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234

1

2
3
5
에이티식스들이 설 자리를, 내가 그들을 이끌 자리를 나는 어느새, 그리고 이때
까지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블라디레나 밀리제 [회고록]

6
서장 레드 드래곤

“너희들이 보고한 제레네의 정보다만”


이 연방의 임시 대통령 각하는 역시, 어딘가 세상에 지쳐서 가늘게 불을 뿜는
용 같다고 세오는 생각한다.
연방의 수도 장크트 예데르의 에른스트의 사저 거실, 늘 입던 양복 차림으로 에
른스트가 말했고 그와 세오, 신과 라이덴과 앙쥬와 크레나, 그리고 프레데리카
가 제각기 소파에 걸쳐 낮은 테이블을 에워싼다.
안경 속 검은 눈동자는 휴일의 아버지와 같은 온화함이었으며, 그것은 어딜 보
아도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는 강철의 재앙을 일거에 무력화할 수를 들은 강대
국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

<레기온>은 멈출 수 있다

정지 명령을 내리는 비밀 사령부와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표면적으로는 상실된,


<레기온>을 포함한 구 기아데 제국군의 통수권을 가진 아델아들러 황제의 혈
통, 이 두 개의 열쇠를 다 갖춘다면.
신은 제레네로부터 받은 정보를 프레데리카 본인과 그녀의 신원을 아는 우리들
네 명에게는 에른스트에게 보고하기 전 먼저 말해주고 그 외에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레나에게조차
정보는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누설되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 연방의 멸망의 원
인이 될 수 있는 제국 최후의 여제 프레데리카.
그런 그녀에게 <레기온>이라는 전쟁의 불길을 멈출 유일한 열쇠, 인류를 구하
는 기적의 담당자라는 가치가 부여되어 버린다면.

7
그렇다고 해도 에른스트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이
정보를 신 혼자만의 생각으로 은닉하는 것은 분명 배신이다. 적당한 구실로 장
크트 예데르로 돌아가서 검토하겠다고 에른스트는 한번 물러난 뒤, 사정을 아는
군이나 정부의 고위 관계자와 최근 몇 일 동안 검문, 검토를 거듭하며.
“결론부터 말하자면……너희들은 당초 예정대로 다음 파견지로 가게 된다.”
“뭐”
학연 자만하게 원래부터 큰 눈을 더 크게 뜬 것은 프레데리카였다.
“어째서인가 하급 공무원?! 제국의 여제인 이 몸이 여기에 있는 이상, 비밀 사
령부를 되찾으면 될 뿐인데—그냥 그뿐인데 왜 안 된다는 거냐!”
“그 “그뿐”이 어려워. 해당 사령부는 소재가 전혀 불분명하니까”
프레데리카는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고 에른스트는 허허 웃음을 지었다.
“연방은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포함해 많은 것을 물려받았지만 원래는 제국을 안
에서 잠식해 버린 적이다. 비밀 사령부의 위치를 적에게 알려 줄 리가 없지. 그
사령부에 속하지 않는 아군에게도”
기지가 놓여 있는 곳은 구 제국 영토의, 그리고 제국의 군 기지인 이상, 아마도
<레기온>의 지배역의 어딘가 일 것이다. 적지 깊숙한 곳에 있는 후보지를 총
조사할 여력은 연방에는 더 이상 없었다.
“덧붙여서,……너희들이 파견되는 곳. 그쪽의 상황이 오히려 더 급한 상태다.
<레기온>의 두 번째 대공습. 그 전조가, 너희들이 공략할 예정의 거점으로 확인
되었다.”
순간의 숨을 삼킨 것은 누구였을까. 대공습. 연방의 서부전선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갔고 공화국에 이르러서는 불과 일주일 만에 함락시켰다
“<레기온> 이름 그대로 무수히 많은 강철의 해일을 다시 최우선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배제와 함께 너희들에게는 어떤 정보를 거점에서 탈취
해 왔으면 좋겠다.”
라이덴이 눈썹을 찡그렸다.
“정보? <레기온>으로부터 도대체 무슨 정보를?”
“<무자비한 여왕>은 제국군인 제레네 빌켄바움 소령,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제
어계는 제국의 여제 아우구스타 근위기사를 필두, 공화국 북부 샤리테 지하터널

8
의 <아트미랄(발전플랜트형)>도, 아무래도 구제실파였던 것 같다.”
제국 만세.
그렇게 반복하고 있던, <아트미랄(발전플랜트형)> 속 얼굴도 모르는 망령의 생전 마
지막 외침
직감한 듯 신은 눈을 번득였다.
“구제실파의 인간이,<양치기>가 되었다는 겁니까?”
“레기온은 원래 제국의 무기다,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연방이 모르는 비
밀 사령부도, 제실파의, 그것도 중추였던 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양치기>가 되었을 거다. 그들의 제어계로부터 사령부의 정보를 읽어내는 것
도……뭐, 가능할지 어떨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레기온>의 제어계는 편집적인 암호화 처리가 이루어져 지금도 해석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불확실하지 않아? 라고 세오는 생각했고, 크레나는 혀를 내
밀었다.
“그게 가능해? <양치기>라니, 86구 전체에서도 100기 정도밖에 없었는데.”
한 해 동안 수백만 명이 전사하고 그들 모두 시신을 묻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전
사자의 뇌구조를 도입한 <레기온>—<흑양>과 <양치기>가 허다하게 생겨난 86구
조차 생전의 지성과 기억을 간직한 <양치기>는 겨우 백여 구 정도이다. 사람의
머리를 쉽게 부수는 기관총탄, 인간 등은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상처 없는 뇌는 쉽게 구할 수 없다.
“응. 그러니까 몇 가지 병행해서 진행하는 조사의 일환이야. 다른 방법도 당연히
찾아 볼 거다. ……나도 장군들도 총지휘관 전기가 제실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
지는 않아.”
다만 그들 중 한두 명은 <양치기>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사령 거점이라고 하는 중점이라면, 그 누군가가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얘기다
“신군이 있으니까 아직 판단도 할 수 있겠지만. 왠지 허황된 이야기네……”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앙쥬가 하늘을 쳐다본다, 프레데리카는 안절부절못하며 에른
스트와 신을 번갈아 봤고, 신은 무심한 강아지처럼 눈을 감았다.

9
에른스트가 웃는다.
“……다만. 구제실파에는 한 사람, 확실히 <양치기>로 되어 있고, 우선 틀림없이
비밀 사령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전사자가 있지.”
고관은 아니지만, 여제의 근위기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제어계로서 잡혀 있었다.
“키리야 노우젠, 예를 들어 그 사령거점에 있는 것이 그의 망령이라면?”
“………………!”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역시 신의 표정도 험악해졌다. 그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을 격파한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는 1년 전, 내가 확실히 파괴했습니다. <양치기>는 같은 망령을 바탕으로
하는 자가 복수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는 망령을, 정보원으로는 할 수 없습니
다.”
“예비기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만? 게다가 만약 그가 아니더라도 대공습의
기점이 될 수 있는 거점이다. 상응하는 지휘관을 배치했을 거야.”
분명하게 불복을 표시하고 신은 입을 다문다. 그것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치기>로 변한 형을 두고, 그의 마지막 부름을 계속 들은 신에게는 기계장치의
망령이라 할지라도 사람이다. 그걸 이런 식으로 정보 판독을 위한 부품으로 취급
되다니
“뭐, 어쨌거나, 정지수단이라고해도 이렇게 시간과 시간이 걸리는 거니까, 하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프레데리카의 안전을 무시하고 지금 당장 <레기온>을 멈추게
하는 루트는 시키지 않을테니 안심해도 된다, 신. 그리고 모두들. 사령부의 위치,
덧붙여 제실파의 잔당……보다도, 오히려 다른 파벌이 위험하지만. 어쨌든, 프레
데리카의 은폐를 위한 정보 공작과, 무엇보다 탈환 작전에 충분한 전력의 보강.
그것이 전부 완료될 때까지, 작전은 실행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나라는 연방이 지향해야 할 정의가 아니니까.
프레데리카가 일어났다.
“그대의 백성들의 죽음을 숱하게 좌시하고, 무엇이 정의냐! 연방의 수억, 인류 전
체의 수십억에 비하면 나 하나쯤의 희생은 싼 것 아닌가!? 그것이 왜………”

10
“그런 비도를 옳다고 한다면, 인류 따위는 망해버려도 된다.”
냉혹하게 에렌스트가 쏘아붙이자 오싹 프레데리카가 얼어붙었다.
세오 또한 조용히 전율했다.
예전에 똑같은 말을 들었다. 그 때는 우리들 5명을, 처분시키지 않는 이유였다.
닮았다.
아이들을 희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면 인류는 멸망하면 되는 거야.
“애당초 나는 너희들 에이티식스들이 전국의 타개에 투입되는 것도 사실은 마음
에 들지 않는다. 너희들만 싸우면 된다, 너희들만 희생된다면, 그런 건 안 돼. 그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담담하게 가로막고 신이 말한다.
“그건 곤란합니다, 에른스트”
달빛 아래 전쟁터에서 침울하게 빛나는 부러지지 않는 정밀하고 예리한, 그리고
강인한 검처럼.
“인류가 멸망해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툭하면, 당신을 실망시킨다면 망하라고 쏘아붙이는
것도 불쾌합니다.”
순간
에른스트의 숯빛 눈동자와 핏빛 색채를 한 신의 두 눈이 서로 부딪쳤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소를 띤 짙은 검은색의 공허를, 핏빛의, 불빛의 붉은빛이 딱딱하게 튕긴다.
“……상황은 이해합니다. 제어 중추 노획 명령도. 나도 이 전쟁은 이제 끝내고 싶
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인류를 망하게 만들지도 않을 겁니다. 프레데리카가 희생
되는 길은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프레데리카가 입을 다문다.
그러면서도 말없이 동의하는 라이덴과,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는 앙쥬와 작게 고
개를 끄덕이지만 조금 불안한 눈을 한 크레나.
세오 자신의 표정은, 이 거실에는 거울이 없어서 모른다.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이전의 신이라면.

11
86구에 있을 때의 그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말할 수 없었다. 전쟁을 끝
내려고 해도, 자기가 바라는 것을 성취하려고 해도, 그것은 86구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정말.

그 86구를 나와 버렸구나, 라고 뼈저리게 느낀 것 같았다.

12
13
14
1장 The Gun In The High Castle

실전보다 나은 훈련은 없다.


그것은 일면의 진리이기는 하나 사실 실전만 반복하다 보면 부대의 전투능력은
오히려 떨어진다. 훈련하지 않은 것은 실전에서도 할 수 없다. 개인이든 부대로든
숙련도를 유지하려면 역시 적절한 훈련과 교육이 필수적이다.
제 86 독립 기동 타격군의 본거지 뤼스트카머. 그 훈련장
연방 서부전선의 주전장인 산림과 시가지를 충실히 재현한 훈련장이다.
숲은 원래 그곳에 있던 숲의 일부를 구분하였으며, 시가는 숲을 개척해 구 제국
의 군사 요해 도시를 본떠서 만들었다.
그 한쪽에 새로 지은 금속 뼈대만의 빌딩이 기동 타격군 제1 기갑반의 다음 전장
을 재현한다.
<저거노트>의 전폭에 가까운 폭의 강철 보와 기둥. 기하학적 패턴으로 질서 정연
하게 짜여져 종횡으로 공간을 누비는 그것들을 박차고 삽을 맨 목 없는 해골의
마크와 교차하는 머스킷총의 마크가 새겨진 두 대의 다각기갑무기가 질주한다.
신이 조종하는 <언더테이커>와 훈련교관으로 맹약동맹에서 파견된 올리비아의
<안나 마리아>다. 서로 유리한 위치를 빼앗아, 상대의 약점을 잡아먹고, 함께 고
기동형 전용으로 개발된 기체를 그 성능 제원의 한계까지 휘두르며 숨가쁘게 전
투는 진행된다.
올리비아가 가상의 적기 역을 맡은 일대일 모의전투다.
펠드레스의 콕피트는 거주성보다 생존성을 중시하여 비좁지만 그 중에서도 <스트
렌블룸>의 그것은 특히나 심하다. 장갑 강화 외골격에 공간이 뚫려 광학스크린을
둘 여유도 없는 곡선으로 망막 투영되는 영상과 물리적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는
미래의 광경을 보면서 올리비아는 <언더테이커>의 궤적을 좇는다.
미래예지.

