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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과 불의노래

제2부 왕들의전쟁 -하-

조지 R.R.마틴

오역 오류 수정 & 편집 위대하시며 잘생기고 귀엽고 깜찍하며 카리


스마 넘치고 쎅씨하고 유머가 넘치고 짱멋찌신 후언니님

비주얼 락켄롤 G.O.S & 월드 와이드 정통 인터넷 라디오 음악방송


후언니say

http://cafe.naver.com/whosay

산사

“더 이상 전하를 기다리게 하면 좋을 게 없을걸!”

서두를수록 단추와 매듭을 매만지는 산사의 손이 더욱 심하게 떨렸


다. 본래 입이 거친 산도르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광포하게 굴고
있었다.

‘내가 세르 돈토스와 만난 걸 눈치챈 걸까? 설마…… 아니겠지.’

산사는 머리를 빗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산사에게 돈토스는 유일


한 희망이었다.

‘예쁘게 보여야 해.’

조프리가 특별히 좋아하는 드레스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산사는 마지막으로 옷을 한 번 더 매만지며 가슴 부분을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조였다. 그리고 산도르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화상을 입은
흉측한 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산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다.

“네가 아니라 네 잘난 오빠가 문제지.”

“롭은 반역자예요. 그가 무슨 짓을 했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


어요.”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 산사의 대꾸였다.

‘신들이시여, 무슨 일이든 킹슬레이어와 상관없도록 해주세요.’

만일 롭이 자이메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혔다면, 그 순간 산사의 목


숨은 바람 앞의 촛불만큼이나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산사는 문득 야
위고 얽은 일린 파이네의 냉혹한 얼굴이 떠올랐다.

“훈련을 아주 잘 받았군, 작은 새.”

산도르가 코방귀를 뀌고는 산사를 성의 남쪽에 있는 안뜰로 데리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과녁 주위에 몰려 있다가 산도르와 산사를 보자 옆으


로 비켜섰다. 길레스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침을 하면서도 산사를
흘낏거렸고, 마구간지기들은 괜히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윈 가문의 쌍둥이들은 산사의 시선을 피
하며 짐짓 딴청을 피웠다.

안뜰에는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누런 고양이가 너부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산사는 불길함을 느끼며 고양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돈토스
가 빗자루 말을 타고 와 산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다른 사람들이 눈
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용기를 내.”
마상시합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부터, 그는 왕의 명령에 따라 빗자루
말을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조프리는 화려하게 장식한 석궁을 들고 사람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


다. 그 옆으로 보로스와 메린이 보였다. 그들을 보는 순간 산사는 더
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하.”

산사는 조프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는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일어나. 내가 널 부른 건, 네


오빠가 이번에 저지른 반역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야.”

“전하, 제 오빠가 무슨 짓을 저질렀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전


하께서도 아시잖아요. 간절히 바라옵건대, 제발…….”

“저 년을 일으켜라.”

산도르가 산사의 팔을 잡아 일으키자, 왕이 큰 소리로 란셀을 불렀다.

“세르 란셀, 반역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얘기해 줘라.”

산사는 늘 란셀이 침착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


의 시선에서는 따뜻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반역자 롭은 비열한 마법을 사용해, 라니스포트에서 말을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던 세르 스태퍼드 라니스터를 습격했습니다. 선
량한 사람들 수천 명이 잠이 든 채 학살되었죠. 검을 들어 볼 기회조
차 없이 말입니다. 더군다나 학살이 끝난 후에는 널려 있는 시체 사이
에서 잔치까지 벌였답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산사의 목을 감았다.

“이래도 할말이 없나?”


조프리의 목소리가 뜰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돈토스가 조
프리 주위를 돌며 중얼거렸다.

“전하, 가엾은 소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입다물고 있어, 어릿광대!”

조프리가 갑자기 뒤로 물러서더니 활을 들어 산사의 얼굴을 겨눴다.

“스타크 가문의 사람들은 그들이 키우는 늑대만큼이나 사악해. 나는


네가 키우던 야수가 어떻게 나를 물어뜯었는지 아주 잘 기억하고 있
어.”

“그건 아리아의 니메리아였어요. 레이디는 전하를 해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결국 희생된 건 제 레이디였죠.”

“그건 아니지. 네 늑대를 죽인 사람은 네 아버지야. 난 너의 아버지를


죽였고 말이야. 레이디인지 뭔지, 그 역겨운 늑대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어젯밤엔 네 아버지보다 덩치가 더 큰 사람도 죽였지.
내가 빵장수라도 되는 줄 아는지 멍청한 놈들이 성문으로 몰려와 내
이름을 부르며 빵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더라고. 그래서 아주 간단하
게 문제를 해결해 줬어.”

“그래서 죽였단 얘긴가요?”

산사는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화살을 보자 입이 바짝 말랐다. 머릿속


이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내가 화살로 목을 꿰뚫어 줬어. 아쉽게도 돌을 던지던 여자 하


나는 팔을 맞혔지만 말이야.”

조프리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활을 내려뜨렸다.


“네 목도 꿰뚫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참겠어. 너를
죽이면 자이메 삼촌도 위험해지니까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그냥 넘
어갈 순 없지. 롭, 그 애송이 자식에게 나한테 순순히 굴복하지 않으
면 동생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여 주겠어.”

그러자 돈토스가 양철 갑옷을 덜거덕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멜


론으로 만든 ‘모닝스타’로 무장하고 있었다.

“제가 산사 아가씨를 벌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나의 플로리안.’

산사는 돈토스의 부스럼투성이의 얼굴, 아니 다른 어디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돈토스가 빗자루 말을 타고 산사 주위를 빙빙 돌며 멜
론으로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반역자, 반역자!”

산사는 손으로 몸을 감싸며, 과일이 날아올 때마다 몸을 비틀거렸다.


멜론이 산산조각 나면서 머리에서 끈적끈적한 과즙이 흘러내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어라, 조프리. 마음껏 웃어.’

하지만 조프리는 웃을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로스, 메린!”

메린이 돈토스를 붙잡아 거칠게 집어던졌다. 불그스름한 얼굴의 어


릿광대는 바닥에 큰대자로 뻗었다. 보로스가 산사를 붙잡았다.

“얼굴은 건드리지 마라. 난 예쁜 여자가 좋거든.”

조프리의 차가운 목소리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보로스의 주먹이 배로 날아왔다. 산사는 통증 때문에 숨이 막혔다. 배
를 움켜잡고 몸을 구부리는데 보로스가 한 손으로 산사의 머리채를
낚아채 위로 치켜올리더니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목을 베려나?’

하지만 산사의 예상과는 달리 검은 넓적다리를 향해 날아왔고, 뼈가


부서질 듯한 아픔이 산사를 덮쳤다. 칼등으로 쳤다지만 다리가 댕강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를 악물었지만 터져 나오는 비명과 눈물
은 어쩔 수 없었다.

‘곧 끝날 거야.’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살이 찢어져 흐르는 핏물도, 얼굴


에 범벅이 된 눈물도, 뼛속까지 전해지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
로 구타는 계속되었다.

“이제 저 정도면 충분합니다.”

산도르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조프리는 고개를 저었


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보로스, 옷을 벗겨라.”

보로스가 산사의 보디스를 움켜잡고 양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옷이


찢어지면서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산사는 얼른 드러난 가슴을 두 손
으로 가렸다.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려! 우린 롭이 어떤 상상을 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채찍처럼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


다. 그 사이 산사는 찢어진 옷을 추슬러 가슴 앞으로 대충 움켜잡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픔과 눈물을 삼키느라 숨이 가빠졌다.

“지금 뭐하는 건가, 세르 보로스? 힘없는 여자를 폭행하는 게 기사가


하는 일인가 보지?”

티리온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옆에는 그가 가장 총애


하는 용병과 눈에 화상을 입은 야만인이 서 있었다.

“기사는 자신의 왕을 섬길 뿐입니다.”

보로스가 티리온을 보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메린도 소리 없이


검을 빼어들고 보로스 옆에 가서 섰다. 그러자 티리온의 용병이 비아
냥거렸다.

“검은 신중하게 다뤄야지. 그 훌륭한 흰색 망토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하지만 티리온은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산사에게 바로 다가


왔다.

“누가 이 아이에게 걸칠 것 좀 주지.”

산도르가 망토를 벗어 산사에게 던져 주었다. 산사는 망토를 입고 앞


을 단단히 여몄다. 올이 굵고 성긴 망토였지만, 산사에게는 그 어떤
실크보다 부드럽게 느껴졌다.

“전하, 이 아이는 장차 왕비가 될 몸입니다. 인격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벌을 주고 있었을 뿐이에요.”

조프리는 삼촌의 나무람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덤덤하


게 대답했다.
“무슨 죄목으로요? 이 작은 아가씨가 롭과 함께 전투에 출전하기라
도 했습니까?”

“산사에겐 늑대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럼 전하께선 금붕어의 지혜를 갖고 계신 겁니다.”

그 말에 조프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어떻게 감히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죠! 왕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아에리스 왕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었죠. 그러다 결국 어떻게 됐는


지 왕대비께서 얘기해 주지 않았나 보죠?”

그러자 보로스가 티리온을 노려보며 끼여들었다.

“어느 누구도 킹스가드 앞에서 전하를 협박할 수 없습니다!”

티리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세르 보로스, 난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왕께 권고하는 거네.”

티리온의 시선이 브론과 티메트에게 향했다.

“세르께서 다시 입을 연다면 죽여 버리게. 알았나, 브론?”

보로스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뭐라 항의하려는데, 티리온이 웃


으며 손사래를 쳤다.

“세르 보로스, 이런 것을 바로 협박이라고 하지. 차이를 알겠나?”

“왕대비님께서 이 일을 들으시면 그리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가? 그렇겠지.”
티리온이 조프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뭘 기다리시는 거죠? 어머니를 모시러


사람을 보낼까요?”

왕의 얼굴이 차갑게 굳으며 붉어졌다. 하지만 티리온은 멈추지 않았


다.

“다른 할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귀는 열어 두고 입은 되도록 다


물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하의 통치 기간은 그리 오래 가
지 못할 겁니다. 이유 없이 내리는 가혹한 형벌은 백성들과 아내에게
서 존경과 신뢰와 사랑을 잃는 지름길이죠.”

“어머니께선 사랑보다 두려움이 더욱 나은 통치 방법이라고 하셨어


요. 그리고 산사는 나를 두려워해요.”

티리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산사는 전하를 두려워하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스타니스와 렌


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브론, 티메트, 산사 아가씨를 방으로 데려가
게.”

산사는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브론과 티메트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


을 옮겼다. 그들은 산사를 핸드의 관저로 안내했다. 에다드가 신의 은
총을 잃은 후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산사는 다시 그
계단을 오르는 일이 왠지 내키지 않았다.

하녀들은 산사를 진정시키려는 듯 끊임없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누


군가 옷을 벗기고 얼굴과 머리에 묻은 끈적끈적한 과일즙을 비눗물
로 씻어 주었다.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흘러내릴 때에야, 산사는 뜰
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뻔뻔스런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기사들은 약자를 돕고 여자들을 보호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그런 기사는 아무도 없었어. 오로지 세르
돈토스만이 나를 도와 주려 했어.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사도 아닌데
말이야.’

진짜 기사는 난쟁이 티리온뿐이었다. 산도르도 기사가 아니었다.

‘하긴 하운드는 기사를 싫어하지. 나도 그들이 싫어. 이곳에는 진정한


기사가 없어.’

목욕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갈색 머리의 살찐 마에스터 프렌


켄이 왔다. 그는 산사를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는 붉은 핏자국에 연고
를 발라 준 뒤 꿀을 넣은 포도주를 내밀었다.

“마시고 좀 주무세요. 자고 나면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될 겁니다.”

‘아뇨, 그 일은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없어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


예요.’

그렇지만 산사는 포도주를 받아 마셨고 곧 잠이 들었다.

산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깨어나고 한참


동안 산사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방안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하지
만 일어나려고 움직이는 순간 다리에 통증이 밀려오면서 모든 기억
들이 되살아났고, 산사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주르륵 흘렀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침대 옆에 망토가 있었다. 산사는 망토를 걸치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목걸이를 세 줄씩이나 걸고 있는 구릿
빛 피부의 여자가 기다란 창을 짚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목걸
이는 금과 은, 사람의 귀로 만든 것이었다.

“어디 가려구요?”

“가즈우드에 가서 기도 좀 하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 돈토스를 만나 당장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야 했
다.

“티리온 경께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여기


서 기도를 해도 신들께서는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산사는 고개를 떨구고 순순히 방안으로 되돌아오다가 멈칫했다.

‘이 방이구나! 아리아의 방…….’

그제야 방이 친숙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아리아가 사용하던 물건


은 모두 사라지고 가구들도 완전히 다르게 재배치되어 있었지만, 그
방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하녀가 치즈와 빵을 담은 접시와 물방울이 송이송이 맺힌 물


병을 들고 들어왔다.

“생각 없으니 그냥 갖고 나가요.”

하지만 하녀는 들은 척도 않고 음식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갔다.

산사는 갑자기 목이 말랐다. 움직이면 넓적다리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지만 꾹 참고 걸음을 옮겼다. 물을 연달아 두 컵이나 마시고 있는
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산사는 마음을 졸이며 문을 향해 돌아서서 옷을 매만졌다. 티리온이


들어왔다. 그의 목에는 직책을 나타내는 손 모양의 황금빛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제가 경의 포로인가요?”
“포로는 무슨? 오히려 귀한 손님이지.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좋겠는
데…….”

“좋아요.”

티리온을 바라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굴은 흉측하게 생겼


지만 그에게는 산사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음식과 옷은 마음에 드니?”

산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마음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어떻


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티리온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사실 조프리 왕이 그렇게 화가 난 데에


는 다 이유가 있어. 엿새 전, 네 오빠가 캐스틀리 록 부근의 옥스크로
스라는 마을에 주둔해 있던 스태퍼드 라니스터를 습격해 대승을 거
뒀거든. 오늘 아침에서야 나도 삼촌의 비보를 접했지.”

‘롭 오빠가 당신들을 모두 죽일 거예요.’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산사는 뛸 듯이 기뻤다.

“끔찍한 일이군요. 제 오빠는 비열한 반역자예요.”

티리온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끔찍한 일이지. 네 오빠는 정말 확실하게 일을 해치웠더구나.


우리 진영에 몰래 잠입해 말들의 고삐를 풀어 놓은 후 늑대를 풀었거
든. 자고 있던 기사들은 미친 듯이 날뛰는 말발굽에 짓밟혀 죽었고,
병사들도 느닷없이 들이닥친 적군에 놀라 무기는 다 팽개치고 도망
치기에 바빴지. 스태퍼드 삼촌은 말을 뒤쫓다가 릭카드 경이 던진 창
에 가슴을 맞아 죽었고, 세르 루베르트 브락스, 리몬드 비카리, 크레
이크홀 경, 자스트 경도 모두 죽었지. 그리고 자스트 경의 아들들과
내 조카 마틴 등 50여 명의 기사들이 포로로 잡혀 갔고, 살아남은 이
들은 이번 전쟁에 대해 괴소문을 퍼뜨리고 있어. 북부인들은 신들이
네 오빠와 함께한다고 큰소리치고 있지.”

“그럼 오빠가 마법을 쓴 건가요?”

티리온이 코방귀를 뀌었다.

“마법은 무슨 얼어죽을 마법! 스태퍼드 삼촌이 진영에 보초도 세우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지. 삼촌의 병사들은 아직 훈련도 받지 않은 신병
들과 광부, 농부, 어부, 라니스포트의 얼간이들만 모여 있는 오합지졸
이었어. 그런데도 마음을 너무 푹 놓았던 거지. 불가사의한 건, 네 오
빠가 어떻게 그 진영의 위치를 알아내서 그곳으로 갔느냐는 거야. 그
곳으로 가려면 우리의 영토인 골든투스를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데
말이야.”

티리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설명했다.

“네 오빠는 우리 아버지에게 독버섯 같은 존재지. 내게 조프리 왕이


그런 존재이듯이 말이다. 산사, 말해 봐라. 너는 내 조카에 대해 어떻
게 생각하지?”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해요.”

산사는 앵무새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라니스터 사람에게 진심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정말? 아직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거니?”

“전하를 향한 제 사랑은 전보다 더 커졌어요.”


그 말에 티리온이 소리내어 웃었다.

“이것 참, 누군지 몰라도 거짓말을 잘도 가르쳤군. 하지만 그 사람에


게 고마워해야겠구나. 산사, 너는 아직 어린아이야. 그렇지? 아니, 혹
시 벌써 생리를 시작했니?”

산사는 얼굴을 붉혔다.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


기게 했던 조프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요.”

“잘됐군. 네게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산사, 난 널 조프리와 결혼시


키지 않을 생각이다. 둘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스타크 가문과 라니스
터 가문이 화해하게 되진 않을 테니까 말이야.”

산사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목에 걸린 듯 나오


지 않았다.

“말이 없군. 너도 약혼을 파기하고 싶지, 산사?”

“저는…….”

‘이건 또 무슨 속셈이지?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거야! 사실대로 얘기하


면 벌을 내릴지도 몰라.’

산사는 불룩 튀어나온 난쟁이의 이마와, 강렬한 검은 눈과 매서운 초


록색의 눈, 뻣뻣한 수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 단지 충성을 다하고 싶어요.”

“충성이라……. 라니스터 가문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 하지


만 나도 네 나이 때는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티리온이 엷은 웃음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매일 가즈우드에 간다고 들었는데 무얼 기도하러 가는 거지?”

‘롭의 승리와 조프리의 죽음,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요. 윈


터펠을 위해서도…….’

“전쟁이 곧 끝나기를 기도했어요.”

“그래,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네 오빠와 나의 아버지는 언젠가 반드


시 한판 붙을 거야. 그때는 중재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결국 오빠가 이길 거예요. 오빠는 당신 삼촌과 형을 이겼으니


까 당신 아버지 역시 보란 듯이 물리칠 거예요.’

산사의 얼굴이 펼쳐진 책이라도 되는 듯, 티리온이 너무나 쉽게 산사


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옥스크로스 전투의 승리로 너무 큰 희망을 품진 마라, 산사. 조그만


전투에서 한 번 이기는 것과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
까.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스태퍼드 삼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말이다. 다음에 가즈우드에 가거든 네 오빠가 헛된 꿈을 버리고 어서
빨리 우리에게 항복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라. 그러면 너도 집으
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오늘밤은 여기서 자도 좋아. 스톤크
로우 병사들 중에서 너를 지켜 줄 사람을 몇 불러…….”

“아뇨.”

산사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대답했다. 경비병에게 감시를 받으며 이


곳 핸드의 관저에 갇혀 있으면 돈토스가 구해 주러 올 수 없다는 사실
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럼 블랙이어스족이 더 나은가? 여자가 더 편하다면 셀라를 보내


주지.”

“아뇨, 전 그 야만인들이 무서워요.”


티리온이 이를 내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나도 무섭겠구나. 하지만 그들은 킹스가드라 불리는 독사 같은


교활한 놈들과 망나니 아첨꾼의 무리를 두렵게 하지. 그게 중요한 거
야. 셀라나 티메트와 함께 있으면 어느 누구도 네게 해를 끼치지 못할
거다.”

“아뇨, 괜찮아요. 전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뭔가 둘러댈 말이 필요했다. 그때 산사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거짓말


이 떠올랐다.

“여긴 아버지의 부하들이 살해된 곳이에요. 보는 곳마다, 가는 곳마


다 그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악몽을 꿀 거예요.”

티리온이 산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나도 악몽을 많이 꿨었지. 너는 생각보다 참 영리한 것 같구나. 네


방까지 널 무사히 에스코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니?”

캐틀린

날이 완전히 저문 후에야 그들은 마을의 셉트에 당도했다. 웬델이 횃


불을 밝혀 들고 캐틀린을 안으로 안내했다.

셉트의 일곱 벽면은 심하게 갈라지고 뒤틀려 있었다. 어릴 적 캐틀린


은 셉톤 오스민드에게, 셉트의 벽면이 일곱 개이듯 신도 일곱 가지의
모습을 지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재정 형편이
좋은 도시에서는 셉트에 일곱 개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 앞에 각각 제
단을 쌓아 놓았지만, 이곳 남부의 작은 셉트에는 조야한 목탄 그림 일
곱 점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웬델이 나지막한 문 옆의 횃대에 불
을 붙이고는 캐틀린만 남겨 놓고 밖으로 나갔다.
캐틀린은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수염이 난 성부, 자애로운 미소를 띤
성모, 검과 망치를 든 전사와 대장장이의 신, 자태가 곱고 아름다운
미의 여신, 쭈그렁이지만 지혜로워 보이는 노파 신, 일곱 번째 이방인
의 신. 한데 이방인의 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방랑자. 캐틀린은 그 마지막 신의 그림이
영 마음에 걸렸다. 셉트에 왔지만 역시 마음의 위안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캐틀린은 성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시여, 이 전쟁을 굽어살펴 주세요. 그들은 모두 어머니의 아


들들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제 자식들, 롭과 브랜과 릭
콘도 보호해 주세요. 제가 그들 곁에 있게 도와 주세요.”

왼쪽 눈 부분의 벽이 금이 가 있어서인지, 성모는 우는 것처럼 보였


다.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웬델과 그에 답하는 로바르의 조용한 목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닥칠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그
들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아주 고요한 밤이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밤…….

‘네드, 당신의 신들도 당신의 기도에 응답한 적이 있었나요? 하트트


리 앞에 무릎을 꿇으면 신들은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던가요?’

그림들은 너울거리는 횃불에 비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


다. 도시의 부유한 셉트에 세워진 조각상들은 조각가의 솜씨대로 일
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곳의 목탄화들은 표정이 변화무쌍했
다.

캐틀린은 성부의 모습에서 리버룬에서 서서히 숨을 다해 가는 아버


지를 떠올렸다. 전사의 신은 롭 같기도 하고, 스타니스, 렌리, 로버트
같기도 했으며, 자이메와 존 같기도 했다. 언뜻 아리아처럼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횃불의 불빛을 흔들면서 캐틀린
을 상념에서 깨웠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수많은 얼굴들이 오렌지빛
섬광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에 날려 횃불의 연기가 캐틀린을 덮쳐 왔다. 캐틀린은 연기 때문


에 따가운 눈을 상처 입은 손으로 비비며 다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성모는 꼭 돌아가신 어머니 같았다. 둘째 아들을 낳다가 끝내 세상을
뜬 어머니, 미니사 툴리. 그 후로 아버지는 삶의 일부를 잃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조용하셨지. 그분이 살아 계셨으면 우리 삶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어머니는 자신의 맏딸을 어떻게 키우고 싶어했
을까?’

캐틀린은 미니사 툴리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사로운 미소를 떠올렸


다. 문득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한심했다.

‘나는 집에서 너무 멀리 나와 있어.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은 대체 누군 거야! 딸들은 적들의 손에 있
고, 롭은 더 이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 브랜과 릭콘은 날 몰
인정하고 냉정한 엄마로 여기겠지. 네드가 죽을 때조차 곁에 있어 주
지 못하고…….’

모든 것이 캐틀린을 가운데 놓고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벽이 흔들리


고, 그림들이 아롱거리고, 귀가 윙윙거렸다. 캐틀린은 바보처럼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
어 보았지만, 사실은 네드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음식
의 맛을 잊어버렸다.

‘저들은 네드의 목을 베면서 나 역시 죽인 거나 다름없어.’

뒤에서 횃불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벽에 그려진 성


모가 여동생의 얼굴로 보였다. 하지만 그 눈은 캐틀린이 기억하는 동
생의 눈보다 더 매서워 보였다. 어느새 그것은 리사가 아니라 세르세
이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르세이도 아이들의 어머니지.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누구이든 간
에 말이야. 그 여자도 아기의 태동을 느꼈을 테고, 자신의 고통과 피
로 아이들을 낳았을 테고,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폈겠지. 정
말 그들이 자이메 자식이라면…….’

“세르세이도 당신께 기도를 하나요?”

캐틀린은 문득 성모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당하면서도 냉랭하고


아름다운 세르세이의 모습이 성모와 겹쳤다. 왼쪽 눈 부분이 갈라진
것은 여전했다.

‘세르세이도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울기는 울 테니까…….’

셉톤 오스민드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곱 신은 저마다 신이 지니고 있는 면을 하나씩 형상화한 것입니


다.”

그 말이 맞았다. 주름진 할머니의 신에게도 여신의 아름다움이 있었


고, 성모도 자식이 위험에 빠졌을 때는 전사의 신보다 더 맹렬해졌다.

로버트 왕 일가가 윈터펠에 머무는 동안, 캐틀린은 그가 조프리를 다


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조프리가 자이
메의 씨앗임을 알았다면, 로버트 왕은 당장에 아들과 아내를 죽였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남자에
게서 자식을 낳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지만, 근친상간은 어
느 신도 용서하지 않는 능지처참할 죄악이었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
들은 신들과 셉톤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혔을 테니까. 물론 드래곤의
자손들이라 자부하는 타르가르옌 가문은 형제자매끼리 결혼했다. 하
지만 그건 그들이 신과 인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고대 발리리아
의 후손들이기 때문이었다.

네드는 왕가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존 아린 역


시 그 사실을 캐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나 역시 그랬을 거야. 아니, 그보다 더한 짓
이라도 했을 거야.’

캐틀린은 두 손을 꼭 쥐었다. 브랜을 해치러 온 암살자와 싸우다 베였


던 흉터가 당겼다.

‘세상에, 브랜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 애는 뭔가 봤거나 들었던 게 틀


림없어. 그래서 그 애를 죽이려 했던 거겠지.’

캐틀린은 대장장이의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아들 브랜을 보


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미의 여신 앞으로 가 아리아와 산사에
게 담대함을 주고, 그들의 순결을 지켜 달라고 빌었다. 성부에게는 정
의를 찾을 힘과 지혜를 달라고 빌고, 전사의 신에게는 롭을 강하게 붙
잡아 주고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손
에 등불을 들고 있는 노파 신 앞으로 갔다.

“지혜로운 신이여, 저를 인도해 주세요. 제가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시


고, 제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 앞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스르르 열렸다. 로바르였다.

“부인, 죄송하지만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동이 트기 전에 돌아가야


합니다.”

캐틀린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하고 저렸다. 침


대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고마워요, 세르. 안 그래도 끝내고 갈 참이었어요.”

그들은 나무들이 바다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숲으로 조용히 말


을 몰았다. 신경질적인 말 울음소리와 새벽 공기를 진동시키는 대장
장이들의 금속음이 그들을 안내해 주었다.
병사들과 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장을 한 채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주위로 깃발들도 사방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동트기 전이
라 색깔이나 문장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회색 군대 같군. 회색 사람들이 회색 기를 들고 회색 말을 타고 있는


것 같아.’

그때 렌리가 창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멀리서 그것을 본 캐틀린은 말


에 박차를 가했다. 스톰엔드 성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스타니
스의 진영에서는 불빛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렌리의 초록색 비단 막사는 환하게 타고 있는 촛불의 불빛에 반사되


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마법의 에메랄드빛 성처럼 보였다. 두 명의 레
인보우가드가 막사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브리엔느가 무장하는 왕을 돕고 있었고, 랜딜 탈리와


마티스 로완이 머리를 맞대고 이번 전투의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막사 안은 여러 개의 화로에서 숯이 타고 있어 기분 좋게 따
뜻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렌리 왕.”

캐틀린은 이번뿐이라 생각하며 렌리를 왕으로 존칭했다. 어떻게든


그의 주의를 끌어야 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스타크 부인.”

브리엔느가 렌리의 누빈 튜닉 위로 갑옷을 하나씩 입히고 있었다. 무


성한 여름날의 나뭇잎과 같은 짙은 초록색의 갑옷은 촛불을 받아 더
욱 짙어 보였다. 렌리가 움직일 때마다 갑옷에 박힌 금속 장식들이 빛
을 발했다.

마티스 로완이 캐틀린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투가 임박했습니다. 왜 날이 밝기를 기
다리십니까? 지금 바로 진격을 명령하십시오.”

“비겁하게 승리를 거뒀다는 비웃음은 사고 싶지 않소. 전투는 새벽에


시작하기로 이미 결정했잖소”

“그거야 스타니스 경이 결정한 시간이죠. 그 시간이면 우리가 해를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거
란 걸 염두에 둔 계략입니다.”

랜딜의 지적에 렌리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만 그럴 뿐이오. 세르 로라스가 그들을 치면 혼란에 빠져 우


왕좌왕할 텐데 무슨 상관이오.”

브리엔느가 렌리의 허리에 녹색 가죽 벨트를 두르고 금버클을 채웠


다.

“스타니스 형이 쓰러졌을 때 누가 시신을 욕보이지 않는지나 잘 감독


하시오. 나의 혈육이 머리에 장대를 꽂는 일은 없어야 할 거요.”

“항복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랜딜이 심각하게 물었지만, 마티스가 피식 웃으며 끼여들었다.

“항복이라구요? 스타니스 경은 지난날 메이스 티렐 경이 스톰엔드를


포위했을 때 한가하게 쥐고기나 뜯으며 끝까지 버틴 사람이오.”

렌리가 목 보호대를 하기 위해 턱을 들면서 말했다.

“나도 기억하오. 그 당시 세르 가웬 윈델이 항복하려고 기사 셋을 이


끌고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다 걸렸었지. 스타니스 형은 그들을 투
석기에 달아 날려 버리라고 명령했소. 난 아직도 가웬이 투석기에 매
달렸을 때의 표정을 기억하오. 그래도 한때 우리 부하였는데…….”
마티스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성벽에서 날아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기억합


니다.”

“경의 기억이 맞소. 그때 마에스터 크레센이 우리 사정에 시체라도


먹어야 할 날이 올지 모르니 참으라고 말렸거든. 식량을 날려 버리면
안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오.”

렌리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자, 브리엔느가 벨벳 끈으로 머리를


묶은 후 투구를 씌웠다. 투구는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솜을 넣은 것
이었다. 렌리의 얘기가 계속됐다.

“우리가 시체를 먹지 않도록 위험을 무릅써 준 양파 기사에게 감사할


일이지. 그때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었소. 감옥에서 죽은 세르 가
웬에게는 더더욱. 자기 육신이 다른 사람의 식량이 될지도 모른단 걸
알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캐틀린은 조급해졌다.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이젠 시간이 없었다.

“전하, 제게 약속한 걸 잊으셨나요?”

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영주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전투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만약 바리스탄 셀미가 스타니스


형과 함께 있다면, 그의 목숨은 살려 주고 싶소.”

“킹스랜딩에서 떠난 후 그에 대한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마티스가 반감을 표시했다.

“나는 그 늙은이를 아오. 그에겐 보호할 왕이 필요하지. 하지만 그는


내게 오지 않았고, 스타크 부인의 말로는 롭 경에게도 가지 않았다고
하니, 스타니스말고 가 있을 곳이 어디 있겠소?”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영주들이 절을 하고 물러갔다.

“자, 스타크 부인, 이제 당신 말을 들어볼까요?”

렌리가 그제야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왕의 어깨에는 금실로 짠 망토


가 걸쳐져 있었고, 거기에는 왕관을 쓴 수사슴이 검정색 실로 수놓아
져 있었다.

“선왕 로버트가 윈터펠을 방문했을 때, 내 아들 브랜이 탑 꼭대기에


서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죠. 한데 왕이 떠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라
니스터가 보낸 암살자가 사경을 헤매는 브랜을 죽이기 위해 잠입해
들어왔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더니, 스타니스 경 얘
기를 들으니 이제 좀 감이 잡히더군요. 브랜이 탑에서 떨어진 날, 로
버트 왕은 성안의 기사들을 모두 이끌고 멧돼지 사냥을 나갔죠. 하지
만 세르 자이메만 성안에 남아 있었어요. 왕비와 함께 말입니다.”

렌리가 캐틀린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그럼 부인 아들이 그들의 근친상간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


까?”

“부탁이에요, 내가 스타니스 경을 만나 이야기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진실을 알게 되면 롭은 왕관을 버릴 겁니다. 당신들도 그렇게 한다


면 말입니다.”

캐틀린은 자신의 말이 사실이길 바랐다. 아니,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되게 만들 것이었다. 북부의 영주들이 반대한다 해도, 롭은 어머니의
말을 따르리란 믿음이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이 함께 1백 년 전 사라진 대의회를 요청하는 거예요.
난 윈터펠로 사람을 보내 브랜에게 그날 보았던 것을 이야기할게요.
그럼 라니스터야말로 진정한 우수르페르임을 온 왕국에 알릴 수 있
어요. 그러고 나서 세븐킹덤의 모든 영주들에게 누가 그들을 다스릴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 거죠.”

렌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그럼 한번 말씀해 보시죠. 다이어울프들이 우두머리를 투표로


정하던가요?”

브리엔느가 왕의 장갑과 그의 키를 한자나 높여 줄 금뿔 달린 투구를


가져왔다.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누가 더 강한지 겨뤄 볼 시간입니다.”

렌리가 붉은색과 초록색, 금색이 어우러진 긴 장갑을 손에 끼며 단호


하게 말했다. 캐틀린은 렌리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고 싶었
다.

“성모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그때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막사의 문을 들썩이더니, 뭔가 언


뜻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지고 초록색 막사에
는 렌리의 그림자만이 비쳤다. 야유 섞인 렌리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
림자의 손이 검으로 향하더니 그것을 치켜들었다. 문득 촛불이 하나
꺼지면서 막사 안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상해. 뭔가 잘못되고 있어.’

캐틀린은 여전히 검집에 들어 있는 렌리의 검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


다. 그림자에는 분명 검이…….

“춥구나.”
불안한 듯 희미하게 떨리는 렌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순간 그림자
의 검이 그의 목을 내려쳤다. 목에 두른 보호대는 천 조각처럼 너무나
쉽게 찢겨 나갔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렌리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
왔다.

“저, 전하! 안 돼!”

브리엔느가 렌리의 피를 보고는 겁먹은 소녀처럼 두려움에 떨며 소


리를 질렀다. 렌리는 풀썩 쓰러져 브리엔느의 팔에 안겼다. 초록색 갑
옷과 금색 망토가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촛불들이 하나둘 꺼져 갔
다. 렌리가 뭔가 이야기하려 했지만 피에 숨이 막혀 캑캑거릴 뿐이었
다. 브리엔느가 부축하고 있지 않았으면 그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브리엔느는 왕을 안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고통에 찬 비명만 질러
댔다.

‘그림자였어.’

캐틀린은 뭔가 사악한 기운이 저지른 일임을 알았다. 이건 도대체 인


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분명 렌리의 그림자가 아니었어. 바람이 촛불을 꺼뜨린 것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바람과 함께 들어와 그의 목숨을 앗아간 거야.’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로바르 로이스와 에몬 쿠이가 달려왔지만, 캐


틀린에게는 그 시간이 반나절도 넘은 듯 길게 느껴졌다. 병사 둘도 횃
불을 들고 따라왔다. 그들이 처음 본 것은 브리엔느의 팔에 안겨 쓰러
져 있는 렌리와 그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브리엔느였다. 해바라기
가 새겨진 갑옷을 입은 에몬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요망한 계집! 왕에게서 당장 물러나라!”

로바르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세상에, 브리엔느, 대체 왜?”


자신이 모시던 왕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브리엔느의 무지갯빛 망토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전……. 저는…….”

“죽을 각오는 돼 있겠지? 네 년을 당장 내 손으로 죽여 주겠다.”

에몬이 문가에 세워져 있던 액스를 집어들었다.

“안 돼!”

캐틀린이 가까스로 외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너무 작았고, 때는 이미


늦었다. 에몬이 앞뒤 가릴 생각도 없이 브리엔느를 향해 액스를 휘둘
렀다.

브리엔느는 캐틀린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민첩했다. 자신의 검은


미처 빼내지 못하고 얼른 렌리의 것을 잡아 빼 에몬의 액스를 막아냈
던 것이다. 쨍 소리와 함께 푸른색 불꽃이 튀면서, 브리엔느가 퉁기듯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렌리의 시신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에
몬이 시신에 걸려 넘어졌고, 브리엔느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액스 자
루를 베어냈다. 병사 하나가 등뒤에서 브리엔느의 망토에 횃불을 갖
다 댔다. 하지만 망토는 이미 피를 잔뜩 머금어 불이 붙지 않았다. 브
리엔느가 돌아서면서 휘두르는 검에 병사의 손목과 횃불이 함께 날
아갔다. 손목이 잘린 병사의 비명과 양탄자로 번져 나가는 불길의 소
리가 묘한 화음을 이뤘다.

에몬이 도끼를 버리고 검을 더듬어 찾는 동안, 나머지 병사 하나가 검


을 치켜들고 브리엔느에게 달려들었다. 또 한 번 쨍하는 소리가 귀청
을 울렸다. 그때 뒤에서 에몬이 공격해 들어왔다. 잠시 밀리는 것 같
던 브리엔느가 어느샌가 두 남자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바닥에는 렌
리의 머리통이 피를 흘리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껏 뒤로 물러서 있던 로바르가 마침내 칼자루로 손을 뻗었다. 캐


틀린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로바르, 내 말 좀 들어 봐요. 브리엔느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저 싸움을 말려 줘요. 내말 들어요, 왕을 죽인 건 스타니스예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캐틀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캐틀린은 그것이 사실임을 직감했다.

“맹세해요. 렌리 왕을 죽인 사람은 스타니스예요.”

로바르가 놀란 눈으로 캐틀린을 쳐다보았다.

“스타니스가요? 어떻게요?”

“나도 몰라요. 마법을 쓴 거 같아요. 정확히는 몰라도 어떤 사악한 마


법을 쓴 것 같아요. 그림자가 있었어요, 그림자가.”

흥분한 캐틀린의 목소리에는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맞부딪치는 검


의 날카로운 소리가 캐틀린의 말을 재촉했다.

“검을 든 그림자였어요. 맹세컨대 분명히 내 두 눈으로 봤어요. 모르


겠어요? 저 소녀는 왕을 사랑했어요. 어서, 어서 브리엔느를 도와 줘
요!”

뒤를 돌아보니, 두 번째 병사가 검을 떨어뜨리며 힘없이 쓰러지고 있


었다.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제 곧 성난 병사들이
막사 안으로 들이닥칠 것이었다.

“브리엔느는 결백해요, 로바르. 내 말을 믿으세요. 죽은 남편과 스타


크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이 로바르의 마음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저들을 막겠습니다. 걱정 말고 나가 있으세요.”

그가 돌아서서 막사 밖으로 나갔다.


불길이 막사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에몬이 얇은 모직 옷
만 입은 브리엔느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에게 캐틀린은 안
중에도 없었다. 그 틈을 타 캐틀린은 화로를 집어 그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에몬이 화
로에 맞아 쓰러졌다.

“브리엔느, 얼른 이쪽으로 와.”

브리엔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비단 장막을 찢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어두웠고 새벽 공기가 쌀쌀했다. 막사 반대편에서 병
사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쪽으로. 아니, 서둘거나 뛰어선 안 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느긋하게 걸어.”

브리엔느가 검을 벨트에 집어넣고 캐틀린을 따라 걸어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얼굴을 식혀 주었다. 막사를 태우는 불길이 어둠
속에서 높이 치솟았다. 그들을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들 옆에서 불이라느니, 살인이라느니, 마법이라느니 소리치며 지
나쳐 다닐 뿐이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거나 기도를 하
고 있었다. 한 어린 종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다.

해괴한 소문이 퍼지자, 렌리의 병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밤의 기


운이 약해지고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면서, 아침 안개가 피어올
랐다. 안개 사이로 스톰엔드의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아침의 유령이다.’

언젠가 낸 할멈은 동이 틀 때가 죽은 혼령이 무덤으로 돌아가는 시간


이라고 했었다. 이제 렌리도 로버트, 네드와 마찬가지로 죽은 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난 그분께 결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브리엔느가 아수라장 속을 걸으며 조용히 말했다.

“왕께선 웃고 계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피가 사방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부인께선 뭔가를 보셨죠, 그렇죠?”

“내가 본 건 그림자였어. 처음에는 렌리 경의 그림자라 생각했는데,


그건 그의 형제의 그림자였어.”

“스타니스 경 말인가요?”

캐틀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할 순 없지만, 난 그를 느꼈어.”

애매한 말이었만 브리엔느는 충분히 이해한 듯했다.

“그자를 죽이겠어요. 왕의 검으로 반드시 그자를 죽이겠어요. 맹세하


고, 맹세하고 또 맹세합니다.”

할리스 몰렌과 북부의 영주들이 말에 올라탄 채 캐틀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웬델이 동분서주하며 렌리에 관한 비보를 전하고 있었다. 그
가 캐틀린을 보고 얼른 달려왔다.

“큰일났습니다. 렌리 경이…….”

그가 피를 뒤집어쓴 브리엔느를 보더니 놀라서 말을 멈췄다.

“죽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한 짓은 아니에요.”

그러자 할리스가 입을 열었다.

“전투는…….”

“전투는 없을 거예요.”
캐틀린이 단호하게 말하며 말에 오르자 호위대가 주변으로 정렬했
다. 웬델이 캐틀린의 왼쪽에, 페르윈이 오른쪽에 섰다.

“브리엔느, 말은 충분하니 하나 골라 타고 우리와 함께 가자.”

“제게도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갑옷을…….”

“그것들은 내버려둬. 저들이 우리를 찾으려 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


가야 해. 우리는 둘 다 왕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야.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브리엔느가 순순히 캐틀린의 말을 따랐다. 일행이 모두 말에 오르자


캐틀린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자, 출발! 누구라도 우리 앞길을 막으려 들면 가차없이 베어 버리시


오.”

동이 트면서 세상은 점차 제 색깔을 찾아갔다. 회색의 병사들이 회색


말에 앉아 창을 들고 있던 곳에는 이제 수천 개의 창끝이 차가운 은빛
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수한 깃발들도 붉고 푸른 제 색깔을 찾았다.
스톰엔드와 하이가든의 모든 권력은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렌리의
것이었다.

‘그것들은 이제 스타니스의 손에 들어가겠지? 저들은 아직 그 사실을


부인하겠지만, 바라테온 가문이 아니면 누구에게 돌아가겠어? 스타
니스는 사악한 손놀림 한 번으로 승리를 거머쥐었어.’

“난 정당한 왕입니다. 부인의 아들 역시 여기 있는 내 아우와 마찬가


지로 반역자에 지나지 않아요.”

스타니스는 그렇게 선언했었다. 그러고는 무쇠처럼 굳게 입을 다물


었었다.

캐틀린은 온몸에 한기가 밀려옴을 느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속에서 유난히 높이 솟아올라 눈에 띄는 언


덕이 하나 있었다. ‘퍼스트맨의 주먹’, 와이들링족이 그렇게 부르는
언덕은 존이 보기에도 딱 주먹을 쥔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땅을 박
차고 튀어 오를 것처럼 불쑥 솟은 언덕의 꼭대기에는 주먹 쥔 손의 정
권(正拳)처럼 커다란 바위가 몇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존은 ‘늙은 곰’ 모르몬트와 다른 레인저들을 따라 언덕을 올라갔다.


고스트는 옆에 없었다. 언덕을 오르면서 세 번이나 사라진 고스트를
매번 휘파람을 불어 가며 찾았지만, 시간이 자꾸 지체되자 모르몬트
가 짜증을 냈던 것이다.

“알아서 따라오겠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정상에 닿으려면 서둘러야


하니, 늑대는 나중에 찾도록 해라.”

언덕길은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게다가 위에서 바위가 계속 굴러 떨


어져 온통 바위투성이였다. 바위가 얼마나 높이 쌓였는지 길을 찾아
언덕 주위를 몇 바퀴씩 돌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르몬트는 정상
에 도착하자 그간의 노고를 그새 다 잊은 듯 얼굴이 밝아졌다.

“아주 훌륭한걸! 여기만한 곳은 다시없겠어. 소렌 스몰우드, 여기서


야영을 하며 코린 하프핸드를 기다리도록 하지.”

그가 어깨에 앉은 까마귀를 쫓으며 말에서 내렸다. 까마귀가 시끄럽


게 깍깍거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보는 숲은 보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바위를 높이 쌓아 만든 성벽이 주위를 둘러보던 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것은 ‘퍼스트맨의 주먹’이 여명기에 퍼스트맨의 요새
였다는 사실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오래됐는데도 아직 변함이 없군.”


소렌 스몰우드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까마귀가 그의 머리 위
를 빙빙 돌며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오래됐어, 오래됐어, 오래됐어.”

“조용히 해!”

모르몬트가 까마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존은 그 모습을 보며


로드커맨더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
을 눈치챘다. 그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려면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 정도 높이라면 적이 나타나도 방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소렌이 하얀 이끼가 끼어 있는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말했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고급스런 담비 망토가 바람에 날렸다.

모르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을 들었다. 까마귀가 그의 팔뚝


에 내려와 앉았다.

“맞아, 적당한 장소지.”

“한데 로드커맨더, 물은 어디서 구합니까?”

존은 문득 음식을 준비할 걱정이 앞섰다.

“아까 개울을 건너왔잖나.”

“언덕 아래서 말입니까? 너무 먼 거리입니다. 그리고 너무 위험하고


요.”

존이 이의를 제기하자 소렌이 말참견을 했다.

“꼬마, 그렇게 게을러서 어떻게 하겠나?”


“존, 여기보다 튼튼한 요새는 찾기 힘들 거야. 그러니 멀더라도 그렇
게 지내는 수밖에 없어. 잘 하리라 믿는다.”

모르몬트의 말에 존은 입을 다물었다.

나이트워치의 형제들은 퍼스트맨이 만들어 놓은 튼튼한 성벽 뒤쪽에


캠프를 치기 시작했다. 비 온 뒤 쑥쑥 자라 있는 버섯처럼 검은 텐트
들이 하나씩 쑥쑥 올라왔고, 침낭과 담요가 맨땅을 메워 갔다. 한쪽에
서 집사들이 조랑말들을 긴 줄에 묶어 놓은 후 물과 여물을 먹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레인저 몇이 밤새 뗄 장작을 팼다. 저쪽 구석에서는
빌더들이 불에 잘 타지 않는 말뚝을 둥그렇게 박아 화장실을 마련했
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랑을 파고 말뚝을 전부 박도록 해라.”

모르몬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존은 얼른 로드커맨더의 막사를 치고 말을 돌본 뒤 고스트를 찾아 나


섰다. 언덕을 내려가자 바로 고스트가 나타났다.

존은 휘파람도 불고 소리도 지르면서, 새벽 안개처럼 새하얀 다이어


울프와 함께 숲 속을 거닐었다. 낙엽들이 발 아래에서 기분 좋은 소리
를 냈다.

한껏 기분 좋게 존을 따라오던 고스트가 언덕을 올라 요새에 도착하


자 주춤거렸다. 고스트는 조심스럽게 성벽으로 다가가더니 돌 사이
에 난 틈으로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몹시 싫어하는 냄
새라도 맡은 듯 뒷걸음질을 쳤다.

존은 냉큼 고스트의 목덜미를 잡고 요새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지만,


고스트가 어찌나 심하게 반항을 하는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 동안 고스트는 몸집도 커지고 힘도 세어져 존도 마음대로 할 수 없
을 때가 있었다.
“그럼 가서 사냥을 하든지 맘껏 달리기를 하든지 네 마음대로 해.”

존은 체념하고 고스트를 놔주었다. 고스트가 빨간 눈을 빛내며 존을


빤히 바라보다가 숲 속으로 사라졌다.

‘포스트맨의 주먹’은 대단히 훌륭한 요새였다. 높이 솟아 있어 시야


확보도 유리했고, 언덕길도 동쪽만 다소 완만할 뿐 나머지는 경사가
몹시 져서 적들이 공격해 오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존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곳은 귀신 들린 숲이야. 유령이나 퍼스트맨의 영혼이 떠돌아다닐


지도 모른다구. 한때 여기는 그들의 은신처였잖아.’

존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높직한 바위 위로 올라섰다.

“아니, 유치한 생각은 그만 하자.”

태양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며 산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남


쪽으로 굽이져 흐르는 밀크워터의 수면 위로 금빛 햇살이 쏟아져 반
짝였다. 강 위쪽의 땅은 걷기도 힘들 만큼 울퉁불퉁했고, 언덕 아래로
펼쳐진 울창한 숲은 북서쪽의 높고 험한 벌거숭이 돌산으로 이어졌
다. 위용을 자랑하며 지평선 위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돌산의 줄기
가 푸르죽죽한 하늘 속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만년설로 뒤덮인 뾰족
뾰족한 산봉우리가 어쩐지 황량해 보였다.

요새를 둘러싸고 동남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는


나무들은 수천 수만 가지 색상의 옷을 입고 보초병처럼 우뚝 서 있었
다. 바람이 불어오자, 노랗고 빨갛게 물이 든 수천 개의 나뭇잎들이
부스럭거리며 서로 살을 비벼 댔다. 숲이 잠시 저 깊은 곳에 거센 파
도를 감추고 있는 초록빛의 거대한 바다처럼 보였다.

언덕 아래에서 고스트가 요새 쪽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


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무에 가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
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어. 혹시 적들이 벌써 눈치챈 건가?’

존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태양이 톱니처럼 들쭉날쭉


한 돌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숲을 완전히 뒤덮는 모습을 지
켜보았다.

“존?”

샘의 목소리였다. 존은 숲에서 눈을 떼고 돌아섰다.

“맞구나. 넌 줄 알았어. 그런데 왜 그렇게 서 있어? 괜찮아?”

샘이 어둠 속에서 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존은 얼른 바위에서 뛰


어내렸다.

“괜찮지, 그럼. 샘, 너는 오늘 어땠어? 괜찮았어?”

“응, 아주 좋았어.”

이제야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는 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존은 불


안한 마음을 감추고 애써 밝게 웃었다.

“늙은 곰은 섀도타워에서 오는 코린 하프핸드를 여기서 기다릴 모양


인가 봐.”

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한데 여기서는 왠지 강력한 힘이 느껴져. 퍼스트맨의 요


새여서 그런가 봐. 예전엔 이곳에서 전투도 일어났었겠지?”

“당연히 그랬겠지.”

존은 무심한 척 그렇게 대답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전령조를 대기시켜야 할 거야. 늙은 곰이 전갈을 보낼 생각인 것 같
더라구.”

“모두 보내 버렸으면 좋겠어. 까마귀들은 새장에 갇혀 있는 걸 너무


싫어해. 시끄러워 죽겠어.”

“날 수만 있다면 너도 날아가고 싶을 거 아냐. 같은 이치지, 뭐.”

“날 수만 있다면, 나는 돼지고기 파이를 먹으러 캐슬블랙으로 날아갈


거야.”

샘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꿈에 부풀었다. 존은 피


식 웃으며 샘의 어깨를 툭 치고는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캠프로 돌아
갔다.

모닥불이 하나둘 켜지고, 별들도 새까만 하늘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


냈다. 달빛보다 환한 횃불이 모르몬트의 막사를 밝히고 있었다. 그들
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시끄럽게 울어대는 까마귀들이었다. 존의 이름
을 불러 대며 우는 놈도 있었다.

‘저 녀석들도 뭔가를 느끼고 있는 거야.’

“늙은 곰한테 가 보는 게 좋겠어. 늙은 곰의 까마귀도 지금쯤 배가 고


파 저렇게 시끄럽게 울고 있을 거야.”

모르몬트는 소렌 스몰우드와 레인저 대여섯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왔구나. 가서 따끈하게 데운 포도주 좀 가져다주겠니. 밤이 쌀쌀하


구나.”

“네.”
존은 화로에 불을 지피고는 모르몬트가 가장 좋아하는 적포도주를
주전자에 담아 화로 위에 걸어 두었다. 그런 뒤 모르몬트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향신료와 계피, 벌꿀 등을 준비했다. 그는 늘
몸을 데우려면 펄펄 끓는 뜨거운 음료를 마셔야 하지만 포도주만은
절대로 끓을 때까지 데워서는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 때
문에 존은 포도주를 불에 올려놓을 때마다 주전자를 유심히 지켜봐
야 했다.

포도주를 불에 끓이는 동안, 존은 모르몬트와 레인저들이 나누는 얘


기를 들었다. 자르만 부크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로스트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밀크워터를 건너 강을 따라 올
라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만스 레이더한테 들킬 게 뻔
합니다.”

”’거인의 계단’이 우릴 도와 줄지도 모릅니다. 정확하게 길을 찾기만


한다면 스컬링패스로 가는 방법도 있고요.”

이번에는 말라도르 로케의 목소리였다.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존은 포도주를 여


덟 잔에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늙은 곰이 샘이 그린 지도를 들
여다보고 있다가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더니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
를 까닥했다.

“옥수수, 옥수수, 옥수수.”

모르몬트의 어깨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날아오르며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오틴 위세르는 포도주를 사양하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커맨더, 전 그런 곳에는 정말 가고 싶지 않습니다. 프로스트팽


은 한 여름에도 춥다던데 지금은 얼마나……. 만약 얼음 폭풍이라도
만난다면…….”
드디어 모르몬트가 입을 열었다.

“갈 필요도 없는데 굳이 프로스트팽으로 가자는 게 아니잖나. 눈 덮


인 바위산은 우리보다도 와이들링들이 더 참기 어려울 거야. 그 많은
수를 데리고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그들은 다른 보금자리
를 찾아 곧 내려올 거네. 밀크워터를 따라서 말이야. 그렇다면 우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지. 여기서 공격을 당하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지 못할 거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수는 수천이고, 우리는 코린 하프핸드가


온다고 해도 겨우 3백뿐입니다.”

말라도르가 존에게서 잔을 받아들며 지적했다. 모르몬트가 씁쓸한


듯 입맛을 쩍 다셨다.

“그렇지. 하지만 만에 하나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이곳만한 곳이 없


네. 언덕 사방에 구덩이를 파고 못을 뿌려 놓으면 방어하기도 쉬울 거
야. 요새도 보수 공사를 하면 웬만한 성보다 튼튼할 거고 말이네. 자
르만, 자네는 시력이 좋으니 요새의 경비를 맡게. 부하들을 나무 위에
잠복시키고 요새 주변이나 강가에 누구라도 나타나면 즉시 보고하도
록!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저수지를 파서 물을 저장해 두자구. 나
중에 반드시 물이 부족할 때가 생길 테니까.”

“저희 레인저들은…….”

“코린 하프핸드가 도착할 때까지 강 이쪽으로만 정찰을 돌도록 하게.


요새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상황을 지켜보자구. 이제 더 이상 레인저
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모르몬트가 소렌 스몰우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만스 레이더가 언제 나타날지 안다고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소렌이 못마땅한 듯 불만을 토로했다.

“크래스터한테 와이들링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정보를 얻었네. 그


자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우리한테 거짓말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네.”

“알겠습니다.”

소렌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잔을 비우고는 정중한 태도로 물러났다.

“저녁을 준비할까요?”

존은 사람들이 다 나가자 모르몬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옥수수, 옥수수, 옥수수.”

까마귀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었지만, 모르몬트는 존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스트에 대해 물었다.

“네 늑대는 뭘 하고 있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 덕분에 신선한 고기를 맛볼 수도 있겠군.”

그가 자루에서 옥수수를 한 움큼 꺼내 까마귀에게 주면서 존을 쳐다


보았다.

“레인저들을 멀리 나가지 못하도록 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제가 감히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네 생각을 물어 봤을 뿐이다.”


“레인저들이 요새 안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제 삼촌을 찾기를 바라
겠습니까?”

존은 솔직히 말했다.

“그렇겠지.”

까마귀는 모르몬트의 손바닥에 있는 옥수수 알을 열심히 쪼아먹고


있었다.

“우리 수가 2백이든 2백만이든, 이 땅은 너무 광활해.”

“그래도 수색을 포기하진 않으실 거죠?”

“마에스터 아에몬께서는 네가 영리한 아이라고 하셨다.”

모르몬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옥수수를 다 쪼아먹은 까마귀를 손등


에 앉혀 다시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존은 모르몬트의 엉뚱한 대답이
왠지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다시 입을 여는 모르몬트의 대답
은 존을 실망시켰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2백 명이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2백 명을 찾는 게 더 쉬울 것 같구나.”

까마귀가 계속 시끄럽게 울어댔지만, 늙은 곰은 희끗희끗한 수염 아


래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동했으니, 앞을 못 보는 아에몬


이라 해도 우릴 발견했을 거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에 진을 치고서 프
로스트팽에서도 보이도록 불을 밝혀 놓고 기다리면 되는 거야. 만약
세르 벤젠이 살아 있고, 누구에게 붙잡혀 있지만 않다면 분명 이곳으
로 오겠지. 분명 그럴 거야. 안 그렇나?”

존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말이냐?”

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었어도 우리를 찾아올 거다. 오도르와 제이퍼처럼 말이다. 존, 나


도 불안하다. 몹시 불안해. 하지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야 해.”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면서 점점 더 시끄럽게, 점점 더 날카롭게 울


어댔다. 그 녀석 역시 불안한 모양이었다. 모르몬트가 달래듯 까마귀
의 날개를 쓰다듬어 주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하품을 겨우 손등으
로 가렸다.

“저녁보다는 그저 쉬고 싶구나. 아침이 밝으면 바로 좀 깨워 줘라.”

“네, 로드커맨더. 안녕히 주무십시오.”

존은 빈 잔을 모아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구슬픈


음악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스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진영 한가운
데서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늙은 곰은 어쩐지 몰라도 존은 무척
배가 고팠다. 존은 재빨리 냄새가 나는 쪽으로 갔다.

디웬이 손에 수저를 들고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난 누구보다도 이 숲을 잘 알아. 오늘밤 혼자서 말을 타고 이 숲을


지나갈 거야. 잘 맡아 봐. 냄새가 나지 않아?”

그렌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디웬의 얘기에 푹 빠져 있었지만, 돌로


라우스 에드는 코방귀만 뀔 뿐이었다.
“냄새는 무슨 냄새? 말똥 냄새뿐인걸. 아, 그리고 스튜 냄새도 나는
구나. 대체 어디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여기서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헤이크가 투덜거리며 엉덩이를 탁탁 치더니 존에게 스튜를 부어 주


었다. 스튜라고 해봤자 너무 끓여 흐물흐물해진 쇠고기 몇 점과 당근,
양파가 전부였다.

“디웬, 무슨 냄새가 나는데요?”

그렌이 심각한 얼굴로 디웬에게 물었다. 그러자 디웬이 수저를 쭉 빨


더니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의 피부는 돼지가죽처럼 뻣뻣하고
오래된 나무 뿌리처럼 쪼글쪼글했다.

“나한테는 뭐랄까, 음…… 추위 냄새가 나.”

“역시 돌대가리라니깐. 추위 냄새라는 게 어딨어?”

헤이크가 당장 면박을 주었다.

‘아니, 있어. 그건 죽음의 냄새와도 비슷하지.’

존은 로드커맨더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그 끔찍했던 사건을 떠올렸


다. 갑자기 입맛이 가시고 배고픔도 사라져, 그렌에게 스튜를 넘기고
그곳을 나왔다.

문득 매서운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아침이 되면 온 땅에 서리가 내


리고, 모두 꽁꽁 얼어 버릴 터였다. 주전자에 포도주가 조금 남아 있
다는 생각에, 존은 다시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고 포도주를 데웠다.
그리고 손을 비벼 가며 언 손을 녹였다.

나이트워치의 진영 가장자리로 경비병들이 늘어서 있고, 성벽 위에


는 횃불이 타고 있었으며, 달도 없는 새까만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존은 어두운 숲 쪽에서 언뜻 무슨 소리를 들었다. 늑대 울음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한기가 느껴지면서 외로움이 묻어 있는 소리
였다. 그리고 잠시 후 모닥불 너머로 새빨간 눈동자가 빛을 발하며 번
뜩였다.

“고스트!”

존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사냥을


하느라 종종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어, 이번에도 고스트라고는 생각
지도 못한 터였다.

“돌아왔구나. 사냥이 시원치 않았나 보지? 자, 이리 와.”

하지만 다이어울프는 불가를 맴돌며 킁킁거릴 뿐이었다. 한번은 존


의 냄새를 맡고, 또 한번은 바람의 냄새를 맡는 모습이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어. 고스트는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경고하려는 거야.’

존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고스트는


슬슬 어디론가 움직일 뿐이었다.

“뭐가 있니? 뭔가 냄새를 맡은 거야?”

‘디웬도 추위의 냄새가 난다고 했어.’

다이어울프가 어디론가 달려가다가 멈춰 서서 존을 돌아보았다.

‘나보고 따라오라는 소리구나.’

존은 외투를 걸치고 고스트를 따라 나섰다. 고스트가 지나가자 나무


에 묶여 있던 말들이 앞발을 쳐들며 울어댔다. 존은 말들의 콧잔등을
쓰다듬어 주고는 성벽 가까이로 고스트를 따라갔다. 성벽의 바위 틈
새로 소름 끼치는 바람소리가 났다.

존은 우선 경비 초소로 갔다.

“로드커맨더께 드릴 물을 떠와야 해요.”

“빨리 돌아와야 해.”

그때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경비병은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존이 양동이도 들지 않고 외투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존은 성벽의 갈라진 틈 사이에 꽂힌 횃불을 하나 들고, 쏜살같이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는 고스트의 뒤를 힘겹게 좇았다. 사방이 어두운
데다 경사가 심하고, 바닥까지 울퉁불퉁해 몸을 앞으로 잔뜩 기울이
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야 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발을 헛
디뎌 발목을 삐거나, 심하면 목이 부러질지도 몰랐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존은 고스트를 따라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무 사이사이로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무장한 병사들이 언제 닥칠지


모를 기습에 대비해 숨을 죽이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그
들도 검은 형체로만 보였지만, 횃불이 비치자 언뜻 초록빛이 보였다.
물 흐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데, 고스트는 덤불에 가려 보이
지 않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때문에 하늘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존은 개울물 소리와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언덕을 내려
갔다.

강에 도착하니, 고스트는 이미 도착해서 물을 먹고 있었다.

“고스트! 이제 이리 와.”
하지만 다이어울프는 고개를 들고 불길하고 불안해 보이는 새빨간
눈으로 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강물이 침을 흘리는 것처럼 고스
트의 턱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고스트가 이내 숲 속으로 달려가 버렸
다.

“고스트, 안 돼. 거기 서!”

존이 소리를 질렀지만 고스트는 들은 체도 않고 어둠 속으로 달려들


어갔다. 존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혼자서 다시 돌아가느냐, 아니면
어둠이 삼켜 버린 고스트를 찾아 나서느냐.

화가 났지만 존은 결국 고스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


닥이 울퉁불퉁한데다 미끈거리기까지 해서 발 아래로 횃불을 비추면
서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밖으로 뻗어 나와 있는 굵은 나무뿌리가 금
방이라도 발을 잡아 챌 것만 같았다. 걸으면서 계속 고스트를 소리쳐
불렀지만 휘몰아치는 바람소리에 존의 외침은 힘을 잃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존은 고스트가 사라진 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작정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앞에서 언뜻 하얀
물체가 아른거렸다. 존은 재빨리 숨을 헐떡이며 그 물체를 쫓아갔지
만, 결국에는 덤불과 가시가 덮인 바위 앞에서 길을 잃고 걸음을 멈추
어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완
전한 암흑이었다.

문득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존은 얼른 돌아서서 덤불을 헤치며 소


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쓰러져 있는 나무 밑을 고스
트가 열심히 파헤치고 있었다.

“고스트, 뭘 하는 거야?”

횃불로 비춰 보니 둥그렇게 쌓아 올린 흙무더기가 나타났다.


‘무덤인가? 그런데 뭐가 묻힌 거지?’

크기로 봐서는 사람의 무덤은 아닌 듯했다.

존은 횃불을 옆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무덤을 덮고 있는 흙을


한 움큼 집어 보았다. 흙은 성긴데다 돌멩이나 나무뿌리 같은 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뭐가 묻혔는지 몰라도,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흙을 대충 더 파헤친 후 손을 넣어 보니 두툼한 직물이 만
져졌다. 냄새도 나지 않고 천 안쪽으로 단단한 물체가 만져지는 걸 보
니, 시체는 아닌 듯했다. 온기 같은 것도 없었다. 고스트가 뒤로 물러
서서 조용히 앉아 존을 지켜보고 있었다.

흙을 한참 더 파헤쳐서야 땅속에 묻힌 물건이 윤곽을 드러냈다. 존은


물건의 양끝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다가 휙 잡아 뺐다. 보석이 아닐까
추측도 해보았지만, 중량이나 감촉으로 봐서는 아닌 듯했다.

물건은 검은 천에 싸여 닳아빠진 로프로 칭칭 감겨 있었다. 존은 단검


으로 줄을 끊고는 둘둘 말려 있는 옷을 쫙 펼쳤다. 천 위에서 검은 물
체가 환하게 빛을 냈다. 열서너 자루의 검과 나뭇잎 모양의 창촉, 수
많은 화살촉이었다. 존은 그 중에서 자루가 달리지 않은, 검은 칼날을
집어들었다. 횃불로 날을 쭉 비추니 오렌지빛 반사광이 일었다.

‘드래곤글래스야, 마에스터들이 흑요석이라고 부르는 유리. 고스트


가 어떻게 수천 년 동안 묻혀 있던 이것을 발견해낸 거지?’

드래곤글래스말고도 들소의 뿔로 만들어 청동을 입힌 오래된 전투용


나팔도 있었다. 물건을 싸고 있던 옷감은 감촉이 무척 좋았다.

‘훌륭한 양모야. 두 겹으로 되어 있어 두툼하고 축축하긴 해도 전혀


썩지 않았어.’

물건이 땅에 묻힌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졌다. 천은 색


이 유난히 어두웠다. 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횃불에다가 천을
비춰 보았다.
‘검은색이잖아!’

그건 바로 스온브라더의 검은 망토였다.

브랜

애일벨리가 미켄을 도와 풀무질을 하고 있던 브랜을 찾아 대장간으


로 왔다.

“마에스터께서 탑에서 왕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께서 보낸 전


령조가 도착해 있습니다.”

“롭 형한테서?”

브랜은 마음이 다급해서 호도르를 기다리지도 않고 애일벨리에게 안


겨 탑으로 갔다. 애일벨리는 호도르만큼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세지 않
아, 마에스터의 탑에 다다르자 얼굴이 벌게져서 숨을 헐떡였다. 릭콘
과 왈더 프레이들이 먼저 와 있었다.

루윈이 애일벨리를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왕자님, 전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전해 오셨습


니다. 우선 우리 북부의 군대가 캐스틀리 록 근처의 옥스크로스에서
라니스터의 군대를 박살내고 성도 여러 개 빼앗았답니다. 완전한 대
승이죠. 예전에 마브랜드 가문의 요새였던 애시마크를 점령해 그곳
에서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릭콘이 희망에 들떠 마에스터의 옷을 잡아당겼다.

“롭 형이 집으로 오는 중이에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 전투가 남았거든요.”

“그럼 티윈 경을 패배시킨 건가요?”


브랜의 물음에 루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세르 스태퍼드 라니스터가 지휘한 군대였죠.”

‘세르 스태퍼드 라니스터?’

브랜은 처음 듣는 인물이었다.

“이제 남은 건 티윈 경뿐이군요.”

큰 왈더의 얘기는 브랜의 생각과 일치했다. 릭콘이 폴짝폴짝 뛰며 루


윈의 손을 잡아당겼다.

“형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롭 형한테 전해 주세요. 형은 그


레이윈드를 데려올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도요!”

릭콘은 가끔 아버지의 죽음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아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브랜은 롭이 전해 온 승전보에 마음이 들뜨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


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문득 롭이 군대를 이끌고 윈터펠을 떠나던 날,
오샤가 롭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윈이 왈더 형제들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슬픈 일이지만 대가 없는 승리는 없는 법이죠. 도련님들의 큰삼촌인


세르 스테브론께서 옥스크로스에서 전사하셨답니다. 부상이 그리 심
하지는 않았다는데, 전투가 끝나고 3일 후에 텐트에서 잠든 채로 돌
아가셨답니다.”

그러자 큰 왈더가 어깨를 으쓱했다.

“삼촌은 전쟁을 치르기엔 너무 연로하셨죠. 연세가 쉰여섯쯤 되나,


그랬으니까요. 게다가 항상 지쳤다고 말씀하셨어요.”
“꼭 삼촌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길 기다리다 지쳤다는 얘기처럼
들리는걸. 그럼 이제 에몬 삼촌이 후계자가 된다는 소린가?”

작은 왈더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태도에 큰 왈더가 얼굴을 찡그렸다.

“바보 같은 얘기 마! 장남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 다음 서열이지. 그


다음이 블랙 왈더와 에드윈, 페티르 핌플, 그리고 아에곤과 그의 아들
들 순이라구.”

“리만 삼촌은 너무 늙었어. 마흔 살이 훨씬 넘었다구. 게다가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걸! 형은 리만 삼촌이 영주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
지?”

“아니. 영주는 언젠가 내가 될 거야! 그러니 리만 삼촌이 지금 뭘 하


든 상관없어.”

그들의 대화에 루윈이 혀를 찼다.

“그런 얘기를 하다니, 도련님들은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삼촌


께서 돌아가셨다는데 슬프지도 않습니까?”

“아뇨, 우린 지금 매우 슬퍼요.”

작은 왈더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


다. 브랜은 속이 메스꺼워, 루윈에게 먼저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했
다.

루윈이 벨을 울렸다. 호도르는 지금쯤 마구간에서 한참 바쁠 시간이


었다. 호도르 대신 온 사람은 오샤였다. 오샤가 브랜을 번쩍 안아 계
단을 내려갔다.

“오샤, 북쪽으로 가는 길 알아? 월로 가는 길 말이야. 그리고 그 너머


의 길은?”
브랜은 안뜰을 가로지를 때쯤 오샤에게 물었다.

“물론 잘 알지요. 길은 아주 쉬워요. 아이스드래곤을 찾아 파란별만


좇아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오샤가 어느새 구불구불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거기엔 아직도 거인들이 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아더들이나 숲 속의 아이들까지 말이야.”

“제가 봤던 거인들, 얘기로만 들은 숲 속의 아이들, 그리고 하얀 그림


자들……. 그런데 왜 그걸 물으시는 거죠?”

“오샤, 눈이 셋 달린 까마귀를 본 적 있어?”

오샤가 싱긋 웃었다.

“아뇨. 하지만 있다고 해도 보고 싶진 않은걸요.”

방 앞이었다. 오샤가 문을 발로 차서 연 뒤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에 브랜을 앉혀 주었다. 오샤가 나가고 조젠과 미라가 허락도 없이 들
어왔다.

“전령조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군요?”

브랜의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젠, 당신이 꿈에서 봤다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꿈은 가끔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런 꿈들은 언제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꿈 이야기를 계속해 봐요. 윈터펠에 불길한 일이 닥치고 있다는 그


꿈에 대해서 말이에요.”
조젠이 브랜을 빤히 쳐다보았다.

“왕자님께선 지금 저를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어떤 별난 소리를 해


도 말이에요.”

브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다가 오고 있습니다.”

“바다가 오고 있다?”

“바다가 윈터펠을 휘감는 꿈을 꾸었습니다. 검은 파도가 요란한 소리


를 내며 문과 탑에 부딪혔고, 성은 바닷물이 범람해 온통 물바다가 되
었지요. 익사한 남자들이 둥둥 떠다녔어요. 처음에는 그들이 누구인
지 몰랐지만, 이젠 확실히 압니다. 한 사람은 추수감사절 연회 때 우
리를 안내했던 애일벨리이고, 또 다른 사람 둘은 셉톤과 대장장이였
어요.”

브랜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샤일하고 미켄이? 하지만 바다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요.


게다가 바닷물이 밀려온다 해도 윈터펠의 성벽이 높아서 물에 넘치
지는 않을 거예요.”

“바닷물은 어두운 밤에 성벽을 넘쳐흐를 겁니다. 왕자님, 전 그들이


물에 빠져 죽은 걸 분명히 봤습니다.”

“그럼 그들에게 미리 경고를 해줘야겠군요. 애일벨리와 미켄, 샤일에


게 물을 조심하라고 전해 줘야겠어요.”

초록색 옷을 입은 소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때 미라가 창가로 다가와 브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왕자님의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조젠이 누나의 얘기에 동의하며 브랜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왕자님께서 꾼 꿈을 말씀해 보세요.”

브랜은 두려웠다. 하지만 이미 두 오누이의 말을 믿기로 맹세한 터였


고, 스타크 가문 사람들은 한번 맹세한 건 반드시 지켰다.

“난 당신과는 좀 다른 꿈들을 꿔요. 다람쥐를 잡는 꿈도 꾸고, 까마귀


가 날아와 나보고 날라고 재촉하는 꿈도 꾸고, 하트트리가 날 부르는
꿈도 꾸죠. 하지만 가장 나쁜 꿈은 추락하는 꿈이에요.”

브랜은 몸서리를 치며 안뜰을 내려다보았다.

“전에는 성벽을 오를 때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죠. 지붕 위나 성벽


을 따라 어디든지 다녔어요. 불에 타 무너져 내린 탑 꼭대기에서 까마
귀들에게 먹이도 주고……. 어머니는 내가 떨어질까 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셨는데, 난 결코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잠만 들면 탑에서 떨어지는 꿈을 꿔요.”

미라가 브랜의 어깨를 꼭 안아 주었다.

“그게 다예요?”

브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젠이 단호하게 말했다.

“워그(Warg)입니다.”

브랜은 낯선 용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워그?”

“네, 워그요. 꿈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왕자님을 그렇게 부를 겁니


다. 야수로 변하는 인간, ‘비스틀링( beastling)’을 뜻하지요.”
브랜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누가 날 그렇게 부른다는 얘기죠?”

“왕자님의 친척분들이요. 사실이 밝혀지면, 왕자님을 두려워하고 싫


어하는 사람도 생길 겁니다. 죽이려 드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낸 할멈이 야수로 변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이


야기 속에서 그들은 항상 사악했다. 브랜은 도리질을 쳤다.

“아니요, 난 워그가 아니에요. 그건 꿈일 뿐이라구요!”

“왕자님,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평소 왕자님께서 감고 있는 세


번째 눈이 잠이 들면서 떠지는 겁니다. 왕자님의 영혼은 지금 감춰진
본성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왕자님 안에 있는 그 힘은 강력합니
다.”

“난 그런 거 원치 않아요. 난 기사가 되고 싶다구요.”

“기사는 왕자님의 꿈이지만, 워그는 왕자님 자신이에요. 왕자님께서


원치 않는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죠.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왕자님은 날개 달린 늑대이면서도 결코 날지 못할 겁
니다.”

조젠이 천천히 일어나 브랜이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두 손가락으로 브랜의 이마를 쿡 눌렀다.

“감고 있는 이 세 번째 눈을 뜨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는 눈을 어떻게 뜨라는 거죠?”

“손가락으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눈이죠. 왕자님께서 직접 마음으로


찾으셔야 합니다.”
조젠의 초록색 눈이 브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려우세요?”

“루윈이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니까 두려워할 것 없다고 했어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꿈에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진실이 있습니다.”

조젠의 말은 브랜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브랜은 그후 혼자 방에 있을 때면 세 번째 눈을 떠 보려고 몇 번 시도
를 해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마에 주
름도 잡아 보고 찔러도 보았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
들에게 조젠이 꿈에서 보았다는 일도 경고해 주려고 했지만, 그 얘기
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바다라고요? 전 어릴 적부터 바다에 나가는 게 소원이었죠. 한데 내


가 못 가니까 바다가 저한테 오는 건가 보죠? 신들은 정말 너그러우
시다니까요! 이런 가엾은 대장장이를 위해 그런 수고까지 해주니 말
이에요.”

미켄은 브랜의 얘기를 듣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샤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들은 적당한 때에 절 데려가실 겁니다. 한데 제가 익사할 거란 생


각은 왠지 안 드는데요. 왕자님, 왕자님도 아시다시피 전 화이트나이
프 제방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수영을 꽤 잘한다구요.”

브랜의 경고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애일벨리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조젠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는, 목욕은 물론이고 우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고약한 냄새를 참다못한 주위의 병사들
에게 붙잡혀 목욕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애일벨리가 성이 무너져라
비명을 질러 대자, 때를 밀어 주던 병사들은 조젠 말대로 그를 물에
빠뜨리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애일벨리는 브랜이나 조젠을 보면
매섭게 노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렸다.

애일벨리가 목욕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로드릭이 뚱뚱한


포로 하나를 이끌고 윈터펠로 돌아왔다. 그는 머리가 길고 입술이 두
툼했는데, 애일벨리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났다.

“리크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요. 진짜 이름은 모르겠고, 볼톤 경의 서


자를 섬겼는데 혼우드 부인을 살해하는 데 한몫 했다더군요.”

브랜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헤이헤드가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그날 저녁식사 때에야 브랜은 볼톤의 서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드릭이 혼우드 가문의 영토에서 망측한 짓을 저지르고 있
는 그를 붙잡았다고 했다. 브랜은 ‘망측한 짓’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옷을 입지 않은 채 하는 어떤 행동일 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로드릭은 도망치는 그를 활로 쏘아 쓰러뜨렸지만, 가엾은
혼우드 부인에게는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녀석은 강제로 결혼식
을 올린 후, 부인을 탑 속에 가둬 놓고 제때 식사도 주지 않았다고 했
다. 로드릭이 부인을 구하러 탑으로 갔을 때, 부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손가락을 다 물어뜯긴 상태였다.

“그 괴물은 가시가 많은 매듭으로 부인을 졸라매 놨더군요. 하지만


좋든 싫든 혼우드 부인은 그의 아내였어요. 그 망나니의 협박에 못 이
겨 셉톤과 하트트리 앞에서 맹세도 했고, 바로 그날 밤 증인들 앞에서
잠자리까지 했다더군요. 또 그를 후계자로 명명한 유언장에 서명한
후 도장까지 찍었답니다.”

“칼날 앞에서 한 맹세는 정당치 못합니다.”


루윈이 로드릭의 말에 반박했다. 로드릭은 무척 언짢아 보였다.

“마에스터 말씀이 옳긴 해도, 루제 볼톤 경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영토 문제는 아주 민감한 부분이죠. 참, 우리가 끌고 온 녀석은 머리
통을 날려 버리려다가 롭 왕께서 직접 처단하셔야 할 것 같아 꾹 참고
데려왔습니다. 그 서자의 사악한 죄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니까요.
그런데 그 사이 맨더리 가문의 기사들과 볼톤 가문 기사들이 혼우드
가문의 영토를 놓고 싸움을 벌였더군요. 하지만 난 그들을 멈추게 할
기력이 없었습니다.”

늙은 기사는 돌아앉아 굳은 표정으로 브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제가 멀리 가 있는 동안 왕자님은 뭘 하셨습니까? 병사들에


게 씻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죠? 윈터펠의 병사들이 저 질 나쁜 포로
녀석처럼 냄새나 풍겼으면 좋겠습니까?”

“바다가 윈터펠로 오고 있어요. 조젠이 꿈속에서 똑똑히 보았대요.


애일벨리가 익사한 걸 말이에요.”

루윈이 마에스터의 사슬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쓰게 입맛을 다셨


다.

“세르 로드릭, 그레이워터워치에서 오신 도련님은 꿈으로 미래를 본


다고 믿고 있어요. 왕자님께 꿈은 현실과 다르다고 말씀드렸는
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스톤니 해안에 말썽거리가 생기긴 했습
니다. 롱십을 탄 침략자들이 나타나 마을을 약탈해 갔거든요. 토르헨
의 레오발드 톨하트가 놈들과 협상하라고 조카 벤프레드를 그곳으로
보냈다는데, 놈들은 무장한 병사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달아날 겁니
다.”

“그럼 또 다른 데 가서 집적대겠군요. 전쟁 중만 아니라면 해적들이


감히 우리 북부 지방을 넘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로드릭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브랜을 쳐다보았다.


“왕자님, 리드 가문의 도련님이 또 뭐라고 했습니까?”

“바닷물이 범람해 윈터펠 성이 물에 잠길 거라고 했어요. 애일벨리하


고 미켄, 셉톤 샤일이 익사한 것도 보았대요.”

로드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흠, 그럼 해적들을 물리치러 갈 때는 애일벨리는 데려가지 않겠습니


다. 제가 익사하는 꿈을 꿨다는 얘긴 없었죠?”

브랜은 얼굴이 환해져서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들은 익사하지 않을 거야.’

그날 밤 조젠과 미라가 찾아왔을 때, 브랜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소식


을 전했다. 미라 역시 브랜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조젠은 고개를 저었
다.

“아뇨, 제가 꿈에서 본 것들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미라가 화를 냈다.

“그렇다면 신들이 왜 네게 꿈으로 경고하는 거지?”

“모르겠어.”

조젠이 애처롭게 대답했다.

“조젠, 만일 네가 애일벨리였다면 너는 당장 끝장을 보기 위해 우물


로 뛰어들었을 거야. 하지만 원치 않는 운명이라면 싸워야 해. 너도,
애일벨리도, 왕자님도 싸워야 한다구!”

브랜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내가 말인가요? 어째서죠?”


“제가 괜한 얘기를 했군요.”

미라가 갑자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풀이 죽었다. 브랜은 미라가 무


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조젠, 그 꿈에서 나도 봤나요? 나도 물에 둥둥 떠다니던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사실은…… 오늘 왔던 그 ‘리크’라는 자를 꿈


에서 봤어요. 그가 붉고 긴 칼로 자기 발 앞에 쓰러져 있는 왕자님과
릭콘 왕자님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있었…….”

미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조젠은 거기서 말을 멈춰야


했다.

“내가 지하 감옥에 갈 수만 있다면 그놈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버릴


텐데. 죽은 사람이 브랜 왕자님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어!”

“하지만 경비병들이 누나를 막을 거야. 누나가 아무리 놈을 죽여야


한다고 설명해도 그들은 믿어 주지 않을 거라구.”

“내게도 병사들이 있어요. 애일벨리와 폭시팀, 헤이헤드가 내 호위병


이니까 그들한테 얘기하면 돼요.”

하지만 브랜을 바라보는 조젠의 눈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그래도 소용없을 겁니다, 왕자님.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 봤


어요. 왕자님과 릭콘 왕자님이 돌아가신 북부의 왕들과 그분들의 다
이어울프 석상 앞에 있었다구요.”

‘안 돼. 안 돼…….’

“내가 그레이워터로 도망친다면, 아니면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친다면…….”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그 꿈은 너무나 생생했어요. 생생한 꿈은 결
코 거짓이 아니에요.”

티리온

바리스는 화로 옆에 서서 보들보들한 손을 불에 쬐고 있었다.

“렌리 경은 바로 자신의 진영 한가운데서 잔인하게 살해된 모양입니


다. 칼로 무를 벤 듯 머리가 댕강 잘려 나갔답니다.”

“누가 죽인 거죠?”

세르세이가 물었다.

“그건 아직 확실치가 않습니다. 제가 심어 놓은 첩자들이 다들 신분


이 낮은데다 왕이 죽으면 근거 없는 소문들이 독버섯처럼 마구 퍼지
게 마련이라서 말입니다. 마부로 일하는 자는 렌리 경이 레인보우가
드 중 하나에게 살해됐다고 하고, 하녀는 스타니스 경이 마법의 검을
가지고 몰래 침입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병사들은 어떤 여자가 앙
심을 품고 렌리 경을 살해했다고 하는데,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의견
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렌리 경이 무시했던 어느 하녀라고 하고, 누구
는 렌리 경을 즐겁게 해주려고 들여보냈던 여자라고도 하고, 또 누구
는 캐틀린 스타크 부인의 짓이라고도 하더군요.”

왕대비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바리스 경, 내가 그런 한심한 자들이 지껄이는 소문을 죄다 들으며


시간을 낭비해야겠어요?”

“그런 소문을 알아 오라고 왕대비님께서 친히 비용을 지불하시지 않


으십니까?”

“바리스 경, 내 말을 명심하세요. 난 진실을 알기 위해 돈을 주는 것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의회 의원들이 점점 줄어들 테니까 말이에
요.”

“왕대비님과 핸드님께서 하시는 대로라면, 의회에서 의원을 찾을 수


없는 날이 오는 건 시간 문제일 겁니다.”

바리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리틀핑거가


피식 웃더니 한마디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바리스 경, 왕국은 소수의 의원만으로도


충분히 잘 꾸려질 수 있습니다.”

“허참 페티프 경, 경께선 경의 이름이 핸드님의 블랙리스트에 바로


다음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바리스 경보다 먼저 말입니까? 나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


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는 리틀핑거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바


리스가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우린 월에서 함께 형제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세르세이가 할 수 있다면 다시 거세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바리스를 노려보았다.

“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경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이 무엇이냐에 따라 말이죠.”

리틀핑거가 안 되겠는지 다시 화제를 돌렸다.

“바리스 경, 혹시 렌리 경의 의문사에 모종의 계략이 있었던 건 아닐


까요? 만일 그렇다면 정말 탁월한 계략인데 말입니다.”

“그렇죠. 제가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으니까요.”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티리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프리 왕이 매우 실망하겠군. 렌리 경을 위해 멋진 대못을 아껴 두


고 있었는데 말이오. 아무튼, 누가 죽였든 배후에는 스타니스 경이 있
었다고 보는 게 가장 설득력이 있소. 렌리 경의 죽음으로 가장 득을
본 사람은 바로 그니까.”

바라테온 가문의 두 형제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함께 자멸하기


를 기대했던 터라, 티리온은 렌리의 죽음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문득
레드포크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팔꿈치가 지끈거렸다. 습도가 높
은 날이면 가끔 그런 증상이 있었다.

“렌리 경이 이끌던 군대는 어떻게 됐소?”

티리온은 슬며시 팔꿈치를 손으로 쥐며 바리스를 바라보았다.

“병사들 대부분은 비터브리지에 남아 있답니다. 하지만 렌리 경과 함


께 스톰엔드로 갔던 영주들과 기사들은 대부분은 스타니스 경에게
투항을 했다더군요.”

바리스가 화로에서 떠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리틀핑거가


입을 비죽거렸다.

“플로렌트 가문이 맨 첫번째였겠군. 안 그렇습니까?”

바리스가 선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알레스터 경이 제일 먼저고,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무릎


을 꿇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라면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로군.”

티리온이 정곡을 찔렀다.


“그렇습니다. 로라스 티렐, 랜딜 탈리, 마티스 로완은 투항하지 않았
고, 세르 코트나이 펜로즈가 아직 렌리 경의 이름으로 스톰엔드를 지
켜내고 있습니다. 세르 코트나이는 군주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지
시체를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성문을 열지 않겠다고 버틴다는데, 희
한하게도 렌리 경의 시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답니다. 스타니
스 경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기사들은 세르 로라스를 따라 하이가든
으로 돌아갔습니다. 풍문에 따르면, 세르 로라스가 렌리의 시체를 보
고 격분한 나머지 레인보우가드 셋을 그 자리에서 베어 버렸다고 합
니다. 그 중 둘이 에몬 쿠이와 로바르 로이스라고 합니다.”

‘좀 더 죽였으면 좋았을텐데 유감이군.!’

티리온이 생각했다. 바리스의 얘기가 계속 이어졌다.

“세르 로라스는 비터브리지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스톰엔드로 가지


않은 많은 병사들과 그의 여동생, 그러니까 렌리 경의 부인이 그곳에
있거든요. 병사들이 어떻게 나올지 그게 자못 궁금합니다. 그들 대다
수가 스톰엔드에서 스타니스 경에게 무릎을 꿇은 영주들 휘하에 있
던 병사들이거든요.”

티리온은 순간 눈앞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기회일 수도 있겠군. 여러분, 세르 로라스만 우리편으로


끌어들이면, 메이스 티렐과 하이가든의 군대도 곧 우리 진영으로 몰
려들 겁니다. 당장은 스타니스 경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해도, 그들
은 곧 그를 싫어하게 될 겁니다. 그를 섬길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렌
리 경 휘하로 들어가지도 않았겠지요.”

“그렇다고 스타니스보다 우리를 더 좋아하겠어?”

세르세이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물론 아니지. 하지만 우리가 발 빠르게 행동한다면 그들이 조프리


왕을 선택할 충분한 동기는 제시할 수 있어. 그들은 렌리 경을 좋아해
자진해서 그의 휘하로 들어간 사람들이야. 렌리 경이 아니라면 그들
에겐 스타니스나 조프리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구.”

“어떤 동기를 제시하겠다는 거지?”

세르세이의 질문에 리틀핑거가 얼른 답했다.

“황금이죠.”

그러자 바리스가 혀를 찼다.

“페티르 경, 그런 콧대 높은 영주들과 고상한 기사들을 시장통에서


파는 병아리들처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리스 경은 최근에 시장에 가본 적이 없군요? 요즘은 병아리보다


영주들을 사는 게 훨씬 더 쉽습니다. 물론 영주들이 병아리보다 더 시
끄럽긴 하지만요. 그들에게 동전이나 툭 던져 주면 기분 나빠하겠지
만, 선물, 그러니까 명예나 영토나 성 같은 선물을 주면 절대 사양하
지 않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티리온이 이의를 제기했다.

“소영주들은 그런 걸로 매수할 수도 있겠지만 티렐 가문은 아니오.”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핸드님의 말씀대로 세르 로라스만 끌어들


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겁니다. 메이스 티렐 경은 로라스 위로 아
들을 둘이나 더 두고 있지만 막내아들을 가장 편애하죠. 세르 로라스
만 얻는다면 티렐 가문은 우리와 손을 잡을 겁니다.”

티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렌리 경한테 한 수 배울 게 있더군요. 그의 방법대로 하면 우리도 티


렐 가문과 더욱 확고히 얽힐 겁니다.”

티리온의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한 사람은 바리스였다.


“조프리 왕을 마가에리 티렐과 결혼시키자는 얘기입니까?”

“그렇지요.”

티리온의 기억으로 마가에리는 열대여섯 정도였다. 조프리보다 두세


살 더 많았지만, 나이 차이는 그다지 문제될 게 없었다.

세르세이가 당장 반박하고 나섰다.

“조프리는 산사와 약혼한 사이야.”

그러자 리틀핑거가 나섰다.

“왕대비님, 약혼은 파기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산사는 반역자의 딸


이 아닙니까? 왕께선 티렐 가문이 스타크 가문보다 훨씬 부유하고,
마가에리가 산사보다 더 아름답고……, 게다가 잠자리도 할 수 있다
는 걸 아시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티리온은 다시 한 번 리틀핑거의 수완에 감탄했다.

“페티르 경 얘기가 맞아. 조프리는 분명 좋아할 거야.”

“아니, 내 아들은 그런 걸 좋아하기에는 아직 어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누나, 그 애는 벌써 열세 살이야. 내가 결혼했


을 때와 같은 나이라구.”

“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우리 가문을 부끄럽게 했어. 조프리는 너와


달라.”

“나하고 달라서 세르 보로스를 시켜 산사 옷을 찢었을까?”

티리온의 얄미운 대꾸에 세르세이가 발끈했다.

“그때는 화가 나서 그랬던 것뿐이야!”


“조프리는 며칠 전에 수프를 쏟은 하인한테도 화를 냈지. 하지만 그
소년을 벌거벗기지는 않았다구.”

“그건 수프를 엎은 거하곤 차원이 다르지.”

‘그렇지. 여자냐 아니냐의 문제니까.’

산사의 사건 이후, 티리온은 바리스와 함께 조프리를 차타야의 집으


로 은밀히 데리고 가는 문제에 대해 의논했었다. 여자를 경험하면 부
드럽게 다루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
다. 어쩌면 조프리는 삼촌의 배려에 깊이 감사할지도 몰랐다. 조프리
와의 관계가 좋아지면, 티리온은 지금보다 훨씬 국정을 돌보기가 수
월해질 것이었다. 물론 그 모든 일은 비밀리에 추진되어야 했다. 하지
만 거기에는 ‘산도르 클레가네’라는 커다란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그
를 조프리에게서 떼어 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리스 경, 산도르는 항상 조프리 왕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질 않


소.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잠을 자게 마련이고,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갈보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오.”

그러자 바리스가 티리온의 마음을 바로 읽고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하운드 역시 그런 짓을 모두 다 합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가 언제 그런 일을 하냐는 거요.”

바리스가 티리온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지금 경은 어떻게든 산도르가 조프리 왕을 호위하지 않는 시간을 찾


아내 그를 모함하려는 것 같습니다.”

“바리스 경, 경은 날 잘 알지 않소. 나는 왕에게 좀더 잘 보이고 싶을


뿐이오.”
결국 바리스는 그 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했고, 둘
은 다음에 다시 머리를 맞대기로 하고 헤어졌었다.

“물론 누나가 나보다 조프리에 대해 더 잘 알겠지. 하지만 티렐 가문


과 정혼하는 건 고려해 볼 만한 일이야. 그것만이 조프리가 첫날밤을
지낼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몰라.”

리틀핑거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산사는 조프리 왕에게 육체 외에는 줄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


다운 몸이라고 해도 별 이득이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마가에리 티렐
은 5만의 병력과 하이가든의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바리스가 세르세이의 팔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왕대비님께서는 어머니로서 아들의 행복을 바라시겠죠. 우리도 왕


께서 산사를 사랑한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한 나라를 책임진 왕이
라면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결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르세이가 바리스의 손에서 슬쩍 팔을 뺐다.

“경들이 여자였다면 그렇게 몰인정한 말은 하지 못할 거예요. 어디


한번 좋을 대로 해보세요. 하지만 조프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렌리와
결혼했던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을걸요. 절대 동의
하지 않을 거예요.”

티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나, 조프리 왕은 3년 후 성인이 되어야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그 전까지는 섭정왕대비인 누나와 섭정핸드인 나의 결정에 따라야
해. 마가에리가 과부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야.”
안 되겠는지 세르세이가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조프리한테는 네가 말해. 아무리 우리 결정이 그렇다고 해


도, 조프리가 싫다고 하면 일은 수포로 돌아갈걸.”

티리온은 그 정도에서 만족했다.

“동의해 줘서 고마워. 자, 그럼 이제 우리 중 누가 비터브리지에 가는


지에 대해 의논해야겠군. 세르 로라스가 이성을 되찾기 전에 제안을
해야 효과가 있을 테니까 서둘러야 해.”

“설마 의원 중에서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왕대비가 티리온을 보내려는 심산을 슬쩍 내비쳤다.

“세르 로라스가 브론이나 샤가를 잘 대접해 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서 말이야. 티렐 가문이 자존심이 보통 센 게 아니잖아.”

티리온은 교묘하게 왕대비의 그물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제이슬린 바이워터를 보내. 그 사람은 그래도 세르잖아.”

티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엔 우리의 뜻을 전하고 답변을 듣고 오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왕과 의회를 대신해서 티렐 경을 설득시키고,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재빨리 해결할 수 있는 특사여야
한다구.”

순간 세르세이의 눈빛이 와일드파이어처럼 활활 타올랐다.

“핸드는 왕을 대신하는 자리잖아. 티리온, 네가 간다면 조프리가 간


것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낼 거야. 너만한 적임자가 어딨겠니? 넌 자이
메가 검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화술에 능하잖아.”
‘나를 이 도시 밖으로 그렇게 내보내고 싶어?’

절대 세르세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날 그렇게 과대평가해 주다니, 고마워. 하지만 결혼을 주선하는 데


에는 삼촌보다는 엄마가 더 좋을 것 같은데? 게다가 누나에겐 누구와
도 쉽게 친해지는 재능이 있잖아.”

세르세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조프리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해.”

그때 갑자기 리틀핑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두 분 모두 왕께는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죠. 그러니 제가 대신 가겠


습니다.”

“페티르 경이요?”

티리온은 그가 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의혹이 일었다.

“저는 의회 의원입니다. 하지만 왕족은 아니니까 인질로 잡아 놔도


별 이득이 안 될 거란 사실을 그들도 잘 알 겁니다. 그리고 세르 로라
스가 킹스랜딩에 왔을 때 대접을 잘해 줬으니 박대하진 않겠죠. 메이
스 티렐 경도 특별히 절 미워할 이유가 없구요. 제 입으로 말하긴 뭣
하지만, 티리온 경만큼은 못해도 저 역시 협상에는 서툰 편이 아닙니
다.”

‘선수를 치는군.’

티리온은 리틀핑거를 신뢰할 수 없었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리틀핑거가 아니면 그
가 가야 했다. 만일 지금 킹스랜딩을 떠난다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페티르 경, 저들과 우리는 적대 관계에 있어요. 게다가 스타니스 경
도 주인을 잃고 길을 헤매는 동생의 양들을 모으기 위해 벌써 양치기
를 보냈을 거고.”

“양치기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죠. 골칫거리는 항상 양이죠. 하지만


호위병은 필요할 것 같군요.”

당연한 요구였다. 티리온은 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시티워치를 1백 명 붙여 드리지요.”

하지만 리틀핑거는 고개를 저었다.

“5백 명 주십시오.”

“3백 명으로 하죠.”

“좋습니다. 그리고 기사 스무 명을 종자를 하나씩 딸려 붙여 주십시


오. 기사도 없이 가면 티렐 경은 분명 절 우습게 볼 겁니다.”

옳은 말이었다.

“그러죠.”

“그리고 화해의 뜻으로 호라스와 호버 쌍둥이를 레드윈 경한테 돌려


보내죠. 팍스터 레드윈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메이스 경
의 오랜 친구이며 아보르의 영주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배신자이기도 하죠. 만일 우리가 그 쌍둥이를 인질로 잡고


있지 않았다면 팍스터 레드윈은 벌써 렌리한테 가서 붙었을 거예요.”

왕대비가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왕대비님, 렌리 경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스타니스는 그가 스톰엔드


를 공격하는 동안 팍스터 경이 갤리선들을 이끌고 바다에 운집해 있
던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쌍둥이를 데려가면 얼씨구
나 하고 우리를 반겨 줄지도 모르죠.”

리틀핑거의 설득에도 세르세이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병력과 선박이지 그런 환영이 아니에요. 쌍둥이를


붙잡아 놓는 것이 그것들을 손안에 넣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티리온은 두 사람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해결책을 냈다.

“그럼 세르 호버만 아보르로 데려가고 호라스는 여기에 잡아 두지.


그러면 팍스터 경도 우리의 뜻을 충분히 알아차릴 거야.”

그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됐다. 리틀핑거가 또 다른 문제를 제안했다.

“말도 필요합니다, 강하고 빠른 것들로요. 한창 전쟁 중이라 중간에


새 말로 갈아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티렐 경에게 선물로 줄 황
금도 필요하고요.”

티리온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요. 도시가 함락될 경우엔 어차피 전부 스타니스


의 손에 들어갈 테니까.”

“메이스 경이 제 권한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위임장도 써 주시죠.


이번 일에 관한 한 모든 권한을 제게 준다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그리
고 조프리 왕과 다른 의원들의 서명도 필요합니다.”

티리온은 불편한 듯 자세를 바꿨다.

“좋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노파심으로 말하지만 가는 길이 정말


위험할 겁니다.”

리틀핑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 뜨기 전에 출발하겠습니다. 돌아오면 왕께서 저의 노고를 충분히
치하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리스가 싱긋 웃었다.

“조프리 왕은 너그러운 분입니다. 경께서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


니다.”

세르세이는 더욱 직설적이었다.

“페티르 경, 원하는 걸 얘기해 보세요.”

리틀핑거가 티리온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좀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지요.”

그는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마치 갈보집에 갈 때처럼 덤덤하게


자리를 떠났다.

티리온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안개가 짙어 안뜰 너머로는 몇몇 희미


한 불빛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행하기에 좋은 날은 아냐.’

문득 리틀핑거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문서를 작성해야겠군. 바리스 경, 양피지와 깃펜을 가져오라고


하시오. 그리고 누가 가서 왕을 깨워야 할 것 같은데…….”

회의가 끝났을 때도 밖은 여전히 뿌옇게 흐렸다. 바리스는 부드러운


슬리퍼를 끌며 서둘러 방을 나섰지만, 티리온과 세르세이는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사슬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프레스톤이 다람쥐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은빛 외투를 어깨에 걸
쳐 주는 동안 세르세이가 물었다.

“점점 길어지고 있지. 세르 코트나이 펜로즈가 강직한 사람인 걸 신


께 감사해야 할 거야. 스톰엔드를 함락하지 못하는 한 스타니스는 절
대로 북진하지 않을 테니까.”

“티리온, 내가 너에 대해 잘못 판단했던 것 같아.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바보가 아니었어. 사실, 이제야 네가 얼마나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지 깨달았어. 정말 고마워. 내가 널 심하게 대했던 걸 용서
해 주겠니?”

티리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용서라고? 아니, 누나는 용서받아야 할 행동을 한 적이 없어.”

“지금만 그렇다는 거겠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세르세이가 몸을 숙여 티리온


의 이마에 빠르고 부드럽게 키스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티리온은 너
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나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티리온은 세르세이가 사라질 때까지 넋이 나가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브론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달콤했습니까?”

“이건 정말…… 뜻밖의 행동이야.”

세르세이는 요즘 들어 행동이 많이 변하고 있었다. 티리온은 그것이


불안했다.
“누나가 내게 마지막으로 키스해 줬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 여섯 살
인가 일곱 살 때였어. 그것도 자이메 형이 시켜서 했던 거지만.”

“왕대비님이 드디어 경의 매력을 알게 되었나 보죠?”

“아니. 누나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 브론, 아무래도 자네가 좀 알아


봐 줘야겠어.”

테온

테온은 손등으로 뺨에 묻은 침을 닦았다.

“롭이 네 녀석을 죽일 거야, 이 더러운 인간아! 그리고 변절한 네 놈


심장을 늑대 먹이로 던져 주겠지.”

벤프레드 톨하트가 소리를 지르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때 아에론 댐


페어가 칼로 치즈를 잘라내듯 차갑게 말했다.

“테온, 이제 저 녀석을 죽일 때다.”

“아뇨, 죽이기 전에 먼저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벤프레드는 스티그와 워랙 사이에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었다.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 전에, 네 놈이 롭의 부하들에게 목 졸려 죽


을 거다. 이 비겁자! 변절자!”

그러자 아에론이 차가운 시선으로 테온을 쳐다보았다.

“저 놈이 네게 욕설을 퍼붓는 건 우리 모두를, 그리고 드라운드 가드


를 욕하는 거다. 그러니 어서 저 녀석을 죽여라.”

“아버지께서 제게 통솔권을 주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삼촌.”


“그리고 네게 조언을 해주라고 나를 보내셨다.”

‘나를 감시하라고도 하셨겠죠.’

테온은 사사건건 삼촌과 실랑이를 벌일 수 없었다. 통솔권이야 그에


게 있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어린 왕자보다는 드라운드 가드의 존재
를 더 믿었고, 아에론 댐페어를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벤프레드, 후회할 거다. 머리가 댕강 잘려 나가고 까마귀들한테 눈


알을 파 먹혀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벤프레드가 격분해서 뭐라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말 대신 피만 나올 뿐이었다.

‘벤프레드, 넌 방정맞은 주둥아리 때문에 죽게 되는 거야.’

테온은 씁쓸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스티그, 워랙, 저놈을 조용히 시켜.”

그들은 벤프레드를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워랙이 벤프레드의 벨트


에서 토끼가죽을 벗겨 그의 목구멍에 쑤셔 넣는 동안, 스티그가 도끼
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아에론이 두 병사를 제지했다.

“잠깐, 저놈은 신의 제물로 바쳐야 해. 옛날 방식대로 말이야.”

‘죽기는 매한가진데, 이래 죽든 저래 죽든 무슨 상관이라고…….’

테온은 못마땅했지만 삼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데려가라.”

“테온, 넌 이곳의 통치자야.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감사의


제물을 바쳐야 해.”
테온은 그 말이 너무나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문제는 성직자인 삼촌께 일임하겠어요. 하지만 전쟁에 관한 한은


제게 맡기세요.”

그러고는 한 손을 들어 스티그와 워랙에게 포로를 끌고 가게 했다. 아


에론이 책망하는 듯한 눈길로 조카를 쳐다보더니 자갈이 깔린 스톤
니 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옛 관습대로 벤프레드를 물에 빠
뜨릴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더 친절을 베푸는 것일지도 몰라.’

테온은 해변을 등지고 천천히 걸어갔다. 스티그의 검술이야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벤프레드는 덩치가 산만해서 목도 수퇘지처럼 두꺼
웠던 것이다.

‘그래서 참 많이도 놀렸었는데…….’

그건 순전히 어떻게 해야 벤프레드를 화나게 할 수 있나 알아보기 위


해서였다.

테온은 잠시 옛 기억에 잠겼다. 3년쯤 전이었던가, 네드는 헬만 톨하


트를 만나기 위해 토르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테온도 네드를
따라와 벤프레드와 2주일을 함께 보냈었다.

‘그걸 결투라고 할 수 있을까?’

테온은 그와 결투를 벌였고, 결국에는 벤프레드가 거친 숨소리를 내


쉬며 기뻐하는 모습을 봐야 했었다.

테온은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옛 기억을 애써 지우며 돌무더기


를 올랐다. 아래쪽으로 죽어 너부러진 사람들과 쓰러져 신음하는 말
들이 내려다보였다. 말들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우르젠과 블랙 로렌이 상처가 심한 말들을 죽이는 동안, 티모르와 그
의 형제들은 다치지 않은 말들을 한데 모았고, 나머지 병사들은 시체
들 사이에서 괜찮은 물건을 찾고 있었다. 게빈 하로우가 반지를 끼고
있는 한 남자의 손가락을 톱으로 자르고 있었다. 테온도 자신이 죽인
사람에게서도 쓸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시체를 뒤지다가 멈
칫했다.

‘에다드 스타크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그건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테온은 자신이 아직도 에다드의 그림자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에다드 스타크는 썩어 가고 있어! 이젠 나를 어찌할 수 없다구.’

‘고래수염’이라 불리는 로드스포트의 영주 보틀리는 세 아들이 약탈


해 온 전리품 더미 옆에 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아들
중 하나가 토드릭이라는 뚱보와 맞붙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뚱보
는 피가 약간 묻은 흰색 여우털가죽 망토를 걸치고, 한 손에 호른을
쥐고 다른 손에는 도끼를 든 시체 사이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주정뱅이.’

테온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언아일랜드의 늙은 병사들은 용감무쌍한


전사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술에 취한 망나니들일 뿐이었다.

“웩스, 가서 활과 화살통을 가져와.”

소년은 바로 그것들을 들고 달려왔다. 토드릭이 보틀리의 아들을 때


려눕힌 뒤 그의 얼굴에 맥주를 붓는 동안, 테온은 화살을 겨눴다. 보
틀리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테온
은 누구든 움직이면 쏘아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그들에게 다
가갔다. 그때였다. 토드릭이 달아나려고 몸을 비틀었고, 그 순간 화살
이 그의 배를 관통했다.
헉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표정이 심하게 경직되었다. 테온은 활을
내리며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내뱉었다.

“내가 말했듯이 술이나 전리품 때문에 싸우는 건 용납 못 해!”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토드릭이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


다.

“보틀리 경, 저놈을 죽여 버리시죠!”

보틀리와 그의 아들들의 동작은 재빨랐다. 토드릭의 머리가 저 멀리


나가떨어지자, 보틀리의 아들들은 순식간에 그에게서 망토와 반지와
무기들을 벗겨냈다.

‘앞으로 내 말이 먹혀들 테지.’

테온은 분명 발론에게서 통솔권을 부여받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그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테온은 아무것
도 모르는 나약한 소년에 불과했다.

“또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 있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좋아.”

테온은 발 앞에 있는 톨하트 가문의 깃발을 걷어찼다. 어린 종자의 손


에 단단히 들려 있던 깃발 끝에는 토끼가죽이 묶여 있었다.

‘왜 토끼가죽일까?’

누군가에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


는 웩스에게 다시 활을 던져 준 후 해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위스퍼링우드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그렇게 우쭐했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착잡한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벤프레드 톨하트, 이 유세 덩어리, 멍청이! 어떻게 정찰병도 없이 올
수가 있지!’

테온의 군대가 덮쳤을 때, 벤프레드가 이끄는 군대는 노래까지 흥얼


거리며 행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시덤불 아래를 지나가는
순간, 노랫소리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로 인해 비명으로 바뀌었다.
가시덤불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테온의 군대는 우왕좌왕하는 병사
들을 단 몇 분 만에 박살내 버렸다.

심문을 위해 우두머리는 생포해 오라는 명령에 따라 벤프레드가 앞


으로 끌려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테온은 스톤니의 해적을 무찌르
러 온 군대의 대장이 벤프레드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테온이 시비치 호(號)로 되돌아갔을 때, 벤프레드의 시체는 밀려드는


파도에 연신 부딪히고 있었다. 자갈 깔린 해변을 따라 롱십들이 죽 늘
어서 있었다.

스톤니의 어촌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토르헨으로 소문을


퍼뜨릴 도망자들을 제외하고 그곳의 남자들은 모두 참수를 당했다.
여자들은 젊고 아름다우면 뱃사람의 아내가 될 것을 강요받았고, 늙
거나 못생겼으면 강간을 당한 뒤 노예가 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테온은 춥고 어두운 새벽에 몰래 해안가로 들어와 잠들어 있는 마을


을 습격했었다. 그런 식으로 싸우는 게 싫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샤는 블랙윈드 호를 이끌고 북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발론은 연


회가 있었던 날의 회의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렸고, 테온에게 내린
지시도 명목상으로는 해적을 물리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북부인
들은 딥우드모트와 모아트카일린 위로 액스와 해머가 날아들어야만
진상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승리로 끝나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그 승리의
기반을 마련한 건 다 잊고 빌어먹을 아샤 누나를 칭송하겠지?’

다그머 클레프트조가 포움드링커 호의 높다란 뱃머리에 서 있었다.


테온은 이번 일의 성공이 모두 다그머의 덕으로 돌아갈 게 두려워, 그
에게 배를 지키라는 임무를 맡겼었다. 과민한 사람이라면 항의할 수
도 있었겠지만, 다그머는 그저 씩 웃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겼군요! 한데 왜 웃지 않으시죠? 살아남은 자는 웃어야 합니다.


죽으면 웃을 수가 없잖습니까.”

다그머가 싱글벙글하며 테온을 향해 소리쳤다. 젊었을 때 긴 액스에


얼굴을 난도당한 다그머는 웃는 모습조차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
찍했다. 턱이 두 동강 나면서 앞니가 나가고, 입술이 네 개가 되고, 얼
굴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뺨과 목의 상처는 턱수염으로 가렸지만,
이마 위의 상처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아래로 흉측하게 드러났다.
상처는 마치 거북이 등처럼 균열되어 이마 아래의 얼굴과 명확하게
경계선을 지었다.

“놈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군요. 아주 씩씩하게 부르


던데…….”

늙은 전사가 혀를 찼다.

“놈들은 싸우는 것보다 노래를 더 잘하더군요. 놈들에겐 창보다 하프


가 훨씬 잘 어울렸을 겁니다.”

“사상자는 얼마나 됩니까?”

“우리 쪽 말인가요?”

테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토드릭뿐입니다. 술에 취해서 전리품 때문에 싸우기에 내가 활로 쏴
버렸죠.”

“세상에는 오로지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있죠.”

다그머가 또 한 번 히죽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모습에 두려움을


느낄 테지만, 테온은 그 모습이 아주 익숙했다. 어릴 적 테온이 말을
타고 이끼 낀 벽을 뛰어넘거나 도끼를 과녁판에 정확히 던지면 그는
항상 그렇게 웃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테온이 그의 검을 막아
냈을 때, 날고 있는 갈매기를 활로 맞혔을 때, 그리고 파도 치는 바다
에서 직접 키를 조종해 바위 사이를 안전하게 지나갔을 때도 그런 미
소를 보내 주었었다.

‘아버지와 에다드 경보다 내게 더 많이 웃어 준 사람이지.’

“얘기할 게 좀 있습니다, 삼촌.”

진짜 삼촌은 아니었지만, 테온은 어릴 적부터 다그머를 항상 그렇게


호칭했다.

“그럼 내 배로 오시죠.”

다그머는 시비치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테온에게 호칭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아이언아일랜드에서 선장들은 모두 자신의 배에서만은
각자가 왕이었다.

테온은 큰 보폭으로 포움드링커 호에 올랐다. 다그머가 그를 배 후미


의 비좁은 선실로 안내하고는 시큼한 맥주를 호른에 따라 권했다. 그
러나 테온은 사양했다.

“말을 몇 마리 사로잡지 못했어요. 하지만…… 음, 적은 인원으로 그


정도 잡았다는 걸 감안하면 영광은 더 크다고 할 수 있죠.”
“말은 잡아서 뭘 하게요? 말들은 갑판에 똥이나 싸서 우리를 귀찮게
만 할 뿐입니다.”

아이언 출신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그머도 배의 갑판이나 맨땅


에서 싸우는 것을 더 좋아했다.

“우리가 바다에서만 전투를 치른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겐


또 다른 계획이 있어요.”

테온은 마음을 졸이며 다그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계획은 다그머


의 동의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테온의 명령이
라 해도, 부하들은 아에론과 다그머가 반대하는 일에 따라 줄 리 없었
다.

“왕자님의 아버지께서는 해안의 마을들을 유린하라고 명령하셨죠.


우리가 할 일은 그게 전부입니다.”

숱이 많은 흰 눈썹 아래로 바다 거품처럼 창백한 두 눈이 테온을 주시


했다.

“이곳의 통솔자는 난데, 삼촌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부하로군요.”

“언제나 그랬지만, 전 최고 지휘자의 최고 부하입니다.”

‘자존심이 강하군. 바로 그걸 이용해야 돼. 그의 자존심을 말이야.’

“아이언아일랜드에서 삼촌처럼 창과 검에 능수능란한 사람은 찾아보


기 힘들죠.”

“왕자님은 너무 오랫동안 아이언아일랜드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왕


자님께서 떠날 때만 해도 그랬지만, 요즘엔 저도 나이를 먹었고, 새로
운 실력자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서 몸집이 아주 거대하고 ‘웃
지 않는 안드릭’이라 불릴 정도로 무뚝뚝한 안드릭의 검술이 아주 뛰
어나다고들 합니다. 그는 올드윅의 드럼스 경 밑에서 기사로 있지요.
그리고 블랙 로렌과 콸렌도 솜씨가 대단하고요.”
“안드릭이란 자가 위대한 전사일지 몰라도, 삼촌만큼 사람들의 존경
과 두려움을 받진 못하겠죠.”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는 다그머의 얼굴에 자부심이 엿보였다. 사파이어가


박힌 금반지에 석류석을 박은 은반지, 드래곤글래스가 박힌 청동 반
지까지, 그의 손은 맥주를 가득 채운 호른보다 더 무거워 보였다.

“내 곁에 삼촌 같은 부하가 있다면, 이런 어린애 같은 일로 시간을 낭


비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은 발론 경의 최고 부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다그머가 쪼개진 갈색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발론 경의 아들에게는 그렇지가 않고요? 전 왕자님을 너무나 잘 알


고 있습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할 때며 활을 처음 만져 볼 때도 항상
왕자님 곁에 있었죠. 한데 지금 제 생각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바로 왕자님입니다.”

“난 누나에게 명령을 내릴 권리가 있죠!”

테온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보일 수 있


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왕자님, 이걸 아셔야 합니다. 형님들이 죽고 왕자님마저 볼모로 잡


혀 가자, 영주님께 위안이 될 사람은 누님뿐이었습니다. 영주님은 아
샤 아가씨를 믿고 의지하게 되셨고, 아샤 아가씨 또한 결코 영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죠.”

“나도 아버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에다드 경은 나의 진가를 잘


알아 줬죠. 그래서 세르 브린덴의 정찰병으로 뽑혀 위스퍼링우드 전
투에서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거고요. 그날 다린 혼우드 경이 우리 사
이로 들어오지만 않았으면, 난 킹슬레이어와도 대결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그머가 테온의 손을 잡았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왕자님 손에 검을 맨 먼저 쥐여


준 사람은 바로 접니다. 전 왕자님이 겁쟁이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아버님도 알고 계십니까?”

백발의 늙은 전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오직……. 어쨌든 왕자님, 왕자님은 늑대 소년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에다드 경 밑에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왔고요.”

테온은 그 말에 흥분했다.

“그래도 난 스타크 가문 사람은 될 수 없어요. 죽으나 사나 그레이조


이 가문 사람이라구요. 삼촌, 난 장차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몸입니
다. 그에 걸맞은 공적을 세워야 제 체면도 설 게 아닙니까.”

“왕자님은 아직 젊습니다. 기회는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을 테니, 공적


은 그때 세우시면 됩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스톤니 해안을 유린하
라는 명령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건 아에론 삼촌께 부탁하면 됩니다. 포움드링커와 시비치를 뺀 나


머지 배 여섯 척을 아에론 삼촌께 드리면, 삼촌은 해안을 온통 불바다
로 만들고 드라운드 가드가 포식할 정도로 많은 제물로 제사를 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명령은 아에론 댐페어가 아니라 바로 왕자님한테 떨어진 것입니


다.”
“그거야 꼭 내가 아니라도 누구든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 뿐이에요.
하지만 내가 계획하는 이 일에는 삼촌이 꼭 필요합니다.”

다그머가 호른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그럼 말씀해 보시죠.”

‘슬슬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군. 삼촌도 나처럼 약탈이나 하는 시시한


일은 하기 싫겠지.’

“아샤 누나가 성을 함락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요.”

“아샤 아가씨는 우리보다 서너 배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있습니다.”

테온은 일부러 간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지혜와 용기가 있잖아요. 우리는 그들보다 네다


섯 배는 승산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영주님께서는…….”

“나한테 감사하실 겁니다. 노획한 성을 아버지께 헌납하면 말이죠.


난 천년 동안 음유시인들이 노래했던 그런 업적들을 현실에서 실현
해낼 작정입니다.”

테온은 그 말에 다그머의 마음이 움직일 거라는 걸 확신했다. 오래 전


부터 음유시인들은 턱이 두 동강 난 다그머의 일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청해 듣곤 했었다. 뿐만 아니라 영웅들의 업적에
관한 노래도 듣기 좋아해 술에 취하면 항상 음유시인들을 불렀다.

