한이 이야기를 나누던 여직원들을 지나쳐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 부지런히 움직이던 입을 다문 여직원들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야. 오늘 우리 팀장님 피부에 물올랐다. 요즘 연애하나?”


“그러게요. 저런 남자 품에 한 번 안겨라도 봤으면 좋겠네. 그치, 유 대리?”

“……네? 아,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아무 의미 없이 가볍게 던진 질문인지 알면서도 얼굴 가득 열기가


몰려왔다.

“꿈 깨세요. 우리 레벨이 아니에요.”

“그래도 신데렐라 한 번쯤 꿈꿀 수 있잖아?”

“그런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가능하니 꿈 깨시고 회의 준비하세요.”

그저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회의 준비를 시작하는 직원들 사이에 지안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유 대리, 뭐 해? 회의실 가자.”

“네.”

수첩과 회의 자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차가운 눈동자.

너무나도 낯선 느낌.

온몸이 따스함으로 물들 만큼 자신을 끌어안고 연신 입맞춤을 해 오며 미소 짓던 따스한 남자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그가 빠르게 지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사용하는 바디 워시 향이 옅게 공기 중에 번졌다.

묘한 기분과 함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엇물린 감각에 마음이 이상했다.

회의 시간 내내 회의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왜일까? 그와의 달라진 관계 때문일까?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쾌락을 맛보게 해 준 남자와 그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진지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석한의 모습만이 눈에 담겼다.

“유지안 대리.”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석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광고 건 때문에 홍보 팀 가야 하니까, 같이 내려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는 그를 말없이 따라갔다.


여전히 지안의 시선은 그를 쫓았다.

의미가 담기기보다는 자연스레 따라가는 시선을 굳이 거두지 않았다.

승강기 앞에 나란히 섰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석한이 천천히 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자신의 팔목에 감기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몸이 휘청였다.

“어! 어!”

손목을 잡고 빠르게 움직이는 석한의 행동에 정신없이 끌려갔다.

혹시나 누가 들을까 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불안함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쾅.

비상구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의 돌발 행동에 침착했던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다시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서부터 밀려들어 왔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두 팔에 가두고 내려다보는 석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그가 작게 속삭였다.

꾹 눌린 음성과 참을성이 바닥나 보이는 눈빛에 지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왜 그러냐고 물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그가 다시 물어 왔다.

“나 괴롭히는 거예요?”

주객이 전도된 상황.

“무슨 소리야?”

혹시나 누가 들을까 봐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동그란 눈 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또 다른 데 본다. 나 봐요.”

“왜 그래, 대체. 누가 오면 어쩌려고.”

살짝 찌푸려진 눈매 안에 오롯이 지안을 담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지안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밀려오는 불안감에 작게 숨을 내쉰 지안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작게 내쉬는 숨결에서 수없이
빨아들였던 그녀의 향기가 풍겨 왔다.

석한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래로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이 콧등을 간지럽히듯 스쳤다.

“하아, 가기 싫다.”

“…….”

“자꾸 사람 떨리게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내가 가기가 싫잖아요.”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눈동자 가득 원망이 담겨 있었다.

“……무슨 소리야, 대체.”

“계속 나 봤잖아요.”

“…….”

“내가 그거 무시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아…….”

생각해 보니 의도적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이 그를 쫓고 있었다.

의식하고 여러 번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새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그저 무관심한 줄 알았다.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괜히 훔쳐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난 그냥, 별 뜻 없이…….”

입술에 밀려들어 오는 촉촉한 감각에 말을 잇지 못했다.

비스듬히 돌려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여러 번 방향을 바꾸어 맞물려 들어오는 입술을 맛보듯 움직이며 빨아들였다.

달아오른 숨결을 흘리며 지안이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아 당겼다.

단단한 허벅지로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자 가녀린 몸이 바짝 붙어 왔다.

혹시나 누가 오지 않을까 예민해진 귓가에 질척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하아…… 하아…….”

지안이 입술을 떼어 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덜미 위로 자신과 다르지 않은 호흡이 흘러내렸다.

목을 감싸던 손이 부드럽게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감각에 깊게 얼굴을 묻은 석한이 작게 속삭였다.

“빨리 다녀올게요.”

자잘하게 내뱉던 숨을 삼키고 지안이 천천히 답했다.

“그래. 잘 다녀와.”

□ ◆ □

사무실로 돌아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눈은 모니터를 향했지만,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진짜, 정신 나갔지.’

지난번 사무실에서 그와의 일이 있고 난 후에, 다시금 떠올려도 미친 짓을 한 것 같아서 엄청난


자기반성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직원들이 언제 이용할지 모르는 오픈된 공간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누가 보면 전쟁 통에 헤어지는 애절한 연인인 줄 알 것이다.

애라도 하나 업고 있었으면 아주, 보면서 눈물까지 흘릴 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 왜 이렇게 제어를 못 하는 거야.’

머리를 탓하면 뭐하리. 몸이 자꾸만 그에게 반응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 참을성이 없고 욕망이 강하다는 것을.

물론 깨달을 계기가 없었음이 맞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자꾸 나타나 자신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그가 살며시 원망스러웠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흘깃 팀장실 내부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한숨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 □

그가 출장을 떠나고 그를 만나기 전처럼 평온한 하루들이 지나갔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치 그에게 안겼던 것이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유 대리님. 서류 받으러 왔어요.”

홍보 팀 강 대리가 지안의 책상 앞에 서서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 강 대리. 잠시만요. 출력해 줄게요.”

“네. 기다릴게요.”

모니터를 바라보는 옆얼굴로 시선이 느껴졌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강 대리가 눈꺼풀을 살짝 밀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유 대리. 오늘 끝나고 밥 먹든가 가볍게 술 한잔 같이해요.”

몇 주 전부터 그를 마주치면 버릇처럼 저렇게 말을 걸어 왔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얼마 전 업무적으로 빠질 뻔했던 것을 지안이 찾아 주어 실수를 면했다.

지안은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지만, 몇 번이고 물어 오는 그의 행동에


조금씩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둘이 오늘 밥 먹어? 나도 가도 되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이 과장님 같이 가도 되나요?”

지안이 눈을 반짝이며 강 대리에게 천천히 물었다.

“어?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저도요!”

기다렸다는 듯 옆에서 물어 오는 한 대리와 김 대리.

아무 대답 하지 않는 강 대리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지안이 어색하게 눈매를


접었다.

둘이 가자고 해 놓고 점점 회식이 되어 가는 상황.

“강 대리님, 같이 가도 되나요?”
“……네. 그러죠.”

한 박자 늦은 그의 대답에 살짝 미안하긴 했지만, 둘이 가는 부담이 사라져 마음이 가벼워졌다.

강 대리가 돌아가자마자 이 과장과 한 대리가 지안의 옆에 몰려들었다.

“……왜, 왜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의미 가득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

“진짜인가 보다.”

“……뭐가요?”

“그래. 거봐, 한 대리. 내가 맞는 거 같다고 했잖아.”

“……네?”

저, 좀 떨어져 주실래요?

부담될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두 사람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유 대리.”

“네.”

“강 대리 어떻게 생각해?”

촉이 왔다.

“왜요. 누가 강 대리님이 저 좋아하기라도 한대요?”

“어라, 알고 있었어?”

“아니요.”

“응? 그럼 뭐야?”

“그냥 계속 밥 먹자고 하시길래. 혹시 그런 거 아닌가 잠깐 생각했었어요.”

두 여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럼 유 대리, 강 대리 어떻게 생각해?”

지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올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커다란 눈동자가 여러 번 깜빡이고 나서 다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 대리님, 좋으신 분 같아요.”

“오오! 썸인가요!”

서로의 손을 맞잡고 깨방정을 떠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남자로 보이거나, 동료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아…….”

마주 잡은 두 손을 순식간에 내려놓은 두 사람이 급하게 서글퍼진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왜? 강 대리 정도면 괜찮지 않아? 유 대리 눈 높구나.”

“아니에요. 정말 괜찮으신 분인데. 제가 지금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한번 만나 봐요. 혹시 알아요? 만나다 보면 정이 들지.”

그놈의 정이야 여러 번 다른 사람이랑도 들었지.

몸 정이 안 들어서 문제지.

자신만 아는 이야기에 작게 한숨지으며 빙긋 웃었다.

“아무튼, 저녁때 같이 가요.”

퇴근 시간이 되었다.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는 강 대리 앞에 지안이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마주 섰다.

“다 끝났어요? 나가요. 이 과장님이랑 한 대리는요?”

“저…… 강 대리님. 죄송한데요.”

“네? 뭐가요.”

“한 명이 더 가고 싶다고 해서. 저희 팀 막내가. 어쩌다 보니까 일이 커졌어요. 오늘은 그냥 저희끼리


먹을 테니 따로 날 잡아요.”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그가 동의하긴 했어도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미안함이 몰려왔다.

“아니에요. 그냥 같이 가요.”

“밥은 저희가 살게요.”

“괜찮습니다. 저 그 정도 능력은 있어요.”

수더분하게 대답하는 그를 바라보니 점점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 과장과 한 대리 말처럼 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면 더욱 미안해지는


상황.

몇 번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그는 그저 괜찮다고만 답을 해 왔다.

회사 앞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늦게 온 이 과장이 그 어떤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강 대리! 걱정하지 마. 오늘 내가 여직원 간이 회식이라고 법카 받아 왔어! 괜히 부담 주기 싫었는데.


웬일로 턱 하고 주네! 나 잘했지! 나 잘했지?”

그제야 지안의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에 어르신들 없이 진행된 자리이기에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지안도 강 대리에 대한 미안함을 지우고 편안하게 술자리를 즐겼다.

“저 잠시만요.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지안이 전화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 과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강 대리를 바라보았다.

“강 대리. 우리 유 대리한테 관심 있어?”

이 과장의 물음에 입술에 가져다 대던 맥주잔을 내려놓은 강 대리가 잠시 머뭇거리다 빙긋 웃었다.

“왜요. 누가 그렇대요?”

“아니. 그냥 지난번부터 느낌이 와서. 강 대리가 계속 유 대리한테 밥 먹자고 그러는 거 같길래. 이게


촉이라는 게 있잖아.”

그가 다시 빙긋 웃었다.

“네. 그냥 좋으신 분 같아서요. 궁금하고 그러네요.”

그가 수더분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회사 내에서 강 대리는 업무적 능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좋다고 소문이 나 있는 직원이었다.

이 과장이 보기에 지안 또한 똑 부러지게 일도 잘하고 모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그녀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직원 중의 한 명이었다.

거기다 외모 또한 둘 다 훈훈하지 않은가.

이런 선남선녀가 이 좋은 세월을 홀로 보내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아니에요. 괜히 유 대리님이 부담 갖는 거 싫어요. 이 과장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런 옳은 남자를 봤나.

순간 그를 둘러싼 여직원들의 눈동자에 분홍빛 하트가 반짝거렸다.

잠시 활짝 펼쳤던 오지랖은 넣어 두기로 한 이 과장이 옆에 앉은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우리 아까 작업하던 거 하러 들어가야지? 이 정도 먹었으면 됐지?”

툭 하고 옆구리를 찌르는 이 과장의 신호에 찰떡같이 호흡을 맞추는 직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 대리님, 저희 먼저 일어날게요. 하던 일이 있어서요.”


“그래요. 원래 유 대리님이랑 먹기로 한 거니까 둘이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아, 그리고 이 법카는 유 대리 줘요. 내일 달라고.”

대충 봐도 소주 맥주 말아서 서너 잔은 원샷으로 들이켜신 분들이 갑자기 일하러 간다는 말에 강 대리가


황당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저 술을 그렇게 드시고.”

“호호호. 원래 저희 일이 제정신에 못 하는 일이라서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경쾌하고 발랄한 한 대리의 말과 함께 세 여자가 동시에 쏜살같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지나간 상황에 황당함을 가득 담은 강 대리가 자리로 돌아오는 지안을 바라보았다.

“어? 다들 어디 가셨어요?”

화장실 가셨나? 물어 오는 지안을 바라보던 강 대리가 흠흠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회사에 일하러 가셨어요.”

“네에?”

평소에도 그렇게 열심히 안 하는 사람들이 왜 갑자기 술 말다가?

황당한 표정으로 강 대리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편하게 둘이 마시다가 가요.”

“……네.”

잠시 당황했던 강 대리도 다시 편안하게 표정을 머금었고, 막상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터라


지안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체육 대회 때 넘어지셨던 거, 몸은 괜찮아요?”

대화를 나누던 중간 물어 오는 그의 질문에 지안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4~5 개월 전쯤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걸 기억하세요?”

“아…… 네.”

“한참 지난 일인데요. 멀쩡해요. 보시다시피.”

“아, 다행이네요.”

“강 대리님 기억력이 되게 좋으신가 봐요…….”

“아, 그런가요? 하하. 다 그렇지는 않아요.”

살며시 붉은 기가 맴도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술을 꾹 눌러 물었던 지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누구였죠? 그 직원분. 생일 챙겨 주셔서 다른 여직원들이 강 대리님 자상하다고
한동안 말 많이 했었어요. 사람들 잘 챙기는 것도 정말 아무나 못 하는데. 대단하세요. 어쩜 그렇게
직원들한테 친절하세요?”

“아…… 아닙니다.”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지안을 바라보던 강 대리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관심의 표현임을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자신이 받아 줄 수 없음을 조금씩 어떻게라도 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이잉.

[어디예요?]

석한의 문자였다.

출장 내내 바쁜지 어쩌다 가끔 한 통의 문자를 보내오는 것이 다였다.

밤늦게 혹여나 전화하지는 않을까 살짝 기대했지만 오지 않았다.

하지만 서운하거나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랬던 적이 없었으니까.

가만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지안이 천천히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

[나 회식 중이야.]

금세 답변이 왔다.

[팀 회식? 나 없을 때 회식을 하나? 그런 말 없었는데.]

[여직원 회식. 간단하게.]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더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홍보 팀은 어때요? 요즘 바쁘죠? 여기저기 많이 들어가려고 노력 많이 하시는 거 같던데.”

“쉽지 않죠. 본사 눈치도 봐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더라고요. 그래도 다들 마음이 잘 맞아서


열심히 하려고 해요.”

“네. 팀장님도 좋으시고, 그래서 그런지 항상 가면 분위기가 좋더라고요.”

“맞다. 팀장님. 새로 왔죠? 어때요?”

“아…….”

잠시 말을 멈춘 지안이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밀어 올렸다.

“네. 일도 잘하시고 결단력도 있고 좋으세요.”

너무 들이대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와, 저 지난번에 깜짝 놀랐잖아요. 남자가 봐도 외모가…….”

인정. 잘생기기도 했죠.

“그런데 카리스마가 넘치시더라고요. 나이도 많지 않은데.”

근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면도 많답니다.

그저 미소를 머금고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의도치 않게 석한의 이야기로 말이 흘러갔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에 관해 이야기하자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나이 어린 팀장이 신기하기라도 한 건지 석한에 관해 물어 오는 강 대리로 인해, 그저 회사 동료로서,


상사로서 그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지고 끝이 났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9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지안이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럼 이거 남은 것만 다 마시고 일어날까요?”

반쯤 남아 있는 그의 맥주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강 대리의 손이 갑자기 공중에 멈추었다.

탁 하고 맥주잔이 테이블 위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강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 회사 직원인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지안이 들이마시던 숨을 급하게 꿀꺽 삼켰다.

“요즘은 회식을 타 부서 직원이랑 단둘이 하나 봐요?”

아니, 얘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일본에 있어야 할 사람이 버젓이 눈앞에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야! 너…… 흡.”

아무 생각 없이 반말을 내뱉던 지안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크게 떠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 대리와, 살짝 입술을 밀어 올리고 다음 말을 기다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석한의 시선이 동시에 지안에게 닿았다.

“어, 어디 갔지? 방금 팀장님 뒤에 한 대리가 지나간 거 같았는데. 어. 그런데 팀장님 출장 다녀오신


거예요?”

실수로 내뱉은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물었다.

일주일이라며. 더 길어질 수 있다며.


아직 4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지안의 옆에 천천히 앉으며 석한이 말했다.

“잠깐 잊고 간 게 있어서요.”

“…….”

“가지러 왔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강남에서 한남 대교 건너면 일본이었던가?

무슨 옆집에 물건 가지러 온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석한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물어 오는 강 대리에게 석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지금 유 대리 데리고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해서요. 일단 편하게 드세요.”

지금. 가 봐야 해. 일단 편하게.

네가 이런 말 들으면 퍽 편하겠다.

이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와 말투에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마침 금방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잘됐네요. 그럼 일어날까요?”

“네. 그러시죠.”

“유 대리, 뭐 해요? 나랑 사무실 가야지.”

어느새 일어나서 자신을 채근하는 석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과 석한을 번갈아 바라보는 강 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죄송해요, 강 대리님. 제가 다음에 따로 밥 한번 살게요.”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강 대리. 다음에 유 대리랑 같이 식사 한번 해요.”

네가 왜. 지안이 흘깃 석한을 바라보았다.

술집을 나와 예의 바르게 석한과 지안에게 인사를 마친 강 대리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헤어지려는 찰나에 석한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그에게 미안해지는 상황이었기에 지안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선배, 가요.”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가 해사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

갑자기 나타난 것에 관해 물으려던 지안이 잠시 사고를 멈추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왜요? 며칠 만에 보니 더 멋있어졌어요?”

“진짜 왜 온 거야?”

“일단 가요. 차 저쪽에 있어요.”

어깨를 감싸 오는 강인한 힘에 지안이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재빨리 피했다.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까 강 대리랑 밥 먹는 건 누가 보면 어쩌려고 했어요?”

“뭐가 어쩌려고 해. 그냥 직원끼리 밥 먹는가 보다 했겠지.”

“그럼 우리도 그냥 친한가 보다 할 거예요.”

다시 자신을 감싸려는 팔을 냅다 손으로 빨리 쳐 내고 한 걸음 물러났다.

“적당히 해.”

안 그래도 회사 앞인데. 작게 눈을 흘기는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모양 좋은 입술을 느릿하게 밀어


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차.

한참을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다가 지안이 물었다.

“어디 가?”

“호텔이요.”

“응?”

석한의 눈이 차 내부 시계에 닿았다.

“제가 비행기 출발 시간이 빠듯해서 집까지는 못 갈 거 같아요.”

“야, 진짜 왜 온 거야?”

“왜 왔겠어요?”

“…….”

“안 그래도 빠듯한데, 사람 기다리게나 만들고.”

“…….”

“이런 식이면 불안해서 내가 어디 가겠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예민함이 묻은 음성.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죄지은 기분이지?

미간을 찌푸리며 정면을 바라보는 석한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저 말없이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했다.

호텔 룸에 도착하자 석한이 슈트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대충 던지고 침대에 걸터앉아 지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배, 이리 와요.”

핸드백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고 그에게 다가갔다.

기다란 손가락 끝에 닿은 작은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앉아요.”

탄탄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툭툭 내리치며 그가 빙긋 웃었다.

엉덩이 아래 탄탄한 근육이 닿는 순간 가슴이 벅찰 정도로 그의 팔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익숙하면서도 늘 낯선 감각이 밀려든다. 닿으면 닿을수록 새로운 감각이 피어나는 것만 같은 신기한 기분.

적당한 감각으로 위아래 입술을 번갈아 빨아 당기던 입술이 깊숙하게 밀려들며 벌어진 틈으로 능숙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으응…….”

옅은 안개가 밀려들어 짙게 깔리듯 그가 주는 감각이 온몸을 자욱하게 채워 갔다.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그와 맞닿았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눈꺼풀 위로 촘촘하게 메워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블라우스 위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그녀의 가슴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옷 위로도 느껴질 만큼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가 손바닥 안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뜨겁게 피가 몰렸다. 정신없이 핥아 대던 혀끝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을 듯 강하게 빨아 당겼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감각에 취한 채 입술 사이로 흐르는 그녀의 신음을 받아 삼켰다.

“하앗. 서, 석한아…….”

떨림이 얹어진 그녀의 부름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석한이 달뜬 지안을 바라보았다.

열기가 올라 붉게 충혈된 석한의 눈동자가 오르내리는 눈꺼풀 사이에서 강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입술을 떼어 내고 그녀의 가슴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쪽- 쪽-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아…….”

옅게 번진 미소와 함께 그의 입술 사이로 열기를 머금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가 그녀를 안은 채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천히 움직여 그녀를 침대 가운데 내려놓고 답답하게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손끝으로 느긋하게 끌어
내렸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그녀를 떠나지 않는 시선.

침대 위에서 움직임 없이 자신을 향한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 몸을 섞기 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이 그에게서 묻어났다.

그가 쓰러지듯 침대 위로 털썩 누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듬뿍 들이마시는 호흡에 지안에게 맞닿은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아…… 좋다…….”

“…….”

“선배 살결. 향기. 다 너무 좋다…….”

목덜미에 작게 속삭이는 그의 행동에 작은 간지러움이 일었다.

“너무 그리웠어…….”

가슴속을 파고든 작은 감각이 헤아릴 수 없이 커져 감미로운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저 그 한마디에 이상하리만큼 온몸이 떨려 왔다.

가녀린 팔을 들어 손바닥으로 천천히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떨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듯


의미를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그렇게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석한은 얼굴을 보들보들한 살결 위에 비비며 그녀에게 점점 더 파고들었다.

“나, 오늘 여기 오려고 일정 엄청 당겨서 일하고 왔어요.”

“…….”

“그러니까 칭찬해 줘요…….”

“……왜 그랬어.”

칭찬하라니 핀잔을 주는 그녀의 말에 작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런 거 말고 칭찬.”
“……잘했어.”

짧은 한마디에 그가 다시 웃었다.

“나 한 시간 뒤에 나가야 하니까 깨워 줘요. 지금 나 너무 피곤해.”

“……그래.”

그가 잠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슴팍에 그가 내쉬는 숨결이 잔잔하게 퍼지자 지안이 천천히 몸을 떼어 내고 까무룩 잠이 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왔겠어요?’

단순하게 자신과의 섹스를 위해 그가 왔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찾아올 정도로 그가 욕정이 강한 사람이구나,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잠든 그의 얼굴 앞에 지안의 작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열 번만 자자며……. 근데 왜 자꾸 파고들어…….”

말을 멈춘 작은 입술 언저리가 씁쓸하게 밀려 올라갔다.

눈을 뜨자 어두운 방 안을 짙은 남색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창문이 보였다.

피곤함이 묻은 눈꺼풀을 천천히 깜박이다가 단숨에 끝까지 밀어 올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재빠르게 손을 뻗자 아무도 없는 침대 하얀 시트가 손바닥 안에 잡혔다.

“하아, 간 건가?”

한 시간만 지나고 깨워 달라던 그를 바라보다 지안 또한 같이 잠이 들어 버렸다.

설마 비행기 시간 늦은 건 아니겠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가방 속 핸드폰을 꺼내었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요. 출장 다녀오면 봐요.]

그의 문자였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털썩 침대에 주저앉아 그가 누워 있던 침대 위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온기가 식어 버린 손바닥.
또다시 밀려오는 공허함.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멍하니 앉자 어두운 공간을 채웠다.

□ ◆ □

일주일 후.

퇴근을 집으로 돌아온 지안이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지이잉. 지이잉.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잡았다.

석한이었다.

업무가 예정보다 느리게 진행되어서 그의 출장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열흘이 지나 있었다.

오늘 아침 회의 시간에 확실한 일정을 알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여보세요?”

-선배. 어디예요?

“나 집. 너는 어디…….”

띠띠띠띠.

응? 뭐지?

갑자기 현관에서 들리는 도어록 누르는 소리에 지안이 빛의 속도로 고개를 현관으로 돌렸다.

블랙 슈트를 잘 차려입은 석한이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오며 장난스럽게 입술을 밀어 올렸다.

“저도 선배 집이요.”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그가 말했다.

“야, 너 뭐 하냐.”

“안 놀랐어요?”

“놀랐어.”

“와! 성공했다! 서프라이즈로 딱 하고 나타난 건데.”


“아니. 네가 비밀번호 알고 있어서 놀랐다고.”

에이, 뭐야. 신발을 벗으며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매를 곱게 접고 지안에게 다가왔다.

석한이 빠르게 지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내려 그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어어! 야!”

눈만 자신을 보고 있었지 어느새 지안의 티셔츠를 훌렁 위로 올리는 손 움직임에 반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가슴 아래까지 드러난 살결을 감아 당기는 그의 행동에 꼼짝하지 못하고 다시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티셔츠가 바닥에 빠르게 떨어졌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지안의 풍성한 가슴이 출렁임과 동시에 그의 손바닥이 그 위를 점령하듯 강하게
쥐었다.

천천히 주무르다 손가락 사이에 동그란 유실을 끼워 넣고 살살 비틀자 말랑거리던 끝이 점점 탱탱하게


변해 갔다.

“흐응…….”

흐르는 전율에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바닥 안에 느껴진 감각에 만족이 되지 않는지 그의 입술이 남은 한쪽 유실을 삼킬 듯 베어 물었다. 입


안 끝까지 하얀 살을 강하게 빨아 넣고 혀끝으로 빙글빙글 정점을 빠르게 괴롭혔다.

“하아…… 하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틀려 올라오는 감각에 강하게 움켜잡은 손바닥 아래로 까끌까끌한 슈트 천이


느껴졌다. 자잘하게 경련하는 그녀의 허리를 달래듯 쓸어내리며 미끄러져 내려간 그의 손이 적당히 살집이
잡힌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흐읏……. 자, 잠깐만. 옷 벗고…….”

이미 달아오른 열기에 그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차올라 있는 것이 보이자 지안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쪼옥- 솟아오른 젖꼭지를 길게 빨아 당기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그녀의 아름다운 하얀 살덩이 위에 자신이 남겨 놓은 흔적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자신의 입술을


혀끝으로 훔쳤다.

지나치게 색정적인 표정과 검게 짙어진 눈동자.

“흐윽…….”

그가 몸을 강렬하게 붙여 왔다.

꼼짝하지 못하게 휘감은 팔이 점점 더 강하게 지안의 몸을 조여 왔다.

골반 근처 어디 즈음에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의 남성.

석한이 야릇한 미소를 보이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빛을 머금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선배…….”

목적의식이 뚜렷한 눈빛을 머금은 그가 유독 위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몇 번 하는지…… 카운트 잘 해요. 알겠죠?”

열기를 품은 와중에 능글스럽게 올라가는 입술이 지안의 시선에 닿았다.

지안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시 제 것인 양 입술을 머금으려고 내려오던 석한의 얼굴이 작은 틈만 남기고 멈추었다.

“왜 웃어요?”

“……아니야.”

여전히 살며시 휘어 있는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웃지? 너무 좋아서?”

아래에서 터질 듯 크기를 키우는 남성을 두고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보면 궁금하기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뭐 마음대로 생각해.”

“말해 줘요. 좋아서 그러는 거죠?”

“질문 금지.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지안이 다시 작게 웃었다.

각오하라는 듯 말을 건네 오는 석한을 보며 이 관계에서 더 이상의 횟수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리만큼 자신을 보면 집착해 오는 그와, 그것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신.

이 관계가 그 안에 끝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그저 그와의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몸은 제어가 되지 않는다.

이미 맞닿은 것만으로 질척한 액체에 속옷이 젖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런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진짜 말 안 해 줘요?”

“그걸 지금 따지면 뭐할 건데. 중요해?”

“몰랐구나. 선배가 하는 건 나한테 다 중요해.”

“…….”
“그게 말이든, 생각이든…….”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웃음이 묻은 얼굴. 더는 번지지 않는 미소가 진심처럼 느껴지는 표정.

너는 대체…….

웃음을 옅게 지운 지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좋아서 그래.”

석한이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짙은 속눈썹이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로 다가와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많은 감정을 털어 내고 싶어 보이는 석한의 눈동자가 고요한 지안의 눈동자를 담았다.

한참 동안 얼굴 위를 맴도는 작은 숨결 끝자락에 그의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기대해요.”

“…….”

“오늘은 더 좋을 거예요…….”

잠시 식었던 온기가 입술 위로 번졌다.

생명을 불어넣듯 입 안으로 퍼지는 숨결과 함께 밀려든 그의 혀를,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빨아
당겼다.

허겁지겁 엉기는 입술 사이로 흐르는 뒤섞인 타액을 정신없이 핥아 마셨다.

거칠게 밀려드는 것에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성마른 손길이 강하게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흣…… 선배…….”

“하아, 하아…….”

바닥에 옷가지들이 하나둘 개수를 늘려 갔다.

서투른 손길이 그의 바지춤을 잡고 벨트를 풀어내고 급하게 끌어 내렸다.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나신이 뒤엉키고 치미는 쾌락에 허덕이는 소리가 가득했다.

자국을 붉게 남기며 지안의 온몸을 입술로 물고 빨던 석한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다리가 허리를 감아 왔다.

침대로 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가 그녀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만질만질한 식탁 표면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 잔뜩 달아오른 몸과는 확연하게 다른 차가운 온도가 느껴져
가녀린 몸이 움찔거렸다.

차오른 흥분에 근육이 잘 잡힌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꺼덕거리는 남성이 그녀의 살을 당장이라도 파고들어 올 것처럼 위협적으로 솟아 있었다.

“흐으응…….”

그녀의 귓불을 빨아들이며 뜨거운 혀로 귓가를 질척하게 핥고 떨어졌다.

이미 여기저기 새겨 놓은 붉은 자국 위를 입술로 짓이긴 그가 하얀 살결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흐읏, 석한아…….”

흥분에 물들어 버선코 모양으로 솟아오른 유두 끝을 입으로 물었다.

희롱하듯 혀끝을 빙빙 돌리다가 쪽쪽 빨아 대는 행위에 온몸이 쾌락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어 손가락을 깊숙하게 쑤셔 넣고 조여 오는 속살을 정신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흐으…… 제발…….”

파고들 때마다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조여 오는 느낌에 석한이 가슴에서 입술을 떼어 내고 입맛을 다셨다.

제 손길에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말로는 표현 못 할 전율이 온몸에 뻗쳤다.

자신을 자꾸만 미치게 만드는 여자.

구석구석 모두 제 흔적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 더욱 갈급하게 그녀의 하얀 살결을 잡아먹을 듯 삼켰다.

몽롱하고 색기로 물든 그녀의 눈동자가 허공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민망함에 늘 조금씩은 참아 왔던 신음을 거침없이 내질렀다.

“후우…… 선배. 다리 위로 올려요.”

잠시 머뭇거리는 지안의 두 발목을 잡고 식탁 위로 올린 석한이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열기를 머금어 뜨겁고 축축한 석한의 혓바닥이 예민한 살결을 야릇하게 아래에서 위로 할짝거리며
어루만졌다.

“하앗…… 흐응…….”

입술로 빨아 당기며 비비고 다시 혀끝으로 어루만지듯 핥아 올렸다.

작은 살점이 문질러지며 휘몰아치는 감각에 지안의 몸속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던 욕정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쏟아져 내렸다.

울컥 쏟아져 나온 투명한 액체가 공기 중에 닿자마자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혀의 감각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찰나, 깊숙하게 파고든 그의 손가락.

발끝이 오그라들고 머리가 쭈뼛거렸다.

“아……. 자, 잠깐…… 흐읏.”

혀끝은 능란하게 움직였고, 질척한 액체가 가득 묻은 손가락은 앞뒤로 거침없이 흔들렸다.


지안이 두 팔로 식탁을 짚고 허리를 휘며 몸을 비틀었다.

가녀린 두 팔에 의지한 몸이 파르르 떨리며 정신없이 교성이 쏟아져 나왔다.

“읏! 읏! 흐응……. 하아, 좋아…….”

쾌락에 물든 몸. 욕망에 충실해진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했다.

자신이 뱉었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순간 지안의 눈이 커지고 신음을 뱉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순식간에 온몸이 경직되어 벌어진 다리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집요하게 물고 빨던 살결을 놓아준 석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안의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묻어 번질거리는 섹시한 입술이 뇌쇄적인 자태로 꿈틀거렸다.

“……괜찮아요.”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속살을 파고든 손가락은 여운을 남기듯 느리게 움직였다.

몇 번을 더 찌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스르륵 빠져나간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야릇하게 문질렀다.

자신의 흔적이 붉게 피어난 탐스러운 가슴, 색정적으로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고스란히 드러난 핑크색
돌기, 그 아래 황홀함을 가져다줄 구멍으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를 키운 남성의 끝을 뭉근히
비볐다.

“흑…… 흐읏!”

거침없는 삽입에 그녀의 몸이 한 번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어림도 없다는 듯 허리를 잡아채고 뿌리 끝까지 자신을 밀어 넣었다.

자신이 들어갈 길을 다듬기라도 하듯 허리를 천천히 돌렸다.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벌어지는 틈을 조용히 관찰하다가 천천히 앞뒤로 몸을 움직였다.

“하앗…….”

친절할 것만 같던 움직임은 금세 거칠게 표정을 바꾸었다.

탁. 탁. 탁. 탁.

짧고 빠른 울림이 퍼졌다.

“하앙……. 한아. 나…… 나! 흣!”

“흐읏, 하아. 나도 미치겠어. 좋아서 미치겠다고!”


차마 지안이 내뱉지 못한 말이 흥분에 치닫기 시작한 석한의 입술 사이로 거칠게 터졌다.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가 다시 강하게 치받았다.

틈 없이 맞물리며 깊숙이 찔러 오는 자극이 아랫배를 가득 채웠다.

불길이 온몸 위를 훑고 지나가듯 뜨거운 열기에 사로잡혀 거침없이 숨을 허덕였다.

겨우 식탁 위를 짚고 의지하던 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급하게 석한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흐윽……. 안, 안아 줘……. 흐윽.”

울먹이는 신음과 함께 흘러나온 간절한 소리에 석한의 두 팔이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단숨에 감싸며
품으로 당겨 안았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석한의 허리짓에 눈앞이 몽롱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채워 주고 채워 줘도 갈증이 났다.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만큼 예민해진 몸이 절정으로 치닫고 싶어 몸부림쳤다.

“하악, 흐흐읏…….”

그가 치고 들어온 아주 깊은 곳에서 몸속이 번쩍이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감각이 삽시간에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의 어깨에 기대었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강한 탄식이 터졌다.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운 그의 물건을 정신없이 조이며 여린 살이 파르르 진동했다.

“하아. 선배…… 으…….”

참기 힘든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흥분을 많이 한 걸까.

뜨거운 열기를 품고 그녀 안을 헤집던 남성 위로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강한 조임이 느껴졌다.

온몸이 저리고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앓는 소리를 흘리다 숨을 삼키며 재빨리 입술을 꾹 닫았다.

하마터면 그대로 사정할 뻔했다.

뜨거워진 몸만큼 뜨겁게 달궈진 숨이 터져 나와 주변을 가득 메웠다.

“흐으응…… 흐응…….”

지안이 여린 신음을 흘렸다.

겨우 참아 낸 그가 여전히 쾌락의 여운에 물든 채로 제게 몸을 맡긴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아!”

번쩍 몸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강하게 감는 동작과 함께 몸 안을 가득 채웠던 단단한 것이 쑥


빠져나갔다.

“흐읏…….”
순간적으로 온몸이 텅 비어 버린 듯한 느낌에 흠칫거리며 그의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마요.”

“…….”

“다시 넣을 거니까.”

그녀를 안은 채로 침대를 향했다.

내려놓는 순간조차도 그녀는 떨어지지 않고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헐떡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귓가에 퍼지고 정신없이 파닥이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가슴 위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석한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지금껏 그녀를 강하게 원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깊이 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촉촉하게 젖은 묘연한 눈빛이 흘러나와 석한의 정신을 흐트러트렸다.

평소에 생각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덤덤하던 눈동자 위로 강한 욕망이 느껴지는 빛이 가득 번져 있었다.

이제는 그녀도 자신을 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낮게 숨을 내뱉은 석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꼭 감은 팔이 스르르 풀어지며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엎드려요.”

친절한 음성으로 속삭이는 그의 말에 지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릎 세우고…….”

자신의 행동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그의 앞에 자신의 은밀한 곳을 치켜드는 것만으로 밀려드는 민망함에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엉덩이를 들자 허리를 타고 흘러내려 온 그의 손이 아래를 향하고 흔들리는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고 느릿하게 주물렀다.

“흐응…….”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살며시 비틀자 그녀가 잠시 잊었던 신음을 흘렸다.

“흐윽! 자, 잠깐…….”

예고 없이 그녀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사소한 걸림도 없이 그를 받아들인 쫀득한 속살이 다시 강하게 그를 조여 왔다.


“하아…… 선배. 힘 빼요…….”

“흐윽, 마음대로…… 안 돼. 하앗!”

석한이 입술을 강하게 눌러 물었다.

손 안에 가득 넣고 만지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고 하얀 엉덩이를 따라 야릇하게 뻗어 있는 아름다운 라인을


석한의 시선이 흘러내렸다.

그녀 안을 가득 채운 단단한 것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빠지지 않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거리만을 남겨 두고 엉덩이를 뒤로 한껏 물린 석한이 허리를 비틀며


신음하는 그녀의 안으로 강하게 자신을 꽂아 내렸다.

“하악. 흣…… 그, 그만.”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것같이 흔들렸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윗니로 입술을 강하게 눌러 물었다.

치고받는 자극에 온몸이 몸서리치며 반응했다.

“흣. 흣. 흣……. 깊, 깊어. 자, 잠깐…….”

“흐윽, 못 멈춰요. 그러니…… 선배가 참아요.”

골반 위를 강하게 붙잡은 손으로 자꾸만 도망치는 지안의 몸을 당기며 허리를 튕겼다.

자지러지는 듯한 그녀의 신음에 석한의 흥분은 점점 더 치솟아 올랐다.

탁탁탁탁탁.

빠르고 둔탁하면서 질척한 소리.

어떠한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몸이 만드는 야한 소리가 방 안을 팽팽하게


채워 갔다.

“하아, 하앗. 석한아…… 그만, 흐으윽.”

위에서 찌르고 내려오는 강한 자극에 몸서리치다가 두 팔을 지탱해 상체를 세워 보았지만, 점점 더 강하게


몰아세우는 그의 움직임에 힘없이 침대 위로 다시 무너져 내렸다.

“조금만, 하아, 조금만…….”

“아앙! 아앙! 흐으응!”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진 땀방울이 열기에 물든 그녀의 몸 위로 토도독 떨어져 튕겨 나갔다.

격하게 밀려든 쾌락에 온몸을 맡기고 허리를 흔들었다.

“으으으으으으…….”

짧고 빠르게 허리를 치대는 동작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좋아요? 응? 좋아? 선배?”


“흐윽…….”

“하아, 말해 봐요…… 응? 좋냐고…….”

“흣, 흐읏. 어…… 좋아.”

배 속에 무겁게 뭉쳐 있던 감각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꿈틀거렸다.

야릇하게 휘어 뒤틀리는 몸 아래 정신없이 출렁거리는 그녀의 뽀얀 가슴을 바라보며 점점 더 속도를


올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혹여나 그녀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녀가 정신없이 터트리는 교성에 파묻혀 모든 사고가
멈추고 그저 그렇게 내달렸다.

“하앗…… 윽.”

“아앗, 흐응…….”

강렬하던 허리짓이 탁 터지는 호흡과 함께 멈추었다.

부족함이라고는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 냈다.

“하아! 하아! 하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거칠게 숨을 뿜어 대고 강하게 들이마셨다.

지안이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남아 있는 신음을 흘려 냈다.

또다시 그의 것을 꽉 물고 있는 살들이 강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품에서 다시 맞이한 절정.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하고 황홀한 감각이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아 그녀가 몸을 잘게 떨었다.

그가 느릿하게 그녀의 안에서 자신을 빼어 내자, 지안의 몸이 풀썩이며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리 와요.”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번졌다.

옆으로 몸을 누인 석한이 그녀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눈동자 가득 즐거움을 담은 그가 한참 동안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득 지친 표정으로 맥없이 안긴 그녀의 모습에 미칠 것 같은 행복감이 밀려왔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베어 물었다.

느릿하게 빨아 당기고 느릿하게 밀려들어 가 달고 부드러운 것을 맛보듯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쪽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간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부드럽게 빨아 당기고 하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몸 위를 핥아 나갔다.

지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온기가 담긴 움직임. 조금 전 끝이 난 격렬한 정사와는 상반되는 부드러운 움직임.

가만히 그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 난 마음을 전하듯 정성스러우면서도 끊임없는 움직임이었다.

지안의 한쪽 가슴이 울컥거렸다.

사랑받는 느낌.

그것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 ◆ □

지나치게 피곤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밀려오는 피곤함을 견디기 위해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카운트 제대로 하라 그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삽입하고 절정을 맞이한 것이 두 번이기에 두 번이라고


했다.

‘진짜 사기꾼 기질이 있다니까.’

그저 안으로 두 번 들어왔을 뿐이지 그는 밤새 그녀를 괴롭혔다.

온몸을 정신없이 만지는 것은 기본이고 구석구석 입술과 혀로 빨고 핥아 대는 바람에 밤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출장을 다녀온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체력 단련을 하고 온 것인지 지치지도 않는 그의 체력에 하마터면
박수갈채를 보낼 뻔했다.

떨어져 있는 열흘 동안 자신의 몸이 그렇게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그리웠던 걸까.

잠시 깊게 파고들었던 생각을 지우고 고개를 살짝 모로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출장 잘 다녀오셨습니까?”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차장님의 행동에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네. 잘 다녀왔어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갑자기 나타난 윤서영 상무의 모습에 직원들이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안도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인사를 마쳤다.

처음 만나면 시선을 빼앗길 만큼 출중한 외모를 가진 그녀.

전체적으로 가늘고 여성스러운 라인에 적당한 볼륨감을 가진 몸매.

짙은 쌍꺼풀에 기다란 눈매, 여성스러운 콧날과 동그스름한 콧방울. 또한, 웃을 때 밀려 올라가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얼굴.

여자가 보아도 빠지는 것 하나 없는 외모에 집안과 능력까지 갖춘, 여성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소위 상위


톱클래스 안에 들어가는 그녀였다.

“오 팀장 만나러 왔어요.”

“팀장님 잠깐 지금 자리 비우셨습니다.”

비어 있는 석한의 사무실로 시선을 옮긴 그녀가 매력적인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들어오고 있대요. 방금 통화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들어가서 기다릴게요.”

“네. 그러십시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사무실에 퍼졌다.

팀장실에 들어간 그녀를 지안이 창문 너머로 넌지시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지 않고 자연스럽게 팀장실을 돌아다니며 책상에 놓인 서류와 물건들을 손에 들고 살피는 그녀의


모습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서영이 말한 대로 석한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팀장님. 윤 상무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에게서 오늘도 자신과 같은 향기가 났다.

애써 눈길을 주지 않고 업무를 하던 지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팀장실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안으로 마주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주 서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올라와 고개를 다시
돌리려는 순간.

‘아…….’

환한 미소를 지은 서영이 두 손을 뻗어 석한의 넥타이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지안의 눈매가 살며시 꿈틀거렸다.

서영의 손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석한도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지나칠 정도로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순간 당혹감이 몰려왔다.

“야야. 봤어? 지금?”

뒤에서 들려오는 여직원의 목소리.

“팀장이랑 윤 상무 왜 저렇게 다정해?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야? 출장 엄청 길게 같이 다녀오더니


사귀기라도 하나?”

궁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여직원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남지. 둘 다 미혼에다가 모자란 게 없는데. 그리고 둘이 식사 자주 하던데?”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근데 회사에서 저렇게 티 내도 되는 거야? 하긴 윤서영이 보통 여우가 아니지.”

가만히 여직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지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 잠깐 총무 팀 좀 다녀올게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한산한 복도를 걷던 지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자요. 딱 열 번만.’

그의 말이 떠오르자 작게 코웃음이 났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서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팀장실 유리 너머로 책상에 앉아 있는 석한의 모습만이
보였다.

순간 고개를 드는 석한과 눈이 마주쳤다.

