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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3. 스물일곱, 겨울
14. 스물일곱, 겨울
2A. 열여덟, 겨울
4. 열여덟, 봄
5. 열여덟, 봄
7. 열여덟, 여름
9A. 열여덟, 여름
13. 스물일곱, 겨울
[6:00AM]
“한 잔 타 드릴까요?”
“아뇨, 여기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우리 조카 한번 만나 볼래요?”
“네?”
“내가 너무 갑자기 들이댔다, 그치.”
A는 난데없는 제안을 받은 것치고 표정이 태연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선 왼손을 올려 넥타이를 고쳐 맸다. 박 차장이 그의 넷째 손가락
에서 금색 반지를 발견하곤 민망한 듯 웃었다.
“맞다, 맞다! 선호 씨 누구 있었지, 참. 까먹고 있었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예.”
“네.”
‘뭔가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남자 B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정수리에 맞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반
투명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물의 온도가 그를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나
른하게 만들었다. 일어난 지 10분 정도 지났나, 아니 15분쯤 되었나. 냉수를
마시고 샤워를 시작했는데도 눈꺼풀에서 잠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명아, 엄마 왔다.”
“네.”
“언제 갔는데?”
음 한 9시?”
“ …….
“네.”
‘아, 이건 좀 억울한데.’
“하하하. 언제 퇴근해?”
“아까 해 드렸잖아요.”
“가끔 보는 정도예요.”
“내가 또 바둑 하면 할 말 많은데. 우리 외가가 바둑 집안이거든요. 사촌 형
이 무슨 바둑 신문 편집장이고 제일 잘하는 사촌 누나가 아마 5단이에요.”
“아마추어 5단도 대단한 거 아니에요?”
“명이요.”
“응? 명이?”
“……글쎄요.”
이명 9단은 어떤 고등학생이었나.
A의 머릿속에 여러 단편적인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대체로 누구나 아는 것
들, 그 남자와 같은 공간에 5분만 있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
작위로 떠오르는 기억 중에는 절대로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장면도 있었
다. A는 모니터 속 사진에 시선을 고정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실은 얘 잘 몰라요, 대리님.”
“그러네요.”
“넹, 이따 봐요.”
최 대리가 자리로 돌아간 뒤, A는 손을 키보드 위에 얹었다. 그러고도 한동
안 움직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이어폰을 집어 들고 천천히 귀에 꽂았다.
“……파죽지세라고 봐야죠? 그야말로 무패 행진. 기풍이 이 정도로 공격적
인 기수가 이렇게 성적에 기복이 없기도 쉽지 않은데요. 김석훈 9단이 사전
인터뷰에서 ‘껄끄러운 상대’라고 몸을 사렸을 만하죠?”
“전성기를 한창 달리고 있다 보니 ‘호랑이’ 김석훈 9단도 긴장이 되는 모양
이에요.”
“그 누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명 9단 별명이 ‘떨어지는 빗물’이잖아
요? 솔직히 빗물보다는 폭풍우가 어울리지 않나요?”
“연구생 시절에 행마가 예측불허하다고 붙은 별명이라는데……. 요즘 같아
선 사람 두개골을 팍! 깨 놓는 우박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하하하,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중반 전투력은 국내 역대 기사 중 최강급
기력인 것 같아요. 게다가 아직 20대 젊은 기사다 보니 미래가 정말 기대되
는데…….”
A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푸른 남색 하늘을 배경으로 투
명한 빗방울들이 유리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투둑투둑, 작은 물소리를 내
며.
‘어렵다고 느꼈던 건 내가 그 시절에 어려서였을까, 아니면 네가 어려운 사
람이라서였을까.’
A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사실은 그의 얼굴조
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등나무 꽃과 천둥 번개, 무표정하다가도 웃으면 분
위기가 정반대로 바뀌는 하얀 얼굴,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피었던 여름
과 눈 아닌 비가 내리던 축축한 겨울. 영화의 스틸 컷처럼 단편적인 여러 장
면은 안개 낀 거리와 같이 뿌옇고 희미했다.
떨어지는 빗물이라…….’
‘
“아니요. 바둑 둘 때만 씁니다.”
“위기는 없었고?”
“음…….”
“응. 땡큐.”
“네.”
“역시!”
“오늘은 혼자 있을래.”
두 여자가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저녁은 먹고 가.”
“집에 데려다주세요.”
- 서기 경민 -
이명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세 번이나 정독한 뒤에도 길 잃은 시선이
행간 사이를 헤맸다.
이런 연락은 난생처음 받아 봐서 황당했다. 졸업한 지 8년 만에 동창회라
니……. 그들이야 서로 친했으니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누구와도 친분이 없는 자신을 초대한 건 의아한 일이었다.