‘머리는 하얗게 세고 이는 다 썩었으면서도 아직도 영웅이 되고 싶단


욕망에 사로잡힌 늙은이…….’

“왕자님의 계획에서 제 임무는 뭡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다그머가 그렇게 물었을 때, 테온은 자신이 승리했
음을 직감했다.

“적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삼촌뿐이에요. 삼촌은


우리와 함께 토르헨으로 행진해 가는 겁니다. 헬만 톨하트는 토르헨
최고의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 있고, 벤프레드가 이끄는 군대
는 이번 전투에서 모조리 죽었어요. 이제 남은 사람은 벤프레드의 삼
촌인 레오발드와 얼마 안 되는 수비대뿐입니다.”

‘벤프레드를 심문했으면 그 규모가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었을 텐


데…….’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시끌벅적하게 행군하세요. 그들이 성문 가까


이까지 다가오도록 말입니다.”

“토르헨의 성은 튼튼한가요?”

“네, 상당히 튼튼합니다. 돌로 쌓은 성벽은 10미터쯤 되고 각 모서리


마다 네모난 탑이 있죠. 그 안에는 또 네모난 아성이 있어요.”

“돌벽이라면 불을 질러 봤자고, 우리에게는 병력도 거의 없는데 어떻


게 그 성을 차지할 수 있다는 얘깁니까?”

“성벽 밖에서 야영을 하면서 성을 포위하면 돼요. 낮에는 투석기로


돌을 쏘아 던지고 말예요.”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닙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이언 사람들은


돌이 아니라 검과 도끼로 싸웁니다. 그리고 굶주린 적군에게서 얻은
승리는 명예롭지 못한 겁니다.”

“레오발드는 명예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에요. 성이 포위되면 그의


늙은 부인은 공포에 휩싸일 거고, 그러면 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윈터펠로 전령조를 날려보낼 겁니다. 전령조가 무사히 임무를 수행
하도록 그냥 놔두세요. 나이를 먹어 몸뚱어리는 물론이고 머리까지
고철이 된 세르 로드릭이 왕의 기수 가문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에
앞뒤 안 가리고 곧장 토르헨으로 달려오도록 말입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온 무시무시한 전사가 북부의 영토를 위협한다는 말에 모든 병
력을 모아 달려올 겁니다. 그런 일도 않는다면 그는 빈 껍데기에 불과
한 거죠.”

“그럼 우리 병력이 너무 적을 텐데요? 그리고 그 늙은 기사는 왕자님


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교활한 사람일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나이가 되도록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토르헨의 성은 결
코 함락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테온은 빙그레 웃었다.

“삼촌, 내 목적은 토르헨을 차지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리아

성은 시끄러운 쇳소리로 온통 혼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람들은 열


심히 포도주 통과 밀가루 포대, 화살을 마차에 잔뜩 실었다. 대장장이
들은 검을 곧게 펴거나 움푹 들어간 갑옷을 열심히 두드려 펴고는 군
마에 편자를 박았다. 위즈의 하녀들이 수선해야 할 망토는 스무 벌이
넘었고, 세탁해야 할 옷가지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성안의 사람들은 귀족부터 노예까지 모두 기도를 하기 위해 셉트로


모여들었다. 병사들은 성벽 밖에 세웠던 대형 천막들을 거두고, 모닥
불에 물을 끼얹고, 숫돌을 꺼내 검을 갈았다. 주위는 점점 시끄럽고
소란스러워졌다. 말들의 거친 울음소리, 명령을 내리는 영주들의 고
함소리, 서로 소리를 높이는 병사들의 다툼 소리…….

드디어 티윈이 출정 길에 올랐다.

선두는 애덤 마브랜드였다. 그는 기운차고 용맹스러워 보이는 붉은


말을 탔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용맹스러워 보였다. 말은 애덤의 긴
머리카락처럼 갈기가 구릿빛이었고, 등에는 애덤의 망토와 어울리도
록 청동빛으로 물들인 화려한 안장을 얹고 있었다. 성안의 몇몇 여자
들이 그의 모습을 보며 흐느껴 울었다. 위즈는 그가 위대한 기수이자
‘검의 전사’이며, 티윈의 가장 용감한 지휘관이라고 설명했다.

‘콱 죽어 버려라.’

아리아는 성문 밖으로 말을 달리는 애덤의 뒷모습을 보며 저주를 퍼


부었다. 그 뒤로 병사들이 두 개의 종대로 나뉘어 그를 따라갔다.

‘저들도 모두 콱 죽어 버려라.’

아리아는 그들이 롭과 싸우러 가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


여기저기서 롭에 대해 쑥덕대는 소리가 들렸었다. 소문에 따르면, 롭
은 캐스틀리 록 부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롭이 라니스포트
를 불태운 건지, 아니면 캐스틀리 록을 점령해 모두 화형에 처한 건
지, 그것도 아니면 단지 골든투스를 포위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는 의견이 분분했다. 어쨌든 확실한 건, 티윈의 영토에서 무슨 일인가
가 일어났다는 것뿐이었다.

위즈는 최근 며칠 동안 새벽부터 저녁까지 아리아에게 전갈만 전하


게 했다. 그 때문에 아리아는 성밖으로 나가 진흙탕을 미친 듯이 헤집
고 다녀야 했다. 야영장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그대로 도망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아리아를 유혹했다. 마차가 철버덕거리며 옆을 지
나갈 때는, 수레에 숨어들었다가 야영지 속으로 뛰어들면 붙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평소 달아나다 잡히면 어떻
게 되는지 경고하던 위즈의 말이 떠올라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도망가다 잡히면 때리는 일도 없어. 그럼, 없고말고. 난 절대 도망자


에게 손 안 대. 바르고 호트를 위해서 말이야. 그가 돌아오면 너희들
발목은 그대로 잘려 나갈걸.”

‘위즈만 죽는다면…….’
하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항
상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떠들어댔고,
아리아는 그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위즈는 아리아가 글을 읽으리라는 걸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에, 심부


름을 시키면서도 전갈을 봉인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리아는 그것들
을 전부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창고나 병기고에 보내는 전갈이었는데,
그 중에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도박 빚을 갚으라고 청
구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받은 기사는 까막눈이었다. 그
래서 아리아가 내용을 설명했고, 기사는 놀림을 당한다는 생각에 손
찌검부터 하려고 했다. 아리아는 재빨리 몸을 숙이고 그의 안장에서
은색 테두리가 쳐진 술잔을 낚아채 달아났다. 기사는 무섭게 으르렁
거렸지만 무거운 쇠미늘 갑옷을 입고 있어, 마차 바퀴 사이로 재빨리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다시 궁수들 무리를 비집고 도망가는 아리아를
쫓아오지는 못했다.

위즈는 아리아가 술잔을 건네 주자 착한 아이라며 보상을 해주겠다


고 약속했다.

“오늘밤에 먹으려고 통통한 닭 한 마리를 찍어 뒀는데, 그걸 네게 나


눠 주마. 맘에 들게다.”

아리아는 가는 곳마다 자켄을 찾았다. 빚지고 있는 두 사람의 생명 중


한 사람을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그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혹시 다른 병사들처럼 전쟁터로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어, 어느 날 용기를 내어 한 경비병에게 그의 거처를 물었
다.

“세르 아모리의 부하 말이냐? 아마 아직 성안에 있을 게다. 세르 아


모리는 하렌할을 지키기로 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마운틴은 티윈과 함께 전쟁을 선두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자켄을 찾지 못하면 던센과 폴리버와 래프는 아
리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위즐! 병기고에 가서 루칸에게 세르 리오넬이 훈련 중에 검을 망가


뜨려 새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다고 전해라. 자, 이걸 가져가.”

어느 날 오후, 위즈가 아리아를 불러 쪽지를 건네 주었다.

“가서 급하다고 전해. 세르 리오넬은 세르 케반과 함께 나가야 하니


까.”

아리아는 쪽지를 들고 힘껏 달렸다.

병기고는 대장간과 이웃하고 있었다. 높고 긴 터널처럼 생긴 대장간


건물 안에는 열두 칸의 용광로와 강철을 불리는 기다란 물통이 있었
다. 아리아가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용광로의 절반 이상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고, 쇠를 벼리는 망치소리가 귀청이 찢어져라 울리
고 있었다. 근육질의 남자들이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서서 모루 위에
서 세차게 망치질을 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리아는 젠드리를 찾아 대장간 안을 한번 휘 둘러보았다. 웃통을 벗


어 던진 젠드리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짙은 흑발 아래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강인해 보였다. 아리아는 어떻게 그에
게 이야기를 붙여야 할지 잠시 궁리했다.

“루칸이 누구죠? 세르 리오넬에게 새 검을 가져가야 해요.”

아리아는 젠드리에게 다가가 종이를 내보였다. 하지만 그는 팔로 종


이를 확 밀쳐냈다.

“세르 리오넬 따윈 알 바 아냐. 간밤에 핫파이가 묻더라. 우리가 요새


에서 싸울 때 네가 ‘윈터펠’ 하고 외치는 걸 들었냐고 말이야.”

“난 안 그랬어요!”
“아니 그랬어. 나도 들었다구.”

아리아는 얼른 둘러댈 말을 찾았다.

“모두 다 소리를 지르고 있었잖아요. 핫파이도 ‘핫파이’라고 소리쳤


어요. 백 번도 넘게 말이에요.”

“문제는 네가 뭐라고 외쳤냐는 거야. 어쨌든 핫파이한테 네가 ‘지옥


에나 가라’고 외쳤으니까 귀 좀 잘 씻고 다니라고 했어. 너도 그 녀석
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죠.”

하지만 ‘지옥에나 가라’는 말은 너무 우스웠다.

‘핫파이의 이름을 자켄에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루칸을 데려올게.”

젠드리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누군가를 데려왔다.

루칸은 쪽지를 힘겹게 읽더니 선반 위에서 묵직한 롱소드를 끌어내


렸다.

“이건 그런 멍청이한텐 어울리지 않는 명검이야. 내가 그러더라고 전


해.”

“그럴게요.”

아리아는 거짓말을 했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가는 위즈에게 피가 터


지게 얻어맞을 게 뻔했다.

롱소드는 니들에 비하면 훨씬 무거웠지만 아리아는 그 느낌이 좋았


다. 손에 쥐어진 강철의 무게로 기분상으로나마 강해진 느낌을 맛볼
수 있었으니까.
‘아직 난 수중댄서가 아닐지 몰라도 그렇다고 쥐새끼도 아냐. 검을 다
룰 줄 아는 쥐는 없잖아.’

활짝 열린 성문 안으로 병사들이 오가고, 짐을 잔뜩 실은 수레들이 드


나들었다. 아리아는 문득 마구간으로 가서 리오넬이 새 말을 원한다
고 말할까 하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쪽지도 있으니 어려울 건 없었다.
마구간지기들은 루칸보다 더 글을 읽지 못할 터였다.

‘말과 검을 들고 도망가는 거야. 경비병들이 마차를 세우면 그들에게


도 이 쪽지를 보여 주고 세르 리오넬에게 가져가는 중이라고 말하면
되겠지.’

하지만 아리아는 리오넬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그를 찾을 수 있


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 그의 거처를 묻는다면 거짓말
이 들통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는 위즈…… 위즈가…….

아리아는 발목이 잘려 나갈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가죽 조끼 위에 활을 메고 강철 투구를 쓴 궁수들이 아리아


옆을 지나갔다.

“……그 녀석, 거인들을 거느리고 있대. 월 너머에서 온 사람들인데,


키가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넘고 개처럼 그들을 잘 따른대.”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지! 정말 상상이 안 돼. 그 녀석은 사람이


라기보다는 늑대 인간에 가까운가 봐. 스타크 사람들은 다…….”

“거인이니 늑대니 하는 얘길랑은 집어 치워. 그 꼬마는 우리가 가고


있다는 걸 알면 바지에 오줌을 지릴걸. 녀석은 하렌할로 진격해 올 만
큼은 용기가 없어. 아마 지금쯤 도망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야. 그 녀석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지도 몰라. 도망


쳐야 하는 건 우리일지도 모른다구.”
‘맞아. 그래, 도망쳐야 하는 건 이 사람들이지 내가 아냐. 위즈와 티
윈, 마운틴, 애덤, 아모리, 리오넬, 이 사람들이 도망쳐야 하는 거라
구. 오빠가 이 사람들을 모두 해치울 거야. 오빠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늑대에 가까운 스타크 가문의 자손이니까. 물론, 나도 그렇고.’

“위즐!”

위즈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아리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딴 생각에


빠져 있어 그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서 그 검을 이리 줘.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위즈가 재빨리 검을 잡아채고는 손등으로 아리아의 뺨을 후려쳤다.

“다음엔 늦지 마!”

잠시나마 자신감을 찾았던 아리아는 다시 웅크려들고 말았다. 입 안


에서 피 비린내가 났다. 맞을 때 혀를 깨물었던 것이다. 순간 증오심
이 피어올랐다.

“또 맞고 싶어? 어디서 그런 건방진 표정을 지어! 당장 양조장에 내


려가서 터블베리에게 전해. 줘야 할 통이 스무 개가 넘으니까 애들을
보내서 가져가는 게 좋을 거라고.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줘 버린다고
해.”

아리아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위즈는 만족스


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녁밥을 얻어먹고 싶으면 뛰는 게 좋을걸!”

통통한 닭고기는 벌써 잊어버린 게 확실했다.

“그리고 또 옆길로 샜다간 흠씬 맞을 줄 알아!”

‘그렇게는 안 될걸. 다신 그러지 못할 거라구!’


어쨌든 아리아는 발에 땀이 나게 달렸다.

아리아가 위도우타워와 킹스파이어타워 사이를 잇는 아치형의 돌다


리 아래로 막 들어설 때였다. 앞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들리고, 로지가
다른 세 남자와 함께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가슴에는 세르 아모리 가문의 만티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요렌의 어린 계집이잖아!”

로지가 아리아를 보더니 가면 아래로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


다.

“그 까마귀가 널 왜 월로 데려가려 했는지 우리가 알까, 모를까?”

그의 웃음을 따라 다른 자들도 신나게 웃어댔다.

“그래, 네 나무 막대는 어디 있지! 내가 그걸로 널 혼내 주겠다고 약


속했던 것 같은데?”

로지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덤벼들 기세로 소리쳤다. 일순간 다른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로지의 걸음이 천천히 아리아에게 향했다. 아
리아는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웬일이지? 내가 묶여 있지 않으니까 용기가 사라진 모양이지?”

“난 당신을 구해 줬어요.”

아리아는 그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재빨리 뛸 준비를 했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빚을 갚아야 하잖아. 그래, 요렌이 널 즐겁게 해


주더냐?”

“난 자켄을 찾고 있어요. 그에게 전할 말이 있다구요.”


순간 로지가 움찔했다.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자켄을 두려워하기 때
문일 것이었다.

“목욕탕에 있어. 어서 썩 꺼져!”

아리아는 목욕탕으로 가는 자갈길을 사슴처럼 잽싸게 달렸다. 자켄


이 수증기에 싸인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어깨에 무겁게 드리
워진 희고 붉은 갈래 머리 위로 시중드는 소녀가 뜨거운 물을 붓더니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소녀는 새앙쥐처럼 살금살금 들어왔지. 그래도 남자는 다 알아.”

‘내가 들어온 걸 어떻게 알지!’

아리아는 문득 자켄이 자신의 머릿속 생각까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가죽신을 신으면 발소리가 전쟁 나팔소리처럼 크게 들리지. 영리한


아이라면 맨발로 걸어야지.”

“전갈이 있어요.”

아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시중드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녀


는 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위즈…….”

자켄이 나른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 한가한 시간에 찾아 뵙겠다고 전해.”

그가 갑자기 물을 힘껏 내려쳤다. 아리아는 물에 젖지 않기 위해 얼른


몸을 피해야 했다.
아리아가 터블베리에게 가서 위즈의 말을 전하자, 그가 큰 소리로 욕
지거리를 내뱉었다.

“위즈에게 내 아이들은 할 일이 아주 많다고 전해! 그리고 그 빌어먹


을 자식에게 내가 ‘후레자식’이라고 했다고 전하고, 앞으로 그런 소릴
한 번만 더 했다간 재미없을 줄 알라고 해! 그리고 한 시간 안에 그 통
들을 여기다 가져다 놓지 않으면 티윈 경 귀에 그 얘기가 들어갈 거라
고, 알아서 하라고 해.”

아리아가 위즈에게 그 말을 전하자 위즈 역시 속사포로 욕을 해댔다.


‘후레자식’이라고 했던 말은 뺐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이
들을 불러 통을 양조장으로 나르게 했다.

그날 아리아의 저녁식사는 보리와 양파, 당근이 들어간 스튜와 푸석


한 갈색 빵이 전부였다. 위즈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만이 아침에
말했던 닭의 날개 부위를 얻어먹었고, 나머지는 모두 위즈 차지였다.
그의 입가에 난 누런 고름 위로 기름이 줄줄 흘러내렸다.

“위즐, 이리 와.”

위즈가 식사에서 눈을 들어 아리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이미 고기


를 대부분 먹어치운 후였다. 하지만 허벅지 부분에 아직 살점이 약간
붙어 있었다.

‘이제야 내게 했던 약속이 기억난 게 틀림없어.’

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즈에게로 갔다.

“네가 날 보는 걸 봤어.”

위즈가 아리아의 치맛자락에 손가락을 문질러 닦더니, 갑자기 한 손


으로 아리아의 목을 움켜잡고는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내가 뭐라고 했지!”


다시 한 번 그의 손이 날아왔다.

“눈을 조심해. 안 그러면 다음엔 숟가락으로 눈알을 파내서 개밥으로


던져 줄 테니까.”

그러고는 아리아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넘어지면서 아리아의 옷자


락이 나무 의자의 못에 걸려 찢어졌다.

“자기 전에 꿰매도록 해!”

위즈는 마지막 살점까지 깨끗이 뜯어먹고는 요란하게 손가락을 빨았


다. 그러고는 못생긴 점박이 개에게 닭뼈를 던져 주었다.

‘위즈…….’

그날 밤, 아리아는 늦게까지 침대에 앉아 눈물을 삼키며 찢어진 옷을


꿰맸다.

‘위즈, 그레고르, 던센, 폴리버, 치스윅, 래프, 티클러, 하운드, 아모


리, 세르 일린, 세르 메린, 조프리 왕과 세르세이 왕대비. 위즈의 이름
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에 포함시켜야 하지?’

아리아는 다음날 일어났을 때 그가 죽어 있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리아를 깨운 것은 여전히 위즈의 부츠 발이었다. 그
는 비스킷으로 아침을 먹으며 티윈 경의 주요 병력이 오늘 출정을 떠
날 거라고 말했다.

“티윈 경이 없다고 일이 쉬워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주인이 잠


깐 집을 비운다고 성이 작아지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성을 돌보는 일
손만 더 줄어들 뿐이지. 앞으로 너희 게으름뱅이들은 일이 어떤 것인
지 배우게 될 거다. 알겠나?”

‘네게서는 아냐.’
아리아는 비스킷을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그러자 위즈가 아리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섬뜩한 눈빛이었
다. 아리아는 재빨리 시선을 떨구고는 감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티윈은 희미한 불빛이 뜰을 채울 때쯤 하렌할을 떠났다. 아리아는 웨


일링타워 중간쯤에 있는 아치형의 창문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
다. 새하얀 담비가죽 망토를 걸치고, 화려한 주홍색 갑옷을 입힌 말
위에 올라탄 그의 모습은 휘황찬란했다. 티윈의 형인 케반도 그만큼
화려했다. 그들 앞으로 기사 넷이 금실로 사자를 수놓은 주홍빛 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뒤로는 멋진 갑옷 차림의 소영주들과, 붉은 수소
와 수퇘지, 보랏빛 유니콘, 작은 수탉, 오소리, 은빛 족제비, 땡땡이
옷을 입은 마술사, 별과 태양, 공작과 표범, 갈매기와 단검, 검은 후드
와 푸른 딱정벌레 그리고 녹색 화살 등이 그려진 색색의 깃발들이 따
라갔다.

가장 뒤쪽에는 그레고르가 회색 판금갑옷을 입고 그 자신만큼이나


거칠어 보이는 군마를 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젠드리의 투구를 쓴 폴
리버가 검은 개가 그려진 기를 들고 서 있었는데, 그는 키가 꽤 큰 편
인데도 그레고르의 그늘에 가려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하렌할의 거대한 격자 철문 아래로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


던 아리아는 멈칫했다.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후회가 뇌리를 스
쳤다.

‘이런 바보 같은!’

위즈는 치스윅보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문제


의 인물들은 따로 있었다. 어젯밤 그에게 그 중 하나의 이름을 속삭일
수도 있었다. 위즈에게 맞은 일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았더라면 말이
다.

‘티윈 경, 왜 티윈 경을 생각하지 못했지!’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위즈는 아직 죽지 않았어. 자켄만 찾으면 되는데…….’

아리아는 할 일을 팽개치고 서둘러 나선형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철


문이 천천히 내려지면서 쇳소리가 났다. 그리고 또 하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길을 막고 무리지어 있었다. 아리아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목에 피를 철철 흘리며 자갈길 위에 뻗어 있는 위즈가 보였
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멍하니 회색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못생긴
점박이 개가 그의 가슴을 밟고 서서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핥으
며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저, 은혜도 모르는 막된 놈 같으니라고! 강아지 때부터 키워 줬더니


만…….”

누군가 혀를 찼다.

“이곳은 저주받은 곳이야.”

궁수 하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리자, 굿와이프 아마벨이 말을


받았다.

“하렌 왕의 원혼이 저지른 짓이랄 수밖에……. 여기선 하룻밤도 더


못 살겠어.”

아리아는 죽은 사람과 개에게서 눈을 돌렸다. 웨일링타워의 한쪽 벽


에 몸을 기대고 선 자켄이 보였다. 그는 아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
가까이 손을 들어 무심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캐틀린
리버룬까지 이틀 남짓 가야 할 즈음, 한 정찰병이 강가에서 말에게 물
을 먹이고 있는 캐틀린 일행을 발견했다.

캐틀린은 지금까지 프레이 가문의 쌍둥이 탑 문장이 그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우선 정찰대를 맡고 있는 삼촌의 안부부터 물었다.

“브린덴 경께서는 왕과 함께 서부로 떠나셨습니다. 마틴 리버스 경께


서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고 계십니다.”

마틴 리버스라면 캐틀린도 트윈스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워들


러 프레이의 서자로, 페르윈의 이복형제였다.

“알았네.”

롭이 지금 라니스터 가문의 심장부를 공격하러 갔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캐틀린을 렌리에게 사절로 보낼 때부터 맘먹
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리버스 경은 지금 어디 계시지?”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두 시간 거리에 계십니다.”

“날 좀 그리로 안내해 주게.”

캐틀린은 브리엔느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랐다.

“비터브리지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정찰병이 캐틀린 앞으로 말을 몰며 물었다.

“아니.”

돌아오는 길에는 감히 그곳을 지나올 수가 없었다. 렌리의 젊은 미망


인과 그의 기사들이 렌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걱정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라니스터 가문의 병사들이 잿
더미로 만들어 버린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말을 달려왔다. 그 풍요롭
던 트라이덴트 강 유역의 땅은 완전히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오는 내
내 척후병들은 매일 불길한 소식을 가져왔다.

“렌리 경이 살해되었네.”

정찰병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희는 그것이 라니스터들이 지어낸 헛소문이길 바랐는데…….”

“나도 그랬음 좋겠네. 참, 내 동생은 리버룬에 있겠지?”

“네, 세르 에드무레께서는 리버룬에서 전하의 배후를 지키도록 명령


받으셨습니다.”

‘신이시여, 에드무레에게 그럴 만한 힘과 지혜를 허락하소서.’

캐틀린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전하께서는 다른 소식이 없었나?”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왕께선 옥스크로스에서 대승을 거두셨습니


다. 세르 스태퍼드 라니스터는 죽었고, 그의 군대도 풍비박산이 났습
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웬델 맨더리가 기쁨의 탄성을 질렀지만, 캐틀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의 승리보다 내일의 시련이 더 걱정 아니
겠는가.

마틴은 옆에 1백여 개의 무덤이 모여 있는 요새에서 야영을 하고 있


었다. 캐틀린이 지붕도 없는 마구간 앞에서 말을 세우자, 마틴이 뛰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세르 에드무레께서 오시는 대로 최대한 빨리
리버룬으로 모셔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캐틀린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께 무슨 일이라도?”

“아닙니다. 호스터 경께선 여전하십니다. 단지 라니스터 정찰병들이


들이닥칠까 봐 그런 것뿐입니다. 티윈 경이 휘하의 병력을 모두 거느
리고 하렌할을 나와 출정 길에 올랐답니다.”

리버스는 그의 이복동생과 달리 혈색이 좋은 사내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티윈 경이 언제쯤 이곳에 도착하리라 보죠?”

스타니스 바라테온도 곧 출정 길에 오를 터였다.

“사나흘쯤 걸릴 테지만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 길마다 정찰병을 내


보내고는 있지만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다. 리버스는 신속하게 야영을 철수하고 말에


올랐다. 50명 가량으로 불어난 캐틀린 일행은 다이어울프, 송어, 쌍
둥이 탑의 기를 휘날리며 다시 길을 떠났다.

웬델을 비롯한 캐틀린의 수행원들은 옥스크로스에서 롭이 거둔 승리


에 대해 더 듣고 싶어했고, 리버스는 그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리버룬에 전쟁 이야기를 노래로 잘 지어 부르는 라이먼드 라이머라


는 음유시인이 와 있는데, 오늘밤에 아마 그자의 노래를 들으실 수 있
을 겁니다. ‘한밤의 늑대’라는 노래지요.”

리버스는 라니스포트에서 스태퍼드의 남은 군대가 어떻게 뿔뿔이 흩


어졌는지, 지금 롭이 서부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계속 늘어
놓았다. 맞서 싸울 주인도 없는 캐스틀리 록은 성문만 굳게 닫고 있
어, 롭은 손쉽게 티윈이 트라이덴트 강 유역의 영토를 폐허로 만든 것
에 대해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여전사 매지 모르몬트는 노획한 가축
떼를 몰고 리버룬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카스타크와 글로버는 연
안을 따라 계속 공격을 감행했고, 그레이트존은 카스타메레와 눈스
딥, 펜드릭 힐의 금광을 공격했던 것이다.

금광 얘기에 웬델이 껄껄 웃었다.

“라니스터 놈들을 달려오게 하려면 금을 위협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


은 없지.”

하지만 페르윈은 이해하기 힘든지 이복동생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


다.

“어떻게 골든투스를 차지할 수 있었지? 그 성은 견고한데다 언덕 위


에 있어 공격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그래서 밤에 몰래 언덕을 올라갔지. 왕의 늑대가 길을 안내했는데,


산등성이 아래로 염소가 다니는 길이 있었어. 구불구불하고 돌투성
이였지만, 일렬로 서서 행군하면 별 무리 없이 지날 수 있는 길이었
지. 그 덕에 쥐도 새도 모르게 성을 공격할 수 있었던 거지.”

갑자기 마틴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나도 들은 얘긴데 말이야, 왕께서 스태퍼드 라니스터의 심장을


꺼내 늑대에게 주었대.”

캐틀린은 그 말에 발끈했다.

“그런 말은 믿을 수 없어요! 내 아들은 그런 야만인이 아닙니다.”

그러자 마틴이 얼른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스태퍼드 경의 심장은 늑대가 먹을 만한 값어치
도 없지요. 그레이윈드는 평범한 늑대가 아니니까요. 그레이트존 경
은 북부의 신들이 부인의 아드님들에게 다이어울프를 보내 준 거라
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답니다.”

캐틀린은 롭과 브랜과 존이 다이어울프 새끼들을 발견해 데려온 날


을 기억했다. 수컷 세 마리와 암컷 두 마리는 스타크 가문의 적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털이 희고 눈이 붉은 다이어울프는 서자인 존 스노우
를 위한 것이었다.

‘평범한 늑대들이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그날 밤 브리엔느가 캐틀린의 막사로 왔다.

“부인께선 이제 안전하고, 리버룬 성까지도 하루 길밖에 남지 않았습


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보내 주세요.”

캐틀린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브리엔느는 캐틀린 일행과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말갈기를 손질하거


나 말발굽에 박힌 돌을 빼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또한 세드
를 도와 요리도 했고, 어느 누구보다 사냥에 소질이 있다는 것도 증명
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일을 브리엔느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
히 잘 수행했다. 묻는 말에는 공손히 답했고, 수다를 떨거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으며, 시끄럽게 웃는 법도 없었다. 매일 함께 말을 타고
함께 잠을 자면서도 말이다.

‘우리와 하나가 되지 못해서였겠지.’

브리엔느를 바라보는 캐틀린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배여 있었다. 하


지만 문득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렌리와 함께 있을 때도 그랬어. 마상시합이 있던 날 연회에서


도, 렌리의 막사에서 레인보우가드 형제들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
고. 이 아이에게는 윈터펠보다 더 높은 벽이 있는 거야.’

“우리와 헤어지면 어디로 가려고?”

“돌아가겠습니다, 스톰엔드로요.”

“혼자 가겠다는 것이겠지?”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예.”

넓적한 브리엔느의 얼굴은 한밤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좀처럼 마음


을 예측할 수 없는 표정…….

“스타니스를 죽이려고?”

브리엔느가 굵고 거친 손을 칼자루에 가져갔다. 그것은 렌리의 검이


었다.

“저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들으셨지 않습니까?”

“그래, 들었어.”

캐틀린은 그 소녀가 피로 얼룩진 옷들은 모두 내버렸으면서도 레인


보우가드의 망토만은 잘 간직해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급히 막사를 빠져나오느라 브리엔느는 옷가지나 소지품을 모두 버려
두고 와야 했다. 때문에 몸집이 그나마 비슷한 웬델의 옷을 잠시 빌려
입고 있었다.

“맹세는 지켜져야 의미가 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스타니


스 경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그리고 그의 호위병들 역시 그
의 안전을 맹세했을걸.”
“그의 호위병 따윈 두렵지 않습니다. 전 자신 있어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널 겁쟁이라고 부를까 봐 걱정이 되니?”

브리엔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렌리 경의 죽음은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충심으로 그를 모셨어. 만


약 네가 그를 따라 지옥으로 간다면 넌 아무도 섬길 수 없어. 네가 얼
마나 힘든지 알아.”

캐틀린은 브리엔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러자 브리엔느가 얼른


어깨를 옆으로 치웠다.

“아뇨,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남편이 가고 없다


는 사실에 새삼 놀라. 검을 다룰 줄도 모르면서, 킹스랜딩으로 달려가
세르세이의 목을 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브리엔느가 눈을 들었다. 아름다운 눈, 브리엔느에게서 가장 아름다


운 부분이었다.

“부인도 그러시면서 왜 저를 말리시는 거죠? 스타니스가 에다드 경


의 원수를 갚고, 따님들을 찾아 주겠다는 약속해서인가요?”

‘그런지도 모르지.’

캐틀린은 창을 들고 근무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기사는 악에 맞서 싸워야 하고, 렌리 경은 분명 악한 자의 손에 죽은


게 틀림없어. 하지만 왕을 세우는 건 인간의 검이 아닌 신의 뜻이야.
만일 스타니스가 정당한 왕이라면…….”
“부인, 그는 아닙니다. 로버트 왕 역시 정당한 왕이 아니었죠. 렌리
왕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로버트 왕이 합법적인 왕세자를 트
라이덴트 강둑에서 죽이는 동안, 자이메가 정당한 왕을 살해하는 동
안, 대체 신은 어디에 있었던 거죠? 신은 인간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
습니다. 왕들이 백성들의 고충에 무관심하듯 말입니다.”

“아니, 좋은 왕은 그렇지 않아.”

“전하께선……, 그분은 정말 좋은 왕이 되셨을 겁니다. 그분은 정말


좋은…….”

“브리엔느, 렌리 경은 이제 가고 없어.”

캐틀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최대한 부


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스타니스와 조프리, 그리고 내 아들이 남았지.”

“스타니스는 절대……. 그리고 부인께서도 절대 그에게만은 무릎을


꿇지 말길 바랍니다.”

“브리엔느, 나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내 아들이 왕을 자청하고


있지만, 난 왕대비가 아니야. 난 단지 자식들의 안전을 지키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어머니일 뿐이라구.”

“전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싸울 수는 있어요.”

“그렇다면 싸워. 하지만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말


이야. 어떠니? 렌리 경의 적들은 내 아들 롭의 적이기도 한데…….”

브리엔느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발로 땅을 걷어찼다.

“전 부인의 아드님을 모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절 거두어 주신다면 부인을 섬기겠습니다.”

캐틀린은 깜짝 놀랐다.

“나를? 왜?”

그 질문이 브리엔느를 난처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음…… 부인이 저를 도와 주셨으니까요. 막사 안에서 저를…….”

“넌 결백했으니까.”

“그렇더라도 모른 척하실 수 있었어요. 부인은 저와 아무런 연관도


없었으까요.”

캐틀린은 괜히 미안해졌다.

‘어쩌면 난 그날 일어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증인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라.’

“브리엔느, 나를 보살펴 주는 소녀들은 많아. 하지만 너 같은 소녀는


없어. 난 기사도, 지휘관도 아니잖아.”

“하지만 부인에겐 용기가 있습니다. 지휘관의 용기와는 다르지만, 뭐


랄까…… 여자의 용기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부인이라면 적당한
시기가 왔을 때 저를 막지 않을 거란 믿음도 들고요. 약속해 주세요,
제가 스타니스에게 가는 걸 막지 않겠다고요.”

캐틀린은 롭도 반역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스타니스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 생각을 하니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때가 되면 막지 않을게.”

키 큰 소녀가 어색하게 무릎을 꿇고는 렌리의 검을 뽑아 캐틀린 발 앞


에 내려놓았다.
“이제부터 저는 부인의 뜻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경호원이든 뭐든 원
하시는 대로 명령만 내리세요. 부인을 보호하고, 부인의 비밀을 지키
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바치겠습니다.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
합니다.”

“항상 내 옆자리를 지키고, 나와 함께 식사하기를 바라며, 네게 명예


롭지 않은 일은 요구하지 않을 것을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자,
이제 일어나.”

캐틀린은 브리엔느의 손을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드가 충성의


맹세를 받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캐틀린 자신은 처음 겪는 일이었
다.

‘네드가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일행은 다음날 늦게 강물이 얕아지는 레드포크의 여울목 앞에 도달


했다. 그곳의 요새는 독수리 문장을 단 말리스터의 궁수와 창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툴리 가문의 깃발을 알아보고 사람을 몇 명 보
내 캐틀린 일행이 강을 건너는 걸 돕게 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강바닥에는 쇠못을 박아 두고, 저기 바위 사이


에는 마름쇠를 뿌려 두었거든요. 여울목마다 다 그렇게 해놓으라는
세르 에드무레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말리스터 병사가 말고삐를 잡으며 주의를 주었다.

‘여기서 싸울 모양이지?’

캐틀린은 속이 뒤틀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캐틀린 일행이 레드포크를 지나 텀블스톤으로 향하는데, 가축을 몰


거나 수레를 끌고 가던 사람들이 툴리 가문의 깃발을 보고는 얼른 길
을 내주며 ‘툴리 만세!’ ‘스타크 만세!’를 외쳤다.
리버룬 성을 5백 미터쯤 앞두고 블랙우드 가문의 진분홍색 깃발이 휘
날리고 있었다. 루카스 블랙우드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서
캐틀린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텀블스톤 북쪽의 강둑
을 따라 죽 늘어선 두 번째 진영이 보였다. 피페르 가문의 춤추는 소
녀, 대리 가문의 농부, 파에게스 가문의 붉은 뱀과 흰 뱀의 문장들이
깃발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리버룬
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다시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에드무레
가 소집했기 때문일 터였다.

‘세상에, 티윈 경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게 사실이었군.’

저 멀리 리버룬 성벽 위에 매달린 검은 물체가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


니 밧줄에 목을 매달아 얼굴이 검게 변한 시체들이었다. 살점은 까마
귀들에게 뜯어 먹혔지만, 주홍빛 망토는 사암으로 만들어진 성벽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라니스터들의 목을 매단 모양입니다.”

할리스 몰렌은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사실만을 얘기했다. 웬델이 크게


탄성을 질렀다.

“우와, 멋진 광경이군요.”

“멋지긴! 친구들이 우리도 없이 잔치를 벌였구만요!”

페르윈의 농담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캐틀린과 브리엔느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만약 저들 중에 킹슬레이어가 끼여 있다면 우리 딸들도 역시 죽은목


숨이야.’

캐틀린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할리스와 나이 많은 로빈 플린트도 캐


틀린을 따라 빠르게 말을 몰았다. 보초병이 깃발을 알아보았는지, 그
들이 성 앞에 당도하기도 전에 성문은 올라가 있었다.
에드무레가 캐틀린을 마중하러 성 앞에 나와 있었다. 그 옆에는 배불
뚝이 데스몬드 그렐 교관, 어서라이데스 웨인 집사, 리버룬의 대머리
호위대장 로빈 리게르가 함께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호스터를 모시
는 데 평생을 바친 충신들이었다.

‘다들 많이 늙었구나.’

캐틀린은 괜히 마음이 착잡했다.

에드무레는 은색 물고기가 수놓인 튜닉 위에 파란색과 붉은색이 섞


인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무성
하게 자라 있었다.

“누님이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렌리 경이 죽었다는 소식


을 듣고 누님도 해를 입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아, 그리고 티윈 경
도 출정 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나도 들었어. 그래, 아버님 건강은 어떠니?”

“하루는 좋아졌다가 또 다음날은……. 참, 아버님께서 누님을 찾으면


서 뭔가 말씀을 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더군요.”

“바로 가 뵈어야겠다.”

캐틀린은 아버지의 침실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렌리 경이 죽은 이후로 스톰엔드에서 무슨 소식 없었니? 아니면 비


터브리지에서라도?”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몹시 궁금했다.

“비터브리지에서는 없었고, 스톰엔드에서는 세르 코트나이 펜로즈가


전갈을 보냈더군요. 까마귀를 세 마리나 날려보냈는데, 모두 ‘스타니
스에게 포위당했는데 누구라도 와서 구출해 주면 그에게 충성을 바
치겠다’는 내용이더군요. 그리고 그 소년의 일이 걱정이라고 했는데,
그 소년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혹시 누님은 아세요?”

“에드릭 스톰입니다. 로버트 왕의 서자지요.”

브리엔느가 대신 대답했다. 에드무레는 잠시 의아한 시선으로 브리


엔느를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스타니스 경은 2주 안에 성을 양도하고 그 소년을 넘겨주면 스톰엔


드의 병사들을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대요. 하지만 세르 코트나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자신의 혈육도 아닌 서자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구나.’

캐틀린은 문득 마음이 경건해졌다.

“그래, 답장은 보냈니?”

에드무레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움을 줄 수도, 그렇다고 바랄 수도 없는 이때에 그럴 필요가 있겠


어요? 그리고 스타니스 경은 우리의 적이 아니잖아요.”

“스타크 부인, 렌리 경이 어떻게 죽었는지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에 대해 해괴한 소문이 횡행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드무레의 얼굴에도 궁금한 빛이 역력했다.

“누님이 렌리 경을 살해했다는 소문도 있고, 어떤 남부 여인이 암살


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저의 왕께선 살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타크 부인께서 저


지른 일이 아닙니다. 저의 검과 모든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
다.”
브리엔느가 에드무레의 시선을 받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캐틀린은
얼른 브리엔느를 소개했다.

“이쪽은 타르스의 브리엔느라고 해. 이븐스타 경의 딸이자 렌리 경의


레인보우가드였지. 그리고 브리엔느, 리버룬의 후계자이자 내 동생
인 세르 에드무레를 소개할게. 이쪽은 집사인 어서라이데스 웨인, 호
위대장 세르 로빈 리게르, 교관 세르 데스몬드야.”

“영광이오.”

데스몬드의 인사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브리엔느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상투적인 예의에도 브리엔느는 익숙지 못했던 것이다.

“렌리 경이 살해될 때 나는 브리엔느와 함께 현장에 있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의 죽음과 무관해.”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림자에 대한 얘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


았다. 대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성벽에 달린 시체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누구지?”

에드무레가 거북한 표정으로 시체들을 올려다보았다.

“세르 클레오스가 우리 평화조약에 관한 답신을 레드클락의 호위를


받으며 가져왔는데, 그때 같이 온 자들이에요.”

캐틀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사절들을 죽였단 말이야?”

“가짜 사절들이었어요. 평화를 약속하고 무기를 우리에게 맡기는 조


건으로 레드클락들에게 성안에서의 자유를 허락했는데, 나흘째 되던
날 밤에 저자들이 킹슬레이어를 탈출시키려고 했어요. 처음 3일 동안
푸짐한 음식과 술로 성심껏 접대했더니만…….”
그러면서 시체 하나를 가리켰다.

“덩치가 큰 저 녀석이 맨손으로 킹슬레이어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 둘


을 죽였어요. 양손에 한 사람씩 잡아 머리를 부딪쳐서 말이에요. 그
사이에 저기 저 비쩍 마른 놈이 철사로 감옥 문을 땄구요. 제일 끝에
있는 놈이 빌어먹을 광대 녀석이었는데, 저자가 내 목소리를 흉내내
리버게이트를 열도록 했죠. 그날 엔게르와 델프와 롱류가 보초를 섰
는데, 그 멍청한 녀석들이 나랑 전혀 닮지도 않은 목소리에 속아 문을
열어 줄 뻔했던 거예요.”

‘난쟁이의 소행이군.’

캐틀린은 그가 에이레에서 비슷한 수법을 보여 줬던 일을 기억했다.


한때는 라니스터 중에서 티리온을 가장 안전한 인물로 생각했었지
만, 지금은 그 판단에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한데 그들을 어떻게 잡을 수 있었지?”

“그날 난 성안에 있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창녀들과 놀아나고 있었구나. 이야기나 계속해 봐.”

나무라는 듯한 누나의 시선에 에드무레의 두 뺨이 그의 수염처럼 붉


게 달아올랐다.

“난 동트기 바로 직전에 돌아왔는데, 롱류가 멀리서 오는 내 배를 보


고서야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소리를 지른 거예요.”

“킹슬레이어를 어떻게 다시 잡았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어요. 자이메는 포울 펨포드와 세르 데스몬드의


종자인 밀레스를 죽이고, 델프에게도 깊은 상처를 입혔죠. 성안은 이
내 피바다가 되었고, 그 와중에 다른 레드클락들이 그에게 합세했어
요. 나중에 자이메를 도운 자들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처넣었
죠. 자이메는 이제 더 이상 탈옥하지 못하도록 해놨어요.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워 벽에 고정시켜 놨거든요.”

“그럼 세르 클레오스는?”

“자기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빡빡 우기는데, 그걸 누


가 믿겠습니까? 반은 프레이고 반은 라니스터인데. 두 가문 모두 사
기와 거짓말을 밥먹듯 하잖아요. 그래서 자이메가 전에 갇혀 있던 탑
에 가뒀어요.”

“그래, 그자가 가져온 협상안은 어땠지?”

“협상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이었어요.”

그러자 집사인 어서라이데스가 물었다.

“한데 스타크 부인, 남부에서는 전혀 도움을 바랄 수가 없는 겁니까?


근친상간이라니……, 티윈 경은 그런 멸시를 절대 참지 않을 겁니다.
분명 자신의 딸에게 씌워진 오명을 스타니스 경의 피로 씻으려 할 겁
니다. 스타니스 경도 우리와 손을 잡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
아야 해요.”

‘하지만 스타니스 경은 더 크고 어두운 힘과 결탁해 있는걸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캐틀린은 소름 끼치는 시체들을 뒤로하고 도개교를 건너 성안으로


들어갔다. 에드무레가 옆에서 함께 보조를 맞췄다. 그런데 갑자기 발
가벗은 아기 하나가 말 앞으로 달려들었다. 캐틀린은 깜짝 놀라 황급
히 말고삐를 죄었다. 성안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들어와 가옥을 짓
고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맨발로 돌아다녔고, 뜰 안에는
소, 양, 닭들이 가득했다.

“이 사람들은 다 뭐지?”
“나의 백성들이에요.”

에드무레가 대답했다.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곧 성이 공격당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이런 쓸모 없는 사람들을 성안


에 들여놓는 건 에드무레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야.’

캐틀린은 에드무레의 여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동생


을 사랑했다. 하지만…….

“롭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왕께선 전장에 나가 계십니다. 전령조를 날려도 왕을 찾지 못할 겁


니다.”

데스몬드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웨인이 헛기침을 하며 한마디 거


들었다.

“왕께서는 떠나기 전에, 부인께서 돌아오시면 트윈스로 바로 가 계시


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왈더 경의 따님들과 함께 지내면서 왕비감
을 눈여겨봐 주셨으면 한다고요.”

“누님, 새 말과 식량을 마련하겠어요. 좀 쉬었다가…….”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캐틀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아들의 아내감을 고르기


위해 죽어 가는 아버지를 남겨 두고 리버룬을 떠날 마음은 없었다.

‘이젠 핑계거리가 바닥난 모양이지. 내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라는 건 알지만…….’

“여기 아무도 없나!”


마구간에서 한 소년이 뛰어나와 캐틀린의 말고삐를 받아들었다. 에
드무레도 말에서 뛰어내렸다.

“누님, 티윈 경이 오고 있어요.”

에드무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캐틀린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지만, 누나한테는 항상 어린 동생이고 싶어했다.

“걱정 마. 그자는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서부로 바로 갈 테니까. 우


리는 성문을 닫아걸고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만 지켜보면 돼.”

“누님, 이곳은 툴리 가문의 땅이에요. 티윈 경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지나가도록 놔둘 수 없어요. 쓴맛을 보여 줄 거라구요.”

에드무레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바위처럼 고집이 세어졌다. 하


지만 아무도 그가 지난번에 자이메한테 어떻게 참패당했는지 잊지
않았을 것이다.

“티윈 경과 맞선다면 얻을 건 아무것도 없고 많은 걸 잃을 뿐이야.”

“누님, 이런 뜰에서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내게 계획이 있어요.”

“그럼, 어디 가서 그 얘길 좀 들어 볼까?”

에드무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이내 입을 열었


다.

“가즈우드가 좋을 것 같군요.”

캐틀린은 동생을 따라 가즈우드로 향했다. 화가 나면 언제나 부루퉁


해져서 말을 잘 하지 않는 동생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게 미안했지만,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동생의 자존심까지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두 오누이는 가즈우드의 나무 아래서 마주 섰다.


“에드무레, 너에겐 티윈이나 스타니스와 겨룰 만한 병력이 없어.”

기분 상해할 걸 알면서도, 캐틀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병사들을 최대한 모으면 보병 8천에, 기마병은 3천이나 돼요.”

“그렇게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모은다면, 티윈 경에게는 그 두 배가 넘


는 병력이 있을걸.”

“롭 왕은 더 나쁜 조건에서도 승리를 거뒀어요. 그리고 내겐 계획이


하나 있어요. 루제 볼톤 알죠? 티윈 경은 그린포크에서 그를 눌렀지
만, 추격하는 데는 실패했어요. 티윈 경이 하렌할로 갔을 때, 볼톤 경
은 1만의 병력을 데리고 강을 건넜죠. 나는 세르 헬만에게 롭 왕이 트
윈스에 남겨 둔 병사들을 이끌고 볼톤 경과 합류하라 명령했다는 전
갈을 보냈어요.”

“에드무레, 롭이 트윈스에 병사를 남겨 놓은 건 그곳을 지키는 동시


에 왈더 경이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그렇게 했잖아요. 프레이 가문 사람들은 위스퍼링우드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세르 스테브론도 옥스크로스에서 장렬히 전사했어
요. 세르 리만과 블랙 왈더, 나머지 아들·손자들은 롭 왕과 함께 서부
에 있고요. 마틴은 충실히 척후병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고, 세르 페르
윈은 누나가 렌리 경에게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도와 주었잖아요.
그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어요? 롭 왕은 왈더 경의 사위
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고, 루제 볼톤 경도 그의 딸과 결혼했다고 들었
어요. 게다가 누나도 그의 손자 둘을 윈터펠에 데려다 놨잖아요.”

“대자들을 말하는 거구나? 그 아이들은 언제라도 볼모가 될 수 있는


처지야.”

사실 스테브론의 죽음과 볼톤의 결혼에 대해서는 캐틀린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우리가 두 아이만 볼모로 잡고 있어도 왈더 경은 감히 허튼 짓을 못
할 겁니다. 볼톤 경에겐 프레이 가문의 병사들이 필요해요. 세르 헬만
도 마찬가지고요. 난 그에게 하렌할을 재탈환할 것을 명령했어요.”

“피비린내가 진동하겠군.”

“하지만 일단 하렌할을 다시 수복하면, 티윈 경은 피신처를 잃게 돼


요. 우린 레드포크의 루비 여울목을 막고 있다가 그들이 강을 건너려
고 공격해 오면 끝장내 버리는 거죠. 설사 강을 건너지 않고 돌아간다
해도 리버룬과 하렌할 사이에서 잡히게 될 거고요. 롭 왕이 서부에서
돌아왔을 때는 우리가 이미 티윈 경을 완전히 무너뜨린 후일 거예
요.”

에드무레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캐틀린은 롭이 브


린덴을 그의 곁에만 잡아 두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전투를 수
십 번 경험한 노병이었고, 에드무레는 단 한 번, 그것도 패배한 전투
를 겪었을 뿐이었다.

“그 계획은 아주 완벽해요. 티토스 경과 조노스 경도 그랬어요. 그들


이 언제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동의한 적 있었던가요?”

“글쎄…….”

갑자기 피곤이 몰려 왔다. 캐틀린은 어쩌면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


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졌다. 어쩌면 에드무레의 계획은 대단한 것인
지도 몰랐다.

‘내가 소심해서 지금 큰일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네드가 있었으


면……. 브린덴 삼촌이라도…….’

“아버지한테는 말씀드렸니?”

“아버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이틀 전엔 누님을 브랜든과 결혼


시킬 계획을 짜고 계시더라구요. 못 믿겠다면 직접 가서 보세요. 누
님, 걱정 마세요. 이번 계획은 성공할 거예요. 두고 보세요.”

“그래, 그러길 바랄게. 진심으로.”

캐틀린은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기 위해 동생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호스터는 여전히 야위고 핏기 없는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병


마의 기운이 역력한 방안은 찌든 땀내와 약내가 섞여 쾨쾨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캐틀린은 바로 창가로 가 커튼을 젖혔다. 그 소리에 호
스터가 낮은 신음을 토하면서 꾸물꾸물 눈을 떴다. 그러고는 낯선 사
람을 보듯이 캐틀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어요.”

캐틀린은 야윈 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호스터가 딸을


알아보는 듯했다.

“왔구나.”

그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속삭였다.

“네. 롭이 남부로 보내 서둘러 다녀왔어요.”

“남부라고? 에이레의 남부가 어디냐, 아가? 생각이 안 나는구나. 오,


얘야, 나는 두려워. 이 아비를 용서해 주겠니?”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진 용서받아야 할 일을 하신 적이 없으세요.”

캐틀린은 흘러내린 아버지의 흰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이마를 짚어


보았다. 마에스터가 백방으로 약을 쓰고 있었지만, 호스터는 아직도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그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최고의 선택이다. 존은 좋은 사람이야. 강하고, 친절하고…….
너를 잘 돌봐 줄 거야. 그리고 명문 귀족 출신이지. 내 말을 잘 듣거
라. 난 네 아비다, 네 아비. 캐티가 결혼하면 넌…….”

‘아버진 내가 리사인 줄 아시는구나.’

호스터의 손이 두려움에 떠는 두 마리의 하얀 새처럼 캐틀린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애송이, 미천한 녀석……. 그 녀석이라면 입 밖에도 내지 말아라.


네 어머니는…….”

호스터가 고통스러운 듯이 소리를 질렀다.

“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내 약을…….”

마에스터 바이만이 슬며시 다가와 그의 입술에 약병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호스터가 엄마 젖을 빠는 갓난아이처럼 우윳빛의 물약을 빨
아 마셨다. 그리고 다시금 평온해졌다.

“이제 잠이 드실 겁니다.”

바이만이 호스터의 입가에 묻은 하얀색 액체를 자신의 옷소매로 닦


아내며 말했다.

‘아버지는 강하고 당당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토록 쇠약해지다


니…….’

캐틀린은 약해진 아버지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테라스로 나


갔다. 성안은 피난민들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성벽 너머 강물은 여
전히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저 강은 아버지의 것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곧 마지막 여행을 위해


저리로 돌아가시겠지.’
바이만이 곧 뒤를 따라나왔다.

“스타크 부인, 영주님께선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세르 브린


덴께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도 영주님의 임종을 지켜 드리
고 싶으실 겁니다.”

“그래요.”

캐틀린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그리고 아린 부인께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직접 서신을 쓰신다면 혹시라도…….”

“몇 자 적어 보도록 하죠.”

캐틀린은 문득 ‘미천한 애송이’가 누구였을까 궁금했다. 젊은 종자였


거나 떠돌이 기사, 서출 출신의 종자가 아니라면 음유시인이었을지
도 몰랐다. 리사는 음유시인들을 유난히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리사를 나무랄 순 없지. 존 아린 경은 귀족이긴 했지만 아버


지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노인이었어.’

에드무레가 오랜만에 들른 캐틀린에게 내준 방은, 어린 시절 그녀가


리사와 함께 쓰던 방이었다. 캐틀린은 따뜻하게 불이 지펴진 화로와
폭신한 침대를 기대하며 방으로 향했다. 몸이 편해지면 세상이 덜 쓸
쓸해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편안한
휴식이 아니라, 어서라이데스와 회색 옷을 입은 두 여인이었다. 두 여
자는 모두 얼굴을 고깔로 가리고 눈만 내놓고 있었다.

“네드?”
캐틀린은 사일런트시스터들을 보고 무슨 일인지 직감했다. 어서라이
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 클레오스가 킹스랜딩에서 에다드 경의 유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죠?”

네드는 탁자 위에 눕힌 채 잿빛 다이어울프 문장이 수놓인 깃발에 덮


여 있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요.”

“뼈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사일런트시스터 중 하나가 네드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를 걷었다.

‘이건 뼈일 뿐이야. 네드가 아냐. 내가 사랑했던 남편도, 내 아이들의


아버지도 아니라고!’

네드는 가슴께에서 두 손을 모아 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고 생


동감 넘치던 그의 손은 이미 옛 모습을 잃은 채였다. 유골에는 네드가
평소 즐겨 입었던, 가슴에 다이어울프의 문장이 수놓인 회색 튜닉이
입혀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밤에 베개가 되어 주었던 가슴도, 안아
주던 팔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은색 철사로 몸통에 붙어 있는 두개골도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움푹 파인 눈구멍도 텅 비어 있었다. 때론
안개처럼 부드럽고, 때론 바위처럼 강하던 그의 회색 눈동자는 이제
다시 볼 수 없었다.

캐틀린은 돌아섰다.

“저건 내 남편의 검이 아니군요.”

“아이스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유골을 보내 준 것만으로도 세르세이에게 감사해야겠지.”

캐틀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사라면 티리온 경에게 해야 할 겁니다. 유골을 보내자고 했던 사


람이 그였답니다.”

‘언젠가는 그들 모두에게 감사해야 할 날이 올 테지.’

어서라이데스의 말을 씁쓸하게 되씹으며 캐틀린은 사일런트시스터


들에게 돌아섰다.

“이런 수고를 해주어서 감사해요. 하지만 또 한 번 더 수고해 줘야겠


어요. 에다드 경은 스타크 가문 사람이니 윈터펠에 안치되어야 해
요.”

‘사람들은 석상을 만들었겠지. 발치에 다이어울프를 앉히고, 무릎에


는 검을 올려놓고…….’

“어서라이데스, 시스터들에게 새 말을 준비해 주고 여행 경비를 마련


해 주세요. 그리고 할리스 몰렌에게 저들을 윈터펠까지 호위하도록
하세요. 그가 호위대장이니까요.”

캐틀린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물러들 가세요. 오늘밤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시스터들이 고개 숙여 절을 하고 방을 나갔다.

‘침묵의 여사제들은 살아 있는 사람에겐 말을 걸 수가 없어. 하지만


죽은 사람과는 얘기할 수 있다고 했지.’

캐틀린은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대너리스
마차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먼지와 열을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커
튼도 실망감까지 막아 주지는 못할 터였다. 대니는 맥이 쭉 빠져 마차
에 올랐다. 콰스인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서 빠져나온 것만으로
도 기뻤다.

“길을 비키시오. 어서!”

조고가 힘차게 채찍질을 하며 소리쳤다.

얼룩덜룩한 쿠션에 기대어 있던 자로 조안 닥소스가 비취와 황금으


로 만든 잔에 루비처럼 붉은 포도주를 쏟아 부었다. 그는 덜커덩거리
는 마차 안에서도 손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대니에게 잔을 건
넸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시군요. 잃어버린 꿈에 대한 슬픔인가요?”

“꿈은 그저 연기됐을 뿐이에요.”

목에 꽉 끼는 은목걸이 때문에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대니는 자수정


이 박힌 목걸이를 풀어 한쪽으로 내팽개쳤다. 자로가 ‘세상의 모든 독
으로부터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라는 말과 함께 준 목걸이였다. 그래
서인지 위험 인물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독을 보내기로 유명한
‘퓨어본’들도 대니에게만은 아직 아무런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나를 여왕으로 여기지 않아. 그저 한나절을 즐기기 위한


서커스단의 어릿광대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을걸. 신기한 애완동물을
가진 어릿광대 말이야.’

잔을 받으려고 팔을 뻗치는데, 라에갈이 콧김을 내뿜으며 검은 발톱


으로 대니의 맨어깨를 쿡쿡 찔렀다. 대니는 어깨를 움칫했다.

대니는 전형적인 콰스풍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녹색 실크드레스


에 한쪽 가슴을 내놓고, 은샌들을 신고, 허리에 진주 벨트를 둘렀다.
콰스인은 도트락인을 우습게 여긴다는 자로의 주의를 듣고 특별히
복장에 신경을 썼던 것이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차라리 다 벗은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대니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단숨에 잔을 비웠다.

고대 왕족의 후손이라는 ‘퓨어본’은 시빅가드와 갤리선 함대를 지배


하고 있었고, 대니는 그 함대가 필요했다. 전부가 아니라도 좋았다.
물론 병사들도 필요했다. 그래서 관습대로 기억의 신전에 산 제물을
바쳤고, 키퍼들에게 뇌물을 주었으며, 오프너에게는 감나무를 보냈
다. 전통에 따라 ‘푸른 실크 슬리피어’들은 대니를 수천 개의 왕좌가
있는 홀로 불러들였다.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왕좌는 콰
스의 전성기 때 모습을 그려 놓은 아치형의 높다란 천장을 뒤로하고,
대리석 바닥에 둥그렇게 놓여 있었다. 금칠을 한 뒤에 정교하게 조각
을 새겨 넣은 왕좌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왕좌 여기저기에 박힌
호박, 오닉스, 청동석, 비취 등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렸다. 하지
만 그 위에 앉은 퓨어본들은 세상만사가 귀찮은 듯 힘없이 늘어져 있
어 마치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내 얘길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 날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라구. 날 부른 건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겠지. 내 얘기보다는 내 어
깨에 앉은 드래곤에게 더 관심이 있었을 거야.’

그때 자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퓨어본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고 했기에 여왕님께서 이렇게 슬


퍼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내 의견에 반대했어요. 그것도 아주 공손하고 점잖게요. 하


지만 그들의 결론은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포도주 속의 석류에서 뜨거운 여름의 맛이 느껴졌다.


“그들의 비위 좀 맞추어 주었나요?”

“아뇨, 그건 부끄러운 짓이에요.”

“그럼 눈물을 흘리기는 하셨죠?”

“드래곤의 자손은 울지 않아요.”

대니의 단호한 대꾸에 자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왕님께선 눈물을 보이셔야 했어요.”

콰스인들은 자주 울음을 터뜨렸고, 그것을 문명인의 표시라 여겼다.

“그럼 우리가 매수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카토스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웬델로는 내게 말을 잘한다고 칭찬


하더군요. 엑스퀴지트,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반대하더니만 나
중에서야 찬성을 하더군요.”

“이런! 정말 신의가 없는 사람들이로구만.”

누구에게 얼마나 뇌물을 줘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 자로였


다.

“여왕님께선 눈물을 흘렸어야 합니다.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 방법이 최고인데…….”

퓨어본들에게 뇌물로 줬던 황금들, 차라리 그것들을 생각하면 눈물


이 날 성싶었다. 카토스 말라리안, 웬델로 카르 디스, 에곤 엑스퀴지
트에게 뇌물로 준 황금이면 배를 사거나 용병을 스무 명쯤 고용할 수
있었다.

“자로, 내가 저들에게 보냈던 것들을 되찾으려면 세르 조라를 보내야


할까요?”
“그건 한밤중에 ‘사로우풀맨’을 내 집으로 보내 여왕님 목을 베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로우풀맨’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자객 단체를 이르는 말


이었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정말 슬픈 일이오’라고 중얼거리기 때문
에 그렇게 불렸다. 콰스인들은 그야말로 예의 빼면 시체인 사람들인
것이었다.

“파로스의 돌젖소에서 우유를 짜내는 것이 퓨어본에게서 금을 뜯어


내는 것보다 쉽다는 격언이 있지요.”

대니는 파로스가 어디인지 몰랐지만, 콰스에는 온통 돌젖소투성이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를 누비고 다니며 막대한 부를 일궈낸 콰스의 상인들은 오래 전


부터 터를 닦아 온 ‘스파이서’, ‘투어말린 브라더후드’, 자로가 속한
‘서틴’, 이렇게 세 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패권을 다투면서
도 모두 퓨어본과 대적하고 있었다.

자로가 없었으면 대니는 낯선 콰스 땅에서 좌충우돌하며 헤매고 있


었을 것이다. 퓨어본들의 홀로 들어가기 위해 뿌려 댄 황금은 대부분
자로의 넓은 아량과 발빠른 재치로 얻어낸 산물이었다. 자로는 살아
있는 드래곤에 대한 소문을 확인하려고 몰려든 수많은 구경꾼들을
구슬려 드래곤의 어머니에게 선물을 하도록 손을 썼던 것이다. 상선
의 선장들은 미르에서 가져온 레이스나 이티의 향료, 아사이의 호박
과 드래곤글래스, 두둑한 돈 봉투, 은세공품 등을 가져왔고, 악사들은
드래곤의 어머니를 위해 음악을 연주했으며, 곡예사들은 재주를 넘
고, 마법사들은 마술을 보여 주었다. 조고스 느하이에서 온 어떤 부부
는 얼룩말을 선물했고, 한 과부는 남편의 시신을 은으로 도금한 나뭇
잎으로 장식해 가지고 왔다. 죽은 자의 몸, 특히 생전에 마법사였던
자의 몸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투어말
린 브라더후드들은 드래곤 세 마리가 장식된 왕관을 바쳤다. 머리를
각각 비취와 상아와 오닉스로 조각한 세 드래곤은 몸통은 황금, 날개
는 은으로 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선물 중에서 대니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왕관뿐


이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팔아 퓨어본들에게 줄 뇌물로 사용했다.
자로는 서틴들이 더 좋은 것으로 마련해 줄 터이니 왕관도 팔자고 했
지만 대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세리스 오빠는 어머니의 왕비관을 팔아 결국엔 ‘거지왕’으로 전락


했죠. 나는 이 왕관을 꼭 간직해서 사람들에게 여왕이라고 불릴 거예
요.”

왕관은 너무 무거워 잠시만 쓰고 있어도 고개가 뻣뻣해졌다. 하지만


그런 고통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왕관을 쓰고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거지 신세야. 세상에서 가장 호


화로운 거지……. 하지만 결국은 거지일 뿐이지.’

대니는 비세리스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하고 배를 채우


기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애원하고 아첨하며 살아온
시간들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끔찍했다.

‘오빠는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걸 분명히 알았던 거야. 그래서 조


금만 놀려도 무섭게 화를 냈던 거지. 그러다 결국엔 미쳐 버린 거고.
오빠처럼 한다면 나도 언젠가는 미치고 말 거야.’

대니는 자신의 칼라사르를 이끌고 바에스 톨로로로 가서 도시를 재


건하고 싶었다.

‘나는 이겨낼 수 있어. 나는 오빠가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가지고 있잖


아. 드래곤……. 드래곤들만 있으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어.’

대니는 라에갈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라에갈이 대니의 손


바닥에 놓인 먹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밖에서는 거대한 도시가 만들
어내는 수많은 잡음들이 한데 뭉쳐 굽이치는 바다의 파도소리를 만
들어내고 있었다.

“길을 비켜라. 드래곤의 어머니께서 가신다. 길을 비켜라.”

조고의 외침에 콰스인들은 한쪽으로 비켜섰지만, 그것은 드래곤의


어머니의 행차보다는 수레를 피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펄럭이는 커
튼 사이로 대니는 말 위에 걸터앉은 조고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대
니에게 받은 채찍으로 수레를 끄는 황소들을 가끔 한 번씩 가볍게 쳤
다. 아고는 수레와 나란히 말을 달리며 대니를 경호했고, 라카로는 행
렬의 맨 뒤에서 위험해 보이는 인물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조라는
지금 대니의 거처에 남아 나머지 드래곤들을 지키고 있었다. 조라는
처음부터 이번 일을 어리석은 짓이라며 반대했었다.

‘조라는 아무도 믿지 않지. 모두 좋은 뜻에서 날 도우려는 것인데도


말이야.’

대니는 천천히 잔을 들었다. 그러자 라에갈이 냄새를 맡더니 얼른 목


을 잡아 빼고는 콧김을 내뿜었다. 자로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쓱
핥았다.

“여왕님의 드래곤은 후각이 예민하군요. 이 포도주는 품질이 그리 좋


지 않죠. 제이드해(海) 너머에 최상급의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맛이 어찌나 좋은지 한번 맛보면 다른 포도주는 떨떠름한
식초만도 못하게 느껴진다더군요. 나중에 제 유람선을 타고 함께 가
보지요. 여왕님과 저, 단둘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좋은 포도주는 아보르산(産)이에요.”

대니는 우수르페르에 대항해 끝까지 아버지 편에 섰던 레드윈을 생


각하며 그렇게 단언했다. 그는 최후까지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충신
중 하나였다.

‘그가 나를 위해서도 싸워 줄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로, 나와 함께 아보르로 가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포도주를 맛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거기는 유람선이 아니라 군함을 타고 가
야 해요.”

“여왕님, 제게는 군함이 없습니다. 전쟁은 무역을 하는 데 전혀 도움


이 안 되니까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저, 자로 조안 닥소스
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황금을 사랑하겠지. 하지만 황금만 있으면 배와 무기


는 물론이고 내가 원하는 걸 모두 살 수 있어.’

“당신더러 검을 들고 싸우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내게 배만 빌려 주


면 돼요.”

자로가 점잖게 웃었다.

“상선이라면 몇 척 있긴 하지만, 그게 또 그렇습니다. 한 척은 이미


물에 가라앉고 있을지 모릅니다. 서머시에서 폭풍우라도 만났으면
이미 그러고도 남았을 거고, 또 다른 한 척은 폭풍우가 아니더라도 해
적선과 맞닥뜨렸을지 모릅니다. 그것말고 다른 것은 선장 녀석이 재
물에 눈이 멀어 ‘이건 내 거다’라고 선언하고 이미 줄행랑을 쳤을 수
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무역의 어려움입니다. 제 얘기가 길어
지면 길어질수록 제 배는 줄어들고 있는 겁니다. 저는 점점 빈털터리
가 되어 가는 것이고요.”

“제게 배를 주세요. 당신이 다시 부자가 되게 해드릴게요.”

“여왕님, 그보다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가슴속에서 항


해를 하세요. 아름다운 당신을 생각하면 저는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답니다.”
자로의 달콤한 유혹에 대니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행동이 말과 너
무나 딴판이었다. 조라는 대니가 수레에 올라타는 걸 돕는 내내 드러
난 가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지만, 자로는 무관심했었다. 심지어 좁
은 마차에 함께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가 저택에서 실
크 쪼가리를 몸에 걸친 아름다운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모습을
대니는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결국은 거절의 말이로군요.”

“여왕님께서 얘기했던 그 철제 의자는 생각만 해도 섬뜩합니다. 날카


로운 가시에 여왕님의 부드러운 살갗이 긁힐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
파 견딜 수가 없어요.”

자로는 코에 박아 넣은 보석들 때문에 현란하게 꾸민 광대처럼 보였


다.

“이곳을 여왕님의 왕국이라 생각하시고, 절 여왕님의 왕으로 세워 주


시죠. 여왕님께서 원한다면 전 부의 왕관을 씌워 드릴 수도 있습니다.
콰스가 싫증나면 이티로 여행을 갈 수도 있고,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환상의 도시를 찾아가 죽은 사람의 두개골에 담긴 지혜의 포도
주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아뇨, 난 킹스랜딩으로 항해를 떠날 거예요. 그리고 반역자의 두개


골에 담긴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겠어요.”

대니가 라에갈의 한쪽 눈 밑을 살짝 만져 주자, 녀석이 녹색 날개를


활짝 펴고 날갯짓을 했다. 자로의 볼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
다.

“그 무모한 생각에서 여왕님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진정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요?”

“없어요.”
대니는 자신의 의지를 목소리에 실어 담으려는 듯 힘주어 대답했다.

“만일 서틴들이 각자 배 열 척씩만 내게 빌려 준다면…….”

“그렇게 되면 여왕님은 130척의 배를 가질 수 있지만, 선원은 한 사


람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콰스의 남자들에게 여왕님의 사연은 아무
런 의미가 없거든요. 이곳 선원들이 세상 저 편에 있는 어떤 나라의
왕좌에 누가 앉는가를 신경 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럼 신경 쓸 수 있을 만큼 보수를 지불하죠.”

“무슨 돈으로요? 제 사랑의 대가로요?”

“구경꾼들이 가져오는 황금으로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왕님은 제가 얘기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주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온 콰스가 저의 쓸
데없는 관용을 비웃게 되겠죠.”

“서틴이 날 도와 주지 않겠다면, 나는 스파이서나 브라더후드에게 도


움을 청하겠어요.”

자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람들은 온갖 감언이설로 겉치레만 할 뿐 아무것도 주지 못할


겁니다. 스파이서들은 위선자에 허풍쟁이들이고, 브라더후드는 죄다
도둑놈들입니다.”

“그렇다면 피야트 프리 말대로 마법사에게나 가야겠군요.”

그러자 자로가 벌떡 일어났다.

“피야트 프리는 푸른 입술을 가진 남자입니다. 푸른 입술은 거짓말밖


에 할 줄 모른다는 말이 있죠. 여왕님, 여왕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
을 들으세요. 마법사란 것들은 먼지나 먹고 어둠이나 들이켜는 몹쓸
존재들입니다. 그자들이 여왕님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나의 친구 자로 조안 닥소스께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준다면,


내가 구태여 마법사를 찾을 필요가 없지요.”

“저는 이미 여왕님에게 제 집과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게 여왕님에게


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건가요? 저는 여왕님께 향수와 석류, 발리
리아산(産) 족자, 신상의 머리까지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왕님
께 상아와 금으로 만든 수레를 내주었고, 그에 어울리게 상아처럼 희
고 흑옥처럼 검은 황소 두 마리를 뿔에 보석까지 박아 주었습니다.”

“예, 그래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배와 군사들이에요.”

“제가 여왕님께 군사를 주지 않았습니까? 번뜩이는 갑옷을 입은 1천


명의 기사를 드렸잖습니까.”

자로는 대니에게 새끼손가락만한 장난감 기사단을 선물했었다. 금과


은 갑옷을 입은 그 장난감 기사들은 비취와 호박, 녹주석, 오팔, 자수
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랬죠. 1천 명의 귀여운 기사들. 하지만 그 기사들은 내 적들이 무


서워할 타입이 아니에요. 그리고 황소들도 날 바다 건너로 실어다 주
지는 못하고요.”

그때 갑자기 황소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니, 왜 수레가 멈추려는 거죠?”

“칼리시!”

덜컥 하고 수레가 멈추자 아고가 대니를 불렀다. 대니는 팔꿈치로 창


틀을 짚고 밖을 내다보았다. 수레는 시장 언저리쯤에 와 있었는데, 길
앞쪽이 사람들로 꽉 막혀 있었다.
“저들이 뭘 구경하는 거죠?”

조고가 말을 돌려 대니에게 다가왔다.

“불마법사입니다, 칼리시.”

“보고 싶어요.”

“그러시지요.”

조고가 대니를 말 위로 끌어올려, 사람들 머리 위로 볼 수 있도록 자


기 앞자리에 앉혀 주었다. 오렌지빛 불길에 휩싸인 사다리가 탁탁 소
리를 내며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스멀대는 불꽃이 격자무늬 지
붕 끝에 가 닿았다.

구경꾼들은 대부분 이곳 사람들이 아니라, 타지(他地)에서 온 선원


들, 캐러밴의 상인들, 레드웨이스트에서 온 먼지투성이 떠돌이들, 어
슬렁거리는 병사, 직공, 노예들이었다. 조고가 한 팔로 대니의 허리를
감싸고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콰스인들은 불마법사를 꺼리지요. 칼리시, 저기 펠트 모자를 쓴 여


자가 보이십니까? 저기 뚱뚱한 사제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소매치기로군요.”

대니는 불마법 따위에 현혹되지 않았다. 반역자의 칼날을 피해 비세


리스와 도망다니던 시절, 자유도시의 거리에서 소매치기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던 것이다.

마법사는 두 팔을 점점 넓게 펼치며 불꽃을 더 높이 일으키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목을 길게 빼고 불꽃에 넋을 잃은 사이, 손바닥에 작은 면
도칼을 감춘 소매치기들이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불사다리가 사람들 어깨 높이까지 오르자, 마법사는 껑충 뛰어 원숭
이처럼 재빠르게 사다리를 기어올라갔다. 사다리는 그의 손이 닿는
대로 회색 연기를 남기며 한 칸씩 사라졌다. 마침내 그가 사다리 끝에
다다르자 사다리가 완전히 없어지더니 마법사마저 사라졌다.

“훌륭한 속임수군.”

조고가 감탄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 말에 반박했다.

“속임수가 아니에요.”

대니는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여자를 한참 만에야 알아보았다. 냉혹해


보이는 붉은 마스크 뒤에서 한 여자가 눈물 젖은 눈을 빛내며 서 있었
다.

“무슨 말씀이죠, 부인?”

“반 년 전만 하더라도 저 사람은 드래곤글래스로 불을 일으키지도 못


했습니다. 그저 소매치기들이 돈을 훔칠 수 있도록 구경꾼들을 모아
놓고 화약과 도깨비불 같은 것을 써서 보잘것없는 재주나 부리는 정
도였죠. 하지만 저 마법사는 어부가 전설의 크라켄을 잡기를 원하는
심정보다 더 열렬히 불타는 사다리에 오르고 싶어했습니다.”

대니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사다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연기


마저 사라지고 구경꾼들도 모두 제 볼일을 보러 흩어졌다. 잠시 후면
몇몇 사람들이 자기 지갑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
었다.

“그런데 지금은요?”

“하루가 다르게 능력이 커지고 있지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


니다.”

“나 때문이라구요? 어째서요?”
대니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드래곤의 어머니입니다. 아닌가요?”

여자가 대니에게 가까이 다가와 대니의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올려


놓았다. 그러자 조고가 채찍 손잡이로 여자의 손가락을 탁 쳤다.

“네 말대로 이분은 드래곤의 어머니시다. 그러니 어둠의 자식들은 손


을 댈 수 없다.”

여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어서 이 도시를 떠나셔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여기를 떠


나지 못할 겁니다.”

대니는 여자가 만졌던 손목 부위가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죠?”

“남쪽을 여행해 북쪽으로 가십시오. 동쪽을 지나 서쪽으로 가십시오.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가셔야 합니다. 어둠을 거친 후에 밝은 곳으
로 가셔야 합니다.”

‘아사이로 가라는 말이구나.’

대니는 여자의 말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사이에서 내게 군대를 내줄까요? 아니면 황금은 얻을 수는 있을


까요? 배는요? 콰스에서는 찾지 못했지만 아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실입니다.”

마스크를 쓴 여자가 공손히 절을 하더니 군중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


렸다.
이 모든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라카로가 검은 콧수염 사이로 경멸
에 차서 코방귀를 뀌었다.

“칼리시, 태양 앞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어둠의 자식을 믿느니 차


라리 전갈을 삼키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맞습니다.”

아고도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자로가 푹신한 쿠션에 기대고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대니가 다


시 수레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왕님의 난폭한 호위병들이 보기보다는 현명하군요. 아사이에 가


더라도 여왕님께서 바라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는 대니에게 포도주를 또 한 잔 건넨 뒤 돌아오는 내내 사랑과 아름


다운 미래에 대해 속삭였다.

대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자 콰스풍의 화려한 의상을 벗고 헐렁


한 자줏빛 실크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드래곤들의 저녁식사를
위해 뱀을 잘게 썰어 화로에 구웠다. 드래곤들이 까맣게 탄 고기를 서
로 먼저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많이 자랐어. 바에스 톨로로에 있을 때보다 몸집이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아.’

하지만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 정도로 크려면 앞


으로도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얘들을 잘 훈련시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대니는 아직 드래곤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지 몰랐다. 해
질녘쯤 조라가 대니를 찾아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퓨어본들을 만난 일은 잘 됐습니까?”

“조라, 당신 말대로예요. 이리 와서 내게 얘기 좀 해주세요.”

대니는 조라를 자기 옆자리로 잡아끌었다. 이퀴가 자줏빛 올리브와


포도주에 절인 양파를 내왔다.

“여왕님, 이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겁니다.”

조라가 양파를 하나 집으며 말을 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런 확신이 듭니다. 퓨어본들은 콰스의 성벽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로는…….”

“그가 내게 청혼했어요.”

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검고 숱이 많은 눈썹이 움푹 파인 눈 위에서


서로 달라붙었다.

“그 이유를 알 만합니다.”

“그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내 꿈을 꾼대요.”

대니는 피식 웃었다.

“여왕님, 제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여왕님의 드래곤들입니다.”

“나도 그 점이 의심스러웠지만 자로 말이, 콰스에서는 결혼을 하더라


도 남녀가 각자 자신의 것을 계속 간직할 수 있대요. 그러니 결혼을
하더라도 드래곤은 내 것이죠.”
대니는 날개를 퍼덕이며 대리석 바닥을 껑충껑충 뛰어 자기 옆자리
로 오는 드로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여왕님, 자로의 말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빠뜨렸어요. 콰스인들에게는 유별난 결혼 풍습이 하나 있는
데, 첫날밤에 서로에게 사랑의 징표를 하나씩 요구하도록 되어 있습
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두 사람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합니다. 오직 한 가지뿐이고, 절대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라고요? 거절해서는 안 되고요?”

“자로는 드래곤 하나만 있으면 이 도시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거기


에 비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배 한 척 정도뿐입니다.”

대니는 양파를 씹으며 신용 없는 남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퓨어본들의 홀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지나다가 한 여자를 만났


어요.”

대니는 불마법사와 불사다리, 붉은 마스크를 쓴 여자가 했던 말을 모


두 조라에게 이야기했다.

“여왕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사이로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럼 어디로요?”

“동쪽으로 가겠습니다.”

“여기도 세븐킹덤에서 지구 반 바퀴나 떨어져 있는걸요. 여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난 내 고향으로 절대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지금 서쪽으로 가신다면 목숨을 내놓으셔야 합니다.”


“타르가르옌 왕가는 자유도시에 친구들이 있어요. 자로나 퓨어본보
다 진실된 친구들이죠.”

“일리리오 파티스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유감이군요. 그는 황금만 얻


을 수 있다면 여왕님을 순식간에 노예로 팔아 버릴 자입니다.”

“오빠와 나는 일리리오의 집에서 반년이나 손님으로 지냈는걸요. 우


리를 팔아 넘길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 팔았을 거예요.”

“그자는 여왕님을 팔았습니다. 칼 드로고에게요.”

대니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말이 사실이긴 했지만, 그렇게 콕 집어


얘길 하니 기분이 언짢았다.

“일리리오는 반역자의 칼날에서 우리를 지켜 주었어요. 그리고 오빠


의 말도 믿어 주었고요.”

“일리리오는 자기 자신밖에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루톤들은 거의


도둑놈들이고, 마지스터들은 꽉 막힌 사람들이죠. 일리리오는 양쪽
에 다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있습니
까?”

“그 사람이 내게 드래곤 알을 주었죠.”

“알들이 부화할 줄 알았다면 그자는 자기가 직접 알을 품었을 겁니


다.”

대니는 비아냥거리는 조라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세르 조라, 내 생각은 달라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일리리


오를 더 잘 알아요. 그의 저택에서 보호받으며 살 때, 난 어렸지만 장
님도 귀머거리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젠 어리지도 않고요.”

조라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퉁명스레 말했다.


“일리리오가 여왕님이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왕
님을 옹립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비세리스 왕자님에게 해줬던 것 이
상은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부자예요. 자로만큼은 아니지만, 아마도 전함과 병사들을 사줄


만큼은 될 거예요.”

“용병들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지요. 그렇지만 그들도 여왕님이 아버


님의 왕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지는 못할 겁니다. 킹스랜딩에서 여
왕님을 원조할 영주도 없구요.”

“난 그들의 정당한 여왕이에요.”

“하지만 여왕님은 그들의 언어조차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한낱 이방


인에 불과합니다. 세븐킹덤의 영주들은 여왕님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들이 여왕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거죠. 여왕님은
세븐킹덤 땅에 발을 내딛기 전에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할 겁니다.”

“그럼 당신 말대로 동쪽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조라가 올리브 열매를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손바닥에 씨를


뱉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여왕님. 하지만 여왕님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록 적들에게 쉽게 발견될 겁니다. 타르가르옌은 아직도 그들에게
두려운 이름이니까요. 저들은 여왕님께서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자
바로 자객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드래곤들과 같이 있다는 걸 알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요?”

대니의 품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드로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하


루 종일 놓여 있던 바위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라에갈과 비세리온은
아직도 고기 조각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치고 받고
있었다.
‘나의 사나운 아이들……. 얘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혜성이 나를 콰스로 이끈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나는


여기서 군대를 얻길 바랐지만,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요. 그럼
이곳에서 바랄 것은 무얼까요?”

‘난 지금 떨고 있어. 바보처럼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지만…… 용감해


져야 해.’

“조라, 내일 봐요. 당신은 내일 피야트 프리에게 가야 할 거예요.”

티리온

미르셀라는 울지 않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세븐킹덤의 공주였고, 티


리온이 항상 말하듯 세르세이의 피만큼이나 자이메의 피도 섞인 라
니스터 가문의 딸이었으니까. 그래도 오빠와 남동생이 작별인사를
하고 시스위프트 호에서 내릴 때는 웃음이 희미하게 떨리긴 했다. 하
지만 끝까지 의연함은 잃지 않았다. 오히려 울음을 터뜨린 사람은 토
멘 왕자였다.

티리온은 노가 4백 개나 달린 거대한 전투용 갤리선, 해머 호의 갑판


에서 조카들의 이별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잡이들에게는 ‘로
버트 왕의 해머’라 불리는 그 배는 미르셀라의 여행에 가장 든든한 호
위대가 될 것이었다. 라이언스타, 볼드윈드, 리안나 호도 해머 호와
함께 시스위프트 호를 호위하게 되었다.

스타니스가 드래곤스톤으로 떠나면서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버린 탓


에 지금 킹스랜딩에는 함선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많은 배를 떠나보낸다는 사실이 티리온으로서는 적잖이 불안
했지만, 세르세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쩌면 세르세이가 현명한
것인지도 몰랐다. 만에 하나 미르셀라가 선스피어에 도착하기 전에
적들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마르텔 가문과의 동맹은 물 건너간 일
이 되어 버릴 테니까.
티리온은 목청을 가다듬고 크게 소리쳤다.

“내가 한 명령을 기억하고 있겠지, 선장?”

“네. 우리는 크랙클로우에 도착할 때까지 해안을 따라 항해할 것이


고, 브라보스를 향해 해협을 통과할 겁니다. 절대 드래곤스톤에서 눈
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항해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적들의 눈에 띄는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배가 한 척이면 그 자리에서 박살을 낼 것이고, 그 이상이면 볼드윈


드 호가 시스위프트 호를 호위해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나머
지 함선들과 함께 전투를 벌일 겁니다.”

티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적함의 추격을


따돌려야 했기 때문에, 선체가 작고 돛이 커다래 그 어떤 전함보다도
속도가 빠른 시스위프트 호에 미르셀라를 태우게 되었다. 브라보스
까지만 무사히 도착하면 미르셀라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셈
이었다. 티리온은 특별히 아리스 오크하트를 미르셀라에게 딸려 보
냈고, 브라보스인들을 고용해 선스피어로 가는 나머지 여정을 책임
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무서울 게 없는 스타니스라도 자유도
시 중 가장 세력이 막강한 브라보스는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브라보스를 통과해 도르네로 가는 길은 멀리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티리온이 생각하기에 그 길이 가장 안전했다.

티리온은 고깃배 한 척 떠 있지 않은 드넓은 초록색 수평선를 보며 마


음을 놓았다. 지난번 보고에 의하면, 스타니스의 함대는 아직도 스톰
엔드에서 코트나이 펜로즈와 맞서고 있다고 했다. 그 동안 윈치타워
는 4분의 3 가량 완성된 상태였다. 지금도 인부들은 축제 때도 일을
시킨 티리온을 원망하며 돌을 쌓고 있을 터였다.

‘원망하고 싶으면 하라지, 뭐. 2주만 더 있으면……. 스타니스 경, 내


게 필요한 시간은 단 2주야. 그땐 모든 것이 끝나지.’
티리온은 이번 항해를 축복받기 위해 하이셉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미르셀라를 지켜보았다. 햇빛이 크리스털 공주관에 모였다가
미르셀라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무지개가 되어 쏟아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셉톤의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티리온은 신들
이 청력이 좋기를 희망했다. 뚱뚱한 하이셉톤은 피세르보다 더 거만
하고 쓸데없이 말이 길었다.

‘됐어, 늙은이. 이제 그만 좀 하지. 신들도 당신 얘기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구.’

티리온은 짜증이 났다.

마침내 지루한 기도가 끝났고, 티리온은 해머 호의 선장에게 작별인


사를 했다.

“내 조카딸을 안전하게 브라보스에 데려다 주길 바라네. 그렇게만 한


다면 기사 작위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티리온이 해머 호를 내려와 부두로 향하는 동안 곱지 않은 시선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배가 강물에 부드럽게 출렁였고, 그 때문에 뒤뚱거
리는 티리온의 걸음새는 평소보다 훨씬 볼썽사나웠다.

‘나를 보며 속으로 낄낄거리고들 있겠지.’

소리내 웃는 사람은 없었지만, 갑판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출렁이는


강물소리에 섞여 사람들의 비웃음이 전해 오는 듯했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하긴 당연한 일이지. 나는 잘 먹어 기


름기가 줄줄 흐르는데, 저들은 지금 한참 굶주리고 있으니까.’

티리온은 브론의 호위를 받으며 군중 사이를 지나 누나와 조카들에


게 합류했다. 세르세이가 동생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사촌인
란셀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누나, 난 누나의 비밀을 알고 있어. 어쩌면 누나가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비밀인지도 모르지만…….’

티리온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란셀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세르세


이는 바엘로의 셉트를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후 수수한 갈색 외투를
걸치고 케틀블랙 삼형제를 만나기 위해 몰래 성을 빠져나간 적이 있
었다. 그날 란셀은 티리온에게 그들 삼형제에 대한 얘기와 세르세이
가 그들을 이용해 병사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었다.

‘혼자 은밀히 즐기라고 하지, 뭐. 누나는 자기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할


때에만 내게 친절하니까.’

티리온은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누나를 바라보았다. 케틀블랙 형제


들은 지금 온갖 감언이설과 호언장담으로 세르세이를 속이며 주머니
를 두둑이 채우고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왕대비에게 받은 액수를 브
론에게서도 똑같이 받고 있었으니까. 세 형제는 전투보다는 사기에
훨씬 능했다. 결국 세르세이는 속 빈 수레를 세 개나 사느라 정성을
쏟아 붓고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소리는 요란했지만 실속은 전혀 없
었다.

티리온은 그 생각만 하면 한없이 즐거웠다.

라이언스타 호가 리안나 호와 시스위프트 호에게 길을 내주며 강 아


래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강둑을
따라 모여 있던 군중 속에서 작은 환호성이 터졌고, 갑판에 있던 미르
셀라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르셀라 뒤로 아리스가 흰색
망토를 날리며 서 있었다.

밧줄을 내리라는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노잡이들이 힘차게 노를


젖기 시작했고, 시스위프트 호는 천천히 블랙워터 강의 급류로 나아
갔다. 돛이 바람을 받아 팽팽해졌다. 티리온이 주장한 대로 돛은 주홍
색 대신 평범한 흰색이었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토멘이 훌쩍였다.

“너는 언제까지 젖먹이 애처럼 앵앵거릴 거니? 왕자는 우는 게 아


냐.”

조프리 왕이 한심하다는 듯 동생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산


사가 토멘을 두둔하고 나섰다.

“드래곤나이트였던 아에몬 왕자도 나에리스 공주가 아에곤 왕과 결


혼하는 날에 울었대요. 그리고 쌍둥이 기사, 세르 에릭과 아릭 형제도
결투를 벌이다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죽어갈 때 눈물이 볼을 타
고 흘러내렸다고 했어요.”

“조용히 해! 그렇지 않으면 세르 메린을 시켜 네 눈에서도 눈물이 흐


르게 해줄 테니까.”

티리온은 조프리의 냉혹한 말을 들으며 누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하


지만 세르세이는 바론 스완의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프리의 성격을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누


나가 그 정도로 둔했었나?’

강에서는 볼드윈드 호가 시스위프트 호의 뒤를 따라 노를 저어 바다


로 나아가고 있었다. 왕실 전함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해머 호가 가장
뒤에 있었다. 티리온은 바리스의 의견에 따라 신중을 기해 선장과 선
원들을 뽑았지만, 바리스라는 인간 자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나는 바리스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어. 내 사람이 필요해. 물론 완전


히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야.’

요즘처럼 혼란한 시기에 신뢰와 믿음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재앙일


뿐이었다.
티리온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리틀핑거에게로 향했다. 그는 비터브리
지로 떠난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지만, 큰일이라면 큰일일 수도 있었다. 바리스조차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아낸 바가 없었다. 어쩌면 불행한 일을 당했을지
도 모르겠다는 얘기까지 했지만, 티리온은 그 말에 코방귀를 뀌었다.

‘만일 리틀핑거가 죽었으면 내가 킹스랜딩의 거인이 됐겠지.’

어쩌면 티렐 가문에서 조프리와의 결혼을 주저하는지도 몰랐다. 하


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내가 메이스 티렐이라도 조프리의 손에 딸을 맡기느니 조프리의 머


리에 대못을 박는 편을 택할 거야.’

세르세이가 왕궁으로 돌아가길 명령했을 때는 시스위프트 호가 바다


로 한참 나아간 후였다.

브론이 말을 끌고 와 티리온 앞에 대령했다. 그것은 포드릭의 임무였


지만, 어린 소년보다는 험상궂은 기사가 훨씬 위압적일 거란 생각에
미리 조치를 해놓은 터였다.

시티워치 대원들이 창을 들고 일렬로 늘어서서 밀려드는 군중들을


막았다. 제이슬린이 검은색 갑옷 위에 황금색 망토를 두른 기마대를
V자 형으로 이끌며 길을 내자, 아론 산타가르와 바론 스완이 각각 라
니스터 가문과 바라테온 가문의 깃발을 들고 앞서 나갔다. 그들 뒤로
황금관을 쓴 조프리가 키 큰 회색 말을 몰았고, 그 옆에는 밤색 말을
탄 산사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고 말을 달리고 있었
다. 산사의 숱 많은 적갈색 머리칼이 그물 모양의 머리장식 아래로 어
깨까지 굽이치고 있었다. 킹스가드인 산도르와 만돈 무레가 그 두 사
람을 양옆에서 호위했다. 뒤로는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토멘 왕자가
프레스톤의 호위를 받으며 행진했고, 란셀을 대동한 세르세이가 메
린과 보로스의 호위를 받으며 토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티리온은
세르세이와 함께였다. 가마를 탄 하이셉톤과 호라스, 탄다 부인과 그
딸들, 잘라바 호, 길레스가 귀족들로는 가장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는
병사들의 무리가 이어졌다. 그들의 뒤통수에더럽고 궁상맞은 군중의
원한에 사무친 시선이 따라왔다.

‘이런 상황이 정말 싫어.’

티리온은 마음이 무거웠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군중 속에 병사 스


무 명을 심어 놓았지만, 일이 터지면 그것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세르세이도 케틀블랙 형제들을 시켜 사병들을 몰래 풀어
놨을 터이지만 상황은 매한가지일 것이었다. 센 불길에 건포도를 몇
개 더 넣는다고 푸딩이 타는 걸 막을 수 있겠는가.

일행은 생선 시장과 진흙길을 지나고 좁고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 아


에곤 언덕으로 올라갔다. 군중 속에서 ‘조프리 왕 만세!’라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사람들 수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소리였다. 누더기를 걸
친 굶주린 백성들의 따가운 눈총은 내내 그들 뒤통수를 따르고 있었
다.

주위를 둘러싼 불안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세르


세이는 아주 유쾌해 보였다. 티리온은 그것이 항상 강한 척하려는 누
나의 영웅심리임을 잘 알았다.

언덕을 반쯤 올랐을까, 웬 여자가 죽은 아이의 시체를 머리에 이고 흐


느껴 울면서 두 병사를 제치고 왕 앞으로 달려나왔다. 시퍼렇게 부은
시체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여자의 눈
빛이었다. 조프리가 여자를 짓밟고 지나가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그때 산사가 몸을 기울이고 뭐라 속삭였다. 조프리
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화를 참으며 지갑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여
자에게 던졌다. 은화가 시체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군중 속으로 굴
러 들어갔다. 서로 줍겠다고 열댓 명이 몸싸움을 벌였지만, 정작 여자
는 눈 하나도 꿈쩍하지 않았다. 여자의 앙상한 팔이 시체 무게 때문에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내버려두세요, 전하. 저 여자는 우리가 도와 줄 수 없어요.”

세르세이가 안 되겠는지 왕에게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것!”

그 말에 무표정했던 여자의 얼굴에 역겨운 기색이 떠올랐다.

“더러운 년! 제 오빠와 붙어먹은 년!”

여자가 세르세이를 향해 팔을 쭉 뻗자, 아이의 시체가 밀가루 포대처


럼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제 오빠와 붙어먹은 년! 더러운 년! 창녀!”

티리온은 산사의 가뿐 숨소리와 조프리의 욕설을 들으며 고개를 돌


렸다.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지만, 조프리가 볼에 묻은 짙은 갈색의
오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머리에는 더 큰 덩어리가 얹혀 있었
다. 산사의 다리에도 약간 튄 듯했다.

“어느 자식이 던졌지!”

조프리가 머리 위의 오물을 떨어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곱살한 얼


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이걸 던진 놈을 찾아! 그놈을 찾아오는 자에게 금화 백 냥을 주겠


다!”

“저기에 있습니다.”

누군가 건물 지붕을 가리켰다. 조프리는 지붕과 발코니를 살펴보기


위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고,
떠밀고,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제발 전하, 그자를 그냥 보내세요.”

조프리는 산사의 간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외쳤다.

“내게 오물을 던진 놈은 내 몸에 묻은 오물을 깨끗이 핥아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어. 산도르, 가서 놈을 끌고 와!”

산도르가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지붕은 고사하고 인파를 뚫고 지나


가는 것조차 수월치 않았다. 앞쪽 사람들은 산도르를 피해 물러나려
고 몸부림을 쳤지만, 뒤쪽에서는 무슨 일인가 구경하기 위해 앞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티리온은 뭔가 큰 일이 벌어지리라는 불길한 예감
에 잔뜩 긴장했다.

“산도르, 돌아오게. 범인은 이미 오래 전에 도망쳤어.”

“아니, 난 그자를 원해!”

조프리가 범인이 있던 지붕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자는 저 위에 있어! 산도르, 길을 막는 자들을 칼로 베고 그자를


데려…….”

갑작스런 소란이 왕의 마지막 말을 삼켜 버렸다. 분노, 두려움, 증오


가 섞인 함성이 사방에서 일제히 터졌다.

“개새끼!”

“천하의 몹쓸 놈!”

“창녀!”

“제 오빠와 붙어먹은 년!”

“난쟁이! 악마!”
군중의 분노는 조프리는 물론이고 세르세이, 티리온에게까지 폭발했
다. 욕설과 함께 ‘늑대 왕 만세!’, ‘스타니스 왕 만세!’, 심지어 ‘렌리
왕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병사들을 밀치고 앞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머리 위로 돌멩이, 쓰레기, 오물 등이 날아다녔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줘!”

“빵! 우리는 빵을 원한다, 나쁜 놈들!”

순식간에 조프리니 롭이니 스타니스니 하는 이름들은 모두 잊혀지


고, 여기저기서 일제히 빵을 달라는 외침뿐이었다.

“빵!”

“빵, 빵!”

티리온은 세르세이에게 급히 다가갔다.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금 당장.”

세르세이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고, 란셀이 검을 뽑아들었다. 행렬을


이끌고 있는 제이슬린이 ‘출발’을 호령하자, 시티워치들이 창을 앞으
로 내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조프리는 병사들의 울타리를 뚫고 들어
온 군중의 손길을 피해 여러 번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누군가 조프리
의 다리를 잡았지만 잠깐뿐이었다. 만돈이 검으로 손목을 내려쳤던
것이다.

“달려라!”

티리온은 조프리 말의 엉덩이를 세차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말이 뒷


발을 들고 히힝거리더니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갔고, 그 기세에 놀라
사람들이 흩어졌다.
티리온은 재빨리 조프리의 말을 따라갔다. 브론도 검을 높이 들고 티
리온을 바짝 따라왔다. 커다란 돌이 티리온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썩
은 양배추가 만돈의 방패에 날아와 부딪혔다. 폭도로 변한 군중에게
떠밀려 시티워치의 병사들은 바닥에 쓰러지고 발에 밟혔다. 왕을 호
위하던 산도르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더니, 아론 산타가르가 안장에
서 끌려 내려오고 바라테온의 깃발이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이 보였
다. 바론 스완이 검을 빼들기 위해 라니스터의 깃발을 던져 버렸다.
그가 휘두르는 검에 깃발이 조각조각 잘려 붉게 물든 단풍잎처럼 바
람에 흩날렸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린애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조프리의 말발굽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티리온 옆에서 말을 달리는
조프리의 얼굴은 창백했고, 왕을 호위하는 만돈 역시 공포에 질려 있
었다.

성의 망루가 보이고 얼마 안 돼, 성문 앞에 한 줄로 늘어선 창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 선 제이슬린의 외침에 따라, 경비병들은 왕 일
행이 지나갈 수 있도록 양쪽으로 갈라졌다.

티리온은 어떻게 말에서 내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세르세이, 토


멘, 란셀이 메린과 보로스의 호위를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만돈은 덜덜 떨고 있는 왕을 말에서 내려 주었다. 보로스의 칼날에 피
가 묻어 있었고, 메린의 망토는 뒤쪽이 찢겨 있었다. 바론 스완의 말
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입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광장에 떨어뜨리고 온
딸 걱정에 반쯤 미친 탄다 부인을 호라스가 부축하고 들어왔다. 평소
보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 길레스가, 하이셉톤이 가마에서 떨어져
군중에게 돌팔매질을 맞으면서 새된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더듬더듬 얘기했다. 그러자 잘라바 호가 프레스톤이 하이셉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티리온은 괜찮냐고 묻는 마에스터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프리에게 달


려갔다. 오물이 묻은 왕관을 비스듬하게 쓰고 있는 왕은 잔뜩 흥분해
서 분노를 토하고 있었다.

“……반역자들, 전부 목을 베어 버리겠어! 내가…….”


티리온의 손이 조프리의 뺨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왕관이 쨍그랑거
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멍청한 자식!”

티리온은 조프리를 뒤로 확 밀었다.

“왜, 왜 이래요! 저들은 반역자라구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날


공격하는 걸 봤잖아요!”

조프리가 벌렁 뒤로 넘어진 채 꽥꽥 소리를 질렀다.

“산도르를 앞세우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산도르가 자기들의 팔다리를 베는데 순한 양처럼 가만히 무릎이라도
꿇고 있을 줄 알았어! 어쩌면 그렇게 모자랄 수 있지! 산도르는 네가
죽인 거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너 때문에 죽을지는 신만
이 아실 거야. 그런데도 너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다
니, 제길!”

티리온은 화를 참지 못하고 조프리를 발로 뻥 찼다. 맘 같아서는 몇


대 더 차고 싶었지만, 만돈이 앞을 가로막고 서는 바람에 거기서 멈췄
다. 브론도 달려와 티리온의 팔을 잡았다. 그 사이 세르세이가 아들
옆에 와 앉으며 동생을 노려보았다.

티리온이 브론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밖에 남아 있는 사람이 몇이지?”

“내 딸이 남아 있어요. 제발 누가 가서 롤리스를…….”

울부짖는 탄다 부인은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보였다. 보로스가 착


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르 프레스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론 산타가르도 그렇구
요.”

“유모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유모란 티렉 라니스터의 별명이었다.

티리온은 뜰을 휙 둘러보았다.

“산사는 어디 있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조프리가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내 옆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모르겠어요.”

티리온은 뭉툭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산사가 해라


도 당한다면, 자이메는 죽은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르 만돈, 자네가 산사의 방패막이 임무를 맡지 않았었나?”

만돈이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폭도들이 세르 산도르를 덮칠 때 저는 전하를 생각했습니다.”

“옳은 행동이에요. 보로스, 메린, 다시 가서 산사를 찾아와요.”

세르세이가 끼여들었다.

“그리고 내 딸도요. 제발, 세르…….”

탄다 부인이 흐느꼈다. 보로스는 다시 그 위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는 사실이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왕대비님, 저희가 입은 흰색 망토를 보면 폭도들이 더욱 포악해질
겁니다.”

티리온은 뻔뻔한 보로스의 태도에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두려우면 망토를 벗어 던져 버리면 되잖소! 그 빌어먹을 망


토를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고, 당장 가서 산사 스타크를 찾아오시
오! 그렇지 안으면 샤가가 당신의 그 못생긴 머리를 두 쪽 내어 안에
까만색 푸딩말고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게 될 거요.”

보로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뭐라고!”

그가 쥐고 있던 피 묻은 검을 들어올렸다. 순간 브론이 티리온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세르세이가 고함을 질렀다.

“둘 다 그만둬요! 그리고 보로스, 티리온이 시킨 대로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 망토를 입을 만한 사람을 다시 찾아보겠어요. 당신
은…….”

“어, 저기 산사가 오네!”

조프리의 외침에 모든 시선이 성문으로 모아졌다. 산사는 산도르 뒤


에서 그 허리를 꼭 잡고 말에 앉아 있었다.

“산사! 다친 데는 없니?”

티리온은 반가운 마음에 산사에게 달려갔다. 산사의 머리에서 눈썹


을 따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폭도들이, 폭도들이 마구 던졌어요. 돌멩이, 쓰레기……. 그들에게


줄 빵이 없다는 걸 얘기하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어요. 그때 산도르가 와서 그 사람을 주, 죽였어요.”
산도르가 산사를 번쩍 안아 땅으로 내려놓았다. 그의 하얀색 망토는
여기저기 찢기고 핏물이 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왼쪽 소매에서는 아
직까지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산사 아가씨가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얼른 방으로 모시고 가서 상


처를 치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마에스터 프렌켄이 황급히 앞으로 달려나왔다. 산도르가 이


야기를 계속했다.

“세르 아론도 당했습니다. 사내 넷이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돌로 머


리를 짓이겼습니다. 제가 그 중 한 놈을 죽였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탄다 부인이 산도르에게 허겁지겁 달려갔다.

“내 딸은…….”

“따님은 못 봤습니다.”

산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뜰을 둘러보았다.

“제 말은 어디 갔습니까? 만약에 그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누군


가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티리온은 기가 막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한동안 우리와 함께 달렸는데 언제부턴가 보이질 않더군. 그 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도 모르겠네.”

그때였다.

“불이야! 핸드님, 도시에 연기가 자욱합니다. 플레어 바톰에서 불이


났습니다!”
티리온은 두려움에 숨이 탁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넋 놓고 있을 시간
이 없었다.

“브론, 병사들을 불러 물 마차를 모으게.”

‘신이여, 굽어살피소서. 와일드파이어, 거기에 불길이 닿기라도 한다


면…….’

“플레어 바톰을 모두 희생하더라도 불길이 연금술사의 회당에 닿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게, 알겠나? 그리고 산도르, 자네도 브론과 함께
가게.”

티리온은 잠시 산도르의 검은 눈에서 두려움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 불! 불을 두려워하는구나.’

하지만 산도르는 즉시 예의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알겠습니다. 그 이유말고라도 나가서 제 말을 찾아야 하니까요.”

티리온은 남아 있는 세 명의 킹스가드에게 돌아섰다.

“도시를 돌며 사람들을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시오. 저녁 종소리가


멈춘 뒤에도 거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말
이오.”

“저희가 있을 자리는 전하 옆입니다.”

메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르세이가 먹이를 발


견한 독사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의 자리는 티리온 경이 말한 곳이에요. 핸드는 왕을 대신하는


자리인 만큼 불복종은 반역죄예요.”
보로스와 메린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보로스가 이내 고개를 숙이
며 입을 열었다.

“망토를 입고 가야 할까요, 왕대비님?”

“그렇게 무서우면 아예 벌거벗고 가든가요. 이번 기회에 폭도들에게


남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지 그래요? 아까 거리에서 당신들을 본 사람
들은 당신들이 진짜 남자인지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요.”

티리온은 세르세이가 맘껏 화를 내도록 내버려두었다.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게 벌써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신경 과민인지도 모르겠군.’

핸드의 탑은 스톤크로우족 병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내게 티메트를 데려와.”

“스톤크로우족은 번드맨족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가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티리온은 이들이 누구인지 잠시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샤가를 데려와.”

“샤가는 자고 있습니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그럼 깨워!”

“샤가는 잘 때 깨우면 무서운데…….”

병사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사라졌다. 잠시 후 샤가가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이봐, 샤가, 도시의 절반은 폭동으로 들썩들썩하고 나머지 절반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고 있는데, 코를 골며 자고 있다니 그게 말
이 되나?”

“저는 이곳의 진흙 섞인 물이 싫습니다. 그래서 맥주와 시디신 포도


주를 좀 마셨더니 머리가 아프더라구요.”

티리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 가서 샤에를 안전하게 지켜.”

샤가가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노란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즉시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가서 샤에를 안전하게 잘 지키기만 하면 돼. 그


리고 샤에에게 가능하면 내가 빨리 가겠다고 전해. 어쩌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안에 가겠다고 말이야.”

화재는 바로 진화되고 폭도들도 대부분 해산되었지만, 해질녘이 될


때까지도 도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티리온은 샤에의 품이 몹시 그
리웠지만 꼼짝없이 레드킵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티리온은 어둑한 방안에서 다 식은 닭요리와 갈색 빵으로 저녁식사


를 하고 있다가 제이슬린의 방문을 받았다. 어두운 방만큼이나 기분
이 우울했던 티리온은 하인들에게 물러가라고 소리를 쳤다. 난로에
불을 지피고 촛불을 켠다고 부산을 떨던 하인들이 허둥지둥 사라지
자, 제이슬린이 들고 온 사상자 명단을 내놓았다.

첫번째 사망자는 하이셉톤이었다. 그는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동안


갈가리 찢겨 죽었다.

‘굶주린 시민들이 걷지도 못할 정도로 뚱뚱한 그를 고운 시선으로 봐


줄 리가 없지.’
프레스톤의 시체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게 난도질되어 있었
다고 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피투성이라 찾는 데도 무척 힘이
들었다고 했다. 하수구에서 발견된 아론 산타가르는 머리가 완전히
으깨져 붉은 과육처럼 되어 있었고, 탄다 부인의 딸 롤리스는 한 무두
장이 집 뒤에서 50명이 넘는 남자에게 윤간을 당했다고 했다. 롤리스
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거리를 헤매다가 시티워치들에게 발
견되었다.

티렉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고, 하이셉톤의 수정관도 어디론가 사라


지고 없었다. 시티워치 아홉 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지만, 폭
도들은 얼마나 많은 수가 죽었는지 헤아려 볼 수가 없었다.

“티렉을 꼭 찾아내게, 살았든 죽었든 간에. 그 아이는 내게 아주 친절


했던 티게트 삼촌의 외아들이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말이야.”

티리온은 제이슬린이 보고를 끝내자 그렇게 말했다.

“찾아보겠습니다. 셉톤의 수정관도 마찬가지구요.”

“아니, 셉톤의 번쩍이는 관에는 관심 없네.”

“한데 티리온 경,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경께서는 저를 시티워치의


로드커맨더로 임명할 때 항상 진실만을 말하라고 명령하셨지요.”

“자네가 지금 얘기하려는 얘기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군.”

티리온은 우울했다. 하지만 제이슬린은 개의치 않았다.

“시티워치는 오늘 폭동을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내일도 그럴 수 있다


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전자는 지금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입니
다. 도시 곳곳에 도둑과 살인자들이 들끓어 어느 집도 안전하지 못하
고, 설사 돈이 있더라도 음식을 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예전
에는 은밀한 곳에서만 반역을 얘기했지만, 지금은 아무 데서나, 심지
어는 시장바닥에서조차 공공연히 그런 얘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시티워치 병사들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저는 지금 우리 병사들 중 반도 믿지 못합니다. 자노스 경은 시티워


치의 규모를 세 배로 키워 놓았지만, 황금색 망토를 입힌다고 해서 모
두 시티워치가 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새로 모집한 병사들 중에도 충
성스럽고 훌륭한 대원이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망나니나 술주정
뱅이, 겁쟁이들입니다.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고, 기강도 잡을 수가
없고, 충성은 더더군다나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목
숨에만 충성할 뿐입니다. 만일 전투가 벌어진다면 대다수가 성을 버
리고 줄행랑을 놓을 겁니다.”

“나도 그들에게서 충성을 기대하지는 않네. 일단 성벽이 무너지면 우


리는 모든 걸 잃게 되겠지. 처음부터 각오했던 바네.”

“티리온 경, 제 부하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입니다. 그들은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아마 바리스 경께서도 분명히 말씀했겠지만, 그들은 킹스랜딩의 라
니스터 가문에 전혀 애정이 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경의 아
버님께서 어떻게 아에리스 왕을 죽이고 이 도시를 약탈했는지 생생
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르 자이메는 아에리스 왕과 라예
가르 왕자의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했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조프
리 왕은 명예를 중히 여기는 에다드 경의 목을 쳤습니다. 라니스터 가
문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거라고 쑥덕거리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로버트 왕이 살아 있을 때가 훨씬 좋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타니스 경이 왕좌에 오르면 훨씬 살기 좋아질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식당이나 술집에만 모이면
모두 그런 얘기들뿐입니다. 병사들도 모이기만 하면 수군댑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을 증오한다, 하고 싶은 말이 그건가?”

“그렇습니다. 기회만 생기면 모두 반역할 겁니다.”

“자네도 그런가?”
“그건 바리스 경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자네에게 묻고 있네.”

제이슬린의 깊은 눈은 티리온의 이글거리는 눈초리에도 흔들림이 없


었다.

“사람들은 경을 가장 증오합니다.”

“날 가장 증오한다고? 왜, 왜지? 그들에게 시체를 먹으라고 한 사람


도, 그들 앞에 하운드를 내세운 사람도 내가 아니라 조프리 왕이야.
그런데 왜 내가 비난받아야 하지?”

너무도 불공평하단 생각에 티리온은 속이 끓었다.

“왕은 어린 소년에 불과하니까요. 사람들은 왕 주위에 악마 같은 대


신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대비님을 미워하고, 바리스 경
을 스파이더라고 경멸하죠. 하지만 가장 증오하는 사람은 바로 경입
니다. 왕대비님과 바리스 경은 로버트 왕 생전,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
씬 살기 좋을 때부터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
람들은 경께서 이 도시를 거드름 피우는 병사들과 더러운 야만인들
로 가득 채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노스 경을 추방시킨 이유도
그가 고지식할 정도로 무뚝뚝하고 정직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그랜드 마에스터 역시 경에게 반대 의견을 냈다가 지하 감옥에 갇
힌 거라 생각하고요. 심지어는 경께서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고 말하
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티리온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게다가 난 괴물이지. 끔찍하게 못생긴 난쟁이.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네. 자네 얘기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그만 물러가
게. 우린 둘 다 할 일이 많잖아.”
‘만일 내가 이뤄낼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이라면, 아버지가 날 그렇게
경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티리온은 차갑게 식은 저녁식사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닭기름이 하얗게 변해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문득 짜
증이 치밀어 소리쳐 포드릭을 부른 뒤, 당장 바리스와 브론을 데려오
라고 명령했다.

‘내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는 환관과 용병,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는 창


녀지. 그 사실이 뭘 의미하는 걸까?’

브론이 방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어둡다며 불평을 했다. 바리스가 도


착했을 때에는 난로에서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다.

“바리스 경은 어디 계셨습니까?”

“조프리 왕 때문에 일이 있어서요.”

“아, 조프리 왕 때문이라……. 내 조카는 왕좌는 고사하고 화장실조


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가 보죠?”

바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티리온의 맞은편에 앉은 브론이 닭의 날개를 쭉 찢어 입에 가져갔다.


티리온은 지금껏 브론의 뻔뻔스러운 행동을 모두 모른 척해 왔지만,
오늘밤에는 짜증이 치밀었다.

“브론, 저녁식사를 나눠 먹자고 한 적 없는데?”

“드실 것 같지 않아서요. 도시 전체가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음식을 버리는 것은 죄악입니다. 혹시 포도주는 없습니까?”

브론이 입에 가득 고기를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음에는 나보고 아예 따라 달라고 하겠군.’


문득 슬픔이 밀려들었다.

“브론, 자네는 선을 너무 많이 넘었어.”

“티리온 경께선 너무 선을 넘지 않으십니다.”

브론이 살을 다 발라먹은 뼈를 바닥에 휙 던지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마디 던졌다.

“토멘 왕자가 먼저 태어났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브론의 손은 또다시 닭의 가슴살을 뜯고 있었다.

“누나를 보내며 훌쩍거리던 그 왕자 말입니다. 그는 훌륭한 왕이 그


렇듯, 시키는 대로 뭐든 할 것 같았습니다.”

티리온은 등골이 오싹했다.

‘토멘이 왕이 된다면…….’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절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조프리는 그의 피가 섞인 혈육이자, 세르세이와 자이메의 아들이었


다.

“그런 말을 하다가 목이 달아날 수도 있네.”

하지만 브론은 티리온의 말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바


리스가 안 되겠는지 중재에 나섰다.

“자, 두 분, 말싸움은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발 진


정하세요.”
“그럴까요?”

티리온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몇 가지 계획을 세


우고 있었다.

다보스

코트나이 펜로즈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밤색 말을 타고 나왔고, 그


옆으로 회색 말을 탄 기수가 왕관을 쓴 수사슴과 노란색 바탕에 흰색
깃털이 그려진 깃발 두 개를 펄럭이며 따라왔다. 펜로즈는 자기 가문
의 색처럼 노란색 수염을 뾰족하게 기르고 있었지만, 정작 머리카락
은 한 올도 없었다. 스타니스가 이끌고 온 부대의 규모와 위용에 내심
놀랐을지 모르겠지만, 온갖 시련을 헤쳐 온 듯한 그의 얼굴에는 어떠
한 기색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스타니스의 군대는 요란하게 갑옷을 덜거덕거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다보스도 미늘갑옷을 갖춰 입고 나
와 있었다. 익숙지 않은 갑옷의 무게에 어깨가 구부정하게 굽어, 왠지
스스로 쓸모 없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왕의 명령에 의혹을
품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지금은 자꾸 의문이 생겼다.

왕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보스보다 지위가 높은 귀족들이


었다. 그 중에는 명망 높은 가문의 영주들도 있었다. 그들의 은도금한
검과 금으로 아로새긴 갑옷이 아침 햇살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했
다. 투구 꼭대기에서는 가문을 상징하는 가지각색의 동물들이 보석
으로 박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무리 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단연 스타니스였다. 휘황찬


란한 차림의 귀족들과는 대조적으로 뻣뻣한 가죽옷에 미늘갑옷만 걸
쳤을 뿐이지만, 머리에 쓰고 있는 순금 서클릿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위엄스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서클릿이 햇빛
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블랙베타 호가 함대와 합류해 스톰엔드로 향한 이후, 다보스가 지금
처럼 왕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거의 8일 만의 일이었다. 처음 합류
할 때부터 왕을 알현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바
쁘다는 답변뿐이었다. 왕의 종자로 있는 아들 데반도 종종 왕이 바쁘
다는 얘기를 전해 주었다.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타
니스 주변에는 시체에 꼬이는 파리떼처럼 수많은 귀족들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스타니스는 산송장처럼 보였다.

‘드래곤스톤을 떠난 지 일 년밖에 안 됐는데 어쩌다 저렇게 몸을 많이


상하셨지?’

언젠가 아들이 그 이유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왕께서는 렌리 경이 죽은 후로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세요. 마에스터


가 마법의 약을 만들어 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전하께서 편
히 쉴 수 있도록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멜리산드레뿐이죠.”

‘멜리산드레는 어떻게 왕을 위로하는 걸까? 함께 기도를 올리나? 아


니면 또 다른 방법이 있나?’

