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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화

외전 1. 가을에서 겨울까지

좋은 향기가 났다. 동시에 가느다란 것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빌헬름은 눈을 뜨기에 앞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 가느다란 것을 한가득 쥐었다. 머리카락이었다. 그 빛깔이 가을의 들녘과 같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눈을 뜨는 동시에 그 머리카락에 입 맞췄다. 희미한 햇살이 제 손과 그 머리카락 위를 비췄다. 충만했다. 늦봄의


고소하고도 따뜻한 냄새, 손을 간지럽히는 온기. 손 한 번만 뻗으면 닿을 곳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머리카락의 주인.

라인하르트.

당장이라도 그녀를 당겨 품 안에 안고 싶은 마음과. 피로에 지쳐 잠든 라인하르트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서로 싸웠다.

빌헬름은 다시 한번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갈등했다.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햇볕 아래 따끈하게 데워져


있을 저 목덜미에 코를 묻으면 분명히 기분이 아주 좋아질 테지. 하지만 피곤한 라인하르트가 약간이라도 이마를
구기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늘 빌헬름보다 앞서 멋진 답을 내어놓는 여인답게, 느리게 돌아누워 빌헬름의 품으로


파고듦으로써 그의 갈등을 박살 냈다. 라인하르트의 팔이 그를 끌어당겼고, 빌헬름은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더 자려던 건 아니었는지, 빌헬름의 품속에서 신음했다.

“눈이 안 떠져…….”

“피곤하면 더 쉬어요.”

“피곤……. 피곤하지…….”

으음, 하고 입맛을 다시던 라인하르트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도 못 뜨고 있었다. 빌헬름은
부드럽게 그녀의 코끝에 입 맞췄고,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더 들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뗐다.

“죽겠어…….”

결국 빌헬름은 참지 못하고 입 열었다.

“사랑스러우세요.”

“뭐가…….”

“제가 그렇게 말할 사람이 당신 말고 또 있겠나요, 라인하르트.”

그 말에 품속에 있던 라인하르트가 겨우 눈을 떴다. 그것이야말로 아까부터 빌헬름이 고대하고 있던


광경이었으므로,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모습을 감상했다.

겨우 눈 뜨는 게 대체 뭐 대단히 고대할 만한 광경이냐고 혹자는 말할 수도 있겠지만 빌헬름에게는 늘 감동적인


일이다.
일자로 감겼던 눈이 희미하게 벌어지고, 그 안에 빛이 깃들었다가 이내 태양이 만개하는 모습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눈동자를 꿀 바른 사과파이에 비유했다지만, 그것은 너무나 소박한 표현이라고 빌헬름은 매번
생각했다. 그가 시인이었다면,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은 모조리 라인하르트의 독차지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라인하르트는, <네가 시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같은 대답으로 응수했지만.

“죽겠다는 말에 그런 대답 하는 것도 정말이지 너밖에 없을 테니, 빌헬름.”

“예.”

“내가 이제야 수도에 온 것 같구나…….”

라인하르트가 가볍게 웃었다. 빌헬름도 키들거렸다.

“당신은 늘 명쾌하게 말씀하는 편이시니까요. 잠에 취해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세요?”

“……그래서 막 입성한 사람을 그렇게 정신없이 괴롭혔니?”

그의 품 안에 있던 라인하르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다만 여전히 날아갈 듯한 웃음은 함께였다.


빌헬름은 반쯤 감겨 있는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 맞추고는 속삭였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요.”

초대제가 제국의 곳곳에 만들어 둔 수정문은 고도의 마법과 엄청난 양의 백수정을 필요로 한다. 하여 제국의
위정자들에게 수정문을 늘리는 것은 늘 부담스럽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빌헬름은 또다시 황성의 수정
창고를 덜어 냈다. 그녀가 주저앉아 있는 루덴에 수정문을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눈보라가 멎은 프람 산맥에 제국의 손길을 뻗는다는 원대한 핑계가 주효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속내가
루덴의 대영주에게 있다는 건, 제국 전체가 대충 다 알았다.

아무튼 그 수정문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고, 그래서 라인하르트는 꼬박 일곱 날을 달려 오리엔트의 수정문을


넘어온 차였다. 그리고 위대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며 루덴의 대영주님을 기다린
끝에 곧장 제 방으로 끌어들였고…….

“아팠겠다.”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의 벗은 어깨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숨 막히는 순간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깨문 흔적이
오른쪽 어깨에 가득했다. 빌헬름은 제 어깨를 힐끗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늘 당신이 돌아가고 나면 당신이 제 품에 있었다는 걸 되새기게 해 주는 유일한 증거인데요.”

라인하르트가 눈을 흘겼다.

“어깨의 상처를 침대에 흘린 머리카락이랑 같은 취급하면 안 돼, 빌헬름.”

“이런 건 그냥 멍이죠. 상처도 안 돼요.”


빌헬름이 속삭였다.

“차라리 정말 상처로 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당신 잇자국이라니 너무 황홀해…….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닿은 손가락에 입 맞춘다. 라인하르트는 얼굴을 슬쩍


뒤로 물리고 기가 막히다는 듯 그를 보다가 입 열었다.

“그래, 나도 내 손가락이 그렇단다.”

“…….”

그녀의 손가락을 핥아 올리려던 눈빛이 대번에 복잡해진다. 검은 눈이 그녀의 손을 당겨 뒤집었다. 손바닥 안은


아문 지 얼마 안 된 커다란 상처로 난잡하게 뒤덮여 있었다. 희고 노란 오래된 피부와, 커다란 상처를 밀어내고
올라온 분홍빛 새살. 라인하르트의 손을 보고 헤이츠는 ‘마치 막 자수를 시작한 어린 아가씨가 누덕누덕 기운
듯하다’고 평했다.

손바닥의 상처를 훑은 빌헬름의 시선이 팔 안쪽까지 상처 자국을 따라 흘렀다.

“그런 말씀 마세요.”

“네가 하는 말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뭐.”

“달라요.”

빌헬름이 그녀의 손가락을 휘어잡고 등을 끌어당겨 안았다.

맨살과 맨살이 맞닿는 느낌은 그리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단단한 사내의 가슴에는 전쟁 통에 입은 상처가
군데군데 자리했고, 라인하르트 또한 그러했다.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에게 안긴 채로 물끄러미 청년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어젯밤의 제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안다. 남자는 라인하르트가 제 목숨을 쥐고 흔드는 기분을 좋아한다.

라인하르트가 그의 어깨를 깨물 때는 대부분 그녀 또한 제정신이 아니기에 잘은 모르지만, 가끔 속절없이


흔들리다가도 제 이가 그 단단한 살을 파고들 때면 한층 더 격렬해지는 정사를 보면 그렇다.

다만 반대의 경우에, 남자는 더없이 냉랭해진다.

라인하르트의 모든 상처는 빌헬름으로 인한 것이다. 뺨부터 시작해 목덜미로 이어지는 갈색 상처는 빌헬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입었고, 너덜너덜해진 손바닥과 팔 안쪽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빌헬름은 그 모든 광경을
그녀의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목도했다.

하여 빌헬름은 그녀의 상처에 늘 예민하게 굴었다.

“내 뺨의 상처가 널 사랑하는 방증이 아니냐고 했었잖니?”

놀림에 가까운 말투였으나 빌헬름은 정말로 죽고 싶은 얼굴이 됐다.

“아, 정말로 멍청한 예전의 그 새끼를 어쩌면 좋아요…….”

멍청한 그 새끼라 함은 바로 자신을 칭하는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겪는 놀라운 변화 중 하나였다. 뺨의 상처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것이야말로 라인하르트가 저를 사랑하는 방증이라고 황홀해하던 청년은 어디로 가고.
라인하르트가 눈에 보이는 상처를 입었다면, 빌헬름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더욱 깊이 마음속에 입은 게
분명했다. 안타까운 건, 빌헬름에게는 그 전에도 이미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는 점이다.

빌헬름은 그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는 라인하르트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하더라도, 당신이
주신 상처가 아물면서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고. 그리고, 라인하르트. 나는 언제나 당신께서
주시는 상처들이 황홀하고 흥분된답니다……. 같은 말도 한 번씩 주워섬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대신 그렇게 흘려보내며 터트리는 웃음들이 라인하르트에게
안도를 가져다주곤 했다. 이제 두 사람 다, 제 상처를 가지고 농담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방증
같았으니까.

다만 그런 라인하르트 앞에서, 정작 빌헬름 본인은.

“당신을 다치게 해 놓고 그딴 소리나 지껄이다니 저도 정말 죽어야만…….”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

“죽으면 안 돼.”

라인하르트가 빌헬름의 말을 끊으며 코를 튕겼다. 빌헬름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새삼스레 애틋하게 그
손끝에 다시 입 맞췄다.

“당신이 다칠 때마다 멍청한 짓거리나 하고 있던 새끼는 죽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안 된다니깐.”

“살았으니 남은 생은 내내 당신 곁에서 속죄하게 해 주세요.”

“왕관 벗는 것도 안 되고.”

“정말이지 나의 주인은 쉽지가 않으셔서.”

어디 빈틈을 파고들려고, 하는 말은 입맞춤 사이로 사라졌다. 낮은 웃음소리, 습기나 어떤 끈적한 의도 없이


부드럽게 맨살이 부딪치는 감각 같은 것들이 라인하르트를 행복감에 젖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해야 할 말이 있었으므로, 라인하르트는 그 행복감을 길게 누리지는 않았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빌헬름은 제게 부드러운 비단 가운을 가져다 둘러 주었다. 라인하르트는 그 가운에 팔을 꿰는


대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빌헬름.”

“말해요.”

“내가 조금 일찍 오긴 했지?”

“말한 시기보다는요.”

여름에는 빌로이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라인하르트는 조금 더 늦게 왔어도 괜찮았다.


시기는 아직 늦봄이라고 말하기 충분한 계절이었으며 루덴에서는 겨울이 덜 끝났다고 엄살 섞인 소리를 할 만한
때이기도 했다. 빌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나요?”

일이라.

일이 있지, 라고 대답하는 대신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빌헬름이 눈을


껌벅이다가,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금세 돌아가야 하나요?”

“글쎄, 따지고 보면 반대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반대라는 말을 곱씹던 빌헬름이 이마를 찡그렸다.

“루덴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굳이 말해 보자면 루덴은 아니고 내가.”

“……무슨 일이 있다고요? 당신에게?”

청년은 다급히 다가앉았다. 라인하르트는 짓궂게 웃었다.

“빌헬름. 내가 한 번만 더 목숨을 내놓는다면 어떻겠어?”

“그게 무슨 미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험한 말을 삼키려 고개를 돌렸던 빌헬름이 침착을 잃은 표정으로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셋째가 생겼어.”

빌헬름의 입이 약간 헤벌어졌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손을 뻗어 그 입가를


엄지로 쓸어 주고는 덧붙였다.

“이번에는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아기가 어떻게 해야 세상에 나오는지, 아마도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을 청년에게.

157 화

두 사람이 프람 산맥에서 내려온 지 1 년이었다. 루덴 대영주와 젊은 황제의 기묘한 연애담이 다시 제국 전체의


화제가 되는 데에는 딱 한 달이 걸렸다. 근 7∼8 년여에 걸쳐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아이까지 둘이나 낳아
놓고서 다시 들러붙은 모습에 기함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라인하르트 델피나 린케가 황후의 관을 쓰게 될 것인가를 두고 내기하는 이들이 도처에
생겨났다. 친정에 나섰다가 프람의 눈 폭풍을 잠재운 빌헬름 콜론나 알랑케스가 수도로 개선하기는커녕 세 달을
루덴에 붙어 있었으니 일견 당연하게도 보였다.
그러나 빌헬름은 수도로 혼자 돌아왔다. 다만 린케 후가 황후가 된다는 쪽에 건 자들은 젊은 황제가 ‘혼자’
돌아왔다는 쪽에 주목해야 한다고 우겼다. 데본 빌로이 알랑케스, 어리고 가엾은 여섯 살짜리는 루덴에 남았던
것이다. 알랑케스의 어린 핏줄들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수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통례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프람 산맥에서 건강을 해친 라인하르트 린케가 회복한 후 수도로 돌아와 혼례를 올릴 조짐이
아니겠느냐고.

다만 루덴 대영주가 황후가 되지 않을 거라는 데에 건 자들의 의견도 팽팽했다.

애당초 루덴 대영주는 한때 미쉘 알랑케스의 아내였다. 형사취수가 언제 적 이야기냐. 황후가 될 거였다면 진작


됐을 것이다. 혹은 한발 물러서 패륜적인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치들을 경멸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튼.

라인하르트는 빙긋 웃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다들 판돈 올리는 데 여념이 없겠군.”

그 말을 들은 루덴 대영주의 자랑스러운 두 가신 중 하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하나는 손가락을 꼽았다. 전자는


후자를 보고 의심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후자, 헤이츠는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움찔했으나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여윳돈을 놀리지 않고 괜찮은 곳에 투자하는 것은 자산 관리의 기본입니다.”

“거참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로군요, 헤이츠 님.”

전자, 디트리히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고는 덧붙였다.

“모시는 주인을 두고 돈놀이를 하지 않는 것도 가신 된 자의 기본이 아닐까요?”

“법전에 안 쓰여 있지 않습니까.”

헤이츠가 어깨를 으쓱했다.

“뭣보다 확실한 정보를 두고 걸지 않으면 아깝잖습니까. 우리의 자랑스러운 각하께서는 이 루덴을 두고 절대로
재혼하지는 않으실 테지만, 각하를 모르는 수도의 멍청이들은 모조리 각하가 재혼한다는 쪽에 수억을 걸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자산 관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헤이츠.”

웃으며 끼어든 것은 라인하르트였다.

“이거 하나는 나도 알지. 내가 빌헬름과 재혼하면 받을 수 있는 작위와 영토는 루덴에 버금가고, 빌헬름은 내가
저 동부의 철광산을 죄다 달래도 줄 텐데. 내가 그 영토가 탐나 결혼한다면 어쩔 텐가? 그렇게 되면 자네의 자산
관리는 엉망진창이 될 텐데?”

헤이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재혼하실 것도 아니면서 저한테 겁주지 마십쇼. 1 만 알랑케씩이나 걸었단 말입니다.”


“아하하.”

라인하르트가 마구 웃었다. 디트리히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본인의 세 번째 임신을 두고 이렇게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 제 주인에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라인하르트는 심각한 디트리히를 보고 금세 웃음을
그치곤 이어 물었다.

“자네, 걱정되나?”

헤이츠가 뾰족하게 받아쳤다.

“당연한 말씀을. 각하의 시녀 되시는 에른스트 부인이 얼마나 난산을 겪었는지 아시면서 말입니다.”

라인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리오니는 첫째인 펠릭스를 낳을 때도 고생했지만, 둘째를 낳을 때 더욱


어마어마하게 고생했다. <말 더럽게 안 듣는 두 아들들은 배 속에서도 말을 안 들어서, 얼마나 나오기
싫어하는지.>가 출산을 회상할 때 리오니의 입버릇이었다.

“괜찮아, 디트리히. 수도의 궁의들은 척박한 루덴보다 나을 것이다. 나도 이번에는 잘 먹고 잘 잘 테니 걱정


말고.”

하지만 디트리히는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였다.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왜. 나는 리오니만큼 고생하지는 않았어.”

“리오니 때문이 아닙니다. 애당초 저는…….”

말을 잇던 디트리히가 혀를 차고는 덧붙였다.

“각하께서 첫 아이를 낳으신 건 7 년 전입니다.”

“그게 왜?”

디트리히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각하께서는 그때는 20 대셨다 이 말입니다. 그때와 지금이 같습니까?”

헤이츠가 아하,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도 못 했다는 투였다.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찡그렸다.

“나이 가지고 놀리는 거면, 디트리히.”

“놀리는 거면 차라리 낫겠습니다.”

디트리히는 머리를 헤집고 한숨 쉬었다.

라인하르트가 셋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지난해 겨울, 약속했던 대로 겨울을 나기 위해 입성한 때였던 듯했다. 첫 겨울에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들어
있던 환영궁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라인하르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리오니와 마르크를 입단속시키는 것이었다. 하여
헤이츠와 디트리히 또한 수도로 그녀를 수행해 와서야 셋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디트리히는 제
아내를 조금 원망하게 될 것 같다며 투덜거렸다.

“아이를 가지신 걸 알았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모셨을 겁니다.”

“아서. 위험할 때는 대강 다 지났다.”

“각하.”

불만 섞인 디트리히의 말에, 라인하르트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헤이츠마저 혀를 찼다.

“각하께서는 좀 너무 본인 몸을 막 다루는 경향이 있긴 하십니다.”

“막 다뤄도 잘 살고 있으니 괜찮지 않나.”

“그런 거치고는 또 삶에 미련이 없는 분은 아니신데, 참.”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지.”

“그 정도까지요?”

헤이츠의 반문에 라인하르트가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슬슬 글렌시아 경의 청혼을 받아 줘 보는 건 어떤가. 자네와 똑같이 생긴 아이 하나쯤 낳아 보면 생에


미련이 철철 넘친단 말이 무슨 소린지 알게 될 거야.”

“각하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너무 양심 없지 않습니까?”

애 낳아 놓고 식음을 전폐했던 여자를 보며 헤이츠가 턱을 당겼다. 라인하르트는 헤이츠를 흉내 냈다.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어 올렸단 뜻이다.

그러고는 슬쩍 환영궁의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어린애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헤이츠 또한 그쪽을 보고는 코웃음 쳤다.

“저는 애들 싫어해서 안 됩니다.”

“애들만?”

“글렌시아 경은 더 싫고요.”

안타까워라. 라인하르트는 무지막지하게 예쁘고 성격은 더욱 무지막지한 변경백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킬킬거렸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내가 원했던 일이야. 그러니 너무 그렇게 험악한 표정 하지 마, 디트리히.”

라인하르트의 말에 얼굴을 구기고 뭔가 생각하고 있던 디트리히가 볼을 씰룩였다.

“각하께서 원하지 않았다면 애당초에 아기님이 오시지도 않았을 거란 거 압니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야.”
“각하.”

“음, 말해.”

“역시 저는 폐하께서 황위를 내려놓는 게 좋은 생각인 듯합니다.”

갑자기? 라인하르트가 눈을 껌벅이자 헤이츠가 옆에서 이죽거렸다.

“한 대 치기 좋은 생각이라고 부연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경.”

“정확합니다.”

“…….”

라인하르트가 이마를 좁혔다. 디트리히가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대는 치고 싶어서 말입니다.”

“참고로 지난해에 이미 한 대 치신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헤이츠가 끼어들었다. 디트리히는 시치미를 뚝 떼고 “제 기억에 없으니 무횹니다.”라 받아쳤다. 아하하. 그제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라인하르트만 또 웃었다.

그러니까, 제 여동생 같은 라인하르트를 세 번째로 고생시키고 있는 빌헬름을 아무래도 한 대 치고 싶으니,


요즘도 틈만 나면 황제 계급장 떼겠다고 한 번씩 라인하르트를 떠보곤 하는 그 애의 요청을 들어주면 안
되겠느냐는 뜻이다.

“정말로 기억이 대강 다 돌아온 모양이군.”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누구한테 유감입니까?”

“물론 지고하신 황제 폐하죠.”

대화 속에 웃음이 섞였다. 라인하르트는 웃느라 눈가에 고인 눈물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그녀의 호위 기사인 디트리히 에른스트의 기억이 거의 다 돌아온 것도 지난겨울의 이야기다.

라인하르트가 황성에서 겨울을 날 때, 루덴을 지키고 있던 디트리히 에른스트는 겨울 산에 순찰을 나갔다가


순록의 뿔에 받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 충격 덕분에 기억이 돌아왔다 들었다. 꼬박 사흘을 앓고 난
후, 제 부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 리오니가 ‘올 게 왔다’고 통곡했다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아무튼 그리하여, 기억을 잃은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도 천천히 찾아 가는 중인 디트리히 에른스트는


툭하면 빌헬름 콜론나가 알랑케스의 성을 버리길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잘난 턱뼈를 한 번은 부숴
놔야 성에 차겠다던가.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디트리히. 애한테도 간신히 부친 비슷한 게 생겼는데.”

“비비 아가씨의 부친 비슷한 거 노릇이라면 제가 더 오래 했습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디트리히가 눈에 힘을 주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건 맞긴 하지. 라인하르트가 박장대소했다가, 이내 정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비비 말고.”

“…….”

“빌로이 말이야.”

그 말에 디트리히도 단박에 입을 다물고 정원 쪽을 바라봤다. 환영궁의 정원. 나무로 된 미로정원을 전부 밀어


버린 그곳은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되었다. 그리고 늦봄을 맞아 화사해진 그 정원에, 두 어린애와 시녀들 말고도
남자 하나가 있었다.

어린애들이 좋아할 법한 화사한 색의 옷을 차려입고 어색하게 앉은 뒷모습은 분명 빌헬름이었다.

시녀들조차 어려워 쭈뼛거리는 상대였으나, 애들은 그게 보이지 않는 듯 시종일관 그 무릎에 번갈아 앉았다가
뛰어 내려갔다 하며 그를 마치 놀이 기구처럼 다루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빌로이의 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아이는 몇 번의 계절을 제 아비와 보내며


확 달라졌다.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금만 해도 남자의 무릎에 매달려 뭐라 말하며
웃고 있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제 아비의 뒷모습에 비하면 얼마나 신이 나 보이는지.

그 모습을 보고 디트리히는 한숨을 쉬었다.

“빌로이 전하께 큰 죄 지은 사람이 될 순 없죠.”