엉켜버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돌렸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업무를 마무리 짓던 지안이 사무실로 급하게 들어오는 여직원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야, 진짜 둘이 사귀나 봐.”

“누구?”
“윤 상무랑 우리 팀장님.”

“왜? 왜?”

지안이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나 지금 회사 들어오는 길에 봤는데. 팀장님 차가 서더니 거기 윤 상무가 딱 올라타더라고!”

“뭐 회의나 미팅 가는 거 아니야? 원래 둘이 자주 같이 움직이잖아.”

“내가 오다가 이 비서님 만나서 물어봤는데, 윤 상무님 오늘 일정 없대. 대박이지!”

“와, 둘이 진짜 뭐 있나?”

한참 동안 여직원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멍하니 모니터를 한참 바라보던 지안이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응. 유 대리 할 일 있다더니 일찍 가네.”

“네. 몸이 별로 안 좋아서요.”

“그래. 안 그래도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여. 가서 쉬어.”

“네.”

회사를 나와서 버스를 타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그저 발끝만 바라보며 길을 걷던 지안이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어디야?]

석한에게 문자를 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에게 답장이 왔다.

[오늘 약속 있어요. 왜요? 나 보고 싶어서요? 선배는 어디예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의 답장.

[나도 약속 있어서 나왔어. 내일 보자.]

[선배가 보고 싶다고 하면 약속 끝나고 갈 수 있는데. 집으로 갈까요?]

가느다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내일 보자.]

문자를 보내고 가방 속에 핸드폰을 넣었다.

집까지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지안은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자격지심 같은 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만 흥분한다는 여자. 그리고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의 품 안에서 신음을 터트리는 여자.

신기하고 궁금한 마음에 생긴 소유욕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몸을 가진 여자이니까.

가끔 가슴속이 이상하리만큼 이유 없이 자신에게 집착하고 파고드는 그의 행동과 말에,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려고 하는 것을 애써 다잡았다.

그저 열 번만 자고 나면 끝날 관계. 아마 조금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몸뿐인 관계.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통할 수 없는 서로의 상황.

지안은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꾹 눌렀다.

지나치게 몰려오는 피곤함에 샤워를 마치고 침대 안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그저 눈을 감았다.

지이잉.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여러 번의 진동이 울렸지만 지안은 확인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응?”

잠결에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지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피곤함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딩동-

“어?”

희미했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딩동-

다시 한번 울리는 초인종 소리.

“선배…….”

그리고 문밖에서 정확하게 들리는 석한의 목소리.

잠시 머뭇거리던 지안이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벽에 기대어 있던 석한이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선배, 잤어요?”
“너 번호 알잖…… 어후. 술 냄새.”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어깨를 끌어안는 그의 행동과 함께 순식간에 파고드는 알싸한 알코올 냄새.

“많이 나요?”

그러고 보니 살며시 어눌한 발음.

“응. 많이 마셨어?”

“조금?”

“조금 마셨는데 이래? 어어. 넘어져…….”

단단한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의 행동에 휘청이는 몸을 겨우 바로잡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가 두 팔로 지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선배는 좋은 향기만 나는데. 나는 술 냄새나서 어쩌죠?”

“뭘 어떡해. 집에 가지 왜 왔어.”

몸을 비틀면서 그에게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그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알면서 그래요. 보고 싶어서 왔죠.”

“…….”

“선배는 정말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요?”

“……집에 가. 내일 출근도 해야지.”

“또, 또, 또 이런다. 나 오늘 자고 갈 거예요.”

그제야 꼭 끌어안은 팔을 풀고 석한이 지안의 집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소파에 털썩 앉은 그가 지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선배. 이쪽으로 와요.”

“……물 줄까?”

“아니요. 선배만 있으면 돼요.”

“씻어.”

“잠깐만 이리 와 봐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주방으로 향하던 지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다가와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는 그의 행동에 숨죽인 채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누구랑 술 마셨어?’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그저 꿀꺽 삼켰다.


“하아. 좋다.”

목덜미에 진한 알코올 향과 함께 뜨거운 숨이 번졌다.

“흐읏…….”

어깨에서 밀려 내려온 그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단숨에 움켜잡았다.

“오늘도 속옷 안 입었네요.”

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아무 대답 하지 않았다.

“흐으응…….”

말랑한 둔덕 위에 솟아 있는 동그란 돌기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는 그의 움직임에 꾹 눌러 참으려던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석한의 다른 손이 지안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 내더니 거침없이 바지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읏. 자, 잠깐만…….”

금세 자리 잡은 그의 손이 팬티 위를 나른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예민한 살점 위로 강한 감각이 느껴지자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그거 알아요?”

“하아, 뭐…….”

“회사에서 선배 볼 때마다 내가 미칠 거 같은 거?”

응? 알아요? 느릿하게 물어 오는 말에 답하기도 전에 짜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와 순간 숨을 멈췄다.

“앗. 자, 잠깐…….”

얇은 천 위로 그녀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순식간에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뾰족하게 솟은 유두 끝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야릇하게 비트는 동시에, 팬티 속으로 파고든 기다란
손가락이 이미 그를 받아들일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 버린 살결 안을 깊게 파고들었다.

“흐으윽. 서, 석한아.”

“따뜻해…….”

“……흐읏.”

“좋다.”

술에 적당히 취해서일까.

그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지나치게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오롯이 모든 정신을 손끝에 집중한 것처럼 그가 파고들었다. 손이 스치는 모든 곳에 뜨겁게 열기가


피어났다.
“하앗, 읏. 읏…….”

아래를 파고든 손가락이 위아래, 좌우 할 것 없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이미 엉덩이에 맞닿은 그의 물건은 더없이 팽창해 있음이 느껴졌다.

허벅지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곧추세웠다.

서서히 여린 몸 위로 욕망이 밀려들었다.

이미 한번 맛본 쾌락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는 손길.

하루 종일 깊었던 생각과 다르게 그를 한순간도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 밀어낼 수 없었다.

그저 본능에 사로잡힌 몸은 열렬하게 그를 원하고 있음을 지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뜨겁게 뒤엉키는 것은 순간이었다.

서로를 탐하는 것 외에는 목적이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밀려들어 온 혀를 강하게 빨아 당기자 알코올 향과 섞인 그의 타액이 입속으로 침범했다.

차라리 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몸을 섞는 이 순간.

오롯이 그가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점유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를 품고 정신없이 허덕이는 배덕감이 가득한 몸.

차오르는 욕망과 함께 치솟아 오르는 소유욕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도록.

미세하게 흐르는 생각마저 다 사라지도록.

차라리 취하고 싶었다.

“흐흐흑…….”

욕정에 부풀어 오른 단단한 기둥이 여린 살을 벌리며 파고들었다.

“하아. 너무 따뜻하다. 흐흣…….”

축축한 열기를 가득 머금고 강하게 조여 오는 살결에 그가 뜨겁게 숨을 터트렸다.

눈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하얀 살결이 작은 움직임에 물결치듯 아름답게 흔들리며 겨우 다잡은


시선을 흐트러트렸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최고치에 치솟았다.

달아오른 몸을 바짝 붙이고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그녀의 안을 휘저었다.

“흐응, 흐읏…….”
움직일 때마다 풀어졌다 조여 오는 황홀한 느낌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던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번쩍 들어 어깨 위로 얹었다.

“으읏. 석한아, 흣…….”

순간적으로 바짝 상체를 숙여 뿌리 끝까지 자신의 물건을 밀어 넣었다.

취기가 조금 사라진 눈동자 안에 자신의 아래에서 흐느끼는 그녀가 담겼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대리 기사의 행동에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녀의 집 앞이었다.

헛웃음이 나왔었다. 무의식 속에서도 그녀를 찾을 정도로 그녀에게 미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안은 아찔하게 밀려들어 오는 감각에 그를 품은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손 안에서 이지러지는 하얀 이불을 생명줄인 양 꼭 말아 쥐었다.

쿵 하고 박아 오는 감각에 붉게 물든 지안의 얼굴이 작게 도리질 쳤다.

“읏…… 선배. 나 봐요.”

“흐읏…….”

“나 봐. 다른 데 보지 말고…….”

밀려 올라오는 열기에 흐릿해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기 중에 달아오른 숨결을 내뱉으며 멈추지 않을 것처럼 허리를 튕기면서도, 꽂힐 듯한 시선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 오직 나만이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눈빛.

“키스해 줘…….”

앓는 듯한 신음을 내지르던 붉은 입술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진 것처럼 주변이 암흑으로 가득 차고, 오롯이 빛나는 그녀만 보였다.

허덕이며 질주하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천천히 아래로 내린 목 위로 그녀의 가녀린 팔이 부드럽게 감겨


왔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살결 위로 밀려드는 작은 몸짓에, 정신없이 뛰던 심장에 찌릿한 느낌이 파고들었다.

더운 숨결을 내쉬며 벌어진 입술 위로 얼굴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팔을 당기며 그녀가 입속을


파고들었다.

충만하게 차오른 감각 위로 더 큰 감각이 차올랐다.

정신없이 파고든 그녀의 혀가 입 안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듯 격렬하게 속살을 핥아 나갔다.

작은 공간 안에 맞닿은 혀가 정신없이 뒤엉키며 질척한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그의 하체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흐흐흐흥…….”

맞물린 입술 사이로 흐르는 신음을 받아 삼키며 한껏 빼내었던 남성을 그녀의 중심으로 강하게 밀어
넣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감싸진 엉덩이가 움푹 패도록, 위아래로 격렬하게 치대는 행위를 받아 내느라 여린 몸이
정신없이 팔딱거렸다.

절정의 순간.

동시에 숨이 멈췄다.

갈비뼈 사이가 저리도록 치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쾌감을 서로를 품에 안고
조용히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 지안이 눈을 떴다.

그와의 관계가 끝나고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비어 있는 옆자리.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부지런도 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재빨리 입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하체에 커다란 수건을 두른 그가 물기가 촉촉해진 자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일어났네요.”

“……어.”

“조금 더 자지 그랬어요. 아직 여유 좀 있는데.”

“너 안 피곤해?”

“네. 전혀요. 선배 피곤해요?”

뭐지? 저 반질반질하고 촉촉한 피부와 상쾌해 보이는 미소는?

뭔가 자기 혼자 되게 충전한 느낌인데.

누구는 지금 다크 서클이 발끝까지 떨어질 거 같은데.

괜히 억울하네…….

지안에게 다가와 침대에 털썩 앉은 석한이 불쑥 얼굴을 가깝게 들이밀었다.

눈앞이 환해지는 잘 다듬어진 얼굴이 가깝게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지안의 얼굴을 살피던 석한이 유연하게 미끄러져 올라가 있던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선배, 피곤해요?”

“응.”

당연하지. 밤에 자기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어떻게 했는데.

대체 맨날 무슨 힘이 저렇게 남아도는지.

“피곤한 사람치고 너무 예쁜 거 아니에요?”

“또 시작이다.”

“뭐가 또 시작이에요. 보는 그대로 말하는 건데.”

눈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모습에 괜히 얼굴이 붉어져 시선은 허공을 향했다.

“너 그리고 다시는 술 먹고 갑자기 찾아와서 씻지도 않고 내 침대에서 자는 거 하지 마!”

“왜요. 나 더러워요?”

설마, 하는 눈빛이 얄미워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석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선배 혹시 결벽증 있어요?”

“왜. 좀 있으면 안 되냐?”

결벽증이 없지만 물어 오니 괜한 오기에 답했다.

“아니요. 돼요.”

“뭐야.”

“그것도 매력 터진다.”

너 돌았냐?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또 눈까지 반짝이니 차마 지르지 못하고 꾹 참았다.

“어제 누구랑 술 그렇게 마신 거야?”

혼자 속으로 생각하면 뭐하나 싶었다.

차라리 편하게 물어보고 말지.

“윤 상무랑요. 원래 술 마시려고 한 건 아니고 출장 다녀와서 고생했다고 밥 한번 먹자 한 건데 어쩌다


보니 술 좀 마셨어요.”

“아,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석한을 바라보니 또 자신이 너무 깊게 생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는 묻지 않았다.

윤 상무랑 친해? 이 질문을 또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석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는?”

“……응?”

보기 좋게 휘어 있던 석한의 눈매가 조금씩 일자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 안의 눈동자가 예민한 빛을


머금었다.

“약속 있었다면서요. 누구랑요?”

“아, 내가 그랬나?”

“네. 누구예요?”

안 그래도 가까운 얼굴을 더욱 가깝게 밀어붙이며 물어 오는 덕에 지안의 상체가 점점 뒤로 기울었다.

“……말하면 네가 알아?”

“말해 주면 앞으로 제가 잘 알아 가도록 해 봐야죠.”

“응? 누구를?”

“어제 만난 사람이요.”

어찌 표정이 싸한 게 또 한 번 사람 오싹하게 만든다.

“남자면…… 죽일 거니?”

“에이, 설마요. 그래도 제가 배운 사람인데 그 정도까지 하겠어요? 그냥 몇 주 입원하는 게


고작일걸요?”

고작 같은 소리 한다.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저 입가에만 번지는 것이 아닌, 소리를 내며 웃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지안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석한을 바라보았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좋아서요.”

“그러니까 어디가.”

“다요.”

1 초도 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그가 술술 답했다.

“진심이야?”

“아닌 거처럼 보여요?”

잠시 그를 들여다보던 지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진심 같아.”

“그렇죠?”

“근데 그래서 더 이상해.”

큭- 소리와 함께 석한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잠시 고개를 돌려 웃던 석한이 얼굴을 살며시 기울여 지안과 눈을 맞췄다.

“선배는 달라진 게 없네요.”

“…….”

“예나 지금이나.”

“무슨 뜻이야…… 엄마야!”

갑작스레 몸을 겹쳐 오는 행동에 폭신한 침대가 등 뒤에 닿았다.

보기 좋게 갈라진 가슴 근육 사이가 잔잔하게 남아 있는 물기로 반짝거렸다.

적당한 무게감에 눌린 몸 위로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 박동이 퍼져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좋은 향기가 엄습하더니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뭐야, 갑자기.”

지안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래도 괜찮아요.”

“……응? 뭐가?”

“선배는 똑같아도.”

“…….”

“내가 변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고요.”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읍.”

내뱉던 말이 겹쳐 오는 입술에 고스란히 삼켜졌다.

큭큭- 입술을 겹쳐 오면서도 숨결 사이로 웃음을 내뱉는 그가 얄미워 몸을 비틀며 벗어나 보려 했지만,
입 안을 파고든 부드러운 감각에 잠식되어 작은 몸짓은 금세 멈추었다.

한참을 뜨겁게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자 지안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스르륵 이마 위를 스쳐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서요?”

“응? 뭐가?”
“누구 만났냐고요.”

난 또 뭐라고……. 집요하다. 역시.

“야, 아무도 안 만났어! 바로 집에 왔어! 됐냐? 됐어?”

“아, 그랬어요? 거짓말 아니죠?”

“그래. 아무도 안 만났어.”

집요해 보이게 꾹 다물렸던 석한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득 밀려 올라갔다.

그게 뭐라고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세하게 엇나간 감정을 인정하고 이 관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묵살한 건 자신이었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출구가 없는 길에 발을 들인 걸지도 모른다.

긴 시간 밀어내 보았지만 결국 내 길인 것처럼 어느새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미 그를 다시 만난 순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으려고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됐든, 잠시나마 출구를 찾고 싶지 않은 것이 지금 자신의 솔직한 마음임을 지안은 알고


있었다.

그와 차에 나란히 앉아 멍하니 도로 위를 달리는 차를 바라보던 지안이 고개를 돌려 넌지시 석한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시선에 그가 고개를 돌려 왜요? 물으며 빙긋 웃어 보인다.

‘선배, 이거 가지고 왔어요.’

‘뭔데?’

‘내 칫솔이랑 면도기, 로션. 필요한 것들 욕실에 놔둘게요.’

‘그걸 왜 여기다 둬?’

‘왜긴요. 이제 자주 올 텐데. 왜요? 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올 거야?’

‘설마요.’

오늘 아침 당연하다는 듯 물건들을 자신의 공간에 채워 넣는 그를 보며 괜한 걱정과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걱정이야 예상했던 거지만, 밀려오는 안도감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 그렇게 보냐니까요?”

“아, 미안. 아니야.”


“무슨 생각 했어요?”

“어! 나 저기서 세워 줘.”

회사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도착한 것을 깨달은 지안이 빠르게 손짓을 하며 외쳤다.

“어? 세워 달라고.”

“그냥 가요.”

“어딜? 회사?”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석한의 모습에 지안의 미간에 잔주름이 잡혔다.

“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누가 보면 같이 오나 보다, 하겠죠.”

“야…….”

“그리고 실제로도 같이 오는 거잖아요.”

이쯤 되면 또다시 떠오르는 생각.

얘가 나를 회사에서도 묻어 버리려는 건가?

너 사실 나 되게 싫어하지?

하아- 지안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석한.”

“네?”

“너 그거 알지?”

“뭐요?”

건조하게 메말라 가는 입술 위를 혀끝으로 한 번 축인 지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회사에서 여직원들이 너를 되게 열심히 관찰하고 있어.”

“그런 건 뭐 늘 있던 일이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저 자신감.

“그런데요? 그게 뭐요?”

“그런데 내가 너랑 아침 댓바람부터 같은 차 타고 딱 회사에서 내려 봐. 난 어떻게 되겠어?”

“우와! 유 대리, 진짜 부럽다! 이거 아니에요?”

잠시 차가 멈춘 사이 손뼉까지 쳐 가며 몸소 보여 주는 그의 행동에 지안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하아- 치고 싶다.

이 자식을 진짜.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꼭 말아 쥔 지안이 천천히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그건 완벽한 네 생각이고. 딱 구설수에 오르기 쉽다니까. 응?”

“에이. 그런 걸 뭐하러 신경 써요.”

“뭐?”

“그냥 아니라고 하든가, 인정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말자, 말아.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자기 생각에 충실한 뇌를 가진 애랑 무슨 말을 하리.

입술을 꾹 눌러 물고 작게 중얼거리는 지안을 바라본 석한이 피식 웃었다.

주차를 마치고 평온한 상태로 차에서 내리는 석한과 다르게 지안은 여기저기 살피며 죄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꺄악-!”

갑작스럽게 어깨를 더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숙였던 허리가 아주 곧게 펴졌다.

“선배, 지금 뭐 해요?”

“놀랐잖아!”

“우리가 무슨 불륜이에요?”

“……뭐?”

“누가 보면 불륜남이랑 바람피우고 집 앞에서 내리는 여자 같아 보여서요.”

“말을 해도 꼭…….”

“그냥 편하게 가요. 편하게.”

어깨를 툭툭 내리친 석한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빨리 와요. 외치는 석한을 바라보며 지안이 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직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지안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봐요. 별거 아니죠? 뭘 그렇게 몸을 사려요.”

“내가 뭘.”

띠링-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지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석한은 금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윤 상무님.”

“네. 안녕하세요. 오 팀장님.”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지안이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서영의 고요한 시선이 엘리베이터를 올라타는 지안에게 닿았다가 석한에게로 옮겨 갔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많이 취하셔서 잘 들어가셨나 전화했었는데.”

“네. 가자마자 급한 일이 조금 있어서요. 윤 상무님도 잘 들어가셨죠?”

“네. 그런데 급한 일이라니요?”

“업무적인 건 아니고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급한 일이라니…….

순간 지안의 얼굴 위로 뜨거운 열감이 치밀어 올랐다.

왜 필요도 없는 말을 내뱉는지.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어젯밤 석한과 뜨겁게 몸을 섞을 때 한참 동안 울렸던 전화벨.

그 주인공이 윤 상무였음을 깨달았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네. 오 팀장님도요.”

평상시와 다른 바 없는 표정으로 서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꽉 막혀 있던 숨통이 그제야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끝나고 뭐 해요?”

“……응?”

“약속 있어요?”

“아니. 왜?”

“끝나고 나랑 어디 좀 가요.”

지안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의심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작게 웃었다.


“뭐예요, 그 눈빛은?”

“어디 갈 건데?”

“그냥. 좋은 데요.”

그 좋은 데가 혹시 호텔, 너희 집, 이런 곳 아니니?

“우리 밖에서 제대로 만난 적 없잖아요. 맛있는 것도 먹고 야경 좋은 데도 가고 그래요.”

아…… 데이트.

“어때요?”

“그래. 그러자.”

“와……. 어디 가지.”

소풍을 하루 앞둔 어린아이처럼 순간적으로 설레는 표정을 머금는 그의 모습에 작게 웃음이 났다.

뭐가 저렇게 늘 솔직하냐.

어쩌면 그래서, 너무도 솔직해서 겁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도착해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따로 자리를 향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야경 좋은 데도 가고 그래요.’

일하는 중간중간에도 그의 말이 떠올라 괜한 설렘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 그저 그처럼 단편적인 부분만 보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당기기만 하는 사이.

얼마나 오랫동안 주변에 가득 차오른 행복과 만족이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먼저 나서서 그것을 제 손으로 박박 지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으러 여직원들과 회사 앞 식당을 찾았다.

평소에 회사의 소식통이라고 불리는 여직원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음성으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 이건 완벽하게 확실한 소식인데.”

역시나 그녀의 한마디에 모든 여직원이 귀를 쫑긋 세웠다.

물을 마시던 지안도 궁금함에 뒤이어 나올 말을 기다렸다.

“지금 오 팀장이랑 윤 상무랑 도는 소문 맞대.”

“무슨 소문? 둘이 사귄다는 거?”

지안의 눈매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물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지안이 입 안에 고인 물을 꿀꺽 삼켰다.


“아니. 사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썸?”

“아니. 그보다 더 대박…….”

“뭔데요? 빨리 말해요! 답답해!”

한참 뜸을 들이던 직원의 입술 사이로 믿기지 않는 말이 흘러나왔다.

“둘이 곧 약혼한대요.”

“헉…….”

“와…….”

한참 궁금함에 열을 올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직원들이 동시에 목소리를 잃었다.

“근데 그럴 만하지 않아요? 우리 회장 바뀌고 나서 그 많은 계열사 중에 여기로 보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더 높은 자리지 왜 우리 팀장으로 왔을까?”

“거기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요. 이건 거의 확실한 사실이래요. 집안끼리 인사까지 했다는 모양이에요.”

여전히 이야기를 내뱉는 직원을 바라보던 지안의 눈동자 위로 떨림이 얹어졌다.

재빨리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 어디인지도 모를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당황스러움에 밀려 올라오는 감정이 혹여나 제어되지 않고 직원들에게 보일까 봐.

입술을 꾹 눌러 물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계속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

사무실로 돌아온 지안이 상체를 숙이고 윗배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제대로 체했다.

“유 대리 왜 그래?”

지나가던 이 과장이 안색이 좋지 않은 지안을 향해 다가와 물었다.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요.”

“어째. 뭘 먹었길래 체해. 약은?”

“사러 가려고요.”

“잠깐만. 다른 직원들한테 물어볼게. 혹시 소화제 있는 분?”

“저 있어요. 드릴까요?”

이 과장의 물음에 한 직원이 손을 들며 말했다.


“다행이다. 약 좀 줘.”

“이 과장님 체했어요?”

“아니. 유지안 대리. 두 알 먹는 거지? 고마워.”

약을 받아 자리로 돌아온 이 과장이 물과 함께 약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뭘. 약 먹으면 곧 나을 거야.”

마침 사무실을 들어오던 석한이 이 과장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아픕니까?”

지안이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을 구겼다.

알게 하고 싶지 않은데…….

“네. 심한 건 아니고 유 대리가 조금 체했나 봐요.”

그의 모양 좋던 눈매가 천천히 찌푸려졌다.

석한이 지안의 자리로 가깝게 다가왔다.

“유 대리. 많이 아픕니까?”

“아니에요. 그냥 조금 체한 거예요. 약 먹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안이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

“얼굴 봐 봐요. 안색이 안 좋은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진짜 별거 아닙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지안의 모습에 조금 더 지안의 위로 머물렀던 석한의 시선이 떨어졌다.

“혹시 더 아프면 말하고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석한이 팀장실로 들어가고 잠시 후 문자가 왔다.

[괜찮아요?]

한참 동안 움직임 없이 문자를 내려다보던 지안이 문자를 써 내려갔다.

[약 먹었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오늘 저녁에 가기로 한 거는 다음으로 미루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라…….”

우리는 무슨 관계일까?

그가 말한 것처럼 편하게.

편하다는 건 빌어먹을 어떤 마음을 먹고 그를 마주해야 하는 걸까.

석한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지안은 먼저 퇴근을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잠시 버스 정류장에 서서 바닥에 자잘하게 흩어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들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안이 걸음을 옮겼다.

“유지안. 무슨 일이냐? 평일에?”

“그냥. 아유, 좋다.”

“야, 야. 코트는 벗고 누워.”

갑자기 찾아와 소파 위로 벌러덩 누워 버리는 지안의 모습을 하은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냐?”

“아니. 일은 무슨 일.”

“딱 봐도 무슨 일 있는데? 말해. 들어 줄게.”

“아니야. 없어.”

“오석한 일이구나?”

“…….”

“안 들어도 뻔하다.”

어느새 일어나 창밖으로 생기 없는 시선을 돌린 지안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하은이 작게 한숨 쉬며


물었다.

“밥은?”

“점심 먹은 게 체해서 생각 없어.”

“약은?”

“먹었어.”

“죽 줄까?”

“죽 있어?”

“아니. 끓여야지. 기다려 봐.”


지이이잉. 지이이잉.

가방 속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지안이 가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동이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 예상대로 석한이었다.

지이잉.

[선배. 어디예요? 퇴근했어요? 집으로 간 거예요?]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핸드폰 전원을 끄고 가방으로 다시 넣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소파에 누웠다.

“야, 자냐?”

잠시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지안이 눈을 떠 멍한 눈동자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팔자 좋다. 친구는 지 아프다고 죽 끓이는데. 잠이나 자고.”

“친구 좋은 게 뭐니?”

“이럴 때만? 지 얘기는 하나도 안 하면서…….”

“…….”

“됐어. 나도 듣기 싫어. 얼른 먹기나 해.”

뽀얀 김이 올라오는 흰죽을 천천히 떠먹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은이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왜 웃어?”

“그래도 먹는 거 보니 이번엔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아…….”

그러게. 지안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유지안. 그때 진짜 그런 진상이 따로 없었는데 말이야.”

“야,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버럭거리는 지안의 모습에 하은이 코웃음 쳤다.

“됐고. 당연히 그때랑은 달라야지. 나이는 괜히 먹었니? 시간은 괜히 흐르고?”

“…….”

“또 몹쓸 병 도져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하고…….”

지안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미자 하은이 톡 하고 지안의 이마 위로 딱밤을 때렸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럴 거면 차라리 즐기든가. 이 상황을.”

“즐겨?”

“그래. 뭐 그게 죄니? 사람이 즐겁게 사는 게 최고지.”

“…….”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고, 자존심 세울 것도 없어. 피하면 뭐하니? 그냥 부딪혀. 그때처럼 도망가고
나서 힘들다고 난리 치지 말고. 넌 꼭 다른 때는 잘 지르다가 걔 앞에서는 그렇게 멍청하게 굴더라.”

“최하은. 돗자리 깔지 그러냐. 말을 안 해도 어떻게 그렇게 술술 나오냐?”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냐? 아무튼, 멍청하게 있지 마. 한 번 사는 인생 뭘 그렇게 몸을 사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하은이기에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야, 멍청까지는 아니거든?”

“그래. 멍청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심하기는 했지.”

“……됐어.”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난 똑같은 마음이야.”

“뭐가?”

“복 받은 년.”

지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복 더럽게 많아서 이 고생이다.”

“피해 봤자 어차피 또 회사에서 얼굴 볼 사람인데. 쭉 갈 거 아니면 확실히 정리해.”

“말은 되게 쉽지. 그치?”

“말이 쉬우면 뭐해. 마음은 안 따라가는데.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게 최고야.”

“…….”

“먹고 얼른 가. 복 받은 년 위로하기도 짜증 난다.”

자고 가겠다는 지안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하은 덕에 결국 늦은 시간 집으로 향했다.

가방 속 꺼져 있는 전화기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괜한 오기에 켜지 않았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았다.

“지금 들어가면 왠지…….”

잠시 고민의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지안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또렷이 보이는 인영.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석한이 문 앞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이 와중에 유난히 남다른 기럭지와 잡지 모델 뺨치는 포즈는 왜 눈에 들어오는지.

성큼성큼 긴 다리로 단숨에 다가온 석한의 두 손이 빠르게 지안의 양어깨 끝을 강하게 잡았다.

“선배…….”

바닥까지 떨어지는 낮은 음성과 찌푸려진 눈꺼풀 아래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화났겠지?

아마 수없이 전화하고도 남을 녀석이니.

“미안. 배터리가 없었어. 집에 가지 여기는 왜 왔어.”

꽂히는 듯한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몸은 괜찮아요?”

“……어?”

“전화 안 받아서 걱정했잖아요. 아픈 사람이 집에도 없고…….”

“아……그게…….”

“빨리 들어가요.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왜 그렇게 돌아다녀요.”

길게 뻗은 팔이 어깨를 감쌌다.

문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당겨 안아 걸음을 옮기는 석한에게 폭 파묻혀 집으로 들어갔다.

“뭐 먹었어요? 죽 사 왔는데.”

여전히 낮지만,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소파까지 지안을 옮겨 놓고 나서야 그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식탁으로 다가가 자신이 사 온 죽을 종이봉투에서 꺼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 안 났어?”

지안의 물음에 석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요한 눈동자가 한참 동안 지안의 얼굴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왜요? 오늘 어디 못 가서요?”

“……그것도 그렇고. 전화했었잖아.”

“몸도 안 좋은데 돌아다니는 건 조금 화가 났었는데. 선배가 말한 이유로는 화 안 났어요.”

“…….”

“어차피 이렇게 왔잖아요. 그러니 됐어요.”


환자 특별 우대인가…….

평소 같으면 작은 거에 질투하고 바르르 떨던 녀석에게 요즘 이상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강 대리를 만난 날도 석한은 만남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오늘도 어디를 다녀왔는지, 왜 이 시간에 왔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둘이 약혼한대요.’

나름의 정리인 건가.

지안이 여전히 분주하게 식탁 앞에서 움직이는 석한을 바라보았다.

“오석한.”

그녀의 나지막한 부름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너 약혼하니?”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윤서영 상무랑, 약혼하니?”

한 번 더 나지막한 목소리가 둘 사이에 퍼졌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지안을 향했던 시선이 어둠이 가득한 하늘이 훤히 보이는 창문 위를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왔다.

적막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

“오늘 그냥 돌아가.”

“…….”

“나 쉬고 싶어.”

잔잔한 목소리가 적막을 파고들자 석한의 눈매가 조금씩 찌푸려졌다.

멈췄던 걸음이 다시 시작되고 지안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그녀의 앞에 앉아 눈을 맞추었다.

“누가 그래요?”

“……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

“아니요.”

잠시나마 일렁였던 그의 눈동자가 단단히 고정된 채 지안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눈빛.

생각이 가득 담겼던 석한의 눈동자가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서 조금씩 짙어졌다.


“그게 우리 관계랑…… 상관이 있어요?”

아……

잠시 벌어졌던 지안의 입술이 천천히 맞물렸다.

깊숙이 묻어 놨던 기억의 한 조각이 또렷하게 떠오르며 씁쓸한 웃음이 흘렀다.

그래. 그때도 그랬었지.

4.

7 년 전.

“선배!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할 말 없어. 그러니 따라오지 마.”

점점 빨라지는 지안의 발걸음을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그가 당연히 따라잡지 못했다.

“아주 잠깐만요.”

“난 잠깐도 너랑 할 말 없어.”

저 멀리 건널목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것이 보이자 그녀가 더욱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하아! 미치겠네!”

애꿎은 목발만 바닥에 세게 내려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거칠게 한 손으로 쓸어 올린 머리카락이 아무것도 모르고 평온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부꼈다.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지안이 가슴을 손바닥으로 뭉근히 문질렀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날 밤 그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얼굴 위로 밀려오는 열감에 도저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쾌락을 맛본 몸은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 작게 꿈틀거렸다.


처음 맞이한 당황스러움이 그녀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야, 유지안. 쟤 어쩔 거야.”

하은의 목소리에 지안이 작은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멀쩡하게, 아니 어디 가든 눈에 띌 만큼 반반하게 생긴 녀석이 목발까지 짚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지안이 가는 모든 강의실에 그가 나타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할 말 없다고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는 지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강의실 한편에 앉아서 뒤통수가 불편할 정도로 자신을 바라볼 뿐.

“야, 저 정도면 또라이 아니면 완전 너한테 꽂힌 건데.”

“됐어. 시끄러워.”

“왜? 저렇게 계속 노력하는데 대화 좀 해 봐.”

“또라이든 꽂힌 거든 그냥 얽히기 싫어.”

강의가 끝나고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지안이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이 수업 들어?”

어찌나 목소리가 반가운지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한눈에 봐도 미모가 눈부신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석한에게 다가가 너무나도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나 왜 몰랐지?”

“야. 거기 목발 좀 줘 봐.”

“어라? 발은 언제 다쳤어!”

“그럴 일이 있었어. 나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목발을 손끝으로 가리키는 그의 행동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학생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그날은 왜 그렇게 갔어. 친구들이 엄청 서운해했어.”

“야. 조금 비켜 봐.”

“오빠? 우리 또 언제 날 잡을까? 그날 내 친구들 다 괜찮다며.”

“야, 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 그렇지.
지안이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갔다.

“오빠? 응? 언제가 좋아?”

“야…….”

“응?”

이미 그녀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던 석한이 짜증 섞인 눈으로 눈앞의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하아……. 야, 너 내가 비키라고 얘기했지.”

“어? 아니 나는 그냥 그날 내 친구들도 재밌었다고 하고. 오빠도 좋다고 해서.”

“나 그날 네 친구들한테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었으니까, 다시 나 보면 말도 걸지 마. 알겠어?”

“뭐?”

“비키라고…….”

잔뜩 굳은 얼굴로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는 석한의 모습에 여학생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제기랄…… 작게 읊조린 석한이 목발을 짚고 강의실을 나갔다.

***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강의실에 나타나던 석한은 더는 지안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늘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온몸에 긴장이 가득 들어갔었다.

오늘도 혹시나 그가 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도감과 함께 괜한 궁금증이 생겼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자리에 앉은 지안이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더니.”

딱이네, 딱이야.

아무튼, 이상한 자식.

어느덧 봄날이 많이 깊어 있었다.


흩날리던 봄꽃 잎이 많이 사라지고 여름을 맞이하려는 푸른 잎들이 조금씩 돋아나고 있었다.

한산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캠퍼스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지안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창문 위로 톡톡 떨어져 투명한 선을 그리고 미끄러져 가는 빗방울.

“비 오나?”

우산도 없는데.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창문을 치던 빗방울이 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지안은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비가 안 그치려나?”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 보았지만 모두 우산을 가져다줄 거리에 있지 않았다.

학교 안 편의점에서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일어나 강의실을 나섰다.

“이런……. 난감하네.”

조금만 맞아도 온몸이 젖을 만큼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편의점까지 가는 도중에 우산이 필요 없을 만큼 젖을 것이 예상되었다.

문 앞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쓰실래요?”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안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귀에 익은 목소리.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신기하리만큼 생생하게 기억나는
향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작은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낮이라고 하기에 복도는 꽤 어두웠다. 전등 불빛에 복도 위로 번져 있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 위로


겹쳐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뜻 스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목발도 사라지고, 다리를 감싸고 있던 깁스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풀었어요.”

지안이 눈동자를 추켜올려 그를 보았다.

“안 궁금해. 말 안 해도 돼.”

“선배. 아직도 화났어요?”


“아니.”

“화 풀렸어요?”

“화가 났다기보다는 아직도 네가 싫고 말하기 싫어.”

아- 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나랑 얘기 좀 해요. 선배.”

“하고 있잖아.”

그가 고개를 돌려 간간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여기 말고 다른 데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냥 서로 아무 말 안 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면 안 될까?”

“오해는 풀어야죠.”

“오해?”

“아, 미안해요. 오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사과라도 하게 해 줘요.”

복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강의를 마친 학생들이 강의실을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지안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또 눈에 띄고도 남을 녀석.

“일단 가자.”

“네!”

지안의 한마디에 말도 안 되게 환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담겼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웃음에 가득 커진 지안의 눈이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빨리 가요.”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우산을 빠르게 펴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작은 우산 속에 자리 잡은 그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여전히 굵은 빗방울이 정신없이 우산을 때리며 내리쳤다.

귓가가 멍멍해질 정도로 우산을 때리고 튕겨 나가는 빗소리를 들으며 둘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대충 학교 앞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카페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 가자.”
“……네?”

“거기……로 가자고.”

“…….”

알아듣지 못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내려왔다.

자신을 향해 기울여진 우산과 그의 상체.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귓가를 무섭게 때리던 빗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멍멍하게 들려왔다.

말도 안 되게 가까워진 거리에 심장이 여러 번 가슴을 크게 두드렸다.

“선배, 뭐라고요?”

귓가에 머무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등줄기를 따라 아릿한 감각이 밀려 올라왔다.

‘유지안 뭐야.’

그저 가깝게 다가와 속삭일 뿐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반응이라니.

이미 붉어진 얼굴 위로 간간이 튀기는 물방울이 차가운 감촉을 남기며 하얀 목선 위를 타고 흘렀다.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 자신의 반응에 지안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저기! 저기 가자.”

아무 데나. 그저 가장 가까운 카페를 손으로 가리켰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머문 그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숨이 트이는 느낌.

아무래도 얘는 너무 위험하다.

무언가 존재만으로 굉장히 치명적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그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카페에 들어가자 빗속에 차갑게 식었던 몸 위로 온기가 스몄다.

지안이 고개를 숙이고 가방 위로 가득 묻은 빗물을 손으로 툭툭 내리쳤다.

‘어…….’

갑작스럽게 머리 위로 스치는 감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커다란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지안의 머리 위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어 내고 있었다.

“야!”
순간 크게 튀어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손이 우뚝 공중에 멈추었다.

카페 안 몇 안 되는 손님들과 직원의 시선도 동시에 둘에게 닿았다.

“나한테 손대지 마.”

그제야 의미를 파악한 석한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나며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일부러 안 그랬으니까 더 위험해. 너 쓸데없이 내 몸에 손 한 번만 더 대 봐. 그때는 가만 안 있어.”

“네. 알겠어요.”

저것도 버릇이지, 버릇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카페 가장 구석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여나 자신과 거리가 멀어질까 걱정을 하는 것처럼 뒤에 바짝 따라붙은 그가 느껴졌다.

“선배, 뭐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나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가 잠시 고민하는 듯 서서 지안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가운 거 드시기에는 약간 날이 추웠죠?”

“……뭐?”

“아니요. 혹시 맞더라도 차가운 게 더 나으니까.”

“뭐래.”

“아, 농담이에요. 사 올게요.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주문하기 위해 걸어가는 그를 넌지시 바라보다 지안이 작게 입술을 벌렸다.

온전치 않은 걸음걸이.

‘아, 어제 풀었다고 했지.’

지안의 이마 위로 주름이 가득 팼다.

분명히 깁스를 어제 풀었으면 걷는 것이 불편했을 텐데, 어디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걷던


자신을 불편한 내색 없이 따라왔다.

“쟤는 대체 뭐야.”

커피를 들고 다가오는 석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바르게 걸어오는 모습에 지안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여기요.”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자로 앉는 석한.

다리를 구부림과 동시에 옅게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 지안이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야! 너 다리…….”

“이제 다 나았대요.”

“장난하냐? 어제 깁스 풀었는데 하루 만에 그렇게 멀쩡하다고?”

“…….”

“그냥 불편하고 아프면 나한테 천천히 걸으라고 하면 되잖아.”

“괜찮아요.”

“그리고 집에서 쉬지 뭐하러…….”

자신이 뭐라고 할수록 선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지금 선배가 나 멀리하는 거. 그게 더 불편해요.”

진짜예요. 믿어 달라는 듯 제법 진지한 눈동자를 하는 그의 모습에 빗물에 차갑게 식었던 얼굴 위로


천천히 온기가 밀려왔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느릿하게 위아래로 여러 번 움직이던 지안의 눈꺼풀이 자리에 멈추었다.

잠시의 생각이 마무리되고 지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너랑 얽히는 거별로야.”

“왜요?”

“일단, 난 주목받는 거 아주 싫어해. 너랑 얽히면 주목받고도 남으니까.”

“뭐 생긴 거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이거 아직 되게 뜨거운데 생각 있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를 잡은 지안의 손을 보며 석한이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에요, 농담.”

“뭐가 됐든 나 너랑 얽히는 거 싫고, 그날 일은 나도 너 때렸으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서로 떠올려


봐야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니까.”

그러니 앞으로 찾아오지도 말고, 알은척도 하지 마.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지안을 감정 없는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던 석한이 입술을 작게 밀어 올리며 움직였다.
“일단, 이게 순서일 것 같네요.”

“…….”

“그날은 내가 미안했어요. 참아야 했는데. 미안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

“물론 아프다고 오기 싫은 사람 불러 놓고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한 건 쓰레기라고, 발정 난 새끼라고


욕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도 많이 반성하고 후회했어요.”

“많이 반성했으면 됐어. 그러니 우리 더는…….”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알아주세요.”

진심으로 그날 일에 대한 미안함을 전한 그가 진실한 눈빛을 머금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마치 영롱한 빛을 담은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말도 안 되게 예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생각이 멈추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드는 묘하고 이상한 눈빛.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 것만 같아서 지안이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마음이 없는데 충동적으로 그랬던 거 아니에요.”

“…….”

“뭐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선배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

“그런 쓰레기 같은 마음으로 선배 기다리고 선배한테 그렇게 한 거…….”

“…….”

“그런 거 아니에요.”

잠시 내렸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 옮겼다.

믿어 달라는 다부진 목소리와 함께 거짓이 없어 보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편하게 내쉬던 숨이 멎었다.

순간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자꾸 이런 식으로 다가오면 거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주한 순간부터 두근거렸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고백의 순간 설렘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트러졌던 초점을 모으고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갑자기 왜?”

“……네?”

“그러니까 갑자기 왜 나한테 마음 같은 게 생겼냐고.”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뭐야…….”

석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본 적 없지만 답해야 한다면, 지금부터 잘 생각해 볼게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장난하나, 이게…….

“야.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뭐가 그런 게 아니야. 너 지금 나 놀리냐? 됐고. 그냥 앞으로 이런


불편한 만남 가지지 말자. 지금도 상당히 부담되거든?”

안 그래도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같은 과 후배들의 모습에 옆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아무튼, 됐고. 그만 일어나자.”

“선배는 잘 알아요?”

빗물이 가득 묻어 있는 가방을 챙기던 지안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늘 매사에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아냐고요.”

“……뭐?”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마음이 가는 거…… 그런 적 한 번도 없었어요?”

“뭐야.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작은 한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나만 이상한 건가 싶어서요.”

“…….”

“자꾸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가고. 그냥 나만 봐 주면 좋겠고. 한 번이라도 말 걸어 보고 싶고…


….”

“야…….”

“선배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어요.”

“…….”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 잠시 시선을 흐트러트렸다.

“나도 요즘 내가 너무 이상해요. 원래 뭐 하나에 그렇게 집착하거나 깊게 생각하는 편은 아닌데. 이제


그래 봐야겠어요.”
“……뭘?”

단단히 결심한 듯 지어 보이던 진중한 표정 위로 옅은 웃음이 번졌다.

물기를 여전히 머금고 있는 하얀 얼굴 위에 탁한 것이 섞이지 않은 말간 눈동자. 두 볼 위로 따스해


보이는 붉은빛을 머금은 그녀.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동그랗고 말랑거리는 볼을 쓰다듬고 싶은 생각이 들어 꿈틀거리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석한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도대체 왜 선배만 보면 미칠 거 같은지…….”

“…….”

“내가 더 미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야겠어요.”

