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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1-93완-프티차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1-93완-프티차
<1 화>
1. 자일스 헤센
“보인다! 저기 저 저택!”
본토에서 쳐들어온 그들은 남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여 입스윈 사람들을 빨아먹고 부유하게 지냈다.
국가의 원래 주인인 입스윈 사람들이 도리어 노예처럼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전쟁에서 패전한 여파로 벨담은 약화되었다. 벨담이 자국을 지키는 데에 바빠 입스윈을 아예
포기해 버린 덕에 귀족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그 틈을 타 입스윈 사람들은 귀족들을 몰아낼 혁명을
일으켰다.
“그래.”
“그런 일 없었어!”
로빈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가관이군.’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이곳저곳 천천히 돌아보던 자일스는 화려한 무늬로 양각이 된 문을 발견했다.
특별해 보이는 공간 같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는 점마저도 다른 곳과는 달랐다.
자일스는 간단한 소나티네 정도는 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연주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그의 출신 성분을 알고 있는 판국에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행위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안에 들어 있던 건 콘트라베이스가 아니었다.
“넌 누구지?”
“이름이 뭐야?”
“릴리예요.”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
“나와 함께 살던 사람들, 그들이 나를 때렸는데…… 그래서 잡혀간 거죠? 사람을 때리고 괴롭혔으니까.
그래서 벌을 받는 거죠?”
“누가 널 때렸지?”
릴리가 대답했다.
“배가 고파요. 쓰러질 것 같아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여기 안에 누워 있었어요. 여긴 생각보다
아늑하거든요. 난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 돼요!”
‘……맞아요.’
‘아아악! 정말, 정말이라니까요! 그년은 심지어 내 딸도 아니라고요! 천박하고 쓸모없는 년이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서 죽여 버렸어요. 몇 달 동안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고요. 시체만 겨우 남아 있겠죠.
믿어 주세요. 정말이에요…….’
‘하도 풀이 죽어 계셔서 무엇이든 서툴고 부족했어요. 그래서 많이 맞기도 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어요.’
시체는 그림 속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아무튼 귀족 부인의 진술과
일치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한 가지 묻겠다.”
<2 화>
대답이 느려지는 걸 보니 어리석은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자일스는 천천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그녀는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릴리는 이제 자일스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생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 말인가요?”
“사실이에요.”
“네 가족들도 직접 심문했다.”
릴리는 별로 슬퍼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자일스 또한 그러한 반응을 놀랍지 않게 여겼다. 그들의
이야기를 1 분만 들어도 릴리가 이곳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릴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자일스가 부하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죠?”
“음식이요?”
“갖고 와.”
“하지만 그건 제 점심인데요.”
“위브너, 갖고 와.”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랬던 그가 살아남은 귀족가의 막내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부하의 음식까지 빼앗아다 주었다.
혹시 심문 내용 때문인 걸까? 취조를 통해 그녀가 끔찍한 학대에 시달리던 불쌍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가? 그래서 뒤늦은 동정심이 일었고, 이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아진 건가?
자일스는 생각에 잠겼다. 릴리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그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그녀가 유달리 느껴지지는 않았다.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는 생존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혁명군은 피아노를
저택에 두고 갔다. 악기를 연주하며 예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 또한 배가 부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제 연주를 듣고 싶으신가요?”
자일스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나갔다. 릴리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지 그녀가 어색한 동작으로 건반 위를 쓸었다.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나직하던 악기의 음성이 곧 서정적인 선율을 자아냈다. 잔잔하고 아름다우나,
단순하지만은 않다.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음악가만이 소화할 수 있는 야상곡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마주친 피아니스트였다.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던, 그러나 그를 만나 스스로와 음악 모두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
그가 살린 피아니스트.
자일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니, 그녀를 끌고 나가기로 결정했더라면 릴리의 야상곡은
연주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영영 지워져야 했을 것이다.
<3 화>
*
자일스의 아버지는 사업 확장을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입스윈으로 떠났다. 그는 자식들이 새로운 땅에서
날개를 펼치기를 바랐다. 낯선 이국에서의 가능성은 무한해 보였다. 모두가 입스윈은 벨담의 제 2
전성기를 열 것이라 입을 모았다.
자일스의 누이 셀레스트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언제나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열정을 보이던
그녀였다.
자일스는 가까운 곳에 앉아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원고를 고치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무엇에 관한
원고일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셀레스트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는 컸다. 입스윈을 위한 기회였다. 그들에게는 입스윈 내의 상황을
통제할 만한 능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셀레스트의 말대로 자일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버지는 실종된 지 오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모두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들은 자일스와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생존을 위해 국가를 배반하고, 입스윈 혁명을 도우러 나섰다. 그가 가진 막대한 재산을 혁명
지도부와 나누고, 무기를 보급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 신의. 자존심. 그것들을 챙기느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귀족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게 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는데…… 파란이 끝나고 혁명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에게 미래를
약속했던 지도부가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격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자일스는 증오의 굴레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땅에서 벨담
출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뻔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상 뒤늦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자일스는 오히려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만신창이가 된 생존자. 스스로를 돌아볼 즈음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뭔가 해야만 했다.
자일스는 솔즈부르의 저택을 적절히 개조한다면 다양한 목적의 관공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관청 혹은 학교…… 쓰임새는 많았다.
그러나 릴리는 아직 저택에 있었다. 똑같이 하얀 잠옷을 입고, 정돈되지 못한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로.
당연한 사실이지만 야윈 것도 똑같았다. 저런 몸에서 어떻게 피아노를 칠 힘이 나오는 걸까?
“자, 먹어.”
“날 주는 건가요?”
자일스가 뒤늦게 말을 꺼냈을 땐 이미 샌드위치의 절반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릴리는 잠깐이나마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았을 땐…… 그도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맛있어요.”
릴리가 말했다.
“고마워요.”
<4 화>
“꼴사나워 보였죠? 그동안 죽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먹고 살았거든요.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어서 주체를
못 했는데…….”
“다음에는 더 많이 가져오겠다.”
“그러고 싶어서.”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제가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당신은 제 연주를
좋아하시니까…… 그렇죠?”
릴리는 자일스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부디 그녀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릴리의 연주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 또한 아니라, 자일스는 구태여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결국, 끝에 남은 건 무엇이었는가…….
“장교님?”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릴리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너는 죽지 않을 거야.”
자일스가 말했다. 비굴한 살인자로서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에라도 그는 이 세상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남기고 싶었다.
릴리는 자일스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동향 사람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살갗을 찢으며 고문하는
데에 망설임 없던 그였기에 더더욱 릴리를 살리고 싶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적어도 사형수처럼 운명이 찾아오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 헤센이야.”
“고마워요, 헤센 씨.”
“다행이군.”
“하지만 네 진짜 이름은…….”
“요새 좋은 일 있나 봐?”
“안색이 많이 편해졌어.”
“그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자네는 거울도 안 보나? 난 자네를 볼 때마다 다음 날 시체가 되어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어찌나
곧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지 말이야.”
“아니면, 혹시 미련을 놓아 버린 건지.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든다네. 마음을 비우면 평화가 찾아오기
마련이지. 마치 보상처럼 말이야. 등에 짐을 잔뜩 지고 걷는 사람의 눈에 길가에 핀 들꽃이 보일 리 없지
않나.”
“전 괜찮습니다.”
<5 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건가? 나는 혁명을 일구어 나가는 내내 자네를 봐 왔어. 물론 자네에겐
혈통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열성적인 동지라고 생각하네. 그걸 지도부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자네에게도 길이 열릴지 몰라. 아니, 열릴 거야. 그러니 혹시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고 그 잘생긴 눈에 다시 불 좀 켜 봐.”
해링턴은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자일스는 파일을 건네받아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도주한 포로들. 추적 결과에 따르면 그들은 벨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패전의 여파로 느슨해진 국경을 통과하기만 하면 그들은 자유로워질 테고, 그것이 훗날 입스윈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요한 인물들입니까?”
“되도록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와. 뒤처리는 언제나 귀찮은 일이니까. 자네도 동의하겠지?”
“무슨 생각 해요?”
별안간 릴리가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자일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본 릴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숨죽여 웃었다.
“별생각 안 했어.”
릴리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신경이 쓰이기는 했는지 자일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자일스와 함께 있는 동안 항상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본인은 아닌 척해도 자일스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혁명군 장교라는 사실이 릴리에게 위압감을 주는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자일스는
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꾸며 냈다.
“별일 있는 건 아니고요?”
그녀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랐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벌써 눈치챈 것이다. 그러나
자일스는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이에요?”
자일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빵을 내밀었다. 릴리는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영락없는 피아니스트의 손이었다.
“열매를 따야 할 때만요.”
자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는 릴리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고 싶어졌다. 핍박하는 사람도
없는 지금,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릴리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었다.
“실례하겠다.”
“자일스!”
“불편하면 말해.”
릴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곧 자일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 바깥으로 나섰다. 가을의 하늘은 청명했다. 릴리는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언제 이곳에 피바람이 불었냐는 듯, 저택 주위를 둘러싼 전원 풍경은 마냥 평화롭기만 했다.
자일스는 그가 눈여겨봐 두었던 곳으로 릴리를 데려갔다. 들꽃이 무수히 피어 있는 오솔길 근처 냇가였다.
한때 귀족들이 이곳을 거닐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는 냇가 근처에 릴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녀도 이곳은 처음이었는지 생경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새들의 울음과 어울려 그들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버려진 저택에만 갇혀 있던 릴리는 이곳에서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이것이 정말 단순한 임무에 불과하다면, 왜 해링턴은 그의 목숨을 운운하며 중대한 일이라고 칭했을까?
<6 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자일스, 또 무슨 생각 하고 있죠?”
눈치 빠른 릴리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말없이 흐릿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일스는 아직 혁명군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는 살아남았다. 그 사실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계속 들락거리는 건 의심을
사기 좋아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일스 헤센은 몸을 낮추고 릴리 곁에 앉았다. 곁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며, 스스로의 미련을
달랬다.
여기서 끝내.
“컨디션은 좀 어떠십니까?”
“이상 없어.”
“다 모였나?”
“한 명도 빠짐없이 집합 완료했습니다.”
부관이 운전석과 그들이 앉은 뒤쪽 공간을 나눈 두꺼운 칸막이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트럭이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담이 입스윈을 지배하던 시절, 그곳은 풍광이 아름답고 벨담으로의 왕래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이
머물러 가는 일종의 휴양지로 쓰였다. 물론 혁명군이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운 지금은 잿빛 잔해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임무는 지금껏 맡아 왔던 일들과는 달랐다. 자일스는 호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부하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냉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끌던 부하들이 아니었다. 개중엔 처음 보는 군인들도
있었다.
10 월의 끝자락.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샅샅이 뒤져야 할 마인헤바흐 지역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우선은 토끼굴을 찾아내야죠.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을 모아서 토끼굴 근처에 자리를 잡도록 시키는
겁니다. 특히나 추운 겨울에는 무조건 토끼가 굴속에 숨어 있기 마련이거든요. 제가 말씀드렸죠? 토끼는
겁이 많다고요. 입을 모아 고함을 지르면 놀란 토끼가 펄쩍 뛰어나오는데, 그때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자일스는 손을 들어 부관의 발걸음을 제지했다. 희미한 발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군화의 흔적은
아니었다.
“찰리, 북서쪽을 맡은 인력이 우리뿐인 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거의 다 왔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 멀리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탕!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저 멀리 나무들 사이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자일스는 부관을 뒤로하고 목표물을 향해 곧장 뛰었다. 새까만 물체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도주자다.
한 놈을 잡았다고 해서 상황이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자일스는 부관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멀리서 소음이
나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찰리, 마무리해!”
부하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여자가 앞쪽으로 튀어 나갔다. 저 자식들은 임무를 의도적으로 망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쓸모없는 녀석들!”
자일스는 여자의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걷어 냈다. 화상으로 반쪽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이미 파일에서
사진을 확인한 덕에 그런 건 변수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셀레스트?”
하지만 그조차 이 순간에는 사치였다. 부하들이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자일스는 권총 머리를 누이의 이마에 갖다 댔다.
자일스는 추위에 덜덜 떨며 충혈된 눈으로 망가진 셀레스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난 못 해.”
자일스는 부디 누이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자유를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어디든지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스스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목숨 하나에 자유, 목숨 하나에 미래, 목숨 하나에 내일
새벽 어스름…….
“잘하신 겁니다.”
“혼자 있고 싶다.”
“안 됩니다.”
“……찰리. 나 피곤해.”
마인헤바흐에서 돌아온 후 그는 피부가 빨갛게 일어날 때까지 손을 문질러 씻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누이의 피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랬어.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이건 해링턴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한데…… 대위님도 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
“다른 부하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분명히 총으로 목표물을 겨누고 있었는데, 죽은 뒤에 시체를 확인하고
나니 사인은 자상이었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땐 그리 이상스럽게 여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냥
몸싸움하다 보니 무기를 바꾸신 것뿐이잖아요.”
자일스는 차라리 지도부가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 버리라고 지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미련이 없어졌다기보다는 그 정도로 머리가 아프게 지끈거려 왔다.
릴리를 봐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생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자일스의 정신은 마비되었다. 마인헤바흐 작전은 그의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더는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자일스!”
“릴리.”
“……될까?”
“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이미 한 벌 줬잖아요.”
“난 이게 따뜻해서 좋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예상치 못한 부탁이 들어오자 당황한 자일스는 피아노와 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아노를 마지막으로
만져 본 건 변성기가 채 오기도 전이었을 때다. 제대로 연주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건반을 눌렀다. 선율이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뉘른베르크 소나티네는 기본적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간단한 연습곡이었다.
그가 입을 맞춘 순간, 환상을 자아내던 선율이 사라졌다. 사위가 정적으로 고요했다. 자일스는 환상과
현실의 차가운 경계 속에서 번쩍 깨어났다.
“아, 미안하군.”
다급히 그녀에게서 물러난 자일스가 괜스레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이걸 어쩌면 좋지. 방금 그는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절대로 그런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닌데.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러나 자일스가 다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릴리가 벌어진 간격을 다시 좁혀 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을 맞추었다. 서툴지만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자일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릴리는 자일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온 여자였다. 자일스를
안에서부터 조금씩 파괴하고 있는 과거 중 그 무엇도 그녀와는 연관이 없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자일스는 두 팔로 릴리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현실이 그녀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지키기라도 하듯,
그는 필사적이었다.
“릴리…….”
해링턴은 말했다. 그에겐 이루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고. 목표도, 갈망도, 그 어떤 것도.
자일스는 이제야 깨달았다.
릴리에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뜯어내 오려 낸
신문 뭉치를 꺼냈다.
“다 풀면 좋은 점이라도 있나?”
“기분이 좋잖아요.”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 그런 것들이 자일스의 일상이었다. 새 정부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살인은 곧 그의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릴리가 자일스의 위안이 된 것처럼, 어쩌면 그도 릴리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일스는 나직한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집중하는 이 순간만큼엔, 머리를 터뜨릴 것처럼
압박하던 사념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한테는 거짓말할 생각 말게. 아무리 우리 혁명군의 적인 여자라 해도, 자네에게는 적이기 이전에
누이였을 것 아닌가. 위대한 혁명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게지. 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있네.”
자일스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한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해링턴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식사 자리였다. 자일스에겐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해링턴은 그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염려되는지 좀체 그가 혼자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자네가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야 할 계단이 더 남은 모양이야. 자네도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그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부하들 몇몇은 자네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기로 되어
있었네.”
<9 화>
자일스를 따르던 부하들이 아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도부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조차
두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철저히 제 3 자의 시선으로 본 자일스에 대해 보고받고 싶어 했다.
“보고서들은 빠짐없이 올라간 것 같네. 내게도 소식이 들려온 걸 보면 말이야. 문제는 자네를 지켜보러
갔던 요원들이…….”
한마디로 자일스는 의심받고 있었다. 그들이 의심하는 것도 납득할 만했다. 실제로 자일스는 셀레스트를
직접 죽이지 못했으니까. 그건 자살이었다. 의혹이 합당함을 넘어서서 그것이 진실이었다.
혁명군 내에는 자일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자일스는 그들이 죽이지 못한 벨담인이었다.
그 사실이 혁명군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잔인한 작전이 짜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편함의
근원을 제거해도 될지 재검토하려는 것이었고……
해링턴은 그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 혁명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입스윈의 투쟁은
끝을 보였지만 자일스에게는 아직 한참 남은 과제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식사가 나왔다. 식당 직원이 쟁반을 들고 나타나 자일스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자일스는 말없이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었다. 붉은 핏물이 흰 접시 위로 배어 나왔다.
차마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기에 릴리가 머물고 있는 버려진 저택을 들락거리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수시로 미행이 붙었다. 자칫하다간 릴리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솔즈부르의 저택에 잠시 발길을 끊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릴리는 그의 도움을 받기
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자일스는 릴리를 믿기로 했다.
길어야 며칠 안에 청문회가 열리리라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지도부는 오래 뜸을 들였다. 며칠이 어느새
몇 주 단위로 넘어갔다.
자일스는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 혁명 지도부의 명령이라는 핑계를 앞세워서 수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인 살인자…….
그런 것들을 모두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게 릴리였다.
그녀만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으니까.
진실은 그가 누이, 셀레스트 헤센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셀레스트는 자살했고, 자일스는 임무에
실패했다. 혁명을 위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혁명보다는 자기 자신과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더욱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예전과 같지 않은가?
자일스 또한 그럴 생각이었다.
“자일스 헤센 대위, 그대가 이끌었던 마인헤바흐 작전의 성패에 대해 여러 의견이 갈리고 있음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직접 진술하시오.”
작은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어느덧 솔즈부르의 사유지 전역에 낙엽이 깔렸다. 나무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모두 잠에 들었다. 쓸쓸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낙엽들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점차 몰아붙였다. 곧 있으면 그것들마저도
모습을 감출 것이다.
릴리가 저택에서 오래 버티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문이 깨져 외풍이 들이닥치고 한기가 매섭게
저택을 장악할 텐데, 악기 케이스 안에 웅크려 잠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를 도시로 데려가야만 했다. 그러는 편이 릴리에게도 좋았다. 신분에 대한 문제는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이미 출생 신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입스윈 사람들이 전역에 깔려 있었다. 릴리도 겉으로만 보면
그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자일스는 항상 오르던 계단을 오르고, 이전과 같은 코너를 돌아 저택을 가로질렀다. 문틈 사이로 버려진
피아노가 보였다.
“릴리?”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었냐는 것처럼 마른 먼지만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릴리!”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10 화>
2. 릴리 벨모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길게 설파하고 싶지는 않다. 자세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누구라도 장황한
불행 얘기 따위는 오래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난 그냥 부모를 잘못 만난 것뿐이었다. 그게 전부다.
귀족의 명예를 가장 치명적으로 먹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생아일 것이다. 그들이 원하지
않은 사생아를 어떻게 대했을지, 내가 굳이 설명해야 할까?
철저한 무관심 속에 나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났다. 혹여나 비스마르 가문에서 더러운 사생아가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저택에서 쫓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던 나는 주제도 모르고 저택의 위용에 감탄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웃긴 일은 내 곁을 지나친 이들 전부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거였다.
15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생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려 한 이는 아무도 없었던 데다, 길다면
긴 세월이었던 만큼 사용인들도 몇 번 교체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엘로이즈예요.”