“그뿐인가. 무시무시한 복수가 기다릴걸.”

“복수요?”

빌헬름 콜론나 알랑케스의 무시무시한 복수가 무엇이든 각하에게서 저를 떼어 놓을 수는 어쩌구, 하는 소리를


주워섬기려던 디트리히보다 라인하르트가 빨랐다.

“저 글렌시아의 고강한 기사, 시에라 글렌시아에게 비급을 전수받은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의 어마무시한
주먹질을 견뎌 내야 할 거야.”

아. 디트리히의 입술이 움찔움찔하며 웃음을 만들어 냈다. 다만 목석처럼 앉아 있는 젊은 황제의 뒷모습을 볼


때는 그 웃음이 사뭇 음험해졌다.

“폐하께서는 소식 듣고 기뻐하셨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가?”

“기뻐했으면 앞으로 폐하 새끼라고 부르려고요.”

“이런. 페르나하 글렌시아에게 안 좋은 버릇이 옮았군.”

라인하르트는 대답하고는 코로 웃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일을 다시 회상했다.


158 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식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기뻐할 일이다.

제 지긋지긋하게 사랑하는 연인은 스쳐 지나가듯 <가을에도 아이의 생일이 있다면 당신을 여름부터 겨울까지
수도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 적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비앙카 같은 정신없는 아이와 하루 종일 놀아 주다 보면 그렇게 변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라인하르트는 숨죽여 웃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빌헬름의 반응이 기대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리오니와 마르크의 입을 단속한 것도, 사실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혹시라도 바람에 함께 대영주의 세 번째 임신 소식이 전해져, 빌헬름이 먼저 알게 될까
봐.

그래서 소식을 접한 그 아름다운 얼굴이 어떻게 바뀌는지, 자신이 영영 모르게 될까 말이다.

두 사람이 비록 부부가 아니라 해도, 아이는 서로가 있어 누릴 수 있는 기쁨 중 가장 큰 것 아니겠는가.

다만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이 마냥 웃으며 기뻐하리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 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빌헬름은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태어나는 과정을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돋은 봄꽃같이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그래서 라인하르트는 주의 깊게 빌헬름을 바라봤다. 입을 약간 벌린 빌헬름은 그녀를 올려다봤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라인하르트의 배를 바라봤다. 그 표정이 넋이 나간 듯해, 라인하르트는 옅게 미소 지었다.

“갑작스럽니?”

그녀의 미소에 그제야 빌헬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빌헬름은 허둥지둥하더니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어 번 침대 곁을 왔다 갔다 하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 맙소사…….” 마른세수를 한 그는 다시
라인하르트 옆으로 다가앉았다.

“그러면 오래 있겠다는 말은…….”

“루덴의 의사보다는 궁의가 더 솜씨가 좋지 않겠니?”

라인하르트가 제 목을 더듬었다. 언젠가 그녀가 스스로 그었던 자국을, 궁의는 참 솜씨 좋게도 꿰매 놨다.
처음에는 그 자국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던 리오니도 나중에는 ‘세상에, 저희 어머니 자수 솜씨보다 더 곱네요.’
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빌헬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가, 이내 평온해졌다.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기쁘지 않아?”

라인하르트가 일부러 여상히 묻자 빌헬름은 다시 제 하관을 한 손으로 난폭하게 문질렀다. 눈에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으나, 그 끝에는 미약하게나마 기쁨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기뻐요, 라인하르트.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건 정말 좋아요. 지금 얼마나 된 거지요?”

“두 달 정도가 되었다. 아이를 낳고 꼬박 반년은 더 있어야 할 테니, 너는 한 해 넘게 내 곁에 내내 붙어


있겠구나.”

그 말에도 빌헬름의 얼굴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는 눈을 깜박거리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건’ 좋다. 그러면 다른 건?

“가을이 생일인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 한 적도 있잖니.”

“하지만…….”

“하지만.”

“그렇지만…….”

빌헬름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문득, 화들짝 놀라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보고는 뒤늦게 횡설수설했다.

“아니, 정말 기뻐요. 정말이야. 그런데, 그러니까…….”

“천천히 말해도 돼, 빌헬름.”

남자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창백해지길 반복했다.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가, 결국은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빌헬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

“라인하르트. 나는, 그…….”

“…….”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아. 그제야 라인하르트의 입에서도 작은 탄성이 터졌다. 청년은 말간 눈으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죄책감과 무지, 당황과 슬픔, 아직도 진득하게 남아 있는 증오 같은 것들이 사랑과 함께 두서없이 뒤섞여 있었다.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죠. 아이를 낳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는 건 들어 알고는 있었어요. 아니, 뒤늦게
알았죠.”

“…….”

“빌로이 때는 관심이 없어 몰랐고……. 비앙카야 경황이 없어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죠.”

빌헬름이 입술을 깨물기에, 라인하르트는 손을 뻗어 그 입술 끝을 부드럽게 눌러 그의 이 사이에서 빼내 주었다.


빌헬름의 말이 이어졌다.

“뒤늦게 알았어요. 당신이 얼마나 무서웠을지를, 남에게 들었죠…….”


빌헬름이 라인하르트의 고통을 짐작이나마 해 볼 수 있었던 건 생각보다 더 늦은 때였다. 지난여름 더위를
지나치게 타는 라인하르트에게 그는 궁의를 보냈다. 궁의는 라인하르트를 진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래 타고난 체질이 약하지 않아 그럭저럭 버티고 있으나, 지나치게 많은 고생을 겪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출산 때도 위험하셨다 루덴의 의원에게 전해 들었는데, 또다시 피를 이렇게 많이 흘리셔서…….>

의원의 말을 듣고 빌헬름은 한 번 더 무너졌었다. 대영주의 수도행에 따라와 있던 루덴의 의원이 몰래 불려 갔다.


의원은 황제 폐하의 다그침에 더듬더듬 제가 아는 것을 털어놨다.

아이를 낳을 당시의 라인하르트가 제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것. 팔삭둥이로 태어나 손을 엄청나게 타던


첫째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라인하르트가 거의 바스라지기 직전의 몸 상태로 아이를 돌봤다는
것.

둘째는 순한 아기였다지만, 출산 당시 라인하르트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 문제였다.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말에 빌헬름은 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멍청한 새끼는 둘째를 낳아 놨더니 당신께 말이나 몇 마디 붙일 수 있어 좋다는 소리나 하고…….”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알을 굴리던 라인하르트는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비앙카 때문에 막사에서
단둘이 만났던 때, 빌헬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라인하르트는 급작스럽게 안타까워져 빌헬름의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빌헬름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가을이 생일, 그런 건…… 없어도.”

자초지종을 짐작할 만했다. 어쩐지 여름 이후부터, 빌헬름은 라인하르트에게 셋째 아이를 가지자는 소리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던 거구나.”

“제가 어떻게 염치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빌헬름의 시선이 허공을 부유했다. 눈동자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빌헬름을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더 있는데, 말하지 않을 거니? 그렇게 말하는 눈빛에 빌헬름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라인하르트에게 비밀을 털어놨다.

사실은 그 때문에 아주 조심하고 있었노라고. 궁의에게 약을 지어 먹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 약을 온전히 믿지


못해 제 나름대로, 세 번째 아이를 가지는 것은 막아 보려 했다는 소리 말이다.

라인하르트는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하는 시늉을 했다.

어쩐지 침대 위에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지나치게 품위를 지키더니!

그 또한 그저 그녀의 상처에 예민해진 결과라 생각했다. 아프냐, 괜찮으냐 묻고는 벌게진 얼굴의 라인하르트가
괜찮다는데도 결국 물러서곤 하는 제 연인이 몰래 이런 꾀를 부리고 있었다니, 세상에. 라인하르트는 원망 반,
농담 반으로 그의 가슴을 퍽 두들겼다.

“빌헬름! 나와는 상의도 없이!”

“하지만…….”
“내가 원하지도 않는 술을 왜 그렇게나 마셔 없앴는데!”

이번에는 빌헬름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그가 더듬거렸다.

“그러면, 그, 애는.”

“그래! 저번 겨울에 그렇게 마셔 대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니!”

그러니까, 라인하르트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셋째를 가지고 싶어서.

한때는 미친 새끼라 불렀던 제 충견이 어찌나 고상해졌는지 제정신일 때는 늘 그녀가 원하는 것 따윈 조금도
들어주지 않았다. 졸라도 봤고, 끌어안은 채 놔주지도 않았지만 매번 이기는 것은 빌헬름이었다. 인내가 생긴
것이 괄목할 만한 변화이니 참 좋은 일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북부인들이 마셔 대는 독주였다. 몸을 덥히기 위한 독주를, 춥지도 않은 수도에서 춥다고


둘러대며 얼마나 마셔 댔는지 몰랐다. 물론 저는 환자라는 핑계를 대며 빌헬름에게는 제 세 배를 권했다.
거절이라고는 모르는 저 청년이 얼마나 성실하게 그 모든 술을 마셔 댔는지.

다만 빌헬름의 주량도 만만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건장한 20 대 후반의 청년과, 몸을 챙기지 않아 허약해 빠진


30 대 중반의 여인. 둘 중 먼저 쓰러지는 건 대부분 라인하르트였다. 결국 그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빌헬름이 제
품에서 그녀가 원하는 바를 들어준 일은 서너 번에 그쳤다.

빌헬름은 그 횟수를 손가락으로 꼽아 보다가 죽고 싶은 얼굴을 했다. 라인하르트는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약을 온전히 믿지 않은 건 정말 올바른 판단이긴 했다. 이렇게 보란 듯 셋째가 들어섰으니 말이다.
다만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니 기함할 일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눈을 부라렸고, 빌헬름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벌써 둘이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한 빌헬름은 다급히 덧붙였다.

“그 둘이 많다는 건 아니에요. 버겁거나 싫다는 뜻도 아니에요.”

“알지.”

실소가 나왔다. 첫째인 빌로이는 제 아비의 앞에서 웃게 된 지 얼마 안 됐다. 요즘도 종종 웃다 말고 갑작스레


눈치를 보곤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빌로이 때문에라도,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에게 신신당부했다. 예전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지라도, 그 비슷한 말은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그녀의 목줄에 매인
개는 빌로이가 없는데도 라인하르트의 당부를 제법 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저는 빌로이가……. 모르겠어요.”

아이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낸 빌헬름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당신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감당해 가면서까지 새로운 애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네 마음은 잘 알았다.”

라인하르트는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뺨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거기 입 맞췄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 해서 빌헬름의 바람을 순순히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세 번째 아이도 가지고 싶어, 빌헬름.”

“……라인,”

“있잖니, 빌헬름. 나는 빌로이를 보면.”

라인하르트는 말을 멈추었다가 단숨에 내뱉었다.

“네게 단 한 번의 눈길도 받지 못했을 세 명의 아이가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빌헬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슨 소리인지 분명 알아들었으리라.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이대로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네가 알아들었으니 됐다, 하는 식으로 대충 넘길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네 아이들 말이다.”

159 화

빌로이와 비앙카는 한 배에서 난 아이들인데도 정말 많이 달랐다. 비앙카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가져야 성이


풀렸다. 앉은 자리에서 떼를 쓰고, 가끔은 바닥에서 뒹굴기도 했다.

리오니는 그 모습만 보면 제 첫째인 펠릭스를 보고 배운 듯하다며 송구스러워했으나, 라인하르트는 그게 펠릭스


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원래 그렇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에 한해서.

빌로이는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황손이니 물질적인 것이야 말하기 전에 먼저 대령해
오니 필요하다 말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제 어미에 한해서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라인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순종적으로 굴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파 라인하르트는 아이에게 미처 주지 못한 사랑을
쏟아부었다.

빌로이는 라인하르트의 애정에 차츰 익숙해졌고, 어미가 제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모두가 그것으로 충분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생각보다 아이는 그리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는 비앙카와 자주 싸웠다. 대체로 어미에 대한 독점욕 때문이었다. 빌로이는 비앙카에게 대부분 양보했으나,
라인하르트의 옆자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비앙카가 라인하르트 옆에서 잠들어 있으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비앙카가 제 물건을 탐내면 그대로 밀어 주는 아이가, 라인하르트의 손은 놓지 않았다.

자기 전에 비앙카의 이마에 입 맞추면, 빌로이에게는 이마와 뺨에 두 번 입 맞춰 주어야 했다. 그동안 받지 못한


사랑을 모두 돌려받겠다는 듯, 아니 어쩌면 앞으로의 사랑도 제 것이라는 듯 탐욕스럽게 구는 아이. 빌로이를 볼
때면 라인하르트는 지난 세월 속의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만 1 년을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보듬어 준 덕인지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그걸 나아졌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자면 빌로이는 이제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덜 봤다. 묘한 방향으로. 비앙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아이는 자신보다 자그마한 비앙카를 망설임 없이 밀쳤다.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보다가 비앙카의 머리를 몰래 잡아당겼던 예전에 비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와중에
비앙카의 성질이 대단하여 울음을 터트리기는커녕 제 오빠와 우격다짐을 벌이는 것 또한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겠다고 마르크가 웃었다.

아무튼, 덕분에 귀하신 황손과 대영주의 따님 얼굴에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로이는 제
어미를 보면 자주 웃었다.

<있지, 빌로이. 동생이 많이 미우니?>

그 말에 빌로이는 한참을 망설였다.

<안 미워요.>

<정말?>

<……응. 안 미워요.>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대답한 건 아닌가 싶었다. 빌로이는 지나치게 빨리 철이 들어, 라인하르트의
앞에서는 원하는 바를 곧잘 감췄기 때문이다. 아이를 살피는 눈초리에 빌로이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진짜야. 안 미워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싸울까.>

그 말에 빌로이는 라인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 열었다.

<제가 비비와 안 싸우는 게 좋으세요?>

그 질문에 라인하르트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안 싸우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렇게 네가 물으니까 그건 아닌 거 같기도 하네. 제 아비와


똑같은 새까만 눈이 맑게 빛났다. 라인하르트는 빌로이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비앙카가 할퀴어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 자국이 있었다. 아이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빌로이가 참는 건, 싫어.>

<…….>

<빌로이.>

라인하르트는 아이를 제 무릎 위에 올렸다. 한 해 동안 부쩍 살도 붙고 키도 큰 아이는 그사이 엄청나게 묵직해져


있었다. 같은 나이인 펠릭스는 이미 또래들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크다. 하지만 루덴의 골목대장인 그 애를
빌로이도 곧 따라잡을 수 있을 듯했다. 빌로이는 얌전히 라인하르트의 품에 안겨 그녀를 올려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아이의 정수리에 제 머릴 기댔다. 따끈따끈했다.

<미안해.>

빌로이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밀어 냈다. 그리고 똑바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고는 입 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거 싫어.>

<어?>
<어머니가 맨날, 으응.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거 싫어요.>

응석이 섞인 말투였으나 그 뜻은 명백했다. 아이와 대화할 때마다, 끝맺음은 늘 라인하르트의 사과였다.


빌로이는 이어 말했다.

<저도 알아. 비비는 나보다 작아요. 그러니까 제가 잘못한 거 맞아요.>

<빌로이.>

<그러니까 나한테도 화내면 안 돼?>

그 말에 라인하르트의 가슴 한구석이 울컥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게. 생각해 보면


비비에게는 소리도 지르고 엉덩이도 때렸는데, 빌로이에게는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사이좋게 지낼게요.>

그제야 라인하르트는 또, 제가 아이보다 못하구나 싶어졌다. 참 내가 모자라다, 그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뭐, 그 뒤로도 빌로이와 그렇게 무난하고 평범한 모자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펠릭스에게 휩쓸려
말썽을 부리거나, 비비와 싸운 애를 혼내려고 내려다보노라면 아이의 표정엔 언제쯤 어미가 자신에게 화낼까 싶은
묘한 기대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고 있으니 화를 내려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리고 평화 사이에 잡념이 스며들었다.

지난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두 사람은 영원의 샘을 거닐었다. 빌헬름의 초상 앞이었다.

<하나뿐이구나.>

<결혼하지 않았으니까요.>

젊은 황제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영원의 샘에 걸려 있는 초상도 하나였다. 빌헬름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비를 고쳐
안았다. 그 무렵의 비비는 부쩍 제 아비의 몸을 타고 오르는 것에 큰 재미를 붙인 참이었다.

하도 들썩거려 <가만히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빌헬름이 고요히 내려다보면, 비비는 눈을 부라리며 맞서곤


했다. 난폭한 황제 폐하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성질머리 만만찮은 어린애의 조합. 황성의 사용인들에게
처음에는 꽤 큰 충격을 안겼던 듯했으나 최근에는 다들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빌로이의 자리는 이름만 걸린 채 비어 있었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초상을 그려 그 곳에


걸겠지. 비앙카가 손가락질했다.

<비비는 여기 없어?>

<없어.>

<왜?>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그래.>

비앙카의 의문에 빌헬름이 가볍게 답했다. 비비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돌아봤다. 라인은 눈을 흘겼다.
어디서 저런 농담 배워 온 거야?

빌헬름이 씩 웃고는 비비의 이마를 쿵, 하고 제 이마로 박았다. 악, 하고 아이가 이마를 문지르는 틈을 타


빌로이가 비앙카의 발을 쭉 잡아당겼다. 비비와 눈이 마주친 빌로이가 입 열었다.

<루덴에 있잖아. 오리엔트 성에, 어머니와 같이 비비의 얼굴도 걸려 있잖아.>

그 말에 비비의 입이 아, 하고 벌어졌다. 곧장 사태를 파악한 아이가 잔뜩 부어 제 아비를 노려봤다. 빌헬름이


심술 가득한 얼굴로 코웃음 쳤다. 평소였다면 벌써 밉다 소리쳤을 비비였다. 하지만 제 아비가 그리 만만하지
않긴 한지, 씩씩거리며 노려보기만 했다.

그렇게 지나갔다면 정말로 평화로운 한때였을 테다. 라인하르트의 마음이 선득해진 것은 실론 홀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는 급작스레 뒤를 돌아봤다. 황성의 시녀들이 라인하르트의 시선에서 비켜나 옆으로 물러섰고, 열려
있는 실론 홀의 문이 보였다. 라인하르트는 그 안쪽으로 들어섰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치워진 미쉘과
둘시네아의 초상. 그녀를 따라 들어온 빌헬름의 눈썹이 들썩였다.

이전의 생에는 영원의 샘에 걸려 있었을 그 두 사람의 초상들에 새삼 마음이 쓰인 건 아니다.

라인하르트의 마음에 걸린 건, 이전의 생이었다면 미쉘과 둘시네아 밑에 걸려있었을 세 개의 초상이었다.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그리고 누구도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둘시네아가 낳은 세 명의 황손들.

미쉘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야 기정사실이었다. 빌헬름 또한 그 애들이 제 핏줄이었음을 못 박은 적 있었다.


빌헬름의 핏줄이었으니 그 아이들의 손에서 수정은 별 이상 없이 빛났겠으나.

수정이 빛났다 하여 아이들의 인생이 평화로웠을까. 잔잔하던 마음에 파동이 일었다. 빌헬름이야, 증오하는
여자가 저를 쥐어짜듯 착취해 낳은 그 애들에게 별달리 눈길 주지 않았을 테고.

둘시네아가 그 애들에게 어찌했을지 라인하르트는 모른다. 전생의 라인하르트에게 그 황손들은 그저 죽여 치워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였다. 그 애들은 어떠했을까. 초상조차 남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아이들.

<어머니?>

꼭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저를 부르는 빌로이를 봤을 때 그 마음은 더 강해졌다. 누군가는 기괴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이상하게 허전해졌다.

***

라인하르트의 말을 들은 빌헬름이 인상을 썼다.

“전 그런 줄 모르고.”

“모를 만도 하지. 딱히 내가 티를 내지는 않았잖니.”

“아뇨, 티는 났는데…….”

빌헬름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라인하르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빌헬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의
연인이 변명하듯 겨우 답했다.

“……초상화를 불에…….”
“뭐라고?”

“……태우려고 했는데, 하도 펄쩍 뛰는 통에 더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뒀어요.”

웅얼거리는 대답에 기가 막혀 웃어 버렸다. 라인하르트가 그날 두 사람의 초상을 보고 멈칫한 것이, 빌헬름에게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다만 멀레이 백작을 비롯한 황가를 모시던 가신들이 기절할 듯 구는 통에 불에
태우지는 못했다고 빌헬름은 털어놨다.

그것 또한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긴 했다. 예전이었으면 초상이든 뭐든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을 텐데,
그래도 남의 말을 들어는 준다는 게. 이유야 당연히 라인하르트가 질색할지도 모른다는, 사소하고도 빌헬름에게는
큰 의미 때문이었겠지만.

“그때부터 계속 묘한 기분이 들었어.”

“무슨 기분이요?”

“음……. 나는 말이야. 네가 내 시야에 들어와서 만드는 그림이 늘 만족스러웠단다.”

그 말에 남자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라인하르트는 그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다시 속삭였다.

“빌로이와 비앙카가 그 그림 안에 들어오면 정말로 완벽한 풍경 같았지.”

“이해해요.”

“정말?”

“예전에는 몰랐지만, 요즘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빌헬름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답했다. 라인하르트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날부터는 조금 달라졌어.”

“…….”

“그 완벽한 풍경에, 마치 이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160 화

이상했다. 누군가 들으면 라인하르트를 미친 사람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이야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도무지
라인하르트는 제게 세 번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두 아이만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라는 생각도 물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인하르트는 빠진 이를 끼워 맞추고 싶었다.

“둘시네아를 생각하면 나는 늘 복잡한 마음이 들어, 빌헬름.”

“…….”