□ ◆ □

집에 도착해 축축하게 젖은 옷들을 모두 벗어 버리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적지 않게 맞은 비에 온몸이 으슬으슬하던 것이 따뜻하게 감아 오는 온기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피곤함에 겨우 추켜올렸던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시선이 닫히자 애써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머릿속을 채워 갔다.

‘나만 이상한 건가 싶어서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상한 거로 치면 나만 하겠냐.”

작은 읊조림이 한숨과 함께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안에 느릿하게 퍼졌다.

그와 닿았을 때 느꼈던 몸의 반응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끼쳤다.

생전 처음 겪은 이상한 감정과 느낌.

예민한 살결을 집요하게 어루만지던 손길과 인장을 새기듯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던 입술.

욕조에 가득 담긴 따스한 물 위로 지안의 더워진 숨이 번졌다.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세하게 번지는 야릇한 기분이 온몸 신경 세포를 하나하나 어루만지듯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생각을 아무리 닫아 보려 해도 저절로 떠오르는 몸의 기억.


천천히 눈을 뜨고 흐릿해진 시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탁한 숨결과 함께 어지럽혀진 음성이 흘렀다.

“내가 미친 건가…….”

미치기 딱 일보 직전이었다.

□ ◆ □

5 월이 되고, 축제 기간을 맞이한 대학가는 한층 활기를 띠고 있었다.

과마다 준비한 행사로 길게 늘어진 부스와 행사를 준비하는 들떠 보이는 학생들.

“오늘 주점 갈 거지?”

하은의 물음에 지안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행사를 진행하느라 분주한 캠퍼스 안을 스치듯 눈에 담았다.

과 행사는 주로 1, 2 학년과 3 학년 학생회 중심으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어제 과 전공 시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벌금 5 만 원이라며 회장에게 단단히 잔소리를 들은


터라 안 갈 수도 없는 상황.

“잠깐 가야지. 또 선배인데 와서 돈도 안 쓰네, 이런 말 듣기 싫다.”

“맞아. 그리고 분명 안 가면 스토커처럼 따라붙어서 5 만 원 뜯길 게 뻔해.”

“내 말이……. 걔는 정말 회장감이야.”

“그래. 그럼 우리 수업 끝나고 바로 가자. 학생 회관 1 층에서 만나자. 얼굴만 비치고 잠깐 앉아 있으면


되겠지.”

“그래. 그러자.”

수업을 마치고 학생 회관 앞에서 하은을 기다렸다.

[나 잠깐 과실 들렀다가 갈게. 주점 앞에서 보자.]

하은의 문자를 받고, 주점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붉은색을 띠던 하늘 위로 어둠이 조금씩 차오르고 캠퍼스 길목을 따라 행사를 위해 달아 놓은 예쁜


전구들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행사가 진행된다는 무대 앞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학생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환호 소리와 함성.

한껏 들뜬 분위기에 지안의 마음도 덩달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지안아, 여기!”

과 행사 부스에 도착하자 이미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친구들이 지안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를 전한 후 걸음을 옮기는 순간.

“지안 선배! 왔어요?”

그 누구와도 비교 안 되는 반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지안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반가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빠르게 다가와 지안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와. 선배 올지 몰랐어요.”

나도 네가 여기 있을 줄 몰랐다.

반가움이 극대화되어 있는 표정으로, 뚫어져라 지안을 살피는 석한의 모습에 주변 동기들의 눈동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과 이름이 박힌 초록 앞치마를 두른 것을 보니 아마도 주점 일을 돕고 있는 듯싶었다.

“야. 너 안 바쁘냐?”

“저요? 괜찮아요. 사실 저는 얼굴 마담이거든요. 저 없으면 장사가 안 된다나?”

어쩐지 유독 우리 과만 여자애들이 복작복작하다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나한테 말을 걸어?

저리 가라고 지안이 말하려던 순간.

“둘이 친해?”

궁금증이 가득한 동기들의 물음에 지안이 아니라고 답하려 했다. 그러나.

“네.”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대답이 석한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허……. 동시에 작은 한숨이 지안의 입술로 터졌다.

그날 그렇게 얘기했는데…… 얘가 그날 못 알아들었나.

살짝 짜증이 섞인 눈으로 석한을 바라보았다.

지안의 눈빛에 잠시 머뭇거리던 석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지안 선배는 어떤지 몰라도. 제가 좋아해요.”


“뭐? 너 지안이 좋아해?”

동기들이 입 모아 외쳤다.

이 또라이 자식.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다시 석한이 말을 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예요.”

“아아…… 그런 뜻이야?”

지안이 살짝 벌어졌던 입술을 다물고 석한을 살며시 노려보았다.

“너 안 가냐?”

“선배는 언제 가요?”

“나 금방 갈 거야.”

너 있어서 불편해. 차마 이 말은 뱉지 못하고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선배 갈 때 같이 갈 거예요. 할 말도 있고.”

“……할 말?”

“네.”

지금 그의 행동으로 유추해 보건대 절대 앞으로 선배 알은척하지 않을게요, 이런 말을 할 리는 없는 듯


보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석한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로 고개를 돌렸던 석한이 지안과 눈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즐거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 자신과 만남이 꽤 행복해 보이는 표정.

“저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아무 데도 가지 마요. 알겠죠? 선배들 지안 선배 잘 지켜요!”

“어……? 응. 그래. 우리가 아무 데도 못 가게 잘 지킬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석한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은혜롭다. 은혜로워…….”

잠시 남다른 얼굴과 몸매에 감탄하던 동기들의 눈빛이 동시에 지안을 향했다.

“야. 너 쟤랑 친해?”

“아니.”

“뭐가 아니야. 좋아한다잖아.”

“선배로 좋아한다잖아, 선배로! 너네도 다 좋아할 거야!”


대충 얼버무려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언제 친해진 건데? 왜 우린 몰랐지?”

우리가 그다지 아주 친하진 않았어.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교양 수업 같이 들어. 팀 프로젝트 같이 하면서 몇 마디 해 봤어. 됐냐? 됐어?”

“그 수업 뭐야. 난 왜 몰랐지?”

“다음 학기부터 쟤한테 그럼 시간표 같이 짜자고 그래. 나한테 그러지 말고.”

주문한 파전과 막걸리가 나오자 잠시 집중되었던 시선이 흩어졌다.

그냥 얼굴만 비치려고 생각했던 지안도 동기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재빨리 들이켰다.

그래. 술이라도 마시자.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하은이 도착하면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지안이 하은이 오지 않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를 살피던 지안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동시에 동기들의 시선도 지안의 시선 끝에 함께 멈추었다.

“안희수네.”

“누구?”

“안희수. 오석한 전 여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안도 아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학교 모델로 활동할 정도로 훌륭한 외모를 가진 그녀 또한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었다.

“둘이 헤어졌어?”

“응. 몰랐어? 안희수 한동안 엄청 술 마시고 다녔다던데. 왜 그러나 했더니 헤어졌다더라고.”

지안이 흘깃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격 없어 보이고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

“헤어진 거 맞아? 근데 왜 저렇게 친해 보여?”

“희수 쟤가 아직도 미련 못 버리고 따라다닌다는 소문 있던데.”

“안희수가? 그 콧대 높은?”
“몰라. 소문이 그래. 근데 둘이 다시 사귀나?”

“아니라고 들었는데. 하긴 남녀 일은 모르는 거니.”

한동안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안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시 채운 술을 천천히 마셨다.

“오석한이 집안도 그렇게 좋다며. 오앤아트 쪽이라던데?”

“아, 그래서 안희수가 저렇게 목매나? 하긴 근데 안희수도 집안이 한가락 하던데.”

“끼리끼리 노는 거지 뭐. 어차피 우리랑 상관없어. 우리는 술이나 푸자…….”

집안도 좋고. 허우대도 멀쩡한 애가 대체 왜.

그리고 저렇게 예쁜 애들이 주변에 많은데.

막걸리를 한 잔 다시 비워 낸 지안이 작게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뭐라고 쟤네를 신경 써…….”

“응? 지안아, 뭐라고?”

“아, 아니야…….”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지안이 다시 막걸리를 한 잔 쭉 들이켰다.

“야, 유지안. 너 빨리 간다며 술 마셔?”

그제야 나타난 하은이 지안의 옆에 앉아 지안을 살폈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와!”

“미안. 갑자기 교수님 만나서 설교 듣느라. 야. 너 근데 막걸리…… 완전 약한 애가.”

하은이 뜨악하는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막걸리만 마시면 금세 취하는 지안이었다.

“그냥. 한잔하고 싶었어. 가자.”

“벌써? 나 지금 왔는데.”

“그럼 나 먼저 간다. 얼굴 보려고 기다렸어.”

“어어? 같이 가자.”

“아니야. 넌 더 놀다가 와.”

어떻게든 빨리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은 기분이 밀려왔다.

하은의 어깨를 톡톡 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안이 동기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야. 너 근데 괜찮아? 취한 거 아니야?”


발그레해진 볼과 살짝 애매해진 눈빛.

하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안이 앉으라며 어깨를 꾹 눌렀다.

“야, 놀다 와. 이 언니 간다.”

“어라. 너 취한 거 같은데.”

“장난해? 이 언니 술 경력이 몇 년인데.”

“웃기고 앉았네. 막걸리만 마시면 집도 못 찾아가는 게. 같이 가!”

어느새 멀어진 지안의 모습에 하은이 재빨리 일어나 지안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선배.”

“……어?”

갑작스럽게 앞에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에 하은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지안 선배 모셔다 드릴게요.”

“어……? 아…… 그럴래?”

당황스러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하은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남긴 석한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냥 놔둬도 되나…….”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 하은이 지안을 따라 뛰어가는 석한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둘이 알아서 하겠지.”

걱정 반 기대 반.

“아무튼 복 받은 년. 남은 대화도 잘 못 해 봤구먼.”

하은이 자리에 앉자마자 지안과 석한에 대한 물음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며 술을 마셨다.

“선배! 지안 선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그저 무시하고 걸음을 계속 옮겼다.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커다란 음악 소리와 함성이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선배!”

어깨에 닿는 다급한 손길에 지안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휙 돌아선 지안이 가는 눈으로 석한을 노려보았다.

“야! 너!”

재빨리 손을 치운 그가 능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안. 아무리 불러도 선배가 안 봐서요. 손댄 거 아니에요.”

한 번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본 지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면 간다고 말 좀 해 주지.”

“내가 왜.”

급하게 따라온 것인지 이제야 목에 두른 앞치마를 주섬주섬 벗은 석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봤으면 됐죠.”

“가서 일이나 도와.”

“이미 제가 할 만큼 다 한 거 같은데요.”

하긴 오래 먹은 사람들이 자리를 빼 줘야 할 만큼 여학생들이 줄을 길게 섰었지.

“그럼 집에 가.”

“벌써요?”

“뭐가 벌써야.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선배. 모르는구나.”

“뭘?”

손목에 닿는 따스한 감촉에 지안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내렸다.

자신의 손목을 잡았던 감촉이 역시나 금세 사라졌다.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축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뭐?”

발그스레한 뺨 위로 살짝 어그러진 눈매 안의 눈동자가 캠퍼스를 밝히는 화려한 전등 빛에 반짝였다.

석한이 던진 말의 뜻을 모르겠다는 듯 의미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던 석한이 잠시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귀엽다.”

“……뭐?”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순간 또 다른 의미의 홍조가 지안의 얼굴을 뒤덮었다.

“야! 너 대체.”

내 말은 어디로 알아먹은 거냐. 물으려던 찰나.

“키스해도 돼요?”

“……!”

“물론 안 되겠죠? 하아! 미치겠다.”

“야…….”

석한의 모양 좋은 기다란 손가락이 봄바람에 살랑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짜증스러운 손길로 흐트러트렸다.

“나도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

“아무리 생각해도! 못 찾겠어요.”

“뭘?”

“선배만 보면 미치겠는 이유! 아무리 며칠을 밤새고 생각해도.”

“…….”

“도저히 못 찾겠다고요.”

짜증과 원망이 섞인 말투.

“아직도 궁금해요?”

“……뭐가.”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로 꼭 알아야 해요?”

“야, 대체 무슨 말이야.”

이제는 원망만 남은 목소리가 주변을 둘러싼 커다란 음악 소리에 섞여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냥 좋은 거라고요.”

“…….”

“그냥 좋은 거라고. 선배가.”

모르겠어요?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 지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석한이 물었다.

“너 인기 많잖아. 너 좋다는 여자도 많고.”

“…….”
“그냥 너 좋다는 여자 만나.”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지안이 다시 가던 길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금세 앞을 가로막는 석한의 행동에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왜 도망가요?”

“무슨 소리야. 비켜.”

순간 지안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작은 숨을 내쉬느라 지안의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내가 여자를 잘은 모르지만. 지금 선배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도망가는 거 같아요. 아니에요?”

“아니야.”

“거짓말.”

확신을 가진 눈빛을 담은 그가 망설임 없이 외쳤다.

“네가 어떻게 알아?”

“이미 내가 파고들기 전부터 나 막았잖아요.”

“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나 주목받는 거 싫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뱉었다.

“핑계예요. 이유가 뭐예요? 내가 이해할 만한 이유를 알려 줘요.”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진짜 귀신같은 자식.

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 미리 생겨 버린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 온몸을 지배해 버린 순간, 그때부터 그는 지안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한번 빠지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핑 하고 온 세상이 도는 것만 같았다.

몇 잔 마신 술이 이제야 뒤늦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술기운에 눈을 감았던 지안이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

“뭐가요? 내가 막 이렇게 다가오는 게?”


“다. 그것도 그렇고. 이렇게 찾아와서 이러는 행동도. 그리고 네 주변에 모든 환경도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네가 나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도. 지금은 아주 잠깐 나한테 그런 마음이 들지
모르겠지만 호기심일 수도 있고, 잠시 착각했을 수도 있어. 그러니 금방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 오래
만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거니까. 우린 그럴 관계도 아니니 너도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질
거야.”

밀려드는 술기운에 최대한 정신을 바로 잡고 긴 호흡을 이어 가며 말을 마쳤다.

묵묵히 고요한 눈빛을 머금고 자신의 말을 듣던 석한이 천천히 입술을 밀어 올렸다.

“희망적인 이야기네요.”

“응?”

지안의 기다란 눈매가 잔뜩 찌푸려졌다.

이미 그의 생각은 제 생각과 다른 노선을 타고 흐르는 듯싶었다.

“그 말은 선배도 바뀔 수 있는 거고, 즉 내가 싫다가도 언제 좋아질지 모른다는 말. 맞죠?”

“야. 그게 왜 해석이 그렇게…….”

“알겠어요. 앞으로 내가 노력하면 되겠네요.”

“……뭐?”

전의를 불태운 눈빛이 어둠 속에 반짝였다.

“좋아해요.”

순간 내쉬던 호흡이 멈추었다.

“나랑 사귀어요. 선배.”

“야…… 대체…….”

“한 달만 만나 보고 그때도 선배가 나 싫다고 하면, 더는 아무 말 안 하고 사라져 줄게요.”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지안의 표정에 석한이 슬그머니 입술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왜요. 자신 없어요?”

“……뭐라는 거야.”

“한 달 안에 나한테 안 빠질 자신 없냐고요.”

“이게 진짜 미쳤나.”

“네. 나 선배한테 미쳤어요. 그러니 이러지 안 그러면 이럴 이유가 없잖아요. 자신 없어요?”

안 그래도 올라오는 취기에 온몸이 후끈거리는 마당에 오기 생기게 슬슬 건드리는 석한의 행동에 온몸에
열기가 거침없이 치솟았다.
“안 넘어가면 어떻게 할 건데.”

“말했잖아요. 다시는 선배 앞에 안 나타난다고.”

약속할게요. 내 모든 걸 다 걸고.

이게 뭐라고 모든 걸 다 걸어. 작게 읊조린 지안이 피식 웃었다.

아마도 심각해야 할 상황인 거 같은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별 진짜 이상한…….”

“또라이를 다 봤냐고요?”

무서운 자식.

아 취했나. 순간 빙 도는 하늘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빨리 대답해요.”

“잠깐만…… 머리 아파.”

“네? 선배. 대답하라고요.”

“아우. 알았다고. 잠깐만.”

“네. 그럼 오늘부터 사귀는 거예요.”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손이 멈추었다.

감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야. 그 알았다가 그 알았다가 아니잖아. 뱉으려던 지안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닫혔다.

어느새 유지하던 거리를 좁히고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을 가로막았다.

어두운 세상에서 환한 빛을 만난 듯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안 그래도 어지럽게 돌던 머릿속이


더 빙빙 도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 무슨 반박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도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뭐 얘랑 사귄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냥 왕따 정도 당하거나 술자리 안줏거리나 몇 번 되겠지.

아닌가? 하은이 말한 것처럼 ‘복 받은 년’이라는 말이나 들으려나?

“야. 네 마음대로 해. 나도 이제 모르겠다.”

그를 막아야겠다던 생각을 단숨에 내려놓았다.

혹시 그가 자신의 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 어디 가 보자. 어떻게 될지.

포기한 듯한 지안의 음성에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진짜죠! 가요. 선배.”

“어딜. 나 어지러워.”

여전히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잡아 내리던 석한의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선배. 술 취했어요?”

“어. 약간…….”

바짝 마주한 석한의 눈동자가 빠르게 지안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나 누군지 알아요?”

“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다행이다. 난 혹시 방금 한 말 기억 못 할까 봐 걱정했잖아요.”

“못 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안 하고 싶든가.

“그럼 안 되는데.”

농담으로 던진 말에 그의 표정이 말도 안 되게 진지해졌다.

이 녀석 정말 진심인가 봐.

진짜 얘 왜 이러니.

큭 하고 웃음이 흘렀다.

“너 진짜 웃기다.”

“선배는 진짜 예뻐요.”

말문을 막히게 하는 그의 대화법.

늘 거짓이 느껴지지 않아 지안을 더 당황스럽게 만든다.

눈에 새겨 넣기라도 할 듯 하염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몽롱해진 눈동자에 담겼다.

빤히 바라보는 진득한 눈빛 아래,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섹시해 보이는 입술에 지안의 시선이 멈췄다.

그날 입 안을 파고들어 정신없이 자신의 입속을 탐하던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떠올라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점점 바짝 마르는 듯한 입술 위를 재빠르게 혀끝으로 훔쳤다.

“와. 선배. 아무리 취했어도 그러지 마요.”


“……뭐?”

“지금 누구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완전 키스하고 싶은 표정이었어요.”

“야! 너 말 잘했다. 너 나한테 손대는 거 금지야. 한 달 동안.”

“네. 알겠어요.”

반발을 예상했었는데, 그가 쉽게 수긍했다.

괜히 앞서갔나 싶어 순간 움찔했던 지안이 다시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한테 손도 대지 마. 알았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그날 대차게 뺨 맞은 것도 있고. 내 진심이 왜곡되는 것도 싫으니까.”

“…….”

“대신 선배가 나 좀 도와줘야겠어요.”

“도와? 뭘?”

그가 주먹을 쥔 채 지안의 눈앞으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잡아요.”

“……?”

“손목 잡아요. 될 수 있으면 꽉.”

대체 이게 무슨…….

그의 말대로 그의 손목을 작은 손으로 꼭 말아 쥐었다.

말아 쥔 손끝이 닿지 않을 두께의 단단한 손목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딸려 내려가는 자신의 손을 따라 지안이 고개를 내렸다.

“꽉 잡았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보기 좋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절대 손은 안 댈게요.”

이상하리만큼 야릇하게 느껴지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그의 얼굴이 점점 지안을 향해 기울어졌다.

“아…….”

시선을 단숨에 빼앗아 갔던 그의 붉은 입술이 깊숙하게 지안의 입술 위로 맞물렸다.

입 안을 뜨겁게 파고든 그의 혀가 단숨에 지안의 혀와 맞물리더니 금세 엉켜 들었다.

이런 뜻이었어?
황당함에 지안의 눈이 크게 떠지고 그의 손목을 잡은 손끝에 힘이 가득 실렸다.

그의 손목을 놓고 밀어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얼굴의 방향을 바꾼 석한이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 뜨거운 숨결을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촉촉하고 뜨거운 혀가 여기저기 파고들어 야릇하게 훑고 지나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아무리 어두워도 학생들이 가득한 캠퍼스였다.

분명 자신들을 향한 눈동자들이 가득하다는 걸 석한과 지안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석한은 멈출 생각이 없었고, 지안은 차마 멈추지 못했다.

망했다.

이제 내일부터 지금처럼 평온하게 지내던 캠퍼스 생활은 끝이 나겠지.

여기저기서 안줏거리가 될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니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하지만 차마 떼어 내지 못한 그의 입술이 너무 뜨겁게 파고들어 금세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갔다.

“하아…….”

진하게 입술 위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탄식이 섞인 한숨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갔다.

그가 말한 대로 여전히 지안의 손은 석한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막기보다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짜릿하고 생경한 감각에 뭐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다급하게 들어서 차마 놓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을 눈앞에 맞닥뜨린 것처럼 신기하고 놀란 듯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
위를 한참 동안 머물렀다.

“야…… 너 대체…….”

차마 어떤 말을 뱉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아 의미 없는 단어만 입 밖으로 툭툭 내뱉어졌다.

재빨리 그의 손목을 놓고 반걸음 물러나 그를 바라보았다.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석한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와…… 대체 선배…….”

“…….”

“진짜…….”

“……?”

그 또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하아. 진짜. 내가 미친 건가.”


“무…… 무슨 소리야.”

“뭐가 이렇게 좋지…….”

지안의 미간이 가득 찌푸려짐과 동시에 순식간에 얼굴 위로 홍조가 번졌다.

주변이 어두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시선을 옮겨 주변을 살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을 향한 시선에 다시 고개를 재빨리 그를 향해 돌렸다.

“야, 가자.”

“네. 어디 갈까요. 난 어디든 선배랑 가면 좋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의 손목을 놓아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손이 재빨리 그의 손목을 다시 강하게 잡았다.

“빨리 가자.”

“어, 어…….”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목을 당기는 힘에 끌려가던 석한이 입술을 꾹 눌러 문 지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웃지 마.”

“선배만 보면 웃음이 나는데 어떻게 해요.”

“장난하지 마.”

“저 지금까지 선배한테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다가간 적 한 번도 없어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됐고. 빨리 걷기나 해.”

한참 동안 그저 세상 모든 즐거움을 담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걷던 지안이 한적한 거리에 들어서자 걸음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대체 뭐야.”

왜 내가 얘를 데리고 이렇게 도망쳐야 하는 거지?

조금씩 취기가 사라지며 정신이 또렷해졌다.

가만히 서서 여전히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자꾸 왜 그렇게 봐. 관찰하냐?”

자꾸 저렇게 이상하게 살핀다.


“좋기도 하고…… 믿을 수 없기도 하고…….”

“……뭐가?”

“선배랑 사귄다는 게 정말 현실인지. 꿈은 아닌지. 믿기지 않아서요.”

이 자식 정말 또라이인가.

무슨 덕질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맹목적이야.

오히려 믿기지 않는 행동으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석한…….”

“네. 선배.”

“너 진심이야?”

어둠 속에서 지나치게 반짝이던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예요. 어떤 미친놈이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한테 이렇게 해요.”

“……그러니까.”

“진짜 해도 너무해요.”

생각해 보니 또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정도 대놓고 들이대는 사람을 두고, 피하고 의심하고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

한숨을 내쉰 지안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 내가 조금 너무한 거 같기도 하다.”

다물어졌던 그의 입술이 보기 좋게 밀려 올라갔다.

바라만 봐도 멍해지는 말도 안 되게 해사한 미소에 지안의 가슴이 울렁였다.

“걱정하지 마요.”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음성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마치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편안하게 내리꽂히는 눈빛에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노력할게요.”

“…….”

“선배는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 세상을 다 줄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마치 그의 세상에 이미 빠져든 듯 주변을 둘러싼 세상이 몽롱하게 느껴졌다.


밀어내고 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파고드는 그의 행동에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나야, 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내뱉지 않았다.

끝까지 나인지. 이제는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선배. 끝나고 지난번에 만났던 지하철역 앞에서 만나요.]

강의가 끝나고 그에게서 온 문자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학교에서는 절대 같이 안 다닐 거야.’

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지안을 향해 그는 가볍게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선배. 왔어요?”

뭐가 그리 좋은지 이미 입이 귓가에 걸려 있는 그의 모습에 그를 향하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래 기다렸어?”

“즐겁게 기다렸어요.”

“또…….”

“왜요. 너무 좋아요?”

“그래. 아주 좋아서 죽겠다.”

“저도요.”

히죽거리며 지안을 향해 뻗어 오던 팔이 공중에 멈추었다.

“아, 죄송해요.”

“너 끌어안으려고 했지.”

“네. 진짜 안 돼요?”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러실까.

“어. 안 돼.”

“그럼 손은요? 새끼손가락만 잡을게요.”

“……뭐?”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한참 동안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지안을 살피던 석한이 작게 투덜거렸다.

“원래 손만 잡고 잘게도 손만 잡고 자는 거 아닌데……. 정말 손 하나 못 대게 하냐.”

“가자. 오늘 어디 가려고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던 눈빛이 사라지고 그가 빙긋 웃었다.

“좋은 데요.”

갑자기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 위를 파고들었다.

새끼손가락만 잡는다더니 손가락 사이사이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고 깍지를 낀 그가 빠르게 그녀를


당기며 걷기 시작했다.

“어어어…… 야. 어디 가.”

지하철을 탈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고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얼굴에 가득 채우고 걷기 시작하는 그를 넌지시 바라보다가 지안도 말없이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어찌나 꼭 잡았는지 손바닥 안에 땀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살포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밥 먹었어요?”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걸음이 멈추자 그가 빙긋 웃으며 물어 왔다.

“아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내가 잘 아는 집 있어요.”

배도 고프던 참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꽤 규모가 큰 일식 식당 앞에 그가 멈추었다.

“여기예요. 와 봤어요?”

“아니.”

“들어가요.”

와 보지는 않았지만 지안도 잘 알고 있는 가게였다.

워낙 유명한 집이었기에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 항상 줄을 서서 먹어야 하는 곳.

두 사람이 도착한 시간에도 역시나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기표도 받지 않고 들어가는 그의 손을 강하게 당겼다.

“야. 여기 번호표 받아야 해.”


“괜찮아요.”

“뭐?”

당당하게 들어가는 그를 따라 주변을 살피며 들어갔다.

“다음 번호인가요? 어? 오셨어요.”

정신없이 손님들을 안내하던 직원이 석한을 보며 반갑게 웃었다.

“네. 자리 안내 좀 해 주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직원이 밝게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와 직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리에 마주 앉은 그가 빙긋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주문은 내가 여기서 제일 맛있고 비싼 거로 했어요. 회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지.”

“다행이다.”

맛집이긴 했지만, 학생이 오기에는 여간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닌 것을 지안은 알고 있었다.

“야. 너 여기 엄청 비싸.”

“네.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내가 부담스러워.”

“선배가 사는 거예요.”

“뭐?”

정색하는 지안을 보고 석한이 큭큭 소리 내 웃었다.

“농담이에요.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지안이 자꾸만 느껴지는 이상한 시선에 주변을 살폈다.

지나가던 직원들이 흘깃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뭐지…….”

괜히 나 혼자 의식하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 많은 대기 인원을 제치고 들어온 것 자체가 뭔가 평이하지 않다.

자신이 오버하는 거겠지, 라는 생각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오석한이? 어디! 어디!”

하이 톤의 여자 목소리와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바닥을 내리치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오석한! 어. 없네.”

갑자기 테이블 앞에 나타난 여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작은 얼굴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이목구비며 격식을 차리지 않은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 갔지? 야! 오석한! 아니지.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눈앞의 여자가 사랑스러운 핑크빛 입술을 예쁘게 밀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지안 씨죠?”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놀란 지안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네. 안녕하세요. 유지안입니다.”

“반가워요. 앉아요. 괜찮아요. 나도 잠깐 앉을게요. 괜찮죠?”

어색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친 지안에게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은 그녀가 아주 빠른 속도로 지안의


앞에 마주 앉았다.

여전히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피는 그녀의 모습에 괜한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저를 아세요?”

“당연하죠.”

“어떻게…….”

“오석한 저 자식이 맨날 얘기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네요. 오혜인이에요. 지안이


큰누나.”

“아, 누나…….”

그런데 큰누나?

그럼 누나가 더 있다는 뜻인가…….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재빨리 표정을 고치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진짜 신기하다.”

“……네?”

“아, 미안해요. 근데 지안 씨 엄청 예쁘네요.”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에요.”

대체 생각을 어떻게 했길래.

그나저나 필터링 없이 마구 투척하는 화법. 이 집안 내력인가.

“아니에요. 저…… 혜인…… 님이 더 미인이신데요.”

“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타고나길 이렇게 타고 나서요.”

왜 다른 사람인데 같은 사람을 보고 있는 느낌이지.

내력이 많은 집안이구나.

다시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어! 뭐야! 여기서 뭐 해!”

갑자기 나타난 석한이 기겁한 표정으로 빠르게 달려와 테이블을 두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짚었다.

“야! 오석한! 진짜였어!”

“아, 조용히 안 해?”

“오면 온다고 미리 얘기하지. 그럼 누나가 이렇게 안 입고 오지.”

“넌 뭘 입어도 못생겼어.”

“이 새…… 아니, 자식이. 입 닫아. 지안 씨랑 초면인데.”

웃으며 욕설도 시원하게 날릴 거 같아 보이는 혜인이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 석한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그냥 멀리서 보라고 했지. 누가 이렇게 들이대래!”

“내가 뭘 들이대. 인사만 간단하게 한 건데.”

“일어나! 빨리.”

“지안 씨. 뭐 시켰어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여기 내가 하는 가게예요. 말만 해요. 제가 풀코스로


쏠게요.”

“……석한이가 시켰어요. 잘 먹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테이블 위에서 점점 지안을 향해 다가왔다.


들이대는 것도 집안 내력이구나 싶다가 하도 빤히 바라보니 당황스러움에 지안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야. 뒤로 안 가?”

“어머. 미안해요. 내가 너무 신기해서.”

“누나. 안 바쁘냐?”

“응. 한가해. 지안 씨 미안해요. 얘가 지금껏 여자 친구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엄청 놀랐거든요.”

“야, 야……. 너. 입 닫아. 너 내가 조용히 멀리서 보랬지.”

점점 더 붉어지는 얼굴이 감당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말까지 더듬으면서 자신만큼 얼굴이 붉어진 석한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늘 자신 앞에서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표정을 짓던 그가 당황하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빨리 안 가냐고 소리를 지르며 밀어내는 덕에 혜인이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안 씨 맛있게 먹고 좋은 시간 보내고 가요. 저 자식이 성격이 좀 지랄…… 아니 안 좋아서 혹시


기분 상하게 하면 저한테 말해요.”

“저기. 상관하지 말고 좀 가 줄래?”

가득 인상을 찌푸리고 석한을 노려본 혜인이 지안의 앞으로 다가와 빙긋 웃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안의 앞으로 그녀가 손을 내밀자 지안이 재빨리 손을 잡았다.

“나중에 혼자 놀러 와요. 내가 재미있는 얘기 많이 해 줄게요.”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지안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혜인의 행동에 석한의 목소리가 다시금 크게 들려왔다.

“알았어! 간다고! 야! 그럴 거면 왜 데려와. 꽁꽁 싸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나도 그러고 싶거든?”

“와. 이 자식 미쳤네.”

대체 이 남매의 싸움에 부끄러운 건 왜 나의 몫일까.

지안은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아, 맞다. 나 차 키 좀 줘.”

“오오. 어디 좋은 데 가려고?”

“알 거 없고. 주기나 해.”

“오케이. 지안 씨랑 간다니 내가 특별히 빌려주마. 지안 씨. 좋은 시간 보내요.”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정신없던 시간이 끝나고, 오랜 시간 만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작은 한숨을 내쉰 석한이 그제야 조금 안정을 찾은 표정으로 지안의 앞에 마주 앉았다.

“미안해요. 당황했죠.”

“……나보다 네가 더 당황한 거 같은데.”

“아…… 저희 누나가 좀 무데뽀라…….”

큭, 하고 지안이 웃었다.

괜히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자꾸 웃음이 올라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선배…….”

“아, 미안해. 내가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손을 내렸다.

애써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지만,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눈매는 애써 감추지 못했다.

기분이 나쁜 걸까?

애매한 석한의 표정에 지안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야. 미안해. 뭘 그렇게 봐.”

“선배 내 앞에서 오늘 많이 웃네요. 아까도 웃더니…….”

“……응?”

“예쁘다.”

예쁘다는 말과 함께 마치 좋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화사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있다 보면 하루에도 얼굴에 열기가 몇 번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생각해 보니 그럼에도 그의 앞에서 환하게 웃어 준 적은 없었다는 것을 지안은 깨달았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눈앞의 이상한 남자.

내가 뭐가 잘났다고 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걸까.

“미안.”

지안의 말에 예쁘게 휘어졌던 석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 뭐가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오히려 그가 당황한 듯 보였다.

“생각해 보니 정말 제대로 너 마주 보고 웃어 본 적도 없는 거 같다. 내가 뭐 그렇게 잘난 사람도 아닌데


…… 자꾸 너한테 그러는 것도 좀 그렇고…….”
“아아~ 난 또 뭐라고.”

“뭐가 아니라…….”

자존심이 상하고도 남을 텐데 또 저렇게 웃는다.

한참을 부드럽게 미소 짓던 그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입술을 가득 밀어 올렸다.

“미안하면 키스해 줘요.”

“뭐?”

갑작스럽게 테이블 위로 훅 치고 올라오는 그의 상체에 지안의 등이 의자에 바짝 닿았다.

“야, 똑바로 안 앉아?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여기 너희 누나 가게라고.

이게 진짜.

“미안하다면서요. 그럼 가볍게 키스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이게 또 일부러 이러지.

너 미쳤니?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괜히 지나가는 직원들을 흘깃 바라보며 눈매를 잔뜩 찌푸렸다.

테이블을 넘어올 것처럼 자신에게 가득 다가온 석한의 어깨를 재빨리 주먹으로 툭 하고 때렸다.

“제대로 앉으라고!”

“빨리요. 우…….”

아오, 저 입술.

팍씨. 한 대 칠 수도 없고.

“여기 사람 많다고. 제대로 안 앉아?”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저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혜인의 모습이 보이자 지안이 점점 다급해졌다.

“어? 어? 당연하지.”

“그럼 둘이 있을 때 해 줘요. 네?”

“알았으니까. 빨리 똑바로 앉아!”

또 한 번 다급한 손길이 그의 어깨를 조금 전보다 강하게 때렸다.

그제야 석한의 몸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두 사람의 앞에 다가온 혜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 손님이 많아서 음식이 좀 늦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지안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빨리 줘. 나 빨리 가야 해!”

석한이 삐뚤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 약속 있어? 뭐 하러 가려고? 느긋하게 데이트나 하고 들어가지.”

의외라는 듯 혜인이 물어 오자 석한이 빙긋 웃었다.

“나, 빨리 가서 선배랑 조금 할 게 있어서.”

아차 싶었다.

그 할 것이 바로 그 할 것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도 뭔가 또 굉장히 되게 많이 말린 기분.

“그렇죠, 선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물어 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또 웃음이 튀어나왔다.

오늘 참 많이 웃는다.

대책 없는 녀석. 뭐가 이렇게 직진만 해.

궁금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혜인과 여전히 즐거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석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빨리 먹고 가자. 우리 할 거 있지.”

쏟아지는 눈빛에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괜한 말을 했지 싶다.

“이제 다 먹었죠?”

“아니.”

“배 안 불러요?”

“어. 하나도.”

이 녀석 아까부터 적당히 하지 너무 심하게 앞에서 재촉한다.

키스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풍족하게 먹기 힘든 신선한 회들이 눈앞에 화사한 빛을 머금고 펼쳐져 있건만, 석한의 눈은 오로지
지안만을 향했다.
“석한아…….”

나지막하게 그를 부른 지안이 살며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선배. 다 먹었어요?”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참 어이가 없어서 또 입술이 삐죽거리며 올라가려고 한다.

“나 먹다 체해서 약 사 먹고 바로 집에 갈까?”

“아…….”

“너도 빨리 먹어.”

그제야 그가 젓가락을 들었다.

뭐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 사소하게 나오는 반찬들까지. 왜 맛집인지 그냥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음식이 훌륭했다.

공짜라니 염치없게 느껴지긴 했으나 맛있는 음식을 두고 깨작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복스럽게 입 안에 음식을 넣었다.

“먹는 것도 예쁘네.”

찌릿거리는 지안의 눈빛에 알겠어요. 작게 답한 석한이 다시 먹기 시작했다.

드디어 지안이 완벽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자 빛의 속도로 석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가요. 야! 나 간다.”

석한의 목소리에 빠르게 다가온 혜인이 제대로 앞에 서기도 전에 지안의 손바닥 안으로 밀려들어 온
석한의 손이 그녀를 당겼다.

“고마워. 잘 먹었어.”

“야, 잠깐만. 잘 먹었다고 인사라도…….”

“다음에 와서 해요. 다 먹었으면 잘 먹었겠구나 생각하겠죠.”

대책 없이 무작정 전진하는 그에게 끌려가며 지안이 재빨리 혜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어유. 저 자식 미쳤나 진짜. 지안 씨. 다음에 꼭 혼자 와요.”

“네. 가 보겠습니다.”

식당을 나와 석한의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야! 야! 잠깐 서 봐.”

“왜요.”

“아우. 빨리.”
우뚝 멈춰 선 석한이 지안을 돌아보았다.

“야. 너 지금 그러니까 그……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키스 때문에 그러는 거 맞는데요.”

“허…… 진짜.”

“맞으니까. 빨리 가요.”

주차장에 도착하자 허공에 대고 다급한 손놀림으로 자동차 키 버튼을 누르던 석한이 저 멀리서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발견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야! 잠깐만!”

아, 왜요!

날아온 반격의 멘트에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우리 지금 회 먹었어.

장난하냐?

이대로 키스하는 흑역사 따위 너나 가져.

“커피!”

“네?”

“나 커피 마셔야 해!”

“나중에 마셔요!”

“아니. 절대! 절대! 지금 마셔야 해!”

아, 왜 이러실까.

평소에 볼 수 없는 까칠함이 보이는 그의 눈빛에 질 수 없다는 지안의 눈빛이 닿았다.

“왜요. 지금 키스하면 냄새날까 봐요?”

역시 귀신같은 녀석.

“우리 사이에 무슨. 괜찮아요.”

등짝을 내리치는 또 한 번의 차진 소리와 함께 잡고 있던 손이 그제야 떨어졌다.

“아, 진짜. 선배.”

“왜!”

“뭐가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요. 회 먹고 키스하는 사람이 어디 우리뿐인가?”

“이게 진짜.”
그래. 가요, 가. 커피 아주 사발로 마시고 하자고!

짜증 섞인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석한이 갑자기 눈을 번쩍였다.

“선배…….”

순식간에 느릿하게 불러 오는 그의 목소리에 뭔가 섬뜩함이 느껴졌다.

“왜, 왜…….”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석한의 행동에 재빨리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지안의 눈동자가 불안함에 번쩍였다.

“아! 안 해요!”

내가 지나가는 개를 믿지.

“선배. 우리 커피 마시러 거기 가요.”

“어디?”

입을 가린 손바닥을 살며시 내린 지안이 반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우리 집이요.”

“이게 진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요!”

“장난하냐? 가서 또 차지게 귀싸대기 또 한 번 맞아야지. 응?”

“줄 거 있어요. 선물.”

지안이 코웃음을 치며 삐딱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 선물이 저예요. 이딴 말 안 통하는 거 알지?”

“어, 벌써 들켰어요?”

“이게 진짜.”

“장난이에요, 장난! 진짜예요. 아니면 잠깐 집 앞에서 기다려요.”

믿어 달라는 듯 진중한 눈빛을 보이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자.”

“어? 진짜요?”

“그래. 가자고. 너희 집.”


“와…… 집 안까지?”

“그래.”

석한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금세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그저 한마디에 밀려 올라오는 감정을 숨길 생각 따위 없다는 듯 그가 기가 막힐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귀엽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 좋아할까.

밀려오는 웃음을 참으며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싫어?”

“내가 미쳤어요?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가요.”

빛의 속도로 날아온 손이 지안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석연찮은 듯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웃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가 말한 대로 어쩌면 자신이 너무 그를 향해 마음을 닫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다른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들.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들을 벽창호 같은 여자처럼 굴면서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언제까지 두렵다고 피할 일이 아니었다.

도로를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선배. 잠깐만 기다려요.”

재빨리 차에서 내린 석한이 편의점을 향해 뛰어 들어가더니 금세 손에 봉지를 들고 차로 돌아왔다.

“자, 받아요.”

시동이 걸린 차가 다시 빠르게 도로를 달렸다.

“이게 뭐야.”

봉지 안의 그가 사 온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칫솔. 커피. 가글.

“그거 없다고 키스 못 한다, 이런 말 이제 절대 못 해요.”

“참나…….”

준비성이 철저하기도 하시지.

이제 뒤로 도망갈 생각도 안 했지만 도망갈 구멍을 찾지도 못할 게 뻔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그의 공간.

살며시 열린 문틈으로 그날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던 침대가 슬그머니 보여 시선을 내렸다.


“자, 받아요.”

그가 다가와 손에 칫솔을 꼭 쥐여 주었다.

“커피 마시고 양치할 거면 빨리 원샷하시고요.”

“큭. 너 뭐야, 진짜.”

“저 지금 되게 초조하고 간절하고 설레고 그러니까 빨리 좀…….”

더 마주 보고 있다가는 당장에라도 덮쳐 올 거 같은 석한의 모습에 도망치듯 욕실을 향했다.

구석구석 상쾌하게 양치를 하던 지안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아. 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야.”

키스하겠다고 칫솔까지 사 오는 애나, 그렇다고 열심히 양치하는 자신이나.

그저 상황이 재밌어 웃음이 나왔다.

양치를 마치고 거울 속의 자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제 과제를 한다고 조금 늦게 자서인지 꽤나 피곤해 보였다.

이런 모습도 예쁘다고 좋다고 하는 석한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엄마야!”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허리를 감아 당기는 감촉에 지안의 몸이 휘청였다.

“이제 됐어요?”

“……뭐가?”

“뭐긴요. 키스할 준비 됐냐는 거죠.”

지안이 작고 예쁜 입술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궁금하면 네가 확인해 봐.”

작게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에 석한의 심장이 쿵 소리와 함께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지. 엄청 귀여운데, 엄청 섹시하다.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흠흠 소리와 함께 표정을 가다듬었다.

“선배가 해요.”

“……응?”

“내가 받기로 한 거잖아요. 그러니 선배가 해 봐요.”

사실 무슨 얘기 하다가 키스하기로 했는지 이미 잊은 상태였다.


가만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지안이 자신을 좀 더 품으로 끌어안는 힘에 천천히 턱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 차오른 눈동자.

짙은 빛을 머금은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오롯이 자신만이 담겨 있었다.

가슴이 울렁였다.

파도가 넘실거리듯 가슴속에 간질간질 기분 좋은 느낌이 파고들어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가느다란 그녀의 팔이 천천히 그의 목을 감싸 안아 당기자 그의 숨이 순간 멈추는 것이 느껴져 지안의


입술이 작게 밀려 올라갔다.

“왜 긴장해?”

“선배가 앞에서 그런 표정 짓고 있는데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

그의 입술 사이로 미세하게 갈라진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빨리…….”

다시 한번 흘러나온 탁한 목소리가 빠르게 입술을 덮어 오는 지안의 입술 속으로 고스란히 빨려 들어갔다.

작고 도톰한 입술이 느릿하게 간지럽히듯 석한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오히려 긴장한 쪽은 지안이었을지 모른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맞닿은 입술이지만 닿는 순간 온몸을 타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짜릿함이 퍼졌다.

그도 다르지 않은 듯 석한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혀를 살며시 밀어 넣자 델 듯 뜨거운 숨결이 탁 하고 터지며 그가


뜨거운 혀끝을 그녀의 입 안으로 강하게 밀어 넣었다.

