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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권

베사 길드의 길드장 에테르


정령계에서 라한은 자연과 대화를 하는데 성공햇다 아마 신
화력을 익히면서 만물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게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것이리라
하지만 물질계에서은 자연과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정령계의 자
연이 가지고 있던 언어능력이 이곳에는 없은 탓이다 정령계에서
정령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과 달리 물질계에서 하급 중급 정
령이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자연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들이 무언가을 전하려 할 때 품게 되은 의지가 라한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라한은 누군지 모를 자연과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앞으로 조심하지
-주인, 또 중얼거린다.
-요즘 주인 상태를 보면 뭔가 불안해.
라한은 요즘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자연이
전하는 의지에 자신도 모르게 대꾸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테세르와 슈라는 라한의 의지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지 못한다고하여 없다고단정 짓는무신론자. 마찬가
지로 자신이 듣지 못한다 하여 자연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정
령왕들
테세르와 슈라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듣
지 못한다는 생각에 라한을 미친놈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노력할게. 하지만, 그때는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지?"
슈라. 우리 주인 저대로 괜찮을까? 아무래도 상태가 너무 심각
해 보이는데.
-나도 걱정이다. 도대체 왜 저러지? 최근 며칠 사이에 저렇게
변한 것 같은데
물 덩어리 변은 라한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전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
재는 투바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라한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알아듣는 단둘밖에 안 되는 존재 중 하
나가 라한인 셈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니 자연의 의지를 알아
듣는다는 라한의 말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 로테마이어스 걱정 안 해?
"안 그래도 슬슬 움직여야겠다. 나가자. "
-어딜?
"전에 봤던 다크라이더 길드의 정보 수집처에 좀 가야겠어. 정
보가 곧 힘이거든. "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슈라와 테세르, 변도 그
뒤를 느긋하게 따랐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슈라와테세르, 변이
인간들이 많은 곳에 나타나다니. 이곳 블리아드 마을이 아니면 꿈
도 꾸지 못할 일임이 분명했다.
라한과 일행들이 전에 봐둔 곳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
에는 여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낮에 와보니 술 냄새도 꽤나 강하게
풍겼다.
"어떻게 접촉해야 할까?"
말을 하던 라한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다크라이더
의 길드장 다크시안에게 증표로 받은 패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 패의 재료가 뭔지 모르고 있군. '
라한이 다크시안에게 받은 패는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로이
나에게 받은 대륙 물질 사전에도 이 물질에 대한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이 대륙의 물질이 아닐지도 모르지. 만나봐야겠어. '
어차피 이 패는 다크시안에게서 나온 증표였다. 아무리 노력해
도 알아낼 수 없다면 다크시안에게 다시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슈라. 넌 밖에서 대기해. 가자."
끼이이익!
라한이 문을 열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쾌나 귀에 거슬리는 소
리가 들려왔지만 라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곳곳
에서 느껴지는 낯선 자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은 놈도 있군. 놀라운데. '
라한이 문 안에 한 발을 들여놓은 상태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
를 천천히 돌리며 숨어서 지컥보는 이들을 하나씩 훌었다.
'저자인가?'
차례로 돌던 라한의 시선이 왼쪽 지붕근처에서 멈추었다. 라한
이 이채를 발하며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렸다. 긴장보다는 호기심
이 가득 담긴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주인 왜 그래?
"곧 알게 되겠지. 나서지 마라. "
테세르라고몰래 지켜보는자들이 있음을모를 리 없다. 라한이
깨달음을 얻기 이전만 해도 테세르의 기감이 라한을 능가하지 않았
던가? 비록 상대가 있고 없고를 알아채는 데 뛰어날 뿐, 강함과 약
함을 판별하는 능력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어찌 뤘든 테세르도 숨은 자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라한이 나서지 말라고 말한 건 테세르가 숨어 있는 자들을 해코
지할까 염려되어서 한 말이다
"실례합니다. "
"무슨 일인가? 이방인. "
카운터에 앉아 있던 구레나룻 가득한 사내가 거칠게 대꾸했다
라한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한 가지 부탁과 한 가지 의문을 풀고 싶습니다만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말은 해 보게. "
"저들은 잠도 저기서 잡니까?"
라한이 지붕, 탁자아래, 카운터 뒤를차례로훔으며 말했다. 이
에 카운터에 있던 구레나룻 사내가 몸을 움찔거렸다.
"흠. "
"이런. 얼굴에 살기가감도는군요. 대답하지 않아도상관없습니
다. 아주 어릴 적에 이야기책을 보면서부터 가졌던 의문이거든요. "
라한의 얼굴에서 정말 궁금해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말을
들은 구레나룻 사내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오래전에 가져봤던 의문인 듯했다.
"대답해주지. 대신 자네도 내 물음에 대답을 해주면 좋겠군. "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말은 들어보겠습니다. "
라한이 좀 전에 사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아쳤다. 겉으로 보
기에는 서로가 아주 유쾌해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실제 구레나룻 사내의 손에는 땀이 가득했다. 어느 날 느
닷없이 나타나서 몬스터들을 박살 내 버린 사내. 강함으로 따지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벼도 승산이 없을 게 분명했다 오직 믿는
거 라고는 기습 하나뿐이 었다.
한데 유일한 그 방법도 용이하지 않을 성싶었다 들어오자마자
숨어 있는 이들을 다 가려내는 상대에게 기습이라니 가당치도 않
은 소리였다.
"저들도 저기서 잠을 자지는 않네. 교대하는 사람이 있지. "
"그럼 저들 외에도 더 있다는 얘깁니까?"
"그렇지는 않네. 자네가 온다는 정보를 듣고 인원을 모두 동원
한 거지. "
"철저하시군요. "
"자네에게 들켰으니 철저하다는 말은 부담스럽군. "
구레나룻 사내의 대답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딴에는그 말도 맞았다. 결국모든준비가 허사로돌아갔다. 준
비 그 자체가 무의미해진 것이다
"아까 제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하셨죠? 물어보세요. "
"어떻게 알았는가? 저들은 철저히 훈련받아서 숨을 참는 시간도
그리 짧지 않네. 거기다 좀 전에 저들은 특별하게 제조된 약물까지
마셨네. 그 약물을 마시면 몸이 차갑게 식어 체온을 감지하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
사내는숨어 있는자들의 실력을잘알았다. 설사한제국의 황
실 친위 기사단 단장이 온다 하더라도 30분 이상 몸을 숨길 수 있
는 자들이 그들이다.
물론살기를드러내서 공격을시작한다면 들킬 수밖에 없다. 하
지만 가만히 숨어서 정보만 캐는 거라면 세상 그 누구의 눈도 속일
수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런 존재를 곡한이 한눈에 알아채 버렸으
니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체온이 전부인 건 아닙니다. 숨소리가 전부인 것도 아니고요.
생명체는 누구나 가진 기운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마나라고 부른다지요?"
"그럼 그 기운을 느꼈다는 말인가? 마나를?"
"그렇다고 해 두죠. "
쾅- !
라한의 대답에 사내가 탁자를 손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말도 안되는소리! 저들은그 어떤 검술도 익힌 적이 없다. 물
론 마법도 마찬가지다. 저들이 배운 전투술은 암기를 사용하는 게
전부인데 마나가 느져져? 헛소리다. "
"마나는 꼭 어떤 걸 익혀야지만 몸에 스며드는 게 아닙니다. 누
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마나를 가지게 되죠. 하지만 그 양이 너무 미
미해서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
라한의 대답에도 구레나룻 사내는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
다. 누구나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몰랐던 얘기지만, 설사그
렇다 치더라도 미미한 양일 게 분명했다.
물론 라한이 마나 스캔을 시전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어느 정도
는수긍하고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라한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감시당했고, 그동안 마나스캔과 흡사한 주문이나
손짓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어 있는
이들을 모조리 찾아낸 것이다.
"이, 이, 이음?혹시
구레나룻 사내는 다크라이더 길드의 제198지부 소속 정부 수집
처 수장이다. 서열로만 따지면 까마득하게 아래인 셈이다.
하지만 정보를 캐는 능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 오직 정보를 캐는 능력만 습득했고,
또 그것만 배웠다 그리고 쉰세 살이 된 지금, 43년이라는 기나긴
경력이 라한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인가?'
구레나룻 사내 닉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정보를 습득하
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 원로회의에 대한 정보
도 들었고, 그곳에서 라한이 드래곤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하지만 닉스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드래곤이라니 이곳에 사는 시골 무지렁이는 모를지라도 정
보를 캐며 살아온 닉스는 드래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드래곤은 라한처럼 마을을 위해 몬스터를 죽이
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또 얼마 전 드래곤이 마을을 선회하며 라
한을 죽이겠다고 선포하고 사라졌다. 드래곤과 드래곤의 대결은
전무후무한 일이니 라한이 드래곤이라는 것도 사실로 보기 힘든 것
이다.
닉스는 이런저런 가정들로 라한을 드래곤으로 알고 있는 원로원
들의 생각을 무시했던 게 사실이다.
한데 지금 라한의 행동과 태도를 보자 원로원의 생각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드래곤이십니까?"
"예?"
구레나룻 사내 닉스의 말에 라한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드래곤이라니. 자신이 그렇게 광포하게 굴었나 싶었다.
'전에는 날 류카라한이라는 자라고 오해하더니 이젠 드래곤인
가? 잘하면 엘프, 드워프 다 나오겠군. 오크는 싫은데
"사실이었군요. 무례를 범했습니다. "
"이봐요. "
"말씀 낮추십시오. 정보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
"이 사람이 진짜 내가 어딜 봐서 드래곤으로 보여요? 전 인간
이라고요, 인간!"
라한이 발끈하며 외쳤다.
라한은 인간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거나 만물의 영장이 인간뿐이
라고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인 지금은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제아무리 뛰어나고 아름다운 존재라도 지금 라
한에게는 타 종족에 불과했다.
"정말 아닙니까?"
"아닙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절 드래곤으로 본 겁니까? 안 그래
도 드래곤 몇 놈이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
"흠, 흠. 그렇군. 미안하네. 원로원 늙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해
서 그만 허허. 이거 참. "
닉스의 말투가 다시 하대로 바픽었다. 그리고 말끝에 어색한 웃
음을 흘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정보를 담당하는 자신이 잘못
된 정보를 믿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음이다.
"됐습니다. 지나간 일이니까 잊도록하죠. 우선 이것부터 봐주
십시오. 자, 여기."
라한이 품에 있던 패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렸다. 이제 농담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었다
"이건 음
닉스가 패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몇 차례 두드리고 돌려본
스의 얼굴에 놀람의 감정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어디, "
닉스가 카운터 아래에서 검은 잉크를 어냈다. 그리고 라한이 내
민 패를 잉크 속에 넣었다 빼서 카운터의 깨끗한 곳에 꾹 눌렀다.
"잉크는 닦아서 주세요. "
"아, 몰라봤습니다. 상부에서 오셨습니까?-
닉스의 말투가 존칭으로 바뀌었다. 그 말에 오히려 라한이 어색
한 표정을 지었다.
"말투가 아주 자유자재로 바뀌시는군요. -
"이해해 주십시오. "
"그 패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아, 외부분이시군요. 패는 저희 길드 내에서 길드장인 다크시
안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
닉스의 말투는 이제 완전히 높임말이었다. 얼굴도 반쯤 숙인
습이라 하인이 주인을 대할 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길드의 존폐가 달린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상징적인 의
미로 잠깐 빌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 길드 상부에서 큰일을 하
러 오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
"뭐, 아닌 걸 알았으니 다시 말씀 좀 낮춰주시겠습니까? 전
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높임말 듣는 걸 즐기지는 않거든요.
없는 놈들한테는 아니 지만
라한은 닉스가 높임말을 쓰는 그 순간부터 불편함을 느꼈다. 라
한이 닉스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이 패는 라이더스 패라고 불립니다. 이 패를 소지한 사람에게
는 이유를 불문하고 길드장을 대하듯 예의를 다해야 하는 게 저희
규칙인지라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
"길드장에게는 말하지 않을 테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
"죄송합니다. 차라리 절 죽여주십시오. "
닉스의 극단적인 말에 라한이 길게 한숨 쉬었다.
고집불통 닉스. 라한은 그를 그렇게 규정지었다.
'골치 아프네. '
"좋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
"감사합니다, 라한님. "
"전에 제가 길드장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정보
듣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라한이 말을 돌려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말을 높이고 낮추
는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음이다.
"죄송합니다. 아마, 길드의 극비 사항인듯합니다. 길드에 서신
을 넣어 담당자를 부르겠습니다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
"그러죠. "
"캐슬에 가 계시면 제가 기별을 넣겠습니다. "
라한이 사는 곳은 슈라의 거대한 덩치를 수용하기 위해 엄청난
크기로 지어졌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는 라한이 사는 곳을 캐슬이
라 불렀다.
개중에는 마왕성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
분은 캐슬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
라한이 고개를 짧게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왼쪽 지붕
에 숨어 있는 사내를 흘낏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라한이 나가자 닉스가 주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손짓해 불러
모았다.
"휴, 라이더스 패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
"나도 놀랐네, 근데 그 패가 라이더스 패가 확실하던가?"
"직접 보십시오. "
닉스가 라한이 눈여겨본 사내에게 천천히 패를 내밀었다. 말투
도 하대가 아닌 높임말이었다. 실제로 그의 지위가 닉스보다 높다
는 증거였다
"맞군. 근데, 어떻게 이 패를 가지고 있지? 그자가 다크시안님
과 무슨 관계이기에
"에테로님도 모르시는 일이었군요. "
"다크라이더 길드 내부의 일이니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 하지만, 흠 아닐세. "
"본부에 연락할까요?"
"내가 하겠네. 통신 마법사를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
닉스가 카운터 아래에 달린 작은 줄을 당겼다. 줄이 쾌 멀리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먼 곳에서 아련하게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로브를 깊게 눌러쓴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이 안으로 들
어왔다. 일견하기에도 나이가 무척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리플리. 본부와 통신을 열어라. "
"알겠습니다. "
에테로의 말에 마법사 리플리가 품에서 수정 구슬을 꺼냈다. 그
리고 손을 올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통신 마법을 시전했다.
츠츠 츠츠츠츠1
"누구시오?"
"198지부 리플리입니다. 담당자를 부탁드립니다. "
"누구의 통신인가?"
"베사 길드의 에테로님이십니다. "
"아, 알겠네. "
수정 구슬 속의 통신 담당자가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한과 마주했던 다크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크시안이다. 에테로는?"
"헉! 길드장님을 뵙습니다. 198지부 리플리입니다. "
리플리는 본부의 상급자 중 한 명이 통신을 받을 줄 알았다. 한
데, 때 아닌 길드장이 직접 통신을자청하고나왔다. 예상못한 일
이기에 그만큼 놀람이 클 수밖에 없었다.
"리플리로군. 자네 아들 병은 이미 완치 단계에 접어들었네. 이
왕 고생하는 거 조금 더 수고해 주게.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다크라이더 길드의 힘은 다크시안의 저런 세심함이 큰 힘을 발
휘했다. 수많은사람을부하로 두고 있지만 그누구도 함부로 대
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상대의 기분이 좋을 말을 골라서 할 줄 아
는 언변. 그리고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약간의 정보를 얻어서 만나
는 철두철미함까지 다크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다크라이더
길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격한 리플리가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터트리며 구슬에서 멀어
졌다. 그 뒤를 이어 에테로가 구슬 앞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다크시안님. "
"후후,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는가? 에테로. "
"하하, 다크시안님의 염려 덕에 이렇게 눈 뜨고 살아 있습니다. "
"하긴, 내가신경을좀쓰긴 했지. 그건 그렇고무슨 일인가?아
니, 그것보다 거긴 무슨 일로 간 건가?"
"저도 휴가 좀 즐기고 싶었습니다. "
베사 길드는 다크라이더 길드에 정보를 제공하는 진짜 정보 길드
라고 볼수 있다.
다크라이더의 다크시안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재까지도 다크라
이더만을 위해 정보를 캐는 곳이 베사 길드인 셈이다.
그리고 베사 길드의 수장인 에테로에게는 지병이 있다. 허리를
쓰면 쉽게 픽로해지는 병이었다. 걸어 다니면 다리보다 허리가 먼
저 아파오고 앉아서 일을 해도 허리에서 뻐근함을 빨리 느낀다. 일
종의 노환인 셈이다.
"그 친구 참.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통신을 넣은 겐가?
특별한 정보라도 얻었는가?"
"오늘은 오히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연락했습니다. "
에테로의 말에 다크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
며 에테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정보를 얻어? 무슨 말인가?"
"제가 쉬고 있는 이곳에 라한이라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자에
대해 아시는 대로 알려주십사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
베사 길드의 길드장 에테로의 말에 다크시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실종 이후, 다크시안은 라한을 찾는 데 총력
을 기울였다. 라한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소수라서 베사 길드에 도
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오직 다크라이더 길드의 핵심 멤버만을 이
용해서 그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찾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적한 곳에서 라한이 죽었다고
결론 내렸다.
한데 뜻밖의 장소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의 흥분과 희
열이 다크시안을 들뜨게 만들었다.
"정말인가? 정말 라한인가?"
"이름은 라한이 맞습니다. 또, 라이더스 패를 가지고 있었습니
다. "
"맞군, 정말맞군 허허허. 역시 살아 있을줄 알았다. 그가 쉽
게 죽을 리 없지. 암, 그렇고말고. "
다크시안의 들뜬 목소리에 에테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크시안을 모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간 그가 흥분하
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체 라한이 누구이기에? 다크시안과 무슨
관계이기에 이렇게 감격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누굽니까?"
"라한일세. 내 오랜 염원을풀어줄사람이기도 하고. 어디 다친
곳은 없던가?"
"훗, 그는 누가 다치게 하고 싶다고 다칠 만큼 약자가 아닙니다. "
"그런가?"
다크시안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실제로 라한의 실력이 어
느 정도인지 아는 게 없는 탓이다.
라한에게 복수를 부탁한 것도 라한보다 그 세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또,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것도 라한의 강함보다
는 묘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봐야 정확했다.
"혹시 그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겁니까?"
"난 그를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가 강한지 약한지는 잘몰
라. 뭐,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고. "
"겨우 한 번 보고 라이더스 패를 맡겼다는 말입니까? 또, 말씀하
시는 걸 보니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
으로 라이더스 패를 맡긴 겁니까?"
"그냥 넘어가 주게. "
"그리고다크시안님. 라한이라는사람은제 정보망에도들어 있
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대체 누굽니까?"
"글쎄. 자네가 강하다고 하니 강한 사람이겠지 "
다크시안은 라한의 본실력이 어떤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인간됨을 믿었고 그의 눈빛을 믿었을 뿐이다.
그런 라한에 대해 됫조사하는 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
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라한에 대해 더 무지할수밖에
없었다.
"강한 정도가 아닙니다. 베어울프를 날아다니는 똥파리보다 더
쉽게 잡아버리는자가그자입니다. 또, 베어울프를종잇장처럼 구
걱 버리는 골렘을 소유하고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만하게. 난 그의 힘에는 관심이 없어 그냥 그가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게. 그럼 되는 거야. "
"다크시안님 ! ! "
다크시안의 대책 없는 말에 에테로가 언성을 높였다.
같은 길드이지만 다크라이더 길드의 하부 길드나 다름없는 베사
길드. 마찬가지로 에테로도 다크시안의 하급자나 마찬가지이기에
언성을 높이는 그 자체가 하극상이 었다.
하지만, 길드를 만들기 전에 죽마고우였던 둘이기에 이 정도로
하극상을 논하기는 힘들었다.
"난 그를 믿네. 그냥 믿어. "
"에휴, 알겠습니다. 그가제게 와서 전에 부탁했던 정보를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전에 내가 자네에게 알아보라고 했던 것일세. "
에테로가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러다 정보가 무언지 깨달은 듯 눈을 밝게 빛냈다.
"혹시
"맞네. 그 일일세. 자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그에게 알려주면
되네. "
"흠. "
에테로가 침음성을 흘리며 침묵에 잠겼다
다크시안이 오래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건 대륙에 새로이 나타난
강자들의 세력. 즉, 굴레를 벗은자들에 대한정보였다. 그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또 길드 지부도 수차례나 옮겨 다녀
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굴레를 벗은 자들의 정보를
캐는 건 성공했다. 그것도 쾌나 깊이 파고들어서 상당히 정확하고
방대한 양의 정보를 캘 수 있었다.
"그였군요. "
"그에게 내 안부나 전해주게나. 그럼 끊겠네, "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
통신을 끊은 후에도 에테로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굴레
를 벗은 자들에 대해 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그들의 실력
때문이다.
그가 본 굴레를 벗은 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되 인간으로 보기 힘들 만큼 강한 자들. 그들 개개인의 힘으로도
한 나라와 자웅을 걱룰 수 있는 그런 실력자들이었다.
라한이 그들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면 최소 그들과 비슷한 정
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인 줄 몰랐군. '
에테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기
습으로 그를 처리하려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에테로님. "
"아, 그를 만나러 가야겠네. 준비해 주게. "
"예, 알겠습니다. "
에테로가 이곳에 온 건 지금부터 약 1년 전의 일이다 지병이 있
어서 마음 편히 업무를 볼 곳을 찾다가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면서도 베사 길드가 얻은 정보를 취합하는 데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설사 당장 목숨을 잃을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정보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할 사람이 에테로였다. 닉스가 그러하듯 그 역시
정보 하나만 보고 평생을 지낸 사람이니 말이다
라한은 집에 다시 돌아와서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방인의
방문을 받았다. 닉스를 대동한 에테로 일행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닉스씨. "
"책임자는 제가 아니라 여기 계신 에테로님이십니다. "
"반갑네. 난 에테로일세. 아, 내가말을높이지 않는 걸 이상하
게 생각하지 말게. 다크시안님은 내 상관이기 이전에 친구이니 이
해해줄 거라 믿네. "
라이더스 패를 가진 사람은 길드장을 대하듯 한다. 다크라이더
길드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철칙이자 법이다.
하지만 에테로는 라한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다크시안과의
개인적인 친분 그리고 다크라이더 길드가 아닌 베사 길드의 길드장
이라는 이유 때문에 높이기가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
라한이 마련된 테이블로 에테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공손
하게 에테로 일행을 먼저 앉힌 후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자네 얘기를 들었네 다크시안님이 안부 전해달라더군. "
"고맙습니다. 한데 제가 부탁한 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내가 전해주겠네. "
말을 마친 에테로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 모습에 닉스를
비롯한 일행들이 자리를 떴다. 에테로가 하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길드 내부의 약속된 행동이었다.
"훈련이 잘돼 있군요. "
"다크라이더 길드니까. "
에테로는 자신이 다크라이더 길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라한도 상대의 신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원
한 정보를 얼마나 자세히 알아왔느냐 그리고 그 정보가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느냐만 알면 그뿐이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
"잘 꾸며놨군. 대륙에서 보기 힘든 모습들 같은데?"
라한이 꾸며놓은 정원과 집 외관은 대륙 형식과는 사뭇 달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가 섞인 듯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묘하게
어울려서 무척이나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말을 돌리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이곳은 제가 어렴풋
이 기억하고 있는 이런저런 기억을 섞어서 꾸민 곳입니다 "
"그렇군. "
에테로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에테로는 자신의 입에서 나을 말이 대륙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대륙 최강자들의 정보 아니던가? 라한 역시 최강자
중의 한 명일 테니,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대륙의
판도가 바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 때문일까? 입을 여는 게 자꾸만 주저되었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
"제가 왜 두려우십니까?"
"자네가 이 대륙을 어떻게 바꿀지가 걱정되네. "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정도는 수긍
이 가는 말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대륙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 대륙의 판도가 바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대륙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라한의 관심 사항이 아닌 것이다.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
라한의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오래 사는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적들에게 목숨을 잃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을 안
전하게 지키는가? 자신의 가문을 망하게 만든 엘베로를 어떤 식으
로 비참하게 만드는가? 이런 것들뿐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륙이 바펄 수도 있다. 하지만 대
륙이 피바다가 되든 평화를 유지하든 그건 라한의 관심 밖이었다
되도록 대륙도 평화롭게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불가
피하다면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전 대륙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럼 왜 그들에 대해 알려는 건가?"
"그건 그들과 제 일이지 대륙의 정세와는 무관합니다. 그 과정
에서 불가피하게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리 크지는 않을
거 라고 생각합니 다. "
"그게 그렇지가 않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
은 이미 세상의 정세에 너무 깊이 관여해 버렸어. "
라한은 대륙 흐름과 무관한 이곳 블리아드 마을에서 소일하고
있다. 그 하나만 보더라도 라한이 대륙을 바꿀 생각이 없음은 자명
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테로가 파악한 다른 이들은 달랐다. 이미 그들의 손짓
한 번, 발걸음 한 번이 대륙을 크게 바꿀 위치까지 오른 상태였다.
라한이 그들과 어떤 관계인지 또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지가 대륙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말씀해 주시죠. "
"알겠네. 어차피 피할수 없는 거겠지. 음, 누구부터 설명을 해
야 할까? 일단 검은 측부터 설명하겠네. "
"검은 측?"
"처음 다크시안님이 알아보라고 한 곳은 지금 말하려는 검은 측
뿐이었네. 한데 수개월 전 또 다른 지령이 내려왔지. 다른 곳까지
함께 조사하라는 거였네. "
검은측은 처음라한이 부탁한곳. 즉, 류카라한이 이I는굴레
를 벗은 존재의 조직이었다.
"다른 곳요?"
"그렇네. 검은 측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는 강자들의 모임이지.
우린 그곳을 회색 측이라고 부르네. "
"아, 그렇군요. "
에테로의 대답에서 회색 측이 카이렌 일행임을 짐작할수 있었
다. 류카라한 일행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조직. 아무리 생각해도
카이렌 일행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가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는 시
기도 라한의 실종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검은 측은 골렘을 가지고 있네. 자네가 가진 골렘보다는 작은
것 같군. "
"골렘? 말도 안 돼. "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그가 알기로 골렘이라는 마법 물체는 이
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비록 라한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얻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말이 안 되지만 사실일세. 나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
르지만, 분명 골렘이었네. 그것도 1인당 하나씩. 모두 여덟일세. "
"여덟이라
라한이 알기로 기존에 있던 굴레를 벗은 존재는 모두 여섯 명이
다. 거기에 류카라한이 포함되었다 치더라도 일곱 명. 한 명이 많
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은 나을 곳이 없었다.
"왜 뭐가 잘못줬는가?"
"어떻게 여덟 명이죠?"
"그 중 둘은 라이칸드로프일세. "
"둘?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라이칸드로프라면 여덟이 아닌 아홉이어야 맞아떨어진다.
한 명의 실종. 혹은 죽음 그게 뭐가 됐든 라한으로서는 반드시 알
아야 할 일이었다. 정말 운 없으면 제3세력이 등장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가?"
"혹시 이름을 압니까?"
"그건 모르네. 자기들끼리는 본명을 부르는지 몰라도 타인이 있
는 곳에서는 모두 가명을 쓰고 있네. 하지만 이런저런 가정을 대입
해 보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대륙에선
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존재들이니까. "
"직업 구성은요?"
라한이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가 둘이고 나머지는 모두 검사일세. "
"마법사가 둘에 모두 검사? 정령사는 없습니까?"
"없네. "
"제이슨이라는 자가 그 일행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제이슨이라 대륙에서는 최고의 정령사로 알려진 역사 속 인
물이지. 한데 그 일행에는 없네. "
에테로의 대답에서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제이슨이 굴fl를 벗은 존재들의 일행에서 빠졌
다. 내부문제인지 외부문제 때문인지는아직 알수 없다. 어찌 뤘
든 류카라한 일행에서 빠져나온 건 분명해 보였다.
'다행이군. 제이슨이 내심 껄끄러웠는데. '
실제로 제이슨의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라한도 제이슨의
실력을 높게 보지 않았다. 정령왕까지 만나본 라한이었으니 상급
정령사가 하찮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령사라는 점이 라한을 신경 쓰게 만들었다. 다양
한 직업군이 조합될수록 다양한 공격이 가능한 일. 제이슨이 적 세
력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제이슨이 일행에서 빠졌다. 이제 두 직업밖에 없는 셈이다.
)건 곧 그만큼 단조로운 조합밖에 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계속 설명해 주십시오. "
"그는 골렘을 구해온 뒤에 바로 여러 왕국을 순회하듯 방문하고
다녔네. 그리고 엄청난 자금을 강탈하듯 빼앗아왔지. "
"류카라한. 실망이군. "
라한이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대륙 최고의 영웅 류카라한. 아버지 필슨 백
작도 류카라한을 닮아가라는 뜻에서 맨 앞 글자를 뺀 카라한이라는
이름을 아들 라한에게 주었다.
한데 그런 류카라한이 치졸한 짓을 저질렀다. 거기다 드래곤과
싸우려는 그들이 왕국의 원조를 받고 있다. 그건 자칫 싸움에 패했
을 때, 왕국 모두가 드래곤들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 되겠군. '
"그리고 각 왕국에서 정예로 키우고 있는 견습 기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갔네. "
"음 "
라한이 보기에 견습 기사들은 드래곤과의 싸움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지금부터 제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가르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자신들 대신 죽는 방패막이 그 이상은
되기 힘들 터. 결국 류카라한은 자신들이 단 1분이라도 더 살기 위
해 방패막이를 만든 것에 불과했다
"왜 그러는가?"
"검은 측이라는 그들의 목적이 뭔지 압니까?"
"그건 모르네 "
"그들은 드래곤과의 싸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

에테로가 긴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괴었다. 라한과는 좀 다른 의
미에서 흘린 침음성이었다.
에테로는 인간이 드래곤과 대적한다는 그 자체를 무모하게 생각
했다. 지금 터트린 신음도 그런 만용을 허탈해하는 소리였다.
'하긴 눈앞에 있는 라한이라는 자도 드래곤이 노리고 있는 인간
이었자 근데 싸운 적이 있으려나?'
얼마 전 드래곤이 마을을 선회하며 살기를 뿜어대고 사라진 적
이 있다.
라한도 드래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였다. 비록 그때 라한
이 자리를 비우면서 싸움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충돌은 시간문
제 같았다.
"자네는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글쎄요. 원래는 대충 싸우다 몸을 피하면 그만인 싸움이었습니
다. 하지만 이젠 절대 패해서는 안 되는싸움이 됐습니다. 그들이
패한다면 드래곤의 다음 목표는 왕국 전부가 될 테니까요. -
"그그렇겠지. "
에테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제야 작금의 사태를 짐
작한 모습이 었다.
드래곤과 인간의 대결.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몇몇 소수의 싸움은 과거에도 있어왔다.
무지한 이들이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면서 혹은 드래곤이 스스
로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드는 그런 일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칫 종족 대 종족의 대결로 퍼질 수 있었다. 설
사 인간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회생 불능의 상처를 입을 게 뻔했다.
'흠, 그래도 최소한 라한은 그와 드래곤의 싸움 정도로 범위가 정
해진다. 한데 회색 측과 검은 측은 대륙 전체와 드래곤의 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너무 커. 이거 심상치 않은 일에 빠지겠는데.
에테로는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다크라이더 길드와베사
길드만큼은 드래곤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어차피 세상에 나름대로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만든 길드가 다크라
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였다.
드래곤이 정의에 어긋난다면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게 설
립 취지인 셈이다.
"어쩌면 좋겠는가?"
"그거야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계속 얘기해 주십시오. "
"아, 알겠네. 회색 측은 검은측과 계속해서 대립해 왔네.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세력이 커졌지. "
"세력이 커지다니요?"
"그들 역시 사람들을 끌어들였네, 하지만 왕국에서 견습 기사를
데려오는 방법이 아닌 길드를 이용하는 방법이었지. "
"길드? "
"그들은 대륙에 산재해 있는 중소 용병 길드와 암살자 길드를 병
합해서 병력으로 쓰고 있네.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카이렌이 선택한
방법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다.
그게 누가 됐든 다른 인간을 끌어들인 건 분명했다. 이 역시 자
칫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요?"
"그들은 그 병력으로 검은 측을 끊임없이 견제했네. 그리고 몇
달 전에는 검은 측이 가지고 있던 골렘 한 기를 탈취하는 데에도 성
공했지. "
"골렘 한 기?"
"그렇네. 원래 검은 측에는 1인당 골렘 한 기가 있고, 한 기가 여
분으로 있었네. 한데 회색 측에게 한 기를 탈취당하는 바람에 여분
이 없어진 셈이지. "
에테로의 대답에 라한이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골렘은제이슨몫이었겠군. 흠, 골렘은 뛰어난 병기라고볼
수 있다. 그리고 한번 계약을 맺은골렘은그주인이 죽기 전까지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그럼 제이슨이 죽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제이슨을 주려고 가져온 골렘인데, 그 전에 제이슨이 실종
돼서 주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제이슨에게 골렘이 없
는 건 확실하군. '
라한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일단 제이슨은 걱정하지 않아
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회색 측에서 묘한 일을 하더군. "
"무슨 일입니까?"
"그 진형에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루이나 왕국의 왕세자가 되는
간택 경쟁에 뛰어들었다. "
"그래서요?"
라한은 직감적으로 그가 휴란트임을 알아챘다. 라한의 성격을
아는 카이렌 일행이 그 성격에 맞는 복수를 진행하는 중인 듯했다.
"지금 현재로는 상당히 유력한 후보까지 오른 상태일세. "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아직 몇 개월은 더 지켜볼 모양이야. 엘베로의 신중한 성격을
알 수 있지. "
라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엘베로
라면 그런 신중함이 당연했다
"더 있습니까?"
"정리는 이 정도로 끝일세. 더 들어오는 정보가 있으면 찾아오
겠네. "
"알겠습니다. "
라한의 대답을 끝으로 에테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척이나
어두운 얼굴이었다 종족 대 종족의 대결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
이다.
에테로 일행이 떠난 후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검은 측이라 불리는 류카라한 진형과 회색 측이라 불리는 카이
렌 진형. 라한은 이 두 진형이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이렌. 내가 너희를 떠나온 건 실력을 키우라는 의미였다. 휴. '
안타까웠다. 자신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자꾸만 엇나가는
카이렌 일행.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애써 키운 그들의 세력은 물론이고 잘하고 있는 스스로의
수련까지도 방해할 것 같았다.
'부디. '
라한은 카이렌, 류카라한 일행에 대한 생각을 접고 다른 고민에
빠졌다. 이곳을 떠나기 전 테세르가 언급한 로테마이어스에 대한
생각이었다.
'내가돌아왔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 벌써 나타났어야하는
데, 왜 안 나타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로테마이어스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블리아드 마을에서 발광한 이후 로테마이어스는 레어 안에서 자
중하며 보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반성하는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라한의 실력을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얼마남지 않
은 카이렌 일행과의 전투에 신경을 집중시키는 정도의 자중이었다.
"아카폴리안 "
"네. "
로테마이어스의 정보 담당 아카폴리안. 그는 요즘 로테마이어스
의 레어와 정보를 얻어야 하는 곳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오가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10일 남았다. "
"알고 있습니다, 로드님, "
"그들은 여전한가?"
"예,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로드님과의
싸움을 잊은 듯한 모습 같았습니다. "
카이렌과 로테마이어스가 약정한 1년이 이제 10일 남았다. 10일
후에는 로테마이어스가 약속에서 자유로워지는 셈이다. 그건 곧
카이렌과의 일전을 치를 수 있다는 얘기도 되었다.
"내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로드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
"난 너의 생각을 물었다. "
"제 생각은
약간 뜸을 들이던 아카폴리안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라한 쪽을 먼저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로드님
께서 시간이 없으시면 저희들이 가서 그 녀석을 처리하겠습니다. "
"너희들이?"
"예. 맡겨만 주시면 제가 가서 그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는 아카폴리안의 자신감 넘치는 말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행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
아카폴리안은 로테마이어스의 눈이나 다름없다 로테마이어스가
얻는 정보의 90퍼센트 이상이 아카폴리안이 모아오는 정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아카폴리안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몇 달 동
안은장님으로 지내야할상황에 처하게 된다. 괜히 골치 아픈 일
을 자처할 만큼 로테마이어스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네 생각은 괜찮지만 무리가 많다. "
"무리라면?"
"라한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비록 전투에선 무
능했지만 크라이드리안을 제압했던 인간이 라한이다. "
"그럼 제가 다른 드래곤들을 이끌고 처리하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의 연이은 요청에도 로테마이어스는 고개만 가로저
었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의 말을 한 번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꼭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라 라한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넌 가선 안 된다. 하지만 2천 살 내외의 드래곤 둘 정도를 그 녀
석에게 보내라. 목표는 물론 그 녀석의 죽음이다. 하지만 힘에 부
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즉각 도주하라고 일러라. "
"알겠습니다, 로드님. "
"넌 카이렌과 그 떨거지들만 감시해라. "
"명심하겠습니다, 로드님 "
"피곤하군. 쉬고 싶다. "
"네, "
로테마이어스의 축객령에 아카폴리안이 됫걸음질로 fl어를 나갔
다. 그가 나가자 로테마이어스가 의자에 기대며 길게 한숨 쉬었다.
"라한, 휴. "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이 무서웠다. 꼭 이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
었다.
그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대체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지
아는 게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의미모를 두려움을 안걱줬다.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가는 걸 자꾸 미룬 이유도 이 때문이
었다. 어쩌다 보니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상대가 라한이 되어 버린
셈이다. 질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껄끄러운상대. 그가 라한
이었다.
에테로가 라한의 집을 떠난 지 5일 후, 그가 다시 라한을 찾아왔
다. 아마 그 5일 동안 베사 길드를 통해 검은 측과 회색 측에 대한
정보를 재정리했으리라.
"어서 오십시오. "
"기다린 것 같군. "
"그냥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라한이 에테로를 공터 테이블로 안내했다 전과는 다르게 에테
로의 수행인들은 라한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방문한 이후 에테로에게 어떤 언질을 받은 듯했다
"자네는 내가 말하는 정보를 믿는가? 혹 거짓 정보라면?"
자리에 앉은 에테로가 다짜고짜 물음을 던졌다.
에테로 자신은 남이 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정보를 오랫동안
다루어왔기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한데 라한은 에테로의 말에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런 라한의 태도가 너무 신기했다.
대충 대화를 해 봐도 라한의 경험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그런
사람이 남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듣고 믿는다?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에테로의 말을?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왜요? 거짓말이라도 했습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닐세. 내 판단에 자네는 심상치 않은 경험을 많
이 한 사람일세. 그 정도 실력을 갖추자면 그만큼의 경력과 경험을
거쳐야 하는 건 당연하겠지. 한데 그런 자네가 내 말에 약간의 의
심도 품지 않더군. 내가 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일세. "
"훗, 물론 대부분 어느 정도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
심하고들겠죠. 경험은사람을 타성에 젖게 할뿐만 아니라, 의심
이라는 놈을 마구 키우니까요. "
"그런데?"
"뭐, 그냥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
그냥 지나치듯 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라한은 에테로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만큼이나 많은 기
억을 가지고 있다.
8, 에테로가 꿈도 꾸지 못할 경지에 이르면서 수많은 깨달음의
단계를 거쳤다.
