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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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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가을에서 겨울까지
라인하르트.
“눈이 안 떠져…….”
“피곤하면 더 쉬어요.”
“피곤……. 피곤하지…….”
으음, 하고 입맛을 다시던 라인하르트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도 못 뜨고 있었다. 빌헬름은
부드럽게 그녀의 코끝에 입 맞췄고,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더 들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뗐다.
“죽겠어…….”
“사랑스러우세요.”
“뭐가…….”
그녀의 아버지는 그 눈동자를 꿀 바른 사과파이에 비유했다지만, 그것은 너무나 소박한 표현이라고 빌헬름은 매번
생각했다. 그가 시인이었다면,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은 모조리 라인하르트의 독차지였을
것이다.
“예.”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요.”
초대제가 제국의 곳곳에 만들어 둔 수정문은 고도의 마법과 엄청난 양의 백수정을 필요로 한다. 하여 제국의
위정자들에게 수정문을 늘리는 것은 늘 부담스럽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빌헬름은 또다시 황성의 수정
창고를 덜어 냈다. 그녀가 주저앉아 있는 루덴에 수정문을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눈보라가 멎은 프람 산맥에 제국의 손길을 뻗는다는 원대한 핑계가 주효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속내가
루덴의 대영주에게 있다는 건, 제국 전체가 대충 다 알았다.
“아팠겠다.”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의 벗은 어깨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숨 막히는 순간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깨문 흔적이
오른쪽 어깨에 가득했다. 빌헬름은 제 어깨를 힐끗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라인하르트가 눈을 흘겼다.
“…….”
“그런 말씀 마세요.”
“달라요.”
맨살과 맨살이 맞닿는 느낌은 그리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단단한 사내의 가슴에는 전쟁 통에 입은 상처가
군데군데 자리했고, 라인하르트 또한 그러했다. 라인하르트는 빌헬름에게 안긴 채로 물끄러미 청년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어젯밤의 제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모든 상처는 빌헬름으로 인한 것이다. 뺨부터 시작해 목덜미로 이어지는 갈색 상처는 빌헬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입었고, 너덜너덜해진 손바닥과 팔 안쪽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빌헬름은 그 모든 광경을
그녀의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목도했다.
빌헬름은 그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는 라인하르트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하더라도, 당신이
주신 상처가 아물면서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고. 그리고, 라인하르트. 나는 언제나 당신께서
주시는 상처들이 황홀하고 흥분된답니다……. 같은 말도 한 번씩 주워섬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대신 그렇게 흘려보내며 터트리는 웃음들이 라인하르트에게
안도를 가져다주곤 했다. 이제 두 사람 다, 제 상처를 가지고 농담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방증
같았으니까.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
“죽으면 안 돼.”
라인하르트가 빌헬름의 말을 끊으며 코를 튕겼다. 빌헬름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새삼스레 애틋하게 그
손끝에 다시 입 맞췄다.
“안 된다니깐.”
“왕관 벗는 것도 안 되고.”
“빌헬름.”
“말해요.”
“내가 조금 일찍 오긴 했지?”
“말한 시기보다는요.”
“무슨 일 있나요?”
일이라.
“그게 무슨 미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험한 말을 삼키려 고개를 돌렸던 빌헬름이 침착을 잃은 표정으로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셋째가 생겼어.”
157 화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라인하르트 델피나 린케가 황후의 관을 쓰게 될 것인가를 두고 내기하는 이들이 도처에
생겨났다. 친정에 나섰다가 프람의 눈 폭풍을 잠재운 빌헬름 콜론나 알랑케스가 수도로 개선하기는커녕 세 달을
루덴에 붙어 있었으니 일견 당연하게도 보였다.
그러나 빌헬름은 수도로 혼자 돌아왔다. 다만 린케 후가 황후가 된다는 쪽에 건 자들은 젊은 황제가 ‘혼자’
돌아왔다는 쪽에 주목해야 한다고 우겼다. 데본 빌로이 알랑케스, 어리고 가엾은 여섯 살짜리는 루덴에 남았던
것이다. 알랑케스의 어린 핏줄들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수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통례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프람 산맥에서 건강을 해친 라인하르트 린케가 회복한 후 수도로 돌아와 혼례를 올릴 조짐이
아니겠느냐고.
아무튼.
라인하르트는 빙긋 웃었다.
“법전에 안 쓰여 있지 않습니까.”
“뭣보다 확실한 정보를 두고 걸지 않으면 아깝잖습니까. 우리의 자랑스러운 각하께서는 이 루덴을 두고 절대로
재혼하지는 않으실 테지만, 각하를 모르는 수도의 멍청이들은 모조리 각하가 재혼한다는 쪽에 수억을 걸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거 하나는 나도 알지. 내가 빌헬름과 재혼하면 받을 수 있는 작위와 영토는 루덴에 버금가고, 빌헬름은 내가
저 동부의 철광산을 죄다 달래도 줄 텐데. 내가 그 영토가 탐나 결혼한다면 어쩔 텐가? 그렇게 되면 자네의 자산
관리는 엉망진창이 될 텐데?”
“자네, 걱정되나?”
“당연한 말씀을. 각하의 시녀 되시는 에른스트 부인이 얼마나 난산을 겪었는지 아시면서 말입니다.”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그게 왜?”
헤이츠가 아하,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도 못 했다는 투였다.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찡그렸다.
지난해 겨울, 약속했던 대로 겨울을 나기 위해 입성한 때였던 듯했다. 첫 겨울에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들어
있던 환영궁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라인하르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리오니와 마르크를 입단속시키는 것이었다. 하여
헤이츠와 디트리히 또한 수도로 그녀를 수행해 와서야 셋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디트리히는 제
아내를 조금 원망하게 될 것 같다며 투덜거렸다.
“각하.”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지.”
“그 정도까지요?”
“애들만?”
“글렌시아 경은 더 싫고요.”
안타까워라. 라인하르트는 무지막지하게 예쁘고 성격은 더욱 무지막지한 변경백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킬킬거렸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야.”
“각하.”
“음, 말해.”
“정확합니다.”
“…….”
헤이츠가 끼어들었다. 디트리히는 시치미를 뚝 떼고 “제 기억에 없으니 무횹니다.”라 받아쳤다. 아하하. 그제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라인하르트만 또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누구한테 유감입니까?”
“비비 말고.”
“…….”
“빌로이 말이야.”
시녀들조차 어려워 쭈뼛거리는 상대였으나, 애들은 그게 보이지 않는 듯 시종일관 그 무릎에 번갈아 앉았다가
뛰어 내려갔다 하며 그를 마치 놀이 기구처럼 다루고 있었다.
“복수요?”
“저 글렌시아의 고강한 기사, 시에라 글렌시아에게 비급을 전수받은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의 어마무시한
주먹질을 견뎌 내야 할 거야.”
“폐하께서는 소식 듣고 기뻐하셨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가?”
제 지긋지긋하게 사랑하는 연인은 스쳐 지나가듯 <가을에도 아이의 생일이 있다면 당신을 여름부터 겨울까지
수도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 적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빌헬름의 반응이 기대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리오니와 마르크의 입을 단속한 것도, 사실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혹시라도 바람에 함께 대영주의 세 번째 임신 소식이 전해져, 빌헬름이 먼저 알게 될까
봐.
“갑작스럽니?”
그녀의 미소에 그제야 빌헬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빌헬름은 허둥지둥하더니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어 번 침대 곁을 왔다 갔다 하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 맙소사…….” 마른세수를 한 그는 다시
라인하르트 옆으로 다가앉았다.
라인하르트가 제 목을 더듬었다. 언젠가 그녀가 스스로 그었던 자국을, 궁의는 참 솜씨 좋게도 꿰매 놨다.
처음에는 그 자국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던 리오니도 나중에는 ‘세상에, 저희 어머니 자수 솜씨보다 더 곱네요.’
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기쁘지 않아?”
라인하르트가 일부러 여상히 묻자 빌헬름은 다시 제 하관을 한 손으로 난폭하게 문질렀다. 눈에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으나, 그 끝에는 미약하게나마 기쁨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건 정말 좋아요. 지금 얼마나 된 거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렇지만…….”