아들이 왕의 종자이긴 했지만 감히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데반은 불타


는 심장을 수놓은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 아이였고, 땅거미가
지면 어둠을 밝히는 횃불 앞에서 ‘빛의 신’을 향해 광명을 가져다 달
라고 간절히 기원하는 아이였다.

“왕의 종자니 군주가 섬기는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테


지.”

다보스는 씁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렴풋이 보이던 스톰엔드가 가까워지자, 다보스는 그곳의 성벽이


얼마나 높고 두꺼웠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윽고 스타니스가 코트나
이와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세르 코트나이.”

말에 앉은 채로 부르는 스타니스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건조했다. 예


상대로 상대도 격식을 갖추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영주님.”

그러자 알레스터 플로렌트가 나섰다.

“세르, 왕을 부를 땐 ‘전하’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


요.”

알레스터의 갑옷 가슴 부분에서 코가 툭 튀어나온 순금 여우가 청금


석으로 조각한 꽃으로 둘러싸여 반짝이고 있었다. 거부(巨富)에 키도
크고 점잖은 브라이트워터킵의 영주, 알레스터는 렌리의 측근 중에
서 가장 먼저 스타니스 쪽으로 선회한 사람이자, 자신이 섬기던 신을
버리고 ‘빛의 신’을 받아들인 첫번째 인물이기도 했다. 셀리스는 악셀
플로렌트와 함께 드래곤스톤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 스타니스 왕의
측근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셀리스의 친정 집안 세력이 막강하고 그
수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알레스터 플로렌트가 가장 선두주자라 할
수 있었다.

코트나이가 알레스터의 말을 무시하고 스타니스를 마주 보았다.

“여기 유명하신 분들이 다 모이셨군요. 고매하신 에스터몬트 경과 에


롤 경, 바네르 경, 세르 존, 세르 브리안, 카론 경, 렌리 왕의 레인보우
가드인 세르 구야드, 그리고 저분은 권세가 막강한 알레스터 플로렌
트 경이 분명하군요. 아니, 저 뒤쪽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양파 기
사가 아니십니까? 잘 오셨소이다, 세르 다보스. 그런데 저 숙녀분은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유일하게 갑옷을 입지 않은 멜리산드레가 붉은 옷자락을 바람에 펄


럭이며 서 있었다. 루비 목걸이가 햇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제 이름은 멜리산드레입니다, 세르. 저는 당신의 왕을 모시고 있으
며, ‘빛의 신’을 섬기는 사람이죠.”

“오, 그렇군요, 아가씨. 부디 그분들을 잘 모시길 바라겠소. 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다른 신을 숭배하고, 다른 왕을 모시고 있소이다.”

“진정한 왕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이시고, 진정한 신 또한 한 분이시


오.”

알레스터가 또 한 번 나섰다. 그러자 코트나이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


다.

“알레스터 경, 우리가 지금 종교 얘길 하러 모였던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셉톤을 데려올 걸 그랬습니다.”

조용히 있던 스타니스가 입을 열었다.

“세르 코트나이, 당신은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잘 알 거요. 난 2주


라는 시간을 주었고, 그 동안 당신은 이곳저곳으로 까마귀를 날려보
냈소. 하지만 그 어디서도 원군은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스톰엔드는 고립됐고, 나의 인내심도 이제 바닥
이 났소. 이번이 마지막이오. 어서 성문을 열고 정당한 나의 몫을 넘
겨주길 바라오.”

“그럼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겠습니까?”


“전과 마찬가지요. 우선 당신의 반역 행위를 용서해 주겠소. 여기 있
는 영주들을 모두 사면해 주었듯이 말이오. 그리고 병사들에겐 그들
의 가정으로 편히 돌아가든가 아니면 나의 휘하에 들어올 수 있는 자
유를 주겠소. 당신은 무기를 그대로 지닐 수 있고, 개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재산을 소유하게 될 거요. 하지만 말과 가축은 우리
에게 제공해야 하오.”

“그럼 에드릭 스톰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형의 서자는 반드시 나에게 인도해야 하오.”

“그렇다면 저는 이번에도 거절합니다, 영주님.”

스타니스가 이를 악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멜리


산드레가 한마디했다.

“세르 코트나이, 부디 암흑 속에 있는 당신을 빛의 신께서 보호해주


시기를…….”

“빛의 신이라는 그 엉터리 신한테 당신이 걸치고 있는 그 넝마쪼가리


로 엉덩이나 닦으라고 하시오.”

코트나이의 폭언에 알레스터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세르 코트나이, 말조심하시오. 전하께서는 그 소년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으실 거요. 그 아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듯이, 내 조카 델
레나의 혈육이기도 하오. 설마 내가 내 핏줄을 위험 속에 가만히 내버
려두겠소? 만약에 스타니스 전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대
신 나를 믿어 보시오. 나는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고…….”

“내가 보기엔 경은 지나치게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경은 부츠를 갈


아 신듯 군주와 신을 갈아치우는 인물이 아닙니까? 이 앞에 모인 다
른 변절자들처럼 말입니다.”
스타니스 주위에 모여 있던 기사들 사이에서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
왔다. 하지만 다보스는 그것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
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포소웨이 가문 사람들과 구야드 모리겐, 카론,
바네르, 에롤, 에스터몬트 등은 모두 렌리를 섬겼다. 그들은 렌리의
막사에 모여 앉아 전투 작전을 구상하거나, 스타니스를 넘어뜨릴 방
법을 획책하던 자들이었다. 알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타니
스와 사돈지간이면서도 인기 높은 렌리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
세했었다.

브리스 카론이 말을 몰아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바닷바람이 그가 입


은 무지갯빛 줄무늬 망토를 흩날렸다.

“세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배신자가 아니오. 예나 지금


이나 우리는 스톰엔드에 충성할 뿐이오. 스타니스 왕은 바라테온 가
문의 마지막 후예로서, 로버트 왕과 렌리 왕을 계승하는 정당하고도
진정한 우리의 왕이오.”

“경의 말이 옳다면 꽃의 기사는 왜 이 자리에 없는 거요? 그리고 마


티스 로완 경은? 랜딜 탈리 경과 오크하트는? 혹시 그들이 진정으로
렌리 왕을 섬긴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오? 그리고 타르스의 브
리엔느는 대체 어디에 있소?”

“브리엔느 말이오?”

구야드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그 여자는 줄행랑을 쳤소. 가만있다가는 왕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


됐을 테니까.”

코트나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리엔느가 왕을 살해했다고? 그건 말도 안 되오! 나는 그 아이가


이븐폴에 살던 때부터 보아 왔소. 그리고 이븐스타 가문에서 그 아일
스톰엔드로 보낼 때 어땠는지도 봤고 말이오. 렌리 왕은 눈치채지 못
했겠지만, 브리엔느는 렌리 왕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 왔소.”

“그렇다면 더더욱 의심을 받을 만하지 않소. 사랑을 거절당한 여자의


애증은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법이니까. 하지만 나
는 왕을 죽인 범인이 스타크 부인이라고 믿고 있소. 그 여자는 동맹을
구실 삼아 리버룬에서 이곳 하이가든까지 먼길을 왔소. 분명히 렌리
왕이 자기 아들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제거해 버린 걸 거
요.”

알레스터가 아는 척을 하며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브리스 카론이 반


박하고 나섰다.

“아니, 그건 브리엔느의 짓이었소. 세르 에몬 쿠이가 죽기 전에 분명


히 그렇게 증언했소. 그건 내가 맹세할 수 있소, 세르 코트나이.”

체면이 손상된 코트나이의 어조가 더욱 격해졌다.

“그래, 경의 맹세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이오? 당신이 지금 입고 있


는 그 무지갯빛 망토는 렌리 왕을 목숨 걸고 보호하겠다고 맹세하고
하사받은 것 아니었소? 그런데 렌리 왕이 돌아가신 마당에 경은 어찌
하여 아직도 멀쩡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소!”

그의 가차없는 독설은 구야드에게 옮겨갔다.

“세르 구야드, 당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소. 당신 역시 렌리 왕


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레인보우가드였소. 만일 내가 당
신이었다면, 지금 그 옷을 걸치고 있는 게 매우 수치스러웠을 거요.”

모리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


었다.

“세르 코트나이, 지금 여기가 협상을 위한 자리임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당신의 혀를 잘라
버렸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양심을 내던진 불구덩이 속으로 내 혀도 똑같이 던


져 넣고 싶단 말이오?”

더 이상 보고 있지 못하고 스타니스가 소리쳤다.

“그만! 그만 하면 충분하오. 내 동생은 ‘빛의 신’의 뜻에 따라 배신자


의 손에 죽음을 당한 거요. 그러니 그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소.”

“영주님께서는 그러시겠지요. 여하튼 영주님의 뜻은 충분히 알겠습


니다. 그리고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코트나이가 갑자기 장갑을 벗어들더니 스타니스를 향해 던졌다.

“단독 결투를 신청합니다. 검이든 창이든 어떤 무기라도 좋습니다.


만약 이 늙은이와 싸우다가 그 고귀하신 옥체나 마법의 검에 상처가
날까 걱정이시라면, 다른 기사를 대신 지명해도 좋습니다.”

그러면서 구야드와 브리스를 쏘아보았다.

“아니면 저 풋내기들을 내세워도 괜찮을 것 같군요.”

그 말에 구야드와 브리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한마디씩 소리


쳤다.

“왕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나도 당신의 도전에 응해 주겠소!”

“나도 그렇소.”

하지만 스타니스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코트나이가 피식 웃


으며 스타니스에게 말했다.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영주님의 정당성에 자신이 없어서인가요, 아
니면 무기의 성능을 확신할 수 없어서인가요? 혹시 제가 불타는 검에
다 오줌이라도 갈겨서 불을 꺼뜨릴까 두려우신 겁니까?”

스타니스는 코트나이의 모욕적인 언사에 참을성 있게 대응했다.

“나를 완전히 숙맥으로 아나 본데, 세르 코트나이, 나에겐 2만 명의


군사가 있소. 한데 당신은 바다와 적군에 에워싸여 고립된 상태지. 이
렇게 승리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마당에 내가 결투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소?”

그러면서 코트나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당신에게 충분히 아량을 베풀었소. 만일 나와 맞서겠다면 자비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난 반역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수형에 처할 생각이니까.”

“우리는 신의 뜻에 따를 생각입니다. 우리 성을 공격할 생각이셨다면


그 계획을 철회하십시오. 우린 스톰엔드 성의 이름을 걸고 영주님께
대항할 테니까요.”

코트나이는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성으로 돌아갔


다. 스타니스도 아무 말 없이 말을 돌렸다. 수많은 영주들이 뒤를 따
랐다.

“우리가 스톰엔드 성을 공격하면 수천 명의 목숨이 희생될 거요.”

나이 든 에스터몬트가 근심에 싸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스타니


스의 외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대답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운에 맡겨야지요. 우리 목적이 정당하니 일


곱 신들께서도 우리에게 승리를 축복해 주실 겁니다.”

다보스는 나이든 영주들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노인네들이란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우리에겐 이제 신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잊었나 보군. 멜리산드레가 모시는 빛의 신…….’

존 포소웨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라면 이번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겁니다. 난 카론 경이나 세


르 구야드처럼 어설픈 기사가 아니거든요. 렌리 왕은 스톰엔드에 괜
찮은 기사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죠. 수비대 임무라야 고작 늙은이
들과 아이들을 지키는 거니까.”

그 말에 카론이 맞장구를 쳤다.

“코트나이 제안대로 결투를 했으면 스톰엔드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


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스톰엔드를 함락
시켰으면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 됐을 텐데…….”

모두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앞서 가던 스타니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영주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생각 없이 참새떼처럼 잘도 재잘대고 있군. 짐은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겠소. 다들 각자의 막사로 돌아가시오.”

스타니스의 시선이 다보스의 얼굴에서 멈췄다.

“그리고 세르 다보스,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스타니스는 바로 말에 박차를 가해 일행과 멀어졌다. 멜리산드레가


스타니스와 보조를 맞춰 달려나갔다. 그 여자는 불타는 심장 안쪽에
왕관을 쓴 수사슴이 그려진, 심장의 불길이 수사슴을 통째로 삼켜 버
린 것처럼 보이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다보스는 자신도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영주들의 표정을 살폈다. 명


예와 전통을 쌓아 온 명문가의 자랑스러운 후손들은 아마도 지금까
지 그런 식으로 질타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렌리는 꾸짖거
나 화를 내지 않는 군주로 소문이 나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바라테온
가문의 막내아들은 형과는 달리 ‘관용’이라는 신의 축복을 타고 태어
났던 것이다.

“전하.”

다보스는 어느새 왕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스타니


스는 더욱더 초췌해 보였다. 얼굴은 핼쑥하고 눈 밑은 검었다.

“아, 다보스, 한 가지 물어 보지. 자네는 밀수꾼 출신이니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겠지? 그래, 세르 코트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다보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다루기 어려운 사람인 듯합니다.”

“그래? 나 같으면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라고 말하겠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면전에서 바로 내 호의를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겠
나. 그건 바로 자기 목숨을 내던진 거고, 더 나아가 성안 사람들의 목
숨마저 다 버린 거라 할 수 있지. 흠, 단독 결투를 신청한다고? 그자
는 내가 로버트 형인 줄 아는 모양이야.”

스타니스가 조소를 금치 못하며 코웃음을 쳤다.

“전하, 그것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그에겐 어떠


한 희망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래, 희망이 전혀 없긴 하지. 성이 함락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


야. 어떻게 시간을 단축하느냐가 바로 관건이지.”

스타니스가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말발


굽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알레스터 경은 펜로즈의 영주를 데려오자고 하던데……. 자네도 알
지? 세르 코트나이의 부친이 펜로즈 영주라는 걸.”

다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전하의 특사 자격으로 펜로즈를 방문했을 때, 그분께서 더할


나위 없이 극진히 절 대접해 주었었죠. 전하, 그분은 병들고 허약한
노인네에 불과합니다.”

“알레스터 경은 코트나이의 기를 좀더 확실하게 꺾어 놓자고 하더군.


이를테면 그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목을 매달자는 거지.”

기고만장한 셀리스의 측근을 거슬리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


지만, 다보스는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 자신의 진심을 숨기지 않았다.

“전하, 제 생각에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 듯합니다. 세르 코트나이


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봤으면 지켜봤지 절대 신의
를 저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소득 없이 불명예만 얻
게 될 겁니다.”

“불명예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들은 모두 반역자야. 지금 내


게 반역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라는 건가?”

스타니스가 벌컥 화를 냈다. 다보스는 뒤에서 따라오는 영주들을 흘


낏 돌아보았다.

“전하께서는 저 사람들의 목숨도 살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날 비난하겠다는 건가?”

다보스는 자신의 얘기가 지나쳤음을 깨닫고 잠시 주춤했다.

“전하, 어찌 제가 감히…….”
“자네는 우리 측 영주들보다 세르 코트나이를 더 높이 평가하는군,
안 그런가?”

다보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의를 지킨 사람입니다.”

“그릇된 믿음은 죽음을 초래할 뿐이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


키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럼 우리 뒤를 따라오는 저자들은 신의가 없다는 건가?”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 있었다.

“전하, 저들은 작년에는 로버트 왕의 측근이었고, 한 달 전에는 렌리


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전하의 부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이면 어디로 가서 붙을지 어느 누가 알겠습니
까?”

스타니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거칠고 냉소에 찬 웃


음이었다.

“멜리산드레, 내가 뭐랬소. 양파 기사는 항상 내게 진실만을 얘기한


다고 했잖소.”

“다보스 경을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전하.”

지금껏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붉은 여자가 조용히 대꾸했다.

스타니스가 다보스의 어깨를 툭 쳤다.

“양파 기사, 그 동안 자네가 무척 그리웠네. 자네 말대로 내 휘하에는


변절자들이 있네, 그것도 아주 많이. 언제 또 돌아설지 모를 사람들이
지만, 다보스, 지금 내겐 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가벼운 죄도
엄히 다스리는 나로서는 저들을 관대히 대하는 게 얼마나 속이 뒤틀
리는 일일지 자네는 모를 거네. 하지만 다보스, 자네에겐 언제라도 나
를 비난할 만한 자격이 있지.”

“전하, 전하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하십


니다. 왕좌를 획득하시기 위해서라면 변절자라 해도 저들을 이용하
시는 것이…….”

“손가락이 전부 그 안에 들어 있나 보지?”

느닷없는 질문에 다보스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스타니스의 시선이


자신이 목에 걸고 있는 작은 주머니에 향해 있음을 알고, 다보스는 끝
마디가 잘린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다. 잘린 손가락 끝으로 뭔가가 만
져졌다.

‘행운이 있기를…….’

“도대체 아직까지도 그걸 그렇게 챙기는 이유가 뭔가? 난 그게 항상


궁금했네.”

스타니스가 그의 행동을 보며 물었다.

“이 손가락들은 제게 제 처지를 일깨워 줍니다. 이전에 제가 어떤 사


람이었는지 절대 잊지 못하게 해주죠. 그리고 이건 또 전하께서 추구
하는 정의를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그래, 나는 그때 그게 정의를 실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선이 악을


완전히 씻어 버리지 못하듯, 악도 선을 없애지는 못하는 거라네. 자네
가 영웅인 동시에 밀수꾼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둘 다 그에 상응하
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

그렇게 말하며 스타니스가 알레스터와 다른 영주들을 힐끔 돌아보았


다. 그들은 알록달록한 망토를 걸치고 멀찌감치 뒤떨어져 오고 있었
다.

“저기 내 용서를 받은 영주들이 그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자들이


네. 진실하고 명예로운 자들은 조프리가 정당한 왕이라는 어리석은
믿음 때문에 그 아일 위해 싸울 거네. 북부인들도 롭 스타크처럼 생각
하겠지. 하지만 저자들은 한때나마 렌리가 권력을 차지할 거라 여기
고 그의 밑으로 들어갔던 인물들이야. 그리고 이제는 권력과 명예를
꿈꾸며 다시 내게 왔지. 나는 저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반드시 기억해
둘 거네. 관대히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사실을 잊
어버리진 않을 거란 말이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정의를 실행할 계획을 곰곰이 짚어 보던 스타


니스가 돌연 물었다.

“그래, 백성들은 렌리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매우 애통해하고 있었습니다. 전하의 아우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많


은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바보들이나 바보를 좋아하는 법이지. 물론 나도 렌리의 죽음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아니라 어렸을 때의 그 아이
를 아깝게 여기는 거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세르세이와 자이메의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받아들이


던가?”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전하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떠난


뒤에도 그럴지는 저로서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가?”
“전하, 전 밀수를 하면서 터득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 잘 믿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희는 그 두 종
류의 사람들을 다 만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또 다른
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알고 있네. 하지만 어릿광대처럼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얘


기를 믿진 않겠지.”

스타니스가 재빨리 다보스의 말을 잘랐다.

“그렇긴 합니다만 전하, 믿든 안 믿든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하는 것만


으로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수군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로버트 왕이 잔에다 소변을 받아 줘도 포도주라고 좋아할


거네. 하지만 내가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한 잔 건네면 의심스런 눈초
리로 잔을 흘겨보며 맛이 이상하다고 투덜대겠지. 내가 멧돼지로 둔
갑해 로버트를 죽였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걸.”

“사람들이 지껄이는 얘기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


만 전하께서 로버트 왕을 살해한 진짜 범인을 밝혀내 처형한다면 떠
도는 소문이 거짓임을 온 나라가 알게 될 겁니다.”

스타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 형의 죽음에는 분명 세르세이가 관련되어 있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난 형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거네. 그리고 에다드 경과 존
아린 경을 위해서도 말이야.”

“렌리 경을 위해서도 그러실 겁니까?”

다보스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불쑥 내뱉고는 스스로 흠칫 놀랐다. 하


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스타니스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아주 낮은 목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때때로 꿈에서 렌리가 죽는 모습을 보네. 촛불이 켜진 초록색 막사


안에서 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막사 안은 곧 피바다가 되지.”

그러면서 스타니스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무 끔찍해서 깨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내 뜻대로 되질 않네.


그러면 자네 아들이 나를 깨우지. 그랬다가 다시 잠이 들면 또다시 악
몽이 반복돼. 데반 말로는, 꿈을 꾸는 동안 내가 고함을 지르며 몸부
림을 친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나. 단지 꿈일 뿐
인데 말이야. 나는 렌리가 죽을 당시 내 천막에 있었고, 잠에서 깨어
났을 때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

다보스는 잘려진 손가락이 근질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왕에


게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협상 자리에서 렌리가 내게 복숭아 하나를 내밀더군. 조롱하고, 협


박하고, 반항하다가 말이야. 나는 렌리가 슬쩍 검을 빼들려는 건지 알
았지. 내가 두려워하는 걸 즐기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아무 의
미 없는 장난에 불과했을까? 그 복숭아가 얼마나 달콤한지 얘기하는
렌리의 말속에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
데…….”

스타니스가 말을 멈추고, 토끼의 목덜미를 덥석 문 사냥개처럼 세차


게 고개를 저었다.

“복숭아 같은 과일 하나로 나를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렌


리 녀석뿐일 거네. 그 아이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거야. 하지만 내
가 그 아이를 사랑한 것만은 분명하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어.
맹세코, 나는 렌리의 복숭아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어느새 그들은 야영지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막사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들, 산더미처럼 쌓인 무기 사이로 말을
몰고 지나가자,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타니스는 뒤따라오는 영주들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해산을 명령했


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작전 회의가 있으니 자신의 막사로 집합하라
는 말도 덧붙였다. 영주들은 왕에게 절을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멜리산드레와 다보스는 스타니스를 따라 왕의 막사로 향했


다. 막사는 노란색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 때때로 황금빛으로 보이기
도 했지만 결코 호화롭지는 않았다. 버팀목 꼭대기에서 휘날리는 깃
발만이 그것이 왕의 막사임을 알려 주었다. 막사 앞에는 경비병 대신
셀리스의 부하들이 불타는 심장이 수놓인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왕이 도착하자 마구간지기들이 달려나왔고, 경비병 하나가 멜리산드


레가 들고 있던 깃발을 받아 부드러운 땅에 깊숙이 꽂았다. 문 옆에
서 있던 데반이 그들을 보자 천막을 들어올렸다. 데반 옆으로 나이 많
은 시종이 한 명 더 보였다. 스타니스가 막사 안으로 따라 들어온 데
반에게 왕관을 벗어 건넸다.

“시원한 물 좀 갖다 주게.”

데반이 재빨리 막사 밖으로 나갔다.

“다보스 경, 이리 오게. 그리고 멜리산드레, 당신은 이따 따로 부르겠


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멜리산드레가 절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밝은 아침 햇살이 걷힌 때라 막사 안은 서늘하고 침침했다. 스타니스


가 장식 없는 나무 의자에 앉더니 다보스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언젠가는 자네를 영주로 만들어 주겠네. 셀티가르와 알레스터 경이
지치는 날이 오면 말이야. 하지만 그다지 고맙다는 생각은 안 들 거
네. 수시로 회의에 불려 나와야 하고, 당나귀 같은 인간들의 얘기들도
참고 들어줘야 하니까.”

“그렇게 아무 쓸모도 없는 자들을 왜 거느리고 계시는 겁니까?”

“당나귀들은 자기 울음소리를 좋아하지. 한데 나는 내 마차를 끌 당


나귀가 필요하거든. 앞으로는 그자들이 더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 거
네. 아직은 그렇지 못하지만, 내 생각에……. 아, 저기 자네 아들이 물
을 가져오는군.”

데반이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두 개의 도기 잔에 물을 따랐다.

‘물 대신 포도주였으면 좋겠군.’

물에 소금을 타서 마시는 스타니스를 보며, 다보스는 단숨에 물을 들


이켰다.

“지금 전하께서 하시고픈 말씀이 의회에 관한 겁니까?”

스타니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회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미리 말해 주겠네. 벨라리온 경은 동이


트자마자 갈고리와 사다리를 준비해 스톰엔드를 습격하자고 주장할
거네. 그 애송이 같은 당나귀 녀석은 자기 의견이 무척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에스터몬트 경은, 티렐과 레드윈처럼 성안 사람
들을 굶겨 죽이는 작전을 펼치자고 할 거네. 그러자면 일 년은 족히
걸릴 텐데, 과연 나이든 당나귀들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자고 할
까? 브리스 카론 경과 몇몇 사람들은 세르 코트나이의 결투 신청에
응하고 싶어하겠지. 아마 벌써부터 영웅이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
며 꿈에 부풀어 있을걸.”

왕이 남아 있던 물을 마저 들이켰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다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 즉시 킹스랜딩을 공격하셔야 합니다.”

“스톰엔드를 내버려두고 그냥 떠나자는 건가?”

“세르 코트나이는 전하께 해를 끼칠 만한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


지만 라니스터 일당은 다르죠. 포위 공격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결투는 결과가 너무 불확실합니다. 성을 공격하는 것은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데다 수천 명의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선
조프리 왕을 폐위시키면 저 성은 저절로 전하의 수중에 들어올 겁니
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티윈 경이 라니스포트를 되찾기 위해 서쪽으
로 갔다던데요.”

스타니스가 피식 웃으며 옆에 서 있는 데반을 바라보았다.

“데반, 네 아버지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구나. 앞으로 밀수꾼을 계속


신하로 삼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아무래도 영주들의 수를 더 줄여야
겠어.”

그러면서 스타니스가 다시 다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다보스, 자네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네. 저 성을 반드시 수


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 첫째, 내가 지금 이대로 떠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패배했다고 수군댈 거네. 난 그런 얘기를 참을 수가 없
는 사람이야. 그리고 둘째, 사람들은 내 동생을 아끼는 만큼 나를 좋
아하지 않아. 그저 내가 두려우니까 따를 뿐이지. 그런데 패배를 했다
고 해봐, 분명 나를 우습게 알고 믿지 않을 거네. 따라서 저 성은 반드
시 함락해야만 해.”

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왕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물론 서둘러 일을 끝내야겠지. 도란 마르텔은 지금 측근들을 소집해
낡은 산채를 요새화하고 있고, 도니시 사람들은 마치스를 공격할 준
비를 하고 있어. 그리고 렌리는 거의 6만에 달하는 병력을 비터브리
지에 남겨 두었네. 세르 팔멘 크레인과 내 아내의 오빠인 세르 에롤을
그곳으로 보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로라스가 비터브리지에 먼저 도착했으면 일은 더욱 어렵게 되
는 거지.”

다보스는 왕의 말을 듣자 더더욱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갔다.

“모든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킹스랜딩의 공격을 되도록 서두르는


편이 좋을 성싶습니다. 살라도르 사안이…….”

“살라도르 사안? 그자는 돈만 밝히는 인간이잖나! 머릿속엔 오직 금


은보화 생각뿐이고, 레드킵의 비호 아래 그럴듯한 거짓말만 일삼는
순 사기꾼! 내 앞에서 살라도르 사안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게. 그
자한테 조언을 듣느니, 차라리 왕관을 벗어 던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는 게 낫지.”

스타니스가 얼굴이 벌게져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보스, 지금 그걸 조언이라고 하나? 설마 논쟁이라도 벌여 나를 화


나게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전하, 저는 전하께 충성할 따름입니다.”

다보스는 당황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내 말을 들어보게. 세르 코트나이의 부관이 메도우스 경이라


고, 포소웨이 가문의 사촌이라고 하더군. 스무 살 난 새파란 애송이인
데, 코트나이에게 사고가 생기면 그 친구한테 스톰엔드의 지휘권이
넘어가게 되지. 포소웨이 경 말로는,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애
송이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당장 성을 우리한테 넘길 거라는데, 자
네 생각은 어떤가?”
“아, 저도 그 풋내기를 기억합니다. 스무 살은 넘을 것 같지 않은 젊
은이였지요.”

“메도우스 경은 코트나이만큼 완고하지도 않고, 겁도 많은 것 같더


군.”

다보스는 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고집쟁이든 겁쟁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세


르 코트나이는 나이는 많아도 아직도 정정하던걸요.”

“렌리도 팔팔했지만 지금은 저세상으로 가고 없지 않나? 자고로 밤


은 어둡고 공포로 가득 차 있는 법이네.”

다보스는 순간 목뒤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보스, 난 지금 자네를 이해시키려는 게 아니라 ‘충성’을 바라는 거


네. 멜리산드레가 기도를 하면서 불꽃에서 봤다는데, 세르 코트나이
는 오늘밤을 넘기지 못한다더군. 그리고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전사
하지도 못한대.”

스타니스가 잔을 들자 데반이 다시 물을 채워 주었다.

“다보스, 멜리산드레의 불꽃은 이제껏 틀린 적이 없었네. 드래곤스톤


에 있을 때도 렌리의 죽음을 미리 알아내서 내 아내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나. 그리고 자네 친구 살라도르 사안과 벨라리온 경은 조프리를
치러 킹스랜딩으로 가자고 주장했지만, 멜리산드레는 스톰엔드로 가
면 렌리의 권력 중 알짜배기를 차지할 거라고 했네. 결과적으로 그 말
은 옳았지.”

다보스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킹스랜딩으로 진군하던 렌리 경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전하
께서 스톰엔드를 포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렌리 경은…….”

스타니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래, 아마 렌리가 어쨌다는 건가? 렌리는 자기 운명을 좇아 깃발과


복숭아를 들고 이곳까지 왔고, 멜리산드레 말대로 내게 많은 걸 주고
떠났네. 멜리산드레는 그때 불꽃에서 또 다른 예시를 보았는데, 초록
색 갑옷을 입은 렌리가 킹스랜딩 성벽 밑에서 나를 습격하고 있었다
고 했네. 만약 렌리가 살아서 킹스랜딩에서 나와 마주쳤다면 저세상
으로 간 사람은 내가 되었을 거네.”

“그렇지 않고 두 분이 힘을 합쳐 라니스터를 쓰러뜨렸을지도 모를 일


이지요.”

다보스는 아무래도 멜리산드레의 예시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전하,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멜리산드레가 미래의 상황을


두 가지나 목격했다지만 글쎄……, 그 두 가지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
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양파 기사, 불빛은 그림자를 여럿 드리우기도 하네. 화롯불 앞


에 서 있으면 그림자가 하나뿐이지만, 활활 타오르며 춤을 추는 불꽃
앞에 서면 수많은 그림자가 생기면서 불길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
아지기도 하지 않나. 어떨 때는 그림자가 희미해지기도 하고 말이야.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래에 그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네. 하나일 수도 있지만 수십 개일 수도 있다는 거지. 어쨌든 멜리
산드레는 그것들을 모두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자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아네. 나도 눈치란 게 있으니
까. 영주들도 모두 자네처럼 그 여잘 싫어하지. 에스터몬트 경은 불타
는 심장말고 예전처럼 왕관을 쓴 사슴을 휘날리며 싸우자고 간청하
더군. 멜리산드레를 작전 회의에 참석시켜선 안 된다고 하는 이가 있
는가 하면, 아예 아사이로 돌려보내자고 하는 사람도 있네. 또 밤에
내가 멜리산드레를 막사로 불러들이는 것도 죄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네. 그 여자가 날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데도 말이야.”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물었지만, 다보스는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다.

“뭐든 내가 원하는 건 다. 다보스, 자네도 내게 그렇게 해주겠나?”

다보스는 먼저 입술부터 핥았다.

“저는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몸입니다. 제게 무슨 분부라도 내릴 일


이 있으십니까?”

스타니스가 다보스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밤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스톰엔드 성 아래로 배를 몰고 갈


일이 있네. 자네가 예전에 했던 일이지. 할 수 있겠나?”

“할 수는 있습니다만……, 오늘밤 말씀이십니까?”

왕이 또 한 번 고개를 까딱했다.

“블랙베타 호말고 작은 배가 필요할 거네. 은밀히 해야 하는 일이니


까.”

‘전하, 저는 이제 밀수꾼이 아니라 기사입니다! 그리고 전 지금까지


누군가를 죽여 본 적은 없었습니다.’

다보스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말을 뱉어낼 수는 없


었다. 스타니스는 그의 모든 것을 맡긴 하나뿐인 군주였다.

‘도대체 멜리산드레는 왕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아무 대답도 않는군, 다보스.”

스타니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차라리 말 못 하는 벙어리였으면 좋겠군.’

다보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분명 저 성을 차지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방법이 문제


지요. 전하, 좀더 깨끗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로버트 왕의 서
자를 내놓으라고 요구만 하지 않으시면 세르 코트나이는 기꺼이 성
문을 열어 줄 겁니다.”

“다보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꼭 데려와야겠네. 멜리


산드레도 불꽃을 통해 그런 상황을 내다봤지.”

다보스는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길 바랐다.

“스톰엔드에는 세르 구야드나 카론 경과 대적할 만한 기사가 없습니


다. 성을 함락시키는 건 아주 간단할 겁니다. 그러니 코트나이에게 명
예롭게 항복할 기회를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왕의 얼굴에 일순 고뇌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단독 결투 같은 것은 결코 없을 거네. 그 전에 코트나이가 죽을 테니


까. 멜리산드레의 불꽃은 결코 틀린 적이 없어.”

‘하지만 그 예언이 실현되려면 내가 필요하단 말이지?’

다보스는 자신이 처량하단 생각을 실로 오랜만에 했다. 그날 밤 검은


돛을 단 조그만 배를 조종해 십브레이커만(灣)으로 향하면서도 서글
픈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하늘도, 바다도, 소금기가 밴 짭짤한 바람
도, 뱃전에 와 닿는 물결도 모두 기억 속 그대로였다. 성벽 위로 빙 둘
러 있는 수천 개의 모닥불이나 티렐과 레드윈 가문의 불빛 또한 16년
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들말고는 모든 것이 너무도 변해 있었
다.

‘그때는 양파를 실어 날랐지만, 지금은 죽음을 나르고 있군. 멜리산드


레라는 붉은 여자의 모습을 한 죽음을…….’

16년 전, 다보스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에 천을 감아서 젓


고 돛도 거두었었다. 그렇게 조심했으면서도 그땐 왜 그렇게 떨었는
지…….

그 당시 함선에 타고 있던 레드윈 가문의 보초병은 장시간 서 있던 탓


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경비는 부드러운 새틴만큼이나 허술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타니스 왕 소속의 함선들만이 눈에 띄었
고, 단지 성 위를 순찰하는 파수병만 조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도 다보스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만큼이나 바짝 긴장해 있었
다. 붉은 외투로 온몸을 감싼 멜리산드레가 다보스 옆에 웅크리고 앉
아 어둠에 푹 파묻힌 채 창백한 얼굴만 드러내 놓고 있었다.

다보스는 바다를 사랑했다. 그리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갑판 위에서


잠자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바람소리는 언제나 하프를 뜯으며 노
래하는 음유시인의 목소리보다 그를 더욱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지
만 오늘밤만큼은 바다에서 그런 안락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보스 경, 당신에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나는군요.”

붉은 여자가 속삭였다.

“누군가 ‘밤은 어둠과 공포로 가득 찼다’고 했소. 그리고 오늘밤 나는


경이 아니오. 그저 밀수꾼일 뿐이오. 나의 양파는 바로 당신이고.”

붉은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경, 내가 두려운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하려는 일이 두려운 건가


요?”
“당신이 하려는 일이 두려운 거요. 난 그 일에 전혀 상관하지 않을 작
정이오.”

“하지만 경의 손으로 돛을 올렸고, 경이 직접 키를 잡고 있잖아요.”

다보스는 아무 대꾸도 않고 묵묵히 배를 조종해 나갔다. 해안 가까이


는 암초로 뒤덮여 있어 만을 가로질러 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
러려면 조수가 썰물로 바뀔 때를 기다려야 했다. 스톰엔드가 점점 멀
어지고 있는데도 붉은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경은 좋은 남자인가요?”

‘좋은 남자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이오. 아내에게는 친절하고, 성실하오.


다른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 또 자식들에게는 험한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소. 아, 법을 어긴
적은 있소만 한 번도 악한 마음으로 일을 한 적은 없다고 자부하오.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렇게 보면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뒤섞인 남자라
고 볼 수 있겠군.”

“회색 남자로군요.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중간. 정말 그럴까요, 다보


스 경?”

“그럼 내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오? 난 대부분의 남자들이 회색이 아


닐까 생각하는데…….”

“양파가 반쯤 썩었으면 그건 썩은 양파가 아닌가요? 남자도 좋은 남


자가 아니면 나쁜 남자가 있을 뿐이에요.”

그들 뒤로 불빛 하나가 어두운 하늘 너머로 희미한 궤적을 그리며 사


라져 갔다. 이윽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다보스
는 행동을 개시할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머리를 조심하시오.”

다보스가 키를 돌리자, 배는 멜리산드레의 시선이 향해 있는 검은 바


다 쪽으로 서서히 나아갔다. 붉은 여자는 여유 있는 태도로, 한 손으
로 뱃전을 짚고서 흔들리는 배에 몸을 기댔다. 돛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 노가 삐걱대는 소리, 파도가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 등이 어둠
속으로 크게 울렸다. 다보스는 스톰엔드의 성벽에서 수상한 배의 출
현을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사실 그럴 일은 없었다. 거대한 성벽 너머로는 오직 끊임없이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릴 터였다.

밀물이 그들이 탄 배를 해변 쪽으로 밀었다.

“멜리산드레, 당신은 남자와 양파에 관해서만 말했는데 여자는 어떻


소? 여자도 다 마찬가지 아니오? 그래, 당신은 좋은 여자요, 아니면
나쁜 여자요?”

그 말에 붉은 여자가 깔깔대며 웃었다.

“저야 물론 좋은 여자죠. 저는 스스로 제 자신의 기사가 되었어요. 빛


과 인생의 승리자인 셈이죠.”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밤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소? 마에스터 크레


센을 죽였던 것처럼.”

“마에스터 크레센이요? 마에스터는 스스로 독약을 먹고 자살한 거예


요. 저를 독살하려 했지만, 제가 위대한 힘에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그럼 렌리 경은? 그를 죽인 것은 누구요?”

멜리산드레가 그 말에 다보스를 돌아봤다. 두 눈이 두건 아래서 빨간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저는 아니에요.”

“거짓말.”

다보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멜리산드레가 피식 웃었다.

“다보스 경, 당신은 지금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군요.”

“그럼 저기에 좋은 것이 있군.”

다보스는 멀리서 깜박이는 스톰엔드 성벽의 불빛을 가리켰다.

“바람이 얼마나 찬지 느껴지시오? 저곳의 경비병들은 추위에 몸을


떨며 횃불 옆에 바싹 붙어 있을 거요. 약간의 따스함과 빛을 바라면서
말이오. 어두운 밤이면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평온을 구하죠. 덕분
에 우리는 이렇게 들키지 않고 항해를 하고 있는 거고. 말하자면 지금
은 어둠의 신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는 얘기요. 심지어 당신까지
도.”

순간 빨갛게 타오르던 멜리산드레의 눈빛이 더욱 빛을 발했다.

“다보스 경, 함부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세요. 어두운 눈동자가


우리를 보게 될까 두렵군요. 어둠의 신은 어느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
아요. 제가 장담하죠. 어둠은 모든 생명체의 적이에요. 그리고 지금
우리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조금 전에 당신이 언급한 그 횃불
이에요. ‘빛의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광명의 선물인 불 말이에요.”

“그건 당신의 바람이겠지.”

“나보다는 그분의 바람이죠.”

한줄기 바람이 어두운 수면 위에 흔적을 만들었다. 다보스는 돛이 있


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돛을 접는 걸 좀 도와 주시오. 이제부터는 노를 저어 가야 하오.”


돛을 내리고 나니 배가 암초에 걸린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다보
스는 노를 꺼내 잔물결 치는 수면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당신을 렌리 경에게 데려다 준 사람은 누구였소?”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그는 보호받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여기는……. 이곳 스톰엔드는 마법의 돌들로 둘러싸여 있지요. 이 어
두운 마법의 성은 예로부터 어떠한 그림자도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
런 사실조차 잊혀진 지금까지도 말이에요.”

“그림자? 그림자는 어둠의 산물이 아니었소?”

“다보스 경, 당신은 어린아이보다도 아는 게 없군요.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요. 그림자는 빛의 충실한 신하이자, 불의 자식
이죠. 가장 밝은 불꽃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처…….”

순간 다보스의 손이 멜리산드레의 입을 막았다. 어느새 해안가로 바


싹 다가온 터라 성벽까지 말소리가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보스
는 파도소리에 맞춰 노를 저었다.

바다로 향한 스톰엔드의 성벽 위로 창백하리만큼 하얀 석회석 절벽


이 거대한 커튼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깎아지를 듯 가파른 절벽 한쪽
에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다보스가 16년 전에
드나들던 밀수 통로였다. 동굴은 오래 전 스톰의 영주들이 영토를 일
궈낸 성 안쪽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오직 밀물 때에만 이용할 수 있
는 그 통로는 위험하기 그지없었지만, 다보스의 뛰어난 항해술 덕분
에 별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보스는 동굴의 입구가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암초들 사이로 배를


몰아갔다. 그리고 밀물을 따라 자연스레 배가 안으로 흘러가도록 조
종했다. 출렁이는 물결에 두 사람의 몸이 흠뻑 젖었다. 경비라도 보듯
물위로 반쯤 몸을 드러낸 암초들을 노로 밀치면서 다보스는 앞으로
배를 몰았다. 마침내 물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지점에까지 도달했
다. 배가 조금씩 천천히 흔들거렸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메아리로
되돌아올 만큼 주위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다보스는 그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


에는 동굴 곳곳에 횃불이 불타고, 굶주린 사람들이 천장에 난 구멍을
통해 항상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쪽 어딘가에 격자
문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다보스는 천천히 노를 저었다.

“안에서 도와 줄 사람이 없다면, 여기까지가 우리 힘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이오.”

그의 속삭임은 쥐 떼들이 물장구를 치듯 파장을 일으키며 동굴 안으


로 울려 퍼졌다.

“성벽을 통과해 온 건가요?”

“그렇소. 성벽 밑을 통해서 들어왔소.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소. 곳곳마다 물 속으로 격자문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그 사이
는 어린아이라도 빠져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좁소.”

문득 부드럽게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치솟아 올랐다.

갑작스런 빛에 다보스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면서도 놀라움을 감추


지 못했다. 멜리산드레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더니 어깨를 움직여 머
리에 쓰고 있던 후드마저 벗어 던졌던 것이다.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
은 멜리산드레의 배가 산처럼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
마다 가슴이 출렁거리면서 부풀어 오른 배가 금세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다보스는 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
다.

멜리산드레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대답


을 대신했다.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르는 석탄처럼 이글거리고, 땀방
울이 온몸에 흐르며 그 자체로 빛을 발했다. 한마디로 멜리산드레는
빛나고 있었다.

멜리산드레가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았다. 허벅지 사


이로 잉크보다 까만 피가 흘러내리고, 고통과 쾌락에 찬 울부짖음이
어둠 속으로 울려 퍼지더니, 검은머리 하나가 멜리산드레의 몸을 헤
집고 나왔다. 이어서 나온 검은 두 팔이 고통으로 떨고 있는 멜리산드
레의 허벅지를 움켜잡고 몸이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안간힘을 썼
다. 마침내 멜리산드레의 몸밖으로 나온 것은 거대한 그림자였다. 그
것은 아주 잠깐 사이에 격자문의 틈새를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
다.

다보스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눈에 익은 그림자


였고 그림자의 주인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어둠 속에서 길게 뿔나팔소리가 울렸다. 존은 눈을 번쩍 뜨고 버릇처


럼 롱클로우부터 찾았다.

뿔나팔의 긴 여운이 주위를 맴도는 동안, 보초병들은 입김을 내뿜으


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팔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바람까지
멈춘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잠자리를 치
우고 무장을 하는 등, 재빠르면서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숨을 죽
이고 있는 듯한 숲에 문득 천둥소리처럼 커다란 소리가 한 번 울려 퍼
졌다. 나이트워치의 형제들은 다음 신호음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두려움과 함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더 이상 천둥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 동안 가슴
졸였던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는 듯, 나이트워치의 형제들은 서로 마
주 보며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존은 모닥불에 장작을 더 집어넣고는 허리에 검을 단단히 차고, 부츠


를 찾아 신었다. 그리고 외투에 묻은 진흙을 털어낸 다음 어깨에 둘렀
다. 그 바람에 모닥불이 순간 확 타올랐다. 텐트 안에서 인기척이 들
리고, 잠시 후 모르몬트가 얼굴을 내밀었다.

“신호음이 한 번 울렸나?”

까마귀가 웬일인지 모르몬트의 어깨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네, 한 번입니다, 로드커맨더. 형제들은 다시 자리에 들었습니다.”

모르몬트가 불가로 다가왔다.

“코린 하프핸드였을 거다. 올 시간이 이미 지났지.”

코린은 약속한 날짜에서 훨씬 늦어져 있었다.

“대접할 만한 음식이 있는지 챙겨 봐라. 그리고 말에게 먹일 것도. 코


린이 도착하는 대로 바로 만나겠다.”

“알겠습니다, 로드커맨더.”

일정대로라면 코린은 벌써 며칠 전에 도착했어야 했다.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그들이 나타나지 않자, 나이트워치 형제들은 모닥불
에 모여 앉을 때마다 걱정을 늘어놓으며 술렁거렸다. 오틴 위세르는
곧 캐슬블랙으로 퇴각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전망했고, 말
라도르 로케는 섀도타워에 가서 코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걸 알 수 없다면 어느 길로 떠났는지라도 알아봐야 한다고 했다. 또
소렌 스몰우드는 무조건 산 속으로 그들을 찾으러 떠나야 한다고 주
장했다.
“만스 레이더는 언젠가 우리와 한번 맞붙어야 한다는 걸 예상하고 있
겠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온 줄은 아직 모를 거야. 그러니 밀크워터를
따라 올라가 먼저 급습을 해야 해.”

언젠가 소렌 스몰우드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


자 오틴이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인원이 월등히 많아. 크래스터는 그자가 헤


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을 확보했다고 했어. 적어도 수천 명은
될 거란 얘긴데, 우리는 코린마저 없으면 겨우 2백밖에 안 돼.”

“수천 마리의 양떼 속에 늑대 2백 마리를 풀어놓아 봐. 결과는 뻔한


거 아냐?”

소렌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자르만 부크웰도 그리 낙관적


이지 않았다.

“그 수많은 양떼 속에 염소도 끼여 있을 수 있고, 사자도 몇 마리 있


을지도 모르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자르만 부크웰. 하지만 그들은 와이들링일 뿐


이야. 전사가 아니라구. 물론 영웅이 될 만한 인물도 몇 있겠지. 하지
만 대부분은 힘없는 여자들과 아이들, 노예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전
부라구. 우린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어.”

그날 그들은 한참을 더 얘기했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늙


은 곰은 절대로 퇴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렇다고 밀
크워터를 따라 올라가 만스 레이더를 덮쳐 맞서 싸우겠다는 것도 아
니었다. 결국 그날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며칠 더 기다렸다
가 그때도 섀도타워에서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다시 이야기해 보자
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한데 결국 그들은 도착했고, 그건 오늘 내로 뭔가 결정이 난다는 걸


의미했다. 존은 무엇보다 그 사실이 반가웠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
다고, 만스 레이더와 싸워야 한다면 빨리 그 순간을 맞고 싶었다.

모닥불 앞에서 고뇌하는 에드가 뿔나팔소리에 달콤한 잠을 깨어 버


렸다며 한창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존은 미안했지만
그에게 불평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들은 함께 로케를
깨우고 로드커맨더의 명령에 따라 아침을 준비했다.

존이 말라도르 로케를 깨우러 갔을 때, 샘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가


왔다. 퉁퉁하게 부은 얼굴이 둥근 달처럼 창백해 보였다.

“나팔소리가 들리던데, 삼촌이 돌아오신 거니?”

“아니. 섀도타워에서 사람들이 도착한 거야.”

존은 ‘퍼스트맨의 주먹’ 아래서 외투를 발견한 이후, 삼촌이 살아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더욱 단단히 부여잡았다. 외투가 삼촌 것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늙은 곰도 그 추측에 상당히 동감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드래곤글래스를 왜 그렇게 비밀스럽게 묻어 놓
았는지는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샘, 이만 가볼게.”

성벽에서 보초병 하나가 통로를 만들기 위해 반쯤 언 땅에 못을 박고


있었다. 섀도타워에서 온 형제들은 어느새 요새 바로 아래에까지 올
라와 있었다. 철과 청동 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말랐지만 단단해 보이
는 얼굴에 조랑말 꼬리처럼 털이 덥수룩했다. 뒤쪽으로 말 한 마리에
두 사람이 올라탄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존은 그 낯선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이유를 깨달았다. 오는 도중 사고를 당했는지, 그들은
대부분 부상자들이었다.

코린 하프핸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느리고 근엄한 말투에 신속한 행동, 워치의 위대한 레인저들은 모두
그렇게 모습이 비슷했다. 코린은 특별히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머리
를 길게 땋아 투구를 쓴 채였다. 원래 검은색이었을 옷은 빛이 바래
회색이 되어 있었다. 고삐를 쥔 손은 엄지와 검지만 남아 있었다. 언
젠가 와이들링이 휘두르는 액스를 손으로 막아내어 생긴 일이었다.
손가락이 아니었으면 머리통이 박살났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코
린은 손에서 핏줄기가 치솟자 손을 와이들링의 눈앞에 들이대 그자
가 허둥대는 사이 처치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월 너머에는 ‘코린보다
잔인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존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로드커맨더께서 바로 만나 보시겠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


다.”

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렸다.

“부하들이 배가 고플 거네. 그리고 말들도 좀 보살펴 주고.”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코린은 부하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존을 따라갔다.

“자네가 존 스노우로군. 아버지와 많이 닮았는걸.”

“제 아버님을 아십니까, 코린 경?”

“경? 존, 난 경이 아니라 나이트워치의 형제일 뿐이네. 에다드 경은


내 잘 알지. 그분의 아버님도 그렇고.”

존은 코린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걸음을 빨리 했다.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도 워치와 아주 가깝게 지내셨지.”

코린은 뒤를 흘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다이어울프가 자네를 따라다닌다고 들었는데?”

“고스트는 새벽녘이나 돼야 돌아올 겁니다. 밤에는 사냥을 다니거든


요.”

모르몬트의 막사에 도착해 보니, 고뇌하는 에드가 한창 베이컨을 굽


고 달걀을 삶고 있었다. 모르몬트는 나무의자에 가죽을 깔고 앉아 있
었다.

“코린, 그 동안 걱정 많이 했네.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

“오다가 알핀을 만났습니다. 만스 레이더가 정찰병으로 보냈나 본데,


돌아가다가 우리와 마주쳤던 거죠. 이제 알핀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
히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 일당 중에서 달아난 자들이 있습니다.”

코린이 투구를 벗었다.

“그 대가는?”

“네 명이 죽고, 열 명 정도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리 쪽이 세 배는


더 피해가 컸죠. 하지만 포로를 몇 잡았습니다. 한 명은 상처가 깊어
금방 죽었지만, 다른 자들은 심문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요.”

“안에서 자세한 얘기를 듣도록 하지. 존이 맥주를 가져올 거야. 아니


면 향료를 넣은 뜨거운 포도주 한잔 들겠나?”

“따뜻한 물 한잔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달걀과 베이컨이면 됩니


다.”

“그러지.”

모르몬트가 코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뇌하는 에드가 스푼으로 달걀을 톡톡 쳐서 껍질을 까며 푸념을 했


다.
“나는 이 달걀들이 너무 부러워. 얘들은 얼마나 따뜻하겠어. 나도 들
어갈 수 있을 만큼 냄비가 컸으면 기꺼이 삶은 에드가 됐을 텐데…….
물이 아니라 포도주로 삶아 주면 더 좋겠지. 술에 취해 따뜻하게 죽으
면 얼마나 행복할까. 혹시 포도주에 빠져 죽은 형제 얘기 알아? 포도
가 흉년이었을 때였는데, 그 시체 때문에 값도 제대로 못 받았지.”

“술 마셨어?”

“죽은 형제를 발견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지. 존, 너도 술을 좀 마실


필요가 있어.”

존은 모닥불 앞에 앉아 장작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잘만 하면 막사 안


에서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텐데,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대는데
다 코린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이야기를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핀이 죽었다니 잘된 일이었다. 그자는 와이들링 중에서도 잔혹하


기로 유명한 자였다. ‘블렉 브라더 킬러’라 불릴 정도로 그자 손에 죽
은 나이트워치 형제들도 아주 많았다. 한데 그렇게 대단한 승리를 거
두고도 코린의 목소리는 너무나 침통했다.

‘섀도타워에서 사람들이 온 걸 알고 캠프를 떠도는 영혼들이 모두 도


망갔으면 좋겠군.’

존은 바로 어젯밤에 소변을 보러 갔다오면서 형제들 대여섯이 불가


에 둘러앉아 소리 죽여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돌아가기도
늦었다는 체트의 중얼거림을 듣고, 존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번 출정은 어리석었어. 늙은이가 잘못 판단한 거라구. 결국은 아


무것도 못 찾고 이 산에 묻힐 거야.”

“프로스트팽스에는 거인들이 있대. 워그들도 있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도 많대.”

그렇게 말한 사람은 라크였다.


“나는 절대로 거기 안 갈 거야.”

“늙은 곰이 그렇게 해줄 것 같아?”

“그럼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때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존은 들키기 전에 얼


른 도망쳤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이상
모르몬트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형제들의 일을 일일
이 고자질할 수는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 그만 두었다. 설사 그다지 좋
아하지 않는 체트나 라크라고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그건 아무도 없
는 데서 그들끼리 나눈 얘기였다. 너무 춥고 두려워서 말이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태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존은 단검을 뽑아 검게 빛나는 날을 바라보았다. 자루는 나무를 직접


깎아 만든 뒤 실타래로 감아 놓았다. 그다기 보기 좋은 검은 아니었지
만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터였다. 드래곤글래스는 깨지기 쉬웠지만
강철보다도 훨씬 날카로웠다.

‘땅에 묻어 놓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존은 그렌과 로드커맨더에게도 단검을 하나씩 선사했다. 그리고 샘


에게는 전투용 뿔나팔을 선물했다. 나팔은 끝이 약간 깨진데다 먼지
를 깨끗이 닦아내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샘은 오래된 물
건을 워낙 좋아하는 터라 그 선물을 무척이나 만족해했다.

“샘, 그걸로 술잔을 만들면 되겠다. 그럼 술을 마실 때마다 월 너머로


출정을 떠나 왔던 일이랑, 여기 ‘퍼스트맨의 주먹’까지 왔던 일들이
기억날 거 아냐.”

존은 샘에게 창촉이랑 화살촉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형제


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모르몬트도 그 단검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
는 건 역시 강철 검이라는 사실을 존은 잘 알았다. 어쨌든 모르몬트도
누가, 왜 그것들을 망토에 싸서 묻어 놓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
다. 존은 문득 어쩌면 코린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월 너머의 일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식사는 네가 가져갈래, 아니면 내가 갈까?”

존은 에드의 물음에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듣고 싶어, 단


검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내가 갈게.”

에드가 두껍게 썬 딱딱한 빵 위에 베이컨을 얹어 나무 접시에 올려놓


고, 다른 그릇에 삶은 달걀을 담았다. 존은 접시를 양손에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코린은 창을 세워 놓은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책상다리를 하


고 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촛불이 그의 뺨 위로 이상한 그
림자를 만들어냈다.

“래틀셔츠, 위핑맨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워그와 맘모스들도 있다는데,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월에 위기가 닥친 것은 분명한 것 같네. 그리


고 왕에게도 말야.”

늙은 곰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어떤 왕 말씀이십니까?”

“전부 다. 자기 영토를 지키겠다면 세븐킹덤부터 지켜야 하는


데…….”
코린이 달걀을 하나 집어들었다.

“왕들은 그렇게 할 겁니다. 다행이 그럴 능력도 있고요. 제가 보기에,


가장 기대할 만한 곳은 윈터펠입니다. 스타크 가문이 북부에 힘을 집
중시켜야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늙은 곰이 옆에 있던 지도를 하나 집어 폈다. 하지만 얼굴을 찡그리고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한쪽으로 밀어 버리고는 다른 지도를 폈다. 위
기가 어디로 닥칠지 생각하는 듯했다. 존도 모르몬트의 어깨 너머로
지도를 보았다. 5백 킬로미터가 넘는 월을 따라 열일곱 개의 성이 자
리해 있었다. 예전에는 워치에서 그 모든 성에 병력을 파견했었지만,
형제들의 수가 감소하면서 이제는 겨우 세 군데에만 수비대를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스 레이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세르 알리세르가 킹스랜딩에서 새로운 병력을 끌고 올 테니,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자구. 그리고 섀도타워에서 그레이가드가 오고, 이스
트워치에서 롱바로우가 와 준다면…….”

“그레이가드는 크게 패했습니다. 스톤도어 쪽이 더 나을 것 같군요.


아마 아이스마크와 딥레이크도 괜찮을 겁니다. 요새의 돌벽을 따라
매일 정찰을 돌아야 합니다.”

“정찰은 가능하면 하루에 두 번 정도 돌 생각이네. 월 자체도 커다란


장벽이 되어 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어. 놈들
의 칩임만 조금 지연시킬 뿐이지. 인원이 많을수록 놈들도 움직이는
속도가 더딜 거야. 놈들이 떠나고 난 뒤 마을에 쥐새끼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았던 걸 보면 여자들도 함께 다니는 게 분명해. 거기다가 아이
들과 동물들까지……. 월을 넘으려면 거대한 층계나 경사로를 만들
어야 할 거야. 한데 그러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테고……, 만스 레
이더는 분명 월 밑으로 통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거야. 게이
트를 직접 통과하거나…….”
“구멍을 낼 겁니다.”

모르몬트가 흠칫해서 코린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그들은 월을 넘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갈 생


각도 없습니다, 로드커맨더. 아예 월에 구멍을 낼 겁니다.”

“월의 높이만도 2백 미터가 넘고, 두께도 어마어마하지 않나. 수백


명이 달려들어 액스로 뚫는다고 해도 일 년은 족히 걸릴 거야.”

“그렇다고 해도 말입니다.”

모르몬트가 얼굴을 찡그리며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말인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마법밖에는.”

코린이 달걀을 한입 베어 물었다.

“만스 레이더가 왜 하필 프로스트팽스에서 집결했다고 생각하십니


까? 그렇게 황폐하고 추운 곳에 말입니다. 게다가 월까지는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말입니다.”

“그 많은 인원을 우리 눈을 피해 모으려면 그만한 장소가 제격이었겠


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코린이 남은 달걀을 한입에 넣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잔인하리만큼 춥고 높은 그


산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겁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말입니다.”
“필요한 것이라고?”

모르몬트의 까마귀가 머리를 쳐들더니 깍깍 울어댔다. 귀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울음소리였다.

“알 수 없는 어떤 힘…….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잡힌 포로도


절대 말하지 않더군요.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죽었
습니다. 그가 알고는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무섭게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막사가 들썩이고 있었다. 바위틈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웠다. 모르몬트가 깊은 생
각에 잠겨 입가를 쓰다듬었다.

“그 어떤 힘이라……. 그걸 알아내야 한다…….”

“그 산으로 정찰병을 보내야 합니다.”

“난 더 이상 부하들을 잃고 싶지 않네.”

“그럼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영토를 지


키겠다고 검은 망토를 두른 게 아니었습니까? 형제들을 열다섯 명씩
세 조로 나누어 각각 정찰을 보내겠습니다. 한 조는 밀크워터를 조사
하게 하고, 다른 한 조는 스컬링패스, 나머지는 자이언트 스테어로 올
려 보내겠습니다. 지휘는 자르만 부크웰과 소렌 스몰우드,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맡겠습니다. 그 산에서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아내야만 합니다.”

모르몬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군. 하지만 자네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쨌든 프로스트팽스에서 누군가는 내려올 겁니다, 로드커맨더. 저


희가 내려온다면 일이 잘 해결된 거겠죠.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만스
레이더가 내려올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곳을 지나치게 될 거고, 그
럴 경우 후미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들이 더 이상 남하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이곳은 강력한 곳이니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강하지만도 않네.”

모르몬트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설사 우리가 모두 죽는다 해도, 그 동안 형제들이 월로 돌아갈 수 있


는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동안 비어 있던 성에 수비대
를 배치할 수도 있고, 성문을 닫을 수도 있고, 군대를 모을 수 있고,
무기를 준비할 시간도 벌게 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만큼 가치 있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죽음, 죽음, 죽음.”

까마귀가 모르몬트의 어깨에서 까악거렸다.

늙은 곰이 입을 떼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신들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그럼, 데려갈 형제들을 고르게나.”

코린이 고개를 돌리자 존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한참을 바라


보았다.

“좋습니다. 전 존 스노우를 데려가겠습니다.”

모르몬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존은 아직 어린애야. 그리고 내 집사이지 레인저가 아니야.”

“톨렛이 돌봐 드릴 겁니다, 로드커맨더.”

코린이 손가락이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월 너머에 있는 신들은 예전부터 그랬지만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퍼스트맨과…… 스타크 가문의 신들도요.”

모르몬트가 존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가겠습니다.”

존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모르몬트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존이 코린을 따라 텐트 밖으로 나왔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 오고 있었


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검은 외투가 휘날렸다. 바람
을 따라 타다 남은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후에 떠난다. 네 늑대를 빨리 찾아보는 게 좋겠구나.”

티리온

“왕대비님께서는 토멘 왕자님을 멀리 보내려 하십니다.”

티리온과 란셀은 어른거리는 촛불을 앞에 두고 어둠침침하고 조용한


셉트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란셀은 한껏 목소리를 낮
추었다.

“길레스 경이 토멘 왕자님을 로스비로 데려갈 겁니다. 그곳에서 왕자


님은 종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머리를 검게 물들일 거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떠돌이 기사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작정이랍니다.”

“누나가 두려워하는 것이 폭도들인가 아니면 나인가?”

“둘 다입니다.”
“아, 그렇군.”

티리온은 그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리스의 작은 새들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도 있나? 바리스도 나


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군. 아니면…… 어쩌면 그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은밀하고 세밀한 게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고맙네, 란셀.”

“일전에 제가 부탁한 걸 들어주시겠습니까?”

“생각해 보겠네.”

란셀은 다음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부대 하나를 지휘할 수 있기를 원


했다. 그래 봤자 솜털 같은 콧수염이 채 자라기도 전에 멋지게 전사할
것이었다.

‘그래도 젊은 기사들은 항상 영웅이 되길 꿈꾸지.’

티리온은 란셀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한참을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


다. 그리고 전사의 신 제단에 또 하나의 촛불을 켰다.

“내 형제를 지켜 주십시오. 그 역시 여러분들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이어서 이방인의 신 앞에 두 번째 촛불을 켰다.

‘저를 지켜 주십시오. 작고 초라한 난쟁이 티리온을…….’

그날 밤 티리온은 브론을 불렀다. 그리고 편지를 넣은 봉투에 뜨거운


황금색 밀랍을 똑똑 떨어뜨리고 내밀었다.

“이걸 세르 제이슬린 바이워터에게 전해 주게.”

“뭐라고 씌어 있습니까?”
브론은 글을 읽지 못했다.

“정예군 50명을 데리고 로즈로드를 정찰하라고 썼네.”

티리온은 자신의 인장을 부드러워진 밀랍에 대고 꾹 눌렀다.

“스타니스는 킹스로드로 나타날 가능성이 더 클 텐데요.”

“그래, 알아. 제이슬린에게 편지 내용을 무시하고 로스비로 가는 길


을 따라 병사를 배치하라고 하게. 길레스 경이 하루나 이틀 후면 병사
10여 명과 하인들, 그리고 내 조카를 데리고 자신의 성으로 떠날 거
네. 토멘은 종자로 가장하고 있을 거야.”

“토멘 왕자를 다시 데려오길 원하십니까?”

“아니, 그 아일 그 성으로 데려가길 원하네.”

토멘을 킹스랜딩에서 멀리 보내는 건 세르세이가 생각해낸 계획 중


에서 가장 쓸 만했다. 로스비에 있으면 토멘은 적어도 폭도들한테 당
할 일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조프리와 떨어뜨려 놓으면 스타니스에
게도 상황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스타니스가 킹스랜
딩을 점령하고 조프리의 목을 친다 해도 라니스터 가문임을 주장하
며 싸울 세력이 남는 것이니까.

“만에 하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길레스 경은 도망치기에는


병약하고 싸우기에는 너무 겁쟁이라 바로 성문을 열 거네. 일단 성안
으로 들어가면 세르 제이슬린이 주둔군을 쫓아내고 토멘 왕자를 안
전하게 모시게 될 거야. 제이슬린에게 경이란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 보게.”

“브론 경이 훨씬 듣기 좋을 것 같은데요. 저도 토멘 왕자님을 잘 보살


필 자신이 있습니다. 영주만 될 수 있다면 왕자님을 무릎에 올려놓고
자장가를 불러 드릴 수도 있죠.”
“내겐 아직 자네가 필요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티리온의 생각은 달랐다. 만일 조프리에게 불상


사라도 생기면, 라니스터 가문은 토멘의 여린 어깨를 통해 왕좌의 권
리를 주장해야 했다. 그럴 경우, 제이슬린은 토멘을 잘 지켜 줄 사람
이었다. 하지만 브론이 지휘하는 용병들은 토멘을 적에게 팔아먹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난 자네를 믿을 수가 없어.’

브론이 티리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질문을 계속했다.

“새 영주는 전 영주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영주를 먹여 살리는 임무만 잊지 않는다면 좋을 대로 해도 되네.


난 길레스 경이 죽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티리온은 탁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는 분명 킹스가드 중 하나를 토멘에게 딸려 보낼 거네.”

브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하운드는 조프리 왕의 충실한 개라 왕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나


머지 킹스가드는 세르 제이슬린이 이끄는 시티워치도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사람들이죠.”

“만일 부득이하게 죽여야 할 경우가 생기면 토멘 왕자 앞에서는 삼가


라고 전하게. 토멘 왕자는 마음이 여리니까 말이야.”

티리온은 암갈색 모직으로 만든 무거운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브론


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토멘 왕자가 라니스터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확신하십니까?”


“난 지금 겨울과 전투 외에는 확신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 자, 나랑
같이 나가지. 나도 그쪽 길로 가야 하니까.”

“차타야로 가시려구요?”

“자넨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것이 흠이야.”

두 사람은 성 북쪽의 뒷문으로 향했다. 티리온은 섀도블랙 거리로 말


을 달렸다. 말발굽소리가 나자 몇몇 사람들이 뒷골목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의회는 통행금지 시간을 늘렸다. 해가 지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 뒤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한 조치
로 킹스랜딩은 다시 평화를 찾았고, 아침에 뒷골목에서 발견되는 시
체도 4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바리스의 말에 따르면 통행 금지령
때문에 백성들은 티리온을 증오했다.

‘욕할 수 있도록 숨이 붙어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걸.’

골목을 지나는데 시티워치 둘이 티리온과 브론을 세웠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신분을 밝히자 경례를 하고 보내 주었다. 브론은 티리온에게
인사를 하고 머드게이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차타야의 가게로 말을 달리던 티리온은 갑자기 샤에가 못 견디게 그


리워졌다. 뒤돌아 정황을 살피니 미행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집집
마다 창문은 꽁꽁 닫혀 있고, 길에는 바람 부는 소리뿐이었다.

‘세르세이가 나를 미행하라고 누군가를 보냈다면 그자는 쥐로 위장


해야 했을 거야.’

“될 대로 되라지, 뭐.”

매사에 조심을 하는 일에는 이제 신물이 났다. 티리온은 말의 방향을


돌리고 박차를 가했다.
‘만일 누군가 내 뒤를 쫓고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말을 잘 달리는지
한번 봐야겠어.’

달빛이 비치는 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려 좁은 골목을 지나고, 후미진


뒷골목을 올라갔다.

티리온이 샤에의 저택 문을 두드리는데 스파이크를 두른 돌담 너머


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벤 출신의 사내 하나가 서둘러 그를 안
으로 안내했다. 거실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창틀에서 노란 불빛과 함
께 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티리온은 말을 사내에게 넘기
며 물었다.

“저게 누구 목소리지?”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배가 나온 뚱뚱한 음유시인입니다.”

마구간에서 집으로 가는 동안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티리온은 이제껏 음유시인이란 족속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너무 싫었다.
그 어떤 음유시인보다.

그가 문을 열자 노랫소리도 뚝 그쳤다.

“존경하는 핸드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대머리에 배불뚝이 사내가 티리온을 보자 무릎을 꿇었다.

“오, 티리온!”

샤에가 티리온을 보자 활짝 웃었다. 티리온은 샤에의 예쁜 얼굴에 생


각 없이 재빨리 번지는 그 미소가 좋았다. 샤에는 자주색 실크 드레스
위에 은빛 허리띠를 묶고 있었다. 자주색 드레스가 검은색 머리칼과
크림색 피부와 잘 어울렸다.

“샤에, 이자는 누구지?”

음유시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저는 사이몬 실버입니다. 연극배우 겸 음유시인 겸 얘기꾼이죠.”

“어릿광대로군. 자네,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때 나를 뭐라고 불렀지?”

멈칫하는 사이몬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네? 저는……. 존경하는 핸드님이라고, 뵙게 되어 영광이라고…….”

“현명한 자였다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척했을 거야. 나를 속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튼 자네는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어. 이
제 내가 자네를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자네는 나와 샤에의 관계를 알
고, 샤에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내가 밤에 혼자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

사이몬이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맹세하겠습니다요. 저, 절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그래, 명심하게. 자 이제 가보도록 하지.”

티리온은 차갑게 내뱉고는 샤에를 계단 위로 이끌었다.

“이제 저 음유시인은 절대로 노래를 하지 않을 거예요. 무서워서 목


소리가 나오기나 하겠어요.”

샤에가 티리온을 놀려댔다.

“두려움에 떨면 목소리가 더 높이 올라갈걸.”


샤에가 침실 문을 닫았다.

“그자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죠, 그렇죠?”

샤에는 향기 나는 초에 불을 붙인 뒤 티리온의 신발을 벗겨 주었다.

“당신이 오지 않는 밤에 제게 위안을 주는 건 노래밖에 없어요.”

“그 말은 내게 매일 밤 오라는 얘긴가? 그래, 그자가 노래를 얼마나


잘하지?”

“어떤 음유시인보다는 낫고, 또 어떤 음유시인보다는 못해요.”

티리온은 샤에의 옷을 벗기고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썩어 가


는 도시의 매춘굴 속에서도 샤에는 항상 상큼한 향기를 풍겼다.

“원한다면 그자를 계속 데리고 있어도 좋아. 하지만 잘 감시해야 해.


너에 대해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어.”

“그는 절대로…….”

티리온은 입술로 샤에의 입을 막았다. 알아들을 만큼 충분히 얘기를


했으니, 이제 샤에의 허벅지 사이에서 달콤한 즐거움을 만끽할 차례
였다. 적어도 거기서만큼은 그는 환영받는 존재였다.

즐거운 시간이 끝나고 티리온은 샤에에게 팔베개를 해주던 팔을 살


며시 빼내고 가운을 걸친 뒤 정원으로 내려갔다. 달빛이 나뭇잎과 연
못을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를 들으며 명상에 잠겼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이었다.

‘평화롭군.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그럴 수 있을까?’

문득 고약한 냄새에 티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샤에가 은빛 가운을 걸


치고 서 있었다.
‘나는 눈처럼 하얀 여인을 사랑했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머
리카락…….’

그리고 샤에 뒤로 뚱뚱한 남자 하나가 보였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남자는 맨발에 누더기를 입고 사발을 단 가죽끈을 목에 걸고 있었
다. 쥐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은 악취의 주범은 그 남자였다.

“바리스 경이 당신을 만나러 오셨어요.”

샤에의 말에 거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티리온의 웃음소리가 정원


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오, 어쩜……. 샤에, 나도 몰라봤는데 어떻게 알았지?”

샤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옷만 다른 것을 입었을 뿐인걸요.”

“다른 옷차림, 다른 냄새, 다른 걸음걸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아넘


어갈 텐데.”

“하지만 창녀들은 안 그래요. 창녀는 옷이 아니라 사내 자체를 보는


법을 배우죠. 그렇지 않으면 뒷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기 십상이거
든요.”

발에 있는 가짜 상처가 아니라도, 바리스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티리


온은 낄낄거렸다.

“샤에, 포도주 좀 가져다주겠어?”

지금 바리스에겐 술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한밤중에 이곳까지 온 걸


보면 분명 좋은 소식은 아닐 터였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씀드리기가 매우 두렵습니다. 아주 끔찍한


소식입니다.”
샤에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바리스가 입을 열었다.

“검은색 깃털 옷을 입고 오지 그랬소. 그러면 까마귀처럼 불길하게


보였을 텐데.”

티리온은 두려움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이메 형에 대한 소식이오?”

‘만일 저들이 형을 죽였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 역시 죽음뿐이야.’

“아닙니다. 다른 소식입니다. 세르 코트나이 펜로즈가 죽었습니다.


스톰엔드는 스타니스 경에게 성문을 열었습니다.”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티리온은 샤에가 포도주


를 가지고 돌아오자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던져 버렸다. 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샤에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빌어먹을 놈!”

“누구 말입니까? 세르 코르나이 말입니까, 아니면 스타니스 경 말입


니까?”

바리스가 썩은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둘 다.”

스톰엔드는 반년 이상 버텨냈어야 했다. 그 시간이면 아버지가 롭과


전투를 끝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소?”

바리스가 샤에를 흘낏 쳐다보았다.


“핸드님, 경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런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때문에 밤을 지새도 괜찮겠습니까?”

“정숙한 숙녀라면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아녜요.”

샤에가 입을 비죽거렸다.

“아니, 샤에, 너도 두려워해야 할 거야. 스톰엔드가 함락되면 스타니


스는 곧 킹스랜딩으로 관심을 돌릴 테니까.”

티리온은 잔을 던져 버린 걸 후회하며 바리스를 돌아보았다.

“바리스 경,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곧 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겠


소.”

“마구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리스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티리온은 샤에의 손을 잡고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샤에, 이곳에서 넌 안전하지 않아.”

“이 저택은 높고 견고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보낸 경호원도 있구요.”

“그들은 용병들이야. 내가 가진 금을 끔찍이 좋아하지만 과연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담이 아무리 높아도 사람이
넘을 수 없는 담이란 없어. 폭동이 일어나면 이런 저택은 쉽게 불타고
말아. 폭도들은 식료품 창고가 가득 찼다는 이유만으로 금은방 주인
을 죽이고, 하이셉톤을 갈가리 찢고, 탄다 부인의 딸 롤리스를 강간하
고, 세르 아론의 해골을 짓이겼어. 만일 네가 내 여자인 줄 알게 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핸드의 창녀에게 말이죠?”


샤에는 커다란 눈으로 티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핸드님, 전 당신의 아내가 될 거예요. 축제 때면 당신이 준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당신이 준 보석을 달고, 당신 옆에 앉을 거예요. 당신
손을 꼭 잡고서 말예요. 전 당신에게 아들을 낳아 줄 수 있어요. 장담
해요. 그리고 결코 당신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할게요.”

“꿈이 아주 원대하군. 좋아, 샤에. 하지만 그 꿈은 접어 두는 게 좋아.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왕대비 때문인가요? 난 그 여자도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난 무서워.”

“그렇다면 그 여자를 죽여 버리세요. 왕대비와 당신 사이에는 우애라


곤 전혀 없잖아요.”

티리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르세이는 나의 누나야. 자기 피붙이를 죽인 사람은 신과 인간에게


영원히 저주받는 법이지. 게다가 나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버
지와 형은 누나를 끔찍이 아껴. 그리고 지금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다
해도, 난 자이메 형과 대적할 만한 힘이 없어.”

“당신은 롭 스타크와 스타니스 바라테온도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내 사랑, 아는 것이 정말 없군.’

“샤에, 난 그들과 대적할 수 있어. 하지만 자이메 형이나 아버지에겐


그럴 수 없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난 등이 굽은 꼬마 도깨비에 지나
지 않아.”

“당신에겐 제가 있잖아요.”
샤에가 몸을 바짝 붙이며 티리온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했다. 샤에의
키스는 언제나 그의 잠자던 남성을 깨웠다. 하지만 티리온은 부드럽
게 샤에를 떼어놓았다.

“지금은 안 돼, 내 귀여운 여인. 나는……. 글쎄, 어쩌면 너를 성 안


부엌으로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샤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부엌이요?”

“응. 바리스에게 부탁하면 아무도 모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샤에가 낄낄거렸다.

“그럼 제가 당신을 독살시켜 버리겠어요. 제 요리를 맛본 남자들은


모두 저보고 요리 솜씨 좋은 창녀라고 했죠.”

“레드킵에는 요리사가 많아. 너는 그냥 하녀인 척만 하면 돼.”

“하녀라구요? 뻣뻣한 갈색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요? 경께선 제가 그


런 모습으로 있는 걸 보고 싶으세요?”

“난 살아 있는 널 보고 싶은 거야. 하녀니까 실크나 벨벳 드레스는 입


을 수 없겠지.”

“제가 싫어지셨어요?”

샤에가 갑자기 아래로 손을 뻗어 티리온의 남성을 움켜잡았다. 가볍


게 만지기만 하는데도 몸이 반응을 했다.

“이놈은 여전히 나를 원하는데요? 하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으신 거


예요? 원하신다면 밀가루 속으로 날 밀어 넣고 내 가슴을 빨 수
있…….”
“그만 해!”

티리온은 문득 차타야의 가게에 있는 댄시를 떠올렸다. 제 뜻을 이루


기 위해 무슨 말이든 거침없이 내뱉던 여자……. 티리온은 샤에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야멸차게 손을 밀쳐냈다.

“샤에, 지금은 잠자리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네 생명이 위태


롭다구.”

샤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세요.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니


에요. 전 단지……. 제게 호위병을 더 보내 주시면 되잖아요.”

‘샤에가 어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티리온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샤에의 손을 잡았다.

“보석은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어. 드레스도 지금 것보다 훨씬 아름


다운 걸로 맞춰 줄 수 있고. 샤에, 내게 넌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
야. 물론 레드킵이라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기
보다는 훨씬 안전해. 그래서 널 그곳에 있게 하고 싶은 거야.”

“부엌에요? 하녀로 말이죠?”

샤에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잠시일 뿐이야.”

샤에의 입술이 뒤틀렸다.

“아버지는 나를 하녀처럼 부렸어요. 난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아버지가 너를 범해서 도망쳤다며?”


“네. 그랬어요. 한데 그의 물건이 몸에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그가 먹
은 그릇을 닦는 것도 싫었다구요.”

갑자기 샤에가 머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왜 저를 옆에 두시지 못하는 거죠? 궁정 대신 중 절반 이상이 여자


들을 데리고 있어요.”

“너를 성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하셨어.”

샤에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경의 멍청한 아버지께서 말이죠? 경은 원하는 대로 여자를 가질 수


있는 성인이에요. 경의 아버지께서는 경을 왜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
시는 거죠? 그분이 경에게 무엇을 해주죠? 엉덩이 때리기?”

순간 티리온의 손이 샤에의 뺨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리 힘이 들어


가지는 않았다.

“제길, 날 비웃지 마. 너는 날 비웃어서는 안 돼.”

잠시 샤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


게 들렸다.

“죄송해요. 건방진 행동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마침내 샤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널 때리려고 한 것은 아냐. 세상에, 어느새 내가 세르세이를 닮


아 가고 있는 건가?’

“됐어. 우리 둘 다 잘못했어. 하지만 샤에, 넌 이해하지 못해.”

의도하지 않았던 말들이 갑자기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열세 살 때 난 어떤 농부의 딸과 결혼했어. 아니, 농부의 딸은 아니
었는데, 어쨌든 난 그렇다고 믿었지. 난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고, 그
여자 또한 나와 같다고 여겼어.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진실을 보여 주
셨지. 사실 나의 신부는 형이 내가 남자임을 알도록 만들기 위해 고용
한 창녀였던 거야.”

티리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런데 난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모두 믿었어. 얼마나 어리석었는


지…….’

“샤에, 아버지가 내게 어떻게 진실을 보여 주었는지 알아? 아버지는


나의 아내를 병사들에게 주어 그들이 원하는 만큼 즐기도록 했지. 그
리고 내게 그 모습을 지켜보도록 명령했어.”

‘그리고 병사들이 일을 끝낸 뒤 마지막으로 내게 아내를 안으라고 했


지. 마지막, 사랑도 부드러움도 남지 않았던 마지막 잠자리…….’

더할 수 없는 처참함에 티리온은 몸을 떨었다.

“그 여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잘 기억하라고 말이야.”

‘난 아버지의 명령에 반항해야 했지만 내 페니스가 날 배신했어. 그래


서 아버지의 명령대로 하고 말았지.’

“모든 일이 끝나고 아버지는 나의 결혼을 무효로 만드셨지. 셉톤이


내게 와서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그러니
제발 아내니, 결혼이니 하는 생각은 더 이상 말아 줘. 샤에, 아주 잠시
만 부엌에 있으면 돼. 스타니스와의 전투만 끝나면 새 저택과 네 손만
큼 부드러운 실크 옷을 선물해 줄게.”

샤에의 눈은 커졌다. 하지만 티리온은 그 눈에 숨겨진 뜻을 읽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설거지하고……. 그때쯤이면 제 손은 전혀 부
드럽지 않을 거예요. 그런 손으로 당신을 만져도 돼요?”

“당연하지. 그 손을 볼 때마다 네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생각하며 감


사할 거야.”

그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표정하게 있던 샤에


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것은 샤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티리온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가면 바로 사람을 보낼게.”

티리온은 샤에의 뺨에 살며시 키스했다.

바리스는 약속한 대로 마구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쩍 마른 절름


발이 말에 앉아서. 티리온이 말에 오르자, 경비병 하나가 문을 열었
다. 두 사람은 조용히 말을 달렸다.

‘왜 샤에에게 티샤 얘기를 했을까?’

티리온은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세상에는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비밀이 있는 것이었다. 사내라면 무덤 속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
이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고도 샤에가 날 계속 사랑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서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보 같은 난쟁이! 샤에가 사랑하는 것은 네가 가진 금과 보석일 뿐


이야.’
전쟁에서 입은 팔꿈치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가끔 상처 안쪽에서 뼈
들이 서로 부딪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몇 번 했었다. 마에스터에
게 진통제를 얻고 싶었지만, 피세르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는 마에
스터들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누구와 결탁해 음모를 꾸미는
지 어찌 알겠는가. 약에 무엇을 섞는다 해도 알 길이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바리스 경, 누나 모르게 샤에를 성안으로 데려왔으면 좋겠소.”

티리온은 바리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대충 설명했다. 그러자 바리스


가 킥킥거렸다.

“물론 티리온 경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겠죠.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


지만, 부엌에는 눈과 귀가 많습니다. 샤에가 특별히 의심을 받지 않는
다 해도 수많은 질문을 받게 될 겁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군지, 킹스랜딩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샤에는 거짓말을
하고 또 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 티리온을 흘낏거렸다.

“게다가 그렇게 어리고 예쁜 하녀는 호기심뿐만 아니라 성욕도 자극


하겠죠. 시도 때도 없이, 기회만 있으면 남자들이 집적댈 거고, 밤에
몰래 샤에의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 놈들도 있을 겁니다. 몇몇 외로운
요리사들은 결혼하자고 달려들지도 모르고요. 빵 굽는 자들은 밀가
루 묻은 손으로 젖가슴을 주무르겠죠.”

“샤에가 칼에 찔려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티리온의 씁쓸한 말에 바리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얼마쯤 갔을까,


바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것도 같군요. 탄다 부인의 딸을 시중들던 하녀가


보석을 훔쳤다더군요. 탄다 부인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주면 그 하녀
는 즉시 해고될 거고, 그러면 새 하녀가 필요할 겁니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귀부인의 하녀들은 식모보다 좋은 옷을 입었고,
간혹 보석도 한두 개 몸에 지니기도 했다. 샤에도 부엌데기보다는 그
편을 훨씬 좋아할 터였다. 게다가 세르세이는 탄다 부인이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라면서 그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롤리스는 본래 소심하고 남을 잘 믿었죠. 한데 얼마 전 폭도들에게


당한 후부터는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마 샤에가 다
른 사람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경께서 원하신다면 바로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핸드의 탑에서도 무척 가깝고요.”

“그러기엔 내 관저에 보는 눈이 많지. 경도 잘 아시지 않소. 롤리스의


하녀가 나를 자주 방문한다는 소문이 돌면 누나는 분명 호기심을 보
일 거요.”

“아무도 모르게 샤에를 티리온 경의 침실에 데려갈 수 있습니다. 차


타야의 가게에만 비밀의 문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샤에가 아무도 모르게 내게 올 수 있단 말이오? 내 침실로?”

티리온은 놀라기보다는 당황했다. 사실 그런 비밀 통로를 만들기 위


해서가 아니라면 지난날 그 잔인한 마에고르가 성을 짓고 난 뒤 인부
들을 모두 죽였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그 문이 어딨소? 내 침실?”

“경, 제가 알고 있는 보잘것없는 비밀들을 전부 가르쳐 달라고 강요


하지 마십시오.”

“그래 봤자 우리의 보잘것없는 비밀이 될 뿐이지 않소, 바리스 경. 물


론 당신이 내 편일 경우에만 말이오.”

티리온은 냄새나는 바리스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전적으로 경을 신뢰하오.”

씁쓸한 웃음소리가 굳게 닫힌 창문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바리스 경, 사실 난 경을 내 혈육처럼 믿고 있소. 그건 그렇고, 코트


나이 펜로즈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 주겠소?”

“탑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난 절대로 믿지 못하겠소.”

“호위병들은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답니다. 그


가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미리 방에 들어가 침대 밑에 숨어 있었다거나, 지


붕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을 거요. 아니면 호위병들이 거짓말을 하
는 것이거나. 호위병들이 범인일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럼 바리스 경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요? 그럼 어


떻게 된 거라 생각하는 거요?”

바리스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발굽소리가 정적을 깨뜨리


고 있었다. 마침내 바리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티리온 경,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마법 말이오? 주문, 저주, 변신 같은 걸 말하는 거요?”

티리온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세르 코트나이가 마법의 힘에 죽음을 당했다는 거요?”


“세르 코트나이가 죽던 날 아침, 그는 스타니스 경에게 결투를 신청
했다고 합니다. 절망에 빠져 자살할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렌리 경의 죽음도 이해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
다. 그는 형과의 전투를 눈앞에 두고 살해당했습니다.”

바리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티리온 경, 일전에 제가 어떻게 환관이 되었는지 물어 보신 적이 있


죠?”

“기억하오.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던 걸로 기억하는


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묵이 더 오래 갔다. 바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


가 예전과 좀 달랐다.

“고아였던 저는 여기저기 떠도는 유랑극단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죠.


그때 우리 극단주는 작은 배를 하나 가지고 해협을 오가며 공연을 했
죠. 주로 자유도시로 다녔고, 가끔 올드타운과 킹스랜딩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죠. 어느 날 미르에서 어떤 사내가 우리 공연을 보러왔습니
다. 공연이 끝난 후 그 사내는 나를 사기 위해 주인에게 거절할 수 없
는 액수의 돈을 제안했습니다. 나는 그가 어린 소년들을 희롱한다는
그런 변태인 줄 알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게서 바란 것
은 오직 나의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약을 먹
였죠.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감각만은 아주 생생히 살아 있었죠. 그가
긴 칼로 나의 남성을 잘라내더니 주문을 외우며 그것을 화로에서 불
태웠습니다. 그러자 파란 연기가 나면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죠. 비록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 사내는 목적을 달성하자
나를 쫓아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자 곧 죽
을 거라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난 그의 말대로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극단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난 후라, 구걸하고, 훔치며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나는 미르에서 둘
째가라면 서러운 도둑이 되었고, 좀더 나이를 먹은 후에는 지갑보다
편지의 내용이 더 값질 때가 있다는 사실도 터득했죠. 티리온 경, 난
아직도 그날 밤 일을 꿈꿉니다. 그 마법사도 아니고, 내 남성을 자른
칼도 아니고, 불에 타며 쭈그러들던 내 남성도 아닙니다. 그 목소리,
불꽃에서 나오던 그 목소리를 꿈꿉니다. 그것이 신이든, 악마든, 마법
사의 장난이든 상관없습니다. 난 웬만한 마술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마법사가 불
렀을 때 그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날 이후 나는 모든
마법과 마법사를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스타니스 경이 마법사
라면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조용히 말을 달렸다. 마침내 티리온이 입을 열었다.

“끔찍한 이야기로군.”

바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경은 절 불쌍하게는 여기시지만 믿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뭐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오래 전 일이고, 저 바다 건너에서 일어난 일이었
으니까요.”

“바리스 경, 나는 검과 금, 사람의 이성만을 믿소. 그리고 과거에 드


래곤이 있었다는 사실은 믿소. 두개골을 직접 보았으니까.”

“경께서 본 가장 끔찍한 것이 언제까지나 드래곤이길 바랍니다.”

티리온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점에 동의하오. 세르 코트나이의 죽음은, 글쎄, 스타니스가


자유도시 출신의 뱃사람들을 고용했다고 들었소. 아마 잘 훈련된 암
살자도 고용했을 테지.”

“그렇다면 정말로 솜씨가 뛰어난 암살자일 겁니다.”


“그렇겠지. 나 역시 부자가 되면 그런 자를 고용해 누나한테 보내야
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으니까.”

“세르 코트나이가 어떻게 죽었든, 중요한 건 그가 죽었다는 사실입니


다. 성이 함락되었으니, 스타니스 경은 거침없이 진군할 겁니다.”

“마르텔 가문을 설득해 스톰엔드를 공격하게 할 방법은 없겠소?”

“불가능합니다.”

“유감이군. 참, 아버님 쪽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없었소?”

“티윈 경께서 레드포크를 건너는 데 성공하셨는지 몰라도, 아직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티윈 경께선 적들
사이에 갇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리틀핑거에게서도 아직 소식이 없소?”

“아직 비터브리지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처


형당했을지도 모르고요.”

티리온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경, 왜 그러십니까?”

바리스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티리온은 잠자고 있는 도시


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바리스 경, 재미있지 않소? 스톰엔드는 함락되었소. 스타니스는 군


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진군해 올 거요. 그들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는 아무도 모르는데, 우리는 그들을 막을 자이메 형도, 로버트 왕도,
라예가르도, 꽃의 기사도 없소. 오직 나뿐이오. 사람들이 경멸하고 미
워하는 나뿐이란 말이오.”

티리온은 다시 한바탕 웃어댔다.


“난쟁이에다 원숭이처럼 다리가 휜 꼬마 악마만이 그들과 혼돈 사이
에 서 있는 유일한 존재란 말이오.”

캐틀린

“아버님께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아버님을 자랑스럽게 해드리기 위해


떠났다고요.”

에드무레는 번쩍이는 갑옷과 망토를 걸치고 말에 올라탔다. 은빛 송


어가 장식된 투구는 방패와 잘 어울렸다.

“안 그래도 아버님은 항상 너를 자랑스러워하셔. 그리고 널 아주 사


랑하시지.”

“누님, 아버님을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가 손을 들었다. 바로 트럼펫과 드럼이 울리며 도개교가 내려졌다.


에드무레 툴리는 창을 높이 들고 깃발을 나부끼며 병사들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갔다.

그에 비해서 브리엔느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캐틀린은 브


리엔느에게 어울릴 만한 예쁜 옷을 지어 주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낡
은 갑옷과 가죽옷을 더 좋아했다. 아마도 브리엔느 역시 에드무레와
함께 출전하길 바랐을 터였다.

에드무레는 이번 출전을 위해 인원을 최대한 동원했다. 그 때문에 데


스몬드 그렐은 몇몇 종자와 농가의 소년, 부상당하고 늙은 병사들로
수비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힘을 보태야 할 정도였다.

에드무레의 병사들이 성을 완전히 벗어나자 브리엔느가 물었다.

“부인, 이제 우린 어떻게 하지요?”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지.”

그렇게 대답하며 안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캐틀린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난 항상 내 의무를 수행했어.’

그래서 아버지가 그녀를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인지도 몰랐다. 본래


캐틀린 위로 오빠가 둘 더 있었지만 둘 다 어릴 때 죽었다. 그 때문에
에드무레가 태어나기 전까지, 캐틀린은 아버지에게 딸임과 동시에
아들이었다. 그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리버룬의 안주인 역
할도 맡아야 했고, 그 일에 충실했다. 그리고 브랜든 스타크와 혼약을
맺었을 때는 그러한 멋진 만남을 주선한 아버지께 감사했다.

‘난 브랜든에게 마음을 준 이후 페티르가 나 때문에 부상을 당했어도


위로는커녕 이곳을 떠날 때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브랜든
이 죽은 후엔 아버지 말씀대로 그의 동생인 네드와 결혼했어. 결혼식
전날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자와 말이야. 그리고 얼마 후 네드
도 전쟁터로 떠나 보냈어. 왕과 그의 사생아를 낳은 여인에게로…….
난 항상 그렇게 내 의무를 다했어.’

캐틀린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셉트로 향했다. ‘어머니의 정원’ 한복


판에 7각으로 세워진 사암 사원은 무지갯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셉트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캐틀린은 전사의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에드
무레와 롭을 위해 향초에 불을 붙였다.

‘그들을 안전하게 돌봐 주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리고


죽은 자들의 영혼에 안식을 주시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평안을 주
소서.’

셉톤이 향로와 크리스털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캐틀린은 에드


무레와 또래로 보이는 그 셉톤과 초면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그는 자
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리고 음량이 풍부해서 찬양할 때 듣기가
참 좋았다. 하지만 캐틀린은 오래 전에 죽은 셉톤 오스민드의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가 그리웠다. 오스민드라면 렌리의 막사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 설명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캐틀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밤에는 가즈우드로 가서 네드의


신들에게 기도할 생각이었다. 북부의 신들은 이곳의 일곱 신보다 훨
씬 오래된 신들이었다.

문득 특이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양조장 근처에서 음유시인 라이


먼드 라이머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
리는 ‘피의 들판’에서의 데레먼드를 찬양하는 부분에서 매우 장엄하
게 울렸다.

한 손에 검을 치켜든 그가 서 있도다.

달리의 마지막…….

브리엔느가 잠시 멈춰 서서 굵은 팔을 팔짱끼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헐벗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막대기로 칼싸움을 하며 지
나갔다.

‘왜 저 아이들은 전쟁 놀이를 저렇게 좋아할까?’

캐틀린은 라이먼드 같은 음유시인들이 그 원인을 제공하는 게 아닐


까 추측했다. 노랫소리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점점 더 커졌다.

발 아래에는 붉은 풀

머리 위에는 붉은 깃발

하늘에는 붉은 황혼

‘나를 따르라!’

위대한 영주가 호령했도다.


‘내 칼은 피에 굶주렸다.’

사나운 분노의 고함과 함께

그들은 강을 건너갔도다.

“부인, 기다리느니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브리엔느가 문득 중얼거렸다. 캐틀린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에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브리엔느가 파란 눈으로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다 죽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런 여자를 위해 노


래를 불러 주진 않아요.”

“아이를 낳는 것도 또 다른 전쟁이지.”

캐틀린은 발걸음을 옮겼다.

“검이나 깃발은 없지만, 그 역시도 대단히 처절한 고통이 따르는 일


이지. 새로운 생명을 세상 속으로 내놓는 일……. 네 어머니도 얘기해
주셨겠지만…….”

“전 어머니를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에겐 부인이 있었지만, 해마다


바뀌었죠. 하지만…….”

“브리엔느, 힘들게 아이들을 낳지만 그후에는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지. 때로 나는 내가 낳은 다섯 아이가 또 다른 나처럼 느껴져. 그래
서 내가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는지도
몰라.”

“그럼 부인은 누가 지키죠?”


브리엔느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글쎄, 내 가문의 사람들이겠지. 아버지와 남동생, 삼촌, 남편, 그들


이 날 안전하게 지켜 줘야겠지. 그러나 그들이 내 곁에 없을 땐, 브리
엔느, 네가 그 자리를 채워 줘야 할 거야.”

브리엔느가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마에스터 바이만이 편지를 한 통 가져왔다. 캐틀린은 롭이나


윈터펠에 있는 로드릭에게서 온 편지이길 바랐지만, 그것은 스톰엔
드에서 보낸 것이었다. 호스터 툴리와 에드무레 툴리, 롭 앞으로 날아
온 편지는 코트나이 펜로즈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스톰엔드의 성
문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 스타니스 바라테온 왕에게 열렸다는 소식
을 담고 있었다.

“코트나이 펜로즈가 죽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캐틀린은 그의 죽음이 매우 마음 아


팠다.

“롭에게 즉시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마에스터, 롭이 어디 있는지 아


시나요?”

“제가 받은 마지막 전갈에는 크랙으로 행군한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서둘러 전령조를 날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캐틀린은 바이만이 떠난 후에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브리엔느, 이 편지에는 로버트의 서자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어.


물론 살려 두긴 하겠지만, 난 스타니스 경이 왜 그렇게 그 아일 원했
는지 이해가 안 가.”

“그 소년의 요구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요?”

“서자의 요구?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


야. 참, 그 아이는 어떻게 생겼지?”

“나이는 일곱 살인가 여덟 살쯤 되는데, 머리칼이 검고 눈이 파란, 아


주 귀여운 소년이죠. 사람들이 렌리 왕의 친아들로 착각할 정도로 렌
리 왕을 많이 닮았어요.”

“그리고 렌리는 로버트를 닮았지.”

캐틀린은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스타니스 경은 로버트 왕의 서자를 앞세울 생각인지도 몰라. 사람들


은 그 아이의 얼굴에서 로버트를 떠올리면서, 조프리 왕은 어째서 로
버트와 전혀 닮지 않았는가 하고 의아해하겠지?”

“정말 그럴까요?”

“스타니스 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내세우겠지. 조프리 쪽에


서야 무시하겠지만.”

캐틀린은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다. 모두 스타크 가문보다는


외가인 툴리 가문 쪽을 많이 닮았다. 아리아만이 네드를 닮은 유일한
자식이었다. 존도 네드를 닮았지만, 그 아인 캐틀린 자신이 낳은 아이
가 아니었다. 문득 존의 친모가 떠올랐다. 남편이 결코 말하지 않은
그림자 같은 비밀스런 사랑.

‘그 여자도 나처럼 네드의 죽음을 슬퍼할까? 아니면 나 때문에 자기


의 침대를 떠난 네드를 미워할까? 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그 여자도 존을 위해 기도할까?’
캐틀린은 갑자기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생각을 멈췄다. 데스몬
드의 종자가 숨을 헐떡이며 캐틀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인, 라니스터……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해 보게.”

종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보고했다.

“무장한 병력이 레드포크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자 깃발과 유


니콘의 깃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브락스 경의 아들인가 보군.’

브락스는 캐틀린이 어릴 적에 리버룬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아들


중 하나를 툴리 가문의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서였다.

캐틀린은 혹시 그때 그 아들이 지금 군대를 이끌고 있을지도 모르겠


다 생각하며 브리엔느와 함께 서둘러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 위에서
는 넓게 펼쳐진 레드포크의 남쪽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드무레는
그곳의 방어를 제이슨 말리스터에게 맡기고 있었다. 아래로 한 줄로
길게 행군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50명은 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옆에 있던 데스몬드가 설명했다.

제이슨의 군대는 낮은 언덕과 바위, 풀숲 뒤에 몸을 가린 채 숨을 죽


이고 있고, 적군은 개울물을 첨벙거리며 당당하게 진군해 오고 있었
다. 잠시 동안 그들은 용감했다. 빛나는 갑옷과 창, 그리고 펄럭이는
깃발…….

“지금이에요.”
브리엔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순간, 갑자기 말들의 비명소
리가 하늘을 찔렀다.

캐틀린은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쇳소리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윽고 깃발이 하나 쓰러지고, 시체 한 구가 물살을 타고 떠내려갔다.
라니스터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캐틀린은 말없
이 지켜보았다. 옆에서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왔던 길로 후
퇴하는 적군을 보며 함성을 질렀다.

“영주님께서 이 장면을 보셨어야 하는데, 아쉽군요. 보셨다면 춤이라


도 추셨을 텐데.”

데스몬드가 아쉬운 듯 얘기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유감스럽게도 아버지가 춤출 수 있는 시절은 이미 지나갔어요. 그리


고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적들은 다시 쳐들어올 겁니다. 게다가 티윈
경은 에드무레보다 병력이 두 배가 넘어요.”

캐틀린은 작은 승리에 들뜨지 않았다.

“부인, 설사 병력이 열 배가 넘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레


드포크는 동쪽보다 서쪽이 지대가 높고, 나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시
야도 확 트인데다 몸을 숨기기에도 좋은 지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경의 말씀이 옳기를 빌겠어요.”

캐틀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한밤에 적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하녀가 미리 지시받은 대로 적군의


침입을 아는 순간 캐틀린을 깨우러 왔다.

캐틀린은 하녀가 어깨를 두드리자 즉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적군이 다시 레드포크를 건너고 있어요, 마님.”

캐틀린은 잠옷을 입은 채로 망루로 올라갔다. 강둑을 따라 밝혀 놓은


횃불 덕에 달빛에 비친 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쩌면 라니스터
병사들은 그걸 보고, 리버룬 사람들은 야맹증 환자거나 생각이 짧다
고 비웃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빛은 오히려 리
버룬 병사들의 편이었다. 그들에게 어둠은 장애만 될 뿐이었다.

리버룬 궁수들이 쏜 불화살이 빗발치듯 아래로 쏟아졌다. 쉿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불꽃은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라니스터 병사 하
나가 불화살을 열두 방이나 맞고 무릎까지 오는 강에서 춤추듯 맴을
돌다가 물살에 떠내려갔다.

드디어 전투가 끝나고 살아남은 적군들이 어둠 속으로 서둘러 사라


졌다.

‘작은 승리야. 이건 단지 작은 승리에 불과해.’

캐틀린은 구불구불한 계단을 내려오면서 브리엔느에게 이번 전투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보았다.

“부인, 이번 전투는 티윈 경에게 손끝이 따끔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자는 무방비 상태로 강을 건널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했을 겁니
다.”

브리엔느가 등을 구부리며 덧붙였다.

“제가 만일 그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다음날, 캐틀린은 아침식사를 들며 늙은 집사를 불렀다.

“웨인, 세르 클레오스에게 이 포도주를 보내고, 저녁에 좀 봤으면 한


다고 전해 줘요. 물어 볼 게 좀 있거든요. 그전에 그가 긴장을 좀 풀었
으면 좋겠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인.”

웨인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에 말리스터 가문의 문장을


붙인 기마병이 전갈을 가지고 도착했다. 제이슨이 보낸 것이었다. 편
지에는 또 한 번의 작은 전투와 승리에 관해 적혀 있었다. 적군은 다
시 강을 건너오려고 시도했다가, 제이슨의 궁수들이 퍼붓는 화살과
에드무레의 병사들이 날린 바위에 무참히 깨져 왔던 길을 되돌아갔
다.

“강에서 목숨을 잃은 적병은 열둘인데, 그 중 두 사람의 시체가 우리


가 있는 여울까지 떠내려 왔습니다.”

그 기마병은 그것말고도 레드포크 상류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곳은 카릴 반스가 지키는 곳이었다.

“상류에서도 적들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에드무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지도 모르겠군.’

캐틀린은 어쩌면 롭도 더 이상 자신이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아닐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그날 저녁, 클레오스가 캐틀린을 방문했다. 캐틀린이 보낸 포도주를


마신 게 분명해 보였다. 그가 캐틀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인, 저는 달아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기사로서 맹세한 바


를…….”

“세르 클레오스, 일어나세요. 나는 왈더 프레이 경의 손자들은 맹세


를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에드무레 말로는 세르께서
평화조약 협상안을 가지고 왔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클레오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모습을 보는 캐틀린의 입가
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나도 듣고 싶군요.”

클레오스가 하나하나 그 내용을 얘기했다. 캐틀린은 얘기를 듣는 내


내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에드무레의 말대로 협상안이라고 할 수
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자이메를 풀어 주면 아리아와 산사를 보내 주겠다고 했단 말이죠?”

“네. 분명히 티리온 경이 왕좌에 앉아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격자들이 있나요?”

“모든 대신들이 다 들었습니다, 부인. 물론 신들도 그렇구요. 그래서


세르 에드무레에게 여러 차례 그 이야길 했지만, 세르는 믿지 못하더
군요. 롭 왕도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구요.”

“그렇겠죠.”

롭의 판단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아리아와 산사는 어린아이였지만,


킹슬레이어 자이메는 세븐킹덤 안에서 누구보다도 위험한 자가 아닌
가.

“내 딸들을 보았나요? 어떤 대우를 받고 있던가요?”

“저어…… 제가 보기엔……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클레오스가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거짓말에 서투른 모양이었


다. 어쩌면 포도주 탓인지도 몰랐다.

캐틀린은 정색을 했다.


“세르 클레오스, 당신은 킹스랜딩에서 보낸 병사들이 우리를 속이고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잘 봤을 겁니다. 만일 내게 한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당신도 그들 옆에 함께 매달릴 겁니다. 다시 한 번 묻
겠어요. 내 딸들을 봤나요?”

클레오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산사 아가씨는 보았습니다. 티리온 경에게 협상안을 받을 때였지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조금 여윈 듯했습니다.”

산사는 워낙에 고분고분한 성격이라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아리아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아리아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가둬 놓은 건가? 혹시…… 그 애를 죽


인 건 아니겠지?’

캐틀린은 애써 불길한 생각을 밀어냈다.

“그래, 세르세이 왕대비는 어땠소?”

“왕대비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날 몸이 불편하다는 말만 들었습


니다.”

“그것 참 이상하군.”

캐틀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티리온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는 너무


나 영리했다. 에이레에서 풀려난 후 그 험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았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가
네드의 처형에 조금도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지난날 에이레로
가는 도중 산적을 만났을 때 그가 보여 준 행동이었다.

‘만일 내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다면…….’


캐틀린은 손바닥을 펴서 잠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자객의 손에서
브랜의 목숨을 구하려다 입은 상처, 그것은 티리온의 단검이었다. 물
론 티리온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지만…….

“라니스터 가문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죠. 그 중에서도 그 난쟁이


가 가장 악질이고요.”

캐틀린은 손바닥의 상처를 클레오스에게 들이밀었다.

“내게 이 상처를 입힌 자객은 그 난쟁이의 단검을 가지고 있었죠.”

“저,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클레오스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래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죠.”

캐틀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방을 둘러보았다. 브리엔느가 남자 같은


모습으로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캐틀린은 문득 그런 그녀가 부러
웠다.

캐틀린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레이트 홀에서 수비대


원들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음유시인 라이먼드가 식사하는 내
내 노래를 불렀다. 그는 옥스크로스에서 거둔 롭의 승리를 끝으로 노
래를 마쳤다.

밤하늘의 별들은 롭 왕을 따르는 늑대들의 눈이었고,

바람 또한 그의 늑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였도다.

음유시인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절규하듯 노래를 불렀는데, 결국에


는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음유시인을 따라 괴성을 지르며 합창을
했다. 심지어는 데스몬드까지도 술에 취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
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들에게 노래를 부
르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븐폴 홀에도 늘 음유시인이 있었죠. 저는 그때


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브리엔느가 문득 조용히 말했다.

“산사도 그랬지. 하지만 북부에 있는 윈터펠까지 찾아오는 음유시인


은 드물었지.”

‘하지만 나는 산사에게 킹스랜딩의 왕궁에는 음유시인들이 있다고


얘기해 줬어. 그리고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두 듣고 배울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말했지. 오, 신들이시여, 용서하
소서.’

캐틀린은 목이 아파 오면서 코끝이 시큰했다.

“여자 음유시인이 기억나는군요. 해협 너머의 미지의 땅에서 왔었는


데, 저는 그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몰랐죠. 그
래도 목소리가 얼마나 감미롭고 사랑스럽던지……. 그 여자는 눈이
짙은 보라색이었고, 허리는 제 아버지가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가늘었죠. 아버지 손은 지금 제 손과 크기가 거의 비슷해요.”

브리엔느는 자신의 두껍고 큼직한 손을 숨기듯 오므렸다.

“넌 아버지를 위해 노래했었니?”

브리엔느가 고개를 저었다.

“렌리 경을 위해서는?”

브리엔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뇨. 한 번도요.”
“언젠가 넌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게 될 거야.”

“전……, 제발……, 전 음악엔 영 재능이 없어요.”

브리엔느가 의자를 뒤로 물렀다.

“죄송해요, 부인. 그만 가봐도 될까요?”

캐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 크고 못생긴 소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큰 걸음으로 떠들썩한 홀을 빠져나갔다.

‘신들이 저 소녀와 함께 하길…….’

캐틀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무레의 전갈이 도착했을 때, 캐틀린은 아버지와 있었다. 전령의


갑옷과 투구는 움푹 파이고, 부츠는 진흙투성이였으며, 옷은 여기저
기 찢겨 넝마 같았다. 하지만 안색만은 좋았다.

“부인, 이겼습니다.”

전령이 에드무레의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열어 보는 캐틀린의 손


이 가늘게 떨렸다.

편지에 따르면, 티윈은 레드포크를 건너기 위해 강줄기를 따라 열 군


데가 넘는 곳에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후퇴해야 했다. 레포드
는 익사했고, 스트롱보라 불리는 크래크홀의 기사는 포로가 되었으
며, 아담 마브랜드는 세 번이나 패전 기사가 되었다고 했다. 가장 격
렬했던 전투는 그레고르와 벌였던 스톤밀 전투였는데, 수많은 라니
스터 병사들이 말과 함께 급류에 휩쓸려 내려갔다고 했다. 그레고르
역시 부상을 입고 말도 없이 걸어서 후퇴했다고 했다.

‘누님, 그들은 이제 다시는 레드포크를 건너올 엄두를 내지 못할 겁니


다. 티윈 경은 남동쪽으로 행군하고 있다더군요. 어쩌면 위장전술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두 번 다시
레드포크를 건너지 않을 테니까요.’

에드무레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휘갈겨 써 놓았다.

“오, 제가 세르 에드무레와 함께 있었더라면…….”

캐틀린이 편지를 읽어 주자 데스몬드가 아쉬운 탄식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목소리로.

“음유시인에게도 알려야겠군요. 이젠 세르 에드무레도 노래로 불려


지겠어요. 스톤밀에서 마운틴을 쓰러뜨리도다, 노랫말이 절로 나오
는데요. 아무래도 제게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하.”

“나는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어떤 노래도 듣지 않을 거예


요.”

캐틀린은 냉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승리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


는 것은 허락했다. 그리고 스톤밀 전투에서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술통을 좀 열자는 제안에도 동의했다. 무겁고 어둡던 리버룬의 분위
기가 약간의 술과 희망으로 모처럼 만에 활기찼다.

그날 밤 성안에서는 환성이 울려 퍼졌다.

‘리버룬 만세! 툴리 가문 만세!’

백성들의 열띤 목소리는 높은 탑의 창문을 통과해 거대한 나무문 밑


으로 흘러들어 캐틀린의 귀에도 들려왔다. 모두들 흥에 겨워 소리 높
여 노래를 불러 댔지만, 캐틀린은 아직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었다.

캐틀린은 아버지 방에서 가죽으로 싸인 커다란 지도책을 찾아내 레


드포크 유역을 살펴보았다.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서 레드포크의 물
줄기를 좇아 내려갔다. 적들이 남동쪽으로 행군했다면, 지금쯤 블랙
워터 상류에 도착했을 것이다.

캐틀린은 펼칠 때보다 더 힘들게 지도책을 덮었다. 신들은 거듭되는


승리를 허락했다. 스톤밀에서, 옥스크로스에서, 위스퍼링우드에
서…….

‘정말로 우리가 이기는 걸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두려운 거지?’

브랜

그 소리는 돌에 대고 쇠를 긁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을 향


해 코를 킁킁거렸다. 저녁 비는 잠자고 있던 숱한 냄새들을 공기 중으
로 퍼뜨렸다. 풀과 가시나무, 땅에 떨어진 산딸기, 진흙과 벌레, 썩은
잎과 수풀 사이로 기어다니는 쥐, 언젠가 잡아먹은 적이 있는 다람쥐
와 형제들의 냄새……. 다람쥐들이 그의 냄새를 맡고 나무 위로 달아
났다. 그리고 작은 발톱들로 나무껍질을 긁어 댔다.

잠시 후 다시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까지 치켜세웠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길
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돌을 쌓아
만든 자신들의 ‘은신처’에서 불을 피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
었다.

그의 형제가 털을 곤두세우고 조용히 숲 속으로 들어왔다. 형제 역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서 위험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쇠를 긁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 맨발로 돌 위를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람이 그가 모르는 사람의 냄새를 실어왔다. 낯선 사람, 위
험, 죽음…….

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형제도 옆에서 함께 뛰었다. 그


들 앞에 축축하고 미끄러운 돌벽으로 된 동굴이 나왔다. 그는 이를 드
러내고 으르렁댔지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굳게 닫힌 거대한
문에는 검은 ‘철뱀’이 빗장과 버팀대를 단단히 감고 있었다. 그가 철
뱀을 공격하자 문이 삐거덕거리며 철커덕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또
아리를 틀고 있는 몸은 풀지 않았다. 빗장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검은
은신처가 보였다. 그러나 철뱀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그의 형제가 그 ‘검은 뼈’들을 부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
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땅을 파 보기도 했지만, 땅
속으로 거대하고 판판한 바위가 버티고 있어 그도 불가능했다.

그는 으르렁거리면서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한 번 문에 몸을 내
던졌다. 하지만 문은 삐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잠겼어. 사슬이 매여 있어.’

누군가 속삭였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였고, 맡아 보지 못


한 냄새였다. 다른 문들도 잠겨 있는 게 분명했다. 문이 열린 곳들은
숲이 울울창창해 밖으로 나갈 길이 없었다.

‘있어.’

다시 속삭임이 들렸다. 그는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눈에 띄


지 않았다.

‘가즈우드 저쪽에 보초나무가 있어. 서둘러! 어서!’

어둠 속에서 짧고 둔탁한 소리가 몇 번인가 들렸다.

그는 몸을 틀어 썩은 나뭇잎이 쌓여 있는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뭇가지들이 진로를 방해했다. 바로 뒤에서 형제가 뒤따라오는 소
리가 들렸다.

그들은 하트트리 아래를 지나 차가운 호수 주위의 떡갈나무와 산딸


기 덤불을 헤치고 숲 저편으로 달려갔다. 거기에 커다란 보초나무 하
나가 동굴 안쪽의 건물 지붕 꼭대기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어떻게 건물 지붕으로 올라갔는지 생각이 났다.
수액이 끈적거리고 옹이가 맨살을 찔렀지만, 어린아이도 오를 수 있
는 나무였다. 가지들은 사다리를 만들 만큼 서로 얽혀 있었고, 지붕
가까이까지 경사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나무를 오를 수가 없었
다. 킁킁거리며 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다가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도
록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었다. 낮게 자란 나뭇가지 하나가 얼굴을 찔
렀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입으로 나뭇가지를 비틀어 부러뜨렸다. 수
액 때문에 입이 썼다.

그의 형제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 나무를 보고 길게 울어댔다.


그 소리가 구슬픈 노랫가락처럼 들렸지만,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
다. 다람쥐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니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가 없
었다. 그들은 달리고, 사냥하고, 어슬렁거릴 줄만 아는 족속들일 뿐이
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고 날이 밝자, 가까이에 있는 돌담 너머에서 개들


이 깨어나 짖어대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모든
개들이 크게 짖어댔다. 그들 역시 두려움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는 절망적인 분노에 휩싸여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나뭇가지와 잎


의 그림자가 그의 회색 털에 얼룩처럼 드리워졌다. 그는 다시 뒤를 돌
아 질주했다. 이슬에 젖은 나뭇잎을 발로 차며 달리는 그를 보고 사슴
들이 놀라 도망쳤다.

두려움의 냄새에 심장이 두 방망이질치면서 턱에 침이 흘렀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폴짝 뛰어올라 나무 줄기에 발톱을 박았다. 그리고 천
천히 한발한발 위로 올라갔다. 거친 나무옹이와 나뭇가지들이 거치
적거렸지만, 무사히 지붕에 닿을 만한 거리까지 힘겹게 올라갔다. 하
지만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공포와 분노
로 울부짖으며 자신을 박살내기 위해 돌진하는 땅을 보았다.

그 순간 브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서머, 서머!”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처럼 진짜로 어깨가 뻐근하고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꿈일 뿐이었다. 조젠의 얘기처럼 늑대는 영혼만의 경험이었
다.

‘나는 짐승이야.’

밖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가 왔어. 바닷물이 돌담을 범람하고 있어. 조젠 말이 맞았어.’

브랜은 머리 위의 빗장을 잡아당기며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


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올 수 없었다. 로드릭이 쓸 만한 병
사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기 때문에, 윈터펠에는 최소한의 수비대만
이 남았던 것이다.

로드릭은 8일 전 병사 6백을 데리고 윈터펠을 떠났다. 클레이 세르윈


이 로드릭과 합류하기 위해 3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행군하고 있었
고, 마에스터 루윈은 화이트하버와 울프스우드의 산골짝 마을에서까
지 세금을 거두게 했다. 토르헨 지역은 다그머 클레프트조라는 괴물
같은 인물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낸 할멈이 들려 준 얘기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그머의 얼굴에 나 있는 흉측한 칼자국만 보고도 겁에 질
린다고 했다.

‘다그머가 이긴 걸까?’

브랜은 걱정이 앞섰다. 토르헨은 윈터펠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


만 안심할 순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로대를 잡고 창가로 가보았
더니, 안마당은 텅 비고 창문은 모두 검었다. 윈터펠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호도르!”
브랜은 아래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호도르는 아니라도 누구라
도 소리를 들으면 달려올 터였다.

“호도르, 빨리 와! 오샤! 미라, 조젠, 누구라도 좀 와 줘!”

브랜은 입에다 두 손을 모았다.

