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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1 화>

1. 자일스 헤센

방울꽃과 솔체꽃이 아름답게 만개한 솔즈부르의 어느 사유지. 검은 딱정벌레처럼 빛나는 자동차가 잘 닦인


포장도로 위를 달렸다.

본래대로라면 벨담 귀족을 태운 고급 승용차만 오갈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뒷좌석에 앉은 자일스는


정장 혹은 오간자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깔깔 웃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이 길을 지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더 이상 벨담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승용차 또한 본래 귀족의


소유물이었을 것이다. 귀족은 이제 몰락했고, 입스윈 혁명군은 벨담 귀족의 재산을 징발해 그들을
체포하고 짓밟는 데에 두루 사용했다.

자일스가 타고 있는 이 차 역시 징발된 것이었다. 차에는 총 네 명이 타고 있었다. 자일스를 뺀 셋 모두


그의 부하들이었다. 부하들이 떠드는 소리로 차 안이 시끌벅적했다. 자일스는 대화에 끼지 않았다. 원래
그는 부하들과 별로 친한 편이 아니었다.

처음에 그들은 자일스의 부하가 되는 것을 껄끄러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벨담인의 밑에서 싸우라니…… 모순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목적지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였다.

운전을 맡은 부하가 창 너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보인다! 저기 저 저택!”

그러자 나머지 부하들도 저택을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이야, 집 한번 화려하게 지어 놨네.”

“도대체 방이 몇 개일까? 내가 장담하는데 저 중 절반은 쓰지도 않는 공간이었을 거야. 허영심 때문에


돈지랄을 해 댄 거지. 저건 나중에 학교로 써도 되겠다.”

“우리 손에 뒈진대도 저 집 꼬라지를 보니까 남는 장사 같네. 한 번이라도 저렇게 살아 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부하들이 그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자일스 또한 귀족이 살던 저택을 볼 수 있었다. 벨담식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물론 그곳에 살던 이들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다.

혁명군은 이미 예전에 이 지역을 접수했다. 귀족들을 끌어내고, 저택 안에서 물건이란 물건들은 전부 다


뒤져서 가져가 버렸다. 보기에만 그럴듯하지 사실상 버려진 폐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자일스를 비롯한 이들이 솔즈부르의 저택을 다시 찾은 건 시찰을 위해서였다. 과연 새로운


시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절한지 검토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관공서로 쓸 수 있다면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자비하게 철거될 것이다.

과거 빛나는 명성을 자랑하던 벨담 귀족들이 그리 되었듯이.

본토에서 쳐들어온 그들은 남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여 입스윈 사람들을 빨아먹고 부유하게 지냈다.
국가의 원래 주인인 입스윈 사람들이 도리어 노예처럼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전쟁에서 패전한 여파로 벨담은 약화되었다. 벨담이 자국을 지키는 데에 바빠 입스윈을 아예
포기해 버린 덕에 귀족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그 틈을 타 입스윈 사람들은 귀족들을 몰아낼 혁명을
일으켰다.

약 2 년이 지나고서야 혁명이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벨담 귀족들은 전부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제 입스윈 그 어느 곳에서도 벨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일스는 폭풍 같던 시절을 견디고 이 땅에 살아남은 유일한 벨담인이었다. 그 또한 아주 오래전에는 저런


저택에 살면서 도련님 대접을 받았던 지주의 아들이었다.

지금은 그저 입스윈에 투항한 혁명군 장교일 뿐이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대위님?”

“그래.”

“저런 저택 말입니다. 진짜로 화장실이 거실만 합니까? 제 동료가 그러더군요. 귀족 저택 화장실이


자기가 살던 집보다 더 넓었다고요.”

뼈가 있는 질문이었다. 그들도 자일스가 벨담 지주 혈통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제공하고, 무기를 건네주었을 때까지도 적대적인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자일스는 동향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고 총살하면서 점점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대위님은 우리 중 유일하게 경험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저희는 네 가족이 함께 쓰는 작은 화장실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어서요.”

비록 자일스는 그들의 상관이었지만 대답을 신중히 해야 했다.

혁명에 공헌한 영웅 대접도 그의 혈통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생각도 안 나.”

“별로 오래되지도 않으셨을 텐데.”

운전병이 툴툴거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조수석의 페터슨이 견디다 못해 끼어들었다.


“아, 그게 뭐 중요해? 화장실을 금으로 만들어 놨든 은으로 만들어 놨든 이제 무슨 상관이야. 다 우리
건데. 이해하십쇼, 대위님. 로빈이 어제 술 먹다 애인한테 한 소리 들어서 컨디션이 안 좋답니다.”

“그런 일 없었어!”

“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로지아한테 바칠 뇌물이나 생각하고 있어. 둘이 빨리 화해하라고. 네 풀 죽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사기가 떨어진다니까.”

로빈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승용차가 저택 내부까지 들어섰다. 철제 대문은 이미 고장이 나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본래 정원으로 꾸며졌어야 할 공간에 잡초가 들쑥날쑥했다. 멀리서는 아름다워 보였던 저택 건물 또한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방치된 태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자일스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너희는 아직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나 살펴봐라. 나는 보고서에 뭐라고 써서 올릴지 둘러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부하들과 흩어져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메인 홀을 보고 처음 느낀 감상은 이러했다.

‘가관이군.’

한때 번쩍번쩍 광이 났을 대리석 바닥은 빛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낙엽이 들이쳐


난장판이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완전히 박살이 난 채 나동그라져 쓸쓸한 쓰레기로 전락해 있었다.

커다란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옷장이나 침대를 비롯한 가구는 물론 욕조까지도 전부 뜯어 가 버렸다.


펜 한 자루 남아 있지 않았다. 사물이 없으니 새삼 이 저택의 규모가 더욱 실감되었다. 부하의 말대로
학교로 개조하면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이곳저곳 천천히 돌아보던 자일스는 화려한 무늬로 양각이 된 문을 발견했다.
특별해 보이는 공간 같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는 점마저도 다른 곳과는 달랐다.

방 안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부서진 곳 한 데 없이 멀쩡했다. 아마 이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기물일 것이다.

호기심이 동한 그가 피아노를 향해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쓸어 보니 먼지가 하얗게 묻어났다.


뚜껑 아래에 잠들어 있던 건반들은 모두 멀쩡했다. 허리를 굽히고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 보았다. 조율은
나름 잘 되어 있었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혁명에 쓸 데도 없는 데다가 너무 무거웠다. 옮기다 파손될


확률도 높고. 고작 유희를 위한 악기는 자리도 많이 차지했다.

자일스는 간단한 소나티네 정도는 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연주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그의 출신 성분을 알고 있는 판국에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행위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피아노 연주 따위가 아니라 더 많은 벨담 귀족들을 찾아내 체포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큰 바람이 지나간 요새는 이마저도 뜸해졌지만.

자일스는 피아노를 내버려 두고 구석의 작은 문을 열어 보았다. 기름칠이 안 된 경첩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관리를 받지 못해 망가져 버린 악기들이 여럿 보관되어 있었다. 이 집의 주인은 음악을 꽤나 사랑했던


모양이었다. 돈 받고 갖다 팔지도 못하겠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자일스의 눈이 한쪽 구석에 가 닿았다.

커다란 악기 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콘트라베이스를 위해 만든 케이스 같았다. 자일스는 케이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지퍼가 열려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이걸 열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안에 들어 있던 건 콘트라베이스가 아니었다.

비쩍 마른 검은 머리 여자가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설마 이런 케이스 안에서 사람을 찾아낼 줄은 몰랐던 자일스는 잠시 당황했다. 얼굴 위에 쏟아진 머리카락


새로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보였다. 여자는 제대로 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속옷으로 사용하는
하얀 슈미즈 드레스가 전부였다. 앙상한 다리에 오래된 매질 자국이 눈에 띄었다.

한숨을 내뱉은 자일스가 물었다.

“넌 누구지?”

겨우 숨만 쉬는 지경인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단 한 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마냥, 여자가 두 팔로 자신을 감쌌다.

“이름이 뭐야?”

여자가 곧 대답했다. 말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된 사람 특유의 쉰 목소리였다.

“릴리예요.”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인가?”

“그,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이제는 릴리가 역으로 물어 왔다. 떨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 선연했다.

“나와 함께 살던 사람들, 그들이 나를 때렸는데…… 그래서 잡혀간 거죠? 사람을 때리고 괴롭혔으니까.
그래서 벌을 받는 거죠?”

“누가 널 때렸지?”

“백작님. 그리고 마리안나 백작 부인께서도…… 전부 다요.”

“그때부터 줄곧 이곳에 있었나?”

귀족들을 전부 끌고 나간 건 물론이고 일하던 사용인들도 전부 흩어졌을 터였다. 돈을 주고 사 온


사람이라면 뭐 하러 이런 폐가에 숨어 있었던 거지?

릴리가 대답했다.
“배가 고파요. 쓰러질 것 같아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여기 안에 누워 있었어요. 여긴 생각보다
아늑하거든요. 난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널 음식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

“안 돼요!”

돌연 그녀가 외쳤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공포가 요동쳤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안 돼요. 부탁이에요.”

“여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건 혁명을 위해 압수됐다. 네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어.”

“내가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따라가요? 날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도 모르는데.”

“신분증을 원하면 보여 줄 수 있어.”

“그래도 바깥에 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먹을 것을 준다고 하는데도 강경하게 거부하는 모양새가 의심스러웠다. 그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저택을 나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릴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자일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 저택에 살던 귀족들과 사용인들을 직접


심문한 적이 있었다.

‘명부에는 다섯 사람이 올라 있다. 네가 직접 보고 대답해. 여기 적혀 있는 마지막 이름. 가족이 맞나?’

‘……맞아요.’

‘우리가 체포한 건 네 사람뿐이었다. 이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거짓말이 아니에요. 걘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못 찾았겠죠.’

‘아아악! 정말, 정말이라니까요! 그년은 심지어 내 딸도 아니라고요! 천박하고 쓸모없는 년이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서 죽여 버렸어요. 몇 달 동안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고요. 시체만 겨우 남아 있겠죠.
믿어 주세요. 정말이에요…….’

‘막내 아가씨는 주인님께서 하녀를 통해 얻은 따님이세요. 말만 아가씨였지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신세셨어요.’

‘하도 풀이 죽어 계셔서 무엇이든 서툴고 부족했어요. 그래서 많이 맞기도 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어요.’

‘막내 아가씨를 못 본 지도 벌써 몇 달이 된 것 같아요. 아마 벌써 죽어 계실 거예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는 저택을 다시 뒤져서 시체를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얼마 후, 부하에게서 전갈이 왔다.

‘여자 시체를 찾았습니다. 벽장 안에 있더군요.’

시체는 그림 속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아무튼 귀족 부인의 진술과
일치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자일스는 아직도 그림 속 여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 물론 그림 쪽이 훨씬 더


예쁘고 행복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본디 초상화란 왜곡하기 쉬운 법이다.

그는 무언가 조작되었음을 느꼈다.

“한 가지 묻겠다.”

자일스는 릴리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네가 엘로이즈 비스마르인가?”

<2 화>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릴리가 스스로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직접 확인시켜 주기를 원할


뿐이었다.

대답이 느려지는 걸 보니 어리석은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자일스는 천천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대답해. 네 진짜 이름이 맞는지.”

“내가 인정하면, 나를 죽일 건가요?”

그녀는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릴리는 이제 자일스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혁명 지도부에서 너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지시를 내리겠지.”

“평생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릴리가 혼자 중얼거렸다. 너무 마르고 볼품없어서 귀족을 앞에 둔 건지 떠돌이 부랑아를 심문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 번도 귀족 대접 받은 적 없었어요. 그냥 끝까지 그렇게 살다 갈 줄 알았어요. 마지막에서야 나를


그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군요. 쓸쓸하게 굶어 죽는 것보단 낫겠죠.”

자일스는 릴리의 반응에서 생소함을 느꼈다. 그가 체포한 귀족들은 전부 악을 쓰고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고고한 귀족의 혈통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이.

물론 그들 전부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비를 갈구했지만, 이렇게 저항 없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는


릴리가 처음이었다.

“이곳에서 일했던 하녀들을 심문했더니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더군.”

“내 이야기 말인가요?”

“네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던데.”

“사실이에요.”

“옆방에 있던 피아노도 네가 연주하곤 했던 건가?”

“그건…… 손님들이 계실 때만 쓸 수 있었던 거고, 내가 주로 연주했던 건 더 작은 거예요.”

“네 가족들도 직접 심문했다.”

릴리는 별로 슬퍼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자일스 또한 그러한 반응을 놀랍지 않게 여겼다. 그들의
이야기를 1 분만 들어도 릴리가 이곳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

“맞아요. 사실이에요. 당신도 보다시피 실패했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지 얼마나 되었지?”

“말해서 뭐 해요. 어차피 난 죽을 거잖아요.”

그제야 릴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자일스가 부하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얼마 안 가 남자의 뜀박질 소리가 텅 빈 홀을 울렸다. 제일 근처에 있던 부하 위브너가 나타났다.

위브너는 릴리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죠?”

릴리가 푹 젖은 푸른 눈으로 자일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마주 보던 자일스가 말했다.

“그냥 떠돌이 여자다. 이 집에 숨어들었던 걸 찾아냈어.”

“여기 뭐가 있다고 이런 곳에 침입해요? 제가 샅샅이 뒤져 봤지만 남은 건 먼지와 죽은 쥐밖에


없던데요.”

“잘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위브너, 혹시 음식 갖고 있는 거 있나?”

“음식이요?”

그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더니 대답했다.

“귀리 빵이 있기는 하죠.”

“갖고 와.”
“하지만 그건 제 점심인데요.”

“돈 줄 테니까 돌아가서 다른 거 사 먹어. 지금 이 여자 몰골이 안 보이나? 굶어 죽기 직전이다.”

“차라리 차에 태우고 데려가는 게 어떨까요?”

“위브너, 갖고 와.”

그는 더 대꾸하지 않고 돌아갔다. 곧이어 뒤늦게 도착한 두 부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위브너와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했다.

“특이 사항은 없나?”

“예, 동지들이 싹 비우고 갔더군요. 이 여자는 부랑자입니까?”

“보는 대로다. 가구가 없어서 악기 케이스 안에서 자고 있었어.”

“저런. 데려가실 건가요?”

“같이 가자고 설득을 해도 들어 먹질 않는다. 현재로선 여기 놔두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여기 있다간 또 굶을 텐데요!”

“그렇다고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만…….”

“우리 임무와는 상관없는 여자야. 부랑자에겐 부랑자의 삶이 있겠지. 굳이 힘 뺄 필요 없어.”

부하들은 더 이상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떠돌이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떠돌이들은 도시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해야 할 건 귀족들을 잡아 처넣는 것이었지, 부랑자를 구조하는 게 아니었다.

“시찰은 끝났다. 차로 돌아가서 대기해. 곧 가겠다.”

“알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좁은 공간에 둘만이 남았다.

자일스는 부하가 주고 간 귀리 빵을 건넸다. 릴리는 잠깐 주저하는 듯싶더니, 곧 그의 손에서 빵을


낚아채 가듯 받아 들었다.

검은 머리를 어지럽게 풀어 헤친 채로 허겁지겁 빵을 뜯어 먹는 모습이 실로 부랑자와 다를 바 없었다.


한때 귀족이었던 여성이라 말해도 증거를 보기 전까지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편 릴리의 모습을 관찰하던 자일스의 머릿속에 혼란이 슬금슬금 밀려들었다.

방금 자일스는 릴리를 구했다.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부하들에게 단지 부랑자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누구보다도 앞서서 벨담 귀족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곤 했던 그였다. 예외를 둔 적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심지어 성년이 채 되지 않은 소년, 소녀들까지도.
자일스는 그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똑바로 내려다보았었다.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들은 입스윈이 증오하는 벨담 출신 귀족이었고, 이


땅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 일을 돕는 것이 자일스의 임무였을 뿐이다.

그랬던 그가 살아남은 귀족가의 막내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부하의 음식까지 빼앗아다 주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심문 내용 때문인 걸까? 취조를 통해 그녀가 끔찍한 학대에 시달리던 불쌍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가? 그래서 뒤늦은 동정심이 일었고, 이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아진 건가?

자일스는 생각에 잠겼다. 릴리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그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그녀가 유달리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지?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는 릴리를 붙잡아 차에 태우고 감옥 앞에 대령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릴리를 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던 동력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열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연료가 다 떨어진 증기 기관차처럼, 그는 그저 멈춰 서 버렸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한 게 아니었다.

릴리를 체포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만 하던 빵을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렸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허기는 채운


모양이었다. 낯빛이 한층 편안해 보였다.

부하들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운이 좋아 커다란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굶게 될


것이다. 그녀가 오래 버티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택 안에서만 길러지던 영애가 부랑자의 거친 삶을 살아 낼 가능성은 전무했다.

보아하니 릴리 또한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자일스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근에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었나?”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는 생존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혁명군은 피아노를
저택에 두고 갔다. 악기를 연주하며 예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 또한 배가 부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릴리가 다시 물어 왔다.

“제 연주를 듣고 싶으신가요?”

그녀가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종아리까지 오는 흰 옷이 마른 몸을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음식을 주셨으니 답례로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저를 구해 주셨으니까…….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건 피아노를 치는 것밖에 없기도 하지만요.”

릴리는 자일스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나갔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서 마치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자일스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나갔다. 릴리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지 그녀가 어색한 동작으로 건반 위를 쓸었다.

창가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릴리의 몸 위로 쏟아졌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공중에 먼지가 떠다녔다. 릴리는 호흡을 갈무리했다.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두 손이 이윽고
건반을 눌렀다.

텅 비어 쓸쓸했던 공간이 풍성한 음계로 가득 찼다. 장엄하고 느린 멜로디가 천천히 말을 가다듬는다.


방금 전까지 귀리 빵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었던 열 손가락이 다채로운 음을 발산해 냈다.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나직하던 악기의 음성이 곧 서정적인 선율을 자아냈다. 잔잔하고 아름다우나,
단순하지만은 않다.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음악가만이 소화할 수 있는 야상곡이었다.

자일스는 근처에 서서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 외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커다란 폐가는 순식간에 그녀를 위한 공연장으로 변모했다.

그의 눈에 릴리는 더 이상 부랑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벨담 귀족의 막내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연히 마주친 피아니스트였다.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던, 그러나 그를 만나 스스로와 음악 모두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

그가 살린 피아니스트.

자일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니, 그녀를 끌고 나가기로 결정했더라면 릴리의 야상곡은
연주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영영 지워져야 했을 것이다.

비록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자일스는 이제 기뻤다. 릴리가 살아남게 되어 기뻤다.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 붉은 혈흔들……. 자일스는 내내 그런 것들 속에서 지내 왔다. 무뎌지고 무감정했던 가슴속에
옛 시절의 비옥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끝에, 이제야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릴리가, 릴리의 마법


같은 음악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명령이 아니라 그의 의지만으로 실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심연처럼 어두운 나날 끝에, 그는 한 줄기 빛을 마주했다.

그는 릴리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3 화>
*

한때 자일스는 가족이 퍼부어 주는 사랑과 행복을 누리던 작은 도련님이었다.

헤센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 세대에 다이아몬드 탄광 개발로 커다란 부를 얻었다. 낮잡아 말하면 졸부


집안이었다. 어쨌거나 가족들은 풍요로운 나날을 만끽했고, 여느 귀족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고는 했다.

자일스의 아버지는 사업 확장을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입스윈으로 떠났다. 그는 자식들이 새로운 땅에서
날개를 펼치기를 바랐다. 낯선 이국에서의 가능성은 무한해 보였다. 모두가 입스윈은 벨담의 제 2
전성기를 열 것이라 입을 모았다.

자일스의 누이 셀레스트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언제나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열정을 보이던
그녀였다.

셀레스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누이는 좋은 이야기란 실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경험과 생각에서 비롯한다고 믿었다.

셀레스트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대상은 다름 아닌 입스윈 사람들이었다.

가족들은 그런 셀레스트를 만류했다. 비록 입스윈은 벨담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지만, 벨담인에 대한


반감까지 정복할 수는 없었다. 혼자 다니는 벨담 여성은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야.”

셀레스트는 자일스와는 달리 아름다운 금발을 가졌다. 그녀는 금빛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서 직접 쓴


원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해칠 근거가 사적인 원한이 아니라 단지 내 혈통 때문이라면, 다른 사람인들 안전할까?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부모님이 걱정하셔. 그럴 만하잖아. 누나의 차림새를 봐. 누가 봐도 부유한 가문의 여식이라고 생각할


거야.”

“차림새 때문에 해코지를 당한단 말이야?”

“내 말은, 강도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거야.”

“다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진 않은 것 같던데. 다들 잘못하다간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일스는 가까운 곳에 앉아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원고를 고치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무엇에 관한
원고일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셀레스트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벨담 사람이라서, 그 이유로 누군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그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해?”

“아니,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셀레스트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사각거리던 소리가 멎자 방 안이 아늑한 정적으로 가득했다.

“이곳 사람들은 우릴 증오해.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우리를 죽이고도 남을 거야. 그 사람들을 만나 봐서


알아. 사실 우리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 그들의 증오를 권력으로 겨우 찍어 누르고 있다는 걸.
봐! 우린 남의 땅에 쳐들어와서 마치 이곳 사람인 양 살고 있어. 정작 그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서
말이야.”

“누나는 그 사람들 이야기 듣는 데에 정말 진심이구나.”

“들어야만 해. 처음에는 소설을 위해서였지만, 점점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어.”

그 당시 자일스는 셀레스트가 평소처럼 별나게 굴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셀레스트의 말은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일스, 네가 사관 학교에 들어가면 뭘 하게 될까?”

“군인들이 보통 하는 일을 하겠지. 국가의 명령을 따르고, 벨담의 안보를 지키고.”

“네가 그저 벨담을 지키는 일만 하게 된다면 좋을 텐데. 너 졸업하자마자 본국으로 불려 갈지도 몰라.


신문 봤지? 큰 전쟁이 곧 터지게 될 거야.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 본 전쟁보다 훨씬 거대한.”

자일스 또한 신문 1 면을 독차지한 헤드라인을 기억했다.

「‘세계 대전’ - 도셀베르크 총리가 명명한 미래」

헤드라인 밑에는 작은 부제목이 붙어 있었다. ‘과장된 허풍인가? 앞날의 예견인가?’

“만약 우리가 지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뀔 거야. 누군가의 증오를 사게 된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정말이야.”

자일스는 아직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던 셀레스트의 눈빛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처럼, 그녀는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우울해 보였다.

“그때가 오면 선택을 해야만 할 거야. 도망칠지, 아니면 죽을지.”

누군가는 그런 셀레스트더러 발이나 닦고 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길한 예언은 자일스가 사관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는 컸다. 입스윈을 위한 기회였다. 그들에게는 입스윈 내의 상황을
통제할 만한 능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셀레스트의 말대로 자일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버지는 실종된 지 오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모두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들은 자일스와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다.

더 이상 벨담 사람으로서의 미래는 없었다.


자일스는 그가 살기를 바랐다. 또한 항상 사려 깊었던 누이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생존을 위해 국가를 배반하고, 입스윈 혁명을 도우러 나섰다. 그가 가진 막대한 재산을 혁명
지도부와 나누고, 무기를 보급했다.

무엇보다도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누거나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수많은 벨담 인사들을


구렁텅이로 내모는 데에 앞장섰다.

자일스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국가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자일스가 혁명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 또한 죽었을 것이다. 셀레스트를 지키지도 못했을
터였다.

생존만으로도 그의 모든 선택은 가치가 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 신의. 자존심. 그것들을 챙기느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귀족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벨담은 힘을 잃었고,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가 잡아들였던 귀족들은 전부 그를 향해 배신자라고


외쳤다. 제 한 몸 건사하려 동족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 그런 비난은 자일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

결국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만이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생존만이 최상의 가치였다.

다른 방향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는데…… 파란이 끝나고 혁명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에게 미래를
약속했던 지도부가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돕기는 했지만, 그는 지주 혈통의 벨담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도부는


부유한 벨담인을 요직에 앉힐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면 자일스는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지도부는 그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격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자일스는 증오의 굴레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땅에서 벨담
출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뻔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상 뒤늦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집어삼킬 듯 무섭게 타올랐던 불꽃이 가신 뒤에는 암암한 어둠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자일스는 느려지고 무던해졌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놀랍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보다 훨씬 평온할 지경이었다.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헤매기에 그는 그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제는 조금 쉬어야 했다.

릴리를 체포하고 싶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몰랐다.

자일스는 오히려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만신창이가 된 생존자. 스스로를 돌아볼 즈음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어떤 가치를 뒤좇으며 지내야 하지?

그는 잠시 길을 잃었다. 그에게는 길잡이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타오르는 불꽃에


눈이 먼 그에게 빛을 반짝일 별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달린 탓인지, 그는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졌다. 잡생각이 머릿속에 들이닥치기 일쑤였다.

뭔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홀로 앉아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던 그가 이내 시동을 걸었다. 검은 승용차가 시골길을


달렸다.

릴리의 연주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가 대낮에 한가로운 나들이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평화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체포할 사람들이 산을 이루던 때와는 달라졌다.

자일스는 솔즈부르의 저택을 적절히 개조한다면 다양한 목적의 관공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관청 혹은 학교…… 쓰임새는 많았다.

보고서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곧 건물에 대한 추가 지시가 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릴리가 이미 도망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자일스는 릴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혁명군 요원이었으니까.

그러나 릴리는 아직 저택에 있었다. 똑같이 하얀 잠옷을 입고, 정돈되지 못한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로.
당연한 사실이지만 야윈 것도 똑같았다. 저런 몸에서 어떻게 피아노를 칠 힘이 나오는 걸까?

릴리는 그가 다시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급히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정돈했다. 비록 그 효과는 미미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두 손이 얼룩덜룩했다. 자일스의 시선이 닿자 릴리는 얼굴을 붉혔다.

“이건…… 방금 전에 야생 열매를 좀 땄더니 그런 거예요.”

지금껏 그런 식으로 생존해 왔던 게 분명했다. 자일스는 가방 안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본 릴리의 눈이 동그랗게 열렸다.

“자, 먹어.”

“날 주는 건가요?”

“그래. 너 주려고 가져온 거다.”

릴리는 작게 감사를 표하고는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포장을 벗기자마자 텅 빈 공간에 신선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얇게 썬 햄과 삶은 계란, 그리고 각종 채소가 든 샌드위치였다.

“혹시 알러지 같은 게 있다면…….”

자일스가 뒤늦게 말을 꺼냈을 땐 이미 샌드위치의 절반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릴리는 잠깐이나마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았을 땐…… 그도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맛있어요.”

릴리가 말했다.

“고기를 먹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감도 안 잡혀요.”

“가방 안에 더 있으니까 원하는 대로 꺼내 먹어.”

“고마워요.”

릴리는 먹는 데에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샌드위치 한 개는 허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자일스가 가져온 여분의 샌드위치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4 화>

오래된 공복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서야 릴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꼴사나워 보였죠? 그동안 죽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먹고 살았거든요.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어서 주체를
못 했는데…….”

“다음에는 더 많이 가져오겠다.”

“정말 고마워요. 정말로.”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녀가 이내 물어 왔다.

“나를 왜 구해 주시는 거예요?”

릴리를 돕게 된 이유. 그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결국 자일스는 형편없는 대답을


내놓고야 말았다.

“그러고 싶어서.”

“내가 뭐라도 돌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라 빚만 지는 것


같아요.”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냥 살아 있기만 해. 그 정도로도 충분하니까.”

“그래도 다음엔 꼭 보답할 거예요. 내게 그럴 능력이 생긴다면 꼭 그럴 거예요.”

하지만 릴리는 이미 보답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죽지 않고 생존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릴리를, 릴리의 음악을 살리고 싶었다. 후회만 가득한 삶을 살아온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거라면, 더는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피아노를 연주해 드릴까요?”


“갚을 필요 없다니까.”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제가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당신은 제 연주를
좋아하시니까…… 그렇죠?”

릴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건반이 더러워질까 봐 신경이 쓰였던 건지 때가 탄 옷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이윽고 그녀가 건반을 눌렀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폐허 속의 생존자였을 뿐인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모했다. 마치 마법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릴리는 자일스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부디 그녀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릴리의 연주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 또한 아니라, 자일스는 구태여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릴리의 연주는 그가 가슴속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처박아 버렸던 옛 기억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대접받았던 시절. 또래 아이들이 그랬듯 자일스 또한 여러 교양 교육들을
받았다. 그중엔 피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날들의 친숙한 소음들과 닮아 있었다. 은식기가 부딪히던 소리.


셀레스트가 연주하던 바이올린 선율. 무도회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주고받던 이야기들…….

한때 그 풍경 속에서 자란 소년이었던 자일스는 스스로의 손으로 그 시절들을 무참히 부수고 짓밟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러야 해.

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의 목을 겨눈 칼날은 그를 비껴 간 것이 아니었다. 먼 길을 빙


돌아오는 속도가 남들보다 느렸을 뿐이다.

결국, 끝에 남은 건 무엇이었는가…….

자일스는 화염에 휩싸여 검게 타들어 가던 저택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로 그


저택이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불태운 애정 어린 집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던가? 슬픔? 비애?
그것도 아니면 죄책감?

그가 제대로 기억해 내기도 전에, 릴리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장교님?”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릴리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릴리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자일스는 오해를 풀기 위해 즉시 표정을 풀었다.

“별거 아니야.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미안해.”

그가 뒤늦게 덧붙였다. 릴리는 시선을 떨어뜨린 채 깍지를 낀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 게 아니야.”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예요. 제가 감사를 표할 방법은 연주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릴리,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난 그냥…….”

“게다가 청중을 가지게 된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자일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미약하게나마 릴리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미소가


낯설었다. 두려움에 떨며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와는 또 다른 사람 같았다. 찰나 동안, 자일스는
그녀에게서 초상화 속 엘로이즈 비스마르의 모습을 보았다.

“제 연주가 마음에 들어서 또 오신 것 아니에요?”

꼭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이라, 자일스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 연주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요. 오랜만이라 부족한 점은 많지만…….”

“그동안 피아노 연주는 멈췄던 건가?”

“누군가 듣고 신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동안은 쥐 죽은 듯이 지내야 했어요. 나도 살고


싶었으니까.”

자일스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입 안에서 수많은 말들이 맴돌았다. 나도 그랬어. 나도 살고


싶었어. 누구보다도 간절히 살기를 원했지. 그래서 친구들을 죽이고, 내가 살던 집을 불태웠어. 그런
것들이 나를 살릴 거라고 믿었어.

“너는 죽지 않을 거야.”

자일스가 말했다. 비굴한 살인자로서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에라도 그는 이 세상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남기고 싶었다.

릴리는 자일스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동향 사람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살갗을 찢으며 고문하는
데에 망설임 없던 그였기에 더더욱 릴리를 살리고 싶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적어도 사형수처럼 운명이 찾아오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직 당신 이름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네요.”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물어 왔다.

너무 늦은 소개였지만 자일스는 기꺼이 대답했다.

“자일스 헤센이야.”

“고마워요, 헤센 씨.”

“그냥 자일스라고 불러. 그 쪽이 나에게도 편해.”


“자일스.”

릴리가 그의 이름을 입 속에서 몇 번 굴려 보았다.

“입에 잘 붙는 이름이라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

“저도 제 소개를 할게요. 릴리 벨모어예요.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네 진짜 이름은…….”

릴리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찬 손이 자일스의 손을 장난스레 잡았다가 놓았다.

“기억 안 나요? 엘로이즈는 죽었잖아요. 예전에.”

그녀가 무어라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자일스가 릴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차가웠다. 이런 손으로 식어


버린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는 건가.

“손이 왜 이렇게 차.”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빼서 릴리의 손에 끼워 주었다. 안감에 인조털이 있는 가죽 장갑이었다. 릴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날씨가 서늘했지만 자일스는 코트와 장갑 없이 저택을 나섰다.

춥기는커녕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했다.

그날 이후로도 자일스는 종종 릴리를 만나러 갔다. 집행부의 추가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버려진 저택 깊숙한 곳에서, 릴리는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자일스 앞에 나타났다.

처음 만날 적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던 두려움과 경계가 물러난 자리에는 웃음이 많고 천진한 소녀 같은


릴리가 있었다. 그녀는 자일스가 하는 말을 경청하며 곧잘 웃고는 했다. 누이와 영영 헤어진 이후로
누군가와 마음 편히 담소를 나누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자일스가 식량을 가져다준 덕인지 릴리의 몸에 살이 붙고 혈색이 점점 살아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일스는 그녀가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릴리는 그의 손으로 살린 여자였다. 릴리 또한 그
사실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핏빛으로 얼룩졌던 그의 삶이 또 다른 색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가 본래 어떤 인간이었는지에 대해 깜빡 잊어버릴 만큼.

어쩌면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요새 좋은 일 있나 봐?”

자일스의 상관인 해링턴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는 자일스를 앞에 앉혀 둔 채 한 손에는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안색이 많이 편해졌어.”
“그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자네는 거울도 안 보나? 난 자네를 볼 때마다 다음 날 시체가 되어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어찌나
곧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지 말이야.”

“업무로 인해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혹시 미련을 놓아 버린 건지.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든다네. 마음을 비우면 평화가 찾아오기
마련이지. 마치 보상처럼 말이야. 등에 짐을 잔뜩 지고 걷는 사람의 눈에 길가에 핀 들꽃이 보일 리 없지
않나.”

해링턴은 파일을 넘기다 말고 자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 가며 공기


중에 불투명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말해 봐, 헤센. 요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말로 해서 안색이 좋아졌다는 거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네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보여. 지금 자네 눈을 봐도 그래. 아무것도 없어. 이루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목표도 갈망도 아무것도 없다고. 이젠 다른 의미로 다음 날 시체가 되어 돌아올까 봐 걱정될 지경이야.”

“전 괜찮습니다.”

해링턴은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헤센. 지도부에서 자네를 보호할 수 없다고 한 건…….”

“모든 것이 정리되면 저를 내치겠다는 말과 같죠.”

자일스가 즉각 대답했다. 해링턴은 차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5 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건가? 나는 혁명을 일구어 나가는 내내 자네를 봐 왔어. 물론 자네에겐
혈통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열성적인 동지라고 생각하네. 그걸 지도부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자네에게도 길이 열릴지 몰라. 아니, 열릴 거야. 그러니 혹시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고 그 잘생긴 눈에 다시 불 좀 켜 봐.”

“과연 지도부가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하겠습니까? 그들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저는 벨담 지주의 아들이고,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일스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는 완벽하고 순수해야 할 새로운 지도부의 표면에 진 얼룩 같은 존재였다.


큰 폭풍을 몰아내고 나면 그제야 작은 오점들이 눈에 보이는 법이다. 그다음엔 마무리 청소가 시작된다.
완벽한 끝맺음을 위해서라면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자네가 계속 내 밑에 있어
줬으면 해.”

해링턴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당부했다.

“최선을 다해서 도울 테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더라도 자네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줬으면 하네.


자네는 혁명군의 충성스런 인재야.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봐 왔기에 알아. 하지만 저 멀리 있는 이들은
자네를 옆에서 본 적이 없으니 그런 판단을 내린 게지.”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네가 직접 맡아 줬으면 하는 임무가 있네.”

해링턴은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자일스는 파일을 건네받아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도주한 포로들. 추적 결과에 따르면 그들은 벨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패전의 여파로 느슨해진 국경을 통과하기만 하면 그들은 자유로워질 테고, 그것이 훗날 입스윈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네가 할 일은 그들이 국경을 넘기 전에 체포하는 일이네. 이번 임무는 지금껏 맡아 왔던 일들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할 거야.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임하게.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하도록 해.
필요한 정보는 모두 이 서류에 들어 있을 걸세.”

“중요한 인물들입니까?”

“그들이 누군지 알게 되면 자네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인물들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자네


부하들에게는 내가 전갈을 보내 놓겠네.”

해링턴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덧붙였다.

“되도록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와. 뒤처리는 언제나 귀찮은 일이니까. 자네도 동의하겠지?”

“무슨 생각 해요?”

별안간 릴리가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자일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본 릴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숨죽여 웃었다.

“별생각 안 했어.”

“거짓말. 난 자일스가 화난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죠. 인상을 팍


쓰고 계시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잖아요.”

릴리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신경이 쓰이기는 했는지 자일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자일스와 함께 있는 동안 항상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본인은 아닌 척해도 자일스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혁명군 장교라는 사실이 릴리에게 위압감을 주는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자일스는
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꾸며 냈다.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가끔씩 그럴 때가 있어. 습관이야.”

“별일 있는 건 아니고요?”

그녀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랐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벌써 눈치챈 것이다. 그러나
자일스는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

자일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빵을 내밀었다. 릴리는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영락없는 피아니스트의 손이었다.

“빵이 조금 딱딱할 거야.”

“괜찮아요.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요.”

“천천히 먹어. 체하니까.”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둘 모두 말이 없었다. 릴리 또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많이 건강해졌다. 햇볕을 쬐지 못해 여전히 창백했지만, 예전의 유령 같던 모습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머리카락에도 서서히 윤기가 돌고 있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릴리는 주저하던 끝에 곧 말을 이었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계속 찾아와 주시고 저에게 먹을 것도 가져다주시잖아요. 혹시 번거롭지는


않으세요? 저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여자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내주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자일스는 릴리를 바라보다 간단히 대답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니까 찾아오는 것뿐이야.”

“제가 하는 일이라곤 당신이 준 음식을 먹는 것밖엔 없는데.”

“그래. 그거면 됐어.”

그건 진심이었다. 릴리가 그가 챙겨 온 음식들을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자일스에게 큰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단순히 아무 음식이나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오지 않으면, 너는 굶을 게 분명하잖아.”

“이렇게까지 마음 써 주시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누군가 자신을 위해 신경을 써 준다는 일이 어색한 걸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그녀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자일스가 보이는 호의에 편하게 기대지는 못했다.
“저를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인데…….”

“릴리. 때로는 좋은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는 마.”

자일스는 덧붙여 말했다.

“지금으로선 네가 나를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니까.”

릴리는 그 말을 듣고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한 티를 숨기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자일스는 그런


릴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택 밖으로 자주 나가는 편이었나?”

“열매를 따야 할 때만요.”

“그럼 남은 시간 동안은 뭘 하면서 지내는 편이지?”

“그냥…… 대부분 누워서 시간을 보내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전 불만 없어요. 이제


아무도 나를 해치려 하지 않으니까. 나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요.”

“밖에 나가서 산책하거나 하지는 않고?”

“그러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이 근방에는 사람이 없었다. 본래 귀족의 사유지였을뿐더러, 혁명군이 휩쓸고 간 지역을 감히 기웃대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바깥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나와 함께 있으면 괜찮을 거다.”

자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는 릴리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고 싶어졌다. 핍박하는 사람도
없는 지금,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릴리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릴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자는 건가요?”

“그러는 편이 네게도 좋을 거야. 햇볕을 쬐어야지.”

“하지만 저는 신발이 없어요.”

자일스는 릴리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를 따라 나섰다가 혹시라도 발을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던 자일스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실례하겠다.”

그러더니 그가 릴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릴리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자일스!”

“불편하면 말해.”
릴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곧 자일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 바깥으로 나섰다. 가을의 하늘은 청명했다. 릴리는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언제 이곳에 피바람이 불었냐는 듯, 저택 주위를 둘러싼 전원 풍경은 마냥 평화롭기만 했다.

자일스는 그가 눈여겨봐 두었던 곳으로 릴리를 데려갔다. 들꽃이 무수히 피어 있는 오솔길 근처 냇가였다.
한때 귀족들이 이곳을 거닐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는 냇가 근처에 릴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녀도 이곳은 처음이었는지 생경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새들의 울음과 어울려 그들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버려진 저택에만 갇혀 있던 릴리는 이곳에서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냇가에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가 보던 릴리가 넌지시 말했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작은 박새 무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짹짹거렸다. 자일스는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평안한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릴리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절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없었으리라.

말없이 발을 흔들어 물장난을 치는 릴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확신했다. 릴리만큼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릴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일스의 안식처이자 낙원이 되어 있었으니까.

스스로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나, 적어도 자일스는 한 사람만큼은 살렸다.

그 사실이 그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자일스는 얼마 전 해링턴 장군이 내린 임무에 대해 생각했다. 탈주자들을 체포하는 평범한 임무처럼


보였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이것이 정말 단순한 임무에 불과하다면, 왜 해링턴은 그의 목숨을 운운하며 중대한 일이라고 칭했을까?

<6 화>

그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자일스는 릴리와 시간을 보내며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결국 릴리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은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전국 각지에 숨어든 자들이 남아 있었다. 지도부는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찾으려 했다.

어찌 보면 릴리도 지도부의 목표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녀의 소재가 들통난다면…….

만에 하나, 릴리에 대해 알게 된 지도부에서 자일스에게 직접 그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이곳을 계속 들락거리는 게 맞는 걸까? 나로 인해 그녀의 거취가 들통나게 되는 건 아닐까.

“자일스, 또 무슨 생각 하고 있죠?”

눈치 빠른 릴리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말없이 흐릿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일스는 아직 혁명군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누구라도 체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릴리는 살아남았다. 그 사실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계속 들락거리는 건 의심을
사기 좋아 보였다.

자일스는 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이제 살아갈 힘이 생겼다. 살도 붙고, 목소리도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만 발길을 끊어야 할 것 같았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릴리의 곁에 남고 싶어 했다.

“내 걱정은 말고, 이 순간에 집중해.”

그는 릴리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그 말을 전했다.

자일스 헤센은 몸을 낮추고 릴리 곁에 앉았다. 곁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며, 스스로의 미련을
달랬다.

나는 그녀가 살기를 바랐지, 그녀와 미래를 그리려 한 게 아니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는 순간, 릴리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자일스 헤센은 눈을 감았다.

여기서 끝내.

욕심을 내면 릴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네 손으로 그녀를 부수게 될지도 몰라.


작별 인사를 해야 했지만 자일스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 영원한 작별로 못을 박게 될 것 같아서였다.

작전 당일. 자일스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군용 트럭에 올랐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부하들이 전부 트럭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일스가 말없이 지도만 내려다보는 사이, 그의 직속 부관이 말을 걸어왔다.

“컨디션은 좀 어떠십니까?”

“이상 없어.”

“새벽부터 임무를 나가는 건 참 오랜만입니다. 혁명 집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철야 임무가 몸에 밸


지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며칠 잠잠했다고 몸뚱어리가 슬슬 투정을 부리네요.”

자일스는 부관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늘어놓는 쓸데없는 말들을 무시했다.

“다 모였나?”

“한 명도 빠짐없이 집합 완료했습니다.”

“운전수에게 출발하라고 신호해.”

부관이 운전석과 그들이 앉은 뒤쪽 공간을 나눈 두꺼운 칸막이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트럭이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야 할 목표지는 국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터였다.

벨담이 입스윈을 지배하던 시절, 그곳은 풍광이 아름답고 벨담으로의 왕래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이
머물러 가는 일종의 휴양지로 쓰였다. 물론 혁명군이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운 지금은 잿빛 잔해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는 사람도 살지 않는 그곳을 도주자들이 경유지로 선택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마인헤바흐.


벨담인들이 붙였던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던 자일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 임무는 지금껏 맡아 왔던 일들과는 달랐다. 자일스는 호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부하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냉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끌던 부하들이 아니었다. 개중엔 처음 보는 군인들도
있었다.

특별한 임무라는 해링턴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군대가 그에 맞춰 다시 편성된 건가?

혁명군 군대는 급한 대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그물망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직 편성 과정 중에


있었다. 한데 모아 놓고 보니 아귀가 안 맞으면 그 자리를 다른 이들이 채우는 경우 정도는 있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일스에게는 이보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는 덜컹거리는 트럭 안에서 목표물들의


인적 사항과 경로를 스크랩해 둔 파일을 읽으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되도록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와.’

사살하라는 명령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시체를 운반해야만 할 이유가 무엇일까?

입스윈 땅은 넓은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몇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자일스는 기쁜 마음으로


트럭에서 내렸다. 열댓 명이 한데 모인 좁은 공간 안에서 포장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 상황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경험은 몇 번을 해도 적응되질 않았다.

예측에 따르면 도주자들이 국경을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두세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자일스는


부하들을 풀어 일대를 수색하도록 명령했다.

10 월의 끝자락.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샅샅이 뒤져야 할 마인헤바흐 지역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

좋은 징조였다. 눈밭에 남는 발자국이 수색을 크게 도울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임무를 망치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토끼 사냥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부관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자 자일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토끼 사냥 말입니다. 말 그대로 토끼를 사냥하러 가 보신 적이 있으시냐는 겁니다.”

“……아니.”

“토끼는 겁이 많은 동물이죠. 하지만 몸집이 작고 날래서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식하게


달리기 솜씨만 믿고 잡으려 했다간 허탕을 치기 일쑤입니다. 모든 사냥이 그렇듯이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전략이 필요하죠.”

자일스는 부관의 말에 대충 장단만 맞춰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전략이라는 게 뭐지?”

“우선은 토끼굴을 찾아내야죠.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을 모아서 토끼굴 근처에 자리를 잡도록 시키는
겁니다. 특히나 추운 겨울에는 무조건 토끼가 굴속에 숨어 있기 마련이거든요. 제가 말씀드렸죠? 토끼는
겁이 많다고요. 입을 모아 고함을 지르면 놀란 토끼가 펄쩍 뛰어나오는데, 그때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게 지금 이 임무랑 무슨 상관이지?”

“그냥요. 이렇게 수색하고 있으니 마치 토끼 사냥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토끼가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결국은 똑같지 않습니까?”

자일스는 손을 들어 부관의 발걸음을 제지했다. 희미한 발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군화의 흔적은
아니었다.
“찰리, 북서쪽을 맡은 인력이 우리뿐인 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거의 다 왔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 멀리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탕!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저 멀리 나무들 사이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자일스는 부관을 뒤로하고 목표물을 향해 곧장 뛰었다. 새까만 물체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도주자다.

확신이 듦과 동시에 자일스는 권총을 꺼내 들어 사격을 가했다. 탕! 탕! 그러자 점점 멀어지던 물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놈을 잡았다고 해서 상황이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자일스는 부관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멀리서 소음이
나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찰리, 마무리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임무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자일스는 달리기에 방해가 되는 무거운 코트를


벗어 던지고 부하들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맨 처음 방아쇠를 당긴 부하들이었다. 아직도 목표물을 잡지
못했다는 건가?

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그들이 도주자 한 명을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총으로 쏴! 쏴


버리라고! 자일스가 고함을 쳐도 그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고작 여자 한 명을 잡지 못해 시간만
지체하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하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여자가 앞쪽으로 튀어 나갔다. 저 자식들은 임무를 의도적으로 망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쓸모없는 녀석들!”

자일스는 옆구리에서 선혈을 흘리며 도망치는 여자를 쫓아 쉬지 않고 달렸다. 점점 몸에 무리가 오고


호흡이 어려웠다. 놓치면 끝장이다. 목표물이 부상을 당한 덕에 다행히 수월하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자일스의 손이 여자의 뒷덜미에 가 닿았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된 채로 눈밭에 한차례 뒹굴었다.


궁지에 몰린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땅에 깔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자일스는 여자의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걷어 냈다. 화상으로 반쪽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이미 파일에서
사진을 확인한 덕에 그런 건 변수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다만 파일에 꽂혀 있던 사진의 화질이 형편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실물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자였지만 나머지 반쪽은 아직 멀쩡했다. 금발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의 반쪽 남은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이의 것이었다.

“……셀레스트?”

정신적인 충격과 더불어 혼란이 판단 감각을 마비시켰다. 누이가 왜 이런 꼴로 도망치고 있는 거지?


<7 화>

한편 셀레스트는 자일스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괴성을


내지르며 저항하는 셀레스트를 몸으로 찍어 누른 채, 자일스는 잠시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조차 이 순간에는 사치였다. 부하들이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자일스는 권총 머리를 누이의 이마에 갖다 댔다.

그러자 그의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느려졌다. 부하들은 더 이상 그를 돕기 위해 달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자일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작전 자체가 자일스를 중심에 둔 커다란 덫이었다.

이제야 왜 부하들이 여자 하나를 잡지 못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셀레스트 헤센이기 때문이었다. 자일스가 직접 죽여야 할 목표물. 그가 처음 보는 부하들을 이끌고
마인헤바흐까지 여정을 떠나게 된 핵심.

도주자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는 건 둘째 문제였다.

이 임무는 자일스의 가치를 가늠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인 것이었다. 과연 그가 사랑하는 누이를 죽일 수


있을까?

자일스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수많은 동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의 생존뿐만 아니라 누이


셀레스트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거기까지는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의 백 개 목숨보다
자신과 누이의 것이 훨씬 소중함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혁명 지도부와 누이라면 어떨까?

이제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살아남을 것인가, 혹은 누이를 위해 희생할 것인가.

자일스는 추위에 덜덜 떨며 충혈된 눈으로 망가진 셀레스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방아쇠를 당겨야 해. 아니, 당기지 마.

시간이 얼마 없었다. 부하들이, 자일스의 충성도를 입증해 줄 증인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스카프를 걷었던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를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은 건 셀레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자일스의 손을 움켜잡고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셀레스트는 자일스를 내팽개치고 다시 도주를 시도했다.

자일스는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온몸으로 찍어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임무가 자네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못 해.”

자일스가 그의 밑에서 몸부림치는 셀레스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못 한다고. 셀레스트, 제발…….”


반쯤 흐느끼던 그는 어느 순간 셀레스트의 움직임이 멎었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일스는 황급히 셀레스트의 몸을 반대로 눕혔다.

누이가 쥔 작은 칼이 배에 꽂혀 있었다. 자일스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셀레스트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최악의 결말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녀는 조용한 성미를 가진 소녀였다. 파티나 사교 모임을 즐기기보다는 방 안에 틀어박혀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드레스와 구두 혹은 장신구보다 한 자루의 좋은 만년필에 더욱 열렬히 반응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자일스는 부디 누이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자유를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어디든지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스스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목숨 하나에 자유, 목숨 하나에 미래, 목숨 하나에 내일
새벽 어스름…….

하루를 더 살게 해 줄 수많은 희생자들 끝에 결국 누이가 돌아올 거란 사실을 정녕 몰랐던가.

구석진 곳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워 대는 그의 곁으로 부관 찰리가 다가왔다. 자일스는 별로 달갑지 않은


눈길을 보냈지만 언제나 그랬듯 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하신 겁니다.”

그는 결국 갈기갈기 짓이겨진 자일스의 속을 긁어 놨다. 자일스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지도부에서 결정을 내린 이상 어차피 죽을 여인이었습니다. 직접 끝을 내 주지 않으셨다면 더 처참하게


죽었을 수도…….”

“혼자 있고 싶다.”

“안 됩니다.”

“……찰리. 나 피곤해.”

“하지만 해링턴 장군님께서 대위님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하셨는데요. 혼자 별별 생각을 다 하고 계실


거라면서 말입니다.”

그걸 잘 아시면서도 찰리를 보내셨단 말인가. 지도부의 결정과 저번 작전에 대해 단 1 초라도 더


생각했다가는 정말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자일스는 성질을 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인내했다.

마인헤바흐에서 돌아온 후 그는 피부가 빨갛게 일어날 때까지 손을 문질러 씻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누이의 피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었어.

내가 그랬어.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이건 해링턴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한데…… 대위님도 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자일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윗선에선 대위님이 총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영 의심쩍어한답니다.”

“…….”

“다른 부하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분명히 총으로 목표물을 겨누고 있었는데, 죽은 뒤에 시체를 확인하고
나니 사인은 자상이었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땐 그리 이상스럽게 여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냥
몸싸움하다 보니 무기를 바꾸신 것뿐이잖아요.”

가만히 허공만 바라보던 자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부관의 곁을 떠났다.

“대위님이 죽이신 거 맞죠? 전 그렇게 믿어요!”

등 뒤에서 찰리가 소리쳐 물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자일스는 차라리 지도부가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 버리라고 지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미련이 없어졌다기보다는 그 정도로 머리가 아프게 지끈거려 왔다.

그의 삶은 오류와 잘못된 선택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던 일의 결과까지


결국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이제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말아야 할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아직 남은 한 가지의 ‘올바른 선택’이 있다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릴리 벨모어예요. 잘 부탁드려요.’

릴리. 릴리 벨모어. 나의 안식처이자 나의 살아 있는 낙원.

그녀에 대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자일스를 집어삼켰다. 분명 버려진 솔즈부르의 저택을


들락거리면 의심을 살 거라 생각해 다시는 방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당장
릴리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릴리를 봐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생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자일스의 정신은 마비되었다. 마인헤바흐 작전은 그의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더는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릴리를 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인헤바흐에서 있었던 일들도 잠깐의 악몽으로 치부할


수 있으리라. 릴리는 자일스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자일스는 차에 올라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시동을 걸었다. 운전하는 내내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이 있을 뿐이었다.

반쯤 미친 사람이 되어 도착한 저택은 여전했다. 인적은 전무했고, 폐가가 된 저택은 곧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곧장 향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얼마간 답이 없던 커다란 문이 살짝 열렸다.

“자일스!”

문틈 사이로 슬쩍 내다보던 릴리가 웃으며 다가왔다. 이번에는 하얀 슈미즈 위에 그가 건넸던 코트를


헐렁하게 걸친 채였다.

처음 만날 적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릴리가 웃음 짓는 모습을 보는 순간, 자일스는 마음이


가라앉는 동시에 가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릴리.”

차마 무어라 말을 건넬 수도, 마주 웃어 줄 수도 없어 넋을 놓은 사람처럼 쳐다만 보는 그를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온 릴리가 이내 두 팔을 벌려 그를 포옹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오롯이 느껴졌다. 큰 위안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릴리는 머쓱했는지 바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안해요. 그냥 또 와 준 게 고마워서 그런 건데.”

“……될까?”

“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의도치 않게 말끝이 떨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놀란 건지, 혹은 충동적으로 꺼내고 만 말 한마디에


놀란 건지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던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자일스가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릴리를 안을 수가 없었다. 릴리는 그와


달리 선하고 때 묻지 않은 존재였다. 그가 릴리를 두 팔로 안았다가는 지금까지 묻혀온 더러운 때가
그녀의 몸에 탈 것만 같았다.

“……다음에는 옷이라도 한 벌 가져다줄게.”

“이미 한 벌 줬잖아요.”

“그거 말고. 제대로 된 옷.”

“난 이게 따뜻해서 좋아요.”

릴리는 자일스가 코트를 도로 가져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는지 앞섶을 여몄다.

불편한 정적이 감돌았다. 끝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릴리였다.

“자일스,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그럼 연주해 본 적은 있다는 거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눈빛에서부터 다


보이거든요. 저, 부탁이 있는데…… 오늘은 당신이 내게 피아노를 쳐 주지 않을래요?”
<8 화>

예상치 못한 부탁이 들어오자 당황한 자일스는 피아노와 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아노를 마지막으로
만져 본 건 변성기가 채 오기도 전이었을 때다. 제대로 연주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그는 결국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린 시절 배웠던 연주곡들은


대부분 기억 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소나티네 연습곡 정도는 더듬거리며 칠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건반을 눌렀다. 선율이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뉘른베르크 소나티네는 기본적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간단한 연습곡이었다.

어릴 적 연주했던 연습곡. 악보에 새겨진 음표 하나하나를 더듬어 기억해 내는 것은 곧 그가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한 옛 시절을 다시 더듬어 돌아가는 과정을 동반했다.

자일스는 더 이상 버려진 폐가의 텅 빈 방에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환청처럼 겹쳐 들렸다.

못 하겠어. 그가 결국 건반에서 손을 떼려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의 곁에 앉았다. 릴리였다. 릴리가


오른손을 뻗어 건반을 눌렀다. 그녀의 선율이 자일스를 지도 교사처럼 이끌었다. 자일스는 릴리의
가이드에 맞추어 다시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함께 연주하던 그는 어느새 행복하던 그 시절의 낯익은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일스가 옆을


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행복한 아가씨가 있었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슴이 탔다. 또한 동시에


뜨거워졌다. 가늘고 얇은 선율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자일스는 이끌림에 못 이겨 천천히, 릴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가 입을 맞춘 순간, 환상을 자아내던 선율이 사라졌다. 사위가 정적으로 고요했다. 자일스는 환상과
현실의 차가운 경계 속에서 번쩍 깨어났다.

“아, 미안하군.”

다급히 그녀에게서 물러난 자일스가 괜스레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이걸 어쩌면 좋지. 방금 그는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절대로 그런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닌데.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러나 자일스가 다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릴리가 벌어진 간격을 다시 좁혀 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을 맞추었다. 서툴지만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자일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릴리는 자일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온 여자였다. 자일스를
안에서부터 조금씩 파괴하고 있는 과거 중 그 무엇도 그녀와는 연관이 없었다.

릴리가 옆에 있으면,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그런 것들은 전부 다른 세상 이야기인 양 잊어버릴 수


있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아니, 릴리 벨모어는 그의 도피처였다. 자일스는 이상향처럼 찾아온 달콤한 순간


속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그가 살린 피아니스트. 그가 내린 ‘올바른 선택’…….

릴리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괜찮았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자일스는 두 팔로 릴리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현실이 그녀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지키기라도 하듯,
그는 필사적이었다.

“릴리…….”

그가 달뜬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자일스는 동력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버린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속 뜨거운 화로가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해링턴은 말했다. 그에겐 이루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고. 목표도, 갈망도, 그 어떤 것도.
자일스는 이제야 깨달았다.

릴리는 단순히 지켜 내고 싶은 사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자일스에게는 릴리가 필요했다.

릴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릴리 벨모어는 그를 다시 움직인 사람이었다.

그 날은 어쩐지 저택에 평소보다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날이었다.

처음에는 릴리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오곤 했던 그는 어느새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어쩌면 그가 거주하는 연립 주택보다 휑하기 그지없는 이 넓은 폐가가 더 편한 장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혁명군이 펜 한 자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압수해 텅 빈 저택에서 제일 안락한 장소는 릴리가 주로 시간을


보내곤 하는 악기 보관소였다. 아무런 쓸모도 없어 혁명군조차 버리고 간 망가진 악기들이 되레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자일스도 인정해야만 했다.

릴리에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뜯어내 오려 낸
신문 뭉치를 꺼냈다.

알고 보니 그건 신문에 부록처럼 실어 두곤 하는 십자말풀이였다. 가족들이 읽고 버린 신문을 몰래 훔쳐다


오려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고 릴리는 설명했다.

릴리는 군데군데 공란이 남겨진 십자말풀이 뭉치를 자일스 쪽으로 내밀었다.

“달리 할 게 없으니까 이거라도 풀어 줘요. 저는 아무리 해도 못 풀겠더라고요.”

“다 풀면 좋은 점이라도 있나?”
“기분이 좋잖아요.”

자일스는 십자말풀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묵묵히 릴리가 비워 둔 퀴즈들을 풀기 시작했다. 릴리는 그런


자일스의 옆에 앉아 그가 빈칸을 하나씩 채워 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모든 십자말풀이 퀴즈가 그렇듯이 채워 넣어야 할 정답에 대한 힌트가 주석처럼 달려 있었다. 농어목


자리돔과에 속하는 물고기. 빨강 혹은 주황과 흰색의 배열로 인해 클라운 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건
흰동가리다. 그는 정답을 써넣었다. 릴리의 필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필기체가 이질감을 자아냈다.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는 릴리가 이미 풀어 놓은 앞뒤 글자와 주석을 꼼꼼하게 읽어야 했다.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혹은 어떤 사물의 기초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텔레비전에서, 음성에 대하여
화상을 이르는 말.

퀴즈를 하나씩 풀어 가던 그가 한 문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혹은 그런 일.

이게 뭐였지? 자일스는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마냥 머리가 굳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자일스를


재촉하듯 힌트가 한 줄 더 쓰여 있었다.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혹은 그런 일.

그는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당장 얼마 전만 해도 그러한 감정이 밀물처럼


덮쳐 오는 것을 느꼈던 그였다.

자일스는 차마 정답을 적어 넣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혼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기가 찰 만큼 어이가 없었다. 그는 티가 나지 않게 슬쩍 릴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릴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졸고 있었다. 굳게 닫힌 눈꺼풀이 피로해 보였다. 어깨에 걸친


커다란 군용 코트가 꽤나 따뜻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잠에 든 것이겠지.

자일스는 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런 존재가 곁에서 자고 있다는 게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경악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던 동향 사람들을 트럭 안으로 무자비하게 밀어 넣고, 직접


총살까지 집행했던 그였다.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 그런 것들이 자일스의 일상이었다. 새 정부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살인은 곧 그의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삶을 살아왔던 그가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선량한 피아니스트의 곁에서 십자말풀이나 풀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일상적일 이 풍경이 못내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오랜 악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릴리의 곁 언저리에서 머물던 손이 곧 거두어졌다. 만지면 좋은 꿈이 깨질 것만 같아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십자말풀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곤 하는 감정. 가장 깊고, 강렬하고도


원초적인……. 더는 그의 삶과 관련이 없으리라 믿었던 감정의 이름을 자일스가 적어 내려갔다.

사랑. 흐릿한 모습으로 머릿속을 맴돌기만 하던 감정의 정체를 제 손으로 직접 적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자일스는 릴리를 아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지켜 내고 싶었고…… 그는 릴리를 사랑했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진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릴리는 그를 사랑할까? 속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지금 자일스의 코트를 덮은 채


그의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자일스가 위안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릴리는 왜 이 칸을 비워 놓은 것일까?

자일스는 그가 심문했던 비스마르 일가의 진술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사랑 같은 속 편한 감정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기에 급급한 탓에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은 전부 이
마룻바닥 밑에 밀어 넣고 다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릴리가 자일스의 위안이 된 것처럼, 어쩌면 그도 릴리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일스는 나직한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집중하는 이 순간만큼엔, 머리를 터뜨릴 것처럼
압박하던 사념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가 괜찮아질 때까지 이 평화를 누리기로 했다.

“자네는 요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자일스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링턴은 자일스의


머리를 갈라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파헤치고 싶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던 자일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질책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요새 괜찮은가 해서 말이야.”

그런 말이 스스로도 무안했는지 해링턴이 한숨을 쉬었다.

“근래에 겪어야 했던 일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지.”

“저는 괜찮습니다.”

“나한테는 거짓말할 생각 말게. 아무리 우리 혁명군의 적인 여자라 해도, 자네에게는 적이기 이전에
누이였을 것 아닌가. 위대한 혁명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게지. 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있네.”

자일스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한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해링턴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식사 자리였다. 자일스에겐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해링턴은 그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염려되는지 좀체 그가 혼자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자네가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야 할 계단이 더 남은 모양이야. 자네도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그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부하들 몇몇은 자네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기로 되어
있었네.”
<9 화>

자일스를 따르던 부하들이 아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도부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조차
두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철저히 제 3 자의 시선으로 본 자일스에 대해 보고받고 싶어 했다.

사실상 그 작전은 도망자들이 아닌 자일스를 위한 작전이었다. 그가 과연 살려 둘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인지 알아보기 위한 모의실험.

“보고서들은 빠짐없이 올라간 것 같네. 내게도 소식이 들려온 걸 보면 말이야. 문제는 자네를 지켜보러
갔던 요원들이…….”

해링턴은 ‘감시’라는 말을 꺼내지 않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네를 혁명군의 충실한 장교로 보기보다는 지주 혈통을 가진 벨담 사람으로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야. 보고서의 내용은 객관적이었지만, 자네에게 그리 호의적인 어조로 쓰이지는 않았어. 게다가 자네가
총을 사용하지 않은 사소한 내용 하나가 아주 좋은 꼬투리가 되었지.”

한마디로 자일스는 의심받고 있었다. 그들이 의심하는 것도 납득할 만했다. 실제로 자일스는 셀레스트를
직접 죽이지 못했으니까. 그건 자살이었다. 의혹이 합당함을 넘어서서 그것이 진실이었다.

혁명군 내에는 자일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자일스는 그들이 죽이지 못한 벨담인이었다.
그 사실이 혁명군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잔인한 작전이 짜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편함의
근원을 제거해도 될지 재검토하려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온전히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곧 청문회가 열릴 거야, 자일스.”

해링턴은 그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 혁명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입스윈의 투쟁은
끝을 보였지만 자일스에게는 아직 한참 남은 과제였다.

혈통은 그가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 것이다. 평생을 의심받고 질문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결백함을 검증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자네에게 여러 질문들을 할 거야.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납득시켜야 하네, 자일스. 나는 자네가 그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자넬 잃고 싶지 않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일스. 혁명이 마무리를 지어 가고 있어. 그 말은 더 이상 귀족들을 잡아넣는 것만으로는 충성심을


입증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야. 그 이상을 보여 줘야 자네가 살아남을 수 있어. 아무리 충실한
사냥개라도 주인이 사냥을 나가지 않게 되면 갈 곳이 없어지는 법이지 않나.”

“그들이 제게 기회를 주리라 믿으십니까?”

“자네의 가치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과연 그럴까. 어차피 자일스는 단두대에 오를 죄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운명이었다. 사소한 잘못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를 없애는 데에 활용하고 싶어 할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피로가 몰려왔다. 물론 자일스는 살아남고 싶었다. 하지만…… 셀레스트의 죽음 이후로 그를 쌓아 올렸던
것들이 일부 무너졌다. 생존에 대한 집착까지도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얻게 된 내일 하루의 목숨이 얼마나 오래 갈까.

해링턴은 그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말을 꺼냈다.

“자네에게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른 이들이 다 그렇듯이. 그럼 그것 하나에 집중하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식사가 나왔다. 식당 직원이 쟁반을 들고 나타나 자일스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자일스는 말없이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었다. 붉은 핏물이 흰 접시 위로 배어 나왔다.

차마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해링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자일스는 혁명 지도부에서 그를 위한 청문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사방에서 수 쌍의 눈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굳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군인으로서의


예민한 감각이 가르쳐 주는 사실이었다. 필시 그들은 청문회를 앞두고 그가 사라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

이런 시기에 릴리가 머물고 있는 버려진 저택을 들락거리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수시로 미행이 붙었다. 자칫하다간 릴리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솔즈부르의 저택에 잠시 발길을 끊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릴리는 그의 도움을 받기
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자일스는 릴리를 믿기로 했다.

길어야 며칠 안에 청문회가 열리리라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지도부는 오래 뜸을 들였다. 며칠이 어느새
몇 주 단위로 넘어갔다.

자일스는 밤마다 릴리에 대한 생각을 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끼우고 녹음된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그러곤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릴리 벨모어를 사랑하게 되었나?

처음에는 오직 그녀의 음악이 좋았었다. 그 아름다운 음악을 그가 구해 냈다는 게 좋았고, 더 나아가서는


릴리를 죽이지 않았다는 그의 선택 자체가 어쩐지 그를 기쁘게 했었다.

그러나 감정의 축은 점점 음악이 아닌 릴리에게로 옮겨 갔다. 릴리의 몸에 살이 붙고 혈색이 도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면 자연히 따라 미소 짓게 되었다. 자일스는 릴리가
건강해지기를,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게 된 건 자일스의 세계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가 믿던 가치관.


당연히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믿음. 앞날에 대한 희망. 그 모든 것들을
자일스는 한순간에 잃었다.
그리고…… 마치 솔즈부르의 저택처럼 약탈당해 텅 비어 버린 그의 세계에 남은 단 한 사람이 바로
릴리였다. 자일스의 마음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인 릴리는 점점 제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곧 릴리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자일스는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 혁명 지도부의 명령이라는 핑계를 앞세워서 수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인 살인자…….

너무 오랜 세월을 그리 살아왔던 탓에, 그의 머릿속은 피와 비명 소리로 점철되어 버렸다. 아마 그가


살아남더라도 남은 여생을 망령들의 목소리에 시달리며 악몽에 떨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것들을 모두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게 릴리였다.

릴리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만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지?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곧 열릴 청문회에서 그는 참관자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진실은 그가 누이, 셀레스트 헤센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셀레스트는 자살했고, 자일스는 임무에
실패했다. 혁명을 위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혁명보다는 자기 자신과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더욱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자일스는 진실을 말해야만 했다. 그 쪽이 죄를 짓지 않는 방향이었다. 그는 이미 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지켜 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정작 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를 달리게 했던 생존에 대한 열망마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예전과 같지 않은가?

청문회 당일, 그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혁명 지도부 인사들 앞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자일스는 여전히 외지인처럼 동떨어져 보였다.

수많은 눈들이 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자일스 또한 그럴 생각이었다.

더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어.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해.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만 했어…….

의장 역할을 맡은 남자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자일스 헤센 대위, 그대가 이끌었던 마인헤바흐 작전의 성패에 대해 여러 의견이 갈리고 있음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직접 진술하시오.”

오른쪽에 앉은 해링턴 장군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네에게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진실을 말해.

편한 죽음을 맞을지, 혹은 오래 고통받으며 살다 죽을지…… 네가 직접 선택해.

자일스는 어깨를 펴고 의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실’을 말했다.

“제가 직접 셀레스트 헤센을 죽였습니다.”

작은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어느덧 솔즈부르의 사유지 전역에 낙엽이 깔렸다. 나무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모두 잠에 들었다. 쓸쓸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낙엽들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점차 몰아붙였다. 곧 있으면 그것들마저도
모습을 감출 것이다.

릴리가 저택에서 오래 버티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문이 깨져 외풍이 들이닥치고 한기가 매섭게
저택을 장악할 텐데, 악기 케이스 안에 웅크려 잠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를 도시로 데려가야만 했다. 그러는 편이 릴리에게도 좋았다. 신분에 대한 문제는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이미 출생 신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입스윈 사람들이 전역에 깔려 있었다. 릴리도 겉으로만 보면
그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자일스가 거기에 손을 좀 쓰기만 한다면 이전에 가졌던 불온한 신분 같은 건 쉽게 벗어던질 수 있으리라.

자일스는 자동차에서 내려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넓은 건물이었지만, 릴리가 있을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악기 보관소를 고집했다.

자일스는 항상 오르던 계단을 오르고, 이전과 같은 코너를 돌아 저택을 가로질렀다. 문틈 사이로 버려진
피아노가 보였다.

“릴리?”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자고 있는 건가? 자일스는 굳게 닫힌 보관소 문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었냐는 것처럼 마른 먼지만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자일스가 외쳤다.

“릴리!”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10 화>

2. 릴리 벨모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길게 설파하고 싶지는 않다. 자세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누구라도 장황한
불행 얘기 따위는 오래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난 그냥 부모를 잘못 만난 것뿐이었다. 그게 전부다.

혹자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비렁뱅이 신세를 물려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인 판에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면 어찌 됐든 큰 축복을 받은 거라고 말이다.

글쎄,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쟁취하기 힘든 것인지는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건 가족과 똑같은 귀족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을 때의 얘기다.

무릇 귀족들이란 머리에 자존심밖에 들어찬 게 없는 족속들이다. 불명예를 죽음보다도 끔찍하게 여기고,


다른 귀족들의 가십에 오르내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하녀는 나를 임신해서는 안 됐다. 원래대로라면 그날 밤은 한 순간의 충동으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불행은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 노크 한 번 하지 않는 법이다. 그 하룻밤 사이에 내가 생겼고,


그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귀족의 명예를 가장 치명적으로 먹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생아일 것이다. 그들이 원하지
않은 사생아를 어떻게 대했을지, 내가 굳이 설명해야 할까?

나는 온종일 방에 갇혀서 생활하곤 했다. 내가 지내곤 했던 방은 저택의 가장 안쪽에 처박혀 있던 쓰지


않는 공간으로, 햇빛조차 잘 들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 나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났다. 혹여나 비스마르 가문에서 더러운 사생아가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저택에서 쫓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뭐, 내 유년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것이 없다. 나는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하고 깡마른 아이였고, 내


어머니는 나에게 글자를 읽는 법이라도 가르치기 위해 버려진 신문을 앞치마 속에 숨겨 오곤 했다. 그
앞치마 속에는 가끔씩 훔친 빵이 들어 있기도 했다.

어떻게든 나를 살려 보려 애쓰던 어머니는 내가 열다섯 살이 될 즈음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이 내


어머니를 어떻게 한 건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어머니가 실종되기 전, 다락방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비록 잘 먹지 못해 깡마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는


하루하루 아이에서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당부하곤 했다. 절대로 다락방을 나가서는 안 돼! 어찌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는지,


나는 거역할 엄두조차 못 냈다. 그건 내 삶을 지배하는 철칙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나는 15 년간 얌전히
다락방 안에서만 지냈다.

하지만 열다섯 살의 여자아이들은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답게 내 가슴속에도


반항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질문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왜 방 바깥으로 나갈 수 없지? 다락방은 날이 갈수록 커


가는 나에겐 너무나도 좁은 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락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이 오로지 어머니의 결정에 의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를 거스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슬쩍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내가 살던 방보다 훨씬 더 넓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던 나는 주제도 모르고 저택의 위용에 감탄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웃긴 일은 내 곁을 지나친 이들 전부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거였다.

15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생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려 한 이는 아무도 없었던 데다, 길다면
긴 세월이었던 만큼 사용인들도 몇 번 교체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닮은 얼굴 때문에, 사용인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슈미즈


차림이었던 내 모습에 기겁한 하녀들이 나를 화려한 드레스로 가득한 방으로 끌고 가 옷을 입히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비스마르 가의 아가씨로 변모해 있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발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또한 15 년 전의 사생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버지, 비스마르 백작은 생전 처음 보는


소녀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예법 따위는 배운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백작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누군데 소식도 없이 내 저택에 들어와 있는 겁니까?”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묻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로이즈예요.”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맨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에서 살고 있는데요.”

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만 같았다. 15 년 전에 만들었던 사생아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데다, 그를


닮은 소녀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러나 비스마르 백작은 나를 다락방에 다시 처넣는 대신 정신을 차리고 내 얼굴을 이곳저곳 뜯어보기
시작했다. 과연 이 물건이 쓸모 있을지 감정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내 얼굴을 보고 무언가 결심한 백작은 뒤늦게 가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 그래. 엘로이즈. 진작 내려와서 우리를 좀 보러 오지 그랬니. 자,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식사를


들러 가지 않으련?”

그의 머릿속에 추악한 계획이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애였다. 나는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신나서 묻기까지 했다.
“제게 흰 빵을 주실 건가요?”

백작의 얼굴에 잠시 금이 갔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잠깐이었다.

“그래. 당연하지. 너는 내 딸아이잖니.”

그때서야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커다란 사내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가 좋았다.


왜냐하면 내게 훔친 빵이 아닌 ‘식사’를 주겠다고 말해 줘서였다. 그리고 어머니와는 달리 내게
따뜻하게 웃어 줬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의 등장과 동시에 비스마르 가의 저택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나는 생전 가진 적도 없던 진짜 방을 갖게


되었다. 방인지 거실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넓은 방이었다.

하인들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드레스와 실내복을 몇십 벌씩 들고 왔다. 시종들이 내 곁에 붙어 머리


모양을 손봐 주고, 내 발을 따뜻한 물에 담가 마사지했다.

그들은 명령이라도 받은 양 나를 귀족가 아가씨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분투했다. 마른 몸은 둘째 치고


나는 백작가 영애로서의 교양이 전무한 상태였다. 벨담에서도 알아준다는 온갖 가정 교사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 교육에 대한 백작의 집착은 병적이라 할 정도로 과했다. 그는 나를 불러다가 교육의 진전이 되고


있는지 살피고는 했다. 백작의 성에 차지 않는 날이면 나는 그날 배운 것들을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잠도
잘 수 없었다.

하녀인 어머니에게서 자연스레 습득한 하층민 말씨를 고치기 위함이라는 명목하에, 가정 교사는 내 입에
커다란 유리구슬을 일곱 개나 밀어 넣었다.

“아가씨, 이제 제가 드린 책을 읽어 보세요. 또박또박하고 천천히! 제 시범을 따라해 보세요.”

가정 교사가 먼저 책을 읽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입


안에 구슬을 쑤셔 넣으면 상류 사회의 말씨를 익힐 수 있다는 이론은 대체 누가 먼저 생각해 낸 건지
찾아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해내야만 했다. 나를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에 급급한 백작과, 내 존재 자체를 심히


못마땅해하는 백작 부인의 눈초리가 점점 내 심장을 조여 왔다. 나는 그게 전부 내 탓인 줄로만 알았다.

난 생각했다. 내가 충분히 아가씨 같지 않아서 그런 거야. 하루빨리 공부를 마쳐야 해. 그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내가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까지는 꼬박 몇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마저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비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배움이 느린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다시 시작될 내일 하루에 대한 두려움에 잠겨 매일 밤 잠을


설치느라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생각 따윈 들지도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챙기기에도 바빴다.

좋은 딸이 되어야 해.

내가 이 저택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면 백작 부인께서도 나를 사랑해 주실 거야.


과도한 스케줄과 압박감에 짓눌린 나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다른 영애들은 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과정을 나는 고작 몇 달 만에 머릿속에 쑤셔 넣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영애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알지도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나의 부족함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가을이 찾아올 때쯤에야 그동안의 교육 과정을 대부분 마친 나는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하층민 말씨를 불쑥불쑥 내뱉지도 않았고, 불시에 예법을 까먹어 실수하는 일도 없었다.

슬슬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가고, 나만의 시간이 생길 무렵.

나는 작은 연주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나를 유일하게 괴롭히지 않았던 것이 바로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치는 일만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악보 속에 암호처럼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음악을 꺼내는 일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 날에도 나는 빈 시간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은 흘러가는 시간조차 느리게 만들고, 메마른
마음을 풍요롭게 일구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곡가의 예술성에 감탄하며 그의 악보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있던 그때, 그가 찾아왔다.

“아름다운 연주로군요.”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남자가 문가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비스마르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남자 때문이었다는 사실 같은 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요한 마이어 공작, 내 이복 언니의 약혼자가 나를 꿰뚫을 듯이 쳐다보았다.

<11 화>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와 같다. 비스마르 백작가의 첫째 영애인 엘리자베트 비스마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요한 마이어와 정략결혼을 맺은 사이였다.

가문 간의 정략결혼은 흔한 일이었지만, 특히나 엘리자베트의 경우에는 비스마르 백작 가문의 위세를 크게


높여 준 사례였다. 그 이름도 유명한 마이어 공작과 연을 맺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건 고작 서너 살 때였다. 애초부터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엘리자베트에겐 그랬던 모양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자라 여러 파티에 참석하고, 사교계에 데뷔하면서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


랑’을 만났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혼사가 이미 아주 오래전에 결정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문의 위상과 본인의 사랑을 두고 갈등하던 엘리자베트는 결국 한 남작가의 셋째 아들과 도망을 가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마이어 공작가에서는 길길이 날뛰었고, 비스마르 백작가에서는 딸의 배신을 무마할 만한
또 다른 카드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비스마르 백작이 나를 거둔 것은 내가 상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치라
믿고 은폐했던 갓난아이가 쑥쑥 자라 적절한 카드가 되어 주었으니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린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몇 달간 가족의 눈치를 보며 사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재빨리 상황 판단을 했다. 저 남자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럴 용도로 만들어진 레이디였다. 그동안 과도한
교육과 레슨에 시달려야 했던 것도 이제 전부 이해가 갔다.

요한 마이어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인지 아닌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요한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백작이 그 어둡고 좁은 다락방으로 나를 돌려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락방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을 때야 괜찮았지만 이제 나는 푹신한 침대와 러그, 그리고 몇 접시


먹지 않아도 포만감이 들 정도로 좋은 음식들을 아는 사람이었다.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난 내가 가진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교양 있는 아가씨


연기를 했다.

요한은 나를 ‘지병이 있어 그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던 비스마르 백작가의 또 다른 영애’로 알고


있었다. 다른 영애들에 비해 마른 몸도 나름 근거를 끼워 맞춰 주는 장점 노릇을 했다.

다행히 그는 나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고, 종종 나를 만나러 백작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요한 마이어는 확실히 누구나 탐낼 법한 좋은 남자였다. 그는 신사적이었고, 내 말을 존중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명망 높은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이런 약혼자를 버리고 간 엘리자베트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남작가 도련님은 얼마나


더 대단한 신랑감이기에 도망을 친 거지?

하지만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요한은 어느 날, 나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아직 혼삿말이 오가지도 않은 영애를 직접 초대한다는


건 아주 좋은 징조였다.

비스마르 백작은 매우 기뻐하며 하녀들을 시켜 제일 좋은 드레스와 장신구로 나를 치장시켰다. 잘만 하면


마이어 공작도 엘리자베트의 과오를 묵인해 줄 것이고, 가문의 명예는 지켜질 것이었다.

그 몫은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너무도 긴장한 탓에 호흡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과연 그가 내게 청혼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요한은 화려하게 빛나는 나를 정중하게 맞았다. 값비싼 보석과 실크로 뒤덮인 나보다 간소한 정장 차림인
그는 더욱 빛나 보였다. 나는 하릴없이 주눅이 들었다.

“레이디 엘로이즈.”

그가 자동차에서 내린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나를 에스코트했다. 나는 그동안 배운 것들을 열심히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요한은 명망 높은 가문의 공작이었다. 한 번이라도 그의 머릿속에 의구심을 심어 놓을 만한 행동을 했다간


……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요한은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티 테이블이라도 차려져 있을 법하건만 그곳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던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공작님. 베풀어 주신 호의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그런 딱딱한 호칭은 안 어울리지. 내 부인이 될 사람인데.”

놀란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기쁨으로 벅차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그 전에 오늘 내 앞에서 어떻게 구는가에 따라 결정될 사안이겠지.”

“네?”

“엘로이즈.”

그가 다음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벗어.”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외국어를 들은 것만 같았다. 방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그는 말을 잃은 나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잘 못 들었나?”

“죄송하지만 무슨 말을 하신 건지…….”

“옷을 벗으라고 했다.”

격정처럼 차올랐던 기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비릿한 미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내가 직접 벗겨 주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인가?”

그가 내 가슴팍에 달린 단추를 풀고 있었다. 단추가 톡,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풀리고 있었다. 작지만


강렬한 소리가 내 정신을 번쩍 깨웠다.

“그만두세요.”

당연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를 거세게 뿌리쳤다.

“손대지 마요!”

빌어먹을 요한은 애초에 작정하고 나를 불렀던 건지 절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 몸을


붙잡고 구석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는 내 얼굴을 붙잡고 강제로 눈을 마주쳤다.

“네게 날 거부할 권리가 있을 것 같아? 넌 내 약혼녀의 대체품이야. 감히 싫다고 말하지 마. 나에게


버림받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텐데. 보아하니 네 가문보다 우선시할 만큼 고귀한 몸뚱어리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넌 내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해야 해. 다른 선택지 같은 건 없어.”

아무도 이런 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공작가의 자제와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지,


그가 춤을 청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따위를 배운 적은 있었지만 아무도 공작이 추행을 시도할 때
대처하는 법 같은 건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가문의 일원이 되기 위해 요한의 눈에 들어야만 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문이 내 몸보다 우선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아닌 거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요한을 밀쳤다. 그가 바닥으로 쓰러진 틈을 타 나는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내리쳐


박살을 내 버렸다.

내가 집어 든 거울 조각이 피부를 아프게 찔렀다. 하지만 괜찮았다. 저 자식에게 내 몸을 바치는


것보다는 거울 조각에 찔리고 마는 것이 백번은 나았으니까.

나는 날카로운 거울 조각을 들이대며 쏘아붙였다.

“당신 약혼녀가 도망친 이유를 잘 알겠어.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자에게도 이따위 짓을 하려


하는데, 약혼녀에게는 더욱 가관이었겠지! 나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 나를 지킬 줄도 모르는
머저리 같은 여자가 아니라고!”