빌헬름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문득, 화들짝 놀라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보고는 뒤늦게 횡설수설했다.
남자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창백해지길 반복했다.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가, 결국은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빌헬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
“…….”
아. 그제야 라인하르트의 입에서도 작은 탄성이 터졌다. 청년은 말간 눈으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죄책감과 무지, 당황과 슬픔, 아직도 진득하게 남아 있는 증오 같은 것들이 사랑과 함께 두서없이 뒤섞여 있었다.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죠. 아이를 낳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는 건 들어 알고는 있었어요. 아니, 뒤늦게
알았죠.”
“…….”
“그런데 그 멍청한 새끼는 둘째를 낳아 놨더니 당신께 말이나 몇 마디 붙일 수 있어 좋다는 소리나 하고…….”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알을 굴리던 라인하르트는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비앙카 때문에 막사에서
단둘이 만났던 때, 빌헬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라인하르트는 급작스럽게 안타까워져 빌헬름의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빌헬름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초지종을 짐작할 만했다. 어쩐지 여름 이후부터, 빌헬름은 라인하르트에게 셋째 아이를 가지자는 소리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빌헬름의 시선이 허공을 부유했다. 눈동자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빌헬름을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더 있는데, 말하지 않을 거니? 그렇게 말하는 눈빛에 빌헬름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라인하르트에게 비밀을 털어놨다.
그 또한 그저 그녀의 상처에 예민해진 결과라 생각했다. 아프냐, 괜찮으냐 묻고는 벌게진 얼굴의 라인하르트가
괜찮다는데도 결국 물러서곤 하는 제 연인이 몰래 이런 꾀를 부리고 있었다니, 세상에. 라인하르트는 원망 반,
농담 반으로 그의 가슴을 퍽 두들겼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도 않는 술을 왜 그렇게나 마셔 없앴는데!”
“그러면, 그, 애는.”
한때는 미친 새끼라 불렀던 제 충견이 어찌나 고상해졌는지 제정신일 때는 늘 그녀가 원하는 것 따윈 조금도
들어주지 않았다. 졸라도 봤고, 끌어안은 채 놔주지도 않았지만 매번 이기는 것은 빌헬름이었다. 인내가 생긴
것이 괄목할 만한 변화이니 참 좋은 일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빌헬름은 그 횟수를 손가락으로 꼽아 보다가 죽고 싶은 얼굴을 했다. 라인하르트는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약을 온전히 믿지 않은 건 정말 올바른 판단이긴 했다. 이렇게 보란 듯 셋째가 들어섰으니 말이다.
다만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니 기함할 일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눈을 부라렸고, 빌헬름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알지.”
“아무튼 당신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감당해 가면서까지 새로운 애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네 마음은 잘 알았다.”
“……라인,”
159 화
빌로이는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황손이니 물질적인 것이야 말하기 전에 먼저 대령해
오니 필요하다 말할 이유도 없었다.
빌로이는 라인하르트의 애정에 차츰 익숙해졌고, 어미가 제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모두가 그것으로 충분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생각보다 아이는 그리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는 비앙카와 자주 싸웠다. 대체로 어미에 대한 독점욕 때문이었다. 빌로이는 비앙카에게 대부분 양보했으나,
라인하르트의 옆자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비앙카가 라인하르트 옆에서 잠들어 있으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비앙카가 제 물건을 탐내면 그대로 밀어 주는 아이가, 라인하르트의 손은 놓지 않았다.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보다가 비앙카의 머리를 몰래 잡아당겼던 예전에 비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와중에
비앙카의 성질이 대단하여 울음을 터트리기는커녕 제 오빠와 우격다짐을 벌이는 것 또한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겠다고 마르크가 웃었다.
아무튼, 덕분에 귀하신 황손과 대영주의 따님 얼굴에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로이는 제
어미를 보면 자주 웃었다.
<안 미워요.>
<정말?>
<……응. 안 미워요.>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대답한 건 아닌가 싶었다. 빌로이는 지나치게 빨리 철이 들어, 라인하르트의
앞에서는 원하는 바를 곧잘 감췄기 때문이다. 아이를 살피는 눈초리에 빌로이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진짜야. 안 미워요.>
<…….>
<빌로이.>
<미안해.>
빌로이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밀어 냈다. 그리고 똑바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고는 입 열었다.
<어?>
<어머니가 맨날, 으응.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거 싫어요.>
<빌로이.>
<사이좋게 지낼게요.>
그제야 라인하르트는 또, 제가 아이보다 못하구나 싶어졌다. 참 내가 모자라다, 그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뭐, 그 뒤로도 빌로이와 그렇게 무난하고 평범한 모자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펠릭스에게 휩쓸려
말썽을 부리거나, 비비와 싸운 애를 혼내려고 내려다보노라면 아이의 표정엔 언제쯤 어미가 자신에게 화낼까 싶은
묘한 기대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고 있으니 화를 내려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하나뿐이구나.>
<결혼하지 않았으니까요.>
젊은 황제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영원의 샘에 걸려 있는 초상도 하나였다. 빌헬름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비를 고쳐
안았다. 그 무렵의 비비는 부쩍 제 아비의 몸을 타고 오르는 것에 큰 재미를 붙인 참이었다.
<비비는 여기 없어?>
<없어.>
<왜?>
비앙카의 의문에 빌헬름이 가볍게 답했다. 비비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돌아봤다. 라인은 눈을 흘겼다.
어디서 저런 농담 배워 온 거야?
그렇게 지나갔다면 정말로 평화로운 한때였을 테다. 라인하르트의 마음이 선득해진 것은 실론 홀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는 급작스레 뒤를 돌아봤다. 황성의 시녀들이 라인하르트의 시선에서 비켜나 옆으로 물러섰고, 열려
있는 실론 홀의 문이 보였다. 라인하르트는 그 안쪽으로 들어섰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치워진 미쉘과
둘시네아의 초상. 그녀를 따라 들어온 빌헬름의 눈썹이 들썩였다.
수정이 빛났다 하여 아이들의 인생이 평화로웠을까. 잔잔하던 마음에 파동이 일었다. 빌헬름이야, 증오하는
여자가 저를 쥐어짜듯 착취해 낳은 그 애들에게 별달리 눈길 주지 않았을 테고.
<어머니?>
***
“전 그런 줄 모르고.”
“아뇨, 티는 났는데…….”
빌헬름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라인하르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빌헬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의
연인이 변명하듯 겨우 답했다.
“……초상화를 불에…….”
“뭐라고?”
그것 또한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긴 했다. 예전이었으면 초상이든 뭐든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을 텐데,
그래도 남의 말을 들어는 준다는 게. 이유야 당연히 라인하르트가 질색할지도 모른다는, 사소하고도 빌헬름에게는
큰 의미 때문이었겠지만.
“무슨 기분이요?”
“이해해요.”
“정말?”
“…….”
160 화
이상했다. 누군가 들으면 라인하르트를 미친 사람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이야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도무지
라인하르트는 제게 세 번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두 아이만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라는 생각도 물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인하르트는 빠진 이를 끼워 맞추고 싶었다.
“…….”
“적어도 미쉘에 한해서는 감사한 마음이 있지. 미쉘과 이혼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니. 하지만
둘시네아에게 내 자리를 주기 위해 미쉘은 내 아버지를 해하였다. 내 아버지뿐이니. 너에게 휘둘렀던 폭력을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모자랄 것이다. 사실 너무 간단히 죽었다는 생각도 가끔 한단다.”
“그런가.”
“전생엔 네가 내 것이 아니었잖니.”
“그래.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할 것들을 탐냈으니, 어쩌면 그녀가 낳았던 세 명의 아이들 또한 원래는 나의
아이들이었던 것이 아닐까…….”
“…….”
빌헬름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라인하르트를 지그시 들여다봤다. 총기 넘치는 새까만 눈 안에는 온통 그녀뿐이었다.
빌헬름이 천천히 입 열었다.
