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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억센 나뭇잎들이 뺨을 스쳤다. 처녀는 숨이 턱끝까지 닿도록 뛰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고, 밤하늘도 돌았다. 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괴물의 손이
지금에라도 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 그녀는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 사람 살려…….”

숨도 모자라면서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원을 올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나오는 말인지라 스스로 의식도 하지 못했다.

“꺄악!”

힘이 떨어져 휘청거리며 뛰던 그녀의 발끝에 나무뿌리가 걸렸다. 처녀는 그대로 앞으로


구르며 비탈길을 굴러 떨어졌다. 온갖 나뭇잎과 나무뿌리로 뒤덮인 비탈길을 구르며 그녀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한참을 굴러 떨어지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고


꼼짝도 못 했다. 곧 그녀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잘도 뛰는군.】

호랑이는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산더미 같은 덩치의 새하얀 호랑이, 백호(白虎).


【공물을 훔쳐간 도둑 주제에.】

달을 등진 거대한 짐승의 두 눈이 형형했다. 새파란 불꽃 같은 맹수의 눈동자는 격렬한


감정으로 불타올랐다. 연화는 덜덜 떨면서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호랑이의
뒤로 거대하고 붉은 달이 비추어 맹수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산주(山主)시여.”

어느 산에나 있다는 땅의 주인. 위대한 백호에게 바치는 공물에서 빼낸 손수건이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흰 비단에 고운 자수가 놓인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백호는 다시 한 번
으르렁대었다.

【가뜩이나 불쾌한 달이 뜬 날에……. 어린 계집아이가 못 하는 짓이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엎드려 비는 연화의 앞에서 호랑이는 어슬렁거리며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호랑이의 예민한
코에 젊은 처녀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너 때문에 제사는 망가졌고, 나를 만족시켜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마을 전부를 몰살시킬 것이다.】

호랑이는 목을 울렸다. 매번 붉은 달이 뜰 때마다 반복되는 이 어두운 충동. 갈 곳 없고


이유 없는 분노가 차오르고 세상을 향한 파괴의 욕구로 가득 찬다. 호랑이의 새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빛났다.
“산주님!”

연화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눈물과 땀과 먼지로 얼룩진 흰 얼굴이 애처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흩어져 흰 뺨에 붙어 있었다.

“잘못한 건 저입니다. 제발 벌은 저 하나에게만 주십시오, 제발.”

처녀는 빌면서 호랑이의 발치에 매달렸다.

자신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고작해야 작은 손수건일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산주에게 바쳐진 공물을 빼내는 일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아무런 관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목숨을 잃게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백호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간 받아오던 공양이 끊긴 지 수십 년. 인신공양을 그만두라 일렀더니 오만해진


인간들은 아예 수신(獸神)을 공경하는 법을 잊더군. 게다가 이 작은 제사에 바쳐진
공물마저 훔쳐내다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산주님. 제발…….”

이제 연화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저 옛 이야기로만 내려오던 그 산주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다니 이건 꿈같은 일이었다. 악몽이었지만.

백호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공물을 훔쳐간 인간 여자 따위는 적당히


혼내주고 잊었을 일이지만 오늘은 날이 좋지 않다. 붉은 달이 떴다.
【운이 좋지 않은 여자로군.】

그는 몸 안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 향할 곳 없는 충동을 느끼면서 흰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몇십 년에 한 번 오는 발정기다. 유달리 크고 붉은 달이 뜨는 밤.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사방신의 하나인 백호에게는 그 달이 내뿜는 음기가 온 몸으로 침투하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극양의 존재인 백호에게 이 밤은 몸을 조심해야 하는 때였다. 지금 이렇게 유달리


감정이 파도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앞의 계집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양기가
달의 음기 때문에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백호는 눈을 내렸다. 콧속으로 연한 인간의 살냄새가, 달리느라 피부로 솟아오른 땀의


소금내가, 무엇보다 달콤한 여인의 암컷내가 파고들었다.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희다. 반듯한 이마 위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애처로웠다.


그녀는 검고 둥근 눈으로 백호를 올려다보며 공포를 누르려 애썼다. 가여운 자. 백호는
문득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아랫배를 단단하게 경직시키는 충동 또한 느꼈다. 저
가여운 여인을 부서질 때까지 범하고자 하는 욕망.

‘이 계집아이를 죽이고 빨리 거처로 돌아가야 한다.’

붉은 달이 중천이다. 몸이 훅 달아올랐다. 호랑이는 오랜만에 찾아온 발정기에 깊게


으르렁거렸다. 이대로 욕망이 솟구치다가는 눈에 띄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곁에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암컷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음양의 기가 균형을 이루었을
테니 굳이 교접을 하지 않고도 발정기를 가라앉혔을 것이다. 또한 제사가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굳이 이 시기에 인간계로 나오지 않았을 일이다.

모든 것이 이 여자 때문이었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백호의 몸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털이


스며들고 형형한 호랑이의 얼굴 안에서 인간의 얼굴이 나타났다. 팔과 다리가 드러나고, 곧
키가 큰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건방지고 불쾌한 일이다.”

남자의 아름다운 긴 백발이 땅에 끌렸다. 은색 눈썹이 짙은 그는 연화가 생전 처음 볼


만큼의 미남이었다. 형형한 눈동자는 색이 짙은 푸른빛. 빛이 날 만큼 희디흰 피부의
남자는 분명히…….

“산주님……?”

“그래. 내가 이 땅의 산주, 백호다.”

백호는 천천히 걸어서 여자에게 다가갔다. 느릿한 발밑으로 나뭇잎과 자갈들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의 긴 백발이 밤바람에 날려 뒤로 흩어졌다. 연화는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네 죄를 알겠지, 인간의 계집아이야.”


옷이 다 찢어진 처녀의 음기가 백호에게까지 와서 닿았다. 달의 영향인가, 유달리 강하고
향긋한 음기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번득였다. 연화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백호의
다리에 매달렸다.

“사, 산주님.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제 목을 걸고 벌을 달게 받겠사오니 제발 다른


이들만은…….”

처녀는 애타게 애원했다. 속이 끓는 듯한 말에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의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음기가 그의 발을 타고 올라왔다.

거처로 돌아가 다른 암컷을 들여야 하는가 고민하던 것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아, 흑…….”

짧은 신음성과 함께 향긋한 암컷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달콤했다.

본래대로라면 곁에 있을 형식적인 반려와 굳이 교접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은 발정기와 파괴된 제사의 분노로 엉켜 있었다.

신선한 암컷의 냄새.

평소 그는 자비로운 신이었으나 광폭해진 금수의 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백호는 발발 떨고 있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젖혔다. 그러난 목덜미가 희고 가늘어서


입맛이 돌았다. 그는 천천히 그 피부를 핥았다.
“흣…….”

“네 목숨 같은 것은 너무 하찮아서 내게 필요 없다. 그러나 넌 다른 쪽으로 쓸모가 있을


것 같군.”

“……예, 예?”

연화는 호랑이가 자신의 목을 느슨히 물고 있는 듯한 느낌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백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고
신령은 피식 웃었다. 인간이란 겁을 먹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 그는 좀 더
자비롭게 그녀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백호는 지금 당장 교미할 상대가 필요했다.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대신 내 잠자리 상대가 되어라.”

남자는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려 속삭였다. 여자는 여전히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의


초점이 흩어져 있었다. 백호는 그런 그녀의 옷깃 속으로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소금기
있는 땀에 촉촉히 젖은, 부드럽고 야들한 피부였다.

“자, 잠자리 상대라 하심은…….”

“마을에 내릴 벌을 거두는 대신, 네가 살아 있는 공물이 되어 내 충동을 가라앉히는


것이지.”
여인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내 발정기를 그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인간의 여인아.”

“아…….”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귓가와 턱선 위로 입을


맞췄다. 두려움과 당황에 정신이 나간 뇌리로도 감촉이 불식간에 스며들었다. 한 번도
남자와 이렇게 접촉을 해본 적 없었던 여자는 그 자체로 당혹해서 몸을 떨었다.

“앗…….”

백호는 그녀의 육신에서 처녀의 향기를 맡았다. 신선한 향기. 달밤에 올라와 있던 양기가
순간 훅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연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뒤로 눕혔다.
달리느라 찢어지고 벌어진 치맛자락이 힘없이 흐트러졌다. 그 사이로 여자의 희고 가느다란
허벅지가 드러났다.

“사방신(四方神)의 하나, 산주 백호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비록 잠시겠지만 좋은 꿈을


꾸는 것도 행복 아니겠느냐.”

백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발정기를 나기 위해 신부가 필요하지만 결코 실제 몸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었다. 신령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절차를 거치고 난 암컷이 곁에 있다면,
백호의 발정기는 그리 격렬하지 않게 지나간다. 만약 공물만 제대로 들어왔다면 그가
분노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신은 스스로 충동과 욕망을 잠재워야 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인간의 여인일 수밖에 없었다.
2화

그리고 연화는 신령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마구 달려 도망치느라 엉망이 된 머리와


옷차림에도 원래의 아름다움은 선명했다. 눈물이 어린 큰 눈과 달콤한 붉은색의 입술,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새처럼 가느다란 사지가 마음에 들어서 백호는 그녀의 치맛자락
사이로 손을 넣으며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에 연신 입술을 가져갔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에 대한 벌을 거둬주시는 건가요.”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호는 그녀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공물을 제대로 받은 셈이니까.”

처녀는 깊은 숨을 쉬었다.

그녀는 어리숙하고 순진했지만 백호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았다. 이 사내는 그녀의


몸을 원하는 것이다. 여인의 몸을 안고 씨를 뿌리려 하는 사내의 욕망이 피부가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생전 처음의 성교다. 심지어 상대가 산주 백호였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을 애써


억눌렀다.

“산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백호는 미소를 지었다.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짙은 푸른빛의
눈동자가 만족스럽게 가늘어졌다. 밤이라 동공이 확장된 것이 연화의 눈에도 보였다.
형상은 인간이되 그의 눈은 여전히 고양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 이리 오너라. 몸에 힘을 빼고. 두려워하지 마라.”

남자의 커다란 손이 연화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입은 얇은 저고리 깃 사이로 입을


맞추면서, 백호는 그녀의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음기. 머리카락 끝까지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붉은 달이 뜬 이 발정기에는 지나가는


암컷만 보아도 백호의 몸에서 양기가 솟아나왔다. 더구나 연화의 몸은 아주 부드럽고
연해서 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 같은 여인이었다.

신선하고 향기로운, 그만을 위한 여인.

“내 긴 삶에 있어서도 이러한 인연은 쉽지 않은데……. 너는 특별한 것 같구나.”

백호는 낮게 속삭이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귓볼을 잘근잘근 씹다가 귓구멍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연화의 어깨가 떨렸다. 신음성을 삼키려 애쓰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백호는 계속해서 귀를 핥고, 입술로 씹었다.

예민한 부분을 뜨거운 혀가 핥고 삼키려 든다. 연화는 생전 처음 겪는 감각에 결국


신음성을 터뜨렸다.

“으, 으읏……. 응…….”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둥글게 말고 남자의 애무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연화의 몸을 덮어버리는 백호의 큰 몸은 수월하게 그녀를 끌어당겨 구속했다. 가느다란
턱선을 핥고,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뿜는다. 어둠 속에서 정욕에 휩싸인 맹수의 눈이
번득였다.

“무서우냐? 할 수 없지. 네가 저지른 일의 업보다. 자업자득이라 할까.”

치마가 걷어지고 그 안 속곳이 남자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갔다. 부드러운 속치마까지


걷어내 버리고 그는 천천히 여자의 가느다란 다리를 쓸어 올렸다. 희고 매끈한 다리가
백호의 커다란 손에 한 줌으로 잡혔다.

연화는 여전히 두려움에 달달 떨었다. 그런 여자를 보면서 백호는 연신 그녀의 피부 위로


입술을 내렸다. 뺨과 귀, 목덜미와 턱선, 그리고 쇄골과 저고리 사이의 가슴.

남자는 끈을 풀 것도 없이 저고리의 고름을 간단히 끊어내었다. 소박하고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옷 사이로 얄팍한 속옷 한 겹이 나타났고, 그 밑으로 어릿하게 여자의 둥근
가슴이 보였다.

백호는 천천히 입술로 속저고리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뜨거운 입술과 축축한


숨결이 얇은 한 겹 천 위로 느껴져서 연화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을 할딱였다.

“흣……. 백호…… 님…….”

“그래.”
다른 사내의 손이 단 한 번도 닿지 않았던 몸이다. 생소하고 무서운 쾌락에 연화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백호는 그녀를 놀리듯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금수의 왕이었고, 그
누구보다 육체로 하는 대화에 익숙했다.

“흐, 흑…….”

무섭고 공포에 질린 작은 인간 여자를 꽉 끌어안고서 그는 그녀의 매끈한 종아리 위쪽


볼록한 복사뼈에 입을 맞췄다. 열이 올라 뜨거운 남자의 입술이 가느다란 발목에서부터
흘러 내려와 종아리를 거쳐 무릎 안쪽에 입맞춤한다.

“흐윽…….”

허벅지 안쪽으로 천천히 뜨거운 입술이 연신 입을 맞추며 올라온다. 씻을 때 이외에는


자신의 손마저 잘 닿지 않는 곳이다. 안쪽 넓적다리의 예민한 피부로 사내의 두껍고 큰
손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백호는 그녀의 다리와 골반이 연결되는 민감한 곳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치마를 걷어 올려


드러난 납작한 아랫배와 보송보송하게 음모가 시작되는 곳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신경이
온통 곤두서서, 마치 전신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것이 전부 쾌락처럼 느껴졌다.

“읏…….”

자꾸만 신음성이 비어져 나와 연화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남자가 목을 그르렁대며


말했다.

“손 치우거라. 예쁜 소리를 들려줘야지.”


“……으. 하…… 하지만…….”

“아니면 이대로 안고 인간의 마을로 내려가 주랴?”

백호는 심술 맞게 웃었고 떨던 연화는 결국 손을 내렸다. 손등을 깨물어서 발갛게 잇자국이


나 있었다.

남자는 혀를 차고 연화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숨결도 놀랍게 가빠져


있었다. 서로 호흡이 오가고, 뜨겁게 달아오른 혀와 타액이 오갔다.

언제 그녀를 죽이려 했냐는 듯, 사내의 몸짓은 지극히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마치 정말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격렬하게 연화의 온 몸을 탐했다.

“정말 작고 가느다란 몸이구나.”

손 안에 잡히는 인간 여인의 몸은 대나무처럼 날씬했다. 그녀의 허리가 뒤로 젖혀져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작은 흉곽이 위로 발씬거리며 오르내렸다. 소담한 가슴 끄트머리 유두가
솟아올라 붉었다.

“아, 흐……. 아!”

그의 손길에 연화는 정신이 나가 몸이 흔들렸다.

“아, 읏……!”
쾌락과 열기와 공포가 같은 양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백호가 급히 손을 내려 음모 안쪽으로 좀 더 깊숙히 손을 넣었다. 까슬한 검은 털 속으로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가고, 천천히 자그마한 돌기를 문질렀다.

“앗……!”

틈을 벌려 돌기를 꺼내 손톱으로 긁고 돌리면서 남자의 긴 중지가 천천히 여자의 은밀한


구멍으로 들어갔다. 자꾸만 조여드는 빡빡한 질 입구를 벌리면서 백호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연화의 내벽으로 파고들었다.

“……!”

생전 처음 겪는 삽입에 처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백호의 느린


애무로 이미 꽤 습기에 찬 내벽은, 좁고 빡빡했지만 찢어지지 않고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몸 안에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다는 생각에 연화는 넋을


잃었다. 정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백호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첫 경험인
그녀가 최대한 통증을 덜 수 있도록 좁은 내벽을 넓혀야 했다. 충분히 젖도록 작은 돌기와
그녀의 전신에 시간을 들여 애무를 했다.

“젠장.”

빨리 그녀의 몸 안으로 진입하고 싶어 손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깊숙이까지


반복적으로 추삽질하는 손가락이 거의 끝까지 살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여러 번. 흘러내린
애액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구멍이 제법 잘 먹는구나.”

내벽은 뻑뻑했지만 애액이 흐르면서 굵고 긴 손가락을 무리 없이 집어삼켰다. 백호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도 연화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했다. 뱃속이 뜨겁고 정신이 없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지만 연화의 몸은 이완되어 갔다. 중지 하나를 더 밀어 넣자 그


빡빡함에 연화가 작게 우는 소리를 냈지만 백호는 그녀의 몸이 상처를 입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움직였다. 미끄러운 애액이 그래도 될 만큼 넘쳐흘렀다.

산속의 숲은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 남자의 손이 찌걱찌걱 움직이는 소리가 둘 모두에게


들릴 만큼.

“이대로 씹어먹어 버리고 싶군.”

백호는 연화의 귓볼을 물면서 자근자근 씹었다. 그의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으르렁댔다. 절반의 공포와 절반의 쾌락에 연화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경직되었다.
덜덜 떨리는 아랫배를 보며 백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 암컷.”

그가 손가락 두개를 조금 벌렸다.

“아, 읏.”
내벽이 늘어나는 느낌에 연화는 고통과 쾌락 어느 쪽이 큰지 알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자꾸만 잇자국이 나는 그녀의 입술에 깊이 입 맞추어 호흡마저 앗아버리면서 백호는
손가락을 빼고 자신의 하의를 풀어헤쳤다.

“하아, 하아…….”

사내의 손이 떨어져 나간 음부가 허해서 연화는 다리를 움츠리려 했지만 곧 백호가 그녀의
다리를 잡아 넓게 벌렸다. 민감한 하지에 사내의 뜨거운 양물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아앗…….”

그녀는 뭐가 뭔지 알지 못한 채로 허덕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백호가 천천히


허리를 밀어붙였다.

“……!”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입구가 힘겹게 사내를 받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완전히


벌어져서 다리를 오므리지도 못하고, 그녀는 자신의 음부가 찢어질 것 같은 공포에 숨을
들이켰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백호는 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양물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넘치는 애액이 간신히
사내의 양물이 밀려들어 가도록 도와주었다.

“아, 아악!”

상상 외였다. 처녀의 여린 몸을 뚫고 들어온 백호의 성기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고통스러웠다. 연화는 어쩔 줄 몰라 덜덜 떨면서 바닥을 마구 쥐어뜯었다.
“악! 아아……!”

가느다란 어깨가 떨리며 어떻게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치는 것이 정복욕을


자극했다. 백호는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위로 몸을 숙였다.

3화

그르릉. 남자는 잔인하게 여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사정없이 문


그의 송곳니에 연화의 여린 피부에 생채기가 났다.

“아, 아파, 아픕니다……!”

간신히 숨을 찾은 연화가 애원했다. 살려달라 빌었다. 그녀는 백호의 손을 꽉 쥐고


목숨줄처럼 매달렸다.

“처음은, 언제나 고통스럽게 마련이지. 흣…….”

백호는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하반신은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아, 흑!”

완전히 벌어져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여자의 양다리를 잡고 남자는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연화의 가느다란 몸이 그 서슬에 풀 위로 밀려 올라갔다.
서로의 음모에 애액이 엉켜 끈적거렸다.

남자는 정신없이 바닥을 쥐어뜯고 있는 연화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목을 잡게 했다. 여자는


손 안에 잡히는 강인한 남자의 목덜미와 어깨에 정신없이 매달렸다. 백호의 흰 피부 위로
손톱자국이 벌겋게 생겼다.

“흣, 흐윽……! 백호 님, 백호 님……!”

“그래, 나는 여기 있다.”

허리 아래로는 무자비하게 쳐올리면서 백호는 진득한 목소리로 연화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낮고 달콤한 목소리.

몸 전체가 덜컥 덜컥 아래위로 흔들리면서 연화는 남자의 몸에 팔과 다리를 얽었다. 남자의


숨소리도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둘의 맞닿는 하지에서 찰박거리며 물기 젖은 피부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너무나 음란했다.

“나만 보아라. 다른 걸 보는 건 용서하지 않아. 찢어 죽일 것이다.”

백호는 유혹적인 동시에 위압적으로 속삭였고 연화는 숨을 몰아쉬었다.

다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백호가 허릿짓을 할 때마다 그의 양물은 점점 더 깊이 연화의


아랫배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좁고 가느다란 골반 밑으로 들어온 남자의 양물은 믿어지지
않게 커서 연화는 하반신 전체가 그의 것으로 가득 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부를 넘어서
마치 배꼽까지도 백호의 물건이 들어찬 기분이었다.

그녀는 허덕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를 만졌다. 손바닥 밑으로 꾸물거리며 양물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른 배 안쪽에서 크고, 두꺼운 것이 부피를 늘려가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크……!”

여자의 몸이 빠듯하게 백호의 양물을 조여 왔다. 내벽 한구석의 어딘가를 그의 물건이 치고


지나가면서 연화는 정신을 놓은 것처럼 바르작거렸다.

가느다란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백호의 가슴을 밀어댔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본능적으로 허릿짓이 빨라졌다. 그녀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백호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아, 아응……. 하읏! 아!!”

“큽……!”

연화는 전신을 옭아매는 절정의 감각에 도리질 쳤다. 백호 역시 여자의 몸을 꽉 끌어안고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후우…….”
그는 낮은 신음성을 삼키면서 여인의 몸 안에 자신의 뜨거운 정액을 분출했다. 연화의 경험
없던 몸은 난생 처음 맞이하는 절정에, 머리끝까지 정복하는 진득하고 충격적인 쾌락에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백호는 토정하면서 그녀의 탄력 있는 내벽이 쥐어짜듯 자신의
물건을 조이는 것을 느꼈다.

“…….”

연화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저 멀리 붉은 달을 보았다.


곧, 그녀의 의식이 재빠르게 사라졌다.

백호는 축 늘어지는 여인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의 전신에 땀이 흘러내렸다. 가냘픈 인간


여인은 금수의 왕을 받아내다가 결국 정신을 잃은 듯했다.

“간만에 괜찮은 여인을 찾은 것 같군.”

백호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체력이 약한 것은 흠결이지만 그거야 인간의


여자이니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매끄럽고 빠듯한 내벽이나 눈물 어린 자그마한
얼굴, 손에 착 감기는 매끄러운 피부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하고도 남았다.

연화를 들어 안은 채로 그는 숲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백호의 몸은 천천히 투명해져


갔다. 그렇게 그는 인간계에서 차원을 건너 자신의 영토인 신령계로 들어섰다.

숲의 반대편으로 나왔을 때는 신령계였다.


백호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신령계의 달은 더욱 붉고 커다랗고 잔인했다. 저 달이 뜰
때는 언제나 모든 금수들이 발정기에 미쳐 날뛴다. 가장 위험한 날일 것이다.

백호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그는 금수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달이 뜰 때마다 한 번씩


발정기를 맞이했다. 붉은 달이 떠 있는 한 달가량 지속되는 그 기간마다 신에게는 반려가
필요했다. 자신의 발정기를 달래고, 마치 한 쌍의 부부처럼 지낼 만한 반려가.

원래라면 그저 형식상의 반려로 서로 예를 갖춰 같은 공간에 있다가 돌아갔겠지만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백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공중에 몸을 띄웠다.

사방신의 신형은 공기를 타고 까마득한 절벽 위, 백호의 궁궐을 향해 올라갔다.

***

백호가 발정기를 맞이해 여자를 들이는 것은 몇십 년마다 한 번씩 있는 일이다. 붉은 달이


떠서 오게 되는 발정기는 꽤 간헐적이라 대중이 없었다.

백호의 반려 중에는 신령도 있었고 길짐승도 있었고 인간의 여자도 있었다. 인간 반려가
처음은 아니었다.

금수와 초목을 다스리는 사방신은 형식상의 반려라도 그들을 모두 존중했다. 여태까지의


반려들은 대부분 평화롭고 즐겁게 그의 발정기를 가라앉히고 함께 하다가 재화와 상을 받고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간혹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는데, 한 인간의 여인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백호의


정식 반려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끝끝내 벌을 받았다. 그저 한 공간 안에 달포가량
있었을 뿐인데도 그녀는 백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사방신끼리 얽혀 마찰이 있을
만큼 상당히 큰 소란이었다.
그래서 백호궁의 신령들은 또 다시 인간의 여인을 안고 불쑥 들어온 주인을 다소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백호는 2 층 누각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너른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청룡(靑龍) 놈이 또 지랄을 떨겠군.”

금수의 신은 투덜거렸다. 이 작은 산은 백호의 영토지만 산이 자리한 나라, 수국은 청룡의


가호를 받았다. 산의 모든 동물들은 백호의 수하이나 수국의 인간들은 청룡의 밑에 있다.
백호가 마음대로 연화를 데려와 반려로 삼았으니 꽤 말이 많을 것이었다.

“어차피 반려님도 좋다고 하셨잖습니까. 비록 공물의 대신이라도요.”

수호령 호접이 곁에서 날개를 팔랑거렸다. 그녀는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건드리지 않으시는 게 좋다고.”

“또 잔소리냐?”

“인간은 연약하고 동시에 강한 생물입니다. 백호 님의 수하인 짐승들과는 다릅니다.


교활하면서도 강인하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이거야?”

“그렇습니다. 아시는 분이 멋대로 인간의 여자를 데려오시다니.”

“겨우 한 달 남짓이야. 어차피 잠시 데리고 있다가 재물을 주고 내려 보낼 것이다.”

호접의 곁에 서 있던 묘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잔소리를 쏟아붓고 싶어서 입을


씰룩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줄였다.

“예전에도 인간의 여자가 한 번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당시 청룡 님께 꽤 큰 보상을


하셨었는데.”

“또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

“제발 신령 중에서 반려를 찾으세요. 어찌 이번 대의 사방신들께선 제대로 반려를 찾으시는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신지.”

“구닥다리, 그 소리 좀 그만해.”

“다음 대를 이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사방신의 다스림이 안정화되려면 반려와 가정이


있으셔야…….”

“현무 놈부터 찾으라고 해. 그놈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백호는 투덜거리면서 손을 휘저었다.

호접과 묘우의 입을 다물게 해놓고 그는 휘적휘적 걸어서 침실로 돌아갔다. 거대한 욕실과
연결되어 있는 침실에서 연화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예쁘긴 하군.”

백호는 팔짱을 끼고 침대가에 기대서서 그녀의 얼굴을 감상했다.

아침 햇살 속에서 연화의 피부가 투명하게 빛났다. 울어서 조금 부은 듯한 발그레한


눈가와, 간밤에 그가 물고 빨아서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눈을 끌었다.

백호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처음에 가벼웠던 입맞춤이 곧 깊어졌다. 입술을 벌리고 치열을 훑는 남자의 혀에 연화가


신음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화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4화
남자는 손을 내려 연화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작은 몸에 비해 소담하고 풍성한 젖가슴이
그의 손 안에 만족스럽게 들어찼다. 아주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잠옷을 입고 있었으나
벗은 것이나 매한가지라, 그는 그냥 옷의 위로 연화의 가슴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

막 잠에서 깬 연화가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놀라 몸을 웅크렸고 백호는 그녀의 팔을 잡아


침대로 눌렀다. 혀를 내어 유두를 핥고 이빨로 긁으면서 애무하자 금세 얄팍한 천이
젖어든다. 사내의 뜨거운 호흡과 질척한 점막의 느낌에 연화가 작게 울었다.

“흐, 응…….”

“어딜 물어도 맛있군.”

양쪽 가슴을 번갈아 핥고 베어 먹으며 백호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는 금수의 왕,


입맛을 돋우는 여인의 살결은 먹음직스러웠다.

옷이 걸리적거리자 그는 구태여 벗기기가 귀찮아 그대로 옷을 찢었다. 얇디얇은 비단이


그의 손짓에 따라 종잇장처럼 쭉 갈라졌다.

“배…… 백호 님…….”

밝디밝은 햇살 아래 매끄러운 속살을 내놓고 연화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백호는 입으로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을 연신 애무하면서 손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넣었다.
까슬하면서도 연약한 음모를 헤치고 손가락이 살짝 갈라진 은밀한 틈을 쓰다듬었다.

“흣…….”
어젯밤의 여파인가 그녀의 다리 사이는 도톰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미 입맞춤과 가슴을 어루만진 손길로 인해 손끝에 느껴지는 습기가 음모까지 번져


있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열이 훅 치받는 것을 스스로 다스리려 애쓰면서 조심히 그 틈을
어루만졌다.

“이 작은 몸으로 나를 잘도 받았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좁은 틈이고 작은 몸이다. 아마 백호의 양물이 들어서면 이


아랫배가 불룩해질지도 모른다. 그 광경을 상상하자 백호의 물건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반쯤 발기했던 큰 것이 완전히 힘을 얻어 곧추서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연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탓이다. 괜히 붉은 달이 떴을 때 죄를 범해서는.”

여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백호는 그녀의 아랫배로 고개를 숙였다. 약한 관절 부위와 배꼽


밑의 동그란 아랫배를 혀로 핥고 입술을 문대자 연화의 몸이 움찔거렸다.

“응…….”

그녀는 신음성을 내지 않고 싶었지만 양손을 백호에게 꽉 잡혀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정말 좁구나. 하지만 촉촉하고 매끄러워서 내 걸 또 삼킬 수도 있겠어.”


다리 사이에 엎드려서 백호가 입맛을 다셨다. 발정기를 거치고 또한 반려인 여인을 곁에 둔
적은 많았으나 실제로 관계를 가진 것은 연화뿐이었다. 발정기에 맞춰 제사를 망가뜨린 운
나쁘고 대담한 여인은 연화밖에 없었으니.

손가락으로 천천히 살점을 벌리자 위쪽으로 도드라진 돌기가 보였다. 부끄럽다는 듯 숨어


있다가 흥분을 견디지 못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곳. 그곳을 손톱으로 긁자 갈라진 틈 사이로
애액이 스며 나왔다.

“……!”

반복적으로 자극하며 혀를 가져다 대 스민 액체를 고양이처럼 핥았다.

“아……. 응…….”

입을 막지 못해 신음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꽃잎처럼 벌어진 분홍빛의 살점을 혀와


손끝으로 괴롭히면서 백호는 연화가 쾌락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치는 것을 즐겼다.

“흐, 흐으……!”

가느다란 몸이 허덕이며 뒤로 넘어갔다. 벌어진 다리는 발버둥이라도 치는 듯 침대 위로


마구 비벼졌다.

“백호 님……. 제발……!”


부끄러움에 연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난밤 파과를 했다 한들 그녀는 여태껏
사내와 관계를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던 몸이다. 애원에 가까운 말에 백호가 낮게 웃었다.

“아침엔 너무 괴롭히진 않겠다. 하지만 네가 내 식욕을 돋우는구나.”

자신의 허리춤을 헤치고 백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밑은 상당히 젖어들었고, 어젯밤


덕분에 여전히 풀린 상태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아, 아응……. 흑…….”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랫배로 불기둥 같은 것이 들어온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백호의 양손에 잡힌 채 무력하게 흔들리며 울었다.

“흑, 흐응……!”

그는 너무 괴롭히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게 점점 자제가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남자의 두 손이 연화의 가느다란 두 다리를 벌려 세워 어깨에 걸었다.
거의 반절로 접힌 상태로 그가 체중을 싣자 연화가 비명을 올렸다.

지나치게 큰 양물이 지나치게 깊이 들어왔다.

“아, 아아……!”

“정말로 좁고 정말로 따뜻하구나. 내 것을 오물거리며 잘도 먹어치워.”


“제발, 아, 읏, 아응!”

반복적인 추삽질에 연화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백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가는 종아리가 허공을 찰 뿐이었다. 그는 연화의 복숭아뼈와
정강이를 이빨로 물어 자국을 남기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랫배에서 오싹거리는 쾌락이 거부할 수


없이 치고 올라와 전신을 사로잡았다.

연화는 이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이불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 안에서 비단금침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백, 호 님……!”

“큭……!”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백호의 허릿짓이 절정으로 치달으며 연화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매끄럽게 드러난 목덜미에 남자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았다. 고통에 가까운 폭력적인
쾌감에 점령당하면서 연화는 자신의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을 느꼈다.

그녀의 내벽이 힘 있게 백호의 양물을 조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백호 역시 절정을


맞이했다. 그녀의 작고 따뜻한 몸 안에 자신의 씨물을 퍼뜨리면서 자신을 품고 있는 여인의
몸에 푹 묻혔다. 연화는 가쁘게 숨을 갈구했다.

“하아, 하아…….”
그는 팔꿈치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밑에서 바르작거리며 경련하듯 떨고 있는 연화에게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마저 뺏어갈 듯 거친 입맞춤이었다.

뱃속이 불을 품은 듯 뜨거웠다. 다시 한 번, 까무룩하고 연화의 정신이 잠시 멀어졌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온전히 암전되었다.

아주 느리게 세상이 돌아왔다.

“정신이 드나 보군. 아무래도 몸이 힘들었나?”

백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화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흰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면서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침햇살이 그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빛났다.

설마,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게 현실이었나.

방금 전의 관계까지도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연화는 눈을 비볐다. 설마 자신이 한밤


깊은 산속에서 산주 백호와 관계를 가진 것이 진짜였다니.

갑자기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어서 그녀는 다소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꽤
귀여워서 백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표정은.”
백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덥썩 연화를 안아 들었다. 꺅, 소리를 내며 처녀가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아, 아아……. 저…….”

“내 이름도 잊은 건 아니겠지? 백호다. 사방신 백호. 널 붉은 달이 뜨는 동안의 신부로


데려왔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는 인간 여자를 보면서 백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아주 가느다랗고 부드러웠다. 키는 그리 작지 않았는데 유달리 몸이 부서질 듯


가녀렸다. 백호는 그녀가 마치 날짐승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화는 몸을 움츠렸다. 눈앞의 남자는 인간 세상의 것 같지 않게 아름다웠고 실제로도


인간이 아니었다.

옛 이야기, 그들의 신앙 속에서만 전해지던 사방신이자 이 세상 모든 산의 주인인 백호.


흰 호랑이는 가장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인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었다.

만약 어젯밤 눈앞에서 그가 변하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몸집이 집채만 한 흰 호랑이가 아름다운 사내로 변하던 모습. 마치 환각처럼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그 광경.

“무서운 게냐?”
백호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인간의 여인을 들여다보았다.

지난밤 그녀를 취한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거칠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어제와 똑같이, 방금 전과 똑같이 그녀를 손 안에 쥐고 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 안에서 연화는 너무 작고 가냘픈 꽃 같아서 함부로 하면 바로


바스라질 것 같았다.

“아뇨……. 아닙니다. 아닙니다.”

연화는 떨리는 속내를 감추고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호랑이가 형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그리 쉽게 잊힐 리가 없었다. 눈앞의 미남자가 그 호랑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까지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흠, 흠.”

침실 입구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외의 방해에 백호가 인상을 쓰면서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호접이 점잖게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백호 님, 지금 반려님께서는 잠시의 쉼과 목욕재계가 필요하실 듯하옵니다.”

호접은 영 섬세하지 못한 백호를 걱정해서 따라 들어온 참이었다. 그녀는 날개를 팔랑이며


다가와 주군에게 눈짓을 했다. 잔뜩 긴장해서 몸이 굳은 연화를 깨달은 백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침대 위에 다시 내려놓고 호접에게 넘겨주었다.

5화
“괜찮습니다, 반려님.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호접은 눈을 반달로 접으면서 웃었다. 등 뒤에 나비의 날개를 단 작은 여인을 보면서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인간계를 많이 드나들어 인간들이 신령들의 어떤 점에
의문을 가지는지 잘 알고 있는 호접은 뒤를 돌아서 날개를 보여주었다.

“자, 보세요. 저는 나비의 혼을 지닌 신령이랍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연화는 오색의 꽃가루가 흩날리는 신령의 날개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쪽 벽에


기대선 백호의 눈치를 보다가 손을 내밀어 호접의 날개를 만져보았다. 얇고, 보슬하게
일어나 있는 촉감의 연한 노란색 날개. 연화는 손을 거두고 신기함에 눈만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저분은 사방신인 백호 님……. 그렇다면 이곳은 백호 님의 영토인…….’

세상은 세 개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저승과 현생과 천상.


현생은 다시 둘로 나뉘어진다. 인간계와 신령계. 백호는 신령계의 사방신으로, 인간을
제외한 산천초목과 금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예, 이곳은 신령계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백호 님의 반려로 이곳에 방문하셨으니


반려님께서는 저희를 마음대로 부리실 수 있습니다. 신령계의 모든 존재는 반려님 밑에
머리를 조아릴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호접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화의 손을 잡았다. 공포와 고통과 쾌락이 온통 뒤얽힌 지난밤에
갇혀 있던 연화는 조금 놀랐지만, 손을 감싸는 더 작고 보드라운 호접의 손길에 다소
안심했다.
나비의 신령은 따스하게 데운 꽃차를 준비해 대령시켰다. 인간계에서는 보지 못했던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에, 붉은 물의 차였다. 조심스레 차를 마시는 연화를 보다가 백호가
불쑥 물었다.

“그보다, 이름은 뭐지?”

“……연, 연화라고 합니다.”

“연화. 연못에 핀 꽃인가?”

백호가 턱을 긁었다. 호접은 잠시 주군을 무례하게 노려보았다. 하룻밤을 지냈으면서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단 말인가. 아무리 인간의 여인이라 해도 지나친 일이었다.

흰 머리카락의 남자는 느른한 눈으로, 얌전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약간 기묘한 기운 같은 것들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사방신인 그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분명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노란 빛이


연화의 피부 위로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었다.

“허.”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린 백호는 혀를 찼다.

“뭐야,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가피 아래 있는 게냐?”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주는 가피를 입은 여인이라니. 호접은 조금
놀라서 연화를 자세히 살폈다. 과연 그녀의 눈에도 아주 미세하게 연한 노란 빛이 잡혔다.
인간의 여인은 찻잔을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예……. 과분하오나 가피 한 자락 은혜를 입었습니다.”

“보살의 가피를 입은 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사방신은 법칙을 지키는 자, 보살은 법칙에서 빠져나간 자. 둘의 사이는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동시에 가깝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껄끄럽다고 봐야 맞았다. 보살들은
중생들을 그 법칙의 굴레에서 빼내고자 노력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관이야 없겠지. 어차피 한 달만 내 곁에서 지내는 것이니 말이다.”

“백호 님!”

“왜, 이미 연화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자신의 욕정은 지금 붉은 달 때문에 최대치로 올라간


상태라 연화는 끝없이 예뻐 보였다. 하지만 이 상태가 결코 한 달 이상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백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곁에 앉은 연화의 작은 머리통을 끌어당겨 꽃잎 같은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럽고


달콤하다. 호접의 앞이라 연화가 수줍어 멈칫하는 게 느껴졌으나 백호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꽃차의 향기가 감도는 도톰한 입술은 갑작스러운 접문에 놀라 움찔거렸으나 결국 백호의
의지에 얌전히 열렸다. 부드럽고 따스한 점막이 서로 맞물리고, 백호의 혀가 그녀의
자그마한 입 안으로 침범한다. 연화가 조금 힘겹게 입맞춤을 받아내다가 입술이 떨어지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반들거리는 입술을 감추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백호 님.”

입술이 떨어지고 연화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호접이 손을 잡아주고 차를 마시는 사이


머릿속이 많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한 달간, 그녀는 신령계에서 백호의 반려로 살게 된다.
그의 발정기를 잠재울 기간 동안만.

“나는 내 반려에겐 아주 잘해주는 편이다. 인간계로 내려갈 때도 섭섭지 않게 재물을


챙겨주마. 네 가족들이 기뻐할 것이다.”

백호는 긴장하고 있는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기억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 연화는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비록 지금은
다정하지만 이 손이 지난밤 얼마나 거칠게 자신의 몸을 훑었는지 마치 지금 눈앞에 보이듯
기억이 났다.

다소 긴장한 채로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무서운데도, 긴장이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어


식은땀이 피부로 스미는데도 그 커다란 손은 어젯밤의 기억을, 공포와 더불어 쾌락을
불러일으켰다. 다리 사이가 다시 기묘한 느낌으로 움찔거렸다.

“자, 이제 목욕을 하러 가볼까?”


“네……?”

연화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더러 몸을 씻으라는


말인 줄 알고 일어서려 했지만 백호가 그녀를 낚아채 들었다.

“씻겨주마. 아직 시녀들은 부르지 않았으니 말이야.”

“네, 네?”

“내가 직접 씻겨주는 건 드문 일이야, 감사하거라. 호접, 너는 물러나 있어라.”

호접은 조용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찻잔과 주전자를 가지고 물러났다.

연화는 제대로 현실이 잘 인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백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백호가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욕실로 들어서자 비로소 목이 막힌 소리를 냈다.

한가운데 둥그런 욕조에 가득 담긴 따뜻한 온수 때문에 욕실 안은 희미한 습기가 흘렀고,


어디서인지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백호가 그녀를 욕실 한켠에 마련된 침상에 올리자 연화는 옷깃을 움켜쥐며 재빨리 그로부터
멀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괘, 괜찮습니다, 백호…… 님. 솔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씻고 어, 얼른 나갈


테니…….”
“흠. 벌써부터 말을 안 듣는 게냐?”

“아뇨,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정말로…… 직접 씻는 게 편하고, 굳이 백호 님을


불편하게 해드릴 이유는…….”

“그런 거라면 걱정마라. 난 내 신부를 씻겨주는 걸 참 좋아하니까.”

백호는 호랑이 모습을 본체로 지녔고 사랑하는 자들을 싹싹 혀로 핥아주는 걸 좋아했다.


백호의 몸이었다면 연화의 머리를 핥으며 단장해 주었겠지만 사람의 형체이니 그럴 수는
없다.

“하오나…….”

뭐라고 더 항의하려는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죽자고 놓지 않는다. 연화는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곤란해진 백호가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왜, 그리도 싫으냐?”

“싫다기보다는…… 부끄럽습니다.”

연화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것이 꽤 귀여워서 백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본래 발정기에는


모든 암컷이 예뻐 보이는 법이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엇이 부끄러워. 어차피 앞으로 한 달간은 내 신부다. 여기 누가 있다고 부끄러워?”


“하오나…… 너무 넓고, 개방된 곳이라서.”

그녀가 머뭇거렸다. 벽이 뚫린 것은 아니지만 과연 지나치게 넓은 넓이 때문에


개방되었다고 느낄 법했다. 백호는 웃으면서 그녀의 옷 위로 물을 부었다.

“꺅!”

“내 말했지? 내가 너의 신랑이다. 부끄러울 필요 없다.”

옷을 입은 채 등에 물을 맞은 연화는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왜, 벗는 게 부끄럽다면 내 입은 채로 씻겨주려고 하는데. 그도 싫으냐?”

“아……. 백호 님. 그게 아니라…….”

겨우 어제 처음 관계를 가졌고, 둘은 그 전까지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으며, 심지어 그녀는


사내가 처음이었다. 안 부끄럽다면 그게 이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을
지니지 않은 백호는 망설이는 연화를 끌어당겨 안았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인간의 도덕이 이렇지 않다는 것은 안다만, 이곳은 신령계다. 한 달
동안 나와 즐기는 것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게야. 나는 네 신랑이니.”

그는 웃으면서 그녀의 젖은 옷 위로 계속해서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 정말 그는 옷을


입은 채 그녀를 씻길 생각이었다. 연화의 옷이 푹 젖은 것은 당연했고 백호의 장포도
젖어들어 갔다.
입은 것은 얇은 잠자리용 옷이라 물에 젖으니 안 입으니만 못 했다. 그것을 깨닫고 연화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억해라. 비록 한 달간이어도 너는 이 삼세계 최고의 신랑을 얻은 게다. 감히 인간


따위는 어디 대지도 못할 나이니.”

남자는 빗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곱게 빗어주었다. 청포물을 부어 연화의 머리카락을


씻어주고, 상아로 만든 빗으로 머리카락을 연신 빗었다. 매끄러운 여자의 머리카락은 마치
비단처럼 그의 굵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는 그런 여자의 뒤통수에 입을 맞췄다.

커다란 손길에 뇌리를 잠식했던 공포의 기억이 오싹한 쾌락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귓가에
끝없이 집요하게 속삭이던 백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뿐이었다.

너는 내게 몸을 열고 바치는 것이다, 인간의 암컷아…….

금수의 붉은 달

6화

장미를 띄운 탕 속으로 백호는 연화를 안고 들어갔다. 스스로 들어가겠다고 했으나 백호의


고집에 못 이겨 그녀는 남자가 하고픈 대로 그냥 두었다. 부끄러움에 질식할 것 같던 것도
초반뿐, 잠시 뒤에는 적응이 되어버려서 연화도 얼굴을 조금 붉힐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만족스러워서 백호는 탕 안에서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 자그마한


그녀에게는 지나치게 깊어서 잘못하면 입까지 잠겨버릴 것 같았다.
“어제는 많이 아팠겠지. 내가 정욕을 이기지 못해 산속에서 널 안아버려서…….”

백호는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큰 눈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에


목덜미까지 발갰다. 귀여워서 남자는 여자의 뒤통수에 입술을 대고 큭큭 웃었다.

“정말 수줍은 신부로군. 이런 이야기도 부끄러운가?”

“……당연히 부끄럽지요. 저는 이런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남성분과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괜찮아, 아주 예쁘고 사랑스럽다.”

지난밤 백호는 처녀가 분명했던 연화를 마구잡이로 산속에서 안았던 것을 아주 약간


후회했다. 아무리 발정기라지만 사방신이면서도 정욕을 이리도 통제하지 못하다니.

조금의 자괴감과 함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붉은 달이 떠오른 첫


주이니 정욕이 최대치에 달할 시기다. 게다가 이 자그마한 인간 여자는 그가 본 중 가장
입맛에 맞는 여인이었다.

“어제 상처는 안 났겠지?”

“안, 안 났습니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백호 님.”

남세스러운 말에 연화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백호는 괜히 장난기가 들어서 손을


불쑥 그녀의 치마 밑으로 넣었다. 연화가 얼른 다리를 모았지만 그녀의 날씬한 허벅지
사이로 남자의 손은 쉽게 파고들어 그녀의 음부를 더듬었다.
“배, 백호 님……!”

연화는 어디까지나 죄인으로 그에게 벌을 받는 대신 공물로 바쳐진 위치였다. 그걸 잊지


못하는 연화는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하고 얼결에 그의 손목만 잡을 뿐이었다.

깃털 같은 그녀의 손길에 남자는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괜찮아. 상처가 났는지 보긴 해야 할 거 아니냐?”

“괜찮습니다, 전혀 아프지 않아요!”

“그럴 리가. 자면서 밤새 끙끙 앓던 걸?”

그는 손가락 끝으로 살살 여인의 음부를 훑고 콕콕 찔렀다. 남자의 장난스러운 손길에


연화가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아, 읏.”

탕의 따뜻한 온수가 그녀의 몸짓에 따라 이리저리 튀었다. 백호는 자신의 양물이 또다시
부피를 키우는 것을 깨닫고 입맛을 다셨다.

“이것 봐라. 네가 자꾸 몸을 움찔거리며 자극하니 이렇게나 또 커지지 않느냐.”


사내의 것이 다시 커졌음을 깨닫고 연화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아는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백호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그 가느다란 눈매가 또
예뻐서 백호는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는 크게 웃었다.

“원망하지 마라. 나는 금수의 왕, 본능은 막을 것이 아니야.”

연화는 붉어진 얼굴로 사내의 품 안에 고개를 묻었다. 무서웠지만 도망갈 곳도, 도망갈
능력도 없었다.

기실 도망갈 의지도 없었다. 이 거대한 가슴은 그녀의 몸을 거칠고 아프게 품었으나 연화는
처음으로 알게 된 쾌락과 이 사내의 단단한 가슴이 주는 기묘한 만족감을 어렴풋이 알았다.

감당하기 힘든 사내다. 하지만 연화는 긴장한 채로 망설이다가 작게 속삭였다.

“원하시는 대로…….”

“……말도 참 깜찍하게 하는구나.”

사내를 자극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는 하는 걸까. 백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연화를 바로 돌려 안았다. 가슴끼리 맞닿는 자세에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백호의 잘생긴 얼굴과 푸른빛 눈동자가
선연하게 보였다.

“아…….”
사내는 아름답다. 상제가 빚은 사방신이니 당연하다. 너른 어깨에 손을 짚고 그녀는 넋을
잃고 생각했다.

긴 백발과 희디흰 피부, 길고 강인하게 잡힌 근육들. 연화는 지난밤 보았던 그 거대한 흰


호랑이의 모습을 기억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백호는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연화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다가 그의 입맞춤


아래 살짝 벌어졌다. 남자는 연화의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하의도 풀어헤쳤다. 물 위로
연화의 치맛자락이 떠올랐다.

따뜻한 온수 속에서 천천히 둘의 하지가 맞닿아 갔다. 연화의 허리를 잡고 백호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중심으로 내렸다. 한껏 벌려진 여자의 양다리가 바들거리며 떨렸다. 어제의
여파로 잔뜩 부어올라 있던 내벽이 간신히 벌어지며 다시 사내의 양물을 받아들였다.

“아, 흐…….”

가능한 그녀의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 백호는 자신의 팔로 그녀를 받쳐 안았다. 연화의


가느다란 허리가 뒤로 휘어지며 동그란 가슴과 유두가 그의 턱을 스쳤다. 따뜻한 물속에서
피부가 더 민감해져 그녀는 사내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절정을 맞을 것 같아 발발 떨면서
신음했다.

“흑……. 흐응…….”

백호의 양물은 지독히 크고 길었다. 아랫배 전체가 그에게 정복당하는 기분이다.


아기집까지 그의 양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에 연화는 허덕이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백호는 연화의 저고리 위로 도드라진 색이 옅은 유두를 입으로 핥고 빨았다. 그가 아플
정도로 깨물 때마다 연화가 몸서리를 치며 다리를 조였다.

“못 참겠군, 정말.”

백호는 속으로 이를 악물면서 자제를 하려 했지만 연화의 몸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마치 그의 것을 한껏 빨아들이는 것처럼 쫄깃하게 압박한다. 가늘고 부드러운 몸 안쪽으로
이런 음탕한 음부가 숨어 있다니, 그는 자제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의 허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거칠게 내렸다.

“앗, 아아앗! 으응!”

연화가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온통 텅 빈 거대한 욕실 안에 그녀의 젖은 신음성이


메아리쳤다. 찰랑거리는 물 안으로 철벅철벅 맞닿는 소리가 삼켜졌다.

그녀는 부어올라 민감해진 질 내부로 백호의 뜨겁고 단단한 양물이 더 깊을 수 없을 만큼


꽂히는 것을 느꼈다. 연화의 납작한 아랫배가 그의 양물 때문에 볼록 나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 백호 님……! 응, 아읏……! 하앙!”

“……큭, 젠장……!”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그가 주는 쾌락을 좇아 허리를 움직였다. 백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에 맞추어 그녀의 허리가 돌아갔다. 연화는 다리를 스스로 한껏
벌리고 백호를 끌어안았다. 어느 한 점에 그의 양물이 쾅 하고 꽂히는 순간 그녀가
자지러지며 뒤로 넘어갔다.

“읏! 흑! 흐으읏!”

백호는 여자를 놓아주지 않고 끌어안은 채 무자비하게 자신의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화가 무의식중에 도망가려 몸을 뒤집고 탕의 난간을 잡았지만, 남자가 그녀의 엎드린
허리를 잡고 치마를 끌어 올려 드러난 다리 사이로 자신의 하지를 거칠게 박아 넣었다.

“흣, 흐앙!”

연화가 다시 자지러지는 비명을 올렸다. 그녀의 몸부림에 찰박찰박 땀과 물이 뒤섞였다.

대리석으로 된 탕의 바닥에 무릎이 엉망으로 비벼지며 찰과상이 났지만, 그걸 의식할


정도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욕탕 벽면에 가슴을 문대며 완전히 벌려진 음부로
사내의 거대한 양물이 완전히 다른 각도로 들어와 새로운 내벽을 자극하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죽을 것 같아서 연화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난간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여자의 흰 손등


위로 혈관이 도드라지고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했다.

그대로 사내의 허리질에 휘둘리며 여자는 절정을 맞이했다.

“아, 아아아! 하앗! 아, 흑!”


눈앞이 표백되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이, 연화는 그대로 난간을 잡았던
손을 놓쳤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백호가 급히 건져내어 일으켰다.
절정에 올라 몸에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여자를 끌어안고 남자가 마지막으로 속도를
올렸다.

아랫배 깊은 곳으로 사내의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백호의 양기는 일반적인 인간의 양기와 다르다. 연화는 마치 불처럼 뜨거운 사내의 정액이
자신의 아랫배를 가득 채우는 것을 희미한 의식 속으로 느꼈다. 음부를, 배를, 온몸을
태우는 것 같은 쾌감이 전신을 돌았다.

절정을 맞이하고도 백호는 둥글게 허리를 돌리면서 후희를 유도했다. 그의 능숙한


허리놀림에 여자는 몸을 떨고 흐느끼면서 여전히 지속되는 절정의 쾌락을 전신으로 느꼈다.

축 늘어지는 연화의 허리를 잡아 안정적으로 안고서 그는 그녀를 다리 위에 앉혔다. 엉망이


된 치마와 저고리가 온통 물에 젖어 오히려 벗은 것보다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언제나
단정하던 긴 머리도 흐트러졌지만 그녀는 지쳐서 제대로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백호는 다시 한 번 연화를 안고 싶었지만 정말 그녀가 쓰러질 것 같아서 참고 여인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빗어줄 뿐이었다.

“목마르지? 이걸 좀 마셔라.”

백호는 탕 곁에 있는 협탁에서 차 한 잔을 따라 연화의 입가에 대어주었다. 간신히 차 한


모금을 넘기고 연화는 백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하아, 하아…….”
어제부터 지나치게 충격적인 일의 연속이다. 여태껏 성적인 자극을 전혀 받아보지 않았던
그녀는, 대체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도 힘들었다.

“힘들었지?”

여인의 힘겨운 낯빛을 보고 백호는 미안한 소리로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사방신이면서도


정욕을 통제하지 못해서 또 이 작은 여인을 힘들게 했다. 아무리 발정기라지만 이번에는 좀
심한 것 아닌가 싶어서 그는 머쓱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도 연화의 가느다랗게 물에 젖은 어깨를 보면 다시 정욕이 치밀었다.

“아니에요, 백호 님.”

호흡을 가다듬은 연화는 고개를 들어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금수의 붉은 달

7화

분명히 그녀는 이곳에 공물을 훔친 죄인으로 공물을 대신하기 위해 끌려온 것이다. 하지만
백호는 자비롭고 다정했다. 거칠고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그의 관심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된 것은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사내의 욕망에 물든 눈은 오직 연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호는 그녀의 부드럽고 작은 미소를 보고 다시 아랫배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밑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있는 사내의 물건을 보고 연화가 움찔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빼지도 않은 상태로 다시 커지는 사내의 양물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배, 백호…… 님……. 흐읏.”

남자는 숫제 울먹이는 듯한 그녀를 끌어안고 신음했다.

“정말…… 이번 발정기는 어지간하군.”

참지 못하고 그는 젖은 저고리 위로 연화의 가슴을 다시 베어 물었다.

“아, 아앙! 흐응!”

혀가 꼬인 채 작은 짐승처럼 신음을 터뜨리며 여인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직 제대로


절정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몸이 다시 한 번 강제로 달아오르게 밀어붙여진다.

백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절정에 올랐던 연화의 내벽은 그의 물건을


부드럽게 조였다.

“흑, 흐으응……. 흐읏, 흑…… 흑…….”


배와 등허리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여인이 기어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랫배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쾌락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제대로 불이 꺼지지도 않은 몸에 다시 불씨가
인다. 그녀는 백호의 목덜미에 매달려서 가늘게 울었다.

백호가 사정 봐주지 않고 허리를 쳐올렸다. 연화는 흔들리며 자신의 체력이 이제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눈앞이 뿌옇다. 그녀의 팔에서 느릿하게
힘이 빠져갔다.

그녀는 또다시 느릿하게 어둠이 자신을 덮어 오는 것을 느꼈다. 평화로운 잠이었다.

뒤로 늘어진 연화를 백호가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잠의 초입에 들어선 뒤였다. 마치


기절하는 것처럼 고개를 떨구는 연화를 안아 들면서 백호는 혀를 찼다.

***

호접은 시녀들이 연화의 머리를 빗겨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몸집에 머리색이


옅은 호접은 뭔가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니……. 인간이 아니니까 당연한가.’

연화는 곁눈질로 호접을 훔쳐보았다. 자그마한데도 당당하고 우아한 여자였다. 그녀의 등


뒤에 달린 반투명한 날개가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연화는 그 날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져봤을 때 그 포슬한 감각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당분간 연화 님께서는 백호 님의 반려가 되십니다. 그동안 몸가짐을 정결히 해주십시오.”

다 씻은 연화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 손질을 해주면서 호접이 당부했다.


“산주 백호 님께서는 산의 주인이실뿐더러 사방신의 일방을 담당하시는 분. 거기에
어울리는 반려가 되어주십시오.”

“……저는 잠시만 백호 님의 곁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 달 동안?”

연화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호접은 어깨를 으쓱했다.

“본래 사방신의 반려는 영구적인 것이나, 연화 님은 발정기를 나기 위해 선택되신


것이니까요.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백호 님의 발정기는 한 달가량이 보통이지만 더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르게 돌아가실


수도 있지요.”

다정하던 첫 대면과는 다르게 호접은 잘라 말했다. 그 이전에도 산주 백호의 반려가


되었다고 착각한 인간의 여인들이 오만하게 굴며 신령들을 부리고 안주인 행세를 하려
들었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이란 미리 한계를 정해놓아야 한다. 안심시킬
필요는 있되 그 이상일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냉철한 눈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한 달 뒤에는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요?”

연화가 재차 물었다. 호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다소 의아해서
호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백호의 반려가 된다면 먼저 얼떨떨해하다가 신분이 상승한 듯 기뻐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실제로 인간 중 이곳 사방신의 궁에 들어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보통은 사방신 밑의 신령조차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일반적이었다.

“돌아가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마을에 제가 돌봐드려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

호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령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간을 넘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그렇군요. 인간들은 가족이라든가…… 걱정할 사람이 있지요?”

“네. 양어머니께서 마을에 계셔서. 게다가 제가 마을의 유일한 치유사라, 빨리 돌아가서


봐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연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양어머니는 아주 늙고 힘없는 여인이었다. 사망한


친어머니를 키워주었던 유모였다고 들었으니 실제 나이로는 할머니뻘인 것이다.
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치유자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양어머니 덕이었다.

“치유사라.”

호접은 연화에게서 노란 빛을 발견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신령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약사여래의 보살핌 덕분에 치유의 능력까지도 가지고 계신 거군요.”

“친어머니께서 가호를 입으셔서 저까지 감사하게도 능력을 이어받았습니다.”

치유를 관장하는 약사여래. 모든 병자와 환자들을 보살피는 보살이다. 저승사자가 나타나도


영혼의 손을 잡고 이승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힘. 염라대왕을 거스르는 그의 능력을 받은
자들은 극히 드물어 신령 중에도 치유의 능력을 지닌 자는 찾기 힘들었다.

설사 그의 가피를 받았다고 해도 능력이 나타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치유란 그만큼


직접적인 가호를 받아야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치유의 이능은 드물지 않습니까? 인간의 나라에서는 한 대에 한 명쯤 나타난다고


하던데.”

연화의 손에 어리는 은은한 노란 빛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빛났다. 일개 인간이


가지기에는 상당히 놀라운 치유력이다. 약사여래에게서 직접 가호를 받은 인간의
혈통이라니.

“아뇨,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닙니다. 그저 작은 상처를 치유할 뿐……. 마을에는


그마저도 없어서요.”

인간 여자는 다소 수줍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천민들의 부락이다. 치유사를


배정해 줄 리가 없었다. 병이 나면 앓고, 상처가 나면 죽는다. 연화가 마을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고통받을 사람이 너무 많았다.

“치유의 이능이라…….”
사방신들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능력이다. 생명이란 적자생존으로 자연 속에서 죽고 나야
한다는 것이 백호의 법칙이었다.

“이것도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연화가 망설였다. 호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백호 님이시라면 대충 알고 계실 겁니다. 이미 수 번 몸을 접하셨으니


기운으로 알아차리셨겠지요.”

사실 사방신과 보살들의 관계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사방신은 사바세계의 법칙을


관장하는 자들, 보살들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들. 각자 법을 지키는 자와 거기서
벗어난 자들이라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접은 신령계에서도 약간 입장이 다른 편이다. 나비는 언제나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날아다니며 자유로이 오가는 존재다. 그만큼 법칙에서도 벗어나 있고 보살들의
이해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보살들의 손길을 호접은 무척
감사히 여겼다.

그런 약사여래의 아래에 있는 인간이라니.

“그저 보살의 가피를 조금 나눠받은 분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거의 여래의 혈족과


같으신 분이군요.”
호접은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산주 백호, 사방신의 하나인 천방지축 일신은 자기도
모르게 여인을 선택해 왔을 터였다. 붉은 달은 백호를 목적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고는
했으니.

그간 데려왔던 여인들과는 다르게 연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호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잘될지도 모른다. 백호의 신부로 꼭 신령이 들어와야 한다는 묘우와는 달리, 호접은
인간 여인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쪽이었다.

“아, 백호 님께서는 그래도 제법 잘 골라 오셨군요…….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되길


바랍니다.”

그녀는 상쾌한 얼굴로 날개를 파닥였다. 기분이 좋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인 게냐?”

여인이 표독스럽게 외쳤다. 앞에 부복한 남자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사영 아가씨께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백호 님께서는 이번 발정기를 그 인간 여자와


교접하며 지내고 계신다는 게 사실인 줄로 압니다.”

“아니, 여태껏 단 한 번도 형식상의 반려 외에는 필요치 않았던 분께서 대체 왜 이번에는


계집을 들여 교접을 하신다는 것이지. 대체 어째서냐.”
긴 검은 머리를 밑으로 늘어뜨린 뱀의 신령은 의자에서 일어나 초조하게 걸었다. 그녀는
양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으로 앞에 앉은 새의 신령, 수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홍채는 세로로 길었다. 사영이 걸을 때마다 치마 밑에서 타르르르 하며 방울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긴 검은 머리를 뱀처럼 꼬아 묶고 밑으로 늘어뜨렸다. 검고 푸른
비단 옷자락이 바닥에 길게 끌렸다.

“왜 마음을 바꾸신 게지? 어느 신령과도 아직은 교접하기 싫다지 않으셨는가.”

“그랬습니다만…….”

“천하의 절색이라도 된다더냐? 그럴 리가 없지, 신령의 여인보다 아름다운 게 인간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저희도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는데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백호 님의 최측근들만 그 여자를 보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대체.”

분노를 다스리려 애쓰면서 사영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차가운 피를 지닌 뱀의 신령,


이렇듯 눈에 보이게 분노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또한 피가 뜨거워지는 일은 그녀 자신의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백호가 관련된 일에 피가 뜨거워지도록 흥분하는 것은
사영에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금수의 붉은 달

8화
“내가 그리도 신령 중에 반려를 맞으셔야 한다고 했거늘.”

사영은 백호의 곁을 노린 지 이미 백여 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는 세월을 생각했다. 그녀는


성급한 태도로 곁에 놓인 차가운 술을 마셨다.

“그러나 걱정하실 일은 아닐 듯합니다. 백호 님께서 특별히 깊은 관계를 가지겠다 말씀하신


것이 없으니…….”

“멍청한 소리 마라. 몸을 섞으면 마음도 끌리는 법이지.”

백호는 강하고 거칠고 냉정한 산주다. 금수의 왕이니 당연한 순리다. 자연세계에서 강자가
약자를 봐주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금수를 다스리는 그는 그 정점에 서 있는
강자다. 수많은 신령들이 그의 발밑에 엎드리는 것 역시 백호의 강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영 역시 그 강인함 때문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어찌 우리 뱀의 일족에게 이렇게 대하실 수가 있단 말이냐.”

다시 한 번 타르르르 하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여인은 의자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백호와 말을 나눌 수 있는 자들은 한 일족의 수장과 그에 가까운 몇몇 신령들이다. 다른


자들은 아직 수양이 부족해 사방신의 높은 격과 마주하면 그대로 바스러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사영은 뱀의 일족의 수장의 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뭐라고 하시더냐.”

“아직은 두고 봐야 하신다고…….”

수조가 눈치를 보았다. 작은 새의 신령인 그는 사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의뭉스럽고 느린 분이니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나는 그럴 수는 없다.”

여인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육체의 관계가 단발성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녀의 생각에 결코 그렇게 쉽지 않을 듯했다.


사영 본인은 여러 신령이나 인간들과 짧은 관계를 즐겼지만 백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의 성격에 한 번 빠져들면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직접 가서 그 여인을 만나 보아야 하겠군.”

사영은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서 중얼거렸다. 수조가 놀라서 겁먹은 눈을 껌벅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당장 가겠다.”

“하, 하지만 사영 아가씨, 지금은 백호 님이 신령들을 살피러 먼 땅으로 눈을 돌리셨을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가겠다는 게야. 백호 님의 눈에 띄어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느냐.”

그녀의 손짓에 뱀의 일족의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조는 어딘가 불안에 차서


커다란 눈을 굴렸다.

시녀들이 다가와 사영의 머리와 옷차림을 다듬기 시작했다. 사영의 검은 머리에 알맞은
은색의 가느다란 사슬과 붉고 노란 구슬로 장식된 관을 얹고, 창백하게 흰 얼굴에 분을
발라 발그란 홍조를 더한다. 꼬아서 내린 머리카락을 풀어 다시 빗고 몇 갈래로 땋아 그
머리를 다시 꼬아 장식했다.

검고 푸르렀던 비단옷은 어두운 색조의 붉은 옷으로 바뀌었다. 긴 장포를 입히고 목걸이를


걸어 반짝임을 더했다. 뱀의 비늘과 같은 문양이 그녀의 손등에 나타나 있었는데 그 윤기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시녀들이 사영의 손등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밖에서는 금세 앞마당에 가마가 마련되고 가마꾼들이 사영의 앞에 부복했다. 뱀의 일족의


수장이 부리는 자들답게 바람을 달리는 뛰어난 가마꾼들이었다.

“가자꾸나.”

사영이 가마에 오르자 곧 가마꾼들의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새의 일족을


하위로 부리고 있는 뱀의 일족은 새들을 가마꾼으로 썼다. 바람처럼 날아가며 뱀의 여인은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령계는 여느 때처럼 평화롭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백호의 옆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즉 이 신령계를 한 손에 쥔다는 뜻이 된다. 백호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남자이자 강인한 신이었으나 그의 반려라는 지위가 주는 만족감 또한
사영이 무시할 바가 못 되었다.

‘어디서 난지도 모르는 인간의 계집 따위를 신령계의 왕비 자리에 앉힐 수야 없지.’

뱀의 일족은 아주 역사가 깊고 세가 대단하다. 지렁이와 뱀 모두가 그 일족에 속하니


신령계의 땅은 그들에게 빚진 바가 많았다. 지렁이가 없다면 산천초목이 돋아날 수 있는
땅의 토질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윗선의 수장인 뱀의 신령들은 대단히 힘이
셌지만 사실상 뱀의 일족의 위치를 만든 것은 가장 하위의 위치에 있는 지렁이들이었다.

‘여태껏 뱀의 일족의 요구를 무시하셨으면서, 인간의 계집을 끌어들이다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 높은 사영은 절대 이 일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 백호의 궁이 보였다. 아주 높은 봉우리 위에 날 듯이


놓여 있는 기와를 얹은 궁궐. 가마꾼들은 솜씨 좋게 바람을 타고 날아 봉우리 틈으로
들어갔다.

궁궐의 앞마당에 사뿐하게 내려서자 주위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가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뱀의 일족의 문장을 보고 누구도 착륙을 제지하지 못했다.
병사 한 명이 다가와 가마 앞에 허리를 숙였다.

“뱀의 일족이십니까.”
“수장 사혈의 딸, 사영이다.”

발을 걷고 사영이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창백한 안색의 여자를 알아본 경비병들이 모두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궁궐의 2 층 누각을 노려보았다.

“지금 백호 님이 계시느냐?”

“예, 현재 침전에 들어 계십니다.”

“……지금은 신령계를 살피러 나갔을 시간이 아니냐? 그런데 계신다고?”

계획과 다르다. 사영은 눈을 찌푸렸다. 설마 경비병이 잘못 알았을 리는 없고.

“원래는 그러하나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어 살핌을 파하시고 자리에 누워 계시겠다


하시어…….”

“뭐? 자리에? 몸이 안 좋으신 게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금수의 왕이자 사방신인 남자가 아프다니. 하지만 사영은 거침없이


움직여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내 백호 님을 뵈어야겠다. 세상에, 몸이 안 좋으시다니!”

계획과 달리 백호가 모르게 여자를 만날 수 없다면 백호라도 보고 가는 쪽이 낫다. 만나서


그의 기색을 살피면 과연 지금의 관계가 그저 즐기기 위함인지 아니면 위험한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궁궐 앞쪽으로 갈색 머리의 굉장한 미남자가 묘한 미소를 띄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시군요, 사영 님.”

“묘우.”

뱀의 여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묘우는 고양이와 여우의 혼령을 몸 안에 넣고 있는


신령으로,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호박색의 눈동자나 가끔 붉게 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묘한 매력을 발했다.

그러나 그 매력에도 사영은 묘우를 싫어했다. 계략에 능한 뱀의 일족이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 바로 여우의 일족이었고, 묘우는 그중에서도 원로격이었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에도 묘우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그는 사영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신령계에서도 소문은 발이 빠르고 사영은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다. 언제쯤 올까 슬슬 기대가 되던 참이었다.

“백호 님을 만나야겠다. 비켜라.”

“지금 백호 님께선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시고 침전에 들어 계십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신령계 원로의 일족으로서 내가 만나 뵙고 위로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

“물론이지요. 그러나 지금 백호 님은 아주 건강하시답니다.”


묘우는 과장되게 친절한 대답을 했다. 뭔가 놀림을 받는 느낌이라서 사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발밑에서 타르르르 하는 방울 울리는 소리가 났다.

원래 상위 포식자인 방울뱀의 존재가 드러나면 밑의 신령은 위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묘우는 꼬리가 여러 개인 아주 오래 묵은 여우의 신령이었다. 그는 입가를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현재 백호 님께선 붉은 달의 반려인 연화 님과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하명이 있으셨답니다.”

“…….”

사영의 손이 주먹으로 틀어쥐어졌다. 묘우는 재미난 광경에 빙글거리며 웃었다. 저


도도하고 차가운 뱀의 일족들이 얼굴을 구기는 광경은 언제 봐도 좋다. 그는 연극적인
태도로 여인에게 절을 했다.

“혹여, 안에서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대접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백호 님과


반려님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아마도 거절하지 않을까 묘우는 기대했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좁히고 있던 뱀의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차라도 마시고 가겠다. 그래야 여기에 온 보람이 있지.”

예상외의 반응에 묘우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는 시녀들에게 지시해 다과상을


내오게 했다.
궁궐의 1 층 손님 접대용의 방에 다과상이 나오고 사영은 느릿하게 그곳으로 걸어들어
갔다.

사영은 대단히 능력이 뛰어난 신령이었고, 아마 귀를 기울이면 백호의 열에 들뜬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청각을 차단했다. 이 궁궐 높은 곳 어디선가
백호가 그 건방진 인간 계집과 몸을 섞고 있을 거라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그녀의 치마 아래에서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묘우는 태연하게 차를 따랐다.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차랍니다. 향이 강해서 함께 곁들이는 과자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흠이지만요.”

사영은 불쾌한 낯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차 대신 과자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길게


찢어진 눈으로 묘우를 노려보았다.

“그 인간의 반려란 어떻게 된 물건이지?”

역시 아직 어려서 미숙하다. 묘우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과연 사영이 찢어진 눈을 올리며 노려보았다.

“묘우!”

“뭘 알고 싶으신 거지요?”
“알면서 묻지 마라. 너희 여우의 일족들이란 그래서 문제야.”

“저희가 문제여봤자 뱀의 일족만 할까요.”

대놓고 말한다면 이쪽도 그렇게 말해 줄 밖에. 그렇게 맞대거리를 하고도 묘우는 태연했다.

금수의 붉은 달

9화

사영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녀도 그도 알고 있다. 천년 묵은 구미호를 건드릴 수 있는


신령은 사영의 아버지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마저도 백호가 허락해야 가능할 테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사영을 보고 묘우가 한 손을 들었다. 그는


항시 웃느라 가늘어져 있던 눈을 똑바로 뜨고 뱀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여기까지 와서 인내가 모자라 아무것도 얻어가지 않을 셈입니까?”

“……무슨 헛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말씀드릴 만한 이야깃거리들이 있긴 하답니다.”

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 당신은 반려님에 대한 내용이 궁금한 게 아닙니까? 하지만 반려님은


최측근들만 얼굴을 보고 모시기 때문에 이 궁궐 안의 시비들조차 제대로 아는 자가
드물답니다.”

“그래서 그걸 왜 내게 말해 주겠다는 거지?”

“글쎄요…….”

여우의 신령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를 올렸다. 그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저와 사영 님의 의견이 대체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어서일 겁니다. 저는 할 수 없는


걸, 사영 님께서 대신 해주실 수가 있을 듯하거든요.”

***

백호는 곁에 누운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지쳐서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어린애처럼 아주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작고 흰 얼굴을 내려다보며 백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 안에 감겨 오는 가느다란


뼈대가 여전히 입맛을 돋웠다.
‘……하지만 지금 몸에 무리가 많이 가긴 했을 텐데.’

백호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는 연화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몸을 움직여 아래로


향했다.

여인의 다물린 다리를 살짝 벌려 양옆으로 세워놓고 그는 그녀의 은밀한 틈을 살펴보았다.


도톰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상처도 보였다. 부분적으로 핏방울이 몇 군데 보이기도 했다.

백호는 혀를 차고 호접을 불러 약을 가지고 오게 했다.

그는 자그마한 약단지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 끝으로 퍼 올렸다. 부드러운 흰색의 연고였다.


부어오른 상처 부위의 열을 낮춰주고 통증을 줄여준다.

백호는 연화의 다리 사이에 몸을 수그리고 조심스럽게 살점을 벌렸다. 부풀어 올라 아파


보였지만 동시에 꽃잎처럼 어여쁘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래에 약을 펴 발랐다.

부드러운 고체 상태였던 약은 체온에 녹아 액체 상태가 되어 그의 손가락 끝에 휘감겨


연화의 벌어진 살점 안쪽으로 사라졌다.

“으…… 응…….”

작게 신음소리가 났다. 연화의 목소리였다. 잠이 든 상태로도 예민한 하지에 약을 바르는


손길이 자극적인 모양이었다. 허벅지가 살짝씩 떨려 왔다.
잠이 깼나 싶어 얼굴을 보았지만 의식이 든 느낌은 없었다. 백호는 입술을 핥으며 그녀의
따스한 내벽 속으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액체가 된 약이 손가락 끝에 감겨 내벽에
발라졌다.

“으, 흣…….”

연화의 신음성이 조금 튀었다.

혹 그녀가 깰까 하는 마음에 백호는 손을 거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또 한 번


그녀를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야 없었다. 그는 사방신이었고 연화는 인간의 여인일 뿐이다.
많이 힘들게 되는 것은 백호도 바라지 않았다.

***

‘와. 정말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네.’

다시 일어나서 연화는 멍청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녀의 하루는 늦게 일어난 오전과


백호와의 관계로 보낸 시간과 그 이후 또 다른 낮잠으로 가득 찼다. 일어나 보니 벌써
저녁식사 시간인 것을 깨닫고 그녀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다리 사이와 아랫배 사이로 찌르르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연화는 몰랐지만 그녀가 자는 사이 백호가 조심히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신령계의 고약을
펴 발라놓아 상처가 많이 아문 상태였다. 덕택에 그녀가 느끼는 것은 칼로 저미는 듯한
날카로운 상처의 고통이 아닌, 백호로부터 한껏 사랑받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동통뿐이었다.
이불 속에서 연화는 몸을 웅크렸다.

‘어젯밤에는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일곱 살부터 천민 마을에서 자랐다. 죄를 범해 천민 부락으로 쫓겨 온 어머니는


그녀가 열 살 갓 넘었을 무렵에 돌아가셨고, 양어머니가 대신 그녀를 키웠다.

이제 연화의 나이가 스물 초반이니 일반적인 양갓집 규수라면 결혼을 하고도 아이가 둘쯤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천민 부락에는 그녀를 책임질 만한 남자도 없었고, 모든 천민들은
관아에서 허락을 받고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연화는 혼인을 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관아 근처에 사는 데다 양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호해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이때껏 살아왔다.

게다가 그녀는 친어머니로부터 치유의 능력을 물려받은 자였다. 약사여래의 가피 아래 있는


자만 가질 수 있다는 이능. 연화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의술사 없는 천민 부락의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치유사 노릇을 했다.

‘제사상에 올라갈 공물로, 어머니의 손수건만 가져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연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락의 촌장은 파렴치한 남자였고 제사상에 올릴 공물이 부족하자 마을에서 닥치는 대로
좋은 물건을 끌어모았다. 연화에게 모친의 손수건을 요구했지만 그것만은 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기에.

하지만 양어머니와 그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도둑이 들었고 손수건이 사라졌다.


정신없이 뛰어가서 제사상에 올린 손수건을 품에 넣었지만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었다.

지난밤에 결국 손수건은 잃어버렸다. 그 정신에 그걸 찾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신께는 죄를 지었지만 자비롭게도 기회를 주셨어.’

연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벌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


혼자 감당해 낼 것인가.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기뻤다.

‘게다가…….’

백호는 건장하고 뜨거운 사내였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고운 피부의 남자는 세상에서


보지 못할 미남이기도 했다. 상제가 빚어놓은 사방신의 일인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접한 사내가 그렇게나 뜨겁고 아름다운 남자라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난 정숙치 못한 여자인 걸까…….’


백호에게 안긴 지난밤부터 오늘까지, 아팠지만 좋았다. 처음엔 공포가 동반된 관계였으나
그것이 곧 잊혀질 정도였다. 정말로, 호랑이에게 물려 잡아먹힌다는 공포로 도배되었던 그
밤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백호는 위압감 있는 남자였지만 그의 품은 더할 나위 없이 안온했다. 좋은 것은 단지


육신의 쾌락만은 아니다. 감정적으로도 백호가 선사하는 남성의 뜨거움과 강인함이
지독하게 안락했다.

태산처럼 그녀를 품에 안던 너른 품과 단단한 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혹은


절대적으로 그녀를 보호해 주는 남자의 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져서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뭘 그리 두더지처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게냐?”

부드러운 질책이 연화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배, 백호 님?”

“그래. 내가 와 있는 것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백호는 입을 삐죽였다. 침대 곁에 앉은 그는 연화를 일으켜 앉혔다.

“자,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한 끼니도 먹지 못했지 않느냐. 좀 먹어야지.”


그는 마치 십 년 전부터 연화와 함께 산 것처럼 그녀를 챙겼다. 만난 지 겨우 이틀째였다.
하지만 백호는 자연스럽게 연화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향기가 좋구나. 피부도 곱고.”

발정기에는 백호가 언제나 흥분 상태라는 걸 호접에게서 당부받은 연화는 간신히 당황하지


않고 버텼다. 잠시 연화의 허리를 끌어안고 더듬다가 정신을 차린 그는 곧 고개를 들고
허공에 손짓을 했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어디선가 나타난 시녀들이 조용히 탁자 위로 식사를 준비했다. 의자에


앉은 백호가 그녀를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려 앉히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 밑으로 느껴지는 백호의 양물에 당황했다. 그는 확실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반쯤 발기한 양물은 뜨거운 온도로 연화의 허벅지 밑을 툭툭 건드렸다.

“아, 저…….”

수치스럽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수치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연화는 확실하게 자신도


부끄러운 와중 기대가 든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했다. 백호와의 정사는 힘겹고 때로
거칠어 무섭지만 동시에 그 쾌락은 극상의 것이었다.

다리 밑의 양물을 한 번 의식하고 나자 연화는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의 허벅지 사이


안쪽 깊은 곳에서 습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백호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띄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 밑의 상태로 봐서


분명 그도 욕망을 느끼고 있는 상태인데, 안달이 난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아서 연화는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조용히 웃은 백호가 그르릉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식사를 하고 나서 네 몸을 내게 다오. 쉬지 않고 교접하려면 영양이 필요한


법이지.”

마지막 말은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연화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백호는


태연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먹자꾸나. 신령계의 식사라고 해도 인간계와 별다를 바는 없으니 괜찮을 거야.”

금수의 붉은 달

10 화

신령계의 식사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흰 쌀밥과 생선으로 만든 기름진 생선전, 산에서 나는


담백한 산나물과 간을 한 고기 요리 정도였다.

백호는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얌전하게 앉아 있었지만 기력이


아주 다 빠진 얼굴이었다.

‘내가 좀 과하게 괴롭히긴 했나.’

아주 약간이지만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그는 다시 연화를 안을 수


있었다. 얄팍한 잠옷 한 겹만 입고 앉은 연화는 아주 연약하고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관능적이고 섬세했다. 마치 세필화로 그린 매화 같은 모습이다.
붉은 달의 발정기란 참 무서운 것이다. 천하의 사방신인 백호가 또 다시 눈길을 빼앗기다가
간신히 고개를 돌리고, 밥을 한 술 먼저 떴다. 그제야 연화도 천천히 밥술을 들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입술이 오물거리며 밥알을 넘긴다. 워낙 느리게 꼭꼭 씹어먹는데 그나마도 양이


적은지 그녀는 몇 술 뜨지 못하고 백호의 눈치를 보았다.

“밥을 잘 먹지 못하는구나. 입에 안 맞는 거냐?”

“아뇨, 맛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좀 속이…….”

“밥이 먹기 싫다면 단것은 어떠하냐? 신령계의 시녀들은 다디단 떡과 다과도 잘 만들지.”

“괜찮습니다, 백호 님.”

연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백호는 자신도 심드렁해져서 대충 밥을 떠 넘기고 물을 마셨다.

이미 밖에는 빠르게 해가 져 붉은 노을이 번졌다. 하늘에 드리운 붉고 푸른 기운에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름답지 않으냐. 이곳의 저녁 하늘은 내 자랑이지.”

백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연화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네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살랑거리며 바람이 흘러들었다.

백호는 연화의 귓가를 살짝 물었다. 사랑스러운 여인. 이 육체만이 사랑스러운 것인지,


연화라는 인간 자체가 사랑스러운 것인지 아직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호의 안에
있는 금수는 계속해서 그녀를 원했다.

“급한 것만 먼저 풀어야겠군.”

손이 닿은 그녀의 다리 사이가 습한 것을 느끼고 백호가 결국 웃었다. 연화는 얼굴이


발그레해져 백호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너도 그렇지만 나도…… 지금 좀 급하단다.”

여인의 손을 끌어당겨 백호는 자신의 양물에 가져다 댔다. 아까 반쯤 발기했던 것은 완전히


힘을 얻어 단단하고 뜨거웠다. 불기둥 같은 것을 손 밑에서 느끼고 연화는 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나 큰 것이 자신의 안에 들어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몸과


비교할 때 백호는 체구가 두 배 이상 컸고 양물 역시 크기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오므려 그의 물건을 쥐어보았다. 손가락 끝이 닿지 않았다.

“크……. 그래, 그거 좋구나.”


연화의 손놀림에 백호가 탄성을 뱉어냈다. 아주 단순한 손놀림인데도 어찌 이리 좋은
것인지, 그는 새삼 신기해졌다. 연화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으며
백호가 중얼거렸다.

“계속 움직여주렴. 네 손이 내게 주는 쾌락이 아주 좋구나.”

연화는 망설이면서도 조심히 작은 손을 움직였다. 귀두를 쓰다듬고 그 밑의 기둥을 훑는다.


사실 너무 서툴고 약한 움직임이었으나 그것이 연화의 것이라는 사실 하나로 백호는
금세라도 참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치마를 걷어 올려 연화의 다리를 벌리게 하고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앗…….”

이미 잔뜩 젖어 풀린 음문은 수월하게 백호의 굵은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찌걱거리며


애액이 손가락에 휘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귀까지 빨개진 연화는 하지만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백호가 음핵을 어루만지고 질구를 벌리는 손길에 따라 연화의 손에도 힘이 들락거렸다.


백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연화의 절정을 유도했다.

“아, 아아…….”

부드럽고 작은 절정이었다. 연화는 몸을 떨며 백호의 가슴에 묻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땀에 젖어 소금기 있는 체향이 콧속 깊숙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백호 역시 신음하며 연화의 손 안에 흰 액체가 튀었다. 재빨리 자신의 손으로
덮어 둘의 얼굴까지 튀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양이 많고 기세가 좋았다.

“생각보다 밤일에 재능이 있어.”

백호가 웃었고 연화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손길로 백호가 절정을 맞았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뿌듯했다.

밥상을 물리고 백호는 다과와 술을 가져오게 했다. 연화를 위해서는 연한 향기의 꽃차를
준비하게 했다. 시녀들이 조용히 물러가고, 둘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호의 침실은 한쪽 벽면이 완전히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 시종들에게 문을 위로 올리라


하였다. 노을이 저무는 하늘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졌다.

장관 앞에 연화는 잠시 입을 벌렸다. 보라색과 붉은색이 뒤섞여 소용돌이 치는 듯한 하늘의


구름을 물들였다. 마지막으로 저물어가는 해의 붉고 노란 낯빛이 산등성이 너머로 빛을
발했다.

넋을 잃은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백호가 웃었다.

“꽤 좋아하는군.”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칭찬 고맙다.”

사방신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는 여전히 넋을 잃은 채인 연화의 입 안에 슬쩍


다과 조각을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입 안에 들어온 것을 씹었다.

“치자꽃으로 노랗게 물들인 찹쌀떡이다. 색도 곱고 맛도 달콤하지.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


않느냐.”

백호는 떡을 조금씩 떼어서 연화의 입에 넣어주었다. 됐다고, 자신이 먹을 수 있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데도 그는 고집을 부리며 어미 새처럼 여자에게 직접 다과를
먹여주었다. 목이 막힐 것 같으면 꽃차를 들어서 연화에게 마시게 주고 다시 떡을 주었다.

그녀는 얌전히 떡 한 덩이를 다 먹었다. 배가 부르지만 떡이 꽤 맛있기도 했고, 이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많이 힘들었느냐?”

남자가 물었다. 그의 어조가 다소 미안한 투라서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붉은 달의 발정기를 이리 보내는 것은 처음인지라, 자제가 힘들어. 네 몸에 무리가 갈


것을 알면서도 손을 떼기가 힘들군. 이렇게 데려와 놓고 사과하는 게 좀 어이없는 일이긴
하다만. 혹시 너무 힘들면 이야기하거라.”

“아니요…….”

“아니라고?”
백호는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는지를 몰라서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귀여워서 남자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 너무 힘들지 않다면…… 지금도 또 한 번 내게 안기겠느냐?”

“백, 백호 님.”

아무리 그래도 심하다. 백호가 웃은 뜻을 깨닫고 연화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옷


속으로 파고드는 남자의 커다란 손을 느끼고 그의 손을 잡았다.

“왜, 이제 와서 내빼려고?”

남자는 웃으면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향긋한 떡과 차의 향기가 났다.

“네가 꽃차 같구나.”

백호는 무릎 위에 앉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미 조금 전 한 번 약하게 절정을 맞아 부드럽게 풀려 있는 몸이었다. 그는 연화를


똑바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자신의 양물 위로 천천히 내렸다.

“읏…….”
느릿하게 몸 안을 파고드는 거대한 물건에 여인은 입술을 물었다. 잘못하면 그대로
신음성이 다 튀어나갈 것 같았다.

몇 번을 받아들였지만, 빠듯하게 힘이 든다. 매끄러워진 내벽은 이제 제법 능숙하게 백호의


양물을 삼키고 조였지만 그렇다고 골반이 벌어지는 듯한 기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연화는 다리를 한껏 벌려 백호의 것을 받아들인 상태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백, 호 님……. 흐, 으…….”

그녀는 작게 신음했다. 신의 푸른빛 눈동자는 마치 한밤중의 호랑이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연화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힘에 겨워 허덕였다. 아랫배 가득 들어찬 불기둥은 지나치게 깊이까지 침범했다.


마치 자궁 입구에 귀두가 닿아 예민한 살을 긁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꾸만 허리를 뒤로 빼려는 그녀를 잡고 백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위로 세게 앉혔다.

“아……! 아앙!”

제대로 박혔다. 허리가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녀는 학학 숨을 몰아쉬며 본능적으로


백호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은 강철 같았다. 멀어지려는 여자의 몸은 오히려
백호의 손에 끌려와 완전히 잡혔다.

“어딜 가려고?”
으르렁대는 목소리였다.

점잖았지만 때로 연화는 깨달았다. 백호는 금수의 왕이자, 그 스스로도 금수의 하나였다.


교접을 할 때 그의 푸른 눈은 사냥을 하는 맹수처럼 빛났다. 자신의 지배에서 머리털 한
올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말 그대로 폭력적인 맹수였다.

“아, 흐, 하응……!”

곧 그의 손이 연화의 허리를 들었다가 아래로 강하게 내렸다. 더 깊은 곳에 사내를 받으며


연화가 신음했다.

“아, 아아! 아앗! 아응! 흐!”

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백호의 목에 막무가내로 매달려 그의 어깨를


할퀴었다. 희디흰 피부 위로 그녀의 손톱에 상처가 나는 화끈한 느낌을 백호는 오히려
시원하게 느끼며 웃었다.

“그래, 내 품에서 네가 느끼는 걸 보여주렴.”

“백, 백호 님! 아! 앗!”

백호의 양물이 정액을 뿜은 것과 연화가 몸을 떨며 절정에 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여자의 내벽은 마치 씹는 것처럼 사내의 물건을 조여댔다. 신은 백발을 흔들며 또 한 번
자신을 쓸고 가는 극상의 쾌락에 잠겼다.

한동안 둘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금수의 붉은 달

11 화

“후…….”

백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화를 안고 있으면 자신조차 앞뒤를 가리지 않게 만드는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여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내가 정말로 자제를 못 하는군. 괜찮으냐?”

“……예, 예…….”

일단 괜찮다고 해놓고 연화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몸이 힘든 건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도


나른하고 전체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호의 푸른빛 눈동자는 다정했고, 행동은 거칠지만 때로 배려 깊었다. 시작은 연화가


공물을 훔쳐 그에 대한 벌 대신이었는데 불과 이튿날에 그런 생각은 지워질 지경이었다.
여전히 무섭지만 동시에 다감하다.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제가 백호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 것을 잊지


않아요.”
“그래. 정말…….”

백호는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사방신이면서도 지나치게 자제를 모르는구나. 어이가 없어.”

“…….”

답할 말이 없어 연화는 볼을 붉혔다. 그녀는 이번이 처음으로 겪는 관계여서 다른 사내는


어느 정도인지를 몰랐다.

백호는 그녀의 몸을 슬쩍 들어 자신의 양물을 빼냈다. 연화의 몸 안에서 그의 정액과


연화의 애액이 뒤엉킨 액체가 흘러내렸다. 점액질의 액체가 그녀의 흰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것을 보며 백호는 입맛을 또 다셨다.

아니, 이제 정말로 참아야 한다. 그는 알고 있었지만 본능은 계속해서 여인을 원했다.

“네 몸이 너무 맛있으니까 말이야.”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말도 안 되는 불평이지만 백호에겐 진실이었다. 연화는


얼굴이 붉어져서 얼른 치마를 내려 허벅지를 가렸다.

“네 음부는 정말 힘 있게 내 양물을 오물거리며 먹지 않느냐. 내 태어나길 백호로 나서


남에게 먹히기는 처음이야. 참으로 건방진 여인 아니냐.”

“그, 그건 제가 그러려는 게 아니라…….”


“그래, 그래. 알아. 남과 여의 육체와 본능이 시키는 일이지. 하여튼 참으로 요망한
구멍이야.”

적나라한 백호의 말에 연화의 얼굴은 더 이상 붉을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백호를 노려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뭘 말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그녀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뭘 그런 얼굴로 보느냐. 사실인 것을.”

“그, 그런 말씀은 정말 그만두어 주세요.”

“내가 이런 소리를 네게 안 하면 누구에게 하겠느냐? 하여튼, 생각보다 자질이 있는


몸이야.”

잠자리의 일에 자질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연화는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백호의 가슴에 묻었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도 많고 발씬거리며 물건도 잘 삼키고. 혹여라도 다른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간 경을 칠


것이다. 알겠느냐?”

농담 같은 말투였지만 백호의 눈은 번뜩였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도 능력도 없습니다, 백호 님.”


“쯧쯧.”

작게 대답하는 연화의 답을 듣고 백호는 혀를 찼다. 그는 잠시 그녀의 머리에 코를 대고


체향을 마셨다. 정사 후의 흥분이 다소 진정되고 몸도 마음도 가라앉았다.

연화는 백호에게 기대 조용히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신도 심장이 있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흘러내린 백호의 백발을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았다.

“저는 그저 이곳에서 백호 님만 바라보고 있겠습니다.”

불쑥 나온 말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도 몰랐다. 백호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무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다소 부끄러워서 그녀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차마 백호와의


관계가, 잠자리가 나쁘지 않다고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여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꽃차를 마셨다. 그녀에게서 옅은 야생화의 향기가 풍겼다.

“너무 거칠게 데려와서 미안하구나.”

작게 중얼거리고 백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런 사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화는 뭔가 마음속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데가 있는 여자였다.
새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팔다리, 매끄러운 피부 같은 육체와 함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숙일 때마다 붉게 뺨을 물들이는 그 수줍음도 사랑스러웠다.

발정기에는 반려로 점지한 암컷이 언제나 예뻐 보이지만 이번에는 유난하구나 싶었다.

노을이 거의 져서 밖에는 어둠이 내렸다. 해가 진 하늘로 달이 들어선다. 연화의 작은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백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탁자 너머로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 밑에서


자그마한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야생화의 향기와 따스한 숨결.

백호는 연화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등과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이


앉은 무릎 위로 앉히고 그는 여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달콤한 여인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연화는 수줍은 얼굴로 그의 긴 백발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얇은 저고리 위로 백호의 손이


봉긋한 가슴을 오르내렸다. 부끄러워서 가능하면 신음성을 내지 않으려고 연화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백호는 그녀에게 깊이 입을 맞췄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붉은 달이 떠 있는 동안은 내가 너의 신랑이다. 신부는 신랑


앞에서 거칠 것이 없어도 되는 법이지.”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의 긴장을 풀고 백호에게 기댔다. 남자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묘우의 목소리였다.


“백호 님, 상제폐하의 사절이 왔습니다.”

“……상제폐하의?”

백호는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가 오만방자한 다혈질의 사방신이라 한들 옥황상제의


사절을 직접 맞이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돌아오마. 쉬고 있으렴.”

남자는 사실을 나섰다.

양옆 미닫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백호의 등을 바라보다가 묘우가 연화를 향해 돌아섰다.

“다과상을 치우겠습니다. 뭐 더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뇨, 아무것도……. 감사합니다, 묘우 님.”

연화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귀동냥하여 듣기로 신령계의 장로격이라는 묘우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마냥 어색하고 불편했다.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난 신령의 시녀들이 다과상을 전부 내어갔다. 향기로운 꽃차만 협탁에
놓아둔 채 시녀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아마도 사방신 영토의 경계를 지키라는 명일 겁니다.”

묘우가 불쑥 말했다. 연화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여우의


신령은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지금 온 상제의 사절 말입니다. 요즘 들어 사방신의 각 영토 간을 넘나드는 주민들이


자꾸 생겨서……. 각 세계의 법칙이 유별한데 주민들이 넘어가 버리면 굉장히 곤란한 일이
발생하거든요. 영토의 주인에게도 주민의 주인에게도.”

“아……. 그렇군요.”

연화는 자신을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인간이면서 신령계로 왔다. 인간이자 청룡의 주민인
그녀는 비록 백호의 손에 이끌려 온 것이지만.

묘우의 가늘고 긴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노을에 비추어 그의 눈은 빨강과 호박색을


넘나들었다.

묘우의 시선에 연화는 약간씩 좌불안석이 되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우의 신령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순진하지만 눈치가 없지는 않은 연화가 모를 수가 없었다.

신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그런 의미로 연화 님도 가능한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습니다.”


“그…… 그런가요. 한 달이 지나면 내려가도 된다고, 호접 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들었습니다.”

“백호 님의 발정기만 지나면 내려가셔도 되지요. 사실 그 전에 가셔도 별상관은


없습니다만……. 응급상황은 지났으니까요.”

조금 당황스러워서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 온 것이 겨우 사흘째였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묘우의 말이 맞다. 원래도 그녀가 속한 곳은 저 산 중턱의 초라한 천민


부락이었다. 그곳에 그녀가 돌보아야 할 사람도, 할 일도 있었다. 다만 죄인이자 공양물로
이곳에 끌려온 것일 뿐이다.

“사절이 왔으니 백호 님께서…… 절 내치실까요?”

단호했던 말투나 기묘한 눈매와는 달리 묘우는 친절한 얼굴로 웃었다.

“설마요. 다만 백호 님의 발정기가 지나도 내려가지 않고 버텼던 인간의 여인이


있었기에……. 백호 님도 다소 걱정하고 계시답니다. 일단 자비롭고 다정하신 분이라 당신을
그냥 두고는 계시지만요.”

여우의 신령은 교묘하게 말하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사방신의 반려에 대해 한 치의


어긋남 없는 태도였다. 말의 내용을 제외한다면.

연화는 마주 인사하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스스로 잊지 않으려 계속해서 되뇌었다. 자신은 공물 대신 이곳에 와 있는
죄인이고, 백호의 발정기가 끝나는 날이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연화는 앉은 자리에서 백호가 올 때까지 마치 망부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별일도 아닌데 사절까지 보내시는군.”

돌아온 백호가 투덜거렸다. 무슨 일이었나요, 라고 물으려다가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묘우의 말대로 인간계에서 신령계로 오게 된 불청객일 뿐이었다. 그것도 제사의
공물을 훔쳐내어 백호에게 폐를 끼쳤기에 끌려온 죄인.

마음 좋은 사방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어 죽지 않고 살아났으나 신령계에 주어진 이상으로


머물 수는 없었다. 백호의 일에 과한 관심을 갖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런 얼굴이냐, 연화야?”

백호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수의 붉은 달

12 화
남자는 재빨리 연화가 앉은 의자로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외로워서.”

“외롭다고?”

놀란 눈으로 백호는 연화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번뜩이는 푸른 눈은 세상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여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흑발 위로 입을 맞췄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게지?”

“……아무것도요. 그저…….”

뭐라고 해야 할까, 백호에게 이 마음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희게 웃었다.

“아마 마을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런가 봅니다. 제가 너무 입에 단 음식과 보기에


좋은 옷을 입고 있어서인가.”

“…….”

“곧 돌아가겠지요, 곧 어머니를 뵈러 가겠지요.”


연화는 미소를 잃지 않고 백호의 얼굴을 잡아 그의 뺨에 입술을 댔다.

거친 사내는 강인한 신이다. 그러나 순간순간 느껴지는 그의 다정함에 연화는 자꾸만


마음을 기대게 되었다. 백호의 손이 뺨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그
넓고 따스한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백호는 답이 없었다. 그는 다만 연화를 들어 침상에 눕히고 그녀의 입술을 찾을 뿐이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거친 손길이었다.

그는 연화의 저고리를 풀어 헤쳐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유두에 입을 가져갔다.

“……!”

이빨로 갉고 깨물어 날카로운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쾌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드러운 밑 가슴과 양쪽 유두를 남김없이 입으로 깨물고 핥으면서 백호의 손이 치마를


헤치고 들어왔다. 가느다란 연화의 두 허벅지 사이는 무서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채로
떨렸다.

혹사당해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 통증이 느껴지는 입구로 백호의 손이 들어왔다.

“읏……!”

역시 조금 아파서 연화가 흠칫했다. 그녀의 아픔을 눈치채고 백호는 손을 거두었다. 다소의


안심과, 놀랍게도 다소의 아쉬움이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곧 백호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 음부에 입을 묻는 것을 느끼고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사내의 두툼한 혀가 살점을 가르고 들어왔다. 붓고 예민한 음부를 살살 달래 열고,
계속해서 자극당해 평소보다 훨씬 도드라진 돌기를 이빨로 살살 긁었다. 혀는 살점을
가르고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와 꽃잎의 깊은 곳을 핥고 빨았다. 사내의 입은 완전히 음문을
덮고 이와 혀를 사용해 깊이 그 안을 애무했다.

“아, 응, 백, 백호 님……. 그, 그만. 응……!”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져 연화는 손 밑의 이불을 잡고 허리를 들썩였다. 차마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지 못하고 그녀는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우적거렸다. 이불을 잡았다가
자신의 옷섶을 쥐었다가 하며 고개를 젖히고 허덕였다.

“으응! 흐, 응!”

울컥하고 애액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고 백호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빨아들였다. 마치


맛있다는 듯 찔꺽이는 살점 사이를 핥고 빨아들이는 통에 연화는 수치심과 쾌락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백호의 입으로 작게 절정을 맞았다. 아랫배가 바들바들 떨리며 발가락이


말려들어 갔다.

채 신음도 내지 못하고 온 몸에 잔경련을 일으키는 연화를 올려다보며 백호는 끝까지


그녀를 빨아들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픽 웃으며 자신의 장포를 벗었다.

“이제 다른 생각을 못 하겠구나.”


이건 좀 심술이라는 사실을 그 역시 안다. 연화가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두운 얼굴로 다른 이를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앞에서.

“…….”

백호는 잠시 멈칫했다. 원래 발정기에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이던가?

이전의 발정기에도 분명 형식상이지만 반려가 있었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음기가 한 공간 안에서 미쳐 날뛰는 백호의 양기를 잠재워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연화를 상대로는, 그 작은 머리통 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못마땅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침대에 누워 할딱이는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다.


희고 부드럽고 자그마한, 가느다란 새와 같은 여인.

백호는 침대에 엎드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몸을 덮는 묵직한 사내의 무게, 하지만 그녀가
힘들지 않도록 팔꿈치로 지탱하고 있는 백호의 몸은 마치 질이 좋은 이불처럼 아주
아늑하고 따뜻했다. 연화는 눈을 감고 스스로 다리를 벌려 백호를 끌어당겼다.

“이제 대담한 짓도 할 줄 아는구나.”

백호는 웃었다. 연화는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물건이 애액으로 덮여 매끄러운 연화의 음부로 파고들었다.


한 번의 절정으로 완전히 풀려 여인의 몸은 부드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너무 커서 다
들어오자 여전히 빠듯했지만 그녀는 그를 품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흐……. 흐으…….”

그녀의 손이 자신의 배 부분을 둥글게 문질렀다. 아랫배가 불룩하게 일어설 만큼 큰


대물을, 연화는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내고 있었다.

더 참지 못하고 남자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화의 양다리를 손으로 잡아 양쪽으로


벌려 들어 올리고 그는 추삽질을 했다. 처음에 다소 느리게 시작했던 허릿짓이 점차 속도를
올렸다.

“아, 흣, 아응, 흑!”

그녀의 입구에서 흘러내린 애액으로 인해 살끼리 부딪치며 질퍽이는 소리가 났다. 백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다리를 완전히 벌리게 했다. 뱃속이 다시 뜨거워져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아, 흑……!”

골반이 완전히 벌어지는 것 같다. 좁고 작은 몸으로 받아내기에 백호의 남근은 지나칠 만큼


컸다. 내장이 전부 밀려 올라가는 기분이다.

“아! 으응……! 흐응! 흣!”


그녀는 벌어진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울었다. 백호의 손이 내려와 이마와 뺨을 쓸었다.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는 푸른빛 눈동자는 다감하면서도 잔인해 보였다. 맹수의 눈.

“흑, 아! 으읏……! 백, 호 님!”

연화는 마지막으로 그의 양물이 배꼽 위까지 치받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절정은 언제나 이것이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르는 형태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혹사당한
신경은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는 백호에게 매달려 속절없이 울었다.

“백, 백호……! 아, 아아!”

“큿…….”

절정에 달하며 그녀의 좁은 내벽이 빠듯하게 사내의 물건을 조여 왔다. 백호는 더 참지


않고 희고 뜨거운 액체를 토해 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모든 신경이 전부 그녀에게로
쏠려서, 그의 눈에는 연화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백호에게 안겨 연화는 숨을 골랐다. 너무 지쳐서 그대로 수마가 그녀를 끌어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가물거리는 눈을 들어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빛을 담고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연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떠날 사람을, 어차피 이별할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백호 님께 사랑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

수국의 왕실에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 있었다. 잊혀진 꽃, 사방신의 가호를 받는 단 한


송이의 꽃을 연못에 띄운다면 이 나라의 왕조가 바뀔 것이라는 전설이었다. 대대로 왕조가
바뀔 때마다 그 꽃이 연못에 띄워졌다 했다. 연못은 왕궁 정면에 있는 큰 희례연이라고
전해졌으나 전설 속의 일설일 뿐이었다.

“우리 수국의 가호자, 사방신 청룡께서는 이번 제사가 마음에 드셨나 보오.”

수국의 왕 만희는 제사장 성현을 향해 빙긋 웃었다.

계속해서 가뭄이 들던 수국에 비가 내렸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내린 큰 비라 가뭄은 거의


해갈되었다. 제사를 올린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때의 일이라 마침내 그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나 보다 하여 왕은 몹시 기뻐했다.

제사장 성현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사방신의 모두에게 제사를 올렸으니 저희의 정성을 알아봐 주신 게지요. 청룡뿐 아니라
백호, 현무(玄武), 주작(朱雀)의 사방신께 전부 공물과 음식을 올렸습니다. 이에 들어간
인력과 재물이 상당하였으니 왕께서 굽어살피신 덕입니다.”

“모두 제사장의 덕이지. 우리들은 신께서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니.”


만희가 크게 웃었다. 키가 팔 척에 덩치가 큰 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희례연의 잔잔한 수면이 보였다. 그 위에는 어떤 식물도 키우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왕의 눈앞에서 연못 위로 꽃이 피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왕조가
바뀐다는 전설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으나 동시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사실 왕은 전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오만하고 잔인한 자였고, 결코 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자신의 칼뿐이었다.

“청룡의 제는 신전에서, 주작의 제는 대장장이들의 마을에서, 현무의 제는 먼 광산에서,


백호의 제는 깊은 산속에서 지냈습니다.”

“오죽 알아서 잘하였겠소.”

왕은 예의상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정적이 많았기 때문에 수족처럼 부리는 제사장
정도는 적당히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수틀리면 베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또 다른
수족을 구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니.

성현은 흠흠거리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왕의 잔인한 성정을 잘 안다. 그는


최대한 자신의 공을 부풀리기 위해 말을 떠벌렸다.

“청룡의 제는 매우 성대히 치렀으나 나머지는 적당한 규모였습니다. 단, 백호의 제는 워낙


깊은 산속 마을에서 지낸 터라 매우 작은 제였습니다마는.”

금수의 붉은 달

13 화
“깊은 산속 마을이라…….”

수국에는 산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산속의 마을은 더군다나 적었다. 왕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천민들의 부락에서 지낸 것인가?”

“그렇습니다.”

제사장 성현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백호는 사방신 중 가장 흉폭한 존재, 제를 지내다 인신공양이 필요할 가능성도 있어


일부러 그쪽으로 제의 장소를 정했습니다. 아마도 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천민 두엇을
잡아갔을지도 모르지요.”

“흠.”

만희는 턱을 긁었다.

과연, 흰 호랑이로 연상되는 백호는 가장 성미가 나쁜 신으로 전해져 온다. 인간들이


산속의 호랑이를 사냥하면 그에 상응하여 마을을 몰살시킨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었으나 만희는 사방신 중 백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자신이


신이 된다면 그만큼 제멋대로 굴었으리라.
‘나야 신 같은 건 믿지 않는다만.’

그는 킬킬 웃었다.

갑작스럽게 혼자 웃는 왕의 얼굴을 보면서 제사장은 열심히 눈치를 보았다. 백관이 늘어선


자리라면 자신이 그 목표가 될 일은 없겠지만 지금은 둘만 있는 자리다. 왕은 예측할 수
없는 성미를 지닌데다 지독히 잔인한 자였다. 언제든 칼을 빼 들어 거슬리는 자를
내려친다. 그렇게 해서 죽어나간 내관이나 신하가 한둘이 아니었다.

킬킬거리다 머릿속에 편두통이 찾아와 만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일 년 전부터 골의


한쪽이 칼로 저며내는 것처럼 아팠다. 뇌를 한 점 한 점 포를 떠내는 것 같다고 왕은
고통스럽게 생각했다.

“전하……?”

“아니, 잠시…… 머리가 아파서.”

왕은 천천히 이마를 문질렀다. 고통은 쉬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온갖 약을


써보았고 온갖 명의를 전부 모셔 왔지만 그의 두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벌써 그것이
일 년째다.

“또 두통이 심하십니까.”

제사장은 쩔쩔매면서 곁에 선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얼른 물에


적신 비단수건을 가지고 와서 왕의 머리 위에 얹었다.
시녀의 몸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언제 왕이 침대로 끌어와 안을지 모르기 때문에, 침소의
시녀들은 언제나 몸단장을 하고 향수를 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왕의 코에 향기가 거슬렸다. 그 농축된 꽃향 때문에 두통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만희는 핏발이 선 눈을 치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직 십대의 어린 시녀는
험악한 왕의 시선에 위축되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정말 더러운 냄새로군.”

왕은 허리춤에 손을 댔다. 사실에서도 언제나 검을 차고 있는 그는 천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시녀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차리고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전,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풍만한 가슴이 왕의 시선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만희는 검끝을 그녀의 등쪽 옷 밑으로 밀어 넣었다. 날 선 칼날에
시녀의 저고리가 투둑거리며 끊어져 내렸다.

“손 올리지 마라. 가리지 마.”

시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손을 그대로 두었다. 윗옷이 힘없이 그녀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탐스러운 시녀의 가슴이 속옷 한 겹만 남기고 그대로 드러났다. 왕을 모시는
시녀답게 언제든 그가 손을 댈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유혹적인 자태였다.

“읏……!”
시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흘렀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주물렀다. 아무런
배려도 다정함도 없는, 검사를 하는 것 같은 무감정한 손놀림이었다.

속옷 아래로 손을 넣어서 시녀의 둥글고 풍만한 가슴을 큰 손에 꽉 쥐자 야들야들한 피부가


손가락에 착 붙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유두가 바짝 서서 손톱으로 긁자 그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내관이 준비를 잘 시켰나 보군. 일어서봐. 치마를 걷어 올려라.”

제사장은 아랑곳없이 왕이 명했다. 수치심에 짓눌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시녀는


일어서서 치마를 걷어 올렸다.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동그랗게 붉은 자국이 남은 무릎
피부와 흰 허벅지가 치마 밑으로 드러났다.

살집이 있어 통통하고 하얀 허벅지 안쪽을 발로 툭툭 쳐서 벌리고, 만희는 그녀의 치마


밑으로 무심하게 손을 쑥 집어넣었다. 침소의 시녀답게 속옷도 아무것도 입지 않아 까슬한
음모가 그대로 손가락 끝에 잡혔다.

잠시 손가락으로 음모를 꼬고 뽑으며 놀리다가 그는 시녀의 음핵을 문질렀다. 내관에게


교육받아 민감한 몸을 지니고 있는 시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뱉으면서 그녀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질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시녀의 몸은 매끄럽게 왕을 받아들였다. 내관에게 교육받아


이미 충분히 넓혀지고 예민해진 몸이다.

습기 찬 음부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치마 밖으로 꺼내자 그의 손가락은 시녀의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그 손가락을 들고 왕이 웃었다.
“내관을 칭찬해 줘야겠군. 본분을 잊지 않는 건 좋은 일이지.”

여자의 몸에서 손가락을 빼니 다시 두통이 심해졌다. 만희는 천천히 관자놀이를 눌렀다.


여인은 나름 매력적인 몸이었다. 그녀를 안으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 최소한 잠이라도 들
테니.

“……침소로 가서 잠자리를 준비해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예, 예. 전하.”

시녀는 덜덜 떨면서 저고리를 주워 들고 비틀거리며 사실을 빠져나갔다.

제사장은 그녀를 아마 다음날이면 못 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룻밤을 지낸 뒤 어쨌든 왕은


그녀의 목을 벨 것이다. 여태까지 수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왕의 침소에 피를 뿌렸다.

“대체 이놈의 두통이 언제쯤 나을지 정말 모르겠군.”

“제대로 된 치유사를 구해와야 할 텐데요.”

“치유사라. 그런 능력은 요즘 거의 없지 않은가.”

말끝을 끌다가 왕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산속으로 쫓겨 들어갔던


여인과 그 딸이 생각났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아주 예쁘고 나중이 기대되었던 소녀.

너무 어리지만 않았다면 왕은 그 소녀를 왕궁 안에 깊이 가두었을 것이지만 보살의 가호를


받는다는 어미의 눈이 지나치게 선연했다.
‘그 어미가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는다는 헛소리를 했지.’

왕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사촌이던 선왕을 직접 베고 이 자리에 오른 자였다. 당시


왕을 보호하던 장군이 중상을 입어 목을 벨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 바로 그 어미
때문이었다. 노랗게 빛나는 손으로 장군을 치유하여 도망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던 여자.

만희는 사실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사촌형을 베고 직접 관을 머리에 얹었다.


수국의 가호자라는 청룡 따위는 그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왕좌를
장식하는 좋은 장식품일 뿐.

오만한 왕은 그래서 약사여래의 가호 밑에 있다는 그 여자의 말도 믿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빼어난 치유의 능력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고. 그는 단지 그 능력이 필요할
뿐이었다.

“제사장, 예전에 그 마을로 쫓겨갔던 여자. 기억나는가?”

“여자라 하심은…….”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는다며 헛소리를 했던 여자와 그 딸 말이야.”

“그 죄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승려들이 달라고 난리를 쳤던 그 여자.”


제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미도 아름다웠고 딸도 예뻤던 모녀였다. 드물디드문 치유의
능력을 지녀 왕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나 그 어미가 모든 보호를 거부했다. 선왕에게 은혜를
입었던 어미는 자신의 은인을 살해한 왕 만희에게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선왕의 충신이었던 장군을 결국 도망시켰던 여자.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사 천민의


부락으로 내쳐졌다.

“어미는 죽었다 했고……. 그 딸은 어찌되었나?”

제사장은 눈을 굴렸다. 워낙 특이한 능력이 있던 모녀라서 제사장과 승려들도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신의 이능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이다. 직접 보살의 가피를
몸으로 발하는 두 사람을 거의 해부하려 들던 그들을 말린 건, 약사여래를 모시는 사찰의
주지승이었다. 하지만 둘의 위치는 항상 파악하고 있었다.

“여즉 천민 마을에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딸 역시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만희는 다시 두개골이 쪼개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잡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또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제사장은 슬슬 도망가려고 엉덩이를 뺐다.


최근 들어 왕은 환우에 시달리고 있었고, 두통이 극심해지면 마치 눈이 먼 것처럼 칼을
뽑아 주변에 있는 시종들을 베어 죽이곤 했다.
조용히 일어서려는 제사장을 향해서 수국의 왕이 중얼거렸다.

“그 딸을 데려오시오. 치유의 능력, 그 어미가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았다 했으니 나의


편두통도 고칠 수 있을지 모르지.”

“그 딸 말씀이십니까.”

제사장은 곤란한 낯빛을 했다. 왕에게 명을 받는 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다. 성공하면


상을 받지만 실패하면 목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성공하더라도 무엇 하나 트집이 잡히면
왕이 그대로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 써보지 않은 약이 없고 부르지 않은 의사가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지.


내게 신이란 별것 아니지만.”

“진짜 약사여래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않사옵니까…….”

말꼬리가 약해지는 제사장의 말에 만희는 자신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만약 거짓이라면 죽이면 그만인 것을, 모를 것은 또 뭐가 있겠나.”

죽음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고 왕인 그의 손 아래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존재 같은 것도 없다. 세상천지 칼과 칼이 맞대어 이기면 그뿐이다.

만희는 뇌를 쪼개는 고통에도 히죽거렸다.

금수의 붉은 달
14 화

백호는 주기적으로 신령계를 날아 세계를 살폈다. 신령계는 워낙 넓고 인간계인 주작과


청룡의 영토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사방신인 백호로서도 며칠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다.

연화와 교접하느라 관찰 시기를 놓친 백호는 어쩔 수 없이 떠났다. 불과 나흘밖에 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아쉬움과 불안함을 어쩔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거든 묘우나 호접에게 말해라.”

백호는 침상에 앉아 있는 연화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그는 흘긋 묘우의 빙긋이 웃는


얼굴을 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호접에게 말해라. 저 여우 놈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서.”

“너무하십니다, 백호 님. 제가 얼마나 충성심이 깊은 신령인지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묘우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입가가 묘하게 올라가 있어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충성심이야 깊지, 자꾸 내 뜻과 맞지 않는 다른 짓을 해서 문제지. 명심해라, 묘우. 내


뜻을 따르는 것이 충성이다. 네놈의 뜻대로 아무 짓이나 마구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입니다.”

여우의 신령은 방긋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뭔가 모를 찜찜함에 백호는 못마땅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호접은 곁에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그러지 마셔요, 백호 님. 제가 단속하겠나이다.”

“그래. 너는 내가 믿는다.”

수하를 많이 두는 걸 기꺼워하지 않는 백호의 성정 때문에 그의 최측근이라고 할 만한 자는


묘우와 호접 정도였다. 신령으로서의 지위나 힘은 묘우 쪽이 컸으나 그는 겉과 속이 달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신령의 원로 중에 데리고 온 놈이 저리도 제멋대로이니.”

“염려 놓으소서. 얌전히 있겠나이다.”

묘우가 빙글거렸다. 못마땅한 얼굴로 백호는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한 번 연화를 끌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나흘이다. 더 빨라질 수도 있으니 염려 말고 기다리거라. 신령계의 저 끝과 이 끝을


보아야 하는 일이라 나로서도 하루 만에 끝내기는 무리로구나.”

“너무 걱정 말고 다녀오셔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신 역시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관할하는 게 아니로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놀라울 뿐이었다.

백호는 대체적으로 신령계의 저 먼 곳도 앉은 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나 직접 샅샅이 살피는


일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신령의 일족은 워낙 많았고 그들끼리의 충돌도 상당히 많아
자칫하면 약한 일족들에게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르게 오시면 안 됩니다. 본래 일주일은 걸리는 일정을 나흘로 조정하신 게


아닙니까.”

묘우가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신은 부하 주제에 겁을 상실한 신령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말이 매우 이치에 맞아서 더 뭐라 꾸짖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여우라서 그런지 까탈스럽기는.”

투덜거리는 말에 묘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신령계를 샅샅이 보셔야 합니다. 일족 간의 분쟁이 숨겨진 채 길어지면 자연세계 자체가


뒤틀려 그 종족이 멸종할 수도 있으니까요.”

“네놈이 사방신이냐, 내가 사방신이냐? 여하간 말은 많아가지고.”

저래 보여도 묘우는 정말로 신령계를 걱정하는 원로다. 백호 역시 그 부분을 알기 때문에


크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연화는 궁궐의 누각까지 걸어 나와 백호를 배웅했다.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물빛의 비단이
바닥에 끌렸다. 발에 신은 부드러운 꽃신은 걸을 때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누각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코끝으로 스미는 청량한 공기에 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폐 속 깊숙이 공기를 마셨다.

그는 본래 자유로운 영혼이다. 금수의 왕인 그가 어느 한 곳에 처박히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연화가 오기 전, 그는 하루도 그대로 궁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굳이


신령계를 살피러 떠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곳저곳을 다녔다. 다만 연화가 온 이후
그녀를 취하기 위해 침상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발걸음이 안 떼어져 그는 돌아서서 여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백호가 좋아하는 그대로 긴 흑발을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채 뒤로 늘어뜨리고 그녀는


발돋움을 해 백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수줍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입맞춤이자 인사였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일은 부질없다. 하지만 인간의 버릇대로 그녀는 속삭였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이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호는 눈치 빠르게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래, 최대한 빨리 다녀오마.”


연화의 수줍은 애정 표현에 백호의 얼굴이 벙글거리며 밝아졌다. 그는 파란 눈동자를
빛내면서 연화를 내려다보다가 반대쪽 뺨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해주렴.”

“백호 님…….”

부끄러움에 연화가 뒤로 물러섰고 그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던 호접과 묘우는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들의 주인이 저렇게 인간의 여인에게 애정을 바라는 모습을 보다니. 둘 다
티는 내지 못했지만, 특히 묘우는 속으로 기분이 묘한 상태였다.

“빨리 가셔요.”

“한 번만 더 입을 맞춰주면 가지! 얼른 해주렴.”

답지 않게 아이처럼 떼까지 쓰면서 백호는 연화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뒤에 선 호접과


묘우, 시중을 드는 시비들이 신경 쓰여 얼굴이 붉어졌지만 백호는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그녀에게 양뺨에 모두 입맞춤을 받고 백호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가능한 빨리


돌아오겠다 약속에 약속을 거듭한 뒤였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백호의 궁궐로 날아든 것은 그날 밤이었다. 창틀에 내려섰던 새는 곧


바닥에 땅을 딛고 선 인간의 형체로 바뀌었다. 사영의 수하인 수조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경비병이 없는 것을 깨닫고 다시 새로 변했다. 약속했던 대로
묘우가 경비병을 최소화해 물린 모양이었다. 작고 파란 새는 궁궐 안을 날아 부엌으로
향했다.

시녀나 시중을 드는 신령들도 모두 자러 간 상태였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궁궐 안에서


부엌에 서 있는 자는 단 한 명이었다. 가느다랗게 눈을 좁히며 웃고 있는 여우의 신령,
묘우였다.

“묘우 님.”

수조가 변해 바닥에 내려섰다.

“약은 가져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수조는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묘우는 푸른 도기로 만든 찻주전자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이게 현재 반려가 드시는 차를 담는 주전자입니다. 여기에 발라주시고, 그리고 이 앙금이


식사에 항상 곁들여지는 떡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여기도 부어주십시오.”

“예, 예.”
새의 입장에서 여우의 신령인 묘우는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수조는 굽실거리며 그의
말대로 호리병에서 붉은 액체를 부어냈다.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혀 조심히 주전자의 바닥과 주둥이에 바르는 모습을 보며 묘우가


눈썹을 올렸다. 약의 양이 지나치게 적어 보였다.

“이 정도의 양으로도 충분할까요?”

“물론입니다. 뱀의 일족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가전절기의 산물이니까요. 아주 소량만


입 안에 넣어도 은은히 몸이 달아오릅니다.”

수조가 가져온 약은 미약이었다.

뱀의 일족은 약물을 잘 다루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초의


활용을 안다고 할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여인을 가장 음란한 창부로 만드는 약
역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기에는 붉습니다만…… 일단 이 병에서 나오면 무색무취가 됩니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모양이 되지요.”

“훌륭하군요.”

묘우는 웃으며 칭찬했다. 과연, 훌륭한 약이다. 무색무취라면 쓰기에 따라 훌륭한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전자와 앙금을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이걸 찍어서 발랐다고 제 손가락 끝마저 화끈거립니다. 보이시죠? 붉어진 것.”


“그렇군요. 역시 뱀의 일족의 솜씨는 훌륭합니다. 사영 님께서도 준비는 하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하위 일족들 간의 분란을 가장해 놓은 상태라……. 아마도


사흘 뒤쯤 백호 님의 눈에 띄겠지요.”

“딱 좋습니다.”

시기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사영이 왔던 시기도, 일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도. 여우의


신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묘우는 뱀의 일족을 싫어했지만 사영 정도면 나름대로 협력하기 좋은 상대다. 그녀는


욕심이 많아 자극하기도 쉬웠고, 반면 영리하여 일을 그르칠 확률도 높지 않았다. 서로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진행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묘우는 미소를 짓고 호리병을 받아 품 안에 넣었다.

“약속은 지키시기 바랍니다. 제 이름은 새어 나오지 않도록요.”

“물론입니다. 사영 아가씨를 못 믿어 맹세까지 받으시고도 그러십니까? 저주가


무서워서라도 입을 떼지 못합니다.”

“만약을 위한 거니까요.”

묘우는 웃으며 수조를 배웅했다. 파란 새는 올 때처럼 고요하게 궁궐을 날아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흠, 글쎄……. 희생양이 될 경비병이나 연화 님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특히 경비병 쪽에게. 사실 인간의 여인에게는 그리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인간 주제에


어리석게도 주제넘은 자리를 바랐던 것이 화근이다.

그는 호리병을 들어 달빛에 비춰보았다. 파랗고 작은 호리병은 딱 손바닥만 했다. 안에서


찰랑거리며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나흘. 미약을 먹으며 며칠이나 버티실 수 있을까요, 연화 님.”

백호가 인간의 여인에게 열중한 것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길어지면 결코 좋지 않았다.

신령계의 원로로서 그는 결코 금수의 왕이자 신령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이 한낱 인간의


여자와 오랫동안 살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녀 간의 정분이 떨어지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백호는 연화가 수줍고 완전한 처녀라서 더 매료되었다. 그 역시 여인과의 관계가 과거에


거의 없다시피 하였고, 그래서 풋풋하고 수줍은 연화에게 더 끌렸다. 묘우가 보기에는 그게
맞았다.

‘그러니까 실은 그 여인이 육욕에 찌든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환상도


애정도 깨어지게 되어 있지.’
사영이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서 다행이다. 사영은 사영의 일을, 묘우는 묘우의 일을 하면
아주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자, 내일이 기대되는데?”

그는 기지개를 켜고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금수의 붉은 달

15 화

뱀의 일족의 마을은 다른 신령들의 마을과 다르게 아주 깊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위 신령인 지렁이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땅 밑의 지하에 자리 잡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안에서는 당연히 밤의 달빛도, 숲의 바람도 느끼지 못한다. 사영은 가끔 자신의 저택


안에서도 그래서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도 그녀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초조하고 답답했다.

사영은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묘우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글쎄, 발정기 아닙니까. 비록 그간은 형식상의 반려를 맞이해 그들의 음기로 기운을
다스렸다지만 백호 님의 정욕은 지금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묘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사영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사내가 발정이 났을 때 여자는 누구라도 상관없는 것이지요. 그저 몸을 요구하는 상태일
뿐.’

하필 제사를 깬 인간의 여인이 눈앞에 있었을 뿐이다. 전의 상황을 들은 사영은 백호가


갑자기 인간의 반려를 들인 것을 납득했다. 물론 머리로 납득했을 뿐 가슴이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설마 그 여우같은 놈의, 아니, 그 여우 놈의 꾐에 넘어간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며칠 동안 애써 만들어 수조에게 쥐여 보냈던 약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들려서


보냈던 것과 아주 동일한 호리병이 그녀의 책상 위에도 있었다. 약이란 민감한 물건이어서
색과 성질이 맞는 그릇에 보관해야 해 병의 모양과 색 모두 동일했다.

이 일만 성공하면 사영은 백호의 옆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신령계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 꿇을 것이다.

‘잘되겠지, 설마.’

초조했다. 물론 묘우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는 했으나 그녀가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백호를 이곳으로 끌어들여서…….

‘할 수 있을까?’

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고, 사영이 평생토록


가장 원한 것이 백호라는 사내였다. 신이기 이전에 남자로서 꼭 갖고 싶었다.
백호의 얼굴을 떠올린 사영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름다운 백발과 황홀한 푸른 눈, 희디흰 피부. 사내답게 키가 하늘만큼 크고 어깨가


벌어져 뱀의 일족으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강인한 사내.

“절대 넘겨주지 않아.”

욕심나는 것을 손 놓고 보기만 하는 건 뱀의 일족의 성질에 맞지 않는다.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짙어지고 세로로 긴 홍채가 깜박이며 열렸다 닫혔다.

“사영이 게 있느냐?”

그 때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아버지.”

길고 가느다란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옆으로 찢어진 눈은


사영과 몹시 닮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이었다.

사혈은 지독히 오래전에 태어나 수련을 해 용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나 청룡의 수하로


들어가길 거부하여 뱀으로 남은 자였다. 대신 청룡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하며 그에게서
약간의 힘을 얻어내고 있었다.

사혈의 휘하에서 뱀의 일족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하게 부흥했고, 그만큼 강하고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검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사혈은 딸이 권하는 대로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의 눈은 사영의 책상 위에 있는 호리병에 꽂혔다.

“약 만드는 솜씨가 제법 좋아졌더구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대로 제조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누구나 그리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노력도 많이 했고, 재능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 딸이니 당연하겠다만. 내 아주 너를 예뻐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거짓말쟁이. 사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혈의 자식은 그 숫자가 지독하게 많았다. 공식적으로 사혈의 밑에 들어와 사는 자식들만


해도 서른 명에 가까웠고 아마 그대로 버려두어 세상을 떠도는 자식들은 그 배에 가까울
것이다. 그녀는 그중 열일곱 번째의, 평소라면 사혈이 눈여겨보지도 않을 딸이었다.

다만 사혈이 그녀를 기억이나마 하는 이유는 그녀가 뛰어난 약학자이자 욕심이 아주 많은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사영이 몇 번째 딸인지도 아마 모를 것이다. 이름과
얼굴이나마 아는 것이 다행이다.

“나는 사방신의 장인이 되길 기다리고 있단다. 꼭 성공해야 한다.”


저 미약을 만드는 데 들어간 귀한 약재를 급히 구하는 것도 사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는 빙글거리고 웃으며 호리병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그 무게감을
보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확히 정량을 만들었구나. 똑같은 양을 수조에게도 보낸 게지?”

“그렇습니다. 지금쯤 아마 약을 탔을 거예요.”

“그래. 기대되는구나.”

사혈은 손바닥을 비볐다.

그가 사방신 청룡의 직속 수하로 들어가길 거부했던 이유는, 언젠가 사방신과 동렬이나


윗줄에 서고 싶은 야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호의 장인이 된다고 하여 사방신보다 높은 지위나 더 큰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방신의 혈족으로 대접을 받게 된다. 뱀의 일족은 단숨에 그 신분이 상승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 일족이 대단히 강성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야 없지.’

사혈은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식들이 모두 멍청하고 심약한데 비해 사영은 제법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스스로 이런 방법을 발견해 오다니.

그리고 설사 실패한다 한들 수많은 자식들 중 한 명이니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백호가


노한다고 해도 자식의 목숨으로 갚겠다 하면 사혈 자신과 일족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리라.
사혈은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꼭 성공해야 한다. 백호의 성질은 불과 같아서 만약 들키면 곤욕을 꽤 치를 게야.”

“아버지께서 도와주셨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사혈이 보채지 않아도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이 일을 이루어낼 작정이었다.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모든 신령계의 가장 높은 신분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를
포함한 뱀의 일족마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신령계의 반려의 자리. 그것이 사영이 노리는
목표였다.

***

연화의 아침은 언제나 호접이 신경 써서 준비했다. 원래 백호와 함께 일어나 식사를 했지만


오늘부터 나흘간은 그녀 혼자 식사를 하게 된다.

언제나 연화가 좋아하는 기름을 발라 윤기를 낸 앙금떡과 향이 강하지 않은 곡물차를


준비한다. 고소하고 입 안에서 씹히는 맛이 있는 고등어를 굽고, 지난 저녁 뜯어다 씻고
다듬어놓은 신선한 산나물을 참기름과 소금을 조금 넣어 무쳐낸다.

신령계의 식재료들은 언제나 신선하고 질이 좋아서 연화는 그 재료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오늘도 시녀들과 함께 호접은 소박하지만 정갈한 아침식사와 함께 후식으로 떡과 곡물차를


내갔다.
체력이 부족하니 삼시 세 끼를 반드시 꼭 챙겨 먹으라고 당부한 백호 덕분에, 연화는
아침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고 얌전히 받아 먹었다.

그녀는 밥을 몇 술 뜨고 앙금떡과 곡물차를 들었다. 달콤한 떡과 구수한 차의 향이


어울려서 맛이 일품이다. 호접은 내온 떡을 연화가 전부 다 먹는 것을 보고 기쁘게 빈
그릇들을 내갔다.

이상한 징후는 그날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연화는 기묘할 정도로 몸이 더웠다. 백호의 궁의 주변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가장


쾌적한 기온과 습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백호에게 딱 맞는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녀는 약간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의 공기였다. 그러니 덥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서늘한 공기 때문에 어깨에 챙겨 덮었던 부드러운 비단천을 내려놓았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감기인가…….’

백호가 어제 갓 떠났는데 아파서 눕기라도 하면 여러 사람한테 민폐다. 무엇보다 호접이


당황할 텐데, 적당한 미열 정도라면 티 내지 않고 참는 쪽이 낫다.

연화는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얌전히 앉았다. 몸이 더웠지만


차라리 땀이 나는 게 낫다 싶어서 그녀는 이불을 걷지 않고 누웠다.
점심시간이 되어 호접이 연화를 보러 와서 놀랐다. 아침시간에는 일어나서 자수를 놓거나
책을 보던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어서였다. 얼굴도 불그스레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아, 조금 졸려서요. 그냥 누워 있으면 괜찮을 듯싶어요.”

연화가 미소를 띄었다. 호접이 식사 준비를 이르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서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차만 준비해 주시겠어요?”

“차만 드시면 안 돼요, 최소한 떡이라도 드셔요. 제가 잘게 잘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아주 조금만요.”

앙금떡은 달달하니 맛나다. 입맛이 좀 없어도 그건 넘길 수 있었다. 연화는 호접이 쟁반에


가지고 온 떡 두어 조각과 차만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열은 점점 더 심해졌다. 몸이 달아올랐지만 무엇보다 아랫배가 뜨겁고 가슴에 열이 몰렸다.


자꾸만 다리 사이가 움찔거리는 느낌에 연화는 당황해서 몸을 웅크렸다.