“호! 도! 르!”

하지만 문을 부서져라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가죽 조끼를 입고 한 손에는 단검을, 등에는 도끼를 멘
남자였다.

“누구야? 여긴 내 방이다. 썩 나가라.”

브랜은 두려움을 꾹꾹 누르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때 친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테온 그레이조이였다.

“브랜, 너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

“테온?”

브랜은 테온을 보고 안심하면서도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다.

“형이 보냈어요? 형도 함께 온 거예요?”

“롭은 멀리 있어. 그래서 지금 널 도울 수 없지.”

“날 도울 수 없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날 놀라게 하지 마.”

브랜은 혼란스러웠다.

“브랜, 나는 너처럼 지금 왕자야. 테온 왕자.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건


너의 성을 차지하러 온 거고.”
“윈터펠을? 아니, 그럴 리 없어.”

브랜은 머리를 내저었다.

“워랙, 나가 있게.”

그러자 단검을 든 자가 물러갔다. 테온이 침대에 앉았다.

“브랜, 난 부하 넷을 여기로 침입시켜 샛문을 열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부하들은 이곳 병사들을 처리하고 있지. 분명히 말하지만 이제 윈
터펠은 내 거다.”

브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온, 형은 우리 아버지의 대자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너와 릭콘이 나의 대자다. 내 부하들이 네 부하들을


잡아 그레이트 홀에 대령시킬 거야. 너는 그 자리에서, 윈터펠을 나에
게 넘기고 새 왕에게 봉사하고 복종할 거라고 선언해야 해. 그리고 네
부하들에게 그걸 명령해야 하고.”

“아니, 그럴 순 없어.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아! 그리고 나를 항복시


킬 수도 없을걸!”

테온이 얼굴이 벌게져 소리치는 브랜을 보고 피식 웃었다.

“브랜, 이건 어린애 장난이 아니야. 억지 부리지 마. 이제부터 이 성


은 내 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네 부하들이지. 만약 네가 내 뜻
에 따른다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어.”

그가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누군가 와서 너에게 옷을 입히고 그레이트 홀로 데려다 줄 거야. 거


기서 네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지금부터 잘 생각해 봐.”
브랜은 자신의 무력함이 이처럼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창틀에 앉
아 어두운 탑과 그림자 같은 검은 벽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가 서머처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와 냄새도 잘 맡는 코를


가졌다면, 적들의 침입을 미리 알았을 텐데…….’

브랜은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이 호도르일 줄 알았다. 아니면 하녀이


거나. 하지만 방문이 열렸을 때 보인 사람은 촛불을 들고 있는 마에스
터 루윈이었다.

“브랜 왕자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십니까?”

루윈의 왼쪽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테온이 와서 이제부터 이 성은 자기 것이라고 말했어요.”

루윈이 촛불을 내려놓고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그들은 해자를 헤엄쳐 건너고 갈고리와 밧줄로 벽을 타넘어 침입했


어요. 물을 뚝뚝 흘리며 무기를 들고 있었죠.”

피곤한 듯 루윈은 문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애일벨리는 전사하고 헤이헤드는 부상을 당했죠. 놈들이 제 방에 들


이닥치기 전에 전령조를 두 마리 날려보냈는데, 화이트하버로 날아
간 새는 무사했지만, 다른 한 마리는 놈들의 화살에 맞았어요. 세르
로드릭이 병사들을 너무 많이 데려갔어요.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
는 게, 저 역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결코 이
런 일이…….”

브랜은 씁쓸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젠은 예견했다고.

“루윈, 내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네.”

루윈은 침대 밑에 있는 묵직한 철제 상자에서 옷을 골랐다.

“왕자님은 윈터펠의 스타크 가문 사람입니다. 그리고 롭 왕의 상속자


이기도 하죠. 그러니 위엄을 지키셔야 합니다.”

“테온은 내가 이 성을 넘겨주길 원해요.”

브랜은 은색과 흑옥으로 된 다이어울프머리 모양의 끈으로 조끼를


단단히 죄여 주는 루윈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자님, 수치스러워하실 건 없습니다. 현명한 군주는 백성을 보호해


야 하는 법이니까요. 아버님께선 테온을 길들이려고 애쓰셨지만 역
부족이였나 봅니다.”

루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이 검은 털로 뒤덮인 건장한 아이언 병사가 왔을 때, 그들은 릭콘


을 깨웠다.

“엄마를 불러 줘. 엄마가 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새기독도.”

잠에서 깨어난 릭콘이 떼를 썼다.

“어머님은 먼 곳에 있어요, 왕자님.”

루윈이 릭콘의 옷을 갈아 입히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여기 있어. 그리고 브랜 형도.”

결국 릭콘은 떠밀려 홀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미라와 조젠이 대머리 남자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브랜


을 쳐다보는 조젠의 초록빛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다른 아이언 사람
들은 프레이 형제를 깨웠다.

“네 형이 왕국을 잃은 거야. 그러니 너는 이제 왕자가 아니야. 단지


인질일 뿐이야.”

작은 왈더가 브랜을 보고 입을 비죽였다. 그러자 조젠이 한마디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그렇고. 우리 모두 같은 처지야.”

“아무도 네게 말하지 않았어, 이 야만인아.”

한 남자가 그들 앞에 횃불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다시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횃불은 곧 꺼져 버렸다. 그들이 비를 피해 급히 안마당을 가로
지르는데 가즈우드에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서머가 다치지 않았기를…….’

테온은 가슴에 금색 크라켄이 새겨진 검은 서코트를 입고 스타크 가


문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이 팔걸이 끝에 새겨진 다이어
울프의 머리 위에 있었다.

“롭 형의 왕좌에 테온이 앉아 있잖아!”

릭콘이 말했다. 그는 아직 너무 어렸다.

“조용히 해, 릭콘.”

커다란 난로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여기저기에 횃불이 밝혀 있


었지만, 사람들로 꽉 찬 홀은 어두웠다. 분위기가 무겁고 삼엄했다.
무리를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
다. 그 중에서 이가 빠져 합죽한 입을 벙긋거리는 낸 할멈이 보였다.
보초 둘에게 잡혀 있는 헤이헤드는 벌거벗은 가슴에 피로 얼룩진 붕
대가 감겨 있었다. 폭시팀과 베스 카셀이 두려움에 떨며 작게 흐느꼈
다.
“이들은 누구지?”

테온이 리드 남매와 프레이 형제를 보고 묻자 루윈이 대답했다.

“이들은 캐틀린 부인의 대자들인 프레이 가문 형제들이고, 이쪽은 충


성의 맹세를 확인해 주려고 그레이워터워치의 하울랜드 리드 경이
보낸 남매입니다. 조젠 리드와 누나인 미라입니다.”

테온이 헛웃음을 웃었다.

“때를 잘못 만났군. 블랙 로렌, 왕자를 데려와라.”

테온의 부하가 귀리 자루라도 되듯 브랜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윈터펠 사람들은 창과 고함소리에 밀려 그레이트 홀로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게이지와 오샤는 아침을 준비하다 잡혀 왔는
지 밀가루 범벅이었다. 미켄은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끌려왔고, 칼론
은 팔라를 부축하면서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옷이 갈가리 찢긴 팔라
는 고통스러운 듯 옷을 움켜쥐고 걸었다. 셉톤 샤일이 도와 주려고 다
가가려 했지만, 아이언 병사 하나가 그를 바닥에 내려쳤다.

마지막으로 붙잡혀 온 사람은 역겨울 정도로 악취가 심했다.

“탑 꼭대기에 갇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리크라고 한다더군요.”

갈색머리에 젖은 옷을 입은 젊은이가 말했다. 테온이 리크를 보며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이해할 수 없군. 자네는 항상 이렇게 더럽게 사나? 아니면 돼지 치


는 일이라도 하나?”

“이곳에 잡혀 와서 계속 갇혀 있었습니다. 제 본명은 헤케라고, 드레


드포트 가문의 서자를 섬겼습니다. 스타크 가문이 결혼 선물로 그의
등에 화살을 꽂기 전까지 말입니다.”
테온이 재미있는지 싱글벙글했다.

“그가 누구와 결혼했는데?”

“혼우드 가문의 과부입니다.”

“빈 가죽 부대처럼 비쩍 마른데다 유두도 쭈글쭈글한 그 노파랑? 드


레드포트의 서자는 눈이 멀었었나?”

“그가 결혼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병사 하나가 그레이트 홀의 문을 발로 쾅 닫았다. 테온이 손을


들어 홀 안을 조용히 시켰다.

브랜은 스무 명쯤 되는 테온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문 밖과 병기고에 병사들이 몇 더 있겠지.’

테온이 홀 안의 윈터펠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모두 잘 알 것이…….”

“그렇다. 우리는 네가 똥자루쯤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미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테온의 부하가 창으로 그의 옆


구리를 마구 찌르고는 얼굴을 내려쳤다. 비틀거리던 미켄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부러진 이가 떨어졌다.

“미켄, 조용히 해.”

브랜은 위엄 있게 말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아기 울음


소리처럼 들렸다.

“그렇다, 미켄. 네 어린 군주의 말을 들어라. 그는 너보다 현명해.”


브랜은 속으로 ‘현명한 군주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
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테온에게 윈터펠을 양보했다.”

“더 크게 말해라, 브랜. 그리고 나를 왕자라고 불러라.”

테온의 말에 브랜은 다시 소리를 높였다.

“나는 테온 왕자에게 윈터펠을 양보했다. 여러분은 이제 테온 왕자의


명령을 따라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미켄이 고함을 질렀지만, 테온은 무시했다.

“나의 아버지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소금과 바위의 왕관을 쓰신 분


이다. 그분은 스스로 아이언아일랜드의 왕임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곳 북부를 정복하고자 하신다. 너희들은 이제 그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나쁜 놈!”

미켄이 입술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쓱 닦고 말을 이었다.

“나는 불한당들이 아니라 스타크 가문을 받든다.”

아이언 병사가 창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테온이 입술을 비틀며 씩 웃었다.

“저 대장장이는 힘만 좋지 머리가 아주 나쁘군. 너희들이 에다드 스


타크를 섬겼던 것처럼 나를 섬긴다면, 나 역시 관대한 군주라는 것을
알게 해주겠다.”
미켄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피를 토했다. 브랜은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으나, 그 대장장이는 온 힘을 모아 다시 소리쳤다.

“만일 네 녀석이 딱하게도 북부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넌 아니야!”

그 순간 창끝이 미켄의 목을 관통했다. 핏줄기가 소용돌이치며 솟아


올랐다. 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고, 미라가 릭콘을
감싸안으며 팔로 눈을 가려 주었다.

‘미켄은 피에 빠져 죽었어.’

브렌은 멍하니 생각했다.

‘자기 피에 빠져 죽은 거야.’

“자, 내게 더 말할 사람 있나?”

테온의 물음에 호도르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호도르, 호도르, 호도르.”

“저 얼빠진 놈의 입을 막아라.”

테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 둘이 호도르를 창으로 마구 때려


댔다. 호도르는 바닥으로 쓰러지며 손을 들어 방어를 하려고 애썼다.

테온이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다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너희들에게 좋은 영주가 될 것이


다. 하지만 누구든 나를 배반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토르헨과 딥우
드모트 역시 곧 우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모아트카일린 역시 지
금 솔트스피어를 항해하고 있는 나의 삼촌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
다. 만일 롭 스타크가 라니스터를 이기면 트라이덴트를 지배하는 왕
이 될 수 있겠지만, 북부는 우리 그레이조이 가문이 지배하게 될 것이
다.”

그러자 리크가 외쳤다.

“스타크 가문의 왕은 왕자님과 싸우려 할 것입니다. 움버와 카스타크


가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왕자님께서는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니 절 풀어 주십시오. 저는 이제부터 왕자님을 섬기겠습니다.”

테온은 그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영리한 녀석이군. 하지만 네게서 나는 불쾌한 냄새는 참기


힘들어.”

“풀려나면 바로 목욕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좋아. 이 자리에서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테온이 미소를 지었다. 테온의 부하 하나가 검을 건네자, 리크는 테온


의 발아래 엎드려 그레이조이 가문과 발론 왕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
했다.

브랜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떨구었다. 그때였다.

“그레이조이 영주님!”

오샤가 쓰러져 있는 미켄을 지나 앞으로 나섰다.

“저 역시 이곳에 포로로 잡혀 있는 몸입니다.”

브랜은 가슴이 아팠다. 이제까지 친구라고 생각해 왔던 오샤였다.

“난 싸움을 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부엌데기는 필요 없어.”


“저를 부엌데기로 만든 것은 롭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래 전사였
습니다. 제게 창을 주십시오.”

“자, 여기 있으니 가져라.”

미켄을 죽인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의 바지가랑이를 들어올렸


다. 그러자 오샤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창을
빼앗아 그를 후려쳤다.

“그 물건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좋을 거예요.”

사내는 동료들이 웃는 동안 바닥을 뒹굴었다.

테온도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

“좋아. 그 창을 갖도록 해라. 스티그는 다른 것을 쓰면 되니까. 그럼


너도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그후로 맹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자, 테온은 말썽을 일으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고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호도르에게는 브
랜을 침실로 데려다 주는 일이 맡겨졌다. 호도르는 맞아서 얼굴이 엉
망이 되어 있었다. 한쪽 눈은 감기고 코는 부어서 뭉개져 있었다.

“호도르.”

호도르는 피묻은 손으로 브랜을 업고 흐느끼면서 비가 내려치는 밖


으로 나갔다.

아리아

“거긴 유령이 있어. 내가 안다니까. 피아가 간밤에 식료품 창고에서


뭔가를 봤대.”

핫파이가 빵을 반죽하며 장담했다. 반죽이 그의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코방귀를 뀌었다. 피아는 항상 식료품 창고
에서 뭔가를 봤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따가 그 파이 한 쪽 먹어도 돼?”

“안 돼. 이거 한 판이 다 필요하거든. 세르 아모리가 부하들에게 나눠


줄 거랬어.”

아리아는 아모리가 싫었다.

“그럼 우리 거기다 침 뱉자.”

핫파이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방 안은 언제나 사람들이


득실거렸지만, 지금은 모두 다락방에 올라가 자고 있었다.

“알아채면 어떡해.”

“어떻게 알아. 침은 아무 맛도 없잖아. 모를 거야.”

“만에 하나라도 들통나면 죽는 건 나라구. 넌 여기 있지 않는 게 좋겠


어. 밤이 늦었어.”

핫파이가 반죽을 멈추고 아리아를 보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늦은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아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밤이 깊어도


주방은 한가할 때가 없었다. 항상 누군가 다음날 아침을 위해 밀가루
를 반죽하거나, 긴 나무 주걱으로 수프를 젓거나, 아모리의 아침상에
올릴 베이컨을 위해 돼지를 잡고 있었다. 오늘밤은 핫파이가 그 일을
하는 차례였다.

“핑크아이가 깨서 너를 찾으면…….”

“핑크아이는 안 깨. 한 번 잠들면 다신 안 깬다구.”

핑크아이의 이름은 메블이었다. 하지만 항상 눈이 충혈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핑크아이라고 불렀다. 핑크아이는 매일 아침을
맥주로 때웠고, 매일 저녁이면 술에 취해 포도주색 침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아리아는 매일 코고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맨발
로 조심스럽게 잠자리를 빠져나오곤 했다. 양초도 없었지만, 시리오
는 어둠이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그가 옳았
다. 달빛이나 별빛만 있어도 앞을 분간하기엔 충분했다.

“핫파이, 우린 여기서 도망칠 수 있어. 핑크아이는 내가 없어진 것도


모를 거야.”

“난 도망치고 싶지 않아. 숲 속보다 여기서 지내는 게 더 나아. 또다


시 벌레를 잡아먹으며 살고 싶진 않아. 여기 도마 위에 밀가루 좀 뿌
려 줄래.”

아리아는 밀가루를 집으려다 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소리지?”

“뭐? 난…….”

“조용히 하고 들어 봐. 뿔나팔소리야. 두 번씩 울려. 안 들리니? 그리


고 철문을 올리는 소리도 들려. 누군가 들어오거나 나가고 있어. 가서
확인해 볼래?”

하렌할의 철문은 티윈이 출정을 나간 아침 이후 한 번도 열린 적이 없


었다.

“난 아침식사를 만들어야 해. 그리고 어두울 때 움직이는 건 싫어, 말


했잖아.”

핫파이가 투덜거렸다.

“그럼 나 혼자 갔다올게. 무슨 일인지 나중에 말해 줄게. 파이 하나만


먹어도 되지?”
“안 돼!”

그래도 아리아는 파이 조각을 하나 슬쩍 집어 입에 넣었다. 잘게 다진


땅콩과 과일, 치즈로 속을 채운 파이는 오븐에서 갓 꺼내 따뜻했다.
아모리의 파이를 슬쩍해서 먹으니 왠지 용기가 솟았다.

‘난 하렌할의 유령이야.’

뿔나팔소리는 잠들어 있던 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자다 말


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 눈을 비비며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아리아도
그 사람들 틈에 끼였다. 소가 끄는 수레가 긴 행렬을 지어 철문 밑으
로 지나고 있었다.

‘약탈한 거로군.’

아리아는 단번에 알아챘다. 병사들은 수레를 호위하며 쉴새없이 기


묘한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그들의 갑옷이 희미하
게 빛났다. 그리고 흰색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말 한 쌍이 보였다.

‘블러디머머스들이잖아.’

아리아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커다란 흑곰을 가둔 수레에


이어 은과 무기, 밀가루를 실은 수레가 이어졌다. 볼품없이 말랐지만
돼지와 개와 닭을 실은 수레도 지나갔다. 그리고 포로들이 줄지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행렬 맨 앞에 선 포로는 수염과 고개를 꼿꼿이 쳐든 태도로 보아 귀족


임이 틀림없었다. 찢어진 서코트 아래로 반짝이는 갑옷이 보였다. 아
리아는 처음에 그가 라니스터 중 하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횃불 밑을
지날 때 보니, 문장이 사자가 아니라 강철 장갑이었다. 그는 손과 발
이 꽁꽁 묶인 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은 다
음 사람, 그 다음 사람으로 연결되어 포로들은 발을 맞춰 걸어야 했
다. 누구라도 멈춰서면 병사 하나가 재빨리 달려가 그를 채찍질했다.
아리아는 비틀거리며 걷는 포로들을 하나씩 헤아려 보았다. 50을 세
기도 전에 세던 것을 잊어버렸지만, 최소한 그 수의 두 배는 되어 보
였다. 하나같이 옷이 피와 진흙으로 얼룩진데다 횃불이 바람에 심하
게 흔들려 문장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언뜻 보고
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쌍둥이 탑, 햇살, 블러디 맨, 액스……. 액스는 세르윈 가문 문장이


고, 어둠 속의 흰 햇살은 카스타크 가문이잖아. 저들은 북부인들이야.
아버지, 그리고 롭 오빠의 사람들.’

아리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블러디머머스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을 돌보


기 위해 마구간지기들은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나타났다. 병사 중
하나가 맥주를 달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아모리가 횃불을 든 병사
를 양옆으로 이끌고 나타났다. 염소머리 투구를 쓴 바르고 호트가 그
앞에서 말을 세웠다.

“성주님.”

바르고 호트의 목소리는 거칠고 발음이 부정확했다.

“이게 다 뭐요, 바르고 호트?”

아모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포로입니다. 강을 건너려고 하는 루제 볼톤을 우리가 혼쭐을 내줬지


요. 볼톤은 도망치고, 이들만 붙잡아 왔습니다. 저 맨 앞에 있는 자가
글로버이고, 그 뒤는 세르 프레이입니다.”

아모리가 작은 눈으로 포박당한 포로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는


그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고 있음을 감지했다. 사람들은 그와 바르고
호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잘했군. 세르 캐드윈, 저자들을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라.”

맨 앞에 가던 포로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명예로운 대우를 약속받았소.”

“닥쳐!”

바르고 호트가 침을 튀기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이어서 아모리


가 입을 열었다.

“바르고 호트가 너희에게 무어라 약속했는지 몰라도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티윈 경께선 날 하렌할의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니 내 말이
곧 법이다.”

그가 경비병에게 손짓을 했다.

“위도우타워 지하 감옥에 저들을 모두 처넣어. 반항하는 놈은 죽여도


좋다.”

포로들이 창끝에 밀려 지하 감옥으로 향할 때 핑크아이가 눈을 깜박


이며 계단참에 나타났다. 그가 아리아를 보면 볼기가 떨어져 나가도
록 때려 주겠다고 소리를 지를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그다지 겁
나지 않았다. 그는 위즈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때려 주겠다고 협박
만 했지 진짜로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들키지 않
는 편이 나을 터였다.

아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들은 멍에가 풀려 있었고, 수레에선


짐이 다 내려진 후였다. ‘위대한 용사’들은 마실 것을 달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고, 몰려든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곰을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
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온 길로 돌아갔
다.
성문에서 멀어지자 성은 점점 한적해졌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뒤로 사라져 갔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웨일링타워의 갈라진 틈을
지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가즈우드의 나무들은 벌써 나뭇잎을 하나둘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낙엽을 안뜰과 텅 빈 건물 사이로 쓸고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하렌할은 마치 텅 빈 성처럼 보였다. 그 어떤 소리도 이곳에서는 낯설
게만 느껴졌다. 돌들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 버린 듯, 성은 침묵의 망
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메아리들이 독특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발소리는 유령의 발소리 같았고, 사람의
목소리는 유령의 목소리 같았다. 그것은 핫파이를 두려움에 떨게 만
들었지만, 아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아는 조용히 드레드타워를 둘러싼 안뜰을 가로질러 죽은 매들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는 텅 빈 마구간을 사뿐히 지나갔다.

티윈이 머무르는 동안에는 병사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1백 명이 채


안 되었다. 그래서 1백 개의 벽난로가 있는 홀은 다른 작은 건물들과
함께 잠겨 있었다. 웨일링타워도 마찬가지였다. 아모리가 킹스파이
어타워의 넓은 성주의 침실을 쓰고 있어서, 아리아를 비롯한 하인들
은 모두 그곳으로 숙소를 옮긴 터였다. 킹스파이어타워말고 다른 탑
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텅 빈 채 버려져 있었다.

병기고를 지나면서부터 해머질 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오렌지빛 불


꽃이 높은 창문을 통해 이글거렸다. 아리아는 지붕으로 올라가 건물
안을 엿보았다. 젠드리가 갑옷의 가슴받이를 한참 두들기고 있었다.
젠드리가 그곳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다. 거기엔 쇠붙이와 굉음과 불
꽃과 젠드리뿐이었다. 해머가 그의 팔처럼 보였다. 근육이 꿈틀거리
는 그의 가슴을 보고, 그가 만들어내는 금속음을 들으며 아리아는 흐
뭇한 미소를 지었다.

‘젠드리는 강해.’
아리아는 그가 가슴받이를 물에 담금질할 부젓가락을 들어올릴 때
창문을 넘어 그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젠드리는 아리아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가서 자는 게 좋을 텐데.”

가슴받이를 찬물에 담그자 지지직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밖이 왜 그리 소란스럽지?”

“바르고 호트가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어요. 문장을 봤더니 딥우드


모트에서 온 글로버 가문 사람이 있더라구요. 우리 아버지 편인
데……. 나머지들도 거의 그렇고요.”

갑자기 아리아는 자신이 왜 이리로 발길을 옮겨왔는지 깨달았다.

“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해요.”

젠드리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세르 아모리는 포로들을 지하 감옥으로 보냈어요. 위도우타워의 지


하 감옥 말예요. 당신이 해머로 문을 부술 수 있을 거예요.”

“그 동안 경비병들은 보고만 있을 것 같니?”

아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경비병들은 죽여야겠죠.”

“우리가 몇 명이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숫자가 많지 않다면…….”
“두 명만 있어도 너와 나로선 감당하기 힘들어. 이미 경험했잖아. 아
직도 깨달은 바가 없니? 네가 이 일을 시도하면 바르고 호트는 네 손
과 발을 자를 거야.”

젠드리가 부젓가락을 다시 집어들었다.

“당신은 겁쟁이예요.”

“날 좀 내버려둬.”

“젠드리, 그곳엔 1백 명도 넘는 북부인들이 있어요. 어쩌면 더 많을


지도 몰라요. 다 세지 못했는데, 세르 아모리의 부하들만큼이나 수가
많은 건 확실해요. 감옥에서 꺼내 주기만 하면, 그들은 아모리를 물리
칠 거예요. 그럼 우린 도망칠 수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그들을 탈출시킬 수 없어. 넌 로미도 구


하지 못했잖아.”

젠드리가 부젓가락을 들고 돌아서서 가슴받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도망친다 해도 어디로 가지?”

“윈터펠이요.”

아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날 도왔다고 하면 그곳에 머무르게


해…….”

“그런 영광을 제게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아가씨. 제가 당신의 말에


편자를 끼우고 귀하신 아가씨의 오라버니들을 위해 검을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젠드리의 조롱에 아리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 해요!”

“내가 왜 하렌할 대신 윈터펠에 내 발목을 저당 잡혀야 하지? 늙은


벤 블랙섬 알지? 그 할아버지는 어릴 적에 이곳에 와서 휀트 부인과
그분의 아버지, 그리고 그 이전에 하렌할을 통치했던 스톤 경 밑에서
대장장이 일을 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검은 검이고 투구는 투구래. 누구 밑에서 일하든 불에 손이 데
면 화상을 입을 뿐이라는 거야. 루칸은 좋은 스승이야. 난 여기 머무
를 거야.”

“당신은 왕대비한테 쫓기고 있어요. 왕대비가 벤 블랙섬을 잡으러 시


티워치를 보내진 않았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사람은 아마 내가 아닐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난 견습공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마스터가 될 거야. 도망가거나 다


리가 잘리거나 죽지만 않는다면 말야.”

젠드리가 아리아에게 돌아서서 해머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어쩔 수 없이 주먹만 불끈 쥐었다.

“다음 번에 투구를 만들 땐 황소의 뿔 대신 나귀의 귀나 달아라!”

아리아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젠드리를 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맞아도 저 똥고집은 못 버릴 거야. 왕대비의 부하가 나귀 머


리를 잘라내서야 나를 돕지 않은 걸 후회하겠지. 쳇, 어쩌면 저 바보
가 없는 편이 나을지 몰라. 마을에서 잡힌 것도 다 저 바보 때문이었
잖아.’
그때 생각을 하니 고통스러웠던 행군과 잔인한 티클러, 공포의 창고
가 떠올랐다. 철퇴로 얼굴을 맞아 죽은 어린 소년과 ‘오직 조프리’ 노
인, 로미 그린핸드…….

‘그때 난 양이었다가 이곳에 와서 쥐가 되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라곤 숨는 것밖에 없었지.’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용기를 되찾았다.

‘자켄이 내게 힘을 주었어. 내가 쥐에서 유령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지.’

위즈가 죽은 뒤 아리아는 자켄을 피해 다녔다. 치스윅의 죽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성벽에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물려죽은 사
람은 드물었다. 흑마법이 아니고서야 개가 주인을 물 수가 없었다. 게
다가 위즈는 그 못생긴 개를 강아지 때부터 키웠다. 요렌은 자켄을 지
하 감옥에서 로지와 비터와 함께 찾았다고 했다. 그는 자켄이 뭔가 끔
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
면 자켄을 굳이 묶어 놓았겠는가.

‘자켄이 마법사라면, 로지와 비터는 사람이 아니라 마계에서 소환한


마물일지도 몰라.’

자켄은 아직 한 사람의 목숨을 빚지고 있었다. 아리아는 낸 할멈에게


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세 번
째 소원을 빌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치
스윅과 위즈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마지막은 신중해야 해.’

아리아는 매일 밤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머뭇거리


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 마디 속삭임으로 사람의 생명을 좌지
우지할 수 있을 때에는 무서울 게 없었지만, 일단 마지막 소원을 빌고
나면 다시 쥐로 돌아가야 했다.

핑크아이가 일어났기 때문에 아리아는 잠자리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숨어 있을 곳을 찾아 가즈우드로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 향과
발가락을 간질이는 흙의 감촉,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가 좋았
다. 나무 사이로 작은 냇물이 흘렀고, 곳곳에 함정이 파여 있었다.

아리아는 썩은 나무와 잔가지들이 쌓여 있는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숨겨 놓았던 검을 찾았다. 아무리 부탁을 해도 젠
드리가 검을 만들어 주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대나무를 쪼개 만든 것
이었다. 자루도 없고 너무 가벼웠지만, 날만은 톱니처럼 날카로웠다.

아리아는 시간이 나는 대로 시리오가 가르쳐 주었던 기술들을 다시


연마했다. 맨발로 낙엽 위를 걷고, 나뭇가지를 쳐서 나뭇잎을 떨어뜨
리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를 발가락으로 움켜잡고 춤을 추
었다. 날이 갈수록 균형 감각이 되살아났다.

검술을 연마하기엔 밤이 최상의 시간이었다. 밤에는 아무도 방해하


는 사람이 없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 검을 빼드는 순간, 아리아는 모
든 것을 잊었다. 아모리와 블러디머머스와 아버지의 부하 따윈 이제
안중에 없었다. 발 밑의 거친 나무껍질과 공기를 가르는 검을 느끼느
라 자신을 잊었다. 부러진 가지를 조프리라 생각하고 정신없이 내려
쳤다. 왕대비와 이린 파이네, 메린 트란트, 하운드는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모조리 죽였다. 힘이 빠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자, 아리아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아 박쥐들이 사냥하는 소
릴 들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뭇잎 사이로 하얀 하트트리가
보였다. 윈터펠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여기가 윈터펠이라면……, 그럼 나무만 내려가면 집인데……. 어쩌


면 위어우드 아래에 아버지가 앉아 계실 수도 있는데…….’
아리아는 대나무검을 벨트에 찔러 넣고 나무를 내려왔다. 그리고 위
어우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위어우드가 달빛에 비쳐 은백색으로 물
들어 있었지만, 다섯 손가락의 붉은 나뭇잎은 검은빛으로 변해 있었
다. 아리아는 나무 줄기에 새겨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흉측했다. 입은
뒤틀려 있고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신들이 이렇게 생겼을까? 신도 사람처럼 상처를 입을 수 있나? 기도


나 할까?’

아리아는 문득 마음이 경건해져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어떻게 소


원을 빌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신이여, 도와 주세요. 감옥에 갇힌 자들을 구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그래서 세르 아모리가 죽고 제가 윈터펠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를 수중댄서와 다이어울프로 만들어 주세요. 다시는 겁먹지 않게
해주세요.’

눈을 떴다.

‘이 정도면 되나? 어쩌면 큰 소리로 기도해야 신들이 쉽게 알아들을


지 몰라. 한데 더 오래 기도해야 하나?’

아버지는 오랫동안 기도를 하곤 했다. 하지만 신들은 결코 아버지를


굽어살피지 않았다. 문득 화가 치밀었다.

“당신들은 우리 아버지를 구해 줬어야 했어! 아버진 항상 당신들에게


기도하셨는데……. 당신들이 날 도와 주든 말든 난 상관없어. 당신들
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야, 그렇지?”

그때였다.

“신을 모욕해선 안 돼.”


갑작스런 목소리에 아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들었
다. 어둠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처럼 조용히 서 있는 자켄이 보였다.

“이름을 들으러 왔어. 두 사람은 끝났으니 세 번째 이름을 말할 차례


야.”

아리아는 검을 아래로 내렸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죠?”

“남자는 보고, 듣고, 알아.”

아리아는 의혹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이 보냈나?’

“어떻게 개한테 위즈를 물게 했죠? 로지와 비터는 마계에서 불러온


악마인가요? 자켄은 당신의 진짜 이름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름이 아주 많지. 위즐, 애리, 아리아.”

아리아는 움찔해서 뒤로 물러섰다.

“젠드리가 말해 줬나요?”

“남자는 다 알고 있어, 스타크 가문의 아가씨.”

어쩌면 신이 기도에 응답해 보내 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


리를 스쳤다.

“지하 감옥에서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데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글로


버 경과 다른 사람들 말이에요. 경비병을 죽이고 어떻게든 감옥 문을
열어야 해요.”
“잊었구나. 둘은 이미 갚았고 남은 것은 하나뿐이야. 경비병이 죽어
야 한다면 그의 이름을 말해.”

“하지만 경비병을 하나만 죽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감옥 문을 열


려면 전부 죽여야 해요.”

아리아는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난 북부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내가 당신을 구해 준 것처럼.”

하지만 쟈켄의 눈빛은 차가웠다.

“세 명의 생명을 신에게서 빼앗아 왔어. 그만큼만 다시 갚으면 돼. 신


을 조롱해선 안 돼.”

“난 신을 조롱한 적 없어요.”

아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든지 이름을 대면…… 죽여 줄 거란 말이죠?”

자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상관없나요? 여자든, 남자든, 갓난아기든, 티윈 경이나 하


이셉톤, 당신의 아버지라도?”

“남자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소녀의 명령에 따라 죽였을 거야.”

“맹세하세요. 신들 앞에서 맹세하세요.”

“바다와 하늘과 불의 신, 그 모든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세븐


킹덤의 신들과 셀 수 없이 많은 고대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그가 위어우드 잎사귀에 손을 대고 말했다.


“왕이라고 해도?”

“이름만 말해. 그러면 죽음을 그에게 선사할 거야. 내일이든, 다음 달


이든, 내년이든,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새처럼 날 수는 없으니까 걸
어서라도 간다.”

자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아리아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크게 말하기가 겁나면 속삭여. 조프리를 원하니?”

아리아는 그의 귀에 입을 갖다 댔다.

“자켄.”

사슬에 묶인 채 불타는 헛간에 있을 때에도 그는 지금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지, 지금 농담을 하는구나.”

“맹세했잖아요. 신들이 당신의 맹세를 들었어요.”

“그랬겠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예리한 나이프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


다. 그것이 그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리아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
었다.

“소녀는 슬퍼질 거야. 유일한 친구를 잃는 거니까.”

“당신은 내 친구가 아니에요. 친구라면 날 도와 줄 거예요. 난 친구를


죽이지 않아요.”

그가 나이프를 던질 경우를 대비해, 아리아는 발끝으로 중심을 잡으


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자켄의 입술에 미소가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소녀를 도와 준다면 다른 이름을 댈 수도 있다는 거니?”

“어쩌면요. 친구가 도와 준다면…….”

나이프가 사라졌다.

“따라와.”

“지금요?”

그가 그렇게 빨리 행동을 취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유리잔의 모래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어. 남자는 소녀가 남자의 이


름을 취소할 때까지 잠을 잘 수 없어. 어서, 따라와. 악마의 자식 같으
니라고!”

‘난 악마의 자식이 아냐. 난 다이어울프이고 하렌할의 유령이야.’

아리아는 대나무검을 원래 장소에 다시 숨기고 그를 따라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하렌할은 시끌벅적했다. 바르고 호트의 입성은 하


렌할의 질서를 깨뜨려 놓았다. 뜰에서 수레와 소, 말들은 모두 치워지
고 없었지만, 곰 우리는 아직도 있었다. 두 탑을 이어 주는 아치형 구
름다리에 두꺼운 쇠사슬로 묶여서. 뜰은 여기저기 피워 놓은 횃불 때
문에 환했다. 마구간지기 몇 명이 돌을 던지며 곰을 화나게 만들었다.

홀에서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부르는 노랫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


리, 술에 취해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잠들기 전까지 먹고 마시겠지?’

만에 하나 핑크아이가 술시중 들 사람을 부르러 오면 아리아가 자리


에서 빠져나온 게 그대로 들통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용맹한 전우들
과 아모리의 병사들에게 술을 따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피에 굶주린 신이 오늘밤 유혈이 낭자한 축제를 벌일 거야. 남자가


그 일을 벌인다면 말이야. 지금이라도 그 이름을 취소하고 다른 이름
을 말해. 그리고 이 미친 짓을 집어치우는 게 어때?”

자켄이 다시 한 번 아리아를 설득하려고 했다.

“아뇨, 그러지 않을 거예요.”

단념한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래, 소녀의 소원은 이뤄질 거야. 하지만 소녀는 남자의


말에 따라야 해. 긴 말 할 시간이 없어. 어떻게 할 거야?”

“따르겠어요. 뭘 해야 하죠?”

“저 사람들은 지금 배가 고파서 우선 주린 배부터 채우고 싶어할 거


야. 가서 파이 굽는 소년에게 세르 아모리가 뜨거운 수프를 가져다주
라고 명령했다고 말해.”

“수프라고요? 그럼 당신은요? 어디에 있을 거예요?”

“남자가 갈 때까지 주방에서 수프 만드는 걸 돕고 있어. 자, 어서 가.


뛰어.”

핫파이는 오븐에서 막 빵을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방에는 더 이상


그 혼자가 아니었다. 바르고 호트와 블러디머머스에게 대령할 음식
을 마련하기 위해 요리사들이 모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들은 핫파이가 빵과 파이를 구워내는 즉시 갖다 날랐다. 주
방장은 햄을 자르고, 한 소년은 토끼를 불에 굽고, 다른 소년 하나가
거기에 꿀을 바르고 있었다. 여자들은 양파와 당근을 자르고 있었다.

“위즐, 뭘 가지러 왔니?”


주방장이 아리아를 보자 대뜸 물었다.

“수프요. 성주님이 수프를 가져오래요.”

그가 불 위의 검은 솥을 가리켰다.

“저게 뭔 것 같으냐? 지금도 음식을 대느라 죽을 지경이다. 밤에 잠


도 못 자게 하다니……. 가서 더 빨리는 못 한다고 전해라.”

“다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럼 밖에서 기다려. 아니면 너도 일을 돕든가. 식료품 창고에 가서


치즈와 버터를 가져와. 그리고 피아를 깨워서, 두 발을 온전히 보전하
고 싶다면 재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거라고 말해.”

아리아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렸다.

피아는 자고 있지 않았다. 한 남자 밑에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가,


아리아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바구니
에 버터와 천으로 싼 치즈를 가득 채웠다.

“여기 일 좀 도와 줘. 난 지금 일을 할 수가 없어. 안 그러면 바르고


호트가 네 발목을 자를 테니까.”

아리아는 피아에게 잡히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주방으로 돌아


가는 내내 손이나 발이 잘린 포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르고 호트
가 롭이 무서워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했나 싶었지만, 그는 누구도
두려워할 사람은 아닐 듯했다.

주방에 도착해 보니, 핫파이가 긴 나무 주걱으로 수프를 젓고 있었다.


아리아는 핫파이를 도와 함께 수프를 저으며, 핫파이에게도 지금 계
획을 얘기해 줄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레고르 병사들에게
잡힐 때의 일이 떠올랐다.
‘안 돼. 저 녀석은 또 다 불 거야.’

그때 로지의 역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요리사, 수프를 가지러 왔다!”

아리아는 놀라서 하마터면 주걱을 떨어뜨릴 뻔했다.

로지는 잘려나간 코가 보이지 않도록 얼굴을 반 이상 가리는 강철 투


구를 쓰고 있었다. 자켄과 비터가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

요리사가 얼른 그들 앞으로 나섰다.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요. 이제 막 양파를 넣었어요. 더 끓여


야…….”

“닥쳐. 안 그러면 네 놈의 엉덩이를 베어 불에 구워 줄 테니까. ‘수


프’라고 말했고, ‘당장’이라고 말했어.”

비터는 씩씩거리며 반쯤 구워진 토끼 구이를 잡아채더니 꿀을 뚝뚝


흘리며 고기를 뜯었다.

“그럼 덜 익은 걸 가져가시죠. 하지만 바르고 호트 님께서 맛이 왜 이


러냐고 묻거들랑 제 탓은 하지 마시죠.”

요리사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비죽거렸다.

자켄이 두툼한 장갑을 끼는 동안, 비터는 손가락에 묻은 꿀과 기름을


핥으며 장갑 하나를 아리아에게 내밀었다.

“위즐, 가서 도와라.”

수프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무거웠다. 아리아와 자켄은 솥


하나를 들고 쩔쩔맸다. 로지는 혼자 하나를 들었고, 비터는 두 개를
들었다. 손잡이가 뜨거웠지만 그래도 솥을 떨어뜨리는 사람은 없었
다. 그들은 솥을 들고 주방을 나와 위도우타워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
다. 탑의 입구를 경비병 둘이 지키고 있었다.

“이게 뭐지?”

경비병 하나가 로지에게 물었다.

“끓고 있는 요강단지다. 좀 줄까?”

자켄이 천진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포로들도 먹어야 해.”

“포로들의 식사에 대해선 아무 말도…….”

“이건 그들 거예요. 당신 것이 아니라.”

아리아는 그의 말을 잘랐다. 다른 경비병이 손을 흔들어 동료를 막았


다.

“그럼 들여가.”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을 로지가 앞장서 걸어갔다. 자


켄이 갑자기 멈춰 섰다.

“가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

아리아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은 창문도 없이 길고 음습한 지하 동굴로 이어졌다. 듬성듬성 횃


불이 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아모리의 경비병들이 나무 탁자에 둘러
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육중한 쇠창살이 어둠 속
에 모여 있는 포로들과 경비병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수프 냄새를 맡
자 사람들이 창살로 모여들었다.
경비병은 모두 여덟이었다. 그들도 수프의 냄새를 맡고 돌아봤다.

“제일 꼴 보기 싫은 계집애를 데려왔군. 그래, 솥에 든 건 뭐야?”

그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로지를 보며 물었다.

“네놈의 거시기다. 먹어 볼래?”

각각 흩어져 있던 경비병들이 음식 냄새를 맡고 모두 탁자 주위로 모


여들었다.

“벌써 식사시간인가?”

“양파 냄새도 나는데?”

“그런데 빵이 없잖아?”

“웃기는 놈, 그릇하고 스푼만 있으면 되지, 무슨 빵까지.”

그때였다.

“스푼도 필요 없지!”

로지가 들고 있던 뜨거운 수프를 그들을 향해 확 뿌렸다. 그 순간 자


켄과 비터도 그들에게 솥을 던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뜨거운 수프에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울부짖으며 신을 찾는 사람
이 있는가 하면, 옆 사람을 밀치며 수프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는 사람
도 있고, 눈도 뜨지 못한 채 바닥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사람도 있었
다.

아리아는 벽에 바싹 붙어 서서 로지와 비터와 자켄이 병사들을 해치


우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로지가 검을 빼어들었고, 비터는 커다란 손
으로 병사들의 목을 비틀어 부러뜨렸다. 병사들 중에서 대항하는 사
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자켄의 질풍 같은 공격으로 목이
베어졌다. 자켄이 피묻은 검을 아리아의 옷에 문질러 닦았다.
“소녀도 피를 묻혀야 해. 이건 소녀가 한 일이니까.”

로지가 탁자 위 벽에 걸려 있던 감옥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처음


나온 사람은 서코트 위에 갑옷을 입은 영주였다.

“고맙네, 난 로베트 글로버다.”

“영주님.”

자켄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풀려난 포로들은 죽은 경비병들의 무기를 집어들고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말없이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들 중 아무도 수레에 실려 하렌
할로 들어올 때처럼 심하게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수프를 이용하다니, 정말 머릴 잘 썼군. 이건 바르고 호트 장군의 책


략인가?”

로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심하게 웃었던지 코가 잘려나간 구


멍에서 콧물이 뿜어져 나왔다. 비터는 시체 위에 걸터앉아 축 늘어진
시체의 팔을 들어 손가락을 뜯고 있었다. 뼈를 씹는 소리가 으드득으
드득 났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러고 보니 바르고 호트 장군과 함께 왔던 자들


이 아니군. 너희, 용맹한 전우들이 맞나?”

로베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제부터 그렇소이다.”

“남자는 자유도시 로라스의 출신으로, 자켄 하이가르라고 합니다. 무


례한 저 친구들은 로지와 비터라고 하죠. 누가 비터인지는 금방 아시
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아리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쪽은…….”

“전 위즐이에요.”

아리아는 불쑥 그렇게 얘기했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름을 밝


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글로버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매우 잘했다.”

하지만 로베트의 말투에는 아리아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슬슬 결말을 내볼까?”

계단을 올라가 보니 탑 입구에 경비병들이 피를 흥건히 흘리고 쓰러


져 있었다.

아리아는 뜰로 달려나가는 북부인들의 외침을 들었다. 홀의 문이 부


서지고 사람들이 밀려 들어갔다. 홀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로지
와 비터도 글로버와 함께 전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자켄은 아리아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해할 수 없지?”

“아뇨, 알아요.”

사실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리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바르고 호트는 충성심이 없어. 곧 다이어울프의 기가 이곳에 올라갈


거야. 나는 우선 이름을 취소받아야겠어.”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취소할게요. 아직도 세 번째 목숨을 받을 수 있나요?”


“욕심이 많군.”

자켄은 너부러져 있는 경비병을 가리켰다.

“여기 세 번째가 있고, 저기 네 번째가 있어. 그리고 저 지하에는 여


덟 명이 죽어 있어. 빚은 갚고도 남았어.”

“네, 다 갚았어요.”

아리아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다시 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


음이 씁쓸했다.

“임무를 다했으니 남자는 이제 죽어야 해.”

자켄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죽다뇨?”

아리아는 깜짝 놀랐다. 이미 이름을 취소하지 않았는가.

“무슨 말이에요? 이름을 취소했으니까 죽지 않아도 돼요.”

“아니, 남자는 때가 됐어.”

자켄은 손으로 얼굴을 쓱 쓸어 내렸다. 그러자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


다. 뺨은 부풀어오르고, 미간은 좁아지고, 오른쪽 뺨엔 상처가 생겼
다. 머리를 흔들자 반은 붉고 반은 희던 긴 생머리가 짧고 검은 곱슬
머리로 바뀌었다.

아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숨이 막힐 것처럼 두려웠지만 용기를


냈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된 일이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어려


운 일인가요?”
그러자 자켄이 반짝이는 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법만 알면 새 이름을 짓는 것보다 덜 어렵지.”

“그럼 나한테도 가르쳐 줘요.”

“배우고 싶으면 남자를 따라와야 해.”

아리아는 머뭇거렸다.

“어디로요?”

“아주 멀리. 해협을 건너가야 해.”

“안 돼요. 난 집에 가야 해요. 윈터펠로.”

“그럼 헤어져야지. 남자는 또 다른 임무가 있어.”

그러면서 그가 아리아의 팔을 들어올리고 뺨에 작은 동전을 하나 갖


다 댔다.

“자, 받아.”

“이게 뭔데요?”

“아주 귀한 동전이야.”

아리아는 동전을 깨물어 보았다. 강철처럼 단단했다.

“이거 하나면 말도 살 수 있어요?”

“이건 말을 사기 위한 게 아냐.”

“그럼 뭐할 때 쓰는 건데요?”
“그 얘긴 삶과 죽음이 뭐냐고 묻는 거랑 똑같아. 남자를 찾을 일이 있
으면 브라보스에서 온 아무에게나 이 동전을 주면서 발라 모르굴리
스라고 말해.”

“발라 모르굴리스.”

어렵지는 않았다. 아리아는 동전을 꼭 쥐었다. 뜰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세요, 자켄.”

자켄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자켄은 애리처럼 죽었어. 그리고 남자는 지킬 약속이 있어. 발라 모


르굴리스, 다시 말해 봐.”

“발라 모르굴리스.”

자켄의 옷을 입은 낯선 남자는 아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망토를


휘날리며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아리아는 시체들 사이에서 홀로 남겨졌다. 문득 호숫가 창고에서 아


모리가 죽인 사람들이 떠올랐다.

‘저들은 죽어도 싸.’

숙소로 돌아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리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리


스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발라 모르굴리스.”

그것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날이 밝자 전투 중에 이유 없이 죽은 소년 하나만 빼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다. 핑크아이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혼자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고 투덜대면서. 잠시 후 그
가 돌아와 하렌할이 북부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블러디머머스들이 자고 있던 세르 아모리의 부하들과 먹고 마시던


병사들을 죽였다. 새 주인이 오늘 안으로 도착할 거라는데, 북부에서
온 사람이래. 무서운 사람이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주인이 누
가 됐건 우린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누구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살
이 벗겨지도록 때려 줄 테다.”

그가 그렇게 얘길 하며 아리아를 쳐다봤지만, 간밤에 어디 있었는지


는 묻지 않았다.

아침 내내 아리아는 블러디머머스들이 시체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벗


겨내고, 시체들을 화장터로 질질 끌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릿광대
쉐그웰이 죽은 기사 머리 둘을 들고 성 주위를 돌아다니며 연극을 했
다.

“너는 왜 죽었니?”

“위즐의 뜨거운 수프 때문에 죽었다.”

아리아는 마른 핏자국을 닦느라 하루 종일 걸레질을 했다. 일상적인


말 외에는 아무도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힐끗거리는
사람은 많았다. 로베트와 병사들이 분명히 지하 감옥에서 있었던 일
을 말했을 테고, 쉐그웰이 위즐 수프에 대해 성안 곳곳에 떠들고 다녔
으니 그럴 만도 했다. 쉐그웰에게 입 좀 다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반쯤 미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위험 인물이었다. 자기가 한 농담에 웃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는 얘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 입을 다물지 않으면 내 기도 명단에 올려야겠어.”

아리아는 갈색으로 변한 핏자국을 닦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렌할의 새 주인은 거의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얼굴이나, 수
염이나 모든 게 평범한 사람이었다.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그렇다고
근육질도 아니었다. 검은 링메일에 분홍색 점박이 망토를 걸쳤는데,
눈에 띄는 거라고는 움푹 파인 퀭한 눈동자뿐이었다. 문장은 머리끝
부터 피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보였다.

“드레드포트의 영주님께 무릎을 꿇어라!”

아리아 또래로 보이는 종자가 외쳤다. 온 하렌할이 무릎을 꿇었고, 바


르고 호트가 앞으로 나왔다.

“영주님, 하렌할은 당신의 것입니다.”

영주가 뭐라 대답을 했지만 너무 작아서 아리아는 들을 수 없었다. 로


베트와 아에니스 프레이는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새 더블릿과 망토
를 입고 나타났다. 간단한 이야기가 끝나고 아에니스가 그들을 로지
와 비터에게 안내했다. 아리아는 그들이 아직도 이곳에 있다는 데에
놀랐다. 자켄이 사라졌을 때 그들도 함께 갔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로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그때 쉐그웰이 갑자기 달려들어 아리아의 손목을 잡
고 뜰 바깥으로 끌고 갔다.

“영주님, 영주님, 여기 수프를 만든 위즐이 있어요!”

“놔 줘!”

아리아는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잡아 뺐다. 그때 영주가 고개를 돌렸


다. 눈동자가 얼음처럼 투명했다.

“넌 몇 살이지?”

아리아는 잠시 나이를 따져 봤다.

“열 살입니다.”
“열 살입니다, 영주님이라고 해야지. 그래, 동물을 좋아하느냐?”

“조금요, 영주님.”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사자는 아니겠지? 만티코도 아닐 테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아리아는 잠자코 있었다.

“이름이 위즐이라고? 진짜 이름은 아닌 것 같구나. 부모님이 지어 주


신 이름은 뭐냐?”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로미는 ‘럼피헤드’라


고 불렀고, 산사는 ‘홀스페이스’라고 했다. 그리고 윈터펠의 병사들은
‘언더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다 영주가 바라는 종류의 이름
이 아니었다.

“니메리아입니다. 줄여서 낸이라고 불러요.”

“내게 말할 때는 호칭을 빼먹지 말거라, 낸. 전사가 되기에는 너무 어


리구나. 게다가 여자고. 참, 거머리를 무서워하느냐?”

영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거머리는 거머리일 뿐이에요, 영주님.”

“내 종자가 네게 좀 배워야겠구나. 거머리에게 몸의 피를 빨게 하는


건 장수의 비결 중 하나란다. 사람은 핏속의 불순물을 제거해야 해.
너도 그러도록 해라. 내가 하렌할에 머무르는 동안, 넌 내 술잔에 술
을 따르고 내 침실에서 시중을 들어라.”

이번에는 마구간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었


다.
“예, 영주님.”

그러자 영주가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애에게 예절을 가르쳐 줘라. 그리고 포도주를 흘리지 않고 따르


는 법을 확실히 가르치도록.”

영주가 아리아에게서 돌아서더니 바르고 호트를 불렀다.

“저기 망루 위의 기를 보시오.”

그때 용감한 전사 넷이 성벽으로 올라가 라니스터의 사자와 아모리


의 검은 만티코를 끌어내리고 대신 드레드포트의 살갗이 벗겨진 사
람과 스타크의 다이어울프를 올렸다.

그날 저녁 낸이라는 하녀는 용감한 전사들이 아모리를 발가벗겨 걷


게 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루제 볼톤과 바르고 호트를 위해
포도주를 따랐다.

아모리가 울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다리를 죄고 있는 사슬


이 쩔렁거렸다. 잠시 후 로지가 그를 풀어 주었고, 쉐그웰이 그를 곰
우리로 처넣었다.

‘저 곰은 새까맣네. 요렌처럼…….’

아리아는 요렌을 생각하며 루제 볼톤의 잔을 채웠다. 단 한 방울도 흘


리지 않고.

대너리스

이 찬란한 도시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은 ‘불멸의 저택’일 것이라 기대


했던 것과는 달리, 그 건물은 잿빛의 오래된 잔해일 뿐이었다.

탑이나 망루가 없는 길고 낮은 건물은 돌로 된 거대한 뱀처럼 검은 기


나나무 숲을 뚫고 서 있었다. 기나나무의 검푸른 나뭇잎은 ‘밤의 장
막’이라는 마법의 약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저택 근처에는 다른 건
물이 보이지 않았다. 지붕의 검은색 기와가 군데군데 깨졌고, 돌벽을
이은 회반죽은 균열이 나 있었다.

대니는 그제야 자로 조안 닥소스가 불멸의 저택을 왜 ‘먼지의 궁전’이


라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드로곤도 그 광경에 숨을 죽였다. 문
득 검은 드로곤이 날카로운 이 사이로 연기를 뿜어냈다.

조고가 대니 앞으로 나왔다.

“여왕님, 이곳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보십시오, 저것


이 아침해를 집어삼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마저 삼키기 전에 어서
여길 떠야 합니다.”

조라가 두 사람 옆으로 다가왔다.

“만일 그들이 저 안에 살고 있다면 과연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


겠습니까?”

그러자 자로 조안 닥소스도 마차 안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여왕님,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저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십시오. 마


법사란 것들은 먼지나 마시고 어둠이나 삼키는 몹쓸 것들입니다. 그
들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할 겁니다. 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요.”

아고가 자신의 아라크에 손을 얹었다.

“여왕님, 먼지의 궁전은 들어가는 이는 많았지만 나오는 이가 드물었


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조고가 얼른 동의했고, 아고가 말을 계속했다.


“여왕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귀하신 분이십니다. 저희는 여왕님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여왕님을 호위할 수 있도록 허
락해 주십시오. 저 위험한 곳에서 여왕님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대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곳은 칼라사르를 이끄는 ‘칼’이라 해도 혼자 들어가야 해요.”

“그럼 저를 데려가시죠.”

조라가 나섰다. 하지만 그때 마법사 피야트 프리가 나무 그늘 아래서


나왔다.

“여왕님께서는 반드시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대니는 마법사의 갑작스런 출현에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줄곧 저기 있었나?’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지금 발길을 돌리신다면 여왕님은 영원토록 지혜의 문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제 유람선은 지금도 대기중입니다. 고집불통 여왕님, 이 바보 같은


곳을 어서 떠나시죠. 아름다운 음악으로 여왕님의 고통스러운 영혼
을 위로할 피리 부는 악사와, 여왕님의 마음을 녹여 줄 귀여운 몸종도
구해 놨습니다.”

자로 조안 닥소스의 말에 조라가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여왕님, 미리 마즈 두어를 기억하십시오.”


“물론 그 여자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있어요. 그 여자는 단지 마에기
일 뿐이에요.”

대니는 그 순간 마음을 정했다. 대니의 말에 피야트 프리가 피식 웃었


다.

“어린 분이 꼬부랑 할멈만큼이나 지혜로우시군요. 자, 제 팔을 잡으


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대니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았다.

검은 나무 숲은 생각보다 어둡고 길었다. 저택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을 죽 따라 걷던 피야트 프리가 문 앞에 다다르자 옆으로 비
켜났다.

“여왕님, 이 길을 따라 곧장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절대 되돌아 나오


셔서는 안 됩니다. 제 말을 명심하세요. 불멸의 저택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면 정신 차리고 제 말
대로만 하십시오.”

“그러지요.”

“일단 들어가시면 문이 네 개인 방이 나올 겁니다. 그러면 오른쪽 문


으로 가셔야 합니다. 언제나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가세요. 계단이 나
오면 올라가고, 절대로 내려와서는 안 됩니다. 결코 다른 문을 열어서
는 안 됩니다 꼭 오른쪽에 있는 첫번째 문을 여세요. 아셨죠?”

“오른쪽에 있는 첫번째 문이라, 알았어요. 한데 나올 때는요? 반대로


하면 되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들어갈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나오세요. 항


상 올라가고, 항상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다른 문들도
열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왕님을 혼란스럽게 하는 광경들도
많이 보일 겁니다. 에로틱한 광경, 무섭고 끔찍한 광경, 기이한 광경,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보고 듣게 될 겁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여왕님께서 지나가면 말을 걸기도 할 겁니다. 대답하든 무시하든 마
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절대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알았어요.”

“언다잉, 불멸의 마법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셔


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그분들에게 그저 나방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찰나일 뿐입니다.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에 깊이 새
기세요.”

저택의 현관은 사람 얼굴을 본따 만든 벽에 입을 벌린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문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 같은 난쟁이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니의 무릎에도 못 미치는 키에, 쥐처럼 얼굴이 앞
으로 튀어나온 난쟁이는 자주색과 파란색을 적절히 조화시킨 멋진
제복을 입고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분홍색 손으로 들고 있는 쟁반에
는 마법사들이 마시는 푸른색 포도주 ‘밤의 장막’이 크리스털 잔에 담
겨 있었다.

“마시세요.”

피야트 프리가 푸른색 포도주를 대니에게 권했다.

“이걸 마시면 내 입술도 파랗게 되나요?”

“한 잔으로는 그저 귀가 막히고 눈이 멀게 될 뿐이죠. 여왕님은 앞으


로 펼쳐질 미래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될 겁니다.”

대니는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썩은 고기 맛이 나고 역겨운 걸 겨우


삼키고 나니, 그것이 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덩굴
이 가슴속에서 뻗어나가 몸을 휘감고, 혀가 불길처럼 가슴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입에서는 벌꿀과 술과 젖이 녹아 있는 크림 같기도 하
고, 드래곤 알 같기도 하고, 살코기 같기도 하고, 뜨거운 피 같기도 한
맛이 났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맛이 뒤섞인 것이었고, 아무 맛도 아
닌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대니는 잔을 비웠다.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대니는 쟁반 위에 잔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홀이 나오고 나란히 있는 문 네 개가 보였다.


대니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번째 방은 첫 번
째 방과 똑같았다. 역시 이번에도 오른쪽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또 문이 네 개 있는 자그마한 홀이 다시 나타났다.

‘여기는 마법의 세계구나.’

네 번째 방은 달걀 모양으로 벽이 벌레 먹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거


기서부터 문은 넷이 아니라 여섯 개로 늘었다. 대니는 바로 오른쪽에
있는 문을 골라 들어갔다. 어둡고 천장이 높은 홀이 길게 이어지고,
벽을 따라 횃불이 오렌지빛 불꽃을 일렁이며 줄지어 타고 있었다. 드
로곤이 후덥지근한 공기를 세게 휘저으며 검고 큰 날개를 펄럭였다.
하지만 얼마 날지 못하고 벽에 부딪혀 우스운 꼴로 떨어졌다. 대니가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닥에는 한때 화려했겠지만 지금은 곰팡이 피고 색이 바랜, 찢어진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양탄자 덕분에 발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것
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천장이나 다른 방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렸던 것이다. 누군가 황급히 뛰어가는 소리와 쥐가 나무를 긁는 듯
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드로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멈칫
하더니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조금 지나자
그것말고도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벽을 뚫어 버릴 듯 몸을 부
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드로곤이 불안한 듯 꼬리로 바닥을 이쪽저쪽
내려쳤다. 대니는 서둘렀지만, 문이 열린 곳마다 시선을 잡아끌었다.
‘들여다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유혹이 너무 강했다.

어떤 방에서는 아름다운 여자가 알몸으로 누워 있고, 난쟁이 넷이 득


시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푸른색 포도주를 건네주었던 난쟁이처럼
얼굴이 쥐처럼 생기고 손이 분홍색이었다. 한 녀석이 여자 다리 사이
에서 펌프질을 하고, 나머지는 여자 가슴을 물고 뜯으며 날뛰고 있었
다.

좀더 앞으로 나가자 한 방에서는 죽음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뒤


집힌 의자와 부서진 책상 위로 팔다리가 잘리거나 머리가 없는 시체
들이 온통 난도질당한 채 너부러져 있고, 그 밑으로는 핏물이 흥건했
다.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잘린 손들이 깨진
컵과 수저, 닭, 빵 쪼가리를 잡은 채 널려 있었다. 그 살육의 현장 한
가운데에 늑대 머리의 시체가 무쇠 왕관을 머리에 쓰고 양의 다리를
홀처럼 움켜쥐고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대니를 따라 천
천히 움직였다.

대니는 황급히 도망쳤다. 그러자 다른 방이 보였다.

‘어? 이 방은 나도 아는 곳이야.’

거대한 나무 들보와 거기에 장식된 동물들을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


다. 창 밖으로 레몬 나무가 보였다. 대니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아렸
다.

‘여긴 브라보스의 빨간 대문 집이야.’

그때 윌램이 지팡이에 무거운 몸을 의지하고 나타났다. 대니를 보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공주님이시로군요. 이리 오세요. 이제야 집으로 돌아오셨군요. 이젠


안심하셔도 돼요.”
그가 오래된 가죽처럼 크고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대니는 그 손을 붙
잡고 키스하고픈 마음에 얼른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멈
칫했다.

‘아니, 세르 윌램은 죽었어, 죽었다구.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이


야.’

대니는 뒷걸음질쳐 달아났다. 홀은 가도가도 끝이 이어졌다. 왼쪽에


는 수없이 많은 문이 있었지만 오른쪽에는 횃불만 줄지어 불타고 있
을 뿐이었다. 닫힌 문과 열린 문, 나무문과 쇠문, 화려한 문과 평범한
문, 문고리가 있는 문과 자물쇠가 있는 문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을
지나쳤다. 드로곤이 등을 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니는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왼쪽으로 거대한, 지금까지 봤던 다른 문보다 훨씬 거대한 청


동문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대니는 걸음을 멈
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굴처럼 어둡고 축축한 홀이 보였다. 문만큼
이나 거대한 규모의 홀이었다. 벽에 걸린 드래곤의 두개골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우뚝 솟은 왕좌에 옷을 잘 차려입은 은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눈이 유난히 검었다.

“그가 불태운 뼈와 익힌 살의 왕이 되도록 하라.”

노인이 아래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가 유골의 왕이 되게 하라.”

드로곤이 괴성을 지르며 발톱으로 쿡쿡 찔러 댔지만, 노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대니는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비세리스’와 똑같이 생
긴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머리색은
같았지만, 키가 좀더 컸고 눈도 보라색보다는 진한 쪽빛에 가까웠다.
그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주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어떤 이름이 왕에게 어울리겠소?”


“우리 아기를 위한 노래는 지으셨나요?”

여자가 대답은 않고 물었다.

“이 아이한테는 이미 노래가 있소. 장래가 약속된 왕자에겐 ‘얼음과


불의 노래’가 있지.”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대니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문 너머에 대니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하나가 더 있어야겠소.”

남자의 말은 대니에게 한 것인지 침대에 있는 여자에게 한 것인지 분


명치 않았다.

“드래곤은 머리가 셋이지.”

남자가 창가에 있는 의자로 가서 하프를 집어들고 은빛 줄을 퉁겼다.


아름답고 구슬픈 음악이 방안에 울려 퍼지자 남자와 아내와 아기가
아침 안개처럼 사라졌다. 오직 음악만이 대니가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약 한 시간쯤 갔을까, 마침내 홀은 어둠을 향해 아래로 뻗어 내려간


가파른 돌계단에서 끝이 나 있었다. 열린 문이든 닫힌 문이든 문이란
문은 모두 왼편에 있었다. 대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횃불조차 꺼져 가
고 있었다. 잘해야 서른 개 정도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그 사이 또 하
나가 꺼졌다. 홀이 좀더 어두워지면서 어둠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
다. 그리고 낡은 양탄자 위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뭔가 다가오는 소리
가 들렸다.

대니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되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계속 가야 하지?’


이제 오른쪽으로는 문이 없었고, 계단도 아래를 향하고 있지 위로 올
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횃불 하나가 또 꺼지


고 소리는 더 커졌다. 드로곤이 긴 목을 쭉 빼고 소리를 질렀다.

‘드로곤도 무슨 소리를 들었구나.’

대니는 아무것도 없는 벽을 다시 한 번 휙 둘러보았지만 역시 문은 없


었다.

‘내가 찾지 못하는 비밀의 문이 있나?’

횃불이 또 하나 꺼졌다. 그리고 또 하나가…….

‘오른쪽에 있는 첫번째 문이라고 했는데……. 오른쪽에 있는 첫번째


문, 오른편에 있는 첫번째 문…….’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왼쪽에 있는 마지막 문! 그게 오른쪽으로는 첫번째지.’

대니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네 개인 조그만 방이 나타났다.


고민 없이 오른쪽을 택했다. 그리고 또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오른
쪽, 오른쪽, 오른쪽…….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
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대니는 축축한 돌벽의 방 앞에 멈춰 섰다. 한데 그 방 맞은편


으로 둥근 입구가 보이고, 문 저쪽 나무 밑 잔디밭에서 피야트 프리가
보였다.

“벌써 일이 끝나신 겁니까?”

피야트 프리가 대니를 보자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벌써라고요? 지금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는데도 그 사람들을 찾지
못했는걸요.”

대니는 허무하고 혼란스러웠다.

“길을 잘못 드셨군요. 이리 오세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피야트 프리가 손을 내밀었다.

대니는 순간 망설였다. 오른쪽 방은 맞은편에 있었다. 여전히 닫힌 채


로…….

“여왕님,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언다잉들은 영원히 기다리지 않습


니다.”

피야트가 파란 입술을 비죽거렸다. 문득 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그


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일생은 그분들에게 그저 나방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을 정도


의 찰나일 뿐입니다.’

“여왕님, 제 말을 듣지 않으시면 길을 잃게 됩니다. 영원히 언다잉들


을 만나지 못할 거라구요.”

대니는 그에게서 물러나 오른편에 있는 문으로 갔다.

“안 됩니다!”

피야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여왕님, 안 돼요. 제게로 오십시오. 내게로, 내게로…….”

피야트의 얼굴이 조각조각 갈라지더니 벌레로 변했다.


대니는 방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가 아팠다. 대니는 불
멸의 저택에는 망루가 없던 것을 기억했다.

마침내 계단이 끝나고 입구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나무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문은 검은 흑단나무와 새하얀 위어우드를 소용돌이치
는 기이한 모양으로 꼬아 놓은 형태였다. 그것은 아름다우면서도 어
찌 보면 소름이 끼쳤다.

‘드래곤의 혈통은 두려워해서는 안 돼.’

대니는 재빨리 도트락의 신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조


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은 아주 넓었고, 마법의 힘 때문인지 광채가 감돌았다. 거기에 언


다잉들이 모여 있었다. 하얀 족제비 모피와 루비색 벨벳 옷을 걸친 이
들도 있고, 보석이 박힌 갑옷과 투구를 입은 자들도 있고, 별무늬가
그려진 길고 뾰족한 모자를 쓴 이들도 있었다. 여자도 몇 눈에 띄었는
데, 그들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햇살이 비스듬히 비쳤다. 방안의 공기는 이제껏


접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음악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대니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가 마


법사들의 괴수인 듯했다.

“타르가르옌 왕가의 대너리스,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콰스의 ‘언다


잉’입니다. 어서 들어와 함께 영원의 음식을 나눕시다.”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어요.”

장미와 은으로 잔뜩 치장을 하고 괴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했다.


콰스 식으로 한쪽을 드러내 놓은 가슴이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마법사의 괴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이 무사히 올 줄 알았습니다. 천년 전부터 당신을 기다
려 왔지요. 길을 가르쳐 주느라고 혜성을 보낸 것도 바로 우리입니
다.”

그러자 빛나는 에메랄드 갑옷을 입은 전사가 나섰다.

“우리가 가진 지혜를 나누어 드리지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법의


무기도 있습니다. 당신은 함정을 모두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자, 이리
와서 우리와 함께 얘기를 나누시죠.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대니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갑자기 드로곤이 풀쩍 뛰어오


르더니, 흑단나무와 위어우드로 만든 앞쪽의 문에 달라붙어 거기에
새겨진 조각을 물어뜯었다.

“고약한 짐승이군요. 대너리스, 드래곤의 비밀을 가르쳐 드릴까요?


자, 이리 오시죠, 이리로.”

잘생긴 젊은 남자가 웃으며 손짓했다.

대니는 의혹을 떨칠 수 없었지만 마음을 다잡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짝이 어찌나 무거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니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서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막 문 안쪽
으로 들어가려는데 오른쪽으로 어둠에 싸인 문이 하나 희미하게 더
보였다. 멈칫해서 마법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노랫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음성으로 계속 유혹을 하고 있었다.

대니는 도망치듯 그곳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어둠에 싸여 있는 방문


을 열었다. 드로곤이 다시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 방에는 돌로 만든 긴 탁자가 가득 차 있고, 부패해서 퍼렇게 변한


심장이 깊고 묵직한 맥박 소리를 내며 떠다니고 있었다. 맥박이 뛸 때
마다 심장에서 푸른색 불빛이 흘러나왔고, 탁자 위는 온통 푸른색 그
림자뿐이었다. 대니는 탁자 앞에 놓인 빈 의자로 갔다. 부패한 심장의
느리고 둔탁한 맥박 소리가 끊임없이 귀청을 울렸다.

“드래곤의 어머니…….”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


가 심장 맥박 소리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드래곤……. 드래곤……. 드래곤…….”

남자 같으면서도 여자 같고, 늙은이 같으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목소


리였다. 대니는 감히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연
습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나는 타르가르옌의 대너리스이고, 세븐킹덤의 여왕입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나? 그런데 왜 기척이 전혀 없지?’

대니는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 무릎에 얹었다.

“말씀 좀 해주세요. 죽음을 이기신 분들이시여, 제게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

심장이 내뿜는 옅은 푸른빛이 늙고 주름진 언다잉의 모습을 희미하


게 비추었다. 머리칼이 한 올도 없는 언다잉은 피부가 보랏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다. 입술과 손톱은 물론이고, 눈도 흰자위가 파랬다. 언다
잉들은 빛 바랜 실크 옷을 입고 대니 맞은편에 앉은 노파를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콰스 식으로 한쪽을
드러내 놓은 노파의 푸른색 가슴이 가죽처럼 딱딱해 보였다.

대니는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여자는 숨을 쉬지 않아. 움직이지도 않고, 눈은 뜨고 있지만 보고


있지도 않아. 저들은 죽은 건가?’
쥐의 수염처럼 가느다란 여자의 속삭임이 들렸다.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어…….’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어…….’

한꺼번에 많은 소리들이 메아리쳤다.

대니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나는 진실의 선물을 받으러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것


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실제인가요, 거짓인가요? 과거의 일도
있었는데, 모두 과거인가요, 아니면 앞으로 닥칠 일도 있나요? 대체
그것들은 뭘 의미하는 거죠?”

‘그림자들의 형상, 아직 겪지 못한 내일……. 컵에 든 얼음을 먹어라.


컵에 든 불을 마셔라.’

‘드래곤의 어머니. 세 아이의 어머니…….’

‘세 개의 머리는 드래곤…….’

“셋이라고요?”

대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다잉들은 입술도 움직이지 않은 채 중얼


거렸다.

‘드래곤의 어머니……. 폭풍의 어머니…….’

속삭임은 차츰 소용돌이치는 노래가 되었다.

‘세 개의 불을 밝혀야만 한다. 하나는 생을 위하여, 하나는 죽음을 위


하여, 하나는 사랑을 위하여…….’
대니의 심장이 앞에서 박동하는 파랗게 부패한 심장과 하나가 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너는 세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하나는 침대로, 하나는 공포로, 하나


는 사랑으로…….’

대니는 문득 메아리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점점 자신의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호흡조차도.

‘세 번 배반을 당할 것이다. 한 번은 피로, 한 번은 황금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사랑으로…….’

“나는 잘…….”

대니의 목소리도 어느새 언다잉들의 속삭임처럼 변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번에는 좀더 크게 말했다. 하지만 말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도와 주세요. 보여 주세요.”

‘도와 주라…….’

속삭임이 대니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렸다.

‘보여 주라…….’

환영이 어슴푸레한 푸른 공기 속에서 너울거렸다. 비세리스가 펄펄


끓는 금물이 머리 위로 흘러내리자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구릿빛
피부와 은발의 기사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 서 있었다. 루비가 죽
어가는 왕자의 가슴에서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그는 무릎을 꿇
은 자세로 물 속으로 가라앉으며 중얼거렸다.
‘드래곤의 어머니, 죽음의 딸이여…….’

그림자 없는 푸른 눈의 왕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붉은 검을 번쩍 들어


올리자,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드래곤의 깃발이 펄럭였다. 불타오르
는 망루에서 불꽃의 그림자를 내뱉자, 그 속에서 거대한 야수의 석상
이 날아올랐다.

‘드래곤의 어머니, 거짓을 벌하는 자여…….’

대니의 애마 실버가 잔디밭을 지나 별들의 바다를 걸어갔다. 이미 싸


늘하게 식은 시체가 뱃머리에 서서 눈을 반짝이며 잿빛 입술로 사악
한 미소를 지었다. 푸른 꽃이 얼음 속에서 피어나 부드러운 꽃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웠다.

‘드래곤의 어머니, 불의 신부여…….’

의미를 알 수 없는 환영들이 점점 더 빨리 바뀌었다. 그것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푸른 그림자들이 문어처럼 흐물흐물춤을
추었다. 작은 소녀가 맨발로 빨간 지붕의 저택으로 뛰어갔다. 미리 마
즈 두어가 불꽃 속에서 새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드래곤 한 마리
가 그 여자 마법사의 이마를 찢으며 튀어나왔다. 은빛 말이 뒤로 피범
벅이 된 알몸의 남자 시체를 땅에 질질 끌며 달렸다. 하얀 사자가 사
람 키보다 더 높이 자란 풀숲에서 뛰어 나왔다. ‘어머니의 산’ 밑의 거
대한 호수에서 벌거벗은 노파들이 기어 나와 덜덜 떨며 하얗게 센 머
리를 조아리고 대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니가 실버를 타고 바람같
이 달리자 노예들이 핏자국이 선명한 손을 들고 울부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들은 손을 뻗어 대니의 옷자락과 발, 다리, 가슴을 잡아당겼다. 그


들은 대니와 불과 생명을 갈망했다. 대니는 숨을 헐떡이며 팔을 벌리
고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려 했다. 한데 그때 검은 새떼가 날아와 머
리를 공격했다. 새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쪽빛 하늘을 열어 젖히
자 환영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대니의 헐떡임은 공포로 바뀌었다. 푸르고 차가운 언다잉들이 대니


를 둘러싸고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뻣뻣하고 차가운 손으로 옷과
살갗을 만지고, 잡아당기고, 문질렀다. 대니는 손발에 힘이 쭉 빠져
좀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조차 박동을 멈췄다. 누군가 가슴
을 만지고 유두를 비틀었다. 또 누군가 부드러운 살점을 찾아 목구멍
안을 헤집었다. 축축한 혀가 눈을 핥고 빨았다.

점차 푸른빛은 오렌지빛으로 바뀌고, 속삭임은 비명으로 바뀌더니


대니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순간 대니의 몸을 만지고 있던
손들과 입들이 사라지면서 뜨거운 공기가 몰아닥쳤다.

대니는 갑작스런 열기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깨에 앉아 있던


드로곤이 날개를 쫙 펴고 검은 심장을 갈가리 찢은 뒤, 목을 쭉 빼고
불을 내뿜고 있었다. 밝고 뜨거운 불이었다.

언다잉들이 불에 타면서 높고 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알아들


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울부짖었다. 그들의 살점은 산산이 부서지
고, 마른 장작 같은 뼈는 부러졌다. 그들은 화염 속에서 몸부림을 치
며 비틀거렸다. 높이 들어올린 그들의 손은 횃불처럼 환하게 타올랐
다.

대니는 무거운 발을 가까스로 들어 걸음을 옮겼다. 언다잉들은 속이


텅 빈 껍데기처럼 슬쩍 닿기만 해도 쓰러졌다. 대니가 나오는 순간 방
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다.

“드로곤!”

드로곤이 불을 뚫고 대니에게 다가왔다.

대니는 활활 타오르는 방을 뒤로하고 나선형의 길고 어두운 통로로


뛰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문을 찾아야 했다. 오른쪽이든 왼쪽이
든 문만 보이면 그리로 나갈 생각이었지만, 복도는 돌벽만 죽 이어지
고 있었다. 대니는 뒤틀리듯 꿈틀거리는 복도를 조심하며 온 힘을 다
하여 달렸다. 갑자기 저 앞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문이 보였다.

대니는 햇빛이 비치는 그곳으로 몸을 내던졌다. 눈이 부셔서 눈을 제


대로 뜨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리는데, 피야트 프리가 알아듣지 못하
는 말로 뭐라 중얼거리면서 깡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
니 새까만 연기가 덩굴손처럼 먼지의 궁전에서 하늘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피야트 프리가 검을 뽑아들고 저주의 주문을 외우며 대니에게 달려


들었다. 드로곤이 날아와 얼굴을 공격하고, 무시무시한 조고의 채찍
이 등을 내려쳤지만, 그는 대니 앞까지 달려와서 무섭게 눈을 부릅뜨
며 검을 치켜들었다. 순간 라카로가 그에게 몸을 던졌고, 둘은 함께
풀밭 위로 넘어졌다.

조라가 차가운 초록의 풀밭에 무릎을 꿇고 대니의 어깨를 감싸주었


다.

티리온

“바보같이 죽으면 자네 시체를 염소에게 던져 주겠네.”

스톤크로우 전사들을 태운 배가 떠나기 바로 전, 티리온은 협박하듯


샤가를 다그쳤다. 하지만 샤가는 그 말에 낄낄거릴 뿐이었다.

“경은 염소를 키우지 않을 텐데요?”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놓지.”

동이 트고 있었다. 배는 천천히 강으로 나아갔고, 장대 아래에서 물결


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면서 잔물결을 일으켰다. 티메트는 이틀 전
에 번드맨족을 이끌고 이미 킹스우드로 출발한 터였다. 그리고 어제
는 블랙이어스와 문브라더 전사들이 떠났다.
“절대로 맞붙어 싸울 생각은 말게. 야영지나 보급품 부대를 공격하거
나, 매복했다가 정찰병들을 습격해서 행군하는 길 앞 나무에 시체를
걸어 놓기만 해. 낙오병들이 있으면 죽여 버리고. 놈들이 무서워 잠을
못 자도록 기습은 주로 밤에 하…….”

갑자기 샤가가 티리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수염도 자라기 전부터 돌프에게서 이미 다 배운 것들입니다. ‘달의


산’에서 그런 것도 모르고 산적 짓을 했겠습니까.”

“킹스우드는 달의 산하고는 달라. 내가 딸려 보내는 안내인들의 말을


잘 듣게. 그 사람들은 자네가 달의 산들을 아는 것만큼이나 킹스우드
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조언을 새겨들으면 도움이 많이 될 거
네.”

“네, 경의 애완동물들 얘기를 잘 듣겠습니다.”

샤가가 엄숙한 태도로 약속했다. 이제 그가 배에 올라탈 시간이 되었


다.

티리온은 샤가를 태우고 블랙워터로 향하는 배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배를 보는 동안 가슴 한구석
이 쓰렸다. 그들이 없으면 그는 벗은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티리온에게는 브론이 고용한, 지금은 거의 8백에 이르는 용병들이 남


아 있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지조가 없었다. 급한 대로 전쟁에서 이기
면 땅과 기사 작위를 주겠다는 약속으로 충성심을 맹세받긴 했다. 그
들은 티리온이 베푸는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고 티리온의 농담에 신
나게 웃어젖히며 서로 세르라고 불렀다. 하지만 브론만은 그렇지 않
았다. 어느 날, 그가 어두운 얼굴로 냉소를 지으며 티리온에게 말했
다.

‘그들은 기사 작위를 얻기 위해 살인은 하겠지만, 절대 목숨까지 바칠


거라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티리온 역시 그런 희망은 조금도 품지 않았다.

시티워치도 믿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세르세이 덕분에 황금빛


망토를 두른 대원은 6천 명이나 되었지만 믿을 만한 대원은 그 중 4
분의 1이나 될까. 언젠가 제이슬린도 경고한 적이 있었다.

‘처음부터 탈영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바리스 경조차


찾아내지 못한 염탐꾼이 몇 있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봄 새싹
보다 더 파릇한 신병들이 수백 있습니다. 오직 빵과 술과 안전을 위해
들어온 자들이죠. 누구도 동료들에게 겁쟁이로 보여지길 원치 않을
겁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겠죠. 하지만 상황이
불리해지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만약 누구 한 사람이라도 창을
버리고 도망가는 자가 있으면, 순식간에 수천 명이 줄행랑을 칠 겁니
다. 한 명도 남김없이 말입니다.’

물론 시티워치에 숙련된 대원들도 있었다. 선왕 로버트에게서 황금


망토를 하사받은 2천 명의 대원들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완전
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사, 종자, 고참병들만 계산에 넣으
면 3백 명이 조금 넘을까 말까 하는 수였다. 티윈의 말대로 시티워치
는 진정한 군인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티리온은 조만간 아버지
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성벽 위의 병사 하나가 성벽 아래의 병사 열보
다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시험해 볼 터였다.

브론과 시티워치들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어시장 앞에서 티리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가판에 몰려든 사람들과 생선 가격을
흥정하느라 어부의 아낙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전쟁통에 곡
식이 거의 들어오지 못해 생선 값은 열 배가 넘게 올랐고, 지금도 꾸
준히 오르는 중이었다. 돈이 있는 자들은 생선을 사기 위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강가에 나왔고, 돈이 없는 자들은 훔칠 기회를 엿보며 가판
주위를 얼쩡대거나 성벽 아래에서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시티워치들이 창으로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길을 냈다. 티리온
은 가능한 한 군중들이 중얼거리는 저주의 소리를 무시했다. 군중 사
이에서 미끈거리는 썩은 물고기 하나가 날아왔다. 티리온은 조심스
럽게 물고기를 피해 안장 위로 올라갔다. 배만 산처럼 볼록 튀어나온
아이들이 그 냄새나는 물고기 조각으로 몰려들었다.

티리온은 말 위에 앉아 강가를 한번 죽 둘러보았다. 머드게이트 위 성


벽에서 목수들이 아침 공기를 가르며 망치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성
벽에 울타리를 설치하는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선
체에 붙은 조개삿갓처럼 성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건물들을 보
자 티리온은 기분이 나빠졌다.

‘저것들을 깡그리 없애 버려야 해.’

그 건물들은 간이 여인숙, 식당, 창고, 술집, 싸구려 창녀들이 다리를


벌리고 사람들을 기다리는 매음굴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건물
들을 그냥 놔둔다면 스타니스는 사다리도 없이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었다.

티리온은 브론을 불렀다. 그리고 너저분한 가건물들을 바라보며 통


통한 손을 흔들었다.

“병사를 모아서 강가와 도시 성벽 사이의 가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


려. 단 하나도 남기지 말고. 알아들었나?”

브론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불평들이 대단할 텐데요?”

“그렇겠지. 그래도 할 수 없어. 나를 욕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겠지.”

“더러는 반항하는 자도 있을지 모릅니다.”

“반항하더라도 얻는 게 없다는 걸 알려 줘.”


“그럼 거기서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죠?”

“가재도구를 옮길 시간을 주고 난 후에 쫓아내. 그들은 적이 아니니


까 살상과 강간은 절대 금한다. 그리고 병사들은 거리에서 일렬로 줄
을 지어 다니도록 하고.”

“제 부하들은 용병이지 셉톤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술도 마시지 못하


게 하라고 명령하시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티리온은 성벽을 두 배로 높이고 세 배로 두껍게 만들 생각뿐이었다.


하긴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거대한 성벽과 높은 탑이 없어서
스톰엔드나 하렌할, 윈터펠이 함락된 것은 아니니까.

문득 마지막으로 본 윈터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렌할처럼 엄청나


게 큰 성도 아니고, 스톰엔드처럼 견고한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지
도 않았다. 하지만 돌로 된 윈터펠의 성벽은 알 수 없는 힘에 보호받
아 그 안에만 들어가면 안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 윈터펠
이 함락되다니, 티리온은 아직도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에
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신께서는 한 손을 주시고 다른 손은 거두어 가시는군.’

바리스가 소식을 전했을 때 티리온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스타


크 가문에게 하렌할을 빼앗긴 대신 윈터펠로 보상받는 셈이었다. 그
렇다면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롭은 북으로 되돌아가야 할 터였
고, 그것은 라니스터 가문이 당분간 서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
도 된다는 사실을 뜻했다. 하지만…….

티리온은 윈터펠에서 본 테온 그레이조이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


다. 아직 철없는 젊은이로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궁술에 뛰어났었다.
하지만 윈터펠의 영주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윈터펠의 영주는
항상 스타크 가문에서 나와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곳의 가즈우드도 기억이 났다. 참나무, 산사나무, 서양물푸레나무,
소나무들이 진녹색의 날카로운 잎으로 무장하고 가즈우드 둘레를 보
초병처럼 서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하트트리가 창백한 거인 같은 모
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티리온은 금방이라도 오랜 세월을 이
어져 내려온 그 유서 깊은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숲이 바로 윈터펠이야. 그곳이 바로 북부야. 그곳을 걸을 때는 내


가 마치 환영받지 못하는 침입자 같았지.’

티리온은 그레이조이 가문 역시 그렇게 느낄지 궁금했다. 성은 그들


의 것일지 몰라도 가즈우드는 아닐 터였다. 1년, 10년, 아니 50년이
지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었다. 티리온은 머드게이트를 향해 천
천히 말을 달리면서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윈터펠은 네게 아무것도 아냐. 그곳이 함락된 것을 기뻐해야 해. 네


성이나 잘 지키라구.’

성문은 열려 있었다. 안에는 투석기 세 대가 거대한 새처럼 성벽을 올


려다보며 나란히 서 있었다. 그것들은 오래된 참나무로 몸통이 만들
어지고, 균열을 막기 위해 강철로 묶여 있었다. 시티워치들은 그것을
‘세 명의 창녀’라고 불렀다. 스타니스가 오면 제일 먼저 호들갑스럽게
그를 환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게 우리의 희망 사항인지도 모르지.’

티리온은 말에 박차를 가해 군중을 뚫고 성문을 통과했다. 투석기를


지나자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레드킵까지 가는 길은 수월했다. 하지만 핸드의 관저에는 배를 징발


당한 선주 열둘이 알현실에 모여 있었다. 티리온은 그들에게 미안하
다고 정중히 사과하고 전쟁이 끝나면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
만 그들은 전혀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만약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브라보스 출신의 한 선주가 물었다.

“그럴 경우 스타니스에게 보상을 청구하시오.”

선주들을 다독여 모두 돌려보냈을 때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티리온


은 그제야 자신이 임명식에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뛰다시피 정
원을 가로질러 셉트로 향했다. 사람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프리가 새로 임명된 두 명의 킹스가드에게 하얀 망토를 걸쳐 주고
있었다. 임명식이 거행되는 동안은 모두 일어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티리온은 궁전대신들의 엉덩이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이셉톤
이 그들에게 맹세를 시키고 세븐의 이름으로 머리에 기름을 부은 후
에는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으니, 그 자리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티리온은 세르세이가 군중에게 살해당한 프레스톤 그린필드의 자리


를 바론 스완에게 물려주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스완 가문은 자존심 강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군사력도 막강했다. 굴


리안 스완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직까지도 자신의 성에 남아서
전쟁을 관조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장남은 렌리에게 충성을 맹세했
다가 지금은 스타니스에게 협력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킹스랜딩에
충성하고 있었다. 만일 굴리안에게 셋째 아들이 있었다면 아마도 롭
에게 갔을 것이다. 명예롭지는 못하지만 훌륭한 판단이었다. 누가 왕
좌를 차지하든 스완 가문은 살아남을 테니까.

바론 스완은 좋은 가문 출신일 뿐만 아니라 용감하고 충성스럽고 무


술이 뛰어났다. 창술과 모닝스타에 능했고, 궁술에서도 최고의 실력
자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르세이가 두 번째로 선택한 인물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오스문드 케틀블랙은 생김새부터가 험악했다. 180센티
미터에 달하는 키에 근육질의 몸, 매부리코, 짙은 눈썹, 삽 모양으로
퍼진 갈색 수염은 보는 이를 주눅들게 했다. 세르세이는 분명 그런 외
모 때문에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세르 오스문드는 충성스럽고 용감해.’

세르세이는 조프리에게 그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것


은 사실이 아니었다. 세르세이에게 고용된 이후 그는 브론에게 비밀
을 팔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왕대비에게 그런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
다.

티리온은 자신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오스문드가 킹


스가드에 임명되면 왕 주변의 일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오스문
드가 아무리 속이 시커멓다고 해도 로스비의 지하 감옥에 갇힌 보로
스 블라운트보다야 나을 것이었다. 제이슬린 바이워터가 시티워치를
이끌고 나타나자, 토멘과 길레스를 호위하고 로스비 성으로 가고 있
던 보로스는 민첩하게 자신의 임무를 제이슬린에게 양도했다. 그러
한 행동에 세르세이뿐만 아니라 바리스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 세르
세이는 조프리에게 반역과 직무 유기를 죄목으로 보로스의 직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누나는 세르 보로스를 대신해 그와 똑같은 놈을 그 자리에 임


명하는군.’

킹스가드 임관식으로 아침 시간을 다 보낼 것 같았다.

티리온은 다리가 점점 아파 와, 몸의 무게를 이 발 저 발에 옮기며 몸


을 비비꼬았다. 탄다 부인이 몇 줄 앞에 서 있었지만 롤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먼발치에서라도 샤에를 보길 바랐는데…….’

바리스가 샤에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지만, 티리온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문득 바리스의 계획을 듣고 샤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엌데기보다야 시녀가 낫죠. 은으로 장식한 벨트와 검은색 다이아
몬드가 박힌 황금 목걸이를 가져가도 돼요? 다이아몬드가 제 눈을 닮
았다고 했던 거 말예요. 몸에 걸어서는 안 된다면 몰래 감춰 두고만
있을게요.”

샤에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티리온은 탄다 부인이 영리한


여자는 아니더라도 딸의 시녀가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의심
할 거라는 점을 지적했다.

“옷 두세 벌만 골라, 모직 옷으로. 더 이상은 안 돼. 나머지는 네가 나


를 방문할 경우를 대비해서 내 방에 가져다 놓을게.”

샤에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면 적어도 그녀는 안전


할 터였다.

마침내 임관식이 끝났고, 조프리가 셉트를 나갔다. 티리온은 새로 임


명된 하이셉톤에게 몇 마디 하기 위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가 직접
선택한 하이셉톤은 은혜를 잊지 않을 만큼 사람 됨됨이가 괜찮았다.

“신들이 우리와 함께 하길……. 하이셉톤, 셉톤들에게 스타니스 경이


바엘로의 그레이트 셉트를 불태우겠다고 맹세했다는 소문을 퍼뜨리
십시오.”

티리온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티리온 경?”

몸집이 작고 얼굴이 여윈 하이셉톤은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티


리온은 그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스타니스 경은 빛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스톰엔드


의 가즈우드도 불태우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가 다른 신들이라고 남
겨 두겠습니까? 셉톤들에게 말하십시오. 스타니스 경에게 협력하는
자는 누구든 왕뿐만 아니라 신들까지도 배신하는 것이라구요.”
“잘 알겠습니다. 그들에게 왕뿐만 아니라 핸드님을 위해서도 기도하
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티리온이 방으로 돌아오니, 연금술사 할리네와 마에스터 프렌켄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리온은 할리네를 좀더 기다리게 하고 프렌켄이
가져온 편지를 읽었다. 하나는 도란 마르텔이 스톰엔드가 함락되었
음을 경고하는 오래된 편지였고, 또 하나는 파이크의 발론 그레이조
이에게서 온 흥미를 자아내는 편지였다. 발론은 조프리에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고 동맹을 맺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티리온은 그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후 내려놓았다. 발론의


롱십은 스톰엔드에서 올라오는 스타니스의 함선과 싸우는 데 큰 도
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킹스랜딩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
고, 과연 영토의 절반을 나눠 줘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의회에서 해결하도록 해야겠군.’

프렌켄이 업무 보고를 끝내고 나간 후에야, 티리온은 회계 보고를 하


러 온 할리네를 불렀다.

“이럴 리가! 거의 1만 3천 개나? 나를 바보로 아시오? 텅 빈 단지를


오수로 가득 채우고 밀랍으로 봉한 것에다 황금을 낭비할 생각이 없
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티리온은 장부를 꼼꼼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할리네가 서둘


러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것은 와일드파이어가 틀림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우리는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로사트 경이 숨겨 놓은 또 다른 와일드
파이어를 발견했거든요. 드래곤피트 아래서 말입니다. 창녀들이 그
폐허에서 손님을 받아 왔던 모양입니다. 한 사내가 단지를 발견하고
는, 너무 취한 상태라 술로 착각해 얼마를 마셨답니다.”
라예니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드래곤피트는 150년 동안 버려진 장
소였다. 티리온이 생각하기에도 그곳은 와일드파이어를 감춰 두기에
좋은 장소였다.

‘로사트 경이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얘기해 줬더라면 좋았


을걸…….’

하지만 그렇더라도 1만 3천 개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렇더라도 기껏 3백 단지잖소?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기껏해야 몇천 개 더 만들 수 있다고 한 걸로
기억하는데?”

“네, 그렇게 말씀드렸죠.”

할리네는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저, 저희는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핸드님.”

“그래서 전보다 훨씬 많은 와일드파이어를 만들어냈군.”

티리온은 씩 웃으며 할리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전에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기는


군.”

할리네는 안색이 원래 창백했기 때문에 더 이상 창백해지지는 않았


다.

“핸드님, 우리는 처음부터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 그 동안 많은 와일드파이어를 만들면서……, 그러니
까 능숙해지면서 일하는 데 가속도가 붙어서……. 그리고…….”

할리네가 불편한 듯 몸의 자세를 바꾸었다.


“주문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비밀 주문이……. 매우 까다롭고
골치 아픈 것이라서……, 하지만 꼭 필요한 것입니다.”

티리온은 점점 짜증이 났다. 지금쯤이면 제이슬린이 도착해야 했다.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그의 체질이 아니었다.

“비밀 주문? 정말 멋지군.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거요?”

할리네가 티리온의 웃는 얼굴에 마음이 놓였는지 엷게 미소를 지었


다.

“그것들이 전보다 훨씬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핸드님께서는 드


래곤이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시죠?”

“드래곤피트 아래서 당신이 발견한다면 믿겠소. 한데 그건 왜 묻소?”

“오, 죄송합니다. 제가 조수였을 때 폴리터 현자께서 했던 말씀이 생


각나서요. 저는 그분에게 주문이 왜 책에 씌어 있는 것만큼 효력이 나
타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마지막 드래곤이 죽은 이
후 세상에서 마법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죠.”

“실망시켜서 미안하오. 하지만 난 드래곤을 본 적이 없소. 대신 왕의


사법관을 보았지. 당신이 가져온 물건 중 단 하나라도 와일드파이어
가 아닐 경우에는 당신도 그를 보게 될 거요. 자, 이게 그만 가보시
오.”

할리네는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안으로 들어오던 제이슬린과 부딪쳐


넘어질 뻔했다.

제이슬린은 이제 경이었다. 그는 로스비에서 새로 모집한 병사들을


데리고 곧장 돌아와서는 다시 시티워치의 커맨더 자리를 맡았다.

“내 조카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도시 수비에 대해 논의가 끝난 뒤 티리온이 물었다.

“토멘 왕자님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제 부하가 잡아온 새


끼 사슴을 애지중지하시며 항상 데리고 다니십니다. 전에도 새끼 사
슴을 갖고 있었다는데, 조프리 왕께서 가죽옷을 만들겠다며 가져가
버리셨다더군요. 가끔 왕대비님에 대해 물으시고, 미르셀라 공주님
에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한 번도 끝까지 쓰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형을 그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질 경우를 대비해 적당한 조치를 취해 놓았겠지?”

“부하들에게 지시를 해놓았습니다.”

“어떤 지시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잖습니까?”

그 말에 티리온은 미소지었다.

“자네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 기쁘군.”

킹스랜딩이 적군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토멘은 살아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디로 갈 것인지도 티리온도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제이슬린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스가 나타났다.

“인간은 참으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티리온은 바리스의 인사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배신자는 누구요?”

바리스는 두루마리 문서를 내밀었다.


“정말 치가 떨리는 배신입니다. 우리 시대의 슬픈 노래 같습니다. 우
리 아버지들과 함께 명예도 죽은 것일까요?”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시오.”

티리온은 명단을 훑어보았다.

“아는 사람이 몇 눈에 띄기는 하군. 대체로 부유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왜 반란을 꿈꾸는 거요?”

“스타니스 경이 이길 거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나누고 싶


은 거죠. 그들은 바라테온 가문의 문장을 본 따 스스로 ‘앤틀러맨’, 사
슴뿔의 사람이라고 부르죠.”

“그자들에게 스타니스가 문장을 바꿨다고 얘기해 줘야겠군. 그러면


‘핫하트맨’이 되려나?”

하지만 농담할 때가 아니었다. 수백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있는 그들


은 전투가 시작되면 적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올드게이
트를 수중에 넣으려고 했다. 명단 중에는 대장장이 살로레온도 끼여
있었다.

“앞으로 멋진 투구를 얻기는 글렀군.”

티리온은 살로레온의 체포 영장에 서명하면서 투덜거렸다.

테온

테온은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카이라가 젖가슴을 그의 등에 붙이고


한 팔을 가볍게 그의 몸에 얹은 채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부드럽고
고른 숨소리가 편안하게 들렸다. 침대 주위로 옷가지가 어지럽게 헝
클어져 있는 침실은 어둡고 고요했다.

‘무슨 소린가가 들렸는데……. 누구지?’


하지만 창문에 부딪히는 가냘픈 바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라, 그레이조이! 병사들도 곳곳에 배치해 두었고, 성도 쥐 죽은 듯


이 조용하잖아.’

테온은 불안한 마음을 나쁜 꿈 탓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꿈이 생각나지 않았다.

카이라는 밤마다 테온을 녹초로 만들었다. 테온의 눈에 띄기 전까지


18년 동안 성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던 그 여자는 족제비처럼 나긋
나긋하고 열정적이며 촉촉이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테온은 에다
드 스타크의 침대에서 천한 계집과 뒹군다는 매력적인 유혹을 거부
하지 않았다.

테온이 침대 위에서 빠져나가려 하자, 카이라가 그의 발을 잡고 뭐라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벽난로에는 아직 약간의 불기가 남아 있었고,
침대 밑에서는 웩스가 망토를 깔고 자고 있었다. 모두 깊이 잠들어 있
었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테온은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몸을 차가운 손으로 훑고 지나가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창
가에 기대어 서서 어두운 탑과 빈 마당, 검은 하늘, 백년을 세어도 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반달이 유리 정원의 지붕
위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개 짖
는 소리도…….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어, 그레이조이. 저 고요함을 봐! 너는 술


에 취해 이 승리를 맘껏 즐겨야 해. 서른 명도 안 되는 병사로 윈터펠
을 손에 넣다니, 이건 놀랄 만한 업적이라고.’

테온은 알 수 없는 환영들을 어떻게든 내쫓고 싶은 맘에 침대로 다시


돌아가 카이라를 안았다. 밤의 적막을 깨는 카이라의 헐떡거리는 숨
소리가 왠지 반가웠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멈칫했다. 본능이 느낀 부재……. 다이어울프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윈터펠에서는 항상 그것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테온 역시 그 소리를 들으며 지냈었다. 한데 지금은 너무나
고요했다.

테온은 침실 밖으로 나갔다. 우르젠이 둥근 방패를 등에 메고 침실 앞


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다이어울프들이 너무 조용하잖아. 가서 그 녀석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와.”

문득 브랜이 울프스우드에서 무법자들에게 공격받았던 사건이 떠올


랐다. 서머와 그레이윈드가 무법자들을 발기발기 물어뜯은 일이 아
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테온은 마음이 불안해져 바닥에 누워 있는 웩
스를 구두 끝으로 툭 쳤다.

소년이 깜짝 놀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가서 브랜 스타크와 그 동생이 침대에 있는지 확인해라.”

웩스가 막 방문을 나서는데 카이라가 잠에 취한 채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넌 그냥 자.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테온은 포도주를 한 잔 들이켜며 다이어울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인원이 너무 적어. 만약 아샤가 오지 않으면…….’

그때 웩스가 다급한 얼굴로 잽싸게 돌아왔다.


‘제기랄.’

테온은 바닥에 널려진 옷가지를 보았다. 다급하게 카이라를 안느라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던 것이다. 얼른 튜닉과 가죽옷을 챙겨 입고 롱
소드와 단검을 허리에 찼다.

그때 우르젠이 돌아왔다.

“늑대들이 사라졌습니다.”

테온은 에다드만큼 신중하고 냉정해야 한다고 되뇌었다.

“성안 사람들을 모두 깨워 마당으로 집합시켜라. 빠진 사람이 없는지


잘 확인하고, 블랙 로렌에게 성을 순찰하라고 해라. 그리고 웩스, 너
는 나를 따라와라.”

스티그가 딥우드모트에 도착했을지 궁금했다. 그자는 아이언 섬 출


신들이 대개 그렇듯 숙련된 기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만
큼 시간이나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샤는 지금쯤 돌아오고 있을
터였다.

‘내가 스타크 가족을 놓쳤다는 걸 아샤가 알게 되면…….’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브랜의 침실은 비어 있었다. 테온은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병사를 붙


여 두었어야만 했다. 두 아이, 그것도 하나는 반신불수인 아이들에게
사람을 붙이는 것보다도 성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뜰에서 사람들이 끌려나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흘리게 해주겠어. 난 저들을 너무 친절하게 대해 줬어. 하지


만 이제는 아니야.’
테온은 한 소녀를 윤간한 병사 둘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여전히 나를 욕할 테지.’

모든 게 불공평했다. 미켄은 벤프레드와 마찬가지로 투항을 거부하


고 죽음을 택했다. 셉톤 샤일은 드라운드 가드의 제물로 바쳐졌다. 테
온의 부하들이 모두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테온은 샤일을 우물
로 던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난 너에게 아무 감정 없어. 하지만 너와 너의 신들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어.”

우르젠이 블랙 로렌과 함께 돌아와 테온을 상념에서 깨웠다.

“헌터게이트로 가시지요. 그곳이 제일 잘 보입니다.”

테온은 로렌을 따라 헌터게이트로 향했다. 그곳은 하수도와 부엌에


서 가까운데다 들판과 숲으로도 곧장 연결되어 있어, 사냥 행사 때마
다 이용되는 문이었다.

“여기는 누가 책임자였지?”

“드레난과 스킨트였습니다.”

드레난은 팔라를 강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만일 그 애들을 놓쳤다면 두 녀석 다 등가죽을 벗겨낼 거야, 맹세


코.”

그러자 블랙 로렌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랬다.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그들이 있어
야 할 자리에 없었다. 스킨트는 창자가 밖으로 다 빠진 채 해자에 둥
둥 떠 있었고, 드레난은 성문 초소에서 반쯤 벌거벗은 채 입이 양쪽
귀까지 찢어져 너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누더기가 된 튜닉이 등을 반
쯤 가리고 있었다. 초소에는 부츠와 반바지가 아수라장이 된 바닥을
굴러다녔고, 문가의 작은 탁자에는 치즈와 빈 포도주 병,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테온은 술잔 하나를 집어들어 코를 킁킁거렸다.

“스킨트는 성벽 위에 있었던 게 아니었나?”

“네, 그렇습니다.”

블랙 로렌의 대답이었다. 테온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잔을 난로로 내


던졌다. 블랙 로렌의 설명이 이어졌다.

“드레난이 여자를 겁탈하려고 바지를 내릴 때 여자가 치즈 칼로 찌른


것 같습니다. 저 해자에서 다른 바보도 곧 찾아낼 겁니다.”

다른 자는 드레난보다 더 흉측한 몰골이었다. 한 팔은 팔꿈치가 뒤로


꺾여 있고, 목은 반쯤 날아가 너덜너덜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
고 허벅다리가 몸에서 달랑거렸고, 창이 창자를 관통해 있었다. 악취
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다이어울프 짓이야, 둘 다.”

테온은 구역질이 나서 도개교로 발길을 옮겼다.

윈터펠은 두 개의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


로 넓은 해자가 흐르고 있었다. 성벽은 안쪽 것이 바깥쪽보다 5미터
가량 높았다. 테온은 인원이 부족해 바깥쪽은 포기하고 안쪽 성벽에
만 보초를 배치했었다.
‘그래도 해자 쪽엔 둘 이상을 배치해야 했어. 그렇게 했으면 드레난이
여자를 안고 즐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다이어울프를 쫓아냈을 텐
데…….’

후회가 막급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테온은 병사들에게 횃불을 가


져오게 한 뒤 성벽으로 올라갔다. 불빛이 그의 발 앞을 비추었다.

‘저기야. 두 성벽 사이에 있는 넓은 저 안쪽.’

테온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피가 보이지? 솜씨 없게도 치워 놨군. 여자는 드레난을 죽이고 도개


교를 내린 것 같다. 스킨트가 그 소리를 듣고 확인하러 왔다가 그런
일을 당했을 테지. 스킨트는 성벽 너머 해자에 버려져 다른 보초들에
게는 발견되지 않았던 거겠지.”

우르젠이 성벽 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다른 감시 탑들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저쪽 탑엔 횃불도 타고 있


는데…….”

“횃불은 있지만 보초는 없을 거다. 윈터펠에는 내가 거느린 병사들의


수보다 더 많은 감시 탑이 있어.”

10년을 산 곳이라 테온은 윈터펠을 잘 알았다.

“정문에도 넷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스킨트 가까이에도 순찰하는 보


초병이 다섯이나 있었구요.”

블랙 로렌의 의문에 우르젠도 얼른 거들었다.

“만일 그가 나팔을 불었다면…….”

‘이런, 내 밑엔 얼간이들뿐이로군.’
“우르젠, 네가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해 봐라. 여긴 어둡고 춥다. 보초
를 서는 내내 너는 빨리 교대 시간이 오기만을 바라겠지. 그런데 갑자
기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러더니 계단 꼭
대기에서 눈이 보이는 거야. 횃불에 반사되어 빨갛게 번쩍거리는 눈
이 말이야.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너를 향해 돌진해 오
지. 너는 그제야 창을 들지만 놈들은 이미 네 배를 갈라 버리지. 얇은
천을 찢듯이 북! 그러면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올 거고, 그 순간 다이
어울프 하나가 네 목을 확 물어뜯는 거야.”

테온의 손은 어느새 우르젠의 앙상한 목을 움켜잡고 힘을 주고 있었


다.

“자, 우르젠, 너는 지금 왜 나팔을 불지 않았지!”

테온은 씩 웃으며 우르젠을 거칠게 밀어 제쳤다. 우르젠이 비틀거리


며 10년 감수한 얼굴로 목을 쓰다듬었다.

‘성을 손에 넣은 날 그놈들을 모두 없앴어야만 했어. 죽였어야 했다


구. 그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인지 알면서…….’

테온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그놈들을 뒤쫓아야 합니다.”

블랙 로렌이 말했다.

“한밤중엔 안 돼.”

테온은 어두운 밤에 다이어울프들을 쫓고 싶지 않았다. 사냥꾼이 오


히려 사냥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까지 나는 나의 백성들에게 얘기해


줄 게 있어.”
안뜰로 가보니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벽에 붙어 모여 있었다. 대
부분 옷을 걸칠 시간이 없어서 담요를 두르고 있거나 망토나 잠옷만
입은 채였다. 열두 명의 병사가 한 손에는 횃불을, 또 한 손에는 무기
를 든 채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휙 불어오는 바람에 강철 투구와
덥수룩한 수염, 웃음기 없는 눈들이 불빛에 흐릿하게 반사됐다.

테온은 사람들 앞을 오가며 표정을 살폈다. 모두 범죄자처럼 보였다.

“몇 명이나 빠져 있나?”

“여섯입니다.”

리크가 뒤에서 걸어오며 대답했다. 그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


다. 그에게선 이제 비누 냄새가 풍겼다.

“스타크 가문의 두 소년과 늪지에서 온 오누이, 마구간의 얼간이와


그 여자입니다.”

‘오샤? 이럴 수가, 좀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그 계집도 아샤처럼


불가사의한 구석이 있었어. 게다가 이름까지도 비슷하잖아.’

“마구간을 들여다본 사람은 있나?”

“아가르가 말들은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댄서가 그대로 있단 말이냐?”

“댄서요?”

리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가르는 말이 모두 있다고 했습니다. 단지 그 얼간이만 빼고 말입


니다.”

‘그렇다면 걸어서 갔단 말이야?’


잠에서 깬 이후 들어 본 가장 좋은 소식이었다. 브랜은 틀림없이 바구
니에 담겨 호도르의 등에 업혀 가고 있을 것이다.

‘릭콘은 오샤가 업고 갔겠군. 그 애의 걸음으로는 따라가지 못할 테니


까.’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였다. 곧 그들을 다시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테온은 성 주민들을 한번 휙 둘러보았다.

“브랜과 릭콘이 도망갔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다. 음식도


없고 옷도, 무기도 없다.”

윈터펠에 있는 무기는 모두 거둬들였지만 분명 숨겨 놓은 게 몇 점 있


을 터였다.

“나는 그들을 도와 준 사람을 모두 알고 있다. 못 본 체했던 사람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테온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최소한의 실마


리라도 잡기 위해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날이 밝는 대로 그자들을 다시 데려올 사냥꾼이 필요하다. 겨울을


날 따뜻한 가죽이 필요한 사람 없나? 게이지, 자넨 어떤가?”

그 요리사는 테온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를 즐겁게 맞이


해 주었었다. 항상 식탁에 올릴 만한 것을 잡아왔는지 궁금해했는데
지금은 아무 말도 없었다.

“들판에는 불구자가 있을 곳이 없어. 그리고 알다시피 릭콘은 아주


어린아이다. 그 애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낸, 그
꼬마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지 생각해 봐라.”

그 나이든 할멈은 테온이 윈터펠에 있던 10년 동안 끊임없이 옛날 이


야기를 늘어놓으며 잔소리를 해온 사람이었다. 한데 지금은 낯선 사
람이라도 보듯 입을 딱 벌리고 서서 아무 말이 없었다.

“난 너희들을 모두 죽였어야 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병사들 전리품으


로 나눠 주고 말이야. 하지만 난 오히려 너희들을 보호해 줬다. 한데
이게 나에 대한 보답인가?”

조세스는 그의 말을 돌봐 주고, 파렌은 사냥개에 대해 가르쳐 주고,


양조장 주인의 아내인 바르뜨는 그가 처음으로 품은 여자였지만, 아
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

리크가 가까이 다가왔다. 리크의 두꺼운 입술이 횃불에 번쩍거렸다.

“살가죽을 벗겨 버리시지요.”

“루제 볼톤 경은 사람이 벌거벗으면 비밀을 숨길 수가 없다고 했지.


하지만 살가죽이 벗겨진 사람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살갗이 벗겨진 사람은 볼톤 가문의 문장이었다. 지난날 그들은 가문


의 비밀을 은폐하기 위해 죽은 적들의 살가죽을 실제로 벗겼었다. 그
러나 윈터펠에 무릎을 꿇은 이후 그 일을 중단했다.

“내가 윈터펠을 통치하는 한 북부에서 살가죽을 벗기는 일은 없을 것


이다.”

테온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들의 유일한 보호자야!’라고 소


리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뻔뻔하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몇몇은
그 말뜻을 알아들으리라 기대할 뿐이었다.
하늘이 성벽 너머로 희끄무레해지고 있었다. 새벽이 멀지 않았다.

“조세스, 스마일러에 안장을 얹고 네 말도 준비해라. 무르크, 가리스,


폭시팀도 나와 함께 간다.”

무르크와 가리스는 성안에서 가장 훌륭한 사냥꾼이었고, 폭시팀은


훌륭한 사수였다.

“아가르, 레드노즈, 겔마르, 리크, 웩스도 준비해라.”

탐색조의 뒤를 지킬 사람도 필요했다.

“파렌, 나는 나를 지켜 줄 사냥개가 필요하다. 네가 사냥개를 데리고


따라오도록.”

“나의 주인을 사냥하는데 내가 왜 당신을 보호해야 하는 겁니까?”

반백의 사냥개 사육사가 팔짱을 낀 채 항변했다. 테온은 그에게 가까


이 다가갔다.

“이제부터 내가 너의 진짜 주인이다. 그리고 난 너의 딸 팔라를 안전


하게 지킨 사람이기도 하지.”

파렌의 눈에서 반항의 빛이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뒤로 물러나면서 테온은 자신이 불렀던 사람들에게 흘낏 눈길을 주


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 호명했다.

“마에스터 루윈.”

“나는 사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난 내가 없는 동안 널 여기에 남겨두는 게 안심이
안 돼.’

“그럼 이제부터 배우도록 하시오.”

그때였다. 한 소년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전 늑대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입고 싶어요.”

소년은 브랜의 또래처럼 보였다. 테온은 한참 만에야 그 소년이 누군


지 기억했다.

“나는 전에도 여러 번 사냥에 참가했었어요. 붉은 사슴이나 엘크, 멧


돼지도요.”

왈더 프레이가 테온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테온은 의심스러운 눈


초리로 왈더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가도 좋다. 하지만 네가 우릴 따라오지 못한다 해도 너를


돌봐 줄 거라 기대하지는 말아라.”

그리고 테온은 블랙 로렌을 돌아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이곳은 자네에게 맡기겠다. 만일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네 맘대로 해도 좋아.”

‘이 친구라면 내가 성공하기를 바랄 거야.’

동이 트자 사냥에 참가할 사람들이 헌터게이트에 모였다. 공기가 차


서 입김에 서리가 맺혔다. 겔마르는 다이어울프를 멀리서 공격하기
위해 손잡이가 긴 롱액스를 준비했고, 아가르는 강철 갑옷을 입었고,
리크는 멧돼지 사냥용 창과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불룩한 부
대자루를 가져왔다. 테온은 활을 챙겨 나왔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
요하지 않았다. 활로 브랜의 생명을 구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서 열두 명의 남자와 열두 마리의 사냥개가 해자를 건넜다.
성벽을 나가자 부드러운 땅에 다이어울프의 발자국과 호도르의 큼직
한 발자국, 그리고 더 작은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나무 아래에 이르자 자갈과 낙엽 때문에 발자국을 알아보기 힘들어
졌다. 하지만 그때 파렌의 붉은 암캐가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나머지
개들이 그 뒤로 몰려들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으르렁거렸다. 그 뒤로
괴물 같은 맹견 한 쌍이 따라왔다. 그놈들의 거대한 몸집과 사나운 얼
굴이 궁지에 몰린 다이어울프들을 압도할 것이었다.

테온은 그들이 로드릭에게 갔으리라 추측했지만, 발자국은 북쪽 숲


으로 나 있었다. 그것은 딥우드모트로 이어진 길이었다. 테온은 그 사
실이 영 못마땅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아샤의 손으로 들어간다면, 그
러면 아주 씁쓸한 일이 벌어질 터였다.

‘녀석들을 잡는 대로 죽여야겠어. 어리석은 것보다 잔인한 쪽이 더 낫


겠지.’

나무들 사이에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었다. 보초나무와 소


나무는 갈수록 크고 두꺼워졌고, 주위는 점차 어두워졌다.

땅이 울퉁불퉁한데다 소나무의 바늘잎이 잔뜩 떨어져 있어 말의 걸


음이 불안정했다. 행군은 자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구의 소년과 네 살 난 꼬마를 데리고 도망가는 사람들보다
는 낫겠지.’

테온은 스스로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날이 저물기 전에 그들을 찾아


야 했다. 협곡을 따라 한참을 추적하고 있는데 루윈이 다가왔다.

“이런 식이라면 사냥이 아니라 승마를 하러 나온 것 같군요.”

“하지만 사냥은 승마와 달리 언제나 피로 끝을 맺게 되어 있소.”

“네? 무슨 말씀이죠? 설마 그렇게 하겠다는 얘긴 아니겠죠? 도망자


들이 어리석긴 했지만 자비를 베푸셔야 합니다. 그래도 한때 같이 지
낸 형제들 같은 사이가 아닙니까?”

“하긴 브랜과 릭콘은 죽이는 것보다 살려 두는 편이 더 가치가 있겠


지.”

“그건 리드 가문 남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사는 늪지 가장자


리에 모아트카일린이 있죠. 하울랜드 경은 마음먹기에 따라 왕자님
의 삼촌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들도 살려 두는 편이 이로
울 겁니다.”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테온은 한 번도 그 진흙탕에 사


는 종족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라가 처녀인지
궁금해했던 걸 제외하고는.

“자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될 수 있으면 그들도 살려 두도록 하


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호도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주시지요. 아시


다시피 그 아이는 지능이 떨어져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지요. 그 아
이가 예전에 왕자님의 말을 돌봐 주고, 안장을 닦아 주고, 갑옷을 들
고 열심히 뛰어다니던 일을 기억해 주세요.”
호도르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항하지만 않으면 그 아이도 살려 주지.”