“적어도 미쉘에 한해서는 감사한 마음이 있지. 미쉘과 이혼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니. 하지만
둘시네아에게 내 자리를 주기 위해 미쉘은 내 아버지를 해하였다. 내 아버지뿐이니. 너에게 휘둘렀던 폭력을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모자랄 것이다. 사실 너무 간단히 죽었다는 생각도 가끔 한단다.”

어디에서나 가장 약한 자를 자처했던 둘시네아. 하지만 저보다 약한 자를 찾아내 귀신처럼 깔아뭉갰던 여자에게


동정은 금물이었다. 빌헬름이 픽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어쩌면 그 여자에게는 하찮은 끝맺음이 어울리지 않나요?”

“그런가.”

“주제넘게 늘 당신의 것을 탐냈잖아요.”

“전생엔 네가 내 것이 아니었잖니.”

그 말에 빌헬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생에도 제 영혼은 당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으신 거예요?”

“전후 관계가 좀 바뀐 것 같지만, 그렇다 하자.”

라인하르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턱을 들었다. 거만한 턱 끝에 빌헬름이 입 맞추자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이 터졌다.

“그래.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할 것들을 탐냈으니, 어쩌면 그녀가 낳았던 세 명의 아이들 또한 원래는 나의
아이들이었던 것이 아닐까…….”

“…….”

“네가 날 미친 사람으로 봐도 좋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단다.”

빌헬름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라인하르트를 지그시 들여다봤다. 총기 넘치는 새까만 눈 안에는 온통 그녀뿐이었다.
빌헬름이 천천히 입 열었다.

“당신이 아셔야 할 게 있어요. 첫째. 제가 당신보다 더 미쳤어요.”

라인하르트는 웃다 혀를 깨물 뻔했다. 빌헬름 역시 미소 띠고는 말을 이었다.

“둘째.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당신께서 제 비루한 인생마저 안타깝게 여기는 건 좋아요.”

“…….”

“셋째. 정말 기뻐요.”

입이 조금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빌헬름의 말뜻을 가늠하던 라인하르트는 그것이 세 번째 아이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약하게 가늘어지는 라인하르트의 금빛 눈을 감상하던 빌헬름이 말했다.

“늘 제 앞에서 아파하고 피 흘리던 당신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어요. 아시잖아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분명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앙카가 태어났어요. 그러니 저는 조심할 수밖에요.”

그랬다. 그 지옥 같았던 사흘 동안 비앙카가 생겨났다. 라인하르트가 에헴, 하고 헛기침하더니 늙은 궁의의


말투를 흉내 냈다.
“부군 되시는 분께서 혈기가 넘치시어…….”

“놀리지 마세요.”

“얼마나 다행입니까아.”

“자랑스러워하시든가요.”

“물론 자랑스럽지.”

라인하르트는 콧대를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자랑스러운 양 얼굴을 치켜들었다.

“과연 루덴의 천둥이시라, 그 철벽같은 방어를 뚫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태풍이 몰아치는데 천둥이 자리할 곳이 어디에 있겠어요?”

몇 번의 입맞춤과 은근한 미소, 자잘한 농담이 오갔다. 아름답고 젊은 라인하르트의 연인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원하셨다면 나는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걸 가지는 거야말로 내 기쁨이에요,
라인하르트.”

“불편하지는 않니?”

아이들이야 이제 제법 제 아비를 겁내지 않게 됐다. 하지만 빌헬름이 이따금 굉장히 낯선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라인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낯설기는 하죠. 하지만 그건 그저…… 그래요. 지옥에서 걸어 나와 앉은 곳이 지나치게 평화로워 느끼는


생경함에 가까워요.”

“…….”

“그거 알아요? 라인하르트. 저는 당신과 떨어져 있을 때의 꿈을 꿔요. 그리고 그 꿈속에서 나는 또 꿈을 꾸죠.”

빌헬름은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제 방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가구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했던 때의 꿈을.
잠이 들면 행복한 꿈을 꾸었다. 라인하르트가 저를 보고 웃어 주고, 입 맞춰 주던 때의 꿈. 그 꿈에서 깨고 나면
자리한 현실에 아득해져 손에 쥐이는 것마다 집어 던지고 부수었다. 제가 앉아 있는 곳이야말로 빨리 깨어야 할
악몽 같아서.

그래서 빌헬름은, 이따금 제가 누리는 행복을 믿지 못했다. 두 번의 생애 동안 그가 누렸던 행복은 지나치게


짧았고, 지금의 행복조차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하여 새삼스럽게 저와 똑같이 생긴 남자아이, 그리고 그악스러운
여자아이를 들여다보곤 했다. 이게 허상은 아닌가. 어쩌면 또, 이 꿈에서 깨어나 을씨년스러운 황태자궁에서
홀로 절규하는 건 아닐까.

“그래요. 어쩌면 이게 제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일지도 모르겠네요.”

빌헬름이 짐짓 비장하게 말했다.

“당신이 아파하시는 걸, 또 당신 곁에서 감내해야 하잖아요.”


“음, 빌헬름. 너도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뭔데요?”

“첫째. 네가 감내할 고통이 얼마가 됐든 내가 백배는 더 아플걸.”

“……미안해요. 가볍게 여긴 건 절대 아닌데…….”

라인하르트가 심술궂게 빌헬름의 코를 비틀었다.

“둘째. 하지만 네가 견뎌야 할 고통이 더 남아 있기는 해.”

“……무슨 고통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디트리히와 닮은 동작에 빌헬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디트리히는 몰라.”

“……그건 당연한 거 같은데요. 제가 먼저 알아야…….”

“그런 문제보다는…… 뭐랄까. 디트리히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건 서신에 쓴 것 같은데.”

“예. 쓰셨었죠.”

“그때 디트리히가 대강 상황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한 말도 기억해?”

“절 한 대 치고 싶다는 말이었죠. 아.”

그제야 빌헬름은 어릴 적 소꿉친구를 지독히 고생시킨 제자에 관해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품고 있을 악의에 관해


상기했다. 그 제자가, 이제는 나이까지 많은 소꿉친구에게 세 번째로 아이를 낳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분노에 관해서도.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투를 하게 되겠군요.”

“저번엔 디트리히가 졌다고 했지?”

“……이번에도 이길 거예요.”

빌헬름이 불퉁하게 답했다. 라인하르트는 오리처럼 내민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키득거렸다.

“이겨야지. 셋째 얼굴은 살아서 봐야 하지 않겠니.”

“지더라도 죽이지야 않겠죠. 루덴 대영주 각하가 사랑하는 남자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설마 그렇게 예뻐하는
‘비비 아가씨’의 친부인데. 아비 없는 아이가 되기에 비비는 아직 어린 것 같은…….”

“아하하. 그 말 디트리히 앞에서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디트리히는 매번 자신이 비비의 아버지 노릇 정도는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그녀의 말에 빌헬름은


코를 찡그렸다. “그렇게 둘 순 없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라인하르트의 납작한 배를 쓸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잠잠했다. 하지만 곧 쑥쑥 부풀어 오를 것이다. 빌헬름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사랑할 수 있겠죠?”

“그럴 수 있을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하듯이. 빌로이와 비앙카를 보고 이따금 낯설어 하면서도 이내 입가를 꿈틀거리며 몰래 웃듯이.


펠릭스를 놀리는 디트리히를 흉내 내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농담이나 주워섬기듯이. 네 무릎에 매달리는
빌로이를 슬쩍 들었다 놓듯이. 내가 오는 때를 기다리며, 빌로이의 방에서 매일 그 애가 잠들기 전에 함께 벽에
빗금을 그리듯이.

그 그림은 참으로 완벽할 거야.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수도 있겠지.”

그 말에 빌헬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떨떨한 까만 눈을 들여다보며 라인하르트는 옅게 웃었다.

“네가 나를 델피나, 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면.”

“……아.”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은 린케 가문에 이어진다.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라는 긴 이름에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이
덧붙여질 날이 오면, 어쩌면.

그 말뜻을 곧장 알아들은 새까만 눈이 확 커졌다가, 환하게 휘어졌다.

“좋아요. 너무 좋아…….”

“그렇게 좋아하기 전에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긴 하지만.”

“……프람 산맥도 넘었는데요.”

“그러네.”

라인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다가오는 붉은 입술에 응했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구리를 쥐었다가, 제풀에 놀라 확 떨어졌다. 라인하르트가 감았던 눈을 뜨고 남자를 관찰하자, 남자는
변명하듯 답했다.

“이제, 그러면, 이러면 안 되는 거…….”

그러더니 어젯밤 제가 라인하르트에게 저지른 만행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귀까지 새빨갛다 못해
검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제가 또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눈치다. 라인하르트는 허리를 접으며 깔깔거렸다.

“그랬으면 어젯밤에 얘기했겠지.”

“그치만.”

“그동안 하신 것처럼 하시면 된답니다, 황제 폐하.”

그야 끝까지는 안 되기는 하지.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여태까지의 경험 덕에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서 말 잘 듣는


개처럼 굴다가도 급작스레 막판에는 사람으로 돌아가실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말 죽어도 안 듣는 개라는 쪽이
나을까. 아무튼 괜찮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의원에게 듣고 온 참이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이 수도로 날듯이 달려왔다는 걸 너는 알까, 모를까.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갑자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곧 죽어도 라인하르트의 앞에서 품위를
지키며 신전의 신관처럼 살 것을 엄숙히 맹세했다. 어째 굉장히 아쉬워지는 대목이었으나, 정결하게 지내는
빌헬름 콜론나 알랑케스의 모습 또한 궁금하기는 했으므로 라인하르트는 그 맹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삶이란 건 늘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다. 다만 그게 빌헬름 콜론나의 일탈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
연인의 무사를 기원하기 위해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매일매일 신전에 들락거렸는데, 그 지극정성이 무색하게 루덴
대영주는 하루를 꼬박 지새운 난산을 겪었다. 일설에는 루덴 대영주의 비명에 젊은 황제의 손바닥이 다
헤집혔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그것 또한 예상을 벗어난 일은 아니었다.

예상외인 것은 그 난산 끝에 태어난 것이 쌍생아라는 점이 그랬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태어난


쌍생아에게는 각각 가을과 겨울의 이름이 붙여졌다. 누구의 생각인지는 알려진 바 없었다.

쌍생아의 탄생이 불길하다 여겨질 만도 하지만, 적어도 황성의 사용인들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예민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던 젊은 폐하께서 두 어린애의 탄생 뒤로 부쩍 웃음이 많아지고 너그러워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게 아주 황성에 눌러앉은 루덴 대영주 때문이 아니냐고 갸웃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상전이


너그러워지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좋은 일인 것을.

161 화

외전 2. 천사와의 재회

산에서 빵은 평소에는 엄두 내기도 힘든 호화로운 음식이다. 야생 밀은 북부의 산에서는 자라지 않으니 마을에
가서 사 올 수밖에 없다. 북부까지 싣고 온 밀의 가격은 평소에는 엄두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아빠가 계실 때는
그래도 종종 밀을 살 만한 형편이 되었는데. 리오니는 입맛을 다시면서 화덕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갓 구워진
빵을 꺼내기 위해서다.

오늘 아침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군 보람이 있는지,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산 아래에 사는 한스의 아내 안나가
나눠 준 밀이다. 본래 좋은 일이 있을 때 따로 먹으려고 두었던 것이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 상하거나 벌레가
먹을까 싶어 그냥 먹어 치우기로 한 것이다.

가루로 갈아 구워 낸 빵 두 덩이는 흰색이었다. 햐. 흰색 빵을 얼마 만에 먹어 보는지. 리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빵 하나는 갈라 입에 물고, 한 덩이는 얼른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보통 때였다면 충분히 식혔겠으나,
먼 길을 가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리오니는 아무도 없는 집 안에다 그렇게 인사했다. 통나무를 쌓고 흙을 개어 틈을 메운 단출한 통나무집의 문이


닫혔다.

***

등허리에 맨 주머니와 허리춤에 찬 화살통, 커다란 강궁. 작은 손도끼에 주머니칼 하나. 집을 나선 리오니의
차림새였다. 사냥을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사냥을 가려 한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철저하게 준비할 것이다.

오랜만에 먹는 흰 빵의 맛이 달았다. 리오니는 가루 하나라도 흘릴세라 빵을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는 손을 바지에


대충 털었다. 질긴 사슴 가죽으로 만든 바지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 잔소리하셨을 테지만, 뭐 어때.
아버지도 안 계신데.

근방에서 가장 솜씨 좋은 사냥꾼은 아니었지만, 리오니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아버지가 야만족들에게


유명을 달리한 것은 세 해 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 큰 변화는 식생활이었다. 우습지만 그랬다.

산 생활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집에 고기 떨어질 날은 별로 없었다. 봄과 여름,


가을에는 동물을 잡고 겨울에는 염장해 놓은 고기를 먹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부쩍 식탁이
빈한해졌다. 리오니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힘 차이였다.

토끼야 리오니 혼자서 몇 마리든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사슴만 돼도 리오니에게는 참 버거운 상대였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암사슴을 잡고 나면 그걸 지고 오는 게 큰일이었다. 멧돼지 같은 건 말도 못 했다.

한 달 전 리오니는 산속에서 멧돼지를 잡았다가, 제 쪽으로 쓰러지는 짐승 때문에 팔이 부러진 참이었다. 한스가
부목을 대고 나서 움직이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통에, 한 달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멧돼지야 팔이 부러져
끌고 오지도 못했다. 한스가 뒤늦게 멧돼지 시체를 찾으러 가 봤으나 늑대들이 이미 다 헤집어 먹어 치우고 뼈만
남았다던가.

결국 창고가 텅 비었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팔과 동전 두 닢 남은 주머니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다가 결국


리오니는 근방의 초소에 가 보기로 했다. 뭐라도 주워다 팔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3 년 전 전쟁이 벌어진 초소 근방에서 고물을 줍다가 야만족들과 조우해 큰 부상을 입었고, 어찌어찌
도망은 쳤으나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뭐든 해야 했다.
성하지 않은 팔에 어느 눈먼 토끼가 잡히겠는가.

3 년째 계속된 전쟁으로 야만족들도 거의 절멸 직전이라고 했다. 전선도 이 근방으로 좁혀졌다던가. 조금만 가


보자. 정말 손바닥만 한 고철이라도 동전 몇 닢은 받을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며 리오니는 이틀 내내 산을
탔다.

초소는 듣던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초소에는 작은 식량 창고가 딸려 있었는데, 야만족들이 늘 그 창고를 노려


매번 싸움이 벌어지곤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꽤 많이 왔다 갔는지, 아니면 야만족들이 다
걷어 갔는지 쓸모 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고. 짜친다.”

리오니는 화살촉 두어 개를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투덜댔다. 눈에 안 띄는 곳에 박혀 있던 것들이었다. 반


시간을 넘게 뒤졌는데도 이 정도라니. 조금 더 들어가서 근방 다른 초소를 찾아가 봐야 할까. 하지만 비슷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찾으려면 또 사흘을 걸어야 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면 목숨을 버리는
셈이 된다. 더 이상 남은 식량도 없었다. 돌아가는 이틀 동안 간신히 버틸 만한 양이 고작이다.

“어쩌나.”

답이야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틀이나 고생했는데……. 리오니가 갈등할 때였다. 근방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만족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리오니는 기겁하며 초소 안쪽의 방벽으로 몸을 숨겼다. 다 무너진
돌벽이지만 그럭저럭 몸을 숨길 만했다.

바깥을 몰래 지켜보니 웬 야만족들 셋이 허덕대며 커다란 남자 하나를 떠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꽤 훌륭해
보이는 제국군 갑옷을 입고 있었고, 리오니는 곧장 상황을 알아차렸다. 야만족들이 인질을 잡은 것이다. 초소로
몸을 피한 후 협상을 하려는 것이겠지.
본래대로라면 리오니는 얼른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리오니는 조심스럽게 손에 든 주머니칼과 가방을
내려놓고 활에 화살 두 개를 메겼다. 생전 아버지가 쓰던 활이었다. 본래 아버지는 힘이 좋아 그 활에 화살 두
개를 한꺼번에 메겨 썼으나, 리오니는 팔 힘이 달려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는 세 사람. 화살 두 개가 한
번에 날아가지 않는다면 리오니는 그대로 죽음을 당하리라.

그녀는 시위를 당겼다. 팔이 뻣뻣해졌다. 더 이상은 못 당겨, 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살 두 개가 손끝에 달칵,


하고 자리하는 감각이 전해졌다. 리오니는 그대로 시위를 놨다. 슈르륵, 소리를 내며 화살 두 개가 날아갔다. 곧
퍽, 하고 화살 두 개가 동시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소리 하나 못 내고 야만족 둘이 쓰러졌다. 남자를 떠메고 오던 마지막 야만족이 기함하며 남자를 내팽개치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으나 이미 늦었다. 리오니는 이미 다음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쏜 화살은 마지막 야만족의 어깨에 박혔고, 그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뒤늦게 리오니를 발견하고 검을 빼
들었으나 리오니가 더 빨랐다. 손도끼가 야만족의 목에 반쯤 박혔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야만족이
쓰러졌다. 리오니는 재빠르게 달려가 그 목에서 손도끼를 뽑았다. 그리고 비척비척 일어서려 노력하는 두
야만족의 목숨도 절멸시켰다.

“하, 시팔.”

리오니는 콧등의 땀을 닦았다. 얼굴에 튄 피가 손등에 묻어났다. 야만족에게 죽었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기분이었다. 만족스럽게 뒤를 돌아보는데, 저만치 내팽개쳐진 제국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야만족들의 몸에서
단검 몇 개를 챙겼다. 저 남자가 혹시라도 깨어나 저를 위협할까 싶어서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핀 바 남자는 여전히 의식 불명이었다. 리오니는 갈등했다.

“무슨 인간이 집채만 하냐.”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엎어진 남자를 뒤집는 데만도 힘을 한참이나 써야 했다. 이 인간을 구하려면 리오니도
탈진할 게 뻔했다. 그뿐인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내팽개치고 갈까, 하고 몇 번이나 갈등했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리오니는 남자의 갑옷을 모두 풀어냈다. 배 쪽에 큰 상처를 입었기에 리오니는 제 팔에 감긴 붕대를 풀어 그 배에


감아 주었다. 갑옷과 야만족 시체들은 모두 무너진 초소 안에 숨기고, 리오니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여전히
의식이 없는 남자의 몸 밑에 기어 들어가듯 한 후, 젖 먹던 힘을 쥐어짜 일어났다.

“끙차.”

다행히도 근방에 사냥꾼들이 쓰는 오두막이 있긴 했다. 다만 거기까지 가려면 꼬박 반나절 동안 산을 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는데 가능할까. 리오니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제 아버지였다면 그녀는
반나절이 아니라 하루 종일이라도 산을 탔을 것이다.

“썅.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험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한 번도 내뱉지 못했다. 아버지가 와서 제 머리통을 내리쳐도


좋으니 살아 계셨으면 참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하며 리오니는 기어이 남자를 산 위에 올려다 놨다. 먼지 가득한
오두막 안에 남자를 내팽개치고는, 다시 내려가 초소에서 남자의 갑옷도 살뜰히 주워다 챙겼다. 목숨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갑옷을 내팽개친 후 리오니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근처의 샘에서 물을
떠 온 후에도 남자는 의식 불명이었다. 리오니는 한숨 쉬었다. 어젯밤에 이마에 손을 댔을 땐 열이 불덩이
같았는데, 지금은 식은땀만 계속 맺히고 있었다. 다친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차갑다니.

“시체 치울 수도 있겠네.”

그렇게 툭 내뱉었지만 리오니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가운데의 화덕에 불을 피우고, 제 가방을 풀어
헤쳤다. 네모나고 커다란, 튼튼한 천으로 만든 가방은 야영할 때에는 담요로 쓰는 것이었다.

떠 온 물로 상처 부위와 얼굴을 대강 닦아 주고는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약초를 빻아 상처 부위에 뿌려


주었다. 담요를 덮어 준 후에는 오두막을 치우고, 방패 대신 쓰는 검은 무쇠 판을 화덕 위에 올렸다. 뭐라도
먹어야 했으니까.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냐.”

사냥꾼들이 쓰는 오두막은 연기가 땅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그게 참 다행이었다. 리오니는 코를 문지르고는 제게


남은 마른 식량을 모조리 판 위에 쏟아붓고 물을 부었다. 남자야 어차피 의식이 없어 먹지 못하니 저라도 배불리
먹어야 했다.

그래야 사냥을 할 수 있으니까.

“저기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 있어야 돼요. 알았죠?”

오두막의 문을 닫을 때마다 리오니는 그렇게 속삭였다. 남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근처에서 토끼 두어 마리를
잡고, 약초를 따다 매달아 말려 놓고, 다시 나가 물을 떠 오고, 한숨 잤다가 토끼를 다듬어 핏물을 빼 오고.
가죽은 따로 벗겨 말리고, 물 마시러 온 사슴을 쏘아 잡은 다음에 질질 끌고 오고. 소금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사슴 다리 한쪽을 지져 먹고.

일주일이었다. 하루 이상 머물러 본 적 없는 사냥꾼들의 오두막에서 리오니는 일주일 동안 거의 살림을 살았다.


잘 마른 토끼 고기를 들여다보며 사슴 고기는 훈제해야 하나? 하지만 훈제는 연기가 밖으로 보일 텐데……. 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남자가 눈을 떴다.

“아, 으, 아…….”

리오니가 놀라 후다닥 일어섰다. 남자는 흐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겨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라인, 하르트.”

그게 끝이었다.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리오니는 머쓱해져서 코를 문질렀다.