“둘째.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당신께서 제 비루한 인생마저 안타깝게 여기는 건 좋아요.”
“…….”
“셋째. 정말 기뻐요.”
“늘 제 앞에서 아파하고 피 흘리던 당신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어요. 아시잖아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분명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앙카가 태어났어요. 그러니 저는 조심할 수밖에요.”
“놀리지 마세요.”
“얼마나 다행입니까아.”
“자랑스러워하시든가요.”
“물론 자랑스럽지.”
몇 번의 입맞춤과 은근한 미소, 자잘한 농담이 오갔다. 아름답고 젊은 라인하르트의 연인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원하셨다면 나는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걸 가지는 거야말로 내 기쁨이에요,
라인하르트.”
“불편하지는 않니?”
아이들이야 이제 제법 제 아비를 겁내지 않게 됐다. 하지만 빌헬름이 이따금 굉장히 낯선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라인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빌헬름은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제 방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가구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했던 때의 꿈을.
잠이 들면 행복한 꿈을 꾸었다. 라인하르트가 저를 보고 웃어 주고, 입 맞춰 주던 때의 꿈. 그 꿈에서 깨고 나면
자리한 현실에 아득해져 손에 쥐이는 것마다 집어 던지고 부수었다. 제가 앉아 있는 곳이야말로 빨리 깨어야 할
악몽 같아서.
“뭔데요?”
“……무슨 고통이요?”
“예. 쓰셨었죠.”
“……이번에도 이길 거예요.”
“지더라도 죽이지야 않겠죠. 루덴 대영주 각하가 사랑하는 남자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설마 그렇게 예뻐하는
‘비비 아가씨’의 친부인데. 아비 없는 아이가 되기에 비비는 아직 어린 것 같은…….”
“그럴 수 있을 거야.”
“……아.”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은 린케 가문에 이어진다.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라는 긴 이름에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이
덧붙여질 날이 오면, 어쩌면.
“좋아요. 너무 좋아…….”
“그러네.”
라인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다가오는 붉은 입술에 응했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구리를 쥐었다가, 제풀에 놀라 확 떨어졌다. 라인하르트가 감았던 눈을 뜨고 남자를 관찰하자, 남자는
변명하듯 답했다.
그러더니 어젯밤 제가 라인하르트에게 저지른 만행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귀까지 새빨갛다 못해
검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제가 또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눈치다. 라인하르트는 허리를 접으며 깔깔거렸다.
“그치만.”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갑자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곧 죽어도 라인하르트의 앞에서 품위를
지키며 신전의 신관처럼 살 것을 엄숙히 맹세했다. 어째 굉장히 아쉬워지는 대목이었으나, 정결하게 지내는
빌헬름 콜론나 알랑케스의 모습 또한 궁금하기는 했으므로 라인하르트는 그 맹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삶이란 건 늘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다. 다만 그게 빌헬름 콜론나의 일탈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
연인의 무사를 기원하기 위해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매일매일 신전에 들락거렸는데, 그 지극정성이 무색하게 루덴
대영주는 하루를 꼬박 지새운 난산을 겪었다. 일설에는 루덴 대영주의 비명에 젊은 황제의 손바닥이 다
헤집혔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그것 또한 예상을 벗어난 일은 아니었다.
쌍생아의 탄생이 불길하다 여겨질 만도 하지만, 적어도 황성의 사용인들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예민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던 젊은 폐하께서 두 어린애의 탄생 뒤로 부쩍 웃음이 많아지고 너그러워졌기 때문이다.
161 화
외전 2. 천사와의 재회
산에서 빵은 평소에는 엄두 내기도 힘든 호화로운 음식이다. 야생 밀은 북부의 산에서는 자라지 않으니 마을에
가서 사 올 수밖에 없다. 북부까지 싣고 온 밀의 가격은 평소에는 엄두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아빠가 계실 때는
그래도 종종 밀을 살 만한 형편이 되었는데. 리오니는 입맛을 다시면서 화덕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갓 구워진
빵을 꺼내기 위해서다.
오늘 아침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군 보람이 있는지,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산 아래에 사는 한스의 아내 안나가
나눠 준 밀이다. 본래 좋은 일이 있을 때 따로 먹으려고 두었던 것이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 상하거나 벌레가
먹을까 싶어 그냥 먹어 치우기로 한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
등허리에 맨 주머니와 허리춤에 찬 화살통, 커다란 강궁. 작은 손도끼에 주머니칼 하나. 집을 나선 리오니의
차림새였다. 사냥을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사냥을 가려 한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철저하게 준비할 것이다.
토끼야 리오니 혼자서 몇 마리든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사슴만 돼도 리오니에게는 참 버거운 상대였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암사슴을 잡고 나면 그걸 지고 오는 게 큰일이었다. 멧돼지 같은 건 말도 못 했다.
한 달 전 리오니는 산속에서 멧돼지를 잡았다가, 제 쪽으로 쓰러지는 짐승 때문에 팔이 부러진 참이었다. 한스가
부목을 대고 나서 움직이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통에, 한 달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멧돼지야 팔이 부러져
끌고 오지도 못했다. 한스가 뒤늦게 멧돼지 시체를 찾으러 가 봤으나 늑대들이 이미 다 헤집어 먹어 치우고 뼈만
남았다던가.
아버지는 3 년 전 전쟁이 벌어진 초소 근방에서 고물을 줍다가 야만족들과 조우해 큰 부상을 입었고, 어찌어찌
도망은 쳤으나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뭐든 해야 했다.
성하지 않은 팔에 어느 눈먼 토끼가 잡히겠는가.
“아이고. 짜친다.”
“어쩌나.”
답이야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틀이나 고생했는데……. 리오니가 갈등할 때였다. 근방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만족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리오니는 기겁하며 초소 안쪽의 방벽으로 몸을 숨겼다. 다 무너진
돌벽이지만 그럭저럭 몸을 숨길 만했다.
바깥을 몰래 지켜보니 웬 야만족들 셋이 허덕대며 커다란 남자 하나를 떠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꽤 훌륭해
보이는 제국군 갑옷을 입고 있었고, 리오니는 곧장 상황을 알아차렸다. 야만족들이 인질을 잡은 것이다. 초소로
몸을 피한 후 협상을 하려는 것이겠지.
본래대로라면 리오니는 얼른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리오니는 조심스럽게 손에 든 주머니칼과 가방을
내려놓고 활에 화살 두 개를 메겼다. 생전 아버지가 쓰던 활이었다. 본래 아버지는 힘이 좋아 그 활에 화살 두
개를 한꺼번에 메겨 썼으나, 리오니는 팔 힘이 달려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는 세 사람. 화살 두 개가 한
번에 날아가지 않는다면 리오니는 그대로 죽음을 당하리라.
“누구냐!”
쏜 화살은 마지막 야만족의 어깨에 박혔고, 그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뒤늦게 리오니를 발견하고 검을 빼
들었으나 리오니가 더 빨랐다. 손도끼가 야만족의 목에 반쯤 박혔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야만족이
쓰러졌다. 리오니는 재빠르게 달려가 그 목에서 손도끼를 뽑았다. 그리고 비척비척 일어서려 노력하는 두
야만족의 목숨도 절멸시켰다.
“하, 시팔.”
리오니는 콧등의 땀을 닦았다. 얼굴에 튄 피가 손등에 묻어났다. 야만족에게 죽었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기분이었다. 만족스럽게 뒤를 돌아보는데, 저만치 내팽개쳐진 제국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야만족들의 몸에서
단검 몇 개를 챙겼다. 저 남자가 혹시라도 깨어나 저를 위협할까 싶어서였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엎어진 남자를 뒤집는 데만도 힘을 한참이나 써야 했다. 이 인간을 구하려면 리오니도
탈진할 게 뻔했다. 그뿐인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내팽개치고 갈까, 하고 몇 번이나 갈등했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끙차.”
“썅.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갑옷을 내팽개친 후 리오니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근처의 샘에서 물을
떠 온 후에도 남자는 의식 불명이었다. 리오니는 한숨 쉬었다. 어젯밤에 이마에 손을 댔을 땐 열이 불덩이
같았는데, 지금은 식은땀만 계속 맺히고 있었다. 다친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차갑다니.