요한은 산발이 된 채로 피를 뚝뚝 흘리며 자신을 위협하는 나를 귀신 보듯 올려다보았다. 감히 여자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나는 하녀의 딸이자 근본 없는 레이디였고, 그래서 이런 미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완전히 미쳤군!”

그는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나를 협박하려 했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너와 네 가문이 무사할 것 같아?”

“고작 해 봐야 혼담을 취소하겠다는 말밖에 더 할까?”

“네 아버지가 널 죽이려 할 거다.”

“집어치워! 적어도 내 몸을 멋대로 다루려 하는 남자보다는 낫겠지!”

그를 정말로 찌를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를 충분히 위협하고 난 다음 도망치듯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내가 타고 왔던 승용차가 아직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내 엉망이 된 꼴과 피투성이가 된 손을 보고 기겁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승용차에 올라탔다. 저택을 벗어나고 나니 냉정이 가시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의 말대로 백작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냥……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내가 그런
취급을 당했다는 게 서러웠다.
“묻지 말고 다시 돌아가 주세요. 어서요.”

이 끔찍한 저택 근처에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던 내가 부탁했다. 운전수는 더 묻지 않고 차를


몰았다.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오히려 얼굴만 피범벅이 되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리라 기대하고 보냈던 여자애가 미친 여자 꼴을 하고 돌아온 것을 본 백작 부부는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물었지만, 나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백작은 내가 외간


남자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사용인들을 시켜 내 손부터 치료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일이 백작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12 화>

요한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그를 위협했다는 것만으로도 공작가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왕정과 귀족들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은 의회와 내각이 쥔 시대이기에 망정이지 옛 시절
같았다면 한순간에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사용인들이 떠드는 소리에 의하면 그랬다. 나는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빌어먹을 요한이 먼저 나를 해치려 했고, 나는 정당한 방어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주지 않았다. 좋은 대체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돈을 들여 키운


여자애가 공작의 마음을 빼앗기는커녕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앗아 갔다.

나는 더 이상 아가씨가 아니었다. 백작은 나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뭐, 처음부터 그가 나를 소중한


딸로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을까 싶지만. 그는 툭하면 나를 불러들여 화가 풀릴 때까지 발길질과 매질을
퍼부어 댔다.

바닥에 쓰러져 잔뜩 웅크린 채로 구타를 받아 내고 난 뒤에는 좁은 곳에 그대로 갇혀야만 했다. 그는 정말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다락방은 물론이고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벽장에, 심지어는 나를 마룻바닥
밑에까지 밀어 넣었으니까 말이다.

못질을 한 마룻바닥 밑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어안고 누운 나는 울지 않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픔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는 아주 냉정하고 차분했다.

공작을 위협했던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로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데에 성공했다. 나를 해치려고 했던 커다란 남자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고, 그놈의


마수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나는 내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내 몸에 하나둘씩 새로운 상처들이 생겼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건 내가 선택한


결과였으니까. 적어도 매질을 받아 내는 건 더 이상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다.
백작가는 나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이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나를 끌어내 빵 부스러기와 극소량의 물을 먹였다.

나름대로 내게 복수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매일 밤마다 후회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그들이 나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내 정신은 더욱 더 명료해졌다.

남들에게 복종하며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걷는 대신 나의 의지로 내 운명을 선택한 경험은 나를 끈질긴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나를 제 물건처럼 대한 공작과 아버지가 증오스러워서라도 나는 꼭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내가 죽기를 바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공작이 나를 해치지 못했다면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친 남자의 억센 손아귀 속에서 빠져나온 경험이 있었다.

아무도 내게 운명을 강요하거나 나를 해칠 수 없었다.

한 번 케이지 문을 박살 내고 바깥으로 나오면 그 안이 얼마나 좁고 답답한 곳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케이지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주로 마룻바닥 밑에 갇혀 있다 보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풋내기 하녀가 새로


들어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언제나 사용인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새로운 하녀의 이름은 록시였다. 록시 마틴. 나이는
열여덟이고, 밑으로 여동생이 다섯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불쌍한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하녀 일을 자처한 것 같았다.

록시는 내 존재 자체를 몰랐다. 내 이름은 저택 안에서 금기시되었다. 오직 명령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내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기회임을 알았다.

마룻바닥 밑이 좁기는 했지만 작전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록시의 스케줄과 동선을 며칠
새에 파악했다. 언제 출근하며,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고, 언제쯤 혼자 시간을 보내러 가는지.

해가 점점 기울고 날이 어두워질 즈음이면 대부분의 하녀들은 퇴근하거나 쉬러 갔다. 록시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즉시 나는 최대한 슬픈 생각을 하며 눈물을
짜냈다.

내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록시가 노래를 멈추었다.


“누구 계세요?”

나는 우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그 애를 불렀다.

“언니…….”

머리 위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귀를 대고 내 소리를 듣던 록시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거기 누구 있니?”

“언니, 제발 도와주세요.”

“대체 거긴 어떻게 들어간 거야? 이, 이걸 어떡하지. 사람을 부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겠니?”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난 벌을 받는 중이거든요.”

“뭐?”

“제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너무 춥고 힘들어요.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아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꺼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내 예상대로 록시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애가 훌쩍이며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걸 무시하기에 록시는 너무 착했고, 특히나 어린애에게 약했다.

동생들 때문에 하녀가 되기로 결심한 열여덟 살짜리 소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잠, 잠깐만 기다려 봐! 바닥을 뜯을 만한 걸 찾아볼 테니까.”

록시가 내게 속삭이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나는 가슴 졸이며 그 애를 기다렸다. 멀어졌던 발소리가 몇


분 만에 다시 가까워졌다. 록시가 날붙이로 못을 뜯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나는 환한 달빛을 등진 채 나를 바라보는 록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괜찮아?”

나는 야윈 데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였다. 굳이 영화배우처럼 전설적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불쌍한 어린애였다. 록시는 그런 나를 가여워했다.

그 애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런 볼품없는 여자애가 대단한


잘못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눈물을 훔치며 그런 록시의 믿음을
더욱더 굳혀 주었다.

내가 사실은 백작의 친딸이고 마이어 공작의 목에 날카로운 조각을 들이대서 이렇게 됐다는 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절반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냈지만, 나머지 절반은 록시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 애는 나를 은밀하게 도와주었다. 들키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내버려 두지 못했다.

그 애의 착한 심성을 이용해 먹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어떤 것도 생존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록시는 내게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조금씩 아껴 먹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까.
그 애는 음식을 신문지에 싸 오곤 했는데, 나는 그 신문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낮이 되면
마룻바닥 틈새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곤 했다. 그 빛에 의지해서 신문을 읽으며 정신이 멍해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단련했다.

한편 비스마르 가문은 날이 갈수록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내가 마이어 공작을 위협한 게 정말로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작가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백작이 언젠가 식사
자리에서 떠들어 댔던 사업 비스무리한 게 실패했을 거라 생각했다.

가족에게는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다. 뭐, 그러라지. 나는 그들이 나를 살려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고통과 굶주림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새로운 삶과 환경에 적응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내가 견디지 못해 죽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마음 약한 애들을 꼬드기고 모아 둔 신문들을 읽었다. 언젠가 이 저택을 탈출할 기회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적절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최대한 버텼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난 내가 몇 살인지조차 까먹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그때 내 방처럼 익숙해진 좁은 공간에 누워서 생각하고 있었다.

신문에서 얼핏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게 기억났다. 전쟁이 난 지 한참이 된 것 같은데 여긴


왜 이리 평화로운 걸까?

나는 눈을 감고 적군들이 이 나라에 쳐들어오는 것을 상상했다. 그들이 이 저택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백작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전쟁에도 징집되지 않았다. 그는 아마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를 것이다.

그들이 백작을 죽이고, 금은보화를 다 털어 가고 떠날 때까지 이 밑에 누워 숨을 죽이고 있어야지.


아무리 적군들이라 해도 설마하니 바닥 밑에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할 거야. 그들이 전부 떠나고
나면, 나는 자유가 되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닥 밑에 누워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고함 소리와 비명이 겹쳐


들렸다. 친절한 손님들의 방문은 확실히 아니었다. 수 쌍의 구둣발이 머리 위를 정신없이 오가며 골을
울렸다.

<13 화>

아무튼 절대 내가 그들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을 하려 애썼다. 침입자들인가? 하지만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비스마르 백작가인데?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그들은 가문


사람들을 위협하고 약탈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혹시…… 내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건가? 드디어 적군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기쁜 건지 경악한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탕, 탕, 총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박살 나는 파열음이 귀를 때렸을 땐 모든 게 확실해졌다.

우리가 전쟁에서 졌구나.

적군들이 온 거야!

하지만 나는 곧 그들이 적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남자들은 내가 아는 언어로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조용히 해! 반항하지 마! 입 닥치고 따라와! 여기 있는 것들 싹 끌어내!

사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는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이런 혼란과 소음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고요에 너무 길들여져 버렸다.

머리를 쿵쿵 울리는 소음이 가시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머리 위의 판자를 슬쩍 밀어 보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짓밟고 간 덕에 나사가 느슨해져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판자를 밀어 내고


바깥으로 나왔다.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을 온전한 모습으로 마주하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저택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렇게 자유로이 걷는 일 또한 오랜만이었다.

나는 마치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여러 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만찬장, 응접실, 사용인들이 지내는 방,


그리고 욕실까지……. 그 어디에도 남은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곧 깨달았다. 이 넓은 저택 안에 남은 건
나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신이 나서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옛 동화에 나오는 마녀처럼 깔깔 웃으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살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환호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이 저택은 내 거였다!

나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내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도, 천박한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녀도 아무도 나를 매질할 수 없었다.

나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점점 저물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홍색으로 타오르는 노을이 마치 내


심경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나는 즐거운 생각들을 했다. 이제 나는 자유다. 뭘 해야 할까? 적군인지 누군지 모를 침입자들은 몇 시간


새에 저택의 기물들을 쓸어 가 버렸다. 아쉽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피아노! 그들이 피아노를 가져갔을까? 나는 피아노가 있는 연주실을


향해 뛰었다. 다행히 피아노만큼은 무사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마음껏 연주를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연주곡들


중에 가장 발랄하고 신나는 곡들만 골라서 말이다. 물방울처럼 통통 튀는 피아노 발라드가 텅 빈 저택
한구석을 가득 채웠다.

별들조차 내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밤이었다.


아침이 밝고, 들떴던 마음이 진정된 후에 나는 모아 뒀던 신문들을 마저 읽었다.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읽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기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을 꼬박 새워 신문을 완독한 끝에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 건 사실이었다. 세계 대전이라더니, 생각보다 규모가 거대한 전쟁이었던 것


같았다. 본국인 벨담은 망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또 다른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혁명이었다. 벨담이 망해 가는 양상을 보이자 억압받던 입스윈 사람들이 총과 칼을 빼 들고 나선 것이다.


유추해 보건대, 저택을 침입한 사람들도 혁명군이 틀림없었다. 그들이라면 아버지 같은 귀족들에 치를 떨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혁명군이 내 존재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마이어 공작과 공식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있는


비스마르 가의 영애였다. 걱정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찾으러 이곳을 다시 방문할 것만 같았다.

도망칠까? 하지만 어디로? 혼자서는 멀리 이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몸은 오랜 굶주림과 학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최대한 가까운 마을까지도 도달하지 못할 게 뻔했다.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내 죽음을
위장해 줄 시체를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 병에 걸려 죽었다는 하녀가 떠올랐다. 나와 비밀리에 대화를 나누곤 했던 어린 하녀가 무심코


흘린 이야기가 있었다.

‘다들 마리아가 병에 걸려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난 진실을 알아. 병에 걸린 게 아니야. 마리아는


살해당한 거야.’

‘살해당했다니? 누구한테서?’

‘백작 부인께서 마리아를 죽였어.’

그 애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난 알거든. 마리아가 마님께 죽도록 맞았다는 거. 그런데 가만히 있는 사람을 갑자기 죽어라 팰 리가
없잖아? 마리아는 마님께서 절대 용서 못 할 짓을 한 거야. 틀림없어.’

‘뭐야, 은식기라도 훔쳤대?’

‘너 바보야?’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백작님이랑 한 침대에서 잔 거지!’

개자식. 제 버릇 못 고치고 또 그런 짓을 벌인 거다. 아무튼 나는 백작 부인이 그만 마리아를 죽이고


말았으며, 살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마리아가 전염병을 얻었다는 거짓말을 꾸며 내어 다급히 시체를
치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그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장례를 치러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장례를 치르려면 목사를 불러야
했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그게 병에 걸려 죽은 시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단박에 눈치챌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나는 혹시나 싶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비스마르 가문의 선조들을 모셔 두는 납골당이 있었다.


납골당을 두는 건 위세 높은 벨담 귀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일종의 전통 같은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뒤탈이 생길까 무서워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여자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당연히 시체는
부패한 상태였다. 나는 구역질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시체를 질질 끌고 올라갔다.

이제껏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 혁명군의 총에 맞아 죽을 수는 없었다. 울면서 썩은 시체를 운반하는


쪽이 더 낫지.

내 예상대로 목록에서 내가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군인들이 저택을 다시 한번 방문했다. 내가 숨겨 둔


시체를 발견한 그들은 죽은 하녀를 들고 떠났다.

이젠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혁명군을 또


마주치게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나는 그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게 기운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에너지를 아끼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적절한 방도를 찾을 때까지는 웅크리고 있는 게 나았다.

나는 혁명군 때문에 마지막까지 침대에서 자 보지 못하게 된 걸 속상해하며 악기 가방 안에 몸을 구기고


눈을 감았다. 그 속에 누워 있으면 생각보다 아늑했다. 안감이 부드럽기도 하고.

그때, 나는 연주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찰칵. 문고리 돌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누가 왔다. 누구지? 느리고 둔탁한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불청객이 피아노 건반을 아무렇게나 누르기 시작했다. 질서 없는 음계가 자못 음산하게 들려왔다.

도망칠 만한 곳을 찾기에는 이미 늦었다. 퇴로가 없었다. 나는 직접 보지 않아도 그가 혁명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아니면 대체 누가 여길 찾아온단 말인가? 그들이 내가 시체를 조작했다는 걸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

날 잡으러 온 거야…….

끼이익. 경첩 소리가 으스스했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눈을 감았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멈추었다.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케이스 뚜껑이 열렸다.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자세를 낮춘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남자였다. 나는 감정을 들여다볼 수 없는 그의 새까만 눈을


마주 보았다.

내 몸을 눈으로 훑어보던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넌 누구지?”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얼마 전 저택을 휩쓸었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그는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내게 저지를 수 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나를 재촉했다.
“이름이 뭐야?”

어떻게 하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간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아무 말이나 꾸며 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릴리예요.”

젠장. 정말 형편없는 가짜 이름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군인이 물었다. 내가 적절한 거짓말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인가?”

그래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는 내가 엘로이즈 비스마르라는 사실을 몰랐다. 어쩌면 나를


잡으려고 저택을 찾아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아무 말이나 쏟아 내었다.

<14 화>

군인은 내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의 눈빛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내 말을 믿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정말이지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때, 그가 소름 끼치는 제안을 했다.

“널 음식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

소스라친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를 쳤다.

“안 돼요!”

군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화가 난 건가? 겁에 질린 나는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고,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안 돼요. 부탁이에요.”

“여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건 혁명을 위해 압수됐다. 네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어.”

“내가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따라가요? 날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도 모르는데.”

“신분증을 원하면 보여 줄 수 있어.”

“그래도 바깥에 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평정을 잃는 건 생각보다 치명적인 문제였다. 나는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변명처럼 온갖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침착하게 그를 속여야 하는데, 다 망했다. 그가 나를 의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 머릿속의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 가지 묻겠다. 네가 엘로이즈 비스마르인가?”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 그의 입술을 빌려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내 인생이 끝장났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제 와서 ‘아니요,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라고 대답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정말 내가


엘로이즈인지 궁금해서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그는 철옹성처럼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오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결국 체념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에 눈길이 갔다. 그래, 차라리 나를 죽일 거라면 그 총으로 깔끔하게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비스마르 백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원하는 진실을 얻어 낸 군인은 쓸데없는 질문들을 했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던데. 옆방에 있던 피아노도
네가 연주하곤 했던 건가? 가족들이 너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

나는 그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나를 갖고 노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겠다 싶었던 내가 쏘아붙였다.

“말해서 뭐 해요. 어차피 난 죽을 거잖아요.”

군인은 그 번듯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덫에 걸린 생쥐가 되어 그에게 관찰당하는


것만 같아서 속이 상했다. 무엇보다 억울했다. 내가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죽게 되다니.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인이 부하들을 불렀다. 나는 곧 그들에게 끌려 나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내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냥 떠돌이 여자다. 이 집에 숨어들었던 걸 찾아냈어.”

혼란스러웠다. 뭐지? 이 사람, 혁명군 아닌가? 왜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난 엘로이즈 비스마르가
맞는데. 그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던 나는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군인은 내게 음식을 건넸다. 나는 빵에서 그렇게 향긋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어쨌든 내게는 기회가 생겼다. 하나는 배를 채울 기회였고, 다른 하나는 빵을 먹는 동안 생각할 기회였다.


나는 귀리 빵을 씹으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군인은 내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건 나를 살려 주기로 결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나를 살려


주고 싶어 하지? 어쩌면 내가 동정심을 산 건지도 몰랐다. 내 꼴이 귀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동정심이든 뭐든 간에, 나는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의 마음에 들어야만 했다. 내가 살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줘야만 했다.

난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했다.

“최근에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었나?”

그가 물었다. 아, 그래. 피아노. 내겐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내가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 방패이자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가 나를 살린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야 해.

비록 그는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을


것만 같던 몸이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군인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서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침착해, 엘로이즈. 너는 피아노를 곧잘 연주하곤 했잖아.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가 네
연주에 깜빡 속아 넘어가게 만들면 돼.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니까 내가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피아노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연주할 때만큼은 오직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 나는 내 연주에 귀를 기울이며 최대한 군인의 존재를
잊어버리려 했다. 내 머릿속에서 공연장이 펼쳐졌다. 청중들이 어둠 속에서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 연주는 서서히 제 호흡을 되찾아 갔다.

군인은 내가 연주를 끝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고요 속에 침잠하여.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내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절정에 올랐던 음악이 다시 낮게 사그라들고, 이윽고 내가 마지막 건반을 눌렀다. 그런 줄도 몰랐는데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가 내 연주를 듣고 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군인은 똑같은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일단 안심했다.

“그들이 피아노를 가르쳤나?”

그가 물었다. 나는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믿을 수가 없군.”

군인은 혼잣말을 했다. 그는 슈미즈가 겨우 가리고 있는 내 앙상한 몸과 흉터들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침묵하던 그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군인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가 내 팔을 잡아끌 줄 알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나를


끌고 가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와중에도 오른손을 내주었다. 귀족으로
살던 때에 생긴 습관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랑자 같은 꼴을 하고서는 레이디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군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나를 레이디처럼 대해 주었다.
군인이 허리를 숙이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아주 가까이에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이제 그의 눈동자 속에서 호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연주가 먹힌 것이다.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인데, 내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고 있었다.

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분명 기쁜 일이었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소리 내어 울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억눌렀던


감정들이 뒤늦게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다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가 내 이름을 묻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내 연주를 듣고 나서 내 손등에 입을


맞출 때까지…….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공포였다. 나는 체포당한 귀족의 딸이었고, 그는 군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총을 갖고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나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나는 요한 마이어도 두렵지 않았고, 내 아버지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왜냐면 그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죽일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내게 자비를 베풀었으니까.

내 목숨이 그의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엘로이즈. 그가 너를 마음에 들어 했잖아. 살았으면 된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마.

나는 스스로에게 그리 되뇌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군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마음을 바꾼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가방 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받아 들면서도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뭔가 목적이


있는 건가? 난 군인에게 검은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니까.
아버지가 그 사실을 내게 직접 가르쳤다. 망할 요한 마이어도 마찬가지고.

군인은 제가 건넨 음식을 먹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샌드위치 먹는 사람 처음 보는 것처럼


말이다. 검은 속셈이 있다기에는 그의 시선이 너무도 담백하고 건조했다. 그래도 나는 군인을 섣불리
믿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잘해 주려 할수록 내 불신은 크기를 키워 갔다. 이유 모를 호의가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나중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아 놓는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그가 주는 음식들을 꼬박꼬박 열심히 받아 먹었다. 그의 의중이 어떻든 간에 체력을
비축해야만 했다.

나는 바보 같은 애처럼 고맙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했다. 착하고 불쌍한 여자 연기를 하는 건 내


전문이었다. 일부러 그의 앞에서 멍청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가 하는 말에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꿍꿍이가 무엇이든 그는 나에게 호감이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내가 멍청한 연기를 하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나는 그가 나를 계속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는 여전히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가 선심 쓰듯 베푸는 호의에 매달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혁명군 장교, 자일스 헤센의 방문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나는 점점 이 남자의 머릿속에 든 음흉한 계획이라는 게 혹시 나를 살찌우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정말 내게 음식을 갖다주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적선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불쌍한 애들에게 베풀어 주며 자아도취 하는 놈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일스도 그런 부류인 건가? 아니면 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이 웃겨 보이나? 나는 배가 고팠고, 솔직히
허겁지겁 먹어 치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맛있게 먹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마냥 나를 쳐다보았다. 그 덕에 체할 뻔한 적도 여럿


있다는 걸 그는 알까?

자일스의 방문은 이제 예측 가능한 일이 되었다. 제발 그 끔찍한 군복을 다시 볼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그는 꿋꿋하게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그를 반가워하는 척했다.

그 날에도 그랬다.

<15 화>

나는 군화 소리를 바로 알아듣고 그를 마중 나갔다. 내가 지을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를 띤 채로.

“자일스!”

그런데 그날은 유독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내 가짜 이름을 불렀다.

“릴리.”

자일스는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에 염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형형한 눈빛에 얼어붙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게 나와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내가


위험해진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자일스를 시험해 보기 위해 무작정 그를 껴안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든지, 혹은 쳐 내든지 둘 중
하나겠지. 자일스는 나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하거나 나를 마주 안아 주지도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미안해요, 그냥 또 와 준 게 고마워서 그런 건데.”

거짓말이었다. 군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가 음식을 주는 건


좋았지만…… 절대 그라는 사람을 반긴 적은 없었다.

그가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될까?”

“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그는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싫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결국 나를 안지는 못했다.

“……다음에는 옷이라도 한 벌 가져다줄게.”

“이미 한 벌 줬잖아요.”

“그거 말고. 제대로 된 옷.”

“난 이게 따뜻해서 좋아요.”

나는 그가 주고 간 코트를 여몄다. 코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옷을 핑계로 또 올까 봐 겁이 났다.

자일스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 줘야 했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침묵하는 그가 너무도 불편했던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일스,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그럼 연주해 본 적은 있다는 거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눈빛에서부터 다


보이거든요. 저, 부탁이 있는데…… 오늘은 당신이 내게 피아노를 쳐 주지 않을래요?”

그는 내가 피아노를 쳐 달라고 말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더 놀란 건 내


쪽이었다. 자일스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가 아주 간단한 연습곡 하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노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되었는지 그가 건반을


더듬거렸다.

괜한 짓을 시켰다고 역정을 내기라도 할까 봐,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두 옥타브 위에서


주선율을 연주해 그를 도왔다.

우리는 함께 연주했다. 내 도움을 받은 그의 연주가 아주 살짝 나아졌다. 자일스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그에게 잘 보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일스의 연주가 미세하게 느려졌다. 홀린 듯이 바라보던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 입술에 그의


것이 닿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일스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비슷한 상황을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어.

그는 내가 호응해 주지 않자 머쓱했는지 내게서 곧장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마치 중력에 저항하기란 불가능한 것과도 같았다.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그를 안고 먼저 입을 맞추었다. 그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내주는 수밖에. 그럼으로써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그의 총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감옥으로 끌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에 감옥은


벽장과 마루 밑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알았다. 자일스 헤센은 그냥 숫기 없는 요한 마이어였다. 애초에 이런 목적을 가지고 내게 접근한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란 없는 법이다.

과거에 나는 요한 마이어를 바닥으로 밀치고 깨진 거울 조각을 그에게 들이댔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남들을 위해 나를 바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가문이 내 몸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목숨은 내 몸보다 우선이었다.

자일스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쩌면 그가 내 치마를 들추고 제 것을 꺼내 들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내게 매달리듯 키스하던 자일스는 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지도, 바지 지퍼를 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 입맞춤을 거두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를 안고 있기만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삭였다.

“넌 내 옆에 있어. 그냥 옆에 있기만 해. 그거면 돼.”

라디오 단막극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었다면 그의 고백에 몹시 감동해 온갖 찬양하는 언사들을 쏟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사이,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번엔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그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물론 나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날 밤을 떨면서 지새웠다. 아무리 목숨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자와 관계를 한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커다란 남자가 내 몸을 물건처럼 다룰 거란 데에서
우러나는 두려움은 내 정신을 마비시켰다.
나는 그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잠을 자기도
싫었다. 자면 내일이 시작되고, 그럼 자일스를 만나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 몸을 남에게 내어 주기는 싫었다.

그러나 자일스는 곧바로 나를 탐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도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내일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가 내 곁에 앉아 나를 쳐다볼 때면, 나는


그가 내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할까봐 겁이 났다.

긴장 속 외줄타기를 하며 매일 밤을 두려움에 떨었다. 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두려웠다. 불안해서였다.

왜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거지? 저 남자의 머릿속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단 말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면, 왜 나를 꾸준하게 찾아오는 거지?

금방 돌아가곤 했던 자일스는 점점 저택에 오래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불평할 수 없었다. 착한


아이처럼 굴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항상.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일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나는 그가 갑자기 왕래를 그만둔 데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군대를 이끌고 나를 잡으러 올 준비를 하는 걸까?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일주일이 지나도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기회였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자일스의 발길이 끊긴 틈을 타 저택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하루걸러 찾아올 적에는 곧 잡힐 거란 두려움 때문에 감히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를지 몰랐다.

예전과는 달리 내 몸에는 살도 많이 붙었고, 충분히 걸을 힘도 생겼다.

나는 내가 아는 길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예전에 승용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나 본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10 분 정도를 달리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는 사람들도 있고, 기차역도 있었다.

물론 가진 거라곤 내 몸뚱어리밖에 없는 신세였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용기를 내야만 했다.

저택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걸음은 더욱 더 빨라졌다. 스스로 저택을 벗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드디어 내 운명은 내 손안에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분 좋아서,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자일스가 나를 찾아내기 전에 솔즈부르를 떠야 했다.

나는 걷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승용차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가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조금 분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는 나를 금방 잊을


것이다. 나는 피아노를 좀 치는 볼품없는 여자에 불과했다. 자일스 같은 장교라면 주변에 널린 게 여자일
텐데, 굳이 나 같은 것에 그가 아쉬워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믿어야 했다.

<16 화>

3. 안나 키팅

나는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걸었다. 차로 다녔을 땐 금방이었던 것 같은데, 직접 걸어서 향하자니 몇


시간을 걸어도 부족했다.

내 걸음이 빠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아무리 음식을 먹어서 체력을 쌓았다지만, 나는 그래도 건강한 축에
들지 못했다. 이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온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내게는 신발조차도 없었다. 맨발로 고르지 못한 땅 위를 걸으니 발바닥에 금방 상처가 났다.
그래도 나는 참아야 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솔즈부르 사유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 멀리서나마 보일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짐수레라도 마주쳤으면 태워다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침내 내가 솔즈부르를 벗어나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하늘에서 모습을 감춘 후였다.


오로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가스등 불빛만이 세상을 비추었다. 나는 성치 못한 발로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나는 서민의 삶을


몰랐다. 그렇다고 평생을 귀족 아가씨 대접 받으며 산 건 아니지만, 홀몸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래 걷다 보니 배가 고팠고, 걸친 건 얇은 슈미즈 하나뿐이라 지독하게 추웠다. 나는 완전히 무방비해져


있었다. 음식은 포기한다 치더라도 잠깐 몸을 데울 곳이 필요했다.

자일스가 줬던 코트를 버리고 온 게 살짝 후회됐다. 누가 봐도 혁명군의 것이 분명한 코트를 입고


돌아다니면 자일스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 봐 내버려 두고 온 건데. 겨울은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바깥을 오래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였다.

정처 없이 걷기만 하던 나는 문득 멈춰 섰다. 근처에 빵집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빵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금화 한 닢이면 저걸 다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었다. 금화는 무슨. 난 신발도 없는 여자였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내 머리 위로 뭔가 툭툭


떨어진다 싶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건물 벽에 붙어서 비를 피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내
옷이 빗물에 젖어 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주택 안으로 들어서던 내 또래의 여자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한 팔로 빵 봉투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나는 입이 얼어붙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진짜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비도 오는데 거기 그러고 있으면 시체 되기 딱 좋아. 얼른 들어와.


내일 아침 집 밖을 나서자마자 여자 시체를 마주치기는 싫으니까.”

나는 덜덜 떨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커다란 이층 주택이었다. 고급스러운 벽지나 가구를 보아


하니 부유한 집이 틀림없었다. 나는 간신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고……마워.”

주근깨가 특징인 여자는 물을 뚝뚝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잠시 훑어보더니 우산과 빵 봉투를


근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욕실로 끌고 갔다.

“묻고 싶은 게 많기는 한데 일단 씻어. 요새 병원이니 진료소니 아픈 사람들로 꽉 들어차서 감기라도


독하게 걸리면 답 없어. 씻는 건 도와주지 않아도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내가 알아서 하게끔 나를 내버려 두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욕조를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욕조에서 하는 목욕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젖은 슈미즈를 당장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을 하면서 몸을 데우니 한결 나았다. 젖은 슈미즈를 다시 입을 수는 없는 일이라 여자가 두고 간


두꺼운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었다. 살짝 헐렁하기는 했지만 입을 만은 했다.

욕실 밖으로 나가니 여자가 저녁 식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내가 눈길을 빼앗겼던 바로 그 빵이었다.

여자는 뭘 하고 있냐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뭐 해? 어서 와서 앉아.”

여자가 시키는 대로 식탁 앞에 앉기는 했지만, 그녀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직접 물었다.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야?”

“그럼 네가 거기서 죽게 놔뒀어야 했나?”

여자는 내 질문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죽어도 저 여자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 아닌가?

그때, 여자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입스윈 사람끼리는 도와줘야 하는 거니까. 우리끼리 쌀쌀맞게 굴 게 뭐가 있어? 벨담 놈들 다


쫓아낸 이상 이제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거야. 적어도 너같이 얇은 옷 한 장 걸치고 바깥을 떠도는
애들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지.”

아,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저 여자는 내가 입스윈 사람인 줄 알았던 거다. 나는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았다.

“내 이름은 셰일라 칼튼이야. 그냥 셰일라라고 불러. 너는 이름이 뭐야?”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나는 내가 쓸 이름을 정해 뒀다. 나는 내 새 이름을 자신 있게 내뱉었다.


“안나.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야.”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런 얇은 옷차림으로 바깥을 헤매고 있었던 거야? 미친놈한테 걸리면 어쩔 뻔했어?
너한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셰일라는 자세히 물으려 하지 않았다. 나 같은 떠돌이들을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셰일라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불쌍한 입스윈 떠돌이인 양 풀 죽은 얼굴을 하고, 본래의 하층민 말씨를
다시 사용했다.

우리는 묽은 수프에 빵을 적셔 먹었다. 셰일라는 저녁을 먹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본래 이 집은 벨담 가족이 살던 집이었어. 너도 보면 알겠지만 돈 좀 가진 집안이었나 봐. 하지만


혁명군이 우리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 후에도 떵떵거리며 살 수는 없는 법이지. 난 최근에 이 집을
배정받았어. 원래 다른 가족이 같이 입주하기로 했었는데 하루 이틀 정도 늦는 것 같아.”

“그럼 그 가족이랑 함께 살게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 큰 집을 나 혼자 차지할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과 집을 공유하는 건 이전까지도 흔한


일이기도 했고. 뭐, 나야 불만 없어.”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을 생판 모르는 남들과 공유한다는 건 내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튼 셰일라와 함께 입주하기로 했었던 가족이 늦는 바람에 내가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놀랄 만한 행운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 가족은 언제 들어오는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레 즈음에 올 거야. 왜? 혹시 갈 곳이 없어서 그래?”

셰일라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가서 네 이름이랑 신분증 대고 서류 몇 장 작성하면 그 사람들이 너한테 곧 집을 배정해 줄 거야. 내일


아침에 한번 가 봐. 그 전까지는, 뭐, 대충 여기서 지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 가족도 별로 신경 안
쓸걸? 네 가족이 이보다 작은 집에서 지내던 때도 있었는데 여자 하나 끼여 사는 것쯤이야.”

“어디로 가면 되는데?”

“근처에 혁명군이 운영하는 임시 사무소가 있어. 원한다면 내일 같이 가 줄게.”

혁명군이라는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곳은 솔즈부르 바로 옆 동네였다. 내가 없어진 걸 자일스가


눈치챘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뒤져 볼 게 분명했다.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천천히 하지 뭐.”

“명단이 얼마나 밀려 있는지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나도 이 집에 들어오기까지 무려 세 달이나


걸렸어. 나 정도면 그래도 운이 좋았던 거야. 어떤 사람은 절차가 꼬여서 반년이 지나도 입주를 못 하고
있대.”
“사, 사실은 곧 가족이 나를 찾으러 올 거라서 그래. 가족들이 이미 거주지 신청을 마쳤을 거야.”

“그래? 그렇다면 굳이 두 번 신청할 필요는 없겠네. 가족이랑 만날 때까지 여기서 지내. 아무리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바깥은 여자에겐 위험한 곳이야.”

셰일라는 지금껏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미친놈들을 얼마나 다채롭게 만나 보았는지에 대해 장장 십여


분간을 설토했다. 하지만 내겐 맞장구치며 돌려줄 이야기가 없었다.

물론 나라고 미친 남자를 만나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셰일라 앞에서 마이어 공작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곤경에 처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 달라고 해. 웬만하면 다들 도와줄 거야. 우린 벨담 놈들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서 결국 승리했잖아. 전부 다 피를 나눈 동지들이라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비 맞으면서 바깥에 서 있지 마.”

“고마워, 도와줘서.”

“고맙긴,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얼어 죽게 놔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는 빵과 수프를 금방 해치웠다. 내가 말을 별로 하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식사 시간은 별로


길어지지 않았다.

셰일라는 함께 입주할 가족이 오기 전까지 지낼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사람들 올 때까지는 여기서 자. 뭐, 보아하니 너도 여기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 같고 말이야. 야,


내가 한 번 앉아 봤는데 침대가 엄청 푹신푹신해.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녀가 떠나고 나는 침대 시트 위에 앉아 보았다. 셰일라가 강조한 만큼 부드럽지는 않았다. 물론


그조차도 없는 형편이었던 내게는 감지덕지할 일이지만, 나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최고급 침대 시트가
얼마나 부드럽고 푹신한지 알아 버린 사람이었다.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맞은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덜덜 떨면서 맨발로 헤매고


다니던 내가 지금은 아늑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나를 상대로 달콤한 환상을 보여 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이 모든 게 내가 불쌍한 입스윈 떠돌이처럼 보여서 가능한 일들이겠지. 동정심은 여러 번 내 목숨을


구했다. 저택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저택 바깥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얄팍한 동정심
하나로 버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자일스가 나를 쫓아오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갔을까? 만약 그가 나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이 근방을 수색하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긴 일일 거다. 웬 깡마르고 초라한 여자가 저를 두고
도망갔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설령 자일스가 나를 포기했다고 해도 여전히 내게는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뭘 해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 안에 웅크리고 있으니 눈꺼풀이 감겨 왔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텅 비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푹 자 두는 것 또한 내일을 위한 좋은 전략 중 하나였다.
<17 화>

내가 눈을 떴을 즈음엔 집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지만 어딜 봐도 셰일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그녀가 남겨 둔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일하고 온다! 점심 즈음에 올
것임.’

쪽지를 내려놓은 나는 빵 한 덩이를 발견했다. 내가 먹어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을 하기에 나는 아직


배가 고팠다.

솔즈부르의 저택에서는 잘 참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텅 빈 저택을 나오니 배고픔이 나를 두 배는 더


괴롭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셰일라는 내게 이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저택과 너무


가까웠고, 여기 오래 머무르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근방을
떠야 하는 사람이었다.

밤사이 비가 그쳐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분명 행운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좋은 옷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벨담인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그 애가 알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셰일라는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실제로도 그 애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빈털터리였다.


가진 것 한 푼 없이 타지로 떠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은인의 집을 뒤졌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덕성이 내 목숨을


살려 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아 버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

간신히 동전 몇 푼을 찾아낸 나는 현관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셰일라가 돌아오려면 한참 지나야


했다. 내가 손에 넣은 화폐가 정확히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일 가까운
도시로 떠나기에는 충분하리라 믿었다.

언제 비가 내렸었냐는 듯, 날이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사람들의 기분도 훨씬 좋아 보였다. 나는


처음부터 이 마을의 일부였던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를 활보했다.

길을 걷던 나는 건물 벽에 기대어 잡담을 나누는 혁명군 두어 명을 발견했다.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금세


심장이 뛰고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다행히 그들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실 때문에 안심했다. 적어도 자일스가 나를 찾기 위해 부하들을 풀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생각해 보니 내 망상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는 혁명군 장교가 거지꼴을 한


몰락 귀족의 딸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란 망상 말이다.

그래! 그건 그냥 망상에 불과할 거다. 그는 떠오르는 새 시대의 영웅이었고, 심지어 미남이었다. 그가


내게 아주 조금의 미련이라도 갖고 있다 한들 주변 여자들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가 추적할 만한 가치가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여자였다. 적어도 그의 눈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그가 내게 잘해 준 건 단순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거지에게 적선하는 마음으로 관심과 음식을 베풀어


주었겠지. 적선하던 거지 하나가 사라졌다고 그 거지를 찾아 나설 사람은 없었다. 찾아 봤자 얻어낼 것
하나 없는 존재니까.

나는 조금 홀가분해진 어깨를 편히 내려놓고 걸었다.

모든 건 괜찮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짙은


색의 군복을 잘 갖춰 입고 곧은 자세로 선 남자. 자일스 헤센이었다. 그가 이 마을에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시야에 들지 않을 만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냥 볼일이


있어서 들렀을 뿐일 거야. 난 그렇게 믿었다. 자일스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눈으로 탐색하더니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세웠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자일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종이 같은데…… 행인의 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자일스가 종이를 들고 뭔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생긴 여성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가 한 여자의 생김새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에, 눈은 파랗고…… 키는 이만하며 흰 옷을 입은


마르고 창백한 여자.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 망상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현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나를 왜 찾고 있을까. 아마 내가 도망쳐서 그런 거겠지. 호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도망친 괘씸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내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었다. 내가 벨담 귀족의 딸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저


남자뿐이었다.

자일스에게 잡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에게 복수하고 싶어 할 거야. 그의 커다랗고 마디가 굵은 손과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권총이


생각났다. 나는 요한 마이어와 비스마르 백작의 손아귀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저 남자에게선 그렇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익숙한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공포였다. 나는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뭘 논리적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말초적인 본능이 내게 도망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혁명군이 나를 찾고 있었다.

*
릴리가 사라졌다.

텅 비어 버린 방을 마주했을 때, 아주 잠시 동안 그의 머릿속도 공허하게 비어 버렸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아무리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불러도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릴리는 이 저택을 완전히 벗어난 게
분명했다.

자일스 헤센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쿵쿵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릴리의 실종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건
그가 릴리가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릴리뿐이었으니까. 자일스의 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재투성이 폐허 속에 남은 유일한 존재가 바로 릴리였다.

단순히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살렸던 여자는 의도치 않게 그의 전부가 되었고,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존재 없이는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릴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설마, 릴리의 소재가 혁명군의 귀에 들어갔나? 그가 참지 못하고


저택을 들락거려서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걸까?

만약 혁명군이 릴리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녀는 엘로이즈 비스마르,
벨담의 귀족 여식이었다.

자일스의 유일한 안식이 되어준 릴리가 그의 욕심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땐 정말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일스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동아줄 하나에 매달려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릴리가 죽는 일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자일스는 릴리가 저택에 없음을 확인하고 난 후 본부로 돌아갔다. 체포 명부를 뒤져 보고, 빠진 사람이
없나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감옥을 순찰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릴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혁명군은 아직 릴리에 대해 몰랐다.

그렇다면 릴리는 왜 저택에서 사라졌을까.

그가 모르는 다른 위협 요인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릴리가 아직 성치도 않은 몸으로


무작정 저택을 떠났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남겨 두지 않은 채 말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릴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분명 내게 말할 여유도 없이 떠나야 했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혼자서 저택을 떠났다면, 분명 이 근방 지역에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가 도우러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이제 자일스는 그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릴리를 찾아야 해.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

그녀를 찾아야…….

“도주한 벨담 귀족의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린즈데일로 간 게 분명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를 쓰던 자일스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동안, 그는 몸이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린즈데일이라면 솔즈부르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자일스 또한 린즈데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릴리가 머물고 있을 확률이 제일 높은 곳일 거라고 말이다.

“……어떤 도주자를 말하는 거지?”

그의 부관의 얼굴 근육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기억 안 나십니까? 얼마 전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말입니다. 감옥으로 호송 중이던 차량이 사고를 당했고,
그 틈에 탈출한 그 여자 말입니다. 마르티나 솔제의 동선을 추적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랬지.”

자일스는 안도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의 온 신경은 사라진 릴리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보고받은 사항도 얼른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릴리는 아직 혁명군의 레이더망 밖에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인가?”

“확실합니다. 그 근방에 잠복 중인 저희 요원들이 마르티나 솔제로 추정되는 여자를 인근 숲에서


발견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체포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저희가 지금 출발하기만 한다면 이번엔 기필코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린즈데일이라고 했나?”

자일스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이곳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내외를 달리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출발하지.”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다른 의미로, 정말 신속해야만 했다.

<18 화>

린즈데일에 도착한 그들은 흩어져서 도주한 벨담 귀족 여성의 흔적을 쫓았다.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에게는 찾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을 뿐이었다.

자일스는 마르티나 솔제를 찾는다는 구실로 릴리의 행방을 조심스레 뒤쫓았다. 그는 릴리의 초상화를
참고해 대충 본뜬 그림을 들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이렇게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위험한 인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그녀를 찾는 일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은 예감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며 동네를 한 바퀴 돌지 않는 이상 사람을 찾는 건 원체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게다가 릴리가 이곳 린즈데일에 있을지도 사실은 미지수였다.

임무와 병행하며 반나절을 캐물어도 소득이랄 게 없었다. 절망한 자일스는 초췌한 꼴이 된 채로 그의 앞을


지나쳐 가는 한 남자를 붙잡았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남자는 그의 제복을 보고는 금세 호의적인 태도를 갖추었다.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긴 여자……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남자는 그림을 아주 오랫동안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뭔가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잡니까?”

그는 이어 한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젯밤에 저기 저쪽 건물에 기대서 떨고 있는 걸 봤습니다. 아마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죠. 비도 오고,


추운 날씨인데 얇은 천 쪼가리 하나 걸치고 있었거든요. 신고하려 했는데 바로 저 집에 사는 여자애가
안으로 들여보내 주더군요. 아직도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자일스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남자가 가리킨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다시금 힘이 실려


있었다. 릴리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릴리가 이곳에 있을까?

자일스는 대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안나?”

주근깨가 특징인 여자가 문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마주친 그녀가 놀란 얼굴로 굳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녀가 물어 왔다.

“무슨 일인가요?”

“사람을 한 명 찾고 있습니다.”

자일스는 이제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그림을 들이밀었다.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림 속 주인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안나예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나요. 이 애 이름이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자기 이름을 안나 키팅이라고 말했어요.”

셰일라 칼튼은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헌칠하게 키가 큰 혁명군 장교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위용은 가히 위압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정중하고 예의 발랐지만, 신사 같은 태도가 미처 가려


주지 못한 냉혈한의 눈빛 앞에서 그녀는 자연히 긴장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 셰일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조국을 구해 낸 혁명군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그가 아주 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셰일라는 굳이 누가 그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남자의
얼굴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장교는 셰일라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다 얻었는지 한층 편해진 낯빛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볼일이 없으니 떠나려는 눈치였다. 셰일라는 그가 완전히 집을 벗어나기 전에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장교가 걸음을 멈추고 셰일라를 돌아보았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빛이 마치 버려진 폐가의 암암한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혹시 그 애가 위험한 인물인 건가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교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니까…… 장교님께서 찾으시는 거라면, 혹시나 해서요. 그럴 리는 없을 거라 믿고 싶지만……


혹시나 그 애가 벨담…….”

“칼튼 양.”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물론 장교는 아직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가 셰일라의 질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싸늘하게 식어 있던 장교의 낯빛이 온화하게 물들었다. 마치 어두웠던 방 안에 촛불을 켠 것처럼


말이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과도 같은 선량한 국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불온한 사건과는 전혀 연루될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제가 개인적으로 빚을 진 일이 있어서, 꼭 갚고 싶어 찾는 것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안나 양을 찾아도, 혹은 찾지 못한다 해도…… 큰일은 없을 겁니다.”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장교는 가볍게 목례해 보이고는 그대로 집을 떠났다. 이윽고 혼자 남게 된 셰일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벨담인을 몰라보고 숨겨 줬을
리가.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야채를 썰고 향신료를 준비했다.
벨담 사람들이 기세등등하던 시절에는 감히 욕심도 못 냈던 재료들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셰일라는
요리를 할 때 제일 만족스러웠다. 이젠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향기로운 빵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빵은 입스윈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식들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질 좋고


부드러운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과도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야채수프와 흰 빵으로 식탁을 차리고 앉으려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셰일라는 움직임을 멈추고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설마 안나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가 잠시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거다. 어서 말해 줘야 하는데! 어떤 장교님이 와서 너를 찾았다고


말해 줘야지. 셰일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릇을 내려놓고 문 쪽으로 달음질쳤다.

“안나, 너야?”

그녀는 문을 열어 문을 두드린 당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문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이번에도 안나가 아니었다. 또 다른 남자가 셰일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건넸다. 먼젓번 다녀갔던 장교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셰일라는 자연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러 사람 들쑤시고 다니면서 수소문을 했더니 진이 다 빠지는군요. 글쎄, 제 사촌 여동생을 찾아야만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연락이 닿지를 않지 뭡니까. 혹시 근처에서 보신 적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나 키팅이라고 하는데.”

그 순간 셰일라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분명 안나도 가족이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는데!

“맞아요! 안나가 여기 있다가 갔어요. 사실,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하러 갔다 오니 집에


없더라고요. 곧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안나가 어젯밤에 여기서 머물렀어요. 어떡하지, 안나
얘는 가족이 온 줄도 모르고 어딜 간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마을은 정말 좁으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방금 혁명군이 이 집을 들렀다고 해서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한 건
아니죠?”

이름 모를 남자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물어 왔다. 셰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기에……. 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도 안나를 찾는다고


했는데! 아마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혁명군 사무소 위치 알려
드릴까요?”

“혁명군이 안나를 찾았다고요?”

그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그가 안절부절못했다.

“왜 안나를 찾은 거죠? 그 애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남자가 간절히 부탁해 왔다. 그는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그가 왜 안나를 찾았는지 말해 줘요.”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이 마을에는 기차역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려면 노면


전차라는 것을 타야만 하는데, 충분히 멀리 떠나기 위해서는 많은 삯을 지불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내가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다.

내가 가진 건 훔친 동전 몇 푼이 다였다. 돈을 더 마련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택에 있을 적에 보석 장신구라도 하나 훔쳐다 놓을 걸 그랬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버티기에는 너무 추울 뿐만 아니라, 해가 제일 빨리 떨어질 시기라는


점이 내게는 최악의 악재였다.

어제는 운 좋게도 누군가의 호의를 빌려 무사히 침대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오늘 밤도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셰일라가 준 스웨터는 따뜻했지만 겨울의 한기를 막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덜덜 떨며 그나마


따뜻해 보이는 구석에 주저앉았다.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점차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게를 밝혔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산함만이 빈 거리를 채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든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 했다.

이런 곳에서 얼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19 화>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남았는데, 고작 추위 따위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건 정말 억울할 것만 같았다.

사실 억울하지 않은 게 없었다. 내가 왜 이따위 상황에 처해 있어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난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딱 한 번, 그것도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반항을


했다는 이유로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게 해 준 것도 없는 귀족의 혈통 때문에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데다 웬 미친 혁명군


하나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사람을 죽이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다.

그 일이 이렇게나 고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자일스는 왜 나를 찾고 싶어 하는 걸까? 이 또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다 그런 식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남자들은 단지 내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매질하고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내게 호의를 베풀었던 남자들이 전부 다


그랬으니까. 그라고 다를 게 있을까? 내가 아는 세계는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내게 호의를 베풀고, 나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고.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또다시 벌을 받는 중이었다. 자일스로부터 도망침으로써 그가 원하는 걸 주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기필코 끝까지 도망칠 거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나를


괴롭히는 남자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결말이자 승리의 트로피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앉아서 머리를 굴렸다. 멍청하게 웃으며 순종하는 게 훨씬 편하고 쉬운 길이겠지만 난


이미 그 길을 거부했다. 이 추위는 내가 선택한 것이었고 나는 그에 대해 만족했다.

다만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지?

그때였다. 나는 군화 소리를 들었다. 분명했다. 나는 군홧발 소리만은 확실히 구분할 줄 알게 되었으니까.


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 두 사람 이상이 걸어오고 있었다. 혁명군이 틀림없었다!

나는 벽 쪽에 최대한 붙어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확실해. 일부러 이곳 주민들에게 한시적으로 통금을 걸었으니 뭔가


움직인다 싶으면 높을 확률로 그년일 거라고.”
“알겠습니다.”

“오늘 안에 잡지 못하면 다음에는 더 힘들어질 거야. 장장 삼십 킬로미터를 도망친 여자다.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소리라도 가볍게 대하지 마라.”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물론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삼십 킬로미터 이야기는 뭐지? 솔즈부르


저택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그렇게나 멀었던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지금 나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그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벽에 등을 대고 옆으로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그들이 알아차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근처에서 깡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나는 완전히 굳어서
커다란 깡통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쳐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머지않아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불빛이 건물 벽 틈새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이젠 내 발소리가 크게 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골목의 그림자 사이사이를 누볐다.

마침내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누구야?”

또 다른 불빛이 나타났다. 손전등을 든 군인이었다.

나는 불빛에 완전히 잡히고 말았다.

자일스 헤센은 홀로 거리를 순찰 중이었다. 텅 비어 버린 거리를 밝히는 건 희뿌연 가스등뿐인 어둑한


밤이었다.

탈출한 벨담 여자 하나를 잡기 위해 이곳 사람들에게 통금 명령까지 내렸다. 그의 계산이 맞다면 마르티나


솔제는 아직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목표물을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지휘관이나 마찬가지인 자일스에게 그 모든 책임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될 작전이었다.

더 나은 위치로 올라서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자리만큼은 지켜야 했다.

그에겐 아직 몰락해선 안 될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미 부하들이 이 근방을 봉쇄하고 흩어져서 수색 중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작전이 실패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자 하나였다. 혁명군이 고작 여자 하나를 상대로
패배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더더욱 작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일스는 자꾸만 정신이 분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는 마르티나 솔제를 찾아 이 마을을 방문한 것이었지만 이곳에는 그가 찾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다.

릴리, 이제는 안나 키팅이라는 이름으로 저택을 떠난 여자. 잊으려 한들 잊을 수가 없는 사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겐 저마다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욕망이든,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든, 혹은 사명감이든.

자일스는 안나와 함께했던 짧은 순간순간을 잊지 못했다. 이만 그의 세상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날조차 안나의 곁에 있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건 안나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야 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두렵게 만든 건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저택에서 도망치게 만든 것인지…….

안나는 그에게 무한한 평온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안나에 대한 위협은 그에 대한 위협과도 같았다.
안나를 해치려 하는 이가 있다면 자일스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일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은 마르티나 솔제를 체포하는 게 우선이었다. 임무를 빠르게 마무리해야
안나를 찾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그때, 근처에서 소음이 들렸다.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던 사위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사물이 넘어져서 와장창 깨지는 소음이 났다.

자일스는 곧장 불빛이 깜박이는 쪽으로 달려갔다. 부하들이 뭔가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다급한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단순한 취객이나 철없는 아이의 훼방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골목 너머 어딘가에서 부하들이 여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섣불리 골목 안으로 진입하는 대신


벽에 몸을 붙이고 발소리가 들리는 위치를 파악했다. 목표물의 발소리는 군화를 신은 부하들이 내는
소리와는 확연히 구분될 터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골목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의 부하는 아니었다.

그보다 두 뼘은 더 작은 여자였다.

자일스는 몸을 날려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여자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버둥대는 것이 느껴졌다.


자일스는 목표물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벽 쪽으로 밀어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찍어 눌렀다.

“움직이지 마.”

그가 으름장을 놓자 저항이 멈추었다. 자일스는 여자를 잡지 않은 손으로 손전등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환한 빛 속에서 그가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자일스의 사고 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릴리?”

*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이었다. 내게 다음 기회는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앞을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 기회에


알았다.

좁은 골목 안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건 내게 불리했다. 그들은 숫자가 많았고, 이런 좁은 곳에서


포위당하면 그땐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들을 따돌리는 것만이 내가
가진 최선의 수였다.

마침내 환한 달빛이 비추는 커다란 거리를 발견한 나는 그쪽으로 곧장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에게 잡힐 것만 같아서 나는 오로지 앞만 봤다.

마침내 골목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던 그때, 별안간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나를 움켜잡았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억센 남자의 손아귀를 뿌리칠 힘이 내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혁명군이 나를 차갑고 딱딱한 벽 위로 몰아붙였다. 이마에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분명 벽에 긁힌


상처가 났을 거다. 그가 나를 향해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설마…….

그가 내 얼굴을 향해 손전등 불빛을 비추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얼굴을 확인한 혁명군은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지도, 동료들을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서서 내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릴리.”

그 이름.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이름이었다. 릴리에 대해 아는 이는 오로지 단 한 사람뿐일


텐데.

나 또한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자일스 헤센이 내 앞에


있었다. 어쩐지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이제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나를 잡았는데 왜 저러는 거지?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은


몰랐다는 건가?

그가 뭔가를 더 하기도 전에 부하들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대위님! 잡으셨습니까?”

<20 화>
수 쌍의 손전등 불빛이 나타나 또다시 나를 비추었다. 순식간에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그 여자가 아니잖아!”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통금 명령 못 들었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그만.”

자일스의 명령 한 마디에 그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동요한 것처럼 보였지만, 목소리만큼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지휘관의 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자는 내가 알아서 돌려보낼 테니 각자 원위치로 복귀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헛수고를 해서


분통이 터지는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 없어. 다들 이해하겠지?”

“알겠습니다.”

“돌아가. 이러고 있는 도중에도 그 여자가 한 발짝씩 멀어지고 있을 거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흩어졌다. 마침내 나와 단둘이 남게 된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았던 손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우리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나를 놓아주었다.

“릴리. 그러니까―”

그가 말을 꺼낸 순간, 내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나는 몸을 돌려 도망쳤다. 자일스는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가 나를 쫓아오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 같았다.

발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향해 천천히 조여들어 오는 공포 때문에 반쯤 흐느끼며


정신없이 달렸다.

두 번은 괜찮지만 세 번은 안 돼.

세 번씩이나 내가 증오하는 남자들 때문에 고통받을 수는 없어!

그는 반드시 내게 똑같은 짓들을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똑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어


봤다.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내게 벌어진 일들은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난 아무것도…….

목적 없이 달리기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자일스에게 머리채를 잡힌 이후로는 더 그랬다.

마치 악몽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무리 꿈에서 깨어나려 해도, 꿈속에선 깊은 심해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듯이.

나는 결국 으슥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제발 그가 나를 찾아내지


못하기만을 바라면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발견하기를 바랐다.
이젠 그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갓을 쓴 백열등이 흐릿하게 시야를 밝혔다. 그것이 뿜어내는 빛이 너무 밝아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뭔가가 불쑥 나타나 백열등 불빛을 가렸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웬 남자가 나를 향해 가까이 몸을 숙여 왔다. 처음에는 자일스인줄 알고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 냈으나,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아님을 알았다.

“쉿, 괜찮아.”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일단 이곳은 최소한


감옥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 몸에선 열이 났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내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추운 겨울밤에 얇은 스웨터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으니, 몸살이 안 날 수가 있나. 불쌍한 것.”

그는 내게 계속해서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섣불리 그를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이 주는 온기와 안락함에 기대고 싶어졌다. 내게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준 이는 지금껏 나 스스로밖엔 없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의 목소리로 그런 위로를 들으니 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체감이 되었다.

몸이 아픈 탓인지 마음이 약해진 나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난 참았다. 낯선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으니까.

대신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만 쉬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세상이 밝아져 있었다. 내 정신도 훨씬 말끔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뜬 나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분명 혁명군을 상대로 도망치다 자일스에게 잡혔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그는 나를 놓아줬고……


나는 도망쳤다. 그 후로는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태가 여실해 보이는 좁은 방이었다.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난로가 탁탁


소리를 내며 방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기억해 냈다. 그 남자! 내가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지난밤에 내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며 무어라 말을 건네 왔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자일스의 부하일까? 저 문 밖을 나가면, 제복을
입은 혁명군과 눈이 마주치게 될까?
그러나 문이 열리고 어젯밤에 나를 돌봐 주었던 남자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는 혁명군이 아니었다. 제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자일스가 나를 잡았다면 직접 나를


대면하고 싶어 했을 테지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남자가 내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목마르지? 마셔.”

나는 컵을 받아 들면서도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자일스의 부하가 아니라면, 그는 누구지? 나는 세상과


맺은 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 천지에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나를 달래듯이, 혹은 부탁하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깨끗한 물이야. 아무것도 안 들었어. 믿어도 돼.”

“내가 뭘 믿고?”

“너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은 사람이 고작 물 한 컵으로 너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난 당신을 몰라.”

“그래. 나도 알아. 갑자기 낯선 곳에 와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게 된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지난밤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넌 아직 아파.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얼른 나아야지.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넌 그 전에 수분을 보충해야만 해. 지난밤 일로 탈수가 왔을 거야.”

나는 물컵을 내려다보았다.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물에 뭔가 들어 있지는 않은지 테스트만 해 볼


요량으로 살짝 입술을 적셨다. 맛은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훨씬 더 목이 말랐다는 걸 깨달은
나는 물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그가 나를 타일렀을 땐 이미 내가 컵을 비우고 난 뒤였다.

“더 갖다줄까?”

“나를 왜 도와주는 거야?”

“종종 좋은 일도 일어나기 마련인 법이야.”

“나한텐 안 그래.”

남자는 내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더니 말했다.

“네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어.”

“…….”

“긴장하지 마. 이걸 빌미로 너를 협박하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나는 반대로 네게 협조를


요청하고 싶어.”

“웃기고 있네. 이런 식으로 길거리를 떠도는 여자들 잡아다가 지금껏 어디에 팔아먹었어? 나도
팔아넘기려고 이러는 거야?”
“자일스 헤센이 너를 쫓고 있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유명한 사람이지. 물론 좋은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입스윈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영웅이나 마찬가지일 거야. 벨담을 끌어내리고, 이곳의 영광을 되찾아 준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그는 지독한 냉혈한과도 같아. 그가 잡아 넣은 희생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야.”

“구조한다고?”

“그래. 혁명군의 눈에 든 이상 이 땅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어. 아마 평생을 도망 다니면서 살아야겠지. 난


너를 이 땅 밖으로 빼내 줄 거야. 그럼 너는 자유를 찾겠지.”

“그 대가로 당신은 뭘 얻지?”

“꼭 대가를 받아야만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개소리.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을 돕겠다고 나설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자일스 헤센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더 많은 사람들을 고문했고. 그에게 적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가 입스윈의 자유와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동안, 그의 가슴팍에 달린 훈장들이
빛나는 동안 그만큼 원한을 품은 사람들도 늘어났을 거라는 생각은?”

“그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자일스가 적이야?”

“그럼. 두말 하면 입 아플 소릴.”

“그럼 자일스가 당신도 쫓고 있어?”

“나에 대해 알아낸다면 반드시 나를 쫓아오겠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야. 그가 바라 마지않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일스가 너를 그리도
간절하게 원하고 있으니, 나는 반대로 네게 자유를 되찾아 줄 거야.”

“……당신이 그럴듯한 말로 나를 속여서 사람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힘들여서 너를 설득하려 하지도 않겠지. 내가 널 사창가에라도 팔아넘길


생각이었다면, 그냥 지난밤에 네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 이미 널 팔아 치우지 않았을까?”

그는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말이 맞기도 했다. 나는 힘없는 여자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그가 완력을 써서 나를 제압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는 구태여 나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정말 나를 외국으로 데려다줄 거야?”

“네가 나를 믿고 따라오기만 한다면. 선택권은 네게 있어. 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믿겠다고 한다면 정말 기쁠 테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아. 네가 결정해. 적어도
나는 자일스 헤센이랑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거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에 나가 있을게. 마음 정하면 내게 말해 줘.”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그의 말대로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를 믿어도 될까? 외국으로


데려다준다는 건 허울 좋은 거짓말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 정말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는 이


마을을 떠날 여비조차 없었다. 떠난다 해도 자일스가 더 빠를지 몰랐다. 아니, 그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서는 가망이 없었다.

남자가 했던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생 도망치며 살아야 할 거야. 이 땅을 떠나지 못하면, 나는


몇 번이나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몰라. 그는 마음이 바뀔 때까지 나를 쫓아다니겠지. 그리고 그가 마음을
바꾸는 일 따위는 평생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남자를 믿어야 할까?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온 사람일까? 왜 자일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을까.

적어도 남자는 자일스 헤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과 신분에 대해서도, 그가 해 온 일들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는 내게 자일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침대 바깥으로 나갔다.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우선은 그를 믿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이 없는 쪽보단 있는 쪽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그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적의를 믿기로 했다.

문밖에 그가 있었다. 그가 담배를 태우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 줘. 그리고 당신 이름도.”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앨버트 쇼야.”

거리를 활보하던 남자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인 양 최대한 자연스럽게 폐건물 문을 닫았다. 그의
앞에는 낡은 타자기가 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보내야 할 전보는 아주 짧고 간단명료한 단어들에 불과했다.

오직 동료들만이 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보다 힘을 덜 빼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그는 영업 사원 체질이 아니었다. 여자가 그를 흔쾌히 믿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타자기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OPEN FOR BUSINESS」


안나 키팅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21 화>

4. 불안한 조우

봄의 초입. 샌드위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이름난 가게는 아니었지만 싼값에 비해서는 맛이
좋은 편이었다.

나도 기다란 줄에 가담했다. 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누가 왔나 싶었는지 슬쩍 나를 뒤돌아보더니 놀란


눈이 되어 제 앞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냥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제길, 역시 이래서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거다. 이름과 더불어 내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내 사진이 신문
한편을 차지했을 땐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누군가 내게 말을 걸려고 시도하거나 ‘여기 그 여자가 왔다’고 떠들어 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샌드위치를 빨리 받아서 돌아가는 데에 더욱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얇은 트렌치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두 볼을 잔뜩 붉힌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아이가 부모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곧 용기를 냈다.

“사인해 주세요.”

“아, 그래.”

아이에게는 친절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나는 아이가 내민 종이에 내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안나 키팅.」

내 사인을 받아 든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신이 나서 달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스카프


속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앨버트한테 사 오라고 할 걸!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난 바깥바람이 쐬고 싶었을
뿐이다. 게다가 내 얼굴이 신문에까지 오른 판국에 외출 좀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샌드위치를 받기까지는 10 분 정도가 걸렸다. 나는 값을 지불하는 즉시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비텔스덴에서라면 몰라도, 이곳 입스윈에서 그랬다간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몰랐다.

내가 머물고 있는 연립 주택 안으로 들어서고 난 후에야 나는 답답한 스카프를 풀어 헤칠 수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은 여자가 있었다. 금발로 탈색한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열쇠를 꽂고 내 집 문을 따려는데, 문손잡이를 채 돌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안나!”

“제발 큰 소리로 말하지 좀 마!”

나는 다급하게 속삭이며 그를 안으로 밀어 넣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는 자기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정말 뻔뻔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냥 네가 반가워서 그런 거야.”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난 지 스무 시간도 안 됐잖아.”

“꼭 오랜만에 만나야만 반가워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됐어. 소란 그만 피우고 이거나 먹어.”

나는 그의 품에 샌드위치를 들려 주고는 트렌치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앨버트는 샌드위치를 그대로


든 채로 나를 따라왔다.

“이 정도는 괜찮아, 안나라는 이름은 엄청 흔하잖아. 당장 위층에만 안나가 두 명이나 더 있는걸.”

“그래도 난 최대한 조심하고 싶다고. 알겠어?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여길 뜰 때까지는 눈에 띄는 짓 하면


안 된다고.”

앨버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반성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앨버트 쇼와 처음 만난 지도 벌써 두 달 이상이 흘렀다. 그를 믿기로 결심한 후에도, 나는 한편으론 그가


정말 나를 팔아치워 버릴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또 다른 음모를 갖고 있다거나.

하지만 그는 나를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내가 피아니스트로 거듭난 것 또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앨버트는 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그는 말했다. 안나, 넌


외국행 티켓을 갖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야.

그는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잘 웃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난 이런 사람은 평생 처음 만나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는 내게 헌신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는 그를 믿어도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절하거나 서글서글한 호인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자일스 헤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믿을 가치가 있었다.

앨버트는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더니 투덜거렸다.

“난 계란 샌드위치 싫은데.”

“어제는 제일 좋아하는 요리가 계란 스크램블이라며?”

“그건 노른자를 풀어서 익힌 거고, 이건 삶은 거잖아. 난 삶은 계란은 싫단 말이야.”

단점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짜증 나게 굴 때가 있었다. 도대체 스크램블이랑 삶은 거랑 무슨 차이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몫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나는 짜증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보자고 한 거야? 이런 아침부터.”

“아침에는 보면 안 돼?”

“말꼬리 잡지 말고.”

“내가 아무 용건도 없었다고 하면 화낼 거야?”

내 눈치를 살피던 그가 얼른 꼬리를 내렸다. 간만에 그의 번듯한 얼굴에 진지함이 서렸다.

“다름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어서 그래.”

“좋은 소식?”

나는 얼른 그의 곁에 앉았다. 앨버트는 의기양양하게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편지 봉투가 실링


왁스로 봉인되어 있었다.

“너를 위한 골든 티켓이야.”

“그게 뭔데? 말장난하지 말고 이리 줘 봐.”

“어허, 안나.”

그가 편지 봉투를 향해 손을 뻗는 나를 제지하며 ‘골든 티켓’을 든 팔을 높이 올렸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예의 바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골든 티켓을 줄 수 없어.”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마법의 주문이 있다는 소리야.”

“말장난하지 말고 진짜 줘 봐!”

“주문을 외워야만 줄 수 있다니까! 그냥 딱 한 마디만 하면 돼. 어서.”

그는 작은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단념하고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부탁합니다.”

망할 앨버트는 나를 놀리는 게 퍽 재밌었던 모양이다.

“뭐가 부탁인데?”

“편지.”

“편지가 뭐?”

“부탁이니까 편지 좀 달라고, 진짜!”

그래도 그는 멈춰야 할 선을 아는 남자였다. 알았어, 알았어. 앨버트가 나를 달래며 편지를 넘겨주었다.

나는 봉인을 뜯고 안에 숨겨져 있던 빽빽한 글씨들을 읽었다.

“이건…….”

“내가 좋은 소식 있다고 했지?”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안나, 난 이런 걸로 장난 안 쳐. 네가 그토록 바라 왔던 거잖아.”

골든 티켓의 정체는 초청장이었다. 다름 아닌 비텔스덴에서 날아온 거였다. 그것도 친절하게 우리말로


번역까지 되어 있었다.

나는 이게 진짜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첫 줄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안나 키팅 양.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비텔스덴 필하모닉 연주자 협회에서 감히 키팅 양께


편지를 드립니다.

자격에 맞는 음악가를 찾고 있던 저희 측은 최근 몇 달간 열린 콩쿠르에서 우승을 독차지한 독보적인


피아니스트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키팅 양께서 괜찮으시다면, 귀하를 비텔스덴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귀하께서 제안받으실 내용은 저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속 피아니스트로…….」

“네 소문내느라 엄청 힘들었어. 알지?”

“이 편지, 언제 도착했어?”

“배달부가 몇 시에 왔다 간 건지는 몰라도 이걸 발견하자마자 곧장 너한테 달려온 거야.”

“그럼 나, 갈 수 있는 거야?”

나는 항상 외국으로 떠나기를 갈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외국이라면 내가 안전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른 외국이라면…… 어쩌면 나는 몸을
사리며 살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말이다.

“당연한 걸 묻네, 안나. 비텔스덴에서 너를 공식으로 초청했잖아. 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난…… 어쩌면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넌 대단한 피아니스트야! 신문에까지 기사가 났잖아.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피아니스트, 3 대 콩쿠르를 석권하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알기 시작했어. 아마 곧 있으면 네 이름을
걸고 리사이틀도 열 수 있을걸.”

아, 그래. 신문도 문제가 되었다. 내 소식이 비텔스덴까지 닿은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비텔스덴


사람들까지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건 곧 ‘그 사람’도 내 이름에 대해 알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입스윈을 떠나야 하는 건 그 사람이 내 꿈에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떠올리기 싫은 남자.


자일스 헤센. 나는 자일스가 나를 잡으러 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마수를 뻗지 못할 만큼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안나, 정말 비텔스덴으로 떠날 거야?”

“너야말로 왜 당연한 걸 물어?”

“혹시라도 네가 마음을 바꿨으면 기차표를 취소해야 하니까 그렇지.”

“벌써 표를 샀다고?”

앨버트는 벌써 표까지 구비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의 행동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가 내게 이토록


진심인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앨버트는 내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마냥 생각하고 행동했다.

“네가 빨리 떠나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그건 맞지만…… 설마 지금 당장 짐 싸서 떠나야 한단 소리는 아니지? 나 가방 하나도 안 싸 놨단


말이야.”

“시간은 충분하니까 괜찮아. 비텔스덴행 열차는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표를 구하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구해야 해. 그래서 미리 끊어 놓은 거고. 기차가 출발하려면 한…… 일주일 남았나?”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시장에서 장을 볼 생각부터 했다. 음식을 잔뜩 사다 놓고 일주일 동안 집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것이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외출을 했다가 군복을 입은 순찰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건물
벽 뒤에 숨어서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앨버트는 그런 나를 다독이며 말해 주었다.

“비텔스덴에 내릴 때까지 같이 가 줄게. 거기서라면 너도 안전할 거야. 그 남자도 널 쫓아오지 못할 거고.


남의 나라에서 그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작게 감사를 표했다. 앨버트는 가끔씩 짜증 나게 굴 때가 있기는 해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 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상상하곤 한다.

“기차는 어디서 타면 돼?”


“몬트리올 기차역에서.”

처음 들어 보는 장소였다. 난 입스윈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갇혀 산 덕분에 이곳 지리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럼 일주일 후에 거기로 가면 되는 거야?”

“맞아. 정오를 넘어서 가면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기차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오리엔트 특급열차. 나를 미지의 땅으로 데려다줄 기차의 이름이었다.

앨버트는 내 곁에서 뿌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슴이라도 한 마리 물어 온 사냥개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22 화>

자일스 헤센은 신문에 실린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안나 키팅.


언뜻 평범한 이름처럼 들렸지만, 그에게만큼은 무엇보다도 특별한 이름이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 색이 옅어지고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기에.

얼마 전 그는 릴리, 아니 안나의 연주를 들으러 갔었다. 입상자를 위한 연주회였다. 명망 있는


콩쿠르였던지라 관객들이 꽤 모였고, 3 천 석에 달하는 커다란 홀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그가 연주회를 찾아간 건 안나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이미 안나라는 이름에 대한


단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흰 드레스를 입고 무대로 올라서는 금발의
여성을 목격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게 분명했던 그녀가 갑자기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어 온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아는 그녀가 맞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안나는 하얗고 부드러운 천에 휩싸인 채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건반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연주를 시작했다.

안나의 연주에는 심연과도 같이 깊은 감정이 실려 있다. 그게 다른 이들과 안나를 구별 지어 주는


특징이었다. 자일스는 섬세하게 휘몰아치는 음계의 향연을 듣고는 얼핏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나의 연주를 통해 확신했다. 아, 내가 아는 그녀가 맞구나.

자일스가 발걸음을 끊은 사이 그녀는 저택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래도 그가 없는 새에 위험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알릴 여유도 없이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저택에 침입했고, 그녀를 해하려 했던 걸까?

그렇다면 누가?

자일스는 인근 마을에서 안나를 다시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망쳤다. 자일스가
무어라 말을 건넬 여유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안나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확신한 자일스는 접근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섣불리 그녀에게
접촉하기보다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안나의 동선을 파악해 사람을 배치해 놓고,
도청 센터의 힘을 빌렸다.

자일스의 눈에 띄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앨버트 쇼. 정황상 안나의 후원자인 것 같았다. 그녀와의


관계도 제법 친밀했다. 안나는 앨버트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앨버트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 그는 해외에서 살다가 최근에 입스윈으로 입국한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앨버트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정보의 맥이 끊겼다. 그에 대해서만큼은


깊게 파고들어 갈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의심스러웠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일스는 앨버트 쇼에게 붙여 둔 비밀 요원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원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코트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자일스에게 건넸다.

도청 기록이었다.

“원하시면 녹취록을 직접 들으시겠습니까?”

“아니, 우선은 읽어 보지.”

그가 도청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안나에게 날아온 초청장. 비텔스덴. 외국행 급행열차표…… 오리엔트


특급열차.

“그가 ‘몬트리올 기차역’이라고 말한 게 확실한가?”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취록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심각한 사안이었다. 몬트리올 기차역은 얼마 전 재정난으로 폐쇄되었다. 폭격으로 인해


주변국에서의 기차 운행은 한정적이었고, 입스윈 또한 혁명의 여파로 인해 관광 산업이 주춤했다.
중앙역은 어찌저찌 살아남았으나, 변두리의 작은 기차역은 결국 폐쇄 명령을 피하지 못했다.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라고?”

“전쟁 이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한 호화 열차인 것으로 압니다. 그런 열차가 폐쇄된 역에 정차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최근에 이 열차를 예매한 사람들이 있었나?”

“입스윈에는 그런 이름의 열차가 아예 오질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중에 팔린 표도 없습니다. 이자가


언급한 비텔스덴행 티켓은 존재하지 않는 물건입니다.”

자일스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봉투에 든 필름 사진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던 앨버트
쇼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자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요원을 물렸다.

존재하지 않는 티켓. 폐쇄된 기차역. 앨버트는 안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안나를 둘러싼 위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경고해야만 했다. 앨버트 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했으나, 그가 안나를 대상으로


비밀스런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름을 바꿀 정도로 조심에 조심을 기하던 안나가 앨버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겉으로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 그녀를 무르게 만든 것일까? 어째서 그를 신뢰한 것이지?

자일스는 요원에게서 건네받은 봉투를 품 안에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료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안나에 대한 일만큼은 그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신분을 세탁하기는 했지만 안나는 여전히 벨담 귀족의 여식이었다. 동료들에게 그녀에 대한 조사를 시킬
수는 없었다. 그건 안나를 돕는답시고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안나를 다시 만나 볼 시간이었다.

음식을 사다가 집 안에 쟁여 놓고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겠다는 생각은 정말이었다. 나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에 스카프로 코 밑을 최대한 가렸다.

쉽게 상하는 음식은 제외했다. 나는 넉넉히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가방을 채웠다. 앨버트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 그래도 그는 나를 너무 많이 신경 써 주었다. 이런 일쯤은 나 혼자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장을 순찰하던 경찰들과 눈이 마주쳤을 땐 그 선택을 후회했다. 젠장. 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얼굴을 가린 여자가 그들 눈엔 못내 수상쩍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망치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이, 아가씨.”

진압 봉을 든 경찰이 허리를 굽히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결백한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무슨 일이죠?”

“잠시 검문 좀 합시다.”

경찰이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나는 품을 뒤적여 신분증을 꺼냈다. 관청에서 발급받은 것이기는 했지만 거기 적힌 인적 사항은 백 퍼센트


가짜였다. 나는 손을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분증을 받아 든 경찰은 묘한 표정으로 동료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름이 안나 키팅이라고?”

“맞는데요.”

“스카프 내려 봐요.”

나는 할 수 없이 스카프를 내렸다. 내 얼굴을 본 그들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탄성을 지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그 여자네! 그 피아니스트!”

“이봐요, 당신이 우리 동네에서 얼마나 화제인지 알아요? 내 애인이 당신 업적에 푹 빠졌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피아노 하나쯤 배워 놓을걸.”

“안나 키팅, 여기서 장을 보는 편입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들은 동네 시장에서 나를 만났다는 게 퍽 놀라웠는지 호들갑을 떨어 댔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을 느끼며 대충 대답했다.

“아, 네에…….”

“실물이 훨씬 더 낫네. 그 사진사는 해고해야겠소. 이럴 때가 아니라 사인 하나만 받아 놓읍시다.


당신이랑 이렇게 마주칠 기회가 얼마나 더 있겠어?”

나는 그들을 최대한 빨리 치워 버리기 위해 순순하게 굴었다. 벌써 집에 가고 싶었다. 수첩에 휘갈긴


사인을 받아 든 경찰들은 흡족해 보였다.

“그래, 시간 뺏어서 미안합니다. 설마하니 당신일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검문하기를


잘했군.”

“스카프로 얼굴은 왜 가렸습니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내가 대충 얼버무렸다.

“다음부터는 그러고 다니지 마세요. 수상쩍어 보이거든요. 뭐, 그 덕에 이렇게 유명 인사를 만나는


영광을 누렸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신분증을 품에 넣고
다시 스카프를 올렸다.

장은 대충 봤으니까 이제 집에 가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가방을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곁에서 멀어졌다.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으로 접어들던 그 때였다. 나는 누군가 나를 골목 사이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크게


휘청거렸다. 불쾌한 숨결이 가까이서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다치기 싫으면 가진 거 다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웬 남자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지독히도 운이


나쁜 하루였다. 내 사인을 받는답시고 나를 귀찮게 하던 경찰들은 꼭 이런 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원하는 걸 들어주고 보내 버리고 싶지만, 그러려면 내 가방에 든 시장거리를 포함해 돈을 다 털어서 줘야


할 것이 뻔했다.

그건 싫었다. 그럼 시장에 또 와야 하니까. 나는 외출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앨버트에게 동행을 요청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가 곁에 있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나던데.

나는 협상을 시도했다.

“가진 것의 절반을 줄게요.”

당연하게도, 그는 내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다 내놔.”

“아, 진짜 왜 이래! 이거 다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진짜 죽고 싶냐? 내가 말했지, 다치기 싫으면―”

나는 가방으로 그를 밀치고 있는 힘껏 뛰었다. 그러나 강도 녀석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팔팔한


인간이었다. 나는 금세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 절대 가방만은 뺏기고 싶지 않았던 내가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텼다.

“저리 가! 이거 진짜 얼마 안 한다고! 감자랑 빵밖에 없단 말이야!”

“이게 진짜 미쳤나! 빨리 안 내놔?”

나는 내게서 가방을 빼앗으려는 그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진짜인데. 정말 감자랑 빵밖에 없단 말이다.
그는 내가 가방에 금덩이라도 숨겨 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고작 감자
때문에 이러고 있는 내 꼴이 서러워서 눈물이 고였다.

하루빨리 비텔스덴으로 떠나든가 해야지―


갑자기 남자가 내게서 손을 뗐다. 알고 보니 그는 바닥에 쓰러져 군인에게 호되게 맞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은 강도를 흠씬 두들겨 패더니 한 손으로 그를 잡고 일으켜 엉덩이를 차 주었다.

“저리 가, 빌어먹을 놈.”

강도는 모자를 고쳐 쓰고는 비틀거리며 줄행랑을 쳤다. 나 또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군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그는 나를 아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뭐지? 나는 고개를 들어 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23 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동자. 아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못했다.


그는 잊을 만하면 내 꿈에 등장하곤 했으니까.

나는 항상 그날 밤의 꿈을 꿨다.

그에게 머리채를 잡히던 그날 밤의 꿈을…….

자일스 헤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군복을 입은 채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꿈속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

“안나.”

그가 나를 불렀다. 자일스는 내 이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뻔뻔하게도 그는 나를 위하는 척 목소리를 꾸며 내고 있었다.

“어디 봐. 다친 곳은 없는지―”

나는 꿈속에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 냈다. 자일스가 내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가방을 품에 꽉


끌어안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안나!”

그가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둔탁한 군화 소리가 나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인파가 몰린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가방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를 떼어 내려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불만 섞인 눈길을 보냈지만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내
작전이 형편없었음을 알아챘다. 사람들은 웬 민간인 여자보다 군인에게 길을 더 잘 터 주었다.

군복을 입은 자일스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양 길을 훤히 열어 주었다.

인파를 뚫고 나온 나는 무작정 달렸다. 달리기 실력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피해 도망치면서도 나는 억울함이 목구멍 위로 치고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내가 도망쳐야 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때, 이제 막 출발하려는 전차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잠깐만요! 잠깐만!”

놀란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전차 안으로 뛰어 올랐다. 종이 울리고 전차 문이


닫혔다. 땀을 줄줄 흘리며 가방을 끌어안은 채 쓰러진 나를 승객들이 신기한 동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쫓아온 자일스가 전차 외벽을 두드렸지만 이미 전차는 출발하고 난 뒤였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우두커니 선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앨버트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신발만 겨우 벗은 채로 소파에 누워 담요를 끌어안고 있었다. 추격전을 벌일 때 얼마나 필사적으로


뛰었던지 힘이 다 빠지고 없었다. 내가 사온 식재료들은 바닥에 쏟아져 나뒹굴었다.

물론 지금은 앨버트가 그것들을 다 정리했다. 그는 좁은 부엌에서 수프를 끓이는 중이었다. 내 기운을


북돋으려는 생각이었는지 그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채널에서 흥겨운 재즈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 됐다.”

앨버트의 목소리는 얼핏 나른하게 들리면서도 느리게 끄는 데가 있었다. 그는 나름 미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수프 냄비를 들고 와서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안나.”

나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앨버트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이리 와. 밥 먹어야지.”

입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내 세상은 아직


안전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그가 내 몫을 떠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는 안 먹어?”

“난 다른 거 먹었지. 넉넉하게 끓여 뒀으니까 많이 먹어. 배라도 든든해야지. 그렇지?”

나는 그가 썰어 둔 빵 조각을 수프에 적셨다. 난 내가 배고프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수프를 떠먹는 나를 앨버트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맛은 괜찮아?”
“그 미친놈이 나를 쫓아왔어.”

내 동문서답에도 그는 그저 웃음만 지었다.

“적어도 기운은 돌아왔구나.”

“갑자기 나타나서 날 쫓아왔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한 걸 몇 번이나 참았어.”

“그놈이 확실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얼굴만큼은 헷갈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일스 헤센이


맞았다.

“그때랑 하나도 안 변했어. 나는 이렇게 달라졌는데.”

“혹시 곁에 동료를 달고 있었어?”