테온이 갑자기 눈을 치켜 뜨고 손가락 하나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 여잔 안 돼! 그 야만인 여자에 대해서도 자비를 구한다면


자네도 함께 죽여 주겠어. 그 여자는 거짓 맹세로 나를 모욕했어.”

마에스터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저는 단지 자비를 베푸


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루윈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테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비라……. 잔인한 올가미로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약하고 여려.


그래서 나는 흉악해지기로 했지.’

그러나 루윈의 조언은 새겨들을 만했다. 아버지 발론은 정복하는 것


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테온은 군주가 자비를 보여 주지 않으면
민심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무력과 공포를 행사하는 것만으로
는 진정한 왕국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숲이 깊어지면서 점점 길이 험악해졌다. 어느새 보초나무와 소나무


는 사라지고 거대한 떡갈나무 길이 나왔다. 빽빽이 들어찬 나무 숲 사
이로 험한 골짜기들이 나타났다. 오두막을 지나고 은빛으로 반짝이
는 개울에 잠긴 돌산을 지났다. 개들이 갑자기 요란하게 짖어 댔다.
테온은 이제 곧 도망자들을 손안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말에 힘껏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사냥개들이 발견한 것은 동물의 시체일 뿐이
었다.

테온은 말에서 내려 죽은 동물을 좀더 자세히 살폈다. 시체는 아직 신


선했다. 다이어울프들의 짓이 분명했다. 개들이 흥분해서 시체 주위
를 맴돌며 킁킁거렸고, 맹견 한 마리가 시체의 엉덩이를 물어뜯었다
가 파렌에게 혼쭐이 났다.

‘다이어울프들이 좀 먹긴 했지만 그냥 놔두고 갔어.’

불을 지필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더라도, 오샤라면 이 소중한 식량을


그냥 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파렌, 우리가 제대로 추적하고 있다고 확신하나? 우리가 지금 다른


늑대를 추적하는 게 아닐까?”

“이 개들은 서머와 새기독의 냄새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그러길 바래.”

한 시간이 채 못 돼 산기슭에서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 발자


국은 비로 물이 불어난 시내로 이어졌고, 그곳에서 개들은 냄새를 잃
어버렸다. 파렌과 웩스가 맹견을 이끌고 물을 건너갔지만 아무 소득
도 없이 한참만에 고개를 저으며 되돌아왔다. 그 동안 다른 개들은 둑
이쪽저쪽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건 분명합니다, 왕자님. 하지만 어디로 사라졌


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군요.”

파렌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테온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구부리고 손을 물에 담갔다. 물이 아주 차


가웠다.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겠군. 파렌, 개들을 반쯤 데리고 시내 하


류로 가라. 나는 위쪽으로 올라갈 테…….”

그때 웩스가 테온의 손을 탁 쳤다.

“뭐지?”
웩스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물가에 질퍽거리는 발자국이 보였다.

“발자국이군.”

웩스가 발에 힘을 주고 진흙을 꾹꾹 눌러 댔다. 그러자 땅에 깊은 홈


이 파였다.

조세스가 그 행동의 뜻을 알아차렸다.

“호도르 정도의 체구라면 이곳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어야 합니다. 게


다가 등에 소년까지 업었으니 발자국이 아주 깊이 파였어야 하는데,
이곳에 있는 발자국은 우리 것뿐입니다. 잘 보세요.”

테온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다이어울프와 그 일행은


시냇가에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오샤는 우리 뒤편으로 돌아간 게 분명합니다. 동물 시체를 발견하기


전에요. 그리고 다이어울프만 앞으로 보낸 거예요. 우리가 그놈들을
뒤쫓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테온은 조제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나를 농간한 것이라면…….”

가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왕자님, 우리가 추적해 온 흔적은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늑대들은


절대 주인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절대로.”

맞는 말이었다. 서머와 새기독은 사냥을 나섰다가도 언제나 금방 브


랜과 릭콘에게로 돌아왔었다.

“파렌, 가리스, 무르크, 너희들은 사냥개 네 마리를 데리고 우리가 왔


던 곳을 되짚어가 보도록 해라. 그리고 에가르, 넌 저들이 나를 배반
하지 못하도록 감시해라. 난 파렌과 함께 늑대들을 따라갈 거다. 만약
에 발자국을 발견하면 나팔을 한 번 불고, 늑대를 찾으면 두 번 불도
록 해라. 늑대들은 우리를 그들의 주인에게 인도할 거다.”

테온은 웩스와 왈더 프레이, 레드노즈를 데리고 시내 위쪽으로 올라


갔다. 레드노즈와 왈더가 맹견을 이끌고 테온과 웩스의 맞은편으로
찾아 나섰다.

테온은 발자국말고 늑대들이 남겨 놓았을 다른 흔적, 가령 냄새라든


가 부러진 가지 같은 것으로도 눈을 돌렸다. 사슴이나 엘크, 오소리
같은 동물의 발자국은 쉽게 눈에 띄었다. 웩스는 시냇가에서 물을 마
시고 있는 여우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꼬마
왈더는 덤불에서 토끼를 세 마리 찾아내 한 마리를 화살로 잡기도 했
다. 곰이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낸 자국도 발견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늑대의 발자국은 없었다.

‘조금만 더 멀리 가보자. 저 떡갈나무를 지나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


거야.’

테온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돌아갈 길이 멀어졌다는 생각과 뱃속


을 갉는 듯한 불안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다이어울프 찾기를 포기
하고 말머리를 돌렸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오샤와 호도르 일행은 이미 꽤 멀리까지 달아난 것 같았다.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불구 소년과 어린애를 업고서 말이다.

‘혹시 마을로 간 게 아닐까?’

북부인들은 에다드의 아들이자 롭의 형제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었


다. 음식을 내주고 도망할 수 있도록 돕고, 어쩌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뭉쳤을 수도 있었다. 북쪽인들은 모두 그들 주변으로 모일
것이 틀림없었다.

‘다이어울프들은 틀림없이 시내 하류로 내려갔을 거야. 그 녀석들이


물에서 나온 곳만 찾으면, 그 다음부터는 사냥개들이 냄새로 따라갈
수 있어.’

테온은 산을 내려오는 내내 마지막 희망에 매달렸다. 하지만 파렌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모든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저 개들은 곰의 미끼로나 써야겠군. 곰을 한 마리 갖고 싶었는데 잘


됐군.”

테온은 화가 나서 비아냥거렸다.

“이 개들한테는 잘못이 없습니다. 물에서는 냄새가 남질 않잖습니


까.”

파렌이 개들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늑대들은 시냇물을 건너 어디론가 갔을 겁니다.”

“그랬겠지. 추적하면 언젠가는 발견하겠지만, 언제? 대체 어디 가서


그것들을 찾아내지?”

그 동안 조용했던 리크가 입을 열었다.

“전 늑대가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물 속을 걸어다닌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늑대
도 그럴까요?”

하지만 그 다이어울프들은 일반 늑대와 달랐다.

‘망할 것들, 잡기만 해봐라. 가죽을 벗겨 버릴 테다.’

테온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왔던 길을 다시 추적했다. 그들이


거쳐 온 길에 브랜 일행이 다이어울프와 헤어진 지점이 있을 게 분명
했다. 사냥개들은 나무와 바위 사이를 킁킁거리며 서로 신경질적으
로 짖어 댔다.
테온은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다시 아까 그 시냇물로 돌아간다. 다시 샅샅이 뒤져라. 이번에는 최


대한 멀리까지 가겠다.”

“아마 못 찾을 겁니다. 개구리를 잡아먹는 그 족속들과 함께 있는 한


은요. 그들은 비열한 야만인이라 숨어서 독화살을 날릴지도 몰라요.
우리는 놈들을 못 보지만 놈들은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
요.”

꼬마 왈더가 불쑥 그렇게 말하더니 신경질적으로 사방의 숲을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말을 엿듣고 있을지 몰라요.”

그 말에 파렌이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그들이 이 근처에 있다면 개들이 벌써 냄새를 맡았을 겁니다.”

“하지만 늪지에 사는 머드맨은 사람처럼 냄새를 풍기지 않아요. 악취


나는 구정물과 개구리, 나무를 너무 좋아해서 몸에 털 대신 이끼가 자
란대요. 게다가 진흙과 물만 먹고도 살 수 있고요.”

테온이 철부지 소년에게 그게 얼마나 어린애 같은 생각인지 말하려


고 하는데 갑자기 루윈이 소리를 높였다.

“여명기의 ‘숲의 아이들’의 족장들, 그러니까 그린시어들은 해머를


해협 너머에서 넥으로 가져오려 할 때 크랜노그맨과 친해졌다고 합
니다. 어쩌면 그들은 숲에서 몸을 숨기는 비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
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숲이 어두워지는 듯했다. 어


리석은 소년이 바보 같은 말을 지껄이는 것은 봐줄 수 있다고 해도 마
에스터라면 좀더 현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테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나는 오직 브랜과 릭콘에게만 관심이 있소. 자, 이제 시내로 돌아간


다.”

사람들은 내키지 않은 듯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뚱한 표정을 짓고


발걸음을 옮겼다. 꼬마 왈더는 토끼를 잡을 때처럼 깡충깡충 앞으로
뛰어 나갔다.

테온은 사람들을 두 팀으로 나눠 시내 양쪽으로 배치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땅 위를 살피게 했다. 길이 울퉁불퉁할 때나, 곰의
미끼로나 쓸 법한 사냥개들에게 떨기나무 밑을 살피게 할 때에는 말
에서 내리기도 했다.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곳
에서는 좀더 면밀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다이어울프들은 발자국
은커녕 냄새조차 남기지 않았다. 헤엄을 쳐서 이동한 게 틀림없었다.

‘잡기만 해봐라. 죽을 때까지 헤엄치게 만들어 줄 테니. 그 다음에는


드라운드 가드에게나 던져 줘야지.’

숲이 어둑해졌다. 테온은 이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


다. 크랜노그맨이 ‘숲의 아이들’의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샤가
뭔가 속임수를 썼다든지…….

점차 어둠이 내려오자 더 이상 테온에게 시달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


지, 조세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왕자님. 이러다가는 말들도 발을 헛


디뎌 다리가 부러질지 모릅니다.”

루윈도 얼른 동조했다.
“조세스의 말이 맞습니다. 게다가 횃불을 들고 숲을 뒤진다고 찾을
것 같지도 않고…….”

테온은 입맛이 썼다. 뱃속에서 뱀 두 마리가 서로 물어뜯고 있는 기분


이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북부인들의 비웃음을 살 건 뻔했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샤가 이 일을 알게 되면…….’

그때 리크가 말을 몰고 테온 가까이 다가왔다.

“왕자님, 스타크 소년들은 이 길로 온 것 같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그들이었다면 북동쪽으로 갔을 겁니다. 움버 가문에게로요. 거리가
멀어 중간에 분명 쉬었다 갈 겁니다. 그 장소가 어디일지 짐작 가는
데가 있습니다.”

테온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래, 그곳이 어디지?”

“왕자님도 아실 겁니다. 에이컨워터에 있는 낡은 방앗간 말입니다.


제가 윈터펠이 잡혀 올 때 거기에 들렀었는데, 방앗간 마누라가 말에
게 먹일 건초를 팔더군요. 스타크 소년들도 분명 그곳에서 지친 몸을
쉬어 갈 겁니다.”

테온도 그 방앗간을 잘 알았다. 예전에 그 방앗간 마누라와 한두 번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

“왜 하필 그곳이지? 가까운 곳에 인가도 많잖아?”

리크의 창백한 두 눈에 장난기가 스쳤다.

“왜냐구요? 글쎄요. 어쨌든 놈들은 그곳에 있을 겁니다. 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간사한 자식. 입술이 벌레 같아.’


테온은 짜증이 일었다.

“내 질문에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마. 만일 뭔가 숨기고


있다면…….”

“왕자님.”

리크가 말에서 내리더니 테온에게도 내려오라는 신호를 했다. 테온


이 땅에 내려서자 리크가 윈터펠에서 가져온 자루를 열어 보였다.

“여길 좀 보십시오.”

어두워서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테온은 손을 자루 속으로 집어


넣어 안을 더듬었다. 날카로운 바늘이 손을 찌르면서 차갑고 딱딱한
물건이 손에 잡혔다. 그것은 은과 흑옥으로 만든 늑대머리 장식 핀이
었다. 마침내 모든 게 확연해졌다.

테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겔마르, 아가르, 레드노즈, 나와 함께 가자. 나머지는 사냥개들을 이


끌고 윈터펠로 돌아가라. 이제 더 이상 사냥개는 필요 없다. 브랜과
릭콘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았으니까.”

“테온 왕자님.”

루윈이 황급히 그를 불렀다.

“왕자님께서 약속한 것을 기억하시죠? 분명 자비를 베푼다고 하셨습


니다.”

“자비는 오늘 아침에나 베풀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자식들이 나를 화


나게 하기 전에 말이야.”


그들은 산 맞은편 어두운 밤하늘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을 보았
다. 별보다 더 밝게 빛나면서, 가끔씩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긴 했지
만 그렇게 강렬한 불빛은 아니었다.

‘여기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구나. 높이가 6, 7백 미터


쯤 되려나?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군.’

존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스컬링패스에 감시꾼들이 있군. 만스 레이더는 뭘 두려워하는 걸


까?”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내가 말을 꺼냈다. 젊은 시절에 왕의 종자


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스콰이어 달브리지’라고 불렀다.

“저 녀석들이 불을 피운 사실을 알면 만스 레이더가 가죽을 벗길지도


몰라.”

키가 작고 머리가 반질반질하게 벗겨졌지만 온몸이 돌멩이처럼 딴딴


한 에벤이 말했다.

“산에서는 불이 생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불러들이는 위험


물이기도 하지.”

코린 하프핸드의 이런 생각 때문에 그들은 산을 오른 이후 한 번도 불


을 피우지 못한 터였다. 따라서 언제나 차가운 고기와 딱딱한 빵과 단
단한 치즈로 배를 채워야 했고, 밤에도 외투와 털옷을 두껍게 깔고 서
로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자야 했다. 그럴 때면 존은
윈터펠에서 보냈던 추운 밤을 떠올렸다. 너무 추워서 형제들과 한 침
대에서 꼭 끌어안고 자곤 했던 추운 밤……. 지금은 흙을 침대 삼아
누웠지만, 이들도 역시 그의 형제였다.

“저들은 호른을 갖고 있을 겁니다.”


스톤스네이크의 말에 코린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절대 불지는 않을 거다.”

“밤에는 정말 힘든 산행이 될 것 같습니다.”

에벤이 바위틈으로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은 구


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산들은 검은 형체를 띠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
었다. 봉우리마다 눈이 녹지 않고 쌓여서 달빛에 하얗게 빛났다.

“꽤 높은 폭포구만. 두 사람이면 되겠다. 저 위에도 망을 보는 사람이


둘 정도일 거야.”

코린 하프핸드의 말에 일행 중 가장 산을 잘 타는 스톤스네이크가 자
진하고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는 나서지 않아도 지목될 사람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존이었다.

코린이 존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로 계곡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조랑말 한 마리가 그 소리에 놀라 앞발을 치켜들
었다.

“네 늑대는 우리와 함께 남는다. 너무 하얘서 눈에 띌 염려가 있어.


그리고 스톤스테이크, 일이 잘 끝나면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떨어뜨
리게. 그럼 우리가 올라가지.”

스톤스네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존과 스톤스네이크는 각각 기다란 로프를 몸에 감았다. 스톤스네이
크가 커다란 쇠못이 든 가방과, 펠트로 머리 쪽을 감싸 놓은 작은 망
치를 들었다. 뒤에 남은 그들의 조랑말 위에 투구와 갑옷이 실려 있
고, 그 옆에 고스트가 서 있었다. 존은 출발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앉
아 다이어울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 가만히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스톤스네이크가 앞서 나갔다. 50이 다 된 나이에 수염도 희끗희끗했


지만, 그는 보기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존이 이제껏 보았던 사
람 중에 가장 밤눈이 밝은 사람이었다. 이곳에서는 앞을 잘 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깊은 산 속에서는 해가 지고 나면 짙은 어둠만 남
았다. 그나마 눈 쌓인 산봉우리만 달빛에 비쳐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검은 바위를 지나 깎아지른 듯한 비탈을 올랐다. 갑옷을 벗


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지만 산행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괜히 서
둘렀다가는 발목이 부러지거나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
다. 스톤스네이크는 본능적으로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 아는 듯
했지만, 그렇지 못한 존은 조심조심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스컬링패스에는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절벽이 많았다. 바람에 깎이


고 깎인 뾰족한 봉우리는 얼음에 덮여 솟아 있었고, 아래는 햇빛도 들
지 않는 까마득한 계곡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스톤스네이크를 따라가는 존도 이제는 밑에 있던 사람들이 전혀 보
이지 않을 만큼 높이 올라와 있었다.

프로스트팽스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최


악의 곳이었다. 바람은 살갗을 베어 버릴 것처럼 날카로웠고, 소리 또
한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의 통곡소리처럼 처량하고 섬뜩했
다.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성장을 멈춰 버린 나무들도 눈에 많이 띄
었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나온 나무들은 모습이 모두 기괴했다. 곳곳
에 굴러 떨어진 바위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어 멀리서 보면 꼭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짐승 같았다.

존은 코린을 따라온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세상은 그에게


색다른 기쁨을 선사했다.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위에서 얼어붙은
폭포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며, 초원에 흐드러지
게 피어 있는 야생화를 감상하는 일은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었다.
까마득해서 지옥까지 뚫려 있을 것만 같은 계곡을 내려다본 적도 있
었다. 절벽 위에 둥지를 틀고 있다가 먹이를 찾아 계곡 아래로 떨어질
듯 날아갔다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을 선회하는, 하늘과 하
나가 된 것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독수리도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당장 덤벼들 자세로 산양에게 접근하는 섀도캐츠도 보았다.

‘지금은 우리가 덤벼들 차례구나.’

존은 그때 보았던 섀도캐츠처럼 자신도 조용하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해치우길 바랐다. 롱클로우를 등에 메고 있었지만, 그걸 휘두르기에
는 장소가 너무 비좁았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단검도 준비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들도 무기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조금 뒤면 누가 섀도캐츠이고, 누가 양인지 밝혀지겠지.’

스톤스네이크와 존이 절벽을 따라서 뱀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오른


지도 한참이 지났다. 간혹 지형이 푹 내려앉은 곳이 있어 잠시 불빛을
놓친 적도 있었지만, 불빛은 항상 다시 나타나곤 했다.

스톤스네이크가 선택한 길은 워낙에 좁고 가팔라, 그를 따라가려면


차가운 절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게처럼 옆으로 조심조심 나아가야
만 했다. 길이 조금 넓어지는 곳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다리 하나가 푹 빠질 만큼 커다란 웅덩이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발한발 천천히’를 연신 중얼거리며 존은 조심조
심 몸을 움직였다.
‘한발한발 천천히, 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

‘퍼스트맨의 주먹’을 떠나온 이후 면도를 하지 못해 덥수룩하게 자란


존의 수염은 서리가 끼어 뻣뻣해져 있었다. 산을 오른 지 두 시간이
넘으면서 존은 극도로 힘이 빠졌다. 갑자기 강풍이 몰아쳤지만, 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필사적으로 바위에 매달려 제발 떨어지지 않
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한발한발 천천히. 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

존은 바람이 약해지자 다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밑으로


는 입을 크게 벌린 암흑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위로는
오직 달과 별뿐이었다.

“산이 네 어머니야. 어머니한테 매달려 젖을 빤다는 생각으로 얼굴을


파묻어 봐. 그러면 어머니는 절대로 널 밀어내지 않을 거야.”

길이 한결 수월해지자 스톤스네이크가 입을 열었다.

“이제껏 어머니가 누군지 정말 궁금했는데 이제야 찾겠군요.”

존은 그렇게 농담을 했지만 프로스트팽스 같은 곳에서 어머니를 찾


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한발한발 천천히’를 되뇌며 바위를 꼭 붙잡고 걸음을 옮기는데,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어졌다. 달빛
은 밝았지만, 바위 밑은 칠흑같이 어두워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바위 위로 올라가야겠군. 저 위로 돌아서 가야겠어.”


스톤스네이크가 장갑을 벗어 벨트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로프의 한
쪽 끝을 자기 허리에 묶고 다른 쪽 끝은 존의 허리에 둘러 주었다.

“로프가 팽팽해지면 따라오도록 해.”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출발했다. 아무 장비도 없이 절벽을 타


는 속도는 존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긴 로프가 천천히 풀려 나
갔다. 존은 바위에 바싹 붙어 서서 스톤스네이크가 발을 어디에 딛고,
손은 어디를 짚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어느새 감겨 있던 로프가 다 풀
렸다.

로프가 팽팽해지자 스톤스네이크가 멈춰 서서 바위틈에 대못을 끼우


고 로프를 감아 놓았다. 존은 장갑을 벗고 천천히 바위를 올랐다. 존
이 도착하자 그가 다시 못을 뽑아들고 출발했다.

로프는 곧 팽팽해졌지만, 이번에는 못을 끼울 만한 틈새가 보이지 않


았다. 스톤스네이크는 망치를 꺼내 바위에 대못을 대고 몇 차례 두드
렸다. 망치를 펠트로 감아 최대한 가볍게 두드렸는데도, 소리는 우레
와 같이 울려 퍼졌다. 와이들링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로프는 다시 대못에 감겼고, 존도 다시 바위를 기어올라갔다.

‘산의 품에 안겨 젖을 빨라고 했지. 절대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발


에 체중을 싣자. 내려다보지 말자. 바위만 쳐다보는 거야. 꽉 잡고, 좋
아. 내려다보지 말자. 저기까지만 가면 숨을 돌릴 수 있어. 저기까지
만 가면 돼. 절대로 내려다보지 말자.’

한발한발 조심스레 내딛던 발이 갑자기 죽 미끄러졌다. 존은 순간 숨


이 턱 막혔다. 하늘의 도움으로 발 디딜 곳을 바로 찾았지만, 순간 간
이 콩알만해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위의 냉기가 손가락
을 파고 들어와 괴로웠지만 장갑을 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여기서 미
끄러졌다가는 끝장이었다.
화상을 입었던 손이 점점 굳어지더니 쑤시고 아파 왔다. 엄지손톱이
바위에 찢겨 피가 났다. 존은 다시 용기를 내어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
다. 손을 짚는 곳마다 핏자국이 남았다. 제발 손가락이 온전하기를 바
라며 존은 오르고 또 올랐다.

바위 위로 드리워진 희미한 달빛에 검은 그림자 둘이 산을 오르고 있


었다. 형제들은 아래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지만, 위
에 있는 와이들링은 심한 경사 때문에 보지 못할 것이었다. 가까이에
와이들링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순간 존은 다른 생각을
했다.

‘브랜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는데……. 브랜의 재주가 10분


의 1이라도 내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톤스테이크가 얼어서 3분의 2 이상이 갈라진 바위에 올라서서 존


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존이 무사히 바위에 오르자 다시 장갑을 꼈
고, 존도 그렇게 했다. 두 사람은 불빛을 찾아 천천히 기어갔다. 와이
들링이 가까이에 있었다.

와이들링들은 바람을 막을 바위더미와 경사가 심한 절벽 사이에서


모닥불을 밝혀 놓고 있었다. 바위더미 덕에 존과 스톤스네이크는 바
로 눈앞까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와이들링 하나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가죽깔개를 머리까지 덮어쓰


고 잠들어 있었다. 가죽깔개 아래로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빨간 머리
칼이 보였다. 그리고 바람에 불길이 약해지는 걸 불평하며 모닥불 앞
에 붙어 앉아 장작을 집어넣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말고 또 한 사
내, 그는 보이는 거라고는 눈 덮인 산과 어둠밖에 없는 고갯길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자 손에 호른이 들려 있었다.

모두 셋이었다. 하지만 존은 잠시 망설였다.

‘잠든 사람 빼고 두 명이라고 봐야 하나?’


둘이든 셋이든 아니면 스물이든 이제 운명의 순간이었다.

스톤스네이크가 말없이 존의 팔을 툭 치고는 고갯짓으로 호른을 든


사내를 가리켰다. 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가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
았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바로 이 순간
을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훈련을 받았던가.

‘롭도 처음 전투에 나갔을 때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스톤스네이크가 재빨리 움직여 와이들


링을 덮쳤고, 존도 롱클로우를 뽑으면서 뒤따라갔다.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존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검보다 호른부터 먼저


집어든 사내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가 호른을 입에 무는 순간 스톤스
네이크가 단검을 날려 호른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와이들링은 존이 달려오자 얼른 불타는 나뭇가지를 발로 찼다.

뜨거운 열기에 잠시 주춤하던 존은 자고 있던 와이들링이 몸을 움찔


하는 것을 감지했다. 빨리 끝내지 않으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조
급함에, 불을 휘두르는 와이들링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롱클로우가
가죽옷을 뚫고 살을 그대로 꿰뚫었다. 하지만 와이들링이 쓰러지면
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비트는 바람에, 존은 그만 롱클로우를 놓치고
말았다. 자고 있던 자가 어느새 일어나 앉은 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단검을 꺼내 새빨간 머리채를 낚아채면서 턱 밑에다가 칼날


을 갖다 대던 존은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여자잖아!”

“감시꾼일 뿐이야. 그리고 와이들링이고. 끝내 버려.”

스톤스네이크가 당황해하는 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존은 여자의 눈에 공포와 함께 분노의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단검
끝에 눌린 하얀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이면 끝난다.’

존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짝 붙어 있어 숨결에 묻어 나오


는 양파 냄새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랑 비슷한 나이겠구나.’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그 여자는 아리아를 생각나게 했


다.

“항복할 텐가?”

존은 단검을 약간 비틀며 물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어쩌지?’

“항복해요.”

여자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너는 우리 포로다.”

존이 머리채를 놓아주자 여자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저 여자는 창잡이야.”

스톤스네이크가 가죽깔개 옆에 세워져 있는 창을 가리켰다.

“네가 머리채를 낚아챘을 때 창을 잡으려 했어. 기회만 생기면 저 여


자는 창으로 네 머리통을 꿰뚫어 버릴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기회가 없을 테니까.”


존은 여자의 손이 닿지 않도록 창을 저쪽으로 걷어차 버렸다.

“이름이 뭐지?”

“이그리트.”

여자가 목 언저리를 문지르다가 손에 피가 묻어나자 피 묻은 손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존은 단검을 칼집에 넣고 시체의 몸에서 롱클로우를 잡아 뽑았다.

“너는 내 포로야, 이그리트.”

“전 이름을 알려 드렸는데요.”

“난 존 스노우야.”

여자가 움찔했다.

“그건 악마의 이름이에요.”

“서자의 이름이지. 윈터펠의 에다드 스타크 경이 나의 아버지야.”

여자가 조심스럽게 존을 쳐다보는 걸 보고, 스톤스네이크가 낄낄거


리며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존, 포로에게서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저


여자도 쉽게 말할 것 같지는 않군. 와이들링들은 심문을 당하면 혀를
깨물어 버리지.”

그는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절벽으로 가더니 아래로 던졌다. 나뭇가


지가 빙글빙글 돌며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체는 태워 버려야 해요.”


이그리트가 굳을 얼굴로 말했다.

“불길이 일면 눈에 띄기 쉬워.”

스톤스네이크가 돌아서서 멀리 어둠 속에서 조그맣게 빛나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에 와이들링이 많이 있겠지, 안 그래?”

하지만 여자는 완강했다.

“시체를 태워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과 다시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던 죽은 오도르의 검은 손을 기억했다.

“여자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다른 방법이 있어.”

스톤스네이크가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외투와 부츠, 벨트 등을 모


두 벗기더니 시체를 들쳐업고 낭떠러지로 갔다. 그러고는 툴툴거리
며 힘겹게 시체를 집어 던졌다. 잠시 후 철퍼덕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존은 스톤스네이크를 도와 두 번째 시체를 어둠 속으로 던졌다.

이그리트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그리트는 존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스무 살


은 됐음직했지만, 키는 나이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다리는 안짱다리
이고, 얼굴은 둥그렇고, 코는 들창코였으며, 손은 아주 작았다. 숱 많
은 빨간 머리칼은 푸석푸석해서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쭈그리고 앉
은 모습이 무척 뚱뚱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두툼하게 껴입은 가죽
과 털옷 때문이지, 실제로는 아리아만큼 말랐을 것 같았다.

“우리를 감시하려고 온 건가?”


존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요.”

스톤스네이크가 불가에 서서 손을 쬐었다. 존은 그를 흘낏 보며 다시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자유민들.”

“와이들링은 수가 얼마나 되지?”

“수백? 수천? 당신이 상상도 못 할 정도죠.”

여자는 웃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이는 들쭉날쭉했지만 무척 희었


다.

‘이 여자도 제대로 모르고 있군.’

“왜 여기로 모이지?”

그 질문에는 이그리트가 입을 다물었다. 존은 계속 물었다.

“당신의 왕이 프로스트팽스에서 원하는 게 도대체 뭐지? 여기는 사


람이 살 수가 없어. 먹을 게 하나도 없다구.”

이번에는 여자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곧 월로 진격할 건가? 그게 언제지?”

여자는 귀머거리처럼 모닥불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혹시 벤젠 스타크에 대해 들어봤나?”


이그리트가 여전히 못 들은 척하자, 그 동안 지켜보고만 있던 스톤스
네이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여자가 혀를 깨물어 버리면 나더러 경고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


지 말게.”

그때 바위를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섀도캐


츠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존이 일어서려는데 또 한 마리가 나타났
다. 존은 검을 뽑아들고 귀를 기울였다.

“우릴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시체만 찾아다니는 녀석들이니까. 녀석


들은 10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피 냄새를 맡죠. 뼈에 살점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시체 옆을 떠나지 않아요. 그리고 살점을 다
먹어치우면 골수를 파먹기 위해 뼈도 부숴 버리죠.”

이그리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섀도캐츠들이 고기를 뜯어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은 그 소리를 듣


자 왠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불가에 있어 금세 몸이 나른해지고 피로
가 몰려왔다. 하지만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 되었다. 포로가 있었고,
그 포로를 감시하는 건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혹시 가까운 사이였나? 우리가 죽인 자들 말이야.”

존은 여자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만큼이나요.”

“나만큼? 그게 무슨 뜻이지?”

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윈터펠 영주의 서자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어머니는 누구죠?”

“여자였겠지. 대부분이 그렇잖아.”

언젠가 누군가 그렇게 얘기해 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였


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여자가 다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 어머니는 당신에게 ‘겨울 장미’를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았겠군요?”

“나는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런 노래는 더군다나 몰라.”

“바엘이란 음유시인이 만든 노래죠. 바엘은 오래 전 이곳의 왕이기도


했죠. 자유민들은 모두 그 노래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있는
남부에서는 부르지 않나 보군요.”

“윈터펠은 남부가 아니야.”

존은 즉각 대꾸했다.

“아, 그렇죠. 하지만 우리한테 월 아래는 모두 남부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군.”

“맞아요. 항상 그렇죠.”

코린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 동안 이그리트의 얘기라도 들어야 졸


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노래에 대해 얘기해 봐.”


존은 강요하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요.”

“그래도 듣겠어.”

“용감하시군요.”

여자가 할 수 없다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엘은 자유민의 왕이 되기 전에 이곳에서 유명한 레이더였죠.”

“살인자에 강도에 강간범이었다는 얘기로군.”

스톤스네이크가 코방귀를 뀌며 끼여들었다.

“당신도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군요.”

이그리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윈터펠의 왕이었던 브랜든 스타크는 바엘이 킹스랜딩에 위협이 된


다고 생각하고 그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어요. 하지만 그를 잡기
가 그리 쉽지 않았죠. 그는 바엘을 잡는 데 계속 실패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바엘을 ‘약자들만 골라서 괴롭히는 겁쟁이’라고 비난했
죠. 바엘은 그 말에 발끈해서 브랜든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고 다
짐하고, 어느 겨울날 밤 월을 넘어 윈터펠로 갔죠. 스카고스의 시게릭
이라 불리는 하프를 들고 말이죠. 시게릭은 ‘사기꾼’이라는 뜻의 고어
인데, 거인족들은 아직도 그 말을 쓰고 있죠. 음유시인들은 어딜 가나
환영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바엘은 브랜든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
도 하고 어두워질 때까지 함께 흥겹게 놀 수 있었죠. 바엘은 그 자리
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도 선보였는데, 노래가 끝나자 브랜든이
상을 내리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바엘이 대답했죠. ‘바라는 건 꽃밖에
없습니다. 윈터펠의 정원에 피어 있는 꽃이면 아무거나 좋습니다.’라
고요. 그런데 그때 꽃을 피운 건 겨울 장미밖에 없었지요. 진기하고
아름다운 꽃이었죠. 브랜든은 자신의 정원에 피어 있는 겨울 장미 중
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꽃을 꺾어 그에게 주라고 명령했어요. 그리
고 파티는 끝났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음유시인은 사라지고…… 브
랜든의 딸도 보이지 않았죠. 텅 빈 그녀의 침대에는 바엘이 놓고 간,
창백하리만큼 파란 겨울 장미가 놓여 있었어요.”

존은 이제껏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말한 브랜든은 누구를 말하는 거지? ‘빌더’ 브랜든은 영웅시대


에 살았으니 바엘보다 수천 년 전 사람일 테고, ‘선장’ 브랜든과 ‘불지
르는’ 브랜든도 있지만…….”

“내가 말한 사람은 ‘딸이 없는’ 브랜든이에요. 이 얘기를 처음 듣나


요?”

이그리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존은 매서운 눈초리로 이야기를


계속하란 말만 했다.

“브랜든에게는 다른 자식이 없었어요. 검은 형제들을 시켜 온 성을


샅샅이 뒤졌지만, 바엘과 그의 딸이 남긴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
죠.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브랜든은 실의에 빠져 몸져눕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스타크 가문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밤,
브랜든이 죽을 때만 기다리며 병석에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아기 울
음소리가 들려왔어요. 딸의 방이었죠. 당장 달려가 봤더니, 딸이 아기
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거예요.”

“바엘이 데려다 놓은 건가?”

“아뇨, 그들은 계속 윈터펠에 있었어요. 성 아래쪽에 시체들을 쌓아


놓는 곳에 숨어서 살았던 거죠. 노래에는 브랜든의 딸이 바엘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나와 있어요. 사실이 어떤지는 모르
지만, 바엘은 항상 모든 처녀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노래했죠. 어쨌
든 분명한 건 바엘이 ‘허락받지 않고 가져간 장미’의 대가로 아이를
남겨 두고 갔다는 거죠. 소년은 자라서 스타크 가문의 대를 이었죠.
그러니 당신한테도 바엘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구요.”

“그럴 리가 없어.”

존의 항변에 이그리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어쨌든 난 그 노래가 좋아요. 어렸


을 때 어머니가 불러 주셨는데, 우리 어머니도 당신 어머니처럼 여자
였죠.”

이그리트가 단검에 찔린 목의 상처를 문질렀다.

“노래는 거기서 끝나지만 아직 비극적인 결말이 남아 있어요. 그로부


터 30년 후, 자유민들의 왕이 된 바엘은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죠. 그때 프로즌포드에서 바엘을 맞은 사람은 바로 그 젊은 스
타크였어요. 바엘은 아들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않은 채 아들의 칼에
전사했죠.”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군.”

“그래요. 하지만 신들은 그 패륜아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아


버지인 줄 모르고 저지른 일이지만, 그건 천륜을 저버린 행위였으니
까요. 젊은 스타크는 바엘의 머리를 창대에 꽂아 개선했고, 그걸 본
그의 어머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탑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
을 끊었죠. 아들도 바로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는 운명을 맞았지요. 그
의 부하가 그를 죽이고 가죽을 벗겨 망토로 삼았거든요.”

“바엘은 거짓말쟁이야!”

존은 확언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그건 듣는 사람마다 다른 거예요. 어쨌든 당신이 얘기해


달라고 해서 난 말한 것뿐이에요.”
이그리트가 화난 듯 홱 돌아앉더니 눈을 감아 버렸다.

코린은 새벽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스톤스네이크가 내려가 동료들을


확인했을 때는 까맣던 바위들이 회색을 띠면서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존은 포로를 깨워 팔짱을 단단히 낀 다음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북쪽과 서쪽 길은 밤에 올라왔던 길보다 훨씬 완만
했다.

잠시 후에 검은 형제들이 조랑말을 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고스트가


존의 냄새를 맡고 제일 먼저 달려나왔다. 존은 무릎을 꿇고 앉아 고스
트의 앞발을 잡고 앞뒤로 밀고 당겼다. 그건 존과 고스트만의 놀이였
다.

이그리트가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둘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코린은 포로로 잡혀 있는 와이들링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


다.

“모두 세 명이었습니다.”

스톤스네이크의 보고는 그게 전부였다.

“시체 두 구를 지나쳐 왔어. 모두 섀도캐츠의 밥이 되어 있더군.”

에벤은 그렇게 말하며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이그리트를 쳐다보았


다. 존은 뭔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항복했어요.”

“내가 누군지 아나?”

코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그리트를 바라보았다. 겁먹은 소녀처럼


존의 옆에 딱 붙어 있던 이그리트가 코린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
었다.

“코린 하프핸드.”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내가 만약에 너희한테 잡혀서 항복을 했


다면 나한테 무슨 득이 있을까?”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천천히 죽겠죠.”

코린이 존을 바라보았다.

“존, 우리에게는 저 여자를 먹일 식량도, 붙어서 감시할 한가한 사람


도 없다.”

그러자 스콰이어 달브리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위험천만하다네, 친구.”

“쥐죽은듯이 숨어 있을 때 저 여자가 한 번만 소리를 지르면 우리는


모두 끝장나는 거야.”

에벤이 단검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걸로 단번에 영원히 입을 막아 줄 수 있지.”

존은 목이 탔다. 속수무책이었다.

“이 여자는 자진해서 항복했다구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해라. 너는 윈터펠


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나이트워치의 형제다.”

코린이 엄숙히 말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자, 존은 일을 처리하도록 남겨 두고 우리 먼저 떠나지. 우리가 없어
야 존이 일을 더 쉽게 처리할 거야.”

사람들은 존과 고스트, 와이들링 여자만 남겨 두고 굽이굽이 난 길을


따라 해가 뜨는 쪽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그리트가 존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여자를 죽여 본 적이 한 번도 없군요?”

존이 고개를 저었지만 여자는 무시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죽어요. 하지만 당신이 날 죽일 필요는 없어


요. 나와 함께 달아나면 만스 레이더가 당신을 받아들일 테니까요. 그
분은 너그러운 분이에요. 그리고 저 까마귀들은 절대 우리를 잡지 못
해요.”

“나 역시 까마귀야.”

여자가 체념한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태울 건가요?”

“그럴 순 없지. 연기가 나면 안 되니까.”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겠군요. 섀도캐츠 먹이가 되다니, 이보다 좋지 않은 최후는 없


을 거예요.”

존은 등뒤에서 롱클로우를 뽑았다.

“두려운가?”

“어젯밤에는 두려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태양이 떠올랐잖아요.”


이그리트가 머리를 한쪽으로 모아 목을 드러내고 존 앞에 무릎을 꿇
었다.

“추우니까 빨리 끝내 줘요.”

존은 손에 힘을 주며 롱클로우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있는 힘을 다해서 한 번만 내리치면 끝나는 거야. 난 아버지의 아들


이잖아.’

이그리트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어서 해요. 나도 언제까지나 용감할 수는 없다구요.”

이그리트가 재촉했다. 하지만 존에게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


고, 여자는 의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존은 롱클로우를 아
래로 내려뜨렸다.

“가.”

이그리트가 멍하니 존을 쳐다보았다.

“어서 가. 달아나라구. 내가 마음을 고쳐먹기 전에 말이야.”

산사

남쪽 하늘이 연기로 자욱했다. 저 멀리 불길이 타오르며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는 하늘을 가득 메웠다.

티리온이 매음굴과 성벽 바깥쪽의 무허가 주택들을 불태우는 동안,


블랙워터 강 너머로 밤마다 불길이 타올랐다. 레드킵에도 공기 중에
재가 떠다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산사는 그날 가즈우드에서 돈토스를 만났다.


“아니, 우셨어요?”

돈토스가 빨갛게 충혈된 산사의 눈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산사는 얼른 거짓말을 둘러댔다.

“아뇨, 연기가 매워 눈물이 난 것뿐이에요. 킹스우드 반이 불타는 것


처럼 보여요.”

“스타니스 경은 불을 질러 하이로드에서 온 야만인들을 몰아낼 작정


인 거예요.”

돈토스가 그렇게 얘기하고는 비틀거리며 밤나무 줄기를 잡았다. 그


의 튜닉은 붉고 누런 포도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야만인들은 스타니스 경의 정찰병들과 짐마차를 습격해 불을 놓고


다니고 있대요. 이제부터 스타니스는 말들에게 풀 대신 재를 먹여야
할 거라고 티리온이 왕대비에게 말하더군요. 요즘 난 기사일 때는 들
을 수 없었던 갖가지 소문들을 듣고 있죠. 사람들은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아무 얘기나 거리낌없이 해요. 스파이더는 아무리 사소한 일
이라도 돈을 지불해 염탐하고 있는데, 아마 문 보이도 오래 전부터 그
의 첩자였을 거예요.”

‘또 취했군. 자기 스스로 보잘것없는 플로리안이라고 부르더니, 사실


이 정말 그래. 하지만 내 유일한 희망은 보잘것없는 플로리안밖에 없
어.’

“세르 돈토스, 스타니스 경이 스톰엔드의 가즈우드를 불태웠다고 하


던데, 사실일까요?”

돈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니스 경은 붉은 여사제가 시키는 대로, 새로운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가즈우드를 장작더미로 만들었죠. 사람들 말로는, 그 여
사제가 스타니스 경의 육체와 정신을 조종한대요. 스타니스 경은 그
여자한테 도시를 차지하면 바엘로의 그레이트 셉트도 불태우겠다고
맹세했대요.”

“차라리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다 불타 버렸으면 좋겠어요.”

돈토스가 산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곱 채의 크리스털 탑으로 이뤄진 바엘로의 그레이트 셉트를 처음


보았을 때, 산사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 생각했
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곳에서 처형당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아가씨, 신들이 듣겠어요.”

“신들이 듣는다고요? 아뇨, 지금까지 제 기도도 듣지 않으셨는걸요.”

“들으셨으니까 절 보냈죠. 안 그래요?”

산사는 착잡한 심정으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듯 아찔했다.

“신들이 당신을 보내셨다면 당신은 대체 지금 하는 게 뭐죠? 날 집으


로 데려다 준다고 약속했지만, 난 아직도 여기에 있잖아요.”

돈토스가 산사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배를 빌려 달라고 말해 놨어요. 아주 좋은 친구


죠. 물론 당신한테도 그럴 거구요. 그가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가 줄
배를 빌려 줄 거예요. 때가 되면 말이죠.”

“지금이 바로 그때예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떠나야 해요. 요즘 나


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시도만 하면 우리는 감쪽같이
빠져나갈 수 있다구요.”

산사가 고집스럽게 말했지만 돈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물론 성을 빠져나갈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성문은 그 어
느 때보다도 경비가 삼엄해졌고, 강은 아예 막혔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블랙워터 강은 요즘 늘 비어 있었다. 나룻배는 모두


북쪽 둑으로 옮겨졌고, 무역선들은 도망치거나 티리온에게 징발당했
다. 배라고는 강 한가운데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정렬해 있
는 군함들뿐이었다. 군함의 병사들은 남쪽 강기슭에 주둔한 스타니
스의 군대와 서로 불화살을 날려 대고 있었다.

스타니스는 여전히 킹스랜딩으로 오는 중이었지만, 그의 선봉장은


이틀 전에 어둠을 틈타 모습을 드러냈었다. 소문에 의하면, 스타니스
의 병력은 5천 명으로 시티워치의 수와 비슷하다고 했다. 선봉대는
포소웨이 가문의 붉고 푸른 사과, 에스터몬트 가문의 바다거북, 플로
렌트 가문의 여우와 꽃이 그려진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의 지
휘관인 구야드 모리겐은 ‘그린의 구야드’라 불리는 남부의 이름난 기
사였다. 그의 깃발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검은 날개를 펼친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엷은 노
란색의 기였다. 너덜너덜해진 끝 부분이 흔들리는 불꽃처럼 펄럭이
는 그 깃발에는 ‘빛의 신’의 불타는 심장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스타니스 경은 조프리 왕보다 병력이 다섯 배가 넘는다고


하던데…….”

돈토스가 산사의 어깨를 잡았다.

“강을 건널 수 없는 한 군대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배가 없으면


강도 건널 수 없구요.”

“스타니스 경은 킹스랜딩에 있는 배보다 더 많은 배를 갖고 있다던데


요.”

“그렇더라도 스톰엔드에서 오려면 긴 항해가 될 겁니다. 그렇지 않으


려면 마세이훅을 거슬러 올라와 굴네트를 통과해 블랙워터만(灣)을
건너와야 하는데, 그럴 경우엔 너그러우신 신들이 그들을 바다로 빠
뜨려 버릴 폭풍을 보내 주실 겁니다.”

돈토스가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 인내심을 가지세요. 제 친구가 오면, 우리는 배를 갖게 될


겁니다. 당신의 플로리안을 믿으세요. 걱정하지 말고요.”

산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배를 휘저으며 콕콕 찌르는 듯한 통


증이 왔다. 요즘 복통이 매일 심해졌다. 미르셀라 공주가 출항하던 날
의 악몽이 아직도 산사를 괴롭혔다. 산사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 목이
졸려 죽는 꿈을 꾸고 버둥거리다 깨어나곤 했다.

그날 사람들은 산사를 에워싸고는 오물을 던지며 욕설을 퍼붓고 말


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그때 하운드가 사람들을 헤치며 옆으로 와 주
지 않았다면 분명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이셉톤을
난도질했고, 아론 산타가르의 머리에 돌을 던졌었다.

도시 전체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산사는 성벽 위에서 백성들이 빗


장을 걸어 잠그고 몸을 숨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라니스터 병사
들은 요즘 마음내키는 대로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다.

“제가 아직도 기사였다면 갑옷을 입고 성벽을 지켜야 했겠죠. 그걸


생각하면 조프리 왕의 발에 키스하며 감사하고 싶을 지경이에요.”

돈토스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어릿광대로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하면, 조프리 왕은 당신을


다시 기사로 만들 거예요.”

산사의 말에 돈토스가 낄낄거렸다.

“아가씨는 정말 영리한 소녀예요.”


“하지만 조프리와 왕대비는 내가 어리석다고 하던걸요.”

“그러라고 하세요. 그래야 아가씨가 더 안전해지니까. 왕대비와 티리


온 경, 스파이더, 그리고 다른 의회의원들은 매눈을 하고 서로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돈을 뿌리
면서 말이죠. 하지만 탄다 부인의 딸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요.”

돈토스가 입을 막고 트림을 참았다.

“신들이 당신을 보호해 주실 겁니다, 나의 귀여운 조니킬.”

포도주 탓인지 돈토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자, 당신의 플로리안에게 입을 맞춰 주세요. 행운을 비는 입맞춤을


요.”

산사는 수염을 깎지 않은 돈토스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


를 했다. 코끝이 시큰했지만 눈에 힘을 주고 참았다. 요즘 너무 자주
눈물을 보였다. 꼴사나우리라는 것이야 잘 알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에고르의 홀드패스트로 이어지는 도개교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티리온은 시티워치들을 대부분 성벽으로 이동시켰다. 킹스
가드들도 이제 산사를 미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성
을 떠나지 않는 한 산사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성안에서 가
고 싶은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산사는 무지막지한 강철 스파이크가 설치되어 있는 바짝 마른 해자


를 건너고 폭이 좁은 나선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 앞까지 도착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숨이 막혔고,
벽이 덫처럼 느껴졌다.
산사는 방을 지나쳐 성 위로 올라갔다. 연기가 자욱해 하늘의 별과 달
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레드킵의 거대한 탑과 멋진 요새, 도시의
미로, 검붉은 강, 동쪽의 만,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과 소용돌이치는
재……,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 주
위로 횃불을 들고 개미처럼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꽉 채운 모래주머
니가 성벽처럼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짙게 드리워진 연기 사이로 거
대한 투석기 세 대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들은 보는 이를 위압할 정
도로 거대했지만, 전쟁에 대한 산사의 두려움을 덜어 주지는 못했다.

산사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격심한 통증에 배를 감싸안았다. 입에


서 신음소리와 함께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떨어질 듯 비틀거리는데
갑자기 산도르가 나타나 팔을 붙잡았다.

산사는 쓰러지지 않으려 벽에 손을 짚고 울부짖었다.

“놔요. 놔줘요.”

“날개라도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아니면 네 남동생처럼 앉은뱅이가


되려고?”

산사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떨어지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당신 때문에 놀라서…… 그


것뿐이에요.”

“내가 너를 겁먹게 했단 말이군.”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산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고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작은 새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못하는군. 하지만 폭도들에게 붙잡


혔을 때는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었지. 기억나나?”
산도르가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

산사 역시 잘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울부짖음, 말에서 끌어내리


려는 남자에게서 풍기던 마늘 냄새, 돌에 맞아 피를 흘리던 소년, 모
든 게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억센 손 하나가 산사의 허리를


낚아챘고, 마늘 냄새를 풍기던 남자는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남
자가 바닥에 쓰러졌고, 잘린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주위에 사
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그 중 몇은 곤봉을 들고 있었다. 산도르가 피
로 얼룩진 검을 그들을 향해 휘두르자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모여 있
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줄행랑을 쳤고, 그 모습을 보며 산도르
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끔찍한 화상으로 덮인 산도르의 얼굴
이 그 순간 달리 보였었다.

산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산도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숙녀는 어


떤 경우라도 예의를 잊어서는 안 되었다. 산도르의 얼굴 중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화상 자국도, 뒤틀린 입술도 아니었다. 눈이었다, 이글
거리는 눈. 산사는 그토록 증오에 가득 찬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난…… 당신을 찾아가려 했어요. 나를 구해 줘서……, 그래서 고맙


다는 인사를 하려고요. 당신은 정말 용감했어요.”

산도르가 히죽 웃었다.

“용감했다고? 쥐를 쫓는 개에게 용기 따위는 필요 없어. 어느 누구도


내 앞을 막아서지 못하지.”

산사는 거칠고 화난 듯한 그의 말투가 싫었다.

“사람들을 위협하는 게 즐겁나요?”

산도르의 비틀린 입술에 냉소가 떠올랐다.


“아니, 난 사람 죽이는 걸 더 즐거워해. 앞으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은
삼가는 게 어때? 너는 고귀한 집안 자식이잖아. 그리고 윈터펠의 에
다드 경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아는데, 안 그런가?”

“그건 아버지의 의무였어요. 그리고 아버진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어


요.”

“아버지가 직접 그렇게 말했나? 그렇다면 거짓말이야. 살인은 세상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거든.”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롱소드를 뽑았다.

“이게 바로 진실이야. 너의 그 대단한 아버지도 바엘로의 처형대에서


몸소 그 사실을 증명했잖아. 윈터펠의 영주이자, 왕의 핸드, 북부의
관리자, 8천 년 동안 북부를 지켜 온 위대한 가문의 에다드 스타크.
하지만 그도 일린 파이네의 칼에 목이 잘리고 말았지. 네 아버지의 머
리가 어깨에서 떨어질 때 뿜어져 나오던 피를 기억해?”

산사는 갑작스런 한기에 몸을 떨었다.

“왜 당신은 늘 그렇게 증오에 차 있죠? 난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마치 내가 사랑하는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봐, 아가씨,


기사들이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아가씨들의 사랑과 황금 갑옷?
아니, 기사들이 원하는 건 살육이야.”

산도르의 검이 산사의 목에 와 닿았다. 산사는 강철의 섬뜩한 감촉에


등골이 오싹했다.

“난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어. 그후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


을 죽였는지 셀 수도 없고. 명망 있는 가문의 영주, 벨벳으로 온몸을
친친 감은 부자들, 높은 지위를 내세워 우쭐대던 기사들……. 여자들
과 어린아이도 죽인 적이 있었지.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고깃덩어
리이고 나는 도살자인 셈이지. 신, 황금, 높은 지위 따윈 나하고 상관
없는 일이야.”

그러면서 산도르가 산사의 발치에 침을 탁 내뱉었다.

“내 손에 검이 있는 한, 난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어.”

‘당신의 형을 제외하고 말이죠? 당신은 당신 말대로 개일 뿐이에요.


쓰다듬으려 하면 손을 물어 버리는, 적당히 사납고 심술궂은 개. 하지
만 자기 주인을 다치게 하려는 자는 누구든 물어뜯어 버릴 그런
개…….’

산사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눈을 돌렸


다.

“저들이 정말 강을 건너지도 못할까요?”

“모든 것들이 불타고 있어. 겁쟁이만이 불을 이용해 싸우지.”

그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스타니스 경은 겁쟁이가 아니에요.”

“그는 결코 형을 못 따라가. 로버트 왕이었으면 저런 짓은 안 했을 거


야.”

“스타니스 경이 강을 건너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싸워서 죽여야지. 내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두렵지 않아요? 신들이 그 동안 저지른 악행을 보고 당신을 무시무


시한 지옥으로 보낼지 몰라요.”

“악행? 신들?”
산도르가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신들께서 우리를 만드셨어요.”

“우리 모두? 그럼 말해 봐, 작은 새. 신들은 왜 티리온 같은 괴물이나


탄다 부인 딸 같은 얼뜨기를 만들었을까?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그들을 양으로 만들어 늑대 밥이 되게 했을 거야. 신들은 강자
가 가지고 놀도록 약자를 만드는 법이거든. 늑대가 바로 기사야.”

“진정한 기사들은 약자를 보호해요.”

산도르가 코방귀를 뀌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듯이 진정한 기사 따위도 없어. 만일 네가 네 자신


을 스스로 보호할 수 없다면, 그럼 죽는 거야. 그러니 가능한 한 그들
에게서 멀리 도망가.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검과 창, 무기뿐이야.”

산사는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에요.”

“나는 정직해. 지독한 것은 세상이라고. 이제 그만 날아가, 작은 새.


네가 흘낏흘낏 쳐다보는 게 메스꺼워.”

산사는 말없이 뒤돌아 방으로 향했다. 산도르가 무서웠다. 하지만 돈


토스에게 산도르의 잔인함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들은 존재해. 진정한 기사도 존재하고.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일 리 없어.’

그날 밤, 산사는 다시 악몽을 꾸었다. 어디를 봐도 소름 끼치도록 흉


측한 가면의 괴물들뿐이었다. 울면서 ‘나는 잘못한 게 없어’라고 소리
쳤지만, 괴물들은 말 위에 앉아 있는 산사를 끌어내리려 했다.

‘안 돼요. 안 돼! 제발, 싫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돈토스와 남동생들, 아


버지와 불쌍한 레이디, 붉은 장미를 주었던 친절한 꽃의 기사를 소리
쳐 불렀지만, 어느 누구도 구해 주러 오지 않았다. 노래에 등장하는
플로리안이나 리암 레드윈, 드래곤나이트 아에몬 왕자도 큰 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들이 다리를 꼬집고 배
를 때리고 살을 할퀴었다. 누군가 얼굴을 쳐서 이가 부러졌다. 그때
강철의 희미한 빛이 보이더니, 갑자기 나이프가 나타나 배를 사정없
이 찔러 댔다.

산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 너머에서 희미한 아


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몸이 찌뿌드드했다. 다리 사이가 축축하면서 끈적끈적했다.

산사는 놀라 담요를 걷어차고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핏


자국……. 나이프가 배를 찔러 대던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두려움
에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는데, 순간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 안 돼. 제발…….”

진정으로 원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안 돼. 여기서는 안 된다고. 이럴 수는 없어. 안 돼!”

화가 치밀었다. 침대 기둥을 잡고 일어나 대야로 가 다리 사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대야의 물이 선홍색으로 바뀌었다.

‘이를 어쩌지…….’
하녀들은 대야를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세 알 것이었다. 문득
침대 시트가 생각났다. 급히 달려가 보니 선명한 핏빛 얼룩이 보였다.

‘흔적을 없애야 해.’

산사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하녀들이 보면 모든 사실이 알려질 터


였고, 그러면 조프리와 결혼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런 일을 그대
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사는 나이프를 가져와 얼룩이 뭍은 시트를 잘라냈다.

‘사람들이 이걸 보면 뭐라고 얘기하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른 침대에서 시트를 벗겼다. 얼룩은


담요에도 묻어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태워야 해.’

산사는 램프의 기름을 가져다가 담요에 붓고 난로에 밀어 넣었다. 담


요에 불이 붙었다. 순간 피가 깃털 매트리스에도 스며들었을 거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그것 또한 난로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피가 너무 커서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끙끙대며
매트리스를 불꽃 속으로 떠밀고 있는데, 짙은 연기가 방안을 가득 메
웠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하녀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왔
다.

몸부림치는 산사를 끌어내기 위해 하녀 셋이 달라붙어야 했다. 결국


산사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찌 됐든 침구는 다 불
태웠지만, 하녀들에게 끌려나올 때 다리에서 다시 피가 흘렀던 것이
다. 산사는 자신의 몸이 조프리를 위해 자신을배신했다는 사실에 절
망했다.

불길은 곧 잡혔다. 하녀들은 까맣게 타 버린 깃털 침대를 치운 뒤, 창


문을 활짝 열고 방안을 가득 메운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부채질을 해
댔다. 그리고 방안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물통을 가져왔다. 이리저리
오가던 하녀들이 산사를 흘낏거리며 서로 속닥거렸다.

하녀들은 뜨거운 물로 산사를 씻긴 뒤 다리 사이에 댈 천을 가져다주


었다. 산사도 이제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
동을 반성했다.

옷이 모두 연기에 그을려 입을 수 없게 되자, 한 하녀가 나갔다가 산


사에게 맞을 만한 녹색 울 드레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가씨 것만큼은 예쁘지 않지만 입을 만은 해요. 다행히 신발은 타


지 않아서 왕대비님 앞에 맨발로 가는 일은 면했어요.”

산사가 찾아갔을 때, 세르세이는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앉거라. 좀 들겠니?”

세르세이는 언제나 우아했다. 탁자 위에 포리지(오트밀을 물이나 우


유로 끓인 죽)와 꿀, 삶은 달걀, 파삭파삭하게 튀긴 생선이 놓여 있었
다.

산사는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했다. 배가 뒤틀리듯 아파


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티리온과 스타니스 때문에 모든 음식에서 재 맛이


난다니까. 그건 그렇고, 네가 불을 질렀다고 하던데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산사는 고개를 숙였다.

“피를 보자 너무 두려웠어요.”
“그건 네가 진정한 여자가 되었다는 징표란다. 캐틀린 부인이 네게
가르쳤으리라 생각하는데……. 너는 이제 네 생애의 한창때를 맞이
한 거야.”

“네, 어머니께 듣기는 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이렇지는 않


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렇지가 않다면?”

“저도 모르겠어요. 단지…… 좀 덜 지저분하고, 좀더 신비로울 줄 알


았어요.”

세르세이가 빙긋 웃었다.

“아이를 낳으면 알게 되겠지만, 꽃을 하나 피기 위해서는 아홉 번의


괴로움을 참아야 하는 것이 여자의 인생이란다.”

세르세이가 우유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이제 너는 진정한 여자가 된 거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결혼하고 잠자리에 들 때가 되었다는 걸 의미해요. 전하를 위해 아


이들을 낳아야 하고요.”

왕대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을 치러 보면, 그 일이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게


다. 이번 일로 널 나무랄 생각은 없어. 조프리는 늘 다루기 힘든 아이
였지. 처음 날 때부터 그랬어. 하루 반나절을 진통으로 고생하고 나서
야 그 아일 봤으니까. 그 고통을 넌 절대 상상하지 못할 거야. 얼마나
크게 비명을 질렀던지, 킹스우드에 있던 로버트도 그 소릴 들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더구나.”
“전하께선 함께 계시지 않으셨어요?”

“로버트? 로버트는 사냥 가고 없었어. 그 사람은 항상 그랬지. 출산


일이 가까워지면 사람들과 사냥개를 이끌고 숲으로 도망쳤어. 내 고
귀한 남편은 돌아올 때마다 모피나 사슴 머리를 선물로 가져왔고, 나
는 아기를 선물했지. 사실 나도 그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진 않았어.
내 곁엔 그랜드 마에스터와 산파들과 자이메가 있었으니까. 조프리
도 네게 헌신적이지는 않을 거야. 그건 네 여동생 탓이 커. 아니 모두
그 아이 탓이다. 조프리는 네 앞에서 망신당한 트라이덴트에서의 일
을 결코 잊지 못해. 그래서 너를 더욱 모욕하는 거고. 하지만 넌 보기
보다 강하더구나. 난 네가 약간의 굴욕은 극복하리라 믿는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전하를 사랑해요.”

왕대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하는 걸 정말 빨리도 배웠구나. 스타니스도 그렇게 잘 하진


못할 거다.”

“하이셉톤이, 합법적인 왕은 전하시니 스타니스가 승리하는 걸 신들


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왕대비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어렸다.

“조프리는 로버트의 적출이자 상속자야. 하지만 그 애는 로버트가 안


아 올릴 때마다 항상 울었고, 그때마다 로버트는 매우 언짢아했어. 서
자들은 그가 안아 주면 까르륵 웃으면서, 반갑다는 듯 입술에 댄 손가
락을 쪽쪽 빨았으니까. 로버트는 늘 자신이 환영받는 존재이길 원했
어. 사랑받길 원한 거지. 그래서 친구나 매춘부만 찾은 거지. 그건 티
리온도 마찬가지고. 너도 사랑 받기를 원하니, 산사?”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해요.”


“어른이 됐어도 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오늘처럼 특별한 날,
너와 여자의 지혜를 나누고 싶구나. 산사, 사랑은 독이란다. 아주 달
콤한 독이지. 그래서 널 행복하게 해주는 동시에 너를 죽일 수도 있
어.”

스컬링패스는 어두웠다. 산 옆으로 툭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에 해가


가려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바위에 달려
있던 고드름이 떨어져 바닥에 수북히 쌓였다. 사람들과 말이 내뿜는
하얀 입김이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가끔 바위틈에 난 잡초나 바위를
덮고 있는 이끼가 눈에 띄었지만, 목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길이 좁은데다 경사가 심해, 레인저들은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가야


했다. 고도를 가늠하기 위해 스콰이어 달브리지가 선두에 섰다. 나이
트워치에서 가장 눈썰미가 예리하다고 알려진 그의 손에는 긴 활이
들려 있었다.

고스트는 존 옆에서 함께 달리면서, 가끔 섀도캐츠 소리에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섀도캐츠는 굶어 죽을 정도가 아닌 한,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절대 덤벼들지 않았다. 그래도 존은 언제든지 롱클로우
를 쉽게 뽑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바람에 깎인 회색 바위는 그곳이 고개에서 가장 높은 곳임을 알려 주


고 있었다. 점차 길이 넓어지면서 밀크워터 계곡으로 향하는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다. 코린은 그늘이 다시 생길 때까지 쉬어 가기로 결정
했다.

“그림자는 검은 형제들의 좋은 친구지.”

존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흠뻑 받으며 말을


달리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았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쯤 만
스 레이더는 지난밤에 경비를 맡은 병사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스톤스네이크는 낡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누워


잠을 청했다. 존은 고스트와 함께 고깃덩어리를 나눠 먹었고, 에벤과
스콰이어 달브리지는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코린은 바위 뒤에 앉아
롱소드의 칼날을 갈았다.

존은 코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로드커맨더, 그 여자를 어떻게 했는지 묻지 않으세요?”

“난 로드커맨더가 아니다, 존.”

코린은 대답을 하면서도 두 개뿐인 손가락으로 열심히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저보고 함께 달아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만스가 받아들


일 거라고.”

“그래, 그럴 거다.”

“그 여자는 우리가 한 핏줄이라고도 했습니다. 어떤 얘기를 들려 줬


는데…….”

“바엘과 윈터펠의 겨울 장미에 대한 전설? 그래서 스톤스네이크가


그 얘기를 했군. 나도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있지. 만스는 정찰이 끝나
면 항상 그 노래를 불렀거든. 만스는 와이들링의 음악에 관심이 많았
어. 그리고 여자들한테도.”

“그자를 잘 아세요?”

“우리 모두 잘 알지.”
그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 있었다.

‘형제만큼 친했던 친구에게 이제 서로 칼을 맞대고 있구나.’

존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자는 왜 도망갔죠?”

“누구는 여자 때문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왕좌가 탐나서 그랬다고


하지.”

코린은 손가락에 잘 갈아진 칼날을 대고 죽 그었다.

“둘 다 맞는 얘기다. 그는 정말로 여자를 좋아했고, 또 누구한테든 무


릎 꿇는 걸 싫어했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월보다 이
곳을 더 사랑했다는 거다. 그는 본래 와이들링이었어. 그런데 한 레인
저가 월로 데려와 키웠던 거지. 그가 섀도타워를 떠나 이곳으로 온
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 뿐이야.”

“레인저로서는 어땠어요? 뛰어났나요?”

“우리 중에서 최고였지.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했어. 와이들링을 무


조건 경멸하는 소렌 스몰우드처럼 그도 어리석었어. 존, 와이들링들
은 용감해. 그리고 강하고, 빠르고, 영리하지. 하지만 전술엔 약해. 제
각각 자신이 왕보다 뛰어나고 마에스터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해. 만
스도 마찬가지고. 그는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자야.”

“저도 그래요.”

존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코린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존의 마음


을 꿰뚫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여자를 보내 줬군.”

너무도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였다.


“알고 계셨어요?”

“아니, 지금 알았어. 왜 보내 줬지?”

존은 그 이유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음, 그건…….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직접 사형을 집행하셨어요.


죽여야 할 사람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지막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그리트의 눈을 쳐다봤을
때…….”

존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여자가 적인 건 알지만,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건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거 아니냐.”

“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어요. 만


약 우릴 발견하고 호른을 분다면…….”

“와이들링들이 우리를 잡으면 죽일 거다. 우리에게 악한 마음이 보이


지 않아도 분명히 그랬을 거야.”

“그래도 호른은 이제 스톤스네이크에게 있고, 이그리트의 무기도 저


한테 있어요.”

“우리를 위협할 상황이 못 되었단 말이군.”

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 내가 만약 그 여자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에벤에게 맡기거나 내


가 직접 했을 거다.”

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다면 왜 저한테 명령하셨죠?”

“명령한 적은 없다. 그 상황에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결정해서 실


행하라고 했을 뿐이지. 그래서 널 남겨 둔 거고.”

코린은 일어나 예리해진 롱소드를 도로 검집에 넣었다.

“산을 올라가야 할 때면 나는 스톤스네이크를 찾는다. 화살을 쏴서


적을 잡아야 한다면 스콰이어 달브리지를 부르지. 에벤은 포로들한
테 비밀을 캐내는 데 선수다. 존, 너도 사람들을 이끌려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해. 여하튼 이번 기회로 난 너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구
나.”

“제가 만약 그 여자를 죽였다면요?”

“그래도 너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됐겠지. 자, 얘기를 너무 많이 했


구나. 존, 너도 눈 좀 붙여라. 앞으로 한참을 행군해야 하고, 이제부터
는 더 위험해질 테니까. 좀 쉬면서 기운을 회복해야지.”

옳은 말이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존은 바람을 피할 만한 곳


을 찾아 망토를 덮고 누웠다.

“고스트, 이리 와.”

존은 고스트와 항상 꼭 붙어 잤기 때문에 남들보다 따뜻하게 잘 수 있


었고, 고스트의 체취는 늘 그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스트가 쳐다보기만 할 뿐 다가올 생각을 않고 조랑말 주위만 맴돌
더니, 갑자기 멀리 뛰어가 버렸다.

‘사냥하고 싶어서 그러나?’

산에 다른 동물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섀도캐츠가 사는 것도 뭔가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섀도캐츠를 건드리면 안 되는데…….”

아무리 다이어울프라 해도 위험할 수 있었다.

존은 망토를 푹 뒤집어쓴 뒤 몸을 쭉 폈다.

꿈속에서 다이어울프들이 나타났다. 그와 형제들이었다. 분명 형제


는 여섯인데 보이는 건 다섯 마리뿐이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모두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숲은
춥고 광활했다. 형제들이 숲 속 어딘가에 있을 텐데도 전혀 그들의 냄
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어두컴컴한 하
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슬픔에 찬 긴 울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숲
전체에 퍼져 나갔다. 곧 사방이 잠잠해졌고, 그는 대답 소리를 기대하
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눈발이 휘날리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존?’

문득 뒤쪽에서 아주 부드럽고 여리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속삭


임이 들려왔다.

‘어떻게 저토록 강렬한 외침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지?’

그는 고개를 돌리고 주위를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


다. 거기에는 단지…… 위어우드만 있을 뿐이었다.

바위 틈새로 뿌리를 박고 있어 바위를 뚫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나무


였다. 이제껏 본 위어우드와 달리, 그건 줄기가 무척 가늘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묘목보다도 더 가는 듯했다. 하지만 키는 컸다. 그
리고 희한하게도 위로 올라갈수록 가지들이 두꺼워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무 주위를 돌다가 어떤 눈과 마주쳤다. 빨갛고 겁


먹은 눈……. 하지만 그를 보자 그 눈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바로 동생의 눈이었다!

‘얘가 원래 눈이 세 개였나?’

‘원래는 아니었어. 형이 나이트워치 대원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야.’

고요한 외침이었다.

그는 컹컹 짖으며 냄새를 맡았다. 늑대와 나무와 소년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뒤에서 나는 냄새는 달랐다. 기름진 진흙과 단단한 회색 바위
의 냄새, 그리고 한 가지 더……. 그건 뭔가 두렵고 끔찍한 냄새였다.

‘그래, 이건 죽음의 냄새야.’

그는 금세 알아차렸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머리가 곤두서면서 입


이 딱 벌어졌다.

‘형, 두려워하지 마. 난 어둠 속에서 나는 죽음의 냄새를 좋아해. 아무


도 형을 볼 수 없지만 형은 그들을 볼 수 있어. 하지만 먼저 눈을 떠야
해. 자, 이제 봐봐?’

나무가 몸을 굽혀 그를 쓰다듬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와 있었다. 절벽 위에서 눈 속에


발을 깊이 박고 있었다. 앞쪽으로 스컬링패스가 펼쳐졌고, 위로는 하
늘이 드높았다. 긴 V자형 계곡은 가을날 오후의 햇살과 색색으로 물
든 단풍으로 가득 차서 누비이불을 덮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문
득 산 사이로 거대하고 창백한 벽이 보였다.

‘캐슬블랙인가?’

그때 수백 미터 아래로 강이 내려다보였다. 아니, 그것은 거대한 호수


였다. 수심이 깊어 코발트색으로 보이는 물위로 호수를 둘러싸고 있
는 눈 덮인 봉우리들이 비쳤다. 호수 위로 건초더미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한데…… 계곡 아래에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야 보였다. 수많은 사람


들, 거대한 무리였다. 그들 대부분은 얼어붙은 땅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있었고, 나머지는 전쟁에 대비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개미만큼
작아 보이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방어벽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도 보
였다. 강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에 날려 희미하게 들렸다. 그들
의 진영은 허술했다. 도랑도 없었고, 날카로운 말뚝도 없었으며, 말도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막사는 여기저기에 볼썽 사납게 세워져 있었
고, 어수선하게 쌓여 있는 건초 더미에는 염소와 양, 말, 돼지, 개들이
몰려 있었다. 식사 준비를 위해 피워 놓은 수많은 모닥불에서 검은 연
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이건 군대가 아니라 마을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이 한데 모여 사는 마


을이라고.’

마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곳이 지저분하고 더럽기만 한 곳은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털이 덥수룩한
커다란 짐승을 타고 다녔는데, 처음 본 것이었다. 코는 뱀처럼 길고
가늘었고, 입에는 멧돼지보다 훨씬 큰 어금니가 나 있었다.

그때 차가운 돌풍이 일면서 털이 곤두섰다.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그


림자가 덮치면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양을 가리고
있는 청회색의 거대한 날개가 어렴풋이 보였다.

“고스트!”

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맹수의 발톱이 할퀴고 간 아픔이 목뒤


를 훑고 지나갔다. 고스트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스트, 어딨니? 이리 와.”

하지만 고스트 대신 에벤이 다가와 존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조용히 해! 와이들링들을 불러들일 셈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존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난 고스트였는데……, 절벽에 서서 얼어붙은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을 받았어요. 새였는데…… 아
마 독수리였던 것 같아요.”

스콰이어 달브리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 꿈에서는 항상 예쁜 여자가 공격을 하는데. 좀더 자주 나타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때 코린이 존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어붙은 강이라고 했니?”

그러자 스톤스네이크도 끼여들었다.

“밀크워터는 빙하 옆에 있는 거대한 호수에서 흘러 내려오죠.”

“네. 나무에 동생 얼굴이 새겨 있었어요. 와이들링은…… 수천 명이


넘었고요. 거인들이 맘모스를 타고 있었어요.”

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위치를 보니 적어도 네댓 시간은


잔 듯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독수리 발톱에 긁힌 목 뒤쪽이 끊어
질 듯 아팠다.

‘하지만 꿈속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나는 것은 빠짐없이 모두 말해 봐라.”

코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존은 혼란스러웠다.

“그냥 꿈이었어요.”
“그렇지. 하지만 로드커맨더 말씀이, 크래스터가 와이들링들이 밀크
워터의 근원지로 모인다고 했다. 그러니 네가 본 대로 얘기해 봐.”

존은 꿈이 현실과 같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코린의 요구대로


꿈에서 본 것을 자세히 얘기했다. 하지만 형제들은 얘기가 끝났을 때
까지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변신, 스킨체인저?”

에벤이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코린을 바라보았다.

‘독수리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내 얘긴가?’

스킨체인저나 워그 따위는 낸 할멈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속에서


나 나오는 것이었다. 적어도 존이 살아온 곳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이
곳이라면, 바위와 얼음으로 가득한 이 낯설고 황폐한 야생의 세계에
서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로드커맨더께서도 많이 두려워하고


계셨지. 벤젠 스타크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죽었던 자가 살아 걸어다
니고, 나무가 다시 눈을 가지는 판이니……. 이제 우리도 워그나 거인
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군.”

“혹시 내 꿈도 현실에서 똑같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존이 맘모스를


타게 된다면, 난 여자를 갖고 싶은데 말이야.”

스콰이어 달브리지가 장난스레 끼여들었다. 하지만 에벤은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워치에 있을 때나 정찰 나갔을 때 별의별 이상한 얘기를 다 들었지.


거인의 뼈라는 것도 보고 말이야.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난 이 두
눈으로 꼭 그들을 확인해야겠어.”

“하지만 에벤, 저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야.”


스톤스네이크가 에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들이 다시 떠날 채비를 할 때까지도 고스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태


양이 ‘포크의 갈퀴’라 불리는 쌍둥이 봉우리 뒤로 넘어가면서, 산의
그림자가 강어귀에 길게 드리워졌다.

‘꿈이 사실이라면……. 고스트가 독수리한테 당한 건가? 아니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건가? 동생의 눈이 새겨져 있던 위어우드와 죽음의 냄
새는 무엇을 말하는 거지?’

희미하게 남아 있던 햇살마저 ‘포크의 갈퀴’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땅거미가 지면서 급작스럽게 추위가 몰려들었다. 이제 더 이상 오르
막길은 없고 내리막길뿐이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길 여기저기
에 깨지고 금이 간 표석과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는 바위가 널려 있었
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고스트는 어디 있는 거지.’

존은 일행에서 뒤처져 걸으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고스트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스콰이어 달브리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코린, 저기 좀 보세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바위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였다.

‘그저 독수리일 뿐이야. 꿈속에 봤던 것과 같은 놈일 리가 없어.’

존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에벤은 생각이 달랐는지 즉


시 화살을 겨눴다. 스콰이어가 그를 말렸다.

“독수리가 화살을 얼마나 잘 피하는데 그래?”

“우리를 쳐다보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어.”


그러자 스콰이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활을 쏴 봤자 귀한 화살만 낭비하는


거라구.”

코린이 말에 앉아 한참 동안 독수리를 관찰하더니 마침내 명령을 내


렸다.

“앞으로 돌진한다.”

레인저들은 다시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갔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존은 고스트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렸을까, 문득 두 개


의 표석 사이로 언뜻 하얀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눈이려니 했는
데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존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하얀 물체에 가까이 가 보았다.

고스트가 인기척을 느끼고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존이 장갑


을 벗고 피에 젖은 목을 쓰다듬어 줄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
다. 독수리의 발톱이 할퀴고 간 상처에서는 아직까지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코린이 옆에서 물었다.

“상태가 어떠냐?”

고스트가 대답이라도 하듯 앞발로 눈을 긁어 댔다.

“존, 걱정 마. 늑대는 여간해서 죽지 않으니까. 에벤, 물 좀 가져오게.


그리고 스톤스네이크, 자네 포도주 좀 나눠 줄 수 있겠지?”

코린이 물과 포도주 병을 받아들고 존을 바라보았다.


“꽉 잡아라.”

먼저 물로 피를 닦아낸 뒤 깊게 파인 상처에 포도주를 붓자, 고스트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존이 꼭 안고 달래 주자 곧 조용
해졌다. 코린은 소독이 끝나자 존의 망토 끝자락을 찢어 상처를 싸맸
다. 이제 사위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검은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계속 돌진해 나갈 겁니까?”

스톤스네이크의 물음에 코린은 말없이 자신의 말로 가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른 길로 돌아간다.”

“네? 다른 길로요?”

존과 일행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독수리는 사람보다 시력이 훨씬 좋아. 이미 노출되었으니 이제부터


서둘러 다른 길로 가야 한다.”

코린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말에 올랐다. 토를 다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레인저들도 하나씩 말에 올라탔다.

“고스트, 이리 와.”

다이어울프가 그림자를 남기며 존에게로 갔다.

그들은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지나고, 여기저기 갈라진 동굴을 지나


밤새도록 말을 달렸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밤길이 너무 어두울
때는 가끔 말에서 내려 걸어가기도 했다. 에벤이 횃불을 만들자고 했
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불은 안 돼.”
코린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정상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는데, 어둠 속에서 섀도캐츠 한 마리가 크


게 울부짖었다. 그에 답하듯 이내 산 속으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존은 그 순간 절벽 위에서 반짝이는 두 눈을 보았다. 보름달처럼 크고
둥그런 눈이었다.

동트기 한 시간 쯤 전, 존 일행은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행진을 잠


시 멈췄다. 모두 각자의 말에게 귀리와 건초를 먹이고 있는데 코린이
말했다.

“와이들링의 시체가 있는 지점까지 온 것 같다.”

코린의 시선이 스콰이어 달브리지에게로 향했다.

“저곳이라면 혼자서 1백 명쯤은 상대할 수 있겠지?”

스콰이어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활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형제들, 줄 수 있는 화살은 다 내게 주고 가게. 그리고 고향에 돌아


가거든 내 조랑말에게 사과 좀 줘. 여기까지 나를 따라와 준 대가로
말이야. 불쌍한 녀석…….”

‘여기서 죽는 거구나.’

존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코린이 장갑 낀 손을 스콰이어의 어깨에 얹었다.

“만약 독수리가 자네를 발견하고 날아들면…….”

“그 녀석, 화살로 된 깃을 새로 하나 달게 될 겁니다.”

존이 마지막으로 스콰이어 달브리지를 돌아봤을 때, 그는 등을 보이


며 좁은 길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날이 밝자, 존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서 작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에벤도 봤는지 낮게 욕설을 내뱉었
다. 하지만 코린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만 해보였다.

“다들 잘 들어 봐라.”

존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사냥용 호른 소리가 들리더


니 온 산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이제 그들이 온다.”

그렇게 말하는 코린의 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티리온

포드릭이 호화로운 벨벳 튜닉을 티리온에게 입히고 핸드의 목걸이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티리온은 그것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가 핸드라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는 세르세이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리온이 누나에게 가기 위해 정원을 지나가는데 바리스가 숨을 헐


떡이며 다가왔다.

“티리온 경, 즉시 이것을 읽어 보시지요.”

그가 하얗고 부드러운 손으로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북부에서 온 전갈입니다.”

“좋은 소식이오? 아니면 나쁜 소식?”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닐 성싶군요.”

티리온은 문서를 폈다. 횃불 아래라 글을 읽으려면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두 아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슬픈 소식입니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


을…….”

“물론 아직까지는 그렇겠지.”

티리온은 편지를 둘둘 말았다.

“누나에게 보고해야겠소.”

왕대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그날 밤 세르세이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짙은 녹색 벨벳으로 만든 짧


은 숄이 눈 색깔과 잘 어울렸다. 황금빛 머리칼은 살을 드러낸 어깨로
굽이쳤고, 허리에서는 벨트에 박힌 에메랄드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티리온은 먼저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한 잔 받아든 뒤,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문서를 내밀었다. 세르세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티리온
을 바라보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어때, 기뻐? 누나가 원했던 일이니까 당연히 기쁘겠지.”

티리온의 비아냥거림에 왕대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애를 창문에서 집어던진 건 자이메였지, 내가아니야. 사랑때문에


라고 했지. 마치 그걸 내가 기뻐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야.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어. 게다가 위험한 짓이었지. 하긴, 우리의 사랑스런 형제
께서 언제 신중했던 적이 있긴 했니? 그 애는 어린아이였어. 아이들
은 겁만 좀 줘도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다구.”

왕대비가 문서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었다.

“왜 스타크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거지? 이번 일은 그레이조이가 벌인 거야. 난 그 일과 전혀 관계
없어.”

“캐틀린 부인이 그 말을 믿어 줬으면 좋겠군.”

왕대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여자는…….”

“자이메 형을 죽이지 않을 거라구? 어째서? 만일 조프리와 토멘이 살


해당했다면 누나는 어떻게 하겠어?”

“난 아직도 산사를 붙잡고 있어.”

“그래, 우리에겐 여전히 산사가 남아 있지. 산사를 잘 보호해 주는 게


좋을 거야. 자, 그럼 누나가 날 위해 준비한 저녁식사나 먹어 볼까.”

음식은 맛이 좋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밤으로 만든 크림색 수


프와 바삭바삭하고 따뜻한 빵, 사과와 파인애플과 땅콩으로 버무린
샐러드로 시작된 식사는 칠성장어 파이, 꿀 바른 햄, 버터로 볶은 당
근, 버섯과 굴로 속을 채워 구운 백조고기로 이어졌다.

티리온은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렸다. 맛있는 요리는 먼저 왕대비


에게 권하고, 그녀가 먹으면 그때서야 자신도 먹었다. 음식에 독이 들
었으리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티리온은 누나가 스타크 가문의 흉보에 기분이 상한 걸 눈치챘다.

왕대비가 사과를 포크에 꽂아 우아하게 한 모금 베어 물면서 물었다.

“비터브리지에서는 아직 소식 없어?”

“아직 없어.”

“난 한 번도 리틀핑거를 신뢰한 적 없어. 돈만 많이 주면 단숨에 스타


니스에게 가 버릴 위인이야.”
“스타니스 경은 돈으로 적을 매수하기에는 너무 정직한 사람이지. 리
틀핑거 같은 부류의 사람이 편하게 섬길 군주도 아니고 말이야. 이번
전쟁으로 정말 이상한 동맹 관계가 많이 생겼지만, 적어도 그 둘만은
절대 친해질 수 없어.”

왕대비가 티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잠시 후 티리온이 햄을 자르고 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먹는 이 돼지고기는 탄다 부인이 올린 거야. 그분에게 감사


해라.”

“우리를 사랑한다는 징표에 대해서?”

“아니, 이건 뇌물이야. 탄다 부인은 자기 성으로 돌아가길 원해. 한데


길레스 경처럼 가는 도중에 체포될까 걱정되나 봐.”

티리온은 누나에게 햄을 한 조각 건네주고 자신도 하나 집어들었다.

“탄다 부인은 여기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불안하


다면 스토크워스에서 수비대를 불러 들여도 된다고 해. 원한다면 병
사들을 모두 불러 와도 되고…….”

세르세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병력이 부족한 거야? 그러면서 왜 네 야만인 용병들을 보내 버린 거


지?”

초조함이 깃들인 목소리였다. 티리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내가 그 친구들을 가장 잘 이용하는 길이었으니까. 그들은 용


맹하긴 하지만 병사는 아냐. 전투에서는 용기보다 규율이 더 중요한
법이지. 그리고 그들은 여기보다 킹스우드에서 우리에게 더 큰 도움
을 줄 거야.”
백조 요리가 나올 때쯤 왕대비는 ‘앤틀러맨’의 음모에 대해 물었다.
무척 화가 난 듯했다.

“왜 이렇게 배신 행위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거지? 우리가 그


놈들에게 무슨 해를 입혔다구!”

“해를 입히지는 않았지. 하지만 그들은 승자 편에 서고 싶어해. 그런


생각이 그들을 배신자이자 바보로 만들고 있어.”

“배신자들을 모두 색출했다고 확신해?”

“바리스 경 얘기로는 그렇대.”

백조 요리는 너무 기름졌다. 세르세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넌 그 환관을 너무 신뢰하고 있어.”

“바리스 경은 내게 많은 도움을 줘.”

“네게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일 수도 있지. 바리스 경이 비밀을 속삭여


주는 사람이 너 하나라고 생각하니? 그자는 우리에게 그가 없으면 아
무 일도 못한다고 믿을 정도로만 비밀을 나눠 주고 있어. 내가 처음
로버트와 결혼했을 때 그자는 내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지. 난 오랫
동안 그자가 궁전에서 가장 진실한 친구라고 믿어 왔어. 하지만 지금
은…….”

왕대비가 잠시 티리온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자가 네가 조프리에게서 산도르를 떼어 놓을 계획이라고 말해 주


더구나.”

‘빌어먹을 바리스.’

티리온은 얼른 변명거리를 찾았다.


“산도르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를 맡길 필요가 있어.”

“왕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임무는 없어.”

“지금 왕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아.


조프리에게는 세르 오스문드와 세르 메린이 있잖아.”

‘물론 전혀 쓸모 없는 인간들이지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티리온은 말을 이었다.

“돌격대를 지휘하기 위해서는 산도르와 바론 스완이 필요해. 스타니


스 군대가 블랙워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해.”

“자이메는 조프리의 명령에 따라 돌격대를 이끌 거야.”

“리버룬에서? 어허, 그래? 하긴 그거야말로 돌격대답겠군.”

“조프리는 아직 어린애야.”

“이 전투에 참가해 자신의 용기를 보여 주길 원하는 철부지 어린애


지. 조프리를 싸움터로 내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왕은 전쟁터에 모
습을 보일 필요가 있어. 엄마의 치맛자락에 숨은 왕보다는 위험을 함
께하는 왕을 위해 병사들은 더 용감하게 싸우거든.”

“티리온, 그 애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야.”

“로버트 왕이 열세 살 때 어땠는지 기억해? 조프리가 로버트 왕처럼


되길 원한다면 전투에 내보내야 해. 조프리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갑옷을 입을 거고, 열두 명의 시티워치 대원에게 호위 받을 거야. 조
금이라도 전투에서 패배할 기미가 보이면 즉시 레드킵으로 돌려보낼
테니 걱정하지 마.”

티리온은 그 정도면 왕대비를 안심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왕대비의 초록색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도시가 함락될까?”

“아니.”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아버지가 구하러 오실


때가지 레드킵에서 버틸 수 있기를 바라야지.’

“티리온, 넌 전에도 내게 거짓말을 했어.”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 난 누나만큼이나 우리 둘 사이


가 좋길 바라는 사람이야. 길레스 경도 그래서 석방시킬 생각이고.”

사실 이런 일에 대비해서 길레스를 붙잡아 두고 있던 터였다.

“세르 보로스도 석방할 거야.”

왕대비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난 세르 보로스가 로스비 성에서 썩든 말든 상관 안 해. 하지만 토멘


은…….”

“그 애는 있어야 할 곳에서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어. 토멘은 길레스


경보다 제이슬린 경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지금이 훨씬 더 안전해.”

시종이 거의 손도 대지 않은 백조 요리를 치웠다. 세르세이가 후식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네가 블랙베리 타트를 좋아했으면 좋겠구나.”

“난 타트라면 뭐든 좋아.”

“하긴 예전부터 넌 그랬지. 참, 너 바리스 경이 왜 위험한 인물인지


알아?”

“지금 나랑 수수께끼라도 풀자는 거야? 몰라.”


“그는 물건이 없어.”

“그거야 누나도 마찬가지잖아.”

‘누나는 항상 그 사실에 자격지심을 가졌지.’

“그래, 어쩌면 나도 위험할지 모르지. 하지만 너 역시 다른 남자들처


럼 아주 멍청해. 네 다리 사이의 그 벌레 같은 물건이 이성적인 생각
을 방해한다구.”

티리온은 손가락에 묻은 빵가루를 핥았다. 누나의 미소가 싫었다.

“그래, 맞아. 지금 막 그 벌레가 떠날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왜 그 벌레가 이상해?”

세르세이가 가슴을 내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갑자기 당황한 사람처럼 보이네.”

“내가 당황한다구?”

티리온은 문을 흘낏 바라보았다. 밖에서 무슨 소린가가 들리는 듯했


다. 문득 이곳에 혼자 온 것이 후회되었다.

“예전에는 내 물건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더니 웬일이야?”

“내 흥미를 끄는 건 네 물건이 아냐. 그리고 너처럼 모든 걸 환관한테


의지하지도 않고. 난 내 나름대로의 정보통이 있어. 특히 네가 내게
숨기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이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내가 네 사랑스런 창녀를 데리고 있다는 얘기지.”


티리온은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포도주 잔으로 손을 뻗었다.

“난 누나가 남자들에게 더 흥미가 있는 줄 알았는데?”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 혹시 너 그 계집애와 결혼이라도 한 건 아니


겠지?”

티리온이 대답을 않자 세르세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무척이나 좋아하시겠구나.”

티리온은 뱃속 가득 뱀장어가 꾸물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샤에에 대해 알게 됐지? 바리스가 날 배신한 건가? 아니면


그날 곧장 샤에의 집으로 말을 달린 게 화근이었나?’

“누나가 무엇 때문에 내 잠자리의 파트너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거지?”

“라니스터 가문 사람들은 빚지고는 못 사니까. 넌 킹스랜딩에 온 순


간부터 나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며 왔어. 미르셀라를 팔아 넘기고 토
멘을 훔쳐가더니 이제는 조프리까지 죽이려고 해. 조프리를 죽이고
토멘의 섭정으로 나서려고 말이야.”

‘그 생각도 꽤 유혹적인데…….’

“누나, 미쳤어? 며칠 후면 스타니스가 이곳을 공격해 올 거야. 누나


에겐 내가 필요해.”

“내가 왜? 전투에서 너의 용감함이라도 보여 줄 생각인가 보지?”

“브론이 이끌고 있는 용병들은 내가 없다면 절대 싸우지 않을 거야.”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오, 난 그들이 너 없이도 잘 싸울 거라 생각해. 그들이 널 사랑하는
이유는 황금 때문이지 너의 장난꾸러기 같은 재치 때문이 아냐. 하지
만 걱정하지는 마. 널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네 목을 잘라 버리겠단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자이메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럼 나의 창녀는 어떻게 할 작정이지?”

차마 누나 앞에서 샤에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누나에게 샤에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믿게 할 수 있다


면…….’

“내 아들들이 무사하다면 그 애 역시 안전할 거야. 하지만 조프리가


죽거나 토멘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너의 귀여운 창녀
는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야.”

‘누나는 정말로 내가 조프리를 죽일 거라고 믿고 있군.’

“걱정하지 마. 모두 안전할 테니까. 그 애들은 나와 같은 핏줄이야.


누난 대체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조그만데다 이리저리 비비꼬인 인물이지.”

티리온은 잔에 남은 포도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이메 형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십중팔구 앞뒤생각 없이 세르세이를 죽이고 그 다음 대책을 강구했


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티리온은 검도 갖고 있지 않았고, 그것을 제
대로 다룰 줄도 몰랐다. 형의 저돌적인 성격을 좋아는 했지만, 닮으려
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바위, 난 바위가 되어야 해. 땅에 박혀 꿈쩍도 않는 캐스틀리 록 같은
바위가. 이번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내가 아는 누나라면 벌써 그 여자를 죽였을 것 같은데?”

“그 창녀를 보고 싶니? 그러니?”

세르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내 동생의 여자를 데려와.”

오스문드의 형제인 오스네이와 오스프리드가 여자를 이끌고 나타났


다. 매부리코와 검은머리, 잔인해 보이는 미소, 둘은 모습이 상당히
비슷했다. 여자는 입술이 부르터 피가 흐르고,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몸 여기저기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손은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티리온이 따지듯 묻자 오스네이가 끼여들었다.

“이 여자는 반항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수염을 기르지 않은 오스네이의 볼에는 손톱자


국이 선명했다.

“손톱이 고양이처럼 날카롭더군요.”

“멍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 저 여자는 조프리가 살아 있는 한 안전


할 거야.”

세르세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티리온은 세르세이를 비웃고 싶었다.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


었지만, 그렇게 되면 게임은 끝이었다.
‘누나, 누나는 졌어. 게다가 케틀블랙 형제들은 브론이 말한 것보다
더 바보들이군.’

티리온은 정말 그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여자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


다본 후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저 여자를 풀어 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어?”

“토멘을 풀어 준다면, 그렇게 하지.”

티리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저 여자를 데리고 있어. 하지만 안전하게 데리고 있어야


해. 만일 저 얼빠진 놈들이 여자를 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글쎄, 사랑하는 누나, 거래가 공정하려면 저울이 필요하
다는 걸 기억해 줬음 좋겠군.”

티리온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내려


는 노력이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저 여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 토멘에게도 일어날 거라는


걸 명심해 줘. 거기에는 구타와 강간도 포함돼.”

‘만일 누나가 나를 괴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행동해 주지.’

하지만 세르세이는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행동을!”

티리온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깊은 초록색 눈이 왕대비를 비웃었


다.

“감히라고? 내가 직접 그렇게 할 거야.”


세르세이의 손이 티리온의 얼굴로 날아왔다. 하지만 티리온이 먼저
세르세이의 손목을 낚아채 뒤로 비틀었다. 오스프리드가 왕대비를
구하러 다가왔다.

“한 발짝만 더 가까이 오면 왕대비의 팔을 꺾어 버리겠어.”

티리온의 경고에 오스프리드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다시는 누나에게 당하지 않을 거라고 한 말 기억해?”

그는 세르세이를 바닥에 넘어뜨리며 케틀블랙 형제들에게 몸을 돌렸


다.

“여자를 풀어 줘. 재갈도 풀고.”

로프가 너무 단단히 묶여 있어 피가 통하지 않던 손에 피가 돌자, 여


자는 신음을 흘렸다. 티리온은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여자의 손을 문
질러 주었다.

“나의 사랑, 용감해져야 해. 다치게 해서 미안해.”

“전 티리온 경께서 구해 주실 거라 믿고 있었어요.”

“언제든 꼭 구해 줄게.”

그러자 알라야야가 허리를 굽혀 티리온의 이마에 키스했다. 부르튼


입술이 이마에 핏자국을 남겼다.

‘내가 받아야 할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피 묻은 키스! 내가 아니


라면 절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티리온은 세르세이를 돌아보았다.

“난 누나를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누나였기 때문에 절대 해


를 입히지 않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거야. 이번 일에 대
해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 아직은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지
만, 시간이 지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르겠지. 누나가 안전하고 행복하
다고 생각하는 날, 갑자기 누나의 기쁨이 재로 변하게 될 거야. 그러
면 내가 빚을 갚았다고 생각해.”

티리온은 언젠가 아버지한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병사 하나가 전열에서 이탈하는 순간부터 전투는 끝난 것이다.’

아무리 병사들이 용맹하다 해도, 병력이 적군보다 훨씬 많다고 해도,


강력한 무기에 튼튼한 갑옷을 입었다 해도, 누군가 한 사람이 도망치
기 시작하면 그들은 절대 다시 몸을 돌려 싸우지 않을 거라는 얘기였
다. 이번 경우도 그러했다.

“나가! 내 눈앞에서 썩 사라져!”

그 말이 왕대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티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꿈 꾸시구요.”

핸드의 관저로 돌아오는 동안, 티리온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생각으


로 복잡했다.

‘차타야의 옷장을 통과하던 첫 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야 했는


데…….’

어쩌면 일부러 그런 사실을 외면해 온 것인지도 몰랐다. 계단을 오르


는 동안 다리가 심하게 아팠다. 티리온은 포드릭에게 포도주를 가져
오라고 한 뒤 침실 문을 열었다.

한데 샤에가 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봉긋한 가슴 위로


둥글게 감은, 무거워 보이는 체인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금으로 만든 손 모양의 사슬이 서로 부딪쳐 쨍그랑거렸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샤에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샤에가 낄낄


거리며 체인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누군가의 손이 제 가슴을 만져 주길 원했어요. 하지만 이 손은 너무


차갑군요.”

티리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른 여자가 대신 매를 맞


고, 만에 하나 조프리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대신 죽기까지 해야 한다
는 사실을 샤에에게 얘기해야 할지…….

“롤리스는?”

티리온은 이마에 묻은 알라야야의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잠들었어요. 그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잠자는 것뿐이에요.


미련한 소 같아요. 어떤 때는 먹다가 잠이 들기도 하죠. 음식이 담요
아래로 떨어지는데도 모르고 말이에요. 그러면 나는 그 여자를 깨끗
이 닦아 줘야 해요.”

샤에가 역겨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탄다 부인 말로는 롤리스가 아프다던데?”

“아니에요. 롤리스는 아기를 가진 거예요, 아픈 게 아니라.”

티리온은 방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

샤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리스 경이 후드를 씌워서 볼 수가 없었어요. 아, 한 군데는 보았어
요. 후드 아래로 바닥을 봤는데, 모두 타일로 되어 있었어요. 그림을
만드는 타일 말이에요.”

“모자이크?”

샤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드래곤이었던 것 같아요. 그


리고 나머지는 깜깜했어요. 우리는 사다리를 내려가서 긴 길을 걷고,
다시 이리저리 꼬인 길을 걸었죠. 철문을 열고 나오기도 했어요. 드래
곤 그림은 철문을 조금 지나서 있었구요. 문을 지난 후 우리는 한 번
더 사다리를 올라갔어요. 사다리 꼭대기에 낮은 터널이 있어서 몸을
굽혀야 했죠. 바리스 경은 기어가는 것 같았고요.”

티리온은 침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벽에 달린 촛대 중 하나가 느슨해


보였다. 까치발을 해 그것을 돌리자 삐걱거리며 천천히 돌아갔다. 하
지만 촛대가 뒤집히자 타다 남은 밑동이 떨어져 산산조각 날 뿐 다른
특별한 건 없었다.

“저와 같이 자고 싶지 않으신가 보군요?”

샤에가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잠깐만.”

티리온은 옷장을 열고 옷을 양쪽으로 밀어낸 뒤 뒤쪽 패널을 밀었다.


차타야의 집과 같은 방법일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패
널은 꿈쩍하지 않았다. 문득 창문 옆으로 튀어나온 돌이 시선을 끌었
다. 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기고 밀어도 소용이 없었다.

티리온은 실망해서 축 늘어진 채 침대로 올라갔다. 샤에가 티리온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팔로 목을 감았다.
“어깨가 돌처럼 딱딱해요. 서두르세요. 내 몸이 당신을 느끼고 싶어
해요.”

하지만 샤에가 다리로 허리를 단단하게 죄어도, 티리온의 남성은 일


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에가 안 되겠는지 침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티리온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 일 역시
소용이 없었다.

몇 분 후 티리온은 샤에의 행동을 제지했다.

“왜 그래요?”

샤에가 얼굴을 들었다. 세상의 모든 천진난만함이 묻어 있는 백치의


얼굴이었다.

‘천진난만? 바보 같으니라구. 이 여자는 창녀야. 누나 말이 옳아. 난


페니스로 생각을 해. 바보같이…….’

“그냥 잠이나 자, 귀여운 것.”

티리온은 샤에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샤에가 잠이 들고도 오랫동안 티리온은 샤에의 작은 가슴을 쥐고 그


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깨어 있었다.

캐틀린

리버룬의 그레이트 홀은 두 사람이 앉아서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너


무 넓었다. 벽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횃불은 하나가 꺼
져 세 개만 남았다.

포도주 잔을 응시하고 있는 캐틀린 맞은편으로 브리엔느가 앉아 있


었다. 둘 사이에 놓인 높다란 영주의 의자는 텅 빈 홀처럼 비어 있었
다. 하인들조차 없었다. 캐틀린이 연회에 참석해도 좋다고 모두 내보
냈던 것이다.

그레이트 홀의 벽은 두꺼웠지만, 정원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


리는 막아 주지 못했다. 데스몬드가 지하실에서 술통 스무 개를 내오
자, 성안 주민들은 에드무레의 귀환과 크랙에서 날아온 롭의 승리를
축하하며 맥주가 담긴 뿔잔을 높이 들어 환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사람들을 비난할 순 없지. 설령 알더라도 관심도


없겠지만. 저들은 내 아들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브랜이 두려
움을 참아 가며 자랑스럽게 말 등에 올라타는 것도, 그 아이의 웃는
모습도, 릭콘이 형들처럼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도 결코 본 적
이 없어.’

캐틀린은 앞에 놓인 저녁식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송어로 둘둘 말은


베이컨, 순무와 붉은 회향 열매와 감초로 버무린 샐러드, 완두콩과 양
파 요리, 따끈한 빵…….

맞은편에 앉은 브리엔느는 마치 완수해야 할 임무라도 되듯 꼼꼼히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난 괴팍한 여자가 되어 가고 있어. 산해진미도 맛이 없고, 음유시인


들의 노래도 즐겁지 않아. 웃는 것도 낯설기만 하고. 오직 슬픔과 씁
쓸한 외로움만이 남았을 뿐이야. 이제 내 마음엔 황량한 바람만이 불
고 있어.’

문득 브리엔느의 포크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브리엔느, 나와 함께 있으니까 따분하지? 원한다면 너도 저 축하연


에 참석해도 좋아. 술도 마시고 라이먼드의 하프소리에 맞춰 춤도 추
렴.”

“저는 흥청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부인.”


브리엔느가 커다란 손으로 검은 빵을 뜯더니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빤히 들여다보았다. 캐틀린은 브리엔느가 내켜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령이시라면…….”

“난 네가 좀더 즐겁고 활기 찬 곳에 있길 바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을 뿐이야.”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브리엔느가 빵으로 송어에 묻은 베이컨 기름을 꾹꾹 눌렀다.

“오늘 새벽에 전령조가 한 마리 도착했어.”

캐틀린은 자신이 왜 그런 얘길 하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이야기를 계


속했다.

“마에스터가 즉시 나를 깨웠지. 그로선 의무를 다하는 거겠지만 나로


선 달갑지 않았어.”

브리엔느에게 사실을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캐틀린과 마에스터 바


이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계속 그 사실을 감출
작정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쩌면 난 바보일지도 몰라. 마음속에 감춰 두기


만 한다고 사실이 거짓이 될 수는 없어. 입 밖에 내지 않는다고 진실
이 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이 모든 것이 한낱
악몽이 될까? 아, 신들이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면 얼마나 좋을
까?’

“킹스랜딩에 관한 소식입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이번 전령조는 세르 로드릭이 세르
윈의 성에서 보낸 거야.”

‘까마귀는 새까만 날개만큼이나 음울한 소식을 물고 왔지.’

“세르 로드릭은 힘닿는 데까지 병력을 모아 윈터펠로 가는 중이야.


윈터펠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편지에 따르면……, 그가 말
하길…….”

“부인, 왜 그러세요? 혹시 도련님들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캐틀린은 말이 목구멍에 걸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내겐 롭 외에는 아들이 없어.”

용케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 무서운 말을 해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사실은 기뻤다.

브리엔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캐틀린을 쳐다보았다.

“부인?”

“브랜과 릭콘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에이컨워터의 방앗간에서 붙잡


혔대. 테온 그레이조이가 윈터펠 성벽에 그 애들 머리를 타르에 묻혀
걸어 두고……. 열 살부터 나와 함께 식사를 했던 테온이…….”

‘오, 난 드디어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냈어.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전


모든 것을 기정 사실화 시켰습니다…….’

브리엔느가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뻗었지만, 캐틀린의 손 가까이에


와서 멈칫했다.

“오, 이런.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할지……. 부인, 도련님들은 지금


신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캐틀린은 캐틀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그럴까? 신들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둔 거지?


릭콘은 아직 어린애야. 왜 그 애가 그렇게 죽어야 하는 거지? 그리고
브랜은……. 내가 윈터펠을 떠나올 때 그 애는 성 위에서 떨어져 의식
불명의 상태였어. 난 그 애가 정신도 차리기 전에 떠나 왔지. 이제 난
그 아이를 아주 볼 수 없게 됐어. 그 애가 웃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캐틀린은 손을 들어 손바닥의 상처를 브리엔느에게 보였다.

“이 상처는 브랜을 암살하러 온 자객이 남긴 거야. 그때 브랜과 나는


목숨을 잃을 뻔했지. 하지만 브랜의 다이어울프가 자객의 목을 물어
뜯었어.”

캐틀린은 잠시 멈추었다.

“나는 테온이 브랜과 릭콘의 다이어울프까지 죽였을 거라 생각해. 그


렇게 해야만 했을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다이어울프들과 함께 있었
다면 브랜과 릭콘은 안전했을 거야. 그레이윈드가 항상 롭 옆에서 떠
나지 않듯이 그것들도 그랬을 거라구. 하지만 지금 내 딸들한테는 다
이어울프가 없어.”

갑작스레 바뀐 화제로 브리엔느가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아가씨들은…….”

“산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숙녀였어. 항상 예의바르고, 다른 사람


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썼지. 그 아인 용감한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어. 사람들은 그 애가 나를 닮았다고 했지만, 걘 나보다
훨씬 아름답게 자랄 거야. 브리엔느, 너도 그 애를 보면 나랑 똑같이
생각할걸. 나는 가끔 직접 산사의 머리를 빗겨 주곤 했어. 나보다 더
밝은 갈색머리가 어찌나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던지……. 횃불에 비
칠 때는 구릿빛으로 빛나는 그 머리칼……. 그리고 아리아는……, 그
아인 손님들이 마구간 소년으로 자주 착각할 정도로 천방지축이었
어. 사실 늑대새끼 같았다니까. 뭐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
고, 하루 종일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지냈지. 얼굴은 제 아버질 닮았
고, 갈색 머리칼은 항상 까치집을 지은 것 같았어. 난 아리아를 숙녀
로 만드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어. 다른 여자애들이 인형을 모을 때 그
아인 딱지를 모았어. 그 애도 어쩜 죽었을지 몰라.”
캐틀린은 거대한 손이 가슴을 쥐어짜는 듯 아팠다.

“브리엔느, 나는 저들이 모두 죽기를 원해. 테온 그레이조이, 자이메


라니스터, 세르세이 왕비, 난쟁이 티리온까지 모두 다 죽어 버렸음 좋
겠어. 하지만 내 딸들만은…… 딸애들만은…….”

“세르세이에게도 딸이 있어요. 그리고 도련님들과 비슷한 나이의 아


들들도 있고요. 이 소식을 들으면, 세르세이도 아마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내 딸들은 해치지 않고 보내 줄 거라고?”

브리엔느의 서투른 위로에 캐틀린은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구슬퍼


보였다.

“브리엔느, 너 정말 순진하구나. 나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롭은 형제들을 죽인 복수를 하려 할 거고, 그러
려면 ‘아이스’가 제격이지. 아이스는 네드가 사용하던 발리리아산 명
검이야. 너무 날카로워 난 손대기조차 두려워했었는데……. 아이스
에 비하면 롭의 칼은 두부도 못 자를 것처럼 뭉툭해 보여. 그 애가 테
온의 머리를 베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스타크 가문 사람들은 망나니를
사용하지 않고 영주가 직접 죄인을 처형하는 관습이 있어. 네드는 늘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 직접 목을 베야 한다고 말했어. 그 일을 좋아하
지 않았으면서도 말이야. 나도 그렇게 할 거야. 아무렴, 그렇게 해야
지.”

캐틀린은 상처 자국이 난 손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들었다.

“브리엔느, 나는 그에게 포도주를 보냈다.”

“포도주요?”
브리엔느가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롭에게요? 아니면 테온에게?”

“킹슬레이어에게.”

‘자이메, 난 네가 목마르길 바란다. 너무 목이 말라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있기를…….’

“네가 나와 함께 가 줬으면 좋겠구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캐틀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서 편안하게 식사를 끝내도록 해. 그리고 자정에 날 부르러 와.”

“한밤중에 말인가요?”

“지하 감옥에는 창문이 없어. 그러니 낮과 밤의 구별도 없을 거야. 그


리고 내게는 하루가 늘 한밤중이니까.”

캐틀린은 공허한 발소리만 남긴 채 방을 나갔다.

“툴리! 우리의 용감하고 젊은 새 주인을 위해 건배!”

아버지의 침실로 향하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캐틀린은 그 소리


에 속이 상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어. 내 아들들은 죽었지만 아버


지는 아직 살아 계시다구! 그리고 그분은 여전히 너희 영주야.’

캐틀린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바이만이 캐틀린을 맞았다. 호스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에 드림와인을 한잔 드렸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요.


영주님께선 부인이 여기에 와 있는 걸 모르실 겁니다.”

“괜찮아요.”

‘아버지는 살아 있다기보다는 죽어 있는 것에 가까워. 그러나 불쌍한


내 아들들에 비하면 어쨌든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지.’

“부인,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수면을 도와 주는 음료수라


도…….”

“고마워요, 마에스터. 하지만 사양하겠어요. 난 내 슬픔을 잠재우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브랜과 릭콘의 일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만
가 보세요. 가서 사람들과 어울리세요. 그 동안 제가 아버지 곁에 있
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바이만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는 호스터의 입에서 휘파람 같은 한숨소리가 희


미하게 났다. 창백하고 힘없는 한 손이 침대 끝에 걸쳐 있었지만, 만
져 보니 따뜻했다. 캐틀린은 아버지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내가 아무리 손을 꼭 붙잡아도 아버지는 계속 여기에 계실 수 없어.


아버지를 보내 드리자.’

하지만 차마 아버지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전 의논 상대가 없어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 드렸는데, 신들


은 아무 응답이 없어요.”
캐틀린은 아버지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 따뜻한 피부 밑으로 강물
처럼 파란 정맥이 가지를 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성밖에는 레드포크
와 텀블스톤 같은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영원히 흐를
테지만, 아버지의 손에 흐르는 강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곧 그 강물
은 멈출 것이었다.

“아버지, 어젯밤에 시가드에서 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리사와 제가 길


을 잃었을 때의 꿈을 꿨어요. 기억하세요? 이상한 안개가 끼여 있던
그날 우리는 일행에서 뒤처져 길을 잃었죠. 주위는 온통 회색이었고,
한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어요. 나뭇가지는 길고 비쩍 마른 팔처럼
우리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듯했어요. 리사는 비명을 지르고 저는 고
함을 쳤지만, 안개가 그 소리를 삼켜 버렸죠. 하지만 페티르는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우릴 찾아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저를 찾아 주
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젠 제가 직접 길을 찾아야 해요. 하지만
너무 어려워요. 전 스타크 가문의 가훈을 잘 알아요. ‘겨울이 오고 있
다.’ 아버지, 제게 겨울이 왔어요. 롭은 라니스터 가문뿐만 아니라 그
레이조이와도 싸워야만 해요. 무엇을 위해서죠? 왕관과 왕좌를 위해
서? 이제 땅은 충분히 피로 물들었어요. 전 제 딸들을 다시 찾고 싶어
요. 그리고 롭이 칼을 내려놓고 왈더 경의 딸과 결혼해서 아들이나 낳
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브랜과 릭콘도 되찾고 싶어요. 저
는…….”

캐틀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에요.”

캐틀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촛불이 꺼지고, 창


문 너머로 달빛이 비스듬히 비쳐 호스터의 얼굴에 옆은 은색 줄무늬
를 만들었다. 호스터의 고통스러운 숨소리, 강물로 들이치는 물소리,
정원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먼드의 노랫소리는 슬프면서도 달콤했다.


“난 가을처럼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를 사랑했지. 그녀의 머리카락에
노을이 걸려 있었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노래는 끝이 났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캐


틀린은 브리엔느가 문 앞에 나타날 때까지 아주 잠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 자정입니다.”

브리엔느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버지, 한밤중이에요. 이제 전 제 의무를 수행해야 해요.’

캐틀린은 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간수는 맥주가 든 큰 컵과 비둘기 파이를 앞에 두고 쪼그리고 앉아 있


었다. 그는 조금 취한 듯한 얼굴로 캐틀린과 브리엔느를 흘겨보았다.

“죄송합니다. 에드무레 영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장이 새겨진 편지를


갖지 않은 자는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드무레 영주님이라고? 언제 에드무레가 영주가 됐지? 그럼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단 얘긴가?”

사내가 입술을 핥았다.

“아닙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옥문을 열게. 아니면 나와 함께 아버지 방으로 가서 왜 내


명령을 거역했는지 이유를 말해야 할 거야.”

간수가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열쇠는 그의 허리 벨트에 걸려 있었다. 그는 열쇠를 찾는 내내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계속 불평을 중얼거렸다.

“가서 마시던 맥주나 더 마시게.”

캐틀린은 천장에 걸린 기름 등잔을 내려 불꽃을 크게 만들었다.

“브리엔느, 혹시 누가 오지 않는지 망을 좀 봐줘.”

브리엔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자루 끝에 손을 올린 채 감방 앞에 섰


다.

캐틀린은 나무와 쇠로 된 육중한 문을 열고 더럽고 어두운 방으로 들


어갔다. 오래된 지푸라기가 발 밑에서 부스럭거렸다. 벽은 그을림으
로 얼룩져 있었다. 벽 너머에서 텀블스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희미
하게 들렸다. 등잔불이 한쪽 구석에 놓인 내용물이 찰랑찰랑 넘치는
요강과 다른 쪽에 쌓아 놓은 배설물을 비추었다. 문 옆에 아무도 손대
지 않은 큰 포도주 병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간수가 마셔 버리지 않은 걸 감사해야겠군.’

자이메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빛을 막았다. 손목 주위에 있던


쇠사슬이 쨍그랑거렸다.

“스타크 부인? 당신을 제대로 맞이할 형편이 못 되어서 미안하군요.”

그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나를 봐요, 세르.”

“불빛 때문에 눈이 따가우니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위스퍼링우드에서 포로가 된 이후 그는 면도할 자유를 박탈당했다.


면도칼로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는 자였다.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을
덮은 모습이 세르세이와 오히려 더 닮아 보였다. 등잔불에 비친 금발
의 구레나룻이 그를 황금색 야수처럼 보이게 했다.

자이메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모습마저도 매우 위엄 있어 보였다. 오


랫동안 감지 않아 밧줄처럼 엉킨 머리칼, 몸에서 나는 악취, 창백한
얼굴, 그런데도 그의 남성미는 여전했다.

“내가 당신에게 보낸 포도주는 맛도 보지 않은 모양이죠?”

“그런 갑작스런 호의는 좀 의심스러우니까요.”

“난 언제든 당신의 목을 벨 수 있어요. 무엇 때문에 독약을 먹이는 귀


찮은 절차가 필요하겠어요?”

“독살은 목을 자른 것보다 훨씬 자연사처럼 보이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양이 같은 초록색 눈이 차츰 빛에 익숙해지


는 듯했다.

“앉으실 수 있도록 의자라도 내드렸으면 좋겠지만, 당신 동생이 준비


를 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군요.”

“난 서 있어도 상관없어요.”

“정말입니까? 아주 힘들어 보이는데……. 어쩌면 등불 탓일지도 모


르겠군요.”

수갑과 족쇄 끝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자이메는 일어서지도, 그렇다


고 편히 누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족쇄는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떠십니까? 제 수갑이 무거워 보이시나요? 아니면 좀더 무거운 걸


얹었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이것들을 예쁘게 짤랑거려 보
일 수도 있습니다만…….”
“자업자득이에요. 우린 당신에게 당신의 신분에 적합한 안락함을 허
락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우리의 호의를 배반했죠.”

“감방은 어디든 마찬가지죠. 사실 캐스틀리 록의 지하 감옥에 비하면


이곳은 햇빛이 잘 드는 정원이랄 수 있습니다. 기회가 생기면 언제 거
길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금 겁을 먹고 있는 거라면 잘도 숨기고 있군.’

“손발이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은 혀를 좀더 부드럽게 놀려야 할 거


예요. 난 당신에게 협박이나 당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게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오신 거로군


요? 하긴 과부들이 수절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킹스가드들은 결코 결
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원하신다면 봉사해 드릴 수도 있죠. 포
도주를 한 잔 따라 주고 가운을 벗으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죠.”

캐틀린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자이메를 쳐다보았다.

‘자이메처럼 아름다우면서 역겨운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내 아들이 듣는 데서 그런 말을 했다면, 당신은 즉시 그 아이에게 죽


음을 당했을 거예요.”

“내가 이 상태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자이메가 쇠사슬을 짤랑거렸다.

“하지만 일대일이라면? 롭이 내 상대가 되지 않음을 우린 둘 다 알고


있지요.”

“롭이 어릴지 몰라도 그 애를 바보 취급하면 큰코다칠 거예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병사를 거느렸을 때에도 그다지 신속하게 도전장을
내밀진 않은 것 같은데요.”
“윈터펠의 늙은 왕들이 어머니 치마 뒤에 숨어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
던 탓이 아닐까요?”

캐틀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싸움은 더 하고 싶지 않군요. 난 지금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


이 있어요.”

“뭘 궁금해하는지 몰라도, 내가 왜 당신의 물음에 친절히 대답해야


합니까?”

“당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요.”

“당신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시오?”