“시체 치울 수도 있겠네.”
그렇게 툭 내뱉었지만 리오니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가운데의 화덕에 불을 피우고, 제 가방을 풀어
헤쳤다. 네모나고 커다란, 튼튼한 천으로 만든 가방은 야영할 때에는 담요로 쓰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냐.”
오두막의 문을 닫을 때마다 리오니는 그렇게 속삭였다. 남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근처에서 토끼 두어 마리를
잡고, 약초를 따다 매달아 말려 놓고, 다시 나가 물을 떠 오고, 한숨 잤다가 토끼를 다듬어 핏물을 빼 오고.
가죽은 따로 벗겨 말리고, 물 마시러 온 사슴을 쏘아 잡은 다음에 질질 끌고 오고. 소금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사슴 다리 한쪽을 지져 먹고.
“아, 으, 아…….”
리오니가 놀라 후다닥 일어섰다. 남자는 흐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겨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라인, 하르트.”
죽지는 않을 모양이네.
162 화
“미치겠네.”
그 뒤로 하루를 꼬박 더 앓다가 깨어난 남자는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반편이였다. 정신이 드냐, 어디
출신이냐, 당신 야만족들에게 납치되던 걸 내가 구했는데 어쩌구 하는 말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던 남자는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짜 내다가,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기가 막혔다. 아차 싶기도 했다. 본래 리오니의 계획은 남자가 깨어나면 출신지를 물은 뒤, 그곳까지 동행하는
것이었다. 혹은 남자의 부대가 근방이라면 거기까지 간 다음 사례금이라도 받아 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에 그 계획이 모두 무너졌다.
‘버리고 가면 안 되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오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남자가 제 얼굴을 본 뒤다. 누가 봐도 귀족인데 산속에
대충 버리고 갔다가 보복이라도 당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럼 그쪽 분께서…….”
“리오니예요.”
“아, 그건 아닌데요.”
머리를 긁으며 리오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초소를 우연히 지나다가, 그를 보고 야만족을 쏘아 죽였다고.
초소에 쇠붙이를 주우러 갔다는 말은 비밀로 했다. 제국군 물건을 함부로 팔아 치우는 건 중죄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기억을 잃었다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런.”
그러나 남자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리오니의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면 제가 일어나야겠군요.”
하고 일어나다 덜컥, 무릎이 풀려 엎어진 것이다. 리오니가 놀라 그를 붙들어 부축했다. “허억…….” 아무래도
배의 상처가 심각했는지,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일어나세요?”
“전 또 뭐라고.”
“하지만…….”
“아.”
남자가 당황했다. 그를 부축하는 바람에, 리오니는 새삼스레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게 됐다.
초췌한 데다가 거칠거칠한 얼굴이었으나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으스대는
이안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남자를 의식한 리오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그녀는 거의 떠밀듯이 남자를 자리에 눕혔다. 거친 손길에도
남자는 불만 하나 없이 리오니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
그제야 남자가 입을 헤벌렸다. 리오니는 우두커니 서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리오니는 뒤돌아서서 “아! 젠장! 아!” 하고는 다시 남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
사냥꾼들의 법칙이다. 산속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므로,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보았을 때는
반드시 도와줄 것. 한번 구해 준 목숨에는 책임을 질 것. 물론 은혜를 입은 사람들 또한 꼭 빚을 갚아야 했다.
리오니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늘 산사람의 법칙을 꼭 지키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리오니의 말에 남자는, 아까 리오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리오니는 벌게진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선량한 인상의 남자는 분명 웃기 힘들 텐데도 옅게 웃고 있었다.
“……그, 나으리.”
“예.”
리오니는 풀 죽은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머쓱해하는 남자 옆에 리오니는 다시 활이며 화살통을 벗어 내려놨다.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리오니를 바라보며
말렸으나 리오니는 고개를 저었다.
***
“악, 이게 뭐야.”
“누가 습격이라도…….”
“곰이겠죠.”
기억도 없으나 기사였던 습관이 남아 있는지, 사방을 경계하는 남자에게 리오니가 한숨 쉬며 말했다.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돌화덕이 집중적으로 헤쳐져 있는 것이, 아무래도 리오니가 떠나기 전 구웠던 빵 냄새를 맡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화덕은 못 쓰겠네…….”
“이거 원.”
다행이라는 생각 취소. 리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간의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부서진 문을 들어 올려 보고
있었다. 곰이 들어오며 문을 뜯어 놓다시피 했다. 경첩은 가뜩이나 비싼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다 휘어져 회생
불가였다.
“두고 봐야죠.”
“울타리도 없는데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리오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도 자그마한 사냥꾼들 오두막에서 함께 지냈는데,
제집이라고 다를 이유가…….
이유가…….
“리오니?”
남자가 그녀를 돌아봤을 때, 리오니는 뒤로 확 돌아섰다. 이상하게 민망하고 얼굴이 빨개져서였다. 초라한 집
안이 갑자기 눈에 밟혔다. 리오니는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손을 뻗어 나뒹구는 집기들을 챙겨 들었다.
“아, 도와드리겠습니다.”
163 화
불운인지 행운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스는 대장간에 없었다. 정확히는 마을 남자들 전체가 봄 사냥을 나갔다고
했다.
“예에…….”
안나의 수다는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리오니는 예에, 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경첩을 골랐다. 고른다기도
뭐한 게, 딱 두 개 있었다. 그나마도 마을의 다른 아낙이 주문해 놓은 물건이었다.
“괜찮아요. 달 수 있어요.”
“감사해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배를 다치면 며칠은 재채기도 잘 못하던데. 이게 말이 되나. 리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어깨에 멘 나무둥치를 엿차, 하고 내려놨다. 쿵 소리가 났다.
말이 되나 보다…….
“그…… 네…….”
둥치 하나를 가져다 놓고 남자는 차근차근 그것을 쪼갰다. 아버지가 쓰던 장작 도끼를 남자는 마치 어린애들
장난감처럼 다뤘다. 하나를 다 쪼갠 후에는 리오니가 가져온 경첩을 가져다가 문에 대 보더니 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아.”
“부친께서는 혹시…….”
“돌아가셨죠.”
“그래도…….”
남자의 눈이 집 구석에 있는 나무 침대로 향했다. 어젯밤 남자가 쓴 침대는 리오니의 아버지 것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쭉 비어 있었던 오래된 침대. 리오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에.”
***
리오니는 나으리라는 말 대신 남자를 펠릭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행운이라는 뜻이었다. 펠릭스는 멋쩍어하며
사과했다. “별수 없죠. 점심부터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리오니는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오고
있었다.
“다 먹고 오늘 저녁 전에 고쳐 놓겠습니다.”
“여름고사리요?”
“아, 그게요.”
봄꽃이 다 떨어진 직후였다. 이맘때쯤 북부의 숲에서는 여름고사리순들이 올라온다. 한여름이 무르익을 때쯤에는
팔뚝만 해지는 덩굴이지만, 이맘때에는 아직 여리여리한 그 순은 시장에서 꽤 비싸게 팔렸다.
“저도 같이 갑니까?”
훌륭한 인력을 침대 수리 따위에 놀리면 쓰나. 남자는 고민하다가 리오니를 따라나섰다. 여름고사리를 따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손은 리오니보다 두 배나 크면서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리오니는 세 바구니를 생각했지만
해가 어스름해졌을 무렵에 두 사람이 든 여름고사리순은 네 바구니였다. 리오니는 방글방글 웃으며 앞서 걸었다.
“조심하세요.”
“예! 괜찮아요!”
“그것도 괜찮아요!”
“추울 텐데…….”
“……아.”
하지만 더 붙들기에는 핑계가 없었다. 펠릭스는 더없이 건강해져서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는 중이었다.
리오니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장작을 패고, 리오니보다 더 늦게 잠든다. 하여 리오니는 슬슬 초조해졌다.