죽지는 않을 모양이네.

162 화

“……그러니까 이름을 모른다고요?”


남자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니는 눈을 부라렸다.

“라인하르트 아니에요? 기사님 이름.”

“……제 이름이 그겁니까?”

“미치겠네.”

리오니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남자가 눈을 끔벅였다.

그 뒤로 하루를 꼬박 더 앓다가 깨어난 남자는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반편이였다. 정신이 드냐, 어디
출신이냐, 당신 야만족들에게 납치되던 걸 내가 구했는데 어쩌구 하는 말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던 남자는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짜 내다가,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기가 막혔다. 아차 싶기도 했다. 본래 리오니의 계획은 남자가 깨어나면 출신지를 물은 뒤, 그곳까지 동행하는
것이었다. 혹은 남자의 부대가 근방이라면 거기까지 간 다음 사례금이라도 받아 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에 그 계획이 모두 무너졌다.

‘버리고 가면 안 되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오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남자가 제 얼굴을 본 뒤다. 누가 봐도 귀족인데 산속에
대충 버리고 갔다가 보복이라도 당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갑옷을 주섬주섬 챙겨다가 보여 주며 “나으리가 입고 계시던 물건인데, 못 알아보시겠어요?”라고 물었으나


남자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제국군 부대를 찾아다가 떠밀어 줘 볼까? 싶었지만 리오니는 제국군
부대가 어디에 주둔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게다가 무슨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결국 리오니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직 자리를 떨쳐 내고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보살펴 준 후 보내 버리는 것.

“야만족에게 납치되어 실려 가던 것도 정말 기억 안 나세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눈알을 굴리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쪽 분께서…….”

“리오니예요.”

“예. 리오니 씨가 저를 구해 주신 겁니까?”

리오니 씨. 그 간질간질한 호칭에 리오니는 멈칫했다. 리오니가 입을 닫은 동안 남자가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그러면 당신의 집입니까?”

“아, 그건 아닌데요.”

머리를 긁으며 리오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초소를 우연히 지나다가, 그를 보고 야만족을 쏘아 죽였다고.
초소에 쇠붙이를 주우러 갔다는 말은 비밀로 했다. 제국군 물건을 함부로 팔아 치우는 건 중죄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기억을 잃었다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런.”

그러나 남자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리오니의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면 제가 일어나야겠군요.”
하고 일어나다 덜컥, 무릎이 풀려 엎어진 것이다. 리오니가 놀라 그를 붙들어 부축했다. “허억…….” 아무래도
배의 상처가 심각했는지,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일어나세요?”

“무슨,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남자는 헐떡이며 답했다.

“야만족이 저를 업어 메고 가는 중이었다면, 그래서 당신이 그들을 죽였다면 저 때문에 그들에게 쫓기게 되실


수도…….”

“전 또 뭐라고.”

리오니가 기막혀하며 남자를 붙들었다.

“여기는 거기서 반나절은 떨어진 곳이에요.”

“하지만…….”

“저는 이미 여기서 나으리와 일주일 넘게 보냈다고요! 그냥 다시 누우세요!”

“아.”

남자가 당황했다. 그를 부축하는 바람에, 리오니는 새삼스레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게 됐다.
초췌한 데다가 거칠거칠한 얼굴이었으나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으스대는
이안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남자를 의식한 리오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그녀는 거의 떠밀듯이 남자를 자리에 눕혔다. 거친 손길에도
남자는 불만 하나 없이 리오니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이곳이 당신의 집이 아니라면 어디입니까?”

“여기는, 사냥꾼들이 공동으로 쓰는 오두막인데…….”

산을 타는 사냥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쉼터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암묵적으로 산에 쉼터를 구축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며 소중하게 사용했다. 누구라도 쉬어 갈 수 있는 곳이었고, 누구라도 함부로 오두막을 훼손해서는 안 됐다.
설명을 듣던 남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잘 쓰고 떠나겠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지만, 혹시라도 모릅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위험해지실 수 있으니 이곳을 떠나시는 게 어떨까요.”

리오니는 고민에 빠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씨구나 하고 냉큼 짐 싸서 떠나갈 상황이었다. 이 기사님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얼굴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다. 누가 봐도 귀족이 분명한 사람과 얽히는 건 평민들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리오니는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남자는 몸을 기댄 채 짤막하게 미안하다
말했다.

“도와드리고 싶은데, 제가 몸이 이렇군요.”

“괜찮아요.”

일주일 동안 널어 말렸던 약초 꾸러미를 돌돌 말아 남자의 손이 닿기 편한 곳에 올려 두었다. 말린 토끼 고기와


사슴 고기를 반으로 나눠 남자 몫으로 놔두었다. 아버지의 활, 화살. 그리고 손도끼와 주머니칼까지 다 챙겼다가,
남자 옆에 손도끼를 두었다. 남자가 민망한 듯 웃었다.

“거절하고 싶은데 솔직히 이건 달갑군요. 반드시 갚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디 사는지 아시구요.”

“아.”

그제야 남자가 입을 헤벌렸다. 리오니는 우두커니 서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리오니는 뒤돌아서서 “아! 젠장! 아!” 하고는 다시 남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기, 산사람들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예?”

“그러니까 산을 다니는 사람들끼리의 법칙인데요.”

사냥꾼들의 법칙이다. 산속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므로,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보았을 때는
반드시 도와줄 것. 한번 구해 준 목숨에는 책임을 질 것. 물론 은혜를 입은 사람들 또한 꼭 빚을 갚아야 했다.
리오니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늘 산사람의 법칙을 꼭 지키라고 당부했다.

“한번 구해 준 목숨에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예. 저 사실 그러기 싫은데요, 으!”

리오니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으리께서 나중에 나으리를 버리고 갔다고 화내실 수도 있고…….”

“제가 당신이 어디 사시는지 알구요.”

리오니의 말에 남자는, 아까 리오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리오니는 벌게진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선량한 인상의 남자는 분명 웃기 힘들 텐데도 옅게 웃고 있었다.

“안 그러겠습니다. 가세요. 하지만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 사시는 곳을 알려 주신다면 고맙겠군요.”

“……그, 나으리.”

“예.”
리오니는 풀 죽은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쓰레기 되는 거 아세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어휴. 앓느니 죽지.”

머쓱해하는 남자 옆에 리오니는 다시 활이며 화살통을 벗어 내려놨다.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리오니를 바라보며
말렸으나 리오니는 고개를 저었다.

“도와드릴게요. 걸어 다니실 수 있을 때까지는요.”

***

두 사람이 사냥꾼의 오두막을 나설 수 있었던 건 꼬박 일주일이 더 지난 후였다. 남자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회복했고, 오두막을 나설 때 상당한 식량을 짊어진 채였다. 본래 남자는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리오니와 헤어지려
했으나 리오니는 고개를 저었다. 근방의 지리도 모르면서 어딜 가겠냐는 핑계는 상당히 훌륭했다. 그리하여
남자는 어영부영 리오니의 집까지 따라오게 됐다.

“악, 이게 뭐야.”

리오니의 집은 보름 동안 폐허가 다 돼 있었다. 이른 봄이라 겨우 녹은 땅에 감자를 조금 쪼개어 심어 뒀는데


멧돼지가 다 파헤쳐 놓은 모양이었다. 밭뙈기라 하기도 민망한 땅이 다 뒤집어져 있었고, 집의 문도 반쯤 부서져
있었다.

“누가 습격이라도…….”

“곰이겠죠.”

기억도 없으나 기사였던 습관이 남아 있는지, 사방을 경계하는 남자에게 리오니가 한숨 쉬며 말했다.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돌화덕이 집중적으로 헤쳐져 있는 것이, 아무래도 리오니가 떠나기 전 구웠던 빵 냄새를 맡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화덕은 못 쓰겠네…….”

화덕 입구가 다 부서져 있었다. 떠나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리오니는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렇잖아도 단출한 집안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래도 그릇이나 집기 같은 것들이 나뒹굴거나 더러워졌을 뿐,
가구가 부서지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이거 원.”

다행이라는 생각 취소. 리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간의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부서진 문을 들어 올려 보고
있었다. 곰이 들어오며 문을 뜯어 놓다시피 했다. 경첩은 가뜩이나 비싼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다 휘어져 회생
불가였다.

“당장 오늘 밤에는 어떻게 하죠?”

“일단 기대 놔야죠……. 내일 대장간 한스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경첩 좀 고쳐 달라 해야겠네요…….”


“이걸 고칠 수가 있습니까?”

“두고 봐야죠.”

리오니가 경첩을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남자가 옅게 웃었다.

“하지만 밤에는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요.”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요. 괜찮아요.”

“울타리도 없는데요.”

남자가 집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밤까지는 제가 같이 있겠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리오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도 자그마한 사냥꾼들 오두막에서 함께 지냈는데,
제집이라고 다를 이유가…….

이유가…….

“리오니?”

남자가 그녀를 돌아봤을 때, 리오니는 뒤로 확 돌아섰다. 이상하게 민망하고 얼굴이 빨개져서였다. 초라한 집
안이 갑자기 눈에 밟혔다. 리오니는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손을 뻗어 나뒹구는 집기들을 챙겨 들었다.

“그, 그러려면 집부터 일단 치워야겠네요. 다행히 저희 아버지가 쓰시던 침대가 있어서…….”

“아, 도와드리겠습니다.”

남자가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리오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163 화

불운인지 행운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스는 대장간에 없었다. 정확히는 마을 남자들 전체가 봄 사냥을 나갔다고
했다.

“리오니, 너부터 가장 먼저 부르러 갔는데 집에 없더구나? 집이 엉망이라 곰이 내려왔다 싶어져 그이가 본래


두세 명이 가려던 걸 마을 사람들 다 불러 모아 나갔잖니!”

“예에…….”

“그렇잖아도 네 걱정 했는데 그이는 네 성질머리에 곰이 도망가면 도망갔지 잡아먹힐 일 없다고 농담을…….”

안나의 수다는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리오니는 예에, 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경첩을 골랐다. 고른다기도
뭐한 게, 딱 두 개 있었다. 그나마도 마을의 다른 아낙이 주문해 놓은 물건이었다.

“네 사정 얘기하면 이해하겠지, 뭐. 마을에 사는 우리와 네 사정이 같니? 곰이 내려와서 집 안 헤집으면 그만인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 혼자 경첩 달 수 있겠니? 그냥 그이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자는 게 낫지 않겠어?”

리오니는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요. 달 수 있어요.”

“그래그래.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못 하겠으면 언제든지 내려와라.”

“감사해요.”

경첩 값으로 토끼 가죽 더미와 열 개 남짓의 화살촉을 내밀었다. 안나는 이마를 찌푸렸지만 그야 위험한 곳에


다녀온 리오니를 걱정하기 때문이었지, 값이 모자라서는 아니었다. 잔소리 몇 마디를 더 듣고, 안나가 챙겨 준
풀 무더기까지 싸 들고 산으로 다시 올라왔다.

집 앞에 못 보던 나무토막 몇 개가 불뚝하니 서 있기에 저게 뭐야?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둘러봤다. 리오니의


눈에 때마침 저 위에서 나무를 메고 내려오던 남자가 들어왔다.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집 근방에 울타리가 하나도 없기에 좀 만들어 보려 했는데 나무가 모자라서…….”

나무가 모자라서 이걸 베어 왔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놀라서 말도 안 나왔다. 남자가 베어 온 것은


근방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였다. 아버지 말로는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 했다. 늘 베고 싶었으나
그걸 떠메 올 사람도 없어 돋은 가지를 잘라 내기나 했던 물건.

남자는 그걸 리오니가 내려간 새에 도끼로 찍어 쓰러트리고, 반으로 자른 다음 또 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그


둥치 네 개를 차례차례 어깨에 지고 내려온 것이다. 남자가 떠멘 나무둥치는 과장 조금 보태서 리오니 두 사람만
했다.

“기사님들은 다 이렇게 힘이 센가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배를 다치면 며칠은 재채기도 잘 못하던데. 이게 말이 되나. 리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어깨에 멘 나무둥치를 엿차, 하고 내려놨다. 쿵 소리가 났다.

말이 되나 보다…….

“곰에게 울타리가 소용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듯해서요.”

“그…… 네…….”

둥치 하나를 가져다 놓고 남자는 차근차근 그것을 쪼갰다. 아버지가 쓰던 장작 도끼를 남자는 마치 어린애들
장난감처럼 다뤘다. 하나를 다 쪼갠 후에는 리오니가 가져온 경첩을 가져다가 문에 대 보더니 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아빠가 늘 하셨는데……. 신기하네요.”


경첩을 대고 구멍을 표시했다. 그다음 표시 난 곳에 못을 두들겼다. 못은 비싸니까 신중하게 두들겨야 한다.
남자가 못을 박는 동안, 리오니는 곰이 휘어 놓은 경첩에서 못을 빼내 펴려고 애썼다. 휜 못도 도로 펴면 쓸 수
있으니까.

못을 박고 난 남자가 돌아보다가 씩 웃고는 리오니의 손에서 못을 받아다 대수롭잖게 손으로 한 번 구부렸더니


곧장 펴졌다. 그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리오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다만 남자가 만능은 아니었다. 경첩을 다 박고 나니 문이 반대로 달린 것이다. 경첩 방향을 잘못 본 탓이다.


리오니는 깔깔 웃었다.

“곰한테 어서 오십쇼, 하고 문 열어 주게 생겼네요!”

남자는 창피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귀족 나으리가 이런 걸 잘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다시 못을


뽑아내고, 경첩을 두개 다 달고 나니 그새 날이 다 저물었다. 기름칠하지 않아 삐걱거리긴 하지만 그럭저럭 잘
닫히는 문을 닫았다. 묽게 끓여 낸 수프를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리처럼 잘 먹었다.

“부친께서는 혹시…….”

“돌아가셨죠.”

남자의 눈빛이 안타까워져서 리오니는 손을 내저었다.

“몇 년 된 일이니 미안하다고 사과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오래된 일인걸요. 야만족에게 돌아가셨어요.”

남자의 눈이 집 구석에 있는 나무 침대로 향했다. 어젯밤 남자가 쓴 침대는 리오니의 아버지 것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쭉 비어 있었던 오래된 침대. 리오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으리도 저도 침대에서 잘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예에.”

식사를 마쳤을 때 남자는 입 열었다.

“울타리까지는 다 만들어 드리고 가도 될까요.”

리오니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볼이 뜨거웠다.

***

봄이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울타리는 진작에 완성됐으나 남자는 집 안의 온갖 삐걱거리는 물건들을


걸고넘어졌다. 새 식탁, 새 의자 다음은 침대였다. 리오니가 뒤척일 때마다 삐걱이는 침대를 고쳐 보겠다던
남자는 침대를 반쯤 부숴 놨다.

“처음에 만들 때부터 그랬다니까요.”


“미안합니다.”

리오니는 나으리라는 말 대신 남자를 펠릭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행운이라는 뜻이었다. 펠릭스는 멋쩍어하며
사과했다. “별수 없죠. 점심부터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리오니는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오고
있었다.

“다 먹고 오늘 저녁 전에 고쳐 놓겠습니다.”

“괜찮아요. 바닥에서 자면 되죠.”

그 말에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듯 펠릭스의 얼굴이 희한해졌으나 리오니는 펠릭스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부슬비가 점심까지 이어지는 걸 보고 마음이 급해진 탓이다.

“그것보다 저랑 같이 여름고사리순 따러 가요.”

“여름고사리요?”

“아, 그게요.”

봄꽃이 다 떨어진 직후였다. 이맘때쯤 북부의 숲에서는 여름고사리순들이 올라온다. 한여름이 무르익을 때쯤에는
팔뚝만 해지는 덩굴이지만, 이맘때에는 아직 여리여리한 그 순은 시장에서 꽤 비싸게 팔렸다.

금방 자라니 때를 맞추는 게 중요했다. 특히 이런 보슬비가 오는 날이 가장 좋은 때다. 아침에 비가 내리면


여름고사리순들이 땅에서 고개를 내미는데, 점심이 지나 저녁때쯤에는 이미 손바닥 한 뼘이 넘게 자라 있다.
그때가 가장 맛있기도 하고 비싸게 팔리기도 했다.

“여름고사리 한 바구니면 침대를 하나 살 수도 있다고요.”

“저도 같이 갑니까?”

“저 혼자서는 두 바구니지만 펠릭스까지 같이 따면 세 바구니는 딸 수 있을 테니까요.”

훌륭한 인력을 침대 수리 따위에 놀리면 쓰나. 남자는 고민하다가 리오니를 따라나섰다. 여름고사리를 따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손은 리오니보다 두 배나 크면서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리오니는 세 바구니를 생각했지만
해가 어스름해졌을 무렵에 두 사람이 든 여름고사리순은 네 바구니였다. 리오니는 방글방글 웃으며 앞서 걸었다.

“조심하세요.”

“예! 괜찮아요!”

“비도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그것도 괜찮아요!”

“추울 텐데…….”

이맘때 내리는 비는 별로 춥지도 않았다. 리오니는 눈을 깜박거리며 뭐 이깟 걸 걱정하냐는 듯 남자를 올려다봤고,


펠릭스는 머쓱한 듯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선량한 녹색 눈동자가 민망함으로 가득 차기에 리오니는 픽
웃었다.
“요즘 낮에는 더울 정도인걸요.”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펠릭스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리오니가 깡충깡충 뛰며 개울을 건넜다. 남자는 리오니를 따라 건넌 후에 겨우 미소 지었다. “저는 산에서


자랐는걸요. 한겨울의 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로 춥지도 않아요.” 곧 여름이 오면 정말 말도 못 하게 더워질
것이다. 문득 리오니가 입을 아, 하고 벌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델마릴에 슬슬 가실 때가 되긴 했네요.”

“……아.”

“날이 진짜 따뜻해졌잖아요. 그쵸.”

펠릭스가 이 집에 붙어 있은 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갔다. 리오니는 아직은 날이 추우니, 혹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하는 마음으로 남자를 구태여 쫓아 보내지 않았다. 남자 또한 집이 낡았다, 가구가 낡았다 하며 계속
머물렀다.

하지만 더 붙들기에는 핑계가 없었다. 펠릭스는 더없이 건강해져서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는 중이었다.
리오니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장작을 패고, 리오니보다 더 늦게 잠든다. 하여 리오니는 슬슬 초조해졌다.

사실 남자를 별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리오니는 처음부터 펠릭스가 자신과
어울리기엔 너무나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지만 남자에게는 시정잡배와는 다른 품위가 있었다. 평범한 놈팡이였다면 진작에 리오니에게 못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펠릭스는 리오니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건 물론, 그녀를 마치 공주처럼
모셨다. 황홀한 두 달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니는 슬슬 남자를 쫓아 보내야 한다 생각했다. 생각만 하기를 며칠이었으나, 오늘 오후


여름고사리순을 캐다 만난 마을의 아낙들이 <리오니! 정말 새신랑을 맞은 거야?> 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을 때
확실해졌다.

먼저 부정하고 나선 건 남자였다. <그런 것 아닙니다.> 보기 드물게 딱딱하게 부정하는 펠릭스의 말을 듣자마자


리오니는 손에 든 여름고사리순을 휘두르며 마구 성질을 냈다. <나으리가 곤란해하시잖아요!> 아낙들은 깔깔
웃으며 좋을 때다, 하고 순을 따러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과 갈 곳 없는 서먹함만 남았다. 하여 여름고사리순이
네 바구니나 되는 것을 보고 리오니는 괜히 더 즐거운 척 팔을 휘둘렀다.

“언제까지 여기서 제 신랑 소리 듣고 살 거예요?”

“뭐, 그거야…….”

“얼른 가셔서 신분 찾으셔야죠.”

그 말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리오니는 씩 웃고는 다시 걸었다.

“맨날 말로만 은혜 갚겠단 소리 하지 마시구, 신분 찾게 되시면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예?”
남자가 당황한 듯 반문했다.

“그리고 절 하녀로 쓰시면 좋겠어요. 사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는데, 제가 별로 솜씨 좋은 사냥꾼은


아니거든요.”

아주 큰 비밀이라도 말해 드린다는 듯, 선심 쓰는 척 농담하려고 휙 뒤돌던 리오니가 흠칫했다. 늘 부드럽게


웃고 있던 펠릭스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리오니와 눈 마주친 펠릭스도 놀란 듯했으나,
여느 때처럼 다시 웃지는 않았다.

“……별로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164 화

“아.”

머쓱해진 리오니가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그리고 눈을 피하며 쫑알거렸다.

“제가 하녀로 쓰기엔 좀 드센 성격이긴 하죠…….”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저도 알아요. 원래 저 밑의 영주님 하녀도 돼 볼까 싶어서 한 2 년 전에 간 적 있거든요. 세탁방


하녀를 구한대서요.”

펠릭스는 말이 없어졌다. 리오니는 민망함을 지우려 계속 말했다.

“그런데 제가 성질이 너무 드세다며 사흘 만에 쫓아 보내지 뭐예요. 빨래 못한다고 뭐라고 하길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했던 게 하녀장님 성질을 거슬렀나 봐요. 차라리 잘됐다고 그랬었어요. 저는 잿물
만드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그치만 봉급은 좀 아깝긴 했는데…….”

계속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뒤에서 나직하게 한숨 쉬는 것이 들렸다. 아이고 헛소리가 너무 길었나.


리오니는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두 사람 다 말이 없어졌다.

리오니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남자가 제게 희미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지는 좀 됐다. 그러나 신분
차이가 너무 났다. 한스는 남자의 갑옷을 보고 이건 자신 같은 대장장이는 엄두도 못 낼 솜씨로 만든 물건이라고
했다. 남자가 걸고 있던 은목걸이는 귀족 가문의 문장이 분명하니 신분을 찾는 것도 시간문제라 했다.