자이메가 비웃듯 말했다.

“그래야만 할걸요. 신들이 공평하시다면 당신의 죄는 일곱 지옥의 가


장 깊고 고통스러운 곳에 갈 만하니까요.”

“어떤 신들 말입니까? 당신 남편이 기도하던 그 나무? 하지만 내 누


이가 그의 머리를 자를 때 그 나무들은 어떤 식으로 그를 돌봤죠?”

자이메가 키득거렸다.

“부인, 신들이 있다면 왜 세상이 고통과 부정으로 가득 차 있겠습니


까?”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이죠.”

“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만 있을 뿐이지.”

‘오만하고 불손하고 무모한 용기밖에 없는 자. 난 지금 이자와 함께


호흡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야. 이자를 위한 명예의 불꽃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죽음일 거야.’
“정 얘기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죠. 포도주는 마시든 그 속에 오줌을
누든 마음대로 하세요.”

캐틀린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스타크 부인.”

문을 열다 말고 캐틀린은 뒤돌아 섰다.

“습기 때문에 모든 물건들이 녹이 슬고 있죠. 심지어 당신의 예의까


지도. 묻는 말에 대해 대답해 주겠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당신은 포로의 몸이에요.”

“당신이 질문에 대답해 주면 당신도 내 질문에 대답해 줘야 합니다.”

“진실만 얘기한다면.”

“진실을 바란다면 미리 말해 둬야겠군요. 티리온 말이, 사람들은 종


종 진실을 원하지만 정작 진실이 나오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걱정 마세요. 난 당신이 진실을 말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어요. 자신도 있고요.”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요. 그 전에 포도주 좀 주시겠습니까? 지금


난 몹시 목이 마르거든요.”

캐틀린은 등잔불을 천장에 매달린 고리에 걸고 포도주 병과 잔을 자


이메 옆에 놓았다. 자이메가 마시기 전에 포도주로 입술을 축였다.

“시고 형편없구만. 하지만 그냥 마시리다.”

그가 벽에 기대고 앉아 다리를 가슴 쪽으로 당기고는 캐틀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 첫번째 질문은 뭐지요?”

게임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몰라도, 캐틀린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로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조프리의 아버지인가요?”

“답을 모른다면 결코 질문하지 않을 질문이군.”

“당신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길 원해요.”

자이메가 어깨를 움츠렸다.

“조프리는 나의 아들입니다. 세르세이가 낳은 다른 자식들과 마찬가


지로.”

“그럼 친누이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요?”

“난 항상 내 누이를 사랑했어요. 자, 이제 당신이 내게 답변을 해줘야


겠군요. 우리 집안 사람들은 아직 다 살아 있습니까?”

“세르 스태퍼드는 옥스크로스에서 전사했다고 들었어요.”

자이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걱정하는 사람은 세르세이와 티리온, 그리고 우리 아버지요.”

“그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어요.”

자이메가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자, 그럼 다음 질문을 하시죠.”

캐틀린은 그가 다음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지 의심스러웠다.

“내 아들 브랜은 어떻게 성에서 떨어지게 되었죠?”


“내가 창문에서 떨어뜨렸소.”

너무 쉽게 나온 답에 캐틀린은 할말을 잊었다. 손에 검이 있었다면 당


장에 그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곧 딸들 생각이 나면서 목이 따끔거
렸다.

“당신은 약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로 맹세했던 기사예요.”

“물론 그 애는 충분히 약했지요. 하지만 무고하진 않았어요. 우리를


염탐했으니까.”

“브랜은 염탐 같은 짓은 안 해요.”

“그렇다면 당신의 소중한 신들이나 비난하시죠. 대체 누가 브랜을 그


창문에 데려다 놓고, 그 애가 원하지 않은 걸 보게 만들었는지 말입니
다.”

“신을 원망하라구요?”

정말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캐틀린은 질문을 계속했다.

“그 아일 그 높은 곳에서 밀었다면 죽일 작정이었나요?”

쇠사슬이 가볍게 짤랑거렸다.

“물론 장난 삼아 그 아일 탑에서 떨어뜨리진 않았죠. 그래요, 난 그


애를 죽일 작정으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브랜이 죽지 않자, 위험에 처할까 봐 자객을 보냈군요? 브랜


을 아예 저세상으로 보내려구요.”

“내가 자객을?”

자이메가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 포도주를 길게 한 모금 마셨다.


“내가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얘기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밤낮
으로 당신이 그 애와 함께 있고, 에다드 경과 마에스터, 경호원, 심지
어 늑대들까지 그 애를 지키고 있는데, 자객 하나로 그 애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겠소? 그리고 며칠 지나면 알아서 죽을 것 같은 아이
때문에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지금 이 얘기가 거짓말이라면 당신과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어요.”

캐틀린은 그때 생긴 상처를 보여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 자객이 내게 이런 상처를 남겼지요. 당신이 이 일에 가담하지 않


았다고 맹세할 수 있나요?”

“라니스터 가문의 명예를 걸고…….”

“라니스터 가문을 걸고 하는 맹세는 이것보다 못해요.”

캐틀린은 배설물이 들어 있는 양동이를 발로 찼다. 구린내가 나는 갈


색 분뇨가 감옥 바닥에 엎질러졌다.

자이메가 오물을 피해 쇠사슬이 허락하는 한 멀리 몸을 움직였다.

“내가 가문의 명예를 위해 똥을 먹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난 청부 살


인 따윈 하지 않아요.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부인. 하지만 내가 만일
브랜을 죽이려 했다면 직접 나섰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당신 누이 짓이었겠군?”

“그렇진 않을 겁니다. 세르세이와 나 사이에는 비밀이 존재하지 않으


니까.”

“그렇다면 티리온의 짓일 수도 있죠.”


“티리온? 그 아인 브랜만큼이나 순진합니다. 창문을 기웃거리며 염
탐하는 짓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면 왜 그 자객이 티리온의 단검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단검? 어떤 단검 말입니까?”

“꽤 길었어요.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아주 고급품이었고요. 발리리아


산 강철로 만든 칼날에 용골 칼자루가 붙어 있었죠. 티리온이 조프리
의 네임데이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마상시합에서 바엘리시 경과 내
기를 해 받은 것이죠.”

자이메가 연거푸 포도주를 몇 잔 마시더니 한참 동안 잔을 들여다보


았다.

“이 포도주는 마실 때마다 맛이 좋아지는 것 같군요. 상상해 보세요.


부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제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었다
고 하던가요?”

“당신이 꽃의 기사와 맞붙었을 때 당신이 이기는 쪽에 내기를 했죠.”

하지만 이내 반대로 얘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꽃의 기사가 이기는 쪽이었던가?”

“아니, 티리온은 항상 내가 이기는 쪽에 내기를 겁니다. 하지만 그날


세르 로라스는 나를 이겼지요. 내가 그 소년을 너무 우습게 생각해서
방심한 탓이었죠.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죠? 어쨌든 그날 티리온은
내기에 졌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단검은……, 아, 이제야 생각이 나는
군요. 로버트 왕이 그날 밤 내게 보여 준 단검 같군. 로버트왕은 내 상
처에 소금이라도 뿌리듯 그걸 보이며 날 약올렸죠. 왕은 술만 마시면
날 괴롭히려고 들었지요. 하긴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가 없었지
만…….”
티리온도 달의 산을 지날 때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캐틀린은 그때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리틀핑거를 믿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던 페티르, 나를 너무 사랑해 결투까


지 했던 그……. 하지만 티리온은 자이메와 같은 얘기를 했어.’

캐틀린은 혼란스러웠다. 자이메와 티리온은 윈터펠을 떠난 이후 지


금까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날 속일 생각인가요?”

무엇인가 함정이 있을 것이었다.

“난 당신의 소중한 아들을 창 밖으로 밀어 버렸다는 사실도 인정했어


요. 그런 마당에 단검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고 내가 얻을 게 뭐가 있
겠습니까?”

그가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마음대로 하시죠. 난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으니


까. 자, 그럼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롑니다. 로버트 왕의 형제들은 전투
를 시작했습니까?”

“네.”

“대답이 너무 짧아요.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죠. 그렇지 않으면


내 답변도 짧아질 겁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자세히 얘기해 주기로 했다.

“스타니스 경은 킹스랜딩을 향해 진군하고 있어요. 렌리는 죽었구요.


비터브리지에서 스타니스한테 살해되었어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의 힘으로요.”
“오, 거참 유감이군요. 스타니스보다는 렌리를 더 좋아했는데 말입니
다. 그럼 당신 가문에선 어느 편을 들었습니까?”

“처음에는 렌리 편을 들었지만……, 지금은 뭐라고 얘기할 수 없어


요.”

“당신 아들이 외롭겠군요.”

“롭은 며칠 전 열여섯 살이 되었어요. 이제 성인이고, 한 나라의 왕이


죠. 그 애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우리가 들은 마지막 승전보는
크랙에서 울렸죠.”

“롭이 아직 우리 아버지와 대적하진 않았겠죠?”

“그럼 당신 아버지도 이길 거예요, 당신을 이긴 것처럼.”

“난 당신 아들이 쓴 비겁한 속임수 때문에 진 겁니다.”

“방금 속임수라고 했나요? 당신 남동생은 우리에게 사절단으로 위장


한 살인자를 보냈어요. 평화 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말이에요.”

“만일 이 감옥에 당신 아들이 있다면 그 형제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


을까요?”

‘내 아들은 이제 형제가 없어.’

캐틀린은 속으로 울먹였다. 하지만 자이메 같은 자하고는 아픔을 함


께 나누고 싶지 않았다.

자이메가 포도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형제의 생명이 위태로운 마당에 명예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게다


가 티리온은 당신 아들이 날 결코 석방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눈치챌
정도로 영리한 아이죠.”
캐틀린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롭의 부하들은 당신이 죽는 것을 보고 싶어해요. 특히 릭카드 경이


그렇죠. 위스퍼링우드에서 두 아들이 다 당신 칼에 죽었으니까요.”

“햇살 모양의 문장을 달고 있던 둘?”

자이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난 당신의 아들이 목표였지요. 그런데 엉뚱한 자들이 끼여들


었죠. 어쨌거나 그들이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전사하는 데 내가 한몫
했지요. 다른 기사였더라도 그 상황엔 그렇게 했을 겁니다.”

“맹세를 모두 저버렸으면서도 어떻게 아직도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


할 수 있죠?”

자이메가 또 한 번 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

“그 많던 맹세들……. 그래요, 난 맹세하고 또 맹세했죠. 왕에게 복종


하라, 왕의 비밀을 지켜라, 왕의 명령을 수행하라, 아버지에게 순종하
라, 여동생을 사랑하라, 여동생의 순결을 보호하라, 약한 자를 보호하
라, 신을 존경하라, 법에 복종하라……. 정말 너무나 많은 맹세들이
죠. 그러니 누구든 한두 가지 맹세는 저버릴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
니까?”

자이메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난 킹스가드 중에서 가장 젊었어요.”

“그리고 킹스가드의 맹약을 모두 배반한 가장 젊은 기사였죠. 킹슬레


이어였으니까.”
“킹슬레이어라……. 하지만 내가 살해한 왕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인
물이었어요.”

그가 잔을 들었다.

“축배를 들어야겠어요. 아에리스 2세, 세븐킹덤의 군주이자 세븐킹


덤의 수호자였던 아에리스 타르가르옌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목을
떨어뜨린 자랑스런 나의 검을 위하여! 황금으로 만든 내 검을 당신도
알겠군요. 그의 피가 황금색 검날을 빨갛게 물들이며 흘러내렸죠. 노
랑과 빨강, 그게 라니스터 가문의 색깔이죠.”

그러고는 자이메가 싱글싱글 웃었다. 캐틀린은 포도주의 효과가 나


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술병은 거의 바닥을 보였고, 자이메는
취해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만 그 일을 자랑스러워하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 이제 내 질문에 답해


주시죠, 스타크 부인. 에다드 경이 당신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다고 얘기했습니까? 그리고 형의 죽음에 대해서는요?”

“그들은 브랜든을 그의 아버지가 지켜보는 데서 목 졸라 죽였어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그렇게 죽였고요.”

16년이나 지난 불쾌한 얘기였다. 캐틀린은 자이메가 왜 지금 그 얘길


묻는지 궁금했다.

“교살당했다? 어떤 식으로요?”

“밧줄을 썼겠죠.”

자이메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입을 닦았다.


“에다드 경이 당신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나 본데, 하긴 당연하죠.
당신이 처녀는 아니지만 사랑스런 새 신부였을 테니까. 자, 진실을 원
하십니까? 그럼 물어 보시죠. 우린 지금 거래를 했고, 난 무엇이든 솔
직하게 대답할 겁니다. 물어 보세요.”

“이미 끝난 죽음이에요.”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브랜든은 에다드 경과 달랐지요. 안 그렇습니까? 에다드 경과 달리


브랜든의 피는 뜨거웠지요. 나보다 더.”

“브랜든은 당신과는 전혀 달라요.”

“맘대로 생각하시죠. 아무튼 그 무렵 브랜든은 부인과 결혼할 사이였


지요.”

“네, 그는 리버룬으로 오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났건만 그 얘기를 할 때면 여전히 목이 메었다.

“그런데 오다가 리안나 소식을 듣고 바로 말머리를 킹스랜딩으로 돌


렸죠. 정말 성급한 행동이었어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호스터는 무척이나 화를 내며 ‘용감함 바보’라


고 불렀다.

자이메가 마지막 남은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브랜든은 몇 사람들과 함께 레드킵으로 가서는 ‘라예가르 왕자는 나


와서 내 칼을 받아라’라고 소리를 질렀죠. 하지만 그때 라예가르는 성
에 없었어요. 아에리스 왕은 병사들을 보내 ‘왕세자를 죽으려한 반역
자’라는 죄목으로 그들을 모두 체포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역시 영주
들의 아들들이었죠.”
“그 중 에단 글로버는 브랜든의 스콰이어였어요. 그가 그때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제포리 말리스터, 카일 로이스, 그
리고 존 아린의 조카이자 상속자였던 알버트 아린이었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이름들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


로도 뜻밖이었다.

“아에리스는 그들을 반역죄로 체포하고, 그들을 인질로 아버지들을


소환했어요. 그리고 아버지들이 왔을 때 재판도 열지 않고 죽여 버렸
죠.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를 모두.”

캐틀린은 알고 있는 사실을 조목조목 얘기했다. 하지만 자이메가 고


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종의 재판이 열리긴 했었죠. 리카드 경은 재판으로 결투를 요구했


고, 왕은 그 요구를 승낙했어요. 리카드 경은 킹스가드 중 하나와 결
투를 벌일 거라 예상하고 갑옷으로 무장을 했죠. 아마 나와 결투할 거
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리카드 경을 왕실로 데려가 서
까래에 매달아 놓고 점술가 둘에게 밑에서 불을 피우게 했지요. 왕은
그 불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챔피언’이라면서 결백을 입증하려면 불
에 타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했지요.”

자이메가 말을 멈추고 웃음 띤 얼굴로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에리스는 불이 한참 타고 있을 때 브랜든을 안으로 데려왔죠. 등


뒤로 손을 묶고, 목에는 젖은 가죽끈을 걸게 하고요. 하지만 다리는
묶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두었죠. 그리고 그의 롱소드는 그가 닿을 만
한 곳에 있었어요. 점술가들이 부채질을 하며 리카드 경을 천천히 구
웠죠. 제일 먼저 망토에 불이 붙었고, 그 다음엔 튜닉, 결국엔 갑옷 외
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꼴이 되었죠. 그리고 다음으로 몸이 조금씩
불타고 있었죠. 아에리스는 브랜든에게 아버지를 서까래에서 내리지
못하면 불에 완전히 탈 거라고 얘기했죠. 브랜든은 노력했지만 몸부
림칠수록 젖은 가죽끈이 더욱 목을 죄어 올 뿐이었어요. 결국 그렇게
브랜든은 목 졸려 죽은 거죠. 그리고 리카드 경의 갑옷은 체리처럼 빨
갛게 달아올랐고, 금장식도 녹아 불 속으로 떨어졌죠. 나는 하얀 망토
를 걸치고 아이언스론 아래쪽에 서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세르세
이 생각뿐이었어요. 나중에 제롤드 하이타니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너는 왕을 심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고 얘
기하더군요. 그가 바로 끝까지 왕에게 충성을 다했고, 세상 사람들이
나보다 나은 인물이라고 인정하는 화이트불이죠.”

“아에리스…….”

캐틀린은 목으로 올라오는 쓴 물을 삼켰다. 너무나 소름 끼쳐서 정말


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요, 아에리스 왕은 미쳤어요. 왕국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죠.


하지만 당신이 브랜든의 복수를 위해 그를 죽였다고 주장할 생각이
라면…….”

“난 그런 얘기 한 적 없습니다. 스타크 가문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


어요. 단지 올바른 행동 때문에 내가 욕을 먹게 된 것이 의아할 뿐이
란 얘깁니다. 로버트 왕의 즉위식 때, 나는 그랜드 마에스터 피세르와
거세를 당한 바리스와 함께 왕좌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그리고
왕은 신하로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했고요. 에다드
경은 아에리스를 죽인 내 손에 키스를 해야 마땅했어요. 하지만 그는
먼저 왕좌에 앉아 있던 내 엉덩이만 경멸하더군요. 내 생각에 에다드
경은 형이나 아버지, 심지어 당신보다도 로버트 왕을 더 사랑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로버트 왕한테는 절대적으로 성실했으니까요. 안 그
렇습니까?”

자이메가 술에 취해 한 번 더 히죽 웃었다.

“스타크 부인, 세상일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뇨, 난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킹슬레이어.”

“킹슬레이어……. 난 당신을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리틀핑거가 당신


을 먼저 가졌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난 결코 다른 사람이 먼저 먹
은 음식은 먹지 않아요. 게다가 당신은 내 여동생의 반도 매력적이지
않죠.”

그리고 갑자기 정색을 했다.

“난 세르세이말고 다른 여자하고는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난 당신의 남편보다 더 성실하지 않습니까? 가엾게
도 이제는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에다드 경 말입니다. 난 적어도
서자는 없지요. 참, 한 가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 서자의 이름이
뭐였죠?”

캐틀린은 뒤로 한 걸음 물러갔다.

“브리엔느!”

“아니오, 그 이름은 아니었어요.”

자이메가 포도주 병을 거꾸로 들었다. 피처럼 빨간 물방울이 그의 얼


굴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스노우였죠. 정말 하얀 이름이에요. 우리가 킹스가드의 맹세를 하고


받은 망토만큼이나.”

브리엔느가 문을 밀치고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 부르셨어요.”

“네 검을 줘.”

캐틀린은 손을 뻗었다.
테온

하늘은 구름이 가득해 어두웠고 숲은 죽은 듯이 얼어붙어 있었다. 나


무뿌리들이 전력 질주하는 테온의 발목을 잡아챘고, 앙상한 가지들
이 얼굴에 부딪혀 뺨에 가느다란 핏자국을 남겼다. 테온은 머리 위로
길쭉이 매달린 고드름을 피할 겨를도 없이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피가 굳는 듯했다.

‘자비를…… 자비를…… 자비를…….’

그는 흐느껴 울었다. 어깨 너머로 힐끗 돌아보니 아이들의 머리를 한,


말처럼 거대한 늑대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오! 자비를…… 자비를…….’

입 안에 검은 피가 가득 고여 땅에 뱉었더니 눈 위에 불타는 듯한 시
뻘건 구멍이 생겼다. 놈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테온은 더 속도를 높이고 싶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 얼굴


을 한 나무들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비웃음소리는 산 속 깊이 울려
퍼졌다. 뒤쪽에서 짐승들의 뜨거운 입김과 유황 냄새, 썩은 악취가 풍
겨 왔다.

‘그들은 죽었어. 죽었다고! 죽은 모습도 봤고, 타르에 머리통을 담그


는 것도 내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어!’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신음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때 누군


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다.

테온은 잠결에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단검을 잡으려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웩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뒤로 리크가 보였다. 그
의 얼굴은 손에 든 양초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네가 왜 내 방에 들어와 있는 거야!”


테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자님, 공주님께서 윈터펠에 도착하셨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보고


하라고 하셔서…….”

“아, 그래. 그랬었지.”

테온은 뒷머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아샤의 출현이 왠지


꺼림칙했다.

‘자비를…….’

문득 창 밖을 내다보았다. 여명이 이제 막 윈터펠의 탑에 내려앉고 있


었다.

“누나는 어디에 있지?”

“블랙 로렌이 아침식사를 대접하러 공주님과 병사들을 이끌고 홀로


갔습니다. 지금 공주님을 만나시겠습니까?”

“그러지.”

테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벽난로에는 아직 불기가 남아 있었


다.

“웩스, 뜨거운 물을 가져와라.”

아샤에게 땀으로 흠뻑 젖은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머리를 한 늑대들이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방이 꿈속의 숲처럼 추웠다.

“창문을 닫아라.”
요즘 그가 꾸는 꿈은 갈수록 더 섬뜩해졌다. 지난밤에는 방앗간에 홀
로 남겨진 꿈을 꾸었다. 뻣뻣하게 굳은 시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반
쯤 언 손으로 옷을 입히고 있었는데, 시체가 아주 음산하게 저항하는
것 같았다. 반바지를 끌어올려 입히고, 굳어서 굽혀지지 않는 다리에
가죽 부츠를 신겼다. 그리고 허리에 한 뼘 정도 되는 가죽 벨트를 두
르고 장식용 단추를 달았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어. 그들이 내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어.’

그는 옷을 입히면서 시체들에게 중얼거렸다. 한데 시체들이 왠지 점


점 더 차갑고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전날에는 방앗간 여자가 꿈에 나타났다. 이름은 잊었지만 육체는


기억하는 여자, 젖가슴이 베개처럼 부드럽고 배에 그가 할퀸 자국이
있는 여자……. 한데 꿈에 그 여자와 또다시 함께 누워 있었다. 여자
는 날카롭게 튀어나온 이로 그의 남성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저 여잔 죽었어.’

테온에게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는 동안 겔마르가 도끼로 내리쳤던


것이다.

‘제발 나를 내버려둬. 너를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 겔마르였어. 그


리고 그도 죽었다구!’

테온의 잠을 방해하지 않는 사람은 겔마르뿐이었다.

테온은 웩스가 물을 가져올 때까지 꿈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


제는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그는 애써 잠 기운을 떨어내고 얼굴을
씻은 뒤 옷을 입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샤는 그를 너무 오랫동
안 기다리게 했으니 이제는 기다려 볼 차례였다.

테온은 검은색에 황금색 줄무늬가 있는 새틴 튜닉과 은빛 매듭이 달


린 세련된 가죽 조끼를 선택했다. 하지만 문득 아샤가 여성의 아름다
움을 가꾸기보다 병력을 기르는 데 더 집중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
쳤다.

‘제기랄.’

그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다시 펠트로 된 검은 튜닉과 사슬


갑옷을 입었다. 아이언 섬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식사
하던 날 받았던 수모를 떠올리며 롱소드와 단검을 허리에 찼다.

‘흥, 나보고 사랑스런 젖먹이 아기라구! 봐, 이제 내게는 검이 있어.


나는 그걸 쓸 줄도 알고.’

마지막으로 손가락처럼 가는 띠에 검은 다이아몬드와 금붙이가 달린


왕관을 머리에 썼다. 흉물스러운 왕자관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미켄은 죽었고, 신참 대장장이는 못이나 말발굽 정도만 겨우
만들 줄 아는 초보였다. 왕자관이 신분을 보여 주기 위한 장식물에 불
과하고, 왕위에 오르면 훨씬 더 멋진 왕관을 가질 수 있단 생각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문밖에서 우르젠과 크롬, 리크가 기다리고 있다가 테온을 호위하고


홀로 내려갔다. 요즘 테온은 어디를 가든 호위병을 대동하고 다녔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윈터펠 사람들은 그를 저주했다. 에이컨워터에서 돌아온 그날, 겔마


르가 한밤중에 계단에서 굴러 등이 부러졌고, 다음날엔 아가르가 입
이 귀까지 찢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레드노즈는 너무 겁을 먹어 포
도주도 사양하고 외양간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잠자
리로 다가올 때를 대비해 개를 곁에 두고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개 짖는 소리에 모두 잠에서 깼다. 개는 우물 주위를 맴돌며 으르렁대
고 있었다. 놀랍게도 우물 안에는 레드노즈가 익사한 채 둥둥 떠 있었
다.
계속되는 살인을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어, 테온은 사냥개 사육사인
파렌을 재판대에 세우고 유죄를 명한 다음 사형 판결을 내렸다.

“나의 주인이셨던 에다드 경은 직접 처형을 하셨지요.”

파렌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렇게 얘기했고, 그 바람에 테온은 직접 처


형까지 해야 했다. 액스를 손에 들고 파렌을 바라보는데 손이 땀에 젖
어 손잡이가 자꾸 미끄러졌다. 그날 테온은 액스를 세 번이나 휘두른
후에야 파렌의 목을 자를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테온은 파렌과 함께 사냥하고 벌꿀 술을 나누어 마시


던 시절의 기억으로 시달렸다.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좀더 깨끗하게 죽이지 못한 것은


마음에 걸렸다.

‘에다드는 항상 단 한 번으로 끝을 냈었는데…….’

파렌이 죽자 의문사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경


계를 늦추지 않았다. 블랙 로렌이 그러한 병사들의 불안을 테온에게
보고했다.

“전투 시에는 어떤 적도 두려울 게 없지만, 적군의 본거지에서 그들


과 함께 지내려니 피가 마릅니다. 하녀가 우리를 위해 방을 치우는 건
지 죽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건지 어찌 알겠습니까. 시종이 컵에
맥주를 따르는 건지 독을 따르는 건지도 알 수 없고요. 아무래도 이곳
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테온은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윈터펠의 왕자다. 이곳이 바로 나의 자리라구. 아무도 나를 여


기에서 내쫓을 수는 없어!”
‘아샤, 이건 아샤 짓이야. 빌어먹을 누나 같으니라고! 누가 그 여우같
은 여자를 난도질이라도 했음 좋겠군!’

테온은 아샤가 상속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동생이 죽기를 바라


고 있다고 믿었다.

아샤는 윈터펠의 영주 자리에 앉아 닭고기를 찢고 있었다. 홀에서는


아샤의 병사들과 테온의 병사들이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테온의 등장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지?”

테온은 리크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부분 테온의 병사들이고, 아샤의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윈터펠의 그레이트 홀은 그 수의 열
배가 넘는 인원도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게 전붑니다, 왕자님.”

테온은 눈을 치켜 떴다.

“이게 전부라고? 누나가 데려온 병사가 몇이나 되는데?”

“제가 알기로는 스물입니다.”

테온은 꼴사납게 누워 있는 누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샤가


병사 하나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다가 동생을 보자 웃음을 그쳤다. 그
리고 홀 안을 어슬렁거리는 개들에게 뼈다귀를 하나 던져 주었다.

“윈터펠의 왕자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매부리코 아래로 아샤의 큰 입이 비틀려졌다.

“아니면 바보들의 왕자님이신가?”


“질투가 누나를 천박하게 만드는군.”

아샤가 피식 웃으며 기름 묻은 손가락을 쭉쭉 빨았다. 검은머리가 흘


러내려 눈을 가렸다. 아샤의 병사들이 빵과 베이컨을 더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시끄럽군.’

“질투라고 했니, 테온?”

“그게 아니면? 나는 병사 서른 명으로 윈터펠을 함락시켰어. 누나라


면 병사 천을 데리고 가도 딥우드모트를 손에 넣으려면 최소한 한 달
은 싸워야 할걸.”

“아무렴, 나는 너처럼 위대한 전사가 아니니까.”

아샤가 뿔잔에 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손등으로 입을 쓱 닦


았다.

“성문에 머리가 둘 달렸더구나. 그래, 네게 격렬한 전투를 치르게 한


쪽이 누구지? 불구 소년, 아니면 어린 꼬마?”

테온은 얼굴로 피가 확 쏠리는 기분이었다. 성벽 위에 달린 브랜과 릭


콘의 머리만 생각하면 마음이 침울해졌다. 성 앞에 세워 놓은 목 없는
아이들의 몸을 생각해도 그랬다. 두 아이의 시체를 성 앞에 전시해 놓
은 날, 낸 할멈은 합죽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렌은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리며
테온에게 달려들다가 우르젠과 콸에게 진창 맞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파리가 시꺼멓게 앉은 시체를 바라볼 때마다 테온은 치욕감이 밀려


들었다.
언젠가 루윈이 찾아와 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두 소년의 머리를 다
시 어깨에 붙여, 다른 스타크 가문 사람들처럼 지하 납골당에 안치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안 돼. 지하 납골당은 안 돼.”

“두 도련님은 이제 더 이상 왕자님에게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리고 그곳이 두 도련님들이 있어야 할 곳이구요. 스타크 가문 사람들
의 뼈가 모두 묻혀 있는 곳인…….”

“어쨌든 안 돼!”

테온은 그 다음날 성벽에 매단 머리는 놔두고 시신은 유품과 함께 태


우라고 명령했다. 화장이 끝난 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재 속에서
녹다 만 은조각과 깨진 흑옥, 다이어울프 머리 모양의 브리치들을 그
러모았다. 그리고 조용히 일을 처리했다.

“누나, 난 브랜과 릭콘에게 관대하게 대했어. 그들이 불행을 자초한


거야.”

“물론 그렇겠지, 귀여운 내 동생.”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병사 스무 명밖에 지원해 주지 못하는 주제에 내게 윈터펠을


잘 지키길 바랄 수 있어?”

“열 명이야. 반은 나와 함께 돌아갈 거거든. 설마 누나가 호위병도 없


이 깊은 숲 속에서 위험에 빠지길 바라진 않겠지? 안 그래? 거기엔
밤이면 숲 속을 배회하는 늑대들이 있다더라.”

아샤가 커다란 돌 의자에서 몸을 펴고 일어났다.

“자, 좀더 개인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길까?”


테온은 화가 치밀었지만 누나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뒤
늦게나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홀에 오지 말아야 했는데……. 누나를 내가 있는 곳으로 불렀어야 했


어.’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테온은 아샤를 에다드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불길이 완전히 사


그라진 벽난로 앞에서 불쑥 얘기를 꺼냈다.

“다그머는 토르헨에서 패했어.”

아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윈터펠의 그 늙은 기사가 다그머의 방패를 부숴 버렸지. 대체


뭘 기대했었니? 세르 로드릭은 북부의 땅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
이고, 다그머는 그와는 정반대야. 게다가 북부인들은 대부분 말을 타
고 있는데, 아이언 사람들은 무장한 말을 막아낼 훈련조차 받은 적이
없어. 다그머는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거야. 지
금 그는 생존자를 이끌고 스톤니로 되돌아가고 있어.”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테온은 기분이 상했다.

“나도 알아. 레오발드 톨하트는 그 승리로 용기를 내어 성안에서 나


와 세르 로드릭과 합류했어. 얼마 전에 맨더리 경이 기사들과 전투마,
무기를 배 열두 척에 싣고 강 상류로 갔다는 보고를 받았어. 움버 가
문도 라스트 강 너머에 집합해 있다며? 달이 바뀌기 전에 난 윈터펠
의 성문 앞에 군대를 배치해야 하는데 누나는 고작 병사 열 명만을 내
게 데려왔어!”

“난 네게 병력 지원을 해줄 필요가 없었어.”


“내가 명령했는데도…….”

“아버지는 딥우드모트를 손에 넣으라고 명령하셨어. 그리고 너를 구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지.”

“빌어먹을 딥우드모트! 그곳은 언덕 위에 버려진, 나무로 만든 오줌


통에 불과해. 북부의 요충지는 윈터펠이야. 그런데 내가 수비대도 없
이 어떻게 윈터펠을 지킬 수 있겠어?”

“그건 이 성을 함락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 뒀어야지. 아, 물론 훌륭한


성과이긴 했지. 하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두 소공자
를 파이크에 인질로 보냈어야 했어. 그렇게 했으면 일이 한결 쉬워졌
을 거라구.”

“나의 승리가 배가 아픈 모양이지?”

“네 승리는 네 머릿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야. 크라겐은 바다에서 일어


나야 해. 늑대들과 지내느라 그 사실을 잊은 거니? 우리의 힘은 바다
에 떠 있는 롱십 안에 있어. 롱십에선 필요하면 언제든지 물자와 새로
운 사람들을 공급받을 수 있지만, 윈터펠은 달라. 이곳은 바다에서 수
백 미터나 떨어진데다, 숲과 언덕과 수많은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
십 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너의 적이야. 넌 실수한 거
야. 네가 성문에 아이들의 머리를 매달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어야 했
는데…….”

아샤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지? 그 아이들을…….”

“걔들은 내게 반항했어! 그리고 피의 대가는 피로 갚아야 해. 난 에다


드의 두 아들을 죽임으로써 로드릭 형과 마론 형의 복수를 한 거라
구.”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지만, 그렇게 얘기하면
아버지도 인정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내 형제들의 영혼이 쉴 수 있도록 해준 거야.”

“우리들의 형제지.”

아샤가 테온의 주장에 적당히 양념을 치며 말을 이었다.

“네가 파이크에서 그들의 영혼을 데려온 거니? 나는 그들이 아버지


한테만 나타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언제쯤 여자들은 남자들의 복수심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발론은 윈터펠이란 선물을 기뻐하지 않는다 해도, 테온이 형제들의


복수를 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 줄 것이었다.

아샤가 큰 소리로 테온을 비웃었다.

“그럼 세르 로드릭도 당연히 그러한 남성의 복수심에 불타겠지. 어떻


게 생각해? 테온, 넌 내 혈육이야.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와 함께 딥
우드모트로 가자. 윈터펠에는 횃불만 남겨 놓고, 후퇴할 수 있을 때
후퇴하자구.”

테온은 왕관을 고쳐 쓰며 눈을 부라렸다.

“안 돼. 난 내가 빼앗은 이 성을 잘 지킬 거야.”

아샤가 말없이 동생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말이야. 어리


석은 생각 좀 그만 하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여자 주제에 어떻게 그
런 말을 할 수 있겠니?”

아샤가 방문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참, 한 가지만 더. 테온, 네가 쓰고 있는 그거, 여태껏 내가 본 것 중
에 가장 보기 흉한 왕관이다. 네가 직접 만든 거니?”

아샤는 테온의 속을 잔뜩 긁어 놓고는, 말에게 먹이를 먹일 최소한의


시간만 보내고 난 뒤 곧바로 떠났다. 이미 말한 대로 데려온 병사 중
절반을 데리고. 그들은 브랜과 릭콘이 도망갈 때처럼 헌터게이트를
통해 성을 빠져나갔다.

테온은 성벽 위에서 그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개 속으


로 사라지는 아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나의 말을 듣지 않은 게 후
회되었다.

“가 버린 건가요?”

언제 왔는지 리크가 옆으로 와서 물었다. 발소리도, 체취도 느끼지 못


한 터였다.

테온은 성안을 활보하고 다니는 리크를 보는 게 고역이었다. 모든 사


실을 알고 있는 그가 꼴도 보기 싫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인 후에 이자도 죽여야 했는데…….’

보기와 달리 리크는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리고 그와 나눈 대화를 비


밀로 할 정도의 눈치도 있었다.

“왕자님, 무례한 얘기지만 우린 공주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윈터펠


을 지켜 나가려면 병사 열 명이 충원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
다.”

“나도 안다.”

‘아샤도 그럴 테고.’

아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쓰렸다.


“저, 제가 좀 도와도 되겠습니까? 제게 말 한 필과 돈을 좀 주신다면
장정들을 구해 오겠습니다.”

테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나 많이?”

“1백 명에서 2백 명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리크가 창백한 눈을 반짝이며 싱긋 웃었다.

“저는 이곳 북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는 사람이 많죠. 또한 많은 사


람들이 저 리크를 잘 알고요.”

장정으로는 군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윈터펠만큼 강한 성을 지키


는 데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창을 쥐는 법을 가르치기만 하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었다.

“좋다. 결과가 좋으면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뭘 원하느냐?”

“저어, 왕자님, 저는 람세이 경을 모신 이후로 여자를 안지 못했습니


다. 팔라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만…….”

리크는 이제 테온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장정 2백을 데려오면 팔라를 네게 주겠다. 하지만 2백에서 하나라


도 모자라면 돼지와 섹스를 하게 될 줄 알아라.”

리크는 해가 지기 전에 은이 가득 든 자루와 테온의 마지막 희망을 등


에 업고 길을 떠났다.

‘일이 제대로 안 되면 저놈을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씁쓸했지만 그렇더라도 기회는 얻은 셈이었다.


그날 밤 테온은 로버트 왕이 윈터펠에 왔던 날 벌어진 연회의 꿈을 꾸
었다. 밖에서는 거센 바람소리가 윙윙거렸지만, 홀 안은 음악과 웃음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모두 포도주와 구운 고기를 안주로 술을 들이
켜고 있었다. 테온은 시중드는 하녀들을 흘낏거리며 혼자 즐거운 상
상에 빠져 있는데……, 문득 홀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음악소
리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음정이 맞지 않는 음악 속으로 낯선 침
묵이 흘렀다. 바람소리도 이상했다. 갑자기 포도주가 써서 고개를 들
었더니 주위에 온통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로버트 왕은 복부에 구멍이 난 채 탁자에 내장들을 쏟아내고 있었고,


에다드는 머리가 잘린 채로 왕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아래로 줄지어
앉아 있던 시체들이 잔을 들어올리는데 회갈색 살덩이에서 뼈가 튀
어나왔다. 눈구멍에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조리 카셀과
뚱뚱보 톰, 포테르, 카인, 말 조련사 훌렌 등, 모두 에다드와 함께 킹
스랜딩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미켄과 샤일도 보
였다. 미켄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샤일은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벤프레드 톨하트와 그의 병사들이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
앗간 여자도 거기에 있었고, 파렌과 심지어 테온이 숲에서 브랜의 생
명을 구하기 위해 죽였던 와이들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얼굴들도 보였다. 그들은 석상으로만 보았던 사


람들이었다. 피로 흩뿌려진 하얀 가운을 입고 창백한 푸른 장미에 싸
여 있는 슬픈 표정의 소녀는 리안나가 분명했다. 그 옆으로 브랜든이
보였고, 그들의 아버지 리카드가 바로 뒤에 있었다. 벽을 따라서 반쯤
보이는 얼굴들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테온은 그들을 바라보
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홀 문이 부서지면서 매서운 찬바람이 안으로 몰아


쳤다. 그리고 롭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 옆으로 그레이윈드가 눈
을 이글거리며 따라 들어오는데, 둘 다 몸에 수십 군데가 넘는 상처가
있었다.

테온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웩스가 깜짝 놀라 벌거벗은 채 방을 뛰쳐나가 칼을 들고 돌아왔다. 그
는 마에스터를 데려오라는 테온의 명령에 방을 나갔고, 곧 루윈이 잠
에서 덜 깬 모습으로 뛰어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테온도 많이 진정
해서 포도주를 한잔 홀짝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악몽을 꿨을 뿐이야.”

“그렇군요.”

루윈이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수면제를 놓고 방을 나갔다.

테온은 루윈이 나가자 약을 변기에 쏟아 버렸다. 루윈은 마에스터이


기 이전에 사람이었고, 새로운 왕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잠들기를 원하겠지. 아샤만큼이나 내가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


지 못하길 바랄 거라구!’

테온은 급히 카이라를 불러 침대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속에서 끓어


오르는 알 수 없는 분노를 카이라에게 모두 쏟았다. 일을 끝냈을 때,
카이라는 울고 있었다. 목과 가슴이 멍과 이빨자국으로 뒤덮여 있었
다.

테온은 카이라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고는 담요를 던져 주었다.

“나가.”

하지만 그후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날이 밝는 대로 그는 옷을 챙겨 입고 성벽을 따라 거닐었다. 상쾌한


가을바람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에 뺨이 붉어지고 눈이 따
가웠다. 빛이 비치면서 숲의 색깔이 회색에서 녹색으로 변해 갔다. 왼
쪽으로 높이 솟은 탑 꼭대기가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으로 번쩍거렸
다. 위어우드의 붉은 잎이 푸른 숲에서 화염을 토하고 있었다.
‘에다드 스타크의 나무로군. 스타크의 숲, 스타크의 성, 스타크의 신
들이야. 이곳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터전이야. 난 파이크의 그레이
조이잖아. 크라겐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갖고 광대한 솔트시를 항
해하는 바다의 아들. 난 아샤와 함께 갔어야 했어.’

성문 꼭대기에 머리 두 개가 강철 대못에 달려 있었다.

테온은 바람이 유령의 손처럼 망토를 잡아당기는 동안 조용히 그 머


리들을 응시했다. 방앗간집 아들들은 브랜과 릭콘 또래였다. 체구와
혈색도 두 아이와 비슷해서 리크가 얼굴 가죽을 벗겨내고 타르를 끼
얹자 감쪽같았다. 보기 흉하게 썩은 살덩어리는 낯익은 얼굴로 보이
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처럼 바보들이었다.

‘만약에 이걸 수양의 머리라고 했으면 뿔을 찾으려 들었을 거야, 바보


같이.’

산사

적함이 도착했다는 첫 보고가 들어온 후부터 셉트에서는 찬송가 소


리가 끊이지 않았다. 말 울음소리, 날카로운 쇳소리, 거대한 성문이
삐걱대는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소리가 찬송가 소리에 뒤섞였다.

‘셉트에 있는 사람들은 어머니 신에게 자비를 기원하며 찬송을 부르


지만, 성벽 위 군사들은 조용히 전사 신에게 기도하겠지.’

산사는 언젠가 셉타 모르다네가 전사 신과 어머니 신이 두 얼굴을 가


진 하나의 신이라고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한 가지만 들어 준다면 어느 쪽 기도를 들어 주실까?’

메린이 조프리 왕이 탈 수 있도록 순종 구렁말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은 조프리와 똑같이 금박 마구에 에나멜을 입힌 선홍색 흉
갑을 두르고 번쩍이는 사자머리 투구를 쓰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갑옷은 햇빛에 반사되어 금색과 붉은색으로 번쩍였다.
‘번쩍번쩍 빛만 나면 뭐해. 아무 소용도 없을걸.’

산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티리온은 조프리보다 간소한 차림으로 붉은 종마에 앉아 있었다. 그


는 아버지의 옷을 빌려 입은 아이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방패
뒤로 액스를 메고 있는 모습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조프리 옆
에는 만돈 무레가 차갑게 빛나는 하얀색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산사!”

티리온이 산사를 보자 말머리를 돌려 다가왔다.

“왕대비께서 다른 부인들과 함께 마에고르의 성에 가 있으라고 하지


않으셨나?”

“그러셨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저의 배웅을 받고 싶다고 하셔서요.


물론 저도 배웅을 마치는 대로 셉트에 갈 생각이에요.”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지는 묻지 않겠어.”

그의 입술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걸 미소라고 할 수 있다면, 산사가


본 것 중에 가장 기묘한 미소였다.

“오늘 모든 것이 변하게 될지도 몰라. 우리뿐만 아니라 네게도 말이


야. 너도 토멘과 함께 보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마에
고르의 성도 안전할 거야. 적어도…….”

“산사!”

그때 조프리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산사를 불렀다.

“여기야, 여기!”

‘나를 개 부르듯 부르는군.’


산사는 조프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조프리가 너를 찾는구나. 전투가 끝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신들


이 허락한다면 말이야.”

조프리의 손짓을 보며 산사는 시티워치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


갔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거야. 모두 그렇게 말하지.”

“신들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빌어요.”

“삼촌에게는 자비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나는 삼촌에게 어떠한 자비


도 베풀지 않을 거야.”

조프리가 검을 뽑아들었다. 자루에 둥근 홈 세 개가 깊이 파이고, 자


루 끝에 사자머리가 조각된 멋진 검이었다. 사자의 턱 사이에는 심장
모양의 루비가 박혀 있었다.

“이게 바로 나의 새로운 검, 하트이터야.”

라이언투스라 이름 붙였던 예전의 검은 아리아가 빼앗아 강에 던졌


었다.

‘스타니스도 아리아처럼 조프리의 검을 빼앗아 강물에 던져 버렸으


면 좋겠어.’

하지만 산사는 마음을 감추며 활짝 웃었다.

“전하, 아름다운 검이군요.”

“키스로 내 검을 축복해 줘. 자, 어서.”

조프리가 산사 눈앞으로 검을 내밀었다.


너무나 유치한 요구에 산사는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조프리에게 키
스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겠다 싶어 얼른 검에 입을 맞추었다. 조
프리가 기분이 좋은 듯, 과장된 몸짓으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내가 돌아오면 다시 키스하게 될 거야. 그때 내 삼촌의 피를 한번 맛


보라고.”

‘킹스가드 중 한 명이 당신을 위해 스타니스 경을 죽인다면요.’

메린, 만돈, 오스문드가 조프리와 티리온을 호위해 함께 출격할 것이


었다.

“전투에서 직접 기사들을 지휘할 건가요?”

“그럴 거야. 하지만 티리온 삼촌이 스타니스 삼촌은 절대 강을 건너


지 못할 거라고 했어. 난 여기 킹스가드 셋을 지휘할 거야. 반드시 반
역자들의 최후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거야.”

조프리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항상 부루퉁해


있는 두툼한 분홍색 입술, 산사는 한때 그 모습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속이 메스꺼울 뿐이었다.

“롭은 항상 가장 치열한 곳에서 싸워요. 전하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


만요.”

산사의 말에 조프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반역자 삼촌을 처리하면 다음은 네 오빠 차례가 될 거야. 하트이터


로 내장을 꺼내서 너에게 보여 주지.”

조프리는 그렇게 잔인한 말을 내뱉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문으


로 달려갔다. 메린과 오스문드가 조프리를 양옆에서 보좌했고, 시티
워치들이 4열 종대로 그 뒤를 따랐다. 티리온과 만돈이 후위를 맡았
다.
경비병들이 격려의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배웅했다. 모두 떠나고 나
자,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고요한 가운데 찬송가 소
리가 울려 퍼졌다.

산사는 셉트 쪽으로 돌아섰다. 어린 마부 둘과 임무가 끝난 경비병 하


나가 산사 뒤를 따랐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았다.

지금까지 셉트가 그토록 붐비고 환한 적은 없었다. 높다란 크리스털


창으로 햇빛이 무지갯빛으로 스며 들어왔고, 양쪽 벽으로 양초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어머니 신과 전사 신 제단
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장장이 신과 미의 여신, 노파 신, 아버
지 신 앞에서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이방인 신 앞에도 몇 개의
불꽃이 흔들거렸다.

산사는 일곱 신들을 차례로 찾아가 제단에 있는 양초에 불을 밝혔다.


그러고 나서 여위고 늙은 하녀와 질 좋은 린넨 튜닉을 입은, 릭콘 또
래의 소년이 앉아 있는 긴 의자로 다가갔다. 하녀는 뼈만 앙상하고 피
부가 거칠었고, 소년은 키가 작고 약간 모자라 보였다. 향내와 사람들
의 땀 냄새로 탁한 공기, 크리스털 햇빛과 반짝이는 양초의 열기……,
현기증이 났지만 산사는 열심히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오래 전, 윈터
펠에서 어머니에게 배웠던 찬송이었다.

온화하신 어머니여, 자비의 근원이시여,

기도하옵건대, 전쟁으로부터 우리의 아들들을 지켜 주소서.

검과 화살들을 막아내게 하시고,

평화로운 날이 곧 올 것임을 알게 하소서.

온화하신 어머니여, 여인들의 힘이시여,

전쟁 속에서 우리의 딸들을 보살펴 주소서.


분노를 진정시키시고, 격정을 억누르게 하시고,

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소서.

수천 만의 사람들이 비센야 언덕에 있는 바엘로의 그레이트 셉트로


몰려들어 함께 찬송을 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도시를 지나고 강을 건
너 하늘에까지 이를 것이었다.

‘분명히 신들께서도 우리의 노래를 들으실 거야.’

산사는 찬송가를 대부분 알고 있었고, 모르는 것들도 최선을 다해 따


라 불렀다. 반백의 하인들과 불안해하는 귀부인들, 하녀와 병사들, 요
리사와 사냥꾼들, 기사와 종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산사는 자비를 위해,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해, 브랜과 릭콘, 롭, 아


리아, 그리고 월로 떠난 이복 오빠 존을 위해 노래 불렀다. 또 어머니
와 아버지, 호스터 할아버지, 에드무레 삼촌을 위해, 친구 제인 풀레,
주정뱅이 로버트 왕, 셉타 모르다네, 돈토스, 조리 카셀, 마에스터 루
윈, 그리고 오늘 죽어 갈 용감한 기사와 병사들, 그들의 죽음에 애통
해할 아이들과 여자들을 위해 노래했다. 마지막으로 티리온과 산도
르를 위해서도 노래했다.

‘하운드는 진정한 기사는 아니지만, 나를 구해 주었어요. 가능하다면


구해 주시고,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를 누그러뜨려 주세요.’

찬송은 셉톤이 높은 연단으로 올라가 그들의 ‘진실하고 고귀한’ 왕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끝이 났다. 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헤
치고 붐비는 통로를 빠져나갔다. 셉톤은 대장장이 신에게는 조프리
의 검과 방패에 힘을 불어넣어 주기를, 전사 신에게는 조프리에게 용
기를, 아버지 신에게는 조프리에게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그를 보호
해 주기를 기원했다.

‘조프리의 검이 부서지고 방패가 산산조각 나게 해주세요. 부하들이


용기가 사라져 모두 그를 버리게 해주세요.’
산사는 셉트 밖으로 빠져나가는 내내 조프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성벽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 몇을 제외하면 성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산사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 소리가 더 컸지만, 전장의 소리도 그에 못지않았다. 뿔피리의
깊은 울림, 삐걱거리며 돌을 날리는 투석기 소리, 무언가 산산이 부서
지는 굉음,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 소리, 그리고 고통에 찬 사람들의
절규…….

실로 무서운 소리였다. 산사는 망토에 달린 두건을 뒤집어쓰고 마에


고르의 성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성 한가운데에 있는 그곳은 왕대비
가 안전을 약속한 곳이었다. 도개교 발치에서 탄다 부인과 그 두 딸이
보였다. 파리세는 어제 스토크워스 성에서 호위대와 함께 이곳으로
온 터였다. 도개교 중간쯤에서 탄다 부인과 파리세가 하녀에게 달라
붙어 흐느끼고 있는 롤리스를 달래고 있었다.

“싫어, 싫단 말이야.”

“롤리스, 전투는 이미 시작됐어!”

탄다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싫어, 싫어요.”

산사는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어 그들에게 다가가 예의바르게 인사


했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을까요?”

탄다 부인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관심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딸이 좀


막무가내네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싫어. 가기 싫어.”

롤리스는 하녀를 붙들며 소리쳤다. 검은머리를 짧게 자른, 날씬하고


예쁘장한 하녀는 주인을 해자에 던져 버리고 싶은 듯 얼굴에 짜증스
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산사는 롤리스를 보며 웃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저 안으로 가면 안전해요. 맛있는 음식과 마실 것, 그리고 노래도 들


을 수 있어요.”

롤리스가 멍하니 산사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갈색 눈에서는 금방이


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싫어요.”

“가야 해. 여길 건너기만 하면 되는 거야!”

파리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샤에, 도와 줘.”

두 사람은 롤리스의 양팔을 잡아 질질 끌다시피 도개교를 건넜다. 산


사는 탄다 부인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저 아이는 병에 걸렸어요.”

‘아이를 가진 것도 병이라고 할 수 있나?’

롤리스가 아이를 가진 것은 성안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자머리 모양의 투구를 쓰고 주홍색 망토를 두른 경비병 둘이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산사는 그들이 단지 차림새만 그럴 듯한 용병이
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또 한 명의 경비병이 계단 발치에 앉아
있었다.
‘진짜 경비병은 무릎에 창을 얹은 채 계단에 앉아 있지 않아. 꼿꼿하
게 서 있지.’

앉아 있던 경비병이 그들을 보자 일어나 성문을 열어 주었다.

왕대비의 응접실은 그레이트 홀의 10분의 1, 스몰 홀의 반도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1백 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었다. 벽이 나무 조
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바닥이 등심초로 덮여 있어 홀 안은 향기
가 그득하고 분위기가 우아했다. 촛대가 박힌 벽에는 거울이 달려 있
어 불빛이 두 배로 밝았고, 갤러리에서는 피리와 바이올린의 선율이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남쪽 벽을 따라 나 있는 아치형의 창문
은 꼭꼭 닫힌 채 모두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어, 홀 안을 훤히 밝히는
촛불의 빛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울리는 전장의 소리와 찬송가 소리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 주었
다.

‘소용없어. 아무리 그래도 전쟁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걸.’

산사는 홀 안의 사람들을 죽 둘러보며 생각했다.

도시의 귀부인들은 모두 회의용 탁자에 앉아 있었다. 더러 노인들과


아이들도 끼여 있었다. 탁자 앞의 여인들은 누군가의 아내와 딸, 어머
니, 동생들이었다. 스타니스와 전투를 치르기 위해 나간 남자들은 대
부분 돌아오지 못할 터였고, 모두 그 사실을 예감하는지 홀 안은 슬픈
기운이 가득했다.

조프리의 약혼자로서, 산사의 자리는 왕대비의 오른쪽이었다. 자신


의 자리로 향하던 산사는 뒤쪽 벽에서 어렴풋한 사람의 그림자를 보
았다. 기름칠을 한 검은 갑옷을 입고 아이스를 들고 선 사람……. 그
는 검을 바닥에 딛고 서서 강하고 여윈 손으로 날을 단단히 쥐고 있었
다.

“저자는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산사는 옆에 있던 오스프리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왕대비의 새로운
호위대를 이끄는 오스프리드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왕대비님께서는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다.”

일린 파이네는 왕의 사법관이었다. 그가 왕대비를 위해 할 일은 하나


뿐이었다.

‘누구의 머리를 원하는 걸까?’

그때 시종장의 외침이 홀 안으로 울렸다.

“조프리 왕의 섭정이자 왕국의 수호자이신, 라니스터 가문의 세르세


이 왕대비님을 위해 모두 일어서십시오.”

세르세이의 드레스는 킹스가드의 망토만큼이나 새하얗고, 나뭇잎 모


양으로 길게 장식한 소매 부분은 안쪽으로 금색 공단이 보였다. 밝은
금발은 굵게 말려 어깨로 늘어져 있고, 길고 가냘픈 목에는 다이아몬
드와 에메랄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가 세르세이를
순결하고 순수한 아가씨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볼에는 붉은 기가 돌
았다.

“다들 앉으세요.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왕대비가 자신의 자리로 가자, 오스프리드가 왕대비의 의자를 잡아


주었다. 시종 하나가 산사에게도 같은 시중을 들었다.

“창백해 보이는구나. 네 몸에는 여전히 붉은 꽃이 피고 있니?”

세르세이가 산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예.”
“정말 적절히 때를 맞추었구나. 남자들은 적지에서, 너는 이곳에서
피를 흘리다니 말이다.”

“세르 일린이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산사는 요리를 들여오라고 손짓하는 세르세이에게 불쑥 물었다. 왕


대비가 말없이 사법관을 바라보았다.

“반역자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만약의 경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서란다. 사법관이 되기 전에 세르 일린은 기사였거든.”

왕대비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스푼으로 홀의 문을 가리켰다. 문


이 잠기고 빗장이 채워졌다.

“저 문이 도끼로 박살이 난다면 그땐 너도 세르 일린에게 감사하게


될 거다.”

‘만약 하운드였다면 더 좋았을 거야.’

산도르도 일린처럼 거칠지만, 산사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경비병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우릴 보호해 주지 않나요?”

“경비병이 우리를 해치려 들 경우에는?”

왕대비가 오스프리드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믿을 만한 용병을 찾기란 순결한 매춘부를 찾는 일만큼이나 힘이 들


지. 만약 우리가 전쟁에서 패하면,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입은 주홍색
망토에 걸려 넘어지면서까지 왕실 물건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을걸.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훔치고 나면 하인들과 마부와 함께 보잘
것없는 목숨을 구해 보겠다고 줄행랑을 치겠지. 킹스랜딩이 함락되
면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생각해 봤니? 하긴,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겠지. 네가 인생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음유시인에게서 들은 것이
전부일 테니까. 게다가 그들이 패한 자를 노래하는 일이란 흔치 않을
거고.”

“진정한 기사들은 여자와 어린아이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 얘기는 산사의 귀에도 공허하게 들렸다.

“진정한 기사들이라…….”

왕대비는 이상하게도 즐거워 보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얌전한 숙녀답게 수프나 먹으며 너를 구


하러 올 드래곤나이트나 플로리안을 기다리려무나. 내가 장담하건대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거다.”

다보스

물살이 거칠고 사나운 블랙워터만(灣)에는 하얀 포말이 넘실거렸다.


밀물을 타고 항해하는 블랙베타 호는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돛
이 부러질 듯 심하게 요동쳤다. 레이드와 마리아 호가 블랙베타 호를
가운데 두고 일정 정도 간격을 유지한 채 항해하고 있었다. 다보스는
아들들이 간격을 잘 유지해내는 것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갑자기 거대한 바다 괴물이 그르렁대는 것처럼, 뿔나팔소리가 바다


를 가로지르며 선단 사이를 오고갔다.

다보스는 힘차게 외쳤다.

“돛을 내려라. 돛을 내리고 노를 준비하라.”

마토스가 아버지의 명령을 하달하자, 블랙베타 호의 갑판은 이리저


리 뛰어다니는 선원들로 분주해졌다. 선원들은 방해가 되는 듯 자리
를 잡고 있는 병사들을 이리저리 밀치고 다녔다. 아임리는 투석기와
대포의 공격에 돛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돛을 내리고 노의 힘
만으로 블랙워터에 들어갈 것을 미리 명령해 놓은 터였다.

다보스는 남동쪽에서 올라오는 퓨릭 호를 알아보았다. 블랙워터로


다가감에 따라 퓨릭 호 범포(帆布)에서 번쩍이는 바라테온 가문의 황
금빛 문장이 똑똑히 보였다. 스타니스는 16년 전 퓨릭 호의 갑판에서
드래곤스톤을 향한 돌격 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형인
아임리에게 퓨릭 호의 지휘권을 위임했다. 아임리도 알레스터나 다
른 플로렌트 가문 사람들처럼 스톰엔드에서 스타니스 왕을 도와 이
곳에 온 기사였다.

다보스는 퓨릭 호에 관한 모든 상황을 자기 배처럼 일목요연하게 꿰


뚫고 있었다. 3백 개에 달하는 노 위로 투석기가 가득 들어선 갑판이
있고, 그 위 선체 꼭대기에는 불붙은 송진 통이 장전된 커다란 쇠뇌가
이물에서 고물까지 탑재되어 있었다. 막강한 화력 못지않게 기동력
까지 뛰어난 퓨릭 호는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을 가득 태워
속도를 내기가 힘들 텐데도 여전히 날렵하게 나아갔다.

뿔나팔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더니 퓨릭 호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다보스는 잘려 나간 손가락 끝이 욱신거렸다.

“노를 내려라! 정렬!”

느릿한 심장 박동소리처럼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맞춰 1


백 개의 노가 일제히 물 속으로 내려갔다. 1백 명의 노잡이들은 마치
한 사람인 양 일사불란하게 노를 저어 갔다.

레이드와 마리아 호 역시 일제히 노를 내렸고, 세 척의 갤리선은 보조


를 맞춰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순항 속도를 늦추지 말도록!”

다보스의 명령에 따라, 벨라리온이 지휘하는 은빛 선체의 프라이드


호가 레이드 호의 좌현으로 나아갔고, 볼드래프터 호가 속도를 올렸
다. 하지만 하리단 호는 그제야 노를 내렸고, 시호스 호는 그때까지도
돛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보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소드피시 호가 평소처럼 꾸물대


고 있었다. 선체에 커다란 충각을 설치하고 노도 2백 개나 달았지만,
다보스는 왠지 소드피시 호가 미덥지 않았다.

병사들끼리 서로 고함을 지르며 독려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톰엔드


에서처럼 자신감에 차 있는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적과 한판 붙기
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모두 이번 전투의 지휘자인 아
임리 플로렌트와 다를 바 없었다.

3일 전 함대가 웬드워터 항구에 정박했을 때, 아임리는 작전 회의차


함장들을 모두 퓨릭 호로 소집했었다. 물론 목적은 자신의 계획을 통
보하기 위함이었지만. 다보스는 아들들과 함께 대단히 위험한 자리
인 2진의 우측 날개에 배치되었다.

“영광스런 임무입니다.”

알라드는 용맹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에 매우 만족해하며 대


답했다. 하지만 다보스는 임무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러자 아들들
은 아버지를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양파 기사가 이제 노인네가 다 되었군. 게다가 아직도 밀수꾼 티를


벗지 못했잖아!’

자식들의 표정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전직이 밀수꾼이


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보스는 거기에 대해 굳이 변명
하고 싶지 않았다.

다보스는 충분히 귀족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시장 바닥의 다보스였다. 세븐킹덤의 어느 누구보
다도 배와 바다에 대해 잘 알고, 갑판 위에서 목숨을 건 전투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전투를 치를 때면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불안과 공포
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사실 밀수꾼에게는 뿔나팔을 불거나 깃발을
올리는 절차가 필요 없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잽싸게 돛을 올리고 도
망치면 그만이었으니까. 만약에 그가 아임리의 자리에 있었다면, 전
혀 다른 전술을 모색했을 것이다.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쳐들어가기
보다는, 먼저 빠른 배를 몇 척 내보내 상대편의 전열을 확인한 후에
출항을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건의를 해도 아임리는 고맙
다는 말만 연발할 뿐 표정에는 못마땅한 빛이 역력했다.

‘알고 봤더니 양파 기사는 비천한 겁쟁이 아냐!’

그의 표정은 그렇게 얘기하는 듯했다.

아임리는 적군에 비해 함대가 네 배나 많다는 사실에 의기충천해서,


방비는커녕 정탐도 생략하고 곧바로 함대를 스무 척씩 열 개의 대오
로 나눈 뒤 1진과 2진이 먼저 강으로 진입해 어린애 장난감 같은 조
프리의 함대를 격파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머지 함선은 궁수
와 창병들을 성벽 밑에 내려주고 나서 해전에 합류하고, 살라도르 사
안과 그의 부하 리세니는 라니스터의 함대가 해안을 따라 잠복해 있
을 것에 대비해 후방에 남으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남쪽 강둑에 있는
스타니스 왕의 본영을 수송할 작고 느린 배들을 보호할 임무가 주어
졌다. 거만하기만 한 1진과 2진 함장들은 아임리의 명령에 마냥 즐거
워했다.

아임리가 그렇게 서두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출항 첫


날부터 십브레이커만(灣)의 암초에 배를 두 척이나 잃은데다, 타스
해협에서 미리시 전함을 한 척 침몰시키고 걸리트에서는 폭풍우에
함대가 뿔뿔이 흩어졌다가 시간을 많이 지체했던 것이다. 그들은 블
랙워터만(灣)의 잔잔한 매지후크에 이르러서야 겨우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스타니스 왕은 이미 킹스랜딩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스톰엔드에서


직선으로 뻗어 있는 킹스로드는 뱃길보다 훨씬 짧았고, 왕을 호위하
는 병사들은 기마대였던 것이다. 2천 명에 이르는 기마대는 렌리의
군대까지 얻어 무리 없이 킹스랜딩에 도착했겠지만, 블랙워터 강의
물살이 거센데다 도시의 성벽이 너무 높아 중무장한 군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스타니스 왕은 지금쯤 강의 남쪽 둑에 군
대를 주둔시키고 함대가 도착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틀 전 그들은 메를린락에서 함대를 보고 도망치는 낚싯배 여섯 척


을 모두 사로잡았는데, 아임리는 그 일을 무척이나 흐뭇해했다.

“싸움 전 입맛을 돋우는 작은 승리로군. 병사들은 더 큰 승리에 배가


고파질 테니까.”

하지만 다보스는 그것보다도 포로들에게 킹스랜딩의 방어망 구축 진


행 상황을 알아보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어부들은 킹스랜딩 병사
들이 강 입구에 둑을 세우느라 동분서주하지만 그 작업이 얼마나 진
척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다보스는 둑이 이미 완성되었기를 바
랐다. 강의 입구가 봉쇄되어 있으면 아임리도 무모한 진격을 멈추고
정세를 살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바다 위는 고함소리와 뿔나팔소리, 북소리, 수천 개의 노들이 물살을


철썩거리는 소리 따위로 시끌벅적했다.

“대열을 정렬하라.”

다보스는 큰 소리로 명령했다. 그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어와 그의 오


래된 녹색 망토를 펄럭이며 지나갔다. 짧은 가죽옷에 단화, 그가 갖춘
무장은 그게 전부였다. 배 위에서 쇠붙이는 그 무게만큼이나 목숨을
갉아먹는 위험물이었다. 하지만 아임리와 다른 함장들은 그걸 모르
는지, 모두 갑옷을 번쩍이며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하리단 호와 시호스 호가 제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그 뒤를 셀티가르


의 레드클로우 호가 따랐다. 알라드의 마리아 호 우현 쪽으로는 궁수
들이 득실거리는 피에티, 프레이어, 디보션 호가 늘어서 있었다. 소드
피시 호는 돛대와 노를 둘 다 사용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렇게 노가 많으니 속도도 빠르겠지. 하지만 균형을 이루지 못할 만


큼 지나치게 큰 저 충각이 문제라구.’

남쪽에서 돌풍이 일었지만 수많은 노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


다. 함대는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라니스터 측에선 강물을 타
고 내려올 것이었다.

‘그럼 강물이 바다로 밀려드는 강어귀는 물살이 거세지지. 첫 격전은


저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겠군. 블랙워터 강에서 싸우는 건 아무래
도 멍청한 짓이야.’

넓게 트인 바다에서는 규모가 큰 함대가 유리하지만, 좁은 강에서는


오히려 그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노가 서로 엉켜 함선이 한꺼번
에 진격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최대 스무 척 정도만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강물 위에 줄지어 떠 있는 전함들 너머로, 붉은


형체의 레드킵이 푸르스름한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아에곤 언덕 위
에 서 있었다. 킹스랜딩의 남쪽 해안가는 말과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스타니스 왕은 병사들을 독촉해 부교를 놓고 화살 깃을 붙이는 등 부


지런히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겠지만, 그래도 함대가 하루 빨리 도착
하기를 기도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터였다. 해안 쪽에서 어렴풋
이 나팔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이내 수천 명의 함성에 묻혀 버
렸다. 다보스는 자신의 손가락뼈가 든 주머니를 잡고 마음속으로 기
도문을 되뇌었다.

1진의 중앙에 자리한 퓨릭 호 양옆으로는 스테폰 호와 ‘바다의 사슴’


호가 각각 2백 개의 노를 힘차게 움직이며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양
쪽 날개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중급에 해당되는, 노가 1백여 개가 넘
는 하라, 브라이트 피시, 래핑로드, 시 데몬, 혼드 아너, 래그드 재나,
트리텐트 트리, 스위프트 소드, 프린세스 라이니스, 독스노즈, 스켑트
레, 페이스풀, 레드 레이븐, 퀸 알리사네, 캐츠, 커리지어스, 드래곤베
인 호가 보였다. 모든 전함의 고물에는 ‘빛의 신’의 불타는 심장이 빨
강, 노랑, 주홍빛 깃발에서 선명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다보스와 그의 아들 뒤로는 기사들과 귀족 출신의 함장들이 지휘하


는, 1백여 개의 노가 달린 함선들이 자리했다. 그 뒤로는 노가 80여
개 정도 달린 작고 느린 미리시 선박들이 따랐다. 그리고 크고 작은
범선과 어선들이 한참 뒤에서 대열을 이루었고, 가장 뒤쪽에는 살라
도르 사안이 자랑하는 발리리아 호를 필두로 독특한 줄무늬의 갤리
선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살라도르 사안은 전투에서 제외되어 후방에 배치된 것을 무척이나


불만스러워했지만, 스타니스 왕처럼 아임리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
다.

‘불평이 너무 많은데다 입만 열면 받을 돈 얘기니…….’

아임리의 처사를 이해하면서도 다보스는 못내 유감스러웠다. 살라도


르 사안은 해적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고, 그의 부하들 역시 모두
바다에서 태어난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그런 인재들을 후방에 배치
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안타까웠다.

‘아후우우우우우우우…….’

힘찬 나팔소리가 바다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드디어 퓨릭 호의 갑판


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대열에 합류한
소드피시 호는 여전히 돛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빠른 속도로!”
다보스가 소리쳤다. 점차 빨라지는 북소리에 물살을 가르는 노의 움
직임도 급격히 빨라졌다. 노 젓는 소리에 맞춰 갑판 위의 병사들도 검
으로 방패를 치며 탁탁 소리를 냈다. 궁수들이 허리에 찬 화살통에서
첫 화살을 꺼내 조심스럽게 활시위에 얹었다.

다보스는 점차 멀어지는 1진의 갤리선들을 잘 보기 위해 갑판 위로


한 걸음 나아갔다. 강 입구에 둑을 봉쇄하는 장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
다. 강은 마치 그들을 반기듯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밀수업을 하던 시절부터 킹스랜딩의 앞 바다를 자기 손바닥보다 훤


히 안다고 자부하고 다니던 다보스였다. 블랙워터 강 입구에 나란히
서 있는 나지막한 돌탑들이 아임리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 몰
라도, 다보스에게는 잘려 나간 손가락이 새로 나는 일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다보스는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 아래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탑


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은 말도 한 마리 들어가기가 벅차 보일 정
도로 작은 탑들은 저 멀리 보이는 레드킵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
리고 그 탑들과 마주한 남쪽 해변가의 탑들은 몸 일부를 물 속에 드리
우고 있었다.

‘탑을 둘러서 호를 파 두었군.’

다보스는 즉각 그 사실을 간파했다. 탑을 공격하기가 곤란하게 되었


다. 다리를 설치해 물을 건너서 공격하지 않으면 활을 쏘는 방법밖에
없는데, 병사가 경솔하게 머리를 내밀지 않는 한 화살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었다.

검푸른 강물이 휘 돌아가는 탑 아래쪽에서 순간 빛이 번쩍했다. 그것


은 분명 금속에 반사되는 햇빛이었다. 그제야 다보스는 궁금증이 모
두 풀어졌다.
‘사슬이라……. 그래, 봉쇄를 안 했을 리가 없지. 그런데 왜 아직도 강
으로 와서 싸우려고 하질 않지? 왜…….’

하지만 미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앞쪽의 함선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뿔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켑트레 호와 페이스풀 호 사이로, 갤리선들이 햇빛을 받아 금빛 문


양을 번쩍이며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적함들
은 모두 그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함선들이었다. 다보스는 밀수
업을 하던 당시, 멀리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함선이 갤리선인지 아닌
지, 함장이 공을 세우는 데 열을 올리는 젊은 함장인지 아니면 은퇴할
날을 기다리는 노함장인지 알아맞히며 안도감을 느끼곤 했었다.

‘아후우우우우우우.’

전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투 속도로!”

다보스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좌현과 우현에서 데일과 알라드


가 똑같은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북소리가 맹렬히 울려 퍼지
고, 그 소리에 맞춰 노가 힘차게 움직이면서 블랙베타 호가 앞으로 나
아갔다. 레이드 호를 돌아보자 데일이 경례를 붙였다. 소드피시 호는
한참을 뒤떨어져서 조그만 함선들이 일으킨 물결에 일렁이고 있었
다. 소드피시 호만 아니면 함대는 전체적으로 스톰엔드의 성벽만큼
이나 견고했을 것이다.

좁게만 보였던 강폭이 막상 앞에 와서 보니 바다만큼이나 넓어 보였


다. 그만큼 킹스랜딩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아에곤 언덕에 우
뚝 선 레드킵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총안이 촘촘히 나 있는 외성의
성벽, 거대한 탑, 강과 도로 위로 불쑥 솟은 거대한 내성의 성벽…….
레드킵이 자리잡고 있는 암석투성이의 가파른 절벽에는 이끼가 군데
군데 푸르스름하게 끼어 있고, 옹이진 가시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함대는 바로 그 성의 절벽을 통과해야만 위쪽에 자리잡은 항
구와 도시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함대의 1진이 강으로 들어서자, 적군의 갤리선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


다.

‘우리를 유인할 속셈이군. 측면 공격을 못하게 하려고 말이야. 우리


함대가 강 안쪽으로 완전히 진입하면 강어귀에 설치한 봉쇄 사슬을
올리겠지.’

다보스는 조프리의 군대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어린


왕의 군대에는 거대한 가드그레이스 호가 포진해 있었다. 오래되어
속력이 느린 아에몬 호, 실크 호를 비롯해 세임, 와일드윈드, 킹스랜
더, 화이트하트, 랜스, 시플라워 호 등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라이언스타 호는 어디에 있지? 로버트 왕이 사랑했던 소녀의


이름을 딴 리안나 호도 보이지 않고. 로버트 왕의 해머 호는?’

로버트 왕의 해머 호는 노가 4백 개나 되는 거대한 전함으로, 킹스랜


딩에서 퓨릭 호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함선이었다. 그 함선이 공격
진영에 없다면 후방의 수비 진영을 이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보스는 매복이 있는지 적군 함대의 뒤쪽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런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스타니스 왕이 해안선을 따라 군대를
길게 세워 놓은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사슬을 이용해 우리를 둘로 갈라 놓으려는 속셈인가?’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에게 이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 왼쪽의


함선들은 속력만 잘 조절하면 도시의 북쪽 외곽에 안전하게 병사들
을 내려놓을 수 있을 듯했다.

성에서 2, 30개의 송진 단지가 주황색 날개라도 단 듯 불꽃을 늘어뜨


리며 날아올랐다. 대부분은 물에 떨어졌지만 그 중 몇 개가 1진의 함
선들 위로 떨어져 화염을 일으켰다. 알리사네 호의 병사들은 불을 끄
느라 갑판 위를 분주하게 움직였고, 드래곤베인 호는 갑판 위 세 군데
에서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불타는 송진 단지가 다시 날아
오르고, 뒤를 이어 탑 위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화살이 쏟아졌다. 캐
츠 호의 병사 하나가 화살을 피하다가 물에 빠졌다.

‘오늘 최초의 희생자로군.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야.’

다보스는 자맥질을 하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병사를 보며 씁쓸한 입


맛을 다셨다.

레드킵의 성벽 위로, 황금빛 들판을 달리는 왕관 쓴 수사슴과 주홍빛


바탕에 사자가 수놓아진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불타는 송진 단
지는 점점 그 수가 많아졌다. 커리지어스 호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병
사들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다행히도 노잡이들은 머리 위를 덮고
있는 갑판에 보호를 받았다. 1진 우측에 배치된 함선들은 다보스의
걱정대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곧 우리 차례가 되겠군.’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섯 번째 줄에


위치해 있던 블랙베타 호는 어느새 불타는 단지의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해 있었다. 이제 1·2진에서 남은 함선은 알라드가 지휘하는 마리
아 호, 너무 뒤처져서 2진이라기보다는 3진에 가까운 소드피시 호,
그리고 피에티, 프레이어, 디보션 호뿐이었다. 그 함선들은 모두 신들
의 가호가 있으면 모를까 공격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2진이 마주 보고 있는 탑 쪽으로 전진하자, 다보스는 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람 머리통만한 구멍에서 뱀처럼 나와 있는 거대한
사슬 세 개가 보였다. 문이 하나뿐인 탑들은 모두 지상에서 6미터는
족히 솟아 있었다. 북쪽 탑에서 프레이어 호와 디보션 호를 향해 화살
을 날리기 시작했다. 디보션 호에서도 그에 응수하여 화살을 날렸지
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병사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함장님! 투구를 착용하시죠.”

마토스가 철면을 떼어낸 투구를 내밀었다. 시야가 가려지는 걸 싫어


하는 다보스를 위한 배려였다.

다보스는 아들에게서 투구를 받아 머리에 썼다. 바로 그 순간 불타는


단지가 비오듯 쏟아졌다. 그 중 하나가 마리아 호 갑판 위로 떨어졌지
만, 다행히도 마리아 호의 선원들은 잽싸게 불길을 잡아냈다.

좌현에 있던 프라이드 호에서 전투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노들이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화살들이 마토스 바로 옆 까지 날아와 갑판에
박혀 부르르 떨었다. 그들 앞쪽으로 1진이 일제히 적군을 향해 활시
위를 당겼다. 먹이를 앞에 둔 뱀처럼 화살들이 쉭쉭 소리를 내며 날아
갔다.

블랙워터 남쪽에는 병사들이 급조한 뗏목들을 강가에 끌어대고 있었


다. 불타는 심장이 그려진 깃발 아래서 병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열을
짓고 있었다. 심장 속의 검은 수사슴은 너무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
다.

‘우린 왕관 쓴 수사슴 깃발을 썼어야 했어.’

왕관 쓴 수사슴은 로버트 왕의 문장이었고,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그 것


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었다.

‘이런식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좋을 게 없어.’

불타는 심장이 보일 때마다 다보스는 스톰엔드의 어둠 아래에서 멜


리산드레가 그림자를 낳던 모습이 떠올랐다

‘적어도 지금 우리는 밝은 빛 속에서 정직한 사람들의 무기로 싸우고


있어.’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스타니스 왕은 멜리산드레를 자신의 조카
인 에드릭 스톰과 함께 드래곤스톤으로 돌려보냈다. 함장과 기수들
이 붉은 여자와 함께라면 전투를 치르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셀리스의 신하들만이 의견을 달리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멜리산드레를 돌려보내는 데 가장 공헌을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브


리스 카론이었다.

“전하,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사람들은 그 승리를 전하의 것


이라 여기지 않을 겁니다. 전하께서 보좌를 차지한 건 오직 불의 마법
을 쓴 그 여자 덕분이라 할 테니까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멜리산드레를 옆에 두고자 했던 왕은 결


국 그 말에 마음을 바꾸었다.

다보스는 멜리산드레 문제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때 침묵을 지켰


지만, 속마음은 카론을 위시한 함장들 편이었다. 그로서도 멜리산드
레나 그 여자가 모시는 신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디보션 호가 해변가에 다다라 발판을 내렸다. 궁수들이 바닷물에 젓


지 않도록 활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해안으로 쏟아져 내려갔다. 마
침내 그들은 절벽 바로 아래 좁은 해변가에 상륙했다. 성벽 위에서 바
위를 굴리고 화살을 쏘아 댔지만, 경사가 워낙 가팔라 별 피해는 입지
않았다. 프레이어 호는 상류 쪽으로 배를 댔고, 피에티 호는 제방 쪽
으로 비스듬히 나아갔다.

킹스랜딩의 병사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모래톱 쪽으로 말을 달려왔


다. 기사들은 양떼를 모는 늑대처럼, 화살도 채 장전하지 못한 궁수들
을 배 쪽으로 몰아 넣었다. 창과 창이, 액스와 액스가 불을 튀기며 부
딪쳤다. 강변은 순식간에 피의 격전지로 돌변했다.
다보스는 투구를 쓴 산도르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하얀 망토를 펄
럭이며 프레이어 호에 드리워진 발판 위로 올라서서 스타니스 왕의
병사들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성벽 너머 언덕에 자리한 킹스랜딩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변


은 라니스터 병사들이 모두 불태우고 후퇴하는 바람에 온통 잿더미
였다. 까맣게 탄 배가 얕은 강바닥에 박혀 있어 선창 쪽으로는 진입하
기가 곤란했다.

‘저쪽으로는 안 되겠어.’

머드게이트 뒤로 늘어선 커다란 투석기가 비센야 언덕에서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그레이트 셉트의 크리스털 탑 일곱 개와 함께 다보스
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보스는 전투가 시작된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갤리선 두


척이 충돌하여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보지 않아 어떤 배가 침
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직후 또 다른 충돌음이 들리
고, 잇달아 다른 소리가 뒤를 이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노들이 서
로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퓨릭 호에 설치된 투석기가 굉음을 냈다.
‘바다의 사슴’ 호가 조프리의 갤리선 한 척을 두 동강이 낸 데 반해 독
스노즈 호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퀸 알리사네 호가 실
크 호와 세임 호 사이에 갇힌 채 갑판 위로 뛰어 넘어온 적들과 치열
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보스 눈앞에서 킹스랜더 호가 페이스풀과 스켑트레 호 사이로 돌


진했다. 다행히 페이스풀 호의 우현 노는 충돌을 면했지만, 스켑트레
의 좌현 노는 킹스랜더 호의 옆구리에 강하게 부딪혔다.

“사격 개시!”

다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아 댔다.

‘저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다보스는 킹스랜더 호의 함장이 물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
게 떴다.

해안에서 거대한 투석기들이 하나둘 팔을 올리자, 사람 머리통만한


돌이 수백 개 하늘로 날아올랐다. 돌들은 대부분 거대한 물보라를 만
들며 강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일부는 배에서 내려오던 병사들을 두
부 으깨듯 뭉개 버렸다.

무차별적인 투석기의 공격으로 돛이 날아가고 갑판이 부서지자, 1진


의 함선들이 방향 감각을 잃고 갈팡질팡하다가 다른 함선의 선체를
들이받으며 연안에 착선했다. 배의 발판을 내리고 쏟아져 나오는 병
사들 위로 화살이 쏟아졌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병사들이 하나둘 쓰
러졌지만 그 사이에 다보스의 부하들은 없었다.

들이받을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다보스의 귀에 블랙베타 호의


북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라니스터 전함 두 대 사이에 포위된 퀸
알리사네 호가 보였다. 그 세 척의 함선은 갈고리와 밧줄로 서로 단단
히 묶여 있었다.

“충돌 속도로!”

다보스가 큰 소리로 외치자,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들 것처럼 고조되


었다.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블랙베타 호 뒤로 하얀 포말이
남았다. 알라드도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마리아 호가 적함 옆
구리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선함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이 검과 액스를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들을 붙잡아 주십시오. 제가 공격할 수 있도


록…….’

다보스는 간절히 전사의 신을 불렀다.

신이 그의 기도를 들은 게 틀림없었다. 블랙베타 호와 마리아 호가 거


의 동시에 세임 호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그 충격으로 반대
편에 있던 실크 호의 선원들이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고, 이내 세
척의 배가 서로 떨어졌다.

입을 벌리고 있던 다보스는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입에 고인 핏물


을 뱉으며, 다음부터 배가 충돌할 때는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마음먹
었다. 40여 년 간 뱃사람으로 살아온 다보스였지만, 다른 배를 들이
받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
에 궁수들이 제각각 활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후진하라.”

블랙베타 호가 강물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세임 호가 다보스의 눈앞에서 수십 명의 사
람들과 함께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은 열심
히 허우적거렸고, 죽은 자들은 물위로 떠올랐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
은 무게 때문에 모두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다보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퀸 알리사네 호의 고물 쪽에서 갑자기 초록색 불길이 솟구쳤고,


그와 함께 두려움에 젖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암
녹색 불길은 포효하는 거대한 바다 괴물처럼 보였다.

“와일드파이어군!”

다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병사들의 망토 끝자락에 붙은 불꽃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졌고, 불


꽃을 털어 내려던 손이 오히려 불길에 휩싸였다. 와일드파이어는 불
붙인 송진 단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는 악마의 불꽃…….

‘와일드파이어에 오줌을 누면 네 물건까지 타 버릴 거다.’


다보스는 언젠가 늙은 선원들이 곧잘 했던 농담을 떠올렸다. 아임리
도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병사들에게 연금술사의 위험한 단지에 대
해 얘기하며 조심하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몇 개 되지는 않을 거라
고 장담했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바다 위에 있는 와일드파이어는 실
제로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좌현은 앞으로, 우현은 뒤로 노를 저어라!”

다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블랙베타 호는 그 자리에서 맴을 돌아 퀸


알리사네 호와 고물을 마주하고 섰다.

“이제 앞으로 힘차게 노를 저어라!”

마리아 호도 성공적으로 와일드파이어의 불길을 피했다.

와일드파이어의 불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퀸 알리사네


호를 집어삼킨 뒤, 옆에 있던 실크 호에까지 번졌다. 병사들이 암녹색
불길에 휩싸인 채 괴성을 지르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킹스랜딩의 거대한 성벽 위에서는 죽음을 부르는 포탄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머드게이트 뒤에서도 계속 돌덩이를 날렸다. 황소만한 돌
덩이 하나가 블랙베타 호와 레이드 호 사이로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
키며 배 위의 사람들에게 물벼락을 안겼다. 잠시 후, 그것 못지않은
커다란 돌덩이가 볼드래프터 호 위로 떨어졌다. 볼드래프터 호는 탑
위에서 떨어뜨린 장난감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때 자욱한 연기와 일렁이는 불꽃 사이로 강 입구에 줄지어 서 있는


작은 선박들이 보였다. 거룻배, 나룻배, 바지선, 뗏목, 보트, 심지어는
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썩어 버린 폐선들까지 그 수가 실로 엄청났
다. 절망감이 밀려드는 풍경이었다. 그러한 오합지졸 함대는 전투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일 터였다.

스테폰, 래그드 재나, 스위프트 소드 호가 항구에서 강 입구로 쏜살같


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함대의 우측 날개에 해당하는 함선들은
이미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중앙의 함선들도 비 오듯 쏟아지는 돌더
미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몇몇 함장은 뱃머리를 돌려 바다로 다시
빠져나가려 하고, 몇몇은 진로를 항구 쪽으로 바꾸었지만 하늘을 뒤
덮으며 날아오는 돌더미를 피하지 못했다. 퓨릭 호에서도 킹스랜딩
을 향해 불붙은 송진 단지를 날렸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모두 성벽에
도 미치지 못한 채 강물로 떨어졌다. 스켑트레 호는 노가 다 부서지
고, 페이스풀 호는 적함의 공격으로 선체에 구멍이 나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다보스는 블랙베타 호를 두 전함 사이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
고 사탕 대신 병사들로 가득 찬 세르세이의 화려한 함선을 쳐다보았
다. 다보스의 병사들은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수십 명의 적군에게 화
살 세례를 퍼부었다.

그때 마토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다보스는 블랙베타 호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는 적함을 보았다.

“우현은 노를 저어라!”

블랙베타 호가 화이트하트 호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너무 늦었다


는 생각에 다보스는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화이트하트 호가 들이
받으려는 순간, 세찬 물살이 밀려와 블랙베타 호를 옆으로 살짝 밀어
내면서 두 배는 아슬아슬하게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노가
부러지면서 창보다 날카로운 파편이 다보스의 이마에 상처를 내었지
만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다보스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명령을 내렸다.

“적의 함선으로 올라타라!”

여기저기서 갈고리 달린 밧줄이 던져졌다.

다보스는 병사들과 함께 검을 빼들고 적함으로 뛰어들었다. 화이트


하트 호의 병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들을 가로막았다. 일대 혼전
이 벌어졌다.
다보스는 적군과 뒤엉켜 싸우면서도 적군의 함장을 찾아 주위를 두
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가 미처 함장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병사
가 일을 마쳤다.

다보스가 쓰러지는 적의 함장을 돌아보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액


스로 그의 머리를 세차게 내려쳤다. 투구 덕에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
는 입지 않았지만, 다보스는 놀람과 충격으로 일단 몸을 굴려 그 자리
를 피하면서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사내
의 복부로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병사 하나가 달려와 다보스를 일으켜 세웠다.

“함장님, 하트 호를 점령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적병들은 대다수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고 갑판에


쓰러져 있었다. 강물로 뛰어드는 사람도 몇 눈에 띄었다.

다보스는 쪼개진 투구를 벗어들고 몸을 추슬러 블랙베타 호로 향했


다. 마토스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를 부축해 주었다. 두 사
람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블랙베타 호는 전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잠시 고요에 싸였다.

퀸 알리사네 호와 실크 호는 함께 불타오르며 앞서 침몰한 세임 호의


파편들과 함께 강 하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리시의 갤리선 중 한
척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캐츠 호가 빠르
게 침몰하는 커리지어스 호의 병사들을 구조하고 있었고, 드래곤베
인 호는 고물이 잘린 채로 가까스로 선창에 정박했다. 곧 배에서 발판
이 내려지고, 병사들이 성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레드 레이븐 호
는 서서히 물 속으로 기울어 갔고, ‘바다의 사슴’ 호는 선체에 붙은 불
도 끄지 못하고 적병들과 일전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조프리의 로
얄맨 호에는 이미 불타는 심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퓨릭 호는 이물 쪽
이 크게 파손된 상태로 가드그레이스 호와 접전 중이었다.
다보스는 벨라리온이 지휘하는 프라이드 호가 라니스터 측의 두 선
박 사이에서 한 척을 전복시키고 다른 한 척을 불화살로 공격하는 광
경을 바라보았다. 남쪽 제방에서는 기사들이 말을 배에 옮겨 싣는 중
이었고, 소형 갤리선 몇 척은 이미 병사들을 싣고 강을 건너고 있었
다. 그들은 침몰하는 배와 물위를 떠다니는 와일드파이어를 피해 조
심스레 항해했다. 살라도르 사안의 부하 리세니를 제외하면, 스타니
스 왕의 군대는 모두 강에 들어와 있었다.

‘저들이 블랙워터를 점령하면 세르 아임리는 승리를 맛보겠지. 그러


면 스타니스 왕도 강 건너에 군대를 주둔시키겠고. 하지만 신은 공평
해. 이번 싸움의 대가는…….’

“아버지.”

마토스가 생각에 잠긴 다보스의 어깨를 다급히 두드리더니 소드피시


호를 가리켰다.

소드피시 호가 노를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높이 솟은 돛으로 날


아드는 불붙은 단지는 피하지 못했다. 불길은 다보스 눈앞에서 밧줄
과 돛 전체로 무섭게 번져 나갔고, 배는 마침내 노란색 불꽃으로 휩싸
였다. 뾰족한 주둥이 때문에 ‘창고기’라 불리는 소드피시 호의 거대한
충각이 바다 위를 가르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앞에서 소드피시 호를
표적으로 삼은 듯 떠내려오는 라니스터 측의 폐선이 한 대 보였다. 문
득 갑판 위로 녹색의 와일드파이어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소드피시
호의 함장은 최후를 각오한 듯 적함을 향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오, 안 돼……. 안 돼!”

하지만 그의 절규를 들은 사람은 아들 마토스밖에 없었다.

다보스는 자신도 모르게 잘려진 손가락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로


뭉툭한 손을 가져갔다. 순간 소드피시 호가 적함을 들이받으면서 귀
를 찢을 듯한 충돌음이 울렸다. 나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두 함선이
썩은 과일 터지듯 산산조각 났다. 동물이 죽어 가며 핏물을 흘리듯,
폐선에 실려 있던 수백 개의 단지에서 초록색 와일드파이어가 흘러
나와 강 표면으로 퍼져 나갔다.

“물러서! 어서 저 배에서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다보스의 절박한 외침에 블랙베타 호와 화이트하트 호를 연결하고


있던 갈고리 줄이 잘려 나갔고, 그와 동시에 블랙베타 호가 출렁거리
며 물결을 따라 움직였다.

그때였다. 쉿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천둥을 치는 듯한 굉음이 바


다를 뒤흔들었다. 갑자기 다보스의 몸이 갈라진 배 틈으로 떨어졌다.
입과 코로 사정없이 물이 들어왔다. 다보스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어
디가 위쪽인지도 모르고 발버둥을 쳤다. 잠시 후, 몸이 물위로 떠오른
것이 느껴졌다. 얼른 물을 뱉어내고 숨을 고른 다음 근처에 떠 있는
널빤지를 하나 붙잡았다.

사람들이 불타는 나무 쪼가리에 매달린 채 검게 탄 소드피시 호와 함


께 다보스 옆을 스쳐 떠내려갔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초록색
악마가 여러 갈래로 난 무시무시한 손을 뻗어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불태우고 있었다. 블랙베타, 화이트하트, 로얄맨이 모두 불길에 휩싸
였다. 피에티, 캐츠, 커리지어스, 스켑트레, 레드 레이븐, 하리단, 페
이스풀에다 퓨릭 호까지 모두 연기와 함께 사라졌고, 킹스랜더와 가
드그레이스 호 역시 초록색 악마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벨라리온
의 빛나는 프라이드 호는 불길을 피해 도망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거대한 초록색 마수가 노의 일부를 스치자 그 배 또한 횃불처럼 타오
르며 속절없이 떠내려갔다.

다보스도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정신없이 떠내려갔다.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됐지?’


다보스는 불붙은 판자를 피하기 위해 열심히 발장구를 쳐대면서도
자식들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는 아들들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블랙워터 강은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사방이 온통 불
타는 돛대와 사람들, 배의 파편뿐이었다.

‘해안으로 다시 나가야 해. 그곳은 여기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을 거


야.’

다보스의 수영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해안에는 아임리의 명


령에 따라 살라도르 사안의 갤리선들이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그 순간 물살이 다시 한 번 다보스를 뒤집어 놓았다. 그때서야 그는


하류 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봉쇄 사슬! 적들이 그걸 올려놓았겠군.’

강의 폭이 넓어지면서 블랙워터만과 연결되는 지점에 쇠사슬이 쳐져


있었다. 이미 갤리선 열두 척이 그 사슬에 부딪쳐 파손된 상태였다.
나머지 선박들도 물의 흐름에 따라 곧 같은 신세가 될 것이 틀림없었
다.

‘함선 대부분은 와일드파이어에 불타고, 나머지는 사슬에 걸려 파손


되고…….’

살라도르 사안의 함선에 그려진 독특한 줄무늬가 시야에 들어왔지


만, 다보스는 그곳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초록색 불길에 먹힌 잔해들
이 앞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블랙워터만으로 들어가는 강어
귀 역시 어느새 지옥의 입구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티리온

티리온은 성벽의 총안과 총안 사이의 돌출부에 한쪽 다리를 얹고 이


무기돌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지금은 황무지로 변했지만 한때
는 어시장이 있던 선창가와 머드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강은 온통 불
길에 휩싸여 있었다. 스타니스의 함선은 물론이고 킹스랜딩의 함선
들도 와일드파이어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위풍당당하던 함
선들은 장작더미로 변했고, 병사들은 살아 움직이는 횃불이 되었다.
강은 매캐한 연기와 화살,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강 하류에 떠 있는 뗏목과 무장 상선, 나룻배 위에서는 병사와 기사들


이 블랙워터 강의 급류를 타고 다가오는 초록색 죽음의 물결을 속절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리시에서 온 갤리선이 방향을 바꾸려고 용
을 쓰는 지네처럼 미친 듯이 노를 움직였지만, 소용없는 일일 터였다.
그 배들은 달아날 곳이 없었다.

성벽 아래에서 송진 단지가 폭발해 거대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


었다. 하지만 강물 위에서 넘실대는 와일드파이어의 불꽃에 비하면
그것은 촛불에 불과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에 불타는 강물의 색이
물들었고, 하늘은 천천히 초록색으로 변해 갔다. 기괴할 정도로 아름
다운 풍경이었다.

‘끔찍하지만 아름답군. 드래곤파이어 같아.’

티리온은 정복자 아에곤이 ‘불의 들판’을 보면서도 자신과 같은 기분


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뜨거운 바람이 주홍색 망토를 들썩이며 티리온의 맨발을 훑고 지나


갔다. 성벽 너머에서 시티워치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티리온은 그
들과 함께 들뜨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절반의 승리일 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티리온은 스타니스가 몰고 온 거대한 함선 하나가 와일드파이어의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았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초록색 불길
이 어찌나 강한지 성 위에서도 눈을 가려야 했다. 하늘을 찌를 듯 치
솟은 불기둥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강물 위에서 춤을 추었다. 강 위
에는 익사하거나 불에 탄 시체들이 수백 구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스타니스, 저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나? 불꽃에 휩싸인 저들이 보이
나? 이건 나만큼이나 당신의 공도 커.’

티리온은 스타니스 역시 블랙워터 남쪽 어딘가에서 이 처참한 광경


을 보고 있으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스타니스는 자이메나 로버트 왕
처럼 전투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분명 후방에서 티리온처럼 전투
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붉은 갑옷을 입고, 불꽃 모양의 장
식이 달린 붉은 왕관을 쓰고 말이다.

“오, 내 함대!”

킹스가드와 몸을 웅크리고 있던 조프리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의 투구에는 왕의 신분을 나타내는 황금색 머리띠가 장식되어 있었
다.

“내 킹스랜더가 불타고 있어. 퀸 세르세이와 로얄맨 호도 그렇구. 저


기를 봐, 시플라워 호에도 불이 옮겨 붙었어!”

조프리의 새 검이 강을 가리켰다. 초록색 불길이 시플라워 호의 노를


타고 올라가 황금색 선체로 번지고 있었다. 함장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와일드파이어의 불길을 피할 만큼 빠른 속도를 내지
는 못했다.

티리온은 시플라워 호가 곧 전소할 거란 사실을 잘 알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 우리 함대가 저들을 막으러 나가지 않았으면,


스타니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금방 눈치챘을 거야.’

모든 무기는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지만, 와일드


파이어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만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일단
사람의 손을 벗어나면 어는 누구의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렇게 불타지 않더라도 우리 함선은 어떻게든


파괴되었을 겁니다.”
티리온은 분개하는 조카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총안으로도 성벽 너머를 보기 힘들 만큼 키가 작아, 티리온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에게 몸을 들어올려 달라고 요구해야 했다. 거대한 불길
과 시커먼 연기 때문에 강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었
다. 하지만 상황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스타니스 함대의 사
령선이 강으로 진입하는 순간, 브론은 황소들을 채찍질해 윈치를 감
아 올릴 것이다. 그러면 무거운 쇠사슬이 삐걱거리며 천천히 올라올
테고, 스타니스의 전 함대가 그곳을 지났을 때쯤이면 쇠사슬이 처음
으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물방울을 뚝뚝 떨어
뜨리며, 군데군데 진흙이 묻은 채로 팽팽해질 때까지 들어올려질 것
이다. 블랙워터 강으로 들어올 때야 제 맘대로였겠지만, 나가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해류의 변덕이 심한데다 와일드파이어 역시 기대만큼 골고루


퍼져 주지 않아, 블랙워터만에 있던 배는 모두 불탔어도 남쪽 제방으
로 향했던 배들은 별 피해 없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적어도 여덟 척
의 함선이 성벽 아래에 정박했다.

‘불에 타든 무사히 해변에 정박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모두 우리 손


에 죽을 테니까.’

적함의 1진 중 남쪽에 있던 함선들은 상류로 향하는 해류 덕에 와일


드파이어를 피할 수 있었다. 적어도 3, 40척은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을 것이다. 병사들이 용기만 되찾는다면, 육지에 있는 스타니스
의 전 병력은 강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용기를 되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아무리


용감한 병사라도 동료들이 와일드파이어에 타 죽는 모습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할리네의 말에 따르면, 와일
드파이어는 하도 강력해서 살이 수지처럼 녹아 버린다고 했다. 하지
만 그렇다 하더라도…….
티리온은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 냉철하고 객관적이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전열은 파괴될 거고, 그렇게 되면 병사들은 심하


게 동요할 겁니다.’

언젠가 제이슬린이 경고해 준 말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종일관 승세를 타야 했다. 시커멓게 재가 된 강기슭
에서 적병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또 다른 돌격대가 필요한 시간이군.’

비틀거리며 막 육지로 올라왔을 때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


적들에게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티리온은 성벽 위에서 내려와 연락병 둘을 불렀다.

“제이슬린 경에게 적들이 강기슭에 도착했다고 전하게.”

그리고 또 다른 연락병을 향해 돌아섰다.

“세르 아르넬드에게 지금껏 잘해 왔다고 칭찬의 말을 전하고, 이제


‘놈’들을 서방 30도 방향으로 돌리라고 해.”

그 각도라면 강에까지 닿지 않더라도 와일드파이어보다는 더 멀리까


지 나아갈 것이었다. 그때 조프리가 끼여들었다.

“엄마는 ‘놈’들을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약속했어요.”

티리온은 조프리가 투구의 철면을 들어올린 모습을 보자 짜증이 치


밀었다. 물론 무거운 갑옷을 입었으니 덥고 답답할 것이었다. 하지만
눈에 화살이 박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티리온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조프리의 철면을 내렸다.

“조심하시죠. 우리에게는 전하의 옥체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리고 너도 그 잘생긴 얼굴을 다치고 싶진 않겠지?’

티리온은 속이 뒤틀렸지만 조카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네, 시체는 전하의 것이죠.”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였다. 이미 불타고 있는 전함들을 향해


와일드파이어를 더 던진다는 건 무의미했다. 그것보다는 스타니스에
게 몰래 성문을 열어 주려 했던 반역자들을 날려보내는 게 더 나을 터
였다. 조프리는 그들을 처형하면서 스타니스에게 꼭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반역자들의 시신은 머리에 대못을 박은 채 성 아래 광장
에 묶여 있었다. 시신은 송진 단지보다 가벼워 훨씬 멀리까지 날아갈
것이었다. 시티워치들은 그 시신들이 블랙워터 강을 넘어갈 것이냐,
그렇지 못할 것이냐를 두고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

“곧 투석기를 사용해야 하니 되도록 빨리 끝내시죠. 와일드파이어도


영원히 불타지는 않을 겁니다.”

티리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프리가 메린의 호위를 받으며 신이 나


서 성벽을 내려갔다. 티리온은 왕을 따라나서는 오스문드의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을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시오. 알아들었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오스문드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티리온은 메린과 오스문드에게 왕이 조금이라도 해를 입으면 그들도


온전치 못할 것임을 경고했고, 조프리 왕의 안전을 위해 계단 아래에
믿을 만한 시티워치를 열두 명이나 대기시켜 놓았다.

‘누나, 최선을 다해 누나의 망나니 아들을 보호해 주겠어. 누나도 알


라야야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는지 어디 두고 보겠어.’
티리온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조프리가 사라지자마자 연락병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뛰어올


라와 티리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티리온 경, 적군 수백이 마상시합장에 상륙했습니다. 그들은 충차를


앞세우고 킹스게이트로 오고 있습니다.”

티리온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뚱뒤뚱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에서 기


다리고 있던 포드릭이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그들은 서둘러 거리로
말을 몰았고, 그 뒤를 포드릭과 만돈 무레가 바짝 따라갔다. 그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이 쉽게 게이트를
옮겨다닐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놨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킹스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충차가 성문을 들이받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거대한 경첩이 힘을 못 이겨 삐걱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죽어 가는 거인의 비명소리 같았다. 문루 여기저기서 부상병들
의 모습이 보였지만, 아직은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은 되어
보였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군마도 성한 놈들이 꽤 눈에 띄었다.

티리온은 말에서 급히 뛰어내렸다. 그 충격으로 게이트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전열을 정비하라. 누가 이곳을 지휘하고 있지? 모두 나가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짙은 회색 갑옷을 입은 키 큰 사내, 산도


르였다. 그는 불에 그을리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투구를 벗어 바닥
에 내던졌다. 왼쪽 귀가 잘리고, 눈 위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 얼굴의
반을 덮었다.

티리온은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할 수 있네.”

“빌어먹을!”

산도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세 번이나 나갔습니다. 병사 중 절반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


습니다. 와일드파이어가 우리 주위에서 터졌습니다. 말들이 인간처
럼 비명을 질러 댔고, 인간들은 말처럼…….”

“마상시합이나 하자고 자네들을 고용한 줄 아나? 맛있는 우유와 딸


기라도 가져다줄까? 그게 아니라면 다시 말에 올라타라. 자네도, 산
도르!”

산도르가 마지못해 자신의 롱소드를 뽑았다. 그의 피 묻은 얼굴에서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산도르가 두려워하고 있어. 사냥개 산도르가 두려워하고 있다구.’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산도르, 적들이 충차를 가지고 왔네. 자네도 저 소리가 들리겠지?


우리는 저들을 쫓아내야만 해.”

산도르가 롱소드의 끝을 땅에다 박고 서서 외쳤다.

“성문을 열어라. 저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문을 닫고 그때 포위 공격


을 한다.”

그러고는 티리온을 바라보았다.

“부하들의 반을 잃었습니다. 말도 마찬가지구요. 더 이상 부하들을


불 속으로 몰아넣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만돈 무레가 티리온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산도르를 나무랐
다.

“산도르, 이분은 핸드님이시네. 핸드님이 자네에게 명령하고 있잖은


가!”

“핸드면 답니까?”

산도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얼굴은 우윳빛처럼 창백했다.


그가 금빛 망토를 두른 시티워치를 하나 불러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병사가 급히 물을 가져와 건넸다.

“물이잖아! 누가 물을 달랬나? 술을 가져와!”

산도르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바로 던져 버렸다. 티리온은 평소와


다른 산도르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친구는 지금 죽어 가고 있어. 틀림없어. 저 상처……. 저 녀석은


이제 끝났어. 다른 사람이 필요해. 한데 누가 있지? 세르 만돈?’

산도르의 공포가 병사들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휘자가 없는 한 병사들은 절대
전쟁터로 나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럼 세르 만돈을?’

하지만 자이메는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했었다.

‘병사들도 저 친구를 따르려 들지 않을 거야.’

또다시 거대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어둑해지는 하늘로 초록색과 오


렌지색 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성문이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돌격대를 이끌겠다.”


‘이건 미친 짓이야. 하지만 패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패배는
죽음이며 수치잖아.’

티리온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라도 산도르가 그 말에 자


극을 받고 다시 용기를 내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
했다.

“당신이?”

산도르가 비웃듯 피식 웃었다. 병사들의 얼굴에도 의심의 빛이 떠올


랐다.

“그래, 내가 한다. 세르 만돈, 자네가 깃발을 들어 주게. 그리고 포드


릭, 내 투구 좀 가져다줘.”

포드릭이 바로 투구를 가지러 뛰어갔다.

산도르가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검에 몸을 의지하고 서서 눈알을 굴렸


다. 티리온은 만돈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탔다.

“전열을 정비하라.”

머리에 철면을 쓰고 엉덩이에 주홍색 천을 걸친 티리온의 붉은 말 위


에는 금으로 도금된 안장이 얹혀 있었다. 포드릭이 투구와 황금 손 주
위로 작은 사자가 둘러서 있는 붉은색 참나무 방패를 건네주었다.

티리온은 병사들 주위로 원을 돌며 말을 몰았다. 그의 명령에 따라 전


열에 선 사람은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너희들은 나를 난쟁이, 하프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지금 너희들이


나보다 나은 게 뭐지?”

티리온의 경멸에 찬 말은 병사들에게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다. 기사


하나가 묵묵히 말에 오르더니 전열을 가다듬은 병사들에 합류했다.
그러자 용병 둘이 그 뒤를 따랐고, 이어서 더 많은 병사들이 줄줄이
티리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킹스게이트가 다시 흔들렸고, 잠
시 후 병사들 중 반이 티리온의 편에 섰다.

티리온은 액스를 뽑아들고 단호한 표정으로 병사들 주위를 빙 돌며


소리쳤다.

“나는 자네들에게 조프리 왕을 위해 싸우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


고 캐스틀리 록을 위해 싸우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스타니스가 약탈
하려는 이곳은 바로 자네들의 도시고, 무너지려는 것은 자네들의 성
이다. 나와 함께 우리의 안식처를 위협하는 저 침입자들을 막아내
자.”

그런 뒤 성문을 향해 힘차게 말을 몰았다.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으리


라 생각하면서도 티리온은 감히 뒤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산사

촛대의 불꽃이 왕대비의 응접실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홀 안


의 분위기는 여전히 음울했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문 앞에
바위처럼 꼼짝도 않고 선 일린 파이네의 흐릿한 눈에서도, 왕대비에
게 뭔가를 속삭이는 오스네이의 작은 목소리에서도, 숨이 넘어갈 듯
콜록거리는 길레스의 기침소리에서도 음울함이 느껴졌다.

오스네이는 산사가 막 마지막 수프를 뜰 때 들어왔다. 그는 마구간 냄


새를 풍기며 동생 오스프리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왕대비 앞
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뺨에 길게 네 줄로 딱지가 앉아 있었고, 머리
는 옷깃을 덮고 눈을 가릴 정도로 길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산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적군이 일부 강기슭으로 올라왔지만 하운드


가 모두 처리했습니다. 티리온 경께서 봉쇄 사슬을 올렸다고 합니다.
플레어 바톰에서는 주정꾼들이 가게문을 부수고 난동을 피워 제이슬
린 경이 시티워치를 보냈습니다. 바엘로의 셉트는 기도를 하려고 몰
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내 아들은 어디에 있죠?”

“전하께서는 하이셉톤께 축사를 들으러 바엘로에 가셨습니다. 지금


쯤은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핸드님과 함께 성벽 위를 걷고 계실
겁니다.”

세르세이가 시종에게 포도주 잔을 채우라고 손짓을 했다. 아보르 지


방에서 제철에 수확해 담근 포도주는 향이 강하고 색이 진했다. 왕대
비는 평소보다 과음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아름다움이 빛을
발했다. 붉게 물든 볼, 열기를 뿜어내는 듯한 눈동자…….

‘와일드파이어 같아.’

산사는 아름다운 왕대비가 두려웠다.

악사들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연주를 시작했다. 문 보이가 구경하


는 사람들을 놀리며 죽마를 타고 홀을 누비고 다녔고, 돈토스는 빗자
루 말을 타고 하녀를 쫓아다녔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지만,
그것은 당장에라도 흐느낌으로 바뀔 수 있는 서글픈 웃음이었다.

‘모두 몸은 이곳에 있지만, 생각은 도시의 성벽에 가 있어. 마음까지


도 말이야.’

산사는 홀 안을 휙 둘러보았다.

수프 접시가 거둬지고 사과와 땅콩과 건포도로 버무린 샐러드가 나


왔다. 다른 때 같으면 맛있게 먹었을 테지만, 오늘밤은 음식을 봐도
흥이 나지 않았다. 식욕이 없는 사람은 산사만이 아닌 듯했다. 길레스
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기침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소비했고, 롤리
스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앉아 떨고만 있었다. 갑자기 란셀 휘하의 기
사와 결혼한 어린 신부가 홀이 떠내려가라 울기 시작했다. 왕대비는
마에스터 프렌켄을 불러 여자에게 드림와인을 먹여 재우라고 명령했
다.

왕대비가 홀을 나가는 여자를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물……, 우리 어머니는 눈물을 여자의 무기라고 하셨지. 남자의


무기는 검이고 말이야. 산사, 그 말에는 네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담겨 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네, 남자들은 매우 용감해요. 말을 달리며 검과 액스에 맞서고…….”

“언젠가 자이메가, 자신은 전투를 하거나 침대에 있을 때에만 진정으


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어.”

왕대비가 또 한 번 포도주를 들이켰다. 앞에 놓인 샐러드 접시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저 여자들과 함께 있느니, 차라리 검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하지만 왕대비님께서 저들을 부르셨잖아요?”

“왕대비로서 해야 할 임무이자 의무이니까. 원치 않지만 해야 할


일……. 산사, 너도 언젠가 조프리와 결혼하게 될 테니 기억해야 할
거다.”

왕대비가 홀에 모여 있는 누군가의 아내, 딸, 어머니들을 휙 둘러보았


다.

“여기 모인 저 여자들은 모두 하찮은 존재일 뿐이지만, 그 남편, 자


식, 아버지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지. 그들 중 몇몇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 거야. 그러니 그들을 위해 여자들을 보호해 줘야 하는 게
내 임무가 되는 거지. 만약 티리온이 승리를 거둔다면 여자들은 자신
의 남편과 아버지, 아들에게 돌아갈 거야. 그리고 얘기하겠지. 내가
얼마나 용감했고,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와 격려를 주었는지 말
이야. 그리고 내가 우리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
하겠지.”

“하지만 성이 함락된다면요?”

왕대비가 산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그러길 바라겠지, 안 그래?”

산사가 부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왕대비의 말이 이어졌다.

“경비병이 배신하지 않는다면, 잠시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스타니스에게 굴복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스
타니스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성이 함락된다면, 여기 나의 손님들은
얼마간의 고통을 치러야 할 거야. 병사들이 여자를 보고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너도 그 최악의 상황에서 제외되지는 않을 거
다.”

산사는 소름이 끼쳤다.

“모두 힘없는 여자들일 뿐이고 집안도 좋잖아요.”

“물론 저들의 신분이 어느 정도 보호막이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


가 생각하는 만큼은 아닐 거다. 물론 몸값이 적지 않겠지만,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병사들은 돈보다 살덩이를 원하는 법이거든. 그렇더
라도 황금 방패가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어쨌든 여자들은 대부분 친
절한 대우를 받지 못할 거야. 탄다 부인의 하녀처럼 예쁜 것들은 즐거
운 밤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늙고 못생긴 여자들에겐 그런 일도 일어
나지 않을 거야. 하긴 술에 취하면 뚱뚱하고 냄새나는 여자도 너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네? 저요?”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산사, 넌 이제 여자야. 기억하지? 그리
고 내 장남의 약혼자이기도 하고.”

왕대비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산사, 성밖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난 아마 그 사람을 유


혹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스타니스 바라테온이야. 차라리 그
가 탄 말을 유혹하는 게 낫지.”

산사는 너무 놀라 입이 벌어졌다. 왕대비가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으며


산사에게 몸을 기울였다.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구나? 넌 역시 어리석어. 여자의 무기는


눈물만이 아니지. 너의 다리 사이에도 하나 더 있어. 그걸 사용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한다. 남자들이 얼마나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검을
사용하는지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검엔 두 종류가 있다는 것도 함께
말이지.”

그때 케틀블랙 형제가 들어왔기 때문에 산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


아도 되었다.

오스문드와 그의 형제는 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늘 웃


는 얼굴로 농담을 즐기는 그들은 기사나 종자는 물론이고 하인이나
사냥꾼들하고도 사이가 좋았다. 하녀들과도 잘 지낸다는 소문도 있
었다. 최근 오스문드는 산도르의 자리인 조프리의 옆자리를 차지했
다. 산사는 여자들이 빨래터에서 오스문드가 산도르만큼 강하다고
쑥덕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럼 왜 오스문드가 킹스가드로 임명되
기 전까지는 케틀블랙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스네이가 환한 얼굴로 왕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대비님, 폐선들이 폭발했습니다. 블랙워터 전체가 와일드파이어


에 휩싸여 1백여 척의 배가 불타고 있습니다. 어쩌면 더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전하는? 내 아들은 어디에 있죠?”

“전하께서는 머드게이트에 계십니다. 핸드님과 두 킹스가드가 전하


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공이 있는 병사들
에게 상을 내리셨습니다. 모두 전하가 훌륭한 분이라고 입을 모았습
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기도 하죠.”

세르세이가 검고 긴 머리에 강철 투구를 쓰고, 검은 콧수염을 길게 늘


어뜨린 오스프리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오스네이보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당신은 무슨 일이죠?”

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대비님, 마부와 하녀 둘이 전하의 말 세 필을 훔쳐 뒷문으로 달아


나다 잡혔습니다.”

“첫번째 배신자들이로군.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생기겠죠. 경종을 울


리는 의미에서 세르 일린을 보낼 테니 그들의 머리를 가축우리에 매
달아 놓도록 하세요.”

그들이 나가자 왕대비가 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아들 옆에 앉고 싶다면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을 거다. 오늘 같은


밤에는 우아하게 행동하거라. 배신자들은 비가 내린 뒤의 독버섯처
럼 불쑥불쑥 튀어나올 테니까. 사람들의 충성을 변치 않도록 하기 위
해서는 그들이 적보다 너를 더 두려워하게 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왕대비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산사는 두려움보다 사랑이 사람들의 충성을
얻어내는 데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만약 왕비가 된다면, 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야.’

샐러드 다음에는 게살로 만든 파이가 나왔고, 이어서 부추와 당근과


함께 구운 양고기, 속이 빈 빵이 나왔다. 롤리스가 무엇에 놀랐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길레스는 계
속 기침을 해대더니 결국 의식을 잃고 음식 위로 엎어졌다.

“저런 최악의 멍청이를 만들다니, 신이 정신이 나가셨던 게 분명해.


저런 자를 돌봐 주는 나도 미친 사람이고.”

왕대비가 음식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있는 길레스를 혐오스러운 듯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오스프리드가 주홍색 망토를 휘날리며
다시 홀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달라며 광장으로 몰려들고 있습니


다. 모두 평민이 아니라 부유한 상인들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말을 듣지 않으면 궁수들을 보내구요.


출격이 아닌 이상 어떤 이유로든 성문은 열 수 없어요.”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오스프리드가 절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직접 그들의 목에 검을 들이댔으면 좋겠어!”

왕대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자이메와 난 너무 닮아서 아버지도 우리를 구별하지 못하
셨지. 그래서 우린 가끔 서로 옷을 바꿔 입고 하루를 보내기도 했어.
하지만 자이메가 처음으로 검을 갖게 되던 날, 내 건 없었어. ‘제 건
없어요?’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우리는 아버지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닮았는데 왜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난 도저
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 자이메가 검과 창과 철퇴를 휘두를 때, 나는
미소짓고 노래하고 예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 자이메는 캐스
틀리 록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나는 말처럼 생긴 이상하고 낯선 사람
에게 팔려 갔어. 나는 주인이 가고 싶어하는 곳은 어디든 따라가야 했
고, 주인의 쾌락을 위해 때가 되면 물러나 있어야 했지. 자이메에게는
명예와 힘이 주어졌지만 내 몫은 남편 수발과 출산뿐이었어.”

“하지만 세븐킹덤의 왕대비시잖아요.”

“검에 관한 한, 왕대비도 결국 여자일 뿐이야.”

세르세이의 잔이 다시 비었다. 시종이 술병을 들고 다가왔지만, 왕대


비는 잔을 뒤집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맑은 정신으로 있어야 하거든.”

마지막 요리는 구운 사과와 치즈를 바른 염소고기였다. 오스네이가


다시 돌아왔을 때 홀은 계피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대비님, 스타니스가 마상시합장에 병사들을 하선시키고 있습니


다. 그리고 더 많은 군함이 강을 건너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드게이
트를 공격하고, 충차를 가져와 킹스게이트를 부수고 있습니다. 티리
온 경께서 그들을 격퇴시키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출격했습니다.”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겠군. 티리온이 조프리 왕을 데려가지는 않았


겠죠?”