사실 남자를 별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리오니는 처음부터 펠릭스가 자신과
어울리기엔 너무나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지만 남자에게는 시정잡배와는 다른 품위가 있었다. 평범한 놈팡이였다면 진작에 리오니에게 못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펠릭스는 리오니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건 물론, 그녀를 마치 공주처럼
모셨다. 황홀한 두 달간이었다.
“뭐, 그거야…….”
“예?”
남자가 당황한 듯 반문했다.
164 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리오니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남자가 제게 희미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지는 좀 됐다. 그러나 신분
차이가 너무 났다. 한스는 남자의 갑옷을 보고 이건 자신 같은 대장장이는 엄두도 못 낼 솜씨로 만든 물건이라고
했다. 남자가 걸고 있던 은목걸이는 귀족 가문의 문장이 분명하니 신분을 찾는 것도 시간문제라 했다.
그러니 리오니는 남자에게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기억이 없는 남자에게, 자신이 크나큰 의지가 되었을 건
뻔했다. 연정을 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남자가 신분을 찾고 나면 그저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나
버릴 게 뻔했다.
부슬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갈아입은 옷도 곧 젖을 게 뻔하니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기가 싫었다. 괜히
옷을 몇 번이고 더 쥐어짜며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오니.”
“리오니.”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
“제가 싫은가요.”
리오니는 그대로 굳었다. 리오니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라고는 하지만, 펠릭스는 그녀의 어깨에 어떤 힘도 주지
않았다. 돌아보려면 얼마든지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 예…….”
“리오니는 어떤가요?”
“……그.”
“싫지는 않아요.”
“……좋은 것도 아니라는…….”
“그게 아니고요.”
좋았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마을의 어느 누구보다 멋진 남자였다. 이미 사랑에 빠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오니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다른 말을 먼저 내놨다.
“…….”
“…….”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초록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리오니가 픽 웃었다. 남자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
“저도 그래요.”
“네.”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리오니도 몰랐던 그녀의 마음을 남자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면,
리오니는 아마 그곳을 떠날 것이다.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될까 봐. 리오니는 가능성
없는 일에 미련하게 제 인생을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다.
“아닌데요…….”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으나 남자는 속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리오니의 손을 당겨 잡았다.
마치 도망치는 그녀를 구속하려는 듯.
“리오니. 제가 당신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제 아내가 되어 주세요.”
급하다는 말에 돌아오는 소리가 아내가 되어 달란다. 리오니는 어쩐지 그대로 짜부라지고 싶었다. 자신이
토끼라면 토끼 굴에 숨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크고 따뜻한 손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고 있었고, 리오니는
대답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쁩니다.”
“근본도 모를 계집앤데요…….”
“그럴 리가요!”
남자가 웃었다. 그제야 제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아차린 리오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
“안 될까요?”
남자가 재차 물었다. 리오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비장하게 펠릭스 쪽으로 고개 숙여 입 맞췄다.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고, 남자의 초록색 눈 안에 놀라움이 번졌다가 이내 기쁨이 들어찼다.
“난 몰라…….”
그렇게 말한 순간, 남자는 리오니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꺅,” 하고 리오니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리오니를 꽉 끌어안고 크게 웃었다. 펠릭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여름의 숲속으로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뒤이어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평생 잊어버릴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순록 사냥에서 정신을 잃고 돌아온 지 사흘이었다. 서투른 기사 하나를 보호하려 가로막다가
순록의 거대한 뿔에 자신이 받힌 것이었다.
하필 대영주도 자리를 비운 터라 리오니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었다. 대신 인편에 소식을 듣자마자, 수정문으로
자신을 진찰하는 의원을 보내 주었다. 의원은 몇 번이나 왔다 간 참이었다. <부상은 심하지 않은데……. 모를
일입니다. 기다려 보시죠.> 기다리라는 말도 몇 번을 들은 것인가. 리오니는 초췌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도 벌써 몇 번째인지.
드세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산속의 리오니를 여리다는 소리까지 듣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야말로 디트리히
에른스트이거늘. 리오니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디트리히 에른스트!
다음 순간, 기적처럼 남자의 눈꺼풀이 꿈틀댔다. “으윽…….” 리오니는 기함해 그 앞으로 달려들었다.
“누구…….”
165 화
남자는 리오니를 아내로 맞은 뒤에도 델마릴로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 델마릴에 다녀오려면 너무 많은 날이
걸리고, 그렇다고 디트리히 혼자 다녀오자니 리오니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의원에게라도
한번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 우연히 마을에 들른 의원에게 그를 보인 적 있다.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다 또 어느
날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돌아오는 일도 왕왕 있다 했다.
<그렇지만 그 기억이 돌아오면 반동으로 기억을 잃었던 때를 또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지. 그러니까 주의해.>
그 의원의 말을 리오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디트리히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고 나서 보였던 여러
의원들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기억을 잃었던 사람들이 원래 기억을 찾으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다고.
늘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었던 말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올 게 왔다는 심정에 가까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태연해지지는 않았다.
리오니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한참을 울었던 터라 눈가가 아직도 발긋했다. 디트리히는 침대에 앉아
의원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가슴에 든 새카맣고 커다란 멍. “제가 순록에게 당했다고요. 허어.”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으니 당분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원은 디트리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이미 그가 그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리오니에게서 전해 들은 뒤였다.
힘든 전투였을 게 뻔했으나 남자는 굉장히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리오니를 쳐다보곤 했다.
낯설어서 그럴까. 진찰을 끝낸 의원은 혀를 차며 몇 가지 주의를 줬다.
“아, 예.”
남자는 단정한 얼굴로 상체를 살짝 세워 앉아 있었다. 이마에도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을 흐려
놓지는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덕분에 감아 놓은 붕대가 속상했다. 여느 때였다면 당장 달려가서 갈비뼈 한
대를 더 부러트릴 기세로 미쳤냐, 당신은 목숨이 어디 두 개냐, 어쩜 그렇게 나랑 펠릭스, 안톤 생각은 안
하느냐 같은 소리를 쏟아부어야 마땅하겠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7 년이 지났다고요.”
확실히 보통 사람들은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일이 없다. 리오니가 쓴웃음을 지으려 할 때,
디트리히가 물었다.
“아.”
그를 보였던 최초의 의원이 했던 말을 리오니는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준비해 놓은 답도 있었다.
그 답은 매년, 매 계절 조금씩 바뀌었지만 대부분은 비슷했다.
“이곳은 루덴 대영지고요.”
“대영지요.”
“예.”
리오니는 눈알을 굴리다 말을 이었다. 에른스트 경께서 말씀하시는 전쟁은 이미 그때 끝났어요. 경이 다친 전투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답니다. 그때 이후로 루덴은 부쩍 몸을 불려 대영지가 되었어요. 지금 영주 각하…….
그러니까 라인하르트 델피나 린케 후작의 휘하에는 아홉 개의 영지가 딸려 있답니다.
그 7 년간을 저렇게 말해도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말할 재주는 없었다. 당신은 기억을 잃으셨고, 제게
구해지셨어요. 우리는 산에서 같이 살았고, 당신은 여름고사리순을 따던 날 제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했지요.
그날은 부슬비가 내렸는데, 저는 온몸이 푹 젖었지만 아주 행복했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해 봐야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수도에요?”
디트리히는 이마를 문질렀다. 영주들이 수도를 오가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루덴 대영주가 아이 때문에
수도에 가 있다는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괜찮으리라. 남자는 한참이나 제 상황을 되뇌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도 친절한 말투였다. 리오니는 디트리히가 제 쪽을 보는 눈동자를 보고, 하마터면 자상한
그녀의 남편이 돌아왔다 착각할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이름을 묻는 그의 얼굴에는 마치 애정처럼 보이는
호감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도저히 착각할 수도 없었다. 남자는 리오니의 이름을 모른다. 괜찮아.
준비했던 말이 있잖아. 괜찮아. 리오니는 심호흡한 다음 입 열었다.
“……예?”