그러나 비스마르 백작은 나를 다락방에 다시 처넣는 대신 정신을 차리고 내 얼굴을 이곳저곳 뜯어보기
시작했다. 과연 이 물건이 쓸모 있을지 감정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녀인 어머니에게서 자연스레 습득한 하층민 말씨를 고치기 위함이라는 명목하에, 가정 교사는 내 입에
커다란 유리구슬을 일곱 개나 밀어 넣었다.
좋은 딸이 되어야 해.
그 날에도 나는 빈 시간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은 흘러가는 시간조차 느리게 만들고, 메마른
마음을 풍요롭게 일구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곡가의 예술성에 감탄하며 그의 악보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있던 그때, 그가 찾아왔다.
“아름다운 연주로군요.”
<11 화>
당연한 일이지만 마이어 공작가에서는 길길이 날뛰었고, 비스마르 백작가에서는 딸의 배신을 무마할 만한
또 다른 카드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비스마르 백작이 나를 거둔 것은 내가 상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치라
믿고 은폐했던 갓난아이가 쑥쑥 자라 적절한 카드가 되어 주었으니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린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요한은 화려하게 빛나는 나를 정중하게 맞았다. 값비싼 보석과 실크로 뒤덮인 나보다 간소한 정장 차림인
그는 더욱 빛나 보였다. 나는 하릴없이 주눅이 들었다.
“레이디 엘로이즈.”
“네?”
“엘로이즈.”
그가 다음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벗어.”
“잘 못 들었나?”
“죄송하지만 무슨 말을 하신 건지…….”
격정처럼 차올랐던 기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만두세요.”
당연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를 거세게 뿌리쳤다.
“손대지 마요!”
그건 정말로 아닌 거였다.
“완전히 미쳤군!”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12 화>
왕정과 귀족들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은 의회와 내각이 쥔 시대이기에 망정이지 옛 시절
같았다면 한순간에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었다.
공작을 위협했던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로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남들에게 복종하며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걷는 대신 나의 의지로 내 운명을 선택한 경험은 나를 끈질긴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사용인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새로운 하녀의 이름은 록시였다. 록시 마틴. 나이는
열여덟이고, 밑으로 여동생이 다섯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불쌍한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하녀 일을 자처한 것 같았다.
마룻바닥 밑이 좁기는 했지만 작전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록시의 스케줄과 동선을 며칠
새에 파악했다. 언제 출근하며,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고, 언제쯤 혼자 시간을 보내러 가는지.
“언니…….”
“거기 누구 있니?”
“언니, 제발 도와주세요.”
“뭐?”
동생들 때문에 하녀가 되기로 결심한 열여덟 살짜리 소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 괜찮아?”
내가 사실은 백작의 친딸이고 마이어 공작의 목에 날카로운 조각을 들이대서 이렇게 됐다는 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절반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냈지만, 나머지 절반은 록시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 애는 나를 은밀하게 도와주었다. 들키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내버려 두지 못했다.
한편 비스마르 가문은 날이 갈수록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내가 마이어 공작을 위협한 게 정말로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작가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백작이 언젠가 식사
자리에서 떠들어 댔던 사업 비스무리한 게 실패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13 화>
혹시…… 내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건가? 드디어 적군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기쁜 건지 경악한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적군들이 온 거야!
머리를 쿵쿵 울리는 소음이 가시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머리 위의 판자를 슬쩍 밀어 보았다.
‘살해당했다니? 누구한테서?’
‘난 알거든. 마리아가 마님께 죽도록 맞았다는 거. 그런데 가만히 있는 사람을 갑자기 죽어라 팰 리가
없잖아? 마리아는 마님께서 절대 용서 못 할 짓을 한 거야. 틀림없어.’
‘너 바보야?’
그럼 그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장례를 치러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장례를 치르려면 목사를 불러야
했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그게 병에 걸려 죽은 시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단박에 눈치챌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뒤탈이 생길까 무서워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여자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당연히 시체는
부패한 상태였다. 나는 구역질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시체를 질질 끌고 올라갔다.
……그런 줄만 알았다.
찰칵. 문고리 돌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누가 왔다. 누구지? 느리고 둔탁한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불청객이 피아노 건반을 아무렇게나 누르기 시작했다. 질서 없는 음계가 자못 음산하게 들려왔다.
날 잡으러 온 거야…….
“넌 누구지?”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나를 재촉했다.
“이름이 뭐야?”
어떻게 하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간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아무 말이나 꾸며 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릴리예요.”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14 화>
“안 돼요!”
그는 내 머릿속의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에 눈길이 갔다. 그래, 차라리 나를 죽일 거라면 그 총으로 깔끔하게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비스마르 백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원하는 진실을 얻어 낸 군인은 쓸데없는 질문들을 했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던데. 옆방에 있던 피아노도
네가 연주하곤 했던 건가? 가족들이 너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
혼란스러웠다. 뭐지? 이 사람, 혁명군 아닌가? 왜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난 엘로이즈 비스마르가
맞는데. 그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던 나는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군인은 내게 음식을 건넸다. 나는 빵에서 그렇게 향긋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난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했다.
그가 물었다. 아, 그래. 피아노. 내겐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내가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 방패이자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연주할 때만큼은 오직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 나는 내 연주에 귀를 기울이며 최대한 군인의 존재를
잊어버리려 했다. 내 머릿속에서 공연장이 펼쳐졌다. 청중들이 어둠 속에서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맞아요.”
“믿을 수가 없군.”
나는 살아남았다.
분명 기쁜 일이었는데…….
적선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불쌍한 애들에게 베풀어 주며 자아도취 하는 놈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일스도 그런 부류인 건가? 아니면 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이 웃겨 보이나? 나는 배가 고팠고, 솔직히
허겁지겁 먹어 치운 건 사실이었다.
그 날에도 그랬다.
<15 화>
“자일스!”
“릴리.”
자일스는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에 염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형형한 눈빛에 얼어붙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될까?”
“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이미 한 벌 줬잖아요.”
“난 이게 따뜻해서 좋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과거에 나는 요한 마이어를 바닥으로 밀치고 깨진 거울 조각을 그에게 들이댔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남들을 위해 나를 바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분명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기회였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자일스의 발길이 끊긴 틈을 타 저택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16 화>
3. 안나 키팅
내 걸음이 빠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아무리 음식을 먹어서 체력을 쌓았다지만, 나는 그래도 건강한 축에
들지 못했다. 이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온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내게는 신발조차도 없었다. 맨발로 고르지 못한 땅 위를 걸으니 발바닥에 금방 상처가 났다.
그래도 나는 참아야 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정말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고……마워.”
“뭐 해? 어서 와서 앉아.”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런 얇은 옷차림으로 바깥을 헤매고 있었던 거야? 미친놈한테 걸리면 어쩔 뻔했어?
너한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놀랄 만한 행운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천천히 하지 뭐.”
“그래? 그렇다면 굳이 두 번 신청할 필요는 없겠네. 가족이랑 만날 때까지 여기서 지내. 아무리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바깥은 여자에겐 위험한 곳이야.”
“고마워, 도와줘서.”
푹 자 두는 것 또한 내일을 위한 좋은 전략 중 하나였다.
<17 화>
모든 건 괜찮을 거야.
나는 귀를 기울였다.
혁명군이 나를 찾고 있었다.
*
릴리가 사라졌다.
아무리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불러도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릴리는 이 저택을 완전히 벗어난 게
분명했다.
자일스 헤센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쿵쿵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릴리의 실종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건
그가 릴리가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살렸던 여자는 의도치 않게 그의 전부가 되었고,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존재 없이는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만약 혁명군이 릴리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녀는 엘로이즈 비스마르,
벨담의 귀족 여식이었다.
자일스는 릴리가 저택에 없음을 확인하고 난 후 본부로 돌아갔다. 체포 명부를 뒤져 보고, 빠진 사람이
없나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감옥을 순찰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릴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혁명군은 아직 릴리에 대해 몰랐다.
그녀를 찾아야…….
“기억 안 나십니까? 얼마 전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말입니다. 감옥으로 호송 중이던 차량이 사고를 당했고,
그 틈에 탈출한 그 여자 말입니다. 마르티나 솔제의 동선을 추적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랬지.”
자일스는 안도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의 온 신경은 사라진 릴리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보고받은 사항도 얼른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인가?”
“린즈데일이라고 했나?”
“출발하지.”
<18 화>
린즈데일에 도착한 그들은 흩어져서 도주한 벨담 귀족 여성의 흔적을 쫓았다.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에게는 찾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을 뿐이었다.
자일스는 마르티나 솔제를 찾는다는 구실로 릴리의 행방을 조심스레 뒤쫓았다. 그는 릴리의 초상화를
참고해 대충 본뜬 그림을 들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그녀를 찾는 일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은 예감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며 동네를 한 바퀴 돌지 않는 이상 사람을 찾는 건 원체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안나?”
주근깨가 특징인 여자가 문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마주친 그녀가 놀란 얼굴로 굳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녀가 물어 왔다.
“무슨 일인가요?”
“사람을 한 명 찾고 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나요. 이 애 이름이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자기 이름을 안나 키팅이라고 말했어요.”
셰일라 칼튼은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헌칠하게 키가 큰 혁명군 장교를
마주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장교가 걸음을 멈추고 셰일라를 돌아보았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빛이 마치 버려진 폐가의 암암한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칼튼 양.”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물론 장교는 아직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가 셰일라의 질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과도 같은 선량한 국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불온한 사건과는 전혀 연루될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제가 개인적으로 빚을 진 일이 있어서, 꼭 갚고 싶어 찾는 것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야채를 썰고 향신료를 준비했다.
벨담 사람들이 기세등등하던 시절에는 감히 욕심도 못 냈던 재료들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셰일라는
요리를 할 때 제일 만족스러웠다. 이젠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똑똑.
셰일라는 움직임을 멈추고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설마 안나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너야?”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건넸다. 먼젓번 다녀갔던 장교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셰일라는 자연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 순간 셰일라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분명 안나도 가족이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는데!
“아니, 그건 아니고…….”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점차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게를 밝혔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산함만이 빈 거리를 채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든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 했다.
이런 곳에서 얼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19 화>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남았는데, 고작 추위 따위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건 정말 억울할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근처에서 깡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나는 완전히 굳어서
커다란 깡통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쳐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머지않아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불빛이 건물 벽 틈새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누구야?”
안나는 그에게 무한한 평온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안나에 대한 위협은 그에 대한 위협과도 같았다.
안나를 해치려 하는 이가 있다면 자일스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일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은 마르티나 솔제를 체포하는 게 우선이었다. 임무를 빠르게 마무리해야
안나를 찾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자일스는 곧장 불빛이 깜박이는 쪽으로 달려갔다. 부하들이 뭔가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다급한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단순한 취객이나 철없는 아이의 훼방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보다 두 뼘은 더 작은 여자였다.
“움직이지 마.”
“……릴리?”
*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이었다. 내게 다음 기회는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골목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던 그때, 별안간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나를 움켜잡았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억센 남자의 손아귀를 뿌리칠 힘이 내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움직이지 마.”
하지만 내 얼굴을 확인한 혁명군은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지도, 동료들을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서서 내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릴리.”
“대위님! 잡으셨습니까?”
<20 화>
수 쌍의 손전등 불빛이 나타나 또다시 나를 비추었다. 순식간에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
“알겠습니다.”
“릴리. 그러니까―”
두 번은 괜찮지만 세 번은 안 돼.
“쉿, 괜찮아.”
“추운 겨울밤에 얇은 스웨터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으니, 몸살이 안 날 수가 있나. 불쌍한 것.”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의 목소리로 그런 위로를 들으니 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체감이 되었다.
대신 나는 눈을 감았다.
“목마르지? 마셔.”
“내가 뭘 믿고?”
“난 당신을 몰라.”
“천천히 마셔.”
“더 갖다줄까?”
“나한텐 안 그래.”
“…….”
“웃기고 있네. 이런 식으로 길거리를 떠도는 여자들 잡아다가 지금껏 어디에 팔아먹었어? 나도
팔아넘기려고 이러는 거야?”
“자일스 헤센이 너를 쫓고 있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구조한다고?”
“자일스 헤센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더 많은 사람들을 고문했고. 그에게 적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가 입스윈의 자유와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동안, 그의 가슴팍에 달린 훈장들이
빛나는 동안 그만큼 원한을 품은 사람들도 늘어났을 거라는 생각은?”
“그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두말 하면 입 아플 소릴.”
그렇다면 남자를 믿어야 할까?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온 사람일까? 왜 자일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을까.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거리를 활보하던 남자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인 양 최대한 자연스럽게 폐건물 문을 닫았다. 그의
앞에는 낡은 타자기가 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보내야 할 전보는 아주 짧고 간단명료한 단어들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21 화>
4. 불안한 조우
봄의 초입. 샌드위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이름난 가게는 아니었지만 싼값에 비해서는 맛이
좋은 편이었다.
다행히 누군가 내게 말을 걸려고 시도하거나 ‘여기 그 여자가 왔다’고 떠들어 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샌드위치를 빨리 받아서 돌아가는 데에 더욱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기…….”
“사인해 주세요.”
“아, 그래.”
아이에게는 친절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나는 아이가 내민 종이에 내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안나 키팅.」
“안나!”
“난 그냥 네가 반가워서 그런 거야.”
“난 계란 샌드위치 싫은데.”
“아침에는 보면 안 돼?”
“말꼬리 잡지 말고.”
“좋은 소식?”
“너를 위한 골든 티켓이야.”
“어허, 안나.”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말장난하지 말고 진짜 줘 봐!”
“뭐가 부탁인데?”
“편지.”
“편지가 뭐?”
“이건…….”
“장난치는 거 아니지?”
“이 편지, 언제 도착했어?”
“그럼 나, 갈 수 있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넌 대단한 피아니스트야! 신문에까지 기사가 났잖아.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피아니스트, 3 대 콩쿠르를 석권하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알기 시작했어. 아마 곧 있으면 네 이름을
걸고 리사이틀도 열 수 있을걸.”
“벌써 표를 샀다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괜찮아. 비텔스덴행 열차는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표를 구하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구해야 해. 그래서 미리 끊어 놓은 거고. 기차가 출발하려면 한…… 일주일 남았나?”
외출을 했다가 군복을 입은 순찰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건물
벽 뒤에 숨어서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22 화>
비록 머리카락 색이 옅어지고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기에.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자일스는 인근 마을에서 안나를 다시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망쳤다. 자일스가
무어라 말을 건넬 여유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안나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확신한 자일스는 접근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섣불리 그녀에게
접촉하기보다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안나의 동선을 파악해 사람을 배치해 놓고,
도청 센터의 힘을 빌렸다.
도청 기록이었다.
“전쟁 이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한 호화 열차인 것으로 압니다. 그런 열차가 폐쇄된 역에 정차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자일스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봉투에 든 필름 사진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던 앨버트
쇼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름을 바꿀 정도로 조심에 조심을 기하던 안나가 앨버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겉으로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 그녀를 무르게 만든 것일까? 어째서 그를 신뢰한 것이지?
신분을 세탁하기는 했지만 안나는 여전히 벨담 귀족의 여식이었다. 동료들에게 그녀에 대한 조사를 시킬
수는 없었다. 그건 안나를 돕는답시고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어이, 아가씨.”
“무슨 일이죠?”
“잠시 검문 좀 합시다.”
경찰이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이름이 안나 키팅이라고?”
“맞는데요.”
“스카프 내려 봐요.”
“아, 네에…….”
내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신분증을 품에 넣고
다시 스카프를 올렸다.
나는 협상을 시도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내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다 내놔.”
나는 내게서 가방을 빼앗으려는 그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진짜인데. 정말 감자랑 빵밖에 없단 말이다.
그는 내가 가방에 금덩이라도 숨겨 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고작 감자
때문에 이러고 있는 내 꼴이 서러워서 눈물이 고였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23 화>
나는 항상 그날 밤의 꿈을 꿨다.
자일스 헤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군복을 입은 채로.
“안나.”
“어디 봐. 다친 곳은 없는지―”
“안나!”
“잠깐만요! 잠깐만!”
“다 됐다.”
“안나.”
“이리 와. 밥 먹어야지.”
“너는 안 먹어?”
“맛은 괜찮아?”
“그 미친놈이 나를 쫓아왔어.”
“그놈이 확실했어?”
“아이고.”
안나. 흔하디흔한 새 이름이 그의 목소리를 빌려 귓가에 들려오는 순간, 내 눈앞이 순간적으로 어지럽게
돌았다. 잘 숨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리고 술도 좀 사다 주면 안 될까?”
“……응.”
“빨리 갔다 와야 해.”
“명심할게.”
앨버트는 겉옷을 입고 내 곁을 지나쳐 대문을 나섰다. 찰칵. 그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전화기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끈질기게 울려
대고 있었다.
“안나.”
“제발, 전화 끊지 말고 들어 봐. 해야 할 말이 있어.”
“…….”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부터 말하자면…… 널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사실은 널 직접 만나서 했어야
할 말이었어. 앨버트 쇼에 관한 거야.”
“왜…….”
“안나, 들어 봐. 그 남자는―”
“안나.”
“안나, 넌 뭔가 잘못 알고 있어.”
“그건―”
“안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잠깐만―”
전화가 끊겼다.
<24 화>
“안나. 안나!”
“안나, 괜찮아?”
“괜찮아…… 그냥 꿈이니까.”
“괜찮아. 네 말대로.”
고단한 일주일의 끝.
바야흐로 봄꽃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혁명으로 뒤흔들렸던 입스윈에도 나름대로의 평화가 깃들었다.
봄철 옷을 입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 대며 자동차를 따라 달리다 이내는 멀어졌다.
“일단은 지낼 곳을 찾아야겠지.”
“잘 모르겠어.”
“왜?”
“고양이를 키울까?”
“갑자기 그건 왜?”
“왠지 맘에 드네.”
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섬세한 무늬를 새긴 고급 원목과 인테리어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정 간격으로 매달린 전등은 따스한
불빛을 내뿜었다.
“제대로 탄 거 맞지?”
“이 기차가 맞아. 확실히 일반적인 기차와는 다르지.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즐긴다고 생각해. 이런
특급열차는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곳은 만찬장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폐쇄된 기차역. 수많은 여행객들. 갑자기 나타난 특급열차. 존재하지
않는 티켓…….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게 개인의 소행은 아니라는 거였다. 더 커다란 배후가 있었다.
자일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기차에 올라탔다. 군복을 벗은 그는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였다.
호화로운 내부를 짧게 탐색한 후, 그는 안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가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안나를 찾아서 그녀를 설득한 다음,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데리고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자일스는 이곳에서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다. 따라야 할 질서가 달랐다. 군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처럼 승무원을 두들겨 패고 나아갈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부우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증기를 내뿜었다. 이윽고 창밖 풍경이 서서히 옆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25 화>
*
“자, 앉아.”
플랫폼 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내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앨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버티.”
“응?”
“그가 왔어.”
“그래?”
“앨버트!”
“안나, 진정해.”
“뭐?”
내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향하던 그때, 앨버트가 작은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유리잔을
정확히 세 번 두드렸다.
“이게 다 뭔지 설명해.”
“무슨 소리야?”
“그가…… 벨담 사람이었다고?”
앨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는 그냥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거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떠넘기고, 앞장서서 동족을 학살하며 살아남으려 했던 거지. 벨담에서 그가
얼마나 유명 인사가 되었는지 몰라. 이제 자일스 헤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걸.”