이불이 피부에 쓸리는 느낌도 자극적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녀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곁에 백호가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 너무 강렬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태아처럼 몸을 구부린 채 차가운 금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금수의 붉은 달

16 화

걱정이 되어 호접이 오후에도 또 보러 와서 얼굴을 굳혔다.

“신령계의 의원은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를 텐데 큰일이군요.”

“오늘만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니라서요.”

애써 웃는 연화의 얼굴은 초췌하면서도 붉었다. 그녀는 자꾸만 움찔거리는 아랫배 깊은


곳의 느낌을 참아내려고 애썼다.

평생 몰라왔지만 지난 며칠간 지독하게 몸에 새겨진 감각이다. 연화는 그 감각을 알았다.


백호와 교접할 때마다 몸 전체를 뒤흔들고 뇌를 곤죽으로 만드는 쾌감. 그것이 발현하고
싶어 자신을 들썩이고 있었다.

여전히 입맛이 없어 떡과 차만을 마시고 그녀는 혼자 침실에 남아 누웠다. 정신이 혼미해서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아침에 눈을 떠 푸른 하늘을 보고 상쾌한
기분으로 세계 저 너머를 날고 있을 백호의 안녕을 바랐는데 그 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눈앞이 흐린 상태로 지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몸은 밤이 될수록 더 뜨거워졌다. 연화는 더위를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일어나 앉았다.

밖에는 밤새 경비를 서는 신령들이 있다. 그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조심히


맨발로 바닥에 내려서서 걸었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나무바닥의 느낌이 좋았다.

‘백호 님.’

그녀는 창문 앞까지 와서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 하늘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검디검은 밤하늘이다. 아쉽게도 먹구름이 끼어 달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서 땀에 젖은 연화의 목덜미가 조금 시원해졌다. 그녀는 밤공기를 느끼고


있다가 힘에 겨워서 기둥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에 닿는 기둥도, 바닥에 느껴지는
찬 바닥도 열을 내려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연화는 멍하니 어둡고 잔뜩 찌푸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호 님.”

그리운 이름을 소리 내서 불러보았다. 혹시 그분이 옆에 없어 내 몸이 이리도 안달이 난


것인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것 같았다.

사실 하루 종일 침대 안에 있으면서 백호가 그리웠다. 거칠게 끌어안는 강인한 손, 그의


품 안에 안기면 콧속을 파고드는 남자다운 체향. 연화를 꿰뚫을 듯 바라보는 푸른색의
눈동자. 그리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연화는 천천히 자신의 목덜미를 스스로 더듬었다. 백호가
쓸어주는 것처럼 귓가를 만지고 목을 지나 쇄골을 쓸었다. 얄팍한 잠옷 위로 가슴을
쥐어보고 그녀는 느리게 숨을 흘렸다.

“흐, 음…….”

그가 만져주는 것과 비할 수는 없었지만, 자극은 여지없이 백호를 기억나게 했다.


망설이다가 손톱을 세워 유두를 긁었다.

“읏.”

따끔하고 아픈 감촉과 함께 찌르르하게 익숙한 쾌감이 등줄기를 흘렀다. 수치심과 쾌락이


동량으로 연화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한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몸은
이미 뜨거워져서 더 큰 자극을 기다렸다.

하지만 차마 다리 사이로 손을 넣을 생각은 못했다. 연화는 아랫배까지만 만지다가 깊은


곳에서 움찔하는 감각이 느껴지자 놀라서 얼른 손을 떼어냈다.

그곳은 이제 완전히 촉촉하게 젖어 더 큰 자극을 원했다. 그녀는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괴로움에 숨을 허덕이며 다리를 모아 힘을 주었다.

다리 사이가 압박되며 쾌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깨닫고 그녀는 손에 닿는 방석을 둥글게


말아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방석을 가운데에 넣고 허벅지를 조여 힘을 주자 가운데가
압박되며 허리가 떨렸다.

연화는 아예 그 위에 올라앉아 거의 엎드린 자세로 허리를 움직였다.


“흣……!”

압박만으로도 달아올라 있던 몸은 순식간에 절정에 올랐다. 쾌감에 연화는 바닥에 반쯤


엎드린 자세로 몸부림쳤다. 옷이 땀에 젖어 몸에 엉겼고, 밑에서는 애액이 울컥 터졌다.
속곳도 방석도 전부 젖을 정도였다.

“아……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한 번 절정을 맞이하고 나자 몸의 열은 훨씬 내려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 떨리는 허리를 지탱해서 겨우 몸을 세웠다.

“세상에.”

옷과 방석이 젖은 것을 보고 연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무슨 음란한 짓이란 말이지.


백호가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으면 말을 안 한다. 겨우 만 하루가 지났을 뿐 아닌가.
그런데도 이렇게 몸이 달아서 안달이라니.

“이걸 어쩌지.”

지금 욕탕으로 가서 빨 수밖에 없다. 그녀는 얼른 속곳을 벗어 방석과 함께 조용히 곁에


있는 작은 욕탕으로 들어가 직접 손빨래를 했다.

욕탕에서 더불어 밑도 닦으면서 새삼스럽게 민망했다. 밑에서 애액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꼼꼼히 닦고 흔적을 지우며 그녀는 제발 백호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몸의 열은 좀
내린 것 같았지만 그가 돌아와야 이 갈증이 채워진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그가 이리도 그립구나. 겨우 발정기의


반려일 뿐인 여자가 너무 주제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 연화는 한숨이 나왔다.

“열이 계속 심하군요.”

“아니……. 심하지는 않아요. 그냥 어제와 비슷한 것 같네요.”

호접은 걱정스러운 눈이었다. 그녀는 손을 연화의 이마에 올려 열을 재봤지만 열이


위험하게 높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붉고 눈의 초점이
흐려져 멍한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많이 안 좋으시면 꼭 말씀하세요.”

“그럼요.”

어젯밤 스스로 자위를 하고 난 뒤 열은 조금 내렸었다. 아침에도 훨씬 낫다고 느꼈는데,


식사를 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몸이 좋지 않았다.

지난밤을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백호에게 수없이 몸을 열었지만 스스로 쾌락을


위해 혼자 몸을 움직인 것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허덕이는 것만도 힘에 겨워 스스로 움직일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백호가 떠난 단 하루 만에 이렇게 몸이 달아오르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예민해졌고 아랫배 주위로 계속해서 뜨거운 기운이 번졌다.

자꾸 땀이 나서 그녀는 아침에도 목욕을 한 번 했다. 곁에 시녀들이 있어 자꾸만


달아오르는 몸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했다. 평소와 다르게 뾰족하게 선 유두나
발그레한 피부 때문에 그녀는 목욕 후 얼른 옷을 입고 침대로 들어왔다.

‘사실은 어제보다 괜찮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다. 점심식사까지 한 뒤 오후에 연화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호접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몸에 열이 나고 땀이 나고,


그 후엔? 백호가 그리워 스스로 아래를 방석에 문댔고, 피부가 예민해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연화는 거기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빨리 백호 님이 돌아오셨으면.’

백호의 앞에 있으면 긴장되었지만 지금은 눈물이 날 정도로 그가 그리웠다. 빨리 와서 그가


큰 손으로 자신을 어루만지고 안아줬으면, 그 묵직한 육체로 자신의 몸을 감싸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백호를 생각하며 이불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옷감에 스치는 감촉까지도 피부를


자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의원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연화는 꾹 참고
눈을 감았다.
문밖에서 호접은 다소 초조한 얼굴로 복도를 오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복도를 지나던 묘우가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섰다. 호접은 평소 대단히 침착한 성품으로
저렇듯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나비의 신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연화 님의 몸이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몸이? 왜? 신령계의 공기는 인간계보다 맑고 좋아 오히려 건강에 좋을 텐데.”

묘우는 대단히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접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야. 끼니도 제때 챙겨 드시고 있고, 신령계의 음식이 인간계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인데.”

“백호 님은 적어도 사흘 뒤에나 돌아오실 텐데 어쩌지?”

“그것도 걱정이고.”

호접은 난감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묘우는 살짝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많이 나쁜 거야?”
“열이 오르고 피부가 붉어. 인간의 건강 상태는 내가 잘 모르지만 좋지 않은 건 확실해.”

“그렇군.”

묘우는 눈을 굴렸다. 예상보다 연화의 상세가 안 좋은 듯했다. 아마도 신령에게 맞는


미약의 양을 인간인 연화에게 넣어 지나치게 많았을 수도 있다.

일이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어도 좋지 않다. 결국 중요한 건 백호가 시찰에서 돌아와 연화가


다른 사내와 뒹구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그래야 연화를 버릴 테니까.

‘수조에게 약의 양을 줄이라고 전해야겠군.’

연화가 사내와 뒹구는 건 이틀 뒤 마지막 밤이어야 했다. 그래야 백호의 도착과 함께


발견할 수가 있다.

호접과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묘우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필묵을


꺼내 몇 마디를 적고 비둘기 다리에 묶었다. 묘우는 비둘기에게 작게 속삭였다.

“뱀의 일족, 사영의 전각으로 가거라.”

새는 고개를 끄덕이고 후루룩 날아갔다. 허공으로 나는 새의 뒷모습을 보며 묘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다.

금수의 붉은 달

17 화
비둘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묘우가 내린 명대로 사영의 전각까지 거의 두 시간을
날아가 날개를 접은 새는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다.

정원에 앉은 새를 잡은 손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중년의 사내,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


그는 새를 살펴보다가 다리에 매인 편지를 발견하고 펴 읽어보았다. 간단하게 적힌 ‘약을
줄이시오’라는 말에 사혈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여우 새끼가 누구에게 명령질이지?”

사혈은 묘우를 극도로 혐오했다. 한낱 여우의 신령 주제에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묘우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도 사혈의 분노를
자극했다.

사영이 묘우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감히 묘우 따위가 뱀의


일족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편지라니.

“약을 줄여? 멍청한 여우 녀석. 다른 사내와 뒹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줄이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 여자가 질펀하게 사내와 뒹굴어야 한다. 며칠 내내 다른 남자의 정액에 찌들고 미약에


찌들어 쾌락을 좇아 허덕이는 모습을 백호가 보아야 했다.
그 전에 적당히 그를 구슬러 이곳 뱀의 전각에서 사영과 밤을 보내게 해 홀린다면 백호는
연화를 쉽게 버리고 쉽게 잊을 것이니. 아무리 신이라 해도 뱀의 일족이 만들어낸 미약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오늘밤 백호는 시찰을 위해 뱀의 일족의 영토에 들르고, 연회를 준비해 초대할
예정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편지를 쥐어서 찢어버렸다. 비둘기를 휘휘 저어서 날려 보내고 사혈은


짜증스럽게 돌아섰다. 아무래도 수조에게 일을 더 빨리 진행시키라고 해야 할 듯했다.

묘우 따위에게 지령을 받다니, 그가 백호의 장인이 된다면 가장 먼저 묘우를 쫓아낼


생각이었다.

***

호접은 저녁을 먹고 상세가 더 심해진 연화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그녀는 연화의


목덜미까지 바람이 샐까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주며 이마 위에 찬 물수건을 올렸다.

신령들은 대부분 인간보다 강인해 이렇듯 열이 오르며 아픈 경우가 잘 없었다. 지금 호접


역시 인간계를 드나들며 알게 된 간호를 하는 것뿐이었다.

“혹시 밤새 무슨 일이 있으면 우현을 부르세요. 믿을 만한 경비병이니 바로 저를


호출하거나 연화 님을 돌봐드릴 겁니다.”

나비의 신령이 타이르듯 말하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접의 뒤에서 덩치가 좋은 남자가 연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움찔하고 다리 사이가 떨려서 연화는 놀랐다. 그녀는 잠시 이불을 끌어 올려 눈 밑까지
숨었다가 조심히 인사했다.

“괜찮을 거예요. 신경 안 쓰셔도 될 거니까…….”

“편히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곰의 신령인 우현이 빙긋 웃었다. 호감 가는 인상의 신령은 연화를 안심시키려는 듯 몸을


가능한 작게 말아서 침대 곁에 섰다.

“저는 언제나 문 앞에 서 있을 테니 안 좋으시면 그저 침대를 서너 번만 치셔도 제가 알


수 있습니다. 곰은 덩치는 산만큼 크고 둔해 보여도 생각보다 귀가 아주 예민한
종족이라서요.”

경비병의 너스레에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연화의 웃음을 보고 우현은 잠깐


얼굴을 붉혔다.

사방신의 반려는 그간 최측근들만 보고 접했기 때문에 우현은 처음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백호가 궁에 있을 때는 경비병이 궁내에 서 있는 것을 싫어해 대부분 정원이나 1 층에
머물렀다.

인간의 여인을 반려로 들였다고 해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저 높으신 사방신께서


운우지정을 나누시는가 했는데, 과연 직접 보니 난초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몸이 안 좋은 중에 처음으로 웃은 거라 호접은 기쁘게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우현은 워낙


성격이 좋고 무던한 신령이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럼 믿고 맡기겠네, 우현.”

“염려놓으십시오.”

우현은 허리를 굽혔다. 호접은 연화가 먹고 마셨던 그릇을 챙겨 들었다.

“나는 오늘부터 이틀 밤을 인간계에 내려가 봐야 해. 정기적인 제사가 있는 날이라…….


백호 님은 직접 가시지 못하고, 작은 제사이기도 해서 내가 다녀와야 하니. 딱 밤에만
다녀오니까 그 시간만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나는 인간계에 가 있더라도 자네 호출을 들을 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부르고.”

“호접 님도, 걱정이 참 많으십니다.”

우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신의 반려가 아픈 와중에 맹하게 웃고 있는 경비병의 등을 한 대


아주 세게 쳐줄까 하다가 호접은 고개를 저었다. 곰의 등짝 따위 나비가 쳐봐야 손만
아프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걱정스럽게 연화의 이불 위를 다시 토닥여주고 방을 떠났다. 우현은


호접을 배웅하러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저 녀석인가.’

궁의 정원 나무 위 높은 곳에 새 한 마리가 앉아서 호접이 떠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조는 덩치가 큰 곰의 신령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아주 암시가 잘 먹히게 생겼군.’

사혈은 일을 빨리 진행시키라고 닦달했다. 사영에게서는 별말이 없었다. 뱀의 일족은


완벽하게 사혈의 밑에서 그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그 수하인 수조 역시 사혈의
말에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실내로 들어가는 곰의 신령의 뒤를 쫓아 날아갔다. 새가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들은 우현이 뒤를 돌아보고 놀랐다.

“아니, 웬 새가 들어와서 날고 있느냐. 나가야지, 나가라. 여긴 백호 님의 궁궐이야. 경을


치려고.”

우현이 이리저리 손을 저었지만 새는 날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차마 새를 치지는


못하고 그가 난감해했다. 새가 우현의 얼굴 앞까지 다가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새 녀석아. 얼른 나가자꾸나.”

얼른 새를 양손으로 붙잡아서 우현은 날려 보내려고 했다. 손을 자꾸만 부리로 콕콕 찍는


느낌에 그는 얼굴을 구기며 새를 들어 올려 보았다.

“너 자꾸 왜 그러는 거냐?”
파란 새의 눈은 구슬 같았다. 눈을 깜박이면서 검은 눈이 우현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곰의
신령은 잠시 멍해져서 두 손을 풀었다. 새는 다시 날갯짓을 하다가 사람으로 둔갑했다.

소리 없이 바닥에 내려선 수조가 히죽 웃었다.

“역시 곰이란 어지간히 둔한 자들이라.”

곰 중에도 대단히 예민하고 난폭한 자들이 많지만 이렇듯 낮은 계급인 자들은 대다수 사람
좋고 느긋한 성격이다. 그 말은 암시도 잘 걸린다는 뜻이었고 이용하기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는 경비병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덩치 좋은 곰의 신령은 눈의 초점이


흐릿하게 풀렸다.

“새의 일족은 재주가 많은 편이지. 우둔한 자들의 정신을 잠시 조종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고.”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우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잠시의 과거를 살펴보는 일은


새의 일족의 특기였다. 그는 우현의 저녁시간을 그의 눈을 통해 훑어보았다.

“오호라, 잘된 일이군. 이 곰 양반이 인간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우현의 기억 속,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 연화는 아주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호감도 컸다.

“일이 쉽겠는데.”
싫어한다면 그 증오심을 이용해도 되지만 서로 정사를 맺게 하는데는 물론 호감 쪽이 훨씬
이용하기 편안하다. 연화 쪽은 미약으로 몸이 잔뜩 달아오른 상태고 거부는 하기 힘들
것이다.

수조는 입가를 올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우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라라. 눈앞의 암컷은 네 것이다.”

우현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리고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에게


수조는 친절히 쟁반과 음식을 챙겨 들려주었다. 물론 거기에 사혈의 명대로, 지난밤보다 두
배의 미약을 넣은 채였다.

“암컷에게 먹이고, 너도 먹는 거다.”

약에 취해 뒹굴어라. 어차피 호접은 자리에 없고 백호는 오늘밤에 뱀의 일족을 시찰하러


들렀다가 연회에 초대받을 예정이다. 이틀 밤 내내 뒹굴고 다른 수컷의 정액에 절여진
반려를, 사방신은 어떤 얼굴로 바라볼까.

수조는 히죽 웃고 다시 새로 변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현은 암시를 받은 대로 느릿하게 쟁반을 들고 어슴푸레한 궁의 2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백호는 그의 인생 최대의 속도로 신령계를 날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기적인 시찰을 게을리 할 수는 없어서 그는 눈이 빠져라 신령계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인간계와 달리 수많은 종족이 뒤섞여 사는 신령계는 그만큼
사건사고도 많았다.

인간의 세상처럼 나라가 갈라지지는 않았으나 대신 그보다 더 공고한 일족들이 세상을 나눠


가졌다. 백호는 그 사이를 돌며 일족들 사이의 억울한 일이나 부당한 일 들을 살펴
풀어주거나 매듭지었다.

시찰은 그래서 중요했다.

아예 호랑이의 몸으로 변해 바람처럼 신령계를 누비다 보니 예상보다 빠르게 일정이


진행되었다. 그는 거의 땅의 끝에 와서 뱀의 일족의 영토에 발을 디뎠다.

‘하여간 기분 좋지 않은 땅이야.’

다스리는 자로 어느 일족에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백호는 뱀의 일족에게 호감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일족으로, 신의
권위에마저 도전하던 자들이었다. 물론 언제나 실패하긴 했지만.

또한 뱀의 일족은 자신들보다 약한 새의 일족을 수하로 부리며 살고 있어 백호가 특히나


싫어했다. 새의 일족은 뱀의 기세에 눌려 자신들이 스스로 원해 그들의 밑에서 일한다고
답변을 해 와 신으로서도 어찌해줄 방도는 없었다.

땅 자체는 매우 비옥하다. 발밑이 푹신할 정도였다. 하위 계급인 지렁이들이 사는 영토이니


당연하다. 그들 때문에 더 신령계의 다른 자들이 뱀의 일족에게 숙이고 들어가기도 했다.
지렁이들이 없으면 토양은 금세 척박해질 테니까.
백호 역시 뱀의 일족이 꺼림칙했으나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그 수장인 사혈은
용이 될 수도 있던 자였다. 스스로 거부하긴 했으나 용이 되었다면 사방신의 바로 다음
가는 위치였을 것이다.

‘스스로 거부하길 얼마나 다행인지.’

사혈의 됨됨이는 지극히 속이 좁고 비열하다. 일신의 능력만으로 그 위치에 올랐다면


곤란한 일이 많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백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금수의 붉은 달

18 화

그의 앞으로 일행이 다가왔다.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 자들이다. 뱀의 일족이 내보낸


사신이었다.

“사방신 백호 님을 환영하옵니다.”

“뱀의 일족의 영토에 어서 오소서.”

십여 명의 일족들이 함께 절을 했다. 재빠르게 영토를 둘러보고 사라지려던 백호는 조금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빨리 둘러보지 않으면 연화에게 돌아가는 시간이 더 늦어진다.
그리고 뱀의 일족은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를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그래, 고맙군. 혹여 일이 있을까 시찰 중이다.”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긴 검은 머리의 여인이 나서서 깊게 인사했다. 백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시찰은 꽤 정기적으로 있는 일이었지만 날짜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


백호가 원하는 날 휙 떠나곤 했다. 뱀의 일족이 거기까지 예상을 하고 따라붙었단 말인가
싶어 오히려 백호는 기분이 나빠졌다.

“뱀의 일족의 영토는 언제나처럼 고요합니다. 이왕 시찰을 나오셨으니 훑어보신 뒤


저희에게 신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나눠주시겠습니까?”

뱀의 여인의 말은 지극히 정중하다. 하지만 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데서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바쁜 길이라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군. 시찰의 목적은 영토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고.”

“하오나 신이시여, 저희가 마련한 일 년간의 풍족한 양식 역시 돌아보아 주십시오. 저희가


성의껏 준비했습니다.”

뱀의 여인은 끈질겼다. 그녀는 비단으로 만든 짧은 편지를 내밀어 백호에게 건네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방신이여. 우리의 전각에 연회가 열렸으니 발걸음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의 필체였다.

연회라. 이왕에 열린 것이 분명 아니다. 백호가 온다 해서 일부러 준비하고 마련한 자리일


것이다. 그는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원래 연회를 자주 하는 일족도 아닌데 사방신이
들렀다 하여 준비를 했다고 하니.

유력한 일족의 호의를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이나 성의가 고맙군. 일단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자.”

“감사합니다.”

여인이 깊이 절을 했다. 일행들 모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백호는 선두에 섰던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얼굴이 익숙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사영.”

그녀는 옆으로 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의 열일곱 번째 딸입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사영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사혈에게는 워낙


자식이 많아 백호가 본 적이 있다면 아마 꽤나 총애하는 자식이리라.

그는 사영의 일행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뱀의 일족이 바닥에 깔아둔 시냇물 위에


나뭇잎으로 만든 뗏목을 띄우고 올라섰다. 물은 마치 그들을 위해 흐르는 것처럼 조용히
일행을 목적지로 안내했다. 마치 뱀처럼, 빠르면서도 고요했다.

시냇물은 지하수가 흐르는 통로를 타고 나지막한 경사를 지나 지하로 진입했다. 물이 고여


있는 넓은 호수 위로 뱀의 지배자들이 살고 있는 전각이 나타났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변함이 없군.’

뱀의 일족들도 어지간히 게으르다. 땅 위에서는 그래도 변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이들의


마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백호는 지하 특유의 비린내 비슷한 냄새에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이 비린내는 아마 수많은 지렁이와 뱀들이 모여 사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어서 오십시오.”

뗏목에서 발을 내리자 전각의 앞에 사혈이 신하들을 이끌고 나와 서서 백호를 맞이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시찰이란 고요히 다니는 법이거늘, 내 걸음소리가 커서 그대들을 깨우고 말았군.”


다시 말해, 이 인사들이 전부 귀찮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사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을 뱀의 수장을 아는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신께서 저희 땅에 오셨는데 예를 차리지 않고 보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흥미롭군. 언제나 그냥 보내지 않았던가?”

“저희가 예상하지 못했을 때는 준비가 미흡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영토는


지렁이들이 언제나 땅을 뒤집고 다녀 바쁘기 때문에……. 이전에는 귀한 손님을 접대하지
못한 점 양해해 주십시오.”

“손님?”

재미있다는 듯 백호가 웃었다.

“단어 선택이 웃기는군. 이 땅은 나의 영토기도 하지. 그대의 것만이 아니잖아.”

그 순간 사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백호가 정면으로 그


표정을 봤으리라. 하지만 백호는 이미 사혈의 기분을 알고 있었고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영토에 뱀의 일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이지. 그대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한들 사방신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어.”
남자는 사혈을 제치고 전각 안으로 휘적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사혈을 지나치며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말게.”

***

연화는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잠이 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 정말 지나치게 몸이 더웠다. 이불은 전부 던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야마저 이지러진 것 같았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으니 치유의 이능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힘은 자신에게는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진작에 의원을 불렀어야 하는 걸까.’

땀에 젖은 옷이 걸리적거렸다. 한 겹 얇은 잠옷일 뿐인데 피부에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왜…… 왜 이러지.”

목이 마르고 갈라져서 연화는 옆에 떠다 놓은 물을 마셨다. 잠을 자라고 어둡게 조절해


놓은 촛불에 의지해 물을 마시고,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댔다. 땀이 흘러서 피부가
습기에 차 있었다.
다리 사이가 저릴 정도로 예민했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얇은 비단 위로 자신의 안쪽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랫배와 둔덕을 스치는 스스로의 손에 허리가 저절로 떴다.

‘대체…… 왜…….’

그냥 아픈 건 분명히 아니다. 아무리 둔한 그녀라도 이쯤 되면 모를 리가 없었다. 연화는


열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이 달아오른 것 때문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 구석구석이 아픈 것도 지나치게 예민해져서였다.

그 때 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큰 남자의 실루엣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먼


거리였는데도 남자의 체취가 훅 풍겨 왔다. 연화는 당황해서 얼른 벗었던 이불을 끌어다가
대충 몸을 덮었다. 얇은 잠옷 한 겹이라 피부가 다 비쳐 남자에게 보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 우현 님?”

“연화 님.”

경비병인 우현이었다.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 들어온 무례한 행동에 연화는


당황했다. 몸을 가리고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의 무릎 위로 우현이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는 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야식으로 이걸 챙겨드리라고 호접 님께서 말씀하셔서요. 이제야 생각이 나서.”


야식? 그러고 보니 호접이 간혹 그녀에게 출출할 때 먹으라며 떡과 곡물차를 가져다주긴
했었다.

몸이 덥고 아파 지금 먹을 생각이 없다며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주전자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손을 내밀어 주전자의 겉면을 만져보니 아주 차가웠다. 땀으로 축축할
정도로 더운 몸에 찬 음료가 매우 절실했다.

“저, 떡은 됐고…… 차만 한 잔 마실게요.”

“그러시겠습니까?”

우현은 잔에 찰랑거리며 가득 찰 정도로 듬뿍 곡물차를 부어 넘겨주었다. 차가운 잔의


표면이 손바닥에 시원했다. 그녀는 단숨에 한 잔을 전부 마시고 다시 한 잔을 직접 따라서
마셨다. 우현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가지고 온 떡 한 조각을 집어 우물거리며 먹었다.

“후…….”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연화는 시원한 곡물차 두 잔으로 목구멍이 적셔져 기분이


나아졌다. 그녀는 우현에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시원한 게 마시고 싶었는데…….”

“그러셨군요.”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침 배가 고파서.”

그는 기계적으로 떡을 씹어 삼켰다. 연화는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

우현의 발음이 좀 이상했다. 어슴푸레한 공기 속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표정도 다소 굳어


있었다. 첫인상과 너무 다르다. 아까 봤던 그 유쾌한 남자가 아닌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였다.

우현은 더 말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떡을 한 조각씩 집어먹었다. 마치 자신이 먹으려고


가져온 것 같은 태도였다. 그의 눈치를 보다가 연화는 차를 더 마시고 싶지 않아 조심히
잔을 내려놓았다. 다소 식었던 몸에 다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지…….’

바로 곁에 선 우현에게서 남성적인 체취가 흘러나왔다. 땀의 소금내가 섞인 사내의 향.


연화는 그 냄새만으로도 자신의 아랫도리가 뒤틀릴 만큼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갈라진 틈이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현 님께 나가달라고 해야…….’

애초에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 자체가 이상했다. 평소 호접도


묘우도 결코 연화의 방문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먼저 기척을 하고 그
후 들어온다 말을 하고 들어왔다. 그것이 신령들이 갖추는 예의였다.
우현의 분위기도 이상했다. 그는 냄새를 찾는 것처럼 코를 킁킁댔다. 곰처럼 덩치가 큰
사내는 침대 곁에 붙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금수의 붉은 달

19 화

그가 고개까지 기울이며 냄새를 맡다가 연화의 어깨에 코를 댔다.

“우, 우현 님?”

연화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조금씩 물러나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달아오른 몸에 우현의 체취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침대 저편으로 물러나
앉았다. 다리 사이 깊은 곳에서 아릿하게 저림이 올라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각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우현이 무릎을 침대 위에 짚으며 올라섰다. 그는 여전히 냄새를 찾으며 다가왔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 연화의 손목을 잡고 그 손바닥에 코와 입을 묻었다. 그녀의 향기를 느끼듯
그가 그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현 님, 이러시면……. 저, 잘 수 있게 나, 나가주세요.”

연화는 용기를 내서 손을 빼냈다. 열 때문에 손이 후들거리고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일단


이 사내를 내보내야 했다.
그녀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사내의 냄새, 사내의 체온을 찾아 몸이 움직이려
들고 있었다. 연화는 그 충동 자체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태껏 백호를 만나기 전까지 사내라곤 모르던 몸이었고, 이런 쾌락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단지 우현이 사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몸이 달아오르다니.

하지만 우현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연화의 몸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우현 님…… 제발.”

연화는 이제 거의 애원했다. 우현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이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뇌가 익어버릴 듯 열이 오르고 있었다. 눈앞은 계속해서
이지러졌고 피부가 옷깃에 스치는 것이 아플 정도로 예민했다.

그녀는 허벅지를 꽉 맞물렸다. 사내의 존재감에 다리가 저절로 벌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비좁은 다리의 틈 사이로 축축한 느낌이 났다.

숨 쉬기가 벅찼다. 그녀가 몸을 굴려서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우현의 커다란 손이


잡았다.

연화는 그 뜨거운 손에 화상을 입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몸을 빼내려고 했다. 그녀도


뜨거웠는데 남자는 아예 비정상적인 체온이었다.

그는 연화를 끌어당겨 침대 위에 눌렀다.


“우현 님!”

“……냄새 좋아.”

남자의 커다란 검은 눈이 껌벅였다. 그는 홀린 듯 초점이 풀린 눈을 하고서 느리게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가늘게 떨고 있는 손목, 달아오른 피부, 벌어진 입술,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그 밑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의 골반과 두
다리, 맞물린 틈 사이의…….

“암컷냄새.”

우현은 고개를 숙여 옷 위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코를 박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둔덕


아래로 은밀한 틈에 고스란히 덧씌워졌다. 밑에서 촉촉하게 젖은 여인의 체향이 올라왔고
우현은 그 냄새를 따라 코를 박고 그 근원에 입을 비볐다.

“우현 님! 이게 무슨!”

경악한 연화는 다리가 저절로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우현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팔과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다가 통하지 않자 발로 차도
우현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하지 마세요! 이, 이러지……!”

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치마를 걷고 들어갔다. 날씬하고 모양 좋은 종아리를 쓸어


올리는 손의 체온이 데일 듯 뜨거웠다. 남자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연화의 가는 발목과
종아리에 입을 맞췄다. 앞니로 긁고 자근자근 복숭아뼈를 씹었다.
연화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걷어찼지만 곧 그 다리마저 잡고 벌리고 들어왔다. 한 겹 잠옷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맨몸이 그의 앞에 완전히 드러났다.

“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발버둥 치며 저항한 것만으로도 몸은 힘이 빠져


헐떡거렸다. 그녀는 맨 허벅지를 짚는 남자의 뜨거운 손에 허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고
숨을 들이켰다.

이건 자신의 몸이 아니다. 이렇게 낯선 감각은 느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백호가 안아줬을


때조차.

아니, 종류가 다르다. 백호가 만져줄 때는 그의 체온이, 그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비록


긴장되고 무섭더라도 그는 연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만을 온전히 눈에 담았다. 그래서
그녀는 무섭고 부끄러워도 그에게 안기는 일을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까이에서 보자 우현의 눈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에게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낮게 중얼거렸다.

“암컷은…… 내 거야. 이 암컷은…….”

“우현 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거의 비명처럼 연화가 소리를 질렀다. 이쯤 되면 다른 경비병이라도 올라오지 않을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바랐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문도 닫아놓았지만 이렇게까지 소란을
모를 일인가.

우현의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연화의 가슴을 주물렀다. 유두까지 봉긋하게 솟아올라


자극을 바라고 있던 가슴은 그의 한 손에 맞춤하게 들어갔다. 백호와는 완전히 다르게
거칠고 두툼한 손이 연화의 몸을 유린했다.

얇은 비단잠옷이 찢어졌다. 그는 이성이 없는 눈으로 발가벗겨진 연화의 맨 가슴을 보았다.


그가 손으로 주물러서 그녀의 가슴은 이미 발긋하게 손자국이 난 상태였다.

남자의 손이 그 위를 덮고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돌렸다. 연화가 그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작은 자극에도 이미 지독하게 예민해진 몸이 반응했다.

“싫, 으응……. 싫어……. 흣……!”

연화의 말끝에 신음과 울음이 섞였다. 싫다, 아무리 몸이 달아 있어도 백호가 아닌


사내에게 이렇듯 몸을 내주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발버둥을 쳤지만 우현은 곰 같은 덩치로 그녀를 내리 눌렀다.


자그마하고 흰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었다.

남자의 손이 가슴 밑 갈비뼈와 가는 허리, 매끈한 겨드랑이를 주물렀다. 아플 만큼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는데도 연화의 몸은 착실하게 그것을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그의 손길을 애무로, 정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끔찍했다.


착실하게 달아올랐고 감각은 예민했다. 다리 사이에서 울컥하고 애액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내리누른 압박감에 허리가 들떴다.

“놓아주세요……!”

눈물이 흘러서 뺨을 온통 적셨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최소한 자신을 덮치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호가 아닌 자가, 낯선 자가 자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안으려 하는 광경을 맨 정신으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사내의 두꺼운 손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둔덕에 나 있는 음모가 애액에 젖어 그의


손가락 끝에 휘감겼다. 물기를 머금은 손가락으로 허벅지 안쪽을 더듬고 약한 관절 부위를
매만졌다. 저절로 몸이 비틀렸다.

“백호 님…….”

연화는 흐린 머릿속으로 백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보고 싶었고,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몸은 뜨겁고 과하게 달아올랐다. 정신이 빠르게 흐트러졌다.

***

백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뱀의 일족이란 정말로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자들이다. 몸이 낭창한 무희들이 나와 앞에서


춤을 추었고 음악이 연주되었지만 신은 지루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유롭게 앉아 술을
마시고 즐기는 종류의 연회를 더 좋아했고, 조금 더 떠들썩한 쪽을 선호했다. 이렇게
지나치게 형식화된 연회는 좋아하지 않았다.

자리마다 얇은 막이 내려져 있었고 연회장 안에는 은은한 향취가 떠돌았다. 뭔가 은밀한


분위기가 지하 전각 전체에 감돌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혈은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술을 건넸다. 아주 독하고 맑은 술이다.

“연회는 마음에 드십니까?”

“술은 좋군.”

현재 분위기가 싫다는 기색을 지우지도 않고 백호는 돌려 말했다. 말뜻을 알아들은 사혈도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저희 술이 좋지요. 매우 독하니 조심해서 드십시오. 첫맛이 부드러워 잘 모르지만 몇 잔


뒤에는 모두가 정신을 잃습니다.”

“그런가? 확실히 좋은 술이야. 내 궁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고 싶을 정도로.”

“몇 병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백호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각 일족의 대표자나 원로들은 공물을 준비해
보내는 것이 일상이다. 이렇게 직접 와서 공물을 가져가 주겠다는데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다. 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맛이 좋아.”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도 춤도 음악도 분위기도, 심지어


곁에 앉은 자도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지만 술 하나만은 일품이다.

‘인간계에 뱀으로 담그는 술이 있다던데 그래서인가.’

사혈이 들으면 경악할 악취미적인 소리를 농담처럼 속으로 생각하며 백호는 몇 잔을 더


연거푸 마셨다.

그들의 앞으로 여인들 몇이 악기를 들고 다가왔다. 피리와 가야금, 비파를 든 그들이


사혈과 백호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운데서 비파를 든 사영은 살짝 눈으로
웃으며 백호를 바라보았다.

‘이건 뭐지?’

누가 보아도 사영의 눈빛은 그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런 눈빛이야 차고


넘치게 받아본 백호였지만, 문제는 그녀가 사혈의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사혈은 야망이 큰 사내다. 그가 용이 되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사방신의 밑으로 들어가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미천한 일반 금수로 태어났으나 그는 스스로를 갈고 닦아
이무기까지 올라섰다.

‘굳이 연회를 열어 초대한 게 혹시.’


그가 자신의 딸을 사방신의 반려로 들이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백호
자신이 붉은 달의 영향으로 인해 연화를 반려로 들여 합방했다는 사실이 여기저기 알려졌을
터.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딸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사혈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연회까지 따라 들어온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삐 움직여 모든 땅을 살피고 빨리
연화에게 돌아가도 모자란 판국에 이런 자리에서 미적거리고 있다니.

일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직전, 사혈이 술 한 잔을 더 권했다.

금수의 붉은 달

20 화

“취기는 전혀 없으신 모양이군요. 역시 백호 님이십니다.”

그가 감탄했다.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반적인 경우와 동일하게 생각하면 곤란하지. 명색이 사방신이거늘.”

“그렇군요.”
사혈은 탄성을 냈다. 백호는 입맛을 다시며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기이할 정도로 달고
맛있는 술이다. 쌉싸름하면서도 끝맛이 달착지근했다. 사혈은 잔을 기울이는 백호를 보며
은근하게 말했다.

“제 딸은 참으로 미인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름답다는 칭송을 한 몸에 받는 아이입니다.”

아주 노골적인 자기 자식 칭찬에 백호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사영을 들이밀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빠르게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도
사혈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영리하고 참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 누구라도 상대로서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글쎄, 나는 그대 딸과 이야기조차 나눠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군.”

“자 보십시오. 비파 역시 아주 잘 탄답니다.”

사혈은 의기양양하게 딸과 여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여인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과연


음악은 훌륭했다. 곡조는 구슬프면서도 애절해 듣기에 좋았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내려놓고 음악에 집중했다. 아주 아름다운 곡조였다. 특히


연주를 끌고 가는 비파의 음색이 고와 홀릴 지경이었다.

금세 한 곡조가 끝났고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는 새삼스럽게 사영을 다시


보았다.
“비파의 명수가 여기 숨어 있었구나.”

“황공합니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입은 푸르고 검은 비단옷이 사각거리며 소리를 냈다. 사혈이
눈치를 보다가 얼른 그녀를 불러 올렸다.

“어서 와서 대작을 해드리거라. 내 술을 하지 못해 신께서 심심하시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대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군.”

“워낙 독한 술이라 주량이 강한 이가 아니면 마셔서 좋을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뱀의 수장이 술을 못 한다라. 재미있는 일이야.”

백호는 피식 웃었다. 긴 옷자락을 사박사박 끌며 단을 올라온 사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곱게 휘어졌다. 창백한 피부에 적당히 분을 바르고 홍조를
띄워 더할 나위 없이 고와 보였다. 그녀는 비파를 조심스럽게 곁에 내려놓았다.

“저는 술이 강하답니다. 얼마든지 신께서 마음 놓고 드셔도 되는 상대입니다.”

“그거 재미있구나.”

사영과 백호는 술잔을 나누었다. 강한 술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홀짝 들이켜는 그녀를


보며 백호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나야 신의 육체니 그렇다 하더라도 네 딸은 정말 대단히 술이 강하구나.”

“그렇습니다. 보기와는 달리 아주 강인한 아이지요.”

가느다란 손목을 꺾어 술잔을 내려놓으며 사영이 웃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나중까지 제정신으로 남아 있을 자신이 있답니다……. 심지어 백호


님보다도 더 말입니다.”

“호승심이 있는 게냐?”

백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신이 되어 다스리는 신령과 경쟁심을 불태우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경쟁이 되는 상대도 아니었다. 청룡이나 주작이면 모를까, 백호는 이
육체가 본신의 힘을 극히 일부만 이용하고 있을지언정 사방신이었다. 뱀의 신령 따위와
힘을 겨룰 일이 아니었다.

“음……?”

눈앞의 사영은 아까와는 달리 대단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겉의 장포를 벗어


가슴을 드러낸 차림이 되었다. 매혹적인 얼굴로 웃으면서 여인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볼이 달아올라 발그레한 얼굴이 마치 소녀 같았다.

“저는 불가능한 경쟁을 좋아한답니다. 백호 님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술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미남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지요.”
여인의 시선이 백호의 얼굴과 가슴을 오갔다. 자신만만하던 것과는 달리 술기운이 벌써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약간 혀가 풀린 모습이 더 귀여웠다. 그녀는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둘의 분위기를 보던 사혈이 조용히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모습에


관심도 두지 않고 사영은 백호만을 주시하며 입술을 핥았다.

“가까이서 뵌 것은 처음인데 멀리서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이토록 눈부신 백발이라니.”

사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밑에 늘어진 백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은으로 짜서 만든 것


같기도 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쌓아올려 만든 것 같기도 한 머리카락이었다.

연회장 안 음악은 은은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모두가 자신들의 자리에서 술을 즐기고


있었다. 무희들도 모두 자리로 돌아가 있어 사영과 백호가 있는 자리는 한적했다.

얇은 막을 내려놓은 자리에 촛불과 등잔의 붉은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어 들어왔다. 빛이


사영의 좁고 날카로운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항상 사모해 왔습니다.”

사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에 발그레해진 볼을 양손으로


눌렀다. 백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혀에 꿀이 발렸구나. 아첨이 수준급이야.”


“혀에 꿀을 바른 것은 맞습니다. 백호 님을 뫼시기 위함이지요.”

뱀의 여인이 웃었다. 그녀는 유혹적으로 붉은 입술을 벌렸다. 안에서 갈라진 작은 혀가


보였다.

“맛을 보시렵니까?”

그녀는 상 위로 상체를 기댔다. 움직임이 없는 백호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사영이 느리게


그의 몸 쪽으로 자신을 기울였다. 둘의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 백호는 사영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백호 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그는 사영의 허리를 잡아채서 자신의 밑에 눌렀다. 얇은 막이 흔들렸다. 밖에서는 무슨


일인지 보아도 모를 것이다.

“아…….”

자신의 허리를 감싼 백호의 손을 느끼며 사영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입맞춤을 받기


위해 그녀는 조심히 입술을 열었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얇은 치마 위로 백호의 단단한 육체가 여과 없이 느껴졌다.


뜨겁고, 탄탄하다. 그녀는 홍조를 띄웠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기대감에 찬 육체는 그를
향해 열릴 준비를 했다. 미리 깨끗하고 부드럽게 해놨던 아래의 입구가 지끈거릴 정도로
기대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곧 다가온 것은 입술로 향하지 않았다. 백호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사영의 목덜미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누가 이렇게 깜찍한 짓을 벌였지?”

“백, 백호 님?”

사영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영의 경동맥을 가볍게


두드렸다.

“조심하거라, 내 손가락이 잘못 빗나가면 여길 가를 수도 있으니.”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끔찍한 소리를 하는 백호는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끝부터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에 사영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백……호 님, 저는 그저.”

“항상 사모해 왔다라……. 날 네가 언제 보았다고 사모했느냐, 말 그대로 가까이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거늘.”

백호는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하는 짓이 깜찍해서 그냥 두었더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저, 저는…… 먼 발치에서 한 번 뵙고 너무나 아름다우셔서.”

“그러하냐?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구나. 술 안에는 미약을 넣고, 연회장에는 혼향을


풀고, 네 몸에는 향유를 바르고 말이야. 아, 비파로 연주한 곡에는 음공을 담았더구나. 그
재주를 다른 데 쓰면 좋았을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사영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비인 사혈은 용이 되기 직전인 이무기였고 그가 알아챌 수 없는 미약과 혼향이라 백호


역시 당연히 모를 줄 알았다. 사혈은 너무 당연하게 백호가 알아챌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를 유혹해 술 한 잔을 먹이면 그때 일은 모두 끝난다고.

그러나 용이 못 된 이무기와 사방신의 격은 차원이 다르다. 사혈은 자신이 그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했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백호는 이무기의 고약한 생각이 손바닥 보듯 훤히
보여 짜증이 났다.

백호의 푸른 눈이 어슴푸레한 속에서도 휘황하게 빛났다. 먹이 사냥 직전의 맹수 같은


눈이었다. 그는 작게 으르렁거렸다.

“술맛이 괜찮기에 앉아 있었더니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 사혈은 이런 짓으로 제 딸을


팔아먹으려는 것인가.”

“그,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제가…… 제가 백호 님을 사모하여 아버지께 조른


일이라.”

“그래, 그렇게 말하겠지.”


백호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는 사혈의 성격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자식도 얼마든지
끊어낼 수 있는 비정한 자였다. 수십 명에 이르는 자식들을 전부 기른 것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사영을 버려두고 일어섰다.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뱀의 여인은 안쓰러워


보였다. 연화에 비하면 키가 큰 편이었으나 어쩐지 연화가 겹쳐 보였다.

“내가 눈치챈 것은 비밀로 해주지. 아니라면 내가 아니라 네 아비가 먼저 널 없앨


테니까.”

백호는 혀를 차고 자리를 떴다.

그가 막 밖으로 나오자 사혈의 시선이 그의 걸음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어울려줬으면 성의는 충분히 보여줬다. 그는 크게 사혈을 불렀다.

“사혈, 나는 이제 가겠다. 술을 가져와라.”

“……아. 예, 예. 물론이지요.”

실패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사혈이 재빠르게 준비해 둔 술 세 병을 가져왔다. 허리춤에


그것을 차고 그는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사혈은 급히 백호의 자리였던 곳으로 뛰어들어 갔다. 자리에 쓰러져 있던 사영이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겉옷을 입고 있었다. 눈매가 붉었다.

“뭐냐, 실패한 게냐?”


“……네.”

“대체 왜!”

사혈은 소리를 질렀다.

금수의 붉은 달

21 화

사혈은 가늘게 기른 수염을 쥐어뜯으며 노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줬는데 대체 무엇이 모자라서 실패했느냐! 내가 대체 얼마나 더


도와줘야 해!”

“…….”

아비의 미약과 혼향이 전혀 듣지 않았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이무기와 사방신의 격차가


이다지도 크다는 것을 몰랐던 아비의 무식 역시 이유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면 이성을
잃고 날뛸 사혈을 알기 때문에 사영은 그저 억울함을 삼켰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똑바로 앉았다. 사혈은 경멸하는 시선을 딸에게 던졌다.
“하여간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대체 너 같은 게 왜 내게서 나온 거지?”

“…….”

“무능한 계집. 몸 건강히 낳아주고 대궐 같은 집에서 잘 먹이고 비단옷 지어 입혀놨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사혈은 혀를 차고 불쾌한 낯으로 돌아섰다. 사영은 가만히 앉아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쉬었다.

지하에서 날 듯이 달려 나오자 신선한 밤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백호는 숨을 크게 쉬었다.


지하에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직 시찰이 끝나려면 하루는 더 돌아야 했다. 죽 이어 돌아야 효율이 높다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백호는 잠깐이라도 자신의 궁에 들렀다 갈까 싶었다.

이곳 뱀의 일족이 사는 곳은 백호의 궁에서 상당히 가까웠다. 날아간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리라.

‘연화는 잘 있겠지.’

그러고 보니 인간계에서 작은 제사가 있던가? 호접이 자리를 비웠을 날짜다. 미처 챙기지


못했던 부분에 백호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래도 궁에는 묘우가 있으니 별일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호접이 없는 궁, 그곳에 연화가 홀로 있다. 혼자 밤을 지새우며 불안하지나 않았을까,


외롭지나 않았을까. 생전 처음 다른 생물체에게 세심한 마음을 쏟는다는 자각도 없이
백호는 입가를 삐뚜름하게 했다.

‘보고 싶군.’

밤하늘 위로 연화의 얼굴이 생생했다. 희고 단정한 이목구비와 가냘프고 부드러운 분위기.


작은 새처럼 아름다운 여인.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입을 다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리웠다. 사실


그리움인지 알 수도 없었다. 신으로 태어난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봐야겠어.”

그는 크게 소리 내서 말했다. 시찰을 돌고 사방신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며 한순간이라도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건만, 백호는 충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머리와 가슴 속이
전부 연화의 얼굴로 가득 차서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정한 순간 망설임 없이 발을 떼었다.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한 그의 넓고


두꺼운 발이 바람을 밟았다. 날아가는 거체의 흰 털이 뒤로 나부꼈다.

소리 없이 흰 호랑이가 밤하늘을 갈랐다. 한 줄기 유성처럼 날아가는 백호의 속도는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궁이 보였다.

그는 잠이 든 모두를 깨우지 않기 위해 아주 조용히 바닥에 내려섰다. 풀 한 포기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괜히 다른 이들을 깨워 ―특히 묘우의―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렇듯 고요한 밤에는 연화의 얼굴을 보고 딱 한 번 입맞춤만 한 뒤 다시 시찰을 나가도


될 것 같았다.

2 층 창문이 평소와 달리 닫혀 있어 이상했다. 보통은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는데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연화에게 밤공기가 차서 창문을 열지 않았나 하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백호는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날아올랐다. 창 근처까지 왔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설사 잠이 들었을지라도
백호의 귀에는 숨소리가 들려야 했다. 기척이 없는 산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술?’

소리가 결박당한 느낌이었다. 제법 괜찮은 수준의 주술이라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감히 신의 거처에 주술이라니. 묘우는 뭘 하고 있기에 감히 궁에
주술이 걸릴 때까지 가만히 있단 말인가.
불안감이 심장을 조금씩 잠식했다. 백호는 지체하지 않고 손가락을 창문에 댔다. 사방신의
손이 닿자 그것만으로도 아주 손쉽게 주술이 풀려나왔다. 그리고 갇혀 있던 소리와
기척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현 님! 제발!”

머릿속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 속에서도 연화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랫배가


타는 듯 뜨거웠다. 그녀는 허물어지는 이성 속에 우현의 가슴을 밀치고 그의 다리를
걷어찼지만 덩치 좋은 남자는 조금의 밀려남도 없이 연화의 옷을 거의 찢듯이 벗겨냈다.

“안 돼……!”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숨마저 뜨겁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지만 우현의 손이


곧 연화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뒤로 꺾었다.

“악!”

고통에 그녀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곰의 신령이 히죽 웃었다. 무서울 정도로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미소는 탐욕스러웠다.

“암컷.”

“우현 님!”
“암컷…….”

얄팍한 저고리가 힘없이 찢어졌다. 우현의 손아귀가 멍이 들 정도로 연화의 팔목을 잡았고
거의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암컷.】

곰의 신령의 눈이 흰자위 없이 새카맣게 물들어 갔다. 짐승의 본능이 신령의 이성을 이기고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연화는 약으로 인해 타들어 가는 욕망 속에서도 공포에 질렸다. 이미 아래는 축축했지만


머릿속은 무서워서 굳어버렸다. 우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와 목덜미를 물고 핥기
시작했을 때는 완전히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가 뇌를 잠식해 연화는 꼼짝도 못하고 달달
떨었다.

사내의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습기에 찬 허벅지 안쪽을 가르고 들어왔다. 이미 땀과 애액에


젖어 질척한 속옷 위로 사내의 손이 덮였고 연화는 이를 악물었다. 커다란 손은 힘이 빠진
그녀의 허벅지를 한 손에 쥐고 쉽게 벌렸다.

그 때 소리 없이 창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약하게 바깥에서 흘러들어 왔다. 연화를


탐하는 데 열중한 우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연화는 정면으로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자는 숨을 삼켰다.

밤하늘 한가운데 백호가 있었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푸른 눈은 동공이 세로로 열렸다.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창문을
쥐어뜯었다. 건물 전체에 걸려 있던 약한 금제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찢겨나갔다. 아마도
금제 주술을 건 자는 그 반동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겠지만 백호에게는 어린아이의 팔을
꺾는 것보다 쉬웠다.

“감히 신의 거처에.”

백호의 신형이 소리 없이 날아들어 와 우현의 뒤에 섰다. 살기를 느낀 곰의 신령의 눈


안에 퍼뜩 아주 약간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밑에 누워 바르작대는 사람을 보았다.

“여, 연화 님……?”

여전히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 듯 어눌한 발음이었다. 욕망과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우현의 검은 눈이 방황했다.

그러나 더 시간이 없었다. 백호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져 버렸다.

“커헉!”

비명을 지르며 뒤로 구른 곰의 신령은 민첩하게 일어났지만 곧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백호를 깨달았다. 그는 멍청한 눈으로 백호와 뒤에 있는 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부엌에 내려가 어두운 찬장을 봤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왜 지금 이 방에 있는
것인지, 연화는 거의 벗은 채로 필사적으로 이불을 둘러써 몸을 가리려 하는 것인지, 왜
백호가 저렇듯 살기등등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 백호 님.”

우현은 대번에 납작 엎드렸다. 다가오는 백호의 살기에 수조가 걸었던 주술은 단숨에 깨져
달아났다. 덜덜 떨고 있는 곰의 신령을 일으켜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백호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차갑게 빛났다.

“…….”

“백, 호 님……. 저, 쿨럭, 그, 그게…….”

“말해 봐.”

“큭, 크……헉, 저, 저는 뭐가 뭔지……. 컥!”

목을 잡힌 채 우현의 커다란 덩치가 허공에 매달렸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져 흔들리자


본능적으로 그는 몸부림쳤다.

그를 들어 올린 백호의 얼굴은 마치 가면 같았다.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새어 나오지 않는


딱딱한 돌가면. 단지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는 살기가 압도적일 뿐이었다.

우현은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신이 후들거렸다.

백호는 우현을 들어 올린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에서 이불을 둘러 써 필사적으로


몸을 가리던 연화는 흔들리는 팔로 침대를 짚었다. 땀에 젖은 흰 얼굴 위로 눈물이
엉망이었다.
“백호 님…….”

그녀는 혀가 절반쯤 굳은 채로 애써 백호를 불렀다. 다리 사이는 애액이 쏟아져


질척거리고, 아랫배는 욱신거린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과 유두가 간질거렸다.
게다가 그녀가 유일하게 안기고 싶은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연화는 허덕이면서 백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호 님.”

가느다란 손끝이 허공에서 떨렸다. 그 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백호는 우현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가볍게 던져 버린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명색이 신령이니 목이 부러지지야 않았을


것이다. 다만 타박상이 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은 느리게 연화가 앉은 침대로 걸어갔다. 여자의 눈가가 붉었다. 혀가 반들거리며 입술


사이로 내비쳤다.

“백, 호 님……. 절…… 좀 어떻게라도…….”

연화가 손을 내밀어 백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녀는 땀에 젖은 이마를 백호의 옷에


비볐다.

금수의 붉은 달

22 화
익숙한 남자의 체향에 연화의 이성은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달아오른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백호의 옷자락을 쥐었다. 말없이 내려다보던 남자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 올렸다.

“……지금 너는, 네가 아니로구나.”

연화의 눈은 완전히 초점이 풀려 있었다. 새빨간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로 그녀의 손이


백호의 어깨를 긁었다.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연화는 입술을 씹었다.

“백호 님, 제발…… 제발.”

간신히 단어를 만들어내면서 연화가 속삭였다. 백호는 느리게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거의 다 벗겨진 상의 때문에 연화의 맨살이 손 안에 감겼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기쁘구나. 이 상황에서도.”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백호가 중얼거렸다. 연화가 안달을 내며 백호의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허벅지 사이가 조이며 비틀렸다.

연화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열은 지나치게 높았고 손 안에 닿는 피부에는


온통 땀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언제나 맑고 총명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흐트러져
색기로 가득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는 찡그려지는 것만으로도 요염해 보였다.
그녀로부터 피어오르는 체향 역시 비정상적으로 달큰했다.
‘……아마도 약.’

주술이나 약 모두 가능하지만 미약 쪽이 훨씬 간편하다. 주술은 상당히 도가 높아야


유혹술을 쓸 수 있지만 미약은 만들어내면 된다.

그리고 그 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들을 백호는 알고 있었다. 미약을 향유처럼 피부에


바르고 자신을 유혹하려던 사영과 대놓고 연회장에 풀어놓았던 혼향. 그의 머릿속에서
고리가 서로 연결되었다.

백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에게 달라붙는 가느다란 팔다리를 부드럽게


떼어놓으면서 그는 연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어떠한 주술도 걸려
있지 않았다. 백호가 느끼지 못하는 주술 따위는 신령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저 멍청한 우현 녀석에게서는 확실히 주술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뱀의 일족의 수하 중 그 정도 주술을 쓸 수 있는 자들이야 넘치겠지. 백호는 이를 갈았다.

“백호 님…….”

다시 한 번 연화가 애처롭게 애원했다. 흰 이마가 땀으로 젖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을 손으로 쓸어주면서 백호가 입술으 가져가 연화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쉬, 괜찮다.”
약으로 완전히 정신이 엉망이 되어버렸을 텐데도 연화는 힘겹게 백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깨닫고 백호는 기꺼움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차올랐다.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쭉 잠자리를 할 때마다 연화는 간혹 두려움에 질린 눈길을 숨기지


못했고, 백호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연화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그에게 달라붙어 왔다. 길고 부드러운 팔은 필사적으로 백호의


목덜미에 감겨 뜨끈한 체온을 전했다. 그녀는 스스로 백호의 입술을 찾아 자신이 입을
맞췄다. 반들거리는 입술이 뜨거웠다.

“백, 호 님.”

애원이 담긴 소리가 연화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백호의 몸도 뜨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양물이 이미 한계까지 단단해진 사실을 알았다.

미약의 대부분은 관계를 가지면 해독된다. 백호는 그를 위해서라고 중얼거리며 연화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얇은 비단으로 된 잠자리용의 옷이 이미 땀에 젖어 반투명했다.

다리 근육이 힘에 겨워 벌벌 떨면서도 백호의 허리를 휘감아 온다. 흰 피부 위로 땀이


반들거렸다. 백호는 손을 그녀의 가운데로 넣어 손가락을 은밀한 틈 위로 문질렀다.

“아! 아아!”

이미 질척한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를 만큼 젖어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를 단숨에


삼키고 오물거리는 내벽을 느끼며 남자가 그 안을 더 깊이 더듬었다. 탄력 있고 좁은
근육이 손가락을 씹어 삼킬 듯 조여들었다.
“제발. 제, 발……. 아흣…….”

연화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백호는 허리춤을 풀고 그녀의 위로 엎드렸다. 다리를 한계까지


벌려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그는 그대로 양물을 진입시켰다.

굵디굵은 귀두 부분이 달아오른 질구를 파고들었다. 연화가 정신이 없는 중에도 압박감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입구는 좁았으나 이미 뜨거워진 몸은 거대한 양물을 버겁지만 기쁘게
받아들였다.

“흣, 흐윽!”

찔걱이며 애액이 흘러 둘의 접합부 사이로 흘러내렸다. 백호가 사정 봐주지 않고 앞으로


밀어붙였고 연화의 머리가 침대 머리맡까지 밀려 올라갔다.

“으응!”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아 품 안에 가두고, 그는 여자의 자그마한 엉덩이를 손 안에


쥐었다.

배 안을 온통 짓누르는 뜨거움에 연화가 눈을 크게 뜬 채 소리 없이 울었다. 관계는


언제나 고통과 쾌락이 동반된다. 지금은 더 그랬다.

약으로 인해 곤죽이 된 머릿속에서 이성 대신 감각만이 극대화 되어 있었다. 고통도 쾌락도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격렬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
연화는 자신의 밑이 벌어지고 아랫배 속으로 파고드는 백호의 양물이 지나오는 길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세세하게 느꼈다. 내벽 속으로 그의 남근 모양이 낙인을 찍듯 모양이
조각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흐린 눈으로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온통 뿌연 세상 속에서 백호의 형형한 푸른


눈만이 선연했다. 마치 차가운 불꽃처럼 타오르는 남자의 눈은 연화가 잃을 수 없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백, 호 님……. 흐, 으…….”

“그래.”

백호는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충동을 참아냈다. 연화의 몸에서 전달되는 열기에 그도


전염되는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충동대로 함부로 굴면 이 연약한 여인은 그대로
부서질지도 몰랐다. 금수의 왕과 인간의 몸은 지나치게 격차가 컸다.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연화는 백호의 목덜미에 매달려서 다리를 한껏 벌려 그를 반겼다.


양물이 출입할 때마다 애액이 찔걱이며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흐, 응! 아……앙!”

백호가 연화의 이마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뺨에 입을 맞췄다. 그대로 이빨을 세워


잡아먹고 싶을 만큼 연하고 부드러운 살이다. 그의 눈은 자꾸만 호랑이로서의 본능이
나오려는 듯 홍채가 세로로 가늘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흐, 아, 응……! 아!”


“큭, 연화야.”

남자의 손이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손자국이 남을 만큼 거세게 붙잡았다. 움직임이


반복될 때마다 허리가 허공에 떠서 흔들렸다. 백호는 이미 미약으로 인해 많은 무리가 갔을
연화의 몸을 생각해 이를 악물고 자신의 충동을 참았다.

“아! 아아! 아아앙!”

하지만 참지 못한 것은 연화 쪽이었다.

그녀는 달아오른 육체에 지나치게 부드럽고 느린 남자의 움직임에 죽을 만큼 갈증을


느꼈다. 지금 당장, 뼈가 모두 부서져도 좋으니, 자신을 짓누르고 파헤쳐 저 깊고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격렬한 욕망을 전부 만족시켜 주기를 바랐다.

“학, 하앗…….”

그녀는 허덕이면서 백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연화의 작은 손바닥 안에 잡힌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연화가 속삭였다.

“더, 더…… 더 세게 해, 주세요. 흑, 흐윽…….”

“……연화야.”
“제발…… 제가 부서져도 좋으니, 흣. 더 세게 안아주세요. 으, 흣……. 더 빨리…….”

“…….”

“못 견디겠어요, 흐, 흑……. 백호 님, 제발.”

백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진정시켰던 욕망이


아랫배 속에서부터 치받고 올라왔다.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눈 안에는 세로로 긴
홍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백호의 푸른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앞으로 흘러내린 긴 백발


사이로 선명한 눈. 그 안에는 오로지 연화에 대한 욕망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연화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입술을 내리누른 후 백호는 그녀를 결박하듯 꽉 끌어안았다.

“백, 호 님……! 아! 아아!”

꼼짝도 못 하는 몸의 안으로 사내의 양물이 짓쳐 들었다. 여태까지와 완전히 다른


깊이였다.

“아! 흐응! 흑!”

아직까지 완전히 들어온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화는 신음을 터뜨렸다. 아랫배
깊숙이 배꼽 부근까지 백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약으로 사내를 갈구하게 된 몸에도 버거울 정도의 양물이다. 연화는 하지만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신음을 내면서 백호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배, 백호 님! 아! 앙!”

남자의 거대한 체구가 그녀의 위를 덮치면서 완전히 시야를 차단했다. 그녀는 몸이 거의


반으로 접힌 채 골반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사내를 받아들이고
연화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아흑!”

내벽 전체를 쾅쾅 짓누르는 사내의 물건에 눈앞이 캄캄했다. 뭔가 소리를 내고는 있었지만


입에서는 제대로 단어가 만들어져 나오지도 않았다.

연화의 양손이 필사적으로 백호의 팔을 긁었다. 뇌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뱃속의 내장을


전부 화롯불로 지지는 것처럼, 인두를 밑으로 넣은 것처럼 뜨거웠다.

“아으! 응……!”

더 이상 이성의 끄트머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뺨과 턱을 온통


적셨다.

“아, 백, 백호 님……. 좋, 좋, 아요……. 아! 아응, 흐읏……!”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연화가 허덕였다. 그녀의 입이 벌어져 발간 혀가
보였다. 백호는 그 입술을 물고 혀를 섞으며 뜨거운 호흡을 삼켰다. 연화에게서 나오는 그
무엇도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뱃속 깊은 곳에서 연화의 가느다란 몸은 백호를 빨아당기며 오물거렸다. 아기집의 입구까지


닿은 백호의 양물 끄트머리에 연화가 몸부림치며 울었다. 너무 깊고 너무 뜨겁다.

금수의 붉은 달

23 화

그녀는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백호에게 입술을 빼앗겨 숨을 쉬지 못했다. 산소가 모자랐고


쾌락이 지나쳤다.

“흐, 핫…….”

연화의 눈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깨닫고 백호가 입술을 떼고 그녀의 뺨을 토닥이며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정신 차려라, 연화야. 정신 차려.”

“……아, 흐으……. 흐응!”

연화가 신음하며 도리질 쳤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도 백호의 뜨거운 물건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으로 손을 뻗어 백호의 허리를 잡고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숨이 모자라 정신마저 흐렸지만 쾌락을 잡고 싶었다. 그래야 이 욕망이 해소될
수 있었다.

“백호 님……. 백호 님. 흐, 응…….”

“그래.”

“제 안에…… 백호 님이 들어와, 흐읏……. 있어요.”

“…….”

“백호 님의 것을……. 백호 님의 씨를 저에게, 주세요…….”

연화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흐린 정신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본능대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 백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겁도 없구나.”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남자는 그녀의 골반을 잡고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 흐앙! 하, 하앙……!”

정말 자궁 입구를 짓뭉개는 굵고 뭉툭한 양물의 끄트머리에 연화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쾌락이 지나쳐 숫제 고통이었다.
울컥이며 쏟아진 애액이 둘의 접합부 사이로 거품을 만들어냈다.

“아, 아! 백, 백호 님! 아응! 아! 아아!”

연화가 소리를 누르지 못하고 높게 신음을 올렸다. 질꺽이는 소리는 그녀의 신음성에 눌려
들리지조차 않았다. 내벽 전체가 백호의 양물로 가득 차서, 아기집과 내장마저 완전히 눌려
압박에 뭉개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백호의 움직임에 맞춰 힘겹게나마 따라갔다. 그의 정을 받고, 그에게 사지를


결박당하고 완전히 정복당하고 싶었다.

“아! 흐, 아응, 아! 백호 님! 아아!”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연화가 마지막으로 비명을 올렸다. 벌어진 입가로 타액이 흐르고
발음이 전부 샜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고 시야가 마구 번져 나갔다. 발가락이
곱아들며 뒤꿈치가 침대 이불 위로 필사적으로 비벼졌다. 그녀의 눈이 다시 뒤로 넘어갔다.

지나친 쾌락에 본능적으로 백호를 밀어내려 연화의 양손이 남자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소용은 없었다.

“아, 아, 아아아!”

“큭…….”
그녀가 절정에 오르며 가뜩이나 빠듯하던 내벽은 마치 끊어먹을 듯 양물을 씹었다. 백호가
숨과 함께 신음을 토해 냈다. 진저리 치며 경련을 일으키는 연화의 아랫배 속으로, 백호
역시 참았던 절정을 쏟아내었다.

신의 뜨거운 체액이 연화의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며 채웠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차오르는
백호의 정을, 거의 사라진 정신 속에서도 느꼈다.

백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정까지 그녀의 몸 안에 완전히 내보냈다. 잔뜩 조여드는 내벽


안에서 양물은 여자의 몸 안에 박혀 뜨거운 정액을 마지막 순간까지 쏟아냈다.

완전히 털어내고 나서도 그는 숨을 고르며 그녀의 위에서 잠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뒤로 넘어갔던 연화는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까무라쳤다. 잔뜩 경직되었던 다리도


힘이 풀린 채 침대 위로 늘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신을 잃은 여인을 보다가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다행히 숨은 안정적이었다.

그는 힘을 끌어올려 손에 맺고 연화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핏기가 없는 흰 피부에 희미하게


푸른 빛이 옮겨갔고, 잠시 후 연화의 얼굴에 연한 분홍빛이 돌았다. 약간의 기력을
회복하도록 힘을 써준 것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었고 다리 사이는 애액과 뒤섞여 흘러나온 백호의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몸을 섞은 터라 온통 더러워진 천으로 몸이 휘감겼다.

그는 손 안에 불꽃을 불러와서 연화와 자신의 옷을 모두 태워버렸다. 신의 힘이라서 둘의


피부에는 아무런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화를 안아 들고 욕실로 가서 그는 탕 안에 들어가 앉았다. 기절한 여인은 목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의 고개를 가슴에 기대게 하고서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과했던 것 같은데.”

인간을 상대로 순간적인 욕망을 참지 못해 눈이 뒤집혔다. 연화를 상대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리 붉은 달의 발정기라도 좀 심했다. 상대가 기절할
정도로 몰아붙이고 스스로도 이성을 잃어버리다니.

다행히 연화는 열이 내리고 호흡이 안정적이었다. 백호와 몸을 섞고 정을 받아 미약이


해독된 모양이었다. 땀에 젖어서도 약간 분홍기가 도는 흰 피부가 깨끗했다. 비정상적인
홍조가 아니었다.

“다행이구나.”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백호는 누가 이 일을 꾸민 건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인간의 반려라 하니 장난감처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리도 눈에 빤히 보이게 일을 꾸미다니. 우현에게 걸렸던 주술은 그리
깊은 술수가 아니었고 따라서 하급의 신령이 뱀의 일족에게 명을 받아 저지른 짓일 것이다.

그 때 욕실 밖으로 인기척이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백호는 연화를 고쳐 안으며 말했다.

“들어와라……. 묘우.”
“백호 님.”

여우의 신령은 여느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방 안과 욕실을


둘러보았다.

“이르게 오셨습니다, 백호 님.”

“그래. 그렇게 되었다.”

“일과는 끝나신 것인지요.”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묘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휘어진 눈 안의 감정은 잘 읽을 수가 없다. 백호는 무표정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침입자가 있었다. 넌 무얼 하고 있었느냐.”

“……침입자라니요?”

“말 그대로. 연화를 노리고 들어온 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경비병인 우현이…….”


더 설명을 붙이지 않고 백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간 어지간히 풀어져 있었군, 묘우. 이 얕은 주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니.”

백호는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궁 전체를 감싸고 있던 인식 방해의 주술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말대로 아주 얕은 주술이라 오히려 걸린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묘우는
움찔했다.

“원로의 이름이 아깝다, 묘우. 정신 나갔군.”

“……죄송합니다.”

그제야 방 안 가득히 찬 밤꽃냄새를 맡고 묘우가 대경실색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없었던 며칠간 연화의 상태는 어땠느냐.”

“호접의 말로, 열이 있고 힘이 없으시다고.”

“그래. 그사이에 와서 약을 탔던 게지.”

“약이라니…….”

“나중에 이야기해 주마.”


사방신의 궁이라 감히 누가 와서 수작을 부릴까 방심했던 게 화근이다. 설마 아무리 간이
큰 자라 한들 신의 거처까지 기어들어 와 술수를 쓰리라 누가 상상했을까.

“대체 누가 어째서 이런 짓을.”

“누구 짓인지는 확실히 알겠구나.”

백호의 느린 대답에 묘우는 잠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신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호는 물로 깨끗이 씻긴 연화를 안고 탕 안에서 일어섰다. 벌거벗은 신과 그 반려의


모습에 묘우는 황급히 눈을 내려 피했다.

시녀를 부르려는 묘우를 제지하고 백호는 손수 연화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침대 위에


그녀를 눕혀 이불을 덮어주고 그는 새로운 장포를 걸치고 일어섰다.

묘우가 눈치를 보며 허리를 굽혔다.

“어디로 가시는지요.”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벌을 줄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이다.

“뱀의 일족의 거처로 가겠다.”

***
밤이 깊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백호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불길했다.

사혈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황급히 일족의 원로들을 모아 거처 밖으로 향했다. 지상에서


백호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원로들 틈에 낀 사영은 가는 내내 아버지의 힐난을 들었다.

“네년 때문이다. 네년이 실패를 해서 신에게 우리 일족이 미움을 받게 되는 게야.”

사혈은 입에서 나오는 저주를 되는 대로 사영에게 퍼부었다. 그 스스로 사영의 꾀를


칭찬하며 도와주었던 사실은 완전히 잊은 듯했다. 사영과 마찬가지로 그의 장포 밑으로
나온 긴 방울뱀의 꼬리가 차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불안하고 분노한 사혈의 감정이 그대로
보였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일이 실패한다면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리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순간이 닥치자 손바닥 안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시내를 지나 도착한 지상의 입구에는 거대한 체구의 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름이 걷혀 별과 달이 빛나는
밤하늘이었다.

일단 사혈은 허리를 굽히고 백호의 앞으로 나아갔다. 일족의 원로들은 그의 뒤에서 허리를
굽힌 채 물러나 있었다.

“신이시여, 오셨습니까. 밤에 두 번이나 걸음을 하시는군요.”


사혈은 불안감을 감추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꼬리에서 차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백호는 하늘에서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모르겠나이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곳에서 서 계시지 말고


저희의 거처로 들어오시는 것이?”

“말이 길어, 사혈.”

일족의 수장에게 건네는 말로는 무례했다. 사혈이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백호가 시선을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달과 별 외에는 온통 어두운 밤하늘 아래 그의 눈이 형형했다. 파란색의 눈동자는


불처럼 타올랐다.

금수의 붉은 달

24 화

거목처럼 서서 내려다보는 백호의 눈에 사혈은 기가 질려 움찔했다.

그가 비록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까지 성장했다고는 하나 실제 용과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도 그럴진대 사방신과의 격차는 셈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사방신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던 사혈은 자신이 착각을 아주
심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노를 감추고 있는 신의 시선만으로도 양무릎이 형편없이
떨려 왔다. 그는 후들거리는 손을 맞잡았다.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로…….”

끝내 잡아떼려는 사혈의 말에 백호가 빙긋 웃었다. 물론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사특하며


멍청하기까지 한 뱀의 수장.

“내 궁에 다녀오는 길이다. 더 가리려 한들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거야.”

“…….”

예상대로 백호의 방문은 그 때문이었다. 사혈은 속으로 딸 사영을 저주했다.

백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설마 이무기까지 이룬 그대가 이런 짓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아, 아닙니다. 이것은…….”

사혈은 이를 갈았다. 저 멍청한 딸년 때문에 자신과 일족이 위험해졌다. 그는 백호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제 미천한 딸인 사영의 짓이라.”

“허나 이 일에는 뱀의 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미약이 쓰였지.”

백호는 입 꼬리를 올렸다.

“내 반려의 몸이 아주 뜨겁고 열이 많이 올랐더군. 내 미약 중독의 증상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당황했을 거야.”

“그……것 역시, 사영이 멋대로 만들어서…….”

“그러나 그 약을 만드는 방법 자체는 그대에게서 왔을 것 아닌가, 사혈?”

거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사혈은 엎드려서 눈을 굴렸다. 등으로 쏟아지는 사방신의 기운이


압도적이었다. 함부로 변명을 했다가는 이대로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제 딸이 백호 님을 지나치게 사모하여 상사병으로 죽겠다기에…….”

“…….”

“아비 된 도리로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저는 제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혈은 떨리는 목소리를 지어내었다. 마음 같아서야 말을 이리저리 돌려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백호는 그것을 허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뱀의 일족은 물론 사혈
본인도 해를 입을 상황이었다.
뒤에 선 사영은 앞일을 예감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부친은 자신을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다.

“말이 번지르르하군.”

“정말입니다, 신이시여. 제 딸은 평소 착한 아이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그만.”

백호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결코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 그래서 뱀의 일족은 이 일을 어찌 갚을 것인가.”

사혈은 침을 삼켰다.

사방신은 뱀의 일족 자체에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사영 한 명의 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백히 한 것이다. 하지만 사혈은 그 이상의 해를 입고 싶지 않았다.

“사, 사영의 목숨으로…… 갚겠나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치를 꺼내 들었다. 뒤에서 창백한 얼굴의 사영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사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백호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영, 네 딸의 목숨이라!”
백호가 웃었다. 웃음소리는 다소 건조했다. 언제나 호탕하게 웃고 불같이 화내던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얼굴 위로 가면을 쓴 것처럼, 그는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고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사혈은 뭔가 계산과 다르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아는 백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영토에 사는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자였다. 일족 간의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당사자들의 손으로 풀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하여 함부로 백성들에게 손을 대는 신은 결코 아니었다.

백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뒤에 물러나 엎드려 있던 뱀의 일족 원로들이 숨을 죽였다.

“다시 묻겠다. 뱀의 일족의 수장이여, 어쩔 셈인가.”

“신이시여…….”

답이 나오지 않아서 사혈은 엎드려서 읍소했다. 딸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데도 백호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더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땅에 바짝 엎드린 사내의 곁에 백호가 앉았다.

“고개를 들어보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여.”

조롱조였지만 사혈은 불쾌함을 나타내지 못했다. 백호의 목소리 밑에 들끓는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혈은 자신의 손등이 본능적으로 떨리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분명 연화는 그저 잠시의 발정기를 잠재울 반려일 뿐이라고 들었다. 처음으로 가진
육체관계라 해도 연화의 위치가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사방신이 자신의 반려로 인간
따위를 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사방신의 눈을 빼앗은 장난감에게서 시선을 앗아 오려 한 것뿐이다. 이렇게 커질 일은


분명 아니었다.

“나는 네 딸의 목숨을 원하지 않는다. 그건 뱀의 일족에 아무런 벌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본디 벌이란 해가 되어야 하는 법. 백호는 히죽 웃었다. 그의 백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벌어진 입가를 가렸다.

고개를 든 사혈은 다시 한 번 자비를 구하는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지만 곧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 침묵했다. 신은 손을 내려 꿇어 엎드린 사혈의 얼굴 위로 덮었다.

거의 절반가량이 백호의 커다란 손 안에 들어왔다. 사혈의 주름진 얼굴이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평소 나는 그리 무자비한 편은 아니지.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니…….”

백호의 웃음이 짙어졌다.

“최대의 자비를 베풀어, 최소의 벌을 내리겠다.”


그의 손 안에서 푸른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사혈의 얼굴 절반을 덮은 손바닥에서 순식간에
열기가 치솟았다. 냉혈을 지닌 뱀의 일족에게 상극인 불. 홍염보다 훨씬 뜨거운 청염의
불길이 사혈의 얼굴을 태웠다.

뒤에서 일족의 원로들이 비명을 올렸다. 일족의 수장의 얼굴 위로 새파란 불이 타올랐다.

“배, 백호 님!”

“끅, 컥, 크헉……! 시, 신이시여……! 큭!”

“백호 님, 한 번만 용서를!”

백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는 사혈의 손이 필사적이었다. 사내는 결국 손톱을 세우고


마구 신의 손목을 할퀴었으나 그의 피부 위로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주름진 얼굴을 강철처럼 단단히 잡은 다섯 개의 손가락은 거의 얼굴뼈 안으로 파고들 듯


잔인하게 죄어들었다. 눈을 번연히 뜬 채 피부가 전부 타고 녹아버리는 고통에 사혈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살가죽이 타는 냄새가 선연하게 후각으로 파고들었다. 주변에 선 뱀의 수하들은 결국 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땅에 머리를 댔다.

거대한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백호는 손아귀에 사혈의 얼굴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사혈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생으로 얼굴의 절반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사내는 눈이 희게 뒤집혀 경련을 일으켰다.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면서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것을 보다가 백호가 성의 없이 사혈을 흔들어
깨웠다.

“벌인데,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면 쓰나, 사혈. 수장답게 일족의 죄를 대신 견뎌야지.”

컥컥대며 사내가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백호는 이리저리 그를 뒤집으며 보다가 그대로


발치에 내던졌다. 구겨진 종잇장처럼 형편없이 사혈의 몸이 땅바닥에 굴렀다.

“이번에는 이것으로 내 분을 누르지.”

고통에 사혈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녹아내린 얼굴 거죽은 지독하게 흉했고 그 밑으로
뱀의 꺼풀이 드러났다. 신령으로서의 외형과 뱀의 원형이 추하게 뒤섞인 모습이었다.

수련을 많이 하고 공덕을 쌓을수록 신령의 원형은 감추어지고 지위는 높아진다. 사혈과


같은 일족의 수장이 자신의 정체를 절반쯤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은 끔찍한 치욕이었다.

백호가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도 못 쉬고 일족이 엎드려 있었다. 사영 역시 그


안에서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신의 분노는 그저 밑으로 가라앉은 것뿐이다, 뱀의 일족이여.”

그가 차게 웃었다.

“허나 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뱀의 일족 누구라도 또다시 이런 일에 손을


댄다면, 그때는 신령계에 일족 단 한 명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허공에 울린 말은 선언이었다.

신은 차가운 눈길로 일족을 훑어보았다. 신령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백호의 가호를


받는다. 그래서 이 땅에 머물러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한 번 더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뱀의 일족에게서 가호를 앗아가겠다는 말이었다.

신의 푸른 불꽃으로 탄 화상은 어떤 짓을 해도 치료할 수 없다. 통증에 정신을 잃고


바닥에 나뒹구는 사혈을 부축하여 수습하며 일족의 원로들이 이마를 땅에 대었다. 신의
분노는 거두어졌으나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다.

“영원의 시간 동안 네 본체를 드러내고 살아가라. 그것이 일족의 수장인 네게 내리는


벌이다.”

***

사방신의 세계는 높고 넓다. 백호는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그 밑을 내려다보았다.


적어도 자신의 영토인 신령계 안에서 백호는 시야가 넓은 눈을 지닌 신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맑고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땅 밑 저승세계에서 잠이나 잔뜩 자고 있을 현무, 인간계를 양분해 이간질을 하는 청룡,


나머지 반쪽 인간계를 맡아 청룡을 비웃는 주작.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백호까지 합쳐
사방신은 세계를 다스렸다.

옥황상제가 세계의 법칙을 세우고 기록하는 밑에서 그의 뜻에 맞도록 움직이는 것이


사방신이다. 각자 자신의 영토에서 그들은 상제를 대신하여 군림하는 신이었다.
금수의 붉은 달

25 화

그는 나무에 기대 시야를 확장했다. 온갖 짐승과 식물들이 화한 신령들은 영토를 채우고


바삐 움직인다. 모두가 중급의 영혼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덕이 높지 못한 인간과는
달리, 신령들은 덕이 높아야만 영혼을 지니고 그 영혼은 상급이다. 인간계보다 인구는
적어도 훨씬 평화롭다는 뜻이었다.

백호의 시야에도 큰 싸움이나 분란의 조짐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연화도 얌전하게 있군.”

신령들의 영혼 사이 인간의 영혼이 감지된다. 백호가 데려온 여인, 연화였다.

거리가 있어도 볼 수 있는 백호의 눈이 연화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호접에게서 받은


자수틀과 실로 소일거리 자수를 놓는 중이었다.

본래 천리안은 각 일족의 안위를 살피는 데에만 쓴다. 큰 문제가 생긴 긴급한 경우 백호는


힘을 들여 마음의 눈을 사용해 일의 앞뒤를 살피고는 했다.

그런 힘일지라도 연화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마다 그녀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스물네 시간 그녀만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애써 참고 있었는데 뱀의 일족이 저지른 일
이후에 백호는 이제 참지 못하고 가끔씩 연화를 훔쳐보고는 했다. 말 그대로 훔쳐보는
기분이라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가느다랗고 흰 손가락이 바늘을 쥐고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했다. 아주 집중을 했는지
동그랗고 까만 눈은 반짝이며 자수틀만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이마 근처로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조금 흘러내려 뺨을 스쳤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손을 저어 그녀의 근처로 시원한 바람을 불게 했다.
집중한 눈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이 살짝 날려서 귀를 간지럽혔다.

‘신령계에 인간이 재미있을 만한 것이 많지 않긴 하지.’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미 연화가 온 지 스무 날이 지났다. 붉은 달은 질 생각이


없고,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몸이 뜨거워졌다. 아마 이번 해의 붉은 달은 한 달 만에
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변덕스러운 달님은 때마다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달랐다. 만약 길어진다면, 물론 연화를


달이 질 때까지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두 달이든, 일 년이든.

며칠 전의 일로 연화가 놀라고 상심했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은 후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일어났다. 풀 죽고 걱정 어린 얼굴의 백호에게 연화는 맑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백호 님.’

그녀는 오히려 관련된 자였던 우현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수조의 주술에 걸렸던 그를
아는지라 백호도 그를 크게 탓하지는 않았다. 다만 더욱더 수련하여 그따위 질 낮은 주술에
걸리지 말라고 호령하고 우현의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내쫓았을 뿐이었다.
우직한 곰의 신령은 사색이 되어 도망을 나갔다. 아마 오랜 수련을 거친 후 백 년쯤
뒤라면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어느 순간 연화가 바람을 의식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령계의 낮이라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다.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만물이 평화로운 세계니라, 하고 백호는
자부심을 가지고 연화의 맑은 눈을 자신의 먼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검고 둥근 눈은 다소 어두웠다. 표정 역시 그늘이 져 있었다. 신은 잠깐


멈칫했다. 하늘 아래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이 신령계에서, 인간의 여인만이 유일하게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지?’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은 있었으나…… 배를 곯기는커녕 매 끼니마다 진수성찬에 아름다운


비단과 옥으로 몸을 감싸고 시중드는 자들이 그림자처럼 연화의 뒤를 따라다닌다.

세상에는 곡소리 나는 곳 하나가 없으며 하늘은 언제나 쾌청하니 신령계는 인간계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것은 백호의 자부심일 뿐 아니라 애초에 상제가 그렇게 만들어낸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필요 이상의 근심 걱정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왜 그런 표정인 것이냐.’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발밑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
잠깐 벽에 기대 졸던 연화는 자수를 놓던 옷감을 떨어뜨릴 뻔하고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고 한 번 더 놀랐다. 바로 코앞에 백호의 커다란 푸른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백호 님.”

“그래.”

그가 웃었다. 어딘지 조금 불안해 보이는 백호의 표정에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방신인
그가 불안해 보이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보인 게 아닐까 하면서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이 몸이 달아올랐던 며칠간의 기억은 연화에게 정확하지 않았다. 안개라도 낀 듯


흐렸다.

우현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이 났다. 다만 그사이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부적인 것이 기억나지 않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지켜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임시라도 반려가 있는데 다른 이와 잠자리를 가질 뻔하다니. 자신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달았던 것을 기억하는 연화는 자괴감에 빠질 뻔했다. 다만 백호가 연화의 탓이 아니라며
다독여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괜찮으냐?”

“그럼요. 저는 괜찮습니다.”
연화가 부드럽게 웃었다. 백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이마가
따뜻했다.

‘백호 님은…… 무섭지 않아. 괜찮아.’

여전히 육체적으로 압도적인 사내는 맞이할 때마다 조금씩 두려움이 앞섰다. 그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그 이질적인 분위기가 간혹 그녀를 엄습했다. 그럴
때면 피부에 소름이 돋고 몸이 오그라들 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백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거칠지만 부드러웠고,


압도적인 힘을 지녔지만 그것을 연화를 겁박하는 데 쓰지 않았다. 두려운 사내였으나……
동시에 그리운 사내이기도 했다.

연화는 지난 일이 생각나 괜한 부끄러움에 자수감을 만지작거렸다. 백호는 그녀의 손에


있던 옷감을 들어 하늘에 비춰보았다.

“예쁘구나.”

푸른 옷감 위에는 새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수 놓여 있었다.호랑이는 흰색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백호는 괜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조금 놀라면서 옷감과 바늘을
빼내어 옆의 탁자에 올려두었다.

“백호 님.”

“그래, 계속 불러라. 난 네가 나를 부르는 게 좋더구나.”


백호가 싱긋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조심히 연화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연화는 팔을 벌려 백호의 목덜미에 감았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충분히 애정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워서 백호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 자신이 의자 위에 앉았다.

“백호 님, 곧 시녀들이 올 텐데…….”

“괜찮아. 그만한 눈치들은 있는 아이들이니까.”

지난 일 이후로 예민해진 호접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선별한 시녀들만을 골라 시중을 들게


했다. 연화의 식사에 미약이 섞여 들어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시녀들이 역시나 익숙하게 백호와 자신의 정사 장면을 피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연화는 볼을 붉혔다.

남자는 연화의 옷을 내리고 희고 투명한 피부 위에 입을 맞췄다. 소담하고 탐스러운 가슴을


베어 물고 빨면서 붉은 자국을 남긴다.

그녀는 다리를 벌리고 백호와 마주앉은 자세가 민망했지만 곧 그 사실을 잊었다. 백호의
단단한 양물이 다리 사이에 지긋이 눌렸다.

“조금 더 다리를 벌려라.”


수줍게 벌어져 있던 다리를 백호의 손이 더 넓게 했다. 희디흰 허벅지 안쪽의 피부가 빛
안으로 드러났다. 그는 허벅지 안쪽 가랑이 사이의 약하고 예민한 피부를 손으로 희롱하며
짙은 음모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하, 아…….”

움찔거리며 연화가 한숨을 뱉었다. 음모의 안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달콤한 쾌락에


그녀는 백호의 어깨를 잡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의 작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이 백호의 목을 간지럽혔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원.”

백호가 투덜거렸지만 연화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백호가 주는


감각에 집중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와 드러난 등을 쓰다듬는 커다랗고 거친 손. 휘어진
허리를 잡고 가까이 끌어당기는 압도적인 힘. 그녀의 몸이 완전히 파묻히는 넓고 단단한
가슴.

곧 그녀의 안으로 백호가 진입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골반이 힘겨웠다. 연화는 숨을 조절해
쉬면서 그를 받아들였고, 조금 더 앞으로 움직이며 남자를 품었다.

스스로 움직여 자신의 물건을 품어주는 연화를 보며 백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따뜻한 몸 속과 손 안에 잡히는 가느다란 몸, 자신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담긴
애정.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연화의 허리를 감고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연화는 다리로 백호의 몸을 감은 채 마치 아기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 아랫배 안에 품은 남자의 뜨거운 물건이 부드럽게 쾌락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으, 흐……!”

오래지 않아 그녀는 백호의 어깨를 물고 신음을 누르며 절정에 달했다. 희고 가느다란 몸이


달달 떨며 내벽을 조이자 백호 역시 더 참지 않고 쾌락을 맞이했다. 그녀의 안에서 체액이
섞여 둘의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쾌감에 한숨을 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화를 안고 백호는 눈을 감았다.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도 한 달 뒤에도 이 손 안의 작은 몸을 안고 계속해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금수의 붉은 달

26 화

생명력이 부풀어 오르는 봄과 여름의 경계에 신령계의 모든 원로들이 선물을 가지고 백호를
찾는다. 신령계의 원로들은 덕을 많이 쌓아 힘이 강해진 신령들로, 그만큼 나이도
까마득하게 많았다. 몇몇 원로는 백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이미 오후가 시작되어 햇살이 낮아지기 시작한 시간에 연화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래, 오늘 오후가 원로들이 방문하는 때란다. 평소에는 내가 멋대로 찾아가긴 하는데,


그 녀석들도 일단 군주인 내게 예를 갖춰야지. 열두 달에 한 번뿐이다만.”
백호는 자유분방한 신이다. 그는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불쑥불쑥 원로들의 영지에 찾아가
놀래키곤 했는데, 일 년에 단 하루 만은 그들이 전부 모여 군주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날이었다.

“어쩐지…… 호접 님도 그렇고 오늘 이른 아침부터 모두가 바쁘셨어요.”

연화가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아무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모두가 정신없이


다녔다.

열두 달에 한 번 있는 행사라니 시녀와 시종들이 꼭두새벽부터 바빴던 것도 당연했다. 영토


안의 귀빈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연화는 손을 꼭 맞잡았다.

“너무 말씀이 갑작스러우십니다…….”

며칠 전에라도 말을 해줄 것이지. 그러니까, 인간계로 말하자면 왕을 보러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말이렷다. 말만 들어도 조금 식은땀이 났다.

“무슨 상관이냐, 너는 옷만 차려입고 바로 연회 자리로 가면 되는데.”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즉흥적인 성격이었고 연화를 그 자리에 데려가겠다는 생각도


오늘 아침에서야 했다. 지난번 사영의 일 이후로 유달리 그녀가 어두워 보여서 많은
금은보화와 진수성찬이 있는 연회 자리에 데려가면 조금 밝아질까 싶어서였다.

“그런 자리에 제가…….”

“넌 내 반려니 당연히 참석해야지.”


“하, 하지만…….”

연화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소박한 사람들과 살아온 여인이었다. 심지어 불과 얼마


전 얼마나 신령의 일족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체감했다. 그녀는 조금 불안해져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내 곁에 앉아만 있어. 널 싫어했던 건 뱀의 일족뿐이다. 욕심들이


앞서서 그랬던 게지.”

백호는 미소를 지으며 연화를 끌어안았다. 인간인 그녀가 낯설어 할 일임은 당연했다. 원래
일시적인 반려는 공식적인 자리에 대동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어쩐지 연화는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인간이라고 또 못마땅해하는 것들이 있기야 하겠다만.’

거기에 생각이 미쳐서 백호는 혀를 찼다. 못난 놈들. 그러나 애초에 뭐라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먼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연화는 동그란 눈을 위로 뜨고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백호가 워낙 장신이라서 연화의


머리는 그의 가슴께에도 닿지 않았다. 불어오는 아침 바람이 창 너머로 백호의 투명한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 시리게 푸른 눈이 다정하게 가늘어졌다. 남자는 거대하고 온화했다.

“알겠습니다.”
자신의 뺨을 감싸는 큰 손에 기대면서 인간의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 손 안에 한 뺨이
완전히 감싸이고도 남는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신은 알 수 없이 가슴을 울리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벅찬 사랑스러움에 백호는 손을 내밀어 연화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부서질까 차마 세게 안지도 못하고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반듯한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호접, 신령계의 안주인다운 차림새를 부탁한다.”

호접을 위시한 시녀들이 다가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그녀들의 손에는 장신구함과
옷가지가 곱게 개어져 들려 있었다.

“차림을 정갈히 하시고 바로 연회 장소로 가시면 됩니다.”

사실 이미 연회는 시작했지만……이라는 말을 목으로 삼키면서 호접이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백호는 항상 제 시간에 행사를 시작하는 법이 없었다. 본인도 이미 늦었으면서
반려까지 단장시켜 데리고 오라는데, 아마 연화가 도착하면 연회는 절정에 달해 있을
시간이었다.

향내 나는 물로 가벼운 목욕을 한 뒤 호접은 신령계의 시원한 바람을 손 안에 쥐고 여인의


머리카락 안으로 휘저었다. 바람이 까르르 웃으며 연화의 머리카락에서 습기를 날리고
지나갔다. 젖었던 긴 머리가 금세 말랐다.

“호접 님, 제가 이런 자리에 나가도 괜찮은 걸까요.”


아무래도 연화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호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구슬을
엮은 머리장식을 둘러주었다.

연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감싸고 떨어지는 보석구슬의 감촉에 흠칫했다. 호접은 직접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작은 귀에 녹색 비취로 만든 귀걸이를 걸어주었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매듭줄기가 귀 밑으로 늘어졌다. 뒤에서는 그녀의 긴 흑발을 빗기며 시녀들이 조용히 머리
단장에 열중했다.

“이 신령계에 백호 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답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셨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함께 나아가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식 반려가 아니다. 연화는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붉은 달이 지면


인간계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 주제넘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말끝이 작게 흐려졌어도 무슨 뜻인지 호접은 알았다. 나비의 신령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


특별히 위로를 하려 들지는 않았다.

색색의 작고 작은 구슬들을 엮은 줄이 긴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러 줄기로 땋은


머리카락을 모양을 내어 묶고, 그 사이에 틈틈이 반짝이는 옥비녀를 꽂아 넣었다.

과하게 무겁지 않도록, 과하게 정식으로 치장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연화는
어쨌든 정식 반려는 아니었으니까.

“백호 님께서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하고 호접은 슬쩍 경대를 내려다보았다.

경대에는 백호의 반려들만이 착용할 수 있는 붉은 노리개가 놓여 있었다. 그 자체가 힘은


없으되 백호의 정인임을 상징하는 노리개였다. 이 경대는 대대로 사방신의 반려들을 위해
이 자리에 놓여 있었던 물건이었고 당연히 경대의 장신구들은 반려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랐지.’

호접은 속으로 인정했다. 설마 원로들을 대접하는 자리에 연화를 데리고 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호가 푹 빠진 듯한 눈치이긴 했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인간의 여인을 신령계 원로들이 모이는 자리에 신의 반려로 데리고 나간다니.

호접 자신도 사실 연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고향을


떠나와서인지 다소 우울한 그림자가 작은 얼굴에 어려 있었지만 백호를 볼 때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연화 역시 백호에게 마음을 품은 게 확실했다.

호접은 그런 면에 있어서 아주 귀신같이 예민한 편이었다.

“자, 옷을 입으실까요.”

속의를 입히고 그 위에 겹겹이 날아갈 듯 얇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히고, 그 위에 화려한


장포를 입혔다. 허리에는 비단띠를 둘렀다. 가뜩이나 가느다란 연화의 허리가 버들가지같이
보였다. 입술 위에는 붉은 연지를 찍어 바르고 뺨에는 흰 분칠을 했다. 풀 먹인 명주실로
이마의 솜털을 살살 밀어 피부가 매끄러워 보였다.
어두운 남색 위에 반짝이는 금실로 수가 놓인 장포라 우아하면서도 위엄 있어 보였다.
호접은 뒤로 물러서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나 화려하게 치장한 것은 정말 생전 처음이라…… 조금 부끄럽네요.”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아주 아름다워요.”

연화는 생전 처음 해보는 치장에 오히려 조금 위축이 되었다. 백호는 객관적으로 대단한


미남이다. 상제가 직접 빚어낸 형상이니 오죽할까. 그의 곁에 앉아 다른 이들을 맞이한다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이 노리개입니다.”

붉은 명주실 매듭의 노리개 끝에는 푸른 구슬이 매달려 달랑거렸다. 백호의 눈 색깔과 닮아


있었다. 매듭에 흐르는 윤기가 워낙 아름다워서 연화는 잠시 넋을 잃었다.

“제가 걸어드릴게요.”

물어볼 필요까지 있을까. 호접은 웃음을 감추면서 붉은 노리개를 들어 연화의 허리춤에


매달았다. 완연한 사방신의 반려로 모자람 없는 차림새였다.

자신이 단장시켜 놓고도 마음에 들어서 호접은 뒤로 물러서서 흐뭇하게 웃었다. 자그마한
인간의 여인은 아주 위엄 있고 화려했다. 그녀는 나비 날개를 팔락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마치 정식 반려에게 하듯 깍듯하고 단정한 자세였다.
“회장으로 납시지요.”

***

“…….”

“호 님…….”

“백호 님…….”

“백호 님……. 듣고 계십니까?”

“백호 님!”

곁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백호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에는 신령계의
원로들이 모여 앉아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구리, 곰, 사슴 등 온갖 짐승들의 신령과 태산 바위와 나무의 정령 등 온갖 자들이 모여


넓디넓은 연회장이 좁았다. 거대한 곰의 모습 그대로 온 원로부터 적당한 형상으로 나타난
원로까지 형태도 다양했다. 워낙 여럿이 모이다 보니 한마디씩만 해도 연회장은
시끄러웠다.

백호는 고개를 기울여 앞을 보았다. 그들이 하나씩 바쳐 올린 진귀한 보물들과 금은보화가


백호의 앞에 차례로 나열되어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호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신령들 주제에 어지간히들 쳐 모았구나. 욕심들 하고는.”

“백, 백호 님……. 그것이 아니라.”

“도를 닦아 한 단계 위로 나아갈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들 궁둥이 밑에 깔고들 앉았으니


원.”

혀를 차는 신의 말에 신령들은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본래 신령들이란 도를 닦고 또 닦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자들, 이곳에


모인 원로들은 그런 면에 있어서는 가히 몇백 년 동안 계속되는 실패만 겪고 있는
실패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은 강하지만 동시에 생에 대한 미련도 놓지 못하는 자들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되는 게 신령계의 원로였기 때문이었다.

공물을 바쳐도 꾸지람이다. 원로들이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뻔히 알면서도 백호는


말을 거두지 않았다.

“못난 것들. 그저 속세에 미련을 못 버려서.”

백호가 혀를 쯧쯧 찼다. 홍진의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는 원로들은 인간계를 들여다보며


거기에 영향을 받을수록 더 우화등선과 멀어진다.

그는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만, 단 한


명, 긴 청색 머리의 여인만이 빙긋이 웃으며 백호를 마주보았다.

금수의 붉은 달
27 화

“뭘 잘했다고 날 쳐다보느냐? 청수희.”

샘의 정령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희끄무레한 하체는 보일 듯 말 듯


길게 이어져 작은 쟁반에 담긴 물그릇에 이어져 있었다. 힘을 보존하기 위해 본체인 자신의
샘과 분신을 이어놓은 채였다. 청수희는 아름답고 창백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백호 님도 고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주 세속적인 고민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사방신이다. 너 같은 정령과 같은 줄 아느냐.”

그는 한심하다는 투로 답했다. 하지만 샘의 정령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물은 세상


만물을 비추는 반영. 청수희는 모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지켜보는 존재였다. 사방신
역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백호는 못마땅한 기분으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입맛이 썼다.

“반려, 연화 님 드십니다.”

호접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장을 가득 메운 원로들의 눈이 한순간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서 어두운 남색의 장포를 입은 인간 여인이 들어섰다.
거대한 연회장을 메운 온갖 원로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연화는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백호의 곁에 섰다.

“아름답구나.”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 정식 반려의 치장에 비하면 많이 간소한


차림새다. 하지만 그녀는 진흙탕 속의 진주처럼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허리춤에 매달린
붉은 노리개가 순간 그처럼 기꺼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며 그는 연화의 작은 뺨에 입을 맞췄다.

“저분이 그…….”

“그래, 이번의 반려님.”

원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백호는 일부러 원로들에게 보란 듯이 연화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인간이라니 못마땅해하는 기색들이 있었으나 백호와 감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연화는 다소 수줍은 기분으로 눈을 내렸다가 반사적으로 다시 들었다. 호접이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반려이기 때문에 결코 백성들 앞에 소심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는 말.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것은 샘의 정령이었다. 긴 물빛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은 방글거리며


눈을 마주쳤다.
“반려, 연화 님이십니까?”

청수희가 어딘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다. 연화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어찌되는지요?”

“아, 저는.”

샘의 정령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랫사람으로 꽤 무례한


짓이다. 그녀는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절을 했다.

“샘의 정령, 청수희라고 하옵니다. 반려를 뵙습니다.”

“백호 님의 반려, 연화라고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연화가 마주 목례를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호가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 순순하지 않은 연화의 태도에 청수희의 눈이 반짝였다. 이 우아한 인간 여인이 바로


소문의 그 여인이란 말이렷다. 샘의 여인은 곁눈질로 백호를 훔쳐보았다. 예상대로 백호의
미간에는 흡족함과 애정, 근심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저것이 또 마음을 훔쳐보려 하는군.’


백호는 청수희의 기색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연화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샘의 정령은 백성이라 해도 마냥 쉬운 상대는 아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마음에 근심과


의문이 가득할 때는 더욱 그렇다.

최근 며칠 백호는 자꾸 의문이 들었다. 손 안에서 연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작은


여인이 힘들어 해서 관계를 자제할 정도다.

신령계에도 아름다운 여인은 많다. 인품이 훌륭한 여인 역시 많다. 하지만 백호는 연화에게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빼앗겼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가느다란 뼈대와 매끄러운 피부, 연화는 분명 미인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혹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연화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여태까지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사방신이었고 자신이 사랑할 상대를


자유롭게 골랐다. 상대방은 당연히 신에게 복종할 뿐이었다.

이런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사방신으로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청수희의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가 달갑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백호 님.”

잠깐 생각에 빠진 백호의 손등을 연화가 자신의 작은 손으로 덮었다. 그녀는 백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접문했고, 연회장 안의
원로들이 다 같이 헛숨을 들이켰다.
“누구, 할 말 있는 건가?”

원로들은 신에게 인간의 반려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한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항의하고자 하는 자를 찾았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다들 눈치만 볼 뿐이었다.

청수희만이 빙글빙글 웃으며 두 사람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백호의 반듯하고 높은


이마에 어린 애정과 연화에게 어린 근심을 번갈아 살폈다.

‘저 천지분간 못 하는 사방신에게도 임자가 나타났나 보군.’

간만에 재미있는 일이다. 신령계를 다스리는 자에게 나타난 반려가 인간 여인이다. 청룡과
분쟁이 있게 될까?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밤이 되고 연회가 무르익었다. 백호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모였다지만, 열두 달에 한 번,


전 신령계에 퍼져 사는 원로들이 얼굴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이기도 했다.

달이 높고 은하수가 흐르는 밤이었다. 모두가 술을 마시고 진귀한 음식들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엄한 사방신의 앞임에도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너구리 신령도 있었다.

백호는 껄껄 웃으면서 그를 놀릴 뿐 딱히 제지하지도 않았다. 연화 역시 절반쯤 너구리화


되어 춤을 추는 원로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곰 모습의 원로가
손 하나로 너구리 신령과 함께 놀아주고 있었다.
술과 음식이 함께 하는 잔치자리나 다름없어서 연화는 매우 기쁘고 재미있게 자리를
즐겼다.

백호는 연화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더운지 머리카락 몇 올이 뺨에 붙어 있었다.

“술이 나쁘지 않지?”

“예. 그리 취하지도 않는 듯합니다.”

술은 향이 좋지만 꽤 독하다. 쓰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연화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조금 풀어진 채로 헤실거리며 웃었다.

말은 안 취했다고 하는데 영락없이 취했구나 싶어서 백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웃음이 많아진 얼굴도 귀여웠다.

“연회 자리라 하여 긴장했는데……. 모두들 좋은 분이신 듯합니다.”

“인간계와는 다르지. 별것도 아닌 것들이 허례만 잔뜩 챙겨대는 그런 놈들하고는.”

백호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속세에 물들었다 한들 신령들은 인간과


다르다. 영혼 자체가 맑고 푸른 자들이다.

“인간 놈들이란 공물은 허술히 하면서 그저 제놈들이 몇 번 절을 하느냐를 가지고 싸우니까


말이야.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그렇군요.”
“허례허식을 말라 그렇게 일러도 고쳐지질 않아. 오히려 그걸 핑계 삼아 잔인한 짓들을
벌이지. 못난 것들.”

“하지만 백호 님의 반려는 인간이시잖습니까?”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호가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인이 방긋거리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의 험담을 하시면 연화 님께 미움받으셔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놀리는 듯한 태도에 연화는 손을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맞는 말씀이신 걸요. 인간계란…… 좀 그런 면이 있지요.”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는 청수희에게 맑은 술 한 잔을 건넸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제가 긴장해서.”

“아닙니다. 반려님이시니 마땅한 말씀이셨지요. 무례는 제가 저질렀습니다.”

샘의 정령은 술을 받아 마시고 한 잔을 돌려주었다. 그것을 받아 마신 뒤 연화는


손부채질을 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더워하는 것을 보고 호접이 나타나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취했는지 발걸음이 단정치 못했다.

“잠시 창가에 가서 밤바람을 쐬시지요.”

“고맙습니다, 호접 님.”

연화가 발그레해진 볼에 연신 부채질을 하며 창가로 가서 기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청수희가 은근하게 백호에게 말을 붙였다.

“연화 님은 근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자꾸 마음을 비춰보려고 수작하는 게냐?”

“수작이 아니라, 아시잖습니까. 물은 그저 그 자리에서 비출 뿐인 것을요.”

깊고 깊은 샘의 본성.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청수희는 연화와 나눴던


잔을 들고 그 잔에 남은 술방울을 손끝에 묻혔다.

“인간계에는, 연화 님의 남은 미련이 있으신 게지요.”

“…….”

“이 물기가 제게 알려준답니다.”
젖은 손끝을 들고 샘의 정령은 작게 웃었다. 무관심한 척하고 있지만 백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사방신은 힘이 세지만 백호는 음흉하지 못하다. 청룡보다는 훨씬 상대하기 좋고 착한


신이다. 청수희는 백호를 제법 좋아했다. 그녀는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연화 님의 근심, 제가 잠시간이나마 풀어드릴 수 있답니다. 완전한 해결은 안 되지만요.”

“……정말이냐?”

“제가 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너는 보답 없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잖아.”

“이미 보답은 받았습니다. 연화 님께서 제게 술 한 잔을 내리셨으니까요.”

“희한하군. 너답지 않게 후하구나.”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청수희는 자신의 발치에 따라온 물그릇을 가까이 당겼다. 그녀는 이제 흥미가 동하는 듯한
얼굴의 백호를 보며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연화 님과 함께 제 거처로 오십시오. 연화 님의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드리지요.”

그녀의 몸 끄트머리부터 물그릇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금수의 붉은 달

28 화

백호는 턱을 괴고 청수희가 사라지는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샘의 정령이란…… 불안정하고 불유쾌하고 장난꾸러기지. 다만 공물에는 답을 하는


신령이고.”

그는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인간계와 신령계 양쪽에 적을 두고 있는 신령이니 따라가서 나쁠 일이야 없다. 밤 산책도


할 겸. 그는 연화가 기댄 창가 쪽으로 가서 창틀을 훌쩍 뛰어넘었다.

바람과 함께 허공에 몸을 던진 백호를 보고 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바람 위에 선 채 백호가 웃었다.

“나는 걸 보여준 건 처음이지?”


“백, 백호 님. 여긴 너무 높은 곳인데.”

백호의 궁은 깎아지른 봉우리 꼭대기에 있다. 떨어지면 뼛가루도 없이 시체를 찾지 못할


높이였다. 백호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괜찮아. 신령계에서는 바람조차 나의 종이니라.”

길디긴 백발이 흔들리며 허공에 나부꼈다. 남자의 굳건한 몸을 감싼 얇은 장포 자락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고, 그는 허공을 밟아 연화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놀라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예?”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연화는 놀랐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백호는 창가에 기대있는 연화의 턱을 살짝 잡아 눈을 맞췄다.

“우울해하더구나.”

“……아.”

“두고 온 자들이 걱정되느냐?”

그제야 무슨 뜻인지를 알고 연화가 잠시 입을 오물거렸다. 백호는 말을 이었다.


“난 내 반려가 행복하길 바란다. 비록 거기에 끝이 있다 할지라도.”

연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배꽃처럼 희고 고운 얼굴이다. 어쩐지 그 웃음에 가슴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백호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몸을 뒤집어 육신을 바꾸었다. 순간 바람이 거세게 불며 소용돌이 쳤다.


연화는 깜짝 놀라 눈을 감았고, 백호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흰 호랑이 한
마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는 백호의 것이었다.

【내 등에 타라.】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다운 흰 호랑이는 그르렁대며 머리를 낮췄다. 원래의 형상보다


연화에게 맞도록 크기를 줄인 상태였다. 백호의 시리게 푸른 눈이 연화에게 눈짓했다.

【얼른.】

“아……. 네, 네.”

연화는 서둘러 호랑이의 등 위로 올라가 털을 조심스레 잡았다.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그녀의 손길에 백호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꽉 잡아. 떨어질지도 모르니.】


“예……. 그런데 따가우실까 봐.”

【네 손으로 잡아 뜯는대도 내 털은 멀쩡하단다.】

백호가 크게 웃었다. 곧 그의 등이 크게 일렁이며 다리가 허공을 박찼다. 너른 하늘


너머로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서슬에 연화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백호의 등 털을 꽉
붙잡았다. 머리와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령과 원로들이 여전히 연회를 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뒤로 멀어져 갔다.

호랑이의 굵은 발이 허공을 달렸다. 그는 날짐승이 아니라 스스로 날 수는 없었으나 바람이


그를 도왔다. 응축된 공기의 덩어리를 밟고 달리면서 백호는 등 위에 탄 연화의 따뜻하고
가벼운 무게감을 느꼈다. 처음에 떨던 여인은 잠시 시간이 지나자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녀는 털을 꼭 쥔 채로나마 상체를 일으켜서 조심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푸른 하늘과 진녹의 산이다. 저 밑으로 보이는 거친 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산맥 사이로 군집해 있는 높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마치 날카로운 창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저곳은 신령계에서 가장 영험한 것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건방지게 하늘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하는 것들이지.】

“영험한 것이라 하시면.”


【오래 살고 그만큼 덕이 높아 신에 가까워진 것들이다. 인간 세상에서 보통 산이나 나무에
혼이 깃들었다고 믿을 때는 대부분 그런 것들이지.】

“그렇다면 서낭당이나 전각에 깃든 신이라고 저희가 믿는 분들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아주 많은 창 형태의 봉우리들이 각자 다양한 형태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이 땅에 자신의 저택을 지닌 자들이다. 비록 백호의 밑에 있지만 신령계의 원로로


기능하기도 하는 무리여서 백호는 꺼림칙함에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백호의 궁에 전부
모여서 이 봉우리들은 대부분 비어 있을 것이다.

원로들 중 몇몇은 인간계와 통하는 간접적인 통로를 지닌 것들이라 어쨌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계의 일이 그리 걱정된다면…… 일단 샘의 정령에게 가보자꾸나.】

“처, 청수희 님께요? 그분은 연회장에…….”

【그 녀석은 먼저 가는 방법이 있단다.】

연화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자신이 신경 쓰여서 여기까지 백호가 달려왔구나. 호랑이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웃었다.

【나는 내 반려가 행복하길 바란다.】


“백호 님.”

【자, 잔소리는 말고.】

호랑이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높은 봉우리들 중 하나로 쏜살같이 내려앉은 백호는


사뿐히 착지했다. 그의 네 발 근처에서 먼지 바람이 풀풀 일어났고 쿵 하는 소리에 하늘이
울렸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다시 인간으로 화했다. 백발의 남자는 호랑이의 높은 등에서 떨어지는


연화를 가볍게 받아 안아 들었다. 품 안으로 폭 안겨드는 가벼운 몸이 놀라 경직된
채였다.

“변하실 때는 미리 말씀을 좀……. 놀랐지 않습니까!”

놀란 가슴을 채 진정시키지 못한 연화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백호가 씩 웃으며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그래, 활기 있어 보여서 조금 낫군. 나한테도 못마땅한 게 있으면 소리를 좀 높여보라고.


그런다고 화를 낼 만큼 좀생이는 아니니까 말이야.”

“……아, 정말이지.”

짓궂으십니다, 라고 말했지만 단어는 연화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백호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몸을 땅에 내려놓았다.
“여봐라, 나오너라!”

하지만 문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백호는 매우 빠른 속도로 기분이 불쾌해졌다. 소중한


반려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감히 미리 불러놓은 주제에 부름에 답이 없다니.

“청수희!”

【아―아, 엄청 빨리도 오셨네요. 저는 적어도 연회라도 끝내고 오실 줄 알았더니.】

청수희가 느릿하게 샘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물빛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턱을 괸 채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급하시긴 한가 봅니다, 백호 님?】

“……하여간 건방지지 않을 때가 없구나.”

샘의 정령, 청수희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물의 신령은 청룡과 백호의 권속이다. 양쪽


모두에 속한 자라는 사실은, 둘 모두에게 속박이 크지 않다는 뜻도 된다. 그녀는 백호에게
그리 고분고분한 신령이 아니었고 사실 백호 역시 그 사실에 크게 괘념치 않았다.

“네가 오라고 했으니 말을 지켜라.”

청수희의 푸른 머리가 물속으로 나풀거리며 흘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끝도 없이 길어서,


샘의 저 깊은 속, 아주 어둡고 검은 중앙까지 흘러들어 가 있었다.
연화는 다소 두려운 마음으로 샘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연회장에서의 청수희와 지금의
그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연회장에서는 가볍고 발랄해 보였으나 지금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청수희는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연화에게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왜 무서워하는 얼굴이세요, 반려님.】

“아뇨, 그게 아니라…….”

“괜찮아. 저것이 저래 보여도 모든 민물의 신령이니 여기서야 좀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백호가 연화의 상태를 눈치채고 혀를 찼다. 샘의 정령이라 이름 붙었으나 청수희는 모든


민물과 통하는 자였다. 그만큼 강한 원로이니 본체가 존재하는 이 장소에서는 위압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청수희는 팔꿈치를 짚고 둘에게 다가왔다. 뱀처럼 긴 그녀의 몸체가 샘으로 죽 연결되어


끊이지 않았다. 연화는 두려움에 질린 채 몸이 굳었다. 샘의 정령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인간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해드릴까요, 반려님. 당신이 제게 술 한 잔을 내리셨으니 저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겠습니다.】

청수희의 눈은 기묘했다. 어두운 청색의 눈동자는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연화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읽어냈다. 그녀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 어머니를 보여주세요.”

【당신의 어머니 말씀이시군요.】

“잠깐만, 연화야, 조금 더 생각해서…….”

【늦었습니다, 백호 님. 소원은 그것으로 끝이에요.】

샘의 정령이 느리게 말했다. 백호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하여간 물귀신들이란 홀리길 잘 홀려서.”

소원 하나라고 했으니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다. 다른 식으로 소원을 말했다면 샘의 정령이


힘이 닿는 한 도와줬을 텐데. 소식을 직접 눈으로 볼 수야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이상하군요.】

청수희의 눈이 희뿌옇게 빛나다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백호를 돌아보았다.

【……반려님의 어머니께선…… 제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계시는데요?】

“무, 무슨 말씀이세요?”

연화가 당황해서 입을 막았다.


【노란 빛에 휩싸인 형상. 아마도…….】

노란 빛, 약사여래를 뜻하는 색이다. 연화의 어머니는 약사여래의 가피 아래 있었으니 노란


빛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연화의 친어머니다. 보고자 하는 자는 인간계에 있는 양어머니이다.”

백호가 그녀를 안정시키려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하.】

청수희가 한층 더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빛내다가 샘으로


전 연화를 돌아보았다.

【자, 이쪽으로 와서 수면을 보세요. 유혹에 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구요.】

홀린 것처럼 연화는 청수희의 뒤를 따라가 샘의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금수의 붉은 달

29 화
샘의 정령은 물 표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고요히 사라져 버렸다. 그 위로 흐린
사람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어머니.”

그립고 그리운 분이다. 연화를 곱게 길러준 양어머니는 그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듯


힘겨워 보였다. 그녀는 멀건 죽을 끓여 한 숟갈씩 힘겹게 떴다. 기침이 자꾸 격하게
튀어나와 죽 한 숟갈을 삼키기가 힘들어 보였다.

‘내가 곁에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지병인 천식도 연화의 능력으로 잠재울 수 있었다. 그녀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입을


막았다. 영양실조로 인해 몸이 뼈가 나올 정도로 말라버린 양어머니와, 지붕을 수리하다가
다쳤는데도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는 촌장네 아들의 모습도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려는 순간, 연화의 어깨가 거칠게 흔들렸다.

“연화야!”

“헉……!”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였다. 자신도 모르게 이미 샘으로 거의 코가 닿게 몸을


기울인 터였다. 연화는 공포에 질린 채로 자신을 깨운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근심은 덜해지기는커녕 더 깊어졌다. 그녀는 백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깨의 옷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청수희.”

백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허공으로 샘의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반려님의 요청을 들어드렸을 뿐이랍니다.】

“일을 오히려 악화시켰어.”

【물은 공물에의 보답으로 소원을 들어드릴 뿐.】

정화수를 놓고 비는 행위 역시 기도라는 정성을 담보로 소원을 비는 것이다. 공물이 하잘


것 없어 샘의 정령이 그 소원을 들어주는 일은 드물다. 술 한 잔에 차원을 건넌 소식을
들려주었으니 이 정도면 샘의 정령은 후한 호의를 베푼 셈이었다. 백호는 샘을 노려보았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지?”

대답 없이 머릿속으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불쾌함에 신은 샘가에 숙여 표면에


손을 댔다. 천천히, 그의 손끝에 닿은 수면에서부터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면이
밑으로 내려갔다. 눈에 띌 정도로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물의 양에 백호의 머릿속으로
청수희가 한숨을 쉬었다.

【장난도 못 칠 양반이군요. 그만하세요.】


“네가 지금 신에게 장난을 쳤다고 네 입으로 말하는 것이냐?”

【물의 영들은 원래 장난기가 많아요.】

답도 없이 백호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수증기가 온 샘을 삼킬 정도로 피어올랐고 수면이


펄펄 끓었다. 결국 청수희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두시라구요! 이러다 제 샘이 마르겠어요!】

“마른다 한들 무슨 상관이지?”

【그럼 인간계에 전부 물이 말라요! 반려님의 마을도 더 식량난에 시달릴 텐데


괜찮으신가요?】

그 말에 백호가 멈칫 손을 뗐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연화의 마을에 네 물을 흘려라.”

【제 물을 흘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허기짐을 면하게 하고 치유를 돕는 물을 흘리라는 뜻이다.”

【…….】
청수희는 바로 답이 없었고, 백호는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때 그의 소매를 조금 당기는
손이 있었다.

“백, 백호 님…….”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진정한 눈치였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계의 일은 인간계의 섭리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제가 돌아가면 모두 해결될


문제입니다. 청수희 님께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차피 얼마 후면 돌아갈 몸. 그때까지는 모두들 견뎌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공물 대신 잡혀 온 몸이었다. 마을이 걸려 있지만 않았어도 차라리 죽기를 택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조금만 견뎌주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붉은
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질 테니까.

“돌아가면 그때, 제 어머니와 모두에게 보답을 할 것이니…….”

순리를 어겨가면서까지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신령계와 인간계가 유별하여 호접 외에는


어지간한 자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다. 자신의 가족과 마을
때문에 그 순리를 어길 수는 없었다.

백호는 말없이 연화를 끌어안았다. 허공으로 청수희의 한숨이 들려왔다.


【일단, 이건 제 잘못이 아닌 건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백호 님.】

“…….”

【하지만…….】

샘의 표면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시작된 파도는 조금씩 철썩이며 수면을
높여, 다시 샘가에 찰랑거리도록 물이 돌아왔다. 그 안에서 푸른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연화 님.】

“……네.”

연화는 백호에게서 떨어져 나와 샘가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작고 흰 얼굴은 아직


어두웠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식을 정말 알고 싶었거든요.”

【…….】

“제가 지금 술에 취해서 감정이 조금 격해져 있었던 거 같아요. 실례를 용서하세요.”

청수희는 묘한 표정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찰랑이는 수면에 손을 적시며 딴짓을


하다가 백호를 흘긋 곁눈질로 살폈다.
【할 수 없군요.】

“네?”

【아무런 공물 없이 해드릴 수는 없으니 뭐라도 내놓으세요, 백호 님.】

끝까지 건방진 말투에 백호가 한쪽 입가를 비뚜름하게 하고 품 안을 뒤졌다. 하지만


청수희는 연화에게 매달린 붉은 노리개를 가리켰다.

【저걸 주세요.】

“……아, 이건 안 돼요.”

귀한 물건이라고 들었다. 연화는 깜짝 놀라 노리개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백호가 그것을


단숨에 떼어내 샘으로 던졌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보석이 달린 붉은 노리개는 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과연, 화끈하시네.】

“백호 님! 그건……!”

“약속대로 해라, 청수희.”

【당신의 소원대로.】
샘의 정령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신나게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화는 멍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풍성한 치유의 물이 흐르기 시작했을 테니 잠시간은 나을 게다.”

“…….”

“영구히는 아니고, 네가…… 돌아갈 때까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마음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백호는 사방신이었으나 인간계까지 돌봐줄 수는 없었다. 사방신으로서 가능한 각 차원의


경계가 흐트러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이런 임시적인 방편이 최선이었다.

청룡과의 다툼을 염두에 둔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달은 언제 질지 모른다.

“제가 돌아갈 때까지군요.”

연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안도와 애달픔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던지신 것은 귀한 노리개가 아닙니까.”

“귀해봤자 노리개이지.”
“사방신의 반려가 달 수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물건을 어찌 이런 일에…….”

“들어보렴, 연화야.”

백호는 여인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노리개가 있든 없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단다. 내가 반려로 여기는 이는 노리개 하나


따위에 좌우되지 않아.”

“…….”

“노리개 이상의 가치를 할 수 있는 일에 썼으니 된 일 아니냐.”

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큰 키를 굽혀 연화를 끌어안았다. 작고 따스한 여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일개 인간일 뿐인 제게…….”

“네가 왜 일개 인간이냐.”

연화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백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너르고 포근한 품이다.


백호는 그녀를 안고 다른 봉우리로 건너뛰었다. 이곳저곳으로 건너뛰며 백호는 바람을
느꼈다. 봉우리를 건너 깊은 산으로, 산으로.

달이 아주 잘 보이는 정자에 내려서서 백호가 여인을 놓아주었다.

연화는 기운 달과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깊어진 밤을 깨달았다. 한동안 괴롭히던 근심


걱정은 조금이나마 가셨다. 하늘에 뜬 달은 붉다. 그녀는 완전히 부푼 그 큰 달을
올려다보며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연화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했다. 다정하고 품이


넓은 신. 평생 단 한 번도 만나리라 기대하지 못했던 존재.

“백호 님은 너무 다정하세요.”

연화는 작게 속삭였다. 그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일생의 한 부분만을 함께


지내고 헤어져야 하는 운명으로는 잔인할 만큼.

“난 다정하지 않아.”

“제게는 친절하고 다정해요.”

곧 헤어져야 하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쉽지 않았다. 연화는 계속해서


흔들리는 마음에 시달렸다. 언감생심 욕심을 낼 수도 없는 존재, 인간도 아닌 신.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남자.

‘난 과연 백호 님을 잊을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가 대단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가 이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서였다.

백호는 난처한 듯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그러느냐. 네 근심을 없애주었다고 생각했는데.”

“…….”

“아, 임시적이라서 그런 게냐? 그건 네가 돌아갈 때까지만…….”

“그만 말씀하세요.”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백호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그의 따뜻한 호흡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금수의 붉은 달

30 화

“연화야.”
백호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을 때 몸을 나누어도 되는 것인가,
망설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화가 급히 손을 들어 백호의 옷깃을
벌리기 시작했을 때 생각은 사라졌다.

곁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정자는 벌레 우는 소리 외에는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백호는 재빨리 연화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흰 허벅지를 드러냈다. 입맞춤을
깊이 하고, 그녀의 몸을 감쌌던 아름다운 짙은 색의 장포를 벗겨 내렸다.

희고 고운 어깨가 밤하늘 아래 드러났지만 바람은 그리 차지 않았다. 그녀는 팔을 들어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귓가와 턱, 목덜미, 쇄골에 입술을 찍으며 내려오다가 작고 소담한 젖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유두를 입에 머금고 굴리자 연화의 숨소리가 조금 커지면서 머리를 감싸 쥐어
온다. 백호의 긴 백발이 밑으로 흐트러져 내렸다. 달빛 아래 마치 금발처럼 보였다.

연화를 아예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백호는 그녀의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에서 손과


입을 떼지 못했다. 어딜 빨아도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귓가에 입술이 스치면 작은 몸이
파득 떨면서 예민하게 반응한다. 가느다란 허리가 비틀리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허공을 찬다.

“하, 흣…….”

수없이 몸을 섞었지만 여전히 수줍은 여인은 신음을 크게 내지 못하고 작게 숨과 섞어


낸다. 백호는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뺨을 더듬으며 입을 맞췄다.

벌린 허벅지 사이로 백호의 거대한 양물이 파고들었다. 몇 번이고 몸을 나눴지만 그


크기만큼은 절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응…….”

연화는 숨을 삼키며 백호의 어깨에 매달렸다. 충분히 젖고 이미 풀려 있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아랫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밀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꽉 차버린 몸 안이 낯설고 두렵다. 완전히 삽입된 뒤 연화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벽은 완전히 확장되어 백호의 양물을 감싸고
옥죄었다. 남자는 숨을 삼키면서 연화를 끌어안았다.

“널 안을 때마다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자신의 불안정한 기분을 소리 내서 말한 건 난생 처음이었다. 그의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불안정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백호는 입술을 연화의 부드러운 흑발 위로 미끄러뜨리며
연신 조심스럽게 그녀를 어루만졌다.

“이……상해, 진다니요……?”

“나도 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남자는 여인을 안고 그녀의 맨 피부를 어루만졌다. 코끝에 감겨드는 연화의 체향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백호는 신이었고 이렇게 불안정한 기분을 느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연화를 안고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듯 충만해졌다.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수없이 많았던 임시적인 반려들이 이런 기분을 준 적은


없었으니까.

밤에 힘입어서인지 연화는 대담하게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버거운 크기를 견디면서,


그녀는 힘겹게 허리를 돌렸다. 서툰데도 그것이 그 무엇보다 자극적이라서 백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대로 연화의 안에 전부 씨를 뿌리게 될 것 같았다.

“응, 흐으…….”

부족한 자극에 여인도 작게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밝은 달빛이 흰 피부를 물들였다.


그녀는 백호의 목에 매달려서 속삭였다.

“안아주세요. 백호 님…….”

백호가 기억하는 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애써 자제하고 있던 본능이 그대로 둑이 무너진


바닷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장포를 정자 바닥에 펼치고, 그 위에 연화를
눕혔다. 남자는 형형한 눈으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 뒤는 둘 모두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달빛 아래, 검은 밤하늘에 감싸인 채로 두


사람은 마음껏 서로를 탐했다.

연화는 전에 없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백호에게 안겨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두 다리는


백호의 단단한 허리를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몸이 폭력적일 정도로 파고들 때도
연화는 한껏 다리를 열어 기껍게 받아들였다.
여인의 손톱이 백호의 희고 매끈한 등에 붉은 상처를 남겼고, 연화의 몸에는 백호의
손자국이 이곳저곳에 남았다.

“아아, 아아아.”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내벽이 짓눌리고 확장되면서 그녀는 소리를 죽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울었다. 몇 번의 절정이 지나간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연화는 기진맥진해서 결국 백호에게 매달려 그만해달라고 애원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백호가 더 이상의 정욕을 자제하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직 한참 모자랐지만 더 이상
몰아붙였다가는 연화가 아예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흣, 흐읏…….”

숨은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연화의 가느다랗고 연약한 몸이 자기 때문에 무리를


했을까 봐 백호는 조금 안절부절못했다.

중간에 잠시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열중해서 여인의 몸을 배려하지 못했다. 과연 그녀의 흰


피부에는 울긋불긋하게 자국이 잔뜩 남아서 내일 아침쯤 되면 엄청나게 화려해질 것
같았다.

땀 때문에 밤바람이 조금 찼다. 백호는 연화를 자신의 품 안에 넣어 냉기를 차단했다.


정자 나무바닥은 단단하지 않고 묘하게 포근할 만큼 말랑거렸다. 지친 정신에도 그것이
신기해 연화는 바닥을 손톱으로 눌러보았다.

“나무바닥이 부드럽네요.”
“고사한 연리지를 베어 만든 정자란다. 두 개의 나무가 한데 묶여 합쳐진, 기이한
나무지.”

“연리지의 이야기는 인간계에서도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 존재했던 거군요.”

“그래. 인간계에 있다는 연리지는 인간들이 억지로 엮어낸 것들이야. 신령계에도 한


경우뿐이었다.”

백호는 지친 여인의 뺨을 조심히 쓰다듬고 장포를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각 나무를 지키던 신령들 둘이 서로 사랑에 빠져 끌어안고 잠이 들 듯 세상을 떠났거든.


그래서 본체였던 나무들마저 서로를 끌어안은 형태가 되었단다.”

“그랬군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자 했지만, 신이 아닌 이상 영원의 약속은 거짓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신령은 쌓아뒀던 도를 모두 잃고 바닥에 떨어지게 되는데,
두 나무는 추락도 헤어짐도 거부한 채 죽음으로 약속을 이루었다.”

연화는 부드러운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끝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한 사랑의 일화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뺨을 댄 나무바닥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온기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부러워요.’
연화는 속으로 나무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한 몸이 되어 정자를 지탱하고 있는, 누군지
모를 두 신령. 서로가 얽히고설켜 완전한 사랑을 이루어낸.

“신령계에서도 영원의 약속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 거군요.”

그녀는 조금 서글픈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누구도 그녀에게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마저 그 약속이 거짓이라니 슬펐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연화는 백호와의 생활 역시 끝이 있을 거라는 사실에, 그 끝이


아주 빨리 다가올 거라는 사실에 더 서글퍼져 따스한 나무바닥에 뺨을 기댔다. 곁에 있는
백호의 체온이 감사하면서도 외로웠다.

***

인간계의 절반은 청룡이, 또 다른 절반은 주작이 다스린다. 거대한 대륙에 여러 나라가


있었고 특히 청룡의 영토에는 수국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오랜 기간 번영했다. 물이 많은
땅의 특성상 청룡이 유달리 수국을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 따위의 미신을 믿는다는 것이지.”

만희는 비웃었다.

“그리하여 이 왕가의 대가 이 모양으로 이어지게 되었지.”

사촌형을 살해하여 결국 만희가 거머쥔 왕의 자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비단 그만이


아니다. 윗대에서도, 그리고 그 윗대에서도 서로를 죽이는 왕위 쟁탈전은 계속 있어왔다.
언제나 그들이 내세웠던 건 청룡의 가호였다.
“그래서 아무도 그 잘난 사방신의 가호는 받지 못했지 않나. 안 그런가?”

팔척장신인 왕은 이전에 무패의 장수이기도 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신하들은 그의 발치에서 엎드려 움직이지 못했다. 함부로 고개를 들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 그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왕이었다.

만희는 감흥 없는 눈으로 석벽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고발된 일가족이었다. 왕에게 바칠 곡식을 제대로 내지 않고 뒤로 빼돌렸다고
했던가.

보통이라면 관청의 관리가 판결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외유를 나갔던 만희의 눈에 판결


장면이 보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가족 중 스물 남짓 된 딸의 모습이 왕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제대로 치장하지 못하고 수수한, 더럽지만 꽤 청순한 이목구비였다. 만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처연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일가족을 궁으로 들이라 했다.

왕이 가난한 이들을 구해주는가 해서 처음에 기뻐했던 일가족은, 궁의 정원으로 끌려와


석벽에 매달리면서 웃음이 사라졌다.

“나는 가난하고 무능력한 빈민들이 가장 싫다. 심지어 왕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들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
백관이 엎드려 있었으나 누구도 눈을 들지 않았다. 일가족의 죄는 벌하는 것이
타당하였으나 반면 이해할 수도 있는 범주였다.

만희의 폭정 때문에 수국의 많은 백성들이 빈민으로 전락했고 배를 주려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왕에게 올리는 세금과 공물의 부담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굶어죽지 않으려면 곡식을
빼돌려야 한다는 게 상식처럼 퍼질 지경이었다.