리오니는 정말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디트리히의 얼굴이 창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그런 적도 없다는 듯
곧장 벌게지는 그 얼굴을 보니 그녀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리오니는
차분하려 애썼지만, 기실 남들 보기에는 거의 울먹이지 않아 다행인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디트리히의 얼굴이 새까매졌다. 귀 끝까지 빨갛다 검어진 그 얼굴은 도무지 항상 태연한 제 남편의 것 같지가
않아 리오니는 슬퍼졌다. 그는 한참이나 넋 놓고 리오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입을 가리고 “아니,
그건……. 이건.” 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남자에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려 해 리오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가 미안하다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속상했다.
그렇지요. 역시 당황스럽겠지요. 갑자기 깨어나 보니 모르는 아내가 생겼다는 건.
쉬시겠어요? 제가 다음에 올까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간신히 디트리히가 손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발긋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그러니까, 벌써 7 년이 지났고.”
“예.”
“예에.”
“……예에.”
“놀랍군요, 이건…….”
“……예?”
남자는 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신음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갈비뼈가 부러진 주제에 일어나려니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당연했다. 리오니는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가 남자의 등을 받쳤다. “조심…….” 눈이
마주쳤다. 리오니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 익숙한 녹색 눈동자가 밭은기침을 내뱉느라
찡그려졌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히 미소 지었다.
“아.”
“…….”
남자의 뺨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리오니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정하고 상냥한
음색으로, 천천히 속삭였다.
“……예?”
“뒤늦게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도 이상하게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맙소사. 그런데 당신이 제 아내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제는 리오니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무슨 말을 섣불리
하려다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디트리히가 웃었다.
“놀라운데요.”
결국 리오니는 디트리히의 등짝을 두어 대 때리고 말았다. 갈비뼈가 부서진 남편에게 내리는 처방치고는
가혹했으나, 그렇다 해도 좋은 일이었다.
166 화
외전 3. 꽃의 이름
“라인.”
“그런 게 왜 궁금하죠?”
“이 양만 봐도 짐작되니까.”
“비슷한데요.”
“어째서요?”
남자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고 그녀를 들여다봤다. 라인하르트는 남자, 빌헬름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하.”
그제야 빌헬름이 알겠다는 얼굴이 됐다. 그만큼 기록들은 두서없고 양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책 한 권이 통째로
놓여있는가 하면, 귀한 종이를 반면도 쓰지 않은 것도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혀를 찼다. 종이가 아까워서는
아니다.
“제 기쁨이에요, 라인하르트.”
“너는 안 궁금해?”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집어 든 종이를 힐끗 쳐다봤다. 라인하르트가 대강이나마 알아낸 것들을 빼곡히 정리해 써
넣은 종이였다. 초대제의 이야기 따위보다는 저 글자들을 쓸 때의 당신 표정이 백배는 더 궁금하다고 말하면 화를
낼까?
“정말요? 모를 것 같은데.”
침대 위에 기대앉은 라인하르트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무심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대답한 남자의 행동은
무심하기는커녕 다정다감했다. 라인하르트의 옆에 앉아, 라인하르트의 어깨를 감싼 후 그 머리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라인하르트는 이제 거의 뒤에서 안기듯 한 자세가 됐다. 남자의 시선이 제가 든 종이에 박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입 열었다.
“당신께서 제게 주신 복된 경험 중 하나죠.”
“어련하겠니.”
***
페드라사의 파피.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다.
페드라사의 고아들은 치안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영주의 병사들에게 죽임당하거나, 혹은 외부로 팔려 나갔다.
파피는 후자였다. 전생의 그녀는 영주에 의해 팔려 나가 항구 도시 여관의 여급이 됐다. 죽도록 부려 먹히고 안
죽을 정도로만 먹을 수 있는 인생을 십 몇 년쯤 살다가, 그 후에는 여관 주인에게 밉보여 또 배에 실렸다.
배에서 내린 후에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의 창관에 넘겨졌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선 곳이 창관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파피는 좋지도 않은 머리를 최대한 굴려 도망쳤다. 항구 도시에서 창관의 여자들이 맞이하는 최후를
익히 봤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도록 일하는 게 나았다.
파피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창관의 주인은 그녀를 쫓으려 개와 건달들을 보냈다. 맨발에 피가 나도록 뛰었고,
어느 순간에는 그 피가 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땅에 도달했다.
보통은 그쯤에서 멈춰 설 것이다. 아니면 다른 따뜻한 곳으로 갈 궁리를 하거나. 하지만 밤새도록 쫓긴 파피의
귓가에는 개들이 짖는 환청이 계속됐다. 파피는 보이지도 않는 개에게 쫓겨 얼음을, 눈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그 산이 프람 산맥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였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네 번째 인생을 살 때쯤 알게 됐다.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
하여 처음으로 인간을 만나는 호기심 많은 용은, 온몸이 얼어붙은 데다가 바짝 말라 빈사 직전인 파피를 살려
두었다.
<파피?>
파피의 이름을 들은 용은 웃음을 터트렸다. 꺽꺽대는 듯한 이상한 소리였다. 집채만 한 용이 그렇게 웃는 바람에
바짝 마른 파피는 그대로 떼굴떼굴 굴러 프람 산맥의 골짜기로 떨어질 뻔했다. 용이 그녀를 집어 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데파피나는 제게 사랑을 고백하는 거대한 도마뱀을 보며,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것을 상상하게 됐다. 도마뱀은
어떻게 교미하더라? 그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데파피나가 도마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아였던 시절
페드라사에서였기 때문이다.
애당초에 이 도마뱀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기는 할까? 데파피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이어 자조했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데파피나도 같았다.
167 화
용은 드래곤 하트를 내어 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게 왜 갖고 싶으냐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데파피나는
새로운 인생을 거머쥐었다.
“왜 내가 널 찾아가야 하는 거야?”
“실례지만 어, 어느 귀한 분이시온지…….”
그래서 데파피나는 용의 목을 끌어안고 쥐새끼들의 소굴을 모조리 불태워 달라 부탁했다. 용은 흥겹게 대륙을
불태웠다. 예쁜 쥐새끼 하나를 손에 들고, 다른 쥐새끼가 사는 하수구를 무너트려 흙으로 메워 버리는 짓은 언뜻
보기에 아이러니해 보인다. 그렇지만 누구든 할 수 있는 짓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용의 머리에서, 데파피나는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그리고 또다시 네 번째 생이 반복됐다.
“개새끼.”
***
아름다운 데다가 지혜롭고 용맹하기까지 한 그녀를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물었다.
고아였기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으나, 족히 백 년은 산 듯한 현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는 술에
취해 웃으며 답했다. 자신은 여덟 번을 죽었다가 아홉 번을 되살아났다고.
라인하르트는 수많은 기록 안에서 아마릴리스 데파피나 알랑케스의 인생을 짐작해 봤다. 고작 열두 살에도 어떤
기사들보다 뛰어난 무용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 소왕국들의 약점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으며, 보통
사람은 평생에 걸쳐도 못 해낼 일들을 이룩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에서 그쳤으나
라인하르트는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용에게 기대어 두 번째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므로.
“징글징글했겠구나.”
“……아마도 그랬겠지요.”
“내가 발견한 건 이거야. 초대제가 했던 말. 그녀는 평생 동안 프람 산맥에 올라가지 않았어. 하지만 루덴…….
제국의 북쪽에는 한동안 머물렀지.”
빌헬름이 웃었다.
“나만?”
“으음…….”
“애들은 여기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빌헬름은 연인의 쇄골께를 간지럽혔다. 연인은 이마를 찡그려 보이며 웃다가 벌떡 일어났다.
빌헬름은 어리둥절해했으나, 그의 손을 잡고 이끄는 여인을 따라 순하게 걸음을 옮겼다. 환영궁의 방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두 사람을 따라 나섰으나 빌헬름이 손을 내저었다. 시종들이 울상 지었으나 젊은 황제는 루덴
대영주와의 시간을 남들이 방해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용은 단 한 순간도 데파피나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데파피나로서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연맹의 한 기사와
정분이 나자 용은 그 기사를 발끝으로 눌러 죽였다. 데파피나가 그 기사와 단둘이 있고 싶다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사랑한다고, 그러던데.”