“흐읏…….”

허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 아래로 지안의 블라우스가 가득 구겨졌다.

터져 나오는 욕정이 가득 담긴 손끝이 그녀의 살결 위로 손자국을 남길 듯 꽉 잡아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파고든 혀가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허덕이며 입 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엉기고 풀리는 혀끝이 얼얼해질 정도로 빨아 당기다가 야릇한 감각에 숨이 차오르면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차마 삼키지 못한 뒤섞인 타액이 잠시 만들어진 틈 사이로 흘러내렸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유는 두 사람에게 없었다.

“하아…….”

“……선배.”

한동안 맞물려 허겁지겁 서로를 탐하던 입술이 잠시 떨어짐과 동시에 석한이 지안의 몸을 번쩍 들었다.
놀라기는커녕 자신을 번쩍 들어 안은 그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강하게 감고 잠시 떨어진 그의 입술을 애가
타는 듯 다시 베어 물었다.

하아, 미치겠다.

선배, 이러면 내가 힘들어.

입술이 간간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에 그가 앓는 듯 속삭였지만 지안은 멈추지 않았다.

각오했다기보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간절히 원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몸이 이토록 뜨겁게 달아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이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았다.

올바른 정신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짙고 농염한 키스는 이어졌다.

어느새 눈을 떴을 때 등에서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자신의 몸 위로 무게를 가득 실은 석한이 욕망이


차오른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읏!”

입술이 하얀 목덜미 위로 축축한 감촉을 남기며 내려앉았다.

흐트러져 스커트 위로 밀려올라 가 버린 블라우스 틈새로 뜨거운 온기를 머금은 손끝이 파고들었다.

“하아, 하아……. 서, 석한아…….”

혀끝이 목덜미를 핥아 올리고 입술로 빨아 당기기를 반복함과 동시에 거친 숨을 내쉬느라 들썩이는 그녀의
가슴을 손바닥 안으로 가득 넣고 움켜잡았다.

손 안에 말랑말랑한 느낌이 차오르자 이미 잔뜩 솟은 물건이 점점 더 크기를 키우는 것이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흐응.”

콧소리가 가득 담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요망스러운 소리를 내뱉은 지안이 잠시 놀라 눈을 떴지만 당황함도 잠시, 또다시 요망한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브래지어 아래를 파고든 손끝이 점점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유두 끝을 살살 비비기 시작하자
갑작스럽게 치고 올라오는 야한 감각에 지안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런 느낌이구나.

누군가의 손에 흥분한다는 것이.

그날은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느끼지 못한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으응…… 흐읏…….”

“하아, 선배…… 좋아요?”

거칠어진 숨결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어찌할 줄 몰라 허공으로 뻗은 손으로 그의 몸을 잡고 하염없이 신음을 흘렸다.

살살 문지르는 작은 감각에 대책 없이 자신이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속옷까지 적시고 남을 만큼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는 것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신기함과 두려움.

두 감정이 동시에 지안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흐으윽! 흑!”

단숨에 풀어 헤친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뽀얀 가슴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마 벗길 새도 없어 밀어 올린 브래지어 아래 드러난 핑크빛 유실이 그의 붉은 혀끝에 농락당하듯


어루만져졌다.

“서, 석한아. 제발…… 흐흑…….”

멈추지 말아 달라는 건지 멈추어 달라는 건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흐느끼듯 그를 부르며 무언가를 애원했다.

츄르릅, 하는 질척한 소리가 신음과 함께 공기 중에 엉겼다.

석한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생크림같이 부드러운 살결에 정신이 획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혀끝에 닿는 도도록한 돌기를 아무리 가득 빨아 당기고 머금어도 이미 끝까지 차오른 욕정을 풀어내기에
너무나도 역부족이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가득 넘쳐났다.

그날처럼 품 안의 그녀가 혹시나 놀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날과 다르게 적극적인 그녀에게 좀 더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

이대로라면 이성적인 사고가 금세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그녀를 탐하기
급급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흥분에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여린 살점과 맞닿자
그녀가 비틀리며 꿈틀거렸다.

정신없이 탐하던 젖가슴을 놓아주고 그녀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입술이 닿자 다시 활짝 열리는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리를 타고 내려간 그의 손이 위로 밀려 올라간 스커트 사이를 파고들어 적당하게 살집이 잡힌 그녀의


허벅지를 유려하게 쓰다듬었다.

“으읏…… 흣…….”

황홀한 감각이 밀려와 그녀가 눈을 꼭 감았다.

손 안에 적당한 감도와 탄력이 느껴지는 허벅지를 살살 쓸어 대다가 점점 안으로 깊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살짝 뜬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하얀 얼굴 위로 가득 붉어진 탐스러운 두 볼.

거친 숨을 내쉬며 밀려오는 감각을 견디느라 가끔 찌푸려지는 눈매와 강렬한 키스로 도톰하게 부어오른
붉고 매혹적인 입술. 자신의 손길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며,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하고 요염한 자태로
자신의 아래에서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지안이 밀려오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괜찮을까.

그동안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자극에 넘실거리는 자신의 몸이 조금씩


두려워졌지만, 스스로 그것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꼭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 왔다.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은밀한 곳으로 밀려들어 오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순간 작은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열기가 가득 몰려 상기된 얼굴. 거친 숨을 삼키며 욕망에 물든 눈동자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을 머금고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선배…….”

“……응.”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걸까.

이대로 계속 가도? 아니면 지금 미치게 치고 올라오는 또렷한 감각을 견디기 힘들지 않냐고?

무엇을 묻는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촉촉하고 맑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석한의 숨이 순간 멈추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 속을 파고든 가녀린 손이 얼굴을 바짝 당겼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진한 향기가


맞닿은 입술을 타고 흘러들었다.

머릿속에 가득 담겨 있던 생각이 저 멀리 어디론가 던져져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성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그동안 무언가로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욕정이 단숨에 쏟아져 나온 순간이었다.

“흐으읏…….”

쏟아지는 신음에도 망설임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속옷을 벌리고 단숨에 손가락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밀려온 감각을 견디기라도 하듯 강하게 석한의 입술을 물어 왔다.

따끔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물어 오는 그녀를 다독이듯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와 강한 조임에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강하게 밀려들어 간 손가락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녀의 안을 정복하듯 파고들었다.

“하아, 흣…… 흐읏.”

작은 움직임에도 흐느끼며 흐트러지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감각이 온몸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끝 하나로 점점 파고들며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라 감당되지 않는 감정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선배…… 하아, 너무 예뻐요.”

“흐으윽. 아…….”

가득 밀어 넣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다가 다시 깊숙이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오랜 시간 계속될수록 눈꺼풀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몽롱한 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하아…… 그, 그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감각이 맞는 걸까.

아랫배를 타고 전신으로 휘감아 오르는 짜릿한 감각에 온몸이 비틀리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직 삽입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흐트러져도 되는 걸까.

차마 견디지 못하고 그의 입술을 찾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정신없이 휘저어 대는 그의 손가락 감각에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기를 반복했다.

“하아…….”

한숨과 함께 긴 탄식이 석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서 콘돔을 살까 고민을 잠시 했지만 사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면 왠지 그녀가 자신에게서 더욱 달아날 것만 같아서 욕심을 채우지 않기로 했다.

“제길…….”

살 걸 그랬다.

알 수 없는 욕설을 내뱉는 그의 행동에 꼭 감겼던 그녀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내가 미쳤지. 속으로 말을 삼키며 여전히 그녀의 안을 휘젓던 손가락 움직임을 천천히 멈추었다.

하아- 하아- 움직임이 멈추자 참고 있었던 건지 그녀가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선배.”

그의 잘 다듬어진 상체가 그녀의 위로 순식간에 떨어졌다.

순간 지안의 몸이 놀라 움찔거렸다.

커다란 상체가 자신의 몸을 누르며 거친 숨과 함께 들썩거렸다.

“흐읏.”

자신의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가자 허전함과 함께 순간 짜릿함이 느껴졌다. 지안은


신음을 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축축한 손가락이 야릇하게 허벅지를 쓸며 내려와 와락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아쉬움과 함께 인내심이 가득 담긴 손끝이 강하게 허벅지를 눌러 왔다.

“아, 아파…….”

“아! 미…… 미안해요.”

그가 잠시 목덜미에 묻었던 얼굴을 떼어 내고 열기가 여전히 담긴 얼굴로 말을 뱉었다.

여전히 그의 욕망을 가득 담은 물건이 단단하게 그녀의 몸을 찔러 왔다.

지안이 살짝 고민에 빠졌다.

왜 멈추냐고 물어봐야 할까.

그렇다고 더 하라 그럴 수도 없고.

살며시 느껴지는 아쉬움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가 주는 이 모든 것들을 자신도 느끼고 즐기고 있음을
인정했다.

“선배가 나쁜 걸까. 아니면 내가 나쁜 걸까…….”

이해하지 못할 말이 목덜미에 묻힌 그의 입술 사이로 뭉개지듯 흘러나왔다.

“이럴 거면 살걸. 내가 정말 미쳤지…….”

“……응?”

번쩍 그의 고개가 들려 지안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 올까요?”

“……응? 뭘?”

“콘돔! 아까 안 샀다고요!”

그놈의 가글이랑 칫솔이 뭐라고 그걸 안 샀을까.

짜증 나는 새끼.
혼자 속으로 자신을 향해 욕을 가득 던졌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던 지안이 흡 소리와 함께 입술을 꾹 닫았다.

예민해진 석한의 눈이 지안을 향했다.

무언가 되게 억울해 보이는 모습에 웃음이 밀려 올라왔다.

참는 거로 치면 남자가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파고들지 않고 욕을 내뱉으면서 참는 그의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신기해 보였다.

그동안 시도해도 되지 않았던 남자들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저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 미안해요. 키스만 한다 해 놓고.”

그가 다시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사과했다.

목덜미에 번지는 따스한 입김이 간지러워 살며시 몸을 비틀었다.

“하아, 자극하지 마요. 선배.”

나 죽는 꼴 보려는 거예요? 모든 불만이 응집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한참 맑게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지켜보던 석한이 미간을 가득 구겼다.

“아우! 진짜.”

“엄마야!”

눈앞의 세상이 뒤집히고 어느새 그의 단단한 가슴 위에 자리 잡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선배 무거울까 봐.”

말을 뱉고 석한이 침대 위로 털썩 머리를 기대었다.

어째 몇 분 만에 훅 늙어 버린 기분이 드는 거지.

남의 속도 모르고 여전히 성나 있는 녀석에 겨우 가다듬던 짜증이 다시 올라왔다.

그녀가 슬그머니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자 석한이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 가요!”

순간 손목을 잡아당기는 힘에 그의 위로 지안이 풀썩이며 다시 자리 잡았다.

“아니. 난 너…… 그러니까, 힘든 거…… 같아서.”

슬쩍 시선을 자신의 불룩 튀어나온 곳으로 내렸다가 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나한테서 도망간다고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거 같아요?”


“……그래도.”

떨어져 있는 게 낫지 않겠니? 지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리 와요.”

그가 팔을 쭉 뻗고 침대 위를 반대 손으로 툭툭 내리쳤다.

살짝 몸을 기울이는 그의 행동에 그녀의 몸이 침대 위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강하게 감아 오는 팔에


끌려 그의 품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따스하게 번져 오는 온기에 말도 안 되게 떨려 왔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는 듯 느껴졌다.

오히려 가슴 위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괜찮아?”

묻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역시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괜찮으면요.”

“……응?”

“어떻게 해 줄 건데요?”

“아니. 그냥…… 뭐.”

“왜요. 나 죽을까 봐 걱정돼요?”

이 자식이 진짜. 그거 못 해서 죽었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어 봤거든?

“안 죽어요. 걱정 마요.”

큭큭 웃는 그의 모습에 그저 말없이 품에 안겨 작게 숨만 내쉬었다.

“선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응.”

“처음이에요?”

“…….”

조심스러운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지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작은 몸을 끌어안은 그의 팔에서 조금 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자신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어 대던 그녀의 모습이 꽤
신경 쓰였다.

혹여나 그녀가 처음이라면 분위기에 이끌려 끌려가듯 그렇게 그녀를 안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

“나 괜찮으니까. 천천히. 선배 마음이 완전히 나한테 왔을 때. 그때 해요.”

“…….”

“기다리다 혹시 내가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퍽 하고 가슴을 때리는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겹쳐 온 그의 손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열흘이면 되려나?”

길다. 길어.

천천히 하라더니 겨우 열흘이냐.

코웃음을 내쉬며 입술을 밀어 올렸다.

Rrrrr Rrrrrr.

자신의 벨소리가 들려 지안이 그의 품에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깐만.”

“받지 마요.”

“아우, 잠깐만.”

“에이. 놓기 싫은데.”

그를 겨우 떼어 내고 거실로 나갔다.

“네. 여보세요?”

허리까지 밀려 올라간 스커트를 한 손으로 내리며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를 따라 곧장 거실로 나온 석한이 뒤에서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움찔거리며 살짝 뒤를 돌아본 그녀가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응. 엄마. 왜요.”

엄마 소리에 잠시 블라우스를 파고들려던 석한의 손이 멈추었다.

“지금? 어? 어? 아. 나 지금 가는 길이지. 응. 알겠어요.”

듣지 않아도 예측이 되는 통화 내용.

석한이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여전히 통화하던 그녀가 눈동자만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가슴팍에 다가와 흐트러진 블라우스를 추스르며 단추를 하나씩 잠그고 있었다.
“네. 알겠어요.”

통화가 끝나고,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단추를 여전히 잠그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 됐다. 가야 하죠?”

“응.”

“아쉽죠?”

“으…… 뭐?”

하마터면 응이라고 답할 뻔했다.

“나도 아쉬워요. 하긴 어차피 자고 갈 것도 아니었으니까.”

은근 떠보는 듯한 뻔한 속내에 지안이 그저 미소 지었다.

“어. 어차피 잘 것도 아니었어.”

“알아요. 그러니 그렇게 막 정확하게 짚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 정확하게 짚어야지, 그런 건.”

“왜요?”

“그거야…….”

“아, 듣기 싫다. 그냥 가요. 알겠죠?”

가라면서 그가 지안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남자의 몸이 다시 온몸에 맞닿았다.

틈 없이 맞닿아 온몸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에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크게 들이마신 숨에 지안의 가슴이 들썩이자 그가 천천히 팔을 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

“여기까지만 욕심낼게요.”

적게 낸 건 아닌 거 같은데.

아까 그래도 어느 정도 하지…… 않았니?

“그…… 그래. 나 갈게. 엄마가 집에서 기다리신대.”

“어머님 만나러 같이 갈까요?”

“아니!”

정색하는 모습에 픽 하고 그가 웃었다.


“왜요. 나 창피해요? 나 어디 가서 그런 말 들어 본 적 없는데.”

네. 네. 없으시겠죠.

“아니야. 괜히 엄마 걱정하실까 봐.”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야!”

“미안하지만 그것까진 양보 못 해요. 가요.”

성큼 앞장서는 그를 따라 집을 나섰다.

혹시나 흐트러진 모습이 없는지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는 사이 그의 손이 다시 손 안에 파고들었다.

어색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설렘도 동시에.

아마도 선을 긋지 않았다면 조금 더 이 상황에 행복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안이 자신을 향해 빙긋 웃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아직 5 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봄 향기가 많이 사라진 바람이 불어왔다.

캠퍼스 구석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으며 하은을 기다리던 지안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예쁘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안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재빠르게 시선을 뒤로 돌리자 바람에 짧은 머리를 흩날리며 해사하게 웃고 있는 석한이 서 있었다.

마주친 미소가 또렷하게 눈과 머리에 자리 잡아 잠시 멍한 시선을 흘리던 지안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야. 너. 지금. 어?”

“학교에서 알은척하지 말라고요? 알아요. 근데 마침 아무도 없는데. 보고 그냥은 못 지나갈 예쁜 사람이


앉아 있지 뭐예요?”

말이라도 못하면.

성큼 다가온 그가 지안의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무슨 책이에요?”

옆으로 가깝게 다가와 앉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요. 잘생겼어요?”

“그래.”

“어? 웬일이야. 막 저리 가라고 안 하고.”

“알면 좀 갈래?”

여유로운 눈빛으로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빙긋 웃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의 손가락이 지안의 입술 위를 스쳐 지났다.

“어…….”

“머리카락.”

그가 빙긋 웃었다.

“내 입술 말고 그런 거 먹지 마요.”

“이게 진짜.”

순간 잔뜩 붉어진 얼굴로 괜히 주변을 살폈다.

“언제 끝나요?”

그가 부드럽게 물어 왔다.

“오늘 조금 늦어. 팀별 과제 있어서 모이기로 했거든.”

“기다릴게요.”

“아니야. 먼저 가. 한잔할지도 몰라.”

“그럼 집에서 기다릴까요?”

“야, 됐거든.”

역시나 예상한 반응에 석한이 큭큭 웃었다.

“나도 오늘 조금 늦어요. 기다릴 테니 이따가 봐요.”

“……그래.”

그녀의 대답에 환한 웃음이 눈앞에 흩어졌다.

“야, 오석한.”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흘깃 지안을 바라본 석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배. 나 갈게요.”

“응. 그래.”

석한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어느새 가깝게 다가온 여학생을 향해 걸어갔다.

‘안희수.’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그녀가 웃음을 지우고 흘깃 지안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다시금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석한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가자. 뭐 먹을까?”

“일단 가.”

다시 그녀의 시선이 잠시 지안에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나부끼는 바람에 작은 먼지가 눈 안에 들어간 것인지 따끔거리는 감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자 뿌연 시선 안에 멀어져 가는 석한과 희수의 모습이 보였다.

떨어진 거리 덕분에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저 밝고 화사한 분위기였다.

화창한 날씨, 싱그러운 캠퍼스와 참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라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자 눈이 아닌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고개를 내려서 읽고 있던 책 위로 시선을 옮겼다.

탁.

결국, 집중을 하지 못하고 펼쳐진 책을 덮었다.

□ ◆ □ 이아

-선배 어디예요?

“응. 이제 거의 끝나 가.”

-나 지하철역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래.”
전화를 끊자 하은이 지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같이 안 가? 한잔하자.”

“약속 있어서.”

“누구. 우리 복덩이?”

“야.”

“크크. 그럼 가셔야지. 난 기다리는 복덩이도 없으니 한잔하고 가련다. 빨리 가.”

터덜터덜 오늘따라 무거움이 느껴지는 발걸음으로 그가 기다리는 장소를 향했다.

하염없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걷던 지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바닥에 낯익은 신발이 보이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이쪽에서 올 거 같아서요.”

지안이 괜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작게 웃는 소리와 함께 그가 물어 왔다.

“그렇게 신경 쓰여요?”

“…….”

“누가 보면 우리가 불륜인 줄 알겠네.”

“아니야. 그런 거…….”

“뭐 난 상관없어요. 선배가 나 피하지 않고 이렇게 만나러 오기만 해도 좋으니.”

덥석 손을 잡고 역시나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강하게 끼어 왔다.

“영화 뭐 볼래요?”

“아, 맞다.”

“아직 안 정했어요?”

“응.”

뭐야. 작게 투덜거리는 석한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영화 보자며 무슨 영화 볼지 생각해 놓으라던 석한의 문자가 떠올랐다.

“나는 계속 무슨 영화 봐야 하나, 수업 중에 그 생각만 했는데.”

“너 보고 싶은 거 보자.”
“나 막 되게 야한 거 볼 건데.”

“그래.”

앞으로 나아가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지안을 향해 몸을 돌린 석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여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오늘 조금 이상한데…….”

“……응?”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분명 아무 일도 없는 하루였다.

그저 그와 다정해 보이는 안희수의 모습을 보았을 뿐.

사귀고 헤어졌다는 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다정한지 궁금하긴 했지만, 괜히 듣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물어볼까 말까 마음속으로 수십 번은 생각했던 거 같다.

팀 모임 때도 집중을 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생각에 머릿속이 온통 두 사람으로 가득 찼었다.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요? 영화 다음에 볼까요?”

“그냥 오늘 보자.”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다정하게 이마를 짚어 보고, 피곤하면 집으로 가자고 이야기하는 석한의


말에도 그저 괜찮다고 답했다.

다시 손을 꼭 잡고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팀 과제는 다 했어요?”

“아니. 늘 그렇지 뭐. 그냥 한 명이 몰아서 하기로 했어. 대체 왜 모이는 건지…….”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선배는 안 가도 괜찮아요?”

“응. 괜찮아.”

“역시 내가 더 중요한 거구나.”

“넌 뭐…… 했어?”

그의 말에 평소 같으면 피식 웃을 타이밍이었지만 지안은 웃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 동기들이랑 만나서 그냥 의미 없는 수다 떨다가 왔어요.”

“동기, 누구?”
도로 어딘가를 향했던 석한의 시선이 빠르게 지안에게로 닿았다.

해석하기 모호한 의미가 담긴 눈동자와 마주치자 지안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니다. 얘기해도 내가 모르는 애들이겠다.”

“그렇긴 한데. 궁금하면 얘기해 줄게요.”

“아니야. 괜찮아.”

“궁금한 거 아니었어요?”

지안이 피식 웃었다.

“아니라고. 궁금한 거 아니야. 됐어. 영화 뭐 보지?”

화제를 돌리는 지안의 위로 한참 동안 같은 눈빛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나한테 궁금한 게 그렇게 없어요?”

막 아무거나 물어봐도 되는데. 속삭이는 그의 말에 핸드폰 영화관 어플만 그저 눈에 담았다.

“이거 보자. 재미있겠다.”

가장 인기가 많은 최신 영화를 대충 이야기하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재미있었어요?”

“응.”

영화가 끝나고 자신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가깝게 다가온 석한이 물었다.

사실 무슨 내용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심히 집중하려고 했지만, 도통 정신이 산만해서 집중되지 않아 조금씩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분명 이런 현상이 낮에 있었던 두 사람의 만남 이후임을 알지만, 그저 훌훌 털어 버리면 될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제어가 되지 않고 자꾸만 신경을 쓰고 마는 자신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표정은 재미없었다는 표정인데.”

“아니야. 재미있었어. 너는?”

“저도요.”

“다행이다. 가자.”
이미 11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많이 늦었네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야. 괜찮아.”

“밤에 혼자 보내는 거 싫어요.”

“알겠어.”

영화가 끝나고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과 함께 승강기에 올라탔다.

“어어…….”

승강기에 올라타며 무자비하게 밀어 대는 사람들 덕에 두 사람의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가슴팍에 묻힌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만족스럽게 입술을 끌어 올린 석한이 한쪽 팔로 부드럽게 지안의 허리를 감아 자신에게로 더욱 바짝


안겼다.

“흡…….”

순간 숨을 삼켰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체향이 번지고, 맞닿은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상하리만큼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더욱더 자신에게로 당겨 안는 행동에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지안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이마에 내려앉은 촉촉하고 따스한 느낌.

짧게 여러 번 소리 없이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포근함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그의 손바닥이 톡톡 괜찮다는 듯 지안의 등을 두드렸다.

마주 닿은 가슴 위로 누구의 것인지 가늠하기 힘든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단지 그 짧은 순간에 말도 안 되는 편안함과 안도감이 느껴졌다.

잠시 마주친 그의 눈빛에서 번지는 감정이 파고들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마치 가득 사랑받고 있는 느낌.

하루 종일 자신을 불안하고 이상하게 만들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 ◆ □
[오늘 우리 집에 갈래요?]

리포트 제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도서관에서 정신없이 자료를 찾던 지안이 석한의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답할까 고민하는 사이.

[몸에 손도 안 댈게요.]

진짜, 어이가 없다.

픽 웃으며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렸다.

[나 오늘 리포트 써야 해. 밤새야 할 듯.]

[우리 집에 와서 써요. 나도 오늘 리포트 써야 하는데. 어때요?]

둘 다 학점 F 맞고 죽자는 거냐?

[아니. 괜찮아. 넣어 둬.]

[제발. 선배. 응?]

분명 문자인데 음성 지원은 물론이고 화상 지원까지 되는 듯한 느낌은 왜일까.

가도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이 되긴 했지만, 지난번 뜨겁게 달아올랐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재빨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번에는 어쩌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나 오늘 이거 다 못 하면 정말 망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가볍게 문자를 보내고 커피를 사 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 카페를 향하던 지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반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걸어오던 희수의 걸음도 멈추었다.

공중에 마주친 두 시선.

지안이 시선을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안 선배. 맞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빙긋 웃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안희수예요.”

가깝게 다가온 희수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얘가 나랑 할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다짜고짜 알은척하는 것에 기분이 별로이기도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말 걸어서 놀라셨죠?”

마주 앉은 그녀가 상냥한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 할 말이 뭐예요? 나랑 할 이야기가 있나요?”

“말 낮추세요. 저 석한이랑 동갑이에요.”

“그냥 이게 편해요.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무슨 할 말이죠?”

넌 모르겠지만, 난 너랑 마주하기 불편해.

마음을 가득 담은 차가운 말투가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잠시 왜 이렇게 경계를 하나 싶다가도, 이유 없는 경계가 그녀에게서 먼저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기분


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없는 친절함 내려놓고 너도 하고 싶은 말해.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소는 짓고 있지만, 여유와 친절함이 많이 사라진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선배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답할 수 있는 거면 답할게요.”

잠시 호흡을 끊고 가만히 지안을 바라보던 희수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선배. 오석한이랑 무슨 관계예요?”

“…….”

직설적으로 떨어지는 눈빛과 직설적인 그녀의 질문에 순간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이런 전개일 거라는
예상이 아주 딱 맞아떨어져 버렸다.

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며 지안을 이리저리 살피던 희수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사귀는 거 맞아요?”

“…….”

대답 없이 눈꺼풀만 천천히 내렸다 올리는 지안의 모습에 희수의 눈매가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작게 숨을 내쉰 지안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저기요.”

“네.”
“그쪽, 석한이랑 친하지 않아요?”

“네. 친해요.”

1 초도 되지 않아 망설임 없이 그녀가 답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한 목소리로.

꽤 거슬리긴 했지만 반응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석한이한테 물어봐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

“…….”

“뭐가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친한 사람 두고 다른 사람한테 떠보듯 이렇게 물어보는 거 예의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이 상황 나만 이상한 건가요?”

이번에는 희수가 답하지 않고 뚫어질 듯 지안을 바라보았다.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는 듯 입술 끝을 밀어 올리고는 있었지만, 심기가 불편함이 느껴지는 희수의 표정.

더 마주 앉아 있어 봐야 뭐하리.

“할 말 더 없으면 저는 이만 일어날게요.”

“잤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지안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석한이랑 잤냐고요.”

지안이 고개를 돌려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게 미쳤나. 이렇게 사람 많은 장소에서.

지안이 눈매를 가득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머금었던 친절함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냉랭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지안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너무 오지랖 넓은 거 같은데.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은 안 하나 봐?”

예의라고는 국에 말아 먹고 온 듯한 그녀의 태도에 존대의 가치도 느끼지 못해 반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가 다시 경우 없는 말을 던졌다.

“역시 아직 안 잔 거 맞죠?”

역시. 아직. 무슨 뜻이지?

그녀의 말에 담긴 단어들의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잠시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던 지안이 미간을 가득 구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은데……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거지? 남의 연애 신경 쓸 만큼 시간이 많은가


봐. 근데 적당히 할래? 난 그런 거 꽤 불쾌한데.”

희수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순간 밀려오는 불쾌함이 온몸을 감아 왔다.

“됐어요. 그럼 언제 헤어질지 아직 모르는 거네.”

“뭐라는 거야. 대체.”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그게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하나 말씀드리자면, 나중에 상처 입지 말고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건 내 사정이고.”

“알아요. 선배 사정인 거. 그래도 알고 있어야 덜 힘들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지랄도 풍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잠시 흥분 수치가 치솟았던 지안이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분명히 이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오석한 좋아해?”

“네.”

역시. 그러니 찾아와서 이러지.

한심한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는 지안의 눈 안에 담겼다.

하지만 그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가 오히려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석한이도 마찬가지예요. 걔가 원래 조금 그래요. 지금 나 질투하게 하려고, 나 보라고 대놓고 선배한테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만 물러나. 적대감을 담은 눈빛이 지안을 향했다.

“혜인 언니한테도 갔던 모양인데……. 착각하지 말아요. 걔 거기 데려간 거 선배가 처음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던 지안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차피 오석한 나 못 밀어내요. 그러니까 더 상처 입기 전에 포기해요.”

“…….”

“그리고 우리 같이 미국 갈 거예요. 다 얘기 끝냈던 거고. 어차피 지금 오석한이랑 계속 만나더라도 그때


되면 끝나겠죠. 그러니 선배가 알아서 적당히 물러나요. 내가 충고해 주는 거예요.”

가느다란 한숨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짧은 시간 안에 정신없이 밀려들어 온 이야기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잠시 찌푸렸던 표정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들어도 내가 석한이한테 직접 들어. 더 이상의 오지랖은 나도 못 참아. 나 먼저 일어난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빨랐던 걸음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느려졌다.

기분이 더러웠다.

딱 그거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하아…….”

자리로 다시 돌아와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정말 생각 없어요? 정말 과제만 한다니까요. 마음 바뀌면 우리 집으로 와요.]

남의 속도 모르고 해맑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고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몇 시간이 지났다.

리포트는커녕 결국 아무것도 손대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오석한이랑 잤어요?’

‘역시 아직 안 잔 거 맞죠?’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고 나면 헤어진다는 소리인가?

지금 나랑 한 번 자려고 쟤가 저러는 거야?

한 달이라는 시간.

그게 그거였어?

“아, 짜증 나…….”

조용한 도서관 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많은 시선이 그녀를 향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지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이렇게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차라리 직접 물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말들과 행동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사실이기를, 오늘 그녀에게서 들은
말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조금씩 마음을 열어 보려고 노력했던 자신이 비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띠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살며시 긴장감이 밀려왔다.

“아니야. 긴장할 게 아니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지.”

입술을 꾹 다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탁-

지안의 손에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빠르게 추락하며 큰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눈앞에 그와 그녀가 있었다.

그의 집 앞에 자신을 꼭 끌어안았던 넓은 가슴으로 자신이 아닌 그녀를 끌어안은 그가 보였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애써 가다듬으며 눌러온 감정이 폭발하듯 치솟아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걷잡을 수 없이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했던 시간이 더없이 허무하게 느껴져 가슴이 울컥거렸다.

“어! 선배!”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야! 안희수! 비켜 봐!”

지안이 재빨리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이미 내려가 버린 엘리베이터.

지안이 가방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선배!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어느새 따라온 그가 지안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 몸을 당겼다.

“놔!”

세차게 휘두른 손목이 강하게 잡은 그의 손에서 빠지지 못했다.

“잠깐만요! 어디 가요!”

“너 같으면 지금 그냥 가지 거기 더 있겠어? 가서 하던 거 해. 그리고 이거 안 놔?!”

“내 말 듣고 가요!”
“무슨 말? 지금 내 눈앞에서 여전히 마음 있다는 여자랑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내가 뭘 더 들어야
하는데?”

“무슨 말이에요. 대체!”

“너 내가 우습냐?”

“……네?”

“한 번 자 보고 싶어서 나한테 접근한 거니?”

“선배 지금 뭐라는 거예요! 왜 갑자기 이러는 거예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배신감에 밀려 올라오는 화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 요즘 세상에 하룻밤 자는 거, 원나잇! 그거 쉽지. 그래, 아주 쉽지! 모르는 사람이랑도 자는데!
너 같은 애한테는 아주 쉽겠지!”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처음 느낀 감각에 두려움과 설렘이 밀려와 오랫동안 고민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점점 더 비참한
기분이 차올랐다.

툭툭 자상하게 던지던 말과 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는 듯 바라봐주던 눈빛. 설렘에 두근거렸던 자신의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 주지 말지 그랬니. 따져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덜 비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나간 년. 누굴 탓해.

그러니 누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래. 계속 무섭다고 도망갔어야지.

“너도 똑같아. 다른 남자들이랑. 내가 원할 때 해? 그리고 나랑 자고 나면 쟤한테 돌아가려고 했니? 한


번 놀아 주고?”

“선배! 그만해요!”

석한의 두 손이 그녀의 어깨를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잡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해요! 내 얘기 좀 들어 봐요.”

“그래. 어디 들어 보자. 너 미국 간다며. 그리고 나만 보여 줬다는 듯 네 누나 보여 주더니 쟤도 알더라.


누나 이름까지 아주 똑바로.”

일렁거리는 석한의 눈동자가 지안의 얼굴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입술을 꾹 다물고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배. 그게 우리 관계랑…… 상관있어요?”

귓속으로 파고든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착각이었음이 확실해지는 순간.


차마 어떤 말을 꺼내야 하나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더 벌리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상관있냐고요.”

지안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렸다.

“너…… 진짜. 쓰레기구나.”

“……네? 선배!”

“됐어.”

지안이 고개를 다시 들고 감추고 싶었던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망만이 남아 있는 그녀의 눈동자.

석한의 얼굴이 당혹감에 점점 붉어졌다.

“선배! 그런 뜻이 아니에요! 잠깐만!”

“놔! 이제 끝이야!”

“선배!”

애써 돌린 어깨가 다시 그의 손에 의해 돌려졌다.

“내 말 좀 들어 봐요!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너랑 나 관계는 따로고, 쟤랑은 또 따로야?!”

“아니요! 내가 알고 싶은 게 그거예요!”

“…….”

“신경 쓰이기는 하는 거 맞아요?”

“뭐?”

“내가 누굴 만나고, 누구랑 하루를 보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이는 거 맞냐고요!”

가슴에 담고 있던 응어리를 뱉어 내듯 그가 단숨에 말을 쏟아 냈다.

“선배는 상관없었잖아요!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마음인지! 그렇게 표현하고 그렇게 말해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요!”

“야…… 오석한.”

“말해 봐요! 네? 말해 보라고요!”

“뭘?”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 맞냐고요! 내가 선배 주변이 신경 쓰여 미치겠는 것처럼. 선배는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냐고요! 네?”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가 말한 대로, 그를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까.

온통 뒤죽박죽 섞여 버린 머릿속.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성큼 한 걸음 자신에게 다가온 석한의 행동에 지안의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두려운 무언가가 다가온 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놔. 아파.”

“왜 자꾸 도망가요?”

“놓으라고.”

“내가 그렇게 다가가는데. 왜 선배는 자꾸 도망칠 생각만 하냐고요.”

툭.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손 위로 떨어졌다.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사실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이 난잡스러운 상황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짜증 난다는 생각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선배…… 왜…….”

그녀의 눈물을 마주한 석한의 눈동자가 그 어떤 순간보다 심하게 일렁거렸다.

어깨를 꼭 붙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가 얼굴을 향해 다가왔지만, 다시 한 발짝 물러나는 그녀의 행동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멈춰 섰다.

“손대지 마.”

“…….”

“내 몸에 손대지 마.”

하아- 따스하게 자신을 끌어안았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재빠르게 훔치고 입술을 꾹 눌러 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약속했지?”
“…….”

“한 달이 지나도 내가 싫다고 하면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선배!”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석한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딱 한 달이네. 잘됐다.”

“…….”

“그만하자.”

“싫어요.”

“뭐가 진심이고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난 복잡하고 지저분한 거 딱 싫어.”

“선배. 그러지 말아요.”

그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지만 지안은 다시 달아났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다.”

“…….”

“나 상관없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네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내든. 너처럼 그러지
않았어. 이걸로 대답 됐지? 서로 상처 주지 말자. 그러니 이제 그만 끝내자.”

모진 말을 표정의 변화 없이 던지는 그녀의 얼굴 위로 멍한 석한의 눈빛이 닿았다.

거짓말.

작게 속삭이는 그의 말을 외면했다.

“야! 오석한!”

뒤에서 들려오는 희수의 목소리에 지안이 피식 웃어 버렸다.

“가서 하던 거나 계속해.”

“선배!”

몸을 돌리는 자신을 잡으려고 다가오는 손을 냉정하게 쳐 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온기라고는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지안의 눈빛에 석한의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경고하는데 다시는 손대지 마. 그리고 나타나지도 마. 이제 너랑 더는 볼일 없어.”

재빨리 몸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야, 오석한! 지금 너 나 두고 저 여자한테 간 거야?”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팔목을 잡는 희수의 손을 석한이 강하게 쳐 냈다.

“야! 너……!”
“닥쳐.”

“…….”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손대지 마.’

원망도 아닌 마치 증오하는 듯한 눈빛을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에 뾰족한 무언가가 심장을
관통한 것같이 아파져 왔다.

“너 뭐라고 했어…….”

지독하게 짙고 낮은 목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안희수. 너 선배한테 뭐라고 지껄였냐고!”

순식간에 쩌렁쩌렁 울리는 석한의 목소리에 희수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사실대로 말했어!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리고 너 곧 미국 갈 거라고! 그게 뭐! 그게 뭐가 어때서!”

“야. 이게 진짜.”

“내가 뭐 없는 말 했어? 너 대체 왜 그래! 저 여자가 대체 너한테 뭔데! 나한테 이럴 정도로 저 여자가


중요해?”

“어.”

“……뭐?”

지안이 떠나간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석한이 고개를 돌려 희수를 바라보았다.

온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기가 가득 서려 있는 눈동자에 희수가 움찔거렸다.

“내가 너한테 경고했지.”

“…….”

“받아 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야…….”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석한아!”

“좋은 말로 얘기할 때 꺼져.”

“…….”

한겨울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에게 냉기가 서렸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를 향해 희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 ◆ □ 이아

툭툭.

엉덩이를 두드리는 감각에 이불 속에 파묻었던 얼굴을 살며시 내밀었다.

“야. 복 나간 년. 죽 먹어라.”

“안 먹을래.”

“그럼 먹지 말든가.”

죽 그릇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하은이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왜. 입맛도 없으셔?”

“어.”

“그럼 다시 만나.”

“싫어.”

“그럼 말든가.”

이불을 순식간에 당겨 버리는 하은의 동작에 지안이 새우처럼 말고 있던 몸을 움찔거렸다.

“꼴좋다.”

“…….”

“야, 유지안. 나 좀 봐 봐.”

“…….”

“아 좀 일어나 봐!”

맥없이 침대 위로 떨어져 있는 팔을 잡고 강하게 당기자, 지안이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럴 거면 그냥 만나지 왜 차고 지라…… 난리야.”

“…….”

“너 말해 봐. 오석한 싫어?”

“아니.”

“그럼?”

“모르겠어.”
“느낀다며. 걔가 만지면 느낀다며…….”

작은 한숨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응?”

“그래서 모르겠다고. 걔가 좋아서 느끼는 건지, 아니면 걔가 만지면 흥분해서 좋아지는 건지.”

미친년. 그게 그거 아니야?

작게 속삭이는 하은의 얼굴 위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됐어. 어차피 미국 간다니까 오히려 잘됐지 뭐. 군대 가도 헤어지는 마당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미국 가는 애를 기다려.”

“진짜 가는 거 맞아?”

“맞겠지.”

‘그게 우리 관계랑…… 상관있어요?’

간다는 소리겠지. 아니라고 안 했으니.

여전히 세상 고민 다 안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지안의 모습에 하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오석한이 하도 들이대서 오래가나 했더니만, 결국 또 도망가는구먼. 그것도 아주 반대의


이유로.”

“…….”

“유지안. 그냥 혼자 살아.”

“…….”

“다른 남자들은 흥분 안 된다고 걱정하며 도망치더니, 이제는 흥분해도 두렵다고 도망가는 거. 너 그거


맞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하은을 보고 지안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

“나쁜 년.”

“왜 욕하고 난리야.”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내 연애도 못 하는데. 제 발로 복 차 버리고 온 친구 죽이나 사다 주는 거 나도


완전 짜증 나거든?”

“미안하다.”

“됐고. 너 근데 정말 오석한 안 만나 볼 거야?”


며칠 동안 핸드폰을 꺼 놓았다.

학교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을 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그가 따라와 잠시 이야기하자고 말을 걸었지만, 이러면 앞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겠다고 매정하게 답했다.

“응. 안 볼 거야.”

눈을 떠 맞이한 아침이 유난히 서글프게 느껴지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무엇이 원인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끝을 예상이라도 하고 그를 대했을지 모른다.

마음을 열지 않은 건 결국 자신이었다.

작은 오해를 더 크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밀어낼 용기가 없었기에 핑계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뭐가 두려워서 그렇게 모질게 이야기를 했을까. 후회를 머리에 담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면 그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유난히 길었던 봄은 지나가고,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가 시작되었다.

우산을 써도 어깨를 적셔 오는 빗방울에 유난히 온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선배…….”

찰박거리며 도로 위를 디디던 발이 우뚝 자리에 멈추었다.

순간 심하게 울렁거린 가슴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멈춰진 숨이 목 언저리에 걸려 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산 위를 흐르던 빗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질 정도로 지안의 몸이 빠르게 돌아갔다.

“아…….”

텅 빈 도로 위를 적시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우산을 건네주고 환하게 웃으며 빗속을 뛰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지안…… 너 웃긴다.”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밀려 올라갔던 입술이 느릿하게 제자리로 돌아가 굳게 꼭 맞물렸다.


툭툭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처음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 애써 참았던 눈물이 유난히 짙게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흘러 있었다.

□ ◆ □ 이아

“어디야?”

-나 지금 가는 길이야. 조금만 기다려.

“나 살 거 있으니까 백화점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

-알았어.

유독 빨리 찾아온 추위에 지난겨울 잃어버렸던 장갑이 떠올랐다.

백화점에서 장갑을 하나 구매하고 1 층 카페에 앉아서 하은을 기다렸다.

“어, 혹시…….”

누군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 오자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보던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혜인이었다.

여전히 밝은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미소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잘 지냈어요?”

“네.”

막상 말을 걸고 나니 혜인도 당황스러운지 지안의 주변을 살폈다.

“친구 기다리고 있어요.”

혹시나 일행이 있을까 살피는 듯했던 혜인이 옅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마주 앉은 혜인은 잠시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숨을 크게 삼킨 후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석한이, 미국 간 거 알아요?”

“……네.”

학교에 가면 원치 않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안희수가 석한과 완전히 헤어진 것인지 둘이 같이 다니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석한이 미국에 갔다는 이야기.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그녀에게 들려왔다.

“저, 내가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망설이는 혜인의 모습에 지안이 입술을 살며시 밀어 올렸다.

“하셔도 괜찮아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

“…….”

“희수랑 석한이 아무 사이 아니에요. 물론 희수가 석한이 좋아한 건 사실이지만.”

“다 지난 일이에요.”

모든 것을 지워 버린 듯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지안의 모습에 한숨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혜인이 말했다.

“희수는 우리 어릴 적부터 집안끼리 알고 있던 사이예요. 부모님들끼리도 많이 친하시고 가깝게 살아서


왕래가 잦았고요.”

“…….”

“워낙 오래된 짝사랑이긴 했지만, 사귀거나 그랬던 것도 아니고 일방적이었던 거예요. 석한이도 그저
오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정하게 굴지 못한 것도 잘못이지만. 지안 씨에 대한 마음
진심이었어요.”

“괜찮아요. 이제 다 끝난 일인걸요.”

역시나 답답함을 머금은 웃음이 혜인의 얼굴에 번졌다.

“그날도 술 먹고 희수가 일방적으로 찾아간 거였고. 그 모질지 못한 자식이 행동을 잘못해서 오해가 생긴
건데……. 아무튼…….”

“…….”

“미국 가는 것도 확정된 일이 아니었고, 부모님한테는 아니지만 저한테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


이유도 오로지 지안 씨 때문이었고요.”

“……같이 간다고 하던데요?”

“누구랑요? 희수랑요?”

“네.”
하아- 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석한이 간다고 하니까. 희수가 집에다가 조른 모양이에요. 물론 석한이는 알지도 못했던
일이고요. 그리고 희수 지금 미국 안 갔어요. 휴학하고 잠시…….”