‘어디 목록을 보고 전체 문자 돌렸겠지.’
“그냥, 기분 나쁜 문자.”
“응?”
“……감사합니다.”
“응?”
“아……. 그럼요.”
“네? 네…….”
“헉, 헉…….”
“……괜, 찮습니다.”
“괜찮아요.”
[나: 응] 19:05
-서기 경민 -
전문을 읽어 내리자 노이즈가 잔뜩 낀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과호흡일 때 숨을 참으면 좀 낫대.’
깊은 과거에서 끌어 올린 음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나지막했다.
이명은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향수를 느끼다 피식 웃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
니었지만, 조금 전에 9년 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르쳐 준 방법을 사용했
었다. 그의 해법은 우습게도 어떤 의사의 충고보다도 잘 들었다. 그 시절이
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이명은 전원이 나간 로봇처럼 한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에 말
도 안 되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외투를 걸쳤다. 화장실에서 손
을 씻고서 문을 박차고 나가 대회 관계자들을 무시하고 미친 사람처럼 앞으
로 걸었다. 출구는 아직도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리셉션에 물어 호
텔 로비를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거리에 서서 처음 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를 말하
며 문을 닫았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응?”
“나 형석이 아닌데…….”
“잠깐만. 이거 놔…….”
“에이, 빼긴 왜 빼.”
남자는 몸을 휙 돌리며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러고선 확성기를 댄 것처
럼 우렁차게 소리쳤다.
“얘들아, 오형석 왔어!”
“걔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이명! 맞아!”
“아쭈? 이 새끼 시비 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응.”
“네가?”
“없대도 그러네.”
“됐어.”
“반장, 담배 피워?”
“엥? 반장이?”
‘그냥 갈 걸 그랬나.’
“엇…….”
“불도.”
“어?”
“아니야. 괜찮아.”
“덴 것 같은데?”
“전화해 봐.”
“쉿, 다 들리겠다.”
한선호는 놀리듯이 중얼거리고선 다시 입술을 맞부딪쳤다. 정신을 차릴 틈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이명의 어깨와 허리를 더듬던 손이 내려와 엉덩이를
지나 사타구니에 닿았다.
이제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너의 행동 때문에, 몸이 녹아
내리는 키스 때문에 머리끝까지 흥분해 버렸다고 소리 내어 고백한 거나 마
찬가지였다. 이명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하하, 귀여워.”
“5반.”
“뭐 이씨, 말 다 했어?”
초등학생 때부터 패턴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말싸움을 한 귀로 흘리며 선호
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조례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은 시점이라 교실에는 아
직 빈자리가 많았다. 새 학기다 보니 분위기는 서먹서먹했지만 서로 안면 있
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붙어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 몇이 선호에
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모범생 무리는 이미 앞줄에 포진해 있었다. 아직 첫 수업도 시작하지 않았는
데 무언가를 꺼내 놓고 공부하는 아이들도 몇 명 보였다. 장난을 좋아하는
까불이들도 눈에 띄었다. 벌써 뭐 재미있는 일 없나 눈을 반짝이는 김경민을
포함해서.
“나 올해는 진짜 공부할 거야.”
“저 새끼 차별도 존나 심하대.”
“네, 선생님.”
“네.”
“담임이 뭐래?”
“내가 언제.”
“장난하냐? 두 명은 축구부잖아.”
“아랍어로 써도 됨?”
‘어휴, 진짜…….’
“에어컨 안 나와?”
“어휴…….”
“이 씹돼지 새끼!”
“잠깐만. 야, 반티 안 입은 애들 빨리 입어!”
“화이팅!”
“뭐라고?”
“마지막.”
“응. 내가 할게.”
“고마워, 반장!”
“반장, 힘내!”
“갑자기 무슨 소리야?”
“M짜리 남는 거 없나 해서.”
“할 짓도 드럽게 없나 보다.”
“그래? 근데 학교 왜 다녀?”
“아무튼 반티 남은 거 없단 거지?”
“응.”
“그럼 가자.”
남들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는 건 선호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집에서 애정과 관심을 듬뿍 받는 외아들이었고, 성적이 우수해서 촉망받는
학생이었고, 늘 남들보다 큰 책임을 진 리더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조금 다
른 종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그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
은 이명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선호는 그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체육 대회의 꽃’이란 별칭답게 아이들이 계주를 구경하러 구름처럼 몰려들
었다. 트랙을 둘러싸고 벽을 치며 인간 아레나를 형성했다. 응원부 아이들이
제각각 장비를 들고 가장 앞줄에 앉았다. 그리고 곧 3반과 5반 선수들이 출
발선에 섰다. 전교에서 운동을 특히 잘하는 두 반에서 가려 뽑은 에이스들이
다 보니 하나하나 존재감이 엄청났다. 주자들이 몸을 풀거나 상대 주자와 눈
을 마주치며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구경꾼들은 어느 반이 이길 것 같은지
큰 소리로 떠들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첫 번째 주자들이 자세를 잡았다. 마이크를
든 학생 주임이 묘하게 느린 속도로 숫자 3부터 역순으로 셌다. 그리고 때가
되자 ‘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자들이 바통을 쥐고 달려 나갔다.