그러니 리오니는 남자에게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기억이 없는 남자에게, 자신이 크나큰 의지가 되었을 건
뻔했다. 연정을 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남자가 신분을 찾고 나면 그저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나
버릴 게 뻔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 다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름고사리순을 따느라 비 맞은 옷을 펠릭스의


것까지 들고 나가 바깥에서 짰다. 주르륵, 물이 떨어졌다. 어째 그게 제 그렁그렁한 눈시울 같아서 조금
속상해졌다.

부슬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갈아입은 옷도 곧 젖을 게 뻔하니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기가 싫었다. 괜히
옷을 몇 번이고 더 쥐어짜며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오니.”

“어, 잠시만요. 저 이거만 짜고.”

“리오니.”

남자는 리오니의 뒤로 곧장 다가왔다. 리오니가 뒤를 돌아보려는데, 펠릭스의 두툼한 손이 양쪽 어깨에 얹혔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

“제가 싫은가요.”

리오니는 그대로 굳었다. 리오니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라고는 하지만, 펠릭스는 그녀의 어깨에 어떤 힘도 주지
않았다. 돌아보려면 얼마든지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리오니.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 당장이라도 내려가 도시에서 제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하죠.”

“그, 예…….”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여기 내버려 두고 산을 내려가고 싶진 않군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굳어 있는 리오니 대신 남자는 천천히 돌아 리오니 앞에 섰다. 리오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다정다감한 눈,


단정한 얼굴. 머리는 정리가 안 돼 조금 길었지만, 봉두난발이라 해도 남자에 대한 리오니의 호감을 가리지는
못했다. 펠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리오니에게 속삭였다.

“리오니는 어떤가요?”

“……그.”

리오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싫지는 않아요.”

“……좋은 것도 아니라는…….”

“그게 아니고요.”

좋았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마을의 어느 누구보다 멋진 남자였다. 이미 사랑에 빠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오니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다른 말을 먼저 내놨다.

“귀족 나으리에게 하룻밤을 바치고 버림받은 평민 처녀 애의 이야기는 너무 흔하잖아요.”

“…….”

“제가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을 끝맺기가 힘겨웠다. 리오니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게 제 키가 너무 커서 리오니가


힘겨워하는 것이라 생각한 듯,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키가 어찌나 큰지 그렇게 서 있는
리오니와도 시선 차이가 많이 나진 않았다. 리오니는 다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축축해진 눈에서는, 다행히도
눈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근데 펠릭스, 당신이라면 그래도 좋을 거 같기도 하고…….”

되바라진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남자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한참이나 리오니를 올려다보던 펠릭스는


아까보다는 조금 편안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리오니. 저는 당신이 좋아요.”

“…….”

“제 신분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당신을 버리진 않을 거라 맹세합니다.”

“이미 결혼하신 분일 수도 있잖아요.”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초록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리오니가 픽 웃었다. 남자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군요. 제가 그런 파렴치한일 수도…….”

“아닐 거예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긴 해요.”

다시 고개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얼굴은 혼란스러웠다. 다만 리오니의 말 때문일까. 한결 여유가 돌고


있긴 했다. 남자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제 신분 말고 결혼 여부도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궁금해지는군요.”

“저도 그래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델마릴로 뛰어가고 싶어요. 그런데, 리오니.”

“네.”

“제가 돌아온 순간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요?”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리오니도 몰랐던 그녀의 마음을 남자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면,
리오니는 아마 그곳을 떠날 것이다.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될까 봐. 리오니는 가능성
없는 일에 미련하게 제 인생을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다.

펠릭스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리오니. 제가 떠나면 당신은 사라질 거예요. 그렇지요.”

“아닌데요…….”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으나 남자는 속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리오니의 손을 당겨 잡았다.
마치 도망치는 그녀를 구속하려는 듯.

“리오니. 제가 당신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저기, 너무 급하신 것 같은데…….”

“제 아내가 되어 주세요.”

급하다는 말에 돌아오는 소리가 아내가 되어 달란다. 리오니는 어쩐지 그대로 짜부라지고 싶었다. 자신이
토끼라면 토끼 굴에 숨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크고 따뜻한 손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고 있었고, 리오니는
대답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기, 저는 별로 예쁘지도 않고요…….”

“세상에서 가장 예쁩니다.”

“근본도 모를 계집앤데요…….”

“근방에서 가장 솜씨 좋은 사냥꾼 안톤의 하나뿐인 따님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귀족이고…….”

“제가 귀족이 아니면 싫으실까요?”

그 말에 리오니는 버럭 소리 지르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남자가 웃었다. 그제야 제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아차린 리오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아까 그러셨지요. 제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

“그…….”

“사실은 제가 기사의 갑옷을 훔쳐 입고 신세 고치러 달아나던 도망병일 수도 있잖아요?”

아, 그런데 이건 좀 큰 문제이긴 하군요. 한낱 도둑놈 따위라면……. 당신에게도 너무 죄송한 일인데. 만약


그렇다면 오늘부터 개과천선하고 살겠습니다. 안 될까요? 남자는 전신이 새빨개진 리오니를 앞에 세워 두고,
그따위 소리를 주절주절 해 댔다. 리오니가 붉어진 손으로 남자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펠릭스는 리오니의 손을
끌어당겨 한층 더 가까이 붙었다.

“안 될까요?”

남자가 재차 물었다. 리오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비장하게 펠릭스 쪽으로 고개 숙여 입 맞췄다.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고, 남자의 초록색 눈 안에 놀라움이 번졌다가 이내 기쁨이 들어찼다.

“난 몰라…….”

그렇게 말한 순간, 남자는 리오니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꺅,” 하고 리오니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리오니를 꽉 끌어안고 크게 웃었다. 펠릭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여름의 숲속으로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뒤이어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평생 잊어버릴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침대 하나가 부서졌어도 바닥에서 잘 필요 따윈 없었다.

***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순록 사냥에서 정신을 잃고 돌아온 지 사흘이었다. 서투른 기사 하나를 보호하려 가로막다가
순록의 거대한 뿔에 자신이 받힌 것이었다.

리오니는 디트리히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서 시종일관 입술을 깨물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부산스럽게 굴 펠릭스도, 둘째인 안톤도 리오니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기가 죽어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어린애들에게도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테니.

늘 사자처럼 큰 소리로 웃고, 태산처럼 큰 남자였다. 아픈 일 따위는 한 번도 없었다. 자랑스러운 루덴 대영지의


기사대장이었던 남자. 그 남자가 벌써 사흘째 정신을 잃고 있다니. 리오니에게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필 대영주도 자리를 비운 터라 리오니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었다. 대신 인편에 소식을 듣자마자, 수정문으로
자신을 진찰하는 의원을 보내 주었다. 의원은 몇 번이나 왔다 간 참이었다. <부상은 심하지 않은데……. 모를
일입니다. 기다려 보시죠.> 기다리라는 말도 몇 번을 들은 것인가. 리오니는 초췌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도 벌써 몇 번째인지.

헤이츠와 사라 부인이 이따금 들여다보고 갔다. 하지만 디트리히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딱히 해 줄 것도


없었다. 리오니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뭐라도 먹으라 권하는 정도였다.

<리오니는 어린 소녀처럼 마음이 여리잖아요. 많이 힘들겠지요.>

사라 부인이 한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혔다. 제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다. 여리다니. 그리고 그 직후 리오니는 깨달았다. 디트리히를 만난 이후로 리오니는 항상,
열일곱의 소녀처럼 살았다.

드세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산속의 리오니를 여리다는 소리까지 듣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야말로 디트리히
에른스트이거늘. 리오니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디트리히 에른스트!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팔자 좋게 누워 있어? 빨리 일어나지 못해요?

다음 순간, 기적처럼 남자의 눈꺼풀이 꿈틀댔다. “으윽…….” 리오니는 기함해 그 앞으로 달려들었다.

“디트리히! 디트리히! 정신이 들어요?”

눈꺼풀 사이로 녹색 빛이 들어왔다. 리오니는 거의 울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누구…….”

리오니는 이제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신이시여? 제가 감사하다고 너무 일찍 말씀드렸나요?

165 화
남자는 리오니를 아내로 맞은 뒤에도 델마릴로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 델마릴에 다녀오려면 너무 많은 날이
걸리고, 그렇다고 디트리히 혼자 다녀오자니 리오니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의원에게라도
한번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 우연히 마을에 들른 의원에게 그를 보인 적 있다.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다 또 어느
날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돌아오는 일도 왕왕 있다 했다.

<그렇지만 그 기억이 돌아오면 반동으로 기억을 잃었던 때를 또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지. 그러니까 주의해.>

그 의원의 말을 리오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디트리히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고 나서 보였던 여러
의원들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기억을 잃었던 사람들이 원래 기억을 찾으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다고.

늘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었던 말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올 게 왔다는 심정에 가까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태연해지지는 않았다.

리오니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한참을 울었던 터라 눈가가 아직도 발긋했다. 디트리히는 침대에 앉아
의원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가슴에 든 새카맣고 커다란 멍. “제가 순록에게 당했다고요. 허어.”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으니 당분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원은 디트리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이미 그가 그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리오니에게서 전해 들은 뒤였다.

“마지막 기억이 그럼 언제쯤이시지요?”

“그러니까, 글렌시아의 초소입니다. 저는 싸우고 있었는데…….”

힘든 전투였을 게 뻔했으나 남자는 굉장히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리오니를 쳐다보곤 했다.
낯설어서 그럴까. 진찰을 끝낸 의원은 혀를 차며 몇 가지 주의를 줬다.

“기억은 천천히 돌아오실 겁니다. 가끔 이런 일이 있지요. 추억의 신 파하카가 치는 장난이라고들 합니다만


신관들도 당장 기억을 돌아오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리오니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디트리히 에른스트를 만났던 당시 루덴 대영주가 가장 먼저 했던 일들 중


하나였으니까. 비싼 기부를 하고 신관을 불렀으나 신관들은 디트리히의 기억을 찾는 데 실패했다.

“당분간 안정이 필요합니다. 아시겠지요, 부인.”

“아, 예.”

약간 넋 놓고 있던 리오니를 보고 의원이 딱한 눈빛을 했다. 기억 잃은 에른스트 경과 그 부인의 연애담은 워낙


루덴에서 유명했다. 이제 다시 기억을 잃어버렸으니, 저 부인은 어찌하나― 하는 것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
리오니는 의원을 보내고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돌아섰다.

마침내, 그때까지도 그녀를 힐끗거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단정한 얼굴로 상체를 살짝 세워 앉아 있었다. 이마에도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을 흐려
놓지는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덕분에 감아 놓은 붕대가 속상했다. 여느 때였다면 당장 달려가서 갈비뼈 한
대를 더 부러트릴 기세로 미쳤냐, 당신은 목숨이 어디 두 개냐, 어쩜 그렇게 나랑 펠릭스, 안톤 생각은 안
하느냐 같은 소리를 쏟아부어야 마땅하겠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녹색 눈동자는 여전했다. 다만 그 눈동자에 담긴 빛은 그녀가 아는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리오니를 볼 때마다 그의 눈은 매번 햇살을 담은 것처럼 환하게 휘어졌다. 하지만 지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짝 눈주름이 진 눈가는 희미하게 의문을 띠고 있었다.

“7 년이 지났다고요.”

남자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리오니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당신이…… 디트리히 에른스트 경인 건 기억하세요?”

저도 모르게 나으리, 라고 말할 뻔했다. 어쩐지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만 같은 생경함 때문에. 리오니는


매끈한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이제 거친 손으로 그를 떠메며 투덜댔던 산골의 처녀 애가 아니라 루덴
대영주의 직속 시녀인데, 참 이상하지.

“예, 그런 질문을 받는 것도 이상하긴 합니다만……. 저는 디트리히 에른스트입니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은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일이 없다. 리오니가 쓴웃음을 지으려 할 때,
디트리히가 물었다.

“당신께서는 혹시 누구신지 여쭈어도 됩니까?”

“아.”

그를 보였던 최초의 의원이 했던 말을 리오니는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준비해 놓은 답도 있었다.
그 답은 매년, 매 계절 조금씩 바뀌었지만 대부분은 비슷했다.

“이곳은 루덴 대영지고요.”

“대영지요.”

“예.”

리오니는 눈알을 굴리다 말을 이었다. 에른스트 경께서 말씀하시는 전쟁은 이미 그때 끝났어요. 경이 다친 전투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답니다. 그때 이후로 루덴은 부쩍 몸을 불려 대영지가 되었어요. 지금 영주 각하…….
그러니까 라인하르트 델피나 린케 후작의 휘하에는 아홉 개의 영지가 딸려 있답니다.

리오니의 예상대로 디트리히는 크게 당황했다.

“그럼 저는 그동안 뭘 했습니까?”

리오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당신께서는 기억을 잃고 사시다가, 영주님께 발견되어 다시 영주님의 기사가 되셨지요. 그러다 얼마 전의


순록 사냥에서 크게 다쳐 기절하셨답니다.”

그 7 년간을 저렇게 말해도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말할 재주는 없었다. 당신은 기억을 잃으셨고, 제게
구해지셨어요. 우리는 산에서 같이 살았고, 당신은 여름고사리순을 따던 날 제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했지요.
그날은 부슬비가 내렸는데, 저는 온몸이 푹 젖었지만 아주 행복했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해 봐야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남자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영주님을 봬야 하겠습니다.”

“송구해요. 영주님께서는 지금 수도에 계십니다.”

“수도에요?”

“예. 수도에 계실 계절이라…….”

디트리히는 이마를 문질렀다. 영주들이 수도를 오가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루덴 대영주가 아이 때문에
수도에 가 있다는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괜찮으리라. 남자는 한참이나 제 상황을 되뇌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그쪽의 아가씨께서는 영주님의 시녀 되십니까? 실례지만 어느 댁의 아가씨이신지 제가 성함을 몰라


무례하게 부르게 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도 친절한 말투였다. 리오니는 디트리히가 제 쪽을 보는 눈동자를 보고, 하마터면 자상한
그녀의 남편이 돌아왔다 착각할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이름을 묻는 그의 얼굴에는 마치 애정처럼 보이는
호감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도저히 착각할 수도 없었다. 남자는 리오니의 이름을 모른다. 괜찮아.
준비했던 말이 있잖아. 괜찮아. 리오니는 심호흡한 다음 입 열었다.

“저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예?”

리오니는 정말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디트리히의 얼굴이 창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그런 적도 없다는 듯
곧장 벌게지는 그 얼굴을 보니 그녀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리오니는
차분하려 애썼지만, 기실 남들 보기에는 거의 울먹이지 않아 다행인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 이름은 리오니이고…… 당신과 결혼했습니다. 리오니 에른스트가 제 이름이에요…….”

“아.”

디트리히의 얼굴이 새까매졌다. 귀 끝까지 빨갛다 검어진 그 얼굴은 도무지 항상 태연한 제 남편의 것 같지가
않아 리오니는 슬퍼졌다. 그는 한참이나 넋 놓고 리오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입을 가리고 “아니,
그건……. 이건.” 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남자에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려 해 리오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가 미안하다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속상했다.
그렇지요. 역시 당황스럽겠지요. 갑자기 깨어나 보니 모르는 아내가 생겼다는 건.

디트리히는 이제 자신의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푸르르,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하는 그를 보며 리오니는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묘하게, 제 남편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는 소리를 들었던 때와 비슷한 심정 같기도
했다. 쥐라면 쥐구멍으로, 토끼라면 토끼 굴로. 그저 짜부라져 사라지고 싶은 심정을 당신은 알까요.

쉬시겠어요? 제가 다음에 올까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간신히 디트리히가 손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발긋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그러니까, 벌써 7 년이 지났고.”

“예.”

“참으로 다행히도 제가 여전히 영주 각하를 모실 수 있었던 거군요. 그동안에는 기억을 잃은 채였고?”

“예에.”

“그리고 당신을 아내로,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리오니는 이제 죽고 싶어졌다. 디트리히는 눈을 몇 번이나 껌벅이다가, 다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짐짓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겁니까.”

“……예에.”

“놀랍군요, 이건…….”

“놀라실 만도 해요. 그러니까, 원하지 않는 아내가 갑자기 생겨 있는 기분이라는 게, 그러니까. 싫으실 수


있겠으나…….”

“……예?”

그녀의 말을 멀거니 듣던 디트리히가 눈을 찡그렸다. 리오니가 흠칫하며 말을 이으려 했으나 디트리히가 더


빨랐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 되더니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 열었다.

“아뇨, 리오니. 그러니까, 이 이름이 맞지요? 맙소사.”

남자는 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신음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갈비뼈가 부러진 주제에 일어나려니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당연했다. 리오니는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가 남자의 등을 받쳤다. “조심…….” 눈이
마주쳤다. 리오니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 익숙한 녹색 눈동자가 밭은기침을 내뱉느라
찡그려졌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히 미소 지었다.

“아.”

리오니는 그 미소를 보고 바보처럼 그렇게 신음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앞에 있는 건, 디트리히였다. 그러니까,


리오니가 익히 알고 있는 디트리히. 기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녜요, 그게 아닙니다. 리오니.”

“…….”

“그게 아니라, 아, 이럴 수가.”

남자의 뺨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리오니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정하고 상냥한
음색으로, 천천히 속삭였다.

“일어나자마자 제 눈에 들어온 당신을 보고 천사인 줄 알았어요.”

“……예?”
“뒤늦게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도 이상하게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맙소사. 그런데 당신이 제 아내라고
하는 거예요.”

리오니는 넋 놓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제야 저를 힐끗대던 남자의 시선이 떠올랐다. 검어 보일 정도로 피가


몰렸던 붉은 얼굴도…….

“농담한 건 아니겠지요, 리오니? 아니라고 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제는 리오니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무슨 말을 섣불리
하려다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디트리히가 웃었다.

“놀라운데요.”

7 년 동안의 저는 당신에게 괜찮은 사람이었나요?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혹시 어쩔 수 없이 결혼하셨다거나 하면


안 될 텐데요, 음……. 그런 말들이 제 귓가를 떠다녔다. 리오니는 디트리히가 덮은 담요만 꽉 붙들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런 그녀를 본 디트리히는 부드럽게 담요를 쥔 리오니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싫지 않다면, 안아 보고 싶은데 제가 그럴 수가 없군요.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면 안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팔을 벌리는데, 대체 어떻게 그를 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리오니는 뒤늦게 울음을


터트리며 남자를 꽉 안아 버리고야 말았다. 디트리히의 커다란 손이 리오니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요,
걱정하게 했나 보군요. 제가 의사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낮고 다정한 음성이 리오니를
안심하게 했다.

다만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한바탕 울어 젖힌 후에 문이 벌컥 열리고 뛰어 들어온 아들 둘이었다. 다만


디트리히는 리오니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눈을 크게 뜨긴 했지만 곧장 더 크게 웃어 젖히고는, 두 아들을
함께 끌어안으며 짓궂게 속삭인 내용은 기가 막혔다.

그래요, 내가 이럴 것 같았죠. 이렇게 예쁜 아내가 있는데 아이가 다섯 명쯤은…… 둘뿐이라고요? 7 년 동안


저는 대체 뭐 했답니까? 뭐 그런 멍청한 놈이…….

결국 리오니는 디트리히의 등짝을 두어 대 때리고 말았다. 갈비뼈가 부서진 남편에게 내리는 처방치고는
가혹했으나, 그렇다 해도 좋은 일이었다.

166 화

외전 3. 꽃의 이름

아마릴리스 데파피나 알랑케스. 거대한 알랑케스 제국을 홀로 만들어 낸 여자에 대해 남아 있는 책이야 워낙


많았다. 환영궁에 당도한 빌헬름은 엄청난 양의 종이들 사이에 앉아서 황성 도서관의 사서를 동정하고 있는
여자를 마주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대체 사서에게 뭐라고 명령하셨지요?”

“라인.”

서슴없이 종이 더미 사이로 들어간 ‘위대하신 황제 폐하’는 책상 앞에 앉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 맞췄다. 라인하르트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짐짓 싫은 척 그를 밀어 냈으나, 남자의 팔은 그녀를 가둔 채
놔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입맞춤을 받아 준 뒤에야 남자가 슬쩍 밀려나 주며 투덜댔다.

“그런 게 왜 궁금하죠?”

“이 양만 봐도 짐작되니까.”

라인하르트의 손이 방대한 종이들을 가리켰다.

“아마도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대충 ‘초대제에 관한 기록은 모두 정리해 가져오라’고 분부를 내리셨겠죠.


그렇지요?”

“비슷한데요.”

“그리고 사서는 죽고 싶어졌겠고요.”

“어째서요?”

남자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고 그녀를 들여다봤다. 라인하르트는 남자, 빌헬름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낱 사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요? 언급만 살짝 되어 있는 것도 포함인가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아하.”

그제야 빌헬름이 알겠다는 얼굴이 됐다. 그만큼 기록들은 두서없고 양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책 한 권이 통째로
놓여있는가 하면, 귀한 종이를 반면도 쓰지 않은 것도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혀를 찼다. 종이가 아까워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덕에 내가 원하는 걸 대강 알아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겠군요.”

“제 기쁨이에요, 라인하르트.”

빌헬름은 그녀의 뺨에 다시 입 맞췄다.

“릴 알랑케스에 대한 기록이 지나치게 적은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당신의 마음에 찬다니 다행이군요.”

“마음에 찼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는데.”