15
산악의 국토를 통일하는 왕가를 끝내 갖지 못하고 산간의 소규모의 영역밖에 갖
지 못한 귀족들도 순혈을 유지하지 못한 맹약동맹에서는 그의 일족이 간신히 전
하고 있을 뿐인 이능.
올리비아의 경우, 보이는 것은 3초 앞의 그 자신의 미래뿐이다.
범위는 미래에 일어날 현상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수십 미터 정도 예지할 수 있
는 것은 의식적으로 힘을 사용하고 있을 사이뿐이고 일족에서는 “눈을 뜬다” 고
비유한다. 위기가 닥치면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능이 발동하는 일도 없다.
일족 외에 그렇다고 밝히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용한 재능도
사실은 아니다. 계속 사용하면 상응하게 피로하므로, 작전 중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상대가 사람이든 <레기온>이든 올리비아가 패배하
는 일은 거의 없다.
3초까지의 미래예지. 적기의 움직임을 3초 동안, 정확히 간파할 수 있는 절대적
인 이점을, 그 우위를, 그렇지만 신은 오랜 전투경험이 가져오는 무의식의 예측과
초월적인 반응속도, 그리고 마치 미래의 피 냄새를 맡는 듯한, 육감이라고 밖에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감으로 채워온다.
실전이라면 맞부딪쳐야하는 훈련이기에 고주파 블레이드는 비가동이지만 참격이
온다. 그러니까 이것도 비가동의 고주파 랜스를 옆에서 쏘아 튕겨낸다.
— 신과의 훈련에서는 “눈”을 감고 있을 수 없다. 항상 미래를 계속 보고 있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다.
튕겨진 기세를 끌어올리는 동작으로 바꾸고, 비스듬한 궤도에서 블레이드가 내려
진다. <안나 마리아>가 날아가려고 하자, 즉응하여 무리하게 한 걸음, 왼쪽 앞다
리를 디디게 해 참겨의 사이를 연장한다.
허세인 것처럼 보이는 후방으로의 도약을 취소하고 옆으로 회피해고, 디딤돌의
다리를 축으로 회전해 가로의 궤도를 연장함으로써 그 회피를 무효화한다. 고기
동성을 자랑하는 <레긴레이브>가 오히려 혹사와 부하의 비명을 지르는 듯한 가
혹한 기동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인 기량.
다만
서로 숨 쉴 틈도 없이 치고받는 근거리의, 그것도 십여홉으로 길게 이어지는 공
방. 극단적인 집중으로 시간이 더딘 수초를 거쳐가며 먼저 <언더테이커>의 손길

16
이 멈춘다. 멈추던 숨을 내쉬고 이어서 내부에 공기를 채우는 한순간.
그 틈을 기다렸다.
<안나 마리아>가 함성을 지르며 <언더케이커>와 가까운 거리에서 부딪치며 두
대가 서 있는 뼈대만 있는 빌딩, 그 뼈대의 틈새를 벗어나는 형태로 모두 떨어진
다.
신은 아직 18살이라는 성장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아직 미완성된 어린
아이의 몸이다. 그것은 즉 근력이나 체력적으로나 성인 남성인 올리비아보다 못
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맞붙은 채로 1층 분량을 낙하하며 짐승이 상대를 깔아뭉개듯 바깥 대지로 내동댕
이친다. 무선도 지각 동조도 가상 적기역인 지금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침투한 충격에 호흡을 빼앗겼는지, <언더테이커>
가 한순간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경직된다.
직후에 옆으로 후려갈기듯 긴 다리가 후들거리며 피하자, 이번에야 말로 <안나
마리아>는 휙 물러난다.
<레긴레이브>의 발끝에는 고정병장으로 파일 드라이버가 장착되어 있어서 꼭지쇠
에 직격탄을 맞으면 일격으로 행동 불능이다.
<언더테이커>가 벌떡 일어나 네 발을 모아 후방으로 도약한다.
낙하 데미지가 빠지지 않는 동안은 근접전을 피해 88mm포의 넓은 간격을 두면
서 싸울 것인가.
하지만
“무르군.”
움직임이 둔하고 데미지가 빠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볼품없는 모습으로 물러났던 <언더테이커>를 올리비아는 힘들이지 않
고 조준에 포착한다.
트리거 격발
짐승의 포효를 닮은 1.5mm 포성과 함께 불가시의 레이저가 조사된다. 실탄 훈련
이 아니기 때문에 쏘아지는 것은 공포탄과 피탄 판정 레이저이지만 발사 불꽃과
포성은 실탄과 다를 바 없다.
눈부신 업화가 한순간, 시야를 가렸다. 귀청을 찢는 포성이 상대의 가동음을 마스

17
킹 한다. 시선을 돌린 레이더 스크린상의 적기 <언더테이커>의 휘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피탄 판정은 다리 부분
……그 상황에서 치명상은 면한건가?
“눈”을 뜨고 3초 앞의 미래예지로 <언더테이커>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장소로
포구를 돌린다. 불길이 잦아들고 시야가 돌아왔을 때, 조준한 끝에 그 순백의 기
체가 잡혔다.
다리를 맞은 <언더테이커>는 왼쪽 앞다리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다. 기동력을 잃
었어도 여전히 이쪽을 향한 88mm포와 살짝 열린채 폐쇄되지 않은 캐노피 안에
신은.
……탈출했나?
둘러본 시선 끝, 최근 수개월간의 훈련으로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있는 석조건물
의 그늘에, 한쪽 무릎으로 어썰트 라이플을 잡는 신의 모습이 포착된다. 어썰트
라이플은 총신이 파랗게 칠해져서 일단은 공포탄을 다루는 훈련전용 총기임을 식
별한다. 가상의 적 역할의 올리비아는, 즉 이 연습에서는<레기온>이다. 포로를 잡
지 않는 <레기온>과 대치하고 있는 이상, 기체가 손상되어도 전투 의지를 계속
버리지 않는 것은 올바른 자세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연습이기 때문에, 실제로 전투를 계속할 필요는 없
다. 라고 할까 계속하면 부상을 입힐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상황 종료, 라고
말하려고 할 때 신이 그보다 먼저 공격했다.
물론 이쪽도 공포탄이다. 그리고 어썰트 라이플은 대부분의 <레기온>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 정면 장갑 상의 탐지기는 , 그렇기 때문에 피탄 판정 레이저를
감지했지만 무효로 판정했다.
그 직후 조준경보가 울려 퍼졌다.
조준파의 근원은
—<언더테이커>!?
“뭐…”
예지의 이능을 닫고 있어서 미래에 일어날 사태를 보지 못한 올리비아는 완전히
의표를 찔린다.
콕피트에는 사람이 없는 채로, <언더테이커>의 88mm 전차포가 포승한다.

18
피탄 판정의 레이저의 조사, 측면 장갑의 감지기가 88mm 고속 철갑탄의 직격을
감지한다.
신과의 일대일 전투에서는 처음 보는 대파 판정이 망막 투영 영상에 비춰졌다.

“조금—아니, 상당히 비겁한 느낌은 들지만”


훈련용 시가는 다음 파견지를 위해 급하게 마련된 것으로 그리 크지는 않다.
다음 훈련자에게 장소를 양보하고, 디브리핑을 위한 텐트 안. 돌아온 올리비아에
게 신이 말한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군요, 대위의 이능.”
“실전에서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면 죽었을 거다. 적이 살아 있는데도 손을 멈추
는 방심을 연습으로 알게 돼 다행이군.”
고개를 한번 흔들고 올리비아는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시선을 돌린다. 소년다운
기세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침착하고 평온한 인상과는 사뭇 달라서.
“자네, 정말 지기 싫어하는구나. 동맹에서의 첫 번째 훈련, 혹시 마음에 두고 있
었나?”
“그때 대위는, 진심이 아니었죠? 기갑탑승복이 아닌 근무복으로 훈련에 참가했고,
그건 확실히 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 그때는 할머니가 갑자기 지금부터 연방의 펠드레스와 결투해 보라고 해
서 탑승복이 없었을 뿐인데”
올리비아의 외할머니는 맹약동맹 북부방위군 사령관, 벨 아이기스 중장이다.
“그때의 앙갚음도 이렇게 끝냈으니 속임수를 밝혀줄 수 있을까? 물론 내가 너에
게 져서 죽을 때 말고는 밝힐 수 없다고 하며 몰라도.”
쓴웃음을 지으며 신은 어깨를 으쓱한다.
“공교롭지만, 그 정도 까진… 주포의 사격 모드 중 하나로, 등록한 외부 음성을
트리거로 하는 것이 있어서. 예상되는 상황은 자기를 포기했거나 휴대무기를 사
용할 수밖에 없는 때일 테니 어썰트 라이플과 권총 총소리를 등록해 놨습니다.”
“그런 것까지 있나, 연방의 펠드레스-아니,”
말하다 말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든다. 외부 음성 사격 모드, 라고도 할 수 있

19
는 이 설정이, 부여되고 있는 것은 아마.
“<레긴레이브>에는……실전에서 쓰일만한 일은 거의 없을 텐데.”
펠드레스의 전장은 피아 전차포 포성에 유탄의 작렬음, 파워팩의 포효와 보병의
중기관총 총성, 노호에 비명 같은 소란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 목소리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있는 어썰트 라이플의 총소리마저 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일대일 훈련에서도 어지간히 조건을 갖춰야 쓸모 있는 기능이다.
“이전에 비슷한 상황이 된 적이 있고, 그때 추가된 기능입니다만……사용했던 적
은 없습니다. 연습이든 실전이든.”
“그러겠지. 그러면서 그런 쓸모없는 설정까지 들고 나왔나? 오직 나를 이기기 위
해서. 너 정말 지기 싫어하는구나.”
“대위의 이능은, 보려고 안 하면 볼 수 없죠. 그럼 이걸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올리비아는 문득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는 거듭 그 사실을 일족 이외의 사람에게 알린 적은 없다. 지금은 같은
부대 동료라지만 다른 나라 군인들에게—에이티식스들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훈련이라면 나를 포함해 대위의 뒤를 잡은 사람은 없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티
피가 달려들면 놀라거나 프레데리카와 모퉁이에서 부딪칠 것 같았으니까, 늘 보
이는 것도 위기가 닥치면 반드시 보이는 것도 아닐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없이 올리비아는 두 손을 들었다.
“이거 한 판 당했네, 하지만……”
그러고는 히죽 웃었다.
“그런 대담성과 관찰력은 밀리제 대령과의 건에서 발위하면 될 텐데.”
뜨끔하며 신은 몸을 굳힌다.
“…무슨 얘깁니까?”
“아니,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그날 밤에 자네 많이 우울해 있었는데”
올리비아가 분명히 히죽거리자 가차없는 그 추격에 신은 울컥 소리를 낸다.
그날 밤
당연히 레나에게 고백하고 입맞춤 당했고 어째선지 도망쳤던 밤의 이야기다.