만희는 석벽으로 다가가 일가족을 살폈다. 수차례 직접 매질을 가해 전부 피칠갑이 된


상태였다. 여덟 명의 일가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조부는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인지
늘어져서 움직임이 없었다.

“송장을 치워라. 꼴 보기 싫구나.”

왕의 명에 군졸들이 나서 조부의 시체를 치웠다.

가장 매질을 적게 당한 스무 살 언저리의 손녀는 멀건 눈으로 멀어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수레에 실어 던져진 조부의 시신은 살점과 피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만희는 채찍으로 매질하는 것을 좋아했고 팔척장신인 장수의 채찍질은 멀쩡한 젊은이들조차


세 대를 견뎌낼 수 없었다.

금수의 붉은 달

31 화
신음하는 가족들의 사이로 다가가 만희는 손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창백하게 핏기를 잃은
그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만희는 히죽 웃었다.

“그래, 뭐…… 이런 얼굴도 괜찮지.”

완전히 생기를 잃고 절망한 여자의 얼굴. 왕은 그런 표정도 꽤 좋아했다. 그는 손녀의


한쪽 손을 풀어 단단해진 자신의 고간 위로 문댔다.

뜨거운 사내의 물건을 손바닥에 대고 손녀는 처음에 무슨 일인지 모르는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커졌다. 상황을 파악하고 그녀는 신음했다. 폭군은 욕망이 분명한
눈으로 그녀를 능욕하고 있었다.

“왜, 싫으냐?”

“아…….”

“싫다면 말해라. 멈춰줄 수도 있으니.”

자비로운 척하는 말투에 손녀는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하지만 알고 있었다. 만희는 결코
대가 없이 그냥 놓아줄 자가 아니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옵니다.”
채찍질에 소리를 지르던 목은 갈라져 거친 소리가 나왔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
깐 여인을 보면서 왕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법 눈치가 빠른 아이로구나. 만약 그만둬 달라고 했다면…….”

“…….”

“네 부모의 팔부터 잘라 협박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왕의 말에 여자는 몸이 굳었다. 곁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부모도 눈을 크게 뜨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진담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었다.

왕은 폭정으로 유명했고 소문에 의하면 사람을 죽여 그 생살을 씹어먹는다고 했다. 잔인한


손속으로 무패의 장수가 되었고 기어코 사촌 혈육마저 살해해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내.

다만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희생양으로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전, 전하……. 제가 모든 말씀을 받들 테니 저희 가족만은, 저희 가족만은…….”

여자는 덜덜 떨며 애원했다. 비록 조부는 죽었지만 그는 나이 먹고 이미 병이 있었던


노인이다. 나머지 식구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음? 무슨 소리냐.”
만희는 그녀의 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사내의 거대한 손은 언제든 여자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두려움에 떨리는 그녀의 어린 얼굴을 보면서 왕은 입가를 올렸다.

그는 천천히 여자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사내의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흠칫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에게서는 오래된 몸냄새와 흙냄새가 났다. 비위가 상하면서 동시에 구미가
당기는 이상한 냄새다.

만희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가슴을 한


손에 잡고 주물렀다. 나이가 어려 제법 탐스럽고 탄력 있는 유방이다. 비록 피부는 먼지와
흙으로 더러웠지만 가지고 놀기는 좋은 몸이었다. 경험이 없는지 움찔거리는 몸이 더
입맛을 돋웠다.

“네 가족이 죽더라도 너는 내 말을 듣는 것이다. 어찌 내게 조건을 달지?”

“조, 조건이 아니오라……! 저는, 그저 전하의 자비를 바라옵고…….”

“그게 조건이지. 왜 내게 자비 따위를 바라는 것이냐. 네가 대체 무엇이기에 내게 없는


자비를.”

만희는 웃었다.

슬슬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칼을 박는 것처럼 뇌를 들쑤시는 고통. 그는


안구를 꾹 눌렀다. 안압이 올라가 눈 안의 혈관이 터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여자는 목을 움츠렸다. 방금 웃던 왕은 눈을
누르면서 혼자 뭔가를 지껄였다. 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채찍에는 가족들의 살점과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두통과 함께 여자에 대한 입맛도 싹 사라졌다.

“아무래도 너희를 죽여야 내가 좀 기분이 나아지겠어.”

만희의 말에 일가족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채찍을 들고 아버지의 앞에 선 왕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가만 올렸다. 기이하고 추한 얼굴이었다.

“전, 전하……! 제발!”

“목숨만은, 전하!”

“시끄럽군.”

일가족이 일제히 터뜨린 애원에 만희는 얼굴을 구겼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손목만큼 굵은 채찍을 휘둘렀다.

“크헉!”

짜악 하는 잔인한 소리와 함께 살점과 피가 흩날렸다. 아버지의 비명이 허공을 울렸고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채찍은 연달아 휘둘러졌고 네 번쯤 뒤에 아버지는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몸 전체가 피투성이였다.
“인내심이 없어.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대체 너희들이 내 영토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만희는 눈을 희번득거리며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 때 엎드려 있던 백관들 중 한 명이 일어났다. 왕의 앞에 들 수 있는 백관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직위가 높지 않은 하급 관리였다.

“전, 하……. 부디 이 가여운 자들에게 용서를.”

비교적 젊은 나이의 관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왕의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목숨을 건


용기였다.

“비록 이 가족들이 죄를 지었다 하나, 이미 그 일을 주도한 노인이 벌을 받아


사망하였고……. 일가족 역시 매를 맞는 벌을 맞았으니 자비를 베푸시길 말씀 올립니다.”

하도 간만에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가 나타나 만희는 조금 놀라워서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는 엎드린 관리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넌 뭐냐.”

“저는 6 품 사관으로 이름은…….”

“아니, 네놈의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라. 네가 대체 뭐기에 내 앞에 허락도 없이 나서서


말을 꺼내냐는 것이다.”
만희는 불쾌함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직언을 하는 관리는 일전에 모두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경고도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관리의 비명이 터졌다. 갑자기 시작된 신하에 대한 매질에
백관이 움찔했으나 누구도 나설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다면 매질의 대상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온통 관리의 비명만이 울리던 때 부들부들 떨며 울던 가족들 중 손녀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이 간악한 자! 왕이랍시고 사람들을 쥐어짜서 제 배만 불리는 자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다니고!”

“오호라.”

이제야 좀 재미있어진다. 만희는 히죽 웃으면서 이제 피투성이가 된 채찍을 끌고 일가족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여자의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중생들을 보살피시는 신과 보살과 부처께서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게다! 청룡께서 널 그냥


두지 않으실 거야! 살아서, 아니면 죽어서라도 네 벌을 면치 못하리라. 어찌 왕이라는
자가 이리도 잔인할 수가 있는 것이지!”

“신과 보살과 부처라.”

왕은 가볍게 웃었다. 그의 뒤에서 매질을 당한 관리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고, 눈앞의 일가족은 눈물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력한 자들. 이리도 힘이 없으면서 그저 신에게 기댄단 말인가.

그는 놀리듯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구랬지?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았다던 여자가 있었지. 그 계집도 내 손에 죽었어.


대체 이 세상에 어떤 신이나 보살이 네놈들을 보살펴준다는 말이냐.”

만희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불쌍하고 가엾은 자들은 머리까지도 모자라, 고문하고


괴롭히기에 아주 재미가 있었다.

“수국을 가호하는 신 청룡이라, 나는 그자조차 믿지 않지만 아무런 벌도 내려오지 않았지.


그 대신 그를 믿는 너희가 이렇게 내 앞에서 벌을 받고 있지 않느냐.”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여자는 주춤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직 스물 정도밖에 안 된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보며 왕이 혀를 찼다. 저토록 어리석고 약하면서 뒷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계집이라니.

순간 두통이 더 극심하게 엄습했다. 신경을 전부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에 만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이를 갈면서 으르렁댔다. 갈 곳 없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왕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잠깐 사이 그의 눈은 마치 피가 차오른 듯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마치 팔척장신의 귀신 같은 모습에 그를 본 모두가 숨을
멈췄다. 그는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비틀거렸다.

“죽여, 다 죽여라. 전부 다 사형장으로 끌고 가!”


“전, 전하.”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아니면 내 손으로 네놈들까지 전부 처형시켜 줄까!”

악에 받친 채 사내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그대로 석벽 위로 검을 휘둘렀다. 일가족은


미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일곱 명분의 피가 석벽 위로 튀었고, 그들의 몸 위로
만희는 셀 수 없이 많은 칼질을 했다.

마치 고깃덩이를 짓이기듯 희생자들을 죽이는 것을 보며 백관이 두려움에 떨었다.

피를 뒤집어써 악귀 같은 몰골로 만희가 웃었다. 이제 두통은 더욱 심해져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귓가에 이상한 환청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광소를 터뜨렸다. 하늘은 흐려 어두웠고 곧 비가 쏟아질 모양새였다. 만희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이성적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점점 더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

“깨었느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방이 환했다. 인간계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늦잠이라고는 몰랐던


터라 연화는 이럴 때마다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곁에서 백호가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어서 더했다.

“죄송해요, 또 늦잠을 자버렸네요.”


“뭘 죄송해. 남는 게 시간인데 이 정도 자는 거야 어떻다고.”

백호는 씩 웃었다. 수줍어 하는 연화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늦은 아침의 밝은 햇살 아래에서 연화는 항상 더 아름다웠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예뻐


보였지만 이토록 밝은 공기 속에서 그녀가 더 잘 보여서 좋았다. 투명한 아침 햇살과
연화의 희고 맑은 피부가 잘 어울렸다.

금수의 붉은 달

32 화

“아……. 옷이.”

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잤다. 연화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백호는 심술궂게 이불을 확 들추었다. 꺅, 작게 비명을 올리며 연화가 다시 이불을 잡아


들이려 했지만 그가 멀찍이 던져 버렸다.

아침 햇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나신이 눈부셨다. 간밤에 그가 물고 빨아 난 붉은 자국들을


제외하면 보드랍고 흠 하나 없는 흰 피부였다.

연화는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슴을 가리고 반쯤 엎드렸다.


“이, 이불 주세요. 아니면 옷이라도.”

“왜? 어차피 서로 다 아는 사이에.”

“백호 님, 그래도…….”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제법 강하게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며 백호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엎드린 연화의 등 뒤로


자신의 몸을 겹쳤다. 그 역시 장포 하나만을 입었던 터라 그것을 벗어버리자 맨몸이
되었다.

“백호 님!”

“그래, 그래.”

나 귀 안 먹었다, 하면서 그가 손을 연화의 밑으로 넣었다. 바닥에 눌린 가슴을 손으로


쥐어 부드럽게 만지면서 손톱 끝으로 유두를 긁었다.

“흣!”

예상치 않게 예민한 끝에서 올라오는 쾌감에 연화가 신음하면서 앞으로 고개를 떨궜다.
“백호 님, 정말이지.”

“뭐 어떠냐.”

“이렇게 밝은 데서는…….”

“부끄러워 말아라. 내 앞인데 무슨 상관이겠느냐.”

연화의 뺨과 귓가에 입을 맞추며 백호가 그녀의 엉덩이를 쥐고 문질렀다. 그녀의 긴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져 넘겨 민감한 뒷목을 드러내고 이빨을 세웠다. 뒷목에서부터 경추,
척추를 따라가며 도드라진 뼈마디에 이빨 자국을 새겼다.

“흐, 흐읏. 흐응……!”

하나씩 그녀의 근육과 뼈의 결을 확인하며 내려갈 때마다 연화의 몸이 흠칫거리며 떨렸다.

무릎을 세우게 하고 그는 연화를 달랬다. 그녀는 밝은 아침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의 앞에서 엎드린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했지만 결국 백호의 말대로 했다.

허벅지를 좀 더 넓게 벌리게 하고 그는 연화의 동그랗고 흰 엉덩이와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그녀의 분홍색 입구가 보였다.

아직 충분히 젖지 않은 길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애무하며 백호가 그녀의 등과 허리에


입술을 문댔다. 뜨거운 남자의 입술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연화가 흠칫거리며 놀랐다.
평소보다 더 민감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밝은 환경 때문일 것이다.
“아프면 말하거라.”

손가락이 느리게 삽입되었다. 그사이 조금 더 젖은 밑은 수월하게 백호의 손가락 두 개를


받아들였다. 따스하고 촉촉한 연화의 내벽이 손가락에 감겨들어 백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처럼 그를 품고 받아들여 주는 연화의 몸.

“빨리……. 으, 응…….”

연화가 베개에 얼굴을 박고 뭔가 웅얼거렸다. 베개에 눌려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백호는 그녀의 입가에 귀를 댔다.

“뭐라고?”

“……빠, 빨리 해주세요. 부끄러우니까 자꾸 보지 마시고……. 으응…….”

연화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남자는 자신이 들은 재촉에 귀를 의심했다. 물론 이유는 수줍어서지만, 빨리 해달라는 말을


맑은 정신에 연화에게서 듣게 되다니. 백호는 뭔가 아주 뿌듯해졌다.

그는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안고 고개를 돌려 입술을 찾았다. 연화의 작은 입술이 그를


반겼다.

“그래,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게 되고. 빨리 해주마. 내 반려의 말인데 그조차 못


들어줄까!”
“아, 앗……!”

만족스러운 백호의 말에 그게 아니라고 연화가 항변하고 싶었지만 곧 안쪽을 파고들어 온


백호의 양물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양물이 입구를 빠듯하게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은
지금까지도 도통 익숙해지질 않아서, 그녀는 압박감에 입을 벌리고 학, 하악 허덕였다.

고개를 숙이고 감각을 버티는 연화의 옆으로 백호의 긴 머리카락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연화의 뺨에 입을 맞추고 몸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가뜩이나 힘겨운 그의
양물이 더 깊이 들어와 완전히 자리 잡았다. 아랫배의 내장이 전부 밀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에 연화는 힘들게 숨을 내쉬었다.

“하, 흣, 흑…….”

뒤에서 안기자 삽입은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백호는 연화가 적응할 수 있도록 느린 속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꽉 잡아 자신의 품 안에 넣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몸을
보고 있자니 만족스러운 정복감이 차올랐다.

그러지 않아도 연화는 이미 그의 반려인데, 새삼스럽고 치졸하게도 자신의 가슴을 채우는


이 풍족한 감각은 대체 무엇인지.

“응, 으응……. 흡, 흐…….”

연화는 밝은 햇빛과 열린 창문이 부끄러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벌어진 허벅지


위로 애액이 흘러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
자꾸만 연화의 몸이 낮아졌다. 팔꿈치도 미끄러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런, 역시나 체력이 못 따라오는군.”

웃음기 어린 백호의 말에 연화는 이제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대체 누가 신의 체력에


뒤따라간단 말인가. 연화 자신은 남자를 모르던 쑥맥이긴 했으나 그의 밤일이 절대 인간의
평균치와 같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신 백호의 머리를 잡아당겨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남자가 덮어 온 등은


묵직하면서도 편안했고, 이 밝은 햇빛 아래서 그는 지독히 사랑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잠시 놀란 듯 백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더 깊이 입술을


맞물리며 연화의 모든 숨을 빼앗을 듯 그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허리 밑의 움직임도
격해졌다.

“아, 흐……응……! 아앙!”

호흡이 모자라 허덕이면서 연화가 얼굴을 베개에 묻고 신음했다. 안에 들어온 뜨거운


양물이 배꼽 있는 부근을 마구 짓이기며 박혔다. 쾌감이 뇌리를 점령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백호의 물건을 품고 조이면서 연화는 침대의 이불을 쥐어뜯었다.

안에 있는 모든 피부가 성감대가 된 기분이었다. 양물이 움직일 때마다 자극되는 모든


부분이 자극적이다.

“으, 응! 으응! 흑!”


그녀는 비명을 삼키면서 목울대를 울렸다. 과한 쾌락에 눈물이 흘러내려 코끝으로
떨어졌다.

쾅쾅 박히는 양물이 가장 안쪽까지 뭉갰다. 연화는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앞으로


넘어졌지만 백호의 손이 잡아챘다. 그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쉬며 그녀의
귓가를 물었다. 아플 만큼 이빨로 귓불을 잘근거리며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으, 백, 백호 님……! 아아앙!”

죽을 것 같아서 그녀가 울어댔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백호의 양물이 빠르게 출입하며


접합부에서 애액이 거품이 되어 찌걱거렸다. 힘에 겨운 연화의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짧은 비명과 함께 결국 연화가 먼저 절정에 도달했다. 온몸에 잔 경련이 지나갔다. 그녀가


벌벌 떨며 절정을 맞이하는 동안 내벽은 잘게 백호의 양물을 씹어댔고, 백호 역시 정액을
터뜨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연화를 품 안에 숨이 막힐 정도로 안으며 자신을 쏟아내었다.

“…….”

연화는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끌어안은 양팔의 압박감이 안정감을 주었다.


따뜻하고 너른 가슴, 언제까지고 기댈 수 있을 듯 단단하고 부드러운 품.

아침 햇살 속에서 그녀는 나신의 부끄러움조차 잊은 채로 백호에게 기대 안겼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누각으로 나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2 층의
누각에서는 드넓은 영토가 한눈에 보였다.

그녀는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호는 어디로 갔는지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았다.

해는 중천을 지나 오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몸이 노곤했다. 하루 종일 백호에게 시달리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으니 당연했다. 다리 사이가 익숙한 통증으로 욱신거리고 온 몸이 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다른 남자도 그런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백호는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연화의 몸 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는 남자의 잇자국과 손자국으로 거의 빈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호접은 시녀들에게 연화의 시중을 맡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백호의 궁은 너르고


고요했다.

신령들은 전부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을


지녔고, 동시에 공간을 넘어 이동할 수 있었다. 간혹 그녀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허공중에서 들렸다가 사라지곤 했다. 인간의 상식으로라면 유령이나 귀신으로 부르는 것이
어울릴 법한 존재들이었다.

이제 그녀는 백호의 궁에 익숙해져 있었다. 너무 넓어서 아주 한정된 길만 알 뿐이지만


연화는 이 넓은 누각으로 나올 수 있는 것만 해도 좋았다.

백호는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연화를 끌어안고 지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신랑이었다. 백호는 다정다감하게 연화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입 안에 이것저것
넣어주었다.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눈 또한 맞춘다. 그의 물빛 눈동자가 이토록 익숙해질
줄 연화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좋은 분이야, 정말…….”

애초에 공양으로 몸을 바쳤으나 연화는 백호의 품 안에서 행복했다.

양어머니는 그녀를 잘 보살펴주었지만 보호를 해주지는 못했다. 남자의 너른 품은 그녀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절대적인 안정과 안온한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연화를 내려다볼 때, 백호의 물빛 눈동자는 아주 부드럽게 온기를 띄우고 있었다. 정말


다정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허나 묘우 님의 말씀을 잊지 말자.’

시시때때로 연화는 묘우의 말을 되새겼다. 그가 백번 맞았다. 천하의 사방신이다. 세상을


넷으로 나누어 관장하는 가장 귀한 존재들.

연화는 천애고아로 천민 부락에 갇혀 있던 몸이고 심지어 공물을 훔쳐 달아나던


죄인이었다. 자비로운 백호의 애정에 기대어 살아남았을 뿐 결코 착각하면 안 되는 일이다.

금수의 붉은 달

33 화
‘언제쯤일까, 내가 떠나는 시간.’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지곤 한다. 연화에게 백호는 가장 고마운 존재였고 또한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온 남자였다. 하지만 절대로 그녀 자신이 마음에 굽힐 수 없었다. 설사 백호가
너른 자비심으로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묘우가 그랬다. 사방신의 질서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발 아래로 사박거리며 발소리가 났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상쾌하고 청량한 공기가 폐 속을 파고들었다. 호접은 이곳이


인간계와 물리적 장소는 같지만 신령들의 차원이라는 말을 했다. 연화와 마을 사람들이
살던 곳과 같은 산맥이었지만 여기서 나가려면 신령의 도움이 필요했다. 백호의 허락이
없다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공기가 찬데 나와 있구나.”

소리도 없이 다가온 따뜻한 손이 연화의 어깨를 감싸 쥐었고 그녀는 조금 놀라서 몸을 움찔


떨었다. 놀라는 작은 동물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눈을 빛낸 백호가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커다란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신령들에게는 적당히 좋은 날씨지만 네게는 좀 차가울 거야. 겨울은 지났지만 바람이


차다. 옷을 두텁게 입고 다니거라.”

남자는 짐짓 그녀를 타박하면서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던 푸른 마괘(馬褂, 조끼의 일종)를


벗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의 몸에는 종아리까지 오던 마괘를 걸치자 연화의 가느다란
몸이 폭 감싸여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발밑으로 옷자락이 조금 끌려 연화는 마괘의 끝을
쥐어 손에 감았다.

“저는 이런 날씨가 좋습니다. 차갑고 상쾌하고요. 제가 보던 것과 같은 산인데 전혀 다른


장소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연화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익숙해진 그녀는 백호의 몸에 기대서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얇은 천옷 하나만을 입은 남자의 몸은 너르고 따스했다.

“그래. 이것이 내 영토다. 같은 장소라도 신령들이 사는 차원과 인간들의 차원, 저승의


주민들이 사는 차원이 모두 다르지. 하지만 일단 이 산속에 들어온다면 내 영토에 발을
딛는 것이다.”

백호는 연화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여전히 붉은 달은 위세를 떨쳤고 그는 발정기였다.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에 신은 완전히 몰두해서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참 작고 가느다란 몸이야.”

남자는 녹아내릴 듯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을 잡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연화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난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 커다란 산주의 품에 안겨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허벅지 쪽으로 백호의 커다란 양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연화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조금 서글퍼졌다.

‘어떤 여인이었더라도 백호 님께는 비슷했겠지.’

그리고 세상 어떤 여인이라도 백호를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적인 매력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잠자리에서도 다정한 사내였다.
한 달이 기한이라 하였다. 벌써 스무 날이 넘게 지났으니 며칠 남지 않았다. 연화는
물끄러미 백호의 강인한 턱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화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백호 님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살아가시겠지.’

바람이 불어 머리를 날렸다. 연화는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들어 백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쩐 일이냐? 밖에서는 수줍다더니.”

남자는 크게 웃으면서 연화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깊이 했다. 입술을 열고 그 안 점막을


깊숙이 핥는 입맞춤에 연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른 이의 뜨거운 숨결이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질척하게 목구멍 안까지 핥을 기세로 밀려드는 백호의 혀는 이제
쾌감이었다.

곧 그의 손이 연화의 허리를 감싸 안고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연화는 화들짝 놀라서


그의 손을 막았다.

“배, 백호 님, 여기는…….”

“왜?”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백호 님!”


“보긴 누가 보겠느냐,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신령들은 모두 물렸으니 염려 마라.”

그래도 손을 밀어 넣는 남자를 말리면서 연화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침의 누각이다.


아무리 신령들을 물렸다고 해도 완전히 개방된 공간에서 관계를 갖는 건 연화의 상식선에서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백호의 손을 부여잡고 그녀는 허겁지겁 그를 밀어냈다.

“이리도 수줍음이 많아서야.”

백호가 투덜거렸다. 짐승들의 수호자, 초목의 지배자인 그는 사방신이지만 그 본성이


인간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웠다. 인간들이 교미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해는
하지 못한다. 하물며 지금까지 자신과 연화는 수를 셀 수도 없이 교합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직까지도 수줍음을 드러내는 그 부분이 더 귀엽기도 해서 그는 웃음을 띄고


연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백호 님!”

“아, 그래. 날 부르지 않아도 여기 있어.”

백호는 2 층 누각 난간에 발을 대고 높이 뛰어올랐다. 연화는 세찬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이 백호의 목에 바짝 매달렸고,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서워하지 마. 일전, 더 높이 날지 않았었느냐.”


눈을 꽉 감았던 연화는 한쪽 눈을 깜박이며 떴다. 몸은 느리게 강하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온기를 담은 공기가 둘의 몸을 받쳤다. 연화는 하늘을 유영하는 기이한 감각에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래, 이제 괜찮다는 걸 알겠지?”

백호가 크게 웃었다. 그의 흰 장포가 바람에 날려 허공에 두둥실 떴다.

남자는 품 안의 여인을 부드럽게 품어 차가운 공기에서 보호하면서 느릿하게 하늘을 날아


건너편 산으로 날아갔다. 산맥 봉우리 근처까지 가서 빽빽한 나무들 틈 사이로 백호의 몸이
내려앉았다. 흙먼지조차 나지 않는 가뿐한 움직임이었다.

품 안에서 고개만 내밀어 하늘을 구경하던 연화가 조심스레 그의 팔 안에서 내려섰다.


백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무 몇 그루의 뒤로 돌아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연화가
탄성을 질렀다.

산꼭대기에 가까운 이곳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광활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건너편 산의 돌아앉은 자리라 누각에서는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놀라워서 연화는 입을 벌렸다. 오전의 햇살이 쨍하게 빛나며 호수의 수면을 비췄다.
하늘만큼 푸른 그 수면은 잔물결만 있을 뿐 고요했다.

“이런 곳에 호수가 있다니…….”

연화는 놀라움에 말을 더듬었다. 눈을 크게 뜬 그녀는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아름답지. 이 호수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수하를 탐내는 청룡이 자꾸만


자신의 영토라고 해서 골치 아플 정도야. 아름다운 별장을 가지고 싶은 게지.”

백호가 투덜거렸다. 물을 다스리는 청룡의 입장에서 욕심을 낼 만한 호수였으나 백호 역시


빼앗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치면 물 밑의 어두운 대지는 현무의 것이겠다. 그
밑에서 자라나는 초목들은 전부 백호의 것이겠고.

그는 상제의 앞에서 청룡이 호수의 소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턱도 없는 소리 말라며


내치고는 했다.

연화는 호수의 기슭으로 다가갔다. 잔잔한 물결이 고운 모래 위를 천천히 드나들었다.


그녀의 분홍색 꽃신 아래로 모래들이 밟히는 소리가 바삭거리며 났다. 호접이 특별히
입혀준 고운 붉은 빛의 치마가 바람에 뒤로 날렸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호수의 물을 손에 담았다. 손바닥 안으로 맑은 물이 고여 찰랑였다.

“마음에 드느냐?”

백호가 곁에 와서 함께 쪼그려 앉았다. 이 귀여운 여인이 하는 짓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커다란 다갈색 눈도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손을 기울여서 물을 흘렸다. 산등성이의 바람에 물방울이 흩날렸다.

그는 그녀의 콧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연화는 따뜻한 입술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그들의 뒤쪽 나무 사이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요?”

고요한 공간에 울린 짐승의 소리였다. 백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보나마나 다친 토끼나 다람쥐나, 뭐 그쯤 아니겠느냐. 그냥 두거라.”

“하지만요.”

작은 짐승의 소리가 분명했다. 동정심을 이기지 못한 연화는 잡는 그의 손을 물리고 조심히


나무 수풀 근처로 다가갔다. 백호의 말대로 그곳에 다친 토끼가 쓰러져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피가 쏟아지는 상처가 상당히 커서 허벅지 쪽이 완전히 갈라져 붉은 근육이 드러나 보였다.


연화는 놀라서 입을 가린 채 내려다보았다.

“삵에게 물린 게지. 용케도 도망쳤나 보군. 본래 한 끼니 거리도 안 됐을 텐데.”

가까이 다가온 백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온갖 짐승들의 왕인 그는


지겹도록 보는 광경이었다. 적자생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당연한 숲의
세상.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연화를 보면서 백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관 말아라. 저 녀석의 목숨이 여기까지인 것이다.”


“잠시만요, 백호 님.”

인간들이란 동정심이 지나치게 많고 약하다. 게다가 약사여래의 힘을 받은 이 여인은


일반적인 인간들보다 더 감정적으로 연약했다.

“연화야.”

“잠시만…….”

연화는 무릎을 꿇고 토끼의 위에 손을 얹었다. 곧 노란 빛이 그녀의 손에서 솟아나왔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어 발하는 치유력이었다.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곧 연화가 손을 떼어냈다. 허벅지 근육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벌어졌던 상처는 말끔히


봉합되어 있었다. 토끼는 팔딱 뛰어 일어나서 연화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백호의 눈치를
흘끔 살피던 토끼가 곧 폴짝폴짝 뛰어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연화는 옅은 미소를 띤 채 토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던 건 알고 있었으나 꽤 강한 힘이구나. 이건 처음 알았는걸.


치유력을 밖으로 발할 수 있을 정도라니.”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보살들의 가피란 너르지만 얕아 이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인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간 연화를 가까이 두며 가피가 상당히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만족스러우냐?”

금수의 붉은 달

34 화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가슴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연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은 그리 기껍지 않았다.

“다친 토끼 따위는 그대로 먹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내가 호랑이인 것처럼, 그


녀석은 토끼지.”

“……아.”

연화는 찔끔했다. 백호는 금수의 왕이다. 그가 지키는 세계의 법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 그대로의 법칙이 그의 수호 아래 돌아간다. 자신의 법칙을 눈앞에서 거스르는 꼴을 본
것이 그에게 결코 기쁜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다친 짐승을 발견해도 그대로 두어라.”

“…….”
남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약사여래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약자가 있다면 돕고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연화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능력을 지닌 이상, 힘닿는 데까지는…….”

“사방신은 약사여래의 능력을 좋아하지 않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

대대로 보살들과 사방신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상제가 다스리는 꽉 짜인 이 세계의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방신의 역할에 비하여, 깨달음을 얻은 개별자들인 보살들은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예외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사여래는 그 치유의 능력 때문에 적자생존의 백호와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현무의


반대편에 서 있는 보살이었다.

백호는 혀를 찼다. 적자생존의 원칙을 비트는 치유력을 눈앞에서 보고 그의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설마 여래의 가피가 연화의 안에 이 정도까지 깊이 닿아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지만 앞으로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백호는 혀를 찼다.

“하여간 보살들이란.”
저승사자가 와도 그 멱살을 비틀어 영혼을 내리게 만든다는 약사여래. 그의 능력은 현무가
가장 싫어했다. 지하와 저승의 지배자인 현무는 자신의 주민이 될 영혼을 자꾸 끌고
이승으로 내려버리는 약사여래가 마땅할 리 없었다. 현무만큼은 아니어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수호하는 백호 역시 그를 싫어했다.

“앞으로는 그 능력을 쓰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여라.”

“백호 님.”

“……붉은 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들, 너는 나의 반려이니라. 백수의 왕 백호의 반려가


다친 토끼를 치유해 준다 하면 세상 사람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게다.”

연화는 가만히 백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녀를 대하는 데 있어,
처음으로 보는 불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저는 이렇게 살아왔고…… 또한 살아갈 것입니다. 어머니의 유지가 그러했습니다.”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은 자였으니 당연했겠지.”

백호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시선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방신으로서


그의 본능은 약사여래의 힘을 반기지 않는다. 자연법칙에 따라 당연한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 고약한 치유의 보살이 그녀에게 먼저 힘을 주었을까.

“앞으로 힘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겠지.”


“…….”

“알겠다. 네 뜻을 존중하마.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궁까지 다시 날아가는 동안 백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연화는 자신이 잘못한 것일까


고민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치유의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어서일 테다. 그 힘을 쓰지 않는 건 자신을 태어나게 한 섭리에
위배되는 거라고, 연화는 확고하게 생각했다.

비록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백호는 그녀를 안고 궁으로 날아


들어가 너른 복도에 안착했다.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안고 사실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의 뒤쪽에 묘우가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던 호접이 그를


발견하고 부르려다가 백호와 연화의 뒷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묘우의 얼굴은 다소
못마땅했다. 그 곁으로 다가온 호접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상 풀어. 좋은 짝을 찾으셨으니 다 좋은 거 아닌가.”

“좋은 짝이라……. 인간 여자가 좋은 짝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연화 님에게 해를 입히려던 뱀의 일족이 벌을 받은 것을 보지 못했어? 게다가 이미


신령들 앞에서도 반려로 연화 님을 내보이셨어. 안 될 것은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묘우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호접은 가끔 인간과 다른 세계를 불신하고 싫어하는
묘우의 성격 탓에 두통이 올 때가 있었다.

“백호 님이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시지 않는가. 연화 님도 괜찮아 보이고.”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은 자가 사방신의 신령계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묘우는 고개를 저었다. 백호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것이다. 호접이 한숨을


쉬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더욱 어울리지. 약사여래는 보살들 중에서도 그 힘이 사방에 뻗은


자, 좋은 짝이 될 게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백호 님이 어찌 판단하시든 난 반대다.”

묘우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호접은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있겠지만, 묘우……. 백호 님의 반려를 결정하는데 네 의견은 필요하지 않아.”

“아니, 나는 그분의 수호령으로 반대 의견 정도는 낼 수 있어. 붉은 달이 지면, 연화 님은


인간계로 돌아가야 해.”
호접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묘우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할 때면 여우답게 교활하고 교묘했다. 그가 연화에게 이렇게까지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니. 조심해야 할 듯했다.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묘우.”

나비의 날개를 단 여인은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 주의를 주었다.

“뱀의 일족의 수장, 사혈이 벌을 받은 것을 떠올려라. 백호 님은 자신의 반려에 손대는 걸


허락하실 분이 아니다.”

“설마, 호접. 어찌 감히 내가 백호 님의 반려를 넘보겠어?”

묘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여우답게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였다.

***

잠시간 백호는 연화에게 뜸해졌다. 둘이 있어도 말수가 적거나 아니면 그저 몸을 쓰다듬는


정도에서 그쳤다. 연화는 그것이 아마도 호숫가의 일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할 수도 없어 그녀는 초조히 기다릴 뿐이었다. 백호의 심기가 풀리기를.

점심을 먹고 정오가 지났을 즈음에 백호가 훌쩍 궁의 회랑으로 뛰어올랐다. 회랑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호접과 묘우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백호 역시
올라온 자리에서 수하 둘을 모두 볼 줄은 몰랐던지 잠시 놀란 눈이 되었다가 턱을
쓰다듬었다.

“흠, 둘이 뭘 하고 있는 거냐? 일은 안 하고.”

“식사를 조금 늦게 마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묘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호접은 미소를 지었다. 백호의 몸에서 향긋한 풀내가 온통
풍겼다. 발에 신은 장화에도 풀물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또 뒹굴다 오신 건가요? 설마 인간계에?”

그녀는 다소 야단치는 것처럼 말했다. 백호는 유모처럼 구는 호접의 기세에 찔끔해서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찾을 게 있어서 다녀왔어. 연화가 일전 뭘 떨궜다기에…….”

말끝에 백호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얼른 다물었다. 그는 눈을 조금 굴렸고 묘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접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연화 님이 인간계에 뭘 떨어뜨리셨다구요?”

“아니, 글쎄, 그냥…… 그녀에게 줄 물건이 있어서.”

백호는 짐짓 뒷짐을 지고 별일 아닌 척했다. 하지만 그의 뺨이 발갛게 홍조를 띄우고 있는


것을 호접과 묘우는 눈치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백호가 멀어지는 뒤로 호접이 중얼거렸다.

“방금, 얼굴 빨개지셨지?”

“그렇군. 내 참.”

묘우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는 결코 연화를 좋게 볼 수 없었다. 호접은 알지


못하나, 뱀의 일족을 들쑤셨던 것은 묘우였다.

“너 너무 못마땅한 거 티 나는 얼굴이야.”

호접이 곁에서 주의를 주었다. 묘우는 백호를 제외하면 신령들 중 가장 오래 산 고대의


여우였다. 인간으로 둔갑해 숨기고 있지만 꼬리도 당연히 열 개였다. 그는 백호가 없을
때는 신령계를 대신 다스리기도 했다.

“못마땅한 건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

묘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백호 님의 반려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한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 말했어, 묘우.”

“길짐승과 날짐승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백성들의 마음도 조금쯤은 생각을 해주셔야지.”


“백성들 중 백호 님의 반려가 인간이라는 것에 심려하는 자가 그리도 많은가? 신령들도
연회 이후로 다 받아들이고, 불만을 가진 것은 묘우 너 하나뿐인 거 같은데.”

호접이 투덜거렸다. 그녀가 보기에 연화는 충분히 백호의 반려가 될 만한 여인이었다.

연화는 몸가짐이 고상하고 차분했다. 함부로 신령의 시녀나 시종들에게 하대하고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합격점이었다.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언동은 호접이 보기에도 좋았다.
백호가 연화에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호접은 꽃가루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르는 나비의 신령, 두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그녀의


눈에 아주 투명하게 보였다. 시작은 공물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하나, 생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다혈질의 신과 수줍은 여인은 서로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이제는 갈라놓기
어려울 정도였다.

“훼방이나 놓지 마라. 두 분은 아주 잘 어울리니까.”

호접은 연애에는 젬병인 묘우를 보면서 턱을 들어 올렸다. 으스대는 투의 말에 묘우도


웃어버렸다. 하지만 웃음과는 반대로 묘우의 마음은 어두웠다.

금수의 붉은 달

35 화

백호는 아침에 인사를 하러 왔지만 여전히 조금 데면데면했다. 호숫가에서 그녀의 치유력에


보였던 반응 때문에 연화 역시 조금 어색해졌다.
백호는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일과가 있다며 나갔고, 하루 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도 그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붉은 달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가 인간계로 돌아가야 할 시기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시가 소중하고 아까운 이때,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게 될 줄이야.

노을이 지는 저녁에 연화는 상심하여 궁의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앞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에 면하고 있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궁궐이었으나 뒤로는 짧고 보드라운 풀밭이
쭉 이어져 외길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저 멀리 노을이 천천히 지며 온통 붉은색으로 허공을 물들이고 있었다. 곧 달이 뜰


것이다. 연화는 잔디 사이 작은 야생화들을 찾으며 꽃을 세다가 무릎을 톡톡 치는 작은 흰
발에 깜짝 놀랐다. 코끝이 동그랗고 아주 자그마한 토끼였다.

“세상에, 너 여긴 어떻게 알았니?”

연화는 놀라워하면서 토끼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토끼는 코를 씰룩이며 그녀에게 안겼다. 따스하고 포근한, 자그마한 생명체가 너무
귀여워서 그녀는 토끼를 안고 그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었다.

“너무 귀엽다, 너.”

여인은 토끼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처럼 뛰어다닐 수 있다면, 내가 어머니 손수건이라도 좀 찾으러 다닐 텐데.”


인간계로 돌아가야 한다 하니 그 숲 어딘가에 떨어뜨렸을 손수건이 생각났다. 비단손수건은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만약 제사를 무사히 지냈다면 아마 중앙으로 올라가 왕의 창고 어딘가에 쑤셔 박혔을


것이다. 그리고 연화 자신은, 백호와 만날 일이 없었겠지.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도.’

연화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숲속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몰라도 아마 짐승이 물어가


찢어버렸거나 했다면 아예 손수건 자체가 세상에 없는 거니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연화에게는 그 손수건이 유일하게 모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백호와 헤어질 걸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고통이 없었을까.

“지금 그냥 걸어서라도 한번 가볼까……. 멀리는 말고, 그냥.”

마음이 허해져서 연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 역시 알고 있다. 인간계와 신령계는 나뉘어


있으니 그 숲 근처에 간다 한들 손수건을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연화는 단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하고 슬퍼졌을 뿐이었다.

토끼가 그녀의 발치를 뛰면서 발등을 콩콩 찍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긴


치맛자락을 물고 뒤로 끌어당겼다. 연화는 애를 쓰는 그 작은 생물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지 말라고? 에이, 길 아니까 괜찮아.”


연화는 웃으면서 토끼를 밀어내었지만 작은 동물은 기어코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길게 갈 건 아니야, 산책이야 산책.”

자꾸만 앞길을 방해하는 토끼에게 말을 걸면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꽃길이 절벽 아래로
쭉 이어져 있어 향기롭다. 그녀는 야생화를 구경하면서 외길을 따라 내려갔다.

정말로 멀리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노을이 져서 사방이 어스름했고 연화는 그리 간이


크지 않았다. 실제로도 길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싼 기암괴석과 비단 같은 녹색 풀밭에 정신을 뺏기고 한참을 걸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아주 가파른 각도로 내려오는 외길을 한참 걷자 상당히 많이 내려온
기분이 되었다.

길은 절벽을 둥글게 둘러서 그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꺾어져 절벽에 면한 길로 들어서자


그늘이 져서 상당히 추웠다. 양지가 아닌 음지로 들어서자마자 연화는 소름이 끼치는
기분에 어깨를 감싸 쥐었다.

원래의 신령계는 볕이 따뜻한 곳이다. 지금처럼 해가 지고 공기가 차가워지더라도 백호의


영토답게 양기가 충만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땅. 추워도 춥지 않은 신기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연화는 자신의 몸을 감싼 공기가 무척 안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고


느꼈다. 일반인이라면 그저 기분이 좋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은
연화에게는 훨씬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궁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 때였다. 연화의 어깨를 갈퀴 같은 손아귀가 잡아챈 것이.

“꺄악!”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녀는 뒤로 넘어졌다. 얼음장 같은 손아귀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연화를 끌고 정체 모를 존재는 밑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목의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아서 연화는 비명을 질렀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질질 끌고 밑으로, 더 밑으로 내려가는 희끄무레한 형체는…….

‘……귀신?!’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혼령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픈


병자나 죽어가는 자들의 곁으로 스치는 저승사자들도 간혹 알아보았다. 지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끌고 가는 것은 분명 혼령이었다.

아귀처럼 찢어진 입에 눈에 구멍이 뻥 뚫린 귀신.

“이거 놔!!”

그녀는 혼령을 걷어차려 했지만 발은 헛되이 허공을 지나갔다. 그 와중에 혼령의 악력은
지독하게 세서 연화의 손목에는 벌써 새빨갛게 울혈이 올라왔다.

그녀가 발버둥 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약사여래의 치유력이 노란 빛을 띄우고 피부에서


빛났다. 노란 빛을 띈 주먹으로 혼령의 손을 치자 퍽 소리가 나며 혼령이 물러났다.
“헉, 허억…….”

다행이다. 치유력을 띤 손으로는 혼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경고성으로


한껏 끌어올린 치유력을 손에 두르고 혼령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혼령은 물러나기는커녕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빛……. 이승으로…… 갈 수 있는…….】

혼령의 비명 같은 신음이 머릿속으로 울려왔다. 연화는 잔뜩 긴장한 채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곧 검은 형체가 그녀의 위로 뛰어들었다. 연화의 비명이 그림자에 먹혀들었다.

그림자에서 검은 줄기가 솟아 나왔다. 그것은 여인의 가슴을 그러쥐고 피부로 파고들었다.


차가우면서 미끌거리는 줄기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벌어진 입 사이로 그림자 줄기가
파고들어 막았다.

형체는 흐물거리면서 연화의 사지를 결박하고 그녀의 육신을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통증이
냉기와 함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

“……무어냐.”

마음이 심란해서 백호는 사방을 떠돌다가 침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연화가 없었고, 그는
시종들의 말에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도 연화는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려던 그의 발치에서 자그마한 동물 하나가
바지를 물었다. 백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조금 의아해했다. 아주 작은 토끼.

보통 본체가 호랑이인 그에게 초식동물들은 범접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신령을 품고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그의 발아래에 있는 것은 아직 신령을 품을 수조차 없는
어린 토끼였다.

백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토끼는 필사적으로 백호의 다리에 매달리면서 뭔가를
말하려 애썼다.

“가만. 넌 어제 연화가 치유해 준 고 녀석이 아니냐.”

백호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토끼를 차내려 하다가 하도 절박한 몸짓에 멈칫했다.


언령의 힘이 깃들지 않은 토끼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아서 그는 손을 내려 토끼의 몸에 손을
댔다.

작은 토끼가 말하려는 바가 뇌리로 스며들었다.

“……연화가, 저승의 주민을 만났다고?”

백호의 낯색이 변했다. 몸이 식는 것 같았다. 신령계까지 들어온 저승의 주민이라니.


어지간한 원한을 지닌 혼령이 아니면 인간계도 아닌 신령계까지 들어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인간이 원한을 가진 혼령을 만난다면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젠장……!”
토끼가 알려준 방향을 향해, 백호는 몸을 날렸다. 그의 육체가 허공중에 떠올랐다가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강하하며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의 시야 안으로 절벽 중턱쯤에서 차원이 둥글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공기가


그쪽으로만 모여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차원이 닫히면, 아무리 백호라도 저승까지 쫓아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튕겨 절벽 쪽으로 날아가 손을 내밀었다.

“연화야!”

둥근 원 가운데로 마지막으로 끌려 들어가는 연화의 소맷자락이 보였다.

희게 질린 그 가느다란 팔목을 간신히 잡아채어 백호는 자신의 뜨거운 기운을 연화의 찬


몸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차가워진 피부에 온기가 돌아오면서 저쪽 차원에서 이쪽
차원으로 연화가 단숨에 끌려 들어왔다.

정신을 간신히 놓지 않고 있던 연화가 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다른 팔 끝에 검은


영혼이 아귀처럼 입을 벌린 채 연화의 몸을 찢어놓을 것처럼 무자비하게 잡아끌고 있었다.

“백호 님!”

백호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혼령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검도
무엇도 쓰지 않은 말 그대로 원초적인 공격이었다. 순수한 물리력으로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악귀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연화는 백호의 뒤에서 덜덜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악귀가 그녀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는 동안 몸 안으로 흘러든 원한이 그녀의 몸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머릿속이 엉크러져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채 연화는 백호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아롱져 흐린 시야로도 남자의 단단한 등줄기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어딜 감히 얌전히 사라지려 들어!”

분노한 사방신은 사라지려는 영혼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연달아 주먹질을 해댔다. 신력에
의해 현계에 고정된 혼령이 사라지지도 못한 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죽음의 비명을
올렸다.

연화는 백호의 뒤에서 귀를 막았다. 원한, 원통함, 비통……. 모든 감정이 그녀의 뇌리를
점령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백호는 귀신의 머리통을 잡고 그 형체를 양손으로 찢어버렸다. 원한에


찬 혼령이었지만 사방신에게는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는 힘이었다. 저승으로 도망가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고 그대로 악귀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것이었다. 검게 재처럼
흩날리던 귀신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금수의 붉은 달

36 화
“백호 님!”

연화는 벌벌 떨고 있었다.

저승주민들 중 길을 잃은 자들이 신령들의 차원이나 인간들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영혼과 능력은 따스한 빛을 발하고 있으니 거기에 끌려 저승의
주민이 손을 댔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약사여래의 온기에 힘입어 저승에서 돌아온 자들이 없지 않았으니. 아마도 연화의 손을


약사여래의 손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저승으로 끌어당겨,
자신들의 영혼을 구제해 주길 요구하며 나락으로 떨어뜨렸을지도.

저승의 맛을 본 자의 갈퀴같이 차갑고 악의에 찬 손아귀. 연화는 손목에 그 감촉이 남아


벌벌 떨었다.

“이리 와라.”

백호는 아주 불쾌했다.

그는 연화를 들쳐 메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사방신의 발밑으로 공기들이 쌓이며 그의 몸을


높은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연화가 울면서 떨고 있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쏜살같이 자신의 궁전으로


날아갔다.
“그런 하급의 영혼 따위가 감히.”

현무에게 한 소리 해야겠어. 주민을 대체 어찌 다스리기에 이런 꼴이 나는가. 바람 속에서


백호의 새파란 눈은 들끓으며 빛났다. 그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화는
두려워서 목을 움츠렸다.

백호는 그 자체로 사나운 존재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일부러 자신의 공격성과 존재감을


한껏 내려놓아 연화가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백호에게서 풍기는 살기는 신령계
전체를 쥐 죽은 듯 적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검은 밤에도 살아 움직이는 길짐승과 날짐승의 소리로 한시도 조용할 때 없는 신령계가


숨도 쉬지 않는 듯 온통 고요했다.

누각을 통할 것 없이 바로 침실의 거대한 창으로 날아든 백호는 연화를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옷이 온통 찢긴 그녀는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희고 작은 얼굴과 큰
검은 눈이 달빛에 빛났다.

남자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닦아줄 수건을 찾으려 몸을 일으키자 연화가 그의 목덜미를


잡고 따라왔다. 목숨이 걸린 듯 필사적인 손길이었다.

“가지 마세요.”

여자는 깨질 것 같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백호는 다시 몸을 숙이고


여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분노와 폭력의 후폭풍으로 그 역시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연화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염려 마라, 이제 안전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백호는 너른 품으로 그녀를 품었다. 연화는 따뜻하고 안전한 그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불을 덮고 누워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위기감으로, 여자는 저승에 끌려갈 뻔했던 두려움으로 서로를
찾았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백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그는 여자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입맞춤을 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녀의 몸이


안쓰러웠다. 백호는 연화의 손목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안아주세요……. 안아주세요.”

연화가 덜덜 떨면서 백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를 안고 꿰뚫어 그


뜨거운 몸 안을 느끼면서 연화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백호는 참았다.

연화에게는 지금 흥분이 아니라 안정이 필요했다.

“쉬, 쉬이……. 괜찮아. 여기 내가 있다. 절대 그놈들이 널 해치게 두지 않아.”

“백호 님, 백호 님…….”

연화는 계속 바르작거리며 남자의 품 안으로 몸을 붙였다. 백호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그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 찢어진 치맛자락과 저고리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그가 차가운 연화의 몸을 덥히기 위해 꽉 끌어안았다.

‘체온이 낮군.’
그렇지 않아도 강한 그녀의 음기가 넘칠 듯 높아져 있다. 체온은 낮아졌고 혈액이 느리게
흐른다. 악귀가 저승으로 끌어당긴 영향일 것이다.

백호는 자신의 양기를 전신에 돌리면서 연화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 중심을 통해 아주 느릿하게 사방신의 기운이 인간 여인에게로 흘러들었다.

따뜻하고 강한 양기가 연화의 전신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단전에 굳어 있던 차가운


기운이 백호의 따스한 양기에 휩쓸려 녹아내렸다. 얼어붙었던 연화의 심장도 온기에 천천히
데워졌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심장까지 완전히 얼어붙었던 몸은 단순히 단전에만 양기를 넣는다고


속까지 녹지 않는다. 그는 얼른 연화의 벗은 몸을 눕히고 다리를 벌렸다.

백호는 그녀의 단전 있는 곳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벌리고 직접 그곳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양기를 주입했다.

배꼽 아래, 연약한 배의 살갗이 그의 호흡에 떨리고 붉게 달아올랐다.

“흐…….”

연화가 작게나마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얼음장 같던 손가락 끝도 온기가 돌았다.

그는 연화의 아랫배에 전부 열감을 불어넣은 뒤 그녀의 다리 사이, 갈라진 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살짝 혀를 내어 틈을 간질이자 연화의 허리가 움찔했다.
그녀의 반응을 더 끌어내기 위해 이빨을 세워 살점에 덮인 자그마한 돌기를 긁고 물었다.
예민한 돌기에 자극이 가해질 때마다 연화의 입술에서도 신음성이 흘렀다.

천천히 연화의 입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충분히 젖어들었다 싶을 때쯤 그는 손가락과


입술로 그녀의 좁은 틈을 열었다. 평소처럼 뜨겁지 않고 그저 은은한 온기만 돌았다.

백호는 그 입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숨결에 따라 양기가 함께


스며들었다.

“아……. 흐…….”

연화가 달아올라서 흠칫거리며 신음성을 뱉었다.

입술과 혀로 핥고 빨며 양기를 불어넣다가 그는 허리춤을 풀고 자신의 양물을 연화의 안에


밀어 넣었다. 힘이 빠진 연화의 몸은 부드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그가 공들여 적셔놓은
내벽 역시 백호를 반겼다.

“연화야.”

느린 움직임에 연화가 작게 울었다.

그의 양물에서 직접적인 양기가 대량으로 그녀의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몇 번의 추삽질 후


백호는 일부러 참지 않고 연화의 몸 안에 자신의 정액을 쏟아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절정으로 이끌어낸 여인의 몸 역시 바르르 떨며 남자의 정액을 받았고, 양기가 그녀의
아랫배 안으로 퍼지며 몸의 체온을 되찾아 주었다.
“연화야…….”

그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돌아온 체온을 빼앗길까 두려워 그는 연화를 끌어안고 품 안에


넣었다.

인간 여인의 자그마한 손을 자신의 큰 손에 잡고 백호는 그녀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연화는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그만큼 연약하고 다치기 쉽다.

뱀의 일족의 흉계에 당할 뻔했던 때와는 또 다르다. 사방신인 자신뿐 아니라 신령계의


주민들에게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혼령 하나로도 연화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만약 연화가 죽으면 어떻게 할 뻔했지?

백호는 등줄기를 흐르는 한기에 그녀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붉은 달의 발정기를 지나기


위해 들였을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잃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서
조금 따스해진 연화가 신음하며 몸을 움직였다.

“백호 님…….”

그녀가 작게 그를 불렀다. 백호의 긴 백발이 흘러내려 연화의 뺨을 감싸고 떨어졌다. 그의


동공이 선연한 눈동자가 연화를 들여다보았다. 작고 부드러운 얼굴.

“나를 보아라, 내 반려야.”

“백호 님.”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라대왕이 직접 오더라도 너를 데려가지 못한다. 너는 내 곁에
있으니.”

사방신은 여인의 반듯한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내렸다. 지금 연화는 약해져 있다. 극도로
깨질 듯 연약한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여인을 끌어안았다. 연화 역시 필사적으로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오히려 여인 쪽이었다. 연화는 백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서툴게 입을 맞췄다. 사방신이 입은 장포를 걷어내고, 여인의 차갑고 작은 손이 남자의 큰
어깨 위로 스며들었다.

그 손을 쥐어서 입김을 불어 따뜻하게 데우면서 백호는 연화를 부드럽게 뒤로 눕혔다.


자꾸만 매달려 올라오려는 그녀를 안정시키며 남자는 조심스럽게 여인을 매만졌다.

원래도 가늘고 부서질 것 같은 몸이다. 지금은 한결 더했다. 새처럼 가늘고 가벼운 골격이
백호의 손 안에서 마치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아서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가볍게 여인의
늑골을 끌고, 그 아래 허리를 손에 쥐었다.

차가운 몸은 마음과는 달리 좀처럼 달아오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저승의 주민이 손목을 쥐고 저 세상으로 끌어당기려 했으니 모든 생기가


차오르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백호는 연화를 무리시키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조금씩 천천히 불어넣었다. 연화는 사지를
활짝 벌린 채 침대에 늘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후광처럼 두른, 희고 흰 머리카락의 남자. 그의 형형한 눈동자에는 걱정과 애정이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세상 어느 보석보다 귀하고 귀한 자.

‘이분을 사랑하고 말았어.’

원래도 알고 있던 사실이 불쑥 가슴으로 치밀어 올랐다. 백호가 귀한 자라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강한 자라서도 아니다. 그냥, 처음 만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연화는 깨달았다.

“백호 님…….”

여인은 신음처럼 다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백호는 조심히 그녀의 몸 위로 엎드렸다.


육체의 온기가 연화의 차가운 몸을 덥혔다. 묵직하고 뜨거운 백호의 몸에 연화는 몽롱한
눈으로 몸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적극적인 연화의 태도에 백호는 조심히 손과 입을 놀렸다. 천천히 제 체온을 찾아가는


여인의 몸을 더 부드럽게 만들면서 그의 손가락이 연화의 다리 사이, 음모 속에서
움직였다. 굵고 긴 손가락이 예민한 돌기와 입구를 간지럽혔다.

이미 충분히 젖었는데도 백호는 그녀의 안에 들어서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내려 그녀의


음모 속에 입을 묻었다. 연화가 몽롱한 정신에도 기겁하면서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백호는 허락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강하게 끌어안았다.

허벅지를 좁히지 못하도록 완전히 고정하고 그는 부드럽게 연화의 입구를 핥았다.


금수의 붉은 달

37 화

“아, 아아!”

정성스러운 애무에 곧 연화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비명 같은 신음성을 내면서 절정에


달했다. 남자는 가느다란 새 같은 여인이 절정에 떠는 것을 느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신음하는 순간 백호는 자신의 양기를 다시 한 번 한껏 불어넣었다. 이번에는 아주


많이, 연화의 배고픈 음기가 만족할 정도로 충분히.

연화는 영문도 모르고 골이 흔들리는 것 같은 절정에 올랐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벅지


사이로 애액이 흘러내렸다.

“백, 백호 님…….”

연화가 허덕이며 간신히 신음처럼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백호는 미소를 지으며 연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거라, 아침까지.”

깃털 같은 잠이 연화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백호는 그녀가 속절없이 곯아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연화를 소중하게 품 안에 안았다.
***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있던 소란을 전혀 모르는 듯 숲은 고요했다. 날카롭고 높은 절벽


위의 백호의 궁 역시 새의 지저귐과 신령들의 속삭임 외에는 어떤 소리도 없었다.

연화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 위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손목의 피부가 지독히 아팠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연화의 치유력은 본인 스스로에게는 쓸 수 없었다. 그걸 두고 백호는 ‘약사여래의
악취미적인 자기희생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못마땅하게 평했다.

하지만 밤사이 백호가 신령계의 고약을 펴 발라두었는지 손목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찢어졌던 상처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물어 있었다.

그녀는 느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손목을 살펴보다가 일어나 앉았다. 침실로 들어오던
백호가 연화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일어났느냐.”

“좋은 아침이에요, 백호 님.”

여자는 아침 햇살 속에서 마주 미소를 지었다. 투명한 공기 속에서 그녀는 마치 날아갈 듯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녀가 사라질까 무서워서 백호는 얼른 다가와서 그녀의 곁에
앉았다.

“몸은 괜찮은 거냐?”


“괜찮습니다……. 다만 백호 님께 추한 모습을 보인 듯해서…….”

연화는 눈을 내렸다. 풀이 죽은 여인을 바라보다가 백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길고 부드러운 연화의 흑발이 바람에 물결처럼 나부꼈다.

그는 조금 어물쩡거리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평소와 다르게 꿈지럭거리는 백호의


행동에 연화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일전, 네가 소중히 여기던 것이라…….”

백호의 품에서 나온 것은 자그마한 손수건이었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걸 어떻게…….”

“지난 며칠간 숲을 찾았다. 처음 우리가 만났던 숲 말이다. 그…… 제사상 있던 자리부터


움직인 길을 찾았더니 있더구나.”

“세상에.”

연화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품에 안았다. 자그마한 꽃이 수놓인 깨끗하고 예쁜 흰 손수건.


어머니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유품이었다.

손 안의 비단손수건은 나비처럼 가볍고 깨끗했다. 오래전 세상에서 떠난 어머니처럼 그렇게


깨끗했다.
연화는 갑자기 몰려오는 그리움에 잠시 말을 잃었다. 모친의 유일한 유품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만난 듯 슬프고 기뻤다.

“찾았던 물건이 맞지?”

“네……. 어머니 유품이어서요.”

연화는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설마 백호가 이 손수건을 찾아 돌려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해서 목이 막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느낌과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이 공존했다.
달콤하면서 슬픈 기분.

“찾느라 애썼다. 산속을 온통 헤집었어. 신령들이 고생 좀 했지.”

“감사, 감사합니다…….”

백호는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연화의 큰 눈은 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기뻐할 걸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나 감사를 받을 줄은 몰라서 그는 다소 쑥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잠시
멀어진 관계를 되돌리고자 행한 일의 효과가 너무 좋아, 백호는 눈을 굴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연화는 손수건을 고이 접어 머리맡에 놓았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나는 화려한 백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의 희디흰 피부가 보였다. 동공이 작은 물빛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가 보여준 작은 정성에 마음이 울렸다.

“백호 님.”
차마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것이 사랑이라 확신하였으나, 그것을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 없었다. 연화는 눈물을 참으면서 그의 품 안으로 무작정 머리를 묻고
파고들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야, 하니까.’

연화는 조심히 백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말 외에


이런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백호의 반려라지만 연화는 가진 것 없는 한낱 인간이었고
백호는 가장 강대한 사방신. 하지만 체온이라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 연화는 수줍음이 많아 제정신으로 먼저 입을 맞추는 것은 참 드문


일이다. 아직 공포에 떨리고 있을 몸을 조심스럽게 껴안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자신에게 매달렸고 백호는 부드럽게 그녀를 도닥였다.

연화의 작은 몸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는 첫날밤과 꼭 같이 여리고


아름답다. 매끄러운 백옥 같은 피부 위로 입술을 내리면서 백호는 눈을 감았다.

많은 발정기를 거쳐 왔으나 여태의 반려들과는 예를 차리는 관계였다. 붉은 달이 지고


그녀들을 돌려보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연화를 떠나보내는 상상을 하자
그는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다. 절대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유순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강단 있고 스스로의 생각이 있는 여자였다.


백호, 사방신의 하나. 산의 주인이자 초목의 주인. 하지만 연화는 부드럽고 고요하게 그를
품었다.

백호는 연화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마음에 든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스울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발정기이니 그런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구나.”

남자가 속삭였다. 그의 뜨겁고 깊은 숨결에 연화의 긴 속눈썹이 파닥였다. 달콤한 건가,


아니면 고통스러운 건가. 여인의 표정은 미묘하고 알기 힘들었다.

어쩌면 연화 자신은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백호는 자신이 멋대로 여인을
끌고 왔던 밤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내려서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려 했지만 연화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빗나가는 시선 사이, 연화의 깊은 연정은 백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남자는 그녀가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을 참고 이곳에 있다고 생각했고


여자는 남자에게 인간 주제에 신을 사랑하게 된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했다.

‘사방신이라 하여 어느 여인이나 마음을 주리라는 법은 없지.’

백호는 다소 쓰게 입맛을 다시고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조금 더 정성을 들이고


잘해준다면, 연화는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그대로 두고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할지도 모른다. 샘의 정령의 도움이 있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이 없을
수도 있다.

백호는 조심스럽게 연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이고, 커다란 손으로 연화의 부드러운
피부 위를 매만졌다. 여인의 모양 좋은 가슴은 백호의 한 손에 잡혔다. 흰 피부에 말랑한
가슴을 만지면서 그는 봉긋 솟은 분홍색의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으응…….”

혀로 예민한 피부를 간지르는 행동에 연화가 몸을 비틀었다. 가느다란 흉곽을 손 안에 잡아


품 안에 넣고 남자는 망설임 없이 여인의 두 다리를 가르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백호의 고개가 숙여져 여인의 음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그의 두텁고 뜨거운 혀가
예민하고 부드러운 연화의 은밀한 피부 위를 훑었다.

“흣……! 흑.”

가느다란 틈새로 혀끝을 밀어 넣자 그녀에게서 억눌린 신음성이 새었다. 소리를 편하게


내라 그렇게 말을 해보아도 연화는 항상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낮추려 노력했다.

백호는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그렇지 않아도 습했던 연화의 음부가 점점 더 깊이


젖어들었다. 애액이 음모로 스미는 것을 느끼면서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빨리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연화는 입을 꼭 다물고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부끄럽고 수줍었던, 밝은 세상에서의


정사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수줍음보다 먼저 가슴 아픔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연정을 품어버린 남자와 결코 맺어질 수는 없는 사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인간과 신의 간극은 노비와 황제의 것보다 크다.


여인은 가느다란 다리를 뻗어 백호의 허리에 감았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백호는 놀란
웃음을 짓다가 곧 불이 붙어 하의를 풀어헤쳤다. 허리춤으로 그의 거대한 양물이 드러났고
연화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닿는 물건을 느끼며 다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곧 백호가 연화의 다리 사이를 뚫고 진입해 들어왔다.

“흐읏……. 하, 앙!”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다. 눈앞이 환하게 보이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높였다. 마치 뜨거운 불기둥이 아랫배 깊숙한 곳을 뚫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깊은 곳, 몸 안 모든 곳이 전부 백호의 존재로 가득 차는 듯한 기분에 연화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숨이 가빠졌다.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허릿짓에 속도를 높였다.

“응, 아…… 아! 아! 아앙! 앙!”

“연화, 연화야…….”

여인은 신음성을 더 참지 못하고 높이 비음을 냈다.

환한 오전의 하늘 아래 화려한 백발의 남자가 그녀를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선연한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이, 정말 자신에 대한 연심이기를. 연화는 바랐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뱃속을 뜨겁게 두들기는 남자의 양물이 연화의 의식을 잠식해 갔다.


“백, 백호 님, 아읏……. 응! 아아! 아아앙!”

여인은 비명 같은 신음성을 지르며 절정에 올랐다. 아침햇살처럼 까마득히 높은


절정이었다. 남자가 그녀의 귓가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화의 깊은 아랫배 안으로
뜨거운 양기를 분출했다.

금수의 붉은 달

38 화

다음날 현무에게서 전언이 도착했다. 그가 직접 오겠다는 것이었다.

“제 주민을 제대로 간수치 못했으면서 무슨 말이 많은 게냐!”

백호는 그 소식만으로도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말을 전한 묘우가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하오나 백호 님,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지 않습니까.”

환한 햇빛이 온통 들이치는 널찍한 대전에 서서 묘우는 한숨을 쉬었다. 옥좌에 앉은 백호는


불쾌함과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으로 넘어오지 않게 했으면 될 일 아니더냐!”


분명 백호의 영토에서 벌어진 일, 그에게 문제를 삼을 수는 없는 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현무가 아닌 염라대왕이 간섭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만약 백호가 소멸시킨
영혼이 저승의 중요한 ‘조각’이라면 더욱이나.

“명부에 오른 혼령이었다고 합니다. 그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아니었으니 더욱


문제지요.”

“제대로 된 명부에 오른 혼이 왜 여기까지 와서 연화를 끌어가려 한 것인데!”

“글쎄요.”

묘우는 못마땅함에 머리를 짚었다. 인간의 여인이란 역시나 분란을 불러온다. 이전


청룡과의 분쟁을 만들었던 여인에 연화를 덧씌워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다시 삼켰다. 뱀의
일족이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연화 님은 곧 돌려보내셔야 할 분입니다. 그분 때문에 저승과 마찰이 일어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백호 님.”

“……돌려보낸다고?”

“그렇지요, 붉은 달도 이제 거의 져가지 않습니까.”

달은 원래 한 달 동안 붉게 물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뜻이고,


먼저 지거나 더 오래 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번의 붉은 달은 예상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백호는 묘우의 지적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높게 묶어 올린 그의 긴 백발이 불편한 주인의
기분에 따라 허공으로 넘실거렸다. 묘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연화 님의 마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인간계에 소중한 것들이 있으시겠지요.


정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고. 백호 님의 욕심만으로 잡아두셔서는 안 됩니다.”

“……시끄러워.”

혹시나 싶어서 일부러 찌르는 소리를 한 것이다. 과연 백호는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주군의 성격을 잘 아는 묘우는 한 소리를 더했다.

“부디 고려해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시는 편이 연화 님께도…….”

“듣기 싫다. 그만해라.”

백호는 손을 들어 묘우의 입을 다물게 했다. 눈치 빠른 여우의 신령은 곧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침실에서 시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연화는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어쨌든 자신이 섣불리
길을 나서 벌어진 일이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백호가 저승의 주민을 소멸시켰다. 그
때문에 다른 사방신과의 분쟁이 벌어지면 그 빚은 고스란히 백호가 떠안게 된다.

“넌 신경 쓰지 마라, 연화.”
백호는 거친 성질을 애써 잠재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백호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연화는 백호의 뒤에 선 묘우의 못마땅한 얼굴을


보았다. 그는 점잖은 성격 탓에 입 밖에 내서 연화를 탓하지 않았지만 여우 같은 긴 눈
안에 그의 마땅찮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연화는 자신을 탓하는 묘우의 기색을 눈치채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백호는 연화를 침실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자신의 수행실로 자리를 옮겼다. 현무가 공간을
옮기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한 법, 이곳에 마땅한 지하의 공간은 없었으므로 백호는
사방이 꽉 가로막힌 수행실을 택한 것이다.

문을 완전히 닫고 촛불 하나만을 켜둔 수행실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올 테면 빨리 와라, 현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백호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어둠 속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호 너는 여전히 성질이 급하다.”

“언제든 올 수 있는 놈이 쓸데없이 전언 같은 소리를 떠드니까 말이지.”

금수의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둠을 가르고 검은 장막 같은 장포 자락이 펼쳐졌다. 촛불


위로 나타난 창백한 얼굴이 한쪽 입술을 올리면서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살아 있기도 했고 죽어 있기도 했다. 절반쯤 가면 같은 흰 얼굴은 천천히 깊은
암흑을 가르며 나타났고 그 뒤로 길고 긴 저승 같은 흑발이 뒤따라 흘러내렸다.

“재수 없으니 앉아라. 난 누가 날 내려다보는 걸 싫어하니.”

백호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현무가 천천히 가느다란 촛불 아래로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백호만큼이나 장신인 사내는 앉아 있는 백호를 내려다보다가
흐흣거리며 웃었다.

백발의 남자는 인상을 썼다. 청룡이 일부러 백호의 신경을 건드린다면 현무는 언제나
백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에 무신경했다.

검은 사내가 느릿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어차피 자주 만날 사이는 아니잖나.”

“그건 그렇지.”

죽음과 영혼을 다스리는 현무와 초목과 짐승을 다스리는 백호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아로새겨져 있다. 둘이 자주 만나는 것이 세계를 다스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몇 년을 가도 한 번 만날 일이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어둠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갈 수 있는 현무는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동료
사방신들을 찾아오곤 했다. 물론 각자의 생명들을 다스리는 세 동료들은 현무의 방문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자고 저승의 주민을 그리 찢어발겼나, 백호? 조각을 전부 줍지도 못하게 찢었더군.”

“감히 내 반려를 건드렸으니 당연하지.”

백호가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현무는 히죽 웃었다.

“진짜 반려처럼 이야기하는군……. 어차피 붉은 달이 뜬 동안의 발정기를 지낼 부인일


뿐이잖아.”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백호의 기가 사납게 확 타올랐다. 불의 신인 주작보다도 어쩌면 더 잘 타오르는 신일지도


모른다.

현무는 혀를 차면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어둠과 안정의 신인 그는 생기로 가득 찬


백호가 가까이 있을 때면 무척 불안정한 감각을 느꼈다. 발밑이 자꾸만 흔들리는 기분.

“염라대왕께서는 몹시 진노하셨다. 네가 예전에도 수없이 소멸시켰던 혼령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달라.”

“죄라.”
백호가 코웃음을 쳤다.

“제 주민 간수를 못해 내 영토로 넘어와 피해를 입힐 뻔했던 네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혼령이 넘어간 건 신령계지만 피해를 입힌 건 인간이니 청룡의 주민이지.”

“말은 잘하는데 그 인간이 내 반려다.”

“흠.”

현무는 흥미로운 얼굴로 백호를 살폈다. 흰 머리카락의 남자는 사나운 눈으로 어둠의 신을
노려보았다.

“관련자이니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싶은데.”

“안 돼.”

백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단칼에 자르는 그를 보면서 현무의 긴 눈이 휘어졌다.

“염라대왕은 명부를 쥔 분이다. 가능하면 협조를 하는 게 좋아.”

“지금 협박하는 것인가?”

“기억해라, 백호. 저승의 그분께선 네 반려의 명줄을 움켜쥐고 계시다.”


하늘에 옥황상제가 있다면 지하에는 염라대왕이 있다. 대왕이 쥐고 있는 것은 이 세계 모든
생명들의 생사여탈권이다. 사방신이 지엄하다고 하나 감히 대왕과 상제에게 댈 것은
아니다.

“내가 네 반려를 보아야 나도 그분께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저승의 주민이 그리 거칠게


찢어발겨졌는데.”

백호는 불쾌한 얼굴이었지만 사실 현무의 말도 맞았다.

저승은 삼세계 중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명이 아닌 혼령들의 세계. 그곳에서는


옥황상제가 아닌 염라대왕이 법칙을 만들고 유지한다.

그곳의 주민을 찢어발겼으니 현무가 어떻게든 상황을 염라대왕에게 잘 설명해야 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얼굴을 보기만 한다 약속해라. 그 이상 수작을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내 동료의 반려인 자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겠나. 백호 너는 너무 의심이 많아.”

현무가 웃었다. 스산한 미소에 백호가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지하에서 올라온
자들에게는 흙 밑 특유의 축축함과 기분 나쁨이 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수행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신령계의 생명력 가득한 햇빛이 온통 어두운
수행실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현무의 검은 장포 자락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승을 다스리는
사방신의 존재는 생명력과 빛을 모두 빨아들여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백호는 그 꼴을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가자. 얼굴만 보고 돌아가는 거다.”

***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죠? 연화 님.”

날개를 팔랑거리며 여자가 연화에게 말을 걸었다. 침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연화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호접 님.”

호접은 연화의 곁으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도록 놓인 긴 의자에서는


신령계의 푸른 하늘과 산천초목이 훤히 내다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저승에서 사자가 왔다고 전해 들어서요.”

연화는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경솔한 발걸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연화


자신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녀는 머릿속을
맴도는 근심을 지우려 애쓰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요. 현무 님이 직접 오셨지요.”

사실 현무는 느닷없이 동료 사방신들을 방문하고는 했다. 짓궂은 장난이랍시고 하는


짓이었으나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저승에서 온 사자를 기꺼워할 생명들이 도무지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짓궂은 장난의 일환이려니 했던 호접은 생각을 약간
수정했다.

연화의 일은 백호에게 연화가 자는 동안 지나가는 말처럼 들은 것이라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인간 여인의 안색을 보니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수의 붉은 달

39 화

호접은 슬쩍 연화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아시겠지만 호접 님, 저를 구하느라 백호 님께서 혼령 하나를 소멸시키셨답니다. 별일


아니라 하셨지만 아닌 것 같아요…….”

“흠.”

신령의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혼백이라면 저승의 주민이고 그 때문에 현무가 오늘 아침


방문했다면 정상적으로 저승으로 인도되었던 혼백일 것이다.

“음……. 좀 상황이 안 좋긴 하군요.”


호접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사실 이번 일로만 문제가 된 건 아니다. 백호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심기가 불편할 때면 저승의 혼령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왔다. 언젠가는
문제가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하필 연화의 일이 얽혀 있을 때 이리 되다니.

‘그러게 자제하시라고 그리도 말했건만.’

백호는 사방신 중 가장 격렬한 성품의 소유자다. 비교적 선하고 온화하고, 스스로 자비롭다
말하는 성향이긴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향하는 것일 뿐.

특히나 가장 넘쳐나는 생명들을 다스리는 백호는 저승의 존재들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사방신은 다들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백호의 저승에 대한 혐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방신은 상제의 휘하이나 염라대왕의 휘하는 아닙니다. 염라대왕은 독립된 존재죠.


하지만 현무 님은 염라대왕의 저승을 영토로 가지고 있으니까 거의 같은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

수호령은 날개를 바짝 접었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괜찮을까요. 저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다른 사방신과 분쟁이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아주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문제야 되겠지만. 그런데 염라대왕과 일이 얽혀버리면…….”

호접은 중얼거리면서 혼자 궁리했다. 곁에 선 연화는 점차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상상으로 걱정하는 것과 실제 호접의 입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연화는 입을 꼭 다물고 손을 쥐었다. 워낙 거대한 존재들끼리의 문제라 그녀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저 때문에 하필…….”

“아니, 아니에요. 연화 님 때문이 아니에요.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날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린 호접이 손사래를 쳤다. 연화가 도화선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간 쌓인 일이


많았으니. 그녀는 위로하듯 연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별일 없을 겁니다……. 사방신들께선 생각보다 마음이 넓거든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되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연화 님.”

호접은 날개를 팔락였다. 그녀는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어주다가, 연화의 어깨 너머로 침실


입구를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이런.”

호접이 중얼거리며 날개를 접고 허리를 굽혔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호접이 인사하는 방향을 보고 움찔했다.
백호만큼이나 장신인 사내가 그의 곁에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긴 흑발과 검은 장포가
바닥에 끌릴 만큼 길고 얼굴은 얼음처럼 창백했다. 빛을 담은 듯 밝은 백호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사내였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호접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모든 곳을 날아다니는 나비.”

“현무 님을 뵙습니다.”

사방신 중 하나인 현무.

머리카락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장포와 머리 모두 암흑처럼 새카만 색이었다.


신령계의 빛나는 아침 햇살을 전부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도 광택 따위
없이 그저 검기만 했다. 머리를 두른 은색의 가느다란 관만이 그에게서 빛나는 유일한
물체였다.

“네가 백호의 반려인가.”

“이, 인사드립니다…….”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현무를 쳐다보다가 손을 저었다.

“자, 됐지. 이 사람이 내 반려 연화다. 봤으니 이제 네놈의 굴로 썩 돌아가.”


“여전히 성격이 급하군.”

현무가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살아 있는 자에게 오한을 주는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서 희디흰 연화의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간 여인은 두려움에 떨며 시선을 피했고 현무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아름답도다. 홀린 이유가 있었군.”

“무슨 헛소리인가? 내가 뭘 홀려? 이상한 소리나 할 거면 썩 꺼져라.”

“아, 혼백 말이다. 너 말고.”

“…….”

백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해하는 걸 눈치챈 현무가 놀리듯 말했다.

“단단히 홀리긴 한 모양이군? 내 말을 곡해하는 걸 보니 말이야.”

“뭐…….”

“이런 모습을 다 보는군.”


저승의 사방신은 배를 잡고 웃고 싶지만 백호 때문에 차마 웃지 못하는 이상한 얼굴로 입
꼬리를 비틀었다.

“뭐, 좋아……. 하지만 일단 말은 확실히 해야지.”

“무엇을?”

“염라대왕의 전언이다. 지난번 말했던 그 영토, 넘긴다면 가만히 계시겠다고 했다.”

“……아까는 그런 소리 전혀 없었잖은가.”

“언제 내가 패를 전부 보여주는 것 보았나. 단순한 너나 하는 짓이지.”

백호는 이를 으득 갈았다. 현무는 항상 원하는 것을 한 번에 말하는 법이 없었다. 속이


검고 우중충한 사내다웠다.

“지난번 말한 영토라면 신령계와 저승 중간에 위치하는 남쪽의 영계 말인가.”

“그래. 어차피 손바닥만 한 곳이잖아. 네놈에겐 필요도 없는.”

“하지만 그곳을 넘기면 주작이 난리를 치겠지. 그곳을 통해 남방으로 저승사자들이 출입할
테니 주작이 기겁할 텐데.”

“그거야 둘이 해결할 일이고.”


현무가 으쓱했다. 백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번 현무의 방문은 연화의 일 한 번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그간 저승의


혼령들을 성질에 못 이겨 많이도 소멸시켰다.

백호는 잠깐, 아주 잠깐 반성했다. 신령계의 존재를 현무가 해했다면 대번에 난리를 피웠을
자신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어차피 지난번에 경고를 들었던 부분이다. 백호가 혼백을 소멸시켰을 때 염라대왕이 그


음침한 목소리로 직접 백호의 고막을 울렸더랬다. 다음번에 또 한 번 저승의 주민을
없앤다면 그때는 영토를 내놔야 할 것이라고.

“좋아. 하지만 주작이 나한테 항의하면 저승에 가서 말하라고 하겠다.”

백호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현무가 나직하게 웃었다.

연화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사방신인 백호가 자신의 영토를 저승에 내놓는다는 것인가.


연화는 당황해서 눈을 들어 백호와 현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호접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연화의 당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기색을 눈치채고 현무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느다란 입술 끝이 위를 향하고 그의


창백한 얼굴이 연화를 향해 기울어졌다.

“이봐, 인간의 여인이여. 네 반려가 이리도 마음이 곱다. 너 때문에 영토마저 수월히
내놓는구나.”
“현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백호가 벌컥 화를 냈다. 그의 동공이 선명한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연화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베어버릴 테다. 네가 누군지는


상관없지.”

“진정하라고. 그냥 알려준 것뿐이잖아.”

현무가 두 손을 들고 얌전히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군소리 없이 물러나자


정말로 검을 잡았던 손을 떼어내면서 백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골치 아프고 불쾌한
상대였다.

“다시는 이 건에 대해 말하지 마라. 내가 나의 영토를 떼어준 건 유례없는 일이야.”

“아무렴 그렇지.”

현무가 웃었다. 그의 몸이 흐릿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연화 쪽을 흘긋 보았다.

“네 인간 반려, 생각보다 더 예쁘군.”

“닥쳐라.”

“아니, 난 인간에겐 관심 없어. 저승에 오기 직전인 인간이 아니고서는.”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방 안을 울렸다. 그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현무의 자취가
완전히 방 안에서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백, 백호 님…….”

“신경 쓰지 마라, 연화야. 별일 아니다.”

백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승의 존재들이 보통의 생명들에게 얼마나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백호는 창백하게 질린 연화의 얼굴에 손을 얹고 아주 약간의
양기를 불어 넣어주며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다정한 백호의 손길만큼 죄책감이 가슴을 뒤덮었다.

‘……나 때문에 백호 님이 피해를 입었어.’

연화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

신령계의 한 구석에는 아주 먼 유배지가 있었다.

사영은 그날 이후 뱀의 일족의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유배되었다. 신령계에서도 길이


험해 누구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심지어 지렁이도 새도 없으며 빛조차 들지
않는 깊은 산속이었다.
‘목숨이나마 부지한 것이 다행인가.’

약간 웃음이 날 정도였다. 아비인 사혈은 그 이후 사영을 없는 자식 취급했다. 아니, 없는


자식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 몰라 죽이지 않고 목줄을
매두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낡은 오두막 한 채에 덩그라니 놓여서 사영은 멍청하게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일과였다.


많은 나무들 틈으로 보이는 작은 조각하늘에는 빛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찾아올 수도 없는 곳. 어쩌면 사영은 여기서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생각을 해보아야 무엇 하나, 어디 하나 쓸 데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그녀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금수의 붉은 달

40 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우물 하나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사방은 온통 나무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어두워서 저승의 원혼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르는 깊은 숲.
사영의 걸음에 따라 울리던 방울소리도, 이제는 나지 않았다. 분노한 사혈이 그녀의 꼬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방울뱀 특유의 힘과 기가 전부 사라진 채 사영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혈은 분노할 만했다. 그는 얼굴 거죽이 곤죽이 된 채로 오랜 날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생으로 얼굴의 절반을 태워진, 그것도 신의 불길로 벌을 받은 그 고통과 통증은
상상할 수 없을 거라고 원로들이 말했다.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 깨어난 아비는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사영을 저주했다.

“나쁜 년, 멍청한 년! 너 때문이 아니냐! 지금 이것은!”

그 목소리에 어린 분노와 증오에 사영은 말을 잃고 바닥에 엎드렸다.

“네년을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야!”

아비는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이무기로서의 자부심, 용이 되지 못한 자로서의 열등감이 사혈의 안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그는 잠을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딸과 신을 저주했다.

비록 원로들의 만류로 사영의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았으나 그는 기어코 딸을 가장 멀고


험한 땅으로 유배 보냈다. 영원토록 보고 싶지 않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내 복이 이쯤인 것을.”
이제 사영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원래 백호의 곁을 차지해 신의 반려가 되겠다는 욕심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우물물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빠지면 내 구차한 목숨을 끊을 수나 있을까.’

어느 정도 수련을 거듭한 뱀의 신령이었으니 자살도 쉽지 않다. 몸은 본능적으로 살아날


것이다. 참으로 귀찮은 생이로다. 그녀는 멀거니 생각했다.

“잠깐, 아가씨.”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영은 흠칫했다. 그녀는 드디어 환청이 들리나 해서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두 눈 안에서 눈동자가 굴러가며 숲을 살폈다.

하지만 근방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영은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다시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 누구……!”

경악해서 사영이 제대로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우물물 안에서 한 여자가 기어 나와 턱을 괴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여자의


푸른 머리가 길게 늘어져 우물물 속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피부가 파릇하게 창백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환청처럼 기묘하게 들렸다.

“어머, 뱀의 아가씨는 생각보다 담이 작네.”

“누, 누구요?”

“나 말이지, 나는…….”

까르르 웃으면서 여자가 우물 속에서 빙글 돌았다. 그녀의 몸이 솟구쳐 땅바닥 위로


내려섰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으나 그녀의 치맛자락은 우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온 몸이 물에


젖어 그녀가 딛는 땅마다 물자국이 번졌다. 메마른 땅 위로 금세 습기가 가득해졌다.

여자는 넘어진 사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샘의 정령, 청수희라고 해. 반가워, 사영.”

청수희가 높게 웃었다.

수상했으나 그녀에게서는 분명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영은 그녀가 내민 손을


망설이다가 잡고 일어섰다. 생전 처음 보는 정령이었다. 자연물의 정령들은 은둔하는 자가
워낙 많으니 고작해야 사영의 지위로 아는 쪽이 이상한 일이다.
“내……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죠?”

“초면에 인사도 없이 질문만 많네.”

어처구니없다는 듯 청수희가 샐쭉 웃었다. 곧 그녀는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난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는 물이거든. 신령계의 일이라면 내가 모르는 게 없지.


게다가.”

그녀는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영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뱀의 일족이 신의 반려에게 손을 댔다는 소문은 신령계에 아주 소문이 파다하게 났거든.”

“…….”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세가 가장 큰 일족의 수장이 한순간 얼굴 반을 잃고 나타났는데


다른 일족들이 모를 리가. 사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욕심이 많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뱀의 일족이라 누구도 놀라워하진 않았지만……. 뭐,


사혈의 얼굴은 좀 놀라웠어.”

청수희는 사영의 기분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사혈이 그녀의 아비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순식간에 불쾌감이 치솟아 사영은 몸을 돌렸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신령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어차피 이곳에 유배된 몸이었고 아마 평생토록 나가지 못할
것이다. 샘의 정령 따위와 말을 나눠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어어, 어딜 가는 거야, 사영 아가씨?”

뒤에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사영은 기겁해서 몸을 뺐지만 물기는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에게 청수희가 허공에서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니, 간만에 재미있는 사건을 봤는데 당사자하고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대체……. 재미있는 사건이라니.”

사영은 울컥했다. 자신은 생을 걸고 일을 저질렀고, 그 결과 생을 잃었다. 뱀의 일족의


아가씨로 살았지만 아비에게 버림받은 이상 이제 원래의 지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는
청수희를 노려보았다.

“재미 삼아 이곳에 왔다면 돌아가세요. 여기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없으니까.”

싸늘한 말투에 청수희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의 길고 푸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사영은 걸음을 재게 놀려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 때 샘의 정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기 들려주면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는데, 아가씨.”

“……난 가지고 싶은 게 없어요.”

“난 주고 싶은 게 있어.”

자꾸만 말을 거는 정령이 짜증스러워서 사영은 들어가려고 문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는 물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대체, 자꾸……!”

“이거, 뭔지 알아?”

사영은 눈앞에 흔들리는 물건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고아한 모양새의 노리개다. 사방신의 반려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던, 원래 신의


반려들이 착용하는 패물. 선명하게 백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비단노리개. 푸른 보석이
달린 붉은 비단실.

“음, 역시 아는 얼굴이네.”

재미있다는 듯 청수희가 방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영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물끄러미


그녀의 손에 들린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걸 어떻게 손에 넣은 거죠?”

“받았어.”

“……뭐라고요?”

“받았다고.”

멍청한 사영의 얼굴이 흥미롭다는 듯 청수희가 제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공물, 이라고


중얼거린 그녀는 노리개를 품 안에 다시 쑤셔 넣었다.

“어때, 이제 이야기를 좀 해볼 마음이 나?”

“……나 같은 실패자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래요.”

“그냥.”

샘의 정령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물의 정령들은 재미있는 일에 아주 목이 말라 있거든.”

자연물에 깃든 정령들은 괴팍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자연물의 정령들은 금수의 신령들과


비교할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았고, 그래서 영원에 가까운 삶의 지루함을 깰 수 있는
재미라면 걸신들린 듯 갈구했다.
‘그래도 보통은 그저 지켜볼 뿐인데…….’

자연물의 정령들은 인간과 신령들을 지켜보며 재미를 얻는다. 이렇듯 청수희처럼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며 달려드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사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청수희를 노려보았다.

“그 노리개는 나한테 쓸모없어요.”

“하지만 가지고 싶겠지.”

“아니, 쓸모도 없는데 뭘 가져요?”

“이유가 결과인가, 결과가 이유인가. 그건 모르는 거잖아? 반려가 되었기 때문에 노리개를
가지게 되는 건지, 아니면 노리개를 가져서 반려가 되는 건지.”

무슨 해괴한 소리냐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청수희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해보지도 않고 그냥 손 놓으려고? 일단 물건이 눈앞에 있는데도?”

사영은 잠시 말을 잃고 샘의 정령이 들어 올린 노리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맞잡은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결국 버티기를 포기하고 사영이 물었다.

***

산속 깊은 곳 천민 부락은 때 아닌 지체 높은 손님의 행차로 떠들썩했다. 좋은 의미의


소란은 아니었다. 지체 높은 나으리는 좋은 일로 방문한 것이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래요?”

“몰라……. 연화를 찾는다는데, 거의 한 달 전에 없어졌잖우.”

관아 마당을 담 너머로 훔쳐보던 마을 사람들이 수군수군 말을 나눴다.

“호랑이에 물려갔을 아이를 왜 찾아……. 없는 살림에 제사를 지내라고 닦달한 게


그때쯤이었잖아.”

“촌장이 제사에 올릴 공물이 없다며 가가호호 좋은 물건을 내라 거의 빌면서 다닌 그때?”

“그러니까. 그 제사 때문에 연화가 산속에 들어갔는데.”

연화네 사정을 잘 아는 아낙이 분개해서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물론 소리는 죽인


채였다.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관아의 눈치를 보았다. 대문을 활짝 열고 지체 높은 중앙


관리의 행차를 맞이한 관아의 마당에는 수령이 관리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계집애가 없다고?”

제사장 성현은 귀를 의심했다.

“언제부터 없어졌느냐?”

“제사가 있던 날부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저희도 죽을 맛입니다요, 마을에 치유사라고는


그 애 하나뿐인데…….”

촌장은 우는 소리를 했다. 수령도 눈치를 보면서 손을 비볐다. 그들은 관리의 자비를
바랐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자신들의 사정도 좀 돌아봐 주기를, 제사도 잘 치러냈으니
말이다.

제사를 치른 이튿날 제삿상에서 백호가 음식과 공물을 꽤 여러 개 가져갔다. 신이 마음에


들어 한 것이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수국의 왕 만희는 직접 사촌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손속에 자비가 없는 자라는


뜻이다. 일단 명한 바대로 따르지 못하면 그대로 검을 뽑아 벨 것이다. 그게 대신이든
제사장이든 상관없었다. 하필 그에게 명을 내렸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모든 벌은
제사장에게 떨어지게 생긴 모양새였다.

금수의 붉은 달

41 화
“왕께서 내게 연화를 찾아오라 명하셨다. 그 여자애는 죄인 아니냐, 어쩌자고 마을
바깥으로 나가게 둔 게야!”

성현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흰 수염 끝이 바짝 서서


파르르 떨렸다.

마당 밖에서 그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대체 연화를 저렇게까지 찾는 이유가 뭐야?”

“왕이 아주 색에 미친 변태라던데 그래서인가…….”

“그래, 연화가 미색이긴 하지. 소문에 정말 더러운 성벽이 있다던데……. 주지육림을


펼쳐놓고 있다지 뭔가.”

천민 부락의 사람들은 이미 왕에게 반감이 깊은 자들이다. 그들의 눈에 마을 유일의


치유사인 연화를 끌고 가려는 제사장과 왕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들이 무어라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제사장은 소리를 질렀다.

“어미가 왕을 거역한 죄인이었다. 그 딸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두다니!”

촌장이 굽신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걸 눈치챘다. 높은 나으리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 그…… 그게…… 밤이 되면 항상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제삿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요. 그 애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을…….”

“어머니? 모친은 죽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만 그 이후에 받아서 키운 양모가 있습니다요.”

“그 여자를 데려와라.”

성현은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단상 위 높게 앉은 제사장은 초조한 손짓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머지않아 마당으로 늙은 여인 한 명이 끌려왔다. 병사들이 끌고 와 무릎 꿇린 여자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서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고령의
노파였다.

“연화의 양모입니다, 워낙 고령이니 너무 거칠게는…….”

심약해 보이는 수령이 작은 소리로 아뢰었지만 제사장은 차갑게 그를 내쳤다. 성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와 함께 살던 연화라는 죄인은 어디로 도망갔느냐.”

“도망이라니……. 제삿날 산속으로 들어간 마지막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으리.”


“죄인이니 신분을 속이고 살기 위해 도망시킨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애는 언제나 해가 떨어지면 집에 돌아오는 아이였는데……. 산속에


놓고 온 물건이 있다며 다시 들어간 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갔는지도
모릅니다…….”

연화의 양어머니는 의연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그녀의 주름진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십 년을 넘도록 고이 길러온 딸과 같은 아이가 산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누구도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깊은 산맥에는 지나치게 많은 맹수들이 살았다.
한밤중에 산에 들어간 자들 중 살아 돌아온 이는 거의 없다.

제사장은 수염을 세우면서 화를 냈다.

“거짓을 고하지 마라! 그럴 리가 없다. 도망을 시켰던 게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누구 하나라도 그 대신 죄를 받을 자를 만들어야 했다. 성현 자신이 제사장이었으니 천민


한 명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호통을 쳤다.

“내 왕께 말씀드려 이 마을의 모든 자들을 전부 참수시키겠다! 감히 대역죄인을


도망시키다니!”
성현은 분노하며 손에 든 지팡이를 땅에 탕탕 내리쳤다. 이 마을 사람들 전원을 죄인으로
만들어 벌을 받도록 하겠다. 제사장의 뚱뚱한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역시 이 산맥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잘 알았다. 만약 정말 연화가 죽어버렸다면


데리고 갈 치유사가 전혀 없다. 왕의 분노는 전부 일을 시킨 제게 돌아올 것이다.
제사장이라봐야 분노한 왕 앞에서는 쳐야 할 목 하나일 뿐이다.

만약 연화를 데리고 갈 수 없다면 대신 이 마을이라도 몰살시켜야 한다. 그래야 만희의


기분이나마 풀릴 것이었다.

“어떻게든 데리고 와라! 그렇지 않다면 전부 참수형에 처하겠노라! 왕께서 자비롭게도


얼마간의 말미를 주셨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벌을 내리겠다!”

제사장은 떨면서 엎드린 연화의 양어머니를 향해 손짓을 했다.

“저년은 옥에 처넣어라! 죄인이 돌아올 때까지 움직일 수 없도록 족쇄를 채워라!”

성현은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두드렸다. 화와 신경질과 짜증과 조바심이 제사장의 목줄을


옥죄고 있었다. 병사들이 전부 명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내치고 연화의 양어머니를 옥으로
끌고 들어간 이후에도 그는 초조하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대체 어떻게 마을을 다스렸기에 이 모양인가! 죄인을 도망시키고 그 어미가 높은 자리를


능멸하다니!”

성현은 수령에게 소리를 질렀다. 심약하지만 나름대로 자비로운 성품의 수령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촌장도 어쩔 줄 모르며 엎드려 있었다.
제사장 성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하늘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아까부터 맴돌고 있었다.
관아의 하늘 위로 낮게 날던 새는 곧 허공 중으로 사라졌다.

***

“……이런.”

묘우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새의 말을 들었다. 날짐승은 까만 눈을 또륵또륵 굴리면서


재잘대었다.

묘우는 과연 이 소식을 연화에게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백호에게 전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만약 백호에게 전달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사방신 중 가장


다혈질이다.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대로 수국 전체를 밟으러 갈지도 모른다.
청룡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연화 님이 내려가 잠시 사태를 진정시킨다면 될 텐데.’

묘우는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백호의 발정기는 이미 끝났다. 한 달은 채 지나지 않았으나


붉은 달은 먼저 졌다. 지금 연화가 빠져나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인간 여자가 계속해서 백호 님 곁에 있는 것도 좋을 일은 아니고.’

백호의 곁에는 역시 신령이나 선녀가 어울린다. 저 거대한 존재를 감당하는 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연화는 나쁘지 않은 신부였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반려다.
연화를 놓지 않으려는 백호의 행동을 묘우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반길 수도 없었다. 수명이
극도로 짧은 인간의 반려를 얻는다면, 남은 그 긴 세월을 어쩌려고 저러시는가.

“저, 부르셨나요. 묘우 님.”

방 어귀에 연화가 서서 머뭇거렸다. 묘우가 선 토실의 안은 어둡고 축축했다. 망설이면서


발을 들인 그녀에게, 묘우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알게 된 소식인데……. 아무래도 연화 님께는 말씀을 드려야 할 듯싶어서요.”

여자를 인간계로 보낼 기회다. 묘우는 뱀의 일족과 암계를 꾀하긴 하였으나 연화 개인에게


나쁜 마음은 없었다. 단지 인간 여자가 사방신의 반려 자리에 앉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마도 다수의 신령이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신의 반려는 신령에게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지금 백호는 상당히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는 것 같아서 더 문제였다.

묘우의 가느다랗고 위로 치켜 올라간 눈을 보면서 연화는 손을 모았다. 그는 상당한


미남자였고 상냥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고 대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제 전령 새가 마을의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을. 연화 님이 계셨던


마을 말입니다.”
“아.”

연화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샘의 정령과 만났을 때만 해도 심각했는데,


그사이 몇 가지 일을 겪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요?”

연화는 애써 목소리를 평온하게 유지했다. 묘우가 일부러 소식을 전해주려는 것을 보면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양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러니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수국의 중앙에서 관리가 나와 연화 님을


찾는다고 하는군요. 어째서인지까지는 전령 새가 알아오지 못했습니다만…….”

“그, 그렇군요.”

“마을에서는 연화 님이 죽은 것으로 아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중앙 관리의 명을 받들지


못하는 상황이라 난처해하고 있다는군요.”

연화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를……. 중앙에서 절 찾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인데요…….”

연화는 천민 부락에서도 양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가난한 처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를


중앙에서 찾을 일 같은 건 없었다. 단 하나, 그녀의 친어머니를 제외한다면.
“……혹시 어머니 때문인지…….”

그녀는 고민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높은 자리의 나으리가 천민 부락까지 찾아와 연화를


찾는다. 좋은 일일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천민 부락으로
쫓겨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찾지 못하면 양어머니 되시는 분과 마을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관리가 엄포를 놓았다고 합니다.”

“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녀는 입을 달싹였다. 묘우는 안되었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인간계에서 신분이 높은 자들은 자신의 뜻이 어긋나면 신분이 낮은 자들을 어지간히


닦달하는 모양입니다. 꽤나 급한 일인지 지금 당장 데려오라고 난리를 쳤다고.”

“아, 세상에. 어째서…….”

“백호 님께 말씀을 드릴 수는 없어서……. 못마땅하면 인간계를 전부 부수어버릴


분이시라서요.”

연화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에 약간 비틀거렸다. 그녀가 없어져서 양어머니와 마을 전부가


벌을 받는다. 아마도 노비가 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미 천민까지 내려온 자들, 그 이상의 벌을 받으려면 일신의 자유를 완전히 뺏겨
사람가축이 되는 노비까지 추락하거나 목숨을 내놓는 것밖에 없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를 왜 찾는지 알 수는 없다고 하셨지요……. 아니, 그보다 언제까지 제가 가야 하는지


그것도 알 수가 없네요.”

“관리가 온 지 사흘 남짓이 되었는데 하루씩 기간을 늘리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합니다. 찾는 것은 수국의 왕이구요.”

“국왕전하께서요……?”

연화는 어머니의 일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어머니의 일, 혹은 그녀의 능력 때문에.

금수의 붉은 달

42 화

어머니는 연화보다도 강력한 치유능력을 지닌 치유사였다. 그 능력 때문에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으나 왕은 그 능력이 다시 필요해졌을지도 모른다.

연화에게 물려준 능력 또한 굳이 숨길 이유 같은 건 없어서, 일전에도 두어 번 근처


마을의 부잣집에서 그녀의 치유력을 빌리려 초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험악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눈을 들었다.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눈은 확고했다.

‘어머니…….’

친어머니도 양어머니도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다. 연화를 기르다 목숨을 다한 친어머니는


가슴에 묻었고 그녀를 기르며 온갖 정성을 다한 양어머니는 그녀가 지켜야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비록 심술 맞은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거의 그녀와 가족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 있으며 민폐만 끼치느니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면 최소한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갈 해악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돌아가야겠네요.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오……. 이런.”

묘우가 감탄사 비슷한 것을 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연화가 결심했다. 애초에 그녀를


꼬드기기 위해 좀 더 많은 험악한 말을 준비했던 묘우는 예상보다 훨씬 쉽게 진행되는 일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여우의 신령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었다.

“그래요. 양어머니 곁에 가야지요. 뭐, 왕이 찾는다고 하니 그리 안 좋은 일로 찾는 건


아닐 겁니다.”
묘우는 시치미를 뗐다. 그의 여우답게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이 휘어졌다. 하지만 둘 모두
그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알았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벌하겠다며 연화를
찾는 상황이다. 결코 좋은 일이 기다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백호 님께…… 죄송하지만, 역시 돌아가야지요.”

연화는 중얼거렸다. 백호와의 시간은 한 달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애정을 주었던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보내줄까? 사실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초에 그녀는 공물을 훔쳐낸
벌로 이곳에 와 있는 인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양어머니를 뵙고 다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연화는 직감하고 있었다.


결코 이곳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어쩔 것인가. 백호는 사방신이며 연화는 한정된 시간의


반려였다. 아니, 그가 자비로워 모든 일에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연화를 반려로 대접해
주었을 뿐이지 엄연히 따지자면 인간 계집 따위, 신의 발정기를 잠재우기 위한 잠자리
상대였을 뿐 아니던가.

연화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묘우는 눈을 굴렸다. 한낱 인간의 여자다. 사방신의 세계는
확고하게 나뉘어져 있고 신령들의 세계에서는 가치가 없는 생명이었다. 그저 백호의
눈속임만 할 수 있다면 된다.
그러면서도 꺼림칙함이 느껴졌지만 묘우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죄책감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백호 님께 말씀드리러 가보겠습니다. 여유 기간이 하루라면 지금 당장


내려가야지요. 이왕 갈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좋은 판단이십니다. 아, 백호 님께 이 사실을 전부 말씀드리면 인간계를 쑥대밭으로


만드실지도 모르니 말을 가려주십시오.”

“예…….”

연화의 얼굴이 흐려졌고 묘우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실은 많이 고민스럽습니다. 백호 님은 상냥한 분, 연화 님이 곤란한 상황이라


생각하시면 돌봐주시려 하겠죠. 그러나 인간계는 엄연히 청룡과 주작의 영토이니 분명
분란이 생길 것입니다. 만약 사방신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백호 님의 영토 역시
폐허가 될 만한 일이죠.”

“…….”

“상제께서 노하실 오점이 생길 수도 있어요. 사방신이라 해도 엄연히 상제의 휘하, 만약


그분이 노하신다면 백호 님의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묘우는 자못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연화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묘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신령계에 있으며 귀에
먼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사방신의 영토를 구별하라는 말이었다. 자신 때문에 백호의
치세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됐다.

여우의 신령은 인간 여인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연화가 돌아가면 그때는 정말로


백호에게 어울리는 신령의 반려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연화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묘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연화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묘우의


토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당장 가야 해.’

연화는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혼란을 지고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인간계로 돌아가


왕에게 가서, 마을과 양어머니를 구하면 된다. 그럼 더 이상 신령계와 백호에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연화의 걸음은 곧장 백호의 사실로 향했다. 너른 사실 안에서 백호는 홀로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백호 님.”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연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백호는 눈매를 치켜 올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왜 그러느냐.”

백호의 말투는 다정해서 새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화는 눈물을 꾹 참았다.

남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인은 눈을 감고 그의 따스한 입술을


느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고 그의 입술을 찾았다.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백호가 곧 입맞춤을 더 깊게 했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고,


둘의 혀가 섞였다. 호흡이 뜨겁다. 연화는 백호에게 매달려 그의 뜨거운 입맞춤을 기억하려
애썼다. 달콤하면서도 버거운 감각.

그는 연화에게서 입술을 떼어내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와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자그마한 머리통과 새처럼 가는 골격, 희고 부드러운 피부. 백호의 손 안에서 연화는 한
마리 작은 새 같았다.

그는 연화를 끌어안고 무릎에 앉혔다.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쇄골에 이빨을 세워 물고


빨았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옷에 감싸인 가슴의 유두가 바짝
일어서서 단단해졌다. 그 위를 크게 베어 물고 백호가 계속 이빨과 입술로 유두를 간질이고
물었다.

“배…… 백호 님.”
대답 없이 그는 여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쥐고 벌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백호의 양물은 뜨겁고 단단해졌다.

연화 역시 빨리 그를 품고 싶어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백호에게 지금 말을 해야 했다. 여기서 안겼다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또 밤이 지나가 버릴 것이다.

이제는 정말 그럴 수 없었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백호 님, 잠시만.”

“……연화야?”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에 백호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수줍고 부끄러워도 연화는
여태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단호함이 남자에게 확실하게 보였다.

연화는 옷을 추스르고 백호의 무릎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제대로


매만지고 그의 앞에 앉았다. 백호는 다소 의아한 얼굴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오늘은 조금 이상하구나.”


“정말로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 무슨 이야기냐?”

신령계로 와서 연화가 처음으로 꺼낸 말에 남자는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마을로…… 내려가 봐야 할 듯합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입을 막고 싶은 마음을 견디며 말을 이었다.

“양어머니께서 많이 위독하시다며……. 그분께서 제가 보고 싶다 애타게 부르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너의 양어머니가?”

백호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양어머니가 무척 위독하고, 아픈 곳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애타게 그녀를 찾고 있다는 말을.

남자는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픈 얼굴이었다.

“다녀 오거라. 내 기다리고 있으마. 신령들을 시켜 길을 바래다 주마.”

백호는 최대한 양보한 절충안을 꺼내놓았다.


신령계와 인간계의 구별이 지엄한지라, 원래 인간의 여자를 데리고 와 정식 반려로
삼으려면 상제와 청룡에게 허락을 얻어야 했다. 붉은 달이 뜨는 발정기 동안 정욕을
가라앉힐 상대로 삼는 것까지 제한이 되지는 않았으나, 만약 그 이상 길어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함부로 그녀의 양어머니까지 데리고 와서 이곳에 요양시킬 수는 없었으나 차후 백호는


연화를 정식 신부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상제와 청룡에게 원하는 것을 얼만큼이라도
내주면서 말이다.

연화는 다소 놀란 얼굴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다시, 되돌아오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당연하지 않으냐.”

백호는 여인의 흰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작고 보드라운 얼굴이었다.

“네 양어머니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죽을 때가 된 자를 신령계로 불러들일 수는


없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법칙을 깨뜨리는 일, 저승의 주민을 관장하는 현무와
염라대왕이 허용하지 않는다. 약사여래와 같은 보살은 이 세상의 법칙 바깥으로 빠져나간
자들이라 그에 얽매이지 않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이 세계 법칙의 수호자다.”

생과 사의 경계는 지엄하다. 사방신의 힘은 거대했으나 거기에도 명백하게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다시 되돌릴 수 없었고, 죽음에 가까워진 자도 살릴 수 없었다.

이미 염라대왕의 명부에 올라간 자들은 강을 건너야 했다. 그것이 세계의 1 법칙이었다.


“기다리고 있겠다. 나의 신부야.”

백호의 말을 들은 연화는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세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인


그가, 하잘것없는 인간인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겠다 말해 준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는 길은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다 말하고 싶었지만 묘우의 말이 가슴을 가로질렀다. 인간계에는 청룡과 주작이 버티고


있고, 백호가 날뛰면 그에게도 심대한 위해가 생길 거라는, 그리고 매번 새로운 반려를
찾으니 심려치 말라는 말.

백호에게는 인간인 그녀가 어울리지 않았다.

금수의 붉은 달

43 화

“백호 님.”

연화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 백호의 앞에 엎드렸다.

“저는 인간이니, 마음이 변덕스럽습니다. 가능하다면 달이 가늘어지는 이번 달 말일까지


돌아오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새 반려를 찾아주셔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인간의 여인. 한 달이 되어가니 벌써 인간계가 그리워서 몸이
아플 지경이어요. 양어머니께 내려가 그곳에서 살고자 한다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백호는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분명 연화가 자신만큼 깊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여인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을 잃고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우의 말이 맞았던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게 다른 정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연화는 엎드린 그대로 어깨를 움찔했다. 백호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입술을 물었다. 차마 그 이상을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을의 소식은 대체 누가 전해준 게지?”

그는 말을 돌렸다. 아마도 위협받고 있는 그 마을 사람들 중 연화가 사랑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백호의 말은 분노를 참고 있었다. 감히 누가, 홍진의 때 묻은 소식을
연화에게 알렸단 말인가. 그것이 비록 마을의 소식이라도 말이다.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부디, 백호 님.”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겠다면 약속된 시간만큼은 있어야 한다.”

백호는 고집을 부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화의 얼굴을 보면서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백호 님.”

신은 가슴 가득 들어찬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연화는 고개를 들어 백호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안 돼, 약속을 어기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백호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사실상 그의 발정기는 이미 끝났지만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령과 인간의 경계는 명확한 법, 이유가 없다면 가고자 하는 인간을
신령계에 잡아둘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백호는 연화의 손을 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그는 가느다란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라. 내 곁에 있어. 원한다면 네 양어머니를 데리고 오도록 하마.”

“아뇨……. 어머니만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도 있어요.”

연화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사방신이 인간과


맺어지는 것이 가당찮다는 묘우의 생각에 그녀도 어느 정도는 동감을 할 뿐이었다.

만약 백호가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전까지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마을에 정 붙인 이가 있는 거겠지.”

백호는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분노에 찬 중얼거림인데도 어딘가 안타까운 아이의


것처럼 들려서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남자는 여인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달빛이 그대로 들이치는 누각 위에서 맨 다리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연화는 몸을 떨었지만 백호의 손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연화야.”

백호는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소담하고 동그란 가슴 위에 입을 맞추면서 남자는


그녀의 샅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보드라운 음모 속을 문지르며 연화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백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백호 님…….”
연화는 허리를 움찔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은밀한 틈을 가르고 들어와 예민한 돌기를
건드렸다. 천천히 밑이 젖기 시작했다. 매끈한 내벽을 더듬으면서 백호는 여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자신의 허리끈을 푸르고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려 앉혔다.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버거운 사내의 물건이 연화의 몸 안으로 느릿하게 삽입되었다.

“흡…….”

연화는 숨을 삼키면서 참아내었다. 손톱을 백호의 너른 어깨에 박고, 그녀는 애써 사내의


몸짓에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둘 모두 아무 말 없이 정사에 몰두했다.

연화는 절정이 다가오자 백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남자는 그녀의 뺨을 잡고 깊이 입을


맞추었고, 그와 동시에 둘은 함께 절정을 맞이했다.

품 안에서 빳빳하게 굳어서 바들바들 떠는 여인의 몸을 잡고 백호 역시 높은 절정의 쾌락을


전신으로 느꼈다.

“……연화야…….”

백호는 다시 한 번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

연화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절정 때문에 힘에 겨워 얼굴이


발그레했고 숨이 찼다. 백호는 그녀의 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연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깊이 쉬었다.

“그곳에 가서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백호는 예언처럼 말했다. 인간이란 그리 순순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비록 신령을 다스리는


자지만 백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연화와 같이 때 묻지 않은 존재가 함께 살기에는
지나치게 힘에 겨울 세상이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다. 인간인 그녀의 의지를 꺾는 것은 청룡과 주작이 허용하지 않을


일이었으며 백호 자신의 자존심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약속이다. 약속이란 신과 인간 둘 모두 손을 댈 수 없는 법칙.”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신은 인간의 여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서로 떨어진 피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뼈까지 스미는 듯한 냉기에 연화가 신음했지만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좋다. 기간은 달이 가늘어지는 이번 달의 말까지다. 길은 호접에게 물어보거라.”

그 말만을 남긴 채 백호는 차갑게 뒤를 돌아 나갔다. 여전히 인간 세상에 미련이 있는


연화가 서운하고 야속했다. 심장 부근이 자꾸 아파서 그는 이를 꽉 깨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화는 침상 위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령계의 온화한 공기 속에서도 바람이
찼다. 그녀의 관자놀이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슬픔이 가슴께를 점령하고 뼛속
마디마디가 저렸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기한을 주고 돌아오라는 백호의 자비로움에 감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계로 내려갔을 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평생을 천민 부락에서 살아온 인간의 여인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주워 하나씩 걸쳤다. 백호의 손길에 벗겨졌던 옷가지들을


다시 입으면서 연화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줄기 흘러내렸던 눈물을 닦아내고 연화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 앞에 어느새 조용한


걸음걸이로 호접이 들어서고 있었다.

“호접 님, 이렇게 부탁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새빨갛게 충혈된 연화의 눈동자를 보면서 호접은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 밤에, 흐트러진 차림의 백호가 나와 연화를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라 한마디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연화는 눈이 새빨개진 채 호접을 맞이했다.
‘싸우시기라도 한 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남녀 사이의 일을 그 누가 알 수 있던가.


도무지 모를 일이라 작은 몸집의 나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호접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팔랑이는 그녀의 날개를 따라, 연화는 자꾸만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힘을 넣으면서 걸어갔다. 인간계까지 가는 길은 나비의 신령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 길을 오가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연화는 처참함에 말을 잃었다.

천민 부락이라 하나 본래 연화의 마을은 잘 정돈되고 말끔한 동네였다. 아침이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웃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밥을 하는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골목은 서로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쓸어 깨끗했으며 아픈 자가 있다면 옆집의
사람이 보리죽이라도 쑤어다 먹였다.

비록 가난하고 버림받은 마을이었으나 서로를 도우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호접은 신령계에서 나오지 않고 즉시 돌아갔다. 아무리 계를 넘나드는 나비라고 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아닌 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아 인간계로
나온 연화는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불에 타 재만 남아 있었다. 깨끗했던 골목길은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를 피로 젖었고 그 썩는 냄새가 고약했다. 멀리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아니, 그보다…… 그녀를 잡아가겠다며 관리가 왔다는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멀고 먼 유배지, 숨이 붙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버림받은 마을이다.


이곳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려야 할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청수희가 약속했던 치유의 샘물이 마을 어딘가에서 솟아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곳에 과연 그것이 얼마나 소용이 있을 것인가. 연화는 망연자실했다.

호접이 바래다 준 숲속 어귀에서 마을 골목으로 돌아 들어간 연화의 앞으로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연화가 살던 집의 이웃집 남자였다. 중년의 나이에 제법 살이 쪘던 그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연, 연화냐?”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가 물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온통 더럽고


찢어진 옷을 입은 그를 보면서 연화가 양손을 꽉 맞잡았다.

마을이 이 꼴이 된 것이 혹시라도 자신 때문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세상에 연화야.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는 게냐…….”

남자가 연화의 앞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는 더러운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벅벅


닦았다. 검댕이 번져 엉망이 되었다.

“아저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연화는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물이 흘러 턱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닦아내며 남자는


숨을 골랐다.

“너, 널 찾겠다며…… 수도에서 관리들이 왔다. 왕의 제사장이라고 했던가.”

“……왕의 제사장이요.”

“그래.”

묘우에게 들었던 대로다. 여우의 신령이 전한 바와 같은 내용에 연화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를 잡아가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왔다는.

“나흘 동안 하루씩 말미를 늘리면서…… 주변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다.”

“맙소사.”

“첫날 네가 나타나지 않자 네 어머니를 죽이는 걸 미루고 대신 다른 집을 불태웠다. 둘째


날도 그랬고, 셋째 날도.”
금수의 붉은 달

44 화

양어머니는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하여 죽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안도하기에는


눈앞의 남자가 너무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집은 그저께 당했단다.”

남자는 다시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그놈들의 손에 딸아이가 죽었다. 이제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 거냐…….”

“세상에.”

이웃집에는 중년의 부부와 과년한 딸이 살았다. 남편은 간혹 장작이 모자란 연화의 집에


마른 나무를 가져다주었다. 아내는 후덕하고 음식 솜씨가 좋아 양어머니에게 맛 좋은
장아찌를 나눠주곤 했고 딸은 연화와도 사이가 좋은 자매처럼 지냈다.

그런 그들의 딸이 죽었다고 한다.

“대체, 대체 왜…….”
연화는 입을 가렸다. 잠시 신령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이렇게 처참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깨문 연화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그녀가 남자의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가 연화의 손을 내쳤다.

“너 때문, 너 때문 아니냐……. 내 아이가 죽은 건.”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저씨.”

남자는 한동안 소리 내어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때로 가슴이 막힌 것처럼 심장


부위를 퍽퍽 치다가 다시 울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연화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연화 네가 무슨 잘못이겠느냐, 그래. 알고는 있다…….”

이윽고 남자는 울던 끝에 다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픔과 분노가 응어리진


소리였다.

“불을 지르고 그 연약한 살에 칼을 찌른 것은 중앙 관리와 병사들이지. 암,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정말…… 슬퍼서 견딜 수가 없구나.”

“아저씨…….”

“정말 하늘이 노해 벼락을 내릴 것들이 아니냐.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집을


태우는 것도 모자라 그리도 처참하게 죽인단 말이냐.”
남자는 분노가 서린 한숨을 토해 냈다. 그는 너무 오래 울어 이제 눈물이 더 나오지도
않는 뜨거운 눈을 두 손으로 눌렀다.

연화는 손을 벌벌 떨면서 다시 손을 내밀어 남자를 끌어안았다. 그는 눈을 벅벅 거칠게


비볐다. 한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남자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라도, 너라도 도망가거라.”

이웃집 남자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연화의 등을 두드렸다. 남자는 평소에도 인심 좋고


다정한 사내였다.

“관리들이 조금 있으면 순찰을 나올 게야. 발각당하기 전에 빨리 떠나렴.”

“그럴 수는 없어요, 아저씨.”

“괜히 나설 이유는 없다. 너라도 살아야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야.”

“제가 가지 않으면 더 잔인해질 거예요.”

“네가 간다고 해서 덜 잔인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남자는 확고하게 말했다.


그는 며칠 동안 유린당하는 마을의 참상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중앙 관리의 군졸들은
망설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베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늙은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낄낄대며 사냥하듯 사람을 잡는 장면을 보고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아 오줌을 쌌다. 그를 보고 군졸들이 비웃으며 지나갔다. 못생긴 중년 남자, 더러운
겁쟁이의 피를 검에 묻히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사장 성현이라는 자는 네가 간다고 해도 마을을 그냥 두지 않을 거야.”

“…….”

“이미 네가 없어서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마을에 해꼬지를 할


게야.”

불을 지르고 사람도 죽였다. 중앙의 관리는 잔인했고 하나밖에 없는 협소한 입구를 막아선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달아날 구석 같은 건 없었다.

그 때 퍼뜩 생각이 나서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연화를 보았다.

“주변은 전부 그놈들이 포위하고 있을 텐데 대체 어찌 마을에 들어온 게냐? 입구가 막혀


있는데.”

“숲으로…… 숲으로 왔어요.”

“숲? 그쪽은 절벽이 아니냐.”


“어찌…… 운이 좋게 그리 되었어요. 제가 머물던 곳과 통하는 길도 있어서.”

“그래.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다. 그렇다면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


얼른 가거라.”

“그건…….”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호접의 안내로 숲까지 도달했으나 그와 동시에 돌아가는 길은


사라졌다. 각 세계를 넘나드는 길은 나비만이 찾아 흘러들어 갈 수 있었다. 그녀의 안내
없이는 어지간한 신령들도 함부로 다른 계로 접근하지 못했다. 인간인 연화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리고 갈 수 있더라도 가지 않을 것이다.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중앙의 관리들은 관아에 있지요?”

“알아서 무엇 하게? 빨리 도망가라니까.”

그러다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참, 너희 집 골목 맨 끝자락에 있는 우물에서 언젠가부터 신묘한 물이 솟더구나.”

“신묘한 물…….”

“가벼운 상처가 낫고 기력이 나는 물이다. 마을 사람들이 덕을 많이 보았어. 가는 길에 꼭


한 번 담그고 도망가거라.”
청수희가 보낸 샘물일 것이다. 그녀가 치유의 물을 보내겠다 약속했던 것을 기억한 연화는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이토록 힘든 시기에 신령이 내려준 듯한 신묘한 샘물이 나타나 너무도 다행이었단다.


거기서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

남자는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이에요. ……정말 신령께서 보살펴주셨나 봐요.”

샘의 정령은 약속을 지켰다. 그나마 한 가닥 근심이 연화의 마음속에서 걷혔다. 마을의


유일한 치유사인 그녀가 수도로 가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무사할 것이다. 굳세게 버텨내면
마을의 재건도 머지않으리라.

“감사했어요, 아저씨.”

일어서며 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비록 연약한 여인의 몸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희생당하는 자들을 뒤에 두고 제 한 몸의 안위만을 위할 만큼 비겁하지 않았다. 남자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간다면…… 수도로 떠난다면, 마을의 남은 사람들이라도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

“……연화야.”
“갈게요, 아저씨.”

연화는 남자의 손을 한 번 맞잡았다가 놓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생채기들이 이곳저곳에 나 있었다.

“저희 집 골목 끝자락에 있는 우물……. 꼭 잘 사용해 주세요. 정말로 치유의 효능이 있는


물이니.”

“그게 무슨 말이냐……?”

뭔가 아는 듯 말하는 연화의 말투에 남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연화는 대답 대신 그저


한숨을 쉬었다. 평생 정붙여 왔던 이 마을을 떠난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치고 갔다.

“……제가 없어도 저 대신, 그 우물이 마을분들께 도움이 될 거예요. 어쩌면 저보다 더.”

“…….”

이웃집 남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멀거니 멀어지는 연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가늘고 연약한 모습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관아로 향했다.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무사하시겠구나.’

걸음을 옮기면서 연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치거나 죽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해도 갚지 못할 죄를 지었다.

양어머니의 안위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돌이 얹힌 것 같았다. 모두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

슬픔과 죄책감에 연화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미 죽고 다친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에게 사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니 가야지.”

죄책감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남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야 했다.

‘나만 가면……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연화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관아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군졸 몇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손에 위협적으로 든 창이


푸르게 빛났다. 이번엔 누구를 죽일지 놀 거리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 못 보던 여자의 모습에 그들은 눈을 찌푸렸다. 연화는 그들을 피하지 않고 곧장
다가갔다. 겁도 없이 자신들에게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군졸 한명이 다가와
그녀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누구냐.”

연화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이 사람은 윗사람의 명을 받들어 이 먼 타지까지


와서 험한 일을 하는 중일 게다. 자신의 의지는 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손가락과 창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마을 사람들을 죽인 손은 이자들의 것이다.

이런 참변의 죄가 대체 자신에게 있는지, 아니면 직접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운


이자들에게 있는지 연화는 궁금해졌다.

군졸은 씹던 잎담배를 뱉어버리고 인상을 썼다. 냄새가 고약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낯모를 여자는 맑고 투명한 눈을 하고 있었다. 행색도 깨끗하고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어 지체가 높은 여인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 천민 부락에 있을 만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속일 생각도 달아날 생각도 없었다.

“나는 당신들이 찾던 사람입니다.”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군졸들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그 약사여래의…….”

“맞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의 손이 앞다투어 그녀의 팔을 결박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도망갈 수도 없는데


쓸데없는 수고였다.

여인은 고개를 떨구고 군졸들이 미는 대로 관아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먼저 달려가 알린 한 사내 덕분에 곧 제사장 성현이 뛰쳐나왔다.

성현은 마루에 서서 마당을 보았다. 굵은 모래가 깔린 거친 마당 위에 가느다란 여인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성현은 기쁨과 노여움이 반반씩 섞인 소리를 질렀다.

“네년! 죄인의 몸이면서 대체 어디에 몸을 숨겼던 것이냐!”

제사장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천민 주제에 그를 그토록 애먹인 여인을 보면서 그는 분노를


터뜨렸다. 감히, 왕께서 부르시어 수국 전체의 대(大)제사장이나 되는 자신이 찾으러
왔는데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니. 제사장에 오른 이후 왕을 제외하면 그를 난처하게 만든
자는 여태까지 없었다.

“더러운 천민 계집!”

성현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질을 하고 당장 죽여 없애도 시원치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왕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사여래의 가호니 뭐니 어차피
거짓일 게 분명하니, 만희가 분노해 계집을 내친 이후 벌을 내리면 되는 일이다. 아니면
만희가 자신은 생각도 못 한 험한 벌을 내릴지도 모를 노릇이고.

“나리, 제 잘못을 뉘우치고 있사오니 제발 저의 어머니만은 풀어주시길 간곡히


청하나이다.”

연화는 바닥에 엎드려 제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금수의 붉은 달

45 화

성현은 입가를 비틀며 그녀를 비웃었다.

“천한 주제에 제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은 있다 이것인가. 허나 네 어미는 피도 섞이지


않은 자라 하였지.”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십니다…….”


“동정심을 얻기 위한 연기가 아니냐? 너 같은 천것이 도리를 따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제사장이 지팡이로 땅을 쾅쾅 쳤다. 여전히 노기가 어린 얼굴이었다.

“저것의 어미를 끌고 와라!”

곧 병사들의 손에 연화의 양어머니가 끌려왔다. 노파는 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많은 어머니는 그사이 너무 여위고 초췌해져 있었다.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연화야, 연화야.”

“어머니.”

내 딸, 하면서 어머니의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눈가가 붉었다. 연화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둘 모두 결박당한 채 거리가 너무 멀어 손도 잡을 수 없었다.

제사장은 잔인한 눈을 번득이고 있었고 지금 울어서 도움이 될 일은 없었다. 그녀는 다만


자리에 엎드려 제사장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제발…… 어머니만은 놓아주십시오. 잘못을 저지른 죄인은 저이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금수라 할지라도 정은 있다 이건가.”


제사장이 두 모녀의 얼굴을 보면서 혀를 찼다. 두 사람의 슬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금수들이 오히려 다정하고 자비로웠지요.’

연화는 떠나온 신령계의 신령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적대적인 신령들도 있었으나 대다수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것이 백호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궁의 시녀들과 호접은
그녀를 아껴주었다. 적어도 천민이기 때문에 그녀를 경멸하는 일은 없었다.

“부디, 어리석은 저희를 살피시어.”

비감함을 숨기고 연화는 몸을 낮췄다. 창백하게 질린 작은 여인을 보던 제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다는 것을 알긴 아는구나. 오늘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예 이 마을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을 텐데.”

“…….”

“건방진 네년을 기다려준 것을 감사히 여겨라.”

“나리의 자비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천하고 아둔한 소녀가 나리의 부름을 받고도


늦게 왔으니 벌은 제게 주시옵고 부디 어머니와 다른 이들에게는 벌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혀에 기름을 발랐나 말은 번지르르하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천한 계집에게 농락당했다는 기분에 분노는 여전히 머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흘긋 늙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줄줄 울면서 간신히 몸을 지탱해 서 있었다.


저토록 늙고 지쳤으니 저항할 수도 없을 모양이었다. 왕이 데려오라 명한 계집이 또
도망가지 못하도록 저 천것을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되었다고 할 때까지 저 노파를 다시 가두어두어라.”

양어머니는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리, 제 딸을 어쩌려 그러십니까. 나리 제발 자비를.”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나리의 말을 따르세요, 어머니.”

노파는 땅 위에 엎드렸으나 제사장은 비웃을 뿐이었다.

“시끄럽군. 저년도 목을 칠까?”

그 때 소식을 들은 촌장이 관아로 뛰어들어 왔다. 급히 달려왔는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는 연화와 양어머니를 번갈아 보다가 덜덜 떨면서도 자리에 꿇었다.

“나, 나리,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쇼.”

“이건 또 뭔가. 나름대로 촌장이랍시고 참견하는 건가?”


제사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작고 더러운 천민 부락의 촌장이라고 발
벗고 나서는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촌장은 겁이 나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제사장 나리, 저 모녀는 아주 얌전하고 상냥하게 살던 이들입니다. 왕께서 찾으시는데


나오지 않았던 것은 죄라 하겠으나 이제라도 나타났으니 부디 참작해 주셨으면…….”

“정말 시끄럽구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는 소리를 질렀다. 얼굴에 땟국물은 줄줄 흐르는 주제에 말이 많다. 제사장은 그의


권위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를 가장 싫어했다. 성현은 누가 뭐래도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지닌 수국의 제사장이었다.

“저자를 옥에 잡아넣어라!”

“예!”

군졸들이 그의 양팔을 잡아 끌고 갔다. 촌장이 떨면서 빌었으나 시끄럽다고 노한 제사장의


한마디에 병사들의 손에 입이 막혔다. 그와 함께 양어머니도 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그들이 끌려간 자국이 모래 바닥에 고스란히 남았다.

연화는 그 참상을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신령계로 사라졌던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애초에 백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어머니의 손수건을 포기했다면…… 아무도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얌전히
마을에 있다가 왕의 부름에 따라갔다면.
성현이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왕께서 기다리신다! 저 계집을 당장 죄인의 마차에 실어라. 손목과 발목을 모두 묶어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하라!”

성현의 명에 병사들이 몰려와 그녀의 발목에 밧줄을 걸었다. 손 한 뼘만큼의 길이도 안


되는 밧줄에 묶여 그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채로 마차로 끌려갔다.

양어머니가 옥의 창살 너머로 그 모습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 그 울음소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제사장은 서둘러 자신의 마차에 올랐다. 그는 관리를 불러 명했다.

“난 먼저 전하를 뵈러 갈 것이니 내 짐들은 싸서 뒤따라 보내라. 그리고…….”

그는 흘긋 뒤편을 바라보았다. 넋을 잃은 촌장과 울고 있는 노파, 관아 바깥 거리에


유령처럼 서 있는 촌락의 사람들.

이들을 살려두어서 무엇 하겠는가. 게다가 왕의 명이 있었다. 만약 연화를 발견하게 되면


천민 부락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저 계집이 어찌 혼자 숨었겠는가. 작고 약해빠진 년은 숲으로 혼자 들어가는 순간 짐승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필시 저 천것들이 이리저리 숨기고 도망시켜 사라졌던 게지.

그리 생각하고 성현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내가 떠나고 사흘 뒤쯤 날을 잡아 마을을 불태우고 천것들을 모두 죽여라.”


명을 받는 관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제사장은 냉정하게 말을 붙였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비밀에 부쳤다가 도망갔던 년놈들이 모두


돌아오거들랑 그때 전부 처형해라. 방법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이 마을에서 나온 재물은
군졸들이 나눠가져라. 묵과해 주마.”

관리의 얼굴에 은밀한 웃음이 번졌다. 아무리 가난한 천민 부락이라 하지만 마을 하나를
털면 재물은 제법 나올 것이다. 하다못해 솥 단지 하나가 나와도 녹여서 팔아버리면 금이
된다. 그는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사장님.”

“확실히 이행해라.”

제사장은 명을 내리고 곧 마차를 출발시켰다.

앞서 가는 죄인의 마차 속에서 연화는 하릴없이 흔들렸다. 말끔히 차려입고 나왔던, 호접의


손길이 닿은 치마저고리는 군졸들의 거친 손길에 마구 구겨지고 더럽혀졌다. 발목과 손목이
모두 묶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멀거니 나무창살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이 흐렸다. 때때로 구름 사이 해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 희미한 빛살을 보며 연화는 백호를 생각했다. 그분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염치없다고 느끼면서도 그리움은 멈출 수가 없었다. 고초를 당할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생각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전신을
짓눌렀다.

서너 시간을 달리자 가파른 산골에서 벗어났다. 길이 험해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하던


일행은 그 때부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높은 속도로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묶인 손발 때문에 제대로 운신도 못 한 채 뻣뻣하게


나뒹굴어 있는 연화를, 곁에서 말을 달리는 군졸들이 킬킬대며 훑어보았다. 천민의
여인이란 가장 넘보기 쉬운 상대다. 만약 왕이 부른 게 아니었다면 연화 역시 당장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애써 눈을 피하고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해가 뉘엿거리며 넘어갈 때쯤이 되어 마차가 멎었다. 저녁식사 때문인지 군졸들이 내려서


재빠르게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지만 입맛은 전혀 없어서
연화는 멍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불을 피운 곳만 밝았다.

그 때 마차 안으로 그림자가 졌다.

“죄인 주제에 끼니를 찾아 먹고 싶은 거냐?”

비웃는 말투는 제사장의 것이었다. 배가 나온 사내는 수염을 비틀면서 연화를 바라보았다.


나무 창살 너머로 숫제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묶인 채 몇 시간째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너무 아파서 연화는 입을 열었다.


“부디 나리, 밧줄을 조금만 여유 있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몸이 너무나 아파서…….”

“흠, 몸이 아프다?”

조금의 자비를 바라는 말에도 제사장은 히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며칠 동안이나 그를 약 올리며 사라졌던 계집 따위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고, 부탁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화는 슬프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앞에 창살 사이로 따뜻한 죽이 담긴 대접이 들어왔다. 입맛이 없어서 연화는 그


대접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접을 가지고 온 군졸은 너무 멀어서 그런가 하는 얼굴로 조금
더 가까이 밀어놓았다.

곁에서 제사장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뭘 하느냐, 먹지 않고?”

“……예…….”

버티기 위해서는 뭐라도 먹어야 한다. 그건 연화도 알았다. 그녀는 묶인 팔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마치 기듯이 그릇 쪽으로 다가갔다.

“밧줄을 풀까요? 식사 때만이라도.”


군졸이 묻자 제사장은 호통을 쳤다.

“감히 죄인의 밧줄을 함부로 풀겠다는 게냐! 내 명이 없다면 생각도 말아라!”

괜히 나섰다가 싫은 소리만 얻어먹은 군졸은 급히 꽁무니를 뺐다. 제사장의 목소리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어 근처에 선 일행들이 전부 창살 안의 연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먹어라. 뭘 하고 있는 게지?”

“…….”

이대로 먹으라는 건 개처럼 기어가 그릇을 핥으라는 뜻이다. 연화는 제사장의 말을


알아듣고 치를 떨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최소한의 존엄성도 버린 채 짐승처럼 식사를
하라니.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먹지 않는다고 버텨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가 굶어서 잘못된다면 고초를


겪는 건 다름 아닌 제사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안달을 내며 연화를 찾지 않았는가.
사람까지 해쳐 가면서 말이다.