“오! 오! 오! 5반! 5반! 5반!”
“와아아아아아아악!”
“아, 쌤! 이건 아니죠!”
“이럴 줄 알았다…….”
“……네.”
“잠깐 교무실 다녀올 테니까, 떠드는 소리 밖으로 안 새어 나가게 해.”
“네. 다녀오세요.”
“콜록! 콜록!”
“존나 기흉이라서.”
“1학년 땐 실려 갔다는데.”
“어어……. 알았어.”
“흐윽……! 윽…….”
“진정될 때까지 조금만 참아. 응? 좀 있으면 보건 쌤 오실 거야.”
크게 뜬 눈 안에서 동공이 흔들렸다. 축축한 입술을 짓누른 손바닥이 뜨거웠
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 둘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이 상황이 이상하겠지만 괜찮아질 때까지만, 조금만 참아.’
“네.”
“네.”
“우와, 쩔어!”
“빨리빨리 창문 좀 열어 봐.”
“대박, 어디?”
“저기 시커먼 데.”
그러나 그가 보는 것은 바깥 풍경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 중간에는 몇 시간
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소년이 있었다. 빛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널찍한 창
을 배경으로 남자아이의 옆모습이 있었다.
교실이 어두운 탓에 그늘진 피부가 은밀한 푸른빛으로 보였다. 콧날과 입술
의 부드러운 실루엣이 역광 때문에 도드라졌다. 빛이 조각해 놓은 옆선은 말
문이 막힐 정도로 섬세해서 그가 앉아 있는 각도가 우연이라기보단 공들인
연출처럼 보였다.
“비 존나 온다.”
“꼰대 새끼.”
“고오?”
“좋아, 좋아. 2:2 가자.”
“머릿수도 딱이네. 선호, 갈 거지?”
“뭔 일 났나?”
“한 명은 오형석이고 한 명은 모르겠어.”
“그건…….”
“그냥 팩트 아닌가.”
“교실에서 뭐 하는 거야.”
“…….”
“……쟤.”
“다 도망간 것 같아.”
“아니야. 먼저 가.”
“알았어.”
“아니야. 괜찮다니까.”
“응.”
“어?”
“……아.”
“…….”
“뇌물…… 줬다고.”
“맞아.”
“담탱이도 막, 군침 흘리더라고.”
실없는 농담이라도 하면 이명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슬그머니
덧붙여 봤다. 이런 건 김경민 같은 애들이 잘하는데, 자신이 하니까 영 재미
가 없는 것 같았다.
“풋.”
그런데 이명이 웃었다. 눈꺼풀이 가늘어지며 동그란 눈동자를 가렸고, 경직
되어 있던 입가가 움직여 곡선을 그렸다. 선호의 귓가에 음악이 들렸다. 아
주 희미하게.
“그 마들렌, 더럽게 맛없어.”
“응?”
“어?”
“개그맨은 무슨.”
“어……?”
“어? 음…….”
“가자. 내가 사 줄게.”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나 다 괜찮은데.”
“응?”
“진짜?”
“응.”
“…….”
“미안…….”
“내가?”
“응.”
“그래? 파일은?”
“웹하드에 올려놨어요.”
“정말요? 뭐 급한 일 있으세요?”
“네?”
“응. 좋아.”
“네 것만 준비했는데…….”
“아니야. 너 마셔.”
“난 괜찮은데…….”
“아니. 잘 몰라.”
“잘 모르겠어.”
“별일 없었어?”
“네?”
“꼭 나 어릴 때 생각나더라고.”
‘진심이세요, 선생님?’
“네? 네.”
어영부영하는 사이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선호는 인생에서 가장 불안정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문득 가슴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 없다가도 급격히 싸늘해져 모든 것이 싫어지기도 했다.
수학여행을 생각하면 기대감이 차올랐고, 그러다가도 화가 나거나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채 아무것도 안 하고 몇 시간씩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는 외아들이 사춘기를 뒤늦게 겪는가 보
다 짐작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선호는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때만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절대로 결론이 나지 않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생
각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던 중에 중간고사가 새벽처럼 닥쳐왔다. 잠에서 막 깨어난 선호는 눈을
비볐다. 그는 준비되지 않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준비되지 않은 예비 낙
오자였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부담,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책
임감, 야망 등 여러 욕심들이 최전선으로 불려 나왔다. 원래 그 자리를 지키
고 있던 모호한 무언가는 일견 물러나는 듯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적지
않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었다.