20
그때는 혼란스러웠고 그 후에는 매우 침울해졌다.
레나도 분명 같은 마음으로 있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입맞춤은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의 소망일뿐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녀가 그와 같은 마음이
었다면 이번에는 레나가 도망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입맞춤
의 설명이……라고 이후 계속 의문의 소용돌이에 빠져, 하룻밤 정도 복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컷 맴돌던 그의 모습을 라이덴, 세오, 비카, 더스틴, 마르셀, 올리비아도
물론 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전원이 호텔 병설의 바에 이끌려, 어느 정도 침울해져 있던 그를
일단 복구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 준 형태다.
참고로 그 바에는 도망친 후 울며 매달렸다는 레나를 방치한 아네트 외에도 앙
쥬,크레나, 시덴, 그레테 끝내는 참모장까지 있었고, 술집에는 들어갈 수 없는 리
토와 프레데리카가 그들과 지각동조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즉 안면이 있는 사람
들 거의 모두가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 다음날에는 역시 머리도 식었다고 할까, 레나도 갑자기 말해서 혼란스러워서
결국 도주했다고는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일단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다만
휴가가 끝나면 레나는 작전지휘관으로 바쁘다고는 하지만 그대로 오늘까지 한
달, 그리고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좀 납득이 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나는 슬슬 조금 정도는 삐져도 되지 아닐까?
그거야말로 삐친 것처럼 생각해봤자 올리비아는 간파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제2 기갑반 훈련도 있어서, 다음 파견지에는 따라갈 수 없지만……돌아올
때 까지는 어떻게든 해결하게.”
“시끄러워……라고 말해도 됩니까?, 대위”
나도 모르게 신이 내뱉자 올리비아는 후, 하고 여유 있게 웃었다.
“실례했군, 노우젠 대위”

21
훈련장에서 열리고 있는 것은 펠드레스 간의 모의전투다.
파워팩이 세우는 고음의 신음과 땅속을 파고드는 금속의 딱딱하고 무거운 음향,
무엇보다 공포탄이라도 88mm포의 격렬한 포성.
남이 듣기 싫은 말을 하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다.
좋든 싫든 눈길을 끄는 신을 굳이 텐트에 남겨두고, 자못 휴식 중의 잡담을 가장
해 라이덴을 중심으로 네 사람이 모인다. 음료수 병을 한 손에 들고 앙쥬가 말문
을 연다.
“……전쟁, 끝날지도 모르겠네.”
“사실 그런 날이 정말 올 거라고 그동안 믿지 않았으니까”
<레기온> 전쟁이 끝난다.
정보를 입수한다면. 그걸로 비밀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면.
갑자기 제시된 그 사실에, 라이덴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엄청난 기분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곁에 있던, 공기나 햇빛과 같이 있어야 마땅했던 전
쟁이라는 것이. -설마 없어질지도 모르다니.
“끝나면 어떻게 하지?……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는”
“음……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로. 감이 안 잡혀”
어딘가 들뜬 기분으로 앙쥬는 말했지만 세오는 곤혹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한
다.
“뭐 그래도, 일단 신에게는 좋은 소식일 거야.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는 소원이 제
대로 이루어질 것 같으니까”
“당신과 바다가 보고싶어”
소중한 시 한 구절이라도 읆듯 크레나가 말하고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응 이루어지면 좋겠지”
한 달 전의 불꽃놀이 뒤에 레나에게 그렇게 고백했고, 그 직후의 바에선 신 본인
이 말실수를 해서 라이덴은 알고 있고 크레나도 세오도 앙쥬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22
레나가 마지막에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뭐, 지금의 신이라면 괜찮겠지
다만
“신이 싫어하는 것처럼……프레데리카는 가급적 이용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 한 사람에게, 연방의, 인류의 미래를 모두 짊어지게 하는 갑자기 솟아난 기
적에 모든 것을 꿰메어. 그걸로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그것은 다 끝났다고 말
못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지수단을 포기하고 힘으로 <레기온>을 전멸시키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셀 수 없이 죽을 테니까
“그러네, 프레데리카 혼자서 지게하고 싶지 않아……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처럼,
어떻게든 적진을 돌파해서 어떻게든 적의 본거지를 치는 것도 적당히 했으면 좋
겠고, 그걸로 죽는 것도 바보 같아서 싫으니까 말이야.”
갑자기 크레나가 번쩍였다.
“하지만……정말로 끝나는 걸까?”
갑자기 솟아오른 기적을…감언이 아닐까 의심하는 목소리로.
“은닉 사령부를 찾을 수 없을 수도 있고. <레기온>이 명령을 안 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전부 제레네라는 사람의 함정으로, 신이……그,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러니까……그렇게 잘 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라이덴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린다.
걱정은 뭐, 말하는 대로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이나 에른스트나, 연방의 대단히
높으신 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크레나의 말투는 마
치.
세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크레나.…… 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아.”
눈이 마주치지 않은 채 크레나는 응한다. 어딘가의 길 잃은 아이처럼 의지할 수
없게.
“그렇지 않아.”

뤼스트카머 기지에서 더 후방인, 연방의 수도 장크트 예데르에서 가장 가까운 훈

23
련장에서 한 달 만에 돌아온 레나는 고풍스러운 트렁크를 들고 기지 정면의 게이
트를 통과한다.
기동 타격군 제1 기갑반의 훈련기간이었던 지난 1개월 동안 레나 역시 작전지휘
관으로 연방의 교육과정을 수강했었다.
레나에게는 집에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본거지라고는 해도 기밀도 높
은 특수기지다. ID를 대조한 뒤 게이트가 열리자 짐을 가지러 와준 것 같은 <파
이드>에게 트렁크를 맡겼다.
그리고는 그만 주뼛주뼛 주위를 살피고 말았다.
둘러본 주위, 게이트앞의 광장은 근무시간중인 지금, 사람의 그림자는 드물다. 강
철색 군복이나 작업복 차림의 그들 속에서 눈길을 끄는 칠흑과 혈색의 색채가 없
음을 확인하고 후유 하고 숨을 쉰다.
그날 이후로
맹약동맹에서의 무도회의 밤의 불꽃놀이 아래에서 신에게 고백을 받고 나서.
레나는 아직도 그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귀국길에서
는 도저히 눈을 맞출 수 없어서 도망다니고 만 것이다. 그 정도라면 몰라도 기지
로 돌아오자마자 지휘관 교육과정 수강 소동이 치명적이었다. 연락이 닿지 못해
서 그녀가 수강대상자라고 들은 것은 귀환 당일이었고, 그 수강의 첫날이 다다음
날 아침이어서 스케줄 문제로 신과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고, 훈련장은 멀어서 선
뜻 돌아올 수도 없어서. 그 결과, 1개월 동안이나 대답을 미루고 말았다는, 나 스
스로도 너무나 해명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다듬은 잔디가 아닌 숲을 잘랐을 때 잘린 잡초를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멎
는다.
"어서 와 레나“
“수고했어, 여왕님”
“다녀왔어, 아네트, 게다가 시덴.……저,”
흰옷을 입은 아네트와 훈련을 나갔는지 탑승복 차림의 시덴을 둘러보며 레나는
두리번거렸다.……둘만. 신은 역시 없구나.
없는 것을 방금 확인했음에도 만나지 않아서 안심하는 모습과 일부러 찾아오지

24
않았다고 생각하면……벌써부터 불안해진다.
“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
아네트는 획 외면했다
“몰라”
“아네트……?”
“그렇게 모두가 밥상까지 차려주고, 귀찮게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도 뒷바라지
해 주고, 마침내 신한테 고백 받았으면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도망친 어디 사는
멍청이 아가씨는 나도 몰라”
“그건 미안하지만, 그런 말 하지마…!”
아네트는 아이처럼 뺨을 부풀린 채였다. 난감해진 레나는 시덴을 쳐다본다.
“시덴…”
“그러니까 그날 밤, 지금부터라도 저승사자 방에 가서 넘어뜨리라고 내가 말했지.
기지에 돌아와서도 말이야. 오히려 기지는, 죽어도 개인실 이니까 마음이 편한
데.”
“그, 그런 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여러 가지로 위험하지 않아? 대체로 호텔이라면 몰라
도, 이 기지의 프로세서 방은 벽이 얇아서 주위에 민폐니까.”
“86구의 숙소의 벽 같은 건 여기보다도 얇고, 그러니까 이제 와서 아무도 신경
안 쓴다구?”
“아아. 그런..”
맥없이 아네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고 의문이 생겼다.
잠깐, 못했다, 가 아니라.
신경 안 쓴다고?
“저기. 설마라고는 생각하지만…”
“응?”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진실을 듣게 된다면, 오늘밤부터 아래층의 침묵이 신경 쓰일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레나가 말한다.

25
“차, 찾아가는 편이 좋을까……?”
“……그런 만용이 있다면 그냥 대답해 줘……”
“대답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아, 저승사자 녀석 슬슬 신병들의 마중이라든지 제레
네와의 정기면담이라든지 하는 거 같고 최근에 군 윗사람들과도 하고 있고, 이능
의 또 다른 제어 시도 등으로 통합사령부에도 갈 테니까. 그것보다 함께 가는거
어때? 수송기라 시끄럽겠지만 대답을 할 정도라면 괜찮겠지.”
“그, 그것은 그………마음의 준비가 아직……”
아네트와 시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기하는 파이드가, 삐, 하고 위로할 수도, 멎을 수도 없는 전자음을 울렸다.

과거 우생사상이 횡행해 에이티식스의 강제수용이 결정되고 그 박해를 태연히 긍


정한 공화국 중에도 이를 옳지 않게 여긴 이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집에 숨겨두거나 86구에 남아서 손닿는 에이티식스만이라도 지키려고
했던 백계종들이.
그렇지만 대부분 밀고와 전쟁에 의해 상실되었고 에이티식스는 거의 전원이 86
구로 흩어졌다.
공화국 시민도 대공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재회가 그렇게 쉽게 이루
어질 리도 없지만.
그 중에서는
“라이덴……!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여, 할머니야말로 쓰러지지 않아서 안심했어.”
연방 서방방면군 통합사령부의 쓸데없이 중후한 대문간에서 자신에게 매달려 속
절없이 울고 있는 노부인에게 그는 쓴웃음을 짓는다. 기억하는 것보다 더 머리
위치가 낮아져 꽤 나이를 먹은 그리운 노부인.
강제 수용이 시작된 뒤에도 자신과 학우들을 숨겨준 교사 노부인이다.
공화국 구원에 임해, 찾아 주도록 연방군에 전하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일국이 괴
멸한 혼란 후의 사람 찾기이다. 발견하기까지 무려 1년 가까이 지난 것도 당연하

26
다. 아니면 연방군도 대공세로 입은 막대한 피해는 아직 회복도 되지 않았으니
우선도가 낮은 이런 사람 찾기 등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던가.
같은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 도피다.
어쨌든 감동의 재회를 하고 있을 자신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오오, 무사히 살아있었구나…!”
“신부님……부러집니다. 늑골이랑 등뼈 부러집니다.……!”
산더미 같은 근육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승복을 입은 흰머리의 곰이 감동
의 포옹을 아니, 무리를 하면 아슬아슬 보이지도 않는 베어허그를 하고 있었기에.
뭐야 저건
이라고 생각해 버린 탓에 라이덴도 그다지 감동의 재회 기분에 젖지 못한다.
짐작건대 신이 갇힌 강제수용소에서 신과 형을 키워줬다는 백계종 신부이겠지만
이미지와 너무 차이가 나도 정도가 있지. 신부님이라고 해서 왠지 청렴한 노인의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아마이저(척후형)>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거 같다.
삽 같은 걸로.
뭐……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좀 무섭고
단호하게 자기보신적인 결론을 내렸고 라이덴은 슬쩍 눈을 돌렸다.

“슈가 중위도, 노우젠 대위도, 잘됐네요.”


"두 분 다 이제 종군사제와 자율학습 보조교원으로 기지에 상주할 테니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정말 다행이고 기쁜 일이지.“
“……아니, 그대들 설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베르노르트가 말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
면서 그레테가 계속했고 그 옆에서 프레데리카는 두려움에 떨며 신음한다.
무시하고 베르노르트도 그레테도 감동의 재회를 지켜보는 척 계속한다.
왜냐면 얽히고 싶지 않고
“대위님은, 훈련도 제대로 안 받은 에이티식스 치고는 전술 지식이 어느 정도 갖

27
추고 있었고 권총이니 어썰트 라이플이니 완전 분해해서 정비할 수 있어서 신기
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저 신부님이 양부모라면 납득이 될 것도 같군요.”
“사실 저 신부님은 원래는 공화국군의 군인이었다고 하나봐.”
무력으로는 지킬 수 있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신의 길에 뜻을 두게
됐다고 말했다
그럴싸하게 베르노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그런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
“아… 과연 그래서”

“그래서 신 군은”
체격차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라이덴을 때려눕히거나 다이야를 실신시
킬 수 있었던 걸까 하고 재미있다는 듯 흐뭇한 재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앙쥬는
생각한다.
“뭐, 신 군은 제국 귀족의 피가 섞여있고, 신이 있던 강제수용소도 치안은 나쁜
것이 아니었으니까, 최소한 몸을 지키는 방법은 가르쳐 줬을 거야……”
언젠가는 징병되는 에이티식스의 입장, 게다가 적국의 계보로서 동포들로부터도
가혹한 박해를 받는 제국 귀족의 피. 싸우는 방법을 가르친 것은 그러니까, 노신
부 나름의 애정이었겠지만.
옆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시덴이 그 얼굴 그대로 말한다.
“그렇다고 살인기술을 가르쳐주면 어쩌자는 건데, 저 신부님. 저승사자랑 내가 처
음 만났을 때도 저거 재수 없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안 죽었으니까 괜찮잖아, 사실 그때 신 군이 많이 봐줬으니까.”
“뭐—”
선뜻 시덴은 수긍하였고 앙쥬는 곁눈질로 그런 시덴을 올려다본다.
신과 시덴은 어쨌든 사이가 나쁘지만 그래도 신은 여자를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
지 않는다.
시덴도 이를 알았으니 성별을 핑계로 윽박지르는 짓은 안 하는 거겠지.
그 근처는 아마, 암묵의 신사적인 협정이겠지, 라고 앙쥬는 생각한다. 그 정도로