그러면서 늘어난 건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또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능력도 범인의 기준을 뛰어넘
었다.
라한이 에테로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투와 목소리에서 거짓을
느끼지 못했다. 에테로 역시 라한에 비하면 한참 적은 경험과 경력
을 가졌을 것이기에 라한이 그렇게 들었다면 그럴 터였다
"알 수 없는 말이군 "
"그냥 그렇다고 해두십시오. "
"그러지. "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뭔가 다른 정보가 있을 거라
고 보이는데요. "
라한의 물음에 에테로가 한차례 머리를 긁적였다. 막상찾아오
기는 했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거 참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닐세, "
"말씀해 보십시오. "
"전에 말했던 그. 휴란트라는 사람의 정체가 발각되었네. "
"정체라니요?"
에테로는 휴란트를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회색 측, 그러니까 카이렌 일행 중에서 휴란트의 실력이 가
장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약하다는 그 이유 하나가 라한의 관심을 끌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한데 라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조바
심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엘베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 들컥서는 안 되는
정보가 있는모양이더군. 그 정보가 엘베로의 귀에 '들어갈' 모양
이야. "
"정체?"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휴란트가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거라면 필슨 가문의 사람이라
는 것뿐이다 그것만 숨긴다면 그의 능력으로 루이나 왕국의 후계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뭐, 자세한건 모르네. 그에 대해서는그리 이목을집중하고 있
지 않아서 말이야. 근데 자네는 그와 무슨 관계인가?"
"그는 아닙니다. "
"휴란트라는 자는 필슨 가문의 후손일세. "
에테로는 라한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라한이라고 부르
고는 있지만, 그의풀 네임이 카라한필슨이라는 것도몰랐다. 다
크시안이 알아보라고 한 인물에 라한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탓이
다. 또, 다크시안이 라한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하지 않았다는 것
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알고 있습니다. "
"그의 정체가 엘베로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꾼 후계자의 꿈은 포
기해야할 걸세 물론, 그의 조력자가 회색 측이니 엘베로가그를
해코지하지는 못하겠지 . "
카이렌과 프라하, 투바. 그들이 있는 이상 휴란트가 엘베로에게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검은 측이라 불리는 류카
라한 일행에게 다친다면 모르겠지만, 엘베로가 가진 힘으로는 카
이렌 일행을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쾌나 오랫동안 공들였을 후계자의 꿈은 접어야 할 게 분
명했다 제아무리 강한 집단의 일원이라도 원수에게 뒤를맡길 수
는 없을 테니 말이다.
"좀 전에 '들어간'이 아니라 '들어갈'이라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는 아직 엘베로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맞네. 엘베로의 하부 정보 조직에서 휴란트의 정체를 알아랜
것 같더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후계 후보자들의 정보가
엘베로에게 보내지는데, 아마이 정보도그때 함께 올라갈걸세 "
"막아주십시오. "
"불가능하네. 정보가 올라가는 날이 이제 3일 남았거든. 지금
당장 동원 가능한 인원으로는 그들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게 불가
능해. "
정보 조직에서 정보를 빼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보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수거하는 건 물론이고, 그 정보를 캔 자와 그
정보가 거쳐 간 모든 이들의 입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3일. 제아무리 뛰어난 조직이라도 한 조직을 혼란시키고 문
서를 빼오고, 몇 명의 입을 막는 일을모두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
한 시간이다. 거기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베사 길드에서 갑자
기 인원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처리해야 할 사람의 이름과 위치
그리고 문서들이 보관된 곳만 알아봐 주십시오. "
"흠, 자네가아무리 대단해도 이번 일은불가능한 일일세. 정보
길드를 우습게보지 말게. 자네가 마법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세. 그들이 마법사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모르긴
몰라도 마법을 방해하는 어떤 장치 정도는 설치해 뒀을 걸세. "
"그건 걱정 마시고 알아봐주세요. 내일 아침까지 부탁드립니다. "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알아봐 주기는 하겠지만
에테로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안 지 얼마 안 되지만, 자신의 친구이자 마스터인 다크시안이 인
정하는 사내가 라한이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다크시안이 호
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절대 다쳐서는 안 되는 사람
이 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
"시간이 촉박하니 이만 가 보겠네. "
에테로가 서둘러 라한의 집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라한이 초조
하게 공터를 오락가락했다.
-주인. 휴란트가 걱정돼?
"아니. 카이렌이 있잖아. 투바랑프라하도 있고. 휴란트가다치
는 일은 없을 거야. "
-근데 왜 그렇게 초조해하는 거o
"카이렌이 선택한 방법은 내가 하려는 방법이었어. 내가 생각한
최선의 복수 방법이지. 근데, 휴란트가 정체를들켜 버리면 이 방
법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싫거든. "
라한은 계획했던 일을 수정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 처음 계
획이 스스로가 생각한 최선책이기에 수정한다면 차선책이 될 수밖
에 없는 탓이다.
아무래도 차선책으로는 엘베로에 대한 복수가 만족스럽지 못할
터. 그런 상황은 죽어도 싫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복수할 수 없을까봐 걱정한다는 거잖아.
"그게 어때서?"
-주인,
"왜?"
-인간이 참 독하다.
테세르의 말에도 라한은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독하다는
말을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라한이었다.
"고마워. "
라한의 담담한 말에 꾸짖으려던 테세르가 오히려 멍해졌다.
'세상에 주인이 독하다는 건 알았지만, 뭐 저런 자식이 다 있
냐? 주인만 아니면 그냥 머리를 뜯어 보는 건데. 쳇. '
생각만했을뿐, 입 밖으로 내지는못했다. 누가뭐래도 라한은
주인이었고 테세르는 그의 소환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뒤처리
다음날 아침
에테로가 닉스만을 대동한체 라한을 찾아왔다 그리고 뭔가 적
힌 쪽지 몇장만 내밀고 바로 사라졌다
흠 생각보다 많군
아홉명이네 그리고 여기서 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본 적이 있는 곳이라는 거다 운 나쁘
게 가 본적이 없는 곳이었으면 거기까지 뛰어가야 할 뻔했다
그렇군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면 테세르는 아쉽다는 빛을 노
골적으로 보였다 라한을 타고 달리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테세
르 아니던가 가 본 적이 있어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게 이렇
게 아쉬울 수 없었다
"슈라. 넌 어떻게 할래?그냥 여기 있을래?아니면 다른공간에
가 있을래?"
-난 그냥 여기 있겠다.
"그래라. "
슈라가 라한의 부름을 기다리는 다른 공간. 그곳은 온통 어둠뿐
이라 적막하기 그지없다. 전에는 그 공간이 싫은줄몰랐지만, 물
질계에 오랫동안 머무르자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밝은 햇살과 따뜻한 정에 익숙해졌다고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이
곳 물질계에서 주인인 라한, 친구이자 동지인 테세르와 평생을 함
께 보내고 싶었다.
"변. 넌 여기서 슈라하고 놀아라. "
-크리릭!
"테세르. 넌
난 당연히 주인 따라가야지.
원래 라한은 테세르도 이곳에 두고 갈 생각이었다. 갖은 수다로
자신을 귀찮게 할 듯한 기분 때문이다. 또 머리 나쁜 테세르가 사
고라도 쳤다가는 그 됫수습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테세르. 그냥 너도 저 녀석들하고
-나 준비는 다 끝났어, 가자.
"아 그게
-뭐 해?시간 없잖아. 전부 열한명이라고. 서두르지 않으면휴
란트가 위험해져.
테세르가 라한의 말을 계속 끊고 서두르자고 재촉했다. 직감적
으로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 한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래. 가자. 이리와 "
출발.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가서 신나게 외쳤다
라한에게 이번 외출은 복수의 성패를 결정지을 만큼 중대한 일
이었다. 하지만 테세르에게는 단순히 놀러 가는 일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었다.
"간다. 공간을 넘어서! "
라한이 간단한 시동어로 공간을 건너뛰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
른 시동어에 테세르도 고개를 갸웃했다.
라한과 테세르가 나메라 왕국의 남쪽 끝 엘퐁소 지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란트의 정체를 알아낸 사람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
탓이다.
"감회가 새롭군. "
-그러게 말이야. 근데, 루이나왕국이 아닌 게 신기하다. 이 먼
곳에서 휴란트의 정체가 유출되다니.
"곧 알게 되겠지. "
라한이 엘퐁소 지방의 시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테세르는
여전히 라한의 로브 속에서 고개만 달랑 내밀고 있었다.
-주인. 어디로 갈 거야?
"저쪽. "
라한은, 작지만꽤나 정갈하게 정리된 술집으로들어갔다 그리
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저자인가?"
라한이 품에서 에테로에게 받은쪽지를 꺼냈다. 그쪽지에는눈
썹이 짙은 40대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비슷한데.
"확인해 보자고. "
라한이 사내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침을 먹고 있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쇼. 당신 뭐요?"
"혹시 부레이노씨 되십니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아시오?"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라한의 말에 부레이노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
다 그 상태로 왼쪽 발을 뒤로 빼며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본능적으로 라한에게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저하고 싸울 생각이십니까?"
"당신! 목적이 뭐야? 누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
"하앗! "
라한의 대답을 듣던 부레이노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라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라한의 얼굴에도 놀
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척-!
단검을 든 부레이노의 손이 어느샌가 라한의 왼손에 잡혀 있었
다. 부레이노의 빠른 기습보다 더 빠른 라한의 대처였다.
"먼저 공격했으니 절 원망하지 마십시오. "
라한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부레이노의 손목에서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직!
"으악! "
그와 함께 부레이노가 쥐고 있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챙그랑!
"저도좀놀랐습니다. 이렇게 다짜고짜공격해 올줄몰랐거든요. "
"헉, 헉. 손손 좀
"아, 이런. 손목이 부러졌군요. "
라한이 부드럽게 왼손을 풀었다.
부레이노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신음을 흘렸다. 정신 멀정한 상
태에서 타인에 의해 손목이 부러진 부레이노. 의식을 잃지 않은 게
용했다.
"당신 목적이 뭐야?"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수면으로!"
라한의 수면으로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부레이노가 서서히 몸을
뉘었다. 라한의 신화력을 이용한 슬립에 당한 것이다.
"이분 식사비는 제가 내도록 하죠. "
라한이 부레이노가 앉았던 테이블에 2실버를 내려놓고 나왔다.
나름대로 자신이 악당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테세르에게는 그런 행동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은 듯
했다. 이미 질린다는 눈으로 라한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 진짜 악독하다.
부레이노는 휴란트의 정보를 처음 캐낸 사람이다. 라한으로서는
처리해야 할 대상 1순위인 셈이다. 다른 사람 모두 사라져도 그가
다시 휴란트의 정체를 상부에 보고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술집을 나온 라한은 이번에는 엘퐁소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어느 정도 지나오자 테세르가 라한을 조용히
불렀다.
-주인.
"왜?"
-아까 '수면으로' 라고 한 게 신화력을 이용해서 쓰는 마법 시동
어지?
"마법은 아니지만 시동어는 맞아. 그냥 내가 의지를 집중하기
편하게 부르면 되니까. "
신화력은 라한의 의지에 의해 발현된다. 하지만 그 의지를 실체
화할 어떤 연상 작용이 필요하다. 마법에서 파이어 볼을 사용할
때, 불의 형상과 열기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름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
"그게 어때서? 내가 편하면 그만이지. "
라한은 이름을 짓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자신만 연상에 도움이 되면 그만인 신화력의 발현. 괜한 이름 때문
에 고민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름은 뭐가 있는데? 아까 보니까 공간을 넘어서던가?
그것도 있던데?"
"공간으로, 불의 공, 뜨자, 수면으로, 고치기. 뭐 이런 식인데 "
-작명 센스가 진짜 엉망이군 이게 뭐니 이게? 뜨자? 고치기?
뭐든 건성건성
테세르가 라한을 나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라한이 지은 이름은 하나같이 유치했다
"귀찮아. 그냥 이걸로 할래. "
라한은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자신이 생각해 둔 이름에
어떤 연상을 떠올리는 게 익숙해진 탓이다.
만약 지금 시동어를 바꾼다면 그에 따르는 연상을 다시 외워야
한다. 불필요한 일에 두 번 고생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쳇.
"저기군 "
라한이 어느 상점 건물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꽤 멀리서
멈추었기에 아직 라한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 건데?
"지키고 있어. "
라한이 테세르를 남겨 두고 상점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어느 정
도 다가갔을 때 라한이 입을 열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의 말이 끝나자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
라졌다. 인비져빌리티와 같은 투명화 마법의 시전이었다.
-저놈의 시동어. 하여간 유치 빤스다
약 10분 후, 라한이 어깨에 갈색 머리의 말끔한사내를 걸치고
나타났다 10분 만에 저택 안에서 사람을 납치해 온 것이다.
-빨리 끝났네.
"별별 장치를 다 해놨더군. 꼴에 죽기는 싫어 가지고. "
라한이 들어갔다 나온 집에는 특별한 장치가 없었다. 한데 주인
의 방 안. 그러니까 라한의 어깨에 있는 자의 방에는 마법 장치와
각종 물리 트랩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다.
-주인. 이 녀석들 왜 안 죽여? 데리고 다니는 거 너무 귀찮은데.
"쓸 데가 있어서. 가자. "
라한이 처음 사로잡은 사내와 이번에 데려온 사내를 양쪽 어깨
에 둘러멨다. 실제로는 부유 마법과 같은 띄우기를 사용해서 살짝
걸친 모습이었다.
라한은 엘퐁소 지방 외곽에 위치한 버려진 농가에 사로잡은 이
들을 가두었다. 그리고 테세르에게 지키라고 한 뒤,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납치해 왔파.
지금까지 모두 여덟 명. 폭력을 사용해서 기절시킨 사람이 반,
마법으로 수면에 빠지게 만든 사람이 반이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납치된 자들 중 한 명이 라한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이없이 이곳
에 끌려온 게 황당하고 화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야! 조용해. "
"이, 이놈! 내 형님은 이곳 엘퐁소 지방의 유력한 부호이시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헉, 그렇습니까?"
라한이 짐짓 놀란 듯 고함친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사내가 기가 살아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날 풀어주면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난한번한말은지킨다. 물론, 약간의 매질은피할수
없겠지만, 내가 선처를 부탁할 테니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다. "
"오, 정말이십니까?"
라한의 태도가 계속 저자세이자 사내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마치 벌써 풀려난 듯 얼굴 가득 웃음까지 머금은 채였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난 한번 한 말은 지킨다. "
"흠, 그렇군. 근데, 내가 당신을 납치한 건 아무도 모를 텐데.
그냥 당신을 여기서 죽여 버리는 게 더 확실할 것 같아. "
"아, 아니다 날살려주면 매질도 하지 않을뿐 아니라돈도 두
둑하게 주겠다. "
"돈이라 . .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뭔가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사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돈에 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사내는 라한이 돈을 택할 거
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납치된 사람들은 라한이 장난치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보시오. 우릴 왜 납치한 것이오? 우리가 댁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소. "
"정말 몰라? 여기 납치된 애들 잘 살펴봐. 그래도 모르겠어?"
"흠. "
라한의 말에 납치된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아닌
척했지만 대충은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알겠지?"
"나메라 왕국에서 눈치 챈 모양이군. 크크크. 그래, 우릴 고문할
생각인가?"
라한이 납치한 자들은 엘베로의 정보 조직원이다.
남의 나라인 나메라 왕국에서 활개 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
에 그들은 라한을 나메라 왕국의 조사원이나 순찰원쯤 된다고 생각
했다. 그에게 자신들은 자국에 침입한 스파이나 다름없었으니 말
이다.
"고문7"
"훗, 해 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고통을 줘도 우린 배후 인물을
밝히지 않는다. "
배후 인물이라는 말에 라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베사 길드의 정보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말로 비추어보면 나메라 왕국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듯했다. 또 설사 들키더라도 배후는 들키지 않도록 모종의 장치를
한 것처럼 보였다.
한데 베사 길드는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배후와 조
직의 연계 그리고 그들이 모은 정보까지
베사 길드의 뛰어난 실력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배후 인물? 엘베로 얘기하는 거지?"
"그,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걸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시나?"
납치된 자들도 자신들이 정보를 캐고 있다는 게 들켰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 배후 인물이 엘베로라는 건 들키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그 누군가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또, 그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보 조직보다 더 뛰어난 조직이 다크라이더 길
드에서 만든 베사 길드임을 알지 못했다. 또 그들 조직의 꽤 깊숙
하고 높은 곳에 베사 길드원 다수가 활동하고 있음도 몰랐다.
"됐어. 그냥 여기 찌그러져 있어라. 근데 올 때가 됐왔군. "
덜컥!
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세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람 크
기로 몸을 불린 테세르가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가린 모습이었다.
"늦었군. "
-아, 이놈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야.
쿵- !
테세르가 어깨에 걸친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라한은 그
사내의 얼굴을 살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
이제 끝이지?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
라한이 처리해야 할 사람은 모두 아홉 명이다. 이곳에 갇혀서 라
한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모두 여덟 명 나머지 한 명을 납치하
기 위해 테세르가 떠난 거 였다.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 같던데.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이 녀석 얼굴이 왜 이래? 벌집을만들
어놨네. "
-말했잖아, 저항이 너무 거셌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테세르가 데리고 온 사내는 20대 중반의 다부진 체격의 사내였
다 얼굴만 멀정하다면 미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지금 얼굴은 인간으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
다. 눈은 퍼렇게 멍이 들었고 볼은 잔뜩 부어서 얼마나 맞았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항이 너무 거셌다니까.
"알았다, 알았어. "
테세르가 사내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가장 큰 이유는 그 남자
의 외모 때문이다. 라한의 모습과약간닮았다는것. 그하나때문
에 테세르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물론 라한의 본래 모습이 아닌 폴리모프 반지를 사용해서 변한
지금 모습과 비슷한 거였다 30대인 지금 모습이 10년 정도 젊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아마, 지금이 아닌 라한의 본래 모습과 흡사했다면 초주검이 아
니라 이미 시체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뭐 하면 돼?
"서류를 찾아와야지. 넌 여기 지키고 있어. 혼자 갔다을 테니까. "
-얘들하고 좀 놀아도 되지?
"맘대로해. 대신, 죽이면 안된다. 알았지?"
-알았어
라한의 승낙이 떨어지자묶여 있던 여덟 명의 얼굴에 공포가 어
렸다
라한에게는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다. 납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은 사람은 있지만, 이곳에 갇힌 그 순간부터는 물리력에 당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는 왠지 폭력을 행사할 것 같았다. 후드를 완전히
트리는 테세르. 일행은 라한이 이곳에 있어주기를 마음속으로 빌
고 또 빌었다.
"그럼 간다. "
-응 잘 놀다 와.
라한이 사라지자 테세르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헉!"
"크헉 ! "
묶인 여덟 명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온통 검은 테세르의 얼굴 때
문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처음 라한이 신화력을 익혔을 때에는 테세르도 백색이었다. 라
한의 신화력이 여과 없이 테세르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데 지
금의 테세르는 예전과 같은 검은색이었다. 라한이 신화력에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무서워?
"어, 어 어 억 ! "
여덟 명 중한 명이 놀란마음에 의식을 잃었다. 나머지 일곱 명
은 차라리 의식을 잃은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랐다. 그럼 테세르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이히히히. 놀아보자고.
테세르가 묶인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칼 모양으
로 생긴 펜을 꺼내들었다.
"살, 살려주십시오. "
"다 말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묶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머리를 묻고 목숨을
구걸했다. 테세르의 모습이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아는 게 뭔데?
"뭐든 물어만 보십시오. "
-그냥 너희들이 알고 있는 걸 다 불어. 안 그러면
"예. 먼저 저는 21년 전에
라한에게 엘퐁소 지방 영주의 동생이라고 했던 사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털어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상 내력부
터 조직에 대해 아는 정보까지, 아는 정보를 모조리 털어내고 있으
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호, 그래?
테세르가 라한이 두고 간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잡혀
있는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정보의 중요
성 같은 건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 걸 가려낼 능력도 없
는 테세르였다
한편, 테세르를 남걱둔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역으로 이
동했다. 1년 전 제이슨과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이 싸웠던 바로 그
장소였다.
"곧 지나가겠지. "
라한이 땅에 귀를 대고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두두두두두.
일반인은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진동이 땅을 통해 전해져왔
다. 말 서너 필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곧 오겠군. "
엘베로의 정보 조직은 정보를 통신 마법으로 전하지 않는다. 대
륙 곳곳에 통신 가능한 마법사를 보낼 만큼의 여력이 없는 탓이다.
이 때문에 정보가 들어오면 일단 서신에 기록해서 빠른 말로 보
내야 한다.
물론, 엘베로의 비밀이나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대한 일에는 통
신 마법을사용한다. 그만큼 시급한문제이기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베사 길드는 거의 모든 정보를 통신 마법으로 주고받는다.
일개 길드가 한 나라의 국왕이 거느린 정보 조직보다 더 많은 통신
마법사를거느리고 있다는증거였다. 또, 엘베로의 정보조직 보다
더 방대한곳까지 퍼져 있으니 가히 베사 길드의 정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의 모습을 감추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잠깐 기다리
자 빈 말 두 필과 사람이 탄 말 한 필이 라한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오호, 말 두필을 비우고 다니는군. 쾌나 치밀한데. '
말 두 필을 비운 건 갈아타기 위함이다. 라한도 한눈에 그런 상
황을 눈치 챘기에 감탄을 터트렸다.
"워, 워!"
말을 세운 사내가 라한이 있는 곳 부근의 나무 아래에 말을 묶었
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어 눈을 스르르
감았다.
때는 한여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식히고 좀 쉰 후에 다시 출발
할 생각인 듯했다.
'어디 있을까?'
사내가 눈을 감자 라한이 묶어둔 말들을 향해 다가갔다. 신화력
으로 몸을 완전히 감싸서 예민한 말조차 라한이 다가오는 걸 느끼
지 못했다.
'대체 어디 숨걱놨지?
라한이 말에 묶인 가방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살폈다. 한데 아무
리 살펴봐도 휴란트를 비롯한 후계자들의 정보가 적힌 서신을 발견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
라한은 결국 찾기를 포기하고 쉬고 있는 사내에게 걸어갔다.
" 이봐! "
"음냐. "
" 이! "
후다닥!
라한의 연이은 외침에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
리번거렸다.
"누구냐?"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너 몇 살이야?"
"이놈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라한의 앞에 선 사내. 이크샤트의 몸에서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정보 조직원이 가질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호, 기세가 제법 사나운데?"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언제 꺼내었는지 이크샤트의 손에 긴 시미터가들려 있었다. 아
주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검을 꺼내 든 이크샤트. 라한은 그 모습으
로 상대가 예사 정보 조직원과 다름을 눈치 챘다.
'좀 배우긴 했군 '
라한이 왼쪽 발을 뒤로 뺀 채로 손을 가슴 앞으로 두었다. 누구
나 알고 있는 전투의 기본자세였다.
뒤처리
f7
* SCAN0031.PCX *
"부질없는 짓이다. 하앗!"
이크샤트의 시미터가 라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라한
의 목을 완전히 레뚫었다. 아니 레뚫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레뚫은 것처럼 보였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이 없었다. 이 정
도의 움직임으로 피한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윗줄이 분명했다. 거
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이크샤트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라한이 피했음
직감한 것이다.
"쾌나 빠른 출수였다. 또, 잘못됐다는 걸 알고 빠르게 주변을 훌
자세도 괜찮았다. "
라한의 목소리가 이크샤트의 뒤쪽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그 목
소리에 이크샤트가 고개를 들어 라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쉽사리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라한의 차분한
표정과 담담한 목소리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강자임을 직감했다.
이런 상대에게 계속 덤비는 행위는 명을 재촉하는 길밖에 되지 않
는다.
"넌 누구냐?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하나만 넘 겨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
"뭘 말이냐?"
"네가 가진 서신. 내가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
"헛소리! "
외마디 외침을 토한 이크샤트가 다시 전투 자세를 갖추었다 목
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서신은 넘겨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
가 느껴지는 모습이 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네. '
상대의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음에 들었음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서신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미안하군. 묶어!"
라한의 말이 끝나자 이크샤트의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빠르게
가지를 뻗어 그를 묶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이크샤트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마법사?"
"보시 다시 피 . "
라한이 대답하며 이크샤트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서신 비슷한 걸 발견할 수 없었다
"야! 어디 있어?"
"차라리 날 죽여라. "
"이 자식을 그냥 아우, 빨리 내놔! "
"그런다고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죽음은 두렵지 않다. "
이크샤트의 강경한 태도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말로는 안 될 상대였다.
"생각 읽기! "
라한이 이크샤트의 눈을 바라본 채로 시동어를 외쳤다.
생각 읽기! 독심술과 흡사한 라한만의 마법이었다.
"더러운 놈!"
한참 이크샤트의 눈을 보던 라한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무, 무슨 소리냐?"
"쳇. "
라한이 이크샤트의 하의를 내려 속옷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크샤트가 자신의 속옷 안에 서신을 숨겨둔 모양이다.
"으, 드러. "
라한이 이크샤트의 속옷 안에서 누런 봉투를 찾아냈다. 쾌 오랫
동안 안 씻었는지 땀 냄새와 그곳의 냄새가 섞여 상당히 묘한 향기
가 코를 자극했다.
라한이 봉투를 꺼내 들자 이크샤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약
간 붉어진 얼굴
자신도 속옷 안에 서신을 숨긴 게 약간은 수치스러운 듯했다.
찌직!
"어디 보자. "
라한이 봉투를 찢어 안에 있던 서신을 꺼냈다. 모두 두 장이었
다. 라한은 그 중 첫 장에 쓰인 내용을 먼저 읽었다.
-오늘 드디어 나메라 왕국의 군사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이 정도
정보면 루이나 왕국과 협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루이나 왕국과 협상을 해?"
라한이 의문을 터트리며 이크샤트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보
면서 품속에 있던 에테로의 쪽지를 꺼내들었다.
"다르네. "
에테로가 준 쪽지에는 서신을 전하는 사람의 몽타주도 함께 들
어 있었다. 한데, 그 몽타주의 얼굴과눈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잘못 골랐군. 너 누구냐?"
"말할 수 없다. "
"너 루이나 왕국의 세작이 아니로군. 넌 대체 누구냐?"
"차라리 날 죽여라. "
"독한 놈이네. 계속 보면 알겠지. "
라한이 이크샤트에게서 시선을돌려 서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래 내용은 나메라 왕국의 군사 정보입니다. 베센 왕국의 영
광을 위해서 미 한 목숭 바칠 각오가 래 있습니다. 그럼 띠만
밝은 달빛 아래에서 베센 왕국의 부활을 꿈꾸며
헤피에하 파을 올림
서신을 읽으면서 라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헤피에타 파올.
한때 라한의 일행을 따라다녔기에 라한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샤르비엘 후작이 라한을 감시하라며 보냈던 5서클 마법사. 그가 베
센 왕국에서 나메라 왕국에 보낸 세작이라니 예상 못한 정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군. 그래, 남부 지방의 방언을썼다는 얘
기를 들었을 때 의심해 봤어야 했어. '
현재 베센 왕국은 루이나 왕국에게 북부 지방을 내주고 세력이
약해졌다. 왕국이라는꼬리표를달고 있지만, 웬만한소국보다못
한 상태가 베센 왕국이었다.
"이봐. 뭔가 이상하군. "
"아무것도 묻지 마라, 난 대답하지 않는다. "
"베센왕국은 대륙중부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고. 근데, 나메라
왕국은 대륙 중북부 지방이거든. 베센 왕국에게 나메라 왕국의 정
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 "
"멍청이로군. 루이나 왕국과의 협상에 쓸 정보다. "
"아, 그렇군 "
라한의 담담한 물음에 이크샤트가 되받아쳤다. 어차피 서신에
있던 내용을 그대로 읖은 정도이니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 정도 정보를 아는 걸로 봐서는 그 역시 단순한 정보 전달자는 아
닌 듯 보였다.
"흥. 넌 누구냐? 내가 알고 있는 나메라 왕국의 인물 중에는 너
같은 실력자가 없다. 넌 누구지?"
"뭐, 나메라 왕국 사람은 아니다. 풀어줘!"
짧게 대답한 라한이 좀 전에 시전했던 마법을 없앴다. 갑자기 주
어진 자유에 이크샤트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날 왜 풀어주지?"
"내가 찾는 녀석이 아니거든. "
"진짜 나메라왕국 놈이 아닌 모양이군. 넌 누구냐? 너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
"신분을 묻기 전에 자기 신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이크샤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게 꺼려지는지 쉽게 입을 열
지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그리 궁금하진 않거든. "
"난베센왕국의 이르나백작이다. 이크샤트이르나. 그게 내 이
름이다. "
이크샤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보다 상대에 대해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단 한 차례 충돌이었지만, 라한은 쉽게 볼 수 있는 마법사가 아
니었다. 특이한 시동어와 빠르고 정확한 마법 구사. 어쩌면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대마법사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하나만 더 묻자. 너 파올하고 친해?"
"파올은 내 직속 부하다. "
"그럼 내 이름을 들어봤겠군. 라한. 그게 내 이름이다. "
"라한? 헛소리. 내가 아는 라한이라는 자는 20대 초반의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다. "
이크샤트는 라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현재 라한의 외모가 30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라한 역시 굳
이 폴리모프를 풀어서 확인시컥줄 생각은 없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난 라한이 맞다. "
"흠. "
이크샤트가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듣기로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반역자인 필슨 가문 사람이다. 즉,
루이나 왕국에게 땅을 내어준 베센 왕국과는 한편이라고 봐도 무방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한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루이나 왕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훗, 내가 당신 나라를 도왔으면 좋겠지?"
라한은 이크샤트의 표정과 뒤바펀 말투만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
챘다.
누구나 핵심이 찔리면 뜨끔하는 법. 이크샤트도 자신이 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의도를 들키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소. 당신도복수할수 있고우리 베센 왕국도큰 힘을
얻으니 서로 좋은 것 아니겠소?"
"복수? 어떤 식으로?"
"잘하면 당신이 루이나 왕국 거대 영지의 영주가 될 수도 있소. 물
론 우리 베센 왕국이 루이나 왕국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았을 때 가능
한 얘기겠지만. 어찌 췄든 서로에게 좋은 일인 건 확실하지 않소?"
"하하하하하. "
이크샤트의 말에 라한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 정도가 복수라니.
그런 식의 복수라면 지금 당장 엘베로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비
틀 능력이 라한에게는 있었다.
"왜 웃는 것이오?"
"비록 엘베로 때문에 가문을 잃었지만 나 역시 루이나 왕국의
국민이다. 내가 너희를 도와서 루이나 왕국에 해를 가할 것이라 보
는가?"
"그래도 루이나 왕국은 당신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소? 내 국
왕 전하께 말해서 당신에게 백작의 작위를 부탁해 보겠소. 아니,
후작의 작위를 내려달라고 말할 수도 있소. 당신이 큰 공을 쌓는다
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오. 어떻소? 우리 베센 왕국을 위해 힘쓰
지 않겠소? 서로에게 좋은 일인 듯싶은데. "
이크샤트의 말이 이어지자 라한도 슬슬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 분노를 담아 이크샤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봐. 난루이나왕국의 국민이다 그 빌어먹을 엘베로 때문에
가문이 망했지만, 그래도 난 루이나 왕국의 국민이다. 내 나라가
제아무리 엿 같고 역걱워도 내가 태어난 땅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란말이다. 애국심?그딴 건 나도잘모른다. 하지만 내 조국
에 해를 가해선 안 된다는 건 잘 안다. "
"그래도
라한도 루이나 왕국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을뿐, 나라에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으니 말
이다. 거기다 엘베로라는 원수가 왕국의 국왕으로 앉아 있으니 정
이 안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을 다른 나라에 팔아먹을 수는 없었다. 제아
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이 루이나 왕국의 국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는 개뿔이 너한페 베센 왕국을 배신해서 해를 가하라
고 한다면 넌 할 수 있어?"
"베센 왕국은 내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소. "
"닥쳐라, 내 손으로 빌어먹을 루이나 왕국을 망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나라에 팔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
"그래도
"야! 너 가! 여기서 그만주절대고빨리 꺼져. 마음바러면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
틱-!
라한이 뜯었던 서신을 이크샤트에게 던졌다. 그리고 살기를 일
으컥 이크샤트를 압박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살기에 이크샤트가 서서히 됫걸음질 쳤다.
난생 처음 겪는 강한 살기에 살갗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가, 가겠소. 가겠소. "
이크샤트가 가까이 있는 말에 올라타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두
필의 말은 손도 대지 않고 달려가는 이크샤트. 살기에 눌려 미처
말을 다 챙길 수 없었음이다.
"빌어먹을. "
이크샤트가 멀어지자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괜히 꿀꿀한 기
분에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었다.
득프든프든프글!
그렇게 한참 돌부리에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말발굽소리가 들
려왔다. 아직 쾌 먼 거리였지만, 말의 속도를생각해볼 때 그리 오
래 지나지 않아서 이곳에 도달할 성싶었다.
라한은 지금 달려오는 말에는 자신이 기다리던 이가 타고 있으
리라 생각했다.
"투명해지기. "
몸을 숨긴 라한이 좀 전에 숨었던 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기댔다.
히이이 잉!
"워워!"
라한의 앞부분에서 달려오던 사내가 말을 멈추었다.
라한이 있던 곳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라 쉬기 딱 좋았
다. 이 때문에 한여름에 말을 달리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에
서 땀을 식혔다가 간다. 라한도 이 점에 착안해서 여기서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이번에는 정확하군. '
좀 전에 확인한 몽타주와 일치하는 사내였다. 이번에야말로 휴
란트에 대해 적힌 서신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거로군. '
이크샤트와 달리 이번에 나타난 정보원의 서신 관리는 형편없었
다. 말 옆에 달린 가방에 단추도 채우지 않은 채로 어설프게 서신
을 넣어둔 것이다. 이크샤트가 좀 지저분하긴 했어도 정보원으로
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할 듯했다
'뜨자. '
라한이 부유 마법과 흡사한 방법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전히
'투명해지기' 를 취소하지 않은 상태라서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공중에 떠오른 라한이 나무 수풀 사이에서 서신을 꺼내 읽었다.
네 명 남은 후계자 후보들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었
다. 물론 휴란트가 필슨 가문의 후손이라는 얘기도 함께였다.
'맞군 이걸 어떻게 바꾸지?음카테슈?이거 좋군. 카테슈로
결정. '
라한이 휴란트의 가문 항목에 필슨 대신 카테슈라는 가상의 가
문을고쳐 넣었다. 신화력과 라한의 세밀한손놀림이 결합되어 거
의 완벽한 조작이 이루어졌다.
카테슈는 카라한, 테세르, 슈라. 세 명의 이름중 첫 글자만섞
어서 만든 가문명이다. 처음에는 카테슈가 아닌 '카슈'라는 가문
을 만들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말썽만 피우는 테세르가 못미더
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있어서 차마 테세르를 제외시키지 못
했다. 당장은 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용솟음쳤지만 억지로 끼워 넣
은 셈이다.
'테세르. 너 운 좋았다. '
라한은 서신을 완벽하게 수정하고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
다. 그동안 정보를 전달하던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코까지 골고 있
었다. 정보 보안에 신경 써야 하는 자신의 직무를 완전히 내팽개친
모습이었다.
'엘베로. 네가 키운 놈들은 네놈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구나. '
라한이 엘베로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마저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힘으로 현자의 지위
에 올랐고 또 국왕이 되었다. 정치적인 수완만큼은 라한보다 휠씬
뛰어난 셈이다.
'얼마 안 남았다. 공간으로! '
결의를 다진 라한이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서신을 가지고 있던
자는 라한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다시 이동했다. 라한
이 서신을 보고 고쳤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채로.
라한이 뿌듯한 얼굴로 인질을 잡아놓은 곳에 들어섰다. 라한의
등장에 테세르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미가 가득했다.
반면, 인질들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한이 없
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시달린 모양이다.
"얼굴들이 왜 이래?"
-얼굴? 누구? 나?
테세르가 짐짓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라한의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이상하네. 폭력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인질들의 얼굴은 깨끗했다. 라한이 갈 때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
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표정에 공포와 고마워하는 감정이
묘하게 려여 있다는 정도였다.
"너하고 저 사람들 전부 다. 표정이 왜 이래?"
-표정이 어때서? 아무 일도 없었는걸.
"네 얼굴은 마치 뭔가를훔친 사람 같은 얼굴이고 저 사람들은
마족에게 쫓기다가 영웅이라도 만난 얼굴 같잖아. "
대충 찍은 말이지만 라한의 말은 거의 들어맞았다.
인질들은 테세르의 검은 얼굴과 외모 때문에 그를 마족으로 판
단했다. 라한이 영웅이 아니라는게 다르기는하지만, 일단그들을
마족의 공포에서 건져줄 사람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인.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이 영웅이라는 건 그렇다 치고
내가 마족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저 사람들 얼굴이 꼭 그렇잖아, "
-우씨. 라한주인. 난정령이라고. 오히려 마족에 더 가까운건
주인이잖아. 투바도 마족이고 주인도 이마에 마족의 낙인이
"야! "
라한이 소리쳐서 테세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나을 말 다
나왔으니 너무 늦은 셈이다.
"컥!"
"히억!"
역시나 테세르의 말을 들은 인질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얼굴도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 어 주인. 고의가아니었다. 그러니까어미안해. 주
인의 정체를 발설하면 안 되는 건데 진짜 그게
"너 그 입 안 다물래?"
-아, 입? 알았어.
테세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라한은 점점 마족으로 굳어졌다. 참
담한 기분이 었다.
신화력을 익히면서부터 라한은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을 종종해 왔다. 스스로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
섰다는 생각 패문이다.
그 후부터 라한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도리라는 걸 지키려고 노
력했다. 나름대로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으로 굳어지는 일까지 벌어지다니. 그 대상
이 테세르만 아니면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이봐요. 설마 저 시커먼 놈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라한이 인질들에게 슬쩍 물었다. 하지만 인질들중에 라한의 말
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몸을파르르 떨며 어쩔 줄몰라
하는 인질들. 죽음보다 더한 공포에 할 말을 잃은 모습이 분명했다.
'테세르 저 자식. 내가사고 칠 줄알았어. 그냥 카슈라고 적을
걸. '
짜증이 나자 테세르를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후회스러웠다. 다
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또 그대로 할 테지만 어찌 됐든 지금
심정으로는 테세르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말한다고 믿을 리도 없고. 에고 모르겠다. 테세르! 이 사람들
알아서 들쳐 업어. "
-아홉 명인데?
"알아서 업어. 문어처럼 몸을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업어. "
-알았어.
라한이 인간이고 싶어 한다면 테세르는 라한이고 싶어 하는 경
향이 강하다. 팔두 개, 다리 두 개, 머리 하나. 이런 형태를유지
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한데 아홉 명의 사람을 업고 가려면 사람의 형태로는 불가능하
다. 결국 괴물처럼 변해서라도 업으라는 얘기였다.
"빨리 안 해?"
-해. 한다고.