“아니. 그는 혼자였어. 자일스는 처음 만났을 때를 빼면 동료랑 같이 다닌 적이 없어.”

수프를 떠먹다 뭔가 떠올린 내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아이고.”

“앨버트,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응. 천천히 말해 봐.”

“……내 이름을 말했어. 내 이름 말이야. 나를 안나라고 불렀어. 릴리가 아니라 안나라고.”

안나. 흔하디흔한 새 이름이 그의 목소리를 빌려 귓가에 들려오는 순간, 내 눈앞이 순간적으로 어지럽게
돌았다. 잘 숨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아주 예전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분명해. 난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이젠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내가 사는 이곳도
알고 있을지 몰라.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안나, 진정해. 내가 뭘 해 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자일스에겐 필요 없을지 몰라도 내게는 동료가 절실했다.

“기차를 탈 때까지 여기 있어 줘. 혼자 있기 싫어.”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술도 좀 사다 주면 안 될까?”

“평소에 마시던 걸로?”

“……응.”

나는 수프를 떠먹으려다 재빨리 덧붙였다.

“빨리 갔다 와야 해.”

“명심할게.”
앨버트는 겉옷을 입고 내 곁을 지나쳐 대문을 나섰다. 찰칵. 그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은 나는 식어 가는 수프를 기계적으로 떠먹으며 생각했다. 자일스가 내게 이리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대단한 미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랬다. 그의 주변엔 나보다 더 나은 여자들이 차고


넘칠 텐데, 자일스는 나를 잊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복수심 때문인가? 내가 그를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그는 내게 호의를 베풀고, 내 목숨을 살려 주기까지


했는데 나는 그에게 감사하단 말도 없이 도망쳤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그에게 수백 번도 넘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단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게 복수심을 품을 일이란 말인가?

어쩌면,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내가 답례하길 바라면서 나를 도왔는데, 내가 그의 기대를


저버렸나? 하지만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었지? 그가 내게서 가져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왜 추적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비텔스덴으로 떠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다.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 딱 며칠만 버티면 나는


외국에 가있을 것이고, 그는 나를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할 거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집 안이 전화벨 울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깜짝 놀란 나는 숟가락을 든 채 굳어 버렸다.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누구지? 전화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나는 현관 쪽을 쳐다보았다. 앨버트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전화기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끈질기게 울려
대고 있었다.

붉은 색의 전화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귀 옆에 갖다 댔다.

자일스는 붉은 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린 뒤, 신호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표는 안나와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유령을 만난 사람처럼 겁에 질려


도망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안나는 얼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일스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안나가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얼마 정도를 기다렸을까, 이내 신호음이 뚝 끊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일스는 급하게 덧붙였다.

“제발, 전화 끊지 말고 들어 봐. 해야 할 말이 있어.”

“…….”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부터 말하자면…… 널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사실은 널 직접 만나서 했어야
할 말이었어. 앨버트 쇼에 관한 거야.”

“왜…….”

안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안나, 들어 봐. 그 남자는―”

“내가 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해?”

돌연 그녀가 물어 왔다. 이제 할 말을 잃은 건 자일스였다. 그는 안나가 그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일스, 말해 봐.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당신에게 뭘 그리 잘못했어?”

“안나.”

“그래, 나는 말도 없이 떠났어. 하지만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었지? 난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당신에게 지은 죄가 뭐가 있다고 날 계속 따라다니는 거야? 말해 봐, 지금까지 나를 감시하고
있었지?”

“안나, 넌 뭔가 잘못 알고 있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던 거야?”

“그건―”

“그날 이후로 내 뒤를 밟았던 거잖아.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왜 나를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건데? 난 그냥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야. 감사 인사가 부족했던 거면 지금 몇 번이라도 해 줄게. 제발
나를 내버려 둬. 제발…….”

“안나. 너는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

수화기 너머에서 안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잘 알고 있어. 당신 덕분에!”

“제발, 단 1 분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 봐. 네 후원자인 앨버트 쇼는 신원이 불분명한 남자야.


그럴듯한 신원 이력은 있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정보를 찾을 수 없는 남자라고.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그가 너를 태우려는 그 기차는…….”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구나, 당신은.”

“미안해. 네 주변을 조사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는 갑자기 사라졌고…….”

“그래, 내가 잘못했어. 말도 없이 가 버린 거, 내가 잘못한 거니까…… 이제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자일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안나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 이름은 죽을 때까지 기억할게. 그러니까…….”

“안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직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내가 떠나도록 내버려 둬.”

“잠깐만―”

전화가 끊겼다.

<24 화>

“안나. 안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기까지는 몇 초 정도가 걸렸다. 간신히 꿈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앨버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종종 이럴 때가 있었다. 앨버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저번과 똑같은 꿈을 꿨다는 것을.

그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안나, 괜찮아?”

“괜찮아…… 그냥 꿈이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네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새벽이었다. 앨버트는 하루 종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내 곁만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었다. 대문 밖에서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도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몇


시간씩 숨어 있고는 했다.

“버티, 미안해. 나는…….”


그는 횡설수설하는 내 손을 잡고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괜찮아. 네 말대로.”

“빨리 여길 뜨고 싶어. 숨어 사는 것도 이젠 지쳤어. 난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오늘 해가 뜨면 출발할 거잖아. 자고 일어나면 돼. 그럼 우린 이곳을 떠날 거야. 괜찮아, 안나. 난


바로 옆에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다시 잠에 들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앨버트는 스탠드를 껐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기차만 타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너도, 나도…….”

그는 내가 잠에 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침대 옆에 앉아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단한 일주일의 끝.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출발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집을 싹 비웠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게는 짐이 많지 않았으니까.


나는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이곳을 완전히 떠나려는 거였다. 내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가기는
싫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자일스가 기차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어쩌면 그가 기차역까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앨버트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직접 차를 운전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봄꽃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혁명으로 뒤흔들렸던 입스윈에도 나름대로의 평화가 깃들었다.
봄철 옷을 입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 대며 자동차를 따라 달리다 이내는 멀어졌다.

기차역은 내가 살던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안나, 비텔스덴에 가면 뭘 하고 싶어?”

운전을 하던 앨버트가 문득 물어 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문제라 대답하기 위해선 고민을 좀


해야 했다.

“일단은 지낼 곳을 찾아야겠지.”

“그런 거 말고. 하고 싶은 거 말이야. 식당에 간다든지, 어딜 방문하고 싶다든지…… 그런 것들.”

“잘 모르겠어.”

보통 사람들은 타지로 떠난다고 치면 그런 것들부터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타지에


대한 동경이나 기대감은 내게 둘째 문제였다. 내가 입스윈을 떠나는 건 오로지 자일스 헤센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새 신분증을 만들었다. 이제 엘로이즈 비스마르는 완전히 죽었다. 아무도 그녀가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었다. 그는 군인이었고,


잔인했으며, 나를 원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면 나를 잊을 법도 하건만, 그는 끈질기게 내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비텔스덴에서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권리. 어깨를 펴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난 외국어를 잘 못하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만 급급해 언어의 장벽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 가서 시장도 제대로 못 보면 어떡하지? 사기를 당할 수도 있잖아. 그쪽 말을 잘 못하면.”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왜?”

“안나 키팅이 직접 시장에 갈 일은 다신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시장이 대수인가. 차라리 그런 사소한 문제들을


걱정해야 하는 삶을 살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창에 머리를 대고 생각하던 내가 불쑥 말했다.

“고양이를 키울까?”

“갑자기 그건 왜?”

“그냥…… 문득 든 생각이야. 집 안이 적막한 건 싫거든.”

“안나, 내가 말해 두는데 걔넨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그 짐승들은 순하고 귀여워 보일 뿐이지,


완전 맹수들이라고. 어쩌면 네가 그놈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왠지 맘에 드네.”

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얼마나 더 달렸을까. 앨버트가 창밖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오래된 기차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짐을 내렸다. 나는 그의 곁에 딱 붙어서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그리곤


혹시나 자일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지 사람들 사이를 끊임없이 눈으로 훑었다.

기차를 타러 온 인파로 장내가 벌써 시끌벅적했다. 앨버트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헤치고 나아가 내가


수월하게 앞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침내 우리는 플랫폼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안나, 이 기차야. 우리가 타야 할 기차.”

나는 앨버트의 말을 듣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증기 기관차가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저 새까만 고철덩어리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런 게 레일 위를 달려 나를 비텔스덴까지


데려다줄 거라는 사실조차 잘 와닿지가 않았다. 저걸 움직일 정도면 얼마나 많은 동력이 필요할까.

우리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기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엔진을 태울 석탄으로 가득하지는 않을까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바깥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섬세한 무늬를 새긴 고급 원목과 인테리어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정 간격으로 매달린 전등은 따스한
불빛을 내뿜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비스마르 저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대로 탄 거 맞지?”

내 물음에 앨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차가 맞아. 확실히 일반적인 기차와는 다르지.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즐긴다고 생각해. 이런
특급열차는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앨버트는 나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나는 무작정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차를 처음 타는


사람이었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막연히 객실에 가서 짐을 내리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앨버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객실이 아니었다.

그곳은 만찬장이었다.

자일스 헤센은 기차역을 둘러보았다. 그가 알기로 이 기차역은 폐쇄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공상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몬트리올 기차역에도 한때 이런 시절쯤은


있었을 테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폐쇄된 기차역. 수많은 여행객들. 갑자기 나타난 특급열차. 존재하지
않는 티켓…….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게 개인의 소행은 아니라는 거였다. 더 커다란 배후가 있었다.

그는 안나가 기차에 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늦었다. 안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지금쯤 기차에


타고도 남았을 것이다. 풀어야 할 의문들이 너무 많았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또한 기차에 타야만
했다.
자일스는 안나를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텅
비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스스로를 움직일 동력이 필요했고……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방향을
안내하는 빛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은 반드시 미쳐 버리고 만다. 자일스는 스스로를 붙들고 있기 위해서라도


안나가 필요했다. 그녀가 무언가 내놓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안나가 온전한 모습으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으로써 우리 둘 모두 괜찮을 수만 있다면.

자일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기차에 올라탔다. 군복을 벗은 그는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였다.

호화로운 내부를 짧게 탐색한 후, 그는 안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가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안나를 찾아서 그녀를 설득한 다음,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데리고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자일스가 만찬장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승무원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2 번 만찬장은 자리가 다 찼습니다. 1 번 만찬장은 반대편으로 쭉 가시면 나올 겁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람을 찾고 있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안 됩니까?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가 있는데, 혹시 여기 있을지도


몰라서.”

승무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승객분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일스는 이곳에서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다. 따라야 할 질서가 달랐다. 군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처럼 승무원을 두들겨 패고 나아갈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자일스는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그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부우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증기를 내뿜었다. 이윽고 창밖 풍경이 서서히 옆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여정이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

<25 화>

*
“자, 앉아.”

앨버트가 나를 위해 의자를 뒤로 당겨 주며 말했다. 나는 이 상황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우선 밥부터 먹자는 건가? 하지만 아직 짐 가방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만찬장을 둘러보았다. 작은 객실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이런 기차 안에 커다란 만찬장이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천장에 달린 은방울꽃 모양 전등이 화려한 빛을 뿜어냈고, 바닥에는 폭신폭신한 고급 매트가 깔려 있었다.


당장 내 앞에는 흰 테이블보를 덮은 식탁과 그 위에 세팅된 여러 식기들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기차에 탄 것 같았다. 플랫폼이 한층


한산해져 있었다. 급사가 내 잔에 투명한 물을 따르던 그때였다.

플랫폼 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내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앨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버티.”

“응?”

“그가 왔어.”

앨버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니, 그가 왔다니까! 자일스 헤센이 왔다고! 지금 이 기차에 탄 것 같아.”

나는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인데, 그는 태연하게 물이나 들이켜고 있었다.

“앨버트!”

“안나, 진정해.”

“내가 지금 어떻게 진정을―”

앨버트는 두꺼운 커튼을 쳐서 창을 가렸다. 덕분에 자일스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기차에 탔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가 나를 잡아가려고 온 거야. 분명해.”

“괜찮아. 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잖아.”

“뭐?”

앨버트는 오늘따라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다정한 눈빛도, 미소도 전부 똑같았지만 그의 얼굴 위를


덮고 있던 뭔가가 한 겹 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앨버트가 아니었다.

“당연히 자일스 헤센은 너를 따라 이 기차에 타겠지. 그가 네게 가진 미련과 집착이 얼마나 큰데, 고작


기차 하나로 그를 떼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소리를 지르고 당장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 자일스 헤센이랑 한 패야?”

그러자 앨버트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마냥. 나는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어졌다. 그가 내게 뭔가 중대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향하던 그때, 앨버트가 작은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유리잔을
정확히 세 번 두드렸다.

댕, 댕, 댕. 그러자 아무도 없던 만찬장 안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좋은 옷과 드레스를 입은 여행객들은


마치 세트장 안에 들어선 배우들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하나둘씩 차지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들 모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거대한 세트장 안에 앉아 있었다.

문제는 나 혼자만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앨버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앨버트가 나 같은 걸 두려워할 리는 없었다. 진심으로 그가 나에게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자일스의 사주를 받은 사람인가?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그렁철그렁, 거대한 바퀴가 레일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게 다 뭔지 설명해.”

“우선 네게 사과부터 해야겠네, 안나. 너에게 모든 걸 미리 말해 두지 않았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놈이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한 가지만 말해. 자일스랑 한 패야?”

“아니. 네게 많은 걸 숨겼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자일스 헤센은 나의 가장 주요한


적들 중 하나지.”

앨버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반면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어려웠다.

“안나, 자일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말이야. 그가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왜 그에겐 적이 그토록 많은


건지…… 왜 너 같은 것이 세상 전부인 양 매달리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

내가 가진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자일스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혁명군 장교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와 나 사이의 균형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를 몹시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설마 자일스 헤센이 벨담 출신이라는 것도 몰랐던 건 아니지?”

“그가…… 벨담 사람이었다고?”
앨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보면 딱 그림이 나오잖아. ‘헤센’. 전형적인 벨담 성씨인데. 그걸 눈치를 못 챘어?”

“하지만 그는 혁명군에 속한 군인이야. 수많은 벨담 귀족들을 죽였다고. 난…… 그가 정말 그들과 같은


벨담 출신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간단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는 그냥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거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떠넘기고, 앞장서서 동족을 학살하며 살아남으려 했던 거지. 벨담에서 그가
얼마나 유명 인사가 되었는지 몰라. 이제 자일스 헤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걸.”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국가의 반역자였다. 또한 나와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도 귀족이었어?”

내 물음에 앨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귀족은 아니고,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지. 작위만 없었을 뿐 귀족과 거의 똑같은 삶을 누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가 반역자인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가 네게 그토록 집착하지만 않았다면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될 수도 있었겠지.”

빌어먹을 놈. 그는 결국 자신의 문제에 나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자, 생각해 봐. 비록 적이 많은 인물이지만, 자일스 헤센은 엄연히 이 나라의 혁명군 장교야. 지은


죄가 많은 만큼 공로도 많이 세웠지. 그를 지켜 주는 든든한 뒷배도 있고. 이 나라 안에서 그에게 직접
접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 어떻게든 그를 입스윈 바깥으로 빼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좋은
미끼를 찾아야만 했지.”

“그래서 나를 이용한 거야? 내게 잘해 주고, 나를 도왔던 것도 전부…….”

“미안해. 악의는 없었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물론 그는 전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탄 이 기차, 사실은 비텔스덴으로 가는 게 아니지?”

“걱정하지 마. 모든 일이 끝나면 넌 자유로워질 테니까. 그것만은 내가 약속할게.”

“나를 이런 수상한 기차에 태운 데다 날 미끼로 썼다는 말까지 해 놓고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우리는 네게 관심이 없어. 우리가 원하는 건 자일스 헤센뿐이야. 자일스만 얻으면 네게 볼일은 다 끝난
거야. 안나 키팅, 너도 신문은 읽으며 살았겠지? 지금 벨담은 커다란 절망에 빠져 있어. 과거에 누렸던
영광, 평화로운 시절들…… 세계 대전에서 패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깡그리 잃었지. 사람들은 바닥에
나앉았어. 공군이 건물이란 건물은 남기지 않고 파괴해 버렸거든. 지금 당장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고 해도 놀라운 상황이 아니야. 우리는 그 화살이 정부에 돌아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해.”

그리고 마침 누적된 분노와 절망을 쏟아 내기에 알맞은 악마가 나타났다. 반역자. 살기 위해 동향


사람들을 입스윈에 팔아넘긴 비열한 배신자.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자일스 헤센은 절대 악이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입스윈 바깥으로 빼내기 위해 나를 이용한 거야?”

“그렇지.”

“이런 호화스런 기차까지 동원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굳이 특급열차일 필요는 없었어. 별다른 검문 없이 은밀하게 국경을 통과하기에


적합하고,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을 고르다 보니 선별된 거야.”

그들의 목표가 내가 아니며, 나를 자일스에게 넘기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런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건지, 앨버트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너는 포로가 아니야, 안나. 나는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네 손으로 자유를 쟁취할 기회를. 주위를
둘러봐.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아니야. 그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
나는 네가 나를 도왔으면 해. 너는 항상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했잖아. 나를 돕는다면 두 번
다신 그와 마주칠 일 없게 될 거야.”

앨버트는 테이블 위로 작은 피스톨 하나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장전이 되어 있는 진짜


권총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그를 생포하는 거지만, 필요하다면 그를 죽여도 좋아. 긴장할 필요 없어, 안나. 온
기차가 자일스 헤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생각해 봐! 이 기차 전체가 네 편이야. 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어. 이제 독 안에 든 쥐는 그놈이고, 그놈의 목숨이 네 손에 달려 있는 거야. 네게는 아주
익숙한 그림이지?”

나는 손에 들린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살아왔던 삶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박해를 견뎌야 했고, 그다음에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나는 한 번도 주류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독 안에 든 쥐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만약 앨버트의 말이 진실이라면,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자일스를 생포하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이고 내가 그 일부가 된 거라면…… 어쩌면 내게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더는 없을지도 몰랐다.

이 넓고도 좁은 기차 안에서만큼은,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내 목숨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자일스 헤센을 상대로.

나는 권총을 품 안에 넣었다. 그러자 앨버트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 손안에 있는 건 자일스 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일까? 자일스가 그들의 손아귀에 이렇게 쉽게 들어왔다고? 그것도 나 하나 때문에? 그렇다면
왜지?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지?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앨버트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일스 헤센은 그렇게 허술한 인물이 아닌데.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기차에
순순히 탈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대체 내가 뭐라고.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권총을 받아 든 행위를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만찬장 안에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 주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이 열차 전체가 한마음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일스 헤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었어?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런 시답잖은 수작질에


넘어갈 사람이었으면 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아는 자일스는 영리하고도 치밀한 사람이었다. 앨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생존 본능이


뛰어나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동족들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허술한
작전에 넘어간다는 거지?

나는 알고 싶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건지, 그가 왜 이토록 내게 집착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를 만나 봐야 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와의 만남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다시 그를 만나 볼 때가 왔다.

<26 화>

5. 오리엔트 특급열차

나는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쉽게 신뢰를 주지도 않았고, 애초에 누군가 내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조차 잘 하지 못했다.

저택에서 근근이 살아남을 당시, 나는 타인을 불신하는 습관에 길들었다. 마음을 헤프게 주면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누군가에게서 동정심이나 이끌어 낼 만한 존재였지 동등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먹을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나를 똑같이


이용하고 싶어 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잘못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뿐만이라도, 앨버트만큼은 온전한 내 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가 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주고…… 그런 일들이 순수한 호감에서 우러나온 행동들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또 이용당했다.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이미 나를
해쳤다. 적어도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는 말아야 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자일스를 만나기 전에 한 대는 피우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흡연이


가능한 칸으로 나갔다.

누군가 창문을 살짝 열어 놔서 바깥 공기가 시원하게 통했다. 나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라이터가 말썽이었다. 틱틱거리며 불티만 낼 뿐 불이 안 붙는 것이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욕지거리를 했다. 이 작은 라이터조차 내 기분을 망치려 작정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게 담뱃불을 들이밀었다. 나는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일단


불부터 붙이고 보았다. 한 모금 빨아들이니 마음이 가라앉고 심신이 편안해졌다.

상대는 라이터를 거둬 갔다. 그는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안녕, 안나.”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자일스 헤센이었다. 군복 차림이 아닌 모습은 처음 보았다.


딱딱하고 절제된 군복을 벗으니 그는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 훨씬 편안해 보였다.

습관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이 기차 안에서만큼은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나도 한 때는 그처럼 검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가식이 아닌 내 진짜 목소리로 그와 대화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나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빨아들였다. 자일스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나를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악몽


속에서나 만나던 남자를 이렇게 침묵 속에서 대면하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적어도 꿈속에서는 이렇게
차분하지 않았는데.

“……왜 탔어?”

결국 나는 형편없는 첫 마디를 꺼내고야 말았다.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물어야만 했다.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무슨 뜻이지?”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래.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저택을 떠난 지도 벌써 세


달째가 넘어가고 있어. 하지만 당신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내 뒤를 쫓아다녔잖아. 결국은 여기서
만나게 됐고. 내게서 뭘 원하기에 그래? 정말, 나를…….”

그다음 말을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나를 벌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는 당황했다. 왜 내가 말을 더듬는 거지? ‘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오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요한 마이어가 나를 강간하려 했을 때도 괜찮았다. 마룻바닥 밑에 갇혀 웅크리고, 매질을 당할 때도


괜찮았단 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동요하는 거지?

나는 담배 연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한편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자일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게 그런 짓을 하겠어?”

“난 도망쳤어. 당신에게 말도 없이.”

“그랬지.”

“그래서 화가 났을 거잖아. 내가 괘씸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커다란 호의를 베풀었는데, 제대로


보답하지도 않고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그렇지?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난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안나.”

아무렇게나 말을 쏟아 내던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몸을 살짝 숙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안나, 진정해. 괜찮은 거 맞아?”

내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자일스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를 두려워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차분히 내게 물어 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봐.”

“뭘 설명해?”

“무엇이 너를 그리 두렵게 하는지 말해 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설마, 그는 모르고 있는 건가? 두려움의 근원이 그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모든 문제의 원흉은 그였으며,
내가 그 때문에 수개월 동안 악몽 속에 떨어야 했다는 사실을?

내가 자일스 헤센이라는 구체적인 공포를 상대로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경악했다. 설마. 그런 현실이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마주하고 있는 저 얼굴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놀리는
거였다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하!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정말로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심장이 곧바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쾅쾅 뛰어 대고 있었고, 피가 머리 쪽으로 역류해 제대로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어지럼증이 도졌다.
“모른다고? 내가 뭐 때문에 도망쳤는지?”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한데……?”

이제 나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분노란 아주 깊고도 차가운 감정이다. 뜨거운 화염 같으면서도 그 온도가


불분명하기도 했다. 이제 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집어삼키기에 충분한 해일이 일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담배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밤마다 나를 고문한 주제에, 내가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게, 단 하루만이라도 그에 대한 공포에 떨지 않게 해 달라고 매달리게 만든 주제에
…… 혼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어떤 말도 의미를 잃을 것만 같았다. 마치 아기의 옹알이처럼


말이다.

“안나.”

나를 목 조를 것처럼 점점 조여 오는 이 상황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나는 그만 흡연실을 뛰쳐나갔다.


담배 연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흡연실을 빠져나간 뒤에도 증상은 얼른 사라지지 않았다. 내 객실이 어디였더라? 나는 미친 사람처럼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고 부딪혀 가며 앨버트가 미리 알려 준 객실로 향했다.

나는 객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닫이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다행히 객실에는 창문이 나 있었다. 나는 테이블을 엎고 화병을 깨뜨리며 다급히 창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질식사하기 직전 겨우 물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맑은 공기를 좀 마시니까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적어도 곧 토할 것 같은 구역감은


사라졌다.

불현듯 나는 이대로 그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알아야 해.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지 그가 모르게 둬서는 안 돼!

나는 객실 바깥을 빠져나갔다. 문을 여니 바로 근처에 그가 있었다. 자일스 헤센은 또 나를 쫓아왔다.


정말 지겹지도 않나 보다. 반쯤 제정신을 잃은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객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 온 힘을 다해 그를 때렸다. 자일스가 아파했으면 좋겠지만


그의 반응을 살필 정신조차 내게는 없었다. 나는 성에 찰 때까지 그를 죽어라 패고 나서야 행동을 멈추고
소리쳤다.

“당신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오히려 제일 잘 아는 건 당신이어야만 하는 거잖아.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은 결국 다 당신 때문이었는데 어떻게 내게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어?”

“안나, 나는―”

“자일스 헤센. 말해 봐. 내가 무엇 때문에 저택에서 도망쳐야 했는지 정말 몰랐어? 진실을 말해.”

“난…….”

자일스는―이미 된통 얻어맞았지만―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입 속으로 맴도는 말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던 그가 물어 왔다.

“내가…… 널 두렵게 한 건가?”

그는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두려워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가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걸 말이다.

<27 화>

그는 항변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절대 그러려고 한 적이 없었어.”

“무슨 소리야?”

“안나. 난 네가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게 좋았어. 네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혈색을 되찾아 가고
…… 그래서 너를 계속해서 방문한 거야.”

“당신은 그랬겠지.”

“단 한 번도 너를 위협한 적이―”

“위협한 적이 없었다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기물을 바닥에 내던졌다.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난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에게 외쳤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내겐 위협이었어! 난―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았잖아! 내 정체를 알았잖아. 내가


엘로이즈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은 날 살려 줬지. 나를 계속해서 찾아오기까지 했어.
필시 내게 바라는 게 있었던 거야.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귀족의
딸이었어! 당신은 제복을 입고 허리춤에 총을 매달고 다니는 혁명군이잖아! 당신은 마음이 바뀌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를 끌고 가 죽일 수 있는 존재였어. 난 당신이 단순히 변덕을 부렸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야. 당신 마음이 언제 다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어.”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일스는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아마 나를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당장이라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 봐 전전긍긍해야만 했어. 언제나 당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정신 빠진 년처럼 굴고, 살기 위해서 연극을 해야 했다고. 당신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어. 원하는 게 없었다고? 거짓말하지 마! 모든 남자들은 내게서 뭔가를 원했어!
요한 마이어도 그랬고, 백작도 그랬다고! 말해 봐. 정말 단 하나라도 내게 바라는 게 없었는지!”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날것 그대로의 내면을


까뒤집어 그에게 쏟아붓는 행위를 멈추었다. 이성이 돌아와서는 아니었다. 더 이상 그에게 내 본심을
털어놓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져서였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이들이 절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는지 모를 테니까.

손톱만큼 남은 이성 덕에 내가 모든 걸 망쳤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앨버트가 내게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미친 사람 꼴을 하고 있는 나도, 그런 내 앞에 서서 침묵을 지키는 자일스 헤센도.


나는 품속에 숨겨 둔 권총을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나가.”

다행히 그는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순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객실을 나갔다.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총을 내렸다. 앨버트는 내게 침대가 딸린 객실을 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기차 안에 커다란 침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연실색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오히려 침대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객실 밖으로 쫓겨난 자일스는 한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이제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승객들도 드물었다. 그는 텅 빈 복도 위에 혼자 남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고독 속을 배회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미닫이 문 너머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 듯 생생하면서도


마치 영화 속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다.

안나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는 안나를 방문할 때마다 유일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념과 죄책감, 그를 괴롭히던 수만 가지 기억들과 감정들이
목소리를 잃고 가라앉게 만들어준 건 안나뿐이었다.

안나 옆에서, 자일스는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살의 광경을 전부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던 건, 위안을 얻은 이는 자일스뿐이었다. 안나는 말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순간이 공포였다고……. 생각해 보면 안나는 자일스 앞에서 언제나 웃고 있었다. 자일스는
안나가 친절하고 밝은 사람이라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안나는 오직 자일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그 많은 시간들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군 제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권총을 매달고 다니는 군인이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꾸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자일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단 한 번도 안나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봐야 했다.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게끔 지탱하는 일조차 버거웠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이기적으로 굴었다. 안나는 전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의 딸이었고, 자일스는
혁명군 장교였다. 당연히 안나의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웠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는 그러한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간과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위해 안나의 입장을 무시했던 걸까?

자일스 헤센은 비참함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유일한 구원을 마련해 준 사람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까? 미안하다는 말? 그런 납작하고 가벼운 사과로 충분할까?

그는 눈을 감았다. 안나는 위험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출처 모를 기차에 올라탔고, 이 기차에 탄


사람들의 신원조차 불분명했다. 하지만 안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앨버트 쇼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도.

이젠 그가 안나를 무엇으로부터 지키려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집중해, 자일스 헤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 기차의 정체를 밝혀내고, 안나를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안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일스였다.

안나는 자일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

이 기차가 아니라.

모든 것이 엉망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이만 객실을 등지고 한 걸음씩 멀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복도를 밝히는 전등이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자일스의 머릿속도
그러했다.

나는 엉망이 된 객실에서 눈을 떴다. 창밖에서 비쳐 들어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이불에 파묻혀 얼마


동안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나는 시계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 침대 옆 탁자 위에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만 잠든 줄 알았는데 꼬박 하루를 쓰러져 잠들었던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아침 일곱 시가 되기도 전, 이른 새벽이었다.

배가 고팠다. 한 끼를 통째로 건너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이른 시간에도 식당 칸이 운영 중일까?


가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없었던 시절에야 배고픔을 잘 견딜 수 있었다지만
원할 때 먹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도 참기는 싫었다.

나는 대충 옷매무새만 가다듬고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도를 짧게 헤맨 끝에 나는 식당으로 추정되는 칸으로 들어갔다.
내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여러 테이블이 늘어서있는 모양새가 딱 식당 칸이었다. 다만 나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를 마주했다.

자일스 헤센이 구석 테이블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얼굴은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피로해 보였다. 나는 그를 얼마간 바라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착석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급사가 나타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아직 주방이 준비되지 않아서 간단한 차나 음료만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우유는요?”

“가능합니다.”

“따뜻하게 데워 주세요.”

나는 떠나려는 급사를 다시 붙잡고 물었다.

“저 사람,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어요?”

그 또한 내가 자일스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급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마 지난밤부터 이곳에 계셨던 모양입니다. 굳이 깨우지는 않았는데, 잘한 선택이었겠지요?”

“네, 잘했어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급사를 돌려보냈다.

곧 유리컵에 담긴 우유가 나왔다. 그는 친절하게도 꿀까지 내게 대령해 주었다. 나는 우유에 꿀을 타서


마시면서도 시선을 자일스 쪽에서 거두지 않았다.

그를 보고 나서야 어제 있었던 일들이 기억났다. 나는 그때 반쯤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었다.

물론 내가 한 행동이 후회스럽다는 건 전혀 아니지만, 자일스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건 좀


놀라웠다. 적어도 화를 내거나 나를 바닥으로 밀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가 증오스러운 건 아직도 마찬가지였다. 정황상 그는 처음부터 내게 혐오스러운 감정을 품었던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저 혼자 꽃밭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그동안 나는 지옥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우유가 절반 이상 사라지고 나서야 자일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아직 근처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오래 묵은 피로를 떨쳐 내려 노력하는 모습도, 잠시 벗어


두었던 겉옷을 다시 걸치는 모습도. 그리고…….

자일스가 내 쪽을 보았다. 그의 눈이 서서히 크게 열렸다. 마치 이곳에서 나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뭐,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여기서 자고 있을 줄은 몰랐지. 하긴
자일스에게도 개인 객실이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자일스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의 구차한 변명을 들으려고


식당 칸까지 온 건 아니었으니까. 마침 우유를 다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을 먹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나중에 다시 오면 될 일이니까.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생각해 보니, 나는 공짜로 이 기차에 탄 게 아니었다.


앨버트는 내가 자일스를 이곳에 붙잡아 두길 원했다. 내가 할 일은 자일스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안심시키는 거였다.

정말 뭣 같기 짝이 없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일스 헤센을 영원히 떼어 놓을 수 있는 데다


앨버트가 약속만 지킨다면 나는 외국에서 자유로이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그에게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앉았다. 자일스는 이제 당황한 듯이 보였다. 한동안 불편한 기류가 침묵


속에서 주변을 감돌았다.

<28 화>

이윽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

“왜 이 기차에 탔냐고 물었잖아.”

“……네 안위가 염려되었으니까.”

“우리가 입스윈 땅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자일스. 당신에게는 적이 많다고 들었어. 입스윈을 벗어나는 순간 위험에 노출된다는 사실도.”

“그래. 전부 사실이야.”

“그런데도 서슴없이 외국으로 떠나는 기차에 탔다는 게 이해가 안 돼서 그래.”

그건 진심이었다. 내가 그가 잘못될까 봐 걱정한다는 건 아니지만,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였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제 목숨을 물가에 내놓는 짓 따윈 말이다.

“자기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아붙이면서까지 나를 쫓아오고 싶었어? 도저히 날 포기할 수 없었던 거야?”

“……진실을 원하는 것 같으니 말해 줄게. 맞아.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나는 눈을 감았다. 내 앞에 앉은 남자를 대면하는 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니까. 이 기차에 탄 사람들 전부가 내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저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그라는 사람이 지긋지긋했다. 정말이지 그를 내 인생에서 떼어 놓고
싶었지만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왜…… 하필 나야?”

내가 짓씹어 뱉듯이 물었다. 자일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뭔데? 아니면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거야? 그것도 말 되네.
난 여전히 당신들의 적이잖아. 그렇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사탕발림은 그만하고 정말 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말하라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윽고 무거운 정적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자일스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런 표정마저도 증오스러웠다. 모든 게 다 가식이고
거짓말 같아서였다.

앨버트가 내게 기대한 건 전혀 다른 것이었겠지만 어차피 난 그가 기대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자일스와 대화하는 것이었고, 나는…… 진심으로 그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안나.”

“이제 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어. 난,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됐으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날 속일 필요도


없었어. 왜 그래야 해? 어차피 난 힘없는 도망자 신세일 뿐이잖아. 차라리 그냥 말해. 머릿속으로 생각해
왔던 걸 그냥 말해 버리라고.”

“안나, 너는 마치…….”

자일스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냉정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동요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너는 마치 내가 너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는 확신했다.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은 다 그랬다. 그런데 자일스는 내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게 악감정이 아니라면, 뭔데?”

“……무슨 뜻이지?”

“당신은 몇 개월 동안이나 내 뒤를 쫓았잖아. 이게 악감정 때문이 아니라면 뭐냔 말이야.”

“네게 앙심을 품어서가 아니야. 이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다른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네 행적을 추적하고, 주변 인물들을 조사한 거야. 나는 네가 안전하길 원했으니까.”

“당신이 왜 내 안전을 걱정해?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너는 절대로 다치게 놔두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야.”

나는 도저히 자일스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당신한테 뭘 했는데? 난 그냥 버려진 저택에 숨어 있던 여자에 불과했잖아.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그래, 당신의 비위를 맞춰 주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연기한 거야. 릴리 벨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애라고. 아직도 내게 그런 걸 기대하고 있다면 이제 그만 포기해.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어떤 사람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당신이 나를 원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자일스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였다. 나는 잠시나마 그에게 집중했다. 그가 드디어 진실을
말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의 눈가가 이전보다 붉어 보였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자일스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살렸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넌 내게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이야. 너는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 잊게 해 주니까.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너는…… 내가 유일하게 내린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너무도 슬프고 비참해 보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울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눈물의 흔적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자일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평화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이 너는 나를 향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했지. 우리는 분명 한곳에 함께 있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분명 내 앞에 있는 건


자일스 헤센이었다. 내가 알던 그 자일스 헤센.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의 이목구비를 비롯한 모든 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나는 이기적이었어. 내 안위만 챙기기에 바빴지. 그래서 네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사과를 받아 주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거라며 그를


비웃지도 않았다. 잠시 내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럼 애초부터 자일스의 본심이, 내가 원하던 진실이


이런 거였단 말인가?

애초에, 그는 내게 앙심을 품은 적도 없었고, 내게 비열한 욕망을 품은 적도 없었다고? 그저 내가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나를 애틋하게 여기게 된 거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런 일에 면역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순수한 호의를 베풀면서 끝까지 그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일 말이다.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안전하기를 바랐다고?

그냥, 그게 다란 말인가?

“……어떻게 나를 그리 대할 수 있는 거야? 난 귀족의 딸이고, 당신은 혁명군 장교잖아. 애초에 처음부터


나를 살려선 안 되는 거였잖아.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가 안전하기를 바라선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해쳤어. 네가 특별했기 때문에 널 살렸던 건 아니야. 그저 그때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너를 잡아가고 싶지 않았어. 너를 체포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

“그게 끝이야?”

그는 모든 걸 말했다. 더 이상 내게 털어놓을 것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 내가 살기를, 그것도 안전하기를 바라는 남자…….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에 의해 살아남은 내 목숨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해져서, 혹여 그가 살려 낸


불씨가 꺼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거다.

보잘 것 없는 불빛이라도 사라지고 나면 흑암 속에 홀로 남아야 하니까.

그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나는 자일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나는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마음을 헤프게 주면,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니까.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를 믿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어릴 적 이후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섣불리 신뢰를 주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겪어 보았으니까.

내가 자일스를 믿는다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뭐지?

그리도 다정한 말들을 건네주고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앨버트조차 결국엔 나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었다.
그렇다면 자일스는?

나는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가 그랬듯이,


나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떠나는 동안 자일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뿐이었다.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지만 너무 피곤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조금 비울 필요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고요를 찾아서 내 객실로 돌아갔다.

나는 방에 홀로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곡이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이 곡을 연주하고 있으면 마음을 쉽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사실은 대부분의 연주곡들이 그랬다. 서서히 진행되는 음악에 집중하다 보면 나는 점차 그 세계에


빠져들었고, 다른 잡념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직 나와 음악만이 남게 되었으니까.

건반을 누르며 피아노와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엘로이즈! 이년이 또 어딜 간 거야!”


<29 화>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았다. 내 아버지가 나를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숨어야 하나? 하지만 이 방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오직 좁은 방에 나와
피아노 한 대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 방에 있는 거 다 안다! 빨리 나오지 못해? 이번에야말로 그 손마디를 분질러 주겠다! 개같은 년이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내게 이런 식으로 되갚아? 애초부터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렸어야 했어!
네가 모든 악재의 원흉이야! 네가 죽어야만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오겠지! 오늘은 기필코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나는 최대한 문에서 멀어져 벽에 붙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머리를 울릴 정도가


되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장악한 목소리는 좀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악한 년! 악마 같은 년! 때려죽일 거야! 너를 죽이고 말 거야!

쾅쾅쾅! 그가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렸다. 문이 곧 부서질 것 같았다. 그에게 맞은 상처가 벌써부터 아려


오는 것 같았다.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던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데. 나는 과거에 단 한 번도 그 앞에서 운 적이 없었는데. 나는


분명히 괜찮았어.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런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이리 나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간 그의


말대로 정말 죽고 말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엘로이즈가 아닌 전혀 다른 이름을…….

“릴리?”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나를 죽이겠다고 고함을 지르던 아버지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자일스 헤센이


거기 있었다. 빳빳한 제복을 차려입고서, 늘 그랬듯 멀끔한 모습으로. 릴리를 만나러 오던 과거 그대로의
자일스였다.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체포하고 싶어 할 게 분명한 귀족의 핏줄을 몇 번씩이나 만나러 오는 장교라니. 나는


예전에 그랬듯, 몸이 본능적으로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면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웃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내가 웃지 않으면 그는 기뻐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자일스는 내 표정이 어떻듯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혼자 있는 동안 춥지는 않았어?”

“괜찮아요.”

“손이 다 텄잖아.”

“예전부터 이랬어요.”

그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박스 뚜껑을 열자 온갖 과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탐스러운


진짜 과일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자, 먹어.”

그가 내게 과일 박스를 건네었다. 나는 과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과일을 먹지 못한 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과일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단맛인지, 혹은 쓴맛인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포도를 한 알 따서 입에 넣었다. 포도 알을 깨물자마자 달콤한 과즙이 입


전체로 퍼졌다. 그냥 달콤하기만 한 수준이 아니었다. 몸 전체로 전율이 퍼져 나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과일에 정신이 팔려서 손에 집히는 대로 허겁지겁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 모습이


예쁘게 보이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곤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포도 알 하나가 손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낀 바닥 위를 말이다.

그가 비싼 과일을 가져왔는데 난 그걸 놓쳤다.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얼어붙어 버렸다. 교육을 받던


시절, 포크질을 잘못해서 음식을 놓쳐 버렸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자일스는 나를 노려보지도, 내 뺨을 때리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몸을 굽혀 포도 알을 줍더니


살짝 열린 창 밖으로 가볍게 던졌다.

“혹시 알아, 내년에는 이 근처에 포도나무가 자라게 될지.”

그가 농담을 했다. 내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안 그가 나를 달래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꾸며 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죄, 죄송…….”

“괜찮아. 누구나 하는 실수잖아.”

나는 계속해서 사과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다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더 이상 릴리 벨모어가 아닌 현재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맞아. 이런 건 아무나 하는 실수야. 내가 왜 어쩔 줄 모르며 사과해야 하는 거지? 그건 그냥 작은
포도 알 하나일 뿐이었어.

하지만 그땐 그래야만 했다. 나는 자일스가 무서웠고, 내 몸은 작은 실수에도 벌을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가 언제라도 내게 벌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자일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일스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내 상상 속에서 변질되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선 음모나 탐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나 요한 마이어가 나를 볼 때 그리했던 것처럼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상품 가치를 매기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내가 과일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게 흐뭇했던 거다.

두려움이 한 꺼풀 걷힌 시선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정상적인 현실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는 그동안 무엇을 두려워했던 거지?

그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나, 괜찮아?”

나는 언제나 네가 괜찮기를 바라.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자일스는 한 번도 내게 복수하려 든 적이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괴물로 만든 건 오히려 나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도 무서운 일들을 많이
겪었으니까.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안나. 그가 방금 나를 안나라고 불렀던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꿈과 현실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눈을 떴다. 소리 내어 울었던 건지, 내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안나?”

그리고 내 울음소리를 듣고 온 자일스가 가까이에서 나를 살피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니, 과거의 한


장면 속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진실되지 않은 적이 없었을까? 그래, 그랬을 것이다.


그가 나를 특급열차까지 쫓아온 건 내게 복수하거나 벌을 주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언제나 내게 달콤한 과일을 주고 싶어 했다.

저택을 방문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자일스,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

당신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거라고 믿어도 될까?

“미안해.”

그가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 안나.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가지 마.”
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어. 날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래. 아무 데도 안 갈게. 걱정하지 마.”

“난 두려웠어. 네가 다른 놈들이랑 똑같을까 봐 무서웠다고. 난 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게 다야. 나는, 난…….”

“안나, 괜찮아.”

그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나는 횡설수설하던 것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나서도 여전히 그의 존재감이 곁에서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가 계속해서 말을 건네 왔다.

놀랍게도 그의 그런 행동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다독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듣는 건…… 훨씬 커다란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었다.

이윽고 정말로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안나는 다시 잠들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곤히 잠에 든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을까. 혹시라도 자신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안나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아무렇게나 벗 어던진 낡은 코트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코트를 옷걸이에 걸기 위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냥 일반 소지품이라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 순간 뭔가를 기억해 낸


자일스는 안주머니를 더듬어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손에 잡혔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자일스는 검게 빛나는 물체를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그것은 권총이었다. 안나가 그에게 겨누었던 바로 그 총이 맞았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뿐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는 권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잠에서 다시 깼을 땐 자일스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꿈을 다시


꾸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어야 두통이 가실 것 같았다.

나는 겉옷을 대충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기차에는 발코니 칸이 있었다. 나처럼 맑은 공기를 필요로
하는 승객들을 위해 마련된 칸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 화>

“아, 안나. 여기서 또 만나네.”

앨버트였다. 그는 차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앨버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꺼 버렸다.

그는 내 안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머리가 아파.”

“그 남자는 만났어?”

두말하면 입 아플 소릴. 앨버트 또한 대강 눈치를 챘는지 굳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때? 다시 만나 보니까. 네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나는 대답하기 전에 자일스 헤센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던 일들이 다시금 선명하게 내 머릿속을 채웠다.

그가 내게 사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증오가 고스란히 담긴 말들을 말없이 받아 내며 짓던 표정도…….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

나는 고개를 흔들며 팔짱을 낀 채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지금 여기서 앨버트와 자일스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어떤 의미에서?”

“그냥…… 내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자일스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으니까. 난 분명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고민 끝에 내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와 이야기를 다시 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뭘 하게?”

앨버트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는 이제 작은 휴대용 거울을 꺼내들고는 머리 모양을 정돈하고 있었다.


필시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거다.

“난 모든 것이 내게 불리할 때 자일스를 처음 만났어. 자연히 그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 그는 괴물로 자라났어. 하지만 만약 그가 그렇지 않다면, 그건 바로잡아야 하는
거잖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악몽 때문에 수개월을 고통받아야 했어! 이건 나를 구하기 위한 일과도 같단


말이야. 그가 나와 똑같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평범한 사람?”

앨버트는 소지품을 품에 집어넣곤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던 앨버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안나, 그 자식이 너를 제대로 홀려 놨구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자일스 헤센이? 내가 그에 대해 한 번


설명해 주지 않았었나? 채 이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배신자가 된 일을 말하는 거야?”

“헤센은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깡그리 잡아다 족친 놈이야. 자신도 벨담인인 주제에
가장 열성적인 벨담 출신 학살자가 되었다고. 이런 사람을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응?”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난 내가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네가 뭘 오해했는데? 넌 그놈을 제대로 본 거야! 죽어 마땅한 개자식이지, 네 표현을 빌리자면. 안나,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줄게. 너도 벨담 출신 귀족이었어. 그건 기억하고 있지?”

그가 오른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내 이마를 겨누었다.

“네가 사생아라는 이유로 박해만 받지 않았더라면, 헤센은 너마저도 죽였을 거야. 곱게 죽이지도
않았겠지. 네게서 더 많은 정보를 뽑아낼 때까지 살을 지지고, 고문을 하고…….”

“그만해.”

“……결국은 이렇게 했을 거라고.”

탕! 그가 총소리를 흉내 내며 총 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평소의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잘 생각해 봐. 네가 정말로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는지 말이야. 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헤센은 절대 네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겠지만.”

앨버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발코니 칸을 떠났다. 그가 부르는 콧노래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앨버트가 내게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여느 평범한 귀족처럼 지낸 여자였더라면 그의 손에 죽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고, 현실의 자일스는 나를 살리는 쪽을 택했다.

앨버트는 내가 그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갖게 될까 봐 염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그저 진실에 기대기를


원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오래된 악몽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내가 누군가를 직접 죽이게 되는
일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객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은 비어 있었다. 자일스 대신 쪽지 한 장이 테이블 위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곧 저녁 시간이야. 먹고 와.」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긴, 바깥에는 벌써 황금빛 노을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쪽지를
만지작거리다 그것이 두 겹으로 겹쳐져 있음을 알아챘다.

뒤에 숨겨져 있던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혹시라도 동행이 필요하다면, 십 분 안에 돌아올 테니 기다려도 좋아.」

나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이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식당 칸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침대 맡에 앉았다. 그리고
내 동행인이 될 남자를 기다렸다.
*

자일스는 안나가 갖고 있던 총을 수첩에 그려 보았다. 익숙한 피스톨이었기에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권총이 아니었다. 오직 군용으로만 생산되는 무기였다.

자일스는 벨담 장교 혹은 요원들이 M1912 모델을 자주 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누군가가 안나에게 이


권총을 제공했다면, 제공자는 반드시 그쪽과 관련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었다.

호신용으로 준 것이든, 혹은 누군가를 제거할 목적으로 준 것이든……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권총을 제공받은 안나는 최소한 표적이 아니라는 거였다. 혹은 이곳에 안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이 유령 기차는 안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녀를 해할 목적으로 태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자일스 헤센은 그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자일스는 10 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내가 기다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놀란


눈치였다.

“안나. 음, 그러니까…….”

그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뜸을 들였다.

“혹시……?”

“혼자 식사하기 싫어. 청승 떠는 것 같잖아.”

자일스는 군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더 말하지 않고 함께 만찬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이 승객들이 전부 자일스를 위해 준비된 승객들임을 알았다. 그들이 자일스의 이력을 알기만 하는


건지, 혹은 앨버트처럼 그를 증오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인지 몰라도, 승객들은 우리를 전혀 모른 체했다. 아마도 그러라고 명령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일스가 위협을 느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나는 그를 데리고 빈자리에 착석했다. 급사가 다가와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메뉴판을 보자마자


곤란함을 느껴야만 했다.
“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나고 말았다. 난 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메뉴판에 쓰여


있는 글자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음식보다는 모르는 음식이 훨씬 더 많았다.

앨버트 앞에서라면 안 그랬겠지만 하필이면 자일스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러웠다.


그가 앞에 있으니까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왜 그러지?”

자일스가 나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내 과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메뉴판을 그에게 떠넘겼다.

“당신이 골라 줘. 아무거나 적당한 걸로.”

자일스는 군말 없이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젠장, 그와 함께 식사를 하러 온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정말이지 급사에게 메뉴를 골라 달라고 할 뻔하지 않았나.

자일스가 메뉴를 살펴보는 동안 나는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음식의 이름을 물어보기만 하면 인상을 찌푸리곤 했던 비스마르 백작 부부에게 책임이 있을 거다.

“해산물 좋아해?”

그가 물어 왔다. 난 해산물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글쎄. 지금껏 먹어 봤던 음식 중에 마음에 들었던 것들을 말해 봐. 비슷한 걸로 골라 줄 테니까.”

아, 그래. 내가 이름을 아는 요리가 있기는 했다. 나는 생각나자마자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파스타 좋아해. 크림소스 들어간 걸로.”

“그거면 되나?”

“다른 건 필요 없어.”

급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일스는 요리 이름을 대며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급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다시 가져갔다.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그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저택을 나간 이후에도 바깥에서 외식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래. 이런 식당 음식 같은 건 잘 몰라.”

자일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는 다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난 네가…… 나와 식사하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가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졌다. 자일스 헤센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를 두려워했던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31 화>

“내가 말했잖아. 혼자 식사하기는 싫다고.”

“나를 불편해할 줄 알았어.”

“설마 체하기야 하겠어?”

나는 그 말이 왠지 우스워서 혼자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보니 이 자리가 썩 편하지 않은 건 자일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가 내 기분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안나.”

자일스가 말을 꺼냈다. 그는 약간 긴장한 듯이 보였다.

“만약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두렵게 한 적이 있었다면…… 내 안위를 위해 너를 희생시키려 했다고


느꼈다면 미안하게 생각한다. 네가 그런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해 헤아릴 여유가 없었어.
전부 다 내 잘못이야.”

“……당신이 계속해서 내 꿈에 나왔어. 난 두려웠어. 혹시라도 당신이 내게 복수하고 싶어 할까 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앞서도 말했지만 너를 추적한 건 혹시라도 네가 당국에 쫓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어.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야.”

“내가 당신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였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나는 그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고백한


말들은 공상 과학 소설에 나오는 내용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한 번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어서 쉽게 와닿지가 않아. 누군가 나를 그리 여긴다는 게 말이야.


난……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자일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나는 놀라서


움찔거렸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그 사실 또한 내게는 너무도 어색하게 다가왔다.

“네가 뭘 할 필요는 없어. 다만 더는 악몽을 꿀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 기억해. 나는 절대로 널 해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거다.”

나는 그와 맞닿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화려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심이겠지. 그는 내게 진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걸 믿는 쪽이 내게도 이로울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나는 잠을 좀 편히 자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기차가 멈추는 순간부터는, 우리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자일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면 그는 죽게 될까?

그는 오로지 나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이 기차가 자신을 위한 기차라는 사실을, 자일스는
알고 있을까. 만약 마지막 순간에 그가 알게 된다면, 내가 그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는 걸 그가
안다면.

그때야말로 그는 내게 복수심을 갖게 될까?

여러 생각을 하던 나는 무심코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앨버트가 나를 쳐다보며 누군가와 속삭임을 나누고 있었다.

밤이 되자 기차가 속도를 줄였다. 어두운 풍경이 나를 더욱 느리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마저도 객실


내의 불빛에 가려 대부분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일스가 커튼을 쳤다. 그러자 방 안에 안정감이 한층
더해졌다.

그리고 나는 결국 소화 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차라리 속을 게워 내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잘 안 됐다.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는 나를 향해 자일스가 다가왔다. 그는 하얀 셔츠 차림이었다.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워 흐트러짐 한 점 없는 모습이 딱 군인답기는 했다.

“많이 아파?”

“이대로는 도저히 못 잘 것 같아.”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군.”

“잘 아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내가 힘없이 쏘아붙였다.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따스한 색감의 스탠드 불빛이 그의 얼굴 위를 아른거렸다.

나는 잠시 동안 아픔도 잊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나도 내가 이런 소릴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 그의 피부가 나처럼 부드럽고, 나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한때는 당신 피가 파란색일 줄로만 알았지.”

“뭐?”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마.”

자일스는 제 코트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왔다. 작고 불투명한 갈색 유리병이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유리병 안에 든 것을 두 알 정도 털어 냈다.

“자, 먹어. 좀 나을 거야.”

“이게 뭐야?”
“소화제.”

“……이런 걸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의사도 아니고.”

“필요했으니까.”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가 건넨 알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자일스는


내게 물병을 건넸다.

설마 독이 들어 있지는 않겠지. 그는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수 가지는 더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난 정말로 그가 내게 독약을 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우리 사이의 간격은 정말 많이 좁혀져 있었다.

자일스는 한숨을 쉬더니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디가 아파? 한번 보자.”

“왜? 그냥 소화가 안 되는 것뿐이야.”

“한 번에 낫게 해 줄 순 없겠지만 조금 완화시켜 줄 수는 있어.”

“뭘 하려는 건데?”

“아픈 부위를 짚어 봐.”

그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제 그가 내게 하려는 일이 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뭘 하려는 거냐고!”

“마사지.”

그 말은 내 배를 문지르겠다는 건가? 나는 경악했다.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싫어!”

“훨씬 나을 거야. 믿어 봐.”

“내가 당신을 어떻게…….”

어떻게 믿느냐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미 그가 건넨 약도 잘만 삼켜 버린


나였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그가 날 해칠 거란 생각에서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가 내
몸을 문질러 주면 거부 반응이 들 것 같았다.

내 배는 아무도 만진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부위를 남에게 허락한다고? 조금만 덜 아팠더라도 난 내


입장을 강경하게 고수했을 거다.

하지만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여기. 여기가 아파.”


“알겠다.”

“살살 해야 해!”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내 명치 아래에 손을 올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이런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힘 빼, 안나.”

“무슨 소리야?”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효과가 훨씬 덜해. 몸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있으려고 노력해 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그의 말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일스가 보기엔 영 시원치 않았나 보다.

“숨을 내쉬어. 심호흡하듯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자 확실히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자일스가 내가 짚어 주었던 위치를 조심스럽게


누르며 말했다.

“옳지.”

나는 눈을 감은 채 그가 얹힌 부위를 요령 있게 마사지하는 감각을 느꼈다. 최대한 다른 사람을 상상하려


노력했으나 내 피부에 닿는 건 커다랗고 단단한 남자의 손이었다.

유모들이나 해 주는 일을 자일스가 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더 놀라운 건 효과가 있었다는 거였다.

“당신한테도 누가 이런 거 해 준 적 있어?”

내가 물었다. 여전히 눈은 뜨지 않은 채였다.

“어렸을 때 배앓이를 자주 하는 편이었지.”

“당신도 잘사는 집 아들이었다고 했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플 때 누가 뭘 해 줬는지 말해 봐.”

“……그건 왜.”

“난 그런 경험이 거의 없단 말이야. 내가 아프면 누군가 나를 신경 써 주고, 옆에서 걱정해 주고……


그런 것들. 당신은 그런 일들을 많이 겪어 봤을 거 아니야. 궁금하다고.”

자일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때 일을 잠시 회상 중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나도


이해했다. 그의 나이가 정확히 얼만지는 몰라도, 10 년도 훨씬 넘은 과거의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를 실망시켰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런 게 어디 있어? 마사지하는 법은 안 까먹었잖아.”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곤 머릿속에서 다 사라졌어. 내가 의도적으로 잊으려 했지.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그런 기억들을 품에 껴안고 있으면 그만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럼 어릴 적에 있었던 일들은 거의 다 잊은 거야?”

“적어도 열세 살 이전의 기억들은 없어.”

그럼 그 전까지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때였을까? 그러니까 잊어버렸겠지. 자일스가 했던


일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직접 부정하고 뒤바꾸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한때 속해 있던 풍경을
제 손에 든 칼로 난도질한 거니까.

나는 자일스 대신 내가 혁명군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훨씬 더 잘했을 것


같다. 내겐 잊어 먹으려고 노력할 기억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하던 내 입에서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당신은 뭘 보고 버텼어?”

“뭐?”

“아니, 보통 힘든 시간을 견디려면 그런 게 필요하잖아. 나를 버티게 해 줄 정도로 간절한 소원이나


만족스러운 기억 같은 거. 예를 들면 나는 날 만지려고 한 새끼를 겁에 질리게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
생각만 하면 어쩐지 살아갈 힘이 나더라고. 그 표정만 떠올리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자식,
나름 공작이었거든.”

어쩌면 자일스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혹시 알아? 요한 마이어라고.”

“군인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그 사람도 체포했어?”

“내 담당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다.”

“아마 벌벌 떨었을 거야, 그놈은. 내가 위협 같지도 않은 위협 좀 했다고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던


놈이거든. 아무튼, 당신한테도 그런 게 있었을 거 아니야? 버틸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자일스의 눈길이 내 쪽으로 옮겨 왔다. 그가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시선이 다시 떨어졌다.

“생존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어. 그게 다야.”

“뭐, 당신한테는 다행인 일이네. 결국에는 살았잖아.”

“그래. 나 혼자 살았지.”

그의 어조가 퍽 자조적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어딘가 잘못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만 산 거 아니야. 나도 살았잖아.”


<32 화>

그러자 자일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을 들은 사람인 양, 얼어붙은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결국 난 살았어. 나중에는 벨담 귀족의 피가 내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봐, 이렇게 멀쩡하게 누워서 당신이랑 얘기하고 있잖아. 나도 살아남으려면 치열하게 싸워야 했어.
살아남는 방식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어? 내가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까
당신만 홀로 남겨졌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적어도 그와 나 사이에 공통점은 있었다. 출신이 같다는 것, 그리고 우리 둘


모두 생존자라는 것.

물론 그 사실만으로 우리가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생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중요한 거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고, 두 번의 기회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벨담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나를


죽이지 않았고, 여전히 날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살고 싶다는 욕망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나도 필요하다면 아무 미련 없이 백작가를 불태우고 나왔을 거다.

“그래. 너도 살았지.”

그가 나를 따라 말했다. 어쩐지 자일스의 안색이 한층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살아 있어.”

“그래,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 상기시켜 줘도 돼. 그리고 이제 안 아파. 더 해 줄 필요는 없어.”

자일스가 손을 거둬 갔다. 그는 내 옆에 우두커니 앉아 스탠드 불빛을 가만 보더니 불쑥 물어 왔다.

“아직도 뭔가를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나?”

“나? 글쎄……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앞을 가로막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는 것 같거든.”

“그래. 다행이다.”

“왜, 당신은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어?”

자일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스탠드를 어둡게 조절했다.

“이제 잘 수 있겠지?”

“응.”

“잘 자, 안나 키팅. 오늘은 악몽이 널 비껴가길 바란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그가 나를 등진 채 테이블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기서 잠을 청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야 상관은 없지만…….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곤 눈을 감았다.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고요한 잠은 생각보다 빨리 나를 찾아왔다.

자일스 헤센은 어두운 불빛을 뒤로하고 홀로 어둠 속에 침잠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몇 년 전부터는 그마저도 잘 자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익숙해지고 나면 제 몸처럼 적응할 수 있었다.

밤을 새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달리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앉아 안나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을 쉰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안나가 살아 있다. 그녀가 살아남았다…… 그건 비단 안나에게만 중요하게 작용하는 사실이 아니었다.

안나는 그에게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당장 생명을 위협받았던 시절은
지났고, 그의 삶은 다시금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벼랑 끝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살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죽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문제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안나의 말대로 그는 원하던 대로 살아남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의 세상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자일스가 스스로 그의 세상에 불을 붙였다. 이젠 잿더미 속을 방황하며 사는 일밖엔 남지 않았다.

이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그는 주변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이런 미래가 오리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견디기가 힘들었다.

안나, 당신은 내게 무엇을 보고 버텼냐고 물었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생존뿐이었어. 그리고 네가 물은 대로, 나는 아직도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고…… 이제 내가 바라보는
건 너야.

너만이 내 재투성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존재니까.

나는 절대 너를 살린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건 내 삶 속에서 유일하게 떳떳하고 올바른 선택이었어.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지.

제 풀에 지쳐 했던 선택이 의도치 않게 그를 살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기차에 오른 건 다


그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를 잃게 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자일스는 이미 품 안에 있다고 믿었던 이를 잃은 전적이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안나만큼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 중에 안나가 고통받고, 그녀의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니까.

그러는 편이 우리 둘 모두에게 이로우니까.

그러니 안나가 잠깐의 평화를 충분히 누렸으면 했다. 그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기차에 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안나를 노리는 기차가 아니라고 해도, 결국에 이 기차는 안나에게
독이 될 게 분명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일스는 머릿속에서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안나는 살아남을 텐데. 그가


필시 그렇게 만들 텐데 말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일스는 안나를 품 안에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다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깨어나 보니 자일스가 없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대충 아침을 먹을 시간 정도는 되었으니 늦잠을


잤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두 다리를 뻗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사람이 두 명은 더 끼여서 잘 수 있을 것 같은 여유


공간을 만끽했다.

이런 커다란 침대를 나 혼자서만 차지하고 자일스는 의자에서 재웠다. 양심의 가책이 아예 생기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를 예전처럼 증오하지 않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와 한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아니었다.


그건 자일스가 아니라 다른 남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를 바닥 위에서 발견하게 될까 봐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자일스는 아예 객실에서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객실 문 너머를 흘깃거렸다. 아침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한산해 보였다. 간단히


조식이나 먹을까 싶어서 조용히 문을 닫고 식당 칸으로 향했다.

익숙한 장소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저녁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급사가 내게 다가와 몇


가지 되지 않는 메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많이 먹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냥 커피랑 토스트만 달라고
부탁했다.

급사가 떠나고 나면 나는 혼자 남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놀란 내가 고개를 들었다. 갈색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웬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속삭여 물었다.


“당신이 안나 키팅이에요?”

“맞는데요.”

“그 피아니스트?”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적어도 내 얼굴이 신문에 실린 날부터는 종종 내 이름을 묻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자는 내가 ‘그 피아니스트’라는
사실보다는 더 궁금한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신, 자일스 헤센이랑 깊은 관계라던데. 진짜예요?”

“그건 왜 묻는 거죠?”

“어제 당신이 그와 함께 저녁을 먹는 걸 봤어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라 자빠질


뻔했다니까요. 알베르트가 아무 내색도 하지 말라기에 티는 안 내려고 애썼는데…….”

“별로 깊은 관계 아니에요. 그냥 좀 아는 사이일 뿐이지. 그러니까 관심 가질 필요 없어요.


돌아가세요.”

이 기차에 탑승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일스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난 그와 엮여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내가 대놓고 차가운 태도를 보이자 여자가 두 손을 들며 나를
만류했다.

“제발, 오해하진 마세요. 당신에게 뭐라고 하기 위해 말을 건 것은 아니에요.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자일스 헤센이라면 몰라도. 난 그냥 그날 저녁에 당신과 자일스를 목격하고 나서 당신의
사연이 너무 궁금해졌을 뿐이라고요.”

“당신 대체 누군데 나한테 이래요?”

“난 카를라예요. 카를라 피셔.”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알았어요. 내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누군지 가르쳐 달라는 거죠? 대충 알고 있겠지만 나도


벨담 사람이에요. 귀족은 아니고, 그냥 좀 살던 집 딸이었죠. 그리고 드디어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고요!”

스스로를 카를라라고 소개한 여자가 한껏 들뜬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카를라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기차요?”

“네! 벨담으로 돌아가는 기차 말이에요. 이 기차, 벨담으로 가는 거잖아요. 그동안 숨어 사느라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 알베르트와 연락이 닿아서 목숨을 건졌죠! 하늘이 날 도운 거예요. 그럼,
그럴 수밖에 없죠. 난 살면서 평생 나쁜 짓이라곤 한 적도 없고, 기도도 열심히 했거든요. 당신도 나처럼
숨어 살다가 이 기차에 탄 건가요, 안나?”

나는 의아해졌다. 카를라가 말하는 알베르트란 앨버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 이 기차에 탄 사람들이


벨담에서 왔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입스윈의 어느 역에서 승차했고,
벨담에서 왔다면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이 전부 다…… 혁명군의 처형을 피해 숨어 있던 사람들이란 말인가?


<33 화>

“당신, 혁명군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인가요?”

“네! 맞아요.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제 가족들은 전부 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아마 높은 확률로 죽었겠죠. 이 기차 안에서 가족을 찾으려고 해 봤는데 결국 찾지 못했거든요.
어쩌면 이미 벨담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겠네요.”

“이 기차에 탄 사람들은 그럼 다…….”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럴 거예요. 벨담으로 탈출시켜 주는 대신에 정보국에 협조하게 된


거죠. 자일스 헤센의 호송을 위해서요.”

“난 몰랐어요.”

왜 앨버트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훈련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이들이 비상사태에


준비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연실색했다. 앨버트를 포함한 소수의 요원들 빼고는 다
민간인들이란 뜻 아닌가.

물론 기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만약 입스윈 군인들에게 기차의 소재가


발각되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이 작전은 생각보다 위험한 작전이었다.

반면 카를라는 오로지 벨담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내가 물었다. 카를라가 나를 알고 있을 정도면 이미 다른 승객들에게도 내 정보가 퍼졌으리라. 내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면, 나 또한 미리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리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 그냥 유명한 신예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그 여자가 자일스 헤센을 기차에


태우는 데에 큰 공헌을 했더라, 이 정도죠. 그건 사실인가요? 설마하니 잘못된 정보가 퍼지지는
않았겠지만…….”

“상상에 맡길게요.”

커피와 토스트가 나왔다. 나는 표면에 작은 파문이 일고 있는 커피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만약 내가 벨담에 내리게 된다면, 피아노를 치러 조용히 사람들 곁을 떠나지는
못하게 되겠구나.

자일스 헤센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온갖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질문을 받는 상황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 나는 반드시 벨담에 내리게 될 것이다. 나를 데려온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일스와 함께 벨담에 가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고스란히 보게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바라나?

희대의 반역자, 자일스 헤센을 처형대로 데려온 여자라고 알려지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내가 자일스를 증오했던 건 사실이었다. 한때 그가 죽기를 바랐고, 그를 죽이기 위해 품에


총을 숨겼던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내 이름이 알려지는 건 싫었다. 그게 마치 좋은 일인 양 소문이 나는 건 더 싫었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미 바뀌어 버렸다. 자일스는 내 눈에 더 이상 괴물로 비치지 않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그를 받아들였다.

이젠 더 이상 확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대로 그가 죽기를 원하는가. 나는 괴물이 아닌 인간 자일스 헤센의 모습을 봐 버렸다. 차라리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의 진실된 모습이 무엇이든, 내 머릿속의 자일스는 여전히 괴물인 편이 더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물론 자일스가 죽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죽든 말든,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자일스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안도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의 비참한 말로를


통쾌해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냥…… 나랑 똑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도 결국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그의 죽음에 어떠한 관여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적어도 내가 그를 죽음의


문턱 앞으로 끌고 온 여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어째서 내가 그런 운명을 짊어져야 하나.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당신 줄게요. 마음껏 드세요.”

“잠시만요, 안나!”

나는 카를라를 그대로 지나쳐 식당 칸을 나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면서도 스스로 혼란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내가 내릴 선택이 앞으로 내 앞길을 크게 좌우할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분명히, 나는 더 이상 자일스를 증오하지 않아.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해 보자.

나는 그를 구하고 싶은가?

그가 살기를 원하는가?

나는 내 감정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직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자.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자.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일 테니까.
나는 객실 문을 열어젖혔다.

자일스가 돌아와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의심할 데 없는 반가움과 깊은 호감이 서려 있는 미소였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문을 조용히 밀어 닫았다. 도저히 그에게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아침 먹고 왔어?”

자일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남한테 다 주고 와 버렸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다급히 객실로 돌아오기는 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다.

“잠은 잘 잤어?”

나는 어색한 인사말로 화두를 떼었다.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잠을


잤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판에 건넬 만한 인사말은 아니었다.

“그럼. 잘 잤지.”

거짓말 같았다. 그의 안색이 어젯밤에 비해 전혀 나아 보이질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자일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자일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리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무슨 일 있어?”

그는 이 와중에도 나에 대한 문제가 생긴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하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 기차…….”

이상하게도, 기차 얘기를 꺼내는 순간 자일스가 긴장을 풀었다. 어쨌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 기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외국으로 가는 기차잖아. 당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그의 대답이 의미심장했다. 그가 기차의 진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 건지 알아?”

“알지. 비텔스덴으로 가잖아. 승무원이 내게 말해 줬거든.”

자일스가 내게 익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 속에서 교활한 속임수나 음모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일스가 일부러 모른 척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이 기차는 비텔스덴으로 가지 않아. 사실은 벨담으로 가는 기차야, 자일스. 벨담으로 간다고.”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가 알아듣기를 바랐다. 그는 벨담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벨담에서 이를


갈고 증오하는 배신자가 지금 철로를 타고 벨담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착까지는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입스윈과 벨담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일스는 내 말을 듣고 놀란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날씨 이야기를 들은 사람마냥 손에
들린 커피 잔에 무던히 입술을 갖다 댔다.

“그렇군.”

“자일스, 내 말 못 들었어? 기차가 벨담에 도착하면 당신은……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나도 알아. 만일 벨담으로 가게 된다면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되겠지. 굳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나는 배신자니까. 벨담 출신 귀족들을 백여 명에 가까이 처형했는데 그들이 나를 증오하지 않을
리가 없지.”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지금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거야?”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위험에 처한 건 자일스인데 발을 동동 구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는 태연히 커피나 마시고 있었다.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초연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안나, 너는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회색 지대에 서 있었다. 그가 죽기를 바라지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 정확히는 아직 확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자일스에게 달려와 진실을 전했다. 당신은 위험에 처했다고. 그러니 어서 달아나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점점 자일스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 쪽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너무 빨랐다. 우리에겐 조금만 더 대화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마워, 안나.”

그래서 나는 태평하게 구는 그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일스는 단지 내가 그에게 경고함으로써 내


진심을 내비쳤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급박한 일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자일스! 당신 곧 죽을 거라니까!”

“내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모르고 기차에 탔을 것 같아? 입스윈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죽은 목숨이야. 내가 과연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 같아?”

“그건…… 그럼 당신은…….”

“나는 다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34 화>
나는 망연히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승차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을 걸 알면서, 그냥 탔다고?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들이 너를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야. 이 기차는 애초에 나를 위한 기차가 아니었어. 다 당신을 태우기 위해서 모략을 짠 거라고.
당신을 그곳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 준비된 거야. 전부 다…….”

“그래. 네가 미끼였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 위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맞아. 나는


미끼다. 벨담 측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일스가 내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내가 출처 불분명의 기차에 올라타면 그 또한 따라올 거란


사실을 알았다.

결국 나만 아니었다면 그는 이 기차에 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절대로…….

나는 나를 짓누르는 감정이 억울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당신을 증오했는데. 당신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고, 당신의 시체 앞에서 웃어 줄 자신이 있었는데. 이젠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진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와 대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억울하고, 화가 났고 또 비참했다. 나는 결국 내가 원하지 않게 될 일에


끌려 들어와 그를 유인할 도구로써 이용당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내가 져야만 했다.

내가 울자 자일스는 이제야 반응을 보였다. 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동요하며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안나, 울지 마.”

“시끄러워.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이렇게
죄를 뒤집어써야 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당신이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이야. 전부 다…….”

“괜찮아. 안나.”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눈물을 그치려고 애써 봤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자일스는 그런 나를


토닥이며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곧 죽을 건 당신인데…… 당신이나 걱정해.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자일스. 곧 열차가 도착할 테고…


….”

“지금은 아직 입스윈 영토에 있잖아. 아직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왔어.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어.


난…… 난 분명히 당신을 증오했는데…….”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나는 팔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바보처럼 그의 앞에서 눈물이나 짜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그러자 나는 한결 나아졌다.

자일스는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는 아주 소중한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도망쳐, 자일스.”

“그래. 그 전에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가 소원을 말했다.

“네 피아노 연주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피아노.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피아노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아마 마지막까지도…… 그럴 것이다.

만찬장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커다란 기물을 어떻게 기차 안에 욱여넣었나 싶지만, 더


놀라웠던 건 피아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기차 안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식사를 들러 올 시간이 아니었다. 만찬장, 혹은 공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오로지 나와


자일스뿐이었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반질반질한 건반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애정을 가진 몇 안


되는 것들이다. 나는 건반을 내려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정말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부탁할게. 안나.”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마 그런 얼굴로 내게 건네는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들려주었던 야상곡을 연주했다.

좁은 기차 안에 음악 소리가 넘쳐흘렀다. 기차 안이라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피아노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연주하는 야상곡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서정적인 야상곡은 마치 다가올 운명이 얼마나 침울할지 알면서도 기다리는 이의 노래 같았다. 그렇기에
우울하다기보다는 담담한 어조를 갖고 있었다. 나 또한 곡을 연주하면서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자일스도 이런 이유로 내 연주를 듣고 싶다고 한 것일까.

선율이 마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피아노 건반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이 순간만큼은 승객들의
말소리도, 철로를 지나는 거대한 바퀴 소리도 음악 소리를 해치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적을 상상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겁에 질려 움츠러든 채 건반을


눌렀던가.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을 것이다. 아마 내 연주도 그때와는 참 많이
달라졌겠지.

그때는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은 반대로 자일스가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어 주는 중이었다. 음악으로써.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연주가 잠시 주춤거렸다. 곁을 지키고 서서 내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자일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제 살길을 모색하러 떠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있는 군인이니까. 그 또한 생존자니까.

대신 나는 전혀 다른 남자가 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앨버트였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돌연 붙들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앨버트는 내 앞에서 저리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너, 자일스 헤센한테 말한 거야?”

“아파, 앨버트.”

“쥐새끼 같은 년이 그 새를 못 참고 일을 그르치려 들어?”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 오른쪽 뺨에 불이 났다. 나는 맞은 부위가 빨갛게 부어올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앨버트는 내 손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따라와. 제멋대로 군 대가를 치러야지.”

그가 나를 끌고 온 곳은 엔진실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이런 장소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벌겋게


불타오르는 커다란 엔진 때문에 후덥지근했다. 이곳을 밝히는 빛이라고는 오직 멈출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엔진밖엔 없었다.

나는 두 손이 결박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앨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앞에 우뚝 서서 버티고


있었다.

언젠가 이 자식이 내게 이런 짓을 할 줄 알았다. 그가 내게 베푼 호의는 거짓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의 호의를 보란 듯이 배반하자, 그는 내게 되갚음을 하려 했다.

“안나.”

앨버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아마 그의 진짜 목소리겠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

“내 코앞에서 날 등쳐 먹으려 하면 안 되지, 응? 이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선 안 됐어.”

“왜? 도청이라도 했어?”


복부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앨버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땀으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긴, 내가 누군지 모르니 이런 깜찍한 짓을 벌인 거겠지.”

그가 예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소는 절대 예전 같지 않았다.


붉은 빛이 앨버트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그에게서 몸을 빼려 했지만 그럴수록 앨버트는 내 머리채를
더욱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나, 왜 그래? 응? 우린 같은 벨담 사람이잖아. 넌 한 번도 벨담 땅을 밟아 본 적이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넌 분명 그를 증오했잖아. 자일스 헤센이 죽기를
바랐잖아. 나만큼이나! 그런데 왜 나를 배반하려 했지?”

그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 같은 것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렸을 거다. 앨버트는 대신에 분노로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놈 밤기술이 죽여줬나 보지, 그렇지?”

“역겨운 자식.”

“자기소개는 그만 해 둬. 어디, 한번 말해 봐. 헤센이 침대 위에서 널 어떻게 만족시켜 줬지? 네가


배신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뭐였어?”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조롱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난 그저 그와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었다. 앨버트는 내 저항을 참아 주지 않았다. 그가 내 따귀를 때렸다.

“말해!”

입 안이 터졌다. 나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너무 더웠고, 나는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35 화>

앨버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작정하고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그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강한 믿음이 들었다.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자의 가면 뒤에는 살인과 고문에 익숙해진 잔인한 영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표적이 된 건 바로 나였다.

그가 윽박질렀다.

“너 같은 년이 수작질을 부린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 같아? 우리는 곧 국경을 통과해. 기차는 두


시간 내로 벨담 영토에 진입할 거야. 자일스 헤센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이미 다 늦었다고.
그놈도, 너도 이제 끝장난 거야.”

뭔가 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앨버트는 내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맞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는 물체가 없었다.

그때였다. 소름끼치는 소음이 귓구멍을 헤집고 들어왔다.

끼이이익―

기차가 급제동을 걸고 있었다. 앨버트가 내 머리채를 놓치는 바람에 나는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찧었다.
몇 초가 지나자 소음이 멈추었다.

내 정신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나는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며 상황 파악을 위해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누군가 엔진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내가 모르는 남자였다. 그는 앨버트에게 경례를 올려붙이더니


급박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비상 상황입니다, 요원님.”

“뜸 들이지 말고 똑바로 말해.”

“기차가…… 기차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의 부하는 잔뜩 동요한 얼굴로 대답했다.

“선로가 끊겼습니다. 이 앞에는 아예 길이 없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앨버트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머리에 뭔가를 씌웠다.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소재였다.

어둠 속에서 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 막혀서 질식사하든지 알아서 하라지. 이년은 자일스 헤센이 죽인 거다. 그렇게 알고 있어.”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숨을 몰아쉬었다. 체온이 오르고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해 봤지만 허사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서 죽지 않을 거다. 정신을 잃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기차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앨버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승객들이
저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리며 바깥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다. 앨버트는 그들 쪽으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입 다물고 있어!”

그러자 문이 닫히고 모두가 사라졌다. 부하들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앨버트는 땅
위로 발을 내디뎠다. 바깥은 아직 밝은 낮이었다. 그들은 잔디가 아무렇게나 자란 땅 위를 나아가 증기
기관차의 선두 근처에 다다랐다.

부하의 말대로 선로가 끊겨 있었다. 원래 선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땅 위에는 선로가
설치되어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임무는 실패했다. 그들이 발각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기차를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일스 헤센을 찾아. 그놈만은 우리가 쥐고 있어야 해. 아직 이 기차 안에 있을 거다.”

“다른 승객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이젠 우리 소관 아니니까.”

앨버트는 몸을 돌려 다시 기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에겐 자일스 헤센을 붙잡아 퇴로를 모색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방에서 군용 트럭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든 기차에는 통신 기기가 있다. 언제든 비상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기기라면 옆에서 지킬 사람을 세워 두었을 것이다. 자일스는 운전실 근처에서 경비를
서는 요원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 자일스를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다. 자일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요원의 사각지대에서 발소리를


죽이고 그에게 접근했다.

요원이 그쪽을 돌아보려던 그 때, 자일스는 순식간에 요원을 제압하고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가 발버둥 치는 요원에게 속삭여 물었다.

“통신 장비는 어디 있나?”

요원은 씩씩대며 끝까지 저항하려 했다.

“너 같은 반역자한테 그런 걸 알려 줄 것 같…… 으윽!”

칼날이 그의 허벅지를 가르고 들어갔다. 요원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자일스가 먼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다시 물었다.

“통신 장비는 어디에 있나? 좋은 말로 할 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요원은 덜덜 떨면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일스 또한 그 위치를 확인했다. 이제 요원은 쓸모가
없다. 자일스는 그의 목을 꺾어 버리고 장비를 향해 다가갔다.

기차는 국경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입스윈 영토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보안국
사무소에 전파가 닿을 것이다. 자일스는 그가 알고 있는 비상 코드를 입력했다.

신호음이 울렸다. 이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누군가 통신을 시도했다는 걸 다른 요원들이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통신을 마쳐야만 했다.

곧 상대편에서 응답을 해 왔다.

“9007 사무소입니다.”

“코드 307 헤링본 월터. 2000 벌쳐 연결 바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다른 사람이 통신을 연결했다. 해링턴이었다.

“무슨 일인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기차 말입니다.”

“설마 그 기차에 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탄 거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벨담으로 탈출하려는 벨담인들이 타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면 국경을 지납니다.”

“시간이 얼마 없군. 지금 입스윈 영토를 지나는 기차가 한두 대가 아니네. 어떻게 자네가 탄 기차를
식별할 수 있겠나?”

자일스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기차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 무엇으로 식별해야 하지? 신호음?
멀리서도 주파수로 추적할 수 있는 소리 형태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추적하십시오. 반드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벨담 국경을 지나는 모든 선로를
미리 제거하라고 이르십시오.”

통신이 끊겼다.

이제는 시체를 치워야 할 때였다.

비슷한 시각, 보안국 사무소 요원들이 수많은 전선이 연결된 커다란 장치 앞에 모여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서쪽 국경 지대에서 발생하는 440 헤르츠 이상의 소리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요원 하나가 장치의 다이얼을 조절하던 동료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들린다.”

그러자 다른 요원들도 전부 헤드폰을 착용했다. 그들은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른슈타인 야상곡


가단조였다. 전해 들은 바와 같았다. 확실한 피아노 소리였다.

그녀가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헬레나, 루비, 좌표 확인해.”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현재 시각, 자일스 헤센은 좌표를 지정받고 몰려든 트럭 무리를 보고 있었다. 기차는 멈추었고, 그들은
포위당했다. 벨담 정보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무장한 요원들이 총을 들고 대응을 시도했다.

총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도 함께 들렸다. 자일스는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동료들을
돕기 위해 나온 참인 벨담 요원과 마주쳤다.

그가 총을 들기도 전에 자일스가 먼저 사격을 가했다. 그는 힘없이 쓰러진 요원의 시체를 지나쳐 계속


나아갔다.

바깥으로 나가자 후방을 점거한 입스윈 군인들이 그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개중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직속 부관인 찰리 스펜슨이 와 있었다.

“대위님.”

그가 자일스에게 군용 코트를 입혀 주었다. 찰리는 씩 웃으며 자일스를 반겼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또 한 건 올리셨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언제나


대위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쪽 상황은 어떻지?”

“아직 기차를 완전히 점거하지는 못했지만, 저희 쪽 전력이 훨씬 압도적입니다. 머지않아 전부 제압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유 부리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부하들을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제 몫을 잘 할 것이다. 지금 자일스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들이 처음엔 안나에게 관심이 없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아니었다. 비록 본인은 몰랐겠지만, 안나가
기차가 발각되도록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는 공식적으로 벨담의 배신자나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연주가 아니었더라면 기차는 벌써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지휘관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안나를 찾아야 했다.


<36 화>

6. 봄의 제전

자일스는 안나를 찾아 기차 안을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모든 객실 문을 열어 보고, 입구가 있는 곳이라면


샅샅이 뒤졌지만 아직까지 안나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심장이 조여 왔다. 왜 그녀가 보이지 않는 거지? 자일스는 시체가 되어 버린


안나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금단 증상이 도진 사람처럼 숨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때, 반쯤 기절한 여자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남자가 보였다. 자일스는 권총을 장전했다.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자일스는 단박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앨버트 쇼였다.