28
둘 다 근본적인 부분으로 상대를 싫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죽으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을테니까, 최대의 방어라고 하면 그렇게 생
각하지 않을까?”
“그런 문제인가……아.”
아…신 군, 실신했다.
반쯤 흐느끼는 프레데리카와, 일단 그레테가 끼어들어서 질식해서 눈이 반쯤 돌
아간 신에게서 노신부를 끌어당겼다.
무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시덴이 고개를 돌렸다. 눈처럼 덮힌 은색의 오른쪽
눈으로
“앙쥬도 부모님과 같이 있지 않는 거야? 공화국과 어느 쪽인가.”
“아버지는 어쩌면 살아 계실지도 모르지만…” 일침을 놓으며 앙쥬는 어깨를 으쓱
거린다.
하얗게 질린 것처럼, 내뱉듯이, 하지만 어딘가, 정숙한 기분으로.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아……아무래도 좋아. 살아있던 죽어있던.”
살아 있어 주길 바라진 않지만 죽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과도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이렇게 아버지 얘기를 꺼냈
을 때, 슬픔도 아픔도 아닌 그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정도의 감회밖에 기억하
지 못하는 상대로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다.
무엇이 부족하지 않다면 당신처럼.
연합왕국에서 더스틴에게 물은 말이다.
레비치 요새기지 <시린>의 죽음에 다른 동료들처럼 내 모습을 흔들릴 것 같아
두려워서.
지금 생각해보면, 부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
담담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건 알고 있고, 그래도 아직 어렵긴
하지만.
그렇지만
“……등이 트인 드레스와 비키니를 입는 걸”

29
“……그런가. 레이는 묻어 주었구나.”
“예”
양부모인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면 신은 왠지 어린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외에는 레나밖에 없는 생전의 형을 아는 사람.
레나는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는……형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
“아무 근거도 없지만. 마지막에는 도와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레기온> 지배지역에서 쓰러졌을 때 꾼 형의 꿈과 연방군 초계선에 단기 진입했
다가 서방방면군과 교전 끝에 격파당했다는, 그와 동료들을 사로잡았던 <디노자
우리아(중전차형)>.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 죽었다 죽었어. 신이나 동료들을 연방의 전선에 데
려다 주는 것과 맞바꾼 세 번의 죽음을, 진정한 자신의 소멸을, 아마 각오하고서.
“그건……다행이구나. 그런가 용서해 준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리고 입 밖으로 내기에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 용서하고 싶었다.
용서받고 싶었다. 자기에게 죄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의 망령을 갚는 것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과 같은 정도로,… 용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잘됐다.……성장했구나. 단순히 키가 커졌다는 그 이상으로.”
뒤돌아본 노신부는 어딘가 씁쓸하게 웃고 있다.
떠나보냈을 때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지금도 선명하게 노신부는 기억하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다.
부모를 잃고 형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고 그 형을 찾으러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결정한 어린 아이를.
웃기는커녕 눈물 흘리는 법조차 잊어버린 아이였다.
“그때 너는 레이에게, 이미 전사해 버린 레이에게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죽은 자
는 죽음의 어둠 속에 있으니까. 레이를 쫓으면 너도 그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여
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

30
그럴 수도 있다
그랬을 거다.
그때 신은 레이를 토벌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고 있었다. 그 후의 일 따위는 생
각지도 아니, 바라지도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을 죽이고, 그대로 함께 부러져 부서
지는 얼음 칼날처럼.
어쩌면 바로 2개월 전의 여름의 설산의 전쟁터까지 계속.
그런데 이제 괜찮아 보인다. 정말로.
“…신부님께서 말씀하셔도 별로 실감이 안 납니다만”
어쨌든 이야기하다 보면 어린 아이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로- 신장 차이가 전
혀 좁혀진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부가 큰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네가 어린애인 것은 언제까지나 변함없다.…그러니까 고민이나
상담이 있으면 언제라도 들어주마. 종군사제니까.”
익살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올린 신부에게 신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나서 퍼뜩 생각에 잠겼다.
고민 상담
그것은 예를 들어, 딱 지금 현재 현안이다…… 레나와의 이래저래.
“…신부님. 그렇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정리하려고 골똘히 생각하다 신은 문득 더욱 생각에 잠겼다.
“……역시 괜찮습니다.”
자력으로 해결 하지 못한 채 껴안아도 좋을 것은 없다고 할까, 오히려 주위에 폐
를 끼치는 것은 얼마간의 일로 배웠지만, 이것은 뭐,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도 아
니라고 생각한다.
“뭐야, 사랑인가? 소년”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과연 신부는 깔깔 웃었다.
“네 또래 아이들의 고민 등은, 대부분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그런가, 또래의
아이들 같은, 평범한 고민을 안게 되었는가. 그건 정말 다행이구나.”

31
-그. 사람의 가족이 발견되었다고는 들었다.
신이나 라이덴 같은 다른 사람 앞에서의 재회가 아닌 세오만 별실로 안내된 이유
도 알고 있다. 만나고 싶지 않다면 면회는 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유도. 별실
에서 기다리던 그 상대를 보고 세오는 순간 당황한다.
“...아빠에 대해 안다고.”
짜증나는 공화국 시민의. 겨우 열한 살에서 열두 살 정도의,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에.
86구에서 최초로 배속된 전대의 전대장.
전대의 부하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전대에서 근무하다가 죽었다. 에이티식스만
싸우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 이라고 스스로 86구로 나온 공화국 시민이자 백계
종으로, 설화종(알라바스터)이였던 그의 전 대장.
유가족이 살아 있다면 전 대장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었다고 그 정도는 알려줘
도 될까 하고 연방군에게 찾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살짝 세오는 입술을 뗐다.
설마 부인이라던가, 아이라던가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살고 싶다고 선택한 사람과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미래를 짊어질 상대와 헤어지면서까지 86구에 와있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머니는 어디에?”
“대공세 때”
“그런가.”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카펫의 밟히지 않는 꽃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는 옳은 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계속 말했고. 외롭겠지만 그
건 자랑해도 좋은 일이래……하지만 할아버지라든가, 근처의 아주머니들이라든가,
친구 엄마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서.”
그것은 아직 어린 아이인 그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한 것과
거의 똑같다.
“에이티식스를 위해 조국도, 공화국 시민의 긍지도 가족도 버리고 게다가 자기

32
목숨도 잃었다니 바보라고. 아버지는 바보였다고. 모두들 그렇게 말해.……저기.”
어딘가 필사적인, 은빛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꺼림칙한, 공화국의 하얀 돼지 같은 색깔의.
생각하면 지금도 묵은 상처처럼 따갑다. -전대장의 두 눈과 똑같은 색상의.
“아빠는 바보가 아니지? 옳은 일을 한 거지? 에이티식스 사람들은 우리랑 색깔이
다르지만 그래도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도운 아빠는…… 바보짓 한
거 아니지?”
“……당연하지”
-잘라버렸다. 밀어내기보다는 그냥 무심하고 어이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모르니까. 강했다는 것과 쾌활했다는 것과 웃는 여우의 퍼스널 마크와 마지막 유
언밖에 모르는 세오보다도 이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
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열한 살에서 열두 살 된 소년이다. 11년 전 전쟁이 시작됐을 때는 갓 태어
난 아기였다.
아버지의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잊어버린 나 자신과도 다르다. 기억할 시간조차도 그와 전대장 사이에는 없었다.
“우리하고 같이 <레기온>하고 싸우다가 죽었어. 그런 사람을 바보라니 아무도 그
런 말 못할 거야. 전대장님은 네 어머니 말씀처럼 올바르게……”
말하다 말고 문득 말이 멈췄다.
올바르게... 뭘까?
올바르게 살았다? 올바르게 죽었다?
가족도 버리고, 아이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전장에 와서, 그 전장에서 죽
고. 얼마나 싸웠고 죽었는지, 그 아이에게조차 전해지지 않은.
그건.
옳은 것일까.
그 옳음은 보답을 받고 있을까?
현재의 행복도 미래의 행복도 스스로 내던지고. 결국 전사하고. 함께 싸운 에이티
식스에게 조차도— 세오에게 조차 생전에는 거절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끝내
누구로부터도 칭송받지 못한 그건.

33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용서하지 마라.
그러니까 마지막에 그런 말만 남기고 죽고.
“……아무튼 말이야.……그 모두라는 녀석들이 뭐라고 해도, 너는 아버지를 믿어
주라고”
허무하구나, 라고 머리 어딘가 깨어 있는 곳이 아찔했다.

신과 라이덴, 앙쥬들이 데리러 간 종군 사제와 보조교원은 공화국인 이었다, 그래


서 아직 만나고 싶지 않았기 혼자 남은 본거지에서 크레나는 착잡한 기분을 주체
하지 못했다.
백계종에도 좋은 인간은 있다, 그것은 크레나도 알고 있다. 신을 키운 신부와 라
이덴을 숨겨둔 노부인의 이야기는 들었고, 레나도 아네트도 더스틴도.
크레나 자신의 부모를 도와준 백계종 군인도 잊지 않았다. 이름은, 크레나는 그때
는 어려서 기억을 못했고, 그래서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올 종군사제와 보조교원도 꼭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아직 처음에는 만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그렇다.
크레나는 줄곧 무서웠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이나 동료들 이외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껴안은 것처럼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왜냐하면 신용 같은걸 한다면, 반드시 언젠가 또 같은 일을 당한다. 웃으며 부모
를 쏴 죽인 군인들. 돌아오지 않은 누나, 처음엔 정말 홀로 던져진 86구 죽음의
전쟁터.
그런 일이 반드시, 또 일어날 거다.
백계종이라니, 사람이라니. 세상은 잔인하다.
틀림없이 배신당한다. 신용 같은 건 하면 안 돼.
믿을 수 없어.
그러니까 미래라는 것도 사실은, 있을 리가 없다.

34
꿈과 같다. 오늘밤은 좋은 꿈을 꾸고 싶다고 바라는 것과 같은 정도이다.
볼 수 있는 거라면 보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다고 해도 - 그건 그걸로 어쩔 수 없다. 그 정도.
“전쟁 같은 거”
반드시 끝나지 않을 거니까

기동타격군의 본거지의 한곳, 또한 <레기온>의 절규가 항상 들려오는 신의 부담


을 감안하여 제레네는 통합사령부 근교의 지하연구소에 수용되어 있다.
통합사령부에서의 용무를 마치고 밤에 그 제레네를 찾아간 신은 웃으면서 뒹구는
<레기온>이라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물체와 마주하게 됐다.
“슬슬 화낼거야, 제레네”

《아니오, 그, 웃어서 미안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아하하하하...!》

제레네는 현재, 회화 이외의 기능을 제한하고 방해하기 위해서, 차폐된 컨테이너


에 밀폐되어 있었다, 그 컨테이너 내외의 단자 너머로 유선 접속된 저감도의 카
메라와 마이크와 스피커가 그녀와 회화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 그것들을 거둔
종이상자가, 매직으로 얼굴을 써 서로 다른 상자 위에 겹쳐, 이상한 인형으로 만
들어져 있었다.
“돌아가도 될까”

《아, 죄송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잘못했으니 좀 더 이야기를……》

또다시 전자음이 폭소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제레네는 내버려두고 신은 만악의 근원을 꿰뚫어본다.
아무리 그래도 제레네가 알고 있을 리도 없는 레나와의 문제를 그녀에게 이야기
한 것은 어차피.
“비카, 나중에 두고 보자.”

35
“될 수만 있다면 말이야.”
그저 재미있어 하는 얼굴로, 비카는 코를 울린다.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제레네가 말한다.

《이야기를 되돌리는 것이지만》

“……돌리지 않아도 된다.”