라인하르트는 그리 말하며 그 종이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남부에서 진상된 귀한 종이에 빼곡히 쓰인 이야기들.


릴 알랑케스. 라인하르트와 빌헬름의 사이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들은 늘 불확실했고, 그럼에도 깊었다.
그러니 뒤늦게라도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너는 안 궁금해?”

“글쎄요, 궁금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집어 든 종이를 힐끗 쳐다봤다. 라인하르트가 대강이나마 알아낸 것들을 빼곡히 정리해 써
넣은 종이였다. 초대제의 이야기 따위보다는 저 글자들을 쓸 때의 당신 표정이 백배는 더 궁금하다고 말하면 화를
낼까?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겠구나.”

“정말요? 모를 것 같은데.”

종이를 들고 침대 위에 기대앉은 라인하르트에게, 빌헬름은 픽 웃으며 올라탔다. 그러나 무정한 그의 연인은 깔깔


웃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밀어 냈다.

“들어 봐.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전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제 인생의 운은 이미 다 쓴 것 같아서요.”

침대 위에 기대앉은 라인하르트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무심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대답한 남자의 행동은
무심하기는커녕 다정다감했다. 라인하르트의 옆에 앉아, 라인하르트의 어깨를 감싼 후 그 머리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라인하르트는 이제 거의 뒤에서 안기듯 한 자세가 됐다. 남자의 시선이 제가 든 종이에 박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입 열었다.

“데파피나 알랑케스. 출신지는 페드라사.”

“역사 수업은 황태자 시절에 지긋지긋하게 겪었는데.”

빌헬름이 툭 내뱉은 말에 라인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사 수업도 받았니?”

“당신께서 제게 주신 복된 경험 중 하나죠.”

말과는 달리 영 지긋지긋하다는 투였다. 그럴 만도 했다. 황실의 후계자 교육이 얼마나 지루하고 틀에 박혀


있는지 라인하르트 역시 알고 있었다. 황태자비 시절 얼마나 그 교육들이 싫었던가.

그렇지만 라인하르트는 제가 알아낸 놀랍고 안타까운 것들을 빌헬름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하여 그녀는 저를


안은 학생의 뺨에 입 맞췄다. 효과는 놀라웠다. 학생이 곧장 그녀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해 문제였지만.

“고작 열두 살에 일어나 페드라사의 영주를 처치하고 주변의 소왕국들을 정복한 것이 열네 살. 그 어린 나이에


어찌나 뛰어난 무용과 지혜를 갖추었는지 순식간에 소문이 났다고 하지. 빌헬름, 제발 내 말에 집중해 줄래?”

라인하르트의 뺨과 입술에 연신 입 맞추던 청년이 비죽 웃더니 툭 말을 던졌다.

“좋아요, 라인하르트. 당신은 열네 살에 뭘 했나요?”

라인하르트는 제 열네 살 시절을 떠올렸다가 신음했다. 순진무구하고도 철없는 그 시절에 그녀는 고작해야…….

“사과를 따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해서 디트리히에게 내려 달라고 울었지…….”

“귀여운데요. 전 그쪽의 열네 살이 더 좋아요.”

“어련하겠니.”

***
페드라사의 파피.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다.

성은 없었다. 저를 낳은 부모도 본 적이 없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생. 하여 고아들은 그녀를


파피라고 불렀다. 이름을 누가 붙여 주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페드라사의 영주는 주변 영지들과 비교하면 특별히 나쁜 영주는 아니었다. 그저 주변 영지들의 영주들이 하는


만큼만, 그 정도로만 영지민들을 대했다. 다시 말해 영지민들의 목숨을 파리처럼은 아니지만, 귀찮으면 치워
버릴 수 있는 소모품 같은 것 정도로는 생각했단 뜻이다.

페드라사의 고아들은 치안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영주의 병사들에게 죽임당하거나, 혹은 외부로 팔려 나갔다.
파피는 후자였다. 전생의 그녀는 영주에 의해 팔려 나가 항구 도시 여관의 여급이 됐다. 죽도록 부려 먹히고 안
죽을 정도로만 먹을 수 있는 인생을 십 몇 년쯤 살다가, 그 후에는 여관 주인에게 밉보여 또 배에 실렸다.

배에서 내린 후에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의 창관에 넘겨졌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선 곳이 창관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파피는 좋지도 않은 머리를 최대한 굴려 도망쳤다. 항구 도시에서 창관의 여자들이 맞이하는 최후를
익히 봤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도록 일하는 게 나았다.

피부에 열이 올라 발갛게 변하고, 머리가 다 빠지고. 맞아 죽는 건 개중에 나은 편이다. 종래에는 온몸의


구멍에서 고름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런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파피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창관의 주인은 그녀를 쫓으려 개와 건달들을 보냈다. 맨발에 피가 나도록 뛰었고,
어느 순간에는 그 피가 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땅에 도달했다.

보통은 그쯤에서 멈춰 설 것이다. 아니면 다른 따뜻한 곳으로 갈 궁리를 하거나. 하지만 밤새도록 쫓긴 파피의
귓가에는 개들이 짖는 환청이 계속됐다. 파피는 보이지도 않는 개에게 쫓겨 얼음을, 눈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그 산이 프람 산맥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였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네 번째 인생을 살 때쯤 알게 됐다.

아무튼 그 산을 오른 파피는 당연하게도, 용을 만났다.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

그 용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용들이 했던 일이라거나, 그리하여 몇백 년을 프람 산맥에서 살았음에도 제 둥지까지


온 용감한 인간 따위는 없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들은 당시의 파피에게는 잘 이해도 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도마뱀은 그저 공포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도마뱀이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 이상하게도 파피는 그 도마뱀에게 말을 붙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마뱀에게도 동정심이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고도 철저히 인간 위주인 추측도 함께. 놀라운 것은
파피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이다.

하여 처음으로 인간을 만나는 호기심 많은 용은, 온몸이 얼어붙은 데다가 바짝 말라 빈사 직전인 파피를 살려
두었다.

<파피?>

파피의 이름을 들은 용은 웃음을 터트렸다. 꺽꺽대는 듯한 이상한 소리였다. 집채만 한 용이 그렇게 웃는 바람에
바짝 마른 파피는 그대로 떼굴떼굴 굴러 프람 산맥의 골짜기로 떨어질 뻔했다. 용이 그녀를 집어 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미안. 그렇지만 그 말은 용들 사이에서는 좀 다른 뜻이라서.>


파피에게 용은 너무 무서웠고, 하여 무슨 뜻인지 그때 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파피는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아홉 번의 인생을 살고, 아홉 번째의 목숨을 다할 때까지 파피는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용은 그르릉거리며 말했다.

<대신 내가 이름을 지어 줄까.>

파피가 데파피나가 된 건, 용의 유머 감각이 조금 섞인 탓일 테다. 용들이 다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데파피나는


제 연인 말고 다른 용을 만나 본 적이 없었으므로.

데파피나는 용이 무서워 뭐든 넙죽넙죽 답했고, 용은 마치 인간이 개를 기르듯 데파피나를 귀여워했다.

……아마도.

용이 데파피나를 대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데파피나를 대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온건했다. 말을


섞고, 함께 잠에 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파피나가 자신과 동등한 존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하여
데파피나도 용에게 점점 익숙해졌다.

그런 둘 사이의 이야기를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다만 딱히 어느 기점이라고 짚을 수는 없는 긴


시간 이후로 둘의 관계가 변했다.

용은 어느 순간부터 데파피나를 조금 다르게 대했다. 기르던 개가 사실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두 발로 걸으면 그


주인은 개를 사람으로 대해 줄까? 열 명 중 아홉 명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개에게는 여전히 털이 나 있을 테니.
하지만 용은 남은 한 사람처럼 굴었다. 다시 말해 미친놈처럼 굴었다는 뜻이다.

데파피나는 제게 사랑을 고백하는 거대한 도마뱀을 보며,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것을 상상하게 됐다. 도마뱀은
어떻게 교미하더라? 그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데파피나가 도마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아였던 시절
페드라사에서였기 때문이다.

하여 데파피나는 거대한 공성용 화포가 제 몸에 쑤셔 박히는 상상을 하고 몸서리쳤다. 포탄 말고, 화포.

애당초에 이 도마뱀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기는 할까? 데파피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이어 자조했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데파피나도 같았다.

그러나 데파피나는 곧, 지나가던 남창이 한 사랑이라는 말에 간이라도 빼줄 듯 굴던 여관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달의 매출을 모조리 뜯고 사라져 버린 남창 때문에 데파피나에게 화풀이하던 그 수전노. 수전노가 돈을
내준다는 말은 심장을 내주는 것과 같다. 사랑은 몰라도 그건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데파피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당신의 심장을 내게 줄 수 있나요?”

167 화

용은 드래곤 하트를 내어 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게 왜 갖고 싶으냐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데파피나는
새로운 인생을 거머쥐었다.

<꼭 나를 찾아와야 해, 알았지?>


용은 데파피나에게 시간을 선물했다. 데파피나는 다시 페드라사의 고아로 태어났다. 아는 것이 없는 두 번째
인생은 허무하게 허비했다. 영주의 병사들에게 끌려가 맞아 죽은 것이다. 그래도 두 번째 인생에서 얻은 건
있었다.

무지렁이로 살던 데파피나는 제 인생을 다시 비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영주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


인생에서는 영주를 죽이는 데에 실패하고, 도망쳤다. 도시들 몇 개를 건너 자신이 알던 산까지 갔다. 그게 프람
산맥이라는 것도 세 번째 인생에서 알게 됐다.

대륙을 여행하며 데파피나는 사람들이 사는 꼴을 무수히 보았다. 남의 주머니를 깔끔하게 칼로 잘라 내어 훔쳐


내는 기술을 익혔으며 저를 위협하는 건달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힘이 부족해 흠씬 두들겨
맞았다. 용은 피멍이 든 데파피나의 얼굴을 보고 비늘을 세웠다.

제가 아끼는 개가 다친 꼴을 보고 분노한 용은 곧장 날아가 그 도시를 불태웠다. 데파피나는 용의 등에 올라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왜 예전엔 이렇게 하지 않은 거야?”

“굳이 쥐들이 사는 하수구를 찾아가는 인간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

데파피나의 세 번의 인생을 전부 지켜본 용은, 이제 그럴싸한 비유도 할 줄 알았다. 데파피나는 킬킬 웃으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너는 쥐새끼를 사랑하는 인간이란 말이지. 쥐에게 비스킷도 주고, 예쁜 목걸이도
채워 주고, 응.

“왜 내가 널 찾아가야 하는 거야?”

“시간은 용의 종복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새 인생을 주는 대신 나를 구속해야 했단다. 그것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시간과의 거래의 매개가 된 너뿐이지.”

용은 다정하게 설명했으나 데파피나는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예전에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지 않은가. 데파피나는 용의 목을 끌어안으며 항구 도시를 찾아가 불태워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여관의
주인은 용의 등에서 내린 데파피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실례지만 어, 어느 귀한 분이시온지…….”

달달 떨며 엎드린 여관 주인을 보며 데파피나는 흥이 식는 것을 느꼈다. 당연했다. 데파피나의 인생은


반복되었으나 항구 도시의 여관은 이번 생에서 데파피나의 인생에 섞여 들지 않았으므로. 데파피나는 용의 등에
도로 올라타 불타는 항구 도시를 바라봤다.

흥이 식은 대신 데파피나는 다른 재미난 것을 찾아냈다. 용의 등에서 내렸을 때 그녀 앞에 엎드린 것은 여관


주인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항구 도시의 영주도 와 엎드렸다. 데파피나는 인간들이 제 발 앞에 굴복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그래서 데파피나는 용의 목을 끌어안고 쥐새끼들의 소굴을 모조리 불태워 달라 부탁했다. 용은 흥겹게 대륙을
불태웠다. 예쁜 쥐새끼 하나를 손에 들고, 다른 쥐새끼가 사는 하수구를 무너트려 흙으로 메워 버리는 짓은 언뜻
보기에 아이러니해 보인다. 그렇지만 누구든 할 수 있는 짓이었다.

대륙 전역이 불탔다. 도시를 불태울 때마다 나와 비는 인간들을 볼 때면 데파피나는 뜻 없이 즐거워졌다. 이런


것이 갖고 싶었다며 금으로 덮인 반지를 끼워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마지막 도시가 불탔을 때,
데파피나는 흥미가 식었다. 용은 행복하게 웃었다.

“이제 우리 둘이 즐겁게 오순도순 살자.”

그렇게 말하는 용의 머리에서, 데파피나는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그리고 또다시 네 번째 생이 반복됐다.

그리하여, 열네 살의 데파피나는 지금 페드라사 성벽 위에 올라서 있었다.

페드라사 영주의 목을 손에 들고.

“개새끼.”

데파피나는 머리카락을 훅 불어 올렸다. 성벽 아래서 아우성이 들렸다. 피투성이인 어린 계집애를 보고 소리


지르는 자들은 아마도 페드라사 영주의 친지들일 것이다. 데파피나는 빙그레 웃었다.

“기분 더럽게 좋네.”

***

초대제의 인생은 정말이지 흥미롭고도 비인간적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종이를 넘겼다.

초대제는 순식간에 소왕국 서른여섯 개를 정복했다. 그리고 프람 산맥 바로 아래까지 진출했을 때가 그녀의 나이


불과 열여덟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람 산맥을 넘지는 않았다. 대신 다시 남으로, 남으로 뻗어 나갔다.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알랑케스 제국을 완성했을 때, 페드라사의 데파피나는 아마릴리스 데파피나
알랑케스가 됐다.

아름다운 데다가 지혜롭고 용맹하기까지 한 그녀를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물었다.
고아였기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으나, 족히 백 년은 산 듯한 현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는 술에
취해 웃으며 답했다. 자신은 여덟 번을 죽었다가 아홉 번을 되살아났다고.

“그 용이 초대제에게 아홉 번의 인생을 주었다고 했죠.”

“그래. 아마 그녀의 말은 진짜였겠지.”

라인하르트는 수많은 기록 안에서 아마릴리스 데파피나 알랑케스의 인생을 짐작해 봤다. 고작 열두 살에도 어떤
기사들보다 뛰어난 무용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 소왕국들의 약점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으며, 보통
사람은 평생에 걸쳐도 못 해낼 일들을 이룩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에서 그쳤으나
라인하르트는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용에게 기대어 두 번째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므로.

하여 라인하르트는 그 많은 기록들 사이에서 그녀가 살았을 아홉 번의 인생을 가늠해 보려 애썼다.

“징글징글했겠구나.”

“……아마도 그랬겠지요.”

“너는 동의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라인하르트가 한쪽 눈을 찡그리자, 빌헬름은 작게 웃었다.

“아, 라인하르트. 당신이 없는 인생은 한 번도 너무 많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시 가벼운 입맞춤이 오갔다. 지난하고도 괴로운 인생을 두 번이나 살아 낸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발견한 건 이거야. 초대제가 했던 말. 그녀는 평생 동안 프람 산맥에 올라가지 않았어. 하지만 루덴…….
제국의 북쪽에는 한동안 머물렀지.”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에게 안긴 채 종이를 읽어 내렸다.

아마릴리스 알랑케스는 30 대 후반에, 자신이 낳은 아이 중 하나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덜컥 제국 유람을 떠난다.


애인이 많았던 여자이기에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몰랐으나, 그녀가 낳았다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후계자가
제위를 물려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다시 제국 수도로 돌아온다. 그 기간 동안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물은


누군가에게 아마릴리스는 술에 취해 또다시 답한다. ‘날 죽인 연인을 만나 보려 애썼지.’ 날 죽인 연인, 이라는
그녀의 말은 알랑케스 제국을 일컫는 가장 시적인 말로 회자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을 다 바쳐 알랑케스 제국을 만든 그녀가 가장 사랑한 것이야말로 제국이었으나, 정작 아마릴리스는


제위 자체에는 큰 미련이 없는 듯 굴었기 때문이다…….”

“제왕이 나라를 사랑할 거라고 믿는 거야말로 사람들의 가장 큰 환상인 것 같은데요.”

“네가 그 말 하니까 정말 와 닿아서 소름이 돋을 것 같은데.”

빌헬름이 웃었다.

“당신이 있는 알랑케스는 사랑한다고 해 두죠.”

“나만?”

“으음…….”

빌헬름이 잠깐 신음하다가 아, 하고 입 열었다.

“당신과 빌로이, 비비까지.”

“조금만 늦었으면 애들이 서운했겠는데.”

“애들은 여기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빌헬름은 연인의 쇄골께를 간지럽혔다. 연인은 이마를 찡그려 보이며 웃다가 벌떡 일어났다.
빌헬름은 어리둥절해했으나, 그의 손을 잡고 이끄는 여인을 따라 순하게 걸음을 옮겼다. 환영궁의 방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두 사람을 따라 나섰으나 빌헬름이 손을 내저었다. 시종들이 울상 지었으나 젊은 황제는 루덴
대영주와의 시간을 남들이 방해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네 번째 인생에서 데파피나는 역시 세 번째 인생의 선택은 옳았으며 또한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데파피나는


지배욕을 자각했으며, 지배할 인간이 없는 대륙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용 앞에서 죽어 버린 건 옳지 못한 선택이었다. 용은 열여덟 살에 프람 산맥을 올라온 데파피나 앞에서
바들바들 떨며 울었던 것이다.

제 앞에서 데파피나가 죽는 꼴을 본 용은 충격에 몸부림쳤다. 그녀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의 구속


때문에 찾아가지 못했다. 400 년도 우습게 흘려보내던 용은 데파피나가 찾아오기까지 걸린 4 년을 억겁처럼
느꼈다.

서른여섯 개의 소왕국 연맹은 프람 산맥을 홀로 오른 그들의 대영주가 거대한 용과 함께 내려왔을 때 기적이라고


울부짖었다.

용은 단 한 순간도 데파피나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데파피나로서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연맹의 한 기사와
정분이 나자 용은 그 기사를 발끝으로 눌러 죽였다. 데파피나가 그 기사와 단둘이 있고 싶다 말했기 때문이었다.

데파피나는 용에게 번식의 욕망이 있는지에 관해 결국 조심스럽게 묻고야 말았다. 용은 물었다.

“인간들은 그렇게 어렵게 말 안 하던데.”

“……그러면.”

“사랑한다고, 그러던데.”

데파피나는 다시금 공포스러워졌다. 용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너는 용을 낳지 못해. 죽고야 말 거야.”

안심이 찾아들었다. 용은 다시 입 열었다.

“대신 인간이 될 수는 있어.”

용은 자신이 눌러 죽인 기사로 변신했다. 데파피나는 용을 찢어 죽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를


악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너는 이 인간을 사랑하잖아. 그러니 내가 이 인간이 된 건데.”

용은 시무룩해졌다. 데파피나는 입 끝을 간신히 끌어 올리고 용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용은 신기한 듯이 두


손을 들어 데파피나의 등을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인간이 되니 좋구나. 진작 이렇게 할걸.” 이전에 용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더 놀라웠으나, 데파피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키우는 쥐새끼를 사랑하기에
쥐새끼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용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나니, 용의 어깨 너머로 으깨진 기사의 시체가 보였다. 데파피나는 구역질이 났다.

대륙의 모든 왕국이 용을 대동한 대영주를 적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데파피나는 무적이었다. 전쟁터에서 용은
데파피나 근처에 오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데파피나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골몰했다. 용 앞에서 스스로 죽을 수는 없었다. 용은 데파피나가


다시 그렇게 한다면 시간과의 약속을 깨고 죽음의 신과 거래하겠다 엄숙히 선언했던 것이다. 스스로 죽는다면
다섯 번째 인생은 없을 것이다.
하여 데파피나는 용을 유혹했다. 용은 결국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와 교합했다. 데파피나가 끈질기게 사랑을
노래하니 데파피나를 사랑하는 용은 그것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너는 용을 낳지 못해, 너는 죽고야 말 거야……. 그 말대로 됐다. 데파피나는 제가 잉태한 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죽었다. 용은 미쳐 버렸다.

하지만 데파피나는 용이 진작 미쳐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쥐새끼와 교합하길 원하는 인간은 보통


미쳤다고 하니까 말이다.

168 화

데파피나의 다섯 번째는 조금 더 간단했다. 영주를 죽이고, 소왕국을 통합하고. 이미 알고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아주 쉬웠다. 쉽다고 생각했다.

연맹의 기사를 눈으로 좇자 용이 고개를 기울였다. 데파피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용은 데파피나에게 물었다.

“왜 저자를 자꾸 쳐다보지?”

데파피나는 당황했다. 기억을 못 한단 말인가? 그러나 데파피나는 곧장 납득했다. 미쳐 버린 자의 기억이 온전할


리 없다. 하여 데파피나는 말을 고르기 위해 무지하게 애썼다.

“아는 사람하고 닮은 것 같아서.”

“누구? 내가 본 네 인생에는 저자와 닮은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얼굴을 얘기한다기보다는……. 그냥. 인간은 봄의 새순을 보면서 겨울을 추억하기도 하는 동물이잖아.”

“그러니.”

용은 크릉크릉 소리를 내고는 데파피나를 꼬리로 감아 제 머리 위에 올렸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 하늘을 날까?”

“아니, 싫어.”

“왜? 처음의 너는 하늘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하늘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지상이 다 내 아래 있는 기분이 좋았다. 늘 남들 발밑에 엎드려 있었던 내가


남들을 내려다본다는 그 역전이 까무러치게 행복했다. 그런 것들을 설명하면 너는 뭐라고 할까? 데파피나는
설명하고 싶지 않아져 입을 다물었다. 용은 갑작스레 말이 없어진 데파피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왕국이 널 화나게 했니? 아니면 널 적으로 규명한 그 인간들 때문에? 내가 가서 불에 태울까? 하지만 너는 그런
건 너무 쉽다고 싫어해…….”