테세르의 몸이 옆으로 쭉 늘어났다. 그 몸에서 촉수 같은 것이
하나씩 나오더니 이내 문어 같이 난잡한모양으로 변했다. 머리가
없고 다리만 아홉 개 달린 묘한 괴물의 형상이었다
"으헉!"
" 크윽! "
테세르의 변한 모습에 그나마 이성을 찾고 있던 인질들도 모조
리 의식을 잃었다. 라한이 보기에도 괴물 같기는 괴물 같았다.
츠르르륵!
-다 들었다.
테세르가 의식을 잃은 인질들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아홉 개의
다리에 각각 한 명씩의 사람 거대한 옥토퍼스에게 당하는 어부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간다 다 함께 공간으로
라한이 광범위 매스 텔레포트와 흡사하게 신화력을 사용했다
순간 백색 빛이 터져 나오며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빛이 사라지
자 라한과 테세르 인진들 그리고 이곳에 남겼던 따스한
온기마저 함께 사라졌다
로테마이어스가본 라한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로테마이어스가 차가운 표정으로 주변 드레곤들을 부러 모았다
정보담당인 아카폴리안 감시와 전투을 담당하은 에스타리스 빌
리마니 등등 열마리가 넘는 드레곤들이 로테마이어스 앞에 도열
했다
아카폴리안
예 로드님
새로운 정보는
라한이라는 인간이 돌아왔습니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착잡하게 변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라한 애기만 나오면 이런 표정이 저절로 지어졌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라한이라는 존재를 두러워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어디 갔다 왔는지는 파악췄느나?"
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쓰는 방법이 좀 특이해서 마나
의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
"역시 그렇군. "
로테마이어스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다. 자신조차
도 라한이 어떤 식으로 공중으로 떠서 달렸는지 모르는 터. 자신보
다 약한 아카폴리안이 라한의 방법을 알아낼 리 만무했다.
"추측되는 일은?"
죄송합니다, 로드님. 뚜렷한 단서가 없는지라 하지만 이
번에 사라졌다가 나타난 이후에 아홉 명의 인간을 데리고 나타났습
니다. 여러 정령들의 말을종합해 보면 인질로 보입니다만, 그 역
시 확실한 건 아닙니다. "
"흠. "
로테마이어스의 침음성에 주변 드래곤들이 몸을 움찔했다. 답답
한 마음에 자신들에게 화풀이할까 두려웠음이다.
.로드님. 오늘 이 자리에 저희들을 모이라고 하신 건
"카이렌. 그 녀석을 오늘 처리할 생각이다 "
.역시 그렇군요. 저기 로드님. 이번 일은재고해 주셨으면 좋겠
습니다 "
"재고? 무슨 말이지?"
아카폴리안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의문을 재기했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그 자체로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이번 일에
막연한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카폴리안의 정보력에
대한 믿음도 일조했다.
"카이렌 일행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합니다 "
"무슨 함정이라도 파고 있는 건가?"
"그게 더 이상합니다. 너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도 로드님
이 찾아갈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도무지 어떤 행동을보이지 않습
니다. 그건 아무래도
"이미 모종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겠지, "
아카폴리안의 말을 로테마이어스가 받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다른 드래곤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로드 로테마이어스가 카이
렌 일행을 신경 쓰고 있다니. 그들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
신들이 아는 로테마이어스라면 당장 찾아가서 그곳을 불바다로 만
들어야 정상이 었다.
"그래도 간다. "
"로드님. "
"아카폴리안! 넌 우리 로드께서 그 녀석들을 피하기라도 해야
한다는말이냐?로드님. 명령만내려 주십시오. 제가당장찾아가
서 깡그리 정리해 버리겠습니다. "
화이트 드래곤 에스타리스가 답답함을 그대로 표출했다. 하찮아
보이는 엘프 일행을 신경 쓰는 게 짜증 났던 모양이다.
"에스타리스. 이번 문제는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
"닥쳐라. 넌 우리 드래곤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린 물질계 최
강의 존재 드래곤이다. 고작 하찮은 엘프 놈 때문에
"그만. 난 너희들에게 이곳에서 싸우라고 허락한 적이 없다. "
둘의 싸움을 로테마이어스가 제지하고 나왔다.
요즘은 되는 일이 없었다 당최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종잡
을 수 없는 라한도 그랬고, 세력을 키우고 있는 카이렌 일행도 마
찬가지였다 또, 골렘이라는희한한마법 무구를준비한류카라한
일행도 별 다르지 않았다. 이래저래 일이 자꾸 꼬이는 느낌에 짜증
이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로드님. "
"용서해 주십시오. "
"됐다. 에스타리스. 카이렌 일행을처리할자신이 있느냐?"
"맡겨만 주십시오. 그들의 목을 로드님 앞에 바치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대타를 보내는 거
였다. 혹시 모를 위험에서 몸을 빼고 카이렌의 실력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빌리마니. 너도 같이 가라. "
"알겠습니다, 로드님. "
"로드님. 저 혼자서도 충분히
"그만. 난 마음을 굳혔다. "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확고한 말에 에스타리스도 뜻을 굽힐 수밖에 없
었다.
카이렌 일행의 문제가 정해지자 이젠 라한에 대한 문제가 남았
다. 그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한에게는 누가 가기로 했지?"
"리투미아와 벨라루스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
"리투미아, 벨라루스. 자신 있느냐?"
로테마이어스가 왼쪽에 선 드래곤들을 보며 물었다
"반드시 그 녀석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
"맡겨만 주십시오. "
리투미아와 벨라루스가 확신에 찬 대답을 해왔다. 그 말에 로테
마이어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라한은 쉽게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우려를 표했음에도 그들의 표정에는 걱정
하는 기색이 없었다.
라한이라는 존재 자체를 우습게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라한은 아니다. 됐다. 그만 가 봐라. "
"네. "
로테마이어스의 말이 떨어지자 카이렌 일행을 맡기로 한 에스타
리스, 빌리마니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 뒤를 라한을 맡기로
한 리투미아와 벨라루스도 따라 나갔다.
걱정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네 명의 드래곤. 로테마이
어스는 왠지 이번 일에서 큰 피해를 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라한과 카이렌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
"그 말씀은
"저들과 그놈들의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네가 그들을 데리
고 도주하라는 뜻이다. "
로테마이어스도 이런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너무
불안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하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를 따르는 드래곤이라고 해 봐야 걱우 열둘. 그 중 넷을 한순
간에 잃는다면 세력의 3분의 1을 잃는 셈이었다. 거기다 패배의 충
격을 더하면 세력의 반 이상을 잃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어야 할 싸움이고, 패한다하더라도 피해는 어떤 식으
로든 최소화시컥야 했다.
"로드님. 전 로드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현재 저들 세력 중 가장 강한 곳은 류카라한이 이끄는 곳입니
다. 카이렌 세력과 류카라한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카이렌이 가진 힘은 류카라한에게 한참 못 미칩니다. "
"그렇겠지. "
"한데, 류카라한이 아닌 저들에게만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습
니다. 또 류카라한과 카이렌의 싸움은 저희에게 이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대적으로 저희가 강해질 텐데 왜
굳이 그들과 싸우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오래전부터 가졌던 의문점이다. 류카라한이 가진
세력은 새로 얻은 병력을 제외시키더라도 녹록지 않은 세력이다.
굴레를 벗은 존재만 무려 여덟 명. 개개의 능력이 드래곤에게 크
게 뒤지지 않으니 엄청난 힘을 가진 세력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카이렌 일행 중 굴레를 벗은 존재는 고작 두 명. 카이렌과
프라하뿐이다. 마족으로 알려진 투바와 뒤늦게 가담한 루이에를
포함하더라도 네 명밖에 없는 셈이다.
"카이렌은 단순히 굴레를 벗은 존재 한 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
"하지만 류카라한 역시 단순히 굴레를 벗은 존재 한 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합니다. "
"하하하하. 넌 카이렌에 대해 너무모르는구나. 하긴 그놈은네
가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놈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흠, 류
카라한이라 그래, 그 녀석도 제법 강한놈이지. 하지만 카이
렌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류카라한 같은 놈 둘 정도는 덤벼
야 걱우 동수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놈이 카이렌이다. "
아카폴리안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 정도로 강할 줄
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아카폴리안도 카이렌과 류카라한의 과거 기록을 본 적이 있었
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보며 카이렌과류카라한을 거의 같은 선
상에 두고 파악했다. 아니, 실제로는류카라한을조금 더 높게 보
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크게 부풀리기를 좋아한다. 특히 강
자가 등장하면 그를 영웅시해서 실제 실력보다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엘프인 카이렌의 행적은 오히려 축소되어 기록되었다. 폭
력과 거리가 먼 종족인 엘프. 때문에 카이렌의 행적을 축소시키는
그 자체가 엘프의 치부를 감추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드님. 카이렌의 실력을 십분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류카라한
의 세력이 더 크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릿수에서 이미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요. "
"그래. 실제 싸운다면 류카라한의 세력이 이기겠지. 하지만 류
카라한 그놈들은 내부가 결속되어 있지 않아. 모래로 지은 성과 비
슷한 거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허물어지게 될 거다. "
로테마이어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실제로 류카라한을 마음으로 따르는 이는 라이칸드로프인 이리
아나 케이플과 돈네리아 미스티크뿐이다. 아카폴리안은 이 현상을
강자를 숭상하는 라이칸드로프의 습성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이 역시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반면,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다섯 명의 존재들은 류카라한을 껄
끄러워했다 당장 드래곤과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류카라한을 무너
뜨리기 위해 궁리를 짤 그들이었다.
물론, 류카라한을 포함한 세 명의 세력이 잉글리아트 일행보다
더 강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암습이나 기습을 랙한다면 승부를 장
담하기 힘들었다. 자칫하면 내부 분열이 공멸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 그렇군요. "
"하지만 지금 류카라한 놈들은 강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드래곤
들을 쉬이 싸움에 투입하지 못하는 거고. "
"알겠습니다, 로드님. 한데
로테마이어스도 이런 식으로 질질 끄는 싸움은 좋아하지 않는
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드래곤들을 대동하고 싹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의 힘은 너무 강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이겨도 손해였다. 자칫 이기더라도 자신을 따르
는 드래곤의 반 이상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한데?"
"로드님의 판단으로 보자면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 카이렌 일
행에게 간 건 너무 위험한 행동 아닙니까?"
"이기지 못할 게다. "
"그런데 왜?"
"그들은 카이렌이라는 존재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어. 몸으
로 느끼게 해 줘야지. "
로테마이어스는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 카이렌 일행을 어떻
게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다. 한데도 그들을 보낸 건 두 가지 생
각에서였다.
첫째는 자신을 따르는 드래곤에게 상대의 힘을 깨닫게 해주는
것. 그래서 다시는방심해서 당하지 않도록하는 거였다. 물론운
나쁘면 두 명의 드래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릴 수만 있다면 이번 일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클 게 분명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상대를 우습게 보는 드래곤은 없
을 테니까.
둘째는 카이렌의 힘을확인할수 있다는 데 있다. 로테마이어스
조차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카이렌의 실력. 어쩌면 굴ㄹ11를 벗은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카이렌을 제대로 팍악할
수 있다면 나머지 싸움은 쉽게 해결될 거라 믿었다.
'문제는 라한 그놈인데. '
카이렌의 실력을 알아내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라한.
도무지 어떤 방법으로 힘을 쓰는지, 정말 마법사가 맞는지조차
의문투성이인 존재가 라한이었다. 그의 실력을 알아내기 위해 리
투미아와 벨라루스를 보내긴 했지만, 그들이 라한의 실력을 파악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프리미아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았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로이나님의 레어를 들른 후로는 흔적이
완전히 지워져서 죄송합니다. "
카이렌 일행을 떠났던 프리미아와 레테아는 먼저 로이나의 레어
부터 방문했다. 그곳에서 잡기에 능하다는골드 드래곤 베르
네미스를 만났고, 그에게 드래곤의 흔적을 없애는 도구를 얻어갔다.
그때부터 프리미아의 행적은 드래곤들의 이목에서 완전히 사라
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챌 수 있는 드래곤 고유
의 기운 한데 다른 드래곤들이 풍기는 기운을 프리미아만 풍기지
않고 있으니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드래곤이 근처에 나타났
을 때, 몸을 숨기면 그만이었으니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
는 한 찾는 건 요원해 보였다.
"베르네미스. 그놈 짓이겠지. "
"그런 걸로 보입니다. "
"베르네미스. 두고 보자. "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 그는 오래전부터 드래곤 사이에서 이
단아라 불렸다. 늘 사고만 치고 다녔고 별 희한한 연구 때문에 산
을 시끄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만큼은그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한데 지금 순간만큼은 베르네미스라는 존재가 성가시기 그지없
었다. 그만 없었으면프리미아를 일찌감치 찾았을테고, 그럼 카이
렌 일행과 함께 지내는 동안 얻어낸 단편적인 지식이라도 얻었을
터였다.
"계속 흔적을 찾고 있으니 곧 어떤 소식이 있을 겁니다. "
"됐다. 프리미아에게는 신경 끄고 카이렌 그놈들과 싸우기로 한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 그리고 라한과싸우기로 한 리투미아, 벨
라루스를 살려서 복귀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라. "
"알겠습니다. "
예전에는 라한에 대한 정보를 캘 패 정령왕을 이용했다. 이 때문
에 라한의 행적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한데 얼마
전부터 정령왕들이 라한을 훔쳐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최상급 정령 역시 라한에 대한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라한에 대한 정보 수집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래도 상급 정령을 이용한 정보 수집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탓이다.
무엇보다 정령왕들의 선언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정보 담
당 아카폴리안이 아닌 로테마이어스였다. 안 그래도 실력을 종잡
을 수 없어서 신경 쓰였던 상대가 라한이다. 한데, 정령왕들마저
돕고 있으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그놈이 대체 뭔데
로테마이어스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하자 아카폴리안이 조심스
럽게 레어를 나갔다. 아무리 로테마이어스를 존경하는 그라도 괜
한 불똥에 화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음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인질들을 골방에 처박아 놓고 며칠
째 시간만 보냈다. 막상납치를 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처리할
지 결정하지 못해서였다.
-주인. 저놈들 그냥 둘 거야?
"왜?"
-밥만 축내잖아, 그냥 처리해 버리자.
"너 정령 맞아?"
테세르의 말을 라한이 황당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어떻게 된 게
정령이라는 놈이 인간인 라한보다 더 죽이고 싶어 안달이니.
-주인답지 않게 왜 그래? 그냥 죽여 버리자.
" 시끄러 . "
라한도 요즘 행동이 평소의 자신과 많이 다르다는 걸 잘 알았다.
물론, 의도적으로 인간적이고 싶어 하는 라한의 마음이 반영된 결
과였다.
-그럼 어쩔 건데?
"생각 중이야. "
처음에는 저들의 기억을 일부만 지워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휴란트에 대한 정보가 그들에게는 단순한 정보 그 이상이 아니기에
지우는 것도 쉬울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가 라한의 정체에 대해 묘한 소리를 하면서부터
일이 틀어졌다. 라한이 마족이라는 테세르의 헛소리가, 그들의 뇌
리에 충격적인 사실로 박혀 있을 터. 아무리 라한이라도 지우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골치 아프군. 그냥 강행해 버려?'
두 기억을 모두 지우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패 확률이 너무높았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완벽하게 지우
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평시에는 몰라도 꿈을 꾸거나 어
떤 계기가 생기면 지웠던 기억이 온전히 살아나 버리는 것이다.
'테세르의 말처럼 그냥 죽여 버려?'
라한도 인질을 처음 잡아왔을 때, 그냥 죽여 버릴 작정을 했었
다. 그렇지만이내 고개를젓고는한숨을푹푹쉬었다. 살인이라는
해결책이 내키지 않은 탓이다.
'방법이 없을까? 음 아! 그렇군. '
"테세르. "
-어?
"가서 에테로 좀 불러와. "
-어? 알았어.
테세르가 사람 크기로 몸을 불린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테세르는 근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거리를 생각하
면 상당히 빨리 온 편이었다. 테세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에테로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온 듯했다
"돌아왔구먼. 그래, 일은잘해결됐는가?"
"돌아온 건 며칠 됐습니다. 일도 거의 해길됐고요. "
"날 부른 걸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말해 보게. "
"그게 저 ."
라한이 인질을 데리고 오게 된 경위를 차례로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에테로가 의문을 품고 라한을 바라봤다.
"얘기만 들어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
"저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젭니다. "
"그냥 죽여 버리면 될 것을 뭘 그리 고민하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그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그 말 진심
이냐고 묻는 눈빛이 었다.
라한의 눈빛에 에테로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허. 그눈좀풀게. 이거 부담스러워서 원. 미안하네."
"전, 절 시험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
"알겠네, 알겠어. 그러니 그눈에 힘 좀풀게."
에테로가 죽여 버리라고 말한 건 라한의 심성을 알아보기 위해
해 본 말이었다. 라한도 그 말을 바로 짐작하고 오히려 에테로를
압박한 것이다.
"그럼 해결책을 내주시죠. "
"그 눈빛이 무서워서라도 말해야겠구먼. "
"그래주시면 고맙죠. "
"그냥 저들을 우리가 데리고 가겠네 그럼 되지 않겠는가?"
에테로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너무 쉬워 보이는 단순
한 대답에 오히려 라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고민했었는데, 저렇게 쉽게 대답해 버리다니. 며칠 동
안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빌어먹을. '
"데려가서 어쩌실 겁니까?"
"우리가 정보 길드라는 걸 잊었는가? 저들을 다시 교육시켜서
우리 정보원으로 쓰면 그만이지 뭘 그러는가? 잘하면 저들에게서
엘베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고. 이래저래 우
리에겐 좋은 일이지. "
막상 대답을 들으니 정말 간단한문제였다 어차피 저들은 정보원
으로 키워졌다. 그리고 정보를 팔아 돈을 번 사람들이다. 직장을 엘
베로 정보 조직에서 베사 길드로 바찐주면 그만인 문제였다.
물론 엘베로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어서 베사 길드에 오히려 해
를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에 대한공포심과 베사 길드의 철
저함이 적절하게 결합된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그렇 .군요. "
"그 문제 말고는 더 할 말 없는가?"
"예. 없 아,혹시 베센왕국에 대해 아십니까?"
"베센? 거긴 루이나 왕국에게 영토의 반을 잃은 나라 아닌가?
이미 세가 기울어서 약해진 곳일 텐데. "
베센 왕국의 몰락은 대륙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 몰락이 루
이나 왕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건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지금 베센 왕국은 루이나 왕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까지 몰락했다
더 이상 대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인 베센 왕국. ell
테로는 라한이 왜 그 나라를 언급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베센 왕국의 세작을 만났습니다. "
"세작?"
"예. 나메라 왕국에 세작을 보냈더군요.
흠, 역시 베센 왕국이 그리 쉼게 영토를 포기할 리 없지
다른 사람들은 베센 왕국을 이미 무너진 나라라고 평가했다 하
지만 에테로는 좀 다르게 판단했다.
순식간에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통의 강호라고 할 수 있
는곳이 베센 왕국이다. 그런 나라가 자기 영토의 반 가까이를 잃
고 주저앉아 있을 리 만무했다.
.예. 땅을 되찾으려고 노력은 하더군요. 근데 방법이 잘못됐습
니다. "
.무슨 발법을 택했던가? 혹, 비밀리에 군사라도 키운 건가?"
.아닙니다. 루이나 왕국에 다른 나라의 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거래를 통해서 되찾으려 하더군요. "
"멍청한
에테로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고할 여지도 없이
잘못된 판단이었기에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예. 멍청한 판단이죠. "
.루이나 왕국이 타국을 점령해서 더 강한 힘을 얻으면 오히려 힘
들어지는 건 베센 왕국이거늘, 어찌 그런 멍청한 판단을 했는지.
쯧쯧. 이게 다 그 썩어빠진 류칸트 공작 때문이지. "
에테로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에 라한도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재차 물음을 던졌다.
"류칸트 공작이 누구죠?"
"베센 왕국 유일한 공작일세. 원래는 두 명이었는데 루이나 왕
국과의 전투에서 한 명이 죽고 이제 유일한공작이 된 놈일세. 현
재 베센 왕국의 실세라고 할 수 있지. "
"근데 그가 왜요?"
"전통적으로 베센 왕국에서 공작을 지냈지만 자국에 불만이 많
것 같더군 하긴자기 뜻대로안되니 화가났던 거겠지 "
"그가 원하는 게 뭔데요?"
"해군 통수권. "
류칸트 공작은 베센 왕국의 실세 중에 실세이다. 그를 따르는 귀
족이 왕국 귀족의 반이 넘으니 가히 엄청난 세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그도 베센 왕국에서 갖지 못한 게 딱 하나 있다. 군사 통치
권. 이미 약해질 대로약해졌지만, 해군력만큼은대륙최강인 나라
가 베센 왕국이다. 이 나라의 해군 통솔권은 타국의 해군 통솔권과
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해군 통솔권?"
"그렇네. 베센 왕국의 해군은 대륙 최강이라불러도 과언이 아
니야. 대륙최강의 기사단을꼽을때, 카르왕국과베루니아왕국,
케라스 왕국. 이 세 나라가 경합을 벌이지만, 해군력은 베센 왕국
에게 견줄 만한 나라가 없네. 말 그대로 최강이라는 얘기지. "
"해군 통솔권을 달라고 했는데 허락을 받지 못한 거군요. "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베센 왕국의 해군 통솔귄은 전통적으로
왕실의 피가 섞인 사람이 맡아 왔거든. 제아무리 류칸트 공작이라
도 해군 통솔권을 얻어낼 수는 없었을 게야.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
에테로가 라한의 호기심을 조금씩 자극해 왔다 어차피 현재 라한
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에테로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방법이 뭐죠?"
"베센 왕국이 무너지면 되는 거야, 좀 더 정확하게는 베센 왕국
의 왕조가 무너지면 되는 거지. "
"그럼 류칸트 공작이 배신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직 거기에 대한 정보는 없네. 하지만 캐려고만하면 그리 오
래지 않아서 캘 수는 있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테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류칸트 공작의 배신. 그것도 적국인 루이나 왕국과 손을 잡았다
확신이 서 있었다
"에테로님의 말투를 들어보니 루이나 왕국을 의심하고 있나 보
군요. "
"그럴 수밖에 없지 최근그가펼친 정책들이 전부그렇거든. 전
쟁 중에 베센 왕국의 국왕이 죽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휘둘리지는
않았으련만. 안타깝군. 안타까워. "
베센 왕국의 전대 국왕은 루이나 왕국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
었다. 지금은 고작 나이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베센 왕국의 국왕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 물론 귀족들이라도 똑똑하면 그나마 정치
가 안정될 수 있겠지만, 현재 왕궁에 출입하는 고위 귀족의 반수
이상이 류칸트 공작의 편이다. 류칸트 공작이 정책을 마음대로 농
락할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주어진 셈이다.
"류칸트 공작이라 에테로님. 그에 대해 조사해 주십시오. 그
리고 그를 돕고 있는 귀족 중에서 다른 나라와 선이 닿아 있는 자가
있는지도 함께 조사해 주시고요. "
"알겠네. 또 해줄 일은?"
"전에 말했던 검은 측과 회색 측.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
는지 찾아봐 주십시오. "
"감시하는 측? 우리 말고 또?"
"네. "
"또 다른 세력이 있는 건가?"
"예. 그 세력이 누군지는 묻지 마십시오 들으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겁니다. "
"흠, 알겠네. "
라한이 생각하는 또 다른 세력은 물론 로테마이어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이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정보의 중요성을 알 터.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에게 나름대로 눈을 심어뒀을 게 분명
했다.
라한은 그들이 심어놓은 눈을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절대 그들의 정체가 뭔지 캐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눈이 있
는지 알아봐 주시고, 있으면 그들이 각 진영에서 어떤 신분으로 있
는지만 제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
상대는 드래곤. 제아무리 뛰어난 정보 길드라도 드래곤의 눈을
완벽히 속이는 건 거의 덜가능하다 자칫 라한의 눈과 귀가 될 베
사 길드가 드래곤에 의해 대륙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알아볼 정보가 또 있는가?"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매번 이런 번거로운 일만 시키
군요. "
"하하하. 아닐세. 어차피 이건 내가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
뭐, 공짜고객이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다크시안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
에테로가 라한에게 농담을 걸어왔다.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서
로가 어느 정도 친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라한도 에테로의 그런 농
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농담이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 주
는 것 같아 반길 정도였다
"하하, 공짜고객이라.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나중에제가타국
에 가게 되면 선물이라도 사와야겠습니다. "
"그거 좋지. 대륙 서부의 밀리아노 왕국에 새로운 고대 유적이
발견되었다더군. 아마, 좋은마법 무구도 몇 구 나왔을 게야. 아,
그렇다고 그 마법 무구를 구해달라는 말은 아닐세. 하하하하하. "
"그럼요. 에테로님이 그런 황당한 요구를 할 리가 없죠. "
"이런,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 그럼 이만 가 보겠네. 다음에
또 보세. "
"알겠습니다. "
라한이 에테로를 집에서 쾌 먼 곳까지 배응했다. 좀 어색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라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를 배웅해 본 적이 거의 없었
다. 있어봐야 아주 어릴 적 아버지 필슨 백작이 왕국에 갈 때 정도
였다. 그런 그에게 에테로를 배웅하는 일은 꽤나 의미 있게 다가왔
다. 보통 사람이 된 그런 기분을 라한에게 선사한 것이다.
'보통사람이라. 그래. 나도보통사람이지. 보통사람이어야지.
보통의
언젠가부터 라한은 평범해지고 싶어 했다.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이 겪기 힘든 일은 자신에
게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보통 사람. 스스로가 인간이고 싶어 하는
라한의 소박한 소망이었다.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래오래
살면서도 평범해지고 싶은, 소박하지만 조금은 무리한 요구였다.
인간VS 드레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자신의 집 부
근에서 낯선 존재의 기운을 느낀 탓이다
보통 사람이라는 거 내 욕심인가
라한이 착잡한 얼굴로 주변을 쭉 었다
둘이군
테세르 슈라 변 이리와라

주인 갑자기 왜 그러지
크릭
테세르는 라한의 부름에 잽싸게 달려왔다 그 역시 드레곤의 접
근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슈라와 변은 기감에 둔한 존재였기에 드
레곤의 접근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ㄸ문에 라한의 갑작스런 부
름도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왜는 왜야? 라한 주인이 오라면 빨리 올 것이지.
-그게 그렇지만
-크릭.
슈라와 변에게 테세르가 일침을 놓았다. 상황 파악 못하고 느릿
느릿 움직이는 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슈라와 변도 라한의 부름에 잽싸게 뛰어왔을 터였
다. 과거에는 라한도 약간은 명령하는투였고, 슈라와 변도그 말
에 절대 복종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라한은 테세르와 슈라, 변에게 자유를 선사해 줬다.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들을 부르는 일 자체를 자제한 것이다.
"됐어. 내 뒤로 와. "
-어? 어.
테세르가 약간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한의 너무나도
태연해 보이는 태도 때문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드래곤. 태연하게 상대할 만큼 약한 존재가 아
니다. 한데, 라한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봐! 그만 나오지.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라한의 부름에도 드래곤들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설마
자기들이 들켰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의 무반응에 라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침묵이 드래
곤 특유의 오만함 때문임을 아는 것이다
"야! 거기 둘! 빨리 좀 나와. 귀찮으니까. "
라한이 지붕 위 굴뚝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지붕이 몇 차례 들썩이더니 흐릿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체가 완전해지자 엘프 모습을 한 남자와 아름다운 인간 여성
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다.
"음- ! "
"흠i "
나타난드래곤들이 일제히 신음을흘렸다. 자신들이 들킨 게 상
당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오라고 할 때 바로 좀 나오면 덧나나? 젠장. 왜? 너희들이 들
킨 게 신기해?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알았지? 그냥 감으로 찍은 건가?"
"풋, 하여간 너희 드래곤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나 기분 엄청
안 좋거든. 용건이나 말해 봐. "
라한의 시비조에 드래곤들이 눈을 꿈틀거렸다. 하찮게 생각하던
인간에게 이런 식의 말을 들은 게 화가 치밀었음이다.
"네가 라한이냐?"
"알면서 온 거 아닌가?"
"역시 시건방진 놈이로군. 나벨라루스. 내 이름을걸고오늘널
죽여 버릴 걸 맹세한다. "
"벨라루스! "
골드 드래곤 벨라루스의 말에 함께 온 리투미아가 외마디 외침
을 토했다. 그가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대목 때문이다.
긴 수명과 엄청난 마법을 가진 드래곤. 수명과 능력만으로 따지
면 축복받은 생명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한 법.
드래곤에게 이런 축복만 선사핼을 리 만무한 일이다. 그들에게
긴 수명과 뛰어난 마법을 준 대신 이름의 가치와 대륙의 중재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이 탓에 드래곤은 맹세를 할 때도
심사숙고해야 하고, 이름을 걸 때도 조심해야 한다.
"리투미아. 내가 설마 저놈을 놓치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게
드래곤의 맹세는 생명보다 소중하고 드래곤의 이름은 그들이 가
진 마법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떠돈다. 함부로 맹세하지 않고 함부
로 이름을 걸지 않는 드래곤을 빗대는 말이다.
한데, 오늘 벨라루스가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서 이름을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됐어. 저놈을죽이면 되는거야 리투미아. 런 저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만 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
"그게 알았어. "
골드 드래곤을 지혜의 드래곤이라 부른다. 그건 그들이 탐구하
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져서였다. 그런 골드 드래곤 벨
라루스가 약간은성급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모든드레곤이 지혜
로운 건 아닌 모양이다.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군. "
"져? 골드 드래곤인 나 벨라루스가 진다고? 하하하. "
라한의 말에 벨라루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아직도 라한이라는
존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싸워 보면 알겠지. 본체로 변해라. 시간을 주마. "
"애송이. 넌 이 몸으로도충분하다. 먼저 덤벼라 "
"난 기회를 줬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
라한도 두 번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권해 봐야 들
을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굳이 불리함을 자처하고 싶지도 않았다.
"슈라, 테세르, 변. 내가말하기 전까지는 끼어들지 마라. 불의
공 "
라한의 공격에 벨라루스가 허리를 슬쩍 틀어 피했다. 너무 자연
스러운 회피에 라한이 이채를 발했다.
'싸울 줄 아는 놈이군. '
과거에 싸워봤던 크라이드리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상
당히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게 분명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윈드 커터! 윈드 토네이도! "
"헛!"
라한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할 때, 벨라루스의 마법이 날아들
었다. 너무 적절한 타이밍이라 라한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을 뻔
했다.
"윈드 글라이 더 !"
수없이 많은 바람의 칼날이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다. 과연 바람
을 다스리는 골드 드래곤다운 공격이었다.
"아직 멀었다. 헬 파이어! 윈드 토네이도! "
"헛! 막기! "
불 마법과 바람 마법이 라한을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신화력을
이용해 막았지만 충격이 작지 않았다
"윈드 글라이더! 윈드 블레이드! "
벨라루스가 다시 윈드 글라이더로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파. 그
리고 그 사이로 거대한 바람의 검이 라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공간으로! 막기 !"
라한이 뒤로 순간이동하며 몸 주변에 막을 씌웠다. 막기는 촉시
날아올지 모르는 마법을 미리 대비한 거였다.
"크크크, 인간의 힘이란고작그런 것이다. 이제 드래곤의 위대
함을 알겠는가?"
다행히 이번은 공격이 아니라 벨라루스의 말이었다. 라한을 언
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로 판단한듯했다.
"그렇군, 지금까지 내가 건방지게 굴었던 것. 진심으로 사과.
바람의 칼날! 물의 소용돌이!"
라한이 사과하는 척하며 두 가지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 라한의 공격은 상대를 탐색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래서
공격의 위력도 약했고, 방향도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한번 벨라루스의 실력을 본 라한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
작했다. 라한의 본신의 힘을 담은 신화력의 정화인 셈이다.
쿠루루룽!
"헛!"
먼저 땅의 흔들림이 가해지자 벨라루스의 발아래에서 지진이 시
작되었다. 다른 곳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직 벨라루스가 디디고
선 발 바로 아래만 흔드는 방법이다. 라한의 세밀한 신화력 움직임
이 만든 결과였다.
"플라이!"
땅이 흔들리자 벨라루스가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그로서
는 가장 자연스러운 대처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처는 라한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엡솔루트 실드 "
라한의 다음 공격인 바람의 칼날이 벨라루스의 전신을 난자하듯
쇄도했다. 갑작스럽게 이어진 공격에 벨라루스가 몸 전신에 투명
한 막을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트러졌지만 용케도 마법 시전에 성공했다.
그러자 라한의 물의 소용돌이가 벨라루스가 만든 실드를 감쌌
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의 시야가물로완전히 가려졌다.
"뭐, 뭐냐?"
"아직 멀었다. 불의 지붕! "
불의 지붕은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로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방
법이다. 보통 사람은 미처 닿기도 전에 숨이 막혀 죽는 엄청난 공
격법이었다.
이, 이놈이
"얼음의 물방울!"
라한이 벨라루스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다음 마법을 시전했
다 이번 전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의 발로였다.
얼음의 물방울.
불의 지붕과 반대로 바닥에서 위펄 얼음 덩어리가 튀어 오르는
방법이다. 얼음이 튀면서 엄청난 한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웬만한
이는 의식하기도 전에 얼어 버린다
"허억! 으악! "
벨라루스가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은 드래곤의 체면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 었다.
상체는 뜨거운 열기에, 하체는 엄청난 한기에 휩싸여 미칠 것같
았다. 너무고통스러워 절로비명이 질러졌다. 맹세코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 었다.
"멈춰라!"
라한의 먼이은 공격에 벨라루스가 거의 유린당하듯 처참하게
개졌다. 이 모습을 보고 리투미아가 라한을 제지하고 나왔다.
"네 이름은?"
난 그린 드래곤 리투미아다. "
골드 일족보다 상황 판단이 빠르군, "
.먼저 저것 좀 어떻게 해 주지 않겠나?"
리투미아가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벨라루스를 보며 말했
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벨라루스. 그 소리를 듣는 것만
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이제 그만. "
털썩!
라한의 짧은 한마디에 이전에 시전했던 모든 공격이 사라졌다.
벨라루스는 공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
었다. 정말 허무한 패배였다.
"네 말대로 풀어줬다. "
"그, 그게
리투미아가 불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순순히 풀어줄 거
라 예상 못한 것이다.
,넌 어쩔 거지? 그냥 돌아갈 텐가? 아니면 나와 싸울 텐가?"
"그냥 돌아 .가겠다. "
말을 하는 리투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당하게 왔다
가 이렇게 돌아가는 게 수치스러웠다.
"돌아가? 누구 맘대로?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그냥 왔다
가 즐기고 가면 되는 줄 알았는가?"
"원하는 게 뭐지?"
리투미아가 어두운 얼굴로 라한을 바라봤다. 그가 무슨 요구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싸워서 담판을 짓고 싶었다.
한데 벨라루스를 단 10분 만에 제압해버린 라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난 흠, 또 다른 손님인가?"
"뭐?"
"나오는 게 어떤가?"
"역시 로드님의 예상이 맞았군. "
라한의 집과 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금발의 엘프 여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등장에 리투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자아졌다
"아카폴리안!"
"리투미아. 꼴이 말이 아니군. "
"그게
아카폴리안의 말에 리투미아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유독 고개를 많이 숙이는 리투미아였다.
"리투미아. 질책하려는 건 아니었다. "
"미안하다. 우리의 자만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
"알면 됐다. 라한. "
아카폴리안이 라한을 불렀다.
라한은 아카폴리안이 나타난 뒤부터 미간을 좁히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카폴리안이 불렀을 때도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
속 같은 표정 이 었다.
-주인. 저 드래곤이 부르잖아
-주인.
,야. 내가 저놈들 부하야? 저놈들이 부른다고 일일이 대답해야
7"
-그건 아니지만
지금 라한의 능력이면 아카폴리안과 리투미아 둘 모두를 처리할
수 있다. 설사 벨라루스가 의식을 잃지 않아서 셋을 상대해야 한다
고 해도 승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에게는 불가능했다. 저들과는 비교
도 안 될 만큼 강한 존재인 로테마이어스. 지금 라한의 힘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처리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는데
라한. 오늘 우리를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로드님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잘 선택해라. "
아카폴리안이 또다시 말을 했음에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
다. 지금 그만의 고민에 빠져 다른 곳에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음
이다.
"그럼 다음에 보지. "
인사를 마친 아카폴리안이 쓰러진 벨라루스를 들치 업고 사라졌
다. 그 뒤를 이어 리투미아도 모습을 감추었다.
-주인! 뭐 해? 나쁜 놈들 다 도망갔잖아.
"어? 어,"
라한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마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기증이 몰려온 것이다.
'시간이 더 필요해. 아직은 아직은 무리야. '
겉으로는 라한이 벨라루스를 아주 쉽게 제압한 걸로 보였다 리
투미아도 그렇게 생각했고 멀리서 지켜보던 아카폴리안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으로서는 몹시 힘겨운 싸움이었다. 라한의 신화력이
벨라루스가 사용한 엡솔루트 실드를 간신히 통과한 것이다.
벨라루스의 실드를 간신히 통과했다는 것. 그건 로테마이어스의
실드에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았다.
'통해야 할 텐데. '
라한이 아카폴리안과 다른 드래곤을 놓아준 건 나름대로 복안이
있어서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라한의 성격으로 보면 드래곤들을
살려두는 그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사 살려주더라도 크라이드리안에게 한 것처럼 모종의 장치를
해서 힘을 못 쓰게 하는 것. 그게 라한이 지금까지 보여 온 성격이
자 패턴이었다.
그런 라한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드래곤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이때 로테마이어스가 어떻게 생각할까? 라한은 이 점에 착안해서
드래곤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어느 정도의 도박성이 깔린 행동이
었다
만약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이 자신에게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면 더 지체하지 않고 라한을 공격할 터였다. 이건 라한이 도박에서
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래
서 좀 더 오랫동안 고민한다면, 그건 라한이 도박에서 이기는 거였
다. 라한으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레어로 돌아간 아카폴리안이 로테마이어스의 레어로 급히 들어
갔다. 두 눈으로 확인한 라한의 실력을 직접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로드님. 로드님!"
"왜 이리 호들갑이냐?"
"라한이, 라한이 "
아카폴리안의 입에서 라한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앉아 있던
테마이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한과 관련된 모든 얘기가
테마이어스에게는 현재 최대의 관심사였다
"리투미아와 벨라루스가 죽었는가?"
.아닙니다. 벨라루스는 현재 자신의 레어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투미아는 밖에서 로드님이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벨라루스의 부상은 어느 정도인가?"
.목숨에는지장이 없습니다. 한데, 쾌 오랫동안 요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다행이군. "
말을 하면서도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벨라루스는 부상을 당했지만 리투미아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라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본 라한
은 적을 살려둘 만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마 라한이 졌다는 건가?'
"라한은 어떻게 됐지?"