“그도 귀족이었어?”
“귀족은 아니고,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지. 작위만 없었을 뿐 귀족과 거의 똑같은 삶을 누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네게 관심이 없어. 우리가 원하는 건 자일스 헤센뿐이야. 자일스만 얻으면 네게 볼일은 다 끝난
거야. 안나 키팅, 너도 신문은 읽으며 살았겠지? 지금 벨담은 커다란 절망에 빠져 있어. 과거에 누렸던
영광, 평화로운 시절들…… 세계 대전에서 패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깡그리 잃었지. 사람들은 바닥에
나앉았어. 공군이 건물이란 건물은 남기지 않고 파괴해 버렸거든. 지금 당장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고 해도 놀라운 상황이 아니야. 우리는 그 화살이 정부에 돌아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해.”
“그렇지.”
그들의 목표가 내가 아니며, 나를 자일스에게 넘기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너는 포로가 아니야, 안나. 나는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네 손으로 자유를 쟁취할 기회를. 주위를
둘러봐.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아니야. 그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
나는 네가 나를 도왔으면 해. 너는 항상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했잖아. 나를 돕는다면 두 번
다신 그와 마주칠 일 없게 될 거야.”
“우리의 목적은 그를 생포하는 거지만, 필요하다면 그를 죽여도 좋아. 긴장할 필요 없어, 안나. 온
기차가 자일스 헤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생각해 봐! 이 기차 전체가 네 편이야. 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어. 이제 독 안에 든 쥐는 그놈이고, 그놈의 목숨이 네 손에 달려 있는 거야. 네게는 아주
익숙한 그림이지?”
하지만 정말일까? 자일스가 그들의 손아귀에 이렇게 쉽게 들어왔다고? 그것도 나 하나 때문에? 그렇다면
왜지?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지?
자일스 헤센은 그렇게 허술한 인물이 아닌데.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기차에
순순히 탈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대체 내가 뭐라고.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동족들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허술한
작전에 넘어간다는 거지?
<26 화>
5. 오리엔트 특급열차
나는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쉽게 신뢰를 주지도 않았고, 애초에 누군가 내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조차 잘 하지 못했다.
저택에서 근근이 살아남을 당시, 나는 타인을 불신하는 습관에 길들었다. 마음을 헤프게 주면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안녕, 안나.”
“……왜 탔어?”
“무슨 뜻이지?”
“내가 왜 네게 그런 짓을 하겠어?”
“그랬지.”
“안나.”
“뭘 설명해?”
설마, 그는 모르고 있는 건가? 두려움의 근원이 그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모든 문제의 원흉은 그였으며,
내가 그 때문에 수개월 동안 악몽 속에 떨어야 했다는 사실을?
내가 자일스 헤센이라는 구체적인 공포를 상대로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경악했다. 설마. 그런 현실이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마주하고 있는 저 얼굴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놀리는
거였다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한데……?”
“안나.”
“안나, 나는―”
“난…….”
<27 화>
그는 항변하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안나. 난 네가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게 좋았어. 네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혈색을 되찾아 가고
…… 그래서 너를 계속해서 방문한 거야.”
“당신은 그랬겠지.”
“단 한 번도 너를 위협한 적이―”
“위협한 적이 없었다고?”
“나는 당장이라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 봐 전전긍긍해야만 했어. 언제나 당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정신 빠진 년처럼 굴고, 살기 위해서 연극을 해야 했다고. 당신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어. 원하는 게 없었다고? 거짓말하지 마! 모든 남자들은 내게서 뭔가를 원했어!
요한 마이어도 그랬고, 백작도 그랬다고! 말해 봐. 정말 단 하나라도 내게 바라는 게 없었는지!”
“나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객실 밖으로 쫓겨난 자일스는 한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이제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승객들도 드물었다. 그는 텅 빈 복도 위에 혼자 남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고독 속을 배회했다.
안나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는 안나를 방문할 때마다 유일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념과 죄책감, 그를 괴롭히던 수만 가지 기억들과 감정들이
목소리를 잃고 가라앉게 만들어준 건 안나뿐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안나는 오직 자일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그 많은 시간들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군 제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권총을 매달고 다니는 군인이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꾸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집중해, 자일스 헤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 기차의 정체를 밝혀내고, 안나를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안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일스였다.
이 기차가 아니라.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복도를 밝히는 전등이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자일스의 머릿속도
그러했다.
“우유는요?”
“가능합니다.”
“따뜻하게 데워 주세요.”
“네, 잘했어요.”
<28 화>
이윽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알고 있어.”
“그래. 전부 사실이야.”
“자기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아붙이면서까지 나를 쫓아오고 싶었어? 도저히 날 포기할 수 없었던 거야?”
“왜…… 하필 나야?”
“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뭔데? 아니면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거야? 그것도 말 되네.
난 여전히 당신들의 적이잖아. 그렇지?”
“안나.”
“안나, 너는 마치…….”
자일스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냉정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동요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무슨 뜻이지?”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너는 절대로 다치게 놔두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야.”
자일스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였다. 나는 잠시나마 그에게 집중했다. 그가 드디어 진실을
말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슬프고 비참해 보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울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눈물의 흔적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자일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안전하기를 바랐다고?
그냥, 그게 다란 말인가?
“그게 끝이야?”
그리도 다정한 말들을 건네주고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앨버트조차 결국엔 나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었다.
그렇다면 자일스는?
엘로이즈가 아닌 전혀 다른 이름을…….
“릴리?”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자일스는 내 표정이 어떻듯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괜찮아요.”
“손이 다 텄잖아.”
“예전부터 이랬어요.”
“자, 먹어.”
“죄, 죄송…….”
“안나, 괜찮아?”
“안나?”
“미안해.”
“가지 마.”
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괜찮아.”
그가 계속해서 말을 건네 왔다.
안나는 다시 잠들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곤히 잠에 든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을까. 혹시라도 자신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그것은 권총이었다. 안나가 그에게 겨누었던 바로 그 총이 맞았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뿐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챘다.
나는 겉옷을 대충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기차에는 발코니 칸이 있었다. 나처럼 맑은 공기를 필요로
하는 승객들을 위해 마련된 칸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 화>
앨버트였다. 그는 차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앨버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꺼 버렸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머리가 아파.”
“그 남자는 만났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
“그냥…… 내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자일스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으니까. 난 분명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고민 끝에 내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뭘 하게?”
“이제 와서?”
“평범한 사람?”
“헤센은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깡그리 잡아다 족친 놈이야. 자신도 벨담인인 주제에
가장 열성적인 벨담 출신 학살자가 되었다고. 이런 사람을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응?”
“네가 뭘 오해했는데? 넌 그놈을 제대로 본 거야! 죽어 마땅한 개자식이지, 네 표현을 빌리자면. 안나,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줄게. 너도 벨담 출신 귀족이었어. 그건 기억하고 있지?”
“네가 사생아라는 이유로 박해만 받지 않았더라면, 헤센은 너마저도 죽였을 거야. 곱게 죽이지도
않았겠지. 네게서 더 많은 정보를 뽑아낼 때까지 살을 지지고, 고문을 하고…….”
“그만해.”
나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곧 저녁 시간이야. 먹고 와.」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긴, 바깥에는 벌써 황금빛 노을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쪽지를
만지작거리다 그것이 두 겹으로 겹쳐져 있음을 알아챘다.
사람들이 식당 칸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침대 맡에 앉았다. 그리고
내 동행인이 될 남자를 기다렸다.
*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안나. 음, 그러니까…….”
그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뜸을 들였다.
“혹시……?”
“왜 그러지?”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해산물 좋아해?”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그거면 되나?”
“다른 건 필요 없어.”
급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일스는 요리 이름을 대며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급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다시 가져갔다.
<31 화>
“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앞서도 말했지만 너를 추적한 건 혹시라도 네가 당국에 쫓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어.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야.”
“네가 뭘 할 필요는 없어. 다만 더는 악몽을 꿀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 기억해. 나는 절대로 널 해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거다.”
그는 오로지 나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이 기차가 자신을 위한 기차라는 사실을, 자일스는
알고 있을까. 만약 마지막 순간에 그가 알게 된다면, 내가 그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는 걸 그가
안다면.
그리고 나는 결국 소화 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차라리 속을 게워 내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잘 안 됐다.
“많이 아파?”
“잘 아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뭐?”
“이게 뭐야?”
“소화제.”
“필요했으니까.”
“뭘 하려는 건데?”
“뭘 하려는 거냐고!”
“마사지.”
“싫어!”
“살살 해야 해!”
“힘 빼, 안나.”
“무슨 소리야?”
“옳지.”
“당신한테도 누가 이런 거 해 준 적 있어?”
“……그건 왜.”
“뭐?”
“그래. 나 혼자 살았지.”
“그래. 너도 살았지.”
“넌 살아 있어.”
“그래. 다행이다.”
“이제 잘 수 있겠지?”
“응.”
안나는 그에게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당장 생명을 위협받았던 시절은
지났고, 그의 삶은 다시금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벼랑 끝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살고
있었다.
이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그는 주변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이런 미래가 오리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안나가 잠깐의 평화를 충분히 누렸으면 했다. 그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기차에 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안나를 노리는 기차가 아니라고 해도, 결국에 이 기차는 안나에게
독이 될 게 분명했다.
이런 커다란 침대를 나 혼자서만 차지하고 자일스는 의자에서 재웠다. 양심의 가책이 아예 생기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맞는데요.”
“그 피아니스트?”
“그건 왜 묻는 거죠?”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기차요?”
“난 몰랐어요.”
“상상에 맡길게요.”
자일스 헤센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온갖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질문을 받는 상황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 나는 반드시 벨담에 내리게 될 것이다. 나를 데려온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일스와 함께 벨담에 가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고스란히 보게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바라나?
희대의 반역자, 자일스 헤센을 처형대로 데려온 여자라고 알려지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확언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안나!”
나는 그를 구하고 싶은가?
그가 살기를 원하는가?
“아침 먹고 왔어?”
“잠은 잘 잤어?”
“그럼. 잘 잤지.”
“무슨 일 있어?”
“이 기차…….”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이 기차는 비텔스덴으로 가지 않아. 사실은 벨담으로 가는 기차야, 자일스. 벨담으로 간다고.”
“그렇군.”
그럼에도 나는 자일스에게 달려와 진실을 전했다. 당신은 위험에 처했다고. 그러니 어서 달아나야 한다고
말이다.
“고마워, 안나.”
“자일스! 당신 곧 죽을 거라니까!”
“그건…… 그럼 당신은…….”
<34 화>
나는 망연히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승차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야. 이 기차는 애초에 나를 위한 기차가 아니었어. 다 당신을 태우기 위해서 모략을 짠 거라고.
당신을 그곳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 준비된 거야. 전부 다…….”
“그래. 네가 미끼였지.”
절대로…….
“안나, 울지 마.”
“시끄러워.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이렇게
죄를 뒤집어써야 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당신이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이야. 전부 다…….”
“괜찮아. 안나.”
“도망쳐, 자일스.”
“아무래도 정말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부탁할게. 안나.”
서정적인 야상곡은 마치 다가올 운명이 얼마나 침울할지 알면서도 기다리는 이의 노래 같았다. 그렇기에
우울하다기보다는 담담한 어조를 갖고 있었다. 나 또한 곡을 연주하면서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선율이 마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피아노 건반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이 순간만큼은 승객들의
말소리도, 철로를 지나는 거대한 바퀴 소리도 음악 소리를 해치지 못했다.
그때는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은 반대로 자일스가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어 주는 중이었다. 음악으로써.
“아파, 앨버트.”
“안나.”
“…….”
“역겨운 자식.”
“말해!”
<35 화>
그가 윽박질렀다.
끼이이익―
기차가 급제동을 걸고 있었다. 앨버트가 내 머리채를 놓치는 바람에 나는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찧었다.
몇 초가 지나자 소음이 멈추었다.
“무슨 개소리야?”
잠시 침묵하던 앨버트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머리에 뭔가를 씌웠다.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소재였다.
“숨 막혀서 질식사하든지 알아서 하라지. 이년은 자일스 헤센이 죽인 거다. 그렇게 알고 있어.”
기차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앨버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승객들이
저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리며 바깥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다. 앨버트는 그들 쪽으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입 다물고 있어!”
그러자 문이 닫히고 모두가 사라졌다. 부하들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앨버트는 땅
위로 발을 내디뎠다. 바깥은 아직 밝은 낮이었다. 그들은 잔디가 아무렇게나 자란 땅 위를 나아가 증기
기관차의 선두 근처에 다다랐다.
부하의 말대로 선로가 끊겨 있었다. 원래 선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땅 위에는 선로가
설치되어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앨버트는 몸을 돌려 다시 기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에겐 자일스 헤센을 붙잡아 퇴로를 모색할 여유조차
없었다.
모든 기차에는 통신 기기가 있다. 언제든 비상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기기라면 옆에서 지킬 사람을 세워 두었을 것이다. 자일스는 운전실 근처에서 경비를
서는 요원 하나를 발견했다.
요원이 그쪽을 돌아보려던 그 때, 자일스는 순식간에 요원을 제압하고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요원은 덜덜 떨면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일스 또한 그 위치를 확인했다. 이제 요원은 쓸모가
없다. 자일스는 그의 목을 꺾어 버리고 장비를 향해 다가갔다.
기차는 국경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입스윈 영토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보안국
사무소에 전파가 닿을 것이다. 자일스는 그가 알고 있는 비상 코드를 입력했다.
“9007 사무소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무슨 일인가?”
“시간이 얼마 없군. 지금 입스윈 영토를 지나는 기차가 한두 대가 아니네. 어떻게 자네가 탄 기차를
식별할 수 있겠나?”
자일스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기차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 무엇으로 식별해야 하지? 신호음?
멀리서도 주파수로 추적할 수 있는 소리 형태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추적하십시오. 반드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벨담 국경을 지나는 모든 선로를
미리 제거하라고 이르십시오.”
통신이 끊겼다.
비슷한 시각, 보안국 사무소 요원들이 수많은 전선이 연결된 커다란 장치 앞에 모여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서쪽 국경 지대에서 발생하는 440 헤르츠 이상의 소리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잠깐. 들린다.”
현재 시각, 자일스 헤센은 좌표를 지정받고 몰려든 트럭 무리를 보고 있었다. 기차는 멈추었고, 그들은
포위당했다. 벨담 정보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무장한 요원들이 총을 들고 대응을 시도했다.
총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도 함께 들렸다. 자일스는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동료들을
돕기 위해 나온 참인 벨담 요원과 마주쳤다.
바깥으로 나가자 후방을 점거한 입스윈 군인들이 그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개중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직속 부관인 찰리 스펜슨이 와 있었다.
“대위님.”
이들이 처음엔 안나에게 관심이 없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아니었다. 비록 본인은 몰랐겠지만, 안나가
기차가 발각되도록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는 공식적으로 벨담의 배신자나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연주가 아니었더라면 기차는 벌써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지휘관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6. 봄의 제전
그때, 반쯤 기절한 여자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남자가 보였다. 자일스는 권총을 장전했다.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자일스는 단박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앨버트 쇼였다.
“안나를 놔줘.”
“다가오지 마.”
“의무병도 같이 왔나?”
자일스는 안나를 품에 안아 들고 다급히 기차를 빠져나갔다. 부하의 말대로 적십자 완장을 찬 군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일스는 의무병에게 안나를 넘겼다. 그는 안나를 살피더니 자일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몸은 좀 어때.”
“……여기가 어디야?”
“먹어.”
“이건 누가 줬어?”
“…….”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러 장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기차에 있었는데. 나는…… 그
엔진실에서 살아 나온 거구나.
“죽었어?”
“……앨버트는?”
“죽었어.”
“그럼 뭔데?”
“엄연히 달라.”
뭐, 그런가 보지. 나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앨버트가 죽었다는 건 조금 의외인 사실이었다. 오히려
앨버트를 살려 두고 그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려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너를 때린 건가?”
“아주 죽여 버릴 것처럼 굴던데. 내가 당신에게 기차에 대해 말해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나 봐.”
“얼마나 많이 때렸지?”
“내가 맞아 본 것 중에 제일 아팠어.”
“널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
“이제 갈 거야?”
자일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서 그런지 그의 미소가 한층 더 가벼워 보였다.
그는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사람 같았다.
<37 화>
“해링턴 장군님.”
“자일스, 여기 있었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덕분에요.”
“그래야 마땅하지요. 의료진이 아가씨를 치료하는 동안 자일스가 밖에서 얼마나 감시를 해 댔는지,
절대로 허투루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해링턴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자일스는 곤란한 기색이었다. 해링턴은 그에게 손짓해 보였다.
“자네는 그만 가 봐도 좋네.”
“키팅 양은…….”
“……알겠습니다.”
“저 녀석이 누군가를 그렇게 애지중지 대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바람직한 일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다는 건 말입니다.”
“저흰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런가 봐요.”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넌 결백해. 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안나.
해링턴이 질문을 시작했다.
“감사해요.”
생각보다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들어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진실을 말해야 하나? 해링턴은 내가
자일스의 비밀 요원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은 내게 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
안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낼 자신은 없었다.
“자일스가 화를 낼까 봐 무서워요.”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남자들은 힘없고 처연한 여자에게선 아무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눈물을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의지를 잃어버린다. 나는 그런 경향을 잘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자일스가 험하게 굴 때가 있었습니까?”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지주 혈통을 타고나서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본성이 튀어나올지도
모릅니다. 그 점은 이해하십시오. 몸속에 흐르는 피를 어찌 하겠습니까? 그래도 좋은 녀석입니다.
자랑스런 혁명 영웅이죠. 혹시라도 그와 미래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사랑, 믿음, 결혼…… 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한다는 것. 나는 그러한 개념들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서로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서 평생 매여 살기를 자처할 정도로
신뢰하게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처음에는 그에게 불순한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망친 후로부턴, 그가 내 도주를 빌미로 앙갚음을
하려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부 틀렸다. 지금은 그 사실을 안다. 자일스는 처음부터 내
안위만을 걱정했을 뿐이라는 걸.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나도 그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자일스가 많이 힘들어했나요?”
“제가요?”
<38 화>
“노력해 볼게요.”
‘안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한 때 내 악몽의 근원이었던 남자. 자일스 헤센. 아직도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불분명하다. 그가 자꾸만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내가 먹어 본 것들 중에 제일 달콤했다.
“안나.”
나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후 네 시 정도.”
“아니.”
“그런가?”
“관심 없어.”
침묵을 먼저 깬 건 자일스였다.
“뭐가?”
“……아니야, 됐다.”
“이건 뭐야?”
“다른 말은 없었고?”
“참석할 생각 있어?”
“됐어. 그렇게 할 것까지야 있겠어? 그냥 파티일 뿐이잖아. 대충 얼굴만 비치고 오지, 뭐.”
“내 진짜 이름에 대해 아는 사람 없는 거 맞지?”
“그러고 보니 내가 꿈을 꿨는데…….”
나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안나, 괜찮아.”
“왜? 산책하게?”
“무슨 준비?”
“돌려줬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필요 없어.”
이제 그런 물건은 쓸모가 없다. 사실 나는 총을 다루는 법조차 제대로 몰랐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건 알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39 화>
“여기야.”
“혹시…….”