“아마릴리스.”

데파피나는 용의 이름을 불렀다. 용의 몸에는 붉은 색의 줄이 몇 개 가 있었고, 그것은 프람 산맥 이곳저곳에


피어 있는 꽃을 닮았다. 그래서 데파피나는 용을 꽃의 이름으로 불렀다. 용은 눈알을 굴렸다.
“너 혹시 작아질 수 있니?”

“작아져? 얼마나?”

고민하다가, 문득 눈에 띈 떠돌이 개를 가리켰다. 전장의 막사에 기어들어 와 병사들의 식사를 얻어먹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개. 용은 크릉크릉 콧소리를 내며 웃더니 순식간에 작아졌다.

“이거면 돼?”

“그래.”

데파피나는 용을 안아 올렸다. 차가운 비늘의 표면은 벨벳처럼 부드럽고도 딱딱했다. 용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즐거워했다.

“늘 내가 널 태우고 다녔는데, 이거 정말 신나는구나!”

“그래?”

“응!”

데파피나는 제 품 안에 들어온 용을 내려다봤다. 노란 눈을 희번덕거리는 용은 정말로 제 애완동물 같았다.


어쩐지 더러운 기분이 조금 가시는 듯도 했다. 작고, 자신만을 따르는 자그마한 용.

“그럼 맨날 이 크기로 있어.”

“네가 원한다면야!”

용은 신이 나 깍깍 웃다가 켈록, 하고 기침했다. 그 순간 화르륵 목 안에서 불꽃이 튀어나와 데파피나가 땋아


내린 금발을 태웠다. 툭, 하고 땋은 머리 타래가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졌다. 그 끝이 다 타서 꼬불꼬불해져
있었다. 데파피나는 용을 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머리끝을 만져 봤다. 허리까지 오던 금발은 어깨 길이가 됐다.
그 끝이 다 탄 채로. 바삭거리는 재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졌다.

“어…….”

용이 눈치를 봤다.

“도로 길게 해 줄까?”

한낱 인간의 머리카락을 길게 해 주는 것은 용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데파피나의 기분이 순식간에


저조해진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제 품에서 아무리 자그마하고 귀엽게 굴어도 이것은 용이었고, 그녀 따위는
용의 기침 한 번에 죽을 수도 있었다.

애완동물은 그녀인데, 기껏해야 크기가 작아졌다고 그렇게 안도하다니.

놀림당한 기분이었다.

데파피나는 다른 것에 골몰했다. 데파피나를 적으로 규정한 왕국을 쳐부수었다. 용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말해
두어 용은 늘 데파피나의 전쟁을 관조했다. 하지만 그것이 기만이란 사실을 데파피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용
덕분에 절대로 죽지 않았으니까. 데파피나에게 날아드는 모든 화살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불타
사라졌다. 누군가는 그녀를 불멸의 여신이라고 불렀고, 또 누군가는 그녀를 마녀라 불렀다.
다섯 번째 인생에서 데파피나는 처음으로 제국을 만들었다. 대륙의 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제국의 이름을 두고
데파피나는 용에게 말했다.

“네 이름을 붙일 거야.”

“아마릴리스?”

“그래.”

용이 좋아했다. 데파피나는 조심스럽게 용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결혼할 거야.”

“결혼?”

“그래. 하지만 사랑해서 하는 건 아니야.”

데파피나는 용을 설득하려 애썼다. 이만한 제국을 건설했잖아. 아이가 있어야 해.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나는 결혼해야 해. 상대를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야. 용은 납득하지 못했다.

“네 뒤를 왜 이어?”

“나는 인간이잖아.”

“데파피나.”

용은 노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네 뒤를 이을 인간은 필요가 없어. 나는 죽음과 거래할 테니까.”

“……내게 불멸을 주겠다는 이야기야?”

“응. 네가 원할 때에.”

“……내가 원하지 않으면?”

데파피나의 말에 용은 침묵했다. 용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용은 한참 후에야 입


열었다.

“인간은 만족을 몰라.”

“아마릴리스.”

“너도 틀림없이 원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안아 줘. 용은 조그만 몸뚱이를 데구르르 굴리며 칭얼거렸다. 데파피나는 용을 안았다. 속에


불을 품고 있는 몸뚱이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네가 아이를 낳는 건 싫어.”


“용을 낳을 것도 아니잖아.”

데파피나의 네 번째 죽음을 용은 기억하지 못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결국은 데파피나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야 말았던 제 멍청함이 싫은 것인지.

용은 처음으로 데파피나에게 화를 냈다.

“인간은 아이를 낳다가 죽어!”

“아마릴리스. 네가 준 시간은 아직도 네 번이나 남아 있어.”

용은 어느새 죽음을 과정으로 치부하게 된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용이 아마릴리스의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 줄 거야.”

“…….”

“내게 이름을 붙여 줬던 것처럼.”

“아마릴리스.”

“제국에 내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그 애의 이름도 내 이름이 되진 않겠지.”

데파피나는 입을 닫았다. 용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저 데파피나를 사랑하여 멍청하게 굴고 있을 뿐이었다.


시야가 가려진 것처럼, 그녀가 키우는 개처럼……. 미쳐 버린 바람에 군데군데 구멍 난 기억을 누더기처럼 기워
놨다 해도 용은 용이었다.

“그리고 넌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거야. 사랑이 나쁘다는 게 아냐. 나도 알아. 넌 사랑하는 것이 많지. 네가
만든 이 인간의 나라가 그렇지. 네 침대도 좋아하지.”

“…….”

“하지만 그중에 제일 사랑하는 건 나잖아.”

“내가 널 사랑한다고?”

용은 슬프게 울었다.

“부정하지 마. 너는 날 사랑해.”

데파피나는 충격받았다.

그녀는 늘 용이 끔찍했으며 버겁다 느꼈다. 하여 용이 그렇게 말한 순간, 그 말을 부정하고 싶어졌으나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분노할 용이 두려워져서가 아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데파피나는 확신했다. 자신이 용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다시는 인간으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데파피나는 침착하게 용을 두고 일어섰다.
“우리 둘 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다. 아니, 너는 지혜로운 용이니 필요 없겠지만 나는 필요해. 그러니 나를
잠깐 놔둬 줄래?”

“그래.”

용이 구슬픈 목소리로 답했다. 데파피나는 사흘을 바깥에서 보낸 후 다시 용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마릴리스, 궁금한 게 있어.”

“말해.”

“네가 인간이 될 수는 없니?”

용은 데파피나를 한참이나 무감하게 바라봤다. 데파피나가 용을 본 중 가장 차가운 시선이었다. 한참 후 용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무서워.”

“아마릴리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간이 되었을 때, 네가 날 버리고 떠나도 손쓸 수 없을 무력함이 싫어.”

“날 사랑하잖아.”

“데파피나.”

용이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럴 때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거란다…….”

“…….”

“비록 그게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용은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데파피나는 차라리 그 눈물에 잠겨 죽고 싶어졌다.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다섯 번째 인생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데파피나는 어쨌든 그것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과정일
뿐인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기 직전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파편들은 늘 같았다.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 웃던
아름답고 커다란 것, 바람에 요동치던 흰 몸의 붉은 줄들, 손끝에 닿던 뜨거운 온기. 그 머리 위에 올라앉아
느끼던 차가운 바람과,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던 안온한 것들.

다섯 번의 인생을 통틀어 데파피나를 안아 준 것은 용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죽어 가며 깨달았다. 그러니


그렇게나 길들여진 개처럼 용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섯 번째 인생에서 그녀는 용을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용의 이름을 제게 붙였다. 누군가가 저를 아마릴리스의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데파피나는 밤새 울던 용의 울음소리를 기억했다. 겨울밤의 낙엽들이 바람에 섞여 찢겨
나가는 것과 비슷하던 그 소리.

데파피나가 찾아오지 않아 미쳐 버린 용은 마물들을 부렸다. 용의 둥지를 지키던 마물들은 내려가 제국민들을


습격했다. 마물 때문에 고통받는 제국민들에게 용은 전언을 보냈다. 제국의 여제가 제게 찾아온다면 프람의
눈보라와 마물들을 모조리 없애 주겠노라고.

한 번만 찾아와 줘. 내가 싫어? 그러면 너를 위해 죽을게. 프람의 눈을 멈춰 줄게. 용들이 나를 지키기 위해


남긴 마법도 전부 부수어 줄게.

한 번만 보여 줘, 너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인생에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용은 그렇게 저열해졌다. 연인이
손가락에 끼고 있었던 별것 아닌 반지 하나를 매만지며 제 목숨과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미치광이가 저열해질 수 있느냐 묻는다면, 용이 제 수준을 인간으로 낮추었다는 것이 그 대답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여제는 용에게 괴롭힘당하는 제국민들을 외면했다. 프람 산맥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 제국 강령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프람에는 가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인생이 중년에 접어들기도 전에, 데파피나는 프람 산맥을 오르고야 말았다.

지독히 차가운 겨울 산을 오르며 데파피나는 용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미쳤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미친
인간의 비루한 인생에 엮여 버리고야 만 아마릴리스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착한 영원한 봄의 분지에서, 데파피나는 용에게 죽임당했다.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찾아오지 않던 연인을 보고 용은 제 사랑을 저주하게 된 것이었다.

저를 끊임없이 갉아먹는 것이 사랑이니, 그녀를 죽이면 될 것만 같았다. 하여 돌아 버린 용은 얼음의 창으로


데파피나를 꿰뚫었다. 데파피나는 죽어 가며 웃었다.

“다시 만나.”

누워서 올려다보니 햇살 아래 반짝이는 금발이 보기만 해도 싱그러웠다. 데파피나의 모습으로 둔갑한 용은 손으로
스스로의 심장 부근을 피가 나도록 박박 긁었다. 죽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용은 손을 멈췄다. 이미 심장
부근은 반쯤 갈라져 피가 줄줄 흘렀으나 용은 죽을 수 없었다.

죽어 버리면 다시 데파피나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169 화

어슴푸레한 저녁이었다. 영원의 샘 또한 조용했다. 그 앞의 회랑까지 단숨에 나아간 라인하르트는 어떤 조각상


앞에 멈춰 섰다. 빌헬름도 그 조각상을 올려다봤다. 초대제가 조각가에게 주문했다던 조각. 가슴에 단창이 박힌
아마릴리스 알랑케스가 프람 산맥의 마물들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프람 산맥에서 이미 한 번 죽었던 거야.”

라인하르트는 그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빌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아마릴리스의 반지를 언제 되돌려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했죠. 어쩌면 한 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요.”

“아홉 번의 인생을 주었으나, 그중에 몇 번을 프람에서 죽었는지 우리는 모르지.”


“기록에 남은 건 아홉 번째의 인생뿐일 테니까요.”

라인하르트 또한 빌헬름에게 용에 대해 들었던 바였다.

빌헬름에게 두 번째의 인생을 준 용은, 미치다 못해 죽음만을 갈망하는 상태였다. 스스로 죽을 수도 없어


빌헬름에게 목숨을 내어준 용.

끊임없이 아마릴리스를 기다렸다 생각했으나 어쩌면 용은 아마릴리스가 제게 돌아온 것조차 잊어버렸으리라.

“아니면 자신이 죽여 놓고 되돌렸을지도 모르죠.”

빌헬름은 평이한 어조로 라인하르트의 말에 반박했다. 라인하르트가 흠칫하며 빌헬름을 올려다봤다. 빌헬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미친놈의 머릿속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에요, 라인하르트.”

한때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죽여 버리고, 끝을 내자. 범해 버리자. 부숴 버리자…….

“제가 용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에요?”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를 살 수 있었다면 빌헬름은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아니,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틀림없이 그리했으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대신 빌헬름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빌헬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입 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일곱 번째의 데파피나는 페드라사의 영주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열두 살의 몸으로 프람 산맥을 올랐다. 용은


데파피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네가 보고 싶어서.”

“머리색은 왜 그래?”

데파피나의 모습을 한 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곱 번째로 다시 사는 데파피나의 머리카락은 희게 세어 있었다.


데파피나는 빙그레 웃었다.

“프람의 겨울 산처럼 되었네. 너무 어린 몸으로 올라와서 그런가 봐.”

“불쌍한 나의 데파피나. 아니, 릴.”

용이 뜨거운 몸으로 데파피나를 안았다. 차갑게 얼었던 몸이 녹았다. 데파피나는 웃으며 울었다. 용에게 붙여 준
이름이었으나 용은 그녀에게 이름을 돌려주었다. 다 줄게. 다 돌려줄게. 그러니까 나 하나만 사랑해 줘. 제발.
온몸으로 발버둥 치는 용이 가엾고 불쌍했으며 지독히 사랑스러웠고, 끔찍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인생은 평온했다. 데파피나, 아니 아마릴리스가 두 번의 인생 다 프람의 분지에서
평생토록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드라사의 영주는 쓰레기로 일생을 끝마쳤다. 서른여섯 개의 소왕국은
연맹을 결성하는 일 없이 저들끼리 치고받았다. 아마릴리스는 영원한 봄의 분지에서 그대로 나이 먹어 노인이
되었다.

“아직도 불멸을 원하지 않아?”

“응, 그리고 내게는 아직도 네가 준 인생이 남아 있잖니.”

용이 눈을 깜박였다. 분지 안에는 아마릴리스와 그가 살아온 증거가 가득했다. 낡은 옷장, 거울과 화덕, 식량들.
그중 자그마한 침대 위에 누운 노인은 너무 작고 말라서 곧 소멸할 것처럼 보였다.

“몇 번 남았더라? 두 번? 세 번인가? 두 번이다. 그렇지?”

용의 기억에 남아 있는 구멍을 기워 주지 않고 노인은 미소 지었다.

“또 봐.”

또 봐, 다시 만나. 용은 노인의 주름진 손에 코끝을 문질렀다. 이내 손끝에서 힘이 빠지고, 그 온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노인은 빛이 되어 빠르게 흩어졌다. 용은 흥얼거렸다.

또 봐.

또 봐, 데파피나.

아홉 번째의 인생.

아마릴리스 데파피나 알랑케스는 죽을 때까지 용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수정을 사들였다. 화폐를 만들었다. 수정문을 만들었다.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들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는 문을.

***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빌헬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빌헬름은 어쩐지 창피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으나, 그의 연인은 곧장 걸어와 그의 턱 밑에 섰다. 결국 빌헬름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늘 그렇게 제게만 상냥하시죠.”

“그게 아닌데, 빌헬름.”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제가 당신한테 저지른 짓거리만 해도…….”

“빌헬름.”

라인하르트는 가볍게 빌헬름의 뺨을 두들겼다. 빌헬름이 흠칫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라인하르트는 계속 들고


있던 종이를 슬쩍 흔들어 보였다.

“아마릴리스 알랑케스는 중년의 나이까지 제국을 끊임없이 유람했다고 되어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혹한지의
폐서]는 그 기록을 전면으로 부정하지. 아마릴리스는 루덴에 있었을 거야. 이런 기록을 쓸 정도면…… 어쩌면
루덴에서 몇 번의 인생을 거쳤을지도 모르지.”
“그거야 진작에 우리가 얘기했던 일이죠.”

“그래. 아마 루덴에서 꽤 머물렀겠지. 그리고, 빌헬름.”

라인하르트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낭만으로 가득 찬 말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인하르트는 확신했다.

“루덴은 프람 산맥에 가장 가까운 영지야.”

“…….”

“그녀가 루덴에 머무르면서 자신에게 아홉 번의 생을 되돌려준 용을 계속해 그렸으리라 생각해, 나는.”

빌헬름과 달리 라인하르트는 용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빌헬름의 말마따나 용이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


라인하르트는 모른다. 다만 라인하르트는 아홉 번의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람이 가장 잘 보이는 영지인
루덴에 머무른 여자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자신을 죽였던 연인을 그리워한 여자. 아마릴리스 알랑케스는 말년을 제국 수도에서 보냈으나, 그 삶의 궤적 속
몇 군데는 드물게 불명확했다. 쉼 없이 연인을 갈아 치워 문란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그 또한 외로움의
증거일지 모른다.

“내가 너무 합리화하는 걸까? 재미없니?”

“아뇨, 라인하르트. 흥미로운걸요.”

“넌 내가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 말도 안 해도 흥미로워할 거잖니.”

“누워 있다고요.”

라인하르트가 코를 찡그렸다.

“그쪽이 흥미로운 거니.”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요.”

“누가 못 하게 하는 건데…… 아니, 말하지 말렴.”

“전 말하고 싶은데요.”

“하지 마.”

기다랗고 우아한 손가락이 황제 폐하의 입을 꽉 막았고, 황제 폐하께서는 더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꺅, 하고 라인하르트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남자는 짓궂게 여자를
끌어안았다.

“저는 제가 아무 말 못 하는 쪽이 더 좋지만요.”

“말하지 말라니까.”

“좋아요, 저는 입 다물 테니 당신께서 말씀하세요.”


라인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빌헬름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손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녀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반지, 용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게 되었다 했지.”

“그렇지요.”

“그렇다면 아마 초대제는 프람 산맥에 올라가 한 번은 죽었을 거야. 읏, 빌헬름.”

라인하르트는 말하다 말고 놀라 저를 안은 남자를 밀어 냈다. 빌헬름이 제 뺨에 입 맞춘 후에 혀를 내밀어 상처를


핥았기 때문이다. 빌헬름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흥미로워하는 중이에요.”

“내 말 재미없니?”

“그쪽도 재미있게 듣고 있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귀를 깨문다. 라인하르트는 남자의 가슴을 퍽 하고 두들겼으나 그녀보다 두 배는 큰 남자를


그렇게 가소로운 동작으로 밀어 낼 수 있을 리 없다.

“여기 회랑이야.”

“그리고 당신께서 내 아이들의 어머니라는 건 황성의 쥐새끼들도 알죠.”

“하지만 나는 그 쥐새끼들에게 낯부끄러운 장면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은 쥐꼬리만큼도 없! 단! 다!”

마지막 음절마다 퍽, 퍽, 퍽 하고 가슴을 두들겼다. 그제야 빌헬름이 혀를 차며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뗐다.

“그거 알아요, 라인하르트?”

“또 뭐?”

“저는 사실 좀 보여 주고 싶기도 해요.”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대번에 새빨개졌다.

“미쳤니!”

빌헬름이 킬킬거리며 떨어졌다.

“세상 사람들한테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소리 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요.”

“소리 지르는 것도 충분…… 아니 소리 안 질러도 충분해!”

소리 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그녀의 연인은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소리치고야 말 것이다. 제 연인을
이제 어느 정도는 안다고 할 수 있는 라인하르트는 서둘러 말을 고쳤고, 빌헬름은 정말로 아쉽다는 얼굴이 됐다.

프람을 정복하려던 여자의 걸음은 그리하여 루덴에서 멈추었다. 자신을 죽이고야 말, 사랑하는 연인을 프람에
두고.
그리고 시간에 발이 묶여 버린 용은 그대로 프람에서 홀로 몇백 년을 지냈다.

“<죽고 싶으나 네 손으로 차마 죽지도 못하는 날이 너에게도 꼭 올 것이다>. 그 용이 제게 했던 말이었죠,


라인하르트.”

“…….”

“그리고 저는 용의 둥지 가운데에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지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은데, 나


스스로는 죽지도 못하는 상황 말이에요.”

라인하르트는 속상해져 남자의 뺨을 쓰다듬으려 손을 올렸으나, 빌헬름은 도리어 그 손가락을 붙들고 안쪽에 입
맞췄다. 그녀가 빌헬름을 막기 위해 다친 상처 자국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홉 번의 인생을 산 초대제가 아니라면, 그 아이라도 자신의 심정을 맛보길 원했을지 모르죠.”

라인하르트는 충동적으로 빌헬름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앞에서 칼을 들고 울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 빌헬름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거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안쪽이
선득했다.

빌헬름은 손가락 끝에 힘주어 그녀를 안았다. 더불어 그 아득하고 서정적인, 영원한 봄의 둥지를 떠올렸다. 그
둥지 안에서 제가 사랑한 여자만을 계속해 기다린 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제 사랑을 끝내고 싶었다. 제 죽음으로 사랑마저 종결하고 싶었으나 스스로 죽지도 못했다. 연인의 생이 몇
번이나 남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여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쩌면 아직도 아홉 번의 인생이 다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하여 증오스럽고 사랑하는 릴의 아이가 나타났을 때, 치욕감에 휩싸였으나 동시에 비로소 아마릴리스를 포기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빌헬름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지나간 용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수심에 잠긴 제 연인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들어갈까요.”

“그래.”

빌헬름은 라인하르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어느새 화제는 요즘 갑자기 말을 잘 듣는 척하기 시작한 두 사람의


둘째 따님에게로 옮겨 갔다. 그리고 무슨 꿍꿍이인지 둘째 따님과 쿵짝이 맞은 첫째 아드님에게도.

찬 바람이 불었다. 열려 있던 실론 홀의 문이 끼익, 하고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알랑케스의 초상화들이 어둠 속에 잠겼으나 단 하나의 초상화만 달빛을 받아 요요히 빛났다. 그러다가 쿵, 하고


문이 닫히는 통에 결국 오래된 액자는 바닥으로 툭 떨어져 박살 나고야 말았다.

끝이었다.

170 화
외전 4. 온전한 관계

“디트리히에게 또 그럴 거야?”

선뜻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온 건,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또 한바탕 몰아치고 간 뒤였다.