생각과 동시에 로테마이어스가 물음을 던졌다. 드래곤들의 무사
귀환이 라한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라한은 무사합니다. 아무런 부상도 없습니다. "
"뭐라?"
"예. 그게 저
"말하라. "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을 재촉했다. 그로서는 라한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놓칠 수 없었음이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은 상황을 그대로 얘기하는 게 수치스러웠다.
대륙 최고라 생각했던 자신들의 패배가 아니던가? 거기다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이름을 팔았다는 것도 부끄
럽기 그지없었다
"리투미아에게 물어보심이 나을듯합니다. 전투의 앞부분은 전
혀 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리투미아를 불러라. "
실제로 아카폴리안은 라한과 벨라루스의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
지 다봤다. 다만, 전투의 초반부에는 엄청나게 먼 곳에서 봤기에
세부 사정을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아카폴리안이 레어를 나가서 리투미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리투
미아의 얼굴도 수치스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투미아. 라한과 벨라루스의 싸움을 네가 본 그대로 말하라 "
"예, 로드님 처음에는 벨라루스가거의 압도하는싸움이었습니
다. 벨라루스가 공격할 때마다 라한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습
니다. 하지만 그가속임수를 써서 벨라루스가궁지에 몰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럴 때, 그를따르는골렘과정령 그리고 정체를 알수
없는 놈들이 라한을 돕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
리투미아가 사실에 거짓을 더해서 대답했다. 들어오기 전에 아
카폴리안에게 어떤 언질을 들은 듯했다.
"속임수라 . ."
로테마이어스는 그들의 목소리만 듣고도 거짓을 상당량 섞었음
을 눈치 챘다. 긴 시간의 삶 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이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게 만들었다.
"예. 분명 속임수였습니다. "
"그가 압도할 때 사용했던 공격이 어떤 것이었느냐?"
"예. 처음에는땅의 흔들림이라는묘한공격이었습니다. 어스퀘
이크(지진을 일으키는 마법)와 흡사한 마법 같았는데, 벨라루스의 발
아래만 흔들렸습니다. 그때 벨라루스는
리투미아가 자신이 보고 들은 전투 과정을 차분하게 전했다. 물
론 중간중간에 슈라, 테세르, 변을 전투에 참가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들의 패배가 조금이라도 만회될 테니 말이다.
'어설프군. '
로테마이어스는 리투미아의 설명을 들으며 정령, 골렘, 정체불
명의 존재가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들의 공격이
앞뒤가 맞지 않는 어설픈 공격이었기 패문이다.
'그래도 마법사는 맞는 모양이군. 방법은 특이하지만 마법으로
보이는 공격이었다. '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을 마법사로 단정 지었다.
검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정령과골렘이 전투에 참가하
지 않았으니 정령사나 골렙술사로 보기도 힘들었다. 설사 그들의
참가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전투 가담 정도가 너무 낮았다
"시전 시간은 어땠나? 주문은?"
"그런 건 일체 없었습니다. "
"흠- ! "
로테마이어스가 리투미아의 설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신음
을 흘렸다. 시동어 없이 사용했다는 게 충격을 던져준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지? 라한 성격상 너희들을 곱게 보내줄 리 없는
데. "
"그게 저
"탈출했습니 다. "
리투미아가 말을 머뭇거리자 아카폴리안이 잽싸게 대답했다. 차
마 로드의 이름을 팔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음이다.
"아카폴리안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맹세할수 있느냔뜻이
다. "
"그, 그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맹세를 언급하자 아카폴리안이 그 자리에 부복했
다. 맹세가 가지는 무게를 생각하면 더 이상의 거짓말은 무모했다.
고작 처벌을 피하기 위해 드래곤임을 포기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지?"
"저, 그건 사실 로드님의 이름으로 그를 협박했습니다. 우릴 죽
이면 로드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
"라한의 반응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아무 대답도못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말도 못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자신이 본 그대로 설명했다. 그 말에 로테마이어
스가 더한 의혹에 쉽싸였다.
"그게 사실이냐 정말 라한이 굳어 있었느냐?"
"예.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
이번에는 아카폴리안도 당당히 맹세했다. 이 얘기만큼은 조금의
가감도 없는 진실이라는 의미였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라한은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대치했을 때도
당당하게 마주했던 라한 아니던가? 그런 그가 겁에 질렸다는 걸 어
떻게 믿겠는가?
한데 아카폴리안이 맹세까지 한 걸로 봐서 라한의 모습이 겁에
질려 있었던 건 분명한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럼, 그럼흠, 라한이 아카폴리안을
속인 거로군. 날 끌어들이겠다는 뜻인가?'
라한이 정말 겁에 질렸다면 로테마이어스는 그를 치기 위해 움
직이는 게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로테마이어스를 끌어들이기 위
해 겁에 질린 척했다면?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가는 건 그의 함
정에 빠지는 일이었다.
'라한.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
로테마이어스가 마음을 굳혔다. 라한의 실력과 그가 판 함정을
완전히 파헤치기 전까지는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있지도
않은 라한의 함정을
"아카폴리안. 라한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말고 그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라.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리투미아가 물러난 후에도 로테마이어스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과연 오늘 내린 결정이 제대로 된 결정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라한이 최근에 힘을 얻었으며 그 힘을 제대로 흡수하고 컨트를
하지 못한다는 걸 로테마이어스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았다면 시간을 재촉해서라도 라한을 치러 갔을 것이다
베센 왕국은 이미 몰락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안과밖으
로 썩을 대로 썩은 베센 왕국. 몇몇 귀족들이 나름대로 살려고 발
버둥 치고 있지만, 몰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베센 왕국에도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었다.
카르노 숲.
이 천혜의 요지가남아 있는한, 더 이상루이나왕국에게 유린
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카르노 숲은 베센 왕국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이
나 왕국에게 공격당하기 전에는 왕족 대대로 사냥을 해 온 곳이 이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이 숲에는 베센 왕국 선조들의 수많은 기록과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루이나 왕국의 국경으로 전락해서 몇몇 병사들
외에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돼 버렸다.
화이트 드래곤 에스타리스와 레드 빌리마니는 대륙의 남부에 위
치한 카르노 숲에 도착해 있었다. 카이렌 일행을 치기 위함이었다.
벨라루스와 라한의 싸움을 듣지 못한 그들. 이 탓인지 얼굴에는
일말의 걱정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기는 건 기정사실이고
어떤 방법으로 카이렌 일행을 죽일까만 고민하는 그들이었다.
"저쪽이던가?"
"누가 오는군, "
에스타리스의 말에 빌리마니도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바라봤다.
희미한 실루엣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미천한 라이칸드로프 프라하입니
다. "
"위대한 드래곤을 만나게 돼서 반갑다 난 마왕의 아들인 투바
라고 한다. "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비천한 엘프 카이렌 인사드립니다. "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죽이려 했던 상대 세 명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프라하는 폴리모프를 풀고 라이칸드로프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렌 역시 로브를 벗고 긴 귀를 드러낸 채로 공
손하게 인사했다. 오직 투바만이 뭔가 불만인 듯 인상을 조금 찌푸
렸다.
"너희들이 그들이로군 우리가 왜 왔는지 알겠지?.
네. 잘압니다. 그래서 죄를청하러 왔습니다. -
프라하가 대표로 대답했다 평소에 그들의 대표가카이렌이었음
을 생각하면 좀 이례적인 일이었다
"네놈 이름이 프라하라고 했나?"
"예. 위대하신 존재이시여. "
"우리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그 모습을
본 프라하가 잽싸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존재께서 원하신다면 저희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
다. 다만
"다만?"
"로테마이어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
프라하의 말에 듣고 있던 빌리마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비
아냥거림 가득한 목소리로 비꼬듯 입을 열었다.
"흥. 로드께서 그리 한가한 줄 아느냐? 너희 같은 하찮은 존재를
만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분이 아니시다. -
"저희가 로테마이어스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분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니 부디 허
락해 주십시오. "
너무 처량한 목소리에 빌리마니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프라하의 말대로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무엇보다
죽이지 않고 생포해온다면 더 큰 공로를 인정받을 것 같기도 했다.
-에스타리스. 어떻게 생각해?
고민 끝에 빌리마니가 에스타리스에게 메시지 마법으로 도움을 청
했다. 그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을 합쳐서 결론을 내릴 작정이었다.
-글쎄. 들어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저놈들은 영악한 놈들이야. 쉽게 믿을 놈들이 못 돼. 거기다
우리가 명령받은 건 생포가 아니라 사살이야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 없잖아.
에스타리스는 카이렌 일행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특히 말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는 프라하라는 놈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가장 큰문제는 자신들이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거였다.
상대의 실력도 얼굴도 그리고 그들의 경력도 그들에 대해 아
는 거 라고는 마족인 투바를 제외한 카이 렌과 프라하가 검사라는 정
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에스타리스. 생각을해 봐. 원래 로드께서 가장아끼던
드래곤은 크라이드리안이었어. 근데 그 멍청한 놈이 저놈들에게
죽었지. 지금로드께서는딱히 총애하고 있는드래곤이 없다는 얘
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건 알지만
에스타리스의 마음도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빌
리마니가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던졌다.
-운 좋으면 우리들 중 한 명이 차기 로드가 될 수도 있는 일 아
니겠어?
-그래. 맞아. 리투미아나 벨라루스도 라한이라는 놈을 생포해
오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가 생포해 간다면 로드께서도 우릴 다시
보시겠지.
둘의 의견이 모아졌다.
생포.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애써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다. 너희들을로드께 데려가도록하지. 단, 영악한네놈들을
그냥 데려갈 수는 없다. "
"저희가 스스로 팔을 묶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프라하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를 본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벨리마니와 에스타리스가 얼핏 듣기로 카이렌 일행에게는 마법
사가 없다 즉 손만 묶으면 거의 완벽히 제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카이렌, 투바 이리 와. "
프라하가 뒤에 선 카이렌과 투바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투바가
발끈하듯 외쳤다.
"정말 묶을 작정이야?"
"응. "
"빌어먹을. 그래 네 멋대로 해라. "
투바도 체념한 듯 팔을 늘어뜨렸다. 얼굴 가득 자포자기한 표정
이었다.
"미안해. 어쩔수 없어. 다음생에 다갚을게."
"젠장. 시끄러. "
프라하의 사과에 투바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묶여서 가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못내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었다
"카이렌 너는?"
"그냥 묶어, "
카이렌은 순순히 두 팔을 내밀었다. 프라하가 팔을 파르르 떨면
서 카이렌의 팔을 묶었다.
"이제 다 묶었습니다. "
"너도 묶어야지?"
아시다시피 저희 중에는 마법사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팔을 묶
을 방법이 없는지라 죄송합니다. "
"이리 와라. 내가 묶어주마. "
빌리마나가 활짝 웃으며 프라하에게 손짓했다. 프라하는 못내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터벅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꽉 묶어 주십시오. 제가 딴마음을 품지 않도록.
크크크, 네놈이 딴마음을 품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다. 건방진
라이칸 같으니 ."
빌리마니가 한소리 내뱉고 프라하의 손을 잡았다 파르르하는
게 프라하의 손이 몹시 떨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스위핑 퍼
"하앗! "
빌리마니가 포박 마법인 스위핑 퍼슨(sweeping person)을 사용하
려 했다. 이때 프라하가 빌리마니의 턱을 향해 손을 쭉 내밀었다.
채챙!
쇄도하던 프라하의 손목 아래에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왔다.
이 상태로 프라하의 손이 빌리마니의 턱을 가격한다면, 두말할 필
요도 없이 빌리마니의 사망이었다.
"허엇! 블링 콕! "
"그게 맘대로 되나?"
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하려던 빌리마니. 그의 시도는 불
발에 그쳤다. 갑작스럽게 그의 목을 조르는 손 때문이다
푸욱!
"커억!"
"하나 끝!"
빌리마니의 뒤에서 목을 조른 이는 카이렌이었다. 오래전에 이
곳에 와서 은신을 하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빌리마니를 제압
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카이렌의 머릿속에서 나온 시나리오였다.
그럼 앞에서 손을 묶였던 이는? 사실 손이 묶인 이는 카이렌이
아니었다 지금 카이렌 일행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하프 엘프 헤
르만. 그가 카이렌으로 분장해 드래곤들을 속였다.
"빌리마니! 빌리마니! 이, 이놈들. 어?카이렌이 둘?"
지지직!
앞에 묶여 있던 카이렌이 얼굴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가죽을
얇게 저며 만든 가면이었다
묶은 줄을 쉽게 끊어낸 카이렌, 아니 헤르만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드래곤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찮
게 생각하는 엘프, 라이칸드로프 그리고 저 하프 엘프에게 꼼짝없
이 당했습니다그려. "
"야! 헤르만 난 왜 빼놓는 거야?"
"아! 위대한 마족 투바님도 계셨죠. 죄송합니다. "
헤르만이 웃으며 말하자 투바도 웃음으로 말을 받았다 스스로
최강의 존재라 생각하는 드래곤 그들을 완벽하게 속인 것만으로
도 통쾌한 기분이었다
"흥. 빌리마니가 없어도 난충분히 강하다. 우리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존재로
"그래.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존재가 맞지. 근데 거기에서 넌 제
외시켜야 할 거야. 넌 죽은 목숨이거든. "
프라하의 비아냥거림에 에스타리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당장 뛰
어나가서 프라하의 목을 비틀어 버리려는 기세였다.
하지만 억지로 화를 억누르고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좀 멀리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진짜 카이렌, 앞에서 도
끼를 어깨에 멘 채로 살기를 풀풀 흘리는프라하.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에스타리스의 요모조모를뜯어보고 있는투바. 대충서 있
는 듯해도 진영이 너무 교묘해서 쉽사리 공격하기가 힘들었다.
'저 가짜 놈만 빼고는 전부 강한 놈들이다. 빌어먹을. 실수했군.
이렇게 강한 줄 몰랐건만 '
카이렌만 없다면 어떻게 대등한 승부를 펼쳐볼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실력을 종잡을 수 없는 카이렌이었다.
'마나를 전혀 안 풍기는데, 대체 저놈은?'
카이렌에게서는 그 어떤 마나도 풍기지 않았다. 아니, 풍기긴 풍
겼으되 그로서는 느끼기 힘들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 카이렌이 모
습까지 숨긴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에스타리스. 죽이지는 않겠다. "
"무슨 소리냐? 내가 네놈들에게 잡히기라도 했다는 말이냐7-
카이렌의 말은 이미 다 이긴 승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에스타리
스가 그 말에 발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에스타리스도 자신이 패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존심 패문에 어떻게 버티고 있을 뿐, 실제로 싸운다면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라한에 대한 모든 걸 조사해라. "
"라한? "
"내 조건은그 하나뿐이다. 라한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으
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죽었다면 누가 죽였는지 밝혀내라. 네가 할
수 없으면 로테마이어스에게 도움을 청해도 좋다. 그것만 지키면
널 살려주겠다. 맹세하겠는가?"
프라하가 에스타리스에게 맹세하라고 재촉했다.
맹세, 즉 약속하면 어떻게든 라한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설사
로드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혼자의 힘으로라도 라한에 대해 반드
시 알아내야 했다.
"라한이라? 후후후. 그는 이미 죽었을 거다. "
"무슨 소리냐?"
가만히 있던 카이렌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경악하는 카이렌
일행을 보며 에스타리스가 고소를 지었다.
"라한에게 드래곤 둘이 찾아갔다. "
"그럼 라한이
"그래. 며칠 전에 찾아갔으니 이미 죽어 사라졌을 거다. "
틸썩!
에스타리스의 말에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너
무 놀라운 사실 때문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에스타리스. 그 말 사실이냐?"
"내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드래곤둘이 갔으니 이미 죽
었다고 봐야겠지. 그놈은 너희들처럼 여럿이 아니니까. "
"흥. 그럼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로군. "
"꼭 눈으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지. 라한이라는 인간은 분명히
죽었다. 너희들은 우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그놈은 그것도 몰랐을
거거든. 아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우리 드래곤들에게 제대로 대
처도 못 하고 죽었을 게 분명하다 "
에스타리스의 말이 카이렌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다가왔다. 은
거하던 곳을 떠나서 떠돌던 카이렌. 그가 왜 이들과 함께 행동했겠
는가? 전부 라한이 좋아서였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
음이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카이렌의 안타까운 말을 들으며 에스타리스가 천천히 앞으로 나
섰다. 그리고 굵은 나무가 있는 곳에서 한쪽 팔을 올리고 비스듬히
기댔다.
"크크크, 모두 사실 컥!"
에스타리스의 목에서 검이 삐져나왔다. 에스타리스가 부릅뜬 눈
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흰머리, 말끔한얼굴그리고매서운눈동자 백준의 기사루이에
였다.
"네놈 네놈은
"루이에, "
촤악!
털썩!
루이에가 에스타리스의 목에서 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쏟
아져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루이에 왜?"
"너희들이 찾는 그가 누군지 난 모른다. 하지만 이 드래곤의 말
에 현혹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설사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우린
바꿔지 않아도 되지. 어차피 우리의 적은드래곤이었고, 라한이라
는 인간을 죽였다는 존재 역시 드래곤이니까. 내 말이 틀렸나?"
루이에의 설교에 카이렌과 프라하, 투바가 주먹을 꽉 쥐었다. 드
래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루이에, 고맙다. "
"당연한 일이었다. 5일 동안이곳에 숨어 있었더니 몸이 뻐근하
군. 그만 돌아가지 "
"한 마리가 도망갔다. "
"응? "
갑작스러운 카이렌의 말에 일행들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 외에 누구도 보지 못한 탓이다
"멀리서 우리를지켜보는드래곤이 있었다. 풍기는기운으로봐
서는 아카폴리안 같더군. "
"아카폴리안?"
"쾌나 영악한 놈이다. 그가 이곳에서 있었던 대화를 다 들었을
거다. "
카이렌이 섣불리 에스타리스를 공격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
다. 멀리 있지만 다른 드래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운 나쁘면 두
마리의 드래곤과 싸워야 한다는 게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음이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나?"
"저 끝에 있는 나무 위에 숨어 있었다. 너희들이 이곳에 나타나
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더군. "
"흠. "
카이렌 일행은 이번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꼬박 5일을 허비했다.
카이렌과 루이에가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5일, 헤르만이
카이렌의 모습으로 지낸 것도 무려 5일 전부터였다.
처음 카이렌이 이렇게 하자고 했을 때, 프라하와 투바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싸우면 되지 뭔 꽁수를 부리냐는 의미
였다.
하지만 수장이 된 카이렌이 강력하게 요청했고, 루이에와 헤르
만이 찬성하면서 계획의 시행이 결정되었다. 가장 고생할 카이렌
과 루이에, 헤르만이 찬성하는데 다른 이의 반대가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
만약 이때 카이렌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혹은 5일이 아닌 하루
이틀 전에 준비했다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쩌지?"
"로테마이어스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뭔가 조치를 취할 거야.
일단 돌아가자. 대책을 논의해야겠어. "
"빌어먹을. 류카라한 그놈들도 짜증 나 미치겠는데, 이게 뭐야?"
"자 자,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가서 일단푹 쉬고 내일 얘기하자. "
카이렌이 일행을 다독이며 몸을 돌렸다. 가장 먼저 앞서 가는 카
이렌.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한. 제발
아카폴리안과 리투미아, 벨라루스가물러난후, 라한은 하루하
루를 초조한 심정으로 보냈다. 로테마이어스의 선택 여하에 자신
의 목숨이 걸린 탓이다.
"오늘도 무사히 넘겼군. "
-주인. 무슨 소리야?
"아니다. "
아카폴리안이 돌아간 지 오늘로 3일이 지났다. 이 정도 시간으
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방법을 정하는 데에
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는 있는 문제였다.
-주인. 로테마이어스가
"왔나?"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온 정신이 로테
마이어스의 행동에 가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어? 오긴 뭐가 와?
"아, 아니군. "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긴
장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미치겠군.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
로테마이어스의 결정은 어쨌든 라한의 권한 밖이었다. 지금 라한
에게는 신화력을 완전히 흡수해서 완벽히 컨트롤하는 게 먼저였다
한데 로테마이어스 때문에 도무지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초
조한 마음이 라한의 수련을 방해한 것이다.
쾅! 쾅-!
"라한, 있는가?"
라한이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부리려 할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테로의 목소리였다.
"에테로님이군요. 정말잘오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허허, 이거 날 너무 반겨주는구먼. "
에테로의 말마따나 라한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에테로를 반
겼다. 듣고 있던 에테로마저 너무 밝은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앉으십시오. "
"어? 그그래. "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뭐, 그저 그렇지. 근데 왜 그러는가? 그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그날이라니요?"
라한이 짐짓 모른 척 에테로에게 되물었다. 그를 보며 에테로가
길게 한숨 쉬었다.
"말해 줄 수 없는 일인가 보군 "
"알고 계셨군요. "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 급히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되돌아 왔
었네. "
에테로도 며칠 전 라한이 누군가와 싸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집 밖에서 안의 싸움을 보는 거라서 눈으로 보지 못했지딴, 풍기는
기세와 수시로 들리는 폭음으로 싸움이 벌어졌다는 건 확신한 상
태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겠네. 말했다시피 밖에서 잠시 서 있다가 돌아갔으니
까. 대체 왜 싸운 건가? 그리고 그들의 정체에 대해 말해 줄 수 있
는가?"
"에휴. "
라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한도 그날 에테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집 밖에 있다가 사라진 에테로. 잘만 하면 그날
싸움이 있었다는 걸 숨길 수 있을 성싶었다.
물론, 라한이 에테로라는 인물을 너무 과소평가했음이다.
에테로는 누가 뭐래도 정보 길드의 수장이다. 일상에서 벌어지
는 사소한 것에도 귀를 기울이는 직업인 셈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눈여걱보는 라한의 일을 건성으로 넘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요 며칠 이곳을 찾아올까 말까 많이 망설였네. 어쩌면 그날 그
싸움으로 자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
"그렇군요. "
"만약 적이 남아 있기라도 하면 나까지 위험하지 않은가?하하
하. 이해해 주겠지?"
"이해합니다. "
에테로도 라한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다. 베어울프를 처리한 일
이나 결계를 만든 일 등등. 이런 일련의 사건만 가지고도 라한의
실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라한이 자신의 집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보통 적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거의 없으니 누군가가 라한을 찾아왔다고 봐야
했다. 또 당당하게 라한을 찾아왔다는 건 라한보다 강자일 수도 있
다는 의미였다. 에테로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일
이었다.
"이겼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
"다친 곳은 없는가?"
"다행히 없습니다. "
"자네와 싸운 적은 어찌 됐는가?"
"도주했습니다. "
에테로의 연이은 질문에 라한이 바로바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는 예상했던 질문이라 망설임이 없었다.
"또 올 수도 있겠군.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때도 이길 수 있는가?"
"그들만 온다면요. "
라한의 애매한 말에 에테로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들만' 이라는 말. 그건 다른 누군가가 등장할 경우 라한이 위
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존재가 있는가?"
"정말 알아야겠습니까?"
"말해 주면 좋겠네. 해 주지 않으면 우리 나름대로 자네 됫조사
를 할 수밖에 없네. 우리 정보력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
"그렇겠죠. "
라한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표정이었
다. 라한은 베사 길드뿐 아니라 다크라이더 길드도 드래곤과의 싸
움에 끼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려면 아예 모르는 게 최선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보를 얻는 일에 그들의 도움을 배제하고 싶었지
만, 라한의 여건상그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정보는 얻지만실
질적인 싸움과 핵심 내용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말해 주게. 이미 한배를 탄 처지 아닌가?"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죠?"
"회색 측인가? 아니면 검은 측인가? 아니, 아니지. 회색 측은
자네와 친분이 있으니 그쪽은 아닐 게야. 그럼 검은 측?"
에테로가 나름대로 생각해 둔 얘기를 꺼내놓았다. 지난 3일 동
안 이 일에 대해 고민한 듯했다.
"둘 다 아닙니다. "
"둘 다 아니다? 흠, 그럼 전에 자네가 언급한 제4의 세력이라는
말이군. "
"예. "
드래곤과 싸우던 그날
라한은 자신을 찾아온 에테로에게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
의 정보를 캐는 또 다른 인물을 찾으라고 했었다. 또 다른 세력이
있음을 에테로에게 말한 것이다.
이때에도 라한은 그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모
르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들은 얼마나 강한가?"
"그들의 정체만 알면 얼마나 강한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
"그들의 정체가 대체 뭐기에 그러는가?"
"그들은 그들은 드래곤입니다 "
라한의 대답에 에테로가 입을 떡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
였다.
드래곤이라니. 대륙 최강이자 물질계의 중재자로 알려진 그들이
아니던가?한데, 군림하는종족드래곤이 라한과싸웠다?또, 그
싸움에서 라한에게 패해 도주했다?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
였다.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말하기 싫으면 관두
지. 에잉. "
"믿고 안 믿고는 에테로님 자유입니다. 대신, 제가부탁한 일은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
"자네 그 말. 진짜로군. "
그제야 에테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라한의 말처럼 그
의 적이 드래곤인 게 확실했다.
"그냥 믿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이건 내 목숨뿐 아니라 우리 베사 길드와 다
크라이더 길드 전체의 존폐가 걸린 일일세. 자네 대체 어쩌자

"어쩌자고 위대하시고 또 위대하신 드래곤에게 죄를 지었느냐
이 말이죠?"
"그렇네. 드래곤은 대륙 최강의 존재일세, 그에게 대적하는 건 스
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의 인상이 구겨졌다.
대부분의 인간이 에테로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게 분명하다.
인간들에게 드래곤은 역사 속의 신수이며 공포의 대상으로 기억되
는 터. 드래곤에게 대적하겠다는 그 자체를 만용으로 여길 게 확실
했다.
하지만 에테로만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눈이 되어주고 있는
그만은 다르길 바랐다. 이게 인간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가 죄를 지었다고요? 네. 죄를 지었습니다. 드래곤 한마리
를 제 손으로 반쯤 죽여 놨거든요. 하지만 제가 그를 처리하지 않
았다면 아마 전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설사, 그 싸움에서 요
행히 도망쳤다 하더라도 평생 그들의 그림자를 피해 다니는 겁쟁이
가 됐을 겁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제 적이 드래곤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그들이 그
렇게 무서워요? 그럼 이 일에서 손 떼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
그냥해보는말이 아니었다. 드래곤에 대한공포를 정녕 떨쳐버
리지 못한다면 이쯤에서 베사 길드와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 필요
하다면 다크라이더 길드와도 연을 끊을 각오가 돼 있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과민반응을했군. 그래, 솔직히 얘기하겠
네. 난 드래곤들이 무섭네. 그 이름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일
세. 하지만이 일에서 손을떼고싶지는않네. 까짓것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는가? 역사상 유례없는 큰 싸움을 한번 준비해 보세,
하하하하하. "
"진심입니까?"
"진심일세. 후후후. "
계속 어두운 표정이던 에테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지
금까지 라한을 시험해 보느라 연기를 한 것 같았다.
"이거 제가 당한 겁니까?"
"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알고 계셨군요. "
"아, 자네가 말한 제4의 인물이 드래곤이라는 거? 알고 있었네. "
라한이 이마를 부여잡고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
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fl게 완벽히 속은 것이다.
"이거 참.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속은 게 처음인 것 같군요. "
"자네가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회색 측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네. 그 정보를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 뭐 그게 아니라도 알아챘을 걸세. 전에 우리 마을
상공에 드래곤이 나타나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적이 있지. 그때부
터 자네를 죽이려 하는 드래곤이 있다는 건 알았네. 하나를 생각하
니 나머지는 대충 짐작이 가더군. "
에테로는 라한과 싸운 상대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라한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연기를 했을뿐. 상대가
드래곤이든 신이든 그리 개의치 않는 존재가 에테로였다.
물론, 처음에는 드래곤에 의해 다크라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가
피해를 입을까 몹시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고민해서 나온 결과는 '라한을 돕
자 ' 였다.
다크시안과는 달리 에테로는 어릴 때 버림받아 암살자로 키워졌
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세상에 대한증오를 배운 셈이다 그런 그
가 누군가와의 싸움을 두려워할 리 만무했다. 그에게는 삶 그 자체
가 투쟁이고 전투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 제가 말한 제4의 인물을 찾았군요. "
"그것도 찾았고 또 다른 정보도 있네. "
"그래요?"
"이틀 전에, 그러니까 자네가 드래곤과 싸운 바로 다음 날 드래
곤 두 마리가 회색 측을 공격했네 좀 더 정확하게는 회색 측의 핵
심 인물들과 싸웠다고 봐야겠지. "
말을 하는 에테로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 말투 때문에 라한도 카
이렌 일행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 전투의 결과를
짐작한 탓이다.
"이겼군요. "
"뭐 이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네. 회색 측 핵심 인물들에게 놀아
났다고 봐야겠지. "
"그래요?"
"함정을 팠더군. "
에테로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스쳐지 나갔다. 처음 이 정보를
받았을 때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다.
"함정요?"
"회색 측의 우두머리. 예사로운 자가 아니더군. "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사실 싸웠다고 보기도 민망하지. 그때
에테로가 자신에게 들어온 정보 그대로 라한에게 하나씩 설명해
줬다. 라한은 에테로의 말을 들으며 가끔씩 감탄사를 터트리며 놀
라워했다.
"역시 카이렌이로군. 그놈 생긴 것하고 다르게 머리가좋다니까. "
"생긴 건 자네보다 나은 게 아닌가? 대충 그에 대한 정보가 들어
왔는데 엄청란 미모를 자랑하는 엘프라고 하던데. "
"예쁜 카이렌보다 멋진 제가 낫죠. 하하하하. "
"허허, 그거 참, 허허허. "
라한이 어색한듯크게 웃어 재꼈다. 뭐라토를달려고 했던 에
테로도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그러고 보면 라한도 잘생기긴 잘생겼어. '
에테로도 라한의 외모를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뚜렷한 이목구
비. 특히 서글서글한 눈매가 남에게 호감을 사기 딱 좋았다.
'근데 저 얼굴은 가짜겠지. '
에테로는 라한의 본 얼굴이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인 다크시안은 라한의 본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처음 라한과 대면한 후, 에테로는 다크시안과 쾌 많은 대화를 나
누었다. 제일 처음한얘기는물론외모였다 다크시안이 언급한사
람이 자신이 본 그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거였으니 당연한 절차였다.
'듣기로는 별로라던데.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 묻
힌다고 했던가?'
다크시안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그가 라한을 만났을 때 아름다
운 로이나가 함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다크시안의 기
억에 라한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기도는 남달랐다. 말 하나하나에도 사람을 압도
하는 분위기를 풍겼던 라한, 다크시안은 외모와 너무 다른 라한의
기도에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했다.
"참, 전에 제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내 정신 좀 보게. 양측의 세작을모두 발견했네. 근데 어
쩔 생각인가? 드래곤이 보낸 눈이니 어쩌면 그들도 드래곤이지 안
겠나?"
"처리해야죠. 일단 눈부터 끊어 버릴 생각입니다. -
"알겠네. 여기 그들의 외모애 대해 적혀 있네. 부디 조심하게.
"걱정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
에테로는 라한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드래곤과의 싸움
을 재고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한 라한. 괜히 말을 저내서 기분을 꿀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고 생각했다.
라한이 모르은 세상
때는 한여름
인간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짜증을 부릴 만큼의 무더위가 계속
되번다 거기다 벌써 석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많았다. 농사가 피
폐해짐은 물론이고 가난한 농부, 힘없는 몬스터들은 때 아닌 가뭄
에 하나씩 말라죽어갔다.
이런 가뭍으로 대륙 모든 나라의 경제가 바닥까지 내리달았다.
특히 루이나 왕국에게 국토를 잃은 베센 왕국은 그 정도가 타국과
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 전쟁의 패배로 매달 공물을 바
쳐야 했던 그들에게 이런 가뭄은 신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과거 베센 왕국의 중남부.
현재 축소된 베센 왕국의 중북부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쩍
쩍 갈라진 논토와 그늘에 늘어져서 굻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
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하군. "
라한의 눈에 보인 사람들은 모두 열한 명. 20대 초중반의 꽤나
젊은 사람들이 었다
"젊은 사람이 일을 하지 못하니 어라?"
세상을 한탄하려던 라한의 코에 묘한 냄새가 포착췄다. 피 냄새
였다. 근원지는 청년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웬 피 냄새? 물어보면 알겠지. "
라한의 코는 남들과 달리 예민했다. 수련을 통해 오감이 예민해
지기도 했고 전생의 마지막이었던 개의 후각이 조금 남아 있어서이
기도 했다.
"실례합니다. "
"엇!"
"으헉 ! "
라한이 갑자기 나타나자 쉬고 있던 청년들이 놀란 음성을 내뱉
었다 라한이 가까이 다가을 때까지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이런, 제가놀라게 해드렸나보군요. 죄송합니다. "
"음 "
라한의 재차 인사에 청년들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중 한 청년이
라한의 몸 구석구석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이 라한의
허리에 있는 세라 소드에 닿았을 때,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기분 나쁘게 뭐 하는 짓이야?'
찝찝한 기분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청년들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좀과도해 보이는 청년들의 행동에
라한의 의구심을 가졌다.
'왜 저러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저, 실례합니다. "
라한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라한에게 말을 건 것이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봐서
라한을 조금쯤은 두려워하는 듯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
"혹시 용병이십니까?"
"아, 이 칼때문에 오해하셨나보군요. 전용병이 아닙니다. "
"그럼 그 검은
"이거요? 그냥 장식용입니다. "
라한이 대충 둘러댔다. 라한의 직업은 용병도 아니고 기사도 아
니다. 또, 허리에 차고 있는세라소드를마지막으로 썼던 때도 미
스릴 창고에서 벽을부술 때였다 검 자체를 거의 쓰지 않으니 장
식용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검을 쓸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검을 배우려고 해 봤는데 재능이 없다고 하더군요. "
"오호, 그래요?"
청년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청년들의 태도에
라한이 슬슬 됫걸음질 쳤다.
'이거 뭐야?'
"얘들아!"
"예, 형님, "
"식사다! 쳐라!"
"흐흐흐. "
우두머리로 보이는 청년의 말에 다른 청년들이 자리를 털고 일
어났다 언제 꺼냈는지 손에는 쟁기와 낫을 챙걱 든 채였다.
"이것 보세요.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이놈 베센 왕국 놈이 아니로군. "
"예. 전 이 왕국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나라에 무슨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제게 왜 이러시죠?"
라한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했다. 괜히 분노해서 무고한 생
명을 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라한의 저자세를 겁에 질려서라고 판단했다.
그 모습에 더욱 짙은 살기를 뿌리며 기세등등 라한에게 다가왔다.
"어디 다른 나라 놈은 얼마나 맛있는가 볼까?"
"말해 뭐 합니까? 저 통통한 살 좀 보십시오. 흐흐흐흐. "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인육을 먹는
잔인한 자들. 라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라한도 이번 일에는 충격
을 크게 받았다. 동족을 먹는 그 행동 자체가 라한을 혼란스럽게
한 것이다.
물론, 라한의 전생에 동족을 먹는 종족으로의 삶도 없는 건 아니
었다.
하지만 이번은상황이 좀달랐다. 이성이 강한 인간. 불을다룰
줄 알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식인이라는 행위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동족을 먹다니
"얘들아! 뭐 하냐? 식사 식는다. "
"예, 형님. "
"너희들. 지금 풍기는 이 피 냄새도 너희들 짓이냐?"
다가오는 청년들을 보며 라한이 어깨를 확 폈다. 더 이상 상대에
게 예의를 갖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놈 참 예민한 놈이네. 땅속에 묻은 지 벌써 다섯 시간이나 지
났는데 그 피 냄새를 맡다니. "
"역시 그랬군. 크크크, 그랬어. 하하하하하."
라한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저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족애 같은 어쭙잖은 감정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살기가
라한을 감싸기 시작했다.
"테세르!"
-기다리고 있었어.
"죽여. 최대한 잔인하고 처참하게, 완전히 뭉개 버려! "
-알았어.
테세르의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상대와 비슷한크기로 커진 테
세르가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테세르의 등장에 청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듣도 보도 못 한
존재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다가오는 모습. 그 하나만으로도 청년
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부디 다음 생에서는 좋은 일만 하면서 살아라. "
"이이
청년 중 하나가 라한에게 기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보다 테세
르가 먼저였다. 테세르가 이미 그의 목을 잡고 옆으로 꺾고 있었다.
"크륵! "
목이 반쯤 꺾인 청년이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얼굴은 붉게 달
아올랐고 발은 이미 땅에서 약간 떠 있는 상태였다.
-주인 말 들었지? 다음 생에서는 내 부하로 태어나라.
테세르가 나머지 손으로 청년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파삭!
청년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깨졌다. 구역질 나고 지저분한 모습
에 라한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남은 청년들의 표정은 라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
했다.
-두려우냐? 그럼 우리 주인한테 잘하지 그랬어?
청년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 심
한 공포감에 신체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테세르! 서둘러, "
-알았어.
테세르가 한 명씩 돌아가며 상대의 목을 비틀었다. 청년들은 테
세르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씩 죽어 나갔다. 개중에 목
이 꺾이고도 죽지 않는 이는 머리를 터트리는 수고까지 더했다.
-주인 끝났어.
"돌아가자. "
-그냥 가려고?
"에테로님을 좀 봐야겠어. 공간으로! "
라한은 테세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라한이 사라지고 몇 시간 후, 농사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습
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테세르가 죽인 이들을 칼로 도려내서
먹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 차마할수 없는잔인한 짓이지만, 그
들에게는 일상사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블리아드마을은 가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어쩌면 대륙
에서 유일하게 가뭄의 영향을 받지 않은곳인지도모른다. 라한이
수시로 물을 불러내고 비를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법은 컨트를 웨더(Cont.of weathe.)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건 인간의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직 드래곤의 용언으로만 가능한 마법인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용언으로만 가능하다는 컨트를 웨더의 시전에 성
공했다. 드래곤의 전유물을 라한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라한의 이런 성장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이 블리아드 마을이
었다. 비가 필요할 때마다 라한이 비를 내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곳 블리아드 마을은 한 달에 한 번 휴일을 가진다.
매달 11일. 라한이 이곳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일종의 기념 일인 셈이다.
그리고오늘은8월 11일. 블리아드마을의 전체 휴일이다. 이 때
문에 에테로가 머물고 있는 닉스의 술집도 문이 닫혀 있었다.
쾅쾅쾅!
"에테로님 ! "
쾅쾅쾅!
"에테로님 ! "
라한이 닉스가 운영하는 술집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너무 다급
해 보여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라한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닙니다. "
라한의 얼굴을 알아본 주민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라한은 그런
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빨리 에테로를 만나자신이 보고 겪
은 일을 확인해 봐야 했다.
쾅쾅쾅!
"에테로님! 닉스씨! "
삐걱!
"라한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문이 열리고 닉스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몹시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
"예. 들어오십시오. "
덜컥!
문이 열리자 라한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사라지자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흩어져갔다.
다시 문이 닫히자 술집의 내실에서 에테로가 천천히 걸어 나왔
다 그 역시 자다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에테로님. "
"왜 이리 호들갑인가? 드래곤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는가?"
