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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 차라리 제 목숨을 가… 목록

40화 :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소서


2022.06.17.

그 후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리사를 찾았다.

리사와 나는 제법 대화가 잘 통했다. 의외로 우리 둘


은 성격이 비슷했다.

“뭐? 널 등 처먹으려고 했던 상인한테 겨우


독점권 뺏어오고 세금을 왕창 내게 하는 결과
로 끝냈다고? 말도 안 돼! 만약 에테리아 제
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손발톱을 뽑고
두피를 벗겨……!”

아픈 리사는 굉장히 강인했다. 대화를 나누자 왕년에


기사였다는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에테리아 황제가
강인한 여자라고 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괜, 괜찮아. ……그건 죽이는 거잖아…….”

“당연하지! 감히 제국의 황후를 등 처먹으려


고 해? 죽어 마땅하지! 에테리아 제국에서는
그런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아! ……콜록, 콜
록!”

격하게 외치던 리사가 손수건을 들더니 별안간 기침


을 토해냈다. 어깨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격한 기침이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리사의 시녀가 익숙한 것처럼 재


빠르게 그녀를 감싸고 물을 건넸다.

“콜록콜록!”

물을 한 모금 마시고도 리사의 기침은 잦아들지 않았


다. 오히려 더 심해져 수 분간 계속 이어졌다.

“하아, 하아. 미, 미안해. 테리. 콜록. 많이 놀


랐지? 하아.”

리사의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떼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겨우 반나절도 안 됐다. 앉아서 대화한 것도 리사한


테는 무리가 갈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었다.

내가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똑…… 똑.

개미가 기어가는 정도의 작은 노크가 들렸다. 이제는


노크만 들려도 누군지 뻔히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리사는 서둘러 입가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닦았다. 그리고 시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피가 묻은
손수건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은 침구를 정리하고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


를 정리했다.

빠른 몸놀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리사를 만나러 왔을 때처럼 아무렇


지 않은 모습으로 청아하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리사가 자신의 손을 꽉 잡아 떨림을 강


제로 멈췄다.

그건 자신이 아픈 모습을 걱정하고 그 누구보다 아파


할 이를 위한 노력이자 배려였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에테리아 황제가


다가와 리사를 반갑게 안았다.

“여보.”

그 몇 시간 동안 잘 있어 줘서 고맙다는 것처럼 말이
다. 별것 아닌 짧은 시간이 두 사람한테는 소중한 찰
나였다.

에테리아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리사의 입술


에 묻은 핏자국을 슬쩍 엄지로 닦아냈다.

“대신관님을 모셔왔소.”

어쩌면 에테리아 황제의 작은 소리의 노크도 리사를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모습
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처
럼 말이다.

“어머. 레온하르타 황제께서 허락해주셨나


요?”

리사는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활기차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런데 이상한 조건을 붙이더


군.”

“조건이요?”

“어…….”

에테리아 황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옆에 있던 나를 힐


끔 살폈다. 왜 저러는가 싶어서 나도 그를 따라 고개
를 기울였다.

“대신관님께 축복을 받는 대신, 레온하르타


황후한테 말을 걸지 말라더군. 딴마음을 품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 당신이 레온하르타 황후에게 고맙다


고 전해주겠소? 나는 말을 걸 수가 없어서.”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에테리아 황제는 날 보며 리사


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리사는 가볍게
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으며 끄덕였다.

“테리엘라.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네요.”

“……오해가 있어서 그래요. 오해가.”

에테리아 황제와 리사는 그 후로도 한참 대화를 나눴


다. 그리고 리사의 뺨에 입을 맞추는 걸 마지막으로
에테리아 황제가 대신관 엘리후를 데리고 들어섰다.

“에테리아 황후님을 뵙습니다.”

엘리후가 들어서자 에테리아 황제와 나는 자연스럽


게 뒤로 물러섰다. 엘리후는 안에 내가 있을 줄 몰랐
는지 반갑다는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이내 자기 할 일을 이어갔다. 두 손을 경건하


게 모은 그가 기도를 읊었다. 엘리후의 기도가 이어
가자 모은 손에서 환한 빛이 퍼지더니 이내 리사의
몸으로 번져갔다.

“제발. 소문으로 들었던 대신전의 기적을 보


여주소서.”

옆에 있던 에테리아 황제가 엘리후를 따라 두 손을


경건히 모으더니 나만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리사도 엘리후를 따라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더니 눈


을 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어가는 기도가
널리 퍼졌다.

***

엘리후한테 축복을 받았음에도 리사의 상태는 점점


악화했다. 결국, 나와 엘리후는 리사가 미안한 얼굴
로 양해를 구하기 전 먼저 침실을 나섰다.