“오랜만입니다, 마담 멘델.”
“자일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나요?”
혹은…… 그가 견뎌 내야만 했던 일들이 자일스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자일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뭐, 보면 알겠죠.”
“다른 거 입어 보고 올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예쁘다.”
입스윈의 수도 언저리에 자리한 커다란 광장은 시민들에게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고는 했다.
그리고 이 메이나드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커다란 건물이 있다. 어떻게 보면 궁전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커다란 학교나 청사 같기도 한 이 웅장한 직사각형 건물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쓰임새 또한 변해
왔다.
처음에 이 건물이 지어진 건 왕정이 위세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곳은 나라를 대표하는 무역 업체
건물로 쓰였다. 왕정의 기반이 흔들리고 벨담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이 건물은 벨담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지배의 근간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은 이곳을 비밀경찰 본부로 사용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4 층
건물만 봐서는 평범한 보안국 건물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지하층에는 끔찍한
감옥과 고문실이 숨겨져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벨담인들의 지배도 물러간 지금. 이 건물은 현재 혁명군의 본부로 쓰이고 있다. 옛
왕족들의 취향에 맞추어 고풍스러우면서도 절제된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 지하에 숨겨진 음침한
복도에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40 화>
자일스는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 중이던 어린 요원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센 대위님.”
“빈센트는?”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요원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 또한 유리벽 너머로 취조실 상황을
내다볼 수 있었다. 바깥에서만 볼 수 있고,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벽이었다.
“알겠습니다.”
“빈센트.”
깍듯한 인사치레와는 다르게 그의 미소에는 불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호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어딘가 낮잡아 보는 듯한 미소였다. 자일스는 엄연히 그의 상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빈센트는 그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다.
“피터, 넌 이만 나가 봐.”
“나중에 뵙겠습니다.”
“한 대 피우시렵니까?”
“난 됐어.”
“그랬죠. 뭐 문제 있습니까?”
“그건 안 되겠습니다.”
“…….”
“이미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합류한 겁니다. 무르고 싶으시다면
제가 아니라 지도부에 직접 부탁해 보시죠.”
“삐딱하게 굴지 마.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나다. 허락이 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결정은 내 승인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알겠나?”
“저자도 일단 감옥에 넣어 놔. 지하 3 층으로 섣불리 데려가지 말고. 사소한 일 하나로 지도부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돼.”
“알겠습니다.”
빈센트는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름대로 계획을 다 짜 놨는데 네가 다 흩뜨려 놨다는 뉘앙스였다.
“그건 왜 묻지?”
“빈센트.”
상황이 좋지 않았다.
증오는 퇴색되어 흐려질망정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잉크와도 같다. 한 방울이라도 물들면 다시는 정결한
빛깔을 되찾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사랑을 멀리하리라 결심했었다. 상처를 받느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않는 편이 나았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혹한을 견디며 걷다가 갑자기 온기로 가득한 집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를 믿어도 될까.
<41 화>
연회는 저녁 일곱 시 정각에 열린다고 했다. 대충 얼굴만 보이고 오면 되는 일인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으니 거창한 무도회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구두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안나.”
“자일스.”
“왜 그래?”
“긴장돼?”
그가 어깨 너머로 물어 왔다. 나는 대답을 생략하고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미 우리는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드레스값을 해야만 했으니까.
“군인들이 많이 올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비스마르 가문은 이제 입스윈 내에 존재하지 않아. 과거의 흔적은 지워 버려. 모두를 속이고 너
자신마저도 속여. 그럼 그것이 결국엔 진실이 될 거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힘을 쓸 수 없을 테니까.”
제복을 입은 군인이 명단을 든 채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단박에 자일스를 알아보고는 경례를 올려붙였다.
“좋은 밤 되십시오.”
우리는 본격적인 연회가 열리는 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자일스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는 체를 했다. 자일스는 내가 곤란해할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적당히 미소만 지으며
그들을 물리쳐 냈다.
내가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순간, 커다란 실루엣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해링턴 장군이었다.
“장군님.”
자일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반기던 해링턴이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얼굴 비친 걸로 됐어.”
“그냥 그게 다라고?”
하지만 입스윈은 그를 진정한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일스의 친우인 동시에 잠재적인 적들이었다.
“당신, 여기 정말 오기 싫었겠구나.”
음악이 잠시 멎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던 그 때, 누군가 스피커를 통해 웅장한
음악을 틀었다.
그것은 벨담 국가였다. 국가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인파 사이로 누군가
외쳤다.
모든 남자들, 모든 여인들이여!
한 손에는 횃불을,
아무리 자일스가 더 이상 벨담의 자식이 아니라지만, 모두가 벨담을 증오하고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가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안나.”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어딜 가는 거야?”
“안나, 나는…….”
“나랑 춤추자, 자일스 헤센. 자랑스런 혁명 영웅이잖아. 꿇릴 게 뭐가 있어? 이러려고 드레스도 선물한
거 아니었어?”
<42 화>
“……그래. 춤추자.”
남녀로 이루어진 파트너들 사이에 끼어들 때만 해도 확신이 없어보이던 자일스는 막상 왈츠가 시작되자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듯이 살폈다. 이미
그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안나.”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안나.”
“사랑해.”
빈센트 모너건은 지루한 얼굴로 군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면서 주정뱅이마냥 낄낄 웃어 댔다. 아니, 실제로도 그들은 조금씩 주정뱅이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술은 넘쳐 났고,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는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멍청한 수다를 떨어 대는 게 아니라 이럴 시간에 더
많은 벨담 놈들을 취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빈센트의 원수였다. 혁명군이 되기 전까지, 단 한 순간도
그들을 증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벨담은 그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뒤틀어 놓았다. 그래서 증오했지만, 덕분에 빈센트는 칼날로 만든
심장을 가진 괴물이 되어 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일스 헤센. 그와 똑같은 군복을 걸쳤지만, 벨담 지주 집안의 귀하신 도련님 혈통을 가진 남자. 한때
벨담 국방군 대위였던 군인. 자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빈센트를 훑어보고는 했다.
빈센트는 자일스의 번드레한 낯짝을 볼 때마다 반감을 가졌다. 그래, 그가 수많은 벨담 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일스는 결국 한때 그들과 같은 벨담의 도련님이었다.
속이 뒤틀렸다.
빈센트는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의례적으로 데려온 파트너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였으니까.
빈센트가 아는 자일스는 무채색과도 같은 사내였다. 언제나 표정이 없었고, 모든 일들에 무감했다. 헌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달랐다. 자일스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여자 때문에.
자일스의 여자가 궁금했다. 아니, 궁금함을 넘어서서 기이한 소유욕이 치밀었다. 저 여자를 빼앗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상관에게 조금이라도 굴욕감을 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행복에 겨웠던 얼굴이 차가워지는 모습을 보며, 빈센트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야, 저 사람?”
“헤센 대위님.”
<43 화>
“빈센트.”
그러나 놀라운 기색은 곧 모습을 감추었다. 빈센트는 나를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바람에 조금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빈센트가 내게서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을 대로 하세요.”
“안나는…….”
“저는 레이디께 여쭌 겁니다.”
“빈센트라고 부르시죠.”
“금방 올게.”
“안나.”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더군요. 자일스 헤센이 이토록 아름답고 유능한
피아니스트 분과 연이 닿아 있었다니 말입니다.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습니까?”
“사랑이요?”
“사랑하십니까?”
“네?”
그걸 이 남자가 왜 묻는 거지? 하지만 의아해할 가치조차 없었다. 애초에 빈센트는 순수한 마음으로 내게
춤 신청을 한 게 아니었다. 뭔가 다른 마음을 품고서 내게 접근했으리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그가 내게서 얻어 내고자 하는 게 정확히 뭘까? 빈센트는 자일스의 부하였지만, 대놓고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나를 자일스의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자일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거지?
“마음에 드니까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춤 신청을 한 겁니다. 혹시나 당신이 내게도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진절머리를 냈을 정도로 뻔뻔한 언사였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누그러졌다. 적어도
그가 내 정체를 아는 건 아닐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모너건!”
그제야 빈센트는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그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자일스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화를 억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44 화>
“가자, 자일스.”
내가 손을 내밀자 자일스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연회장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장을 마친 지금, 바깥은 한산했다.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만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엔 자일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불빛이 은은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퍽 자조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범한 상관이었다면 그랬겠지. 나에겐 커다란 약점이 있어, 안나. 나는 벨담인이야. 모두의
증오를 떠안아야 할 당사자지. 혁명에 공헌해서 입스윈의 신뢰를 얻었다고 해도 내 혈통까지 바꿀 수는
없어. 빈센트만이 나를 적대하는 게 아니야. 사실은 저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렇지. 다만 다른 이들은
빈센트에 비해 조금 점잖은 방식을 택하고 있을 뿐이야.”
그랬으니 빈센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속으로는 자일스를 비웃고 있을 테니까.
마음 같아선 빈센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자일스가 자조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뭐?”
“그럼 됐네. 어쨌든 당신은 목적을 이룬 거잖아. 저 사람들이 뭐라 하든 알아서 지껄이라 그래. 결국
중요한 건 당신이 살아서 나랑 얘기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뭘 그렇게 쳐다봐? 내 말 맞잖아. 당신, 벨담에선 뻔뻔하고 치졸한 배신자라고 부르겠지. 반대로
여기선 교활한 벨담 놈 취급을 받고 있을 거고. 그런데 말이야, 이왕 그리 불릴 운명이라면 좀 뻔뻔해져
봐. 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남들을 열받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열받아 죽게 될 만큼 더욱 더
뻔뻔해질 텐데.”
물론, 그에겐 내 조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쨌든 난 진심으로 조언한 거다. 나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 테니까.
“방금은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뭘 말이지?”
“내가 빈센트 놈 뺨을 때려선 안 됐어. 당신이 주먹을 날리도록 둬야 했는데.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야.”
“지금은 못 한단 말이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손을 잡고 다시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떠나든 말든 파티는 여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술은 넘쳐 나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몇몇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난 그들을 향해 웃어 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안나 키팅 양이 맞으신지요?”
“네, 맞아요.”
“나도 알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연회장 안에서, 나는 단순히 자일스의 파트너에 그치지 않았다. 가끔씩은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그림자 속에 숨어 살던 날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있잖아, 아직도 기분이 거지 같아서 그러는데 술이나 더 마시러 가자. 그 정도는 괜찮잖아, 안 그래?”
“……그래.”
7. 데자뷰
빈센트 모너건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시간이 으레 그렇다지만, 이토록 무료함을
느끼는 건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살살 달래서 필요한 정보만 빼내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는 제법 점잖은 방식으로 그를 취조했다.
적어도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끼치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괜찮을 거다. 적어도 몸뚱어리는 그렇겠지.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그 여자가 자일스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는 사실이었다. 빈센트는
자일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연회장에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몹시 불쾌해졌다.
누군가 자일스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무엇이 마음에 든 것이지? 예쁘장한 얼굴? 안나는 상당히 예뻤지만 원한다면
아름다운 여자 정도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뭐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봐.”
“일어나.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생겼으니까.”
“여자에 대해 잘 아는 편인가?”
“무슨…… 뜻이지?”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묻는 거니까 안심해. 물론 네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절차가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
“사랑하는 여자…….”
“흥분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꺼져! 차라리 나를 죽여! 아니면 제발 저 불빛 좀 없애 줘. 정말이지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그것 참 안 됐군.”
빈센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후 부하가 음반을 가지고 왔다. 빈센트는 부하를 되돌려보낸 후 휘파람을 불며 새까만 레코드판을
축음기에 끼웠다. 그러자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가 삭막한 고문실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랑이라.”
그가 운을 떼었다.
“내 잘나신 상관께서 최근에 그런 감정을 경험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다. 덩달아 나까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대체 어떤 기분이라 그토록 사람이 달라 보였는지…… 한 번은 말이다, 내가 그 여자를 붙잡고
입을 맞췄더니 표정이 볼만해지더라고.”
“넌 미친놈이야.”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다. 적어도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음악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도 피아노만큼은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부였으니까.
예전에는 가족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나, 내가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는 순간을 상상하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전혀 나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46 화>
어느새 방송이 끝났을 땐 자일스가 나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방송국 주변을 걸었다.
커다란 군인과 함께 걷고 있으니 확실히 혼자 걸을 때와는 달랐다. 적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격을 두어
주는 데다 웬 남자가 수작질을 걸어 대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 문득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무작정
찾아온 거야. 혹시 내가 널 놀라게 한 건가?”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적어도 나한텐 정말 웃겼거든. 당신이 그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웃겨. 앞으로 그런 해프닝 좀 많이 만들어봐. 평소에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까 이런 사건
하나하나가 귀하단 말이야.”
“점심은 해결했어?”
“글쎄……. 뭐가 좋을까.”
“뭐?”
“왜 그래?”
“그러니까……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서.”
메뉴가 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음식들을 생소한 눈길로 훑어보는 모습을 포착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야채가 없는데.”
“여기 있잖아.”
“그래, 야채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여기 감자튀김! 이것도 야채로 만든 거야. 그러니까 똑같은 거지.
건강에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
“싫어.”
“……왜 그렇지?”
“어렸을 때, 가족들이 날 귀하신 분께 시집보내려고 상류층 문화를 가르쳤어. 개중엔 식사 예절도 있었어.
나이프를 펜 잡듯이 쥐는 여자애를 받아 줄 높으신 분들이 어디 있겠어? 겉치레에 환장하는 족속들인데.
그 당시에 가족들은 마음이 급했고, 절대 실수 따위 용납하지 않았어. 결국 나는 몸에 익지도 않은
예절을 지키느라 급급하면서 식사를 해야 했지. 그랬으니 소화가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어? 아직도 혼자
끙끙대다가 먹은 걸 다 게워 내곤 했던 날들이 생각나.”
“나이프와 스푼, 포크는 바깥부터 코스별로 하나씩 쓰는 거예요. 나이프는 연필이 아니에요! 그렇게 들지
마세요. 세워서 들어야 해요. 이번엔 음료를 담는 잔의 종류를 알려 드릴게요. 아, 물론이죠.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디저트 와인, 물, 소다를 전부 다 다른 잔에 담아야 한답니다. 그래야 위신이 사는 법
아니겠어요? 미친놈들이지, 아주.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여서 금방 외우지도 못했어. 아무튼 식사 시간은
내겐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싫다고 하는 거야. 어두운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랬지.”
그가 식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지는 못했다. 안 먹는 건가, 못 먹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자일스가 물어 왔다.
“먹을 줄 알아.”
<47 화>
자일스가 나를 방문해 준 덕분에 오랜만에 그의 차를 얻어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새까만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탄 나는 그가 운전을 하는 동안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잡담 좀 하다 보니 벌써
태양의 빛깔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미안.”
“여섯 살 즈음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어. 아버지의 결정이었지. 본가를 완전히 옮긴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곳에 꽤 오래 눌러앉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수도에 지어진 타운하우스에 살았어. 따뜻한 갈색 외벽에 암녹색 지붕을 가진 3 층짜리 집이었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맨 위층까지 갈 수 있었는데, 나는 꼭대기까지 오르는 걸 좋아했어.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재미가 상당했거든.”
“당신 누나 말이지?”
“맞아.”
“생이별을 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멘델 부인한테 들은 적 있어. 당신 누나에 대해서 말이야. 부인은 그녀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했어. 햇살 같은 기운을 주변에 뿌리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당신을 동생으로서 정말 사랑했다고
하더라.”
“그보다 멀리.”
“당신 괜찮아?”
자일스가 일부러 미소를 꾸며 내 보였다. 하지만 내 기분 탓인지, 그의 미소가 어쩐지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할 것 없어.”
“말해 봐, 자일스.”
“안나, 사실은 네게 거짓말을 했어. 내가 과거의 일들은 다 잊어버렸다고 했지. 껴안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내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 버렸다고……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행복했던
순간이든, 잊고 싶은 순간이든…… 전부 다. 그래서 방금 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잊어버린 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자일스는 분명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이 그랬다.
나는 차라리 그가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바랐다.
“자일스.”
그는 뭔가를 각오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어떤 대답이 들려와도 감당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나, 나를 사랑해?”
<48 화>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잘 모른다. 마음과 정신을 비옥하게 만들고, 영혼이
충만해지도록 살찌우는 그 감정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그런 감정을 진실되게 느낀 적도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올랐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열락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몸을 조급한
손길로 더듬으며 탐닉했다.
“안나.”
“……여기선 안 돼.”
자일스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손을 붙잡고 연립 주택 계단을 올랐다. 퍽
조급한 발걸음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내가 머무르는 집으로 통하는 대문 앞에 섰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껴안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생경한 감각에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일스는 나를 안은 채로 들어 올렸다.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널찍한 대흉근 아래로 펼쳐진 모습은 마치 조각상을 방불케 했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곱아들고 다리 사이가 조여들었다.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안나. 힘 빼.”
“옳지.”
“자일스.”
그러곤 다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신체가 다리 사이를 열고 맞붙어 왔다. 두꺼운 천 아래로 뜨겁고 딱딱한 것이 골을 천천히 비볐다.
자일스가 내 가슴을 움켜쥐는 그 순간, 나는 두 다리로 그의 하체를 꽉 끌어안았다.
“힘 빼.”
또한 금세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같은 악보에 담긴 음표의 나열이라지만, 내게 이것은 단순한 음표가 아니었다. 이것은 해석을 바라는
시인의 작품이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말들의 향연이었다. 연주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같은 악보라도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다.
나는 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피아노는 내 곁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곡은 자일스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잿빛 금발을 가진 남자.
빈센트 모너건이었다.
<49 화>
대체 뭘 원하는 거지?
“계속하세요.”
빈센트는 예의 바른 신사의 말투를 사용했지만 그는 절대 신사가 될 수 없는 남자였다. 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를 반듯하게 자르고 고급 정장을 걸친다고 해서 본질까지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라를 구한 혁명 영웅이니까.”
“안나.”
“안나?”
“용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왜 날 찾아온 거냐고요.”
“당신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진심을 듣고 싶어요?”
나는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싫다고?”
“당신이 혐오스럽다고요.”
“이거 놔요!”
“……놔주세요.”
“금발이…….”
나는 황급히 나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금발로 염색하는 여자들은 많잖아. 난 예뻐 보이려고 염색했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그때였다.
“뭐 하는 짓이지?”
“당장 물러나.”
“물러나라고 했다.”
알아챈 건 아니겠지.
“뭐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말해 보십시오. 이 여자가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뭔지.”
“사람은 못 빌린답니까?”
“이만하지.”
“누굽니까? 이 여자.”
<50 화>
“안나, 무슨 일 없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뒤늦은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두 다리가 떨려서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나는 겨우 그에게 물었다.
“안나, 괜찮아.”
“그래. 가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넌 무사할 거야.”
“어떻게 그리 확신해?”
그가 마지못해 내게 대답했다.
“안나.”
“어떻게?”
“알았어.”
나는 서서히 식어 가는 차를 홀짝이며 그를 곁눈질했다. 싸구려 난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일렁이는 난롯불에 비치는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자일스의 과거를 상상했다.
“왜 그렇지?”
“당신은 괜찮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은.”
“악몽이라도 꾸면 어쩌지.”
“왜 그래?”
“여긴 네 집이잖아.”
“그래서?”
“안나!”
“내가 뭐 잘못 말했어?”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왜.”
“화낸 적 없어.”