《삐치지 말고. 다시 돌리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은 애초에 그걸 들으러 왔으니


까》

찰칵하고 기계의 스위치가 바뀌면서 제레네의 목소리가 냉기를 띠었다.

《대공세에 대하여》

연방에서 에이티식스는, 원래는 임관 전에 배웠어야 할 고등교육을 종군하면서


배우는 연방 특유의 소년사관특사사관 취급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강제수용소에 갇혀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이들은 배
워야 할 교양의 양이 일반 특사사관보다 많다. 방학을 겸한 통학 기간이 아니라
도 가능한 강의나 자기학습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훈련 기간은 물론, 그야
말로 파견 임무 동안에조차.
뤼스트카머 기지에 자습실이 마련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습실이 꽤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나가던 레나는 걸음을 멈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습실은 대대장과 부장들 정도밖에 없는 한적한 방이었다.
위관으로는 권한이 부족한 대대장의 직책을 규정보다 더 많은 보좌를 두어 무리
하게 보충하고 있는 대대장과 부장은 조속히 특사사관 과정을 수료하고 다음 과
정으로 넘기도록 요구되고 있다.
당연히 부과되는 과제도 다른 사람보다 많고, 집무하는 사이에 자기 학습도 해내

36
지 않으면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들여다본 야자실에서는 이들 외에도 여러명이 책상에 앉아 보조교원
의 보강을 듣고 있다. 지금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날 무렵으로 아직 식사중인 사
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 방에서 책상에 앉아 있을 사람의 존재도 감안하면 상당
수가 자율학습에 힘쓰고 있는 것 같다.
“녀석을 찾고 있는 거면 신부님 같은 사람의 마중 말고도 그놈의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통합사령부에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울퉁불퉁 무거운 부츠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져 돌아보니 라이덴이 있었다.
“그렇습니까…아, 아니, 별로 신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많군요.”
“아아”
절반은 정곡을 찔려 황급히 고개를 흔드는 레나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라이덴
이 고개를 끄덕인다.
“휴가가 끝나자마자 이런 식이야.……그 전까지만 해도 이 방에 대해 싫어하는
녀석들뿐이었는데.”
자리의 절반 이상이 꽉 찬 자습실을 둘러본다. 평상시에는 느슨하게 하고 있는
넥타이를, 웬일인지 오늘은 제대로 목 언저리까지 조이고 있다. 겨드랑이에 낀 텍
스트와 노트겸 정보 단말기.
“에이티식스가 아니라고 암시를 당하는 것 같아”
“............”
상주하는 보조교원들이 있고 교재로 꽉 찬 책꽂이가 채워져 있고. 덧붙여 진로에
참고가 될 연방의 고등 교육 기관이나 직업 훈련학교의 자료, 아이나 학생을 위
한 직업 도감. 전쟁터 밖의 세계를 배우는 것 같기도 한, 자습실.
보조교원들도, 이 방을 만들게 한 연방군도 에이티식스가 되면 안된다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쟁후의 미래를 봐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여기에 온지 얼마 안
된 에이티식스들에게 그 소원은 아직 너무 일렀다.
그것이 이제는 보려고 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그것에 레나는 안심한다.
“라이덴도 공부인가요?”
“뭐 그렇지. 슬슬, 전쟁이 끝난다든가 하는 생각은 안하지만. ……그보다, 들었어?

37
신임 보조교사의 이야기.”
"네에."
말하다 말고 레나는 피식 웃는다. 과연 옷깃을 단정하게 가다듬은 것은 그래서일
까.
“라이덴의 옛날 선생님이라고.”
“과제 몇 개인가를, 빼먹은 걸 들켜서. 지금부터 설교와 보충수업이거든. 변함없
이 입버릇이 좋은 할멈이라니까.”
입꼬리를 오므리고 한숨을 쉰다. 신임 보조교사인 노부인이 어느샌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장난이 들킨 아이처럼 눈을 돌렸다.
“레나는 가끔은 보충수업 같은거, 안하는 거야? 세오라든지 크레나는 그다지 여
기에 안 오고, 앙쥬는 선택 과목이 따로 있고 신은 오늘 없어서, 그……할멈과
나 혼자 대치하고 싶지 않아…”
노부인보다 덩치가 큰 그가 어린아이처럼 속삭여서 레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아이처럼 눈꼬리를 수그리고 있는 그에게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라이덴은 ……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전쟁이 끝난다면 지금은.”
벌써 2년이나 전의 공화국 86구의 전쟁터에서, 신에게 들은 말이다. 그 때는 지
각동조 너머의 목소리 이외에,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미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렇지만 지금은. 살아남았고, 죽지 않아서 좋아졌고, ……전쟁이 끝났을 때의 일
도 생각하게 된다면.
잠시 후 그는 침묵했다.
물어서 싫다거나, 대답하고 싶지 않다거나가 아닌,……왠지 그리워져서.
“……레나가 2년 전 신에게 그걸 물어봤을 때는 말이야.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그때 그놈에겐 정말 가망이 없었으니까. 이제 곧 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녀석
은 죽은 형에게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형을 매장해 주고 싶다고, 그것밖에 없었으
니까.”
“………………”
“그런 신이 얼마 전 너에게 바다를 보여 주고 싶다는 바람을 말한 건 그래서 기
적 같은 일이야, 다행이기도 하고, 그 녀석 나름대로 꽤 마음을 묶어서 말했을

38
거야. 그거를 조금만 더 레나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레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라이덴이 불쌍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내려다본다.
“그야 레나.…안타깝게도 대체로 전원에게 들켰으니까.”

“너의 정보대로의 2차 대공세의 징후일 것이라는 무기를 연방군이 확인했다. 〈레


기온〉의 정지 수단을 공개하면 연방이, 최악의 경우 인류 자체가 분열된다.”
때문에 은닉 하겠다고 신과 비카는 결정했고, 대신에 공개 가능한 정보를 제레네
에게 요구해서, 얻을 수 있던 것이〈레기온〉이 현재, 계획하고 있다고 하는 제2차
대공세의 정보다.

《그렇겠지요. 저것은 <레기온>에게 금지된 항공무기를 대체하기 위해 총지휘관기


프로텍트들이 고안하고 개발시킨 무기. 금칙사항이 풀리지 않는 이상 폭격 대신
저걸 또 투입해 올 겁니다. 확실히 재생산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 정도의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자 신은 눈을 깜빡인다. 제레네는 총지휘관기다.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


고 있었는데.
“예상?……확정정보가 아니었던가?”

《연구와 개발에 관한 나의 관할은 제어계로, 관할외의 것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공화국에서 노획된 뇌의 샘플을 바탕으로 한 연구용》

“<목양견>…인가”
<레기온>의 제레네가 말하기 어렵게 보충하고, 인간인 비카가 태연히 고개를 끄
덕이는 모습은 새삼 기묘하다.

39
《거기다가 <고기동형>이 아니라, ㅡ포닉스라니 ……재미있는 이름을 붙였군요,
당신들》

이번에는 비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잠깐, 신형도 경의 관할… 제어계 연구 계열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들에게 전언을 담은 것입니다》

의아하게 비카가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대로 질문을 계속할 기미가 없기에 신이 말을 돌린다.
“병사는, 이번에는, 증강하지 않았나? 이에 대해서는 현재 어느 곳에서도 보고가
오르지 않았는데.”
제2차 대공세에 대해서는 제레네의 정보의 진위 확인도 겸해, 각국에서 대치하는
<레기온>집단에 대한 정보수집이 강화되고 있다.
신에게도 몇 차례 추적에 대한 협조 요청이 있었지만 명백한 병수의 증가를 감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거리의 문제인가도 생각했지만 어느 전장에서도 병수
증강의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네. <레기온>은 자난번 대공세에서, 병수 증강으로는 작전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2차 대공세에서는 각 병종의 개량과 성능향상을 통해 전력을
증강하겠다고 전략을 변경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인탁스플리게(방전교란형)>의 광학 미채와 날씨 조작. 아니면 잡병인


<흑양>을 대체하는, 상위 호환의 <목양견>.

《다만 역사상 자원이 없는 나라가, 수를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질을 중시한 것도


아닙니다. 유감스럽지만. 제1차 대공세도 실패한 전선만이 있는게 아닌 것처럼.
……그런데,》

40
간담하게 제레네가 말했다.

《당신, <레기온>의 수나 위치는 알아봐도, 원격지의 <레기온>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군요》

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레네는 협력적이라고는 해도 <레기온>이다.
필요 이상의 정보를 넘겨서는 안 된다. 카메라와 마이크와 스피커밖에 없는, 꼼짝
할 수 없는 공간이라도 소속부대와 직책을 말할 순 없었다.
잡담에 레나 이야기를 꺼낸 비카도 그녀의 이름은 입에조차 담지 않아야 했다
당연히 신의 이능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당신에 대해서는----특이적성체 버레이그에 대해서는, <레기온>도 인식하고 있


습니다. 버레이그는 미지의 수단에 의한 광역고정밀도 색적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병종 파악은 할 수 없다. 동결기를 감지할 수 없다는 등의 제한도 있다.……거기
까지는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레비치 요새기지 전투에서 당신은 나의 군
을 간파하지 못했으니까.》

첫 번째 용아대산 공략작전에서는 <레기온> 전선부대가 <디노자우리아(중전차형)>


를 주체로 하는 중장기갑부대로 교체된 사실을 모르고 양동부대를 진출시켜 격추
당했다. 말하는 대로 병수와 위치는 알아도 병종은 추측할 수밖에 없는, 신의 이
능의 톡톡 찌르는 듯한 형태로.
“간파하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다, 귀가 아팠던 것은.……설마 <레기온>은 노우
젠을 경계하고, 전략의 변경을 단행했던건가?”

《그것뿐만이 아니지만, 우연인 것도 아닌 것은 확실하지요. 수년이 걸려 준비된


앞선 대공세는 예기치 않게 요격 준비가 갖추어져 결국 버티고 말았죠. -- <레
기온> 총지휘관기는 당신의 가치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 이상으로 빨리 제거하고 싶다고, 생각하

41
는 정도로. 그러니까.》

《당신의 부대의, 다음 작전지가 어디라고 묻지는 않겠지만 어디로 간다고 해도,


조심하세요.》

"-그럼 우선은, 오랜만이야. 노우젠, 밀리제 대령님."


뤼스트커머 기지의 작전브리핑룸은 신이 속한 첫 기갑반의 파견을 앞두고 대대장
과 부장, 작전지휘관인 레나와 그의 보좌관, 동행하는 비카와 그의 보좌관들로 구
성된다.
그 중 유일하게 제2기갑부대에 속하는 소년이 타원의 테이블 한쪽에서 웃는다.
츠이리 시온 중위 1 기갑 부대가 휴가에 있던 동안 작전을 맡았던 2개의 기갑부
대 중 2 기갑반의 전대 총대장이다.
또한 반년전의 대공세 때, 공화국 남부 전선 제1전구 제1전대 "레더 에지"의 전대
장. 그란 뮬이 돌파된 후에도 레나의 지휘아래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방위
거점을 구축한 에이티식스들의 그 대장격 이었던 소년이다.
“연합왕국 이래니까, 한달이면서 조금?……아직 휴가기간 이지 않나, 제 2반은”
고개를 갸웃한 신에게 깃을 댄 교복 그대로 어깨를 으쓱했다. 라이덴보다도 장신
의 체구에 짙은 금빛 머리와 두 눈.
“상황설명 때문에 오늘만 특별히 온거야. 제3 반은 지금 작전 중이고 너희들이
파견되는 렉키드 정해선단국군에서 싸운 건 지금 기지에는 우리밖에 없으니까.”
렉키드 정해선단국군
연합왕국의 동쪽, 연방의 북쪽에 위치하는, 두 나라와의 국경의 산악 구릉지대와
북쪽의 해안선에 둘러싸인 좁은 지역을 영토로 하는 소국가의 무리이다.
<레기온> 전쟁에서는 구릉지대의 동쪽 토막으로부터 침공을 받아 구성국 일국을

42
통째로 방어진지로 바꾸며 지난 10년을 버텼지만, 결국은 소국이라서 작년의 대
공세 때 마침내 한계에 도달해, 10년만의 연락을 취하자마자 연방에 구원을 요청
해 온 것이 4개월 전의 이야기다.
이에 따라 츠이리들이 파견되어 <레기온> 거점 3개의 파괴 작전을 실시. 파견
당초부터 위치가 특정되어 있던 생산 거점 2개를 제압하고, 파견 기간 마지막에
위치가 확정된 세 번째, 사령 거점 제압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공격하지 못하고 한 번 철수하게 되었다.
“너희들 제1 반이 이번에 제압하는 것은 그 남은 세 번째 거점. ……우리의 철수
사정은 알고 있겠지만, 우선은 보여 주는 편이 빠를 거야.”
홀로스크린이 전개되면서 거친 광학 영상이 비추어진다.
전체를 채우는 것은 색감도 깊이도 가지각색의 푸른색이고, 그것은 바람 부는 날
의 호수와도 비슷한 물결치는 물의 확대다. 뾰족한 파도의 저편에, 금속제의 건조
물이 솟아 있어 요새라고 알 수 있다.……다음 제압 목표는 수상. 7년의 전투 경
력을 가진 신에게도 아직 경험이 없는 해상 전투다.
하지만 그 어려움도 지금은 오히려 괜찮았다.
해상요새의 최상층의 확대영상.
철색의 <레기온> 중에서는 드문 검은 장갑의 .도깨비불 같은 푸른 광학 센서.
연방의 그것과는 미묘하게 색이 다른 검푸른 창궁을 등에 업고 펼쳐진, 은실을
엮은 두 쌍의 방열재의 날개.
그리고 잊을 리가 없는 하늘에 한 쌍의 창 같은 길이.
신은 핏빛 눈을 가늘게 뜨고 내뱉는다. 제레네로부터도 에른스트로부터도 듣고는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이제 두 번 다시 싸우고 싶은 상대가 아니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

구경 800mm.초속 8000미터 매초유효사거리는 무려 400km.