싸늘한 왕대비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네, 왕대비님. 전하는 오스문드와 함께 ‘놈’들을 강으로 던지고 계십
니다.”

“머드게이트가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에요? 이런, 어리석


기는……. 지금 당장 세르 오스문드에게 조프리 왕을 성으로 모셔오
라고 하세요.”

“티리온 경께서…….”

세르세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내가 명령한 것만 신경 쓰면 돼요. 세르 오스문드에게 다음


출격대를 이끌고 싶지 않으면 맘대로 하라고 하세요.”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왕대비에게 몰려와 셉트로 가도록 허락해


달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세르세이는 우아하고 너그럽게 그들의 요
청을 수락했다. 탄다 부인과 그 딸들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함께 나갔
다.

음유시인이 홀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하프를 뜯으며, 플로리안과 조


니킬, 드래곤나이트인 아에몬 왕자와 나에리스의 사랑, 그리고 마녀
라 불리는 니메리아의 전설을 노래했다. 아름답지만 몹시 슬픈 노래
였다. 눈물을 훔치는 여자가 몇몇 눈에 띄었고, 산사의 눈가도 촉촉하
게 젖어들었다. 왕대비가 산사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래, 잘하고 있구나. 미리 눈물 흘리는 연습이라도 해두는 거니?


스타니스 앞에서 눈물을 보이려고?”

산사는 황당한 얼굴로 왕대비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산사, 가면을 벗는 게 좋을 거야. 난 네가 가즈우드에서 벌이는 작은


반역에 대해 모두 알고 있거든.”
“가즈우드에서요?”

산사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 세르 돈토스를 돌아봐선 안 돼. 침착해야 해. 왕대비는 모를 거


야. 아무것도 모를 거야. 그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어. 돈토스가 내게
약속했는걸. 나의 플로리안은 절대 실수하지 않았을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반역이라뇨? 전 가즈우드에 기도를 하러 갔던 것


뿐이에요.”

“기도? 스타니스를 위한 기도겠지. 아니면 네 오빠를 위한 것이든지.


하긴 네 아버지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이상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너
는 우리의 패배를 기도하고 있어. 그걸 반역이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
니?”

산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급히 손사래


를 쳤다.

“저는 전하를 위해 기도했어요.”

“그래? 한데 왜? 조프리가 너무 다정하게 대해 주어서?”

왕대비가 한참 동안 산사를 노려보다가 지나가던 하녀를 불러 포도


주를 한 병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하녀가 가져온 포도주를 산사
의 잔에 가득 부었다.

“마셔라. 어쩌면 포도주가 네게 진실을 털어놓을 용기를 줄 수도 있


겠지.”

왕대비가 차갑게 말했다.

산사는 잔을 들고 포도주를 홀짝였다. 맛은 달콤했지만 혀가 얼얼할


정도로 독했다.
“제대로, 쭉 마시거라. 내 명령이다.”

산사는 속이 메슥거렸지만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더 마시겠니?”

“아뇨, 그만 마시겠어요.”

왕대비는 매우 불쾌해 보였다.

“전에 세르 일린에 대해 물었었지? 그때 난 거짓말을 했다. 산사, 진


실을 듣고 싶니? 세르 일린이 여기 남은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니?”

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대비는 개의치 않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세르 일린이 고양이처럼 조용히 다
가왔다. 그의 손에는 에다드의 보검 ‘아이스’가 들려 있었다. 산사의
아버지는 사람을 처형하고 난 뒤에는 언제나 가즈우드로 가서 검을
깨끗이 닦았었다. 하지만 세르 일린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지 검에
갈색으로 변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세르,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산사에게 말해 주세요.”

일린은 쫓기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말을 뱉어냈다. 천연두 자국이 얽


어 있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일린의 얘기가 끝나자
왕대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잘 들었지? 세르 일린은 우리를 위해 이곳에 있는 거다. 어쩌면 스


타니스가 전쟁에서 승리해 왕좌를 가로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가 우리를 심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는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을 거다.”

“우리라고요?”
왕대비가 손을 뻗어 산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그러니 이제 다시 기도를 드려야 하겠지? 스타크 가문


사람들도 라니스터 가문이 몰락하면 즐거울 게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지.”

티리온

투구에 시야가 가려 앞쪽밖에 보지 못하는 탓에, 티리온은 강변으로


고개를 돌려서야 갤리선이 세 척이나 새로 들어왔음을 알았다. 강에
서는 거대한 네 번째 함선이 투석기로 화염통을 던지고 있었다.

“쐐기 대형으로!”

티리온은 비상문을 빠져나오는 병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병사들이 티리온을 선두로 하여 대오를 지었다. 만돈 무레가 에나멜


칠을 한 흰색 갑옷에 불꽃을 어른거리며 티리온 왼편에 섰다. 평소 흐
리멍덩하던 그의 눈동자가 투구 속에서 차갑게 빛을 발했다. 그는 흰
색 마갑을 두른 검은 말을 타고, 티끌 한 점 없이 하얀 방패를 들고 있
었다.

티리온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포드릭, 네가 왜 여기 있지? 넌 아직 어려. 돌아가.”

“저는 경의 종자입니다.”

포드릭의 표정은 단호했다. 티리온은 말싸움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


었다.
“그럼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라.”

그들은 어렴풋이 보이는 성벽을 따라 말을 달렸다. 만돈의 창 자루에


서 황금색과 주홍색 깃발이 펄럭이며 사자와 수사슴이 춤을 추었다.
성 앞쪽으로 나오니, 육지나 바다 할 것 없이 날아다니는 돌덩이로 아
수라장이었다. 성벽에서는 끊임없이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앞쪽
으로 킹스게이트가 어렴풋이 보이면서, 쇠로 싼 거대한 참나무 충차
와 씨름하는 스타니스의 병사들이 보였다. 막 배에서 내려 문루의 병
사들에게 가차없이 화살을 쏘아 올리는 스타니스의 궁수들도 보였
다.

“창을 들어라!”

티리온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천천히 말을 달렸다. 땅이 물과 피


에 흠뻑 젖어 조심해야 했다. 티리온의 말이 시체에 걸려 말발굽이 미
끄러지면서 잠시 휘청했다. 티리온은 적들과 맞닥뜨리기도 전에 말
에서 떨어지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말은 곧 다시 균형을 잡았
다.

킹스게이트 앞에 있던 스타니스의 병사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티리온


의 군대를 보고 놀랐는지 잠시 허둥댔다. 티리온은 그때를 이용해 기
세를 잡아야 한단 생각으로 액스를 높이 치켜들었다.

“킹스랜딩!”

그 소리는 병사들의 외침에 이내 묻혀 버렸다. 주위가 이내 창과 검과


액스가 부딪치는 쇳소리와 말발굽소리로 요란해졌다.

만돈 무레가 깃발이 나부끼는 창으로 달려오는 적군의 가슴을 찌른


뒤 그대로 들어올렸다. 창 자루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티
리온 앞으로도 기사가 하나 달려왔다. 갑옷에 꽃을 바라보고 있는 여
우가 새겨져 있었다.
‘플로렌트로군.’

기사는 투구를 쓰지 않은 채였다. 티리온은 온 힘을 다하여 액스를 휘


둘러 기사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 충격으로 어깨가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샤가가 나를 보면 비웃겠군.’

티리온은 말을 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방패로 쉴새없이 창이


날아왔다. 포드릭도 옆에서 말을 달리며 지나치는 적들을 모두 베고
있었다. 어렴풋이 성벽에서 병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적병들이 싸
우기 위해 돌아서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충차가 진흙 속으로 처박혔
던 것이다.

티리온은 궁수 하나를 말발굽으로 짓밟으면서, 창을 휘두르며 달려


드는 적군의 팔을 힘껏 베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은 충
차 앞에서 뒷발을 들며 멈춰 서고 말았다. 티리온은 그 자리에서 닥치
는 대로 적병의 팔다리를 자르고, 머리통을 박살내고, 방패를 갈랐다.
사실 강을 건너는 동안 방패를 끝까지 지켜낸 병사는 그리 많지 않았
다.

티리온은 말을 재촉해 충차를 훌쩍 뛰어넘었다. 도망치는 적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포드릭 생각이 났다. 고개를 휘휘 돌려 주위
를 살폈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화살 하나가 그의 볼을
닿을 듯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나무 그루터기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가슴에 표적을 그려


놓고 선 거나 마찬가지겠군.’

티리온은 말에 박차를 가해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블랙워터 강의 하류는 불타는 갤리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와일드파


이어는 여전히 물위를 떠다니며 초록색 불기둥을 공중으로 쏘아 올
리고 있었다. 충차를 몰고 온 적군은 모두 물리쳤지만, 아직 강변 지
대 곳곳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불타는 배에서 탈출해 강변으로
기어오르는 적들을 바론 스완과 란셀의 부하들이 다시 물 속으로 처
박으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머드게이트로 가자!”

티리온의 명령에 만돈이 외쳤다.

“머드게이트로 향하라!”

그러자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이동했다.

“킹스랜딩!”

“하프맨! 하프맨!”

티리온은 누가 그들에게 자기 이름을 부르게 했는지 궁금했다. 분노


에 찬 외침, 탁탁거리는 불꽃 소리, 나팔소리 등이 귀에 윙윙거렸다.
주위는 온통 이글거리는 불꽃투성이였다.

‘제길, 하운드가 나오기 싫어한 이유를 알겠군. 그 친구가 두려워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저 불길이야.’

커다란 돌덩어리가 갤리선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물살이 높이 치솟


았다.

‘우리 배야, 스타니스 배야?’

고개를 쭉 빼고 보았지만 검은 연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티리온이 이끌던 쐐기형 편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병사들은 이


제 모두 제각각 전투를 하고 있었다. 티리온을 따르는 인원은 손에 꼽
을 정도였다.
티리온은 갑자기 액스를 든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말도 산도르만큼
이나 불을 싫어해 말을 몰기가 유난히 힘들었다. 그래도 산도르보다
는 말을 다루기가 더 쉬운 듯했다.

화상을 입은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강을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티리


온은 부하들을 이끌어 비틀거리며 기침을 해대는 적병들을 깨끗이
해치웠다. 이제 전투의 규모는 그의 시야에 다 잡힐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라니스터!”

티리온보다 몸집이 두 배는 큰 기사들이 도망치거나 멍하니 서 있다


가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제 티리온의 눈에 그들은 겁먹고 하찮은
존재들일 뿐이었다.

“하프맨! 하프맨!”

티리온은 자신을 향한 환호성을 들으며 액스를 휘둘렀다. 정신이 몽


롱하고 술에 취한 듯 기분이 들떴다. 와일드파이어의 불빛을 받아 피
에 젖은 팔이 온통 발갛게 보였다.

‘전투 열병.’

자이메에게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지만, 티리온은 자신이 그것을 경


험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거나 아
예 멈춘 것 같았다.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고 오직 현재만이 남았고,
두려움도, 고통도 사라졌다.

언젠가 자이메는 전투 열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었다.

“그때는 상처의 아픔도 느끼질 못해. 갑옷의 무게도, 눈 속으로 들어


오는 땀방울도 전혀 인식하질 못하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고,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 심지어 나 자신도 잊어버려. 전투와 적군밖에 보이
질 않아. 이 사람을 해치우면 다음 사람, 또 다음 사람, 또 다음 사
람……, 오직 다음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야. 적들이 날 두려워한다는
게 느껴지면서 너무 흥이 나. 적들의 검이 너무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서 그들 주위를 웃고 춤추며 돌아다니지.”

‘그래, 난 하프맨이다. 그리고 살인을 즐기고 있지. 나를 죽일 수 있다


면 그러라고 해!’

그때 창을 든 적병 하나가 티리온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액스를 휘둘


러 병사의 창 자루를 부러뜨린 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머리와 팔을
베었다. 이어서 궁수가 활도 없이 화살만 달랑 들고는 그것이 단검이
라도 되듯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티리온의 말이 허벅지를 차
자 그대로 진흙탕에 넘어져서는 기어 도망쳤다. 티리온은 그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달려 땅에 꽂힌 스타니스의 깃발 하
나를 두 동강 냈다. 한데 바로 앞에서 기사 하나가 그레이트 소드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티리온을 겨냥하고 있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기사의 겨드랑이게 단검을 꽂았다. 티리온의
부하 중 하나일 터였지만, 티리온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항복합니다. 항복합니다, 세르. 맹세합니다. 여기, 여기.”

한 기사가 흙탕물에 누운 채 큰 소리로 외치며 항복의 증거로 목이 긴


장갑을 내밀었다.

티리온이 사내에게서 장갑을 받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순간, 갑자기


와일드파이어 단지가 폭발하면서 초록색 불꽃을 흩뿌렸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흙탕물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티리온의 손에 들린 장갑
에는 기사의 손이 들어 있었다.

티리온은 몸서리를 치며 손이 든 장갑을 뒤로 던졌다.

“항복.”

기사의 절망적인 흐느낌을 뒤로하고 티리온은 말머리를 돌렸다.


적병 하나가 또다시 달려들었다. 병사는 먼저 티리온의 말굴레를 움
켜잡은 뒤 단검을 얼굴에 들이밀었다. 티리온은 고개를 뒤로 살짝 젖
히며 액스를 적의 목덜미에 꽂았다.

적의 목에서 액스를 빼내기 위해 힘을 쓰는 티리온의 시야에 흰색 물


체가 잡혔다. 만돈 무레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다른
기사였다.

바론 스완의 갑옷도 흰색이었다. 그의 말에는 가문의 문장인 고니가


장식되어 있었다. 바론의 갑옷은 군데군데 핏물이 얼룩지고, 연기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저기를 보십시오.”

바론이 곤봉을 들어 강 하류를 가리켰다. 곤봉 머리에는 해골과 뼛조


각이 붙어 있었다.

티리온은 블랙워터를 내려다보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거세게 흐


르는 급류는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물위는 피와 불꽃으로 혼
란스러웠다. 하늘은 온통 붉은색과 오렌지색, 번쩍거리는 초록색으
로 휘황찬란했다.

“뭘 말인가?”

그때 부두에 정박한 난파선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강변


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엄청난 수로군. 도대체 어디서 온 거지?’

티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연기가 자욱한 강변을 살폈다. 강 위에


20여 척의 갤리선이 있었다. 아니, 훨씬 더 많은 듯했다. 그것들은 노
가 서로 교차되어 있었고, 선체는 갈고리로 함께 고정되어 있었다. 그
리고 밧줄로 그물처럼 엮여 있었다. 전함들은 파손된 상태였지만 다
닥다닥 붙어 있어 옆 갑판으로 뛰어넘을 수가 있었다.
스타니스의 용감한 병사들은 그런 식으로 블랙워터 강을 건너고 있
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말을 재촉해 초록색 불길에 휩싸인
갑판을 건너려는 어리석은 기사도 보였다.

‘저들은 피로 얼룩진 다리를 만들었어.’

티리온은 절망감에 빠졌다. 다리 중간중간이 가라앉고 불에 타고 있


었지만, 그들은 다리 건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피의 다리는 당장
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계속 삐거덕거렸다.

티리온은 존경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바론을 바라보았다.

“용감한 사람들이군. 하지만 우리가 가서 죽여 줘야지.”

티리온은 불꽃과 재를 헤치며 병사들을 이끌고 강변으로 갔다. 바론


의 부하들이 돌로 된 방파제를 쿵쾅거리며 티리온의 뒤를 따랐다. 만
돈 역시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방패는 너무 헤져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그들이 돌격하기도 전에, 적들은 서로 살겠다고 밀고 싸우느


라 전열이 와해되고 있었다. ‘피의 다리’ 끝에는 드래곤베인이라고 적
힌 갤리선이 반쯤 가라앉은 채로 떠 있었다.

셀티가르 가문의 붉은 게 문장을 가슴에 단 병사가 바론 스완의 말에


창을 꽂았다. 순식간에 일을 당한 바론이 그대로 안장에서 미끄러지
는 순간, 티리온은 바론을 넘어뜨린 적의 머리를 난타했다. 하지만 고
삐를 놓치는 바람에, 말이 그대로 강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말에서
튀어오른 티리온은 공교롭게도 적함의 갑판에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끔찍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티리온은 다리가 부러져 고


통스럽게 울부짖는 말을 보고 단검을 꺼내 목을 베어 주었다. 불쌍한
말은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죽어 갔다.

티리온은 난간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가는 내내 싸우고 또 싸


워야 했다. 몇몇은 죽고 몇몇은 부상을 입었으며 몇몇은 도망갔다. 하
지만 항상 그렇듯, 도망친 자들보다 더 많은 숫자가 그와 맞섰다. 어
느 순간 티리온의 손에는 단검 대신 어디서 얻었는지 알 수 없는 부러
진 창이 들려 있었다. 그는 부러진 창을 움켜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적
들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티리온은 적들을 헤치며 난간을 기어올라 다음 배로, 또 다음 배로 계


속 나아갔다. 언제부터인가 흰 갑옷을 입은 바론 스완과 만돈 무레가
그림자처럼 티리온 곁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벨라리온의 창병들
에게 둘러싸여 열심히 싸웠다. 두 킹스가드는 춤을 추듯 우아하게 적
병들을 쓰러뜨렸지만, 티리온은 약간 볼썽사나웠다.

티리온은 한 사내의 배를 창으로 찌르면서 또 다른 사내를 강물로 밀


어뜨렸다. 화살 수십 대가 눈앞을 지나가거나 탁탁 소리를 내며 갑옷
에 부딪히다가 어깨와 가슴받이 사이에 한 대 박혔다. 하지만 티리온
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벌거벗은 시체 하나가 하늘에서 툭
떨어져 메론 깨지듯 사방으로 피를 튀기며 산산조각 났고, 킹스랜딩
의 성에서 날려보낸 돌덩이가 갑판을 부수고 사람들을 짓이겼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의 다리’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배가 부서지는구나.’

티리온은 투구 속으로 물이 차는 걸 느꼈다. 얼른 투구를 벗고 물이


목에 찰 때까지 갑판을 천천히 이동해 다른 배로 올라탔다. 거대한 야
수가 죽어 가며 울부짖는 소리처럼 신음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갤리선들이 부서지면서 ‘피의 다리’도 붕괴되고 있었다. 문득 천둥소


리처럼 커다랗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갑판이 흔들렸다.
티리온은 다시 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번에는 배가 너무 많
이 기울어 밧줄을 잡고 조심스레 올라가야 했다.

티리온은 자신이 올라탄 배와 함께 묶여 있던 함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가 급류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았다. 배 안에 있던 병사들이 허겁지
겁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스타니스의 불타는 심장, 조프리의 사슴과
사자 등의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뭍에서는 여전히 맹렬한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서로 뒤엉켜


싸우는 병사들 무리 위로 붉은색 깃발이 물결을 이뤘고, 방패벽이 모
였다가 부서졌다. 말 탄 기사들은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며 질주했
다. 곳곳이 먼지와 연기, 피로 가득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레드킵이
불을 내뿜으며 언덕 위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데…… 둘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스타니스 군대와 성의 위치가 말
이다.

‘어떻게 스타니스가 북쪽 둑으로 건너올 수 있었지?’

티리온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


야 갑판이 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스타니스가 건너온 게 아니라면 내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거


지?’

티리온은 이 모든 상황을 조리에 맞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문득 어


깨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져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제야 어깨에 화살
이 박혀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배에서 빠져나가야 해.’

강은 불길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붙잡고 있는 배가 부서지기라도 한


다면 급류에 휩쓸려 바로 불길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었다.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티리온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여기, 여기야! 나 여기 있어. 도와 줘!”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 스스로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티리온은 기울어진 갑판 위로 가까스로 몸을 끌어올려 난간을 잡았
다. 하지만 그 순간 배가 다른 배와 부딪치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아까까지 넘쳐나던 힘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간신히 난간에 매달려 있는데, 저 건너편 배 갑


판에서 만돈 무레가 손을 내밀고 선 모습이 보였다.

“티리온 경, 제 손을 잡으시죠!”

만돈 무레의 흰색 갑옷은 강물 위의 불길이 반사돼 반짝거렸고, 장갑


은 검붉은 피에 젖어 끈적끈적해 보였다. 티리온은 팔이 좀더 길지 못
한 것을 아쉬워하며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닿는 순간, 아주 하찮은 사실이 티리온을 괴롭혔다.


만돈이 왼손을 뻗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지?’

티리온은 자신이 뒤로 물러난 이유가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오른


손에 들린 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어서 검의 끝이 티리온의 눈
바로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과 함께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따귀라도 맞은 듯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차가운 물이 상처의 고통보다 더 심하게 그를 감쌌다. 일단 물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티리온은 필사적으로
팔을 버둥거리며 붙잡을 만한 것을 찾았다. 간신히 노 끝을 잡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끌어안듯 노를 단단히 부여잡고 조금씩 위
로 기어올랐다.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고, 입 안은 핏물로 가득 찼다.
머리가 끔찍할 정도로 윙윙거렸다.

‘신들이시여, 저 갑판으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오직 물과 노, 갑판만이 보였다.
마침내 티리온은 숨을 헐떡이며 갑판으로 기어올라 바닥에 등을 대
고 누웠다. 머리 위로 초록색과 오렌지색 불꽃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
올라 하늘에 광선을 남겼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하고 있는데 누
군가 시야를 가렸다.

티리온은 누더기가 된 인형처럼 축 늘어져 더 이상 힘을 낼 수가 없었


다. 만돈 무레가 양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칼끝을 티리온의 목에 대고
눈을 빛냈다.

절대절명의 순간, 갑자기 만돈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서 난간으로


몰리더니 부서지는 난간과 함께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떨
어졌다. 잠시 후 함선들이 또다시 충돌하면서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티리온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자이메 형?”

입에 피가 가득해 티리온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형이 아니면 누가 날 구했겠어.’

“가만히 계세요, 핸드님. 부상이 심하십니다.”

‘그 아이? 말도 안 돼.’

그 목소리는 포드릭의 목소리와 너무나 비슷했다.

산사

란셀에게서 ‘전투에서 졌다’는 소식을 듣자, 세르세이는 들고 있던 빈


포도주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티리온은 어떻게 됐지?”

하지만 그 사실에는 별 관심 없는 듯 목소리는 냉담하기만 했다.


“전사한 것 같습니다.”

란셀의 망토는 팔에서 스며 나오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홀에 있던


여자들 중에는 그 모습에 비명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

“배가 부서질 당시 갑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르 만돈 역시 사망


한 듯합니다. 그리고 하운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대비님, 왜 전하를 성으로 다시 불러들이셨습니까? 수백 명의 시티
워치가 창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왕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잃은 겁니다. 블랙워터 강은 시체와 불길에 싸여 있었지만, 전하만 계
셨다면 우리는…….”

오스네이가 란셀을 거들며 앞으로 나섰다.

“왕대비님, 지금 우리나 저쪽이나 모두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확실하


진 않지만 스타니스의 영주들도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도 하운드가 사라졌구요. 세르 바론이 도시 안으로 후퇴해 강변
지대는 스타니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킹스게이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왕대비님, 세르 란셀 말이 맞습니다. 우리 병사들
은 지금 진영을 버리고 자기 지휘관을 죽이고 있습니다. 아이언게이
트와 가즈게이트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도망쳤고, 거리에는 술에 취
한 무리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제 조프리와 나는 죽은목숨이야.’

산사는 일린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어. 그자는 가까이에 있어. 난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어. 결국 그자에게 죽음을 당할 거라구.’

그때 이상하리 만큼 조용히 왕대비가 오스프리드에게 돌아섰다.


“도개교를 올리고 빗장을 걸도록 해요.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마
에고르의 성을 출입할 수 없어요.”

“셉트에 기도하러 간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스스로 내 보호를 떠난 이들이에요. 기도나 하게 내버려둬


요. 신들이 지켜 주겠지요. 그건 그렇고 왕은 어디에 있죠?”

“망루에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궁수들을 지휘하길 원하셨습니다. 성


밖에는 폭도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 중 절반은 우리가 머드게이
트를 떠날 때 함께 나갔던 시티워치들입니다.”

“지금 당장 내 아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요.”

“안 됩니다.”

란셀이 화가 난 나머지 언성을 높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


렸다.

“우린 다시 머드게이트를 되찾을 겁니다. 그냥 그곳에 머무시도록 하


시죠. 왕으로서…….”

“그 아이는 내 아들이에요.”

세르세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이었다.

“오스네이, 왜 아직 멍하니 서 있는 거죠?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나


요?”

오스네이가 서둘러 홀 밖으로 나갔다. 오스프리드와 그곳에 모여 있


던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나갔다. 홀에 남은 여자들이 울거나 기도를
드렸고, 나머지는 탁자에 그대로 앉아 포도주를 홀짝였다.

“왕대비님, 우리가 성을 잃으면 전하의 목숨 또한 안전하지 못할 겁


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냥 그곳에서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
도록 해주세요. 제가 전하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란셀이 다시 간청했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세르세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란셀의 상처 부위를 세게 밀치고는 옷


자락을 끌며 그대로 홀을 나갔다. 란셀은 바닥에 쓰러져 고통으로 몸
부림을 치다가 기절한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산사는 왕대비의 뒷모습을 보며 절망했다.

‘왕대비는 나의 존재를 잊고 있어. 세르 일린이 날 죽일 테니, 나에 대


해선 생각조차 않는 거겠지.’

그때 늙은 여자가 울부짖었다.

“오, 신이시여, 우리는 패배했어. 전쟁에서 지고 말았어. 그래서 왕대


비가 도망간 거야.”

몇몇 아이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저 아이들도 공포의 냄새를 맡은 거야.’

산사는 단 위에 자신만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나, 아니면 왕대비에게 쫓아가 살려 달라


고 간청해야 하나?’

한데 생각과는 달리, 산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


로 외쳤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왕대비님께서 도개교를 올리라고 하셨


잖아요. 이곳은 킹스랜딩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 해자도 있고, 성
벽에는 스파이크가 박혀 있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세르 오스네이가 왕대비께 뭐라고 말
한 거예요? 왕이 부상당하고 도시가 함락된 건가요?”

한 여인이 일어나 물었다. 안면이 있는 여자였다.

“말씀해 주세요.”

다른 누군가도 소리쳤다. 이어서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느라 홀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산사는 손을 들어 주의를 집중시켰다.

“전하께서는 성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부상을 입지도 않으셨고요. 제


가 알기로는 모두 용감하게 싸우고 있어요. 그리고 왕대비님도 곧 이
리로 돌아오실 거예요.”

마지막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산사는


어릿광대들을 보았다.

“문 보이, 모두에게 웃음을 주세요.”

문 보이가 탁자를 뛰어넘고 재주를 부리며 네 개의 포도주 잔을 공중


에서 돌렸다. 때때로 컵 하나가 떨어져 문 보이의 머리를 치기도 했
다. 몇몇 사람들이 그 모습에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산사는 란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왕대비가 친 상처에서 다시 피


가 흐르고 있었다.

“미친 짓이야. 맙소사, 티리온 경이 옳았어. 티리온 경이…….”

란셀이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산사는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이분을 도와 줘요.”
하지만 하인들은 멍하니 산사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그 중 하나가 포
도주 병을 든 채 달아났다. 잠시 후 또 다른 하인도 아무 말 없이 홀을
나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산사는 남은 한 사람과 함께 란셀을 일으
켰다.

“마에스터 프렌켄에게 데려가요.”

란셀 또한 산사에게는 적이었지만 웬일인지 죽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할 사람을 오히려 돕다니……. 조프리 말대로 난 연약하고 둔


하고 어리석어.’

횃불의 불꽃이 점점 약해지다가 가물거리며 꺼졌다. 하지만 어느 누


구도 다시 불을 밝히지 않았다. 왕대비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문 보이에게 쏠린 사이, 돈토스가 산사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귀여운 아가씨, 방으로 가시죠. 가서 문을 잠그고 있어요. 거기가 여


기보다는 더 안전할 거예요. 전투가 끝나면 내가 부르러 가죠.”

‘물론 누군가 나를 부르러 오겠죠. 하지만 그게 당신일까요, 아니면


세르 일린일까요?’

산사는 침울했지만 돈토스가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고 중얼거리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도 검술을 연마하고 약자를 보호하기로 맹세
한 기사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야, 돈토스는 용기도 없고 검술도 그다지 좋지 않아. 나는 돈토


스까지 죽게 만들 거야.’

산사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으며 천천히 홀을 나온 뒤, 숨이 막


히고 현기증이 날 때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당장 방에 가서 속이
시원하도록 울고 싶었다.
경비병 하나가 황급히 내려오다 산사와 부닥쳤다. 순간 보석 박힌 포
도주 잔과 은촛대가 주홍색 망토 안에서 떨어져 계단 아래로 굴러 떨
어졌다. 경비병이 경계의 눈빛으로 산사를 쳐다봤지만, 산사가 비명
을 지르거나 자기를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자 물건을 주우러 서
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방안은 캄캄했다. 산사는 문을 잠그고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


다. 순간 어둡던 방이 환해졌다.

남쪽 하늘에 거대한 불기둥이 빨갛게 타오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


다. 초록색 연기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에메랄드빛 불꽃
이 곧 오렌지빛 어둠으로 바뀌었다. 음식이 오래 끓어 졸아붙었을 때
처럼 공기 중에 탄 냄새가 났다. 불에 탄 재가 개똥벌레 무리처럼 밤
하늘을 떠다녔다.

산사는 창가에서 물러나 침대로 다가갔다.

‘이제 잘 거야. 깨어나면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하늘도 다시 푸르러


져 있겠지. 전쟁도 끝났을 테고,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확실해지겠
지.’

산사는 문득 눈물이 치솟았다.

‘레이디……, 내가 죽으면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산사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


리고 또 다른 손이 비명을 지르려는 산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칠고
피비린내가 나는 끈적끈적한 손이었다.

“작은 새, 네가 올 줄 알았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
밖에서 불기둥이 높이 치솟으면서 잠시 주위가 밝아졌다. 산사는 잠
시나마 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핏자국이 선명한 검은 얼굴, 불빛에
반짝이는 눈……. 빛이 사라지면서 그는 다시 피에 얼룩진 하얀 망토
를 걸친 덩치 큰 그림자가 되었다.

“비명을 지르면 죽여 버리겠어.”

산도르였다. 그는 산사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포도주 병을 가져와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에게 허리를 잡혀 있는 산
사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작은 새, 전쟁에서 누가 이겼는지 궁금하지 않나?”

“누가 이겼죠?”

산도르는 반항하기에 너무나 두려운 존재였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누가 졌는가 하는 것뿐이지. 그게 누구냐고?


바로 나야. 난 다 잃었어!”

산도르가 그렇게 얘기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이렇게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이 사람이 왜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지?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산사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잃은 게 뭔데요?”

“모든 것을 다.”

화상 입은 얼굴의 반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멍청한 난쟁이 같으니라고! 그 자식을 죽였어야 했어. 몇 년 전에 말


이야.”
“티리온 경을 얘기하는 건가요? 그는 죽었대요.”

“죽었다고? 아냐! 제기랄, 난 그 자식이 그냥 죽길 원치 않아.”

그가 포도주 병을 들어 마시려다 병이 빈 걸 알자 바닥으로 집어 던졌


다.

“그 자식은 불에 타 죽어야만 해! 만약 신께서 자비롭다면, 난쟁이를


불에 꼬들꼬들하게 태워 죽이셨을 거야. 하지만 난 그걸 확인하기 위
해 여기 남아 있진 않아. 떠날 거야.”

“떠난다고요?”

산사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힘이 달렸다.

“너는 무슨 말이든 되풀이할 줄만 아나 보지? 그래, 난 떠날 거야.”

“어디로요?”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 불이 없는 곳으로 갈 거야. 아마 북부가 좋


겠지.”

“하지만 성을 나가지 못할 거예요. 왕대비님이 성문을 모두 걸어 잠


그고 아무도 다니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그래? 하지만 내겐 아냐. 난 킹스가드의 흰 망토를 두르고 있어. 그


리고 내겐 이게 있지.”

산도르가 검 자루 끝을 가볍게 툭툭 쳤다.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모두 죽음을 맞을 거야.”

피식 웃는 그의 얼굴이 몹시 씁쓸해 보였다.

“한데 여기는 왜 온 거죠?”


“작은 새, 내게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잊었어?”

산사는 산도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고통에 찬


비명이 천지를 뒤흔드는데 어떻게 노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못 해요. 날 놔줘요. 난 당신이 두려워요.”

산사는 울먹이며 산도르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나만 널 두렵게 하나? 아니, 세상 모든 것이 넌 두려울 거야. 작은


새, 나를 봐. 나를 보란 말이야!”

핏자국이 화상을 입어 흉측한 산도르의 얼굴을 많이 가려 주었지만,


하얗고 동그란 눈은 여전히 무섭게 빛났다. 그리고 입가도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게다가 퀴퀴한 땀내와 시큼한 포도주 냄새, 구린 마구
간 냄새, 역겨운 피비린내 등이 그에게서 풍겨 왔다.

“작은 새, 난 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 병사들은 나를 두려워해.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랬다간 당장 나한테 죽음을 당할
테니까.”

산도르가 산사의 허리를 좀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산사는 산도르가 자신에게 키스하리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처


럼 강한 남자에게 반항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단지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날 쳐다보지 못하는군.”

산도르가 험상궂은 얼굴로 산사의 팔을 비틀고는 침대로 확 밀쳤다.


그러고는 산사의 목에 단검을 갖다 댔다.

“작은 새, 난 네 노래를 들을 거야. 예전에 플로리안과 조니킬의 노래


에 대해 얘기했었지? 자, 불러 봐. 살고 싶으면 노래해, 작은 새!”
산사는 공포에 질려 목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갑갑했다. 노랫말도 전
혀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날 죽이지 말아요. 제발 죽이지 말아 줘요!’

산사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산도르가 산사의 목에 대고 있던 검 끝을 살짝 비틀었다. 산사는 암울


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순간 노랫말이 떠올랐다. 플로리안과 조니
킬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산사는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온화하신 어머니여, 자비의 근원이시여.

기도하옵건대 전쟁의 마수로부터

우리의 아들들을 지켜 주소서.

검과 화살을 막아 주시고,

평화로운 날이 곧 도래할 것을 알게 하소서.

온화하신 어머니여, 여인들의 힘이시여.

전쟁 속에서 우리의 딸들을 보살펴 주소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격정을 억누르게 하시고,

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소서.

다음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산사는 산도르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움츠렸지만, 산도르는 아무 말 없이 단검을 거
두었다.
이상한 예감에 산사는 산도르의 뺨을 감쌌다. 방안이 어두워 그의 얼
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 끈적끈적한 핏물과 함께 또 다른
축축함이 느껴졌다.

“작은 새…….”

산도르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산사는 멀어지는 발소리에 이


어 천이 찢기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이 지나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산사는 혼자였다. 바닥에 피와 화


염으로 얼룩진 흰 망토가 떨어져 있었다. 더욱 어두워진 하늘 아래서
는 희미한 유령들만이 별빛에 춤을 추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한기를 느낀 산사는 망토로 몸을 감싸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시 저편의 언덕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


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종이 울렸다. 종소리는 언덕과 계곡, 오
솔길과 탑을 지나 킹스랜딩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나갔다. 산사는 종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져 덮고 있던 망토를 내려놓고 창
가로 다가갔다.

새벽을 알리는 여명이 밝아 오면서, 레드킵의 종들도 바엘로의 그레


이트 셉트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와 화음을 이루었다. 로버트 왕이
서거했을 때도 도시의 모든 종이 그렇게 울렸었다. 하지만 오늘의 종
소리는 느리고 슬펐던 그때와 달리 밝고 경쾌했다. 환희에 찬 사람들
의 외침도 들려왔다.

산사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한 사람은 돈토스였다. 비틀거리며 나타


난 그는 산사를 안고 방을 빙글빙글 돌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외
쳤다. 산도르만큼이나 취해 있었지만, 산도르와는 달리 기쁨에 들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돈토스가 바닥에 내려놓아 주자, 산사는 숨이 차고 어지러워 침대 기
둥을 붙잡았다.

“끝났어요! 전쟁이 끝났다고요! 이제 도시는 안전해요. 스타니스의


병사들은 전사했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졌거나 전향했대요. 스타니
스는 완전히 패배했어요. 오, 빛나는 깃발! 포도주 있나요? 이렇게 즐
거운 날엔 축배를 들어야죠. 이제 아가씨도 안전해진 거잖아요.”

“자세히 좀 얘기해 줘요!”

돈토스가 웃으며 펄쩍펄쩍 뛰다 넘어질 뻔했다.

“강이 불타고 있는데 그들이 연기를 뚫고 나타났어요. 그들이 뒤에서


스타니스 군대를 공격한 거죠. 아, 나도 다시 기사가 되어 그런 전투
에 참가하고 싶어요! 스타니스의 병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
고 뿔뿔이 흩어졌대요. 도망친 무리도 있었지만 그보다 ‘렌리 왕’을
외치며 전향한 병사들이 더 많았대요. 스타니스는 자기 병사들이 외
치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난 세르 오스네이한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는 세르 오스문드에게서 들은 거라더군
요. 세르 바론의 병사들도 돌아와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시티워치도
그렇게 얘기하니 정확한 이야기일 거예요. 신들께서 우리를 구원하
신 거예요! 렌리 왕의 군대는 스타니스가 재로 만들어 버린 들판과
로즈로드를 지나오느라, 부츠에 재가 뽀얗게 쌓이고 갑옷은 변색했
겠지만 그래도 깃발만은 찬란할 거예요! 금빛 장미와 사자, 마브랜드
의 불타는 나무와 탈리의 사냥꾼, 레드윈의 포도, 오크하트의 떡갈나
무 잎……. 그것들말고도 서쪽 지방의 깃발도 보였을 거예요. 하이가
든과 캐스틀리 록이 힘을 합쳤거든요. 티윈 경은 강 북쪽 진영을 직접
지휘했고, 랜딜 탈리는 가운데, 메이스 티렐 경은 왼쪽을 맡았대요.
연합군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어요. 그들의 검은 마법에 걸린 듯 스
타니스의 병사들을 베었고, 창은 호박을 찌르듯 스타니스의 병사들
을 찔렀죠. 선봉을 누가 이끌었는지 아세요?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롭?”
산사는 모든 희망을 걸었지만…….

“렌리 왕이에요! 초록색 갑옷을 입은 렌리 왕이요. 렌리 왕은 긴 창을


들고 세르 구야드와 결투를 벌여 승리했대요. 검술이 뛰어난 열두 명
의 다른 기사들도 역시 렌리 왕의 창 아래서 목숨을 잃었고요. 렌리
왕! 오, 렌리 왕! 나도 다시 기사가 될 수만 있다면…….”

대너리스

이리가 진주가 박힌 아이보리색의 카스식 가운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대니는 감과 새우로 만든 시원한 수프를 먹고 있었다.

“다시 가져가라. 그런 화려한 옷은 부두에서 어울리지 않아.”

대니는 카스인들이 자신을 야만인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그들의 차림


새를 좇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색이 바랜 실크 바지와 도
트락 조끼, 풀로 엮은 신발을 신고 반달 모양의 단검을 허리에 찼다.
이퀴가 대니의 머리를 땋아 주고 머리끝에 방울을 달아 마무리했다.

“나는 여기 와서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

대니가 머리를 움직이자 방울이 딸랑거렸다. 이퀴는 대니의 말에 동


의하지 않았다.

“여왕님은 먼지의 궁전에서 시답잖은 마에기들을 불태워 지옥으로


보내셨잖아요.”

‘그것은 드로곤이 한 일이지.’

하지만 대니는 이퀴가 자기 머리끝에 매달아 준 방울만큼도 존경하


지 않을 거란 걱정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니는 마구간으로 가서 실버에 올랐다. 그 동안 방울이 계속 울렸지


만, 조라나 퀸스가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니가 저택을 비울
때는 라카로가 드래곤과 도트락 백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
에 조고와 아고, 조라, 세 사람만이 대니를 뒤따랐다.

대니는 언젠가 대리석 저택과 향기로운 정원을 뒤로한 채 도시의 빈


민굴로 향한 적이 있었다. 낡은 벽돌로 쌓아 만든 집들이 천막을 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거리에는 말이나 낙타나 가마 같은 것은 거의 찾
아보기 힘들었다. 아이들과 개들은 모두 거지처럼 비쩍 말라 보였다.
아마 옷을 입은 창백한 사람들이 아치형 대문 아래서 대니 일행을 지
켜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반기지 않는구나.’

대니는 그들의 태도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조라가 가마 안쪽이 안전하다고 들어가기를 권했지만, 대니는 거절


했다. 오는 내내 소가 이끄는 대로 쿠션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것만으
로도 충분했다.

대니가 오늘 말을 타고 나선 것도 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대니는


선택의 여지없이 부두로 향했다. 대니에게 지금까지의 생애는 도주
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도망하
기 시작해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도망자의 삶이었다. 도망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대니는 지금 또다시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자로 조안 닥소스는 피야트 프리가 대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


해 마법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니는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들이란 한창때의 무용담이나 들먹거리는 한물간 늙은 병사들


과 같은 존재라고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때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자신할 수 없습니다. 1백 년 동안 불
붙지 않았던 ‘우라톤 나이트워커’ 저택의 유리 등잔이 타고 있다고들
합니다. 지헤인의 정원에서는 유령 잔디가 자라고 있고, 거북이들이
마법사의 거리에 있는 창 없는 집들로 편지를 전하러 다니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또 도시의 쥐들이 자기 꼬리를 물
어뜯고 있답니다. 마법사의 곰팡이 핀 망토를 비웃던 마토스 말라라
완의 아내는 미쳐서 아무것도 몸에 걸치려 하지 않고요. 아무리 새로
짠 실크를 갖다 주어도 벌레가 굼실대는 것 같다고 집어던져 버린대
요. 그리고 눈이 먼 시바션이 눈을 떴습니다.”

자로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콰스에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역에


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이런 얘기를 하게 돼서 매우 유감이지
만, 여왕님, 서둘러 콰스를 떠나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혼자
떠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왕님은 먼지의 궁전에서 무서운 환상들
을 보았지만, 저는 항상 밝은 꿈만 꾸어 왔어요. 전 종종 우리 아이를
가슴에 안고 젖을 물리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왕
님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여왕님, 저와 함께 제이드해를 항해해요.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있어요! 늦지 않았단 말입니다. 제게 아들
을 낳아 주세요.”

자로가 대니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대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게 드래곤을 주시오.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지금?’

“자로,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요”

담담한 대니의 말에 자로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실 겁니까?”

“어디든 이곳에서 먼 곳으로요.”


사실 이제 때가 되긴 했다. 칼라사르도 잘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터였다. 도트락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
이었다. 안락함과 아름다움에 취해 콰스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도시
는 항상 실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했다. 이곳 역시 마
찬가지였다. 콰스인들은 언다잉의 저택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이자
대니를 냉대했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드래곤이 위험한 존재임을
상기했고, 그때부터 앞다투어 보내던 선물도 뚝 끊겼다. 대신 투어말
린 브라더후드들은 공공연히 대니의 추방을 부르짖었고, 스파이서들
은 대니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자로가 할 수 있는 일
이란 서틴이 그들과 뜻을 합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뿐이었다.

대니는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조라는 세븐킹덤에서


더 멀어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대니는 드래곤들
이 더 크고 강해질 때까지 바에스 톨로로에 정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 의혹이 밀려들었다. 사실 조라의 제안이나 자신의 생각이 모두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날 곳이 정해지더라도 어떻게 안전
하게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로 조안 닥소스의 호의는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대니는 이제야 모


든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열정적인 고백도 사실은 피야트 프
리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떠나라고 한 날 저녁, 대니는 그에
게 마지막으로 배를 한 척 마련해 달라고 간청했다.

“한 척 말입니까?”

대니는 얼굴을 붉혔다. 구걸하는 게 끔찍하리 만큼 싫었다.

“그래요, 배 한 척이 필요해요.”

자로의 눈이 코에 장식한 보석만큼이나 반짝였다.

“여왕님, 저는 장사꾼입니다. 우리 피차 거저 달라는 얘기는 그만 하


고 흥정을 해보죠. 여왕님께서 드래곤을 한 마리 넘기신다면, 전 제
배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열 척을 선물하겠습니다.”

“싫어요!”

“오, 이런. 제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닙니다.”

자로가 아쉬움을 나타냈다.

“자로, 당신은 어미에게 자식을 하나만 팔라고 할 수 있나요?”

“왜 안 되는 거죠? 자식은 얼마든지 더 낳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도 매일 어미들이 자기 자식들을 팔고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배 스무 척을 드리겠습니다.”

“1백 척을 준다 해도 그렇게는 못 해요.”

자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제겐 1백 척이나 되는 배는 없습니다. 여왕님, 세 마리 중 하나입니


다. 하나만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그래도 여왕님께는 두
마리가 남잖습니까. 게다가 배를 스무 척이나 가질 수 있고 말입니
다.”

배 스무 척이면 작은 군대 하나쯤은 웨스테로스 해안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겐 군대가 없어.’

대니는 착잡한 심경으로 자로를 보았다.

“배를 몇 척이나 가지고 있죠?”


“여든 세 척입니다. 제 유람선 하나는 빼고요.”

“다른 서틴들은요?”

“우리 걸 모두 다 합치면 한 1천 척 정도는 될 겁니다.”

“스파이서와 투어말린 브라더후드들의 배는요?”

“그자들의 배는 별 볼 일 없어서 셀 필요도 없죠.”

“그래도 말씀해 보세요.”

대니의 추궁에 자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스파이서가 1천 2백에서 1천 3백, 브라더후드는 8백 척이 채 안 될


겁니다.”

“그럼 아사이, 브라보스, 서머아일랜드, 이벤, 그레이트 솔트해(海)에


서 운항하는 모든 부족들의 배를 다 합하면 몇 척이나 될까요?”

“많아도 한참 많겠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결국에는 자로가 짜증을 냈다.

“자로, 난 지금 세상에서 딱 세 마리밖에 없는 드래곤의 가격을 매겨


보려는 거예요.”

대니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이 세상 모든 배의 3분의 1은 돼야 드래곤을 한 마리 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자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제가 먼지의 궁전에 들어가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가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 마법사들의 속닥거림은 말
라라완의 아내처럼 여왕님을 미치게 만들 겁니다. 세상 모든 배의 3
분의 1이요? 허허,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후 자로는 다시 대니를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집사를 통해 갈수록


냉혹한 전갈을 보내 왔다. 그는 우선 대니에게 집을 나가 달라고 했
다. 그리고 더 이상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고, 선물도 모두 되돌려 달
라고 했다. 자로와 결혼하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는 사실이 대니에게
단 하나의 위안이 되었다.

‘언다잉들은 내게 일생에서 세 번 배신당할 거라고 했어. 피와 황금과


사랑으로 말이야.’

피의 배신은 분명 칼 드로고와 태중의 아들을 죽인 미리 마즈 두어의


배신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럼 피야트 프리와 자로 조안 닥소스가 두 번째와 세 번째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피야트 프리의 배신은 황금 때문이 아니었고,


자로 또한 대니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돌로 지은 음침한 건물이 나오자 거리는 더욱 한산해졌다. 아고가 앞


장을 서고 조고가 뒤따르고 조라가 대니 옆을 지켰다. 대니 머리에 달
린 방울이 경쾌하게 울렸다. 대니는 혀가 이 빠진 자리를 찾는 것처럼
다시 먼지의 궁전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세 아이의 어머니, 죽음의 딸, 거짓을 벌하는 자, 불의 신부.’

언다잉들은 대니를 그렇게 불렀었다.

‘수도 없이 언급된 ‘3’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뭘까? 세 개의 불을 밝히


고, 세 개의 산을 넘고, 세 번 배반을 겪는다? 그리고 세 개의 머리는
드래곤? 머리 셋 달린 드래곤이란 말인가?’
대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셋 달린 드래곤이라니, 조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여왕님, 타르가르옌 왕가의 문장이 머리 셋 달린 붉은 드래곤이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머리 셋 달린 드래곤은 세상에 없어요.”

“아에곤과 그 자매들의 머리가 셋이었죠.”

“비센야와 라예니스……. 나는 아에곤과 라예니스의 자손이죠. 두 분


의 아들인 아에니스와 손자 자에하에리스의 혈통을 이어받았구요.”

“자로가 말씀드렸듯이 입술이 푸른 자들은 거짓말만 지껄일 뿐입니


다. 어째서 마법사들이 속닥거린 소리에 신경을 쓰시죠? 그들은 여왕
님의 생명을 빨아먹으려 그런 겁니다. 이제는 아시잖아요.”

대니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본 것들은…….”

“뱃머리의 시체와 파란 꽃과 피의 향연, 거기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


까?”

“천으로 만든 드래곤도 장대 위에서 날리고 있었어요.”

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광대들이 극중에서 영웅이 싸울 대상을 만들어낸 거죠.”

대니는 찬성할 수 없었다.

“오빠가 분명 ‘얼음과 불의 노래’를 지었다고 말했어요. 분명 오빠가


그랬다고요. 아, 비세리스 오빠말고 라예가르 오빠가 말이에요. 오빠
는 은줄로 만든 하프를 가지고 있었어요.”

조라가 눈살을 더욱 찡그리자 눈썹이 일자로 만났다.

“라예가르 왕자님께서 그런 하프를 켜긴 하셨죠. 그분을 만나 보셨나


요?”

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서 어떤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고, 오빠는 그 아


기에게 ‘장래가 약속된 왕자’라고 말했어요.”

“라예가르 왕자의 후계자는 아에곤 왕자죠. 하지만 아에곤 왕자가 약


속된 왕자였다면, 그 약속은 라니스터가 그를 벽에 던지는 순간 산산
조각 난 겁니다. 왕자의 부서진 두개골처럼 말입니다.”

“나도 그때 얘기를 들었어요. 그들은 오빠의 딸도 죽였죠. 귀여운 내


조카를……. 정복자 아에곤의 누이처럼 그 아이의 이름도 라예니스
였죠. 비센야가 빠졌지만, 오빠는 드래곤의 머리가 셋이라고 했어요.
얼음과 불의 노래가 대체 뭘까요?”

대니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

“저는 그런 노래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마법사들한테 해답을 구하러 간 거였는데, 해답은커녕 새로운


의문만 수없이 남았으니…….”

그때 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길을 비켜라.”

아고가 소리쳤고, 조고는 뒤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납니다, 여왕님. ‘독이 든 물’의 냄새가요.”


도트락인들은 바다를 불신했다. 말이 마실 수 없는 물은 그들에게 아
무 의미가 없었다.

‘나의 백성들도 곧 바다를 받아들일 거야. 내가 칼 드로고와 함께 그


들의 바다에 용감하게 맞선 것처럼, 그들도 나의 바다에 맞서 줄 거
야.’

대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콰스는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손꼽히는 항구 중의 하나였다. 거대한


항구는 갖가지 피부색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냄새로 난장판
이었다. 술집과 허름한 도박장, 싸구려 매춘굴, 괴상한 사원들이 거리
에 즐비했다. 소매치기와 건달, 주술사, 환전상들이 곳곳에 득실거렸
다. 선창은 밤낮으로 흥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출
처만 상관하지 않으면 시장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
다. 허리가 곱추처럼 굽은 노파들이 유약을 발라 구운 단지를 어깨에
메고 음료수와 염소젖을 팔고 있었다. 각지에서 온 선원들이 노점 사
이를 어슬렁거리며 향료가 든 술과 음담패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소
금기가 느껴지는 공기 중에는 생선 굽는 냄새와 뜨거운 타르, 벌꿀,
오일, 정액 냄새 등이 뒤섞여 있었다.

아고는 벌꿀을 발라 구운 쥐포를 사서 말을 타며 뜯어먹었고, 조고는


통통하게 잘 여문 흰색 체리를 한 움큼 샀다. 시장에서는 아름다운 청
동 단검과 오닉스 공예품, 돌멩이에 칠을 한 것 같은 의심쩍은 드래곤
알, 처녀의 젖과 밤의 장막으로 만들어 효험이 뛰어나다는 만병통치
약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서틴들만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돌로 만든 부두를 지나갔다.


자로의 화려한 버밀리온 키스 호에서 향미료 상자와 유향 상자, 후추
상자가 내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브라이드 인 아주레 호가
저녁 밀물을 타고 나가려고 포도주 통, 사우어잎 가마니, 가죽 이불
등을 선체에 싣고 있었다. 멀리 저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선블레이
즈 호 주위로 몰려들어 노예를 경매하고 있었다. 배가 입항했을 때 노
예를 가장 싸게 살 수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선블
레이즈 호의 돛대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이제 막 ‘노예의 만’에 있는
아스타포르에서 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투어말린 브라더후드나 스파이서는 물론이고, 이제 서틴에게서도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어.’

대니는 오랫동안 실버를 타고 부둣가를 달리면서, 편자 모양으로 생


긴 항구며 서머 아일랜드, 웨스테로스, 자유도시에서 온 배들이 정박
해 있는 부두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런 뒤에는 선
원들이 모여서 소리를 지르며 커다란 개를 물어뜯는 바실리스크 도
마뱀을 응원하는 곳에서 말을 내렸다.

“아고, 조고, 말들을 잘 지키고 있어요. 난 세르 조라와 선장들을 만


나 볼게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왕님께서 가시는 길을 지켜보고 있


겠습니다.”

대니는 가장 가까이 있는 배를 향해 걸어가면서 발리리아어로 얘기


하는 남자 목소리를 들었다. 세븐킹덤의 공통어로 말할 필요가 없다
는 사실이 기뻤다. 선원들과 부두꾼, 상인들이 모두 대니를 보자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은 도트락 옷을 입은 작고 가녀린 은발의 여자와 그
옆에서 걷고 있는 기사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한낮의 열기가 뜨거운데도 조라는 갑옷 위에 초록색 양모 망토를 걸


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모르몬트 가문의 흑곰이 수놓아져 있었
다. 하지만 대니의 아름다움과 조라의 건장한 육체도 그들이 설득해
야 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1백 명쯤 되는 도트락인과 말, 그리고 당신과 이 기사, 거


기다 드래곤 세 마리가 다 탈 수 있는 배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아덴트 프랜드 호의 선장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트럼피터 호의 라
이세니는 대니가 자신을 ‘대너리스 스톰본이며 세븐킹덤의 여왕’이
라고 소개하자 멀뚱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하, 그러세요? 그럼 소인은 티윈 라니스터 경이고 매일 밤 황금


똥을 싸지요.”

미리시의 갤리선인 실큰 스피리트 호의 선장은, 드래곤은 너무 위험


해 같이 항해하기가 두렵다고 했다. 드래곤이 숨을 쉬다가 실수로 배
에 불꽃을 뱉어 놓으면 어쩌겠냐는 것이었다. 파로스 벨리 호의 선주
는 드래곤을 태워 주는 위험은 감수하겠지만, 도트락인들은 안 된다
고 했다.

“나는 내 배에 그런 사악한 야만인들은 절대 태우지 않겠소.”

퀵실버와 그레이하운드라는 배의 선장을 맡고 있는 두 형제는 동정


심을 보이며 대니와 조라를 선실로 초대해 아보르산 포도주를 대접
했다. 대니는 그들의 공손한 태도에 한동안 기대를 가졌지만, 그들이
제시한 어마어마한 액수에 그대로 돌아서야 했다. 자로도 그 정도의
액수는 지불하지 못할 것이었다. 핀치보텀 피토와 솔레 아이드 메이
드 호는 너무 작았고, 브라보 호는 제이드해를 항해하면 요동칠 것처
럼 낡았으며, 매지스터 마놀로 호는 항해조차 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
다.

다음 선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조라가 대니의 등허리에 손을 올렸


다.

“여왕님, 따라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그는 대니를 놋쇠를 파는 노점으로 인도했다.

“여왕님, 이것 참 괜찮은 물건 같군요.”

그가 커다란 놋쇠 접시 하나를 들어올리면서 큰 소리로 떠들었다.


“보십시오, 햇빛이 얼마나 잘 반사됩니까.”

놋쇠 접시는 잘 닦여 광이 번쩍번쩍 났다. 대니는 놋쇠 접시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는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두 사람이 보이는군요. 갈색 피부의 뚱뚱한 남자와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할아버지, 둘 중 어느 쪽이죠?”

“둘 다입니다. 저들이 퀵실버 호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왔습니다.”

놋쇠 표면에 굴절이 생겨 두 미행자의 모습이 괴상해 보였다. 한 사람


은 길고 말라빠진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은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납
작해 보였다.

“아주 좋은 물건입니다. 태양처럼 밝습니다. 드래곤의 어머니께 단돈


30아너에 드리겠습니다.”

상인이 소리쳤다. 접시는 3아너의 가치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날강도나 다름없군요!”

대니는 상인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 뒤 조라에게 세븐킹덤의


공용어로 나지막이 얘기했다.

“나쁜 뜻에서 우릴 미행하는 건 아닐 거예요. 남자들이 여자를 쫓아


다니는 일은 태고 적부터 있었잖아요.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놋쇠 장수는 두 사람의 대화에는 상관도 않고 여전히 놋쇠 접시를 파


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다.

“아이구, 이런. 말이 헛나왔군요. 20아너입니다, 20아너.”

“여기 있는 놋쇠 그릇을 다 합쳐도 20아너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대니가 놋쇠 접시로 뒤쪽을 비춰 보며 말했다. 나이 든 미행자는 웨스
테로스인처럼 보였고, 갈색 피부의 미행자는 땅만 넓은 줄만 아는 뚱
보였다.

‘반역자는 나를 죽이는 사람에게 성을 주겠다고 했댔어. 하지만 저 두


사람은 거기서 온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 혹시 마법사가 나를 해치려
고 보낸 자들일까?’

“좋습니다. 그럼 10아너만 내십시오. 너무 아름다우신 분이라 선심


좀 쓰겠습니다. 가져가서 거울로 쓰세요. 이렇게 좋은 놋쇠여야 당신
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비출 수 있죠.”

“똥이나 치우는 데 쓰면 딱 맞겠네요. 이런 건 길바닥에 내버려도 용


무가 급하지 않은 한 아무도 줍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나보고 돈을
내라구요?”

대니가 접시를 다시 상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벌레들이 당신 콧속으로 기어 들어가 머리통을 완전히 갉아먹었으


면 좋겠군요.”

“그럼 8아너만 내십시오.”

상인은 이제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제가 이렇게 싸게 파는 걸 알면 제 아내들이 절 바보라고 욕할 겁니


다. 제발 이 가엾은 사람을 도와 주세요. 자, 이리 오세요. 8아너에 드
리겠습니다. 그 이하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런 형편없는 놋쇠가 대체 내게 왜 필요하겠어요? 자로 조안 닥소


스가 금 접시에 음식을 대접해 주는데…….”

대니는 얼른 자리를 뜨면서 미행자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갈색 피부


의 남자는 접시에서 봤던 것처럼 키가 컸고, 머리는 벗겨져 번들거렸
으며, 얼굴선은 환관처럼 매끄러웠다. 허리춤에는 길게 휘어진 아라
크를 꽂고, 위로는 쇠못 장식을 한, 꼭 끼는 조끼만 하나 달랑 입고 있
었다. 탄탄한 팔과 가슴과 배에 난 수많은 흉터들이 짙은 갈색 피부와
는 대조적으로 허연 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이 많은 남자는 양모 외투를 입고 자기 키 정도 되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하얗게 센 긴 머리가 어깨에 닿았고, 은빛 턱수염이
찌푸린 얼굴 아래쪽을 덮었다.

‘바보들만 이런 백주에 나를 해칠 생각을 하겠지. 그래도 조고와 아고


에게 돌아가는 게 낫겠어.’

“나이 든 남자는 칼을 차고 있지 않아요.”

대니는 조라를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 놋쇠 장수가 그들을 좇아 뛰


어오고 있었다.

“5아너에 드릴게요. 단돈 5아너면 이 놋쇠 접시를 얻을 수 있다니까


요.”

조라가 놋쇠 장수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대니에게 말했다.

“저 지팡이가 두개골도 부술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될지 모르죠.”

“4아너! 이 놋쇠를 원하시잖아요.”

상인이 두 사람 얼굴 앞으로 접시를 들이밀며 깡충거렸다.

“그들이 쫓아오나요?”

“조금 더 높이 들어 보시오.”

조라가 상인에게 말했다.


“예. 나이든 사람은 옹기장이의 가게에서 구경하는 척하고 있습니다.
갈색 남자는 여왕님만 바라보고 있고요.”

“2아너요! 2아너! 2아너!”

상인은 뒷걸음질을 치느라 숨이 턱에 차서 소리쳤다.

“이 사람 숨넘어가겠어요. 값을 지불하세요.”

대니는 커다란 놋쇠 접시로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하며 조라에게 말했


다. 그러고는 조라가 접시 값을 치르는 사이, 광대 놀음을 끝내야겠다
는 생각으로 획 돌아섰다. 드래곤의 혈통이 저런 볼품없는 남자들과
시장에서 한 떼로 몰려다닐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한 콰스인이 대니 앞으로 다가왔다.

“드래곤의 어머니시여, 받으십시오.”

남자가 무릎을 꿇고 보석 상자를 내밀었다.

대니는 반사적으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섬세하게 조각이 된 나무 상


자의 뚜껑에는 진줏빛 조개가 벽옥, 옥수와 함께 박혀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선물을 주시다니,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대니는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마노와 에메랄드를 조각해


만든 초록 풍뎅이가 들어 있었다.

‘아름답다. 이 정도면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되겠어.’

대니가 들뜬 마음으로 상자 안의 보석에 손을 대는 순간 남자가 중얼


거렸다.

“정말 슬픈 일이오.”
하지만 대니는 미처 그 말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풍뎅이가 쉭 소리와 함께 날개를 펼쳤다. 악의에 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풍뎅이의 아치형 꼬리에서 독이 흐르고 있었다……. 상자가
대니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대니는 손가락에 격심한 통증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대니 뒤에 있던 상인도 비명을 질렀고, 지나가던 어떤 여
자도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시장은 소리를 지르며 서로 밀고 밀치
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라가 잽싸게 대니에게로 몸을 던졌다. 비틀거리던 대니는 또 한 번


쉭 소리를 들었다. 지팡이를 들었던 나이 든 미행자가 풍뎅이를 향해
지팡이를 날렸던 것이다. 아고가 말을 달려와 안장 위에서 그대로 몸
을 날렸다. 조고는 채찍을 휘둘렀고, 조라는 놋쇠 접시로 대머리 미행
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여왕님,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벌레는 죽었습니다만, 혹시


손을 다치지나 않으셨는지…….”

나이 든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대니는 손가락을 오므려 보았다.

“아니, 다친 것 같지는 않아요.”

“여왕님, 전 단지 벌레를 죽이려고…….”

남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퀸스가드들의 손에 잡혀 그 자


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아고가 지팡이를 멀리 발로 찼고, 조고는 남자
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여왕님, 이자의 피를 보시겠습니까?”

대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놔주세요. 저 지팡이 끝을 보세요.”

그제야 조라가 대머리 남자에게서 발을 뗐다. 두 남자가 각각 아라크


와 롱소드를 빼어들었다. 대니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두 사람 사이
에 버티고 서서 소리쳤다.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그만 하라구요!”

“여왕님, 이자들이 여왕님을 공격했잖습니까?”

조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검을 약간 아래로 내렸다.

“이들은 나를 구해 주려고 한 거예요. 나를 해치려 한 사람은 콰스인


이었어요.”

대니는 손을 휘저으며 손가락의 통증을 잊고자 했다. 상자를 건넸던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사로우풀맨’이었어요. 그가 내게 준 보석 상자에는 ‘만티코


아’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나를 도와 주었어요.”

놋쇠 노점상은 아직도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고 있었다. 대니는 그를


일으켜 주었다.

“쏘였나요?”

“아뇨, 그랬으면 벌써 죽었게요. 하지만 약간 닿기는 했습니다. 그게


상자에서 날아올라 제 팔에 앉았거든요.”

대니는 놋쇠 노점상에게 은을 쥐어 주고, 나이 든 남자 쪽으로 돌아섰


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군요. 한데 누구신지?”


“은인이라 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아스탄이라고 합니다. 여기로 오
는 중에 벨와스 님이 ‘화이트비어드’라고 이름 붙여 주기는 했지만 말
입니다.”

조고가 손을 놓아주었는데도 나이 든 남자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


은 자세였다. 아고가 도트락어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남아 있던 만티코아 찌꺼기를 닦은 뒤 돌려주었다.

“벨와스는 누구죠?”

대니의 물음에 대머리 남자가 아라크를 허리춤에 다시 꽂으며 앞으


로 나섰다.

“제가 벨와스입니다. 사람들은 절 ‘강한 벨와스’라고 부르죠. 한 번도


격투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그가 흉터로 뒤덮인 자기 배를 탁탁 쳤다.

“전 누구와 싸우든 상대를 죽이기 전에 나를 한 번씩 찌를 기회를 주


죠. 여기 상처 자국을 세어 보면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
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대니는 굳이 세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가 아주 많다


는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여기에 왜 온 거죠, 강한 벨와스?”

“전 미린에서 코호르로 팔려 갔다가 펜토스에 사는 뚱뚱하고 머릿내


가 지독한 어떤 남자에게 팔렸지요. 그분이 절 다시 바다 건너 이곳으
로 보낸 겁니다. 저 늙은 화이트비어드와 함께.”

‘뚱뚱하고 머릿내가 지독한 남자라고? 혹시…….’

“마지스터 일리리오가 당신들을 보낸 건가요?”


화이트비어드가 고개를 끄덕엿다.

“그렇습니다. 주인님은 전처럼 말을 타시나 항해를 하기 어려우셔서


대신 저희를 보내신 겁니다.”

화이트비어드는 처음에 자유도시의 발리리아어로 말했었지만, 지금


은 세븐킹덤의 공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저희 때문에 놀라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사실 저희는 여왕님을 잘 모


르는데다 뭐랄까…… 좀더…….”

“여왕다운 모습을 기대했단 말인가요?”

대니는 싱긋 웃었다. 옷차림도 그렇거니와 드래곤도 다 놔두고 왔기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었단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아스타, 당신도 공용어를 쓰시는군요. 웨스테로스 사람인가


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도니시마치에서 태어났죠. 젊은 시절에는 스완


가문의 기사 밑에서 스콰이어를 했습니다.”

그가 지팡이를 치켜세웠다. 지팡이 끝에서 스완 가문의 깃발이 펄럭


일 것만 같았다.

“지금은 벨와스 님의 시중을 들고 있지요.”

“그런 일을 하시기에는 나이가 좀 든 편인 것 같은데, 안 그렇소?”

놋쇠 접시를 겨드랑이에 어색하게 끼운 채 대니와 나란히 걷던 조라


가 물었다. 그 말이 귀에 거슬리는 듯 벨와스가 힐끔 쳐다보았다. 하
지만 화이트비어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시중을 들기에는 그리 늙은 편이 아니지요, 모르몬트 경.”


조라가 나이 든 남자를 보며 눈을 치켜 떴다.

“나를 잘 아시오?”

“경께서 전투하는 모습을 한두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라니스포트에


서는 킹슬레이어를 물리치셨잖습니까. 파이크에서도 뵌 적이 있죠.
기억 안 나십니까?”

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낯이 익긴 하군. 하지만 라니스포트나 파이크에서 사람들이 수백,


수천 명 들끓었으니 내가 어떻게 그 얼굴들을 다 기억하겠소. 그리고
나는 경이 아니오. 베어아일랜드에서 추방된 이후부터는 한낱 이름
없는 기사에 불과하오.”

대니가 조라의 팔을 얼른 잡으며 말했다.

“세르 조라는 이제 퀸스가드의 기사죠. 그리고 나의 진정한 친구이자


좋은 조언자예요.”

대니는 아스탄의 표정에서 조라를 존경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대니가 바라는 외유내강의 사람 같았다.

“일어나세요, 아스탄 화이트비어드. 두 분을 환영합니다. 세르 조라


는 아신다고 했고, 저 둘은 아고와 조고, 나의 혈족들이죠. 이들은 나
와 함께 레드웨이스트를 건넜고, 드래곤들이 태어나는 것을 직접 보
았죠.”

“유목민들이로군요. 전 전장에서 도트락 유목민들을 수도 없이 죽여


봤죠. 그들은 죽을 때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더군요.”

벨와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자 아고가 표정을 일그러뜨리


며 아라크를 뽑아들었다.
“나는 갈색 뚱보 녀석을 죽여 본 일이 없지. 벨와스, 네가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되겠구나.”

대니는 얼른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둘 다 자제해요. 아고, 아라크를 도로 넣어요. 벨와스는 나를 도우러


온 사람이에요. 그리고 벨와스, 당신도 나의 백성들과 좋은 관계를 유
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빨리 떠나게 될
거예요. 물론 더 많은 상처를 안고 말이에요.”

벨와스의 넓적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


다. 자기 몸의 3분의 1도 안 되는 여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황
당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대니는 나무라는 표정으로 벨와스에게 미소를 보냈다.

“벨와스, 일리리오가 당신을 내게 보낸 이유가 뭐죠? 대체 무슨 일로


당신 두 사람을 보낸 거죠?”

“마지스터께서는 드래곤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십니다. 물론 드래곤의


어머니도 함께요.”

벨와스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아스탄이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왕님을 모시고 펜토스로 돌아오라는 명을 받


았습니다. 세븐킹덤은 여왕님을 필요로 합니다. 반역자 로버트는 죽
고, 세븐킹덤은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우리가 펜토스를 떠나올 때 그
곳의 왕은 넷이었습니다. 정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요.”

대니는 마음속에 기쁨이 피어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에게 드래곤이 세 마리 있고, 칼라사르가 백 명쯤 돼요. 그리고 그


들은 모두 자신의 말을 한 마리씩 가지고 있죠.”
벨와스가 그쯤은 문제없다는 듯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를 쳤
다.

“전부 데려가겠습니다. 마지스터 일리리오께서는 은발의 여왕님을


위해 배를 세 척이나 빌리셨죠.”

“그렇습니다, 여왕님. 위대한 사둘란 호가 부두 끝에 정박해 있습니


다. 서머선 호와 조고스 프랭크 호도 방파제 너머에 있죠.”

아스탄이 또 맞장구를 쳤다.

‘세 개의 머리는 드래곤…….’

대니는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백성들에게 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죠. 하지만 세 배에 새


로 이름을 붙이겠어요.”

아스탄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시죠. 한데 어떤 이름들을 붙이겠습니까?”

대니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바가르, 메라세스, 발레리온이라고 하죠. 선체에 금색으로 크게 이


름을 써넣으세요. 난 세븐킹덤의 모든 사람들에게 드래곤이 돌아오
고 있음을 알리고 싶어요.”

아리아

참수당한 머리들은 부패를 늦추기 위해 부어 놓은 타르로 물들어 있


었다.

아리아는 루제 볼톤의 세숫물을 긷느라, 매일 아침 타르에 물들은 머


리 밑을 지나가야 했다. 그 머리들은 성 바깥쪽을 향해 있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아리아는 그 중 하나가 조프리라고 상상하는 걸 즐
겼다. 그 곱살한 얼굴에 타르가 물들면 어떤 모습일지…….

‘내가 까마귀라면 바보 같은 그 두툼한 입술을 다 쪼아먹었을 텐데.’

시체를 장대에 매달아 놓으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썩은


고기를 즐기는 까마귀떼, 그것들은 귀에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누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까마귀들은 보초병이 성벽을 지나거나
마에스터의 큰 까마귀가 날아들면 깍깍거리며 흩어졌다가 이내 다시
먹이를 찾아 돌아왔다.

‘저 큰 까마귀들은 마에스터 토드무레를 기억할까? 그가 죽은 걸 슬


퍼하긴 할까? 그를 불러도 이젠 그가 오지 않는 걸 알기나 할까?’

어쩌면 죽은 자는 산 사람이 듣지 못하는 영혼의 언어로 새들에게 이


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토드무레는 하렌할이 함락되던 밤, 그 소식을 킹스랜딩과 캐스틀리


록에 전하기 위해 전령조를 날려보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다. 대장
장이 루칸은 라니스터를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죽었고, 굿
와이프 하라는 휀트 부인의 식솔들에게 라니스터 가문을 모시라고
명령했다는 이유로, 집사는 티윈에게 병기고의 열쇠를 내주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독 요리사만 사면받았는
데, 어떤 이는 그가 ‘위즐 수프’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쑥덕였다. 라
니스터 병사들과 정을 통한 피아와 몇몇 여자들은, 원하면 누구라도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알몸인 채로 중앙 광장에 버려지는 형벌을 받
았다.

그날 아침도 프레이 가문 병사 셋이 여자를 취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시시덕거리는 남자들의 웃음소리는
죄다 들어야 했다. 아리아가 물이 가득 찬 물 양동이를 들고 낑낑대며
킹스파이어타워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굿와이프 아마벨이 팔을 잡
아챘다. 그 바람에 물이 넘쳐 아마벨의 다리를 적셨다. 아마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일부러 그랬지!”

“왜 이러세요?”

아리아는 아마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비틀었다. 그 여자


는 하라가 참수당한 이후 반쯤 미쳐 있었다.

“저기 보여?”

아마벨은 뜰 저편에서 남자 밑에 깔려 있는 피아를 가리켰다.

“지금의 영주가 패배하면 너도 저 신세가 될 거야.”

“이거 놔요!”

아리아는 팔을 잡아 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럴수록 아마벨의 손아


귀 힘은 더욱 세어졌다.

“지금 영주도 곧 패배할 거야. 하렌할이 북부 놈들을 모두 몰아낼 테


니까. 들었어? 티윈 경은 지금 승리하고 있대. 그분이 곧 군대를 이끌
고 돌아오실 거야. 그리고 배신자들을 벌주시겠지. 네가 한 일을 그분
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땐 내가 너를 혼내 줄 거야. 하
라는 오래된 대나무 몽둥이를 갖고 있었어. 내가 널 위해 그걸 감춰
뒀지. 손잡이가 갈라지고 쪼개진…….”

아리아는 더 이상 얘기를 들어줄 수가 없어 양동이를 휘둘렀다. 양동


이가 너무 무거운데다 손이 미끄러워 맘먹은 대로 얼굴은 치지 못했
지만, 아마벨의 손아귀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신 날 건드리지 말아요! 또 그러면 죽여 버릴 거니까. 저리 비켜


요.”
아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물을 뒤집어쓴 아마벨은 아리아의 튜닉에 그려진 드레드포트의 문장


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넌 네 가슴팍에 그려진 이 문장 덕에 안전할 거라 믿겠지만 어림도


없어! 라니스터들이 오고 있어! 그들이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
고보자구.”

양동이의 물이 반 이상 쏟아져 다시 우물로 돌아가야 했다.

‘루제 볼톤 경에게 다 일러바치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저 여자 머리


는 하라 옆에 놓이겠지.’

하지만 아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아리아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머리들을 보고 있는데


젠드리가 다가왔다.

“네가 한 일에 감탄하고 있냐?”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그가 루칸을 좋아했다는 걸 아리아는


잘 알았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 머머스와 영주가 한 일이라구요.”

“그들을 도운 사람이 누구지? 너야. 너와 너의 위즐 수프 말이야.”

아리아는 화가 나서 젠드리의 팔을 쳤다.

“그건 단지 뜨거운 수프였어요. 당신도 세르 아모리를 싫어했잖아


요.”

“지금 있는 자들은 더 싫어. 세르 아모리는 적어도 자신의 주인을 위


해 싸웠어. 하지만 머머스는 용병들이고, 매번 망토를 바꿔 입는 ‘턴
클락’들이야. 그들 중 절반은 공용어도 쓰지 못하는 무식쟁이들이고
말이야. 셉톤 우트는 어린 소년을 좋아하고, 콰이번은 흑마법을 써.
그리고 네 친구인 비터는 인육을 먹는다구.”

아리아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


다. 루제 볼톤은 약탈을 일삼는 머머스들에게 라니스터의 잔당을 색
출하라는 임무를 맡겼고, 바르고 호트는 자신의 용사들을 네 무리로
나누어 마을로 내보냈다. 언젠가 로지가 그 일을 비웃은 적이 있었다.
바르고 호트가 하는 일이란, 과거에 그가 라니스터 가문의 기를 들고
갔던 곳으로 다시 가서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것이라
고 말이다. 머머스들은 예전에 라니스터에게 받았던 은전만큼을 또
다시 벌어들였다.

“수수께끼 하나 낼까? 만일 루제 경의 염소가 라니스터 경의 염소치


기를 잡아먹으면 염소는 몇 마리가 남을까?”

쉐그웰은 매일 그렇게 소리치고 다녔다.

“하나.”

아리아는 그렇게 답했었다. 그러자 그 광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제 족제비가 염소만큼 똑똑해졌군!”

로지와 비터도 다른 자들만큼이나 나빴다. 루제 볼톤이 병사들과 함


께 식사를 할 때면 그 둘도 빠지지 않았다. 비터는 상한 치즈처럼 고
약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서 머머스들은 그를 탁자 맨 끝에 앉혔다.
비터는 아리아가 지나칠 때마다 위협하듯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그보다는 로지가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아리아는 병사들의 시중
을 드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내내 온몸을 훑는 듯한 로지의 눈빛
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리아는 때때로 ‘자켄과 함께 해협을 건너갈걸’ 하는 후회를 했다.


그럴 때면 그가 주고 간, 녹이 슬어 볼품없는 작은 동전을 꺼내 보았
다. 한쪽 면에 뭔가 쓰여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단어였다. 그
반대쪽에는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너무 닳아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었다.

‘이게 귀한 동전이라고?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몰라. 자켄은 이름도


가짜고, 얼굴도 꾸민 거였잖아.’

그런 생각이 들자 아리아는 화가 치밀어 동전을 던져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왠지 께름칙해 다시 동전을 찾아왔다.

아리아는 그때 일을 생각하며 물 양동이를 들고 힘겹게 플로우스톤


을 가로질렀다.

“낸! 양동일 내려놓고 이리 와서 날 좀 도와 줘.”

아리아를 부른 사람은 아리아와 또래였지만 나이에 비해 키가 작은,


루제 볼톤의 종자 엘마르 프레이였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서 자갈길 위로 모래 통을 굴리고 있었다. 아리아는 얼른 뛰어가 그를
도왔다. 둘은 함께 성벽까지 통을 밀고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엘마르
가 통 뚜껑을 열고 갑옷을 꺼내자 모래가 쏟아졌다.

“이제 깨끗해진 것 같니?”

그의 임무는 영주의 메일을 빛나게 닦아 놓는 것이었다.

“모래를 털어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 여기 보이죠?


아직도 녹이 남아 있잖아요. 한 번 더 굴려야 할 것 같아요.”

엘마르가 시무룩해져서 한숨을 내쉬더니 아리아를 보며 눈을 빛냈


다.

“네가 해.”
그는 도움이 필요할 때면 친한 척하다가도, 일이 끝나면 자신은 종자
고 아리아는 하녀일 뿐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크로싱의 영주 아들임을 늘 자랑삼아 말했다. 조카도, 서자도, 손자도
아닌 적자임을 강조하면서, 언젠가 공주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얘기
도 빼놓지 않았다.

아리아는 엘마르의 소중한 공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


만 그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싫었다.

“영주님께 세숫물을 떠다 드려야 해요. 지금 침실에서 거머리에게 피


를 빨리고 계시거든요. 그것도 보통 거머리가 아니라 크고 투명한 것
들로 말예요.”

엘마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거머리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특


히 젤리처럼 보이는 투명한 것은 더 그랬다.

“하긴, 저런 무거운 통을 굴리기에는 네가 너무 말랐지.”

‘난 네가 바보라는 것을 잊었지. 너도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게 될지


몰라. 넥에는 돼지만한 거머리가 있다던데.’

아리아는 양동이를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영주의 침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콰이번은 월튼에게 메일 셔


츠와 정강이받이를 입혀 주고 있었고, 프레이들이 한쪽에 여럿 모여
있었다. 루제 볼톤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팔과 다리
에 거머리들이 달라붙어 있고, 핏기 없는 가슴에도 드문드문 붙어 피
를 빨고 있었다. 투명한 거머리들이 피를 빨면서 차츰 분홍빛으로 변
해 갔다.

“티윈 경이 이곳 하렌할에서 술수를 쓰게 해선 안 됩니다.”

아리아가 세숫대야에 물을 따를 때 눈이 붉게 충혈된 아에니스 프레


이가 말했다. 거구의 그는 하렌할에서 1천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도 자신의 형제에게 명령하는 것조차 무력하게 보였다.

“이 성은 너무 커서 많은 병사가 필요한데, 만약 포위라도 당하는 날


에는 식량이 부족해 버티기 힘들 겁니다. 마을은 화재와 약탈로 쑥대
밭이 된데다 늑대까지 판을 쳐서, 지금이 가을인데도 창고는 다음해
경작할 씨곡도 없이 텅텅 비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징발한 물자
에만 의지하는 이상, 티윈 경이 하렌할 주위를 포위하면 한 달도 못
돼 성안의 쥐는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이곳이 포위당하도록 가만있진 않겠네.”

루제 볼톤은 목소리가 너무 작아,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항상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그래서 침실도 항상 괴괴했다.

“그럼 뭡니까? 세드 에드무레가 승리에 도취해 티윈과 탁 트인 곳에


서 싸움이라도 할 거라는 얘깁니까?”

그렇게 묻는 자레이 프레이는 야위고 대머리인데다 얼굴에 얽은 자


국도 있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외삼촌은 그들을 해치울 거야. 레드포크에


서처럼 이길 거라구.’

아리아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콰이번 옆에 섰다.

루제 볼톤의 목소리가 방안에 작게 울렸다.

“티윈 경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소. 그리고 그가 킹스랜딩에 입성


하는 데에도 아직 문제가 많고, 설사 들어갔다고 해도 다시 하렌할로
돌아올 일은 별로 없소. 당분간 그는 하렌할로 진격해 오지는 않을 거
요.”

하지만 아에니스는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은 티윈 경을 저희만큼도 모르시는군요. 스타니스 왕도 티윈
경이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화를 자초하는 결과가 됐습
니다.”

침대에 누운 핏기 없는 영주는 거머리들이 피를 빠는 동안 희미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아에니스 경, 나는 스스로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오.”

이번에는 호스틴 프레이가 나섰다.

“리버룬이 병력을 총동원하고 어린 늑대 왕께서 서부에서 이기고 돌


아온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티윈 경의 군대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티윈 경은 그린포크에서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몰고 올 겁니다. 하이가
든이 조프리와 결탁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잊지 않았소.”

“저는 티윈 경의 포로였습니다. 라니스터의 환대를 다시 즐기고 싶지


는 않습니다.”

호스틴은 프레이 가문의 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로, 얼굴은 각


이 지고 몸은 건장했다.

프레이 가문의 외척인 하리스 하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스틴


을 거들었다.

“티윈 경이 스타니스 바라테온처럼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을 쳐부쉈


다면 우리의 어린 왕도 그와 맞서기 힘들 겁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지지를 구했다. 몇몇이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


했다.

호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나서서 간언해야 합니다. 이 전쟁은 패색이 짙습니다. 롭
왕도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루제 볼톤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롭 왕은 라니스터와 맞서 싸울 때마다 승리했소.”

“하지만 윈터펠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을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왕의 형제들은 죽었고요.”

아리아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었다고? 브랜과 릭콘이 죽었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윈터펠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조프리는 절대 윈터펠을 넘어뜨릴 수 없어.
롭 오빠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문득 롭이 윈터펠에 없다는 사실이 아리아의 뇌리를 스쳤다. 롭은 서


부로 원정 나갔고, 브랜은 다리를 다쳐 불구인데다 릭콘은 이제 겨우
네 살이었다. 아리아는 시리오 포렐이 가르쳐 준 대로 호수처럼 고요
히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눈에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 없어. 라니스터들이 꾸며낸 거짓말이야.’

“스타니스가 이겼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프레이 가문의 서자인 로넬 리버스가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호스틴


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스타니스는 이미 졌소. 이미 끝난 일을 아쉬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소. 볼톤 경, 롭 왕은 라니스터와 평화를 맺어야 합니다. 왕관을 내
려놓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 말에 루제 볼톤이 빙긋 웃었다.
“누가 왕께 그런 충고를 할 거지?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자네들처럼 용
맹한 형제들이 많아서 아주 기쁘군. 좋아, 자네들의 얘기를 곰곰히 생
각해 보겠네.”

그 말은 모두 물러가라는 의미였다. 프레이들이 물러가고 콰이번과


스틸생크스 월튼과 아리아만이 남았다. 볼톤이 아리아에게 손짓했
다.

“낸, 충분히 피를 빨린 것 같으니 거머리들을 떼어내라.”

“예, 영주님.”

루제 볼톤은 두 번 말하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리아는 호스틴


이 윈터펠에 대해 했던 얘기를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감히 운도 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중에 엘마르에게 물어 봐야지.’

엘마르는 분명 얘기해 줄 터였다.

아리아는 영주의 몸에서 조심스럽게 거머리들을 떼어냈다. 축축하고


통통한 거머리들이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꿈틀거렸다.

‘그냥 거머리일 뿐이야. 내가 손을 쥐면 다 찌그러질 거야.’

“마님에게서 온 편지가 있습니다.”

콰이번이 소매 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그는 마에스터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목걸이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흑마법을 쓰다가 잃어버
렸다고 했다.

“읽어 보게.”

왈다 부인은 거의 매일 편지를 보내 왔다. 하지만 내용은 늘 같았다.


콰이번이 편지를 낭독했다.
“전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당신을 위해 기도한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 곁으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내게 돌
아오세요. 그러면 도메릭을 대신해 당신 뒤를 이을 아들을 낳아 드릴
게요.”

아리아는 요람에 누워 있는 통통한 아기를 떠올리며 젖은 수건을 가


져와 루제 볼톤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를 닦았다. 통통한 거머리
에 뒤덮인 아기…….

“편지를 보내야겠어.”

“왈다 부인께 보낼 것인가요?”

콰이번이 당연한 듯 물었다. 하지만 루제 볼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르 헬만 톨하트에게 보낼 거야.”

이틀 전에 헬만은 전령을 보내, 라니스터 주둔군의 항복을 얻어내 대


리 가문의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알려 왔었다.

“그에게 왕의 명령에 따라 포로들을 처형하고 성을 불태우라고 하게.


그리고 로베트 글로버와 힘을 합쳐 서부의 더스켄데일을 치라고 하
게. 그 지방은 땅이 비옥해 부유한데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
거든. 이제 그들도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야. 로베트는 성을
잃고, 톨하트는 아들을 잃었으니 더스켄데일에서 복수를 하면 될 거
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영주님.”

아리아는 대리 가문의 성을 불태우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곳


은 조프리와 싸운 후 잡혀 갔던 곳이자, 왕대비가 레이디를 죽이라고
명령한 곳이었다.

‘거긴 불타 없어져야 마땅해.’


그런데도 로베트와 헬만이 다시 하렌할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들은
아리아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아도 될지 결정하기도 전에 전쟁터로
떠나 버렸다.

“오늘은 사냥을 나가겠네.”

루제 볼톤이 콰이번의 도움을 받아 누빈 저킨을 입으며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불과 사흘 전에 셉톤 우트의 하인들이 늑대에


게 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놈들은 모닥불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
은 야영지로 곧장 들어와 말 두 마리를 물어 죽였답니다.”

“나의 사냥 목표가 바로 늑대네. 늑대 울음소리 때문에 밤에 통 잠을


잘 수가 없어.”

루제 볼톤은 검과 단검을 허리에 찼다.

“그것들이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북부를 배회하던 다이어울프라느


니, 사람은 물론이고 매머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일일 뿐이지. 남부에선 늑대 보는 일도 드물
잖아.”

“시절이 하도 험난해 별일이 다 생기는 것이겠지요.”

루제 볼톤이 웃는 듯 이를 드러냈다.

“마에스터, 이 시기가 험난하단 말인가?”

“여름이 끝나는데다 왕국에 왕이 넷이나 있으니까요.”

“하긴, 왕은 하나라도 끔찍한데 넷이라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리아를 돌아봤다.


“낸, 모피 코트 좀 다오.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침실을 깨끗이
청소해 놓거라. 왈다 부인의 편지도 처리하고.”

“명령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영주님.”

루제 볼톤과 콰이번은 아리아만 남겨 두고 방을 나갔다.

아리아는 우선 편지를 벽난로에 던졌다.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여


불꽃을 되살린 후, 양피지가 오그라들며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니스터들이 브랜과 릭콘을 해쳤다면 롭 오빠가 반드시 복수해 줄


거야. 오빤 그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로. 오빤 그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

연기가 굴뚝 위로 빨려 올라갔다. 아리아는 난롯가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윈터펠이 적들 손에 넘어갔다면 이제 우리 집은 어디지? 난 아직도


아리아가 맞나? 혹시 영영 하녀 낸으로 살아야 하나?’

아리아는 몇 시간 동안 영주의 침실을 청소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향


을 피우고, 벽난로에는 새로 불을 지피고, 침대보를 갈고, 새털 침대
를 부풀리고, 변기를 비워내고 깨끗이 닦았다. 마지막으로 빨랫감을
세탁부에게 갖다 준 다음 주방에서 신선한 배를 가져다 놓았다. 그런
뒤 방을 나와 영주의 집무실로 갔다. 그곳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
다. 우선 다 닳은 양초를 갈고, 책을 정리하고, 깃대와 잉크, 밀랍을
정리했다.

창문 아래에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낡은 양피지가 펄


럭거리고 있었다. 아리아는 그것을 말아 올리다가 문득 거기에 그려
진 그림에 눈이 갔다. 호수와 강, 성, 도시, 숲 등이 파란색과 빨간색
과 녹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엔 넥에서부터 블랙워터 강까
지 나타나 있었다.
‘큰 호수 위쪽에 있는 지역이 하렌할이구나. 그런데 리버룬은 어디에
있지?’

리버룬은 하렌할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일을 다 마친 후 아리아는 가즈우드로 향했다. 저녁때까지는 아직 시


간 여유가 있었다. 루제 볼톤의 시중을 드는 일은 위즈나 핑크아이 밑
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하지만 옷을 자주 갈아입고 자주 씻
어야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영주가 사냥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더 있어야 했다. 아리아는 영주가


돌아올 때까지 검술을 연마할 생각으로, 대나무 검으로 자작나무의
잎을 쉴새없이 내려쳤다.

“세르 그레고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외쳤다.

“던센, 폴리버, 래프, 티클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뭇잎을 내려쳤다.

“하운드, 세르 이린, 세르 메린, 왕대비!”

갑자기 상수리나무의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리아는 막대기를 세


우고 줄기를 힘차게 찔렀다.

“조프리, 조프리, 조프리!”

아리아의 팔과 다리에 얼룩덜룩하게 나뭇잎이 그림자졌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후에야 아리아는 잠시 쉬었다. 오른쪽 발꿈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래서 오른발을 들고 하트트리 앞으로 가 막대기
를 들어 예를 표했다.

“발라 모르굴리스.”
그 말이 주는 어감이 좋았다. 아리아는 뜰을 가로질러 목욕탕으로 가
면서 까마귀떼 위를 선회하는 큰 까마귀를 보았다.

‘어디서 무슨 전갈을 가지고 왔을까? 어쩌면 롭 오빠에게서 온 것인


지도 몰라.’

“그래, 이리 와. 와서 브랜과 릭콘이 죽지 않았다고 말해 주렴.”

아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한테 날개가 있으면 윈터펠로 날아가 직접 확인해 볼 텐데……. 윈


터펠이 정말로 함락되었다면 나는 멀리 날아가 버릴 거야. 달과 별을
지나 저 멀리로. 그러면 낸 할멈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겠지. 드래곤과 바다 몬스터, 브라보스의 타이탄 같은 것들 말이
야.’

사냥을 떠났던 사람들은 해질녘이 다 되어서 죽은 늑대 아홉 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일곱 마리는 덩치가 큰 회갈색이었지만, 나머지 두 마
리는 아직 어린 새끼였다. 루제 볼톤은 병사들에게 그것들의 가죽을
벗겨 담요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영주님, 새끼들은 털이 부드러우니 좋은 털장갑을 만드시죠.”

병사 중 하나가 제안했다. 하지만 볼톤은 펄럭이고 있는 성벽 위의 깃


발을 올려다보며 딴소리를 했다.

“스타크 가문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듯 겨울이 오고 있네. 빨리 끝내


게.”

그러고는 아리아에게 눈을 돌렸다.

“낸, 스파이스 포도주를 따뜻하게 데워 오너라. 날이 많이 차니 식지


않도록 조심하고. 오늘은 혼자 식사하고 싶으니까 빵과 버터, 멧돼지
고기도 가져다오.”
“네, 영주님.”

아리아가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핫파이는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다른 요리사 셋은 생선을 다듬고, 한 소년은 불 위에서 멧돼지를 굽고
있었다.

“영주님이 요리를 가져오래요. 그리고 따뜻하게 데운 스파이스 포도


주도요. 식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요리사 하나가 손을 씻고 주전자를 꺼냈다. 포도주를 불에 데우는 동


안 스파이스를 잘게 부수라는 명령이 핫파이에게 내려졌다. 아리아
가 도우려고 핫파이 옆으로 갔다.

“네가 스파이스 포도주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 주지 않아도 나 혼자


할 수 있어.”

핫파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핫파이도 날 싫어하는구나. 아니면 나를 두려워하는지도 몰라.’

아리아는 뒤로 물러섰다. 슬펐다.

음식 준비가 끝나자, 요리사가 쟁반을 은뚜껑으로 덮고 포도주 병을


두꺼운 수건으로 쌌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성벽 위
엔 왕 주위에 모여 있는 의회 의원처럼 까마귀들이 잘린 머리 주위로
모여 있었다. 경비병 하나가 킹스파이어타워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게 위즐 수프가 아니길 바란다.”

아리아가 들어갔을 때 루제 볼톤은 벽난로 앞에 앉아 가죽으로 장정


한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좀 어두워졌구나. 초를 밝혀라.”

그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아리아는 가져온 식사를 그의 옆에 두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웠다. 볼
톤은 책장을 몇 장 더 넘긴 뒤에 책을 조심스럽게 불 속에 던져 넣었
다. 그러고는 불꽃이 책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낡은 가죽이 치
익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누런 종이들은 마치 유령이 책을 읽기라도
하듯 불길 속에서 너울거렸다.

“이제 그만 물러가 보거라.”

그는 여전히 아리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쥐새끼처럼 조용히 방을 나가야 했지만, 아리아는 무엇에 붙들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

“영주님, 하렌할을 떠나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루제 볼톤이 멍한 눈으로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내가 네게 질문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느냐?”

“아뇨, 영주님.”

아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아무 말 말아라.”

“하지만 대답해 주세요, 영주님.”

그는 잠시 동안 놀란 것 같았다.

“이번 한 번만 대답해 주겠다. 난 북부로 가면서 바르고 경에게 하렌


할을 넘겨줄 생각이다. 그러니 넌 여기에 남아야 해, 그와 함께.”

“하지만 전…….”
“난 아랫사람에게 질문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네 혀를 잘라 버려
야 입을 다물겠느냐?”

그는 그런 일을 개 한 대 때리는 것쯤으로 여길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그럼 아직 할말이 남았느냐?”

“아닙니다.”

“그럼 가 보거라. 이번 한 번만 너의 무례를 눈감아 주마.”

아리아는 방을 나왔다. 하지만 잠자리로 가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탑


앞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병사가 아리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이 오고 있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봐.”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잘린 머리들을 비추는 성벽의 횃불들이 너울거


렸다.

아리아는 가즈우드로 향했다. 웨일링타워가 가는 길에 있었다. 한때


아리아가 위즈와 함께 살던 곳, 그곳은 지금 프레이 가문의 숙소로 쓰
이고 있었다. 창문 너머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럿이 소리를
높여 다투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마르가 바깥 계단에 혼자 앉아 있었
다.

“왜 그래요?”

엘마르의 뺨에서 눈물 방울이 반짝였다.

“나의 공주님이…….”

그는 훌쩍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에니스 경 말이 우리가 파혼했대. 트윈스에서 전갈이 왔는데, 아
버진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하거나 셉톤이 돼야 한다고 하셨대.”

‘쳇, 그따위 바보 같은 공주 때문이라니……. 그건 울 일도 아냐.’

아리아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내 동생들은 죽었을지도 모른대요.”

그러자 엘마르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도 하녀의 동생들에게 신경 안 써.”

아리아는 엘마르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 공주님,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리아는 재빨리 가즈우드로 도망쳤다. 그런 뒤 숨겨 놓았던 대나무


검을 찾아 들고 하트트리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붉은 잎들이 살랑거
렸다. 붉은 눈들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신들의 눈이 나를 보고 있어. 신들이시여,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가


르쳐 주세요.”

오랫동안 바람소리와 물소리, 나뭇잎이 가지에 몸을 비벼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즈우드 너머의 유령 들린 탑
과 거대한 하렌할의 성벽 너머 어딘가에서 길게 포효하는 늑대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잠시 아득한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희미
하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이 내리고 폭풍이 몰아치면 외로운 늑대는 죽고 만다. 뭉쳐야 산단


다.’

“하지만 같이할 사람이 없는걸요.”


브랜과 릭콘은 죽었고, 산사는 라니스터의 손아귀에 잡혀 있고, 존 역
시 월로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전 이제 아리아도 아니에요. 하녀 낸일 뿐이에요.”

‘넌 윈터펠의 아리아다. 북부의 딸……. 언젠가 넌 내게 강해질 수 있


다고 말했잖니. 넌 늑대의 피를 이어받았단다.’

“늑대의 피……. 맞아요, 전 롭 오빠만큼 강해질 거예요. 그러겠다고


약속했죠.”

아리아는 기억을 떠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대나무 검 끝을 잡고 무릎에 세게 내리쳤다. 큰 소리를 내며 검이 두
동강 났다.

‘난 다이어울프야. 이런 나무 검과는 안녕이야.’

그날 밤 아리아는 좁은 침대에 누워 달이 뜨길 기다리면서 산 자의 목


소리와 죽은 자의 속삭임을 들었다. 더 이상 그 목소리들이 무섭지 않
았다. 늑대 울음소리가 그 소리에 섞였다. 늑대는 이제 거대한 무리를
이룬 듯했다.

‘가즈우드에서 들었을 때보다 가까이에 있어. 나를 부르고 있어.’

마침내 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맨발로 소리나지


않게 계단을 내려갔다. 루제 볼톤은 철저한 사람이라 킹스파이어타
워의 입구를 밤낮으로 지키게 했고, 그 때문에 아리아는 지하의 좁은
창을 이용해 성을 빠져나와야 했다.

안뜰은 조용했다. 거대한 성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웨일링타워가 통곡을 했다.

대장간은 불이 꺼지고 문에 닫혀 빗장이 채워져 있었다. 아리아는 킹


스파이어타워를 빠져나올 때처럼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리고 눈이 어둠에 익을 때까지 웅크리고 앉아 기다렸다가 젠드리를
찾았다. 다락방 한쪽 끝에서 자고 있는 그가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입을 손으로 막고 팔을 살짝 꼬집자, 깊이 잠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
가 바로 눈을 떴다.

“쉿, 조용히 해요.”

아리아는 그의 입에서 손을 떼고 밖을 가리켰다.

젠드리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이내 몸을 일으켜


옷을 찾아 걸치고 아리아를 따라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다른 사람들
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 시간에 뭐하는 거야?”

밖으로 나오자 젠드리가 화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내게 검을 줘요.”

“블랙섬이 병기고를 항상 잠가 놓는다고 백 번도 넘게 말했잖아. 거


머리 영주가 가져오래?”

“아뇨, 검이 필요한 사람은 나예요. 당신 해머로 자물쇠를 부수면 되


잖아요.”

“뭐? 저들이 날 가만 두겠어? 걸리면 내 손을 잘라 버릴걸. 아니면 죽


이거나.”

“나랑 같이 도망가요. 그럼 손이 잘리거나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도망치다 걸리면? 그대로 잡아죽일 거야.”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예요. 볼톤 경은 하렌할을 블러디머머스에게


넘기고 떠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젠드리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리아는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겁날 것 없었다.

“바르고 호트는 영주가 되면, 도망치지 못하도록 노예들의 발목을 다


자를 거예요. 물론 대장장이도 마찬가지고요.”

젠드리가 비웃듯 입을 비죽거렸다.

“그건 그냥 헛소문일 뿐이야.”

“아니, 진짜예요. 바르고 호트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내가 직접 들었


는걸요.”

아리아는 다급한 마음에 거짓말을 했다.

“왼쪽 발을 자를 거라구 했어요. 절름발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부엌


으로 가서 핫파이를 깨우세요. 빵이든 뭐든 먹을 게 필요하니까. 당신
말이라면 핫파이도 들을 거예요. 난 말을 가져올 테니까 얼른 검을 가
져와요. 서쪽 성문 근처에서 만나요. 고스트타워 뒷문 알죠? 핫파이
말고 다른 사람은 데려오면 안 돼요.”

“고스트타워 뒷문? 나도 그 문은 알아. 거기도 다른 곳과 똑같이 경


비병이 지키고 있어.”

“그래서요? 걱정 말고 검이나 잊지 말고 가져와요.”

“난 간다고 말한 적 없어.”

“맘대로 해요. 하지만 오게 되면 검을 잊지 말아요.”

젠드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알았어. 잊지 않을게.”
아리아는 나올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킹스파이어타워로 다시 들어
가, 발소리를 죽이며 나선형 계단을 뛰어올라 방으로 갔다. 옷을 벗고
내복과 반바지를 두 벌 겹쳐 입고는 제일 깨끗한 튜닉을 걸쳤다. 가슴
에 드레드포트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진 그 옷은 루제 볼톤 병사들의
정복이었다. 그러고는 신발 끈을 묶고 모직 망토를 어깨에 두른 후 목
에다 매듭을 지었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그녀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
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리아는 영주의 집무실 밖에서 잠시 안에 누가


있는지 살피고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지도는 탁자 위, 루제 볼톤이
남겨 놓은 저녁식사 옆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단단히 말아 허리춤에
끼워 넣는데 영주의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젠드리가 용기를 내지 못
했을 경우를 대비해 그것도 챙겼다.

마구간은 어두웠다. 말 한 마리가 아리아의 기척을 느끼고 작은 소리


로 히힝거렸다. 마부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아리아는 소년 하나를
발끝으로 가볍게 차서 깨웠다. 그가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짜증스럽
게 말했다.

“뭐야?”

“볼톤 경께서 말 세 마리에 안장을 얹어 가져오래요.”

“이 시간에? 말을 왜?”

마구간 소년이 머리에서 밀짚을 털어 내며 일어서다가 아리아의 가


슴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는 눈을 끔벅거렸다.

“이 야심한 밤에 영주님이 말을 왜 찾으시는 건데?”

“영주님은 하인들에게 질문을 받는 걸 제일 싫어하세요.”

아리아는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소년의 눈은 여전히 아리아의 가슴


을 향해 있었다. 그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세 마리라고 했니?”

“네. 한 마리도, 두 마리도 아닌 정확히 세 마리요. 사냥에 나갈 거니


까 날쌔고 가벼운 놈으로 끌고 오라고 하셨어요.”

아리아는 소년이 다른 사람들을 깨우지 않도록 안장을 얹는 것을 도


와 주었다. 나중에 이 소년이 해를 입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럴 리는
없을 터였다.

말을 끌고 성을 가로질러 가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성벽 위에서 순찰


을 도는 보초병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성벽이 드리우는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기며 가야 했다.

‘들키면 어때. 난 영주의 하녀인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싸늘한 가을밤의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서쪽에서 구름


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웨일링타워는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비
통한 비명을 내질렀다.

‘비가 올 것 같은데……. 이런 날씨가 도망치기에 더 나으려나?’

아무도 아리아를 보지 못했고, 아리아도 성벽 위로 기어올라가는 얼


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고양이
는 아리아를 보더니 멈춰 서서 낮게 울었다. 고양이를 보자 아리아는
레드킵과 아버지, 시리오 포렐이 떠올라 나직이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널 잡을 수 있어. 하지만 난 가야 해, 나비야.”

고양이는 다시 야옹 하고 울더니 달아났다.

하렌할의 다섯 탑에서 가장 낡은 고스트타워는 3백 년 동안 쥐만 들


락거리는 무너진 셉트 뒤에 음침하고 황량하게 서 있었다. 아리아는
고스트타워 뒤쪽에 몸을 숨기고 젠드리와 핫파이를 기다렸다. 구름
이 별을 삼키는 동안 말들은 깨진 바위틈에서 난 잡초를 뜯었다. 아리
아는 단검을 꺼내 시리오가 가르쳐 준 대로 부드럽게 손을 놀려 날을
갈았다. 칼 가는 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시간이 꽤 흘렀을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는 그들의 소리


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기다렸다. 핫파이는 오는 내내 거친 숨을 몰
아쉬더니 기어이 어둠 속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하렌할 사
람들을 다 깨울 만큼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드리는 조용
히 왔지만, 움직일 때마다 가지고 오는 검이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
다.

아리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여기 있어. 한데 좀 조용히 할 수 없어? 사람들이 다 깨겠어.”

두 사람은 돌부리를 조심하며 아리아에게 다가왔다. 젠드리는 기름


먹인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등에 커다란 해머를 하나 메고 있었
다. 후드를 깊숙이 눌러써 붉고 둥근 얼굴을 가린 핫파이는 양 옆구리
에 커다란 치즈를 하나씩 끼고, 오른손에 빵 자루를 하나 달랑거리며
왔다.

“내가 말했던 대로 뒷문에 경비병이 하나 있어.”

젠드리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처치할 테니까 말을 데리고 여기 있어요. 내가 부르면 빨리 와


야 해요.”

젠드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핫파이가 한마디 했다.

“우릴 부를 때 올빼미 소리를 내.”

“난 올빼미가 아냐. 늑대 울음소리를 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리아는 혼자서 고스트타워의 그림자를 뚫고 미끄러지듯이 나아갔
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시리오 포렐과 요렌, 자켄, 존 오빠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이럴 땐 단검이 더 나을 것 같아
젠드리가 가져온 검은 들고 오지 않았다. 루제 볼톤의 단검은 가볍고
예리했다.

강철못이 박힌 고스트타워의 뒷문은 하렌할에서 가장 작은 문으로,


방어 탑 아래 성벽 한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경비병도 딱
한 명이었다. 하지만 탑과 성벽 위에 보초병들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그림자처럼 조용히 해야 했다.

‘소리를 지르게 해서는 안 돼.’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아리아의 눈썹


위로 떨어져 코로 천천히 흘러 내려갔다.

아리아는 영주가 보내서 온 것처럼 당당하게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경비병이 야심한 시각에 나타난 하녀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
다.

아리아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북부인이란 걸 깨달았다. 초라한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는 그는 분명 드레드포트 가문의 병사였다. 프
레이 가문 병사이거나 머머스라면 맘놓고 속임수를 쓸 수 있겠지만,
그는 평생 루제 볼톤을 모신 드레드포트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리아
보다 루제 볼톤에 대해 더 잘 알 터였다.

‘이 사람한테 내가 윈터펠의 아리아 스타크라고 말하고 물러나라고


명령한다면…….’

하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북부인이긴 해도 윈터펠의 병


사는 아니지 않은가.

아리아는 가슴의 문장이 잘 보이도록 망토를 뒤로 젖혔다.


“볼톤 영주님께서 보내셨어요.”

“이 시간에? 뭐 때문에?”

병사의 망토 안으로 금속이 빛나고 있었다. 아리아는 단검으로 갑옷


을 뚫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목을 겨눠야 해. 하지만 키가 너무 커서 손이 닿지 않을 거야.’

아리아는 무슨 말을 할지 잠시 망설였다. 두려웠다. 얼굴로 떨어지는


빗물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경비병들에게 모두 은을 나눠 주랬어요. 다들 수고한다면서요.”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아리아로서도 알 수 없었다.

“은이라고?”

병사는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은을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 어디 줘 봐.”

아리아는 튜닉 속을 더듬으며 자켄이 주었던 동전을 찾았다. 그리고


꺼내는 척하다가 일부러 떨어뜨렸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변색한 은
처럼 보였다.

남자가 아리아를 부드럽게 꾸짖으며 동전을 줍기 위해 무릎을 꿇었


다. 고개를 숙인 병사의 목이 눈앞에 드러났다. 아리아는 재빨리 단검
을 뽑아 목에 꽂았다. 피가 치솟았다. 병사가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에 피가 차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발라 모르굴리스.”
아리아는 쓰러지는 병사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병사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자 동전을 주워 올렸다. 하렌할 성밖에서 크고
긴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는 빗장을 들어 한쪽으로 치우고 육중한 나무문을 열었다. 핫


파이와 젠드리가 말을 몰고 왔을 때는 비가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핫파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병사를 보고 숨을 헐떡거렸다.

“네가 그를 죽이다니!”

“내가 못할 줄 알았어?”

아리아의 손가락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비린내는 사람을 흥분시


키는 힘이 있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냐. 빗물이 이 피를 깨끗하게 씻어 줄 거야.’

아리아는 말에 올라탔다.

산사

왕의 알현실은 보석과 모피로 가득했다. 홀에 모인 귀족과 귀부인들


은 부둣가의 생선 장수들처럼 서로를 밀치며 높다란 창 아래에 서 있
었다.

사람들은 오늘 누구보다도 돋보이기 위해 애썼다. 잘라바 호는 금방


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화려한 깃털로 뒤덮인 옷을 입고 있었고, 하이
셉톤의 크리스탈 왕관은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무지개를 만들어냈
다. 회의용 탁자 앞에 앉은 세르세이는 금실로 수를 놓은 벨벳 드레스
를 입고 있었는데, 드레스 앞쪽에 안이 보이도록 길게 트임이 있었다.
왕대비 옆에 앉은 바리스는 라일락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서 실실 웃
음을 흘리고 있었고, 문 보이와 돈토스도 새로운 광대옷을 입었다. 탄
다 부인과 두 딸은 청록색 실크와 모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고, 길레
스는 금빛 레이스가 달린 진홍색 실크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세븐킹덤의 왕 조프리는 주홍색 튜닉에 루비가 박힌 검은 망토를 두
르고 묵직한 황금 왕관을 쓴 채 높은 철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기사와 종자, 재력가들 속에서 우물쭈물하던 산사는 티윈 라니스터


의 입성을 알리는 트럼펫의 소리가 울릴 때에야 회랑에 도착할 수 있
었다.

산사는 왕좌 앞에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는 티윈을 보고 눈이 휘둥그


레졌다. 그 무례함도 놀라웠지만, 그것보다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
한 차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황금색 소용돌이 무늬와 루비를
박아 넣은, 윤기가 반지르르한 붉은 갑옷은 보는 이를 압도했고, 투구
에도 눈을 루비로 박아 넣은, 포효하는 황금 사자가 멋지게 새겨져 있
었다. 길고 묵직해 보이는 망토는 금실로 사자가 수놓아진 주홍색 실
크였고, 군마의 궁둥이에도 똑같은 천이 걸쳐져 있었다. 마갑 역시 황
금색이었다. 말은 그 주인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왕좌
발치에 똥을 한 무더기나 쏟아냈던 것이다.

조프리가 조심스럽게 똥을 피해 내려가 할아버지와 포옹하고는 그를


‘도시의 구세주’로 선포했다. 티윈은 조프리가 왕국의 통치를 요청하
자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산사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감추기 위해 입을 가렸다.

“전하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맡겠습니다.”

종자들이 티윈의 갑옷을 벗겼고, 조프리는 그의 목에 핸드의 목걸이


를 걸어 주었다. 티윈은 왕대비와 나란히 회의용 탁자에 앉았다. 티윈
의 말이 이끌려 나가고 오물이 치워지자 세르세이는 식을 계속 진행
하라는 신호를 했다.

트럼펫 소리가 영웅들을 맞이했다. 의전관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영웅들의 이름과 공적을 발표했고, 그때마다 홀 안의 사람
들이 환호를 보냈다. 하이가든의 영주 메이스 티렐에게 가장 높은 보
상이 주어졌다. 남부의 강력한 영주는 몸집이 거대했지만 역시 핸섬
했다. 뒤이어 그의 아들, 로라스와 그의 형 가랜이 들어왔다. 세 사람
은 똑같이 담비 가죽으로 장식한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

조프리가 다시 왕좌에서 내려와 그들을 맞이했다. 그것은 대단한 영


예였다. 황금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은은한 빛깔의 장미 목걸이가 세
사람의 목에 각각 걸렸다. 목걸이에는 루비로 라니스터 가문의 사자
모양을 박아 넣은 황금 원이 달려 있었다.

“하이가든이 왕국을 지지해 준 것처럼 장미가 사자를 지지해 주시오.


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시오.”

조프리의 말에 로라스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저는 킹스가드가 되어 적들의 손에서 전하를 지켜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프리가 로라스를 일으켜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의 바람은 실현되었소.”

그러자 메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제게 전하를 모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만약 왕실 의회


에 참석할 자격이 된다면, 저보다 더 충성스럽고 진실한 신하는 다시
찾을 수 없으실 겁니다.”

이번에도 조프리는 티렐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경의 소원은 이루어졌소.”

그러자 이번에는 가랜이 조프리 앞으로 나섰다.


가랜 티렐은 다섯 살 아래인 동생 로라스의 얼굴에 수염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동생보다 가슴이 탄탄하고 어깨도 넓었다. 인물도
훤칠하긴 했지만, 보는 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오게 할 만큼 잘생
긴 동생의 외모에는 미치지 못했다.

“전하, 제게는 마가에리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집안의


기쁨인 아이지요. 전하도 아시다시피, 그 아이는 렌리 바라테온과 결
혼했습니다. 하지만 렌리는 신방에 들기도 전에 전쟁에 출전했고, 그
래서 제 여동생은 아직 처녀로 남아 있습니다. 마가에리는 전하의 현
명하심과 용기, 기사도 정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전하를 사모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제 여동생을 거두어 아내로 맞이하시길, 그
래서 저희 가문이 전하의 가문과 맺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조프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르 가랜, 당신 여동생의 아름다움은 세븐킹덤에 널리 알려져 있어


익히 아는 바이지만, 그 일에는 약속할 수가 없소. 내겐 이미 다른 사
람이 있고, 왕은 자신의 말을 지켜야 하는 법이오.”

그러자 세르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의회 의원들의 충고대로, 반역죄로 처형당한 죄인의 딸과 결


혼하는 것은 올바르지도, 현명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롭은 공
공연히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의원들은 왕국의 평화를 위해 전하
께 간청한 겁니다. 마가에리 티렐은 전하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겁니다.”

잘 훈련받은 개들처럼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기쁨의 환성을 질렀


다.

“마가에리! 마가에리!”

“반역자 왕비는 필요 없다! 티렐! 티렐!”


조프리가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나도 여러분의 희망을 받아들이고 싶소. 하지만 나는 이미 신성한


맹세를 했소.”

그러자 하이셉톤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신들은 약혼을 성스러운 것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고인이


되신 로버트 왕께서 약혼을 선언하셨을 때는 윈터펠의 스타크 가문
이 음모를 드러내기 전이었습니다. 저들이 저지른 죄가 만천하에 드
러난 이상, 전하는 그들과 했던 어떤 약속에서도 자유로워지셨습니
다. 전하와 산사 스타크와의 약혼은 무효입니다.”

기쁨의 환호성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마가에리, 마가에리.”

산사는 회랑의 벽을 꽉 짚고서 천천히 몸을 기댔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프리의 입에
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왕국 전체가 조프리의 한마디에 좌지우지되
는 지금, 혹시라도 조프리가 고집을 부릴까 걱정이었다. 산사는 아버
지가 처형되었던 그레이트 셉트의 대리석 계단에 다시 서 있는 기분
이었다. 그렇게 흠모하던 조프리를 믿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자비를
내려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 들은 말은 아버지의 머리를 베라는
명령뿐이었다.

‘제발, 조프리가 약혼을 파기한다고 말하게 해주세요. 제발…….’

산사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티윈이 손자를 바라보았다. 조프리는 그에게 언짢은 시선을 던지고


는 가랜을 일으켰다.
“신들이 허락한다면 약속을 파기하겠소. 짐은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
하겠소, 세르.”

주위가 온통 환호성으로 덮였고, 조프리는 가랜의 수염이 덥수룩한


볼에 키스했다.

산사는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 난 자유야.’

하지만 맘 편히 웃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산사에게


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웃으면 안 돼.’

문득 왕대비가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돼. 내 아들이 네게 모욕을 주지는 않을 거


야. 내 말을 알아듣겠니?”

“예. 하지만 왕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앞으로 생각해 봐야겠지. 우선은 우리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 있어야


해.”

“전 집에 가고 싶어요.”

그 말에 왕대비의 얼굴이 굳어졌었다.

“지금쯤은 이미 배웠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구나. 세상에서 자


기가 원하는 걸 모두 이루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산사는 그때 일을 생각하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원하는 걸 이뤘어. 조프리에게서 벗어났나구. 이제 저 구
역질나는 얼굴에 키스하지 않아도 돼. 순결을 바치지 않아도 되고, 아
이를 낳아주는 일도 없을 거야. 마가에리 티렐이 내 대신 모든 걸 해
줄 테니까. 마가에리, 그 여자가 불쌍하군.’

시간이 흐르자 환호도 수그러들었고, 하이가든의 기사들도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메이스는 의회 대신으로서 탁자에, 그의 아들들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았다. 블랙워터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영웅들이 호명되는 동안, 산사는 버림받아 상심한 사람처럼 보
이려고 노력했다.

아보르의 영주 팍스터 레드윈은 쌍둥이 아들 호라스와 호버와 함께


홀로 들어왔다. 호버는 전투에서 부상을 얻어 다리를 절룩거렸다. 그
들 뒤로 일곱 명의 공훈자가 들어왔다. 가슴에 황금 나무가 수놓인 흰
더블릿 차림의 마티스 로완, 보석이 번쩍이는 검집을 등에 멘 대머리
랜딜 탈리, 수염을 짧게 기른 풍채 좋은 케반 라니스터, 적갈색 머리
가 어깨에서 물결치는 애덤 마브랜드, 서부의 영주들인 리덴, 크레이
크홀, 브락스가 그들이었다.