“괜찮아요. 저 정말.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사실 듣고 싶지 않아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싶어요. 복잡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긴 지안의 표정에 혜인이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 하나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정말 우리 석한이한테 아무 마음 없었어요?”

“…….”

“좋아했던 마음, 정말 없었나요?”

하은과 헤어지고 집까지 꽤 먼 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유난히 자주 흘러나오는 숨결 위로 하얀 입김이 번져 나갔다.

시린 발끝이 콕콕 도로 위를 내리칠 때마다 바늘로 가슴을 찌르듯 통증이 일었다.

혜인의 물음에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걸음이 멈추고,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던 그가 떠올랐다.

“……좋아했어.”

이미 전하기에 너무 늦은 이야기.

작은 입술을 타고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5.
4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득 쌓인 눈 위를 짜증 섞인 발걸음으로 걸었다.

눈이 그쳤음에도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 위에 소복했던 눈들이 머리 위를 날렸다.

이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술집에 도착한 지안이 신경질적으로 코트를 털어 냈다.

“야야. 살살 해라. 일찍 왔네.”

“어. 짜증 나게 눈이 왜 이렇게 많이 왔어!”

“눈이 와서 짜증이 나는 거냐? 아니면 짜증이 나서 눈이 온 게 싫은 거냐?”

“야, 최하은.”

“들어가자꾸나. 친구야.”

하은과 함께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친한 대학 동기 두 명과 마주 앉았다.

“지안아, 일단 마시고 시작하자.”

인사도 하기 전에 술 먼저 따라 주는 배운 친구들 같으니라고.

벌써 다 들었구먼.

“응. 내가 미리 다 얘기했지. 너 힘들까 봐.”

평소에 내 생각을 좀 그렇게 하지.

제 발이 저린 하은이 날카로운 지안의 눈빛에 자진 납세 후 이미 비워 버린 지안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야, 유지안. 이번에는 왜 헤어졌어?”

“……그냥 뭐.”

“성격 차이지!”

대신 답하는 하은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바로 어제.

6 개월간의 지안의 연애가 끝이 났다.

이유는 늘 그렇듯 마찬가지였다.

“어쩌겠냐. 이 몸뚱이가 문제지…….”

“뭐라고?”

작은 중얼거림에 친구들이 되물었지만, 지안은 그저 술잔을 비웠다.

“야. 천천히 마셔라. 너 그러다가 훅 간다.”

“이런 날은 훅 가야지. 야, 언니 잔 비었다.”


차라리 마시자.

당연히 이별은 아픈 것이겠지만, 이별의 순간보다 그 후에 다가오는 많은 생각이 항상 지안을 더욱 힘들게


했다.

왜 자꾸만 생각이 날까.

당연히 생각이 날 수밖에 없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

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깨달았다.

그에게서 느꼈던, 그리고 느끼고 싶었던 것이 단순한 쾌락이 아님을.

스치는 눈빛에 그저 가슴이 벅찼고, 따뜻한 속삭임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시간.

뜨거운 호흡을 나누고 서로를 어루만지며, 그 순간 세상에 오직 그 사람에게 나밖에 없다는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가끔은 지독히도 그리웠다.

금요일 저녁, 술집은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술집 안에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그저 그 사람들처럼 즐거운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야 더는 괴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밀려오는 술기운에 머리가 조금씩 멍해지기 시작했다.

“야, 너 괜찮아?”

“응.”

“그만 마셔. 나 너 업고 가기 싫다.”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같이 가?”

“아니야. 금방 올 거야.”

자신을 따라 일어나는 하은의 어깨를 살며시 누르고 코트를 손에 들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추운 걸 워낙 싫어하기에 평소 같으면 짜증을 내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온몸을 파고드는 냉기가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어?”

고개를 돌리다 시선을 한곳에 멈추고 빙긋 웃었다.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덮여 있는 공간을 발견한 지안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뽀드득.

신발 바닥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과 공기에 뒤섞이는 소리에 입술이 기분 좋게 밀려 올라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잡념이 사라지고 머리가 환해지는 기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술기운에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다리를 용기 내 쭉 뻗었다.

“엄마야!”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몸이 뒤로 휘청였다.

이런 미친 짓은 평소에도, 술 먹고는 더더욱 하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손목 위로 느껴지는 강한 힘에 눈이 번쩍 뜨였다.

허리를 바짝 감아 안는 단단한 팔에 순식간에 몸이 딸려 갔다.

낯설지 않은 향기와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빠르게 스쳤다.

털썩이는 순간 온몸에 느껴지는 단단한 남자의 몸.

이상하리만큼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정신이 단숨에 들 정도로 낯선 느낌에 넘어지는 순간만큼 놀란 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상이 반짝이는 것이 하늘의 별 때문인지. 바닥의 새하얀 눈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의 미소
때문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선배. 위험해요.”

조금 전 그렇게 지독하게 그리웠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술을 너무 마신 걸까.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잠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는 온기와 향기.

“괜찮아요?”
너무나 또렷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꺄악!”

저도 모르게 가슴 앞으로 모았던 팔을 있는 힘껏 뻗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득 맞닿았던 단단한 몸이 떨어져 나가자 온 힘을 다해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엄마야!”

그를 밀쳐 내며 버둥거리는 탓에 미끄러운 눈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히 쿵 소리가 났는데 왜 안 아프지? 아, 꿈인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다가오는 그가 보이자 뇌가 또 꿈 타령을 시작했다.

“선배! 괜찮아요?”

“…….”

“일어나 봐요.”

이렇게 돈만 모아 봐야 혼자 늙어 죽고 말지, 라며 얼마 전에 마음먹고 구입한 고가의 캐시미어 백 프로


코트가 눈 바닥에 새카맣게 얼룩지고 있다는 것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선배. 일어나 보라고요.”

“잠깐만!”

버럭 하는 지안의 모습에 무릎을 꿇고 앞에 마주 앉은 석한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너! 뭐야!”

“……네?”

“너 뭐냐고.”

“저 오석한이에요, 선배.”

설마 기억 못 해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바라보며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일어나요. 옷 다 더러워졌어요.”

순간 정신이 다시 번쩍 들었다.

단단한 팔이 순간 겨드랑이를 파고들더니 몸이 번쩍 들렸다.

발이 바닥에 안전하게 닿은 것을 확인하고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빙긋 웃었다.

“손댄 거 아니에요.”

“아…….”
여전했다.

세월이 무색할 만큼 장난기 가득 담긴 말투며 말을 뱉을 때 사람 홀리게 하는 미소와, 자신을 향한


신기하고 즐거움이 가득 담긴 눈빛까지.

가슴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어제 헤어져 다시 만난 사람처럼, 늘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잊은 적 없는 익숙한 표정으로 그가 눈앞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광경에 잠시 치솟았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잘 지냈어요?”

“……응. 그런데 여기는…….”

“친구들 모임 있어서 잠깐 왔는데 안에서 하은 선배 만났어요. 선배 나갔다고 알려 주시던데요?”

최하은. 이걸 확 그냥.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생각 없이 들이부었던 술기운이 단숨에 확 올라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제…… 들어왔어?”

“한 달 전에?”

이제 완전히 들어온 건가? 저도 모르게 궁금함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미국으로 나가요. 잠깐 들어왔어요.”

“아, 그렇구나.”

다시 미국으로 간다는 말에 안도감과 아쉬움이 뒤엉킨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유지안. 뭐가 아쉬워.’

아, 어지러워. 괜히 많이 마셨다.

잠깐의 후회와 함께 눈앞이 빙 한 번 크게 돌았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그의 모습과 하늘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나 그가 지안에게 손을 뻗어 왔다.

기다란 팔이 어깨를 감싸 오자 애써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괜찮아요?”

“어…….”

“넘어져서 그런 거 아니에요? 봐 봐요.”

“뭘 봐. 술 마셔서 그런 거지.”
“아…….”

어깨를 살며시 감싸 왔던 팔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잠시 닿은 그의 감각에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또 찌릿한 감각이 스며 왔다.

“하아…….”

어쩜. 여전히 이러냐.

그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온몸을 어루만졌던 뜨거운 손길과 뜨겁게 나누었던 숨결.

잊으려고 억눌러 왔던 마음과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그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거냐. 네가 이상한 거냐.

아마도 나겠지.

무섭다고 도망가 놓고, 또 그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작게 코웃음이 났다.

잠시 내렸던 눈동자를 천천히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그래? 고마워.”

“선배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그런가…….”

어색하게 입술을 올리며 답했다.

“요즘 뭐 해요?”

“회사 다녀.”

“아, 그렇구나…….”

“너는?”

“저야 아직 학교 다니죠.”

아, 그렇구나. 어색하게 마주 보고 누구나 나눌 수 있는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그마저 끊어지니 차가운 공기와 어색함이 뒤엉켰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거리던 석한이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 말 건네지 않고 한참 동안 하얀 입김만 흘려보내던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 기다리겠어요.”
“…….”

“저 들어가 볼게요.”

“…….”

“잘…… 지내요, 선배.”

그래. 너도 잘 지내. 가볍게 이야기를 건네야지 하는 마음과 다르게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겠지.

긴 시간 그를 떠올리며 아마도 지금처럼 이별을 맞이하는 순간 그가 다시 떠오르겠지.

저 들어가 볼게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그가 몸을 돌렸다.

“……!”

한 걸음 옮기던 석한의 발이 멈추었다.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자신의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선배.”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온 그의 눈을 지안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석한.”

일렁거리는 눈동자로 석한을 바라보던 지안이 한숨과 함께 그의 이름을 입 안에 담았다.

“네.”

“너…….”

무슨 용기가 났던 걸까.

그가 떠나고 반복된 이별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서?

아니면 오롯이 눈앞에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 정신없이 뛰는 심장과 자동 반응하는 몸 때문일까.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내일 아침 아마 깊은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그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술의 기운을 빌렸다고 핑계를 대고 싶을 정도로. 오늘은 한번 그냥 미치고 싶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망설임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하고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너 나랑 잘래?”

잠시의 침묵이 두 사람 주변을 둘러쌌다.

마치 무엇인가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선배?”

“자자. 나랑.”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많은 생각이 자리 잡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취했나 보다.”

“이유.”

“…….”

당황스러움과 생각으로 가득 찼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이유가 뭐나고요. 그렇게 다가갈 때 밀어내더니, 왜 갑자기 나랑 자고 싶어졌는데요?”

“…….”

“그때는 다시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밀어내 놓고. 왜요? 갑자기 왜 나랑 자고 싶어졌는데요?”

그때 차마 지안에게 묻지 못했던 말이 억눌린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그냥. 너랑 자고 싶어졌어.”

미친 여자라고 욕을 하더라도, 그저 받아들일 마음으로 말을 던졌다.

“갑자기 나랑 자고 싶어진 이유, 말해 줘요. 어떤 마음으로 나한테 이러는지. 괜히 사람 마음 흔들지


말고.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려 달라고요.”

이대로 너를 보내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 그것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미치도록 뜨거운 쾌락에 의한
착각일지 모르지만.

네 마음이 지금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그저 그 마음이었다. 아무 생각 들지 않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뜨겁게 안기고 싶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 올라온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지안이 꾹 다물었던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너한테만 그래.”

“……네?”

“너한테만 흥분한다고.”
“대체…….”

말을 뱉고 나니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시작했기에 그가 믿든 말든 멈추지 않기로 했다.

“다른 사람, 아니 다른 남자들한테는…… 다른 남자들이 아무리 날 만져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

“…….”

“하아…….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야.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도망쳤어. 어린 마음에
두렵기도 했고. 너랑 끝까지 가고 나면, 그 어떤 이유가 됐든 헤어지면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질 것만 같았어. 넌 이해가 안 되겠지만, 네가 만들었던 작은 오해조차도 두려울 정도로……
아무튼 그때는 그랬어.”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할 거야.

속내를 모두 내놓고 나니 이게 잘하는 짓일까 고민이 밀려왔지만,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가 여전히 놀란 눈빛을 머금고 말없이 지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참 어두웠던 그의 표정 위로 옅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

“그래서 도망쳤구나…….”

“…….”

“그런데 어쩌죠? 나 내일 떠나는데…….”

작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아마도 비꼬는 거겠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겠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만하자, 유지안.

애써 끌어올렸던 용기가 무색할 만큼, 그의 차가운 반응에 금세 단단하게 먹었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미안.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친구들 기다린다며. 그만 들어…….”

“내가 선배랑 자면…… 선배는 뭐 해 줄 건데요?”

“……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전히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의 입술이 천천히 비틀려 올라갔다.

“선배가 원하는 거 들어주면, 내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나?”

“무슨…….”

“소원 하나 들어줘요.”

자 주는 대신 소원 들어 달라 이거냐?

동그랗게 뜨고 있던 지안의 눈매가 천천히 찌푸려졌다.

“소원이…… 뭔데?”

“아직,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내일이면 미국 가요.”

“……그래서?”

“뭐 거창한 거 아니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차피 오늘 지나면 안 볼 사람인데. 어때요?”

그래서 선배도 자자고 한 거 아니에요? 느릿하게 그의 입술이 밀려 올라갔다.

“오석한! 빨리 안 와!”

뒤에서 석한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가 봐야 해요. 빨리 결정해요.”

“야…….”

“소원 들어준다고 하면 바로 선배 손 잡고 갈 생각 있는데. 어때요?”

추위 속에 선명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던 그의 매력적인 입술이 매끄럽게 밀려 올라갔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할게.

적잖이 매혹적인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얘는 왜 이렇게 안 변할까.

저 사람 홀리게 하는 눈빛이 나만을 향한 것일까, 의심을 가득 담았던 때가 있었지.

그때처럼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보고 싶었다.

지안의 입술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그래. 소원, 들어줄게.”

“…….”
“나랑 자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한의 눈빛이 번쩍였다.

단숨에 뻗어 온 그의 손이 지안의 허리를 강하게 감아 당겼다.

순식간에 얼굴 위를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가 싶더니, 입술 위로 차가운 감각이 내려앉았다.

“흐음…….”

냉기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뜨겁게 달아오른 혀가 밀려들어 오자 그의 품 안에 갇힌 지안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거칠어진 걸까.

입술을 파고든 혀끝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그의 거친 숨결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벅차올랐다.

흐릿하게 울렁거리는 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그와의 키스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립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깨달았다.

미치도록 그를 그리고 이 감각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지 입술이 겹쳐진 것만으로 지안의 몸은 그를 격렬히 원하고 있었다.

오늘은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향해 뻗어진 지안의 두 팔이 석한의 목을 감아 당겼다.

더는 깊숙이 파고들 것 없이 밀려들어 온 혀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움찔거렸지만, 이내 다시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 정신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깊어진 키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정신없이 내쉬는 숨결에 하얀 입김이 무성하게 눈앞을 어지럽혔다.

“……가요.”

예전처럼, 그가 손을 잡고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고 꽉 잡아당겼다.

지안의 입술이 부드럽게 밀려 올라갔다. 마치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지나면 또 생각이 나고 그리울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이 기분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뭇가지 위에 소복하게 쌓였던 하얀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과 함께 그의 모습을 담고 또 담았다.

“타요.”

지안이 보조석에 올라타자마자 석한이 빠르게 운전석에 올랐다.


“너 술 안 마셨어?”

“네.”

“아…….”

“왜요?”

나만 너무 제정신이 아니잖아.

뭔가 민망함이 밀려 올라왔다.

“걱정 마요. 나 지금 한잔 안 하면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초조하기 그지없는 말투처럼, 그의 차가 빠르게 도로 위를 달렸다.

갑자기 멈춰 선 차.

“잠깐만 기다려요.”

지안을 남겨 둔 그가 잠시 후 다시 나타나 지안에게 하얀 봉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큭…….”

봉지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던 지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칫솔. 커피. 가글. 맥주. 그리고 콘돔.

“오늘은 완벽하죠?”

“그러네. 완벽하다.”

긴장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가 주차를 마치자 지안이 낯선 장소를 둘러보았다.

“여기 어디야?”

“집이요.”

“너희 집?”

“네. 빨리 내려요.”

차에서 내려서도 낯선 장소를 둘러보는 지안의 앞에 빠르게 다가온 그가 말없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찌 자자고 한 사람은 자신인데, 그가 더 급해 보였다.

그래서 가슴이 뛰었다.

늘 자신을 바라보며 애타던 그의 모습이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 보니 행복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어색해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가 빠르게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입술이 지안의 입술을 정신없이 찾아들었다.


그녀도 그것이 당연한 듯 입술을 벌리고 그를 맞이했다.

정신없이 입술을 빨아 당기고 뜨거운 혀가 서로 뒤엉기기 시작하자 몸은 금세 달아올랐다.

여유라고는 전혀 없는 그의 손길에 지안의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녀린 몸을 감싼 포근한 니트


속으로 단숨에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으읏…….”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 위로 갑작스레 내려앉은 차가움에 지안의 몸이 들썩였다.

“하아…… 미안. 선배…….”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짧게 머무른 온기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한걸음 거리를 넓힌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당겼다.

“들어와요.”

가구 몇 개를 제외하고는 살림살이조차 없어 보이는 깔끔한 집.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는 지안을 바라보며 석한이 말을 걸었다.

“여기 오래 비워 놔서 별거 없어요. 선배 이쪽으로 와요.”

소파에 앉은 석한이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천천히 다가가자 주섬주섬 무언가를 뒤적이던 석한이 종이 한 장과 볼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테이블 앞에 서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지안을 향해 그가 빙긋 웃었다.

“뭐야?”

“소원 들어준다면서요.”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잠시 생각했다.

설마…….

“뭐, 각서라도 쓰라고?”

“정답!”

“야…….”

“제가 선배와 자겠다는 약속을 번복할 일 따위는 없을 테고, 하지만 선배가 그러고 나서 약속을 안 지키면
안 되니까.”

우리 각서 쓰죠! 가볍게 말하며 익살스럽게 입술을 밀어 올리는 석한의 모습에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 내가 안 자겠다고 해도, 네가 자자고 덤빌 거 같아 보이거든?

애달아 뜨겁게 키스 퍼붓던 사람이 누군데.


잠시 고민하던 지안이 빙긋 웃었다.

“그래. 쓰자.”

오늘 못 할 게 뭐가 있겠니.

소파 위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볼펜을 가볍게 손에 쥐었다.

“자, 뭐라고 쓸까? 오늘 네가 나랑 자 주는 대신 내가 소원 하나 들어주기? 이렇게 쓸까?”

“네.”

“참나. 별걸 다 한다.”

상황이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술 먹고 별짓 다 한다 싶었다.

가볍게 글을 적어 내리고 사인까지 마친 지안이 볼펜을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자, 됐어? 됐냐?”

“네. 됐어요. 약속 꼭 지켜요. 선배.”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 석한이 셔츠 위에 입고 있던 카디건을 머리 위로 훌러덩 벗어 소파 위로 툭


던졌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살며시 긴장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피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셔츠 단추 여러 개가 툭툭 풀어지자, 살며시 벌어진 틈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이 시선에 잡혔다.

“자, 뭐부터 할래요?”

“……응?”

너무 그의 몸에 집중하고 있던 지안이 순간 흩어진 시선을 바로잡았다.

“자요. 뭐부터 할 거예요? 커피?”

편의점에서 사 온 물건이 담긴 봉지에서 커피를 꺼내어 지안의 눈앞에 흔들었다.

지안이 작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빙긋 웃으며 캔 맥주를 꺼내어 단숨에 들이켜기 시작했다.

빠르게 맥주를 삼킬 때마다 꿀렁이는 목울대로 저절로 시선이 옮겨 갔다.

그의 작은 동작 하나에도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손에 건네받은 커피를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맥주를 원샷하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석한의 모습에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물었다.
“원샷할까?”

그가 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긴장 안 되나 봐요.”

“응.”

“왜요?”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잠시 커졌던 그의 눈동자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걱정 마요. 후회 안 할 거예요.”

지안이 테이블 위로 커피를 내려놓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봉지로 시선을 내렸다.

천천히 봉지 안으로 손을 넣어 콘돔을 꺼내 그의 앞에 들어 보이자,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눈동자가


긴장을 담으며 짙어지기 시작했다.

손끝을 바라보던 시선이 지안과 맞닿자, 오늘 내린 눈처럼 하얀 피부 위에 매혹적인 붉은 입술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오늘은 이게 제일 급한 거 같다.”

채갈 듯 허리를 감아 당기는 힘에 여린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당장에라도 겹쳐질 것같이 바짝 다가온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선배…….”

“…….”

“오늘은 절대…… 도망 못 가요.”

4 년 전 그녀를 뜨겁게 안지 못한 그날 이후, 수많은 날을 아쉬워하며 보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후,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그랬으면 그녀를 더 잊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애써


마음을 덮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냥 그녀를 보낸다면 아마도 평생 후회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 그저 기뻤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그녀의 살결이 맞닿고 호흡이 섞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욕심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돌이키지 못한다고.

“절대…… 도망 못 가요.”

짓눌러 왔던 마음이 억눌린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조금씩 열기가 차올라 그녀를 파고들 것처럼 바라보던 눈빛이 순간 일렁였다.


작은 손이 그의 볼 위로 맞닿은 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탁 터지는 석한의 숨결에 그녀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안 가.”

적어도 오늘은.

“도망 안 가. 그러니…….”

걱정하지 마. 뒷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소복소복 내려와 나뭇가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아 녹아내리는 눈처럼.

온몸이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키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듯 그저 그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받아들였다.

느릿하게 밀려든 혀끝이 여린 살들을 훑어 나갈 때마다 차오르는 욕망에 온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흐응…….”

바짝 끌어안자 단단한 가슴 위로 말랑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느릿한 움직임에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얼굴의 각도를 바꾸어 다시 입술을 베어 물며, 그녀의 니트 속으로 커다란 손을 밀어 넣었다.

하아- 입술이 잠시 떨어지며 그녀가 탁한 숨을 내쉬었다.

살결을 타고 올라온 손끝이 맞닿은 틈 사이를 파고들어 지안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하앗! 흐읏…….”

손바닥 안을 말랑말랑한 감각이 채우자 저도 모르게 격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무 좋아.”

풍성하고 동그란 가슴을 강하게 주무르던 손이 브래지어 속을 파고들자 손끝에 단단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유실이 느껴졌다.

“으읏. 자, 잠깐…….”

온몸을 타고 짜릿한 감각이 흘러 허리가 바짝 곧게 세워졌다.

손가락 사이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 끝을 끼워 넣고 빙빙 돌리는 그의 행동에 허리가 뒤틀리고 묘한


감각이 배 속을 찔러 왔다.

“자, 잠깐만…… 흐으응…….”

“……오늘은 못 멈춰요.”
울 것만 같은 신음에도 한 번 시작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멈추고 싶지 않아.

온몸으로 감각을 받아들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단숨에 불룩한 가슴 위로 끌어 올려진 니트 아래로 그가 얼굴을 묻더니 축축하고 뜨거운 감각이 강하게
느껴졌다.

채 벗겨 내지 못한 브래지어 위로 튀어나온 핑크빛 유두를 삼키듯 입 안으로 물고 가득 빨아 당겼다.

“으으응…… 흐읏…….”

뒤틀리는 하얗고 가는 허리를 강하게 당겨 안고 쪽쪽 빨아 당기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의 갈증을 다 채우고 싶은 욕망에 하얀 살결 위로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빨아 당기고 혀로


핥아 올리느라 정신없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밀어 오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이며 넘어진 지안의 등 위로 소파 가죽의 매끈한 감각이 와 닿았다.

그제야 그녀의 가슴 끝에서 입술을 떼어 낸 석한이 거칠게 소파 위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올라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 어느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그녀를 파고들어 정신없이 허리를 치받고도 남았을 정도로 정상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니트를 벗겨 내고 몇 개 남겨지지 않은 자신의 셔츠 단추를 뜯어 버리듯 거칠게 벗어


던졌다.

천천히 그녀를 눈으로 음미하듯 훑어 내렸다.

자신의 마음처럼 소파 위로 정신없이 흐트러져 흘러내린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 두 볼에 가득 담긴 붉은빛,


자신을 향한 몽롱한 눈빛, 달아오른 숨결을 헐떡이며 내뱉느라 탐스럽게 솟아오른 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또 사람 미치게 하지.”

대체. 유지안 너는.

왜 자꾸 존재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우습게 만드는 걸까.

한겨울 꽁꽁 얼어 버린 호수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너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듯 바라보던 그녀였다.

일부러 마음을 돌리려 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마음을 그녀처럼 차갑게 식혀 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를 잊으려고 쉼 없이 노력했다.

이제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석한은 뜨거워져 있었다.

오늘 그녀와 자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단순히 정복욕이 발동한 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롯이 몸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거짓임을 알고도 덮으려 했는데, 결국 또 그녀
앞에 무너져 내려 인정해 버리고 만다.

그녀가 견디지 못한 성욕에 몸을 맡기고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한다.

눈빛, 몸, 그리고 마음까지.

정신 나간 놈. 속으로 비웃듯 내뱉었다.

갑자기 모든 것을 멈추고 자신을 짙어진 눈동자로 이리저리 살피는 그를 지안이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석한이 맞닿은 상체를 떼어 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아래로 팔을 넣어 번쩍 들어 안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한층 가라앉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자신을 내려놓은 석한이 두 팔 안에 자신을 가두고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생각이 많이 담긴 눈동자가 이리저리 얼굴 위에 닿았다.

“선배…….”

“응.”

“유지안…….”

“응.”

작은 호흡을 내뱉은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 나한테 말한 게 사실이라면…… 혹시.”

그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바로 깨달은 지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처음이야…….”

“…….”

마치 모든 감정이 섞여 있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정말 정신 나간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아니면 자신을 기다렸다고 생각할지도, 아니면 자신이 처음임을


기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생각도 지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 그때처럼, 그를 보내고 후회하고 싶지 않다.

“괜찮아…….”

“선배…….”

두 볼이 예쁘게 달아오른 그녀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나 안아 주라.”
“…….”

“응?”

“…….”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처럼. 그렇게 안아 주라, 석한아…….”

나도 느끼고 싶어. 오늘이 마지막이라도.

네 마음이 그때처럼, 아마도 지금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네가 말하듯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그때 네가 안아 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안아 줘.

오늘 밤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된 것처럼.

그녀의 가녀린 팔이 그의 목을 감싸는 순간 그가 상체를 내렸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격렬하게 혀가 파고들어 서로를 옭아매듯 엉켜 들었다.

“흐읏…… 흣, 흣…….”

순식간에 벗겨진 브래지어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스커트 아래 그녀의 스타킹과 팬티가 그 뒤로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거친 키스로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살결 위를 타고 혀로


핥아 내리며 입술로 빨아 당겼다.

선명한 자국을 만드는 아릿한 감각에 지안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울컥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가 아니면 느껴 보지 못하는 신기한 감각에
기쁨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온몸을 지배했다.

손, 혀, 모든 살 위로 닿는 그녀의 생생한 감각에 석한은 온몸이 중독된 것만 같았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남성이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바짝 서 있었다.

“하앗! 흐으으으응…….”

허벅지 위를 밀고 올라오던 손끝이, 톡 튀어나온 은밀한 살점 위를 진하게 문질렀다.

그녀의 몸이 자잘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다는 듯 살살 문지르는 움직임에도 그녀는 크게 동요했다.

“……선배.”

“하아…… 좋아, 흐읏.”

묻지 않아도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음임을 터트렸다.


“나도. 나도 좋아요…….”

위아래로 흔들리는 유두 끝을 혀끝으로 살살 굴리며 여전히 예민한 살결을 집요하게 매만졌다.

이미 손끝이 축축한 액체에 젖어 갔지만, 석한은 애써 참아 내며 끊임없이 그녀를 어루만졌다.

기다란 손끝 한 마디가 천천히 안을 파고들자 그녀가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살살 돌리는 것만으로 그녀의 허리가 뒤로 휘어지고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으응. 흐응…… 흐으읏…….”

얕게 파고든 손가락을 빼내고 다시 얕게 그리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무언가 크게 치고 들어올 것 같은 감각을 기다리느라 애가 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배려하듯 느릿한 움직임에 견디지 못할 만큼 숨이 차올랐지만, 미칠 것같이 차오른 욕망이


충족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손가락을 빼내자 지안이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앗! 으으윽…… 줘…….”

“…….”

“너, 넣어 줘…… 흐읏.”

역시나 차오르는 욕망을 참아 내느라 미세하게 구겨졌던 석한의 눈매가 크게 벌어졌다.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흐르자 거친 숨을 내쉰 그의 입술이 단단하게 닫혔다.

“으읏! 흐흐흣!”

완벽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안에 갇혀 있던 뜨거운 온기가 손가락 위로 순식간에 번졌다.

그리고 좁았다.

손가락을 조여 오며 움찔거리는 그녀의 속살에 잠시 호흡을 멈추었던 석한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헤집기
시작했다.

“서, 석한아…… 하앗…….”

깊게 끝까지 밀어 넣고 다시 빼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똑바로 자신을 향해 내려앉은 그의 시선을 느끼며 하염없이 신음을 뱉어 내고 숨을 삼켰다.

점점 쾌락에 충만해져 눈앞이 하얘지고 머리가 멈추어 버린 듯 아무런 사고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만지는 것만으로 그 역시 뜨겁게 숨을 뱉고 있었다.

허겁지겁 그의 입술을 찾았다.

나 좀 어떻게 해 달라는 듯 매달려 오는 그녀를 기꺼이 맞이하며 그는 점점 그녀를 파고들었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그의 손길에 차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황홀한 감각이 차오르자 울컥거리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눈꺼풀 아래 맑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초점이 흩어졌던 그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눈가를 타고 흐른 그녀의 눈물을 따라 흐르듯


움직였다.

작게 밀려 올라간 그녀의 입술, 예쁘게 그녀가 눈매를 휘자 차오른 눈물이 또 한 번 옆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멈추었던 석한이 움직임을 다시 시작했다.

달래듯 그녀를 어루만지고 예쁘게 밀려 올라간 입술을 촉촉 소리가 나게 짧게 빨아 당겼다.

“걱정하지 마요…….”

몸 안을 파고든 손의 움직임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귓가에 진하게 스미는 그의 목소리.

“천천히…….”

“…….”

“천천히 할게요.”

“…….”

“오늘 누구보다 행복하게…… 그렇게…….”

“…….”

“내가 만들어 줄게요.”

거짓이어도 좋았다.

따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작게 머무르던 두려움을 조금씩 떨쳐 내기 시작했다.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이 점점 더 뜨겁고 짙어졌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충분히 젖어 가기를 기다리며, 그녀를 품 안에 가두고 하얀 살결 위에 자신을 새기듯 한참 동안


그렇게 어루만졌다.

하나였던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나고,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일 정도로 충분히 젖어 들고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손가락을 완전히 빼내었다.

“흐흐흑…….”

갑자기 밀려오는 공허함에 그녀가 몸을 자잘하게 떨었다.

그가 몸을 완전히 일으키며 그녀의 치마를 완벽히 벗겨 내고,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벗어 던졌다.

허벅지에 선연하게 느껴지던 단단한 물건이 고개를 치켜세운 채로 지안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자리 잡았다.

“흡…….”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저 부딪히는 살결으로 느꼈을 뿐이지, 손조차 대지 않았기에 가늠하지 못했었다.

“잠, 잠깐만!”

드…… 들어갈까?

그동안 넣지는 않았지만, 다른 남자의 것을 눈으로 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간 했던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느껴질 만큼 큰 걱정이 밀려왔다.

완벽한 준비를 위해 사 온 콘돔이 걱정거리의 원인 위로 매끈하게 덮어졌다.

크게 떠진 눈 안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감지한 석한이 천천히 상체를 내리며 그녀와 마주했다.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며 파고들자 단단하게 선 그의 물건이 당장에라도 뚫고 들어올 듯 맨살


위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서, 석한아. 저, 그게…….”

“선배…… 걱정하지 마요. 아프지 않게 할게요.”

저기……그건 네 생각 같고.

분명 아파. 이건.

하지 않아도 느낌만으로 알 수 있어.

느낌 탓이에요. 이딴 말은 하지 말자, 우리.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살결 위로 뭉툭한 느낌이 와 닿았다.

“힘 빼요. 선배.”

살짝 허리를 밀어 올리던 그가 가뭄에 바짝 말라 버린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흐윽. 아니…… 자, 잠깐…… 흐읏!”

또다시 그녀의 가슴을 강하게 베어 문 그가 살살 혀끝으로 간지럽히듯 작은 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목을 세워 석한을 바라보던 지안의 얼굴이 침대 위로 떨어지고 허리가 휘청였다.

천천히 그가 허리를 밀어 댔다.

살 끝에 맞닿은 뭉툭한 느낌이 사라지자 마치 몸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이 아래를 찌르고 들어왔다.

“흐읏! 너무 좁아요. 선배…… 흣…… 힘 빼요.”

너 같으면 지금 힘이 빠지겠냐.

“흐윽! 아, 아파…….”

찰싹.
지안의 손바닥이 차진 소리와 함께 그의 등을 제대로 강타했다.

“아파! 흐읏…… 아프다고!”

“윽. 잠, 잠깐만…… 참아 봐요!”

안 아프긴 개뿔.

아파 죽겠구먼.

“아악…… 흣!”

천천히 밀어 대던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지안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아…… 이제 다 들어간 건가.

“아직 멀었어요.”

제대로 현실을 깨닫게 해 주는 그의 한마디에 눈앞이 어질했다.

이 자식아. 차라리 말하지 마.

툭 하고 쳐 대는 느낌과 함께 온몸을 가득 채우는 듯한 이물감이 쑥 밀려왔다.

“하앗…… 하악…….”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하아. 이제 다 들어갔어요…….”

뿌듯함과 안도감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허리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살 옆으로 돌리다가 끝까지 밀어붙인 몸을 빼내었다.

“흐으으으…….”

분명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 몸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나 선명해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고통이 컸다.

하지만 그 고통 어딘가에서 툭툭 쳐 오르는 짜릿한 감각이 번질 때마다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그의 등을 잡고 있던 손끝이 살결을 파고들 것처럼 세워졌다.

너무 강하게 조여 오는 탓에 석한은 숨이 저절로 가빠졌다.

밀려오는 사정감을 꾹꾹 눌러 내리느라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얼마 움직이지 않았지만, 온몸이 축축해질 만큼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허리를 살살 치받자 매끄러운 라인을 만들어 내며 휘어진 그녀의 매혹적인 몸이 자신의 움직임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윽…… 흑!”

혹여나 그녀가 아플까 봐.

담고 있는 욕망을 죄다 풀지 못하고 꾹꾹 누르며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녀를 파고들었다.

밀어닥친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를 기다리며 아주 오랫동안 그녀 안에 머물며
속살을 어루만졌다.

그의 느릿한 움직임에 휘몰아치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하얀 물결이 퍼지듯 야릇한 감각이 온몸을 잠식해
오기 시작했다.

“흐으응…… 흐응…….”

조금씩 비명이 아닌 야릇함이 담긴 신음이 그녀의 잇새로 흘러나오자 그의 움직임에 조금씩 다급함이
담기기 시작했다.

쓰다듬고 만지고 싶을 정도로 살집이 적당히 잡힌 그녀의 허벅지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허리를 튕겼다.

지금과는 다른 강도의 감각이 치고 들어오자 그녀가 크게 신음했다.

여전히 뻑뻑하게 조여 오는 그녀의 살과 맞닿은 살덩이가 비벼지며 질척한 소리가 침대 위에 퍼졌다.

“하아……. 선배, 선배…….”

정신없이 그녀를 부르며 몸을 움직였다.

“하앗. 아앙, 아앙……! 흐으윽…….”

대답할 겨를도 없어 그저 터져 나오는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흔들릴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촉촉한 땀이 자신이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자신을 품에 안느라 몽롱해진 눈빛, 거칠게 숨을 내쉬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잘 다듬어진 단단한 가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선배…… 제발…….”

나 미치겠어요. 읊조리듯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나는 지금 행복해. 차마 뱉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삼켰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행위.

서로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서로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행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신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러기에 지금 그의 품에 안긴 이 순간이


너무도 벅차고 행복했다.

마치 이 시간이 지나가지 않기를, 그가 내일 떠나지 않기를, 그래서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밀려오는 쾌락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이성을 잡고 스치듯 그렇게 잠시나마 간절히 바라 봤다.

“더, 더 해 줘…….”

“……흐윽, 선배…….”

“더 세게. 나…… 안아 줘.”

두 팔을 가득 벌려 자신을 끌어안는 그녀의 입술을 미친 듯이 탐했다.

정신없이 흔들어 대는 허리짓에 그녀의 몸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침대 시트가 어지러이 구겨지고 발끝에
걸린 이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늘이 지나면 그녀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욱하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왜 그녀를 오늘에야 만난 걸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찾지 않은 것을 미친 듯이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내 품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끝까지 빼내었다가 강하게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흐읏! 흐읏! 서, 석한아! 흐읏…….”

한 손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살점을 야릇하게 문지르자 그녀가


자지러지며 도리질 쳤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공중에서 떨어지려는 그녀의 다리를 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도록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표정, 몸의 움직임을 새기기라도 하듯 두 눈 안에 가득 담았다.

“으으으으으으…….”

석한의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 안에 쏟아 낼 준비를 하듯 짧고 격렬하게 허리를 정신없이 흔들어 댔다.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절정에 이르는 순간.

“흐윽!”

“하앗! 흐으으읏!! 흐으응…….”

마지막으로 강하게 그녀를 파고든 그가 신음이 섞인 탄성을 터트리며 미간을 가득 구겼다.

동시에 맞이한 절정.

뜨겁게 달아오른 속살이 자잘한 경련과 함께 파고든 그의 것을 강한 수축으로 조여 왔다.


“흐윽.”

끝까지 정신없이 조여 오는 탓에 이미 사정을 마쳤음에도 야릇하고 미칠 것만 같은, 차마 설명하지 못할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녀의 위로 그의 상체가 쏟아져 내렸다.

가느다란 목 위로 얼굴을 묻었다.

하아- 하아- 가슴에 담긴 숨을 모조리 쏟아 내듯 뱉어 내는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촉- 촉-

입술이 닿는 곳마다 정신없이 짧은 키스를 남겼다.

조금 전 끝났던 격렬한 행위로 차마 보여 주지 못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그녀의 하얀 살결


위로 입술 감촉을 남겼다.

그녀의 숨결이 잔잔해지기 시작하자 석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꾹 감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밀려 올라가자, 물기를 머금고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

“왜 이렇게 예쁘냐. 사람 심란하게.”

지안의 자잘한 웃음소리가 방을 채웠지만, 석한은 웃지 않았다.

웃음을 흘려보낸 입술 위로 짧게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지만, 여전히 그는 잔잔한 표정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니.”

“많이 아팠어요?”

“조금? 그래도 좋았어.”

미세하게 찌푸려진 그의 눈매에 지안이 다시 한번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이야…… 좋았어.”

그녀의 몸 위를 차지하고 있던 그의 몸이 천천히 침대 위로 내려왔다.

비스듬히 눕자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톡 튀어나온 매력적인 쇄골 아래 가늘게 이어진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그녀가
간지러운 듯 몸을 작게 움츠렸다.

좋다고 말했지만, 많이 지쳐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와 땀에 젖어 축축하게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듯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 아래로 팔을 집어넣자 그녀가 금세 품으로 파고들었다.

“으으응.”

“……졸려요?”

“응.”

“조금 잘래요?”

“……으응.”

마치 대답도 겨우 하는 듯한 그녀의 음성에 꼭 끌어안은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금세 그녀가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가슴팍 위로 느껴지는 새근새근하는 숨소리에 미소와 함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럴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해져 버렸다.

“젠장.”

작게 내뱉으며 품 안의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그녀를 놓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미 후회를 해 봤자, 시간은 지나가 있었고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밀려들어 올 때쯤 석한이 작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여전히 이불 속에 푹 파묻혀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Rrrrr Rrrrr.

혹여나 그녀가 깰까 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일어났어요. 늦지 않게 공항으로 갈게요. 네.”

이제는 정말로 그녀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공항으로 출발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침대 위 흐트러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내렸다.

“선배.”

“…….”

여전히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가요.”
“…….”

“아니, 나 다녀올게요.”

“…….”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찾아올 테니까…….”

“…….”

“그때 소원 꼭 들어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올 테니, 그러니 기다려요.

동그란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 상체를 일으켰지만, 금세 다시 숙여 작은 입술을 짧게 머금고


떨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아쉬움이 가득 묻은 한숨을 삼키고 나서야, 석한이 자리를 떠났다.

눈을 떴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에 지안이 애써 다시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주변을 감싸 오는 차갑게 식어 버린 공기에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낯선 시간이 지나고 남겨진 낯선 공간.

그리고 처음 맞이한 낯선 감각의 여운을 머금은, 평소 같지 않게 무거운 몸이 유난히 낯설어 외로움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꼭 눌러 내렸던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입술을 밀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있었잖아. 근데 뭘 그래.”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로하듯 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술 취해서 그런 거 아니잖아.”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그를 원했잖아.

그리고 행복했잖아.

그러니 아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후회하지 마.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종이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미안해요.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안 깨웠어요. 나 미국으로 가요. 잘


지내요.]

종이 위에 덤덤하게 적어 내린 듯한 글을 바라보며 피식 작게 웃었다.

“너도.”

잘 지내.

그가 없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그가 잘 챙겨 놓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렸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인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글픈 감정이 밀려와 차가운 겨울바람에 빨갛게 물든 콧등을 찡긋거렸다.

밤새 더 많은 눈이 내렸었나 보다.

어지럽게 남겨져 있었을 발자국이며, 누군가의 흔적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새하얀 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 ◆ □ 이아

“그게 우리 관계랑…… 상관이 있어요?”

일렁거림이 사라지고 단단하게 자리 잡은 석한의 눈빛이 짙은 빛을 머금고 지안의 얼굴로 내려앉았다.

씁쓸한 미소가 내려앉았던 지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너무나 온도 차가 큰 표정 변화에 석한의 눈동자가 일순 당황스러움을 머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지안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왜. 이번에도 내가 너한테 아무 반응 안 하고, 네가 뭘 하든지 상관이 없어 보여?”

“…….”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지독하게 낮게 깔려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석한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야!”

갑자기 한 걸음 훅 다가온 지안의 행동에 놀란 듯 석한의 얼굴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찰싹!

“아악!”

“아악?”

찰싹!

“……선배! 왜!”

갑자기 날아온 그녀의 하얀 손바닥이 그의 가슴 위를 따끔하게 때리더니 몸을 돌려 피하는 그의 등을


야무지게 내리쳤다.

“왜? 왜? 너 지금 왜라고 물었냐?”

“선배 말로 해요!”

네가 지금 말로 해서 알아듣냐? 잠시 손을 제자리로 내리고 거칠게 숨을 내쉰 지안이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억눌린 음성을 흘려보냈다.

“너 아주 그 못된 버릇 아직 못 고쳤지…….”

“……네?”

“사람 헷갈리게 말하는 그 못된 버릇 아직 못 고쳤지!”

내가 오늘 아주 단단히 고쳐 주마.

“선배! 아악. 아파요!”

“아파? 아파? 그래. 아프라고 때리는데 아파야지! 네가 그동안 내 마음 아프게 한 거 생각하면 너는 더


맞아야 해.”

잠시 쉬려던 손이 견디지 못하고 그의 등을 또 따끔하게 내리쳤다.

“선배!”

공중을 유연하게 날아다니며 석한을 향하던 그녀의 두 손목을 그가 강하게 잡았다.

그에게 꼭 잡힌 그녀의 손목이 빠져나가려는 듯 강하게 움직였지만, 석한의 힘에 차마 빠져나오지 못하고


공중에 머물렀다.

진정하라는 듯 그 어느 때보다 집중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석한의 모습에 다시 입을 열었다.

“상관없으면? 상관없으면 어쩔 건데?”

“…….”

“상관없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가서 그 여자랑 날름 약혼할래?”

“선배.”

“그럼 난 아~ 좋은 추억이었구나. 열 번 잤으니 됐다. 이러고 멍청이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선배, 무슨 말도 안 되는…….”