기억을 찾은 후의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황제 폐하를 불손한 눈으로 쳐다보곤 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는 대체로 빌헬름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쓰곤 했다. 다만 오늘만큼은 디트리히도 참지 못했다.
빌헬름이 디트리히를 기어이 따돌리고 라인하르트를 빼돌려 몰래 루덴의 숲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루덴의 숲이라고는 해도 거의 코앞, 집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게다가 빌헬름 또한 무장 상태였으니 큰


위험은 없었다. 돌아온 시간도 일러,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주의 호위를 맡은 디트리히에게 두 사람의 따돌림은 좀 다르게 다가오는 문제였다. 결국
디트리히는 숲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얼굴이 활짝 피어서 돌아오신 황제 폐하에게 찡그린 얼굴로 폭언을 퍼붓고야
말았다.

<네 목숨은 신분제가 지켜 주고 있으니 핏줄에 감사하십쇼, 예?>

존대와 반말을 오가는 그 폭언에 당사자는 피식 웃기나 했다. 라인하르트도 킬킬댔음은 물론이다. 그 모습을 본
디트리히는 라인하르트에게도 온갖 짜증을 냈다. <제가 각하께서 철없는 어린애처럼 연애하는 꼴 보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한 때도 있었다지만 말입니다!> 결국 라인하르트가 디트리히의 어깨를 두들기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일이 끝났다.

그러고도 두 연인은 마치 10 대 후반의 멍청한 소년 소녀처럼 눈이 마주치자마자 키득거렸다. 빌헬름이 루덴으로


오자마자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고, 디트리히의 잔소리는 벌써 두 번째였으니 말이다.

두 사람의 화제에 디트리히가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주로 빌헬름이 입술을 삐죽거리는 내용이었다. 들고 간


술병을 루덴의 숲에서 사이좋게 나눠 마신 후였고, 취기가 오른 라인하르트는 삐죽거리는 빌헬름을 보고 장난기가
일었다. 하여 그녀는 충동적으로 저 곤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또 그런다뇨?”

침대에 기대앉은 빌헬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후의 햇살이 불투명한 창문 안으로 들어와 빌헬름의 뺨에서
부서졌다. 라인하르트는 드러누워 그 평화로운 광경을 감상하며 여상히 물었다.

“만약 세 번째 인생이 또 주어진다면 말야.”

“아.”

빌헬름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은 이미 두 번의 인생을 함께했다. 세 번째 인생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만약에…….’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아홉 번의 인생을 살았다던 초대제도 실패한 것이 있었을 테다.

빌헬름의 두 번째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실책을 꼽으라면 역시 디트리히의 일일 것이다. 하여 라인하르트는


궁금해졌다.

만약 세 번째의 인생을 산다면 빌헬름은 디트리히를 어떻게 할 것인가.


흔쾌히 ‘구하러 가죠!’라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면 거짓말이다. 라인하르트와 디트리히, 빌헬름 세
사람 사이에 얽힌 역사는 너무나 지난하고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 모든 것들이 지나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묵은 감정들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빌헬름에게 디트리히는 유독 마음에 걸리는 존재였다. 그를 질투했으며, 가끔은 따랐고 어떤 때는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라인하르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디트리히에게 가로막혀
라인하르트를 마음껏 사랑하지 못할 거라 스스로 넘겨짚었던 것도 한몫할 테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달라지기는 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묘하게 긴 침묵이 갑작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들어앉았다. 누워서 몸을 뒤집으려던 라인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상반신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침대에 앉은 빌헬름을 바라봤다. 빌헬름의 까만 눈이 넋 놓고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한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빌헬름?”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빌헬름이 너무나 명백하게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빌헬름? 내가 물었잖아……?”

“어, 그게. 라인하르트.”

빌헬름은 여전히 라인하르트와 눈 맞추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입 열었다.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그……. 뭐랄까요.”

그녀에게는 늘 환히 빛나던 남자의 눈가가 조금 실룩였다. 당황이 가득한 눈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후, 그녀의 연인은 라인하르트의 기다림을 배신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수심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인 것이다.

“제가 거짓말은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거짓말은 안 하겠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말인즉슨 그는 흔쾌히 디트리히를


구하겠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같은 상황에서도 디트리히를 절대로 구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라인하르트는 버럭 소리 지르고야 말았다.

“빌헬름!”

“그게, 라인하르트.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그대로 디트리히를 구하러 가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인데 이런 소리를 한다고? 라인하르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배신감이 솟구쳤다. 그녀와 빌헬름이 프람 산맥에서 내려온 지 벌써 1 년여가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저만 보는 빌헬름의 맹목이 없어졌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배운 게 조금은 있지 않나?

하다못해 내 앞에서는 적어도 디트리히를 구하러 가겠다는 말이라도……. 아차, 그건 거짓말이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거짓말 안 하겠다는 맹세는 꼬박꼬박 지키고 있는 제
연인이 얄밉고 짜증 나기 그지없어져서였다.

아니 한심하다고 해야 할까?

‘이 애는 어쩜 이런 얘기를 미련하게도 지키고 있지? 이럴 때까지? 요령이라는 게 없나?’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그 모든 생각을 빌헬름에게 다가들며 그대로 퍼부었다.

“그러면 너는 디트리히를 그대로 내팽개치겠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슬퍼한 걸 보고서도? 내가 슬퍼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 이렇게나 민감한 이야기를 너무 취기에 들떠 물었나 하는 마음도 생겼다.
늘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겨우 루덴으로 온 빌헬름에게, 하루 만에 화를 내는 것이 미안해져서다.

그러나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 됐다. 그의 앞에 바싹 다가앉아 거칠게 캐묻는


라인하르트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빌헬름은, 이내 배시시 웃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한층 기가 막혔다.

“빌헬름! 지금 웃음이 나와?”

하지만 그녀의 연인은 어쩐지 뺨이 조금 벌게지더니,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계속 나오는 웃음을
어떻게 하지 못해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라인하르트는 기가 찼다. 설마 내가 지금 우스운 건가? 그래서 저러는
건가? 그러나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그를 오해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아니, 음……. 미안해요, 라인하르트. 잠시, 잠시만요.”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앉은 라인하르트를 조금 밀어 냈다.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을 노려보며 뒤로 물러앉았다.

‘변명이 허접하면 정말 용서 못 할 줄 알아. 아니, 용서 못 하는 건 너무하고 조금 미워할 줄 알아……. 아니!’

라인하르트가 그렇게 혼자 갈등하는 동안, 빌헬름은 한참이나 얼굴을 제 두 손에 문질렀다. 그러고는 겨우


라인하르트와 시선을 맞추고, 아직도 빨간 뺨으로 조심스럽게 입 열었다.

“그러니까……. 저는 늘 당신이 소리 지르고 저에게 화내는 게 정말 무서웠거든요.”

“……무슨 뜻이야.”

“알잖아요, 라인하르트. 우리 프람에서 내려온 후 계속 좋았잖아요. 하지만, 그 후에……. 혹시라도 당신과


제가 싸우게 되면, 음. 이런 문제로 싸우게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찡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빌헬름은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수줍게
말을 이었다.

“정말 무섭고 겁날 것 같았는데……. 당신이 이상하게 지금, 별로 안 무서워요.”

“……아하?”
라인하르트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내가 우습다?”

“그게, 그게 아니고요, 라인하르트.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빌헬름이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망설이던 그는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침묵 후에야, 다시 답했다.

“라인하르트. 당신이 화난 건 알고 있어요. 제 대답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얼른 당신의 화를


풀어야, 그러니까 당신의 마음에 들 대답을 고민해야 하는데, 아. 그게 생각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남자는 입을 잠깐 벌렸다가, 한숨 쉬듯 말했다.

“당신이 지금 화가 났다 해도 나를 떠나진 않을 거죠?”

라인하르트는 순간 넋을 놓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다. 빌헬름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 당신이 제게 화낼 때는요, 라인하르트. 늘 끝이었어요. 끝을 각오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사실


프람에서 내려오고도 항상 당신이 제게 화낼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제가 당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하면 어쩌지,
제 맹목을 없애야 한다 하셨는데 내가 너무 당신에게 집착적으로 굴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거…….”

할 말이 없었다. 빌헬름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러면 당신이 떠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악몽도 가끔 꿨어요. 그런 날은 빌로이가 황태자궁에서 자고 있는


걸 확인해야 성에 찼는데. 그러니까, 당신은 적어도 빌로이를 떠나진 않으실 테니까. 그런데…….”

아, 맙소사. 라인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데 지금 막상 당신이 저한테 화를 내고 있는데……. 이상하네요. 무섭지 않아요. 지금 이거 끝이 아닌


거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제게 화내고는 있지만. 그리고 제 대답이 마음에 안 차면 계속 뭐라고
하시겠지만…….”

조곤조곤하던 말은 점점 횡설수설로 변해 갔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거기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거 너무 이상하네. 이상하다는 말밖에 못 하겠어요. 기분이 갑자기 들떠요. 당신이 제게 계속 화내고
계시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화를 내시겠지만, 라인하르트.”

남자의 새까만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그래도 저를 떠나지는 않고, 계속 옆에서 화내시는 거죠.”

결국 라인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는 지금 그게 좋아서 그렇게 웃었니, 타박해야 하나. 갈등하는 동안에도 빌헬름은 귀까지
빨개져 떠들었다.

“저도 알아요.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싸우고도 헤어지지 않는 거. 그런데 당신이 저에게 그러고 있으니까,
너무 이상하고 좋고……. 꿈같아요.”

……그러니까, 위대하신 알랑케스의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라인하르트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도무지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사실에 넘치도록 행복해하고 계시는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앉은 채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갈등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이상하다는 말을 되뇌며 라인하르트를


들여다봤다. 앉아 있는 그녀 앞에 몸을 숙여, 라인하르트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저 지금 알 것 같아요.”

“뭐!”

라인하르트가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말투 끝에는 어처구니없음과 더불어 가벼운 웃음이
어우러져, 본래는 날카롭기 짝이 없었을 말이 뭉그러져 어린애가 내는 짜증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빌헬름이
한층 더 환히 웃었다.

“들어 봐요, 라인하르트.”

171 화

빌헬름의 손이 라인하르트의 무릎 위, 허벅지 어딘가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보통 때 그의 손이 그곳에


머무른다면, 대부분은 음심 가득한 용건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손끝에는 드글드글한 욕망 대신 신난 10 대
남자애 같은 환희만 가득했다.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어요. 나는 항상 당신을 볼 때마다 갖고 싶은 게 있었단 말이에요.”

“새삼 그게 이제 와서 나라는 말은…….”

“맞아요, 당신이에요. 당신인데.”

빌헬름은 조금 더 다가앉았다. 낮은 곳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청년의 얼굴에서 어쩐지 라인하르트가 익히 알고


있던 어린 소년이 보이는 듯했다. 라인하르트는 진지해진 소년이 뭐라 말할지 기다렸다. 빌헬름은 눈가를 접으며
웃더니 입 열었다.

“온전한 당신.”

“…….”

“온전한 거. 있잖아요. 완전한 당신. 완전하게 갖고 싶다고…….”

“…….”

“그게 뭔지는 몰라도, 항상 열망했는데.”

빌헬름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옅어지고 진지해졌다. 청년은 눈앞의 여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랬다. 빌헬름은 늘 온전한 그녀가 갖고 싶었다.

라인하르트를 볼 때마다 늘 목이 마르고 애가 탔다. 치기 어린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달라 애걸할 때


라인하르트가 어찌했던가. 미쉘을 죽이기 전, 그러니까 몇 년도 더 전에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며 옷깃의
뼈단추를 풀던 라인하르트를 빌헬름은 아직도 기억한다.
갖고 싶다면 껍데기라도 가져가고 대신 그 자신을 바치라던 라인하르트.

짜릿했었다. 제 무릎 위에 올라타 아낌없이 스스로를 내어 주는 그녀의 모습. 전생에서부터 그가 바라 마지않았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기꺼이 그녀를 당겨 가지는 대신 라인하르트의 발밑에 엎드렸었다. 그것은 빌헬름이
라인하르트에게 굴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온전한 것…….

‘온전함’이 무엇인지 그는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구했다.

마치 늘 흙탕물 속에 살아 맑은 물이라곤 접해 본 바 없는 물고기처럼.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맑은 물을 갈구하는,


자그마하고 지저분한 물고기.

그리하여 이전에는 늘 불안했다. 라인하르트의 붉어진 뺨에 입 맞추면서도, 그녀가 저를 끌어안고 입 맞출 때도


그랬다. 술에 취해 깔깔대며 웃는 라인하르트의 귀에서 보석 귀걸이를 떼 내고, 목걸이를 풀고, 흰 살결을
서슴없이 더듬으면서도 매번 라인하르트가 저를 떠날까 무서워 집착했다.

그것은 비단 디트리히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녀를 배신했음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알고 있었으나,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눈물로 고백한다면 그것마저 용서할 사람이었다. 그러니 빌헬름의 불안은 배신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빌헬름은 알 수 있었다. 그 불안이야말로 라인하르트에 대한 그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사랑하는 사람임에도 빌헬름은 라인하르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착각하며
모든 것을 뭉뚱그려 왔다. 사랑하는 이를 짓이기고 뭉개 억지로 반죽 틀에 맞춰 놓고, 네가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 놨으니 된 거 아니냐고 묻는 무뢰한이었다.

“그러니 온전할 수가 있나요.”

빌헬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라인하르트의 손을 끌어당겼다. 상처가 잔뜩 남은 손가락은 늘 빌헬름에게


애틋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 손가락에 입 맞추는 대신, 제 손을 얽어 라인하르트를 붙들었다. 마주 잡은
손바닥에서 온기가 돌았다.

“알겠어요. 지금 당신은 제가 싫어서, 미워서 화내는 게 아니신 거죠. 저를 이해하고 싶으신 거지요.”

“빌헬름.”

“저를 놓기 위함이 아니시지요.”

비난당했음에도 뚜렷한 기쁨이 고혹적인 얼굴 위에 맴돌았다. 아주 어릴 적,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을 안온함. 혹은 같은 나이의 소년들 사이에서 겪었어야 할 칼바람과 단단함 같은 것들을 뒤늦게 누리게
된 기쁨이었다.

“저는 늘 당신과 충돌하는 것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충돌이 이런 것이라면 왜 그렇게 무서워했나 싶어요.”

이해는 늘 충돌을 수반한다. 부딪치고 깨지더라도 그 뒤에 남겨지는 상처 또한 제가 얻을 재산임을 빌헬름은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인하르트 또한, 처음에는 당혹했으나 이내 안타까워졌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두 번의 인생을 살아 냈음에도, 누구나 깨우치는 것들을 미처 배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결핍을 이제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애가 더듬더듬 일어서서 걸음마부터 배우는 것과 같았다.
라인하르트는 손을 뻗어 빌헬름의 이마를 쓸어 넘기고, 손가락 끝으로 상처 난 눈썹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빌헬름이 한쪽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이제는 온전하게 느껴지니?”

“물론이에요.”

라인하르트가 환히 웃었다.

“다행이네.”

“기뻐요.”

라인하르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빌헬름의 뺨으로 내려갔다. 빌헬름은 마치 고양이가 제 뺨을 주인의 손에


비비듯이 부드럽게 얼굴을 내맡기고 비비대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손가락은,

콱.

“아.”

온기를 담은 손가락이 제 뺨을 틀어쥔 순간 빌헬름은 멍청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은


까만 눈이 제 연인을 올려다봤다. 꿀을 바른 사과파이의 풍요를 담은 눈동자는 여전히 웃는 채였다.

“라이아르…….”

라인하르트, 라고 부르려 했는데 뺨이 세게 꼬집히는 통에 발음이 마구 샜다. 얼떨떨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연인은 더더욱 환히 미소 지었다.

“그러면 나는 더더욱 안심할 수 있겠구나, 빌헬름.”

“어…….”

“좋아, 네가 이제 나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 잘 알았다. 그러니 대답해 보렴, 빌헬름.”

탐스러운 금발이 부드럽게 사르륵 흩어져 그녀의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소름이 돋는 건 왜일까.

“디트리히를 구하러 가면 뭐? 그다음 말을 아직도 하지 않았단다.”

“……어어어…….”

“정말로 감동적이었지만, 빌헬름 콜론나 알랑케스.”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 그의 사랑스럽고도 성질머리 대단하신 따님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비비, 혹은 비앙카가 아니라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라는 이름이 라인하르트의 입
밖에 튀어나오면, 조그만 따님께서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치곤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랑해
마지않는 제 연인이 길게 이름을 불러 주면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도대체 왜 저렇게 도망을 치나 궁금해했는데.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거짓말을 못 한다고 입을 꽉 다물었을까, 응?”


빌헬름의 새까만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라인하르트는 슬슬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지웠다. 그녀의 금안은
빌헬름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엄격해졌다.

“디트리히를 구한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결국 그는 새빨갛게 피가 몰린 뺨을 하고, 우물우물 입 열었다. 라인하르트 앞에 무릎 꿇은 자세는 꽤


순종적으로 보였으나 눈만은 열 살 어린애 같은 반항기가 깃들었다.

“당신이 디트리히를 아끼는 건 알아요. 당신이 절 싫어하지 않게 하려면 그때 달려가야 한다는 것도.”

“…….”

“하지만 디트리히가 살아서, 당신 곁을 지켰다면 제가 감히 당신을 탐낼 수나 있었겠어요?”

두 번의 생을 살았으며, 세 번째는 없기에 머릿속으로만 가늠해 보던 상상이 있었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지독한 후회는 라인하르트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디트리히를 그때 살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나를 이렇게 지독히 떨쳐 내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빌헬름은 수만 번도 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만 번의 후회 뒤에 따라오는 것은 디트리히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소년 시절의


빌헬름이 느끼던 무력감이었다. 늘 라인하르트를 싸고도는 데다가 빌헬름 같은 어린애는 떼어 놓고야 말겠다
말하던 남자 말이다. 만약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빌헬름은 그녀에게 대영지를 바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기가 막혀서.”

그러나 그 말을 듣던 라인하르트는 코웃음 쳤다. 그녀는 제 앞에 무릎 꿇은 빌헬름을 내버려 두고는 벌떡


일어서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투명도가 떨어져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유리창을 따고, 바깥의
덧창까지 거친 손길로 열어젖혔다.

“눈이 있으면 좀 보겠니?”

바깥은 어느새 해가 천천히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란 햇살이 온통 루덴의 성 앞마당을 비추는 안온한 시간.
빌헬름은 엉거주춤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성 앞마당은 언제나 그랬듯이 분주했다. 세탁물을 한 아름
안고 가는 하녀, 시시덕거리는 기사들, 말의 등을 닦아 주고 있는 마구간지기와…….

“저 자그마한 다람쥐 같은 리오니를 보란 말야.”

“아.”

빌헬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을 둘러본 후에야, 빌헬름은 성 앞마당의 작은 여름사과나무 아래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는 루덴 대영주의 측근 시녀를 찾을 수 있었다. 여름에 열리는 아기 주먹만 한 여름사과를 따기 위해 제
아들인 펠릭스와 함께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 둘을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팔짱 끼고 있는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있었다.

“저게 왜…….”

라인하르트는 코웃음 쳤다.

“미안하지만 디트리히 에른스트는 스무 살 이후로 나한테 관심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단다.”


“그건 당신이 모르는 소리…….”

“빌헬름.”

받아치려는 빌헬름의 말을 라인하르트는 가당치도 않다는 투로 잘라 내 버렸다.

“디트리히가 기억을 찾자마자, 누군지도 못 알아보는 리오니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고 있니?”

그딴 게 알 바냐. 저 부부가 무슨 대화를 나누든 빌헬름의 관심사는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아냥거렸다.

“천사라고 그랬단다. 천사가 자기 아내라니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 달라 말했다는구나.”

“아, 예.”

무성의한 대답에 라인하르트는 기가 막히다는 듯 빌헬름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걸 내가 알아야 하나. 그런 눈초리에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을 째려봤다. 그 눈길 끝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저 남자 이상형은 따로 있었고,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날 여자로 볼 일은 조금도 없었단 소리야. 알겠니.”

“그럴 리가요.”

빌헬름이 진지하게 라인하르트에게 다가서 손을 뻗었다. 라인하르트는 자연스럽게 그 손에 저를 맡겼고, 남자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천사는 당신이죠. 누구든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걸요. 당신만 몰라요.”

“아니 그게 아니라는 걸 너만 모르는 것 같은데…….”

그의 손에 안긴 라인하르트가 짐짓 한숨을 쉬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을 거야. 알지 않니? 귓가에 살며시 흘려 낸 사랑의 고백에 남자가 헤프게 웃었다.

“그래서 디트리히를 어쩐다고?”

“그…… 당신이 싫어할 테니.”

“아니지.”

손가락이 빌헬름의 코를 비틀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내가 슬퍼할 테니까.”

빌헬름은 라인하르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입 맞추고 눈가를 한 번 핥았다.

“그렇죠, 당신이 울었죠, 참.”

“그래, 내가 울 테니까…….”
“그때도 참 당신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라인하르트는 턱을 당기며 코앞의 얼굴을 흘겨봤다. 그때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해?


하는 말들이 스쳐 지나갔으나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앞에서 라인하르트는 그 모든 말을 삼켰다. 더 이상 캐묻지
않아도 남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또한 그가 입 밖에 낼 답을 알고 있으니, 질문은 무의미했다.

“라인하르트, 해가 져요.”

“응.”

“당신 우는 거 또 보고 싶은데…….”

의미 없는 대화 대신 속삭임, 귓가에 닿는 한숨, 손장난 같은 것들이 둘 사이를 채웠음은 물론이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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