자일스는 그가 짐짝처럼 붙들고 있는 안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의사에게 진찰을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안나를 놔줘.”

자일스가 말했다. 앨버트는 자일스에게 총을 겨눈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호기롭게 입스윈에 잠입해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 벨담 요원의 말로가 저 꼴이었다.

“다가오지 마.”

앨버트가 경고했다. 물론 전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총구를 안나의 머리에 들이민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니면 이 여자는 죽는다!”

“그녀를 죽여 봤자 네게 득 될 건 하나도 없다.”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저승길에 계집년 하나 대동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등 뒤로 부하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건


앨버트뿐이다. 앨버트는 그와 대치한 군인들을 경계심 서린 눈길로 쏘아보더니 안나를 붙잡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내게 불만 따위 없어야 할걸! 난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최소한 너희들에겐 그렇겠지. 이


여자가 누군지는 알아?”

궁지에 몰린 그의 얼굴 위에 마지막 희열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빠진 수렁에 안나를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안나 키팅은 그냥 피아니스트가 아니야! 이 여자는 너희들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벨담―”


그러나 앨버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탕! 총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자일스는 그와 함께 쓰러진 안나를 서둘러 부축했다.

그는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그를 올려다보는 초점이 흐릿했다. 온몸에 열이 나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심지어 구타를 당한 건지 아물지 못한 상처까지 생겨 있었다.

“의무병도 같이 왔나?”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자일스는 안나를 품에 안아 들고 다급히 기차를 빠져나갔다. 부하의 말대로 적십자 완장을 찬 군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일스는 의무병에게 안나를 넘겼다. 그는 안나를 살피더니 자일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자일스는 숨을 길게 내려놓았다. 긴장이 탁 풀리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몸이 균형을 잃었다. 그는 트럭에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이대로 잠깐 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자일스는 항복을 표하며 기차에서 내리고 있는 승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울고


있었다. 자일스는 지금 여기서 저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총소리가 들리면 안나가 혼란스러워할 테니까.

나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곧 죽을 거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올 수 없었고, 내 머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온몸이 불타오르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던 그때였다.

누군가 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봉투를 벗겼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앞이 밝아지고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하지만 저항하거나 무언가 쓸모 있는 말을 할
상태는 여전히 아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끌려가듯 간신히 걷던 나는 어느 순간 멈춰 섰다. 나를 붙들고 있던 남자가


나를 배려하지 않은 까닭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군용 코트를 입은 또 다른 남자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시야가 어지러웠다. 남자가 내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아니, 날 붙든 남자에게 겨눈 건가?

두 사람이 무어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그때, 귓속을 파고든 남자의 말 한마디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 여자는 너희들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벨담―”

군용 코트를 입은 남자가 총을 쐈다.


탕!

천둥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굉음에 놀란 나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내 팔에 뭔가가 꽂혀 있었다.


링거였다. 나는 내가 입은 하얀색 병원복과 내 몸을 덮은 하얀색 시트, 그리고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얇은 린넨 커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있었다. 자일스 헤센.

다시 익숙한 군복 차림으로 돌아온 그가 물어 왔다.

“몸은 좀 어때.”

“……여기가 어디야?”

“군사 병원이야. 쾌차할 때까지는 여기서 쉬도록 해. 간호사들이 널 잘 돌봐 줄 거다.”

자일스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접시에 담긴 포도였다. 나는 알이 그렇게 굵고 커다란 포도는 난생 처음


보았다.

“먹어.”

“이건 누가 줬어?”

“…….”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한 알이라도 먹기를 바라는 눈으로 날 지그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무슨 약을 놓은 건지는 몰라도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

그러자 자일스가 접시를 물렸다. 그는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좀 괜찮아지면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다 먹어라. 다른 사람은 주지 말고.”

“간호사가 나눠 달라고 하면?”

“자일스 헤센 대위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해.”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러 장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기차에 있었는데. 나는…… 그
엔진실에서 살아 나온 거구나.

“기차는 어떻게 됐어? 승객들은?”

“당국에서 압수한 뒤 조사 중이야. 승객들은…….”

“죽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자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어. 안전한 곳에 구금해 놨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벨담에서 자국민 송환을 위해 우리와 협상을 진행 중이야. 잘 마무리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그래도 이제 무턱대고 죽이지는 않나 보네.”

“살려 두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으니까.”

“……앨버트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나마 그가 날 붙잡고 있던 게 떠올랐다.

자일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죽었어.”

그는 내가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덧붙였다.

“그리고 그놈 이름 앨버트 아니야.”

“그럼 뭔데?”

“알베르트 레만. 육군 출신 정보국 소속 요원이다. 전쟁에도 참전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알베르트나 앨버트나 그게 그거 아니야?”

“엄연히 달라.”

뭐, 그런가 보지. 나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앨버트가 죽었다는 건 조금 의외인 사실이었다. 오히려
앨버트를 살려 두고 그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려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너를 때린 건가?”

자일스가 물었다. 나는 문득 내 얼굴을 만져 보았다. 반창고와 거즈가 붙어 있었다. 이제야 모든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아주 죽여 버릴 것처럼 굴던데. 내가 당신에게 기차에 대해 말해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나 봐.”

“얼마나 많이 때렸지?”

“내가 맞아 본 것 중에 제일 아팠어.”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일스를 곁눈질했다. 그는 앨버트를 부활시킨 후 한 번 더 죽이고 싶어 하는


눈초리였다.

“널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

“괜찮아. 안 죽었잖아. 난 끝까지 버틸 자신 있었어.”

“내가 널 발견했을 때 네 상태는 정말 심각했어.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뭘 어떡하게? 내가 애도 아니고. 업고 다니기라도 하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


말도 안 돼. 나는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뭍에 내놓은 금붕어인 줄로 착각할 때가
많았다. 보통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나는 그가 그 나름대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런 호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자일스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그가 나를 아끼는 만큼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대신에 나는 그에게 다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당신이 벨담으로 가지 않아서.”

“내가 그렇게 쉽게 잡힐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어떻게 한 거야? 기차를 기습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줄게. 지금은 그냥 쉬는 것에만 집중해.”

“이제 갈 거야?”

“곧 돌아올 테니까 잠깐 자고 있어.”

자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한쪽 팔에 걸쳤다. 나는 떠날 준비를 하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넘겨짚지는 마.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해야. 난 그냥……


훗날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래.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지.”

자일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서 그런지 그의 미소가 한층 더 가벼워 보였다.
그는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사람 같았다.

솔즈부르의 저택에서 내가 그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때는 정말이지 얼굴 위에 내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가 내게 잠깐의 작별을 고하자마자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역시 군복을 입고 있었고, 자일스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37 화>

자일스는 남자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해링턴 장군님.”

“자일스, 여기 있었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의 자랑스런 피아니스트 아가씨를 보러 왔지.”

해링턴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어쩐지 격식을 갖춰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해링턴은 나를 만류했다.

“누워 있으십시오.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지. 몸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덕분에요.”

“그래야 마땅하지요. 의료진이 아가씨를 치료하는 동안 자일스가 밖에서 얼마나 감시를 해 댔는지,
절대로 허투루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해링턴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자일스는 곤란한 기색이었다. 해링턴은 그에게 손짓해 보였다.

“자네는 그만 가 봐도 좋네.”

“키팅 양은…….”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몇 마디만 나누고 바로 갈 거야. 나도 바쁜 몸인 거 모르나?”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예를 갖춘 후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복도를 울리는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해링턴


장군은 자일스가 앉았던 바로 그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녀석이 누군가를 그렇게 애지중지 대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바람직한 일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다는 건 말입니다.”

“저흰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모른 척 입 다물고 있도록 하지요.”

나는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을 말았다. 장군이라 불린 걸 보아 하니 이 남자가 혁명군의


지휘관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높으신 분이 나를 왜 보고자 했는지 의문이었다.

“포도가 꽤 실하군요. 자일스가 가져온 겁니까?”

“그런가 봐요.”

“값을 꽤 치러야 했을 텐데. 지극정성이군요.”

해링턴은 내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우리 둘을 연인 사이로 생각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머지않아 그가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키팅 양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게 뭘


물으려는 걸까? 그가 자일스를 물렸다는 게 신경 쓰였다.

자일스가 아닌 다른 혁명군 간부를 마주하자 내가 갖고 있는 비밀이 다시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넌 결백해. 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안나.
해링턴이 질문을 시작했다.

“자일스를 도와 기차를 멈추는 데에 큰 도움을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키팅 양의 연주가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주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죠. 정말 영웅적인 일을 해 주셨습니다.”

“감사해요.”

“저희가 본래 바랐던 것은 알베르트 레만의 생포였습니다만……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던 탓인지 그리


되지는 못했더군요. 아무튼, 그건 키팅 양과는 관련 없는 얘기니까요. 제가 묻고 싶은 말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알베르트 레만과는 언제부터 접선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자일스가 키팅 양께 지시를 내린 것 같기는 한데


…… 제게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거든요. 자일스가 제 독단으로 일을 진행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처음부터 레만과 기차에 대해 알고 계셨던 겁니까?”

생각보다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들어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진실을 말해야 하나? 해링턴은 내가
자일스의 비밀 요원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앨버트는 한때 내 동료였고, 내가 믿었던 사람이었으며, 나는 자일스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나


또한 자일스를 제거하려던 세력의 일원이었고.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은 내게 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
안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낼 자신은 없었다.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내며 얼버무렸다.

“자일스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했어요.”

“저는 자일스의 상관입니다. 자일스가 그리 말한 건 외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제 마음대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내가 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가 자일스와 말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답변을 최대한 피해야


했다.

“그 녀석이 단단히 일러둔 게 분명하군요.”

“자일스가 화를 낼까 봐 무서워요.”

다행히 나는 불쌍한 여자 연기를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걸로 살아남은 적도 있을 정도다.

“그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려 놓으면 기분 상해 하거든요. 저번에도 제 마음대로 그런 적이 있었는데…


… 다시는 자일스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기분을 풀어 주느라 정말 힘들었거든요.”

내가 울먹거리자 결국 해링턴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진 마시죠. 뭐, 이런 이야기는 자일스와 직접 나눠도 되는 거니까요. 생각해


보니 제가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남자들은 힘없고 처연한 여자에게선 아무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눈물을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의지를 잃어버린다. 나는 그런 경향을 잘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자일스가 험하게 굴 때가 있었습니까?”

“마음 쓰실 일은 아니었어요. 그에게 뭐라 하지는 말아 주세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지주 혈통을 타고나서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본성이 튀어나올지도
모릅니다. 그 점은 이해하십시오. 몸속에 흐르는 피를 어찌 하겠습니까? 그래도 좋은 녀석입니다.
자랑스런 혁명 영웅이죠. 혹시라도 그와 미래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해링턴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대충 웃기만 했다. 그는 우리 사이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자일스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이미 몇 년 전에 내 마음속에서 죽어 버렸다.

사랑, 믿음, 결혼…… 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한다는 것. 나는 그러한 개념들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서로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서 평생 매여 살기를 자처할 정도로
신뢰하게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저는 키팅 양이 계셔서 안심입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일스는 세상에 그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거든요.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습니다만, 얼굴을 보면 알죠. 원하는 것도 없고,
그저 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할 뿐이고…… 어느 날 갑자기 목이라도 매달까 봐 무서울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일스에겐 키팅 양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 녀석에게 잘해 주세요. 자일스가 누군가를
그토록 애정을 갖고 대하는 건 처음 봅니다. 어쩌면 키팅 양 덕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일스가 나를 각별히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 벨담 요원들에게 생포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기차에 오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불순한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망친 후로부턴, 그가 내 도주를 빌미로 앙갚음을
하려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부 틀렸다. 지금은 그 사실을 안다. 자일스는 처음부터 내
안위만을 걱정했을 뿐이라는 걸.

하지만 난 자일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나는 그 흔한 부모의


사랑조차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 이런 감정을 표현할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자일스를 사랑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잘 모르겠다. 확실히 그가 더 이상 두렵지는 않았지만,


딱히 그가 잘못될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의 이름을 떠올려 보아도 심장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와 이야기를 더 해 보고 싶었다. 그라는 사람이 누군지 더 깊게 알고 싶었다.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이제 그에게서 음습한 속셈을 찾아내려는 생각은 접었다. 내게 남은 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나도 그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자일스가 많이 힘들어했나요?”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거든요. 물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긴 했습니다만…… 충격을 받을 만했죠.


자일스는 제가 아끼는 부하들 중 하나입니다. 제 모든 것을 바쳐 혁명에 투신한 사람 아닙니까. 비록
벨담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걸 잊게 할 만큼 입스윈에 대한 애정이 투철한 놈입니다. 이젠 지도부에서도
자일스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해링턴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무래도 이만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아무쪼록 쾌차하십시오. 안 그럼 애꿎은 간호사들이 시달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그러고 보니 깜빡 잊을 뻔했군요. 곧 혁명군 간부들을 위한 연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 밖에 명망


높은 입스윈 인사들도 참석할 예정이고 말입니다. 물론 자일스도 함께할 자리이니, 키팅 양이 와
주셨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제가요?”

“꼭 자일스의 파트너로서가 아니더라도 키팅 양은 충분히 음악계의 신예 유명 인사가 아니십니까? 대단한


피아니스트를 모시게 되는 건 저희로서도 영광일 겁니다.”

그가 초대장을 건넸다. 장소와 날짜 등 중요한 정보만을 기재한 약식 초대장이었다.

<38 화>

“그때까지 꼭 나으셔서 참석해 주시면 기쁠 것 같군요.”

“노력해 볼게요.”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는 군모를 가슴 위에 댄 채 살짝 목례를 해 보였다. 나는 해링턴이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 문이 닫혔다. 이제야 혼자가 된 나는 긴장을 풀고 숨을 탁 내려놓았다.

다행히 그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장군씩이나 되는 사람이 모를 정도라면 이제 입스윈


전역에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 생각해도 될 것이다.

단, 자일스를 제외한다면. 이제 그만이 내 혈통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그 사실이 내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러나 자일스는 내 혈통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오직
내 안전뿐이었다.

그는 내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안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한 때 내 악몽의 근원이었던 남자. 자일스 헤센. 아직도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불분명하다. 그가 자꾸만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는데. 당신이 내게 하는 것만큼 똑같이 돌려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방법도 모르고, 당신에 대한 내 감정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기에.

나는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해야 할까.

그가 사 온 게 분명한 포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팔을 뻗어 접시를 가져왔다. 포도 알을 따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곧 그것을 입 속에 넣었다.
자일스가 내게 주고 싶어 했던 과일은 달았다.

내가 먹어 본 것들 중에 제일 달콤했다.

“안나.”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자일스가 머리맡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잠든 사이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눈앞이 환한 걸 보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후 네 시 정도.”

“내가 그렇게나 많이 잤단 말이야?”

“환자는 원래 숙면을 취해야 해.”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이 덜 깬 탓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고개가 자연히 자일스 쪽으로


돌아갔다. 별 이유는 없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게 자일스였으니까 쳐다본 것뿐이다.

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보니 자일스는 확실히 미남이었다.

그는 날렵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호사들이


자일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의 눈에 뭐가 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객관적으로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건 인정한다.

“여기 근무하는 간호사들 잘 알아?”

“아니.”

“널 좋아하던데. 특히 빨간 머리를 가진 분이 말이야.”

자일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가?”

“처음 보자마자 반했대. 당신 매력이 그 깊은 눈동자랑 꾹 다문 입매래. 아무래도 당신에게 곧 저녁


일정을 물을지도 몰라.”

나는 말하면서도 킥킥 웃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아주 익숙하다는 듯 굴었다. 흥미를 잃은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래도 거울은 보고 산다 이거야?”

“갑자기 왜 그래, 안나?”

“몰라. 그냥 잠이 덜 깨서 그래. 게다가 당신 앞에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간호사 얘기는 잊어. 원한다면 그분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만.”

“관심 없어.”

그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자일스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뭐가?”

“……아니야, 됐다.”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느라 잘 못 봤는데, 자일스의 낯빛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야?”

“당신 상관이 주고 갔어. 나더러 참석하라던데.”

“다른 말은 없었고?”

“몇 가지 묻기는 했는데…… 별말은 안 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으니까.”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말뜻을 알아먹은 것 같았다.

“참석할 생각 있어?”

“나한테 결정권이 있기는 한 거야?”

“내키지 않으면 내가 대신 전달해 줄 수 있어. 그들도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됐어. 그렇게 할 것까지야 있겠어? 그냥 파티일 뿐이잖아. 대충 얼굴만 비치고 오지, 뭐.”

나는 돌연 목소리를 낮추곤 속삭였다.

“내 진짜 이름에 대해 아는 사람 없는 거 맞지?”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 걱정하지 마.”

“그러고 보니 내가 꿈을 꿨는데…….”

꿈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건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앨버트가 나에 대해 말하려 하더라고.”

“영원히 입 막아 뒀어. 괜찮아.”

“괜찮은 거야? 그 사람, 원래 죽이면 안 되었던 사람 같던데.”

“내가 책임질 수 있어.”

나는 잠시 떠오른 걱정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았다. 어차피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일 테니까. 맞은편 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입에서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이랑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이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그랬다. 온갖 두려움과 망상의 힘을 입어 크기를 불렸던


악몽은 완전히 쪼그라들어 버렸다.

나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난 궁지에 몰려 있었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최악을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던 때였어. 특히나 당신은 혁명군이었고, 난…….”

귀족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하려던 그때, 자일스가 내 오른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당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어. 그 점은 당신도 이해해야만 해.”

“안나, 괜찮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그를


오해했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사랑과 온기…… 한때 그것들을 좇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게


약삭빠르고 교활할 것을 요구했다.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능력은 언제나 상대방이 나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런 습관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자일스가 내게 보인 호의와 진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지 못했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든 나는 항상 긴장을 유지했고, 그
습관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마워.”

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말이다. 그는 나를 구했고, 나는 그 사실이 고마웠다. 그러니 이


말만은 자신 있게 건넬 수 있었다.

자일스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가 내게 물어 왔다.

“안나, 바깥에 좀 나갔다 올까?”

“왜? 산책하게?”

“산책도 산책이지만…… 연회에 가려면 준비를 해야 하니까.”

“무슨 준비?”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자일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아, 그렇지. 높으신


분들이 참석하는 연회였지. 그런 곳에 그냥 평범한 차림으로 입장할 수는 없는 일이리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드레스 고르러.”


외출을 하기 전, 의사가 나를 진찰하러 왔다. 내가 외출을 다녀올 만큼 회복이 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차트를 보고, 몇 가지 검사를 마친 끝에 그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봄철이지만 아직 저녁 공기는 쌀쌀해요. 환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자일스는 의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 옷은 옷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얇은 코트까지…… 옷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곧 하나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을 읽은 것인지, 미처 묻기도 전에 자일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돌려줬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필요 없어.”

이제 그런 물건은 쓸모가 없다. 사실 나는 총을 다루는 법조차 제대로 몰랐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건 알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칸막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자일스가 멀찍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과


똑같은 짙은 색의 군복을 입고서, 흐트러짐 한 점 없는 모습으로. 옷매무새에 구김 하나 없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이마를 드러낸 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일 것이다. 공허하고 텅 비어서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게 하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사뭇 다른 색채가 감돌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가 가지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자일스는 이제 원할 때면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는 함께 병원 밖을 나섰다. 그리고 입스윈의 시내를 걸었다. 그는 나를 가장 번화한 거리로 데리고


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이런 곳을 속 편하게 걷는 게 처음이었다. 기차를 타기 전만 해도 그의 눈에 띌까


봐 노심초사하며 시장이나 겨우 갔다 오던 게 전부였으니까.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다. 질 좋은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화려한 쇼윈도도, 매끈하게 다듬은


돌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해 공사한 바닥도, 처음부터 이런 풍경의 일부였다는 듯 자연스레 내 눈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전부 다.

<39 화>

나는 체면도 잊고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하기 바빴다. 마치 유원지에 처음 방문한 아이처럼 말이다.

“원래는 벨담 사람들이 다니던 거리야.”


자일스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이 거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졌지. 해가 지면 더 볼만해져. 조명을 화려하게 깔아


놨거든.”

“오늘 못 본다는 게 아쉽네. 당신도 이 거리를 걷곤 했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였어.”

“그런데 드레스를 여기서 골라야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아?”

자일스는 미소로 대답을 무마했다. 나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전부 잃었다. 아마 예전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반대다. 자일스는 과거에서 한 발짝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미래로 서둘러 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야.”

자일스는 어느 살롱 앞에서 멈췄다. 내가 보기에도 부자들이나 들락거렸을 법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샹들리에가 먼저 내 눈길을 끌었다. 미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붉은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그녀의 눈길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자일스에게로 옮겨 갔다.

“아, 일행 분이 있으셨군요. 혹시…….”

그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일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혹시…….”

“오랜만입니다, 마담 멘델.”

자일스는 여자의 손등을 잡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쉰 멘델 부인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자일스!”

“너무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니? 난…….”

그녀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네가 잘못된 줄 알았어. 그게, 그러니까 그동안 큰일이 있었잖니. 어떻게…… 정말 살아 있었구나.”

멘델 부인은 자일스를 터뜨릴 기세로 끌어안았다. 감동의 재회를 지켜보던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아는 사이예요?”

“난 자일스가 어린아이였을 적부터 봐 왔어요! 세월도 참 빠르죠. 그렇게 작고 귀엽던 애가 이렇게


어엿한 남자가 되어 버렸으니. 다시는 자일스를 보지 못할 줄 알았어요. 정말이지…….”

뭔가 기억해 낸 멘델 부인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누이는? 셀레스트 말이야! 그 애도 잘 있지? 셀레스트가 가끔씩 드레스를 맞추러 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일스는 셀레스트의 호위 기사처럼 항상 옆에서 보좌하곤 했답니다. 정말 착한
아이였는데. 네가 잘 살아 있는 걸 보니 분명 그 애도 무사하겠구나.”

자일스는 애써 가짜 웃음을 지으며 거짓말을 꾸며 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잘된 일이야, 정말 잘되었어. 비록 저 벨담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나는 이 남매를 무척 아꼈어요.


아직도 아이 때 모습이 눈앞에 선연한데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튼, 오늘도 드레스를 맞추러
온 거지?”

“곧 연회가 있습니다. 제 파트너가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자,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멘델 부인이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녀의 가이드를 따라 드레스를 한 벌씩 입어 보았다.

같은 드레스라고는 해도, 내가 비스마르 백작 영애일 적에 입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벨담식의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간소하고 심플한 이브닝드레스가 주를 이뤘다.

옷을 고르면서, 나는 멘델 부인에게 틈틈이 질문을 했다.

“자일스가 어릴 때 이곳에 자주 왔었나요?”

“때때로 오는 편이었죠. 아주 어릴 땐 어머니를 따라서 오는 편이었고, 좀 커서는 누이와 함께 오더군요.


아무튼 가족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던 애였어요.”

“어렸을 땐 어떤 사람이었나요? 자일스 말이에요. 제 말은, 그러니까,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거든요.”

“어린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죠, 뭐. 가끔씩은 떼를 쓰고, 그러다 혼이 나기도 하고…… 자일스가 한 소리


듣고 훌쩍일 때면 몰래 사탕 한 개를 쥐여 주곤 했답니다. 그럼 금세 눈물을 그치고 착한 아이처럼 굴곤
했죠.”

멘델 부인은 좋은 시절을 회상하듯 미소를 지었다. 자일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머릿속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자일스 쪽을 힐끔거렸다. 그가 등을 보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뒷모습만으로도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셀레스트라는 사람은요? 자일스의 누이라는 건 들었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일스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방금 처음


들은 참이니까.
“착하고 여린 소녀였죠. 마지막으로 본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햇살처럼 긍정적인 기운을 주변에 흩뿌리고 다니던 애라는 건 기억나네요. 자일스는 그런 누이를 진심으로
따랐어요. 무엇보다 셀레스트가 자일스를 많이 챙겼죠. 아마 지금도 그 우애는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소녀와 어린 자일스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자일스의 누이는 그와 딴판으로 생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일스는
멘델 부인의 묘사와는 정반대인 인상을 갖고 있었으니까.

혹은…… 그가 견뎌 내야만 했던 일들이 자일스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자일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일스의 파트너라고 하셨죠?”

“파트너 자격으로 참석하는 거예요.”

“실제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설마, 아무 사이도 아닌 남녀가 파티에 함께 참석하는 일은 드물어요. 뭔가 있겠죠. 적어도 자일스는


당신을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로 보지는 않는 것 같던데요.”

멘델 부인은 내게 새 드레스를 가져다주며 빙긋 웃었다.

“뭐, 보면 알겠죠.”

몇 벌을 거친 끝에 멘델 부인은 나를 위한 마지막 드레스를 골랐다. 어깨를 드러내 그 주변으로 얇은 숄을


두른 듯한 디자인으로, 발목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진주 빛 이브닝드레스였다.

멘델 부인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 등을 떠밀었다.

“가서 보여 줘요. 파트너도 당신 모습을 봐야죠.”

나는 멘델 부인에게 이끌려 앞으로 나갔다. 자일스는 의자에 앉아 손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의 시선이 옮겨 왔다.

나는 어색한 동작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다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멘델 부인은 이게 제일 낫다는데.”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않고 내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무안해진 나는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다른 거 입어 보고 올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자일스는 뒤늦게 일어나 내 손을 붙잡았다. 얼마간 나를 보며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칭찬을 건넸다.

“예쁘다.”

그렇게 말하는 자일스의 얼굴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채를 띠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나는 행복했을 시절의 그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입스윈의 수도 언저리에 자리한 커다란 광장은 시민들에게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고는 했다.

광장을 중심으로 시가지와 공원이 뻗어 있는 것은 물론, 축제가 있을 때마다 모든 주요 행사가 바로 이


광장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이 광장을 메이나드 광장이라고 불렀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몇 번씩 바뀐
끝에 정착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 메이나드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커다란 건물이 있다. 어떻게 보면 궁전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커다란 학교나 청사 같기도 한 이 웅장한 직사각형 건물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쓰임새 또한 변해
왔다.

처음에 이 건물이 지어진 건 왕정이 위세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곳은 나라를 대표하는 무역 업체
건물로 쓰였다. 왕정의 기반이 흔들리고 벨담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이 건물은 벨담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지배의 근간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은 이곳을 비밀경찰 본부로 사용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4 층
건물만 봐서는 평범한 보안국 건물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지하층에는 끔찍한
감옥과 고문실이 숨겨져 있었다.

사람들도 이 건물이 풍기는 공포스러운 존재감을 느꼈다. 벨담 비밀경찰들이 들락거리던 시절, 이곳


주변은 이례적으로 인파가 적은 곳으로 변모했다.

메이나드 광장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불길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건물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벨담인들의 지배도 물러간 지금. 이 건물은 현재 혁명군의 본부로 쓰이고 있다. 옛
왕족들의 취향에 맞추어 고풍스러우면서도 절제된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 지하에 숨겨진 음침한
복도에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본부에 들락거리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건만, 창백한 불빛만 깜박거리는 지하층은 여전히


꺼림칙했다. 그래도 나름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지상층과는 달리 이곳은 본색을 드러내는 지점
그 자체이다.

지하 1 층은 사무실과 취조실이 자리하는 층이다. 자일스에겐 이곳에서 만나야 할 인물이 있었다.

<40 화>
자일스는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 중이던 어린 요원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센 대위님.”

“빈센트는?”

“지금 취조실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아직 일이 덜 끝나서 말입니다. 하지만 들어가신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곧 나오실 겁니다.”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요원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 또한 유리벽 너머로 취조실 상황을
내다볼 수 있었다. 바깥에서만 볼 수 있고,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벽이었다.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의자에 묶어 놓은 또 다른 남자의 턱을 붙잡고 무어라 윽박지르고


있었다. 날 선 목소리가 방음벽에 막혀 웅웅거리는 소리로 전락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음악을 틀까요?”

요원은 그새 축음기 옆으로 가 있었다. 이곳에는 많은 레코드판이 구비되어 있었다. 벨담 지배하에 있을


때부터 존재했던 물건들이었다. 저 축음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여전했다. 벨담인들의
악취미를 혁명군이 그대로 물려받게 되다니 말이다.

“됐다. 그냥 기다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몇 분 되지 않아 취조실 문을 열고 190 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센트


모너건이었다. 그는 취조실보다는 고문실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빈센트의 회색 눈동자가 자일스에게 꽂혔다. 인간성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도 없는 건조한 눈빛은


가끔씩 아군들마저도 흠칫하게 만들었다.

자일스는 그를 무던히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빈센트.”

“아, 대위님 오셨습니까.”

깍듯한 인사치레와는 다르게 그의 미소에는 불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호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어딘가 낮잡아 보는 듯한 미소였다. 자일스는 엄연히 그의 상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빈센트는 그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요원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피터, 넌 이만 나가 봐.”

“나중에 뵙겠습니다.”

요원은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좁은 공간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 빈센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어 왔다.

“한 대 피우시렵니까?”
“난 됐어.”

담배 연기가 공기 중을 머물다 이내 사라졌다. 빈센트는 옅은 색 셔츠에 서스펜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셔츠에는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핏자국을 구태여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오히려
그런 자국들을 훈장처럼 여기는 사내였다.

잘 빗어 넘긴 잿빛 금발은 놀랍게도 흐트러짐 한 점 없었다. 빈센트는 숙련된 고문 기술자였다. 상대방의


정신을 붙들고 진창에 처박는 일을 그는 테니스 치는 일쯤으로 여겼다. 여러 해 동안 쌓이고 쌓인 증오가
그의 재능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얼마 전 생포한 벨담 요원 놈을 취조 중이었습니다. 아무리 살살 달래도 원체 입을 열 생각을 않네요.


아무래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듯싶습니다.”

“승인부터 받고 진행해. 벨담 측과 협상하는 중이니 함부로 손대서 좋을 것 없어.”

“누가 죽인답니까? 사지를 못 쓰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취조하는 방식을 좀 바꾸는 것뿐인데요.”

담배 연기를 한 차례 더 뿜어낸 그가 물어 왔다.

“저는 왜 찾으신 겁니까?”

“네가 이번 사건을 맡겠다고 자처했다던데.”

“그랬죠. 뭐 문제 있습니까?”

“협조 의사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나서서 고생해 줄 필요


없어.”

“혁명 영웅답게 열의가 넘치시는군요. 일손을 보태겠다는데도 마다하시다니.”

그가 은근히 빈정거렸지만 자일스는 무시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사건에서 손 떼라는 소리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

“이미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합류한 겁니다. 무르고 싶으시다면
제가 아니라 지도부에 직접 부탁해 보시죠.”

자일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발 늦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빈센트만큼은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의 우려가 도리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뭐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삐딱하게 굴지 마.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나다. 허락이 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결정은 내 승인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알겠나?”

“예, 예. 걱정 붙들어 매십쇼.”

“저자도 일단 감옥에 넣어 놔. 지하 3 층으로 섣불리 데려가지 말고. 사소한 일 하나로 지도부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돼.”

“알겠습니다.”
빈센트는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름대로 계획을 다 짜 놨는데 네가 다 흩뜨려 놨다는 뉘앙스였다.

자일스는 그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빈센트의 상관일뿐더러 빈센트와 감정적으로 얽혀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일스가 이만 취조실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빈센트는 그의 등에 대고 내뱉듯이 물었다.

“알베르트 레만은 왜 죽이신 겁니까?”

“그건 왜 묻지?”

“궁금하니까요. 이런 잔챙이들 입에서 나오는 백 마디 정보보다 그놈이 뱉는 한 마디가 훨씬 귀중한


법인데 말입니다. 상부에서도 언짢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생포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뿐이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덕분에 제가 해야 할 일만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레만 하나만 있으면 될 일을 여러 사람 붙잡고 캐물어야


하게 됐으니까요.”

“빈센트.”

자일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르자 빈센트의 움직임이 일순 굳었다. 담배 연기만이 불빛 아래로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혁명은 성공했다. 입스윈 국민들은 제 권리를 되찾았어. 예전처럼 손에 피를 묻혀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그러니 너무 이 일에 몰두하지는 마. 일도 추세를 봐 가면서 해야지.”

“설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쓸데없이 열 올리지 말라는 소리다. 너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돼. 잊지 마. 보고 사항이 생기는 즉시


올리도록 하고. 내 통제 안에서 벗어나지 마라.”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죠.”

자일스는 미련 없이 철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담배 연기 때문인지 두통이 쏟아졌다.

그 혼자 처리해야 마땅했던 일에 하필이면 빈센트 모너건이 연루됐다. 그는 혁명군 내에서 가장 위험한


군인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자일스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곤 하는 인물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안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자일스 헤센은 걸음을 빨리했다. 벨담 기차에 탑승했던 요원들로부터 압수한 모든 서류들을 읽어 볼


작정이었다. 단 한 줄이라도 안나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지 즉시 알아봐야만 했다.

알베르트 레만이 엘로이즈 비스마르라는 이름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한때 안나의


신뢰를 얻었던 인물이었다. 자일스 다음으로 그녀를 가장 잘 알았던 이가 바로 레만이었다.

안나는 왜 그런 이에게 신뢰를 준 걸까.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가 정말 지워야 할 게 있다면 그건 혁명군이 안나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일말의 가능성뿐이었다.
*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슬슬 병원 생활도 질려 가던 참이라, 나는 기쁜


마음으로 퇴원 수속 절차를 밟았다.

나를 돌봐 주던 간호사는 유독 아쉽다는 듯이 굴었다. 그건 겉으로만 하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는 그걸 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일스가 병문안을 올 때마다 그를 열심히 힐끗거리고는 했으니까.

나는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입스윈을 떠날 작정으로 입었던 옷차림도, 얼마 되지 않는


짐이 든 가방도 그대로 든 채로.

결국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던 연립 주택은 아직 비어 있었다. 나는 굳이 새로운 곳을 찾지 않았다. 익숙한 건물로 향하는


기분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보금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제 이곳은 앨버트도,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보금자리였다.

열쇠로 문을 따고 텅 비어 버린 집 안에 들어온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할 일을 했다. 짐을 풀고, 옷가지를 옷걸이에 걸고, 며칠 비웠다고 그새 먼지가 쌓인 바닥을
걸레질했다.

집을 돌보고 나니 그새 창밖이 어두워졌다. 나는 간단히 야채 스튜를 만들어 먹었다. 이제 나밖에 남지


않은 좁은 집은 고요했지만 난 그러한 적막이 마음에 들었다. 적막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인 법이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 다시 돌아왔으니 마음이 뒤숭숭할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멀쩡했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평범한 일상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서, 하마터면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내 착각은 가방에 들어 있던 드레스를 꺼내는 순간 깨져 버렸다. 진주 빛 드레스는 내 모든 기억들을


일깨워 주었다. 타국으로 향하는 호화로운 기차, 그 많던 승객들, 앨버트의 죽음…… 그리고 자일스 헤센.
이 드레스도 자일스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자일스가 지었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란히 뜬 두 개의 달을


목격한 사람마냥 얼어붙었던 그는 곧 첫사랑을 마주한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러곤 지극히도 평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법한, 사랑에 빠진 얼굴.

난 정말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나를 한 번도 증오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알았다. 나를 증오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얼굴을 보여 줄 수 없는 법이다.

증오는 퇴색되어 흐려질망정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잉크와도 같다. 한 방울이라도 물들면 다시는 정결한
빛깔을 되찾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그 순간 잠시나마 흔들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손에 든 오묘한 진주색 드레스의 빛깔보다도 더욱 내 눈을 사로잡았다. 비록 찰나일 뿐이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경험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부 착각에 불과했고, 언제나 나를


배신하고는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건 결국 나를 연약하게 만들고, 타인에게 내 약점을 드러내게 만들 뿐이다.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보여 주려면 그만큼 나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더더욱 사랑을 멀리하리라 결심했었다. 상처를 받느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않는 편이 나았다.

내가 가장 우선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가 상처 받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도 찾지 않는 가시덤불이 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한때 내가 증오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바로 그 남자의 눈빛 속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었던 감정을


목격한 순간…… 나는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혹한을 견디며 걷다가 갑자기 온기로 가득한 집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곳에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겠지. 한 번이라도 따뜻한 안락함에 몸을 담그면


매서운 동토의 땅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 알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뿌리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손을 잡고 싶어졌다.

최악의 악몽이 달콤한 꿈으로 바뀌어 나로 하여금 제 안에 한 번 더 뛰어들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에겐 이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많다. 나를


둘러싼 충동이 그중 하나로 되돌아올까 봐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를 믿어도 될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져도 될까.

나는 드레스를 조심스레 개어 놓았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백작 영애 흉내를 내던


시절 입었던 수많은 드레스보다도 더 그랬다. 장식이나 프릴 하나 붙어 있지 않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불빛을 어둡게 조절하고 침대에 누우니 기차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단 하룻밤이 떠올랐다. 나는 그가


건넸던 말을 입 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잘 자, 안나 키팅.

‘오늘은 악몽이 널 비껴가길 바란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나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악몽도, 좋은 꿈도 없는 편안한


적막이었다.

<41 화>
연회는 저녁 일곱 시 정각에 열린다고 했다. 대충 얼굴만 보이고 오면 되는 일인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으니 거창한 무도회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구두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복 차림을 하고서 차에 기대고 있는 자일스가 보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으나, 이 날만큼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나는 뭐가 달라진 건지 알아내고
싶었다. 머리 모양에 더 신경을 쓴 건가?

자일스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안나.”

“빨리 가자. 드레스 입고 서 있으려니까 어색해 죽을 것 같아.”

그는 군말 없이 승용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딱정벌레 같은 차를 타고 고요한 도로 위를 달렸다.


자일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연회에 참석한 경험이 전무하다고 봐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곳에 가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겠지. 호기롭게 참석하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긴장이 되었다.

“자일스.”

“왜 그래?”

“거기 가면 난 뭘 해야 하지? 그러니까, 연회에서 통하는 예법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귀족들이 열곤 했던 파티와는 다르니까. 사람들이랑 마주치면 간단히


인사치레만 해. 무엇보다 내가 네 옆에 붙어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괜히 간다고 했나 봐.”

“긴장돼?”

그가 어깨 너머로 물어 왔다. 나는 대답을 생략하고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미 우리는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드레스값을 해야만 했으니까.

“군인들이 많이 올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생각해 보니 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봐. 귀족 출신이면서 혁명군이 바글바글한 파티에 참석한다니


말이야.”

“너는 안나 키팅이야. 피아니스트지.”

자일스는 처음부터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비스마르 가문은 이제 입스윈 내에 존재하지 않아. 과거의 흔적은 지워 버려. 모두를 속이고 너
자신마저도 속여. 그럼 그것이 결국엔 진실이 될 거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힘을 쓸 수 없을 테니까.”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멈췄다. 자일스는 능숙하게 차를 대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린 후에야 나는 연회가 열리는 장소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어느 귀족이
살았을 법한 저택이었다. 규모가 제법 커다란 것을 보니 고위 귀족의 소유였던 게 분명했다.

내가 대저택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때 당연한 사실을 상기해 냈다. 아,


그래. 나는 자일스의 파트너였다. 함께 팔짱을 끼고 연회장에 들어서는 흔한 남녀들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차마 내게 팔짱을 끼자고 할 수는 없었는지 훨씬 더 얌전한 방법을 택했다. 나 또한 그의 판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자일스의 손을 잡고 대저택을 향해 걸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이 명단을 든 채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단박에 자일스를 알아보고는 경례를 올려붙였다.

“대위님.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의례적인 절차입니다.”

“자일스 헤센. 그리고 내 파트너인 안나 키팅 양.”

군인은 명단에 줄을 긋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는 나를 데리고 대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떨쳐 낼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화려한 저택 내부와 파티를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던 백작 영애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만 이제 대저택을 차지한 이들은 좋은 옷과 사치스런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들이 아닌 군인들과 평범한


여인들일 뿐이었다.

우리는 본격적인 연회가 열리는 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자일스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는 체를 했다. 자일스는 내가 곤란해할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적당히 미소만 지으며
그들을 물리쳐 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직접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소음을 뚫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헤센이 여자를
데려왔네?

자일스는 그나마 인파가 적은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는 펀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술과


안줏거리들이 있었다.

그는 샴페인을 기다란 잔에 따라 내게 내밀었다. 나는 한 손에 잔을 든 채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꼈다. 자일스 또한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벌써 피곤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 간간히 들리는 웃음,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음악


…… 소란스러움이 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순간, 커다란 실루엣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해링턴 장군이었다.

“자일스! 드디어 왔구만. 자네를 찾아다니느라 홀을 한 바퀴나 돌았어.”

“장군님.”

자일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반기던 해링턴이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아, 키팅 양이로군요.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연회를 즐기시기를.”


그의 얼굴에는 벌써 약한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해링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참 멋진 곳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곳은 어느 백작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저택들 중 하나랍니다.


그야말로 이만한 규모의 집을 몇 채나 갖고 있었다는 거죠. 치가 떨리지 않습니까? 그동안 우리 입스윈
사람들은 좁은 공간마저도 여러 사람이 나눠 써야 했는데 말입니다. 뭐, 이제는 다 옛날 얘기죠. 이
호화로운 저택은 이제 우리 겁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계십시오.”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러 떠났다. 해링턴마저 떠나간 이후에 더


이상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샴페인만 홀짝이고 있는 그에게 슬쩍 물었다.

“사람들이랑 안 어울려도 돼?”

“얼굴 비친 걸로 됐어.”

“그냥 그게 다라고?”

“내가 무리에 섞이면 서로 불편해질 뿐이야. 안나, 너도 알겠지만 나는 벨담 출신이니까. 아무리 많은


공로를 세웠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다들 겉으로는 나를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

그는 단순히 사람들과의 모임을 불편해하는 게 아니었다. 자일스는 그간의 행적으로 인해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가슴팍엔 훈장이 달렸고, 사람들은 그를 웃는 얼굴로 대해 주었다.

하지만 입스윈은 그를 진정한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일스의 친우인 동시에 잠재적인 적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일스에게 칼날을 세울 것이다.

나는 자일스가 연회장에 들어선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피로한 얼굴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때는 그 꼬리표를 잘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가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어. 살아남은 걸로 됐으니까. 그거 하나면 됐어. 다른 귀족들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느니 미소 뒤에 숨겨진 경멸을 마주하는 게 훨씬 나아.”

“당신, 여기 정말 오기 싫었겠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술이나 마시면서 서 있다가 대충 파할 때쯤 분위기 봐서 돌아가면 돼.”

“그럼 지금까지 연회가 있을 때마다 그래 왔던 거야?”

자일스는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문득 그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영원한


따돌림의 대상이자 약점이 잡히기만 하면 바로 내쳐질 사람이었다.

음악이 잠시 멎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던 그 때, 누군가 스피커를 통해 웅장한
음악을 틀었다.

그것은 벨담 국가였다. 국가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인파 사이로 누군가
외쳤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노래합시다!”


그러자 모두가 음악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자유와 영광과 번영,

벨담의 하늘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네

모든 남자들, 모든 여인들이여!

형제자매가 되어 함께 손잡고 나아가자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영광스런 성검을 들라

자유와 영광과 번영을 위해!

아버지의 나라, 벨담이여 만세!

연회장에 모인 군인들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깔깔 웃어 댔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국가를 불렀지만


그것은 오히려 벨담을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자일스는 최대한 눈에 띄고 싶지 않은지 제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일스가 더 이상 벨담의 자식이 아니라지만, 모두가 벨담을 증오하고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가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국가가 끝나자 다시 이전과 똑같은 음악이 빈자리를 채웠다.

“안나.”

그가 돌연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기던 그때였다. 자일스가 커다란 품에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차마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그에게는 내 존재가 커다란 위안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이런 자리에서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나를 마지막 보루인 양 힘껏 끌어안았던 자일스는 곧 나를 놓아주었다.

만약 내가 불참하겠다고 했다면,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가만히 서 있다가 돌아가야 했을까?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딜 가는 거야?”

나는 몇몇 파트너들이 짝을 지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턱짓했다.

“저길 봐,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어.”

“안나, 나는…….”

“파트너를 데려왔으면 춤 한 곡은 춰야지. 안 그래?”

그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랑 춤추자, 자일스 헤센. 자랑스런 혁명 영웅이잖아. 꿇릴 게 뭐가 있어? 이러려고 드레스도 선물한
거 아니었어?”

오늘 밤, 적어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을지언정 나까지 우두커니 세워


두지는 말아야 했다.

<42 화>

나는 자일스가 죄인처럼 굴어야 하는 게 싫었다. 나는 그 기분이 어떤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만, 사실은 외톨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껴야 하는 소외감…
….

자일스는 잠시 주저하는 듯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춤추자.”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짝을 지은 파트너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왈츠를 추고 있었다. 왈츠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춤 중에 하나다. 3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춤이라 그런지 왈츠를
추지 않는 나라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 또한 왈츠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춤이었다. 춤 선생의 지적을 들어 가며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났다.

자일스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우리는 천천히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자일스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 군복을 입었을 뿐이지 이제 보니 그는 완전히 도련님이었다.

남녀로 이루어진 파트너들 사이에 끼어들 때만 해도 확신이 없어보이던 자일스는 막상 왈츠가 시작되자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듯이 살폈다. 이미
그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춤 잘 추네.”

“마음에 들어?”

“네가 먼저 춤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그가 웃었다. 하지만 모래사장 위에 그린 그림이 파도에 쓸려 나가듯, 그의 미소 또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내게 사로잡혀 있었다. 아니, 내가 그에게 사로잡힌 건가? 알 수 없었다.

자일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나.”

그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일렁이는 강렬한 감정을


발견하고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자일스의 목소리는 음악마저 잠시 멎게 만들었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필요로 하는 고백이 아니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거절해야 할까? 그와 잠시 거리를 두어야 하나? 내가 과연 그라는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러한 내면의 목소리가 가지를 더욱 뻗어 나가기도 전에, 그것들은 전부 멈춰 버렸다.

“사랑해.”

그 말 한 마디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자일스 또한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았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내 입술을 열고 그의 것이 부드럽게 겹쳐 들었다.

거대한 솔즈부르 저택 한 구석에서 함께 피아노를 치다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 같았지만, 또한 같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따뜻했다. 평생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온기였다. 주저하던 것도 잠시, 나는 끝내 그의


입맞춤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냥…… 한 번쯤은 이래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 모너건은 지루한 얼굴로 군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면서 주정뱅이마냥 낄낄 웃어 댔다. 아니, 실제로도 그들은 조금씩 주정뱅이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술은 넘쳐 났고,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는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멍청한 수다를 떨어 대는 게 아니라 이럴 시간에 더
많은 벨담 놈들을 취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빈센트의 원수였다. 혁명군이 되기 전까지, 단 한 순간도
그들을 증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증오, 증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새겨 본 단어들이다. 빈센트의 삶 전반에 스며들어 버린 감정들.


빈센트는 벨담을 증오했다.

벨담은 그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뒤틀어 놓았다. 그래서 증오했지만, 덕분에 빈센트는 칼날로 만든
심장을 가진 괴물이 되어 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벨담 놈의 살갗을 인두로 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만족스러웠던가? 드높은 권력의


탑 위에서 추락해 땅으로 떨어진 귀족 놈들을 끌어다가 폭력의 집행자가 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애원하도록 만들었다.

아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려 오던 일을 실제로 할 수 있게 되다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평생 염원하던 일을 이루었고, 앞으로의 탄탄대로도 보장되어 있었다. 증오의


깊이가 깊었던 만큼 혁명에 수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이 비명을 지를 때, 빈센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본부
지하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다 보면 그는 종종 익숙한 실루엣의 주인과 마주치곤 했다.

자일스 헤센. 그와 똑같은 군복을 걸쳤지만, 벨담 지주 집안의 귀하신 도련님 혈통을 가진 남자. 한때
벨담 국방군 대위였던 군인. 자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빈센트를 훑어보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빈센트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저 철창 안에서 숨만 겨우 쉬는 꼴을 하고 있어야 할


자가 그와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에게 명령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헤센’. 그 역겨운
성씨를 달고서 뻔뻔하게도 혁명군의 영웅 행세를 하는 것이다.

빈센트는 자일스의 번드레한 낯짝을 볼 때마다 반감을 가졌다. 그래, 그가 수많은 벨담 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일스는 결국 한때 그들과 같은 벨담의 도련님이었다.

자일스는 증오를 몰랐다. 증오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위선자! 빈센트는 속으로 자일스를 그리 불렀다. 변절했다는 것만 빼면, 그가 여타 귀족들과 다를 게


뭐가 있다는 거지? 그는 빈센트가 고문하지 못한 유일한 벨담 남자였다. 본래대로라면 그는 빈센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빈센트는 그의 밑에서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속이 뒤틀렸다.

빈센트는 동료들의 별 의미도 없는 수다를 들어 주는 대신 눈을 굴려 자일스의 흔적을 찾았다. 분명 그도


참석했을 텐데. 저도 제 분수를 아는지, 자일스는 이런 자리가 생길 때마다 찾기 힘든 구석에 박혀
있고는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빈센트는 연회장 정중앙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일스는 한 여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라기보다는 대충 몸만 움직일 뿐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보였다.

빈센트는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의례적으로 데려온 파트너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였으니까.
빈센트가 아는 자일스는 무채색과도 같은 사내였다. 언제나 표정이 없었고, 모든 일들에 무감했다. 헌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달랐다. 자일스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금발의 여자와 무어라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더니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일스 헤센은 행복했다.

저 여자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일까? 빈센트는 믿을 수 없었다. 자일스 헤센이 사랑에 빠지다니. 곧 죽을상을 하고


다니던 그 인간이? 대체 저 여자는 누굴까. 누구기에 자일스 헤센의 낯짝이 따스한 색으로 물들게
만들었나.

빈센트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저 꼴을 보고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한 번에 비우고는 말없이 자리를 옮겼다.

자일스의 여자가 궁금했다. 아니, 궁금함을 넘어서서 기이한 소유욕이 치밀었다. 저 여자를 빼앗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상관에게 조금이라도 굴욕감을 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빈센트는 자일스의 시선이 가장 잘 닿을 만한 위치에 서서 그들을 주시했다.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자일스가 시선을 느끼고 그를 보았다. 그의 움직임이 잠시 굳었다.

행복에 겨웠던 얼굴이 차가워지는 모습을 보며, 빈센트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일스의 표정이 차갑게 식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 군데에 꽂혀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탁한 금발을 가진 군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키가 커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자일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누구야, 저 사람?”

“빈센트 모너건. 내 부하야. 마주쳐서 좋을 것 없는 놈이지. 웬만하면 눈 마주치지 말고 모른 척해.”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참았다. 1 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그만큼


빈센트의 인상은 강렬했다. 그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면식 없는 사이인데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집요한 눈동자였다.

자일스는 계속해서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빈센트 또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 부하라며. 그런데 왜 저래?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천성적으로 위험한 데다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놈이야. 아무래도 시비를 걸어오려는 모양이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안나.”
그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 곁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빈센트에겐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자일스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헤센 대위님.”

이렇게 된 이상 자일스도 어쩔 수 없이 빈센트를 마주 봐야만 했다. 나는 자일스의 손을 잡고서 빈센트를


돌아보았다.

<43 화>

어두운 잿빛 금발 아래로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였다.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법했지만, 그러한


생김새 너머에는 외모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을 모두 반감시킬 정도로 비틀어진 영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뱀 같은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꼼짝할 수도 없이 얼어붙게 될 법한 그런 사람


말이다.

“빈센트.”

“존경하는 대위님께 인사 좀 드리려고 한 건데 왜 도망을 가십니까? 사람 무안하게.”

하지만 나는 그가 짓는 불량한 미소만 봐도 그가 자일스를 전혀 존경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일부러 자일스를 곤란하게 만들어 놓고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빈센트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 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자일스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일스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소개 좀 해 주시죠. 여기서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말입니다.”

“……이쪽은 내 파트너로 참석한 안나 키팅 양. 안나, 빈센트 모너건 요원이다.”

“아, 안나 키팅? 그 피아니스트?”

빈센트는 내 이름을 듣고는 의외라는 듯이 굴었다. 마치 ‘그 피아니스트’가 자일스와 손을 잡고 파티에


참석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러나 놀라운 기색은 곧 모습을 감추었다. 빈센트는 나를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바람에 조금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빈센트가 내게서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키팅 양. 편하게 안나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대위님, 파트너 분께 춤 신청을 하고 싶은데요. 저랑도 한 곡 추시죠, 안나.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안나는…….”
“저는 레이디께 여쭌 겁니다.”

나를 감싸려던 자일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 모든 건 내게 달려 있었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일스의 직장 동료나 다름없는 이의 춤 신청을 별 이유도 없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이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 자일스에게 또다시 시비를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파트너는 자일스였다. 나는 춤 한 곡만 추고 그를 보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요. 모너건 요원님.”

“빈센트라고 부르시죠.”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어깨 너머로 자일스에게 속삭였다.

“금방 올게.”

자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눈 속에 우려가 가득해 보였다. 나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춤 한 곡만 추면 되는 거다.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었다.

빈센트가 한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함께 몸을 움직였다. 그와 나 모두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그는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버거워서, 나는 그만 자일스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안나.”

그가 내 주의를 끌어왔다. 빈센트는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에게 집중해야죠. 지금은 나랑 춤추고 있는 거잖습니까.”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더군요. 자일스 헤센이 이토록 아름답고 유능한
피아니스트 분과 연이 닿아 있었다니 말입니다.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는 어느새 자일스를 헤센 대위님이 아닌 그냥 자일스 헤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가 들을 수 없는


곳에서는 경어를 쓰기도 싫다는 기색이었다. 반면, 그는 첫인상과는 달리 비교적 정중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았어요. 연주회를 다니다가 만난 사이예요.”

“연주회라. 낭만적인 첫 만남 장소로군요. 헌데 그 사건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신 겁니까? 당신은 그저


피아니스트일 뿐이잖습니까.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분에게 그런 위험한 작전에 뛰어들어 달라고 그가
부탁한 겁니까?”

나에겐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기억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는 자일스랑 직접 하셔도


되는 거잖아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꼭 묻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서 혹여나 크게 다치셨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묻지 않을 수 없더군요. 용서해 주시죠.”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이 좋아 춤이지 그에게 잡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
풀려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염병할 음악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거든요. 저라면 사랑하는 연인을 그런 위험한 기차 위에 태우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랑이요?”

“헤센은 당신을 사랑하잖습니까. 혹시 모르셨던 건 아니겠지요.”

물론, 모를 리가 없다. 자일스가 먼저 이 자리에서 내게 고백했으니까.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나는 자일스의 사랑 고백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똑같은
자리에서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그의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배가 되었다.


그는 내 속마음을 들춰 보려는 듯 내 눈동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랑하십니까?”

“네?”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걸 이 남자가 왜 묻는 거지? 하지만 의아해할 가치조차 없었다. 애초에 빈센트는 순수한 마음으로 내게
춤 신청을 한 게 아니었다. 뭔가 다른 마음을 품고서 내게 접근했으리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그가 내게서 얻어 내고자 하는 게 정확히 뭘까? 빈센트는 자일스의 부하였지만, 대놓고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나를 자일스의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자일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설마, 그는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자, 나는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빈센트는 나를 꿰뚫을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들 여기서 동요하면 끝이었다. 나는 떨려 오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뻔뻔한 표정을


지어 내 보였다.

“그럼 당신은요? 자일스가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자일스를 사랑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굳이


내게 춤 신청을 한 거죠?”

그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가 주도권을 장악하게끔 놔두고 싶지 않았다.

“속마음을 말해 봐요. 왜 나에게 춤을 추자고 한 건지.”

“마음에 드니까요.”

그는 생각보다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나는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빈센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춤 신청을 한 겁니다. 혹시나 당신이 내게도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진절머리를 냈을 정도로 뻔뻔한 언사였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누그러졌다. 적어도
그가 내 정체를 아는 건 아닐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빈센트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당신의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거라 생각해서 수락한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말해 보십시오.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야 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읊었다.

“그래요. 나는 자일스를 좋아해요. 이제 됐나요?”

그는 실망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나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더욱 선명해졌다. 뚜렷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알았다. 그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하기도 전에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내 입술 사이를 가르고 그의 것이 침범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자일스와 입맞춤을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또다시 내 입술을 탐했다.

나는 그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그가 나를 꽉 붙든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키스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감각에 정신이 나가고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모너건!”

그제야 빈센트는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그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자일스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화를 억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빈센트는 내게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입을 맞춘 건 안나 양인데 왜 대위님이 화를 내십니까?”

“너는 안나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다.”

“강제였는지 아닌지 대위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그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빈센트는 자일스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나는 절대 키스해도 된다는 허락 따위 한 적 없다고 외쳐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충격 때문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뭔가가 내 목구멍을 콱 틀어막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안나 양이 저 때문에 충격을 받으신 것 같군요. 직접 사과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안나, 더 이상 휘말려 들 필요 없어.”

“아니야. 대화하고 싶어.”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급히 말했다. 자일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그와 직접 대화하게 해 줘.”

자일스는 망설임 끝에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빈센트였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제가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리 되었군요. 제 사과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너그러운 말을 돌려주기 위해 자일스를 물러나게 한 게 아니었다. 대신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따귀를 때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그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주변에서 이
사태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약한 탄성을 내질렀다.

<44 화>

그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에 피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가자, 자일스.”

내가 손을 내밀자 자일스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연회장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장을 마친 지금, 바깥은 한산했다.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만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이거였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일 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나는


스스로를 시궁창에 밀어 넣고, 지옥으로 빠져드는 길인 걸 알면서도 아랑곳 않고 도망쳤던 거다.

결국은 벌어지고 말았지만. 직접 겪어 보니까 상상했던 것보다 최악이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가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일스 또한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죄인처럼 내 곁을 지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안 그래도 연회장에서의 시간을 겨우 버티고 있었던 그는 이런 일까지 일어나니 더욱 비참해
보였다.

“미안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둬선 안 됐어.”

“사과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저 미친놈이지.”

“내게 잘못이 없는 게 아니야. 빈센트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내게 적대감을 표현하곤 해. 너를 데리고


그놈의 마수 속에 걸려든 내 잘못이 크다.”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저놈 분명히 당신 부하라고 했잖아. 그럼 당신이 제압하면 될 일 아니야?


내가 군대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부하가 상관 파트너에게 이딴 짓을 하고도 괜찮은 거야?”

이번엔 자일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불빛이 은은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퍽 자조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범한 상관이었다면 그랬겠지. 나에겐 커다란 약점이 있어, 안나. 나는 벨담인이야. 모두의
증오를 떠안아야 할 당사자지. 혁명에 공헌해서 입스윈의 신뢰를 얻었다고 해도 내 혈통까지 바꿀 수는
없어. 빈센트만이 나를 적대하는 게 아니야. 사실은 저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렇지. 다만 다른 이들은
빈센트에 비해 조금 점잖은 방식을 택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자신이 벨담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길 것 없다는 듯이 굴었다.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테니까. 입스윈이 눈감아 준 유일한 벨담인. 혁명 영웅이기 이전에 그는 벨담 출신 지주의 아들이었다.

그랬으니 빈센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속으로는 자일스를 비웃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거기 휘말려 들어 함께 피해를 본 게 나였고.

마음 같아선 빈센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자일스가 자조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남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뭐?”

“당신이 벨담을 배신했다는 건 알아.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이야.”

자일스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어쨌든 당신은 목적을 이룬 거잖아. 저 사람들이 뭐라 하든 알아서 지껄이라 그래. 결국
중요한 건 당신이 살아서 나랑 얘기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죽으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니까.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전부 다 끝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졌다.

“나도 그랬을 거야. 당신처럼, 살아남기 위해선 나도 무슨 짓이든 했을 거라고.”

그러자 자일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놀란 듯이 보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럼 그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거다. 난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
내거나 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 말 맞잖아. 당신, 벨담에선 뻔뻔하고 치졸한 배신자라고 부르겠지. 반대로
여기선 교활한 벨담 놈 취급을 받고 있을 거고. 그런데 말이야, 이왕 그리 불릴 운명이라면 좀 뻔뻔해져
봐. 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남들을 열받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열받아 죽게 될 만큼 더욱 더
뻔뻔해질 텐데.”

“빈센트 같은 부류가 되라는 건가?”

“그보다 심하게 굴 수도 있고.”

물론, 그에겐 내 조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쨌든 난 진심으로 조언한 거다. 나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 테니까.
“방금은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뭘 말이지?”

“내가 빈센트 놈 뺨을 때려선 안 됐어. 당신이 주먹을 날리도록 둬야 했는데.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야.”

“……예전 같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지금은 못 한단 말이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 신사 노릇할 필요는 없어.”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진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입스윈도 가만있지는 않겠지. 나 혼자서라면


괜찮겠지만……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어. 네게 조금이라도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까. 나
때문에 네가 그 어떤 영향이라도 받게 놔둘 수는 없어.”

자일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걱정하기보다는 네 자신을 먼저 생각해, 안나.”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긴, 내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자일스처럼 나도 벨담의 혈통을


이은 처지였으니까. 게다가 난 귀족이기까지 했다. 그 사실이 들통난다면 그땐 정말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나는 그저 피아니스트에 불과해. 꿇릴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나는 가짜 이름 뒤에 숨은 게 아니었다. 안나 키팅이 내 진짜 이름이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라는 신분이


진실로 내 것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일스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는 오히려 내 뻔뻔함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그래. 넌 피아니스트지, 안나.”

“좋아. 알았으면 됐어.”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이대로 집에 가면 완전히 패배자처럼 보일 거야. 당신은 그 미친놈의 상관이잖아.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줘야지.”

우리는 손을 잡고 다시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떠나든 말든 파티는 여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술은 넘쳐 나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몇몇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난 그들을 향해 웃어 주었다.

빈센트가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자식을 보려고 다시 돌아온 건 아니니까.

다만 빈센트 대신에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장을 갖춰 입고 안경을 쓴 중년 남자였다.


놀랍게도, 그는 자일스가 아니라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안나 키팅 양이 맞으신지요?”

“네, 맞아요.”

“이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입스윈의 자랑스런


신예 피아니스트를 모르고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죠. 반갑습니다. 저는 모건 세이지라고 합니다. 입스윈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이죠. 아마 안나 양께서도 저에 대해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우리는 의례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나 또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입스윈에서 가장 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인데 모를 수가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후에 있을 저희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안나 양을 객원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주 많은 관객들이 모일 테니 분명 안나 양께도 새로운 기회를 마련하기 좋은 발판이 될 겁니다.
어떠십니까?”

“제가 더 감사할 일이죠.”

“그럼 수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제 매니저에게 언질을 해 두겠습니다. 귀하의 연주에 아주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점, 부디 알아주시길.”

그는 다시 한번 내 손을 꼭 잡고 흔들어 보이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방금 전에 펼쳐진 광경을


말없이 구경하던 자일스가 물어왔다.

“이런 일이 흔하게 있었던 편인가?”

“이렇게 커다란 오케스트라에서 초청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

“넌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야, 안나.”

“나도 알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연회장 안에서, 나는 단순히 자일스의 파트너에 그치지 않았다. 가끔씩은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그림자 속에 숨어 살던 날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있잖아, 아직도 기분이 거지 같아서 그러는데 술이나 더 마시러 가자. 그 정도는 괜찮잖아, 안 그래?”

“……그래.”

자일스는 나와 함께 연회장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 같아 보이지 않았다. 엄연한


파트너와 함께였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때 그 누구보다 증오했던 남자…… 나는 이제 그의 곁을 점점 내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편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푼 사람이었다. 자일스는 내가 겪어 본 다른 위선자들과는 달랐다.


그가 사람을 얼마나 죽였든 그런 건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그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일스 헤센은 달랐다. 다를 것이다.


<45 화>

7. 데자뷰

빈센트 모너건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시간이 으레 그렇다지만, 이토록 무료함을
느끼는 건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특히 그가 혁명군 본부 최하층에 자리한 고문실에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작업에 필요한 온갖


도구들에 둘러싸인 채, 거의 정신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심문 대상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살살 달래서 필요한 정보만 빼내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는 제법 점잖은 방식으로 그를 취조했다.
적어도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끼치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괜찮을 거다. 적어도 몸뚱어리는 그렇겠지.

다만 그는 예전처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일스 헤센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만약 그 여자가 자일스의 섹스 파트너라든가, 혹은 가볍게 만나기 시작한 사이라든가…… 그랬다면


빈센트도 금방 잊어버렸을 터였다.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그 여자가 자일스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는 사실이었다. 빈센트는
자일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연회장에서 처음 알았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 양, 현실에 지칠 대로 지쳐 무미건조했던 얼굴 위에 행복이라는 달콤한


색채가 떠오르는 순간…… 빈센트는 벨담의 귀하신 도련님일 적의 자일스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몹시 불쾌해졌다.

누군가 자일스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안나 키팅…… 자일스가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피아니스트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예술가라는 족속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빈센트가 아는 바는 그게 전부였다.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무엇이 마음에 든 것이지? 예쁘장한 얼굴? 안나는 상당히 예뻤지만 원한다면
아름다운 여자 정도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뭐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빈센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묻기로 했다.

“이봐.”

그가 방금 곤죽으로 만들었던 참인 남자를 툭툭 쳐서 깨웠다.

“일어나.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생겼으니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자는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나서야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질문에 제대로 대답만 한다면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 줄 수도 있어.”

“난…… 대답할 수 있는 건 전부 대답했어.”

“여자에 대해 잘 아는 편인가?”

남자는 그의 질문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여자 때문에 행복해 본 적이 있냐는 뜻이야. 여자가 너를 기쁘게 만들었다든가, 그 여자 때문에 웃을 수


있었던 때라든가…… 물론 잠자리 얘기를 하는 건 아니고.”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고문 방식이지?”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묻는 거니까 안심해. 물론 네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절차가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

빈센트는 의자를 끌어다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위에서 그를 비추는 새햐얀 전등 불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어떨 때 행복하다고 느끼지? 여자랑 같이 있을 때면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정도 고문 좀 받았다고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거냐? 말 그대로 어떨 때 행복하냐는 거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사랑하는 여자…….”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던 남자가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나?”

“질문은 내가 한다. 그 사실을 잊지 마.”

“당신의 질문은 근본부터 잘못되었어. 사랑하는 여자가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기 마련이니까. 그


여자가 특별히 뭘 해 줘서가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침묵을 공유하는 것
자체로도 행복할 때가 있어.”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그래.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너 같은 냉혈한들은 평생 이해할 일 없겠지만…….”

“그렇다면 조금 바꿔서 묻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에 대해 알고 있나?”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아니, 전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이게…… 이게 대체 당신이 원하는 대답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악마가 틀림없어. 그 날붙이들로 나를 마음껏 고문하더니 이제는 함께 사랑에 대해 논하자고?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수작질이야?”

“흥분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꺼져! 차라리 나를 죽여! 아니면 제발 저 불빛 좀 없애 줘. 정말이지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그것 참 안 됐군.”

빈센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음반 좀 가져와.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있겠다.”

“어떤 것으로 가져오면 되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빈센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피아노 음반이면 적당하겠군.”

잠시 후 부하가 음반을 가지고 왔다. 빈센트는 부하를 되돌려보낸 후 휘파람을 불며 새까만 레코드판을
축음기에 끼웠다. 그러자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가 삭막한 고문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음악에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피아노 연주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고 싶었다.

자일스 헤센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으니까.

안나 키팅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랑이라.”

그가 운을 떼었다.

“내 잘나신 상관께서 최근에 그런 감정을 경험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다. 덩달아 나까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대체 어떤 기분이라 그토록 사람이 달라 보였는지…… 한 번은 말이다, 내가 그 여자를 붙잡고
입을 맞췄더니 표정이 볼만해지더라고.”

당장 그를 때려눕히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던 자일스 헤센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자일스가 그를 그런


식으로 쳐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만일 내가 더한 짓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 나도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나?”

“넌 미친놈이야.”

“그래,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그러니까 어쭙잖은 반항은 그만두는 게 어때?”

빈센트는 담배를 비벼 끄고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형체 없는 음악가는 아직도 그들 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누군가에겐 평안을 가져다주었을 연주를 뒤로하고, 빈센트가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잡담은 이만하고 하던 얘기나 계속 해 보자고.”


*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다. 적어도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음악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도 피아노만큼은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내 연주를 찾고 있었다.

내가 이름을 알린 이후로 나를 찾는 목소리들이 많아졌다. 개중엔 라디오 방송국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전속 피아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데려가기를 원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그에 응했다.

아직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갈 만했고, 내게는 급히 도망쳐야 할 이유가 더 이상 없었으니까.

지금도 나는 방송국 녹음실에서 연주를 하는 중이다. 물론 미리 녹음해 두는 건 아니고, 내 연주를


실시간으로 방송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라디오 진행자와 여러 관계자들이 방음벽 너머에서 헤드폰을 끼고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연주하고 있는 곡에 집중했다. <어린이를 위한 정경>은 어려운 기교 없이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는 소품집이다.

그중 일곱 번째 곡인 트로이메라이는 내가 아끼는 작품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어떠한 그림이나 풍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이 곡은 항상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는 가족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나, 내가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는 순간을 상상하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전혀 나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기억은…….

나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조용하던 방음벽 너머에 짧은 소란이 일었다. 진행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의도치 않게 전원을 기립하게 만든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자일스 헤센이 군복 차림새로 나타나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물론 손을


흔들어 줄 수는 없었다. 아직 내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청취자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자일스가 헤드폰을 착용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청취자들과 마찬가지로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나는 다시 피아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건반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르고 달래어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도록.

나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제는 방금 전보다 더욱 명료하고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자일스와 나 사이에는 두꺼운 방음벽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악은 끊어지지 않는 실로 우리를 연결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순간에도, 나는 그를 위해 연주했고…… 그것이


길고 긴 인연의 시작이었으니까.

트로이메라이. 꿈을 꾼다는 뜻이었다.


자일스는 내 연주를 들으며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나는 그쪽을 곁눈질했다. 자일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꿈을 꾸는 사람 같기도 해서


나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46 화>

어느새 방송이 끝났을 땐 자일스가 나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방송국 주변을 걸었다.

커다란 군인과 함께 걷고 있으니 확실히 혼자 걸을 때와는 달랐다. 적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격을 두어
주는 데다 웬 남자가 수작질을 걸어 대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봄은 하루하루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냉기가 서려 있던 바람은 이제 사랑하는 이의 손길만큼이나


온화해졌다. 죽어 있는 것만 같았던 나무들은 새 잎을 틔웠고, 길가에서 잔꽃들이 피어났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곁에서는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편안했다.

“여긴 웬일이야?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어.”

“사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 문득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무작정
찾아온 거야. 혹시 내가 널 놀라게 한 건가?”

“나야 당신 얼굴 매일 보는 입장이라 괜찮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안 그런 것 같던데. 그 사람들


표정 봤어?”

말과는 달리 나는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매사에 진지하고 웃음기라곤 없던 방송 관계자들이 그의


등장 하나만으로 마치 코미디 상황극에 돌입한 것 같아서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좀 더 주의하도록 하지.”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적어도 나한텐 정말 웃겼거든. 당신이 그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웃겨. 앞으로 그런 해프닝 좀 많이 만들어봐. 평소에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까 이런 사건
하나하나가 귀하단 말이야.”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자일스가 불쑥 물어 왔다.

“점심은 해결했어?”

“아니, 아직. 왜?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야?”

“그런 것 같아.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글쎄……. 뭐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어느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외쳤다.


“그래! 우리 정크 푸드 먹으러 가자. 어때?”

“뭐?”

“내가 이 근처에 아는 곳이 있거든. 같이 가자.”

자일스는 어느 쪽의 대답도 건네지 못한 채 얼떨떨해 보였지만 결국 나를 따라 5 분 거리에 떨어져 있던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온갖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겨우 자리를 잡아 앉을 수 있었다.

뭘 고를까 고민하던 나는 문득 자일스가 매우 뻣뻣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있어선 안 될 곳에 들어왔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왜 그래?”

“그러니까……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서.”

“말도 안 돼. ‘랜치 앤 서머스’야말로 이 근방에서 제일 훌륭한 음식점인데! 당신 설마 햄버거를


나이프로 썰어 먹는 부류는 아니지?”

놀랍게도 자일스는 내 눈길을 피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당신, 정말 도련님이구나.”

“그냥 이런 음식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그럼 오늘부터 내가 알려 주면 되겠네. 당신이 나보다 잘 모르는 것도 있고, 웬일이야?”

나는 직원을 불러 감자칩을 포함한 메뉴를 주문했다. 가게 안은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로 활기찼다. 확실히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련님 출신 고위 장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메뉴가 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음식들을 생소한 눈길로 훑어보는 모습을 포착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야채가 없는데.”

“여기 있잖아.”

내가 케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 때문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내가 깔깔 웃었다.

“당신 진짜 웃긴다! 정말 샌님 같아.”

“나도 케첩이 뭔지는 알아, 안나.”

“그래, 야채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여기 감자튀김! 이것도 야채로 만든 거야. 그러니까 똑같은 거지.
건강에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

그는 전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권유를 받아들였다. 튀김을 몇 개 집어 먹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별로 질 좋은 음식 같지는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맛있는 데다 저렴하잖아.”


“안나, 나중에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소개해 줄 테니까 같이 가자. 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싫어.”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내키지가 않았다.

“나이프로 고기 썰고 애피타이저니 메인 디쉬니 하는 곳 말이지? 난 그런 곳 별로야. 물론 그곳에 가면


양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싫어. 질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건 알지만, 그런 걸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싫어.”

“……왜 그렇지?”

“그냥 그런 식으로 높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차려져 있는 음식을 보면 속이 안 좋아지니까.”

나는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끔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이야기를 꺼내 줘야 하는 법이다.

“어렸을 때, 가족들이 날 귀하신 분께 시집보내려고 상류층 문화를 가르쳤어. 개중엔 식사 예절도 있었어.
나이프를 펜 잡듯이 쥐는 여자애를 받아 줄 높으신 분들이 어디 있겠어? 겉치레에 환장하는 족속들인데.
그 당시에 가족들은 마음이 급했고, 절대 실수 따위 용납하지 않았어. 결국 나는 몸에 익지도 않은
예절을 지키느라 급급하면서 식사를 해야 했지. 그랬으니 소화가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어? 아직도 혼자
끙끙대다가 먹은 걸 다 게워 내곤 했던 날들이 생각나.”

자일스는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어졌다.


나는 나를 가르쳤던 가정 교사를 과장되게 흉내 내며 말했다.

“나이프와 스푼, 포크는 바깥부터 코스별로 하나씩 쓰는 거예요. 나이프는 연필이 아니에요! 그렇게 들지
마세요. 세워서 들어야 해요. 이번엔 음료를 담는 잔의 종류를 알려 드릴게요. 아, 물론이죠.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디저트 와인, 물, 소다를 전부 다 다른 잔에 담아야 한답니다. 그래야 위신이 사는 법
아니겠어요? 미친놈들이지, 아주.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여서 금방 외우지도 못했어. 아무튼 식사 시간은
내겐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싫다고 하는 거야. 어두운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니까.”

“……그들이 너를 미워하고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왜 날 괴롭혔는지에 대해서도 들었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남편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식이 어느 날은 내 옷을 벗기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거절했지. 거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을 칠 노릇인데 난 한술 더 떠서 그놈을 해치겠다고 협박까지 했어.
정말 해칠 생각은 없었어. 그냥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고.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오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난 무기를 휘둘러야만 겨우 그놈을 대적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한 팔로도 날 제압할 수 있는 커다란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난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날 방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좁은 벽장 안에 갇혀야만
했어.”

나는 그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가 단편적으로 전해 듣기만 했었던 일들의 내막에 대해. 별로


숨길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나?

숨기고 싶어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백작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죽어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겠지만.

“그때는 생존하는 데에 급급해서 그 모든 일들을 당하면서도 내가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나 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알겠어. 난 절대 괜찮은 게 아니었어. 다만 나를 무디게
단련해야 했을 만큼 살고 싶었던 거였어.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문을 잠그거나 두꺼운 커튼을 치는 걸
싫어해. 좁고 어두운 곳이든, 밀폐된 곳이든……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면 정말 버틸 수가 없어져.”

나는 말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에게 내 과거를 이토록 자세히


설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앨버트 또한 내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식당 안을 비추는 밝은 조명과 흥겨운 음악 소리 덕에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는


일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는 거였다. 자일스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물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악기 케이스 안에서 생존해야 하던 시절에는…… 어떤 심정으로 버텼지?”

“그땐 그래도 상황이 나았어. 저택 안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마다 케이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땐 케이스라도 이용하지 않으면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어서 미안해, 안나.”

“괜찮아. 진짜 괜찮아. 적어도 난 살아 있잖아. 그 사람들은 전부 죽었는데 말이야. 그렇지?”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탔다. 나는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러곤 자일스가 차마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채근했다.

“당신 배 안 고파? 나랑 같이 점심 먹고 싶어서 왔다며.”

“그래. 그랬지.”

그가 식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지는 못했다. 안 먹는 건가, 못 먹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자일스가 물어 왔다.

“이건 이름이 뭐지?”

“햄버거. 설마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먹을 줄 알아.”

그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대답했다. 뭐, 그렇겠지. 세상에 햄버거도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컨이 들어간 치즈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며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자일스 쪽을 곁눈질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햄버거를 썰려던 그의 동작이 일순 굳었다. 물론


나는 치즈버거를 두 손으로 잘 들고 먹는 중이었다. 자일스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서는 얌전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햄버거를 무너뜨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7 화>
자일스가 나를 방문해 준 덕분에 오랜만에 그의 차를 얻어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새까만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탄 나는 그가 운전을 하는 동안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잡담 좀 하다 보니 벌써
태양의 빛깔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있잖아, 내가 저택 안에서만 살던 때엔 말이야. 전쟁이니 혁명이니 하는 기사만 읽고 저택 바깥세상이


완전히 망해 버린 줄로만 알았어. 적어도 신문 기사에는 그런 사진만 실려 있었거든. 쑥대밭이 되어 버린
도시 말이야.”

“입스윈은 아주 양호한 편이야. 적어도 주요 격전지에 속하지는 않았으니까. 네가 본 사진은 아마 다른


참전국에서 가져온 사진일 확률이 높아.”

“벨담이 그렇게 되었을까?”

자일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불쑥 내뱉은 말이 어쩌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사과했다.

“미안.”

“……사과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난 더 이상 벨담 사람도 아니니까.”

그가 정말로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나는 잠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저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자일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운전 중이었던 탓에 전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날카로운 옆모습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원래는 벨담에서 살다가 왔다고 했잖아. 혹시 몇 살에 입스윈으로 옮겨 온 거야? 난


입스윈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이 땅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 나도 엄연히 벨담 사람이기는 하지만……
벨담이라는 나라가 당최 상상이 안 가서 말이야.”

어쩌면 그가 이야기하는 걸 꺼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자일스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여섯 살 즈음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어. 아버지의 결정이었지. 본가를 완전히 옮긴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곳에 꽤 오래 눌러앉게 되었던 것 같다.”

“혹시 벨담은 어땠는지 기억나? 그냥, 네가 기억하는 벨담의 모습 같은 것 말이야.”

그때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어릴 적 일들은 거의 다 잊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자일스는 내가 무어라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우리는 수도에 지어진 타운하우스에 살았어. 따뜻한 갈색 외벽에 암녹색 지붕을 가진 3 층짜리 집이었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맨 위층까지 갈 수 있었는데, 나는 꼭대기까지 오르는 걸 좋아했어.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재미가 상당했거든.”

“……가족들이 싫어하지는 않았어?”

“물론, 들키면 혼이 났지. 하지만 그때마다 셀레스트가 날 변호해 줘서 크게 혼이 나지는 않았어.”

셀레스트라면 그의 누나의 이름이 분명했다. 나는 드레스 살롱에서 그녀에 대해 잠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벨담이라고 해서 입스윈과 많이 다른 건 아니야. 아무래도 둘은 서로 이웃한 나라니까. 하지만……


수도가 정말 활기찬 도시였다는 사실만은 기억나. 내 방은 창밖 시야가 탁 트여 있는 위치에 있었지.
창문을 열면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어. 가옥들이 늘어선 곳은 붉은 물결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고, 도시 정중앙에 우뚝 선 성당에서 커다란 종을 울리면 그 소리가 내 귀에 똑똑히 들려왔지.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종소리가 끊길 때까지 셀레스트와 술래잡기를 했어.”

“당신 누나 말이지?”

“맞아.”

“혹시 그 셀레스트라는 분은 지금 어디에 있어? 벨담으로 돌아간 거야?”

어릴 적 이야기를 전해 주며 잠시나마 그리운 회상에 젖어 있던 자일스의 낯빛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옛


시절의 흔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길고도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생이별을 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멘델 부인한테 들은 적 있어. 당신 누나에 대해서 말이야. 부인은 그녀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했어. 햇살 같은 기운을 주변에 뿌리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당신을 동생으로서 정말 사랑했다고
하더라.”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게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가 침묵하는 것도 단순히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언젠간 소식이 닿을 거야. 그렇지? 자일스.”

“아니. 그러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의아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째선지 자일스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 생각에 셀레스트는…… 아주 먼 곳으로 가 버린 것 같아.”

“외국으로 떠났다는 말이야?”

“그보다 멀리.”

어느새 승용차가 내가 사는 연립 주택 앞에 도착했다. 차를 완전히 세운 그는 운전석에 우두커니 앉아


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전혀 괜찮아 보이질 않아서 나는 도저히 그를 두고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당신 괜찮아?”

자일스가 일부러 미소를 꾸며 내 보였다. 하지만 내 기분 탓인지, 그의 미소가 어쩐지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할 것 없어.”

“지금 내 눈에 당신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직접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해 봐, 문제가 뭔지.


혹시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거야?”
“아니야. 네 잘못은 어디에도 없어.”

“말해 봐, 자일스.”

내가 그의 오른손을 잡고 말했다. 그는 놀란 얼굴을 했다. 내게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그도


느꼈는지,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마음속의 산을 한 번 넘고 두 번 넘어, 자일스가 꽉 막힌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사실은 네게 거짓말을 했어. 내가 과거의 일들은 다 잊어버렸다고 했지. 껴안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내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 버렸다고……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행복했던
순간이든, 잊고 싶은 순간이든…… 전부 다. 그래서 방금 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잊어버린 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럼……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나는 자일스가 해 온 일들에 대해 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혁명에 가담했다. 그리고 혁명군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했다. 벨담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것.

한때 그를 이루던 정체성을 박살 내는 일이자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제 손으로 끊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괜찮았던 거야?”

“아니. 괜찮지 않았어. 매일 밤마다 잠에 드는 게 두려웠지. 좋았던 시절이 꿈에 나타날까 봐 겁이


났으니까. 그런 꿈을 꾸고 나서 다음 날 일어나 사람들을 심문하고 해칠 자신이 남아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 꿈속에 나타났던 사람을 내가 직접 고문해야 하는 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일전에 말했던 대로야. 옛 기억을 끌어안고 있는 건 나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어. 하지만 난 도저히
그 기억들을 놓아줄 수가 없었어. 그것들조차 잃어버리면 나는 더 이상 자일스 헤센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어.”

그는 억눌린 감정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자일스가 내 손을


꽉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나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다만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었지. 나는 무언가 다른 것에


집중해야만 했어. 현실도, 과거도 잠시 잊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에…… 정신을 놓아 버리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어.”

“그럼 당신은 무엇에 집중하며 버텼어?”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집중했던 대상은 바로 나였다.