“난로 켜 놨잖아.”
“자일스.”
“난 원래 이렇게 누워.”
“진짜로 오늘 밤 내내 여기 있어 줄 거야?”
잘 자, 안나.
사랑해.
<51 화>
*
자일스 헤센은 언제나 그렇듯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커튼 새로 푸른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걸
보니 이른 새벽녘의 어스름이 이제 막 가신 참이었다.
안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지난밤에 잡았던 손을 아직도 놓치지 않은 채로. 다행히 그녀는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언제쯤 잠에서 깰까? 적어도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는 출근을 해야 했고,
아무래도 작별 인사 없이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빈센트가 안나에게 뒤틀린 관심을 보이는 게 문제였다. 대놓고 반항심을 드러내도 무관심으로 방치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설득이나 협박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안나에게 쏠리기 시작한 관심을 다시
그에게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빈센트만 처리한다면, 당분간 안나는 안전할 것이다. 그 누구도 엘로이즈 비스마르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스크램블 에그가 완성되었다. 따뜻할 때 먹으면 제일 좋겠지만 계란 하나 때문에 안나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일스는 접시에 적당히 구운 식빵 두 쪽과 방금 요리한 계란을 세팅하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는데.
감시당하고 있는 건가? 적어도 그들에게 원치 않은 관심을 가지는 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안나에게.
하지만 안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감시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다. 물론
누군가 안나의 정체를 알아챘을 가능성은 미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나는 귀족의 딸이었다. 그녀가
말했듯이 영원히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안나가 오리엔트 특급열차 작전에 긴밀하게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작전을 위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자일스를 위해 알베르트 레만을 배신했고, 자일스를 납치하려는 벨담 정보국의 작전은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안나가 새로운 표적이 된 거라면? 혹은, 그가 안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벨담 측에서
아직 안나를 포기하지 못한 거라면?
“들어와.”
놀랍게도 빈센트 모너건이 문틈 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갑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형식적인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문을 닫았다.
취조 허가 요청서였다.
하필이면 빈센트가 이들의 취조를 맡았다는 사실마저도 불안했다. 혹시라도 안나가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뜬금없이 안나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혹시 이 작전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건 이미 종결된 사건이야. 벨담으로
밀입국하려던 이들을 송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송환 대상에는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다. 벨담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원해.”
아무래도 그에게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체 뭘 더 듣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앞에 놓인 허가 요청서조차 안나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할 수 없이 자일스는 펜을 들었다.
“……고문은 하지 마.”
그는 의외의 발언에 놀라서 빈센트를 올려다보았다. 한편, 빈센트는 자일스가 서명한 서류를 받아 들고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뭐가 말이지?”
“그 일에 대해선 더 할 말 없어.”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모너건.”
잠시 일었던 분노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일스는 빈센트가 안나를 정말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반어법을 쓰면서 그의 반응을 떠보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억측이 아니라 그는 거의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나는 기차에 타서 외국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 외국이 벨담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안나는 알베르트 레만에 가담한 사실이 있었다.
“의심하고 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정말 안나 양을 사랑하십니까?”
“나가.”
이윽고 문이 닫혔다.
<52 화>
*
빈센트는 휘파람을 불면서 음산한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벨담 치하 시절부터 오래 묵은 죽음의
냄새가 밴 곳이었다. 이곳을 거닐던 그는 생각했었다. 동향 사람들의 흔적을 완전히 덮고도 남을 만큼,
제 몫의 희생자들을 철저히 밟아 주겠노라고.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혁명군이 저놈을 거둬들여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빈센트가 보기에는
크나큰 모순이었다.
그런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안나 키팅. 아름답고 유망한 피아니스트. 자일스 헤센은 그녀를 통해 행복을 얻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고, 그다음부터는 소유욕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만약 그의 품에서 안나를 빼앗는다면 헤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뭐가.’
‘…….’
얼마 후,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그……만.’
‘으…… 으으…….’
‘……알베르트, 레만.’
‘엘…….’
‘제발, 제발…….’
‘……뭐?’
달칵. 녹음기가 다시 침묵했다.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던 목소리의 주인은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빈센트를 멀겋게 쳐다보고 있었다.
빈센트는 펜과 종이 한 장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분명 그런 놈일 줄 알고 있었지!
자일스는 굳이 안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안나가 무언가에 몰두하며 즐거워하는 순간을 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건 그 혼자서도 충분했다.
안나는 누구보다 음악에 열정적이었다. 어릴 적 유일한 위안이자 취미가 되어 주었던 피아노는 지금까지도
시름을 잊기 위한 출구이자 도피처였다.
피아노를 칠 때면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굳이 표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케스트라와의 마지막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안나는 리허설 현장까지 꿋꿋이 따라오려는 자일스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자일스,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안나는 눈치가 빠르고 생존 본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자일스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안나는 결국
알아채곤 했다. 자일스는 그런 안나를 위해 끝까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까 연습 잘 하고 와.”
피아노 앞에 앉은 안나는 거대한 연주홀의 지배자였다. 오케스트라는 뒤에서 그녀를 보조해 줄 뿐이었다.
적어도 자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선두에 서서 음악을 주도하는 건 피아노 선율이었고, 그 선율의
유일한 주인은 안나였으니까.
어느 새 완연하게 무르익은 봄.
“죽을 것 같아.”
대기실 소파에 드러누워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안나가 중얼거렸다. 연주홀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관객석은 저녁 일곱 시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로 들어찼고, 연주가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안나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연주함으로써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안나는 특히나 그
사실 때문에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이건 그녀만의 연주가 아니라 입스윈 필하모닉의 연주회이기도 했다.
“넌 잘할 거야.”
<53 화>
아름다운 교향곡의 선율이 방음벽을 뚫고서 감미로운 음색을 전달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나가 말을 꺼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가끔은 당신이 별나게도 느껴져. 나는 사랑 받으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당신은
내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늘 그 자리에 있잖아.”
“잘하고 와.”
안나는 자일스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얀색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걸음을
따라 물결치듯 흔들렸다.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서 피아노 앞에 앉은 금발의 음악가가 보였다. 그녀가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곧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할 것이다.
자일스는 안나가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그녀가 연주를 성황리에 마칠 것이라는
믿음은 변치 않은 채였다. 안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그 누구보다도 자일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자일스는 안나의 몸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조명 때문에 착시가 일어난 건가? 빛이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안나의 몸 위를 어른거렸다. 이게 과연
의도된 건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외쳤다.
“안나!”
사람들이 경악에 질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몇몇은 겁에 질려서 공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자일스는
그들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안나, 안나! 그가 이름을 소리쳐 불렀으나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안나가
무사할까? 무사할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안나를 잃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안나……?”
새하얀 배경에 붉은 피.
땅 위로 희게 덮인 눈과 그 위를 적시던 혈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안나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거야. 죽고 만 것이다. 자일스는 누이를
잃었듯이 안나마저도 잃어버렸다. 과거의 잔상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안나가 죽었다.
셀레스트가 그랬듯이…….
그는 반쯤 흐느끼며 방황하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안나의 동맥을 짚어 보았다. 박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출혈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둘 수는 없어.
더는 안 돼.
자일스의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죽지 마, 안나.’
‘제발. 죽지 마.’
“안나.”
나는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문득 피아노의 형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나에게는 중요한 연주회가 있었다. 연주회는
어떻게 된 거지? 잘 마친 건가? 그랬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왜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는 거지?
연주를 제대로 마친 것 같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철컥, 철컥. 불길한 소음만 연달아 낼
뿐이었다. 뭐지? 문이 고장 났나? 나는 문에 몸을 부딪치기도 해 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54 화>
8. 행복한 결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저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방의 벽이 나를 향해 점점 좁혀져 오는 듯 환각이 밀려들며 숨이 막혔다.
반드시 그럴 거야.
“자일스!”
“안나, 괜찮아?”
“당신이 올 줄 알았어.”
“아픈 건 좀 어때?”
“나가자.”
내가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안 돼.”
“뭐?”
“안 된다고.”
“무슨 말이야? 내 말은 바깥으로 나가자는 거야. 봤어? 어떤 미친놈이 창문에 판자를 못질해 놓은 거.”
“넌 여기 있어야 해.”
“장난 그만 치라니까!”
“이거 놔!”
“안나, 진정해.”
“납치한 게 아니야.”
“이게 납치가 아니면 뭔데! 저 판자는 어떻게 설명할 셈이야? 완전히 폐쇄된 곳이잖아!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야?”
“웃기고 있네.”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슬퍼서는 절대 아니고 화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안나, 제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조명 장치가 추락했어. 너는 그 파편에 맞았고. 출혈이 너무 심각해서 조금이라도 지혈이 늦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흐느끼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죽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도. 이제야 자일스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다른 곳일 수는 없었어?”
“안심하고 지낸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널 매일 살피러 올게.”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안나! 이해가 안 돼? 널 해치려 하는 놈들이 저 바깥에 있다고 했잖아! 그 어디에 있든, 넌 언제든지
다시 공격받을 수도 있어. 죽을 수도 있다고!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도 내게 살고 싶다고
말했잖아!”
<55 화>
그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일스는 고개를 돌리고선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발, 그가 내 심정을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뒤늦게라도 좋으니까 이게 최선의 방식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깊은 갈등의 흔적이 무서운 기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잔인하리만치 어두운 검은색 눈동자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일스.”
“안 돼, 그러지 마!”
“정말 괜찮겠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괜찮았다.
“걱정하지 말고 가.”
빛나는 금발을 한 갈래로 묶어 늘어뜨린 그의 누이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가족이 누리던
부의 규모에 걸맞도록 커다란 옷장에 질 좋은 옷들을 한가득 갖고 있던 셀레스트가 가진 거라곤 이제 저
조그마한 짐 가방에 든 것이 전부였다.
“제발 고집 그만 피워.”
“날 증오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나는 이제부터 우리가 알고 지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 거야.
그중엔 누나의 친구들도 있을 거고, 심지어 우리 친척들이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고. 내가 베티나를
죽이고 오는 길이라고 생각해 봐! 그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것 같아?”
셀레스트는 그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 왔다.
“지금 누나가 이러고 있는 것조차 내가 누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증거야. 나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누나가 원하는 일들을 해. 난 누나에게 그런 삶을 주기 위해
모두를 배신한 거야. 그걸 이해한다면 내 부탁을 들어줘.”
자유를 얻기를 바라면서 그녀를 저 멀리 있는 세상으로 날려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자유를 주었다고
믿었다.
“왜 나를 붙잡지 않았어?”
“셀레스트.”
누이의 말이 맞았다. 그녀를 곁에 두었어야 했다. 진정으로 지키고 싶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았을 텐데.
안나의 생존은 곧 자일스의 생존과도 같았다. 안나가 죽는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그녀의 미움을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안나가 밀폐된 곳에 갇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그 안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솔즈부르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던 그 시절처럼, 자일스를 다시 증오하게
될지도 몰랐다.
안나가 기절했을 때, 그녀의 흰 드레스가 핏물에 젖어 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때 자일스는 비로소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는 안나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56 화>
“안나.”
“꺼져.”
그라고 안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화가 많이 났겠지. 안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어쨌든 이건 감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안나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것도 잠시, 얼굴 위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며 그녀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느꼈을 절망을 생각해 봐. 난, 나는 평생 동안을 그렇게 살았어. 아무도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다고. 나는 너만큼은 다른 줄 알았어. 너는 적어도 나를 한 인간으로서 생각해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내 착각이었던 거야.”
“안나.”
대문만을 잠그고 집을 빠져나온 그는 승용차 트렁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그는 안전 가옥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차에 올랐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건물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안전 가옥으로부터, 안나로부터 멀어지는 매 순간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불안감이 크기를 키웠다.
안나를 그곳에 두지 말아야 해. 그녀를 감금해서는 안 돼.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누군가가 안나를 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해 보였다.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려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가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자일스는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안나가 참아주었으면 했다.
자일스는 그가 거주하는 연립 주택 근처에 차를 댔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죄책감이 무거운
추가 되어 그의 발걸음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울고 있던 안나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선했다.
“장군님.”
“어서 해명하게.”
엘로이즈 비스마르.
<57 화>
“그게 사실인가?”
해링턴은 심각하게 물으며 자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해링턴이 그의 거처까지 걸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를 비밀리에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올린 게 누구였습니까?”
그러나 해링턴은 이미 정답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구태여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죄송합니다.”
“지금 뭐라는…….”
“그럴 순 없습니다.”
자일스는 서류를 내려놓고 해링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직 확고한 신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굳혀 왔던 결정이었다.
“헤센!”
“완전히 미쳤군.”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니었나? 나는 자네를 잘 알아. 벨담인으로서 혁명군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도,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과업에 임한 것도 전부 그들과는 같은 운명을 맞고 싶지 않아서였잖나. 그러기
위해서 직접 누이를 죽게 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죄송합니다.”
“그 영애를 사랑하는군.”
구태여 대답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자일스는 안나를 사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죽음까지 불사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본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안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로 치부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안나는 삶이자 구원이었고,
암암한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길을 잃은 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는 길잡이
별이었다.
“물론 자네는 체포될 걸세. 이제 입스윈 내에서 자네가 있을 곳이란 없어. 어디로 도망치든 분명 잡히게
될 거야. 지금까지 혁명군의 신뢰를 얻으려 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겠지.”
“상관없습니다.”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자일스의 시선에선 조금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링턴은 자일스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는 혁명군의 수뇌부에 있는 자였다. 적국 출신 장교 하나를 위해 혁명군을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나는 자네를 부하로서 아꼈네. 자네는 언제나 내 충성스러운 심복으로서 역할을 다했지. 스스로 원하는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겠네. 하지만 내가 자네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어.”
“가.”
“나가야 해.”
“뭐?”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불길함이 엄습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자일스, 대체 무슨 일인데?”
우리가 근경의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일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에는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추적자들이 바짝 따라붙지는 않았는지 파악하기에도 바쁠 테니까.
“걸을 수 있겠어?”
그때였다. 멀찍이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혁명군이 분명한 그는 들으란 듯이 경고하고 있었다.
<58 화>
“그럼 잡히면…….”
“헤센, 당장 항복해!”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국경.”
“뭐?”
“당신 지금 미쳤어?”
“당신이 죽게 돼!”
“나도 알아.”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정신 차려, 안나. 너는 살아야 해.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왔잖아. 여기서 멈추면 끝이야.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잖아.”
그러자 놀랍게도 자일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쁨과는 거리가 먼,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폭풍이 찾아오기 전에 그렇듯이, 주변은 고요했다. 나뭇잎끼리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자일스 헤센.”
나는 그를 두고 혼자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우린 계속 가야 해.”
빈센트는 한 손에 권총을 들고서 부하들과 함께 우거진 숲을 헤쳤다. 자일스 헤센이 애인과 함께 숲으로
도망쳤다는 건 매우 확실해 보였다.
벌써부터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곧 있으면 국경 지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계속 나아가면 아마 국경에 배치된 군인들과 대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패망한 국가 주제에. 빈센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입스윈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거대한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벨담은 더 이상 빈센트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안 됩니다!”
“이거 안 놔?”
“따라와!”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입스윈의 군인인 이상 빈센트는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벨담 국경에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겠다고 우기지 않는 이상 커다란 문제야 생기지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편 군인들이 그를 귀찮게 굴
것이다. 그럼 자일스를 잡는 데에도 차질이 생긴다.
“헤센!”
모두가 사태를 파악하고 얼마 안 가 비상이 걸렸다. 빌헬름은 동료와 함께 총격이 발생한 지점으로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무슨 말이야?”
“저번에 말이야, 야간 근무 설 때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갑자기 총격이 들려서 가 봤더니 입스윈 놈들이
코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낄낄대고 있더라고. 우리와 눈이 마주치니까 무슨 노래를 불러 젖힌 줄 알아?
우리 국가였어. 그 주정뱅이 놈들이 우리 국가를 불러 댔다고. 우린 놈들에게 조롱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거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한 동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빌헬름은 여자를 부축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살려 주세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놈, 그 남자 아니야?”
“누구?”
그제야 빌헬름은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제바스티안의 말을 들으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다.
신문에 며칠이고 오르내리던 얼굴과 이름. 온 국가의 미움을 산 남자. 죽어 마땅한 비열한 배신자,
자일스 헤센. 그가 눈앞에 있었다.
“손 들어!”
여자가 옆에서 무어라 외치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자일스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을 향했다.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남자는 확실히 신문에서 봤던 그 남자가 맞았다. 자일스 헤센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59 화>
9. 벨담으로
“괜찮아요.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어요.”
그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벨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자일스 헤센이 너에게 앙심을 품고 죽이려 들었다고.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국경까지 도망쳐 왔다고 해. 복부에 부상을 입은 것도 다 나 때문이었다고 말해.”
내가 왜 그래야 해! 내가 왜 그런 비열한 거짓말을 해야 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야.
“벨담으로 가서 살아. 네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부디 행복하게 살아.
그곳에선 아무도 널 붙잡으려 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그런 짓을 시키지 마.
“자일스.”
“내 옷 어디 있어요?”
“어디로 가시려고요?”
“뭐라고요?”
간호사는 군말하지 않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정확히 어디로 옮겨 온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간호사가 앉았던 자리에 착석해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회색 눈동자가 쉬이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홀슈타인이라고요?”
“그는, 죽었나요?”
“저도 그런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 구금해 놓았으니 헤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세상과 격리되었습니다. 어쩌면
헤센에게도 다행스런 일일지 모르죠. 벨담에서 그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테니까요.”
<60 화>
“재판은…… 언제 열리는데요?”
“관심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내게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라고요.”
“바라시는 대로, 저희는 당신의 신변을 보장해 드릴 겁니다. 단순히 헤센을 데려오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아닙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자일스 헤센의 연인으로서 말입니다. 벨담
역사상 최악의 반역자와 엮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스 헤센이 사랑한 여자라는 타이틀은 내게 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아마 언론에서 당신을 포섭하기 위해 몰려들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벨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과 사랑을 나눈 여자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다면 그 신문사는 얼마나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겠습니까? 찍어 낼 새도 없이 불티나게 팔릴 겁니다. 저희는 그런 불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저택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인가요?”
“선대 백작께서 잠시 입스윈으로 거처를 옮기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벨담에 본적을 둔 귀족입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하신 재산 일부가 벨담에 있습니다. 이제는 살해당하셨으니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몫이겠지요.
퇴원하실 때가 되면 사용인이 당신을 저택으로 안내하러 찾아올 겁니다.”
“떠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작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그 작전의 주요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입스윈 측에서 그들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던 건 내 도움이 컸다고 들었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였기
때문에 기차를 빨리 추적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일스를 버릴 수 없었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안온한 일상, 자유 그리고
막대한 재산…… 모든 것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그에 대한 상실감과 두려움이 더욱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 왜 그런 겁니까?”
“뭘요?”
“그게 진실이에요.”
자일스 헤센은 새하얀 방에서 눈을 떴다. 처음에는 현실 감각을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일스는 국경 앞에서 총을 맞은 사실을 기억했다.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왜, 나는 이곳에서 다시 깨어난 거지?
무거운 놋쇠로 만든 수갑이 그의 손목을 결박한 채로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수갑은 침대 헤드에
쇠사슬로 이어져 있어서 그는 침대 밖을 벗어날 수조차 없었다.