너 말 한번 잘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네가 했잖아! 너 예전에도 똑같은 말 해서 사람 힘들게 만들더니! 뭐? 상관있어요?


너 나랑 엔조이야?”

“…….”

“그래! 있다! 있어! 아주 상관있다! 그러면! 그러면 어쩔 건데!”

아! 생각할수록 열 받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지안은 어떻게 감정을 뱉어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혼자 끙끙거렸다.

때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고, 한껏 그를 노려봐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애매한 발언에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잡힌 손목을 빼내지 못해 이를 꾹 눌러 문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스르륵 지안의 손목을 놓았다.

“어라? 그래. 네가 생각해도 더 맞아야겠지?”

이때가 기회다 싶어 날카로운 눈빛을 머금는 순간.

“네.”

“…….”

“맞아도 싸네요. 생각해 보니.”

어라, 이게 아닌데.

완전 쓰레기네. 혼자 읊조리던 석한이 픽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또 대놓고 인정하니 괜히 마음이 물러져서 등짝을 때리려고 공중에 들어 올렸던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말없이 눈을 마주하자 가만히 바라보던 석한이 그녀의 어깨를 품 안으로 가득 당겨 끌어안았다.

“야, 지금 끌어안을 타이밍 아니고 맞아야 할 타이밍이라고.”

“네. 때려요. 다 맞을게요.”

때리라면서 점점 더 강하게 끌어안는 그의 힘에 온몸에 가득 넣었던 힘을 빼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튼, 오석한. 진짜…….”

이렇게 쉽게 풀어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품에 안기니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때처럼 애매한 행동으로 그를 헷갈리게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일부러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품에 뜨겁게 안겨 한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아무 걱정 없이 그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그때처럼 두려움은 없는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조금 전 그에게서 자신을 떠나게 했던 그 한마디가 그의 입술을 통해 다시 전해지는 순간.

지안은 깨달았다. 자신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오석한. 똑바로 들어.”

“…….”

“상관있어. 아주 상관있다고. 없으면 그게 멍청이지 사람이야? 네가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하루에 몇 번은 내 생각을 하는지. 이런 거 다 상관있다고.”

그때는 어렸었다.

“다시 그때처럼 똑같은 실수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어쩌면 두려워서 비겁하게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신이 상처받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떠나간 것이 다행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괜찮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며 깨달았다.

“후회하더라도 지금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렇게 하고 후회할래.”

이별도 아팠지만, 꺼내 보여 주지 못했던 마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이 더 치열하게 아프다는 것을.

아마도 또다시 이별한다면, 그때처럼 아프고 지독하게 외롭겠지만.

지금 자신 앞에 마주 선 그를 마음껏 사랑하고 가슴이 벅찰 만큼 사랑받고 싶다.

어차피 겪어야 하는 아픔이라면, 그러고 나서 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어렸었다.

아직 아픔이 없을 만큼 성숙하지는 않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숨겨서 밀려오는 고통이 없도록.

이유 없이 도망치려는 서로를 한 번쯤 더 잡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아마 그때의 우리보다 성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나 이제…….”

“…….”

“도망 안 가.”

“……선배.”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걱정이 없다 해도 아마 그건 거짓말일 거야.”

“…….”
“그러니 네가 나 꽉 잡아. 다시 도망치려고 하면 네가 꽉 잡으라고.”

맞닿은 단단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려갔다.

쿵쿵 가슴을 두드리는 그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고스란히 느껴지자 가슴이 조금씩 벅차올랐다.

솔직한 마음을 모두 쏟아 낸 지안이 그의 가슴에 기대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지안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던 석한이 입을 열었다.

“안 해요.”

“……?”

“약혼 안 한다고요.”

“…….”

“아니. 못 해요.”

“무슨…… 소리야?”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반듯한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불안하셨나 봐요.”

“……뭐가?”

“저희 부모님이요.”

그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과 말투에 정말 자신이 심각하게 생각했던 약혼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마트에서 구매한 물건을 취소하듯 아주 간단한 일인 것처럼.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안이 물었다.

“왜 불안해?”

“내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시거든요.”

“……뭐?”

“사실 업무적인 관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억지로 밀어붙여서 만든 자리예요. 그리고 윤 상무네 집에서
적극적으로 밀고 있고요.”

내가 그럴 만한 인물은 되잖아요.

그 와중에도 버리지 못한 자기애를 과시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윤 상무한테 말했어요. 나, 이 약혼 안 한다고.”

“……그래?”
“네.”

“그렇구나…….”

“당사자가 하지 않겠다는 약혼, 당연히 못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약혼하지 않겠다는 말에도 그다지 밝아지지 않고 체념한 듯한 지안의 표정에 석한의 눈매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선배, 약혼 안 한다고요.”

“알겠어.”

“어라? 반응이 왜 이러지?”

“뭐가…….”

“혹시, 지금 못 믿는 거예요?”

“아니야. 믿어.”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영혼 없이 답하는 지안이 모습에 석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살짝 내렸던 눈을 올려 뜬 지안이 빼뚜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너는 단호하게 전했다고 하지만 상대가 알아들었을까 싶어서.”

“……네?”

“너 특기잖아. 애매모호하게 말하기.”

“아니에요! 확실히 말했어요.”

“응. 그건 네 생각이고. 됐어. 어쨌든 난 알아들었어.”

그만 이야기해. 단호하게 이야기한 보람도 없이 그녀는 믿는 둥 마는 둥 말을 마쳤다.

억울한 표정을 짓던 석한이 한참 그녀를 살피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부터 그러지 말아야겠네요.”

흘러나온 한숨과 함께 한층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면 안 되니까.”

“…….”

“그렇죠?”

매끈하게 올라가는 말꼬리에 그를 바라보던 지안의 눈매가 작게 꿈틀거렸다.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그의 표정에 이상하고 불안한 기운이 감지된다.

이 자식은 어떻게 튈지 몰라.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서서 지안의 어깨 끝을 손으로 꼭 잡은 그가 몸을 숙여, 지안과 눈을 맞추었다.

즐거움이 가득 담긴 그의 짙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지안의 얼굴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매력적으로 끌어 올린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한 마음에 입술만 집중적으로 바라보던


지안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사랑해요.”

말도 안 되게 현실적이지 못한 감각이 치달아 올랐다.

어쩌면 이 불안한 관계에서 차마 기대조차 하지 않았을 그 한마디가 그의 입술 사이로 또렷이 흘러나왔다.

입술에 닿았던 눈동자가 순간 크게 동요한 듯 일렁이며 그의 눈동자를 찾아 움직였다.

“사랑한다고, 유지안.”

찾아든 입술이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촉을 짧게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마치 시공간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입술 끝에 닿은 감촉과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 그리고 선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오직 이 순간 지안에게 그가 모든 것이었다.

“못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믿어 줘요.”

“…….”

“그리고 지금 믿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이제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내가 옆에서 계속 이야기해 줄게요.”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울컥거렸다.

아마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 크게 밀려 올라온 감정이 버거울 정도로 감당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선배는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자신을 가득 담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 위로 촉촉한 물기가 번지는 것이 보이자 미안한 감정이 밀려와
가슴을 콕콕 아프게 찔렀다.

조금 더 일찍 얘기해 줄걸.

아껴 두어도 아무 의미 없는 이 말을, 이게 뭐라고 그동안 꽁꽁 숨겨 왔을까.

어쩌면 이 한마디에 그녀도 그리고 자신도 조금은 더 일찍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후회가 밀려왔다.

느리게 밀려 내려온 눈꺼풀 아래로 툭 하고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 내자 잠시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던 눈동자가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콧등을 찌푸리며 훌쩍거린 그녀가 눈매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짧게 입술을
간지럽히듯 머금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니까 잘해. 이 자식아.”

자신의 말에 응? 소리와 함께 눈매를 찌푸리는 석한의 모습을 바라본 지안이 맑은 웃음을 흘렸다.

예쁜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마주한 맑은 눈빛.

그녀의 작고 사랑스러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도…… 사랑해.”

“…….”

“지금도 믿지만……. 그래도 계속해 줘.”

“…….”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게…… 그렇게 사랑한다고 계속 말해 줘.”

자신의 귓속을 파고든 그녀의 목소리가 믿기지 않아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얼빠진 표정이 계속 이어지자 지안이 이리저리 그를 살피다가 입술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왜. 안 믿겨?”

“…….”

“사랑한다고. 오석한.”

“……선배.”

“그래. 나 여기 있어. 그리고 네 앞에서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고.”

이거 꿈은 아니죠? 그녀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석한이 마치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듯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마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인가 보다.

혹시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달콤함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지안을 담으며 손끝으로 그녀의 존재를 새기듯 한참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다가와 따스하게 입술 위로 머물렀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려는 순간.

“읍…….”

놓치면 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허겁지겁 겹쳐 온 입술에 지안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잠시 당황해서 동그랗게 떴던 지안의 눈이 파고드는 그의 뜨거운 입술을 맞이하며 예쁘게 휘어졌다.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는 일.

그 시간이 얼마가 될지 아무도 가늠하지 못하고 약속하지 못하지만.

지금 그런 걱정은 사치일 뿐.

이미 깊게 파고든 뜨거운 혀를 반갑게 맞이했다.

휘감고 빨아 당기며 타액이 뒤엉켜 질척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점점 젖어 갔고, 그는 점점 단단해졌다.

“흐응…….”

“하아…… 선배…….”

맞닿은 살결이 거친 움직임에 부딪힐 때마다 서로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깊어진 신음이 듣기
좋게 흘러나와 서로를 점점 더 흥분시켰다.

“하앗…….”

급한 손길이 지안의 스커트를 허겁지겁 들어 올리고 은밀한 곳에서 흘러나온 체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속옷 위를 강하게 문질렀다.

평소보다 더한 흥분이 차올랐다.

“하아…… 석한아…….”

도톰하게 부푼 살결을 속옷 위로 문지르던 손끝이 작은 천 사이로 파고들어 곧바로 그녀의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휘둘러진 손가락 위로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속살이 느껴지자 맞물린 석한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흐흣…….”

무너지듯 안기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팔로 감으며 한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금세 힘이 빠져 벌어지는 허벅지 사이에서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강한 자극이 밀려 올라왔다.

자꾸만 휘청이는 그녀를 꼭 끌어안던 석한이 순식간에 손가락을 빼내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하앗…….”

그의 품에 안겨 헐떡이는 숨을 빠르게 뱉었다.

침대에 내려지기가 무섭게 지안의 옷가지들이 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그 또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상태로 그녀 위로 빠르게 올라왔다.

“자, 잠깐…… 흐윽!”

커다란 손바닥 안으로 그녀의 말랑한 가슴을 넣고 손가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유두를 입술로 단숨에
베어 물었다.

“……처, 천천히 해. 흐흣…… 나 어디 안 가…….”


입 안에 쏙 들어온 돌기를 혀끝으로 빙빙 돌리며 쪽쪽 빨아 대던 석한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아……. 안 가니까, 이 정도인 거예요…….”

차오른 욕망을 가득 담은 석한의 눈동자가 잠시 그녀에게 닿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하앗! 흐으으으…….”

온몸 구석구석 그의 혀가 닿았다.

간지럽히듯 타고 내려가다가 강하게 입술로 빨아 당길 때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짜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울컥울컥 맑은 액체를 뱉어 내는 야한 몸이 오늘은 부끄럽지 않았다.

허벅지 위를 찌르는 그의 단단한 물건이 어서 빨리 파고들어 마음껏 자신을 지배하고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한 쾌락을 선물해 주길 기다렸다.

지안이 허벅지를 천천히 벌렸다.

풍만한 젖가슴 위를 마음껏 유린하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던 석한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었다.

자신을 기다리듯 야릇한 자세로 다리를 가득 벌리고, 애절하고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

아랫배가 저릴 정도로 흥분을 견디지 못한 남성이 크기를 더욱 키웠다.

“……선배.”

“하아…… 나 더는…….”

못 참겠어. 탁 하고 야릇한 음성에 석한의 눈빛이 번쩍였다.

“흐으윽…….”

그의 얼굴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작은 살점 위로 델 듯한 뜨거운 감각이 닿는 듯하더니, 손가락과는 비교되지 않는 생생한 온도를 머금은


혀가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더없이 야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오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야한 소리를 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지안의 입술 사이로 정신없이 신음이


터지고 또 삼켜졌다.

그녀의 야들야들한 속살을 삼키고 빨아 대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고 흥분이 차올라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거칠게 얼굴을 든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젠장.”

작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지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콘돔이 없었다.
번쩍 몸을 일으킨 석한이 바닥에 떨어진 옷을 재빨리 주웠다.

“……왜?”

“콘돔이 없어요. 사 올게요.”

“있어.”

“……네?”

“저기…….”

지안의 손끝이 화장대 옆 작은 서랍을 가리켰다.

석한이 서랍을 열자 정말 그녀의 말대로 콘돔 상자가 보였다.

“왜…….”

무언가 잔뜩 묻고 싶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석한의 모습에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정신없이 휘몰아친 감각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지안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대체 그 눈빛 무슨 의미야?

“왜…… 그렇게 봐?”

“선배 집에 왜 이게…….”

상자에서 콘돔을 하나 빼서 침대로 돌아온 석한이 의미가 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이게 뻔히 알면서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순간 지안의 번쩍이는 눈빛이 석한에게 닿았다.

“선배 혹시…….”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당연히…….”

“내가 올 거라 생각하고 사 놓은 거예요?”

“어……? 아…… 엄마야!”

순식간에 단단한 무게가 지안을 짓눌렀다.

“완전…….”

“응? 완전…… 뭐?”

“선배가 내 생각 하면서 이거 사는 거 상상했더니. 와 진짜!”

“와, 진짜…… 뭐?”


“거칠게 말해서 미안한데…… 환장하겠어요!”

“야! 그게 아니라…….”

바짝 가깝게 다가온 얼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았다.

“언제 샀어요? 응? 말해 봐요. 응?”

“……조금 됐어.”

“와. 선배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이게 그렇게 되는 건가?

혹시나 그가 집에 오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고민하며 사긴 했지만, 저렇게 반응하라고 산 건


아니었는데.

민망함에 점점 더 붉어지고 난감해지는 지안의 표정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자기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가 집요하게 물어 왔다.

“어디서? 약국? 마트? 편의점?”

“아우, 이게 진짜. 지금 그게 중요해?”

“아……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번쩍 일어난 석한이 콘돔 상자를 들고 와 다시 침대에 자리 잡았다.

“그…… 그건 왜?”

벌써 불안하다.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표정.

“열 개들이잖아요. 그럼 이미 열 번은 더 할 마음이 있었다는 소리고…….”

저거 봐라, 저거.

“야. 얘기가 왜 또 그쪽으로…….”

지안의 위로 다시 자리 잡은 석한이 기쁨을 지우지 않고 뚫고 들어올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뭐가?”

“나 오늘 이거 다 쓸 건데.”

“야!”

덜 맞았지! 덜 맞았어!

찰싹거리는 소리에도 석한은 그저 좋다고 웃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지안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던 석한이 천천히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석한아…… 근데.”

“…….”

“그만 물으면 안 돼?”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좋아서 그만…….”

하아-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니. 좋은 건 좋은 거고…….”

그래. 네 마음 잘 알겠다고.

잠시 고민하던 지안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 너는 아니니?”

“……뭐가요?”

이거 참 말해야 해, 말아야 해.

“나 지금 조금 급한데…….”

“…….”

“우리…… 하던 거 하면 안 될……까?”

석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못난 자식.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자신을 향해 거칠게 욕설을 던진 석한이 번쩍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건재한 그의 물건 위로, 석한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자신을 엄청나게 생각하며 샀다는 콘돔이
금세 씌워졌다.

말을 뱉고 나서 밀려오는 민망함에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흣…….”

갑자기 허벅지를 움켜쥐는 강한 힘과 함께 그의 혀끝이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은밀한 살결을 쓱


스치듯 핥아 올렸다.

은근한 기다림에 잠시 내려놓았던 정신이 야릇한 감각에 번쩍 되돌아왔다.

뜨겁게 혀끝으로 온몸을 달궈 놓은 그가 살결을 머금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흐으응…….”

어느새 풀어져 버린 눈빛을 바라보며 입술을 밀어 올린 석한이 야릇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가 얼마나 급한지.”


“…….”

“이제부터 잘 봐요.”

순식간에 활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뭉툭한 감각이 꽂혀 들었다.

질척하게 젖은 살결이 부드럽게 그의 것을 삼키며 환호하듯 강하게 조여 왔다.

“하아, 흐읏…….”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이 들면서 강하고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덮쳐 왔다.

흐윽- 강한 조임에 석한이 끝까지 파고든 상태로 괴로운 듯 신음을 뱉으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아…… 빨리, 흐…….”

그의 강인한 어깨를 작은 손길이 재촉하듯 감아 안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자신을 품은 그녀가 허리를 자잘하게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윽, 선배. 잠깐…….”

“싫어, 빨리…….”

“하아. 미치겠다. 진짜.”

오늘 자신을 미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차오른 숨을 내쉴 때마다 작게 벌어지는 색정적인 붉은 입술, 감각에 취해 몽롱해진 눈빛이며, 짜릿한


감각을 찾아서 비틀어 대는 그녀의 섹시한 자태에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자신을 강하게 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심장이 터질 것같이 흥분이 차올랐다.

“하앗! 흐읏…….”

뒤로 길게 빠졌던 석한이 그녀의 몸을 쳐올리듯 강하게 전진했다.

더는 파고들 공간이 없음을 알면서도 강하게 치받고 빠르게 허리를 돌렸다.

“흐으응, 하앗. 석한아…….”

오랜 시간 멈춤은 없었다.

그녀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아랫배를 오랫동안 강하게 파고드는 자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신음을 내질렀다.

달아오른 숨결을 머금은 입술이 샅샅이 그녀의 몸을 빨아 당기고 삼키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지나간 자리에 붉은 자국이 진하게 남을 정도로, 달콤한 그녀의 살결 위로 자신의 숨을 쏟아 냈다.

강하게 밀려들어 오는 파도 위에 몸을 맡긴 듯 온몸이 정신없이 넘실거렸다.

자신이 뱉은 말을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듯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석한의 격렬한 움직임에 정신을 차리는
것을 포기한 지안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사랑해요.

사랑해. 유지안.

몇천 번을 들어도 질릴 것 같지 않은 말을 쏟아 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도.

나도, 사랑해.

얼마 전까지는 무엇이 우선인지 알고 싶었다.

몸 정이 들어서 그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이제는 이미 의미 없어진 물음.

그저 나이기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렇듯.

그저 서로이기에.

이렇게 격렬한 행위에 미칠 수 있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다고.

□ ◆ □

“오늘은 여기서 내려 달라고 안 하네요?”

평소에 손가락 끝으로 도로 끝을 콕 짚으며 내려 달라던 지안이 아무 말 않자. 운전대를 잡은 석한이 흘깃


그녀를 보며 물었다.

“우리가 무슨 불륜이니?”

그녀의 답에 석한이 크게 웃었다.

“와, 이건 또 이거대로 무섭네.”

“뭐가 무서워?”

“그동안은 선배가 나를 너무 외면하는 거 같아서 무서웠거든요.”

“그랬어?”

알면서 몰랐던 척 말을 뱉고 빙긋 웃었다.

무섭다고 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기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그저 웃음만 흘렀다.


“와. 정말…… 새롭다.”

“그래서 좋다는 거지?”

“무지. 너무. 완전.”

“그럼 됐지. 뭘 물어.”

역시 매력 터져. 읊조리는 석한의 말에 지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주차를 마친 후 바짝 다가오는 석한을 피하지 않고 지안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슬그머니 어깨 위로 손이 올라오자 어느 날과 다르지 않게 찰싹 소리와 함께 석한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에이, 뭐예요.”

“뭐긴. 그냥 티가 나면 숨기지는 않겠다고 한 거지, 대놓고 회사에서 나 연애해요! 하고 알릴 생각은


없어.”

“치이…….”

“뭐가 치야. 그냥 밖에서 둘이 시간 많이 가지면 되는 거잖아.”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좋아요. 회사 나가면 내가 독차지할 수 있잖아.”

어떻게 독차지해 줄까요? 음흉하게 속삭이며 들떠 보이는 미소를 담은 그의 눈빛에 지안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함께 사무실까지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도착해 그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그동안 내심 신경 쓰였던 시선들이 오늘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더는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내 것을 멀리 떨쳐 버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하루는 지나가고 있었다.

외부 미팅으로 오전에 사무실을 나간 석한이 점심시간이 한참이 지나고서야 들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네.”

“팀장님,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뭐 사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직원과 나누는 이야기에 지안이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밥은 좀 먹고 다니지. 어제 그렇게 힘 빼 놓고는.’

생각해 보니 쟤는 무슨 힘이 저렇게 남아돌아.

물론 열 번은 말도 안 되는 거긴 했지만, 그는 밤을 새하얗게 불태웠다.

유난히 섹시해 보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더듬고 또 더듬으며 모든 욕정을 풀어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니,
밥 한 끼 정도는 굶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유 대리, 무슨 좋은 일 있어?”

정신 나간 여자처럼 모니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에 질문이 날아오자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전혀요.”

“그러네. 이렇게 보니까 피곤해 보인다.”

어어어엄청 피곤합니다, 라고 답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근데 오늘 팀장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 같아.”

콧노래만 안 불렀지 정말 흥이 나 보이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향하는 석한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았다.

참 신기하지.

어쩌면 저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할까.

늘 감추기에 바빴던 자신과는 다른 그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벅찼다.

“그러게요. 좋아 보이네요.”

“윤 상무랑 연애해서 그런가?”

아니거든요. 얘기가 왜 그리로 튀니?

지안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어라? 뭐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밝은 미소를 장착한 서영이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와 석한의 사무실로 직행했다.

예민해진 지안의 눈빛이 사무실 창문에 닿았다.

하필 가려져 있는 블라인드가 꽤 신경 쓰여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그녀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인가 봐. 근데 너무 연애하는 티 내는 거 아니니?”

연애 아니거든요.
“그냥 밖에서 만나지 왜 저래?”

밖에서 나만 만날 거거든요?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거지? 하필 왜 가려져 있어.”

블라인드를 불태워 버리고 싶어 하는 지안의 마음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이 터졌다.

슬금슬금 밀려오는 불안감.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신경 쓰이니 점점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톡톡. 책상 위를 의미 없이 내리치는 자신의 볼펜 소리에 맞추어 초조함이 점점 극에 달했다.

지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지안이 아무것도 없는 결재판을 들고 하얀 종이 하나를 쏙 넣고는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 어느 때보다 다부진 표정을 머금은 지안의 발이 전쟁터라도 나가듯 비장하게 바닥을 쿡쿡 강하게 쳐
대며 움직였다.

똑똑.

노크가 아무 의미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석한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갑자기 열린 문에 회의용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순간 살짝 당황했다.

테이블 위에 난잡하게 어질러진 문서들이며 사뭇 심각했던 두 사람의 표정.

누가 봐도 중요한 의논을 하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유 대리, 무슨 일이죠?”

“아, 그게…….”

비장했던 각오는 어디로 간 걸까.

이거 완전 민폐인데?

순간 당황한 지안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석한의 눈빛이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결재판에 닿더니 유려하게 휘어졌다.

드르륵 바닥을 끄는 의자 소리와 함께 석한이 지안에게 다가왔다.

“결재받으러 온 건가 봐요?”

장난스러운 미소가 내려앉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네.”
그가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가더니 볼펜 하나를 들고 다시 지안에게 돌아왔다.

“혹시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건인가요?”

응? 지난번?

먼저 선수 날리는 석한의 얼굴에 닿은 지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앞에 다가온 그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

“주세요. 결재할 거.”

“아…… 네, 네.”

잠시 주춤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결재판을 건넸다.

여전히 회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서영의 눈빛이 지안과 석한에게 닿았다.

결재판을 열어 본 석한의 입술이 미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웃지 마라.

지금 나 되게 결의 다지고 들어왔거든?

너희 둘이 뭐 하는지 궁금해서?

“이번 기획에 유 대리가 공헌한 바가 커서, 아주 잘 진행될 것 같네요. 훌륭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 위에 그가 무언가 쓱쓱 써 내려가며 웃음기 가득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쭉 진행해 주세요.”

대체 무슨 소리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지안이 느껴지는 서영의 눈빛에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네. 알겠습니다.”

“자, 여기요.”

결재판을 탁 소리 나게 덮은 석한이 알 수 없는 의미를 가득 담은 미소를 건네며 결재판을 지안의 앞으로


밀었다.

“나가 보세요. 회의 중이라. 금방 끝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순간 지안의 표정이 굳었다.

서영이 보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날아온 윙크에 숨을 꿀꺽 삼켰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들키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설렘이 훅 치고 들어오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나…… 나가 보겠습니다.”

“네. 이따가 윤 상무님 나가시거든 사무실로 오세요. 다시 얘기하죠.”

“……네.”

누가 들어도 살살 녹아드는 따스한 석한의 말투에 들어올 때와 다르게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서영을 흘깃 다시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굳어 가는 서영의 표정에 재빨리 시선을 석한에게 돌렸다.

“나가 보겠습니다.”

들어온 속도와 비슷하게 빠른 속도로 사무실을 나왔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쉬는 자신에게 날아온 직원들의 시선에 흠흠 목을 가다듬고 자리로 향했다.

내가 미쳤지. 갑자기 뭐에 욱해서…….

잠시 가졌던 용기에 황당해하며 의자에 등을 풀썩 기댔다.

“유 대리. 왜 들어갔어?”

“……네? 아, 오전에 저한테 팀장님이 들어오라고 했었는데 깜빡했었어요.”

“그랬어? 근데 결재받을 거 있었어? 광고 건?”

책상에 놓인 결재판 위로 시선이 닿자 지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아니요. 빈손으로 들어가기 그래서…….”

“뭐야. 유 대리 완전 재밌다. 크크.”

재미라……. 난 왜 근데 살짝 살 떨렸지?

근데 얘는 대체.

몸을 바짝 책상으로 당겨 앉았다.

하얀 빈 종이가 담겨 있던 결재 파일을 천천히 열었다.

“……!”

결재판이 열림과 동시에 지안이 밀려오는 숨과 웃음을 삼켰다.

아주 자유롭게 써 내려간 그의 또렷한 글씨.

[어젯밤에 아주 훌륭했습니다. 오늘 밤도 잘 부탁해요.]

그 아래 멋들어지게 사인까지 해 놨다.

“진짜, 오석한…….”

웃음 섞인 목소리로 작게 읊조린 지안이 여전히 창문을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시 살짝 굳어지려던 지안의 표정이 밝게 펴졌다.

혹시나 누가 볼까 봐 표정 관리에 들어간 사이 석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위에는 그렇게 보고하면 되겠습니다. 회의 때 뵙죠.”

자신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사무적인 목소리.

“네. 다들 수고하세요.”

서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직원들을 따라 지안이 몸을 일으켰다.

또각또각 바닥을 내리치던 서영의 걸음이 잠시 지안의 앞에 멈추었다.

스치듯 자신의 위를 훑고 지나가는 서영의 눈빛에 멍했던 눈동자에 가득 힘을 주었다.

의구심이 희미하게 담긴 그녀의 눈동자.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석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무실에 퍼졌다.

“유지안 대리. 들어오세요.”

“네.”

부드러운 석한의 말투에 명쾌하고 짧은 답을 내뱉는 지안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서영의 시선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

당당한 표정의 지안이 역시나 비어 있는 결재판을 끌어안고 석한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봐. 팀장님 기분 좋아 보인다니까.”

평소보다 매끈하고 유해진 목소리에 지안의 뒤로 직원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와 내심 기분이 흐뭇했다.

나라서 그런 거야.

너네랑 공유할 목소리는 아니란 걸 잘 알아 두렴.

이미 들어간 석한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좀 전과 다르지 않게 결재판을 끌어안고 사무실로 들어온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또 결재받으러 왔나 봐요?”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결재판을 따라 석한의 시선이 움직였다.

어느새 반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로 다가온 지안의 민첩한 행동에 보기 좋게 휘어졌던 석한의 눈매가
조금씩 커졌다.

좋은 향기가 밀려옴과 동시에 가녀란 필로 목을 부드럽게 감아 오는 그녀의 행동에 석한이 순간 당황한


눈동자로 문을 바라보았다.
“이러려고 온 건데?”

평소보다 몇 배는 야무진 그녀의 눈빛이 똑바로 석한을 파고들었다.

또 사람 미치게 하지.

모양 좋은 석한의 입매가 삐죽 올라갔다.

“내가 이러고 있을까 봐, 아까는 찾아온 거고요?”

“정확히 알고 있네.”

“왜 이렇게 귀여워요?”

“왜? 예쁘기만 한 줄 알았어?”

“선배 나 닮아 가나 봐요.”

“아직은 네가 한 수 위지.”

아닌 거 같은데. 작게 읊조리는 석한의 입술 위로 인내심이 바닥난 지안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입 안을 파고든 그녀의 혀끝에서 밀려드는 달달함이 너무 좋아 적당히 피트된 단정한 치마 안에


감춰진 그녀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가득 움켜잡고 자신에게 바짝 당겼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정신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녀의 달콤한 키스를 받아들이면서도 석한의 시선은 문을


향했다.

“하아…….”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역시나 불안한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는 석한의 모습에 지안이 작게 웃었다.

“야, 오석한…….”

“……네?”

“너 막 나랑 연애하는 거 걸릴까 봐 되게 걱정되나 보다?”

“무슨 소리예요? 난 선배가 오히려…….”

“문 잠갔어.”

아아,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읍…….”

장난은 그만하라는 듯 농염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짧은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옷 위를 더듬어 대는 그의 손길에 지안이 당황해 몸을 움찔거렸다.

그냥 키스만 하려 했는데…… 얘는 지금 대체 어디까지 하려고…….

살짝 벌어진 지안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석한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여린 살결이 비벼지자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당장 옷을 다 벗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격렬한 그의 몸짓에 결국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손이 찰싹
소리를 내며 석한의 등을 쳐 댔다.

“흐읏. 야, 야……!”

“하아. 왜요……. 지금 딱 좋은데.”

지금 너 딱 맞기 좋거든?

“……그러니까, 하아, 누가 시작하래요?”

“야…… 흣, 야!”

예민해진 귓불이 입술 사이로 비벼지는가 싶더니 하얀 목선을 따라 뜨거운 입술이 흘러내렸다.

쪽쪽 빨아 당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온몸 가득 열기가 피어났다.

파닥거리는 지안의 몸짓에 결국 석한이 한 걸음 후퇴하고는 손등으로 타액이 묻어 반짝이는 입술 위를 쓱


하고 문질렀다.

어쩜 입술 한 번 닦았는데 왜 이렇게 치명적이야.

순간 다시 덮칠까? 고민했던 지안이 가빠진 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리고 한 걸음 뒤로 몸을 물렸다.

빙긋 얄궂게 웃는 그를 슬쩍 노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얘기 했어?”

“……윤 상무랑요?”

“어.”

“아까 봤잖아요. 일 얘기.”

“그게 다야?”

“그럼 뭐가 있어요?”

“알았어.”

격하게 온몸을 타고 흐른 그의 손길 덕분에 정신없이 흐트러진 블라우스를 바로 잡으며 지안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둘이 같이 진행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아?”

“네.”

“…….”

“왜요? 하지 말까요?”

저것까지 하지 말라 하면 정말 치졸해 보이겠지.

잠시 고민하던 지안이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을 나름 지어 보였다.


“아니. 상관없어. 일이잖아. 어쩔 수 없지. 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야.”

큭 소리와 함께 석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써 늦었어요.”

“뭐가?”

“이미 되게 상관있는 거 내가 알아 버렸거든요.”

“…….”

“그래서 나 미쳐 버릴 것같이 기분이 좋아요.”

거짓 없이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에 지안의 기분도 한껏 밀려 올라갔다.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괜히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지안이 던지듯 말을 뱉었다.

“윤 상무가 나 보는 눈빛이 곱지 않던데.”

“그렇게 쳐들어와 놓고 곱길 바랐어요?”

“……야.”

윙크는 네가 하고, 말도 안 되게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한 것도 너잖아.

“내가 말하기 전에 눈치채고 알아서 빠져 주면 나야 좋죠.”

“…….”

“왜요. 걱정돼요?”

무언가 석연치 않아 보이는 지안의 얼굴을 그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뭐라고 걱정해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석한의 다독임에도 가볍게 넘기려는 걱정이
지안을 사로잡았다.

일과 엮인 사이. 집안이 엮인 사이.

걱정이 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

그렇다고 양보하기도, 틈을 보이기도, 참기도 싫은데. 어찌해야 하나…….

“너 회사 잘리는 거 아니야?”

“엥?”

석한의 한쪽 눈이 가득 찌푸려졌다.

아, 그건 아닌가?

“선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여기 인수한 게 우리 회사예요.”

아, 맞다.
저 녀석. 대단한 녀석이었지.

“선배가 잘리겠죠.”

“뭐?”

정색하는 지안의 표정에 석한이 소리 내 웃었다.

“잘려도 선배가 잘리지 왜 내가 잘려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

뭔가 되게 분하다.

“야, 나 잘리면 네가 막아야지.”

“왜요?”

“어라? 왜요?”

“난 선배 잘리면 회사 나가지 말라 하고 혼자 독차지하면 되는데. 완전 땡큐죠.”

나 누구랑 내 거 공유하는 거 별로라서요. 역시나 장난스럽게 말하는 석한의 모습에 지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됐고. 걱정돼서 그렇지. 괜히 너 불편한 것도…… 일 틀어지는 것도 싫고…….”

“걱정하지 말아요. 안 틀어져요. 설사 틀어진다고 해도 나한테 좋은 쪽으로 틀어지겠죠.”

나 오석한이에요.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자기애를 뽐내며 빙긋 웃던 석한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내가 다 해결할게요. 그런데…….”

“…….”

“혹여나 그 과정에서 선배가 상처받거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깜빡깜빡 천천히 오르내리는 그녀의 눈꺼풀 안으로 생각이 많았던 눈동자가 금세 맑은 빛을 담았다.

“너 그거 모르는구나?”

가볍고 즐겁게 물어 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석한이 빙긋 입술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뭐가요?”

“너만 잘하면 되는 거.”

“아…….”

잘해. 이 자식아.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다가 혹여나 밖에서 들릴까 봐 막아서는 그녀의 손바닥 사이를 간지럽히며
사라졌다.

손목을 잡고 입술을 가린 그녀의 손바닥을 치운 석한이 그녀의 입술 위로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촉- 촉- 소리를 내며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근데 선배.”

“응?”

“문 잠갔다가, 누가 들어오려다가 잠긴 거 알면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번쩍.

나른하게 감겼던 지안의 눈이 빠르게 떠졌다.

나 왜 그걸 생각 못 한 거지?

이럴 때가 아니야.

“나 나간다!”

“아, 잠깐…….”

키스 한 번 더 하자고 말하며 그녀를 잡으려던 석한의 손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이미 문 앞까지 간


그녀가 문을 힘껏 당겼다.

“히익!”

“엄마야!”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을 가로막는 까만 형체에 지안이 어깨를 들썩임과 동시에 공중을 방황하던 석한의
팔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유 대리! 놀랐잖아! 왜 그렇게 문을 빨리 열어!”

“차, 차장님…….”

정말 심장 멎을 뻔.

“아니. 제가…… 그러니까. 아, 맞아요! 저 사실 화장실이 급해요! 제가 아침에 우유를 많이 마셔서.”

투머치한 그녀의 고백에 박 차장의 당황한 눈빛이 지안에게 닿았다.

“……응? 우유?”

“드, 들어가세요. 팀장님 찾아오신 거죠?”

그럼 날 찾아왔겠냐. 끝까지 헛소리를 퍼 나르는 자신의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어……? 어…….”

정말 누가 보면 화장실이 급한 것처럼 허둥거리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밀려오는 웃음을 꾹 참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박 차장,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나서서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입술을 열었다.

“……네. 팀장님. 유 대리. 급하다며 빨리 가 봐.”

“네!”

그녀가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귀여워 죽겠네.”

“네?”

석한의 혼잣말에 박 차장이 반응하자 여전히 실룩거리는 입술을 챙기며 겨우겨우 진지한 표정을 되찾았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죠?”

뭔가 표정은 진지한데 나사 하나 빠져 보이는 팀장을 이리저리 살피던 박 차장이 물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업무 때문에…… 그런데, 다음에 올까요?”

너 다시 나가고 유지안 들어오라고 해, 라고 말하고픈 걸 꾹 참으며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박 차장의 나름 체계적이고 깔끔한 보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 회사에서 일에만 집중하기 틀린 듯한 느낌이 아주 강하게 다가와 꾹 다문 입술이 줏대 없이


다시 밀려 올라갔다.

정말로 화장실로 도망 온 지안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큰일 날 뻔.”

잠겨 있던 문고리를 박 차장이 돌렸다는 상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와, 유지안. 정신 차리자.”

미쳤다. 진짜 미쳤다.

홀린 듯 그를 덮쳤던 몇 분 전 자신을 강하게 꾸짖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굳은 다짐을 마치고, 혹시나 당황한 것이 티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잖아.

적당히 하자, 유지안.

미쳐도 적당히 미치자.


사랑이 그렇게 좋더냐?

혼자 중얼거리며 오늘 심하게 파이팅 넘쳤던 걸음걸이와는 사뭇 다른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나섰다.

‘혹여나 그 과정에서 선배가 상처받거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복도를 걷던 지안이 그의 말을 떠올리며 옅게 입술을 밀어 올렸다.

나도 우리가 더는 서로 때문에 원하지 않는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속으로 작게 속삭였다.

잘 나가던 지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낯설지 않은 시선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밀려 올라갔던 지안의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사무실에서와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영의 모습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유 대리라고 했나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멈춰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상무님. 유지안 대리입니다.”

유지안 대리.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되새기듯 부른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일이 많을 텐데. 고생이 많네요. 들어가 보세요.”

“아닙니다. 상무님.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유한 듯했지만, 서로를 경계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시선이 공중에 맞닿았다가 흩어졌다.

여자의 촉이라는 게 그녀에게도 있겠지.

아니지, 촉이 예민하지 않은 여자라도 아까 그 상황이면 어느 정도 눈치는 챘겠지.

사무실로 한 걸음씩 옮기는 지안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앞으로 석한과 자신의 사이가 아무 일 없이 그저 그렇게 지나가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욕심인 것
같은 느낌이 물씬 와 닿았다.

하지만 자신도 이제는 쉽게 도망가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그저 좋지 않은 생각은 먼저 하지 않기로 했다.

□ ◆ □ 이아
“나 기다렸죠?”

당당한 인사와 함께 등장한 석한.

오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제 손으로 비밀번호까지 누르고 들어와 제 집인 양 슈트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는 석한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뭐 해요?”

“차 마시려고.”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는 지안의 뒤로 바짝 달라붙은 석한이 지안의 잘록한 허리를 천천히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밥은?”

“대충 먹었어.”

“음. 향기 좋다.”

“선물 받은 허브티야. 향기 좋지?”

“아니. 선배 향기.”

흐음,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간지럽게 숨결을 흩트려 놓더니 말랑한 입술이 하얀 살을 천천히 베어 물었다.

“간지러워.”

어깨를 움찔거리며 투덜거리는 지안의 어깨에 턱을 천천히 기대고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몸은 괜찮아요?”

지안이 작게 소리를 내 웃었다.

자기도 양심은 있나 보다.

어제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더니.

“아니. 안 괜찮아.”

사실 어제 격렬한 밤을 보내고, 회사에서 윤 상무 때문에 예민하게 날을 새웠더니 그 어느 날보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차를 마시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석한이 등장한 상태였다.

석한의 손끝이 지안의 턱 끝에 닿더니 그녀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렸다.

“키스.”

그의 한마디와 함께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던 입술이 한참 동안 지안의 입술을 맛본 후 천천히 떨어졌다.

허리를 감았던 팔을 푼 그가 바짝 붙어 있던 몸을 떼어 내며 지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르듯


어루만졌다.
“오늘은 안 괴롭힐게요.”

진짜야? 하는 눈빛으로 석한을 바라보자 그가 빙긋 웃으며 목덜미에 짧게 키스하고 몸을 떼어 냈다.

“네. 손만 잡고 잘게요.”

역시 안 자고 간다는 소리는 안 한다.

“퍽이나.”

“에에? 내가 뭐 변태예요?”

“알긴 아네.”

“에이. 그건 아니죠. 이렇게 잘생긴 변태가 어디 있어요.”

곧 죽어도 자기 잘난 건 알지.

변태는 아니라며 여러 개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는 그를 바라보았다.

벌어진 셔츠 틈으로 밤새 자신을 끌어안았던 단단한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다듬어진 가슴 근육 아래로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복근을 상상하다가 괜히 밀려오는 민망함에 뜨거운


허브티를 한 모금을 꿀꺽 마셨다.

눈을 떼려 하는데 이게 또 쉽지가 않다.

당당하게 사랑하겠노라 선언하고 나니 생각을 따라 자연스럽게 마음과 몸이 그에게 동한다.

“선배. 이리 와요.”

소파에 앉은 석한이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기댄 채 빙긋 웃었다.

소파에 앉자 자연스럽게 그의 팔이 지안이 몸을 감아 왔다.

“나 할 말 있어요.”

“응.”

몸을 편히 그에게 기대었다.

“윤 상무가 내일 좀 만나자고 연락 왔어요.”

잠시 답이 없던 지안이 입을 열었다.

“왜? 할 말 있대?”

“네.”

“그쪽은 아직도 너한테 마음이 있나 보다.”

“그러게요. 대체 왜 그러지? 이상하네.”

그걸 모르는 네가 더 이상한 거 모르겠니?


사람이 뭐가 빠지고 부족해야 놓아줘도 안 아쉽지.

“그래서?”

“만나지 말까요?”

“왜 나한테 물어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온 그가 이리저리 지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요? 그리고 내가 아무 말 없이 윤 상무 만나면 신경 쓰이지 않겠어요?”

“아…….”

“아?”

순식간에 찌푸려지는 석한의 모습에 지안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 맞아. 신경 쓰여.”

“선배.”

“응?”

“궁금한 게 있는데. 그동안 선배가 나 신경 안 쓴다고 느꼈던 거. 그거 왠지 진짜 같은데.”

늘 궁금했다.

그녀는 자신에 관해 묻지 않는 것이 많았다.

약속이 있다고 해도 그러냐는 짧은 물음이 다였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자신이 꺼내지 않으면 묻지
않았다.

가만히 그에게 안겨 한참을 생각하던 지안이 다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장난스럽게 던진 것 같은 말투였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그 모습이 왜 또 기분이 좋아지는지.

“버릇……인가?”

“……네?”

“아마도 버릇이 된 거 같아. 그저 너와의 애매한 관계에서 신경을 쓰지 않는 쪽이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괜한 오해로 뒤죽박죽 섞여 버린 과거가 싫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해서인 거
같기도 해.”

“…….”

“내가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최고의 선택. 그렇지 않았겠어?”

엉켜 있던 서로의 마음이 풀어지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더 많이 다쳤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시간이 아까워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석한이 지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가 윤 상무를 만난다는 게 선배에게 상처가 된다면 안 만날게요.”

“응. 만나지 마.”

고민의 여지도 없이 답하는 지안의 모습에 석한이 피식 웃었다.

“장난이야. 만나.”

또 다른 지안의 대답에 석한이 얼굴 위 웃음을 지웠다.

“내가 아주 악랄하지 못해서, 나 때문에 너 곤란한 건 아직 못 보겠다.”

“…….”

“피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최대한 잘 정리해.”

“…….”

대답하지 않는 석한을 흘깃 바라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 정리할 생각이 없는 거야?”

“무슨 소리예요! 시작한 게 없어서 뭘 정리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다고요!”

역시 윤 상무는 아닌데 본인은 시작한 게 없다고 하는 그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단순한 게 또 저럴 때는 좋네.

그녀를 감고 있던 석한의 팔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같이 갈래요?”