"확인해 볼 일이 있습니다. "
"말해 보게. "
에테로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라
한도 맞은편에 앉아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가 어디 갔다 왔는지는 아시죠?"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지금쯤이면 드래곤들과 한판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드래곤이 무서워지기라도 했는
가"
"그게 아니라 제가 본 일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본 것? 말해 보게, "
"사실 제가
라한이 베센 왕국의 중북부 지방에서 겪은 일을 침통한 표정으
로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던 에테로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 었다.
"자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대륙 전체에 가뭄이 심각할 정도일세. 블리아드 마을은 자
네 덕분에 물이 풍족하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세. "
"그게 제 얘기하고무슨상관이 있습니까? 가뭄 때문에 사람들
이 전부 굶어 죽기라도 했다는 얘깁니까?"
가뭄이 오면 농사를 망치게 마련이다. 대륙의 근본 식량은 농사
로 나오는 곡물류인 터. 라한도 가뭄이 식량 부족에 크게 일조한다
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가뭄이 올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최근 10년 안
에는 없었지만, 그 이전에는 수없이 많이 겪은 일이 가뭄이었다.
한데 이번에만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었
다. 또 가뭄이 있을 때마다 인육을 먹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걱난다
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
"최근에 베센 왕국이 무슨 일을 져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그럼
답이 나을 걸세. "
"그야 루이나 왕국과의 전쟁 설마 그 전쟁 때문에 모아뒀던 식
량을 다 쓰기 라도 했다는 말입 니까?"
그제야 라한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베센 왕국의 현 상황은 전쟁으로 인한후유증이었다. 당시 너무
많은 인원과 식량 차출로 평민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이다.
"그 정도가 끝이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안 왔겠지. 루이나 왕국
에게 매달 보내고 있는 식량이 더 큰 문제일세. "
"이제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을 매달 루이나 왕국
에게 빼앗기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로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네. 그 덕에 현재 루이나 왕국의 국민들과 귀
족들은 대륙 어느 왕국보다 편하게 가뭄을 나고 있지. "
침통한 라한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대체 누굴 탓해야
하는가? 자국을 위하는 루이나 왕국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힘이 없어 식량을 빼앗기고 있는 베센 왕국의 왕족들을
탓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든 버티는 게 베센 왕국
이 할수 있는유일한일이지. 아, 루이나왕국이 식량을덜 가져가
도록 신에게 비는 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군. "
쉽게 말해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안 돼. 이건 아니야. '
라한의 표정에 결의가 떠올랐다. 당장은 수가 없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휴, 전그만가보겠습니다. 낮잠을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아닐세. 라한 너무 마음쓰지 말게. 어차피 세상이란다그런
거 아니겠는가? 위에서 군림하는 자가 있으면 밑에서 지배당하는
자도 있게 마련이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부하며 지내는 벌레 같
은놈들도 있을테고. 이번 일도마찬가지일세. 현재로써는루이나
왕국이 베센 왕국을 휘어잡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네. 힘이 없
으면 어차피 다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지. "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
라한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닉스의 술집을 나왔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염두를 굴려 봐도 뚜렷
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 힘이 있어야하는 거야. 당장 아부하고 잘보여 봐야 힘
없으면 말짱 꽝인 거야. '
베센 왕국이 사는 길은 단하나뿐이다 힘을 키우는 길. 허리띠
를 더 졸라매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은 힘을 키워야 했다. 루이나
왕국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헬레나와 하울을 만나다
라한이 다시 베센 왕국의 중북부로 이동해 왓다 아까의 상황
을 재현하고 싶지 않아서 이동하기 전부터 투명하게 몸을 만든 상
태였다
저기로군
라한의 눈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들어
왔다 카이렌 일행의 세력ㅇ; 된 사람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다
어디 보자
라한이 주머니에서 에테르가 전해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상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얼굴 그림이 괘나
상세하게 그러져 있었다
라한이 찾아야 할 이가 드레곤이라면 굳이 얼굴 그림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드레곤끼리면 알아볼수 있다는 특유의 기운을 라한
역시 구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도 라한이 몽타주를 꺼낸 건 상대가 드래곤이 아니라는 생
각에서였다.
카이렌에게는 상대가 드래곤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능력이 없
다. 하지만 상대가 강한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
드래곤이 힘을 감추더라도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내
는 것이다.
로테마이어스도 카이렌의 그런 실력 정도는 알 터. 그에게 드래
곤을 세작으로 보낼 리 만무했다. 말 잘 듣는 인간이나 세뇌시킨
인간을 세작으로 심었을 게 분명했다.
'수염 참 멋지네. 나도 수염이나 길러볼까?'
몽타주에 나타난 사람은 옅은 구레나룻과 긴 콧수염이 인상적이
었다. 사내다우면서도 미적으로 균형이 잘 맞는 조각 같은 얼굴이
었다.
'이걸 어떻게 찾는다?'
라한의 '투명해지기'는 거의 완벽하다. 누군가잘때 옆에서 몇
시간씩 구경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한데, 카이렌마저 속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몸을 숨기는 능력은 고금 최강인 카이렌. 그의 실력이라면 라한
을 감지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카이렌에게서 풍기는 기
운이 라한이 사용하는 신화력과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터. 최대한
빨리 찾아서 떠나는 게 카이렌에게 들키지 않는 길이었다.
-주인.
로브 안에서 테세르가 작은 목소리로 라한을 불렀다. 라한은 그
말에 생각으로만 대답했다.
'어?'
-저기 프라하다
'알아. '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사람들의 앞에는 프라하가 근엄한 표정으
로 서 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가리키는 교관 역할을 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여?
'많이 강해졌군. '
프라하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예전보다 강했다. 그 기운도 거칠게
요동치는 게 아닌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운이었다. 라한은 프라하가
자신과 헤어진 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한눈에 알아봤다
-쾌 멋있어졌네.
'테세르. 아까 몽타주 봤지?'
-응
'찾아봐. 너라면 카이렌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테세르에게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풍기는 기
운을완벽하게 감추는능력은가지고 있다. 즉, 모습만들키지 않
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테세르였다.
-알았어,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에서 나와 바닥에 내려왔다. 그 상태로 낮
게 날며 사람들 사이를 훔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라한은 테세르에게 몸을 더 작게 만들 수 없느냐고 물
은 적이 있었다. 몸만 더 작게 만들 수 있으면 천하제일의 스파이
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테세르는 라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몸을 크게 불렸던 건 속
을 비워서 가능했을 뿐. 실제로 가지고 있는 몸체의 구성 성분은
어쩌지 못한다고 말했었다.
한참 후에 다시 날아온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사람들의 왼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야?'
응. 무지 잘생겼더라
'쳇. '
라한은 원래 외모에 무감각한 성격이었다.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한데, 언젠가부터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미소년에
가까운 투바와 엘프 남성 카이렌을 만나고 난 후부터였다. 주변 일
행들이 자꾸 그들과 비교를 하려 들자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생각이
었다.
-안 가?
'곧 끝날 것 같네. 끝나면 처리하지 뭐.
라한의 말처럼 프라하의 교육이 막바지에 들어선 듯했다. 프라
하가 자꾸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도 그러했고, 교육을 받는 훈련병
들의 지친 모습도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해줬다.
"자,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후수업도 열심히 받길 바란다
이상. "
프라하가 큰 목소리로 훈련병들에게 말했다. 어찌나 큰지 거대
한 연무장이 떠나갈 듯했다.
프라하가 나가자 훈련병들이 저마다 그늘을 찾아서 휴식을 취했
다. 라한도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테세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
갔다.
'이쪽인가?'
-저기 저자다. 수염 난 잘생긴 놈
테세르가 가리킨 쪽에 수염이 깔끔하게 자란 잘생긴 남자가 보
였다. 그는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날기. '
라한이 몸을 살짝 띄운 채로 그에게 날아갔다. 그의 바로 앞까지
날아간 라한이 손목을 몇 차례 떨었다.
'오랜만에 하는 건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 '
-뭐 할 건데?
'이거. '
퍽-!
털썩!
라한이 사내의 뒤통수를 세라 소드로 강하게 내려쳤다. 소리가
너무 커 때린 라한이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사내를 기절시키는 데
에는 성공했다.
'너무 강했나? 역시 잘 안 되는군. '
-쟤 머리 깨졌겠다.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가자. 다 함께 공간으로. '
라한이 사내 옆에서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아무런 빛도 터져 나
오지 않는 은밀한 공간 이동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쓰러진 자에게 수면을 한 차례 더 선사했
다. 혹시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라한은 베센 왕국의 남부 지방으로 이동했다 바다가 멀지
않아서인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짠 냄새가 라한의 코를 자극했다
"음, 이게 바다 냄새인가?"
-뭔 냄새라도 나나?
정령인 테세르는 본질적으로 후각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자극적인 향기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것
이다.
"가자. "
라한미 남쪽으로 걸음을 옳겼다. 다가갈수록 바다 향기가 점점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이동하자 라한의 눈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두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이곳만큼은 가뭄의
피해가 닿지 않았는지 사람들의 얼굴에서 굻주림을 찾기 힘들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먹는 건가?"
-바다는 거 대한 식량 창고라고 하잖아.
"그런 얘기가 있긴 있지. "
날이 갈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테세르를 보며 라한이 미소를 머
금었다. 버려진 돌도 다듬으면 옥석이 된다더니. 테세르가 딱 그
경우였다.
-거기다 불의 정령이 대륙에서 많이 활동할 때면 물의 정령은
바다에서 활동하는 게 서로간의 규칙이거든. 지금 가뭄이 심하니
까 바다가 활기를 띠는 게 당연한 거야.
"잠깐. 잠깐만. 그게 무슨말이야?네 말은가뭄이 정령들때문
에 벌어진 거라는 얘기야?"
-당연하지.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은 우리 정령들이
만드는 거라고. 홍수도 마찬가지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가뭄도 마
찬가지지.
"그럼 정령왕들한테 말하면 가뭄을 없앨 수 있는 거야?"
-그건 안 되지. 정령왕들이 들어줄 리가 없어. 그들도 힘이 없
거든.
테세르의 말에 라한의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들이 하는 일
이라면서 그걸 바꿀 힘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령들이 하는 일이라면서? 그럼 바꿀 수도 있는 거 아냐?"
-정령계에 가득한 자연의 힘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다른 곳
에서 자연 활동을 하면서 그 힘을 얻는 거지. 그리고 주인도 정령
계에 가 봤으니까 알 거야. 정령계 지형이 이곳 대륙하고 완전히
똑같지?
"그랬던가? 지형은 유심히 보질 않아서. "
-뭐, 잠깐 가서 지형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였겠지. 그럼 지금
알아둬. 정령계 지형은이곳과완벽하게 일치해. 다른점이라면 인
간이나 엘프, 드래곤 같은 이성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바꾼
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정도지.
라한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대륙하고 같은 모양이라는 게 내가 한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있지. 관계가아주 깊지. 정령들이 속성을가지지 않고 태어난
다는 얘기, 했었지?
"응 "
-그들 중에서 불의 정령으로 거듭나는 녀석들 말이야. 그들이
정령계의 판트리아 대륙 정도 되는 위치에서 불의 정령으로 바꿔고
있어. 그 때문에 판트리아대륙에 불의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지는
거지
"그럼 좀 섞여서 하면 되잖아. "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그건 힘들어. 그리고 설사 시작되지 않
았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거듭날 때는 같은 속성끼리 뭉쳐야
하거든. 가까이 모여서 힘을 교류하지 않으면 순수한 정령으로 태
어날 수 없어.
생소한 얘기였지만 라한의 관심사는 이게 아니었다. 어떻게 가
뭄을 없앨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자연재해를 최대한 막을 수 있
느냐? 라한의 관심사는 이것뿐이었다.
골치 아프군. 위치가 바뀌면 대륙은 홍수에 시달리겠지?"
-아마도.
"혹시 다른 정령들도 지금 거듭나고 있나?"
-물론이지, 땅의 정령은 대륙의 서쪽에서 바람의 정령은 바다
먼 곳에서 거듭나고 있어
"그럼 그들이 만든 영향은?"
-대륙 서쪽은 연일 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바다 먼 곳은 거의 매
일 폭풍이 일고 있지
라한은 정령이라는 존재가 평화와 조화의 존재라고 생각해 왔
다. 한데, 오늘 얘기로그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결국, 자신들살
자고 대륙에 피해를 주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거듭남이라는 거. 안 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럼 정령계가 무너질걸, 정령계가무너지면
이곳 판트리아 대륙도 사라지게 될 거야. 따뜻함도 차가움도 없는
곳. 흙이 없고 바람이 없는 곳. 그리고 빛과 어둠이 없는 곳이 될
거니까.
라한도 별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홧김에 해 본
말일 뿐. 그도 정령계와 판트리아계가 서로 공생 관계에 있다는 정
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버틸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 "
-뭐 그런 셈이지.
"에고. 이건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가자."
라한이 사람들을 비집고 부두의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
가자 '산상의 슁터' 라는 커다란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그렇군. '
어느 정도 가까이 오자 라한이 은밀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곳
에서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들어갈 거야7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해 볼까?'
딸랑!
라한이 문을 열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문 위에서 울린 청량한 종
소리가술집 홀 안에 퍼졌다. 미리 와서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
이 잠깐 입구를 향했다가 사라졌다. 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자
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어서옵셔. "
종소리에 반응한 또 다른 사람, 술집 종업원이 라한을 맞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였다
"괜찮은 포도주 있습니까?"
"외지분이시군요. 이곳은 마하트가 일품입니다 여기서 북쪽으
로 조금만 가면 우리나라 최고의 마하트 생산지가 있거든요. 저희
술집은 그곳에서 바로 만들어서 오는 최상급 포도주만 취급하기 때
문에 정말 끝내줍니다. "
마치 줄줄 왼 듯 읖는 종업원의 목소리에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로 달달 외울 정도라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사람 전문가로군. '
전문가는 기술이나 마법, 검술을 익힌 사람만 되는 게 아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사람도전문가가될수 있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가지고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사람이 바로 전문가인 것이다.
라한은 종업원의 시원한 목소리와 유창한 말솜씨로 그가 전문가
임을 눈치 챘다.
"알아서 주십시오. 식사도함께 주시고요. 아, 설마외지 사람이
라고 바가지를 씌우지는 않겠죠?"
"이런,손님. 저희는바가지 같은 걸 씌우지 않습니다. 한번 손
님은 영원한 손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는걸요. 혹시 압니까?
언제 다시 이 마을에 들르게 될는지요. 저희가 최선을 다하면 그때
도 저희 술집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손님께서 발이 무
척 넓은 분이라면 입소문이라도 내줄 텐데 어찌 바가지를 씌우겠
습니까? 저희는 손님이 누가 됐든지 최선을 다합니다 아, 단 한
가지 경우는예외군요. 저희는공짜손님을받지 않습니다. 술값이
없으면 저기서 노래를 부르든가 춤이라도 추셔야 합니다. 하하하. "
종업원이 술집의 한쪽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트렸다. 쾌 그럴듯
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크기도 서너 명이 함께 올라가 작은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하. 술값은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
"가끔은 술값이 있는데도 저기에 올라가는 분들이 계신답니다. "
"그래요?"
"물론입죠. 스스로음유시인을능가한다고 생각하는분들이 널
리고 널렸는걸요. 또, 어떤 용병은 자신이 겪은 멋지고통쾌한 이
야기를 저기 서서 풀어놓기도 한답니다. "
종업원의 얼굴에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재미있는 얘기와 좋은 노래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전 그런 재주가 없어서요. "
라한이 손사래를 치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쾌 많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손님이 많았음에도 몇 자리가 남아 있었다.
라한이 거절 의사를 표하자 종업원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 모습에 라한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서운 곳이네 그래도 마음에 드는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라좋은생각같아.'
대륙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베센
왕국은 패전까지 겪어 그 정도가 심각할 정도였다. 한데도 이곳만
큼은 패전과 가뭄이 피해간느낌이었다. 술집 사장의 탁월한상술
과 종업원의 철저한 전문가 정신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래. 살 방법은 있는 거지. 근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라
라한은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남에게 해 보고 싶었다. 삶이 자랑
스러워서라거나 신세를 한탄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처음 해 보
는 일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과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버리고 싶은
마음, 이런저런 생각들이 결합되어 나온 결과였다.
'에고, 아서라. 나하고 안 맞아. '
라한은 순간 먹었던 마음을 애써 지웠다. 지금 라한은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류카라한을 보는 눈을 제거
해야 했다. 아직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기에 함부로 나서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
라한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종업원의 시원한목소리
에 라한이 고개를 들었다.
"빨리 나왔군요. "
"예. 그렇다고음식을대충만든건 아닙니다. 일류요리사여섯
명이 항시 대기 중이라서 음식을 빨리 만든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
"하하. 알겠습니다. "
라한이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라한이 식사를 시작하려 하자 종
업원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식사만큼은 수다를 듣지 않
고 편하게 해 주려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
'사소한 거지만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어 사장이 누군지
궁금하네. '
호기심을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 건 드래곤에 필적하는 라한이
다 이런 의문도 풀지 않고 넘어갈 리 만무했다.
'누가 좋을까?'
라한이 식사를 하면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물어볼 사람을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저 사람이 좋겠군. '
라한이 술집 구석에서 술을 먹고 있는 두사람을 발견했다. 얇지
만 긴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남녀였다.
'다른 지방 사람인가?'
이곳은 어촌이라서 남녀가 입고 있는 것 같은 깨끗한 옷은 보기
힘들다. 또, 대륙의 최남단이라서 얇고짧은옷을선호한다. 그런
생각을 갖자 외모도 왠지 이곳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알려나?'
외부인으로 보임에도 라한이 그들을 찍은 건 그들에게서 느껴지
는 편안함 때문이었다. 이곳에 한두 번 온 사람은 저렇게 편하게
있지 못한다. 강인한 뱃사람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어떻게 태연하
겠는가? 대부분은 괜한 위압감에 수저를 들기 힘든 게 정상이었다.
한데도 그들은 주변 얘기를 흘릴 대로 흘리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
라한이 수저를놓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술병과잔을들
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
"무슨 일이죠?"
앉아 있던 사람중 여자가 바로 대답해 왔다 라한이 쳐다보고
있음을 일찍부터 느낀 모양이다.
"보아하니 외지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여자가 대답할 때 남자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착 소리가 들렸다. 라한의 예민한 청각이 아
니면 듣지 못할 소리였다.
'검?'
검을 잡는 소리가 분명했다 쓰지는 않지만 라한 역시 검을 가지
고 다니기에 익숙한 소리였다.
"같은 외지 사람 같아서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저희는 남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만돌아가주
시겠습니까?"
여자의 얼굴에서 강한 경계심이 드러났다. 라한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눈치였다.
"뭐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혹시 북쪽에서 오셨습니
까?"
"그건 왜 묻죠?"
"옷이 길어 보여서요. 아시다시피 이곳은 대륙의 최남단이라서
상당히 덥거든요. "
라한의 말에 여자가 자신의 몸과 일행인 남자의 몸을 한차례 돌
아봤다. 라한의 말대로 뭔가 어색한복장이었다. 귀족 여성이라면
몸을 가리기 위해 긴 옷을 입을 수도 있다 한데 남자마저 긴 복장
인 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렇군요. 앉으시죠. "
"예? 아, 예. "
여자가 라한의 합석을 허락했다. 라한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여
자와 남자 중간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한이 옷차림 얘기를 꺼낸 건 그들을 알고 찾아온 게 아니란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말에 여자도 어느 정도는 의심을 풀고
합석을 허락한 것이다. 물론, 아무런 자신이 없었으면 쉽게 허락
할 리 없었다. 아마 검을잡았던 남자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
이리라.
'어디흠, 예상대로보통 실력이 아니로군. 조금만 더 강했으
면 굴레를 벗을 수도 있었겠어. '
라한이 본 남자의 실력은 이미 극한에 달해 있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정에 얻어야 하는 깨달음은 순전히 그 남
자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어찌 됐든 그 남자의 실력이 굴레를
벗는 조건에 거의 근접해 있는 건 확실했다.
'저런 강자가 여기는 왜?'
라한은 두 명의 일행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남자가 손을 검에서 살짝 떼었다. 라한은 그 남자의 실력을 알
아봤지만, 그는 라한의 실력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보아하니 그쪽도 타지방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어디 출신인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전 특별하게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머물렀던
곳은 케라스 왕국이니 그곳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요. "
"그렇군요. "
여자가본격적으로 라한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의
심은 가셨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듯했다.
"두 분께서는 어디 출신인지요? 그런 복장은 본 적이 없어서요. "
"이 옷은 우리나라옷이 아닙니다. 저희는 이렇게 깨끗한옷을
만들지 못하거든요. "
라한은 두 사람이 입은 옷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리 특별한 옷은
아니었다. 대륙 어디를 가나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런 봄, 가을용 옷
이었다.
'저 옷이 뭐가 깨끗하다는 거지?'
바다 사람들의 거친 복색에 비하면 깨끗한 옷이 분명했다. 하지
만 대륙 내륙에는 저보다 더 깨끗하고 화려한 옷이 널리고 널렸다.
딱히 깨끗하다고 부를 수 있는 옷이 아닌 것이다
"그러시군요. "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성은 있는지요?"
"그냥 라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아, 그러시군요. "
라한이 일행 주변으로 은밀하게 막을 쳤다 라한이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건너편에 앉은 두
남녀는 라한의 그런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사내가 강
하다고는 하지만 라한보다는 한참 아래 실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이름을 듣고 싶네요. "
"아 저는 헬레나라고 하고 이쪽은
"하울. "
여자의 말을 받아 남자가 짧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무뚝뚝함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레이디 헬레나와 하울님이셨군요. "
"그냥 헬레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라한림. "
"그러죠. 헬레나. "
라한의 헬레나라는 호칭에 앉아 있던 하울이 몸을 움찔거렸다
얼굴에는 불쾌하다는 표정이 한것 떠오른 채였다.
헬레나가 하울을 눈으로 제지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에게 온 건 뭔가 물어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아, 제가정신이 없었네요. 이 술집 주인이 누군지 너무궁금해
서 찾아왔습니다. "
착- !
라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울의 손이 다시 탁자 아래로 내려
갔다. 그리고 검을 잡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라한이 의구심을 품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주인이 누군지는 왜 묻는지요?"
"별일은 아닙니다. 여기 종업원이 너무 친절해서 그를 누가 교
육시켰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
"정말 그것뿐인가요?"
"예, "
라한의 단호한 대답에도 하울의 손은 쉽사리 탁자 위로 올라오
지 않았다. 아직도 라한에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사실 우리도 이곳주인의 이름은잘모릅니다 이곳에 온지 얼
마 되지 않았거든요. "
"아, 그러시군요. "
대답을 하던 라한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가 힘겯게 끝맺었다. 아
주 익숙한 기운이 술집 안에서 느껴진 탓이다
'그녀가?'
.그럼 용건이 끝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
헬레나가 말을 멈추고 시선을 한 곳으로 돌렸다. 라한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뒤로 돌렸다.
라한의 눈에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빛 머리카락이 어
깨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여자.
'그녀가 확실해. '
라한은 나타난 여자가 프리미아임을 확신했다. 모습이 조금 성
숙해지기는했지만, 귀엽던 그모습이 그대로날안 있었다. 또, 느
껴지는 기운도 당시에 느꼈던 프리미아의 기운이 확실했다.
챙-!
"하앗! "
하울이 값작스럽게 검을 뽑아 들고 프리미아를 공격했다. 프리
미아는 어깨를 살짝 틀어 하울의 공격을 피했다. 이미 공격을 예상
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 었다.
갑자기 싸움이 시작되자 술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종업원들은 차분하게 탁자를 옆으로 치우기 시작했
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라한이 혀를 내
둘렀다.
"야압! "
하울의 공격이 실패하자 헬레나의 공격이 이어졌다. 강하지는
않지만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 었다.
프리미아는 왼발을 축으로 한 바퀴 크게 회전했다. 그러자 헬레
나의 검이 프리미아의 오른쪽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좋구나. 계속 해. "
"하앗! "
"야얍! "
쉬익!
채채챙!
언제 꺼내 들었는지 프리미아의 손에도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
고 수차례 공방이 계속되며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하울의 공격은 빠르면서도 강했고 헬레나의 공격은 정확하고 날
카로웠다. 이에 반해 프리마아의 검은 빠르지도 강하지도 그렇다
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다만, 몸놀림이 드래곤답게 워낙빠른지라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피할 뿐이었다.
'비슷한데. '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하울과 헬레나의 검은 프리미아와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프리미아는 검술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한의 눈에는 둘 사이에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프리미아의 움직임이 상대의 공격을 모두 읽고 있는 느낌이라고 봐
야 정확했다. 마치 검의 다음공격 지점을 알고 미리 피하는느낌
상대의 발동작까지도 완벽히 레뚫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괜찮소?"
헬레나가 프리미아의 손바닥에 어깨를 맞고 쓰러졌다. 하울은
쓰러진 헬레나에게 달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걸로
치열한 공방전은 프리미아의 승리로 돌아간 셈이다.
"많이 발전했구나. "
"제자 하울, 스승님을 뵙습니다. "
"제자 헬레나, 스승님을 뵙습니다. "
하울이 헬레나의 어깨를 부축한 채로 함께 무릎을 꿇었다.
하울과 헬레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싸움을 구경하던 이들의 얼
굴이 멍해졌다 알고 싸웠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좀 전에 느꼈던 막연한 느낌
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리미아가 헬레나와 하울의 스승이라는 것. 그건 프리미아가
그들의 검술을 모두 레뚫고 있다는 점이나 다름없으니 미리 예측하
고 피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어나라. 들어가자꾸나. "
-프리미아. 맞지?
라한이 프리미아에게 은밀하게 음성을 전달했다. 프리미아는 순
간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예전의 방방 뛰던 성
급하던 성격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라한은 프리미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머리를 두세 차례
긁적였다.
자신이 음성을 보낸 주인공임을 피력한 행동이었다.
라한인가?
-응.
-살아 있었군
프리미아가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라한이 이미 죽었
다고 믿고 있었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설명할 길이 그 방법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
"하울, 헬레나. 이 사람은 누구지?"
프리미아가 짐짓 모른 척 제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하울
과 헬레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프리
미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손님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같이 들어가자고. "
말을마친 프리미아가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제자들의 입을 미
리 막아 라한이 들어오는 걸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라한님. 스승님께서 허락했으니 들어가시죠. "
"고맙습니다. 헬레나. 하울. "
살짝 고개를 숙인 라한이 먼저 프리미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뒤를 헬레나가 길게 한숨을 쉬며 따랐다. 하울은 라한의 등을
보며 눈을 매섭게 치떴다. 불청객인 라한이 마음에 들지 않모 모양
이다
재회1
안으로 들어간 라한은 깨끗하게 단장된 객실로 안내되었다 그
는 머물게 된 객실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 시간까지
프리미아가 방문하지 않은 것이다
똑똑
자정이 한참지난 시간
막 잠을 청하려는 하는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은 풍
기는 기운으로 방문객이 프라미아임을 짐작했다
들어와
프리미아가 안으로 들어와 라한의 얼굴을 뚫어지라 처더봤다
한참을 그렇게 처다보던 프리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라한이 아니라고 생각한듯 했다
내모습이 바뀌어서 놀란 모양이네
"라한 맞아?"
"맞아. "
"목소리가 비슷하기는 한데 얼굴이 너무 달라 풍기는 기운도
. 뭐가 뭔지 모르겠군, "
프리미아는 풍기는 기운이 너무 약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녀에게 라한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라한은 풍기는 기운이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프리미아와 자신 주
변으로 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운을 폭사시켜 자신의 기운이 약
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프리미아는 라한의 들쑥날쑥한 기운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과거에도좀특이한기운이기는했지만, 이 정도는아니었다.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살이 떨릴 정도로 강해지는 기운이라니. 이런 힘
조절은 드래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라한이 맞는다면 강해졌군. "
"고마워. "
"그 얼굴은 뭐야?"
"이걸로 만든 거지 "
라한이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를 내밀었다. 폴리모프가 가능하
도록 해 주는 인챈트가 된 목걸이였다.
"마법 무구로군. "
"응. "
"그래도 완전히 믿기는 힘들어. 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땐 믿어주지. "
프리미아도 라한이 내민 목걸이가 인챈트된 마법 무구임을 알아
챘다.
하지만 그 마법 무구가 어떤 종류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 때
문에 라한이 하는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프리미아가 피해 다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다 로
테마이어스가 자신을 찾기 위해 보냈을 드래곤들. 그들을 경계해
야 하기에 확실하지 않은 건 쉽사리 믿을 수 없었음이다.
"미안하군. 이 얼굴은 한 번 되돌아가면 다시 6개월 정도 걸리거
든 다른 방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방법도 있기는 있지만 귀찮아. "
"그럼 난 네가 라한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
"대신 다른 걸 보여주지. 테세르!"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로브 안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자
다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뭐 해?"
-음냐. 안녕.
테세르가 조금은 성숙하게 변한 프리미아를 보며 손을 어색하게
흔들었다.
"그때 그 버릇없는 정령이로군. "
"이제 내가 라한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겠지?"
"훗. "
그제야 프리미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라한을
경계하느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좀 앉지. "
"그래. "
프리미아가 앉자 테세르도 라한의 로브에서 나와 탁자 위에 섰
다. 탁자 위에서 몇 번 고개를 흔들어 억지로 잠을몰아내는 테세
르.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탁자에 대자로 엎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왜 살아 있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은
거지?"
"이놈 실수로 어디 갇혀 있었다. 나오는 데 한 20일 걸렸던가? 그
렇게 고생 고생 해서 나오고 나니까혼자서 시간을보내고 싶더라고. "
라한이 테세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테세르는 뭔가
대꾸를 하려다 이내 포기해 버렸다. 대신 그는 말싸움보다 잠이 먼
저라는 듯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그랬군. 하긴, 예전부터 저 녀석은사고만치고다녔지 "
"너도 마찬가지였어. "
"그랬나?"
예전이었으면 발끈했을지도 모를 라한의 말도 프리미아는 웃음
으로 넘겼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이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변했군. "
"내가7"
"응. 뭐랄까? 어른스러워졌다고 할까?"
"칭찬으로 들을게. "
프리미아의 말투 하나하나가 라한과의 공백을 느끼게 해줬다.
실제 헤어진 시간은 겨우 13개월에 불과하다. 한데도 마치 10년은
지난 듯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그들도 변했겠지. '
프리미아의 변화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카이렌 일행이 떠올랐
다. 프라하를 먼발치에서 잠깐 보기는 했지만 대화는 해 보지 못했
다. 아마그와도 대화를 하면 13개월의 공백이 느껴질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카이렌, 투바도 그만큼의 공백이 느껴지리라.
"이제 네 얘기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여기서 술집 사
장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유희를즐길 때 만들어둔곳이야. 한5백 년쯤됐지. 그때
이곳에 술집을 차리고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물려줬어, 당시에 난
엘프로 유희를 즐길 때라서 5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나도 그
리 이상할 건 없지. "
"그러고 보니 귀가 길군. "
"이제 본 모양이네. "
"어. "
라한은 사람을 흘낏 봐도 쾌나 상세하게 파악할 줄 안다. 어릴
패 쫓겨 다녔던 기억이 라한의 성격을 치밀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
지만프리미아의 긴 귀는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프리미아의 외모
적 성숙함 때문에 다른 변화에 소홀했던 탓이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먼저 떠났던 네가 날 찾으러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
"혹시 이 부근에서 류카라한 본 적 있어?"
"류카라한? 로이나님이 예전에 사랑했다던 그 인간?-
"뭐?"
"아, 아니다. "
라한은 로이나와 류카라한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 얼핏 안면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사랑한 사이였다는 건 지금에서야 알게 되
었다.
'골치 아프네. '
류카라한의 요즘 행보는 위험 그 자체였다 자칫하면 인간이라
는 종즉 자체가 전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도 있 는 일을 진행하고 있
은 터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그를 직접 처리
할 생각이었다.
그게 인간이라는 종족을 대륙에 오래 보전시키는 길이라는 판단
에서였다.
프리미아. 근데 왜 다른 일행들과 떨어졌지?"
로이나님이 우리한테 떠나라고 했어.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우
리, 아니 레테아의 안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
.그러고 보니 형이 안 보이네 "
.레테아는 다른 곳에 있어. 이곳은 돈이 필요해서 잠시 수금하
러 온 것분이야."
"형이 있는 곳이 어디야
"부티아르 섬 ."
프리미아의 입에서 생소한 지명이 나왔다. 대륙 지도를 완전히
외워서 다시 그렸던 라한조차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
,넌 말해도 모를 거야. 대륙이 아니니까. "
"대륙이 아니라고?"
.응. 부티아르 섬은 대륙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
진 곳에 위치한 섬이야. 아까 날 찾아왔던 녀석들은 그곳에 사는
원주민이 었지 . "
" 큭 "
라한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 헛짚었다.
라한은 헬레나와 하울이 대륙의 북부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조금은 더워 보이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실제로는 오히려 대륙의 한참 남쪽에 위치한 곳 출신이었
다. 그들은 너무 더운 곳에서 왔기에 이곳 날씨가 오히려 선선하게
느껴져 조금은 긴 옷을 입은 거였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옷을 입었
을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지 못한 라한이었다.
'요즘은 실수투성 이로군. '
부티아르 섬은 대륙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이다. 그곳은 대륙
에 있는 웬만한 나라 두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크기를 가지고 있
다. 섬 안에 산,산맥, 강, 호수. 이 모든걸 가지고 있는곳이다.
"왜 그래?"
"아니야. 근데 아까 스승이라고 부르던데 검을 가르친 거아?"
"한50년 됐나?그때 부티아르 섬에 간 적이 있었어. 처음그곳
에 갔을 때는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하더군. 그
래서 나도 표류해서 떠밀려 온 척하고 거기 사람들과 섞여 지냈어. "
"드래곤이라는 건 숨기고?"
"아니. 그곳사람들은드래곤이 뭔지도몰라. 그들이 쓰는대륙
어도 내가 가르친 거야. 거기는 말만 있지 글이 없거든 "
"미개한 곳인가?"
라한의 반사적인 대답에 프리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
에 라한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없는 듯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미개하다는 기준이 글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 드래곤이 뭔지
모른다는 거야? 생활환경이 달라 아는 범위가 다를 뿐이지 그들은
미개인이 아니야. "
"하지만 글은 모든 문명의 척도가
"그래, 글이라는 건 중요하지 기록을할수도 있고 업적을전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그들에게도 글 아닌 글이 있어. 바로 그림
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남기고 싶을 때는 그림을
그려 "
"그래. 내가잘못했어, 미안해."
라한이 얼떨떨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알고 보면 프리이마의 말
도 맞다 싶었다.
어차피 미개하다, 그렇지 않다의 기준도 이곳 판트리아 대륙 사
람들이 만든 거였다. 이곳의 기준으로 이곳을 높게 보는 말이니 바
탕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부티아르 섬에 사는 사람들 기준으로 이곳이 미개하다면
판트리아 대륙에 사는 사람 전부가 미개인이 되는가? 그건 아니었
다. 미개하고 아니고를 나누는 기준. 그건 같은문화를 가진 사람
들끼리 그 문화를 공유하지 못할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전
혀 동떨어진 문화의 사람끼리는 가려내기 힘든 문제였다
"됐어.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나도 화낼 자격이 없
는 거지. "
"그곳에 애착이 많은가 보네. "
"그곳에는 날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사람이 없
거든, "
"이해가 간다. "
라한도 최근 심하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자신이 강하다는 이유
만으로 인간이 아닌 듯 떠받드는블리아드 마을사람들 또, 자신
이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로테마이어스
어차피 자신도 인간일 뿐인데 왜 그렇게 다른 종족 대하듯 하는지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데 아직 왜 왔는지 얘기를 안 했어. 류카라한이 왜?-
"로테마이어스가 류카라한 진영에 자신의 눈을 심어뒀더군. 그
걸 걷어낼 생각이야. "
"로드, 그와싸울 생각이군. "
"이미 싸움은 시작됐어. 이젠 내가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
니야. "
라한은 이미 로테마이어스와 싸울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도 아
직 싸우지 않고 있는 건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라한의 힘이 완전하지 못해서 승률이 반반이라는 것. 라
한의 성격상 이런 승률일 때는 일단 싸움을 피하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로테마이어스의 지위가 드래곤 로드라는 점에 기인한
다. 다른 드래곤의 분노를 사지 않고 당당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서 뒤끝을 남기지 않는 길, 그게 뭐가
됐든 드래곤 전체와의 싸움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탓이다.
"그렇겠지. 로드는 널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 크라이드
리안까지 죽어 버렸으니
"그 얘기는 됐어. 류카라한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로테마이
어스가 심어 놓은 세작이 어디 있는지는 알거든. 누군지도 알고. -
"그 일이 끝나면 어쩔 생각이야?"
"어?"
"로드와의 일이 다 마무리되면 어떻게 지낼 거냐고. "
"그게 어
라한은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눈앞에 닥친 일이
많아서 생각이 미치지 않았음이다.
"할 일 없으면 일 끝나고 부티아르 섬으로 와. 몬스터도 있고 바
다 괴물들도 많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곳이야. 가족을 위해서 몬스
터와 맞서 싸우는 전사들. 그런 전사들이 싸우고 돌아오면 따뜻하
게 맞아주는 가족들. 그리고 그런 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검을
연습하는 아이들, 그곳은 치열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곳이야. "
"내가 가도 될까?"
"물론이지. 언제나환영이야. 레테아도아주좋아할거야."
"응 일이 끝나면 꼭 갈게. 반드시. "
라한도 차별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권력 다툼이 없고 자
신을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먹
은 터에 받은 제의라 더 솔깃했다.
"난 내일부터 식재료를 사 모아야 해서 그만 자야겠다. 쉴 만큼
쉬다 가도록 해. 종업원들한테는 미리 말해뒀으니까. "
부티아르 섬은요즘 연일 해일이 일어 식량이 부족했다. 테세르
가 말한 물의 정령의 거듭남 탓이다. 프리미아가 육지에 나온 것도
해일 때문에 부족한 식량을 사 가기 위함이었다
"아참 형한테는나봤다는얘기 하지 마. 걱정할거야."
"알았어. "
"낮에 그 녀석들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
"그러지. 근데 라한. "
프리미아가 방을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라한을 불렀다
"왜?"
"네가 그 녀석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나이가 마흔이 넘는다.
부티아르 종족 특성이 노화가 느려서 어려 보이지만, 실제로 너보
다 나이가 많다. "
"그, 그래?"
응.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너라고 부르지 말고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그럼 간다. 쉬다가가."
프리미아가 나간 후에도 라한은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리미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라한의 멍한 표정에 테세르가 라한을 쿡쿡 찔렀다. 프리미아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깬 테세르였다.
-주인 왜 그래?
"아니야. "
-주인 이상해.
"그게 모르겠다. "
몹시 복잡한 심정이었다. 과거에 한 번 결혼했던 레테아였기에
형수라는 존재가 처음인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은
기분이 남달랐다.
마치 진짜 가족을 맞았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너무 생소한 느낌
에 머리가 복잡했다.