친구 필기 베끼기, 서로 설명해 주기, 퀴즈 내기, 교과서 필사, 외울 때까지
읽기, 줄임말로 암기하기, 벼락치기……. 예로부터 성적을 급상승시키는 데
좋다고 알려진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수면 시간은 세 시간씩 늦춰졌다.
중간고사 이틀째에는 급기야 코피가 터졌다.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서 옷장에서 다시 춘추복을 꺼내 입은 날, 1학기에 그
랬던 것처럼 교실 벽면에 A3 용지가 붙었다.
4등: 한선호 (평균 93.7점)
“……어.”
“난 점수 올랐다! 아싸.”
공부 안 해도 돼서.
‘명이는 좋겠네.’
아무렇지 않아서.
‘명이는 좋겠네.’
“아……. 그랬지.”
“뭐야, 졸라 재수 없네.”
“뭐부터 한대?”
“네, 선생님.”
“아, 존나 떨린다.”
“…….”
“…….”
과호흡 2권
<목차>
15. 스물일곱, 겨울
2B. 열여덟, 겨울
3. 열여덟, 겨울
6. 열여덟, 봄
8. 열여덟, 여름
9B. 열여덟, 여름
10. 열여덟, 가을
11. 열아홉, 겨울
12. 열아홉, 겨울
16. 스물일곱, 겨울
1. 열일곱, 여름
15. 스물일곱, 겨울
처음 보는 골목들은 핏줄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그 안을 수많은 차량과 사
람들이 뒤섞여 혈류처럼 빠져나가고 밀려들었다.
가사가 뭉개진 유행가와 고함, 간헐적으로 울리는 차량 경적이 뒤섞인 소음
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휙휙 바뀌는 광경에는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골목을 지나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버거울 정도로 화려한
시각적 자극에 원형은 흐려지고 색만 기억됐다.
짙푸른 거리, 녹색 거리, 노랑과 주황색 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며 버릇
처럼 수를 읽었다. 상대가 취할 법한 행동을 예측해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
을 설계한다.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선점해야 하는 요지를 짚어 낸다.
복잡한 전략을 거미줄처럼 확장해 나가면서도 이명은 분석이 무용하다고 느
꼈다. 현실은 바둑이 아니며 그의 기재는 바둑판 바깥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
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공평하게 한 번씩 착점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이명은 8년 만에 만난 남자의 손에 이끌려 낯선 장소를 통과하고 있
었다. 주도권은 상대가 쥐고 있었고 바둑처럼 기다리면 차례가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것은 얼마나 일방적일까. 가만히 저울질해 봤지만 그 질문은 마치 허공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끌고 가는 한선호 이전에 그의 손을 붙잡은 이명이 있
었다. 그 전에 손을 내민 한선호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한선호를 남
몰래 좋아한 이명이 있었다. 누가 주도하고 누가 따른단 말인가. 주도하든
혹은 이끌려 가든 뭐가 달라지는가.
어차피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을 잡은 순간에 속을 활짝
열어 보인 셈이니까. 반면에 한선호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으니 결국 그
가 승리자일까? 이겨서 기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한선호가 꽉 붙잡고 있던 이명의 손을 놓은 건 온통 붉게 번들거리는 거리의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아, 하아…….”
“으응…….”
“뒤로 빼지 말고.”
‘병신.’
“술 마시면서 나만 보는 거.”
“왜, 신경 쓰여?”
“빼.”
‘병신.’
“으윽! 흐윽.”
“네.”
그는 손을 들어 교실 중간을 가리켰다.
“자, 반장. 친구들에게 할 말 있어?”
“지렸다.”
“맞거든, 띨빡아?”
“어쩌라고, 그럼 내가 본 건 뭐야?”
+, +
네 눈이 삐었나 보지.”
“
+, +, +
“누구?”
“택시?”
“그냥 그렇다고.”
“누군데?”
“김명?”
“누군지 모르겠다. 아직 이름 다 못 외웠어.”
이름이 잘못되었는데도 아무도 정정하지 않았다. 하긴, 이명도 거기 앉아 있
는 다섯 명 중에 이름을 제대로 아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바둑 하는 애들 좀 이상하지 않냐?”
“왜?”
“윽! 나 방금 사망함.”
“어? 그래.”
“냄새도 좋고.”
“응. 진하다.”
“안 떨어지던데…….”
“맞아.”
“응?”
“오늘 급식 맛있었어?”
“아니. 너네는?”
“다행이다.”
“오빠도 하고 싶어?”
“응……. 가끔은.”
“그럼 나랑 할래?”
“응?”
“흐음…….”
“축구부는 아니야.”