그의 말에 지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그럼 선배지 누구예요?”

“아니. 내가 왜?”

“…….”

“뺨을 맞든 물을 뒤집어쓰든 너 혼자 해.”

내가 미쳤니? 읊조리는 지안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와…….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큭큭 소리 내 웃던 지안이 천천히 석한의 목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마주한 눈동자로 그의 눈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그럼 나 거기 가서 머리채 잡아도 되는 거야?”

“……네?”

“믿어.”

“…….”

“질투는 하겠지만, 의심은 안 할게. 난 지금은 그냥 둘이 행복하고 싶어. 지나간 시간도 아깝고. 그러니
우리 사이에 필요 없는 일들 네가 잘 해결할 거라고 믿어.”

둘 사이 공간을 없애고 짧게 맞닿고 떨어지는 그녀의 입술 감촉에 잠시 내렸던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들이마실 때마다 몸속으로 스미는 그녀의 향기에, 몸에 닿은 그녀의 온기에, 자신만을 향하는 거짓 없는
눈빛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차올랐다.

“네. 선배는 나만 믿어요.”

“그래.”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가 너무 예뻐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여전히 행복하게 미소 짓는 그녀.

그녀를 살피던 석한이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앞으로 어떻게 더 행복하게 해 주지?”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자신은 모든 것이 행복이지만, 그녀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행복을 주고 싶다.

사람이 이런 것도 욕심낼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의 인식.

그런 깨달음마저 석한에겐 행복이었다.

푸시시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지안이 또로록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술을 느릿하게 밀어 올렸다.

“같이 씻을까?”

누가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치더라도 이렇게 멍해지지 않을 거 같았다.

예상치 못한 지안의 공격(?)에 잠시 나갔던 정신을 재빨리 끌어오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배. 지금…….”

“따뜻한 물에 몸 푹 담그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서. 엄마야!”

“그렇게 담그고 싶으면 담가야죠.”

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내동댕이칠 건 없잖아…….

품 안의 자신을 던지듯 소파 구석에 밀어놓고 이미 욕실로 들어가 버린 석한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퍼지는 저 너머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행복…… 뭐 별거 있나.

자신의 한마디에 저렇게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지금은 그거면 됐다.

6.

“선배. 빨리 와요.”

살짝 열린 욕실 문틈으로 뿌연 수증기와 함께 밝은 목소리가 밀려왔다.

괜히 같이 씻자고 해 놓고 왜 민망한지.

결국, 기다리다 못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탄탄하게 잘 다듬어진 상체가 반쯤 밀려 나왔다.

“선배!”

“알았어. 갈게.”

다 벗고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바지만 벗은 채 욕실을 향했다.

“빨리…….”

이미 찰랑찰랑한 물속으로 몸을 앉히고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말을 멈추었다.

허벅지 위쪽까지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는 셔츠 아래로 매끈하고 하얀 그녀의 다리가 빠르게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을 향해 걸어올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셔츠에 마음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아- 이런 것도 다 행복이구나.

모든 눈이 유지안 맞춤으로 변해 버린 석한이 셔츠 단추를 푸르며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지안을 향해


빠르게 손을 뻗었다.

풍덩.

“꺄아악! 야! 뭐 하는!”

“누구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뭐래! 너야말로 나 죽이려고 그런 거 아니고?

어푸어푸- 얼굴에 튀어 버린 물방울들을 닦아 내며 그를 흘깃 노려보았다.

허리를 가득 끌어안는 동작에 지안의 등이 그의 가슴과 바짝 맞닿았다.


“내가 도와줄게요.”

굳이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솔선수범하며 지안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석한의 손동작이 그 어느 때보다
목적에 충실하고 아주 빠르다.

“용케 안 찢는다.”

“비싸 보여서요.”

웃음이 또 터졌다.

욕실 안에 듣기 좋게 울리던 소리가 금세 사라졌다.

물기가 가득 묻은 셔츠가 축축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물과 함께 자신의 몸 위를 유영하는 능숙한 손놀림에 축축한 숨결이 공중에 퍼졌다.

남아 있던 속옷이 물속에서 모조리 벗겨졌다.

“흐으응.”

물기 묻은 손바닥이 볼록한 가슴을 감싸고 톡 튀어나온 핑크빛 돌기를 손가락 끝으로 빙빙 돌리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아…… 안 한다며…….”

“안 해요…….”

거짓말.

이미 잘록한 허리선을 타고 아래로 점점 내려오는 손에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허벅지 안을 파고들어 여린 허벅지 속살을 만지작만지작하는 손길이 꽤 자극적이다.

위아래로 지분거리는 손길에 어디에 신경을 쏟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축축한 신음을 뱉었다.

“흐읏…… 정, 정말?”

안 할 거니?

뒷말을 이어 가려다가 신음이 터졌다.

따스한 물속에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러워진 속살을 가르고 밀려들어 왔다.

잔뜩 데워진 그의 숨결이 귓가에 와 닿았다.

“선배가 안 원하면…… 흐, 안 해요.”

“야…….”

“그런데…… 아마 안 되겠죠?”

“하앗…… 서, 석한아…… 흣.”

선배가 아마 원할 거야. 꾹 다물어졌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빙빙 돌리는 손길에 허리가 활처럼 순식간에 휘어졌다.

수면 아래 숨겨졌던 풍만한 가슴이 순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풍덩 물속으로 들어갔다.

느릿느릿 제 안에서 움직이는 야릇한 움직임과 따뜻하게 감싸 오는 물의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아 숨이 차올랐다.

엉덩이 아래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단단한 물건이 찌를 듯 살결에 맞닿아 비벼지자 석한이 작게
신음하며 뜨겁게 숨을 토했다.

찰박찰박.

쾌락을 심어 주는 움직임과 그 쾌락에 춤추듯 비틀리는 몸이 만들어 내는 야릇한 움직임에 찰랑이는


물결이 정신없이 뒤엉킨 살 위로 부딪혔다.

“흐응…… 흐읏, 흣…….”

보이지는 않지만 끈적한 액체가 쉼 없이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맞닿은 물이 달아오른 몸보다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해도…… 돼요?”

정신없는 와중에 물어 오는 그가 원망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신음을 토하던 그녀가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하아, 넣을게요.”

“……흐읏.”

대답도 하기 전에 물속의 몸이 아주 쉽게 들리더니 금세 몸이 내려앉았다.

“하앗…… 흐응.”

물보라 치는 욕조 안에서 그가 깊게 파고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살결 위로 그가 쉼 없이 입을 맞추며 잔뜩 솟아오른 유두 끝을 강하게 움켜잡고 비틀었다.

“하아. 선배. 너무 좋아.”

“으읏. 자, 잠깐만…….”

“움직여요. 선배…… 흣.”

지안의 골반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손바닥이 허리를 감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에 전기가 들어온 것처럼 짜릿함이 번졌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녀의 손이 욕조 난간을 세게 잡았다.

“흐응…… 흐읏.”

“더 세게…… 더, 선배…….”
허리가 정신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짧고 강한 움직임에 이리저리 튀는 물방울이 살결 위로 떨어져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울림이 큰 욕실에 자극적으로 크게 번지는 자신의 신음이 민망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좁은 욕조에 몸이 툭툭 부딪히자 나른해졌던 석한의 눈매가 가득 구겨졌다.

“안 되겠어요.”

“흣…….”

몸을 가득 채웠던 그가 쑥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꺄악!”

번쩍 가볍게 지안을 품에 안아 든 그가 성큼성큼 욕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른 몸 위로 차가운 공기가 맞닿아 그를 꼭 끌어안은 지안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야……! 씻어야지!”

“하루 안 씻는다고 안 죽어요.”

온몸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흘러 떨어지는 것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장착한 그가 가볍게 지안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성큼 위로 올라와 우위를


점령했다.

“야, 침대 젖…….”

거칠고 험난한 사냥을 마친 맹수처럼 눈앞의 먹이를 단숨에 잡아먹을 듯한 표정과 눈빛에, 지금 침대가
젖고 있는 것 따위는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다.

“근데 지금 안 하면 내가 죽을 거 같아요.”

“흐읏…….”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릴 듯 강하게 입술을 겹치고 그녀의 숨결을 단숨에 빼앗았다.

그녀의 몸 위에 맺혀 있는 촉촉한 물방울을 모두 삼켜 버릴 것처럼 온몸을 물고 빨고 혀끝으로 핥아 댔다.

비틀리는 몸 위로 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릴 때마다 맑은 물방울이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하아…… 석한아…….”

그녀의 뜨거운 몸속을 다시 강하게 파고들었다.

이미 한 번 달아오른 몸은 하나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애액이 흥건히 흘러나오는 부들부들한 살결 위로 단단한 살결이 밀착되어 부딪힐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욕조 안 가득 담긴 물결이 뒤섞이듯 침대 위 뜨거운 공기가 정신없이 뒤엉키고 흐트러졌다.

누구의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번져 나가고, 이제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미끈거리는 몸을 혹여나


놓칠까 봐 서로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 ◆ □ 이아

외부 회의를 가는 석한 덕에 오랜만에 홀로 출근길에 올랐다.

늘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의 차가 보이지 않자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져 황당함에 얼굴 위로 웃음을


띠었다.

“언제부터 이랬다고.”

길들여진다는 것.

‘네가 오후 4 시에 온다면 난 3 시부터 행복해지겠지.’

어린 왕자의 한 구절처럼 그랬다.

아침마다 행복하고 설렜다.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행복이 너무 커 어떤 날은 눈이 시릴 정도로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침부터 왜 이래.”

말도 안 되게 감성적인 자신의 상태에 민망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유 대리. 안녕하세요.”

회사 1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지안에게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입술은 밀어 올렸지만, 눈은 전혀 그녀가 반갑지 않은 기색이 가득했다.

시선을 피하고 정면을 바라보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팀장한테 들었어요.”

지안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했기에 한산한 회사 로비.


“네.”

더는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실 석한이 서영을 만나고 온 날에도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애써 그녀에게 무언가 티를 내거나 이야기하고 싶지도, 그리고 그녀의 존재가 중요하지도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애써 무시했던 지안의 눈빛이 서영에게 닿았다.

“저랑요?”

“네. 유지안 대리랑.”

“…….”

“지금은 그렇고 저녁에 시간 되나요?”

묘하게 다가오는 눈빛에 꽤 적대감이 들어가 있음이 느껴졌다.

“네. 괜찮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7 시 괜찮아요? 회사 앞은 좀 그렇고 다른 데로 갔으면 하는데. 주차장에서 만날까요?”

“네. 알겠습니다.”

희미하게 미소를 얹은 서영이 잠시 멈칫거리다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오 팀장이 몰랐으면 해요. 우리 만남.”

“…….”

왜냐고 물으려다가 그녀의 입장이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먼저 올라가세요. 상무님. 저는 커피 한 잔 사 가야겠네요.”

“네. 그럴게요.”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1 층 로비 카페를 향했다.

급 카페인이 강하게 필요한 기분.

투 샷을 추가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지안이 커피를 기다리며 잠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혀 있지 않던 눈동자가 순간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진지한 표정으로 통화 연결 음을 들으며 야무지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침부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달달한 커피를 시키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아, 이게 아니지.

-선배. 어디예요?

입술을 열던 지안이 다시금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를 귀에 담고 멈칫거렸다.

“응. 회사야.”

-아침부터 못 봐서 우울하네. 선배는 안 그래요?

“응? 아, 나도 그래.”

-근데 왜 영혼이 없게 느껴지지?

“아니야. 나도 보고 싶어.”

-선배, 로봇이에요? 나는 진심으로 보고 싶은데.

자꾸 말을 하려는데 달콤한 말을 쏟아 내는 석한 덕분에 결국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렀다.

-좋아서 웃는 거 맞죠?

“응. 그래. 너무 좋다. 아주 좋아 죽겠다.”

-회사예요?

“응. 방금 왔어. 이제 올라가려고.”

-나 오후에 들어가니 그때 봐요. 알겠죠?

“어. 그래.”

갑자기 전화를 끊으려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게 아니지!

-그럼 끊어…….

“야! 잠깐만!”

-네? 네. 듣고 있어요. 말해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고민 없이 말을 뱉었다.

“오늘 저녁 7 시. 회사 주차장에서 만나.”

-주차장이요?
“응.”

-데이트하는 거예요?

한껏 들뜬 석한의 목소리에 지안의 입술이 미세하게 밀려 올라갔다.

“응. 데이트. 하자.”

아주 흥미진진한 데이트가 될 것 같다.

□ ◆ □

“이게 대체…….”

“저, 유 대리…….”

당황한 두 시선 앞에 여유로운 건 지안뿐이었다.

‘길들여진다는 건 사이가 좋아진다는 뜻이야. 너는 내게 있어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는 거고. 서로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

완벽하게 길들여지는 걸 공유할 생각 따윈 없어.

그러니 확실히 끊어야지.

“유 대리.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날이 선 서영의 목소리에 지안이 비스듬히 입술을 밀어 올렸다.

“저랑 상무님이랑 해야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아서요. 두 분이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나셨나 하는 생각에


제가 오 팀장님 불렀어요.”

“선…… 아니 유 대리. 이게 대체…….”

“너 말 제대로 안 했어?”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지안의 목소리에 석한의 미간이 가득 찌푸려졌다.

“안 그러면 왜 윤 상무님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실까?”

찌푸린 눈매 안에 석한의 시선이 서영에게 닿았다.

“윤 상무님. 이게 대체…….”

“되게 쉬운가 봐요. 유 대리는.”

서영의 말에 지안의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지금 나랑 오 팀장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봐요.”

“얼마나 중요한데요?”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네 발끝의 때만큼으로도 안 보는 나를 불러 낸 건데?

“집안끼리 오고 간 이야기예요. 비즈니스적인 차원의 일이기도 하고요.”

“아아.”

“윤 상무. 그만해요. 그건…….”

석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안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집안끼리 오고 가고 비즈니스 차원의 일인 이야기를 왜 저랑 하시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그냥 두 분이 잘 이야기하세요. 나 간다.”

빠르게 두 사람을 등지고 몸을 돌리는 지안의 손목을 석한이 재빨리 잡았다.

“같이 가요. 더 할 말 없어요.”

흘깃 석한에게 닿았던 지안의 시선이 서영에게로 옮겨 갔다.

“윤 상무님은 할 말 있으신 거 같은데?”

석한의 차가운 시선이 서영에게 닿자 서영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없다고 하시네요. 가요.”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서영을 한 번 더 바라본 석한이 걸음을 옮겼다.

손목을 당기는 그에게 이끌려 그의 차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서영을 바라보았다.

운전석에 올라탄 석한이 말없이 빠르게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퇴근 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에 차가 정차하자 석한이 고개를 돌려 지안을 바라보았다.

“밥 뭐 먹을래요?”

“순대 볶음. 엄청 매운 거로.”

풉 소리와 함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운 거 엄청 당긴다.”

“괜찮아요?”

“어.”

“진짜로요?”
“어.”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롯이 자신을 담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니 잠시 밀려왔던 짜증이 훅 밀려 내려갔다.

“너 곤란한 일 안 하려고 했는데. 먼저 건드린 거야.”

“알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내 탓 하지 마.”

“선배가 나 떠나는 거 아니면 선배 탓할 거 없어요. 더한 행동 해도 괜찮아요.”

“…….”

한참을 앞만 바라보던 석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약혼 못 한다고 말했고, 일하는 데 서로 불편하지 않게 행동하자고 말했어요. 물론 그다음 날 윤 상무네


집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가 왔고요.”

“…….”

“집에도 내가 제대로 말해 뒀으니 이제 별말 안 할 거예요. 만나는 사람 있다고 확실히 말했으니까.”

한 박자 늦게 지안이 물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예요?”

“집에서는 뭐라고 그래?”

서영의 이야기를 할 때는 변화 없던 지안의 눈동자가 약간의 불안함을 얹은 채 석한에게 닿았다.

“집에서는 무조건 제 편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고.”

“뭐가 그럴 수밖에 없어.”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편안한 말투로 달래듯 이야기를 마친 석한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왜 웃어?”

“근데 의외다.”

“……뭐가?”

“그냥 다요. 선배가 그 자리에 나 부른 것도. 또 윤 상무한테 그렇게 말한 것도.”

“그동안 내가 꽤 답답해 보였겠지. 근데 나도 이제는 더 못 참아.”

이제 앓느니 죽지.
더는 못 한다.

콧등을 찡그리던 지안의 머리 위를 석한의 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잘했어요.”

한층 차분해진 지안의 눈동자가 석한에게 닿았다.

“이제 나도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무슨 걱정?”

“뻔하죠. 선배가 나한테서 도망칠 걱정.”

“무섭다고 도망가지나 마.”

역시 매력 터져. 석한의 웃음소리가 다시 차 안을 채웠다.

□ ◆ □

아무 일 없는 평온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다만 갑작스럽게 진행된 신사업으로 회사 일에 치여서 그저 정신이 없었을 뿐.

지안도 바빴지만, 석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잦은 출장과 회의 일정으로 회사 밖에서는 밤늦게 얼굴을 볼 수 있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얼굴을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유 대리. 회의실 정리됐어?”

“네. 거의 다 됐어요. 지금 회의 자료만 가져다 놓으면 끝나요.”

“수고했어.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준비한 회의 자료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향했다.

원래 지안의 업무가 아니었지만, 출산 휴가를 들어간 직원을 대신해 맡았기에 혹여나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을 가득 안고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쳤다.

“이제 다 됐나?”

회의실 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지안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이제 임원들 오려나? 작게 읊조리던 지안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회의실로 들어오던 서영이 걸음을 멈추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또각또각 다시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고 서영이 자리에 앉아 준비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아주 얼어 죽겠네. 얼어 죽겠어.

시베리아 벌판에 불어오는 잔인하게 차가운 바람처럼 냉랭한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 느껴져
나머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잘 지내죠?”

예상치 못한 의아한 물음에 지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보시다시피요.”

“그래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다시 고개를 숙여 테이블 위에 남은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 팀장은 출장 갔죠?”

“네.”

나 오 팀장 비서 아니야. 나한테 쓸데없는 말 묻지 마.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머금으려고 했지만 날카로워지는 눈빛은 감추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아까 오 팀장이랑 통화했어요.”

하아- 너 너무 투머치야.

그런 정보 줄 필요 없어.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일 때문에 만나는 것까지 저한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요?”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날 말씀드린 대로 그냥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세요.”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 거 알아요?”

참았던 인내심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모르겠거든요?

날이 선 눈빛이 서영에게 닿았다.

“그럴게요. 나랑 오 팀장 일이니.”

“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짜증 나는 대화가 종료되고 회의실을 나왔다.

역시 한 군데도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여자다.

잠시 석한에게 전화할까 고민하며 핸드폰을 들었던 지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이제는 질투도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지금 올라가는 길이에요. 근데 회의가 바로 있어서. 일찍 끝나면 연락할게요.

석한과 통화를 마치고 퇴근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며칠째야.”

며칠 동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못했다.

능력 있는 애인을 가진 여자란 이런 건가.

행복하다고 해야겠지?

띠링.

애써 입술을 끌어 올린 지안이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본 지안의 얼굴이 말도 안 되게 찌푸려졌다.

[윤서영이에요. 지금 호텔에서 오 팀장 만나기로 했어요.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길래 그러려고요.]

“호텔? 뭐야? 이 미친 여자는?”

대체 뭘 해결하겠다고?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 거 알아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대체 무슨 뜻이야.

띠링.

다시 한 번 더 울리는 핸드폰에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H 호텔. 1203 호.]

순간 온몸이 후끈거릴 정도로 열기가 뻗쳐올랐다.

이 미친 여자 나랑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석한의 번호를 꾹 눌렀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를 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석한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히 자신을 열 받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이런 데 휘말리지 말자.”

어차피 석한은 관심조차 없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근데 관심은 없는데 왜 호텔에서 만나? 그것도 룸에서?”

첫 번째 문자에는 당연히 레스토랑이나 이런 곳에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문자를 보니


기분이 훅 나빠졌다.

왜 하필 배터리도 나가서.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기분 나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눈빛으로 서영이 보낸


문자를 노려보았다.

회사를 나와 버스를 타지 않고 밤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H 호텔이 어디더라?’

핸드폰을 열어 호텔 위치를 파악했다.

“에이. 아니야. 뭐 하러 가.”

나 그렇게 의심 많고, 남의 말에 훅 속아 넘어가는 여자 아니야.

□ ◆ □

눈앞의 H 호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나 지금 뭐 하냐.”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거리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찾아가면. 그리고 문 두드리면. 누가 열어 주나?

그냥 돌아가자 마음 여러 번 먹었지만, 끝끝내 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고민이 가득 담겼던 눈동자가 순간 번쩍였다.

“어…….”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직원에게 키를 맡기고 들어가는 석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다급한 발걸음으로.

살짝 벌어졌던 지안의 입술이 굳게 꾹 다물렸다.

들어가기 전에 물어야 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렀던 지안의 발이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호텔 문을 지나 저 멀리 석한의 모습이 보여 그를 크게 부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에 그가 올라타고 빠르게 문이 닫혀 버렸다.

[12 층.]

서영의 말대로 같은 층수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당장 가서 잡아 와야지.

눈을 번쩍이며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초조한 마음과 다르게 왜 이리 엘리베이터 속도는 느린지.

속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 유 대리님!”

옮기려던 발걸음이 자리에 멈추었다.

왜 하필 지금 만나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자신을 향해 밝게 웃는 사람의 모습에 작은 한숨이 흘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잘 지내셨죠?”

아마도 다음 광고 관련 업무를 함께 진행해야 할, 어쩌면 관계를 잘 이어 나가야 할 중요한 업체의


직원이었다.

“저야 잘 지내죠. 유 대리님. 얼굴 좋아 보이네요. 좋은 일 있어요?”

나? 지금? 이 얼굴이? 나 되게 속 타고 있거든?

남의 속도 모르고 너무 반가워하며 자신을 반기는 모습에 차마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기가 뭐해서 애써


입술을 끌어 올렸다.

“지난번에 회사로 안 차장 연락 와서 이번에는 확답 주지 못하겠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이야기예요?”


“아…… 그래요? 저도 확실히 들은 게 없어서요.”

“유 대리님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혹시 들은 거 없어요?”

분명히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하니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팀장님, 그건 제가 회사 가서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럴래요? 아, 맞다. 그리고 김 대리 결혼했다면서요?”

“네. 지금 신혼여행 갔어요.”

“결혼식도 못 가 보고 미안하네. 맞다. 그리고…….”

결국, 차갑게 잘라 내지 못하고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사실 약속이 있다며 미안하다고 떠나는 직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더 바빴거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12 층을 꾹 눌렀다.

괜한 긴장감에 자연스럽게 내쉬던 숨이 무언가에 꾹 눌린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1203 호.

그녀가 이야기했던 룸 앞에 서서 벨을 향해 나아가던 지안의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질투는 해도 의심은 하지 않겠다고 그에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공중에 멈추어 있던 지안의 손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선배는 나만 믿어요.’

수없이 그가 자신을 향해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그를, 또 그 말을 믿은 적이 있었던가?

쓴웃음을 지었다.

“회의한다잖아. 회의.”

호텔에서도 룸 잡고 장시간 회의를 진행한다는 것을 지안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조금 남아 있는 불안함 때문일 것이다.

‘믿어. 믿으라잖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을 마주 선 지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벌컥.
“악! 깜짝이야!”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림과 동시에 지안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썩였다.

순식간에 고개를 돌렸다.

“어…… 선배…….”

슈트 재킷을 손에 든 석한이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얼굴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어수선하게 반쯤 풀려 내려온 넥타이. 두세 개쯤 풀려 있는 단추. 그리고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

문이 열린 틈 사이로 침대 위에 야릇한 캐미솔 차림으로 널브러져 있는 서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 ◆ □ 이아

30 분 전.

“아, 늦었네.”

호텔 앞에 도착한 석한이 재빨리 차 키를 직원에게 맡기고 급한 걸음으로 호텔로 들어갔다.

‘오늘 회의가 길어질 거 같아서 호텔에서 김 팀장이랑 만나기로 했어요.’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 늦어진다는 연락도 하지 못한 터라 그저 정신없이 호텔 룸을 향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빠르게 문이 열렸다.

“오 팀장, 왔어요?”

방긋 웃으며 문을 열어 주는 서영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다시 한번


서영의 얼굴에 번졌다.

“김 팀장은요?”

“들어오세요. 차가 많이 막혔나 봐요?”

“네. 죄송합니다. 조금 늦어서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을 살펴보았다.


김 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석한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 찼다.

“김 팀장. 늦나 봅니다?”

느릿한 걸음으로 호텔 창문 앞에 놓인 테이블로 다가가는 서영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윤 상무님. 술 마셨어요?”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 병과 잔에 석한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이쯤 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회의가 길게 이어질 만한 사안도 아니었음에, 굳이 호텔을 고집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오늘 김 팀장 안 와요.”

“……무슨 소립니까?”

“내가 오늘 오 팀장이랑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

붉은 립스틱이 선명하게 묻어 있는 위스키 잔 위로 그녀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예요?”

몸을 돌려 조금 전 벗은 재킷을 향해 손을 뻗던 석한이 다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이야기는 끝난 거 같은데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저랑 윤 상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똑바로 알아들으라는 듯 단단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를 흘렸다.

탁 하고 잔이 테이블 위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천천히 석한을 향해 걸어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가 모조리 사라진 석한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마주 섰다.

“그 말 나한테 믿으라는 거예요?”

집요하게 파고드는 눈빛과 목소리에 석한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영 씨…….”

“나에게는 네가 성적 매력이 없다, 나랑 결혼하면 평생 후회할 거다, 잠자리 없는 삶을 평생 살고 싶으면


나랑 결혼해라. 겨우 이게 핑계예요?”

“적당히 해요.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겁니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인 석한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오 팀장이 모르나 본데. 다른 남자들은 나 한번 어떻게 해 보려고 안 해 본 짓이 없을 지경인데. 나랑


자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면서요.”

기가 찬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아무 답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요.”

발아래 시선을 두었던 석한의 눈이 점점 커졌다.

찌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원피스.

“윤 상무! 지금 뭐 하는!”

속이 훤히 비치는 야릇한 실크 캐미솔 아래 하얀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시선을 피하자 순식간에 자신의 목을 감고 매달려 오는 서영의 행동에 가슴 위로 물컹한 촉감과 함께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어! 어!”

등 뒤에 닿는 폭신한 감각과 함께 침대에 쓰러진 석한의 위로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며 엎드린 서영이


천천히 입술을 밀어 올렸다.

일부러 몸을 바짝 붙여 오자 몸을 일으키려던 석한이 다시 한번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남자들은 다 아니라고 말해도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오면 결국 넘어와.”

“…….”

“흥분 안 한다고? 정말 이래도?”

단단한 허벅지 사이로 삭제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으며 숨결이 맞닿을 거리까지 석한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너도 어쩔 수 없어. 자신만만한 눈빛을 머금고 과감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

잠시 당황스러움을 담았던 석한의 눈동자가 더없이 차분해졌다.

자신의 허리춤에서부터 가슴까지 야릇하게 더듬어 오는 그녀의 행동에 큭 하고 웃음이 나왔다.

큭 소리와 함께 석한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 내며 입술을 겹칠 듯 달려들던 서영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머금은 석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영의 자신만만하던 눈매가 천천히 찌푸려지고, 유혹하려는 듯 몽롱함을 담았던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다시 한번 석한이 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완벽히 구겨진 그녀의 얼굴.

“왜, 자신만만하더니 자존심 상해?”

“뭐……? 꺄악!”

거칠게 몸을 일으키며 더러운 것을 치워 내듯 밀어내는 석한의 동작에 서영의 몸이 침대 위로 털썩


떨어졌다.

“아, 짜증 나.”
좌우로 목을 천천히 흔드는 석한의 행동에 으드득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참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짜증 나네.”

몸을 벌떡 일으킨 서영이 분해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석한을 노려보았다.

“그냥 서로 좋은 일 아니야? 오석한 지금 나한테 이러고 후회 안 할 거 같아? 꺄악!”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석한이 그녀의 위에 올라타 그녀의 두 팔을 올려 침대 위로 결박했다.

서영이 순간 숨을 삼켰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섭게 꽂히는 그의 눈빛에 날카로운 말을 뱉었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비웃던 석한의 한쪽 입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후회? 지금 후회라고 그랬어?”

“…….”

“너 내가 너희 부모님 얼굴 봐서 참아 주니까, 이제 내가 우습지?”

“…….”

“윤서영. 말해 봐. 내가 우스워?”

다물렸던 입술이 부르르 떨려 왔다.

“내가 똑바로 얘기해 줄게. 잘 들어.”

“…….”

“네가 아무리 홀딱 벗고 나한테 덤벼도, 넌 안 돼.”

“…….”

“제대로 말해 줄까? 너한테 안 선다고. 알겠어?”

“으윽…….”

손목을 강하게 쥐어 잡고 몸을 눌러 오는 석한의 행동에 서영이 신음을 흘렸다.

“윤서영. 잘 들어. 이제 비즈니스고 나발이고 다 끝이야. 이유가 뭔지 네가 잘 알겠지?”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강하게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패대기치듯 침대 위로 던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 위에 벗어 놓은 슈트 재킷을 신경질적으로 잡은 석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했다.

□ ◆ □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지안의 모습에 당황한 석한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지안의 시선이 다시 침대 위 서영에게 닿았다.

야릇한 복장의 서영과 잔뜩 흐트러진 석한의 옷과 머리.

“야. 지금 이게…….”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에 지안이 말을 멈추고 석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마 오석한. 너…….

“일단 가요. 가서 설명할게요.”

“야, 잠깐…….”

“가요. 빨리…….”

“잠깐 놔 보라고! 너 설마…….”

쫘악.

날카로운 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졌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석한의 얼굴 방향이 틀어졌다.

순간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애인이라면 귀싸대기를 한 대 쳐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한 지안이었다.

어느새 자신과 석한에게 다가와 차진 소리를 파생시키며 손바닥을 세게 휘두른 서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지. 이 선빵은?’

내가 쳐야 하는 거 아니야?

뭔가 상황이 아주 거꾸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에 서영의 입술 사이로 짓눌렸지만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고자 새끼!”

지안의 미간이 가득 찌푸려졌다.

강한 마찰에 잔뜩 붉어진 뺨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석한이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서영을


바라보았다.

“넌 남자도 아니야. 이 새끼야!”

쾅.

문이 닫혔다.

“…….”
“…….”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야…… 대체…….”

“하아…….”

큰 한숨을 내쉰 석한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넋 나간 눈빛으로 자신과 꼭 닫힌 문을 번갈아 바라보는 지안을


바라보았다.

“참 나…….”

말을 이으려던 지안이 황당함에 옅은 웃음을 짓는 석한을 바라보았다.

“하아. 미안해요. 일단 여기서 나가요.”

“어……? 어.”

빠르게 다가온 손이 지안의 손목을 꼭 잡았고, 이어진 빠른 걸음에 그를 따라 호텔을 나왔다.

차에 올라타서 여전히 붉은 석한의 뺨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시동을 거는 석한의 모습에 묻고 싶은 말이 속에서 쏟아 나왔지만 일단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닫았다.

석한의 차가 지안의 집을 향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지안이 석한의 앞에 바짝 마주 섰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아…….”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지 석한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많이 기다려 주었다는 생각이 든 지안이 진지한 눈빛으로 석한을 응시했다.

지안과 눈이 마주치자 작은 한숨을 내쉰 석한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해요. 오해했겠다.”

“어. 아주 많이.”

“…….”

“호텔에는 대체 왜 간 거야? 너랑 윤서영이랑 호텔에서 할 게 뭐가 있어?”

“회의요. 김 팀장이랑 같이 회의하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윤…… 아니 그 이상한 여자가…….”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와 말투로 석한이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그도 모르고 갔다가 된통 뒤집어썼다는 이야기.

황당은 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지안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정신없이 변하는 지안의 표정을 살폈다.

“선배. 오해한 거 아니죠?”

“그런데 대체…… 참 나…….”

황당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그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던 지안이 느릿하게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그 여자가 그러는 거야?”

“미안해요. 선배 화내는 거 당연해요. 내가 제대로 확실히 말해야 했는데.”

“아니. 그 여자가 정신이 나간 건 맞지만. 너한테 흥분 안 돼! 그게 그 여자 도발하겠다는 뜻이지 약혼


거절의 뜻이야?”

그냥 평범한 여자라도 열 받을 텐데, 그 가진 거 다 가진 여자가 그 의미를 순하게 받아들였을 리가


난무했다.

믿으라더니 이거 영 불안하다.

따져 묻는 지안의 행동에도 석한은 한참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 여자가 덮쳤다고 하니 대체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 상상하기 싫은 그림이 머리를 채우려고
하는데 석한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점점 참을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오석한.”

“하아…….”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가 큰 한숨을 지었다.

“야. 한숨 쉬고 싶은 사람은 나야.”

“그전에 말했어요. 약혼하지 않는 이유.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했고 일로 얽힐 때


불편함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 후에도 계속 집안을 통해서 연락이 와서.”

“그래서 너한테 흥분 안 했다고 한 거라고?”

그게 정말 최선이니?

지안이 보기에는 정말 그녀의 집요함을 더 건드리고 남을 만한 대화 방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 그렇게 단편적인 이야기를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지안을 바라보는 석한의 눈빛이 퍽 고요했다.

입술을 꾹 눌러 물고 있던 석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이니까.”

“사실? 무슨 소리야.”

“사실이라고요. 그 여자한테 흥분 안 한다고요.”


마치 너에게는 흥분이 되기 때문이야, 라고 해석이 되는 그의 말에 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 여자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한테도. 아무한테도 안 해요.”

“……뭐?”

“유지안. 내가 반응하는 여자가 오로지 유지안뿐이라고요.”

대체 무슨 소리야.

한참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던 지안이 흘깃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거지?”

사랑하기 때문에 너만 안고 싶고 너에게 반응한다, 이런 맥락의 낭만적인 이야기.

나도 그래, 라고 답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는 사이 석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사랑도 해요. 당연히. 그런데 처음부터…… 처음부터 유지안 아니면 안 됐다고요. 이해하겠어요?”

하아- 말 안 하고 싶었는데. 원망스러운 말을 이으며 그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손끝에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처럼 흐트러졌던 그의 시선이 박힐 듯 강하게 지안에게 내려앉았다.

“아니. 무슨 소리야, 대체.”

“선배 나한테만 흥분한다면서요. 나도 그렇다고요.”

“진짜 무슨 소리야. 장난하지 말고.”

자신이 너무 따져 물어서 저러나 싶어 지안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난 내가 무성욕자인 줄 알았어요.”

“……뭐?”

“선배를 만나기 딱 하루 전까지만.”

□ ◆ □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꽃이 화창하게 피어 있는, 신입생에게는 그저 기분 좋았던 봄날이었다.

동기들과 떼를 지어 강의실을 향하던 중 동기 한 명이 스치듯 지나가는 한 여자 선배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그저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솜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뛰어 왔다.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얼핏 옅은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끌려드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의 강한 끌림에 순간 당혹감이


몰려왔다.

“뭐야…….”

그날 이후 우연히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이 말도 안 되는 감각이 계속되었다.

점점 지나치면 지나쳤지, 그 강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과 낯선 감정에 그저 관심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보면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뛰는 가슴이 화가 나서 뛰는 것인지, 그녀에 관한 관심 때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그저 평온했던 하루가 그녀를 마주한 날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뒤죽박죽 뒤섞여 버렸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석한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녀를 피했다.

그렇게 그녀를 마주하지 않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우산 없어? 같이 쓸래?”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온 그녀의 모습에 숨이 멈춘 것만 같았다.

“역까지 가지? 데려다줄게.”

“……네.”

후두둑 우산 위를 정신없이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스치는 어깨 끝과 촉촉한 공기를 타고 밀려드는 그녀의 향기.

찰박찰박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튀어 오른 물방울과 우산을 타고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비에 젖은 몸처럼


그녀와의 공간에 흠뻑 젖어 든 것만 같았다.

“엄마야!”

빠르게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가 바닥에 가득 고인 물을 정신없이 튀기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에게
바짝 다가왔다.

비에 젖어 찰랑거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고 부드러운 몸이 가슴에 와 닿았다.


놀란 듯 뻗은 그녀의 손이 석한의 팔을 급하게 잡았다.

‘흡…….’

빠르게 숨을 삼켰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밀려 올라왔다.

굳이 찾지 않았던 낯선 욕망이 몸속에서 정신없이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처음이었다. 이성을 향해 이렇게 강한 욕망을 분출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 몸의 중심이 묵직해지는 것이 느껴져 당혹감이 밀려 올라왔다.

이게 대체…….

순간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당겼다.

“아, 미안해.”

“……괜찮아요.”

“너까지 다 젖었다. 괜찮아?”

그녀가 자신의 스커트 위에 가득 튄 물방울들을 손으로 툭툭 털어 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방 많이 젖었어?”

그녀의 시선이 손으로 꼭 잡은 그의 가방을 향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요!”

갑자기 버럭 하는 석한의 행동에 지안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저 여기서 갈게요. 선배. 우산 씌워 줘서 고마워요!”

“응? 야! 여기 조금만 더 가면 역…….”

정신없이 빗길을 뛰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당혹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욕망이 들끓는다는 사춘기 때도 다른 여타 사춘기 소년들처럼 강한 욕망을 분출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


적이 없었다.

여자를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손잡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자고 싶다는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여자를 만나지 못했구나.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뜨겁게 끌어안고 뜨겁게 몸을 나눌 여자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이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치고 살결이 살짝 맞닿는 것만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집에 도착해 차가운 물에 샤워를 시작했다.

한참을 떨어지는 차가운 물아래 몸을 맡겨도 이미 뜨겁게 부풀어 오른 욕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지안…… 대체 뭐야…….”

자신을 한동안 미칠 것 같은 혼란에 빠트렸던 존재.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아…… 진짜 얘기하기 싫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한번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모습에 지안이 멍해졌던 눈빛을 지웠다.

“왜?”

짧게 끊기는 그녀의 말투에 석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얘기하면 안 되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그녀의 눈빛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석한의 눈빛이 내려앉았다.

“그거야 당연히…….”

“……뭐가 당연한데?”

“괜찮아요?”

지안이 그저 눈을 깜박이며 이해 못 할 질문을 던지는 석한을 바라보았다.

“선배가 괜찮냐고요…….”

“대체 무슨…….”

“내가 그래서 다가갔다고 생각할 거잖아요…….”

“아…….”

“이유 없이 선배만 보면 미친놈처럼 흥분하는데……. 처음부터 어떻게 해 보겠다고 다가간 거 아니에요.


나 나름대로 선배 피하고, 마주치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

“내가 죽겠더라고요.”

미치겠다. 작게 읊조리며 얼굴을 가득 구기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불안해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빠진 고요한 표정.

꾹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어떤 말이 나올까 기다리는 시간이 더없이 초조했다.

“그럼 너는?”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가 물어 왔다.

“……뭐가요?”

“내가 너한테 자자고 했을 때. 너한테만 흥분한다고 고백했을 때. 아~ 이 여자 목적이 이거구나 생각하고


기분이 나빴어?”

“미쳤어요?”

“근데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해?”

“…….”

“너랑 나. 지금 똑같은 거 아니야?”

여전히 고요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안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건 유지안이니까.”

“…….”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한테 온다 해도, 유지안이면 나한테는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

“…….”

“내가 기분이 나쁠 리가 없잖아요.”

지안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얘가 나한테 왜 이럴까, 정말 수백 번도 넘게 생각하고 입으로 뱉어 냈다.

밀어낼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자신이 밀어내지 못함을 알고 있어서 그렇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며 긴 시간을 망설이고 고민했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

“우리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아?”

“……선배.”

“그런데도 난 지금도 네가 좋은 거 보면, 말이 되는 거 같기도 하고.”

지안이 입술을 밀어 올리며 웃다가 한쪽 눈을 천천히 찌푸렸다.


“빨리 좀 얘기하지.”

“미안해요. 그런데…….”

“그랬으면 나 혼자 미친 듯이 착각하고 널 밀어내려고 보냈던 시간이 확 줄었을 텐데.”

살짝 원망 섞인 눈빛 뒤로 그래도 괜찮아, 작게 속삭이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키스해 줘.”

그녀 위에 멈춰 있던 그의 까만 눈동자가 작게 동요했다.

“나만 보면 미칠 거 같다면서. 키스해 줘. 응?”

자신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미동조차 없던 그에게 다가갔다.

가녀린 팔이 그의 목으로 밀려 올라감과 동시에 웃음이 담긴 예쁜 입술이 함께 가득 밀려 올라갔다.

‘너 나랑 잘래?’

술기운을 빌려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말을 겨우 던졌던 3 년 전 그날.

‘누구보다 행복하게…… 내가 만들어 줄게요…….’

따스하게 속삭였던 그의 말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만,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사라질 행복임을 알고
있기에 두려웠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폭풍처럼 밀려와 마음을 들쑤시는 아픔과 허무함에 지독하게 힘든 날을 보냈다.

하지만 원망할 곳도, 쏟아 낼 곳도 없었기에 그저 마음으로 삼키고 불쑥 다시 떠올라 울컥거릴 때면


지독하게 따스했던 그를 한없이 원망했었다.

“너도 그랬겠구나.”

너한테 정신없이 매달려 안아 달라고 속삭였던 나를 보내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그랬겠구나.”

바짝 맞닿은 석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작게 소리 내 웃으며 예쁘게 휘어진 눈매 안의 또렷한 눈동자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오늘은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행복한 목소리를 흘려 낸 입술이 곧바로 그의 입술 위로 맞물렸다.

몸이 우선이었는지 마음이 우선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저 너라서. 서로를 마주한 순간마다 미치도록 끌렸던 서로라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하고 이 순간을 마주하고 있음이 중요했다.

깊숙이 파고드는 그녀를 입을 가득 벌려 맞이했다.


평소보다 다급한 지안의 손길이 석한의 재킷을 벗겨 내고 넥타이를 거칠게 당겼다.

거친 움직임에 입술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입술을 겹쳐 왔다.

“흐응…….”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자 뜨거운 숨과 함께 야릇한 소리가


흘렀다.

맞닿은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뒤엉키고 서로의 입술에 빨렸다.

서로의 타액을 삼키며 정신없이 서로의 옷을 벗겨 냈다.

툭툭 바닥 위로 떨어지는 옷들이 발에 차이는 것도 괘념치 않은 두 남녀가 침대 위로 동시에 쓰러졌다.

“흐읏. 석한아…….”

두 손 안에 꽉 차게 잡히는 하얀 복숭아 같은 가슴을 단물을 빨아먹듯 그의 입술이 집요하게 물고 빨았다.

혀끝에 감기는 바짝 솟은 돌기를 이리저리 굴리고 맛볼 때마다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지안이 몸을
비틀었다.

그 어느 때보다 흥분이 차올랐다.

이미 꼿꼿하게 솟은 자신의 물건이 어서 그녀에게 들어가고 싶다고 몸부림치듯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하앙, 흐으응…… 흐으읏.”

하얀 살결을 따라 내려간 손가락이 거침없이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허리가 휘어지고 온몸을 따라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꾹 내려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좋아…… 흐읏…….”

미치도록 좋은 감각.

그의 손길과 입술이 스치는 살결 위로 기분 좋은 감각이 정신없이 피어났다.

뜨겁게 조여 오는 그녀의 안을 정신없이 휘젓는 손가락 위로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찌르는 뭉툭하고 단단한 감촉이 자신이 몸 안으로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가 달았다.

“하아…… 선배. 나 더는 못 참아……. 넣을게요.”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너무 뜨겁게 달아올랐기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두 몸이 완전히 포개지는 순간, 탄성에 가까운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흣…… 흐흣, 흣…….”

“하아…… 너무 좋아.”
몽롱한 눈동자를 반쯤 덮은 나른한 그의 눈매가 천천히 휘어졌다.