자일스는 분명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이 그랬다.
나는 차라리 그가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바랐다.

“내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너 때문이었어.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아주 잠시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었으니까. 너를 보고 있으면, 네 생각을 하고 있을 때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어. 그래서 네가 사라졌을 때 미친 사람처럼 네 뒤를 쫓았던 거야. 나에겐
네가 필요했으니까. 너만이 나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내게 진심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일스는 그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심 어린 말들을 건져 내었다. 오랫동안 전해지지 못한


채 햇빛조차 들지 않는 심해를 유영하고 있던 말에는 다른 이가 흉내 내지 못할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안나. 너를 사랑하는 건 나 자신을 구하는 일이었어. 그래서 나는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너를 사랑한 건 내가 살아남는 일과도 같았으니까. 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자일스.”

“너는 나를 살렸는데, 내가 너를 몹시 두렵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너와 함께하기를 원했지만, 만약 네가 그걸 원치 않는다면
물러서야 마땅했어.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해쳤어. 너까지 해치고 싶지는 않아.”

그는 뭔가를 각오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어떤 대답이 들려와도 감당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안나, 내가 아직도 너를 두렵게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면…….”

“안 그래. 더 이상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애초에 내가 당신을 두려워했던 건 당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잖아.”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잖아.”

“자일스 헤센! 정신 차려.”

나는 그 쪽으로 몸을 기울여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정말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를 해칠 게 분명한 허상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자일스의 머릿속에서 몰아내야만 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상관 안 해.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단 한 가지야. 한 번이라도 내게 상처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나를 만나는 거야?”

“절대 그렇지 않아.”

“그럼 난 그걸로 된 거야.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혁명군 장교가 아니라 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 순간 자일스와 눈이 마주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와 나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자일스의


검은색 눈동자가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외로움에 잠긴 색이었다.

“안나, 나를 사랑해?”

<48 화>

그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내가 방금 한 말에 대해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래……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내 입에서 나와선 안 될 말처럼 낯설기는 했지만, 난 분명히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는 경험 말이다.

나는 요한 마이어에게조차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그는 사랑의 대상조차 아니었으니까.

“나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좁은 승용차 안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내가 내쉰 숨을 그가


들이마셨다. 나 또한 그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은 없었고, 자일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동작이었다.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원하지 않는 기미를


보이면 바로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지
않았는데 저 혼자서 앞서나갈까 봐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이의 관계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을 때, 솔즈부르 저택에서 첫 입맞춤을 나누었을 적의


그날처럼.

자일스는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지 않았다. 내게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또한 내가 자일스를 믿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잘 모른다. 마음과 정신을 비옥하게 만들고, 영혼이
충만해지도록 살찌우는 그 감정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그런 감정을 진실되게 느낀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자일스에게 느끼는 감정이 곧 사랑이 맞는지조차 실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내게


입을 맞추었고…… 나는 그를 거부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사랑일까?

나는 자일스가 머뭇거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두려워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일스를 두 손으로 붙잡고 서툴게나마 호응해 주었다.

우리 둘 모두 말이 없었다. 언어 따위가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곧 입맞춤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졌다. 무언가 더한 것이 필요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올랐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열락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몸을 조급한
손길로 더듬으며 탐닉했다.

한참 동안이나 행위에 집중하던 자일스가 어느 순간 입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열띤 얼굴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집중하는 것이라곤 오직 나뿐이었다. 주변의 사물들은 전부 의미 없는 배경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안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짙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나를 갈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또 하나의 자극으로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일스는 내 의사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의 더욱 깊은 곳을


탐해도 될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무서워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가 내


허락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여기선 안 돼.”
자일스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손을 붙잡고 연립 주택 계단을 올랐다. 퍽
조급한 발걸음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내가 머무르는 집으로 통하는 대문 앞에 섰다.

나는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그리고 나에게만 허락된 공간으로 그를 초대했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껴안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생경한 감각에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 팔로 내 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내 다리를 허벅지에 감았다. 다리 사이로 그의 단단한 신체가


맞닿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몸을 떠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먼저 입술을 포개었다. 사실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 집에 발을 들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도 알 텐데.

자일스는 나를 안은 채로 들어 올렸다.

그가 어디로 향할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옷을 벗는 시간마저 지금 이 순간엔 낭비였다. 나를 침대 위에 눕혀 놓은 자일스가 먼저 제복을 벗었다.


딱딱하고 절제된 제복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지고, 이내 셔츠 자락마저 그 위를 덮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드러난 그의 상체를 볼 수 있었다.

단단한 남성의 모습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른 여자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널찍한 대흉근 아래로 펼쳐진 모습은 마치 조각상을 방불케 했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곱아들고 다리 사이가 조여들었다.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내게 다가왔다. 나를 그의 몸 아래에 가두고 반쯤 엎드려 내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허락의 시선을


읽어 낸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고 내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가 옷을 입은 상태에서 안기는 것과 맨몸의 피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태에서 안기는 건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그의 힘줄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자일스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로 그의 존재감이 뭉툭하게 나를 찔러 왔다.

평소엔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일이었지만, 나 또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천


조각이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다. 빨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다급하게 블라우스와 하의를 벗었지만
이번엔 속옷이 문제였다.

쉿, 그가 나를 달래듯이 귓가에 속삭여 왔다. 자일스가 나를 안은 채 브래지어 위로 손을 뻗었다. 툭, 툭.


걸려 있던 고리가 힘없이 풀어지는 동시에 속옷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나는 그와 맨살을 맞대고 있었다. 자일스는 한 손으로 내 유두를 어루만지며 다른 쪽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예민하게 부푼 곳에 닿는 감각이 생경해서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안나. 힘 빼.”

그가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 예전에 가르쳐 줬잖아.”

물론,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그가 내 복부를 어루만져 주었지. 마디가 굵은 손이 부드러운


살갗 위를 조심스럽게 내리누르는 감각을 기억해 낸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하아, 내뱉었다.

“옳지.”

그때도, 그 순간에도 그는 나를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자일스의 목소리는 절대로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절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스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경험이 없을 뿐이었지 남자와 한 침대 위에서 뭘 하게 되는지쯤은 알았다. 그는


나를 너무 배려하고 있었다.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일스.”

그가 나를 보았다. 어쩌면 내가 그만하자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내겐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나를 원하는 만큼 나 또한 그를 원했다.

나는 그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아니, 가지고 싶었다. 그의 흔적을 내 몸에 새겨서 우리가 어떤 관계로


거듭났는지 분명히 하고 싶었다.

나는 그를 가까이 끌어안고 새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빛 언저리에 초조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곤 다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가슴이 짓이겨졌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가 손톱 끝으로 유두를 아래에서 위로 긁어 올릴 때마다 불편할 정도로 젖어 든 아랫도리가 아려 왔다.

그의 신체가 다리 사이를 열고 맞붙어 왔다. 두꺼운 천 아래로 뜨겁고 딱딱한 것이 골을 천천히 비볐다.
자일스가 내 가슴을 움켜쥐는 그 순간, 나는 두 다리로 그의 하체를 꽉 끌어안았다.

금속성의 소음이 귓가를 간질이더니 이내 그가 벨트를 벗어 던졌다. 그가 바지까지 벗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는 내 골반을 잡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힘 빼.”

자일스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숨을 내려놓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그가 침범해 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절대로.

또한 금세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나는 오늘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다만 이번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아니었다. 모건


세이지가 나를 공식적으로 초빙한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기 전에 시내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내가 연주할 피아노 협주곡을 마지막으로


다듬고 있었다.

같은 악보에 담긴 음표의 나열이라지만, 내게 이것은 단순한 음표가 아니었다. 이것은 해석을 바라는
시인의 작품이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말들의 향연이었다. 연주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같은 악보라도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다.

나는 피아노 앞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을 빌어 노래하는


건반의 음색을 오롯이 느꼈다.

어딘가 애달프고 외로운 듯하면서도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필사적인…… 내 머릿속을 채운 상념은


어느새 한 남자의 이름을 향해 갔다. 자일스 헤센. 나는 그의 목소리, 내 손끝으로 느껴지던 감촉,
그와의 입맞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피아노는 내 곁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곡은 자일스를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때였다. 점점 가까워 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구두 소리인가? 아니, 이건 군화를 신은 발소리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연습에 집중하기 틀려먹은 날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자일스를 맞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 앞에 서있는 건 자일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르는 군인도 아니었다. 자일스는 아니되, 내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군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 금발을 가진 남자.

빈센트 모너건이었다.

<49 화>

그가 왜 나를 찾아왔지?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한 티를 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나는


자일스 이외의 군인을 마주치면 굳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한때 나는 그들을 피해 다녀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빈센트는 그저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여길 찾았는지,


내게서 원하는 게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두려웠다. 나는 그와 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

마침내 그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계속하세요.”
빈센트는 예의 바른 신사의 말투를 사용했지만 그는 절대 신사가 될 수 없는 남자였다. 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를 반듯하게 자르고 고급 정장을 걸친다고 해서 본질까지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사람을 공포로 휘어잡는 것을 즐기는 남자였다. 지금 나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용인한 살인마가 있다면 바로 그가 아닐까.

“내가 방해가 된 겁니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방송국 관계자들이 알려 주던데. 내가 알아내지 못할 건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라를 구한 혁명 영웅이니까.”

그가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빈센트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목소리로 그런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빈센트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당장 내 물건을 챙겨 들고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러야만 했다.

그가 내게 억지로 키스한 인물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나를 두렵게 했다. 그는 혁명군


제복을 입고 있었고, 또……

“안나.”

……누군가 자신 때문에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빈센트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안나?”

그가 이번에는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려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잿빛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연회장에서 춤을 출
때도 그는 나를 똑같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매가 웃음기를 띠고 가늘어졌다.

“떨지 말아요. 지난번 일은 이미 용서했으니까.”

“용서?”

“당신이 나를 때렸던 일 말입니다.”

“당신은 내게 강제로 키스했잖아요! 내 허락도 없이!”

“그러니 용서했다는 겁니다. 내가 저지른 무례를 당신 스스로 청산한 거니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나는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기를 포기하고 물었다.

“왜 날 찾아온 거냐고요.”
“당신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요.”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그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나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뒤로 삼키고 꾸역꾸역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날 만나고 싶었던 건데요?”

“저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나는 자일스와 만나는 사이예요.”

“얼마 후엔 그러지 않게 될 수도 있잖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알았다. 빈센트는 나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내게 접근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를 원했지만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어야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부류였다.

한마디로 그는 일방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갖고 싶은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 겁니까? 내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물러날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내 진심을 듣고 싶어요?”

빈센트는 말할 테면 말해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난 당신이 싫어요. 지독하게.”

“싫다고?”

“당신이 혐오스럽다고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순식간이었다. 의자는 넘어졌고, 나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한편 빈센트는


나를 제 몸 아래에 가둔 채로 조명을 등지고서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웃는 건지 분노한 건지 구분하기 힘든 얼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풀었다.

“헤센이 그러던가? 내가 혐오스러운 인간 말종이라고?”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곧 그가 내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다들 내게 그런 말은 잘 안 하는데. 싫다는 말.”


“놓으라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는 나를 붙잡아 놓고 물건을 감상하듯 위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내 몸을 훑는 그의 눈길이


역겨워서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어렵군. 당신의 무엇이 헤센을 변하게 만든 거지?”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쁘긴 하지만 다신 못 만날 미인인 건 아니고.”

“……놔주세요.”

“당신이 얌전히 있겠다고 한다면.”

나는 약속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만 해도 그의 얼굴을 있는 힘껏 때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하지만 다른 수가 있겠는가? 난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 내가 입을 열려던 그 때였다.

“금발이…….”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내 머리카락 언저리를 만졌다.

다음에 이어진 말은 내 심장을 망치로 내려치는 듯했다.

“당신, 염색한 겁니까?”

그 순간 내가 대면하고 있는 이가 혁명군 요원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멍청하게도 감정에 휩쓸려


상대가 누군지 잊을 뻔했다. 새 신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짜 누구였는지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황급히 나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금발로 염색하는 여자들은 많잖아. 난 예뻐 보이려고 염색했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빈센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일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사람의 머릿속에 꽁꽁 숨은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남자였다.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그때였다.

철컥. 빈센트의 등 뒤에서 기계성의 소음이 울렸다. 그가 몸을 돌린 덕에 나는 뒤늦게 나타난 이가


누군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자일스가 총을 들고 빈센트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언뜻 보면 무덤덤해 보이지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뭐 하는 짓이지?”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너머에서 분노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총에 맞아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빈센트는 반항적인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내게서 비켜서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서 뵐 줄 알았습니다, 대위님.”

“당장 물러나.”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요. 이 여자에게 물어보시죠.”

“물러나라고 했다.”

자일스가 빈센트를 겨눈 채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야 빈센트는 마지못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겨우 일어나 앉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놀라 있었다. 그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지? 내 신경은 오로지 그 생각에만 쏠려 있었다.

알아챈 건 아니겠지.

한편 빈센트는 두 손을 들어 보인 채로 자일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겁에 질린 것 같지


않았다.

“여긴 왜 찾아온 건지 말해.”

“안나 양을 만나려고 왔습니다만. 지난날의 회포를 좀 풀고 싶어서 말이죠.”

“안나에게 계속 집적거리는 이유가 뭐야?”

“말이 심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너무 과민 반응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는 총구를 마주한 채 특유의 뱀 같은 눈으로 자일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쉬이 흥분하는 사람이 아닌데.”

“지금 뭐라고 했나?”

“뭐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말해 보십시오. 이 여자가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뭔지.”

나는 자일스가 곧 빈센트를 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빈센트를 잠시 노려보았을 뿐,


곧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서는 말했다.

“난동 피우지 말고 가라.”

자일스는 빈센트를 지나쳐 반쯤 쓰러진 채인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 주는


모습을 빈센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빈센트를 무시하고 연습실을 함께 빠져나가려던 참에, 그가 다시 한번 자일스를 도발했다.

“일주일만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여자가 궁금해서 잠도 안 올 지경입니다.”

“너는 안나가 물건으로 보여?”

“사람은 못 빌린답니까?”

“이만하지.”

“아니면…… 뭔가 숨겨야 할 사실이라도 있는 건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일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그가 눈치를 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도저히 나 자신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쓸데없는 행동을 한 탓인지, 자일스는 빈센트를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응수했다.

“지금 나를 상대로 음모라도 꾸미겠다는 건가?”

“제가 말했잖습니까, 궁금하다고.”

뚜벅뚜벅. 그가 걸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다시 자일스 앞에 선 그는 이제 자일스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사에 감흥도 없고, 감정 변화도 거의 나타내질 않고. 사람 만나는 일이라면 눈에 띄게 질려 하고.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여자 하나를 싸고돌면서 안 하던 흥분까지 해 대는데 제가 안 궁금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곳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빈센트가 내 눈을 통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누굽니까? 이 여자.”

질린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던 자일스는 간단히 대답했다.

“피아니스트. 입스윈 콩쿠르를 석권한 음악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고. 물론 넌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자일스는 나를 끌어안듯이 부축한 채 등을 돌려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등 뒤로 덧붙였다.

“신문 좀 읽어라, 모너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걸었다. 정황상 빈센트는 우리를 뒤따라오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연습실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50 화>

마침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야 멈춰선 자일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나, 무슨 일 없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뒤늦은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두 다리가 떨려서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나는 겨우 그에게 물었다.

“저놈, 나한테 왜 저러는 거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오는 것 같다.”


“아냐, 그게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눈치챈 것 같아. 알아챈 게 틀림없어. 내, 내 머리카락
색이 가짜인 것도 알았단 말이야.”

“안나, 괜찮아.”

“안 괜찮아! 그가 정말 알아 버린 거면 어떻게 해야 해?”

“그놈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장담할게. 너에 대한 정보는 내가 다 없애 버렸어. 괜찮아. 너는 입스윈


출신 피아니스트잖아. 그렇지? 너는 피아니스트야, 안나.”

그가 나를 품에 끌어안고 다독였다. 자일스를 껴안고 있으니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는 혁명군을 만나고 싶지 않아.”

“미안하다. 이런 일이 있도록 놔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쉬고 싶어, 자일스.”

“그래. 가자.”

내가 사는 연립 주택은 연습실에서 멀지 않았다. 나는 그와 손을 잡고 함께 거처로 향했다. 자일스는


이미 내 거처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익숙히 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한 생각을 쉬이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던


빈센트의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명백한 의심의 눈길이었다.

그가 내게 물으려던 게 뭔지 끝까지 들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을까?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자일스가 타 준 차를 마셨다. 그런 식으로 몸을 데우니까 불안이 한층


가시는 느낌이었다. 물론 따뜻한 차 한 잔이 현실까지 바꿔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만약 군인들이 와서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더라도 말이야. 나중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한편 자일스는 나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가 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는 가끔 기이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은 남자를 가장 신뢰하는 현실이 퍽
아이러니해서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내 편이다. 어느 기점 이후로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순 없을 거 아냐.”

“넌 무사할 거야.”

“어떻게 그리 확신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든 막을 테니까.”

“당신이 노력했는데도 결국 그들을 막지 못하면?”

자일스는 이런 주제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나는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그래야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나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지만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마지못해 내게 대답했다.

“너는, 그러니까 네 예전 신분은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었어. 아무도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구태여 네 행적을 수색하려고 하지도 않겠지.”

“누군가는 내가 엘로이즈와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아챌지도 몰라.”

“안나.”

자일스가 내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그는 내 생각의 타래가 점점 길게 뻗어 나가는 일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자일스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꾸 그런 생각 하지 마. 네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뿐이야.”

“난 현실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것뿐이야.”

“방금 있었던 일은…….”

“굳이 그 일 때문만은 아니야.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 왔어. 한 번도 내가 영원히 들키지 않을 거란


생각 따윈 해 본 적 없다고. 오히려 잊으려고 하면 더욱 불안해진단 말이야. 외면하는 건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대안을 세워 놓는 것과는 분명 달라.”

자일스는 한숨을 쉬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그가 얼마 후 다시 말을


꺼냈다.

“만약 네 신분이 들통난다면, 혁명군 간부들이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게 될 거다. 물론 그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어. 그러니까 빨리 대처할 수 있을 거야.”

“어떻게?”

“너를 데리고 외국으로 망명을 신청해야지.”

“외국에서 나를 받아 주기나 할까?”

“받아 주지 않으면 밀입국이라도 해야지.”

그건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그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일스는 진심이었다.


국경에 배치된 군인들에게 들켜 총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나를 국경 바깥으로 내보낼 참이었다.

“외국으로 가고 싶어, 안나?”

자일스가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차에 태우고 국경으로 달려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해. 내가 도울 테니까.”

“알았어.”
나는 서서히 식어 가는 차를 홀짝이며 그를 곁눈질했다. 싸구려 난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일렁이는 난롯불에 비치는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자일스의 과거를 상상했다.

그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귀족들을 끌어내고, 그들의 저택을 불태웠을 때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온 벨담의 증오를 받을 만큼 잔인하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게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문득 무언가를 기억해 낸 내가 불쑥 말했다.

“그 계획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 외국으로 나가지는 말자.”

“왜 그렇지?”

“당신은 외국에 나가면 죽잖아.”

그러자 자일스 또한 무언가를 다시금 깨달은 듯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숨을 길게 내려놓았다. 외국에


나가는 순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다른 계획이 필요하겠는데?”

“네가 입스윈에서 살 수 없게 된다면 그 방법밖엔 없어.”

“당신은 괜찮겠어?”

자일스의 시선이 내게로 와서 닿았다.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안 괜찮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차가 점점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난롯불이 점점 짙은 색으로 환히 빛났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마음은 좀 편해졌어?”

그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한층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애써 그런 척 꾸며 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보면 그랬다. 가끔씩은 그가 어두운 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더 나을 거야.”

“악몽이라도 꾸면 어쩌지.”

“……곁에 있어 줄게. 물론 네가 원한다면.”

자일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 다음 내 눈치를 슬쩍 보는 모습이 어쩐지 웃기고 안쓰러워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쿠션을 바닥에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론 반쯤 어둠에 잠긴 집 안에서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내 눈길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자일스 쪽으로 향했다.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또 달라 보였다. 생각보다
길게 머무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그가 먼저 물어 왔다.

“왜 그래?”

“계속 그렇게 앉아만 있을 거야?”

그는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의 얼굴에 ‘그럼 내가 뭘 하고 있어야


하지?’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긴 네 집이잖아.”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는 뜻이야.”

“왜 그리 새삼스럽게 굴어? 며칠 전에 여기서 섹스도 했으면서.”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자일스가 화들짝 놀라 귓불을 붉혔다.

“안나!”

“내가 뭐 잘못 말했어?”

“그런 게 아니라…….”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싶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상 할 때는 그렇게


저돌적일 수가 없던 남자가 뒤늦게 부끄럼 타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뭔가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있잖아, 방금 곁에 있어 준다던 말 말인데.”

“……그게 왜.”

“여기서 또 하겠다는 말은 아니지?”

아, 이번엔 장난이 조금 선을 넘은 것 같다. 자일스가 나를 힐난하는 눈으로 노려보는 모습이 퍽 억울해


보여서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이니까 화내지 마.”

“화낸 적 없어.”

“그렇다고 치자. 아무튼 사람 무안하게 앉아 있지 말고 옆자리 좀 데워 봐. 공기가 차가워서 신경


쓰이니까.”

“난로 켜 놨잖아.”

“자일스.”

할 수 없이 그가 불편한 제복 재킷을 벗었다. 흰 셔츠 차림으로 내 옆에 누운 그는 어쩐지 어정쩡해


보였다. 침대 위에 있었을 땐 안 이랬는데. 하지만 침대 얘기를 한 번이라도 더 꺼냈다간 자일스가
집에서 뛰쳐나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참았다.
“당신, 관짝에 누운 사람 같아.”

“난 원래 이렇게 누워.”

“진짜로 오늘 밤 내내 여기 있어 줄 거야?”

“네가 악몽을 꿀까 봐 걱정된다며. 그럼 옆에 있어 줘야지. 누군가는 널 악몽에서 깨워 줘야 할 테니까.”

그가 제복을 벗고서 내 옆에 누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걸 듣고 있자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확실히 그는


제복을 입지 않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마치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를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워 보인달까.

“내가 혼자서 악몽을 이겨 내야 할 때는 나만의 방법이 있었어. 가령 꿈속에서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온다든가, 그런 일이 생기면 난 바로 알아챌 수 있었거든. 이건 현실이 아니라 악몽이라고 말이야.
그럼 난 스스로에게 이건 꿈일 뿐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내 몸을 마구 꼬집었어.”

“그런 게 효과가 있었어?”

“일단 그게 꿈이라는 걸 알기만 하면 깨는 건 쉽게 할 수 있어.”

“그러지 마. 적어도 오늘 밤은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손을 아무렇게나 움직이며 가벼운 장난을 치다가 문득 무언가 부드러운 것에 닿았음을 느꼈다. 그의


손이었다. 내 손보다 커다랗고 각이 진 손.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안에서
어색하게 움찔거렸다.

괜한 짓을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손을 놓은 찰나, 이번엔 그가 먼저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이번엔 우리 둘 다 손을 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굳은살은 얼마나 박였는지 조심스레 탐구했다. 궂은일 한 번 해


본 적 없는 티가 나는 영락없는 도련님 손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난로 옆에 누워 있으니까 어느덧 졸음이 밀려왔다. 자일스가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같았지만 이미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덮어 준 담요 안에서 뒤척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마디만큼은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잘 자, 안나.

사랑해.

<51 화>

*
자일스 헤센은 언제나 그렇듯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커튼 새로 푸른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걸
보니 이른 새벽녘의 어스름이 이제 막 가신 참이었다.

안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지난밤에 잡았던 손을 아직도 놓치지 않은 채로. 다행히 그녀는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언제쯤 잠에서 깰까? 적어도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는 출근을 해야 했고,
아무래도 작별 인사 없이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가기 전에 아침 식사라도 간단히 차려 놓고 갈 심산으로 그는 조심스레 손깍지를 풀었다.

부엌에는 계란이 있었다. 계란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많았다. 그는 식빵을 옆에 꺼내 놓고서 노른자를


푼 계란을 가열한 팬 위에 부었다. 주걱으로 팬 위를 뒤적거리면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에 나누었던 대화가 못내 신경 쓰였다. 만일 어떤 이유로든 안나의 입지가 위험해진다면.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안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었다.

빈센트가 안나에게 뒤틀린 관심을 보이는 게 문제였다. 대놓고 반항심을 드러내도 무관심으로 방치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설득이나 협박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안나에게 쏠리기 시작한 관심을 다시
그에게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안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빈센트만 처리한다면, 당분간 안나는 안전할 것이다. 그 누구도 엘로이즈 비스마르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몰락한 백작가의 막내 영애는 이미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을 거다.

빛나는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신예 피아니스트를 끌어내리고 싶어 할 자가, 과연 있을까?

스크램블 에그가 완성되었다. 따뜻할 때 먹으면 제일 좋겠지만 계란 하나 때문에 안나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는 접시에 적당히 구운 식빵 두 쪽과 방금 요리한 계란을 세팅하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제복을 주워 입고 곧 떠나려던 참이었던 자일스는 문득 유일하게 커튼을 치지 않은 창 쪽에 눈길을 주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반대쪽에서 커튼을 드리웠다. 이제 그들을 훔쳐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자일스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는데.

감시당하고 있는 건가? 적어도 그들에게 원치 않은 관심을 가지는 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안나에게.

그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았든 알지 못했든, 사실은 명백했다.

안나는 안전하지 않았다.

안나는 위협받고 있었다.


그건 누구였지? 자일스는 아침에 목격했던 일에 대한 생각을 하루 종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찰나였지만, 자일스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낯선 이의 시선을 도저히 잊지 못했다.

평소 같았다면 사소한 일 취급하고 금방 잊었을지 몰랐다. 우연히 이웃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로 결론지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안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감시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다. 물론
누군가 안나의 정체를 알아챘을 가능성은 미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나는 귀족의 딸이었다. 그녀가
말했듯이 영원히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만약 우연이었다면, 그는 어째서 자일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커튼을 내렸나?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낯선 이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평범한 이웃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했을까?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약 혁명군에서 안나를 의심하고 있다면, 왜 당장 체포하지


않고 감시원을 붙이는 수고를 하는 거지? 의심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말이다. 이런 건 혁명군이
일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일스는 혁명군 이외에 안나에게 적의를 품을 만한 세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안나가 오리엔트 특급열차 작전에 긴밀하게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작전을 위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자일스를 위해 알베르트 레만을 배신했고, 자일스를 납치하려는 벨담 정보국의 작전은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안나가 새로운 표적이 된 거라면? 혹은, 그가 안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벨담 측에서
아직 안나를 포기하지 못한 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안나에게 나쁜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안나를 잃게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오로지 안나 때문이었다.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책상 주변을 서성이던 자일스는 자리에 앉아 대답했다.

“들어와.”

놀랍게도 빈센트 모너건이 문틈 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갑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형식적인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문을 닫았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취조 허가 요청서였다.

“아직도 그 벨담 요원들한테서 들을 것이 남아 있나?”

“어쩌겠습니까? 대위님께서 레만 놈에게 친히 죽음을 선사해 주시지만 않았다면 벌써 깔끔하게 끝났을


일을 가지고 질척여야 되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시죠.”

“송환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뭘 더 어쩌겠다는 거지?”


“마치 제가 그들을 심문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자일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벨담 요원들이 어서 본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필이면 빈센트가 이들의 취조를 맡았다는 사실마저도 불안했다. 혹시라도 안나가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뜬금없이 안나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혹시 이 작전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안나가 알베르트 레만에 협력하기 위해 기차에 탔던 건 사실이니까.

“내가 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건 이미 종결된 사건이야. 벨담으로
밀입국하려던 이들을 송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아직 시간은 남았잖습니까.”

“송환 대상에는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다. 벨담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원해.”

“팔다리는 멀쩡하게 둘 테니까 걱정 마시죠.”

아무래도 그에게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체 뭘 더 듣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앞에 놓인 허가 요청서조차 안나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허가해 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으니까. 만약 그를 돌려보낸다면


빈센트가 상부에 또 무슨 억지를 부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자일스는 펜을 들었다.

“……고문은 하지 마.”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죠.”

그는 의외의 발언에 놀라서 빈센트를 올려다보았다. 한편, 빈센트는 자일스가 서명한 서류를 받아 들고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있었던 일은 죄송했습니다.”

“뭐가 말이지?”

“제가 안나 양께 무례를 범한 일 말입니다. 대위님께도 그렇고.”

“그 일에 대해선 더 할 말 없어.”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면 뭐가 잘못됩니까?”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대답하기도 싫을 지경이었다. 이만 빈센트를 돌려보내려던 그 때였다.

“안나 양께도 대신 전해 주시죠. 잠시 의심했던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무슨 뜻이지? 빈센트를 그대로 나가게 둘 수


없었던 자일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대위님도 아시다시피 안나 양이 이번 사건과 아예 관련이 없지는 않잖습니까? 오히려 긴밀한 편에


속했으면 속했지. 저는 모든 의문점을 빠짐없이 조사해야 하고 말입니다.”

“안나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인가?”

“혹시라도 안나 양이 승객들과 함께 벨담으로 밀입국하려던 자는 아닌가 싶었을 뿐입니다.”

“모너건.”

“그 사건을 기점으로 갑자기 대위님 곁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도 영 의심스러워서요.”

“안나는 처음부터 조사 대상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임무에 태만하면 나중에 뒷감당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만일 안나 양이 대위님을 속이고 레만


놈에게 붙어서 벨담으로 가려다가,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대위님께 다시 달라붙어서 결백을 꾸며 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면 이걸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잠시 일었던 분노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안나를 정말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반어법을 쓰면서 그의 반응을 떠보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억측이 아니라 그는 거의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나는 기차에 타서 외국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 외국이 벨담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안나는 알베르트 레만에 가담한 사실이 있었다.

“……지금껏 안나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건가?”

“의심하고 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왜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지?”

“사실 관계가 명확해지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대위님이 안나 양과 만나는 사이라는 게 좀 걸려서


말입니다. 아무튼 아닌 걸 알았으니 이제 마음 놓을 일만 남은 거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걷던 빈센트가 다시금 물어 왔다.

“정말 안나 양을 사랑하십니까?”

“나가.”

그는 어깨만 으쓱였을 뿐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52 화>

*
빈센트는 휘파람을 불면서 음산한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벨담 치하 시절부터 오래 묵은 죽음의
냄새가 밴 곳이었다. 이곳을 거닐던 그는 생각했었다. 동향 사람들의 흔적을 완전히 덮고도 남을 만큼,
제 몫의 희생자들을 철저히 밟아 주겠노라고.

오직 그런 생각만을 하며 일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다른 벨담 놈들이 어떻게 되든, 그런 건 빈센트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그는 자일스 헤센이 미웠다. 혐오스러웠다. 귀한 집안에서 자라 온 태가 기름처럼 좔좔 흐르는 반반한


낯짝도, 제 주제도 모르고 처음부터 입스윈 혁명의 일원이었던 양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혁명군이 저놈을 거둬들여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빈센트가 보기에는
크나큰 모순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일스는 제 과거를 완벽히 청산한 채로 혁명 영웅으로 거듭날 것이 뻔했다.

그런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저놈에게도 약점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는 배를 깔고 먹이를 기다리는 뱀처럼 오랫동안 그를 주시해 왔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가 딛고 선 위태롭기 짝이 없는 기반을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끝에…… 마치 보상처럼 흥미로운 인물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안나 키팅. 아름답고 유망한 피아니스트. 자일스 헤센은 그녀를 통해 행복을 얻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고, 그다음부터는 소유욕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만약 그의 품에서 안나를 빼앗는다면 헤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흥미는 쉽게 식어 버렸다. 빈센트는 본래 이성과의 교제에 관심을 두는 남자가 아니었다.


여자랑 시시덕대느니 한 명의 벨담 놈을 더 괴롭히는 것이 나았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의 그런 성향이 도리어 안나에게 더욱 커다란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취조실 문을 열어젖혔다. 불쌍한 꼴을 한 남자가 의자에 묶인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센트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잡음이 섞인 대화가 취조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럴 리가 없어.’

‘뭐가.’

‘협상이 결렬되었을 리가 없다고! 넌 거짓말을 하는 거야. 분명 나를 고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난 벨담을 믿어. 조…… 조국이 나를 버렸을 리가 없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벨담이 너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아등바등하고 있을 것 같나?’

비웃는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너 하나쯤 없어도 그 나라는 잘만 돌아간다고. 아니지, 오히려 모든 걸 다 잃고


폭삭 내려앉았는데 국민 몇 명쯤 더 잃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어?’
‘씨발, 더러운 입스윈 새끼가!’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자, 진정하시고. 내 말의 요지는 말이야.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갈 테니 그 어떤


정보도 털어놓지 않겠다는 개소리 따윈 집어치우라는 거였어. 왜냐하면 벨담이 먼저 널 버렸으니까. 이제
여기서 개죽음당하게 생겼는데 이제 와서 신의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 네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 단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빈센트는 요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

얼마 후,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피곤하게 만드는 놈이군.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락가락하면 어떡해?’

‘그……만.’

‘날 봐. 내 눈을 똑바로 봐!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멍청한 새끼. 네 이름이 뭐지? 네 이름이 뭔지 말할


수 있나?’

‘으…… 으으…….’

‘네 이름! 이름을 말해!’

‘위르겐…… 위르겐 바흐.’

‘그럼 이 사진 속 남자는 누구지?’

‘……알베르트, 레만.’

‘이 여자는? 또 헛소리하면 그땐 정말 죽여 버리겠다.’

‘엘…….’

‘그 이름이 아니잖아. 이 여자 이름이 뭐냐니까!’

남자는 계속해서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한숨 소리 끝에, 철컥 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남자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벨담에 대한 네 충성심은 잘 알겠다.’

‘아냐! 난 거……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당신은 나, 나를 이 방에 가두고 잠 한숨 재우지 않았잖아!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기…… 기억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래! 성씨가 비스마르였어! 그가 그렇게 말했어. 비, 비스마르. 엘로이즈 비스마르라고…….’

‘……뭐?’
달칵. 녹음기가 다시 침묵했다.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던 목소리의 주인은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빈센트를 멀겋게 쳐다보고 있었다.

빈센트는 펜과 종이 한 장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서명해. 네 이름을 서명하면 약속대로 벨담으로 보내 주지.”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펜을 잡았다. 서명이 끝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마지막 글자를 적는 순간, 빈센트는 책상 위에서 종이를 채 가듯이 집어 들었다.

「나는 녹취록의 진술이 전부 사실이며,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진술했음을 명백히


확인합니다.」

종이 위에 적힌 문구와 그 밑에 쓰인 애처로운 서명 덕에 흡족해진 빈센트는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이렇게나 기다려진 적이 얼마 만이었던가?

어쩐지 그 여자만 싸고돌더라니.

분명 그런 놈일 줄 알고 있었지!

이제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순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빈센트가 할 일은 증오스러운 남자의 몰락을 그저 앉아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당장이라도 불길한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치 시한폭탄을 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빈센트가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이후로는 더 그랬다. 나쁜 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어서, 지금 당장 안나를
어디론가 숨겨 둬야 하나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걱정이 기우라도 된다는 듯, 그 후로 며칠간은 아무런 징조도 혹은 변화도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안나를 방문했다. 그 때마다 안나는 멀쩡했다. 그와는 달리 심하게 불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다만 안나는 머지않아 열리게 될 연주회에 더욱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의 주의를 온통 사로잡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때문에 그녀를 둘러싼 현실을 잠시나마 내려놓은 것 같았다.

자일스는 굳이 안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안나가 무언가에 몰두하며 즐거워하는 순간을 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건 그 혼자서도 충분했다.

안나는 누구보다 음악에 열정적이었다. 어릴 적 유일한 위안이자 취미가 되어 주었던 피아노는 지금까지도
시름을 잊기 위한 출구이자 도피처였다.

피아노를 칠 때면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굳이 표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케스트라와의 마지막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안나는 리허설 현장까지 꿋꿋이 따라오려는 자일스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자일스, 혹시 무슨 일 있어?”

그는 안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니야.”

“당신이 평소 같지 않아서 그래.”

“평소에는 내가 너무 소홀했던 모양이군.”

“그런 말이 아니야.”

안나는 눈치가 빠르고 생존 본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자일스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안나는 결국
알아채곤 했다. 자일스는 그런 안나를 위해 끝까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까 연습 잘 하고 와.”

그녀는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더 남아 있는 기색이었지만 결국 그를 남겨 두고 무대 위로 향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드레스도, 무대를 밝게 비추는 조명도 없었지만 안나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빛났다.

피아노 앞에 앉은 안나는 거대한 연주홀의 지배자였다. 오케스트라는 뒤에서 그녀를 보조해 줄 뿐이었다.
적어도 자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선두에 서서 음악을 주도하는 건 피아노 선율이었고, 그 선율의
유일한 주인은 안나였으니까.

그녀가 평범한 피아니스트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그랬다면 자일스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음악가와 혐오스러운 과거에 찌든 장교 사이의 접점이 있을 리 만무할
테니까.

영혼 안에 깃든 무한한 잠재력을 펼치며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겠지. 지금처럼 정체를 들킬 걱정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자일스 대신에 온 입스윈이 평생토록 그녀를 사랑해 주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날들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녀에게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찾아올 것인가.

어느 새 완연하게 무르익은 봄.

연주회 당일이 다가왔다.

“죽을 것 같아.”
대기실 소파에 드러누워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안나가 중얼거렸다. 연주홀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관객석은 저녁 일곱 시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로 들어찼고, 연주가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안나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연주함으로써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안나는 특히나 그
사실 때문에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이건 그녀만의 연주가 아니라 입스윈 필하모닉의 연주회이기도 했다.

“안나, 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야.”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넌 잘할 거야.”

자일스는 안나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녀 곁에 앉았다. 잠시뿐이겠지만, 안나는 간만에 빈센트나 다른


혁명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오로지 연주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지금은 불안하겠지만 피아노 앞에 앉으면 다시 자신감을 되찾을 거야. 분명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넌 한 번도 피아노 앞에서 자신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그 말에 안나 또한 용기를 조금 되찾은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내쉬던 안나가 문득 뭔가를 생각해 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단원들이 좀 무서워하는 것 같더라.”

“뭘? 연주를 망칠까 봐?”

“아니! 리허설부터 지금까지 내내 혁명군이 들락날락하니까 그렇지. 제복 입은 군인이 자꾸만 등장하는데


누군들 안 그렇겠어.”

긴장이 풀렸는지 안나가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일스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물어 왔다.

<53 화>

“근무 중도 아닌데 왜 매일 제복을 입고 다니는 거야?”

“군인은 24 시간 내내 근무 대기를 해야 해.”

“와, 뭐가 그래? 끔찍하다. 안 그래도 엄청 불편해 보이는 옷인데. 숨은 잘 쉬어져?”

“제복 때문에 호흡 곤란을 호소한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었어.”

“농담한 거잖아. 당신은 그것도 몰라?”


농담할 여유가 생긴 걸 보니 그래도 이전보다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자일스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교향곡의 선율이 방음벽을 뚫고서 감미로운 음색을 전달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나가 말을 꺼냈다.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주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당신은 내가 그렇게 좋아?”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는 아주 뻔했지만, 자일스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이런 질문에도 가감 없이 대답할 만큼 능청스러운 사람이 못 되었다.

다행인 사실은, 안나도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당신이 별나게도 느껴져. 나는 사랑 받으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당신은
내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늘 그 자리에 있잖아.”

“난 네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

“내가 있으면 어떤 기분인데? 응? 말해 봐.”

그때 박수 소리가 울렸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난 것이다. 이제 안나가 대기실 바깥으로 나갈


차례였다.

“잘하고 와.”

“연주회 끝나면 내 질문에 대답해 줘야 해.”

대기실 문이 열렸다. 잠시 무대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이제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안나는 자일스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얀색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걸음을
따라 물결치듯 흔들렸다.

더 이상 대기실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자일스는 문을 열고 복도를 빙 돌아서 객석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피아니스트를 맞이하는 박수 소리가 다시금 연주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서 피아노 앞에 앉은 금발의 음악가가 보였다. 그녀가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곧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할 것이다.

자일스는 안나가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그녀가 연주를 성황리에 마칠 것이라는
믿음은 변치 않은 채였다. 안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그 누구보다도 자일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자일스는 안나의 몸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조명 때문에 착시가 일어난 건가? 빛이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안나의 몸 위를 어른거렸다. 이게 과연
의도된 건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연극 무대라면 모를까 연주회 공연장에서 조명 불빛이


저리 산만하게 움직일 리는 없다. 자일스는 조명이 매달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일스가 관객석을 마구잡이로 헤치고 나아가자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불안이 극에 달할 때면 항상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쿵! 쿵! 쿵! 자일스는 사람들을
지나쳐 무대 쪽으로 나아갔다.

그가 외쳤다.

“안나!”

이제 막 지휘자와 시선을 마주친 참이었던 안나가 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동시에 무언가


추락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렸다. 밝게 비춰지고 있던 무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들이 경악에 질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몇몇은 겁에 질려서 공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자일스는
그들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안나, 안나! 그가 이름을 소리쳐 불렀으나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안나가
무사할까? 무사할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안나를 잃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누군가가 비상 조명을 켠 덕에 그나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일스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미 무대 바깥으로 도망쳤는지 무대가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엔 단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나……?”

박살 난 조명 장치 근처에 안나가 쓰러져 있었다. 파편이 박힌 복부 주변으로 붉은 선혈이 천천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자일스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는 이러한 광경을 예전에도 목도한 적이 있었다.

새하얀 배경에 붉은 피.

땅 위로 희게 덮인 눈과 그 위를 적시던 혈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안나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거야. 죽고 만 것이다. 자일스는 누이를
잃었듯이 안나마저도 잃어버렸다. 과거의 잔상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안나가 죽었다.

셀레스트가 그랬듯이…….

“안나! 제발, 제발…….”

그는 반쯤 흐느끼며 방황하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안나의 동맥을 짚어 보았다. 박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출혈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을 부를 여유조차 없었다. 자일스는 안나를 품에 안아 들고 뛰었다. 공연장에 의료진 따위가


대기하고 있을 리 없었다. 안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둘 수는 없어.

또다시 빼앗길 수는 없어.

더는 안 돼.
자일스의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죽지 마, 안나.’

‘제발. 죽지 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와중에도 안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난 안 죽어. 죽기를 원했다면 벌써 몇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갔겠지.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야?

난 가족들이 날 말려 죽이지 못해 안달할 때 비로소 내 마음을 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곱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날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흘러가는 세월뿐이리라. 평생을 진창에 처박혀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결국 사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남자는 내게 계속해서 빌었다. 제발 살아남아. 죽으면 안 돼. 내 곁에 있어 줘.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 내게 욕을 퍼부으며 죽어 버리라고 외친 적은 있어도 제발 살아 달라고 간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내 목숨을 붙잡아 놓으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게 내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한쪽 손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오른손은 처량하게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내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안나.”

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내가 살기를 바라는 별난 이가


누구였는지.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나는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떴다. 이번에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아늑하고 평안한 곳이었다.

누군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꾸민 것 같았다. 이곳의 주인이 될 사람이 마음 놓고 지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미색 바탕에 잔꽃무늬 패턴이 그려진 벽지가 특히 눈에 띄었다. 누구를 위해 만든 공간일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을 복기하려
애썼다. 본래대로라면 나는 뭔가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지만 그게 뭐였지?

문득 피아노의 형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나에게는 중요한 연주회가 있었다. 연주회는
어떻게 된 거지? 잘 마친 건가? 그랬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왜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는 거지?

연주를 제대로 마친 것 같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복부에 두꺼운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 침대를 벗어났다. 몸 이곳저곳이


쑤셔 왔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분명 바깥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철컥, 철컥. 불길한 소음만 연달아 낼
뿐이었다. 뭐지? 문이 고장 났나? 나는 문에 몸을 부딪치기도 해 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바깥에서 문을 잠근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익숙한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내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사고가 난 거야. 나는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외쳤다.

“바깥에 누구 없어요? 문이 잠긴 것 같아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려 왔다. 조바심이 났던 나는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다못해 창문이라도 뚫려 있다면. 나는 창이 나 있어야 할 부분으로
달려가 커튼을 젖혔다.

그러나 내 앞에 드러난 건 꼼꼼하게 못질한 판자뿐이었다.

갇혔어. 갇힌 거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악몽인가? 미친 듯이 살을


꼬집고 벽에 머리를 찧어 봤지만 그럴수록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절박해진 내가 다시 문손잡이에 매달렸다. 열어! 이 문 열라고! 화를 내 봤자 닫힌 문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울면서 외쳤다.

“도와주세요! 아무나 이 문 좀 열어 줘요!”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54 화>

8. 행복한 결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저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방의 벽이 나를 향해 점점 좁혀져 오는 듯 환각이 밀려들며 숨이 막혔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럴 수는 없어. 그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내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저택에 있었을 땐 상황이 더 심각했는데. 나는 마룻바닥 밑이나 몸을 최대한
웅크려야만 하는 벽장 안에서도 잘 버틸 수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침대와 책장이 있는 이 고급스러운 방은 황제의 침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산조각 났다. 내가 나약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드러누워 웅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있으니까 그나마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갇혔다는 사실도, 모든 통로가 막힌 이 방의 생김새도. 모든
생각을 차단하자 버틸 만해졌다.

누군가는 구하러 오겠지.

반드시 그럴 거야.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은 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거인의 발에 짓눌린


사람처럼 저려 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말이지, 이대로
까무러쳐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오고 있을 거야. 내가 없어진 걸 알고서 나를 찾는 중일 거야.

그때였다. 나는 누군가 열쇠를 넣고 돌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일스였다. 평소와는 달리 제복을 입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기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일스!”

그가 문을 닫았다. 뭐,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나가 줄 테니까.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려다 그만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내 몸을 자일스가 간신히 붙잡았다.

“안나,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내 상태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구하러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게 괜찮기도 했다.

“당신이 올 줄 알았어.”

“아픈 건 좀 어때?”

“뭐가? 난 괜찮아. 봐 봐, 멀쩡하잖아.”

“네게 진통제를 놔 줬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가자.”

내가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자고. 지금 몇 시야? 하늘을 보고 싶어 죽겠어.”

“안 돼.”
“뭐?”

“안 된다고.”

나는 할 말을 잃고서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자일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나는 그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야? 내 말은 바깥으로 나가자는 거야. 봤어? 어떤 미친놈이 창문에 판자를 못질해 놓은 거.”

“넌 여기 있어야 해.”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그만해.”

“미안해.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장난 그만 치라니까!”

내가 소리를 질렀지만 자일스는 그런 반응마저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뿌리치고 문을 향해 튀어 나갔다. 하지만 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그가 내 몸을 붙잡았다.

“이거 놔!”

“안나, 진정해.”

“놓으라고! 미친 새끼, 내 몸에서 손 떼!”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그의 팔뚝을 떼어 내려 해도 단련된 군인의 무지막지한 완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나를 가둔 미친놈이 바로 자일스였다. 그는 나로 하여금 이
끔찍한 방에서 지내기를 원했다.

“……네가 한 거야? 네가 날 납치한 거냐고.”

“납치한 게 아니야.”

“이게 납치가 아니면 뭔데! 저 판자는 어떻게 설명할 셈이야? 완전히 폐쇄된 곳이잖아!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야?”

“네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어.”

“웃기고 있네.”

나는 씹어 뱉듯이 쏘아붙이며 온 힘을 다해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안의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솔직하게 말해. 그들이 나를 처형하라고 말한 거야? 이럴 거면 애초부터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랬어.


그동안 나를 갖고 놀았던 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나는 널 믿었어, 자일스. 널 믿었다고.”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슬퍼서는 절대 아니고 화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죽길 원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 난 그 말을 전부 믿었어. 당신이


극악무도한 살인자라고 해도 상관없었어.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봐! 내 꼴을 보라고!”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난 이제 알았다.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던 끈은 이제 끊어져 버렸다.

“내게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 믿었던 내가 멍청한 년이지.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당신을 믿는 게


아니었어.”

“나를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내 말을 들어줘야 해. 너도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하니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듣길 원하는 건데?”

“안나, 제발.”

1 초도 더는 그와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가 나를 배신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에 매달리고 싶었던 걸까? 아직 자일스에게 미련이 남은 걸까.

“그래, 말해 봐. 네가 외워 온 그 잘난 대본 좀 읊어 보라고. 물론 네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가


판단할 거야.”

“너를 해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직 자세한 건 알아내지 못했지만 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 그들이 누군지 밝혀 낼 때까지 당분간 이곳에 있어 줘. 이곳에서라면 안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으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는 공연장에서 거의 죽을 뻔했어. 기억 안 나?”

나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지만 제대로 떠올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연주를 위해 무대 위로 입장하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문제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거였다.

“……누가 나를 쏘기라도 했다는 거야?”

“조명 장치가 추락했어. 너는 그 파편에 맞았고. 출혈이 너무 심각해서 조금이라도 지혈이 늦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나는 문득 내 몸을 더듬어 보았다. 멀쩡한 줄 알았던 복부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진통제 운운했던 게 다


그런 뜻이었던 건가?

“그럼 의사는 지금 어디 있는데?”

“의사는 없어. 내가 직접 처치한 거야.”

“당신이 직접 의사 역할을 했다고?”

“군인들은 모두 야전 의술을 훈련받아. 특히 상처를 꿰매고 피를 멎게 하는 기술들을. 언젠가는 전장에서


의무병 없이 동료를 살려야 할 순간이 올 테니까.”

흐느끼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죽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도. 이제야 자일스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조명 장치가 추락했다고?”

“네가 연주를 시작하려던 그때 일어난 일이야.”

“그냥 사고였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사고가 아니야. 누군가 고의적으로 손을 댄 게 분명해. 너를 노리고 일을 벌리려 한 거야, 안나.


사고라기에는 때와 장소가 정확히 들어맞아.”

“아직 확실하게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너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어! 그 누구도 우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닌 네


경우에는 더더욱 우연일 수가 없어!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고! 너도 알잖아, 안나. 언제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걸!”

“그래서 날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거야?”

그는 나를 감옥에 가둬 놨다. 내 안전을 명분 삼은 채. 자일스가 안전할 거라 생각하는 이 빌어먹을 방이


나를 제일 먼저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른 곳일 수는 없었어?”

“네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야.”

“안심하고 지낸다고?”

그의 말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두꺼운 커튼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는 창문조차도 없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뭐가? 이것도 내 안전 때문이야? 창문에 판자를 못질하고,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게? 내가,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잘 알면서도 당신은…….”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일스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해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를 지켜 주고 싶었다면,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어야 했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 말해 줬었잖아.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당신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잖아! 당신도 결국 그놈들이랑 똑같은 거야. 날 죽이고 있는 거라고!”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애써 무시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차라리 그가


죄책감이라도 느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를 이곳에서 꺼내 주기를 바랐다.

“나가게 해 줘. 두 번 다시 갇히고 싶지는 않아.”

“널 매일 살피러 올게.”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안나! 이해가 안 돼? 널 해치려 하는 놈들이 저 바깥에 있다고 했잖아! 그 어디에 있든, 넌 언제든지
다시 공격받을 수도 있어. 죽을 수도 있다고!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도 내게 살고 싶다고
말했잖아!”

<55 화>

결국 그가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자일스가 내게 소리를 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내게 이토록


모질게 대하는 것도, 전부 다. 가슴이 아파 오는 걸 보니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다면 코웃음 치는 것으로 응수했을 텐데.

그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마음을 내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람이 기어이 내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처참한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는 내내 죽을 것처럼 힘들었어.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고. 당신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야. 남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야.”

자일스는 고개를 돌리고선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발, 그가 내 심정을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뒤늦게라도 좋으니까 이게 최선의 방식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제발…… 당신이 내게 이러지는 말아야 하는 거잖아.”

자일스는 침묵했지만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른 끝에, 그가 다시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깊은 갈등의 흔적이 무서운 기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잔인하리만치 어두운 검은색 눈동자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자일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차라리 내 통제 하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야.”

“자일스.”

“내가 허락할 때까지 여기에 있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안 돼, 그러지 마!”

그가 매몰차게 문을 닫고 나갔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내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나는 그가 문을


완전히 잠그기 전에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했지만 이미 문이 잠긴 후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문을 때리며 외쳤다.

“열어 줘! 열어 달라고! 자일스, 좋은 말로 할 때 열어!”

물론 그가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란 사실은 알았다. 나를 대하는 눈빛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난 더


이상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완수해야 할 임무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저항을 그만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혼자가 되니 몸이 떨려 왔다. 내 안전을
바란다면서, 그는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는 대신 문을 잠그고 떠나는 쪽을 택했다.

이젠 뭘 사랑하고 뭘 믿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정말 괜찮겠어?”

그녀가 물어 왔다. 괜찮겠느냐, 그런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자일스는 복잡한


물음에 확답할 자신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셀레스트는 괜찮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자일스가 조국을 배반한 덕에 그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자일스가 혁명군 장교로서 부임하는 동안은 지도부가 셀레스트의 신분을 보장해 줄
것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괜찮았다.

“걱정하지 말고 가.”

“너 혼자 어떻게 살려고 그래.”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셀레스트.”

빛나는 금발을 한 갈래로 묶어 늘어뜨린 그의 누이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가족이 누리던
부의 규모에 걸맞도록 커다란 옷장에 질 좋은 옷들을 한가득 갖고 있던 셀레스트가 가진 거라곤 이제 저
조그마한 짐 가방에 든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일스는 셀레스트가 재산을 빼앗겨서 속상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같이 있는다고 해서 나빠질 건 없잖아.”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을 생각해 봐. 누나를 똑바로 볼 수도 없어질 거야. 나도 더 이상 평범한


남동생으로 보이지 않게 될 테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증오하기라도 할까 봐 겁나니, 자일스?”

“제발 고집 그만 피워.”

“너야말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봐. 내가 널 떠나는 게 옳은지 말이야.”

“날 증오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나는 이제부터 우리가 알고 지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 거야.
그중엔 누나의 친구들도 있을 거고, 심지어 우리 친척들이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고. 내가 베티나를
죽이고 오는 길이라고 생각해 봐! 그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것 같아?”

셀레스트는 그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 왔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해 봐, 자일스. 우리에게 남은 게 뭔지 말이야. 주변을 둘러보라고.


아무것도 남질 않았어. 심지어 우리가 어릴 적부터 지내 온 집도…….”

감정이 북받쳤는지, 셀레스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엔


울음기가 서려 있었다.

“다 불타고…… 없어졌잖아. 우리에게 남은 건 이제 서로뿐이란 말이야. 우린 한 번도 홀몸으로 살아가야


했던 적이 없어. 그런 외로운 삶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더더욱 서로가 곁에 있어야 해. 나중엔
생사도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땐 어떡할 건데?”

자일스는 셀레스트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그는 누이가 용기를 얻기를 바랐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만큼 강해지기를 바랐다.

“누나는 괜찮을 거야. 나도 그렇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누나가 이러고 있는 것조차 내가 누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증거야. 나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누나가 원하는 일들을 해. 난 누나에게 그런 삶을 주기 위해
모두를 배신한 거야. 그걸 이해한다면 내 부탁을 들어줘.”

셀레스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일스를 붙잡고 한참을 운 끝에, 짐 가방을 들고


그녀만이 아는 곳으로 떠나는 차에 올라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자일스는 다시는 셀레스트를 만날 수
없었다.

만나기를 원치도 않았고,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자일스가 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혼자서 자유를 누리기만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자일스가 원했던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해일에


휩쓸릴 일 없이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

실제로도 자일스는 셀레스트가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넘기는 동시에


셀레스트의 목숨을 약속받았으니까.

지금은 눈물을 흘리겠지만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안락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흰 눈이 빗발치는 겨울이 찾아왔다.

이제 셀레스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일스의 몸 아래에 누워 있었다. 얼굴 반쪽은 검게 그을리고,


나머지 멀쩡한 쪽도 그가 알던 예전의 셀레스트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자유를 얻기를 바라면서 그녀를 저 멀리 있는 세상으로 날려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자유를 주었다고
믿었다.

죽은 생선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셀레스트의 시선이 자일스 쪽으로 옮겨 왔다.

“왜 나를 붙잡지 않았어?”

“셀레스트.”

“내게 자유를 준다고 했잖아. 나를 혼자 보내 놓고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던 거야? 그저 나를 잊어버린 거지? 나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던 거지?”

“미안해…… 미안해, 셀레스트…….”

“나를 네 곁에 두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다 네 잘못이야. 다 네 잘못이라고. 내겐 아무


잘못이 없어. 죽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너였잖아.”

자일스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누이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셀레스트가 맞았다. 그의 안일함이 셀레스트를 죽게 만든 원인이었다. 자일스 때문에…… 셀레스트가
죽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시체의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셀레스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누워있는 인물은 안나였다.

놀란 자일스가 안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안나, 안나! 정신 차려!”

하지만 안나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싸늘한 시체는 곧 눈발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자일스의


곁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 믿고서 자유를 주려 했던 결정이 결국 셀레스트를 죽였다. 어찌 보면


정해진 운명이기도 했다. 자일스는 동등한 혁명군조차 아니었으니까. 얼마나 충성했든, 언젠가는 버려질
일이 다분한 벨담 지주의 핏줄이었으니까.

셀레스트 또한 그들의 눈에는 결국 벨담 출신 여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이의 말이 맞았다. 그녀를 곁에 두었어야 했다. 진정으로 지키고 싶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았을 텐데.

나는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거지?

소중한 이를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똑같은 일을 두 번 겪을 수는 없었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안나뿐이었다. 안나를 지킬 수 있는 이 또한 그밖에 없었다. 안나가 무어라


말하든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야만 했다. 자일스를 향해 울부짖고 저주를 퍼붓는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유는 더 이상 아무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안나의 생존은 곧 자일스의 생존과도 같았다. 안나가 죽는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그녀의 미움을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안나가 밀폐된 곳에 갇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그 안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솔즈부르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던 그 시절처럼, 자일스를 다시 증오하게
될지도 몰랐다.

자일스는 그렇다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죽어 가는 안나로부터 마지막 사랑의 속삭임을 듣는


것보다 그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 편이 안나에게도 이로울 거라 믿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안나가 기절했을 때, 그녀의 흰 드레스가 핏물에 젖어 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때 자일스는 비로소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는 안나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무엇을 대가로 희생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56 화>

국경과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안전 가옥은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건물은 아니었다. 자일스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집을 오랫동안 찾아다녔다. 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그 동기였다.

수많은 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던 그가 귀족 출신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일스는 철저하게 대비하고자 했다. 언젠가 안나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

물론, 안나를 위한 안전 가옥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배신자로 낙인찍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껏 혁명군의 신분이 그를 살렸다면 이제 그를 살리는 존재는 안나였다.

안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일스는 버려진 집을 이곳저곳 보수하고 단장해서 안나가 살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벽지를 바꾸고, 가구를 들여놓고 어릴 적의 기억을 최대한 떠올려서 인테리어까지 꾸몄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변화였다.

무엇보다도 오직 그만이 아는 곳에 안나를 숨겨 뒀다는 사실이 그를 크게 안심시켜 주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안나를 해치려 들거나, 납치 시도를 할 가능성이 차단된 것이니까. 이젠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신변에 이상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 년간 혁명군으로 살아온 자일스에게 그보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자일스는 자물쇠를 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창문을


막아 놓은 탓에 온 집 안이 어두컴컴했다. 안나는 꼭대기 층의 제일 넓은 방에 있을 터였다.

온통 암흑인 데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해서 계단 오르는 소리마저도 커다란 소음이 되었다. 자일스는 안나가


지내고 있을 방 앞에 섰다. 기척이 들렸을 게 분명한데도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쇠로 문을 열자 환하게 조명을 켜 놓은 안락한 방이 드러났다. 그가 제일 공을 들여 꾸며 놓은 방이었다.

안나는 구석에 틀어박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을 팔 사이에 묻고 있어서 언뜻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일스는 가방을 내려놓고 안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안나.”
“꺼져.”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기는커녕, 자일스의 머릿속엔 기력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날 여기서 꺼내 줄 게 아니라면 당장 꺼지라고, 미친 새끼야.”

“미안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어.”

“그럼 됐네. 너랑은 볼 일 없어. 말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그라고 안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화가 많이 났겠지. 안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어쨌든 이건 감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뭐라도 먹어야지, 안나.”

“두고 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날 혼자 내버려 둬.”

안나가 절대로 마음을 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기술 따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일스는 한숨과 함께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갈등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무언가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책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두 발을 딛고 서서 그를 노려보는 안나가 있었다.

안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울고 있었다. 눈가가 짓물러서 엉망이 된 걸 보니 하루 종일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일스는 그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안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널 죽일 거야.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자일스는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는 말?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말? 그런 말들이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안나의 귀에는 잔인한
말들로 들릴 것이 뻔했다.

“적어도 나와 상의를 했어야지. 나를 이 망할 집에 가두기 전에 내 의사 정도는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네가 싫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나는 네 물건이 아니야! 네가 기르는 강아지가 아니라고! 네 맘대로 나를 휘두를 수 있는 권리가 어디


있는데? 이젠 잘 알겠어. 너는 나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멋대로 나를 이런 곳에
가둔 거겠지. 반지를 잃어버릴까 봐 꽁꽁 숨겨 두는 데에 반지의 의견 따윈 필요하지 않잖아, 안 그래?”

“난 너를 지키고 싶은 거야, 안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네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어. 너도 그


사실은 이해해야만 해.”

“나를 걱정하는 게 맞기는 한 거야?”

안나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것도 잠시, 얼굴 위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며 그녀가 다시 질문했다.

“넌 나를 위해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지. 하지만 정말로 말해 봐. 넌 내가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만에 하나 나를 잃고 나서 상처 받을 너 자신을 걱정하는 거야?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그 잘난 입 좀
놀려 봐, 이 위선자야.”
그 순간 자일스는 당황했다. 안나가 그를 모욕하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을 듣는 순간
자일스는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강제로 까발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은 사실이었다.

“내 안전을 위해서라고, 웃기는 소리. 넌 그냥 나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잖아. 네가 아끼는 예쁜 인형을


잃어버릴까 봐 구석진 데에 숨겨 둔 거잖아. 안 그래? 내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도, 내 안위를
걱정하는 것도 사실은 다 네가 상처 받는 일을 막기 위해서인 거잖아. 네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닌데? 내가 틀린 말을 했다면 당당히 반론해 봐! 넌 그냥 네가 그만큼 역겨운 위선자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울고 있었다. 스스로는 울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일스는 그녀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 버린 탓이었다.

“내가 느꼈을 절망을 생각해 봐. 난, 나는 평생 동안을 그렇게 살았어. 아무도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다고. 나는 너만큼은 다른 줄 알았어. 너는 적어도 나를 한 인간으로서 생각해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내 착각이었던 거야.”

“안나.”

“할 말 없으면 그냥 가. 어차피 넌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잖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안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그림자 속에 숨어 버렸다.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자일스는 쉴 새 없이 들썩이는 안나의 어깨만을 바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차마 문을 다시
잠글 수는 없었다.

대문만을 잠그고 집을 빠져나온 그는 승용차 트렁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나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넌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야. 정확히는 나를 잃고


나서 상처 받을 너 자신을 걱정하는 거지.

그리고 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야.

안나의 말이 맞았다. 자일스는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안나에게 모질게 굴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살기를 바라서였다. 자일스는 진정으로 안나가 살아남기를 원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그는 안나의 죽음이 두려웠다. 그녀가 죽고 나서 스스로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결국 안나를 살리고자 하는 건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던가?

그는 안전 가옥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차에 올랐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건물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안전 가옥으로부터, 안나로부터 멀어지는 매 순간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불안감이 크기를 키웠다.
안나를 그곳에 두지 말아야 해. 그녀를 감금해서는 안 돼.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누군가가 안나를 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해 보였다.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려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가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그때는 누가 그 일을 책임질 수 있을까?

자일스는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안나가 참아주었으면 했다.

고통은 잠깐이지만, 죽음은 영원한 법이니까.

자일스는 그가 거주하는 연립 주택 근처에 차를 댔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죄책감이 무거운
추가 되어 그의 발걸음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울고 있던 안나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선했다.

자일스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누군가 집에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자일스는 허리춤에 매달린 총에 손을 갖다 댔다.

침입자는 제 정체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일스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해링턴 장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님.”

당황한 자일스가 그를 불렀다. 해링턴은 대답 대신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자일스. 자네가 벌써 죽어 나자빠졌을까 봐 걱정하던 참이었네. 대체 어딜 갔다 온 건가?”

자일스는 해링턴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해링턴 또한 답을 듣고자 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서 해명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하란 말이야.”

해링턴이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자일스는 반듯하게 접힌 서류를 펼쳐서 읽어


보았다.

녹취록을 받아 적은 사본이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던 자일스의 눈길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서류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가고 동공이 열렸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모두가 잊었어야 마땅할 이름이 바로 이 서류 안에 보란 듯이 적혀 있었다.

<57 화>
“그게 사실인가?”

해링턴은 심각하게 물으며 자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해링턴이 그의 거처까지 걸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를 비밀리에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자일스는 더 이상 신변이 안전한 인물이 아니었다.

“키팅 양이 비스마르 백작가의 영애라는 게 사실이냔 말이야.”

“……보고서를 올린 게 누구였습니까?”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자넨 알고 있었나? 키팅 양의 진짜 신분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러나 해링턴은 이미 정답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구태여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알고도, 그 여자와 만났다고?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

“이건 아주 심각한 사안이야, 자일스. 안 그래도 자네 출신 성분을 걸고넘어지지 못해 안달 난 놈들이


그득한데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하냔 말이야! 자네는 곧 체포될 거야. 어쩌면 벌써 자네를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내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자일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네는 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할 말이 없나?”

“죄송합니다.”

“대체 뭐가? 내 신의를 저버린 일이?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혁명군이 자네를 잡으러 오면 반항하지 말게. 순순히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비스마르 영애에
관해 묻는 질문에는 그 여자에게 속은 거라고 말하게. 자넨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그리고 안나를 제 손으로 직접 죽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마치 예전에 똑같은 일이 있었듯이.”

“지금 뭐라는…….”

“그럴 순 없습니다.”

자일스는 서류를 내려놓고 해링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직 확고한 신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굳혀 왔던 결정이었다.

자일스가 과연 제정신으로 선언한 건지 가늠하려 하던 해링턴은 그만 아연실색했다.

“헤센!”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뭘 어쩌겠다고? 이대로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미쳤군.”

해링턴이 중얼거렸다. 그는 차라리 자일스가 경황이 없는 탓에 저런 말을 내뱉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일스의 안색이 너무나도 편안했고, 또 안정적이었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해링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 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피고인처럼.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니었나? 나는 자네를 잘 알아. 벨담인으로서 혁명군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도,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과업에 임한 것도 전부 그들과는 같은 운명을 맞고 싶지 않아서였잖나. 그러기
위해서 직접 누이를 죽게 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저는 제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게 설마 안나 양…… 비스마르 영애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해링턴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일스에겐 그의


선언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저는 예전에 한 번 비겁한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냥 한 여자일 뿐이야. 평범한 여자라고, 자일스.”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애를 사랑하는군.”

구태여 대답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자일스는 안나를 사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죽음까지 불사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본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안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로 치부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안나는 삶이자 구원이었고,
암암한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길을 잃은 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는 길잡이
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자일스는 스스로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해 단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안나를 살리고 싶었다.

“저를 체포하실 겁니까?”

해링턴은 그의 물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일스가 내린 결정에 크게 실망한 게 분명했다.


오랫동안 자일스를 부하로 두었던 탓일까. 혹은 자일스가 다른 부하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일까.
해링턴은 자일스를 불필요할 정도로 아끼게 되었다.

지금 당장 자일스를 총으로 쏴 버릴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자네는 체포될 걸세. 이제 입스윈 내에서 자네가 있을 곳이란 없어. 어디로 도망치든 분명 잡히게
될 거야. 지금까지 혁명군의 신뢰를 얻으려 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겠지.”
“상관없습니다.”

“자넬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 곱게 보내 주려 하진 않을 거야.”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자일스의 시선에선 조금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링턴은 자일스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는 혁명군의 수뇌부에 있는 자였다. 적국 출신 장교 하나를 위해 혁명군을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 마지막 자비를 베풀 수 있을 뿐이었다.

“비스마르 영애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나는 자네를 부하로서 아꼈네. 자네는 언제나 내 충성스러운 심복으로서 역할을 다했지. 스스로 원하는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겠네. 하지만 내가 자네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해링턴과의 마지막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그를


마주할 일이 없으리라는 것도.

“가.”

해링턴이 그를 떠밀며 말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하게.”

나는 고요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일스가 갖다 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상하게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공허한 상실감만이 텅 빈 속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 있는 내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결론지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만약 여기서 나가게 되면, 자일스가 나에게 자유를 허용한다면…… 나는 미련 없이
그를 떠날 생각이었다.

과연 자일스가 그걸 받아들여 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거다. 그가 내게


아주 못된 짓을 했으니, 그에 응당한 결말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를 떠나서, 홀로 살아갈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미래 따윈 그리지 않을 거다. 그런 건 온통 고통으로


얼룩진 선택지일 뿐이었다. 난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도, 고통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다급히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 앞에 선 남자는 자일스였다. 그는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이거 놔, 지금 뭐 하는 거야?”

“나가야 해.”

“뭐?”

“이곳에서 나가야 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물론 바깥으로 나가게 해 주겠다는 선언은 반가웠지만, 갑자기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일스는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햇빛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와중에도 자일스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자일스, 대체 무슨 일인데?”

“네 신분이 들통났어.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나도 영원히 발 뻗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이야?”

“아직 너를 안전하게 지켜 줄 사람들이 남아 있어. 그들에게 가야 해. 그것도 최대한 빨리.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서 따라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누군데?”

우리가 근경의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일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새까만 승용차 몇 대가 안전 가옥 근처에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나를 따라온 거야.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

자일스가 속삭였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절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해.”

우리는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길이 들지 않은 야생 숲은 몸을 숨기기 좋았지만 그만큼 속도를 내기 쉽지


않았다. 자일스는 확실한 목적지를 정해 뒀는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이 말한 그 사람들, 내가 믿을 만한 자들인 건 맞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분명히 너를 보호해 줄 거야.”

“하지만 입스윈 안에서 혁명군에 대항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에는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추적자들이 바짝 따라붙지는 않았는지 파악하기에도 바쁠 테니까.

그러나 나는 도무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굶은 데다 마취가 풀리면서 복부의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 속도가 느려지자 자일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걸을 수 있겠어?”

“조금만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아.”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다친 곳이 너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걸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상당한 부위가 쿵쿵 울려 대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 머지않아 도착할 테니까.”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 버티기 어려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믿을 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일스가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멀찍이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혁명군이 분명한 그는 들으란 듯이 경고하고 있었다.

“헤센!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순순히 나와! 넌 시간만 끌고 있는 거야!”

<58 화>

우리는 더욱 몸을 사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자일스를 계속 따라가며 물었다.

“당신도 표적이 된 거야?”

“네가 귀족인 걸 알면서도 도왔으니까. 지금도 너를 데리고 도망치고 있고.”

“그럼 잡히면…….”

그 또한 죽게 되겠구나.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일스가 내 안위에 그토록 신경을 썼던 것 또한 내 일이 더 이상 남의 일이기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헤센, 당장 항복해!”

혁명군이 다시 외쳤지만 자일스와 나는 못 들은 척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숲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걱정 말고 따라와. 조금만 더 가면 그들도 더 이상은 따라오지 못할 거야.”

“말해 봐,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국경.”

“뭐?”

“우린 국경으로 갈 거야.”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자일스의 손을 뿌리쳤다. 국경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뻔했다.

“당신 지금 미쳤어?”

“안나,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벨담으로 가겠다는 말이잖아. 내 말이 틀려?”

“다른 방법이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저 남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죽게 돼!”

“넌 아니겠지. 그들이 널 죽이지 않을 거란 사실만은 확실해. 그러니까 어서 따라와. 이대로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당신은 어떡할 셈인데?”

자일스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이게 과연 옳은 결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혁명군이 뒤따라오고 있는
상황에서 자일스의 말대로 다른 방법 따윈 없었다.

“벨담으로 가면 그들이 당신을 쳐 죽이려 할 거야.”

“나도 알아.”

“그런데도 가겠다고? 나 때문에?”

“여기서 멈추면 두 명이 죽어. 하지만 국경을 넘으면 적어도 한 명은 살 수 있겠지. 뭐가 더 현명한


선택인지 뻔히 보이잖아.”

“그럼 나는 어떡하라는 말이야? 당신이 죽는 걸 눈앞에서 봐야 하는 나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안전 가옥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자일스를 영원히


떠나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그랬던 나는 그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잠깐 동안 고개를 들었던 증오는 이미 제 목소리를 잃고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당신인 걸 알면 그 자리에서 총을 쏠지도 몰라.”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당신이 죽는 걸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자일스는 몸을 돌리고 나를 마주 보았다.


그가 내 어깨를 붙들고서 단단히 일렀다.

“정신 차려, 안나. 너는 살아야 해.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왔잖아. 여기서 멈추면 끝이야.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잖아.”

“당신 걱정은 안 해?”

당장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 나를 걱정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얼마 후면, 어쩌면 몇 분


안에 총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는 오히려 내게 살아남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당신 걱정은 하지 않는 거야?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내가 나를


우선시하듯이 당신은 당신 목숨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잖아. 왜 당신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그러자 놀랍게도 자일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쁨과는 거리가 먼,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안나.”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는 다시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이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야.”

“왜…… 당신은 왜…….”

폭풍이 찾아오기 전에 그렇듯이, 주변은 고요했다. 나뭇잎끼리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살렸는지. 어째서 내가 떠나게끔 내버려 두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험 속에


내던지면서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었는지. 왜 당신은 그렇게…….

“왜 당신은 나를 그리 필사적으로 살리고 싶어 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생사 따윈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남에게 매달릴 수 있는 걸까? 나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면 절대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자일스는 소중한 것을 대하듯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영혼은 이미 죽었어. 아주 오래전에. 어쩌면 나는 작년 겨울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그 대신에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너 때문이었어. 그대로 삶을 포기하기엔 네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어. 저택에서 사라졌을 때도, 벨담으로 향하는 기차에 탔을 때도…… 나는 네가 걱정되어서
삶을 포기하지 못했던 거야.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법이니까.”

“……자일스 헤센.”

“어쩌면 너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지 모르지. 나로 하여금 살아가게끔 만드는 유일한 끈이


바로 너였으니까. 그래서 난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지 몰라.”

놀랍게도 자일스는 다시 웃었다. 또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내게 마지막 고백을 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어.”


그는 나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 끝까지 살아서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줘, 안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 안겨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일스의


고백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그를 두고 혼자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우린 계속 가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일스는 다시 내 손을 잡고 단호한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점점 국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일스가 죽게 될 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빈센트는 한 손에 권총을 들고서 부하들과 함께 우거진 숲을 헤쳤다. 자일스 헤센이 애인과 함께 숲으로
도망쳤다는 건 매우 확실해 보였다.

그놈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숲에서 추격전을 벌여 봤자 뭘 하겠다고?


이곳에 들어온 이상 자일스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하들은 숲을 포위하고 있었고,
포위망 반대쪽에 있는 거라곤 국경뿐이었다.

자일스는 생각보다 그의 손에 쉽게 잡혀 주지 않았다. 여러모로 짜증스럽게 만드는 놈이었다. 하지만


빈센트는 불만 따윈 없었다. 그는 오히려 즐거웠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순간만을 기다려 왔었다.

자일스 헤센을 그의 손으로 사냥할 기회를!

드디어 그는 빈센트의 표적이 되어 주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 그 더러운


핏줄이 어디 가 버릴 리는 없었으니까.

그는 반드시 자일스를 잡고 싶었다. 아니, 그는 잡힐 것이다.

그리고 본래 그의 운명이 그리 되어야 했던 것처럼, 빈센트의 발밑에 무릎 꿇고 자비의 말들을 갈구하겠지.


마침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벌써부터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자일스가 쉽사리 나타나 주지 않는 것도 즐거움의 일부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빈센트는 숲을 가로지르며 외쳤다.

“헤센, 넌 이미 끝장났어!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거다!”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빈센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가까이에 있다. 이제 모든 건


시간문제였다.
빈센트와 함께 수색 중이던 부하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곧 있으면 국경 지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계속 나아가면 아마 국경에 배치된 군인들과 대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넌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이대로 철수라도 하자는 거야?”

“그게 아니라……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벨담 놈들이 뭐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미 패망한 국가 주제에. 빈센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입스윈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거대한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벨담은 더 이상 빈센트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자일스 헤센을 그의 손으로 체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숲만 뒤지던 때였다. 빽빽했던 나무들이 점점 잦아들면서 시야가 확보되던 그 순간.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절대 그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누구인지는 뻔한
사실이리라.

빈센트는 고민할 것도 없이 권총으로 그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부하가 그를 말렸다.

“안 됩니다!”

“이거 안 놔?”

“여기서 총격전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국경이 바로 코앞입니다!”

함부로 총을 쐈다간 부하의 말대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빈센트는 욕지거리를 하며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고서 명령했다.

“따라와!”

그들은 함께 목표물들을 향해 달렸다.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자일스와 그의 애인 또한 움직임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느렸다. 조금만 더 따라잡으면 체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들이 국경과 정말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입스윈의 군인인 이상 빈센트는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벨담 국경에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겠다고 우기지 않는 이상 커다란 문제야 생기지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편 군인들이 그를 귀찮게 굴
것이다. 그럼 자일스를 잡는 데에도 차질이 생긴다.

국경에 진입하기 전에 신속히 그를 체포해야만 하는데…….

이상했다. 자일스 또한 조금만 더 가면 벨담 국경이라는 사실을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기는커녕 국경 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벨담으로 진입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말이다.


미친 건가? 자일스는 벨담에서 매일같이 물어뜯는 살인자였다. 그가 벨담으로 떠나면 무슨 일을 당할지는
뻔해 보였다.

자신의 손에 당하느니 차라리 조국에서 죽음을 맞겠다는 건가?

이가 갈렸다. 분을 참을 수 없었던 빈센트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헤센!”

그러나 그의 외침은 자일스의 움직임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자일스 헤센을 놓쳐 버리고 말 것이다.

빈센트는 부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었다.

국경에서 근무를 서던 빌헬름은 귀를 의심했다. 옆을 돌아보니 동료들도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총격이었다. 누군가 이 근처에서 총을 쏜 것이다.

모두가 사태를 파악하고 얼마 안 가 비상이 걸렸다. 빌헬름은 동료와 함께 총격이 발생한 지점으로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대체 어떤 놈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지? 국경 반대편에는 입스윈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위세가


약해졌다지만, 입스윈 놈들이 그들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그의 동료인 제바스티안이 말했다.

“분명해. 놈들이 술 한잔 걸친 거야. 대낮부터 팔자도 좋군그래.”

“무슨 말이야?”

“저번에 말이야, 야간 근무 설 때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갑자기 총격이 들려서 가 봤더니 입스윈 놈들이
코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낄낄대고 있더라고. 우리와 눈이 마주치니까 무슨 노래를 불러 젖힌 줄 알아?
우리 국가였어. 그 주정뱅이 놈들이 우리 국가를 불러 댔다고. 우린 놈들에게 조롱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거야.”

제바스티안은 한숨을 쉬며 이번에도 똑같을 거라고 장담했다. 빌헬름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군인들을


마주치는 광경을 상상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래서 그때 어떻게 했어?”

“뭘 어떻게 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우리가 그놈들 머리라도 쥐어박았겠어?”


나라 꼴 한번 잘 돌아간다. 제바스티안이 욕지거리를 섞어 내뱉었다. 그들은 총을 들고 대열을 맞춰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진 것이 아니었는지 동료들의 얼굴 위엔 짜증스러운 기색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건 술에 취한 군인들 따위가 아니었다. 웬 금발머리 여자 하나가 덜덜


떨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배는 피로 빨갛게 물든 채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한 동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빌헬름은 여자를 부축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는 사색이 된 채로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모종의 이유로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씀하십시오. 공격을 받았습니까?”

“……살려 주세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살려 달란 말이에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던 여자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빌헬름은 여자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다른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매일 보던 사람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별안간 제바스티안이 외쳤다.

“저놈, 그 남자 아니야?”

“누구?”

“그 배신자 말이야, 자일스 헤센!”

그제야 빌헬름은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제바스티안의 말을 들으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다.
신문에 며칠이고 오르내리던 얼굴과 이름. 온 국가의 미움을 산 남자. 죽어 마땅한 비열한 배신자,
자일스 헤센. 그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었다. 국경에 이토록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상대는 심지어 자일스 헤센이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손 들어!”

그들이 외쳤다. 그러나 자일스는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여자가 옆에서 무어라 외치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자일스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을 향했다.

탕! 총성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잠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동료들은 총을 내리고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투둑, 투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어깻죽지를 적실 즈음이 되어서야 빌헬름은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남자는 확실히 신문에서 봤던 그 남자가 맞았다. 자일스 헤센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만 그가 동료들에게 일렀다.

“……중위님 모셔 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씀드려.”

벨담을 집어삼킨 어두운 그림자가 정점을 찍던 날.

자일스 헤센이 잡혔다.

<59 화>

9. 벨담으로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흡사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자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레이디, 조금만 더 쉬세요. 아직 이른 새벽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횡설수설 말하려 했다.

“아니에요, 나는…… 나는 쉬고 싶지 않아요. 나는…….”

“괜찮아요.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어요.”

이름 모를 여자의 위로는 내 눈을 감기기에 충분했다. 나는 눈을 감자마자 현실의 장벽 너머로 가라앉았다.

이제 내 눈앞엔 자일스가 있었다. 자일스 헤센. 나를 몇 번이나 괴로움에 몸서리치도록 만든 남자.


지금도 그랬다. 나는 자일스 때문에 괴로웠다. 하루 종일 소리 내어 울어도 부족할 만큼.

그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안나, 기억해. 네가 나를 벨담으로 데려온 사람이라는 걸 알면 그들이 너를 반드시 보호해 줄 거야.


벨담에서 가장 증오하는 배신자가 바로 나니까. 너는 벨담 정보국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거야. 보호받지
못할 이유가 없어.”

아니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살기 위해 당신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버리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당신이 비참하게 죽게 되는 건 싫어.

“벨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자일스 헤센이 너에게 앙심을 품고 죽이려 들었다고.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국경까지 도망쳐 왔다고 해. 복부에 부상을 입은 것도 다 나 때문이었다고 말해.”
내가 왜 그래야 해! 내가 왜 그런 비열한 거짓말을 해야 해?

나는 소리쳤지만 마치 영화 속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내 말들은 자일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절대 나를 옹호하지 마. 내 편이 되지 마, 안나. 나는 온 국가의 증오를 받는 몸이야. 거기에 휘말려


들어서는 안 돼.”

싫어. 당신은 내게 이런 짓을 할 권리가 없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와 함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벨담으로 가서 살아. 네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부디 행복하게 살아.
그곳에선 아무도 널 붙잡으려 하지 않을 거야.”

난 아직 당신을 좋아한단 말이야.

나에게 그런 짓을 시키지 마.

자일스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항상 감정 표현에 인색하던 그가 진정으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


날 처음 보았다.

“안나, 미안해. 너에게 고통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 다만 나는 널 잃게 될 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너를 가둔 거였어. 그리고 그게 전부 너를 위한 거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켰어. 미안해. 나는
결국 내 자신을 위해 널 악몽 속에 빠뜨리고 말았어.”