“리사의 상태는 어때?”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엘리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


다.

“사실 레온하르타 제국까지 온 게 기적입니


다. 아마 오는 데 여러 고비가 있었을 겁니
다.”

그런데도 굳이 레온하르타 대제국까지 온 건 아마 누


군가한테 엘리후가 대신전에서 행했다는 기적을 듣
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움직인 거겠지.

“엘리후. 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제가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미


병이 온몸으로 퍼졌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찰나의 고통을 잠시나마 줄여줄 수 있는 것뿐
입니다. ……그것도 얼마나 도움 될지는 모
르지만요.”

“……차라리 내가…….”

“거기까지.”

엘리후를 보며 운을 떼려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


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방해했다.

뒤를 돌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팔짱을 낀 리반펠이


삐딱한 자세로 날 보고 있었다.

“테리엘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개


입은 딱 거기까지야.”

“폐하.”

“에테리아 황제 부부가 황후를 만나러 제국에


넘어왔다는 건 대륙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만일 여기서 완치될 수 없던 병이 모두 완만
히 치료됐다는 소식이 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나는 리반펠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침만


꿀꺽 삼켰다.

“지금 당장 눈앞의 한 명을 치료해주는 건 좋


은 일이지. 하지만 그건 곧 이 대륙을 혼란으
로 뒤덮을 거다.”

“황제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리사가 있는 곳을 바라보던 엘리후가 통탄한 목소리


로 덧붙였다.

“다들 성녀의 출현을 의심할 겁니다.”

“살려달라는 자가 수백 명이 찾아오면? 수천
명, 수만 명이 달려들면 모두 감당은 할 수 있
고?”

“…….”

“평화협정을 맺기 전 이 대륙이 어땠는지 아


나? 전쟁이 들끓었어. 침략자와 정복자가 날
뛰었고 힘이 없는 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
퍼했지.”

리반펠의 말에 엘리후가 그때를 떠올렸는지 고통스


럽게 눈을 감았다.

“지금 평화협정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해.


서로 얻을 게 없으니 잠시 휴식하는 것뿐이
야. 만일 그 가운데 성녀라는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떨어진다면?”

“폐하의 말씀처럼 이 대륙이 다시 피로 물들


겁니다.”

“단 한 명을 살리고자 말이지.”

“저번처럼 엘리후가 했다고 하면…….”

내 말에 엘리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선한 의도로 힘을 사용하시는 건 동의하지


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건 단순한 치료
와는 힘의 사용이 다릅니다. 저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때처럼 제가 했다고 얼버무
릴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 나쁜 의도로 뒤를
캔다면 아마 성녀의 탄생을 알리게 되는 계기
가 될 겁니다.”

“…….”

“현재 황후님의 힘은 불안정합니다. 지금 힘


을 과다하게 사용하시면 지난번처럼 황후님
의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이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리사를 살리겠다는 내 마음이 이기심


이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하지
않은 잔혹한 이기심.

나는 입술 한번 떼보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돌렸다.

“……알겠어.”

나는 두 사람한테 결국 항복했다.

힘이 있는 데도 힘을 사용할 수가 없다. 나는 곳곳에


서 피어나는 무력감을 꾹 누른 후 주먹을 쥐었다.

 
내가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면.

수백 명의 사람이 몰려도 그들을 치료하고 쓰러지지


않도록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성녀라고 밝힐 수
있었을까?

그럼 리사도 살리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


울 수 있었을까?

‘힘을 제어해야 해.’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햄스터의 작은 뒷모습을 떠올렸


다.

명분이 없다면 내가 명분을 만들 수 있도록 힘의 사


용법을 온전히 배워야만 했다.

‘특훈하자!’

***

대신관의 축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분명 대신전에서 사고가 터졌을 때, 대신관 엘리후의


축복으로 그곳의 전염병이 모두 깔끔히 나았다고 들
었다.

그래서 에테리아 황제는 이 강행군을 고집했다. 리사


의 몸이 나빠지는 걸 느끼면서도 엘리후를 만나면 뭔
가 달라지지 않을까 희망을 기대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후는 그 후로도 며칠이나 지속으로 찾아와 리사


한테 매일 축복을 내려줬다. 그가 애를 쓴다는 건 누
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축복을 내리고 나면 엘리후가 입은 신관복이 다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으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리사의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이시여.”

에테리아 황제는 좌절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


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은 잔혹했다.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소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리사가 잠든 후, 달이 뜬
밤하늘을 보며 애절하게 기도하는 것. 그게 전부였
다.

“데려가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제가 당신의


곁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절 데려가시
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 속에서 구원하소서.

에테리아 황제는 울컥 차오르려는 눈물을 꾹 삼켰다.