전투중량 천 톤을 훌쩍 넘는 거구를 열차포 형태로 고속 이동시켜 연방과 연합왕
국, 맹약동맹과 공화국 각 전선을 유일하게 위협한 최대 최강 <레기온>.

43
-싸한 침묵이 브리핑룸을 지배했다.
직접 대치한 사람은 이 자리에 신뿐이지만 그 위협은 당시 공화국의 전쟁터에 있
던 에이티식스도 연합왕국군 지휘를 맡았던 비카도 알고 있다.
불과 이틀 만에 연방의 4개 연대와 2만여 명이 머무는 기지를 일방적으로 불태
워, 그랑 뮬을 단 하룻밤에 함락시킨 대공세 당세 <레기온>의 비장의 카드.
이것을 격파하기 위해 연방과 연합왕국, 맹약동맹은 협동하여 적중 돌파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세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삼국에 이 피해는, 연방,
연합 왕국은 전진을 정지시켰고. 핀 포인트로 중점을 둔 기동타격군의 운용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단 한 대에 삼국의 전략을 바꿔버린 그 녀석이.
“선단국군은 이 거점을 마천패루라고 명명했다. 위치는 <레기온> 지배지역인 구
클레오 선단국의 해안으로부터, 직선거리로 300킬로의 앞바다. <모르포(전자가속포
형)>를 확인한 조사선은, 직후에 포격으로 침몰해서 위치의 노정을 파악했다는 건
가.…이후, 선단국군의 영해 및, 사정내의 방어진지로의 포격이 연일 실시되고 있
고.”
해발고도가 낮고 남쪽 구릉지에서 물이 유입되는 위치에 있는 선단국군은 국토의
대부분을 습지대가 차지한다. 중량급의 펠드레스 운용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대다.
대신 국토를 지키는 것이 여러 겹으로 부설한 방어진지대, 그리고 <레기온> 지배
영역에 접해 있는 해역의 무수한 작은 섬에 구축한 포진지와 군함들이다.
선단국군은 그 성립상,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다. 포진지에 설치한, 100킬로 이
상의 긴 사정거리를 가지는 다연장 로켓포의 엄호 아래, 해안 부근까지 군함이
진출. 견고한 방어진지로 발이 묶인<레기온>의 군세를 측면에서, 함포 사격과 함
재 다연장 로켓포로 차례차례 누르는 것이 이 10년의 선단국군의 전투 방법이다.
국토의 남북의 폭이 좁고, 대부분이 습지대에서<레기온>도 공격해 지치기 때문에
의 거친 업적이기도 하지만.
그, 간신히 십년을 지켜낸 방어의 요령이.
“해상 진지는 이 한 달 만에 전멸. <레기온> 지배지역으로 향하는 항로가 포격을
받아 군함의 피해도 막심하다. 무엇보다 육상의 방어진지 첫 줄이 절반 가까이
레일건의 사정권에 들어가 있는 것이 뼈아팠다. 제2열의 예비진지까지 후퇴를 면

44
치 못했다. 국토가 좁은 선단국군에는 사실상의 최종 방위선까지 말이야.”
덤덤하게 비카가 입을 열었다.
“만약 선단국군이 함락되면 대공세의 재래가 될 거다.…중량급의 펠드레스는 운용
할 수 없는 진창의 땅이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포진지가 되어서는 연합왕국도
연방도 속수무책이니까.”
선단국군의 위치는 연합왕국의 동쪽, 연방의 북쪽의 이웃나라다. 400km의 사거
리를 가진 포라면 그전에 국경선을 넘어 양국의 동쪽과 북쪽의 전선과 기지, 일
부의 도시도 포격할 수 있다.
리토가 얼굴을 찡그렸다.
“……혹시, 연방이 우리들을 파견한 이유는. 본심은 자기네들이 위험할 수 있으니
까……?”
한숨을 쉬며 츠이리가 말한다. 대공세 때 공화국을 따라가기 싫어 츠이리 휘하의
거점에 있던 리토는 그래서 그와도 안면이 있다.
“리토, 너 그 생각하자마자 입으로 나오는 버릇 이제 좀 고쳐라. 너도 예를 들어
여기서 리토는 사실 울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잖아.”
“저……그만해요 이리형!”
“그리고 나를 가끔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노우젠 대장이라고 잘못 불렀다던가”
“그만하고 가!”
“……시온 리토는 괜찮으니까 계속해줘”
담담하게 신이 얘기하자, 츠이리는 어깨를 으쓱한다.
“연합왕국 파견때도 말했겠지만 노우젠. 난 그냥 츠이리라고 불러줘. 성은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싫으니까.”
얇은 입술이 후 하고 씁쓸하게 웃는다.
“누나가 있어서 말이야. 전사했지만, 무덤이고 뭐고 남겨주지 못했기 때문에 누나
의 적어도 누나의 말투라도 남겨주고 싶으니까.”
“참고로 언니가 있었다는 부분부터 다 거짓말이니까”
“잠깐만 리토! 좀만 더 약올리게나둬!”
온순한 얼굴을 한 레나가 전제를 뒤집힌 채 어정쩡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무정한 소재를 털어내자 츠이리가 부루퉁해졌다

45
“정말……86구가 들개 싸움처럼 되어 있던 것은, 노우젠도 알고 있었잖아. 누가
전대장이니 누가 마음에 안 든다며 마구 때려대고”
싫은 거야 그런 거, 하고 씁쓸하게 내뱉었다. 라이덴보다도 큰 장신에 다부진 체
구. 이 자리의 누구보다 폭력에 뛰어나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흉포를 싫어하
듯.
“우리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사람을 때리지 않는 법은 사실은 잊어야 하는
데. 그렇게 생각해도 이 덩치가 아무래도 분쟁이 되기 쉬워서,……이 말투가 제일
싸움을 피할 수 있었어. 그래서 5년이나 지냈더니 완전히 버릇이 되어 버려서.”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계속했다.
“그나저나.……우리의 실태의 뒤처리를 강요하게 되어, 그것은 미안하지만. 아무래
도 사거리 400km의 장사정포를 상대로 무작정 들이받는 것은 우리도 선단국군
도 할 수 없어서.”
“지난 한 달 동안 선단국군이 최종 방어선까지 몰리면서 기동 타격군 재파견을
재촉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준비와 기다릴 기회가 있으니까.”
떠맡은 것은 연합 왕국의 자흑 군복의, 아직 소녀 사관이다. 선단국군에서는 비카
를 대신해 제3 부대와 함께<알카노스트>를 이끌고 파견되었던 부장 소녀.
"즉 <모르포(전자가속포형)> 400㎞ 포격지역 돌파 준비입니다. 일단 이쪽을 보세요.
자료의 화상을 표시하려는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츠이리가 말한다.
“부탁할게, 자이샤 소령님.”
“…! 제 이름은 그러니까 자이샤가 아니라니까요……!”
순간 자이샤는 태엽 장치의 장난감처럼 츠이리를 되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반쯤
우는 이 자이샤는, 키는 프레데리카보다 조금 큰 정도로 가냘픈 체구에 연색인
두 줄기와 둥근 안경 속의 보라색 눈동자. 그 색채야말로 자영종(아마티스타)의
순혈인 그것이지만 귀족이 군인인 연합왕국의 가치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몹시
연약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아이였다.
“그렇지만 연합왕국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데”
“그렇습니다만, 그것도 원래는 빅토르 전하께서...!”
“넌 이름도 성도 길어서 특히 남들이 발음하기 힘드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로샤라고 불러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는데……!"여러분도!”

46
필사적으로 자이샤는 브리핑룸을 둘러보았지만 모두 신이나 레나조차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길을 돌렸다.
왜냐하면 비카의 말대로 그녀의 본명은 긴데다가 공화국 태생의 레나에게도 에이
티식스에게도, 연방 막료들에게도 발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소할 때마다 씹을 정도라면 말하기 쉬운 별명쪽이 아직 더 예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괜찮으니까 계속해, 라고 거듭해 비카가 말하자 어깨를 늘어뜨렸다.
“……명에 따라. 소신이 설명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화면을 홀로 스크린에 표시. 선단국군 연안부와 거기에서 북쪽으로 펼쳐
진 바다 지도….…그 중앙에 붉게 켜진 마천패루 거점의 상징, 그 주위에.
“마천패루 거점은 아까 츠이리 중위가 설명한 대로 <레기온> 지배지역 앞바다
300km 해상에 건조된 요새입니다. 또한 건조 시기는 불명. 선단국군은 개전 이
후에도 영해 전역의 제해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선단국군 이외의 연안국이
함락된 뒤 그 항구에서 진출, 건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연방이 안부를 확인하고 있는 다른 나라는 대륙 중북부에서 서부, 남부에
걸쳐 극히 좁은 범위뿐이다. 특히 동방의 사이에는, 지금은 <레기온>의 지배하에
있는 광대한 사막이 가로놓여져 어디까지도 두꺼운 <아인탁스플리게(방전교란형)>의
벽에 가로막힌 탓에 무선이 닿는 일은 없다.
“전쟁 이전 선단국군이 채굴 계획을 세우던 해저 광맥의 그 채굴 예정 지점의 바
로 위입니다. 또, 열원으로의 이용을 검토하고 있던 해저 화산을, 역시 열원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공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
둥근 안경 너머, 원래 처진 듯한 눈썹이 더욱 내려간다.
“지금 설명한 대로. 보다시피 이 거점 주위에는 인공, 자연을 불문하고 해수면보
다 높은 것이 일절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도상 마천패루 거점의 상징 주위에는 수십 km에 이르는 작은 섬이 하나도 없
다. 이용하는 자원은 해저 광맥과 해저 화산으로, 즉 주위에는 이용할 수 있는
육상 자원도 없다.
-사거리 400km인 장사정포의 포격 아래로 가는데. -은신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선단국군은 폭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방어

47
진지를 두려워하면서 한 달째 공략작전이 실시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선
단국군에는 이 시기 늦여름에 북쪽에서 큰 폭풍이 몰아치는데 그 폭풍우를 틈타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포격영역을 돌파하기 위해서.”
한 개의 차폐물도 없는 해상에서 폭풍의 높은 파도와 시야를 가리는 비바람을 엄
폐하기 위해.
레나가 묻는다.
“그렇지만 폭풍우를 뛰어넘으려면”
“보통 배로는 어렵지요. 특히 이 해역은 연안에서 멀고 파도가 거세기 때문에. 작
은 배로는 폭풍이 아니어도 위험합니다. 전투기조차 폭풍우를 헤치며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던가. 기다려야 할 시기가 폭풍이라면 준비라는 것은 그에 대
한 것입니다.”
즉- 보통 배에서는 폭풍을 넘지 못한다면 파격적인 군함을 내놓으면 된다.
영상이 바뀌자. 그것이 나왔다.
함선, 이라는 말의 이미지로는 어딘가 이질적인, 플랫 톱의 실루엣. 선체 중앙이
아닌 좌현 쪽으로 기댄, 아일랜드형으로 불리는 특이한 함교와 대조적으로 평평
한 비행갑판. 함교를 한쪽으로 치우면서까지 선수측과 선미에 두줄씩 길게 확보
한 활주로와 사출대.
그것마저도 함재기 출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비행갑판에서 한 계단 내려 설치
된 4대의 4cm 연장포와 함교 최상부에 걸린 고풍스러운 여성상이 옅은 햇빛을
둔하게 튕겨낸다.
“본 작전에서 기동타격군을 운반하는 것은 선단국군이 자랑하는 원생해수 사냥군
함입니다.”