사과는 나중에 해, 자일스.

그게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해.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자일스는 마지막으로 나를 껴안으며 떨고 있었다. 그도 두려운 것이다. 자일스가


그토록 피하려 애썼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을 원래 그래야 했던 대로 돌려놓는 것뿐이야. 나는 죗값을 치를 테고,


너는…… 넌 그곳에서 행복할 거야. 널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뭘 해야 하는지 이제야 알았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놔줘야 했어. 너를 품에 끌어안고 있으려 해선 안 되는 거였어.”

나는 당신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아.

자유든, 행복이든…… 사랑하는 이를 희생함으로써 얻어져서는 안 되는 거잖아.

자일스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행복해야 해, 안나. 내가 널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내가 그에게 무어라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자일스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가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아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아주 크고 화려한 병실이었다. 커다란 창을 반쯤 가린 린넨 커튼이 바람에 흔들렸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벽을 갖가지 유화가 장식하고 있었다. 내 옆 테이블에는 튤립을 정성스레 꽂아 놓은
화병이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누워 있던 것도 잠시. 나는 명백한 목표 하나를 떠올렸다.

“자일스.”

자일스를 찾아야 했다. 그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걸 내가 봤다.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죽었을 리 없었다. 너무 늦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찾아야 했다.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하얀 앞치마를 두른 간호사가 식사가 든 쟁반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이디, 일어나셨군요. 마침 식사하실 시간이었는데 잘되었어요.”

“내 옷 어디 있어요?”

“괜찮아요. 잃어버린 것 하나 없이 저희가 잘 보관해 두었으니까요.”

“식사는 됐어요. 난 여기서 나갈 거예요.”

“어디로 가시려고요?”

“찾으러 가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가, 그 사람이…….”

“아, 안 그래도 지금 오고 계시는 중이에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이곳에서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식사하세요. 배고프시잖아요.”

간호사는 침대를 벗어나려는 나를 다시 얌전히 앉혀 놓았다.

그녀가 들고 온 쟁반 위에 따뜻한 야채수프와 커다란 빵 몇 조각이 있었다. 간호사의 말대로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다.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하는 수 없이 수프를 떠먹었다.

간호사는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엘로이즈 비스마르,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 레이디께서는 안전하게


벨담에 도착하셨으니까요.”

“뭐라고요?”

나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맞아요, 여긴 벨담이에요. 정말 믿기지 않으시죠?”

“그게 아니라…… 방금 나를 뭐라고 부른 거예요?”

“레이디 엘로이즈 비스마르. 비스마르 백작가의 가주이자 상속녀이신 분이잖아요.”

내가 할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이 병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그는 중년으로 들어서는 나이대의 남자였는데, 나는 그가 지위 높은 계급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간호사가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기 때문이다.

남자가 간호사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자리를 비우셔도 됩니다.”

간호사는 군말하지 않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정확히 어디로 옮겨 온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간호사가 앉았던 자리에 착석해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회색 눈동자가 쉬이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드시죠. 아마 식으면 맛이 없어질 겁니다.”

“당신은 누구죠?”

“벨담 정보국에서 나왔습니다. 아렌트 홀츠만입니다.”

“정보국 사람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에요?”

“보호를 받고 싶어서 벨담 국경까지 도망쳐 나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 순간 자일스가 했던 말이 겹쳐 들렸다. ‘벨담이 너를 보호해 줄 거야.’ 나는 자일스의 목숨을 대가로


벨담에서 안전하게 살 권리를 얻은 것이다. 깨어진 유리 파편처럼 정신없이 흩어졌던 의식이 다시금
가지런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나는 현명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선택 또한 내 몫이었다.

이대로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평온한 삶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자일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 당장 내가 알고 싶은 건 자일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살아 있기는


한 건지였지만 아렌트에게 물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로 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지부터 알려 줘요.”

“당신은 수도로 옮겨 왔습니다. 이곳은 홀슈타인의 슐레스비히 국립병원입니다. 상처를 크게 입으신 것


같아 먼저 치료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홀슈타인이라고요?”

“예, 말씀드린 대로 당신은 수도에 있습니다.”

“그럼…… 자일스는, 자일스 헤센은 어디에 있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나는 그가 죽었을까 봐 두려웠다. 보통 총을 맞은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죽었나요?”

아렌트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자일스를


걱정하는 것처럼 비쳤을까 봐 불안했다.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무감한 표정과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저도 그런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 구금해 놓았으니 헤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세상과 격리되었습니다. 어쩌면
헤센에게도 다행스런 일일지 모르죠. 벨담에서 그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테니까요.”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건, 그를 곧 죽이겠다는 건가요?”


“사형 선고가 내려지면 그렇겠죠.”

적어도 아직 자일스를 죽일지 살려 둘지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자일스는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높은 확률로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앨버트는 내게 말했었다. 자일스는 패망한 국가에 대한 분노를 우회해 줄 아주 좋은 제물이자


희생양이라고.

하지만…… 내가 뭘 어찌할 수 있을까? 난 자일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러 갈 수


있다고 해도 반가워하는 기색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자일스는 내게 안온한 삶을 선물해 줬는데 나는 전혀 고마워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그를 제물로 바쳐서 평화를 얻었다. 그건 옳지 못한 일이었다. 자일스는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고, 비록 내게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언제나 내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의 피로 얼룩진 자유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내 몸은 자유를 찾을지언정 내 영혼은 영원히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사슬에 묶인 채 고통스런 비명을 지를


테니까.

내가 원한 건 내 손으로 직접 쟁취해 낸 승리와도 같은 자유였지, 타인을 희생하는 게 아니었다. 절대로.

<60 화>

“재판은…… 언제 열리는데요?”

“헤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가 보군요.”

“관심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내게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라고요.”

내가 항의하자 아렌트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헤센이 지금 당장 벨담으로 돌아오리라는 건 저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준비가 되면 모든 절차를 밟게 될 겁니다. 레이디께서는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수프는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아침 식사


따위는 모두의 관심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라시는 대로, 저희는 당신의 신변을 보장해 드릴 겁니다. 단순히 헤센을 데려오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아닙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자일스 헤센의 연인으로서 말입니다. 벨담
역사상 최악의 반역자와 엮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스 헤센이 사랑한 여자라는 타이틀은 내게 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아마 언론에서 당신을 포섭하기 위해 몰려들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벨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과 사랑을 나눈 여자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다면 그 신문사는 얼마나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겠습니까? 찍어 낼 새도 없이 불티나게 팔릴 겁니다. 저희는 그런 불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나를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건가요?”

“사저에 가 계십시오. 당분간은 나오지 말고 그 안에서만 지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직 당신의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저희 쪽에서도 조치를 취할 겁니다.”

아렌트가 내 표정을 빠르게 훑더니 덧붙였다.

“비스마르 백작가의 저택 말입니다.”

“저택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인가요?”

“선대 백작께서 잠시 입스윈으로 거처를 옮기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벨담에 본적을 둔 귀족입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하신 재산 일부가 벨담에 있습니다. 이제는 살해당하셨으니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몫이겠지요.
퇴원하실 때가 되면 사용인이 당신을 저택으로 안내하러 찾아올 겁니다.”

백작이 소유했던 모든 재산이 내 것이 되었다는 건 쉬이 와닿지 않는 사실이었다. 실질적으로 나는 가문의


일원조차 아니었는데.

나는 백작의 딸이 아니라 그에게 이용당하는 인형에 더 가까웠다.

“떠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몇 달 전, 저희가 헤센을 벨담으로 호송하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는 건 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작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그 작전의 주요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입스윈 측에서 그들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던 건 내 도움이 컸다고 들었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였기
때문에 기차를 빨리 추적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는 아렌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으신 거죠?”

“달갑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저희 쪽에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나도 이해해요. 당연히 묻고 싶겠죠.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 당신들을 배신했던 거니까요,


그렇죠?”

아렌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답을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자일스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내 편이 되지 마, 안나.

나는 온 국가의 증오를 받는 몸이야.

거기에 휘말려 들어서는 안 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일스를 버릴 수 없었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안온한 일상, 자유 그리고
막대한 재산…… 모든 것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그에 대한 상실감과 두려움이 더욱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일스가 죽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스스로 지옥 속에 굴러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행복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절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게 될 것이다.

난 한때 내 귀에 사랑을 속삭이고, 나 때문에 근근이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고 말한 남자를 금방 잊을 수


있을 만큼 되어먹지 못한 여자가 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정했다.

나는 자일스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았듯이.

“나는 자일스가 벨담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벨담으로 가게 되면 죽을 게 뻔하니까요.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를 사랑했으니까요. 아니, 지금도 그래요.”

“자일스 헤센을 사랑한다고요.”

자일스는 내게 제 편을 들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온 국가를 적으로 돌렸으니 나


하나만이라도 그의 편이 되어야 했다. 이게 현명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자일스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옳든 옳지 않든, 나는 내 진심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일스가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도저히 거짓을 꾸며 낼 수가 없었다.

“그럼 왜 그런 겁니까?”

“뭘요?”

“당신은 자일스 헤센을 벨담까지 데려온 장본인이 아닙니까. 그를 사랑한다면,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죠?”

“살아야 했으니까요. 입스윈이 우리를 죽이려 들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곳에 남으면


우리 둘 다 죽을 게 뻔하니까. 사실 나는 벨담으로 오고 싶지 않았어요. 이곳에 스스로 잡혀 들어온 건
오로지 자일스의 선택이었어요. 그는 날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예요.”

아렌트는 내 이야기가 참 흥미롭다는 듯이 집중하고 있었다. 그도 벨담 사람인 이상, 내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자일스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말해야만 했다.

“그게 진실이에요.”

그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인간을 넘어서서, 사랑받을 가치가 있었던 존재였음을.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내 손으로 변질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일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라면, 나는 마땅히 그 일을 할 것이다.

자일스 헤센은 새하얀 방에서 눈을 떴다. 처음에는 현실 감각을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일스는 국경 앞에서 총을 맞은 사실을 기억했다.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왜, 나는 이곳에서 다시 깨어난 거지?

그는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럴수록 살아 있다는 감각은 더욱 생생해졌다. 총을 맞은 부위가


아릿하게 아파 오는 것 또한 그랬다. 누군가 치료를 해 두었는지 피를 흘린 흔적은 말끔히 없어지고 난
후였다.

무거운 놋쇠로 만든 수갑이 그의 손목을 결박한 채로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수갑은 침대 헤드에
쇠사슬로 이어져 있어서 그는 침대 밖을 벗어날 수조차 없었다.

자일스는 일어나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다 곧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많은 죄를 저지른 주제에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그의 오만이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에 자일스는 너무나도 많은 죄를 등에
업고 있었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일스는 상대방이 입은 제복만 보고도 그가 벨담 군인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다만 침대 헤드에 고정되어 있던 쇠사슬을


풀어 끌어당겼을 뿐이었다.

“나와.”

자일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따랐다. 군인이 끌어당기는 대로 걸으면서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감옥이라기에는 너무 호사스러운 공간이었다. 다른 죄수들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감옥이
아니라 저택에 더욱 가까워 보이는 곳이었다.

다만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이 저택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군인은 자일스를 또 다른 방으로 이끌었다. 창문이 모조리 막힌 탓에 환한 전등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자일스의 앞에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식탁 중앙에 또 다른 군인 하나가 앉아서 자일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 사병이 아니라 고위


장교였다. 장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일스를 데려왔던 군인은 사슬을 놓고 물러났다. 그는 이제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자일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앉아.”
장교가 명령했다. 자일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그는 감옥도
아닌 곳에 와있었고, 군인들은 그를 고문하는 대신 좋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 앞에 그를 대령시켰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고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가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착각을 머릿속에 심어


놓고서,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날 때쯤 무참히 짓밟는 식의 고문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교가 말을 걸어왔다.

“배고프지 않나? 미안하지만 쇠사슬은 풀어 줄 수 없어. 그래도 포크질은 할 수 있겠지, 안 그래?”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음식에 대한 갈망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절망감은 오직 공허함만을 남겨 두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저는 괜찮습니다.”

“이건 권유가 아니야. 명령이지.”

“저는 이제 벨담 군인조차 아닙니다.”

“아무도 자네에게 퇴역하라는 허가를 내린 적 없는데.”

“제가 저지른 일들은…….”

“한때 벨담에 꼿꼿이 뿌리내렸던 귀족들을 깡그리 쓸어버렸지. 뭐,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벨담 사람이라면 세 살배기 아기도 자네의 화려한 전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니까.”

장교는 핏빛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자일스는 여전히 하얀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군.”

“…….”

“계속 그렇게 나를 모른 척할 텐가, 대위?”

<61 화>

그제야 자일스는 고개를 들어 장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낯선 얼굴 위에 익숙한 기시감이 감돌더니 머릿속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혔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자일스가 그녀를 알아보자 장교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관생도 시절의 모습이 아주 잠시나마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갔다.

“루이제.”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나는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싶었다니까. 오랜만이다,
자일스 헤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

사관 학교를 다닐 시절에 함께 공부하고 훈련했던 동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그녀는
자일스가 아직 깨끗했을 시절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자일스는 루이제를 알아보자마자 더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는 루이제의 계급장을 살폈다. 전쟁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그녀는 이제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이제 좀 대화를 해 볼 마음이 들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당분간 너를 맡게 되었어. 누군가는 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폭탄을 맡아 처리해야 할 것 아니겠어?”

“왜 하필 너였던 거야?”

“그 반응은 조금 섭섭해지는군.”

말과는 달리 루이제는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네가 음식을 먹는다면 궁금한 걸 전부 대답해 주지.”

“굳이 그래야 하나?”

“자일스. 내가 한때 너와 우애 깊은 사관 학교 동기였던 건 사실이지만, 너는 여전히 내게 복종해야 해.


너는 내 부하이자 죄수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자일스가 선뜻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루이제는 한숨을 쉬며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새까맣게


빛나는 총이었다.

그녀가 권총으로 자일스를 겨누며 말했다.

“명령에 따라, 대위.”

자일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식기를 들었다. 그러자 루이제는 흡족한 얼굴이 되어
총을 다시 거두어 갔다.

그녀는 자일스의 접시 위에 고깃덩어리를 얹어 주기까지 했다. 식욕이 돌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뭐라도


먹었다간 금방 게워 내고 말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지만 자일스는 어쩔 수 없이 나이프로 고기를 썰었다.

그가 명령대로 고기 조각을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루이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은 너를 위한 안전 가옥이야. 하지만 감옥과 다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겉모습만 화려할 뿐 너를


감금하기 위한 장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왜 굳이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지?”

“자일스. 넌 악명 높은 배신자야. 감옥 안에서 함께 지내게 될 죄수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고. 네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악마가 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나 보군. 너를 이대로 평범한 감옥에 넣었다면 넌 아마
안전하지 못했을 거야.”
“벨담에서 내 안위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일이 생겨서 뒤처리를 해야 하는 것보단 낫잖아.”

루이제는 자일스의 잔에 제 것과 똑같은 와인을 따랐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자일스는 괴상한 명령에
따르기 위해 잔을 들었다.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를 살려 두는 데에 의미가 있나?”

반항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묻고 싶었다. 자일스는 스스로가 왜 살아났는지, 왜 식사를 강요받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왜 죽게 두지 않았지? 나를 치료하고, 내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거야?”

“마치 우리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말해 줘, 루이제.”

“물론 너는 언젠가 죽게 될 거야. 아직은 적절한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네가 할 일이고.”

“이해가 안 가. 나를 죽이려면 지금 죽여. 왜 시간을 끌어야만 하는 거지?”

“자일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야. 너는 죽는 순간까지도 국가에 충성하게 될 거라는 사실.”

루이제는 마치 축배를 올리듯이 와인 잔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네 죽음은 결코 불명예스럽지 않을 거야. 그 사실을 기뻐하라고. 때가 되면 우리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너는 그동안 남은 시간을 즐기도록 해. 이곳에서 조용히 살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책이 필요하면
넣어 줄 수도 있어.”

자일스는 여전히 루이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건 언젠가 처형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

“환자는 잘 먹어야 해. 사양 말고 들어. 네가 접시를 다 비우기 전까지는 내보내 주지 않을 거야.”

한편 루이제는 자일스가 제 몫의 음식을 묵묵히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관 학교 시절에 가졌던


감정들은 이미 잊힌 지 오래다.

세월이 오래 지났을뿐더러, 커다란 전쟁을 겪으면서 가슴속에 남아 있던 과거의 흔적들은 물에 씻겨


나가듯 깨끗이 사라졌다.

자일스 헤센은 그녀의 임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일 뿐이다.

“왜 안나에 대해서는 안 물어봐?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 말이야.”

안나의 이름이 나오자 자일스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무기력하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 잠시나마 빛이


돌아왔다. 자일스는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안나를 사랑했잖아. 당연히 궁금할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안전하다는 사실만은 말해 주지. 그런데 말이야, 자일스.
내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받아서 그러는데…… 사실인지 네 입으로 확인시켜 줄 수 있나?”

루이제는 팔꿈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서 자일스 쪽으로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벨담으로 기어들어 온 게 네 의지였다는데, 그게 사실이야?”

“……뭐라고?”

“안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하고 벨담 국경으로 향했다는 게 사실이냔 말이야.”

그녀가 왜 진실을 알고 있지? 뭔가가 잘못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안나는 자일스를 피해 국경으로 도망쳐
온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걸 누구에게서 전해 들었지?”

“안나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던데.”

자일스의 표정을 살피던 루이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하지 마, 절대 심문 절차 같은 건 안 밟았어. 안나는 아주 편안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어. 다 자의로


말한 거라고.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봐, 자일스. 정말 그게 사실이야?”

여기서 거짓말을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루이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온 게 분명했다. 안나가


직접 진실을 말했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자일스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이야.”

“그럼 처음부터 알베르트 말이 맞았던 거네. 너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이 있다면 그건 안나뿐이었어.”

“제발 그녀를 건드리지 마. 그녀에겐 아무 잘못도 없어.”

“알아, 알아. 진정해. 안나는 괜찮을 거야.”

냅킨으로 입을 닦은 그녀는 옆자리 의자 위에 놓여 있던 노트 비슷한 책을 자일스에게 건넸다.

“남은 시간 동안 이거나 읽어 봐. 너도 바깥세상에서 너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댔는지 알 권리는


있으니까.”

자일스는 책을 펼쳤다. 그것은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이었다. 온통 그를 낱낱이 파헤치고


물어뜯는 기사뿐이었다. 내용을 빠르게 훑던 자일스는 어느 지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신문 기사에 안나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
아렌트가 한 차례 예고했었던 대로, 사람들은 내가 바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병실에 갇혀서 생활해야만 했다.

병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제한적이었다. 간호사가 내게 카드놀이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애초에 간호사가 병실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지도 않았다.

혼자서 카드를 뒤적거리던 나는 제풀에 지쳐 카드를 든 손을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내게 카드놀이를


가르쳐 준 간호사는 실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나는 아직도 규칙을
헷갈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자일스라면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을 텐데. 그가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 옆자리에


앉아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각 카드의 역할을 설명하는 자일스를 상상했다.

나는 지금도 자일스의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는데 그는 내 곁에 없었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게 현실이었다.

밤사이 잠도 자지 않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분명 자일스는


경비가 삼엄한 감옥에 갇혀 있을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를 구한단 말인가?

온 나라가 그의 처형을 원하고 있었다. 벨담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앞에 둔 나는 힘없고 무능한 존재로
느껴졌다.

이제 아무도 나를 죽이려 들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안전한 삶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자일스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누군가의 눈에는 정말 악마로 비칠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니었다…….

자일스는 내 목숨을 살렸다. 머리맡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작 자일스는 내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내가 혼자서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간호사가 식사가 든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이제 그녀의


이름이 로테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테는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내 옆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나는 메뉴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 어서 드세요. 잘 먹어야 빨리 낫죠.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가 그런 저택을


갖고 있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려고 회복에 힘썼을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하긴, 아가씨께서는 아직 그 저택이 얼마나 멋지고 커다란지 모르시겠군요. 저라고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상상만 해 볼 수 있을 뿐이죠.”

내가 대답하지 않자 로테는 걱정스런 낯빛으로 나를 살폈다.

“왜 그러세요? 입맛이 없으세요? 아니면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냥…… 식사를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요.”

나는 결국 그녀에게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진정할라치면 자일스가 총살을 당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그런 생각들은 나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로테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 안색을 관찰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62 화>

“그 남자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니죠?”

“무슨 남자요?”

“자일스 헤센 말이에요. 제가 주제넘은 소릴 하는 거라면 용서해 주세요. 만일 아가씨께서 그 남자를


사랑하셨다면…… 아직까지 그 사랑이 유효한가 싶어서요. 그래서 이렇게 식사도 잘 안 드시는 건가 해서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벨담 간호사에게 자일스 얘기를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차피 그녀도, 나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테는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했는지 자세를 고쳐 앉고는 더욱 힘이 실린 목소리로 열변하기


시작했다.

“보세요, 아가씨. 아가씨는 지금껏 그 남자에게 속고 계셨던 거예요. 자일스 헤센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인지 잘 모르셔서 그런 거예요. 아마 아가씨의 마음을 이용하려고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꾸며 냈겠죠. 이젠 아가씨도 헤센의 진짜 본모습이 뭔지 아실 권리가 있으세요.”

“로테, 지금은 그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도 자일스 헤센 때문에 우울해하고 계시잖아요. 그 남자 걱정하시는 것 아니에요? 저는 절대


그럴 필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우리 군인들이 헤센을 아가씨로부터 떼어 놓지 않았다면 그는
아가씨마저도 죽이고 말았을 거예요.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요? 자신의 유일한 누이마저도 제 손으로
살해한 사람인데.”

“……뭐라고요?”

자일스에게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말해 준 사실이니까. 셀레스트 헤센,


그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자일스와 생이별을 하게 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셀레스트를 자일스가 직접 죽였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드디어 내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한 로테는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르고 계셨어요? 자일스 헤센은 그의 누이를 죽였어요. 그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함께 자란 가족을…….”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서 들은 거예요?”


“특별히 전해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벨담 사람들이라면 다 알 만한 사실이에요. 며칠마다 신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리는 걸요.”

“신문에서 자일스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댄다고요?”

“네, 그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는 우리 국가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니까요. 모두가 알 권리를 갖고


있어요. 벨담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잘못된 게 아니겠어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벨담이 자일스를 패전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분노와 슬픔의 분출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앨버트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벨담의 현실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할라치면 신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자일스의 이야기를


해 댔을 것이다.

알 권리는 나에게도 있었다. 나는 벨담에서 정확히 어떤 이야기들로 자일스를 물고 뜯기 바빴는지 알고


싶었다.

“그 신문,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로테는 내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드디어 내 마음을 돌릴 기회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몇 년
치는 되어 보이는 양의 신문 뭉치를 구해다 주었다.

“읽어 보시면 아가씨도 그 남자가 얼마나 악마 같은 사람인지 아실 거예요. 벨담군이 아가씨를 구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신문은 나중에 사저로 가져가셔도 좋아요. 어차피 날짜가 지난
거라 폐기할 예정이었거든요.”

로테는 간호사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금방 내 곁을 떠났다. 여전히 식사는 내 곁에서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지만 나는 빵과 수프 같은 것에 관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는 신문을 펼쳐 읽었다. 자일스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신문들을 살펴보아도 그랬다. 자일스는 이목을
끌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나는 신문에 실린 자일스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이목구비는 자일스의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낯설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 속의 그는 실제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교활해보였다.

그의 사진 옆에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있었다.

‘헤센의 끔찍한 가족 살해’. ‘신은 정녕 그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기사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했다. 벨담 정보국은 일주일 전, 자일스 헤센이 입스윈에 대한


충성심을 부각하기 위해 본인의 누이인 셀레스트 헤센을 살해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나는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에 의하면 자일스는 마인헤바흐라는 곳에서 벨담으로 도피하려는


사람들을 뒤쫓았다.

그중에는 자일스의 누이인 셀레스트가 있었고, 자일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살해해 입스윈에
바쳤다.

기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입스윈의 충성스러운 혁명군임을 보여 주기 위해 셀레스트를 살해한 그가


셀레스트의 발목에 끈을 매달아 질질 끌고 다녔다거나, 살해 직후 그녀에 대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는
등의 끔찍한 부가 내용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자일스의 악행이 미처 채우지 못한 공간은 셀레스트 헤센이라는 인물에 대한 토막글이 마저 채웠다.
그녀는 자일스와 반대로 아름답고 선한 인물이었으며 자일스를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노력하다가 그의
분노를 사 죽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사실일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셀레스트의 죽음을 모욕했다는 내용은 더더욱 진실과는 멀어


보였다. 아직도 누이와 함께했던 추억을 나열하며 설핏 미소 짓던 자일스의 모습이 선연한데.

하지만 그가 셀레스트를 죽였다는 건 사실일까?

기사가 나온 일자를 살피자면, 내가 아직 저택에서 근근이 살아남던 겨울 초입의 일이 분명했다.

그때 자일스는…… 유독 초췌한 얼굴을 하고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가 내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것도


그날의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셀레스트를 죽이고 나서, 온전치 못한 상태로 나를 찾아온 탓에 그랬던
걸까.

그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명백한 악의를 담아 쓰인 대목만을 짚어 낼 수 있을 뿐이었다.

로테는 내가 이 많은 신문들을 다 읽기를 바랐을까.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들은


자일스를 너무나도 증오하고 미워했다. 그 증오가 내 기억 속 자일스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웠다.

적어도 이건 내가 아는 자일스가 아니었다. 벨담과 나는 그를 보는 시선 자체가 달랐다. 나는 채 절반도


다 읽지 못하고 신문을 덮어 버리려 했다.

그때, 나는 신문에 실려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인물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나였다. 내 이름이


거기 있었다. 순식간에 내 시선이 다시 신문 위로 고정되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그녀는 누구인가?

<자일스 헤센의 뒤틀린 사랑을 받는 불행한 여인>

신문에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실려 있었다. 내가 태어날 적에 받았던 이름부터 내가 살던 솔즈부르의


사유지와 저택, 비스마르 백작, 그리고 한때 내 약혼자였던 요한 마이어까지…….

내가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고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고 싶어 했으나, 자일스 헤센의 추적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가명을 썼다는 사실까지도. 전부 여기에 적혀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나는 입스윈 혁명의 불길에서 간신히 살아났으나 자일스에게 발견되었고,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몇 번을 노력했으나 결국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행하고 불쌍한 여인이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벨담 정보국뿐만 아니라 온 벨담 사람들이 내 신상부터


사생활까지 다 꿰고 있었다. 손이 떨려 왔다. 이런 게 내가 찾던 자유인가? 나는 분명 안전해졌지만,
이건 내가 배워 온 자유와는 확연히 달랐다.

벨담으로 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이미 이곳에서도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자일스는 죽게 될 것이고, 나는 살아남는 대신 평생 동안 언론의 관심을 피해 다니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자일스 헤센의 연인이었으니까.

그런 삶을 위해 자일스의 목숨을 바쳤단 말인가?

나는 병원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신 이성을 되찾기 위해 숨을 골랐다.


적어도 나는 신문에 박제된 채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나를 위한 삶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다시 생각해야 했다.

지금부터 내가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해서.

자일스는 수갑에 구속된 채로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범한
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위한 철창 안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지금도 군인 한 명이 문가에 서서
곁눈으로 그를 감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임무는 자일스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것일 게 분명했다. 탈출 시도를 하거나, 혹은…


… 자살을 감행하려 하거나. 하지만 자일스는 쓸데없는 반항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안나의 이야기를 실은 신문이었다.

자일스만큼이나 안나는 좋은 기삿거리였다.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와 로맨스를 나눈 여인의 이야기…….


물론 온 벨담의 증오를 받는 대상은 자일스였지만, 그는 신문을 읽으면서 어쩐지 대중의 관심이 더욱 쏠려
있는 쪽은 안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시간 전, 루이제는 신문 위에서 안나의 이름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가는 그를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마치 그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다시 발견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루이제를 대하는 자일스의 눈빛은 더 이상 공허감에 빠져 있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감이 한데


뒤섞여 그 안의 잿더미를 다시금 불태우고 있었다.

<63 화>

“이건 뭐지?”

“뭐긴 뭐야, 신문 기사지.”


“안나는 벨담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어. 그녀는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야.”

“네가 그리도 열렬하게 쫓아다니지만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자일스
헤센의 사랑을 받는 여자를 세상이 가만뒀을 것 같아?”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은 나로 충분한 것 아니었나?”

“안나를 사랑하기는 하는구나. 너를 깎아내리는 기사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면서, 안나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화를 내다니 말이야.”

그녀는 자일스가 실험 대상이라도 되는 듯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흥미로워했다. 이미 사관 학교 시절에


사귀었던 동기로서의 자일스는 머릿속에서 퇴색된 지 오래였다. 오직 국가에서 언론을 통해 주입한
악마로서의 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루이제는 한 여자의 안위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일스가 정말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언론에서


물어뜯어 대던 것과는 달리, 정말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벨담은 안나를 미워하지 않아. 다만 그녀에게 지대한 궁금증을 갖게 된
것뿐이지.”

“신문에서 안나의 삶을 하나하나 해부하고 있어. 나더러 이걸 괜찮다고 생각하라는 건가?”

자일스가 화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키자 구석에 서 있던 군인이 잽싸게 다가와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자일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명 안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라면 원하던 자유를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오판이었다.

안나는 이미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멋대로 평가하거나 동정할 것이다. 혹은,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이제는 감흥 없는 눈길로 자일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

그는 마지못해 루이제의 말에 따랐다. 안나를 또 다른 종류의 지옥에 데려왔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자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안나가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 둬.”

“나에게 부탁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나는 일개 장교일 뿐이야. 아니, 총리 각하가 직접 나서도 이미


벌어진 일을 막을 수는 없을걸.”

“안나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도 다 벨담이 주도한 것 아닌가? 이 모든 사실들을 고작 언론사의 힘으로


알아냈을 리 없잖아.”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너는 반역자가 아니라고. 오히려 그 많은 귀족들을 죽여 놓고도 여전히 제일


충성스러운 군인이라고 말이야. 벨담은 네가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우린 세계 대전에서 졌어. 온 국가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 사람들의 삶은 망가졌어. 본래대로라면 우리 정부가 온 국민의 분노를 다 받아
줘야 했겠지. 네가 입스윈에 투항해 귀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야. 아주 좋은 화젯거리가
생긴 거야, 자일스. 사람들의 분노를 우회할 이야깃거리 말이야.”

“괜찮아.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 나는 내 죗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 여기에 안나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에겐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다니까. 너는 죄인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솔직히


말해서, 우린 네가 귀족들을 살해한 사실에 대해선 전혀 관심 없어. 다만 자극적인 이야기를 마련해야만
했을 뿐이야. 우리가 안나를 일부러 끌어들인 것 같아, 자일스? 너는 하나의 커다란 화제야. 네가 안나를
사랑한 이상 그녀도 휘말리는 걸 피할 수 없어진 것뿐이야.”

결국 안나를 이런 운명 속에 처박은 건 자일스였다. 안나를 놓아주지 못한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실의에 빠진 자일스가 물었다.

“내가 죽으면…… 국가에서 나를 처형한다면, 안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루이제가 곧 위로하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곤 대답했다.

“아니.”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영영 그녀를 따라다닐 거야.

비록 안나는 목숨을 구했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안나를 그렇게 만든 건 자일스였다.

자일스는 안나를 돕고 싶었다. 그녀가 소중했으니까. 그녀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가 안나와의 사이를
더욱 좁힐수록, 오히려 온갖 악재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었다.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자일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루이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뭔가를 하려 하면, 그것이 또 다른 악재가 되어 나타나지는 않을까.

죽는 건 괜찮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는 비로소 안나에게 그녀가 원하던


삶을 되찾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죽음조차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마지막까지도 모든 것을 망쳤다.

자일스는 신문에 실린 안나의 사진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얼굴이 인쇄된 부분을 엄지로 쓸어
보았다. 허나 뻣뻣한 종이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
“퇴원시켜 주세요.”

내가 의사를 향해 요구했다. 그는 내 요구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는지 몇 초간 안경을 고쳐 쓰길 반복했다.

“퇴원 말입니까?”

“네. 퇴원시켜 주세요.”

의사는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와 시선을 교환했다.

“병원에 입원하신 지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것이라도 있었나요?”

“난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 물론 치료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난 충분히 내 저택에서도 회복할 수


있어요.”

“레이디께서는 전문적인 시설에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사저에서 왕진 의사를 불러 치료 받으면 될 것 아니에요?”

“그건…….”

의사는 확신을 내릴 수 없는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을 확고하게 굳혔기에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병원으로 올게요. 내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법이


아니겠어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레이디께서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결국 의사는 승복의 뜻을 표했다. 애초에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나는 간호사가


항상 옆에 있어야 할 만큼 아프지 않았다. 난 그저 요양하면서 회복해야 할 단계에 있었고, 그게 꼭
병원에서만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말하며 일말의 한숨을 쉬었다.

“활동적인 일은 최대한 자제하시고 쉬는 데에 집중하십시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때까지는 바깥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권고드립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붕대와 거즈를 갈아 달라고 하십시오.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네, 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옷들은 깔끔히 세탁된 채로


옷장 안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모셔다드릴 사용인은 부르셨습니까?”

“이미 오고 있을 거예요.”

내가 칸막이 뒤로 들어가자 의사는 더 묻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제 병실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의사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은 적었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을 떠나고 싶었던 나는 의사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아렌트에게 퇴원하겠다고 선언한 참이었다.
어쩐지 나를 찜찜하게 만드는 특유의 차가운 인상 때문에 그를 자주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연락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 내 것이 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로테가 준 신문들을 모두 챙겼다.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내용이 가득했지만, 분명 내가 알아야


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자일스의 비인간적인 면에 대해 다루는 내용뿐만 아니라, 나를 조각내어 지면 위에 전시한 기사들까지


전부. 벨담에서 내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곧 말끔한 옷을 입은 남자가 병실로 찾아왔다. 아마 아버지가 거느리던 사용인들 중 하나가 분명했다.


그는 새 고용인을 대하면서도 마치 나를 대하는 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목례했다.

“레이디 엘로이즈. 모셔다드릴 차가 병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는 앞장서서 나를 병원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병원을 나가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간호사나 환자들은 제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퇴원 수속 절차를 밟은 평범한
환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병원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병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나를 보자마자 앞으로 튀어나와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강렬한
플래시 불빛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앞을 가렸다.

“비스마르 양! 벨담으로 다시 돌아오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자일스 헤센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직도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십니까?”

기자들이 나를 향해 외쳐 댔지만 무어라 대답할 정신조차 없었다. 나를 데리러 왔던 사용인은 내게


카메라를 들이대려는 기자들을 거칠게 밀어 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저리 꺼져! 아가씨께 손이라도 대면 법적으로 해결할 줄 알아라!”

나는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기자들은 내가 차에 올라탄 이후에도 계속해서


차창에 대고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어 댔다.

<64 화>

운전수는 이 지긋지긋한 기자들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급하지만 능숙하게 엑셀을 밟았다.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던 기자들과 병원의 모습이 백미러 너머로 멀어져 갔다.

우리는 벨담의 수도, 홀슈타인의 시내를 가로질렀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모국의 풍경을 차창 너머로


구경했다.
자일스가 말한 대로 입스윈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커다란 성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과
광장이 분포해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 커다란 전쟁을 겪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를 걸었다. 전쟁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는 의아해졌다.

“홀슈타인은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나 봐요.”

“수도는 마지막 보루여야 했으니까요. 벨담에서는 홀슈타인을 지키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일부 도시들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죠.”

“살아남지 못한 도시들이 많은가요?”

“홀슈타인을 비롯한 인접 지역에 모여든 피난민들이 아직 돌아가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벨담의 상황은 내 생각보다 더 처참한 게 분명했다. 그냥 전쟁도 아니고 세계


대전이라고 명명한 대전쟁에서 패배했으니 놀랄 만한 일도 아니기는 했다.

괜히 자일스 헤센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급급한 게 아니었다. 패전국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상당했다. 만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국가를 향해 손가락을 돌리기
시작한다면 몰락하는 건 벨담 귀족만이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파괴된 건물들과 사람들의 삶을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동안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은
반드시 필요했을 거다.

지금쯤 자일스는 뭘 하고 있을까? 그도 수도에 있을까? 혹시 지금쯤, 철창 안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사용인들이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뭔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렌트뿐인데, 내가


물어본다고 그가 흔쾌히 대답해 줄지도 미지수였다.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내가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요제프입니다.”

“요제프, 내 아버지가 벨담에 자주 들르는 편이었나요?”

“전쟁이 나기 전에는 몇 번씩 방문하셨지만, 대부분 사업차 방문이셨습니다. 그분은 벨담에 있는


본가보다 입스윈에 머무르는 것을 더욱 선호하셨습니다.”

“그는 벨담의 귀족인데, 왜 남의 땅에 눌러앉은 거죠?”

“제가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많은 회사와 공장들이 입스윈으로 옮겨 가던 시절이라 그곳에


머무르시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벨담에 좀 더 자주 들렀다면 좋을 뻔했어요. 그럼 나도 며칠 정도는 쉴 수 있었을 텐데.”

요제프는 내 말을 알아먹지 못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친절히 덧붙여 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죽어라 때렸거든요. 나에게도 쉴 시간 정도는 필요했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

내 말을 들은 운전수와 요제프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백작이 거느렸던 사용인들 앞에서 그의 치부를 까발리는 일이 퍽 즐거웠던
내가 말했다.

“왜요, 이런 건 신문에 실려 있지 않았나요?”

“그게…… 저희는 줄곧 벨담에서 지내 왔기 때문에, 입스윈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나에 대해선 다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간호사가 내게 날짜 지난 신문을 건네줘서 읽어 봤는데,


대놓고 내 인생사를 떠벌리고 다니던데요. 설마 안 읽은 거예요?”

요제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아마 내 말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불쌍한 사용인에게 더 이상 못되게 굴고 싶지 않아서 이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가 백작이랑


무슨 상관인가. 그는 그저 피고용인일 뿐이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희는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관리하던 저택의 주인이셨던 분들께서 대부분 돌아가셨으니까요. 만약 마땅한
상속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택은 경매에 붙여졌을 겁니다. 저희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겠지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급여는 누가 주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저희가 소송을 걸었던 바가 있습니다. 지금은 백작님이 남겨 두신 재산에서


차감되고 있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내게 상속된 재산이 얼마일지 따위는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아마 생각보다 많지도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 백작가는 가세가 기울어 가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래서 마이어 공작가와의 혼약을 어떻게든 이어
가려 안달복달했던 거다. 또한 백작은 가문을 되살릴 사업거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했다.

그래도 그 미친 작자가 저승까지 가져가지 못한 재산은 이제 내 것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흘렸다. 보라,


결국 나는 승리했다.

나를 말려 죽이려 했던 작자들은 시체가 되어 버린 반면 나는 살아남아서 그들의 전유물을 모두 빼앗았다.


그들이 내게서 빼앗아 간 게 얼만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승용차는 어느덧 시내를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비록 백작이 도시 내의 타운하우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내 상황을 고려해 외곽 지역에 숨겨진 다른 저택으로 안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울창한 숲을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나는 몸을 기울여 앞을 보았다. 솔즈부르의 사유지에 지어진 저택과 비슷한 고풍스러운 저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용차가 진입을 시도하자 누군가가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저택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주인이 방문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누군가 이곳에 눌러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저택이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사치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황갈색 건물은 백작 가문이 소유했던 재산이라 할 만했다.
나는 다시 입스윈에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이곳에 오니까 백작의 취향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평범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을 하고서 귀족 아가씨 대접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몇몇 사용인들이 바깥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요제프는 나를 저택 안쪽으로 에스코트했다. 두 계단으로 이어지는 메인 홀과 크리스털 샹들리에까지 모든


것이 솔즈부르의 저택과 유사했다. 비록 백작은 죽어 없어졌다지만…… 내 기분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피곤하실 테니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괜찮아요. 목욕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하녀들이 도와드릴 텐데요.”

나 또한 엘로이즈로 살던 시절 하녀들로부터 목욕 시중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냥 혈족으로써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인일 뿐이지.

그 지독한 비스마르 일가를 조금이라도 흉내 내다가는 구역질이 먼저 올라올 게 틀림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요제프는 내게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써야 할 욕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만 알려 주고는


떠났다.

나는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요제프는 백작 부인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이후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용인들이 꾸준히 관리한 덕인지 바로 어제도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옷을 벗기 전에 욕조에 따뜻한 물부터 받았다. 손을 넣어 가며 온도를 재고 있는데, 누군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뭐죠?”

“아가씨, 정말 시중이 필요 없으세요?”

듣자 하니 하녀가 올라온 것 같았다. 나는 곤란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었다. 키가 작달막한 갈색


머리 하녀가 옷가지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요제프한테 말했어요.”

“아니,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요. 혹시라도 요제프가 제게 잘못 전달한 거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백작 부인이나 엘리자베트 아가씨는 절대 시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귀족이니까 그렇겠죠.”

하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 모든 걸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이 기분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우선 하녀를 욕실로 들여보냈다.

이름 모를 하녀는 ‘역시 내가 옳을 줄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목욕 시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옷을 벗기려 들어서 나는 정중하게 그녀를 물렸다.
“옷은 제가 벗을게요.”

“하지만…….”

“저는 지금껏 당신이 경험해 봤던 귀족 무리랑은 좀 달라요. 성인이라면 옷 정도는 혼자 벗을 줄


알아야죠.”

그녀는 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보였다. 고용주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난생처음


목격한다는 식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델레예요.”

“아델레, 그 사람들 옷을 하나하나 입혀 주면서 그런 생각 안 했나요?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과거


흉내를 내면서, 높으신 귀족 각하 행세를 하냔 말이에요. 시대가 변했잖아요. 이제 진짜 권력을 쥔 건
시민들인데. 옷을 입히고 벗겨 달라니, 현실 부정도 정도껏 해야지. 안 그래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시죠?”

“진심인데요. 내 생각에 백작 부인은 다시 요람에 들어가고 싶었나 봐요.”

아델레는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즐겁게 웃어서 내가 다 놀랄 지경이었다.

“세상에, 정말 한 가문에서 같이 자란 백작 영애님이 맞으세요?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 된 게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죠. 저는 하녀의 딸이기도 하거든요.”

“뭐라고요?”

나는 몸을 씻는 내내 아델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부터 나이를 먹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으며 도망친 엘리자베트의 대용품으로 길러졌다는 사실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겪었던 모든 일들을 말했다. 그러나 자일스가 등장하는 부분은 슬쩍 뺐다. 아델레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아델레는 욕조 옆에 앉은 채 내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엘리자베트 아가씨가 도망쳤다는 게?”

“마이어 공작이랑 결혼하기 싫었대요.”

“그럼 도대체 누구랑 결혼해요? 공작 정도나 되는 남자를 내팽개칠 정도면?”

“어느 남작가의 셋째 아들이랑…….”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들이켜며 입을 가렸다.

“말도 안 돼!”

“말 될걸요? 그 새끼가 쓰레기 같은 짓을 했으니까 마음속에서 내친 거겠죠. 저도 당했는걸요. 그 남자는


대놓고 제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려고 했어요.”

“여느 남자들은 다 그래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신분제가 무너진 거죠. 허영심만 가득 찼지 여느 사람들이랑 다를 게 뭐냔 말이에요. 아랫도리
휘두르고 싶어 하는 것도 전혀 다를 바가 없던데.”

아델레는 내 입에서 그런 저속한 표현이 쏟아져 나오자 놀라면서도 손뼉을 치면서 웃어 댔다.

“아가씨!”

“내 이름은 안나예요. 아가씨가 아니라.”

“저는 아가씨를 엘로이즈 아가씨라고 불러야 해요.”

“고용주는 제가 아니던가요? 그냥 안나라고 불러요. 상관없으니까. 전 귀족 흉내 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요.”

“정말 그래도 돼요?”

“저도 당신을 그냥 아델레라고 부르잖아요.”

“하지만…….”

아델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내려다봐야 할 하녀가 아니라 동등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나는 시중 들 하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빗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전부 다


혼자서 할 수 있었으니까.

“믿기지가 않아요.”

“뭐가요?”

“아가씨, 아니, 안나가 해 준 이야기들이 신문에서 읽은 거랑 너무나도 달라서요. 신문에서는 안나가


백작 가문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평범한 아가씨였다고 했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지어낸 거예요.”

“신문이 왜 거짓말을 지어내요?”

“글쎄요. 결국 돈이 되는 건 담백한 진실보다 자극적인 거짓말이니까 그렇겠죠.”

“그럼 앞으론 신문도 못 믿겠네요?”

“그냥 모든 걸 곧이곧대로 믿지만 말아요.”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일스와 나에 대한 기사들을 읽고, 그 안에 온전한 진실의 비중이 얼마


정도 되는지 가늠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진실은 너무나도 주관적인 것이라서,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사람들이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되었다.

명백한 진실이 있다 한들, 아무도 듣지 않으려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항상 목이 아프다. 외면하는 세상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만 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65 화>

“그럼 자일스 헤센은요? 그 사람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을까요?”

자일스. 그의 이름을 떠올리자 유쾌한 순간은 지나가고 다시 내 앞에 닥친 현실이 떠올랐다. 나는


사형대에 오른 그를 상상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뭐가 알고 싶은데요?”

“그냥, 세간에서 그 남자에 대해 떠드는 말들이 많잖아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극악무도한 짓들은 다


했다고 하던데. 안나 얘기를 들으니까 그것도 전부 다 옳은 얘기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그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진실이겠지요! 그는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스는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 단지


나까지 그가 죽는 모습을 편안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뿐이었다.

“아가씨는, 아니, 안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세요?”

누군가는 신중하게 답하라고 조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진실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 척 에둘러 말하기도 싫었다. 그가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만큼은
떳떳하고 결백했다.

“나는 그를 사랑해요. 물론 그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 적도 있었어요. 죽을 만큼 운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에 대한 마음이 변하질 않는 걸 보면 내가 그를 사랑하나 봐요.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걸 수도
있겠죠. 쉽게 변하기에는 너무 깊은 감정이니까.”

“하지만…… 자일스 헤센은 입스윈에 있던 귀족들을 전부 다 죽였어요. 어쩌면, 안나도 죽이려 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자일스는 나를 죽이지 않았어요.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살렸어요. 자기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아델레의 기색을 살펴보니 이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이것도 신문에 안 나온 이야기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다른 귀족들은 전부 죽이고 안나만 살려 주다니…… 혹시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였나요?”

“아니에요. 난 그날 자일스를 처음 봤어요.”

“그럼 대체 어떻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내가 살렸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넌 내게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이야. 너는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 잊게 해 주니까.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너는…… 내가 유일하게 내린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내 머릿속에서 그의 모습이 흐려질 즈음 말을 꺼냈다.

“제 생각엔 그에게도 붙잡아야 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변덕을 부린 거겠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걸 스스로도 느낀 거예요.”

나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살려 주기로 결정한 건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변덕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만 그는 남은 삶을 한순간 부렸던 변덕에 매달려 살게 되었다. 자일스도 나를 살렸던 그 순간엔


스스로가 그리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그는 스스로가 내렸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아델레는 내가 사용할 방을 보여 주었다. 내 감상을 말하자면, 정말이지 아름다운 방이었지만 그만큼


무식하게 큰 방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내가 비스마르 백작 가문의 가주로서 제일 좋은 방을 가지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차마 관리되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백작 부부가 사용하던 방은 아니죠?”

다행히 아델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들께서 쓰셨던 방은 따로 있어요.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이지요. 지금은 모든 가구를 치우고 걸어


잠가 놓았어요.”

그래, 설마하니 사용인들이 내게 죽어 나자빠진 사람들이 쓰던 방을 주지는 않았을 거다. 만약 이곳이


백작 부부가 쓰던 방이 맞다고 했다면 나는 당장 방을 옮겨 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입스윈에서 짐을 거의 들고 오지 않은 바람에 새 옷가지들이 커다란 옷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작이


내게 그랬듯이 불편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들이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 옷들은 입을 만해
보였다.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메인 디시로 송아지 요리와 구운 가리비를 내오라고 할까요?”

“아뇨.”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단칼의 거절이었다. 무어라 변명할 말을 찾고 있는데 아델레가 다시 물어 왔다.

“그럼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 요리를…….”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요. 계란이 든 샌드위치가 좋겠어요.”

“샌드위치요?”

“네.”
아델레는 내게 피크닉 계획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얌전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계란이 든 샌드위치 말이죠.”

그녀는 창문을 열어 공기가 통하게 한 뒤 주방으로 떠났다. 이제 커다란 방 안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나는 역시나 사치스러울 정도로 푹신한 침대 시트 위에 앉아서―구름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바깥에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편으론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 커다란 저택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모든 재산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게 말이다. 심지어 나는 가문의 일원조차 아니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백작의 딸이 맞았지만, 가족보다는 재산의 의미에 더 가까웠다. 제 몫을 다하기


위해 거두어진 말 잘 듣는 인형이 바로 나였다.

이제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가족들은 전부 죽었다. 백작가의 가주는 나다. 하지만 나는 가주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자일스가 말했던 대로, 나는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게 불만스럽다는 건 아니지만…….

화려하고 커다란 방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텅 빈 듯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였을까?

나는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방이 넓다는 사실이 더욱 그런 기분을 부추겼다. 마치


나무판자에 매달려 망망대해 위에 홀로 떠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곁에 누군가가 있었는데 이젠 아무도 없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 혼자 내던져졌고,


그만큼 외로웠다.

‘그들이 널 지켜 줄 거야.’ 자일스는 그렇게 믿고 나를 벨담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한 안전한


미래라는 게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나는 가방 안에서 신문 뭉치를 꺼내 들었다.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일스와 내가 등장하는 신문들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서 그것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살인자 헤센이 행복한 커플을 비극으로 갈라놓다 ― 엘로이즈 비스마르 백작 영애는 요한 마이어 공작과
약혼한 사이로,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자일스 헤센의 극악무도한 동족 학살이 둘의 사랑을
비참하게 짓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개소리. 애초에 나는 그의 약혼녀조차 아니었다. 약혼녀를 대체할 대용품에 불과했지. 알고도 모른 척한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기사에는 그 부분만 쏙 빠져 있었다. 게다가 혁명의 바람이 불기도 전에
혼담을 파투낸 건 오히려 나였다.

나에 대한 기사들은 대부분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복하게 자란 순진하고 선량했던 소녀’ — 난 유복하게 자라지도 않았고 순진해 빠졌던 건 맞지만
선량한 건 절대 아니었다.
‘백작 부인이 난산으로 어렵게 얻은 귀한 막내딸’ ― 내 어머니는 하녀였다. 아마도 백작이 어머니를
강간했을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 단 한 순간도 그들을 사랑한 적 없다.

‘몸이 아파서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남편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소녀’ ―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나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내 오른쪽 귀 밑에 반점이 있다는


사실부터 긴장할 때면 검지손가락을 까닥이는 습관이 있다는 것까지.

조금 더 저질스런 황색신문은 자일스가 내 어떤 신체적 특징을 보고 나를 쫓아다녔을지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즉, 대놓고 내 몸을 파헤쳤다는 거다.

자일스는 벨담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보호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나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결백한 피해자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내 손톱마저도 이용하고자 하는 악의가 느껴졌다.

아렌트가 왜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지독한 관심은 아직까지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이곳에서 자일스와
똑같은 신세였다.

사형 판결을 받을 일도 없고, 증오의 대상도 아니지만 씹고 뜯기 아주 좋은 추잉 검이 아닌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자일스에 대한 기사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이 나를 해부한 개구리처럼 신문 위에 박제했다면, 자일스는 용광로 같은 존재였다. 끝없이 타들어


가는 그는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감정들이 모이는 집합소였다.

‘살아남기 위해 국가를 배신한 반역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모두가 똑같다 ― 다만 대부분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뿐’. ‘입스윈 혁명군에 목숨을 구걸한 자일스 헤센’. ‘헤픈 창부나 다름없는 남자’.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오직 생존뿐이었다’…….

개중에도 내 눈길을 끈 헤드라인이 있었다. 큼지막한 볼드체로 인쇄된 헤드라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일스 헤센이 자진해서 귀환하다

—죽음을 피해 달아났던 남자는 왜 사형대로 올라왔나?」

나는 본문을 읽지 않았다. 다만 아주 당연한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자일스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살아남기 위해 국가의 배신자가 된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그는 온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죽음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제 발로 기요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던 남자가 삶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건 전부 나 때문이었다. 그는 나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자일스가 나를 안전 가옥에 가두었던 때를 떠올렸다. 창문에 판자를 덧대어 못질하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밀실에 갇힌 채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스럽게
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물건 취급한다고 믿었다. 잃어버리기 싫은 장신구를 대하듯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나를


꽁꽁 숨겨 두기로 작정했다고 말이다.

나는 물건 취급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자일스까지 나를 그리 취급했다고 생각하니 끝이 없는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던 거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모든 결정권의 중심이 자일스에게 쏠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권력이 있었고, 나는 쫓기는 입장이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나를 시궁창 속으로 내던질 수
있는 게 바로 그였다.

그러나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주도권을 쥔 쪽은 자일스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나를 살리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저울의 기울기는 반대로 기울었다.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자일스를 살게 만들 수도, 혹은 죽게 만들 수도 있는 존재였던 거다.

최초의 순간에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랬다.

<66 화>

10. 라디오 방송

루이제는 궁금했다.

왜 상부에선 그녀에게 자일스 헤센을 맡겼는가?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장교들은 많았다. 자일스와 아무런 인연도 가지지 않은 인물을 택할 수 있었을 텐데,


특이하게도 그들은 사관 학교 시절 자일스 헤센과 친한 동기였던 루이제를 택했다.

물론 어린 시절에 자일스와 조금 친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빛바랜 우정이 무엇을 바꿔


놓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루이제는 간혹 생각하곤 했다.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쩌면 자일스가 루이제 앞에서는 경계심을 어느 정도 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부에서는 다트 판의 중심을 정확하게 맞힌 셈이다.

다른 군인들은 루이제를 깍듯하게 대했지만, 자일스 헤센에게 그녀는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이 아닌 그냥
사관 학교 동기 루이제였다. 벨담군에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는 루이제의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조차 별 의미를 행사하지 못했다.

정보국을 통해 자일스를 감시하고, 언론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실컷 떠들어 댔지만 사실


상부조차도 자일스를 잘 몰랐다.

그들은 자일스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자일스였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누이조차도 제 손으로 죽인 사내였으니까.

그들은 자일스가 자살 시도를 하거나 감시병을 해치는 등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일스를 적당히 달래서 얌전히 만들 수 있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야기로는 자주 접해 들었으나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근소하게나마 자일스 헤센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는 군인이 바로 그녀라는 결론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자일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는 건 루이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거의 7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게다가 자일스가 비열한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을 어찌나 주입해 댔는지 루이제는 원래 자일스가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일스가 그녀의 눈앞에 버젓이 자리 잡은 지금은 슬슬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확실한 건 그는 악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루이제의 눈에 비치는 건 그냥 자일스 헤센이었다. 온갖 불명예로 뒤덮여 제 색깔을 잃어버린 사내. 그는


시한폭탄 같지도 않았고 분노에 차 있지도 않았다. 루이제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자일스는 얌전하게
굴었다.

단, 안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서.

루이제는 오늘도 자일스와 함께 식사를 했다. 굳이 그와 식사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루이제에게는 자일스의 건강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식사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곤 하니까.

자일스는 양 손목에 무거운 수갑을 찬 채로 영혼 없는 나이프질을 하고 있었다. 좋은 음식을 갖다주는데도


그는 마치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소극적이었다.

“입맛이 없어?”

그녀가 물었다.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식사 시간이 그를 진절머리 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뭐가 문제인지 말해 봐.”

“아무것도 아니야.”

“만일 몸이 안 좋거나 하면 나에게 말해야 해. 의료진을 보내 줄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안나가 보고 싶어서 그래?”

그를 슬며시 자극하자 자일스가 움직임을 일순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마.”

“왜, 너는 그녀를 사랑하잖아. 지금 안나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안전하다는 것만 보장되면 그걸로 충분해.”

“정말 그럴까? 그래도 소식 정도는 듣고 싶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말이야, 내가 너와 대면할 때마다 몇


가지를 알려 주는 거지. 안나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다거나, 뭐 그런 거.”

예민한 곳을 긁어 내리자 자일스에게서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그는 손을 멈추고 루이제를 노려보았다.


화가 난 기색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대체 뭐지?”

“그냥 예를 든 것뿐이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상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진짜로 안나가 다른 놈을 만나도 상관없다는 거야?”

“…….”

그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체념한 얼굴로 다시 접시 위를 내려다보았다. 루이제는 그가


동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차피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죽은 사람보단 산 사람이 낫겠지. 안나를 위해서도.”

“말 나온 김에 말이야, 내가 어제 안나를 살피러 방문했는데 뭘 봤는지 알아?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고. 분명 안나가 아픈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새 애인 밑에 깔려서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야. 기술이 너보다 훨씬 좋다던데.”

자일스는 결국 식기를 내려놓았다. 루이제는 웃는 얼굴 뒤로 은밀하게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녀는


자일스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금 그가 얌전하게 구는 건 본색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자일스는 폭력에 절여져 살아온 사내였다. 전쟁을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지만 전시에 내던져진
군인들과 그 사이에도 차이점은 있었다.

자일스는 폭력의 집행자였다. 칼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묶어 놓고 마음껏 고문하는
게 그가 하던 일 아니던가.

그는 웃으며 악수를 나누던 사람들을 죽였다. 가장 친했던 친구들을 죽이고 심지어 가족의 몸에 칼을 꽂아
넣기까지 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도 용케 정신을 제대로 붙들고 있었다.

루이제는 신문에서 떠드는 것처럼 그의 내면에 어두운 본성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적어도 사관 학교를 같이 다니던 생도라면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다. 자일스는 변했다.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자일스 헤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증명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만약 그가 그래 준다면, 루이제는 그녀의 머릿속에 약점처럼 잔존하는 옛 시절의 잔상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으리라.

화를 내, 자일스. 식탁을 뒤집어엎고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주먹을 휘둘러도 좋고. 그동안 네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내게 직접 보여 줘.

“너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대.”

“그만.”

“좋다고 막 소리를 지르더라니까.”

“루이제, 그만해.”

이제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애써 화를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서 분노나 증오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줘.”

“할 말이 그게 다야?”

“너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하길 원하는 거지? 안나는 자기 삶을 살고 있을 뿐이야. 내가 말했듯이, 나는 곧


죽을 사람이고. 안나의 인생에서 빠져 주는 게 내 일이야. 나랑 더는 엮이지 않는 게 안나에게도 좋을
거야.”

이유가 무엇일까? 곧 사형을 당할 거라는 사실이 그를 초연하게 만든 걸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루이제는 여전히 그를 의심했다. 그는 이렇게 이성적이고 조용한 인물이 아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다.

지금 루이제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증오하는 자일스 헤센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서 루이제는 자일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속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건 아주 불쾌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안나는 널 버렸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너는 안나를 위해 네 목숨을 바쳤는데 정작 그녀는 다른 남자랑 뒹굴기 시작했어.”

“그러라고 해.”

“화가 안 나?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날 계속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자일스 헤센. 평소엔 이런 식으로 굴지 않잖아. 내 앞에서 순한 양인 척해 봤자 네가 받을 판결을 바꿀
수는 없어.”

“내가 네 기대를 저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오히려 자일스는 이제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루이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살인자가 맞아. 내 한 몸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입스윈 사람도 아닌 주제에 말이야.
증오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굳이 근거를 찾으려고 할 필요 없어. 내가 네게 행패를 부리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혐오스러운 짓을 많이 했어. 너도 그걸 알잖아. 내가 벨담으로 넘어온 건 안나를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어.”

“멈춘다니, 뭘?”

“그냥…… 언제부턴가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어지기 시작했거든.”

자일스는 웃었지만 루이제에게 그건 스스로의 진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급하게 쓴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루이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들은 항상 재앙이 되어 나타나. 누군가를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아무리 옳은 일을 하려고 발버둥을 쳐 봐도 내 오염된 본질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지. 안나는 나 때문에
크게 울었어. 상처 받고 스스로를 학대했지. 그건 다 나 때문이었고. 내가 그녀를 구렁텅이 속에
떠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졌어. 이젠 인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내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내가 청산하지 못한 죄가 주변을 해칠 뿐이라는 걸.”

“그래서 자살하러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67 화>

“모든 걸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내 앞에서 하는 고해 성사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은 알지?”

“의미 있기를 바라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자일스는 그를 황망히 바라보는 루이제를 내버려 두고 다시 음식을 기계적으로 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철저히 망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증명해 내려고 하지 마. 네가 그러지 않아도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내겐 도망칠 생각이 없으니까.”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던 귀족들을 처죽이다가 이제 와서 네 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


사람이 갑자기 그리 변할 수 있는 건가?”

“그럼 넌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랐던 거지?”

“난 널 믿지 않아, 자일스 헤센. 네가 정말로 속죄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걸어 들어왔다는 건 말이 안 돼.


분명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말해 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전 국민이 네
본모습에 대해 알아, 자일스. 굳이 착한 사람을 연기할 필요 없어.”

“내가 널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한편 자일스는 루이제가 왜 그를 도발하려 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를 심문하기 시작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루이제 또한 신문을 통해 그를 알아 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것이다.
뭘 기대하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그녀는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가장 위험한 짐승을 잡아 케이지에 넣는
데에 성공했는데, 막상 그 짐승은 얌전한 애완견처럼 가만히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공포감을 느끼곤 한다. 포악한 맹수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
사지를 찢으려 달려들 때보다 더욱 그 사람을 궁지에 몰리게 하는 건, 그 맹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뭐라도 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부터 자일스는 이미 루이제의 통제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네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운가?”

“이건 네 진짜 모습이 아닐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우린 7 년 만에 처음 만나는 사이야. 물론 네겐 그렇지 않겠지. 신문을 통해 내


소식을 계속해서 접하고 있었을 테니까.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넌 나를 정말 알았던 게
아니야. 누군가 나에 대해 쓴 글을 읽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건 진실이었잖아, 안 그래?”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듣지 않은 건 밀봉된 상자와도 같아.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알 수 없지.”

“그들이 온 벨담을 대상으로 거짓 기사를 냈다고 주장하는 거야?”

“네 앞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데 굳이 활자로 이루어진 기사에 의존할 필요가 있느냐는 소리였어.”

자일스는 역으로 질문했다.

“나에 대해 뭘 알지, 루이제? 라디오를 통해 듣고 신문에서 읽은 걸 제외하고 말이야. 네가 진짜 보고


겪은 나는 어떤 인간이지?”

그러나 루이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서로가 이미 아는 대로 그들 사이의 공백은 너무나도 길었으며,


그마저도 커다란 전쟁이 그 사이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식탁 위에 사과 잼이 있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넌 사과를 못 먹잖아.”

그러자 도자기 인형처럼 한 표정만을 유지하던 루이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옛날 일일 뿐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그딴 건 내게 아무 영향도 못 끼쳐.”

“사과 향만 맡아도 팔에 두드러기가 나곤 했잖아.”

“헛수작 부리지 마. 네가 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

“그럼 너는 나를 아나?”

루이제는 입을 다물고 얼마간 자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그들 사이의 신경전은 끝을 고했다.


그녀는 곧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토스트에 사과 잼을 발랐다.

“네가 허튼수작을 부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것만 알아 둔다면 모두가 편할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그리고 아까 안나 얘기 말인데.”

그녀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거짓말이었어. 난 아직 그녀를 방문하지도 않았거든. 다른 남자를 만났다느니 둘이 함께


뒹굴었다느니…… 그냥 지어낸 말이야. 분명히 네가 반응할 거라 생각했지.”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왜? 안나가 널 배신하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

“내 문제가 아니야. 안나는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아.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

가볍게 그의 말을 넘기는 듯하던 루이제가 무심코 혼잣말을 흘렸다.

“그런 여자가 왜 하필 너를 받아들인 거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을 때 기대한 것은 그야말로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길가 상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건 계란으로 묘기를 부린 것 같은 온갖 샌드위치였다. 접시 위에 놓인 음식들은


마치 ‘이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건 몰랐겠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델레는 얼떨떨한 눈길로 샌드위치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요? 주방에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비스마르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께서 드실 건데 평범한


샌드위치를 내오긴 좀 그렇잖아요.”

“저는 정말 샌드위치면 괜찮다고 말하려던 건데…….”

“그럼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자, 보세요. 이건 삶은 계란을 특제 소스에 버무린 후에 야채랑 함께 돌돌


만 거고요. 이건 햄을 두껍게 올리고 중간중간에 오이랑 파프리카를 넣어서 식감이 살도록 한 거래요.
그리고 저건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새우가 든 거고…….”
“고마워요. 정말로.”

내가 평소에 먹던 얇디얇은 샌드위치와는 다르게 두꺼운 부피를 자랑하는 ‘주방의 자존심’ 샌드위치를
바라보던 나는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괜히 요리사를 고용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는 맛이었다. 이런 걸 매일 독차지하고 먹었으니 혁명이


일어나고도 남지…….

“그런데요, 아가씨…… 아니, 안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송아지 요리를 마다하시고 샌드위치를
달라고 하신 거예요? 저희는 아가씨께서 벨담의 저택에 처음 오신 거니까 당연히 촛대 놓을 자리만 빼고
식탁 위에 빈 곳이 없게 하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설마 나 혼자인데 그럴 리야 있겠어요?”

“그래도요. 안나는 이제 가주가 되신 거잖아요. 보통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아가씨나 도련님들은 연회를


열라고 하시거든요.”

연회라는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저 혼자 연회를 열어도 될 뻔했네요. 나 빼고 다 죽었으니까. 그건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거든요.


예전 같았다면 더 그랬겠죠.”

“저, 그런데…… 선대 백작님이 안나를 때렸다는 게 정말이에요? 원래 백작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분은 자식들을 어여삐 여기셨어요. 특히 엘리자베트 아가씨는 더욱이요. 절대
맨발로는 걷지 못하게 하실 정도였다니까요.”

“그거야 요한 마이어한테 팔아넘겨야 하니까 그랬겠죠.”

내가 정제되지 않은 말을 그대로 내뱉자 놀란 아델레가 순간적으로 입을 가리며 주변 눈치를 보았다.


백작가를 모셔 왔던 사용인으로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괜찮아요, 이제 가문의 일원은 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아직도 백작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되지 않는다고요.


저희 등 뒤에서 다 지켜보고 계실 것 같고…….”

“하지만 저는 진실을 말한 거예요. 그 작자에게 딸이란 존재는 공작가에 바쳐야 할 진상품이나 다름없었을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엘리자베트 양이 괜히 다른 남자 손 잡고 도망쳤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몇 개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포만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성의를 무시하기가 싫어서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다이닝룸에 앉아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드레스를 입고 걸으며 치맛자락을


밟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단계였는데, 온갖 식기의 종류와 용도 그리고 음식을 먹는 순서까지 외워야만
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배운 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내가 왜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는지 알아요?”

“아뇨.”
“샌드위치는 식기를 쓸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손으로 집어 먹어도 되니까 그런 거예요. 난 그런
음식들이 좋아요. 거추장스럽지 않은 음식들이요.”

“식기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으시군요.”

“포크 하나 잘못 집었다가는 그대로 뺨을 맞았어요. 그때 먹었던 음식들은 그 맛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아요. 올바른 식기가 뭔지 생각하느라 바빴거든요. 매일매일 긴장 속에 식사하느라 맛을 음미할 새도
없었고요.”

“어쩌면 그럴 수가. 그때 몇 살이셨어요?”

“난 그때 어렸어요. 열다섯인가, 그쯤 됐었어요. 식사 예절을 처음 배우기에는 많은 나이긴 했죠, 사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난 그동안 다락방에 갇혀 살아야 했다고요. 내가 포크와 나이프에 대해 뭘
알았겠어요?”

사실은 이 만찬장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젠 아무도 날 때릴 수


없지만, 익숙한 공간에서 우러나오는 잔상은 아주 잠깐이나마 옛 시절의 나를 이 자리에 되살렸다.

<68 화>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엘로이즈는 가족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만 알았다.
애초에 내가 뺨을 맞는 것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듣는 것도 다 내가 부족한 탓인 줄만 알았다.

모든 문제의 근본이 내 잘못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게 바로 요한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가 내 옷을 벗기려 들었지만 나는 그 사건 덕에 알껍데기를 깨고 나올 수 있었던
거니까.

“안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아델레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요.”

“자일스 헤센 말이에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안나가 생각하는 자일스 말이에요.


신문의 의견 말고요. 안나는 그 사람이랑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를 더 잘 알 수도
있잖아요.”

“아델레는 어떨 거라 생각하는데요?”

“저야 잘 모르죠. 그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신문에서 떠들어 대는 것만 읽었을 뿐이니까요. 저는


안나에게 헤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요. 안나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건 신문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잖아요.”

자일스라는 사람.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 또한 처음에는 벨담의 여론과 똑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두려움. 끝없는 공포. 그리고 밑바닥에서 숨죽이고 있던 증오. 하지만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확연했다.
나라고 그를 완전히 꿰뚫어 본 건 아니다. 우리는 고작 몇 개월 동안 함께 있었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스스로의 내면을 활짝 열어서 나를 그 안으로 초대했다. 내가 그라는 사람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도록…….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넓고도 좁은 세상 속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거든요. 알잖아요,


아무리 투항했다지만 그도 결국 벨담에 악감정을 가진 입스윈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벨담 출신이니까.
나는 끝없이 겉도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그래서 그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물론 살아남고 싶은
열망도 이해했죠. 자일스는 나라는 존재를 찾게 되어서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대할 때마다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제 주변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 것처럼 나도 불사르고 말까 봐.”

“그 사람이 안나를 무척 잘 대해 주었나 봐요.”

“나는 자일스에게 남은 마지막 도피처 같은 존재였어요.”

자일스는 나를 잃을까 봐 항상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항상 내 뒤를 쫓아다녔다. 스스로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차라리 제 몸을 던져 나를 구하기를 택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상대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바로 나였어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우습죠. 이제 알아 봐야 무슨 소용이에요? 그는
감옥에 있고, 곧 죽을 텐데…….”

나와 아델레의 눈이 마주쳤다. 아델레가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머뭇거리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아델레, 자일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네? 그럴 리가요. 그 사람은 무조건 사형 선고를 받을 거예요.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난 그가 살아남기를 원해요.”

나는 아델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자일스가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델레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머뭇거리다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내게


동의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동의를 구하려고 한 말도 아니었고. 다만 나는 내 마음속을
맴돌던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해해요.”

“아니에요,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제가 뭐라고 첨언하겠어요? 물론 잘 와닿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아델레가 두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나를 위로하듯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제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단지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얘기하세요. 저는
듣는 것 하나는 잘하거든요. 정말 듣는 것만이요. 멋대로 넘겨짚거나 오해하지는 않을게요. 그러니까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찾으세요. 안나는 우리 아가씨니까요.”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뭘. 그럼 안나, 제가 다음 질문을 할게요. 신중히 대답해 주셔야 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델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장난스레 질문을 던졌다.

“후식은 뭘로 하시겠어요?”

아렌트 홀츠만은 루이제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커다란 전쟁은 그녀의 가슴팍에
소령 계급장을 달아 주었지만 그 대가로 루이제가 누렸어야 할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이건 과거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쟁은 청년들을 나이 들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떠오르는
여명처럼 희끄무레한 과거의 날들을 평생토록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루이제는 자일스 헤센을 맡게 되어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그녀는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줄담배를 피워 댔다.

“왜 하필 나였는지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물론 나여야만 하니까 그랬겠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도 난 여전히 불쾌하단 말이야.”

“뭐가 그리 불쾌합니까?”

“난 자일스 헤센이랑 기수가 같았을 뿐이야! 단지 사관 학교를 함께 다녔다고 해서 내가 그놈이랑


관련지어졌다는 게 짜증 난다고. 실제로 나는 헤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단 말이야. 우리가 동기였던
건 오래전 이야기야. 설령 우리가 조금 친했던 건 사실이라 쳐도, 이건 여전히 말이 안 돼. 그놈은 이미
예전의 그놈이 아니잖아.”

“당신 임무는 적절한 시기에 재판이 내려질 때까지만 자일스 헤센을 관리하는 겁니다. 별로 어려운 임무도
아닐 텐데 너무 불평하진 마십시오. 상부에서도 당신 의견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뭐야, 위에다 꼰지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루이제가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갓 임관할 시절에만 해도 초롱초롱하게 빛났을 게 분명한


눈동자 밑에는 오래 묵은 피로와 불면증의 흔적이 검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생도 시절의 루이제가 아니었다. 자일스 헤센 또한 그러했다. 루이제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는 사실 그놈 만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최대한 이 임무랑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었던 건데. 도리어
이게 내 발치로 굴러왔네.”

“헤센이 만나고 싶을 법한 부류는 아니긴 합니다.”


“그놈의 전적이 화려해서만은 아니야. 그냥…… 에이, 씨발. 이걸 뭐라 말해야 하지?”

한 손에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던 루이제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전쟁이란 게 말이야, 한번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나면 영혼 곳곳에 찌꺼기가


끼거든.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봐도 다시는 옛날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가 없는 거야. 예를 들어서
말이야, 나는 하늘을 정말 좋아했어.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그 빛깔이 바뀌는 게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 마치 사람 마음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그녀는 담배를 한 차례 더 피우느라 잠시 공백을 두었다. 아렌트는 루이제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어. 너도 알겠지만 적국 공군의 활약이 참 대단했잖아.


위를 올려다보기만 하면 금세 귓가에 굉음이 울리는 것 같아. 비행대가 하늘에 뜰 때 내는 그 굉음 말이야.
물론 전쟁 끝난 건 나도 알아. 더 이상 공습당할 일은 없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머리로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아도 신경이 먼저 반응하더라고. 이제 나는 팔자 편하게 드러누워서 노을 진 하늘을 감상할
수도 없는 인간이 된 거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난 오염됐어. 눈에 보이는 걸 있는 그대로 보질 못한다고. 단지 깨끗했던 시절의 기억만을 붙든 채로


살아갈 뿐이야. 생도 시절에만 해도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자일스 헤센도 그리 될 줄 몰랐고.”

자조적으로 숨죽여 웃던 루이제는 어느덧 짧아져 버린 담배꽁초를 군홧발로 밟아 꺼 버렸다.

“그래서 그 시절은 내게 정말 소중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선명하면서도 깨끗한 시절이니까. 난


그 시절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싶었어. 나도, 그때 함께 공부하고 훈련했던 동기들도 그리고…….”

“자일스 헤센도 말이죠.”

“만약 그놈 얼굴을 다시 보게 되면…… 자일스가 변해 버린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게 힘겨워질까 봐,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

본의 아니게 가장 소중한 기억의 파편 속 일부가 되어 버린 사내는 국가가 공인한 악마가 되어 돌아왔다.


물론 아직 아무도 확답할 수 없는 함정 같은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과연 그는 벨담이 주도한 이미지만큼 악인일까?

그는 정말로 누이의 시체를 앞에 두고 휘파람을 불었으며, 어린아이를 죽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했을까?

그 이야기들은 정말 진실이었을까?

“그래서 만나 보니 어땠습니까? 생각했던 대로던가요?”

루이제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몰라, 나는 잘 모르겠어.”

그녀는 왜 대답을 회피했을까? 물론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루이제의 의견은 자일스 헤센을 둘러싼
거대한 작전에 반영되지 않을 테니까.

아렌트는 회상을 그만두고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숄을 두른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렌트가 창을 내리자 그녀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비스마르가의 사용인으로 일하는 그녀의 이름은 아델레였다.


“진전이 있었습니까?”

“……아직 많은 걸 듣지는 못했어요. 이제 막 저택에 들어오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몇 마디 중요한 이야기를 흘렸겠지요. 안 그럽니까?”

아델레는 망설였다. 분명 안나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 꺼림칙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벨담을 위한 일이었다.

“아가씨는 자일스 헤센을 너무나도 사랑하세요.”

그녀가 소리 죽여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그가 살아남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꼭 그렇게 만들 거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69 화>

나는 또 악몽을 꿨다. 첫 번째는 자일스가 죽는 걸 보는 꿈이었다.

새벽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난 나는 그대로 다시 잠들었고, 이번에 나는 꿈속에서 과거로 돌아갔다.


어릴 적, 솔즈부르 사유지의 저택에서 지내던 그때로 말이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내 입 속에 구슬을 잔뜩 물려 놓고는 내 머리를 툭툭 치며 욕을 했다. 제대로 말할 줄


아는 게 뭐냐면서 말이다. 이래서는 거렁뱅이의 신부가 되기 딱 좋겠다고 나를 모욕하려 들었다.

물론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꿈속의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고, 그래서 백작에게 너랑


거렁뱅이랑 바꿔치기를 해도 그 천박함은 아무도 분간 못 할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구슬이 입 안을
잔뜩 채우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까지도 분한 일이었다. 나는 내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대충 세수만 하고 저택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오니까 확실히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 저택은 아무래도 내게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우선 내가 악몽 같은 시절을 보냈던 옛 저택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꼭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서 가끔은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저택을 관리하는 몇몇 사용인들이 내게 목례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저택 주변을 마음껏


돌아다니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나를 병원에서 저택까지 데리고 와 준 사용인, 요제프였다. 그는 내가 타고 왔던 바로 그 승용차를


광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까닥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그냥 안나라고 불러요.”

“아델레한테 그리 하라고 시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요제프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마치 별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난 내 결정에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요?”

“보통 귀족 아가씨들이 하실 법할 말씀은 아니거든요.”

“난 귀족 아니에요.”

그러나 내 선언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인데요. 난 내가 귀족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아가씨는 비스마르 백작가의 후계자십니다.”

“아버지가 은행원이라고 해서 그 딸도 은행원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럼 아가씨는 스스로를 뭐라고 정의하시는 건가요?”

간단한 것 아닌가? 나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내뱉었다.

“상속녀요.”

“그냥 그뿐인가요?”

“네. 난 그냥 재산을 상속받았을 뿐이에요.”

“곧 작위를 이어 받으실지도 모르는데도요?”

“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투표로 뽑는 세상에 작위는 무슨 작위예요? 왕좌는 그저 화려한 의자에 불과한
시대잖아요. 난 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아요. 귀족 행세하는 작자들이랑 같이 지내보고 나니까 그게
어릿광대만도 못한 짓이라는 걸 더욱 잘 알겠더라고요.”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는 내가 곧 마음을 바꾸게 될 거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결국 그들이 어떤 파국에


치달았는지 보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귀족 행세를 하면서 마음 편히 눌러앉아 살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이 땅


위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가 엘로이즈 비스마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신문에 실린 내 얘기를 읽고 무어라


첨언하는 무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자일스가 보고 싶었다. 그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곁에서 승용차를 닦고 있는 남자가


사용인이 아니라 자일스였다면.

나는 잠시 내가 물려받은 이 저택에서 자일스와 함께 지내는 상상을 했다.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신문에 그와 내 이름이 사이좋게 실리는 일도 없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겠지. 현실을 무시하려 해선 안 된다. 자일스는 곧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고, 나는 평생 언론의 관심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거다. 그게 현실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요.”

“벌써 이곳으로 도망쳐 오셨잖아요. 벨담 안에서라면 안전하실 겁니다.”

“그냥…… 더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승용차에 몸을 기대고는 농을 던졌다.

“혹시 알아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다 보면 달나라까지 갈 수 있을지.”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답답하니까 그렇죠.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 같단 말이에요. 이걸 어떻게든 해소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 보여서 더 그랬다. 어떻게 하면 자일스와 내가 함께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내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가진 건 재산뿐인데, 이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그랬다면 결말에서 우리는 결국 드라마틱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었을 거다. 진부한 영화가 다 그렇듯이 말이다.

자일스는 나를 몇 번이나 죽음의 위협 속에서 구해 줬는데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어졌다.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나는 다짜고짜


요제프가 닦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것도 운전석에 말이다.

“아가씨, 뭐 하세요?”

나는 나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요제프에게 대고 요구했다.

“운전하는 법 가르쳐 주세요.”

“네?”

“운전 말이에요. 가르쳐 달라고요. 나도 차를 운전해 보고 싶어요.”

“운전…… 말씀이신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요제프는 결국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하죠.”

그는 내 옆자리, 그러니까 조수석에 탔다. 정적 속에 새들이 우는 소리만이 귀를 간질였다.

“안전벨트…….”

“했어요.”
“네, 좋아요. 그럼…….”

그가 내게 차 키를 건넸다. 나도 승용차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건 아니었다. 자일스가 종종 나를 태우고


다니곤 했으니까. 적어도 곁눈으로 본 건 있었다. 나는 자일스가 했던 것처럼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거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요제프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다음부턴 나도 몰라요. 뭘 해야 하죠?”

“아가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으시죠?”

당연한 소릴.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내 생각에 요제프 또한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긴장한 기색이 뚜렷해 보이는 그는 내게 기어를 바꾸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뒤로 젖히면 차가 앞으로 나갑니다. 자…… 보이시죠. 기어를 바꾸니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너무 느린데요. 더 빨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엑셀을 밟으면 됩니다. 그건 두 번째 발판…… 아가씨!”

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엑셀을 힘껏 밟았다. 그러자 승용차가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다행히 우리는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터에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부딪치는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요제프는 사용인으로서의 위치와 예의범절 따위는 완전히 까먹었는지 미친 듯이 내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너무 빨라요! 엑셀은 그렇게 밟는 거 아니에요! 발! 발 떼세요!”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엑셀에서 발 떼라고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승용차는 더 이상 가속하지 않을 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핸들을 돌리며 넓은 공터 위를 자유롭게 질주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물론 망할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이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반쯤 열린 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물론 요제프 또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대로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멀리 떠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승용차가 멈춰 섰을 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마치 불곰과의 격전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초췌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도저히 손님을 맞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요제프가 조금 쉬도록 하고 혼자서
방문객을 맞으러 나갔다.

나를 찾아온 건 아렌트였다. 정보국에서 일한다던 그 작자 말이다. 그는 반쯤 시체가 된 요제프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혼란스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운전을 좀 배웠어요.”

“운전은 갑자기 왜죠?”

“불현듯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안쓰러운 눈길로 사용인 쪽을 바라보던 그가 표정을 가다듬고는 말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제안 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제안인데요?”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할 겁니다. 엘로이즈 양께서 참여해
주신다면 좋겠다는 전보를 보내오더군요.”

“난 싫어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난 아렌트가 이 멍청한 제안을 왜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온갖 신문에서 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형국에 한술 더 뜰 이유가 뭐란 말이지?

그러나 아렌트가 다음에 건넨 말은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잘만 하시면, 자일스 헤센과 잠시 만나실 수도 있게 될 겁니다.”

<70 화>

우리는 응접실에 와 있었다. 이름 모를 사용인들이 간단한 티 세트를 내어 주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이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건 나와 아렌트뿐이었다.

차나 한 잔 할 만한 주제도 아니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도 다과나 찻잔에 입을 대지


않았다. 레몬그라스의 상큼한 향만이 그나마 분위기를 산뜻하게 띄우려 애를 쓰고 있는 형국이었다.

“라디오 방송에 참여해 달라고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제안이었던 만큼 내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날이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요. 당신이 내건 그 조건도 같이.”

“아마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설명드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상관없어요. 내겐 남는 게 시간이에요.”