‘아니, 아니지…….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연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금수의 붉은 달

46 화

그녀는 무엇이든 먹어야 했다. 그래야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소한 왕에게 갈 때까지라도 버텨서 그의 요구를 들어야 했다.

“먹지 않겠다 이거냐?”

성현은 뻣뻣한 수염을 비틀었다. 불편한 심기가 그의 말투와 표정으로 새어 나왔다.

“끌려와서도 명한 바를 듣지 않겠다는 건가. 네 마을 사람들을 죄다 불태워 주랴? 아니면


네 어머니를?”

먹기를 망설이는 연화를 보며 제사장이 히죽거렸다. 그는 창살에 기대서 싸늘한 눈으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근처 모든 이들이 웃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흥미로운 화젯거리리라. 지저분한


모양새여도 지극히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묶인 채로 고초를 겪는 꼬락서니를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과연 저 여자가 저 재수 없는 제사장에게 반항을 할까? 그러다가
얻어맞을까? 그녀를 향한 시선들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화는 얌전히 기어가 고개를 숙여 죽을 먹기 시작했다.


머리를 바닥으로 푹 파묻은 채였다. 거의 미음에 가까운 멀건 죽이었다. 이거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잘도 먹는군. 그래, 천한 것에게는 이게 딱 어울리는 식사 예절이다.”

제사장의 말에 주변 일행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성현에게 누군가 따뜻한 오리고기 구이와


흰 쌀밥으로 상을 차려 바쳤다. 그것을 먹으며 제사장은 연화를 구경했다.

“치유의 능력이 있다지만 밥은 개처럼 먹는군.”

죽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최소한의 안위를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연화는 개처럼 그릇을 핥아먹었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지만 비참한 심정이 목을


졸라왔다.

***

사흘 밤낮을 달려 마차는 수도에 당도했다.

처음으로 보는 거대한 기와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연화는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총천연색의 비단들이 걸린 가게와 천민 부락이 두세 개는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광장,
김을 내뿜는 만두 가게와 색색의 달콤한 설탕과자들이 널린 노점.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도
그녀는 설렐 수가 없었다. 마치 목을 내놓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안이 훤히 보이는 나무 창살 너머로 수도의 사람들이 흘끔흘끔 연화를 구경했다. 그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눈길을 내렸다. 죄인의 마차이니 그 안에 타고 있는 연화는 구경의
대상인 것이 당연했다. 저런 젊은 처녀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러 험한 꼴을 보며 수도까지
끌려왔는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사지가 묶인 상태라 밤에는
거의 까무룩 기절하듯 잠깐씩 선잠이 찾아왔고, 마른 빵과 물 한 모금만 주는 식사는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길 위의 먼지를 온통 뒤집어써 더러워진 채 연화는 지독히 지쳐서 바닥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찌 되는 걸까.’

계속 회피해 왔던 근심이 마음을 짓눌렀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다.

왕이 왜 찾는지 제사장이 스치듯 말한 것 외에 알 수 없었다. 그는 첫날밤 연화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러 마차 가까이 왔다가 치유 능력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렇게 더러운
계집이 그런 이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며 투덜거리고 돌아섰다.

‘내 치유 능력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최소한 죽이지는 않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과 양어머니도 무사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최소한의 쓸모가 있다면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연화는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근심과 공포는 계속해서 목을 졸라


왔다.

‘……전하는 굉장히…… 거친 성품이시라 들었는데.’


아무리 수도에서 먼 천민 부락이라 하나 왕의 성미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다. 아니, 어느
마을보다 왕의 성격에 대한 소문이 심했다. 천민 부락으로 보내진 이들 중 다수가 왕에게
해를 입어 쫓겨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연화와 양어머니 역시 그랬으니.

사촌형을 죽이고 등극한 왕은 거슬리는 모두를 죽이고 손에 닿는 모든 여인들을 범한다고


했다. 남편을 묶어둔 채 아내를 그 앞에서 범하고 아비를 죽인 뒤 그 앞에서 어미와
시동생을 관계하도록 내몬다고 했다. 인륜을 저버린 자라 반드시 천벌을 받을 거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그 소문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감은 심해졌지만 그때마다 연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상황에 공포 때문에 침착함을 잃는 쪽이 더 위험했다.

마차는 거침없이 달려 성에 도착했다. 푸른 기와가 올려지고 좌우로 넓게 자리한 궁은


심지어 3 층까지 지어져 있었다. 백호의 궁은 더 크고 넓었지만 그곳은 자연과 어울리도록
우아하고 편안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인간의 왕궁은 마치 그 위세를 과시하는 듯
부자연스럽게 떡 벌어져 기와 끝이 하늘을 찌르도록 날카로웠다.

“나와라, 계집.”

제사장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끌려나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전리품이니


왕에게 바치는 것 역시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본래라면 어전에 바치는 것이니 최소한 씻기기라도 해 끌고 가겠지만 일이 너무 급박하군.


빨리 들여라.”
성현은 의기양양한 자세로 그녀를 끌고 어전에 들어섰다. 좌우로 군사가 늘어서 도망갈 수
없었기에 손과 발은 풀렸다. 연화는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발로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불안감이 뇌리를 잠식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연화는 넓은 알현실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좌우에 늘어선 내관과 어의, 시녀와
시종들이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높은 옥좌에 앉은 왕의 눈이
가장 차가웠다. 그녀가 정말 치유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허풍쟁이인지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더럽고 작은 여자로군.”

만희의 입에서 나온 첫말은 비웃음이었다. 그는 흥미 없다는 얼굴로 연화를 훑어보았다.

“그래……. 이것이 그 죄인의 딸이냐.”

“그렇사옵니다, 전하.”

제사장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어, 그를 넘어 왕의 호의를 살 수


있게 되어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만희는 상에도 인색하지 않은 왕이니 재물과
보화를 듬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흐뭇함에 성현은 싱글벙글하며 왕의 앞에 무릎 꿇은 연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들어 있었다.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은 어미와 똑같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한 번 시험해
보심이.”

“치유의 능력! 그렇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것이지.”

왕 만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두통이 머릿속에서 뇌 구석구석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지독한 고통에 그는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곁에 선 제사장이 눈치를 보았다. 자칫하면 눈 먼 칼부림에 피바람이 날 수도 있었다.

“너, 진짜로 이능이 있는 계집이냐.”

“황공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연화가 뻑뻑한 목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성현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했다.


연화의 치유 능력이 사실이 아닐까 두려웠다.

만희의 새빨간 적안이 두통으로 가늘어졌다. 흰자에 핏발이 서서 마치 눈 전체가 붉은


것처럼 보였다. 악귀 같은 모습에 늘어선 백관과 제사장이 시선을 피했다.

“빌어먹을.”

만희가 히죽거리고 웃으며 욕설을 뱉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굴렸다. 곁에 있는


누군가라도 죽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희생양을 찾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현이 급히 연화를 불렀다.

“여, 여봐라. 어서 전하께 네 능력을 보여드려라.”

그 말에 만희의 눈이 연화에게 고정되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그마한 여인. 그녀는 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낯빛이 마음에 들어서 만희가 두통
속에서도 피식 웃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 오라.”

연화는 흠칫했다. 거대한 체구, 검은 머리카락과 거무스름하게 짙은 피부. 그 위에서


번들거리는 적안은 마치 악귀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무섭다고 도망갈 수 없었다.

“어서, 어서 가까이…….”

그녀를 이끄는 내관의 손에 의해 연화는 왕의 바로 앞까지 가서 무릎을 꿇었다.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본 왕은 엄청나게 큰 덩치에 길게 찢어진 눈을 한 사내였다. 새빨간
눈동자가 연화를 훑어보았다.

두통 때문인지 완전히 일그러진 그 얼굴을 보고 연화는 순간 두려움에 찼다. 그의 눈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파충류의 것처럼 보였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눈만 보면 생명
없는 그림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연화에게는 그의 고통이 느껴졌다. 뇌에서부터 시작해 머리 전체를 짓누르는
날카로운 통증.

“왕께서는 지금 두통으로 고통받고 계신다. 네가 가진 능력으로 무언가 할 수 있지


않느냐?”

성현이 초조하게 물었다. 만약 두통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연화의 목이 가장 처음


베어지겠지만 그 다음 순번이 자신이 아니라는 확언을 할 수 없었다. 왕은 사람을 벨
이유를 만들어 내는 사내였다. 그는 옷 안에서 떨려오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연화는 두려움을 참으며 말했다. 왕의 새빨간 눈동자는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훑어보고
있었다. 두통을 견디느라 얼굴이 일그러진 채였다.

언제든 다른 이를 해칠 수 있는 자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내의 눈에는 자비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하게 앞에 있는 인간의 쓸모를


탐색할 뿐이었다. 걸친 옷은 화려했고 거무스름한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흑발은 잘
정돈되어 있었으나 만희는 마치 황야를 떠도는 야수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 인간의
목덜미를 물어뜯을까 시기만 엿보고 있는.

무섭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시도는 해볼 수 있사오나 전하의 옥체에 제가 손을 대어야 하니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처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시간을 들이자 그녀의 눈에는 왕의 고통과 그 뒤에
있는 원인이 흐릿하게 보였다.

‘……너무 많은 죽음이 있어.’

섭리와는 다른, 죽지 않았어야 하는 인물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목숨들이 그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머리에, 어깨에, 목에, 갈퀴 같은 흰


손들이 그를 쥐고 있었다.

죄 없는, 죽지 말았어야 할 자들의 목숨값.

왕은 그 죄를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통만이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시일이 지나면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연화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섭리를 어긴


죄는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금수의 붉은 달

47 화
만희는 헛소리라 치부하겠으나 그녀는 왕의 머리 뒤쪽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고 두통의 원인을 다시 확인했다. 저승의 주민이 되는 것을 거부한, 망자의 혼령들. 이
세상에 지나치게 많은 원과 한을 두고 죽어버린 자들.

“…….”

아무리 연화가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다 하나 저토록 많은 혼령들을 보고 태연할 수는


없었다. 만희와는 다른 의미로 두려웠다.

본래 저승으로 넘어갔어야 하지만 이승에 남아 떠도는 혼령들은 그들의 세상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려 한다. 빈틈이 보이면 차가운 갈퀴 같은 손아귀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이다. 마치
일전 연화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마 끝없는 두통 역시 만희를 끌고 가려 하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그러나 그는


일국의 왕이니 수국을 가호하는 청룡의 힘이 거기까지는 허용하지 않을 터.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로 할 수는 없었다.

왕은 폭력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제사장 성현이 발작하듯 그녀에게


왕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던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왕이 지체 낮은 자들을 베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비츤 무어신가…….】
혼령 중 하나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며 연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릿한 형체였으나
머리통이 절반쯤 날아간 형태였다.

연화는 차마 똑바로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이승에 미련이 많은 혼령들은 죽을 때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금 연화의 눈에 비치는 혼령들의
모습은 희미한데도 대부분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뜻해…….】

【빛이야, 보살의 빛이야…….】

왕의 뒤에 빽빽하게 자리해 있던 혼령들은 연화에게서 나는 약사여래의 따스한 빛을 보고


주춤거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이승과 저승에 걸친 자들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것이 약사여래이고, 또한 저승의 주민들에게


한없이 매력적인 것이 그 빛이었다. 저 온기를 잡으면 자신 역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혼령들의 희미한 윤곽이 연화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차마 눈을 들지 못했다.

“다 괜찮으니 빨리 해봐라.”

왕은 두통 때문에 이를 악물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곁에 있는 자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이 계집애부터 피를 보면 시원할 것 같았다. 두개골
안쪽에 누군가 칼을 넣고 마구 쑤시며 곤죽을 만드는 듯했다.
연화는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가 앉아 무례를 무릅쓰고 왕의 머리 양쪽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에서 아주 은은하게 노란 빛이 흘러나왔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실패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왕을 능멸한 죄, 죽음을 면치 못할 터.”

그녀의 작은 손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얹히는 것을 느끼며 만희가 으르렁거렸다. 붉은


눈동자는 얼핏 그의 눈에서 핏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감히 천민 계집이, 사촌형의 아군이었던 여자의 딸년이 자신의 머리에 그 더러운 손을


댄다는 것이 짜증났다. 하지만 연화는 정신을 집중한 듯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성공하든 말든 죽여버릴까.’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연화를 노려보는 만희의 붉은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이상할 정도로 심기를 거슬렀다. 두통은 극심했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치받쳐 올랐다.

“잠시만, 잠시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조금 더 몸을 기울여 왕에게 가까이


숙였다.

만희의 눈 안에 연화의 작고 부드러운 얼굴이 들어왔다. ‘곱다’라고 만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던 왕은 연화의 양손으로부터 흘러들어 오는 기운에
잠깐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위로부터 마치 차가운 바람처럼 상쾌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그 기운이 흐르는 곳마다 통증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가만히 계십시오……. 가만히.”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연화가 조용히 속삭였다.

치유사로서 그녀는 어느 정도 대상의 고통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손바닥이 찌릿거리며


따끔거릴 정도였다. 왕의 두통은 생각보다 아주 심했다. 아마 한 번의 치료로는 안 될
테고 몇 번을 더 해야 나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고통을 줄여주는 정도가 다였다.

“아.”

그러나 만희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무슨 짓을 해도 뇌를 휘젓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것이 연화의 기운


덕분이라는 걸 그 역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지옥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한결 안정된


호흡을 했다.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었다.

맑고 따스한 그녀의 기운이 뇌를 떠도는 동안 왕의 얼굴은 한결 풀어져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연화는 작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고통이 사라지며 왕의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졌다.

“……치유의 이능이 진짜였던 건가.”

믿을 수가 없어서 제사장은 긴장한 채 지팡이를 쥐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왕의 분노하면


그 화를 전부 받아야 하는 내관 이하 시녀와 시종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능력을 믿지는 않았으되 한 가닥 기대감이 그들의 눈에 어렸다.

손으로는 약사여래의 기운을 흘리며 연화는 마음으로 속삭였다. 왕의 뒤에서 맴돌고 있는


혼령들을 향한 속삭임이었다.

‘이제 모두들 마음을 풀고 원래의 자리로…….’

연화는 혼령들을 위로했다. 완전히 돌려보내는 것은 지금 당장 불가능했지만 일단 그들의


혼란과 분노를 잠재워야 했다.

‘이승의 원한을 잠시나마 잊어주세요.’

그녀의 말에 혼령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연화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이는 형태들. 그들이 다가오자 끔찍한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연화는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한을 누군가는 들어줘야 했다. 그래야


잠시라도 그들이 물러날 것이다.
영혼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살의 품에 있는 자여,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줘.】

【그자는 악마야.】

【내 머리통을 반쪽으로 갈랐어.】

【어린 아들이 불에 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어…….】

원한과 혼란이 뇌리를 맴돌았다. 슬픔, 분노. 그들이 지나온 전쟁과 잔인한 광경들 속을
함께 걷는 것 같아 연화는 어깨를 떨었다.

【못나고 악한 자.】

【지옥에 끌려가게 해야 해, 우리를 도와줘…….】

그녀는 차가운 돌덩이 같은 영혼들의 분노를 견디면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란색의


따스한 온기가 혼령들의 가슴을 데웠다.

‘잠시만, 잠시만…….’

뒤로 물러서 주길 바라면서 연화는 그들의 혼 위로 약사여래의 자비를 뿌렸다. 손 안에


온기를 쥔 영혼들이 잠시 만족하며 뒤로 물러갔다.
거의 흐릿해질 만큼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손 안에 있던
왕의 머리통이 천천히 아래위로 흔들렸다.

“……참으로 신묘하군.”

왕의 목소리는 맑아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똑바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만희의 붉은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그녀는 흠칫하며 얼른 손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두통이 사라졌어.”

그들을 바라보던 제사장과 백관이 탄성을 냈다. 왕의 얼굴은 과연 여태껏 그들이 보던 중


가장 맑았다.

만희는 연화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치유의 이능, 그것이 실존할 줄이야. 머릿속은
마치 비온 뒤 갠 하늘처럼 맑았다. 태어나서 거의 최초로 느끼는 명료한 머릿속이었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연화를 훑어보았다. 작고 여린 여자다. 두통이 사라지자 거슬림이


조금 줄어들었다.

“신묘하지 않은가, 그 능력이 말이야.”

“망극하옵니다.”

“아니, 정말로 말이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연화의 턱을 들어올렸다. 여인은 예의 바르게 눈을 내리고 있었다. 이
작고 천한 계집이 왕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제사장이나 의사 따위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 정말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건가.”

하하하.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곁에서 제사장 성현이 몸을 움찔 했지만 왕의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연화에게만 있었다.

“대체 어떻게 두통을 가라앉힌 게지? 아주 머리가 맑아.”

왕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았다. 그냥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통증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말해 봐라. 어떻게 한 게냐?”

연화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저 약사여래의 가호를 나누어드렸을 뿐입니다.”

“거 참 신묘하군! 약사여래의 가호라.”

만희는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의 뒤에, 머리에, 혼백들이
달라붙어 있다. 당신이 죽인 수많은 영혼들과 원한이.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 나는
잠시의 온기를 나누어줬을 뿐이다. 당신의 목숨을 대신해서.

언제고 두통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식은땀이 나서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정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밤이 되면 다시 원혼들이 만희를 찾아와 그의 피와 뇌수를
빨아먹으려 달려들 것이다. 그건 절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쓸 만하군. 눈을 들어라."

처녀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드러난 그녀의 눈에 왕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보냈다.

검고 둥글고 순한 눈이다. 아까는 두통 때문에 정신이 흐려 미처 알아채지 못했으나 제법


미색이었다.

희고 맑은 얼굴. 마치 작은 들꽃 같은 여인이었다. 소박하지만 곱게 입은 연한 녹색의


옷과 잘 어울리는 작고 여린 미인.

사흘간 먹지도 씻지도 못해 더럽고 초췌했으나 본연의 미모가 가려지지는 않았다.

“예쁜 아이로군.”

만희의 눈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관심으로 변해 번득였다.

“치유의 이능이 있고 심지어 미인이기까지 해. 참으로 괜찮은 여인이로다.”


연화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왕의 눈에는 뱀처럼 감정이 없었으나 본능은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탐욕에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리 가까이 와봐라.”

“뭘 하는 게냐, 왕께서 부르시지 않느냐.”

곁에서 내관이 그녀의 등을 밀어 왕의 앞으로 대령했다. 연화는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연화의 작은 얼굴을 만희는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오는 동안 뒤집어쓴 길 먼지로


더러웠지만 그 밑의 피부는 희고 부드럽다.

왕은 자신의 한 손에 감싸이는 여인의 뺨을 잡고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 경험이 있나?”

“예?”

“다리를 많이 벌려봤냐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금수의 붉은 달
48 화

만희가 그녀의 검은 눈에서 발견한 것은 공포였다. 경험은 없어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군,


하며 왕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작은 새 같은 여자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얼굴이
새파랬다.

어쩔까. 만희는 잠시 저울질을 해보았다. 그는 숫처녀를 좋아하긴 했지만 두통이 심해지고


난 다음에는 서툰 여자보다 길들여진 쪽을 선호했다. 신경을 안 써도 여자 쪽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숫처녀인가? 쯧.”

그는 흥미가 떨어져서 연화를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나중에 경험 없는 여자가 필요할 때에


그녀를 안을 생각이었다.

“이 여자를 앞에 앉혀놔라. 그리고 침방시녀 중 한 명을 데려와라. 잘 교육받은 것으로.”

왕의 명에 따라 연화는 알현실의 바닥에 내려가 꿇려 앉혀졌다. 그녀는 잠시 자신이 만희의


욕정의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내의 눈은 곧 인간을 잡아먹을
짐승과 닮아 있었다.

곧 어전으로 시녀 서넛이 들어왔다. 내관에게 이끌려 들어온 여자들은 침착했지만 얼굴이


어두웠다.

연화는 바닥에 엎드린 채 내관이 시녀들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잘 모셔라. 침방시녀들 중 전하의 심중에 든 아이들은 품계를 받았느니라.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는 것이니.”

내관의 감언이설에도 시녀들의 낯빛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연화는 살짝 든 시선으로


흘긋거리며 그들을 훔쳐보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뭘 하는 게냐, 어서 오지 않고!”

제사장이 성화를 부렸다. 시녀들이 급히 걸음을 옮겨 만희의 앞에 섰다.

왕은 차례로 늘어서 인사하는 침방시녀들을 보다가 가장 풍만한 몸을 지닌 여인 쪽을


가리켰다.

“너, 이쪽으로 와라.”

“예, 전하.”

시녀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숙하고 굴곡 있는 육체의 시녀는 만희의 손짓에


따라 그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제법 볼 만한 가슴이군.”

만희의 커다란 손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얇은 비단천의 저고리


위로 막무가내로 움켜쥐는 사내의 손에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시녀는 입을
달싹였다.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는 만희의 커다란 손은 무자비했다. 아플 정도로 떡처럼 가슴을
주무르면서 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큰 데다 둥글고 모양이 예뻐, 손맛이 좋아.”

유두를 손톱으로 긁어 자극에 그녀가 움찔 등을 휘자 만희가 이제는 아예 소리 내어


웃었다.

“적당히 민감하기도 하고……. 오, 가만 보니 교육을 제법 받은 모양이야. 가슴도 제대로


발달했어. 방중술을 담당한 내관에게 상을 줘야겠군.”

그는 치마 밑으로 손을 넣었다. 곁에 늘어서 있던 시종들과 제사장은 그 모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왕은 이런 광경에서 그들이 눈을 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연화는 너무 놀라서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그녀와


만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연화를 알아채고 만희가 히죽 웃었다. 손 안의 여인을


희롱하면서 그는 연화에게 턱짓을 했다.

“그래, 저것도 교육을 받아야지. 직접 보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전하.”
시녀들을 따라온 내관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차피 왕은 상당히 자주 백관들 앞에서
여자를 안았다. 특별할 일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연화는 어떤 가림막도 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보이는 광경에 기절할 것 같았다.


낯빛이 창백해진 그녀를 보면서 만희가 낄낄거렸다.

“저것이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잘 감시해라. 만약 피한다면 채찍질을 해도 좋다.”

“받들겠나이다.”

연화가 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려 하자 등 뒤에서 내관이 말총 회초리를 휘둘렀다.


찰싹 하고 등에 감기는 통증에 연화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왕명을 듣지 않았느냐, 다음번에는 옷이 찢어질 정도로 때려주겠다. 하고많은 시녀들을


체벌해 왔는데 네 등 정도 갈기갈기 엉망되는 것은 일도 아니지.”

내관이 경고했다. 등이 화끈거릴 정도로 아픈 것이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연화는


시선을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가슴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만희의 손길에 시녀가 몸을 뒤틀었다.

“전, 전하……. 제, 제발……! 아, 읏……!”

“어허, 승은을 입는 게 아니냐. 감사해야지.”


만희는 여인을 희롱하면서 낄낄 웃었다. 왕의 손은 그대로 속곳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린
음부로 남자의 굵직한 손가락이 어떤 애무도 없이 그대로 꽂혔다.

빡빡하고 물기 없는 내부에 만희가 혀를 찼다. 그를 밀어내려는 가느다란 손목을 한 손에


말아 쥐고 왕은 손가락을 두어 번 더 움직였다. 빡빡해서 시녀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교육을 받았는데도 아직 여기가 말라붙었잖아? 이래서야 재미를 볼 수가 없지.”

그는 불을 붙이는 용도로 쓰는 향유를 쏟아 손바닥에 담고 그것을 침방시녀의 음부에


문질렀다. 질척하고 향내 나는 기름이 그녀의 음모를 흠뻑 적셨다.

젖을 리 없는 몸 안쪽을 억지로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그의 손가락이 기름을 잔뜩 머금고


그녀의 내벽을 더듬어 올라갔다. 음핵을 엄지손가락으로 자극하면서 그는 긴 손가락을 아주
깊이까지 밀어 넣었다.

기름으로 미끌거리는 검지와 중지가 한꺼번에 밀고 들어와 그녀는 아파서 신음을 삼켰다.
내관에게 방중술 교육을 받았던 몸이라 갑작스러운 삽입에도 찢어지지는 않았으나 억지로
열린 내벽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화는 자꾸만 떨리려는 입술을 물었다. 자신이 당하는 게 아닌데도 수치심과 모욕감이
밀려들었다. 알현실에 늘어선 모든 수하들이 전부 시녀가 능욕당하는 모양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연화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느끼는 모욕감 역시 구경하고
있었다.

“다리를 좀 더 벌려. 방중술을 익히지 않았느냐?”


왕이 킬킬 웃었다. 간만에 맑은 머리로 즐기는 정사다. 검지와 중지를 넣어 내벽 안에서
휘휘 저으면서 그는 시녀의 안을 즐겼다.

내관이 방중술을 핑계 삼아 여기에 이것저것을 밀어 넣고 민감하게 만들었겠지. 상상만


해도 즐거워서 만희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침방시녀들이 배우는 밤의 기술은 그가
특별히 내관에게 지시해 가르치라 한 것이었다. 어떤 것을 배우는지 만희는 아주 잘
알았다.

게다가 밑에서 연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울음을 참는 것인지 눈가가 붉어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저 얼굴은 제법 동하는군.

만희는 생각했다. 숫처녀라도 색기는 제법 보인다. 연화 자체도 소박하고 깨끗한 미인이니.

그는 심술궂게 시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바로 앉혔다.

“자, 저들에게 보여줘라. 네 다리 사이 말이야. 음부도 깨끗하고 예쁜지 검사를


받아야지.”

손을 뺀 왕은 그녀의 양다리를 들어 벌리고 사람들의 앞에 시녀의 음부를 드러냈다. 치마가


전부 흘러내리고 속곳도 반쯤 찢어버려 향유와 애액에 젖은 둔덕과 은밀한 틈이 그대로
모두의 눈앞에 활짝 벌려졌다.

아무리 이런 일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대비가 되는 것은 아니라 침방시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시녀들의 교육을 맡는 내관이 다가와 그녀의 음부를 회초리로 열어 뒤적거렸다. 무기질의
말총 회초리가 성기를 뒤적거리는 감각에 그녀는 거의 숨이 넘어갈듯 허덕였다.

“아주 예쁜 분홍빛입니다.”

내관이 무감정하게 왕에게 아뢰었다. 침방시녀는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녀의 은밀한 틈을 목을 쭉 빼고
구경했다.

별다를 일은 아니었다. 가끔 왕은 이렇게 계집을 모두에게 내놓는 놀이를 즐겼으니.

“어때, 감상을 말하거라. 왕이 이렇게 네게 승은을 내리는데, 기뻐해야지.”

만희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은 후, 아예 저고리를 위로 올려버리고


가슴을 애무했다. 시녀는 제대로 말을 내놓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저, 저는…… 명대로 따를 뿐이오라…….”

“그래, 너 같은 한낱 시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내가 자비롭지 않으냐?”

“전, 전하께서는 언제, 언제나 자비로우시며…….”

시녀는 앵무새처럼 말을 이었고 만희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너에게 승은을 내리도록 부추긴 것이 누구인 줄 아느냐?”


“모, 모르옵나이다.”

“저런, 그런 평생의 은인을 몰라보면 안 되지.”

왕은 가벼운 어조로 그녀를 타박했다. 손은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을 유린했다. 한쪽 손은


그녀의 깊숙하고 은밀한 곳을 희롱했다.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시녀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대고 만희가 연화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저 여인이다. 저 여인이 내 두통을 고쳐 주며, 내게 마음껏 정사를 펼치라 해줬단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시녀와 연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침방시녀는 자신의 다리 사이가 완전히 벌어져 남들에게 전부 보이는 상황에 거의 정신이


날아가 있었다. 그녀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연화는 시선을 피하려다 다시 한 번
채찍을 맞았다. 악 하는 소리를 삼키며 몸을 웅크리는 그녀를 보다가 만희가 시녀에게
속삭였다.

“내 저 여인 대신 너를 안는 거란다. 실은 저 여자의 속살을 전부 이곳의 사내들에게


보이고 모두 한 번씩 맛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고귀하신 치유사인데다 경험도 없는
쑥맥이라 하니 그럴 수가 있어야지.”

웃음소리가 시녀의 귓전을 울렸다. 이제 완전히 젖은 음부에서 애액이 질척이며


흘러나왔다. 흑, 하고 우는 소리를 흘리는 여인을 보며 만희가 껄껄 웃었다.
“그래, 이편이 훨씬 재미있기도 하고 말이다. 저 여자도 이제 다가올 일을 기대하게
되겠지.”

왕은 시녀를 안고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자, 네 이름이 무엇이냐?”

“……흐, 은, 은연이라 하옵니다…….”

간신히 대답하는 시녀 은연의 입술을 만희는 탐욕스레 삼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연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에 광기가 돌아 연화의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사내의 눈은 연화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 어떠하냐? 이것이 네 미래다.

여인은 이를 악물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을 파고들었다. 스스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실신이라도 할 성싶었다. 그녀의 파리한 얼굴이 점점 더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며 만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관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질이 좁은 편인 듯한데 도구를 대령할는지요?”

“오, 그래. 가지고 오너라.”


내관은 곧 양물 모양으로 깎은 나무조각을 여러 개 가지고 들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가는
것을 골라낸 왕은 그의 앞에 대령된 최음제가 섞인 향유 속에 조각을 담갔다.

푹 적셔진 나무 양물을 보면서 은연은 덜덜 떨었다.

금수의 붉은 달

49 화

혀를 차면서 만희가 일부러 거칠게 그녀의 음부 안으로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고 여자는


신음하며 허리를 말았다.

“그리 무서워하면 안 된다. 잘못하면 이 음부가 찢어질 수도 있어서 넓혀주는 거란다.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만희는 히죽거렸다.

“네가 교육을 받은 침방시녀라 하나 내 물건이 오죽 커야 말이지.”

구경하던 사내들 사이에 웃음이 번졌다. 신하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왕의 놀음은 보기만 해도 흥분되었다. 사실 직접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왕이 가지고 놀다 버려 살아남은 여인들을 데려다 스스로 능욕하기도 했으니, 그
순서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녀의 머리채를 쥐고 만희는 자신의 다리 사이로 그녀의 얼굴을 이끌었다. 시녀는 떨리는
손으로 왕의 바지춤을 풀고 남근을 꺼냈다.

교육을 받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라서 은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뺨에 닿는


사내의 큰 양물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대로 빨거라.”

내관은 그사이 왕이 골라낸 양물 조각을 은연의 엎드린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양물을


입 안에 박으면서 왕은 시녀의 뒷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좁고 뜨거운 입 안을 음미했다.

내관이 나무조각을 조금씩 더 깊이 박을 때마다 은연의 무릎이 꺾였고 입 안에서 이빨이


세워졌다. 왕은 그녀의 뺨을 때렸다.

“어딜 건방지게 이를 세워. 왕의 것을 입에 담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고.”

나무조각을 음부에 묻은 채 시녀는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맞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리면서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아무리 연습을 해왔다지만 왕의 남근은 지독하게 커서 목구멍을 찔러대었다. 이빨을 세우지


않으려 은연이 기를 쓰고 입을 크게 벌렸다.

만희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고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이 지독하게 예뻐


보여 그는 히죽 웃었다. 저 계집을 범하는 즐거움은 다음으로 미뤄두길 잘했다. 기대가
하늘로 솟구쳤다.
왕은 시녀의 머리채를 한층 더 잡아당겼다.

“입이…… 정말 쓸모가 없구나. 한 번도 구음을 안 해본 게냐? 방중술을 전혀 배우지도 못한


것처럼 굴고 있어.”

말과는 달리 만희의 얼굴을 붉게 달아올라 호흡이 거칠었다. 시선의 끝에서 연화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채찍질 때문에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앞에 펼쳐진 수치스러운 광경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재미있구나.”

이것도 또 새로운 여흥이다. 왕이 기껍게 웃었다. 아마도 연화는 남자를 모르거나, 최소한
익숙하지는 못한 여자일 것이다. 숫처녀를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았으나 별식으로 나쁠 일은
없었다.

“얼굴이 반반해서 훈련을 좀 받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데 승은을 입다니 정말 분에 넘치는
줄 알아라.”

왕은 은연의 머리채를 잡고 앞뒤로 움직였다. 그녀가 숨 막힌 소리를 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로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입과 코를 가득
메우는 비릿한 사내의 냄새에 그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곧 절정이 올 것 같아서 만희는 시녀를 뒤로 물렸다. 그는 곧 여인을 들어 자신에게 등을


향하게 하고 무릎 위에 앉혔다.
나무로 만든 남근을 멋대로 잡아 빼자 은연이 신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아래가 빠끔거리며
벌어진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녀들은 왕만을 위한 여인이기에 방중술을 배우더라도 다른 사내에게 안기지는 않는다.


은연은 처녀였다.

만희의 물건은 거대했다. 강제적으로 젖은 음부로 만희의 물건이 흉기처럼 꽂혔다. 다리


사이가 찢어질 것처럼 팽창했다. 시녀는 숨이 막힌 소리를 내면서 허덕였다.

“앗, 아악! 아악! 아, 아프……. 윽! 아흑!”

아무리 왕과의 하룻밤을 위해 준비한 여인이라 하나 여전히 좁고 빠듯한 내벽에 왕의


성기는 버거웠다. 향유에 잔뜩 젖은 나무 양물로 내벽을 이미 넓혔음에도 그녀는 고통에
신음했다. 완전히 들어찬 안이 송곳으로 찔리는 것처럼 날카롭게 고통스러웠다.

이 상황의 수치심과 모욕감에 연화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중신과 내시들이 나열해 보고 서


있는 앞에서 시녀는 다리를 벌려 왕의 무릎 위에 앉는다. 연화는 무력하게 그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시녀의 활짝 열린 음부 사이로 드나드는 만희의 양물이 환히 보였다. 중신들은


눈을 돌릴 생각도 하지 않고 남녀의 접합 부위를 벌건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기름기와 열기가 번들거렸다.

은연이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아흐……. 흑! 전, 전하……. 아픕, 아, 아아! 너, 너무 크……!”


“큭……. 제법 괜찮군.”

왕은 빠듯하게 조이는 내벽을 견디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과연 고르고 고른 침방시녀다.


아주 좁고 탄력 있는 몸이었다. 좀 더 훈련을 시킨다면 명기 반열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윽, 아읏……!”

시녀는 본능적으로 옷자락이라도 내려 음부를 가리려 했지만 양손목은 왕의 한 손에 잡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리를 벌려 들어 올린 사내의 손은 용서 없이 허벅지를 더 한껏
벌렸다. 골반이 뒤틀려 깨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화는 기어코 눈을 내렸다. 뒤에 선 내관도 앞의 광경에 눈을 빼앗겼는지 채찍은 날아오지


않았다. 매를 맞더라도 이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왕의 두통을 치유한 뒤 숨 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두통을 가라앉힐 수


있어서 안심했던 것은 찰나일 뿐이었다.

대체 왜, 저 여인을 만인의 앞에서 능욕하는 것이며 왜 자신이 이 광경을 봐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녀는 질식할 정도로 아랫배를 찢어발기는 사내의 불기둥에 쉰 목소리로 높은 신음을


냈다. 뒤에서 만희가 허리를 튕길 때마다 물건은 더 깊이 안으로 치받았다.
“아윽! 사, 살려주, 악!”

인정사정 보지 않고 파고드는 사내의 대물에 자궁이 찢길 것 같아 공포스러워서 그녀는


몸을 뒤틀었지만 사내의 강철 같은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갈퀴처럼 쥐고
있는 곳으로 은연의 백자 같은 흰 피부에 붉은 손자국과 멍이 생겼다.

“계집, 눈을 들어라!”

퍼뜩 정신을 차린 내관이 회초리를 내려쳤다.

“아!”

연화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으려고 버텼다.


한 대, 다시 한 대, 또 한 대. 매질이 계속될 때마다 등이 화덕 위에 올려놓은 듯 불타는
고통에 괴로웠다.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호 님을 기만하고 떠나와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아니, 사실 인간계로 나올 때 좋지 않은 결과가 기다리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죄인이었던 어머니와 자신을 왕이 좋은 일로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지 그의 고통을
치유하는 일만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을 텐데.

연화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고 버티는 광경을 만희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의 벌을 두려워한 내관이 억지로 연화의 상체를 들고 고개를 잡아
정면을 보게 했을 때, 그녀의 얼굴이 붉고 온통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더
흥분했다.
시녀의 내부에 들어가 있는 양물이 훌쩍 크기를 키웠다. 은연이 비명을 올렸다.

“윽, 아앗……!”

뱃속 깊은 곳의 어느 지점이 눌린 것 같았다. 은연은 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몸을 떨었다.


함락되는 강렬한 쾌락이 전신을 지배했다.

연화는 눈을 감았다. 눈알을 파낸다고 해도 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정사란, 백호와 나누었던 그 순간이다. 힘없는 여인이 왕에게 강제로 범해지며
만인에게 그 광경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왕의 명이라 해도 연화는 따를 수 없었다. 백호와의 순간마저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만희는 흥미롭다는 듯 피식거리며 시녀를 돌려 안았다. 그의 시선은 눈을 감은 연화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은연에게 말을 걸었다.

“아, 이제 좀 느끼는군. 좋은가? 아무리 교육을 받았다지만 나처럼 큰 물건에 처음부터


조여대며 창녀처럼 굴다니, 음란한 몸이야.”

연화의 귀에 들어가라고 일부러 비아냥대는 소리다. 마치 너의 운명이 앞으로 이렇게 될


거라는 듯.

만희는 히죽거리면서 시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물과 타액으로 그녀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의 허릿짓 한 번마다 은연의 얼굴 위로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고통과 절망이 쾌락과 섞인 그 얼굴이 보기 좋아서 만희가 크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이 연화와 겹쳐지는 것 같았다.

“제발, 이제 그만.”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 고문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녀는 묘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친절하게도 백호에게는 모든 일을 함구하겠다고


말했다. 백호는 아마도 이 상황을 전혀 모를 것이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가
알았다면 인간 전체를 혐오하고 경멸하게 되지 않았을까, 연화를 포함해서 말이다.

“백호 님…….”

하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연화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내관도


앞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그녀의 눈물을 알지 못했다.

불과 한 달의 기간이었다. 발정기의 시간을 그와 보내기로 했던 첫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고


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백호와 사랑에 빠지기는 충분했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절망스러웠다.

눈물이 방울방울 뺨으로 흘러내렸다. 왕의 손 안에서 시녀가 축 늘어진 것도 그 때였다.

옷이 엉망진창이 된 채 은연은 정신을 잃은 듯 시체처럼 사지를 늘어뜨렸다. 그런 그녀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지고 만희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이 눈물을 흘리는 연화를 보며 번뜩였다. 그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연화가
고개를 움츠렸다.

“네가 다리를 벌린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는 게냐?”

희한하다는 듯 만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허리춤을 제대로 정돈하지도 않고 일어서


옥좌 아래로 내려섰다. 내관이 턱을 놓았지만 연화는 감히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재미있는 아이군.”

만희는 연화의 뺨에 손을 대었다. 온통 젖어 사흘간의 먼지와 함께 엉킨 그녀의 얼굴은 빈


말로라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화의 눈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다. 그 안에
가득 고인 눈물은 금세 넘쳐흐를 듯 눈꼬리에 매달려 있었다.

만희는 홀린 듯 그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연화의 눈물은 마치 보석처럼 흘러 뺨으로


도르륵 굴렀다.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가 왕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말했다.

“우는 것도 사내를 동하게 하는군.”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을 둘러싼 중신들과 내관들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라 함께


웃었다. 습하게 달아오른 공기 속에서 연화는 혼자 외로이 울었다.

시간은 지독히도 가지 않았고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50 화

백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칠 것 없이 맑게 갠 하늘이었다. 바람이 좋구나, 하며 그는


시녀들이 가져다 놓은 꽃차를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향기로우나 그 향기가 폐부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마치 가슴 밑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허전했다.

“이것도 연화가 잘 마시던 차였지.”

그는 물끄러미 잔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꽃차는 연화와 닮아 있었다. 백호는 한숨을


쉬며 등을 나무기둥에 기댔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 아이 하나가 없어졌다고 이리도 허전할 줄이야.”

바람이 불어 그의 백발을 날렸다. 백호는 푸른 눈을 가늘게 떠서 천리안의 힘을 끌어냈다.


원로들이 본다면 또 사감을 섞어 천리안을 쓴다며 난리가 나겠지만, 혼자 있으니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시야가 아주 흐릿하게 그의 앞에 펼쳐졌다.

연화는 지금 다른 계로 건너갔다. 사방신의 힘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가장 강하며,


천리안과 같이 공간을 건너 투시하는 힘은 더군다나 신령계를 넘어가기 힘들다. 각 세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샘의 정령인 청수희뿐이다.
희미한 시야에 그는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백호의 날카로운 눈썹과 반듯한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사방신의 힘이 느릿하게 뱃속에서부터 솟아올라 왔다.

본래 천리안은 이렇게까지 많은 집중을 요하지 않았지만 세계의 경계를 넘어 투시하기


위해서는 백호로서도 상당히 힘을 들여야 했다. 그나마도 아주 흐리고 불투명한 흔적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신령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으로 하면 안 되는 짓이다. 경계가 명확한 영토를 넘어 훔쳐보는


짓은 염탐이나 다를 바 없다. 다른 영토에 존재하는 사방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의 주변에서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올라올 정도로 힘이 모여들었다.

‘단지, 연화의 그림자뿐이라도.’

백호의 눈앞에 열린 천리안은 느릿하고 흐리게 움직였다. 인간계로 넘어간 그의 시야는


지독히 흔들렸다.

“연화야.”
백호는 염원을 담아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신의 염원은 강렬했고 그 힘이 시야를
이끌었다. 아주 천천히, 천리안의 앞에 흐린 그림자가 떠올랐다.

연화였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연화인 것을 백호는 알 수 있었다. 지독히 어둡고


선명하지 않은 시야라서 거의 형체만 보일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백호는 더 자세히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혹시라도 고초를 겪는 것은


아닌지, 제대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흐릿한 형체는 붉은색의 침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넓게 열린 창밖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백호의 궁에서 입던 희거나 엷은 푸른색의 옷과는 달리 아주 짙은 보라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먼 거리 너머로도 그녀를 둘러싼 공간과 걸친 옷이 매우 호사스럽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잘 지내는구나.’

연화는 가난한 천민 부락 출신이다. 저렇듯 화려한 방에, 좋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녀의 정인에게 몸을 의탁했다는 뜻일 것이다.

배를 곯지 않고 고생을 하지 않고 잘 지낸다는 사실에 일단 백호는 안도했다. 하지만


뒤이어서 곧 씁쓸함과 알 수 없는 슬픔이 울컥 가슴 아래에서 치고 올라왔다.

‘정인에게 갔으니 이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구나.’


경계를 넘어선 천리안은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벌써 시야가 뭉개지며 색이 사라져 갔다.
그는 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어 연화의 형체를 덧그렸다. 아주 먼 곳에
있는, 몸뿐 아니라 마음도 멀어져 버린 여인.

완전히 천리안의 시야가 암전된 뒤 백호는 눈을 깜박였다. 느리게 현재 존재하는 공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 버린 연화의 흐린 모습 따위는 마치
꿈이었던 것 같았다.

이렇듯 세상의 규칙마저 어기며 무리를 해서 천리안을 발동시켰으니 아마 한동안은 다시 그


힘을 쓰기 힘들 것이다.

그는 슬픈 기분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찻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백호는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고 수없이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많은


이야기책들 속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가슴이 아프다, 그립다, 마음이 텅 비었다는 감각 따위는 사방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리움의 대상은 이미 그의 앞에 대령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백호는 이야기책과 역사책 속의 감정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곳이 저리는 것 같다.’


그는 천천히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알싸하게 퍼지는 고통은 분명 육체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감정의 파도는 마치 육체적인 통증처럼 실체를 가지고 심장을
두드렸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리며 평소와 다른 통증을 호소했다.

“고통이라.”

얼마 만에 느끼는 것인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금수의 왕은 기억하던 그 순간부터 이 모습이었고, 상제의 손에서 빚어져 태어나 이 땅에


내려서서 모든 신령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때로 같은 사방신들과 충돌을 일으킬 때는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덮쳐 올 때가 있었으나 지금의 감정과는 분명
달랐다.

“연화야.”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백호는 인간 여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빈 공간 안에 그의


목소리만 덧없이 울렸다. 그럼에도 이름을 통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백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부드럽게 늘어지던 긴 흑발과 희고 작은 얼굴, 그를 바라보던 검고
둥근 눈동자. 가늘고 부드러운 손이 때로 그에게 다가올 때면 백호는 연화의 손등에 입을
맞추곤 했다.

그가 앉은 방은 연화가 자던 침실이었다. 연화가 간 뒤 그녀가 쓰던 물건을 조금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어 마치 어디선가 그녀가 나올 것 같았다.

이미 연화가 떠난 지 나흘 넘게 지났지만 백호는 매일 이곳에 들어와 차나 술을 들고는


했다. 그의 명대로 주안상을 봐 올 때마다 호접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백호는
그 눈길을 무시했다.
백호는 곁에 가져다 두었던 베갯잇을 바라보았다. 연한 하늘색의 능견으로 만들어 윤기가
흐르는 베갯잇은, 호접이 빨겠다며 가지고 나가는 것을 잡아둔 것이었다. 연화가 며칠간
베고 자던 옷감이다.

그는 그 천을 집어 들어 코 밑에 댔다. 이미 시간이 지나 그녀의 향기가 날아가고 없을


텐데도 마치 그녀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낱 인간의 여인 아닌가. 대체 왜 이리도.”

보내지 말 것을 그랬나. 백호는 목 안으로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죽든 말든, 양어머니가 죽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녀를 인간계로 보내버렸단
말인가. 그녀가 정인을 그리워해 마음이 아프든 말든, 손 안에 든 작은 새처럼 그저
품속에 가두고 나만 보게 하면 될 것을. 멍청하기는.

코끝에 맴도는 연화의 향기 때문에 그녀가 더 뼈아프게 그리웠다.

“…….”

백호는 코를 베갯잇에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마치 연화의 피부 같은 보드라운 능견의


감촉이 뺨과 코 주위로 느껴졌다.

그는 허리춤을 풀고 자신의 양물을 꺼냈다. 이미 연화의 흐릿한 체향만으로도 절반쯤


일어선 채 힘을 얻고 있는 남근을 손에 잡고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의 큰 손에도 넘치게 큰 물건은 귀두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넓은 손바닥으로


밑둥부터 끝까지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자신의 손은 절대 연화와 같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그녀의 부드럽고 가냘픈 몸이 떠올랐다. 버거워하면서도 기꺼이 백호의 물건을
품어주던 여인의 몸.

연화는 항상 잠자리를 힘겨워했지만 백호를 완전히 몸 안에 받아들였을 때의 눈동자는


희열과 쾌락에 들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는 백호에 대한 애정 역시 있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믿었다.

만약 그녀에게 마을에 두고 온 정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만은 연화는 그의


것이었다. 백호의 지나치게 거친 손길과 성정에 두려워하면서도 애써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던 모습.

“연화야.”

탄식과 같은 부름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 안에서 양물이 단단해져 갔다. 점점 더 손짓을 빨리 하며 백호는 열기에 들뜬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뜨거워지는 손 안이 마치 연화의 몸 안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손을 움직일수록 더 부족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감각이 모자랐다. 거칠고 커다란 손과 다르게 머릿속에 남은 탄력 있고 매끄러운 육체의


안쪽이 그리웠다. 연화의 몸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떠올랐다. 좁고 빠듯하고 부드러웠던
그녀. 눈물을 흘리면서 발그레한 피부로 애써 신음을 억누르던. 세상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여인. 서글프게도 이제 떠나버렸지만 한때는 그의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

절정감이 몰려왔다. 그는 굳이 인내하지 않고 뇌리를 침범하는 쾌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계까지 굳어졌던 양물이 이윽고 그 끝에서 흰 점액질의 액체를 뿜어냈다.
절정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가느다란 새 같은 인간의 여인이
맴돌았다. 절정을 맞이할 때면 언제나 흐느끼며 백호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

배까지 튄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히고서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인이 있을 인간 여자에게 이리도 미련이 남다니.”

연화는 달이 가늘어질 때를 기약하고 떠났으나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여인을 찾아달라는, 아주 매정한 말을
남겼다.

“정말 내게는 마음이 없었던 게냐……. 네 마음을 가진 자가 따로 있었던 게냐.”

절정 뒤의 허탈감 속에서 백호는 한숨처럼 말했다. 공물을 훔쳐냈다고 강탈하듯 그녀를


억압하여 데리고 왔으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녀의 그 보드랍고 따스했던 얼굴과 손이
자꾸만 심장에 남았다.

“보고 싶구나, 연화야.”

그리움과 애정이 밴 목소리였다. 신으로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에 시달리며


백호는 눈을 감았다. 앞이 아득할 만큼 연화가 보고 싶었다.

“…….”
다과상을 내가려 왔던 호접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그녀는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함께 왔던 묘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접의 날개가 간헐적으로 파닥였다.

“왜 그러지, 호접?”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묘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했다. 눈치 빠른 여우의


신령을 속이기란 힘든 일이라 호접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백호 님이 생각보다 많이 힘드신 것 같아.”

“백호 님이? 왜…….”

“왜긴, 뻔하지 않으냐. 연화 님 때문이지.”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묘우를 향해 호접이 눈을 흘겼다. 그녀는 우울해 보이는 백호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남아서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연화 님이 갑자기 내려가신 걸까.”

“……글쎄다.”
묘우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연화를 배웅한 것은 호접이었으나 별다른 말을 듣지는
못했던 듯싶었다.

‘내가 굳이 사정을 알릴 필요야 없지.’

연화의 일은 딱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묘우는 신령계의 일이 먼저였다.

51 화

금수의 왕인 백호가 인간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고, 연화가


떠날 수 있다면 상황이 어떻든 그는 괘념치 않았다.

‘미안하지만, 연화 님.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사과했다. 지나고 보니 그녀는 꽤 얌전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려갈 때도


별다른 소동 없이 아주 조용히 사라졌고, 입이 무거워 호접에게도 별말 하지 않았고.

호접은 갑자기 조용해진 묘우를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여우의 신령은 본래 그리 과묵한


타입이 아니다. 특히 친우인 호접과 함께일 때면 더욱 그랬다. 그는 항상 발랄하게 수다
떠는 것을 즐기고는 했는데, 조용해질 때는 대부분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때였다.

“너 뭔가 아는 것이 있는 게냐?”
“뭘?”

묘우가 시침을 뗐다. 하지만 호접의 눈은 꽤 날카로웠다. 워낙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한


친우이기에 더 그랬다.

‘이 녀석,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수상쩍은 눈으로 묘우를 훑어보았다. 여우의 신령은 잊고 온 물건이 생각났다며


황급히 호접의 시선 안에서 빠져나갔다. 그 역시 자신의 친우가 대단히 날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연화는 중얼거렸다. 몇 번째 중얼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침상 위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사이 더 마른 연화의 몸은 마치 가냘픈 새처럼 작게 접혀져 거대한
침상 위에서 더 작아 보였다.

알현실에서 왕을 치료한 후 끌려온 이 방에는 자그마한 창문뿐, 거의 사방이 막힌


형태였다. 다만 지독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이기는 했다.

붉은 깔개가 바닥을 덮었고 천장은 온통 섬세한 무늬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라색의


천개가 침상의 천장과 옆을 가리며 아래로 늘어졌고, 그 곁으로 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 꽃은 매일 바뀌어 연화는 그것으로 날이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방 한편으로 장미석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탕이 있었다. 탕에는 맑은 물이 항시 가득
차서 그 위에 장미꽃잎이 띄워져 있었다. 백호의 궁에 있던 것만큼 크지는 않았으나
호사스럽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대체적으로 그랬다. 백호의 궁은 너르고 소박하고


자연스러웠으나 이곳 수국의 왕궁은 지독하게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인위적이었다. 깔개와
천개와 벽을 수놓은 장식과 자수는 자세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주 귀하신 치유사이니 고이 모셔라. 상처 하나라도 나면 경을 칠 줄 알아라.’

왕의 한마디에 그녀의 거처가 여기로 정해진 것이다. 대체 이곳이 넓은 구중궁궐의


어디쯤인지 연화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시녀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음식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연화는 차마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둘 중 한 명이 침방시녀 은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만희에게 모든 것을 내놓고 능욕당하던
그 시녀.

은연은 천천히 다가와 연화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은으로 만든 빛나는 쟁반 위에


도자기 그릇들이 희게 반짝였다. 게살로 만든 연한 죽과 당면과 갖은 야채를 볶아 만든
따끈한 채(菜)요리, 흰 쌀밥과 간장과 설탕으로 달고 짜게 요리한 고기볶음 등 다양한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연화 혼자 먹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치유사님, 드시지요.”

은연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연화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흑발을
구름처럼 틀어 올려 금으로 장식한, 눈이 기름하고 뺨이 흰 은연은 과연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곳에 오신 지 벌써 사흘째, 거의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대로면 기운이 빠져


눕게 되실 겁니다.”

은연의 목소리가 차갑다. 하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군요. 그리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음식을 물리고자 했다. 입안이 까끌거려서 도무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두고 온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고초를 당하고 있지는 않을지, 백호가 혹시라도 그녀를 괘씸하다
여기지 않을지.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특별히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버텨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다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마지막 기력까지도 전부 소진한 기분이었다.

음식을 거부하는 연화를 보다가 은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셔야 합니다.”

“…….”
시녀의 눈빛은 냉랭했다. 그녀는 그릇의 뚜껑들을 모두 열었다. 함께 온 다른 시녀가
뚜껑과 아침식사 쟁반을 치웠다. 물론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대로라면 전하의 치유도 못 하실 겁니다. 제대로 드셔야 숨이 붙어 있을 거예요.”

“아주 먹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연화의 대답에 은연의 눈빛이 돌연 사납게 바뀌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연화를


쏘아보았다. 침상에 앉은 채 연화는 은연을 외면했다.

은연을 보면 자꾸만 광기에 차 있던 만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과 육체로 은연을


능욕했지만 눈과 말로는 자신을 범하던 남자.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 일을 당한 당사자인 은연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도무지 신경이 진정되지 않았다.

은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시겠지만, 치유사님께서 드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저희 시녀 중 한 명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있답니다.”

“……뭐라구요?”

연화는 충격을 받아서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들어 은연을 보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제도 한 아이의 오른팔이 잘렸지요. 오늘은 저 아이의 차례랍니다. 오늘도 빈 그릇을
가지고 나온다면 다리를 자르겠다고, 전하께서 호언하셨습니다.”

은연의 손가락은 다른 시녀를 가리켰다. 몸집이 작고 어려 보이는 그녀는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낯색이 창백했다. 연화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어째서.”

“어째서일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은연은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만희의 마음을 대체 그 누가 알겠는가. 왕은 지극히


변덕이 심하고 괴팍하며 잔인한 사내였다. 은연 역시 왕의 곁에 서면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지 않던가.

그저께와 어제 시녀의 팔다리를 벤 것도 사실 무엇 때문인지 은연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연화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말을 만들어낸 것뿐이었다.

‘사실, 음식이 그대로인 쟁반을 보자마자 벤 것이니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은연은 차가운 눈으로 침상 위의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이 연약한 꽃은 왕의 손아귀에서


금세 바스라져 버릴 것이다. 금세 져 버릴 꽃을 위해 시녀들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특히 자신이 당했던 능욕을 생각하면 속에서 열불이 들끓었다. 연화가 아니었더라도 언제든
당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은연의 머릿속에서 그런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연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왕이 왜 자신이 밥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대해 그리도 관심을


둔단 말인가. 두통의 치료 때문에?
‘그래……. 치유사는 구하기 힘들겠지.’

치유의 이능은 거의 사라진 재능이다. 게다가 왕의 두통에는 어떤 약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원혼들이 달라붙어 그의 생기를 뜯어먹으며 저승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이니까. 자신도 치유의 힘으로 만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사여래의 빛에 원혼들이 잠시간 지정되는 것일 뿐.

연화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만약 지금 먹지 않는다면 저 시녀가 다리를 잘린다. 단순한


협박일 수도 있지만 만희의 성정을 본다면 협박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알현실에서 은연을 능욕하던 그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연화는 숟가락을 들고 죽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빈속에 들어가는 음식이라 토기가


올라왔지만 꾹 참아냈다.

그래, 죽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끌려오는 죄인의 마차 안에서 개처럼 엎어져서도 죽을


먹었던 그녀다.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게살죽은 고소하고 간은 밍밍했다. 넘어가지 않는 혀를 움직여서 죽 한 그릇을 다 비워내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서서 그녀를 기다리던 은연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요, 저 아이의 다리가 오늘은 무사할 듯하니.”

억지로 삼킨 죽 때문에 체할 것 같았지만 연화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대체 힘없는


아랫사람들에게 왕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속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야채요리에 손을 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는 다 먹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요.”

음식의 양이 많다. 하지만 연화는 그걸 조금씩이라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놀렸다.

“뭐냐, 오늘은 입에 음식을 댄 거냐?”

그 때 예상치 않은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연화는 흠칫 놀라서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두려운 얼굴의 남자가 문간에 기대 서 있었다.

“흠, 어제와 그제,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기에 와서 보았더니.”

문간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덩치가 큰 왕은 싸늘한 눈으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당황한


시녀 두 명이 뒤로 물러섰다. 연화도 극히 당황해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섰다.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히며 인사한 연화를 보며 만희는 피식 웃었다.

“그나마 이제 먹을 생각이 든 건가? 내가 시녀를 벤다고 하니?”

은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가 정확히 알고 한 말은 아니었다. 왕은 아마도 꽤나


전부터 밖에서 엿들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거짓말을 직접 말하는 만희를 보며 은연이 손을
떨었다. 만희가 피식 웃었다.

“비록 승은을 입었다 하나, 내가 확실히 말하지도 않은 바를 함부로 전하는 시녀라.”


“용서를, 전하…….”

은연은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영문을 모르는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만희의 얼굴은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웃고 있으나 반드시 웃음은 아니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내 비록 그제와 어제 시녀를 베었다 하나 이 여자가 식사를 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

“용서를, 용서를. 전하, 저는 그저 치유사님께서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전하의 두통


치료를 하지 못하시게 될까 두려워…….”

“주제넘구나, 만인 앞에 다리를 벌리는 침방시녀 주제에.”

만희가 검을 들어 은연의 어깨 쪽을 슬그머니 그었다. 옷 위로 그어지는 날카로운 검날에


어깨장식이 툭 떨어졌다. 옷이 찢어져 드러난 맨 어깨로 검끝을 따라 가느다란 상처가
생겨나 피를 흘렸다. 은연은 두려움에 떨며 엎드렸다.

“제발, 제발 용서를. 제발…….”

“너 같은 것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천한 것의 말소리가 귀를 더럽혀


심간이 어지럽구나.”
그 말에 은연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전하, 용서하소서.”

연화가 만희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녀는 이마를 땅에 대고 애원했다.

“제 건강을 걱정하여 음식물을 먹게 하기 위해 한 거짓말입니다. 죄가 있다면 제게 있으니


부디 용서를 해주십시오.”

“…….”

왕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52 화

가느다란 꽃잎 같은 여자가 검끝 앞에서도 입을 열어 지껄인다. 그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검날을 연화에게로 돌렸다.

“죄가 있다면 네게 있다라. 어쩌면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그는 검끝으로 연화의 등을 슬쩍 그었다.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희디흰 등과
목덜미가 그 사이로 드러났다. 보드랍고 깨끗한 피부의 몸을 보다가 만희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를 향해 엎드려 애원하는 연화의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래……. 헛소리이나 널 먹이기 위해 한 소리니 내 용서해 주지.”

은연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 검을 꺼내면 단 한 번도 피를 보지 않고 넣은 적이 없는


사내다. 연화의 애원을 듣고 만족하여 한 발 물러서는 만희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만희는 방만한 걸음걸이로 침상 곁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의 손이 은연을 향해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풀려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다리를 옮기며 은연은 그의 곁에 가서 섰다. 만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만졌다. 제법 괜찮다는 듯 만지다가 곧 흥미가 식었는지 그녀를
내쳤다.

“흐, 거짓말까지 해가며 먹인 것치고는 정말 새 모이만큼이군.”

쟁반을 들여다보며 한 소리였다. 연화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더, 더 먹으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행차하시어……. 차후에 반드시 다 먹겠습니다.”

“차후? 무슨 차후. 먹을 거면 지금 먹어라.”


“예?”

연화는 당황했다. 게살죽만으로도 배가 불러 한 입도 더 먹기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만희는 진심인 듯 그리 웃음기도 없는 얼굴이었다.

“먹으라고. 네가 식사하는 꼴을 보고 가야겠다. 내 두통 치유를 책임질 치유사이니.”

“…….”

“아니면 여기서 저 계집의 다리를 베어줄까? 거짓을 말했으니 그 말한 바가 사실이 되게


만들어주면 좋아할 테지.”

“아, 아니옵니다.”

은연의 얼굴이 새하얘졌고 연화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녀는 얼른 젓가락을 집어 들고


야채요리 접시에 손을 댔다.

급한 마음에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며 연화는 간신히 야채요리 몇 입을 먹었다. 오물거리며


씹는 그녀의 입을 보며 만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거칠 것 없는 손놀림으로 연화의
야채요리를 손으로 집어 몇 입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애써 씹어 삼키는 연화를 보면서 그는 턱짓으로 더 먹으라고 지시했다. 여전히 만희의


칼끝이 은연에게 닿아 있는 기분이라 연화는 열심히 요리를 먹었다. 거의 다 먹어서 연화가
고통을 느낄 때쯤 만희가 자비롭게 말했다.
“잘 먹는구나. 이 정도로 봐주지. 다음부터 음식을 거부하면 크게 경을 칠 줄 알아라.
너뿐 아니라 이 시녀들이 함께 말이다.”

만희의 말에 시녀들이 고개를 움츠렸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왕은 씩 웃었다. 곱게 생긴 계집이 억지로 음식을 먹고 그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내키지 않지만 맛있는 척 입에 넣고 씹어 삼키는 것도 보기 좋았다.

“천한 계집이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다.”

만희는 뒷짐을 지고 연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연화의 턱을 손끝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자신을 피해 시선을 내리는 검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는 명했다.

“날 봐라. 눈을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연화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검고 순한 눈과 만희의


날카롭게 찢어진 적안이 마주쳤다. 겁이 나서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연화는 참았다. 그의
명을 거스르면 또 누가 다칠지 모른다.

만희의 긴 눈꺼풀 안 새빨간 눈동자가 한동안 뚫어져라 연화를 주시했다. 시선의 마주침이
길어지며 연화는 두려움에 손이 떨려왔다.

“마음에 들어.”
만희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곧 그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가지고 들어와라!”

그의 명에 따라 시녀 두 명이 들어와 찻상을 마련했다.

풀어 내린 긴 흑발을 귀찮은 듯 넘기면서 만희가 연화를 불러 작은 식탁 건너편 걸상에


앉았다.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했지만 연화가 머뭇거리자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지?”

“어찌 저 같은 것이 전하 앞에 함께…….”

“네 예의가 내 명보다 중요하다는 거냐? 건방지고 멍청한 것.”

만희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연화는 그 말에 조심스럽게 걸상을 빼 앉았다. 물론 언제든


일어날 수 있게 거의 엉덩이 끝만 걸친 채였다.

그는 주전자를 기울여 맑은 찻물을 따라내었다. 자신의 앞에는 술병과 술잔을 놓은 채였다.

그곳에 올라온 노란 꽃잎의 꽃차를 보고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신령계에서 호접이 자주


내주던 차였다.

“이게 뭔가에 좋다고 했는데……. 뭔지는 잊어버렸지만.”


만희는 턱을 긁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지만 필요 없는 것은 잘 잊어버리기도 했다.

“……잠이 들지 못하는 자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편안한 잠자리로 유도하는 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향기가 좋고 찻물이 맑아 심신을 평안히 해주지요.”

말끝마다 그리움이 저절로 젖어들었다. 연화는 멀거니 그 푸른 찻잔 안의 찻물을


바라보았다. 백호의 궁 안에서 호접이 다과나 식사를 가져다주던 그 평화롭고 안온한
시간들과 함께…… 언제나 그녀를 너르고 뜨겁게 품어주던 백호가 생각났다. 계속해서
피하려고 애쓰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래, 내관이 말하길 이게 계집들이 좋아하는 차라더군. 네가 치유사니 내가 호감을 사야


하지 않겠느냐.”

만희가 껄껄 웃었다. 그는 술잔을 들었다.

“네가 사흘 전 두통을 치료해 준 이후 통증이 없어 그나마 살 것 같으니. 그런데


어젯밤부터는 조금씩 머릿속이 당기더군. 조만간 네 힘을 좀 더 빌려야 할 것 같다.”

“제 능력이 닿는 한은 전하께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야 예쁜 아이지.”

“…….”
“나는 빼어난 능력을 지닌 미인들을 아주 좋아하거든. 하긴 싫어할 자가 어디 있으랴만.”

말투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아주 다정한 사내처럼 말을 잇는 만희는 낯설었고, 연화는


시선을 피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아무리 순진하다지만 만희의 다정한 태도가 평상시 모습과 다르다는 것쯤은 쉽게
알았다. 지금은 그저 그가 ‘다정하고 싶은 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내가 부드러운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희한했다. 언제든 본성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시녀가 술을 따랐다. 아주 맑고 투명한 백주(白酒)였다. 만희는 그것을 한 모금 머금고


미간을 찡그렸다. 지독하게 독하디독한 술이라 목구멍이 그대로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두통이 없어서인지 독주가 더 쓰게 느껴지는군. 머리통이 쪼개질 것 같은 때는 이조차


아주 달콤하던데 말이야.”

그는 술잔을 불쑥 연화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독하고 쓴 냄새에 그녀가 움찔 놀라 몸을


뒤로 물리자 재미있다는 듯 만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믿어지느냐, 이게 달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저는……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아무렴, 당연히 그렇지.”


입 안과 목구멍을 홧홧하게 태우는 고통을 참고 만희는 백주를 기어이 한 잔 전부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큭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는 잔을 뒤집어 마지막 남은 방울을 떨구면서
중얼거렸다.

“머리통을 누군가 날카로운 바늘과 칼로 전부 쪼개고 쑤시는 순간에는, 목구멍과 입 안으로


고통이 가해져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이 술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삼키는 순간
기도가 타는 그 때가 가장 달콤한 휴식이지.”

“…….”

“두개골 안쪽이 전부 한 점 한 점 떠내지는 것 같다. 두통이 심할 때는 말이다.”

만희는 식탁 위에 턱을 괴었다. 그는 맑은 머릿속 때문에 드물게도 기분이 좋았다.

“어때, 치유사로서 이만하면 나는 정말 동정심과 연민이 드는 환자지?”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왕은 킬킬대고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화의 눈 한편에 연민이 스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치유사여.”

“제 능력이 허락하는 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름이…… 연화라 하였던가?”

“예.”

그가 왕족이 아닌 여인의 이름을 외운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만희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외워져 있던 연화의 이름에 조금 놀랐다. 그는 잠시 연화, 연화라 하며 입
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굴렸다.

“연꽃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라. 어울리는구나.”

연화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만희는 그 순간 희례연의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연꽃이


희례연에 떠오르는 순간, 수국의 왕조가 바뀐다는 전설.

백주가 독했는가.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는 하잘것없는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다니. 왕은


어처구니가 없어 쓴 웃음을 지었다.

***

“치유사를 데려온 건 매우 성공적이야.”

제사장 성현은 자신의 집 방 안을 걸어다니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의 육중한 몸이 화려한


비단옷 아래서 출렁거렸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치유사를 데려왔다
하여 왕은 제사장에게 금은보화 한 상자와 비단을 내렸다. 곁에 선 내관이 굽신거렸다.
“그 여자가 그리도 신통하게 전하의 두통을 치료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겉모습만
봐서는 그저 예쁘장한 천것일 뿐이었는데요.”

“그래,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나도 놀랐지.”

제사장은 뒷짐을 지고 히죽 웃었다.

“죄인의 마차에서는 마치 개처럼 죽을 핥아먹던 계집이 말이야.”

“개처럼 핥아먹었다면…….”

“팔다리를 모두 묶고 죽그릇을 덜렁 던져 줬으니 제가 별수가 있을까! 천한 것이 배고픔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들은 인내나 참을성과는 관계가 없는 짐승들이니 말이야.”

성현은 연화가 죄인의 마차 안에서 죽그릇을 핥아먹던 일을 자신이 아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더럽고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며 도망 다니던 천민의 여자에게
모욕을 주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았다. 할 수 있다면 팔다리를 자르거나
죽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천것이 왕에게 필요한 치유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거참, 더러운 계집이군요.”

“그렇다마다. 전하께서도 그 계집의 다리를 자르고 가둬두는 방안을 고려하시는 게 나을


게야. 어차피 손과 머리만 있으면 치유사 노릇하는 데 문제없을 게 아닌가!”
끔찍한 소리를 하며 성현은 투덜거렸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끝났다지만 그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한 가지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내 원한도 잊고 넘어갈 수는 없지.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얕보이게 되는 원인이 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내관이 슬쩍 제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성현은 킬킬댔다.

“내 비록 그 계집을 해할 수야 없지만 그 외의 것이야 상관없지. 안 그러냐?”

53 화

“무슨 말씀이신지…….”

“그 더러운 천민 부락 말이다. 작고 쓰러져 가는 마을이니 지도상에서 없애버리는 게


깨끗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지.”

그제야 알아듣고 내관이 마주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성현은 짐짓 엄격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청소이자 본보기다. 수국의 영토에서 더러운 벌레들을 치우고 왕의 대리인에게


반발했던 집단을 토벌하는 일이지. 알겠느냐?”
“말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일을 크게 벌일 것은 없다. 다만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군졸들에게 말을 전해라. 이미


나 역시 떠나오기 전 명을 남겼으니 알아들을 것이다.”

“예!”

“계집의 양어머니를 가장 먼저 처형하고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라. 목을 내걸고 마을을


불태우라 일러라.”

내관이 곧 성현의 명을 받고 천민 부락으로 가기 위해 나섰다. 제사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천민 주제에 왕 다음 가는 대귀족인 자신을 멋대로 농락한 자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성현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정의 실현에 가까웠다.

제사장은 완전히 불타 사라질 천민 부락을 떠올리며 편안히 앉아 차가운 청주를 마셨다.


입맛이 달고 좋았다.

술에 정신을 빼앗겨 그는 그의 방 앞에 있는 연못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시선이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푸르고 긴 머리의 그 여자는, 사실 그녀가 존재를 숨기고자 한다면 인간들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존재였다. 하지만 샘의 정령은 그리 자신을 숨기지도 않고 연못가에 서서
피식 웃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신령들이라 하여 인간과 다르지는 않다. 뱀의 일족과 사혈처럼 욕망으로 똘똘 뭉친


신령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대다수가 그랬고, 그 욕망의 범위가 지독히 광범위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거지만.”

푸른 머리카락에서 습기가 마른 땅에 젖어들었다.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취하기 시작한


성현은 그제야 연못가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 누구냐?”

취기가 달아오르긴 했으나 아직 정신은 멀쩡하다. 성현은 벽력처럼 호통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못가에 웬 여인 한 명이 서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여인은 느리게 걸어왔다. 곡선이 선명한 몸과 얼굴에 띄운 묘한


미소가 어딘지 선정적이라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방 앞까지 다가와 자연스레 창문을 넘어 방에 들어와 섰다. 그제야 여자의 머리가
푸른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현은 흠칫 놀랐다. 인간의 머리가 저런 색일 수가 있는가?

“존경하는 제사장님.”

그녀는 아주 얌전하고 요염한 자세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인간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에 성현은 잠깐 넋을 잃었다. 그는 위엄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여인의 탈을 쓰고 나타나 나를 홀리려 하는 선녀인가?”

나름 점잖게 말하려 하지만 욕망이 묻어나는 말에 청수희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달콤하게 입가를 올리고 벌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선녀라…….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사장님.”

“충분히…… 충분히 선녀만큼 아름답군.”

청수희의 자태에 완전히 홀린 성현은 이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샘의 정령의 미혹을


이름만 제사장인 탐욕스러운 사내가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눈길을 느끼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명하신 것은, 그 치유사의 마을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나요?”

“그래! 그렇지. 그 더러운 것들을 내 전부 태워버릴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화를 내시지 않을까요…….”

“감히 내게 누가! 누가 화를 낸단 말이냐!”

제사장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가슴을 내밀고 턱을 치켜 올렸다.


그의 자세에 청수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서 있던 그 자리에 성현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죽은 것은 아니다. 다만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것뿐이었다. 술 역시 물이니 그녀의 의지대로 제사장의 신체를 돌다가 뇌로
올라간 것이다. 청수희는 투덜거렸다.

“아, 재미없어. 역시 뚱땡이 늙은 남자는 어떻게 놀려도 재미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녀가 중간에 나서서


재미있게 즐길 만한 일이 생겼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

백호는 물끄러미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맑은 찻물만 들여다보며 이미 기십여 분이


지난 때에 호접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연화가 떠난 이후로 백호는 멍하니 넋을 놓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연화의 침실에 앉아


그녀가 즐겨 마시던 차를 앞에 놓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이제 아예 찻잔 안만
노려보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호접은 가만히 백호의 뒤로 다가갔다.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백호를 불러 다른 곳에


신경을 나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보다 먼저 백호가 입을 열었다.

“호접.”

“……예.”
잠깐 놀라서 나비의 신령은 가슴을 눌렀다. 뒤를 보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알고 계셨구나,
하며 호접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팔랑이는 한 쌍의 날개를 바라보다가
백호가 입을 열었다.

“산 아래 마을의 상황은 어떠하냐.”

“……산 아래 마을이라 하심은.”

“연화의 마을 말이다.”

호접은 잠시 말을 잊었다. 연화가 떠날 때 배웅해 줬을 뿐 언제나 그곳으로 다니는 것은


아니라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백호가 말을
이었다.

“마을이 많이 해를 입은 모양이더군.”

“누……구에게 말씀이십니까?”

“중앙의 관리에게.”

호접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자세한 정황을 전혀 듣지 못했고 앞 뒤 이야기를 몰랐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호접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을 듯하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 장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들고 있었다.

“현재 수국 중앙 관리가 남기고 간 군졸들에게 관리의 명이 간 모양이다. 마을을 불태우고


모두를 죽이라는 명이.”

“그렇다면 연화 님은요?”

호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마을에는 연화는 물론 그녀의 양어머니와 오래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백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다만 연화는 마을을 떠나 수도로 갔고, 현재 마을에는


없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인간계의 일을 전해주다니 고마운 일이군요.”

“청수희의 전언이다. 깜찍하게도 찻물을 통해 내게 이야기를 걸어왔어.”

“아, 그래서 백호 님께서 찻잔을…….”

호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샘의 정령은 모든 세계를 넘나들며 물이 이어진 곳이면


어디든 자유로이 헤치고 다녔다. 그녀라면 어느 곳의 이야기이든 알 수 있을 것이다.

백호는 하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청수희 이것이 뭔가 가리고 말하지 않는 게 있는 듯하단 말이지.”

백호는 인간계의 일을 상세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계의 일이라면 저희가 끼어들 수 없는 노릇이고……. 별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호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 세계는 철저히 나누어져 있고 사방신은 서로의 영토를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만약 침범 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충돌이 있게 마련이었다.

과거 사방신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때마다 대단히 큰 소란이


일었고 세상이 뒤집혔다. 그 모든 소란과 상처를 지켜보던 상제(上帝)가 결국 대단히 화를
내며 모두에게 경고했다.

그래서 아주 오랜 기간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데리고 와야겠다.”

“데, 데리고 오신다고요?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냐. 그 마을의 인간들이지.”

백호는 흘긋 호접을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대단히 빨라서 호접은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인간들을 데려오신다니, 게다가 설마 직접 현신하실 것은


아니시지요?”
“다른 방법이 있느냐?”

“백호 님.”

다른 방법이야 많다. 아니,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호접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죽을


운명인 존재들을 살리는 일이라면, 방법이 있다 해도 쓰면 안 되었다.

“백호 님, 아시지 않습니까. 저승과 연관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죽을 운명인 자들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간…….”

“…….”

호접의 만류에도 백호의 푸른 눈은 단호했다.

어쩌려 저러시는가. 인간계의 일이 진행되는 것은 단순히 인간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을의 인간들이 죽을 운명이라면 그것은 저승의 명부와 관련된다. 즉 현무와 그 뒤에 있는


염라대왕까지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죽음의 운명을 피해가도록 다른 세계의 존재가 손을
쓴다면 분명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안 됩니다. 이번에 충돌이 일어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옷자락을 잡은 호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상제께서 지난번 경고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사방신의 사감(私感)으로 세상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겠다고요. 죽음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자들을 전부
신령계에서 손을 대 구해낸다면 문제가 생길 것은 명약관화, 결코 그냥 넘어가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 내가 모를 성싶어 길게 늘어놓는 것이냐.”

백호의 눈에 서슬이 시퍼랬다. 평소 호접의 말이라면 그나마 한 수 접고 들어주던 그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원로인 그녀의 말마저 이렇다면 그 누가 말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비켜라, 그렇지 않다면 내 떨쳐내고 가겠다.”

“백호님…….”

호접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호는 그녀의 주군이자 신령계의 신이다. 만약 상제에게 큰 벌을


받게 된다면 이 세계 자체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일이 잘못되더라도 차라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게 나았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백호 님,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요.”

호접은 그의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호의 시선이 돌아오자 나비의 신령은 고개를
저었다.
“백호 님이 인간계에 현신하시는 일은 드무니 저승의 이목을 끌게 될 겁니다. 물론 청룡
님의 눈도요. 저는 언제나 인간계를 다니고 있으니 제가 가서 그 사태를 막아보겠습니다.”

“…….”

백호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로 나서기에는 호접의 말이 맞는 면이 많았다.


연화의 이름이 엮여 있어 당연히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문제의 소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니.

만약 문제가 생겨 상제의 벌을 받게 된다면 차후의 일도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을 구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연화가 마을 사람들을 보기 위해 신령계로 돌아온다면…….

자신이 없는 이곳에서 누가 그녀의 사정을 돌보아 줄 것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이었다.

54 화
“좋다.”

호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혈질인 백호가 이 정도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심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옷자락을 놓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틀림없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모두를 데리고 신령계로 와라. 목숨을 잃지 않도록.”

“백호 님, 신령계가 아닌 중간 지대에 숨겨놓으면 어떨까 합니다. 그거라면 모두가 안전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각 세계에 나누어져 사는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호작용도 하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모습을 보는 것은 물론 말을 나누는 것도 불가했다. 인간계의 인간들을
구해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저승의 염라대왕과 현무, 청룡의 항의를 모두 받게
되겠지만, 나중에 올 상제의 징계를 줄이려면 인간들을 신령계와 최대한 격리해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백호의 시선이 가느스름했다. 하지만 호접은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령계의 원로로 이 정도의 설득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백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호접은 엷게 웃음을 띄었다.

“그 오랜 세월 백호님을 모셔온 충신입니다. 제가 언제나 옳은 말만 한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호접의 말이 백번 맞았다. 그녀는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일은 내 너에게 일임하겠다. 다만…….”

그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이었다.

“묘우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묘우에게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연화와 관련된 일이다. 백호는 묘우가 껄끄러웠다. 분명 지독히 오랜 기간 신령계에 충성해


온 충직한 신령인데도 그랬다. 아니, 그래서 더욱이나 연화의 일에 관련해서는 껄끄러웠다.

곧 호접은 차비를 차리고 백호에게 인사를 남기고 팔랑이며 사라졌다. 인간계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나비의 신령은 곧장 연화의 마을로 향하는 숲길로 향했다.

날개는 가볍지만 마음은 무겁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하나, 이 일로 인해 분명 작지


않은 소란이 일 것이다.
호접은 일부러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만약 나중에 일이 커져 상제가 직접 책임을 묻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나서 일을 했다고 하면 어느 정도 백호에게 갈 벌이 가벼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날아 세계와 세계를 잇는 통로를 통과했다. 세계가 중첩되는 사이에 아주


작게 난 틈이나 다름없는 길들이었다.

인간계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노란색의 작은 날개에 빛을 불어넣었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인간을 홀릴 수 있는 빛이었다.

‘말로 소통하는 건 안 돼.’

아무리 호접이라 해도 인간과의 상호작용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녀는 괜찮을지


몰라도 후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 몰랐다. 빛으로만 홀리며 날아가면 인간들을
전부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맨 처음 그녀를 발견한 인간은 숲속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나무를 하던 남자였다. 그는


노랗고 파란 빛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가 곧 눈이 풀리며 홀렸다. 불빛을 무작정 따라오며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고 나비는 팔랑거리며 인간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날아갔다.

어둠 속에서 나비의 날개가 파닥이며 빛을 흩뿌렸다. 때는 밤이라 호접의 빛이 등불처럼 더


밝게 보였다. 마을로 들어서며 남자와 나비를 본 다른 자가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지만 곧
그의 눈도 풀렸다. 그 뒤를 또 다른 여인이 이었고, 그 걸음을 또 다른 자가 따랐다.

나비는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인간들을 끌어모았다. 거의 모든 인간들을 다 모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으로 나타난 작은 집 한 채에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꽉 닫힌 문 앞에서 난처하게 서성였다. 집의 문과 창문이
전부 완전히 닫혀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절망한 사람처럼, 세상과 소통을 단절한 듯이.

그녀는 부엌의 작은 숨구멍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몸을 던져 날아들어 갔다. 그을음이


많았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 밖에서 나비에 홀린 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아우성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방 안에 누워 있던 노파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거 누구요?”

힘겹고 슬픈 목소리였다. 호접은 날개를 팔랑대며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늙었지만 단정한


얼굴이었고, 힘 있는 눈매였지만 슬픔으로 인해 무너진 감정이 보였다. 인간계를 오가며
잠깐씩 얼굴을 보았던 노파는, 연화의 양어머니였다.

‘……됐어.’

호접은 그녀의 눈앞에 날아가 빛을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휘황하게 빛나는 도깨비불과


닮은 빛을 보며 노파의 눈이 흐려졌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호접을 잡으려 했고, 그 때
사람들의 손에 허술한 창호지 문이 부서졌다.

나비의 신령은 최대한도의 빛을 발하며 인간들을 인도했다. 그녀의 뒤를 쫓아 마을


사람들이 걸음을 옮겨 어두운 숲으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걸음도 하지 않을 험하고 깊은 숲이다. 이곳 천민 부락은 삼면이 낭떠러지로


둘러싸여 있어 정면의 길을 빼면 어디로도 갈 수 없었지만, 나비의 뒤를 쫓는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갔다. 길도 없는 수풀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생채기가
나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윽고 나비의 신령만이 찾아낼 수 있는 세계 사이의 통로가 열렸다.

‘연화 님도 지나왔으니 큰 문제야 없겠지.’

불안했지만 호접은 그들을 인도했다. 길은 흐릿하고 신기루와 아지랑이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곳에 들어오는 즉시 길을 잃어 한 자리에서 맴돌다가 죽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호접의 빛에 홀려 있어 괜찮았다.

그 길 사이로, 세계의 교집합 사이로 공간이 보였다. 길 잃은 혼령들이 주로 맴도는 중간


지대였다.

***

성현의 명을 받은 내관이 달려와서 천민 부락 밑 산자락 쪽에 주둔하고 있던 군졸들을 만난


것은 사흘 뒤였다. 전력을 다해 달려온 탓에 지친 얼굴인 내관을 보며 군졸과 관리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렇잖아도 제사장님께서 남기고 가신 말씀이 있었소. 마을을 불태우고 깨끗이 치우라는.”

“그렇습니다. 장수께서는 얼마든지 명받으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거 잘되었군. 혹여 몰라 제사장님의 다음 명을 기다리고 있었지!”

무관은 미소를 지었다. 제사장은 마을을 파괴하고 나오는 재물은 마음대로 나눠가지라
허락했다. 비록 천민의 마을이라고 하나 마을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호미 하나, 솥뚜껑 하나도 녹여서 팔면 전부 재물이 될 수 있었다.
곧 군졸들이 전부 모여들어 창칼을 들었다. 음식과 술, 계집이 고파서 산자락의
이웃마을까지 내려와 머물고 있던 군사들이다. 마음대로 살육하고 재물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몸짓에 그 누구도 거침이 없었다. 그 마을에 계집년이 남아 있으면 전부


범하겠다는 자부터, 남아 있는 숟가락 하나까지 전부 털어먹겠다는 자까지 다양했다.
윗분의 명을 받아 하는 일인지라 잔인하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비었는데?”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발견한 건 텅 빈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어도 한둘은 어귀에서 도망을 치거나
근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자부터 잡아 죽일 생각으로 마을에 뛰어든 군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완전히


고요한 마을을 둘러보았다. 사람은커녕 하다못해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창칼을 들고 달려왔지만 죽일 대상이 없자 군졸들은 힘이 빠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알린 거 아닙니까?”

군졸 중 한 명이 미심쩍게 성현의 내관을 쳐다보았다. 내관은 화들짝 놀라 호통 쳤다.


“아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수도에서 전력을 다해 말을 타고
달려와 이곳까지 사흘 만에 닿았는데!”

“과연 수도에서 여기까지 사흘 만에 오려면 다른 곳을 들리고는 불가능하지.”

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제사장은 분명 이곳이 완전히


불타고 천민들이 고통받으며 죽는 것을 원했을 텐데 미리 전부 도망가 버려서 찝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일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전부 빼내자고. 그런 다음 전부 죽였다고 하면 되는


거 아냐?”

군졸 한 명이 말하자 무관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끼리 말만 잘 맞추면…….”

그는 은근한 눈으로 내관을 바라보았다. 내관은 입을 한일자로 다물며 팔짱을 끼었다. 그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무관과 군졸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내관.”

무관이 히죽 웃었다. 내관이 원하는 거야 뻔했다. 그는 은밀하게 내관에게 눈짓했다.

“여기서 건진 걸 좀 나눠드릴 테니까.”


내관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무관이 말을 덧붙였다.

“1 할을 드리지. 내 크게 인심 썼소.”

“1 할? 흠.”

못마땅하게 내관이 돌아섰다. 군졸들이 인상을 구겼고, 무관은 손을 들었다.

“1 할 5 푼. 그 이상은 안 되오.”

“2 할 5 푼. 3 할 부르려다 깎아준 거요.”

“2 할 5 푼이라니, 이거야 원, 강도구만.”

군졸들 사이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거친 말투에 내관이 속으로 움찔했다. 무관은
사람 좋은 척 허허 웃었다.

“2 할로 하지요. 그 이상이면 고생한 군졸들이 나눠먹을 게 없으니.”

“……뭐, 그러지. 내가 많이 양보해서, 그렇게 합시다.”

좋습니다 하며 무관이 군졸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가며 못마땅하게


내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요구한 만큼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재물이 적어지기 때문이었다.
짜증이 난 군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관의 귀에까지 다 들려왔다.
“시벌, 내시 주제에.”

“왕후장상이 따로 있냐고 하는데 불알도 자른 내시가 유세여.”

“여기다 파묻어 버리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싸게 먹히는 거 아냐? 어차피 요즘 여기저기


반란군 빙자한 녹적(綠賊)이 득세해서 난리도 아닌데.”

“그러게. 죽여서 묻어도 누구 짓인지 알 게 뭐야.”

거친 군졸들이 킬킬대며 지껄이는 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내관은 숨도 쉬지 않고


조심히 뒷걸음질을 쳐 무관의 뒤에 붙었다. 최소한 관리이니 그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무관은 그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 역시 웃고 있지 않아서 내관은 오금이


저려 왔다. 무관의 눈에도 살기가 돌고 있었다. 잠시 이것저것 재보는 듯하던 무관은 잠시
후 고개를 돌려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곧 천민 부락 전체가 불로 뒤덮였다. 역시 아무리 뒤져도 사람은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정말 몸만 빠져나간 듯 집집마다 생활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짐 하나 챙긴 흔적이 없었다.

“신기하구만.”

“그 덕에 우리가 건질 건 제법 많아서 좋지만 말이야!”


군졸들이 신나게 마을의 모든 물건들을 모아 가져오기 시작했다. 내관은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이렇듯 깔끔하게 인간들만 사라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사장 역시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정이라 사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면 경을 치는 건 자신뿐이다. 내관은
군졸들의 말대로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부 삼키고 비밀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55 화

눈을 떴을 때, 만희는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는 이를 갈며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뇌 속을 벌레가 파먹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주 얇은 칼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만 골라 찌르고 저며내는 것 같았다.

어느 쪽도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나 지금의 고통이 그보다 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것이다. 아니, 백배 낫다. 만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주춤거리며 침방시녀가 다가왔다. 어젯밤을 지내고 빠져나갔던 여자다. 그녀는 왕의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은대야에 세숫물을 담아가지고 왔으나 만희는 시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개 같은 년.”

이유 없이 만희는 욕설을 뱉었다. 무엇이라도 욕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않으면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이리도 괴롭히는가? 그는 두통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고통이 멈춰야 했다.

한 번 알게 된 맑은 머릿속은 마약과도 같다. 그는 두통을 더욱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인내심과 참을성은 단 한 순간에 바닥이 났고 시녀는 두려움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왕은 머리를 움켜쥐고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시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서 그 빌어먹을 치유사를 데려와! 그년을 데리고 오란 말이다!”

덜덜 떨며 그녀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연화가 시녀와 함께 달려왔다.


그녀를 지키는 경비병도 함께였다.

“전하, 전하.”

연화는 침착하게 만희에게 다가갔다. 침대 조금 멀리서부터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그녀는 침대에 이르러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머리를 움켜쥔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핏발이 선 붉은 눈이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다시 한 번 연화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그녀는 치유사였고, 환자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매우 뛰어났다. 만희는 연화의 부름에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프지 않게 해줘.”

돌처럼 딱딱하고 고저 없는 말투였다. 마치 만들어진 인형처럼, 만희는 그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침상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만희의 머리
위로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상냥한 말투에 만희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연화의


목소리가 마치 두통에 시달리는 머릿속을 쓰다듬고 위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생소한 느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낯설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연화의 손에서 은은한 노란 빛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왕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 그의 등


뒤에 선 원혼들에게 말을 걸었다. 온기를 원하는 혼령들이 약사여래의 온기를 얻으려
다가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더 수가 많았고, 혼령들이 내미는 손이 움켜쥐는 온기도 늘어났다.

연화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보살의 온기를 나눠주었다. 만희의 등 뒤를 기웃거리던


혼령들은 잠시의 따스함에 만족하여 한 발씩 뒤로 물러섰다.

머리와 목덜미와 등을 쥐어 잡고 있던 갈퀴 같은 찬 손아귀에서 벗어난 만희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너무 두통이 심했기 때문에 통증이 가라앉고 난 이후에도 머릿속이 멍했다.
그는 이마를 짚고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연화의 노랗게 빛나는 손이 만희에게 남은
통증을 마저 몰아내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느릿하게 한숨이 샜다. 만희는 아직 흐린 시야를 들어서 앞을 보았다. 연화의 희고 작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피식 웃었다.

“나도 다 됐군. 천것의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다니.”

두 번뿐이지만 불가능할 것 같던 두통을 물러나게 해준 연화는 만희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의 작은 손과 얼굴이 그 무엇보다 안락한 쉼터처럼 보였다.

“다행입니다.”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고통에 시달리던 자가 그녀의 손길로 편안해지는 것은 언제 보아도


좋았다. 그녀는 능력뿐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타고난 치유사였다.

그 때 시끄러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만희가 인상을 구겼다. 조용하고 편안해졌던 머릿속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문간에 나타난 제사장 성현을 노려보았다. 제사장은 불쾌해 보이는 왕을
보고 연화에게 호통을 쳤다.

“아직, 아직 고통에 시달리시는 게 아니냐! 빨리 네 할 일을 하지 않고 무엇 하고 있는


게냐, 천한 계집!”

성현의 고함에 만희는 미간을 문질렀다. 너무 시끄럽고, 너무 때가 안 좋았다. 간신히


두통에서 벗어나 귀여운 계집의 얼굴을 보며 편안해졌는데, 저 돼지 같은 제사장 따위가
들어와 계집에게 호통을 치다니.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두통은 이제 괜찮으십니다. 다만 남은 통증이 있어 아직 조금 더 휴식을 취하셔야…….”

“그것까지도 네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 남은 통증이라니, 치유사 주제에 그게 할


말이냐!”

연화가 오기 전까지는 애초에 치유사의 존재 자체도 확신하지 못했으면서 성현은 성화를


부렸다. 그는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는 왕의 얼굴을 보며 조바심이 나서 얼른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저것이 무능하여 전하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제가 직접 매질이라도 하여


정신을 차리게 하겠나이다.”

“……시끄럽다.”
만약 지금 침상이 아니고 평상시의 옷차림이었다면 바로 검을 뽑아 성현의 목을
내리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사장은 대귀족이었고 쉽게 죽이면 곤란한 인물이긴 해도
만희의 성격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현에게는 다행히도 만희는 잠옷 차림으로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검을 뽑으러


가기에는 두통 후의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전하, 제가 목소리를 줄이겠습니다. 아뢸 것이 있어서 왔으나…….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아뢸 것?”

“예, 그렇습니다.”

잠깐 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통증이 가라앉고 난 후 머릿속의


고요함은 지극히 귀중했다. 그는 빨리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야겠다,
라고 머릿속으로 간단히 생각하면서.

다행히 성현은 입을 다물고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왕의 눈매에 살기가 매달리기


시작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만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지독한 통증 때문에 전신에 힘이 없었다.

방 한구석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연화를 흘긋 보고 만희가 손짓했다.

“뭘 멍청하게 서 있는 거지? 이리 와라.”


왕의 손짓에 연화는 멈칫거리며 다가갔다. 여전히 잔인하고 무서운 자였으나 그는 지금
환자였다. 당장이라도 뒷걸음질 치고 싶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연화는 그의 침대 곁에
섰다.

“내 이마에 손을 올려라.”

만희의 명령에 연화는 순순히 손을 그의 이마 위로 올렸다. 창백하고 식은땀에 젖은


이마였다.

왕은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작고 부드러운 꽃 같은 여인은 손도


아주 가냘팠다. 적당한 온기가 그녀로부터 전달되었다. 아직 남은 통증마저 연화의 손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길고 날카로운 눈은 내리감자 의외로 마치 아이 같은 인상을 드러냈다. 연화는 만희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두통에서 벗어나 평온한 표정이
아주 안정되어 보였다.

‘원혼들에게 쥐어뜯겨 말로 형언하지 못할 고통이겠지.’

순간 가엾은 자,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연화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국의 이 흉포하고 잔인한 왕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가엾다는 말은 오히려 그에게
매여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 혼령들에게 주어야 한다.

‘고통에 시달리는 건 안타깝지만.’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감고 얌전히 쉬고 있는 만희는 조금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지독히 악독한 자라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왕은 거칠지만 나름대로
단정한 얼굴이었고, 이렇듯 쉬고 있으면 걸핏하면 검을 휘두르는 잔인한 자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보고 있을 때 눈을 감은 채 만희가 입을 열었다.

“그리 쳐다보다 내 얼굴이 뚫어지겠군.”

“아, 저어…….”

연화는 당황해서 손을 떼려고 했다.

“손!”

“예, 예!”

만희의 호통에 그녀는 얼른 다시 손을 붙였다. 뭔가 어정쩡하고 어색한 자세였지만 만희는


만족한 듯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떠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 얼굴을 쳐다본 감상은?”

“예?”

“한참 동안 건방지게 용안을 뚫어져라 보지 않았느냐. 감상이 어떠냐는 말이다.”


만희의 말투는 놀리는 것 같았다. 연화는 당황해서 어물거리며 눈을 내렸다. 감히 왕의
얼굴을 겁도 없이 계속해서 쳐다봤으니 경을 칠 일이다. 하지만 왕은 그리 불쾌하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꽤 미남이지?”

“…….”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못 떼는 연화를 보며 만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얼씨구, 대답을 안 해? 미남이 아니라 이거냐?”

“그, 그게 아니오라…….”

“됐다, 거짓으로 지어낼 거면 진짜처럼 하든가.”

그는 혀를 찼다. 만희는 난처해하는 연화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순진한 여자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이 곤경을 헤쳐 나가야 할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뭐, 생긴 것에 대한 감상은 자유롭게 해도 괜찮지.”

“아닙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면, 괴물같이 생겼느냐?”


생각 없이 툭 튀어나온 말은 만희의 의도보다 진심에 가까웠다. 뱉은 만희도, 들은 연화도
당혹해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만희는 잠시 후 연화의 손을 내려 치웠다. 그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의 적안은 두통이


없어 맑았지만 동시에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물러가라. 네 쓸모는 했으니.”

연화는 내려진 손을 맞잡고 있다가 만희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망설였지만 이윽고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 같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

뜻밖의 말에 만희가 의아한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이왕 입을 열었으니 말은 끝까지 해야 했다.

“눈을 감고 계시니 아이 같은 인상이시라고…….”

“아이?”

“편안해 보이셔서, 아마도.”


“…….”

잔인한 자였지만 적어도 만희의 얼굴은 괴물 같지 않았다. 그것은 말해 주고 싶었다.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만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것만도 다행이었다.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듯해서 연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절을 했다.

“물러가겠나이다.”

“……그래.”

연화가 경비병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 후, 텅 빈 방 안에서 만희는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초록 나뭇잎들이 햇빛을 반사했다. 그는 무표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건방진 계집.”

금수의 붉은 달

56 화

“인간들이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한 마을을 전부 몰살시키려 하는지.”


호접은 느릿하게 맑은 차를 마셨다. 그녀의 앞에는 묘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애매한
얼굴로 웃지도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중앙의 관리라면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 아닌가. 알 수가 없군.”

“인간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그래……. 정말이지. 연화 님도 그렇고 말이야.”

연화는 또 왜 떠나간 것일까. 호접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명쾌하지 않았고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어쩌고 있어?”

“일단 중간지대에 몰아넣은 뒤 어떤 존재도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어. 신령계든


저승이든, 다른 계의 존재와 접하면 순리가 흐트러지니까.”

“그래……. 백호 님은 뭐라 하시던가?”

“명하셨던 부분이니 고개만 끄덕이셨어. 이번에 또 인간계나 저승과 문제가 생기면


상제께서 정말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실 테니까 백호 님도 사실상 손발이 묶인 상태잖나.”

나비의 신령은 발을 까닥였다. 그들은 궁 2 층의 너른 마루에서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나라도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하나 고민이야. 내가 듣는다고 해서 그들의 사정을
풀어줄 수야 없는 노릇이라 그만두기는 했지만.”

“그래, 그만둬. 네가 알면 오히려 곤란해질 뿐일 거야. 사정을 안다고 우리가 손을 댈


수도 없잖아.”

“그건 그래.”

만약 안타까운 사정이라도 있다면 더 곤란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령계의 원로였고,


결코 그 이상 인간계까지 힘을 미칠 수 없었다. 호접은 동의를 표했다.

“연화 님과 뭔가 연관이라도 있다면 큰일이지만…….”

“그렇다면 더 몰라야지. 백호 님이 어떻게 나서실 줄 알고.”

그것도 그렇다. 그의 말이 옳았다. 호접은 연화를 아꼈지만 그보다 더 신령계와 백호가


소중했다. 하지만 호접은 최근 백호의 상태를 생각하면 한숨이 멈춰지지 않았다.

“백호 님이 언제쯤 괜찮아지실까.”

“……기다리면 되겠지. 사방신이신데.”

“정말 그럴까?”
묘우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의심이 갔다. 호접은 백호의 그늘진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긴 삶 동안 사방신이 저토록 가라앉은 얼굴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백호는
여태껏 호접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의 기분이 흐려서인지 신령계의 하늘은 계속해서 흐렸다. 두 신령계의 원로는 우울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투둑이며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백호의
기분을 대변하는 날씨였다.

밖을 내다보면서, 호접과 묘우의 위층에 앉아 있는 백호는 가늘게 눈을 떴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고 싶었다. 자꾸만 허공에 연화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지난번 천리안에
떠올랐던, 지나치게 흐릿했던 그녀.

다시 본다 하여 더 정확히 보리라는 보장은 없다. 고초를 겪지 않고 평안히 있는 듯했으니


이제 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게 나았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정반대로 달려갔다.

‘한 번만 더.’

세계의 규칙을 어기고 경계를 넘었던 탓에 천리안의 힘이 지나치게 소진되었다. 천리안을


아예 연단위로 봉인할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 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백호는 이끌리는
마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림자만이라도.’

욕심내지 않고 아주 약하게만 발동하면 괜찮을지 모른다.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호는


속으로 변명을 중얼거리며 힘을 끌어올렸다. 연화의 그림자만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또렷한 얼굴을 보고 싶었고 거기에 더해 말도 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너의 마을 사람들과 어머니는 내가 구해내어 안전히 데리고 있다. 혹시라도 그들이 보고
싶다면 돌아오려무나.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백호가 더 잘 알았다.

“연화야…….”

가능한 힘을 빼고 시야를 좁혀 가늘고 길게 한다. 한 번 찾아냈던 대상을, 천리안은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쉽게 찾아갔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화롭고 아름답던
건물.

흐리게 드러난 영상 속, 이번에는 침상 위에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덩치가 크고 단단한


것을 보니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 가느다란 여인이 앉아 사내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연화였다.

그 광경을 보고 백호는 심장이 바늘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 사내의 얼굴을 다정히 감싼 여인의 두 손.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천리안이 급속도로 멀어지며 끊겼다. 백호는 다소의 현기증을 느끼며
미간을 짚었다. 아마 천리안은 이제 한동안 이 정도의 세기로도 발동하지 못하리라. 그는
깊이 한숨을 쉬며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정인이 정말로 있었던 게로구나.”

그렇구나. 중얼거리며 백호는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상황도 그러했다. 그러나 연화의 정인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심장은 아프기도 하고 들끓기도 하였다. 그는 한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지 못했다. 한편으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질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연화의 정인은 대체, 저 정도의 부와 권세가 있는 자가 어찌 마을 사람들의 위기를 모른


척 넘겼단 말인가.’

백호는 애끓는 속을 달래려 애쓰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저 정인이 대체 제대로 된 자란


말인가. 여인을 데려가 자신의 거처에 두고 사랑하면서 그녀의 마을은 전혀 돌보지 않다니.
심지어 그곳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이 처음 연화를 데려오며 마을에 벌을 내리겠다 위협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등골에 찬물을 끼얹은 듯 화가 식었다.

백호는 가만히 바닥을 보았다. 스스로 행했던 일에,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는 깊이 탄식했다.

***

사영은 이게 잘하는 짓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청수희의 꾐에 넘어가 다른 세계로


발을 디뎠으나, 그 때문에 그녀의 능력은 아주 쪼그라들고 말았다.

그녀가 알려준 길을 통해 인간계로 첫 발을 낸 순간 사영은 일신의 능력이 형편없이


추락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아마 인간계의 여인과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육체일 것이다.
‘경고를 듣기는 했지만.’

청수희는 누누이 말해 주었다. 네가 다른 계로 나간다면 많은 수련을 한 신령으로서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하지만 사영은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숨이 붙어 있다고 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이제 목표가 없어져 뱀의 일족에서도 배제되어 버린 사영은, 자신이 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왜 그리도 처참하게 자신의 계획이 망가진 걸까. 사영은 궁금했다.

‘대체 그 인간의 여인이 어떤 방법으로 백호 님을 홀렸는지 알고 싶어.’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걸까? 오랜 시간 수련의 시간을 쌓아온 사영조차 따라가지 못할


어떤 점이 백호를 끌리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한탄과도 같던 이야기를 들은 후 청수희는
사영에게 연화를 보고 싶은지 물었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연화를 본 적이 없었고, 그저 인간의 여인이라는 사실만 알았다.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은 전해 들었으나 그만 한 미인이 신령계에 없는 것도 아니다. 그저
외모뿐이라면 신인 백호가 그리도 깊이 빠져들지 않았을 터.

뱀의 일족 수장인 사혈에게 그만한 형을 직접 내렸을 때는 그만큼 분노했던 게 아닌가.


실제로 사혈의 얼굴을 불로 태우던 백호는 무서운 기세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함정은 아니겠지.’
연화를 보여주겠다는 청수희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가슴에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인간계는 완벽하게 미지의 세계였고 샘의 정령은 지독히 장난을 좋아했다. 그녀
혼자의 장난으로 끝나면 좋지만 남아 있는 뱀의 일족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연화는 지금 인간계에 있다고 말을 듣기는 했다. 왜 백호의 곁에 있지 않은 것인지,


어쩌다 인간계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자꾸 더 물어보라며 장난기를 번뜩이는 청수희의 눈이 못마땅해서 더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사실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사영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인간으로 가득 찬 장터를 지나갔다. 경계를


건너오기 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둔갑술을 써 그녀의 외모는 평범한 인간 여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안색, 메마른 낯의 여인.

둔갑할 때 가장 잘 들키는 것이 꼬리였으나 어차피 꼬리는 아비가 자른 터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거 하나는 잘되었다 싶어서 사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인간계로 나올 마음이 든다면 이곳으로 찾아오렴. 청수희가 알려준 곳은 수국의 수도에


있는 한 저택이었다. 사영은 남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 그 저택으로 갔다.

번잡한 거리를 지나고, 한참을 걸어서 사람이 줄어든 대로를 지나쳤다. 저택은 번화가에서
그리 머지않아 걸어서도 갈 수 있었다.

사영은 거대하게 솟은 저택의 대문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다. 신령계의 건물들과는 달리


하늘로 높게 솟아 아주 불쾌한 모양새였다. 언제나 깊은 땅속에 거처를 마련해 두는 뱀의
일족답게 사영은 인간계의 밝고 맑은 날씨도 못마땅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건물은
더욱 싫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대문을 두드렸다. 거대한 손잡이를 잡고 몇 번 두드리자 위쪽 작은
문이 열리고 하인이 내다보았다. 그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뭐야, 거지? 무엇 때문에 온 게냐?”

“……거지가 아니오. 나는 이곳 주인……을 뵈러 왔소.”

청수희는 이 저택을 알려주며 가타부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사영은 주인을


말하면서도 멈칫했다. 과연 그녀가 이 저택의 주인을 보러 온 것이 맞는가? 단지 청수희가
장난을 친 것뿐이면 어쩐다. 복잡한 사영의 얼굴을 보고 하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주인? 주인? 제사장 성현 님을 말하는 게냐? 평민 계집이?”

“아무튼, 그러하오. 그……. 제사장. 성현 님. 그분을 뵙게 해주시오.”

“헛소리도 가지가지군. 날씨가 더워지니 계집이 더위를 먹었나.”

하인이 비웃었다. 큰 저택에는 온갖 거지가 다 찾아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싸늘한 눈초리를 마지막으로 작은 창이 단호하게 닫혔다.

사영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차피 물러난다고 해도 갈 곳도


없었다. 신령계로 갈 수 있는 통로는 이미 입구가 닫혀 그녀의 줄어든 능력으로는 다시 열
수도 없었다.
금수의 붉은 달

57 화

몇 번을 두드려도 작은 창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렸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되어가자 다시 창이 열리고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얼굴을
구기고 짜증을 냈다.

“거, 끈질기구만! 계속 그 짓을 하면 내 병졸을 불러다 쫓아내겠다!”

당장 병졸을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하인은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사영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험한 말을 하는 인간을 참을 만한 인내심 정도는 가진 신령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물었다.

“혹시, 이 집에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살지 않소?”

“……뭐야? 청영 님을 말하는 건가.”

“청영(靑影)…….”

푸른 물에 비친 그림자를 이르는, 청수희의 다른 이름이다. 사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 만나러 온 사람은 청영 님이오.”


하인은 미간을 풀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수상하다는 낌새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청영 님이 곧 오실 시간이긴 하지만……. 집 주인도 아니고 방문객을 여기서 찾으면


어떻게 하나?”

“한 번만 뵈면 되니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소?”

사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하인이 투덜거렸다.

“아니. 그냥 들어오쇼. 찝찝하긴 하니까.”

“고맙소.”

그녀는 열린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이 거니는 시끄러운 대로와는 달리 집 안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불과 문과 담벼락 하나로 세상이 바뀐 듯한 분위기였다.

너른 정원 안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돌길, 그리고 정면에 있는 거대한 전각 앞에 연못이


있었다. 사영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청수희는 아마도 저기로 드나들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연못 근처로 가서 섰다.

하인이 뭐라 하려다가 평민의 여인을 굳이 전각 안으로 이끄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 있대도 특별히 위험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집 주인 성현은 한 번 방에 틀어박히면 잘 나오지 않았으니 들킬
염려도 없었다.
“여기 있다가 청영 님을 만나거든 빨리 돌아가쇼.”

“알겠소.”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마저 전각을 뒤돌아 사라지고 나니 정원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담벼락 바깥으로는


경비를 서는 사병들이 있었으나 안쪽에는 그나마도 없다. 그녀는 뚫어져라 연못을
바라보았다. 푸른 물이 고요했다.

“빨리 나오세요, 청수희. 아니, 이곳에서 쓰는 이름은 청영이라 하였나.”

사영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고약한 취미다. 방문객으로 있는 집이라면 미리 그렇게 말해


주면 어디 덧나나.

그 말에 답하듯 수면이 서서히 흔들렸다. 방울 같은 건 올라오지 않았다. 동그란 공기


방울 따위는 숨을 쉬는 존재들이 내는 것이다. 청수희는 호흡을 필요치 않는 샘의
정령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물 그 자체인 듯 수면에서 아주 미끄럽게 올라왔다.
수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영조차도 미처 청수희가 올라올지 예상하지 못해 흠칫하고 놀랄
정도였다.

수면 아래에서 머리꼭지가 나타나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비록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으나 청수희의 움직임은 생명체가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아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사영과 마주치며 살짝 휘어졌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수면으로 걸어 올라온 샘의 정령이 머리카락을 몇 번 빗어 넘겼다. 물에 젖어 연못에
연결되어 있던 긴 푸른 머리가 스르륵 짧아지며 보송하게 말랐다. 부드럽게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쥐어 비녀를 꽂아 틀어 올리며 청수희가 웃었다.

“제대로 왔네, 뱀의 일족의 딸.”

“오는 데 고생을 좀 했습니다.”

신령계에서 인간계로 오는 통로는 수도에서 사나흘 정도 말을 달려야 하는 산 속에 있었다.


다른 통로도 있었을 것이나 청수희는 알아보기 귀찮다며 그곳만을 알려주었다.

“때문에 군졸 하나를 살해하고 그 말을 빼앗아 타야 했습니다. 마을을 돌며 집을 태우고


있더군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청수희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소리를 했다.

“그래도 능력이 좋네, 인간계에 와서도 군졸을 능히 상대할 수 있다니.”

“불을 지르느라 정신을 놓고 있는 인간 뒤를 찌르는 정도야 아이도 할 수 있을 걸요.”

사영은 투덜거렸다.

“당신은 이리도 자유롭게 다니면서, 날 데리고 와줬다면 그 고생도 안 했을 텐데.


며칠이나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달려왔단 말이지요.”
“나는 물을 통해 자유로이 다닐 뿐, 다른 이를 함께 데리고 나올 수는 없거든. 내가 물로
끌고 들어와 이동해 버리면 넌 익사해 버릴 테니까. 물에 둥둥 떠서 배를 뒤집은 뱀으로
수면에 떠오르고 싶은 건 아니겠지?”

꼴사나울 거야, 하고 말을 덧붙이며 청수희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샘의 정령은 완벽한


인간 여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푸른색이라는 것 정도가 특이할 뿐이었다.

“청영이라고 이름도 따로 쓰고. 게다가 완전히 인간의 모습을 하다니. 아예 머리색도


바꾸지 그러시나요?”

그 말에 청수희는 활짝 웃었다.

“머리색 정도는 내 재미라고 생각해 줘. 특이하고 재미있잖아?”

“…….”

하여간 저 재미를 찾는 성격은 못 말린다. 애초에 그녀가 사영의 유배지까지 찾아왔던 것도


재미 때문이었으니까. 청수희는 우아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자, 마침 성현 님이 안에 계시니…… 함께 들어가 볼까?”

이 집의 주인 말이군. 사영은 눈을 굴렸다. 그녀는 청수희가 이끄는 대로 거대한 전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은 기묘하게 조용했다.

“최근에는 이 집의 주인께서 빨리 퇴청하고 계시지. 왜일 것 같아?”

실내가 어둡고 불기 하나 없었다. 사영은 그것이 샘의 정령인 청수희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불기운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에 계속 머무시는 건가요?”

“최근 얼마간은. 집 안 사람들이야 나를 손님으로 생각하지만 객이 곧 주인이지. 그보다,


주인이 왜 일찍 오는 것 같냐니까?”

“뻔하죠. 인간 따위가 샘의 정령의 술수를 어찌 이긴답니까.”

“날 뭘로 보는 거야? 술수 따윈 안 썼다구. 그 인간이 순수하게 나한테 반해서란 말이야.”

퉁명스러운 사영의 대답에 청수희가 눈을 반짝이며 반박했다. 과연,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청수희는 아마 대단한 미인일 것이다. 희디흰 피부는 매끄럽고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다. 반달 같은 눈썹 위의 이마는 반듯하며 매끄러웠고 인간과 다른 푸른 머리와 푸른
눈동자는 기묘한 이질감을 자아내 더욱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애초에 살아 있다는 단어가 맞지 않는, 호흡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정령이라는 점이


인간들의 기대와 다르겠지만. 그녀에게 육욕이란 가장 먼 단어일 것이다.

그리고 실내의 가장 안쪽 방문을 열었을 때 사영은 한숨을 쉬었다. 술수를 안 쓰긴 뭘 안


썼단 말인가. 인간의 눈이 저렇게 까맣게 죽어 있는데.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보는 사영의 시선을 깨닫고 청수희가 입을 삐죽였다.

“잠깐만 저렇게 해놓은 거야.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너무 시끄러우니까.”

“그러시군요.”

“진짜라구.”

샘의 정령은 의자에 앉은 성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만졌다. 그녀의 푸른 눈이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자, 사영. 넌 연화를 보고 싶다고 했지?”

“네.”

“연화는 지금 이곳 수국의 구중궁궐에 있어. 왕이 그 애를 잡아갔지.”

“궁궐이요?”

놀라서 사영은 눈을 크게 떴다. 청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연화의 치유능력이 필요해서 잡아갔어.


지금은 얌전히 궁에서 잘 먹고 잘 자며 왕을 치료해 주고 있는 중.”
“그렇……군요. 그렇다면 백호 님은…….”

“속이 자글자글 끓고 있겠지. 그토록 귀애하던 인간 여인이 다른 남자의 손에 넘어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청수희가 경쾌하게 웃었다. 사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연화가 인간계로


얌전히 돌아가도록 놓아둔 데다 다른 사내가 그녀를 데려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그렇다면 백호는 그녀를 그리 사랑하지 않은 것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청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연화가 원한 일이야.”

“원했다구요?”

“그래. 자세한 사정은……. 뭐 복잡하지만. 직접 원해서 인간계로 돌아왔고, 직접 왕의


관리에게 찾아가 궁으로 왔어.”

모든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청수희가 간단히 일을 축약해서, 약간 왜곡된 방향으로


들려주었다. 그녀는 성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이제, 너는 여기 계신 제사장의 곁에 붙어서 궁으로 들어가야 해. 연화를


보려면 말야.”

“그런…… 거군요.”
“그래, 내가 이렇게까지 힘을 써주는 일은 잘 없다구. 감사해야 해.”

청수희가 깔깔대고 웃었다. 사영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입을 꽉 다물었다. 다소 멍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괜찮다마다! 애초에 네가 원한 건 연화를 가까이서 살피고 어떤 애인지 아는 거였잖아.


안 그래?”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마저 잘리고 일족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그녀에게 남은 건 많지 않았다. 이제 그저


연화가 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째서 백호가 그리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의 소원을 위해 청수희가 기꺼이 힘을 써주는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제사장님께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주입해 드릴까?”

까맣게 가라앉은 눈의 뚱뚱한 중년 남자 뒤로 돌아가서 샘의 정령이 미소를 지었다.

청수희가 건 술수는 일종의 암시였다. 그녀가 앞에서 사영을 시녀의 한 명으로 설명했고,
성현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연화의 거처 근처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성현은 청수희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성현의 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제사장이라는 자가 정신력이 형편없나 보네요.”


“인간이란 그런 법이지.”

청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언제나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샘의 정령이 저런 표정을 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아마도 곧 생이 마감될 테니 그 전에 우리가 사용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생이 마감된다구요?”

“응. 저승에 내려갔을 때 이 녀석의 이름이 염라대왕의 명부에 오르는 것을 봤거든.”

“……저승까지 가시는군요.”

“그곳에도 강이 있으니까. 건너면 모든 것을 잊게 되는 망각의 강이.”

청수희가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 많고도 많았고, 그녀의 세계 역시 그랬다. 그녀는 조금


질린 사영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은 말을 삼켰다. 그 명부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

그저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며 그녀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한 번 가볼까? 연화가 있는 구중궁궐, 그 깊은 곳으로.”


58 화

요 며칠, 기묘하게 살인의 욕구가 들지 않았다. 아마 두통이 없어져서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을 안고 있을 때는 어느 누구를 매질하고 죽여도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두통에서 주의를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그 계집의 손길이 대단하긴 하군.’

만희는 피식 웃었다. 그는 오랜만에 신하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며 업무를 돌봤다.

사촌형을 죽이고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팽개쳐 둔 국정은 이미 엉망이었다.


그는 턱을 괴고 지루함을 참으면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신하들의 보고를 들었다. 백관이
늘어선 자리에서 나오는 업무 이야기는 손댈 곳이 많아 보였다.

이미 며칠째 이어진 국정 업무에 신하들은 조심스럽게 왕의 회복을 점쳤다. 만약 두통만


없다면 그리 나쁜 왕은 아닐지도 모른다. 많이 기울어진 나라의 기세를 다시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어 넘어진 자들이 많지만 앞으로 조심만 하면…….

서로 눈길을 나누는 백관들의 낌새를 만희가 모를 리 없었다. 신경이 거슬렸으나 그래도


전과는 달리 참을 만했다.

그는 오전 업무를 끝내고 전각을 나섰다. 그의 뒤를 내관들이 우르르 따랐다. 돌계단을


내려가며 만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쨍한 햇빛이 맑았다. 다소 더운 날이라
목덜미에 습하게 땀이 찼다.
“덥구나.”

“욕탕을 준비시킬까요?”

“아니, 내천으로 가겠다.”

왕궁 안에는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작은 천이 흘렀다. 왕실 사람들은 더우면 그곳에서 간혹


물놀이를 즐겼다. 만희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급히 왕의 물놀이를 준비한 시녀와
내관들이 발소리를 죽여 그 뒤를 따랐다. 그 안에는 침방시녀 은연도 있었다.

물가에 도착해 그는 항상 차고 다니던 검을 풀어놓고 옷을 벗었다. 복장을 풀어헤치는 그를


보며 내관과 시녀들이 시중을 들었다. 무거운 왕의 옷을 전부 훌훌 벗어버린 뒤 그는
천으로 뛰어들었다. 물보라가 일며 방울이 이리저리 튀었다. 은연이 조심스럽게 왕의 옷을
젖지 않도록 뒤로 거두어 들였다.

한참 수영을 즐기며 물놀이를 하던 만희가 물을 털며 걸어 나왔다. 그는 흰 수건을


받아들어 머리를 털었다. 가까이에서 수건을 받쳐 들고 있던 은연을 보고 왕은 음심이 솟아
씩 웃었다.

“너, 예전의 그 침방시녀지?”

“예? 아, 예에…….”

은연은 흠칫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은연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단편적인


얼굴만 기억할 뿐이었다.
“너, 좀 더워 보이는데.”

“아, 아니옵니다.”

“더워 보여.”

왕은 손으로 물을 떠서 은연의 가슴팍에 뿌렸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물을 맞은


은연은 눈을 꽉 감았다.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완전히 젖어버린 가슴
부위가 가뜩이나 얇은 옷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야 좀 시원해 보이는군.”

왕이 씩 웃었다. 얇은 옷감 아래 놀란 숨을 쉬며 들썩이는 풍만한 가슴이 만족스러웠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슴을 잡았을 때, 내관들 사이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죽어라, 이 악마!”

검을 든 암살자였다. 그는 검끝을 예리하게 만희에게 겨눴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만희는 순간 당황했으나, 멍하니 서 있던 은연을 밀어내 검의 궤적에서 비껴나게 하고는
자신도 재빨리 암살자를 피했다. 독이 묻은 검 끝이 팔을 스치고 은연이 비명을 질렀다.

“건방진.”

만희가 으득 이빨을 물었다. 감히 이 기분 좋은 오후의 물놀이를 이런 식으로 망치다니.


은연을 한 번 더 밀어 완전히 암살자의 공격 범위에서 밀어내며 그가 반격했다. 암살자의
검끝이 만희의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는 상관하지 않고 그 검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암살자의 정강이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그는 검을 도리어 주인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크윽!”

비명이 궁의 하늘을 울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급히 달려온 경비병들은 왕이 다칠까


함부로 접근하지도 못했다. 왕은 단숨에 제압한 암살자의 목에 검을 꽂아 넣어 절명시켰다.
처절한 단말마가 울렸다.

“전, 전하!”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이것이 대체.”

눈을 홉뜬 채 죽어 넘어진 암살자는 내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내관이었다.


만희조차 희미하게 그 얼굴을 아는 자였다.

“꽤 오래 일한 내관 아니냐, 이것은.”

만희가 발끝으로 시체를 툭 걷어찼다. 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대체 뭐지? 왜 궁 안에서 일하는 내관이 내게 칼을 들이댄단 말이냐.”

“그, 그것이…….”

“상세히 조사하라 일러라. 결과에 따라 곁에 있던 자들의 생사를 결정할 것이다.”


그 말에 죽은 내관과 관계가 있는 자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병사들이 내관들의 주위를
둘러싸 포박했다.

만희는 검에 스친 손바닥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상처로부터 마비가 서서히 퍼지는


것 같았다. 아주 치명적인 독은 아니고 단지 마비독일 뿐이며 그리 강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치료는 해야지. 약을 가지고 달려오는 의원을 무시하고 그는 대충 옷을 주워


걸친 뒤 발걸음을 돌렸다.

“전하, 해독약을!”

“전하, 치료를 하고 움직이소서.”

“됐다.”

따라오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만희는 길을 정했다. 연화가 머무는 전각이 있는 쪽이었다.


치유사가 있다면 치유사를 활용해야지. 그 누구보다 유능한 자가 아닌가.

전각의 바깥 작은 정원에 앉아 수를 놓고 있던 연화는 갑작스러운 왕의 행차에 놀라 얼른


절을 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맨 가슴팍을 내놓은 매우 방만한 옷차림의 만희는 휘적거리며 작은 정원에 걸어들어 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수상한 자가 없었느냐?”

“수상한 자라니, 어떤 자를 말씀하시는지.”

“검은 옷을 입었거나 낯설거나 검을 들거나, 아무튼 거동이 수상한 자 말이다.”

“아뇨, 이곳엔 저밖에…….”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연화의 얼굴을 보고 만희가 잠자코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대각선으로 그어진 자상을 보고 연화가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만희의
손을 잡았다.

“이것이 대체……. 어쩌다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연화의 놀란 시선이 자신의 상처에 와 닿는 것을 기분 좋게 느끼면서 만희가 중얼거렸다.

“내관 사이에 암살자가 끼어 있더군.”

“……세상에.”
그녀는 서둘러 손에 빛을 떠올렸다. 은은한 노란 빛의 힘이 연화의 손에서 일어나 만희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다가 말했다.

“독이 있군요.”

“그것도 알 수 있느냐? 그래, 마비독이더구나.”

“…….”

그녀의 손이 닿은 주위로 마비가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노랗고 은은한 빛은 느리게


퍼져나가 만희의 손으로 옮겨갔다. 빛나는 피부 위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만희는
그 광경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신묘한 힘이로다. 상처가 이렇듯 눈에 띄게 아물다니. 큰 상처에도 이렇게 작용하느냐?


궁금하구나.”

“아닙니다. 제 힘은 미약하여 상처가 크면 힘이 모자라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낫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는 하겠으나…….”

“내가 한번 상처를 내볼까? 얼마나 큰 상처에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는지 궁금한데.


실험을 해보고 싶군.”

“안 됩니다! 그 무슨 말씀을.”

기겁해서 연화가 자신도 모르게 만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아야, 하는 작은 신음성을


듣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녀가 사색이 되어서 손을 놓았다. 겁에
질린 그녀와는 달리 만희가 웃었다.
“그래, 알겠다. 따로 상처는 내지 않도록 하지. 쯧, 왕의 낫지 않은 상처를 움켜잡다니
하여간 분수를 모르는 계집이야.”

말과는 달리 말투는 유쾌했다.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연화 역시 그의 표정이


거짓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서서히 상처가 거의 아물어갔다. 그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생각난 듯 은연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상처 입은 것이 하나 더 있지.”

“예? 어디, 어디에 상처를 또 입으셨습니까.”

“아니, 나 말고 다른 계집이. 그 계집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은연을 찾는 왕의 말에 내관이 고개를 숙였다.

“은연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지금 의원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상처는 어떻다고 하느냐?”

“제법 커서 출혈이 있다고 합니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 하지만…….”

“그래?”
만희는 벌떡 일어섰다. 왕궁 안에 있는 의료실이라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가 일어서다
연화가 손을 떼려 하자 혀를 찼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는데 지금 손을 떼는 게냐? 몹쓸 치유사로군.”

“아, 아직 아프십니까?”

연화가 당황해서 그의 손에 다시 매달렸다. 그녀를 손에 그대로 달랑달랑 단 채로 만희는


멋대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있는 의료실이 목적지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왕의 일행 때문에 의료실은 난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암살 사건으로 다친


시녀를 치료하는 것만 해도 조용하던 의료실이 시끄러워질 만한 일이었는데, 거기에 왕까지
행차했다.

만희의 앞에 엎드린 의원을 보다가 그는 히죽 웃었다.

“저 시녀가 많이 다쳤느냐?”

“예,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옵고 그저 자상이 커서 봉합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옵니다.”
늙은 의원이 떨면서 말했다. 만약 왕이 아끼는 시녀라면 그 고운 피부에 흉터가 질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이 떠맡을지도 몰랐다. 그는 제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서
벗겨지길 바라며 땅에 엎드렸다.

“그래……. 너, 괜찮은 게냐?”

만희의 말투는 언뜻 다정하게도 들렸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은연은 자신을 보기 위해 왕이


여기까지 행차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침방시녀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오다니. 게다가 옆에는 치유사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왕은 아무 의자에나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시 저 시녀를 눕히고 치료를 시작해라.”

다시 은연을 의료 침상 위에 엎드려 눕히고 의원과 의녀들이 그녀의 옷과 붕대를 풀었다.


은연은 왕의 곁에 있어 위험했지만 그가 밀어 구해준 덕분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은연의 팔과 등에는 큰 자상이 세 개나 나 있었다. 아직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는 멎었지만 상처는 벌어진 채였다.

채 피가 꾸덕하게 마르지도 않은 생생한 상처에 연화는 눈을 찌푸렸지만, 곧 손에 치유의


빛을 띄워 올렸다.

“긴장을 풀고 누워 계십시오.”

그녀의 손에서 노란 빛이 은연에게로 옮겨갔다. 은은한 온기가 팔과 등의 상처를 덮어오자


은연은 눈을 감았다. 다소 얄밉기는 했지만 왕 전속의 치유사가 직접 시녀의 상처를
봐주다니 대단한 배려였다.
연화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 정도 크기의 상처는 그녀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상처의 봉합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내부의 상처와 통증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59 화

일단 마비독을 모두 몰아낸 이후, 외부 상처를 하나씩 봉합하기 시작했다. 붉게 드러났던


살점들이 느리게 모아져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게 상처가 사라지는 모습에
주위에 서 있던 모두가 신기한 눈으로 주시했다.

연화의 이마가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치유의 능력을 쓰는 것은 분명 몸에도 부담을


주었다. 작은 능력을 쓸 때야 큰 부담이 아니라지만 이렇듯 큰 상처를 셋이나 치료하는 건
분명 평소보다 무리였다.

그녀의 양뺨과 턱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자 만희가 곧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겨 은연으로부터


떼어냈다.

“그만해라. 이제 됐어.”

“아, 하, 하지만 전하, 아직 마지막 상처가.”

가장 큰 상처가 제대로 봉합되다 말아서 흉하게 안의 붉은 살점을 내보이고 있었다. 한참


느끼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지자 은연이 흠칫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서 만희가 무감정한
눈으로 은연을 훑어보았다.
“아니, 됐어. 이제 내가 궁금했던 건 풀렸으니. 저 정도 크기의 상처도 일단 봉합은 되는
거군.”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분의 상처 치료를 마저…….”

“그만해라. 너, 땀이 나고 있어. 여봐라, 시원한 과일화채를 마련해라. 정원으로 자리를


옮기겠다.”

만희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섰다. 연화의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옆에 세운 뒤 그는 매몰차게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의료실을 나섰다.

엎드려서 그 광경을 보던 은연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의 상처를 잠시라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저…… 궁금했던 것을 보기 위해,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왔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주었다. 적어도 은연의 생사와 안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는 아연해져서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당황한 얼굴로 만희에게 끌려 나가며 은연 쪽을 연신 돌아보았다.

늙은 의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취급을 보니 이 침방시녀는 그리 왕이 아끼지 않는


여인 같았다. 그는 히죽거리며 은연의 등에 남은 상처 위로 약을 발랐다.

“아무래도 왕께서는 저 치유사가 마음에 드신 것 같군. 얘야, 너 침방 시중은 아무래도


그른 것 같으니 나하고 자지 않으련?”
노골적이고 파렴치한 희롱에도 은연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바닥으로 처박혔다는 기분에 얼굴을 침상에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전하, 전하.”

“왜? 자꾸 시끄럽군.”

만희가 짜증을 냈다. 그는 정원까지 연화를 끌고 와서 강제로 자신의 맞은편에 앉혔다.


그가 화를 내자 연화는 겁을 먹은 얼굴이었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아까의 그 사람, 치료를 마저 하고 오겠습니다. 허락을.”

“필요 없어.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마라.”

만희의 단호한 불허에 연화는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시녀와 내관들이
재빠르게 높은 탁자와 고운 무명 식탁보를 가져오고 그 위에 시원한 과일화채와 마실 것을
내왔다. 다디단 당과도 함께 나왔다. 그녀는 맛있는 다과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계속해서 의료실 쪽을 흘긋거리며 바라보았다.

“딴 데 신경 쓰지 마.”

“예? 아, 예.”
다시 한 번 청해볼까 했지만 만희의 얼굴은 빈틈이 없었다. 결국 연화는 치유를 포기하고
얌전히 앉아 입 안에 화채를 밀어 넣었다. 자꾸 먹으라고 만희가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만큼 심한 상처는 아니었으니까.’

의료실 안이기도 했고 의원도 있었다. 이미 마지막 상처만 제외하면 봉합은 해두었고. 지금


자신이 걱정하는 쪽이 오만일지도 모른다.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군.”

만희가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당과 꼬치를 집어 들어 연화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빈틈을


찔린 연화가 깜짝 놀란 채로 입 안에 들어온 당과를 씹었다. 그녀의 커진 눈을 보면서
만희가 히죽거렸다.

“시녀 따위는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어차피 네가 생각한다고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도


아니잖나.”

“……죄송합니다.”

그녀는 조그맣게 사과했다.

“네 앞에 왕이 있는데, 집중해라.”

입 안에 들어온 당과는 달콤하고 말랑거렸다. 천민 부락에 살 때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고, 백호의 궁에 가서는 과일이나 더 신선한 먹거리들이 많아 당과를 많이 입에 대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연화는 조용히 당과를
씹어 삼켰다.

바람이 불어와서 열기를 식혔다. 머리 위로 어느새 내관들이 들어 올린 차양 덕분에


시원하게 그늘이 졌다. 정원 가득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잎사귀가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왕은 곁에 선 내관에게 물었다.

“아까의 그 암살자 조사는 어찌 진행되고 있느냐?”

“이미 죽어 넘어진 자라 심문이 불가하여 일단 거처 물품의 조사와 함께 검에 묻은 독의


정체와 출처를 조사하고 있나이다. 아직까지는 특별히 나온 사항이 없습니다.”

내관이 허리를 굽혔다. 왕은 심상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기대 방만하게 앉았다. 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마치 평상시처럼 나른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상처를
보지 않았더라면 암살 사건이 있었다고 짐작도 하지 못했을 거라 연화는 생각했다.

“주변인들을 철저히 조사해라. 필요하다면 고문도 해. 그게 효율적일 테니.”

“예.”

고문을 말하는 말투도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연화는 그것을 막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마 그녀가 말한다 해도 고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방관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연화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제사장 성현 님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성현이? 지금?”

“예, 암살 사건을 전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돼지 같은 제사장이 바로 뛰어왔군. 그래도 대귀족 중에 눈치가 있는 자라 살려두고


있는 만큼 성현은 궁 안의 모든 사건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 그런 쪽으로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제사장의 이름을 들은 연화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만희는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들어오라고 해라.”

“예.”

잠시 후 제사장의 뚱뚱한 몸이 구르듯 정원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매우 과장된 동작으로


만희의 앞에 엎드려서 통곡했다.

“아니, 어떤 흉괴들이 전하의 몸을 해하려 했단 말입니까! 이 무슨 비극입니까 전하!


옥체에 해는 입지 않으셨습니까!”

“…….”
“악당들! 감히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신 전하를 해하려 시도하다니! 천하고 악하며 멍청한
자들이 아니옵니까! 전하!”

너무 시끄러워서 만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떠드는 성현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그는 물끄러미 제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어리는 기묘한
살기에 맞은편에 앉은 연화는 목을 움츠렸다. 그 기색을 알아채고 성현 역시 재빨리 입을
다물고 엎드렸다.