용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나니, 용의 어깨 너머로 으깨진 기사의 시체가 보였다. 데파피나는 구역질이 났다.
대륙의 모든 왕국이 용을 대동한 대영주를 적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데파피나는 무적이었다. 전쟁터에서 용은
데파피나 근처에 오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168 화
연맹의 기사를 눈으로 좇자 용이 고개를 기울였다. 데파피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용은 데파피나에게 물었다.
“왜 저자를 자꾸 쳐다보지?”
“그러니.”
“아니, 싫어.”
“왕국이 널 화나게 했니? 아니면 널 적으로 규명한 그 인간들 때문에? 내가 가서 불에 태울까? 하지만 너는 그런
건 너무 쉽다고 싫어해…….”
“아마릴리스.”
“작아져? 얼마나?”
“이거면 돼?”
“그래.”
데파피나는 용을 안아 올렸다. 차가운 비늘의 표면은 벨벳처럼 부드럽고도 딱딱했다. 용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즐거워했다.
“그래?”
“응!”
“네가 원한다면야!”
“어…….”
용이 눈치를 봤다.
“도로 길게 해 줄까?”
놀림당한 기분이었다.
데파피나는 다른 것에 골몰했다. 데파피나를 적으로 규정한 왕국을 쳐부수었다. 용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말해
두어 용은 늘 데파피나의 전쟁을 관조했다. 하지만 그것이 기만이란 사실을 데파피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용
덕분에 절대로 죽지 않았으니까. 데파피나에게 날아드는 모든 화살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불타
사라졌다. 누군가는 그녀를 불멸의 여신이라고 불렀고, 또 누군가는 그녀를 마녀라 불렀다.
다섯 번째 인생에서 데파피나는 처음으로 제국을 만들었다. 대륙의 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제국의 이름을 두고
데파피나는 용에게 말했다.
“네 이름을 붙일 거야.”
“아마릴리스?”
“그래.”
“결혼?”
데파피나는 용을 설득하려 애썼다. 이만한 제국을 건설했잖아. 아이가 있어야 해.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나는 결혼해야 해. 상대를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야. 용은 납득하지 못했다.
“네 뒤를 왜 이어?”
“나는 인간이잖아.”
“데파피나.”
용은 노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응. 네가 원할 때에.”
“아마릴리스.”
데파피나의 네 번째 죽음을 용은 기억하지 못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결국은 데파피나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야 말았던 제 멍청함이 싫은 것인지.
용은 어느새 죽음을 과정으로 치부하게 된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용이 아마릴리스의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
“아마릴리스.”
“그리고 넌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거야. 사랑이 나쁘다는 게 아냐. 나도 알아. 넌 사랑하는 것이 많지. 네가
만든 이 인간의 나라가 그렇지. 네 침대도 좋아하지.”
“…….”
“내가 널 사랑한다고?”
용은 슬프게 울었다.
“부정하지 마. 너는 날 사랑해.”
데파피나는 충격받았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데파피나는 확신했다. 자신이 용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다시는 인간으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데파피나는 침착하게 용을 두고 일어섰다.
“우리 둘 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다. 아니, 너는 지혜로운 용이니 필요 없겠지만 나는 필요해. 그러니 나를
잠깐 놔둬 줄래?”
“그래.”
“말해.”
“무서워.”
“아마릴리스.”
“날 사랑하잖아.”
“데파피나.”
용이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
다섯 번째 인생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데파피나는 어쨌든 그것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과정일
뿐인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기 직전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파편들은 늘 같았다.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 웃던
아름답고 커다란 것, 바람에 요동치던 흰 몸의 붉은 줄들, 손끝에 닿던 뜨거운 온기. 그 머리 위에 올라앉아
느끼던 차가운 바람과,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던 안온한 것들.
한 번만 보여 줘, 너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인생에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용은 그렇게 저열해졌다. 연인이
손가락에 끼고 있었던 별것 아닌 반지 하나를 매만지며 제 목숨과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지독히 차가운 겨울 산을 오르며 데파피나는 용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미쳤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미친
인간의 비루한 인생에 엮여 버리고야 만 아마릴리스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만나.”
누워서 올려다보니 햇살 아래 반짝이는 금발이 보기만 해도 싱그러웠다. 데파피나의 모습으로 둔갑한 용은 손으로
스스로의 심장 부근을 피가 나도록 박박 긁었다. 죽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용은 손을 멈췄다. 이미 심장
부근은 반쯤 갈라져 피가 줄줄 흘렀으나 용은 죽을 수 없었다.
169 화
“용은 아마릴리스의 반지를 언제 되돌려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했죠. 어쩌면 한 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요.”
빌헬름은 평이한 어조로 라인하르트의 말에 반박했다. 라인하르트가 흠칫하며 빌헬름을 올려다봤다. 빌헬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를 살 수 있었다면 빌헬름은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아니,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틀림없이 그리했으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대신 빌헬름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빌헬름.”
***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네가 보고 싶어서.”
“머리색은 왜 그래?”
용이 뜨거운 몸으로 데파피나를 안았다. 차갑게 얼었던 몸이 녹았다. 데파피나는 웃으며 울었다. 용에게 붙여 준
이름이었으나 용은 그녀에게 이름을 돌려주었다. 다 줄게. 다 돌려줄게. 그러니까 나 하나만 사랑해 줘. 제발.
온몸으로 발버둥 치는 용이 가엾고 불쌍했으며 지독히 사랑스러웠고, 끔찍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인생은 평온했다. 데파피나, 아니 아마릴리스가 두 번의 인생 다 프람의 분지에서
평생토록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드라사의 영주는 쓰레기로 일생을 끝마쳤다. 서른여섯 개의 소왕국은
연맹을 결성하는 일 없이 저들끼리 치고받았다. 아마릴리스는 영원한 봄의 분지에서 그대로 나이 먹어 노인이
되었다.
용이 눈을 깜박였다. 분지 안에는 아마릴리스와 그가 살아온 증거가 가득했다. 낡은 옷장, 거울과 화덕, 식량들.
그중 자그마한 침대 위에 누운 노인은 너무 작고 말라서 곧 소멸할 것처럼 보였다.
“또 봐.”
또 봐.
또 봐, 데파피나.
아홉 번째의 인생.
그리고 수정을 사들였다. 화폐를 만들었다. 수정문을 만들었다.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들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는 문을.
***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빌헬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빌헬름은 어쩐지 창피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으나, 그의 연인은 곧장 걸어와 그의 턱 밑에 섰다. 결국 빌헬름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빌헬름.”
“아마릴리스 알랑케스는 중년의 나이까지 제국을 끊임없이 유람했다고 되어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혹한지의
폐서]는 그 기록을 전면으로 부정하지. 아마릴리스는 루덴에 있었을 거야. 이런 기록을 쓸 정도면…… 어쩌면
루덴에서 몇 번의 인생을 거쳤을지도 모르지.”
“그거야 진작에 우리가 얘기했던 일이죠.”
“…….”
자신을 죽였던 연인을 그리워한 여자. 아마릴리스 알랑케스는 말년을 제국 수도에서 보냈으나, 그 삶의 궤적 속
몇 군데는 드물게 불명확했다. 쉼 없이 연인을 갈아 치워 문란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그 또한 외로움의
증거일지 모른다.
“누워 있다고요.”
라인하르트가 코를 찡그렸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 말하고 싶은데요.”
“하지 마.”
기다랗고 우아한 손가락이 황제 폐하의 입을 꽉 막았고, 황제 폐하께서는 더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꺅, 하고 라인하르트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남자는 짓궂게 여자를
끌어안았다.
“저는 제가 아무 말 못 하는 쪽이 더 좋지만요.”
“말하지 말라니까.”
“그렇지요.”
“흥미로워하는 중이에요.”
“내 말 재미없니?”
“여기 회랑이야.”
마지막 음절마다 퍽, 퍽, 퍽 하고 가슴을 두들겼다. 그제야 빌헬름이 혀를 차며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뗐다.
“또 뭐?”
“미쳤니!”