류카라한 일행의 본진은 베센 왕국의 동남부 지방이다. 세력을
키우려는 마음을 먹은 후 장소를 물색했고, 이런저런 여건에 가장
들어맞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들이 베센 왕국을 택한 건 패전 이후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이
유에 기인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한 나라의 내
부에서 대놓고 군사훈련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궁에서 다 알더
라도 예의상 어느 정도는 감춰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예의를 덜
지컥도 되는 약한 나라가 좋았다. 베센 왕국이 적격인 셈이다.
또 베센 왕국의 많은 지역 중 동남부 지방을 택한 건 이곳에 넓
은 평야와 분지, 바다가 함께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은 군사를 훈련시키는 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또 베
센 왕국을 택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부유한 곳을 찾다 보니 바닷가
밖에 없었다. 가뭄의 피해를 바다의 어획량으로 어느 정도는 보완
한 것이다.
류카라한 진영의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저택. 그곳에서도 가
장 깊은 내실에 류카라한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모였다.
"모두 모였군. "
"오랜만에 다 모으는군. "
잉글리아트가 비꼬듯 류카라한을 질책했다. 그 말에 굴레를 벗
은 라이칸드로프 케이플과 미스티크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자신
들이 인정한 류카라한을 비난하는 게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반면,
굴레를 벗은 인간들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잉글리아트에게 찬성
의 눈빛을 보냈다
"일이 있었다. 이해해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
"흠. "
류카라한이 당당하게 버티고 나오자 오히려 잉글리아가 할 말
이 궁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수장 자리를 때려치우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 상황에서 너무 위험한 발언이었다. 자칫 이
자리에서 류카라한 측과 잉글리아트 측이 정면충돌할 수도 있다.
아직 카이렌 일행과 드래곤이라는 큰 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내
부 분열은 최악의 경우였다.
"10일 후에 카이렌 일행을 끝장낸다. "
"가능한 소리인가? 아직 그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르지 않
나?"
잉글리아트가 차분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이번 발언은 류카라한
에 대한 반감이 아닌 이성적인 생각에서 나온 얘기였다.
"그들을 나오게 할 생각이다. "
"무슨 소리지?"
"함정을 파서 이번 기회에 완전히 처리할 생각이다.
"함정?"
사실 류카라한은 카이렌 일행과의 충돌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래서 지금까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카이렌 일행과의 정면충돌을
알게 모르게 피해왔다.
자신들의 진형이 카이렌 일행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은 터. 특히 카이렌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는 이상
정면충돌이 공멸로 이어질까 걱정된 탓이다.
그러던 류카라한이 마음을 굳혔다. 야금야금 세력이 축소당하는
게 더 큰 피해를 낳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제3구역 부근에 골렘을 모조리 모아 둘 생각이다. "
"골렘? 미쳤군. 그러다 잘못해서 그들에게 파괴당하기라도 하
면 어쩌려고
류카라한 세력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일행 그 자체이다. 류카라
한과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들 그리고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기
존 다섯 명, 이들이 대륙 최강의 세력을 이끄는 주축이었다.
이들을 제외하고 가장 큰 힘이라면 모두가 골렘을 꼽는다. 특히,
마법사들에게 골렘은 단순히 골렘의 능력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든든한방어막, 캐스팅 시간을 벌어주는 지연제. 골렘의 합류만으
로 힘을 두 배 이상 얻은 것이다.
류카라한은 그런 소중한 존재인 골렘을 미끼로 사용하자고 말하
고 있다. 자칫하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카이렌과의 대치에서 열세
로 돌아설 수도 있는 문제였다.
"골렘을 쓰지는 않는다. "
"하지만방금골렘을미끼로
"8연무장 뒤쪽에 골렘 8기를준비시컥 놨다. 물론, 겉만 번지르
르한 가짜 골렘이다. "
"그럼 그걸 미끼로?"
"이번 함정으로 카이렌 일행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세부 사항은
미스티크에게 말해뒀으니 전달받도록. 이상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내실을 나가 버렸다. 얼굴 가득 불쾌한 표
정을 떠올린 채였다. 자기 이익만 따지는 잉글리아트 일행들에 대
한 역겨움의 표현이었다.
류카라한이 사라진 후, 미스티크와 케이플이 잉글리아트 일행들
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하다 뭔가 눈으로 얘기하
듯 이상야릇한 표정만 지었다.
남은 이들은 류카라한이 나가고 거의 10분 동안을 침묵을 지켰
다. 류카라한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
"갔군. "
"미스티크. 대체 그놈이 말한 함정이라는 게 뭐야?,
"아, 그거? 나한테도 말로 안 하고 여기 써서 주더라고.읽어
봐. 그놈들 안 걸릴 수가 없겠더군. -
잉글리아트와 미스티크가 친근하게 대화했다. 좀 전에 보았더
적대적인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 단순하네. 그냥 골렘을 놔두고 개인 훈련하는거잖아. 그때
골렘을 비우는 시간은 대충 1o분?-
"응. 그놈들이 10분 안에 공격해서 골렘을 다 부술 수 있을까?"
미스티크의 물음에 잉글리아트가 눈을 갑고 생각에 잠겼다. 한
참이 지나서 잉글리아트가 다시 눈을 떴다.
"카이렌. 그놈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
"어떻게?"
"그놈에게는 안 보이는 묘한 능력이 있더군. 그놈이라면 10분
안에 경비병을 모조리 다 처리하고 골렘을 완파시킬 수 있다. "
잉글리아트가 나름대로 카이렌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 결과는
충분히 가능하다였다. 그리고 잉글리아트의 그런 판단은 실제로도
옳았다.
카이렌은 지금까지 싸우면서 가진 능력을 모두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굴레를 벗기 전에 대륙을 유랑할 때도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한다면 10분 안에 골렘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동료들의 힘까지 더한다면 10분
을 반으로 줄여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 엘프 놈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야. "
"당연하지. 그놈하고 드래곤만 어떻게 하면 류카라한 그놈도 이
제 끝이다. "
"크크크 그럼 세상은 우리가 하하하하 "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케이플이 대소를 터트렸다. 좀 전까
지 류카라한을 존경하는 듯 행동했던 케이플, 그도 실제로는 잉글
리아트와 한통속이 었다.
'류카라한. 너도 참 불쌍하다. '
잉글리아트의 회의 내용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프리미아가
영하는 술집을 나온 라한이 었다.
그는 원래 드래곤이 심어놓은 자만 데리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한데, 훈련 중에 갑자기 뛰어가는 케이플을 보며 괜한 호기심이 발
동했다. 평소에는 항상 화만 부르던 호기심이 이번에는 제대로 발
동된 거였다.
'그나저나 카이렌. 설마 저 멍청한 함정에 빠지지는 않겠지?'
라한의 눈에는 류카라한이 짠 함정에 많은 허점이 보였다. 특히,
훈련을 하면서 골렘을 놔두고 간다는 점이 대표적이었다. 아무리
대규모 훈련이라 하더라도 골렘을 두고 다니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골렘은 다른 차원에서 대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훈련에 아무런 방해가 안 되는데 왜 두고 다니겠는가?
두 번째 문제는 다시 돌아온다는 시간이었다. 겨우 10분. 그 정
도로 짧은 훈련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함정인
셈이다.
'어쩌면 그걸 노린 걸지도 모르지. '
류카라한은 바보가 아니다. 그 역시 10분의 짧은 훈련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건 잘 알 터였다. 한데도 10분이라는 시간으로 소문내려
고 하고 있다. 그건 오히려 카이렌의 생각을 역으로 되짚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류카라한이 10분이라고 소문냄으로써 '골렘을 부술 시간이 없
으니 꿈도 꾸지 마라. ' 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카
이렌은 10분 안에 부술 자신이 있으니 덤빌 테고 말이다.
'아무래도 속겠어. 류카라한이 심리전에 이렇게 능할 줄은 몰랐
는데. 에고. '
카이렌이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인간들의 간교함을 너무 모르는
게 단점이었다. 게릴라전을 꾸준히 펼쳤지만 그중에서 간교하다고
할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아주 정석적인 게릴라전과 기습. 매복을할 때도 정석에서 벗어
난 적이 없었다. 류카라한은 카이렌의 그런 성격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 번만 도와줄게. '
라한이 은밀하게 내실을 빠져나와 연무장으로 갔다. 그리고 납
치 대상을 찾아서 조용히 기절시켰다
'공간으로. '
라한이 사라지고 류카라한 일행은 함정을 하나씩 진행시켰다. 8
연무장에 위치한 골렘을 지정한 위치로 옮기고 대규모 훈련도 교육
생들에게 전달했다. 오직 류카라한을 비롯한 핵심 인물만 정확한
사실을 알 뿐.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방 안에 틀어박혔다. 테세르와 슈라,
변의 출입마저도 통제할 정도로 완벽한 격리였다. 문 밖에서 테세
르가 몇 번이나 라한을 불렀지만 그냥 물러가라는 말만 할 뿐, 방
밖으로 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지 5일.
라한이 초췌한 모습으로 방을 나왔다. 모습은 그랬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주인. 무슨 일 있어?
"먼저 에테로님한테 가 봐야겠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 "
라한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블리아드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집
중시킨다. 그가 해놓은 일이 많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세르와 슈라의 움직임은 라한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
들이 한 번 움직이면 마을 전체가 술렁이며 전쟁 통을 방불케 했다.
거대한 덩치가 쿵쿵거릴 때마다 아이들은 슈라를 따라다니기 바
빴고 테세르가 손을 한 번 들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을 움찔거리
며 겁에 질리기 일쑤였다. 정령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완전히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라한은 거추장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다
공간 이동을 사용하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일. 조
용히 가서 처리할 일이었기에 혼자 가는 게 나을 성싶었다.
-괜찮아? 얼굴이 말이 아닌데.
"괜찮아, 기분은 아주 좋으니까. "
라한이 문을 활짝 열고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폐부까지 시원
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아! 좋다. 금방 올 테니까 말썽 피우지 마라. 공간으로. "
라한이 테세르에게 한차례 주의를 주고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테세르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굳이 보채지는 않았다.
5일간의 칩거 후 나타난 라한.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어서 움직였을 터였다. 그런 상황을 대
충은 눈치 챘기에 보챌 수 없었음이다.
변화를 재촉하다
닉스의 술집으로 간 라한이 에테르와 마주 앉았다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라한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는 에테르 꽤긴 시간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답답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군요
때가 되면 하겠지
훗 에테로님은 그 성격 때문에 오래오래 살 겁니다
허허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에테로의 소탈한 웃음에 라한의 마음도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세상사를 달관한 사람의 지혜를 엿봤다는 느낌 그런 오
묘한 기분에 마음까지 아늑하게 변했다
전 에테로님과 대화하는 게기분 좋습니다
나도 자네 같은 뛰어난 젊은이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네
"에테로님은 못 당하겠군요. "
"그래, 말할준비는 된 듯하구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
만 해 보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네. "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잠시 머뭇거리다 힘겸게 입을 열었다.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말해 보게. "
"카이렌 진영에 보낸 세작이 혹시 그의 정보 담당으로 있는 사람
입니까?"
원래 라한은 베사 길드가 심은 눈이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믿는 에테로의 손안에 있는 사람일 테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그러자 베사
길드의 정보력에 대해 감탄을 넘어서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카이렌 진형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헤르만. 그는 카이렌으로 분
장해서 드래곤 둘을 완벽하게 속여 넘긴 하프 엘프였다.
"그렇다네. 하프 엘프이면서 우리 길드 소속이지. 어떻게 알았
는가?"
"드래곤 둘과의 싸움에 있었던 이들 중 제가 모르는 사람은 두
명입니다. 한 명은 나무 안에 숨어서 드래곤을 죽인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카이 렌으로 분장한 사람이죠. "
"그런가?"
"예. 그런데 베사 길드는 정보 길드입니다. 다크라이더 길드가
전신이니 암살자 길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곳의 암살
자들로 드래곤을 암살하기는 힘들죠. 아마, 드래곤을 죽인 그는 굴
레를 벗은 이들 중 한 명일 겁니다. 카이렌에게 몸을 숨기는 법을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겠죠. "
라한이 본 다크라이더 길드는 대륙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하나를보면 열을알듯, 정보를다스리는그들의 능력을보면
암살자들의 능력도 능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상대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암살자
라도 처리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대륙
에 있는드래곤은 이미 오래전에 씨가 말랐을 것이다. 결국, 다크
라이더 길드의 초특급 암살자가 드래곤을 죽이길 바라는 것보다 굴
레를 벗은 이들 중 한 명이 카이렌에게 은신술을 조금 배우는 게 더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허허. 그렇군.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좀 두려운 생각이 들더군요. "
"뭐가 말인가?"
"베사 길드의 정보력 말입니다. 좀무서울 정도입니다. 만약 이
들이 저에 대해 파고들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
강한 사람을 수족으로 두는 건 모든 이의 바람이다 하지만 그
수족이 너무 강해서 통제마저 불가능하다면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
었다. 지금 라한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베사 길드의 정보력은 뛰어나다 못해 두려울 정도였다. 이들의
정보력과 은밀함이면 자칫 자신도 등 뒤에서 칼을 맞을 수 있는 것
이다. 또, 이들의 정보력이 나쁜 일에 사용된다면 대륙 전부를혼
란에 빠뜨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음, 이해는 가네, "
"묻겠습니다. 세상을 집어삼킬 생각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
씀해 주십시오. "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알겠네. 후후, 이제 자네가 인간으로
보이는군. "
" 예?"
"전에는 뭐랄까? 달관했다고 할까? 나쁘게 말하면 자신 외에는
관심 없는 태도 때문에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네. 그런데 지금은 인
간으로 보이는구먼. 세상이 혼란아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
게 보이는군. "
에테로의 평가에 라한도 자신이 그랬나에 대해 고민해 봤다. 아
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잘 모르는 얘기였다.
최근에 스스로 인간적이고 싶어 노력한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이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던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족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던가?
'내가 인간인 건 확실하고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 그런 내가다시 인간성을 회복한건가?모르겠군. 모르
겠어. '
라한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다시 에테로를 바라본 라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대답을 안하셨습니다. 세상을 집어삼킬 생각입니까? 베
사 길드뿐 아니라 다크라이더 길드도 함께 포함해서 물어보는 겁
니다. "
"후후, 글쎄다. 자네가걱정하는건 우리가이 세상을뒤에서 조
종하는 것일 테지. 우리가 가진 정보력으로 말이야. 맞는가?"
"맞습니다. "
"그러지는 않을 게야. 뒤에서 조정해서 뭐 하는가? 그런다고 세
상 사람들이 베사 길드가 주인이라고 인정해 주는가? 단순한 자기
만족과 야망을 위해? 아닐세. 우린 그런 야망을 품은 적이 없어.
자기만족에도 관심이 없네. "
에테로의 목소리는 어딘지 쓸쓸하게 들렸다. 너무 애잔해서 라
한의 기분마저 가라앉을 정도였다.
"왜요? 그런 야망을 품을 법도 한데요. "
"자네는 모르겠지. 내가, 아니 다크시안님을 포함해서 우리가
왜 암살자 길드와 정보 길드를 만들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휴우
우, 우린 세상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네. 누군가에게 버림받거나 조
종받은 경험이 있거든. "
"그럼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군요. "
"끝까지 듣게. 물론,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고는 못 하겠
네. 하지만 우린 그런 방법보다 우리 같은 사람을 구제하는 길을
택했네. 대륙 북동부 사피을 지방은 원래 거대한 평야였네. 십여
년 전 우린 그곳을 사들여서 집을 지었지. 그리고 우리처럼 버림받
거나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던 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네. "
라한도 사피을 지방의 변화에 대해서는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
최근 10년 사이에 가장 크게 변화한 곳으로 대륙에서 쾌나 유명
했다. 그곳의 주인이 누군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죄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
었다.
"거기가
"그곳을 만들자고 말한 사람이 다크시안님이고 그걸 실천에 옮
긴 사람이 나일세. 우리 꿈은 자네가 말한 것처럼 그리 거창하지
않아. 작은 지방을 얻어서 그곳에서 마음 편히 지내고 싶을 뿐이
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크라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의 수장으로
있지만, 일만 마무리되면 그곳에 은거해서 지낼 생각이네. 우린 마
음이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거든 "
에테로의 말에 라한도 느끼는 게 많았다. 작은 행복. 특히, 마음
이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은 라한의 가슴 깊숙이 박히는 말
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
"아닐세. 오해를 할 법한 일이었으니 이해하네. 오히려 지금이
라도 믿어주니 고맙구먼. "
"이거 아침부터 괜히 찾아와서 소란만 피우다 가는군요. "
"멀리 나가지 않겠네 "
라한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닉스의 술집을 나왔다. 잠깐 나와 길
을두리번거리던 라한이 방향을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촌장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라한이 방문했을 때 촌장은 자신의 집을 내주고 다른 곳에서 지
냈다. 하지만 라한이 자기 집을 구한 뒤부터는 촌장도 원래 자기가
살던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라한이 방향을 잡은 곳도 자신이 잠시
머물렀던 촌장의 집이었다.
똑!똑!
"촌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철컥!
"어서 들어오게. "
촌장이 잠옷만 입은 채로 서둘러 뛰쳐나왔다 라한의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일단 앉게. "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나보군요. "
라한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가 불안
했던 촌장의 따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괜찮네. 그래 무슨 일인가?"
"먼저 한 가지 밝힐 사실이 있습니다. "
"뭔가?"
"마을 원로들께서 절 드래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
니다. "
"흠. "
라한은 에테로와 대화를 마치고 나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게 자
랑스러웠다. 딱히 인간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아니었다. 인간
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30년 이상 살아온 라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이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번진 것이다.
"전 드래곤이 아닙니다. 촌장님과 원로들께서 오해하고 계신 겁
니다. "
"역시 그랬군. "
"촌장님은 알고 계셨군요. "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세. 나도 아함브라님 말씀만
들었을 때는 자네를 드래곤으로 믿고 있었지. 근데 자네가 지금까
지 우리 마을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끼더군. 자네에
게는 따뜻한 온정이 느껴졌어. 내가 드래곤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
만 그런 따뜻한 마음씨는 우리 인간들만 가지는 게 아닐까?"
익스멈 촌장의 말이 라한의 기분을좋게 만들었다. 단순히 인간
으로 남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말. 별게 아닌데도 미소가 절로 지어
졌다.
"감사합니다. "
"그런 말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
는 겐가?"
"몇 가지 건의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말해 보게, "
촌장이 등을 등받이에 묻고 들을 채비를 갖췄다. 라한도 머리를
정리하며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블리아드 마을을 이대로 두실 생각입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자세히 말해주겠는가?"
"지금 대륙은 장기간의 가뭄으로 몹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블리아드 마을은 제가 필요할 때마다 비를 내려서 다행히도 별 피
해가 없지만, 제가 계속 머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겠지. "
익스멈 촌장의 얼굴에 불안감이 담겼다. 라한이 마을을 떠난다
는 말이 그를 초조하게 한 모양이다
촌장의 얼굴을 본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당장 떠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마을이 혼자 설 수 있
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뿐입니다. "
"그래도 섭섭하구먼. "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설치한 결계가 영구적이지 않
다는 건 아시겠죠?"
라한의 물음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설치한 결계의 수명이 짧은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겁니다. 전 그 기간을 50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휴우우. 다행히 많이 남았구먼. "
"많이 남은게 아닙니다. 겨우50년. 그안에 몬스터는물론이고
케라스 왕국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힘을 키워야 합니다. "
"몬스터는 그렇다 치더라도 케라스 왕국은 왜? 우리가 케라스
왕국과 전쟁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말인가?"
익스멈 촌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를 보며 라한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50년의 공백은 그리 작지 않거든
요. 50년 후에 이곳이 개방됐을 때, 서로의 문화가완전히 같으리
라 생각하십니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그건 그렇지만. "
"문화적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낳게 마련입니다. 그런 생각의
차이는 오해를 부르게 되겠죠. 어쩌면 그게 빌미가 되어 전쟁이 벌
어질 수도 있는 일이고요. "
익스멈 촌장은 라한의 말에 뭔가 반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
무리 생각해 봐도 라한의 말이 옳았다.
50년이라는 시간. 그것도 완전히 단절된 채로 보내는 50년은 그
리 짧은 게 아니었다. 라한의 말마따나 문화적 공백이 만든 생각의
차이는 서로간의 부적응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대부분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흡수해서 차이가 나는 생각을 없애는 방
법을 택하게 마련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7"
"먼저 경제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요. "
"전문가?"
"예. 농사만큼은 스스로 최고라 자부할 수 있는 농사 전문가. 농
기구를 만드는 일은 최고로 잘하는 농기구 전문가. 그리고 군사용
무기를 만드는 일에 단연 발군인 무기 전문가. 일을 최대한 세분화
해서 각 분야에서 전문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
익스멈 촌장은 라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
를 보며 라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어느 술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종업원은 손님
의 기분을 헤아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
졌더군요. 그런 능력이 타고난 것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
"그런가?"
익스멈 촌장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직도 전문가의 중요
성을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제가 그 지방에 다시 간다면 반드시 그 술집에 갈 겁니다. 그 종
업원과 대화를 하는 일 자체가 편안했거든요. 아직도 느끼는 게 없
으십니까?"
"잘 모르겠네. "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몇 배의 성과를 거
둘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만약촌장님께서 아주 어린 시
절부터 촌장이 되기 위한 수업을 해왔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이곳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농사에 대해 배웠다면 그가 컸을 때 어
떻게 변할까요?"
"어른이 되었을 때 농사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되겠지. "
그제야 익스멈 촌장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촌장수업
이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다.
실제로 익스멈 촌장은 촌장 수업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받
지 못했다. 그는 아함브라가 갑작스럽게 촌장을 그만두고 새로이
촌장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기간은 블리아드 마을 자체도 촌장의 무능
력으로 몹시 힘들어 한 시기였다.
만약 촌장이 되기 위한 어떤 교육을 미리 받았다면 그렇게 힘들
어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또, 블리아드 마을로서도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게 분명했다.
"한분야에 대해 아주 어릴 때부터 꾸준히 노력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문가가 된 사람을 충분
히 존중해 주고 대우해 준다면 사람들도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

"지금 블리아드 마을 사람들은 딱히 잘하는 분야가 없습니다
모두 이 분야 저 분야에 손을 대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할 줄 아
는 건 많지만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어정정한 사람이 되어 버
린 겁니다. "
라한의 말이 익스멈 촌장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꽃혔다.
그도 이런 일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
다. 일은많고 일손은적고. 그런상황이 계속되다보니 어쩔수없
이 이렇게 된 거였다.
"하지만 일손이 너무 부족하네. "
"아니오. 일과사람의 배정이 잘못된 겁니다. 지금 집집마다 기
르고 있는 가축은 가축 전문가를 정해서 맡기고 그가 하고 있던 농
사일은 가축을 넘긴 사람에게 나눠주십시오. 또, 농사와 자경단 일
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검에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농
사를 그만두게 하십시오. 마찬가지로 농사에 재능이 있는사람에
게는 검을 손에서 놓고 쟁기와 호미만 손에 들도록 만드십시오. 그
리고 끝으로 어린아이들에게는 글을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분야를 나눠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도록 하십시오. "
라한의 긴 설명에 익스멈 촌장이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얘기였다.
근데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어차피 나눈다고 해서
일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이 맡는 일의 가짓수가 줄고 맡은
일의 양이 늘어나는 것일 뿐이다 일의 효율이 오르니 오히려 더
큰 이득을 남길 듯도 싶었다. 문제는 업무의 교환 과정에서 생길
혼란과 공백 기간의 무노동이었다.
"그럼 그 변화기간은 . "
"슈라와테세르, 변을 이용해서 최대한돕겠습니다. 대신3개월
안에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기간만도운후에 일에서 손을 뗄 생
각입니다.
익스멈 촌장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이 일의 성패에 대해 깊
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라한은 촌장이 생각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한
참 후 익스멈 촌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3개월이라
"촉박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제게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
해해 주십시오. "
"노력해 보겠네, "
이제 라한이 해 줄 수 있는 얘기는 다 끝났다. 남은 건 익스멈 촌
장과 블리아드 마을 사람의 몫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잘해 낼 수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들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라한이 몸을돌렸다. 그상태로 집을 나가려던
라한이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촌장님. 제가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
"말'하게. "
"지금 블리아드 마을의 촌장은 다른 사람이 아닌 익스멈 촌장님
본인입니다. 아함브라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더 이상 휘둘리지
마십시오. "
라한의 말에 익스멈 촌장이 발끈하듯 입을 열었다.
"그분은 전대 촌장이셨네. 그분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건 당연한
일일세. "
"의견을 물어보는 정도라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분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두머리가 둘이면 조직
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죠. 그냥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만. "
할 말을 마친 라한이 다시 몸을 돌려 집을 나갔다. 익스멈 촌장
라한이 한 말을 계속 되새기며 고민했다.
'우두머리가둘이면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지
않는다 않는다 휴우, 모르겠군. '
로테마이어스가 자신을 따르는 드래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대
륙 곳곳에서 정보를 모으던 드래곤도 모두 포함해서였다. 로테마
이어스를 제외하고도 열세 마리나 되는 수였다.
"로드님. 모두 모였습니다. "
"역시 프리미아가 안 보이는군. "
"죄송합니 다. "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의 짧은 대답을 듣고 주변을 찬찬히
훔었다. 자신을 포함하면 모두 열넷. 대륙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는 엄청난 세력이었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네가 여기 있는 드래곤들 중에선 나이가 제일 많군. "
" 예. "
아카폴리안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겨우 몇 십 년 차이였
다. 드래곤의 수명을 감안하면 아주 작은 차이인 셈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겨우 몇 개월 정도이니 말이다.
"오늘 결판을 짓는다. "
" 예. "
로테마이어스의 선언에 다른 드래곤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런 언
질도 받지 못한 탓이다. 갑작스러운 공격 명령에 어안이 벙벙했다.
로테마이어스가 내릴 결판이라면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
그리고 라한을 죽이는 것뿐이다.
원래는 로테마이어스도 라한과 다른 일행을 치는 걸 더 신중하
게 하려 했다. 가장큰 변수인 라한의 실력을알방법이 없었기 때
문이다.
그랬던 로테마이어스가 공격을 결정한 건 카이렌 일행과 드래곤
둘과의 대화에 기인했다. 그들의 입에서 라한을 걱정하는말을들
은 것이다.
라한의 실력을 가장 잘 아는 이는 그와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카
이렌 일행이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 라한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
나왔다. 그건 드래곤 둘로도 라한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
와같았다. 결국,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실력이라면 라한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라한 이놈. '
지금까지 라한의 허세에 놀아났다고 생각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카폴리안. 네가드래곤 넷을 데리고 카이렌 일행을 친다. 목
표는 필살. "
"알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드래곤 넷을 골라 옆으로 물러섰다. 가름이 끝나
자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투미아. "
"네. "
"너도 드래곤 넷을 데리고 류카라한 일행을 쳐라. 마찬가지로
목표는 사살이다. "
"알겠습니 다. "
로테마이어스가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리투미아에게 류카라한
일행 공격의 지휘권을 맡겼다. 라한에게 패해서 돌아오기는 했지
만 그래도 가장 신중한 그가 믿음직스러웠으리라.
"벨라루스. 몸은 좀 괜찮으냐?"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
"넌 나와 함께 라한에게 복수하러 간다 넌 몸이 아직 완전히 회
복되지 않았으니 구경만
마지막 명령을 내리려던 로테마이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나
고 싶지 않은 이의 기운을 느낀 탓이다.
로테마이어스가 레어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지나
자 금발을 탐스럽게 기른 중년 노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베르타라스님. 여긴 어쩐 일입니까?"
로테마이어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드래곤
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베르타라스님을 뵙습니다. "
"전대 로드님을 뵙습니다. "
"그만. 로드여. 나하고 갈 곳이 있다. "
"베르타라스님. 오늘은중요한 일을 할생각입니다. 다음에 찾
아뵙도록 하죠. "
로테마이어스의 머릿속에는 라한에 대한 살심밖에 없었다. 지금
까지 그에게 놀아났다고 생각하자 하루도 더 지체하기 싫었다. 최
대한 빨리 달려가서 모가지를 비틀어놓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
을 것 같았다.
"로드여. 오늘은 반드시 나와 가야 한다. "
"저 역시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흠, 드래곤들을 많이 모았군. 오늘 그들을 죽일 셈인가?-
"예. 막는다면 설사 베르타라스님이라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대담한 말에 베르타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
신이 뽑은 로드 로테마이어스. 자신의 실수가 대륙에 피를 부른다
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래. 내가로드가하는 일을막을수는 없겠지. 난늙은드래
곤일 뿐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나도 물러설 수 없다. -
"베르타라스님 !"
로테마이어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끝까지 막고 나오는 그가
짜증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베르타라스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보게 로드. 오늘 일은 내 사심이 있어 온 게 아닐세. "
"그럼 ?"
"신의 사자가 찾아왔네. 차기 로드가 된 자네를 만나고 싶은 모
양이야. "
"신의 사자? 판테아?"
로테마이어스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베르타라스
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더군. 신의 사자가 바꿔 모양이야. "
"그럼요?"
"이름이 퓨리트라고 하더군. "
퓨리트는 몇 년 전 판테아의 후임으로 저승사자가 되었다. 심심
하면 라한을 살펴보며 마치 영화를 보듯 구경했던 퓨리트. 그는 판
테아의 경우를 거울삼아 웬만하면 물질계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길어진 가
뭄과 대륙 전체에 퍼지는 전쟁의 기운. 거기다 드래곤들 사이에서
퍼지는 강한 살기의 느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문한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아카폴리안. 네가나대신 정리 좀해라."
"알겠습니다,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말은 오늘 일을 다음으로 미룬다는 말이었다.
다섯의 드래곤이 각각의 진영을 치더라도 라한이 어느 한쪽에 합세
하면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수 없는 법. 다음에 자신까지 힘을
합해서 완벽하기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은 로테마이어스가 하려고 했던 일을 자신에
게 맡긴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라한에 대한 공격을 아카폴리안이
지휘하는
"베르타라스님. 혹시 거짓을 전하는 건 아니겠죠?"
"난 지금까지 맹세를 했건 안했건 거짓말을 한 적이 없네. "
드래곤들이 맹세와 이름을 걸고 한 약속에 약한 건 사실이다. 대
신 아무것도 걸지 않은 약속에는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때론 거짓
말도, 때론 사기도 치는 존재가 드래곤이다.
그러나 베르타라스는 유희 때를 제외하면 그 어떤 거짓말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유희 때에도 거짓을 싫어해서 진실된 행동을 하
려고 최대한 노력했던 이가 베르타라스였다.
"알겠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내 레어에 있네. "
"가시죠. "
로테마이어스의 눈가가 약간 찌푸려졌다. 신의 사자인 퓨리트가
베르타라스의 레어에 있다는 게 거슬린 모양이다.
누가 뭐래도 현재 로드는 로테마이어스였다. 신의 사자가 찾아
온다면 자신을 먼저 만나는 게 순리였다. 한데도 자신이 아닌 베르
타라스를 먼저 찾아갔다.
만약 예전 신의 사자였던 판테아라면 친분 때문에 먼저 갔다고
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퓨리트는 베르타라스로서도 처음 만
나는 존재였다. 그럼 지위를 봐서라도 자신을 먼저 찾아와야 정상
이었다.
"가지. 매스 텔레포트!"
베르타라스와 찡그린 얼굴의 로테마이어스가 모습을 감추었다.
블리아드 마을은 라한이 말한 전문가 양성을 위해 눈코 뜰 새 없
이 바빴다 마을 사람들이 잘하는 걸 가려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해본 일이기에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
렇다고그들에게 마냥놀도록할수는 없는 일. 그나마소질이 있
는 부분을 찾아내서 집중적으로 교육시켜야 했다.
이제 겨우 5일이 지났음에도 진척이 상당히 빨랐다. 아직 본격
적인 교육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할 일을 나누는 일은 거의 마무
리 단계에 와 있었다.
그동안 라한과테세르, 슈라, 변은 비어 있는마을의 일손을채
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장 겨울에 먹고살아야 하기에 농사일도
손을 대야 했고 부서진 쟁기를 고치거나 자경단원의 무기를 손보는
일도 모두 그들의 몫이었다. 심지어 부서진 집을 보수하고 울퉁불
퉁해진 길을 다듬는 일도 모두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재수 없으면 처음으로 허리 못 쓰는 정령 나오
겠다.
-난 손가락이 많이 무텨졌다. 매일 손으로 밭고랑을 만들다 보
니 엉망이군. 아무래도 다시 한번 소환해야겠어.
테세르의 엄살에 슈라도 같은 식으로 응수했다. 걱우 5일이었지
만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테세르가 주로 한 일은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일이었다. 셋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테세르.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었다.
슈라는 거대한 덩치와 힘을 바탕으로 밭을 가는 일을 맡았다. 손
가락으로 한 번 슥 그으면 완성되기는 했지만, 너무 넓고 많은 곳
이라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조용히 물속에서 혜엄을 치는 변이 맡은 일은 밭에 물을 주는 일
이었다. 또, 땅속에 있는 수맥을 발견해서 우물을 만드는 일도 그가
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물과가장친숙한존재인 변. 그는깊은곳
에 있는 물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일인 셈이다.
-주인.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 거야?
"다섯 달. "
-힘들어서 못 하겠어.
"참아. 그동안 마을 사람들 덕에 편하게 쉬었잖아. "
라한의 얼굴에도 픽곤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농기구를 고
치고 집을 보수하는 그의 일도 쉽지 않았기 패문이다. 한데도 그는
힙들다는 표현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주인. 얼굴 표정이 어째 좀 그렇다. 무슨 일 있어?
"이틀도 안 남았어. "
-뭐가?
"카이렌이 류카라한 일행의 함정에 빠지는 날 말이야. "
-아, 맞다.
류카라한의 계획대로라면 이틀 후 자정에 카이렌이 공격을 할
것이다.
라한은 내심 카이렌이 류카라한이 판 함정에 속지 않기를 바랐
다. 한데, 에테로가 가져다준 정보를보면 아무래도속은듯했다.
바로 내일 류카라한의 골렘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카이렌이
었다. 아마 라한이 모른 척한다면 함정에 빠져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내일 잠시 갔다 와야겠다. "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냥 입구부터 마구 흔들어놓을 생각이야. 뭔가 심상찮은 분위
기를 느끼면 카이렌도 골렘 파괴를 감행하지 않겠지. "
라한의 의도는 류카라한 진형의 겉을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었
다 그렇게 여기저기 박살내 놓으면 카이렌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를 느낄 테고, 그럼 골렘을 부수는 일을 다시 생각할 거라 믿었다.
-야호. 신난다. 그럼 내일은신나게 싸울수있겠네.
"쳇. 넌 아무리 봐도 정령 같지가않아. 싸우는 걸 너무좋아하
잖아. "
-나도 그게 신기해. 히히
테세르는 이 지겨운 일에서 하루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라한이 하루를 정리하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때 눈앞에 아지랑
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라한이 몸을 바로
잡고 세라 소드를 움켜잡았다.
-라한. 그 검은 내려놓게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영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령계에서 영상만 라한에게 보여주는 예전의 그 방법
이었다.
"실피드?"
-그래. 나실피드다. 다행히 여기 있었군.
"여긴 무슨 일이지. 그것보다 자연하고 대화는 성공했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실피드의 음성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웬만한 일에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는 조화의 존재 정령. 그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데?"
-골드 드래곤 아카폴리안이 널 공격하기 위해 드래곤들을 끌어
모았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흠, 방금 정확한 정보가들어왔군
드래곤 다섯. 그들이 널 치기 위해 오고 있다.
꽝- !
라한이 탁자를 강하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라한은 드래곤 둘이 패했으니 다음은 로테마이어스가 직접 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로테마이어스가 다른 드래곤들에게 위신을
세우는 길이니 말이다.
또, 라한에 대한 분노는 그 누구보다 로테마이어스가 더 클 터.
직접 와서 처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런 라한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갔다 카이렌이 드래곤과 했던
대화 그리고 로테마이어스와 아카폴리안 간의 잘못된 의사소통.
이 두 가지가 라한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음이다.
"대체 왜?"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는 것보다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다. 네
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드래곤 다섯을 상대할 수는 없어. 설사
로테마이어스라도 다섯의 드래곤과 싸우는 건 무리야.
"젠장. "
-그들은 정정당당한 싸움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아니야. 분명 기
습을 택할 거야. 빨리 피해.
라한은 실피드의 경고가 고마웠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싸움을
이곳에서 했을 게 분명했다. 드래곤 다섯과 라한의 싸움, 결과가 어
찌 췄든 블리아드 마을의 초토화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 막 자
리를 잡아가고 있는 블리아드 마을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테세르,슈라. 일단돌아가. 변!변!"
라한이 보이지도 않는 테세르와슈라를 강제 귀환시켰다. 지금
은 그들을 불러서 의견을 구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생각
과 동시에 행동할 때였다.
"변! 변! 어디 있어?"
삐걱!
-크릭?
물 덩어리 변이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표정 이 었다.
"이리 와! "
라한이 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그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라한 서두르게. 난 이만 가네.
라한이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리고 막 마법을 시전하려다가 몸
을 멈추었다.
'젠장. 그냥은 안 돼 '
라한이 변을한손에 잡은 채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짧은 글을 휘갈겨 썼다.
날 죽이고 싶으면 세바스헤스 평원으로 와라 -라한
라한이 도전장을 쓴 종이를 문 앞에 붙였다.
그냥 갔다가는 블리아드 마을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다. 또 싸움
을 피한다고 마냥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싸워야
할 거라면 블리아드 마을에 피해를 주지 않고 싸우고 싶었다.
"변! 확 잡아라! "
스팟!
라한은 공간 이동 대신 광견보를 시전했다. 그것도 발자국을 강
하게 찍어 흔적까지 남겼다. 드래곤들이 나타났을 때 라한이 남기
고 간 흔적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세바스테스 평원은 블리아드 마을에서 서쪽으로 한참 가야 나온
다. 지금 그곳은 베어울프의 서식지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넓
은 데다 강까지 끼고 있어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
었다.
세바스테스 평원의 중앙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세스리안 강.
그 가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라한이 걸터앉았다.
"테세르, 슈라. "
라한의 부름에 강제 귀환췄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보며 라한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우. "
-주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곧 큰 싸움이 벌어질 거야. "
-여기가류카라한 그놈이 함정이 만든곳이야? 아싸. 어디 있
어? 그놈들 어디 있어?
테세르의 철없는 말에도 라한은 미소만 지었다. 처연하기 그지
없는 미소에 슈라가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주인. 무슨 일 있는 거로군. 여기가 어디지?
-어?그러고보니 여긴 내가 매일 돌 가져오던 곳이네. 세바스
테스 평원이던가?
"맞아. "
세바스테스 평원 곳곳에는 작은 바위산이 여러 개 존재한다. 이
때문에 몬스터가 없을 때에도 농토로 각광받지 못했다. 땅도 비옥
하고 강까지 끼고 있음에도 지형적 영향으로 그리 발전하지 못했던
세바스테스 평원. 이곳에 바위산만 없었다면 케라스 왕국에서도
어떻게든 이곳에서 몬스터를 몰아냈을 터였다.