“엘로이즈 양, 벨담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의 현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세계 대전이라는 대전쟁에서 패했으니 벨담이라는 나라가 어디까지


추락했을지는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뻔했다. 내게도 사용인들에게서 대충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부터 전해 드릴 말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부디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그러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 좋을 것 없는 일들이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말씀해 보시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일스 헤센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죄인입니다. 물론 그가 자국민을 살해했다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의 죄가 더욱 부풀려지고 가히 악마적인 형태로 변질된 건 모두 국가의 공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시궁창만도 못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을 잊게 만들
만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을 겁니다.”

“당신들이 자일스를 제물로 이용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엘로이즈 양도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눈길을 끌 만한 이슈가 없이는 사회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마른 가지에 작은 불티가
옮겨붙으면 온 숲이 화마에 집어삼켜질 수 있는 법이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식어 가고 있었지만 입을 댔다간 그대로 뱉어 내고 말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이해하라는 말인가? 그건 불가능한 요구였다.

“엘로이즈 양도 이젠 벨담의 일원이 되셨으니 아시겠죠. 매일 약탈과 범죄가 일어나는 나라에 살고 싶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그건 패망한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이에요. 전쟁을 막지 못한 데다 패배하기까지 했으면


그만한 책임이 따라오는 법이잖아요. 이건 벨담이 고스란히 져야 할 무게예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희생될 겁니다.”

“벌써 당신들은 한 사람을 희생하고 있잖아요. 이 커다란 국가가 져야 할 죄를 단 한 사람의 등에


짊어지우고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당신들이야말로 이해해야 할 거예요.”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입느니 차라리 한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했다.

나는 벨담보다는 자일스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벨담은 내게 멀고도 희끄무레한


존재였지만, 자일스는 한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남자였다.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제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고,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또…….

“국가의 존재 의의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견고하고도 거대한 울타리는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업을 한 차례 실패한 전적이 있습니다. 또다시
실패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비록 벨담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었죠. 하지만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뿐입니다. 국가가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혼란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 되는
것이 자일스 헤센이 할 일이라면, 오히려 그는 영웅으로 불려야 할 사람이기도 하죠.”

“영웅이라고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돌려서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대혼란을 늦추고 있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국가에 가장 충성스런 군인으로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이죠. 그는 훈장을 받아 마땅합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마음 깊이 그에게 경의를 표할 겁니다.”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거대한 국가의 실패를 한 사람이 떠안아서 만들어진 평화에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요?”

“영웅이란 본디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요?”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일스라면 어땠을까? 그라면 이런 말들을 듣고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평소의 그 담담한 눈빛으로, 표정에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벨담이라는 국가를 위해


필요악이 되겠다고 자처했을까?

“……자일스도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나요?”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처한 운명이 어떤 것인지도 알려 주지 않을


만큼 매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렌트는 다음 말을 이었다. 아주 확고한 어조로.

“그리고 그는 받아들일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는 거예요?”

“그는 군인이니까요. 군인들은 국가를 대신해 팔다리를 잃어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그건


뼛속까지 깊이 새겨진 본능입니다. 사냥개가 죽는 순간까지도 주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건…… 너무 가혹해요.”

“하지만 그뿐이겠습니까.”

아렌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조롱이나 비웃음과는 거리가 먼 미소였다.

“자일스 헤센은 무엇보다 당신을 위해 받아들일 겁니다. 벨담의 안위 속에는 당신의 삶이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당신이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그는 뭐든지 할 겁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이미 당신을 위해 삶을 포기하고 벨담 국경을 넘은 사내가 아닙니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자일스는 어느 시점 이후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대신 그에게는 맹목적으로 굴 만한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다.

끝없는 자기혐오는 누군가 그를 진창에 처박아도 무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덜 혐오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고자 했다.

과거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랬듯이.

“이 모든 사정들을 이해하셨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십시오. 물론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신다는 걸


압니다. 이 거대한 작전에 손을 보탠다는 게 그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시겠지요. 라디오 방송을
하시는 대신 그와 한 차례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엘로이즈 양이 라디오 방송에서
하게 될 말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더라도, 헤센 또한 엘로이즈 양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드리겠다고 제안하는 겁니다.”

“결국 저를 깊숙이 끌어들이셔야만 하겠다는 거군요.”

“엘로이즈 양은 이미 자일스 헤센과 깊은 관계를 맺으신 시점에서부터 스스로 걸어 들어오신 겁니다. 물론


이런 결말을 원하신 적은 없으셨겠지요. 유감을 표합니다.”

아렌트는 각이 진 새까만 가방 안에서 끈으로 묶인 종이 다발을 꺼냈다. 나는 그것을 테이블 위로


건네받았다. 타이핑 기계로 인쇄한 그 문서는 내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읊어야 할 대본인 것 같았다.

나는 대본을 천천히 훑던 끝에 내 마음을 정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 테니 결단이 서시면 제게 연락하십시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테니까요.”

대본에서 눈을 떼고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마주한 사람처럼 확고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료해서 주저할 필요조차 없었다.

“할게요. 라디오 방송에서 이대로 읊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할 수 있어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받아들이시겠다고요.”

“저 또한 자일스의 일에 휘말려든 이상, 벨담의 영속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거잖아요. 할게요. 어차피 모든 절차가 정해졌을 테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을 게 뻔하잖아요. 그가
죽는 걸 막을 수 없다면, 그의 죽음을 더욱 명예롭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자일스가 오해할 일도 없게 해
주신다니 더할 나위 없네요.”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나를 잠시 바라보던 아렌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승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좋아요. 방송은 언제 하는 거죠?”

“이번 주 목요일 정오입니다. 때가 되면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대본을 잘 숙지하신다면


좋겠군요.”

그가 가방을 닫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모자를 눌러쓴 그가 챙을 한 손으로 잡고 살짝 내리며 말했다.

“국가는 당신의 헌신에 경의를 표할 겁니다.”

나는 그를 굳이 배웅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발소리 끝에 문이 닫혔다. 대신 나는 아렌트가 주고 간


대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대놓고 자일스를 비판해야 할 라디오 방송은 정확히 사흘 뒤였다.

<71 화>

저택 본관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머리를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내겐 더 이상


내 진짜 머리색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금발을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색을 빼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머리가 많이 상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검은 머리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젠 내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놔줄 때가 되었다.

머리를 한 차례 감고 나서 거울을 보니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예전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금발로 산 지


몇 개월은 되었는데 다시 돌아오니 어색하기는커녕 이제야 내 모습을 되찾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 모든 일들은 결국 나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안나 키팅. 그것은 내 이름이자 정체성이다.

아델레는 이제 내 말동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아렌트가 방문했다는 사실이나, 그가 내게


라디오 방송에서 그대로 읊어야 할 대본 서류를 주고 갔다는 사실 등을 다 알고 있었다.

아델레는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더니 기겁했다.

“이렇게나 많이 말해야 한단 말이에요?”


“자기들 딴에는 분량을 채워야 하니까 그렇겠죠.”

“안나, 이거 다 외울 수 있겠어요?”

“완벽하게 외울 필요 없을걸요? 보면서 말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물론 다 읽어 보기는 했어요.”

내가 뒤늦게 덧붙였다. 반면 아델레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괜찮겠어요, 안나?”

“뭐가요?”

“안나는 아직 자일스 헤센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이건……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내용이에요.
여기도 쓰여 있잖아요. ‘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라고요.”

아델레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게 내심 고마웠다. 그녀는 이 방송 때문에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우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정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겠어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런 말들인데. 게다가 방송을 하면 자일스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어요. 거짓말 한 번 하고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할 거예요.”

“정말 괜찮은 것 맞죠?”

“괜찮다니까요. 정 걱정되면 직접 알아볼래요?”

나는 아델레를 마주 보고 앉아 그녀와 나 사이에 대본을 놓았다.

“예행연습이나 한번 해 보죠. 아델레가 진행자를 맡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말하는지 봐


줘요.”

“아, 네에…….”

그녀는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대본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커다란 방 안에서, 우리 둘만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게스트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명배우보다 더욱 유명하며, 벨담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연애사의 주인공이시기도 하죠. 매일같이
신문 1 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분! 바로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마르 백작 영애님.”

“저도 반가워요.”

“인터뷰를 하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기분이 어떠세요?”

“무척 떨려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 드리려
노력할게요.”

“좋습니다, 비스마르 양. 편하게 엘로이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엘로이즈. 얼마 전에 조국인 벨담으로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입스윈과 벨담은 좀 다르죠?”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이제야 벨담 땅을 밟게 되었다는 게 억울할 정도였어요.”

“무사 귀환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듣자 하니 벨담으로 돌아오실 때 동행인이


있었다고요.”

“맞아요. 그는…… 제가 이 이름을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다들 알고 있는 이름인데요, 뭘.”

“저는 자일스 헤센과 함께 벨담으로 왔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를 피해 달아나다가 국경까지 오게 된


거예요. 벨담이 저를 살린 거죠.”

“그때 상황이 어땠나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엘로이즈?”

“물론이에요. 우선 제 이야기부터 하는 게 낫겠네요. 입스윈에서 숨어 살 때, 저는 벨담 귀족 출신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어요. 하지만 자일스 헤센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죠. 그가 저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저를 살려 두었어요. 아마도 제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자일스는 내 처지를 이용해 내가 사랑을 연기하도록 강요했어요. 난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리고 뭐든 그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으니까요.”

“혹시 그 요구 사항 중에 잠자리도 있었나요?”

“네, 맞아요. 그는 제게 잠자리를 강요했어요. 저를 비난하지는 말아 주세요. 죽지 않기 위해서 뭐든


해야 하는 그 심정을 여러분도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물론 이해합니다. 정말 힘든 상황이셨겠군요.”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어요. 저는 자유를 뼈저리게 원했어요.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도


힘든데, 한 남자의 호의에 매달려서 매일을 불안하게 사는 건 고문과도 같았죠.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자일스 헤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성공하셨군요. 혹시 기억나시는 일화가 있나요? 그와 함께 있을 때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종종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안나, 여기까지 해도 되겠어요. 정말 자연스러우셨어요! 방송국에 가셔서도 분명 잘하실 거예요.”

나는 아델레가 왜 멈추었는지 의아했다.

“왜 그래요, 아델레?”

“그다음 부분이 너무 잔인해서 도저히 제 귀로는 못 듣겠어요.”

그녀는 대본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완강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다음에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읽어 보았다.

“자일스가 제 앞에서 사람들을 처형하는 부분이요?”

“너무 디테일하게 나와 있잖아요! 제발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요. 저는 비위가 약해서 정육점 앞도 눈


감고 지나가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하물며 전쟁이 제게는 얼마나 가혹했을지 예상이 되시죠?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굳이 아델레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 소리 없이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자일스와
함께 지내며 겪었던 일화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물론 전부 다 거짓말이다. 이런 일들은 일어난 적조차
없었다.

그중에서도 정점은 마지막에 주고받아야 할 문답이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향후에도 그를 사랑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향후에도 그를 사랑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내가 혼잣말처럼 마지막 부분을 읊자 아델레가 슬쩍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뭐가요? 뭐가 없다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쓰여 있다고요.”

나는 이만 대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바람이나 쐬러 갈까요? 오늘 유독 날이 좋아요. 이런 잔인한 이야기들은 다 잊어버리자고요.”

뭔가 떠올린 내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드라이브 태워 줄까요?”

그러나 아델레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아뇨.”

방송 당일은 금세 다가왔다. 나는 아침을 대충 때우고 나서 흰 블라우스와 붉은 스커트 차림으로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아델레는 내가 더 화려한 옷을 입기를 원했지만, 나는 본래의 내 모습으로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

아렌트는 오전 11 시경에 나를 데리러 왔다. 그가 나를 보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조금 달라지셨군요.”

“눈치챘어요?”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머리카락 색깔이 달라지셨잖습니까.”

“이게 본래 내 머리색이었어요. 더 나 같아 보이죠, 안 그래요?”

아렌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승용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물론 나는 방송국에 대한 경험이 몇 번 있어서 별로


긴장되지는 않았다. 입스윈에서 지낼 적에 매주 방송국에 들러서 연주를 하곤 했으니까.
벨담의 방송국이라고 크게 달라 보이는 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건물 안을 오갔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점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입스윈
방송국에 샹들리에 같은 건 없었으니까.

아렌트와 나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가 격자로 된 철제문을 밀어 닫자 이내 승강기가 움직였다.


좁디좁은 공간 안에 몸을 밀어 넣었음에도 그는 불편한 기색 한 번 내지 않았다.

“대본은 읽어 보셨습니까?”

“충분할 만큼은요.”

“진행자가 잘 리드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걱정 안 해요.”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승강기는 우리를 방송이 진행될 녹음실로 데려다주었다. 벌써 많은


관계자들이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지시라도 받은 건지 그들은 나를 보고 고개만 까닥였을 뿐
알은체를 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나는 진행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낙관주의자처럼 밝은 인상을 지닌 그는 아렌트와 엇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비스마르 양. 레오 슈미트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에 대해서는 이미 아시겠죠.”

“그럼요, 워낙 유명 인사이시지 않습니까.”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나를 녹음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내가 첫 번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레오가 손목시계와 녹음실에 달린 시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앞으로 10 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는 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피아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듯이.

“너무 긴장하시진 마세요. 생각보다 별거 아닐 겁니다.”

그가 내게 속삭여 말했다. 레오는 내가 방송국에 아무런 경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해명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녹음실 바깥에서 프로듀서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그가 손가락으로 빨간 전구를 가리켰다.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방송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진행자를 마주 보며 선량하고 순진한 여자처럼 웃어 보였다.

<72 화>
*

언제나 그랬듯이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은 루이제와의 일종의 면담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식사 메뉴는 매일 바뀌었다. 오늘은 베이컨과 감자를 주 재료로 해서 만든 요리가 특히 눈에 띄었다.

물론 자일스에게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식사를 하라는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자의가 아닌 복종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머리가 가벼워지고 뒤숭숭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요즈음 자일스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한계까지 치달아 오른 죄책감과 자기혐오였다. 루이제가 신문


기사들을 보여 준 이후로 그는 안나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물리적인 자유를 얻었다 한들, 안나는 평생 그가 저지른 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점차 버거워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매일


정해진 시각에 돌아오는 이 식사 시간이었다.

고위 장교가 합석하는 자리라 그런지 몰라도, 그들이 죄수에게 대접하는 것치고는 좋은 식사를 내온다는
점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살아남는 데에 정신이 팔려 저지른 죄는 결국 무고한 사람을 집어삼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자일스는 안나를 내버려 두고 사형대로 올라가야 했다. 무책임하고 비겁한 죽음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이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 왔을지 모른다는 무의식 속의 속삭임은 그로 하여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다.

“오늘도 너에 대한 기사가 났어.”

루이제는 마치 평범한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온 사람처럼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신문을
펼쳐 들고서 헤드라인을 읽었다.

“‘간신히 살아 나온 생존자의 인터뷰’. 입스윈에 수감되어 있다가 벨담으로 송환되어 돌아온 여성에
대한 인터뷰야. 혹시 미카엘라 라이너라고 기억나?”

“아니.”

“하긴, 그 안에서 마주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 기억 못 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지.”

“안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나?”

자일스의 물음에 루이제는 신문을 한두 장 넘겨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있지. 네게 전해 줄 만한 별다른 얘기는 없어. 하지만 오늘 있을 방송으로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올 거야. 기대해도 좋아.”
“방송이라고?”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오늘 안나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거야. 네가 듣고 싶어 할 것


같아서 특별히 라디오도 챙겨왔다고.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잖아, 그렇지?”

그제야 식탁 언저리에 못 보던 라디오가 놓여 있었던 연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그림이었다. 자일스는 편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항의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 또한 없었다.

“……안나가 동의한 일인가?”

“그럼, 설마 우리가 억지로 붙들어다 방송국에 앉혀 놨겠어? 제 발로 들어간 거야. 강제성은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안나가 이런 일을 자처했다고?”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지.”

루이제는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터뷰를 잘 끝마치면 너를 만나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러자 자일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득 될 것도 없는 일을 순순히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지. 안나를 만날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지만 자일스는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다는 건 정말인가?”

“우린 거짓말은 안 해.”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지?

자일스는 목구멍 위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키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나의 얼굴을 마주 본다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안나를 마주하고 나면 그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스스로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것들이 자일스를 두렵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견뎌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듯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

원래대로라면 자일스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벨담이라는 나라가 안나까지 집어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 거다.

“뭐, 내게 별 의도가 있어서 들려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만약 듣고 싶지 않으면 말해. 라디오는 도로 가져가면 되니까.”

“아니야. 듣게 해 줘.”

그의 요청에 루이제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라디오


주파수를 조정했다.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던 라디오는 곧 선명한 말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정오에 예정되어 있던 거니까 곧 시작할 거야. 정말 후회 안 하겠어? 너에 대해 좋은 얘기가 나오지는
않을 텐데.”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인터뷰 내용 따위는 그를 상처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자일스는 그들이 안나에게 무슨 짓을 하라고


시켰는지 알아야 했을 뿐이었다.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적어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저는 레오 슈미트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게스트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명배우보다 더욱 유명하며, 벨담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연애사의
주인공이시기도 하죠. 매일 같이 신문 1 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분! 바로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마르 백작 영애님.”

“저도 반가워요.”

“인터뷰를 하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기분이 어떠세요?”

“무척 떨려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 드리려
노력할게요.”

“좋습니다, 비스마르 양. 편하게 엘로이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엘로이즈. 얼마 전에 조국인 벨담으로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입스윈과 벨담은 좀 다르죠?”

“아,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이제야 벨담 땅을 밟게 되었다는 게 억울할 정도였어요.”

“무사 귀환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듣자 하니 벨담으로 돌아오실 때 동행인이


있었다고요.”

“맞아요. 저는 자일스와 함께 왔어요.”

“음, 그랬군요. 그때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입스윈 혁명군이 우리 뒤를 쫓고 있었거든요. 가만히 있다간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자일스는 저를 데리고 벨담 국경을 넘겠다고 했어요. 물론 벨담으로 가면 그는 사형수가 되겠지만, 저는
살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요. 그는 저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거예요.”

자일스와 루이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자일스는 뭔가가 엇나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분명 대본이나


지시 사항이 있었을 텐데, 안나가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진행자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입스윈 혁명군에게 쫓기고 계셨다고요.”

“네, 맞아요. 자일스가 저를 지키기 위해 제 신분을 숨겨 주었거든요. 그게 들통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만 했어요.”
“결국 자일스 헤센이 벌여 놓은 일에 말려든 게 아닌가요? 만약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엘로이즈
양은…….”

“간단해요. 저는 죽었을 거예요.”

침묵은 찰나였지만 아주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장 이 방 안에 모인 세 사람마저도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안나의 목소리만이 낭랑한 어조로 이어졌다.

“많은 분들이 저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아실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 당사자가


직접 전한 이야기가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 지금 제가 해 드릴 말이 그 최초가 아닐까요? 그래서 먼젓번
약속한 대로, 저는 제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해 드릴 거예요. 우선 저를 구한 건 자일스였어요. 그는 제
인생에서 일어난 최초의 행운이었어요.”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왜냐하면 그 전까지도 저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거든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요. 제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했어요. 제 아버지 아시죠? 선대 백작님이요. 그 사람은 제가 요한 마이어와의
혼담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절 죽어라 팼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물론 신문에 나오지 않았겠죠?”

“엘로이즈 양, 지금 하시는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전부 다 진실이에요. 아버지는 매일같이 저를 불러다 때렸어요. 그리고


벽장이나 마루 밑에 가두곤 했죠. 제 몸에 난 흉터는 대부분 그가 만든 거예요. 난 그런 삶을 살아왔어요.
제가 행복한 아가씨였다는 얘기는 전부 다 지어낸 거짓말이에요. 저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나는 결국 내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준 사람을 만났어요. 그게 바로 자일스 헤센이에요.”

루이제의 시선이 그 쪽으로 옮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자일스는 라디오에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안나는 대본을 무시하고 온 벨담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오로지 그만을 위해…….

“물론 자일스가 죄를 지었다는 건 알아요. 사람을 죽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겠죠.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자일스 때문에 행복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건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떳떳한 감정이에요. 난 그걸 말하고 싶어요.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 무어라 말하든
상관없지만, 적어도 자일스에 대한 내 감정을 모욕하게 둘 수는 없어요. 자일스는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이제 이 인터뷰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독백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놀랍게도 안나는
자일스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일스, 거기 있어? 네가 듣고 있는 거 알아.”

“안나.”

그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안나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안나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랬었지. 너는 나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던 거라고. 나를 포기할 수 없어서 네 삶도 포기하지


않은 거라고. 나는 네가 앞으로도 계속 버텨 주었으면 해. 계속 버텨서, 내 옆에 있어.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왜냐하면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자일스는 굳어진 채 안나가 하는 말을 들었다.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자일스, 네 삶을 포기하지 마!”

방송이 끊겼다.

<73 화>

나는 녹음실에서 거의 끌려 나오다시피 했다. 관계자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무마해야 할지 긴급회의를


여는 동안 들이닥친 아렌트가 내 팔을 잡고 한산한 복도로 나를 끌어냈다.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벌인 짓이 그를 화나게 하기에는 충분하리라는 사실을 나도


모르진 않았으니까.

이건 전국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생방송이었다. 아마 라디오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 말들을


들었을 거다.

아렌트는 내게 다짜고짜 화를 내는 대신 안경을 벗고서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정보국 사람이라도 그가 앨버트 같은 부류는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겠다. 앨버트였다면 자신을 거스른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을 테니까.

그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 대신에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로이즈 양,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인지하고 계십니까?”

“내가 쇼를 망쳐서 미안하네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그럼 내가 있지도 않은 일을 마이크에 대고 나불거릴 거라 생각했어요?”

“저와 약속을 했잖습니까. 당신에게도 그에 걸맞은 대가를 제시했고요.”

“그래요. 당신을 속인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할 거라고요. 아까 내가 한 말 들었다면 당신도 이해해야만 해요. 난 내 삶 속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들을 내 손으로 먹칠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로.”

물론 아렌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냉랭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나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로이즈 양……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이런 행각을 벌이셔 봐야 당신에게 절대 좋은


영향이 되돌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상관없어요.”
“이런 식으로 헤센의 편을 드시면 언론과 대중의 관심만 한 몸에 받게 될 뿐입니다. 자일스 헤센이 져야
할 몫을 함께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거 괜찮네요. 애초에 나한텐 편하게 발 뻗고 살 생각 따위 없었거든요. 내가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자일스를 비난해도 말이죠, 온 나라가 나에 대해 쑥덕거리는 건 마찬가지예요. 어차피 모두의 관심을
받을 거라면, 난 차라리 자일스의 곁에 서는 쪽을 택하겠어요. 그는 내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어요.
그런데 이깟 돌 따위 같이 못 맞아 주겠어요?”

“그는 어차피 죽을 사람입니다.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 겁니까?”

“누가 자일스가 죽게 놔둔대요?”

아렌트는 나를 설득할 의지를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손목시계와 주변을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사저로 모셔다드리죠.”

인터뷰 방송은 이렇게 끝을 고했다. 아렌트와 나는 내가 보기 좋게 망쳐 놓은 프로그램을 뒷수습하기 위해


애를 쓰는 방송국 관계자들을 내버려 두고 건물을 나섰다.

나는 그가 몰고 온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가 손을 써 놓은 건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기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운전하는 내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속이 뒤집어졌겠지. 그러고도 남을 거다. 하지만 이럴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 또한 아니기 때문에 나는 굳이 사과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자일스뿐이었다.

아렌트가 말한 대로 나는 대중의 귀에 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발을 했다. 사회는 그들만의


방식대로 내게 앙갚음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고분고분하게 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단 말인가?

자일스와 나는 운명 공동체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일스라는 존재에 묶여서 똑같이


손가락질 받을 거라면 나는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신거리기보다는 차라리 끝까지 자일스를 놓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한 가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렌트가 말을 꺼냈다.

“헤센의 편을 드신다 한들 그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정된 일입니다. 그 결정을 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만일 있다고 해도 그게 엘로이즈 양은 아닐 겁니다.”

“…….”

“헛수고로 돌아갈 일을 위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엘로이즈 양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헛수고일지 아닐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죠.”

“엘로이즈 양.”

“제발 그 이름 좀 그만 불러요! 그건 내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요.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에요.


엘로이즈는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요. 내가 내 손으로 그 애를 죽였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내가 화를 냈다.
“그리고 어쭙잖게 내 편인 척할 생각 마세요. 처음부터 당신은 내 편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만약 정말 나를 생각했더라면, 당신은 이런 거지 같은 인터뷰 제안을 들이밀지도 않았겠죠. 당신이
정말로 내 편이 되고 싶었다면 내가 아니라 언론사 입을 막았어야죠. 나는 멍청이가 아니에요. 누가 진짜
내 편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요.”

승용차가 저택 앞에 서자마자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아델레였다.

“안나! 괜찮아요?”

“물론이죠. 방송 들었어요?”

아델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이랑은 조금 달랐죠, 안 그래요?”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자일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뿐이에요. 부디 그도 듣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녀가 뭔가를 더 묻기 전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혼자 있고 싶었다.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 삶을 포기하지 마.

안나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당연한 말이었는데도, 그는 안나의 말을


듣는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그의 목숨은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자일스는
안나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러니 절대 마음대로 내버릴 수는 없으리라.

지금까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의 정신은 다시금 선명해졌다.


스스로 자책하면서 운명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그는 오히려 계속해서 맞서 싸워야만 했다.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안나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또한 안나를 위해 살아남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자기 연민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안나를 지킬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오만이라 해도 좋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스스로가 만든 진창에서 안나를 빼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안나는 그의 사랑이자 사명이었으며 먼 길을 돌고 돌아 끝내 마주하게 될 종착지, 세상의 끝이었다.


아직 끝에 서려면 한참 남지 않았는가.

그녀는 자일스의 엔진에 끝없이 연료를 던져 넣는 존재였다. 안나의 곁에 있는 한 자일스는 멈춰 설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움직이게 하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안나는 불타오르던 엔진이 점점 식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다시금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자일스는 안나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를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는 안나뿐이었다.

그러니 자일스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야만 한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편 루이제는 라디오의 전원을 껐다. 이제 실내는 다시 적막으로 가득 찼다. 잠시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루이제였다.

“이런, 보란 듯이 망쳐 버렸네.”

“안나가 괜찮을까?”

“집으로 잘 돌아갔을 테니 걱정하지 마. 물론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르지. 아직은 말이야.


그나저나 너, 안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뜻이지?”

“뭔 짓을 했기에 한 여자가 네게 그리도 맹목적으로 굴게 된 거냔 소리야. 네 행적을 살펴보자면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은 절대 못 될 텐데.”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명백한 해답을 알고 있지는 못했던 까닭이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자일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분에 넘칠 정도였다.

“넌 살인자야, 자일스 헤센.”

“나도 알아.”

“살인자를 사랑할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미치지 않은 한 말이야.”

“…….”

“그래서 말인데, 안나의 인생을 생각해서라도 네 본모습을 이만 드러내는 게 어때? 네가 맨정신으로 그


많은 동향 사람들을 죽였을 리가 없어. 내가 아는 자일스 헤센이라면, 사관생도 시절의 그 자일스라면
친구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총으로 자살했을 거야. 하지만 넌 변했어. 네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속일
수 있겠지만 나까지 속일 수는 없어. 난 네가 무결했던 시절을 아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점잖은 척은
그만하고 편하게 있으란 말이야. 응?”

루이제는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대놓고 의심을 드러낼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 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살인자의 얼굴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루이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만 솔직해져, 자일스.”

“네가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너, 지금 내 앞에서 생도 시절의 네 모습을 꾸며 내고 있잖아. 내 말이 틀려?”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추측이었다. 그는 이미 사관 학교를 다닐 적에


스스로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그 시절의 너라면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었을 거라고.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말이야. 넌 분명히 뭔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 거야. 적어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자일스 헤센과는 다른 사람으로.”

“지금 무슨 소리를…….”

“나는 안나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만 진짜 네 목소리를 드러내, 자일스. 날 영원히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저택을 밝히고


있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하필이면 창문까지 모조리 막아 놓은 탓에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손전등을 밝혔다.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잠깐…….”

손전등 불빛이 멀어졌다. 이제 그들은 완연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자일스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정전이 일어난 틈을 타 도주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군인들의 시야를 지금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차단시킬 기회는 없을 것이다.

도망쳐야 할까? 수갑이 채워져 있기는 했지만 체술을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가 도주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귀에 낯설고도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힘겹게 신음하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74 화>

루이제 고틀리프는 쾌활하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소녀였다. 특유의 낙천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을 타고난
그녀는 한번 마음먹은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저질러 버리곤 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생도 시절에는 가벼운 징계도 많이 받았다. 어쨌든 루이제는 그런 소녀였고, 모두가


그녀를 작은 골칫덩어리라고 부르면서도 호감을 가졌다.

그런 루이제에게도 한 가지 약점은 있었다.

루이제는 어릴 적, 달빛조차 희미한 야밤에 바닷가에서 놀다가 그만 파도에 휩쓸린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 친오빠가 겨우 구해다 던져 준 선박용 튜브 쓰레기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말이다.

그날 이후 루이제는 암흑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한 줌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 갇히면,


그녀는 어린 시절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숨 한 번 쉬지 못해 죽을 위기를 겪던 때를 떠올리곤 했다.

머릿속 아주 깊은 곳에 아물지 않는 흉터를 남긴 트라우마는 루이제가 다 자랄 때까지도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던 날이었다. 소등 시간이 다 되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겠지만, 그 때까지는 꿋꿋이 버틸 요량으로 책을 붙들고 있었다.

루이제의 곁에는 자일스도 있었다. 자일스 헤센.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사관 학교에 들어와서 군인이
되기를 자처한 괴상한 놈. 모두가 그에게 대체 이런 곳엔 왜 기어들어 왔냐고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을
들은 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일스는 오히려 루이제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서로만의 별종 같은 면모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밤늦게까지 함께 공부를 하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함께 몰려다니는 무리 중 일부였고, 그 무리 중에서도 특히나 가까운 사이였다.

물론, 친구로서 그랬다는 거다.

“언제 들어갈 거야?”

책을 보던 자일스가 물어 왔다. 루이제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20 분 뒤에는 가야겠지.”

“이번에는 좀 서두르자. 저번에 소등 시간에 겨우 맞춰서 들어갔잖아. 또 걸리면 이번엔 훈계만으로 안


끝날걸.”

“알았어, 알았어. 거의 다 봤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15 분 뒤에 가는 거다.”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침묵 속에 빠졌다. 도서관에 남은 사람도 그들 외에는 거의 없던 까닭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제 됐다 싶었던 루이제가 책을 덮으려던 순간, 갑자기 불이 나갔다. 정전이 된


것이었다. 자일스는 갑작스레 그들을 덮친 어둠에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주위에는
비상등으로 사용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소등 시간은 아직인데. 루이제, 아무래도 정전인가 봐. 그냥 지금 빨리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러나 루이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자일스가 상황 판단을 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가 위험을 감지한 건 루이제가 내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도가 막힌 사람처럼 켁켁거리며


밭은기침을 해 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의자 쓰러지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루이제!”

자일스는 소리가 난 쪽을 더듬어 쓰러진 루이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루이제가 정말로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 일어난 일이라 그조차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호흡 곤란으로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던 자일스는 루이제를 품에 끌어안고


다급히 속삭였다.

“괜찮아, 그냥 정전이 된 거야. 그게 다야. 루이제, 나 여기 있어. 정신 차리고 따라 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어 봐. 다시, 들이마시고. 옳지. 그렇게. 잘 하고 있어. 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우린 바닷속이 아니라 도서관에 있잖아.”

1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정전 상태가 정확히 몇 분이나 지속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자일스가 루이제를 붙들고 고군분투하던 끝에, 다시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때 자일스는 눈물로 엉망이 된 루이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불이 들어오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 난 못 해…… 난 못 하겠어. 난 군인이 아니야……. 고작 어두워졌다고 병신 새끼처럼 구는 게 무,


무슨 군인을 할 수 있어? 난 포기할래. 난 안 될 것 같아.”

“루이제 고틀리프.”

루이제와 자일스의 눈이 마주쳤다. 나무라듯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자일스가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 이만 자러 가야지.”

그는 루이제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짐을 대신 챙겨 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이제는


아직도 울음기가 채 가시지 못한 목소리로 외쳤다.

“넌 내가 가망이 있다고 생각해?”

“루이제.”

“임관하면, 내가 임관하고 나서 전쟁이라도 터지면 그땐 내가 제일 먼저 죽을 게 뻔해. 못 봤어? 내가


고작 어두워졌다고 주저앉아 버린 거 못 봤냐고.”

“넌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어. 군인은 혼자 싸우지 않아. 그 사실을 잊지 마. 누구나 약점 하나쯤은


갖고 있지. 그래서 동료를 두는 거고.”

할 말을 잊은 루이제의 품에 가방을 들려 주며 그가 씩 웃었다.

“이제 정말 가자. 늦었다고 혼나겠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제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랬던 날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루이제. 루이제 고틀리프!”

자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잠시 갈등했다. 루이제를
버리고 도주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다시 불이 들어올지 몰랐고,
루이제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기회가 있다면 아마 지금뿐이 아닐까.

끝내 자일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출구가 아니라 루이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각에 의존하며
식탁을 빙 돌아 반대편으로 옮겨 간 자일스가 루이제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그는 루이제가 그에게 기대게 한 후 차분하게 지시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숨 쉬어. 정신 차리고. 들이마셔. 들이마시라고. 이제 다시 내쉬어. 다시. 정신 차려, 고틀리프. 불이


곧 들어올 거다. 그때까지 정신 놓지 말고 숨 쉬어.”

갖은 노력 끝에 그녀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루이제는 이제 스스로 자일스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증상이 도질 때 루이제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 붙잡을 만한 것이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다 보면 그나마 견딜 만해졌다. 이상하게도 그걸 제일 먼저 알아차려 준 건 자일스였다.

얼마 안 가 장내가 다시 환해졌다. 자일스는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그는 강한 힘에 의해 떠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씨발, 나한테서 떨어져!”

루이제는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로 일어나 자일스를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아직 호흡을 갈무리하지 못해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일스는 반항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루이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총을 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살인자 죄수 따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겠지.

그는 루이제가 스스로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넌, 넌 네가 충분히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까 이딴 짓거리를 하면서 날 속이려 드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네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덜떨어진 머저리인 줄 아는 건가? 허튼짓하지 마! 나는 네가
변했다는 걸 알아! 너는, 너는 배신자고 또…….”

“그래. 나는 사람을 죽였지. 친구들도, 내 하나뿐인 누이마저도 죽도록 내버려 뒀어.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겠지.”

“잘 아네. 그럼 연기 따위 집어치우고 진짜 네 모습을 드러내. 이건 네 진짜 모습일 리가 없어. 내가


알던 자일스 헤센은 사라졌어.”

“난 연기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아.”

“개소리 집어치워!”
“루이제, 진정해. 넌 지금 많이 흥분했어.”

그 순간 루이제는 생도 시절의 자일스가 그의 모습에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예전과는 같지


않았지만, 반대로 루이제가 예전에 알았던 자일스 헤센 그대로이기도 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루이제는 권총 머리로 자일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참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던 자일스가 여기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사회가 선전하려 그리 애를 쓰는 희대의 악마가 아니라 ‘그’ 자일스 헤센이 그토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니. 제정신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배신감? 절망?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루이제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과거의 친구는 완전무결하지
않았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고,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널 이런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자일스를 노려보다 권총을 집어넣고 홱 몸을
돌렸다. 그 사이 돌아온 부하가 뭔가를 묻는 듯했으나 루이제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자일스는 두 손이 결박된 채로 균형을 잡고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이제 훔친 휴대용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75 화>

루이제는 안전 가옥을 나서면서 입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품을 뒤져도 라이터를 찾을 수 없었다. 안 가져왔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녀에겐 라이터의
행방에 대해 생각할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놈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이 자존심을 긁어 댔고, 두 번째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으로도 모자라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는 것이었다.

루이제는 심지어 자일스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아마 윗선에서 이 사실을 알면 경을 칠지도


모르는 일일 테다. 자일스는 국가의 철저한 계산 아래에 진행될 재판이 있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머물러야
했고, 그래서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안전 가옥까지 마련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보다는 스스로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격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곧 마음속에 감춰진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과도 같았다. 자일스 헤센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들키고 말았다는 게 그녀로 하여금 담배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일스만이 알아챘다고 볼 수도 없었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제는 자일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폭행했고, 그건 자일스를 평범한 죄수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일스 헤센은 그녀가 맡은 죄수였다. 동시에 친하게 지냈던 사관 학교 동기이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과거 잔상의 파편 중 일부이기도 했다. 그 점이 루이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더욱 혼란스러운 건……
그녀가 알던 과거의 자일스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일스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검은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댔던
어린아이처럼, 생존하려는 본능에 목매달았던 인간. 물론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었지만, 결국
악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물론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렇다면 루이제는? 그녀는 어땠는가? 그녀야말로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수류탄으로 그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그렇다면 루이제와 자일스를 구별 짓는 건 뭐란 말인가? 군인과 민간인의 차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들은 전부 의미 없었다. 어차피 자일스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는 죽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 처형당함으로써 죄를 갚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루이제 또한 라디오 방송에서 외치던 안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안나는 자일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야 했다. 하지만 안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자일스의 곁에 서는 쪽을 택했다. 그것도
벨담의 전국민이 듣는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지? 만일 자일스가 정말 교활하고 악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다른 이에게서


이토록 확고한 지지와 사랑을 얻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루이제는 문득 안나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심리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녀와
대화를 하고 나면 마음을 정리하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일스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는 건 안나 키팅뿐이었다.

나는 창문 너머로 검은 승용차가 대문 앞에 서는 걸 보았다. 차를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 왔다. 보나마나


아렌트가 찾아온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면 날 방문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게다가
저런 번듯한 승용차를 타고 올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렌트를 돌려보낼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에 나는 한숨만 푹푹 쉬어 댔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온 거지? 아니면 저번에 내가 라디오 방송을 망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고
쫓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 날, 나 또한 저택으로 배달된 신문을 확인했었다. 굳이 한 장 한 장 넘길 필요도


없었다. 1 면에 떡하니 나에 대한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으니까.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살인마에게 세뇌당한 여인의 고백’이었던가? 제일 점잖은 신문에 실린


기사마저도 직설적인 화법을 가차 없이 사용했다. 나는 기사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았다. 헤드라인 한
줄만으로도 내용이 머릿속에 훤히 들어오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방송에 참여하겠다고 한 건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다. 어딘가에 갇혀 있을 자일스에게 내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 말이다.

그가 들었을까? 들었다면 좋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사용인이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건네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요.”

나는 하는 수없이 대답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사용인을 따라서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내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그를 만나면 대체 뭐라고 응수해야 하지?

하지만 응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인물은 아렌트가 아니었다.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군인이 테이블 앞에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안나 양.”

“네…… 안녕하세요.”

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청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을 텐데,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우리 둘 다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죠?”

“아, 반가워요. 소령님. 자리에 앉으세요.”

그녀의 말대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게다가 소령씩이나 되는 거물이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탓에 얼떨떨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벨담 군인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던 내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루이제가 먼저 운을 떼었다.

“벨담에서의 삶에는 익숙해지셨습니까?”

“사실, 입스윈에서와 그리 다르지 않아요.”

“하긴 그렇겠지요. 이웃 나라인 만큼 생활 양식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저…….”

나는 루이제가 입은 군복에 눈길을 주었다. 그가 군인이라면, 혹시 자일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자일스는 무사한가요? 많은 건 바라지 않을 테니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만 알려 주세요.”

“자일스 헤센 말이죠.”
루이제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공백을 둔 후 대답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어있습니다. 사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혹시 고문 같은 걸 받지는 않았나요?”

“왜 당연한 걸 물으시죠?”

의미심장한 대답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표정을 살피던 루이제가 어느 순간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롱을 당한 기분이 들어서 내 표정이 일순 구겨졌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러니까, 정말 사실이었구나 싶어서요.”

“뭐가요?”

그녀는 한 번 터진 웃음을 좀체 가라앉히질 못했다. 나는 이게 웃을 만한 일인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화를 냈다.

“그만해요! 당신에겐 장난일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아니라고요. 자일스는 내 소중한 사람이에요. 물론


당신은 비웃겠죠. 저 바깥의 다른 사람들처럼 신문만 읽고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부류일 테니까요.
나는 자일스를 사랑해요. 당신도 그걸 다 알고 왔으면서 이런 장난을 치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알았어요. 미안해요, 안나 양.”

루이제는 겨우 웃음을 그쳤다. 나는 왠지 몰라도 그녀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제는
커다란 사건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겪었고, 그 때문에 어딘가가 살짝 엇나가고 만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전쟁 때문이겠지. 그녀 또한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테니까. 그래도 난 이런 처우는 용서할 수


없었다.

루이제가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당신이 자일스에 대해 진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거든요.”

“그걸 당신이 왜 알려고 하는데요?”

“안나 양, 이제부턴 사실만을 말씀드리죠. 자일스는 잘 있어요. 그는 감옥이 아닌 다른 장소에 홀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특별히 취급해야 할 죄수이니까요. 물론, 고문도 없었어요.”

“……날 왜 찾아온 건지 말해요.”

“당신이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말들을 들었어요.”

결국 그 이야기인가? 그러나 피로감이 채 몰려오기도 전에 루이제의 다음 말이 내 주의를 사로잡았다.

“저 혼자만이 아니라, 자일스와 함께 들었죠.”

“자일스와 함께 있었나요?”

“저는 매일 자일스를 면회합니다. 제가 자일스를 관리하고 있거든요. 그런 만큼 많은 건 알려 드릴 수


없는 점 이해하십시오.”
“어쨌든 자일스는 무사하다는 거죠?”

“네.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를 안전하게 구금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그러니 그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자일스는 곧 사형 선고를 받을 텐데 신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니.

그래도 자일스가 내 말들을 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조금이나마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방송을 듣고 저는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안나 양, 당신은 자일스 헤센을 변호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멋대로 행동했어요. 그건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 자일스 헤센을 위해 누군가가 위험 부담을 감수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알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도 아닌 모두의 미움을 받는 희대의 살인자를 변호하다니 말입니다.”

루이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안나 키팅, 당신이 자일스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죠?”

<76 화>

“꼭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당신이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와 함께했던 날들을 삶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라고 표현하셨죠.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그녀의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어째서 남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지? 그건 자유로운 감정이었다. 논리적인 인과나 타당한 이유로써 성립하는 게 아니었다. 노을이
지는 어느 날, 홀로 바다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다 문득 밀물처럼 스며드는 감정과도 같은 것이지.

하지만 루이제는 나를 시험하거나 떠보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녀는 내가 왜 자일스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벨담군 소령이 사사로운 감정에 대해 캐묻기 위해서 방문했다는 건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지만,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들은 전부 잊어야 해요. 대부분이 사실과는 다르거든요.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처음부터 자일스를 사랑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처음에는 그를 증오했었죠. 동시에
두려워했었고요. 하지만 누구나 나 같은 삶을 살아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타인의 이유 모를
호의를 전혀 믿을 수 없었던 때니까.”

루이제는 내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나는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귀족의 딸이었고…… 그는 혁명군 장교였어요. 당연히 그가 나를 해치려 할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몸을 함부로 대할 줄 알았고요. 하지만 자일스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적이 없었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가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러 온 건, 내게 코트를 건네주었던 건 그냥 조금이라도
나를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던 거예요. 그럼으로써 그 또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이야기를 건네면서 점점 내 감정 속에 빠져들었다. 자일스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처음 보는 장교에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물론 그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내 몸을 탐하지도 않았고, 나를 때린 적도
없어요. 자일스는 내게 순수한 호의라는 걸 처음 보여 줬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가 내 안위를 그의 것만큼 아꼈고 우리가 서로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가 자신의 누이를 직접 죽였다는 건 알고 있나요?”

나 또한 그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자일스가 셀레스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던 탓에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나는 그 기사를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었다.

“그건…… 사실인가요? 자일스가 정말 셀레스트를 죽였나요?”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사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는 혁명군에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했고, 그 증거로 자신의
누이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겠죠. 자신의 가장 끔찍한 치부였을
테니까요. 이 사실을 알고도 당신은 그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무어라 반박하려던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음을 추슬렀다. 자일스가 셀레스트를 죽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하지만 그런 사실은 내가 알던 자일스와는 너무나도 괴리감이 컸다. 개연성이 뒤죽박죽인 이야기처럼.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가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자일스가 누이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요. 분명해요.”

“그걸 안나 양이 어떻게 확신하죠? 그는 이미 친구들과 지인들을 죽인 전적이 있는데.”

“자일스는 가족을 사랑했어요. 그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요. 그가 내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어요. 물론 셀레스트가 등장하는 이야기였어요. 만약 그가 정말 셀레스트를 죽였다면 그런 얼굴을
하고서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요? 난 아니라고 봐요. 한 가지만은 확실해요. 자일스는 혁명의
불꽃이 되어 주변을 다 태워 버렸지만, 그럼에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과거의 기억들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일스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내 말을 들은 루이제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도 같았고, 무언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나 양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죠?”

“자일스가 내게 직접 말해 줬어요. 처음에, 그는 과거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다 내버렸다고 했죠. 품고


있다간 미쳐 버리고 말 것 같다고. 하지만 나중에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고 내게 고백했어요. 내게
벨담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면서, 그것들이 없으면 정말 괴물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말했어요.”

“…….”

처음과는 달리 이제 루이제의 안색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에게선 더 이상 나를 도발하거나 의심하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생각해 냈다.

“소령님, 저와 처음 대면하실 때부터 저를 안나라고 부르셨죠.”

“네. 그게 당신 이름 아닌가요?”

“벨담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저를 엘로이즈라고 불렀어요. 내가 대외적으로 사용한 이름이 뻔히


있는데도, 저를 안나라고 불러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왜 저를 엘로이즈라고 부르지 않은 거죠?”

“글쎄요.”

상념에서 잠시 빠져나온 루이제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아마 엘로이즈보다는 안나 쪽이 제게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자일스는 매번 당신을 안나라고 부르니까요.


하루도 그 이름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죠.”

“……자일스는 내가 이름을 바꾸고 나서,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내 새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줬어요.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죠. 아직도 내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선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안나 키팅이라는 이름은 대충 떠오르는 대로 지은 것이었다. 자일스의 추적을 피하고


싶었고, 릴리나 엘로이즈라는 낡은 이름들을 계속 쓸 수는 없었으니까.

나도 내가 새로운 이름에 이토록 애정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직접 지은 내 이름은 곧 내


정체성이자 자유 의지와도 같았다. 어린 시절에 이용당하며 살기만 했던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정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의 목소리로 내 진짜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이름을 평생


내버리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자일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루이제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운명은 정해졌고, 아무도 바꿀 수 없어요.”

“난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예요. 자일스는 나 때문에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 순간 나는 알았어요. 내가 살아남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해 내는 건 다른 의미로 가치 있다는 사실을요. 내가 이 짧은 생을 살면서 이룰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좋은 일을 망쳐 버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만 나 스스로의 감정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루이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말해 봐요, 안나. 자일스는 어떤 사람이죠?”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진정으로 묻고 싶었던 건 당신이 자일스에게 가진 감정에 대한 것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나도


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얼굴 위에서 눈물의 흔적을 지워 낸 나는 루이제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나만큼이나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착각이겠지. 벨담군 소령이 자일스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루이제는 내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자일스 헤센에 대한 당신의 견해입니다. 그는 어떻죠? 당신에게 다정했나요? 혹은


때때로 선을 그을 줄 알았나요? 자일스는 제 앞에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참 낭패인
일이죠. 당최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심지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모르고서 그를 관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죠. 자일스 헤센을 곁에서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 순간 나는 루이제가 자일스와 일면식 한 번 없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일스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확언할 수 없어요. 사람마다 기준을 다르게 둘 테고, 그 또한 저지른 죄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자일스는 내가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내 목숨을 구하고,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어요.”

루이제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곤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알베르트가 당신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를 알겠군요.”

“네?”

“그는 종종 난폭해진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사람 하나는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았거든요.”

그녀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화 즐거웠어요, 안나 양. 아, 사용인을 통해 내어 주신 이


다과도요.”

나는 루이제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군모를 옆구리에 끼운 채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루이제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나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루이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루이제는
그대로 문 너머로 사라졌다.

<77 화>

11. 탈출로

“당신이 엘로이즈 양을 만나러 갔다던데요.”

루이제는 아렌트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대답 대신 담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일 뿐이었다. 아렌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런 겁니까?”
“뭐가.”

“그녀에게 용무가 있었다면 저에게 말씀을 주셔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직접 묻고 싶었을 뿐이야.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이었다고.”

루이제가 짜증을 내자 아렌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호기심 하나를 해결하고자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찾아갔다는 겁니까?”

“별말 안 했어. 라디오 방송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었을 뿐이야. 솔직히 말해 봐, 너도 안나 양이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하나도 몰랐잖아. 그러니까 일을 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던
거겠지. 안 그래?”

“그 일은…….”

“됐어, 변명할 필요 없어. 나도 네게 해명 따위 할 생각 없고. 누군가는 알아야 할 것 아니겠어? 그녀가


정말로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건지 말이야. 나는 이 임무에 직접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이야. 알 건
알아야지.”

아렌트의 인상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찮은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요새 루이제가 평소보다 담배를 더 많이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쟁 이후 골초가 된 그녀였지만,
그나마도 요새는 더하다.

뭔가가 그녀를 신경 쓰이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엇일까?

“혹시라도 자일스 헤센을 다루는 게 부담 되신다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저에게도 눈치란 게 있습니다.”

“홀츠만.”

루이제가 담배를 거두고 그를 쏘아보았다. 불면증과 묵은 스트레스 때문에 망가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위 장교로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권위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내가 자일스 헤센을 위해 딴생각을 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대체


뭐야? 똑바로 말해.”

“상부에서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하실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보고하든지 알아서 해. 난 벨담을 위해 대전쟁까지 치른 군인이야. 고작


배신자 하나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기라도 할 것 같아?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얄팍해 보이나?”

“……아닙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만 가 봐. 문제가 있다면 내가 먼저 말할 테니 안심하고 있어. 그리고


혹시나 내가 딴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자일스 헤센이 사형당하리라는 사실은 아무도 바꿀 수
없어. 너도 그걸 잘 알고 있겠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아렌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짧은 목례와 함께 그가 루이제에게서 멀어져 갔다.
루이제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담배가 맛이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이게 담배 때문인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젠장.”

그녀가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돌연 군인들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두 손이 결박된 채 침대맡에 앉아 있던 자일스는 예고도 없이


군인의 팔에 붙들렸다.

“가만히 있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항할 생각일랑 그에겐 없었다. 군인은 그의 몸을 이곳저곳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일스를 노려보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다른 군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이 있을 뿐, 텅 비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성과를 올릴 리가 만무했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 그들이 말했다.

“여긴 이상 없습니다.”

그제야 이름 모를 군인이 자일스를 놔주었다. 그는 여전히 자일스를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쓸데없이 잔머리 굴릴 생각 마.”

군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경고하는 것뿐이었다. 자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들이닥쳤던 군인들이 하나둘씩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다시 외로운
침묵에 휩싸였다.

자일스는 그들이 수색 작전을 펼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분명 라이터 때문일 거다. 루이제는 라이터가
사라진 게 우연일 거라 생각할 만큼 속 편한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침대맡에 앉았다. 아직도 문밖에서는 한 명의 군인이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재판 날짜를 기다리는 온순한 죄수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만은 그렇지 않았다.

자일스는 정전이 일어났던 그날에 대해 생각했다. 일반 가옥에 전기가 끊기는 일은 전쟁 이전에도 드물게
일어나곤 했다. 그러니 벨담이 대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언제 정전이 일어나도 전혀 놀랍지 않게
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갈등했었다. 불이 나간 틈을 타 도망쳐야 할지, 혹은 눈앞에서 쓰러진 루이제를 구해야 할지…


…. 그러나 그는 결국 루이제를 구했다. 새파랗게 어린 사관생도 시절에 그랬듯이, 호흡 곤란이 찾아온
루이제를 붙들고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안나가 라디오를 통해 건넨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순순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자일스는 루이제가 경황이 없는 사이 몰래 그녀의 품속에서 라이터를 훔쳤다. 더 쓸모 있는 물건을 훔칠


수도 있었겠지만 가판대에서 물건 고르듯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짧은 소동이 끝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자일스는 어두운 밤을 기회 삼아 수갑의 툭 튀어나온 부분으로


침대 매트리스 밑을 찢었다. 물건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찢기까지는 몇 시간 정도가 걸렸다.
군인은 밤에도 보초를 서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라이터는 매트리스 아래쪽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의 유일한 기회였다. 자일스는 이곳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안나에게 또 다른 절망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사는 동안 수많은 죄를 저지른 그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안나가 그를 원한다면, 그는 살아갈 것이다. 죽음이라는 형벌은 그녀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받아도 충분했다.

내가 방송을 망친 일을 빌미로 앙갚음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는 멀쩡했다. 갑자기 나도


모르는 새에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정보국은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마 나를 건드리지 않는 쪽이 그들에게 더 이로울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처럼.

나는 신문 읽기를 멈췄다. 그런 일에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세상은 자일스와 나를 가지고


쇼를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항의하면 할수록 그들이 더욱 신나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하녀에게 더 이상 신문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는 방문객들이 나를


만나기를 종종 요청해 오곤 했다.

그들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마 기자들이겠지. 그들에게 무서운 것이란 없고, 기삿거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맹수의 굴에도 들어갔다 오고도 남을 작자들이니까.

나는 방문객 요청이 올 때마다 거절했다. 내가 기자들을 만나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떻게든 내 마지막 남은 살점까지 다 뜯어 가려고 기다리는 까마귀 떼와도 같았다.

신문이라는 매체에 신물이 났던 나는 기자들을 모조리 돌려보냈다. 모르는 이들이 내 저택으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아렌트는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외쳐 봤자 아무도


듣는 이가 없었다. 나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권력이란 백작가의 가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사소한
말에도 사람들이 귀 기울여 경청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말해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에게나 내


이야기를 전달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신문에 보도되던 이야기들이 전부 진실만은 아니라는 걸 알릴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해도 좋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나.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저하며 말했다.

“저, 그게……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저번에 오셨던 분들과 다를 것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기자인가요?”

“예, 아무래도 그래 보입니다.”

어제 같았다면 더 듣지도 않고 당장 내쫓으라 했겠지만, 나는 몇 가지를 더 묻기로 했다.

“어느 신문사에서 나왔는지는 말하던가요?”

“신문사가 아니라 잡지사랍니다. ‘글뤼비흐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나는 그 잡지사에 대해 알았다. 최근에 사람들이 주로 찾는 신문과 잡지들을 모아 꼼꼼히 훑어본 적이


있었다. 내 이야기를 제멋대로 조각내어 왜곡하지 않을 곳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잠시 생각하던 내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대화를 해 봐야겠어요. 응접실로 모시세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하녀에게 당부했다.

“단, 한 명만 들어올 수 있어요.”

<78 화>
손님을 안으로 모셨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이제 그곳에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기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근래 들어 손님을 꽤 자주 맞이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선택이었다. 나는 이 ‘손님’을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다. 백작가의 이름값에


걸맞은 티 세트가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나는 자연스레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냥 편하게 대하세요. 어차피 우리뿐이잖아요.”

그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을 쓰고 나름 유행하는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만진 그녀는 다른


기자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러니까, 내 관점으로 보자면 덜 사기꾼 같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자라기보다는 사인을 받으러 온 독서광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사람이었다.

나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게 영 믿기지 않았는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두 눈이 호기심과 열의로 빛나고


있었다.

돌연 기자가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아니타 뮐러라고 합니다. 글뤼비흐네 잡지사에서 나왔고요.”

그러면서도 아니타는 확신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귀족에게 이런 식으로 악수를 청해도 되나? 물론 나는
그런 귀족식 예법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았기에 흔쾌히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저도 읽어 봤어요.”

“정말요?”

“네. 아주 흥미롭던걸요.”

일부러 애매모호한 단어를 골랐는데도 아니타의 낯빛이 금세 상기되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잡지사는 주로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꼭 가수나 배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들이라면 저희 잡지사의 페이지를 채우기에 충분하죠. 글뤼비흐네는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뤄 왔어요. 그중에서도 저희는 스캔들 전문이죠.”

“더 자세히 말해 봐요.”

“저희는 스캔들을 찾아다녀요.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세요. 다른 황색언론처럼 도마에 오른 사람들을 물고


뜯는 그런 짓은 하지 않으니까요. 저희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말의 진실입니다.
자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진실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없죠. 레이디께서 출연하신 라디오 방송이
저희에게 영감을 주었어요.”

글뤼비흐네 잡지사의 특성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가십거리에 오른 인물들의 인터뷰를 싣곤


했다.

거기에 자극적인 요소를 위한 과장이나 악의적인 편집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던 나는 이
잡지사야말로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글뤼비흐네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온 벨담 국민이 듣는 앞에서 진실을 전달하려 하신 건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방문을 결심하게 된 거고요.”

“제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죠?”

“예?”

아니타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자일스 헤센은 극악무도한 배신자이자 살인자예요.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의 죽음까지도 모욕하고,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약혼자도 죽였어요. 그리고 제 몸을 노리고서 착한 남자를 연기하며 제게 접근했죠.
저는 긴 시간을 고통받다 그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벨담 국경을 넘었어요. 벨담에서는 이게 진실이에요.
사람들이 믿는 건 바로 이 얘기라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어떻게 레이디의 말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하시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한 적도 없지만 내 말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찍어 낸 종이 쪼가리에 실린 말들만 믿었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는 나인데도 말이다. 모든 걸 눈앞에서 보고 겪은 건 나인데.

아니타를 비롯한 이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그럼 당신들만이 특별한 이유는 뭐지?

이미 조사를 마쳤다지만, 나는 한 번 더 그들을 검증해야만 했다. 계획이 흐트러질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야 했으므로.

“그게 거짓말이라면, 왜 굳이 전국민이 듣는 앞에서까지 말하려고 하겠어요?”

“제가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잖아요.”

“누굴 위해서요? 자신에게 하나도 득 될 것 없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아직 자일스에게서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요? 신문에서 말하는 대로, 제가 세뇌를


당한 거라면요?”

“그래요. 자일스 헤센이 정말 레이디를 괴롭혔다고 치죠.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세뇌당한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서 벨담 국경을 넘어 도망치고, 자일스 헤센을 벨담에 체포당하게 만든 다음 뒤늦게 그를
구제해 달라고 사람들 앞에서 호소한다? 그건 너무 이상해요. 삼류 작가라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쓰지는 않아요.”

“사람들은 그걸 믿잖아요.”

“그들에게는 무엇이 진실이고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죠. 듣고 싶은 이야기가 곧 진실이 되는


법이니까요.”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벨담은 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원했다. 내가 울고 화내고 소리칠수록 그들은


더욱 좋아할 것이다.

그만큼 이 사회가 괴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통을 또 다른 고통으로 해소하려 하는 그
심리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저희도 알아요. 언론에 좋지 않은 일로 회자되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거든요. 레이디께서
방송을 통해 하시는 말들을 듣고 바로 알았어요. 믿든 믿지 않든,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은
기분이죠. 그렇죠?”

그렇다.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 사지가 묶인 사람이 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처럼,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이 믿어 줄 거란 기대는 안 했어요.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자일스가


듣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방송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테이블 밑으로 두 주먹을 쥐었다. 아니타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거란 확신이 생겼다. 그녀가


그래 주기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자일스를 살려야 해요. 그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잖아요. 벨담은
자일스를 희생양으로 쓰려 하고 있어요. 단순히 그가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나는 그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어요. 왜냐면 나는 그를…….”

그를 사랑하니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자일스는 나를 구해 준 사람이에요.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요. 예전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증오했어요. 그가 죽기를 바라기까지 했어요. 물론 내가 살아온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를 죽음 앞까지 몰아세우려 했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도 모른
체할 수는 없어요. 이번에야말로 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예요. 내 자신을 더 이상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자일스는 내가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내게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내가 그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괜찮아질 때까지,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레이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안나요. 내 이름은 엘로이즈가 아니에요. 나에게는 안나 키팅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그래요. 안나 양. 이번에는 제가 질문 하나를 드릴게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제 방문을 허락하신 건가요? 저희 잡지사는 인터뷰를 싣는 것밖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판결을 바꿀 수도 없을 테고, 심지어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 줄지도 미지수겠죠.
그럼에도 안나 양은 저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셨어요. 무엇을 바라시고 제게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시나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글뤼비흐네는 대중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잡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글뤼비흐네는 마이너한 잡지사 쪽에 속했다. 애초에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 비하면 구독자 수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잡지사의 유명세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전달하기만 한다면, 잡지사의 규모가 작든 크든 그런 건 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게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권력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돈밖에 가진 게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내 노력이 자일스를 구하게 될지는 나중에 가면 알게 되겠죠. 우선은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볼
뿐이에요. 그러니 당신들은 내 이야기를 전해요. 잡지에 실어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발행하면 돼요.
단 한 치도 왜곡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요. 그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요.”

“나머지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돈을 대 줄게요. 비록 기울어 가던 귀족가라 해도 잡지사 하나 못 밀어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아요. 내


이야기를 전해요. 벨담 안에서뿐만 아니라 바깥에까지. 나는 이 이야기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원해요.”

아니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나는 사용인이 가져다 놓은 찻주전자를 들어 연한 붉은색이 감도는 차를


따랐다. 쪼르르르, 찻잔 채워지는 소리가 맑게 들려왔다.

“그러니 당신은 하던 일을 하세요. 나는 내 몫을 다할 테니까.”

나를 학대하고 천천히 말려 죽이던 자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은 제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과거에 나는 내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던 여자였다. 물론 그건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제 나의 목적은 내 구원이자 내가 구원한 이를 다시 한번 구하는 것이었다.

<79 화>

자일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예전에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수 있었던 거지? 마치 그때의


자일스는 잠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난 존재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자일스의 신경은 완전히 곤두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얌전해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잠시 실의에 빠져 멈춰 서 있었던 그를 안나가 깨웠다. 라디오를 통해서나마 그녀와 만난 이후로 자일스는


절대 예전 같지 않았다.

재판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적거리는 게 허용될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일스는 허공을 노려보며 유순한 죄수처럼 앉아 있었다. 보초를 서는 군인이 그를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자일스는 적절한 순간이 오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오래전, 저격 부대에 차출되었을 적 목표물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때처럼.

루이제는 안나가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루이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안나는 인터뷰를
망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에게 제발 돌아와 달라고 외쳤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나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자일스는 뭐라도 해야 했다. 설령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다고 해도 말이다.


방송이 나간 뒤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라이터를 빌미로 수색을 당하기는 했지만 자일스는 나름 조용히
지냈다. 군인들로부터 ‘이런 게 정말 그 지독한 놈이 맞나’ 싶은 눈초리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과연 모범 죄수가 되고 싶어서 그랬을까?

자일스는 눈을 감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오늘은 기회가 와야 한다. 하루를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희미하게 번쩍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일스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전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순식간에 문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군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런, 젠장. 또 뭐야?”

“정전인 것 같습니다.”

“하인리히! 힌들러 따라서 최대한 빨리 복구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벨담의 주요 전력 공급원이 대다수 폭격을 당한 이래로 정전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길어 봤자 몇 시간 정도 내에 다시 불이 들어올 테지만 군인들에게 그 시간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자일스는 보초를 서던 군인이 문 너머로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며칠 밤을


꼬박 새며 마룻바닥에서 뜯어 낸 나사를 신발 안에서 꺼냈다. 찰칵, 나사에 의해 자물쇠가 풀리며 수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의 두 손은 자유로웠다. 자일스는 매트리스 안에 숨겨 둔 라이터를 꺼내 불이 잘 붙을 만한 곳은


전부 불을 붙였다.

화재를 효과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기의 순환이 필요했다. 그는 버려진 벽난로 안에 나동그라져 있던
부지깽이로 판자를 뜯어 냈다.

창문을 열자 금세 바람이 통했다. 불이 순식간에 방 안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직 전등은 제 빛을


되찾기 전이었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건물 구조상 그들이 눈치채기까지는 얼마 정도가 더 걸릴
터였다.

이제 자일스는 문을 열고 방을 탈출할 것이다. 그리고 혼자 남겨져 있는 군인을 찾아서 그의 목을 조른


다음, 그의 제복 상의를 빼앗아 걸치기만 하면 어둠 속에서 자일스와 다른 군인들을 식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틈을 타서 저택을 은밀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자일스는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 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일순 그의 행동이 멈췄다. 그들이


평소에도 문을 잠갔나? 적어도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자일스는 주먹을 휘둘러 문에


달린 유리창을 박살 냈다. 그 사이로 팔을 뻗어 보려 했으나 문고리까지 잘 닿지가 않았다.
이제는 힘으로 문을 부숴야 했다. 그는 문에 몸을 부딪쳐 보았다. 몇 번만 더 반복하면 문을 부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연기에 콜록거리면서도 있는 힘껏 문을 부수려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일스!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젠장! 자일스는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바람의 힘을 입은 불길은 그를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문을 부술 수 있는데. 기침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아. 시도는 좋았으니까.

그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루이제는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좀 그만 피우라던 동료들의 잔소리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루이제 같은 사람들은 알코올에
중독되거나 골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고.

그녀는 안나가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안나가 자일스와 손을 잡은 사기꾼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나를 찾아갔던 건 단순히 그녀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방송을 망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자일스
헤센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이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듣고 말았다.

‘그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과거의 기억들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일스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뿐이었는가.

‘처음에, 그는 과거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다 내버렸다고 했죠. 품고 있다간 미쳐 버리고 말 것 같다고.


하지만 나중에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고 내게 고백했어요. 내게 벨담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면서,
그것들이 없으면 정말 괴물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말했어요.’

하……. 루이제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비단 자일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 과거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사는 사람. 그건


루이제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일스도 그랬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자일스는 그의 친구들을 죽이고
하나뿐인 누이마저도 죽였다. 그런 짓을 하고서 좋은 시절의 추억을 품고 산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는 정말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안나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정부가 선전했던 내용들 중엔 거짓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까?

루이제는 머리를 흔들어 퍼즐 조각들을 흩어 버렸다.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다. 곧 죽을 죄수에게


감정적으로 흔들려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잊지 마, 루이제 고틀리프. 자일스 헤센은 더 이상 네 동기가 아닌 네


임무야. 넌 임무를 수행하기만 하면 돼.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담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이던 그녀가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았다. 생각 없이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판자로 완전히 막혀 있어야 할 창이 뚫려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틈으로 보이는


저 불빛은…… 절대 전등 불빛일 수가 없었다.

“씨발!”

그녀가 욕설을 내뱉으며 손전등을 켜고 안전 가옥 안으로 달려들었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그의 몸이 더 이상 나른해지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양 누군가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냈다. 뭔가


부서지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여자는 계속해서 외쳤다. 나와! 나오라고, 이 개자식아! 자일스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렀다.

이제 끝인가?

그런 생각이 들던 그때, 열기가 그의 온몸을 덮쳤다.

자일스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어나.”

누군가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자일스는 흐릿하게나마 눈을 떴다. 이제 시야는 다시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루이제는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는지 연신 그의 뺨을 때려 댔다. 아팠지만 효과가


있었다. 거친 손바닥으로 맞을 때마다 머릿속의 전구가 하나둘씩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직도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이성을 놓고 있었다.

“정신 차려! 씨발, 정신 차리라고! 자일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자일스의 얼굴을 내리치던 끝에 뭔가 흉기처럼 보이는 것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보다 못한 부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소령님.”

“뭐야, 이거 안 놔?”
“조금 흥분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자일스를 깨워야 돼! 깨워야 한다고! 눈을 못 뜨면 그대로 죽어!”

“고틀리프 소령님…….”

루이제는 결국 부하의 만류에 못 이겨 손에 들린 물건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헤센 대위!”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물에 흠뻑 젖은 그는 덜덜


떨면서도 젖어 있는 게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을 수 있었다.

루이제는 충혈된 눈으로 울고 있었다.

<80 화>

대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던 터전, 앞날에 대한 희망과 꿈. 그뿐이었겠는가.


차라리 그뿐이었다면 좋았을 뻔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개중에는 루이제의 동료나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들의 숨이 멎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매정하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전쟁이란 그런 거였다. 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었다.

‘고틀리프 소령’으로서는 그랬지만, 루이제 고틀리프는 단 한 번도 그들의 죽음을 무시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죽은 이들의 흔적이 미련과
악몽이 되어 발목을 붙잡을까 봐 두려웠다.

루이제는 아직도 그의 직속 부관의 숨이 꺼져 가던 날을 기억했다. 그는 끝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부관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믿음직스러웠고 절친했던 이였다. 사관생도 시절에 아끼던 후배 녀석이기도
했고.

조금 아껴 줬더니 그는 종종 건방지게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옛 시절에 그랬듯이, 끝까지 루이제의 속을 뒤집어 놓고야 말았던 부관은 결국 남들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이번에는, 속 좋게 웃으며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일 따윈 없었다.

불현듯 얼굴 위로 쏟아져 오는 선득한 감각에 자일스가 눈을 떴다. 몽땅 젖어 버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니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몰골의 루이제가 물컵을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불시에 물을 끼얹은 게
분명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는 말간 정신으로 눈앞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소령님, 환자에게 갑자기 물을 끼얹으시면…….”

그러자 사나운 눈길이 의사 쪽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말이 멎었다.

“보고.”

화를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의사가 잽싸게 대답했다.

“다행히 제때 구조를 받으셔서 신체상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계셨더라면 위험했을 겁니다. 연기를 많이 들이마시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회복은?”

“그을린 부분에 물집이 잡힐 겁니다. 그 부분만 안내드린 대로 조치 취해 주시면 다른 건 괜찮을


겁니다.”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는 이만 가라는 제스처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루이제가 한 번 더 말했다.

“다 나가.”

“예?”

“나가라고. 전부 다. 우리 대위님께서 진지한 훈육을 받으셔야 할 모양이니까.”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보던 군인들이 하나둘씩 방을 빠져나갔다. 머지않아 처음 와 보는 방에는


자일스와 그녀 둘만이 남게 되었다.

루이제는 부하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새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동작이


성급했다.

“……환자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나?”

자일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루이제의 시선이 옮겨 왔다.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듯이,
그녀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었다.

루이제는 테이블 위에 살짝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거야?”

“…….”

“정말 뒈질 생각이었던 거야? 그 안에서 불을 붙이게?”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보적인 실수 때문에 계획에 실패했다는 데에 대한 침울함만이 그를 감쌌다.

루이제는 끝까지 그를 몰아붙였다.


“아니면, 반항인가? 네 눈엔 내가 그따위 반항을 받아 줄 정도로 쉽게 보였나 보지. 안 그래?”

“진정해. 죽으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넌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잠긴 방 안에서 불을 붙인 놈의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이왕 처형당할


거, 화형당하고 싶다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건가?”

자일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이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자일스는 그녀가 크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소령이 아니라 루이제 본인으로서.

“멍청한 놈. 그 문은 안에서 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는 자유로이 열 수 있지만, 문이


닫히고 안에서 다시 열려면 열쇠가 필요하지. 왜, 입스윈은 너무 구식이라 그런 건 처음 봤나 봐?”

“그런 거였군. 다음번엔 참고하지.”

“건방진 새끼야,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담배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냐고 물었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가?”

“딴소리하지 말고 네 입으로 직접 대답해.”

“정전을 틈타 도망치려고 했다. 난 네가 당연히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딴 걸 몰라서 물은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

다시 그의 손목을 구속한 수갑이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걸 다시 풀 기회가 더는 오지 않으리라는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성공했어야 하는 건데.

보초병에 눈길을 빼앗겨 문에 주목하지 못한 그의 패착이었다.

“나는 매일 너를 보고 있었어.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넌 죽은 사람 같았지. 식사도 억지로 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겨우 하고. 네게선 살려는 의지가 보이질 않았어. 뭐, 사형수가 으레 보이는 모습이긴
하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넌 갑자기 달라졌어.”

루이제는 담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그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 깜찍한 계획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거지?”

문득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면, 네 손버릇이 희망을 주기라도 한 건가?”

“…….”

“쓸 만한 물건이 생기니까 참을 수 없어진 거겠지. 잠시나마 네가 날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자일스 헤센, 말해 봐. 그 날에 무슨 생각 했어?”

“뭘 말이지?”

“정전 되던 날에 말이야. 무슨 생각 하고 있었냐고. 네가 날 두고 도망가지 않은 게 이런 짓을 벌이기


위해서 그런 거였나?”

자일스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다른 목적을 머릿속에 품고서 그녀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러나 라이터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래. 네가 갑자기 동지애를 발휘해서 내 곁에 남았을 리가 없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완벽히 이해가 가네. 잠시나마 내가 널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내가
한심스러울 지경이야.”

자일스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루이제가 받아들여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에너지를


낭비하기에 그는 너무 피곤했다.

“자일스 헤센.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뭐였어?”

“너무 명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

“안나가 말했잖아. 포기하지 말라고.”

루이제의 행동이 일순 멎었다. 담배 연기만이 공중으로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고작 그것 때문이었다고?”

“안나는 내가 살기를 바라.”

“그걸 그때가 되어서야 깨달을 만큼 아둔한 놈이었나?”

“……그럴지도 모르지. 그 당연한 사실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며 루이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일스에게서 그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네가 사형대를 피해 달아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자일스 헤센. 나는 잠시나마 네가…….”

루이제는 한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내 그녀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다. 그만하지. 너 같은 놈에게 이런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질문에 대답했으니 나도 한 가지 물어도 되나?”

눈길이 마주쳤다. 자일스는 구태여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를 그 방에서 빼냈을 때…… 왜 울었지?”


정신이 몽롱할 때 스치듯 남았던 기억이라 사실은 그조차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루이제가, 벨담의 고위 장교가 한낱 죄수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어쩌면 그가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헛것을 본 것이거나.

그러나 단박에 거친 대답을 들려줄 줄 알았던 루이제가 잠시 침묵하는 것을 보면서 자일스는 의아해졌다.

왜 망설이지?

놀랍게도, 그녀는 화를 내거나 비웃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이유를 좀 알 수 있었으면 좋겠군.”

루이제는 담뱃불을 지져 껐다. 그녀는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음을 군모를 눌러쓰는 것으로 대신
표현했다.

“쓸데없는 소동 피울 생각 마. 넌 절대 달아날 수 없어. 달아나더라도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 쪽에서도 가만있을 수만은 없겠지.”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 둘 다 불편해지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루이제는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자일스는 남몰래 한숨을 내려놓았다.

루이제의 경고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 다음 기회는 어떻게 노려야 하지.
경비는 더 삼엄해질 테고, 루이제도 다시는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사형대로 끌려갈 때까지 두 번째 기회 따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자로 막힌 창을 바라보던 자일스는 문득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던 루이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왜 그랬을까?

잠시나마 자일스가 죄수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걸까.

어째서 그를 죽어 가는 동료처럼 바라봤던 걸까?

<81 화>

‘모종의 이유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글뤼비흐네 잡지사가 해외의 동종 업계 회사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이너 잡지사인 글뤼비흐네가 무슨 돈이 생겨서 해외 진출까지 한단 말이지? 그야말로 미스테리였다.

일각에선 벨담의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자 대출을 끌어모아서 아예 해외로 뜨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글뤼비흐네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금방 식어 버렸다. 그래 봤자 인기 없는


잡지사일 뿐이지. 곧 쫄딱 망해서 빚더미에 올라앉겠군.

오래간만에 업계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글뤼비흐네는 다시 ‘그저 그런 잡지사’로 되돌아가 모두의 관심


속에서 잊혀졌다.

벨담에서도 별 소득을 내지 못하던 잡지사가 해외에서 커다란 주목을 얻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글뤼비흐네를 대표로 방문한 기자에게 당부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에 내던 기사들을 계속 발행하세요. 본사를 옮기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작은 잡지사라 처음에는 주목을 받게 되겠지만 곧 관심이 식을 거예요.’

벨담 사회는 잡지사 하나에 눈길을 두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주도로 자극적인 정보들이
판을 치는 요즈음에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정상적으로 잡지를 발행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성급하게 굴면 안 돼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정보국에서 눈치채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예요.’

라디오 방송 사건 이후로 정보국은 엘로이즈 비스마르를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보국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자일스 헤센의 연인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서적들을 사들이는 것으로 위장해 글뤼비흐네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 정도 원고라면 괜찮겠습니까?’

원고를 꼼꼼하게 훑어 내려가던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 계획에 확신이
없는 듯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만큼 대단한 효과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괜찮아요.’

정말 괜찮았다. 한낱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허탕만 친 꼴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우선은 계속해서 진행해요. 결과를 보면 답이 나오겠죠.’

벨담이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에게 호소하면 될 일이었다. 내 이야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닿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와 자일스를 도울 수 있게 된다면.

가끔은 나도 생각한다. 이런 게 정말 자일스를 살릴 수 있을까. 어차피 벨담 내에서 그는 공인된


사형수나 마찬가지인데. 벨담 바깥의 여론을 움직여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나는 뭔가 꾸준히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이게 소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또 다른 방안을 찾으면 될 일이다.


머지않아 타국에 본사를 옮긴 글뤼비흐네 잡지사가 내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발행했다.

나는 단박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보국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저택에 쳐들어올 이유가 그것 말고 더


있겠는가?

아렌트 홀츠만이 입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스마르 백작가의 가주로서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요원님.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물론 그가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한숨에 섞어 흘려보내며 말했다.

“엘로이즈 양……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항의하실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해 보라지. 나는 뭐든지 대가로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것 같았다. 쓸데없는 첨언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그가 수행원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커다란 남자들이 나를 붙잡으려 하자 일부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잠시만요! 지금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이분은 비스마르 백작가의 가주이십니다.”

요제프가 수행원들을 내게서 떼어 내며 항의했다. 나는 그에게 조금 고마워졌다. 허울뿐인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용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엘로이즈 양께서는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동의한 부분이 아니라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그 한마디에 요제프는 할 말을 잊은 채 아렌트와 나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나는 의로운 사용인이 더


흥분하기 전에 그를 달랬다.

“괜찮아요. 내겐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로 가면 되죠?”

저항해 봤자 내게 더 이상 물러설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구태여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렌트는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따라오시죠.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해 드릴 겁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보다 최악의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던 적이 있었다. 또한


그들이 아직은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내겐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제 요제프를 포함한 사용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내


눈이 아델레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내게 가는 길을 보여 주지 않았다. 차창은 검은 천으로 막혀 있었고 이동하는 내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단단히 화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 해도 놀라워할 일은 아니었다. 나도


대충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여론의 반응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얼마 후 차에서 내린 나는 건물의 모양새를 올려다볼 새도 없이 출입문 안으로 등을 떠밀렸다.

그들이 내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나는 열심히 눈을 굴려 보았다. 다행히 나를 험한 장소로 데려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곳은 또 다른 저택일까? 아니면 정보국 소유 건물이라도 되나? 텅 비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건물


내부는 내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용기 내어 물었으나 아렌트는 등을 보인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안전한 곳이니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원래도 안전한 곳에 있었는데요.”

“적어도 이곳에선 아무도 엘로이즈 양을 귀찮게 하지 못하겠죠.”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먹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이 건물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게다가 창문이 있어야 할 곳은 모조리
판자로 못질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좀 더 뻔뻔하게 굴어 보기로 했다.

“반응은 어떻던가요?”

그는 나를 무시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들이 이렇게 화를 낼 정도면 내가 헛일을 하지는 않았나 봐요, 그렇죠?”

미세하게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짙은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


말이 사실인가 보군.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내가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 사람들이 나를 깊숙한 곳에 가두기로 작정한 거라면 나는


이제 자일스를 어떻게 도와야 하지?

벌써부터 탈출 동선을 그리고 있는데 돌연 아렌트의 걸음이 멈추었다.

“들어가십시오.”

그가 또 다른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나는 표정을 읽기 힘든 그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첫 인상은 생각보다 넓은 방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전혀 아늑하지는 않았다. 새하얀 방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단순히 다른 수행원인 줄 알고 그를 무시하고 있었던 내가 그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안나?”

자일스가 거기 있었다. 다행히 그는 멀쩡해 보였다. 고문을 당한 것 같지도 않았고,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멀끔했다. 다만 묵직해 보이는 수갑이 그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일스 또한 이게 현실임을 자각했는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안나!”

“자일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서 무작정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물론 자일스는 나를 안아 줄 수 없었다.


상관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껴안았다.

혹시라도 이게 허망한 꿈 중 하나일까 봐 입술을 깨물어 보았지만 다행히 꿈은 아닌 것 같았다. 단단한


몸을 감싼 천의 감촉이 생생했다. 꿈이 아니야. 이건 현실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 자일스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더


그랬다.

자일스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동시에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움찔거리자 쇠사슬이


쩔그렁거리는 소음을 냈다.

나는 자일스에게 뭔가를 묻기 위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일스, 그들이 너를 괴롭히지는 않았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무사했던 거야? 아무 일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들은 내게 그마저의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재회는 금방 끝을 고했다.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거칠게 떼어 냈다. 무어라 항변할 새도 없이 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거친 마룻바닥에 피부가 긁혀서 피가 맺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화가 난 자일스가 나를 향해 다가오려 했으나 그마저도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는 두 팔을 붙잡힌


채 불안이 서린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렌트는 벌써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보이질 않았고 군인들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찾아왔던 소령, 루이제 고틀리프였다.

“루이제, 지금 뭘 하려는…….”

그녀는 유난히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내게는 들려주지 않았던 또 다른 목소리로 명령했다.


“……시작해.”

“루이제!”

자일스의 외침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커다란 군인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손에 들린 곤봉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82 화>

과거의 어느 날.

루이제는 베흐만 대령의 집무실에 들어서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벨담에 무궁한 영광을. 대령님, 부르셨습니까?”

“아, 루이제. 적절한 때에 바로 와 줬군. 여기 앞에 앉게.”

그녀는 책상 앞으로 걸어가는 발소리마저도 신중히 하며 명에 따랐다. 반면 베흐만 대령은 바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는 특이한 꽃을 피우는 화초가 몇 가지 있었다. 그는 화초들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 요새 별문제는 없나?”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비록 자일스 헤센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런 사실까지는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을 아는 건 헤센과 그녀 둘뿐이었다.

“안정적이라. 그것 참 희귀한 소식이군.”

“아무리 자일스 헤센이라지만 벨담이 주시하는 이상 꼼짝도 못 할 겁니다. 물론 도주의 가능성 또한


미미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자신감 넘치는 것 같아 좋군그래. 분명 이 임무를 처음 내려 받았을


땐 달갑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주 잘해 주고 있어.”

“그렇지 않습니다.”

루이제가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사령부의 명령에 단 한 치의 이견도 가진 적 없습니다.”

“어깨에 힘 풀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와 절친한 동기였던 과거는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우리는 자네를 더욱 믿을 수 있었던 거라네. 적에 대해 잘 알수록, 더욱 대비하기도
쉬워지는 법이니까.”
마침내 베흐만 대령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정보국 소속 참모인 그는 군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군복을 입고 있지만 않았다면 정말 평범한 원예가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금까지 자일스 헤센을 관찰했으니 그에 대한 견해가 생겼으리라 믿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그가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이던가?”

“제가 보기에는…….”

그가 기대하는 답이 뭘까?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루이제는 진실을 그대로 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략은 절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생각보다 얌전합니다.”

“얌전하다고?”

“예,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저항하지도 않고, 명령에도 순순히 따릅니다. 처음에는 빈틈을 노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런 속셈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체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흠. 그렇군.”

“그래도 저희는 긴장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응할 준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고틀리프 소령.”