정원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만희의 눈치를 보았다. 연화 역시 눈을 아래로 내리고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설핏 성현의 뒤로 눈을 옮겼다. 그의 뒤에 함께 들어와 엎드려 있는 여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얼굴인데 뭔가…….’

평범한 얼굴인데 뭔가 이질적이다. 주변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에서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연화를 흘긋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인데 어디선가 많이 느낀
기색이었다.

그것이 신령계에서 느꼈던 신령들의 기색이라는 것을, 연화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저, 옥체는 평안하시온지요…….”

간신히 조용해진 성현이 입을 열었다. 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손바닥의 작은 상처 외에는.”


“저런. 치료를 받으셨사옵니까!”

목소리를 줄였어도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반응이다. 만희는 턱으로 연화를 가리켰다.

“그래, 내 치유사가 솜씨가 좋아 흔적도 남지 않았지.”

“오오, 천것이 제대로 일을 하였다니 천만다행이옵니다. 제가 이 계집을 데려올 당시


고생을 하였으나 그 보람이 있습니다, 전하.”

성현은 자신이 연화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뻐기면서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만희는 그
말투가 거슬려서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귀족이니 가능하면 죽이지 않는 게 귀찮지 않은
길이다. 그는 그래서 검을 드는 대신 지적했다.

“천것이라 부르지 마라.”

“……예?”

“내 치유사를 천것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말투는 평이했지만 만희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검은 머리 밑에서 성현을 주시하고 있는


적안은 형형했다. 눈 안에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제사장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연화와 만희를 번갈아 보았다. 그저 치유의 이능을 지녔을
뿐, 연화는 천한 신분이 맞았다. 그러나 그 단어가 왕의 기분을 거스른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니 다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성현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흘긋거리며 연화를 살폈다. 설마 저 계집이 그사이에 침상에서
밤일로 왕을 홀렸나? 싶었다. 천한 것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왕이
천것이라 부르지 말라 경고까지 했겠지.

연화는 성현의 눈빛에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기색을 만희가 눈치챘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를 마셨다.

“됐으니 이제 물러가라.”

“예, 전하, 예…….”

성현이 급히 엎드려 절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중에도 그 검은 머리의 여자가


신경 쓰여서 연화는 그녀를 찾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

사영은 성현의 지시에 따라 연화의 거처가 있는 전각의 시녀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외모로 둔갑한 터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성현은 왕을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세가였고 만희가 워낙


포악하여 시녀로 들어오려는 처녀가 부족한 터라 사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시녀로
소개받아 들어갈 수 있었다. 시녀를 관리하는 내관은 성현과 같은 대귀족이 잘 아는 처녀를
시녀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 특이하다는 듯 의아하게 한 번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래도 전하의 시녀가 아니라 작은 전각의 일을 돌보게 되었으니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야.”
내관의 말에 사영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말이 없는 아이로군, 하며 그가 사영의 신분증에
시녀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도장을 쾅 찍었다.

그날부터 바로 일이 시작되었다. 가장 허드렛일인 빨래 담당이 되어 그녀는 이곳저곳으로


세탁물을 날랐다. 능견으로 된 저고리와 치마는 전부 솔을 뜯어내어 해체한 뒤 빨아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으므로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사영은 별다른 불만 없이 일을 따라했다. 평생 아가씨로만 살아와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손이 빠른 편이라 따라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전이면 작은 전각의 전부를 돌면서 세탁할 옷감들을 거두어 들였다. 동시에 새로
빨아 바느질한 옷들을 개어 장에 넣어두었다.

사영의 눈에 비친 연화는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가 옷감을 가지러 들어간 첫날,


연화는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영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연화 역시 마주


고개를 숙였다. 무표정한 사영의 얼굴을 보면서도 연화는 곱게 미소를 지었다.

60 화
오전의 햇살 속에서 희게 배꽃처럼 빛나는 연화의 모습을 보고 과연 미인이로구나, 하며
사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작은 전각의 일을 하면서 사영은 의도치 않게 연화의 일상생활을 전부 구경하는 셈이


되었다. 궁의 빨래라는 것은 지독히도 많아서, 오전과 오후, 저녁 시간에 규칙적으로
옷감을 걷고 배분하는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일어나면 연화는 말끔히 차림을 단장한 후 수를 놓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수를 놓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녀가 놓는 수가 흰 호랑이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영은 말없이 인정했다.

그립겠지, 그리도 사랑해 주던 신의 얼굴이. 그녀 자신은 얻고자 해도 수치만 당하고


쫓겨났던 사방신의 사랑이 아닌가.

오후가 되면 왕이 방문하는 일이 많았다. 만희는 연화의 맞은편에 앉아서 다과를 들거나


술을 마셨다. 두통이 있으면 연화가 간혹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치유를 행했다.
노랗게 빛나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주고 나면 만희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앉아서
그녀에게 기대고 있었다.

혹시 밤에 침상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가, 하면서 며칠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왕은 정말 그저 치유사에게 기대는 것처럼 그저 이야기만 나누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의
욕구를 받아내는 것은 침방시녀들이었다.

‘정말로 평범하군.’

생각보다 연화는 정말 평범한 인간 여인이었다.


사영이 새로 가져온 금침으로 침상을 다시 만들려 하면 연화는 급히 일어나 그녀의 손을
막았다. 일을 새로 배운 사영보다 평생 천민 부락에서 스스로 빨래하고 침상을 정돈해 온
연화의 손길이 훨씬 빨랐다.

야무지게 침상을 정돈하고 나서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헌 금침을 내주었다. 만약 할 수


있었다면 그 빨래마저 연화가 했을 것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 같았다.

그 야무진 손매가 부럽지는 않았다. 세도가 있는 일족의 아가씨로 살아온 평생이 사영은
자랑스러웠다. 그게 그녀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화는 좋은 사람이었다. 마음 저 속에서부터 연화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던 사영은 더 이상 그것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마냥 나쁘게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또 패배한 것 같아서 괴로웠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아, 피곤하네.”

궁의 시녀들은 나름대로 대우받는 편이라 좁아도 개인실이 주어졌다. 사영은 일과시간이


끝난 뒤 피로한 몸을 침상에 뉘였다. 예전에 쓰던 것보다는 초라하고 좁고 낡은
침상이었다.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몸이 이 생활에 적응해 버렸는지 침상에 누운 이


시간이 꿀처럼 달콤했다. 지금쯤 교대한 동료 시녀들은 열심히 또 밤을 새 일할 생각에
지쳐 버리고 있겠지만.
소박한 흰 찻잔에 찻물을 따라내며 사영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말이 없고 성실한, 평범한
얼굴의 신입 동료를 다른 시녀들은 잘 받아들여 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찻물을 들여다보며 사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곳에 들어오며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그녀는 연화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었다. 아마도 더 깊은 곳에서는, 연화가 나쁜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사영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 정확히 말하면 그 원인


제공자는 사영 자신과 아비인 사혈이었으나 연화 역시 원인의 하나였다.

그녀는 복잡한 기분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연화가 나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미워할 대상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때, 사영 아가씨?”

고요한 개인실에서 흘러나온 여자의 목소리에 사영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찻물에 은은하게 비치는 것은 푸른색이다. 청수희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고 그저 목소리만


보내는 방식이었다. 사영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연화를 알고 싶다고 했잖아. 원하는 결과를 얻었어?”

“…….”
분명히 청수희는 뻔히 알고 있다. 사영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면서도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기가 싫어서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침묵만으로도 이미 청수희가 충분히 재미를 얻고 있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좋은 사람이에요.”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청수희가 웃었다. 다행히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싫어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할 것 같네요.”

사영은 우울하게 말했다.

작은 전각에는 만희가 품계를 내리고 잊은 후궁들도 몇 있었고, 급이 높은 시녀들도


있었고, 간혹 높은 손님이 다녀가기도 했다. 연화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행동도 달랐다. 전각에 머무는 자들 중 고약한 자가 제법 있었지만 그들과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사영은 연화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여인이기에 백호가 사랑에 빠진


것일까 생각했다.

청수희가 저 건너편에서 웃는지 찻물이 연신 흔들렸다. 그녀는 웃으라고 내버려 두고


사영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더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때
청수희가 물었다.
“어때, 사영 아가씨. 거기 더 있을 거야? 더 있어봤자 원하는 결과는 못 얻을 텐데.”

“…….”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순간 울컥해서 사영은 찻잔을 엎어버릴까 했지만 다행히 순간적인


자제력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그녀는 불퉁하게 답했다.

“그거야 봐야 알죠. 좀 더 있어볼게요. 한길이어도 모르는 게 사람 속이니.”

“뭐 그러든지. 소용은 없겠지만.”

끝까지 속을 긁는 소리를 하는 청수희를 마음으로 노려보면서 사영은 찻물을 홀짝 마셨다.


계속 놀리면 아예 입천장이 데든 말든 한꺼번에 다 마셔서 없애버릴 테다, 하면서.

“그리고 사실 연화를 싫어해 봐야 백호 님이 아가씨한테 간다는 보장도 없고……. 여러모로


쓸모없는 행동이긴 하네. 쯧쯧.”

그 쓸모없는 걸 도와준 게 당신이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라 왔다. 사영은 차를


쭉 마셨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미리 알았는지 청수희가 숨넘어가게 웃었다.

“아, 그래, 그래. 알았어, 미안해. 그만 놀릴게.”

“소용없어요. 다 마셔버릴 거니까.”


웃음소리에 고막이 울릴 지경이다. 뭔가 더 청수희가 말했지만 사영이 진저리를 치면서
찻물을 마구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다음 말이 들려왔다.

“그래, 다 마셔. 어차피 찻물이란 마시기 위해 따라놓은 거잖아.”

좋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사영이 완전히 찻잔을 들어 올려 마지막 방울까지 깨끗이


마셨을 때, 청수희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괜찮아. 아가씨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 힘내라구!”

***

암살 사건의 조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검을 들고 만희를 공격했던 내관은 알고 보니 얼마 전 궁으로 들어왔던 시녀의 오라비라


했다. 시녀의 오라비인데 왜 나를 공격했는가, 하는 물음에 조사관은 눈을 피했다.

“그것은, 그……. 시녀가 얼마 전 사망하여.”

“내가 죽인 건가?”

아아, 하며 왕은 귀를 후벼 팠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으나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워낙 많은 수를 다양하게 죽여서 누구인지 기억에도 없었다. 궁에서, 특히 왕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연화가 들어온 이후에는 덜했으나 그 전까지는 이유 없이 심해지는 두통이 몰려올 때면
만희는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반드시 누구 한 명은 죽어서
시체로 실려 나갔다. 한 명이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 오라비를 궁내에 그대로 뒀다니 관리가 소홀했군.”

궁내 인력을 관리하는 내관이 창백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하기사, 이놈도 빼고 저놈도 빼다 보면 궁내에서 일할 자들은 아무도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좀 많이 원한을 사댔어야지. 자신도 뻔히 아는 사실에 만희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그래서, 관련자는 색출했나?”

“대부분 꼬리를 끊고 내뺐습니다만 궐 밖에서 마비약을 구해준 자를 잡았습니다.”

마비약이라 해봐야 약효도 그다지 많지 않은 하급의 약이었다. 그런 것을 독이라며


구해줬을 정도면 보나마자 빈민일 게 분명했다. 독 역시 효과가 좋을수록 비쌌으니. 궁의
내관이라 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독을 살 만한 비용은 외부에 의존했을
게 뻔했다.

왕의 앞에 끌려온 자는 역시나 빈민이었다. 추레한 차림새에 창백한 낯의 중년 사내는


그러나 겁도 없이 왕을 노려보았다. 뒤에서 오금을 쳐 무릎을 강제로 꿇렸으나 눈빛만은
결코 복종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빈민가에서 약을 파는 약사라고 합니다.”


관리의 귀띔에 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약사라면 마비약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명을 받아 이런 짓을 벌였지?”

만희는 물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이리 무도한 짓을 했을 리는 없었으니 분명


뒤에 이웃 국가나 국내의 권세가가 있으리라. 외부의 적이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국내에 왕위를 찬탈하려는 권세가가 있다면 짓밟을 것이다.

왕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더러운 것들, 감히 내게.

그러나 중년 사내는 눈을 번들거릴 뿐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당신은 궁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있나?”

무엄한 말투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죄인을 치려 했으나, 만희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간만에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놈이다. 말은 들어보고 싶었다.

순간, 고막 속에서 기묘한 울림이 들려왔다. 관자놀이가 당겨서 만희는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주물렀다. 서서히 두개골 전체가 조여드는 듯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은가.
만희는 두통을 따라오는 충동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뇌에 대고 직접 새겨 넣는 듯한
욕구와 충동이었다. 잘 드는 조각칼로 뇌를 한 점 한 점 파내면서,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이면 이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

그는 이마에 손을 짚고 히죽 웃었다.

“궁 바깥? 나가지, 자주.”

“…….”

“너 같은 벌레들을 죽이러.”

해충은 죽여야 사람이 편하지. 만희가 낄낄 웃었다. 그를 보며 중년 사내의 얼굴은 극도의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감상하면서 왕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댔다.

“대체, 대체 왜.”

간신히 꺼낸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사내의 표정을 보며 만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말인가?”

“왜 우리들을…… 사람이 아니고 벌레로 보는 것이오. 우리는…… 우리는 사람이란 말이오.”

사내는 호소했다. 그는 묶인 두 손을 들고 무릎걸음으로 걸어 만희의 앞으로 나왔다.


“최소한…… 살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니오. 밖의 빈민들, 아니, 평민들마저도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는 게요?”

“…….”

“밥을 굶는 것은 예사요, 어미의 젖이 말라 젖먹이가 죽어가오. 물이 말라 마실 물이


없고, 고기가 없어 키우던 개를 잡아먹고 있소. 내 아내 역시 배를 곯다가 병에 걸려
죽었소. 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왕은 느른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61 화

이 벌레가 대체 뭐라고 떠드는지 들어보기나 할 심산이었으나 점차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점점 더 조이며 아파왔다. 속삭임도 커지고 있었다.

만희의 눈을 보고 그가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내는 분통을 터뜨렸다.

“밖에는 당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반란군이 속속 일어나고 있소! 이대로 천년만년


계속 지배할 것 같은가, 더러운 자!”

한 번 욕설을 시작한 사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그는 묶인 손으로도


손가락질을 했다.
“오라비가 제 여동생을 겁간하여 그 사이에서 낳은 더러운 자! 그런 자가 왕위에 있으니
수국이 저주를 받아 이렇듯 고통받는 것이다!”

“저, 저놈이!”

사내가 쏟아놓는 말들에 병졸들과 백관이 기겁했다. 모두가 알지만 쉬쉬하며 누구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던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중년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며 다물지
않았다.

“네가 죽인 사촌형은 실은 친형 아니냐, 이 개 같은 놈!”

“당장 저자의 입을 막아!”

신하들이 외쳤고 병졸들이 달려들어 그를 때려눕혔다. 그 때 만희가 일어나서 천천히 중년


사내의 앞으로 내려섰다.

팔척장신의 사내는 조용히 다가와 사내의 코앞에 섰다. 얻어맞아 쓰러진 사내는 눈앞에
놓인 왕의 발끝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만희를 보는 중년 사내의 독기 어린 눈에 만희는
씩 웃어 보였다.

“인두를 가져와라.”

주변에서 숨을 삼켰지만 곧 인두가 준비되었다.

새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를 꺼내 눈앞에 들어 살펴보며 만희는 느릿하게 그 위에 침을


뱉었다. 치익 하며 금세 증발해 버렸다.
“최근 며칠은 내 기분이 꽤 좋았는데 말이지. 그걸 꼭 이런 식으로 부수는 놈들이 나와.”

“더러운 작자! 네놈이 뭘 하든 난 겁먹지 않아!”

“아, 그러시겠지. 그러실 거야, 물론.”

만희는 머리를 꽉 짚었다. 그의 적안이 번들거렸다. 뇌가 한 점씩 조각칼로 떠지는 듯한


고통이 켜켜이 쌓여갔다. 눈이 그대로 안와에서 빠져나와 버릴 것 같은, 혹은 직접 손으로
파내 버리면 그나마 고통이 줄어들 듯한 두통에 만희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부릅뜨며 왕은 히죽 웃었다. 그는 인두를 들고 서 있다가 예고 없이 사내의 입을


지졌다. 치직거리며 살이 타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끅, 윽, 읍……!”

제대로 입을 열지도 못해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몸부림쳤다. 병사들이 재빨리 그의 사지를 잡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만희는 곧 이어
사내의 목덜미에 인두를 가져다 댔다. 성대가 있는 자리였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입 안에서 샜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사내가 오줌을 지렸는지 바지
주위가 젖어들었다. 만희는 신경 쓰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거센 발길질에 뻐걱 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팔다리를 잘라 인간돼지를 만들까 고민했는데 네놈에게 들어가는 사료도 아깝겠어. 그냥


죽는 쪽이 돈이 덜 들겠군.”
검을 빼 들고 중년 사내에게 다가가며 왕이 웃었다.

“네놈이 먹을 사료값으로 반란군을 수색하는 비용을 충당하지.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그리고 곧 사내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굴렀다. 단칼에 베었으니 차라리 자비로운


것이다. 만희는 검을 털어내고 다시 검집에 넣었다.

“아차, 이자를 심문해서 누가 배후인지를 알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깨닫고 만희는 몹시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간만에 피를 볼 생각에 너무 흥분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목을 잘라버렸다.

대체 누가 배후가 되어 이런 짓을 사주했는지 알아냈어야 했다. 저런 버러지들이 스스로


생각해 의지를 가지고 행할 리가 없는 노릇이다.

그는 잠시 머리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피를 보았음에도 두통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왕은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내관이 주춤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듯한 고통에 만희가 검집째로 땅을 짚었다.


지팡이처럼 검집을 짚고 서서 그는 크게 신음했다.
“몇 놈을 더 죽여야 이게 좀 나아지는 거지?”

“저, 전하? 전하…….”

내관이 떨었다. 그러나 그가 아니면 왕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내관은 조심히 왕의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하, 치유사를 불러올 테니 부디 안정을…….”

“……그래, 치유사. 연화, 그래.”

만희는 입속으로 연화의 이름을 굴렸다. 그녀의 이름을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쯤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려다가 여지없이 조여드는 고통에 신음하며
내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뭘 하는 게야, 죽고 싶으냐?”

“전하, 전하, 곧 그 치유사를…… 불러오겠나이다. 전하!”

만희의 손이 내관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는 검을 뽑을까 말까 망설였다. 예전 같으면


망설임따위 없이 저 내관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머릿속의 통증이 계속해서 피를 원한다고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충동을 참아냈다. 연화의 이름이 한 번 더 그의 입 안에서


굴렀다.
“빨리 불러와라. 내가 네놈의 멱을 따기 전에 말이야.”

왕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미 그의 흰자에 핏발이 가득 서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달려갔다. 전각에서 쉬고 있을 연화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

‘대체 저들을 언제까지 중간 지대에 놓아두어야 하나…….’

호접은 고민했다. 마을의 인간들은 한둘도 아니고 수십이었다. 비록 중간지대의 환영에


이끌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내고 있다지만, 저대로 있으면 영양실조로 멀쩡한 이들이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중간지대는 다른 곳보다 확연히 힘의 소모가 적어서 아직 쓰러진 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중간지대에서 저들을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인간계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아직은 안전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음식물들을 가지고 중간지대로 날아들어 갔다. 백호에게도 묻지 않은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에게 물어서 또 한 번 연화를 생각나게 했다가는 간신히 조금
가라앉아가는 신의 감정을 또다시 흔들어놓는 일일 테니까.

인간들을 중간지대에 데려다 놓은 이후로 시간이 지나며 백호는 조금이나마 감정을 추스른
모습이었다.
나비의 날개가 팔락였다. 중간지대에 누워 환영에 홀려 어두워져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나비를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호접은 정신이 흐려진 사람들의 틈으로 날아들어 한
명씩만을 깨웠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과 죽을 먹고 사람들은 한 명씩 조용히 다시
잠이 들었다.

저 멀리에서 저승에 가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들이 이곳을 넘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호접은


단호하게 그들을 쫓아냈다. 적어도 원혼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지 않는 이상 이곳의 사람들은
안전했다. 그리고 대부분 원혼들은 자신의 원한이 서린 자에게만 달라붙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나비의 날개가 팔랑였다.

마지막으로 깨운 자는 연화의 양어머니였다. 그녀는 환영에 눈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그녀를 깨우자 노파는 눈을 깜박였다. 입모양으로 연화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호접은 덜컥 걱정이 되었다. 마치 실성한 것 같은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자, 정신 차리세요. 이 죽과 물을 좀 잡수시고.”

호접이 그녀를 일으켜 죽을 입에 흘려 넣었다. 그러나 영 받아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노파는 죽을 먹으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연화야, 연화야……. 너는 잘 있는 게냐…….”

양어머니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딸을 보고 쓰다듬는 것처럼 손을 앞으로


뻗어 움직이고 있었다. 호접은 그 손을 잡았다.

노파와 직접적인 대화는 세계의 규칙을 깨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그녀의 잠꼬대를
간접적으로 듣는 것은 규칙과 상관없다. 호접은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궁까지 끌려가서…… 멀쩡한 게냐, 대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네 치유의 능력이 그리도 탐이 났을까, 수도에는 더 대단한 사람도 많을 텐데
대체 왜.”

말의 부분 부분이 뭉개져 어눌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연화야, 내 딸아. 내 딸아…….”

노파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널 보고 싶단다. 이 세상이 어쩌면 이리도 무심한지, 내게 남은 것은 내 딸인 너뿐인데.”

노파의 말에는 한가득 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물과 죽을 조금 더 마시게 한 뒤


호접은 그녀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환영을 불러 잠들게 했다. 잠시라도 편안하게,
딸과의 환영 속에서 쉴 수 있도록.

호접은 잠시 중간지대의 어둠 속에서 앉아 있었다.

‘연화 님은 치유의 이능 때문에 누군가의 눈에 띄어 수도로 가게 된 것인가.’

노파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랬다. 그리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대체 왜 마을을 없애려


했는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궁이라면 왕에게 끌려갔다는 사실을 의미할
터.
지난번 백호가 했던 말로 미루어보아 연화는 정인과 함께 있다고 호접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설마 왕이 정인인가, 허나 치유의 이능 때문에 수도로 갔다면 그도 아닐 것이다.
왕이 정인이라면 마을을 불태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은 치유의 능력 때문에 거짓되게 연화의 정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호접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매일 허한 얼굴로 슬픔에 젖어 있는 백호가
눈앞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된다.’

호접은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할수록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더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호접은 선을 그어야 했다. 백호가 저렇듯


힘겨워하고 있을 때 자신마저 흔들리고 일을 허투루 처리해서는 안 된다. 신령계와
인간계의 경계는 유별하므로 안됐지만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화가 걱정되었다. 인간의 여인은 여리고 부드럽고 상냥했다. 호접은
그녀와 함께 지내는 사이 어느새 마치 자매 같은 애정을 품었다. 연약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은, 어린 여동생.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때 노란 나비의 날개에 홀린 원혼이 손을 들고


느리게 접근했다. 그를 쫓아내면서 호접은 날개를 푸른색으로 바꾸었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차가운 색이었다.

저승에 가지 못하고 중간지대를 떠도는 망령이 입을 쩍 벌리고 뒤로 물러섰다.

【따뜻한…… 온기…… 아냐…….】


“나는 네가 찾는 온기가 아니다, 썩 꺼져라!”

【노란 빛……. 보살의 빛…… 아냐…….】

보살의 빛? 호접은 잠깐 휘두르던 손을 멈췄다.

노란 보살의 빛. 그녀가 알기로, 세상에 남은 보살의 가피는 몇 없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는 연화였으며 오색찬란한 보살의 빛 중에서도 그녀는 노란색을 가졌다.

대체 연화의 빛을 대체 저 원혼이 어찌 아는가. 호접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으로 원혼을


노려보았다.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원혼이란 이성적인 사고나 대화가 불가능한 자들. 그들에게 뭘


더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호접은 왠지 불안한 기분에 주먹을 쥐었다.

돌아가기금수의 붉은 달

62 화

연화는 수를 놓다가 말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날이 더웠고 밖에는 진녹색의


나뭇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시녀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셨다. 더운 날이라
차게 식힌 찻물이 입 안을 축였다. 수를 놓으며 집중하느라 입 안이 마른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옷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색색의 실로 채워져 가는 수틀 안에는 푸른 눈의 흰
호랑이가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그 눈이 살아 움직여 연화를 바라볼 것만 같이
생생했다. 백설처럼 희디흰 털과 선명한 세로줄 무늬. 연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

만희는 방에 다녀갈 때마다 그 호랑이 자수를 보며 웃었다. 푸른 눈의 흰 호랑이라니,


계집이 놓는 수 치고 꽤나 대담한 그림이로구나. 과연 수틀 안의 호랑이는 담대하고
푸르렀다. 그것은 백호가 담대하고 푸른 사내이기 때문이라고, 연화는 생각했다.

“보고 싶어요.”

그녀는 수틀 속의 백호에게 작게 속삭였다.

염치없는 소리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자신의 결정으로 떠나온 남자의 품이었고


세계였다. 비록 마을 사람들과 양어머니의 위기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지만 책임은
자신의 몫이다. 그걸 회피할 수는 없었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백호는 다정한 사내였으니 만약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면 그녀를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가 상제에게 큰 벌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 일을 어찌했을까.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연화의 결정은 옳았다.

이곳에 온 지 불과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첫날 험한 꼴을 보았지만 그 이후 만희는


그리 거칠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다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주며 자주 들러 얼굴을 비추고 갔다. 아마도 자신의 치유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사내의 두통은 의원이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다정함은 어딘가 기묘한 데가 있어서 연화는 간혹 위화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래서


만희가 다가올 때마다 연화는 오히려 백호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육신이 괴로운 환경이 아니어서 그런지 백호에 대한 그리움이 더 자주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혼자 멍하니 앉아 있으면 더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어서 수를 손에 잡았고,
자기도 모르게 한 땀 한 땀 뜨는 바느질은 어느새 흰 호랑이의 얼굴을 그려갔다.

‘이렇듯 좋은 날이면 백호 님은 나를 누각으로 데려가 함께 차를 마셨지.’

신령계의 하늘은 인간계보다 높고 푸르다.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 듯한 누각 아래에서,


백호는 연화를 무릎 위에 안고 다과를 즐겼다.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서 눈앞에 흔들리는 흰 머리카락을 조심히 만질 수 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백호의 푸른 눈이 내려와 연화를 바라보았다. 마치 시선으로


쓰다듬듯,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강한 신이기에 무서웠지만 동시에 가장
아늑하고 포근한 품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언제나 바람 부는 누각에서 정을 나눴다. 밝고 맑은 하늘 아래 약간


서늘한 듯한 신령계의 공기가 맨 피부에 느껴지곤 했다.

선명하게 보이던 백호의 푸른 눈과 웃음 띤 입가. 느릿하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던 크고


뜨거운 손. 마디가 굵고 길고 강인한 손가락과 이마며 뺨에 온통 작은 입맞춤의 비를
선사하던 따뜻한 입술.

“백호 님.”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수틀을 품에 안고 깊이 숨을 쉬었다.

여전히 그가 몸을 쓰다듬던 감각이 마치 어제 일처럼 남아 있었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겨 입술을 맞대고, 사내의 몸이 마치 태산처럼 덮쳐 왔다. 등 뒤에 나무바닥이
지나치게 딱딱하다며 그 밑에 장포와 푹신한 방석을 끌어다 깔아주었다.

치마를 걷어 올려 부끄럽게 드러난 무릎과 허벅지 위를 천천히 빨아들이던 사내의 입 안은


뜨겁고 강렬했다. 흰 피부 위로 열꽃이 남을 때마다 연화의 호흡도 가빠졌다.

다리 안쪽 깊은 곳을 희롱하던 그의 입술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와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할 은밀한 곳에 혀를 밀어넣으면 눈앞이 희게 바랬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질 정도로,
모든 감각이 아래로 쏠려 아랫배와 그 아래가 타는 듯한 쾌락에 시달렸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연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억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사이에 벌써 다리


사이가 습하게 젖은 것이 느껴졌다. 이 밝은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인지. 하지만 한 번
떠오른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문 밖 정원 멀리로만 시녀들이 오가는 인기척이 간혹 들렸다.


만희가 준 거처는 나름 지체 높은 이들이 머무는 곳이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인적이
드물었다. 물론 방 바깥에는 시녀들이 대기를 하고 있지만…….

‘이러면 안 되는데.’

한 번 들쑤셔진 몸과 마음의 그리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백호의 얼굴이 떠오르는


마음과 망설임이 충돌해 그녀는 한동안 갈등했다.
하지만 곧 연화는 꾸물거리며 침상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얇디얇은 모시 이불 속에
앉아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치마 밑 다리 사이로 넣었다. 벌써 속곳 위로 습기가
느껴졌다. 백호와의 기억을 되새긴 것만으로도 애액이 돌아 다리 사이가 젖은 것이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모르는 여자 같아서 연화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눈앞에 백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릎 위에 놓은 수틀 위 흰 호랑이의 그림이 기억을 부추겼다. 수틀을
바라보던 연화는 곧 손을 움직였다.

잠시 얇은 천 위로 둔덕을 서툴게 문지르던 그녀는 감질 나는 감각에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은 지나치게 가늘었고 자신의 몸을 제대로 알지 못해 어설프게 움직였다. 한 겹 얇은
천이지만 방해가 되었다. 아래가 간지럽기만 해서 다리가 자꾸만 꼬였다. 허벅지를 꽉 붙여
비비면서 그녀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백호의 손길은 자연스럽게 떠올라 피부 위를 미끄러졌다. 자신의 손을 그의 것처럼


상상하면서 연화는 천천히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옷감 밑으로 내려가 축축한 피부에 얹힌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스스로 만지는 자신의 음부는 기묘한 감촉을 선사했다. 까슬한 음모가 젖어들어 손가락에
감겼고, 갈라진 틈은 좁았다.

백호는 언제나 그 굵고 긴 손가락으로도 조심스럽게 연화의 다리 사이를 매만져 주었다.


그것을 기억하며 습기 찬 살점을 어설프나마 가르고 손가락의 끝이 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애액이 약간 흘러 매끄러운 속을 더듬다가 도톰하게 올라온 돌기가 손가락 끝에 잡혔다.

손톱에 긁히면서 올라온 날카로운 감각에 연화가 조금 놀라서 흠칫했다. 처음으로 쾌감과
비슷한 것이 아주 조금이나마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백호가 만져 주던 것과 희미하게나마
닮은 감각이었다.
“백호 님…….”

저절로 그의 이름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잠깐 망설였지만 엄지 끝으로 돌기를 조금씩


건드리면서 그녀는 손가락을 조금 더 대담하게 넣어보았다.

저항감 때문에 내벽이 자꾸만 밀어냈지만 미끄러운 점막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하나가


들어갔다. 사내의 손가락이 들어왔던 생각을 하며 조금 더 밀어 넣어 봤지만 생각처럼
쾌락은 올라오지 않았다. 어설픈 이물감만 생길 뿐이었다.

조금 더 다리를 벌리고 앉아 그녀는 이불 속에 손을 더 깊이 넣었다. 백호의 손길을


생각하면서 다른 손을 들어 슬그머니 저고리 밑에 넣어 가슴을 더듬었다.

동그란 밑가슴을 조심히 더듬다가 용기를 내서 그 위의 뾰족이 솟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둥글게 굴렸다. 살짝 느껴지는 쾌감에 손톱을 세워 긁었다. 백호의 뜨거운 손과 입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밑에 내려간 손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돌기를 긁고 갈라진 살점 틈으로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넣었다. 내부는 그것만으로도 좁고 빠듯해서 백호의 그 큰 물건을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몸의 감각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뒤로 기댔다. 감은 눈 안으로, 신령계의


궁 안에서 그녀를 안아 오던 백호의 얼굴이 온통 떠올랐다.

바람에 날리던 비단과 같던 흰 머리카락, 난폭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부드럽던 푸르고


시린 눈동자. 처음 만났던 날, 그 순간부터 무섭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남자.

“아……. 백호 님…….”
연화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엄지손가락 밑에 있는 돌기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 애액이
울컥 쏟아져 흘러내렸고 작은 쾌락이 이곳저곳에서 솟아올라 온 몸의 피부 위에
불꽃놀이처럼 터졌다. 아랫배가 뜨거웠다.

서툰 손길에도 절정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백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과 손과 입술의 기억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자신의 피부 위에 있는 것은 스스로의
손이었지만, 기억 속에서는 백호가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백호에게 안길 때처럼 정신없이 거대한 쾌락은 아니었으나 연화는 이것만으로도 지독히


만족했다. 마치 그의 향기를 맡고 그에게 안겼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그 착각 속에 잠시나마 잠겨 있고 싶었다.

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자 울컥 터진 애액으로 인해 연화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흠뻑 젖어


있었다. 밑의 옷까지도 젖었을 정도였다.

절정의 여운으로 몸이 나른해서 그녀는 잠시 등을 기댄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밖은


여전히 고요했고 더운 바람이 간간이 불어왔다. 눈부신 초록빛이 반사되어 시야를
간지럽혔다.

“보고 싶어요, 백호 님.”

조용히 속삭인 말끝에는 희미하게 울먹임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떨어져 나온 지 열흘인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애틋함은 더 커져만 갔다.
사랑하는 남자가 차마 누구에게도 그리움을 말하지 못할 큰 존재이기 때문에 슬픔은 가슴
깊이 숨길 수밖에 없었다. 저 너머 신령계로 넘어가 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대체 그 누가
진지하게 들어줄 것인가.

그러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큰 존재라서, 연화와 같이 작은


인간의 존재 따위는 금세 잊어버려 줄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떠나왔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덜어졌다.

고요하게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렸다. 땀에 젖은 피부가 조금씩 식어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텅 빈 방 안에, 갑작스럽게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날이 꽤 덥구나.”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라서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만희였다. 느릿하게 들어온 남자는 그녀의 침상 곁에 섰다.

평소 같으면 빨리 일어나 그의 앞에 무릎 꿇었을 연화는 순간 당황했다. 지금 이불 속


그녀의 차림은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었다. 손을 재빨리 이불 속에 감추면서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63 화

“문이 조금 열려 있더군.”
왕의 말에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이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수치스러운 짓을
하면서 제대로 문단속도 하지 않고. 혹시라도 그가 보지 않았을까? 작은 소리였지만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서 연화는 무릎이 떨릴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는 그녀를 보고 만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있어. 몸이 안 좋은 거냐? 쓸모없이, 이런 날 이불 속에나 누워 있고.”

“아, 예…….”

예상 외로 앉아 있을 것을 허락하는 왕의 말에 연화는 엉거주춤하게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직 절정의 여운이 남아 있어 허벅지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무엇에 대해 죄송한지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만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내는 별다른 표정 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연화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불을 꼭 쥐었다.


문을 열어놓았고, 이불 밑의 일이라 그가 갑자기 이불을 들춰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다.
아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만희는 무표정해 보였다. 혹시라도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연화는
좌불안석이었다. 그의 안색은 별 변함이 없어보였으나 적안이 어두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댔다. 연화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얽혀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한참 만에 나온 왕의 말에 연화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

만희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한동안 연화를 훑어보았다.


특별히 뭔가 눈치챈 것 같지는 않은데, 뭘 본 것 같지는 않은데……. 불안한 채로 연화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게 날이 덥군.”

“예……. 갈수록 더워집니다.”

과연 만희의 얼굴이 붉었다. 연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분과 불안까지 더해 땀이 목덜미를


살짝 적시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뒷목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떼어주려 무심코 손을 뻗다가,
연화가 흠칫하며 목을 움츠리자 만희는 자신도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그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 손을 들고 있다가 얼른 다시 팔짱을 꼈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쉬어라. 날도 더운데 앓기나 하다니 치유사 주제에 몸도 약해서 어디에 쓰겠나.”

“예……. 죄송합니다.”

더 이상 방에 머물지 않고 나가는 왕의 모습에 연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을 보니 부끄러운 장면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과 몸을 씻기 위해 얼른 욕탕으로 향했다.

밖으로 걸음을 옮긴 만희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내관이 왕의 눈치를 보았다.

“전하……?”

“정말,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어.”

내관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왕은 뒷짐을 지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연화의 방으로 뛰어들어 가 그녀를 침상 위에 눕히고 범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깜찍하게도 혼자 방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던 모습과 그 가냘픈 음성을


들어버렸으니.

옷을 전부 찢어버리고 그 가느다란 허벅지를 벌려 안고 싶었다. 배꽃처럼 희고 가냘픈 몸을


쥐고 안으면 듣기 좋게 울고 높이 신음하겠지.

이미 첫날 그녀에게 은연을 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때도


이미 조금만 더 흥이 솟았다면 연화에게까지 손을 댔으리라.

만희는 자신의 양물이 아까부터 이미 잔뜩 서서 바지가 갑갑할 정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열린 문틈으로 연화가 손을 움직이는 광경을 봤을 때부터.

희고 부드러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보기 좋았다. 벌어져 언뜻 혀가 보이던 입술도,


쾌락이 치밀어 눈을 감고 조금씩 흔들리던 고개까지도. 가슴까지도 착실히 애무하고
있었지.

만희가 머리 저 끝까지 달아오르는 게 당연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은…….

“‘백호 님’이라.”

그의 적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내가 있었던 것인가.


깊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만희의 본성대로라면 다른 정인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마음에 든
여인을 강제로라도 취했을 것이다. 외로운 여인을 보고 그 몸을 취하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그래서 만희는 오히려 알 수 있었다.

그는 연화에게 함부로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부르던 이름이 다른 사내의


이름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럴 수가 없었다. 만희의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녀에게
강제로 손을 댄다는 생각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태껏 강제로 범한 여인의 숫자를 나도 기억 못 하거늘. 심지어 내 어미조차 겁간당해


나를 낳았는데.’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상황에 그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웃었다. 대체 이것이 무슨 마음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리가 없어. 뭔가 이상해.’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만희의 표정에 곁에 서 있던


내관이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

“꽤 신경 쓰이는 존재감이 하나 이리저리 오간다 했더니 너였느냐.”


성현의 집 안에 있던 청수희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제사장의 저택에는 하인들도 함부로 다니지 못하도록 명을 내려놓았다. 물론 청수희에게


정신을 일부 점령당한 성현이 내린 명이었다. 그래서 제사장의 저택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연못으로 흘러드는 작은 폭포의 물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샘의 정령인 그녀조차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청수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느낄 수 없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청수희가 텅 빈
집 안에 서있는 사내를 보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인간계 절반의 지배자이신 청룡 님.”

사내의 머리카락은 청수희보다 훨씬 짙은 청색이었다. 늘씬한 체격의 그는 긴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리고 황금색의 커다란 잠화(簪花)를 꽂고 있었다. 옷 역시 짙은 청색 위에
금실로 정교히 수를 놓아 지독히 화려했다. 사내, 청룡은 집 안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청수희에게 눈을 돌렸다.

“여전히 제멋대로구나, 청수희.”

“제가 누굴 닮았겠습니까. 세계를 자유로이 다니며 모든 사방신의 백성이지만 제게 가장


가까운 분은 청룡 님이신 것을요.”

청수희가 미소 지었다. 청룡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흘긋 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그의


긴 옷자락이 의자 밑으로 흘러내려 바닥에 끌렸다.
청룡이 다스리는 본래의 영토가 바다를 포함하며 청수희가 물에서 비롯되었으니 둘은
가까운 친척관계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너라도 함부로 내 영토에 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

“함부로 휘젓다니요, 저는 그저 마음에 드는 거처를 발견해 신세를 지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넌 사방신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어.”

청룡이 코웃음을 쳤다. 청수희는 긴장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대범하며 사소한 일은
호쾌하게 넘어가 주는 백호와는 달리 청룡은 까다로운 존재였다.

“설마 그럴리가요. 한낱 정령인 제가 어찌.”

인간을 다스리는 그는 이기적인 신이다. 그에게 도움되는 일이 아니라면 자신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일도 극도로 싫어했다. 청룡의 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청수희를 훑어보았다.
금안 속 검은 홍채가 선명했다. 청수희는 마르는 입 안을 숨겼다.

“내가 가호하는 수국까지 와서 네가 이 저택에 머무는 이유가 뭘까, 응?”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희고 날카로운 턱선 위로 손을 올리면서 청룡은 금안을


깜박였다. 파충류 특유의 냉기 도는 눈매가 섬뜩했다. 청수희는 감히 대답하려 하지 않고
침묵을 택했다.

“제사장의 정신까지 침범하면서 말이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발걸음이었다. 청수희 역시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퇴청하자마자 청수희의 명에 따라 집 안 한구석의 침실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제사장
성현이었다. 그가 느릿하게 걸어와서 청룡의 옆에 무릎 꿇고 엎드렸다. 엎드린 성현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었다.

청수희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래, 청룡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걸


좋아했다. 청수희의 술수를 자신의 힘으로 덮어 강제로 그 조종을 빼앗아간 것이다.

“아무리 기울고 있다 한들 내 영토이며 내 가호를 받는 나라다. 대귀족인 이자 역시……


왕실의 피가 조금은 섞여 있지.”

수국의 왕실은 청룡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 최근 총애가 사그라들고는 있으나 한때 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냈던 나라이기도 했다. 한 번 정을 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청룡의 성격상 현재까지도 나라가 유지될 만큼 가호를 주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조금의 재미를 찾아다니고 있을 뿐이라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청룡의 웃음은 서늘했다.

“하하, 재미라.”

그는 뭔가 계산하는 듯한 눈초리로 청수희를 쏘아보았다. 그의 머릿속을 짐작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신의 의중은 겹겹이 숨겨져 있어 샘의 정령으로서도 알기 어려웠다.
“백호가 인간계를 넘나들며 난장을 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멍청하고 폭력적인 녀석이니
한순간의 충동을 막기야 힘들었겠지. 거기에 업혀서 네가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것도
그렇고.”

청수희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이 예민한 자가 사실 모를 리야 없었다.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백호가 연화를 처음 데려갔을 때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일을 약점으로 잡고 백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할지도.

“이미 아시겠지만 그리 험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간들끼리의 작은 충돌일


뿐이지요.”

“작은 충돌?”

청룡이 킬킬 웃었다.

“헛소리 마라. 이미 저승의 명부에 올라 있던, 죽을 운명인 인간이 수십 명이나 사라져


버려서 현무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그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일어날 때에는 이미 일이
커졌다는 뜻이지. 만약 그 목숨들을 찾지 못하면 아마도 염라대왕까지 나서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

“…….”

청수희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백호에게 말을 전했을 뿐 자세히 어찌 되었는지


결과까지는 알지 못했다. 백호 님이 늦지 않게 움직였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저승의 눈을 피해 죽을 인간들을 대피시키는 짓을 했는지 모르겠군. 아,


네게 하는 말은 아니다. 백호를 말하는 게지. 멍청한 신령계의 원로들과 함께 말이다.”
청룡은 마치 모든 광경을 본 듯이 말했다. 아마도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수희는 교묘히 웃었다.

“저승의 명부는 양이 중요할 뿐 누가 죽어야 하는지는 둘째 문제 아니옵니까.”

64 화

“뭐라?”

“만약 명부에 오른 자들이 죽지 못한다면 일정 기간 후 그 명부는 무명(無名)으로 바뀌어


기재되어 숫자만이 지정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녀의 말에 청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청수희가 거기까지 알 줄이야. 아무리 저승에도


큰 강이 흘러 영토를 가로지르고 있다지만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못마땅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의도가 수상하군. 그 말은, 그자들을 대신할 목숨을 따로 구하겠다는 뜻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단지 그리 큰 소란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청룡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사과의 표시로 청수희가 나붓이 절을 했다. 제가 구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 다른 이가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눈을 휘며 웃었다. 굳이 신의 성격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불쾌해진 청룡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 지금은 넘어가지.”

“…….”

“그러나 더 이상 깊게 개입하지 마라. 네가 움직이면 내가 알 수 있으니, 또 한 번 헛짓을


하면 내가 본체로 직접 찾아오겠다.”

신이 직접 인간계에 현신하겠다는 뜻이었다. 신령계와 달리 인간계의 생물들은 훨씬


연약했고 인간들끼리 얽힌 인과관계의 실은 훨씬 복잡했다. 게다가 청룡의 본체는
용이었다. 사방신이 직접 인간계에 육신을 드러내고 현신한다면 어떤 영향이 생길지
모른다.

그것은 오히려 청룡에게 큰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청수희를 보고 청룡이 피식 웃었다.

“내가 현현하여 생기는 피해는 모두 원인제공자가 책임지게 될 것이다. 원인이 없었다면 왜


내가 굳이 본체까지 끌고 인간계에 오겠느냐? 충돌이 없더라도 피해가 있다면 벌을
받겠지.”

“…….”
“네가 그랬지, 수십 명의 목숨은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가 된다고. 내가 인간들의
목숨을 좀 앗아가더라도 그것으로 갚음이 되겠구나.”

교활한 자. 청수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이 자신이 피해를 보며 백호와 충돌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규칙이 어그러진 죄를 백호에게 묻겠다는 뜻이었다.

신이 영토에 직접 개입하면 인간들의 운명이 어그러진다. 그래서 죽는 자들은 운명에


어긋나게 죽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저승의 입장에서는 명부에 적힌 숫자 안이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피해는 수국 자체에 미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청룡은 수국을 언제쯤 버릴 것인가 시기를 재고 있던 참이었다. 그에게는 기실


영토에 머무는 백성들의 목숨 따위는 그리 소중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세력이
침범당하는 것을 참지 못할 뿐이었다.

저승과의 마찰도 없이 백호를 벌할 수 있다니 청룡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녀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청룡은 만족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허튼 짓만 안 하면 된다. 순리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거라.”

“명 받들겠나이다.”

“그래, 샘과 물의 정령답게 순리를 놔둬.”

그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발치에서부터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검고 둥근 파도가


몰아치는 수면이었다. 고요한 물을 타고 다니는 청수희는 조금 질려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파도가 청룡의 다리를 감싸고 올라왔다. 바닷가로부터 먼 내륙에서도 만들어낸 작은
바다 속에 서서 청룡이 무심하게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금안 속으로 자신의 용궁이
보였다.

“지켜보고 있겠다, 샘의 정령.”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청룡의 모습이 파도 속으로 완전히 삼켜졌다. 그의 신형이


사라진 직후 파도치던 작은 바다 역시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그 자리에 성현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청수희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진 나무바닥을


노려보았다.

‘앞으로는 신중히 움직여야겠어.’

그녀는 분명 청룡과 친척이나 다름없었지만 결코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신령계에 더


자주 머무는 이유도 좀 더 자유분방한 백호의 기질을 선호해서였다.

‘사영 쪽도 조심시켜야겠군.’

청룡이 사영의 일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신령계에서 둔갑하여 인간계로


들어왔으니 이미 경계 전부터 인간의 기운이었을 것이다. 예민한 사방신이지만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까.

***
백호가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이 인간들이
산주(山主)와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제사가 있는 날은 세계의 규칙이 사방신의
걸음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가 경계를 넘는다 해도 영향이 가지 않았다.

마치 연화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말이지.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연화가 떠나버린 이


마당에 굳이 인간계에 발걸음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흔치 않은 기회에 경계를 넘어 그녀와
같은 하늘 아래라도 있고 싶은 마음이 엇갈렸다.

‘차라리 천리안으로 위치까지는 알지 못해서 다행이다. 알았다면 찾아가고 싶어 몸이


달았을 테니.’

안다 한들, 간다 한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텐데 참으로 쓸모없는 욕망이다. 인간인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정인을 찾아갔으니 백호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 물러서는 것이
마땅했다.

아무리 신이라 한들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백호 스스로도 연화의 생각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슬픔으로
돌아올지라도.

제(祭)를 받기 위한 의복을 차려입느라 시녀들이 다가와 복장을 정돈해 주었다. 인간들이


올리는 공물과 제례는 때마다 그 의미가 달랐고 역할도 달랐다. 이번에는 그저 산주인
백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제사였다.

“수국 수도 뒤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 어귀입니다. 가축들이 여름을 잘 나기를 바라며


바치는 공물이니 편안히 다녀오시면 되지만 피로하시다면 제가 대신 다녀와도.”

“피로라니, 날 뭘로 보는 게냐.”
묘우의 말에 백호가 피식 웃었다. 사방신에게 피로라니 그보다 안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물론 원로로서 걱정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는 여전히 인간계에 있을 연화를
백호가 찾아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 주려다가 백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스스로도 그런


욕망을 품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푸른 비단의 허리띠를 맨 뒤 그는 몸을 돌려 인간계로 이동했다. 흰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며 공간과 공간 사이의 바람결에 흩날렸다. 인간들이 그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다면 바람과 구름을 두른 채 갑작스럽게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리라.

한순간 경계를 열어 공물이 바쳐진 곳에 도착한 백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간계는


밤이라서 하늘이 어두웠다.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딱 이런 밤이었지.’

공물을 받아야 발정기를 잠재울 수 있던 밤, 붉은 달이 떠 그의 심신이 안정되지 않고


흔들리던 흔치 않은 밤. 하필이면 운이 나빴던 연화가, 어머니의 고운 손수건을 되찾기
위해 밤을 틈타 숲을 찾았던 밤.

‘그날이 아니었다면…… 아예 연화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가슴이 아팠으나 그날 그녀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거칠 것 없었던 사방신은


인간의 여인으로 인해 감정을 알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회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연화를 만난 건 사고와도 같이 갑작스레 찾아온 운명이었으니.
‘우리들 역시 어차피 상제의 피조물.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지.’

백호는 아무도 없는 숲 속을 걸어 공물이 놓인 앞에 섰다. 갖은 음식과 과실, 곱게 수놓인


비단이 올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 인간들이 점점 더 신을 모시는 일에 소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정성을 들인 상이었다. 여름의 더운 날씨를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이 잘 나기를 소원하며 바친 공물이었다.

현재 수국의 왕은 사방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기꺼워하지 않아 수국의 수호신인 청룡에게


올리는 제례마저 그 규모가 줄었다고 했다. 게다가 계속된 왕의 실정(失政)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인간들은 생계를 잇기마저 힘들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이 공물도 마련하느라 제법 힘이 들었을 것이 뻔했다.

“고마운 일이군. 그래도 이렇게나 정성을 들이다니.”

신은 제상 앞에서 인간들의 염원과 정성을 확인하고 흡수한다.

사방신의 영토는 서로를 침범할 수 없으나 자연물을 타고 흐르는 각자의 힘은 경계


밖에서도 유지된다. 신령계 안에 존재하는 바다가 청룡의 관할 안에 있듯 인간계에 있는
금수는 백호의 관할이다.

‘정성이 가상하니 특별히 수국 수도의 가축들을 돌아보고 갈까.’


어차피 그가 인간계로 나올 수 있는 날의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수국 수도의 짐승들을
한 바퀴쯤 돌아본다고 해도 여유롭다. 작은 제례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염원을 흡수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속도 복잡했으니 그저 한 바퀴 바람만 쐬고 갈 생각이었다. 간만에 정성스러운


공물이었으니 그 보답으로 한 번씩 손길을 내려줄 겸.

그의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구름이 백호의 모습을 감추고 바람이 그의 발을 옮겼다.


아마도 인간은 그저 바람 한줄기가 지날 뿐이라고 느낄 것이다.

허공에 몸을 맡기고, 신은 낯선 인간계의 냄새를 맡으며 수국의 수도로 향했다.

백호는 수도로 들어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이 본래도 이러했는가. 기실 실제 이곳을


들른 것은 이미 수십 년도 더 된 일이라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길거리에 기력 없어 보이는 인간들이 많았다. 번화가 쪽에야 많은 인간들이 나와 장을


벌리고 있었지만 그조차 지난번 방문과 비교하면 생기가 없었다. 번화가가 아닌 뒷골목은
한층 심각했다. 힘없는 얼굴로 나와 앉아 있는 인간의 아이들은 비쩍 말라서 뼈가 보였다.

본래 빈민가가 있기는 했지만 그 구역이 훨씬 넓어져, 번화가를 제외한 구역은 전부


극빈층이 사는 듯 했다. 길바닥에 오물이 뒹굴었고 가난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을 하는 사내들이 보였다. 병자처럼 마른 남자가 그를 말렸지만 곧 주먹에
맞아 나뒹굴었다.

‘부패의 냄새가 난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인데도 썩은내가 진동했다. 백호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 때의 냄새다. 나라가 기울고 이제 새로운 해가 뜨기 직전, 온통


썩어버린 진흙탕 속에서 나는 악취.

‘곧 큰일이 일어나겠군. 청룡이 요즘 이상하게 조용하다 했더니 이제 슬슬 가호의 손을


놓고 있는가.’

길에 힘없이 엎드려 있는 개 한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축복을 내리면서 백호는 싸우고


있는 인간들을 돌아보았다. 백호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인간들은 술을 마시다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 왕은 미친놈이라니까!”

“그건 맞아. 미친놈이지. 그러나 왕이니 어쩌겠는가.”

나이가 많은 영감 쪽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술을 마셨다. 코가 시뻘건 것이 어지간히


고주망태인 모양이었다.

“왕은 하늘이 낸 것이야,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어쩔 수가 없는 존재라.”

65 화
노인이 푸념했다. 그는 모든 희망을 놓은 듯 허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두 손의 손톱 열 개는 흉할 정도로 닳아 빠져 있었다. 평생 동안 죽도록
고된 노동을 한 자의 손이었다. 일생을 소처럼 일했으나 갈아입을 옷도 없이 더럽고 구멍
난 옷을 입은 빈민층.

맞은편에 앉은 젊은 사내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영감님,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하늘이 내다니, 누구는 삼신할미한테 점지받지 않고 이


세상에 나온 자가 있던가? 대체 왕이라고 뭐가 달라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이 상황에!”

사내는 입을 벌리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싸구려 술의 냄새가 고약했다.

“게다가 지금 왕은 진짜도 아니잖아? 사촌형을 제 칼로 죽이고 왕 위에 오른 자라고.


더러운 새끼!”

“말 조심하게, 조심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니.”

“들으라지!”

젊은 사내가 다시 술을 벌컥 들이켰다. 아무런 안주도 없이 그저 독하디 독한 술만 그대로


마시는 중이었다. 술기운이 돌아서 벌건 얼굴로 그가 식탁을 두드렸다.

“난 이대로 여기서 굶어죽지는 않을 거요. 절대로. 나는 내 힘껏 싸워볼 것이니.”


“그러다 개죽음당해. 대체 오합지졸인 반란군이 얼마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그저 이곳에서 안전히 버티는 쪽이…….”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요, 영감님.”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골목에 나와 있는 것은 개 한 마리를


제외하면 그들뿐이라 쓸데없는 짓이었으나 말의 내용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백호는 호기심에 귀를 기울였다.

“아시오, 영감님? 성벽 밖에는 이미 반란군이 득세했소. 군사들이 있어 수도에 들어오진


못하고 있지만 산 속에는 수많은 녹적(綠賊)들이 푸른 깃발을 올리고 혁명을 요구하고
있지.”

“그런 소리 말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러나!”

기겁하는 노인을 보면서 사내가 낄낄 웃었다.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들으라지! 시대의 흐름인데 제까짓 것들이 어쩌겠소. 나 하나 죽인다고


일이 달라지는가!”

노인은 고개를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텅 빈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그는 좌불안석인 채 싸구려 술을 마셨다.

그들의 탁자 바로 곁에 서서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듣던 백호는 몸을 돌렸다. 인간계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이런 흐름에는 가끔 재미를 느꼈다.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신령계에는 도통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백성들의 삶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평등한 법칙을 따르는 백호의 세계와 너무도
다른 곳이 인간계였다.

백호에게 축복을 받은 개가 인간들의 탁자 곁으로 다가와 꼬리를 흔들었다. 실상 개는


백호에게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모르는 인간들이 손을 저어서
그를 쫓아냈다. 멀리로 쫓겨가는 개를 보면서 백호는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나 같은 인간들의 삶을 도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왕이라는 자가 궁금했다. 시간은


많이 남았고, 왕궁에 역시 수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라 좋은 일이군,
하면서 백호는 바람을 타고 몸을 띄웠다.

수도의 하늘을 날면서 백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번화가와 빈민가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 겨우 1 할도 될까 말까 한 멀쩡한 동네와 나머지 빈민가. 그는 다른 것보다 연화가
걱정되었다.

‘아마도 여전히 수도 내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다행히도 그녀의 정인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라 배를 곯거나 힘든 일을 겪지는 않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말 아까 그들의 말대로 반란군이 득세하고 나라가 뒤집어진다면, 현재
권세가 있는 자라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일지도
몰랐다. 만약 세상이 뒤집힌다면 가장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 핑계로 연화를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에


이끌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연화의 의지와 운명에 간섭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그녀가 스스로 원해 떠났다면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흐르든 그것은 연화에게 맡겨야 했다.

“그만두자.”

다른 흥밋거리에나 신경을 쏟자. 백호는 눈앞에 다가온 수국의 왕궁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화려한 궁의 건물은 그가 잘 아는 누군가의 취향과 꼭 닮아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수십 년 전에도 보긴 했으나 다시 보니
새삼스러웠다. 짙푸른 색의 기와에 황금색의 장식이 화려하게 새겨진 건물들.

“청룡 놈은 제 취향을 여기에도 쏟아부었어.”

호사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청룡의 나라답다.

그러고 보니 인간계를 다스리는 두 사방신은 모두 화려한 장식을 선호했다. 청룡과 주작 둘


다 어디에고 장식을 못 달아 안달이었다. 색조가 정반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지만. 둘
모두 남들의 취향을 몹시 무시한다는 점도 닮아 있었다.

백호의 흰 옷자락이 날렸다. 그는 허공에서 왕궁 안을 훑어보았다. 마굿간의 말들은 꽤


관리가 잘되어 살이 쪄 윤기가 흘렀다. 굳이 백호의 축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말들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을 잘 보살피니 왕은 들은 것처럼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왕궁 안의 짐승들은 대부분 건강했다. 먹이를 충분히 먹었고 관리를 잘 받았다.
인간계임에도 인간들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었다. 그는 재미있어서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왕궁 안의 금수들은 내가 관계하지 않아도 되겠군.”

적어도 수국의 왕은 자신이 책임지는 짐승들은 홀대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고통받는 것은 백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청룡의 백성들이고


그는 청룡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이 짐승들에게 자비롭다는 점에 점수를 높게 주며 그는
건물 안 어딘가에 있을 쥐들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잘 가꿔진 정원의 바닥에 백호의 발이 소리 없이 안착했다.

그는 정원의 나무를 쓰다듬으며 느리게 걸었다. 가장 잘 꾸며진 정원으로 들어가 꽃을


구경했다. 아주 아기자기하고 정성스레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로 자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더 선호하지만 이것 역시 색다른 미감이 있다.

그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건물 가까이에 이르렀다. 전각의 창문이


활짝 열린 방이 있어, 그는 이곳에 어떤 인간이 사는지 들여다보았다.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

백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연화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연화의 얼굴은 희고 보드라웠다. 그녀는 검은 눈을 깜박이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시선은 백호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를 통과해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

남자는 멀거니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바로 창문 앞,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검고 둥글고 순한 눈동자가 바로 그곳에서 반짝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는 모든 생각을 잃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연화를 보게 될 줄이야.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가 흠칫했다. 연화는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고 백호의 심장이 저려 왔다.

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

“날이 좋구나.”
하늘이 높고 푸르다. 환한 햇빛 아래 신록이 우거졌다. 만희는 궁의 안이라면 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도 된다 말했지만 연화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 봤자 새장 안의
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왕께 혹시라도 마을에 대해서 여쭈어볼까 연화는 고민했다. 비록 처음 끌려온 날은 험한


꼴을 봤지만 만희는 그녀에게만은 그리 거칠지 않았다. 간혹 스치는 얼굴에서는 나름대로
그녀를 배려하는 듯한 표정도 보았다. 나라 안 유일한 치유사라서일 것이다.

왕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마을에 대해서 여쭈면 지금 어떤 상황인지, 혹은 아주 운이 좋으면


어머니의 소식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그저 끌려온 천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말을 꺼내기 저어되었다.


더구나 연화가 밥을 먹지 않으려던 때 시녀를 해하려 했던 만희의 행동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지금 당장이야 괜찮지만 역시 두려운 분이라.’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스스로를 위로하던 장면을 들킬 뻔한 적까지 있어 아직


그에게 말을 걸기조차 무서웠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아예 내려놓고 창밖으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햇빛이


쨍해서 자꾸만 백호 생각이 났다. 사실 신령계의 날은 이렇게까지 무덥지는 않았다. 다소
춥고 더운 정도야 있었으나 언제나 기분 좋은 정도를 유지했다.

“덥네, 바람도 불지 않고.”


여름이긴 여름이다. 날씨를 느낄 때마다 백호와 함께 하던 신령계가 자꾸 맴돌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어도 전혀 덥지 않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던 곳. 백호는 금수의 왕인
동시에 그의 힘은 바람을 닮아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허공을 날 때도 백호의 발을
옮겨주는 것은 부드러운 공기의 움직임이었다.

더위에 연화의 뺨에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붙었다. 시녀들이 차가운 물과 귀한 얼음을 넣은


화채를 가져다주었으나 그 정도로는 이제 더 이상 더위를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계절이었다.

“……?”

순간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뺨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와 귀 뒤로도 적당히
기분 좋을 만한 상쾌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눈앞 정원의 나무들은 잎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쥐죽은 듯 고요한


여름의 낮,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밑에서 가을처럼 서늘한 바람을 느끼다니.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화의 바로 옆, 창문의 위쪽에서 내려온 가림막과 비단술이 조금씩 날렸다. 자신의


머리카락 역시 뒤로 흘러내렸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기억 속 신령계에서 느끼던 공기의 흐름과 똑같아서 그녀는 그리움에


눈가가 조금 젖었다. 조금 더 시원함을 잘 느껴보고 싶어서 연화는 눈을 감았다. 땀이
나서 촉촉한 피부 위로 흐르는 서늘한 바람이 마치 백호와의 기억 같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백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더워 보이는 연화에게 바람을 흘려보내 준다는 핑계로 손을 뻗어 뺨 위를 살며시 만졌지만,
실체화하지 않은 그를 연화는 당연히 알아보지 못했다. 나타나지 않은 신의 존재를 인간인
그녀가 알아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조금 서글퍼져서 백호는 눈을 감은 연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백호가


불러낸 공기로 발간 얼굴을 식히고 있는 그의 반려.

“여전히 곱구나.”

그의 목소리에 서글픔이 섞여들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자신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연화가 슬펐다. 동시에 여전히 아름답고 고와서 기뻤다. 이제 반려라고 부를 수
없는, 그리운 여인.

66 화

가슴 속에서 그리움과 애틋함이 섞여 소용돌이쳤다.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가,


연화가 떠난 내내 가슴의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백호는 알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심장 저릿한 아픔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확신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연화의 뺨에 실체 없는 손을 얹으며 백호가 속삭였다. 설사 연화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너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구나…….”

스스로도 믿기 힘들어서 백호는 눈을 깜박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방신은 영토의


주민들과 다르다. 사적인 감정은 태생적으로 크게 느끼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래야 오랜
시간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규칙에 온전히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방신이 인간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다니.

백호는 우두커니 서서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세상의 규칙 앞에, 영토의 주민들이나


다름없는 작고 힘없는 미물이 된 기분이었다. 의도치 않았던 감정에 휩쓸려 풍랑을 만난
조난자. 이 연약하고 가느다란 인간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신.

아무리 속삭여도 이제 그녀에게 다정한 말을 전할 수 없게 된 남자.

그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전하.”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연화가 바로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가 절을 했다. 백호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큰 키에 체격이 좋은, 흑발 적안의 사내였다.
그는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이었으나 연화가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냉기가 녹아
사라졌다.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부드러운 감정이 뒤에 흐르는
얼굴이다.

백호의 눈에 사내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푸른 장막이 흐리게 보였다. 수국의 왕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청룡의 가호였다.

‘전하라……. 수국의 왕이 정인이었던 것인가. 놀라운 일이군.’

어느 정도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왕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 중앙의 관리가 연화의 마을을 불태우라 명했다고 들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함이 치솟았다.

“그놈의 수틀 때문에 더 덥겠군. 옷감이 죄다 네 다리를 덮지 않느냐.”

왕의 타박에 연화는 얼른 수틀을 뒤집어 탁자 밑에 놓아 숨겼다. 신령계에서도 언제나


바느질을 하며 소일하던 연화를 기억하는 백호는 어딘가 그리워져서 그녀가 숨긴
바느질거리를 보았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궁 앞에 핀 작은 야생화들을 그려 그것을 자수로 놓고는 했는데


그림 솜씨도 바느질 솜씨도 좋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했다.

‘이곳에서는 정인의 얼굴을 그려 수를 놓고 있으려나.’

어딘가 비참해져서 백호는 혼자 생각했다.


수국의 왕은 뒷짐을 지고 들어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고 왕의 눈은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침묵은 진하고 부드러웠다.

‘부러운 사내로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 대신 저 사내를 택한 것이 연화의


의지라면, 백호는 기꺼이 그것을 존중할 것이다. 다만 가슴이 아프고 저릴 뿐이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발길을 돌리려던 그는 잠깐 멈칫했다. 날카로운 사내의


눈매, 그리고 그 뒤로 어릿한 그림자들을 발견한 탓이었다. 백호는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원혼.’

저 멀리 흐릿한 그림자들이 서성거린다. 단번에 백호는 그들이 원한을 지닌 혼령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원한은 다름 아닌 저 사내에게 가진 것이리라.

본래 한 국가의 왕쯤 되면 원한을 사지 않을 수는 없다. 거리가 웬만큼 있는 것을 보니


그저 그 정도의 원혼이겠지. 백호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발 물러섰다.

연화의 정인이기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는 사방신이었고, 세계를


이루는 각 구성원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미 연화에게 가진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규칙 위반이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연화가 머무는 거처를 눈에 새기면서, 백호는 작은
바람들을 불러 모았다. 적어도 여름을 나는 동안만은 이곳의 공기가 정체되어 멈추는 일이
없도록.

‘청룡 놈이 이 정도로도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

그가 기이하게 여긴다고 해도 연화를 보고 바로 알 터이다. 아니, 이미 알고서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바다와 인간계의 절반을 다스리는 사방신은 눈치가 빠르고
고약한 성격이었으니.

‘웃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수백 년 동안 놀림거리가 된다 한들 후회 따위를 할 일도 아니었다. 인간의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도 선택받지 못한 신, 인간의 사내에게 패배해 떠나는 여인을 잡지 못한 신.
그러나 백호는 그 모든 호칭을 받는 것도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모여든 작은 바람들이 연화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드는 것을 보며 백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떠나야 했다. 더 이상 머물면 욕심은 더욱 커지리라. 그는 신형을
띄워 하늘로 날아갔다.

연화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더위 속에서도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시녀들이 애써 가져다준 얼음과 화채 따위보다 훨씬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 만희 역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밖의 나뭇잎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만희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재미있구나. 실내에만 부는 바람도 있던가.”

“……글쎄요.”

그리운 기분이 들어서 연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호와 함께 허공을 노닐던 신령계의
나날들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았다.

***

은연은 전각에 새로 들어온 신입 시녀의 방에 들어섰다.

아직 다친 상처가 쑤시며 아팠다. 겉으로는 상처가 대충 봉합이 되었으나 속까지 치료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쉬고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시녀의 운명이었다.

그녀는 새로 온 시녀 사영의 일과를 점검하고 주의점을 알려줄 참이었다.

“제사장 성현님의 소개로 들어왔다지?”

“예.”

사영은 침착한 태도였다. 창백한 얼굴이지만 강단은 있어 보였다.

“전각은 넓어. 높은 분들이 오시는 곳이니 바닥의 깔개까지도 보름마다 바꿔야 한다.
지난번에는 가장 큰 방의 깔개를 바꾸지 않았다지?”
“죄송합니다. 미처 알지 못해서…….”

“앞으로는 모든 깔개를 신경 써라. 그리고 특히…….”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치유사인 연화 님의 방 깔개는 특별히 나흘에 한 번씩 바꿔라.”

“나흘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하께서 유독 자주 행차하시는 공간이니.”

“예.”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전하께서 어떠한 행동을 하시는 걸 목격하더라도 절대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행동……이라면.”

“전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 누구의 방에 자주 가신다, 어느 시녀와 놀이를


나가셨다 이런 것들.”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여태껏 말조심을 못 해서 다친 시녀들이 참 많았다. 새는 말은
반드시 시녀들이 흘린 것이 아닌데도 항상 첫 번째 희생자는 그녀들이었다. 그래서 은연은
밑으로 들어오는 시녀들에게 항상 입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다치는
사람을 줄일 수가 있었다.

“함부로 전하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말고.”

“예.”

“예를 들어, 치유사인 연화 님의 방에 자주 가시지만 그건 두통의 치료를 위한 것이다.


그걸 이상한 눈으로 보고 동기들과 말을 퍼뜨리면 곤란해질 게야.”

사영의 의아한 눈을 보고 은연은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시녀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지, 전하께서 치유사와 자주 밤을


보내신다고. 그런 일은 없으니 절대 너는 말을 옮기지 마라.”

“알겠습니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연은 만족해서 다른 주의점들까지 알려준 뒤 자리를 떴다.

과연 그런 소문을 듣기는 했다. 왕이 새로 데려온 치유사에게 빠져 계속해서 그녀의 방을


드나든다는 소문. 내관들이 수군거리며 연화의 방 쪽을 가리키며 험담을 하는 것도 들었다.
천것이 두통을 물리치는 재주가 있다며 들어앉아서는 창피도 모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천민 부락에서 온 여자가 지체 높은 귀한 분들의 전각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는 험담들이었다.

‘백호 님과 함께했던 연화 님이 일 없이 인간의 왕 따위에게 왔을 리가.’

사영은 그 말들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연화를 잘 몰랐다. 연화의 얼굴을 본 것조차 이곳에 와서가 처음이었다. 다만


백호가 연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았다.

‘신의 반려라는 자리를 버리고 겨우 한 나라의 왕 정도로? 웃기는 소리.’

한 세계를 다스리는 사방신, 그의 옆자리. 사방신의 반려라는 그 자리를 사영 자신이


얼마나 탐냈던가. 만약 백호가 연화에게 그러하듯 그 전폭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사영은 그랬다.

그녀는 청수희가 건네주었던 반려의 증표, 자그마한 노리개를 품 안에서 꺼내보았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너를 신의 반려로 생각할 거야. 세계의 규칙은 이 노리개의
주인이 사방신의 옆자리에 있는 자라고 말하지.’

청수희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녀가 말하는 세상이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청수희에게서 연락이 없다.’


시시때때로 청수희는 사영에게 말을 걸어오곤 했는데 며칠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빨래를 하는 빨래터에서도, 정원의 작은 연못에서도, 심지어 세수를 하려고 떠놓은
대야물에서도 청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비록 정령이라 하나 청수희의


힘은 사방신의 바로 밑쯤 된다. 바다와 물을 다스리는 청룡이 있었으나 육지의 민물은
청수희의 관할이었다. 그 누가 감히 샘의 정령에게 위해를 가하겠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사방신 정도 외에는 없었다.

‘연화 님의 심중은 어떨까.’

비록 끌려왔다고 하지만 연화는 그리 억압받는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 만희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닐 텐데 그리 떠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사영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랬다.

인간계로 넘어오며 둔갑한 터라 일반 인간 여인이나 진배없게 되어 전처럼 술수를 부려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오가며 들은 말이나 직접 본 바로는 연화가 탈출하려
노력하는 모습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떠나고 싶어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사영은 만약의 경우를 상상했다. 보는 것과 달리 연화가 백호에게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녀


자신은 연화를 도와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모른 체하고, 백호에게 자신과 일족이 당했던
수모를 간접적으로나마 갚을 것인가.
67 화

연화가 아주 밉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밉지도 않은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녀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꿈이 망가졌는데도 별다른 감정이 없을 수가 있다니.

심지어 며칠간 지켜보며 오히려 호의적인 감정이 생기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 덕분에 이제 사영은, 백호의 반려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아예 접어 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모두가 사영과 같지는 않았다. 오랜 기간 왕의 곁에 있던


자들은 연화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치유사가 들어온 덕에 왕이 충동적으로 살인을 하는
일은 확연히 줄어들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천한 여자가 들어앉아
왕의 예쁨을 받는다고만 했다.

‘특히 방금 저 침방시녀.’

이름이 은연이라 했던가. 연화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요염하고 아름다운 얼굴 밑으로


분노가 흘렀다. 왜 그녀가 그토록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을 알
도리는 없었으나 몹시 찜찜하기는 했다. 다른 이들이 경멸에 가깝다면 은연의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도대체 모르겠군.’

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
아침이 되어 제사장 성현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괴이한 일이다. 마치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것처럼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집을 떠난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낯설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일어나
앉았다. 여름의 무더위 때문인지 땀으로 목덜미가 축축했다.

하인이 들어와 세숫물을 들여놓았다. 제사장은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가 충분히 시원하지


않아서 다시 가져오라고 꾸짖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다시 가져온 물 역시
미적지근했다. 불쾌감에 제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뭘 하는 게냐! 시원한 물을 가져오라니까!”

“그, 그것이.”

하인이 쩔쩔 맸다. 새로 받아온 물도 계속해서 미지근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성현은


결국 시원찮은 물로 세안을 하고 땀에 젖은 채 일어섰다.

“며칠 전만 해도 집안에 놓아두었던 물도 차가웠는데 도통 무슨 일인지.”

하인이 중얼거렸다. 날이 더워져서인가, 했지만 청수희가 부리던 술수를 거두어서 그렇다는


사실을 일개 인간이 알 리가 없었다.

찝찝한 상태로 궁으로 나아간 제사장은 왕이 부른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간


자신을 찾지 않던 왕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달려간 왕의 침실에는 그 치유사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성현을 보고 움찔해서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짚고 있던 만희가 흘긋 성현을 바라보았다.

연화가 그에게서 손을 떼려 했지만 왕은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에


다시 손을 댔다.

“왔나?”

성의 없는 인사였지만 성현은 감지덕지하며 왕에게 엎드려 절했다. 암살 사건도 있었던


터라 궁 안의 모두가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고 제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엄하신 전하를 뵙고자 달려왔나이다. 부르심이 계셨다 하여.”

“그래.”

만희는 턱을 매만졌다. 두통은 없었지만 연화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아 일부러 그녀를


불러 곁에 앉혀둔 참이었다.

제사장을 불러온 것은 연화의 말 때문이었다. 두통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만희의 곁으로


달려온 연화는 말을 꺼내기 위해 한참을 애썼다. 보다 못한 만희가 뭔가 말하고 싶으면
하라고 채근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연화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

‘혹시…… 제 마을의 안위를 알 수 있을지요. 전하의 자비에 기대어 천것이 감히


여쭙습니다.’
‘마을이라. 네가 떠나온 곳 말이냐.’

‘돌아가겠다는 심산이 아니옵니다. 그저 알고만 싶어서.’

만희는 천천히 턱을 두드렸다. 연화는 다소 조심스럽게,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무서운


듯 말을 꺼냈다.

‘그들이 안전한지, 어머니는 몸이 어떤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아니라고 연화는 반복해서 말했다. 원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안부를


아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연화는 우울하면서도 슬퍼 보였다.

가만히 연화의 말을 들은 만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제사장을 불러오라 일렀다.

발 앞에 엎드린 성현을 내려다보면서 왕이 입을 열었다.

“제사장, 내 치유사를 데려오라고 했던 그 마을의 소식. 알고 있나?”

성현은 왕의 의도를 읽어내려 애썼다. 만희의 적안은 안정되어 보였다.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순간 돌변할 수도 있는 자다. 그리고 곁에는 그 치유사 여인이 아주
친근하게 왕의 머리에 손을 짚고 있었다.

그는 궁 내에 도는 소문을 잘 알았다. 치유사의 방에 자주 들르며 호의적인 대화를 나누는


왕, 연화와 그가 이미 정을 나누었다는 소문. 제사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마을을 불태우고 모두를 죽여버리라 명을 내린 것은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걸 그대로
말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왕은 기꺼워했겠지만 만약 치유사에게 혼이 팔린 상태라면 성현 자신에게


죄가 떨어질지도 몰랐다. 더구나 두통이 없을 때의 왕은 이유 없는 죽음을 썩 즐기지
않았다.

“그 마을의 소식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알고자 하신다면 제가 노력하여


알아오겠나이다.”

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가 떠나온 마을의 소식을 신경 쓰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니 소식 정도야 알아보는 게 나쁘지는 않다.
안심시키고 아예 마음 놓고 지내게 하는 쪽이 좋다. 거기에 더해 그 ‘백호’라는 사내를
아예 잊어버리게 하는 것도 좋고.

“좋아. 일단 그 마을의 소식을 알아와라. 연화의 어머니 소식도 함께.”

“명 받들겠나이다.”

대답하며 성현의 뒷덜미에 다시 축축하게 땀이 났다.

그는 분명 떠나오며 마을을 전부 불태우고 죽이라 명했고, 그 명을 이행했던 내관은


돌아와서 군졸들이 충실히 성현의 명을 따랐다고 전했다.

대체 어떻게 일을 수습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왕은 단지 치유사를 데려오라


명했을 뿐이니 그 죄는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당시 일을 했던 무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야겠어.’

마을이 멀쩡하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만약 연화의 양어머니나 마을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명이 떨어진다면 큰일이다. 애초에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쪽이 백배 나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계산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연화는 어두운 얼굴로 계속 성현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제사장이 일어나 나갈 때까지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물끄러미 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뭔가 묘하게 성현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그는 입을 열어 직접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는 불편한 일을 솔직하게 입 밖에


내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만희가 직접 알아봐야 했다.

***

왕궁 지붕에 푸른 머리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머리를 높이 묶어 올린 그는 왕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머리에 꽂은 잠화(簪花)가 탐스럽게 빛났다. 가볍게 지붕을 딛고
움직이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수령아.”

그의 말에 푸른 정령 하나가 남자의 어깨 위로 나타났다. 형체가 흐물흐물한 날개를 등에


단 자그마한 사람 형상을 한 정령은 눈알이 없는 눈을 깜박였다. 청룡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와지붕 위에 앉아버렸다.

“네가 말한 백호의 인간 신부가 여기 있다는 게지?”


【그렇습니다, 청룡 님.】

“재미있구나.”

청룡이 해사하게 웃었다. 선이 고운 그의 흰 얼굴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는 턱을 고이고 앉아서 인간계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밤은 소리 없이


수국의 왕궁을 덮으며 흐른다. 달빛이 요요하고 물결은 잔잔하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 저 밑으로 얼마나 썩어 문드러진 일들이 많이 벌어질까. 물론 그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딱히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평민들은 반란군을 조직해 들고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규모가


충분치 않았고, 수국 왕실의 피는 아직 청룡의 가호를 간직하고 있었다.

언제쯤 이 나라가 무너질까. 그건 청룡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상제의 안배에


따라 운명이 흘러갈 뿐이었다. 희례연에 연꽃이 피면 왕조가 바뀐다―그것은 상제의 말이기
때문에 청룡 역시 그저 뜻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청수희가 이곳을 어지간히 오가더니 요즘은 좀 잠잠하군. 눈치가 있는 편이니 내 말을


알아듣기는 했겠지만.”

그 재미만 찾아 쏘다니는 샘의 정령이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다니 희한한 일이다. 항상


예쁘게 웃으며 청룡을 약 올리듯 이리저리 인간계 일에 간섭하고 다니는 청수희를
생각하면서 청룡은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호는 성질이 불같은 신인데, 과연 제 여인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을까? 제것을 애먼
사내에게 내주었으니 얼마나 속이 끓어오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재미있어서 청룡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생각하냐, 수령아. 설마하니 백호가 인간 하나 때문에 다른 계로 진입할까?”

【글쎄요.】

수령은 날개를 흔들었다. 그녀와 친한 신령인 호접이 몹시 힘들어 하여 그녀가 알아본


바로는 대단히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둘 모두 세계를 넘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이어서 친해진 기묘한


인연이었다. 비록 속한 세계가 다르다고는 하나 수령과 호접은 그것을 넘어선 우정을
지속하고 있었다.

힘들여 이곳 저곳으로 알아본 바 어렴풋이 알게된 사정은 수령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무려 신령계의 신인 백호가 인간의 반려를 떠나보내고 깊이 상심하여 하루 종일 궁 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던가. 백호는 다혈질이고 잔인한 사방신이다. 어떤 짓을 할지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백호가 노한다면 그 분노는 수국의 왕을 향할 것이다. 현재 왕실의 핏줄을 잇는 자는


단 하나, 만희만 남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왕조의 대가 끊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이 나라의 왕조 역시 좀 손을 볼 때가 되긴 하였다. 하지만 그건 내 손에 의해서지,


백호가 손을 댈 것은 아니지.”
청룡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는 백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동료 사방신의 인간
신부라면 구해줘도 별 상관은 없겠으나 그게 백호라면 별로 구해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여자에게 그리 빠져 있다니 애간장 좀 닳는 모습을 봐도 괜찮지 않은가. 아무리


예측불허의 백호라도 사방신의 경계를 깨는 짓은 할 수 없을 테니. 여자를 볼모로 약을 좀
올려도 흥미로울 것이다.

“흠. 인간이란 재미있지만 역시 역겨운 존재야.”

인간계의 영토를 주작과 나누어 다스리는 청룡은 인간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는


감각을 열어 궁 아래쪽을 살폈다.

68 화

왕의 침실 바로 위 지붕 위에 앉아서 물의 사방신은 만희를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그의


희생자로 저승의 주민이 된 이들이 만희의 머리맡에 기웃거렸다. 굳이 쫓아줄 의리는
없어서 청룡은 무심히 그 광경을 보기만 했다.

왕의 미간에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두통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저승의 주민들이 앙심을 품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플 텐데.’


청룡은 만희를 비웃었다. 그가 세우기를 허용했던 왕조는 이제 스러질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언제쯤 스러질지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청룡의 마음은 떠난 지 오래였다.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는 상제폐하만이 아시겠지만 가호하는 나의 마음도 중요한 것이니.’

만희는 사촌형을 살해하여 왕이 된 자로 정통성이 없었으나 청룡이 판단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그냥 이 수국 자체에 청룡이 갖는 애정이 사그라진 것이다.

만희가 수호신에 대한 충성심을 갖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의 발아래에서는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한낱 개미에 불과한 인간이니까.

이 수국의 영토 자체가 청룡의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아예 모른다. 청룡은


본래 물속의 인어들을 지배했으나 인간 쪽이 더 흥미롭다는 이유로 물 위의 영토를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도.

사실 청룡의 진짜 백성은 뭍 위의 인간이 아닌 물 아래의 인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관심을 준 물 위의 인간은 왕이 아닌 다른 쪽이다. 청룡은 고개를 돌려


왕의 후궁전에 갇힌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전각의 지붕을 뚫는 청룡의 눈에 확실히
보였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은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노란 빛이 새어 나왔다. 일반 인간에게야


보이지 않겠지만 사방신의 눈에는 명확하게 보인다.

‘약사여래의 가피와 백호의 애정을 받는 여자라. 신기한 존재야.’


청룡은 턱을 괴고 그녀의 가느다란 등을 내려다보았다. 잠을 자고 있어 그녀는 조용했다.
몸이 아주 가늘고 버드나무 가지 같은 여인이었다. 청룡은 그녀를 자세히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화가 미인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과연 사방신의 사랑을 받을 만큼인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한계마저도 딛고 백호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여자인 게 아닌가.

그는 잠든 연화의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역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난 좀 더 키가 크고 대담한 미인을 좋아하니까.’

청룡의 취향에 연화는 지나치게 얌전하고 곱기만 하다. 하지만 백호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청룡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수령이 전해준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붉은 달이 뜨는 밤에 일이 꼬여서 관계를 맺게 된


인간 여인과 어느새 진심이 되어버린 신. 세계를 공평히 다스리기 위해 사감(私感)이
최소화된 상태로 태어난 사방신이 사랑을, 심지어 인간 여인 따위를 상대로 진심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청룡은 희한하게 여기며 감탄 비슷한 것을 했다. 심지어 저승에서 나와 헤매는 혼령까지도


없애버렸다지 않은가. 그 엉덩이 무거운 현무가 신령계까지 행차했다고 들었다.

그는 턱을 긁었다. 백호는 과연 어디까지 저 여자를 위해 해줄 것인가. 여인은 비록 무슨


연유에서인지 수국의 왕실로 와 머물고는 있으나…… 백호의 마음 역시 식었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방신끼리는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큰 존재들이며 동시에 지나치게
다른 기운을 품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슬쩍 닿는 것만으로도 세계 어딘가에는
이변이 생겼다. 물론 청룡은 이변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상제가 좋아하지
않았다.

상제는 사방신들이 오갈 때마다 책임이 있는 자의 영토에 번개를 내렸다. 특히나


바다에서는 그 전류가 잘도 퍼지기 때문에 바다 밑이 몹시 시끄러워져서 청룡은 번개를
매우 싫어했다.

그 때 수령이 눈을 빛냈다. 눈동자가 존재하지 않는 안구가 환하게 빛나면서 그녀가 뭔가


중얼거렸다. 다른 곳에서 소식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저, 청룡 님?】

“왜 그러느냐?”

수령이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을 돌려서 청룡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교신을 유지 중이라는 뜻이었다.

【백호 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백호가? 왜?”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으니 교분을 나누고 싶다 하시며.”


청룡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교분?”

교분이라니, 이보다 더 안 어울리는 말이 있나. 청룡도 알았다. 저 말은 당연히 핑계다.


그들 둘은 교분 따위를 나누려고 따로 만날 정도로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비록 오래된
관계로 인해 친구라 부를 수는 있었으나 사방신 중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아웅다웅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상제가 좋아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별다른 용무 없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아니지. 분명히 용무가 있겠구만.”

어차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백호, 상제는 책임 있는 자에게 화를 내니 번개는 신령계로


내릴 것이다. 흥미로움에 청룡이 눈을 반들거리며 빛냈다.

“역시 제 말 하면 오는 게 호랑이로군.”

그가 낄낄대며 웃었다.

***

신들은 대다수 시대의 흐름을 안다. 정확한 시기와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어도 그들은 한
일족이, 혹은 한 세대가 흥하고 망하는 과정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십여
년 안에 그들의 예감은 현실로 드러나고는 했다. 그것이 자신의 영토가 아닌 다른 세계여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계에 내려갔을 때 백호는 그것을 느꼈다. 아주 진하고 끈적한, 쇠퇴와 멸망의 냄새.
아마도 곧 다가올 새로운 세계의 풋내. 거기에는 짙은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될 인간들의 피 냄새일 것이다.

지독하게 많은 혼령이 새로 생겨날 것이고 수많은 은원이 해소되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며


오래된 나라는 저물고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것이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문제는 그 부분이었다. 연화의 정인인 사내는 수국의 왕이었다. 만약


나라가 전복된다면 가장 먼저 신변에 문제가 생길 위치다. 그렇다면 그의 곁에 있는 연화
역시 마찬가지다.

왕비로 올릴지 올리지 않을지 알 수 없었지만 정식 왕비로 삼아도, 곁에 두고 총애만


하여도 결과는 같았다.

수도를 날아다니며 직접 목격했던 바로 미루어보면 수국의 왕은 결코 성군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왕조 교체의 시기에 선대 왕은 당연히


처참하게 목숨을 잃을 것이고 그의 곁에서 총애를 받던 연화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최소한 현 왕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라도 시대가 저무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다른 것이 아닌


연화의 안전을 위해서. 폭군의 치세가 길어져 그만큼 연장될 수국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고민 따위는 백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금수의 신인 그가 인간계에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으니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인간계를 다스리는 청룡을 설득하는 것.
비록 청룡 역시 운명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라지만 분명 세계를 다스리는 신의 자격으로서
역사의 좌표를 미세하나마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다.

오래도 필요 없었다. 그저 연화가 생을 다할 때까지만,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이라도.

“일단 수령에게 전했습니다. 바로 곁에 청룡 님이 계시다더군요.”

“그래.”

백호의 얼굴에서는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호접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청룡 님께서 행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상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놈이 수경을 통해 들어온다면 곧이겠지. 간단한 주안상을 내오거라.”

바닥에 정좌하여 앉은 채로 백호는 흰 호리병에서 술을 따라냈다. 청명하고 맑은 청주(淸酒


)가 흰 술잔 안으로 흘러들었다. 상 위에는 갓 무쳐낸 갖은 산채와 생선찜 요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가 두 잔에 모두 술을 채웠을 때, 그의 정면 허공에 서서히 소용돌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방울이 거품을 일며 빙글거리고 돌았다. 둥그런 원은
점차 넓어져 이윽고 저편의 광경이 보였다.
바닷물로 넘실거리는 안쪽 저 너머로 건물들이 늘어선 것을 보니 용궁의 마당인
모양이었다. 저편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푸르고 화려한 전각이 보였다. 새파란 기와
위로 황금색의 장식들이 수놓아져 있다. 수국의 왕실과 일견 비슷하였으나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세련된 건물이었다.

백호는 턱을 괴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여전히 악취미로군.”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그는 술을 홀짝 마셨다. 모든 것이 자연에 가깝게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백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계를 다스리는 청룡과 주작은 유달리 화려한 것을 좋아했고, 현무와 백호는 소박한
것을 선호했다. 서로 맞지 않는 취향이었다.

“먼저 불러놓고서 남의 취향을 존중도 하지 않는 건가?”

불쾌해하는 목소리가 원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백호는 시큰둥하게 다시 한 번 술을 마셨다.

“어차피 네놈도 여기 와서 초라하네 어쩌네 할 거잖아.”

“그거야 실제로 초라하니까.”

“네놈이 악취미인 것도 사실이야. 건물 주변을 쓸데없이 죄다 금으로 둘러싸 놓고서 좋은


취향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냐.”
소용돌이 속에서 청룡이 나타났다. 그는 물길을 헤치고 나와 마른 땅에 발을 디뎠다.

긴 푸른 머리를 높이 묶은 채 잠화를 꽂은 것이 변함없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키는 컸으나


늘씬하고 고운 생김새라 일견 여인으로도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백호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상제의 노여움도 마다 않고 나를 부르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청룡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의 도마뱀과 같은 눈이 깜박였다.

“……글쎄, 좋은 술이 들어와서라고 하면 믿어줄 건가.”

“그럴 리가. 하지만 재미있는 일일 것은 확실할 듯해서 왔지. 재미없는 일이라면 여기다가
바다를 소환하고 가버릴 테다.”

“그러든지. 상제가 싫어할 테지만.”

“상제는 지금 이 초대도 좋아하지 않을걸. 들키면 신령계에 칠 일간 벼락이 내리꽂힐


게다.”

백호가 피식 웃었다. 신령계에 꽂히는 벼락은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다.

청룡은 백호의 건너편에 앉아 주안상을 들여다봤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술상에 그는


비웃음을 머금으려다가 생선찜 요리를 발견하고 인상을 구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왜 하필 생선찜이야?”

“아, 이런.”

백호가 중얼거렸다.

“네가 생선 요리를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또 잊어버렸지 뭔가.”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감히 내 영토의 주민을 잡아다 요리해서 내 앞에 내놔?”

“민물고기야.”

“모습으로 구분은 안 되잖아!”

“거 참, 희한하단 말이야. 네놈은 왜 생선을 안 먹는다는 거냐? 난 고기 요리를 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약육강식, 강자가 먹는 게 자연의 섭리상 당연하지 않나.”

“닥쳐. 야만적인 놈. 난 바닷속에서 나는 건 해초만 먹는다.”

69 화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이 참으로 좋아하겠군.”


“부처 이야기는 하지도 마. 골치 아픈 작자.”

청룡이 시끄럽게 구는 게 귀찮아져서 백호는 시녀를 불러 생선찜을 내가도록 했다. 대신


올라온 잡채에 그제야 청룡이 제대로 젓가락을 잡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따뜻한
맛이 일품이었다. 맑은 청주 역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깔끔했다.

“이런 음식을 할 줄 알면서 생선찜 따위를 내다니.”

그가 투덜거렸다. 어차피 뭔가 용건이 있으니 불러냈을 텐데 이런 걸로 기분을 거슬리게


수작을 부리다니 역시 백호와는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밖에서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룡은 잠시 놀라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넓게 열린 미닫이 창 밖으로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굵었고 바람 없이 수직으로 땅바닥에 낙하했다. 온 세계가 젖어서
흔들리고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피부를 적시는 느낌이었다.

“신령계에 비가 오다니 드문 일이군.”

언제나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공간이 신령계다. 폭풍우나 홍수와 가뭄 같은 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의 일이다. 간혹 이례적으로 일부러 백호가 날씨를 조종하여 비를
내리는 경우는 있으나 인간계처럼 많지 않았다. 그래도 자연계의 정령들 덕분에 수량은
풍부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청룡은 물끄러미 건너편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았다.


“슬픈가?”

그러나 지금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니 청룡은 능히 백호의 마음이


짐작되었다. 백호 역시 딱히 부정하지 않고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청룡이 모를 리야 없었다. 어디까지 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라면 아마 거의 다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프지. 안 슬플 수가 있나.”

“이렇게나 차분한 네놈 모습은 처음이야.”

“나도 이런 내가 처음이라 이상해.”

청룡이 킬킬 웃었다. 둘은 말없이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호리병이 거의


비어갈 무렵 백호가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다.”

청룡이 말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백호의 시리게 푸른 눈은 비 오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국의 멸망을 가능한 늦춰다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청룡은 잔을 들다가 말고 내려놓았다. 소박한 상 위에 손을 짚고


눈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백호는 호리병에서 다시 술을 따라냈다.

“제사를 받으러 인간계에 갔었다. 수국의 수도에 있는 금수들을 보살필까 하여 잠시


둘러보았는데…… 냄새가 나더군. 부패의 냄새가.”

“…….”

청룡은 속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말하는 것은 사방신들 사이에서도 드문 일이다. 게다가 백호가 언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세계의 흐름이었다. 과연, 그 여인 때문에 그러는 거군. 청룡은 속으로
실소했다.

“멸망을 늦춰달라니, 그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알아, 많은 시간을 달라는 게 아니다. 다만 가능한 만큼만 미뤄달라는 것이지.”

“왜?”

“…….”

백호는 답하지 않고 다시 술을 마셨다. 청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면 거절이다.”

“말해 준다면 수락할 건가?”

“조건을 봐서.”

허, 하면서 백호가 웃었다. 과연 청룡은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 자다. 이기적인


동료를 익히 잘 아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 반려가 그곳에 있다.”

“그건 알아. 그런데 왜 그 여자를 데려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수국의 멸망을 늦춰달라는
게 부탁이냐는 거다.”

“연화의 정인이 수국의 현재 왕이다.”


청룡은 침중한 얼굴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려가 인간계로 넘어와 왕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수령에게 전해 들었지만, 그것을 백호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려오면 되는 일이잖나. 정인이야 바뀔 수도 있는 것이지.”

“……난 그녀의 행복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맙소사, 세상 순정적인 사내 나셨군.”

못마땅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청룡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지만 연화와 만희를


지켜보았을 때, 그들이 연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관계가 담백해
보였던 탓이다. 청룡은 자신의 눈썰미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다소 의아해서 그가 물었다.

“그런데 수국의 왕이 그녀의 정인이라는 건 정말 확실한 거냐?”

“그래. 이곳을 떠날 때도 그랬고, 돌아가서도 바로 그의 곁으로 갔다.”

정인인 건 확실하다. 아니라면 어찌 일국의 왕이 인간의 여인인 연화를 그토록 잘 돌보아


줄까.

수국의 왕은 그녀에게 좋은 옷과 음식을 주고 안락한 거처에 머물게 해주었다. 연화는


평화로워 보였다.

왜 연화의 마을이 엉망이 되는 것을 그대로 두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왕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복잡한 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들끓었다. 구해내서 중간계에 머물게 하고 있는 연화의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하나, 왕이 그들을 돌보고 연화가 외롭지 않도록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지 않고 백호의 보호 아래 있다면…… 연화가 그들을 보기 위해


잠시라도 이곳에 시선을 두어주지 않을까 욕심이 났다.

신답지 않은 치졸한 마음이었으나 백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꾸만 다른 길로 새는 생각을 다잡으며 백호는 청룡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유를 말했으니 이제 네가 원하는 조건을 말해라.”

“……뭐, 좋아.”

청룡은 의심이 많은 자다. 그는 과연 왕이 연화의 정인인가부터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역사의 사건을 뒤로 미루는 건 제법 힘이 드는 일이다. 알고 있겠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미뤄달라는 뜻이다.”

“어쨌든 말이야. 시대의 흐름이 역류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도 힘들다. 인간의


역사는 섬세하니까 말이야. 흐른 듯 만 듯한 신령계와는 달라.”

“…….”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자가 대체 얼만한 반대급부를 요구하려 이렇게 말이 많은가
싶었다.

청룡은 대담하게 말했다.

“네 한쪽 눈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가.”

제정신인가 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그러나 청룡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앉아서 백호를


바라보았다.

“금수의 신의 눈, 그 정도라면 역사의 흐름을 막는 것에 합당한 대가라고 보는데.


아닌가?”

“왜 내 눈을 달라는 거지?”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 중 하나에 담긴 바람의 정수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지.”

백호는 헛소리 작작하라는 얼굴이 되었다. 설마 청룡도 진심은 아닐 게다. 상제가 안다면
벼락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백호뿐 아니라 요구한 청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거래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불가하다. 내 눈이 없다면 모든 신령계를 돌보지 못한다.”

“어차피 나머지 하나가 남잖아? 까다롭군. 그럼 조건이 안 맞다고 봐도 되나?”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 진짜 조건을 말해 봐라.”

다혈질이던 놈이 생각보다 치밀해졌어. 청룡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호의 표정 없는 눈을


보면서 그는 좀 더 쉬운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네놈의 살을 내놔라.”

“그건 또 왜.”

“지금 바다 밑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서. 네놈의 살 몇 점이라면 바다의 생물들을 한참


먹일 수 있겠지.”

백호는 청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닷속 역시 다른 영토나 다를 것이 없었다. 신령계나


인간계보다 오히려 더 수많은 풍랑과 조류에 휩쓸리는 곳이라 영토의 식량 상태는 자주
뒤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번연히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살점을 베어다가 영토의 주민들을


먹이겠다니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작태다. 청룡은 물론 태연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기적인 동료의 모습에 백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흠, 거래 성립인가?”
“그래, 받아들이지.”

청룡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술잔을 끝까지 비웠다. 밖에는 비 오는 소리가 들리고 술이 맑고


시원했다. 나름의 정취가 있군. 그는 이 날씨가 백호의 마음과 같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살은 어디서 떼어낼 건가.”

“너의 정수에서 가장 가까운 곳.”

“성격 한번 고약하군.”

그 말은 심장 근방에서 살을 도려내겠다는 뜻이다. 백호는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군말 없이 일어서서 허리띠를 푸르고 장포를 젖혔다.

옅은 녹색의 장포가 벌어지고 그의 넓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드러났다. 흰 피부 아래로


촘촘하게 근육의 결이 보일 정도였다.

잘 짜여진 몸을 보면서 청룡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냈다. 백호보다 키가 작은 그가


다가서자 시선은 아래에서 위를 향했다. 백호의 시퍼런 시선을 마주 보면서 청룡이 씩
웃었다.

“이대로 심장을 찌르면 어떨까. 혹시 아나, 천하의 백호가 죽을지?”

“네놈이 어떻게 찌르든 살을 떼어내든 안 죽으니 걱정 마라.”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다 한다. 어차피 이 신체에 모든 힘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사방신은 그 세계의 곳곳에 자신의 힘을 깃들여 놓았고, 그 중심 의식이 육체로 화한 것이
현재의 몸이었다.

어쨌든 신의 살이니 조금만 베어가더라도 바다의 주민들을 전부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백호의 생명에는 어떠한 지장도 없었다.

다만.

“생명과는 관계가 없지만…… 고통은 꽤 크겠지.”

비웃음과 섞인 냉소였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청룡이 단검을 백호의 옆구리로 찔러 넣었다. 일반적인 검이라면 흠


하나 낼 수 없는 피부였지만 이건 백호와 충돌하는 사방신의 힘이 깃든 검이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들어온 검날에 백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는 듯한 열감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졌다. 고통스러운 그의 표정을 보면서 청룡은 그대로 위로 올려 그었다.

뼈나 내장을 다칠 만큼 깊지는 않았다. 살이 많지 않은 백호의 옆구리와 가슴 옆면을


도려내면서 청룡은 생각만큼 유쾌하지 않았다.

생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백호의 몸은 미약하게 떨렸다. 식은땀이 순식간에 희고


반듯한 이마 위로 났지만 그는 신음성을 내지 않았다.
“독한 놈.”

이를 악물고 참는 백호를 보며 청룡이 투덜거렸다. 그는 순식간에 도려낸 백호의 살점을


손수건에 놓고 잘 감쌌다. 붉은 피가 흘러 수건을 적셨고 그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으려
청룡은 재빨리 접시를 그 밑에 댔다. 팔을 내려 자신의 상처를 살피던 백호는 그런 청룡을
보고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피도 아깝다 이건가.”

“당연하지. 사방신의 피라면 한 방울로도 호수를 정화할 수 있을 텐데.”

청룡은 접시와 살점을 함께 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냉큼 대답했다. 신의 살과 피는 곧


힘의 정수다. 누구에게도 쉽게 내주지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 귀중한 것이었다. 청룡은
히죽거리며 손에 든 백호의 살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70 화

곧 백호의 상처가 슬금슬금 아물기 시작했다. 새로 수복되어 올라온 새살이 붉은 상처를


덮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급의 사방신인 청룡에게 꽤 큰 양의 살점을 빼앗겨 타격은 상당할
터였다. 어쩌면 여태까지 겪지 못한 고통을 인간처럼 겪을지도 몰랐다.

상처가 모두 새살로 덮인 뒤 녹색 장포를 다시 어깨 위로 덮고 허리띠를 매고서 백호는


청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 거래를 성실히 이행해라.”

“좋아, 이렇게나 많은 식량을 얻었으니. 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지.”

“맹세를 해라.”

백호가 요구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거래의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니 너 역시 제대로 이행하겠다고


맹세해.”

“까다롭기는.”

청룡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대가를 받았으므로 그는 망설임 없이


세계의 규칙에 대고 맹세했다.

《나 청룡은 수국의 멸망을, 시대 흐름이 역류하지 않는 한까지 최선을 다해 늦추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사방신의 말은 준엄하다. 그가 약속의 말을 내뱉은 이상, 아무리 사방신이라 해도 그 말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흐르든 상관없었다. 백호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는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


“나를 너무 믿지 못해, 너는.”

“당연하지 않은가.”

백호의 싸늘한 웃음에도 청룡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영토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백호의 살점에서 떨어지고 있는 피가 마르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했다. 순식간에
열린 길 너머로 청룡이 발을 옮겼다.

“인간 반려 때문에 별짓을 다하는군. 내 긴 평생 사방신이 제 육신을 그따위 이유로


내주는 것은 처음 본다.”

청룡이 남기고 떠난 비웃음이 이제 백호 혼자 남은 방 안에 울렸다. 그 말에 동감이라서


그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새살이 돋은 옆구리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생전 처음 맛보았던 날카로운 통증이 여전히 몸 안에 남아서


전신을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본신의 힘에 영향이 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 육신에는
고통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청룡의 힘이 담긴 단검으로 찔렸으니 더했다.

상처가 났던 부위가 욱신거렸다. 정말 익숙지 않은 고통이었다.

그는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머리까지 통증과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입을 열자 뜨거운


숨이 올라왔다.

“내 고통이 네 행복에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더한 것도 내줄 수 있다, 연화야.”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정인의 나라라도,
최소한 연화의 생 중에는 무너지지 않도록.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실 청룡이 끝내 백호의
안구를 원했더라도 내주었을 것이다. 옆구리와 가슴의 살점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었다.

백호는 침실로 가서 너른 침상 위에 누웠다. 연화와 함께 나른하고 행복한 오후를 보내며


뒹굴었던 침상이었다.

그녀가 그리워서 백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고통보다 그녀가 떨어져
나간 고통이 수백 배는 더 힘들었다.

열이 전신으로 번져서 몸이 나른했다.

비록 신이라 하나 백호가 연화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그는


무력감에 휩싸여서 눈을 감았다.

살점이 베어져 나간 만큼 마음도 베어져 나가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연화를 향한


연심은 조금의 퇴색도 없이 여전히 불타올랐다.

***

만희는 아무래도 연화의 표정이 걸렸다.

제사장 성현이 그 이유 같았다. 그와 한 공간에 있을 때마다 연화는 다소 불안하고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저 아니라고만 답했다.
별다른 까닭은 없고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물론 만희는 거기에 속지 않았다.
‘제사장 그 능구렁이가 제대로 답할 리는 없을 테고.’

그는 턱을 두드렸다. 마을의 소식을 알아오라 명했을 때도 제사장의 표정이 흔들렸다. 뭔가


다르다는 낌새를 만희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희가 소리를 높여 밖의 내관을 불렀다.

“여봐라!”

대답하며 내관이 들어와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왕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치유사 연화가 이곳에 올 때 동행했던 군졸을 찾아서 데려와라. 가능한 입이 무겁고


성실한 자를 찾아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단, 제사장 성현이나 그 측근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리에 데려와라.”

“예.”

내관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바로 왕의 명을 받들어 물러났다.


왕궁에서 일하는 자를 불러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난데없이 왕의 부름을 받은 군졸은 벌벌 떨면서 그의 앞에 엎드렸다.

백관이 모이는 전각도 아닌 왕의 사실이었다. 잔뜩 긴장한 군졸은 모자를 벗어 들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두통이 조금 시작될 기미가 있기는 했으나 아직 제정신이라 살의가 치밀지 않는 만희는


군졸의 떨리는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참 많은 인간을 죽이고 공포스럽게 만들기는 하였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지금조차 그 지독한 두통이 찾아오면 눈앞에
있는 자를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눈을 들어라.”

군졸은 간신히 긴장을 삼키고 눈을 들었다. 붉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왕의 소매 끝에서


거무스름한 피부에 강건한 손끝이 보였다. 도저히 더 이상 시선을 올리지 못하고 그는 그저
왕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괴물이나 다름없다는 새빨간 눈동자나 귀신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볼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네게 물을 것이 있으니,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예, 예 전하.”

왕의 손끝은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지난번, 치유사 연화를 데려올 때 너와 동료들이 따라갔다고 들었다. 맞느냐?”

“예, 맞습니다.”

“그래……. 천민 부락에도 들어갔고?”

“그렇습니다.”

“데려오게 된 과정을 소상히 말해 봐라.”

군졸은 긴장한 상태에서도 열심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앞에 앉아 있는 왕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대체 왜 다 지난 일을, 그것도 말단의 군졸인 자신을 불러 묻는지 알 수
없었으나, 왕이 묻는다면 당연히 최대한으로 대답해야 했다. 자신의 답이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 천민 부락에서 꽤 지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천민 여자……. 아니, 치유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어디로 도망간 거냐 물었지만 아는 자가 없어서…… 제사장께서 무척
분노하시어 매일 집을 한 칸씩 태우고 마을 주민들을 벌주었습니다. 여자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을이 전멸할 때까지 하겠다고…….”

만희는 흠, 하면서 턱을 두드렸다. 제사장의 방식은 도망간 자의 위치를 마을 사람들이 알


때나 효과적인 것이었다. 뭐, 마을 주민들 중 아는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뭔가 못마땅해서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여자, 아니, 연화 님이 나타났고 그 자리에서 죄수용의
마차에 태워 수도까지 이송했습니다.”

“묶었느냐?”

“예. 죄수와 다름없이 팔 다리를 모두 묶어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하였고 식사는 멀건


죽을 주었습니다.”

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 역시 멈췄다. 대신 손이 허리에 찬


검집 위로 옮겨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별로 좋은 징조 같지 않아서 군졸은 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팔이 묶여 있는데 어찌 먹었느냐.”

“엎드려 핥아먹도록 바닥에 던져 두었습니다. 전신을 너무 꽉 묶어뒀던 터라 접시에 얼굴을


대고 핥는 것도 힘겨워하셔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군졸은 대답을 망설였지만 피할 곳은 없었다. 말을 지어낼 재간도


없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답했다.

“예, 죄수용 마차는 창살로 되어 있어 가릴 곳이 없는지라.”

그 순간 왕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군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명을 받들었을 뿐이라……!”

“…….”

왕이 총애하는 여인이다. 그녀를 데려오며 그다지도 모질게 굴었으니 변덕스러운 왕에게


당장 벌을 받는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양손으로 빌었다.

“전하, 제발 용서를!”

만희는 이를 악물고 검의 손잡이를 놓았다. 팔걸이를 움켜쥔 다른 쪽 손은 의자를 부술


기세였다.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그는 애써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외는?”

엎드려 떨고 있는 군졸의 머리 위로 떨어진 왕의 목소리는 그의 공포 섞인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다. 거의 실금이라도 할 기세로 겁에 질려 있던 군졸은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실려 온 것밖에는.”

“마을은 괜찮은 것이냐.”

“마을은…….”

군졸은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는 사실 무관과 함께 천민 부락을 불태우는 데도 동참한 자였다. 내관의 시중을 들며
쫓아가서 다른 군졸들이 재미를 보는 것을 함께 즐겼다.

설마 그것이 큰 죄가 되는 일일까, 하며 그는 두려운 눈으로 왕의 손어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텁고 커다란 왕의 손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팔걸이에 올라와 늘어져 있었다.

다소 마음을 놓고 그는 머리를 굴렸다. 만약 왕이 치유사의 대접을 소홀히 한 죄를 물을


예정이고 이게 취조의 시작이라면, 서로 말을 맞출 겨를 없는 사이 가장 밑바닥의
군졸들에게 죄가 뒤집어씌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높은 자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전부 불어버리면 나만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군졸은 눈을 굴렸다.

“대답해라.”

왕이 독촉했다. 군졸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 이후의 일이 또 있었습니다…….”

“뭐지?”

“저, 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뒤를 따라갔을 뿐이며.”


뭔가 일이 있기는 했군. 뛰는 심장과 다르게 만희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꾸며내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물론 네 잘못이 아니다. 윗사람의 잘못이지.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자의 죄는 언제나 경감되는 법.”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군졸이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감사를 외쳤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만희의 얼굴이 마치 귀신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71 화

“모든 일을 상세히 말해 보거라. 내 관련자들을 처벌하고자 하니.”

“예, 제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풀려 나왔다. 제사장 성현의 명에 따라 마을을 태우고 모두를 죽이고자


했으나 주민들이 기이하게 사라져 있었다는 사실까지.

결과적으로 연화가 찾는 양어머니와 마을은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이 일을 만약 연화가 알면 어떻게 될까. 만희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마음은 아주 간신히 평정을 잃지 않았지만 대신 두통이 시작될 기미가 보였다. 그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저는 정말 말리려 노력하였으나…… 정말로 불가능했습니다. 제사장님의 명이 워낙 지엄하여


군졸들이 그것을 수행하느라…….”

“그랬군.”

“예, 그래서 결국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주민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

만희는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우리 안을 서성이는 맹수와 같은 걸음이었다.


그는 분노에 차 눈을 손으로 눌렀지만 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제사장 성현의 명을 받들었던 내관이 누구지? 고약한 놈이로다, 궁의 내관인 주제에


제사장의 명을 사사로이 받들다니.”

“내관은 중앙전각에서 일하는 황(黃)씨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관 황씨라면 왕의 제법 가까운 심부름꾼 중 하나였다. 화가 눈앞을 까맣게 가리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은 마을 주민들을 죽이고 불을 놓으라는 명까지는 내린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성현이 멋대로 행한 일이었다. 아마도 연화가 천민 부락 출신인 주제에 애를 먹였던 것에
대한 복수였겠지. 대귀족들이란 그런 인간들이다.

제사장의 얕은 마음이 빤히 보여서 왕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여봐라!”

밖을 향해 만희가 소리를 높여 불렀다.

“예, 전하.”

“이자를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어라.”

“전, 전하?”

군졸이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그제서야 도깨비 같은 얼굴의 왕과 눈이


마주쳤다. 새빨간 눈동자를 지닌 눈에 핏발이 서서 마치 눈 전체가 붉은색인 듯 보였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곧 경비병들이 들어와 그를 끌고 나갔다.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다. 왕은 이미 그를 벌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만약 말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감옥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은 군졸은 입을 다물고 경비병들에게 끌려갔다.

“더러운 것들, 감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만희는 이마를 짚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고 두통이 점차 뇌리를 점령해 왔다.
활화산 같은 분노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추가로 명령을 내렸다.

“제사장 성현을 끌고 와라. 눈치채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붙인 채 끌고 와!”

병사들이 명을 받고 사라졌다. 그리고 만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이 후들거리며 떨릴


만큼 길 잃은 분노가 뇌리를 잠식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는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전각 밖에서 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던 내관 서너 명 속에 황씨가 있었다. 꽤 오래 일했고


왕도 얼굴과 이름을 알 만큼 출세가도를 달리던 자였다.

그는 얌전하게 소매 속에 손을 넣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으나,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왕의 모습을 보고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왕의 얼굴이 살기로 흉흉했다.
두려움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희는 검을 빼 들었다.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서 그는 히죽 웃었다. 얼굴 근육은 통제를


벗어나고 머릿속은 다시 엉망이 되었다.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고통은 빠르게
그의 두개골 안을 두드렸다.

세찬 두드림 속에 누군가 고막 안으로 속삭여 왔다.

피를 봐, 죽여. 최소한 너만 고통스럽지는 않아야 하잖아.


왕의 살의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깨닫고 내관은 뒷걸음질 치다가 도망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을 꺼내 든 만희를 보고 곁에 서 있던 시녀가 급히 다른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왕의 광증이 도진 듯하니 치유사를 불러와야 했다.

시녀는 황급히 뛰어가 가까운 전각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녀에게 매달렸다. 갑자기 달려온
시녀를 붙들고 이웃 전각의 시녀, 은연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전하께서 또 광증, 이……. 제발 빨리 치유사님을.”

전력으로 달린 시녀가 숨을 헐떡였다. 은연은 그 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모두 집어던지고


연화의 방으로 뛰어갔다.

방 안에서 가만히 수를 놓고 있던 연화는 깜짝 놀라서 은연을 뒤따라 뛰어나왔다. 왕이


귀신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쫓고 있다는 말에 지체할 수가 없었다.

“어디입니까?”

“저, 중앙전각 쪽……. 전하께서 내관을 뒤쫓아 따라가셨는데…….”

“빨리 가시죠, 치유사님.”

“예.”
은연과 시녀가 앞장서고 연화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걸음을 급히 옮겼다. 그 때
중앙전각 쪽에서 뛰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앞서서 달려오는 사내는 연화 역시 익히 아는 내관 황씨였다. 그는 두려움에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숨이 턱까지 찬 채 도망 오고 있었다.

“사람 살려!”

비명과 같은 외침이었다. 목소리가 가닥가닥 갈라져 나왔다. 그 필사적인 외침에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 뒤를 따라서 오고 있는 만희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뒤로 흩날렸다. 거무스름한 피부 위 선명한 적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거구의 사내는 검을 흔들며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내관을 놀리며
따라왔다.

내관 황씨의 등 뒤는 왕의 검으로 이미 모두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

“전하, 전하!”

연화가 황급히 그를 말리려고 불렀지만 만희는 마치 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내관을 따라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땅에 내팽개쳤다.
힘없는 헝겊인형처럼 땅에 나가떨어진 내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기었다. 실금을
한 것인지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더러운 새끼.”

욕설을 중얼거리며 만희가 검을 들었다. 연화는 있는 힘껏 뛰어가서 왕의 팔에 매달렸다.

“전하!”

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면 원혼이 늘어난다. 틀림없이 후회할 결과만 생길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만희에게 매달렸다.

“전하, 제발!”

“……이게 누구야. 연화 아니냐.”

왕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담하고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숨을 멈추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왕이 검을 들어 연화의 목을 내려쳐도 놀랍지 않았다. 왕의 눈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연화는 그의 목덜미와 머리에 틈 없이 매달린 원혼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촘촘히 붙어 있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 중 몇은 연화를 보고 이빨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갈수록 원혼들을 달래서 보내기가 힘들어지고 있어.’


연화는 노란 가피의 빛을 내보내면서 만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왕의 눈이 아주 약간이나마 가라앉으며 이성을 찾는 듯했다. 거기에 힘을 얻어서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전하, 정신을 차리셔요. 제가 곧 두통이 가라앉도록 하겠습니다.”

“두통? 그래…… 그래, 두통. 이 빌어먹을 것을……. 너는 할 수 있지.”

“예, 저를 믿어주세요. 잠시만 눈을 감으시고.”

그녀는 손을 뻗어서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댔다.

만희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연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내관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그는 틈을 봐서 도망가려고 버벅이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만희의 얼굴이 다시 귀신에 씐 듯 험악해졌다. 그는 입꼬리를 찢어 올리며


연화에게 말했다.

“아느냐? 저것이 네 마을을 불태웠다고 하더구나.”

순간 연화는 몸이 굳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에서 나오던 노랗고 따스한 빛도 멈췄다.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얼어붙은 앞에서, 광기에 휩싸인 만희가 속삭였다.

“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없앴다더구나. 그래도 저것을 가만 두어야 할까?”


만희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마치 도깨비 같은 형상이었으나 연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고, 정수리부터 찬물을 부은 것처럼 뼛속까지 차가워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없앴다고? 모두가 죽었다는 말인가.


어머니도, 이웃집의 아저씨도, 앞집 소녀도, 모두가? 그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라서 백호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믿을 수 없는 말에 연화는 몸에 힘이 풀려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만희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이제 도망가고 있는 내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쫓아가려는


병사들을 웃음을 지우지 않고 제지했다.

귓가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먹먹하고 여러 목소리가 중첩해서 들려왔다. 속삭임은 피를


달라고 요구했다.

“됐으니 활과 화살을 내놔라.”

병사들에게서 활을 받아 든 그는 활시위를 당겼다.

벌겋게 달아올라 미쳐 버린 정신이었으나 시위를 매기는 시선은 정확했다.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사내의 등을 보며 만희는 비웃었다. 저리 달린다고 살 수
있겠느냐?

핑! 하고 팽팽하던 시위가 놓여진 순간 내관의 뒤통수에 화살이 꽂혔다. 커다란 장궁이라


위력이 몹시 강해 두개골이 거의 관통되었다. 눈으로 나온 화살촉이 시체가 땅바닥에
쓰러지며 꺾였다.
“도망간다고 살 줄 알았나 보지? 멍청한 놈.”

만희는 마구 웃으면서 시체 쪽으로 다가가 직접 화살을 잡고 시체를 질질 끌고 왔다. 그의


걸음마다 핏줄기가 흉하게 묻어 나왔다.

두통으로 인해 머릿속은 곤죽이 되는 것 같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죽음을 요구했다.

더 필요해, 더 죽여.

이건 대체 누구의 목소리일까. 아주 잠시 그런 의문을 가졌다.

또 누구의 피를 볼까. 살기등등하게 만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내관들이나 시녀들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모두가 한 걸음씩 물러선 가운데 만희는 검을
뽑았다. 누구의 것이라도 더 피를 보아야 머릿속의 목소리가 만족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부드러운 손 한 쌍이 다가와 머리를 짚었다.

“전하, 잠시만 무례를 무릅쓰겠습니다.”

작게 잠긴 목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다가와 품으로 파고든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검고 둥글고 순한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맺혀 있었으나 울지는 않았다. 얼굴도 감정의 동요로 인해 붉었다. 흰 피부에 달아오른
홍조가 열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72 화

만희는 멍청한 눈으로 연화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 만희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연화는 손 안에서 다시 노란 빛을 내뿜었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자여…….】

【더 줘, 더 많은 빛을.】

【저자를 포기할 수 없어.】

예전보다 원혼들이 더 끈질겨졌다. 더 많은 빛과 온기를 요구하는 그 갈퀴 같은 손아귀들이


연화의 손목을 잡아 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이 급속도로 그녀의 손목으로 옮겨 왔다.

“자, 내가 가진 것을 나누겠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물러가 주세요.”


연화가 속삭였다. 전보다 더 많은 빛을 뺏어 가져가며 원혼들이 간신히 한 발짝씩
물러났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만희에게서 원혼들을 떼어냈다.

그들은 더 끈질겨졌고 더 많은 말을 속삭여 왔다. 연화는 그들의 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의 뒷덜미에 매달려 있던 원혼 하나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이자를 지키고자 하는가.】

“……그렇습니다. 물러가 주십시오.”

【쓸데없는 짓이야.】

그 원혼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뚜렷한 형상이었고 말소리도 또렷했다. 그는 연화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은 손이었다.

【이제 곧 이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날이 올 거야. 보살의 가피를 입은 자여, 그 날에는


저자가 완전히 미치게 될 것이니.】

마치 예언과도 같은 속삭임이었다. 연화는 이를 악물고 그 꾀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노랗고 따스한 빛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넘쳤다. 다른 이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그 온기 속에서 만희는 눈을 감았다. 뇌를 저미던 통증이 사라지고 귓가를 맴돌던 속삭임도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편안해진 머릿속에 온몸이 나른해져 왔다.
“후…….”

평온하게 가라앉은 신경을 느끼며 만희는 눈을 떴다. 느리게 초점이 잡힌 시야에 연화의
얼굴이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그 얼굴이 너무도 처참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는 감사인사 대신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연화의 시선이 그와 맞닿았다.

검고 둥근 눈동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양어머니와, 평생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과, 태어나 이
나이까지 살아오던 마을이 전부.

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실패했다. 만희는 그녀를 품에 가둔 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겨우 연화가 말을 이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로…… 절대로요.”

현실을 부정하는 연화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안구가


메말라 아파 왔다.

“거짓이겠지요?”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한 채 그녀는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거짓이라고 말해 달라는 듯 물끄러미 보는 시선과 함께.

붉게 달아오른 눈매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만희는 자신의 심장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기분 나쁠 정도로 갈비뼈 밑에서 펄떡거렸다.

그는 여태까지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멋대로 살아온 이 나라의 왕이었으나, 지금 연화가


간절히 바라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

제사장 성현은 미친 듯이 집 안의 재물을 챙겼다. 침실에 있는 비밀금고까지 열어 패물과


금은보화를 짐에 쓸어 넣는 손짓에는 광기까지 어려 있었다.

방금 급한 소식을 전해 들은 터였다. 제사장의 명을 왕의 것처럼 받들던 내관 황씨가 왕의


화살에 맞아 처참히 죽었다는 비보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졸 하나를 불러 치유사
계집의 송환 과정을 소상히 물은 게 먼저였다고 했다.

‘아마 마을을 태우고 전부 죽여버린 것도 알게 되었겠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곧 자신을 잡기 위해 왕의 군사가 들이닥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궁에 심어놓았던 또 다른 내관이 급히 알려주어 도망갈 시간이
빠듯하나마 생겼을 뿐이었다.

‘그 천민 계집을 끌고 온 것이 누구의 공인데, 대체 어째서!’


제사장은 왕을 원망했다. 그는 손을 바삐 놀려 재물을 전부 넣은 짐을 하인을 불러 지게
했다. 발이 날랜 자였다. 빨리 가야 하니 둘만 떠날 예정이었다. 성현은 몸집이 자신과
비슷한 하인을 한 명 더 불러 자신의 옷을 입히고 신신당부했다.

“만약 누가 와서 묻거든 네가 나라고 답해야 한다. 제사장 성현이 나이니라, 하고.


알겠느냐?”

“예? 하, 하지만…….”

몸집이 둥근 하인은 난처한 듯 멈칫거렸다. 수염까지 나서 같은 옷을 입혀놓으니 얼핏


성현과 무척 비슷했다. 대신 하인의 옷을 입은 제사장이 발을 굴렀다.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냐?! 왕의 명이 있는데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서 그렇다. 집


안에 내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느니.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 내가 제사장
성현이니라! 알겠느냐?!”

“예, 예…….”

“좋아. 내 돈을 주지.”

성현은 주머니에서 종이돈 한 장을 꺼냈다. 엽전이 아닌 종이돈에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현은 지독히 인색해서 결코 하인들에게 돈을 줄 때 엽전이 아닌 것으로
주지 않았다. 종이돈을 받고 하인은 허리를 굽실거렸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쇼, 나리.”


멍청한 것. 혀를 차며 제사장은 간편한 복장으로 짐을 든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재빨리
집을 나섰다.

평민과 같은 복장을 입고 골목까지 걸어 나갔는데 저 멀리서 왕의 군사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평민처럼 지나갔다. 군사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우르르 성현의 저택으로 몰려갔다. 짐을 진 하인 천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요, 나리? 군사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쉿, 목소리를 낮춰라. 나리라고 부르지도 마.”

성현은 부르르 떨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택 쪽은 아직 고요했다. 최대한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걸었다. 뚱뚱한 몸이 흔들리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서둘러 번화가를 지나 숨죽여 일부러 뒷골목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하인 천씨에게 성문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천씨는 자신이 익히 아는
지름길로 걸었고, 두 사람은 오전 시간이 끝날 때쯤 성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성문 밖으로 삼삼오오 나가는 보부상들 사이에 섞여서 걸어가며 성현은 속으로 계산했다.

‘패물이 있으니 어딜 가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나…… 위험하니 몸을 의탁할 곳이


필요하겠지.’

제사장으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이가 수도 근방에 있었다.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진(鎭)을 지키는 장군 오유였다.
‘비록 낮은 신분 출신에 어린놈이지만 쓸모가 있겠지. 오히려 그래서 속여 넘기기는
쉬울지도 모른다.’

오유의 군대 거점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 걸린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는다 해도 그는


걸음이 느리니 그보다 한참 더 걸릴지 모른다. 아무래도 말을 얻어 타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성 밖의 주막에서 키우는 말을 한참이나 흥정한 끝에 샀다. 하인 천씨가 안절부절했다.

“저, 나리, 말을 한 마리만 사신다면…… 저는 어쩔깝쇼?”

“너는…….”

성현은 그를 훑어보았다.

패물이 많이 든 짐은 무거웠지만 말을 샀으니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한 마리


더 산다면 너무 돈이 많이 든다. 물론 그가 지닌 돈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액수였으나
하인 따위를 위해 말을 사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씨가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가 전부 들통


날지도 모른다.

“일단 국밥부터 한 그릇 먹을까? 배가 고프니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

“예, 나리.”
가뜩이나 오전 내내 무거운 것을 지고 걸어 배가 고프던 천씨는 식사를 하자는 말에
반색했다.

성현은 주막의 평상에 올라앉아 국밥을 한 그릇 시켰고 거기서 조금 덜어내 천씨에게


내밀었다. 한 그릇을 따로 시켜줄 줄 알았던 천씨는 시무룩해져서 그것을 받아 들고
먹었다. 그래도 먹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얼굴이었다.

“물을 한 잔 떠 오거라.”

성현은 우물을 가리켰다. 상 위에 번연히 물주전자가 있는데도 그랬다. 주인의 터무니없는


명령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천씨는 얌전히 우물로 가서 물을 길어 올려 펐다.

그사이 성현은 품에서 약을 꺼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먹는 수면약이었다. 의원이


과용하면 몹시 위험하다며 새끼손톱의 절반만큼만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던 약이다.

흰색의 가루가 든 작은 병을 그는 천씨의 밥그릇 위에 퍽 쏟아버렸다. 거의 정량의 수십


배가 넘는 가루였다.

천씨가 물을 가져왔을 때 제사장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그의 그릇 위로


자신의 국밥을 전부 얹어주었다. 자비롭게도 자신의 먹을 것을 전부 내주는 주인의 행동에
천씨는 기뻐하며 그것을 허겁지겁 다 먹어치웠다.

“빨리 일어나지.”

“예, 예. 그런데 나리, 말은 여기 있는데…….”


“잠시 저쪽 숲속에 볼일이 있어.”

천씨가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주막을 나와 숲으로 들어가는데도 그의 걸음걸이가 계속


흔들렸다. 계속 참다가 천씨가 눈을 비볐다.

“나, 나리. 제가 너무…… 이상하게 졸립니다. 눈이 안 떠지고.”

“그래?”

성현은 흘긋 그쪽을 바라보았다. 천씨의 얼굴은 하얗게 색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눈을 뜰 수가 없는 듯 필사적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주인이 멀쩡히 서 있는데 하인이 졸리다며 누웠다간 경을 칠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천씨의 눈은 계속해서 묵직하게 감겨 왔다.

“잠깐 쉬어갈까? 많이 힘든 것 같으니 잠시 눕도록 해라.”

“제, 제가 나리 앞에서 그럴 수는.”

“괜찮으니 누워.”

성현은 비틀거리는 하인을 끌어당겨 바닥으로 눕혔다. 그사이 제법 숲 속으로 많이


걸어들어 와 인적은 없었다.

마치 자는 것처럼 그의 머리 밑에 돌까지 받쳐 두고 성현은 천씨의 짐을 등에 걸머졌다.


휘청할 정도로 무거운 짐이었다.
천씨는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아마 짧은 시간 안에 숨을 거두리라. 길에서 벗어난 숲이라
쉽게 발견되지도 않을 것이다.

성현은 짐을 지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주막으로 돌아왔다. 귀찮은 자를 처리했으니 이제


목적지로 가야 했다.

***

만희는 눈앞에 와서 무릎 꿇은 자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얼간이들이 옷을 바꿔 입었다고 아예 다른 자를 잡아왔다 이거냐.”

급히 가느라 중급 무관과 군사들이 간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윗사람의 눈을 마주치면 안


되는 수국의 문화 때문에 지위가 차이 나는 자들은 매일 마주치는 사람이라도 높은 지위인
자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자는 성현과 아주 비슷하기까지
했다.

“옷까지 제 것을 입힌 걸 보니 아주 작정하고 도망갔군.”

73 화
이 궁 안에 제사장을 그렇게나 편드는 자가 있다는 말이지. 하기사 중앙전각의 내관이었던
황씨조차 그랬으니 누가 제사장의 편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귀족인 성현에게는 돈이
많았고 어떤 인간들은 매수가 참 쉬웠다.

왕의 앞에 꿇어앉은 자는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굴이 둥글고 살집이 많아


성현과 몹시 닮았으나 자세히 보면 햇빛 아래에서 일을 해 피부가 거칠었다. 제사장의
부드럽고 희고 살진 피부와는 달랐다.

“저, 저는 그저 제사장댁의 하인일 뿐입니다 전하. 주인 나리께서 잠시 어디에


다녀오시겠다며, 집에 주인 나리가 계시는 것처럼만 꾸미라 하시어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온데.”

“…….”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전하.”

우는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만희는 미간을 짚었다. 또 두통이 오려나 싶어서


내관이 화들짝 놀라 하인에게 조용히 할 것을 명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던 하인은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래서, 제사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느냐?”

“……주인 나리께서는 하인 천씨만 데리고 사라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하인 천씨라. 짐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어지간히 급하게도 도망친 모양이군. 만희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제사장을 꽤 잘
알았다. 머리가 좋은 자이고, 또한 욕심이 많은 자다. 집 안의 온갖 패물을 다 짐에 집어
처넣고 도망쳤겠지.

군사들은 이미 그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달려나갔다. 성문은 총 다섯 군데 있었고 과연


어느 방향으로 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평민의 옷을 입고 나갔다 하니 인상착의로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뚱뚱한 몸으로 과연 어디까지 가나 볼까.”

수도에서 성문을 벗어난다 해도 그 이후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곳의 진(鎭)이 관문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곳에도 전부 방을 뿌려 나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만희는 앞에 엎드린 하인을 내려다보았다. 살집이 있는 어깨가 울음을 삼키느라 떨리고


있었다.

‘어쩔까.’

예전 같으면 두 번의 생각도 필요 없이 검을 들었을 것이다.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따로


제물을 찾을 필요도 없다며 기꺼운 생각마저 들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감히 제사장을 달아나게 만든 죄인임에도 그랬다.

무엇보다 연화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피를 보는 일에 그녀는 언제나 안색을


굳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저자는 하옥해라.”

당연히 왕이 그를 단칼에 베어 죽일 줄 알았던 백관이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높은


옥좌에서 만희는 턱을 괸 채 무심한 눈을 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놀란 얼굴을 보고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뭘 그렇게 봐?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둬. 벌은 나중에 정하겠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군졸들이 들어와 하인을 끌고 나갔다. 여전히 굳고 겁에 질려 있었지만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에 하인이 울며불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외쳤다. 왕은 한숨을 쉬었다.

“이틀 뒤의 조례(朝禮)에는 수도 근방 진의 장군들을 전부 모이게 하라. 미리 방을


뿌리겠지만 장군들이 제대로 제사장을 잡을 수 있도록 내가 직접 명령할 것이니.”

“예, 전하.”

제사장 성현만큼은 목숨을 그냥 두어줄 생각이 없었다.

만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백관에게 해산을 명하고 일어섰다. 하인을 잘못 잡아왔던 군사들은
모두 죄를 물어 곤장형에 처했다. 그들 역시 전과 같았다면 전부 채찍이나 검으로 목숨을
빼앗았을 일이었다.
갑자기 몹시 피곤해져서 만희는 발길을 돌려 중앙전각에서 나섰다. 피로할 때면 으레
연화가 보고 싶었다. 지금 역시 그랬다.

‘지금 가도 되는 것인가.’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만희는 가만히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연화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녀에게 어물어물 마을의 소식을 알게 된다면 알려주마, 라고 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 외에 대체 뭘 더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함께 성현의 명을 받았던 자들을 수소문해 하나씩 잡아들이고 있지만 증언은 같았다.


마을은 불탔고 사람은 사라졌다.

‘그나마 죽이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가.’