“어? 우리 반인데…….”
“그렇구나.”
“한…….”
“…….”
“누가 싫어하겠어, 저런 사람을.”
“그치?”
“그러게.”
“…….”
“……뭐?”
“오랜만에.”
“……뭐?”
“…….”
“응? 아냐.”
“12초.”
“나나 11초!”
“씨발, 다들 자메이카인들이세요?”
“뭐야, 존나 무섭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기분이 안 좋아서요.”
엄마가 핏 웃었다.
“늦게 오는 사춘기가 무섭다더니. 선생님께서 뭐라고 안 하셨어?”
“이거 주시던데요.”
“…….”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응?”
“보내 주세요……. 진짜, 열심히 할게요.”
엄마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이명의 눈을 가만히 보더니 한
숨을 길게 쉬었다.
“마지막이라서 아쉬워?”
“그냥…… 한 번만 가 보고 싶어요.”
“와아아아아악!”
“시끄러워!”
힘없고 졸려 보이던 아이들은 ‘자유 시간’이란 말에 쌩쌩함을 되찾았다. 일
정상 취침할 일만 남았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이명은 아이들이 잠
자는 시간에 열광하는 게 좀 의아했다.
“들어가서 씻고 조용히 잠만 잔다. 알았어?”
“네에!”
“네에에에에엣!”
“이날만을 기다렸다!”
“…….”
“창가?”
“네가 저리 가. 저기 왼쪽으로.”
“아, 왜? 내 자리야!”
“……미안.”
다른 애들이 자리를 턱턱 밟고 다녀도 웃어넘겼으면서, 그에게만 까칠하게
굴었다. 이런 취급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데도 이명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
았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그에게 무관심했다면 이곳에서는 적대감이 더 피
부로 와닿았다. 핸드폰을 보며 낄낄거리다가도 그만 지나가면 고개를 휙 돌
리며 노려보는데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너
는 이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오른쪽 구석 자리가 이렇게 멀었던가. 한선호가 맡아 놓은 자리에 도착했을
때 이명은 진이 빠져 있었다.
‘수학여행, 힘든 거였구나…….’
“왜?”
“너 코 골까 봐.”
“너 자는 줄 알았는데. 안 잘 거면 같이 놀자.”
“어?”
‘나 나가려던 참인데.’
‘옆방 가서 자려고.’
‘아니야. 난 됐어.’
“그럼 건배!”
“윽, 원래 이런 거야?”
“워어어어어!”
“윗집 누나.”
“어어어어억! 어억!”
“뭘?”
“뭐기는, 섹스!”
“아니.”
‘응?’
“크흐흐흐, 어.”
“뭐야, 쟤…….”
“오냐.”
“하루에 딸 몇 번 잡냐?”
“에헤헤헤헤, 뿡!”
“어? 이거 네 거냐?”
“뭔 잠옷인데?”
“흰 티야.”
“난 못 봤는데.”
“어떻게? 우리 형이 그거 어렵댔는데.”
“아니야. 직접 해 보면 훨씬 쉬워.”
“선생님께 경례.”
“뭐야, 알려 줘!”
“……메롱.”
“음…….”
“뷔페?”
찰칵.
아무래도 사진은 잘 안 나올 것 같았다. 하필 그때 비구름이 햇빛을 가려 운
동장에 그늘이 짙게 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요, 확인해 보세요!”
“그래? 다녀올래?”
“금방 갔다 올게요.”
“명이야.”
“넌 앞으로…… 기사 하는 거야?”
“응? 응.”
“응.”
“응?”
‘이런, 바보!’
“그렇구나.”
“나도!”
“부질없다.”
‘명이야, 괜찮아?’
‘명이 너, 집 어디야?’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나 좋아하잖아.’
과호흡 3권
<목차>
17. 스물일곱, 겨울
18. 스물여덟, 봄
19. 스물여덟, 겨울
17. 스물일곱, 겨울
“…… 치명적인 자충수 이후 17수 만에 불계패를 선언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의 선전을 바라던 바둑 팬들에게는 참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국내에선 경기 중 기사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래도 끝까지 책
임을 다하며 스포츠맨십을 보였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
데, 홍랴오치 9단이 경기 직후의 인터뷰에서 이 대국에 관해…….”
이명은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흘려듣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분명히
속상했을 내용이 알쏭달쏭한 외국어처럼 들렸다. 그는 휙휙 흘러가는 시가
지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한선호가 옆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
자, 무표정하던 눈매가 가늘어지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명은 어떻게 반응
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저거 네 얘기지?’ 하고 순진하게 묻는
건가, 아니면 놀리는 건가. 어쩌면 라디오를 듣지 않았는데 그냥 웃은 걸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다 왔어’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명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자
연스럽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확신이 없었다. 눈치 보는 게 티 나지 않을까,
자신감 없어 보이지 않을까. 숫기 없고 서툴러 보이겠지. 말주변도 없고 분
위기를 처지게 하겠지. 어쩌면 한선호는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 이런 남자를 선택한 것을…….