자일스는 일어나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다 곧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많은 죄를 저지른 주제에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그의 오만이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에 자일스는 너무나도 많은 죄를 등에
업고 있었다.
“나와.”
군인은 자일스를 또 다른 방으로 이끌었다. 창문이 모조리 막힌 탓에 환한 전등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자일스의 앞에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앉아.”
장교가 명령했다. 자일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그는 감옥도
아닌 곳에 와있었고, 군인들은 그를 고문하는 대신 좋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 앞에 그를 대령시켰다.
“왜 대답이 없어.”
“……저는 괜찮습니다.”
장교는 핏빛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자일스는 여전히 하얀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
<61 화>
그제야 자일스는 고개를 들어 장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낯선 얼굴 위에 익숙한 기시감이 감돌더니 머릿속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혔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자일스가 그녀를 알아보자 장교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관생도 시절의 모습이 아주 잠시나마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갔다.
“루이제.”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나는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싶었다니까. 오랜만이다,
자일스 헤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
사관 학교를 다닐 시절에 함께 공부하고 훈련했던 동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그녀는
자일스가 아직 깨끗했을 시절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너였던 거야?”
“그 반응은 조금 섭섭해지는군.”
“여긴 어디지?”
자일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식기를 들었다. 그러자 루이제는 흡족한 얼굴이 되어
총을 다시 거두어 갔다.
“왜 굳이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지?”
루이제는 자일스의 잔에 제 것과 똑같은 와인을 따랐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자일스는 괴상한 명령에
따르기 위해 잔을 들었다.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반항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묻고 싶었다. 자일스는 스스로가 왜 살아났는지, 왜 식사를 강요받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말해 줘, 루이제.”
“물론 너는 언젠가 죽게 될 거야. 아직은 적절한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네가 할 일이고.”
그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안전하다는 사실만은 말해 주지. 그런데 말이야, 자일스.
내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받아서 그러는데…… 사실인지 네 입으로 확인시켜 줄 수 있나?”
“……뭐라고?”
그녀가 왜 진실을 알고 있지? 뭔가가 잘못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안나는 자일스를 피해 국경으로 도망쳐
온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래. 사실이야.”
*
아렌트가 한 차례 예고했었던 대로, 사람들은 내가 바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병실에 갇혀서 생활해야만 했다.
온 나라가 그의 처형을 원하고 있었다. 벨담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앞에 둔 나는 힘없고 무능한 존재로
느껴졌다.
“잘 모르겠어요.”
<62 화>
“무슨 남자요?”
“보세요, 아가씨. 아가씨는 지금껏 그 남자에게 속고 계셨던 거예요. 자일스 헤센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인지 잘 모르셔서 그런 거예요. 아마 아가씨의 마음을 이용하려고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꾸며 냈겠죠. 이젠 아가씨도 헤센의 진짜 본모습이 뭔지 아실 권리가 있으세요.”
“……뭐라고요?”
“모르고 계셨어요? 자일스 헤센은 그의 누이를 죽였어요. 그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함께 자란 가족을…….”
“그 신문,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로테는 내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드디어 내 마음을 돌릴 기회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몇 년
치는 되어 보이는 양의 신문 뭉치를 구해다 주었다.
“읽어 보시면 아가씨도 그 남자가 얼마나 악마 같은 사람인지 아실 거예요. 벨담군이 아가씨를 구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신문은 나중에 사저로 가져가셔도 좋아요. 어차피 날짜가 지난
거라 폐기할 예정이었거든요.”
나는 신문을 펼쳐 읽었다. 자일스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신문들을 살펴보아도 그랬다. 자일스는 이목을
끌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중에는 자일스의 누이인 셀레스트가 있었고, 자일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살해해 입스윈에
바쳤다.
내가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고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고 싶어 했으나, 자일스 헤센의 추적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가명을 썼다는 사실까지도. 전부 여기에 적혀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나는 입스윈 혁명의 불길에서 간신히 살아났으나 자일스에게 발견되었고,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몇 번을 노력했으나 결국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행하고 불쌍한 여인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생각해야 했다.
자일스는 수갑에 구속된 채로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범한
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위한 철창 안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지금도 군인 한 명이 문가에 서서
곁눈으로 그를 감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63 화>
“이건 뭐지?”
“네가 그리도 열렬하게 쫓아다니지만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자일스
헤센의 사랑을 받는 여자를 세상이 가만뒀을 것 같아?”
“안나를 사랑하기는 하는구나. 너를 깎아내리는 기사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면서, 안나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화를 내다니 말이야.”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벨담은 안나를 미워하지 않아. 다만 그녀에게 지대한 궁금증을 갖게 된
것뿐이지.”
분명 안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라면 원하던 자유를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오판이었다.
안나는 이미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멋대로 평가하거나 동정할 것이다. 혹은,
비난할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아.”
그러곤 대답했다.
“아니.”
자일스는 안나를 돕고 싶었다. 그녀가 소중했으니까. 그녀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가 안나와의 사이를
더욱 좁힐수록, 오히려 온갖 악재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자일스는 신문에 실린 안나의 사진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얼굴이 인쇄된 부분을 엄지로 쓸어
보았다. 허나 뻣뻣한 종이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
“퇴원시켜 주세요.”
“퇴원 말입니까?”
“그건…….”
“네, 네.”
“이미 오고 있을 거예요.”
의사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은 적었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을 떠나고 싶었던 나는 의사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아렌트에게 퇴원하겠다고 선언한 참이었다.
어쩐지 나를 찜찜하게 만드는 특유의 차가운 인상 때문에 그를 자주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연락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 내 것이 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와 줘서 고마워요.”
그는 앞장서서 나를 병원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병원을 나가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간호사나 환자들은 제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퇴원 수속 절차를 밟은 평범한
환자일 뿐이었다.
병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나를 보자마자 앞으로 튀어나와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강렬한
플래시 불빛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앞을 가렸다.
<64 화>
운전수는 이 지긋지긋한 기자들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급하지만 능숙하게 엑셀을 밟았다.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던 기자들과 병원의 모습이 백미러 너머로 멀어져 갔다.
사람들은 언제 커다란 전쟁을 겪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를 걸었다. 전쟁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는 의아해졌다.
괜히 자일스 헤센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급급한 게 아니었다. 패전국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상당했다. 만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국가를 향해 손가락을 돌리기
시작한다면 몰락하는 건 벨담 귀족만이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파괴된 건물들과 사람들의 삶을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동안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은
반드시 필요했을 거다.
“이름이 뭐예요?”
“요제프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희는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관리하던 저택의 주인이셨던 분들께서 대부분 돌아가셨으니까요. 만약 마땅한
상속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택은 경매에 붙여졌을 겁니다. 저희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겠지요.”
“잘된 일이네요.”
비스마르 백작가는 가세가 기울어 가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래서 마이어 공작가와의 혼약을 어떻게든 이어
가려 안달복달했던 거다. 또한 백작은 가문을 되살릴 사업거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했다.
승용차는 어느덧 시내를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비록 백작이 도시 내의 타운하우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내 상황을 고려해 외곽 지역에 숨겨진 다른 저택으로 안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다 왔습니다.”
승용차가 진입을 시도하자 누군가가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저택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주인이 방문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누군가 이곳에 눌러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저택이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사치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황갈색 건물은 백작 가문이 소유했던 재산이라 할 만했다.
나는 다시 입스윈에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이곳에 오니까 백작의 취향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평범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을 하고서 귀족 아가씨 대접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몇몇 사용인들이 바깥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뭐죠?”
“하지만…….”
“이름이 뭐예요?”
“아델레예요.”
“뭐라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 겪었던 모든 일들을 말했다. 그러나 자일스가 등장하는 부분은 슬쩍 뺐다. 아델레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말도 안 돼!”
아델레는 내 입에서 그런 저속한 표현이 쏟아져 나오자 놀라면서도 손뼉을 치면서 웃어 댔다.
“아가씨!”
“하지만…….”
“믿기지가 않아요.”
“뭐가요?”
이것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진실은 너무나도 주관적인 것이라서,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사람들이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되었다.
<65 화>
“뭐가 알고 싶은데요?”
누군가는 신중하게 답하라고 조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진실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 척 에둘러 말하기도 싫었다. 그가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만큼은
떳떳하고 결백했다.
“하지만…… 자일스 헤센은 입스윈에 있던 귀족들을 전부 다 죽였어요. 어쩌면, 안나도 죽이려 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럼 대체 어떻게…….”
“제 생각엔 그에게도 붙잡아야 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변덕을 부린 거겠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걸 스스로도 느낀 거예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아뇨.”
“샌드위치요?”
“네.”
아델레는 내게 피크닉 계획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얌전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한편으론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 커다란 저택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모든 재산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게 말이다. 심지어 나는 가문의 일원조차 아니었는데.
이제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가족들은 전부 죽었다. 백작가의 가주는 나다. 하지만 나는 가주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자일스가 말했던 대로, 나는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게 불만스럽다는 건 아니지만…….
「살인자 헤센이 행복한 커플을 비극으로 갈라놓다 ― 엘로이즈 비스마르 백작 영애는 요한 마이어 공작과
약혼한 사이로,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자일스 헤센의 극악무도한 동족 학살이 둘의 사랑을
비참하게 짓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복하게 자란 순진하고 선량했던 소녀’ — 난 유복하게 자라지도 않았고 순진해 빠졌던 건 맞지만
선량한 건 절대 아니었다.
‘백작 부인이 난산으로 어렵게 얻은 귀한 막내딸’ ― 내 어머니는 하녀였다. 아마도 백작이 어머니를
강간했을 것이다.
자일스는 벨담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보호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렌트가 왜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지독한 관심은 아직까지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이곳에서 자일스와
똑같은 신세였다.
‘살아남기 위해 국가를 배신한 반역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모두가 똑같다 ― 다만 대부분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뿐’. ‘입스윈 혁명군에 목숨을 구걸한 자일스 헤센’. ‘헤픈 창부나 다름없는 남자’.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오직 생존뿐이었다’…….
개중에도 내 눈길을 끈 헤드라인이 있었다. 큼지막한 볼드체로 인쇄된 헤드라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66 화>
10. 라디오 방송
루이제는 궁금했다.
다른 군인들은 루이제를 깍듯하게 대했지만, 자일스 헤센에게 그녀는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이 아닌 그냥
사관 학교 동기 루이제였다. 벨담군에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는 루이제의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조차 별 의미를 행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일스가 자살 시도를 하거나 감시병을 해치는 등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일스를 적당히 달래서 얌전히 만들 수 있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야기로는 자주 접해 들었으나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일스가 비열한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을 어찌나 주입해 댔는지 루이제는 원래 자일스가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냥 예를 든 것뿐이야.”
“…….”
자일스는 폭력에 절여져 살아온 사내였다. 전쟁을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지만 전시에 내던져진
군인들과 그 사이에도 차이점은 있었다.
자일스는 폭력의 집행자였다. 칼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묶어 놓고 마음껏 고문하는
게 그가 하던 일 아니던가.
그는 웃으며 악수를 나누던 사람들을 죽였다. 가장 친했던 친구들을 죽이고 심지어 가족의 몸에 칼을 꽂아
넣기까지 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도 용케 정신을 제대로 붙들고 있었다.
화를 내, 자일스. 식탁을 뒤집어엎고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주먹을 휘둘러도 좋고. 그동안 네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내게 직접 보여 줘.
“너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대.”
“그만.”
“루이제, 그만해.”
“할 말이 그게 다야?”
지금 루이제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증오하는 자일스 헤센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안나는 널 버렸어.”
“그러라고 해.”
“멈춘다니, 뭘?”
<67 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공포감을 느끼곤 한다. 포악한 맹수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
사지를 찢으려 달려들 때보다 더욱 그 사람을 궁지에 몰리게 하는 건, 그 맹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식탁 위에 사과 잼이 있군.”
“넌 사과를 못 먹잖아.”
“옛날 일일 뿐이야.”
“그럼 너는 나를 아나?”
“네가 허튼수작을 부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것만 알아 둔다면 모두가 편할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그리고 아까 안나 얘기 말인데.”
“그럴 줄 알고 있었어.”
“그래?”
내가 평소에 먹던 얇디얇은 샌드위치와는 다르게 두꺼운 부피를 자랑하는 ‘주방의 자존심’ 샌드위치를
바라보던 나는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요, 아가씨…… 아니, 안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송아지 요리를 마다하시고 샌드위치를
달라고 하신 거예요? 저희는 아가씨께서 벨담의 저택에 처음 오신 거니까 당연히 촛대 놓을 자리만 빼고
식탁 위에 빈 곳이 없게 하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진실을 말한 거예요. 그 작자에게 딸이란 존재는 공작가에 바쳐야 할 진상품이나 다름없었을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엘리자베트 양이 괜히 다른 남자 손 잡고 도망쳤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몇 개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포만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성의를 무시하기가 싫어서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아뇨.”
“샌드위치는 식기를 쓸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손으로 집어 먹어도 되니까 그런 거예요. 난 그런
음식들이 좋아요. 거추장스럽지 않은 음식들이요.”
<68 화>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엘로이즈는 가족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만 알았다.
애초에 내가 뺨을 맞는 것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듣는 것도 다 내가 부족한 탓인 줄만 알았다.
“뭐든지요.”
“아델레는 어떨 거라 생각하는데요?”
“……고마워요.”
“후식은 뭘로 하시겠어요?”
아렌트 홀츠만은 루이제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커다란 전쟁은 그녀의 가슴팍에
소령 계급장을 달아 주었지만 그 대가로 루이제가 누렸어야 할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이건 과거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쟁은 청년들을 나이 들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떠오르는
여명처럼 희끄무레한 과거의 날들을 평생토록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루이제는 자일스 헤센을 맡게 되어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그녀는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줄담배를 피워 댔다.
“왜 하필 나였는지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물론 나여야만 하니까 그랬겠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도 난 여전히 불쾌하단 말이야.”
“뭐가 그리 불쾌합니까?”
“당신 임무는 적절한 시기에 재판이 내려질 때까지만 자일스 헤센을 관리하는 겁니다. 별로 어려운 임무도
아닐 텐데 너무 불평하진 마십시오. 상부에서도 당신 의견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나는 사실 그놈 만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최대한 이 임무랑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었던 건데. 도리어
이게 내 발치로 굴러왔네.”
그 이야기들은 정말 진실이었을까?
“몰라, 나는 잘 모르겠어.”
그녀는 왜 대답을 회피했을까? 물론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루이제의 의견은 자일스 헤센을 둘러싼
거대한 작전에 반영되지 않을 테니까.
아델레는 망설였다. 분명 안나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 꺼림칙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벨담을 위한 일이었다.
그녀가 소리 죽여 말했다.
<69 화>
“그게 뭐 어때서요?”
“난 귀족 아니에요.”
“상속녀요.”
“그냥 그뿐인가요?”
“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투표로 뽑는 세상에 작위는 무슨 작위예요? 왕좌는 그저 화려한 의자에 불과한
시대잖아요. 난 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아요. 귀족 행세하는 작자들이랑 같이 지내보고 나니까 그게
어릿광대만도 못한 짓이라는 걸 더욱 잘 알겠더라고요.”
“아가씨, 뭐 하세요?”
“네?”
“운전…… 말씀이신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요제프는 결국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안전벨트…….”
“했어요.”
“네, 좋아요. 그럼…….”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뒤로 젖히면 차가 앞으로 나갑니다. 자…… 보이시죠. 기어를 바꾸니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엑셀에서 발 떼라고요!”
요제프는 마치 불곰과의 격전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초췌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도저히 손님을 맞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요제프가 조금 쉬도록 하고 혼자서
방문객을 맞으러 나갔다.
“운전을 좀 배웠어요.”
“아닙니다.”
“무슨 제안인데요?”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할 겁니다. 엘로이즈 양께서 참여해
주신다면 좋겠다는 전보를 보내오더군요.”
“난 싫어요.”
<70 화>
“그렇습니다.”
“상관없어요. 내겐 남는 게 시간이에요.”
“엘로이즈 양도 이젠 벨담의 일원이 되셨으니 아시겠죠. 매일 약탈과 범죄가 일어나는 나라에 살고 싶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입느니 차라리 한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했다.
그리고 또…….
“영웅이라고요?”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거대한 국가의 실패를 한 사람이 떠안아서 만들어진 평화에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그건…… 너무 가혹해요.”
“하지만 그뿐이겠습니까.”
아렌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조롱이나 비웃음과는 거리가 먼 미소였다.
“자일스 헤센은 무엇보다 당신을 위해 받아들일 겁니다. 벨담의 안위 속에는 당신의 삶이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당신이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그는 뭐든지 할 겁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이미 당신을 위해 삶을 포기하고 벨담 국경을 넘은 사내가 아닙니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자일스는 어느 시점 이후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대신 그에게는 맹목적으로 굴 만한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다.
“할게요. 라디오 방송에서 이대로 읊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할 수 있어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받아들이시겠다고요.”
<71 화>
“안나, 이거 다 외울 수 있겠어요?”
“괜찮겠어요, 안나?”
“뭐가요?”
“안나는 아직 자일스 헤센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이건……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내용이에요.
여기도 쓰여 있잖아요. ‘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라고요.”
“아, 네에…….”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게스트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명배우보다 더욱 유명하며, 벨담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연애사의 주인공이시기도 하죠. 매일같이
신문 1 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분! 바로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마르 백작 영애님.”
“저도 반가워요.”
“무척 떨려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 드리려
노력할게요.”
“네, 괜찮아요.”
“저는…….”
“왜 그래요, 아델레?”
그녀는 대본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완강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다음에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읽어 보았다.
“뭐가요? 뭐가 없다고요?”
“아뇨.”
“조금 달라지셨군요.”
“눈치챘어요?”
“대본은 읽어 보셨습니까?”
“충분할 만큼은요.”
“저는 걱정 안 해요.”
“앞으로 10 분 정도 남았군요.”
셋, 둘, 하나…….
<72 화>
*
언제나 그랬듯이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은 루이제와의 일종의 면담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식사 메뉴는 매일 바뀌었다. 오늘은 베이컨과 감자를 주 재료로 해서 만든 요리가 특히 눈에 띄었다.
물리적인 자유를 얻었다 한들, 안나는 평생 그가 저지른 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고위 장교가 합석하는 자리라 그런지 몰라도, 그들이 죄수에게 대접하는 것치고는 좋은 식사를 내온다는
점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자일스는 안나를 내버려 두고 사형대로 올라가야 했다. 무책임하고 비겁한 죽음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이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 왔을지 모른다는 무의식 속의 속삭임은 그로 하여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다.
루이제는 마치 평범한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온 사람처럼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신문을
펼쳐 들고서 헤드라인을 읽었다.
“‘간신히 살아 나온 생존자의 인터뷰’. 입스윈에 수감되어 있다가 벨담으로 송환되어 돌아온 여성에
대한 인터뷰야. 혹시 미카엘라 라이너라고 기억나?”
“아니.”
“물론 있지. 네게 전해 줄 만한 별다른 얘기는 없어. 하지만 오늘 있을 방송으로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올 거야. 기대해도 좋아.”
“방송이라고?”
“그럼, 설마 우리가 억지로 붙들어다 방송국에 앉혀 놨겠어? 제 발로 들어간 거야. 강제성은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안나가 이런 일을 자처했다고?”
“하지만…….”
자일스는 목구멍 위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키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나의 얼굴을 마주 본다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니야. 듣게 해 줘.”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저도 반가워요.”