마을 사람들이 통째로 사라졌다면 누군가 미리 알려줘서 도망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화의 양어머니의 인상착의를 물어 그녀를 찾는
방을 전국에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옮겨졌다. 그는 차마 연화의 전각에 들어서지 못하고 정원 너머 먼


발치에서 그녀의 창문 너머로 방을 살폈다. 언제나 그녀가 즐겨 앉는 창가에 지금도 연화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그녀는 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소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마치 인형처럼 굳어져 초점이 사라졌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연화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는 지키고 싶었던 가족이 없었고, 소중한 사람이
없었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잃었으니 슬플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책에서 읽은 듯이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일 뿐이었다.

만희의 심장이 아픈 부분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연화, 네가 슬프기 때문에.’

그녀가 슬프고 괴롭다는 사실이 몹시 못마땅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만희는 명치 부분을


눌렀다.

저 멀리 창 너머에서 연화는 고개를 기울였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 날렸다.


지난번과 같이 정원에는 전혀 불지 않는 바람이 연화의 주변만을 싸고돌았다. 마치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연화의 둥근 눈에 생기가 조금 돌아오고 어느새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져 이름 하나를 불렀다.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만희는 그것이 사내의 이름임을 알았다. 백호 님이라고
불렸던 그자의 이름. 아마도 연화의 정인일 사내.

화가 치밀어 올라서 만희의 적안이 더 붉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검자루를 쥐었다.

아마 그자가 앞에 있다면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을 것이다. 어떤 사내인지 모르나 연화의


눈이 저토록 아련한 감정에 물들게 하다니, 감히 저 여인의 얼굴을. 저런 연화의 눈을
만희는 전혀 몰랐다.
질투 때문에 눈앞이 검게 물들 정도였다.

백호라는 사내가 근방에 있다 해도 만희는 절대 연화를 그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에게 가서 연화가 행복해진다 해도 그랬다. 만희는 마음에 든 것을 손에서 놔줄 만큼
마음이 넓은 사내가 아니었다.

‘먼저 만났어야 했는가.’

연화의 저 애틋한 눈을 다른 사내에게 빼앗긴 채로 두고 보아야 하는가.

억지로 그녀의 몸을 잡아 궁에 매어두었지만 심장은 다른 이에게 속박되어 있다.

만약 연화를 좀 더 일찍, 그 사내보다 좀 더 먼저 만났다면 그녀의 심장마저 자신이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만희는 치밀어 오르는 화와 질투와 후회의 감정에 눈앞이 아찔해져서 나무에 기댔다.
미간을 누르며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정원의 여름 햇볕이 잔인할 만큼 뜨거웠다.

***

백호가 자신의 살을 내주면서까지 수국의 멸망을 지연시키려 했다는 것은 사방신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인간계를 청룡과 양분하여 다스리고 있는 주작은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두드렸다.
“재미있구나.”

주작의 붉고 굽슬한 머리카락은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이야깃거리를 들고 온 상대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가 얼른 이 이야기를 들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너는 재미난 이야기로는 세상 누구보다 뛰어나지.”

푸른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상대는 샘의 정령 청수희였다. 청룡이 보았다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을 뜨거운 주작의 기운 곁에서도 그녀는 태연히 앉아 담소를 나눴다.

“아무리 백호가 성정이 강하다지만 한낱 인간의 여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다니 조금


놀라운 걸.”

주작의 궁은 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비록 다른 사방신들과 달리


인간계에 자신의 거처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높이가 하늘을 찌를 정도이며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어 실상 다른 계라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세상의 구역을 정하던 무렵, 마음 넓게 청룡에게 인간계의 일부를 양보했으나 사실


인간계의 진정한 지배자는 그녀였으니 인간계에 자신의 거처를 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의 살점을 내주다니 그의 마음이 가늠이 되지 않는구나.”


“아주 순수한 애정이랍니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였으나 그곳에도 역시 물은 흘러 생명을 적셨다. 청수희가


이곳에 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주작에게도 간혹 들러 말동무를 하곤 했던
샘의 정령은 태연스레 신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셨다.

주작의 곁에 선 시종들이 천천히 깃털 날개를 흔들었다. 뜨겁지만 서늘한, 양면의 기이한


온도를 지닌 공기가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주작은 긴 적발을 쓸어내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으로 수많은 새들이 날고 있었다.

“하필이면 수국이람. 같은 인간계라도 내 영토에서 일어났다면 백호를 도와주련만.”

“그러게 말이어요. 게다가 한 시대가 저무는 시기라 더욱 곤란합니다.”

주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청룡이 인간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주작에 비해 매우


작았다. 말로는 절반이라 하지만 그녀가 다스리는 영토의 인간들이 훨씬 다양하고 부유하고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야 청룡은 바닷속의 주민들을 더 사랑하니 인간계 영토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사고라도 칠까 무섭군.”

그녀는 다소 걱정스러운 어조였다. 백호는 그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기적인
청룡이나 차갑고 어두운 현무와 비교하면 그들 둘은 상성이 좋았다. 백호가 다소 뜨겁고
다혈질인 성격이라서 주작은 그를 걱정할 때가 자주 있었다.

“백호 님의 살을 받은 이상 청룡 님이라도 함부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럴까. 하지만 청룡은 워낙 교활한 녀석이어서.”

비록 청룡이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청수희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청룡과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교활해질 수 있었으나 백호는 아니다.
청룡은 명시적인 단어 그대로의 뜻만 남겨둔 채, 약속의 의미를 얼마든지 비틀어버릴 수
있는 사내였다. 주작은 생각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렸다.

“수국이 이대로 멸망하지 않고 남은 생을 끌고 가는 것에 나는 별 반대 의사가 없어.


나쁘지 않다.”

“수국의 현재 왕은 대단히 폭군이라던데 주작 님이 보시기엔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 맞아. 흔히들 하는 평가로 본다면 폭군이 맞다. 그러나…….”

붉은 비단 위 금실과 은실을 교차해 수놓은 화려한 장포를 끌며 주작이 일어섰다.


석조기둥들을 타고 올라온 식물의 줄기에서 능소화와 장미가 피어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74 화

그녀의 정원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꽃이 피어 나비를 유혹했다. 불과 같은


생산력을 관장하기도 하는 주작의 궁이니 당연했다. 꽃들의 향은 지나칠 정도로 다양하고
강렬해서 폭력적일 정도였다.
허리를 넘어서도록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으며 그녀는 정원을 내다보았다. 만개한
색색의 크고 작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계절과 장소에 피어야 할 꽃들이 한데 모인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사방신들이


질색을 할 것이다. 아름다움이라곤 모르는 것들. 주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수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내 영토인 초국이다. 수국의 선대 왕은 성군의 자질을


보인다 하여 인간계에 소문이 자자했지. 그러나 초국의 백성들에게도 과연 그가 성군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

“현재 왕의 사촌형이기도 했던 선대의 왕은 전쟁에도 능해 초국의 국경을 짓밟았고 많은


수의 인간을 살해했다. 아마도 단일 전투에서 죽었던 최대 사망자가 거의 수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한동안 현무와 염라대왕이 바빴다.”

“그랬군요. 초국으로서는 타격이 엄청났을 사건입니다.”

“그래. 때문에 초국은 세가 기울어 한동안 대단히 고생을 했지. 상업과 외교에도 능했던
자라 교역의 통로도 막아버려서 사정은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그건 나로서도 어찌 해주지
못하니 좋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초국이 아직 멸망할 시기의 흐름은 아니었다. 다만 약화된 상태로 시간을 끌게 될


뿐이었다. 백성들은 빈곤한 상태에서 고통받고 이웃 국가인 수국의 군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때 수국은 상당히 부흥한 상태였지. 선대의 왕이 현왕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수국의 백성들이 살기 좋았을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흥망은 결국 서로를 얼마나 앞서느냐로 결정된다. 초국의 부(富)를 강탈해
자국의 발전에 사용했던 수국은 그로 인해 흥했다. 그러나 치세에 관심이 없는 왕이 왕좌에
오르면서 수국의 부흥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초국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기사 선악이란 상대적인 것이지요.”

“인간계처럼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자들로 점철된 곳은 더하다. 과연 선대의 왕이 살해한


인명이 많겠느냐, 현재 왕이 살해한 인명이 많겠느냐.”

아무리 만희가 미쳐 날뛰어 많은 자를 죽였다 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해 죽어나간 사람의


숫자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저승의 명부가 인간의 출신 나라를 구별하던가? 죽음은 아주
공평하게 만인에게 찾아온다. 그저 숫자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 왕은 선대 왕보다 죄를 덜 지었다. 개인이 쌓은 덕업과 원한이야 또


다른 문제겠지만.

주작은 신중한 얼굴로 손 위에 벌을 불러다 앉혔다. 꽃가루를 꽁무니에 묻히고 날던 노란


꿀벌이 침을 내밀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그녀는 예쁘다는 듯 꿀벌을 한동안
살피다가 곧 하늘로 날려 보냈다.

“백호가 빠졌다는 그 연화라는 자는 어떤 아이냐?”

청수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화가 어떤 사람인가, 오래지 않아 그녀가 답을 냈다.


“새처럼 가늘고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보는 것과 달리 심지가 굳어 단단하지요.”

“너도 그녀에게 호의적인 모양이구나.”

“예. 좋은 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어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호오, 약사여래라.”

주작은 조금 놀랍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보살의 가피를 받은 자가 아직도 인간계에 남아 있었단 말이냐. 여전히 애들 쓰고 있군.”

그녀의 웃음소리가 높았다. 그녀 역시 세계의 규칙을 지키는 사방신의 일원인 만큼 윤회의


굴레에서 중생을 빼내려 노력하는 부처와 보살들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유연한 사고를 지닌 주작은 그저 그들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중립에 조금 더 가까웠고, 인간계에 뿌려놓았던 보살들의 가피가 이제


많이들 흐려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전히 남아 있다니 조금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예, 그래서 그 치유의 이능을 갈구한 왕이 그녀를 데려갔지요.”

“불치의 병이라도 걸렸다더냐.”


“제가 본 바로는 원혼이 얽혀 덕지덕지 머리와 어깨에 붙어 있더이다.”

“아하, 그래. 개인적인 일로 사람을 죽여댔으니 혼령들이 가서 붙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저승의 찬 기운이 머릿속으로 파고들 테니 인간의 약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겠지요.”

주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청수희에게 눈을 흘겼다.

“너도 참 심술궂구나. 연화는 왕의 정인이 아니니 그저 데려와도 괜찮다는 걸 백호에게


이야기해 주지도 않고.”

“저 역시 인간계와는 속한 세계가 다른 몸, 함부로 끼어들어서야 곤란하지요. 신께 고하는


일이라면 곧장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작은 장난들을 치고 다니는 게냐? 뭐, 백호에게 이야기를 했다간 바로


수국이 뒤집어지겠으니 이해는 한다만.”

백호는 확실히 앞뒤 가리지 않고 연화를 뺏어올 것이다. 지금은 그녀의 선택이라 생각해
수국을 지켜주려 할 뿐이지만.

가능하면 청룡이 엿이나 먹었으면 좋겠는데. 주작은 그 얄미운 작자의 면상을 생각하면서
입을 삐죽였다. 영토끼리 국경을 마주 대고 있었으므로 청룡의 행태를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주작이었다.

“수국 내부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만, 백호는 조금 걱정되는구나. 저 이기적인 청룡이


과연 약속을 제대로 지킬지 알 수가 없어서.”
청수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은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혹여 무슨 문제가 생기거든 나를 불러라. 혹시라도 네가 알게 된다면 말이다.”

“알겠습니다, 주작 님.”

***

이틀 뒤 조례에는 수도 근방 진의 장군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간 성현의 행방은 묘연했다.


군사들을 잔뜩 풀었는데도 못 찾는 바람에 만희의 벼락같은 호통이 이틀 내내 떨어졌던 건
당연했다. 왕의 기분은 몹시 저조했다.

“감히 나의 명령을 어기고 사적으로 재물을 탐하기 위해 왕궁의 내관과 군사를 이용해 일을
저질렀다. 어찌 이리 간악한 자가 있단 말인가.”

만희는 노해서 옥좌의 손잡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제사장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왕조에 헌신하기는커녕 제 욕심을 채우려 급급하고 있다니,


나는 백관에게 제사장 성현의 빠른 체포와 징벌을 명한다.”

왕의 기세는 대단했다. 거무스름한 피부 위 새빨간 적안은 분노로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는 장군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왕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전과는 달라진 게 있었다. 예전 같으면 왕은 분노한 그 자리에서 군사나 내관의


목을 땄을 것이고, 시녀를 능욕하며 광증을 내보였을 것이다. 지금 그는 그저 무섭도록
화가 났을 뿐, 광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백관 중 기뻐하는 자가 많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수도 서쪽 진을 담당하고 있는 장군 오유는 그리 품계가 높지 않았다. 장군과 백관들의


행렬 중반 이후에 서 있는 그는 곁에 서 있던 장군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많이 차분하시군.”

“전에는 시녀 몇을 능욕하는 장관을 보여주시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쉬워.”

킬킬대는 소리에는 경멸과 혐오가 스며들어 있었다. 만희는 이미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잃어 이제 와서 부드러워진다 해서 한순간에 여론이 바뀔 리는 없었다.

오유는 느긋한 얼굴로 백관들의 머리 위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큰 사내라 뒤에 서


있어도 앞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였다.

한 번 더 제사장 성현을 제대로 잡을 것을 강조해 명령한 왕이 곧 해산을 명했다. 백관과


장군들은 왕에게 무릎 꿇어 경의를 표하고 물러나왔다.

나이 먹은 장군 한 명이 오유에게 다가왔다. 수도 자체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장군


황영이었다.

“황 장군.”

포권으로 예를 표하는 오유에게 황영이 미소 지었다. 그는 오유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앞서 흩어지는 백관들의 뒤를 따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 참으로 안정적이 되셨습니다. 그렇지요?”

황영은 상냥하게 말했다. 장군으로 늙은 자였으나 그는 학자이기도 했다. 길게 기른 희끗한


수염을 만지면서 그는 흘긋 왕의 전각 쪽을 보았다. 전과 같았다면 피비린내가 풍겼을
전각은, 지금은 조용하고 말끔했다.

“좋은 일입니다. 고질적이던 두통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천민 부락에서 데려온 치유사가


두통을 치유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 소문이 진짜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오유는 침묵을 지켰다. 황영은 의심이 많은 편이라 들려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늙은


장군은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느린 속도 탓에 주변에 있던 백관은 모두 앞서 나가
그들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치유사가 젊고 아름다운 계집이라지요. 어쩌면 왕께서 그 계집에게 마음을 주었을지도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일입니다. 어쨌든 거친 성정이 가라앉았으니.”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요.”

“좋은 일이죠, 좋은 일.”

황영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는 느긋하게 뒷짐을 졌다.

“왕이 자비로운 건 항상 나라에 좋은 일일까요, 오 장군?”


갑작스러운 물음에 오유는 조용히 황영을 바라보았다. 황영은 미소를 지었다.

“나라에는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다만 왕 자신에게는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오유의 말은 대담했다. 황영조차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가 둘러볼 정도였다.


어쨌든 궁내였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웃었다.

“여전히 담대하십니다.”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황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르치고 길러낸 이 젊은 장군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용맹한


자였다. 가끔 지나치게 용맹하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본래부터 자애로웠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폭정을 휘두르던 자가 갑자기 제정신을


찾고 자비로워진다면…….”

“…….”
“원한을 가진 자와 우습게 보는 자가 모두 생기게 되겠지요. 자비라는 것을 마음에 들인
이상 왕 자신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생기게 마련이고.”

폭군은 결코 성군이 될 수 없다. 살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잔인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밑에서 그를 잡아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생긴다.

황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라는 자리는 잔인함이 필수인 위치지요. 그러나 중간에 태도를 바꾼 자는,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고 전부 내다버리기 때문에 백성을 통제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오유는 미소를 지었다. 황영은 그가 급진적인 젊은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마도 언젠가
이 왕조를 뒤집을 이가 나타난다면 그건 바로 이 오유이리라.

75 화

“너무 급히 움직이지는 마십시오.”

황영은 노인답게 걱정이 앞서 말을 붙였지만 오유는 젊은이 특유의 대담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신중히 움직이겠습니다.”


웃는 얼굴은 해사했다. 관옥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을 보면 어느 대귀족의 자식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유는 황영이 길에서 주워다 기른 뒷골목의 고아 출신이었다. 만희의
치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빈곤함에 배를 곯아 부모를 잃었던 빈민층의 아이를
황영이 데려다 길렀다.

비 오는 날 비쩍 마른 소년을 주웠던 일을, 황영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여겼다.


어쩌면 시대가 자신에게 운명처럼 이 담대한 젊은이의 보호자 역할을 맡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처리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주위를 의식한 듯 정체를 삭제한 말에 오유는 어깨를 으쓱했다.

“최대한 구슬려 비료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황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비료라는 단어는, 아마도 비유적인 의미와 문자 그대로의 의미


모두가 될 것이다.

***

조례에서 돌아온 오유는 저택 안을 걸었다. 긴 복도를 지닌 고색창연한 집이었으나 장식은


소박했다. 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용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오유는 화려한
건축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인이 다가와 그의 옷과 검을 받아 들었다.

“그는 어쩌고 있느냐.”


“방금 일어나셔서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어지간히 게으르군. 아예 내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줄 착각하는 게 아니냐.”

젊은 장군의 눈동자가 불쾌하게 빛났다. 그는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잠시 방 안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찌는 듯 덥고 바람 한 점 들지 않았다.

‘이제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가.’

오랜만에 들른 수도는 한층 더 비참한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일부러 들어간 뒷골목에서는 빈민층의 백성들이 그를 보며 돈과 먹을 것을 달라고 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갈퀴 같은 손아귀들이 뻗어졌으나 그의 바짓자락을 차마 잡지 못하고
내려졌다. 무력을 지닌 젊은 장군의 몸에 손을 대도록 부하 장수들이 당연히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유의 부하들은 그와 친구 같은 관계인 동시에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곧 피바람이 불겠군.’

대담한 청년 장군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생각했다. 정작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면서도 그는 한 발 멀리 선 듯이 상황을 살폈다. 그런 객관성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했다.
반란의 준비는 착실히 되어가고 있었으나 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오유는 집에서
신는 비단신에 발을 밀어 넣고 제사장 성현이 감금되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허리춤에는
그가 즐겨 쓰는 곡도를 찬 채였다.

“오 장군.”

어제 낮 직접 이 서쪽 진으로 찾아온 제사장은 잡히자마자 오유를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쨌든 왕이 생포를 명령한 죄수이기 때문에 감금이 먼저였으나 오유는 그가 잡혔다는
사실을 기밀로 하라 일렀다.

제사장은 생각보다 아주 교활한 자였기 때문에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면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제사장은 들어선 오유를 보자마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대귀족이라고 대접한
좋은 음식과 비단옷이 한껏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내 장군과 같은 젊은이를 평소 참 좋아하지 않소.”

성현이 손바닥을 비볐다. 젊은 장군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오유의 얼굴에 감탄하며 한동안 살폈다. 그는 빈민층 출신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품
있는 미남자였다. 오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성현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와서야 간신히 귀족다운 비단옷으로 갈아입었으나 사실 올 때 입었던 하인의 복장이


훨씬 잘 어울리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유가 기묘한 미소만을 띤 채 말이 없자
성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장군, 이미 나를 잡으려는 왕명이 떨어졌을 것으로 알고 있소. 하지만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소.”

“저는 언제나 열린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열린 귀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니, 그대의 심장도 열어두어
주시오.”

성현은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 작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하면서


오유가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현은 차로 입을 축였다. 차의 향이 지나치게 강해 쓸 정도였다. 낮은 신분 출신이라


역시 차를 제대로 끓일 줄 모른다며 속으로 성현은 불쾌하게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 우리 수국의 왕조에 대한 이야기요. 좋은 말만은 할 수 없고, 매우 혁명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오만. 아,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들어주시오.”

짐짓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주로 그간 왕의 폭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이 오유가 아는 이야기였으나 미처 모르던 내용들도 나왔다. 이야기 중간 중간


맞장구를 쳐주는 장군의 태도에 신이 났는지 성현은 점점 더 흥분하면서 말했다. 그간 궁
안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실의 살과 거짓이 덧붙여져 과장되어 갔다.

“……그리하여, 왕은 나마저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오. 죄목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직언과


충정 어린 말들을 끌어다 왕을 능멸했다 했겠지. 대단한 자가 아닌가 정말.”
성현은 탄식했다. 그는 비단옷의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간 내 얼마나 충심을 다해왔는지 알지 않소, 장군. 나는 최선을 다해 왕을 모셨으며


또한 그분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직언을 해왔소. 그런데 대체 어째서.”

“그랬군요. 속사정은 몰랐습니다.”

오유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썹이 찌푸려지고 반듯한


얼굴이 걱정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성현의 얼굴 위로 순간 득의양양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오유는 그것을 눈치챘으나 비웃음을 목 안으로 삼켜냈다.

“그런데 오늘 조례(朝禮)에서 전하께서는 치유사의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대체


전하와 무슨 관계이기에 백관의 앞에서 이름을 말씀하시는지 궁금하더군요. 단순한
치유사라기에는…….”

오유가 짐짓 사정을 모르는 척하며 물어보았다. 그 물음을 던지자마자 성현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찻잔을 두드렸다.

“치유사 연화, 그 계집이 불행의 근원이오. 왕께서는 원래도 병이 있으셨지만 그 계집이


온 탓에 더 깊어지셨지.”

“저런.”

“왕의 뿌리 깊은 두통을 치유할 수 있다 장담하며 궁으로 밀고 들어온 계집이오. 천민


주제에 가장 큰 전각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지. 믿어지시오? 천민 주제에!”
성현은 무릎을 두드리며 화를 내다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상대가 오유라는 사실을 깨닫고
잠깐 움찔했다. 빈민 출신의 사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안심하고 제사장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꼬여낸 계집이오. 내게 힘이 있다면 그 계집부터 처단했을


터.”

“그렇군요.”

“말세에 언제나 영웅의 마음을 괴롭히는 여인들이 나타나지만 내가 직접 그런 광경을


목격할 줄은.”

성현이 답답하다는 듯 차를 마저 마셨다. 오유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사장, 왕명에 의해 당신을 체포해야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아아, 장군, 오 장군.”

성현은 재빨리 오유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오유가 움찔 놀라며 더러운 것이 닿았다는 양


털어냈다. 결벽증이 있는 사내라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낸 성현은 얼른 손을 떼었다.

“장군, 우리 사이에 더 숨기는 것은 없도록 합시다. 나는 다 알고 있소.”

“뭘 말입니까.”
“장군께서 왕명을 그저 받들기만 하는 멍청한 자는 아니라는 사실을요!”

오유는 잠시 말없이 탐색하듯 성현을 바라보았다. 제사장은 히죽 웃으며 손을 비볐다.

“젊고 활기찬 장수들은 전하께 불만이 많지요. 오 장군께서도 그렇지 않소.”

“……그것은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위험하다니! 전혀 그렇지 않다오. 위험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위험한 것이지. 저는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고 있소.”

성현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장군께서 무엇을 하든, 뒤를 밀어드릴 채비가 되어 있소. 제가 가지고 온 짐에 든


패물을 팔면 막대한 돈이 될 것이라오. 저를 숨겨주신다면, 곳곳에 숨겨놓은 제 재산을
드리겠소.”

“…….”

오유는 손을 깍지 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늙은 너구리 같은 작자는 기어코 살


구멍을 찾아 여기까지 기어든 것이다. 자신이 ‘살 구멍’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하지만 군자금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라 성현은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이었다.

만약 오유가 조금 더 사적인 욕심이 많은 자였다면 정말 목숨을 구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제 솔직하게 말합시다. 제사장께서도 솔직히 말씀하셨으니까요.”

“물론이오! 얼마든지 환영이지.”

“솔직히 돈을 주신다는 말씀은 믿기 힘들군요. 제사장께서는 도박으로 많은 재산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노골적인 오유의 말에 성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과연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온 재산 중


많은 부분을 도박으로 날렸다. 그러나 워낙 대단한 부자였던 집안이라 남은 것만도
충분했다. 그는 배를 내밀었다.

“그런 말씀 마시오. 내 집안의 부가 조금 줄었다 한들 다른 이들과 비교할 것은 아니니.”

“그러나 성문 안 저택 세 채 중 한 채를 이미 파셨다 들었습니다.”

“그 판 값을 내 숨겨두었지!”

“……글쎄요.”

오유가 영 믿지 못하는 눈치이자 성현은 선심 쓰듯 말했다.

“장군은 사람을 못 믿으시는군. 그렇다면 내가 한 군데 재산을 묻어놓은 장소를


알려드리겠소. 성문 남쪽 강이 교차하며 지나는 언덕 기슭, 큰 소나무 밑을 파보라
이르시오. 거기에 상자에 묻어놓은 보석이 있으니.”
성현이 미리 빼돌려 놓았던 재산의 일부였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비율이어서 이것을
내주면 사실상 그리 남는 것은 없었다. 따로 빼놓았던 재산은 저택 내부에 있어 지금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성현은 이것으로 오유가 마음을 돌리고, 남은 재산을 받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살려줄 것을 바랐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 부하를 그곳으로 보내보고 제사장의 말씀이 맞다면 거래를 하지요.
제사장께서 합당한 값을 치르신다면 제가 숨겨드리는 것으로.”

“좋소. 값이야 자신 있으니 나도 확실히 숨겨주시오.”

“물론입니다. 제 능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오유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반란군의 군자금이 더 필요했던 참이었다. 그는 당장


부하 장수를 불러 성현이 말했던 장소를 일러주고 상자를 파내 오도록 지시했다. 제사장은
불안하면서도 안심한 얼굴로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교활한 주제에 멍청한 작자. 오유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76 화

연화는 며칠간 계속해서 머릿속이 멍했다. 분명 그녀가 떠나올 때 마을 사람들과 어머니의


안전을 대가로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들이 없었다. 마을은 불타고
모두가 사망했다.
난 여태까지 대체 뭘 한 걸까. 여기까지 와서 왕의 곁에 붙어 그를 치유하며……. 연화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 직후를 제외하고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왕은 연화를 배려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었다. 적어도 몸만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내가 비단옷을 입고 금침에서 잠들고 있을 때…… 그분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렸겠구나.’

연화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불과 피와 비명이 가득 차 흘러내렸다.


마치 자신의 피부가 불에 타들어 가며 심장이 검에 찔려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꾸만 가빠지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동시에 고통은 현실이었다. 그들이 죽은 것 역시
현실이었다.

“어머니.”

평생 길러준 양어머니, 나이 먹고 병이 든 몸을 이끌면서도 연화에게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던, 품이 넓고 온화했던 어머니. 그녀는 눈두덩이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너무 울어서 새빨갛게 짓물러버린 눈가가 손바닥 밑에서 뭉개졌다. 약한 피부가 눌려


아팠지만 아픔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픔이 달가워서 연화는 눈을 마구 비비고 피부를
긁었다. 불에 타 죽어간 사람도 있는데 이런 따끔한 통증 따위가 대수랴.

“뭘 하는 거냐.”

그 때 그녀의 손목이 잡혀 눈에서 떨어져 나갔다. 연화는 엉망이 된 얼굴로 멍하니 앞에


가까이 온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적안이 분노를 담고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하.”

“눈이 짓물렀잖아, 그걸 멋대로 비비고 누르면 피부가 전부 상처를 입지 않느냐.”

만희가 허리를 일으켜서 밖의 시녀들에게 얼음과 찬 물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연화는


여전히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곧 대령된 냉수에 부드러운 수건을 적셔서
만희가 조심스럽게 연화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차가움에 그녀가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네 탓이 아니다.”

정확히는 내 탓이다. 만희는 그 말을 삼켰다. 애초에 연화를 끌고 오라 명을 내린 것은


그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책임은 모두 내게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생 악행을 저질러도 단 한 번도 그것이 자신의 죄라는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웠다.

자신의 책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바뀔 연화의 눈길이 두려웠다. 언제나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만희를 돌아보던 그 순하고 검은 눈동자에 들어찰 냉기와
혐오가.

그녀는 눈을 감고 얌전히 만희의 손길을 받았다. 멍하게 힘이 빠진 채, 그녀는 만희의


뒤쪽에서 기웃대기 시작하는 원혼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 여인이 아닌가…….】

【그래, 중간지대의 노파가…….】

원혼들은 살아 있는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전이받기 쉬웠다. 그들은 뚝뚝 끊어지는 문장을


중얼거리며 만희의 뒤에서 연화를 살펴보았다. 노랗게 빛나던 따스한 온기는 슬픔으로 인해
깊이 침잠했다. 그 온기를 기억하는 혼령들은 한 줌이라도 빛을 나누어 받기 위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연화는 눈을 뜨고 어두운 형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저승의 사방신인


현무가 백호에게 들렀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빌어서 어머니를 한 번 더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은 자를 만나 무엇 하겠느냐고 이성이 속삭였으나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죄수의 마차에 오르는 연화였으니, 죽어갈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만희는 눈을 깜박이는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슬픔을 풀어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무어라도 먹겠느냐? 그사이에 야위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손목에서 살이 내려 더욱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비단옷 밑의 그


마른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으면서 만희는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좋은 음식과 옷과
거처를 주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받아들이는 이가 아무런 감흥 없이 슬퍼하고 있는데.

그는 살며시 연화의 손을 무릎 위에 내려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진심이었다. 그는 생전 단 한 번도 누군가의 감정에 휘둘려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슬픔에


넋을 잃고 깜박이는 연화의 눈동자가 이리도 자신의 심장을 쥐고 흔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타까움에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연화는 잠시 무릎 위에 모아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결심한 듯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목소리는 가느다랗고 잠겨 있었지만 연화가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기뻐서 만희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청이라. 무엇이냐?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제가 부디…… 잠시만 마을에 다녀올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마을?”

“흔적을 보고 싶습니다. 남은 흔적이라도…….”

고개를 든 연화의 검고 둥근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만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가슴 속 두 가지 마음이 충돌했다. 연화가 최소한 자신의 어머니와 지인들이 죽은
자리를 보고 추모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마음과 그녀가 자신을 떠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는 마음.

“간곡히 청 드립니다, 전하.”

연화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자신이 염치가 없음을 알았다.
왕에게가 아닌, 백호에게.

어떻게든 백호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에게 저승에 있는 어머니의 혼령을 볼 수 있도록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애타게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의 염치없음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이토록 양심도 없는 여자가 있나,


그녀를 귀애해 주던 신의 만류를 저버리고 떠나온 주제에 다시 그에게 힘을 빌리려 하다니.

그러나 저승으로 가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면 심장의 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만희에게 엎드렸다.

“전하, 제발.”

“……가서 누구를 만나려는 것이냐. 설마 네 정인에게 가려는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찔린 연화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백호가 그립다는 이유로 가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은애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기색을 예민한 만희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적으로 치솟아 올라 참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네게 정인이 따로 있다는 건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정인이…… 아니오라, 제가 그저 그리워하는 분일 뿐입니다.”

“그리워하는 분?”

만희는 잠시 멈칫했다. 그 말은 사내 쪽은 연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저 따위가 감히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될…… 그런 분입니다. 그저 그분의 자비에 기대


은혜를 입었을 뿐.”

“…….”

“다시 한 번 그분의 은혜에 기대고자 하는 파렴치한 마음입니다.”

연화는 서글프게 눈을 내렸다. 슬픔과 수치심이 가슴을 물들였다. 백호는 자비롭게도


그녀를 아껴주었으나 그런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인간계로 돌아왔다. 어차피 붉은
달이 저물면 돌아올 운명이었다 해도 그런 식으로 먼저 신령계에서의 생활을 끝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를 사랑하느냐.”
“……예.”

그건 알고 있었다. 사내를 떠올리는 연화의 눈은 조금 전과 다르게 뿌연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시달리던 슬픔에서조차 마음을 건져낼 정도로, 그 사내에 대한 연정이
깊은 것이다.

순간 만희의 뱃속이 뒤틀렸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연화의 양팔을 붙들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에 꽉 붙잡혀 연화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왕은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활활 타오르는 적안이 불꽃같았다.

두통이 조금씩 시작되려는 것을 느끼면서 만희는 이를 악물었다.

“왕의 궁에 들어왔으면서 잘도 다른 사내를 입에 담는구나.”

“……예? 전하, 하지만…….”

“궁에 들어온 여인은 모두 빠짐없이 왕의 것이다. 그런데 감히 다른 사내를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내 앞에서 입에 담아?”

“하지만 전하, 저는 치유사로……. 시녀가 아니라.”

“닥쳐라.”

으르렁대는 소리는 위협적이었다. 연화는 두려움에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양팔을 잡은


손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 전하.”

만희의 강인한 손가락이 연화의 팔을 파고들었다. 멍이 남을 게 분명했다. 통증에 연화가


작게 신음했다. 왕은 흠칫 놀라서 손에서 힘을 뺐다. 그의 손에서 놓여난 연화는 팔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의 심기를 거슬렀다.

궁에 들어온 자가 감히 왕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려 했다. 왕을 향한 충심이 아닌, 정인을


향한 연심으로 가슴앓이를 한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만희의 분노는 갑작스러웠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엎드려서 용서를 구했다.

사실 그리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소중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죽어버렸다. 이제 백호


님은 뵈러 갈 수 없겠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왕의 허락이
없다면 그녀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도리 따위는 없었다.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군.”

만희는 이를 갈다가 일어섰다. 그는 연화에게서 돌아섰다.

“한동안 꼼짝도 하지 말고 이 방에서 나오지 말아라.”


“받들겠습니다.”

연화가 머리를 숙여 바닥에 이마를 댔다. 왕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나와


문을 거칠게 닫았다.

“안에 있는 계집을 절대 나가지 못하게 감시해라. 만약 방 밖으로 한 발이라도 디디게


만들었다가는 네놈들의 목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전각의 경비병들에게 노호성을 내리고 만희는 거친 걸음으로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왕의 기세는 대단해서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숨도 쉬지 못한 채, 그가 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화는 두렵지 않았다. 그저 으레 하던 대로 몸을 숙였을 따름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녀는 엎드려서 자신의 눈물이 깔개를 적시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뜨겁지도 못하고 미지근했다. 죽어버린 소중한 사람들, 스스로 떠나와 버린 백호.
허무함에 심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77 화

돌아나와서 만희는 분노가 극에 달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상처받은 맹수처럼 방 안을


걸어다녔다. 서서히 머리가 조여들고 있었다.
또다시 두통인가, 그 고통스러운 통증. 그러나 시작되는 뇌 속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만희는
어느 쪽이 더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저며지듯 아팠다.

‘내가 왜 그 계집의 정인 따위에게 질투를 느껴야 하는가.’

만희는 이를 갈았다. 자신의 심장이 불타는 듯한 이 고통이 연화의 잘못도, 그 정인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이 더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오로지 추한 것은 만희 자신뿐이었다. 아마도 온유한 정을 나누며 평범하게 행복했을


연화와 그녀의 정인 사이를 갈라놓고, 그녀를 억지로 끌어와 감금하고 있는 폭군.

‘그따위 천한 계집은 얼마든지 불러 능욕하고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연화가 대단한 미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라를 뒤지면 그만 한 미인이야 몇쯤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보아도 만희는 더 이상 연화 외의 여인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그녀의 손아귀에 펄떡이는 뇌와 심장이 쥐인 양, 그는 홀린 듯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육신을 상상해도 단숨에 연화의 생각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조여들어 왔다. 가슴이 함께 조여들어 와 숨조차 쉬기가 힘들어져 그는 헐떡이며


자신의 침상 위로 쓰러졌다.

“저, 전하, 치유사님을 오시라 이르겠습니다…….”

덜덜 떠는 목소리는 시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만희는 허리춤에 달린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고통에 찬 적안이 부르르 떨렸다.
또다시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손아귀에서 검이 철컹 하고 뽑혀 나왔다. 내관들에 의해 억지로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온
어린 시녀는 울면서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죽기 싫어서 대신 들여보낸 희생양이었다.

만희는 잠시 붉어진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깜박였다.

“……나가.”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보다 먼저, 연화가 매달리며 죽이지 말라고 하는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만희는
자신의 의지로 연화의 뜻을 따르고자 했다.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한층 더
조여들었으나 그는 견뎌내려고 발버둥 쳤다.

“치, 치유사님을.”

“안 돼. 절대로 데려오지 마라. 그리고 빨리…… 나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 누구도 나타나지 마. 피를 불러오는 손에서 전부 멀어져라.


만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이마를 침상에 문질렀다. 왕의 뜻이
확고해 보이자 시녀는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방을 나갔다.

처음이었다. 혼자 아무도 없이, 화풀이도 하지 않고 두통을 견뎌내는 것은. 과연 이


고통이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지만 그는 피식 웃었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는
심산도 들었다.
한동안 밖에서 걱정 가득하게 안을 살피던 내관과 시녀들은 왕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섬뜩하도록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비명은 때로 높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지쳐서
낮아져 갔다. 그르릉대는 짐승의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과연 치유사님을 불러오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양손을 잡고 물어보았다.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자 방에서는 비명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불안감에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왕명이긴 하나…… 어길 수밖에 없겠군.”

결국 내관 중 한 명이 연화를 불러왔다. 그녀 역시 몹시 지치고 힘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왕이 고통에 시달린다는 말에 별다른 불평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왕의 방은 쥐죽은 듯 조용한 고요만이 감돌고 있었다.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공간 안으로 연화가 발을 들였다. 굳이 따라 들어오려는 시녀와 내관들을 만류한 채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그가 연화의 청을 거절하며 화를 내기는 했으나 치유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세상


고통받는 자들을 모두 감싸 안는 것이 약사여래의 자비인 법, 어떤 자라도 여래의 손길
아래 편안히 잠들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힘에 대한 의무였다.

침상 위에서 만희가 엎드려 있었다. 거대하고 무섭던 왕의 뒷모습은 너무 고요해서 마치


죽은 게 아닐까 겁이 더럭 날 정도였다. 연화는 천천히 그의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간헐적으로 그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노란 빛과 함께 만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순간 만희가 그녀의 손을
쳐내며 일어나 앉았다. 놀라서 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적안은 지나친 고통으로 인해 실핏줄이 터져 흰자까지 전부 벌겋게 변해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 몸부림쳐서 머리는 산발이었고, 식은땀에 젖은 얼굴이 번들거렸다.

도깨비 같은 몰골을 하고 만희가 연화의 양어깨를 잡았다. 너무 거센 손길이라 피부에 멍이


들 지경이었다.

“전, 전하?”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으르렁대는 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오지 말라고…….”

짐승 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조심히 감싸면서 연화가 그와 눈을


맞췄다. 무서워서 무릎이 떨렸지만 그래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지금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제가 치유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
연화의 검은 눈은 부드럽고 순했다. 비록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찌들어 있었지만
만희를 향한 원망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눈에 넋을 잃고 만희는 손을 내렸다. 그녀의 눈
안에 있는 평화와 안식에 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매혹되었다.

이래서 너를 부르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만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조여드는 고통이
극심해 코 안에서 단내가 나는데도 연화의 얼굴을 보자 그것은 견딜 만해졌다. 두통은
여전히 구토가 날 정도로 심했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연화는 천천히 만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내는 더 이상 그녀의 팔을 잡지 않고 손에서


힘이 빠져 늘어뜨렸다. 가만히 그녀와 시선만 맞추고 있는 적안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

그녀의 눈에 만희의 뒤에 붙은 혼령들이 보였다. 그의 목덜미를 잡고 연화의 손을 잡아


오는 갈퀴 같은 손들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고 악착같았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손아귀를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약사여래의 온기를 나눠주었으나 원혼들이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뻥 뚫린 눈구멍을 연화의


코앞에 가까이 들이대고 원혼들이 중얼거렸다.

【이제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여인이여.】

【시간과 함께 원한이 깊어져 이 사내의 고통은 더 이상 줄어들 수 없다.】


‘제발, 물러가 주세요.’

연화가 애원했으나 원혼들은 고집스러웠다. 그녀에게서 약사여래의 온기와 빛을


빼앗아가면서도 탐욕스럽게 더 내놓으라며 그녀의 팔과 손을 잡았다.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체온이 점차 낮아지는 것


같았다. 최대한도로 힘을 짜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해 연화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연화야!”

만희가 그녀를 부르며 급히 흔들었다. 연화는 흠칫하며 혼령들에게서 눈을 돌려 만희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핏기가 빠져 가는 연화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냐. 너무 힘이 드는 게냐?”

적안에 담긴 뚜렷한 애정과 걱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연화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혼령들에게 힘을 빼앗겨 전신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체온이 낮아져 차가운 연화의 손을
눈치채고 만희가 놀라 그녀의 손을 잡고 연화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넓고 따스한 품이었다. 체온이 뜨거운 사내는 쉼 없이 그녀의 팔과 등을 쓰다듬으며


두드렸다.

“그만해라. 그만 두어라. 이렇게까지 몸이 차가워지다니.”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목소리는 애틋했다.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만희의 애정은 선명했다. 그의 성격만큼 혼란스러웠으나 동시에 눈을 감지 않으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연심과 걱정이 목소리에 드러나 있었다. 어깨와 등을 쓰다듬는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혼령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까이에 있었으나 다행히 거리는
조금 멀어져 있었다. 원혼들은 그러나 언제든 덤빌 수 있는 태세로 눈을 빛내며 그들의
주위를 돌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전하.”

원혼에 대하여 사내에게 말해야 할 때였다. 더는 그녀 혼자 간직하고 있을 비밀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주는 연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이미 마음을 준 상대가 있어
만희의 애정에 보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청룡은 수국의 궁 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아래를 굽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금색


눈동자 안 세로로 가느다란 동공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신의 약속은 지킨다. 백호 녀석이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아예 먼저 손을


써놓는 게 낫겠지.”
아무리 청룡이라도 사방신끼리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품 안에 든 백호의
살점이 주는 무게감을 만족스럽게 느꼈다. 좋은 거래였기 때문에 그의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를 가능한 늦춰달라니, 정말 드물게 듣는 요구다.’

시대를 빠르게 변하게 해달라는 기원은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반대의 경우는 처음이라


그는 잠시 고민했다.

청룡은 자신이 가호하는 수국의 상태를 잘 알았다. 빈민들은 고통받고 있었고 귀족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밖으로는 외세가 쳐들어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며 안으로는
평민의 반란군이 녹적의 이름을 달고 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왕의 치세가 허술한
틈을 타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느라 바빠 어느 누구도 반란의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다.

왕조 교체를 통해 시대는 변화한다. 반란군이 득세한다면 가장 먼저 궁을 점령하고 왕의


목을 쳐서 시대 교체의 증거를 삼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왕과
궁의 보호다. 아무리 반란군이 밖에서 득세한다 해도 가장 중요한 궁의 점령에 실패한다면
결국 진짜 시대의 흐름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78 화

결정을 내린 청룡은 서서히 수인(手印)을 맺었다. 왕과 궁의 보호를 위해 진을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가능하면 운명에 거스르지 않도록, 직접적인 타격이 아닌 빙빙 도는 미로에
가까운 진이었다. 공격 의사를 가진 인간들이 들어오더라도 죽지는 않고 그저 같은
자리에서 돌기만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만든 것이니 신이 오더라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만.”

궁의 밑으로 희미한 원과 글자가 빛나다가 사라졌다. 청룡은 싱긋 웃었다. 이것을 설치해


두었으니 나중에 백호가 그에게 약속의 증거를 제시하라며 들이대도 이 흔적을 보이면 될
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용궁으로 향했다.

이제 슬슬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바닷속 주민들을 위해


그는 깊은 바다 밑 땅으로 들어가 다음 해를 위한 준비를 해 와야 했다. 바다 밑의 땅에
묻혀 있는 청룡의 본신을 몇 번씩 뒤집어주어야 섬이 솟고 해구가 가라앉아 바닷속
주민들이 살기에 풍족한 땅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본신을 몇 번쯤 뒤집는’ 행위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행해야 지진이나 화산을 피할 수


있어, 적어도 몇 달 이상은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 동안은 밖에 나와서 수국의 상태를 지켜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나중에 백호가 와서


뭐라 한들 몇 달간 그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청룡은 자신이 설치한 진 쪽을
흘긋 내려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난 최선을 다했으니 나머지는 백호, 네놈이 알아서 해라.”

***

사영은 비록 자신의 아비만큼은 아니었으나 제법 수련을 오래 한 신령이었다. 아비에게


꼬리를 잘리고 힘을 빼앗겼지만 그 예민한 감각만은 남아 있어, 인간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눈치채고는 했다.
그녀는 공기 중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뱀은 혀를 통해 냄새를 맡는다. 얼마 전부터 수국의
공기 중에는 점차 비릿한 피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조만간 무슨 일이 나긴 하겠다.’

그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기분으로 정원의 연못 앞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수국의 왕은 폭군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오로지 그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정에 신하들이 반기를 들지 못하기 때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태였다. 사영은 신령이기 때문에 인간은 잘 몰랐지만 이 정도라면 누군가 일을 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영은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노리개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청수희가 건네주었던 물건이다. 백호의 반려만이 가질 수 있다는 노리개, 거래의


대가로 백호가 청수희에게 주었다던가. 이것을 가지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었지, 하며 사영은 생각에 잠겼다.

노리개는 푸른 비단에 붉은 보석이 장식된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부드러운 비단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윤기 흐르는 보석이 반짝였다.

‘이것을 지닌 자를, 세계의 규칙은 사방신의 반려로 인식한다고 했던가.’

청수희가 주며 해줬던 말이다. 굳이 백호뿐 아니라 사방신 모두에게 이런 물건이 하나씩


있다고 들었다. 규칙이 반려로 인식한대도 백호 본인이 코웃음 쳐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녀는 고요한 왕의 전각 쪽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왕은 다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연화도 쉽사리 치유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궁내는 고요했으나 안정된 것이 아닌 일촉즉발의 고요함이었다.
밤이면 때때로 왕의 고통 어린 신음소리가 전각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바람도 없는 공기 속에 연못의 수면에 동심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영은 조금 놀라서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맑디맑은 물속에 비춰지는 그림자는 사영 본인의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는 청수희가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수희 님.”

“오랜만이야, 사영 아가씨.”

밝은 목소리가 경쾌하게 웃었다. 그녀는 물속에서 손을 뻗어 사영이 들고 있던 노리개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

“이걸 가지고 있구나. 그래,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쓸모라……. 글쎄요. 무슨 쓸모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예요? 한동안 안 보였잖아요.”

오랜만에 보게 된 청수희의 얼굴이 나름 반가워서 사영은 조금 툴툴거렸다. 청수희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 보고 싶었나 봐, 사영 아가씨.”
“누가요?”

“아니야? 섭섭한걸.”

까르르 웃는 소리가 청명했다.

“실은 인간계 오가는 걸 청룡 님한테 걸렸었거든. 이제 그 양반이 바다 밑 땅으로 들어간


모양이라 다시 올 수 있게 되었어.”

“바다 밑 땅이요?”

“응, 그런 게 있어. 섬하고 해구 만들려고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러 들어가는 거.”

그러고 보니 신령계에서는 지렁이들이 땅 속을 돌아다니며 꿈틀거려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사영은 비슷하게 이해를 하면서도 지렁이와 용의 움직임이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는 사실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수희는 말을 이었다.

“조금 뒤숭숭해. 주작 님께 다녀왔는데 그분이 인간계의 흐름에 속도가 붙을 거라고


그러셨어.”

“……역시 그런가요.”

“응, 사영 아가씨도 가능하면 몸을 피하는 게 낫지 않겠어? 괜히 상관도 없는 인간계에서


싸움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하면 속상하잖아.”
상냥한 청수희의 제안에 사영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인간계에 온 목적도 달성했고. 연화를 자세히 살펴보고 미워하는 데 실패도


했잖아.”

……상냥하긴 하지만 심술궂기도 하다. 입을 삐죽이는 사영의 기색을 깨닫고 청수희는 애써


미소를 숨겼다.

그러나 사영에게서 나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아뇨, 전 그냥 이곳에 있을래요.”

“왜? 아니, 진짜?”

청수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아예 연못 속에서 고개를 내밀기까지 했다.


사영은 기겁하면서 그녀의 이마를 밀어서 물속으로 다시 넣었다. 꼬로록 하는 소리를 내며
청수희가 다시 가라앉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요!”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막 밀어 넣으면……. 그보다 왜?”

사영은 별달리 할 말이 없어서 입을 우물거리며 손톱을 만지작댔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냥…… 있고 싶네요.”

“…….”

“연화 님도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상황도 불안하고 그래요. 내가 있는다고 뭐 힘이


되지야 않겠지만.”

물속에서 청수희가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입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영 아가씨의 뜻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안전은 내가 보장 못 해. 알고 있지?”

“알아요. 그래서 여기 있겠다는 건데, 뭐.”

“생각보다 의리 있네. 아, 비꼬는 거 아니고 좋은 뜻이야. 칭찬이라고.”

사실 사영 자신 역시 왜 이곳에 머물고 싶은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니 자신의 눈으로 보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힘을 보태야 한다는.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 살고,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평생 뱀 일족의 전각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혈의 딸로만 살아왔던 사영으로서는 대단히 큰 결심이었다.

“좋아, 그럼 나도 상황을 지켜보다가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게.”


청수희가 생긋 웃었다. 사영은 수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다시 수면 위로
청수희의 흰 얼굴이 솟아나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로 흰 이마를 사영의
이마에 댔다.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사영 아가씨.”

“…….”

마치 나온 적이 없는 것처럼, 청수희의 신형은 금세 연못 속으로 사라졌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사영의 눈앞에는 이제 보통의 수면처럼 자신의 얼굴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마에 잠깐 느껴졌던 차갑고 습기 찬 피부를 기억했다. 사영은 곧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오지랖은 넓어서.”

어쩌면 그 투덜거림은 자신과 청수희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오유는 앞에 엎드린 부하 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성현의 말대로 쫓아가 그의 재물을


가져온 참이었다. 곁에 잔뜩 쌓인 짐을 보던 오유는 재물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펼쳐 쭉
읽었다.

“참 대단한 자로다. 이것도 일부일 텐데, 이렇게나 많은 재물을 땅 밑에 파묻어놓다니.”


보석이 수십 개였다. 그중에는 부호로 유명한 상인이 강도를 만나 빼앗겼다는 값진 것들도
섞여 있었다. 강도가 상인의 일행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데, 과연
그것들과 제사장이 한 패였던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보석이 한 번에 들어온 것은 나쁘지 않다. 비록 장물이기 때문에


처분해서 금이 들어오는 데는 한참 시일이 걸릴 것이나, 어차피 이만큼의 추가 자금이
필요한 시기는 조금 기다려도 괜찮다. 군자금이 필요하기는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닌 것이다.

짐을 전부 풀어 보석들을 앞에 늘어두고서 그는 만족스럽게 그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오유는 원래 재물에 욕심이 없는 자였다. 그의 만족스러움은 오로지 반란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데서 나왔다.

“제사장을 모셔 와라.”

“예.”

성현은 집의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다. 감옥이 아니라 나름대로 잘 갖추어진 방에 갇혀 있을


따름이었으나 제사장은 나름 불만이 많았다. 감히 대귀족인 그가 직접 투항을 했는데
초라한 방에 가둬놓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사장.”

“장군! 융숭한 접대에 내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성현은 자신의 말대로 보석을 파내 온 것을 보고 배를 내밀어 뽐냈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오유가 권하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차가 쓰다며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끓일 것을
요구하는 말에 오유는 선선히 그러라며 하인을 불러주었다.
“자, 아셨소. 장군? 제게는 이러한 재물이 이에 열 배만큼 있소. 집 안에 묻혀 있지요.
만약 집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밀 장소를 알려드리겠소.”

“그것 대단하군요. 역시 제사장은 대단하십니다.”

“축재(蓄財)란 나쁜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요.


자랑하고 싶지는 않으나 저는 그 방면으로 대단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오.”

성현은 은근슬쩍 자신의 재주를 내밀었다. 오유는 그의 얕은 수가 빤히 보이는 듯해 그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성현은 오유가 자신을 살려줄 거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치였다. 그는 배를 내밀고


다시 끓여온 차를 마시다가 몹시 못마땅해하는 소리를 하인에게 쏘아붙였다. 하인의 눈이
슬쩍 오유에게 돌아왔으나 그는 턱짓으로 나가라는 명을 대신했다. 하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밖으로 나섰다.

방 안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오유는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제사장께서 떠나오시기 전까지 왕께서는 최근 들어 어떠셨습니까. 그래도 잔인한 성정이


조금 무뎌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79 화

“……말도 마시지요.”
성현은 왕의 악행을 잔뜩 부풀려서 이야기했다. 만희는 수많은 사람을 죽여 굳이 더 부풀릴
것도 없는데도 지어낸 사실을 덧붙였다. 평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로 땅을 점거하는 등
자신이 했던 잘못들도 죄다 만희의 것처럼 이야기하며 그는 눈을 번뜩였다.

“나는 사실 장군과 반란군들에 심정적으로 대단히 동감하는 바요. 비록 그간은 나의 위치가


제사장이며 왕께 충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으나…… 그 간악한 폭정을 견디기는
힘들었소. 이제 왕이 나를 죽이려 든 이상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니.”

엄숙하게 선언하는 성현의 말을 들으며 오유는 웃음을 참았다. 글쎄, 왕보다 오히려 앞서서
악행을 저질렀던 자가 누구던가. 앞에 있는 사람을 바보로 아는 행태에 짜증과 화도 났지만
오히려 그 어리석음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작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성현을 훑어보았지만 자신의 말에 취한 제사장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젊은 장군은 보석을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럼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왕의 특이한 점은 더 없다는 겁니까.”

“흠……. 특이점이라.”

“알아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 말입니다.”

오유는 왕의 약점을 요구하고 있었다. 성현은 그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 그 치유사. 치유사 여자 말이오. 연화라는.”


“알고 있습니다. 왕의 두통을 치유했다지요.”

“그렇소. 그 여자를 왕이 총애해서 매우 아끼지. 내가 쫓겨난 것도 그 계집 때문이고.”

성현이 치를 떨었고 오유는 무감하게 턱을 두드렸다. 군사들이 잡으러 왔던 상황은 이미


성현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들었다. 결국 약한 여인을 처참히 대우하다가 제 잘못에 제가
발을 잡힌 거 아닌가.

“아마도 그 계집의 목줄을 쥐면 왕이 꼼짝도 하지 못할 거요. 아, 하지만 왕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자라 불과 며칠만 지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 계집을
제일 아끼는 것만은 분명하오. 나를 쫓아낼 정도로 말이야.”

“그래요……. 치유사 여자. 왕의 약점으로 알아두는 건 나쁘지 않겠군요.”

오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성현은 이제 목숨이 안전하다는 태평한 생각으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젊은 장군은 허리춤에 애용하는 곡도를 차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성현의 앞에 섰다.

“……왜 그러시오, 장군?”

제사장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유는 무심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입니다, 제사장.”


“…….”

“당신이 축재에 능한 것과 눈치가 빠른 것 모두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성현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그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앞에 체격이 좋은 장군이


버티고 서 있어 일어서기도 마땅치 않았다. 어쩐지 위압감 있게 내려다보는 오유의 앞에서
뚱뚱한 제사장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축재에 능해 빈민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렸으니 그것이 첫 번째 부정적인


면이요…….”

오유가 곡도를 빼 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눈치가 빨라 우리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이 두 번째 부정적인


면이겠지요.”

반란은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아야 한다. 성현은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빈민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누구보다 그들의 사정에 밝았기에 빨리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그 모두가
오유는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은 성현이 비척비척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빌었다.
“장군, 장군……. 내 말했지 않소, 이보다 몇 배나 되는 재물이 있다고. 내 집안에 묻혀
있으니 비밀 장소를 말씀드리겠다고.”

“그랬지요. 그러나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군요. 이를 어쩐답니까.”

오유가 싱긋 웃었다. 그는 천천히 곡도를 성현의 목덜미에 댔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이


살찐 목덜미 피부에 실금을 냈다.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 상처에 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었다.

“원래 내 성격으로는, 잘못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응당한데.”

“…….”

“어때요? 제사장. 당신이 선택해 보십시오.”

“무, 무엇을.”

“어떤 쪽이 더 좋으시겠습니까, 죄를 지은 대로 벌을 받으며 그 구차한 삶을 더 연명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생을 마감할지 말입니다.”

오유의 젊다 못해 어린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해 보였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의 미소는 미래처럼 찬란했다. 그러나 성현의 눈에는 저승사자와
다름없었다.

“최소한 자신의 마지막 정도는 스스로 정하게 할 만한 자비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왕과 나의 다른 점이겠지요. 자, 어떠십니까, 제사장.”
오유는 진심이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곡도를 늘어뜨리고 그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정말 성현 자신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 * *

얼굴의 절반이 타버린 이후 뱀 일족의 수장 사혈은 자신의 집에서 긴 칩거에 들어갔다.


이무기였던 그의 힘 역시 절반으로 깎여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수장이 사방신인
백호에게 벌을 받고, 수장의 딸인 사영은 꼬리까지 잘려 유배 갔기에 뱀 일족의 기세는
수그러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그 계집 때문이다.”

사혈은 이를 갈며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의 앞마당에는 뱀 일족의 수하인 수조가


엎드려 있었다. 사혈이 길게 찢어진 눈을 굴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 계집을 죽여야 해.”

사혈이 으르렁댔다. 가느다란 수염을 소중하게 길러 다듬고 있던 그는 얼굴이 죄다


녹아버린 후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한때 강인하고 교활하던 중년 남자는 이제
흉하게 비늘로 절반쯤 덮여 있는 모습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의 앞에 엎드린 수조는 덜덜 떨고 있었다. 뱀 일족의 주인이 망가진 것은 이미 꽤


시간이 되었다. 사혈은 언제든 수조처럼 작은 새 따위는 삼켜버릴 수 있는 강한 뱀이었다.
뱀 일족의 한낱 수하인 그를 굳이 불러다 놓고 술을 마시며 분노를 토로하는 이유를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 사혈 님……. 부디 고정을.”


“고정? 고정이라. 고정이라! 화를 내지 말라 이거겠지!”

불을 뿜는 듯 분노가 타올랐다. 취기로 흐려진 노란 눈이 번들거렸다.

“내가 화를 내지 않는다고 내 처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제 너 따위가 내


기분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갈데없는 분노는 기이한 방향으로 터진다. 소리를 지르고서 그는 손을 떨면서 수조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넘실거려 수조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가 나앉은 정원 한켠에는 인적이 아예 없었다. 모두가 사혈의 분노에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어 쥐죽은 듯 고요했다.

“더러운 계집.”

사혈은 이를 갈면서 다시 술을 마셨다. 술잔을 들고서 갑자기 그는 킬킬대면서 웃었다.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술잔에서 맑은 술이 넘쳐 흘렀다.

“내 가만히 둘 줄 아느냐.”

뱀 일족의 수장은 백호에게서 벌을 받은 이후 계속해서 실의에 빠진 채 술을 마셨으나


신령계의 소식에 귀를 닫지는 않았다. 그 계집이 다시 인간계로 갔고 그 때문에 백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소식 역시 들었다. 정식 반려로 들일 듯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결국
그 꼴이다. 그 계집 때문에 자신의 얼굴은 이 꼴이 되었고 힘은 절반으로 깎여버렸는데.
그는 술에 젖은 손을 들어 비늘이 드러난 얼굴을 쓰다듬었다. 흉하게 드러난 비늘은 부덕의
소치다. 겉으로 명명백백히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벌이었다. 사혈은 독한 술을 한 번에
부어 넣고 히죽 웃었다.

“난 그 계집이 명대로 죽지 못하길 바란다.”

저승사자는 탐욕스럽다. 명분만 만들어준다면 그들은 언제든 지상의 모든 영혼을 저승으로


끌고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중요한 건 미끼를 던지는 것이었다.

“한 번쯤 해볼 만한 도박이지.”

사혈의 찢어진 눈이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백호와 연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짓눌러 죽이고
싶었다.

힘만 있었다면. 그러나 그가 용이 되기를 선택했어도 사방신과 어깨를 겨룰 수는 없다.


그것만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수조, 네놈.”

“예, 예 사혈 님.”

수조가 황급히 대답했다. 눈은 결코 들지 않아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너는 아주 오래 뱀 일족에 봉사해 왔지. 안 그러냐.”


“그렇습니다.”

“내 너에게 제대로 된 보상 하나 준 적이 없는 듯하구나. 이번 기회에 상을 주어야겠다.


그러나 아무런 명목 없이 상을 줄 수는 없으니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느냐?”

사혈의 목소리는 갑작스럽게 달콤하게 들렸다. 수조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뱀의


눈은 함부로 마주 보면 안 된다. 눈을 바라보면 사냥감을 현혹해 마비시키는 자들이었다.

“부탁이라 하시면…….”

“별것 아니다. 내가 주는 편지를 들고 저승에 한 번 다녀오면 된다.”

“저, 저승 말씀이십니까.”

수조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과연 그를 따로 불러 술을 마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땅에 이마를 대며 간절히 말했다.

“저승은…… 겁 많은 제게는 너무도 멀고 무서운 곳입니다. 부디 다른 이에게 명을


내리시면.”

“먼 길이니 네가 다녀와야지. 가장 몸이 가볍고 빠른 새 아니더냐.”

“하오나 저는 힘이 없어 가는 길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다른 이에게…….”


벌벌 떠는 수조를 내려다보며 사혈이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는 설득하기도 귀찮아져서
말없이 수조의 머리통을 흘끔거렸다. 그냥 다른 놈을 찾고 이놈은 그냥 여기서 먹어버릴까.
새를 맛본 지도 오래되었다.

보통 신령계에서 일반 금수가 아닌, 덕을 쌓아 신령이 된 자들끼리 잡아먹으면 중죄로


처벌받았으나 사혈은 개의치 않았다. 이 깊은 땅 밑 전각에서 새 한 마리쯤 없어진대도
대체 누가 알아챌 것인가.

사혈에게서 말이 없고 대신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챈 수조가 거의 울기


직전이 되었다. 그는 사혈이 어떤 성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서를, 제발.”

“그래서, 내 부탁을 못 들어주겠다?”

사혈은 천천히 술잔을 톡톡 두드렸다. 뱀 일족 특유의 긴 손톱이 자기 표면에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혈은 그저 수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래서는 안 된다. 수조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선택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느냐, 아니면 목숨을 걸고 저승에 다녀오느냐 둘 중 하나였다. 사혈이 작정하고 그의
목숨을 취하려 한다면 수조는 이 자리에서 살아서 걸어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저승은 아주
낮은 확률로라도 살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떨면서 슬쩍 시선을 올려 사혈을 마주 보았다가 기겁을 하고 다시 땅에 이마를


박았다. 사혈의 눈은 이제 거의 시뻘건 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겠느냐.”
묻는 말투만은 부드러웠다. 수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구나.”

기꺼운 듯 사혈이 웃었다.

80 화

그는 품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 편지를 한 장 적어 접었다. 그리고 약초를 말려 담은 향낭(


香囊) 두 개를 꺼내 편지와 함께 수조에게 건네주었다.

“붉은 향낭을 던지면 저승사자가 향에 끌려 그곳으로 올 것이다. 그러면 이 편지를 그에게


주면 된다. 그 후 저승사자가 보여주는 저승의 문서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오거라.”

“저, 저승사자요…….”

“그래. 명부에 백호의 반려가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말이다.”


말만으로도 무서웠다. 지상의 모든 존재는 저승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사방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저승의 명이란 지엄하기 짝이 없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푸른 향낭은 저승의 혼령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향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꼭


이것을 품에 지니고 다녀라.”

“예, 예. 꼭 유념하겠습니다.”

“급한 일이니 이걸 가지고 당장 저승으로 떠나라. 돌아오면 내 아주 큰 상을 내려주지.”

사혈이 히죽 웃었다. 수조는 떨리는 손으로 세 가지 물건을 받아 품에 넣었다. 절을 하고


급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혈은 마지막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저승의 명부는 다양한 형태로 적힌다. 이름이 명시적으로 적힐 때도 있었고, 죽을 자의


지위나 더 나아가서는 숫자와 지역만 올라갈 때도 있었다. 영혼들을 끌고 가는 저승사자는
그저 저승의 주민이 늘어나는 것을 기꺼워하는 자들이었다.

죽을 운명이 아닌 자가 죽어버리면 명부에는 갑작스럽게 없던 자리가 하나 생겨난다.


이름도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무명(無名)의 자리다. 그 자리에 어떤 영혼이
지목되어 끌려갈지 아무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저승사자가 죽은 자를 놓치는 경우는
없었지만…….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 명부의 빈자리에 그 계집의 영혼을 끌고 가라고 하면, 저승사자가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없다.’
저승의 일에 손댄 자는 염라대왕의 앞에 끌려가 108 층의 지옥 맨 밑바닥에서 영겁의
세월을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사혈은 히죽 웃으면서 텅 빈 술병을 두드렸다. 뭐 어떤가.
지옥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이무기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지.

수조는 저승사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뿐 아니라 ‘죽을 운명이 아닌 자’인데 죽게 되는


역할까지 맡게 될 것이다. 참으로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쓰임이다 하며 사혈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 * *

“정말 지금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호접이 다소 어두운 얼굴로 묻자,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도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안정이 되어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심시키려는 백호의 말에도 나비의 신령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녀는 날개를 파닥이면서
양손을 꽉 쥐었다.

살점을 청룡에게 주었다는 것은 비단 육체적인 타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세계의


영양분이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는 뜻이며, 백호 개인적으로도 그만큼 능력과 육신이
손실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만큼 큰 값을 치른 것이다.

그는 당분간 쉬면서 손실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사방신인만큼 쉬면 빠르게


수복된다. 그래서 백호는 당분간 가장 높은 산맥의 가장 깊은 동굴에서 칩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치졸한 욕심도 조금 가라앉지 않을까.’

백호는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삶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돌봐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애써 잠재웠던 애욕과 그리움은 크기를
키웠다.

궁 내부를 돌아보면 발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사뿐사뿐 걸어오던 연화의 모습이 보였고


정원에서는 토끼와 놀던 그녀가 보였다. 맑은 꽃차를 마시면 그 향기에 섞여 연화의 체향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간계로 내려가 그녀를 데려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 더 백호를


미치게 했다.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그는 청룡이 살점을 베어 내간 가슴부터 허리까지를 쓸어보았다. 비록 상처는 회복되었으나


그 자리는 전과 같지 않아 허전했다. 진기가 회복되지 않아 그럴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쓸쓸함과 합쳐져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공허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다만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곧 상제 폐하를 뵈러


가기도 해야 하니까.”

“예.”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를 깨우러 오지 말거라.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때가 되면


내가 일어날 것이다.”
“……예.”

혹시라도 연화 님의 신변에 변고가 일어나면 어쩝니까라는 말이 호접의 목구멍까지


기어나왔으나 그녀는 애써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칩거까지 결심한 백호의
결심을 그녀가 흐트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묘우의 말대로 애초에 인간과 연이 닿지 않으셨던 쪽이 좋았을지도.’

그녀는 연화를 좋아했지만 힘들어하는 백호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호접은 백호의


옷매무새를 좀 더 다듬어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호 님.”

“그래. 아랫것들은 그사이에 묘우와 함께 잘 보살피거라.”

인간계와 달리 신령계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평온한 편이다. 묘우와 호접이 잠시 맡는다


해도 별일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발을 떼어 바람을 밟고 날아올랐다.

시원하고 서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습기가 찬 대기이기도 했다.
신령계의 하늘은 계속해서 어둡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백호의 기분을 반영한 날씨는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이래서야 다스리는 영토와 주민들에게 미안할 일이다.

‘그러니 이제 아예 마음을 정리해야지.’


가느다란 새처럼, 어느 순간 그에게 날아와 손끝에 앉아 지저귀던 여자. 첫 만남이
거칠었는데도 그 두려움을 감내하고 곁에 머물러주었던 여인.

‘애초에 인간의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던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백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갑고 공기가


습했다. 인간계에 머물고 있을 그의 여인은 아마도 정인의 부드러운 품에서 차가운 바람
따위는 느끼지 못하고 안락하게 지낼 것이다. 그거면 족하다, 하며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긴 백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립고 보고 싶다. 지금도 눈앞에는 연화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름다운 긴 흑발과
작고 부드러운 얼굴. 그에게 매달려 침대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허덕이던 입술과, 품 안에
안겨 하늘을 날 때 설렘과 긴장감에 물들어 있던 눈. 조심스럽게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으며 가슴에 머리를 기대던 그 감촉까지도.

잊어야 할 때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쉽지 않았다.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 붉은


심장이 갈비뼈 아래에서 퍼덕이며 날뛰었다. 기력이 떨어져 감정을 억누르기가 더
힘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건방진 수국의 왕을 짓눌러 버리고 연화를 끌고라도 오고 싶었다. 백호


자신도 여태까지 미처 몰랐던 폭력적인 감정이 심장 안에서 날뛰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그의 한쪽 손에는 인간의 피가 묻고 다른 쪽 손에는 연화를 끌어안고 있을 것
같았다. 정인과 헤어져 슬프게 울고 있는 그녀를.

연화의 우는 얼굴을 생각하고 백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신의 인내심으로도


고통을 헤아리고 견뎌내기가 버거웠다.

* * *
연화는 조심스럽게 왕의 곁에 앉았다. 두통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희는 지독히
지친 얼굴이었다. 연화는 내관이 두려워하며 은쟁반에 받쳐 가지고 온 광목천에 물을 묻혀
왕의 이마를 닦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짙은 색의 피부 위에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연화는 고민했다.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그녀는 녹초가 된


왕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침상에 누운 채 그는 붉은 눈만을 껌벅이고 있었다. 이전보다
유달리 더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연화는 천을 조심히 은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전하.”

“…….”

대답은 없었지만 말해 보라는 듯 만희의 눈이 연화를 향했다. 이전에 없이 힘이 빠져


보이는 그 붉은 눈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연민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연화 자신 역시
지치고 슬프고 힘이 든 상태였으나 그녀는 천성적으로 다른 이가 힘든 모습을 보기
힘들어했다.

만희의 지친 얼굴을 마주하고 연화는 고민했다. 지금 그에게 원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옳은 일일까? 예전과는 달리 원혼을 물러나게 하는 데 힘이 더 많이 들었고, 그들의 원한
역시 더 커졌기 때문에 만희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신경이 너덜너덜해졌을 그에게
과연 과거의 잘못에 대해 말한다는 게 잘하는 짓일까.

하지만 더는 원혼을 물러나게 할 자신이 없었다. 가능하다고 해도 몇 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야 했다. 여래의 온기로도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이제 만희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두통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연화는 침착하게 말했다. 난데없는 말에 만희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야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하소서. 그동안 저 역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나


고민했기에.”

그녀의 입술에서 한숨이 샜다. 만희는 비척거리면서도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고 연화는 똑바로 앉아 만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적안에는 아직
핏발이 서 있었으나 맑고 제정신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더 정확히 말해 보아라.”

만희가 요구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두통은 육체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사오나…… 전하의


뒤에 갈퀴 같은 손을 내밀어 매달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승에 가지 못한 혼령들입니다.”

“…….”

“저승의 주민들은 얼음장과 같이 찬 몸을 지니고 있으며, 산 자와 접촉할 때마다 생기를


앗아갑니다. 그들의 손아귀가 살아 있는 자의 몸에 닿을 때마다 고통과 통증이 샘솟아
전하께서 고역을 겪고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왕은 가만히 침상에 기댔다. 그는 연화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헛소리 말라며 단칼에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이가 연화였기 때문에
만희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혼령이라. 내가 죽인 자들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만희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래, 그간 내가 직접 죽인 자들이 많기는 했지. 그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쌓아온 원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에는 저항 한 번 못 하더니 죽어 귀신이 되어 내게 복수를 한다 이거로군.”

악의적으로 비웃는 듯한 말에는, 그러나 힘이 빠져 있었다. 연화는 시선을 내려서 그를


외면했다.

“처음에 왕궁으로 와 전하를 치유했을 때는 혼령들이 처음 접하는 약사여래의 온기를


조금만 얻고도 물러났지만…… 지금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81 화
연화는 자신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혼령들에게 온기를 빼앗겨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정도라면 조금 쉬면 바로 돌아오겠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혼령들은 점점 더 힘을 얻었고 바라는 바도 커져 갔다.

“제대로 제사를 지내 혼령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돌이키지 못할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만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이키지 못할 일이라. 연화는 분명 만희의 죽음을 일컫는


것이리라.

‘죽음이 두려운가?’

만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뻔히 알았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 아주 어려서부터 그래 왔다.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제사라, 그 많은 넋들을 위로해 주려면 아주 큰 제사여야겠군. 내가 죽인 이들의 숫자가


적지는 않으니.”

“그렇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의식을 준비해야 다소라도 원혼들이 물러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연화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감이 어지간한 공물이나 제사로는 원혼의


한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만희는 차갑게 웃었다.
“그러나 어쩐다,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은 이미 도망가 버렸고 무능력한 수하들은
며칠째 잡지도 못하고 있으니.”

“…….”

“제사장이란 본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자격이 있는 대귀족만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제사를 올릴 수 있는 것. 특히나 국가와 왕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말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을 새로이 가려 뽑아 지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사장은 내가 뽑는 것이 아니다. 귀족들이 때를 보아 적임자를 추대해 올리는 것이지.”

만희는 머리를 짚었다. 귀족들의 절차란 복잡하고 느리기 짝이 없다. 연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루빨리 진행하심이 옳을 줄로 압니다.”

“……알겠다. 어쨌든 노력은 해봐야 하겠지.”

그 자리에서 왕은 내관을 불러 재상과 백관에게 전할 말을 알렸다. 고약한 원혼의 원한을


풀기 위해 큰 제사가 필요하니, 빨리 제사장의 자리를 채울 적임자를 골라 올리라는
명이었다. 그는 명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만희는 연화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간혹 시선이 마주쳐도 먼저
눈을 돌리는 것은 그였다. 연화는 이상하게 여기다가 곧 이유를 깨닫고 저 역시 고개를
숙였다. 만희가 숨기고 있던 붉디붉은 연심을, 그녀 역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만희가 가여웠다. 비록 잔인한 사내였으나 동시에 안쓰럽고 연민이 들었다. 하지만
연정은 아니다. 그녀의 심장은 백호에게 주어버려서 남은 조각조차 없었다. 만희는 체격이
좋고 건장한 사내였으나, 그가 아무리 다정하게 군다 한들 연화는 그를 남자로서 볼 수
없었다. 아예 그럴 만한 마음이 그녀에게 남지 않은 탓이다.

“연화야.”

만희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그녀를 불렀다. 손끝을 잡아 오는 사내의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왕은 시선을 마주치며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손이 차구나.”

“그들에게 온기를 나눠준 탓에 이리 되었습니다. 조금만 쉬면 나아질 일이니 너무 염려


마셔요.”

연화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정인을 향한 연모가 아닌, 병자를 향한


연민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곧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만희의 미간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연화는 모르는 척했다. 만희의 연심에 그녀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심히 일어서서 물러가기 위해 절을 했다. 만희는 멀거니 물러서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러가겠나이다, 라는 작은 인사를 끝으로 문밖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이
사라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늘고 예쁜 옷자락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비워낸 머릿속에, 상념이 가득 차올랐다. 연화를 향한 연심과 그것을 빌미로 한


욕망 두 가지가 한꺼번에 용솟음쳤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모든 상념을 내리눌렀다. 지금
이것들이 솟아올라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혼령들이 만희에게 원한을 가지고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근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만희의 죽음이라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 와서 죽음이 꺼려지는 건 연화 때문이었다. 만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연화가 그녀의 정인을 잊게 된다면, 그때는 비로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연화를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긴 어둠과 같은 인생 속 생전 처음으로 보게 된 빛과 같은 여인이었다.

* * *

수조는 날개를 퍼덕였다. 비록 뱀 일족의 수장인 사혈의 명을 받고 거역할 수 없어


날아오긴 했으나 역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일은 꺼림칙했다. 심지어 날아가야 하는
세계는 다른 곳도 아닌 저승이었다.

차라리 인간계나 상제의 치하에 있는 천계라면 조금 더 마음이 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승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저승의 주민들은 모두 지상 위의 세상에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든 다시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저승에 발을 들이면,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혼령의 흥미를 끌게
된다. 온기와 생명력을 빼앗아가기 위해 산 자를 머리통부터 집어삼키려는 본능을 지닌
것이 저승의 주민이었다.

하물며 작은 새의 모습을 한 그 정도는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사혈에게 받았던 파란색의 향낭만 아니라면 진작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독과 약이
절묘한 비율로 섞인 주머니에서 풍기는 향내는 저승의 주민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연 사혈 님 말씀대로 하면 되는 것일까.’

두려움에 찬 채로 그는 날아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떠도는 혼령들이 가득한 중간지대를


넘어갈 때부터 이미 저승의 주민들은 그를 주목했다. 파랗고 작은 새이니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껏 날개를 펼쳐 향내를 풍기며 날갯짓을 했다. 산 채로 생기를 빼앗겨
죽지도 살지도 못한 존재가 되어 세계의 중간에 걸쳐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저승사자를 만나 편지를 전달하고 저승의 문서에서 이름을 확인하라니.’

사혈이 내린 명마저도 찜찜했다. 저승사자를 만나 망자의 목록에 백호의 반려와 수국의


왕이 올라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과연 저승의 일을 하는 자가 겨우 새의 신령에
불과한 자신을 만나줄까 싶었다. 그러나 사혈은 향낭을 하나 더 주며 웃었다. 그것은
붉은색이었다. 혼령과 저승사자를 모두 이끌어 모은다고 했던 향낭이다.

살펴보니 장례에 쓰는 향이었다. 넋을 달래 저승으로 이끄는 향내이기에 망자들을 모두


만족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가지고 갈 때 조심해야 한다. 혼령을 쫓는 파란색의 향낭과 넋을 달래는 붉은색의


향낭, 두 개를 헷갈리면 너는 저승의 주민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난다. 사혈의 경고대로 그는 지금 품 안에 파란 향낭을 매달고 날고
있었다. 붉은 향낭은 조심히 감싸 상자에 넣어 봉인한 상태였다.

어쨌든 사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수조는 어쨌든 뱀의 일족 밑에서 대대로 일을


받아먹고 사는 처지였고, 사혈의 명을 거역한다면 당장 오갈 곳이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제대로 다녀온다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도 했다.

‘다녀오기만 하면 상도 받고 쉴 수도 있을 테니.’

요즘의 사혈은 공포스러웠지만 백호에게 다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주인이었다. 적어도 사는 데에는 문제없도록 강력한 보호를 제공해 줬기 때문이었다.

수조는 더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중간지대를 지나며 혼령이 아닌 묘한 형체들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경계를 지나 저승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뼈를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저승의 주민들이 그에게서 멀리 거리를 두고 웅성거렸다. 품 안의 향내 때문인 듯했다.


그는 자신감이 조금 붙어서 더 깊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저승은 말 그대로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했다. 일반적인 혼령들은 첫 번째 저승에서


모든 죄와 벌을 마치고 나와 새로운 윤회의 굴레에 들어가지만 고약한 자들의 넋은 거기서
용서받지 못하고 더 밑바닥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108 개의 층이 있다고 하던가, 끝없는
지옥의 무저갱은 잘못해서 저승에 발디딘 자마저 끌어당겨 빨아들인다고 했다.

저승의 강 앞에 서서 수조는 조심스럽게 붉은색의 향낭이 담긴 갑을 꺼냈다. 그는 재빠르게


한적한 강가에 향낭을 던지고 먼 덤불 뒤로 물러섰다.
곧 그 냄새에 혼령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생전 그들을 사랑하던 자들이 피워주었던
마지막 이승의 냄새다. 가지각색의 혼령들이 향낭의 주변에 모여서 그 향기를 맡으며
눈물지었다. 아직 저승의 강을 건너지 않아 이승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저승사자가 나타나야 하는데.’

수조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향낭 주변으로 전부 보통의 혼령들만이 모여들었다. 저승사자가


나타나야 저 혼령들을 모아 강을 건널 테니 기다리면 되는 일이기는 했으나, 저승의 공기는
기분이 좋지 않다. 가능한 빨리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각자 다른 기억 속에 빠져 황홀한 표정으로 서 있는 혼령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고,


수십이 모인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다른 혼령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크기였다.

“현무…….”

수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사방신 현무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그 위에 은색의 간단한 관을 쓰고 있었다.


땅의 그림자에서 솟아 나온 듯한 검은 옷자락이 길게 끌렸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혼령들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현무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몇 걸음씩


물러나는 혼령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비록 염라대왕과 같이 생전의
죄를 판별하는 판관은 아니지만, 현무는 이 저승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자다. 일반적인
혼령들에게는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였다. 위압감에 혼령들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 저승사자가 아닌 저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수조는 덜덜 떨리는 손을 쥐었다.
저승사자도 두려운 존재지만 현무와는 격이 다르다. 저 멀리서 향낭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는 모습조차 두려웠다.

82 화

긴 흑발의 사방신은 향낭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재미있구나, 새의 신령아.”

수조가 저 멀리 떨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는데도 현무는 말을 건넸다. 그는 향낭을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이승의 햇살과 같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영혼들에게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일 것이다.

“재미없는 냄새로다. 그렇지?”

현무는 히죽 웃었다. 감히 저승의 주민이 될 자들에게 이승의 미련을 연상하게 하는


냄새라니. 불쾌감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그는 붉은 향낭을 쥐어 손 안에서 으깨어
부숴버렸다. 그의 손 안에서 독과 약이 섞인 내용물이 흘러내렸다. 더러운 것을 털 듯
손을 털어버리고 현무가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려서 수조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날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리 오라.”
현무의 낮은 목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수조의 날개는 저절로 움직여 홰를 쳤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날아오른 몸은 저승의 공기 속을 날아 현무가 내민 손가락 위에 안착했다.

“작은 새로군. 누구의 심부름이냐.”

차마 현무의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수조는 부리를 꾹 다물었다. 까만 콩 같은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다가 현무는 손을 바닥을 향해 털었다.

“신령아, 말할 수 있게 변하라.”

수조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현무의 손에서 떨어질 때는 새의 형상이었으나


땅바닥에 굴렀을 때 그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구르는 수조를 보며 현무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 새의 신령아.”

“예, 예……. 현무 님. 제가 결례를…….”

“너같이 미천한 것의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누가 보냈지?”

“현, 현무 님,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신다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로구나, 두 번이나 물었는데도 말이다.”


공포에 질려 정신이 없는 수조의 모습을 보면서 현무가 빙긋 웃었다. 창백한 얼굴이 마치
가면과 같았다.

“정신 차려라.”

“…….”

수조는 벌벌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본능적인 공포였다.

사방신은 세계의 주민들과 격이 다른 존재다. 그 차이에서 오는 위압감과 공포감이


대단했으며 현무는 거기에 저승이라는 특수성까지 더해졌다. 저승의 지배자, 죽은 자들의
왕. 언제든 산 자를 차갑고 어두운 땅 밑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자.

“왜 이곳에 왔는지 말해라. 너같이 작고 싱싱한 새가 말이야.”

“저, 저, 저……. 그것이.”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들은 대로 자초지종을 말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품에서 저승사자에게 전달해야 할 편지까지 꺼내어 보여주었다. 내용을 읽은
현무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수조를 훑어보았다.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명이 긴 놈이로다.”

“……예, 예?”
그 말은 살려주겠다는 뜻인가? 애초에 현무가 자신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조가 벌벌 떨었다. 현무는 편지를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검은
불꽃이 그의 손가락 주변으로 불타올라 종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뱀 일족의 사혈이라 했던가. 이무기랍시고 사방신 다음이라 거들먹거리던 구렁이 아니냐.


그 녀석이 이런 잔머리를 굴렸다는 것인가.”

현무는 무표정으로 돌아가 턱을 두드렸다. 사혈은 나름대로 사방신들이 조금 아는


인물이었다. 용이 되어도 청룡과 같은 격이 될 수 없다며 승격을 거부한 이무기였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이무기가 아무리 승천한다 한들 사방신과 동격이 될 수는 없는 법인데,
그것을 모르는 가련한 자였다.

“그런 멍청한 녀석이 이런 짓을 한다, 라. 믿어지지 않는데.”

여전히 엎드려 있는 수조를 내려다보며 그는 웃었다.

“네 목숨을 대가로,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여인의 이름을 명기해 달라고 하더군.


사자의 명단에 말이다.”

“……예?”

수조는 귀를 의심했다. 목숨을 대가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그를 내려다보며 현무는


드물게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승사자와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한단 말이지. 네 목숨을 빼앗아 명단에 공석을 만들고,


그 자리에 죽어야 하는 여인의 이름을 넣어달라고. 그리고 그 여인의 원래 운명이 끝에
닿았을 때 비로소 네 영혼을 끌고 가라는 거래로구나. 저승사자야 좋겠지. 여분의 영혼을
하나 더 갖게 되는 일이니 그 탐욕이 어디 가겠느냐. 원래 너는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니니까 말이야.”

수조는 무릎을 덜덜 떨었다. 말하자면, 그의 주인은 수조를 죽여 그의 죽음을 통해 사자의


명단에 빈 공간을 만들려 시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 여인의 영혼을 넣으려는
계획이었다. 본래 죽지 않았을 운명의 수조를 손수 죽여 없애서 말이다.

“운이 좋구나, 너는.”

“…….”

“저승사자 대신 나를 만났으니 말이다. 과연 그 운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면서 운 따위는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라고 말하며


현무는 껄껄 웃었다. 간만에 재미난 광경을 보았다. 그는 품에서 꺼낸 사자의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백호의 반려가 이미 목록에 올라 있으니 다행히도 네 목숨은 필요가 없겠구나. 쓸모없는


제물이 될 뻔했어.”

현무는 수조의 어두운 얼굴을 향해 명단을 흔들었다.

“재미있구나. 여기에 놀랍게도 백호의 이름도 있어, 물론 이것이 과연 사방신을 뜻하는지야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승의 뜻은 신조차 피해가지 못한다. 예상외의 말에 수조가 흠칫했다.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을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현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무저갱의 동굴처럼 깊어 언뜻 뜻을 알기 어려웠다.

현무는 손을 들었다.

“돌아가라, 네 임무는 완수한 듯하니. 발칙한 놈이나 이번만은 용서해 주마.”

* * *

무관이 문관과 함께 소집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그 일이 일주일 새 두 번이나 생기는


것을 오유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단, 이번에는 조례가 아닌 회의였다. 그것도 유력자들만
모은 소규모의 회의였다.

“전하께서 새 제사장을 임명하기 위해 적임자를 추천하라 하시었소.”

백발의 제사장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곁에 있던 대신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렇군요. 허나 아직 전 제사장이 제대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성미가 급하시지요.”

“그러나 이번 일은 조금 더 성급한 지시로군요. 뭔가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국가 제사를 지내려 하신다고 합니다.”


“제사요.”

“예에.”

재상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치유사 여인의 조언이라고 합디다. 전하의 두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넋을


위로해야 한다고.”

“저런.”

대신이 혀를 찼다. 원형 탁자 건너편에 앉은 황영도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오유 역시


제사를 지내 병을 고치겠다는 미신과 같은 생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처음부터 의원도 아닌
치유사라는 명목으로 미모의 여인을 들여오더니, 무당이나 사기꾼인 모양이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치유사, 혹은 무당이나 사기꾼이라. 참으로 너절한 단어의 조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재미있지 않은가. 그 더러운 성미의 왕, 광기에 휩싸여 누구도 곁에 다가가지 못했던
사내가 데려온 여인이 천민 출신의 치유사라니.

정말 두통에 효험을 보아 데려온 것일까, 아니면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일까. 오유는 연화


자체에도 관심이 갔다. 제법 미인이기는 했으나 그가 관심 있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대체 저 미치광이 같은 왕을 어떻게 길들였는지였다.

미인도 사기꾼도 많은 세상이다. 그중 하필 그 여자가 왕의 곁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 어처구니가 없지 않습니까. 치유사도 그렇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받아들이시는
전하도 그렇구요.”

“애초에 요즘 들어 좀 이상해지시긴 했습니다. 그 여인의 일 때문에 제사장 성현도 쫓겨난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대신들은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왕의 행동이 이전과 달라져 물러지고,


치유사를 유난히 감싸고 도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 계집이 신을 받은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신보다는 미모에 홀리신 것 같습니다만. 천민이라 하나 상당한 미인이더군요.”

“그래요……. 어지간한 궁 안의 시녀들보다도 미인이라.”

대신들 몇이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는 광경을 오유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저치들은 왕의 폭정이 수그러드는 것보다 본인들의 주색을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여태 살아서 권력을 누리고 있지.’

오유는 비웃듯 생각했다. 입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대신들의 면면을 훑는 눈매가


싸늘했다. 이곳에 모인 대신들은 대부분 때가 되면 몰아내야 할 자들이었다.

재상이 지팡이로 탁자를 두들겼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늙은이는 아둔하여 모르겠으니 지혜를 나눠주시지요,
대신들이여.”

“제사장 적임자를 추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가 제사장 성현이 돌아와 무죄로 판명되거나, 아니면 새 제사장을 임명해 제사를
지나치게 크게 일으키면 어쩌시려구요. 지금 국고에 그만한 돈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대신 한 명이 반대했다.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걱정하는 것도 그 부분입니다. 전 제사장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으니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요, 큰 제사를 지내 돈을 물 쓰듯 해도 문제일 것입니다. 그
치유사 여인이 아주 작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민이니 돈을 이처럼 쓸 기회가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혀를 차면서 재상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꾸만 신분을 입에 올리는 재상이 못마땅했으나


오유는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유력 대신들만 모인 이곳에 아직 젊은 오유가 초대받은 이유는, 그가 황영의 양자이자 가장


강한 진의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스스로의 정치 기반은 약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적임자 찾는 일을 늦춰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깐깐한 인상의 대신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강퍅한 인상의 그는 탁자를 두드리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대체, 여태껏 전하께서 하신 실정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런데 치유사의


말을 듣고 큰 제사를 일으켜 전하의 두통을 고친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요!”

“맞는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명이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자 줄줄이 동의하는 대신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재상은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유 역시 거기에는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재상은 지팡이로 탁자를 두드렸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신들의 의견을 모아, 제사장의 적임자를 찾는 것은 다소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83 화

“전하께 말씀드리실 겁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흰 수염의 재상은 인자하게 웃었다. 다만 그의 눈은 가늘어서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잠시만 기다립시다. 내 생각에, 제사장 성현께서 돌아오실 거라고 봅니다. 숨겨놓은
재산도 많고 정치적 기반도 있어 그리 쉽게 무너질 분이 아니시지요. 그럼 그 이후에
국정을 안정시키면 됩니다.”

오래된 귀족들의 권리를 놓을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오유는 회의 탁자의 말단 자리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대귀족의 자리가 하나라도 바뀌려 하면 가장 먼저 방해를 하는 것이 같은
귀족들이었다. 최소한 같은 위치에 있던 자들이 유지되면 귀족들 전체는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재상의 현명함에 대신들이 모두 찬사를 보내며 회의가 해산되었다. 오유는 탁자에서 일어나
황영과 함께 걸어 나왔다.

젊은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재미있군요.”

“그래, 그렇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이 궁내다.”

“그러게 말입니다. 왕은 누구보다 저 유력 대신들을 믿고 있을 텐데요.”

“글세……. 왕은 믿는다기보다는 그저 두고 볼 뿐인 듯하지만. 아무튼 슬슬 저들이 왕의


날개를 자르려는 건 확실하구나.”

황영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유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대귀족들의 썩은 속내를 목격한 젊은이의 속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기분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 황영은 잘 자란 자신의 양자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황영과 안녕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온 오유는 곧장 지하감옥으로 내려갔다. 비록 사택이지만


군에 위치한 오유의 저택에는 감옥과 고문기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가볍게 운동 삼아 채찍을 휘둘렀던 자리로 가서 상대에게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심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사장 성현.”

불과 이틀 사이에 성현의 몰골은 거의 넝마가 되어 있었다. 진동하는 피냄새에 오유는 코를


막았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손수건을 들어 코를 가리고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호위가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오유는 허리춤에 찬 장검을 만지작거렸다.

제사장 성현의 퉁퉁한 몸뚱이에는 멀쩡한 곳이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두들겨놓아 절반쯤
짓뭉개진 얼굴은 이제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대귀족들에 대한 혐오감이 샘솟을 때마다 한 대씩만 손댄다는 것이 그만 여기까지 왔다. 딱


이틀 동안 이 지경이 될 정도로 혐오감이 넘쳐흘렀다니 새삼 자신의 뿌리 깊은 귀족에 대한
증오가 놀라울 뿐이었다.

“일전에 제사장께서 치유사 여인에 대해 강조를 하셨었지요.”

잔뜩 겁먹은 눈치의 성현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혀와 이빨은


그대로 두었으니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유는 느릿하게 호위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셨다. 앞에서 풍기는 오물냄새와 피비린내에
차 맛이 조금 떨어져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여인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정말 능력이 있는 치유사입니까?”

“……그, 그 여자는…… 본, 래 그 어미가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았던 터라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약사여래라, 믿기 힘들지만……. 그렇군요. 또?”

“실제로도…… 약한 노란 빛을 손에서 내기도 하고, 왕의 두통을 치료하기도 하였으니…….”

성현은 오유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이미 연화가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
이야기를 또 꺼내냐며 채찍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오유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능력은 실제로 있다는 뜻이군요.”

“저는……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요.”

신이나 보살이나 부처가 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참으로 믿기 힘든 일 아닌가. 젊은


장군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실제로 왕의 두통을 치료하는 것을 곁에서 본 자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쯤 살펴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일단 첫 번째 처형 명단에서
연화를 제외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고, 혁명의 시기는 다가왔다.


오유의 진과 황영의 수도군은 함께 일거에 일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실패할 리 없는
혁명이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이 자신의 편에 서고 있다고 확신했다.

* * *

왕의 광증은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도졌다.

치유사가 온 뒤 얼마간은 조용해졌던 광증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치유사마저


실패하거나 아예 그녀를 보는 것조차 거부했다. 대체 무슨 변덕이냐며 대신들이
수근거렸다.

두통에 미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만희는 최대한 주변인의 피를 보는 것을 줄이려


들어 예전처럼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왕을 얕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프고 나면 만희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연화를 보기를 거부하면 그녀는 이웃 전각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사랑하고 소중했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버렸고 왕은 여전히 그녀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무하구나.’

연화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나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는 무릎 위에 놓은


채였다. 이미 끝낸 흰 호랑이 그림 자수를 계속 쓰다듬으며 그녀는 까만 눈을 깜박였다.
이 창가 자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무더운 날이라도 이곳에만 앉으면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그렇게 사랑스럽고 포근한 흔들림이었다.

그것이 마치 백호의 손짓과 같다고 생각하며 연화는 그리움에 젖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준 유일한 사람은 다른 세계의 신이다. 평생토록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하며


연화는 끝없는 그리움 속에서 천천히 익사해 갔다. 가슴 밑은 가끔 끓어오르다가 가끔
차가워졌다.

가끔 만희가 연화를 불러 손만 움켜쥐고 뚫어져라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 눈 속 타는


듯한 붉은 마음이 적나라해 그녀는 불편하고 슬펐다. 지독하게 깊은 업보를 쌓은
사내였으나 그 진심만은 지나칠 정도로 잘 전달되었다. 손을 꽉 쥔 만희의 손바닥이 델
듯이 뜨거웠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시녀 은연이 들어와 탁자 위에 다과를 올려놓았다. 왕이 신경 쓰지 못하는 중에도 연화의


식탁은 여전히 호화로웠다. 지나치게 많은 음식에 간혹 연화가 조금 줄여달라 요청할
때에도 은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늘은 궁에 신선한 과일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당과도 올렸으니 좀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입맛은 조금도 당기지 않았지만 일부러 다과상을 차려준 은연의 성의를 보아서 연화는 애써
당과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파삭 하며 입 안에 끈적하고 달콤한 과자가 씹혔다.
쌉쌀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맛이 좋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은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있습니다.”

“시녀들이 기뻐하겠군요. 음식을 하는 이들은 먹는 사람이 맛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좋답니다.”

은연의 태도는 이제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화를 조금쯤 살갑게 보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흘긋 지쳐 보이는 연화를 살펴보았다.

“최근 들어 식사량이 줄었습니다. 조금 더 드시는 게 좋아요.”

“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음식이 먹힐 리가 없었지만 연화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은연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은연은 딱딱하고 까칠한
태도로 일관해 왔으나 첫 만남에 봤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면 그간 보여왔던 은연의
감정을 이해하고도 남아서 연화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전하의 두통이 오늘도 심해졌다가 오후에 간신히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왕의 소식을 전해주는 이도 그녀였다. 은연은 손을 모은 채 서서 조근조근 말을 했다.


“전과는 달리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하시기 때문에 시녀와 내관들이 전부 방에서 물러 나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언제까지 참으실 수 있을지 사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은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공감한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희의 광증은 곁에서 보기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자제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극한까지 참아내고 있었으나, 두통에 시달릴 때 만희의 붉은 눈은 거의 검게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번들거렸다. 언제든 그의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끊어지면 곧바로 피의
폭풍이 몰아닥칠 듯한 분위기였다.

컵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딱 한 방울만 더해지면 넘칠 것 같은 상태. 지금 만희의 상태가


그러했다.

연화는 한숨을 쉬며 손을 꾹 쥐었다. 아무리 혼령을 물러나게 만들기 힘들어졌다 한들


그녀가 곁에 있으면 잠시라도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온기를 뿜어내면
원혼들이 그 온기를 쥐고 몇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희는 그것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치유 직후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연화의


손을 몇 번 잡아본 뒤부터였다.

“오늘만 해도 침실 안에서 의자와 침상을 부수셨고, 모든 천과 옷을 전부 찢으셨다고


하니…….”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억누르고 있을 따름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터질 것이다.

연화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만희의 뒤에 매달린 원혼들의 선명한
모습까지도 보였다. 이제 원혼들은 더 강하고 커지고 뚜렷해졌다. 만희를 조롱하는 말을
지껄이며 연화에게까지 저주를 속삭여 왔다.

【아무리 네가 노력한다 한들 이 사내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작은 온기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해. 이 사내를 어둠으로 끌고 들어갈 거야.】

【네가 뭔가 할 수 있다고 느끼나 보지.】

차가운 원한으로 가득 찬 말들이다. 그러나 연화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이다. 그녀는 그저 침묵한 채, 자신이 줄 수 있는 여래의 온기를 최대한
뽑아내어 나눠줄 뿐이었다.

만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한계에 달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직감이


계속해서 연화를 괴롭혔다. 그녀는 얼굴 주변을 감싸고 도는 애정 어린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만희는 가엾지만, 과연 자신의 생명이 아까운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이제 백호를 볼 길도 요원해졌다.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녀는 생명이
없는 조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84 화
호접은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 뭔가의 정체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이것이 언제부터
생긴 고민인고 하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연화의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가 중간지대에
넣어놓은 뒤부터였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가 싶은 고민부터 시작해서……. 무엇보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날 밤도 호접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고민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고민되는지, 원인과 실체를 자신조차 몰랐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혼령들이 한 말이 자꾸 그녀를 괴롭혔다. 연화의 노란 빛, 약사여래의 온기를 알고


있던 혼령들. 인간 세상에 보살들의 가피 자체가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약사여래가 내리는
노란색의 빛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 혼령들이 연화를 본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그 수국의 왕이란 작자는 진짜 연화 님의 정인인 것인가, 아니면 치유능력만을


노리고 정인인 척 연기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백호가 칩거까지 하며 마음을 떼어내려 애쓰는 것을 보며 호접은 가슴이 아팠다. 사방신의


심장은 본래 사랑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애끓는 단심으로 저렇듯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 연화의 곁에 머무는 수국의 왕이 진실한 정인이 아니라면 호접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백호는 자신의 살을 베어내 힘의 손실까지 입으면서 수국의 멸망을 뒤로
미루도록 청룡과 거래를 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무릎에 놓인 손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백호의 궁에서 반짝이는 빛을 흩날리는 나비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생각이 든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호접의 날개가 파르라니 밤하늘 아래서
빛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일단 먼저 중간지대를 거쳐 저승으로 가볼까. 중간지대에 있는 마을 사람들도 이제


인간계로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쳐 호접은 그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중간지대, 인간계, 저승까지 둘러와야 하는 여정이다. 잘못 걸렸다간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 한 죄로 꽤나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호접은 입을 앙다물었다.

반대로 말하면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나비란 원래도 세계를 오가는 존재였으므로
특별히 큰 문제만 없다면 발각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백호는 현재 칩거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호접이 행동하다가 발각되어도 독단적 행동으로 책임을 질 수 있었다. 백호에게까지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좀 더 자유로이 움직여도 된다.

‘특별히 큰 문제가 있어서도 안 되고.’

수상한 낌새를 지나치지 못하고 알아보러 가면서도 호접은 간절히 빌었다. 부디 별다른
일이 아니기를. 그저 연화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인에게 간 것이기를. 그렇다면 호접은
그냥 헛수고를 한 셈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중간지대에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더 재워두었다간 인간으로서 몸이 축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호접은 날갯짓을 해 잠들었던 인간들의 눈을 뜨게 했다.
이성이 돌아오지 않아 멀거니 눈만 뜬 마을 사람들은 초점 없는 시야로 눈앞의 나비를
바라보았다.
【따라오라.】

무언의 명령이 인간들의 뇌로 전달되었다. 비척거리며 일어선 이들이 호접의 날갯짓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연화의 양어머니도 일어서서 합류한 것까지 확인하고 나비는 날개를
파닥이며 푸른 빛을 흘렸다. 중간지대에 오가는 혼령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신령한 불빛이었다.

원래 그들이 살던 천민부락으로 통하는 길로 호접이 안내했다. 깊은 숲속에서 연결된 길을


지나, 그들은 도깨비불에 홀린 모습으로 인간계로 걸어 나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은 나비를 쫓아 숲 바깥까지 흘러나왔고, 호접은 그제서야 날개의 빛을


꺼뜨리고 인간들에게 이성을 돌려주었다. 곧 정신을 차린 마을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지?”

마을은 전부 불타 집은 쓰러져 있었고 온통 폐허였다. 그 한가운데 사람들만 멀쩡하게 서서


서로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의 기억은 완전히 날아간 채여서 앞뒤 사정을 알 수가
없다.

다 타버린 집들을 살펴보면서 한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일부러 다 태운 거야.”

“대체 왜? 아니 그보다 언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시간은 뚝 잘려나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도 다치거나 사라진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으나 마을이 폐허가 되어버려 그들은
멍하니 넋이 빠졌다.

그런 그들의 뒤 깊은 숲속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집이 작은 여인이었다.

“사정 설명은 제가 드리지요.”

사람의 형태로 변한 호접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인간들의 앞에 섰다.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몸집이지만 어딘가 위엄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녀의 등 뒤에서 피어오른 날개 한 쌍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간이 없어 호접은 간략히 축약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자들이 마을을 공격해


모두를 죽이고 불태울 예정이었다는 것, 그것을 우연히 알게 된 자신이 그들을 잠시 안전한
곳에 대피시켜 잠재웠다가 지금 돌려보내 주었다는 것.

어차피 뒷사정은 호접 자신도 자세히 알지 못했으니 더 할 이야기도 없었다. 하물며 연화가


백호와 함께 신령계에서 일정한 기간을 지냈다는 사실 같은 것은 더 말해 줄 수 없었으니.

믿지 못할 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호접의 등에서는 반투명한


날개가 파닥거렸다. 나비의 신령이야, 라며 그들은 수군거렸다. 산속의 신령들과 산주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구전되어 내려왔으니 머릿속에서는 낯선 존재도 아니었다.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일 뿐이었다.

“대, 대체 왜 우리 마을을.”

“누가 그런 짓을 한 겁니까.”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인간의 군사들이 한 짓이라는 것밖에는.”

호접의 대답에 마을 사람들이 고민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군사라니, 그렇다면 관의


짓이라는 뜻이다. 사내 한 명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연화와 연관된 일이 아닐까? 예전에 그 제사장이 연화를 찾겠다며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해쳤지 않은가.”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밖에 없어. 아니라면 왜 굳이 이렇게 별것 없는 천민의


마을에까지 군사를 보내 전부 불태우고 사람을 해하려 시도했겠나.”

“잠시만. 누가 연화 님을 찾으러 왔다는 말씀이시지요?”

익숙한 이름을 들은 호접이 재빨리 물었다. 말을 꺼냈던 사내가 대답했다.

“왕이 연화를 찾겠다며 제사장을 보내왔는데, 당시 연화가 마을에 없어서 분노한 나머지
마을 사람들을 벌주고 집을 태우며 연화를 데려오라고 협박했었지요.”

답에는 우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양어머니가 그때가 기억이 나는지 한탄했다.

“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나를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고 그


아이를 협박했지요.”

“그랬군요…….”
호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데려간 게 아니었다.

“왜 연화 님을 찾는다고 하던가요.”

“왕이 지독한 두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치유의 능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

역시, 수국의 왕은 연화의 정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호접은 화가 치밀었다. 여기서 굳이


화를 내색해 죄 없는 인간들을 겁먹게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그녀는 일단 감정을 삼켰다.

백호는 당연히 수국의 왕이 연화의 정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라면 그저 연화를 데려와


버리면 되는 일인데.

이 정도라면 저승까지 가볼 필요도 없었다. 일단 묘우와 먼저 상의를 하고 움직일까 하며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나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환하게 빛나는 나비의 뒷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를 전송했다.

중간지대까지 다시 길을 되짚어 날아들어 온 호접은 혹시라도 뒤에 쳐졌던 인간이 있었을까


염려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모두 제대로 그녀의 인도를 받아들여 마을로 나간
것인지 남은 자는 없었다. 쥐죽은 듯 조용한 중간지대에는 간혹 길을 잃은 혼령들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호접 정도로 강한 신령은 길 잃은 혼령 따위에게 겁을 먹을 일은 없었다. 비록 작고
가녀린 나비의 모습이라 하나 그녀는 신령계에서 손꼽히는 원로 중 한 명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거슬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싸움이라도 하는 듯 시끄러운 소리였다. 고요한


중간지대에서는 결코 나서는 안 되는 소음이다.

‘뭐지?’

그녀는 날갯짓을 해서 기척이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근처의 혼령들이 느릿느릿 그


방향으로 가는 것 역시 불길했다. 잠시 날아가자 소음이 나는 현장이 보였다.

푸른 깃털이 허공으로 날렸다. 혼령들의 차가운 손아귀에 잡힌 푸른 몸체가 보였다. 피가


튀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흔들리는 날개가 꺾였다. 새의 찢어지는 단말마가
울렸다.

‘신령?’

호접은 몸 안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기가 혼령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꺼려지는


강하고 투명하고 차가운 기운에 중간지대의 혼령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본래 몇 없어야
하는 길 잃은 원혼들은 운 나쁜 새의 존재를 느끼고 몰려들어 숫자가 많았다.

“물러나라.”

결국 사람의 형태로 변해 땅에 발을 딛고 선 호접이 목소리를 키웠다. 저승도 아니고


중간지대였다. 감히 신령계의 원로인 그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혼령은 존재하지 않았고,
차갑고 흐릿한 형체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 이쪽을 흘긋거리며 돌아보는 시선이 남았다.

호접은 발밑에 떨어진 파란 새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분명히 신령이었지만 이제 사람의


형태로 변신할 힘마저 없는지 새는 쌔액거리며 간신히 숨을 쉴 뿐이었다. 호접은
직감적으로 그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꼈다. 혼령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온기를 빼앗긴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로 사고로군, 하며 호접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신령이여, 정신을 차리시오. 왜 이곳에 들어와서 혼령들의 손아귀에 잡힌 겁니까.”

【……나, 나는……. 분명히…… 향낭이 있으면…… 다가오지 않는다고…….】

숨소리 사이로 흐릿한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의 발에 매달려 있던 푸른색 작은 향낭을


발견하고 호접이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어찌나 허술하게 만들어놓았는지 안의 내용물이
전부 빠진 상태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을.”

호접은 안타깝게 그의 깃털을 쓸어주었다. 워낙 덕이 낮은 하급이라 호접이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던 신령이었다. 비록 모르는 신령이었으나 이렇듯 사고로 죽어가는 꼴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새의 신령은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려 노력했다. 죽어가는 와중이라 낯선 자가 중간지대를


지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상하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흐릿한 시야로 호접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 한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싶소. 낯선 분.】


85 화

“말해 보십시오. 들어드리리다.”

【부디, 부디 전해, 전해주시오…….】

새가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치료를 해주고 싶었지만 혼령에게 지나치게 많은


온기를 빼앗긴 마당에 그것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 정도로 오래
잡혀 쥐어뜯겼다면 사방신이 온다 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나는, 사혈의…… 사혈의 명으로 저승에 다녀왔소.】

“사혈? 뱀의 일족의?”

갑작스러운 말에 호접은 잠시 숨을 멈췄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뱀 일족의


수장, 게다가 저승이라니. 하급의 신령이 함부로 넘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당황한 그녀가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못했지만 수조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말을 이었다.

【반드시…… 백호 님께, 알려주시오. 그자는 나를 제물로…… 제 복수를 하려 했으니.】

“무슨 복수 말입니까.”
【사, 정이…… 복잡하지만.】

수조가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작은 새의 피가 부리 근처와 호접의 손바닥 안에 묻어났다.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라며 호접이 온기를 피워올렸으나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백호 님의 반려와…… 관계된 일이라고.】

“……!”

연화의 일이라는 말이다. 호접은 놀라움을 숨기려 애를 썼다. 수조는 숨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사혈, 사혈……. 내가 그리도 오랫동안 뱀 일족에 봉사했거늘.】

“정신 차리세요.”

【더러운 뱀, 귀신 같은 자!】

죽어서 꺼져 가는 와중에도 분노가 목소리에 스몄다. 수조는 벌벌 떠는 날개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흐려지는 시야를 눈꺼풀을 껌벅여 맑게 하려고 노력했다.

오갈 데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오랜 세월을 뱀의 일족 밑에서 수하 노릇을 했는데,


그 누구보다 충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제물이 되는 것뿐이었다.
만약 현무가 아닌 저승사자를 만났다면 저승에서 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일한 내 목숨을…… 제물로 그 반려 여인을, 저승으로 끌어들이려


하다니.】

흐흐흐 하며 수조가 웃음 비슷한 울음을 토해 냈다.

호접은 오랜 기간의 경험으로 인해 대번에 수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저승사자는 혼을 저승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탐욕스러운 법이다. 수조의 목숨을 없애 죽음의
명단에 하나의 칸을 만들고, 그곳에 연화의 이름을 써넣을 작정이었을 것이다. 운명과
어긋나게 죽는 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저승사자에게 반길 일이다.

“과연 사혈이 생각할 법한 짓이지.”

호접은 중얼거렸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사혈은 지난번의 일 이후로 뱀 일족의 거처에서 칩거했다. 얼굴이 무너지고 힘 역시


절반으로 깎여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뱀은 원한을 잊지 않는 일족이었고 또한 사혈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그, 그리고, 그리고, 백호 님의 이름도, 명, 명단에.】

수조의 숨이 깔딱거리며 넘어갔다. 마지막 말까지 마치려는 의지가 그의 목숨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체온은 이미 내려가 얼음장 같았다. 예상치 않았던 말을 듣고 호접이
화들짝 놀라 그를 흔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백호 님의 이름이라니?”

【저승의 명단……. 백, 호 님.】

결국 새의 눈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떨리던 날개도 축 늘어졌다.


흔들어도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호접은 그를 손에 든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백호 님의 이름이 저승의 명부에?’

제대로 말을 맺지 못했으나 분명히 그런 뜻이었다. 호접은 입술을 씹었다.

물론 사방신 백호의 이름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누가 알 것인가. 그러나 하필 백호의


반려와 함께 명부에 올라 있다는 것이 불길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호접은 수조를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사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어야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혼령들은 죽은 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으니 그대로 두어도 며칠은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수조의 넋이 저승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는 것 역시 사흘 뒤다.

‘죽음의 명단에 백호 님의 반려가 올라가 있다는 건가.’

호접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연화의 이름이 명기되지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했으나…….


그러나 현재 백호의 반려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연화였다.
호접은 초조함에 잠깐 발을 굴렀다.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신령계로 가서 묘우에게
알리고 도움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인가. 백호가 어디로 칩거했는지 호접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백호 님과 연화 님이 동시에 명부에 있다니.’

호접은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두 사람 모두 저승으로 끌려가는 일은 막아야 했다. 만약


연화가 죽는다면 백호는 더 큰 실의에 빠질 것이다. 그는 연화를 잊겠다며 칩거에
들어갔으나, 호접은 그가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더
큰 상처를 입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백호가 저승으로 가버린다면 신령계는 혼돈의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관리하고 다스리는
신이 없는 세계라니. 호접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 않은 사태에 옥황상제가 새로이
후대의 사방신을 빚어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주군인 백호가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백호 님의 위치를 찾아야겠어. 찾아서 알려야…….’

판단을 내린 호접은 재빨리 나비의 모습으로 변해 전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백호에게


반드시 가능한 빨리 알려야 할 소식이었다.

* * *

만희는 눈을 깜박였다. 이제 머릿속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뇌 전부를 아주 얇게 포를


뜨는 듯한 통증은 전신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따위 원혼들에게 져서 살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런 오기와 고집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살인이 나쁜 일인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았으며, 앞으로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낱 원혼들 따위의 수작에 패배해서 그들의 꼬임대로 움직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한시가 다르게 심해졌다. 거의 머릿속이 마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전신으로


퍼진 통증으로 인해 사지가 꼬였다. 그는 침구를 쥐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이따위 수작에
질 줄 아느냐. 하지만 서슬 퍼런 그 기세도 며칠간 단 한 순간도 줄어들지 않고 강도를
더해가는 고통에 한풀 꺾이고 있었다.

어차피 지은 죄가 많은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귓가에 킬킬대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살을


저미는 듯한 아픔에 만희의 눈앞은 시커멓게 변했다. 이성도 사라져 이제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기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만희는 깨닫고
있었다.

“빌……어먹을 것들.”

숨이 헐떡였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지만 습관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더 이상 어디가 더


아픈지 알 수도 없었다. 자꾸만 귓속에서는 환청이 들려왔다. 고막을 두드리는 목소리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했다.

【더럽게 태어난 자가 왕의 핏줄이라며 귀한 자리에 앉아 있는 꼴이 우습구나.】

【제 아비가 여동생을 범해 태어난 더러운 놈.】

귓가가 찢어질 정도로 웃음소리가 시끄러웠다. 만희는 고통 어린 소리를 내질렀다.


평소라면 누구라도 뛰어왔겠지만 그 어떤 소란이 있어도 절대 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놨던
터라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차 의식이 흐려지고 있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사내의 크고 단단한 손이 침상을 둘러싼 휘장을 전부 찢어발겼다. 그는 일어나서 의자를


부쉈고, 검을 뽑아 책상을 내려쳤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붉은 깔개가 검날에 전부
난도질되어 조각조각이 났다. 침상까지 마구 검으로 쑤시며 만희가 고성을 질렀다. 태어날
때부터 쌓여왔던 갈 데 없는 분노가 머릿속에서 터져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개 같은 잡놈들!”

【잡놈이라니, 잡놈이라니.】

【진짜 잡놈이 누구일까.】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토록 선명한 금속성의 목소리를, 여태까지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원혼들의 목소리는 끝없이 중첩해서 들려왔다.

【네놈이 죽였잖아.】

【내 아이, 내 아버지, 내 남편. 모두 네가 죽였어.】

【네 목숨은 귀중한가, 왕이여. 그렇게 모두를 죽여대고도 네 목숨은.】

【아니면 네 곁에 있던 그 여자, 보살의 가피를 받았던 그 여자가 소중한가.】

만희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더러운 것들, 감히 누구를 입에 올리는 것이냐!”

【소중한가, 그 여자가.】

【노란 빛의 여자.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만희는 원혼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순간 목소리가 입을 쩍 벌리고 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무저갱처럼 검고 깊은 입이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보살이 보호하는 여인이라 우리가 손을 댈 수는 없으나 너라면 다르겠지.】

목소리가 음침했다. 만희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 하는 것인가,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곧 손발 저 말단까지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날뛰었다.
끝 간 데 없이 위로만 치솟는 고통에 그는 눈을 까뒤집었다.

미치지 않을 거라고, 더는 저 발칙한 원혼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만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방 안에 우뚝 선 채 부르르 떨었다.
팔다리에 쥐가 나고 사지가 비틀렸다.

【우리 말대로 해.】

【최소한 고통을 잊을 수는 있어.】

【물론 깨어난 후의 비참함은 기대되지만 말이야.】


원혼들의 비웃음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흔들었다. 깔깔대는
소리가 아주 잠시 잦아들었다. 안구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을 눌러 막으면서 만희는 방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 스스로 걸어 잠갔던 잠금장치가 수없이 많아 그것을 여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 내관과 시녀들이 있는 곳에 달했다.

“저, 전하!”

깜짝 놀란 내관 한 명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왕과 눈이 마주치고 내관은 놀라 흠칫하고


고개를 숙였다. 실핏줄이 전부 터진 흰자는 완전히 붉어져 그의 눈 전체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은 모습에 내관의 무릎이 떨렸다.

“가서…… 연화를 숨겨라.”

“숨……기라는 말씀은.”

“궁에서 가장 깊은 곳……. 떠날 수도 내가 들어갈 수도 없는 곳에 가둬.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알 수 없는 명령에 내관과 시녀들은 전부 말을 잃었다.

만희는 이를 갈았다. 결코 연화를 그대로 놓아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내의 손으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증오와 분노로 몸이 떨렸다.
그렇다고 자신의 손아귀에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원혼들은 분명히 연화를
해하려 그를 꾀어낼 것이었다.

꾐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위험은 제거하는 편이 낫다. 왕은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내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절대로 도망갈 수 없도록, 절대로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 연화는 내 손 안에, 하지만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있어야 한다.”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절대로 떠날 수 없도록, 절대로. 그 사내를 만날 수 없도록. 감옥에라도 가둬놔라. 내


손이 닿아서도 안 되지만 내 곁을 떠날 수는 없다.”

으르렁대는 왕의 말에 두려움에 질린 내관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길을 되짚어 방으로 돌아갔다. 그를 따라오며 부축하려는 이들의 손길도 전부 뿌리치고,
또다시 절대 방에 접근하지 말라 명을 내린 채였다.

86 화

연화는 갑자기 방에 들이닥친 내관과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시녀들이


전부 나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은연이 내관을 붙들었다.

“아니, 염 내관.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연화 님을 끌고 가다니요.”


“전하의 명이네. 도망갈 수 없는 곳에 눈에 띄지 않게 가둬두라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은연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간 그토록 연화를 아꼈던 만희가 내린 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관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설명을 좀 해보세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은연과 사이가 좋던 염 내관은 다소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는 수염이 없는 맨들한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전하께서 조금 전 방에서 나와 내리신 명이었네. 앞뒤 사정은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연화 님을 도망갈 수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가두라는
것뿐.”

“……맙소사.”

그동안 그리도 예뻐하더니 총애는 과연 길게 가지 못했다. 은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연화를 미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런 감정은 그녀의 마음속에 없었다. 다만 궁으로
강제로 끌려온 저 여인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할 수 없지요. 전하의 명이시라면.”


이 궁 안에서 왕의 명에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바깥의 누군가는 그래도 왕의 명을 한
번이라도 거역해 주지 않을까, 은연은 요즘 간혹 생각했다. 멋대로 구는 만희의 성정이
유달리 숨 막히게 느껴졌다.

“어디에 가두려 하십니까.”

“그게.”

“음식이라도 넣어드리고 싶어 그럽니다. 잠시지만 제가 모셨던 분 아닙니까.”

강경한 은연의 말에 염 내관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전각 후원에 있는 지하옥일세. 이미 쓰임이 있은 지 이십 년이 지난 공간이니,


누구도 거기에 사람이 갇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후원의 지하옥이라면 닫힌 지 이십 년 가량 지난 곳이었다.


그곳에서 왕의 어미가 미쳐서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수군거리는 주제라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끌려가면서도 연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은연이 항의하는 모습을 보고 연화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힘없이 가느다란 꽃가지가 꺾인 듯했다. 그녀는
병사들이 이끄는 대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죄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삶에 대한 의욕 역시 사라졌으니 그리 억울할 일도 없었다.
그녀는 늘어진 어깨를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호랑이의 그림을 수놓은 자수틀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언제나 즐겨 앉던 창가 자리에 더 이상 앉을 수 없다는 게 슬플
뿐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맴도는 바람을 느끼면 마치 백호가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듯한
상상을 할 수 있었는데.

* * *

연화가 끌려갔다는 이야기는 전각 안에 곧 퍼져나갔다. 빨래를 하던 사영 역시 놀라서


뛰어나왔다. 전각에 머무는 다른 이들 역시 있었기에 당장 이곳이 폐쇄되지야 않겠지만
이곳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을 가지고 있던 연화가 끌려 나갔다는 소식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사영은 초조하게 손에 든 빨랫감을 꾹 쥐었다. 분명히 왕은 연화를 제법 총애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변의 누가 봐도 명백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녀를 옥에 가두라는 말을 한
걸까. 불안감이 목구멍을 가득 메우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조심히 연화의 텅 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졸지간에 끌려간 터라 방 안이 몹시


어지러웠다. 침상 위에 놓인 동그란 수틀이 보여 사영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이건…….”

흰 호랑이의 얼굴이 수놓아져 있었다. 빼어난 솜씨로 곱고 소중하게 놓은 자수였다. 사영은


그 수틀을 들어 올려 손으로 매만졌다.

‘뭔가 영기(靈氣)가 느껴지네.’


기묘한 느낌이다. 일반적인 자수로는 보이지 않는 묘한 영기였다. 보통 물건이 아닌 듯해서
그녀는 일단 수틀을 치마 안에 넣어 숨겼다. 방을 치우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이상 챙겨야 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청수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려나? 아니면 아무래도 인간계


일이라 힘들까.’

이제 신령의 힘도 거의 잃은 사영에게 청수희는 유일한 소식통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청수희가 오지 않는다면 사영이 연락할 방법 따위는 없었기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연화 님에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아주 이른 새벽이었다.

수도의 왕궁 근처에는 별처럼 많은 대신들의 저택이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매일 궁으로


다녀야 하는 그들을 위해 저택은 궁의 가까이에 몰려서 자리 잡았다. 그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근처를 맴돌다가 담벼락 안으로 사라졌다.

최근 수국의 정세는 흉흉했으나 수도 안, 그중에서도 고관대작의 저택이 몰려 있는 궁


주변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다. 제대로 사병을 키우기에는 돈이 지나치게 들어 문관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위층은 하인들로 경비를 세우고는 했다.
하인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경비로도 일하며 등골이 빠지게 착취당했다. 당연히 늦은 밤과
이른 새벽, 그들은 경비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잠을 잤다.

잠이 든 피로한 하인들의 곁으로 작은 소리가 났다. 가벼운 발걸음들 서넛이 스치는


소리였다.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조용히 지나간 발걸음은 대신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원래라면 특별히 고용한 호위무사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 역시 잠이 들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세상모르고 잠이 든 호위무사의 얼굴을 보며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스걱 하고 호위무사의 목이 날아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어찌나 잘 드는 칼이었는지


두터운 사내의 목이 한 번에 잘렸다. 무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단칼에 죽임을
당했다.

허공에 피가 날렸고, 한동안 꼿꼿이 버티고 있던 목 없는 몸뚱아리가 서서히 무너져 옆으로


기울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검은 손 한 쌍이 그 육신을 받아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시체의 밑으로 피웅덩이가 고여 들었다.

“엉터리 같은 놈을 큰돈을 주어 고용한 모양이군.”

검은 복면 속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어지러워 사기꾼이 횡행했다. 무관들을


천시해 솜씨가 뛰어난 자들은 대부분 수국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다.

호위무사로 고용해 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치들은 대다수 저질의 무뢰배들이다. 그런


자들을, 솜씨를 볼 줄 모르는 무관들은 비싼 돈을 들이고 고용해 곁에 두었다. 아마도
지금 목이 잘리지 않았다면 언제 주인의 심장을 찌르고 재물을 챙겨 달아났을지 모르는
놈일 것이다.
사내의 시체를 그대로 둔 채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은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도 없이 쉽게 열려버린 문 안, 붉고 푸른 비단 위 화려하게 금실로 수놓은
걸개들로 장식된 방이 나타났다.

문을 하나 더 열고 가장 깊은 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침상에 누워 잠든 사내가 보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자가 자신의 손녀뻘에 가까운 어린 여인을 한 팔에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여인이 먼저 인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그녀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서넛의 검은 인영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재빨리 틀어막고 그녀를 끌어냈다. 여인에게
재갈을 물리고 손을 묶어 꿇어앉히는 동안 노인이 눈을 떴다.

“누, 누구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노인이 말을 더듬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그야 일국의 재상이 한밤중 깊은 침실에서 낯선 이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복면의 남자는 눈에 초점이 잡히고 나서야 경악해 소리를 지르려는 노인의
머리채를 쥐어 침상에 처박았다.

“조용히 하십시오, 재상 나리.”

말투는 정중하지만 동시에 싸늘했다. 그는 눈가를 좁혀 들며 손 밑에서 바둥거리는 노인을


보았다.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치고 있었지만 남자의 손은 강철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허연 노인과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복면의 남자는 혀를 찼다.


“손녀뻘은 되겠군. 부끄럽지도 않은가.”

간신히 숨을 쉬도록 놓여난 재상은 현명하게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랬다간 단칼에
맞아죽으리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덜덜 떨면서 벽으로 붙었다.

“그, 그……. 저 계집이 탐이 나서 온 게냐? 그렇다면 주겠다, 줄 테니 제발 목숨만은.”

“생각하는 꼴 하고는.”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복면의 사내는 재상의 턱 끝으로 긴 검을 뽑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수염이 잘리고 목에 상처가 나 피가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겁을 먹은
재상이 덜덜 떨며 비명을 지르려 했고, 사내는 그의 안면을 망설이지 않고 검자루로
가격했다.

뻐걱 소리와 함께 앞니가 부러져 나가고 다시 비명을 지르려는 재상을 침상에 처박았다.


베개에 묻혀 소리가 다 뭉그러졌다.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 마라. 수치스러우니.”

사내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재상의 아랫도리에서 시금털털한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실금을 해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는 꼴에 그가 눈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여간
쓸모없는 자다.

“선발대도 임무를 완료했다고 합니다.”


사내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온 또 다른 복면 사내가 속삭였다.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휘었다. 어차피 그럴 걸 알고 있었지만, 한 단계씩 성취해 갈 때마다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거사의 날이 아닌가.

“병력은 모두 모였겠지.”

“예, 왕궁 해자 근방으로 모였습니다.”

“좋아.”

사내는 재상의 멱살을 틀어쥐어 들어 올렸다. 노인은 피투성이가 된 입가를 가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사내가 복면을 벗어 던졌다.

“자, 재상. 내가 누군지 보시지요.”

노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복면을 벗은 오유가 해맑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정신 차리세요, 재상. 제게 답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뭐, 무엇…….”

“비상 시 성문을 여는 암호가 필요합니다. 말씀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재상은 입을 뻐끔거렸다. 수도 근방 진의 장군 오유는 분명 상당히 기세를 빠르게 키워가고
있는 신진 세력이었다. 그래서 대귀족들 사이에 그를 죽여놔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선수를 쳐버렸다. 설마 눈치를 챘던 것일까.

“자, 재상. 다른 생각 하실 여유가 없으실 텐데요.”

오유는 미소를 지었다. 해사한 얼굴은 아직도 많이 어렸지만 동시에 잔인했다. 그는 검을


재상의 손목으로 가져갔다.

“이대로 손을 잃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87 화

“잠, 잠깐, 잠깐…… 잠깐!”

재상은 낯빛이 곧 죽을 사람처럼 납빛이 되었다. 그는 양손을 싹싹 빌었다.

“제, 제발, 이건 나나 제사장만 알던 것이라, 이건……. 제발. 잘못하면 내가 말을


발설했다고 누구나 알게 되는 것이야!”

“그래요. 두 분만 알고 계시지요. 그러니 말씀해 보시라는 겁니다. 여부에 따라 살려드릴


수도 있고 손발을 하나씩 잘라가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보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오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손목을 덧그리는 것을 느끼고 재상은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슬슬 눈치를 보았다.
“대답, 하면…… 정말 살려줄 건가?”

“물론입니다, 재상. 사내란 자고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지요.”

대답하는 오유의 얼굴은 엄숙하면서도 어렸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고사(古事)에 집착해


정의로운 영웅의 흉내를 내고 싶은지도 몰랐다.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재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귀족끼리 연합해 사병을 모아 반격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아마 궁으로 진입해 왕을 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이 기회에 왕과 오유를 한꺼번에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리라. 급박한 순간에도 재상의 노회한 머릿속은 재빨리
계산했다.

“암, 암호는…… ‘별을 보기 위해 왔노라’이고 성벽의 왼쪽 아래를 세 번 두드리면 경비병이


열어주니까……. 제발.”

최대한 비굴하게 보이길 바라며 재상이 대답했다. 오유는 가만히 뚫어져라 재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재상. 과연 제사장께서 해주셨던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미 제사장 성현을 고문해 암호는 알아낸 상태였다. 틀림없이 하기 위해 재상에게도 답을


들은 것뿐이다. 멱살을 놓아주고서 그가 발걸음을 물렸다. 다시 복면을 고쳐 쓰면서 곁에
다가온 부관의 보고를 들었다.
“이제 성문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알겠다. 그리고 저자는…….”

오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복면 사내 둘이 그곳에 남아 있었고 재상은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검은 눈알이 쥐새끼처럼 빛나는 것을 흘긋 보고 오유가
미소를 지었다. 교활하고 어리석은 작자. 늙어서도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아무것도
내려놓으려 들지 않는다. 제사장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 난세의 영웅이 되길 바랐으나 고서에 나오는 영웅들이 모두 정직하고 올곧지는


않았다. 오유는 올곧은 방법보다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자였다. 그는
부관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부관이 물러나 재상에게로 향했다.

입을 막아 나오는 막힌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서는 오유의 코에도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재상이 마지막으로 지었을 표정이 눈에 훤했다.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천한 것들이 감히 내게.

단칼에 죽여주었으니 최소한 괴롭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곧이어 뒤를 따라온 부하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말에 오르며 오유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그 정도면 훌륭하게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굳이 약속이 말 그대로일 필요야 없지. 저치들이 여태까지 해온 짓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뿐이니 말이다.

* * *

호접은 급히 날갯짓을 했다. 중간지대에서 신령계로 넘어가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 가장 깊은 동굴.’

칩거하겠다며 백호가 말하고 사라진 장소였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제자리에서 뱅글거리며 돌았다. 한시 바삐 알려야 하는 소식인데, 들어야 할 주군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답답할 노릇이라 그녀는 자꾸 조바심이 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혹시, 묘우라면 알지도.’

묘우는 여우의 신령으로 신령계에 존재하는 많은 동굴들을 잘 알았다. 걸핏하면 굴을 파고


숨는 여우의 습성 때문이었다. 어둡고 좁은 곳에 몸을 숨기기를 좋아해 그는 잠시 쉬러갈
때면 어김없이 동굴을 찾았다.

호접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방향을 틀어 백호의 궁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묘우는


궁에서 백호를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바로 묘책을 내줄지도 몰랐다.

“묘우!”

전속력으로 비행한 끝에 궁에 도착해 그녀는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갔다. 바로 사람


형태로 둔갑하며 내려선 그녀는 소리쳐 묘우를 불러댔다. 놀란 시녀들이 달려왔다.

“묘우는 어디 있느냐?”

“아, 묘우 님께선 아래층에…….”

“무슨 일이야, 호접. 왜 이리 부산스러워.”


그 때 시녀들의 뒤에서 묘우가 나타났다. 가느다란 눈의 미남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묘우를 잡고 호접은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일이 안 좋게 됐어.”

“뭐가?”

“백호 님과 연화 님에 대한 일이야. 저승 명부에……. 아, 일이 복잡해.”

호접은 가능한 간단한 문장으로 구성해 상황을 전달했다. 최대한 상황을 축약한 설명에도
묘우는 재빠르게 알아들었다.

“맙소사.”

묘우가 중얼거렸다. 그는 비록 연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녀를 떨어트릴 간계를


꾸몄지만 백호와 멀어지기를 바랐을 뿐이지 그녀의 파국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승의 명부에 백호의 반려는 물론이고 백호의 이름마저 올라가 있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호접은 불안해서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갔다.

“먼저 백호 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야 해. 혹시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을…….”


그는 흥분한 호접을 진정시켰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가 묘우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청수희의 거처를 알고 있어?”

“알지.”

“그곳 봉우리 밑에 아주 깊은 동굴이 있어.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가장 깊은 동굴이지.


백호 님이 칩거하시는 장소는 아마도 그곳일 것 같다.”

“……그렇군. 그럼 지금 당장 가보겠어.”

“조심해야 해. 수직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다. 잘못 들어가면 뼈도 추리지 못하니 사람


형상으로 둔갑해 들어가면 안 된다.”

“알겠어. 지금 간다.”

호접이 당장 떨치고 일어섰다.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아 묘우가 한마디를 보탰다.

“혹시 그곳에 청수희가 있다면 내게 와달라고 말을 전해줘. 그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

“저승의 명부에 관련된 일.”


묘우는 한숨을 쉬었다. 삶과 죽음은 신이라 해도 거역할 수 없는 엄중한 경계선이다.
그러나 사방신이 생사를 달리하는 일이란 극히 드물 수밖에 없어, 평소 명부에 백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면 당연히 인간의 이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백호의 반려와 함께
올라가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명백하게 그 둘을 함께 가리키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았다.

“‘규칙의 눈’을 속이는 방법이 있을 거야. 어느 책에서인가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찾고 있을 테니, 호접 너는 빨리 청수희의 거처로 가서 백호 님을 찾고 청수희에게 말을
전해줘. 백호 님은 아마 소식을 듣자마자 인간계로 가실 테니 차후에라도 청수희가 그
방법을 전해드려야 해.”