-여긴 왜 온 거야?
"말했잖아. 싸우러 왔다고. "
-대체 누구하고 싸우는데? 로테마이어스라도 온 거야?
-맞나 보군.
테세르의 말을 슈라가 받았다. 그 말에 테세르의 얼굴이 급속도
로 어두워졌다.
슈라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드래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지
금은 라한을 모시고 있는 슈라였다. 기왕이면 드래곤과의 싸움에
는 참가하고 싶지 않은 그였다.
"아니 . "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모습에 테세르와슈라의 얼
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들은 드래곤만 아니면 누구하고든싸울자신이 있었다. 특히
슈라는 드래곤 로드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창
조자의 위치에 있는 이를 어찌하는 건 껄끄러웠음이다.
-그럼 됐네. 다 나오라고 해. 드래곤이야? 까짓것 그놈들이야
그냥 처 리하자고.
"다섯이라고 하더군. "
-어?
"이번에 날 죽이기 위해 오는 드래곤이 다섯 마리라고. "
-컥!
테세르가 입을 떡 벌리며 황당하다는표정을 지었다. 슈라의 얼
굴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이건 창조자에 대한 예의 문제가 아니었
다. 드래곤 다섯이 힘을합쳐서 공격하는상황. 라한의 안위가위
협받을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마을에 위해를 주는 게 싫어서 이리로 왔어. "
-바보 주인. 우리 도망가자. 다섯 마리는무리야. 주인도 전에
그랬잖아. 아직 힘을완전히 사용하지는못한다고. 그렇게 말했잖
아. 일단 도망갔다가 나중에 싸우자.
"흠. "
라한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길 자신이 있는 싸움만
했지만, 이젠싸움그자체가싫었다. 그냥조용히 초야에 묻혀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쿠오오오오!
-쿠오오오!
-쿠오오오!
멀리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반응하듯 또 다른 포효 소리
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늦었군. "
-주인!
"싸울 수밖에 없어. "
-왜?
"내가 싸우지 않으면 블리아드 마을이 사라질 거야. "
언젠가부터 갖게 된 인간적인 마음. 그런 감정이 라한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예전이면 도망치고도 남았을 일에 어쩔 수 없이 싸워
야 하는 상황이 었다.
-쳇.
"변. 네 역할이 크다. 저기 강에 들어가있어."
-크릭!
라한이 강가를 싸움터로 정한 건 변의 능력 때문이었다. 물만 있
으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변. 그의 도움으로 회심을
일격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팔락!
착- !
라한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이 가로로 흔들리며 떨어졌다. 그 종이
를 라한이 낚아채듯 손에 쥐었다.
-크크크크. 감히 그따위 도전장으로 우릴 귀찮게 하다니
-하찮은 인간이 겁을 상실했구나.
라한 앞으로 공간 이동 되어온 종이는 그가 남겼던 도전장이 었다.
그 도전장을 보며 라한이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히 자
신의 도전장을 보고 찾아왔다. 드래곤의 급한 성격을 생각할 때,
마을에 피해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전장을 보자마자 라한을
죽이기 위해 날아왔을 테니까.
"다행이군. 근데 여섯인가?"
실피드의 말로는 다섯의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라한 앞
에 나타난 드래곤은 여섯이었다.
-크크크. 벨라루스. 마지막은 너에게 맡길 테니 적당한곳에서
쉬고 있어라.
-흠, 부탁하마.
라한에게 엄청난부상을 입고 달아났던 벨라루스. 그가포함되
어서 하나가 늘어난 거였다.
라한은 벨라루스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전에는 폴리모프 상태로 싸웠기에 본체를 보지 못한 탓이다.
"나한테 박살 나더니 친구들을 데리고 왔군. "
-닥쳐라.
"내 기억에 넌 나와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다. 그때 날 죽이겠다
는약속이었지 한데, 넌 약속을지키지 못했어."
-그, 그건
라한은 로이나, 프리미아와 함에 지내며 드래곤에 대해 쾌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건다는 의미와 맹세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름을 걸고도 넌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그럼 벨라루스라는
이름을 쓰는 이는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내 말이 틀렸나?"
-큭
벨라루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신음만 흘렸다.
잠깐 말하고 지나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데, 라한이 그
말을 언급하자 당시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그 소원마저 들어주지 못하면 넌
드래곤으로서의 삶을마감하게 되지. 아, 다른종족은환생이라는
걸 하지만 드래곤은 죽음이 곧 소멸이라던가?"
-원, 원하는 게 뭐냐?
결국 벨라루스가 저자세로 나왔다. 소멸 당하는 상황까지는 어
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음이다.
벨라루스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다른 드래곤들도 웅성거리기 시
작했다. 벨라루스가 라한과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는 걸 몰랐던 다
른 드래곤들, 만약 알았다면 이 자리에 데리고 나오지는 않았을 터
였다. 라한만 죽이면 소원을 말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라한이 다른 드래곤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가장 약한 드래곤을
찾기 위함이었다.
'저놈이 좋겠군. '
라한은 벨라루스와 다른 드래곤 하나를 맞상대시킬 생각이었다.
문제는 벨라루스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겨우 날아다니고 말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벨라루스. 그에게는 가장 약한 드래곤을 상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몹시 낮았다
"이리와 봐. "
큼.
벨라루스가 천천히 날아서 라한 앞에 섰다. 얼굴을 약간은 숙인
모습이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운 듯했다
"치료하기. "
라한이 벨라루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치료를 시작했다. 라한이
다시 손을 떼자 벨라루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라한에게 당
한 상처라 라한이 치료하는 게 더 효과가 있었음이다.
'아직은 무리군. '
치료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힘을 회복하는 데에
는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하지만 부상은 완전히 치료되었기에 좀
전보다는 한결 나은 전투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이게 무슨 뜻이냐?
"내 소원을 말하기 위한 준비 단계 정도라고 생각해라
-소원이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야. 너 저기 보이는 까만 드래곤 놈하고 싸워
야 한다. 죽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단, 저 드래곤이 날 공격하지 못
하도록 만들어라. 내 소원은 그게 전부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
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보나마나 벨라루스의 패배였다. 완치는 췄지만 회복이 덜 된 탓에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는 벨라루스였다.
문제는 그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날 경우 또다시 다섯 드래곤의 합
공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라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황과 맞닥
뜨리는 경우였다.
차라리 둘을 대충 싸우게 해서 전투에서 배제시키는 게 나았다.
물론, 다른 드래곤들이 위험해 처한다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그때까지라도 라한은 넷의 드래곤만 상대하
면 되었다.
-그런
-벨라루스. 빨리 이리 와. 까짓것 소원 들어주라고.
라한에게 지목당한 드래곤이 벨라루스를 불렀다 그의
밝은 목소리에 벨라루스의 얼굴도 조금은 밝아졌다.
라한에게 지목당한블랙 드래곤 이실리아. 그는 라한의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드래곤 넷이면 라한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
각한 것이다.
-이실리아.
-괜찮아. 앉아. 우린 구경이나 하자고. 어때?
-그럼 되는군.
벨라루스는 이실리아와 싸우는 게 껄끄러웠다. 몸 상태도 안 좋
았고 같은편과싸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라한의 소원은 이실리아가 싸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
는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 달라진 건 너 혼자 구경하려던 좀 전에서 나랑 같이 구
경하는 걸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크크크. 라한. 똑똑한 척하더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구나.
벨라루스가 라한을 비웃었다. 그 말에 라한도 머리를 짚으며 실
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연기였다.
지금 라한의 실력이면 드래곤 셋 정도는 어떻게 요리할 수 있다.
넷은 좀 버겁지만 테세르와 슈라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문제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로테마이어스였다.
'해보자. '
"슈라, 테세르. 넌 저기 있는 저놈하고 놀고 있어. 나머지 놈들
처리하고 도와줄 테니까. "
-알았다.
-그러지.
테세르와 슈라가 화이트 드래곤 라모네샤트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에 라모네샤트가 코웃음을 쳤다
-비천한 놈들이 겁이 없구나. 쿠오오오!
라모네샤트가 테세르와 슈라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살기를 풀
풀 흘리는 모습에 라한이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조심해! "
-주인이나 조심해!
처음 공격의 시작은 라모네샤트의 발끝에서 시작됐다. 앞발을
이용해서 슈라의 가슴을 공격해 온 것이다.
-쿠오오오!
슈라는 그 발을 오히려 한 손으로 잡고 공중에 조금 떠 있는 라
모네샤트의 몸 아래로 뛰어 들어갔다.
-하앗!
슈라가 라모네샤트의 몸아래까지 파고들었을 때, 뒤에 숨어 있
던 테세르가 위로 뛰어올랐다.
목표는 라모네샤트의 눈이었다.
-건방지다. 블링크.
-빌어먹을.
테세르가 욕설을 내뱉고 슈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들로서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라모네샤트가 최대한땅에 가까이 있을 때 어
떻게든끝장을봐야하는 일이었다. 한데, 결국실패했다. 이제 공
중에 높이 떠 있는 라모네샤트를 상대로 힘걱운 싸움을 벌일 수밖
에 없었다.
'역시 힘의 소모가 심해. '
슈라나 테세르 모두 힘의 원천은 라한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격
렬하면 격렬할수록 라한이 사용하는 힘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입장
이었다.
"네가 아카폴리안이 었던가?"
-기억하고 있군.
"이제 우리 차례로군. 시작하지. 공간으로!불의 공!"
공중에 떠오른 라한이 불덩어리를 아카폴리안에게 쏘았다. 탐색
을 겸한 공격이라 그리 매섭지는 않았다.
-엡솔루트 실드!
-쿠오오오!
라한의 공격은 아카폴리안에게 쉽게 막혔다. 어차피 어떤 부상
을 입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라한도 그리 아쉬워
하는 기색은 없었다.
라한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다른 두 마리의 드래곤이
라한의 좌우를 치고 들어왔다.
"흥. "
라한의 원래 목표는 애초부터 아카폴리안이 아니었다. 역습을
가해을 드래곤 중 하나를 노린 일종의 포석이었다.
카오오오.!
콰콰콰쾅!
라한은 왼쪽에서 찍어오는 앞발을 가볍게 피하고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테세르가 했던 것처럼 빠르게 위로 튕겨 올라갔다.
"물의 소용돌이! 바람의 향기!"
라한이 물의 소용돌이로 다른 쪽에서 공격해 오는 드래곤의 시
야를 가렸다. 그리고 바람의 향기로 전방에서 노려보고 있는 아카
폴리안에게도 공격을 가했다 이것 역시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견제의 의미가 강했다.
"하앗! "
챙-!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서 바로 앞에 선 드래곤에게 집어던졌
다. 정확성이 아무리 떨어지는 라한이라도 거대한 덩치의 드래곤
마저 못 맞출 정도는 아니 었다.
-쿠오오오!
왼쪽에 있던 그린 드래곤 메카드리가 라한의 세라 소드를 날개로
쳐냈다. 세라 소드는 메카드리의 날개에 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투명해지기. 공간으로. "
라한이 메카드리가 날개를 드는 그 순간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
다. 그리고 메카드리의 턱 아래로 공간 이동했다.
퍼퍽!
-쿠욱!
라한의 주먹이 메카드리의 턱을 강타했다. 마법사로만 알았던
드래곤들. 갑작스러운 라한의 육탄 공격에 대처법을 찾지 못했다.
상대가 드래곤 스케일을 뚫을 수 있는 강한 검사일 경우에는 드
래곤 본체보다 폴리모프한 작은 몸이 유리하다 막기보다 피하는
방법을 전투법으로 써야 하는 까닭이다.
반면, 마법사와의 싸움에서는 폴리모프한 작은 몸보다 드래곤
스케일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본체가 휠씬 유리하다. 드래곤 스
케일이 가진 마법 방어 능력과풍부한 드래곤 하트의 마나. 이 두
가지의 도움만으로도 무적에 가까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탓이다
드래곤들은 라한을 마법사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본체로 공격
해 왔다. 폴리모프한 채로 싸우다 패한 벨라루스의 전례가 있다는
것도 본체로 공격해 오기로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데, 갑작스럽게 라한이 육탄 공격을 감행해 왔다. 전에는 보이
지도 않던 세라 소드도 꺼내 들었다. 도무지 검사인지 마법사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놈! 블링
퍼퍽!
라한의 주먹이 메카드리의 턱을 마구 강타했다. 주문을 외울 틈
조차 주지 않을 만큼 빠른 주먹 공격이었다.
-레드리안느.
-알았어.
아카폴리안이 레드 드래곤 레드리안느를 불렀다. 이에 레드리안
느가폴리모프했다. 확실치 않으니 둘은본체로 둘은 폴리모프한
작은 몸체로 싸울 생각이 었다.
퓨리트 강림
베르타라스의 레어
전대 로드답게 거대한 동굴 벽 전체가 화려함의 극치였다 물론
대부분의 드레곤이 금과 보석을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베르타
라스의 레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금덩어리였다 이 정도로
화려한 레어는 전 드레곤 준 오직 베르타라스의 레어가 유일했다
드워프의 세공 기술로 동굴 벽에 홈을 만들어 금괴를 박아 넣는
다 그리고 박아 넣은 금괴들 사이의 빈 공간은 사파이어 루비 다
이아몬드 오팔등등 대륙에서 값비싸기로 유명한 보석을 갈아 알
막게 끼워 넣는다 심지어 바닥도 어둠의 눈물이라은 애칭을 가진
흑요석을 깔아서 반짝이는 검은빛이 입을 다물수 없게 만든다
예술품에 가까운 베르타르스의 레어 안에서 저승사자의 수장 퓨
리트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 정도로 많은 보석을 구하기 위해 인
간과 드워프를 핍박했을 걸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드래곤이라는 놈들. 어째 하는 짓이 다 마음에 안 들어 "
퓨리트의 말이 레어를 울렸다. 그 말에 앞에 앉아 있던 베르타라
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반면, 로테마이어스는 당당하게 고개를 쳐
들고 퓨리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퓨리트님. 로드를 데리고 왔습니다. 하실 말씀은
"내가 말하고 싶을 때 할 거니까 재촉하지 마라. 베르타라스. "
"죄송합니다. "
베르타라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로테마이어스는 베르타라스
의 저자세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베르타라스도 처음부터 이런 저자세를 유지한 건 아니었다. 처
음 퓨리트가 사자라고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로테마이어스보다 더
근엄하고 오만한 자세였다. 퓨리트가 자신이 신의 사자라고 한 말
을 믿지 못한 탓이다.
이에 퓨리트가 간단한 손짓으로 레어 근처에 있던 산 하나를 날
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 손짓을해서 없어졌던 산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후부터 베르타라스는 저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타라스님 . "
"왜 그러는가?"
"왜 저딴 녀석의
"말조심하게. 저 분은 신의 사자일세. "
베르타라스가 급히 로테마이어스의 입을 막았다. 순간의 말실수
로 드래곤 전체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되었음이다.
"저놈이 신의 사자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흠, 네가 로테마이어스라는 빨간 드래곤이군
발끈해서 외치는 로테마이어스에게 퓨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리고 퓨리트를 노려봤다.
"뭐라?"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믿지 못하겠다고?-
"흥. "
퓨리트의 담담한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다.
말투에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어떤 식으로 보여줄까? 음, 레드 일족을 이 세상에서 지워줄
까? 아니면 골드 일족을 지워줄까? 그냥 드래곤이라는 종족 전부
를 세상에서 지울까?"
퓨리트가 은근슬쩍 로테마이어스를 위협했다. 그의 지위가 로드
이니 가장 적할한 협박이었다.
"아이고, 퓨리트님.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제가 이 못난 로
드를 대신해서 사죄드리겠습니다. "
"베르타라스. 난 네게 한 말이 아니다. -
"부디 용서를
"한 번만 더 내 말에 끼어들면 판트리아 대륙에서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사라질 것이다. "
"크헙! "
베르타라스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협박 내용보다 퓨리트의 몸에
서 풍기는 살기에 놀란 얼굴이었다.
순간 베르타라스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사죄를 청했다. 퓨리
트가 신의 사자임을 새삼 인지한 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
옆에 있던 로테마이어스도 퓨리트의 살기를 체감했다. 드래곤조
차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살기였다 드래곤보다 강한 존재.
퓨리트가 신의 사자임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널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다. "
역시 무책임한 로드로군 베르타라스. 이놈이 정녕 네가뽑은
로드더냐?"
"죄송합니다. "
베르타라스는 연신 사과의 말만 내뱉었다.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사
라질 수도 있을 터. 최대한 입조심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태도가
최선이었다.
"로테마이어스. "
"하명하십시오. 사자시여. "
드래곤의 존재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질계의 중재입니다. "
"중재의 의미는?"
물질계가 다른 차원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고 이곳에 사는 종
족이 멸종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
퓨리트의 물음에 로테마이어스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한시라
도 지체했다가는 화를 당할 것 같은 느낌에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
었다.
잘 알고 있군. 그럼 네가 그동안 물질계의 중재 임무를 제대로
완수했다고 생각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
"잘 몰라? 하하하하. 세턴! 트레이시!"
퓨리트가 로테마이어스를 비웃듯 크게 웃어재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수하인 저승사자 세턴과 트레이시를 불러들였다.
마계와 천계를 살피는 저승사자 세턴, 물질계와 정령계를 살피
는 트레이시, 그들이 퓨리트의 부름에 즉각 모습을 드러냈다.
"수장님을 뵙습니다. 신 세턴 부름을 받고 대령했습니다. "
"수장님을
퓨리트가 그들의 인사를 손을흔들어 제지했다. 본성이 겉치레
를 싫어하는 퓨리트였다
"세턴. "
"예. "
"지금 마계와 천계는?"
"천계는 현재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계는마왕의 아
들이 사라진 지 오래돼서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마왕인 루
시퍼는 아들 투바의 실종을 물질계의 짓으로 단정하고 대대적인 전
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마계의 행동이 옳다고 보는가?"
"루시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좀 전에 말씀
드린 투바라는 마족이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은 마족이라 아무래
도 어린 마족이라 자칫 물질계 사상에 물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물질계에 익숙해진 마족이 마왕이 된다면 마계가 어떻게 변할지 장
담할 수 없습니다. "
세턴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계의
전면적인 진출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로테마이어스가 일어나자 베르타라스가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앉
혔다. 아직 한 명의 신의 사자가남아 있는상황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반응을 해도 늦지 않았다.
"트레이시. 정령계는?"
"원래 정령계에는 정령들이 자연과 대화하지 못하는 소소한 문
제가 있었습니다. 한데, 물질계 한 인간의 도움으로 현재 거의 정상
화된 상황입니다. 아직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만이 자연과 대화
가 가능하지만 어린 정령의 거듭남이 끝날 때쯤에는 다른 정령왕들
도 모두 자연과 의사소통할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리고 시간
이 더 흐른다면 하위 정령들도 자연과 대화가 될 거라 사료됩니다. "
"물질계에 대해서도 말하라. "
"물질계는 몹시 혼란스러운상태입니다. 정령계 거듭남의 영향
으로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고 그 영향으로 인육을 먹는 인
간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격체가 인육을 먹는 일은
2천 년 전의 대가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
"또? "
"물질계에 마족이 장시간 소환된 채로 있습니다. 완전 소환으로
소환된 터라 시간제한도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물질계에 눌러 살
지도 모릅니다. 아까 세턴이 한 말로 미루어보면 그가 마왕의 아들
인 투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마족은 마계에서 물질계로 옮겨오면서 모습이 변한다. 일단 모
습이 변하면 같은 마족이 아닌 이상 구분하기가 힘들다.
물론, 마계와 물질계를 살펴보는 이가 한 명이었다면 구분할 수
도 있다. 그들의 고유 기운을구별할수 있는 것이다. 한데 물질계
는 트레이시, 마계는 세턴이 살피다 보니 기운을 구별하는 게 불가
능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눈앞에 있는 드래곤입니다. 특히 로드인 로테
마이어스. 그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간 하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물론, 인간 하나를 죽이는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만
트레이시가 로테마이어스를 곁눈질로 살펴봤다. 형편없이 구겨
진 로테마이어스의 면상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하라. "
트레이시가 헛기침을 한차례 하고 말을 이었다.
"흠, 흠. 알겠습니다. 로테마이어스는 인간하나를죽이는 일에
만 매달려 물질계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물질계 중재를 담당해
야 할 그가 임무를 태만히 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트레이시의 말이 끝나자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
다. 면목이 없었다. 드래곤 로드가 되어서 드래곤이 해야할 임무
를 망각하다니. 그것도 다른 드래곤들에게까지 일을 시켜서 임무
를 소홀히 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말까지 들었음에도 라한에 대한 분노는 도무지 사그라지지
가 않았다. 이젠 크라이드리안의 복수가문제가아니었다. 드래곤
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질책받
는 게 모두 라한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모두 그놈 때문이다. 순순히 죽어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으련
만 라한 이놈 두고 보자. '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 이래도 할 말이 있는가?"
로테마이어스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로테마
이어스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였다
"로테마이어스.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
"없습니다. "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로테마이어스가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퓨리
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퓨리트는 오래전부터 라한을눈여걱봐왔다. 그가살아가는모
습이 재미있었고 그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유쾌했다. 라한과 그 주
변 인물을 보는 일이 퓨리트에게는 지루한 영계 생활의 활력소나
다름없었다.
그런 재미를 로테마이어스가 앗아가려 했다 라한을 죽임으로써
쌓인 분노를 풀려고 한 것이다.
퓨리트는 그 일로 쾌 오랫동안 고민했다. 라한을 계속 살 수 있
도록 해서 재미를 느끼고 싶어음이다. 한데 명분이 없었다. 아무
리 저승사자의 수장이라도 물질계의 일에 마구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어쩌겠어. '
퓨리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로메마이어스를 바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에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인지시키면 라한을 죽
일 시간조차 없을 터. 그럼 라한을 보는 재미를 계속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번 일이 로테마이어스의 분노를 더 크
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퓨리트였다.
"로테마이어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빠른 시일 안에 '마족을 마계로 돌려보내고 물질계 인간들을 계
도하겠습니 다. "
"혹시 네가 죽이려 하는 인간이 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인가?-
".
갑작스러운 퓨리트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라한의 이름이 언급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그놈 인생이 참재미있더군. 아주재미있어. 하하하
"아, 예. "
퓨리트가 라한의 이름을 슬쩍 언급했다. 괜히 라한을 건드려서
자신의 재미를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세턴. 넌 마계로 가서 루시퍼를 말려라.만약 물질계 공격을 감
행했다가는 내가 마계를 송두리째 날려 버리겠다. -
"알겠습니다. "
"그리고 트레이시와 얘기해서 투바라는 마족과 친분이 있는 마
족을 물질계로 불러들여라 투바라는 그놈은 말로 해서 돌아가지
않을 거다. "
"예. "
퓨리트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투바도 라한의 주변 인물중 한 명이다. 그가 마계로 돌아가는
것도 퓨리트의 재미가 반감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베르타라스. "
"예. "
"넌 이 길로 정령계로 가라. "
예?"
베르타라스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정령계로 가라는 말을 제
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인간들 중에는 정령계를 방문한 이가 종종 있었다. 라한을 포함
해서 무려 세 명. 한데 드래곤들은 인간들 중에 정령계를 방문한
이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드래곤 중에서 정령계를 방문한 존
재가 단 한 명도 없는 탓이다.
자신들이 못하는 일은 하찮은 인간도 할 수 없다는 드래곤의 자
만과 오만함, 그런 생각이 소문으로 떠도는 인간의 정령계 방문을
인정하지 않았음이다.
그런 베르타라스의 귀에 정령계를 방문하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퓨리트가 하는 말이니 방법도 그가 만들어줄 터. 역사를 통틀어 정
령계를 방문하는 유일한 드래곤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실피드, 엘라임, 노아스, 샐리온!"
퓨리트가 정령왕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이에 정령왕들이 차
례로 강제 소환되어 왔다 얼떨떨한 표정을 봐서 소환을 예상치 못
한 모습이었다.
-누구냐?
-누가 우리 넷을 동시에 베르타라스. 너인가?
불의 정령왕 샐리온이 베르타라스를 노려봤다. 범인이 그밖에
없다는 확신마저 가진 얼굴이었다.
드래곤과 정령왕의 계약은 허락을 구하는 방식이다. 정령왕을
부르면 그 말에 응답하고 안 하고는 모두 정령왕의 뜻에 달린 것이
다. 로이나가 4대 정령왕을 모두 소집했던 것도 이런 허락에 의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은 강제 소환이었다. 정령왕이 허락하고 안 하고
를 묻지도 않고 그대로 끌고 나오는 강제 소환. 정령왕들이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아닐세. 저기
베르타라스가 눈으로 정령왕 옆에 앉은 퓨리트를 가리켰다. 이
에 정령왕들의 시선이 모두 퓨리트에게 향했다.
-흠, 당신은 누구인가? 본 적이 없는 인물인데
-누구시죠?
샐리온의 반말과 엘라임의 높임말이 차례로 이어졌다. 말투에서
도 성격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말조심하게. 이분은 새로이 신의 사자가 되신 퓨리트님이시네
-신의 사자? 판테아님은?
"바뀐 모양이야. 인사부터 올리게. "
-흠.
샐리온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조금 낮췄다. 그러면서도 눈은 퓨
리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신의 사자인지를 탐색하는
모습이었다
'똑같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
이런 완벽한 무의 상태는 판테아가 유일했다. 최소한 정령왕
마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존재는 그가 유일했다.
그런데 퓨리트에게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베르타라스의
말마따나 그가 신의 사자인 게 사실인 듯했다.
-샐리온. 신의 사자를 뵙습니다
-실피드. 신의 사자를 뵙습니다.
"그만. "
정령왕 네 명이 차례로 인사를 하자 퓨리트가 말을 끊어버렸다.
아무 의미 없는 겉치레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음이다.
.여기 있는 베르타라스를 정령계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지금
정령계에 닥친 상황에 대해 의논하고 대륙에 퍼져 있는 가뭄을 빨
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
-하오나 대륙의 가뭄은
.거듭남 때문이겠지. 베르타라스와 의논하면 거듭남을 빨리 당
길 수 있는 방법이 나을 거다. 그리고 실피드. "
-예. 퓨리트님.
실피드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퓨리트는 그
를 찬찬히 뜯어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명이 다 됐군, "
- 예 .
"얼마나 남았지?"
-10년 남짓 남았습니다.
"흠. 후계는 구했느냐?"
-생각해 둔 사람은 있습니다.
퓨리트의 짧은 물음에 실피드도 공손하지만 짧은 말로 대답했
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베르타라스와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이라고? 정령이 아니고. "
-저희들 실수로 너무 오랫동안 자연과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정령을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심각하군. 그 인간이 누군가?"
-라한이라는 인간입니다. 아직 정령이 될 자격은 부족하지만 자
연을 이해하는 능력은 뛰어납니다. 그에게 바람의 술을 가르치
면 바람의 정령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피드의 말은 베르타라스와 로테마이어스, 심지어 퓨리트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반면, 다른정령왕들은크게 놀라는기색이 없
었다. 실피드에게 이미 언질을 받은 듯했다.
"바람의 술을 익힐 자질은 있는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한 차례 시험하기는 했습니
다만 그때는 좀 부족했습니다.
"그럼 정령왕이 될 수 없는 게 아니더냐? 거기다 인간이 정령왕
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퓨리트는 라한을 정령왕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
다. 그를 계속 인간으로 두고 구경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라한이
들었다면 실피드와 퓨리트 모두에게 발끈할 일이었지만 그들로서
는 어쩔 수 없었다.
실피드는 남은 수명 동안 어떻게든 정령왕이 될 존재를 만들어
내야했다. 한데, 정령왕조차자연과간신히 의사소통하는 시점에
서 하위 정령이 자연과 대화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로서
는 라한 외에는 적격자가 없는 셈이다.
이에 반해 퓨리트는 자신의 유일한 재미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
다. 영계 일이 눈코뜰 새 없이 바쁘기는 하지만그건 어디까지나
하위 저승사자에 국한된 일. 하루 종일 서류에 사인만 하는 퓨리트
에게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라한이라는 구경거
리마저 없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퓨리트님께서 이번에 새로이 신의 사자가 되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냐?"
퓨리트가 발끈하듯 소리쳤다. 그 모습에 실피드가 부드럽게 웃
으며 대답했다.
-과거에도 인간이 정령왕이 된 경우는 있었습니다. 물의 정령이
두번, 땅의 정령이 한번. 이렇게모두세 차례나됩니다.
"그래?"
-예. 그들 모두 뛰어난 자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
만, 몸 자체가 마나를 많이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령을 소환하는 능
력은 약했지만, 정령과 자연 친화력만큼은 뛰어났기에 정령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라한 역시 자연 친화력은 대륙에서 최고입니다.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고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테세르라는 정령을 부려왔습니다. 정령 친화력도 알
게 모르게 많이 성장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떻게 해서든 라한을 차기 정령왕으로 만들
겠다는 말이냐?"
화난 듯한 퓨리트의 말투에 실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신의 사자라는 존재가 인간 한 명에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의아했다. 판트리아계에 속하는 차원 전부를 관할하는 신의 사자
퓨리트. 적어도 그의 지위라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었다.
-저 라한과는 무슨 관계이십니까?
"관계는 무슨 관계. 난 그놈을 만난 적도 없어.
그럼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
을까요?
"=1건
"실피드. 감히 네가 퓨리트님께 뭘 물을 자격이 있느냐? 넌 그냥
퓨리트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다. 알겠느냐?"
퓨리트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세턴이 대신 대답했다. 그를 보
며 퓨리트가 몰래 눈을 찡긋거렸다. 일종의 고맙다는 신호였다.
-죄송합니다.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정령이 없다고 했나? 그래도 가장 가능
성 있는 정령은 있겠지. 그에게 바람의 술을 가르쳐라, "
-죄송합니다. 정령 중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라한 외에도 가
능성이 있는 인간은 있습니다. 근데 이미 반쯤 폐인이 된 사람이
라서
"폐인이 됐다고? 젠장. 폐인이 되기 전에 정령계로 데려갔어야
지. "
퓨리트가 안타까운 듯 외침을 토했다. 그 말에 실피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폐인이 되기 전에는 가능성도 없는
자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폐인이 되고 나서 자연과 친숙해진 인
물인지라
"젠장. 그럼 어차피 안 되는 거잖아 "
-예. 그래서 지금으로써는 라한이 가장 적합한 인물얍니다.
"그 일은 차후에 얘기하도록 하지. 일단 베르타라스를 데리고
정령계로 가라. "
알겠습니다.
정령왕들이 베르타라스와 함께 사라졌다. 정령계로 간 것이다.
정령왕들과 베르타라스가 사라지자 퓨리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
다. 깊이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하는 버릇이었다.
'누구지? 누군지나 물어볼 걸 그랬나?'
퓨리트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괜히 물질
계에 내려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원래 퓨리트가 물질계에 내려온 건 라한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라한을 살리는 일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싶었다. 한데 그
과정에서 투바를 보내야 하는 일이 생겨 버렸다. 재미가 크게 반감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로테마이어스.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마라. "
"알겠습니다. 퓨리트님. "
"세턴, 트레이시 그만 돌아가자. "
"저기 퓨리트님. 잠시만
트레이시가 퓨리트를 슬쩍 불렀다. 급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
었다.
"막 ! "
퓨리트가 간단한 언어로 주변에 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안에서
밖의 소리는 들을 수 있되 밖에서는 안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막이
었다.
퓨리트의 요상한 술법에 로테마이어스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법. 마법과 흡사하지만 분명히 차이
나는 방법. 라한이 사용하는 것과 너무 비슷했다.
"퓨리트님. "
"무슨 일이지?"
"지금 드래곤 몇 마리가 라한을 공격하러 갔습니다 "
"뭐야?"
퓨리트가 물질계의 심각한 변화를 알게 된 건 꽤나 오래전 일이
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간섭하고 싶지 않았기에 물질계 방문을 계속
미루기만 했었다.
그러던 퓨리트가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이곳을 방문한 건 로테마
이어스가 라한을공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그를부르지 않으
면 라한이 위험에 처할 것 같아서 방문한 것이다.
한데 로테마이어스의 공격은 막았지만 다른 드래곤의 공격은 막
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방문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었다.
'우씨, 라한 살리려고 왔는데 라한도 위험하고 투바도 보내야
되고. 이게 뭐야?'
"모두 여섯 마리인데 한 마리는 부상이 심해서 아, 지금 정보
가 들어왔습니다. "
"말채 봐, "
"드래곤 한 마리가 자신의 동족과 구경만 하고 있답니다. 라한
이 상대하고 있는 드래곤은 네 마리이고 그 중 한 마리는 슈라라는
골렘과 테세르라는 정령이 상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
"젠장. "
퓨리트가 욕설을 내뱉었다. 수장이 된 후에 처음으로 뱉는 욕이
었다. 그만큼 라한의 위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라한의 싸움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그건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라한이라는 인간은 굴
레를 벗은 존재라서 저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움의
자세한경과까지는
"알았다. 넌 세턴과 투바를 귀환시키는 일부터 처리해라 그리
고 정령왕과 얘기해서 폐인이 됐다는 그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를
완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
퓨리트는 로테마이어스가 보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
세턴과 트레이시가 공손하게 읍하고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지
자 퓨리트가 주변에 만들었던 막을 걷어냈다.
"로테마이어스. "
"예. 퓨리트님 "
"머리가 아주 좋더군. "
"예? 무슨 말씀이신지. "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드래곤들에게 라한이라는 인간을 공격
하라고시켰더군. 아주훌륭해. 머리를아주잘썼어."
퓨리트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로테마이어스를 죽
일 기세였다.
"그 그럴 수가
"모른다고 할 텐가?"
"저는 그게
로테마이어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부하 드래곤들이 과도
한 충성심을 발휘한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자신
을따르는드래곤에게 피해가갈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두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하기에는 퓨리트가 너무 무서웠다
"빌어먹을. "
로테마이어스의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퓨리트도 결국 살기를 억
눌렀다.
상대는 드래곤 로드. 아무리 퓨리트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자
였다. 죄목이 충분하다면 소멸의 영을 내리겠지만 당장은 죄목이
너무 부족했다. 중재자로서 임무를 소홀히 하기는 했어도 아직까
지는 물질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은 탓이다
"로테마이어스. 잘 들어라. 지금 당장 드래곤 전부를 소집해서
물질계의 혼란을 막아라, 그리고
라한을 절대 죽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턱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중재자라면 자신은 관리자였다. 관리자가 되어서 어느
한 존재를 편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됐다 알아서 잘해라 "
퓨리트가 찡그린 얼굴로 영계로 돌아갔다.
퓨리트는 영계로 돌아가서 신의 호출을 받았다. 신은 퓨리트의
물질계 외출과 그곳에서의 대화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퓨리
트에게 영계 외출 금지와 개별 존재에 간섭할 수 없다는 처벌을 내
렸다. 퓨리트가몇 번이나항변했지만아무소용이 없었다. 물질계
의 절대자가퓨리트라면 영계의 절대자는신이니 말이다.
쿠쿠쿠쿵!
"헉, 헉!"
라한이 숨을 헐떡이며 전방을 노려봤다.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는 전투. 라한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
었다. 단순히 전투를 한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투의 치열함
때문에 마치 한 달은 싸운 느낌이었다.
아카폴리안과 다른 드래곤들 역시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라한이 이 정도로 끈질기게 버틸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나마 다행이라면 테세르와 슈라에게 큰 부상을 입혀서 강제 귀환시
킨 정도였다.
-제법이구나.
"흥. 아직 난 팔팔하다고. "
라한이 뻐근한 가슴을 활짝 펴며 기세등등하게 대답했다. 그 모
습을 보며 아카폴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드래곤 셋과 라한의 싸움은 라한이 거의 압도하는 상황이
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라한의 빠른움직임. 그리고 신화
력의 사용과 육박전을 병행하는 멋진 공격 방법. 드래곤들은 계속
해서 수세에 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 테세르와 슈라 역시 라모네샤트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 실력
을 보였다. 슈라의 강한 힘과 테세르의 빠르고 매서운 공격이 라모
네샤트의 손발을 어지럽힌 결과였다.
라한에게 약간은 유리하게 돌아가던 전투 양상은 아카폴리안에
의해 바뀌었다. 그가 라한을 공격하다 말고 슈라를 기습해서 부숴
버린 것이다. 다행히 핵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당장 혼자 남은 테세
르가 문제였다.
결국 테세르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라모네샤트에 의해 강제
귀환되었다. 다시 소환하려면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독한놈.
슈라와 테세르가 강제 귀환됐을 때, 아카폴리안은 라한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셋으로 아주 조금 밀리는 정도였으니
넷이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한데, 그 후로 꼬박 한나절을 싸웠음에도 라한은 쓰러질 줄 몰랐
다. 도무지 라한이 가진 힘의 끝이 어디인지, 정말그가 인간이 맞
는지, 이젠 라한의 정체마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라한은 테세르와 슈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빠짐으로써 힘을 고스란히 잃은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들어가던
신화력을 소모시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시간이 없는데. '
라한이 하늘을 바라보며 조바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류카라한 일행이 함정을 파는 날이다. 라한이 미리 가서
흔적을 남걱놓지 못하면 카이렌 일행이 크나큰 타격을 받을 터. 어
떻게든 빨리 처리하고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승부다. '
라한에게도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었다. 하루 종일 강 속에서
라한의 부름만 기다리고 있는 변이 마지막 한 수였다.
"하앗! "
라한이 광견보를 사용해서 빠르게 쇄도했다. 목표는 아카폴리안
이었다. 어차피 드래곤 넷과 싸우는 지금도 라한은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드래곤 하나를 처리해서 셋만 남게 되면 승산은 라한에게
있었다.
-블링크!
라한의 공격에 아카폴리안이 마법을 사용했다. 보통은 실드를
사용했겠지만 그는 블링크를 선택했다. 라한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방어법이었다.
라한의 공격은 실드를 무력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드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가는 이상한 방법이었다. 이런
공격 때문에 드래곤들이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계속되자 드래곤들도 실드의 사용을 자제
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되도록 블링크로 몸
을 피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어딜!"
라한이 공간 이동한 아카폴리안에게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라
한의 연이은 공격에 아카폴리안이 당황한 얼굴빛을 보였다.
'저놈 왜 나만 공격하는 거야?'
-블링크!
-이놈! 거기 서라! 헬 파이어!
-아쿠아 스크류!
다른 드래곤들이 라한의 공격을 끊기 위해 공격을 가했다 라한
은 다른 드래곤들이 가하는 공격 중 위험한 것만 피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허용했다. 그들의 공격으로 약간의 부상을 당하더라도 아
카폴리안만큼은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막기! 하앗! "
-블링크!
라한은 등 뒤에 막을 만들어 놓고 다시 아카폴리안에게 쏘아져
갔다. 놀란 아카폴리안이 또다시 블링크를 사용했지만 라한 역시
계속해서 뒤를 쫓았다.