조금 전 괜찮냐고 물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괜찮지 않다고 답했더라도 아마 그녀를 놓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유지안이라는 여자에게 이미 미쳐 있음을 늘 그랬듯 오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앞뒤로 허리를 흔들었다. 욕망이 터지고 거친 신음과 숨결이 터졌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쾌락에 마치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흣, 흣…… 하앗.”

정염에 물든 눈빛이 그녀를 뚫을 듯 내려 보았다.

“……지안아.”

호흡을 애써 삼키며 짓눌린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차마 답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허리를 치댈 때마다 신음이 흘러 그를 부르지 못했다.

“지안아…… 유지안…….”

“흐으응…….”

“하아…… 유지안, 사랑해.”

뒤로 젖혀진 지안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뭉클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더니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졌다.

두말할 것 없이 행복했다.

이 행복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머리와 가슴에 오로지 그가 주는 사랑과 감각만을 벅찰 정도로 담아 보는 것이.

여전히 거칠게 흔들리는 몸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정신없이 파고드는 그를
가득 느끼며 받아들였다.

끝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강한 쾌락이 온몸을 휘감았다.

“으으으으으…….”

“흐으읏! 흐응응…… 하앗!”


긴 호흡과 신음을 뱉으며 모든 것을 터트린 그가 허리를 강하게 치받았다.

결합한 몸이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잘 다듬어진 그의 몸을 뒤덮은 땀방울이 갈라진 근육 사이로 흘러내림과 동시에 석한의 상체가 그녀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가 느껴져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목덜미에 촉촉 소리를 내며 키스하고 얼굴을 파묻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미치겠다…….”

그녀가 작게 읊조리자 살결에 맞닿던 그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석한…….”

“…….”

“이제는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석한의 입술이 느릿하게 밀려 올라갔다.

그리고 금세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에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거짓 없이 담은 눈부신 미소가 얼굴을


가득 채웠다.

촉- 짧은 입맞춤 후에 석한의 옅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촉- 다시 맞닿고 떨어진 입술이 더욱 가득 밀려 올라갔다.

예뻐 죽겠어. 나지막하게 흐르는 기분 좋은 목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의 미소에 물든 듯, 지안의 입술도 망설임 없이 밀려 올라갔다.

다시 깊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행복에 벅차 흐르는 자잘한 웃음소리가 참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품에 꼭 끌어안은 지안의 머리카락을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작은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것마저 기분이 좋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석한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왜 그렇게 봐요? 좋아서?”

“어. 좋아서.”

“보지만 말고 만져도 되는데.”

“이렇게?”

등을 때리는 차진 소리와 함께 그가 또 좋다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참 나…….”

“그게 이상해요? 난 하나도 안 이상한데.”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나만큼 신기하려고. 지금도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도 감기 싫어요.”

고요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안 가.”

“…….”

“나 어디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마.”

“…….”

“이제 우리 좀 편하게 사랑하자. 너무 오래 걸렸어. 마주 보고 편하게 웃는 시간이 이렇게 쉬운데.


우리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래서 더 꿈같고 소중해요. 따스한 목소리와 함께 감겨 온 팔이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다 토닥토닥 두드리는 그의 손길에 그저 몸을 맡기고 미소 지었다.

“그래요. 우리 편하게 이제 사랑만 해요.”

끄덕이는 그녀의 이마 위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한참 동안 그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고 좋은 향기를 듬뿍 마시던 지안이 천천히 몸을 떼어 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네. 물어봐요.”

무엇이든지 답해 줄게.

말만 해 봐.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지그시 바라보는 그를 말똥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혹시…….”

“네. 혹시 뭐요?”

“너도…… 처음이었어?”

“……네?”

말간 웃음이 머물렀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귓불부터 붉어지더니 금세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 진짜 그런가 보네.”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게 지금 왜 궁금해요? 이리 와서 그냥 안겨요.”


“야아. 나 궁금하다고! 야아!”

뒤통수를 순식간에 파고든 그의 손이 그 입 다물라는 듯 그녀를 가슴으로 가득 당겼다.

“야……! 말해 봐. 처음이었냐고!”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다는 거! 그게 중요하다면서요!”

“풉. 진짜구나?”

“하아…… 졸리다.”

털썩 머리를 베개 위로 떨어뜨리며 눈을 감는 석한을 즐거움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와. 진짜…….”

“뭐가 진짜예요.”

눈을 뜨지도 않고 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나 네가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그동안 아니었어요?”

“아니. 그동안 무작정 사랑스럽기는 힘들었지. 근데 오늘은 유난히 더 사랑스럽다.”

웃음을 꾹 눌러 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석한이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근데 처음인데 완전 잘했죠?”

“뭐래…….”

나 오석한이잖아요.

잊을 만하면 나오는 저 자신감.

“어? 아니에요?”

“글쎄…….”

뭐 비교 대상이 있어야 그렇다 아니다를 말하지.

“그러는 넌?”

“……네?”

“아…… 아니다.”

넌 좋았어? 라는 물음을 던지려다가 입을 닫았다.

민망하게 그런 것까지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나 생각하던 찰나.


“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지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순간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녀의 행동에 석한이 눈매를 작게 찌푸렸다.

“선배, 왜요?”

“아…… 이제 알겠다.”

“네? 뭐를요?”

“나 이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놀란 듯 살짝 벌어졌던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닫히고 예쁘게 휘어졌다.

‘석한이랑 잤어요?’

‘역시 아직 안 잔 거 맞죠?’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너무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희수의 이해되지 않는 물음.

마치 오랜 사건을 해결한 듯 뿌듯하게 미소 짓던 지안의 표정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석한아.”

“…….”

“근데 정말 내가 처음이야?”

“아, 왜 또 그 얘기를. 유지안. 제발 그만 좀…….”

민망함에 열기가 다시 밀려들어 석한이 제발 그만하라는 눈빛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희수라는 후배가 했던 말.”

“……무슨 말이요?”

“나한테 물었어. 너랑 잤냐고.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어. 역시 아직 안 잔 거 맞죠? 이렇게…….”

“허…….”

그런 말도 했어요? 물어 오는 석한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또렷한 눈동자로 석한을 바라보았다.

잠시 이리저리 생각하느라 말 없는 지안을 바라보던 석한이 말을 이었다.

“아무랑도 안 잤으니까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자존심 상한다고 헤어지자는 말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런데 이해가 되더라고요.”

“……진짜?”

“오히려 내가 거부했으니. 그럴 만하죠.”


그녀가 던졌던 질문의 뜻이 자신의 해석과 완벽히 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그런 뜻이었다니. 황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완벽히 이해되는 상황.

하물며 남자가 참는 게 더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잠자리를 거부하는 남자라.

이거 문제 있다고 해야 해, 아니면 매력적이라고 해야 해?

큭 짧게 소리 내며 작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던 석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안. 그만…….”

“……큭큭.”

웃음이 터져서 멈추지 않았다.

“하아, 그만해요. 이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

“알아. 그런데 상황이…….”

“쉬잇.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나만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야, 잠깐만…….”

“응? 유지안. 나만 봐.”

더는 안 되겠다는 듯 다급하게 다가온 도톰한 입술이 순식간에 입술을 머금었다.

“아니. 나 이제 알겠다고…… 읍. 잠, 깐만…….”

그러든지 말든지 이제는 혀끝까지 입술 사이로 밀려들어 오는 바람에 결국 말을 삼키고 말았다.

따뜻한 온기가 입 안을 다시 점령했다.

밀려 올라오는 웃음만큼 즐거움이 온몸에 퍼졌다.

맛보듯 빨아 삼키고 달래듯 혀끝으로 어루만지는 달콤한 키스.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아 당기자 순식간에 그가 지안의 위로 올라왔다.

품 안에 가두고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지독하게 매력적이고, 저돌적인 키스.

하지만 더없이 달콤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궁금함이 자취를 감추고 녹아내릴 듯 설레는 키스에 몸을 맡겼다.

먼 길을 오래 돌아온 소중한 시간.

닳고 닳아 서로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서로를 눈에 담고 서로를 끊임없이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유지안. 사랑해.”

뱉어도 뱉어도 질리지 않고, 부족하게 느껴져서 수없이 품에 안고 속삭였다.

“오석한, 앞으로도 나만 사랑해. 알겠어?”

대답은 물론 ‘Yes’였다.

□ ◆ □

[선배. 나랑 밥 먹어요.]

사무실에 앉아서 석한의 문자를 확인한 지안이 피식 웃었다.

[너 지금 수작 부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아니. 돼. 이렇게 대놓고 그러면 내가 안 넘어갈 수가 없지.]

혹여나 누가 볼까 봐 밀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2 개월이 흘렀다.

긴 시간 눌러 왔던 마음을 폭발시키듯 서로 열렬하게 사랑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출장을 가거나 서로 바쁜 일이 생겨 만나지 못하면 그 기다리는 시간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동안 어떻게 떨어져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에게 깊게 빠졌다.

회사 정문을 나서자 단정하게 원피스를 차려입은 지안이 손을 흔들었다.

입가를 한껏 밀어 올린 석한이 단걸음에 지안에게로 향했다.

“왔어?”

“와…… 진짜.”

“뭐가 진짜야?”

“우리 예쁜 애인이 이렇게 나 기다리면서 손 흔들어 주니 너무 설레서.”

늘 회사 멀리서 만나거나 집에서 만나자던 지안이었다.

오늘 회사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지안의 말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쁘게 웃어 주기까지 하다니.

완전 계 탔네.

그저 좋아서 입술이 내려오지를 않았다.

“참나. 키스라도 해 주면 기절하겠다?”

가자. 말을 이으며 몸을 돌리는 지안의 손목을 재빨리 잡았다.

“해 줘.”

“응?”

“지안아, 키스해 줘.”

잠시 머뭇거리며 석한을 바라보던 지안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여기저기 퇴근하는 직원들이 이미 손까지 맞잡은 두 사람을 흘깃거리며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석한이 피식 웃으며 손을 더 꽉 잡았다.

“됐어. 그냥 해 본 말이야. 가자. 밥 먹으러.”

“하자. 키스.”

꽉 잡은 손목이 당기는 그녀의 움직임에 끌려갔다.

쪽.

순식간에 다가온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오히려 더 당황한 석한이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선…… 아니. 지안아…… 너.”

“왜?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대놓고 수작 중인데. 어때 마음에 들어?”

석한이 주변을 살폈다.

멍한 눈으로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름 모를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너도 봤지? 지금 유지안이 나한테 뭐 했는지?

“엄마야!”

좋은 향기가 물씬 풍기더니 그의 품 안에 지안의 몸이 끌려들어 갔다.

“와. 너무 좋다!”
“야야! 놔! 놔! 사람들이 보잖아!”

“이제 와서 그러면 무슨 소용이야. 그냥 하는 김에 좀 더 하자.”

그의 말에 지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하는 김에 아주 대놓고 하자.

자신을 따뜻하게 끌어안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자신들에게 멈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행복한 웃음소리가 둘 사이에 번졌다.

그의 품에 안기면 두려웠던 일이 그저 행복한 일이 될 것만 같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닿는 마음이 눈물겹게 행복한 요즘이었다.

□ ◆ □

“나 왔어.”

“……아, 안녕하세요.”

7 년 전 찾아왔던 혜인의 가게.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네는 지안의 앞에 거침없이 다가와 손을 덥석 잡는 혜인의 행동에 석한이 눈매를
찌푸렸다.

“야. 부담스러워.”

“너무 오랜만이에요! 지안 씨!”

석한의 말 따위는 안중에 없는 혜인이 잡은 손을 더 꼭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어색하던 웃음이 거짓 없이 자신을 반기는 혜인의 미소와 맞물려 점점 편안해졌다.

“안 그래도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 듣고 내가 얼마나 좋았는지.”

다시라……. 근데 다시 맞나?

그러고 보면 은근 누나한테 별 이야기 다 하는 거 같단 말이야.

“요즘 엄마·아빠가 장난 아니었거든요. 얘 하마터면 미국에 끌려들어 갈 뻔했어요.”

“……네?”

갑자기 미국은 무슨…….


그런 말 없었잖아.

“야. 그 얘기는 내가 할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궁금함을 담은 지안의 눈빛에 혜인이 작게 웃었다.

“그런 얘기는 아직 안 했나 보다?”

“어. 아직.”

“무슨 이야긴데?”

두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안이 물었다.

“자자. 일단 이쪽으로 와요. 앉아서 이야기해요. 우리.”

마주 앉자마자 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안 씨. 진짜 너무 반가워요. 내가 그때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몰라요. 저 바보 같은 자식 때문에


지안 씨만 마음고생 하고. 저게 아무튼 여럿 속 썩인다니까요.”

“내가 또 언제…….”

“약혼 안 하기로 한 건 들었죠? 아, 그런데 이런 얘기 해도 되나?”

혹시 하는 생각에 혜인이 눈치를 살피자 지안이 빙긋 웃었다.

“네. 알아요. 괜찮아요.”

“아무튼 오혜인 쓸데없이 나서는 건 알아야 해.”

싫은 듯 투덜거렸지만, 석한도 혜인을 말리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알았으면 하는 이야기인가 싶어 혜인에게 괜찮다는 의사를 다시 전했다.

“아직 나이가 젊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연세가 조금 있으셔서 사업을 빨리 물려주고 싶어 하셨거든요. 나도
뭐 물려받기 싫다고 밖에 나와서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있고. 그래서 일로는 물론 가정적으로도 안정되길
바라셨어요.”

“네.”

“근데 얘가 도통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보여서 부모님이 약간은 강압적으로 선도 보라고
하시고, 집안끼리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엮이길 바라셨어요. 윤 상무도 그런 케이스였고요.”

처음 듣는 생경한 이야기.

집안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석한이었다.

물끄러미 석한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혜인에게 닿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 궁금하네. 야! 오석한. 너 맨날 싫다 그러더니 왜 그때 윤 상무 만나 보라고 할 때는


알겠다고 그랬어?”

어라, 그랬어?
지안의 예리한 눈빛이 순식간에 석한에게 닿았다.

지안의 눈빛을 받고도 당황하지 않고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던 석한이 입술을 움직였다.

“열 받아서.”

“……응?”

“열 받아서 그랬다고.”

대체 뭐가 열이 받았다는 걸까.

두 여자의 궁금한 눈빛에 석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 날 지안이 선봤거든. 내가 어디 가든지 관심도 안 가지던 사람이 나한테 선본다고 하고 집에


들어가는데. 내가 열 안 받겠어?”

“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잊었던 기억이 떠올라 지안이 소리 내 웃었다.

그래. 기억난다.

너 개 된 날.

내가 개 있다고 멀쩡한 소개팅남 보내고 집에 빨리 왔었지.

마음속으로 다시 그분께 미안함을 전하며 자신이 몰랐던 석한의 이야기가 우스워 빙긋 웃었다.

“그리고 선보러 가서 엄청 오래 있다가 와서 나 열 받았잖아.”

“한 시간이었거든? 뭐가 엄청 오래야.”

“아무튼, 그날 내가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 그리고 그날 윤 상무 만나 보라는 거 좋다고도 안 하고 그냥


대답도 안 했는데 엄마가 긍정으로 받아들인 거고. 그러니 오혜인, 지안이 오해할 말 하지 마.”

알았어. 이 자식아.

인상을 찌푸렸던 혜인이 다시 지안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그 후에 오석한이 윤 상무 안 만난다고 해서


부모님이 뭐라 하셨거든요.”

“……그런데요?”

“갑자기 오석한이 폭탄 선언했어요.”

“네? 뭐라고요?”

“자기 남자 좋아한다고. 그러니 여자 만나라고 하지 말라고.”

어후- 어이가 없어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걸 핑계라고……. 근데 또 부모님은 믿으셨나 봐요.”


“내가 이 인물 가지고 여자를 워낙 안 만났으니. 믿으실 만했지.”

‘나 그런 남자야’. 흐뭇한 미소를 짓는 석한을 흘깃 노려보았다.

그날 뒤죽박죽된 집안 상황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이어 가는 혜인의 모습에 얼마나 집안이 쑥대밭이


됐었을지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졌다.

“아무튼, 지금은 괜찮아요.”

괘…… 괜찮은 거 맞나요?

“응. 맞아. 지금은 아무 여자나 데려가도 좋다고 반겨 주실 거야.”

“아무 여자?”

흡.

순간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석한이 입술을 꾹 눌러 물었다.

“아무 여자면 다른 사람 데려가도 좋아하시겠네.”

“지안아. 에이. 왜 그래.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

“아우. 나는 음식 준비를 좀…… 둘이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재빨리 눈치챈 혜인이 자리를 떠났다.

혜인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어깨를 둘러 오는 석한의 행동에 그를 흘겨보았다.

“아무 여자?”

“아니 아니. 특별하지. 우리 지안이.”

“와. 너 단어 선택 잘해라. 오석한.”

“알잖아요. 선배가 나한테 얼마나 특별한지.”

무서웠는지 존댓말로 속삭이는 석한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작은 한숨이 지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한 번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셔?”

“어떤 관점에서 묻는 거예요? 사업가로서? 아니면 인성?”

“내가 지금 사업하려고 너 만나냐? 그냥 그러니까…….”

“아아. 미래의 시부모님으로 묻는 거구나.”

아직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어서인지 괜히 민망해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넘겨짚을 문제였다.

“우리만 좋다고 만나는 거 물론 가능하지만, 네 배경이 나와 다른 건 사실이잖아.”

“아…….”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석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긋 웃었다.

“좋으신 분들이야. 워낙 외국에 오래 사셔서 생각도 깨어 있고. 사실 정말로 선보라 하고 그런 것도 내가


도통 관심이 없는 거 같아서 그러셨어. 그리고 정말로 관심이 없기도 했고. 어찌 보면 내 잘못이구나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러길 잘했던 거 같아.”

생각이 깨어 있으시면 네가 남자 좋다고 했을 때 집을 엎지는 않으셨겠지……. 이 사람아.

“왜, 아무인 나를 데려가도 오케이 할 거 같아서?”

하아, 또 이런다. 선배 이러면 나 무서워요.

질색하는 석한의 표정에 지안이 작게 웃었다.

“그냥. 걱정되잖아.”

“걱정하지 마. 음…… 그럼 말할까?”

“응? 뭘? 어?! 야 너 설마…….”

“안 되면 말하지 뭐. 나 사실 유지안한테만…… 읍…….”

“이게 진짜.”

“아우. 왜요. 사실인데. 내가 유지안한테만 흥분…… 읍, 읍…….”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내가 아무나 할게.

그건 그냥 우리끼리만 알자.

어깨를 두른 팔이 가득 몸을 당겼다.

폭 품 안에 안긴 그녀를 애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의외다.”

“……뭐가?”

“그런 생각 전혀 안 할 줄 알았어요. 이거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나?”

“뭐가 또.”

“나만 평생 우리 지안이 독차지하고 사랑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해석 중인데?”

“좋겠네.”
“좋아 죽지.”

결국,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혜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을 향했다.

따뜻하게 맞잡은 손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길을 걸었다.

흘깃 날아든 시선에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왜? 할 말 있어?”

“응.”

“해. 무슨 이야기인데 그런 표정이야?”

“저기 지안아…….”

손가락 하나로 이마를 긁적거리던 석한이 한참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응.”

“우리 부모님…… 만나 보는 게 어때?”

느릿하게 옮기던 걸음이 멈추었다.

천천히 돌아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망설임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다른 곳을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내가 부모님한테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래.”

“…….”

“아직 너무 빠르지?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알았어.”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혼자 한숨 쉬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아니야, 괜찮아. 다시 속삭이는 그를 눈에 담았다.

“그래. 가자.”

“……뭐?”

짧게 답한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다시 몸을 돌린 지안이 걸음을 옮겼다.

“정말? 정말 부모님 만난다고?”

“응.”

“진짜로?”
“어. 그렇다고.”

재빠르게 따라붙은 석한이 얼굴을 가깝게 들이밀며 연신 물어 왔다.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 약속한 거다.”

“알았다니까. 내가 뭐 사기꾼이야? 왜 이렇게 자꾸 물어.”

“싫다고 할 줄 알았거든.”

“안 싫어. 그냥 걱정만 조금 되는 거지.”

“아, 내키지 않으면 조금 더 시간 지나고 만나도 괜찮아.”

금세 꼬리 내리는 그를 흘깃 바라보며 웃었다.

“나도 똑같아. 오석한 너랑.”

“뭐가?”

“나도 평생 너 독차지하고. 평생 너한테 사랑받고 싶다고. 그러니까…… 꺄악! 야! 야!”

몸이 붕 떠올라 허우적거리는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와! 유지안! 너 진짜!”

“야! 내려! 꺄악!”

기쁨을 주체 못 하고 빙빙 돌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웃어 대는 석한의 모습에 지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야. 내려줘. 창피해.”

“와! 여기 꿈 아니지?”

창피해서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말하기 전에 좀 내려 줄래?

그러든지 말든지 석한이 한참 동안 흥분을 주체 못 하고 지안을 안은 채 웃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막 좋아서 미칠 거 같은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실컷 빙빙 돌더니 뭘 더 하려고.

쪽쪽쪽. 정신없이 얼굴 위로 내려앉는 키스에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걱정 마. 내가 좋다고 하면 무조건 프리패스야.”

“아무 여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유지안이라서.”
“그래. 그래. 믿는다. 믿어. 그런데 좀 내려 줄래?”

한참을 빙빙 돌고서야 발이 바닥을 짚을 수 있었다.

□ ◆ □ 이아

‘이 자식이 진짜.’

그 이야기 나온 지 겨우 3 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안녕하세요. 유지안입니다.”

“반가워요. 한주아예요.”

급하긴 급했나 보다.

이렇게 빨리 마주 앉을지 몰랐건만.

힐긋 얼굴에 봄꽃이 만발한 듯 혼자서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석한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석한이 아빠가 같이 나오려다가 지금 미국 들어가 있어서 나 혼자 나왔어요.”

아니요. 오히려 다행입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워낙 바쁘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은근히 긴장이 밀려오는지 입술을 자꾸만 지분거리는 지안을 흘깃 바라본 석한이 부드럽게 지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어때요? 딱 봐도 너무 예뻐서 마음에 드시죠?”

제발. 그런 말은 둘이 있을 때 하자.

불안한 눈동자로 주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밀려 올라갔다.

아무 대답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주아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지안 씨.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괜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기분 나쁘게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리 석한이가…….”

“…….”

“부탁해서 이 자리에 나온 거 아니죠? 예를 들어 조건을 내건다거나, 금전적 보상 이런 거로.”

“어머니!”

석한이 버럭 하든지 말든지 주아가 말을 이어 갔다.

“얘가 어려서부터 그쪽으로 머리가 잘 발달해서 사업 수완이 좋아요.”

“……네?”

“그래서 덕분에 사업하면서 훌륭한 성과를 많이 내고 있어요. 그런데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고.
잔머리도 잘 돌아간다는 뜻이죠.”

하마터면 훅 밀려 올라온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머니…… 대체 무슨…….”

“넌 조용히 해. 얘가 안 그래도 한 번 우리 집 발칵 뒤집어 놨어요. 그때는 정말이라고 만나는 남자


데려온다고 난리 쳤던 터라, 지금 이 상황도 나는 안 믿기네요.”

하아- 옆에서 석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올라오는 웃음을 삼킨 지안이 차분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주아를 바라보았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요?”

“네. 도대체 그전에 석한 씨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모르겠지만…….”

잠시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숨을 꾹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다 저 때문인 거 같아요.”

“지안 씨 때문이라고요?”

“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말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 제가 많이 밀어내고 많이 도망 다녔어요.


그리고 돌고 돌아서 다시 이렇게 만난 거고요.”

“…….”

“어머님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오히려 저 때문에 석한 씨가 부모님께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손한 말투로 긴장 없이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지안을 바라보는 주안의 눈빛이 짙어졌다.


“정말이야? 오석한?”

“네. 그렇다고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네가 그렇게 말하라고 연습시킨 거 아니고? 한두 번 당해야 내가 믿지.”

대체 집에서 행동을 어떻게 한 거냐…….

오히려 자신의 말을 믿을 거 같아 지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짧게 답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의심을 가득 담은 주아의 눈빛이 다소 차분해졌다.

“알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같은 부서에 있다고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주아였다.

“네.”

“둘이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했죠?”

“네. 저보다 1 년 선배예요. 나 자퇴하기 전에 다녔던 학교.”

“아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주아가 석한을 바라보았다.

“너. 어쩐지 이상하더라.”

“뭐가요?”

주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피식 웃었다.

“다른 좋은 곳에 보낸다고 해도 죽어도 프리웰로 가야 한다고 그러더니. 더 높은 자리 준다 해도 절대 그


팀 팀장 아니면 안 간다고 해서 얘가 왜 이러나 했는데. 인제 보니 딱 맞아떨어지네.”

지안의 고개가 빠르게 석한에게 돌아갔다.

“나 이 회사에 있는 거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거 때문에 간 건데.”

거봐, 거봐. 주아가 작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6 개월 전에 잠깐 사업체 방문 왔다가 봤어. 그리고 바로 추진해서 온 거고.”

“세상에.”
우연인 줄 알았더니.

“그럼 말을 했어야지.”

“도망 다니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뭐 하러 해. 어쨌든 지금은 다 잘됐잖아.”

“나는 그것도 모르고.”

“스토커 같다고 더 도망갔을 거야.”

작게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아가 피식 웃었다.

“뭐, 지금 나한테 사기 치는 건 확실히 아닌 거 같네.”

“어머님. 아니라고요.”

“그래. 알았어. 믿을게.”

너무 예의 없이 속닥거렸나 싶어서 지안이 멋쩍은 표정으로 주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편하게 만나요. 사람이 만나다가 헤어질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연이 돼서 쭉 함께


살 수도 있는 거고. 요즘 세상에 둘이 좋은 게 제일이니.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난 아무튼
오늘 내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걸로 만족해요.”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아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혹시 결혼하게 되면 그때 또 봐요.”

“네…… 네?”

“그전에 둘이 만나느라 바쁘지. 그리고 나도 바쁜 사람이라. 엄마 간다. 데이트 잘해라.”

주아가 한 손을 번쩍 공중에 들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멍한 눈빛을 한 지안이 그녀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지안과 사뭇 다른 표정의 석한이 지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우리 지안이가 엄청 마음에 드시나 봐.”

대체…… 어느 대목을 보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거지?

“원래 저렇게 성격이…….”

“응. 완전히 시원시원하셔. 저 정도면 되게 마음에 드신 거야. 원래 싫으면 얼굴에 바로 나타나거든.”

“아아…… 머, 멋지시다.”

“그런가? 늘 저런 모습이셔서.”

은근히 긴장했었는지 그녀가 떠나니 긴장이 풀려 몸이 나른해졌다.


털썩 의자에 앉은 지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했었어?”

“그럼 하지. 안 해?”

“와. 긴장해도 왜 이렇게 예뻐.”

손을 잡고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석한의 동작에도 지안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석한아.”

“응. 왜?”

“근데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았어?”

“어. 맞아.”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오히려 오늘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이 나오면 어쩌지 걱정하고 자리에 나왔다.

“지금 엄청 결혼시키고 싶어 하시는 거야.”

그건 또 어딜 보고?

“결혼하게 되면 보자고 하셨잖아. 그 말을 꺼낸 거 자체가 이미 마음이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응.”

지안이 신기한 상황을 접한 듯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석한과 눈이 마주쳤다.

“유지안.”

“……응?”

“근데…… 나랑 결혼할 생각…… 있는 거. 맞지?”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과 얼굴 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지안의 눈동자가 닿았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했잖아. 왜 불안해? 아니면 신기해? 꿈인 거 같아? 아직도?”

“…….”

“걱정 마. 내가 처음인 남자. 내가 책임져야지.”

“저기 지안아…… 그 말은 이제 그만 좀…….”

“걱정 마. 내가 오석한 넌 책임질게.”


장난스럽게 밀려 올라가는 지안의 입술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넌 나 행복하게만 해 주면 돼.”

“당연하지. 유지안의 행복을 위해 태어난 남자인 거 몰라?”

말이라도 좋다.

긴장이 완벽히 풀린 지안의 웃음소리가 편안하게 울려 퍼졌다.

□ ◆ □

두 사람의 연애가 한동안 회사 내 핫 이슈가 되었다.

지안은 서영이 미국 지사로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석한의 말로는 본인의 지원이라고 했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저 덤덤히 반응했다.

늘 시간이 맞으면 함께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둘만의 공간에서는 사랑을 속삭이고 뜨겁게 몸을
섞으며 서로의 숨결을 나누었다.

서로에게 물들어 갈수록 함께 나누는 행복이 커졌다.

신사업이 진행됨과 동시에 석한이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안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석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고, 장기 출장에 몇 주간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런 석한을 이해는 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외로움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띠띠띠.

밤늦은 시간 도어록 버튼 음에 침대에서 선잠이 들었던 지안이 눈꺼풀을 살며시 밀어 올렸다.

잠이 가득 담긴 눈꺼풀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잘못 들었나……. 하암…….”

몸을 뒤척이며 눈을 꼭 다시 감았다.

“제대로 들었어.”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꼭 끌어안는 다정한 동작에 눈이 번쩍 뜨였다.

“벌써…… 온 거야?”
“응. 보고 싶어서.”

깊게 입술이 맞물렸다.

지안의 머리카락 안을 파고든 손이 강하게 자신을 향해 지안을 당겼다.

마치 오랜 시간 머금지 못한 갈증을 해소하듯 깊숙하게 파고들어 그녀의 숨결을 한껏 삼켰다.

2 주 만의 만남이었다.

“하아…… 출장. 끝난 거야?”

“아니. 다시 가 봐야 해.”

“……뭐? 지금 일본에서…….”

“응. 맞아. 보고 싶어서 온 거야. 하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제발. 응? 지안아.”

“아니 왜, 흣…….”

“나 지금 네가 너무 간절해.”

지안을 덮고 있던 하얀 이불이 순식간에 벗겨지고 그 위를 석한이 대신했다.

“하아…… 너무 보고 싶었어.”

슬립 사이로 밀려들어 온 커다란 손이 단숨에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흐응…….”

“물고 빨고 만지고 싶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강하게 여러 번 주무르는 손 안에 예민하게 솟은 유두 끝이 자극되어 온몸이 틀어졌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살살 문지르다 삼킬 듯 입술 안으로 단단한 돌기를 가득 넣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아 놓기를 반복했다.

“흐으읏…… 천천히…….”

허벅지 사이를 타고 올라오던 손가락이 속옷 틈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깊숙하게 밀려들어 왔다.

“하앗…… 아, 잠깐…….”

“지금…… 나만 급한 게 아닌 거 같은데…….”

속옷을 흥건하게 적시고 남을 정도로 흘러나온 액체가 손가락에 휘감겨 질척이는 소리가 번졌다.

“흐응…… 흐응, 흐읏!”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나도.”

온몸에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그녀의 하얀 살결 위를 물고 빨았다.


긴 시간도 아니었지만, 지독하게 그리웠던 향기를 온몸에 담기라도 하듯 듬뿍 마시고 제 숨결을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하아…… 너무 좋아. 따뜻해…….”

활짝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로 꼿꼿하게 일어선 자신의 남성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강하게 조여 오는 감각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그렇게…… 기다렸어? 엄청 반기는 거 같은데?”

“뭐래…… 흐읏…….”

찰싹 등을 때리며 웃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옅은 핑크빛으로 사랑스럽게 물든 얼굴 위로 자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가끔 찡긋거리는 눈 안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움직임을 멈추고 좀 더 그녀에게 얼굴을 내렸다.

별빛을 뿌려 놓은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행복하다…….”

아무것도 가감되지 않은 솔직한 마음이 쏟아져 내렸다.

“유지안이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해.”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몰랐을 거야.”

“…….”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건지. 아마도 몰랐을 거야.”

“…….”

“사랑한다. 유지안.”

뜨겁게 내려앉는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는 듯 머금었다.

공기를 삼키듯 그의 숨결을 머금었다.

마치 그가 있음에 숨을 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앗…… 천, 천천히…… 흐흑.”

“미안…… 하아. 오늘은 못 참겠어…….”

격렬하게 파고들어 격렬하게 치대기를 반복했다.

휘몰아치는 감각에 아름답게 휘어지는 지안의 몸을 손으로 다급히 어루만졌다.

거친 호흡이 터지고, 서로를 품느라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살결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행복에 그저 서로를 더욱 강하게 파고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같이 몰아쳤던 쾌락이 그 어떤 날보다 강렬하게 터졌다.

맞닿은 가슴이 오르내릴 때마다 이상할 만큼 미소가 번졌다.

귓가에 맴도는 옅은 숨소리에 가슴속 어딘가에서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겨났다.

알 수 없는 끌림에 시작된 이상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욕망이 전부일까 봐 두려웠던 시간.

도망가고 밀어내도 소용없었던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사랑이 맞을까? 의심하며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이제는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처럼. 그렇게 안아 줘.’

용기 내 시작된 첫날 밤.

그에게 속삭였던 자신의 말이 떠올랐다.

한 번도 다시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는 늘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처럼 안아 주었다.

맑은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예쁘게 휘어진 눈매를 따라 고인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도.”

“…….”

“나도…… 너무 행복해.”

미소를 가득 담은 입술이 얼굴 위에 자잘한 키스를 남겼다.

품에 안고 소중하게 그녀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몸을 계속해서 손으로 쓸어내렸다.

“언제 가야 해?”

한참이 지나서야 지안이 물었다.

“조금 더 있어도 괜찮아. 왜? 한 번 더 하게? 난 가능한데.”

“그럼. 오석한 님이신데.”

큭큭. 소리 내 웃은 석한이 짧게 입을 맞췄다.

털썩 베개에 머리를 떨어뜨린 석한이 고개를 살짝 돌려 지안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 미칠 거 같아서 왔어.”

“알아.”

“알고 있었어?”
“나도 그랬으니까.”

가녀린 어깨를 팔로 가득 당겨 안았다.

“출장은 언제 끝나?”

“빨리 끝내려고 하는데 아직 확답은 못 주겠어. 며칠 더 걸릴 거 같아.”

그렇구나. 작게 속삭이는 지안을 바라보며 그가 웃었다.

“이번 출장 가서 깨달았어.”

“뭘?”

“아~ 유지안 없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죽진 않을 거야. 어떻게든 살겠지.”

“이럴 때 보면 현실적이야. 이러니 내가 불안하지. 안 불안해?”

지안의 동그래진 눈이 석한을 향했다.

“불안? 뭐가?”

그렇게 뭐가 있었니?

“몰라. 그냥 눈에 안 보이는 것만으로 불안해.”

“와. 너 되게.”

“……응?”

“누가 보면 2 년은 출장 갔다 온 줄 알겠다.”

“나한테는 20 년 같았다고. 어디 갈 때마다 데려갈 수도 없고.”

“못 살아…….”

듣고 있자니 기분은 좋은데. 이 정도면 중증인 듯싶었다.

“아! 맞다.”

“응? 뭐가?”

“내가 말한다고 해 놓고 잊었네.”

“뭔데?”

흐트러진 그의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며 빙긋 웃었다.

“6 월 16 일에 시간 있어?”

“응? 6 월? 아직 멀었는데? 주말이야? 회사 일 아니면 없지. 왜?”


“어. 토요일. 그때 같이 어디 좀 가려고.”

지안이 빙글 몸을 돌려 엎드려 석한을 바라보았다.

말똥말똥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어디 여행 가게?”

“여행 가고 싶어?”

“에엥? 여행 아니야?”

그러고 보니 여행 한 번 제대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뭐야. 괜히 기대했네.”

“여행 가면 되지. 이번 출장 끝나고 같이 가자. 뭐 그게 어렵나.”

“와! 진짜?”

“응. 어디 가고 싶은지 생각해 놔. 난 어디든 좋으니까.”

“알았어! 나 요즘 일이 바빠서 힐링이 필요했거든! 그리고 사실 너도 마찬가지야. 요즘 업무가 너무


과해.”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녀의 입술 위로 그가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난 이게 힐링이야.”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아무튼, 그날 시간 비워 둬.”

“아직 멀었잖아. 여행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 줘. 와! 난 여행 계획이나 짜야겠다. 어디 가지?”

신이 나서 연신 종알거리는 그녀를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꼭 끌어안고 어루만졌다.

□ ◆ □

석한의 출장이 끝나고 바빴던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한숨 돌린 직원들이 출근 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유 대리, 팀장님 이제 또 출장 안 가시는 거지? 이번에 극한 직업 체험하시는 줄 알았어.”

“거의 살인적 스케줄이었지.”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오죽했겠니.


지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외로웠겠어. 유 대리.”

이제는 둘 사이가 공공연하게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지안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괜한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오전에 회의에 들렀다 와야 한다고 따로 출근했던 석한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오늘 팀장님 어디 가세요?”

휘둥그레진 직원들의 눈이 동시에 석한을 향했다.

지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오늘 오후에 미팅 있다고 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욱 신경 써서 입은 슈트며, 세련되게 다듬은 머리 스타일.

탄탄하고 멋진 몸매와 고급스러운 슈트가 어우러져 만들어 낸 패션의 완성.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직원들이 감탄사를 날렸다.

‘어디 숍이라도 다녀온 거야?’

오늘따라 유난히 더 멋있어 보이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입술을 밀어 올렸다.

‘누구 애인인데 저렇게 멋있데.’

너무 대놓고 웃으면 팔불출 같아 보일까 봐,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슬쩍 웃었다.

자신을 향한 눈들을 뒤로하고 석한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더 보고 싶은데 아쉽다.

나중에 나 혼자 봐야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석한의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집중하라는 듯 문을 두드리는 석한의 행동에 직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자. 다들 잠깐 집중해 주세요.”

모든 직원이 자신을 바라보자 석한이 사무실을 한 번 천천히 훑었다.

“다름이 아니라, 6 월 16 일 다들 일정 비워 두세요.”

“6 월? 3 개월 뒤인데요?”

“어? 주말이네?”
그의 말이 끝나자 직원들이 탁상 달력을 넘기며 수군거렸다.

지안이 얼굴을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도 물었던 날이 아닌가.

“회사 행사인가?”

작게 중얼거리며 지안도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날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회사 행사라면 제발 넣어 둬.

간절한 눈빛들이 석한에게 닿았다.

“아. 강요는 아니고요.”

직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석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찌푸려지는 눈매를 느낀 석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결혼식이 있어서요.”

결혼식이요? 여기저기서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누구 결혼식인가요?”

물어 오는 직원의 얼굴을 흘깃 바라본 석한이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대충 높은 분 결혼식이니 비워 두라 하겠지. 직원들은 물론 지안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제 결혼식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모든 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안에게로 흘러갔다.

난생처음 듣는 소리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안의 모습에 오히려 직원들이 더 당황했다.

“그런데 아직 결재가 안 나서요.”

그저 침묵 속에 석한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고요했지만 어느 때보다 격양된 분위기가 흐르는 사무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획입니다, 작성하면서 가장 떨렸고, 가장 행복했던, 그 어떤 사업 계획보다


신중하게 작성한 기획안입니다.”

잠시 긴장한 듯 굳어 있던 석한의 표정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한참을 다른 곳을 향했던 그의 눈동자가 그제야 지안에게 닿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잔잔하게 떨렸던 심장이 강하게 일렁거렸다.

숨을 들이마실 뿐인데 가슴이 벅찼다.

뚜벅뚜벅.

결심한 마음이 담긴 듯 바닥을 강하게 때리는 석한의 구두 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가 지안의 앞에 걸음을 멈추자 익숙한 향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오직 그만이 눈에 담겼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마주 섰다.

퍼지는 좋은 향기와 함께 은은하게 번지는 미소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석한이 사무실을 나올 때부터 한쪽 팔 아래 꼭 끼고 있던 결재판을 손으로 잡았다.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결재판으로 지안의 시선이 옮겨졌다.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신중하게 살펴보시고 결재 부탁드립니다.”

너무나도 진지하게 결재판을 건네는 석한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밀려 올라왔다.

직원들 또한 차마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눈 안에 담기는 모습이 흐뭇해 입술을 밀어 올렸다.

손을 뻗어 그가 건넨 결재판을 받았다.

천천히 결재판을 열자 하얀 종이 위에 또박또박 적힌 글씨가 보였다.

[유지안 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청혼.

한참을 바라보던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석한이 아! 소리를 내며 빙긋 웃었다.

“문서만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요.”

멋스럽게 차려입은 재킷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보석 상자.

기다란 손가락이 상자를 열자 눈앞에 마주 선 그처럼 반짝이는 예쁜 반지가 보였다.

지안의 고요한 눈동자가 아름다운 반지 위로 머물렀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손 위에 닿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위로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 넣은 석한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밀어 넣어 꼭 잡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차마 다물어진 입술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어느 순간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의 입술이 밀려 올라가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결재해 주셔야죠. 유지안 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지르는 작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석한을 가만히 바라보다 지안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석한 팀장님. 축하드려요. 남편으로 승진하셨어요.”

동시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휘파람을 불며 공중으로 내던진 서류들이 펄럭이며 떨어지는 모습에 지안이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를 품 안으로 가득 끌어안았다.

행복함에 가슴이 벅차올라 석한 또한 그녀를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저기서 키스하라는 환호가 울림과 동시에 미소가 번진 입술이 하나로 겹쳤다.

□ ◆ □

“진짜 결국 여행이었네. 너무 좋다!”

빙긋 웃는 그녀를 끌어안고 짧게 키스했다.

6 월 16 일.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 여행지인 프라하에 도착한 지안이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 피곤해?”

“응. 전혀. 나 완전 프라하 오고 싶었거든.”

“비행기 오래 탔는데도?”

“응. 그 정도야 뭐.”

나는 호텔에서 쉬고 싶은데. 연신 읊조리는 그의 의견을 무시한 채 호텔에 가방을 놓고 곧바로 프라하


구경에 나섰다.

오후에 도착한 탓에 금세 날이 어두워졌다.

날이 어두워지자 더욱 아름다워진 프라하 광경에 지안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손을 꼭 맞잡은 채로 많은 사람이 여유롭게 오가는 카를교를 걸었다.

대화하지 않아도, 마주친 눈빛만으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눈이 마주치면 짧게라도 입술이 마주쳤고,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자석같이 서로
끌어안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이마 위로 흩날리는 지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여유롭게 흘러가는 볼타강 물결을 바라보던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

지안이 눈을 반짝이며 한곳을 응시했다.

“저거 그거다.”

“응? 뭐?”

“소원 비는 동상.”

“아…….”

“우리 저거 하러 가자!”

지안이 신이 난 듯 석한의 손을 끌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저기 반짝거리는 개 만지면서 소원 비는 거래.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저기만 반짝거린다.”

신기한 듯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며 살피는 지안을 바라보다 석한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우리 지안이가 무슨 소원 빌 건데 이렇게 신이 났을까?”

“소원을 누가 말해.”

“어? 나한테도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너도 나한테 말하지 마.”

“와. 서운하다.”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

살짝 눈매를 찌푸렸던 석한이 금세 웃었다.

두 사람의 순서가 되었다.

반짝이는 개를 어루만지며 눈을 감고 소원을 빈 석한이 천천히 눈을 떠 지안을 바라보았다.

금세 지안이 눈을 떴다.

“다 빌었어?”

“응. 가자.”

다시 손을 맞잡고 한참을 아름다운 프라하를 눈에 담으며 걸었다.

“근데 소원 뭐 빌었어?”
다시 집요하게 물어 오는 석한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만 물어보시죠, 오석한 씨. 좋은 거 빌었어요. 좋은 거.”

“나도. 아주 좋은 거 빌었어.”

“그래. 그러니 서로 궁금해하지 말자.”

“지안아, 너는 안 궁금해?”

“궁금해도 참을래. 들으면 효력 떨어져. 그러니 너도 참아.”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결국 석한이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마에 짧게 남는 입술 감촉에 지안이 그저 좋다고 웃었다.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아름다운 당신.

모든 것이 완벽했다.

‘평생 지금처럼 서로만 바라보길.’

두 사람의 소원은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필요 없는 소원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

- 完 - 윤이아 직작 공금 갠소 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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