“무척 떨려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 드리려
노력할게요.”
“네, 괜찮아요.”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이제 이 인터뷰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독백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놀랍게도 안나는
자일스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안나.”
안나가 말을 이었다.
방송이 끊겼다.
<73 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상관없어요.”
“이런 식으로 헤센의 편을 드시면 언론과 대중의 관심만 한 몸에 받게 될 뿐입니다. 자일스 헤센이 져야
할 몫을 함께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저로 모셔다드리죠.”
아렌트가 말을 꺼냈다.
“…….”
“엘로이즈 양.”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내가 화를 냈다.
“그리고 어쭙잖게 내 편인 척할 생각 마세요. 처음부터 당신은 내 편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만약 정말 나를 생각했더라면, 당신은 이런 거지 같은 인터뷰 제안을 들이밀지도 않았겠죠. 당신이
정말로 내 편이 되고 싶었다면 내가 아니라 언론사 입을 막았어야죠. 나는 멍청이가 아니에요. 누가 진짜
내 편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요.”
“안나! 괜찮아요?”
“물론이죠. 방송 들었어요?”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 삶을 포기하지 마.
그러니 자일스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야만 한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편 루이제는 라디오의 전원을 껐다. 이제 실내는 다시 적막으로 가득 찼다. 잠시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루이제였다.
“이런, 보란 듯이 망쳐 버렸네.”
“안나가 괜찮을까?”
“무슨 뜻이지?”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명백한 해답을 알고 있지는 못했던 까닭이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자일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분에 넘칠 정도였다.
“나도 알아.”
“…….”
루이제는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대놓고 의심을 드러낼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 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금 무슨 소리를…….”
“잠깐…….”
그리고 이 순간, 자일스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정전이 일어난 틈을 타 도주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군인들의 시야를 지금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차단시킬 기회는 없을 것이다.
도망쳐야 할까? 수갑이 채워져 있기는 했지만 체술을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74 화>
루이제 고틀리프는 쾌활하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소녀였다. 특유의 낙천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을 타고난
그녀는 한번 마음먹은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저질러 버리곤 했다.
루이제는 어릴 적, 달빛조차 희미한 야밤에 바닷가에서 놀다가 그만 파도에 휩쓸린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 친오빠가 겨우 구해다 던져 준 선박용 튜브 쓰레기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말이다.
루이제의 곁에는 자일스도 있었다. 자일스 헤센.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사관 학교에 들어와서 군인이
되기를 자처한 괴상한 놈. 모두가 그에게 대체 이런 곳엔 왜 기어들어 왔냐고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을
들은 이는 거의 없었다.
“15 분 뒤에 가는 거다.”
“……그래.”
“루이제!”
자일스는 소리가 난 쪽을 더듬어 쓰러진 루이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루이제가 정말로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 일어난 일이라 그조차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 자일스는 눈물로 엉망이 된 루이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불이 들어오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루이제 고틀리프.”
“일어나. 이만 자러 가야지.”
“루이제.”
자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잠시 갈등했다. 루이제를
버리고 도주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다시 불이 들어올지 몰랐고,
루이제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끝내 자일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출구가 아니라 루이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각에 의존하며
식탁을 빙 돌아 반대편으로 옮겨 간 자일스가 루이제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갖은 노력 끝에 그녀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루이제는 이제 스스로 자일스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증상이 도질 때 루이제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 붙잡을 만한 것이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다 보면 그나마 견딜 만해졌다. 이상하게도 그걸 제일 먼저 알아차려 준 건 자일스였다.
루이제는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로 일어나 자일스를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아직 호흡을 갈무리하지 못해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나는 사람을 죽였지. 친구들도, 내 하나뿐인 누이마저도 죽도록 내버려 뒀어.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겠지.”
“난 연기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아.”
“개소리 집어치워!”
“루이제, 진정해. 넌 지금 많이 흥분했어.”
사회가 선전하려 그리 애를 쓰는 희대의 악마가 아니라 ‘그’ 자일스 헤센이 그토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니. 제정신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배신감? 절망?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루이제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과거의 친구는 완전무결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자일스를 노려보다 권총을 집어넣고 홱 몸을
돌렸다. 그 사이 돌아온 부하가 뭔가를 묻는 듯했으나 루이제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75 화>
루이제는 안전 가옥을 나서면서 입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품을 뒤져도 라이터를 찾을 수 없었다. 안 가져왔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녀에겐 라이터의
행방에 대해 생각할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보다는 스스로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격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곧 마음속에 감춰진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과도 같았다. 자일스 헤센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들키고 말았다는 게 그녀로 하여금 담배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일스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검은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댔던
어린아이처럼, 생존하려는 본능에 목매달았던 인간. 물론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었지만, 결국
악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루이제 또한 라디오 방송에서 외치던 안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안나는 자일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야 했다. 하지만 안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자일스의 곁에 서는 쪽을 택했다. 그것도
벨담의 전국민이 듣는 앞에서.
루이제는 문득 안나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심리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녀와
대화를 하고 나면 마음을 정리하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알았어요.”
사용인을 따라서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내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그를 만나면 대체 뭐라고 응수해야 하지?
“안녕하세요, 안나 양.”
“네…… 안녕하세요.”
“저…….”
“말씀하세요.”
“자일스 헤센 말이죠.”
루이제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공백을 둔 후 대답했다.
“왜 당연한 걸 물으시죠?”
“왜 웃으세요?”
“뭐가요?”
루이제는 겨우 웃음을 그쳤다. 나는 왠지 몰라도 그녀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제는
커다란 사건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겪었고, 그 때문에 어딘가가 살짝 엇나가고 만 사람처럼 보였다.
루이제가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당신이 자일스에 대해 진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거든요.”
“자일스와 함께 있었나요?”
<76 화>
나는 그녀의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어째서 남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지? 그건 자유로운 감정이었다. 논리적인 인과나 타당한 이유로써 성립하는 게 아니었다. 노을이
지는 어느 날, 홀로 바다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다 문득 밀물처럼 스며드는 감정과도 같은 것이지.
벨담군 소령이 사사로운 감정에 대해 캐묻기 위해서 방문했다는 건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지만,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내 몸을 탐하지도 않았고, 나를 때린 적도
없어요. 자일스는 내게 순수한 호의라는 걸 처음 보여 줬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가 내 안위를 그의 것만큼 아꼈고 우리가 서로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정황상 사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는 혁명군에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했고, 그 증거로 자신의
누이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겠죠. 자신의 가장 끔찍한 치부였을
테니까요. 이 사실을 알고도 당신은 그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
“네. 그게 당신 이름 아닌가요?”
“글쎄요.”
“……무슨 뜻이에요?”
“네?”
나는 루이제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군모를 옆구리에 끼운 채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루이제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루이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루이제는
그대로 문 너머로 사라졌다.
<77 화>
11. 탈출로
“왜 그런 겁니까?”
“뭐가.”
“그 일은…….”
아렌트의 인상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찮은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요새 루이제가 평소보다 담배를 더 많이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쟁 이후 골초가 된 그녀였지만,
그나마도 요새는 더하다.
그게 무엇일까?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마.”
“홀츠만.”
루이제가 담배를 거두고 그를 쏘아보았다. 불면증과 묵은 스트레스 때문에 망가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위 장교로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권위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아렌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짧은 목례와 함께 그가 루이제에게서 멀어져 갔다.
루이제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젠장.”
“가만히 있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항할 생각일랑 그에겐 없었다. 군인은 그의 몸을 이곳저곳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일스를 노려보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다른 군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이 있을 뿐, 텅 비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여긴 이상 없습니다.”
군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경고하는 것뿐이었다. 자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들이닥쳤던 군인들이 하나둘씩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다시 외로운
침묵에 휩싸였다.
자일스는 그들이 수색 작전을 펼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분명 라이터 때문일 거다. 루이제는 라이터가
사라진 게 우연일 거라 생각할 만큼 속 편한 바보가 아니었다.
자일스는 정전이 일어났던 그날에 대해 생각했다. 일반 가옥에 전기가 끊기는 일은 전쟁 이전에도 드물게
일어나곤 했다. 그러니 벨담이 대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언제 정전이 일어나도 전혀 놀랍지 않게
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안나가 라디오를 통해 건넨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지금도 라이터는 매트리스 아래쪽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의 유일한 기회였다. 자일스는 이곳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안나에게 또 다른 절망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신문이라는 매체에 신물이 났던 나는 기자들을 모조리 돌려보냈다. 모르는 이들이 내 저택으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아렌트는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들어와요.”
“기자인가요?”
잠시 생각하던 내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78 화>
손님을 안으로 모셨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이제 그곳에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기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근래 들어 손님을 꽤 자주 맞이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오히려 그녀는 기자라기보다는 사인을 받으러 온 독서광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니타는 확신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귀족에게 이런 식으로 악수를 청해도 되나? 물론 나는
그런 귀족식 예법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았기에 흔쾌히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저도 읽어 봤어요.”
“정말요?”
“네. 아주 흥미롭던걸요.”
“더 자세히 말해 봐요.”
거기에 자극적인 요소를 위한 과장이나 악의적인 편집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던 나는 이
잡지사야말로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
“자일스 헤센은 극악무도한 배신자이자 살인자예요.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의 죽음까지도 모욕하고,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약혼자도 죽였어요. 그리고 제 몸을 노리고서 착한 남자를 연기하며 제게 접근했죠.
저는 긴 시간을 고통받다 그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벨담 국경을 넘었어요. 벨담에서는 이게 진실이에요.
사람들이 믿는 건 바로 이 얘기라고요.”
“그래요. 자일스 헤센이 정말 레이디를 괴롭혔다고 치죠.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세뇌당한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서 벨담 국경을 넘어 도망치고, 자일스 헤센을 벨담에 체포당하게 만든 다음 뒤늦게 그를
구제해 달라고 사람들 앞에서 호소한다? 그건 너무 이상해요. 삼류 작가라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쓰지는 않아요.”
“사람들은 그걸 믿잖아요.”
그만큼 이 사회가 괴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통을 또 다른 고통으로 해소하려 하는 그
심리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저희도 알아요. 언론에 좋지 않은 일로 회자되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거든요. 레이디께서
방송을 통해 하시는 말들을 듣고 바로 알았어요. 믿든 믿지 않든,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은
기분이죠. 그렇죠?”
그렇다.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 사지가 묶인 사람이 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처럼,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아서였다.
“나는 자일스를 살려야 해요. 그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잖아요. 벨담은
자일스를 희생양으로 쓰려 하고 있어요. 단순히 그가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나는 그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어요. 왜냐면 나는 그를…….”
그는 한 번도 나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79 화>
지금 이 순간, 자일스의 신경은 완전히 곤두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얌전해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허공을 노려보며 유순한 죄수처럼 앉아 있었다. 보초를 서는 군인이 그를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자일스는 적절한 순간이 오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오래전, 저격 부대에 차출되었을 적 목표물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때처럼.
루이제는 안나가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루이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안나는 인터뷰를
망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에게 제발 돌아와 달라고 외쳤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나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자일스는 눈을 감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오늘은 기회가 와야 한다. 하루를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정전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화재를 효과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기의 순환이 필요했다. 그는 버려진 벽난로 안에 나동그라져 있던
부지깽이로 판자를 뜯어 냈다.
루이제는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좀 그만 피우라던 동료들의 잔소리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루이제 같은 사람들은 알코올에
중독되거나 골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고.
안나를 찾아갔던 건 단순히 그녀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방송을 망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자일스
헤센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이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그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과거의 기억들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일스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뿐이었는가.
자일스도 그랬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자일스는 그의 친구들을 죽이고
하나뿐인 누이마저도 죽였다. 그런 짓을 하고서 좋은 시절의 추억을 품고 산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안나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정부가 선전했던 내용들 중엔 거짓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까?
“씨발!”
여자는 계속해서 외쳤다. 나와! 나오라고, 이 개자식아! 자일스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렀다.
이제 끝인가?
“일어나.”
“소령님.”
“뭐야, 이거 안 놔?”
“조금 흥분하셨습니다.”
“고틀리프 소령님…….”
“헤센 대위!”
<80 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개중에는 루이제의 동료나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들의 숨이 멎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매정하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옛 시절에 그랬듯이, 끝까지 루이제의 속을 뒤집어 놓고야 말았던 부관은 결국 남들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흐트러진 몰골의 루이제가 물컵을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불시에 물을 끼얹은 게
분명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는 말간 정신으로 눈앞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보고.”
“회복은?”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는 이만 가라는 제스처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다 나가.”
“예?”
자일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루이제의 시선이 옮겨 왔다.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듯이,
그녀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었다.
“왜 그런 거야?”
“…….”
자일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이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자일스는 그녀가 크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어.”
성공했어야 하는 건데.
“…….”
“뭘 말이지?”
자일스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다른 목적을 머릿속에 품고서 그녀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러나 라이터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뭐?”
“고작 그것 때문이었다고?”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그러나 단박에 거친 대답을 들려줄 줄 알았던 루이제가 잠시 침묵하는 것을 보면서 자일스는 의아해졌다.
왜 망설이지?
루이제는 담뱃불을 지져 껐다. 그녀는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음을 군모를 눌러쓰는 것으로 대신
표현했다.
그녀가 덧붙였다.
루이제의 경고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 다음 기회는 어떻게 노려야 하지.
경비는 더 삼엄해질 테고, 루이제도 다시는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판자로 막힌 창을 바라보던 자일스는 문득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던 루이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왜 그랬을까?
<81 화>
‘모종의 이유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글뤼비흐네 잡지사가 해외의 동종 업계 회사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벨담에서도 별 소득을 내지 못하던 잡지사가 해외에서 커다란 주목을 얻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에 내던 기사들을 계속 발행하세요. 본사를 옮기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작은 잡지사라 처음에는 주목을 받게 되겠지만 곧 관심이 식을 거예요.’
벨담 사회는 잡지사 하나에 눈길을 두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주도로 자극적인 정보들이
판을 치는 요즈음에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원고라면 괜찮겠습니까?’
원고를 꼼꼼하게 훑어 내려가던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 계획에 확신이
없는 듯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았다. 한낱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허탕만 친 꼴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괜찮아요. 내겐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로 가면 되죠?”
“여기가 어디죠?”
우리는 계속 걸었다. 이 건물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게다가 창문이 있어야 할 곳은 모조리
판자로 못질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반응은 어떻던가요?”
“들어가십시오.”
“안나?”
“안나!”
“자일스!”
하지만 그들은 내게 그마저의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재회는 금방 끝을 고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루이제, 지금 뭘 하려는…….”
“루이제!”
자일스의 외침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커다란 군인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손에 들린 곤봉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82 화>
과거의 어느 날.
비록 자일스 헤센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런 사실까지는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을 아는 건 헤센과 그녀 둘뿐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일스 헤센을 관찰했으니 그에 대한 견해가 생겼으리라 믿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그가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이던가?”
“제가 보기에는…….”
그가 기대하는 답이 뭘까?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루이제는 진실을 그대로 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략은 절대 실패한 적이 없었다.
“얌전하다고?”
“예,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저항하지도 않고, 명령에도 순순히 따릅니다. 처음에는 빈틈을 노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런 속셈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체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흠. 그렇군.”
“그래도 저희는 긴장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응할 준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고틀리프 소령.”
“예, 대령님.”
“우리가 문제 삼는 건 바로 그 부분이라네.”
뭘 말하는 거지? 루이제는 지금껏 이루어졌던 대화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복기해 보았다. 뭔가 실언이
있었나? 베흐만 대령의 얼굴을 살피니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살육광도 아니고, 미치지도 않았으며 악의와 증오가 가득 차 들끓는 사람도 아니지. 희대의
살인마라기에는 너무도 점잖고, 이성적이고 심지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줄도 안다네.”
“……예. 이해했습니다.”
“예. 그렇겠죠.”
“그녀를 이용하게.”
대의……. 양날의 검과도 같은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던 루이제는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사안에 한해서는 그 어떤 행위를 가해도 상관없네.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여자가 어떻게
되든, 살든 죽든……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자일스 헤센이야. 평범한 자일스
헤센이 아니라 최악의 살인자 자일스 헤센이지.”
서류가 거두어져 갔다. 베흐만 대령은 서류에 불을 붙이며 그것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게 벨담을 위한 일이야.”
벨담을 위해서.
“제발, 제발 그녀를 놔줘. 죄를 저지른 건 나야. 내가 모든 걸 감당할 테니까 안나는 건드리지 마.”
“루이제 고틀리프!”
“그만.”
“의사를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그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기계처럼 명령에 따랐다. 자일스는 숨을 몰아쉬며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제는 끝까지 자일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매정한 걸음걸이였다.
그녀의 뒤로 문이 닫히고 나서야 군인들이 그를 내팽개치듯 놔주었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자일스는 비틀거리며 안나를 향해 다가갔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안나.”
전부 다 그의 패착이었다. 안나를 벨담으로 데려온 것도,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 것도……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제때에 그녀를 놔주지 못한 것도. 전부 다.
“울지 마, 자일스.”
<83 화>
적어도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그랬다. 그녀는 아주 완벽한 희생양이었다. 자일스를 자극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루이제는 아직도 명령서에 적힌 내용들을 기억했다. ‘자일스 헤센이 재판정에 설 때까지 엘로이즈
비스마르를 고문할 것. 그 방법이 어떠하든 헤센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용인됨. 단,
반드시 재판 당일까지는 효과가 나타나야 함.’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 안에 빈사 상태에 이를 것이 예상됨. 뒤탈이 없도록 시체를 확실하게 처리할
것. 사망 시 즉각 상부에 보고서 올릴 것.’
루이제는 생각했다. 애당초 자일스 헤센을 맡아선 안 되었다. 대충 감시만 하면 끝날 거라던 아렌트의
무책임한 말이 떠올라 이가 갈렸다.
자일스 헤센이야 그렇다 쳐도 안나는 달랐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헤센과 놀아난 것뿐이었다.
아니, 그게 죄인가? 개처럼 맞아 죽는 잔인한 결말을 맞게 될 만큼?
상부에서는 군인들을 시켜 안나를 기절할 때까지 때리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치료를 받게 했다. 의미
없는 행위였다. 어차피 해가 밝으면 또다시 맞게 될 텐데…….
자일스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바깥으로 분노가 터져 나오는 대신 뭔가가 그의 내면을 엉망으로
갉아먹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환멸이 났다. 평생토록 믿어 온 신념의 맨얼굴을 목격한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자 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는 수갑을 찬 상태로 자신을 붙든 군인들을 제압할 방법에 대해 빠르게 생각해 냈다. 곧 붙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안나는 여전히 힘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안나의 외침은 오히려 그들의 비웃음만 샀다.
“뭘 경고한다는 거지?”
군인들이 안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안나의 시선이 돌연 자일스를
향해 옮겨 왔다.
그녀가 외쳤다.
“받아!”
“씨발, 뭐야!”
“지금 뭘 하는 거냐?”
언짢은 장교의 고성에 군인들이 즉각 자세를 바로 했다. 루이제가 문가에 서서 쓸모없는 부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나가!”
“그거 내려놔.”
“내가 뭘 믿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내려는 듯하던 자일스가 이내 안나와 가까운 쪽으로 무기를 떨어뜨렸다.
루이제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자일스는 자유롭지 못한 팔로 안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안나는 시트가 등에 닿을 때조차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 냈다.