라한은 광견보로 빠르게 이동한 후에 아카폴리안의 아래에서 위
로 날아오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냥 날기를 사용하는 건 이동이
너무 느려서 광견보를 적절히 배합한 것이다.
"하앗! "
-헬 파이어!
"막기 ! "
라한이 뒤에서 날아오는 헬 파이어를 힘겸게 막았다. 한데, 정신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헬 파이어에 의해 막의 한쪽이 부서
졌다. 그리고 그 부서진 틈으로 헬 파이어의 불덩어리가 라한의 어
깨를 때리고 지나갔다.
"크윽! 하앗!"
이를 악다문 라한이 다시 아카폴리안에게 쇄도했다. 그 모습에
아카폴리안이 놀란 얼굴로 몸을 틀었다.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격을 감행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
때문에 미쳐 블링크를 쓰지 못했다.
퍼억!
쿠억!
라한의 주먹이 몸을 튼 아카폴리안 옆을 공격했다. 날개가 있는
부분이었다.
"뜨거운 열기! 차가운 냉기! "
라한이 날개에 손을 묻은 채로 두 가지 신화력을 발동시켰다.
예전에 테세르와 슈라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 단순 열기 발산과 냉
기 발산이었다. 물론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겁고 또 차
가웠다.
-쿠오오오오!
아카폴리안이 비명을 터트렸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몸이
흔들거렸다.
-아카폴리안! 매직 미사일! 토네이도!
뒤에서 따라오던 메카드리의 마법이 라한의 등을 향해 날아왔
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라한의 등짝이 벌집이 될 판이었다.
"빌어먹을!"
-엡솔루트 리커버리!
라한이 물러나자 뒤따라왔던 레드리안느가 아카폴리안에게 회
복 마법을 시전했다.
-크!
레드리안느의 회복 마법에도 아카폴리안의 상세는 좀처럼 나아
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날개에서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냉기가
연신 반발하고 있었음이다
-이놈!
"흥. "
라한이 코웃음을 흘리고 강 쪽으로 몸을 피했다. 레드리안느와
메카드리, 라모네샤트가 분노한 얼굴로 뒤쫓았다.
드래곤들도 강 속에 라한의 아군이랄 수 있는 존재가 숨어 있음
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 하루를 싸우면서도 강 쪽으로
는 의도적으로 가지 않았다.
한데, 이번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아카폴리안의 부
상에 이성을 잠시 상실한 모습이었다
-받아라. 헬 파이어!
레드리안느의 헬 파이어가 라한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라한은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옆으로 빠르게 피했다. 좀 전에 입은
어깨의 상처가 라한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죽을 뻔했다. '
라한의 어깨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이 상태로 싸움
이 길어졌다가는 라한의 패배가 불 보듯 뻔했다. 마지막 도박을 위
해서 살을 주는 법을 택했던 라한이다.
"막기! 바람의 광시곡! "
라한이 바람의 광시곡을 시전했다. 이에 강 주변에 있던 돌들이
마구 떠올라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라한의 공격 자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데, 그 돌들이
쇄도하는 드래곤들의 눈을 마구 어지럽히고 있었다. 라한이 노린
것도 이점이었다.
콰콰쾅!
-허튼짓은 안 통한다.
메카드리가 돌을 부수며 뚫고 들어왔다. 그 뒤를 레드리안느를
비롯한 다른 드래곤이 따랐다.
그들의 눈에는 라한의 부상당한 어깨와 뒤에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는 아카폴리안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 한 명 빠져서 전력
이 감소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라한의 어깨 부상이 치명적이니 지
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변!"
스팟! 콰콰콰콰쾅!
드래곤들이 강 위를 지날때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드래곤 주
위를 감싸듯 치솟아 오른 수십 줄기의 물기둥 갑작스러운 사태에
드래곤들이 몸을 멈추었다.
-이이
"변! 빨리! "
-크리릭!
변의 대답이 들리고 치솟아 오른 물기둥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드래곤을 완전히 둘러싼 일종
의 막처럼 변했다.
-크리리릭!
막이 조금씩 축소되기 시작했다. 드래곤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물이 몸을 조여오자 드래곤들의 얼굴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어림 없다. 헬 파이어!
레드 드래곤인 레드리안느. 그는 속성과 맞는 헬 파이어를 자주
사용한다. 라한과 싸울 때도 그랬고 평소에 장난을 칠 때도 헬 파
이어를 가지고 놀 정도였다.
그만큼 헬 파이어 하나는 완벽한 컨트롤을 보여주는 레드리안
느. 한데도 이번에 사용한 헬 파이어는 변이 만든 물기둥을 뚫지
못했다. 불을 다스리는 그의 능력보다 물을 다스리는 변이 한 수
위라는 증거였다
-프리즌!
레드리안느의 공격이 실패하자 화이트 드래곤 라모네샤트의 공
격이 이어졌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는 프리즌을 사용한 라모네샤트. 이번 공
격은 효과가 있었다 변이 만든 물의 막이 얼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프리즌은 오히려 자신들의 수명을 깎아먹는 역할을 해
버렸다 물이 언 상태로 계속해서 조여 온 것이다.
-이게 뭐야? 헤븐스 포이즌!
라모네샤트의 공격이 실패하자 그린 드래곤 메카드리도 가장 자
신 있는 공격을 가했다. 모든 속성에 독을 가하는 그린 드래곤 고
유의 마법이었다. 역시나 이 공격도 변이 만든 물의 막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물에 독을 가함으로써 자신들이 위태
로운 지경에 처했다.
-크릭!
"어?"
변이 라한을 돌아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라한도 변
을 돌아봤다
-크리리릭!
변의 말은 물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최근 연이어 벌어진 가뭄
으로 강의 수위가 낮아진 탓이다. 드래곤의 덩치가 조금만 작았어
도 완전히 조여 죽일 수 있었으련만 긴 가뭄과 부족한 수량가 못
내 아쉬웠다.
"미치겠군. 그럼 저놈이라도
라한이 아카폴리안에게 빠르게 쏘아져 갔다. 다른 드래곤이 빠
져나오기 전에 아카폴리안만이라도 완벽히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크리릭!
변이 얼마 안 남았다며 라한을 재촉했다. 라한도 최대한 빨리 아
카폴리안에게 쏘아져 갔다. 그리고 그를 공격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변, 이리와!"
-크링?
"빨리! "
-크리리릭!
라한의 재촉에 변이 라한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라
한이 아카폴리안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깝군. 함께 공간으로! "
라한이 변의 손을 잡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그가 사라지고 얼
마 있지 않아서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로드님을 뵙습니다. 이실리아 인사드립니다.
-로드님을 뵙습니다. 벨라루스 인사드립니다.
이실리아와 벨라루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인사를 귀
끝으로 흘린 로테마이어스가 주변을 천천히 훌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는 아카폴리안이었다.
처참하게 녹은 왼쪽 날개의 반과, 마찬가지로 얼어서 깨지고 있는
왼쪽 날개의 반. 결국 아카폴리안의 왼쪽 날개는 녹거나 얼어서 완
전히 못쓰게 돼 버렸다
-로, 로드님을
-됐다. 저건
쿠쿠쿵!
로테마이어스가 강으로 눈을 돌렸을 때, 때마침 변이 만든 물 덩
어리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갇혀 있던 드래곤 셋이 바닥으로 추락
했다.
-흠, 이실리아. 벨라루스.추궁은나중에하겠다. 매스텔레포트!
로테마이어스가 가까이 있던 아카폴리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뒤를 이실리아와 벨라루스가 나머지 드래곤들을 데리고 따랐다.
재회2
베센 왕국의 서부 지방 베네스
이곳은 산이 많고 그산에서 철광석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베센
왕국이 매년 저둬들이는 수입의 꽤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그런 베네스 지방도 가뭄은 어쩔수 없었다 안 그래도 수원
이 부족한 곳이라 아사자가 속출한 것이다 거기다 원래 인
구가 적은 곳이라 지금은 생존자를 보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였다
이미 황폐화되어 몬스터가 가득한 베네스 지방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께에 피를 철철 흘리고 얼굴마저 창백한 라한 공간
이동해오자마자 몸을 비틀거렸다

크릭
괜찮아 치료
라한이 치료의 신화력을 어깨에 사용했다. 어깨에서 희미한 빛
이 흘러나오자 흐르던 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이 부근이 었는데. "
이곳은 류카라한이 3구역이라고 했던 곳, 카이렌을 죽이기 위한
함정을 파놓은 곳이다.
라한은 지도를 얼핏 보며 찾아왔기에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
다. 카이렌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서둘러 3구역이라 명명된 곳
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비틀!
걸어가려던 라한이 몸을 비틀거렸다. 치료는 다 끝났지만 흐르
는 피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크리리!
변이 라한의 앞에서 팔을 양옆으로 확 펼쳤다. 가지 말고 몸을
추스르라는 의미 였다.
그런 변을 보며 라한이 손을 내저었다.
"그럴 시간 없어. 내가 지체하면 내 친구들이 위험해져. "
-크리리릭!
"난 괜찮아. "
변의 걱정해 주는 마음에 라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자신을 위해 드래곤과 싸워주고 또 몸까지 걱정해 주
는 변. 괜히 울컥하는 기분에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었다.
-크리릭?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마. "
말과는 달리 라한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물체
도 흐릿하게 보이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또, 팔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크리릭.
"훗. "
라한은 변의 계속되는 걱정을 웃음으로 흘렸다
몸은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쉴 틈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몇 시
간 전에 에테로에게 정확한 위치를 전해 듣고 이곳으로 왔어야 했
다. 드래곤과의 싸움만 없었다면 조금은느긋하게 일을 처리했을
터 였다.
몸도 정상일 테니 수월하게 일을 처리했을 테고.
"음.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거의 바닥
난 신화력이 라한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저기군. "
라한이 방향을 틀어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자 수풀 사이
에 교묘하게 가려진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또, 동굴주변에 십여
명의 사람이 숨어 있는 게 보였다. 동굴 입구를 은밀하게 지키는
사람인 듯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은동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신화력을 사용했다. 이젠 현
기증을 넘어서서 헛구역질이 마구 나왔다.
동굴을 통과하자 거대한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견하기에도
쾌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같았다.
'대단하군. 류카라한녀석. 하는짓은마음에 안들지만능력하
나는 죽여주는 놈이라니까. '
이런 은밀한 장소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거기다 이
런 곳에 많은 사람을 들키지 않고 데려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 난제를 류카라한은 모두 해결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연무장이 존재하고 있고 만 명은 될 법한 사람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또, 그 만 명이 머물 수 있는 수많은 집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만
었다.
'제대로 가르쳤군. '
때는 저녁
연무장주변은식사준비로몹시 분주했다. 여기저기 연기가 피
어오르고 그 사이로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풍걱 나왔다.
그런데도 연무장 주변 곳곳에는 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
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라한이 놀란 점은 이 때문이다. 지형적 이
점만으로도 경계를 소홀히 할 법하건만 경계하는 이들의 눈빛은 뭔
가 찾아내겠다는 집 념으로 가득했다.
'근데 어디지?'
라한이 골렘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더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듯했다.
'일단 좀 살펴봐야겠다. '
라한이 투명한 상태로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골렘을 찾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곳에 대한좀 더 많은 정보를 캐려는목적도
없지 않았다.
라한이 숨어들어 간 곳. 베네스의 비밀 기지에 류카라한 일행이
한자리에 모였다.
거대한 중앙 탁자의 상석에는 류카라한이, 그 좌우에는 케이플
과 미스티크가 자리했다. 그리고 하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랫자리
에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굴레를 벗은 인간들이 자리 잡고 앉았다.
"다 모였군. "
류카라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몇몇이 자신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눈을 파는 그 순간 승냥이 같은 그들의 먹이가 될 것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잉글리아트를 포함한굴레를 벗은 인간들을
하석으로 앉힌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케이플과 미스티크도.
잉글리아트의 편에 섰다는 건 몰랐다. 알았다면 자신의 양옆으로
그들을 앉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 그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훌
훌 털어 버리고 예전에 머물던 은거 장소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왜 모이라고 한 거지?"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됐나?"
류카라한이 잉글리아트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깨끗하게 무시
했다. 그 태도에 잉글리아트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루나시언. 어떻게 됐지?"
"거의 다 끝나간다. "
"거의 다 끝나가?"
"그렇다. "
루나시언의 대답에 류카라한이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너무
느리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탓이다.
"대체 지금이 몇 신가? 끝냈어도 벌써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
"생각보다 많아? 크크, 내 험담하느라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고?"
"이이
발끈하려던 루나시언이 어렵게 화를 억눌렀다. 지금은 참을 때
였다. 괜스레 화냈다가는 인내하며 지냈던 긴 시간을 날려 버릴 수
도 있는 일이었다.
"한 시간 준다. 그 안에 끝내라. "
"젠장. "
"불만인가?"
"하면 되잖아. 썩을.'"
루나시언이 욕설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를 잉글
리아트를 비롯한 다른 미들이 따라 나갔다. 류카라한에 대한 반감
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쿵- !
"어?"
가장 뒤에서 나가던 마법사 토일렛이 뒤로 튕겨났다. 마치 무언
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토일렛. 왜 칠칠치 못하게 넘어지고 난리야?"
"그게 이상하네. 분명 뭔가에 부딪혔는데. "
토일렛이 한 손으로 엉덩이를 문지르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토일렛과 크리퍼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류카라한이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났다
챙-!
"나와라!"
류카라한이 검을 뽑으며 외쳤다. 그 모습을 보며 토일렛과 크리
퍼트가 뒤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잘못한 게 있으니 알아서 겁
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토일렛!주변에 마나스캔을시작해라. 크리퍼트. 먼저 나간놈
들 전부 모이라고 전해라. "
"어? 어."
류카라한이 빠르게 명령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크리
퍼트는 지체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이다.
"토일렛! 뭐 해?"
"알았어. 마나 스캔!"
토일렛이 눈을 지그시 감고 주변 마나를 탐지했다. 투명화 마법
으로 숨어들어 온 이가 있는지 찾는 것이다.
"케이플. 넌 토일렛을보호하고. 미스티크. 넌 잉글리아트가오
면 그를 보호해라, "
"그러지. "
"알겠다. "
케이플이 눈을 지그시 감은 토일렛 앞을 막아섰다. 미스티크는
입구 쪽으로 가서 잉글리아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움직이자 류카라한도 검을 전방으로 슬그머니 들어 올렸
다. 그 상태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언가를 느끼려 애썼다.
류카라한과 케이플, 미스티크가 진형을 갖추자 먼저 나갔던 이
들이 한 명씩 들어왔다. 그 잠깐 사이에 쾌 멀리 갔었는지 생각보
다 오래 걸린 편이었다.
"루나시언. 루시펠. 너희는 입구를 막아라, 우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출입시컥선 안 돼. 알겠지?"
"그러지. "
루나시언과루시펠이 입구를막아섰다. 이미 검을뽑아들고온
걸로 봐서는 크리퍼트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듯했다.
"잉글리아트. "
"알았어. 마나 스캔!"
언질을 받았는지 잉글리아트가 곧바로 마나 스캔을 시전했다. 아
직 아무런 임무도 부여받지 않은 크리퍼트만이 멍하게 서 있었다.
"류카라한, 난 뭐 하지?"
"기다려. 토일렛, 찾은거 있나?"
"없어. "
"흠. 카이렌인가?"
류카라한이 의심한 이는 카이렌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을 수 있는 존재. 마나 스캔으로도 쉽게 잡히지 않는 존재. 류
카라한이 알기로는 카이렌이 유일했다.
"류카라한. "
"크리퍼트. 너와난칼질을시작한다. 우리 일행이 있는곳을제
외한 이 공간 전체에 칼을 휘둘러. 어서. -
류카라한이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휘두르기
고 크리퍼트도 반대쪽에서 칼을 휘둘렀다.
시작했다. 그를 보
찌익!
한참 칼을 휘두르던 크리퍼트의 칼끝에 뭔가가 걸렸다. 순간적
으로 칼을 뒤로 뺀 크리퍼트가 칼끝을 자신의 눈앞에 가져왔다
"류카라한. 옷자락이야. 피가 묻어 있는데. "
"어디?"
류카라한이 크리퍼트 옆으로 다가와서 칼끝에 달린 옷자락을 살
폈파 그의 말처럼 피가묻어 있었다. 한데, 크리퍼트의 칼에 베여
흘린 핏자국은 아닌 듯했다. 이미 반쯤 말라 있는 피와 누렇게 묻
은 먼지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잉글리아트. 토일렛. 공격 마법 준비해, "
"알았어. "
"그러지. "
저마다 대답을 마친 그들이 마법 주문을 중얼거렸다
토일렛은 공격력이 약해도 많은 곳을 공격할 수 있는 매직 에로
우를 머리 위에 만들었다. 일견하기에도 십여 개는 되는 수였다.
잉글리아트는 가장 무난하면서도 공격력이 강한 파이어 볼을 눈앞
에 만들었다.
"나오는 게 어떤가? 이미 들킨 것 같은데. "
류카라한의 엄포에도 상대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갔다
가는 마법과 칼에 죽음을 맞을 게 뻔한 상황에서 나을 리 만무했다.
"끝까지 버티겠다는 건가? 그것도 좋겠지. 크리퍼트
"알았어. "
휘익!
휘이 잉 !
크리퍼트와 류카라한이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좀 전보다 더 세
밀하고 매서운 칼질이었다.
한편 라한은 연무장 곳곳을 살피다가 익숙한 기운을 느쪘다. 오
래전 어느 동굴에서 만났던 잉글리아트 일행의 기운이었다.
'따라갈까?'
몸 상태로 봐서는 무리한 행동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런데도 호기심 때문에 발이 저절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미 한
번 그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는 것도 뒤따르는 데 한몫했음이다.
그렇게 따라갔던 라한이 내실의 천장에 매달렸다. 그곳에서 류
카라한과 그들의 대화 내용을 다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쾌하지
않은 마무리까지도 모두 목격했다.
그렇게 일이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면 라한으로서는 더 나을 것
없는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잉글리아트 일행이 몸을 돌려
나갈 때 벌어졌다.
갑자기 느껴진 어깨의 통증. 그와 동시에 매달려 있던 라한이 바
닥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서둘러 시전한 '날기'로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막을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토일렛이 라한에게 다가
와 부딪혔다는 게 문제였다
'빌어먹을. '
천장 구석에 몸을 쭈그린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마음속
으로 한 욕이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끝까지 버티겠다는 간가? 그것도 좋겠지. 크리퍼트. "
"알았어. "
류카라한과 크리퍼트의 말에 라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망할. '
무의식적으로 라한이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좀 전에 크리
퍼트의 칼에 찢긴 부위였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치명적인 상처가
될 뻔했다.
'돌아갈까?'
다행히 류카라한은 상대가 라한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라한에게도 도망갈마지막수단은 남아 있었다. '공
간으로' 이 방법이면 이곳에서 안전하게 도주하는 것도 가능했다.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
지금 라한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돌아가는 건 두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첫째는 라한스스로가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
고 두 번째는 류카라한 일행이 이번 함정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점
이었다.
류카라한은 지금 숨어 있는 이를 카이렌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입구만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함
정도 카이렌 일행을 속이기 위한 거였다. 즉, 카이렌에게 함정의
전말을 들켰으니 시도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공간으로. '
라한이 연무장으로 통하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동굴 밖으로 공
간 이동했다. 여전히 '투명해지기'가남아 있는상태라서 들킬 염
려는 없었다.
'하나를 더 남기는 게 낫겠지. '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들고 주변을 찬찬히 훌었다. 숨어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동굴 입구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
었다.
'미안하다 '
라한이 숨어 있는 이들의 뒤로 가서 한 명씩 처리했다. 뒤에서
조용히 목만 가르는 일이라서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십여 명을 다 처리한 라한이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 큰 움직임이
아니었는데도 어깨에 무리가 간 듯했다
'이것도 좋겠군, '
라한이 동굴 입구 위 벽면으로 날아올랐다. 그곳에 류카라한에
게 남기는 짧은 서신을 남겼다.
류가라한.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가짜 골렘이라니 하하하.
아주 유쾌한 장난이 었어, -렌
마지막 서명은 '렌' 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했다. 류카라한에게 카
이렌이 다녀간 것으로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카이렌 일행도 이곳에 올 수 있는 일. 카이렌이라는 이름
을 전부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이 때문에 끝 글자만 따서
서명을 남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기절하다시피 하며 침대에 쓰러졌
다. 그 상태로 몸도 꿈쩍하지 않고 근 이틀 동안 잤다.
이틀후, 라한이 몸을꿈틀거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너무오래
자서인지, 몸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
"일어났군. "
"헉. "
순간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목소리의 주인을찾았다. 아
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로테마이어스라도 찾아
온다면 그대로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일세. "
"아씨. 놀랐잖아요. "
라한이 대상을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사 길드
의 길드장 에테로였다. 로테마이어스가 아니라는 건 다행스러웠지
만, 잠시나마 간을 졸였다는 게 못내 억울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랫동안 자는가?"
"그랬나요?"
라한이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꼬박 이틀 동안 잠만 자더군. "
"좀 피곤했나 보죠. "
"흠, 자네가 자러 들어을 때 여기 내가 있었다는 거 아는가?"
"그 그랬나요?"
라한은 집에 들어와서 쓰러져 잘 때도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했
다. 몸 상태가 너무 엉망이라 경계심이 약간 흐트러진 듯했다.
"옷 좀 갈아입 어야겠군. "
"흠. "
라한은 그제야 자신의 거짓말이 먹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
긴, 비틀거리며 들어오는모습도 다들켰고, 옷에 잔뜩묻은 핏자
국도 들켰으니 라한의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나가 있을 테니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게. "
"네. "
에테로가 나가자 라한은 서둘러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다
행히 상처가 다시 터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진
신화력을 다시 회복하려면 몇 달은 걸릴 성싶었다.
'로테마이어스가 안 와야 할 텐데. '
라한이 옷가지를 대충 챙겨 입으며 고민을 시작했다
류카라한 일행은 큰 문제가 안 되었다. 그들의 대화로 판단컨대
라한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
식조차 못하고 있는 이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 측의 드래곤과는 몇 차례나 부딪쳤다. 심
지어 며칠 전에는 드래곤 네 마리를 박살 내놓기까지 했다. 지금
로테마이어스의 머릿속은 안 봐도 뻔했다. 라한을 어떻게 처리할
까? 라한의 실력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이런 고민으로 하루하루
를 보낼 게 분명했다.
'들키면 끝장이다. '
로테마이어스가 아무리 라한을 신경 쓴다 해도 부상만 들키지
않으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신경을 많이 쓰는 만큼 공격도 섣불리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직 멀었는가?"
"다 줬어요. 들어오세요. "
라한이 에테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에테로를 건너편에 앉혔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
"아닙니다. "
"아니긴 자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네. 어딘가에 기댄 자세로
날 맞은 게 이번이 처음이지 않은가? 아직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기
힘들 정도라는 얘기겠지. 안 그런가?"
"에고, 역시 에테로님은 못 속이겠네요. "
라한이 졌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실제로 그 말이 모두 사실이었
으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을 당한 겐가? 아참, 검은 측의 3구역은
"이미 갔다 왔습니다 혹시 그곳에서 최근에 들어온 소식은 없
습니까?"
"깨끗하게 비우고 사라졌더군. 아마 회색 측에게 들킨 모양이야. "
"다행이네요. "
라한의 예상대로 류카라한은 숨어들어 온 사람을 카이렌이라고
생각했다. 또, 비밀 기지를들켰다는생각으로그곳에서 인원을철
수시켰다. 물론 철저히 준비했던 함정도 포기했다.
"자네 몸은 어떻게 된 건가?"
"드래곤과 싸웠습니 다. "
"살아있는 걸 보니 이기긴 이긴 모양이군. "
라한이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테로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라한이 드래곤과 싸운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심장이 멎을 듯
경악스러워했다 한데 이젠 라한이 드래곤과 싸웠다는 얘기가 담
담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게 익숙해진다는 건가 싶었다.
"싸움 얘기를 해줄 수 있겠는가?"
"훗, 마치 제가 이야기꾼이라도 된 듯이 얘기하시는군요. "
"뭐 어떤가? 나 정도면 뛰어난 관객 아닌가? 기왕이면 몸짓까지
같이 해주게. "
"하하하. 몸 상태가 엉망이라 몸짓은 못하겠습니다. "
간단한 농담이 오가고 라한이 그때 상황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
작했다. 정령왕이 드래곤의 공격을 알려준 대목부터 마지막에 변
을 이용해서 도망갈 때까지
한참 얘기하던 라한이 뭔가 놓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 그러는가?"
"뭔가 놓친 것 같은데 그게
"그러고보니 테세르와슈라, 변이 안보이는구먼. 그들은 어딜
갔는가?"
"아까 강제 귀환됐다고 말했잖아요. 정식 소환과 귀환이 아니라
서 한동안은 부를 수 없어요. 한두 달은 있어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변은 . 변은 맞다. 변! "
그제야 라한은자신이 놓친 게 무언지 깨달았다. 물 덩어리 변.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갑자기 도망치는 바람에 그를 데리고 오는
걸 깜빡했다.
"변이 왜?"
"그놈을 3구역에 두고 왔어요. "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죠. 잠시만요. 공간으로! "
라한이 3구역으로 공간 이동했다. 그곳에서 변을 찾기 위해 3구
역과 그 주변까지 샅샅이 뒤졌다. 한데도 변을 찾을 수 없었다.
"에휴, 어쩌지?"
라한 혼자 떠나 버리자 변은 땅속에 숨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
다가 자신의 창조주인 투바가 오는 게 느껴졌다. 카이렌 일행이 함
정 인 줄 모르고 다가오는 거 였다.
이에 변은 잽싸게 땅에서 나와 투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곳을 몇 번 둘러보다가 돌아갔다. 라한이 있는 곳이 아닌
카이렌 일행이 지내는곳으로 그제야제 주인을찾은셈이다
"찾았는가?"
"아니요. "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는 원래 여기저기 떠돌다 이곳까지 오
지 않았는가? 잘 찾아을 테니 마음 편하게 먹게. "
"에휴, 그놈이 없으면 일손이 많이 달리는데
"쿨럭 ! "
라한은 변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쇠심줄보다 더 질긴 목숨을 가진 놈이 변이었다.
문제는 변혁기에 있는 블리아드 마을에 일손이 부족해진다는 거
였다. 물을옮기고수원을찾는 데 최고의 인재인 변. 그가 없으면
일이 두 배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테세르하고 슈라 그놈들도 한두 달은 일을 못 하는
데, 젠장. "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얼굴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걱
있었다.
에테로는 그제야 라한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
도 실제로는몹시 걱정하고 있는 라한.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성격. 되는 대로 막사는 듯
보이지만 항상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따뜻한 성격을 가졌
지만 선악을 확실히 구분 짓는 라한은 그런 성격이었다
라한은 3일을 더 쉬고 다시 마을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테세르
와 슈라 그리고 물 덩어리 변까지 빠진 자리를 라한 혼자 도맡아 처
리해야 했다.
물이 필요하면 옮걱 주었고, 농기구가 필요하다면 직접 두드려
만들어주었다. 또, 돌이 필요하면 밖에서 옳걱 주었고 밭을 갈아
달라면 땡볕 아래에서 밭을 갈았다.
아직 채 회복되지 않은 신화력과 이제 많이 사라져서 신화력에
거의 응화되다시피 한 제령기와 제란기. 라한이 사용할 수 있는 힘
을 총동원한 고된 노동이 었다.
라한은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밤늦게
집으로돌아왔다. 혼자서 일을도맡아한지 벌써 10일. 지치고힘
들어서 뼈마다가 분리되는 느낌마저 받았다
"아이고. 못살겠다. "
라한이 다리를 두드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오늘따라 괜스레
테세르와 슈라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
는 변까지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정말잘해주겠다고 스스
로에게 다짐했다.
"뼈가 녹네, 녹아. 이거 내 몸 맞아?"
똑똑!
"안에 있는가?"
에테로의 목소리였다. 예전 같으면 웃으며 맞았겠지만 지금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와 대화하자면 최소 몇 분은 허비할 터.
라한은 그 시간마저도 수면에 투자하고 싶었다.
"예예. "
"다행히 있었구만. 그래 몸은 좀 어떤가?"
"보시다시피 죽을 지경입니다. "
라한의 엄살에 에테로가 웃음을 머금었다.
무적의 강철 마법사로 보였던 라한의 엄살이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제야 진짜 인간처럼 보였다고 할까? 그런 기분에 괜
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멀정하구만. "
"이게 멀정한 걸로 보이십니까? 이 다리 부은 것 좀 보십시오.
내 다리가 아닌 것 같다니까요. "
"허허,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네. "
"그래요?"
라한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지금 그에게는좋은 소식보다 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했음이다.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
"아닙니다. 말씀해 보세요. "
"변을 찾은 것 같네. "
"어디서요?"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반가운마음에 자신도모
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슬그머
니 앉았다.
스스로도 좀 경박스러웠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회색 측에 있는 것 같네. "
"회색 측이면 카이렌?"
"그런 것 같더군. "
"아, 그럼 그때 그렇군. "
라한이 사건의 전말을 손쉽게 추리해 냈다. 변의 창조주가 투바
임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왜 그러는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닐세. 그만 쉬게. "
"예. 그럼 멀리 안 나갑니다. 공간으로. "
"안 쉬고 어디
에테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한이 모습을 감추었다. 서두
르는 모습을 보며 에테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 아는가? 난 최근까지도 자네가 드래곤이 아닐까 의심했었
다네 후후. 하지만 이젠 알겠어. 자넨 인간이 맞네. 정말 인간적
이고 따뜻한 인간 말일세. '
에테로는 라한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힘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
는 점도 좋았고 영웅인 척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또 자신의 잘난
부분을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점도 귀엽게 보였다.
스팟!
"헛! "
에테로가 집을 막 나가려 할 때 집 안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
다. 공간 이동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아, 저기 에테로님. "
"어? 라한 아닌가? 벌써 데리고 온 건가?"
"그게 아니라어, 그러니까지금카이렌이 어디 있죠?"
카이렌 일행은 본진을 수시로 옮겨 다닌다. 드래곤의 이목과 류
카라한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라한은 아무 생각 없이 전에 갔던 카이렌의 진형으로 갔다가 빈
공간만 보고 돌아왔다. 이미 카이렌이 본진을 옳긴 것이다.
"이거 참. 지금은루이나왕국남부지방에 있네 베테나라는지
방 아는가?"
"아, 어딘지는 알아요. "
"그곳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가면 거대한 저택이 나을
게야. 거기 있네."
"그럼 나중에 봐요. 공간으로. "
라한이 다시 공간 이동해 갔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에테로는 폭풍이 지나간 느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용건만 듣고 사라지는 라한. 왠지 자신도 바쁘게 뭔가
를 해야 할 듯한 느낌이었다

라한이 에테로가 일러준 지역에 도착했다. 그의 말처럼 거대한
저택이 산을 끼고 지어져 있었다.
'이놈도 대단해. 여기저기 잘도 만들어놨다니까. '
라한의 눈에 보인 저택은 새로 지어진 듯 깨끗했다. 전에 갔던
집도 크고 깨끗한 건물이었다. 카이렌이 세력을 키울 마음을 먹은
후에 만든 저택이 분명했다.
'이런 저택을 대체 몇 개나 지은 거야? 갑부네. '
라한은 집 한 채를 얻기 위해 블리아드 마을에 갖은 도움을 줘야
했다. 그러고도 크긴 하지만 나무로 만든 허름한 집이 전부였다.
한데, 카이렌 일행들은 아예 저택을 지어 버렸다. 그것도 대륙
곳곳에 수십 개의 저택을 지금 라한의 집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가볼까?"
14개월 만의 재회.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혀왔다. 첫마디를 어
떻게 꺼낼까? 그냥 손 인사를 할까? 아니면 윙크를할까? 이런저
런 고민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까짓것 부딪쳐 보자고. "
라한이 저택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어차피 만날 일. 숨어
들어가기보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가고 대면하고 싶었다
"멈춰라! 이곳은 타인에게 쉴 곳을 제공하지 않는다. 물러가
라. "
"실례합니다만 전 이곳 주인을 꼭 만나야 합니다. 전갈을 넣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썩 물러나지 않으면 당장 검을
쓰겠다. "
저택 입구를 지키던 사내가 라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호통을
쳤다. 그 모습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요. 전 이곳주인을아주잘알거든요. 괜히 망신당하지 말
고 들어가서 전갈이나 넣어주시죠. "
"흥. 밥한끼 얻어먹으려고온모양이다만잘못짚었다 이곳은
거지들 구제하는 곳이 아니니 썩 꺼져라. "
어디를 가든 상대의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라한의 허름한 외모만으로 주인인 카이렌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
각하는 경비병 그 모습에 라한도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봐. 내가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날들여보내 주든가. 아니면
험한 꼴을 당하든가, 난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고. "
"이, 이 거지 같은 놈이 감히
"경고를무시했다이거지. 좋아. 네가자처한일이니 어쩔 수 없
지. 낙석! "
라한의 간단한 말이 끝나자 경비병 위에 거대한 바위가 생성되
었다. 그리고 그 바위가 곧바로 경비병에게 떨어졌다.
"허업!"
쿠우웅!
라한이 만든 바위가 경비병 바로 앞에 떨어졌다. 정확하게는 경
비병의 발등 위에 떨어진 것이다

라한은 당연히 경비병이 비명을 터트릴 줄 알았다. 발바닥이 짓
뭉개지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은 건 자명한 일이니 말이다.
한데도 경비병은 신음을 흘릴 뿐 비명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카
이렌의 훈련이 만든 성과였다.
"어디 이래도 버티는가 볼까?"
툭툭!
"으악! "
라한이 경비병의 발을 뭉개고 있는 바위를 발로 툭툭 찼다. 이에
바위가한두 차례 흔들리며 경비병의 발에 통증을 배가시켰다. 결
국 경비병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험한 꼴 당할 거라고 말했지?"
으,
"야! 거기 숨어 있는놈들. 빨리 너희 대장한테 라한이 찾아왔다
고 전해. "
저택 입구에는 경비병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숨어서 문을
지키는 자가 족히 열 명은 되었다.
라한의 말이 끝나자 미약한 발소리가 들렸다. 몇 명이 안으로 이
곳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러 간 거 였다.
후다다닥!
저택 안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은 발소리만으로
그가 프라하임을 짐작했다.
콰쾅!
"라한! "
프라하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라한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이내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눈을 부라렸다. 어떤 놈이 라한을 사칭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오랜만이야. "
"누구냐"
라한은폴리모프를 해서 가짜모습을유지하고 있다. 프라하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폴리모프 때문에 못 알아보는 모양이군. "
"폴리모프?"
"네 반지하고 같잖아. "
"흠. "
프라하가 마법 반지를 착용하고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
다. 그중 라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저택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상황. 결국 눈앞에 있는 이가 라한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긴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한의 실종은 벌써 오래된 일이고,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라한인가?"
"그렇다니까. "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
프라하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정하
게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녀석. 변했구나. '
콰쾅!
프라하가 어떤 물음을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저택 문이 또 한
차례 거칠게 열렸다. 그 안에서 카이렌과 투바가 놀란 얼굴로 뛰어
나왔다.
"라한은?"
"저자가 자신이 라한이라고 하는군. "
프라하가 카이렌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말했다. 라한이 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주는 모습이었다.
얘기를 다 들은 카이렌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라. "
"네! "
카이렌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주변 나무와 땅 아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어서 저택 문을 지키는 이들이었다
모두 물러나자 카이렌이 라한을 지그시 쳐다봤다.
"네가 라한이라고?"
"카이렌. 쳇, 너도날못알아보다니 섭섭한데."
"라한에게선 예전부터 별다른 기운을느낄 수 없었지. 한데, 지
금 네게서 풍기는 기운은
카이렌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도 라한에게서 풍기는 기
운이 자신과 흡사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비슷하지. "
"그렇군. 어떻게 그런 기운을 가질 수 있지? 판테아를 만났나?"
카이렌은 수련을 통해 신화력과 비슷한 기운을 얻은 게 아니었
다. 굴레를 벗는과정에서 판테아와 거래를통해 얻은 거였다. 그
때문에 이 기운은 생명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기운이라고 생각해
왔다. 자신이 신의 사자에게 얻었으니 오직 신과 그의 사자만이 가
지는 기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불가능해. 이건 인간이, 아니 드래곤이라도 가질 수 없는 기운
이야. 근데 저자가 어떻게
판테아가 힘을 줬다고는 해도 제대로 된 힘은 아니었다. 판테아
가 가진 기운의 아주 미미한 조각을 얻었다고 할까? 그 정도였기에
라한이 가진 기운보다 많이 미흡하고 부족했다. 카이렌은 몰랐지
만 라한은 그 차이를 명확히 잡아냈다
"카이렌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아니다. 네가라한이라고했나?"
"그렇다니까. "
"프라하 "
"알았어. "
카이렌이 프라하를 불렀다. 라한과 가장 먼저 만났으니 오래전
일을 물어보라는 의미 였다.
프라하도 그 말뜻을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묻지. 내 원래 이름이 뭐지?"
프라하가 물음을 던지자 카이렌과 투바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
다. 거짓임이 드러나면 한 번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못 알아보
는 건 괘씸했지만 철두철미한 자세가 마음에 든 것이다.
"네 이름은 프라미트. 맞나?"
"흠, 그건 아는사람이 좀 있으니 알수도 있겠지. 그럼 너와내
가 처음 만날 때 상황을 말해 봐라. "
"넌 내가 마법을 쓸 때 풍기는 기운을 느끼고 찾아왔지 그때 내
가 사용했던 마법이 아마도 로케이션 디텍트였을 거야. 그리고 너
하고 나하고 크게 한판 붙었고 난 싸우다 힘에서 밀리니까 도망갔
지. 더 말해 볼까?"
"그리고 내가 다시 널 만난 건 언제지?"
프라하의 물음에 라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도 투바
와카이렌은 라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내가 용병들을 따라다닐 때였어. 그때 모습이 바꿔 네가 뒤에
서 따라오는 걸 내가 발견했지. 거래를 통해서 동행하기로 했고.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프라하. 다 맞는 얘기야?"
라한의 대답에 카이렌이 프라하를 재촉했다
라한이 대답한 내용은 투바나 카이렌도 모르는 얘기였다. 그런
내용까지 모두 알아맞혔다면 라한이 분명할 터였다.
카이렌의 질문에 프라하가 입을다물고 멍하게 서 있었다. 그렇
게 한참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반갑다. 친구야. "
"반갑다. "
프라하가 라한을 조용히 끌어안고 훌쩍였다. 라한은 프라하에게
안긴 채로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들이 좋았다. 정이 느껴져서 좋았고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이 좋았다. 그래서 이들을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프라하의 행동에서 라한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카이렌과 투바도
라한에게 다가와 그를 안았다
"라한. "
"반가워. "
"나쁜 놈. 우리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
라한이 카이렌과 투바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렇게 작은 덩치
의 라한이 장정 셋을 끌어안았다. 프라하, 투바, 카이렌 그리고 라
한은 그렇게 다시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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