그들 다음으로는 전공(戰功)을 세운 낮은 신분의 기사 넷이 들어왔


다. 결투를 신청해 브리스 카론을 죽인 외눈박이 기사 필립 푸테, 50
여 명의 포소웨이 병사들을 헤치고 전진으로 들어가 푸른 사과 존을
생포하고 붉은 사과를 죽여 ‘사과 귀신’이란 별명이 붙은 프리라이더
로소르 브로네, 열두 명의 적군들을 헤치고 죽은 말에 깔린 주인 하리
스 스위프트를 구해낸 반백의 병사 윌리트, 기사 둘을 죽이고 셋을 부
상 입히고 둘을 생포한 열네 살도 채 되지 않은 종자 조스민 펙클레
돈, 이렇게 네 명이었다. 그 중 윌리트는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 나
타났다.

의전관이 각각의 공적을 공표하자, 티윈 옆에 앉아 있던 케반이 자리


에서 일어섰다.
“조프리 왕께서는 용감한 기사들이 그 공로에 합당한 포상을 받길 원
하시오. 왕의 명령에 따라, 세르 필립은 푸테 가문의 필립 경이 될 것
이고, 카론 가문의 토지와 지위와 소득을 모두 양도받게 될 것이오.
로소르 브로네는 기사로 승격되어 전투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강변
지역을 지키게 될 것이오. 조스민 펙클레돈은 검과 갑옷 한 벌, 왕실
마구간에서 마음에 드는 말을 한 마리 갖게 될 것이오. 또한 성인이
되면 기사로 임명받을 것이오. 마지막으로 굿맨 윌리트에겐 은창과
링메일, 투구, 철면을 하사하고, 그의 아들들이 라니스터 가문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소. 나이가 찬 아들은 스콰이어로, 어린아이
는 시동으로 일할 것이고, 그 아이들이 성실하게만 일한다면 기사가
될 기회도 줄 것이오. 이 모든 것은 핸드와 의회가 승인한 것이오.”

다음으로 군함 와일드윈드, 아에몬의 함장들과 가드그레이스, 랜스,


실크 호의 선원들이 포상을 받았다.

산사는 그들을 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저들 최고의 공적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거야.’

할리네와 연금술사들 역시 왕의 사의(謝儀)를 받았다. 하지만 경의


칭호 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 역시 바리스처럼 허울
만 좋은 경일 뿐이었다.

란셀 라니스터에게는 더욱 많은 대가가 주어졌다. 땅과 성, 그리고 적


법한 상속자 없이 대가 끊긴 대리 가문의 권리까지. 하지만 란셀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상처가 너무 심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
다는 쑥덕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산사는 언젠가 티리온이 ‘머
리에 상처를 입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다음으로 페티르 바엘리시의 이름이 불렸다.

리틀핑거는 보라색과 분홍색 튜닉에 흉내지빠귀 무늬가 있는 망토를


두르고 나타났다. 그가 왕좌 앞에 무릎을 꿇으며 싱긋 웃었다.
‘너무 좋아하네.’

산사는 그가 전투 중에 특별히 용맹스런 업적을 이뤘다는 얘기는 들


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포상을 받을 모양이었다.

케반이 다시 일어섰다.

“전하께서는 왕실 의회 의원인 페티르 바엘리시 경이 왕국을 위해 충


성을 다한 대가로 그에 합당한 포상을 주기로 하셨소. 바엘리시 경은
하렌할의 모든 권리, 즉 성과 토지와 소득 등을 모두 소유하게 될 것
이오. 그는 이제 명실공히 트라이덴트 최고의 영주가 된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자손 대대로 상속할 수 있소. 따라서 트라이덴트의 영주
들은 모두 합법적인 군주인 페티르 경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오.
이 모든 것은 핸드와 의회에서 승인한 것이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페티르가 고개를 들어 조프리를


올려다보았다.

“황송하옵니다, 전하. 앞으로 자식과 손자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신


경을 좀더 써야겠습니다.”

조프리는 물론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트라이덴트의 최고 영주라고?’

산사는 리틀핑거가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


은 할리네가 수여받은 ‘경’이란 직위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었다. 하
렌할이 저주받은 곳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은 라니스터 가문 수중에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트라이덴트의
영주들은 리버룬의 툴리 가문과 북부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
문에 페티르를 군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오빠와 삼촌, 할아버지가 모두 권력을 잃고 처형당하지 않는 한 저자


는 트라이덴트 최고의 영주가 될 수 없어.’
산사는 왠지 불안했다.

‘오빠는 늘 승리했어. 페티르 바엘리시도 쉽게 무찌를 거야.’

그날 하루 6백 명이 넘는 기사들이 새롭게 임명되었다. 그들은 밤새


바엘로의 그레이트 셉트에서 기도를 하고 아침에 겸허한 마음을 증
명하기 위해 맨발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의식을 행한 뒤, 킹스가드에
게서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염색하지 않은 울 슈미즈를 입고 나타났
다. 그들이 기사 작위를 받는 시간은 꽤나 오래 걸렸다. 킹스가드 중
만돈 무레는 전사하고 산도르는 사라졌으며, 아리스 오크하트는 미
르셀라 공주와 도르네에 있고, 자이메는 롭에게 잡혀 있어서 바론 스
완, 메린 트란트, 오스문드 케틀블랙 세 사람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
다. 기사 작위를 받은 이들은 일어나 검을 허리에 차고 창문 아래에
섰다. 맨발로 도시를 돌면서 발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도 있었지만 모
두 의기양양하고 당당해 보였다.

기사 임명식이 끝나자 홀 안은 점점 술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들


떠 있는 사람은 역시 조프리였다. 갤러리에 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기 시작했지만. 1층에 있는 사람들은 왕의 허락 없이는 감
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조프리는 한창 들떠 있어 요청만 하면 누구든
자리를 떠나는 걸 허락했을 테지만, 행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분위기가 바뀌고, 포로들이 홀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그 중에서 지체 높은 영주와 귀족 출신의 기사들이 보였다. ‘붉은


게’라 불리는 심술궂은 노인 셀티가르, 셀티가르보다도 나이가 많은
에스터몬트, 다리가 부러져 절뚝거리면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도 거
절하고 혼자 걸어오는 바르너, 왼쪽 팔이 잘린 창백한 얼굴의 마크 물
렌도르, 그리핀 루스트 가문의 사나운 레드 로네트, 레인우드 지방의
데르모트, 윌럼 경과 그의 두 아들 조수아와 엘리아스, 존 포소웨이,
티몬, 드리프트마크의 서자 아우라네, ‘패니러버’라 불리는 스테이드
몬 등이 그들이었다.
조프리는 전투 도중 전향한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끝까
지 스타니스를 위해 싸운 사람이라 해도 용서를 구하고 충성만 맹세
하면 아무런 죗값도 묻지 않고 토지와 직위를 돌려주었지만, 그 중 몇
몇은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얘야. 빛의 신께서는 스타니스


전하를 언제까지나 보호해 주실 거다. 스타니스 전하의 시대가 오면
어느 누구도 너를 구하지 못해!”

어느 가문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서자 하나가 조프리를 보고 소리쳤


다.

“네 최후는 지금이다.”

조프리가 일린 파이네에게 데려가 목을 베라는 눈짓을 했다. 사내가


끌려나가자 가슴에 불타는 하트 문양이 그려진 기사가 큰 소리로 외
쳤다.

“세븐킹덤의 진정한 왕은 스타니스 왕이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저 괴물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혐오스러운 악의 자식이오!”

“입 닥쳐라.”

케반이 고함쳤다. 하지만 기사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조프리는 왕국의 심장을 갉아먹는 사악한 벌레요! 저자의 아버지는


어둠이고, 저자의 어머니는 죽음이오. 여러분, 저자가 우리를 악의 구
렁텅이로 몰아넣기 전에 우리가 죽여야 합니다! 매춘부 왕대비와 벌
레 왕, 사악한 난쟁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스파이더, 모두 죽
여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살길입니다!”

시티워치가 달려나와 덮쳤지만, 그는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불이 닥칠 것이오! 스타니스 왕은 곧 돌아
올 거요!”

조프리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기사를 가리켰다. 분노를 참지 못해


얼굴이 벌겠다.

“저자를 죽여라! 지금 당장! 명령이다!”

누군가 기사의 팔을 벴다. 기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


다. 옷이 붉게 물들어 갔다.

“성모여!”

기사가 울부짖었다.

세르세이가 왕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티윈은 바위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가 손가락만 하나 들어올렸다. 그러자 메린이 검을 빼들고 앞으
로 나갔다. 결말은 빠르고 잔인했다.

시티워치에게 붙잡혀 메린의 검을 가슴으로 받으며 기사가 마지막으


로 외쳤다.

“조프리는 왕이 아냐!”

조프리가 세르세이의 품에 쓰러졌다. 마에스터 셋이 급히 앞으로 다


가가 왕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소리로 홀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남자는 바닥에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며 질질 끌려나갔다.

‘우리를 모두 해산시키려나?’

산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바리스의 귀엣말을 듣고 있는 바엘리시를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포로는 스물 남짓 남아 있었다. 그들이 충성
을 맹세할지, 아니면 저주를 퍼부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티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진행하시오. 반역자들이 소란을 피운 것에 양해를 구하겠소.


더 이상의 소란은 없을 것이오.”

티윈의 준엄한 목소리가 홀의 웅성거림을 잠재웠다.

모든 식이 끝날 때가 다가오자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빛은 차츰 희미


해졌다. 산사는 피로와 무력감에 축 처져서 갤러리를 나왔다.

‘조프리가 오늘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그


철제 왕좌에 앉으면 잔인해진다는 말이 있던데…….’

산사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작게 기쁨의 탄성


을 질렀다.

‘신들이 도우신 거야. 조프리는 오늘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어.’

산사는 너무 기뻐 저녁을 가져온 하녀에게 키스해 주고픈 심정이었


다. 저녁은 따뜻한 빵과 금방 만든 버터, 걸쭉한 소고기 수프, 닭고기
요리, 당근, 꿀에 절인 복숭아였다. 모두 꿀맛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 산사는 망토를 두르고 가즈우드로 향했다.


도개교를 지키고 있는 오스문드에게 최대한 가련한 목소리로 인사했
지만, 곁눈질하는 걸로 봐서는 자신의 연기가 그럴듯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돈토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슬퍼 보여요? 아까 당신도 들었잖아요. 조프리가 나와의


약혼을 파기했어요. 다 끝났어요. 그는…….”
돈토스가 쾌활하게 얘기하는 산사의 손을 꼭 잡았다.

“조니킬, 나의 가엾은 조니킬.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이게 끝


이 아니에요. 겨우 시작일 뿐이에요.”

산사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무슨 뜻이죠?”

“왕대비는 절대 아가씨를 보내지 않을 겁니다. 아가씨는 너무나 귀중


한 볼모거든요. 그리고 조프리 왕은……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어요.
만약 조프리 왕이 아가씨를 안고 싶어하면 반드시 뜻을 이룰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가씨는 서자를 낳게 되는 거고요.”

“안 돼! 그는 날 보낼 거예요. 그럴 리가…….”

산사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돈토스가 산사의 귓가에 축축한 입술


을 대고 속삭였다.

“용기를 내세요. 내가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곧 일


을 진행할 거예요. 그리고 이곳을 탈출할 날짜도 정했어요.”

산사는 눈이 동그래져서 돈토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언제죠? 언제 탈출하는 거예요?”

“조프리 왕이 결혼하는 날, 피로연이 끝난 후에 떠날 거예요. 준비는


모두 끝났어요. 그날 레드킵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할 거예요. 사람들
의 반은 술에 취할 거고, 나머지 반은 조프리 왕의 첫날밤을 준비하느
라 정신이 없을 거예요. 잠시 아가씨의 존재는 잊혀지겠죠. 그리고 나
중에 모두 어리둥절하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결혼식이 열리려면 한 달도 더 기다려야 해요. 마가에리는


하이가든에 있잖아요. 이제야 사람들이 데리러 갔다고요.”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잖아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참으세
요. 그리고 아가씨께 드릴 게 있어요.”

돈토스가 주머니 속을 더듬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


에 가는 은줄이 매달려 나왔다.

그것은 헤어네트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섬세


했다. 두 가닥이 교차되는 곳마다 작은 보석이 박혀 있는데, 보석들은
너무 까매서 달빛도 모두 삼켜 버린 것 같았다.

“이 보석들은 뭐죠?”

“아사이에서 가져온 검은 자수정이에요. 햇빛을 받으면 짙은 자주 빛


으로 변하는 진귀한 종류죠.”

“멋지군요.”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날 집으로 데려다 줄 배야. 내 머리에 장식


할 헤어네트가 아니라구.’

“그렇죠? 하지만 그건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거예


요.”

돈토스가 몸을 기울여 산사에게 입을 맞추었다.

테온

성벽 밖에서 막 정찰병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마에스터 루윈이 들어


왔다.

“왕자님, 항복하셔야 합니다.”

테온은 아침식사로 가져다 놓은 케이크와 꿀과 소시지가 담긴 접시


를 바라보았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의 신경은
날카로워져, 음식만 봐도 속이 메스꺼웠다.
“삼촌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파이크에 계신 왕자님 아버님께서도 아무 응답이


없으시구요.”

“전령조들을 더 날려보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령조가 다시 되돌아올 때까지는…….”

“날려보내라니까!”

테온은 팔을 휘둘러 음식 접시들을 날려 버렸다.

“아니면 내가 죽기를 바라나? 그런가, 루윈? 사실대로 말해라.”

키 작은 중년 남자에게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하지요.”

“좋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서인가?”

“왕국, 그리고 윈터펠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지난날 왕자님께 글과


산술과 역사, 전술을 가르쳤습니다. 왕자님이 원하셨다면 더 많은 것
을 가르쳐 드렸겠지요. 왕자님께 자애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또한 왕
자님을 미워하지도,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왕자님께서 윈터펠을 통
치하는 이상 저는 조언자로 맹세한 몸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항복
하라고 조언하는 것입니다.”

테온은 몸을 굽혀 진흙투성이의 외투를 바닥에서 들어올려 골풀을


털고 어깨에 둘렀다.

‘난로에 불도 지피고, 옷도 깨끗이 세탁하라고 시켜야지. 그런데 웩스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난 더러운 옷 입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
진 않아.’
루윈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는 가망이 없습니다. 만일 왕자님의 아버님이 왕자님을 도우려


하셨다면 지금쯤엔 도착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관심이
있는 땅은 넥뿐입니다. 지금 모아트카일린의 폐허 한가운데서 벌어
지고 있잖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내가 윈터펠을 지키고 있는 한 세르 로


드릭과 스타크 가문에 충성하는 영주들은 후방에 있는 내 삼촌을 치
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할 수가 없단 말이군.”

‘난 당신 생각처럼 전술에 완전히 무지한 건 아니라구.’

“우리에겐 일년 동안 포위 당해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식이


있어.”

“포위 공격은 없을 겁니다. 아마 한 이틀 사다리를 만들고 밧줄 끝에


갈고리를 묶은 뒤에 즉시 성벽을 넘어올 겁니다. 잠깐은 버틸 수 있을
지 몰라도, 성은 한 시간 안에 저들의 손에 넘어갈 게 분명합니다. 차
라리 성문을 열고 요청하는 편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란 말인가? 난 저들이 베풀 자비라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어.”

“그 길뿐입니다.”

“난 아이언 섬 출신이다. 난 나대로의 방식이 있어. 저들이 내게 무슨


선택권을 줄 것 같은가? 아니, 대답하지 마. 난 자네 조언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가서 내가 명령한 대로 전령조를 날려보내게. 그리고 로
렌에게 내가 부른다고 전하고, 웩스도 불러. 갑옷을 깨끗이 닦아야겠
다. 그리고 수비대를 마당으로 집합시켜라.”

테온은 잠시 루윈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루윈은 뻣뻣


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병사들은 불쌍할 정도로 수가 적었다. 그리고 그에 비해 마당은 너무


넓었다.

테온은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곧 북부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세르 로드릭과 그의 부름을 받은


영주들이지. 난 저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성을 빼앗았으
니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윈터펠의 왕자로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
음을 택하겠다. 하지만 너희들까지 나와 함께 죽어야 한다고 명령하
지는 않겠다. 만일 떠나고 싶다면 세르 로드릭이 들이닥치기 전에 자
유롭게 떠나라.”

그런 뒤 롱소드를 빼어들고 땅 위에 선을 그었다.

“남아서 싸울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돌부처처럼 조용히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아니,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우르젠이 발을 질질 끌었고,
다이크 할로우가 가래침을 뱉었다. 바람이 엔드하르의 긴 머리카락
을 물결치게 했다. 테온은 물에 빠져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놀랄 일도 낙심할 일도 아냐.’

아버지도 그를 버렸고, 삼촌들도, 누이도, 심지어는 버러지 같은 리크


까지도 그를 버렸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부하들의 충성심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할말도, 할 일도 없었다. 단지 거대한 회색의 성벽과 푸
른 하늘 아래에 서서 손에 검을 들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다리기만…….

그때 웩스가 처음으로 선을 건너왔다. 재빨리 테온의 편에 구부정하


게 서는 소년 뒤로 블랙 로렌이 쑥스러워하며 앞으로 나왔다.
“이제 더 없나?”

롤프와 크롬, 티모르의 형제들이 나왔다. 울프와 일, 하렉과 할로우


가문의 두 아들, 그리고 보틀리 가문의 두 아들이 가세했다. 웨일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모두 열 일곱 명이었다.

움직이지 않은 사람은 우르젠과 스티그, 아샤가 딥우드모트에서 데


려온 열 명의 병사들이었다.

“자, 내 누이에게로 돌아가라. 아샤가 너희들을 따뜻하게 맞아 줄 것


이다.”

스티그는 최소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머지는 말없이


움직였다. 테온은 자신에게 동의한 열일곱 명의 병사에게로 돌아섰
다.

“성벽으로 돌아가라. 만일 신이 우리를 살려 주신다면 너희들의 도움


을 잊지 않을 것이다.”

모두 돌아가고 블랙 로렌만 남았다.

“왕자님, 성 사람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우리에게 맞설 겁니다.”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들을 내보내십시오. 모두 다.”

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올가미가 준비되어 있나?”

“예. 하지만 굳이 그 방법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나?”
“제가 액스를 들고 도개교에 서 있겠습니다. 그러면 적들이 저를 치
러 건너올 겁니다. 한 번에 하나씩. 문제없습니다. 제가 숨을 쉬는 한
아무도 해자를 건너올 수 없을 겁니다.”

‘스스로 죽으려 하는군. 이 친구가 원하는 건 승리가 아니라 영웅이


야. 음유시인의 노래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영웅…….’

“블랙 로렌, 우리는 올가미를 사용할 것이다.”

“말씀대로 하시지요.”

블랙 로렌이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테온은 웩스의 도움을 받아, 기름을 잘 먹인 갑옷을 입고 금색 망토에


검은 겉옷을 걸쳤다. 갑옷 아래로는 빳빳한 가죽옷을 입었다. 그리고
바로 그의 멸망을 바라는 동쪽과 남쪽의 성벽들을 보기 위해 모퉁이
의 망루로 올라갔다.

북쪽 사람들은 넓게 퍼져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 수를 가


늠하기가 어려웠다. 최소한 1천여 명, 아니 그 두 배가 넘을지도 몰랐
다.

‘그런데 우리는 열일곱이라니…….’

적들은 갈고리와 투석기, 공격용 탑을 지을 목재를 잔뜩 실어 오고 있


었다.

테온은 루윈의 망원경으로 깃발들을 살펴보았다. 어느 곳을 보든 세


르윈 가문의 전투용 액스가 펄럭였고, 톨하트 가문의 나무와 맨더리
가문의 인어도 보였다. 플린트 가문과 카스타크 가문의 문장도 간혹
보였고, 혼우드 가문의 수사슴도 보였다.

‘그런데 글로버 가문이 없군. 드레드포트의 볼톤 가문도 없고, 움버


가문도 보이지 않네.’
이윽고 클레이 세르윈이 기수들 무리를 이끌고 성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로드릭이 ‘턴클락 테온’과 협상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턴클락이라고?’

그 말은 담즙보다도 씁쓸했다. 문득 아버지의 군대를 이끌고 파이크


로 갔을 때가 생각났다.

“난 쉽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혼자라도 말이다.”

테온이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블랙 로렌이 불평했다.

“오직 피만이 피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기사들은 무법자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협상할 때는 명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분명히 속
임수를 쓸 겁니다.”

테온은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윈터펠의 왕자이며 아이언 왕국의 계승자다.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한 대로 그 여자를 찾아가라.”

블랙 로렌이 눈빛을 이글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이 친구도 내게 등을 돌리는군.’

테온은 블랙 로렌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최근엔 모


든 사람들이 그에게 대항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죽으면, 친구도 없이 버려진 채로 죽겠군.’

성문으로 말을 모는데, 한 여자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모습이 보


였다. 요리사 게이지는 부엌문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시무룩한 표정
과 공허한 얼굴이었지만, 테온은 그 뒤로 애써 감춘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도개교가 내려가고 차가운 바람이 해자를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에


몸이 떨려 왔다.

‘추워서 그런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떨릴 거야.’

테온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람을 타고 창살 아래로 지나가자, 바깥쪽 성문이 회전하며 천천히


열렸다. 테온은 성밖으로 나갔다.

로드릭이 광장에서 말 위에 앉은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드릭


옆으로 기수 하나가 보였다. 광장 근처의 가옥 지붕 위에 있는 궁수들
과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고, 광장 왼편으로는 맨더리 가문
의 기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저들 모두 내가 죽기를 바란단 말이군.’

그들 중 몇몇은 테온과 함께 술을 마시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여자


들과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이었다.

테온은 말을 세웠다.

“세르 로드릭, 우리가 적으로 만나다니 참 슬픈 일이군요.”

“내 슬픔은 네 목을 매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뿐이다, 테온 턴


클락.”

늙은 기사가 진흙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난 파이크의 그레이조이다. 내 아버지가 나를 감쌌던 강보의 문장은


크라켄이지 다이어울프가 아니라구.”
“10년 동안 너는 스타크 가문의 대자였다.”

“인질이며 포로였을 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랬다면 에다드 경은 너를 쇠사슬로 묶어 지하 감옥에 처넣었을 거


다. 하지만 경께선 너를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길렀어. 네가 살해한
그 사랑스런 아이들과 함께 말이다. 네게 전투 기술을 가르친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이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구나. 네 손에 검을 쥐여 주
는 대신 네 뱃속에 검을 찔러 넣어야만 했는데 말이다.”

“난 협상하러 왔지, 네 욕설을 참으러 온 게 아니다. 할말만 해라, 세


르 로드릭.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두 가지다. 윈터펠과 너의 목숨. 너의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고 무기


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해라. 두 분 왕자님을 죽이지 않은 사람들은 자
유의 몸이 되겠지만, 넌 롭 왕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잡혀 있어야
한다. 그가 돌아왔을 때 신들이 너를 데려가기를 바랄 뿐이다.”

“롭은 결코 윈터펠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남부 군대들이


늘 그랬듯이 모아트카일린으로 갈 것이다. 세르 로드릭, 지금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네가 지금 장악한 성은 셋뿐이다. 그리고 내가 돌려달라고 하는 건


그 중 하나고 말이야, 턴클락.”

“세르 로드릭, 이곳은 나의 왕국이다. 해질녘까지 해산해라. 발론 그


레이조이를 왕으로, 그리고 윈터펠의 왕자인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곧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와 영토에 해가 있었는
지 확인할 것이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자들은 모두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클레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테온을 쳐다보았다.

“그레이조이, 미쳤나?”
그러자 로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다 허풍일 뿐이네. 내가 항상 걱정했던 일이지만, 테온은 언제나 자


만에 가득 차 있어.”

로드릭이 손가락을 들어 테온을 가리켰다.

“내가 롭 왕이 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나에겐


2천 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다. 그리고 소문이 사실이라면, 네 병력은
50명도 채 안 되지.”

‘사실은 열일곱 명이지.’

테온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난 병사보다 더 나은 것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블랙 로렌에게 신호를 했다.

윈터펠의 성벽을 등지고 있었지만, 테온은 로드릭의 표정으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있었다. 하얀 구레나룻 아래로 로드릭의 턱
이 사르르 떨렸다.

‘놀라지 않는구나. 하지만 공포를 느끼고는 있어.’

“이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어린아이를 이용하다니…….”

“아, 진정하라구. 나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지. 당신도 기억할 텐


데? 난 열 살 때 우리 아버지를 옭아매기 위한 당신들 계획 때문에 여
기까지 끌려왔어.”

“이건 달라!”

테온은 표정 없이 피식 웃었다.
“내게 씌웠던 건 삼으로 만든 밧줄은 아니었어도 다를 게 없어. 살이
찢기는 아픔은 마찬가지니까. 세르 로드릭, 그게 내 살을 찢었다구.”

이제껏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않은 일이었는데, 말이 입 밖으로 나


오자 진짜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절절해졌다.

“너에겐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딸 베스에게도 말이


야. 네가…….”

“이 독사 같은 놈!”

로드릭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턴클락, 네게 네 부하들을 구하고 조금이라도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너 같은 비열한 살인자에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던
모양이구나.”

로드릭의 손이 칼자루에 닿았다.

“이 자리에서 네 목을 잘라 반역자의 최후를 보여 주겠다.”

테온은 그 늙은 기사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병사들은 달


랐다. 만일 로드릭이 검을 빼든다면 그 자신은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거의 없었다.

“맘대로 해. 당신의 어린 딸 베스가 밧줄에 목이 매달리는 모습을 보


고 싶다면 말이야.”

로드릭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부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


갔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군.”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내 조건을 받아들일 텐가?”


“난 스타크 가문과 캐틀린 부인에게 충성을 서약한 몸이다.”

“그렇다면 당신 자신의 가문은 어쩔 텐가? 베스가 마지막 혈육일 텐


데?”

늙은 기사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 딸 대신 나를 데려가라. 그 애를 풀어 주고 나를 인질로 삼아라.


저 아이보다는 윈터펠의 성주가 더 가치 있을 것이다.”

“나에겐 아니야.”

‘용감한 제의로군. 하지만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턴클락, 내가 장담하지만 맨더리 경이나 레오발드 톨하트라도 그렇


게는 안 할걸.”

‘당신의 주름진 가죽은 다른 보통사람들처럼 아무 가치가 없어.’

“아니, 난 네 딸을 데리고 있겠다. 내가 명령한 대로만 하면 저 애는


안전할 것이다. 네 딸의 목숨은 네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오, 맙소사! 테온,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너도 알다시피 난 충성을


서약한 몸이야. 공격을 해야 한다고!”

“해가 질 때까지 군대를 철수하지 않으면 베스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


다. 그리고 내일 해가 뜰 때는 다른 인질이 저 애 뒤를 따를 거고, 해
가 질 때는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될 거다. 매일 그렇게 해가 뜨고 지
는 순간마다 한 사람씩 저세상으로 갈 거다. 너의 군대가 물러가지 않
는 한 말이야. 그리고 참고로 말해 두지만 내겐 인질이 충분해.”

테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돌렸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말을


몰았지만 등뒤를 겨누고 있을 궁수들이 떠올라 서둘러 말을 재촉했
다. 성벽 위에 달려 있는 작은 머리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
르를 바르고 얼굴 가죽이 벗겨진 머리들은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 사
이로 올가미가 씌워진 베스가 울고 있었다.

테온은 스마일러를 재촉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도개교를 지날 때는


스마일러의 말발굽소리가 퍽 요란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테온은
말고삐를 웩스에게 건네고 블랙 로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머무를 것 같다. 어쨌든 해질녘까지는 기다려야 하니까, 그


때까지 소녀를 어딘가 안전한 곳에 두어라.”

가죽과 양모로 두툼하게 무장을 한 탓에 그는 온몸이 땀으로 미끈거


렸다.

“웩스, 포도주 한잔 다오. 아니 통째로 가져와.”

에다드의 침실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다. 테온은 난롯가에 앉아 성의


지하실에서 가져온 포도주를 잔에 가득 채웠다. 포도주는 그의 기분
만큼이나 씁쓰름했다.

‘그들은 그래도 공격해 올 거야. 세르 로드릭은 자신의 딸을 사랑하지


만, 다른 기사들처럼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지.’

테온은 울적한 맘으로 불꽃을 응시했다. 만약 그의 목에 올가미가 씌


워져 있고 발론 경이 군대를 지휘했더라면 전쟁 나팔소리는 벌써 울
렸을 것이다.

‘세르 로드릭이 아이언 섬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신들께 감사해야


겠는걸.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벌써 패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
었겠지.’

그의 열일곱 명의 병사가 적들을 세 배, 네 배, 다섯 배로 상대한다 해


도 결국엔 모두 패할 게 틀림없었다.

‘불공평해. 모든 게 불공평해.’
테온은 잔 너머로 불꽃을 응시했다.

“위스퍼링우드에 있을 때는 롭 스타크와 함께 있었지.”

그날 밤에도 몹시 두려웠지만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친


구들과 함께 있었지만 오늘밤엔 혼자였다. 비참했다. 모든 것이 비참
했다.

포도주로도 아무런 위로를 얻지 못하자 테온은 웩스를 불러 활을 가


져오게 했다. 그리고 오래된 안쪽 망루로 올라가, 어깨가 쑤시고 손가
락에 피가 맺힐 때까지 활을 당겼다가 놓고 당겼다가 놓았다.

‘이 활로 브랜의 생명을 구한 적이 있는데, 나 자신도 구할 수 있을


까…….’

그는 혼자 회상에 잠겼다.

여자들이 우물에 가다가 테온을 보자 도망가 버렸다.

테온 뒤쪽으로 오래 전 불에 타 부서진 탑이 있었다. 왕관처럼 꼭대기


가 뾰족뾰족한 탑은 해가 지면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테온의 머리
위까지 뻗어 있었다.

테온은 활시위에 화살을 얹었다.

‘내가 베스의 목을 매다는 순간 북부인들은 즉시 공격을 시작하겠지.’

그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베스를 죽이지 않으면 날 순 허풍쟁이로 여길 거야. 방법이


없어. 전혀…….’

그때였다.

“왕자님 같은 궁수가 백 명만 있어도 성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에스터 루윈이었다.

“가라. 난 이미 너의 충고를 충분히 들었다.”

“그러면 목숨은요? 왕자님의 목숨도 충분한가요?”

테온은 이를 악물며 활을 루윈에게 겨누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이 화살이 너의 심장을 꿰뚫을 거다.”

“아뇨, 왕자님은 그렇게 못 하실 겁니다.”

테온은 잿빛 거위 깃털이 뺨에 닿도록 화살을 당겼다.

“내기를 할 텐가?”

“제가 왕자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나에겐 희망이 없어.’

그러나 화살은 반쯤 내려갔다.

“난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전 도망치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블랙으로 가십시오.”

“나이트워치에 가라고?”

테온은 활을 천천히 내렸다.

“세르 로드릭은 스타크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몸입니다. 그리고 스타


크 가문은 언제나 나이트워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죠. 세르 로드
릭도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성문을 열고 무기를 버린 다음
그에게 가세요. 그러면 왕자님은 블랙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나이트워치의 형제가 되라니!’


그건 왕관도 없고, 아들도 없고, 아내도 없이 살아야 하는 걸 뜻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명을 보장받고 영예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에다드의 형제가 그 길을 선택했고, 존 스노
우도 역시 그랬다.

‘하긴 내 말도 검은색이잖아. 워치에 가면 높은 지위에도 오를 수 있


을 거야. 퍼스트 레인저나 잘 되면 로드커맨더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어. 그리고 아샤에겐 그 빌어먹을 섬들이나 지키게 놔두는 거야. 자
기만큼이나 음울한 섬이나 지키라지 뭐. 만약 이스트워치에서 근무
하게 되면 내 함대도 지휘할 수 있잖아. 월 너머로 훌륭한 사냥터도
갖게 되고……. 한데 여자들은 어떨까? 여자들이 잠자리에서조차 왕
자를 원하는 건 아니겠지?’

테온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졌다.

“테온 왕자님!”

갑작스런 외침이 그의 꿈을 흔들어 깨웠다. 크롬이 광장을 가로질러


뛰어오고 있었다.

“북부인들이…….”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 왔다.

“공격인가?”

루윈이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아직도 시간이 있습니다. 평화의 깃발을 올리세요.”

크롬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저들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수백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새로 왔


는데, 처음에는 서로 연합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아샤 누나인가?”

‘설마 누나가 나를 구하러 왔을까?’

그러나 크롬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북부인들이었어요. 깃발에 피로 물든 사람이 그려진…….”

‘드레드포트의 볼톤 가문 문장이군.’

리크가 볼톤 가문의 사생아 밑에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리크처럼 천한 인간이 볼톤 가문을 움직였다는 걸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직접 가서 보겠다.”

루윈이 그를 따라왔다.

그들이 전투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죽은 사람과 죽어 가는 말들이 성


밖 광장 여기저기에 너부러져 있었다. 기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깃발과 검들만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외침과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왔다. 로드릭의 병력도 많았지만, 드레드포트 병사
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테온은 로드릭의 병사들이 몰려왔다가는 몰려가고 다시 몰려왔다가


는 몰려가면서 매번 피투성이로 난도질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가옥들 사이로 다시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다. 하지만 말들의
고통에 찬 비명 너머로 액스와 검 부딪치는 소리만 높아질 뿐이었다.
주위는 온통 불길이 타올랐다.

블랙 로렌이 테온 옆으로 다가와 잠시 조용히 서 있었다. 노을이 지면


서 들판과 집들이 붉게 빛났다. 비명과 신음소리가 성벽 너머로 떠다
녔고, 전투 나팔소리가 불타는 마을 너머에서 들려왔다. 테온은 한 부
상병이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힘겹게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
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우물에 닿기도 전에 쓰러졌다.
가죽 조끼에 원추형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어느 쪽 병사인지 알 만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까마귀들이 푸르스름한 먼지 사이로 날아들고, 어두워진 하늘에 저


녁별이 떠올랐다.

“도트락인들은 별들이 용감하게 죽은 자들의 영혼이라고 믿지.”

테온은 오래 전에 루윈이 해주었던 얘기가 불쑥 떠올라 말했다.

“도트락인들이요?”

“바다를 가로지르는 자들 말이다.”

“아, 그 야만인들 말이군요. 야만인들이란 터무니없는 것들을 믿게


마련이죠.”

블랙 로렌이 턱수염이 있는 얼굴을 찌푸렸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어둠과 연기 때문에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욱 알아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날카로운 강철 소리가 점점 잦아
들고 외침과 비명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오더니, 마침내 말을 탄 일행
들이 연기 속에서 나타났다.

선두에 선 기사는 어두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투구는 음산하게 붉은


색이 돌고, 망토는 창백해 보이는 분홍색이었다. 그가 성문 앞에서 말
을 세우자 누군가가 성문을 열라고 외쳤다.

“당신들은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

블랙 로렌이 아래를 향해 외쳤다.

“적이라면 이런 훌륭한 선물을 가져오겠소?”


붉은 투구가 손을 흔들자 시체 세 구가 성문 앞에 털썩 떨어졌다. 시
체 위로 횃불을 비추자 그들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 늙은 성주로군. 레오발드 톨하트와 클레이 세르윈도 있고.”

로드릭은 왼팔이 팔꿈치까지 떨어져 나가 있고, 젊은 기사의 눈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루윈이 놀라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돌려 무
릎을 꿇었다.

“돼지 같은 맨더리는 워낙 비열한 놈이라 화이트하버를 떠났소. 그렇


지 않았으면 그놈도 해치웠을 텐데, 아쉽소.”

붉은 투구를 쓴 자가 소리쳤다.

테온은 그 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건 완전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토록 갈구하던 구원이었다.

‘살았구나, 살았어.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공허한 거지?’

테온은 루윈을 흘낏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만 해도 난 굴복하고 블랙으로 가야 할 처지였는데…….’

“우리의 친구들에게 문을 열어 주어라.”

오늘밤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았다.

드레드포트 병사들은 해자를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왔다.

테온은 블랙 로렌과 루윈을 이끌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창백하고 붉


은 깃발이 펄럭이며 따라왔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액스와 검, 방패들
은 거의 반쯤 깨져 있었다.

“군사는 얼마나 잃었는가?”


테온은 말에서 내리며 붉은 투구에게 물었다.

“20명에서 30명쯤이죠.”

횃불이 광택이 나는 철면을 비췄다. 갑옷을 적신 피가 빛에 반사되었


다. 붉은 투구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르 로드릭은 당신들보다 병력이 다섯 배나 많았는데…….”

“그랬지요. 하지만 그는 우리를 아군으로 생각하고 경계를 하지 않았


습니다. 있을 수 있는 실수죠. 아무튼 그 늙은 바보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의 팔을 자른 뒤 내 얼굴을 보여 줬죠.”

남자는 양손으로 투구를 잡고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리크.”

테온은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놈이 이렇게 훌륭한 갑옷을 얻었을까?’

리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불행한 놈은 죽었죠.”

그가 테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모든 게 그 여자 실수에서 비롯됐다고 봐야겠죠. 그 여자가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만 않았더라면, 그 녀석의 말이 절름발이가 되지도 않
았을 거고, 그러면 우리는 도망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때 난 여
자와 막 일을 치른 뒤 녀석과 교대하고 있었죠. 산등성이에서 말 탄
병사들을 보는 순간 난 사태를 파악했어요. 그래서 여자를 덮치고 있
는 녀석을 끌어내려 내 옷을 쥐여 주고, 부츠와 더블릿, 은으로 만든
검집, 담비가죽 망토까지 다 준 뒤, 내 말을 타고 드레드포트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죠. 녀석은 아주 민첩했어요. 난 마지막으
로 아버지가 준 반지를 녀석에게 끼워 줬죠. 그러면 내가 보낸 사람인
줄 알 거라고 말하면서요. 그때 그들이 녀석의 등에 화살을 날렸죠.
난 그 사이 얼른 여자의 오물을 몸에 바르고, 그의 넝마를 걸쳤죠.”

그가 손등으로 입을 문질렀다.

“왕자님, 제 얘기는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2백 명의 병사를 데려


오면 여자를 제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죠? 자, 그 세 배가 넘는 병사를
데려왔습니다. 이들은 어린 소년도 아니고 농사꾼도 아닙니다. 훈련
받은 정예군들이죠.”

약속을 했으니 주춤거릴 필요가 없었다.

‘일단 약속대로 행하고 나중에 이 녀석을 처리해야지.’

“하렉, 오두막집으로 가서 팔라를 데려와라.”

테온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툼한 입가에 미소가 떠있던 리크


가 입을 열었다.

“람세이 스노우, 내 아내가 자기 손가락을 먹어치우기 전엔 나를 그


렇게 불렀지요. 하지만 난 나를 볼톤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미소가 굳어졌다.

“내 충성에 대한 대가가 고작 매춘부란 말이오? 그게 당신의 방식이


오?”

테온은 그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드레드포트 병사들이


바라보는 오만한 눈초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속한 선물이 그 여자 아니었나?”

“그 여자한테선 개똥 냄새가 난다고요. 난 그 지긋지긋한 냄새를 충


분히 맡았어요. 대신 당신의 여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름이 뭐였더라? 카이라였던가?”

테온은 화가 치밀었다.

“카이라? 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 내가 너를 당장…….”

그 순간 볼톤의 서자가 테온에게 일격을 가했다.

테온은 강렬한 고통을 느꼈다. 갑자기 눈앞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 같


더니 땅에 쓰러져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입 안에 피가 가득했다.

‘성문을 닫아!’

그렇게 소리치려 했지만 때가 이미 늦었다. 드레드포트 병사들이 벌


써 롤프와 크롬을 베고 밀물처럼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테온은 공포에 휩싸였다. 검을 빼어드는 블랙 로렌이 보였지만, 그 주


위를 병사 넷이 에워쌌다. 그레이트 홀을 향해 도망가는 엔드하르가
화살에 배를 맞고 쓰러지고, 루윈이 자신을 덮치려는 기사를 피해 달
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한 남자가 횃불을 낚아채 휙휙 돌리더니 마구
간의 초가 지붕을 향해 던졌다.

“프레이들은 남기고 나머지는 태워라. 남김없이 태워 버려!”

불꽃이 치솟자 리크가 소리쳤다.

테온이 마지막으로 본 건 스마일러, 자신의 말이었다. 스마일러는 갈


기에 불이 붙은 채 불타는 마구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길질하며 뒷
발을 곧추세우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티리온

돌 천장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매캐한 연기와 피비린내, 구린내,


불에 타는 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모든 사람들이 신음하며 흐느껴 울
었고, 때때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티리온은 몸을 움직이다가 자신이 침대에 실례를 했음을 깨달았다.


연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내가 울고 있나?’

아버지가 이를 알면 큰일이었다. 캐스틀리 록의 라니스터 가문 사람


은 절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사자, 난 사자로 살고, 사자로 죽어야 해.’

하지만 고통이 너무 심했다. 신음소리를 내기도 힘들어 실례를 한 채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누군가 무겁고 단조로운 목소
리로 신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티리온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
이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후 방은 더욱 어두워졌
다.

티리온은 자신이 성밖의 어두운 세상을 거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썩은 고기를 먹던 까마귀떼들이 화가 난
듯 새까만 날개를 펴고 자신들의 잔칫상에서 회색 하늘로 날아올랐
다. 희끄무레한 구더기들이 시커멓게 썩은 고기에서 꾸물거리고 있
었다. 늑대들도 회색이었고, 사일런트시스터들 역시 회색이었다. 그
여자들은 죽은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마상시합장 여기저기
에 시체들이 즐비했다. 태양이 파손된 배의 시커먼 잔해들을 이리저
리 휩쓸고 다니는 회색 강물 위로 뜨거운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화
장터에서 검은 연기 기둥과 불그스레한 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
다.

‘내가 한 일이야. 저들은 내 명령에 따라 싸우다가 죽은 거야.’

처음에는 그곳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죽은 자들의 통곡이 들렸다. 고통을 끝내 달라는 울음소리와 신음소
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그들은 저마다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머
니를 기억하지 못하는 티리온은 샤에가 옆에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샤에는 없었다.

티리온은 무엇인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며 회색 그림자 사이를 홀로


걸었다.

사일런트시스터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알몸의 병사들만 남았다. 그들


의 몸은 흰색이나 회색으로 모두 피가 검게 굳어 있었다. 그곳의 시체
들은 팔다리가 들린 채 앞서 간 죽은 동료들을 뒤따라 화장터로 옮겨
졌다. 그들의 무기와 갑옷은 키가 큰 검은 말 두 마리가 끄는 흰색 마
차 위로 던져졌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장작 위에 쌓인 시체들은 온갖 형태로 변형되어 거의 인간처럼 보이


지 않았다. 여인들이 벗겨낸 옷에는 검은색 하트 모양, 회색 라이언,
시들어 죽은 꽃들, 유령 같은 수퇘지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갑옷은
모두 움푹 파이고 쪼개지고 부서지고 갈라져 있었다.

‘왜 내가 저들을 모두 죽인 걸까?’

전에는 알고 있었던 듯했지만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티리온은 사일런트시스터 중 한 명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려고 했지


만, 말을 하려고 보니 입이 없었다. 붕대가 입을 완전히 꽁꽁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입 없이 살아야 하나? 어떻게 그렇게 살지?’

티리온은 소스라치게 놀라 힘껏 달렸다. 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죽은 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성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할 것만 같았
다. 그는 죽지 않았다. 입이 없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안 돼, 난 사자여야 해. 그리고 살아야 해.’


하지만 티리온이 성벽에 도착했을 때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티리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어두웠다. 처음에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침대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둥그런 침대 기둥과 머리 위로 벨벳 모기장이 늘어져
있었다. 침대는 깃털로 만든 부드러운 것이었고, 베개는 거위 털로 만
든 것이었다.

‘나만의 침대, 나는 내 침실에 누워 있어.’

모피와 담요 덕에 따뜻했다. 아니, 따뜻하다 못해 더워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열기…….’

티리온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머리를 들려고 하자 고통이 온몸을 관


통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고,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가끔 스치듯이 전투 장면이 떠오


를 뿐이었다. 강가를 따라 싸우던 전투, 손을 내밀던 기사, 배로 엮인
다리…….

‘세르 만돈.’

티리온은 마침내 냉정하고 텅 빈 듯한 눈빛과 손, 흰색 에나멜 갑옷에


빛나던 초록색 불길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면서 공포
가 엄습했다.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
명을 지르고 싶었다. 밀려오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냐, 그것은 꿈이야. 도와 줘. 누가 날 좀 도와 줘. 자이메 형, 샤에,


어머니, 누구든……. 티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도 그의 절규를 듣지 못했고,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티


리온은 어둠 속에서 혼자 오줌 냄새를 맡으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
었다. 꿈속에서 세르세이가 아버지와 함께 얼굴을 찡그리고 침대 맡
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분명 꿈일 터였다. 아버지는 지금
쯤 서부 어딘가에서 롭 스타크와 싸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른 사
람도 보였다. 바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리틀
핑거는 빈정거리며 무어라 말을 했다.

‘재수 없는 배신자 같으니. 비터브리지에 보냈지만 결코 돌아오지 않


은 배신자…….’

티리온은 약이 올랐다.

때때로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두꺼운 펠트 천으로 덮어 놓은 말벌의
소리처럼 윙윙거렸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이겼는지 묻고 싶었다.

‘이긴 게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내 목이 두꺼운 대못에 박혀 성벽에


걸렸을 테니까 말이야. 내가 살아 있다면 그건 우리가 승리한 거야.’

기뻤다. 승리, 아니 승리를 추론해냈다는 사실이 기뻤다. 속도가 느리


긴 하지만 점차 정신이 돌아오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 아닌가. 좋
은 징조였다.

티리온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커튼이 올려져 있고, 포드릭이


침대 옆에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포드릭은 티리온이 눈을 뜬 것을
알자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아냐, 가지 마. 날 도와 줘. 도와 달라고.’
하지만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는 희미한 신음소리뿐이었다.

‘난 입이 없어.’

티리온은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따


랐다. 입술이 있어야 할 부분이 딱딱한 헝겊으로 싸여 있었다. 얼굴
전체를 더듬어 보니, 숨을 쉬거나 음식을 들이기 위한 구멍을 제외하
고는 아래쪽 반이 딱딱한 석고로 덮여 있었다.

잠시 후 포드릭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낯선 사람도 동행했다. 체


인 목걸이와 옷을 보니 마에스터였다.

“티리온 경,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부상을 심하게 당하셨습니다. 목


이 마르십니까?”

티리온이 서툴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에스터가 입에 난 구멍에 깔때


기를 집어넣고는 목구멍 속으로 천천히 액체를 떨어뜨렸다.

티리온은 맛도 모른 채 그것을 삼켰다. 그게 양귀비 즙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마에스터가 그의 입에서 깔때기를 빼낼 때쯤,
티리온은 이미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번 꿈속에서는 승리를 자축하는 대규모의 축하연에 참석하고 있었


다. 티리온은 귀빈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잔을 높이 들고
티리온에게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달의 산에서 함께 동행했던 음
유시인 마릴리온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나무로 만든 하프를 연주하
며 난쟁이 티리온의 용맹을 노래했다. 놀랍게도 티윈조차 노래에 맞
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자이메가 자리
에서 일어나더니 티리온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하고는 황금 검으
로 양 어깨를 가볍게 쳐서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수여식이 끝나자 샤
에가 티리온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웃으며 그를 ‘라니스터의 거인’이
라고 불렀다.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방이 어둡고 추웠고, 침대 커튼은 다
시 내려져 있었다. 그는 또다시 혼자였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무
엇인가 잘못되어 가고는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담요를 걷고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고통이 너무 커서 곧 포기하고 말았다. 얼굴의 통증이
가장 덜한 편이었다. 몸 오른쪽이 매우 불편했고, 팔을 들 때마다 칼
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슴을 관통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부상을 당한 모양이야. 세르 만돈…….’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티리온은 두려움을 떨치며 기억을 떠


올리려고 노력했다.

‘그자가 날 죽이려 했어. 그건 분명해. 그건 꿈이 아냐. 포드릭이 아니


었다면 내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났을 거야. 포드릭, 포드릭은 어디 있
는 거지?’

티리온은 이를 바드득 갈며 커튼을 움켜잡고 홱 잡아당겼다. 커튼이


찢어져 반은 양탄자 위를, 반은 티리온의 몸을 덮었다. 그런 작은 행
동조차도 그는 버거웠다. 방이 빙빙 돌면서, 벽과 어두운 그림자, 하
나밖에 없는 긴 창문도 함께 돌았다. 방안 한쪽 구석에 서랍장과 너저
분하게 쌓아 놓은 옷, 찌그러진 갑옷이 보였다.

‘여기는 내 방이 아냐. 그리고 핸드의 관저 역시 아냐.’

티리온은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내지른 분노와 공포에 찬


외침은 신음소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죽으라고 나를 이곳에 옮겨 놓은 거야.’


티리온은 몸을 움직이려던 노력을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방은
축축하고 추웠지만, 그의 몸은 불타는 것 같았다.

티리온은 꿈에서 좋은 집을 보았다. 석양이 지는 바닷가의 작고 아늑


한 오두막집. 벽은 경사지고 여기저기 갈라진데다 바닥은 진흙을 발
라 만든 것이었지만, 그곳은 불이 꺼져 있을 때조차도 항상 따뜻한 집
이었다. 여자는 불이 꺼져 있을 때마다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난 자꾸 난로에 장작을 넣어야 한단 생각을 잊어 버려. 그것은 항상


하인들이 하는 일이었거든.”

“우리에겐 하인이 없어요. 알잖아요.”

“그래도 당신에겐 내가 있잖아. 내가 당신의 하인이야.”

“게으른 하인이죠. 캐스틀리 록에서는 게으른 하인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하죠?”

“그곳 사람들은 게으른 하인들에게 키스를 해주지.”

그 말에 여자는 항상 깔깔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게으른 하인들을 때려 주죠. 장담해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냐, 키스를 해줘. 먼저 손가락에. 열 손가락 모두 말이야. 그런 뒤


에는 허리, 팔꿈치 안쪽, 우습게 생긴 귀에 차례로 하지. 그곳 하인들
은 모두 귀가 우습게 생겼어. 에이, 그만 웃어. 사람들은 그들의 볼에
키스를 한 뒤 코에 해. 이렇게 말이야. 그리고 달콤한 이마, 머리카락,
입술, 그리고…… 음…… 입에, 그리고…….”

그는 여자에게 어떻게 키스하는지 하나하나 시범을 보여 주다가 그


렇게 몇 시간이고 키스를 했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파도 소리
를 듣고 서로를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여자의 육체는 그에게는 놀라
움 그 자체였고, 여자 역시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여름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네. 햇살이 여인의 머리카락


에서 부서지고…….’

때때로 여자는 그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그


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티리온,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입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내게 하


는 말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대하는 부드러움도 사랑해요. 난 당신
의 얼굴도 사랑해요.”

“내 얼굴도?”

“네. 나를 만지는 당신의 손도 사랑해요. 당신의 페니스, 그것도 사랑


해요. 그것이 내 안에서 느껴지는 감촉도 너무 사랑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 나의 여인.”

“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아요. 티리온 라니스터, 내 이


름과 너무 잘 어울려요. 티리온과 티샤, 티샤와 티리온. 티리온, 나의
주인님 티리온…….”

‘거짓말! 모든 게 꾸민 것이었어. 황금을 위해 꾸민 일……. 그 여자는


창녀였어. 자이메 형이 내게 준 선물. 내가 사랑한 여자는 거짓말쟁이
였어.’

티샤의 얼굴이 눈물로 아롱지더니 희미해졌다. 티샤의 얼굴은 사라


졌지만 멀리서 티리온을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나의 주인님. 내 말 들리세요? 주인님? 티리온? 나의 주인님,


나의 주인님…….”
양귀비 즙을 마시고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티리온은 자신에게 얼굴
을 들이밀고 있는 분홍색 얼굴을 알아보았다. 다시 축축한 방이었다.
티샤의 얼굴은 사라지고, 동그랗고 갈색 수염 자국이 있는 얼굴이 보
였다.

“목이 마르십니까? 우유를 가져왔어요. 아주 신선한 우유죠. 아, 몸


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티리온 경께는 휴식이 필
요합니다.”

마에스터는 한 손에는 구리 깔때기를, 다른 한 손에는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티리온은 마에스터가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슬며시 아래로 떨어뜨


려 체인 목걸이를 움켜잡고 잡아당겼다. 마에스터가 병을 떨어뜨리
자 담요 위로 양귀비 즙이 엎질러졌다. 티리온은 마에스터의 포동포
동한 목살로 체인 목걸이가 파고들어 가도록 힘껏 비틀었다.

“그만…… 그만 하세요.”

마에스터의 목에서 쉰 목소리가 났다. 너무 거칠어 진짜 마에스터의


입에서 나온 소린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티리온은 사내가 진
실을 말할 때까지 계속 비틀었다.

“제발 놓아주십시오, 제발. 경, 경께선 양귀비 즙을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으으, 목걸이를 놔주세요…….”

분홍빛 얼굴이 자주색이 되어서야 티리온은 목걸이에서 손을 놨다.

마에스터가 얼른 뒤로 물러나 숨을 들이마셨다. 붉어진 목에 흰색 줄


이 나 있고, 눈도 흰자위가 하얗게 올라와 있었다. 티리온은 손을 얼
굴에 대고 마스크를 찢는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했다.

“붕대를…… 붕대를 풀어 달라는 뜻입니까?”


마침내 마에스터가 티리온의 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전……. 경, 그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아직 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세르세이 왕대비님께서…….”

세르세이의 이름을 듣자 티리온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자도 누나의 하수인 중 하난가?’

티리온은 마에스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주먹을 쥐었다. 그런 뒤


때리고, 목 조르고, 뭔가를 약속하는 시늉을 했다.

고맙게도 그는 티리온의 몸짓을 이해했다.

“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현명한 일이 못 됩니


다. 상처가…….”

“하라구. 지금 당장!”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왔다.

마에스터가 고개를 숙이더니 방을 떠났다. 잠시 후 그가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긴 칼과 물 한 대야, 부드러운 천 한 무더기, 병을 들고 다
시 나타났다. 그때쯤에는 티리온도 몸을 뒤로 움직여 반쯤 앉은 자세
를 취할 수 있었다.

“칼을 마스크 안으로 밀어 넣을 동안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마에스터가 그렇게 경고를 하고 칼을 들이댔다.

‘손이 목으로 미끄러지는 순간, 세르세이는 내게서 영원히 자유로워


지겠지.’

톱질 소리가 목 부위에서 들려왔다. 다행히도 분홍빛 얼굴의 사내는


그리 배짱 두둑한 하수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후 티리온은 볼에서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통증은
계속되었지만, 이를 꾹 다물고 참았다. 마에스터가 연고가 말라 딱딱
해진 붕대를 던져 버렸다.

“가만히 계십시오. 이제 상처를 닦아내야만 합니다.”

마에스터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따뜻한 물은 통증을 조금이나마 가


셔 주었다.

‘상처…….’

티리온은 눈 바로 아래를 지나간 은색 섬광을 기억해냈다.

“이제 조금 따끔할 겁니다.”

마에스터가 약초 냄새가 나는 포도주를 헝겊에 묻히면서 경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따끔거리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얼굴 위로 불길
이 일어나는 것 같았고, 코를 불타는 부지깽이로 쥐어트는 것 같았다.
침대보를 움켜잡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목
구멍 뒤로 넘겼다. 마에스터가 늙은 암탉처럼 혀를 끌끌 찼다.

“새 살이 돋아날 때까지 붕대를 감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다행히도


상처는 깨끗이 나은 것 같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전사자와 부
상자들 사이에서 경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상처에서 썩은 냄새가 났
었죠. 갈비뼈도 여러 대 부러져 있었고요. 곤봉에 맞았거나 어디선가
추락하면서 입은 상처인 것 같은데, 뭐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게
다가 어깻죽지에 화살을 맞았더군요. 그곳에 괴저 증상이 보였습니
다. 상처를 치료하면서 팔을 잘라야 하나 걱정했는데, 포도주와 구더
기로 치료하니 이제 깨끗하게 나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름…….”

티리온은 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마에스터는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렸다.
“이름…….”

“이름이요? 경께선 티리온 라니스터입니다. 왕대비님의 남동생이죠.


전투를 기억하십니까? 머리에 상처를 입으면 때로는…….”

“네 이름…….”

티리온은 목구멍이 심하게 쓰라렸다. 혀를 어떻게 움직여 말을 해야


하는지 잊은 듯했다.

“저는 마에스터 발라바르입니다.”

“발라바르, 내게 가져와. 거울을…….”

“티리온 경, 제가 감히 충고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그것은 현명


한……, 사실 상처가…….”

“가져와!”

순간 강한 충격으로 입술이 갈라진 것처럼 쓰라렸다.

“그리고 마실 것, 포도주를 가져와. 양귀비말고.”

마에스터가 얼굴을 붉히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가, 엷은 호박색 포도


주가 담긴 술병과 가장자리가 금색으로 장식된 은거울을 가지고 돌
아왔다.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잔에 포도주를 따라 티리온의
부풀어오른 입술에 부어 주었다.

티리온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더…….”

발라바르가 다시 포도주를 조금씩 부어 주었다. 두 번째 잔의 포도주


가 다 없어질 무렵, 티리온은 얼굴을 볼 만큼 충분히 기운을 차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티리온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상처는 왼쪽 눈 밑에서부터 오른쪽 턱까지 길고 구부러
지게 나 있었다. 코의 4분의 3이 사라졌고, 입술도 상당 부분 없어졌
다. 찢어진 살갗을 누가 고양이 창자로 만든 실로 꿰매어 놓았는데,
서투른 한땀한땀이 여전히 붉었다.

“예쁘군.”

티리온은 거울을 옆으로 던지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기억났다. 배로 엮어 만든 다리, 만돈 무레, 손, 얼굴로 날아든
검…….

‘그때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면 머리가 잘렸을 거야.’

자이메는 항상, 멍한 눈빛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만돈 무레가 킹스가드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경
고했었다.

‘아무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메린과 보로스가 왕대비 편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


고, 나중에 오스문드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머지 기사
들이 모두 명예를 저버릴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었다.

‘누나가 날 다시 보지 않으려고 세르 만돈을 매수했음이 틀림없어. 그


렇지 않다면 그가 왜 날 죽이려고 했겠어? 난 그자에게 어떠한 해도
입힌 적이 없는데 말이야.’

티리온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뭉툭하고 두꺼운 손가락으로 살갗을 홱


잡아당겼다.

‘사랑하는 누나에게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이군.’


발라바르가 막 날아가려는 거위처럼 침대 옆에 서 있었다.

“티리온 님, 그것은 아마 흉터가 될…….”

“아마?”

티리온의 비웃음은 고통에 겨워 일그러졌다. 흉터가 남을 거란 건 확


실했다. 게다가 코는 다시 생기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긴 내 얼굴이 언제 보기 좋았던 적이 있었나!’

미소를 짓자 얼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여기가 어디지?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고?”

말을 할 때마다 통증이 밀려 왔다. 하지만 그 동안 티리온은 너무 오


랫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아, 마에고르의 홀드패스트 안입니다. 왕대비님의 홀 맞은 편에 있


는 방 중 하나죠. 왕대비님께서는 티리온 경을 가까이 두고 싶어하셨
습니다. 손수 돌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랬겠지.’

“날 데려다 주게. 내 침대가 있는 내 방으로.”

‘내가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이 있는 곳,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마에스터


를 부를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해. 내가 믿을 만한 마에스터를 찾을 수
있다면…….’

“티리온 경, 그건 불가능합니다. 핸드의 관저는 이미 전임자께서 들


어가 계십니다.”

“전임자? 이봐, 핸드는 나야.”


말을 하느라 기진맥진해 있던 티리온은 지금 들은 소식에 몹시 혼란
스러웠다.

발라바르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이제 티리온 경의 아버님이신 티윈 경께서 임무를 수행하


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여기에?”

발라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있던 날 티윈 경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죠. 백성들은 우리를


구한 사람이 렌리 왕이라고 쑥덕대지만, 진실은 그게 아닙니다. 알 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죠. 우리를 구한 분은 티윈 경과 티렐 경, 꽃의
기사, 바엘리시 경입니다. 그분들은 불탄 잔해를 건너 스타니스를 뒤
에서 공격했죠. 정말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티윈 경께서 킹스랜
드를 다시 복구하는 왕대비님을 도우며 핸드의 관저에 계십니다. 하
늘이 도우셨죠.”

“정말 하늘이 도왔군.”

티리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리틀핑거와 렌리의 유령?’

“가서…….”

누군가를 불러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부를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발라바르에게 샤에를 데려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구를 불러야 하지? 내가 부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믿을 만한 사


람이 누가 있지? 바리스? 브론? 세르 제이슬린?’

“내 종자……, 포드릭 파이네를…….”


‘나를 도와 준 사람은 그 아이였어. 포드릭, 그 아이가 내 생명을 구했
어.’

“포드릭? 그 이상한 소년 말입니까?”

“가서 그 아일 데려오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에스터 발라바르는 머리를 조아리고 급히 나갔다. 티리온은 온 몸


에서 힘이 빠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사경을 헤맸을지 궁금
했다.

‘세르세이 누나는 내가 영원히 잠들기를 원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아.’

포드릭 파이네가 새앙쥐처럼 부끄러워하며 침실로 들어왔다.

“티리온 경…….”

‘전투에서 그렇게 용감하던 아이가 병실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겁많


은 소년이 되는 거지?’

티리온은 의아했다.

“저는 티리온 경 곁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에스터가 저를


쫓아냈어요.”

“그럼 이제 네가 그를 쫓아내 버려. 포드릭, 내 말 잘 들어. 난 지금


말하는 게 엄청나게 힘이 들어. 드림와인이 필요해. 잠이 들려면 그게
필요해. 양귀비 즙이 아니라. 그러니 프렌켄에게 가. 발라바르가 아니
라 프렌켄에게 내 간병을 부탁해. 그리고 그가 무엇을 만드는지 항상
감시해서 그걸 이리로 가져와.”

포드릭은 티리온의 얼굴을 흘낏 보더니 재빨리 눈을 돌렸다.


‘이 아이가 내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

“브론, 브론은 어디 있지?”

“그는 기사가 되었습니다.”

찡그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를 찾아서 이리 데려와.”

“알겠습니다.”

티리온은 포드릭의 손목을 잡았다.

“세르 만돈은?”

포드릭이 움찔했다.

“저는 결코 죽일 생각은…….”

“죽었어? 정말 죽었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사했습니다.”

“잘 됐군. 아무 말도 하지 마. 그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이제 어


떤 말도 하지 마.”

포드릭이 자리를 떠나자, 티리온도 더 이상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가


만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시 티샤의 꿈을 꿀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지금 내 얼굴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군.’

씁쓸했다. 모든 게 씁쓸했다.

코린 하프핸드가 불을 피울 나뭇가지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 존은 이


제 마지막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죽기 전에 잠시라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니, 다행이야.’

존은 말라죽은 나무둥치에서 가지를 잘라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스트가 옆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브랜의 다이어울프는 브랜이 탑에서 떨어졌을 때 큰 소리로 울부짖


었는데, 저 녀석도 내가 죽으면 그럴까?’

존은 얌전히 앉아 있는 고스트를 흘낏 쳐다보았다.

해가 지면서 산너머로 달이 떠올랐다. 잘라낸 나뭇가지를 한 자리에


모아 부싯돌과 단검을 열심히 비비자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코린이 불꽃을 보자 다가왔다.

“이 불꽃은 꼭 첫날밤에 부끄러워하는 새색시 같군. 아름다워. 남자


들은 불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꾸 잊는다니까.”

존은 코린에게서 새색시가 어떻네, 첫날밤이 어떻네 하는 얘기를 듣


는 게 너무 생소했다. 존이 아는 한 코린은 평생을 워치에서 보낸 사
람이었다.

‘코린은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있을까? 결혼은?’

하지만 존은 감히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부채질만


해댔다. 곧 불이 활활 타올라 장갑을 벗고 손을 쬐었다.

‘키스를 하면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존은 갑자기 생긴 궁금증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손에 온기가 스며들


면서 추위가 눈 녹듯 사라졌다.
코린도 불가로 다가와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불빛 너머로 세월에 찌
든 그의 얼굴이 보였다. 스컬링패스에 왔던 다섯 명의 레인저 중에서
남은 사람은 코린과 존 둘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끔찍한 프로스트팽
스로 가는 길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와이들링들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스콰이


어 달브리지가 오랫동안 길목을 막아 주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곧 호
른 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이내 스콰이어가 죽었음을 알았다. 잠시 후
그들은 어스름 속에서 커다란 청회색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는 독
수리를 발견했다. 스톤스네이크가 바로 활을 뽑아들었지만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새는 유유히 날아가 버렸다. 에벤은 워그와 스킨체인
저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그후로도 독수리를 두 번이나 더 목격했고, 산에 울려 퍼지는


호른 소리도 계속해서 들었다. 소리는 매번 커졌고, 점점 더 가까워졌
다. 밤이 되자 코린은 에벤에게 스콰이어 달브리지의 말을 몰고 동쪽
으로 가서 모르몬트에게 긴급한 상황을 알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로드커맨더께 다시 월로 돌아가라고 전하게. 남은 사람들은


자네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주의를 끌겠네.”

그러자 에벤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말고 존을 보내십시오. 존도 말을 잘 몹니다.”

“존은 따로 할 일이 있네.”

“존은 아직 어립니다.”

“그렇지 않아. 존도 나이트워치의 형제야.”

달이 떠오르자 에벤은 떠났다. 스톤스네이크가 짧은 길이나마 그를


배웅하고 지나온 흔적을 지우며 되돌아왔다. 남은 세 사람은 남서쪽
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은 말에게 물과 음식을 먹일 때를 제외하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
았다. 잠도 말 위에 앉아서 잤다.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지 못했
다. 그 동안 바위산도 지나고, 오래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음
산한 소나무 숲도 지나고, 얼어붙은 산마루를 넘어 이름 없는 강도 수
없이 많이 건넜다. 가끔 코린이나 스톤스네이크가 걸어온 흔적을 지
우려고 애썼지만,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독수
리는 언제나 봉우리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은 광활한 하늘에서 찍힌 하나의 점일 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두려
운 존재였다.

어느 날, 그들이 눈 덮인 봉우리 사이에 있는 낮은 산등성이를 올라가


고 있을 때 섀도캐츠들이 으르렁거리며 나타났다. 굶주림에 지쳐 비
쩍 마른 놈들은 스톤스네이크의 지친 암말을 노리는 눈치였다. 암말
이 눈치를 챘는지, 스톤스네이크가 미처 제지할 새도 없이, 앞발을 쳐
들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급경사에서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
러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고스트는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코린이 조랑말의 피에 귀


리를 섞어 힘이 날 거라면서 존에게 내밀었다. 존은 구역질을 꾹 참고
그것을 들이켰다. 그들은 말을 타고 가면서 먹기 위해 암말의 질긴 고
기를 각자 열 조각쯤 잘라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섀도캐츠가 먹도록
남겨 두었다.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스톤스네


이크가 시간이 지체되니 자신은 그냥 남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여기 남아서 와이들링 몇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


까.”

하지만 코린은 반대했다.

“만약 누군가 혼자서 맨몸으로 프로스트팽스에 몰래 잠입해야 한다


면 그건 자네일 걸세. 하지만…… 좋아, ‘퍼스트맨의 주먹’으로 가게.
말이 있으면 산을 돌아가야 하지만 자네는 바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
까. 가서 로드커맨더께 존이 보았던 것을 말하고 방법을 논의해 보게.
올드파워들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고 알리게. 그리고 나무들이 다시
눈을 떴다는 사실도 얘기하게.”

스톤스네이크는 곧 눈 덮인 산등성이 아래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


이 흰 들판을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작고 검은 벌레 같았다.

그후로 밤마다 기온은 계속 떨어졌고, 존은 점점 외로워졌다. 그나마


고스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고스트는 항상 그 옆에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가까운 곳 어딘가에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코린은 전혀 즐거운 말동무가 아니었다. 말의 걸음걸이에 따라 길게


땋아 내린 회색머리만 천천히 흔들 뿐, 그는 몇 시간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꼼짝없이 걷기만 했다. 가끔 말발굽이 돌에 긁히는 소리나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존은 꿈을 꾸지 않았다. 늑대
도, 눈이 달린 나무도, 형제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는 꿈도 꿀 수가 없나?’

문득 불꽃 너머에서 코린의 말소리가 들렸다.

“존, 검은 날카롭나?”

“제 검은 발리리아산 강철입니다. 로드커맨더께서 주신 거죠.”

“그래. 그럼 자네가 했던 맹세를 기억하나?”

“그럼요.”

나이트워치의 맹세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단 입 밖


으로 내뱉어 맹세하면 절대로 번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인생이 영원히 바뀌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걸 나한테 말해 봐라.”

“알겠습니다.”

존은 마음을 가다듬고 나이트워치의 맹세를 읊조렸다.

“밤이 시작되면서 저의 임무도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이 찾아 올 때까


지 그 임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땅도 소유하지 않
을 것이며, 자식도 낳지 않을 것입니다. 권력이나 세력도 얻지 않겠습
니다. 임무를 위해 살고 임무를 위해 죽겠습니다. 어둠의 전사가 되겠
습니다. 성벽 위의 파수꾼이 되겠습니다. 어둠에 맞서 타오르는 불꽃
이 될 것이며 여명을 밝히는 빛이 되겠습니다. 잠든 자를 깨우는 나팔
이 될 것이며, 왕국을 수호하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오늘밤부터 앞으
로 맞이할 모든 밤을 지키는 나이트워치의 대원이 될 것을 생명과 명
예를 걸고 서약합니다.”

사방은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타다 남은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바람소리뿐이었다. 존은 마음속에 그 맹세를 되새기며 손을
쫙 폈다가 다시 오므렸다.

‘용감하고 장렬한 최후를 맡게 해주소서.’

존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랑말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하


지만 코린이 다시 말에 올라타는 것을 보니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지
는 않았다.

모닥불은 그때까지도 불씨가 남아 있었지만 온기는 거의 없었다.

“불이 곧 꺼지겠구나. 하지만 존, 월이 무너지면 세븐킹덤의 모든 불


이 꺼져 버리는 거다.”

존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은 그들을 구해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러지 못할 수도 있
어.”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존은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쉽진 않을 거다, 존.”

“네? 무슨 뜻이죠?”

“만약에 와이들링에게 붙잡히면 넌 반드시 항복해야 한다.”

“네? 항복이요?”

믿을 수가 없었다. 와이들링들은 나이트워치 대원을 절대 포로로 삼


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모조리 죽였다. 예외가 있다면…….

“그들은 만스 레이더처럼 맹세를 깨뜨린 사람만 살려 두잖아요?”

“너도 그렇게 해라.”

존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만 해. 이건 명령이다.”

“명령이라구요? 하지만…….”

혼란스러웠다. 지금 배신을 명령하는 거란 말인가.

“세븐킹덤을 안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명예로운 죽음보다 구차한


삶이 더 나을 수 있다. 너는 분명 나이트워치의 형제겠지?”

“네,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존. 그런 게 아니라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존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 말 잘 들어라. 만에 하나 우리가 붙잡히면 넌 항복해라.


네가 풀어 줬던 와이들링 여자가 널 도와 줄 거야. 어쩌면 그들이 너
에게 검은 망토를 갈기갈기 찢으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대로
따르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그들을 따르겠다고 맹세해라. 그리
고 형제들과 로드커맨더를 비난해라. 무얼 시키더라도 모두 해야 한
다. 피해서는 안 돼. 저들이 널 믿을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언제나
네가 누구인지 명심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말을 타
고, 함께 싸우더라도,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넌 너를 잊어
서는 안 된다. 그리고 면밀히 관찰해라.”

“뭘 말입니까?”

“그건 나도 몰라. 네 늑대는 그들이 밀크워터의 계곡에서 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도대체 뭘 찾는 걸까? 이미
찾은 걸지도 모르지. 넌 형제들에게 돌아가기 전에 그런 것들을 반드
시 알아내야 해. 그게 바로 네가 해야 할 임무다, 존 스노우.”

존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시면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씀해 주실 거죠? 적어도 로드커맨더께는 사실을 얘기해 주실 거
죠? 저는 절대로 진실로 맹세를 어긴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코린이 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곧 어둠 속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꼭 전해 주겠다.”

그가 갑자기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나무를 더 넣어야겠다. 좀더 밝고 따뜻했으면 좋겠구나.”

존은 나뭇가지들을 더 모아 왔다. 말라죽은 지 꽤 오래된 나무들을 불


속에 집어넣자 다시 살아난 듯 꿈틀거렸다. 나뭇가지들은 노란 옷, 빨
간 옷, 오렌지색 옷을 입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높이 뛰어오르기도
하는 열정적인 댄서 같았다.

“이제 충분히 쉬었다. 자, 출발하자.”

코린은 다시 무뚝뚝해져 있었다. 산 속은 캄캄했고, 밤 공기는 차가웠


다.

“어디로 가는 거죠?”

“되돌아간다. 가자.”

코린은 지친 조랑말 위에 한 번 더 올라탔다.

존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장갑을 끼고 모자를 썼다. 그러나 말도 불가


를 떠나고 싶지 않은 듯 낮게 히힝거렸다.

해가 떨어진 지 오래라 하늘에는 반달뿐이었다. 은은한 달빛만이 그


들 앞에 놓인 알 수 없는 위험한 길을 비춰 주었다. 존은 코린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얘기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게 기회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이유더라도 맹세를 어기는 사람 역은 맡고 싶지


않아.’

그들은 말과 한 몸이 되어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


다. 마침내 산골짜기를 흐르고 있는 작은 개울에 도착했다. 존은 그곳
을 기억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말에게 물을 먹였던 곳이었다.

코린이 개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새 물이 얼었군. 개울가로 말을 몰아라. 만약 얼음을 깨뜨렸다간
와이들링들이 우릴 쉽게 찾아낼 거다. 절벽 쪽으로 바짝 붙어서 가라.
저 위로 한 시간쯤 가면 모퉁이가 나오는데 거기라면 숨어 있기 좋을
거다.”

존은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아쉽게 쳐다보고 나서 코린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들은 달빛을 따라 갈수록 좁아지는 골짜기를 계속 올라갔다. 개울


은 얼음이 얼어 있었지만, 밑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
렸다.

절벽이 무너져 내렸는지 커다란 바위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조랑말은 아무런 동요 없이 길을 잘 헤쳐 나갔다. 양쪽 절벽이 점점
더 좁아지더니, 마침내 커다란 폭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괴물이 한숨이라도 내쉰 것처럼 눈앞은 수증기로 가득했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어쩌면 존과 코린은 말도 버리고 절벽을 기어올라가야 할지 몰랐다.

‘말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존은 내심 마음을 졸였다.

“따라와라.”

코린은 그렇게 명령하고 얼음이 덮여 미끄러운 돌을 훌쩍 뛰어넘어


물의 장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사라진 코린은 다시 나타나지 않
았다. 존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고삐를 단단히 잡고 코린의 뒤를
따라 떨어지는 물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물줄기가 마치 돌덩이 같았
다. 존은 당장에라도 얼어붙을 것 같은 찬 기운 때문에 숨이 막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폭포를 통과했다. 몸이 흠뻑 젖어 턱까지 덜덜 떨렸


지만 어쨌든 폭포를 무사히 통과했다. 폭포 안쪽으로는 말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자 길이 확 트이면서 부드러운 모
래톱이 깔려 있었다.

존은 수염에 얼음이 얼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고스트도 날렵하게 폭포를 통과해 들어왔다. 그러고는 온몸을 흔들


어 물기를 털어낸 뒤, 코를 킁킁거리면서 발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존은 말에서 내렸다. 코린은 이미 내려와 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알고 계셨군요?”

“내가 네 나이쯤이었나, 형이 섀도캐츠를 따라서 이곳으로 들어왔었


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코린이 말에서 안장을 내리고 고삐를 풀더니 말갈기를 쓰다듬어 주


었다.

“여기에는 산의 중앙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들


이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돌진하는 거다. 내가 먼저 망을 보겠다.”

코린은 모래바닥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


의 모습은 하나의 검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곧 이어 코린이 검을 꺼내
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존은 젖은 외투를 벗었다. 날이 너무 추워 젖은 옷이라도 벗는 게 너


무 아쉬웠다. 고스트가 존 옆으로 오더니 몸을 쭉 펴고 앉아 장갑을
핥다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존은 그 온기가 눈물겹도록 고마
웠다. 문득 놔두고 온 모닥불이 아직도 타고 있을지 궁금했다.

‘월이 무너지면 세븐킹덤의 모든 불이 꺼져 버린다고 하셨지?’

폭포를 뚫고 들어온 달빛은 모래 위에 물결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하


지만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사방은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존은 그날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성은 불탔고, 무덤에서 죽은 자들
이 깨어났다.

코린이 교대를 위해 그를 깨울 때는 여전히 주위가 어두웠다. 존은 코


린이 자는 동안 동굴 벽에 기대고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새벽이 오기
를 기다렸다.

날이 밝았고, 그들은 반쯤 언 말고기를 꺼내 씹었다. 그리고 조랑말에


한 번 더 안장을 얹고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존이 망을 보는 동안 코
린이 마른 이끼를 바른 나무에 오일을 적셔 횃불을 대여섯 개 만들고,
그 중 하나에 불을 밝혔다. 어둠을 밝히며 걸어가는 그의 뒤를 존이
따랐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바위투성이 길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기를 거듭했다. 한번 올라가면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더욱 심
해졌다. 갈수록 길이 좁아져 나중에는 말이 지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
다.

“여길 나갈 때쯤에 말이 옆에 없겠구나.”

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독수리라도 좁은 바위틈에 있는 우리는 못 찾을 거다. 말을


버리고 ‘퍼스트맨의 주먹’으로 가서 그 동안 본 걸 모두 로드커맨더께
말씀드리자.”

하지만 몇 시간에 걸쳐 힘들게 바위틈을 빠져나가 보니, 독수리가 죽


은 나뭇가지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스트가 바위를 넘어
달려들었지만, 새는 날개를 펴며 유유히 날아가 버렸다.

코린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사라져 가는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버티기에 최적의 장소다. 동굴 입구에 들어가 있으면 위쪽에


서도 우리를 보지 못할 것이고, 산을 뚫고 들어오지 않는 한 뒤에서
공격해 올 수도 없을 거다. 존, 검은 날카롭나?”

“네.”

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에게 먹이를 줘야겠다. 우리를 위해 용감하게 여기까지 와


주었구나, 불쌍한 녀석들.”

존은 마지막 남은 귀리를 먹이면서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 동안


고스트는 바위 사이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존은 장갑을 단단히 끼고
화상 입은 손가락을 꽉 쥐어 보았다.

‘나는 우리의 영토를 수호하는 방패다.’

그때 호른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곧 사냥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있으면 그들을 만난다. 네 늑대와 꼭 붙어 있어라.”

존은 얼른 고스트를 찾았다.

“고스트, 이리 와.”

다이어울프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는 마지못해 그에게 달려왔다.

멀리서 와이들링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보다 앞서 뛰어오던 사냥개


들이 고스트를 보자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고스트도 지지 않고 이빨
을 드러내면서 털을 곤두세웠다.

“고스트, 진정해. 가만히 있어.”

존이 작은 소리로 고스트를 달랬다.


문득 머리 위로 날개 퍼덕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독수리가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승리에 찬 울음을 울었다.

와이들링들은 화살이 날아올까 걱정되는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존


은 얼른 수를 헤아려 보았다.

‘사람 열넷에 개 여덟 마리군.’

와이들링들은 가죽에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둥그렇고 커다란 해골


모양의 방패를 들었는데, 그들 중 반 이상은 어설프게 만든 나무 투구
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양쪽 가로는 사람들이 작은 활에 화살을 재
고 있었고, 나머지는 창과 나무해머로 무장하고 있는 듯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날카롭게 다듬은 돌 액스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모
두 레인저나 마을을 습격해 빼앗은 것들이었다. 와이들링들은 철을
캐내고 제련하는 기술이 없었다.

코린이 왼손으로 롱소드를 빼들었다. 오른손 손가락이 잘린 후, 그가


피나는 노력 끝에 왼손으로 검을 다루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
설이 되어 있었다. 존도 코린과 어깨를 맞대고 서서 롱클로우를 꺼냈
다. 날이 추운데도 눈가에 땀이 맺혔다.

와이들링들은 동굴 입구에서 10미터쯤 아래에 모여 있었다. 그 중 대


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염소에 가까운 짐승을 타고 동굴 입구로 왔다.
울퉁불퉁한 비탈길인데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사람과 짐승
이 모두 단단한 뼈로 무장하고 있었다. 소, 양, 염소, 들소, 사슴, 심지
어는 맘모스의 커다란 뼈까지……. 물론 사람의 뼈도 있었다. 뼈들이
서로 부딪쳐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잘 있었소, 래틀셔츠?”

코린이 예의를 갖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난 ‘뼈의 제왕’이다.”
남자의 투구는 거인의 두개골로 만든 것이었고, 가죽옷 소매 부분에
는 곰 발톱이 수십 개나 꿰매져 있었다.

코린이 코방귀를 뀌었다.

“내 눈에 제왕은 보이지 않는걸. 움직일 때마다 닭뼈를 덜거덕거리는


개 한 마리밖에는 안 보여.”

남자가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그러자 그를 태운 짐승도 앞다리를 치


켜들며 성을 냈다. 그들 몸에 달린 뼈들이 시끄럽게 덜거덕거렸다.

“곧 네 뼈로도 소리를 내주지, 코린 하프핸드. 네 몸을 통째로 삶아


먹고 갈빗대로 갑옷을 만들겠다. 그리고 이는 뽑아서 목걸이를 만들
고, 두개골로는 죽 그릇을 만들어 주지.”

“내 뼈를 갖고 싶으면 와서 가져가 보시지.”

래틀셔츠는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존과 코린이 있는 동굴 입


구에서는 숫자가 많다는 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간이 워낙 작
아 한 번에 두 명밖에 다가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스피어와이
프’라 불리는 여전사 중 하나가 래틀셔츠 옆으로 다가왔다.

“너희는 둘이고 우리는 열넷이다. 그리고 늑대 한 마리에 개가 여덟


마리지. 싸우든 도망치든 너희는 결국 잡힌다.”

그러자 래틀셔츠가 용기를 얻었는지 소리쳤다.

“그걸 보여 줘라.”

그러자 여자가 피가 얼룩진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에벤의 머


리가 새알처럼 반질반질하게 벗겨져 있었다.

“이자는 용감하게 죽었다.”


여자가 에벤의 귀를 잡고 머리통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래틀셔츠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나 어쨌든 죽었다.”

그가 액스를 꺼내 머리 위로 쳐들었다. 양쪽 날이 모두 번쩍번쩍 빛나


는 훌륭한 강철 액스였다. 에벤은 결코 자신의 무기를 소홀히 다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와이들링들이 그들 옆으로 몰려들더니 조롱
과 욕설을 퍼부었다.

“꼬마야, 네 늑대니? 해가 지기 전에 따뜻한 외투를 해 입을 수 있겠


는걸.”

비쩍 마른 남자가 도리깨를 흔들며 존을 비웃었다. 그러자 어떤 스피


어와이프가 자신의 커다란 젖가슴을 내보이며 약올렸다.

“아가야, 엄마가 보고 싶니? 이리 와서 젖 좀 빨아먹으렴. 으이그, 귀


여운 우리 아기.”

개들 역시 한꺼번에 짖어 댔다.

“우리를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군.”

존은 입을 비죽거렸다. 코린이 그런 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존, 내가 내린 명령을 기억해라.”

그때 래틀셔츠가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자, 활을 쏴라!”

“잠깐!”
존은 화살이 날아오기 바로 직전 재빨리 앞으로 두 발짝 나서며 소리
쳤다.

“항복하겠어요!”

그러자 뒤에서 코린이 욕설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서자들은 모두 겁쟁이의 피가 흐른다고 하더니만, 결국 이


렇게 되는구나. 어서 네 새 주인한테 붙어 버려라! 이 겁쟁이.”

존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무시하고 래틀셔츠가 있는 곳으


로 내려갔다. 래틀셔츠가 투구 너머로 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가 입을 열었다.

“우리 자유민들에게도 겁쟁이는 필요 없다.”

그때였다. 활을 겨누고 있던 와이들링 중 하나가 투구를 벗고는 자신


의 빨간 머리칼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 사람은 겁쟁이가 아니에요. 윈터펠 영주의 서자이자,


나를 살려 준 사람이라구요. 살려 주세요.”

존은 이그리트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죽여야 해. 까마귀들은 믿지 못할 놈들이다. 저 녀석도 믿을


수 없어.”

래틀셔츠가 단호하게 말했다. 독수리도 기분 나쁜 듯 깍깍거리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그리트가 새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저 새가 당신을 싫어하는군요, 존 스노우. 하지만 그럴 만도 해요.


저 새는 바로 당신이 죽인 사람이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진심이었다. 하지만 문득 스컬링패스에 와서 자신이 죽였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을 말하는 건가?’

존은 이그리트를 쳐다보았다.

“그때 내게 만스가 날 찾아낼 거라 말했지. 기억해?”

“그렇게 될 거예요.”

이그리트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때 래틀셔츠가 거친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만스는 여기 없다. 래그윌, 저자를 죽여라.”

“안 돼요. 저 사람은 항복했잖아요. 믿을 수 없다면, 존 스노우가 자


신의 용맹성과 진심을 보여 줄 수 있도록 기회를 한 번 주는 게 어때
요?”

“뭐든지 하겠어요.”

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존은 얼른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래틀셔츠가


온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코린 하프핸드를 죽여라, 서자.”

그러자 코린이 소리쳤다.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래, 이리로 와서 어디 한번 죽여 봐라,


존 스노우.”
코린의 검이 먼저 날아들었다. 존은 코린의 검을 받아내긴 했지만, 엉
겁결에 맛본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롱클로우를 놓칠 뻔했다. 간신히
검을 잡아내고 뒤로 물러섰다.

‘무얼 시키더라도 모두 해야 한다. 피해서는 안 돼.’

존은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잡고 나름대로 재빠르게 일격을 가했다. 하


지만 코린은 우습다는 듯 존의 공격을 슬쩍 피했다.

두 사람은 검은 외투를 휘날리며 서로 공격했다 물러섰다 하면서 힘


겹게 싸웠다. 코린이 엄청난 힘으로 가차없이 공격을 해왔다. 존도 몸
놀림이 빠른 편이었지만, 코린의 빠르고 빈틈없는 공격에 여러 번 균
형을 잃을 뻔했다. 공격이 계속되면서 존은 팔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
다. 그때 존의 위험을 감지한 고스트가 달려들었다.

코린은 고스트한테 종아리를 물리면서도 용케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스트에게 벗어나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 존은 기회를
포착했다. 그대로 롱클로우가 날아갔다.

존은 잠시 자신이 정말로 코린을 베었는지 분간을 못 하고 어리벙벙


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린의 목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붉은 핏물은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처럼 목 주위로 흘렀고, 잠시 후 코
린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롱클로우도 피가 흘렀고, 고스트의 입에서도 피가 흘렀다. 존은 무릎


을 꿇고 앉아 다이어울프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려운 얼굴로 코
린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생기가 없었다.

“날카롭구나.”

코린이 잘린 손을 들어올리며 나지막이 말하고는 힘없이 손을 떨어


뜨렸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코린은 저들이 내게 무엇을 시킬지 다 알고 있
었던 거야.’

존은 망연자실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샘과 그렌, 고뇌하는


에드, 핍, 토드와 검은 형제들이 생각났다.

‘브랜과 릭콘과 롭을 잃었던 것처럼, 이제 나이트워치의 형제들도 모


두 잃는 건가? 나는 이제 누구인 거지? 나는 대체 뭐냐구!’

“저 친구를 데려와라.”

래틀셔츠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누군가 존을 질질 끌고 갔다. 하지만


존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름이 뭔가?”

“그 사람 이름은 존 스노우예요. 윈터펠의 에다드 스타크의 피를 이


어받았대요.”

이그리트가 존 대신 대답했다. 그 말에 래그윌이 낄낄거렸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코린 하프핸드가 귀족의 서자에게 살해당하


는 배신을 맛보리라고 말이야.”

“그 아일 죽여라.”

래틀셔츠의 목소리가 들떠 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독수리


가 그의 투구 위로 날아와 앉더니 깍깍 울어댔다.

“그 사람은 항복했어요.”

이그리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이 벌게져서 항의했다. 그러자 녹


슨 청동 투구를 쓴, 조그맣고 볼품없는 와이들링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그리고 자신의 형제도 죽였잖아.”


래틀셔츠가 덜거덕거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늑대가 저 아일 도왔다. 그러니 이건 부정하게 얻어진 승리야. 코린


을 죽일 사람은 바로 나였다구.”

“자네가 얼마나 그자를 죽이고 싶어했는지 모두 잘 알아. 그자는 워


그였으니까. 게다가 까마귀이고. 나도 그자가 정말 싫지만, 우리는 꼬
마에게 약속을 지켜야 해.”

래그윌이 비난조로 말하자, 스피어와이프 중 하나도 거들었다.

“코린은 워그일지 몰라도, 저 서자는 아니잖아. 저 아인 한 번도 우리


를 두렵게 한 적이 없었어.”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웅성거렸다. 두개골


로 만든 투구 속에서 존을 바라보는 래틀셔츠의 눈빛은 적의에 차 있
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자유민들이로군.’

존은 내심 놀랐다.

와이들링들은 나뭇가지를 모아 코린의 시체를 태웠다. 처음에는 푸


른색이던 나무들이 시체와 함께 타들어 가면서 검은 연기가 되어 하
늘로 올라갔다. 잠시 후 래틀셔츠가 새카맣게 탄 시체더미 속에서 뼈
를 추려냈고, 다른 사람들은 레인저의 옷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주사
위를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그리트가 코린의 외투를 갖게 되
었다.

“다시 스컬링패스로 돌아가는 건가?”

존은 이그리트에게 물었다. 또다시 산을 오를 자신도, 조랑말이 잘 버


텨내 주리란 확신도 없었다.
“아뇨, 우리 뒤쪽으로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그리트의 얼굴이 좀 슬퍼 보였다.

“지금쯤 만스는 밀크워터를 지나 월로 가고 있을 거예요.”

브랜

재가 회색 눈송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는 소나무들이 드문드


문 나 있는 숲 가장자리를 따라 마른 솔잎과 낙엽 위로 터벅터벅 걸어
갔다. 들판 너머로 스타크 가문의 석상들이 화염에 싸이는 것이 보였
다.

후텁지근한 바람에 피비린내와 고기 타는 냄새가 섞여 오자 입에 군


침이 돌았다. 하지만 고기 타는 냄새가 강하게 그를 잡아끌수록 피비
린내는 그만큼 그를 밀어냈다.

그는 떠다니는 연기 속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사람이군, 아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말, 불…….’

연기와 재 때문에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하늘에서 날개 달린 거대한


뱀이 불꽃을 내뿜는 것 같았다. 그가 이빨을 드러내자 뱀이 곧 사라졌
다. 절벽 뒤에서 높이 치솟은 불꽃이 별들을 살라 먹고 있었다.

불타는 소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한밤중에는 거대한 불길이 일어


나 쿵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튀어 올랐다. 개들이 낑낑거리며 짖어 댔
고, 말들은 공포에 질려 히힝거렸다. 그 이후 사람들의 통곡소리, 신
음소리,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들려왔다. 그 어떤 짐승
도 사람들만큼 시끄럽지 않았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숨을 죽인 채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


다. 하지만 그의 동생은 툴툴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바늘잎 같은 바람
이 하늘에서 재와 불티를 몰고 왔다. 불꽃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이후
그들은 길을 떠났다. 태양이 희뿌연 잿빛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며 날
이 밝았다.

숲을 벗어나자 너른 들판이 나왔다. 그들이 피와 죽음의 냄새를 맡으


며 천천히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나무와 짚, 진흙으로 지은 집들의
옆을 스쳐갔다. 정말로 많은 집들이 불에 타 무너졌지만, 간간이 예전
그대로 서 있는 건물도 보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들판에 너부러져 있는 시체들 위를 까맣게 뒤덮고 있던 까마귀떼는


그의 동생이 가까이 다가가 짖어 대자 일제히 날아올랐다. 들개들이
그와 동생 앞으로 슬금슬금 지나갔다.

거대한 절벽 아래에서 말 한 마리가 부러진 다리로 일어서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말은 일어났다가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곤 했
다. 그의 동생이 말 주위를 뱅뱅 돌다 말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
다. 말이 짧고 굵직한 비명을 꽥 지르고는 눈알을 굴리며 힘없이 죽어
갔다.

그는 성이 나 곧장 달려가 동생을 앞발로 후려갈겼다. 이내 둘은 잿더


미가 된 더러운 들판 한가운데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동생은 곧 항복
의 뜻으로 땅을 구르며 꼬리를 내렸다. 그는 동생의 뜻을 받아들여 먼
저 말고기를 한 입 물어뜯고 동생에게 내주었다.

그후 그는 어두운 장소로 이끌려 갔다. 속닥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장


님이었다. 차가운 손길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돌처럼 차가운 바람이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둠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자신을 이끄는 그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는 늑대이자 사냥꾼이고, 밀렵꾼이자
살인자였다. 또한 깊은 숲 속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별이 흩뿌려
진 하늘 아래로 맘껏 뛰어다니는 자유인이기도 했다. 어둡고 답답한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하늘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난 가지 않을 거야. 난 늑대야, 가지 않을 거라구.’

하지만 암흑이 더욱 두껍게 내려앉아 그의 눈을 덮고 코와 귀를 막았


다. 더 이상 앞을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듣거나 달릴 수도 없었
다. 어느새 절벽과 죽은 말과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암흑
이었다. 세상은 온통 어둠과 죽음만이 혼재해 있었다.

“브랜 왕자님.”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브랜 왕자님, 돌아오세요. 어서요. 왕자님, 브랜 왕자님.”

브랜은 세 번째 눈을 감고 다른 두 눈을 떴다. 오랫동안 감겨 있던 두


눈이 뜨였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누구나
장님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가까이에서 그의 몸을 붙잡
고 있다는 건 체온으로 느낄 수 있었다.

“브랜 왕자님, 돌아오세요. 어서요.”

또다시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렸다. 그와 함께 호도르가 조용히 혼잣


말로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도르, 호도르, 호도르.”

“브랜 왕자님?”

그제야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건 미라의 목소리였다.

“왕자님,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뒹굴던데, 뭘 본 거죠?”

“윈터펠.”

혀를 움직이기가 왠지 낯설고 둔했다.


‘세 번째 눈을 따라다니다 보면 말을 못 하게 될 수도 있겠군.’

“윈터펠이 불타고 있었어요. 피비린내, 쇳소리, 말들의 비명소


리……. 미라, 그들은 윈터펠 사람들을 모두 죽였어요.”

브랜은 미라의 손길이 얼굴에 와 닿는 걸 느꼈다. 미라가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온통 땀에 젖었어요. 뭘 좀 마시겠어요?”

“네, 좋아요.”

미라가 물컵을 입술에 바싹 갖다 대 주었지만, 너무 급히 마시는 통에


브랜의 입가로 물이 흘러내렸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브랜은 언제
나 기운이 쇠하고, 목이 마르고, 허기가 심하게 졌다. 문득 죽어 가던
말이 떠오르면서, 피 맛과 아침 공기에 뒤섞여 있던 고기 타는 냄새를
느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3일 정도요. 그 동안 걱정을 많이 했죠.”

언제 왔는지 조젠이 대답했다. 발소리를 일부러 죽여 슬며시 다가온


게 아니라면 내내 그곳에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난 서머와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너무 오래 있었어요. 굶어 죽을 뻔했다구요. 미라 누나가 왕


자님 입에 물을 떨어뜨려 주고 꿀을 발라 주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
죠.”

“난 먹었어요. 사슴에게 달려드는 고양이를 쫓아내고 사슴고기를 뜯


었죠.”
황갈색을 띠는 고양이는 늑대 크기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매
우 사나웠다. 브랜은 고양이에게서 나는 사향냄새와 고양이가 떡갈
나무 위에서 으르렁거리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건 늑대가 먹은 거지 왕자님께서 드신 게 아니에요. 왕자님, 항상


자신이 누군지 잊으면 안 돼요.”

조젠이 답답한 듯 흥분해서 말했다.

브랜은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


이었고, 불구였다.

‘차라리 꿈에서처럼 늑대가 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브랜은 춥고 습한 지하 납골당에서 마침내 세 번째 눈을 뜰 수 있었


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서머를 부를 수가 있었고, 유령을 만질 수
도 있었으며, 존과 얘기할 수도 있었다. 비록 한낱 꿈속의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조젠이 자신을 현실로 불러오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
하지 못했다.

브랜은 일어나 앉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난 내가 본 걸 오샤에게 말해야 해요. 오샤는 어딨죠? 어디 갔어


요?”

그러자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오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어요, 왕자님. 이미 어둠 속에서 충분히 어정거렸는데 어딜


가겠어요?”

이어서 신발이 돌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냄새는 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악취를 풍겼고, 지금은 서머의 코를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밤에 전 왕의 발에 오줌을 갈겼어요. 아니, 어쩌면 아침이었는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때 자고 있어서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
네요.”

브랜을 제외하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분히 잠을 잤다. 아니


넘칠 정도로 많이 잤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자거나 먹지 않았다.
때때로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그것도 살기 위해 가끔씩 속
삭이는 것뿐이었다. 오샤는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
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릭콘이나 호도르를 조용히 시키기는 역부
족이었다.

“오샤, 난 윈터펠이 불타는 것을 봤어.”

왼쪽 어딘가에서 릭콘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꿈일 뿐이에요.”

오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도 늑대 꿈이었어. 들어 봐. 정말 많은 냄새가 났어. 불과 피의


냄새가…….”

“누구의 피였는데요?”

“사람, 말, 개, 모두. 한번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왕자님, 제가 갖고 있는 건 앙상한 살가죽뿐이에요. 밖에 나갔다가


는 오징어 같은 왕자한테 붙잡혀 등가죽이 벗겨질 거예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미라가 브랜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한번 나가 볼게요.”
브랜은 가죽 만지는 소리와 부싯돌에 쇠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
서 뭔가 번쩍이더니 불이 붙었다. 오샤가 입으로 부드럽게 바람을 불
자, 발끝을 들고 선 소녀가 기지개를 켜듯이 길고 창백한 불꽃이 피어
올랐다. 오샤의 얼굴이 불꽃 위로 일렁거렸다. 오샤는 불씨를 횃대에
붙였다.

브랜은 송진에 불이 붙는 모습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세상이 온통


오렌지빛으로 보였다. 불꽃이 일자 릭콘도 하품을 하며 일어나 앉았
다.

그림자가 불빛에 일렁거릴 때마다 죽은 자들도 따라 일어나는 것 같


았다. 리안나와 브랜든, 그들의 아버지 리카드,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에드윌과 오노르와 베론, 윌리엄과 그의 형제 아르도스, 로드웰, 외눈
박이 조넬, 바스, 브랜든, 크리건……, 그들은 발 밑에 다이어울프를
두고 돌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스타크 가문의 사람들이 몸에서 온기를 잃으면 오는 곳이었


다.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영령이 떠도는 어두운 홀로 들어오기를 꺼렸
고, 그래서 그들은 납골당으로 숨어 들어왔다. 에다드의 텅 빈 무덤에
여섯 명의 도망자들의 식량을 은닉해 놓았다.

“어머, 이제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네!”

오샤가 저장고를 보고 놀라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군요. 음식을 훔쳐 오지 않으면 호도르를 먹어야 할 판이


니……. 좋아요, 제가 성으로 올라가 보죠.”

“호도르.”

호도르가 오샤를 보며 씩 웃었다.

“한데 왕자님, 밖은 지금 낮인가요, 밤인가요? 전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낮이야. 하지만 연기 때문에 온통 어두워.”

“확실해?”

절름발이라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지만, 브랜은 앉아서도 밖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두 곳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한 눈으로는 횃
불을 든 오샤와 미라, 조젠, 호도르, 릭콘, 그리고 어둠 속으로 늘어선
죽은 사람들의 긴 열, 두 줄로 서 있는 키 큰 기둥을 보았고, 또 한 눈
으로는 온통 연기로 휩싸인 어두운 성과 무너진 성문, 사슬이 엉키고
받침까지 없어진 도개교, 해자에 둥둥 떠 있는 까마귀들의 섬이 되어
버린 시체들을 보았다.

“확실해.”

브랜의 단호한 태도에 오샤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받았다.

“좋아요, 왕자님. 위험을 감수하겠어요. 왕자님은 뒤에서 바싹 따라


오세요. 미라 아가씨, 왕자님의 광주리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 난 내 말을 보고 싶어. 애플파이와 버터와


꿀도 먹고 싶고. 그리고 새기독도 보고 싶어. 지금 새기독이 있는 곳
으로 가는 거지?”

릭콘이 신이 나서 물었다. 브랜은 동생의 밝은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


다.

“그래. 하지만 네가 조용히 해야 돼.”

미라가 호도르의 등에 바구니의 가죽끈을 메어 준 뒤 브랜이 편안하


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브랜은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 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 무


엇이 그들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마지막으
로 아버지의 석상을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눈이 가면 안 된다고 말하
는 듯했다.

‘우리는 가야 해요. 이젠 가야 할 시간이 됐어요.’

브랜은 아버지 눈에 슬픔이 고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출발했다. 오샤는 양손에 긴 떡갈나무 창과 횃불을 들었다. 그


리고 등에 검을 멨다. 그것은 미켄이 에다드의 무덤 앞에 놓기 위해
만든 검이었다. 하지만 미켄이 살해되고 병기고가 아이언 사람들에
게 점령당한 마당에 검을 보고 못 본 척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비
록 그것이 절도 행위에 해당한다고 해도 말이다. 미라는 리카드의 검
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무겁다고 불평을 했다. 브랜은 자기 이름
과 똑같은 조상의 검을 선택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지만, 그
리고 자신이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었지만, 어
쨌든 그 검이 손에 딱 맞았기 때문에 들고 가기로 했다.

동굴 같은 납골당 안으로 그들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림자가 그


들을 따라오며 석상들을 삼켰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단순
히 영주가 아니라 북부의 옛 왕들이었다. 그들은 돌로 된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토렌과 에드윌, 테온, ‘불지르는 브랜든’과 ‘선장 브랜
든’이었다. 그리고 조라와 조노스, 또 다른 브랜든, 월튼, 에드리온,
에이론, 벤젠, 에드릭도 있었다. 그들은 준엄하고 강해 보이다 못해
어떤 석상은 흉측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브랜은 그들의 이야기
를 모두 알아서인지 납골당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의
가족이었으며, 또한 그곳은 언젠가 브랜이 눕게 될 자리일 수도 있었
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브랜은 그렇게 믿었다.

‘지금 위로 올라가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난 죽으면 어


디로 갈까?’

“잠시 모두 기다려요. 내가 먼저 올라갔다 올게요.”


지상으로 나가는 나선형 계단에 이르자, 오샤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
다. 그러고는 미라에게 횃불을 건넸다.

오샤의 발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호도르.”

호도르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브랜은 이 어두운 무덤에 숨어 있는 게 얼마나 싫었는지, 얼마나 햇빛


을 보고 싶었는지, 또 얼마나 바람과 비를 맞으며 말을 타고 싶었는지
되뇌었다. 하지만 막상 나가야 할 시간이 눈앞에 닥치자 두려워졌다.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 편안했다. 그건 어떠한
적들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석상들은 그
에게 용기를 주었다.

한참이 흘러도 오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브랜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집에 가고 싶어!”

릭콘이 불안하게 꿈틀거리다가 급기야는 소리를 질렀다. 호도르가


깜짝 놀라 멈칫하더니 말했다.

“호도르.”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커졌다. 잠시 후


오샤가 불길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뭔가가 문을 막고 있는데 그걸 움직일 수가 없어요.”

“호도르라면 움직일 수 있을 거야.”

브랜의 말에 오샤는 거구의 마구간지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함께 올라가 보죠.”

계단이 좁아 그들은 한 줄로 올라가야 했다. 오샤가 길을 안내했고 호


도르가 그 뒤를 따랐다. 브랜은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도록 몸을 웅크
렸다. 미라가 호도르의 뒤에서 횃불을 들고 따라왔고, 조젠은 맨 뒤에
서 릭콘의 손을 붙잡고 왔다. 그들은 조심조심 주위를 살피며 올라갔
다.

납골당의 문은 아이언우드를 깎아 만든 것으로, 엄청나게 무겁고 오


래된 것이었다. 땅에 비스듬히 놓인 문은 한 번에 딱 한 사람밖에 드
나들지 못했다. 오샤가 앞으로 나가 얼굴이 벌게지도록 문을 밀었지
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브랜은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오샤를 불렀다.

“호도르를 시켜 봐.”

브랜이 바구니에서 내려지자 호도르가 오샤와 자리를 바꿔 문 앞으


로 나갔다. 미라가 브랜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한 팔로 그의 어깨를
보호하듯 감싸안았다.

“문을 열어, 호도르.”

브랜의 명령에 따라 호도르가 양손을 문에 대고 힘껏 밀었다. 순간 문


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 이상 더 움직이지는 않았다.

“호도르.”

호도르가 문을 주먹으로 쾅쾅 올려쳤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움직이


지 않았다.

“호도르, 등을 사용해 봐.”


브랜이 답답해서 소리쳤다. 호도르가 몸을 돌려 등을 문에 대고 힘을
주었다.

“호도르!”

계단을 하나 더 올라 등에 힘을 주며 천천히 뒷걸음쳤다. 이번엔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꿈틀했다.

“호도르!”

호도르는 다른 발로 다시 한 계단 더 올라갔다. 그리고 다리를 쭉 뻗


으며 몸을 폈다. 얼굴이 벌게지고 목에 힘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호도르, 호도르, 호도르!”

위에서 둔한 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갑자기 문이 살짝 젖혀지며 밝은


햇살이 한줄기 쏟아져 내렸다. 브랜은 눈이 부셔 잠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호도르가 한 번 더 힘을 주자 바위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문
이 활짝 젖혀젔다.

오샤가 얼른 문 사이에 창을 받쳐 놓자, 릭콘이 좋아라 하며 튀어나갔


다. 호도르는 몸을 힘차게 흔들더니 밖으로 걸어나갔다. 조젠과 미라
가 브랜을 운반했다.

하늘은 창백한 잿빛이었고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서 소용돌이치고 있


었다. 그들은 퍼스트킵의 그림자를 밟고 서서 잿더미를 둘러보았다.
성채와 성벽은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산산조각 난 이무기 돌들이 흩
어져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브랜은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감


사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근처에
서 까마귀들이 쓰러진 돌에 깔린 시체를 쪼고 있었다. 엎어져 있어서
그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사용되지 않은 퍼스트킵은 산산조각이 난 채 무너져 있
었다. 모두 다 불타고 바닥에는 들보만 남아 있었다. 방이며 홀, 주방,
심지어는 화장실도 훤히 보였다. 퍼스트킵 뒤로 보이는 부서진 탑은
그다지 심하게 망가지진 않았다. 조젠이 연기 때문에 재채기를 해댔
다.

“집에 데려가 줘! 난 집에 가고 싶단 말이야.”

릭콘이 보챘다. 그러자 호도르가 원을 돌며 춤을 추었다. 작은 목소리


로 흐느껴 울며…….

“호도르.”

그들은 폐허와 시체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침내 오샤가 말했다.

“우리는 드래곤이라도 깨울 만큼 큰 소리로 납골당에서 나왔는데, 아


무도 오지 않는군요. 성안 사람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나 봐요. 왕자
님의 꿈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오샤가 갑자기 기척을 느끼고 창을 던질 태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위고 마른 그림자 두 개가 무너진 탑 뒤에서 천천히 나타났다. 순간
릭콘의 얼굴이 환해졌다.

“새기독!”

검은 다이어울프가 릭콘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서머는 좀더 느린


걸음으로 브랜에게 다가와 발에 고개를 비비고 얼굴을 핥아 댔다.

“우리는 가야만 해요. 시체가 천지에 깔렸으니 늑대들이 잔뜩 몰려들


거예요.”

조젠의 말에 오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요. 하지만 우선 식량을 준비해야 해요.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모두 조용히 날 따라오고, 미라 아가씨, 방패를 들고 제 뒤 좀 보호해
주겠어요?”

성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아침 반나절이 걸렸다. 거대하고 단단한 성


벽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을음 때문에 여기저기
가 얼룩져 있었다. 간혹 전혀 손을 대지 않은 듯 말끔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성벽 안의 것들은 모두 죽어 있었고 파괴되어 있었다.

지붕 전체가 바닥으로 내려앉은 그레이트 홀의 문들도 까맣게 그을


려 있었다. 유리 정원은 색색의 유리들이 산산조각 나 흩뿌려진 채 나
무와 꽃들이 깡그리 죽어 있었다. 마구간도 모두 타서 재로 변했고,
말들도 모두 불에 타 처참히 죽어 있었다. 마구간을 둘러보던 브랜은
댄서가 생각나 눈물이 울컥 치밀었다. 도서관 탑 아래로 있던 얕은 온
천에서는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오고, 마에스터의 탑은 반쯤 날아가
버렸다.

그들은 그레이트킵 아래의 지하실을 살피다가 창 밖으로 불길이 타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창고 중 하나가 타고 있었다. 오샤가 희뿌연
연기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면서 작은 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하지
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 한 마리가 어떤 시체를 지키고
있다가 서머와 새기독의 냄새를 맡더니 냉큼 달아나 버렸다. 그 개말
고는 모두 개집에서 죽어 있었다. 마에스터의 까마귀들은 시체를 파
먹고 있었다.

브랜은 주위에 널린 시체를 하나하나 살피다가 폭시팀을 발견했다.


그는 얼굴에 액스가 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어떤 시체는 주먹을 쥔
채 팔이 위로 빠져 있어서 마치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누군가에게 주
먹을 날릴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누가 이런 일을……. 이런 짓을 한 자들도 나중에 똑같이 당


할 거예요.”
오샤는 몸을 부르르 떨며 낮게 중얼거렸다.

“테온의 짓이야.”

브랜은 심술궂게 말했다. 하지만 오샤가 고개를 저으면서 창으로 어


딘가를 가리켰다.

“잘 봐요, 저 사람은 테온의 부하잖아요. 그리고 저건 테온의 말이에


요. 보이죠? 저기 꽂혀 있는 화살도 검은 거구요.”

오샤가 계속 시체들 사이로 움직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블랙 로렌이 있어요.”

블랙 로렌은 얼마나 심하게 난도질을 당했는지 턱수염이 불그스름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 배지가 있네요.”

오샤가 발치에 있는 시체에게 몸을 숙이며 중얼거렸다. 브랜이 얼른


그쪽을 바라보았다.

“드레드포트 가문의 문장이야.”

갑자기 서머가 요란하게 짖어 대더니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가즈우드 쪽이에요.”

미라가 방패와 창을 들고 서머를 따라 달려갔다. 나머지 일행도 뒤를


좇았다. 길은 자갈투성이에 연기가 자욱했다. 하지만 가즈우드로 들
어서자 공기가 훨씬 맑아졌다. 숲 가장자리의 소나무들은 불에 그을
려 있었지만, 토양이 습한 숲 안쪽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살아 있는 숲에는 힘이 있어요.”


브랜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조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불처럼 강한 어떤 힘이 있죠.”

하트트리 아래의 웅덩이 근처에 누군가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루윈


이었다. 축축하게 이슬을 머금은 풀밭 위로 루윈이 쓰러진 곳까지 핏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브랜은 처음에 그가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미라가 루윈의 목을 만지자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도르? 호도르?”

호도르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루윈의 몸을 바로 뉘여 주었다. 회색 눈에 회색 머리칼, 회색


옷, 항상 회색 일색이던 루윈이 지금은 온통 빨갛게 피범벅이 되어 있
었다.

루윈이 호도르의 등에 업혀 있는 브랜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


었다.

“브랜 왕자님. 그리고 릭콘 왕자님. 천만다행이에요. 나는 알고


있…….”

“알고 있었다구요?”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 애들의 다리를 보고…… 알았어요. 옷은 딱 맞았지만 다리 근육


이……. 불쌍한 아이들…….”

루윈이 기침을 하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


다.
“왕자님들은 멀리 피하셨잖아요. 숲 속으로……. 그런데 어떻
게…….”

브랜은 눈물을 참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가지도 않았는걸요. 숲 근처까지만 갔다가 되돌


아왔을 뿐이에요. 흔적을 남기려고 서머와 새기독만 보낸 거에요. 그
리고 우리는 납골당에 숨어 있었어요.”

“납골당에…….”

루윈이 싱긋 웃었다. 또다시 입에서 피 거품이 흘러나왔고, 그는 고통


으로 숨을 헐떡거렸다.

기어이 브랜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내가 다치면 루윈이 치료해 줬는데, 나는 루윈이 다쳤는데도 아무것


도 해줄 수가 없어…….’

“루윈을 데려가려면 들것이 필요할 거예요.”

오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루윈이 희미하게 고개를 저였다.

“아니, 소용없는 짓이야. 난 죽어 가고 있어.”

“안 돼. 죽으면 안 돼요!”

릭콘이 소리쳤다. 옆에서 새기독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루


윈이 우는 릭콘을 보며 미소지었다.

“슬퍼하지 말아요. 전 왕자님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요. 그러니……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브랜은 루윈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호도르, 나를 아래로 내려 줘.”

호도르가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루윈의 시선은 오샤에게 가 있었다.

“오샤, 잘 들어라. 왕자님들은…… 롭 왕의 후계자들이시다. 절대 함


께 있으면…… 안 돼. 알겠지?”

오샤가 창에 몸을 기댔다.

“알겠어요. 만약을 위해 따로 모실게요. 하지만 왕자님들을 어디로


모셔 가죠? 제 생각으론 세르윈 쪽이…….”

루윈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조차 루윈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처


럼 보였다.

“세르윈의 소년은 죽었다. 세르 로드릭과 레오발드 톨하트도…… 모


두 당했어. 딥우드모트도 무너지고, 모아트카일린, 토르헨도 곧 그렇
게 될 거야. 아이언 사람들이 스톤니 해안으로 몰려들 거야.”

“그렇다면 어디로요?”

“화이트 하버……? 움버……? 나도 잘 몰라. 어디든 전쟁터니까. 이


웃끼리 서로 싸우고 있어. 겨울이 오고 있는데 어쩜 그토록 어리석은
지…….”

루윈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브랜의 팔을 잡았다.

“왕자님, 왕자님은 이제 강해지셔야 합니다. 강해져야…….”

“그럴게요.”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브랜은 순순히 대답했다.

‘세르 로드릭도 죽고, 이제 루윈도 죽을 거고……. 모두 죽다니…….’


루윈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훌륭합니다. 과연 스타크 가문의 아드님답습니다. 그럼 왕자님, 이


제 떠나세요.”

오샤가 붉은 얼굴에 드러난 굳은 표정을 응시했다.

“왕자님, 이제 루윈이 쉴 수 있도록 떠나지요.”

루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오샤, 물 한 모금만……. 그리고 제발 내 마지막 부탁을…….”

“네, 알겠어요.”

오샤가 결연한 표정으로 미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왕자님들을 데려가세요.”

조젠과 미라가 릭콘의 손을 잡고 돌아섰고, 호도르도 브랜을 업고 뒤


를 따랐다.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브랜의 얼굴을 낮은 가지들이 쓸고
지나가면서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잠시 후, 오샤가 마당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하지만 루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도르, 넌 브랜 왕자님과 함께 가. 왕자님의 발이 되어 드려야 하니


까. 난 릭콘 왕자님을 데려갈게.”

오샤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브랜 왕자님과 함께 가겠어.”

조젠이 말하자 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난 이스트게이트 쪽으로 해서 킹스로드를 따라가
겠어요.”

“우리는 헌터게이트로 갈게.”

미라가 말했다. 호도르가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다.

“호도르.”

그들은 먼저 부엌에 들렀다. 오샤는 그곳에서 거뭇하게 타긴 했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는 빵 조각과 반쯤은 온전한 닭고기를 찾아냈고,
미라는 꿀단지와 사과가 담긴 단지를 발견했다.

음식을 찾아 밖으로 나온 그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릭콘이 울며


호도르의 다리에 매달렸지만, 오샤가 창끝으로 두 사람을 떼어 놓았
다. 브랜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부서진 탑 뒤로 사라지는 늑대의 꼬리
였다.

헌터게이트는 충격으로 심하게 뒤틀려 있어서 위로 조금도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은 창으로 틈새를 하나하나 벌렸다.

“우리가 당신 아버지에게 가야 할까요? 그레이워터워치 말이에요.”

도개교를 건너면서 브랜이 물었다. 미라가 대답 대신 동생을 바라보


았다. 그러자 조젠이 짧게 대답했다.

“우리의 길은 북쪽이에요.”

숲 근처에서 브랜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성을 돌아보았다. 흐린


하늘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주방 굴뚝에서 나는 것
은 아닐 터였다. 수백 년 동안 언제나 그러했듯이 성벽 너머로 탑 꼭
대기들이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윈터펠이 약탈당하고 무너진 성이
라고는 믿기 어려울 것 같았다.
“돌은 강해. 숲의 뿌리는 깊어. 그리고 저 땅 밑에는 조상들이 저마다
석좌를 지키고 앉아 있어.”

브랜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윈터펠도 존재하


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윈터펠은 죽은 게 아니야. 단지 나처럼 다쳤을 뿐이야. 나 역시 죽지


않았어.’

왕들의 전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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