“알겠다. 꼭 방법을 찾아내.”

호접이 바로 나비로 둔갑하여 창문을 빠져나갔다. 시녀들을 헤치고 묘우는 곧 등을 돌려


지하로 내달렸다. 넓은 자색의 소맷자락이 뒤로 날렸다. 목적지는 지하서고였다. 빠르게
달리는 그의 발밑으로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분명히, 세계의 규칙을 속이는 방법이 있었다.’

세계를 다스리는 규칙은 너무 거대해서 가끔 허점이 있다. 만약 무명(無名)이라는 자가


규칙에 인식된다면 그 특징을 베껴내어 다른 이를 무명으로 속일 수도 있었다. 물론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라 조건들이 필요했다.

명부상의 백호가 사방신 백호를 말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주군을 가리킬
확률은 상당히 높았고, 묘우는 결코 백호가 저승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백호의 반려는 분명 연화를 말하는 것일 테다. 묘우 자신은 그녀를 반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백호가 그토록 깊이 마음을 주었던 상대는 그녀 하나였으니.

묘우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인간계로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저 백호의 반려가 인간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지하까지 내려가 서고로 달려들어 간 묘우는 먼지 쌓인 서책들을 바삐 꺼냈다. 오래된


서고의 책장들에서 종이 먼지가 날렸다. 책상 위에 쌓아둔 채 그는 기억을 더듬어 실마리가
있을 만한 내용들을 찾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살아온 여우의 신령으로서, 이 신령계에서 규칙에 대한 사례를 그보다 더 많이


아는 자는 없으리라. 가느다란 눈은 크게 떠져 서책의 내용들을 훑었다.

규칙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다른 이를 희생하게 만들어서라도 백호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붓과 종이를 챙길 시간도 없어 관련 있는 내용들을 전부 머릿속에 담으면서
묘우가 집중했다.

* * *

호접은 날개를 힘껏 뻗어 허공을 갈랐다. 청수희의 거처는 제법 먼 곳에 위치했으나 그녀는


신령계의 각 지역을 잘 알았다. 가장 빠른 길을 골라 재빨리 날다 날개 부근이 뻐근해질
무렵에 저 멀리 아주 높은 봉우리가 나타났다. 호접은 먼저 구르듯이 그 봉우리 위에
내려앉았다.

“청수희! 청수희, 샘의 정령, 계십니까?!”


샘물을 향해 외쳤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호접은
애타게 수면을 두드렸다. 묘우가 하는 말은 대개 쓸모가 있었다. 청수희에게 말을 전해야
했다.

한동안 두드려도 지나치게 고요한 수면을 향해 호접은 눈썹을 찌푸렸다.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힘을 써서라도 그녀를 불러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호접은 화기를 손끝에
머금었다. 나비의 신령인 그녀와도 상성이 맞지 않는 힘이라 손끝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녀는 수면으로 곧장 손을 집어넣었다.

이 열기 때문에 물 밑의 생명들이 몹시 불편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샘의


밑에는 많은 생명들이 모여 살았다. 미안했지만 별수는 없었다.

“나오세요, 청수희.”

잠시 동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곧 물 밑에서 보글거리며 물방울이 끓어올랐다. 마치 끓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파도가 쳤다.

【……누구기에, 쉬고 있는 샘의 정령에게 이토록 시끄럽게 말을 거는 것입니까.】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푸른 머리의 여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뒤로 넘겼다.

88 화
“객의 예를 다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샘의 정령이여.”

물에 젖은 흰 피부가 창백했다. 청수희는 오랜만의 쉬는 시간을 방해한 호접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인사했다.

【호접, 신의 측근이신 나비의 신령이시여. 어쩐 일이신가요?】

원로급이자 백호의 최측근인 신령이니만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호접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휴식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미안합니다만, 부디 지금 백호


님의 궁으로 좀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궁으로요? 어째서요?】

청수희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백호는 수하들을 궁으로 불러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래 번잡한 것을 싫어해 연례행사로 있는 연회 때에도 간혹 얼굴을 구겼다.

“예, 사정이 복잡한데…….”

호접은 간략하게 사정을 줄여 설명했다.

말을 전부 들은 청수희는 자신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 나름대로 인간계와 저승의 일까지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휴식한 시간 동안
꽤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청룡이 경고한 뒤로 조심스럽게 다니다 보니 피곤해져서 쉬고
있었는데.
【그럼 묘우 님이 제게 뭔가 소식을 전달해 줄 역할을 시키신다는 거군요.】

“예, 백호 님은 곧장 인간계로 가실 테니 저보다 더 빠르게 소식을 전해줄 이가


필요합니다. 저는 백호 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수희의 거처 역시 신령계에 존재했고, 백호의 신변에 사달이


난다면 그녀가 아끼는 이 샘물 역시 천재지변으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연화를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청수희는 알았다며 곧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이제…….”

호접은 곧장 산봉우리 밑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다. 가벼운 나비의 몸으로 날아


내려가는 것보다 이쪽이 빠르다. 쏜살같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뒤로 지나갔다.

거의 낭떠러지의 중반 이후까지 충분히 내려왔을 때 그녀의 몸이 나비로 둔갑했다.


팔랑거리는 가벼운 나비의 몸은 속도가 늦어졌지만 최선을 다해 날아 아래로 향했다.

깊고 깊은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무저갱과 같이 검은 입구다. 호접은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날아들어 갔다. 그녀의 화려한 날개의 빛이 동굴 안으로 점점이 이어져
갔다.

【백호 님.】
나비인 채로 최대한의 전음(傳音)을 보냈다. 수직으로 뚫려 있는 동굴이라 인간의 몸으로
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주군에게 닿기를 바라며 수직 동굴
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날아 내려갔다.

* * *

연화는 벽에 기대 기진한 채 늘어져 있었다.

만희가 그녀를 가둔 지 사흘째였다. 이곳에 옮겨 온 이후 은연이 드나들며 꼼꼼히 먹을


것을 챙겨주었으나 떨어진 입맛으로는 세 입을 채 먹지 못했다.

화를 내면서도 두터운 옷가지와 음식을 가져다주는 은연의 얼굴을 봐서라도 힘을 내고


싶었으나 몸은 천근만근 늘어질 뿐이었다. 약사여래의 가피가 깃들었으나 그 힘은 연화
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은연은 아름다운 얼굴 가득히 화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부드러운 이불을 감옥의


창살 너머로 넘겨주면서 연화가 갇힌 옥의 상태에 대해 치를 떨었다.

완전한 돌벽으로 이루어져 차디차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안에는 침대도 없어


돌바닥에서 자야 했다. 현 왕의 모친이 갇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

“그동안은 그토록 귀애하셨으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리 끌어다 가두시다니.”

염내관이 입단속을 하라 일렀지만 연화가 있던 전각의 시녀들은 연화가 어디에 갇혔는지


대부분 알았다. 그까짓 내관이 뭐라고, 하면서 은연이 이리저리 다 퍼뜨렸던 까닭이었다.
시녀들은 대부분 연화를 좋게 보았기 때문에 갑자기 끌려가 감옥에 갇힌 그녀의 처지를
동정했다. 은연이 가져오는 음식과 옷가지도 모두 시녀들이 모아서 보내는 것들이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셔서 아무것도 못 알아보신다고 합니다. 정신이 있으실 때


마지막으로 내리신 명령이…… 이것이었다고 하고요.”

지독한 인간이다. 귀애하던 치유사를 가두라는 것이 마지막 명령이었다니. 은연은 침울한


얼굴이 되었지만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 써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모두 떠나버린 내게도 여전히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위로가 되어 연화는 가늘게 웃었다.

더욱 힘이 빠져 완전히 늘어진 사지였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


살아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이곳에서 나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저 같잖은 경비병들이 또 유세로군요.”

왕궁의 경비병들은 기강이 해이해 은연이 연화를 만나고자 옥에 오는데도 은근히 재물을
요구했다. 동전도 아닌 은전을 원했다. 그러고도 조금 오랜 시간 머무르려 하면 밖에서
헛기침을 하고 소리를 치며 빨리 나오라고 유세를 떨어댔다.
은연은 연화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얼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주 잡았던 희고 가는
손끝이 차가워서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연화는 은연이 가져다준 두터운 이불을 한구석에 깔고 마치 번데기처럼 그 이불을 온 몸에


감았다. 여러 가지 옷가지를 가져다준 덕분에 더 이상 돌바닥이 그대로 옷 아래에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곱아 오는 손을 얼른 안으로 숨겼다.

희한한 공간이다. 밖은 찌는 듯한 염천(炎天)인데 이 안은 지독하게 추웠다. 연화는 창문


하나 없이 완전히 막힌 네모난 돌벽의 감옥 안에서 가만히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

귓가에 스륵거리며 천자락이 돌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왕의 모친이


죽었다고 했던가, 연화는 애써 그 소리를 귓가에서 밀어내며 생각했다. 눈을 들고 싶지
않았다.

저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아이…….】

음성이 창백하다고 하면 말이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핏기가 전부 빠져나간 듯 생기 없는


목소리로 여자가 흔들거리며 속삭여 왔다. 연화는 아예 눈을 감고 무릎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뺨 근처로 스치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절대로 시선을 마주하면 안 돼.’


뭘 알아서라기보다 본능이 시키는 일이었다. 연화는 자꾸만 늘어지는 사지에도 힘을 주면서
구석으로 몸을 물렸다. 곧 여인의 발자국 소리가 옥 안을 오갔다. 맨발이 돌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울렸다.

【내 아이.】

연화는 눈을 떠서 팔뚝 밑으로 바닥을 훔쳐보았다. 확실한 형태의 혼령의 발이 감옥을 걷는


것이 보였다. 비쩍 마른 발과 발목이었다.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거친 피부 위로
빈 틈 없이 상처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혼령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연화가 애써 보고자 한다면 볼 수


있었으나, 보지 않으려 해도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확실한 형태의 혼령이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만희의 두통을 치유하느라 너무 오랫동안 혼령들과 접촉했나. 저승의 기운을 많이 쐴수록


한 발짝씩 더 저승에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었다. 연화는 자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계속해서 기력이 쇠진해 가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 마. 그만해. 오라버니.】

여인이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기이하게도 확실하게 연화의 고막을 울렸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었다.

‘큰일이야.’
이곳에 들어온 지 사흘. 연화의 생기를 먹고 여인의 영혼은 서서히 힘을 얻고 있었다.
처음에 약사여래의 온기를 내보내 여인을 위로하려던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온기를 전부
빨아먹고 연화에게 달라붙어 생기를 흡수하려 들어 기겁했다.

비록 생기를 먹는다고 해도 검게 뚫린 두 안구의 자리가 채워질 일은 없었으나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처음 벽 한쪽에 열십자로 매달려 있던 원혼은 이제 내려와
바닥을 걷고 연화의 뺨을 만지기도 했다. 옥 안만을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언제 바깥으로
나가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나가줬으면, 시야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연화의
심정이었다.

다른 이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불행한 과거를 지녔던 왕의 모친이 원혼의 상태로 여전히


죽은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단칼에 맞아죽을
일이었다.

【내 아이를 내게 보내줘…….】

여인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그녀는 돌아다니다가 연화의 앞에 멈추어 섰다. 팔뚝


밑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연화는 눈앞에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들어오는 즉시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한번, 소름 끼치게 차가운 손이 연화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기운이 쭉 빠진다. 만희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령은 연화의 근처를 맴돌며 그녀의 생기를
빨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는 육신은 마치 너절한 낡은 옷처럼 늘어졌다. 연화는
허덕이면서 힘겨워했다.

잠시 후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여인의 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한결 힘 있게 들려왔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여인의 발걸음이 감옥의 창살 근방까지 간 것이 보였다.
힘을 얻었어도 마치 이곳에 갇힌 듯 한 장소만 맴돌던 여인은, 이번에는 창살까지 가서
한참을 그 앞에서 서 있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작은 속삭임이 한 번 더
들려왔다.

【내 아이.】

여인의 선명한 형체는 마치 물을 헤치듯 창살 감옥을 헤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옥


안에 갇혀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연화는 마지막으로 여인의
속삭임을 들었다.

【만희야……. 빼앗긴 내 아이야.】

* * *

현무는 흥미로운 얼굴로 저승의 명부를 들추어보았다.

저승을 지배하는 그는 언제나 죽음을 마주했다. 비극과 희극, 양극단 사이에서 모든 죽음이
이루어진다. 지독하게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극단적인 죽음들을 마주하며 지내온 그에게는
세상만사가 모두 지루했지만 최근 들어 재미있는 일이 늘어났다.

“사방신의 이름이 죽음의 명부에 올라온 것은 처음이지, 게다가 그 반려와 함께 말이야.”

“그렇습니다. 상당히 큰 건수가 되겠군요.”

그는 앞에 앉은 저승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어딘가 흥이 난 듯했다. 키가 작고


마른 저승사자 견암이 현무의 눈길을 깨닫고 잠시 얼굴 표정을 정돈했다. 지금 앞에 앉은
그 역시 사방신이라는 사실을 잠깐 간과했던 탓이다.
“수국의 왕도 올라와 있고. 이번에 죽는 자의 숫자가 제법 많군.”

명부가 꽤 길다. 현무는 천천히 명부를 넘기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 일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

“어떤 이야기이십니까?”

“어느 작은 새가 해준 이야기일세.”

갑작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현무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 자였다. 저승사자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 파란 새가 저승에 붉은 향낭을 지니고 방문했지. 제사에 쓰이는 그 향긋한 냄새를


풍기면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겁이 없군요.”

89 화

“겁이 없다기보다 명령을 받아 어쩔 수가 없었던 게지. 신령계 뱀 일족의 수하였거든.”


“아.”

뱀 일족이라면 견암 역시 알았다. 뱀 일족의 수장인 사혈은 아주 탐욕스럽고 고약한


자였다.

“그런데 그 새에게 왜 왔느냐 물었더니 내게 편지 하나를 주더군. 아, 내게 올 편지는


아니었지만 저승의 사정을 모르는 게 없어야 하니 일단 펴보았네.”

현무는 명부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 백호와 백호의 반려가 적혀 있는 장이었다. 그것을


두드리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둑한 방 안 하나만 켜놓은 촛불이 흔들리며 현무의
얼굴에 명암을 만들어냈다.

“뱀 일족의 수장이 파란 새의 목숨을 대가로 백호의 반려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 달라는


내용이었지.”

“……하지만, 이미 명부에 올라가 있는데…….”

“그자는 그걸 몰랐던 게지.”

현무는 명부를 덮었다. 온통 검은 옷을 두른 사방신은 마치 어둠 그 자체처럼 보였다.


깊고 검은 눈을 들어서 사방신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한테 가기로 되어 있던 편지였다네.”

“…….”
견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속으로 그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좀 더 많은 영혼을 끌어모으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사혈과도 한


번쯤 그런 일이 있었다. 그것을 하필 현무에게 발각당하다니. 그는 잠시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영혼을 끌어모으는 거야 좋지만 편법은 적당히 쓰게.”

저승사자가 저승으로 많은 영혼을 끌고 오려 하는 것은 그의 천성이었다. 평범한


혼령이었다가 기억을 지우고 저승사자로 승격된 견암은 역할에 아주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현무는 평소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이렇듯 발견했을 때 지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거짓을 말하는 건 소용없다. 견암은 눈치 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윤회의 굴레바퀴를 돌리려면 저승에 많은 영혼이 들어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영혼을 데리고 오면 안 되는 일이야.”

“예.”

굳은 얼굴의 저승사자를 잠시 보다가 현무는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그림자처럼 견암이 소리


없이 물러났다. 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현무는 생각에 잠겼다.


백호와 백호의 반려가 한꺼번에 명부에 올라간 건 꽤 큰일이다. 본래 그것 역시 발설하면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는 일부러 수조에게 그를 알려주었다. 걸린다면 약간의 벌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건 현무가 큰 귀찮음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저승에서 알려준
것이니 다른 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현무는 나름대로 백호와 그의 반려였다는 인간 여인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벌써


죽기에는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가 하였으나 저승의 명부란 운명과 윤회와 세상의 규칙이
멋대로 합산되어 나오는 것이었으니 함부로 손을 대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그놈들이 꾀를 낸다면, 최선을 다해 협조는 해주지.’

신령계의 사방신이다. 결국 백호와 그의 측근들이 꾀를 낼 테니 현무는 거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셈이었다.

마음에 든 자에게 죽음의 신은 생각보다 자비로운 편이었다.

* * *

만희는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이 아주 간만에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일어나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웬일이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만희의 머리는 땀에 젖어 귀신처럼 솟아 있었고 피부 역시 거칠었다. 며칠 동안이나 두통에
몸서리치며 괴성을 질러대 목소리 역시 잠겨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은 고통에 못 이겨
스스로 찢어발겨 넝마가 되었다. 침상의 침구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방 안은 전쟁통처럼
난장판이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만희가 신신당부한 대로 그의 방 근처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그사이 살이 쑥 내려버려 손과 팔과


얼굴의 뼈가 툭 불거진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거칠기 그지없는 손바닥의 피부에 얼굴을
묻고 만희가 잠시 신음했다.

너무 오랜만에 갑자기 맑아진 머릿속이라 오히려 멍했다. 아무런 소리도 고통도 없는 상태.

“갑자기 귀신들이 전부 쫓겨나기라도 했는가.”

다행스럽다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멍청한 머릿속으로도 만희는 오히려


불안감이 들었다. 수상쩍은 기분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귓가에 며칠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속삭이던 그 악의에 찬 목소리들이 전부 사라졌다니, 이유가 없다면 믿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것들이 이제야 겁을 먹고 물러났나?!”

그는 괜히 큰소리를 쳤다. 허세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이 잠시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만희는 조금도 아프지 않은 머리를 털어댔다.

문 밖에는 아마도 시녀와 내관이 가져다놓은 물과 음식이 있으리라. 갑자기 꼬르륵 하며


나는 배의 울림에 만희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토록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었으면서
배가 고프단 말인가.
“미치겠군…….”

며칠이나 굶은 터라 힘이 빠져 사지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일어나서 바닥에 넘어진 의자와


찢어진 깔개를 피해 넘어지지 않도록 걸어가는 것만도 힘들 지경이었다.

문 앞의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문 앞에 선 여자를 발견했다.


시녀인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코 이 근방에 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는데. 만희는
화를 낼 기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저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여자는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시녀라면 당연히 물과 음식을 만희 대신 들고 들어오거나


그의 손짓에 따라 얼른 인사하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만희는 힘들어서 다소 멍한 머릿속으로도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만희에게 고정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는 숨을 삼켰다.

눈두덩이가 움푹 파여 검은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얼굴은 뼈다귀 위에 가죽만 발라놓은 듯


비쩍 말라 있었다. 얇은 입술이 말려들어가 치아가 보였고, 코는 잘려나가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빠져 길게 늘어진 몇 가닥만이 남아 있었고, 다 낡은
옷자락이 흐들거리며 허공으로 날렸다.

수없는 목숨을 스스로 죽였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시체의 모습에 만희는
당황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자의 시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더러운 맨발 밑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가 양옆으로 찢어졌다. 웃는 표정이라고 만희는 알아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누, 누구냐?”

힘이 없어 말은 의도만큼 거세게 나오지 못했다. 이 정도로 기력 없는 소리를 입 밖에


내뱉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꼴불견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상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만희는 주춤주춤 더 물러났다.

만희는 혼령이든 시체든 비정상적인 존재를 무서워할 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속에서부터 기묘한 감각이 끓어올랐다. 이 여자의 눈을 보거나 정체를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돌리며 그는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여자는 잠시 그를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그녀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두터운 깔개에 발자국 하나 나지 않는다. 뒤로 그림자조차 없었다. 역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귀신 따위를 무서워할까 보냐 하며 만희가 용기를 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겁을 먹어 몸을 떠는 겁쟁이들을 비웃었으나 지금 그가 그 꼴이었다.

만희는 결국 침상에 풀썩 주저앉았다. 모르는 사이 등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버석거리던 손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그의 코앞으로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의


주위로 고약한 악취가 풍겨 왔다. 시체의 썩은내였다.

“대, 체…… 누구냐…….”

물음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입을 달싹여 간신히 말을 만들어냈지만 소용은


없었다. 여인은 몸을 굽혀서 만희의 시선과 눈 높이를 맞췄다.
오기가 생겨 그가 죽을힘을 다해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까짓 혼령들과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씨름을 해왔다. 평소에도 자신의 목덜미와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우스울 뿐이었다. 만희는 도깨비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똑바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고 표현하기는 이상한 일이었다. 여인에게는 안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눈이 있던 자리에 뻥 뚫린 동굴 두 개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더 큰 공포는 그녀가 신음처럼 낸 소리였다.

【내 아이.】

만희의 적안이 찢어져라 커졌다. 여자의 손이 그의 어깨에 올라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아귀가 넓은 어깨를 틀어쥐었다. 분명 혼령인데 살이 패일 만큼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부터 냉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누, 누구……. 감, 히 내게…….”

만희는 난생 처음 공포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거대한 덩치로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자는 비쩍 마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안아 들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여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돌아오렴, 나의 아이. 내 아이.】

높은 비명과 닮은 웃음소리였다.
【내 오라비가 지은 죄의 증거. 내 시궁창 같은 삶의 결과물, 내 아이야.】

“닥쳐!”

기어코 그가 비명을 지르며 여자의 몸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주먹은 아무것도 때리지


못하고 허공을 지나쳤다. 분명 실제 사람처럼 선명한 모습이었으나 만져지는 것은 없다.
만희는 미친 것처럼 발광하며 주먹을 휘둘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여자가 웃는
소리가 높았다.

【내 아이! 내게 오렴. 나와 함께 이제 저 땅 밑으로 가자꾸나.】

성대가 긁히며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새었다. 만희가 침상 뒤로 벌벌 떨면서 물러났지만


여인의 몸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따라왔다. 목이 부러진 것처럼 직각으로 꺾여 눈을
들여다보는 여인의 뻥 뚫린 안와에 만희가 발작적으로 허공을 할퀴었다. 깔깔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여인의 형상은 천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목덜미와 어깨, 머리에 남은 차가운 손아귀의
감촉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강해졌다. 만희의 눈이 텅 비어갔다. 생생하게 타오르던
붉은 눈동자는 검게 죽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네가 함께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고르렴. 함께 가자.】

그의 귀에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였다. 속살거리는 소리는 유혹적이었다. 네가 고른 여인은


영원히 너와 함께 있게 될 거란다, 내 아이야.
90 화

만희는 숨을 헐떡이며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곧 몸을 일으킨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검을 찾아냈다. 혹시라도 남을 해칠까 두려워 숨겨두었던 검이다. 잠긴 옆 방까지 가서
숨긴 무기를 찾아내 온 그는 검을 뽑아 들고 검집을 바닥에 버렸다. 정신이 나가버린 듯
꼬이는 걸음걸이라 한참이나 헤맸다. 그는 몸을 휘청이며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그는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가 복도 벽에 부딪히며 돌아 나왔다.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러 장식용의 도자기와 걸개들이 전부 부서지고 찢어져 나갔다. 시끄러운 소리에도
근처에 오지 말라는 엄명 때문에 시녀나 내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계속해서 전각 안을 부수어나갔다.

【그 여자를 찾아.】

【이제 영원히 네 곁에 잡아둘 수 있어.】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 갈 수 있어.】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만희의 어둡고 더러운 속마음을 그대로 햇빛 아래 끌어내 보여주는 것처럼 선명한


속삭임이었다.
무의식 속에서도 그의 이성이 꿈틀거리며 괴로워했다. 억지로 끌고 온 여자, 정인에게 가지
못하도록 붙들어놓고 가둬버린 여자. 연화를 향한 더러운 집착.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계속해서 눈앞을 검게 물들이던 그 독점욕이


머리를 망가뜨렸다. 그는 머릿속에 들리는 말소리에 기쁘게 수긍하며 움직였다. 원혼의
목소리 역시 기쁨에 가득 차 명징하게 만희의 귓전을 울렸다.

【너도 나와 함께 간단다, 내 아이야. 네 소원을 들어줄게, 함께 가자꾸나.】

걸음걸이에 망설임은 없었다. 새벽이어서 시녀와 내관들은 거의 잠들어 있었다. 만희는


비틀거리며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경비병이 그를 막으려다가 흠칫해서 얼른 창을
거두었다. 왕은 느릿하게 두 명의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전하.”

경비병들이 깊이 엎드렸다. 만희의 손에 있는 검을 보고 그들은 긴장한 상태였지만 왕은


그들에게 용건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마치 매우 제정신인 사람처럼 명료하게 말했다.

“염 내관은 어디 갔지?”

“염 내관님께선…… 지금 숙소에 계실 것으로 압니다.”

새벽이었고 염 내관은 지체가 높은 내관이었기 때문에 새벽에 나와서 일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관들의 거처에서 아직 깨지 않았을 텐데 왕이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완전히 미쳐 버린 머리는 마치 제정신일 때처럼 정확하게 모든 일을 기억해 냈다. 그는 염
내관에게 연화를 숨기라 지시했고, 어디에 숨겼는지 자신에게 알리지 말 것 역시 명했다.
나중에 자신의 말이 달라지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엄히 단속했다. 혼령들의 속삭임에 져서
그녀를 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들으면 되는 거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고문이라도 해서 하게 만들면 된다. 비록 절대 알리지 말라는


엄명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염 내관은 충심이 뛰어난 자였으므로 아마 쉽게 입을
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재빨리 경비병 한 명이 뛰어나가 내관을 부르러 갔다. 시간이 어쨌든 왕이 부른다면 당연히
와야 했다. 머지않아 염 내관이 제대로 매무새도 갖추지 못하고 황급히 뛰어왔다.

광증에 매몰되었던 왕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염 내관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그의 앞에 엎드리다가 왕의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그는 순간
멈칫거렸다.

“어찌 일어나 밖까지 걸음하셨습니까, 전하.”

“그래, 염 내관. 내 물을 것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왕의 적안은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무해하게 보이려 만희는 검을 든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해주면 되는 거야. 알겠지?”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래.”

만희의 완전히 미쳐 버린 붉은 눈동자가 휘어졌다.

“연화를 어디에 숨겨두었지?”

* * *

은밀하게 사내들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때는 새벽이었다. 수도 궁 근방의 저택들이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수도를 손에 넣은 채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성들은 가능한 해치지 말라는 장군의 명에 의해 군사들은 절도 있게 빈민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 궁으로 향했다. 해자 근처에 모여 선 군사의 숫자는 일만에 가까웠다. 수도
방벽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군의 숫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아마 왕이 동원할 수 있는 왕궁 내의 병사보다 몇 배는 많으리라. 수도를 방어하는 장군


황영과 도시를 둘러싼 방어진의 장군들이 모두 합심한 결과였다.

‘오랜 시간 장군들을 설득한 보람이 있었지.’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지속되어 온 수국 내에서 장군들은 이미 조정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선대 왕이 정복 전쟁을 즐기며 무관의 위치가 다소 격상되는가 하였으나 만희가
집권하며 다시 원래의 풍조대로 돌아가 버렸다. 오유가 그리 어렵지 않게 장군들을 설득할
수 있던 이유였다.

그는 궁의 성벽 앞에 도착해 말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귀족이자 왕에게 빌붙어


폭정을 돕고 축재에 눈이 벌겋던 대신들은 짧은 시간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살해당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없앴으므로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칼은 뽑힌 것이다.

오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장군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길은 침착하면서도 열렬했다. 그가


손수 고르고 키워낸 소중한 그의 부하들이었다.

밖에서는 그들을 반란군이라 불렀으나 오유는 자신의 군대를 혁명군이라 불렀다. 지배층을
완전히 갈아엎고 새 시대를 열 자랑스러운 군대. 이 지리멸렬한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새
나라를 개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그의 군사.

“수도 내부는 이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황영 장군께서 안심하라 전하셨습니다.”

“그래, 고맙다.”

오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걸려 해자를 건넜다. 성문의 왼쪽 아래를 두드리자 작은


창문을 열고 경비병이 눈을 드러냈다.

“장군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이 시간에는 누구도 궁에 출입이 불가능하십니다만…….”

의아한 듯한 그의 눈빛에 오유가 암호를 말했다.


“‘별을 보기 위해 왔노라’”

경비병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님 말씀 받고 오셨습니까? 제사장님은 지금 행방불명이시니…….”

웅얼거리던 경비병은 곧 작은 창을 닫고 사라졌다. 잠시 후 끼익거리며 느릿하게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가 들어올 만한 간격만이 열린 육중한 성문에 오유는 미소를
짓고 말을 몰아 들어갔다. 곧 그의 뒤로 성문이 닫혔다.

“시녀를 데려가려 오셨습니까? 밤놀이를 위해 시녀를 데려가실 때는 재상께서 항상 직접


오셨는데…….”

“그랬군. 시녀를 데려가 놀이를 즐기셨나?”

“자주 그러셨지요. 어제도 데려가신 시녀가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하하 하면서 오유가 웃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다. 과연 재상과 함께 있던 그 어린 여자가


시녀였던 모양이다. 다소 의아한 얼굴의 경비병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괘념치 말게. 그나저나 아직 궁 안은 어둡고 조용하군, 나도 이 시간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

“그렇지요. 불침번을 제외한 시녀나 내관들이 깨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말입니다. 호위군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 그렇군. 한 시간. 그 정도면 충분하지.”

“뭐가 말씀이십니까?”

오유는 온화하게 웃었다. 다음 순간 경비병은 말을 멈췄다. 말뿐 아니라 숨도 멎어갔다.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손 안에 감췄던 단도로 경비병의 성대와 경동맥을 한꺼번에
잘라버린 오유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답했다.

“알 거 없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사내가 버둥거리다가 곧 숨을 거뒀다. 바닥에 피웅덩이가


생겨났다.

오유는 손잡이를 돌려 성문을 완전히 개방했다. 조용하게 검은 야행(夜行)복을 입은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 불침번으로 높은 곳에서 밖을 살피는 궁 안의 경비병도
이미 포섭이 된 상태였다.

빠른 속도로 오유의 군사들이 궁 안으로 퍼져 들어갔다. 오유가 명을 내렸다.

“궁 안의 모든 인간을 죽여라. 단 한 명도 놓치지 말고.”

괜한 자비심은 화근의 원인이다.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면 모르되, 이미


벌어졌다면 무자비한 칼날을 공평하게 들이대야 하는 법이다.

“내관이든 후궁이든 시녀든 신하든 관계할 것 없다.”


수국의 궁은 바깥을 둘러싸는 외궁과 중앙의 내궁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궁에는 지체 낮은
후궁과 시녀, 내관, 나아가 병사들이 거주했고 내궁에는 왕과 지체 높은 후궁이나 왕비의
거처가 있었다.

“먼저 외궁부터 깨끗하게 죽여 없애라.”

그 이후에 내궁으로 진입한다. 오유의 명은 군사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사천리다. 지금까지는 계획에 완벽하게 들어맞게 진행되어 왔다. 시간조차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오유는 뭔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불안감을 마냥 무시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파고든 복면의 군사들은 가차 없이 피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이만큼 일이 진행된 이상에는 이제 소란이 일더라도 별수 없다.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수밖에.

그는 군사 몇을 이끌고 내궁으로 곧장 진입했다. 자주 가지는 않았으나 익히 잘 아는


길이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일직선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길.

하지만 몇 발자국 걷다가 그는 자신이 다시 원점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황당해서 오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장, 장군님? 이게 대체…….”


함께 뒤를 따른 군사들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오유는 다시 한번 내궁으로 가는 길로
진입했다. 그리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이가 없어서 오유가 중얼거렸다. 분명 시야에 저 멀리 내궁의 끄트머리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다섯 번째 진입에 실패하고 나서 그는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거 곤란한데.”

* * *

백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수직 동굴의 밑에는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피어난 들판이 존재했다. 온갖 동물들도


함께 뛰어놀았다. 아직 수련을 쌓기 전이라 영(靈)을 가지지 못한 동물들이었다.

그는 발치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안아 올렸다. 백호의 커다란


손 안에서 토끼는 한 줌도 안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구슬 같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백호임을, 사방신임을 아는 눈이었다. 백호는 천천히
토끼의 등을 쓸어주었다.

“무엇을 봐도 연화가 생각나니 정말 곤란한 일이로구나.”


한숨과 비슷한 말이 흘렀다. 토끼의 흰 털은 보드랍고 골격은 가녀렸다. 마치 연화와
같았다. 다친 토끼마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치료를 해주던 여인.

91 화

이제 와서는 그때 다소 좋지 않은 말을 했던 것조차 후회가 되었다. 함께 있던 시간을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그 몸에 자신을 새겨주어야 했다.

“정말 곤란해.”

백호는 토끼를 놓아서 보내주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토끼가 곧 뛰어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백호는 한숨을 쉬고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든 절경이었으나
마음은 어둡고 답답했다.

이렇게나 그립고 힘들 시간을 알았다면 멍청한 짓을 하지 말고 그녀가 떠난다고 했을 때


잡아둘 것을. 나중에 그녀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잡을 것을 그랬지. 그러나 연화가 행복한
곳은 지금의 정인 곁일 것인가.

【백호 님!】

그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아주 멀리서 희미한 전음이 들려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동굴은 수직으로 깊어 보통의 동물이나 신령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날쌘 새가 간혹 들어와도 나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죽기도 할 만큼 깊은 곳인데
대체 누가 들어왔다는 것인가. 백호는 다시 들려온 전음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백호 님, 어디 계십니까!】

호접의 전음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백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바람이 뭉쳐 발밑을


지지하고, 그는 빠른 속도로 전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날아갔다.

“호접, 무슨 일이냐?!”

날아가면서 그는 큰 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고요한 동굴 아래쪽의 들판 위에 백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칩거라고 했는데도 들어왔다는 건 호접의 성격상 대단히 큰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었다.

【오, 맙소사, 백호 님.】

겨우 그를 찾아낸 호접이 날아와 그의 손끝에 앉았다. 어지간히 지쳤는지 그녀의 날개가


바르르 떨렸다. 기가 꽤 소진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백호가 손바닥에 기운을 돌려
호접을 북돋아주었다.

“왜, 무슨 일이냐. 큰일이라도 생긴 게야?”

【예, 백호 님. 빨리 손을 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호접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실은 그 왕이 연화의 정인이 아닐 거라는 추측, 다름


아닌 그 왕이 연화를 끌고 갔다는 말, 저승의 명부에 관한 이야기까지. 가능한 정리하고
축약해 전달하려 했지만 말은 뒤죽박죽이었다.
【백호 님, 연화 님의 정인이 아닙니다. 그 왕은요. 연화 님을 강제로 끌고 가서 정인인
척을 하는 것뿐이에요.】

“…….”

그간 백호의 마음고생이 가슴 아파서 호접은 토해 내듯 말했다.

듣는 동안 백호의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소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푸르고 맑은 눈이 눈꺼풀 아래로 숨겨졌다가 다시 나왔다. 그 눈동자가
다시 또렷이 초점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두, 진실이겠지.”

백호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예, 백호 님.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칩거하시는 공간까지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온


것이며…….】

호접은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백호를 만나고 나니 잔뜩 지친 몸이 이제야 인식이 되었다.

【무엇보다 빨리 저승의 명부를 어찌 해야……. 백호 님과 연화 님이 모두 올라가 있다니


보통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과연 그렇구나.”
백호는 조심스럽게 바람 위에 호접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백호가
부리는 바람은 그녀를 실어 나무 위로 옮겨 놓아주었다. 호접은 지친 채 주군을
바라보았다.

【현무님을 뵈러 가실 겁니까?】

“……아니.”

【그, 그럼요?】

“인간계에 다녀오겠다.”

【……잠시만, 백호 님. 인간계, 수국에요?】

호접의 물음에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백호가 그대로 몸을 날려 수직 동굴을 날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에 제대로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백호 님!】

아니, 그래도 뭔가 눈가림이라도 하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는 말이 치솟아 올랐으나


이미 백호는 시야에 없었다. 최소한의 위장이라도 해야 상제나 세상의 규칙에 들키지 않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텐데. 하지만 백호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갔다.

‘빨리 무슨 수를 내라, 묘우.’


호접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대로라면 백호가 인간계로 내려가 큰 소란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 * *

“말이 없구나, 염 내관. 내가 사람을 잘 보았어.”

만희가 크게 웃었다. 그의 앞에는 염 내관이 피범벅이 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이


먹은 내관은 충심이 깊은 자였고, 왕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자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목덜미에서 흐르는 피를 느꼈다.

지금 왕은 제정신처럼 보이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일전에 자신에게 당부했던 건,


이런 상태를 대비해서였으리라. 염 내관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왕의 진짜 뜻은 전에
자신에게 내렸던 명령이다. 그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바로 눈 앞에서 왕이 명령하는데도 전에 받았던 명을 받들기 위해 말을 할 수가 없다니


말이야. 재미있지 않은가.”

“……전하께서,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제게 말씀하셨기에.”

“재미있구나. 네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뜻을 읽었느냐? 아니면 내가 왕처럼 보이지를


않는 게냐.”

왕이 날카롭게 웃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이 먹은 내관의 머리채를 쥐어 뒤로


젖혔다. 이미 얕게 베인 목덜미에서 피가 튀었다. 경비병들도 차마 고초를 당하는 염
내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는 대단히 인망이 있는 자였고 주변 사람들이
의지하는 자였다.
“그 계집을 어디에 가뒀는지 말하거라, 그런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염 내관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것이 거부의 뜻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만희가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큰 손아귀에 잡힌 내관의 목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손아귀에 힘이
가해져 숨이 막혀 왔다.

컥컥대는 염 내관을 내려다보며 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집이 세. 자네는 옛날부터 그랬지. 아주 옛날, 젊은 시절부터.”

내관은 흠칫했다. 만희의 말투가 묘했다.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염 내관의 젊은 날을


봤다는 듯한 말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목을 조르고 있는 만희의 얼굴을, 그는 애써
눈을 돌려 올려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기묘한 눈이다. 인간으로서 가능한가 싶을 만큼 새빨간 적안. 그의 눈은 이제


푹 깊게 가라앉아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구슬처럼 번들거리다가도 곧 무저갱처럼
침잠한다. 아무리 보아도 살아 있는 인간 같지가 않아서 염 내관은 두려움을 느꼈다.
평상시 만희의 광기 어린 눈과는 또 달랐다.

“계집은 어디 있지?”

확실히 말투가 이상하다. 만희가 연화를 총애하게 된 이후 그는 그녀를 낮춰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왕은 쓸모없는 천한 것을 부르듯 연화를 일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감정한 눈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고?”


“없나이다.”

“마지막 기회인데.”

“뜻대로 하시옵소서.”

염 내관은 목을 길게 늘였다. 목을 치기 좋도록 옷깃과 머리까지 깔끔히 정리해 엎드리는


그를 보고 왕이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나이를 먹고 건방져지기만 했구나, 염 내관.”

“…….”

“하기사 언제나 그러했지. 내게 지켜드리겠다며 울 때부터 말이야.”

염 내관은 흠칫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왜, 죽을 시간이 되니 무서우냐?”

“방금, 제게 내리신 말씀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만희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염 내관은 그의 얼굴 위로 덧씌워지는 희미한


그림자를 목격했다.

“지켜드리겠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지, 늙은이.”

“…….”

“왕이 희례연에 날 밀어 넣고 즐겼을 때 울기만 하던 주제에.”

왕이 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서 내관은 아주 오래 전, 그가 사모했던 한 여인을 떠올렸다.


젊고 아름답고 가여우며, 끔찍한 불행 끝에 기어코 파국으로 내몰렸던 여인. 믿을 수가
없어 그는 떨면서도 만희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광기에 찬 만희의


얼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관의 턱 밑에 칼을 들이댔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전하.”

염 내관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화비(花妃) 전하.”
불러서는 안 되는 금단의 이름을 들은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귀신 같은 형상을 한 채
그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이 늙은 내관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단숨에 목의 절반이 달아났다.

하지만 염 내관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비 전하, 라고


중얼거리는 늙은이의 입모양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만희는 그대로 그의 몸을 도륙
내었다.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듯 내관의 육체를 마구잡이로 찌르고 잘라대는 서슬에
살점과 피가 온통 튀어 만희의 얼굴과 몸을 더럽혔다.

경비병들은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손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왕은 분노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내관들과
시녀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자, 이리들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 중 그 계집, 치유사 계집의 위치를 아는 자가 있겠지?
내게 말해 보거라.”

만희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염 내관, 이 늙은이가 혼자서 계집을 옭아매어 데려갔을 리


만무하다. 분명 저들 중 아는 자가 있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자비로운 듯한 표정을 지어내었다.

“자, 그 계집이 잡혀갈 때 곁에 있던 자를 말해 주지 않겠느냐? 말해 주는 자에게 내 상을


내리겠다. 한 명씩 말해 줄 때마다 내 금 한 덩어리씩을 내리지.”

만희의 명에 따라 내관이 금을 가져왔다. 금 덩어리를 손에 얹고 굴리면서 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로 공포보다 재물이 훨씬 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보통 내관이나
시녀의 일 년치 녹에 해당하는 가치의 금덩이를 보고 서서히 그들의 눈빛이 욕심에 물들고
있었다.

죽어 넘어진 염 내관의 시체와, 왕의 손에 구르고 있는 금 덩어리. 두 가지의 조합은


그들이 입을 열게 함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만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92 화

수직 동굴의 까마득한 높이도 백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숨에 바람을 타고 날아


올라간 백호는 전력을 다해 인간계로 질주했다. 심장이 두근거려 갈비뼈께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통증은 전적으로 마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대체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백호는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저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숨에서 단내가 났다.

‘연화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끝없이 여인의 이름만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평생토록 이렇게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그는 눈앞이 멀어버릴 것 같은 다급함 속에서,
빠르게 스치는 지난 시간들을 생각했다.

당연히 수국의 왕이 연화의 정인이라고 생각했다. 천리안 속의 연화는 좋은 옷을 입고


아름다운 거처에서 지냈다. 그러나 다시 돌이키면 연화는 정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간다고,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녀를 자신이 정인이 있는 게 아니냐며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다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이토록 멍청할 수가 있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호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으나 웃음 한 조각도 밖으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큰 대가를 지불했고, 그리고 지금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 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생각은 계속해서 지난날의 일들을 조각내어 맞추기 시작했다.
연화의 마을이 갑자기 공격받은 것, 정원에 앉아 있으며 다소 쓸쓸해 보였던 연화의 얼굴,
그저 말없이 고요히 떠나가던 그녀의 뒷모습.

‘내가 그리도 못미더웠던 것인가.’

탄식이 터졌다. 남자의 가슴을 저미는 것은 그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뒤늦은 말이고,


그녀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줬다면 어땠을까, 이렇듯 억지로
끌려가게 된 일이 있는데 내가 가야 하노라. 그렇게만 말했더라면 백호가 여태까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여태껏 가만히 앉아 있었던 이유는, 마을로의 귀환이
전적으로 연화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뜻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 그래서 놓아주었는데,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찾아왔던 연심을 조금이라도 더 욕심내어 움켜잡고 있을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을지 모른다. 도망가던 그녀를 끌고 잡아 거래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안았을 때부터. 그렇듯 그녀를 겁박해 끌고 온 주제에 연화에게 그를
믿어달라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짓이다.

백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심장 밑바닥은 타들어 가는 듯 안타까웠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을 수 있던 시간과 다른 사내의 손에 보내지 않을 수 있던 시간.

【다시는 내 손에서 내려놓지 않겠다.】

날아가며 백호는 중얼거렸다. 애써 누르고 숨기고 있던 분노와 욕망이 스멀거리며 전신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길고 흰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리며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는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새처럼 가느다란 여인을 생각했다. 엇갈린 선택 때문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 인간계에 머무르게 된 그녀를.

【처음이 잘못되어서,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가 속으로 웃었다. 시작이 잘못되었다면 나중에 고치면 된다. 백호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내였다. 연화가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줄 수 있었다.

이제 와서는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신령계의 풍경이 그의 곁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인간계로 통하는 통로를 지나 그는


빠르게 수국으로 나아갔다. 더 빠르게, 흰 호랑이의 모습으로 둔갑한 그의 발이 바람을
밟고 앞을 향해 날아갔다. 어느새 수도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스며들었다. 인간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언제나 사건이 있었고
서로를 해쳤다. 그래서 항상 수도 근처에서는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지금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허공에는 피냄새가 군데군데 고여 있다. 특히 왕궁 주변의 저택들에서 여럿의 죽음이


감지되었다. 인간이 여럿 죽어나간 것이 틀림없는 냄새에 백호는 기이한 예감에 얼굴을
굳혔다.

‘분명 청룡이 최대한 늦춘다고 했는데 이미 시작된 것인가.’

나라의 멸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촉발된다. 그러나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가능성 높은 것은


역시 반란군의 득세였다. 이곳은 가장 치안이 좋아야 할 수도의 번화가였다. 그런 왕궁
근방에서 지독하게 나는 피 냄새는 하나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빨리도 시작되었군.】

백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시대의 묵직한 흐름이 피할 수 없이 피부로 느껴졌다.

수국 따위의 멸망은 백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는 정인이든 아니든, 현재 연화가
왕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치유력으로 그의 두통을 달래주고 있다면 왕의 측근이나 다름없을 터. 만약 반란군이


들이닥친다면 가장 먼저 위험할 거라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었다. 백호는 불안이 심장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습을 투명하게 만든 채 궁 위로 날아갔다.


‘저자들인가.’

외궁에서 내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반란군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미 외궁 쪽의 병사나 시녀들은 반란군에게 사로잡히거나 목을 베인 후였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백호의 코 안을 찔러 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반란군을 전부 도륙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인간의


시대가 흘러가는 흐름에 금수의 신인 그가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때, 다른
인간이라면 손을 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만큼 가장 민감하게 흐름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사방신인 그는 촉감으로 시대가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호령해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는 장수 한 명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백호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세계의 규칙이 저자를 가리키고 있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한 공기의 움직임이다. 젊다 못해 어리다시피 한 그 장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내궁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침착을 유지하며 병사들을
지휘했다.

아무리 그래도 청룡의 결계를 뚫지는 못할 것이나, 만약 안에 있는 자들이 밖으로 나온다면


문제는 또 달라진다. 포위한 채 기다리면 안에 갇힌 자들은 어차피 먹을 것이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니.

‘지금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에서는 알기나 할 것인가.’


시간은 얼마나 있을까. 백호는 궁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청룡이 쳐 놓은 결계에 지금은 보호받고 있지만…….’

인간들이 조금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것을 보니 청룡의 진이


분명했다. 과연, 내궁에 청룡씩이나 되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벽을 설치했다면
보통의 인간은 전혀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청룡, 청룡!】

그는 허공을 향해 청룡을 불렀다. 그가 만든 진이라면 그에게 묻는 것이 빠르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바다의 주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인간계로 넘어오며 본신이 아닌 채


세계를 통과하였으니 자신의 힘이 약해져 있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룡이
아예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허공 중에 작은 틈이 생기고 그 안에서 자그마한 요정이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여인의 모습을 한 물의 요정, 수령이었다.

“금수와 초목의 신이신 백호시여, 부르심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청룡을 불렀다만, 어째서 나오지 않는 게냐.】

“지금은 청룡께서 잠시 본신으로 돌아가시어 땅 밑을 살피시는 기간입니다.”


아, 하고 백호가 잠시 날짜를 세어보았다. 과연 청룡이 바다 밑의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본신으로 돌아가 몸을 뒤트는 시기였다. 이 때에는 어떤 일로도 청룡을 불러낼 수
없었다. 그는 못마땅하게 눈썹을 좁혔다.

【그렇다면 혹시 너는 저 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

“진……. 왕궁에 쳐 놓은 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저 청룡 님께서 백호 님과의 거래


때문에 안배하여 쳐 놓으신 거라고 밖에는. 수국의 왕을 보호하여 시대의 흐름을 잠시
머물게 하신다 들었습니다.”

【젠장.】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필, 택한 방법이 이런 것이었다니. 거래의


요구는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가능한 멈춰달라는 것뿐이었으니 청룡의 입장에서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었지만. 과연 청룡과 자신은 잘 맞지 않는 친구
사이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래를 굽어보았다.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청룡의 진이


푸르게 수국의 내궁을 덮고 있었다. 과연 전심전력을 다해 성실히 쌓아올린 진이었다.

그 녀석답지 않게 아주 착실히 약속을 이행했군, 하면서 백호는 혀를 찼다. 쓸데없이 이럴


때만 성실함을 발휘하다니.

저 안에 연화가 기다리고 있다. 청룡의 진만 아니었다면 바로 내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데려오면 될 것인데, 거대한 장애물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었다.
“하오나 저 진은 청룡 님께서 공을 들여 쌓으신 결계이며, 어지간해서는 깰 수 없을
것이라 자신 있게 말씀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리셨다가 청룡 님이 깨어나시면 직접 풀어달라
하시는 쪽이……. 백호 님?”

【시끄럽다. 그렇게 여유가 있다면 내가 부르지도 않았겠지.】

백호는 거칠게 말하며 호랑이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해 허공에 나타났다. 희디흰
머리카락이 어두운 새벽하늘에 날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손을 쥐었다 펴며 자신의 힘을 가늠했다. 청룡에게 살을 내준 데다가


인간계로 넘어오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신의 힘을 수십 분의 일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진을 무효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효화는커녕 자신과 연화를 빼내서 나오는


것만도 힘에 겨울 수도 있었다.

별수 있나. 백호는 수령을 뒤에 남겨둔 채 그대로 쏜살같이 아래로 향했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형상인 그가 오유와 반란군들의 사이를 스쳐 내궁으로
진입했다.

곁을 스치는 난데없는 센 바람에 인간들이 어리둥절하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미 진입할 때부터 전신에 느껴지는 압력이 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관에 힘이


들어가 턱근육에 바짝 날이 섰다.
청룡의 결계는 고약하다. 쭉 뻗어 내궁의 전각이 바로 보이는 길이지만 진입하는 자는 결코
그곳으로 갈 수 없다. 길의 초입에서는 그저 빙빙 돌기만 한다. 그러나 한 발 더 들어서면
그곳은 다양하게 천변만화하며 진입자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초입을 뚫지 못할 것이고, 뚫는다 하여도 이 자리에서 끝없는


미로를 뱅글거리며 돌다가 결국은 말라죽어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명색이 사방신인 그가 이 정도 진을 못 뚫는다면 그도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백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 갔다.

이 진 너머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연화가 있었다.

이제껏 손에서 떠나보내 그리워만 하던 여인이, 바로 이 너머에.

93 화

“내게 볼일이 있다 들었습니다.”

시녀들이 가져다 놓은 찻잔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도 묘우는 놀라지 않았다. 샘물의


정령이란 항상 예상외의 장소에서 나타나는 존재였다.

“왜 본신이 안 오시구요, 청수희.”


“오는 중입니다.”

“어차피 인간계로 가셔야 하는 일이니 본신이 오셔야 합니다.”

여우의 신령은 서책 위의 먼지에 눈을 찌푸렸다. 눈이 뻑뻑할 정도였다. 붓으로 써 내려간


실마리들이 이미 종이 열 장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고 전체에 먼지가 가득 쌓여 그는 간혹
기침을 했다.

“묘우, 그래서 내게 말할 것이 뭐죠? 나를 부르다니 희한한 일이군요.”

까탈스러운 묘우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청수희는 별다른 말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우의 신령은 그사이 빠르게 정리를 해놓은 종이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호접보다 샘물의 정령인 당신이 훨씬 빠르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지금 저는


세계의 규칙을 속여넘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저승의 문서를 속일 방법을.”

“……그런 것이 가능한 건가요?”

“가능할 겁니다.”

세계의 규칙은 엄중한 동시에 허점이 있다. 모두가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동시에 그
죽음의 눈을 속여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 묘우는 신령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신령 중
하나였고, 그래서 옛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얻으려 했다. 그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써
내려가던 내용을 정리했다.

【기발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여우의 신령을 따라갈 자가 있을 리 없지요.】


여인의 목소리가 서고의 계단참에서 들려왔다. 그사이에 본신이 뒤늦게 이 자리에 당도한
청수희였다. 그녀는 긴 푸른 머리를 쓸어 올려 묶으면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지하 서고에 가득한 먼지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샘물의 정령인 그녀에게 건조한
지하 서고의 공기는 몹시 불쾌하게 다가왔다.

【찾아내셨나요?】

“…….”

묘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턱을 두드리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상징과 영기(靈氣)가 모인 물건이 필요합니다. 백호 님과 연화 님을 대신할 만한.”

【물건이라.】

“그 물건을 지닌 생명이 저승으로 가면, 세계의 규칙을 속여 저승의 명부에서 조건이


충족된 것으로 결론지어지겠지요. 무엇보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듯 눈을 속여야 합니다.”

청수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묘우가 고개를 돌렸다.

“사방신의 반려에게 언제나 내려오는 노리개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든 연화 님을


대신할 수는 있을 거예요. 제가 보물창고로 가서 찾아올 테니 일단 그것을 지니고 인간계로
가셔서 백호 님께 말씀을…….”
【그 노리개는 지금 이곳에 없을 겁니다.】

“예?”

묘우가 잠깐 멍해졌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청수희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찌 당신이 아냐는


듯한 눈길에 청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백호 님께서 어떤 거래에 대한 대가로 제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푸른 비단 끝에


붉은 보석이 달린 노리개, 맞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뇨, 그것은 지금 인간계로 넘어간 사영 아가씨가 가지고 있습니다.】

한층 더 알 수 없는 소리에 묘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영이라니, 뱀 일족의 아가씨가


아닌가. 유배를 갔던 그녀가 왜 인간계에 있다는 건지, 그 노리개는 왜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으니, 제가 먼저 사영 아가씨에게 가서 노리개를


받아오지요. 묘우 님은 이곳에서 백호 님을 대신할 만한 물건을 찾아주세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청수희가 바로 지하 서고에서


나갔고, 묘우 역시 서책을 챙기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과연 백호를 대신하여 세계의 규칙을 속일 만한 물건이 뭐가 있을까. 그를 상징하며 동시에
그만큼의 영기가 모인 것이.

* * *

만희는 눈앞에 엎드린 시녀를 내려다보았다. 낯은 익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이다.


그녀의 곁에 염 내관과 함께 연화를 끌어갔던 병사 두 명도 함께 엎드려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쓸데없이 고집들이 세군.”

그는 불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돈에 눈이 먼 내관 한 명이 고한 바대로, 염 내관이 연화를


데리고 갈 때 함께 있던 이들을 전부 데려온 것이었다. 만희는 시녀의 어깨를 발로 툭
밀었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의 눈물범벅된 얼굴이 흔들거리며 위를 향했다. 이미 만희의 손에 한 차례 얻어맞고 난


뒤라 뺨이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눈물로 젖은 얼굴은 단지 신체적인 고통에 의한
것이었을 뿐, 표정은 연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와 흐트러진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만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기껏해야 침방시녀인 주제에 고집하고는.”

다 드러낸 가슴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움찔 놀라는 시녀의 반응에 웃었다. 만희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쥐고 터뜨릴 듯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제법 괜찮은 몸을 하고는 있는데. 나름 내가 예뻐했던 적 있지 않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신음을 목 안으로 삼키면서 시녀 은연은 입술을 씹었다. 만희는 확연하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연화를 가둘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때가
정상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미칠 거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왕은. 그래서 연화를 가두고 그


스스로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그 위치를 발설하지 말라 명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은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집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만희가 히죽거리더니 그대로 그녀의 옷을 단숨에 찢어 내렸다.

내관과 병사들이 가득한 어전에서 거의 맨몸이 된 은연이 숨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가렸다.


만희는 그녀를 뒤로 넘어뜨리고 다리를 벌려 무릎을 세우게 했다.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왕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말을 안 하겠다는 거냐? 그 계집이 네게 뭐라고 이렇듯 왕의 명을 듣지 않는 게지.”

“…….”

은연의 이가 악물렸다. 만희가 바지춤을 풀고 자신의 반쯤 발기한 양물을 꺼냈다. 그는 몇


번 물건을 문지른 뒤 은연의 몸 안으로 성기를 처박았다. 조금도 풀리지 않은 입구가
찢어져 은연은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신음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희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제법 입맛 돌게 생기기는 했어. 지금 그 치유사 계집의 행방을 말한다면 나름 호강하며


살게 해줄 것인데.”
응? 하면서 만희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하반신을 점령해
은연의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었다. 다리 사이에서 찔걱이는 소리는 애액이 아닌 피가 고여
나는 소리였다. 아파서 다리를 움찔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희는 희미하게 만족감 서린
얼굴로 거세게 추삽질을 했다.

그 광경을 함께 있던 병사들이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들은 염 내관과


가까웠고 그녀와도 친분이 있었다.

“어때, 말할 생각이 들지 않느냐? 원한다면 더 높은 자리로 승진도 시켜주지. 품계도


내려주겠다. 딱 한마디, 치유사의 위치만 알려주면 된다.”

“큭, 흐으, 읏…….”

더 이상 신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강제로 열린 몸인데도 아랫배가 따끔거리는 쾌감이


간헐적으로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고통과 쾌락이 섞인 감각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만희가 달콤하게 속삭여 왔다.

“그 계집은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한마디만 하면 된다.”

은연은 눈물이 어린 눈으로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미친 것이 확연히 보였다.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연화는 은연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미워했고, 잠시 모셨고, 잠시 호감을


가졌던 여인. 어디에 있는지 말 한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은연은 목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끝없이
아랫사람들을 능욕하고 짓밟던 사내에게 끝내 고개 숙여 그 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앞에서 다리 벌려 그를 받아내고 있었지만, 이 따위의 능욕에 무릎 꿇고 저 사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오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만희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에 젖어 있었지만 동시에 강단 있게 고집을 드러냈다.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치십시오.”

은연은 기어코 이를 악물고 왕에게 대들었다.

그동안 보아온 왕의 만행들이 그녀 안에 쌓여 분노를 터뜨렸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다. 왕은 결코 주위 사람들이 명을 다해 죽는 꼴을 보지 못했다.
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녀의 신세로는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꼴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하고 싶은 말을 하고나 죽겠다. 만희의 밑에서 흔들리면서도 은연의


눈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불쾌하군.”

감히 천한 것이. 만희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은연은 절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쓸모없고 불쾌한 존재를 가만히 놓아둘 이유도 없었다. 만희는 천천히 손을 내려
은연의 가느다란 목을 감싸 쥐었다. 손에 힘을 주자 서서히 은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이
모자라 허덕이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일부러 느리게 숨통을 조이자 은연의 몸이 퍼덕이며 성기를 조이는 힘이 더 강해졌다. 그
감각을 만끽하면서 만희가 히죽 웃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 쾌감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느리게 은연의 얼굴에서 이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왕의 손등을 마구


할퀴었지만 만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버둥치는 사지도 사내의 거구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전, 전하, 제발, 전하!”

결국 곁에 엎드려 있던 병사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은연이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오던 늙은 중년의 병사였다.

“전하, 전하……. 제발 용서를. 전하. 제가 말씀을 올릴 터이니.”

“…….”

“그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전하.”

병사가 손을 떨면서 엎드려 울었다. 만희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컥컥거리며 은연이


급격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과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붉었다. 왕은 병사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했다.”

“용서를, 전하.”
“그래. 한 번 말해 보거라. 그 치유사 계집은 어디에 있지?”

“연, 연화 님은…… 연화 님은.”

은연은 흐릿한 머릿속으로도 필사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고개를 흔들고 버둥대었다. 하지만
왕의 커다랗고 두터운 손이 내려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

94 화

만희가 자애롭게 웃었다.

“말만 하면 모두 살려줄 뿐 아니라 큰 상을 내리지. 이미 앞서 금 덩어리를 받은 자들도


있지 않은가.”

그 말에 은연과 병사들의 존재를 고해 바쳤던 내관과 시녀들이 황급히 눈을 피했다. 중년


병사는 그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연화 님은 이곳 전각 뒤, 지하감옥에 갇혀 계십니다……. 몇십 년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곳에요.”

“……하.”
만희가 히죽 웃었다. 염 내관, 깜찍한 짓을 했군. 절대 그의 발로는 찾아가지 않을 곳을
골라 연화를 숨겨두었다. 과연 명만은 제대로 지켰어. 그리고 머릿속 한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계집이었군, 그 계집이었어. 그래, 그 노란 생기와 불빛.】

만희는 그 자리에서 은연을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그의 붉은 눈에서 빛이 사라진 듯했다.

바닥에 구르는 은연을 중년의 병사가 황급히 끌어당겨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목이


상해 콜록거리면서 은연은 눈을 감았다. 절대 병사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은연을 위해
입을 열어 연화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었으니.

“가서 이자들을 하옥시켜라.”

만희의 말에 경비병들이 달려와 세 사람을 끌고 나갔다. 만희는 이제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후원의 감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난 그곳이 싫어. 지독하게 차가운 공간, 끔찍한 곳.】

머릿속의 여인이 속삭였다. 후원의 감옥에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끔찍한


기억만이 남아 있는 공간.

【그래도 가야 해, 내 아이가 그 계집을 원하니까.】

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이 사라진 그의 붉은 눈은 그저 본능을 따라, 머릿속에


울리는 원혼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 * *

내궁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또 길이 몹시 길었다.

청룡의 결계는 아주 고약하다. 밖에는 밤하늘과 빛나는 달이 보였으나 그건 눈속임이었다.


백호는 예민한 후각으로 축축한 땅굴의 냄새를 맡았다. 궁의 길은 지상의 누각에서 지하의
땅굴로 연결되어 그를 미로로 인도한 것이다.

청룡은 아주 교활한 작자였고 결계는 그에 비례해 견고하고 복잡했다.

‘쓸데없이 성실하게도 진을 쌓아두었군.’

몸을 누르는 압력이 거세질수록 백호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본신을 소환하여 바닷속으로 들어가 청룡을 끌어내고 결계를 걷어내라고 한바탕
난동을 부릴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눈이 어두워졌지만, 그러다간 본신을 찾아
진입하기도 전에 연화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의 본능은 분명히 지금 가능한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한다고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백호는 금수의 왕, 그의 본능이 가리키는 곳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세상에, 세상이 창조된 이래 사방신이 이리도 애달프게


뛰어야 한다니. 그는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본신으로 올 것을.’


물론 그랬다면 인간계에 지나친 영향을 미쳐 일이 커졌을 것이다.

사방신들은 각자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것에 지독하게 민감하고 영토 자체 역시 다른 세계의


힘에 매우 취약했다. 하지만 지금 백호의 뇌리에 그런 생각 같은 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연화가 바로 지척에 있는데 청룡의 결계 때문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백호는 이를 으득 갈았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살기를 갈무리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여기서 그가 힘을 전부 터뜨리면 결계야 터져 나가겠지만 어디 있을지 모르는 연화가
다칠지도 모른다.

끝없이 뱅글뱅글 이어지는 통로. 청룡의 특기도 아니고 현무의 특기인 땅굴에 가까웠다.

수국은 분쟁이 많았던 땅이라 저승에서 청룡에게로 넘어갔던 영토였다. 현무가 아주 오래


전에 뚫어놨던 굴일 터다. 백호가 다루기에는 더 고약했다.

청룡의 반대편이 주작이라면 현무의 반대편은 백호다. 현무의 힘이 스치고 간 자리는


정면충돌로 부수기 전에는 백호가 다른 방법을 쓰기 힘들었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세상이 뒤집히든 말든, 정말 정면승부를 내어야 할지도 모른다.
밤하늘에 뜬 달이 빛을 뿌렸고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색이 엷어졌다. 백호는 점점
마비되어 가는 이성을 느꼈다.

【정신 차려.】

그 때 그의 앞으로 가느다란 불꽃이 날았다. 길게 이어지는 붉은 불꽃.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신력.

“……주작?”

【아아, 그래. 오랜만이야.】

남방의 신, 주작이었다. 자그마한 새로 화한 주작이 검은 허공 속을 날았다. 백호의 펼친


손만 한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새.

하지만 그녀는 남방의 인간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이었다. 불꽃처럼 화려한 머리카락의 색을


그대로 옮겨온 깃털이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주작은 백호의 시선 앞으로
날아올랐다. 새의 검은 눈이 뚫어져라 백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정해라, 백호. 언제나처럼 단순무식하군.】

작은 새가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주작답게 전음마저도


황홀하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새빨간 깃털을 가진 새를 보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난 너와 놀 시간이 없어.”


【나도 너와 놀려고 온 건 아니야. 아, 물론 놀리려고 온 건 맞지만.】

주작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허공을 한 바퀴 돌아서 백호의 눈앞에 두둥실 떴다. 새의 검고


콩알 같은 눈동자 속으로 번뜩이며 선연한 동공이 보였다. 그녀는 날카롭게 웃었다.

【네놈이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와봤더니 멍청한 짓을 하고 있도다. 평소의 패기는


어디로 간 게야? 아니, 평소와 같은 건가. 생각 없이 앞으로만 달리는 꼴이라니.】

불의 사방신 주작은 긴 꼬리를 흩날리며 백호의 앞을 이리저리 날았다. 그녀는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이놈 저놈 다 구경이군.”

【이곳저곳에 전부 유명해졌거든, 네 반려. 천하의 짐승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고 말이야.】

“시끄러워, 난 지금 길이 바쁘다. 말싸움하고 있을 틈이 없어.”

【바쁘다고 해도 어쩔 건데? 이곳에 펼쳐진 청룡의 결계는 현무의 땅굴과 합쳐져 네놈과는
궁합이 최악이다. 어쩔 테야?】

“너만 없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한 발이라도 앞으로 갔다!”

백호가 화를 벌컥 냈다. 청룡은 교활했고 현무는 음습했으며 백호는 다혈질이었다. 주작은


속을 알 수 없었다. 변신의 귀재인 그녀는 변화무쌍한 불처럼 언제나 모습을 바꾸었고
청룡이나 현무의 속내까지도 꿰뚫어보았다.
주작은 화려한 날갯짓을 하며 낮게 웃었다.

【앞으로만 가서 어쩌려고? 네 반려를 찾으러 온 거라며.】

“찾아야지.”

【결계는 어쩌구?】

“…….”

백호는 분노에 눈을 번들거렸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자신의 단전에 쌓이는


기운을 느꼈다. 금수의 왕의 분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생명력을 전부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운을 이대로 폭발시켜 버릴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멍청한 짓.】

백호의 극한에 달한 분노를 눈치챈 주작이 날개를 팔랑거렸다. 이대로 백호가 본신의
힘까지 동원해 결계를 터뜨린다면 그 영향은 본인에게만 미치지 않는다. 수도 전체가, 혹은
수국 전체가 폐허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것은 필시 주작이 수호하는 초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모든 것을 너 혼자 하려고는 생각하지 마라, 이 독불장군아.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청하는 것이 현명하다.】

“무슨 헛소리야, 청룡의 결계를 감히 누가 뚫을 수 있다고. 지금 신령들을 불러봤자 이 궁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으이구, 멍청한 것.】

주작은 답답하다는 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는 백호의 얼굴 가까이로 날아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너, 내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 것 같으냐.】

“그야, 너는 현무와 대척점이 아니니 힘을 비틀 수 있었을 것이고 천변만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청룡의 힘에도 그리 영향을…”

【그래. 그 다음은?】

백호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주작을 바라보았다. 작고 붉은 새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난 이곳의 길을 알 수 있어. 그 다음에 나한테 할 말은 없어?】

그녀는 백호의 다음 말을 빨리 하라는 듯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백호는 재빨리 답했다.

“……날, 도와줄 수 있겠나, 주작? 이 빚은 꼭 갚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백호가 부탁했다. 그 말의 어조는 마치 애원과도 같아서 주작은 조금
놀랐지만 표정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호는 지극히 직선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사내다. 설마 그에게서 이런 부탁의 말을 듣게


되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만불손한 다혈질의 금수조차 사랑 앞에서는 제법 기특하게 변하는군. 주작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을 뻔했다.

그녀는 다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주작의 꼬리깃에서 붉은 빛이 새의 움직임을


따라 둥근 빛의 원을 그렸다. 어둠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붉은 빛. 그녀는 짐짓 탓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 빨리도 말하는군. 성질만 급한 놈.】

“도와줄 건가?”

【네가 멍청한 짓을 하고 있으니, 동료 된 의리로 도와줘야지 뭐 어쩌겠어.】

“여태 내가 곤란을 겪는 걸 구경한 건 아니고?”

백호는 긴장된 목소리로도 툴툴거렸고 주작이 한 바퀴 다시 돌았다.

【설마, 그걸 구경하고 싶었다면 이리 빨리 나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날 모르는군, 백호.



웃음소리와 함께 주작의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땅굴 안에 청명한 소리가 가득 찼다.

【그냥은 아냐. 내 이 빚은 꼭 받아낼 것이다. 기다려라.】

주작이 빙글 돌아섰다. 그녀가 날기 시작했다.

【날 따라와라. 길을 알려주지.】

“고맙다.”

새의 빠른 날갯짓에 맞춰 백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둘의 움직임은 빛처럼 빨랐다. 작은


새가 그리는 궤적은 한 줄기 붉은 선처럼 보였고 백호의 걸음은 바람과 같았다.

한동안 달리다가 검은 통로 가운데, 한 번도 보지 못한 길이 나타났다. 주변이 온통


일그러진 것이 청룡의 환술과 현무의 땅굴 때문에 현실과 결계 사이의 경계가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저 경계를 부숴라. 최대한 다른 공간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힘을 조절해서. 자칫하면


결계 안의 공간과 밖의 공간이 충돌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해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백호의 손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는 바람을 일으켜 오른손에 감고 오른발을 내밀어 디디며


부드럽게 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서부터 퍼져나간 장력(掌力)이 둥근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을 일으켰다. 아주 고요하고 세밀한 힘의 발산이었다.
정확히 경계만을 두드린 고요한 힘에 의해 진을 형성하고 있는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땅굴의 모습이 점차 흐려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95 화

백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군. 내 이목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의 환상 결계라.”

【실제 있는 땅굴을 끌어다 보여준 것이니 그럴 만하지.】

공기가 흔들리며 결계가 빠르게 무너져갔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망가뜨릴 수 없는


청룡의 결계가, 약점을 건드려 치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주작이 한 바퀴를 돌았다.

【이로써 청룡 놈의 결계를 내가 또 한 번 무너뜨렸군. 약점을 알기 쉬웠어, 이번에는.】

주작은 청룡과 더불어 결계를 잘 쌓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고 둘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의


기류가 흐르고는 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붉은 새의 가슴털이 동그랗게
솟아 나왔다.

【자, 가라, 백호. 너무 늦기 전에.】


“그래,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다.”

백호는 사라지는 땅굴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 아래로 아주 미세한 먼지가 풀썩


일었다. 사방신은 어떤 흔적도 없이 산과 물을 건널 수 있지만 금수의 왕인 그가 육신과
육화된 사물을 일부러 피할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라도 백호는 자신의 육신의 존재감을
극한으로 과시하는 신이었다.

눈을 깜박 하자 파랗던 눈동자가 거의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밝은 파란빛이 되었다. 원래도


고양이과 맹수의 눈을 하고 있던 백호의 눈은 동공이 가늘어져 완벽한 호랑이의 눈으로
변했다.

점차 빨라지는 발걸음에 따라 자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굵은 모래를 밟으면서 백호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 * *

“사영 아가씨.”

“……청수희 님?”

사영이 난데없는 부름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물이 없었다. 청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올 만한 매개체가 단 하나도 없는 공간에서, 샘물의 정령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어, 어디인 거죠?”

“여기, 화병.”
꽃이 꽂힌 도자기 안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영은 도자기 쪽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청수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좀 일이 있어서 본신도 인간계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야. 다만 먼저 전해야 하는


말이 있어서.”

“예, 뭔데요?”

“지난번 내가 줬던 노리개, 가지고 있지?”

“물론이에요.”

백호의 반려에게 대대로 물려졌던 노리개다. 소중한 물건이니 언제나 품에 넣고 다녔다.

사실 자신이 원했던 반려의 자리에 대한 미련처럼 느껴져서 불편하기도 해 때가 되면


청수희에게 돌려주거나 아니면 연화에게 직접 주려고 했다. 그녀는 품에 손을 넣어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일이 좀 복잡해. 지금…….”

청수희는 한숨을 쉬고 현재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줄여 전해주었다. 사영은 놀라서 손을


떨었다. 백호와 연화가 함께 저승의 명부에 올라 있다고?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천지가
한 번쯤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그냥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방신 중 한 명이 사망하여 저승으로 떠난다는 건 한
세계를 책임지는 자가 완전히 자리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령계 하나뿐이 아니다. 각 세계의 균형이 어그러져 어떤 식으로 망가질지 모르니 분명


상제가 개입하여 그 균형을 다시 잡아놓을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떤 잔혹한 수단이
동원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옥황상제는 자비로운 동시에 가장 잔인한 신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저승의 명부를 속여야 해. 일단 그 노리개가 있다면 연화 님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는 있을 것이고……. 하나를 더 찾아내서 백호 님을 대신해야 하는데.”

골치가 아프다. 청수희의 시름이 깊었다.

“묘우 님이 그런 물건을 찾아본다고 했는데 쉽지는 않을 거야. 백호 님은 물욕이 그리


없으신 데다 과시도 안 하는 분이고.”

“어떤 물건이 필요한 건가요?”

“백호 님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만큼 영기(靈氣)가 쌓인 것. 누가 보아도 백호 님을 닮아


세계의 규칙을 속일 수 있는 것. 쉽지 않은 조건이지.”

사영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그녀는 치마 속에 숨겨 가지고 나왔던 수틀을 생각했다.


연화가 공들여 수놓으며 계속해서 어루만졌던 동그란 수틀. 첫눈에 보아도 짙은 영기가
느껴졌던, 흰 호랑이의 그림이 수놓인.

“아무튼 그 노리개 꼭 잘 간수하고 있어. 내가 가볼 테니까.”


“그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저승으로 가야 하겠지. 그것도 사실 문제야, 일단 저승으로 가서 강을 건넌다는 건


실질적으로 목숨 하나가 필요한 일이니까…….”

“…….”

“곤란하지. 뭐, 아무튼 방법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사영


아가씨. 곧 도착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 후 청수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기운도 사라져 완전히 방 안에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영이 멍하니 서 있다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어쩐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왕이 연화를 갑작스럽게 가두고, 은연을


끌고 가고……. 이제 어떻게 흘러갈지 사실 예측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전각 안에 있는
자들도 모두 은연처럼 끌려가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지금 만희는 광증이 이전보다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사영 자신 역시 둔갑하여 힘이 약해진


만큼 인간들과 똑같이 수모를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노리개와 수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사영은 직감적으로 이 수틀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느꼈다. 거의 틀림없이, 백호를 대신할 수 있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수틀을 쓰다듬었다.
빼어난 솜씨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자수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했다. 연화는
언제나 그 수틀을 끌어안고 앉아 한 땀씩 바느질을 하며 그리운 얼굴을 했다. 그녀의
마음이 온전히 모이고 결합하여 이 안에 담긴 것이다.

눈앞에 온화하고 부드럽던 연화의 모습이 스쳤다. 괜히 그녀를 미워하여 큰일을 당하게
하려던 과거 자신의 모습 역시.

“미안합니다, 연화 님.”

사영은 마음속이 혼란해져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와 백호가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손 안의 물건들로 둘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쓸모없이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충분히 쓸모없는 삶을 살았으니, 이제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시점일 것이다.

사영은 그렇게 믿었다.

“저승…… 저승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

사영 역시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알았다. 인간계와 신령계 사이의 중간지대를 지나 좀 더


깊이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끝없이 나아가다보면 저승과 맞닿은 경계를 지날 수 있다.

그곳까지 가며 혼령들에게 위험한 상황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저승까지


가지도 못하고 스러진다면 그건 개죽음이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는 노리개와 수틀을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겼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쓸모없는 인생을 기다려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한 번이라도 세상에 태어난 쓸모를 하고
죽을 것인가. 저승으로 간다는 사실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사영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곧 물건 두 개를 손 안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왕


결심한 이상 더 시간을 끌 일은 아니었다.

그 때 방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으로 긴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들어섰다.

“빨리 오셨군요, 청수희.”

【일이 급하니 무리를 좀 했지.】

힘을 과하게 썼는지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청수희는 손을 내밀었다.

【노리개 줘. 일단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럴 필요 없어요.”

【뭐가?】
“이거.”

사영이 결심한 얼굴로 노리개와 수틀을 틀어쥐었다.

“내가 가지고 저승으로 내려가겠습니다.”

* * *

“아.”

오유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앞에서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던 부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풀려난 사지에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갑작스럽군.”

내궁까지의 길이 갑자기 훤히 뚫렸다.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보고 부하 장수가 달려와


그에게 고했다.

“장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조금씩 나아가라. 혹시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고.”

그 명을 받들어 조심히 앞으로 전진하는 부하들의 뒤에서 오유는 검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만 막혔던 것이 아니라 소리도 지워져 있었는지, 밖에서 났던 소란을 안의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자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나온 시녀나 하인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반란군의 칼에 목이 떨어졌다.

‘미안한 일이지만, 궁 안의 인원은 깨끗이 죽여야 후환이 없겠지.’

오유 역시 스스로 검에 피를 묻히며 사람을 베었다. 그는 그리 큰 죄책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 더 큰 자신의 의무가, 새 시대를 열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이 저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왕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생포해서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그리 간단히 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전 시대의 왕이 죽는 모습은 반드시 백성에게 보이고 전시해야 하는 법이다. 참수하여 목을


성문 밖에 걸어 누구나 이 나라의 왕조가 뒤바뀌었음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오유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누구도, 이제


막을 수 없었다.

병사와 시녀와 하인들을 모두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다. 내궁 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눈치챈 경비병들이 전각 내외부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반란군들이 맞서 싸워 없앴다. 나무 수풀 틈에 숨어 화살을 날리는 자들
덕분에 경비병들이 더 손쉽게 죽어나갔다.

오유는 왕의 전각 근방까지 다가가 곁에 있는 전각에 불을 지르도록 명했다. 이제 들킨대도


상관없는 노릇이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전진했다. 이제 전면전이었다.
전각에서 불 붙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 내관들의 숙소였는지 제대로
차림새를 갖추지 못한 내관들이 도망 나왔고 나오는 족족 칼에 맞아 죽었다. 이리저리
도망가는 그들을 쫓아 정교한 솜씨로 화살이 날아갔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갔다.

“쓸데없이 넓기도 하군.”

계속해서 전진하는데도 내궁은 끝이 없다. 왕의 여인들과 함께 거처하는 곳이라 그로서도


이 안까지는 구조를 알지 못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군사의 발길에 짓밟혔다.

“이 난리가 나는데도 나와보지 않는 왕이라.”

어디까지 썩어빠졌는지 알 수가 없다. 경비병들은 저 사느라 도망가기 바빴다. 내관이나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벌써 도망이라도 친 건 아니겠지.”

오유는 타당한 의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뒷문까지도 포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느


쪽에 개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전 왕이 도망치면 으레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에 붙어 다시 왕조를 복권시키겠다 난리를 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자, 빨리 앞으로 가라, 가서 왕을 가장 먼저 찾는 자에게 기와집과 재물을 내리겠다!”

마음이 급해져서 오유가 호령했다.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이 욕심에 눈을 번뜩이며 휘두르는


검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아침이었다.
96 화

만희의 발걸음이 후원에 멈춰 섰다. 도무지 저 차가운 땅 밑의 감옥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의 여인이 속삭였다.

【그 여자를 끌고 나오라고 해. 나는 저곳에 들어가지 않아.】

만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지하감옥으로 들어가 곧


여인을 끌고 나왔다.

연화는 신음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침이 밝아오는 듯 아직 어둠이 남은


하늘이었다. 며칠째 지하감옥에만 갇혀 있었던 그녀는 거의 축 늘어진 옷감처럼 사지에
힘이 빠져 병사들에게 들려 나왔다. 병사들이 그녀를 끌어다 만희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오랜만이구나, 연화야.”

만희가 웃었다.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이 여인의 이름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더럽고 슬프고 힘든 모습이었으니 연화는 여전히 가느다란 새처럼 가녀리고 아름다웠다.
그는 연화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잘 지냈느냐? 나도 네가 어디에 있었는지 몰랐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 만희의 몸에 거의 겹쳐져 있는 혼령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단숨에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바로 감옥에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 여인의


혼령이었다. 눈이 검게 뚫려 있던, 소름 끼치게 차가웠던 여인. 그녀가 만희의 신체에
깃든 채로 무저갱과 같은 입을 벌려 웃었다.

“보고 싶었다.”

만희가 연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 눌렀다. 달콤하다기에는 어딘가 오싹한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떨면서 그의 입맞춤을 견디고 있다가 놓여나는 즉시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두려움이 심장을 조여 오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군.”

“…….”

차마 보고 싶었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연화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만희는 분명 그녀가 알던 그자가 아니었다. 원혼, 저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싹한


원혼이었다. 그 한이 깊고 깊어 더 이상 저승에조차 발걸음하기 힘든. 그래서 제물을
데리고 함께 끌고 가려 드는 원혼.

“전하, 제발…… 제발 전하.”

“그래, 말을 해보거라.”
만희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듯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답했다. 저것은 아마도 그의
진심이리라. 연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녀를 해할 것이다.

“저는……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 눈을 뜨셔야 합니다.”

연화는 용기를 내서 속삭였다.

지금 만희의 눈은 완전히 가리워져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 자신의 행동이 아니다.


원혼의 한과 뒤섞인 잔인함 때문에 만희는 분명히 후일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눈을 뜨라니, 난 뜨고 있다.”

“마음의 눈 말입니다, 전하. 제발. 저를 보셔요. 전하.”

연화는 필사적으로 말하면서 손 안에 노란 기운을 띄웠다. 대담하게 왕의 손을 잡고 그녀는


기운을 불어넣었다. 어쩌면 이것으로 잠시라도 원혼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화의 손 안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원혼의 그림자가 잠시 흐릿해졌다. 한순간에 연화의


몸이 축 늘어질 정도로 거대한 생기가 빠져나갔다.

순간 만희의 눈이 조금 또렷해졌다. 그는 자신을 잡고 있는 연화를 내려다보면서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기억이 전부 섞여서 흐렸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날 듯 하면서 나지 않았다.
만희는 큰 손으로 지쳐서 초췌한 연화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연화야?”

“……전, 하…….”

그녀가 만희의 손등을 잡아 왔다. 연화는 숨을 헐떡였다. 지나치게 많은 기운을 한 번에


뺏겨버렸다.

“정신 차리세요, 전하. 기억해 보세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만희가 눈을 깜박였다. 아주 천천히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연화에게 무엇을 할 작정이었는지.

“대체 이게…….”

창백해진 왕의 얼굴을 보며 연화가 그의 바짓자락에 매달렸다. 그녀는 애타게 애원했다.

“잠시나마 원혼이 물러난 상태입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무엇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게냐. 내가…….”

순간 만희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일어서서 덜덜 떨며 물러나는 그녀를
막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역시 왕이 이상해진 것을 모두 확실히 느꼈다. 눈 먼
칼에 누가 먼저 맞아 죽을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왕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그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만희는 연화를 노려보았다.

“함께 가자꾸나.”

이빨이 드러나는 웃음과 함께 만희는 검을 빼 휘둘렀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아 여전히 염


내관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피가 묻어 있는 그 검을 보면서 연화의 눈이 커졌다.

“이제 도망갈 수 없어. 같이 가야지.”

그의 말투는 마치 달래는 것 같았다. 원혼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


연화는 떨면서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왕은 천천히 다가와 검날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천천히 그었다. 날카롭게 갈린 검날에


얄팍한 치맛자락의 천이 갈라졌다. 그 밑의 연화의 허벅지 피부에서도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신음성을 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만희의 얼굴은, 마치 단 한


번이라도 자극하면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은 폭발 직전의 모습 같았다.

“전, 전하…….”
무릎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연화는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의 검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대로 자신을 조각 내어버릴 살의가 피부가
아프도록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이리 와라, 같이 가자. 저승으로 갈 시간이다.”

킬킬대는 남자가 잠깐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안 돼, 라고 그가 신음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화는 사슴처럼 궁 바깥쪽을 향해 뛰어나갔다.

“잠, 잠깐!”

워낙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왕 옆을 지키던 병사들이 빠져나가는 연화를 잡지 못했다.

왕은 그 뒤를 쫓아 나오며 병사 한 명을 찔러 죽였다. 벌벌 떨던 다른 한 명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며 쓰러지는 동료를 보고 달아났다.

만희의 눈은 이미 악귀와 같이 무분별한 살기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지 눈앞에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도망가는 병사를 쫓아가 그의 모자를 잡고 경동맥에 칼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젊은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원 저 멀리로 달아나는 여자의 발소리가 들려 그는 맹수처럼 그


소리를 쫓아 뛰었다.

연화는 이를 악물고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더 백호를 보고 싶었다. 이제 와서 무슨 염치없는 생각인가
했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차가운 감옥 안에 갇혀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백호에 대한 생각 하나뿐이었다. 갇힌 내내


그녀는 벽을 보면서 그를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었던 신과의 만남. 그가
보여주었던 따스한 애정.

‘한 번만 더 뵐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개죽음당하고 다시 한번 백호를 보지 못한 채 스러질 수는 없었다.

오로지 그 의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살아남아야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망가야


했다.

“어디, 도망가 봐라. 계집년. 내가 잡아줄 테니까!”

만희는 미친 자처럼 웃었다.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는 연화를 보면서 갈데없는 분노가 그녀를
향했다. 그는 악귀 같은 몰골로 그녀를 쫓아갔다.

연화는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달렸다. 마치 죽음의 위기에 놓인 사슴처럼 그녀는 뛰었다.


호접이 오기 전에, 백호에게 사죄의 말을 하기 전에 죽을 수는 없었다.

여자는 후원의 뒤를 돌아, 왕의 전각의 정원으로 달려들어 갔다. 길도 모르고 마구 달린


끝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하늘 밑으로 연화가 달려갔다. 신발이 벗겨져 달아나고 맨발인 채였다.
돌길을 발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뒤에서 들리는 만희의 목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정원 저 멀리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금속성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까지 깨달을 여유는


없었다. 만희 역시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살려, 살려주세요.”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기원의 말을 입에 올렸다. 그녀는 고꾸라질 위기를 몇 번이나


벗어나면서 정원 끝으로 달음질쳐 도망쳤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왕은 갑자기 미친 것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이를 죽일 때처럼 확실한 목적이


있는 칼질도 아니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생명을 다 죽여야 하는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방을 뛰쳐나온 연화를 잡으려던 경비병 둘도 왕의 칼을 받고 죽었다. 시녀와 내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병사들은 갑자기 미쳐 날뛰는 왕을 보며 차마 어쩌지
못하고 멀찍이 도망가 버렸다.

왕은 연화를 쫓아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달려 나와 도망쳤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고, 아침 하늘 아래 왕궁의 정원에는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와 같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숨이 턱 끄트머리에 달려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겪었던 공포. 백호로부터 도망치던 그 첫 순간. 거대한 호랑이가 자신을
물어갈 거라고, 공포와 죄의식에 질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달리던 그 순간. 자신을
잡아 짓누르던, 저 달을 뒤로 한 채 세상 하나밖에 없을 듯 하얗게 빛나던 남자.

가장 위급한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결국 그밖에 없었다.

‘백호 님.’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그래도 슬펐다.
백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다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

허둥거리며 달리던 그녀는 아래를 보지 못했다. 정원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뒤늦게 그것이
생각났고, 발밑이 물컹 했다. 숨이 턱에 달한 연화는 밑을 보지 못했고 헛디딘 발끝에
몸이 기울었다.

현기증인가, 기우뚱 하는 하늘에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대로 한 걸음이라도 더


달려보려고 덧없이 연화의 가느다란 발목이 허공을 찼다. 희례연, 꽃이 피면 나라가 망하고
왕조가 바뀐다는 옛 이야기가 있던 연못.

텀벙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방울이 온통 하늘로 튀어 올랐다. 연화는 몸을 온통


감싸는 싸늘한 물의 감촉을 느꼈다. 인간 여인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수면 위로
흐릿하게 사내의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습니다…….’

왕의 검에 베여 험한 꼴로 죽고 싶지 않소. 연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희가


제정신이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결코 연화를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 다만…… 지독한 한을 지닌 원혼에게 붙들린 것뿐. 지금 만희는 그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연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원을 들은 것처럼, 여인의 몸은 한도 끝도 없이 깊고 깊은 연못의 수면


아래로 꺼져 들어갔다. 마치 쇳덩이라도 매놓은 것처럼 그렇게 무겁게.

“계집!”

연못가에 선 만희는 으르렁대면서 검으로 물 안을 마구 쑤셨다. 이미 깊이 빠져 사라져


버린 연화의 몸이 칼끝에 걸릴 리는 없었다. 그의 검에서 묻어나온 핏물이 맑은 연못
안으로 퍼져나갔다.

어차피 이 연못에 빠져서 살아나온 자는 없었다. 지독히 깊고 끝을 알 수 없는 물이었다.


절대 꽃 하나 필 수 없는 검은 연못이다. 그래서 그런 옛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내 칼로 죽였어야 했는데.”

만희는 숨을 씩씩대었다. 왜 갑자기 연화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칼에 원하는 피를 묻히지 못했다는 불만족감만이 남아 그의
복부를 팽만하게 만들었다.

다른 누구라도 더 죽여야겠어. 저승에 누구라도 더 끌고 가야겠어. 왜 이렇게 분노가


차오르는지 알지도 못한 채 왕은 육두문자를 지껄이며 눈에 핏발이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다 도망가 버려 인간이 남지 않은 왕궁의 뜰 앞에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전부 솟아올라 밤하늘 아래 넘실거렸다. 눈동자에 동공만이 까맣고


새파래 마치 귀신같아 보였다.

97 화

만희의 뇌 속이 순식간에 탈색되듯 깨끗하게 비워졌다. 뱃속을 자글자글 끓게 하던 피에


대한 욕구가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는 머릿속을 습격하는 갑작스러운 공허에 얼이 빠져
눈을 껌벅였다.

귓속을 가득 채우던 여인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그녀는 마치 바람이 빠진 것처럼 희미하게


속삭였다.

【신. 사방신. 어째서?】

하늘로 솟은 백발은 악귀처럼 보였으나 동시에 신성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빛났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그의 주변만 검은 어둠처럼 보였다.

주변이 고요했다. 병사들도 시녀들도 모두 도망갔는지 인적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만희는


침을 삼켰다.

그는 전장에서 십수 년을 직접 몸으로 구른 전사이기도 했다. 눈앞의 존재가 지극히 위험한


상대라는 것이 전신의 피부가 아프도록 느껴졌다. 초점이 돌아온 수국의 왕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쪼그라들었다.
순간 혼령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없이 원혼들과 씨름하며 그들의 목소리와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보통의 원혼들과 달랐다. 애초에 같은 수준의 존재라고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자였다. 다시 한번, 귓가의 여인이 속삭였다.

【신.】

만희가 흠칫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이 없었다. 수국을


가호한다는 청룡의 존재도 우습게 알았다.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벌받지 않는 이 세상에
신의 존재라니 우습기 짝이 없다.

내심 비웃으며 평생을 살았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릎이 녹아나는 것 같았다. 저 남자는


분명히 신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네놈이.”

백호에게서 발산되는 살기에 정원의 풀들이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새파란 눈동자


안을 검은 동공이 부풀어서 꽉 채우고 있었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백발은 허공으로
치솟은 채, 백호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인간 주제에…….”

백호의 머릿속은 분노로 꽉 차서 터질 지경이었다.

저자가 연화를 끌고 갔던 인간 사내다. 그녀의 정인이 아니면서, 그런 척 굴면서 연화의


치유능력만을 이용했던 사내. 그 무엇보다 연화를 백호 자신의 손에서 빼내 가 숨이 닳도록
그립게 만들었으며…….
“감히 손을 대었느냐, 사방신의 반려에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대로 모든 힘을 발산해 이 땅을 태워버리고 싶은 분노를,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사방신으로서의 본능이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의 자제력은 그대로
무너질 둑과 같았다.

사방신의 반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만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공포와


위압감에 압도되어 그는 난생 처음 입 안이 바짝 말라붙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기능을 멈춘 듯한 머릿속으로 아주 느리게,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짓이 흘러들었다.

내관들을 겁박했다. 무엇 때문에 검까지 들고 설치며 그들을 위협했지? 기억이 흐릿했다.


만희는 덜덜 떨리는 몸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하려 했더라.
오래 일한 염 내관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누군가를 쫓아오면서, 반드시 저승에 누군가를
데려가야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이승에 미련 없이 저승으로 떠나기를 바랐어.】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꼭 같이 있고 싶은 그 계집. 저승까지도 함께 가고자 했던 계집…….】

그 속삭임과 함께, 그 자신이 방금 전 행했던 짓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믿을 수가 없어서 만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연화를 죽이려 검을 들고 그녀를
쫓아왔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그녀는 이 깊은 희례연에 빠져 버려 떠오르지 않았다.
익사였다.

“그, 그럴…… 그럴 리가.”

자신의 행동이 마치 다른 이의 행동처럼 눈앞에 보여서 왕은 아래턱을 떨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어쩌면 원혼들에게 져서 연화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 그녀를 알 수
없는 곳에 가두라 명했던 것이지만 설마 진짜로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작게 경련이 일어나는 손을 누르면서 연못을 돌아보았다. 검고 깊은 수면 위로는 방울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습구나.”

분노한 신은 느릿하게 걸어서 만희의 앞에 섰다. 왕은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하고서도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깡 하면서 백호의 피부에도 닿지 못한 왕의 보검이
유리조각처럼 깨져 달아났다.

가까이에 선 백호의 눈빛은 시퍼런 색으로 빛났다.

“넌, 넌 대체 뭐야!”

손잡이만 남은 검자루를 휘두르면서 만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로 점점 더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폭군이었다 하나, 신의 존재는 일개 인간이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백호는 분노만이 타오르는 눈으로 만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뼈 속이 푸른 불꽃으로
자글거리며 타들어 가는 듯했다.

신으로서의 감각이 이미 저 연못에 살아 있는 인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가


땅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그랬다. 인간의 생명력은 저 깊은 연못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뜻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연화는 이미 죽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백호가 탄식했다. 그의 눈 주위가 뜨끈하고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풀뿐 아니라 그가


딛고 선 땅마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사방신의 극한에 달한 분노와 슬픔에 반응해 자연이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다. 초목과 땅의
소리 없는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

거의 곤죽이 된 듯한 머리로 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지나친 두려움으로 뇌가 마비된 것 같았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넓은 어깨를 웅크리고 백호의 발치에 엎드렸다. 마치 용서를 바라는
것 같은 모양새로 만희는 부들부들 떨었다. 식은땀이 몸 전체를 적셨다. 저 깊은 본능이
지금 앞에 있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네가 죽인 여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피부를 아플 정도로 찌르는 살기와 다르게 백호의 말은 단정하고 낮았다.

그는 앞에 엎드린 남자를 굽어보았다. 평소라면 한낱 미물이라 여겨 제대로 보지도 않았을


자다. 그는 사내의 몸에 겹쳐져 있는 여인의 원혼 역시 알아보았다. 지독한 원한이 켜켜이
쌓여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영혼.

“네놈이 손을 댄 그 여인이 내 반려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느냐.”

백호가 낮게 말했다.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는 연못 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말에 만희가 고개를 들었다. 용서를 구할 것인가, 했지만 왕의 눈은 오히려 분노와


경쟁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 그…… 그 여인은, 내가, 내가 사랑하던.”

“…….”

“내 계집, 이다. 내…….”

과연, 사랑 앞에는 용감해지는 것이 인간인가. 용기를 넘어선 만용에 백호는 감탄했다.


본디 인간은 사방신 앞에서 목소리조차 내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수국의 왕은 바닥을 긁었다. 거친 땅바닥을 박박 긁어대며 그의 손끝이 피범벅이 되고
있었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려는 듯 일부러 상처 부위를 문대면서 만희가 헐떡였다.

“내 것이니, 저승으로…… 저승으로 함께 끌고 갈 것이다…….”

백호의 위압감에 짓눌려 바닥에 머리가 처박히면서도 만희가 이를 갈며 문장을 맺었다.


눈의 핏줄이 터져 그의 적안은 완전히 새빨갛게 변했다. 그는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흙바닥에 흐트러졌다.

“저승으로 함께 끌고 간다라.”

백호가 중얼거렸다. 기실 그것이 만희의 진심이었다. 애써 이성을 찾아 연화에 대한 욕심을


줄이려 하였으나, 여인의 원혼은 저 밑바닥에 깔린 그의 진짜 욕망을 찾아내 드러냈다.

사랑하게 되어버린 여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죽음까지 함께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욕망.

신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이해 반 혐오 반으로 바라보았다. 이전이라면 그저 불가해의


영역이었을 것이나 연화가 그의 손을 떠난 뒤 절반은 이해하게 되었다.

백호는 그런 자신에게 약간의 욕지기를 느꼈다. 소중히 해 감싸주어도 모자랄 여인을,


놓아주지 못해 바닥까지 함께 끌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애써 감상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그는 정반대로, 연화가 저승으로


떠났다면 함께 그녀의 뒤를 따라 떠날 것이라고.
“그리하여 치유능력을 아낌없이 써준 연화를, 네놈이 직접 죽인 것이구나.”

백호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승까지 함께 끌고 갈 사랑이라, 비록 절반쯤 이해는 하였으나


그것을 과연 순수히 바라볼 수 있는가.

“원혼이 덧씌워진 인간은 그 욕망을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낸다 하였다. 그것이 네


속마음이었구나.”

백호의 말에도 만희는 눈을 번들거리며 물러서지 않았다. 입 안에서 이빨이 부러져 피가


터져 입가로 흘러내렸다. 반항적인 눈의 인간을 내려다보며 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금수보다도 못한 것이 인간이니.”

더 이상 용서의 여지는 없었다. 비록 분노로 이성이 가리워졌으나 사방신이 된 도리로 그는


최소한의 자비심을 끌어올리려 노력했고, 실패했다.

백호는 말없이 엎드린 만희의 손 위에 발을 올렸다.

“네 죄는.”

“크악!”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고통에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백호의 걸음은 평온하게 한 발을 가볍게 올려놓은 것 같았지만 태산 같은
무게였다.
신은 만희의 오른발 위로 다시 발을 옮겨 밟았다. 산산조각 나는 발의 뼈에 만희는 고통에
울부짖었지만 몸을 피할 수 없었다. 백호의 기세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엔 발목과 종아리를 차례로 밟았다.

“첫째로 그 여인을 속여 끌고 온 죄요.”

죽지도 못한 채로 만희는 바닥을 기었다. 백호는 잠자코 벌레처럼 기어가는 왕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를 밟았다. 우드득 하며 뼈가 마치 묵처럼 뭉개졌다. 처참한 비명이
텅 빈 정원을 울렸다.

“두 번째로 연화의 치유력만을 취하고 속인 것이 또한 죄요.”

신은 탄식하면서 만희의 손목과 팔뚝을 자근자근 밟았다. 인간 남자의 강인한 뼈는 백호의


발 아래서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세 번째는 신의 반려를 죽인 것이 죄라.”

고통에 눈이 뒤집혀 비명을 지르는 만희의 꼴을 내려다보다가, 백호는 문득 이 시간 낭비를


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만희의 주위에서 공기를 제거했다. 죽을 때까지
시끄럽게 내는 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98 화

“정말…… 해악만이 남은 것이 인간이로다.”


진공 상태에서 숨을 쉬지 못한 만희가 눈을 까뒤집었다. 숨을 쉬려고, 공기를 받으려고
본능적으로 인간은 앞으로 기어갔다. 두 다리와 한 팔이 곤죽이 되어 뭉개진 상태에서도
살려고 앞으로 기는 것을 백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 덧씌워졌던 원혼이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려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백호는 다시


사내와 함께 묶어버렸다. 신이 만들어 낸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은 원혼마저
소멸시키고 있었다. 원한에 찬 여인의 혼령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냈다.

【내게 죄를 묻기 전에, 그자들의 죄를 물어라! 신이여, 그자들의 죄를!】

만희의 몸에서 고개를 든 여인은 무저갱 같은 입을 쩍 벌렸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마구 긁어대었다.

【내 삶을 구렁텅이로 몬 그자들을!】

백호는 물끄러미 원혼을 내려다보았다. 억울한 자가 하나둘일까. 그러나 그들이 한을


해소하지 못해 이승에 머물면 더 많은 피해자를, 나아가서는 또 다른 원혼을 만들어낸다.

연화도 그래서 죽었다.

“그것은 저승의 판관에게 물어라.”

백호가 느릿하게 말하며 눈썹을 올렸다.

오래지 않아 사내의 거대한 육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고개가 푹 떨궈지며 흙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만희의 육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꿈틀거리던 원혼도 단말마를 내뱉었다.
허공중에 검은 틈이 벌어지고 창백한 손이 나왔다. 죽은 사내의 머리채를 움켜쥐자 만희의
영혼이 그 손에 잡혀 육신에서 끌려나왔다. 육체의 고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사내의 혼은
귀가 찢어져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갈퀴 같은 흰 손은 그 혼을 그대로 빛
한 점 없는 검은 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인의 원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손 하나가 나와 그녀의 목을 잡아 채 끌고 갔다.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영혼은 생전의 힘 따위는 전혀 쓰지 못했다. 마른 들풀
같았다.

소리도 없이 검은 틈이 사라졌다. 백호는 걸음을 돌려 연못으로 다가갔다.

아주 검고 깊은 연못이다. 연꽃이 피어나면 왕조가 뒤바뀐다는 전설을 지닌 희례연.

저 멀리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피비린내가 함께 흘러들어 왔지만 백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연화야…….”

연못 위로 여자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주위로


옅은 분홍색의 치맛자락이 떠올라 그녀는 마치 연못에 핀 꽃처럼 보였다. 얼굴 주위로
연못의 맑은 물이 고요히 떠돌았다. 화사하고 평온한, 하지만 죽어버린 꽃.

이미 저승으로 가버린 것일까, 어떤 영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백호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목숨이 끊어진 신체는 그저 시신일 뿐. 법칙을 가르는 자인 백호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결도 없는 연못의 수면 위에서 연화의 몸이 저절로
백호에게로 흘러왔다.
“나는 법칙을 지키는 자…….”

사내는 연못가에 무릎을 꿇었다. 사방신으로 태어난 그는 본능적으로 세상의 법칙을 알았고
법칙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백호는 차가운 연화의 손을 잡았다. 물속에서 싸늘하게 식은 그 손을 잡고, 남자는 여인의


피부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백호의 안에서 천천히 법칙들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약사여래를 불렀다.

“당신의 가피를 받은 자가 죽었어. 그녀를 내게 돌려주시오…….”

백호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백호의 긴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날렸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키워 올렸다. 옥황상제 휘하의 모든 세계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연화가 저승으로 간다면 내가 함께 갈 것입니다.”

이번에는 상제에게 속삭이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듣고 있으리라. 세상 구석구석,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전능한 신이었으니 말이다.

“사방신으로서 저승에 입성하는 첫 번째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리하여 함께할 수 있다면.”


두 번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백호는 부드럽게 연화의 차가운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여전히 희고 부드러운 뺨이다. 손은 가늘고 고왔다. 그 손을 입술에 대고 백호가
중얼거렸다.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소. 연화를 돌려주시오.”

만약 이대로 연화가 떠난다면 백호는 저승으로 직접 뛰어들어 갈 생각이었다. 염라대왕의


멱살을 잡아 저승의 명부를 불태워서라도 그녀를 이승으로 돌릴 것이다. 불가능하다면 저승
끝까지,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 갈 생각이었다.

“현무, 답해라!”

백호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동료 사방신을 불러내 담판을 지어야 했다.

뺨에 바람이 스쳤다. 피비린내 나는 아침 바람이었다.

* * *

사영이 빠르게 중간지대로 갈 수 있었던 건 청수희 덕분이었다. 그녀는 청수희에게 지금


당장 자신을 중간지대로, 가능하면 저승까지 데려다줄 것을 요청했다. 샘물의 정령은
물끄러미 사영을 바라보았다. 진의를 알고자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왜 그러려고 해?”

“…….”
“이유를 알고 싶어. 그러기 전에는 움직이기 곤란해.”

청수희는 단호하게 말했고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라. 청수희의 말이 이어졌다.

“알겠지만 저승으로 내려가면 이 세상에 다시 올라올 수 없어.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의


상징물을 가지고 넘어간다면 아예 죽은 목숨으로 분류가 될 거야. 사실 드물게 있던 일이라
과연 사영 아가씨의 영혼이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그조차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알고 있어요.”

“백호 님을 정말 사랑했어? 아니잖아. 연화 님과 그렇게나 친해졌어? 그것도 아니고.”

알 수 없다는 듯한 청수희의 말에 사영은 침묵했다. 청수희의 말이 맞다. 목숨을 내놓는


행위를 하면서 그 이유를 모르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아래로 뜨고 깜박였다.
글쎄, 내가 왜 둘의 목숨을 대신하여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것일까.

“모르…… 모르겠어요.”

“뭐? 저기, 사영 아가씨.”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영은 품 안의 노리개와 수틀을 한 번 더 꽉 틀어쥐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일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 한 가지만 확실했다.
“난 여태까지 내 손으로 이뤄본 게 없어요.”

“…….”

“아마 이번에 성공하면 내가 사방신과 그의 반려를 구한 최초의 신령이 되겠죠.”

사영이 긴장된 얼굴로 웃었다.

“뱀 일족의 열일곱째 딸이, 평생 제대로 뭘 해본 적도 없던 뱀이…….”

평생 전각 한 구석에서 숨만 쉬며 살던 자가 사방신과 그의 반려를 구해낸다. 어린애 같은


영웅담에 취한, 한순간의 감상이라고 폄하될 수도 있었다. 청수희가 그렇게 말할까 봐
사영은 잠깐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면 애써 짜낸 용기가 사그라들 것
같았다.

하지만 청수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영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사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사영은 조금 두려운 눈으로 청수희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얼굴에 다음으로 어린 표정은 동정이나 한심함이 아니었다. 작은 미소를


떠올리고 청수희는 사영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맞닿은 피부가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웠다. 청수희가 손가락으로 톡톡 사영의 뺨을 두드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용기 있는 아가씨야.”

“…….”
“과연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청수희는 부드럽게 속삭였고 고맙다는 말을 사영은 꿀꺽 삼켰다. 어쩐지 울음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눈가를 붉히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얼굴을 굳힌 그녀는 수틀과
노리개를 품에 넣은 채 청수희를 재촉했다.

“빨리 가요, 빨리.”

“알겠어.”

자, 그렇다면 여기서 저승까지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이왕 정했다면 가능한


지름길로 가야 한다. 몸 자체를 옮기기에 방에는 지나치게 물이 부족했다. 청수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리하더니 사영을 전각의 공동욕실로 끌고 갔다.

복도를 꺾어 한참을 달려 간신히 욕실 앞에 갔을 때 전각 바깥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예민한 뱀의 혀끝에 피비린내가 와 닿아 사영이 흠칫했다. 불온한 공기였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죠, 이거?”

“인간들의 반란군인가.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긴 했지만 꽤 빨라.”

청수희는 흘긋 창밖을 바라보았다. 완전 무장한 군사들이 바깥에서 달아나는 시종과


내관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계에 대해 알 만큼 알았고, 돌아가는 상황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수국과 그곳을 전복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정도는.
곧 매캐한 연기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무 전각을 태우는 터라 연기가 검고 짙었다.

“불을 질렀어.”

“빨리 가야겠어요!”

사영이 급히 공동욕실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욕탕에 물이 절반가량 차 있었다. 바깥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시녀와 내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량 살육이다. 신령계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사영은 겁에 질렸다. 신령계는


적자생존의 세계였으나 동시에 이런 식의 대규모 공격과 살해는 일어나지 않는 세계이기도
했다.

욕실 앞까지 달려온 발소리가 멈추고 문이 벌컥 열렸다. 반란군 서너 명이 욕실로 우르르


들어섰다.

“계집들, 여기도 있었구나!”

곧 번져 올 불이 무섭지도 않은가 방화까지 해놓고 전각으로 뛰어들어 오다니, 어지간히


전공에 눈이 먼 자들이다. 어차피 갈 것이니 시간 낭비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청수희는 생긋 웃고 욕탕으로 사영을 끌어안고 발을 들여놓았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완전히 막힌 공간 안에 있는 여인 둘을 보고 군사 서너 명이 검을


번뜩이며 웃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끈적했다. 한 중년 군사가 동료의 옆구리를 찔렀다.
“둘 다 제법 예쁘장한데 재미 좀 보고 없앨까?”

“미쳤어? 빨리 가서 왕의 목을 따야지. 다른 놈들보다 먼저!”

“아, 하긴 그렇군. 걸린 게 많으니까 말이야.”

“난 왕의 목까지는 관심 없어. 여기서 저 계집들이나 좀 즐겨야겠다.”

“그래, 어차피 내가 자르지도 못할 텐데 뭘.”

사람을 앞에 두고 마치 물건처럼 취급한다. 더러운 말로 낄낄거리는 소리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대로 사라질까, 하다가 청수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 인간계에 함부로 끼어들어 힘을 쓰면 안 되지만.’

다른 세계의 힘으로 인간의 명운이 달라지면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은 반란군들이 밀고


들어온 상황이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한 전각 내부에서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사라지고 있었다.

‘서넛 정도의 목숨이야 속여 넘기기 쉽겠지.’

청수희는 결정하고 생글 웃었다.

99 화
눈에 띄게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인이 웃어 보이자 군사들의 눈이 벌게졌다. 샘의
정령이니 인간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미모를 지닌 미인으로 보여, 사내들은 더러운
욕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우리하고 재미 볼 준비가 된 여자인가 본데?”

“기특하기도 하지.”

킬킬대는 음담패설이 쏟아져 나왔다. 사영이 불안해하며 청수희를 재촉했다.

“빨리 가요, 청수희!”

“아아, 잠시만.”

샘의 정령이 눈을 깜박였다. 군사들이 거침없이 다가와 흙발을 욕탕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네 명이 전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소리 없이 욕탕의 물이 밑으로 미끄러져 흘러나갔다.

“마른 땅에서 익사를 하다니, 드문 경험일 거야.”

여인의 웃음소리가 높았다. 그녀의 곁에 채 다가가지도 못하고 발이 굳은 군사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의 몸을 타고 오른 물길이 코와 입 안으로 파고들어 갈 때까지도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기도를 막는 한 덩어리 물에 사내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된 채 사지를 휘젓는 그들을 보면서 물을 움직여 청수희가 군인들을 욕탕
밖으로 던져 내쫓았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색색거리는 소리만 욕실 안에 울렸다. 지금쯤
네 군사의 폐에까지 물이 찼으리라. 더 길게 고통받을 수 있도록 그녀는 기도에서 물
덩어리를 제거했다.

애매하게 숨이 쉬어져 미친 것처럼 기침을 하면서 군사들이 바닥을 긁었다. 고통 어린


신음성이 새긴 했으나 비명이 될 정도로 크지도 못했다. 눈이 충혈되어 마치 튀어나올 것
같았고 바닥을 긁는 손톱 밑으로 피가 샜다.

그것을 보며 사영은 몸을 떨었고 청수희는 밝게 웃었다.

“물 무서운 줄을 알아야지. 자, 이제 갈까?”

욕탕 안 절반쯤 찬 물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곧 둘의 몸이 욕탕의 물에 휘감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뒤에 남은 자들은 고통만 존재하고 죽지 못한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 * *

아주 따스하고 노란 빛이었다. 차가운 물속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을 감싸는


온기에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다리 끝을 스치는 치맛자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현실이
아닌 듯 꿈 같은 기분이었다. 힘을 주어도 팔다리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연화야.】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낯선 목소리. 여인은 그 주인공이 기억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인데도 온기가 느껴질 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예쁜 아이야, 어서 일어나렴.】

부드러운 손길이 연화의 찬 뺨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는 차가웠으나


그것이 기묘하게도 거슬리지 않았다. 서서히 몸 전체로 따스함이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
온기에 손을 뻗어 쥐면서 그녀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세요?”

여인은 아이 같은 말투로 물었다. 몸을 감싼 온기는 마치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안아주던 기억과도 같아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친어머니가
죽기 전에 안아주던 기억을 그녀는 뇌리 깊숙이에서 찾아냈다. 어머니의 연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 향기를 맡으며 잠들던 때를.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얼굴을 묻었다. 매끄럽고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다독이듯 상냥하게 얼굴을 감싸고 목소리가 속삭였다.

【너는 나를 안단다. 아주 잘 알아.】

묻지 않아도 알고 있지. 그 말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알아온


분이다. 아니,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직접 뵌 것이 처음일 뿐이지.

그녀는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약사여래 님.”

【그래, 나의 가여운 아이야.】

따스한 노란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아주 강하고 따뜻했으나 태양빛처럼 강하고 태워버릴


듯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저 그 빛 안의 존재들이 모두 편안하게 쉴 수 있을, 그런 빛.

“뵙고 싶었어요.”

연화가 속삭였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느껴왔던 힘이었다. 언제나 그들을 감싸고 지켜주던 온기. 아픈


자들을 모두 굽어 살피는 보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연화의 시야 안에 부드러운 선을 지닌 한 여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온통 노란색으로 감싸인 그녀는 연화의 아이처럼 맑은 눈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약사여래는 천천히 연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주 오랫동안 돌봐온 자신의 딸에게 하는 듯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넌 아직 저승으로 갈 때가 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한단다.】

네 운명은 참으로 기묘하구나, 하고 약사여래가 속삭였다. 저승의 명부에 올랐으나 동시에


완전히 정해지지는 않은 운명. 그러나 나는 너를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싶단다. 아직 충분한
행복을 맛보지 못하였으니. 보살의 목소리는 고요하지만 동시에 단단했다.
연화는 그녀의 뒤로 긴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둡고 차갑고 긴 강물이 가로놓인 길. 그곳에서 희끄무레한 영혼들과
창백하고 하얀 손들이 그녀를 끌어당기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에 서서 함부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바로 이곳에 보살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승으로 절반쯤 발을 담근 자마저 다시 이승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약사여래였으니.

연화는 따스한 손길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모르되 아직 네가 갈 곳이 아니다.】

약사여래는 다정하게 말했다.

【사방신이 내게 보채고 있단다……. 저승사자의 방문도 무를 수 있다면서, 연화는 왜


데려오지 못하냐고. 정말 어린아이 같은 신이로구나.】

“누가…….”

【기억이 나지 않느냐? 너의 반려.】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희고 보드라운 여래의 손이 다가와 여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 같았다.

【삼도천의 물이 네게 튄 모양이구나, 그 오만한 사방신 말이다. 가장 성격이 급하고


빠르게 불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금수의 왕.】

약사여래가 소리를 높여 웃었다. 온통 텅 빈 공간 안에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만이 울렸다.


연화는 멍하니 맑게 웃는 보살을 올려다보았다.

【상제가 본다면 어이없어 할 게다. 그 백호가 자신의 영토마저 버려두고 널 찾으러


오다니.】

그것이 누구였더라.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백호, 그리운 감정이 기억보다 먼저


찾아들었다. 심장께가 저릿하여 그녀는 가만히 왼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주 느릿하게 한 조각, 기억이 돌아왔다. 비었던 머릿속이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백호 님.”

【그래. 그 녀석 말이다. 사방신, 너의 반려.】

약사여래가 답했다. 보살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깊고 긴 눈매가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가늘어져 있었다.
【그와 너의 운명이 무척 기묘하구나. 아주 가까운 앞날인데도 여전히 확정되지 않고 그저
무정형으로 흘러 다니기만 하는 운명이라니.】

약사여래의 눈에는 저승의 명부가 보였다. 한 나라의 왕조가 뒤집어지는 반란의 와중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명부에 올라 끌려갔다. 그곳에 분명 백호와 그 반려가 올라 있었으나
당연히 느껴져야 할 강제력이 미약했다. 여래는 천천히 연화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아마도 신이 운명에 저항하려는 모양이구나.】

* * *

【그만 불러라, 귀청 찢어지겠군.】

현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얼핏 듣기에는 평소처럼 낮고


무감정한 목소리였으나 잘 아는 이의 귀에는 그 밑에 깔린 불쾌감이 들려왔다. 백호는
연화의 손을 잡은 채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형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퍼져나갔다. 이른 아침, 수국의 내궁이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단순히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잠시 겹쳐진
상태였다. 현무가 옮겨오기 귀찮아하며 저승의 공간을 흐릿하게 펼쳐 놓았다.

“나는 바쁜데 한가해서 좋겠군, 백호.”

창백한 얼굴이 어둠 속을 가르고 나타났다. 가벼운 비난의 말을 입에 담으면서 현무가 길게


찢어진 눈을 백호를 향해 흘겼다.
과연,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중이라 저승이 복잡할 것이다. 현무는 남에게 일을
미루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더할지도 모른다. 신나게 인간의 영혼들을 끌고 다니고 있을
저승사자 견암과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현무는 지금 아마 가장 바쁜 시간일 것이다.

“용건이 있어 불렀다.”

“그래, 당연히 있어야지. 허접한 용건이라면 큰일 날 줄 알아라.”

현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저승의 명부를 탁탁 책상에 쳤다. 바빠서 자리에서 일어날 틈도
없어 공간 자체를 열어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바삐 오가는 하위 저승사자들과
그들에게 끌려온 영혼들의 행렬이 보였다. 저승의 판관과 염라대왕의 곁에 책상을 둔
현무는 바삐 붓을 들어 영혼들의 죄목과 앞길을 써 내려갔다.

“명부에 나와 내 반려가 올라 있다 들었다.”

“……그래.”

현무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하던 일을 했다. 그의 검은 머리가 길게


바닥에 끌리는 모양을 보면서 백호는 입을 열었다.

“연화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지?”

“아직. 저승사자들이 바빠 영혼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거 희한한 일이군.”


백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저승사자가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건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자는 이 하늘 아래 몇 되지 않는다.

혹시 약사여래인가? 그녀가 연화를 사자들의 눈에서 숨겨주고 있는 것인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소중한 기회일 수 있었다. 한 번 저승의 강물에 발을 담갔다면 아무리
사방신이라 해도 그 잃어버린 기억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백호는 몸을 일으켜 현무의 앞에 섰다. 몸이 완전히 넘어온 것도 아니고 그저 소통을 위한


형상이 공간 너머로 왔을 뿐이었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예민하다.

그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염라대왕이 그쪽을 보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은은한 진주빛이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가느다란 몸의 소년이었다. 높은
의자에 앉은 그의 발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붓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백호, 오랜만이야. 가장 거친 생명의 신이 어찌 이 먼 저승까지 걸음하셨나.”

100 화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뭐, 명부에 자네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 때문에? 사방신쯤 되면 사실 우리 애들이


잡으러도 못 갈 거고, 자네가 거부한다면 어차피 유명무실한 게 아닌가.”

“저 외에도 또 한 명이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 능글거리며 말을 돌리는 염라대왕을 보며 백호가 답했다. 또 한 명이라, 하면서
염라대왕이 유쾌하게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자네 반려 말이로군. 소문이 파다하던 걸.”

“아신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어쩌겠나, 이미 명부는 작성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집행할 뿐인데.”

“연화의 영혼을 찾아가는 일을, 저승사자들의 임무에서 빼주시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럼


그사이에 제가 알아서 그녀의 영혼을 갈무리할 것이니.”

태연하게 말하는 백호의 얼굴을 보며 염라대왕이 인상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영혼 찾는 걸 업무에서 빼라고?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별소리를 다 듣겠군. 그랬다가 구멍 나는 명부의 숫자 때문에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어쩌려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알지.”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염라대왕이 혀를 찼다.


“게다가 영혼만을 갈무리해 어쩌려고? 혼령이 저승으로 오지 않는다 해도 여인의 시체가
멀쩡하지는 않아. 부패해 가는 육신을 부여잡고 뭘 하려는 겐가.”

“육신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녀 자체가 중요할 뿐.”

그렇다고 부패하게 놓아두지도 않을 것입니다만, 하며 백호가 덧붙였다. 그의 푸른 눈은


침착해 보였지만 동시에 어딘가 빛을 잃고 있었다.

“나 원 참, 살다 보니 사방신이 이렇게 말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것도 보고.”

“안 됩니까?”

“당연하지 않나.”

턱을 괴고 있던 소년은 발을 달랑거리면서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흥미로운


방법이라도 찾아왔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고 왔다. 지루한 일상에 백호의
이야기는 꽤 흥미를 끄는 소문이었으나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염라대왕이 손을
흔들었다.

“이제 저승에서 좀 나가주게. 현무, 내보내라.”

“……백호.”

현무는 좀 난처한 얼굴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음에도 난처함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으나, 염라대왕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버티지 말고 나가. 나하고 힘겨루기를 했다간 이대로 인간계까지 우리 둘의 힘이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 그거 잘됐군.”

백호는 눈을 내려 연못에 떠 있는 연화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창백하고 차가운 얼굴,


지금은 백호 자신의 힘으로 시간이 멈추어져 있지만 이미 생명은 사라져 버린 육체.

염라대왕이 말한 부패한 육신이라는 말에 백호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과연 인간의 영혼은


보존할 수 있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다. 시체는 썩게 마련이며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 금수와 초목의 신으로서 백호 자신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그 부드럽고 가냘픈 손길이, 작은 새처럼 백호가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작은 여인의


가느다란 사지가 썩어 없어진다. 종내에는 부패하여 흙에 묻히고,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는
만질 수 없게 된다.

영혼이 있더라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이 잡아둔다면 지박령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과연


그는 그런 운명을, 연화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

“백호.”

재차 현무가 재촉했다. 백호는 눈만 깜박거리며 답이 없었다. 이대로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인간계에 쓸데없는 영향이 갈 수도 있어 현무는 잠시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는 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준엄한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

“비록 네 죽음은 우리가 완벽히 보장할 수 없다 해도 네 반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

현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눈속임이라도 할 것이지.


지나치게 직선적인 성격의 백호는 타협을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호가 천천히 앉아서 연화의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가늘고 작은


여인의 몸은 백호의 장포 자락에 감싸여 얼굴만 보이게 되었다.

희고 창백한,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백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미 죽음의


냄새가 이 육신을 감싸고 있구나. 백호의 예민한 후각으로 살아생전 연화의 체향과는 전혀
다른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뜻인가.”

백호가 중얼거렸다. 현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백호의 주변에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만둬라, 백호.”

백호는 서늘한 눈으로 현무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그의 몸을 감싸고 올라오는 기운은


소용돌이치는 흰 안개와 같았다. 아무런 공기의 움직임도 없던 저승 한가운데, 세찬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을 전부 부수고 저승사자를 잡아간다면 어떨까.”

그가 히죽 웃었다. 저승사자는 혼령을 잡아올 뿐 아니라 잘못 사망한 혼령을 다시 육신에


붙여 넣을 수도 있었다. 현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냐. 감히 저승의 지엄함을 부수겠다는 뜻이냐.”

“굳이 말하자면 그렇겠지.”

평소 오만하고 다혈질이지만 선을 넘는 일은 없었던 백호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으로


전신의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애초에 본신이 아니니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백호가 신령계에


누워 있던 본신을 끌고 전심전력으로 달려든다면 이곳의 그 누구도 무사히 그를 이길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진정해라, 백호.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검은 기운을 몸에 두르고 있는 저승의 사방신은 어두운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판관과 염라대왕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백호를 주시했다. 저승으로 끌려오던
영혼들과 저승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노한 사방신의 기운은 본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하를 간간이 흔들었다.

“내가 대체 왜 여태까지…… 인간계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며 움직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백호의 입가에 가늘게 웃음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내가 사방신임을 잊으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백호.”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결국 이런 꼴이 나는 것을.”

소용돌이가 거세졌다. 백호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내쫓을 것인가? 그래, 이건 현무 네놈의 공간전이 능력을 통한 것이니 나는


인간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

“…….”

“그렇다면 인간계부터 부수면 되나? 순서가 달라질 뿐이겠군.”

염라대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 당장 백호를 누르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사분지일을 관장하는 신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균형이 망가질지 알 수 없었다.

현무가 차마 백호를 인간계로 밀어내지 못하고 맞서 자신의 검은 기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방신 둘의 기운이 맞부딪히며 공기 중이 타들어 갔다. 고요하고 무거웠던
저승의 하늘에 벼락과 번개가 오갔다.

“기다리세요.”
일촉즉발로 두 기운이 부딪히려는 찰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주의를 끄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호가 잠시 멈칫했다. 품 안의 연화를 고쳐 안으며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기운이
소강되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고, 염라대왕만이 누구인지 아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삼도천의 검은 물결 한가운데로 두 개의 형상이 천천히 떠올랐다. 두 사람은 느릿하게


강물을 넘어왔다. 한 방울의 물도 묻히지 않으려는 듯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어쩐 일이냐, 청수희.”

“샘의 정령 청수희가 저승의 주인이신 염라대왕께 인사 올립니다.”

“됐다. 아무리 네가 샘물의 정령이라 하나 삼도천을 타고 나타나다니 대담한 짓이야. 한


방울이라도 잘못 옷깃에 묻으면 어찌 되는지 잘 알지 않느냐.”

청수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곁에 있는 여인을 흘긋 보고 백호는 누구인지 알아챘다.

뱀의 일족, 사영.

“뱀의 아가씨까지 끌고 여기에 무슨 일이냐.”

“백호 님께서 풀지 못하실 중요한 일을 사영 아가씨께서 기꺼이 풀어드리고자 하시어,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두 사방신의 기운에 짓눌릴 것 같아 사영의 얼굴은 창백했다. 청수희는 그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사영을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세워 보호하면서 나붓이 절을 했다.

“무슨 뜻이지?”

“말씀 그대로.”

청수희의 곁에 서 있던 사영에게 모두의 눈이 쏠렸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된 적 없었던 터라 사영은 잠시 놀랐다. 그녀는 잠시 불안하게 옷깃을 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의 명부에 오른…… 백호 님과 반려님의 이름을 대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염라대왕이 말했다. 가벼운 반문이었으나 무시는 아니었다. 그저 대단히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일 뿐이었다.

“세계를 넘어가는 자들을 다루는 규칙은 엄격하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법칙은 그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준엄하지.”

소년은 다시 붓을 들어 문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소란이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어, 밖에서는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잠시도 손을 놓고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판관들 역시 다시 붓을 들었다.
“윤회의 굴레에서 나온 명부는 우리조차 다시 쓰지 못한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네가
그들을 대신하겠다는 뜻이냐.”

사영은 그 아름다운 진주빛 머리카락의 소년에게 잠시 넋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명부는…… 정확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이 뜻하는


것이 전혀 다른 인물일 때도 있다고.”

“…….”

“그리하여…… 제가 그분들을 대신해 영혼과 생명을 드릴 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염라대왕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 앉은 아름다운 소년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래서 네가 대신 죽겠다?”

“……예.”

“네가 무엇이기에 감히 사방신과 그 반려를 대신하겠다는 것이지?”

명부를 우습게 보아도 정도가 있지 너무 하는군, 하면서 염라대왕이 피식 웃었다. 그는


기세를 전혀 죽이지 않은 채인 백호와 현무 쪽을 흘긋 보았다.
“세계를 부수는 것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돌아버린 사방신이지만, 한낱 뱀 새끼와는
차이가 크지. 네 무엇을 보고 이 명부가 백호와 그 반려로 여기겠느냐.”

101 화

염라대왕은 다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승사자와 혼령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붓질에 따라 이 저승의 모든 존재가 움직이고 멈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영은 잠시 긴장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저승의 주인. 이승에 옥황상제가 있다면 지하에는
염라대왕이 있다. 상제와 동격의 존재를 감히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릎이 떨려왔다.

“세계의, 규칙을…… 속일 수 있다면.”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용기를 내려고 애쓰면서 염라대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명부가 저를 두 분으로 인식해 죽음의 운명을 충족했다 여기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다만 규칙의 엄격한 눈을 어찌 속여 넘기겠냐는 것이다.”

사영은 흘긋 백호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푸른 눈은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대체 무얼 하는 것이냐?

백호는 가차 없이 그녀의 아비를 벌하였으나 동시에 그녀를 그대로 둔, 자비로운 신이기도


했다. 사영에게 잔인하게 군 것은 그녀의 아비였다.
그녀는 백호를 좋아했다.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동경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강하고 높은 위치의 존재, 또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존재. 그래서 그의 곁이 탐이 났던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사영은 떨리는 손을 쥐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품 안에서 반려의 노리개와 연화의


수틀을 꺼냈다.

“재미있는 걸 가지고 있구나.”

염라대왕이 흥미를 보이며 다시 붓질을 멈췄다. 저승의 모두가 다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목을 쭉 빼서 사영이 든 물건 둘을 바라보았다. 세계의 규칙과 몹시 비슷한
그의 눈에는 아마 이것이 연화나 백호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었다.

“……제법인데. 어찌 백호의 영기가 깃든 수틀을 지니고 있는 게지? 한낱 신령이 말이다.”

“반려께서 그리운 마음을 가지고 수놓으신 물건입니다. 붉은 단심이 깃들어 완성된


수틀이지요.”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염라대왕의 앞에 사영이 조심스레 다가가 두 물건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이리저리 노리개와 수틀을 뒤집어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과연 백호와 그의
반려였다.

“그래, 재미있구나.”
염라대왕의 기색을 엿본 백호의 기세가 한층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염라대왕과
현무를 번갈아 보았다. 판관들 역시 서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두 물건을 보던 염라대왕이 뭔가 결심한 듯 새 종이를 하나 꺼내 그곳에 백호와 그


반려를 적어 내렸다. 저승의 명부는 흰 종이였으나 염라대왕이 지금 쓰는 것은 검은
종이였다. 그 위에 먹이 아닌 흰색의 글씨가 흘러내렸다.

다 쓴 뒤 명부를 보던 염라대왕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이것 좀 보거라.”

백호의 눈이 커졌다. 그가 허공에 들어 올린 흰 종이, 검은 먹의 명부에서 슬금슬금 두


개의 이름 옆에 사(死)가 적혔다. 회색 연기가 종이 위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글자는
끄트머리 한 획을 남겨두고 멈췄다.

“아직 모자라. 규칙은 이것을 백호와 반려로 인식하였으나, 모자라다.”

“무엇이 모자란 겁니까.”

백호가 급히 말했다. 이제야 나타난 희망의 빛에 그는 품 안의 연화를 고쳐 안으며 기운을


가라앉혔다. 현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역시 자신의 기운을 내려놓았다.

“무엇이든 가져다드리지요. 무엇입니까.”

염라대왕이 웃었다.
“생명을 거두는 이곳에서 모자란 게 무엇이겠느냐, 목숨이지.”

잠시 공간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논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계의 규칙을 속이는


것은 성공했으나, 거기에는 대가가 역시 따라붙었다. 두 사람분의 생명력.

백호는 순간 바깥으로 나가 죄 없는 인간을 한 명 살해할까 하는 유혹에 시달렸다.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자를 죽여 그 생명력만을 빼앗아 온다면 이 상황이 해결된다. 비록 그
영혼은 원한에 지박령이 될지라도.

“제가…… 그 생명력을 대신하겠습니다.”

강한 유혹을 깬 것은 사영이었다. 백호는 눈을 크게 뜨고 사영을 돌아보았다. 한때 발칙한


짓을 했던 뱀의 여인은 강단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저승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호오.”

“괜한 짓 하지 마시오, 사영.”

백호의 묵직한 만류에 사영은 살풋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젓고 푹 숙였다.

“백호 님, 제가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하신다면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대에게 잘못을 물었던 적은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저질렀던 일이니까요.”

사영은 두 손을 꽉 쥐었다. 현무는 다시 자리에 착석해 명부를 훑어보았다.

“사영 아가씨라 하였나, 하지만 한 명분의 목숨밖에 안 되니까 말이야. 생명력이


모자라지.”

“…….”

“신령으로 제법 괜찮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렇다 해서 두 명분을 전부 감당할 수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현무의 냉정한 말에 백호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가만히 창백한 연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가야 할까.’

삼도천의 물을 묻히면 인간은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연화가 그를 잊도록 둘 수는 없었다.


사방신인 그는 모든 기억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다시
돌아와 연화를 찾을 수 있다면.

순간 흐릿하게 노란 기운이 저승 한가운데 감돌기 시작했다. 염라대왕이 질색하면서 붓을


집어 던졌다.

“아니,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구나. 이 고요한 저승에 또 손님이라니!”


“저런.”

현무 역시 한탄했다.

“심지어 약사여래께서 오셨군요.”

그의 말대로였다. 처음에 연했던 노란색의 기운은 점차 짙어졌고, 작은 구처럼 모인 기운


속에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앞에 모두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고 염라대왕 역시 마땅찮은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보살은 모든 윤회와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였기에 상제나 염라대왕 역시
예를 갖춰야 하는 상대였다.

“오랜만입니다, 염라대왕.”

“가능하면 안 보고 싶은 사이인데 어찌 이렇게 먼 길을 오셨소?”

진주빛 머리의 소년이 심술궂게 말했다. 약사여래는 부드럽게 웃었고, 자신의 뒤에 손을


넣어 또 한 명의 여인을 꺼내었다.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여인은, 연화였다.

“……연화야.”

백호는 눈을 믿지 못하고 껌벅였다. 그는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연화의 육신을 꽉 잡고


연화의 혼령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그리움에 범벅이 된 눈으로 그를 애닲게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가려 하자 약사여래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보호하고 있는 여인이니 누구도 곁에 올 수 없소. 만약 다른 이가 다가온다면
세계의 규칙이 연화를 발견해 곧장 저승으로 넘어가야 할 수도 있으니.”

“아.”

백호는 그 자리에서 덜컥 멈춰 섰다. 그는 애끓는 가슴을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쥐었다. 연화 역시 견딜 수가 없는지 치마를 틀어쥐었다.

“이렇게 난리일 줄 알고는 있었습니다, 염라대왕.”

“…….”