48
2장 Mobile Take or The Whale

무겁고 어두운 흐린 하늘 아래, 침침하고 검은 물결치는 수면. 울퉁불퉁한 암색의


바위 거친 갯바위. 음산한 바닷바람과 구슬픈 바닷새 소리. 그리고 멀리 이어져
있는 작은 섬처럼 점점 좌초하는 썩은 군함.
“바다라고는 했지만”
“아니다! 이런 건 아니란 말이다!”
처음 보는 해변 광경에서 눈을 돌리며 말한 신에게 발을 동동 구르며 프레데리카
가 외친다.
바다가 보고 싶다.
그렇게 말했을 때 프레데리카가 떠올렸던 것은 햇빛이 눈부신 하늘 아래 투명한
새파란 바다라든지, 산호의 시체가 부서졌다는 백사장이라든지. 빛을 튀기며 떨어
지는 물보라라든가, 선명한 녹색 야자수라든가, 아름다운 꽃들이라든가, 요란하게
서로 울어대는 갈매기 소리라든가.
덧붙여서 바다가 검은 것은 흐린 하늘 때문만이 아니라 해저의 바위와 모래가 검
은 탓으로, 즉 날씨가 좋아도 이 바다는 검다. 언제나 검다. 연중 수온이 낮기 때
문에 수영할 수도 없다.
“게다가 뭔가 묘하게 비린내가 나지 않는가! 무슨 냄새냐 이건…!”
“소금 냄새, 라든지 아닌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그렇게 읽었을 뿐이다. 사실은 잘 모르기 때문에 냄새를 맡아봤자 모
른다.
“……우으. 모처럼의 바다인데, 이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바위벽에 부딪쳐 요란하게 흩어지는 파도를 노려보는 프레데리카가 눈물을 참지
못한다. 기대를 철저히 꺾여서 감정을 풀길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애초에, 너는 이래도 되는 거냐! 바다를 보여 주고 싶다고, 함께 바다를 보고 싶

49
다고 블라디레나에게 말했던, 그 바다는 이런 바다가 아니었지 않은가!?”
“확실히 이건 보여주고 싶은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대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얘기는 안 됐지만.
“이건 이거대로, 레나도 기분 좋아 보이고”
그의 시선 끝에서 레나는 말없이 그저 하얀 면을 번쩍 빛내며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도 웃음이 흘러나오고 만다. 프레테리카가 질렸다는

“그대들은 정말……”
멀리 은빛 가느다란 피리 소리 같은 노래가 파도 소리를 넘어 희미하게 울려 퍼
진다.

“아까 전 노래는 녀석들 중 가장 큰, 그녀와 같은 50m의 울음소리다. 선단국군


에선 드문 것도 아니지만 첫날에 오자마자 바로 들을 수 있다니 운이 좋군, 너희
들은.”
개전 직후에 군기지가 되었다는, 해양 대학의 부속 박물관의 광대한 홀. 그 중앙
에 서서 쾌활하게 사관은 말한다. 소매를 통하지 않고 걸쳐 입은, 남색과 진홍색
안감의 해군군복. 이마로부터 왼쪽 눈의 가장자리를 지나, 광대뼈 아래까지 새겨
진, 불사조 날개를 펼친 정교한 문신.
바닷바람에 쓸쓸해진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린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햇빛에
바랜 금발 머리. 오직 취록종(제이드)의 옅은 녹색 눈만이 본디부터의 색채일 것
이다. 하지만 모인 기동타격군의 누구나가 그보다도 머리 위, 선형천장에 매달린
당당하고- 다소 비좁게 유혹하는 것에 눈을 빼앗긴다. 신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 거대한 육지에 현재, 그리고 일찍이 존재했던 모든 짐승보다도 거대한 백골의.
“그녀야말로 우리 정계함대가 자랑하는 최대의 전과라고 말하고 싶지만, 공교롭게
도 자연사한 것이 유착되어서. 그때는 어류가 많아서 수확한 놈들은 모두 기름기
가 많아서 고생했나봐. 골격 표본으로 만들려던 학자들은 지독하게 고생했고.”
천 년 묵은 고목나무 같은 굵기의 그 자체로 큰 용을 연상시키는 등뼈. 안쪽으로

50
빽빽한 집이라도 들어설 것 같은 흉곽과 긴 목뼈와 뾰족한 머리. 무엇보다 뼈가
되어 더욱 그 존재 자체에 압도되는 월등한 거구.
같은 종류의 생물의 뼈를 일찍이 본 적이 있다고 신은 생각한다.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기 전 어디의 박물관인가 뭔가에서 봤다. 그 때는 동화속의
용의 뼈라고 생각한 거수의 표본—.
“전쟁이 시작되기 몇 년 전에 산마그놀리아 공화국의 왕립 박물관에 세놓았으니
까 본 사람도 있을 걸? 기억나는 녀석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손을 들어봐. 자!”
예전에 봤던 골격 표본 그대로였지만 일단 신은 무시했고 다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현지의 박물관이 있는 곳은 공화국 수도 리베르테 에갈리테로, 주민의 대부분이
백은종이기 때문에, 에이티식스뿐인 이 자리에는 애당초 보러 간 사람도 거의 없
었던 것이다.
사관 한 사람이 멍하니 있다.
“으음, 이상하네 … 분명 내방했을 때 꼬마들한테 인기 있었다고 들었는데, 뭐 상
관없나, 그녀의 이름은 니콜이다, 편하게 니콜양이라고 불러줘. 원생해수라도 이
렇게 죽어서 뼈가 되면 무섭지 않지?”
원생해수라고 부르는 이 생물은 성력 이전부터 해양을 특히 대륙과 그 연안 해역
을 둘러싸고 광활하게 펼쳐진, 넓고 깊은 외양의 그 전역을 지배해 온 해양 생물
이다. 정확히는 대륙 전역에 진출해 자신이 지배하로 삼은 인류에게 바다의 패권
을 여전히 내주지 않는 해양의 지배자들이다.
그것은 현대의 강철 군함과 탑재 병기군 조차. 사람과 그들이 낳은 모든 병기,
모든 플랫폼이 원생해수에게는 배제의 대상이다. 연안 이외의 해역을, 인류는 지
금도 이용할 수 없다. 교역이나 수송 항로에 어선 조업, 군함의 전개조차 원생해
수들이 찾지 않는 연안의 극히 좁은 범위에 한정돼 있다.
바다는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다. 대륙 밖으로 인류는 나갈 수 없다.
그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 한 나라뿐이
다.
“아무튼 난 이번에 너희들과 협동하는 렉키드 정해선단국군 합동해군, 함선<스텔
라마리스>의 함장 이슈마엘 아하브다. 이슈마엘 함장이든 이슈마엘 대령이든 이

51
슈마엘 형님이든 마음대로 불러다오. 아, 아하브 함장은 안 되니까. 그건 죽은 아
버지의… 우리 합동함대의 사령관이었던 아버지의 것이니까.”
즉, 기동타격군의 파견지인 이곳 렉키드 정해선단국군은
원생해수의 구축과 바다의 정복을 내건 전투 집단 정해선단을 시조로 하는 소국
가들의 무리, 그리고 대륙연안 전역에 존재하는 바다를 정복하려고 했던 국가들,
그 최후의 11개의 국가로 구성되어 대륙에서 유일하게 원양으로 전개가 가능한
함대와 원생해수와 싸우기 위한 전용 군함-정해함을 가진 세계 제일의 해군-정해
함이 있다.
그런데 신을 포함한 기동타격군은 그로부터 이번 작전의 개요를 듣기 위해 이 홀
에 모였을 텐데.
이슈마엘의 뒤에 있는 그보다 약간의 연상의 여인이 입을 연다. 그녀 역시 해군
군복을 입었지만 이슈마엘과 달리 이쪽은 빈틈없이 껴입고 검은 살갗과 붉게 새
겨진 비늘 문신을 하고 있다.
“형님,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작전개요를 설명해야죠, 기동타격군 여러분이 물러
서고 계십니다.”
“아이고, 미안. 우선 우리 귀여운 니콜을 소개하려고 했어. 아, 이 쿨한 미인은
내 여동생이자 부장인 에스텔 대령이다. 꼭 에스텔짱 이라고 불러줘…랄까”
말없이 에스텔 대령의 미움을 사고 목을 움츠린다.
벽소종(라지르)과 극동흑종(오리엔타)의 혼혈인 모란꽃 문신을 한 청년사관이 화
이트보드를 바싹 밀어 그들의 뒤에 설치한 뒤 그대로 말없이 떠났다.
“자, 그럼 작전개요인데- 우리 정해함대가 마천패루 거점까지 너희들을 데려갈
테니까 너희는 요새를 제압하고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을 때려눕히면 된다. 이상.”
“……………”
긴박하게……라고 하기에는 맥빠진, 시큰둥한 침묵이 에이티식스들 사이에 가득
찼다.
괜찮은거야? 이 사람 이래도?
역시나 레나가 보충한다.
“마천패루 거점은 원생해수 영역과 해양의 경계선 부근에 있으며 연방에도 연합
왕국에도 현재 이 해역으로 향하는 배는 없습니다.… 기동타격군은 이번에 통제

52
함과 해당 함대의 수송과 호위를 맡을 것입니다.”
통제함을 중심으로 호위인 배수량 1만톤의 원정함과 6천톤의 호위함, 수색에 특
화된 척후함과 보급함으로 함대를 구성해 원생해수가 지배하는 해양으로 나서는
것이 <정해함대>다. <레기온>전쟁 이전에는 각 선단국군마다 하나씩, 총 11개의
<정해함대>가 이 북쪽 바다에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최근 10년간, 정해함대의 소속된 함선도 국토방위로 동원되었고 많은
것이 격침되어 잔존하는 함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합동 함대인가 하고 맨 처음의 이슈마엘의 이름을 생각해낸 신은 생각한
다. 보유하고 있는 11대의 함대 중 하나를 출격시키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함
들을 모아 1개 정해함대로 어떻게든 만든 것이 합동함대 <오펀 플리트>라는 것
이다.
화이트보드에 자석으로 작전도와 자료를 올려놓고 에스텔 대령이 계속한다.
아래에 선단국군의 해안선과 중앙 부근에 목표를 나타내는 붉은 점이 찍힌 대부
분이 바다의 푸른색 작전도.
“기동타격군 수송과 왕복로 호위, 빛 왕로 항행중의 양동을 선단국군 해군이 담
당합니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현시점에서 400킬로의 사거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에 대해 정해함대의 침공 속도는 최대 30노트"
“육지의 단위라면…시속 56킬로미터로군”
“어, 느리네.”
"누구야, 지금 느리다고 한 놈, 차버린다? 정해함이 몇 만 톤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야 1000 톤 쯤 되는 가벼운 펠드레스 따위와는 다르다구!"
“형님 마음은 알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으니 자제해 주세요.”
“올리야 소위, 실례예요”
“미안”
“죄송합니다.”
에스텔과 레나의 추궁을 받은 이슈마엘과 리토는 입을 다물었고 에스텔은 무슨
얘기를 했는지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 시속 30노트, 즉,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포격 지역을 돌파하여 마
천패루 거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직선거리로 따져도 7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