“예, 대령님.”

“우리가 문제 삼는 건 바로 그 부분이라네.”

뭘 말하는 거지? 루이제는 지금껏 이루어졌던 대화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복기해 보았다. 뭔가 실언이
있었나? 베흐만 대령의 얼굴을 살피니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자일스 헤센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평범해.”

루이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육광도 아니고, 미치지도 않았으며 악의와 증오가 가득 차 들끓는 사람도 아니지. 희대의
살인마라기에는 너무도 점잖고, 이성적이고 심지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줄도 안다네.”

베흐만 대령은 웃으며 덧붙였다.

“국민들이 배신자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은 특히나 아니지.”

“……예. 이해했습니다.”

“죄수로서 얌전히 굴어 주는 건 분명 편리한 일이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평범한 죄수여서는


안 된다네. 서커스를 보러 갔는데 맹수가 온순하게만 군다면 그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이겠는가. 기억하게,
고틀리프 소령. 우리는 범죄자를 처단하고 있는 게 아니야. 저 바깥 사람들을 위한 쇼를 벌이고 있는
거지.”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눈을 가려 줄 자극적인 이슈들과 스캔들…… 벨담에 필요한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자일스
헤센은 그 자체로도 쇼를 위한 완벽한 배우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악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예. 그렇겠죠.”

“그가 악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그보다 귀찮아질 수는 없겠지. 안 그런가?”

루이제는 불길함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베흐만 대령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정된 재판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때까지 우리는 준비된 맹수를 내놓아야만 해. 나는 얼마 전,


자일스 헤센을 훌륭한 맹수로 만들 만한 탁월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네.”

그가 책상 위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루이제는 서류를 받아들자마자 경악에 휩싸였다.

그 서류에 올라 있는 사람은 바로 안나였다.

자일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단 한 명의 여자…….

“그녀를 이용하게.”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한번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볼 줄 알아야지. 게다가 이건 대의를 위한


일이네.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건 용납될 수 없어.”

대의……. 양날의 검과도 같은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던 루이제는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혹시 자신이 없는 겐가? 고틀리프 소령.”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안에 한해서는 그 어떤 행위를 가해도 상관없네.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여자가 어떻게
되든, 살든 죽든……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자일스 헤센이야. 평범한 자일스
헤센이 아니라 최악의 살인자 자일스 헤센이지.”

서류가 거두어져 갔다. 베흐만 대령은 서류에 불을 붙이며 그것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게 벨담을 위한 일이야.”

벨담을 위해서.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루이제와 같은 사람들에게 벨담은 목숨보다도 우선하는 존재였기에, 그 이름 앞에서는 저항할 수도,


울음을 터뜨릴 수도 혹은 도망칠 수도 없었다.
***

자일스는 군인들에 의해 붙들린 채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지켜봐야 했다.

커다란 남자들에 둘러싸인 건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형벌을 받아 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벌을 받는 건가? 안나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고 있는 건가? 하지만 왜? 그가 불을 질렀기 때문인가? 죄수로서 얌전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인가?

“안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가 분노에 차 외쳤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결국 이 모든 게 전부 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러다가 안나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자일스는 루이제를 향해


빌었다.

“제발, 제발 그녀를 놔줘. 죄를 저지른 건 나야. 내가 모든 걸 감당할 테니까 안나는 건드리지 마.”

그러나 루이제는 석고상보다도 차갑고 미동 없는 얼굴로 이 모든 현장을 지켜보기만 할 뿐, 대답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루이제 고틀리프!”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자일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려는 것일까, 혹은 그럴 자신이 없는


걸까?

그의 호소가 애원으로 바뀌고, 애원이 곧 울부짖음으로 변모하고 나서야 폭행이 끝났다.

“그만.”

루이제의 명령 한 마디에 군인들이 안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안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루이제는 단 한 마디만을 말할 뿐이었다.

“의사를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정해진 인원을 제하고 나머지는 철수해.”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그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기계처럼 명령에 따랐다. 자일스는 숨을 몰아쉬며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제는 끝까지 자일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매정한 걸음걸이였다.
그녀의 뒤로 문이 닫히고 나서야 군인들이 그를 내팽개치듯 놔주었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자일스는 비틀거리며 안나를 향해 다가갔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안나.”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안나에게 새로운 고통이 될까 봐 자일스는 죄인처럼


무릎만 꿇고서 눈물을 흘렸다.

그가 안나의 손을 잡았다. 자일스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미안해, 안나. 널 이렇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왜 그녀를 벨담에 데려왔을까?

자일스는 왜 벨담이 그녀를 지켜 주리라고 그리도 확신할 수 있었을까?

전부 다 그의 패착이었다. 안나를 벨담으로 데려온 것도,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 것도……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제때에 그녀를 놔주지 못한 것도. 전부 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안나가 스르르 눈을 떴다. 자일스는 새파란 눈을 마주하며 누군가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곧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

돌연 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이 상황이 참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실컷 웃었다. 그리고 힘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개새끼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녀의 손이 뻗어 왔다. 자일스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안나의 손을 자유롭지 못한 손으로 붙들었다.

“울지 마, 자일스.”

안나는 나무라는 듯이 자일스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 속에서 뭔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너도 무너지지 마.”

자일스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 한구석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를 집어삼킨 것은 분노와 증오가 아닌 처절한 무력감이었다.

<83 화>

‘엘로이즈 비스마르’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그랬다. 그녀는 아주 완벽한 희생양이었다. 자일스를 자극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루이제는 아직도 명령서에 적힌 내용들을 기억했다. ‘자일스 헤센이 재판정에 설 때까지 엘로이즈
비스마르를 고문할 것. 그 방법이 어떠하든 헤센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용인됨. 단,
반드시 재판 당일까지는 효과가 나타나야 함.’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 안에 빈사 상태에 이를 것이 예상됨. 뒤탈이 없도록 시체를 확실하게 처리할
것. 사망 시 즉각 상부에 보고서 올릴 것.’

‘만일 재판 당일까지 사망하지 않을 시…….’

‘책임자,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확인 바람.’

루이제는 생각했다. 애당초 자일스 헤센을 맡아선 안 되었다. 대충 감시만 하면 끝날 거라던 아렌트의
무책임한 말이 떠올라 이가 갈렸다.

물론 그녀도 자일스 헤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게 절대로 쉬운 임무가 아닐 거라는 사실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민간인 고문이 포함될 줄이야.

자일스 헤센이야 그렇다 쳐도 안나는 달랐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헤센과 놀아난 것뿐이었다.
아니, 그게 죄인가? 개처럼 맞아 죽는 잔인한 결말을 맞게 될 만큼?

상부에서는 군인들을 시켜 안나를 기절할 때까지 때리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치료를 받게 했다. 의미
없는 행위였다. 어차피 해가 밝으면 또다시 맞게 될 텐데…….

이 모든 건 한 사람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쇼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유순한 죄수를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벨담이 원하는 건 좀 더 자극적인 것이니까.

루이제는 이 비인륜적인 임무의 중간에 끼여 있었다. 결국 안나를 폭행하라고 명령하는 건 그녀나


마찬가지였다.

담배가 타들어 갔다. 이게 정말 맞는 것일까.

자작극을 위해 한 사람을 죽도록 패야 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처참히 고문당하는 안나를 바라보는 자일스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눈에 핏대를 세우며 죽여 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자일스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바깥으로 분노가 터져 나오는 대신 뭔가가 그의 내면을 엉망으로
갉아먹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쯤 되어 루이제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거짓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자극적인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진실이 섞여 있기는 할까?

이렇게까지 해서 거짓말을 지어내야 할까?


자일스 헤센은…… 그는, 정말 악마였을까?

그 또한 활자가 찍어 낸 허상의 베일을 뒤집어쓴 건 아닐까?

루이제는 이러한 생각이 벨담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가가 하는 일은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환멸이 났다. 평생토록 믿어 온 신념의 맨얼굴을 목격한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길을 잃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한데, 그걸 어디서 찾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벨담을 위해서’.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던 말은 더 이상 루이제를 고양시키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생각의 흐름을 반대로 바꾸어 보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자 답이 보였다.

문득, 루이제는 스스로가 죽음에 대한 답을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는 사실을 함께 깨달았다.

안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폭행을 끈질기게 버텨 냈다. 그녀의 살갗 위에 검푸른 얼룩이 생길


때마다 자일스의 영혼에도 똑같이 멍이 들었다.

저러다 뼈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다시는 멀쩡히 걷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녀가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일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안나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미래를 그들이 부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멈춰, 제발! 더 이상 손끝 하나 대지 마!”

그러나 돌아오는 건 낄낄대는 비웃음 소리뿐이었다.

“들었어? 자기가 아직 다른 놈한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대위님. 울지 말고 좀 더 또박또박하게 말씀해 주십쇼.”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자일스는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안나가 대신 맞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까.”

곤봉을 든 군인들 중 하나가 의식적으로 자일스를 곁눈질하며 운을 떼었다.

“이제 생각난 건데, 이 여자 직업이 피아니스트랬지.”

그는 쓰러진 안나의 손가락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 하나라도 부러지면 피아노를 다시 못 치게 되는 건 아닐지 궁금하지 않아?”

“야, 이거 봐라. 잔인한 새끼.”

군인들이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보며 자일스는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가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로 자신을 붙든 군인들을 제압할 방법에 대해 빠르게 생각해 냈다. 곧 붙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진짜 할 거야? 진짜로?”

“못 할 게 뭐가 있어. 이러는 목적이 뭔데? 저놈 꼭지가 돌아 버리게 만들어야 한다고.”

자일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현실적으로 두 명의 군인을 힘으로 제압할 수는 없다. 뭔가 다른


작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기절한 사람처럼 누워 있던 안나가 벌떡 일어나 군인의


손아귀를 깨물었다. 군인이 비명을 지르며 곤봉을 놓치자 안나는 그것을 잽싸게 주워 들었다.

물론 그녀는 비틀거리다 다시 무릎을 꿇고 쓰러졌지만 눈빛만은 형형히 살아 있었다.

안나는 무기를 두 손으로 붙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러나 그들의 눈에 안나는 여전히 힘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안나의 외침은 오히려 그들의 비웃음만 샀다.

“뭘 경고한다는 거지?”

“내 눈엔 그걸 휘두를 수조차 없을 것 같은데요, 영애님.”

군인들이 안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안나의 시선이 돌연 자일스를
향해 옮겨 왔다.

그녀가 외쳤다.

“받아!”

안나가 있는 힘을 다해 곤봉을 던졌다. 군인들의 정신이 분산된 사이 팔을 들어 올려 무기를 받아 낸


자일스는 곤봉을 휘둘러 오른쪽 군인의 턱뼈를 가격했다.
한쪽 팔이 자유로워지자 다른 한 놈을 제압하는 건 쉬웠다. 한편 죄수가 무기를 들고 반항을 시도할
경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전달받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군인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자일스는 그들을 안나에게서 멀리 몰아냈다.

“씨발, 뭐야!”

“그거 당장 내려놔! 명령이다!”

“나는 벨담군이 아니야. 명령에 따를 이유는 없지.”

자일스는 안나의 앞을 막아선 채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안나를 내버려 둬.”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지금 뭘 하는 거냐?”

언짢은 장교의 고성에 군인들이 즉각 자세를 바로 했다. 루이제가 문가에 서서 쓸모없는 부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소령님, 그것이…… 이 여자가 저항을 시도하는 바람에.”

“들을 가치도 없군. 이 너저분한 상황은 내가 정리한다. 너희 모두 당장 나가.”

우물쭈물하는 군인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성이 터져 나왔다.

“나가!”

그제야 군인들이 방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루이제는 팔짱을 풀고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직 자일스는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루이제를 믿을 수 없었던 그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안나를 힐끔 바라본 루이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내려놔.”

“내가 뭘 믿고?”

“봐. 내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잖아.”

그러나 자일스는 여전히 루이제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안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감히 나를 믿으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말만은 믿어 줘. 곤봉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발로 차 버려도 좋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내려는 듯하던 자일스가 이내 안나와 가까운 쪽으로 무기를 떨어뜨렸다.
루이제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자일스는 자유롭지 못한 팔로 안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안나는 시트가 등에 닿을 때조차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 냈다.

“왜 왔지?”

물어 오는 목소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루이제는 그를 바라보며 이 작전은 방향 자체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일스는 더욱 초췌해졌을 뿐, 여전히 괴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판일이 정해졌어.”

“그래서?”

“알려 주려고. 사흘 후에 출석하게 될 거야.”

“판결에 의미가 있나?”

그는 사형수였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판정에 모이는 건 자일스가 사형을 받게 되리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제는 대답하는 대신 안나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두 눈을 감고 기절해 있었다.

엉망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내가 죽으면 안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루이제는 이번에도 자일스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안나는 자일스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84 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르겠어.”

자일스는 자신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예전에는 안나가 입스윈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 벨담 안에서


안전할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너희가, 네가 안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원망 섞인 눈초리가 잠시나마 섬광처럼 그녀를 찔러 왔으나 잠시뿐이었다. 자일스는 누군가를 저주하고


미워하기엔 이미 다 타 버린 재밖에 남지 않은 사내였다.
그리고 마지막 잿불은 스스로를 천천히 태워 갈 뿐이었다.

“이젠 안나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그녀의 곁에서 사라져 주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는데…… 애초에 내가 안나를 사랑하려 한 욕심이 모든 걸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스스로가 불타는 화마처럼 위험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한 사람을 사랑하려 했다.

자일스는 후회했다. 안나를 처음 만났던 그날, 빵 한 덩이와 함께 인연을 끝맺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도망친 안나를 그대로 놔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안나의 삶에 그라는 존재를 끼워 넣은 것을 후회했다.

루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일스의 말대로 안나를 때린 건 그녀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첨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은 사흘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제발, 루이제.”

자일스는 이제 애원하기 시작했다.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추락할 곳이 더 남아있었다.

“안나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녀는 내가 벌인 짓과 아무 상관도 없잖아. 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안나가 그냥 살아가도록 해 줘.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 시키는 건 다 할 테니까.”

“자일스.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네겐 권한이 있잖아.”

“그만해!”

루이제는 자일스를 거칠게 뿌리치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안나를 생각해서
참았다. 그마저도 참 뭣 같은 위선이 따로 없다는 걸 알지만…….

“자일스, 제발 그만해. 한낱 장교의 권한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뭘 한다고 한들 금방


다시 붙잡힐 게 분명해. 벨담 전체가 너의 적이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해가 안 돼. 너희는 이미 나를 붙잡았잖아.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굳이 안나를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안나가 죽는 것도 다 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결국 참지 못한 루이제가 말했다. 그 순간 자일스는 그 모습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스스로가 받은 충격을 단 한 마디로 뱉어 냈다.

“왜?”

“그래야 이 쇼를 더욱 자극적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고작 그건가?”

안나가 고작 그런 이유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자일스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나로는 충분하지 않은 건가?”

“자일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벌을 받는 게 아니야. 귀족들을 죽인 건 애초에 문제가 된 적도 없어.


벨담은 그저 너의 이야기가 필요했을 뿐이야. 적절히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아직도 네가 혁명에 가담해서 귀족들을 살해한 것 때문에 체포된 거라고 생각해?”

이제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제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거대한 쇼야. 국가가 주도하는 쇼라고. 넌 그냥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뿐이야. 너도, 안나도. 왜
알베르트가 기차까지 끌고 가서 너를 생포하려고 했을 것 같아? 네가 그만한 흉악범이라서? 아니야!
벨담은 네가 절실히 필요했을 뿐이야. 그만큼 이 나라는 망가지고 뒤틀렸어. 간신히 줄타기를 하면서
버티고 있는 형국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한 일들은…….”

“그건 애초에 중요한 일도 아니었어. 벨담은 귀족들의 안위 따위는 관심도 없었어. 오히려 네가 처리해
줘서 큰 부담을 덜었을 뿐이야.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예전부터 벨담은 실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주요
귀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까.”

“…….”

“너는 벌을 받는 게 아니야. 안나가 말려들게 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너희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나리오에 올라 있었어. 그리고 내겐 그 시나리오를 고칠 만한 힘이 없어.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잠시 침묵하던 자일스는 루이제를 올려다보았다.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이었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뭐?”

“아직 나를 도와줄 생각이 있나?”

그가 결박된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지만 악수를 청하고자 내민 건 아니었다. 자일스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 뭘…….”

“총을 줘, 루이제.”

“뭘 하려는 건데?”

“결말을 바꿀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뭘 하려는 거냐고!”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일스는 자살을 감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 자일스 헤센.”

“예정된 대로 흘러가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런다고 안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안나는 이미 너무 깊숙이 개입해 버렸어. 벨담이 모든 걸


목격한 안나를 살려 둘 리가 없잖아. 정신 차려. 넌 의미 없는 짓을 하려는 거야.”

“너희가 안나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의미가 있나? 말해 봐! 안나는 내일도 처참히 폭행을
당하게 돼! 이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데에는 과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나는 뭐라도 해야 해! 안나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온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모든 걸 끝낼 순 없어.”

잠시 분노하는 듯하던 자일스의 격정은 이내 가라앉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국가의 계획은 너무나도 견고해서 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망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나리오에는 구멍이 있었고, 루이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일스의 새카만 두 눈을 마주 보며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무래도 더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

“뭐?”

“자일스. 재판 당일까지 버텨. 안나에게도 그리 전해. 버티라고. 최대한 버티는 게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죽지만 않으면 돼. 그것만으로 너희는 충분히 저항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리 와.”

루이제는 자일스의 귓가에 대고 그녀만이 아는 사실을 속삭였다. 이제 그녀의 정보를 토대로 무엇을
하느냐는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루이제의 이야기를 듣고 난 자일스는 조금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으로 침묵하며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확고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안나가 그때까지 살아남기만을 빌어. 네가 믿을 건 이제 그녀뿐이야.”

“알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지.”

처음부터, 자일스는 안나라는 존재 하나에 매달려 살아갔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루이제는 굳은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곤봉을 챙겼다.

“당분간은 안나를 격리하지 않을 테니 함께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게 다야.”

“그 이상도 해 줬잖아.”

자일스는 작게 덧붙였다.

“고마워.”

“……난 그런 말을 들을 자격도 없어.”


루이제는 차갑게 식은 대답을 돌려주고는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철컥, 하고
울렸다.

자일스는 다시 침대맡에 앉아서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나마 안도감을 자아냈다.

그가 손을 뻗어 안나의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러자 안나가 스르르 눈을 떴다. 맑은


하늘처럼 파란 눈이 자일스를 응시했다.

“자일스.”

“그래. 나 여기 있어.”

“이리 와. 같이 누워.”

망설임 끝에 자일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안나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 곁에 누웠다.


가까이서 본 안나는 내려다보았을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녀가 버틸 수 있을까.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구나.”

“미안해, 안나. 나만 아니었더라면…….”

“난 네가 구해 줬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설령 여기서 모든 게 끝나더라도……


내 삶을 연장해 준 사람은 너였어.”

하지만 나는 네가 계속 살아가기를 원해. 여기서 끝을 맺는 건 원치 않아. 목이 메어 오는 바람에


자일스는 차마 그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처음에, 너를 미워하고 원망해서 미안했어.”

“사과하지 마, 안나. 네가 왜 사과를 해.”

“그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시절의 나는 호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도 몰랐고, 그럴


여유도 갖고 있지 못했어.”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안나.”

“그래. 그러니까 좀 낫네. 상황이 아무리 개같이 돌아간다 해도 괜찮다고 말해. 죽상을 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어. 이건 내 경험담이니까 믿어도 돼.”

온몸을 피멍으로 물들였음에도 안나는 아직 웃을 수 있었다. 자일스는 그가 안나를 만나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갖지 못한 저력을 안나는 갖고 있었다.

그녀는 끝없는 생명력으로 불타오르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녀로부터 작은 불씨라도 나눠 받기를 원해 왔는지도 모른다.

자일스는 눈을 감고 안나의 입술에 짧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 말이 있어, 안나.”
안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85 화>

전국 각지에 보급된 라디오가 오전부터 사람들의 잠을 달아나게 했다. 신문 파는 아이도 질 수 없다는 듯


동전 몇 푼을 대가로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 날은 유독 신문을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길거리의 모두가 담배 혹은 신문을 들고 있었다.

전쟁이 한 번 더 터진 것일까?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 만큼 사람들의 얼굴은 심각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1 면에 실린 기사는 이웃 국가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기사 대신에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벨담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사내는 오늘부로 사람들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제


운명이 선고되는 순간을 목격할 것이다.

사람들은 흥분해 있었다. 과연 신문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남자는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모두가 자일스 헤센의 얼굴을 알았지만 그를 실제로 본 이는 극히 드물었다. 사진과 실제는 묘하게 다르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곁에서 주워들은 아이들은 내기를 걸었다. 분명 옛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눈이
쭉 찢어지고 눈동자는 피처럼 새빨간 색일 거야. 아니, 창백한 안색에 아주 무섭게 생긴 남자일 거야.
전쟁 때문에 외눈박이가 되었을 거야.

벌써 배심원들은 선출된 지 오래였다. 방청객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마주치지 않고 싶은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헤센이라는 남자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커다랬다.

여름이 찾아오기 전, 어느 화창한 봄날.

자일스 헤센의 재판일이 다가왔다.

군인들은 자일스에게 평범한 죄수복을 입혔다. 거친 면 소재로 된 미색의 옷이었다. 사람들은 자일스가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굳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자일스는 새벽부터 안전 가옥을 나섰다. 안나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사흘 전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는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위기를 절반은 견뎌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안나의
죽음이 오늘은 아닐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그랬다. 이제 모든 것이 그가 하기 나름이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군인들의 거친 손길에 이끌려 커다란 호송용 차에 탑승했다.

법원에 입장할 때도 그들은 최대한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통로를 이용했다. 그는 위험한 화학 물질 같은


존재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어떤 영향을 일으킬지 몰랐다.

루이제는 따라오지 않았다. 자일스는 오히려 안심했다. 안나를 다른 군인들과 함께 놔두는 것보단 차라리
루이제가 그녀와 함께 있는 쪽이 더 나았으니까.

대신에 낯이 익은 중년의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일스를 가둬 놓은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자일스는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안나를 안전 가옥으로 데리고 왔던 그 남자였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남자가 물어 왔다.

“드디어 모든 걸 끝맺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자일스는 남자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이 그의 농간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편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우선 당신 같은 죄수들에게는 보통 국선 변호사가 배정되곤


합니다만, 아무도 당신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변호사 없이 재판을 받으셔야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재판정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겁니다. 방청객이 이토록 많았던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모두


당신을 주목할 겁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신은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양입니다.”

그는 안경을 벗어서 재킷 주머니에 꽂았다. 남자의 말투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아직까지 상태가 이런 겁니까?”

“모든 건 절차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이래서야 더러운 일을 감수해야 하잖아요.”

참 유감이라는 듯이 그가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자일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무슨 말을―”

“붙잡아요.”

그러자 군인들이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던 자일스는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붙잡고 오른쪽으로 내리눌렀다.
남자가 얇은 케이스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주사기였다. 조명 아래에서 번쩍이는 주사기
안으로 그가 무언가를 주입했다.

“헤센 씨, 조금 아플 겁니다. 소리 지르지 말고 참으세요.”

“잠깐……!”

그는 망설임 없이 자일스의 목에 주삿바늘을 갖다 댔다. 누군가 자일스의 입을 틀어막은 탓에 그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액체가 그의 혈관을 타고 침투해 왔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남자는 그에게 뭘 놓은 건지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의식이 점점 그와 분리되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성은
흐려지는데 고통을 떨쳐 내려는 강한 충동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그가 군인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 남자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낫군요.”

“언제쯤 나가면 됩니까?”

한 군인이 묻자 남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림잡아 5 분 후면 입장하게 될 겁니다.”

한편 자일스는 숨을 몰아쉬며 눈앞을 제대로 보려고 애썼다. 그가 정신을 놓아 버리면 안나까지 죽게 된다.

안나를 살려야 해. 안나를 살려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던 와중, 눈앞에 안나가 나타났다.
약물에 의한 환영이 분명했다. 자일스의 시선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연인에게로 고정되었다.

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공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 자일스는 남자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더 이상 자일스에게 신경


쓰는 대신 한 군인과 재판 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일스는 눈을 크게 뜨고 선명해졌다 흐릿해지기를 반복하는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생각이


자일스의 머릿속을 스쳤다. 안나는 이미 죽었구나. 그래서 유령이 된 거야.

죽었기 때문에 모습이 온전치 않은 거야.

절망에 빠진 그가 눈물을 흘렸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군인들이 붙잡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돌연 분노가 치솟았다. 안나를 죽인 게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을 전부 죽여야겠다는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때 안나가 말을 걸어 왔다.

“진정해, 자일스. 모든 것을 망칠 셈이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안나…….”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말했잖아.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내가 그러기를 원하게 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날 죽일 순 없을 거야. 너는 나를 구해야 해. 너만이 나를 구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정신
차려.”

자일스는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녀의 생사가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자일스가
실패하면 안나는 그대로 배를 타게 될 테고, 혹한의 땅에 발을 딛게 될 것이다.

정신을 차려야 해.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흩어진 생각들을 한 곳에 다시 모아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안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고통만은 그대로였다.

귓가에 들리는 음성이 윙윙거리는 시끄러운 소음과 겹쳐 들렸다.

“이제 가지.”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군인들의 팔에 단단히 붙들려 방을 나섰다. 복도를 한참 걸은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재판정에


들어섰다.

거대하고 엄숙한 공간 안에서 모두가 자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자일스에겐 웅성거림마저도 고통으로 치환되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사람들은 흥분한 듯이 보였다.

군인들은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단단한 가죽 벨트로 그의 몸을 의자에 동여맸다. 혹시라도 그가 위험한


행동을 시작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안에 모인 모두가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자일스는 오한이 찾아드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군인들이 물러나고 나서야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의 ……하는 죄수, 자일스 ……의 ……합니다.”

탕, 탕, 탕! 의사봉을 치는 소리가 마치 총소리처럼 귓가에서 증폭되었다. 자일스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두 손이 결박되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판사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의 귀에 제대로 들리는 말소리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자꾸만


몸부림을 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밀려들어 와 그를 에워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체적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의 몸을 단단히 동여맨 벨트의 압박감조차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러기가 힘들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는 허공을 필사적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판사의 외침 소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헤센! ……하시오!”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모든 소음, 모든 말소리 하나하나가 자극이 되어 폭력적인 충동을 부채질했다. 안나라는 이름조차 아주


천천히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안나, 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안나가…….

……그게 누구였더라.

“진술하시오!”

자꾸만 그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대는 판사를 죽이고 싶어졌다. 자일스는 남은 이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불가항력에 가까운 현상은 그를 무겁게 내리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가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돌연 자일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던 소음들과는 달리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86 화>

자일스는 이 선율을 알았다. 안나가 그를 위해 연주해 주었던 적이 있는 피아노곡이었다. 그는 감정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안나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안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만이 재판정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었지?

자일스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비로소 눈앞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장내를 울리는
목소리들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그는 방청객들이 모인 쪽을 바라보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가 퍼뜩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는 그를 향해 우려 섞인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자일스는 두려움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재판만큼은 끝을 봐야 했다. 재판정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었다.

저들이 그에게서 뭘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을 원해서 그의 혈관에 바늘을 찔러 넣었는지도.

이제는 허상에 불과한 공포를 한 꺼풀 벗겨 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자일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판사가 한 차례 더 소리를 질러 왔다.


“자일스 헤센! 스스로의 죄에 대해 진술하라고 명령한 바 있소!”

“저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놀랍도록 담담한 목소리가 재판정에 침묵을 자아냈다.

마침내 모두가 언론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악마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순간이었다.

“전쟁 당시, 저는 전선에서 군인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저는
입스윈에 있는 군 병원으로 옮겨졌고, 머지않아 당분간 입스윈에 주둔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입스윈에서 지내고 있던 누이가 보고 싶었기에 저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쾌차하게 되면 먼저
누이를 보러 달려갈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진중한 내용의 책을 낭독하듯 차분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좌중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자일스 헤센은 보기에도 멀쩡했고 미쳐 날뛰거나 저주스러운 단어들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는 평범했다.

누군가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이토록 당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벨담은 전쟁에서 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패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입스윈에 주둔해 있던 나머지 군인들마저도 벨담을 돕기 위해 그곳을 떠났습니다.
상황이 그리 되자 입스윈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습니다. 저는 동료들을 따라 벨담으로 떠나는 대신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셀레스트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자일스의 고백은 사람들이 알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셀레스트를 데리고 입스윈을 탈출하려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누이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저는 입스윈 혁명군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재산을 모두 내어 주고 혁명에 가담한다면,
저와 누이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스윈을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에 따랐습니다. 개중에는 먼 친척도 있었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셀레스트가 죽게 될 테니까요.”

“당신이 직접 그녀를 죽인 게 아니었나?”

누군가 참지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판사가 의사봉을 내리치며 정숙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일스는 그의 대답을 무시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저는 또다시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누이를 죽이지 않으면 저는 그대로 버려져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후에도 저는 도저히 셀레스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간절했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문당한 기색이 역력했던 셀레스트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스스로를 찔러
자살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정숙하시오! 정숙!”
판사의 외침에 다시 한번 사위가 조용해졌다.

의사봉을 내려놓은 그는 자일스를 향해 말했다.

“자일스 헤센, 피고는 법정 안에서 진실만을 말하기로 사전에 서약한 바가 있소.”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법정을 모독하려 하면 최고형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사형수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아직 제게 베푸실 마지막 자비가 남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피고!”

“사형 선고를 내리십시오. 본래 그래야 했던 대로 제 목에 밧줄을 채우십시오. 저는 제가 다해야 할


마지막 의무가 끝나면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하러 돌아올 겁니다.”

법정 안의 사람들은 자일스가 예상했던 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런 건 그들이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상황극의 대미를 그가 모조리 망쳐 놓고 있었다.

물론 악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진실을 말할 뿐이었다.

“저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당신들의 손에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저의 죄는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조작되었으니까요. 벨담을
우롱하기 위해 저에게 거짓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제 온전한 죄만을
벌하십시오. 그때가 되면 저는 미련 없이 처형장에 올라서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언사가 뻔뻔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비난을 쏟아 내지는 못했다.

누구도 그의 목소리나 시선에서 교묘하게 포장된 거짓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일스를 비난하던 몇몇
사람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조작되었다는 거지? 왜
재판정에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 거지?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반대편으로 옮겨 갔다.

그들은 이제 해명을 원했다. 자일스가 치졸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또다시 속이려 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

자일스는 재판장이 양옆에 앉은 판사들과 무어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판결문을 꺼내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일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고 자일스 헤센은 도합 103 명의 벨담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스스로의 누이를 직접 살해한
죄가 크며 스스로의 죄를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이로써 재판부는 벨담을 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려 한
피고인에게 사형 처분을 내린다.”

판결문을 전부 읽은 후에도 사람들은 얼마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주도하려
하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한두 사람이 조심스레 손뼉을 따라 쳤다.
이내 박수 소리로 물든 재판정 정중앙을 바라보며 자일스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는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체념하는 방법을 익힌 지 오래였다.

군인들이 그를 의자에 속박한 벨트를 풀고 두 팔을 붙잡아 끌어냈다. 자일스는 항의하는 대신 순순히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재판정을 나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처형장까지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얼마 전, 루이제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재판을 받고 나서 다시 차를 타고 안전 가옥으로 돌아올 거야. 감옥에 가두기에 너는 너무 유명한


죄수고, 상부에서는 너를 군에서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곳에 두기를 원하거든. 내부에 배신자만 없다면
탈출 같은 건 꿈도 못 꾸겠지.’

자일스는 그녀가 숨겨 놓았을 열쇠의 감촉을 느꼈다. 작은 열쇠는 그가 입을 죄수복 소매 속 교묘한 곳에


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곧장 라르손 부두로 향해. 최대한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재판이 끝나고
얼마 안 가 배가 출항할 예정이니까.’

‘배라니?’

‘안나가 그 배를 탈 거야. 네 재판일에. 보통 배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 배는 죄수를 싣고 가는


수송선이야. 상부에서는 안나를 그 배에 태워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거야. 뒷말이 나올 구멍을 완전히
봉쇄하려는 거지. 안나도 결국엔 목격자나 다름없으니까.’

‘그녀가 배에 타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나?’

‘거기까진 모르겠어. 상부에서는 내게도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네가 하기에 달려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안나를 구할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야.’

‘왜 나를 돕는 거지, 루이제?’

루이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영영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건 자일스도 알았다.

군인들이 그를 차 안에 쑤셔 박듯이 밀어 넣었다. 자일스는 그들이 차에 타는 틈을 타 열쇠를 손에 쥐고


차분히 수갑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러나 즉각 움직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차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아직 그가 수갑에 구속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 군인들은


자일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일스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나머지는 전부 그에게 달려 있었다.

라르손 부두. 자일스가 기억해야 할 건 오로지 그 장소밖엔 없었다.


도로에 진입한 차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돌연 수갑을 풀어낸 자일스가 한 팔로 왼쪽에 앉은 군인의 목을 꺾었다.

<87 화>

비슷한 시각.

또 다른 호송용 차 한 대가 라르손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는 단 세 대. 그중 가장


녹슬고 노후되어 보이는 커다란 배가 가장 먼저 출항할 예정이었다.

루이제를 포함한 군인들이 차에서 내렸다. 루이제는 그들이 후면에 달린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여자 하나를
실은 들것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나는 완전히 의식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쪽 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머지않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태우고 떠날 배가 굉음을 내며 울었다.

루이제는 불안했다. 자일스는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안나가 곧 배에 탈 것이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가 제때에 오지 못하면 안나는 그대로 죽을 일밖에 남지 않는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서둘러야 해.”

그녀가 중의적인 암호를 중얼거렸다.

“시간이 많지 않아.”

루이제의 말을 더 빨리 움직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들것을 들고 배 쪽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얌전히 누워 있던 안나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치 못한 몸이었지만 그녀는 놀라울 만한 기력을 발휘해 맨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놀란 군인들은 들것을 내려놓고 안나를 뒤쫓았다.

“멈춰! 경고하겠다!”

루이제는 그녀를 쫓아가는 척 뒤를 따랐다. 사전에 모의한 일이긴 했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며칠을 고문당한 몸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솟아 나오는 건지 경이롭기만 했다.

안나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며 화물을 옮기던 일꾼들을 일부러 넘어뜨렸다. 박스가 와장창 쓰러지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군인들을 덮쳤다.

루이제는 그들에게 욕을 지껄이며 한편으로는 불안한 눈빛으로 안나 쪽을 바라보았다.

자일스는 대체 언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

이대로 아무 성과 없이 붙잡힌다면 루이제 또한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였다. 돌연 안나가 놀란 비명을 질렀다. 루이제는 군인 한 명이 불시에 뛰쳐나와 그녀의 팔을


잡아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 분 전, 제압한 군인들을 바깥으로 모조리 내다 버린 자일스는 서둘러 라르손 부두를 향해 차를 몰았다.

벌써 배가 출항했을까? 방금 전 싸움을 벌인 탓도 있겠지만 심장이 거세게 뛰며 체온이 올라갔다. 핸들을


잡은 두 손에는 땀이 찼다.

그는 추적하는 이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도로 위를 달렸다.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정박해 있는 배들이 많았다. 저 중엔 안나를


태우고 떠날 배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녀가 배에 올랐다면 모든 것이 허탕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자일스는 차를 아무 데나 세워 놓고 내렸다. 그를 호송하던 군인에게서 빼앗은 군복 재킷을 입고 머리에는


군모를 푹 눌러쓴 채였다. 유사시를 대비해 권총과 제압용 곤봉도 챙겼다.

자일스 헤센이 부두 근처를 활보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 그는


어렴풋이 보기에 평범한 군인처럼 보였다.

그는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주변을 서둘러 탐색했다.

안나는 어디에 있지?

분명 호송용 차가 세워져 있을 텐데…….

그 순간 근처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일스는 그게 평범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군인들이 무어라 고함을 질러 대는 소리는 곧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자일스는 뒤늦게 합류한 군인인 척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친


흰 옷의 여자가 도주하고 있었다. 안나였다.

안도감이 몰아치는 동시에 자일스는 안나를 향해 뛰었다. 그는 여전히 남들의 눈에 그녀를 체포하러 온
군인으로 보여야만 했다.

자일스는 순식간에 안나의 새하얀 팔을 잡아챘다.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아직 안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일스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안나를 두 팔로 제압하고는 속삭였다.

“안나, 나야.”

그러자 안나가 으르렁대던 것을 멈췄다.

“자일스?”

“정신을 잃은 척해. 내가 널 기절시켰다고 생각하고.”

루이제와 다른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자일스는 금세 움직임을 멈춘 안나를 안아 든 채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루이제는 그의 정체를 눈치챈 듯했다. 설마 자일스가 나타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다른 군인들은


아픈 곳을 주무르며 구시렁대기 바빴다.

“왜 이제 오는 거야?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 빨리 나를 따라와, 배가 곧 출항할 예정이니까.”

“알겠습니다.”

자일스가 낮은 목소리를 꾸며 내며 대답했다.

“너희 쓸모없는 녀석들은 차로 돌아가서 대기해. 죄수를 태우고 나서 바로 이동할 거니까.”

“아, 알겠습니다.”

루이제를 따라온 군인들은 뭔가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결국 상관의 명령을 따르러 떠났다. 루이제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왜 이렇게 늦었어?”

“최대한 빨리 오려고 노력했어.”

“하마터면 이대로 안나를 배에 태울 뻔했잖아.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야. 저길 봐, 맨 오른쪽에 있는


하얀 배가 세피로스 제도로 떠나는 여객선이야. 나머지는 내가 조치를 취해 뒀으니까 이 표를 가지고
여객선에 타도록 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건 오로지 네 몫이야. 그녀가 덧붙였다. 자일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자일스 헤센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안 군인들이 언제 부두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자일스가 여객선 쪽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익숙한 금속성의 소음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잠깐 기다려.”

그것은 분명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였다. 자일스는 등 뒤에서 난 소리에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루이제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렌트 홀츠만이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새 자일스의 뒤를 쫓아온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며 그들을 총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잠깐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겠습니다.”

“민간인들도 많은데 이런 곳에서 굳이 총을 꺼내야 하나?”

“그만큼 심각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자일스 헤센이 도망쳤습니다. 차를 타고 도주한 모양이더군요.


그놈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뻔한 일이죠.”

아렌트는 자일스의 품에 안긴 안나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분명 제 애인을 구하러 갔을 게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홀츠만…….”

“가만히 계세요, 소령님. 얼마 전부터 당신 행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번 작전을 일부러 망치려
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냥 징계만으론 안 끝날 겁니다. 거기 너.”

아렌트가 자일스를 지목하며 명령했다.

“내 쪽을 보고 얼굴을 보여 봐.”

어떻게 해야 하지?

선택권이 없었다. 그들은 열댓 명의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자일스가 몸을 돌렸다. 아렌트는 그가 눌러썼던 군모를 벗기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흘렸다.

“헤센. 벨담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그는 자일스가 훔쳐 입은 군복을 가증스럽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의 머리 쪽으로 권총을


겨누었다.

“여자를 내려놓고 무릎 꿇어.”

자일스는 안나의 호흡이 긴장으로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현실적으로 안나를 품에 안은 상태에서 총을 든


군인들과 싸워 이길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 항복해야 하나?

안나는…… 이대로 죽게 되는 건가?

“무릎 꿇어!”

아렌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자일스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이대로 안나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자일스 헤센,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여자를 내려놓고 무릎 꿇어. 그러지 않으면…….”

탕! 돌연 총소리가 울렸다. 놀란 안나가 자일스의 품에서 파드득 떨었다. 하지만 총에 맞은 건 자일스도,


안나도 아니었다.
아렌트의 고개가 천천히 루이제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경직되어가는 얼굴 근육으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노한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멍청한 짓을 정말 저질렀느냐고 묻는 듯이.

그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곧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렌트의 죽음을 확인한 루이제가 자일스에게 외쳤다.

“뛰어, 병신아!”

그녀의 외침을 기점으로 총격이 시작되었다. 자일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렸다. 품 안에서


떨던 안나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경악했다.

“자일스, 뭐 하는 거야?”

자일스는 죄수들을 태우고 떠날 수송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 배에 타면―”

“선택권이 없어! 부두를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벨담 땅을 벗어나야 해.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최선의 카드야.”

부우우―

수송선이 곧 출발할 것을 알리듯이 다시 한 번 울었다. 자일스는 너무 늦기 전에 배 위에 올라탔다.


이윽고 후미에 달린 통로가 거두어지고 배가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멈춰! 멈추라고!”

군인들이 뒤늦게 쫓아와 외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증기 기관이 내뿜는 소리에 파묻혔다. 출항 중지를
알릴 선원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일스는 이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군인들 뒤로 한 명의
장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때 그와 사관 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기이자 친구였던 이의 죽음이 보였다.

그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바쳐서 이 배에 올랐다. 결코 쉽게 얻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반드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88 화>

자일스는 안나를 안고 후미진 곳에 몸을 숨겼다.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기는 했지만, 이제 그들은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동토로 향하는 중이었다.

정치범과 질 나쁜 범죄자들을 노역시키는 바다 건너편의 수용소. 모두가 그곳에 대한 소문만을 들었을 뿐,


죽음의 땅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시사철 녹는 법이 없는 얼어붙은 땅에서 한 달 이상 버틸 수 있는 죄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제대로 된 옷이나 음식을 제공받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수용소지 사형을
당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안나를 그런 곳에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데……. 안나는 이제 걷는 일조차 힘들어하는 데다 자일스는 모두에게


얼굴이 알려진 최악의 살인마였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로를 바꿀 일은 요원해 보였다.

안 그래도 약해진 몸을 끌고 도주를 시도한 탓에 안나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안나가 자꾸 눈을 감으려 해서 자일스는 불안해졌다.

“안나, 괜찮아?”

“조금만 자고 싶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마워.”

안나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 줘서.”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나도 알아. 알지만…… 지금 말하고 싶었어. 너무 늦게 말하는 것보단 낫잖아.”

“그런 말은 하지 마.”

자일스는 군복 재킷을 벗어서 안나의 몸에 둘러 주었다. 그녀가 그저 지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이 배를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이 아직 단 한 사람의 선원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배에 많은 인력이 배치된 건 아닌


듯싶었다.

그렇다 해도 자일스 혼자서 모든 선원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라고 총을 갖고 있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구명보트를 훔쳐 타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제 막 벨담을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다른 국가로 피신하는 것만이 답인데 아픈 사람을 데리고 망망대해를 헤맬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현듯 자일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스쳤다.

그들에겐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선교와는 다른 곳에 선박 내 감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자일스는 안나를 안아 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선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반대편을 향해 한 바퀴 빙 돌아간 자일스는 마침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는 주위를 한


차례 경계한 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쳐 가자 이윽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거리며 들려왔다. 분명 죄수들이 가까이 있었다.
자일스는 그가 흉악범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아직 안나가 그의 품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감옥이 나타났다. 자일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좁은 공간 안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짐짝처럼 수용되어 있었다. 한 사람당 주어진 공간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다리를 펴고 앉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죄수들은 그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마 그가 순찰을 돌러 온 군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남에게 관심을 줄 정도로 그들의 상황이 여유롭지 못한 탓일 수도 있으리라.

어두침침한 복도에 홀로 선 자일스는 입을 열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제 이름은 자일스 헤센입니다.”

그러자 수십 쌍의 시선이 그를 향해 왔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잠시 아무도 그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일스 헤센이라는 이름에 흥분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이윽고 누군가가 두 손으로 철창을 붙들며 자일스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고생의 흔적이 얼굴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한 여성이었다.

“자일스 헤센? 정말 그가 맞소?”

“그렇습니다.”

“헤센이 여길 왜 와 있지? 엊그제 재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비켜 봐, 어디 얼굴 좀 보자.”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천천히 그 쪽으로 몸을 붙여 오거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일스는 마치


철창에 갇힌 건 자신이며, 스스로가 신기한 동물이 된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진짜 자일스 헤센이에요?”

“맞습니다.”

“그렇다기에는 너무 멀끔하게 생겼는데.”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시오. 태어날 적부터 범죄자로 생겨 먹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멀쩡한 낯짝을
하고서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는 이들 중에 악마의 본성을 숨긴 자들이 많은 법이지.”

한쪽에는 남성들이, 다른 한쪽에는 여성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공방이 오갔다.
“우리는 그런 말 할 처지도 못 돼요.”

“제가 자일스 헤센이라잖아.”

“여기선 우리 모두가 자일스 헤센이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죽으러 바다 위로 떠나온 거겠죠.”

“쉿! 위에서 사람 내려오겠다!”

“헤센 씨, 거기 안고 있는 여자는 누구요?”

자일스는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의 품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 연인입니다. 안나 키팅이라고 합니다.”

“그 백작 영애?”

“더 이상은 아니죠.”

안나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성이
자일스에게로 손짓했다.

“이리 오시오. 나는 벨담에서 30 년을 의사로 일했소. 소아과 의사이긴 했지만.”

자일스는 그에게 다가가 안나를 보였다. 비록 그들 사이를 철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의사는 마르고
지저분한 손으로 안나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온몸에 멍이 들었군.”

“그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이곳에 갇힌 모두가 다르지 않은 신세니까. 폭행을 당한 사연은 아무 의미도


없지.”

자일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안나가 진찰 아닌 진찰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나마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살 수 있겠습니까?”

“위급한 상태는 아니오. 물론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신체 기관은 멀쩡한 것 같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어서 말하는 거요.”

의사는 안나의 상태를 조금 더 살피더니 말했다.

“탈진과 탈수가 같이 왔소. 조금 쉬게 놔둬야 하는데. 깨끗한 물도 필요하지만 그건 여기선 구할 수 없을


거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안나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려고?”

“뱃머리를 돌릴 겁니다.”

그러자 의사는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만.”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배를 점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런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나선다 해도 가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뭘 어떻게 도울 수 있단 거요? 이곳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오.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지. 싸우는


법 같은 건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일 텐데.”

“잠깐,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반대편에서 언짢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도 그 사람을 도우려 나서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저자는 자일스


헤센이라고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아무리 그래도 저런 사람을 돕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자신의 가족마저도 죽인 사람인데…


….”

“맞습니다.”

자일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침묵을 자아냈다.

“저는 제 누이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제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뿐이 아닙니다. 저는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전부 저와 누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게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소금기 섞인 악취가 나는 좁은 복도는 그를 위한 고해실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는 제 죄를 부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음은


사실이며 벌을 받게 된다 해도 저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저에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제 어깨 위에는 수많은 업보가 쌓여 있지만 여기 있는 안나는 아닙니다. 그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군인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고, 결국 이 수송선에까지 끌려왔죠. 전부 제가
아끼는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저는 안나마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자일스는 안나의 손을 꼭 붙들며 말을 이어 갔다.

안나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저를 도와 달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제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온갖 고문에 시달린
여인을 도와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안나가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저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안나는
…… 제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구원이니까요.”
<89 화>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남자가 말했다.

“아가씨의 사연은 안타깝게 됐소만, 이 배에 탄 이상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소. 승선을 피했다면
모를까.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소. 당신과 그 아가씨도 포함이지.”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시오! 전부 다 손에 쇠사슬을 차고 있는 죄수들이잖소.


하물며 우릴 감옥에서 꺼낼 방법은 어떻게 마련할 셈이오?”

“감옥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다 헛수고가 될 거예요!”

누군가 외쳤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불쌍한 사람 같으니. 정말로 이 배가 어딘가에 정착할 거라고 믿는


건가요?”

“동토의 감옥으로 가는 수송선이 아닙니까?”

“당신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을 거예요. 이 배가 정말 어디로 향할지…….”

자일스는 그녀에게 뭔가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벌써 알아챈 것일지도 몰랐다.

자일스는 안나를 기둥 뒤의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을 뜬 안나는 위험을 감지했는지 몸을 웅크리고


사각지대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몸집이 큰 자일스를 숨겨 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일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켜서 안나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안나마저 들키게 할 순 없었다.

선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전등으로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렬한 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자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손님이지? 배를 잘못 찾아오셨나?”

선장은 자일스의 옷차림을 보더니 물었다.

“죄수인가?”

자일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그의 온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탐색했다.

“저 철창 안을 빠져나왔을 리는 없고.”

“자일스 헤센이에요.”

누군가 소리 높여 그의 정체를 밝혔다.

“자기 이름이 자일스 헤센이라고 말했어요.”


“헤센? 그 배신자?”

선장이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전등을 고쳐 쥐고는 자일스의 얼굴을 더 밝게 비추었다.

이내 선장의 얼굴 위에 충격과 놀라움이 차례로 스쳐 갔다.

“자일스 헤센이 왜 이 배에 탄 거지?”

“…….”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군. 따라오게. 쓸데없이 저항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 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가 총을 꺼내 자일스의 머리를 겨누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자일스는 두 손을 들고 선장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천천히 저 바깥의 빛을 향해 올라갔다. 마침내 갑판 위로 올라오자마자 선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게 분명했다.

선원들은 자일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커다랗게 뜬 눈으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선장님, 이자는…….”

“나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군. 우선 구속하고 선실로 옮겨. 이 배에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순식간에 그를 무릎 꿇린 선원들이 자일스의 두 손을 단단한 밧줄로 구속했다. 그는 자그마하게나마


마련된 선실로 끌려갔다. 그의 명성 때문에 불안했는지, 선원들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는 의자와 그의
몸을 한 번 더 둘러 묶었다.

밝은 곳에 나오니 선장의 얼굴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선장의 직함을 가지기에는 젊은 남자였다.
해군이었을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보니 그는 제대로 된 제복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선장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분명히 자네에 대한 지시 사항은 없었는데. 이 배에는 왜 탄 거지? 누가 자네를 임의로 태운 건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 뭐 상관은 없지. 내가 자네 같은 사람이랑 길게 얘기해 봤자 좋을 것도 없고. 통신 장치가 없는


배라서 답답하군.”

자일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에서 일말의 경멸이 느껴졌다.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벨담 사람이


그에게 호의를 보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선장은 문 옆에 서 있던 선원에게 지시했다.

“이따가 신호하면 단단히 구속해서 데리고 빠져나가. 구명 보트에 함께 태운다. 사고 못 치게 관리 잘 해.


이대로 가라앉힐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그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자일스는 그를 무시하려는 선장에게 재차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거 말 안 해 주면 죽일 기센데?”

그가 비웃었다. 이제 혼란스러운 쪽은 자일스였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방금 저자가


가라앉힌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자일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흥분하지 마. 이건 경고다.”

“이 배, 어디에 정착하는 겁니까?”

잠시 그를 응시하던 선장은 어깨만 으쓱여 보이고는 선원과 함께 선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자일스는


낭패감을 느끼며 몸을 뒤틀었으나 구속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낡고 녹슨 선체. 이상할 정도로 머릿수가 부족한 선원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탑승한 배는 이제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 막 도망쳐 온


참이었던 부두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곧 노을이 지려고 했다. 하늘의 일부가 점점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차츰 변해
가는 하늘이 자일스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구속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선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낡아 빠진 가구들만이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자일스는 힘 빠진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불청객이 자일스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멎은 쪽을 훔쳐보았다. 낯선


남자들의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자일스가 나를 기둥 뒤로 밀어 넣을 때 몰래 쥐여 준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권총이었다.

자일스가 이곳에서 채 하지 못한 일을 내가 마저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일스 헤센이야 그렇다 쳐도,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누군가 물어 왔다.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저도 그 답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당신이 헤센의 애인이라던데.”

“맞아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당신도 정말로 헤센을 사랑했던 거요?”

누군가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흉악범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아는 자일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였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자일스를 사랑해요. 그 사람은 제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어요. 이 배에 오른 것도 저를 구하기


위해서 자진한 거예요.”

“그럼 당신은 여기 왜 탔는데?”

“저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이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나 있을까?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국가가 저를 살해하려 한 것 같아요. 아마도 그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겠죠. 아니면 증인을 없애려
한 것이거나.”

“벨담이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저는 자일스의 곁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고,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를 걷어 올려 검푸른 멍 자국들을 보여 주었다.

“보여요? 이거 다 군인들한테 맞은 거예요. 벨담 군인들이요. 그들은 나를 자일스와 한 공간에 가둬 놓고


죽도록 팼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끌고 가서 곤봉으로 때렸죠. 그것도 자일스가 보는 앞에서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언제 맞았는데요?”

“재판이 있기 며칠 전부터 계속이요.”

“난 당신이 왜 이 배에 탔는지 알아요.”

한 여자가 말했다.

“만약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벨담은 당신이 죽길 바랐던 게 맞을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당신처럼 고문을 받았어요. 죽은 사람들은 전부 무덤으로 갔죠. 죽지 않고 버틴 사람들만 이 배에 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운명에 처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여자는 범죄자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범죄자의 얼굴을 타고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그랬다. 죽음의 땅으로 끌려갈 정도로 흉악한 죄를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게르트루드요.”

“당신도…… 나처럼 맞았어요?”

게르트루드는 코웃음을 치더니 다리에 난 화상 자국을 보여 주었다. 절대 사고로 난 흉터가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 고의로 지진 거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왜 그런 일을 당한 거죠?”

“전쟁을 틈타 벨담에 숨어든 적국 첩자랑 내통했거든요.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래요. 내가 첩자와 작당을


했대요. 나도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난 말했죠. 모르겠다고요. 기억이 안
난다고. 이 흉터는 그래서 생긴 거예요. 내가 비열한 거짓말을 한 대가래요.”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요?”

“내가 모든 사람들의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 같은 사례가 많다는 것만은 알아요. 아가씨도 알겠지만
벨담은 위태로운 시기에 처해 있어요. 물론, 정말 첩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죠. 저도 모르는 새에 그들
중 하나와 대화를 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난 느꼈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애당초 나는 죽을
사람으로 찍혔다는 사실을요.”

“사회를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지.”

이번에 말을 꺼낸 건 내 상태를 봐 줬던 소아과 의사였다.

“벨담은 무리하게 전쟁을 시작했고, 보란 듯이 패배했소. 그 대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빼앗겼고.


이제 벨담은 제 국민들이 두려워진 거요.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아니까 말이오. 그래서 누군가
들고 일어나기 전에 먼저 공포로 찍어 누르려 하는 거지. 지금은 시작 단계일 뿐이지만 앞으로 점점
심해질 거요.”

“사람들이 증발하곤 하는 곳에서 누가 불만을 품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붙잡혀 온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오히려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자일스도 마찬가지예요! 벨담은 그에 대한 가짜 뉴스를 꾸며 냈어요. 당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은


대부분 벨담이 자극적으로 왜곡한 것들이에요. 그들은 자일스를 국가가 감당해야 할 돌팔매질을 대신 받아
줄 대상으로 이용한 거예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난 입스윈에서부터 자일스의 행적을 내내 봐
왔어요. 믿어 주세요.”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사람들을 향해 애원했다.

“제발, 우리를 도와줘요. 생각해 봐요,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떻게든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해요.”

“‘도착’이라니.”

게르트루드는 안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이 배는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우리는 전부 이대로 수장될 거예요. 군인들이 말해 주지 않았나요? 아가씨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배가 우리의 무덤이 될 거라고요. 다른 곳이 아니라.”

“하지만 분명히…….”

“저 여자 말이 사실이오.”

의사가 말했다.

“동토로 가는 죄수들은 따로 있소.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아니지. 차라리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할 거요.
노역을 하다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지금쯤 위에서는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경보음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불길함을 자아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안나를 제외하고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의사는 무기력하게 덧붙였다.

“조금 있으면 배가 가라앉을 예정인가 보군.”

<90 화>

붉은 경고등이 번쩍거리며 간헐적으로 그들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배가


가라앉는다고? 정말 진심인가?

하지만 지금은 농담이 어울리는 때가 아니었다. 농담을 즐겨 할 사람들이 모인 곳은 더더욱 아니었고.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냅다 소리를 쳤다.

“다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인가요? 내가 꺼내 줄게요. 바다를 헤엄쳐 가든지,


아니면 구명보트를 빼앗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해요. 물론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건 무엇에도 비할 바 없이 멍청한 짓이에요. 내가 장담할 수 있어요. 내가 그 증거예요.”

“무슨 증거?”

“만약 내가 겁쟁이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벌써 몇 년 전에 죽어 땅 속에


파묻혔겠죠. 내가 죽도록 맞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죽도록
맞았어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그는 정말 내가 죽기를 원했어요.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가두고 방치했죠.

하지만 난 살아남았어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어요. 다음 날이 되면 또 맞게 된다는 걸 알지만


상관없었어요. 결국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나뿐이었죠. 난 그때 알았어요. 절대 내 목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걸요.”

나는 자일스가 건네준 권총으로 철창의 자물쇠를 겨누었다.

“포기할 거예요, 아니면 마지막 시도라도 해 볼 거예요?”

“그 문을 부순다고 해도, 우린 두 손이 자유롭지도 않은데 어떻게 선원들을 상대한단 말이오?”

“숫자로 밀어붙이면 되죠.”

“무모한 사람이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거든요.”

탕! 총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박살났다. 반동에 의해 내 몸이 뒤쪽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다시 일어나 반대쪽의 자물쇠를 부수었다.

이제 그들은 자유였다. 사람들은 확신이 부족한 걸음걸이로 철창 안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 더 소리쳤다.

“배가 곧 있으면 기울지도 몰라요! 구명보트를 빼앗기면 우리 다 죽는 거예요. 명심해요, 먼저 빼앗는


사람만 살 수 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의지를 얻은 것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찬 사람들은 그나마 자유로운 발로 복도를 달려
나갔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서 한 손에는 권총을 든 채로 바깥으로 나갔다.

선원들이 구명보트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진영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뒤늦게


권총을 꺼내 든 이조차 몸으로 밀어붙여 오는 사람들을 상대할 길은 없었다.

나는 자일스부터 찾아야 했다. 혼란한 갑판 위에서 그를 찾으려 고개를 빼 봤지만 그를 닮은 실루엣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자일스!”

내가 외치는 순간이었다.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내가 밟고 있던 지면이 급하게 기울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바닥 위를 굴렀다.

손끝에 힘을 주고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던 나는 문득 내가 총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봤지만 내가 놓친 권총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 죄수들에게 밀려서 바다 위로 추락하는 선원들 등
아수라장이 된 배 위에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일어나려고 시도하다가 몇 번 정도를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종이로 만든 다리를 가진 기분이었다. 겨우 일어난 나는 무작정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헤맸다.
“자일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내 귓가에 들려왔다.

“안나!”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사람들 사이로 그의 얼굴을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자일스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손을 뻗으며 달려 나가려 했다.

그러던 찰나 내 몸이 허공으로 뜨는 것이 느껴졌다. 배가 주체할 수 없이 기우뚱대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내 앞에 서 있던 사람 몇 명이 내 쪽으로 추락하며 나를 바닥으로 떠밀었다.

비명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나는 갑판 위를 정신없이 구르다가 차가운 쇳덩이에 그대로 머리를


부딪혔다.

눈앞이 암전으로 뒤덮였다.

안나.

제발 눈 좀 떠 봐, 안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안개가 점점 걷혀 갔다.


나를 향해 애원하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냈을 즈음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노을빛으로 가득했던 것 같은데, 주변이 벌써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일스가 나를 필사적으로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툭 튀어나온 구조물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배의 절반이 새카만 바닷물에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가 손을 놓치는 순간 우리


모두 갑판 위를 미끄러져 바다에 빠지고 말 것이다.

번쩍 눈을 뜬 내가 물었다.

“자일스, 괜찮아?”

“난 무사해. 너는? 날 붙잡을 수 있겠어?”

“나는…….”

그 순간 나는 내가 처음 보는 조끼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건 구명조끼였다.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자일스가 내게 입혀 준 것일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토록 어지러웠던 갑판 위에는 이제 오직 나와


자일스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빠져나갔어. 이제 남은 구명보트는 없어. 이 배를 빠져나가는 법은 이제


헤엄치는 방법뿐이야.”
“나 때문에 보트를 타지 못한 거야?”

그게 정말이면 어떡하지. 그러나 자일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람에 비해 보트 숫자가 부족했어. 다들 서로 타려고 난리였지. 꼭 너 때문에 타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미안해, 자일스. 너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니야, 안나. 너는 잘했어. 스스로 탓할 필요 없어.”

이제 중요한 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였다.

주변은 깊은 바다였고, 우리는 천천히 가라앉는 배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이 배가 우리의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일스는 안나를 한 팔로 껴안고 생각했다. 구명보트 없이 어떻게 이 배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안나가


헤엄을 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다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으니까.

설령 헤엄을 칠 줄 안다고 쳐도, 안나의 몸은 너무나도 약해진 상태였다.

다른 방법이 절실했다.

그나마 희소식이 있다면 안나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는 거였다. 자일스는 그녀가 조금만 더 버텨 주기를
바랐다.

“신호를 보내야 해.”

그가 말했다.

“누군가 이 배를 발견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벨담 군인들이 찾아올 수도 있어.”

“우선은 배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야. 나머지는 그 후의 일이야. 한 번 도망쳤는데 두 번은 못 도망치겠어?


안나.”

달빛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에게는 손해였다. 기온이 점점 떨어질


것이고, 안나가 걸친 건 얇은 천으로 만든 옷과 구명조끼가 전부였다.

“안나, 이걸 붙잡고 있을 수 있겠어?”

“설마 어딜 가려는 건 아니지?”

“뭐라도 찾아야 해. 선실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럼 넌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선택권이 없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

그는 안나의 손을 이끌어 스스로가 잡고 있던 구조물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안나는 두려워 보였다. 혹여나 그가 저 검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안나, 잘 잡고 있어.”

“자일스…….”

“난 괜찮을 거야. 금방 돌아올게, 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자일스는 안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웃음을 띠어 보인 후 천천히 그녀를 놓았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갑판 위를 미끄러져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아무리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늦은 시간의 바다는 아직도 얼음장 같았다. 자일스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바닷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내려앉은 어둠 탓에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그는 벽을 더듬어 겨우 선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각종 가구와 물건들이 물에 잠긴 선실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자일스는 미약하게 비쳐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그가 찾는 물건을 필사적으로 구별해 내려 애썼다.

어딘가엔 있을 텐데.

곧 버릴 배였다지만 그것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일스는 곧 숨이 차오르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제발…….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기도했다.

이대로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아무 소득조차 없이 올라갈 수도 없었다.

내가 그걸 찾을 수만 있다면.

익숙한 형체가 눈에 띄었다. 자일스는 곧장 팔을 뻗어 그가 찾던 물건을 잡으려 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물속에서도 더욱 눈을 부릅뜨며 새빨간 색을 입힌 비상용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그의 손에 신호탄이 잡혔다.

<91 화>

얼마 동안 물속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배는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옆으로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안나는 하필이면 구조물에서 손을 놓칠 뻔했다.
그녀는 자일스가 사라진 쪽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체감상 몇 분은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왜 그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때 자일스가 흠뻑 젖은 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안나의 입가에 순간적인 안도가 서렸다.

자일스는 한 손에 신호탄 발사기를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갑판 위를 기어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물에


젖었기 때문인지 그는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해가 없는 바다 한가운데는 몹시 추웠다. 특히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온 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스스로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갑판 위로 올라가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신호탄을 발사하기만 하면 누군가 그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니까.

“자일스! 괜찮아?”

안나가 소리쳐 물어 왔다.

“난 괜찮아!”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대답이 그다지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추위 때문에 목소리
끝이 떨렸다.

“내려오지 마, 안나! 조금만 더 붙들고 있어! 내가 신호탄을 발사할 테니까 누군가 올 때까지 그걸
붙잡고 있어야만 해!”

그는 권총과 비슷하게 생긴 발사기를 붙들고 하늘을 향해 조준했다. 제발 제대로 작동해야 할 텐데.


이것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 모두는 끝이었다.

자일스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안나만큼은 꼭 살려 보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니까. 안나는 살기 위해 모진 고문들을 받아 내고, 견뎌 냈다.

여기서 허무하게 끝을 내게 할 순 없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새빨간 조명탄이 밤하늘을 비추며 천천히 포물선을 그렸다. 자일스는
스스로가 발사한 조명탄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그들은 운에 기대는 수밖엔 없었다.

누군가 그가 쏘아 올린 신호를 발견했다면 그들은 살 수 있을 것이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만 할 것이다.

아르나톨의 군인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어두운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헬리콥터에 설치된 조명이 바다


위를 끊임없이 탐색 중이었다.

그들이 야간 임무에 나선 건 영해를 침범한 선박이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가끔씩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외국 어선들이 허락 없이 영해 위를 누비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이들을 잡는


것이 정찰 임무를 나선 군인들의 역할이었다. 그들이 하늘 위를 날며 침입자들을 발견하면 해경 선박에게
전파 연락이 가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다지 심각한 임무는 아니었다. 상대는 보통 민간인들이었고, 조금만 겁을 주면 알아서


물러나고는 했으니까.

그런 이유에서 헬리콥터 뒷좌석에 탄 군인들은 저들끼리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녀석에게 마리나라 소스를 건네줬지. 그랬더니 녀석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자기가 찾는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거야. 마리나라보다는 조금 더 달면서도 적당히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좋으면서도…….”

“미친놈, 가지가지 하네.”

“그래서 난 냅다 그놈 접시 위에 케찹을 뿌렸어. 그랬더니 녀석 반응이 압권이었다니까. 마치 신성


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씨, 조용히 좀 해, 줄리아! 너 때문에 교신하는 데에 방해가 되잖아!”

“교신할 것도 없으면서 괜히 화풀이하지 마. 그냥 우리는 바다 구경이나 하면서 돌아가면 되는 거라고.


밑에 아무도 없잖아, 봐.”

“그래도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닥쳐. 하루라도 조용히 돌아가는 날이 없어, 정말이지.”

“야, 저거 봐 봐.”

함께 낄낄대던 마리아가 그들의 주의를 끌려 했으나 나머지 군인들은 입씨름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불만 있으면 다른 팀으로 옮겨 달라고 하든가, 알아서 하세요. 왜 그리 맘에 안 드는 게 많아? 마치


벨담 놈들처럼 말이야.”

“뭐라고 했냐?”

“그러고 보니까 벨담에 주둔해 있었을 때가 기억나네. 내가 그놈들 땅을 밟았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

“미친놈들아! 그만 좀 떠들고 저것 좀 보라고!”

그제야 나머지 동료들의 시선이 마리아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저건
분명히 신호탄이었다. 붉은 빛을 내는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무슨…….”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거야. 분명해. 저쪽으로 접근해 봐야겠어.”

알레사는 조종간을 잡고 조명탄을 쏘아 올린 방향으로 헬리콥터의 방향을 틀었다. 새하얀 조명이 바다


위를 이리저리 탐지하기 바빴다.

머지않아 그들은 반 이상 가라앉은 선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여자가 선박에 매달린 채 헬리콥터 쪽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모터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내 쪽을 비추고


있었다. 저건 헬리콥터였다. 확실했다.

누군가 나를 구조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미친 듯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예요! 여기라고요!”

혹시 저것이 벨담에서 날려 보낸 헬리콥터는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대로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자일스의 말대로, 두 번 도망치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헬리콥터가 우리 쪽으로 가까이 접근해 왔다. 그 안에는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입은
군복이 벨담군의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안심하고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군인이 외쳐 물었다.

“여객선이 침몰한 겁니까?”

“벨담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 추위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수송선을 보냈는데…… 사실은 침몰시키려고 다 계획하고 있던 거였어요! 저희는 구명보트가


없어서 빠져나가지 못했던 거고요!”

나는 말하면서도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것보다는 훨씬 더 잘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군인들은 나의


거지 같은 설명을 듣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벨담 사람입니까?”

“아니에요, 저는…… 저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벨담의 혈통을 이은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벨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벨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에요.”

그게 내 정체성이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이름밖엔 없었다. 벨담의 백작 영애도, 자일스


헤센의 사랑을 받은 불운한 여성도 아닌…… 피아니스트, 안나 키팅.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군인들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반문했다.

“안나 키팅?”

다음에 이어진 말을 들은 나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피아니스트 말입니까?”

아. 그랬지.

그제야 나는 내가 글뤼비흐네 잡지사를 지원해 외국에 내 이야기를 알렸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냈다.
저들이 어디에서 왔을지는 모르나, 아마 내 이야기를 읽어 본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

“맞아요. 그 사람이 나예요. 내가 그 피아니스트예요.”

“올라올 수 있겠어요?”

헬리콥터가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왔다. 군인은 내게 손을 뻗어 왔으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구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저 밑에 있었다.

내가 자일스 쪽을 내려다보았다.

“저기…… 저기 저 사람도 데려가야 해요. 함께 태워 줄 수 있나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헬리콥터로 접근하기에는 너무 낮은 곳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올라오셔야만 태워


드릴 수 있습니다.”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자일스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일스는 스스로가 구조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자일스, 올라와! 같이 헬리콥터에 타야 해!”

“먼저 가, 안나.”

“뭐?”

자일스는 내게 손짓을 해 보였다.

“나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이잖아. 구조가 급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나는 걱정하지 말고 스스로를 먼저 챙겨.”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자일스에게 화가 났다. 내가 그를 두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 화가


났고, 자일스가 스스로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에 화가 났다.

“아무리 너라도 여기서 오래 버틸 수는 없어! 배가 가라앉고 있단 말이야! 몇 분 안에 바닷속으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안나, 나는 괜찮아.”

“…….”

이제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가 너무도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어서 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야, 안나. 그러니까 가. 너무 늦기 전에.”

“하지만 내가 먼저 가 버리면…….”

“끝까지 버티고 있겠다고 약속할게.”

“키팅 양, 어서 타셔야 합니다. 저쪽 남자분에게는 다른 구조선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평생 동안 이기적인 선택을 해 왔고, 한 번도 내 선택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었건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이기적으로 굴기가 힘들었다. 자일스를 두고 가야만 하는 내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미웠다.

“……자일스. 미안해.”

“괜찮으니까 어서 가.”

“꼭 버티고 있어야 해!”

군인들이 내 손을 잡고 나를 헬리콥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나는 공중에 떠있었다. 나를 구하러 온


군인들과 함께 승선한 채로 밑을 바라보니 자일스가 흠뻑 젖은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다. 당신의 가는 길이 평안하길.


나는 차마 마주 손을 흔들어 주지 못했다.

결국 나는 울고야 말았다. 그는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지만 내가 그에게 돌려준 거라고는 그를 차가운


바닷속에 두고 홀로 떠나는 것이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군인들은 최대한 빨리 구조선을 보내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나는 멀어지는


자일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멀어졌다. 작아지고 작아진 끝에, 이윽고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조명이 사라지자 온통 암흑만이 남았다.

나는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날아 이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우리를 위한 낙원은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살아남아, 그 지옥 속을 빠져나왔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나였다.

그런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제 내게는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바닷속에 내 낙원을 두고 와 버렸다.

<92 화>

Epilogue

나를 데려간 사람들은 입스윈에서 온 이들도, 벨담에서 온 이들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한 번도 발 들인


적 없었던 또 다른 외국에 와 있다.

그들이 자신의 나라를 뭐라고 소개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안락한 병실에 눕혀 놓았지만 나는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침몰하던 배 위에서


벗어나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건 분명 꿈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전혀 다른 곳에 가있었다.

자일스는 지금쯤 구조를 받았을까?

그는 어떻게 되었지?

하지만 자일스의 소재에 대해 알려 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은 내가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를 바랐다.

몇 시간을 혼자 끙끙 앓던 나는 선잠을 자면서 자일스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반기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는 깨어나자마자 그것이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일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에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카렐 지오다 요원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당분간 키팅 양의 안위를 책임져 드릴


겁니다. 이젠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아, 그놈의 정보국 사람들.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요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마 미소를 지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그간 밤은 평안하셨나요?”

“그럭저럭이요.”

“쾌차하실 때까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의료진의 소견에 의하면 신체가
많이 약해지신 상태라고 하더군요. 추정컨대 벨담에서 키팅 양을 그리 만든 것이겠지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 사람들이 나를 구해 준 건 맞지만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벨담에서 나를


거뒀을 때도 나는 내가 안전해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이지 않았나.

어쩌면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들어 보아야 하겠지만, 대충 얼개는 잡히는 것 같군요. 지금은
정신이 없으실 테니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분간은 회복에 집중하세요. 저희도 쾌차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나를 왜 도와주는 거죠?”

결국 내 입에서 사나운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로 치솟은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지오다 요원은 내 말투에 전혀 영향 받지 않은 사람처럼 싱긋 웃었다.

“그야 저희 영해 안에서 구조를 받으신 분이니까요.”

“그렇다 해도 난 당신들이랑은 크게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회복하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죄송하지만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안나 키팅이요.”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당신은 안나 키팅 양이죠. 여기서 키팅 양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지


아시면 깜짝 놀랄걸요.”

그래도 내가 내 사연을 외국으로 전파한 게 헛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는 건
더 이상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당신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벨담의 잔혹함에 치를 떨고 있어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게 놀라울 지경이라고 그러더군요. 전쟁 같은 삶을 헤쳐 나온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당신을 영웅이라고 불러요. 그리 불리는 사람을 맨몸으로 추방시킬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왜요, 나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라도 하겠대요?”

그러자 지오다 요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라고 한 말은 아닌데 내 빈정거림이 이 사람에게는 깔깔


유머집으로 다가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꼭 그 이유뿐만이 아닙니다. 키팅 양은 난민으로서 망명을 신청하실 자격을 갖고 계시니까요. 저희


군인들을 통해 구조를 받으신 순간부터 그랬죠. 절차를 밟을 생각이 드시면 언제든지 제 관계자를 통해
말씀 주시면 됩니다.”

“자일스는 어떻게 됐어요?”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누군가는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굳히기도 했다. 대답이 늦어지자 나는
그들을 한 번 더 재촉했다.

“자일스는 어떻게 됐냐고요.”

“헤센 씨 말이죠.”

잠시 고민하던 지오다 요원이 어깨 너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와 간호사 몇을 뺀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병실을 빠져나갔다.

뭔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하려 하는구나.

나는 바로 알았다. 눈치가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거다.

이윽고 지오다 요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키팅 양…….”

“왜 그리 뜸을 들여요? 자일스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 아니에요. 많이 다친 거라면 내가 가서…….”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잠시 머리가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초 동안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차가운 현실로 내쫓기듯 돌아왔다.

“못 구했다는 소리예요?”

“저희가 소식을 듣는 즉시 구조선을 보냈습니다만, 아무래도 헤센 씨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덧붙였다.

심장이 뛰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믿고 싶지 않아서 그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자일스를 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구해 준다고 했잖아요! 당신들이 꼭 구해 준다고 해서 자일스를 두고 나 혼자만 헬기에 올랐던 건데! 난
그 사람만 차가운 바닷속에 두고 혼자 구조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자일스만 죽게 뒀다고
하면 어떡하라는 건데!”

자일스가 죽었다는 건가? 그런 건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일스가 죽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고 깨부수자 간호사들이 달려와 나를


만류했다. 내 얼굴은 금세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곧 간호사들을 뿌리치려 하던 것을 멈추었다. 적어도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 구조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 끝까지 그 사람 곁에 있었을 텐데.”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게 이토록이나 절망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검은 바닷속에 자일스를 홀로 두고 왔다. 하지만 그건…… 난 절대 내 목숨을 살리기
급급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난 자일스가 살아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 어떤 위험이 닥쳐도 자일스는 끝내 내 곁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탓일까?

마지막에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자일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나와 자일스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내 목숨을 구했는데…….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그 사실이 절대 자랑스럽지 않았다. 이제 내가 몸을


기댈 곳은 없었다. 내가 살던 세상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위로조차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혼자 있고 싶어요.”

내가 푹 잠긴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머지않아 모두가


병실을 떠나고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웅크리고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죄악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자일스가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구해 준 목숨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끝까지 살아남는 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보답이었다.

나는 입 속으로 자일스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려 보았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처음에 너를
의심해서 미안했어. 너에게 심한 말을 하고, 너를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 취급해서 미안했어.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해.

너를 미워한 것을 후회해.

나에게 커다란 빵을 가져다주러 오던 군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는 내게 생존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안겨 주고 나서 내 곁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생각해 보면 자일스는 자기 자신을 전혀 챙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내게 무언가를 주는 데에만 열중했다.

끝까지 제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죽을 걸 알면서도,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정말로 마음이 놓였던 거다.
스스로가 어떻게 되든, 나를 살려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도 만족했던 거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가 듣지 못할 말들을 마음속으로 건네 보았다.

자일스 헤센.

정말 많이 사랑해.

<93 화>

해가 바뀌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벨담과는 달리 승전의 영광을 입은 아르나톨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삶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들 또한 전쟁 얘기라면 치를 떨곤 했지만, 또 다른 전쟁 속에서 살아 나온 여자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는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살아야만 했다. 아르나톨의 사람들에게는 내가 저술한 자서전이


있었고, 이야기 밖의 나에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왔다.

잡지사에서는 팬레터가 끝없이 쏟아진다며 고충 아닌 고충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편지들을 한 아름 안고


집에 가서 하나하나씩 뜯어 보았다. 얼마 동안은 그게 내 일상의 전부였다.

편지를 뜯어 보면서, 나는 발신자의 이름을 꼭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내오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1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많이 덤덤해지고 무던해졌다. 이제 자일스가 나오는 꿈을 꾸고 울면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내 꿈에 등장하고는 했다. 침대맡에 누워서, 그는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요즘 어때? 식사는 잘 챙기고 있어?

네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나.

그런 꿈을 꾸고 난 때면 나는 항상 꽃다발을 들고 그의 묘비에 직접 찾아갔다. 시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장례식에 참석했던 기억은 난다. 비밀리에 치러진 장례식이라 참석자는 거의 나뿐이었다.

물론 땅 밑에 묻힌 시신은 없었다. 단지 의례적으로 준비한 관과 묘비만이 있을 뿐이었다.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영영 바닷속에 가라앉아 버린 그의


영혼이라도 이곳에 편안히 잠들었기를 바랐다.

내가 텅 빈 무덤 앞에 찾아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묘비에 그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도 나는 이제 울지 않을 수 있었다. 그에게 안부를 전하고, 묘비 앞에


얼마간 앉아 있다가 꽃다발을 두고 돌아오곤 한 지가 벌써 1 년째였다.

가끔씩은 자일스가 내가 두고 온 수선화를 들고 나타나는 꿈을 꿀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울고 만다.

파문 없이 평화롭지만 외롭고도 고요한 호수 같은 삶이었다.

나는 혼자서 수프를 끓여 먹다가 문득 생각했다.

자일스는 내가 이렇게 사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묘비에 찾아가 꽃을 갖다 놓는 것보다는 더


많은 걸 내게 원할 거라고.

불현듯 그가 내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건 다 피아노 때문이었다. 자일스는 나만큼이나 내 연주를 사랑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곧 이 조용한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아르나톨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연주회였다.

연주회를 열고 싶다는 말을 들은 관계자는 왜인지 몰라도 크게 기뻐했다. 그는 내게 오케스트라나 일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다가 마지막에 물었다.

‘그런데, 연주하고 싶은 곡이 따로 있으신 모양이지요?’

물론 내게는 생각해 두었던 피아노 협주곡이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일스는 그 작품을 제일 좋아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 연주회는 그를 위해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연주홀에 모였다. 지오다 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대단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가장 큰 홀을 빌렸는데도 관객석이 다 차 버려서 입석까지 허용해야 할 정도였다.

이번에 나는 드레스 대신 정장을 입고 연주하기로 했다. 관계자는 참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드레스가 참 어울리셨을 텐데.’

그러나 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정장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었어요.’

‘뭐, 그래도 키팅 양은 정장 차림도 잘 어울리시니까요.’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시켜서 꽃다발을 보내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다.

‘아무튼, 성공적인 연주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오케스트라를 등 뒤에 거느린 채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새하얀 건반이 조명을 받아 반질반질 빛났다.

나는 지휘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른이 힘차게 울었다. 웅장한 호른에 힘입어 현악 파트가 계단을 오르듯 음계를 서서히 상승시켜
올라갔다. 오케스트라가 첫마디를 떼고 나면, 이제 피아노가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가 온다.

나는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오래간만에 듣는 피아노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키팅 양,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요원이 내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공연장 직원들로부터 전달받은 수많은 꽃다발들에 파묻힌 상태로 겨우
대답했다.

“고마워요.”

“아니, 피아니스트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연주회를 열자고 할 걸 그랬어요.”

“너무 과찬하지 마세요. 전 그 정도로 대단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지금 들고 계신 꽃다발의 숫자 좀 보세요.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로 사랑받기도


쉽지 않다니까요?”

심지어 대기실 소파 위에 내가 든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아 보이는 꽃다발과 선물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곤경에 처한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저걸 어떻게 다 들고 가지…….

“나중에 시들어 버릴 거란 사실이 안타깝네요.”

“꽃이 시드는 건 중요하지 않죠. 지금 이 순간을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반기는 게 이 녀석들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귀중한 찰나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제가 빠지면 섭하겠지요.”

“여기에 뭘 더 추가하겠다고요?”

“키팅 양! 저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1 년째예요! 꽃다발 하나 없이 찾아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적어도 우리 아르나톨에서 그런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랍니다.”

“정중히 사양할게요.”

“저번에 제가 꼭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미 꽃은 주문해 놨다고요! 정말 안 받으실 건가요? 꽃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걸로 사 온 건데.”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꽃다발들을 잠시 내려놓고 그의 것을 받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새로운 꽃다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건 어디 있는데요?”

“지금 배달 중일 거예요. 어디 보자…… 곧 오겠네요. 사정이 있어서 좀 늦는다나 봐요.”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올게요. 그는 변명 같은 말을 남기고는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혼자 남은 나는 요원의 이름을 외쳐 불렀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1 분이 지나고 5 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충분히 오래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 즈음 더는 참지 못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뭐지? 그새 다들 퇴근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남자였다.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 검은 머리를 가졌고…… 키가 컸다. 그는 꽃다발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이나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는 순간 당황했는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엔 오직 그와 나뿐이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안녕, 안나.”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1 년이 지났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꿈에서 계속 듣던 목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네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보다시피 가장 예쁜 것으로 골라 오기는 했는데…….”

내가 더 듣지 않고 그의 품으로 뛰어든 탓에 자일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또 다른 꿈일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생생한 꿈 말이다. 나는 이 꿈이 깨기 전에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봐 두고 싶었다.

그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변함없이 진실하고 다정한 얼굴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언의 사과를 건네는 듯한 미소였다.

나는 쓸데없는 물음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 일들로 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꿈에서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시도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엔 꿈에서 깨지 않았다. 그의 입술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닌 진짜 자일스가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감정을 끝내 제어하지 못했다.

“넌 죽었잖아. 사람들이 네가 죽었다고 했어. 네 묘비에도 항상 찾아갔는데…….”

내가 울먹거리자 자일스는 내 눈물을 닦아 주고는 말없이 나를 품에 껴안았다. 나 또한 입을 다물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넌 하나도 안 늦었어. 사과하지 마. 내게 사과하지 마, 자일스. 나는 울며 웃으면서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몇 번이고 해도 부족했다. 나는 1 년이라는 공백을 한 번에 채우려는
듯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꽃다발이 떨어졌다. 우리는 진한 꽃 내음 안에서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은 살아 돌아왔고,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은 오롯이 우리만의 것이었다.

행복이란 건 추상적이고 허황된 감정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귀를 멀게 할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난 이제 알 수 있었다.

난 더 이상 좁은 다락방 안에서 살던 아이가 아니었다.

행복이 이런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것이 어린 엘로이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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