“왜 왔지?”
“재판일이 정해졌어.”
“그래서?”
재판정에 모이는 건 자일스가 사형을 받게 되리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엉망이었다.
모든 것이 다.
<84 화>
“모르겠어.”
“이젠 안나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그녀의 곁에서 사라져 주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는데…… 애초에 내가 안나를 사랑하려 한 욕심이 모든 걸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제발, 루이제.”
“그만해!”
루이제는 자일스를 거칠게 뿌리치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안나를 생각해서
참았다. 그마저도 참 뭣 같은 위선이 따로 없다는 걸 알지만…….
“왜?”
“고작 그건가?”
“이건 거대한 쇼야. 국가가 주도하는 쇼라고. 넌 그냥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뿐이야. 너도, 안나도. 왜
알베르트가 기차까지 끌고 가서 너를 생포하려고 했을 것 같아? 네가 그만한 흉악범이라서? 아니야!
벨담은 네가 절실히 필요했을 뿐이야. 그만큼 이 나라는 망가지고 뒤틀렸어. 간신히 줄타기를 하면서
버티고 있는 형국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한 일들은…….”
“그건 애초에 중요한 일도 아니었어. 벨담은 귀족들의 안위 따위는 관심도 없었어. 오히려 네가 처리해
줘서 큰 부담을 덜었을 뿐이야.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예전부터 벨담은 실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주요
귀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까.”
“…….”
“뭐?”
“지금 뭘…….”
“총을 줘, 루이제.”
“뭘 하려는 건데?”
“뭘 하려는 거냐고!”
“너희가 안나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의미가 있나? 말해 봐! 안나는 내일도 처참히 폭행을
당하게 돼! 이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데에는 과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나는 뭐라도 해야 해! 안나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온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모든 걸 끝낼 순 없어.”
잠시 분노하는 듯하던 자일스의 격정은 이내 가라앉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리 와.”
루이제는 자일스의 귓가에 대고 그녀만이 아는 사실을 속삭였다. 이제 그녀의 정보를 토대로 무엇을
하느냐는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알겠어.”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 이상도 해 줬잖아.”
자일스는 작게 덧붙였다.
“고마워.”
자일스는 다시 침대맡에 앉아서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나마 안도감을 자아냈다.
“자일스.”
“그래. 나 여기 있어.”
“이리 와. 같이 누워.”
그녀가 버틸 수 있을까.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구나.”
“그래. 그러니까 좀 낫네. 상황이 아무리 개같이 돌아간다 해도 괜찮다고 말해. 죽상을 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어. 이건 내 경험담이니까 믿어도 돼.”
“할 말이 있어, 안나.”
안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85 화>
전쟁이 한 번 더 터진 것일까?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 만큼 사람들의 얼굴은 심각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두가 자일스 헤센의 얼굴을 알았지만 그를 실제로 본 이는 극히 드물었다. 사진과 실제는 묘하게 다르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곁에서 주워들은 아이들은 내기를 걸었다. 분명 옛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눈이
쭉 찢어지고 눈동자는 피처럼 새빨간 색일 거야. 아니, 창백한 안색에 아주 무섭게 생긴 남자일 거야.
전쟁 때문에 외눈박이가 되었을 거야.
군인들은 자일스에게 평범한 죄수복을 입혔다. 거친 면 소재로 된 미색의 옷이었다. 사람들은 자일스가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굳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자일스는 새벽부터 안전 가옥을 나섰다. 안나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사흘 전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는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위기를 절반은 견뎌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안나의
죽음이 오늘은 아닐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그랬다. 이제 모든 것이 그가 하기 나름이었다.
루이제는 따라오지 않았다. 자일스는 오히려 안심했다. 안나를 다른 군인들과 함께 놔두는 것보단 차라리
루이제가 그녀와 함께 있는 쪽이 더 나았으니까.
“소감이 어떻습니까?”
남자가 물어 왔다.
“상관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붙잡아요.”
그러자 군인들이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던 자일스는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붙잡고 오른쪽으로 내리눌렀다.
남자가 얇은 케이스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주사기였다. 조명 아래에서 번쩍이는 주사기
안으로 그가 무언가를 주입했다.
“잠깐……!”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의식이 점점 그와 분리되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성은
흐려지는데 고통을 떨쳐 내려는 강한 충동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좀 낫군요.”
한편 자일스는 숨을 몰아쉬며 눈앞을 제대로 보려고 애썼다. 그가 정신을 놓아 버리면 안나까지 죽게 된다.
안나를 살려야 해. 안나를 살려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던 와중, 눈앞에 안나가 나타났다.
약물에 의한 환영이 분명했다. 자일스의 시선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연인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때 안나가 말을 걸어 왔다.
“안나…….”
자일스는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녀의 생사가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자일스가
실패하면 안나는 그대로 배를 타게 될 테고, 혹한의 땅에 발을 딛게 될 것이다.
“이제 가지.”
“알겠습니다.”
거대하고 엄숙한 공간 안에서 모두가 자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자일스에겐 웅성거림마저도 고통으로 치환되었다.
자일스는 오한이 찾아드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군인들이 물러나고 나서야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는 허공을 필사적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판사의 외침 소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헤센! ……하시오!”
안나가…….
……그게 누구였더라.
“진술하시오!”
그가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86 화>
자일스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비로소 눈앞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장내를 울리는
목소리들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전쟁 당시, 저는 전선에서 군인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저는
입스윈에 있는 군 병원으로 옮겨졌고, 머지않아 당분간 입스윈에 주둔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입스윈에서 지내고 있던 누이가 보고 싶었기에 저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쾌차하게 되면 먼저
누이를 보러 달려갈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자일스 헤센은 보기에도 멀쩡했고 미쳐 날뛰거나 저주스러운 단어들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는 평범했다.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셀레스트를 데리고 입스윈을 탈출하려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누이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저는 입스윈 혁명군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재산을 모두 내어 주고 혁명에 가담한다면,
저와 누이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스윈을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에 따랐습니다. 개중에는 먼 친척도 있었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셀레스트가 죽게 될 테니까요.”
“시간이 흐른 뒤, 저는 또다시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누이를 죽이지 않으면 저는 그대로 버려져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후에도 저는 도저히 셀레스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간절했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문당한 기색이 역력했던 셀레스트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스스로를 찔러
자살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정숙하시오! 정숙!”
판사의 외침에 다시 한번 사위가 조용해졌다.
“피고!”
물론 악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진실을 말할 뿐이었다.
“저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당신들의 손에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저의 죄는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조작되었으니까요. 벨담을
우롱하기 위해 저에게 거짓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제 온전한 죄만을
벌하십시오. 그때가 되면 저는 미련 없이 처형장에 올라서겠습니다.”
누구도 그의 목소리나 시선에서 교묘하게 포장된 거짓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일스를 비난하던 몇몇
사람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조작되었다는 거지? 왜
재판정에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 거지?
그들은 이제 해명을 원했다. 자일스가 치졸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또다시 속이려 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
“피고 자일스 헤센은 도합 103 명의 벨담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스스로의 누이를 직접 살해한
죄가 크며 스스로의 죄를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이로써 재판부는 벨담을 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려 한
피고인에게 사형 처분을 내린다.”
판결문을 전부 읽은 후에도 사람들은 얼마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주도하려
하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한두 사람이 조심스레 손뼉을 따라 쳤다.
이내 박수 소리로 물든 재판정 정중앙을 바라보며 자일스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는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체념하는 방법을 익힌 지 오래였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차를 타고 곧장 라르손 부두로 향해. 최대한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재판이 끝나고
얼마 안 가 배가 출항할 예정이니까.’
‘배라니?’
‘왜 나를 돕는 거지, 루이제?’
<87 화>
비슷한 시각.
루이제를 포함한 군인들이 차에서 내렸다. 루이제는 그들이 후면에 달린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여자 하나를
실은 들것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나는 완전히 의식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쪽 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머지않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태우고 떠날 배가 굉음을 내며 울었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들이 들것을 들고 배 쪽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얌전히 누워 있던 안나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치 못한 몸이었지만 그녀는 놀라울 만한 기력을 발휘해 맨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멈춰! 경고하겠다!”
루이제는 그녀를 쫓아가는 척 뒤를 따랐다. 사전에 모의한 일이긴 했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며 화물을 옮기던 일꾼들을 일부러 넘어뜨렸다. 박스가 와장창 쓰러지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군인들을 덮쳤다.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순간 근처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일스는 그게 평범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군인들이 무어라 고함을 질러 대는 소리는 곧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안도감이 몰아치는 동시에 자일스는 안나를 향해 뛰었다. 그는 여전히 남들의 눈에 그녀를 체포하러 온
군인으로 보여야만 했다.
“안나, 나야.”
“자일스?”
“알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루이제를 따라온 군인들은 뭔가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결국 상관의 명령을 따르러 떠났다. 루이제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건 오로지 네 몫이야. 그녀가 덧붙였다. 자일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자일스 헤센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안 군인들이 언제 부두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잠깐 기다려.”
그것은 분명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였다. 자일스는 등 뒤에서 난 소리에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루이제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홀츠만…….”
“가만히 계세요, 소령님. 얼마 전부터 당신 행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번 작전을 일부러 망치려
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냥 징계만으론 안 끝날 겁니다. 거기 너.”
“내 쪽을 보고 얼굴을 보여 봐.”
어떻게 해야 하지?
“무릎 꿇어!”
“뛰어, 병신아!”
“자일스, 뭐 하는 거야?”
“저 배에 타면―”
부우우―
“멈춰! 멈추라고!”
군인들이 뒤늦게 쫓아와 외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증기 기관이 내뿜는 소리에 파묻혔다. 출항 중지를
알릴 선원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일스는 이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군인들 뒤로 한 명의
장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때 그와 사관 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기이자 친구였던 이의 죽음이 보였다.
<88 화>
안나를 그런 곳에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안나, 괜찮아?”
“조금만 자고 싶어.”
“고마워.”
“살려 줘서.”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그런 말은 하지 마.”
자일스는 군복 재킷을 벗어서 안나의 몸에 둘러 주었다. 그녀가 그저 지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복도를 지나쳐 가자 이윽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거리며 들려왔다. 분명 죄수들이 가까이 있었다.
자일스는 그가 흉악범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감옥이 나타났다. 자일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누군가가 두 손으로 철창을 붙들며 자일스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고생의 흔적이 얼굴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한 여성이었다.
“그렇습니다.”
“비켜 봐, 어디 얼굴 좀 보자.”
“맞습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시오. 태어날 적부터 범죄자로 생겨 먹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멀쩡한 낯짝을
하고서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는 이들 중에 악마의 본성을 숨긴 자들이 많은 법이지.”
한쪽에는 남성들이, 다른 한쪽에는 여성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공방이 오갔다.
“우리는 그런 말 할 처지도 못 돼요.”
“여기선 우리 모두가 자일스 헤센이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죽으러 바다 위로 떠나온 거겠죠.”
“그 백작 영애?”
“더 이상은 아니죠.”
안나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성이
자일스에게로 손짓했다.
자일스는 그에게 다가가 안나를 보였다. 비록 그들 사이를 철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의사는 마르고
지저분한 손으로 안나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온몸에 멍이 들었군.”
“그게…….”
“살 수 있겠습니까?”
“위급한 상태는 아니오. 물론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신체 기관은 멀쩡한 것 같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어서 말하는 거요.”
“어떻게 하려고?”
“뱃머리를 돌릴 겁니다.”
“그래서?”
“맞습니다.”
“저를 도와 달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제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온갖 고문에 시달린
여인을 도와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안나가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저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안나는
…… 제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구원이니까요.”
<89 화>
“아가씨의 사연은 안타깝게 됐소만, 이 배에 탄 이상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소. 승선을 피했다면
모를까.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소. 당신과 그 아가씨도 포함이지.”
누군가 외쳤다.
선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전등으로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렬한 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자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죄수인가?”
자일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그의 온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탐색했다.
“저 철창 안을 빠져나왔을 리는 없고.”
“자일스 헤센이에요.”
“…….”
“선장님, 이자는…….”
밝은 곳에 나오니 선장의 얼굴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선장의 직함을 가지기에는 젊은 남자였다.
해군이었을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보니 그는 제대로 된 제복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거 말 안 해 주면 죽일 기센데?”
“말씀해 주십시오!”
“흥분하지 마. 이건 경고다.”
곧 노을이 지려고 했다. 하늘의 일부가 점점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차츰 변해
가는 하늘이 자일스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맞아요. 사실이에요.”
누군가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흉악범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아는 자일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였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저는…….”
“국가가 저를 살해하려 한 것 같아요. 아마도 그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겠죠. 아니면 증인을 없애려
한 것이거나.”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언제 맞았는데요?”
한 여자가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게르트루드요.”
“왜 그런 일을 당한 거죠?”
“내가 모든 사람들의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 같은 사례가 많다는 것만은 알아요. 아가씨도 알겠지만
벨담은 위태로운 시기에 처해 있어요. 물론, 정말 첩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죠. 저도 모르는 새에 그들
중 하나와 대화를 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난 느꼈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애당초 나는 죽을
사람으로 찍혔다는 사실을요.”
“제발, 우리를 도와줘요. 생각해 봐요,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떻게든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해요.”
“‘도착’이라니.”
“그게 무슨…….”
“하지만 분명히…….”
“저 여자 말이 사실이오.”
의사가 말했다.
“동토로 가는 죄수들은 따로 있소.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아니지. 차라리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할 거요.
노역을 하다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지금쯤 위에서는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경보음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불길함을 자아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안나를 제외하고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90 화>
“무슨 증거?”
“무모한 사람이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의지를 얻은 것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찬 사람들은 그나마 자유로운 발로 복도를 달려
나갔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서 한 손에는 권총을 든 채로 바깥으로 나갔다.
“자일스!”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 죄수들에게 밀려서 바다 위로 추락하는 선원들 등
아수라장이 된 배 위에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찾아야만 했다.
“안나!”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사람들 사이로 그의 얼굴을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안나.
제발 눈 좀 떠 봐, 안나!
번쩍 눈을 뜬 내가 물었다.
“자일스, 괜찮아?”
“나는…….”
“다른 사람들은…….”
주변은 깊은 바다였고, 우리는 천천히 가라앉는 배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절실했다.
그나마 희소식이 있다면 안나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는 거였다. 자일스는 그녀가 조금만 더 버텨 주기를
바랐다.
그가 말했다.
“안나, 잘 잡고 있어.”
“자일스…….”
아무리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늦은 시간의 바다는 아직도 얼음장 같았다. 자일스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바닷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어딘가엔 있을 텐데.
내가 그걸 찾을 수만 있다면.
<91 화>
물론 상관은 없었다. 신호탄을 발사하기만 하면 누군가 그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니까.
“자일스! 괜찮아?”
“난 괜찮아!”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대답이 그다지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추위 때문에 목소리
끝이 떨렸다.
“내려오지 마, 안나! 조금만 더 붙들고 있어! 내가 신호탄을 발사할 테니까 누군가 올 때까지 그걸
붙잡고 있어야만 해!”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새빨간 조명탄이 밤하늘을 비추며 천천히 포물선을 그렸다. 자일스는
스스로가 발사한 조명탄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런 이유에서 헬리콥터 뒷좌석에 탄 군인들은 저들끼리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녀석에게 마리나라 소스를 건네줬지. 그랬더니 녀석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자기가 찾는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거야. 마리나라보다는 조금 더 달면서도 적당히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좋으면서도…….”
“야, 저거 봐 봐.”
함께 낄낄대던 마리아가 그들의 주의를 끌려 했으나 나머지 군인들은 입씨름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뭐라고 했냐?”
그제야 나머지 동료들의 시선이 마리아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저건
분명히 신호탄이었다. 붉은 빛을 내는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무슨…….”
“여기예요! 여기라고요!”
헬리콥터가 우리 쪽으로 가까이 접근해 왔다. 그 안에는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입은
군복이 벨담군의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안심하고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군인이 외쳐 물었다.
“벨담 사람입니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벨담의 혈통을 이은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벨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벨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에요.”
“안나 키팅?”
“그 피아니스트 말입니까?”
아. 그랬지.
그제야 나는 내가 글뤼비흐네 잡지사를 지원해 외국에 내 이야기를 알렸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냈다.
저들이 어디에서 왔을지는 모르나, 아마 내 이야기를 읽어 본 게 분명했다.
“올라올 수 있겠어요?”
내가 자일스 쪽을 내려다보았다.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먼저 가, 안나.”
“뭐?”
“안나, 나는 괜찮아.”
“…….”
“하지만 내가 먼저 가 버리면…….”
“……자일스. 미안해.”
“괜찮으니까 어서 가.”
나는 결국 살아남아, 그 지옥 속을 빠져나왔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나였다.
그런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제 내게는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92 화>
Epilogue
그들이 자신의 나라를 뭐라고 소개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그는 어떻게 되었지?
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구시죠?”
“그간 밤은 평안하셨나요?”
“그럭저럭이요.”
“쾌차하실 때까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의료진의 소견에 의하면 신체가
많이 약해지신 상태라고 하더군요. 추정컨대 벨담에서 키팅 양을 그리 만든 것이겠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들어 보아야 하겠지만, 대충 얼개는 잡히는 것 같군요. 지금은
정신이 없으실 테니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분간은 회복에 집중하세요. 저희도 쾌차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안나 키팅이요.”
그래도 내가 내 사연을 외국으로 전파한 게 헛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는 건
더 이상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당신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벨담의 잔혹함에 치를 떨고 있어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게 놀라울 지경이라고 그러더군요. 전쟁 같은 삶을 헤쳐 나온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당신을 영웅이라고 불러요. 그리 불리는 사람을 맨몸으로 추방시킬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헤센 씨 말이죠.”
잠시 고민하던 지오다 요원이 어깨 너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와 간호사 몇을 뺀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병실을 빠져나갔다.
“키팅 양…….”
“못 구했다는 소리예요?”
죄송합니다. 그가 덧붙였다.
“구해 준다고 했잖아요! 당신들이 꼭 구해 준다고 해서 자일스를 두고 나 혼자만 헬기에 올랐던 건데! 난
그 사람만 차가운 바닷속에 두고 혼자 구조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자일스만 죽게 뒀다고
하면 어떡하라는 건데!”
“혼자 있고 싶어요.”
나는 웅크리고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죄악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입 속으로 자일스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려 보았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처음에 너를
의심해서 미안했어. 너에게 심한 말을 하고, 너를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 취급해서 미안했어.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해.
너를 미워한 것을 후회해.
자일스 헤센.
정말 많이 사랑해.
<93 화>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네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나.
내가 텅 빈 무덤 앞에 찾아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울고 만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건 다 피아노 때문이었다. 자일스는 나만큼이나 내 연주를 사랑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호른이 힘차게 울었다. 웅장한 호른에 힘입어 현악 파트가 계단을 오르듯 음계를 서서히 상승시켜
올라갔다. 오케스트라가 첫마디를 떼고 나면, 이제 피아노가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가 온다.
나는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요원이 내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공연장 직원들로부터 전달받은 수많은 꽃다발들에 파묻힌 상태로 겨우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여기에 뭘 더 추가하겠다고요?”
“정중히 사양할게요.”
“그래서, 그건 어디 있는데요?”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안녕, 안나.”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1 년이 지났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꿈에서 계속 듣던 목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엔 꿈에서 깨지 않았다. 그의 입술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이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