리사는 눈물 흘리는 남자를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이 떠오르기 무섭게 다시 눈물이 차올랐


다.

이렇게 내 작은 것 하나부터 모든 게 당신인데. 당신


이 사라지면 암흑 속에서 난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에테리아 황제는 행여나 제 눈물이 리사의 단잠을 방


해할까 봐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악물었다.

누군들 내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준다고 하면 그게 설


령 악마라고 해도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에테리아 황제시여.”

악마가 그에게 접근했다.

“……누구지.”

침실 밖에서 들리는 부름에 에테리아 황제가 붉게 물


든 눈시울을 황급히 닦았다. 분명 부르는 소리가 들
렸는데 다른 소리가 더 들리지 않았다.

‘뭐지?’

에테리아 황제가 작은 단검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문


을 열었다.

끼이익.

하지만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침실 문 앞에 작은 수통과 편지 한 통이 남겨 있
었다.

“……이게 뭐지.”

에테리아 황제는 주변을 확인한 후 수통과 편지를 쥔


채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편지를 읽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앉은 자리는 달을
등지는 자리였다.

‘황제시여.’

편지는 무척 공손히 시작했고 필체가 고왔다.

‘에테리아 황후님의 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면 황제께


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수통 에 들어있는 약을 황
후님께 드리세요.

황후님을 고쳐드릴 약이 되길 기원합니다. 단, 한 방


울도 남김없이 전부 황후님이 드셔야만 합니다.

양을 정확하게 개량했으니 한 방울이라도 남이 맛보


면 효과를 얻기 힘듭니다.’

밑도 끝도 없는 편지 내용에 에테리아 황제가 헛웃음


을 지었다. 누가 보낸 건지 발신인도 안 적혀 있었고
수통에 든 약이 어떤 약인지 설명도 없었다.

에테리아 황제의 두 눈에 달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잔혹하게 가라앉았다.

‘함정인가.’

하지만 황후를 고칠 약이라는 문장을 읽는 에테리아


황제의 동공이 흔들렸다.

‘만일 믿지 못하겠다면 버리십시오. 드실지 버릴지


그건 모두 두 분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저라면 아무
것도 안 해보는 것보다 황후님을 위해 뭐라도 해보겠
습니다.’

편지에 적힌 말들이 에테리아 황제의 가슴을 후벼팠


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손에 쥔 수통을 향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게 부디 신이 내린 구원의 손길이기를 바
라는 불꽃이 피어났다.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황후님도 더는 고통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전처럼 말을 타고 평야를 누비며 행복하게 살 수 있


습니다. 두 분을 꼭 닮은 아이를 낳고 곳곳으로 여행
을 다니며 행복한 미래를 그리시길 바랍니다.’

이뤄질 수 없는 미래를 그리라는 말에 에테리아 황제


는 결국 편지를 내리고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오열이 흘렀다.

그때 뒤에서 고운 손이 뻗어 나왔다.

“이게 독이든 약이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죠. 여보.”

단단하면서도 고운 미성이 흘렀다. 에테리아 황제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언제 일어났는지 잠에서
깬 리사가 서 있었다.

“어차피 독을 먹어도 지금 죽고, 안 먹는다고


해도 살날이 오래 남지 않았어요. 약이면 살
거고 아니면 죽는 것밖에 더하겠어요?”

“……그런 말 마시오. 난 당신 없는 하루를


견딜 자신이 없으니.”

리사가 쓰게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는 에테리


아 황제의 볼을 쓰다듬었다.

“폐하도 그런 말 마세요. 저도 폐하가 없는 에


테리아 제국은 견딜 자신이 없어요.”

그리고 리사는 그의 손에 들린 수통을 빼앗아 말릴


틈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

“후작님. 명령하신 대로 편지와 수통을 에테


리아 황제의 침실 앞에 두고 왔습니다.”

복면을 쓴 첩자가 리라네프 후작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공손히 보고했다. 후작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가 싶더니 이내 들고 있던 검을 냉혹하게 휘둘렀다.

촤악!

눈 깜짝할 틈도 없이 첩자의 붉은 피가 허공으로 흩


뿌려졌다. 리라네프 후작은 얼굴에 튄 피를 손수건으
로 무심히 닦으며 중얼거렸다.

“네 일은 끝났으니 지옥이나 가거라.”

나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따라가마.

일전에 테리엘라의 앞에서 미소짓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리라네프 후작이 손짓하자 주변에 서 있던
하인들이 황급히 시체를 치웠다.

리라네프 후작은 어둠을 비추기 위해 높게 뜬 달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커튼을 쳤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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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불행은 늘 행복 뒤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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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l(dusq****)
이상한건 아니겠죠?
1시간 전 신고 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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