‘선택이라고?’
“어딜 가려고?”
“어, 어? 미안.”
“아침에 말이야.”
“아침?”
응 아침에. 이런 풍경을 상상하면서 일어났는데, 네가 도망가고 없었잖
“ .
아 .”
“……내가 뭘.”
한선호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어 차
키를 꺼냈다. 삐빅, 바로 옆에 주차된 SUV의 주행등이 켜졌다. 크고, 검고,
멋있고. 한선호와 잘 어울리는 차량이라고 이명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집은 어디야?”
“영산동…….”
“이사 안 갔어?”
“응.”
“다 왔네.”
“……어?”
“네.”
“너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 들어와.”
“귀찮아요.”
“음메에.”
“어, 음…….”
“쟤보다 너 어릴 때가 더 귀여웠어.”
두 번째 귤을 까던 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나, 내가 애기였을 땐 오빠도 애기였거든?”
“그래도 다 기억나.”
보통 연년생 남매는 싸운다는데, 어린 시절 정은 이명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었다. 이명은 늘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녔으며 그녀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가
지 않으려 했다.
“맞아. 정이 네가 쟤보다 훨씬 예뻤어.”
“오, 엄마까지?”
―명이야.
―뭐 하고 있었어?
―잠깐 나올래?
“아무거나 괜찮은데.”
―아메리카노 괜찮아?
“어? 응…….”
“어젠 뭐 했어?”
“응. 춥지?”
“넌 뭐였는데? 기사?”
“얼굴엔 자신 있는 거지?”
“……아니야.”
“왜?”
예쁘니까.”
“
“…….”
“집 다 왔는데.”
“그러네.”
“차는?”
“저쪽에 세워 놨어.”
“너 가야지.”
“응.”
“……괜찮은데.”
한선호는 그가 겨우 짜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럼 연락할게, 명이야.”
“잘 가.”
“응, 으응……!”
“그저께, 왜 그랬어.”
“응?”
“뭐?”
“맨날 가래.”
결국 오해받았다.
이명은 난처했으나, 이것은 꼭 필요한 오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한선호가 집에 가야 하는 이유를–즉, 이번 주
에 야근이 많다던 그가 주중의 한중간인 수요일에 무리해서 찾아온 것부터
가 문제인데 오늘 너무 늦게 들어가면 내일 업무에 지장이 생길 테고, 그러
면 야근을 더 많이 해야 하고, 그가 불행해지는 건 싫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정확히 설명하려면 분명히 얘기가 길어질 텐데, 그들은 그렇게 오래 이야기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 욕실 써도 돼.”
“같이 씻을까?”
‘……이런.’
“그건…….”
“……응.”
“너도, 잘 자.”
“명이야, 뭐라고?”
“응. 괜찮아.”
한선호는 커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의 한 손은 끈적이는 젤에 젖은 채
이명의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다른 손은 그가 이불에 고개를 묻
을 수 없도록 턱을 단단히 쥔 채였다.
“으, 으…….”
“알았어.”
빨 리이, 흑, 으윽.”
“ ……
“괜찮아.”
“기원? 바둑 두러 가는 거야?”
“응, 보통은.”
“넌 뭘 좋아하는데?”
“다 좋아하는데.”
“오늘은 뭐 먹을 거야?”
“그럼 나도.”
“갈비탕 두 개 주세요.”
“응.”
“늦은 건데.”
“응.”
“저번에 네가 커피 샀잖아.”
“이제 사러 갈 건데?”
“너 가서 마실 거나 사 와.”
“……뭐?”
“나 줘! 나부터 줘!”
“하하, 감사합니다.”
“친구는 바둑 좀 두시나?”
“아뇨. 보는 것만 좋아합니다.”
“잘됐다. 오늘 우리 이명 9단 바둑 두는 거 보고 가.”
“그럼 한 판만 두고 갈게요.”
“저게 프로구나.”
“좀 살살해요.”
“수고하셨습니다.”
“2박 3일.”
“누구누구 가?”
“사범님이랑 둘이 가는데.”
“괜찮아.”
“선호 씨, 요즘 좋은 일 있어요?”
“제가 그래 보여요?”
응 요즘 맨날 야근하면서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일까? 좋은 사람이라도 생긴
“ .
거야?”
“하하하, 네.”
‘그래? 둘 중에 누구?’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쪽 말이여. 이따 사인 받아.’