소리 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그녀의 연인은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소리치고야 말 것이다. 제 연인을
이제 어느 정도는 안다고 할 수 있는 라인하르트는 서둘러 말을 고쳤고, 빌헬름은 정말로 아쉽다는 얼굴이 됐다.
프람을 정복하려던 여자의 걸음은 그리하여 루덴에서 멈추었다. 자신을 죽이고야 말, 사랑하는 연인을 프람에
두고.
그리고 시간에 발이 묶여 버린 용은 그대로 프람에서 홀로 몇백 년을 지냈다.
“…….”
라인하르트는 속상해져 남자의 뺨을 쓰다듬으려 손을 올렸으나, 빌헬름은 도리어 그 손가락을 붙들고 안쪽에 입
맞췄다. 그녀가 빌헬름을 막기 위해 다친 상처 자국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홉 번의 인생을 산 초대제가 아니라면, 그 아이라도 자신의 심정을 맛보길 원했을지 모르죠.”
라인하르트는 충동적으로 빌헬름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앞에서 칼을 들고 울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 빌헬름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거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안쪽이
선득했다.
빌헬름은 손가락 끝에 힘주어 그녀를 안았다. 더불어 그 아득하고 서정적인, 영원한 봄의 둥지를 떠올렸다. 그
둥지 안에서 제가 사랑한 여자만을 계속해 기다린 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제 사랑을 끝내고 싶었다. 제 죽음으로 사랑마저 종결하고 싶었으나 스스로 죽지도 못했다. 연인의 생이 몇
번이나 남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여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쩌면 아직도 아홉 번의 인생이 다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하여 증오스럽고 사랑하는 릴의 아이가 나타났을 때, 치욕감에 휩싸였으나 동시에 비로소 아마릴리스를 포기할 수
있었다.
“들어갈까요.”
“그래.”
끝이었다.
170 화
외전 4. 온전한 관계
“디트리히에게 또 그럴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영주의 호위를 맡은 디트리히에게 두 사람의 따돌림은 좀 다르게 다가오는 문제였다. 결국
디트리히는 숲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얼굴이 활짝 피어서 돌아오신 황제 폐하에게 찡그린 얼굴로 폭언을 퍼붓고야
말았다.
존대와 반말을 오가는 그 폭언에 당사자는 피식 웃기나 했다. 라인하르트도 킬킬댔음은 물론이다. 그 모습을 본
디트리히는 라인하르트에게도 온갖 짜증을 냈다. <제가 각하께서 철없는 어린애처럼 연애하는 꼴 보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한 때도 있었다지만 말입니다!> 결국 라인하르트가 디트리히의 어깨를 두들기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일이 끝났다.
“또 그런다뇨?”
침대에 기대앉은 빌헬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후의 햇살이 불투명한 창문 안으로 들어와 빌헬름의 뺨에서
부서졌다. 라인하르트는 드러누워 그 평화로운 광경을 감상하며 여상히 물었다.
“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빌헬름?”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빌헬름이 너무나 명백하게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빌헬름? 내가 물었잖아……?”
그녀에게는 늘 환히 빛나던 남자의 눈가가 조금 실룩였다. 당황이 가득한 눈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후, 그녀의 연인은 라인하르트의 기다림을 배신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수심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인 것이다.
“빌헬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인데 이런 소리를 한다고? 라인하르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배신감이 솟구쳤다. 그녀와 빌헬름이 프람 산맥에서 내려온 지 벌써 1 년여가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저만 보는 빌헬름의 맹목이 없어졌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배운 게 조금은 있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하니 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거짓말 안 하겠다는 맹세는 꼬박꼬박 지키고 있는 제
연인이 얄밉고 짜증 나기 그지없어져서였다.
아니 한심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 이렇게나 민감한 이야기를 너무 취기에 들떠 물었나 하는 마음도 생겼다.
늘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겨우 루덴으로 온 빌헬름에게, 하루 만에 화를 내는 것이 미안해져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은 어쩐지 뺨이 조금 벌게지더니,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계속 나오는 웃음을
어떻게 하지 못해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라인하르트는 기가 찼다. 설마 내가 지금 우스운 건가? 그래서 저러는
건가? 그러나 빌헬름은 라인하르트가 그를 오해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무슨 뜻이야.”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찡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빌헬름은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수줍게
말을 이었다.
“……아하?”
라인하르트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내가 우습다?”
빌헬름이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망설이던 그는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침묵 후에야, 다시 답했다.
“이거 너무 이상하네. 이상하다는 말밖에 못 하겠어요. 기분이 갑자기 들떠요. 당신이 제게 계속 화내고
계시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화를 내시겠지만, 라인하르트.”
“저도 알아요.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싸우고도 헤어지지 않는 거. 그런데 당신이 저에게 그러고 있으니까,
너무 이상하고 좋고……. 꿈같아요.”
“저 지금 알 것 같아요.”
“뭐!”
라인하르트가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말투 끝에는 어처구니없음과 더불어 가벼운 웃음이
어우러져, 본래는 날카롭기 짝이 없었을 말이 뭉그러져 어린애가 내는 짜증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빌헬름이
한층 더 환히 웃었다.
171 화
“온전한 당신.”
“…….”
“…….”
빌헬름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옅어지고 진지해졌다. 청년은 눈앞의 여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온전한 것…….
그것은 비단 디트리히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녀를 배신했음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알고 있었으나,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눈물로 고백한다면 그것마저 용서할 사람이었다. 그러니 빌헬름의 불안은 배신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지금 당신은 제가 싫어서, 미워서 화내는 게 아니신 거죠. 저를 이해하고 싶으신 거지요.”
“빌헬름.”
“저는 늘 당신과 충돌하는 것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충돌이 이런 것이라면 왜 그렇게 무서워했나 싶어요.”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두 번의 인생을 살아 냈음에도, 누구나 깨우치는 것들을 미처 배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결핍을 이제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애가 더듬더듬 일어서서 걸음마부터 배우는 것과 같았다.
라인하르트는 손을 뻗어 빌헬름의 이마를 쓸어 넘기고, 손가락 끝으로 상처 난 눈썹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빌헬름이 한쪽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물론이에요.”
라인하르트가 환히 웃었다.
“다행이네.”
“기뻐요.”
콱.
“아.”
“라이아르…….”
“어…….”
탐스러운 금발이 부드럽게 사르륵 흩어져 그녀의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소름이 돋는 건 왜일까.
“……어어어…….”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 그의 사랑스럽고도 성질머리 대단하신 따님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비비, 혹은 비앙카가 아니라 비앙카스텔라 프리다 린케라는 이름이 라인하르트의 입
밖에 튀어나오면, 조그만 따님께서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치곤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랑해
마지않는 제 연인이 길게 이름을 불러 주면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도대체 왜 저렇게 도망을 치나 궁금해했는데.
“당신이 디트리히를 아끼는 건 알아요. 당신이 절 싫어하지 않게 하려면 그때 달려가야 한다는 것도.”
“…….”
“기가 막혀서.”
바깥은 어느새 해가 천천히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란 햇살이 온통 루덴의 성 앞마당을 비추는 안온한 시간.
빌헬름은 엉거주춤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성 앞마당은 언제나 그랬듯이 분주했다. 세탁물을 한 아름
안고 가는 하녀, 시시덕거리는 기사들, 말의 등을 닦아 주고 있는 마구간지기와…….
“아.”
빌헬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을 둘러본 후에야, 빌헬름은 성 앞마당의 작은 여름사과나무 아래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는 루덴 대영주의 측근 시녀를 찾을 수 있었다. 여름에 열리는 아기 주먹만 한 여름사과를 따기 위해 제
아들인 펠릭스와 함께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 둘을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팔짱 끼고 있는 디트리히 에른스트가 있었다.
“저게 왜…….”
“빌헬름.”
그딴 게 알 바냐. 저 부부가 무슨 대화를 나누든 빌헬름의 관심사는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아냥거렸다.
“아, 예.”
“그럴 리가요.”
“아니지.”
“그래, 내가 울 테니까…….”
“그때도 참 당신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라인하르트, 해가 져요.”
“응.”
“당신 우는 거 또 보고 싶은데…….”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