소년은 입을 삐죽였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던졌던 붓을 주섬주섬 주워 올렸다.

“분명히 내게 뭔가 강요하러 오셨겠지요.”

“물론입니다.”

약사여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겹다는 얼굴을 한 염라대왕을 보며 웃은 그녀는 상냥하게


연화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내 이미 저쪽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현무, 공간전이를 할 때는 제대로 저쪽을 닫아놓으라 내 일렀던 것 같네.”


“죄송합니다. 이럴 줄은 몰라서.”

현무는 시큰둥하게 사과했다. 사실 약사여래쯤 되면 닫아놓는다고 해도 그쯤은 뚫어서 볼


것이다. 보살들이 괜히 윤회 수레바퀴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목숨 하나가 부족하다 하였지요.”

“그래요. 어차피 그것이 없으면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설마 여래께서 여분의 목숨을 지니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고.”

염라대왕이 배짱을 튕기며 말했다. 여래가 살며시 웃었다. 그녀는 품에 손을 넣어 작고


푸른 향낭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작은 푸른 새의 목숨입니다. 중간지대에 떠돌던 혼령 하나를 위로하고 그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죽어 넘어진 작은 새를 말이에요.”

“…….”

“아마 현무 님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기억에서 파란 새를 찾아낸 현무가 혀를 찼다. 그래, 그때 그 자가 죽어버렸군.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자를 억지로 저승에 다녀오게 해 죽게 만들어버린, 뱀 일족의 수하였던 파란
새.

“이것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그의 혼령은 이미 저승으로 갔으니.”


“보살께서 멋대로 이런 걸 가지고 계시다니 좀 곤란한데요.”

“욕심 때문에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자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저승사자보다 더


곤란할까요.”

저승사자와 사혈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이미 약사여래가 알고 있었다. 아마도 파란 새


수조의 혼령을 위로하며 알게 되었으리라. 현무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염라대왕도
못마땅한 얼굴로 붓을 종이 위에 두드렸다.

“할 수 없군.”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더는 거부할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현무가 한마디를 보탰다.

“저는 찬성합니다. 저승 명부가 완료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염라대왕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명부를 들어 올렸고, 백호와 반려의 이름 곁에 써 있던


사(死) 자가 완성이 되었다.

백호는 그것을 보며 속이 전부 타버린 듯 기운이 빠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헤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둘 모두 이승에 머물러, 따스한 육신을 가지고 더불어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정말 별일을 다 보겠군.”


현무가 투덜거렸다. 그는 사영을 건너다보았다.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본 건 당신이로군, 뱀의 아가씨.”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 거니까요.”

연화의 영혼이 하늘거리며 사영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히 사영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전각의 시녀로 일했던 그 여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듯했다. 검은 눈 안에 있는
미안함을 알아채고 사영이 웃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연화 님.”

어차피 이승에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

사영은 똑바로 현무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다는 듯 가늘게 좁혀진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렇듯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연화 님. 나는…….”


사영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혼령의 상태로 있음에도 연화의 모습은 하늘거리며
아름답게 빛났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검고 둥글고 순했다.

102 화

실제로 잡을 수가 없는데도 연화가 조심스럽게 사영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아가씨의 뜻이 그렇다면, 막을 수는 없지만요.”

백호가 다가왔다. 그는 사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 윤회를 거듭하더라도 그대에게 빚을 갚겠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 잘못을 반성하는 것뿐.”

사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백호가 조심스럽게 연화의 혼령을 잡으려 했지만
하늘거리는 혼령은 잡히지 않았다. 애타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백호를 보고
여래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계로 돌아가 잠시 기다려요. 내 연화를 육신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의 육신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현무와


염라대왕을 돌아보았다.
“폐 많았습니다.”

오만하면서 간결한 사과의 말에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다시 한번 붓을


던질까 고민하는 얼굴이었으나 이내 포기하고 열심히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을
가득 채운 저승사자와 혼령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빨리 꺼져라. 네놈 때문에 말썽이 생기고 일이 밀리고 난리도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백호는 피식 웃었다. 세상을 전부 뒤엎을 듯 기세를 올리던 것은 어디로 가고 마치


평소처럼 가볍게 웃는 얼굴에 현무가 약간 울컥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사랑에 빠진대도 너처럼 빠지면 안 되는 거다, 백호.”

“나 말인가, 현무?”

백호가 킬킬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래와 함께 사라지는 연화의 뒤를 좇고


있었다. 연화의 눈 역시 백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네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생긴다면 말이다.”

“헛소리.”
현무가 투덜거렸다. 이 고요하고 안정적인 저승을 한바탕 뒤집어 엎어놓고서 하는 소리 좀
보라지. 백호는 가벼운 웃음만을 남기고 훌쩍 인간계로 나가버렸다. 빨리 달려가서 연못
곁에 앉아 약사여래가 연화를 돌려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뒤에 남은 것은 사영과 청수희뿐이었다. 샘물의 정령은 얄밉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굉장히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잠시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너는 소문 내러 여기저기 다니는 거지?!”

염라대왕이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청수희가 배시시 웃었다.

“아이, 인생은 재미가 최고죠.”

“아, 시끄럽다. 빨리 사라져.”

골치가 아파서 소년이 투덜거렸다. 청수희는 얼른 사영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

“조심하고. 어차피 이제 기억을 잊게 되겠지만……. 뭐, 저승만큼 만인에게 공평한 곳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동안 정이 들어서 청수희는 어쩐지 아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영 역시 청수희의


손을 잡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잊게 되면 새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대하고 있어요.”

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 * *

한참을 어둠 속에 있었다. 눈이 유달리 뻑뻑했으나 뜨는 데 지장은 없었다. 느슨해진


눈꺼풀 사이로 빛이 스몄다. 연화는 흐린 초점을 맞추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백호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고,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고 끝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돌아와, 빨리 돌아오거라.”

‘백호 님…….’

“너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단다, 내 영원한 짝으로……. 나의 부인으로.”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어째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얼굴만 보아도 이렇게 가슴이
녹고 애간장이 닳게 그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백호는 천천히 연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희고 창백한 뺨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커다란 손


안에 폭 감기는 작은 얼굴은 곱다.
만약 여래가 그녀를 돌려보내 주겠다 약속하지 않고 사라졌다면, 아마 지금쯤 백호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연화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혼잣말을 했다. 그는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연화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가 힘들었다.

연화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남자는 조용히 혼자 끊임없이 말했다.
약사여래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빨리 돌아와 주렴, 연화야. 내 반려야.”

여인의 피부 위로 아주 약하게 노란 빛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따스함이 손 안으로


올라왔다. 아주 미세했으나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고 있는 촉각에는 거대한 변화였다.

눈을 감고 혼잣말을 하던 백호는 흠칫 놀라서 눈을 떴다. 그의 시선 아래, 눈을 뜬 연화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창백했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돌아왔고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한 번도 죽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자가 맑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
흑발이 온통 흩어져 백호의 장포 위로 흐트러졌다.

잠시 멈추었던 목을 억지로 움직여서 연화가 느릿하게 남자를 불렀다.

“백호 님.”

백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연화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를 안아서 품에 넣고


그녀의 머리와 목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아 움직이는 그녀의 몸에는 분명한 생명력이
돌아와 있었다. 여인의 흰 피부 위로 은은하게 노란색의 빛이 흘러 약사여래의 가피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연화의 손가락이 힘겹게 백호의 손가락 끝을 감았다. 아직 작고 힘없는 손짓이었으나
백호는 기쁨에 넘쳐흘렀다. 계속해서 거의 숨이 졸리다시피 했던 그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
듯한 느낌에 헐떡였다. 축축해진 백호의 눈가를 연화의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쓰다듬었다.

“울지 마세요.”

감정에 휩쓸리는 그가 안쓰럽고 동시에 자신의 가슴도 감당할 수 없을 듯 벅차서 연화가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가도 젖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백호의 큰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눈가를 닦아냈다.

짐승의 왕은 정신없이 반려의 입술을 찾았다. 그는 연화를 부수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그녀를 끌어안고 그 작은 머리통과 입술에 온통 입맞춤을 내렸다.

예전과 똑같이 작고 보드랍고 도톰한 입술이었다. 체온은 아직 미지근했으나 확실히 살아


움직이며 점막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직 창백하고 기력이 없는 연화도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 그의 애정에 화답했다. 애써


그의 어깨를 잡고 목덜미에 매달리는 무게가 기꺼웠다.

“……돌아왔구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그가 입술을 떼어내며 물었다. 죽어 있던 연화는 여래의 가피 아래


돌아왔다. 백호는 은은한 노란빛이 흘러내리는 연화의 피부를 쓸어내렸다.
저승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도 그는 여태까지 연화가 정말 돌아올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새삼 확인하는 듯 계속해서 그녀의 피부를 만지고 쓰다듬었다.

“약사여래의 도우심이 있었으니까요…….”

숨을 간신히 진정시킨 연화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또한 사영 아가씨 역시.”

절대 일평생 잊을 수 없을 도움이다. 창백하고 표정 없던 뱀의 아가씨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그들을 구해주었다. 조금 울컥해 눈물이 나서 그녀는 백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남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연화의 평소 성정이라면 결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백호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연인이 이승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견뎌야만 했다. 그러라고 사영이 자신을 바쳐 다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빚을 과연 갚을 수 있는 걸까, 연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을 다시 찾아가라고 모두가 우릴 도와줬어요.”

남자는 말없이 여인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한 몸짓이었다.

“그리웠습니다, 백호 님.”
연화가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백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다시 짧게 입을 맞추고, 연화는 전에 없던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백호 님, 제가 그리워했답니다. 백호 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그녀는 작게 사랑을 속삭였다. 실로, 그들의 관계에 최초로 흘러나온 고백이었다. 한 번


입 밖으로 내면 되돌릴 수 없다. 그녀는 둑이 터진 듯 감정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사랑합니다, 백호 님.”

그녀를 끌어안고 백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연화의 정수리에 뺨을 대고


있다가 깊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만족감과 그리움의 한숨이었다.

연화는 답 없는 백호를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만약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수없이 생각했던 바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백호는 고개를 숙여 깊숙이 입을 맞췄다.

“사랑한다, 연화야.”

연화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백호의 푸른 눈 역시 습기를 머금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술을
내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연화는 백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단지 그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진심은 넘치게 느껴졌다. 전신이 저릴 만큼 백호의 감정이 피부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눈가를 적셨다.

백호는 여인의 머리에 이마를 댔다. 아직 창백했지만 온기는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감사함에 남자의 전신이 떨렸다.

만약 연화가 정말 저승으로 넘어가 버렸다면, 백호는 모든 법칙을 깨부수고 저승과 세상을


전부 뒤집어엎었을 것이다. 세상은 뒤집히고 천지가 개벽했을 테다. 결국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났을 결과가 눈에 선했다.

하지만 백호의 마음속에 그런 것은 모두 사라진 채였다. 오로지 그의 세계에 다시 연화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남자는 여인의 작은 얼굴을 두 손 안에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달빛 아래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보드라운 두 뺨이 빛났다. 맑고 검은 두 눈은 온순하게


백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제야 마주한 얼굴. 숨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백호 님.”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백호의 큰 손 안에 뺨을 비볐다. 거칠면서도 다정한 손. 그


무엇보다 그리웠던 손.

“되었다. 돌아왔으니까.”
더 이상 묻지 않고 백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커다란 품 속으로 연화는 얼굴을
묻었다. 따스하고 묵직한 남자의 체향에 파묻혀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103 화

연화는 까무룩하게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너무 오랜만에 그리워하던 이의 체향과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잠시나마 영혼이 떠나 있었던 육신은, 비록 약사여래의 손길로 목숨을 유지했지만 체온이


떨어지고 잠시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차가워진 손을 붙잡은 커다란 손이 자신을 달래듯 등을 쓰다듬고,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와 입술에 천천히 문질러지는 것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느낀 것이었다.

‘따뜻해.’

떨어져 내린 어둠 속은 안온했다. 마치 그녀를 받아 안은 누군가의 품 안과 같았다.


육신의 감각은 모두 사라졌음에도 꿈속에서마저 연화는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현실의 불안감 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의 품이기에 이토록 평화로울까.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 이렇지 않았을까.


어둡고 따스하고 평안한 공간.

【행복하니?】
우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부드러운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옅은 온기를 두른 이의
존재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쁜 존재는 아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오히려 아주
호의적인 목소리였다.

연화는 잠이 든 중에도 환하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 자신의 몸에서도 온기가


넘쳐흐른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약사여래를 닮은, 자비로운 옅은 노란빛의 온기였다.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답했다.

“행복합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몰라도, 그저 백호와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소중한 사람.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저승까지 달려가 주었던, 나의 신.

【그래, 잘되었구나.】

그렇습니다, 하면서 연화는 웃음기를 띤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반듯한 이마 위로 가느다란 손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어딘지 매우


그립고 그리운 손길이었다. 상냥하게 머리와 이마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은 곧 뒤로
물러났다.

그 손을 잡고 싶었으나 가지 말라는 말은 이상하게 나오지 않아 눈가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존재가 사는 곳과 연화가 사는 세계가 유별함을, 그녀 자신이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방신조차 합칠 수 없는 먼 거리.

【참 잘되었어.】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굳이 눈을 떠보지 않아도 말은 맑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연화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잘되었지요, 어머니.”

연화가 다시 정신을 찾은 것은 맑은 햇살이 눈꺼풀을 통과하는 아침이었다. 청량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코끝으로 익숙한 치자향이 몰려 들어왔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이 뻑뻑하고 목도 말랐으나 잠을 잘 잔 듯 정신이 맑고 몸이


가벼웠다. 바스락거리며 연보라색의 가벼운 모시이불이 움직였다.

“돌아왔구나…….”

눈앞에 보인 것은 익숙해졌던 백호의 침실이었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공간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시선 너머로 백호의 푸른 눈이 부드러운 온기를 담고


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부드러운 향내가 감돌았다.

“잘 잤느냐.”

“예.”
자신이 베고 있는 것은 그의 팔이다. 연화는 마주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짧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인은 조금 더 그에게 몸을 깊게 기대어 안겼다. 너른
품이 안온하고 따스했다.

세상은 온통 고요했다. 신령계의 아침이 늘 그렇듯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풀과 치차꽃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언제나 그랬듯.

남자의 손이 부드럽게 연화의 몸을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달리 성애의 뜻을 담은 손길은


아니었다. 단지 보듬고 다독여주려는 손길.

그 손 아래 있으려니 지독했던 지난 얼마간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중간의 시간이


잘려나간 듯, 백호와 함께 지내다가 그저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듯한 기분이었다.

연화의 둥근 눈이 깜박였다. 반듯한 이마에 흐트러진 흑발을 쓸어넘겨 주며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지 피부 아래로 모시이불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역시 아무런


옷도 입지 않은 백호의 피부도 함께였다. 그의 높은 체온이 그대로 연화의 몸을 덥혔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적당히 서늘하고 안긴 품은 적당히 뜨거워 더할 나위 없었다.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기분으로 연화는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왜 떠났었는지 물어보지 않으시나요?”

“대충 알고 있다.”
백호는 목덜미에 닿는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작고 가녀린 호흡이었다. 지난밤 손수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몸에 큰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저승으로부터도 다시 뺏어온 반려였다. 만약 육체적으로 무슨 일을 당했더라면, 백호는


아마 제정신으로 남은 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새삼스레 연화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이토록 가녀리고 소중한 여인을 멍청이처럼


앉은 채 잃을 뻔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답해 주겠느냐.”

“예, 백호 님.”

“혹시 인간계에 나가 있으면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니지?”

걱정스러운 백호의 말투에 연화가 살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험한 꼴을 많이


보았으나 그녀가 직접 그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그저 백호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서
고통스러웠을 뿐.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연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마른 얼굴은 전보다도 더 작아졌다.


가느다란 새처럼 애처로운 연화의 팔이 백호의 목덜미를 살그머니 끌어안았다. 전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에 백호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그녀를 조심히 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한 난초의 향과 같은 연화의 체향이 신경을 가라앉혔다.


잠시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새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그러나 침묵은 무겁거나 어둡지 않고, 그저 편안하고 부드러울 뿐이었다.

“보고 싶었다.”

백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는 천천히 연화의 작은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으나 입밖에 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사람이 연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도요, 백호 님.”

연화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계까지 내려오시고, 저승까지……. 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내가 왜 그것에 네게 감사 인사를 받겠느냐?”

연화의 말에 백호는 오히려 서운할 지경이었다.

“인사란 서로 먼 사이에 하는 것. 내가 살고자 너를 살린 것이니 그런 말은 말아라.”

“…….”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미 만났을 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하기에는 새삼스러운
소리였으나 그동안 멍하게 앉아 그녀를 손에서 놓고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 굳이 입 밖에
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살이 확연히 더 빠져 버린 연화의 가느다란 허리와 허벅지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반려의 연약한 몸이 더욱 가늘어진 것을 보고 백호의 뱃속에는 안타까움과
애정이 한데 뭉쳐 갈 곳을 잃었다.

다시는 한시도 손에서 놓아주지 않으리라. 그는 연화를 품에 안은 채 결심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세상에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더 짙어진 욕심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남자가 연화를 끌어안았다.

“호접과 묘우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 감사 인사라면 그 둘에게 하렴. 나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한 멍청이였으니까.”

“모두 제 잘못이지요.”

“네가 안심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한 내 잘못이지.”

뭔가 더 말하려는 연화의 입술에 백호는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이상 아무것도 더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만약
하나라도 더 들었다간 저승까지 쫓아 내려가 만희의 영혼을 다 찢어발겨 소멸시켜 버릴 것
같았다.

“내가 네게 말한 적이 없었지.”
둘의 입술이 가까웠다. 숨결이 서로 섞이며 흘러든다. 연화는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그녀의 눈 바로 앞에 백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사방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동시에


가장 고귀한 자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저 연정에 가득 찬 남자의 눈동자일
뿐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이리 떨릴 줄은 몰랐다.”

그는 이마를 연화의 이마에 마주 대었다.

따뜻한 체온이 안심되었다. 물속에서 떠올라 돌아왔을 때 차가웠던 손을 잡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정말 돌아온 것인지 확신을 할 수 없어서.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백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의 기억 속에 후회라는 감정을


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연모한다, 연화야.”

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호의 얼굴은 살짝 붉었지만 평온했다.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흔들림 없었지만 동시에 말은 진실했다.

“미리 말할 걸 그랬다고 많이 후회했다. 네가 단지 잠시간의 놀잇감이 아니라, 정말 내


영생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은 여인이라고.”

“백호 님.”
연화의 동그란 눈은 깜박이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녀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조금씩
일부러 호흡을 해야 했다.

“내 마음을 모르고, 네가 원한다면 놓아주려고 했었다.”

백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일전의 일을 일컫는 말이다. 연화 역시 따라


일어났다. 그는 찻잔에 치자꽃차를 따라 여인에게 한 잔을 건네주고 자신 역시 한 모금을
머금었다. 날이 맑고 향이 풍성했으나 마음은 떨렸다.

“네가 마을에 마음을 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게 해주고 싶었다. 너는 제물이


아니고, 네 자유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이니 말이다.”

“백호 님.”

연화는 백호를 불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을 바라보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또한 나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구나.”

더는 놓아줄 수가 없다. 네가 원하더라도 말이다.

104 화
신이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한낱 인간인 연화에게서 평생의 자유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백호는 그래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더


이상은, 그녀가 자신의 손안에서 벗어나는 꼴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남자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백호가 눈을 크게 뜨고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양손을 자신의 두 손에 쥐고
연화가 남자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연화야.”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백호 님의 진심이라고 믿을 수 있게.”

애처로운 목소리였으나 그 안의 심지는 강했다. 연화는 자신의 마음을 간직하고 백호의


맞은편에서 똑바로 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고 둥근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고였고,
바라보는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백호는 잡힌 두 손에 힘을 주어 마주 잡았다. 새처럼 가늘고 예쁜 손. 떠나 있던 동안


밤마다 손 안에 느꼈던 여인의 손이었다.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바람처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너를 연모한다.”

아, 하고 여인은 백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귓가로 심장 소리가 쿵쿵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새빨갛게 물든 여인의
뺨과 귀를 보면서 백호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연화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백호의 맨 어깨에 닿아 스몄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저라도 괜찮으신 건가요.”

“네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단호한 대답에 연화는 고개를 들어 다시 백호를 바라보았다. 진실된 푸른 눈에 차 있는


부드러운 온기와 애정이 뼛속 깊이 느껴졌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며 체온


역시 섞여들었다.

“제가 먼저 연모하였습니다, 백호 님…….”

여인이 속삭였다. 남자는 떨리는 심장을 붙들었다.

“그래.”
연모는 함께 하였으되 먼저 심지 굳게 그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것은 연화였다.

누가 감히 신이 인간보다 현명하다 하겠는가, 멍청하게도 그녀에게 다른 정인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토록 먼 길을 돌아오게 되었다.

후회는 파도처럼 백호의 마음을 덮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째서 더 빨리 알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도, 저도 놓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연화가 백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오래 느끼지 못했던 백호의


체향과 온기가 전신으로 스몄다. 이미 눈가가 젖어 있었고 더 울고 싶지 않아 연화는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리 말해 주어 정말로 기쁘구나.”

백호는 연화의 허리를 잡아채 꽉 끌어안았다. 가냘픈 여자의 몸이 그의 긴 팔 안에


감겨들었다. 그는 입술을 연화의 뺨과 귀에 부비며 속삭였다.

“그래, 이제 나는 네 곁에 있다. 영원의 시간 동안.”

백호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말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는 영생을 사는 사방신이다. 나의 반려가 될 자는 그만큼의 의무와 많은 책임감을 지게


되지. 나는 꽤 다혈질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평온해 보여도 신령계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고 나는 때로 싸우며 지킨다. 언제나 반려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위치인
게다.”

백호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뱉었다.

“그런데도, 나의 반려가 되어주겠느냐?”

연화는 환하게 웃었다. 햇살처럼 밝은 웃음이었다.

“기꺼이, 나의 백호 님.”

* * *

신령계의 밝은 아침 해가 떠올랐다.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떠들썩하게 일하던 부엌의


신령들은 궁 안을 거닐어 오는 호접을 보고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다들,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느냐?”

“그럼요. 경사스러운 날 아닙니까.”

토끼 신령이 기쁜 얼굴로 외쳤다.

“백호 님께서 드디어 혼례식을 올리는 날이지요. 어여쁜 아가씨와 함께요.”


신령들의 면면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연화가 인간의 여인이라 신령들이 부정적으로 볼까
잠시 걱정했던 호접은 근심을 접고 마주 웃어 보였다. 짐승의 신령들이란 대부분 밝고
명랑한 자들이다. 고정관념 같은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호접은 여봐란 듯이 턱짓을 하며 곁에 선 묘우의 허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갈색 머리


미남자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지만 곧 그는 무표정을 가장했다.

제법 마음에 들었던 뱀 일족의 사영이 직접 저승으로 걸음한 것은 가장 예상 밖의


일이었다. 처음 청수희에게 말을 전하면서도 그는 생명 자체에 대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 인간이라도 잡아다 밀어 넣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다간 백호 님께 꽤나 경을 치긴 했겠지만.’

하마터면 백호가 저승부터 시작해 정말로 세상을 날려버릴 뻔했다는 이야기에 여우의
신령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설마 그렇게까지 일이 진행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청수희가 전해준 이야기는 아찔할 만큼 위험했는데 샘의 정령은 아주 신나는 무용담이라도


건진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여겼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아아, 화려하네 화려해.”


묘우와 호접의 뒤에 선 청수희가 분주한 궁 내부를 돌아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아름다운
청색 머리카락을 예스럽게 틀어 올리고 식에 걸맞을 만큼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박하던 궁이 이리도 달라질 수가 있네, 저건 진짜 금사야? 세상에.”

“능라비단에 금사죠. 선녀들이 짜낸 것이라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어요.”

“오, 이 정도면 주작궁이나 용궁에 그대로 가져다 놔도 손색이 없겠는 걸.”

궁 안을 거의 덮다시피 장식한 걸개와 깔개들을 보며 청수희가 감탄했다. 과연 호접이


자랑할 만한 호사스러움이었다. 어지간한 연회에도 꺼내지 않던 사치품들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아아, 여기 사영 아가씨도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사영 아가씨요…….”

호접이 조금 침울해졌고 묘우가 흘긋 청수희를 돌아보았다.

“그분은 이제 어찌 되신 겁니까?”

“어찌 되다니?”

“저승으로 가셨으나 유례가 없던 일이지요. 산 목숨이 신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제물이라 할 법하고. 아무래도 염라대왕께서도 처리에 골머리를 썩이실 듯한데요.”
청수희는 입가를 비틀었다. 하여간 이 오래된 여우의 신령은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래도 소식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도 된 기분이라며 잠시 툴툴댄
뒤 말을 이었다.

“나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영 아가씨가 바로 저승으로 넘어가 윤회의


수레바퀴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죠?”

“나중에 삼도천의 물을 타고 가 훔쳐보았을 때 현무 님이 꽤 즐거워했거든.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고.”

사방신 중 가장 오래 산 현무는 가끔씩 등장하는 평소와 다른 상황을 즐겨 받아들였다.

아마 사영의 존재는 나타나는 순간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으리라. 죽을 자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넘겨주려는 자는 간혹 나타났으나 삼도천의 물을 건너와 신의 상징물을 내놓을
정도의 존재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럼…….”

“현무 님 정도면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영 아가씨 한 명 정도는 뒤로 빼돌릴 수 있을 거고.


내가 훔쳐보았을 때 벌써 사흘이 지나 있었지만 현무 님은 여전히 사영 아가씨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던 걸요.”

“허어.”
예상외의 말에 호접과 묘우 둘 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빨리 윤회의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무가 즐거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묘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모시는 입장이지만 사방신이라는 분들은 역시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그렇죠, 뭐.”

청수희가 씩 웃었다. 그녀는 사실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영의
결심을 몇 번쯤은 더 만류했으리라. 청수희는 현무와도 제법 친분이 있었고, 최근 그가
무료함에 지쳐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사영은 그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수국의 왕조 교체 역시 제법 부드럽게 되어서 청룡 님 쪽도 분위기 나쁘지 않다고


하고요.”

“그렇군요.”

아마 죽은 자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수국의 왕가는 이미 만희 한 명을 제외하면


방계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선대부터 만희까지 2 대에 걸쳐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핏줄들을 전부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란군이 왕궁을 점령한 뒤 큰 저항이 없었다. 물론 대귀족이나 대신들을 치밀하게


먼저 살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에 수국의 왕이 된 사내도 제법 재미있는 것 같단 말이야.’


청수희는 속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오유라 하였던가, 그는 아마도 새로운 국가를
개국하려는 것 같았는데, 그가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인간계에 다시 한번 파란이 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깜짝 놀랄 정도의 일도 잘 일으키니 어쩌면 주작의 영토에까지도 영향이
미칠지 몰랐다.

시녀들이 좋은 향기가 나는 꽃들을 화병에 담아 바닥에 놓았다. 물망초를 꺾어 엮은


꽃다발이 벽에 걸려 장식되고, 수선화는 탁자 위에 놓였다. 궁 바깥에도 붉은 비단과 희고
푸른 꽃으로 화려한 길이 마련되었다. 혼인하는 백호와 연화가 밟고 걸어갈 길이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했습니다. 이 신령계의 모두가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음식이지요!”

부엌의 신령들이 기쁨에 차서 준비한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갖은 채소를 볶아 당면과 섞은


잡채와 채소 절임, 고기를 잘게 다져 볶은 뒤 설탕과 간장으로 간을 맞춘 요리, 생선을
구워 기름을 부은 접시 위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곁들일 술과 차 역시
항아리로 준비되었다. 한껏 솜씨를 부린 음식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다.

곧 혼례식의 연회장소에 귀한 손님들도 올 것이다. 신령계에 이토록 커다란 축제는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모두가 들뜬 얼굴이었다.

묘우는 조금 얼굴을 구기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는 별다른 소용도 없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실은, 연화가 그리 싫지도 않았다.

‘엉뚱한 욕심쟁이가 반려로 들어오는 것보다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제야 간신히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호접이 그 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웃으니 얼마나 좋냐.”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아이고, 그러셔.”

고집스러운 동료의 말이 더 웃겼다. 묘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가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궁 안의 신령들을 지휘하며 밖으로 나갔다.

105 화

호접은 기쁜 마음으로 신부의 방에 들렀다. 이미 합방한 지 오래인 백호와 연화지만,


혼례를 올리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둘은 각자 방을 따로 쓰면서 진짜 결합을 위해 몸을
정갈히 하고 있었다. 작은 몸집의 나비의 신령은 흔들흔들 날개를 흔들면서 문간에 쳐진
구슬발을 살며시 걷고 방 안에 들어섰다.

신부의 방은 온통 오색으로 빛났다. 이날을 위해 매일 꽃을 갈아 꽂아와 방 안에는 한가득


향기로운 수선화의 향이 가득 찼다. 잡내를 없애기 위한 향내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령계의 깊은 굴에서 채굴하는 가장 좋은 수정과 옥으로 촘촘히 꿴 구슬발이 천장과


창문에 듬뿍 매달려 아침 햇살을 온통 반사했다. 백호가 전 신령계에 명을 내려 일주일
전부터 급히 모아 온 보석과 금속이 온통 탁자 위에 널려 있었다.
시녀들이 연화에게 달라붙어 적삼과 치마를 입혀주다가 호접이 온 것을 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냐, 그러면 안 된다. 이제 이 신령계의 가장 높은 지체가 되실 분 앞에서 내게 따로


예를 표하다니.”

호접은 손을 들어 시녀들을 제지했다. 여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연화의 머리를


빗겨주고 연지를 찍고 분을 발랐다. 가만히 앉아 그 손길을 받던 연화는 살짝 눈을 들어
호접을 보며 인사했다.

“호접 님.”

“예, 연화 님. 좋은 아침이지요.”

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했는지 연화의 눈은 조금 발그레했다. 여전히 맑고 고운 얼굴이었다.


호접이 그녀로서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혼례를 치러야 해서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어 백호 님이 아주 안달이 나셨답니다. 하지만


서로 몸을 정갈히 하기 위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네.”

백호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며칠 전에도 들었다. 혼례 전에는


서로 몸을 정갈히 하는 것이 오래된 관례이기 때문에 체통을 지키라는 호접의 꾸중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기실 그녀도 백호가 더없이 보고 싶었다. 그리움을 키우기 위해 일주일간 서로 독방
생활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화는 부끄러움에 볼을
붉혔다.

이따위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연화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정말 생각도 못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호 님의 반려.’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 부위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진짜 신부가 되는 것이다. 백호의


정식 반려, 사방신의 아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위치였으나 그녀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백호와 부부가 된다. 그 아름답고 강한 사내가, 연화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여 영생의 아내로 받아주는 것이다.

“곧 귀한 손님들이 오실 겁니다. 사방신의 혼례라니, 이번 대의 신들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지요. 상제께서도 걸음하신다 하셨으니 정말 큰 잔치가 될 것입니다.”

호접은 기쁘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연화 님이 머무셨던 마을과 양어머니께는 백호 님께서 마땅한 재화를 베푸셨습니다.


왕조가 바뀌었고 청룡 님께서 다스리겠다 하셨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에서 돌아와 몸을 조금 회복한 뒤에 그녀는 이미 마을에


다녀왔다. 백호의 품에 안겨 날아간 마을은 새로 지은 집과 깨끗해진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다. 청룡이 보낸 자들이 마을의 재건을 도와주었다 했다.
죽은 자는 되돌릴 수 없었으나 산 자들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양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연화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양모는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집에서 걸어 나올 수도 없어, 연화는 방 안에 앉아 양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가를
붉혔다. 혼례식에 초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행복하라고 하셨어요.”

“그랬군요.”

호접은 연화의 손등을 다독였다.

양어머니는 노쇠해 지친 얼굴로도 연화의 혼인을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놀랄까


염려되어 신과 혼인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고, 다만 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말만
전했다.

그것으로 양어머니는 매우 위로를 받은 얼굴이었다. 나는 곧 떠나겠지만 너는 외롭지


않겠구나, 하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양어머니 말씀대로 살아야죠.”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면서도 연화는 울지 않고 웃었다. 행복하기를 바랐으니 행복하게 살


것이다. 양어머니는 가장 소중한 이들 중 한 명이었으니. 호접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물론이죠.”

공기 중에는 온통 따듯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기름에 지진 갖은 종류의 전야와 참기름에


고물고물 묻혀낸 데친 뿌리 식물들, 고소한 깨소금을 뿌려 볶은 오색 면요리. 달콤한 설탕
과자와 경단들이 예쁜 그릇에 담겨 올라왔다.

연회에는 인간계와 신령계의 모든 음식들이 올라왔다. 이날을 위해 일주일간 백호궁의


시녀들은 넓디넓은 주방에서 떠나지 않았다.

연화는 가만히 치마폭 위로 손을 모았다. 그녀는 붉고 푸른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


위에 가채를 올리고 향기로운 동백기름을 발라 손질한 뒤 옥과 상아로 장식된 머리꽂이를
꽂는다. 귀에는 자색수정의 귀걸이를 달고 목에는 오색의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건다. 붉은
비단으로 지은 치마에는 금실로 수가 놓아져 있었다. 상제의 선물로 선녀들이 짠 혼례복을
보낸 것이라 어느 한 곳도 맺힌 곳이 없었다. 진실로 천의무봉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에는 한 쌍의 옥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백호가 연화의


안녕을 바라며 끼워준 것이었다.

연화는 그 손을 품 안에 넣어 손가락 끝으로 어머니의 작은 손수건을 살며시 만졌다. 그


무엇보다 고마웠던, 친어머니의 유품. 귀한 몸으로 밤새 숲속을 돌아다녔을 백호가
생각나서 그녀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 * *

신령계의 가장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봉우리에 백호의 궁이 있다.


본래 닫혀 있던 궁 뒤의 광장이 열리고 그 위에는 높은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세 신이 앉아 있었다.

“여, 잔치는 성대하게도 준비했군.”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눈앞에 앉은 세 신을 바라보았다.

“드러누워 있더니 잔치에는 재빨리도 왔군.”

청룡에게 한 말이다. 푸른 머리의 남자는 코웃음을 치고 오만방자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내 안배해 준 진을 다 깨부숴 버린 멍청이가 결혼한다는데 와봐야지.”

“내가 살점까지 베어내며 부탁했는데 그따위로 일처리를 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선에서는 최선이었어. 그대로 뒀다면 왕이건 네 반려건 반란군한테 목이 잘려나갔을


게다.”

“말 함부로 하는군. 제 나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바다 밑에 드러누워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만 한 주제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둘은 마주치자마자 짖듯이 싸워댔다. 주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몇천 년을 살아도 일곱 살짜리 어린애들 같은 저자들을 대체
어쩐단 말인가.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화한 주작과 여전히 검은 어둠을 두르고 있는 현무. 현무는
이 밝은 날 밝은 곳에 나와 앉은 것이 조금 불편한 얼굴이었고 주작은 현무가 불편한
안색이었다.

약간 질색한 표정으로 주작이 현무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상성상 둘은


근거리에 앉아 편안할 수가 없었다. 현무 역시 아닌 척했지만 쏟아지는 햇살만큼 주작의
붉은 기운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부채로 햇살을 가리면서 말했다. 눈이 부신지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염라대왕께서 직접 행차하지 못하시어 아쉽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다. 사방신의 첫 번째


혼례인데 일이 워낙 바쁘셔서 나만 오게 되었어.”

“됐어. 그 영감은 안 나오는 게 세상을 돕는 길이니.”

백호는 혀를 끌끌 찼다. 상제도 아니고 염라대왕이 신령계로 행차라니 큰일 날 소리다.


그의 옷자락에 눈먼 죽음이 매달려 올 수도 있었다.

염라대왕의 성미라면 일이 조금 한가하면 이승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올 텐데, 저승이


언제나 일로 바쁜 세계라는 건 대단히 다행이었다.

“현무 네놈은 말이야, 멋대로 명부를 채워주고 말이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긴 청룡이 투덜거렸다. 그는 백호 쪽을 흘겨보았다.

“백호 저놈을 저승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현무가 킬킬댔다. 그는 턱을 괴고 앉아 흘긋 청룡을 훑어보았다.

“제놈도 똑같이 했을 거면서 허세는.”

“무슨 헛소리야? 나 같으면 없는 명부를 만들어서라도 보내버릴 것이다.”

“네가 저승 관할이 아니라 천만다행이구나.”

악우들의 대화에 주작은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저 유치한 대화에 낄 생각은 없으되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날렸다.

“금수의 왕이 우리들 중 처음으로 반려를 맞는군. 어때, 기분은?”

“당연한 걸 묻는데.”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연화가 대기하고 있을 저 너머의 신부방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의 눈길은 전에 없이 부드럽고 사랑이 흘렀다. 원래의 그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감정들이 넘쳐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그걸 보고 동료 사방신들은 놀리고 싶어 입술을 실룩대었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어쨌든


오늘은 경사스러운 사방신의 혼례일, 신랑을 약 올려서 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 생각은 셋
모두에게 없었다.

물론 청룡은 조금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만은 참자고 아주


다행스러운 결심을 했다.
주작은 자신의 긴 적발을 쓸어넘겼다. 그녀는 머리와 똑같은 색의 눈을 돌려 백호를
바라보았다.

“이봐, 지금 아니면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신세 진 건


기억하지?”

“물론이지.”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작에게 입었던 신세를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나? 기꺼이 답례하지.”

주작은 씩 웃었다. 붉고 푸른 혼례복을 입는 신랑 신부를 위해 오늘은 붉은 옷을 입지


않고 어두운 남색 계열의 옷을 입었지만 그녀는 본래 본체와 닮은 새빨간 색의 장신구와
비단을 사랑했다. 남방의 신은 턱을 괴고 흘긋 신부의 방이 있는 누각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아마 그 여우가 있으리라. 붉은 털을 지닌 예쁜 여우.

주작은 예쁜 것을 참 좋아했다.

106 화

“너한테 꼬리 열 개 달린 여우가 하나 있지?”


“……묘우 말이냐?”

“그래. 그 묘우라는 놈. 그걸 나한테 다오.”

“묘우를? 왜?”

백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아무리 연화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지만 묘우쯤 되면 신령계의


장로격이다. 백호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산 신령 중 하나라 함부로 다른 사방신의 영토에
보낼 수는 없었다.

“저승으로 심부름 보낼 일이 있을 때 그놈을 쓰려고. 아무래도 인간들은 한 번 가면 못


빠져나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시종 수가 지나치게 줄고 있어.”

“그럼 네놈이 직접 가라. 저승에 무슨 볼일이 그리 많다고 시종을 보내서…….”

“남이사? 금수나 다스리는 네놈과 달리 인간은 골치 아픈 일이 많다고.”

주작이 투덜거렸다.

“꼬리 열 개의 여우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오긴 하겠지. 내 심부름꾼으로 달라는


게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신령계의 장로격인 놈을 달라니 심하구만.”


백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도 내심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묘우는 연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리를 잡은 후라면 모르되 아직 불안정한 위치의


연화와 묘우를 함께 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예
주작의 영토로 보내버린다면 잠시 떼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보낼 수는 없고 기간을 정할 생각이었다.

“주는 건 안 된다. 기간을 정하지, 빌려주는 거다.”

“뭐? 째째한 자식.”

“네놈의 새끼 새를 내가 달라면 줄 거냐?”

“무슨 소리야? 그리고 새끼 새라니, 엄연히 어린 봉황이다.”

주작이 데리고 있는 어린 나이의 봉황을 새끼 새라고 부르는 것은 사방신 사이에


유행이었다. 평소 여유만만한 주작이 새끼 새 소리만 들으면 발끈하는 게 흥밋거리였기
때문이다. 백호가 히죽거렸다.

“네가 주작의 지위에 있을 동안 데리고 있어라. 너 어차피 얼마 안 할 거잖아.”

주작은 나머지 세 사방신과 달리 자신의 후계자를 길러냈다. 사방신의 역할이 몹시


재미없어 천계를 놀러다니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자 하는 거대한 새였으니 한 군데서 인간을 다스려야 하는
사방신의 직위에 어울리지 않았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백호도 마찬가지였지만 의외로
백호는 신령계 안쪽을 쏘다니며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인심깨나 쓰는 척하는군. 얼마 안 남은 걸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고.”

“묘우같이 오래된 신령을 그 새끼 새가 감당할 수 있을 거 같냐? 게다가 여우라고.”

주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사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간의 경우로 빗대자면,


묘우는 한 나라의 재상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인간계와 그 다스리는 체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주작이 그를 달라고 한 것은 신령계의 큰 버팀목을 하나 달라는 것이나 진배없는


소리였다. 그나마 백호가 그를 떼어낼 생각을 하고 있어 거래가 성사된 것이었으니.

그녀의 후계인 어린 봉황은 아직 여우의 신령을 상대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그녀의 자리를 이을 때쯤이 되면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지만.

뭐 어쨌든 꼬리 열 개 달린 여우란 제법 귀여운 족속이다. 한 번쯤 데리고 있고 싶을


만큼.

‘고 녀석 갈색 머리도 포슬포슬하니 예쁜데 말이지.’

사실 탐내온 것은 꽤 오래되었다. 주작은 흘긋 묘우가 있을 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영토의 중요한 인재로 쓸 생각은 없고 그저 심부름꾼으로 가끔 쓰며 귀여워해 줄
생각이었으니 백호의 말도 나쁘지 않았다.
“좋아. 거래 성사다.”

“그래. 나중에 다른 소리 하면 안 된다. 이걸로 빚은 갚은 거야.”

백호는 싱글거렸다. 이로써 골치 아픈 일 하나가 해결되었으니 나쁠 일이 없었다.

“곧 오시(11 시)다.”

백호는 몸을 일으켰다. 해는 중천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곧 오시의 쭉 뻗은 햇빛을 타고


이 결혼을 주관할 귀한 분, 옥황상제가 내려올 것이다.

남자의 긴 백발이 바람에 날렸다. 하늘은 쨍하게 맑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모든
공간에 빼곡히 채운 꽃더미 덕분에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솟아올라 하늘을 수놓았다.

연화와 마찬가지로 백호 역시 혼례식을 맞아 적색과 백색이 섞인 장포를 입고 있었다. 붉은


비단 위로 호랑이를 수놓은 장포의 긴 자락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오실 때가 되었어.”

사방신들이 전부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단 아래의 광장에 도열한 신령들 역시 몸가짐을


정갈히 했다.

해시계의 그림자가 정확히 오시를 가리키는 순간 광장의 중앙에 바람이 불었다. 수없이
많은 명주실들이 바람에 날려 찰랑이는 소리가 하늘을 메웠다.
“오랜만이로구나, 나의 아이들아.”

높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도열한 신령들이 전부 가운데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방신들 역시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상제님.”

높은 하늘 아래, 신령들이 가득 찬 광장의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소녀가 서서 별빛 같은


눈을 반짝였다.

소녀의 몸은 밤하늘처럼 검은 비단과 흰 광목이 휘감고 있었다. 그녀가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금속팔찌가 찰랑거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사방신과 만물의 법칙을 주관하는
옥황상제였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상제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렸다. 은색과 금색이 온통 뒤섞인


머리카락은 반쯤 투명하면서도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그녀는 거침없는 태도로 광장을 걸어갔다. 작은 발이었지만 걸음 속도는 이상할 정도로


빨라, 거의 다섯 걸음 만에 상제는 작은 발로 단 위에 올라섰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백호, 주작, 현무, 아아, 그리고 말썽꾸러기 청룡. 오랜만이로구나!”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반가운 듯 말하면서 상제는 청룡에게 눈을 흘겼다.


하늘 위에 홀로 떨어져 있지만 상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천리안을 지닌 상제는 이 세상의 법칙을 관장하는 자다.

청룡은 입가를 씰룩였으나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괜히 여기서 말을 붙였다간 한마디 더


꾸중을 들을 뿐이었다. 게다가 불만을 말하기에는 평소 그가 말썽을 부리는 일이 제법
많았으므로.

상제는 몸을 돌려 백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백호의 손을 잡았다.

“너의 반려를 보았다. 잘 골랐더구나.”

백호는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옥황상제는 사방신을 직접적으로 빚어낸 창조자였다.


자식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반려에게 신경 쓰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성정이 올곧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네가 신령과 인간의 구별에 신경 쓰지 않아


다행이구나. 사방신의 반려로, 나의 새로운 아이로 부끄러움이 없다.”

“감사합니다, 상제 폐하.”

“내 아이가 자라 벌써 혼인할 때가 되었구나!”

소녀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녀가 머리를 한 번 흔들 때마다 멀리에서 빛이 번쩍였다.


기쁘기 그지없는지 상제의 기분에 반응하는 하늘이 화려했다.
사실 그녀가 이전에 빚어낸 선대 사방신들은 모두 천계에 머물며 지내거나 자연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사방신들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어린 막내 아이들이나 다름없었다.
상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머지 셋도 빨리 반려를 찾으면 좋을 것인데, 워낙 고집들이 세야 말이지.”

“폐하, 본래 현무의 자리를 채웠던 자들은 대대로 혼인을 하지 않아…….”

“그래. 내가 참 잘못 빚어냈던 게 아닌가 싶구나. 이 거북이 녀석들은 도통 반려를 들이는


데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상제가 혀를 찼다. 현무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멋대로 이성을 즐기는 편인 주작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말을 보탰다가는 제발 그만 정착하라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상제가 한 바퀴를 돌았다. 검은 비단과 흰 광목이 퍼지고 짤랑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그녀는 유쾌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원래 인간계에 신경은 쓰지 않는 이지만…….”

“손님이시라면…….”

백호가 의아하게 물었다. 대답 없이 상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맑았다. 그녀의 팔찌는 끊임없이 짤랑이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었는데, 이 세계 어딘가에 끝없이 비를 뿌리고 천둥과 번개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신령계에서는 모든 구름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상제는 최고로 아름답고 맑은 하늘을 원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던, 이번 대


사방신 중 첫 번째 혼례였기 때문이었다.

상제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이제 네 신부……. 인간인 연화를 나오라고 하지 않으련. 가약을 맺자꾸나.”

누각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화의 행렬이 상제의 도착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


많은 수의 시녀들이 함께 따라붙고, 연화의 곁에는 두 명의 시녀가 붙어 움직임을 도왔다.
붉은 비단 위에 푸른색으로 수를 놓은 혼례복은 소매와 치맛자락이 길었다.

광장 위 장엄한 높은 단 위에 올라 있는 상제와 사방신의 앞으로, 연화는 긴장을 견디며


걸어 나갔다. 키가 큰 사방신들이 오만하게 연화를 내려다보았고 광장을 가득 채운
신령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쨍하게 맑은 하늘 아래 심장이 떨리도록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 가장 높은 곳에서 백호의 시선을 마주하고 연화는 조금 웃었다.

오만한 신들의 눈 사이에서 백호의 눈만은 걱정과 애정을 가득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기 새를 보는 어미 새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 앞에서
연화의 발걸음에는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비단과 꽃으로 장식된 긴 길을 걸어가 머리 위에 옥과 상아로 된 잠화를 장식하고 연화는
상제의 앞에 나붓이 절을 했다.

“상제님을 뵙습니다.”

인간 여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곁에서 부축해 주는 시녀들이 없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간들 중 몇이나 옥황상제를 대면하는 영광을 얻을까. 상제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도 몇 없을 것이다.

107 화

눈앞의 소녀는 구전되는 상제의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 백호가 미리 언질해 주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상제의 검고 큰 눈은 온통 별빛을 담은
듯 빛났고 알 수 없는 위엄이 전신에 흘렀다. 상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나의 가솔이 된 아이야.”

백호는 그녀가 직접 빚어낸 아이였다. 그의 반려 또한 상제의 가솔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도 인간계의 자들 그 누구도 꿈도 꾸지 못할 까마득한 위치였다. 한낱 귀족이나 왕은
접근조차 하지 못할.

“넌 이제 내 아이란다.”
기쁨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백호와는 독립적으로 연화 역시 상제의 아이가 된다. 소녀의
몸을 한 신은 무릎 꿇은 연화의 앞에 다가갔다. 그녀의 희고 고운 발이 연화의 바로 앞에
섰다.

“네게 많은 선물을 내려줄 것이나, 그보다 네가 더 기뻐할 손님들을 내가 초대했단다.”

상제는 연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온기가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손님이라니,


연화가 의아한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광장 한가운데로 거대한 노란빛의 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은은한 피리 소리가 사방에 펼쳐지며 저 하늘로부터 빛줄기를 타고 한 무리의 구름이


광장으로 내려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상제.】

“오랜만이외다, 여래.”

고막으로 직접 전달되는 소리.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한, 낮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연화는 단번에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녀를 저승에서 돌려보내 준 은인이었다.


설마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약사여래 님……?”

상제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웃음이 다정했다.


“그래…….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렴. 약사여래의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란다.”

소녀의 다감한 목소리가 연화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광장을 바라보았다.

온통 노란 빛에 휩싸여 은은히 빛나는 약사여래의 일행은 여럿이었다. 여래의 수행자들이


그녀의 뒤에 늘어서 보필하고 있었다. 수행자들이라 하나 그들 하나하나 역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중생을 살피는 보살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연화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엄마?”

그녀는 눈을 믿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노란 빛으로 휘감긴 희고 고운 얼굴. 자신과 아주


많이 닮은 여인. 기억 속 그대로인 젊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합장한 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연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살짝


휘었다. 눈물이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상제가 살짝 연화를 앞으로 밀어내었다.

“가보렴, 너의 어머니에게.”

저쪽에서도 여래가 어머니를 밀어 앞으로 보냈다. 연화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일어서서 치맛자락을 들추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길디긴 혼례복의 자락 때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며 달려가자 어머니는 마주 달려
올라와 딸을 끌어안았다.

“연화야, 연화야……. 내 아이야.”

목소리는 따뜻하고 울음이 배어 있었다. 연화는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어머니의


냄새.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향기가 코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머니……. 엄마.”

호접과 시녀들이 공들여 얼굴을 치장해 준 것을 잊고 연화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오래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 왔다. 눈앞에서 죽어갔던 어머니가 지금 자신의
앞에서 팔을 벌려 안아주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가…….”

어머니 역시 울었다. 그녀는 손으로 연화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며 어머니는 자신의 온기를 돋워 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어린 딸을 놓고 숨을 거두어 그리워만 하던 지난 날이었다. 비록 약사여래의 손에 이끌려


깨달음을 얻고 보살이 되었으나 딸에 대한 그리움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여래 역시 그녀의
슬픔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괜찮아질 것이다, 하며 그녀를 다독일
뿐이었다.

“내 아가.”
그래,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연화도 어머니도 이제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울다 고개를 든 연화의 얼굴 분이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어머니가 눈물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애써 딸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분을 정리해 주려고 애썼다. 번져가기만 하는


분에 결국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어머니의 품 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조금 진정이 된 두 사람을 보다가 상제는 싱긋 웃으면서 약사여래에게 손짓했다.

“자, 여래. 이쪽으로. 간만에 걸음하시었소.”

모녀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단 위에 마련된 자리로 옮겨갔다. 여래가 탄 구름은 소리


없이 미끄러져 계단을 올랐다.

“역사적인 혼례의 장면에 증인으로 서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상제.”

약사여래가 웃었다. 그녀의 수행자는 코끝과 눈이 빨갛게 된 채 딸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화장이 모두 흐트러졌으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제 그대의 신분은 천계에 속하게 되었으니 모친과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래는 손을 까딱여서 부드러운 바람을 불러내 연화의 뺨을 닦아주었다. 흐트러졌던 분


화장도 바람에 제자리를 찾았다.
다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면서 백호가 다가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는 연화의 어머니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모친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주 허리를 굽혔다.

“나의 딸입니다, 백호 님. 앞으로 함께 행복하시기를.”

“……감사합니다.”

백호는 연화의 손을 꽉 잡았다. 가느다란 손이 힘껏 맞잡아 왔다. 연화는 붉어진 눈가로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벅찼다. 환하게 푸른 하늘 아래 백호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긴


백발이 흩날렸고, 둘이 함께 입은 붉고 푸른 장포가 뒤섞여 날렸다. 서로의 손 안에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자, 이제 내 첫 아이가 반려를 맞이하는 좋은 날을 알리겠다. 오늘 하루는 이 삼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행복함에 젖어 살고, 저승의 혼백들은 잠시 지옥의 고통을 잊을 것이다.
매년 오늘의 이 하루에 가장 좋은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도록 하겠다.”

상제의 말이 높게 울려퍼졌다. 그녀의 말은 곧 힘, 물리적으로 들리든 들리지 않든


옥황상제의 언령은 삼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피조물에 스며들었다.

이 시각 이후로 매년 천계와 이승과 저승을 걸쳐 세계의 모든 존재가 축복받은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사방신의 혼례, 그 영광된 날을 기리기 위해서.

소녀는 고개를 돌려 백호와 연화를 바라보았다.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자, 너희가 부부가 되었으니 이제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연화는 예상치 않은 상제의 말에 잠시 당황하며 백호를 바라보았고 백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상제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예상하시리라 믿습니다만…….”

“흠.”

상제는 턱을 들었다.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연화의 영생을 요청합니다. 저와 함께 반려가 영원을 살도록.”

“예?”

연화가 깜짝 놀라 백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열렬히 상제를 볼


뿐이었다.

“단순한 줄 알았더니 많이 나아졌구나.”

옥황상제가 웃었다.
연화가 상제의 아이가 되었다지만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의 몸을
지녔고 그 몸에 따라 노화하고 죽고 다시 윤회의 굴레로 들어간다. 그것이 법칙이었다.

상제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해줄 의무는 없었다. 모든 일은 법칙에 따라, 행한 행동에 따라


결과를 받는 것이니 그도 백호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사방신인 주제를 잊고 반려를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꺼내려 하다니 참으로 발칙하도다.”

상제는 농담처럼 말했다. 백호는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상제가 비록 가볍게
말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보통의 요청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었다. 보살이나 여래처럼 스스로 깨달아


굴레를 깨고 나오는 자가 아닌 이상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좋다. 네가 앞으로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들어주마.”

옥황상제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백호는 가볍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청룡의 영토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문제를 좀 일으켜볼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직접 움직이는 것은 불리할 수 있으니 신령을 앞세우면 소소한
분쟁이나 골칫거리 정도야 가볍게 안겨줄 수 있었다. 신령계와는 달리 인간계는 좀 더
다스리는 데 복잡한 법칙이 있었으니까 청룡이 분쟁을 가라앉히기 위해 직접 나설 수도
없었다. 어쩐지 이번 일로 악우에게 사소한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굴리는 백호를 보면서 상제가 혀를 끌끌 찼다.


“네 꿍꿍이 정도를 모를 것 같았느냐. 이 정도면 굉장히 싸게 먹히는 거다. 네가 한 번 입
다물고 꾹 참으면 되는 거야.”

백호는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늦은 아침의 햇살에 흰 뺨이 뽀얗고


투명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연화를 보낸 후 혼자 살 자신은 없었다. 윤회의 굴레에서 언제 빠져나올지도 모르는 인간의


영혼을 찾아 헤매는 것은 영겁의 고문일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니 청룡에 대한 사소한
감정 정도는 잠시 접어둬도 괜찮을 것이다. 반려를 곁에 붙들어둘 수만 있다면.

상제가 손뼉을 쳤다.

“좋아. 내 앞에서 금수의 신 백호가 답했고 나 역시 그에 응하지.”

옥황상제는 싱글거리면서 연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두 사람의 코앞에 붙어서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소녀의 몸을 하고 있어 키가


작은 상제는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연화는 얼른 무릎을
꿇어앉았다. 상제가 기특하다는 듯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성사된 언약이니 무를 수는 없단다, 백호.”

“당연합니다.”
“그래.”

“그리고 윤회의 굴레에서 빼는 방법은 내가 선택하는 거야.”

“……네, 그거야 당연히…….”

백호는 조금 불안해져서 눈을 찌푸리고 상제를 흘끔 훔쳐보았다.

“본래 종족별로 정해진 수명은 내가 손댈 수 없어. 그것이 세계의 법칙이지.”

“스스로 빚으신 종족이니 예외를 만드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전전전전대의……. 아무튼, 동일성을 따지자면 그리 높지 않은


상제가 만들었느니라.”

“지금 언약해 놓고 안되신다고 하실 겁니까?”

“그건 아니고.”

상제는 긴 비단 자락을 끌며 연화의 주위를 빙글 돌았다.

108 화
붉은 옷을 입은 신부의 피부에서는 은은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단 위의 의자에
앉아서 사태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약사여래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셋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고 있어. 이미 깨달음에 많이 다가간 상태다. 그 애의


영혼은 아마 팔십 년 후쯤에는 보살의 경지로 넘어갈 게야.”

“……뭐라고요?”

“내가 뭘 안 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스스로 굴레에서 벗어날 거라는 이야기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고 백호는 입을 벌렸다. 뭔가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에 그는 상제를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얼굴이 방실거리고 웃으며 남자를 마주 보았고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사상 최초의 사방신과 보살 부부가 되겠군.”

주작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야 덜하지만 현무나 백호는 특히 약사여래와


상극이다. 사는 동안 티격태격을 할 수밖에 없는 사이.

“이혼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현무 역시 피식거리면서 말했다. 삼백 년쯤 후에는 반려에게 뺨을 맞고 별거 선언 당하는


백호를 볼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그의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주작은 백호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지만 그녀 역시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청룡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턱을 만지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잘하면 최초로 차이는 사방신이 되겠군. 역사에 남겠어.”

심술궂은 말에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세 신은 입을 틀어막았다. 하여간 상제는


하나도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영생을 얻게 되는 거였군요.”

뭔가 사기를 당한 기분에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했다.

“……그 언약 무를 수는 없습니까?”

“안 돼.”

“젠장.”

상제는 킬킬거렸고 백호는 머리를 마구 긁었다. 옥황상제는 환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연회다. 신령계는 열흘 동안 먹고 마시며 잔치를 해야지. 이 경사스러운 날을


축하하면서 말이야.”

하늘 아래로 상제의 손짓에 따라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장을 채운 모든 신령들이


기쁨의 함성을 외치며 혼인을 축하했다.
* * *

밖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혼례의 잔치는 열흘 동안 이어질 것이고, 모든 신령계의 짐승과


초목들이 먹고 마시고 춤출 것이다.

조용한 신방으로 자리를 이동한 연화는 촛불 앞에서 가만히 앉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이미 많은 잠자리를 함께했지만 마치 첫날밤 같은 긴장감과 설렘이었다.

밖에서 마지막까지 상제와 사방신을 대접하던 백호가 걸어들어 왔다. 그에게서 밤의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어놓아 살랑거리는 밤바람이 남자의 긴 백발을 허공으로 날렸다.

밤하늘에는 청명하고 맑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처음 둘이 만나던 날의 붉은 달과는 완전히


다른, 노랗고 투명한 달.

“어머니를 뵈었으니 기쁘겠구나.”

백호는 연화의 앞에 앉아 그녀의 신발을 벗겨주었다. 꽃이 수놓인 비단신과 고운 버선을


벗기자 그 안에서 작고 하얀 발이 나왔다. 백호의 커다란 손이 발을 꼭꼭 주물렀다.

연화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예. 여래의 곁에서 함께 하시며 앞으로도 종종 뵐 수 있을 것이라 하셔서…….”

“그래.”
연화의 어머니는 여래의 수행자다. 그녀는 아마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또 다른 보살이
될 때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영원의 시간 동안, 모녀는 그 깊은
인연을 쭉 이어갈 수 있겠지. 백호는 느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물이 담긴 대야를 끌어다 놓고 그는 연화의 발을 씻겨주었다. 작고 하얀 발은 손


안에 맞춤하게 들어왔다. 이미 많이 닿은 피부였으나 그의 손길이 민감한 발바닥과
복숭아뼈 안쪽을 스칠 때마다 연화는 기묘한 조바심에 다리를 움찔거렸다.

“오래 서 있느라 피곤했겠어.”

작은 발을 향유까지 발라 꼭꼭 주물러 주고서 백호가 물기를 닦아냈다. 겨우 자유가 된


발을 옷자락 아래로 숨기며 연화가 얼른 뒤로 물러나 앉았다. 부부로서의 첫날밤이라서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더 수줍고 부끄러웠다.

그는 침상에 올라가 연화를 마주 보고 앉았다. 연화는 여전히 신부의 너울을 머리에 쓴


채였다. 선녀들이 천의무봉으로 지어낸 부드러운 옷감이 달빛 속 투명하게 그녀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네가 내 반려가 되었구나.”

백호가 속삭였다. 목구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역류하려 해 그는 억지로 억눌렀다. 그는


여인의 두 손을 맞잡았다. 가느다란 손은 따스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어.”

“백호 님.”
“내가 모자라서…… 너무 먼 길로 왔다.”

그가 조금만 더 눈치가 있고 용기가 있었더라면 연화는 험한 일들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도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나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는 부질없는 것.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시간이었다.

“영원을 약속한다. 나의 맹세는 신의 것. 세상천지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는 언약…….”

백호는 조심스럽게 연화의 너울을 걷어냈다. 붉은 연지를 발라 혈색이 도는 흰 얼굴의


여인이 붉은 족두리 밑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저 역시 영원을 약속합니다, 나의 반려. 백호 님.”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떠났던 자신을 아무런 말 없이 다시 받아준 그의 품은 너르고


따스했다. 붉은 달이 아닌 맑고 청명한 달 밑에서도 사랑을 맹세해 준 사방신. 인간의
여인은 그 품에 머리를 기댔다.

백호는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겼다. 겹겹이 겹쳐진 붉은 비단 장포와 수놓인 치마를 풀어


내리고 촛불을 껐다. 맑은 달빛 아래 수줍은 연화의 흰 얼굴이 떠올라 마치 꽃처럼
보였다.

백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깊이 입을 맞췄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점막을 애무한다. 연화는 백호의 목에 손을 감고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향유를 발라 단장한 연화의 매끄러운 몸이 달빛 아래에 드러났다. 가냘프고 여린 몸.
희디흰 배꽃 같은 피부가 곱고 예뻤다.

백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귓가를 애무했다. 귓볼을 빨고 그 안을 핥자 여인이


움찔하며 몸을 떤다. 고막 전체로 남자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백호…… 님…….”

“그래. 내가 여기 있다.”

백호의 긴 백발이 연화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가슴의 유두를 깨물고 핥고, 그 밑으로
내려와 예민한 아랫배 위로 깊은 입맞춤을 남긴다.

연화는 다리를 스스로 벌려 백호가 자리 잡기 편하도록 도왔다. 음모 속에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백호가 다시 한번 연화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이미 촉촉하고 따뜻하게 젖은 여인의 내벽이 남자의 굵고 긴 손가락을 기쁘게 받아내었다.


공포 같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쾌락만을 위한 능욕과 지금 백호에게 사랑받는
행위는 아예 다른 것이다.

연화는 자신의 안이 백호의 손가락을 죄는 것을 느끼고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게냐? 아니, 괜찮아. 이제 영생을 나와 함께 매일 밤 침대에서 지내야 하니까.”


백호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는 허리춤을 풀고 자신의 양물을 내었다. 뜨겁고 거대한
물건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것을 느끼고 연화는 백호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었다.

“저도…… 저도 좋습니다, 백호 님.”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로 연화가 말했다. 대담한 여인의 말에 백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동공이 크게 확장된 남자가 입가를 올렸다. 마치 배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대담한 소리도 할 줄 알게 되었군, 나의 신부.”

“아...흣, 아!”

백호가 그대로 허리를 밀어 넣었다. 이미 매끄럽게 젖은 내벽이 잔뜩 수축하며 사내의


물건을 반기며 빨아들였다. 거대한 남자의 물건이 마치 꽉 맞춘 것처럼 연화의 안에 맞아
들어갔다.

한 번에 파고든 양물이 마치 배꼽 아래까지 들어와 버린 것 같아서 여인은 몸을 떨었다.


골반이 아예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미 수 번 경험한 것이지만 여전히 낯설다. 아마
영원히 낯선 느낌일 것 같았다.

남자는 여인의 다리를 넓게 벌려 들고 그녀의 한쪽 발목에 입을 맞췄다. 가느다랗고 예쁜


다리였다. 백호는 급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연화는 몸을 활짝
연 채로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아프면 말해야 한다.”


남자는 연화의 위로 엎드려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연화는 양다리로 백호의
허리를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규칙적으로 느리게 움직이던 허리가 절정이 다가옴에 따라 급해졌다. 달콤한 물이 흘러


잔뜩 젖은 밑으로 사내의 물건이 출납하는 소리가 철벅이며 들릴 정도였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버티던 연화는 결국 고개를 도리질 치며 신음을 터뜨렸다.

“아, 흐으……. 배, 백호 님!”

아랫배 깊숙히고 불같은 감각이 터졌다. 전신에 불꽃이 터지면서 뇌가 하얗게 표백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백호를 마구잡이로 끌어안았고 남자 역시 거의 동시에 절정을
맞이했다. 그가 거칠게 허리를 떨며 연화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읏……. 연화야……!”

절정의 쾌락이 한동안 둘을 함께 휩쓸고 지나갔다. 연화의 다리가 파르르 떨리며 금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백호는 숨을 진정시키며 품 안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연화는 숨이 가빴고 얼굴이 붉었다.


검은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져 백호의 흰 머리카락과 섞여 흘렀다. 금침 위로
흐르는 그 머리카락을 보면서 백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영원히 함께 살며 오래도록 보게
될 모습.

연화는 그런 백호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잠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스미는 호흡도


달콤하고 따스했다.

“이제 정말로 넌 내 신부다.”


“백호 님은 제 신랑이시지요.”

둘은 입술을 마주 댄 채 쿡쿡거리며 웃었다. 밝은 달이 침상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데도


연화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부부지간이 된 사이, 연화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시간 동안 함께할 두 사람.

“앞으로 영원이다, 나의 신부야.”

백호는 그녀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천 년이 넘게 살아온 그도 앞으로의 시간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세계가 지속되는 한 함께 살아가게 될 테니까.

109 화

붉은 달이 두둥실 떴다. 밤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른 달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했고,


홍옥처럼 붉은 빛을 지상으로 뿌렸다. 그 빛에 검은 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색의 달님이었다. 연화는 창가에 기대서서 서늘한 바람을 만끽했다.


아름다운 붉은 달빛이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딘가 그리운 기분이
되어 그녀는 하늘에서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백호와 혼인한 것도 벌써 한 해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랑신부가 되어


지엄한 상제 앞에서 평생을 약조한 바를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잠을 깨면 먼저
상대의 얼굴을 보았고 기분을 살폈으며 서로를 보듬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언성을
높이거나 함부로 굴지 않았다.
특히 백호는 연화를 지극하게 보살폈다. 어떤 때에는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연화가 땅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품에 안고 다녔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령계를 둘러봐야 하는 일이 생길 때를 제외하고는 연화가 백호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반려에게 떡을 손수 잘라 먹이고 발을 씻겨주었으며 침대에 눕혀 재웠다.


꽃향기가 맡고 싶다고 하면 직접 그녀를 안고 먼 꽃밭까지 날아가 그곳을 정원처럼
거닐었다.

지독하게 다정한 사내였고, 그래서 조금 문제였다. 연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백호는 간혹 욕망에 물든 눈을 할 때가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보듬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짐승 그 자체인 저 밑바닥의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않는 듯했다.
그럴 때 그의 청안은 깊게 가라앉아 마치 검은색처럼 보였다. 연화를 그대로 씹어먹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백호는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연화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과 손목에


입을 맞추며 뜨거워진 숨을 달래고, 괜찮다고 그를 끌어들이는 반려의 손길도 마다한 채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를 소중히 대하고 싶다고, 백호 자신이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봤던 경험 때문인 듯했다.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연화는 중얼거렸다. 비록 한 번 저승에 발을 들였던 적이 있지만 이제 건강한 몸이었다.

그녀는 처음 백호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오기 전 열정적으로 안던 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지금의 안정되고 부드러운 관계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첫 번째로 가졌던 백호와의
정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산 속에서 엉망으로 안길 때 등에 느껴지던 거친 흙과
풀의 느낌까지도 생생했다.

왜 그토록 정신 차리기 힘들 만큼 거칠었던 관계가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는 것일까.


스스로가 음탕한 것인지 고민도 되었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욕망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알고 있었다.

하늘은 보름달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달은 너무나 커서 자리가 비좁다는 듯 그 위용을


뽐냈다. 기이할 정도로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가만, 이렇게까지 달이 붉다면…… 백호 님의 그 시기가 혹시.”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잊고 있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붉은 달이 뜨면 백호에게는 발정기가 찾아온다. 일정한 주기를 갖고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으나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그 어느 때보다 그의 욕망이 높게 치솟는
시기였다. 연화는 멍하니 붉은 달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어떤 시간들이, 지독하게 뜨겁고 거칠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녀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면서 고개를 저었다. 밤바람은 적당히 서늘했고
뺨을 감싸고 살랑거리며 불었지만 달아오른 뺨은 쉽게 식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생각이
예전의 그 밤들로 되돌아갔다.

“……백호 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백호는 신령계를 돌보기 위해
나가 이틀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보면 필시 백호가 눈치채고 무엇이냐 물었을 것이다.

연화는 발개진 얼굴을 감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둥실 떠오른 것은 그때와 똑같은
달이다. 필시 백호의 몸 상태 역시 비슷할 터.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가만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끼워준 옥가락지가 손끝에 걸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몸이나 씻자.’

차가운 물로 목욕을 하면 쓸모없는 생각 따위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옷을


벗어 내렸다. 굳이 이 밤에 시녀들을 깨울 필요는 없다. 자연적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와 냇물에 연결된 욕탕이 두 사람의 궁 안에 있었다. 연화를 위해 백호가 특별히 따로
마련한 장소였다.

사락거리면서 비단옷이 한 겹씩 벗겨져 내려갔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연화의 살갗 위로


서늘한 밤바람이 스쳤다. 곤두선 신경은 찬 공기 속에서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었다.

욕실의 창문은 사방팔방 열리게 되어 있었지만 연화는 하나만 열어두었다. 백호는 신선한
공기 속이 좋지 않냐며 문을 모두 위로 올려 묶고 목욕을 즐겼지만, 아직도 그녀는 노출된
공간에서 맨 살을 내보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발끝을 담그자 미온수가 느껴졌다. 한쪽으로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올랐고 한쪽으로 시원한
폭포가 쏟아져 중간에서 합쳐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물 안에 몸을 완전히 담그고
머리까지 적신 뒤 시원한 물 쪽으로 갔다. 몸이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어디쯤 계실까.’


신령계 전체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아무리 빨라도 칠 일이 걸리니 겨우 사흘째인 지금이야
저 멀리를 날고 있을 것이다. 영토는 넓고도 넓어 아무리 신이라 한들 한순간에 다 볼
수가 없었다.

찬물 속에 앉아 달아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던 연화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휘영청 밝았지만 그 빛 외에 욕탕에는 어둠뿐이었다. 어슴푸레하게 흩어지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허벅지를 꽉 다물었다. 깊은 안쪽이 자꾸만 움찔대며 무엇인가를
원했다.

“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이는 멀리 떠나 돌아올 날은 멀었고 육신은 그를 원한다. 천


리 밖에서 아마도 그 역시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했다.

이 욕실에서도 수없이 그와 몸을 나눴다.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의 밑에서 물을 맞으며


백호의 품에 안겼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연화의 머리카락과 목을 쓸어내리고, 등과 허리와
엉덩이까지 쥐며 내려갔다. 희고 연한 연화의 피부 위로 붉게 자국이 남는 건 예사였다.
엉덩이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와 그 깊은 은밀한 부분에 그의 굵고 긴 손가락이 닿으면…….

연화는 입술을 물었다. 기억이 흘러넘쳐 감각을 지배했다. 마치 백호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질 때처럼 뱃속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미 동그란 가슴 위 유두가 작고 빳빳하게
일어섰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붉은 달은 설마 반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걸까…….’

백호와 떨어진 시간이 이렇게 긴 건 혼인한 이후 처음이었다. 함께 있을 때는 살이 거의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그가 연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끌어안고
있어 결국 연화가 힘들다고 한숨을 쉴 정도가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그럴 때면 백호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귀가 솟아 있어 그 귀가 축 늘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이렇게 몸이 달아오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뜻이다.

연화는 더 참지 못하고 손을 자신의 목덜미와 가슴 위로 쓸어내렸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살갗은 찬물 속에서도 여전히 열기가 흘렀다. 붉은 볼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유두를 쥐었다. 손톱 끝으로 살짝 긁자 등허리로 찌릿하게 전기가 흘렀다.

“…….”

누군가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웠지만 사방은 고요했고 요요히 떠 바라보는 것은 붉은 달뿐이다.

조금 용기를 얻어서 연화는 매끄러운 피부 위로 손을 내려 조금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차마 갈라진 틈 사이로 깊이 넣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녀는
느릿하게 달라붙은 살점 사이를 손가락 끝으로 갈랐다.

뾰족하게 서 돌출된 음핵이 손톱 끝에 걸려 긁히자 엉덩이가 움찔 떨렸다. 연화는 자칫


새어 나올 뻔한 신음을 애써 삼키고 조심히 그 부근을 문질렀다. 차마 가장 예민한 부분은
다시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끈한 액체가 흘러 질구와 그 주변을 적셨다. 물 안에서도 확연히 감촉이 다른 액체가


손가락을 감쌌다. 한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유두를 자극하고, 연화는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딱 달라붙어 있던 살점이 갈라지고 붉은 꽃잎이 드러났다. 찬물 속에서도
뜨거웠다.
“백……호 님.”

한숨처럼 그의 이름이 샜다. 저녁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피부에 입술을 대던 백호의
체온이 그립다. 겨우 사흘째인데, 그에게 얼마나 길이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못 견디게
그리울까.

몸을 웅크리고 피부를 더듬던 연화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입술을 떨었다. 백호의 그 넓은


품과 뜨거운 체온이 필요했다. 얼마나 그가 그리운지 코끝에 백호의 체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비가 온 깊은 숲과 닮은, 아주 신선하고 어두운 향기.

“안아주세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연화가 속삭였다. 누가 듣는다면 꿈에도 하지 못할 소리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다리를 벌리고 백호를 그렸다. 너른 어깨, 연화가 아무리 매달려도
거대한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강대한 육체. 파고들면 순간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묵직한 압박감을 선사하는 남자.

“백호 님…….”

허공을 향해 뻗은 팔목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흘렀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연화는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벌어진 입술 위로 다른 이의


입술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읍, 흐……!”
놀라 밀어내려는 여자의 가느다란 손목이 잡혀 눌렸다. 반항하려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도톰한 입술과 혀를 잘근거리면서 사내의 두터운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마구 범했다.
타액이 흘러 내렸다. 손바닥에 차가운 털과 같은 감촉이 느껴지고, 사내의 팽팽한 옷과
상체가 연화의 상체를 눌렀다.

발버둥치는 그녀의 몸을 내리 누르면서 커다란 육체가 물속으로 들어왔다. 철벅이는


물소리와 함께 밖으로 넘쳐 주위 땅이 온통 젖었다.

“……대, 대체…… 누, 누구!”

간신히 입술이 놓여난 연화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순간,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혼자 귀엽게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으르렁대며 낮게 울리는 소리가 욕탕을 울렸다.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얼굴의 절반이 호랑이와 닮아 있었다. 평소에도 강맹한 신체는 마치 겉의 장포가 찢어질 듯


부풀어 올라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손톱은 길고 날카롭게 휘어져 있었고, 흰 털이 얼굴과
목덜미와 손등까지 덮었다. 인간과 호랑이의 중간쯤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화는 손을 떨며 입가를 가렸다.

“……백호 님?”
대답 대신 낮게 웃는 소리만이 돌아왔다. 흰 얼굴 가운데 형형히 빛나는 새파란 눈이 살풋
접혔다. 그는 길게 혀를 내어 연화의 뺨을 핥았다. 마치 고양잇과 짐승이 하는 행동
같았다.

“놀랐느냐?”

“……세상에.”

연화는 발발 떨면서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 위에 얹어보았다.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다. 터질 듯 부푼 팔의 근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도 평소보다 훨씬 커진 듯했다.
백호의 눈동자 안 홍채가 확장되어 둥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모습을 너는 본 적이 없구나.”

“이 모습이라 하시면.”

“호랑이와 인간의 중간 모습이다. 금수의 날램이 필요하나 인간의 형태로 의사소통하고


싶을 때 취하는 모습이지.”

아아, 하고 연화는 놀란 상태에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호는 호랑이와 인간 두 가지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번갈아 취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가


변신 가능한 것이 두 모습뿐일 리가 없었다. 하위의 신령들도 서너 가지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지배자인 백호가 변신에 제약을 받을 리가.
웃는 입술 아래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호랑이이기도
했다. 연화는 낯설고 두렵지만 동시에 반가워서 조심스레 백호의 목덜미에 드러난 털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민감한 피부 위로 거친 털이 비벼졌다.

“일정이 길어 잠시라도 널 보려고 이 모습으로 달려왔건만……. 귀엽게도.”

“백, 백호 님.”

“내가 그리 보고 싶었더냐?”

연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차마 백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설마 전부 보신 건가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백호의 생각에 몸이 달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스스로의 피부를


더듬는 장면을 그가 전부 봐버렸다니, 수치심에 터져버릴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백호가 웃으면서 이마를 연화의 뺨에 비볐다. 마치 커다란 고양이가 애정을 표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덩치는 산만 했지만 그는 백호다. 연화는 안심하고 그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평소보다 양팔 안에 가득 차는 목덜미가 훨씬 굵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연화를 안아 들고 물 안에서 돌아앉았다. 옷을 입은 채 들어와 장포는
형편없이 다 젖어 있었다. 백호는 손톱을 세워 옷을 갈라냈다. 한순간에 넝마가 된 옷이
물 안으로 가라앉고, 나체가 된 채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끌어안아 허벅지 위로 당겼다.

연화는 잠시 그의 털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속삭였다.

“붉은 달이라서 그랬습니다…….”

변명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옹알거렸다.

“붉은 달이라 백호 님도 몸이 불안정하실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다보니 저도. 그러니까,


그게, 아무래도 반려라서인지 백호 님의 발정기에 저 역시 영향을 받는 게 아닐……지요.”

“……아하, 그래.”

길어지는 변명에 백호는 어쩐지 웃음을 참는 기색이었다.

110 화

백호는 대답하지 않고 연화의 몸을 좀 더 당겨 끌어안았다. 다리를 벌린 채 그에게


정면으로 안기자 예민한 피부 위로 거친 호랑이의 털들이 쓸렸다. 그것만으로도 자극이
되어 연화가 몸을 비틀었다.

“네가 안달이 난 것이 달 때문이로구나, 그렇지?”


“예, 그런 듯합니다.”

백호의 놀리는 듯한 말에 연화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가 그리워서 몸이 달았고


스스로를 더듬었다고 인정하기가 부끄러웠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연화의 얌전히 내려진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크고 둥글고 순한 눈동자가 잠시 사방을 헤매다가 그의 시선에
따라왔다.

“그렇다면 달의 명에 따라야지.”

백호가 낮게 웃었다. 호랑이와 닮은 얼굴에서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콤함보다 어딘가 성급함과 욕망이 더 배어든 소리였다. 연화는 오싹하게 등에 소름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혼인 후 한동안 듣지 못했던 거친 음성이다.

“어때, 너도 그러고 싶으냐?”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유혹하듯 번쩍였다. 호랑이의 눈을 하고 있어 어둠 속에서 커다래진


홍채가 눈을 둥글게 채웠다. 연화는 침을 삼켰다. 저절로 다리가 모아지는 것 같았다.

대답 대신 그녀는 반려의 목덜미를 좀 더 가까이 안았다. 벗은 가슴을 그의 피부 위에


누르며 어설프게 몸을 흔들었다. 백호의 두터운 허리를 양다리로 감싸 안고 허벅지에 힘을
주자 백호가 다시 으르렁댔다. 푸른 눈이 거의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디, 원하시는 대로.”


연화가 작게 속삭인 말이 활시위를 당겼다. 백호의 커다란 손이 그대로 그녀의 허벅지를
당겨 안았다. 매끄러운 피부가 다치지 않도록 완전한 인간의 형태로 변한 손이 가늘고 흰
허벅지에 붉은 손자국을 냈다. 물이 넘쳐 욕탕 바깥으로 흘렀다.

벌어진 입술이 맞물렸다. 연화는 가쁜 숨을 어찌할 바 모르면서도 최대한 그에게 맞추려


애를 썼다. 그녀 자신도 이미 달아오른 몸이 방향을 잃을 지경이었다. 손이 물기에 젖어
자꾸만 백호의 매끄러운 피부 위에서 미끄러졌다.

동그랗고 소담한 가슴이 백호의 손아귀에서 뭉개졌다. 바짝 선 유두가 단단한 손톱 끝에


할퀴어져 통증과 쾌락이 반반씩 뒤섞여 연화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 신음을 한 치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먹어 삼키면서 백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허리와 엉덩이를
주물렀다. 백호의 허리가 나무처럼 두텁고 강인해 연화의 양다리는 활짝 벌어져서도 힘겹게
그의 몸통을 감싸 안고 있었다.

“백, 호 님.”

간신히 입술이 놓여나 허덕이면서도 연화가 목숨줄처럼 백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답하듯
그가 연화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완전히 벌어져 벗은 샅에 그의 거대한 양물이
느껴졌다.

마치 화로에서 갓 꺼낸 인두마냥 뜨거웠다. 화끈한 열기에 여린 자신의 꽃잎이 화상을 입을


듯한 공포에 연화가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빼자 용서하지 않고 백호가 그녀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배꼽과 배꼽이 마주 닿은 채 연화는 본능적인 공포와 기대감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찬물 쪽으로 들어와 있음에도 욕탕 전체가 화끈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단단하게 일어선 양물로 연화의 매끄러운 살점 사이를 문지르며 백호가 웃었다.
“평소보다 좀 더…… 거칠 수도 있다.”

“……시기가, 시기니까요.”

연화는 새빨간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보다 거칠더라도 받아낼 수 있다. 그렇게 안긴 지


아주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와의 강한 정사는 힘겨운 대신 극상의
쾌락을 안겨주었다. 그녀 자신 역시 붉은 달의 영향 아래 달아올라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기대가 되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부끄러워 눈을 차마 들지 못하고
내렸다.

그녀를 욕탕의 너른 난간 위로 올린 백호가 그대로 연화를 뒤로 눕히고 다리를 활짝


열었다. 하늘을 향해 두 다리를 완전히 벌리고 노출된 채로 연화가 얼굴을 가렸다.
자연적인 바위를 평평하게 깎아 만든 욕탕이라 마치 자연 속에서 그에게 안기는 듯한
착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백호는 고개를 숙여 천천히 혀를 연화의 음문에 가져다 대었다. 물에 젖은 가늘고 부드러운


음모를 젖히고 두 살점을 슬쩍 갈라 두터운 혀를 밀어 넣었다. 이미 기대에 차 단단하게
튀어나온 돌기를 끌어내 살짝 앞니로 잘근거리자 연화가 숨 막히는 신음성을 냈다. 이미
붉은 꽃잎은 매끄러운 애액으로 뒤덮여 미끈거렸다.

살짝 혀끝으로 살점 사이를 파고들자 연화의 두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랫배 역시


힘을 줘서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갈라진 틈을 빠르게 오가고
아예 입 전체로 틈을 완전히 베어 물었다.

“……흐, 으흐……응……!”
연화가 덜덜 떨었다. 계속 입을 놀리면서 살점 안에 있는 깊은 음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기어코 그녀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찌걱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폭포
소리로 결코 조용하지 않은 욕탕 안인데도 그랬다.

내벽 안으로 밀려든 백호의 혀는 평소보다 두텁고 길고 까칠했다. 흠칫거리며 허덕이는


연화를 보면서 백호는 눈을 휘었다. 그의 혀에는 지금, 마치 거대한 고양잇과 맹수의
그것처럼 작은 돌기들이 셀 수 없이 돋아나 있었다.

사냥할 때 피식자의 뼈를 훑으면 묻어 있는 살점들이 그대로 쓸려나올 정도의 거친


촉감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핥고 있지만 결코 평소와 같은 감촉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이토록 예민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살갗이라면, 완전히 벌어져 그만을 기다리고 있는 연약한
살점이라면.

백호가 이빨로 살짝 잘근잘근 음핵과 주변을 씹으며 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아흣……!”

연화가 기어코 입을 막으며 몸부림쳤다. 발끝이 허공을 찼고 목소리를 삼키느라 손가락을


꽉 물었다. 쾌락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밑으로 울컥거리며 애액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랫배가 경직되어 연화의 뜻과 달리 떨리는 것을 지켜보며 백호는 넘치는
애액을 핥았다.

고개를 떼고 만족스럽게 젖은 턱을 닦는 백호를 보며 연화가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입에서 떼어냈다. 눈물로 관자놀이와 뺨이 형편없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벌어지려는 허벅지를 손으로 잡아 모으며 한숨을 쉬었다. 작은 절정이었지만 근육이 떨려
몸 전체가 후들거렸다.

“평소랑 느낌이 다르지?”


“……네.”

“평소보다 좀 거칠 것이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앉혔다.


똑바로 앉아 마주 본 채 연화는 백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욕으로 불타고 있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는 완벽하게 그녀의 반려인 백호였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백호의 뺨을 만지다가 욕탕의 물을 떠서 그의 얼굴을 닦아내 주었다. 자신의
애액으로 젖어버린 그의 피부가 부끄러웠다.

백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마주쳐 오는 그의 눈은 다정한 욕망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제 내게도 기쁨을 다오.”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연화는 백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다리를 벌려 그의 어깨를


잡았다. 스스로 몸을 내려 반려를 찾고, 그의 양물을 자신의 음문 사이로 인도했다. 한 번
절정을 맞이해 힘이 빠지고, 떨리는 다리가 자꾸 미끄러지려 했지만 그녀는 백호의 몸에
의지해 느리게 움직였다.

“흐…….”

백호의 낮은 신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맹수의 으르렁거림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의 욕망에


찬 신음성이 기뻐서, 연화는 너무 큰 양물을 받아들이느라 자신의 입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고 그대로 몸을 내렸다.
한 번의 절정으로 애액으로 충분히 젖은 내벽이 백호의 양물을 꽉 잡아 물었다. 연화는
몸을 내리고서 잠시 압박감에 숨을 멈췄다. 백호의 남근은 본래도 충분히 컸고 혼인한 이후
거기에 조금이나마 적응이 된 상태였는데, 어쩐지 더 벅찬 느낌이었다.

그녀는 발발 떨면서 백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직 절반쯤밖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더


내려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이가 좀 나지?”

백호가 물었다.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려 애쓰는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연화를
끌어안고 가차 없이 안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반려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었다.

연화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숨을 삼키고 백호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평……소보다, 더…….”

“그래.”

“조금 힘, 힘들…….”

연화가 백호의 뺨에 얼굴을 비비자 그의 뺨 근육이 실룩이며 어금니를 무는 것이 느껴졌다.


반려를 배려하느라 극도로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화는 허덕이면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백호는 이를 악물고 자제하고 있으면서도 눈만은 끝이 없을 만큼
따뜻했다.

아마도 한도가 없을, 반려의 애정.

연화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불행히 태어났던 그녀가 어찌 백호와 같은 반려를 만나 살게


되었는지, 간혹 새삼스럽게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그녀는 우는 대신 조심히 백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뒷덜미를 감싸는 그의


커다란 손을 느끼면서, 연화는 그대로 몸을 깊이 내려앉혔다.

“읏, 흐, 아……!”

내벽이 한계까지 넓어졌다. 그녀가 숨도 채 못 쉬고 고개를 숙였고, 오물거리며 질기게


물고 드는 연화의 몸에 백호 역시 아찔해져 이를 악물었다. 익숙한데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뜨겁고 좁고 탄력있게 그를 조여든다.

넘쳐난 애액 덕분에 백호의 거대한 양물도 마치 미끄러지듯 그녀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샅에 백호의 피부가 닿는 것을 느끼고 연화는 그를 완전히 품었음을
깨달았다.

백호는 그녀의 다리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벌어진 것이 걱정돼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연화의 입 안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 응……. 흐, 움, 움직이지……!”


연화의 몸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남근이 지나치게 커서 내벽 전체를 다 자극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를 찔려도 아랫배가 찌르르 달아오르고 뒷목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느껴졌다. 자칫하면 그가 움직이는 대로 절정을 맞이할 것 같았다. 과한 자극에
겁에 질린 연화가 급히 백호의 목에 매달렸다.

“쉬, 알았다. 움직이지 않을 테니……. 큭.”

연화를 달래다가 그녀의 내벽이 조여들자 백호 역시 신음을 뱉어냈다. 그녀는 달달 떨면서


백호의 품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달아올라 연화의 흰 몸은 온통
붉었다. 차가운 물 안에서도 열기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버거워하는 것 같아 그녀를 조금 떼어놓으려 팔을 잡는데, 연화가 고개를 젖혔다.


눈물이 가득 찬 검은 눈동자가 열기로 흐려져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백호의 팔을
더듬었다.

“빨, 빨리 해, 주세요…….”

“…….”

그러다 다친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가만히 쏘아보고만 있는 푸른 눈을 보다가 연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안에…… 받고 싶어요.”

그녀는 지금 절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초점이 나간 검은 눈동자가 말해 주었다. 하지만


백호는 그 순간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의 민감한 피부가 떨리는 것을 보고 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연화의 입술을 탐했다.
한계까지 입술을 벌려 두터운 혀가 연화의 입 안을 훑고 범했다. 동시에 백호의 허리가
움직였다.

“……으, 흐응……!”

퍽 하고 한 번에 더 깊이 박힌 양물에 연화의 손톱이 백호의 등과 어깨에 상처를 냈다.


아랫배 쪽이 불타는 것 같았다. 쾌락과 고통을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배꼽 밑,
어쩌면 배꼽 위까지 그의 것이 파고들어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뱃가죽 위로 만져보면
백호의 물건이 드나드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아아읏……!”

꼴깍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연화의 입술을 놓아주고 백호가 그녀의 허리를 부서져라


끌어안고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벌어진 그녀의 다리가 망가진 인형처럼 흔들렸다. 아랫배
속이 달군 돌절구로 잘게 빻아지는 것 같았다. 연화는 아예 정신을 놓고 비명을 올렸다.

“아, 아! 백, 호 님! 응, 아응, 백……. 아! 흐으, 아아!”

눈물과 타액이 흘러서 얼굴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백호를
밀어내다가 그의 강인한 팔에 속절없이 끌려와 다시 안겼다.

음문과 그 아래, 이어지는 내벽이 전부 한계 이상으로 달아올라 백호의 거대한 남근이


짓누르는 곳을 죄다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흐, 아, 아응, 백, 백호 님! 아아!”


연화가 비명을 지르며 추삽질의 중간 중간 몇 번이나 절정을 맞이했다. 그녀가 도리질을
치며 긴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물 때문에 뺨과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붙어 엉망이었다. 백호는 그러나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연화의 몸이 고통에 가까운 쾌락을 몇 번이나 견디다 못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백호가 그녀를 콱 끌어안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장 깊은 곳까지 남근을 박아 넣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머릿속에 남은 것이 아예 없는 상태로 연화는 눈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덜덜 떨며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연화를 보면서 백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연화야.”

“아, 흐응, 으…….”

“미안하다.”

백호는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연화는 자신의 안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아, 이, 이거…….”

그녀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물었다. 문장은커녕
단어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지만 백호는 알아듣고 그녀를 고쳐 안았다.

“고양잇과 맹수들은…… 성교의 끝에 달하면 성기가 변형되지.”


“네……?”

“지금은 움직일 수 없다. 아마 많이 아플 거야.”

연화는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곧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111 화

뱃속에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녀 자신이 확연히 느낄 정도로, 백호의


남근 끝이 뾰족하게 변하고 있었다. 자궁의 입구를 찌르며 밀고 올라온 성기의 끝이
변형되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 으, 으흐, 아아!”

성기의 변형에 연화가 덜덜 떨며 허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백호가 잽싸게 그녀의 몸을
낚아채 꽉 잡았다.

“연화야, 지금 움직이면 더 다친다, 조금만 참아주렴.”

그는 미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역시 성감이 고조되어 이대로 움직이며 그녀의 안에


빠르게 사정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연화의 내벽이 상처 입고 다칠 것이다. 자연적으로
가라앉게, 시간을 두고 사정을 유도해야 했다.
백호는 끈질기게 아픔과 쾌락 사이에서 헤매는 연화를 끌어안고 달랬다. 차가운 물을 떠서
얼굴에 묻혀주며 열기를 식히고, 덜덜 떠는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실낱같이 남아 있는
이성 덕으로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백호 역시 이 상태로 관계를 가진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꽤나 한참 걸릴지도 모른다.


본래 맹수들의 생태란 그러했으니까.

조금만 움직여도 자궁 안으로 파고든 성기의 끝이 내벽을 찔러 정신이 혼미해졌다.


날카로운 통증마저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 연화의 음문에서는 끝없이 애액이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쉬며 백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이래서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금수인지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백호가 풀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의 머리 위에 달려


있는 동그란 호랑이의 귀가 슬쩍 처지는 것을 보고, 연화는 반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웃어버렸다.

“……괜, 찮아요.”
간신히 말했지만 목소리는 완전히 갈려서 거칠었다. 근래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고 비명을
질러댔던 관계가 있었던가. 그녀는 힘겨운 상태에서도 어딘가 충만한 기분으로 반려의 품에
고개를 기울였다.

전신이 다 아프고 특히 배 속의 이 물건이 골칫거리였지만 그녀의 피부를 조심히 쓰다듬는


백호의 커다란 손 하나로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환한 빛이 눈꺼풀 너머로 쏟아졌다. 연화는 눈을 뜨기 싫으면서도 뜨고 싶은 양가감정에


시달리다가 아침인 것을 자각하고 겨우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환히 열린 창문 안으로 투명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온통 고요한 신령계의 아침 공기 속


지저귀는 새소리와 풀벌레소리만이 들려왔다. 피부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은 적당히
서늘하고 신선했다. 은은한 나무의 냄새가 공기를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 밑으로 전신이 맨 몸인 것이 느껴졌다. 피부에 스치는 비단이불의 감촉이 매끄럽다.


그녀는 조심히 이불을 가슴까지만 내리고 빼꼼 주변을 살펴보았다. 언제나 가득 차 있던
침상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신 건가…….’

일정을 도는 중 그녀가 보고 싶어 갑자기 왔다고 했다. 덕분에 색다른 모습까지 봤지만…….


아무래도 하던 일을 끝마쳐야 하니 빠르게 돌아가셨겠지. 알긴 하지만 어딘가 서운한
마음에 연화는 이불을 쥐고 꼼질거렸다.

‘다 끝내면 오시겠지.’
어제의 관계가 조금 무리였던지 몸을 움직이자 아랫배와 허벅지 쪽으로 달콤한 통증이
찌르르 지나갔다. 다리를 좁히자 아직도 약간 화끈한 기가 남은 은밀한 틈이 쓸려 조금
아팠다. 백호가 좋은 약을 발라주고 갔는지 조금 미끈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정말이지.’

그런 모습의 백호는 처음 보았다. 그의 몸에 난 맹수의 털은 강하고 거칠었다. 그녀의


피부에 문질러질 때마다 기묘한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팔이 연화의 허리를 끌어안을
때마다 성감이 달아올랐다.

‘생각하면 안 돼, 아침부터.’

어젯밤 그렇게나 격렬한 정사를 치러놓고 몸은 감각을 기억하는지 다시 달아오르려 했다.


그녀는 다리를 꼭 말아 오므리고 한숨을 쉬었다. 백호와 함께 지내고부터 몸이 그에게
적응해 걸핏하면 뜨거워졌다. 지금이야 붉은 달의 영향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녀는 스스로
정당화를 했다.

가만히 이불 위에 엎드려 텅 빈 옆자리를 보다 보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잠깐


이불 위를 뒹굴었다.

“보고 싶지만, 뭐……. 다녀가셨으니까.”

빈 옆자리가 어딘지 서러워서 일부러 연화는 소리 내어 혼잣말을 했다. 일주일의 떨어짐도


참지 못하고 굳이 먼 길을 왔다가 간 반려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참으로 다정하고 자상한 이다.
“다녀갔으니 곁에 없어도 되는 거냐, 연화야?”

그 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로 펄쩍 뛸 뻔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이불 속에 숨어버린 그녀를 보면서 백호가 환하게 웃었다. 아침 햇빛 속에서,
백호의 길디긴 백발이 투명하게 빛났다.

장난스럽게 휘어진 푸른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볼을 붉히고 차마 얼굴을 못 내밀고 있는


연화를 내려다보다가 백호가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몸은 괜찮고?”

“아, 백, 백호 님……. 일정은 어떻게 하시고.”

“그깟 일정 따위.”

백호는 어딘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는 입을 쭉 내밀었다가 연화의 곁에 냉큼


누웠다. 밖에 나갔다 온 것인지 그의 옷깃에 향긋한 풀냄새가 묻어 있었다. 연화는 긴
장포의 옷깃에 코를 묻었다. 백호의 체향과 풀향이 섞여 올라왔다.

백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했다. 그는 연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기분을


정돈했다. 사방신인 그가 함부로 풀이 죽거나 우울하면 안 된다. 신령계 전체에 영향이
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돌아야 한다. 쳇.”

“예에?”
“돌아보는 길이 있어서, 그 길을 뚫어주어야 신령계 전체로 기가 원활히 순환되거든.
순찰뿐 아니라 기맥을 뚫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백호는 불편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연화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일을 멈춰본 적이


없어서 이럴 줄은 몰랐다. 그저 잠깐 와서 연화를 보고 가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연화가
잠드는 것까지 보고 난 뒤 새벽에 황급히 돌아가자 기맥은 다시 막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뚫어야 한다.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야 없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짜증스러웠다.

“저런.”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백호가 한껏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웃어? 웃는 게냐? 널 보러 왔다가 일이 제자리인데.”

“세상에, 그러게요.”

그가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건 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연화는 그의 품에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보고 싶어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신이 그녀의 반려였다. 그래서 일을
처음부터 하게 되었는데도 연화를 마주 보는 푸른 눈에는 따뜻한 다정함과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면 못된 건데, 싶으면서도 연화는 충만한 기분으로 백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끝없이
배려받고 끝없이 사랑받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이제야 알아가고 있었다.

백호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을 또 떨어져 있으라니 정말 안 될


말이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달려 일정을 나흘 아래로 줄여서 하고 오겠다.”

“무리는 하지 마세요.”

“무리랄 것까지야 있나. 널 보고 싶으니 어쩔 수 없지.”

걱정스러운 연화의 말에 백호는 웃으면서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가 사랑받는


감각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을 백호는 항상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이 있지. 백호는 조금 심술궂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아주 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백호의 말에 연화가 퍼뜩 생각을 떠올렸다. 평소보다 훨씬 더 몸이 달아올랐던 말을 하는


모양이다. 연화는 얼굴을 붉혔다.

“그야, 붉은 달이 떠 있는 시기니까요. ……발정기이고.”

발정기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어제 그토록 격한 정사를 나눠서인지 지금은 몸이 다소


아프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가뿐했다. 하지만 아마 또 시간이 지나면 달아오를 것이다. 달이
떠오른 동안 백호가 언제나 그랬으니 반려인 자신 역시 그럴 테니까.

백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고 연화도 마찬가지로


갸우뚱했다. 백호는 뭔가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그러세요?”

“흠, 붉은 달과 발정기라.”

웃음기가 밴 목소리였다. 백호는 연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씩 큰 미소를 지었다.

“발정기란 말이다, 천지가 금수의 왕에게 하는 재촉 같은 것이다. 빨리 반려를 찾아


혼인을 하라는 순리를 향한 재촉.”

“그렇군요.”

“그리고 나는 혼인을 했지.”

“…….”

연화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백호는 잠시 그녀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설마 하는 얼굴로 백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붉은 달은 혼인을 한 이후에는 발정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

“……아.”

“그러니까, 네가 어제 그다지도 달아올라 있던 이유는…….”


백호가 고개를 숙여 연화의 귓가를 물었다. 연한 살점을 잘근거리고 씹으며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저 내가 그리웠기 때문이란다. 귀여운 내 반려야.”

백호의 목소리에 음란한 습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연화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번데기처럼 이불로 둘둘 말고
숨으려는 그녀를 통째로 팔 안에 끌어안고 백호가 크게 웃었다.

“하하, 네가 날 그리도 은애하는구나. 어찌 아니 기쁠 일인가.”

이불 안에서 민망함에 몸서리치고 있는 연화를 살살 달래 끌어내면서 백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웃음을 애써 삼켰다. 연화는 조금 토라졌는지 입을 삐죽거렸다.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너무 토라지지 마라. 네가 날 그리워하는 게 어찌 나쁜 일이겠느냐.”

“제가 어제 그러는 것을 보셨으면서……. 진작 말씀을 해주시지.”

연화는 한숨을 쉬면서 붉어진 볼을 토닥였다. 어차피 둘 사이의 일이니 특별히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민망한 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애꿎은 볼만 세게 문질러댔다.

“…….”

그 때 백호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왜 또 그러세요?”

갑자기 침묵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백호를 보고 연화가 움찔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조금…… 묘하구나.”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상한 위화감이 그의 피부 위를 흘렀다.

지금 이 방 안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 존재가 느껴졌다. 아니, 방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연화에게 집중하느라 몰랐을 뿐.

백호는 그녀를 끌어안고 방 안을 휘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다. 감히 그 누가


사방신 백호와 그 반려의 침실에 함부로 발을 들이겠는가.

백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번 느낀 위화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여전히 있었다. 품 안의 연화가 꼬물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래, 이상해.”

또 하나의 존재라. 아주 작고 작았으나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다. 거기까지 읽어낸 백호는


잠시 연화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매끈한 하복부 위로 손을 올렸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이
납작한 배였다.

“……허.”
하지만 뭔가를 느낀 백호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게.”

백호는 그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연화의 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한참이나 그는 고개를


젓거나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연화가 슬슬 걱정이 될 때쯤이 되어서야 눈을
맞춰 왔다.

“놀라지 마라.”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연화는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 위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백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반려의 벗은 어깨를 끌어안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서 나오지 않도록, 백호는 애써 목에 힘을 주었다.

“우리, 아기가 생겼구나.”

“……예?”

연화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혼인을 맺었으나 신과 인간이라는 태생적인 차이로 인해 계속해서 후사를 보는 데 실패했던
둘이다. 백호는 지나치게 강했고 그의 씨를 잉태하기에 인간인 연화는 지나치게 연약했다.
후사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며 백호가 개의치 않았으나 연화는 언제나 그것을 마음에 걸려
했다.

“세, 세상에.”

사방신이 한 말이다. 틀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연화는 떨리는 손으로 배 위를


만져보았다. 아직 당연히 납작하고 매끈한 배였지만, 이곳에 자신과 백호의 아이가 잉태된
것이다.

붉은 달은 발정기와 상관이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축복을 선사했다.

“달이 우리에게 또 다른 선물을 보내줬구나.”

백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뺨 위로 흐르는 그의 따뜻한 숨결에 떨림이 숨겨져 있었다.


연화는 거기에서 기쁨과 환희를 읽어내고 눈을 감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여 둘 사이의 결합을 새 생명의 탄생으로 받아 들이게 되다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 리 없었다.

연화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한참 동안 백호의 품에 매달려서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에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는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에 대한 상상이 펼쳐졌다.

백호를 닮은 아들일 것이다. 듬직하고 강인한, 그러면서도 다정하고 온화한. 흰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닌 소년.
“작고 예쁜 호랑이겠지요.”

연화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손 안에 가득 차는 흰 호랑이 새끼일 것이다. 보드랍고


따뜻한 발바닥을 가지고, 인간과 호랑이의 모습을 할 수 있는 아이 말이다.

“귀여운 여자아이일 수도 있단다.”

백호가 농을 받았다. 그는 연화를 닮은 딸을 상상했다. 새처럼 가늘고 사랑스러운,


그러면서도 심지가 굳은 검은 눈동자의 소녀.

“아이가 찾아왔구나.”

백호가 작게 속삭였고 연화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속눈썹에 어룽져 엉기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그녀는 백호의 흰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둘 사이의 결합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신령계의 축복받은 날이었다.

112 화

장마가 길다.

본래 신령계는 거의 항시 맑은 날을 유지했고, 지배자인 백호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편차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해에는 마치 때 아닌 우기라도 만난 듯 비가 길어졌다.
신령계에 비 오는 날씨가 적어 처음에는 신기해했던 연화도 곧 무료한 기분에 휩싸였다.
인간계에 살 때는 장마가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있었으니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금 지루한 기분으로 궁의 정원을 내다보았다. 솨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이 정원의 낮은 풀잎을 두드렸다.

“도저히 더 못 견디겠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그마한 흰 호랑이, 백호와 그녀의 아들인 백랑은 지금쯤 위층
침대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린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데다가 날씨가 궂어
좋아하는 산책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연화는 곧 시녀에게 우산을 받아 들었다. 화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름칠한 종이우산이었다.

“연화 님,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앞에서만 산책하세요.”

“알겠어요, 호접.”

등 뒤로 따라붙으며 호접이 잔소리를 했고 연화가 웃었다. 나비의 신령인 호접은 혹시라도


날개가 젖을까 따라 나오기를 꺼렸다. 본능적으로 비를 피하는 나비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연화는 우산을 펴고 발걸음을 정원으로 옮겼다.

연화와 백호가 혼인한 이후 궁을 이루는 봉우리는 더 굵고 높고 넓어졌다. 동시에 산맥과


같은 형상을 갖추어, 더 이상 홀로 높이 솟기만 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아니었다. 온갖
짐승과 초목이 가득 들어차 빼곡히 생명의 향기가 느껴지는 공간이 되었다.
발밑에서 자박거리며 물기가 소리를 냈다. 비가 많이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 치마 밑은 금세
젖어버렸다. 그래도 며칠 만에 밖에 나와 풀과 흙을 밟으니 살 것 같아, 연화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들 백랑도 뛰어나와 놀고 싶을 테지만, 어린아이를 이 빗속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백호는 자연스러운 정원을 좋아하여 풀을 웃자라게 둔 곳도 있었다. 길 사이로 걸으며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이 너머로 넘어가면 온갖 기화요초가 자라나는 화려한 꽃밭이
존재한다. 하지만 길이 미끄러워 그곳까지 갈 마음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길을 가로지르는 시내 앞에 서서 물을 들여다보았다. 온몸으로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그와 합쳐져 흘러가는 물줄기가 평소보다 거셌다.

“물냄새도 좋네.”

사방이 온통 빗줄기로 가득 차 있지만 물의 향기는 그와 또 다르다. 콧속을 가득 채우는


풀과 물의 향기에 연화는 심신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종이우산 위를 빗방울이
두드리며 고막마저 가득 채워냈다. 거기에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가만, 개구리 소리?”

비가 올 때 개구리가 나와 있는 일은 흔했지만 시냇물이 거셌다. 자칫하면 작은 개구리


정도는 휩쓸려 내려갈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냇물 한가운데의 작은 돌 위에 올라가 앉은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 저런.”
연화가 중얼거렸다. 개구리는 힘겹게 돌 위를 올랐지만 자리 자체가 위태로웠다. 하필
물줄기가 꽤 거센 가운데라 물방울이 위태롭게 튀었다. 평소라면 연화의 무릎 정도까지밖에
차지 않는 시내였으나 지금은 물이 불어 허벅지까지 올 듯했다.

“얘, 너, 너 그러다 쓸려가.”

연화가 안타깝게 개구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덜 자란 듯 유난히 작은 개구리는 애써


돌멩이에 매달려 있었다. 간신히 자리 잡은 자세가 다행히도 안정적이어서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돌멩이 자체가 물줄기에 휩쓸리며 무너져 내렸다.

“아, 안 돼!”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물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불어난 물길을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숨에 손을 내밀어 간신히 작은 개구리를 구해냈으나, 대신 자신의 몸이 휩쓸렸다.
얕다고 우습게 건너다니며 놀았던 시냇물은 잔뜩 불어나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심을 잃어 넘어지고 그대로 죽죽 밀려났다. 한 손에 든 개구리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한껏 든 채 연화가 애써 바닥의 바위와 풀들을 휘어잡았으나 온통 물기로 미끄러워 계속
밀려나기만 했다.

물속에 얼굴이 몇 번이나 잠기고서 연화는 위험을 체감했다. 그녀는 허우적대면서 힘껏


늘어진 버드나무의 나뭇가지를 잡았다. 유연한 나뭇가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간신히 물에
휩쓸리던 몸이 멈췄다.

“헉, 허억…….”
일어서려 해도 물살이 너무 세고 젖은 긴 치마가 감겨 다리를 들 수가 없다. 그녀는
개구리라도 뭍으로 던지려 했지만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팽팽하던 나뭇가지가 기어코 부러졌다.

“앗……!”

손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베이면서 그대로 몸이 떠내려갔다. 얼굴이 잠기면서 비명도


물살에 먹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허우적거리면서 그녀가 발버둥을 쳤다. 이렇게 어이
없게 생이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설핏 머리를 스쳤다.

“연화야!”

그 때 비명처럼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물에 잠겨 먹먹한 귀를 엄습했다. 고통에


차 한껏 뻗어 올린 손목이 크고 따뜻한 손에 휘어 잡히고, 어깨에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몸이 힘차게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연화야, 연화야!”

허공을 날아온 백호가 축 늘어진 연화를 끌어안고 뺨을 두드렸다. 정신이 흐린 채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허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풀밭에 뉘이고 공기를 움직여 더 이상 비가 연화에게 닿지 않도록 만들고서, 백호는


차가워진 연화의 손을 주물렀다. 잠깐 산책한다며 정원에 나갔다기에 무얼 하나 뒤따라오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연화야, 숨을 제대로 쉬어라. 그래, 옳지.”

호흡이 거친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인도하던 백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연화의


다른 쪽 손에서 폴짝 하고 뛰어나온 한 작은 물체였다.

“……개구리?”

채 다 자라지도 않은 작은 개구리였다. 저런 녀석을 왜 연화가 손에 쥐고 물에 빠진


것인가. 백호는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연화 역시 손에서 개구리가 빠져나간
것을 깨닫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풀 숲 사이로 사라지는 개구리를 보며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백호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연화는 점차


맑아지는 정신 속에서 그가 상당히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함에 그녀 역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궁으로 돌아와 말다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이냐, 대체!”

“……죄송해요.”

사과해야 했다. 백호가 얼마나 놀랐을지 연화 역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백호가


위험했다 해도 그녀 역시 가슴이 내려앉게 놀랐을 테니까.
침상 위 이불 속으로 상처 난 손과 다리를 꼬물거리며 숨기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백호가
약을 가져와서 상처 위에 처덕처덕 바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거칠고 잔뜩 화가 난
손길이었다.

연화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는 금방 나을 겁니다. 너무 염려 마셔요. 큰 상처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백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놀란


연화에게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대체 뭘 하는 게야. 개구리를 구하려고 불어난 물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거냐?”

“그게 아니라…….”

기껏해야 죽어도 그만인 개구리를 구하겠다고 물속에 뛰어들다니, 백호는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화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개구리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신령계에서는 특히나 더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 해도 신령으로 발전할 만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함께 살고 있는 호접도, 시녀들도, 경비병들도 모두 그러한 미물에서
발전한 자들이었다. 공덕을 쌓아 갈고 닦으면 어떤 자든 영혼을 가지고 신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저 개구리도 그럴지 모른다. 더구나 그녀는 보살의 가피를 받고 있는 자였다. 미래의
가능성을, 아직 살아 있는 자의 가능성을 세계의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순리라 하여 자비의 손길을 거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더구나 미래에 어떤 신령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무리 덜 자란 개구리라 하여도요.”

“보통 금수 천 마리 중의 하나가 신령의 자격을 얻지. 특히 저런 개구리 같은 것들은


신령이 된 자가 손에 꼽을 정도다.”

백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연화의 다리와 팔목에 생채기가 난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평소


사랑하는, 온순하지만 단단한 연화의 표정도 동시에 못마땅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이 다칠
정도라면 한 발 정도는 물러서야하는 게 아닌가. 백호는 그녀가 다치는 것에 몹시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저는 가능성을 예단하여 함부로 손길을 물릴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연화는 변함이 없었다. 단호한 그녀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백호는 불쾌했다.
자칫하면 물에 쓸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알겠다.”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방을 나가버렸다. 연화는 차마 그를


부르지 못하고 그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서운한 마음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분노를 이해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 역시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규칙 그 자체인 자. 보살의 가피를 입은 연화와 사방신인 백호는


영원히 평행선일지도 모른다. 속상함에 연화는 팔에 얼굴을 묻었다.

* * *

“그래서, 지금 부부싸움하고 나한테 하소연하러 왔다는 이야기냐?”

“그래. 그러니까 좀 닥쳐라.”

저 멀리 높은 정자에 앉은 청룡이 혀를 찼다. 그는 죽상이 된 백호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는 듯 저 멀리 꽃밭으로 시선을 던졌다.

빗속에서도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난 꽃밭은 선명하게 보였다. 거대할 정도로 드넓은


꽃밭이었으나, 청룡이 원하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었다. 그걸 가져가려면 백호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청룡은 일단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뭐가 문제인데?”

백호는 술잔의 청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싸하게 만들며 타고


흘러들었다.
“……보살의 가피라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어서.”

“그럼 뭐, 좋은 건 줄 알고 혼인했냐?”

청룡이 버릇처럼 비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일단 백호에게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청룡은 못마땅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보살과, 세상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는 없지. 뭐 다 알고 있었잖아.”

청룡의 최선을 다한 위로 비슷한 말에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연화가


안전하기를 바랐고, 백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에게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다. 치졸한
독점욕이라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 그는 몹시 불쾌했으나 본능적인 욕구를 감출 수는
없었다.

보살이란 홍진의 중생 모두를 구하려 하는 자. 그런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는 연화 역시


그런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뭐. 좀 화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래그래. 알긴 하겠는데, 어차피 혼인한 사이에서는 그런 걸로 싸워도 빨리 화해해야지.


아니면 너만 골치 아플 거다.”

청룡의 어른스러운 조언에 백호가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꼭 혼인을 먼저 해본 것처럼 말을 하는군.”

“그건…… 아니고.”

청룡은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백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초조하게 피했다.

“흠.”

백호가 턱을 쓸면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냈다. 푸른 눈이 가늘게 좁혀지는 것을 보고 청룡이


노기를 띠었다.

“뭐,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냐, 왜?”

“아니, 뭐. 나도 들은 바가 있어서.”

“뭘? 아니, 누구에게?”

“네 최근 연애 사정에 대해서, 주작에게.”

백호가 싱글거리며 웃었고 청룡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술잔을 쥐었다.

“주…… 주작이 알아?”

“알다마다. 그것도 아주 상세히 알던 걸.”


백호가 시원하게 웃었다. 청룡은 끄응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일
사이가 안 좋은 주작이 그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다니, 정말 좋지 않은 일이다. 차마
성질대로 백호의 멱살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의 협조를 구해야 하니.

“그 콧대 높던 청룡께서, 나 백호의 혼인을 그리 비웃던 분께서 말이야. 세상에 그 누가


인간의 여인을 만나…….”

“시끄러워, 닥쳐!”

몸을 부르르 떨고 기어코 청룡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그는 발을 굴렀다.

“빨리, 비를 그치게 협조하란 말이다. 그래야 내가 꽃을 가지고 돌아가지!”

“아아, 그래. 네 인간 연인에게 말이지.”

“시끄럽다고 했다!”

콰르릉 하며 천둥이 울렸다. 지금 이 비도 물을 다스리는 청룡이 행차해서 신령계를 헤집고


돌아다닌 때문이었으니, 천둥 역시 그럴 것이다. 백호가 힘을 써서 날씨를 조정하지 않으면
비가 멈추지 않을 게 뻔했다.

“단장초(斷腸草) 따위를 왜 가져가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악취미라며 백호가 투덜거렸다. 먹으면 내장이 온통 끊어진다 하여 단장초라는 이름이 붙은
극독을 품은 꽃이다. 그걸 굳이 가져가겠다며 청룡이 이 먼 신령계까지 발걸음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예쁘잖아.”

“그건 그렇다만.”

그의 말대로 단장초는 독에 어울리는 만큼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얼음조각과


같은 투명한 꽃잎에는 연한 보라색이 퍼져 있었고,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
아름다움에 홀려 손을 대면 독이 퍼져 피부가 중독되어 문드러진다.

백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가져가려는지 모르겠군. 네놈은 중독되지 않겠지만 꽃이 꺾이는 순간 거기서 새어


나온 극독이 공기 중으로 퍼지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 비나 멈춰라.”

“시간이 걸려. 이미 비를 멈추기 위해 다스리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두어 시진 이내에 맑은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하기야 자연의 섭리란 갑자기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리하여 멈추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그치면 단장초는 제일 먼저 그
매끄러운 표면에서 물을 날려 보내고 매끈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혼인한 반려에게 잘해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악우의 목소리가 어딘지 우울하게 들려서 백호는 그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럽게, 희고


창백한 청룡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후회 따위는 안 해.”

백호는 즉답했다. 그는 술잔을 완전히 털어내고 남은 술이 찰랑거리는 술병을 정자 난간


밖으로 뿌렸다. 투명한 술방울이 흩어지며 풀밭에 내려앉았고, 삽시간에 그 주위의 흙에서
새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신들의 술이니 당연했다.

“그냥 그렇다는 것뿐이지. 어쩌겠어, 연화를 내 그래서 사랑하는 걸.”

“진짜 팔불출 다되었구만.”

“뭐 문제 있어?”

태양처럼 웃고 있는 백호를 멀거니 보다가 청룡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만큼의 확신이,
자신에게 있었던가. 그랬다면 후회할 일이 없었을지도.

“아니, 아무것도.”

“싱거운 놈.”

백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구름이 두터웠으나 그의 눈에는 점차 옅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두어 시진이 지나면 완전히 맑게 갠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자, 그럼.”

그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룡의 눈이 금세 샐쭉해졌다.

“가려고?”

“술을 다 마셨으니 가봐야지.”

“술 핑계 대지 마라. 네 반려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들 거잖아.”

“잘 아는군. 나는 네놈의 악취미적인 단장초와 달리 천화(天華)를 꺾어 가지고 가야겠다.”

백호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정자의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허공으로 몸을 띄우기


전, 그는 슬쩍 악우를 돌아보았다. 청룡의 얼굴은 여전히 말갛게 우울했다. 그 우울의
원인을 알 듯해서 백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건투를 빈다. 네게도 나만큼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지.”

“……시끄러워. 필요 없으니 빨리 꺼져라.”

청룡은 고개를 외로 꼬고 투덜거렸고 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 몸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수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이 그의 몸에는 닿지 못하고 산산이 허공중에 비산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백호의 신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청룡은 우두커니 정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기다리면 단장초를 가지고 그의 여인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꽃을 닮아 아름답고, 청룡의 마음에 극독만큼 해가 되는 여인에게.

113 화

연화는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기대어 있어 바람에 빗방울이 날려 얼굴과


살갗으로 튀었다. 신선한 공기였으나 마냥 좋지는 않다.

백호의 말에 순순히 따라 자신의 신념을 바꿀 생각은 없었으나, 역시 서로 굳은 얼굴을


하는 것은 어딘가 슬픈 일이었다. 그가 휙 몸을 날려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보고 싶었다. 웃는 얼굴로 서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저 멀리로 기화요초가 핀 꽃밭이 아른거리며 보였다. 조금 높은 지대에 있어 궁 어디서나


보였지만 특히 이 층 침실의 창문에서는 더욱 잘 보였다. 간혹 근처에 가서 꽃향기를
즐겼으나 위험한 식물들도 있다 하여 그곳에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굳이 꽃의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가까이서 만지고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멀리서 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 때 얼굴로 조금씩 튀던 빗방울이 그쳤다. 그녀는 자신의 위로 그림자가 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가움에 연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늦으셨어요.”
“미안하구나.”

허공에 뜬 채로 백호가 웃었다. 바람에 그의 긴 백발이 흩날렸다. 사실 늦은 것도 아니고


잠시 다녀온 것뿐이지만 연화는 어딘지 투정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볼을
부풀렸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저쪽, 비를 부르는 녀석이 있어서 쫓아내고 왔다.”

알 수 없는 말이라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연화는 구태여 파고들어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백호는 허리를 굽혀 우아하게 인사했다.

“부디, 방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겠나?”

“……들어오셔요.”

연화는 짐짓 새침한 태도로 몸을 물렸다. 어차피 허락 따위 필요하지도 않음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지만, 백호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물 한 방울 묻지
않고 뽀송한 그의 옷을 괜히 털어내면서 그는 헛기침을 했다.

“다녀오는 길에 마주쳐서 꺾어왔다.”

백호가 불쑥 내민 것은 꽃 한 송이였다. 생전 보도 듣도 못 한 모양새의 꽃에 연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꽃잎은 일곱 가닥으로 뻗어 은은한 무지개색으로 영롱했다. 수국만큼 커다란 꽃송이는 꽃잎
안에 빼곡히 채워진 흰색의 몽글몽글한 수술로 인해 마치 새벽안개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연화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건…….”

“천화라 불리는 꽃이다. 신령계에서도 천 년에 한 번 피어 몹시 귀한 것이지.”

“세상에.”

“……너와, 닮아서…… 가져다주고 싶었다.”

마지막 말은 쑥스러운 듯 망설이며 새어 나왔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가렸다.


직접적으로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백호였으나, 이렇듯 비유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일은 드물었다. 백호의 뺨이 불그스레했다.

천 년에 한 번 피는 꽃이라, 그렇다면 차라리 꺾지 않고 그대로 살도록 두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싶었지만 연화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 다시 한번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 들어 향기를 맡았다. 깊은 산속처럼 청량하고 고운 향기가 폐


속을 가득 메웠다.

“감사합니다.”
창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비가 조금씩 잦아드는 듯 바람에 묻은 습기도 한층
덜했다. 연화는 작게 웃으며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밝아져 가는 흐린 하늘의 빛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너에게 내게 맞춰 바뀌라고 말하지 않겠다.”

백호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자신이 뱉은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바뀌면 좋겠지만, 물론……. 하지만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

대답할 말이 없어 연화는 그저 웃었다.

백호는 사방신이며, 존재 자체로 세상을 규율하는 자였다. 실상으로 규칙을 깨려 하는


보살과 한 세상을 같이 살기 참으로 힘든 존재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금씩 비껴가는
생각에 힘든 것은 기실 자신이 아닌 백호일 터였다. 연화는 그저 여래의 가피를 받을
뿐이었으나 백호는 사방신, 세상의 규칙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연화를 보며 백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공기 속에 있어서였는지 피부가 서늘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술을 대며 중얼거렸다.

“몸이 차구나.”
백호의 커다란 손이 연화의 허리춤을 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체온은 인간보다
높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얇은 침실용의 저고리와 치마 위로 흘러내렸다.

“춥겠어.”

연화의 허리를 한 번에 감쌀 만큼 커다란 손이 쓸고 내려가다가 얇은 치마 위로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 연화는 꽃을 쥐고 작게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달구었다. 남자의 손이 꽃을 가져가
창문틀 위에 내려놓았다.

백호의 손이 치맛자락을 헤치고 들어왔다. 서늘한 공기 덕분에 다소 식은 연화의 피부 위로


뜨겁고 거친 그의 손이 움직였다. 골반과 다리 옆면을 쓰다듬던 손이 느릿하게 다리 사이로
들어섰다.

깊은 곳, 은밀한 틈을 천천히 달래듯 만지면서 슬쩍 살점을 갈랐다. 잠깐 몸을 빼려고


움찔거리는 그녀를 끌어안고 조금씩 손가락을 세워 예민한 점막 부분을 만지고 긁자 점차
촉촉하게 젖어갔다. 습기에 그의 손가락 끝이 미끄러워져 한층 부드럽고 깊이 살점 안쪽을
매만졌다.

신음성을 애써 삼키는 듯 연화의 목덜미가 울렁였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연화가


백호의 손목을 잡고 만류했다.

“백랑이 옆방에서 자고 있어요.”

연화가 조용히 속삭였다. 백호가 피식 웃었다.

“그 녀석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많이 들었을 소리야.”


“……그런 말씀을.”

“아닌가? 네가 백랑을 잉태하고 있을 때도 나와 침상을 자주 나누었지. 임신의 영향인지


너 역시 몹시 뜨거워서…….”

“백호 님!”

기겁하면서 연화가 그의 입을 막았다. 입 위에 올라온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핥으면서


백호의 눈이 휘어졌다.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그의 손이 연화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그랗고 소담한 가슴이 손


안에 잡혔다. 아기를 낳고서 조금 더 부풀어오른 가슴은 여전히 둥글고 예뻤다.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이었지만 두근거리고 피가 끓는 것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바짝 선 유두를 손톱 끝으로 긁자 연화가 작게 신음하면서 백호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침상까지 갈 이유도 없었다. 백호는 두 손가락을 연화의 몸 안에 깊이 밀어 넣었다. 이제


정사에 익숙해진 연화의 다리 사이는 백호의 손가락 두 개 정도는 무리 없이 받아들였고,
그가 손목을 움직이자 찌걱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처음에 느릿하던 움직임이 다소
빨라졌다.

치마가 거슬리자 백호가 손톱을 세워 찢어냈다. 그대로 연화를 벽에 기대게 하고 두 다리를


모두 들어 올리자 그녀가 허공중에서 허우적대다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찢어진
치맛자락이 백호의 허리를 두른 양다리 너머로 늘어졌다.

“백, 호 님! 여, 여기서?”
“쉿. 백랑이가 옆방에서 듣겠구나.”

습한 호흡이 가슴 위로 다가왔다. 얇은 저고리 위로 유두를 빨고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다가


그가 젖가슴을 한입씩 크게 베어 물며 핥았다. 연화는 최대한 신음을 억누르려 애쓰면서
백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질구와 내벽을 희롱하는 손가락이 셋으로 늘어났다. 백호의 손가락은 굵고 길어


그것만으로도 연화는 간혹 벅찰 때가 있었다. 찔걱이며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밑으로 흘러내렸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친 백호는 강건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벽에 눌린 채 연화는 허덕이면서 손등을 물었다.

음핵을 엄지손톱으로 긁고 내벽을 세 손가락으로 쑤신다. 예민한 점막이 긁히고 약한 곳이


눌려 기어코 아랫배가 움찔 떨리고 애액이 울컥 새어 나왔다. 바르르 떨며 아랫배를
경직시키는 연화의 볼에 입을 맞추고, 백호는 손가락을 빼냈다.

잠깐 비었던 입구에 뜨거운 물건이 맞춰졌다. 연화는 잠깐 숨을 삼켰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백호는 지나치게 커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잠시 질구에 대고 천천히
남근 끄트머리를 돌리던 그가 살점을 가르고 밀고 들어왔다.

“흐……으응……!”

연화가 채 신음을 삼키지 못했다. 쏟아진 애액 덕분에 미끈거리는 내벽으로 거대한 양물의
끝이 박혀 들어왔다. 좁은 골반과 아랫배가 순식간에 꽉 차고 터질 듯한 느낌에 그녀는
허덕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연화가 적응할 수 있도록 백호가 잠시 기다렸다. 쥐어짜는 듯 조여대는 탄력 있는 내벽의
감각에 그 역시 당장 거칠게 허리를 털고 싶었지만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화를
배려해야 했다. 입을 벌리고 붉은 혀를 내민 채 하닥이는 그녀의 입가에 입을 맞추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연화의 두 다리를 다시 허리에 걸치면서 그는 모든 자제심을 다
동원했다.

“백호…… 님. 백호 님…….”

그녀는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고 허벅지 안쪽 근육에 힘을 주었다. 마치 배 내부의 모든


살점들이 전부 백호의 양물에 밀려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남근 모양대로 길이
나버리지 않았을까, 연화의 머릿속에 설핏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윽고 백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배려하려 느리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곧 그는 인내를 잃고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철썩거리며
그녀의 허벅지 깊은 곳과 회음부에 백호의 샅이 부딪쳤다.

“아, 흐응, 흐, 앗……! 아! 아!”

신음을 참으려 애쓰던 것도 소용 없이 결국 연화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올리기 시작했다.


저 아랫배 가장 깊은 곳까지 절구로 빠르고 크게 빻아지는 것 같았다. 다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바짝 힘이 들어가고, 벽에 연화의 땀이 묻어났다.

“백…… 백호 님! 백호……!”

내벽을 꽉 조이며 연화가 높은 비명을 올렸다.


한참이나 지치지 않고 치대던 백호의 허리가 굳으며 멈췄다. 그의 등허리에 근육이 잘게
날을 세워 일어섰다. 자신의 몸 안에 뜨거운 액체가 가득 뿜어져 나와 흩뿌려지는 것을
느끼고 연화 역시 벌벌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았다. 눈앞에 불꽃이 튀고, 근육들이 제멋대로 튕겨


올랐다. 자지러지는 연화를 끌어안고 백호는 한 번 더 허리를 굴려서 완전히 절정을
맞이했다.

“흐, 아응…….”

연화의 사지에서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그녀의 몸을 받아 안으며 들어 올린 백호가


잠시 벽에 몸을 기댔다. 긴 한숨을 쉬며 그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동그란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거라. 물에 빠지고도 쉬지 못했으니.”

그의 품은 포근하고 목소리는 다정했다. 백호의 말대로, 물에 빠져 발버둥을 치느라 몸은


피곤에 절어 있었으나 그와의 다툼 아닌 다툼으로 연화는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녀는
백호의 손을 잡을 기력도 없어 그저 그의 품 안에 고개를 묻었을 뿐이었다.

달콤하고, 안락한 체온이었다.

연화는 그 후로 내리 두 시간 가까이를 잤다. 원래 낮잠을 아예 자지 않는 그녀로서는


색다른 일이었다. 낮잠을 깨운 것은 백호가 아니었다.
“엄마!”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연화는 흠칫 하고 눈을 떴다. 그사이 백랑이가


잠에서 깬 건가, 어머니로서의 본능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상태로도 손을 먼저 내밀게
만들었다.

“백랑아……?”

“엄마, 내가 깨웠어요?”

침상 위로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폴짝 뛰어올라 왔다. 태어난 지는 삼 년밖에 안


되었지만 백호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인간과 결코 같지 않았다. 백랑은 푸른 눈을
빛내면서 어머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혹시 벗고 있나 흠칫해서 연화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으나 몸도 말끔하고 옷도 입혀져


있었다. 뒤에서 커다란 손이 다가와 연화와 백랑을 한꺼번에 감싸 안았다.

“백랑, 잘 주무셨느냐 인사를 해야지.”

백호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랑은 눈을 굴리며 딱딱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또랑또랑한 파란 눈이 자신과 닮아 부담스러워 백호는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백호 님.”

“인사는 중요한 거다.”


“아이, 참.”

백랑은 잠깐 입을 삐죽거리다가 팔짝 뛰었다. 펑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아기 호랑이가 된


소년이 다시 연화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백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이?”

호랑이 상태로는 아직 백랑은 말을 하지 못한다. 아마 전음은 분명히 가능할 텐데, 어린


척을 해서 연화의 손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 못 하는 척하는 것이다. 다른 이의 눈은
속여도 백호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아내의 애정을 나눠가져야 하는 아들을 다소 얄밉게 바라보다가 백호는 연화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뒷목에 코를 묻었다. 어머니의 품을 독차지한 백랑은 만족스럽게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직 여리고 연한 분홍색인 발바닥을 어머니의 가는 팔 위에
올려놓으면서 아기 호랑이가 하품을 했다.

“조금 더 자렴. 아직 낮잠 깰 때가 아니었잖니.”

연화는 부드럽게 아들을 토닥였다.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이라, 잠이 모자랐던 백랑의 숨이


고르게 변하며 잠이 들었다.

백호가 조심스럽게 백랑을 침상가로 옮기고, 연화를 끌어다 다른 쪽 가장자리로 와서


누웠다.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백호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품 안의 연화는 부드러웠고,


신령계의 비는 완전히 그쳤다. 해가 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발견한 백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런…… 저 녀석.”

갑작스러운 말에 연화가 눈을 굴렸다.

“예?”

“아, 너는 보이지 않겠구나.”

백호가 창문 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작은 점 하나가 땅에서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의 그림자 같았다. 하늘 높은 곳까지 닿았을
때 눈부신 빛과 함께 인영이 사라졌다.

“저건…….”

“이 비를 몰고 왔던 청룡이다.”

백호는 못마땅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보는 것을 알았는지 청룡 역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화와 함께 누워 있는 모습을 눈에 담고 청룡이 인상을 우그러뜨리며 혀를 차는
표정 역시 백호는 보았다. 청룡은 입모양으로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야, 진짜 팔불출 다됐구나.’


글쎄,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본인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굳이 그 위험한
단장초를 구해가겠다고 본신의 힘을 끌어와 신령계에 현신하는 바람에 때 아닌 장마까지
들이닥쳤다. 여인을 위해 민폐를 끼치는 놈이 누군데. 하기사 청룡은 주변에 폐 끼치는
일을 그리 꺼려하지 않는 성격이기는 했다.

하늘로 날아가던 청룡의 두 손은 답지 않게도 곱게 모아져 있었다. 두 손 위에 흙더미와


그 위에 다소곳이 선 꽃 한 송이를 발견했던 백호는 청룡이 사라지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쯧쯧, 조심해 가져가라 일렀더니 아예 흙째로 퍼가는군.”

기막혀하며 백호가 혀를 찼다. 무슨 말인지 몰라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청룡은 항상 악취미적인 데가 있는 남자라서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닐 듯했다.

그녀는 대신 포근한 백호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비가 그쳐 해가 나고 있었다.


바람은 산들거렸고, 비가 온 뒤 특유의 습기 찬 풀향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향기로움과
햇빛을 만끽하면서 연화는 백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창가에 놓아둔 천화의 투명한
꽃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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