해장국집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이명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식당 벽에
는 그의 사인이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금색 액자에 든 채 정중앙에 걸려 있
었다.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이명을 보자마
자 총알처럼 튀어 올랐는데, 테이블에 물을 가져다주며 볼에 홍조를 띠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밥을 갈비탕에 마는 이명은 자신을 둘러싼 관심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명이는 이 세계의 아이돌 같은 거구나.’
‘2박 3일.’
‘누구누구 가?’
‘사범님이랑 둘이 가는데.’
며칠 동안 지방에 간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이명이 한선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 단둘이 며칠간 지낸다고 생각하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기원에서 나왔을 때 이명은 컨디션이 몹시 나빠 보였다. 피곤한지 자꾸 벽에
기대려고 했으며-늘 그렇기는 하지만-눈치를 심하게 보았고 우물거리듯이
말했다. 전날에도 무리하지 않았던가. 이명에게 한마디 하려던 한선호는 마
음을 고쳐먹었다.
조승빈의 말투에서 짐작하건대 ‘교류회’라는 것은 정기적이고도 공개적이
며 사제지간이 함께 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행사 같았다. 게다가 이 일
은 그들이 재회하기 전에, 그러니까 한선호와 이명이 아무 접점도 없었던 시
절에 계획되었다. 그 뼈아픈 사실이 한선호로 하여금 물러서게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명이야, 다음 주에 양양 간다고 했지?’
‘응.’
‘언제 가?’
‘응.’
‘혹시 같은 방 써?’
‘…….’
그럼 예민하지 않다면, 다 큰 남자 둘이서 한 방을 쓰겠다는 건가. 수요일 몇
시에 갔다가 금요일 몇 시에 온다는 건가. 바둑만 두겠다는 건가, 종일 붙어
있겠다는 건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한선호는 입을 다물었다. 가
뜩이나 이명이 자신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하는 상황에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명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한선호는 그를 따라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
았으나 꾹 눌러 참았다. 이명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콤한 키스를 선사했
고, 그들은 헤어졌다.
그때는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한선호는 조 원장이나 조승빈 3단, 임주혁 사
범, 기원에 상주하는 팬클럽 회원들, 그리고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이명의 지
인들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이명이 아무 경계 없이–가령 누가 어깨나 등에
손을 대도 아무런 문제점도 느끼지 못한 채-그들과 어울리는 게 발톱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땐 스스럼없이 말하고, 긴장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깜짝깜짝 놀라지도 않았다.
곱씹을수록 이명은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만 굳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종일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는 이명이 그들에게 다정하게 연락하는 상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억울해…….’
[나: 출발할게] 3일 전
―……근데, 왜?
퉁명스러운 말씨에 속지 않았다. 부끄러운 듯 속삭이는 음성에서는 전화가
와 기쁘다는 티가 꿀처럼 뚝뚝 떨어졌으니까. 한선호는 그런 이명에게 회사
앞까지 자신을 보러 오라고 조를 참이었다. 그러려고 바쁜 중에 짬을 내서
나와 있었다. 그는 할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내일 교류회 가지? 언제 출발해?”
―새벽 4시.
“4시?”
“그래?”
“그동안 못 보잖아.”
“네, 알겠습니다!”
나 잘 도착했어?] 어제
[ :
[나: (이모티콘)] 어제
“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예. 수고하십시오.”
“어이쿠, 깜짝이야.”
“인터폰에 호출하세요.”
“그거 제 택배인데요.”
“오빠, 중국 갔어요.”
“들어가세요.”
“……네.”
woo***: 두유노킹명?
“…….”
“왜…… 못 말해 주는데?”
“말하기 싫으니까.”
“…….”
‘……아니요.’
‘나도, 보고 싶어.’
“네.”
‘헤어지자.’
이명이 말했다. 12월 19일 토요일 오후 3시, 그와 재회한 지 22일 만의 일이
었다.
‘넌 나와 어울리지 않아.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너랑 있으면 내가, 내가 너무, 비참해지고…… 존재 자체가 흔들려.’
처음에 담담하게 내뱉었던 이명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깨물었
다. 갈 곳 잃은 그의 시선이 카페 테이블 위를 방황했다.
‘그냥 난…… 널 멀리서 좋아하는 게 어울렸던 것 같아. 미안.’
“이정 씨? 한선호입니다.”
“네. 괜찮습니다.”
―…….
“지금은, 아니지만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실을 소리 내어 꺼내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그런 것 같았어요. 오빠가 차인 거겠죠.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를 놓치는 게 너무 두려워서, 네가 너무 좋아서…… 나, 뭐든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주먹을 꼭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기적인 건 알지만…… 나, 더 노력할 테니까, 한 번만, 이번 한 번
만…….”
이명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한선호는 그의 애원을 끝
까지 듣지 않고, 그의 왼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코트 주머니 안으로 끌어당
겼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돼, 명이야.”
“……응? 응.”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야?”
“아무거나 괜찮은데…….”
한선호는 일부러 표정을 굳히고 그를 노려보는 척했다. 이명의 미간이 걱정
으로 좁아지더니 그가 무작정 입을 벌렸다.
“엇…….”
“엇, 뭐?”
“그건…….”
“응?”
“난 네가 다른 사람하고 몸이 닿는 게 싫어.”
“악수 같은 것도?”
“응.”
“응?”
“응.”
앱으로 연결>>>>>
대화를 쭉 내려 본 한선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둘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사적인 대화가 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승빈은 단지 이명을 게임 초대용
계정으로 이용해 먹고 있었다.
이명은 화면을 보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고기를 집어 먹었다.
“또 보냈네……. 게임 같은 거 못 한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한선호는 집게로 적당하게 익은 고기를 집어 이명의 밥그릇 뚜껑에 수북이
올렸다. 배가 고프기는 했는지, 그는 정말 잘 먹었다. 한선호는 입 안 가득 고
기를 넣고 씹는 이명을 흐뭇하게 보다가, 조금 긴장한 상태로 가장 신경 쓰
이는 대화방을 확인했다.
※※[[지금 전국이 난리입니다]]※※
무한 펌 글 공유하기부탁요~^^
-출처 청와대-
“응?”
“……아.”
“음…….”
“알아.”
“이명.”
“뭐……?”
“…….”
“…….”
너 말고 누가 있었겠어.”
“
“응.”
“……애인.”
“얼른…… 물어봐.”
“그게 무슨…….”
“…….”
“응? 그게 뭔데?”
“엇……. 진실 게임 마저 하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말만이라도 고맙다.”
“인터뷰?”
“뭐? 당장 데려와!”
“안녕하십니까. 이명입니다.”
김 편집장은 정중하게 악수를 청한 뒤 그를 안으로 모셨다. 이명 9단은 듣던
것보다 훨씬 작고 마른 남자였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키가 비슷하니 체격이
작은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조막만 해서인지 나이보다 앳되어 보여서인지
전체적으로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일요일이라 직원들이 없습니다. 이쪽은 오늘 도와주실 사진 기사분이고요.
그럼 이쪽 회의실로…….”
사진 기사와 이명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이명이 깨끗하게 정돈해 놓은 책상
앞에 앉자, 덩치 큰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곁에 앉았다. 그가 눈앞을 지
나니 김 편집장은 잠시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김 편집장은
직접 차를 타서 이명과 경호원에게 가져다준 뒤 그들의 건너편에 앉았다.
“12년산 보이찹니다. 입맛에 맞으시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말로 하긴 어려운데요.”
“네, 그러죠.”
“예.”
“아…….”
“‘어부’요?”
“네.”
“사진 미리 볼 수 있을까요?”
―어땠어?
―하하하! 다행이다.
―응. 왜?
“오늘 이명 9단하고 같이 왔거든. 난 또 경호원인 줄 알았네.”
―체격이 좀 그렇지? 일도 잘하고 싹싹해. 나 벌써 한 라인 탔잖아.
“뭐?”
“……어, 그래.”
“그래. 알았다.”
“감사합니다!”
아직 졸린 목소리였다.
“더 자, 명이야.”
“응…….”
“바지 안 벗고?”
“너만 벗고 있어.”
“아파?”
“시켜 먹자.”
“치…… 자.”
“그럼 나 커피 타 줘.”
“응.”
이명이 바쁠 땐 그의 하인이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한선호는 커피 메
이커의 전원을 켜며 미소 지었다. 처음 사귈 때는 ‘아무거나’ 좋다고 하던 그
였는데. 이명이 원하는 걸 겨우 요구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거의 1년이
란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이명은 두 번의 커다란 패배를 겪었고 처참하게
난파되었으나, 패배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단단하게 재건되었
다. 그는 애정을 주고받는 데도 더욱 자연스러워졌으며 놀라울 정도로 어른
스러워졌다.
‘가끔은 아쉬워.’
“응.”
“이거 해야 되는데…….”
“으응…….”
“너무한다.”
두 번째는 착해서였다.
‘바둑은 좀 야비해야 되거든, 나처럼.’
“아래쪽도 신경 써야 할 텐데.”
“환격.”
“그게 뭐였지?”
“나가기 귀찮은데…….”
“요플레도 다 떨어졌던데.”
“정이는 서른 살 되는 게 무섭대.”
“왜?”
“왜?”
“난 서른이 기다려져.”
“선호라면 그럴 줄 알았어.”
“왜?”
“그땐 네가 곁에 없었잖아.”
“……이번엔 정말 안 그럴게.”
“왜?”
“너는?”
“뭐?”
“응.”
“치사해, 한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