53
다. 그 사이,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우리와는 별도로 연합 해
군 통상 함대가 2대, 우리보다 앞서 포격 범위에 침입. 마천패루 거점에의 접근
을 시도합니다."
작전도에는 투명한 커버가 한 장 걸리고 거기에 에스텔은 직접 해안선의 두 곳,
아마도 모항으로부터 최단경로로 마천패루 거점으로 접근하는 두 편의 항로와.
이어서 펜의 색을 바꾸어 합동 함대의 모항인 이 기지에서 한 번 북쪽으로, 거기
서 진로를 바꾸어 동남쪽의 마천패루 거점으로 뻗어가는 항로를 그린다
“본 함대는 양동 출격 전에 은밀하게 출항합니다. 포격지역 바깥쪽에 위치한 북
방의, 카자키리 스프링 제도에서 대기하다 양동함대가 교전을 개시한 후 폭풍우
를 틈타 포격영역을 돌파합니다. 즉 본 작전은 폭풍의 발생을 기다려 실시되는
형태입니다”
“덧붙여서 <레기온>에게 해전 사양은 없으니까, <모르포(전자가속포형)> 이외와의
전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지난 10년 선단국군의 전장에서 해전형 레
기온이 확인된 적은 없다.”
선뜻 이슈마엘이 보충했고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는 소국입니다. 대륙 북부에서는 우리나라에만 유용한 해전
형보다는, 연방이나 연합 왕국에 유효하게 되는 무기에, <레기온>들도 개발 자원
을 할애하고 있는 거겠죠.”
“실제로 해전형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이렇게 말라붙고 있잖아”
“................”
남의 나라 사람인 기동타격군에게는 대단히 반응하기 힘든 농담으로 정리했다.
슬쩍 고개를 갸웃하며 신은 묻는다.
“그렇지만,……해상에는 몇 대인가, <레기온>의 소부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움
직임부터가 초계용인 <레기온>인데 그건?"
“응? 아아. 그렇군. 네가 소문의”
이슈마엘은 한순간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의 이능에 대해서는 그도 듣고 있던 것 같았다.
“녀석은 해전형이 아니라 전진관측기의 발진모함이야. <모르포(전자가속포형)>으로
군함을 겨눈다면 관측기는 필수니까. 당신이라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라베(경계

54
관제형)>은 바다 위에 있을 수 없고.”
아, 레나가 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히 해상 상공에 <라베(경계관제형)>는 없다.
그리고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무장도 장사정포다. 사격 정밀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대공세 때처럼 기지나 요새 위치가 판명되고 과녁이 커서 회피 행동도 취하지 않
는 고정목표에 집중해서 수십 발을 때려 넣는 운용이라면 몰라도 광활한 바다 위
에 움직이는 함선을 요격하려면 <라베(경계관제형)>이 없다면 전진관측기가 필수적
이다.
“그 관측기 모함도 양동함대가 유인 및 배제를 담당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것보다 정해함은 절대 가라앉히지 않을 테니까.”
해전을 모르는 소년병에게 자세한 해상기동 얘기를 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한 것인
지, 어디까지나 해전은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요새까지의 이동에
대해서는 묘하게 시원하게 흘리고, 이슈마엘은 최선의 쾌활함으로 히죽 웃었다.
“너희들 에이티식스가 와줘서 선단국군은 정말 살았으니까. 그러니까……<스텔라
마리스>의 이름을 걸고. 다른 무엇을 두더라도 기동타격군은 반드시 살아 돌아가
게 할 테니까.”

기동타격군의 숙소로 제공된 곳은 기지가 된 해양대학의, 학생 기숙사였던 건물


이다.
먼 남쪽의 고대 양식을 본뜬 모자이크 회랑을 소등 시간을 앞두고 세오는 혼자
걷다 사무실 같은 방에서 얇은 책뭉치를 들고 나오는 리토가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아, 릿카 소위”
조금 키가 자랐구나, 라고 수개월전보다 가까워진 시선의 위치에 문득 생각했다.
“그게, 혹시 남아있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 남아있어서 받아온 건데요. 지금은
몰라도 전쟁이 끝나면 국외에서도 모집은 할 예정이라고 해서.”
“…리토. 갑자기 물어본 나도 미안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드러낼 게 아니라,

55
생각하고 정리해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좋아.”
“앗, 어쩐지 요즘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음……이쪽 대학과 부속 해양 고등학교의
자료입니다. 기지에 있는 자습실로 가져가야겠다 해서요 안 온 녀석들도 보고싶
어 할 거 같아서”
리토는 얼굴을 빛냈다.
“그건 그렇고! 원생해수! 장난 아니었죠? 진짜 괴수죠!”
그러고 보니 리토같은 어린 프로세서들은 높으신 분들께서 마구잡이로 주는 코믹
스라든가 영화라든가 애니메이션 같은걸 좋아했고, 그 속의 괴수영화에도 눈을
빛내고 있었지 하고 세오는 흐뭇해진다.
라고 할까, 세오를 포함한 연장자들도, 그러한 오락은 정말로 어릴 적에나 봤었기
때문에 꽤, 즐겨 보고 있었다.
“즉, 원생해수에 관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거야? 전쟁이 끝나면.”
“그것도 좋을까, 해서. 왠지 재밌을 것 같고.”
어느새 생각이 많아졌네, 리토도
언젠가 맹약동맹에서는 화석을 캐고 싶다고 말한 적 있고, 그 전에는 하늘을 나
는 오토바이를 만들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여러가지 생각중이었다.
“아, 왜냐하면 나는 …”
말하다 말고 리토는 잠시 생각했다.
“릿카 소위는, 류드밀라를 아시나요? <시린>의 키 크고 붉은 머리의”
“뭐, 뭐.”
빨간 머리의 키 큰 소녀의 모습으로
—자, 여러분 부디
에이티식스의 말로는 이런 것 같다는 듯이 과시해 왔던.
그들과 우리 에이티식스는 다르다. 그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누군가의 죽음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류드밀라가 무슨 일 있었어?”
“용아대산 거점 공략작전에서 나, 그 류드밀라랑 같은 부대에서 그때까지 나,
<시린>들에 대해 무서웠는데, 그랬더니 류드밀라가 말을 걸어와서”
그러고 보니 리토는 어느새 <시린>들에게 겁먹지 않았다.

56
“행복하라고 들었어요. 원하는 대로 살라고. 그래서 난 그들이…<시린>이 애처롭
게 우리를 걱정해준 것뿐이라는 걸 알게되서”
오래된 전등 불빛에 마치 꿀색처럼 빛나는, 사려 깊고 무구한 짐승 같은 마노의
눈동자.
“걱정돼서요. 86구에서는 저희들에게 계속 죽으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아니니까.
연방군도 공부라든가 귀찮긴 하지만, 그것도 역시 원하는대로 살아도 좋다는 말
이었고. 원하는 곳에,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고. 가고 싶은 곳에서 보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전쟁이 끝나면, 아니 안 끝난다고 해도 군대를 떠나서. 그것을
원해도 좋다고. 86구는 자랑밖에 없었으니까. 뭔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말
았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그것을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러가지
바라고 싶어요.”
86구에서는 바랄 수 없었던 빼앗겨버린 많은 것들을.
그 말을 세오는 어딘가 멍하니 듣는다.
키가 좀 큰 줄 알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어느 틈에 꺼내서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리토도 또 … 86구를 나가려 하는구나.
그 일에 세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57
58
신은 미래를 바라게 되었고, 그것은 분명 기쁘다. 라이덴이나 앙쥬도 계속 그러기
위해 준비하는 건 알고 있고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뿐만이 아니다. 리토도, 세오가 눈치채지 못했을뿐이지 분명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 밖으로
꿋꿋이 리토는 웃는다. 세오가 받은 충격은, 깨닫지 못하고.
“그러니까, 지금은 여러 가지를, 우선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모처럼 작
전으로 여기저기 갈 수 있고, 즐거운 것 같은 것을 전부, 모아서 가지고 돌아가
자고”

《……<양치기>의 제어계에서, 비밀 사령부의 정보의 판독을 시도하겠다, 라는 겁


니까?》

그녀가 가진 정보가 작전에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통신 기능은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제레네의 컨테이너는<저거노트>의 부품에 뒤섞이는 형태로, 제1 기
갑 반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 컨테이너가 숨겨진 수송차 공간.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고 있는 <레기온> 정지
절차 이야기도 둘 만 있을 때의 시간을 가늠해 방문한 신에게 제레네는 응한다.

《즉 제실파의 그것도 고관이, <양치기>가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군요.……


소재를 알아낸다면 다른 방법도 있잖습니까? 꽤나 피가 식은 일을 생각하는군요,
연방도》

“가능한가?”

《제실파 고위 간부의 <양치기>는, 확실히 있습니다.》

신은 그 대답에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59
정지수단을 제레네에게 물었을 때부터 그것은 항상 잠겨 있는 갈등이다.
전쟁은 끝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제레네에게 들은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
은, 그 때문에 비밀 사령부의 소재를 알아내는 것은,…솔직히 별로, 마음이 내키
지 않는다.

《이름과 배치된 곳은 «동러»금칙사항 저촉》-《안되네요. 이는 말할 수 없습니


다.》

계속하려던 제레네의 말이, 같은 음성의 영혼없는 목소리로 차단된 것에 조금, 안


심해 버렸다.
프레데리카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끝까지 싸운다면 기적을 의지하지 않고 전쟁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거기에 덧붙여,……적이라고 해도, 전사자의 망령의 그것도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
고는 해도<양치기>를, 단순한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연방이 요구하는 정보는, 확실히 <레기온>안에 있습니다. 제어계에서 정


보 읽어내기도, ……적어도 우리 <양치기>는, 이렇게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기억을 뇌 안에 축적된 정보를 읽어내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다만, 제실파의 <양치기>를 고집하지 않아도 찾는 방법은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당 명령은 통신위성을 경유하여 각 본거지와 총지휘관기
로 송신되는데, 위성 <라베(경계관제형)>가 파괴되었을 경우에는 가장 최근의 경보
기가 커버에 들어가니까.》

“제레네, 그 전에……묻고 싶은 게 있는데.”

60
《…?…뭐죠》

제레네가 처음으로 대화에 응했을 때부터, 생기고 있던 의문. 이능을 가진 자신이


라면 <양치기>와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무서웠던 그 이유.
-그의 죄일지도 모르지만, 그럴 만도 했다
“내 목소리가 너에겐 들린다. <양치기>의 너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
는건, 다른 <양치기>들도 마찬가지인가.”
제레네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는 듯했다.

《네에. 라고 해도, 지금처럼 눈앞에 있고, 다른<레기온>이 주위에 없으면 괴로워


해, 라고 하는 정도의 목소리이지만.……그러니까 당신이 있는 탓에 습격의 위치
나 부대의 배속이 드러난다든가, 그런 것은 되지 않아요?》

“그게 아니라…”
듣고 싶지 않다. 묻고 싶지 않고, 묻는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지금의 당신처럼 의사소통 수단이 있고, 시간을
들이면 내가 다른 양치기들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서로 싸우며 죽였다. 성불시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게 서로 죽이는 일 없이, 무의미하게 서로 상처입히는 일도
없이. 그저 온화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미움 받는다고 생각한 채 그 자리에서는 무엇 하나 통하지 못한 채 타오르는 마
지막 순간에 환상처럼 한마디만 형이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을 들을 수 있었
다-저런 끔찍한 영결이 아니라.
“나는, 형과.……얘기를 할 수 있었나……?”
제레네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형이었군요. <레기온>이 됐다는 가족은》

61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상세히 말하는 듯한 말은, 지금은 하지 않지만 방심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쓰러뜨렸군요. 소중한, 형님이었던 <양치기>를》

“그래”

《그렇군요》

골똘히 생각에 잠겼고. 잠시 후 제레네는 조용히 말했다.

《대답하기 전에, 나도 듣고 싶은데. ……나는 인간일까요?》

이번엔 신이 침묵할 차례였다.


“그건...”
레르케에게도 예전에 들어왔던 말이다. 그때도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사람이냐 아니냐는 질문을 받으면 레르케도 제레네도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망
령의 한탄을 듣는 그의 이능은 제레네를 망령이라고, 생자가 아니라 그 잔해인
망령이라고 냉엄하게 단정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에게, 면전에 대고 그렇게 단언하는가 하면... 신에게는 그것
은, 아무래도 할 수 없다.
미루어 제레네는 웃은 것 같았다.

《친절하군요》

《당신은 친절한 아이에요. 가능하다면 사이좋게 지내고 싶을 만큼, 그렇게 생각해


요. 하지만 —그건 할 수 없어요. 형도 나도 이제 할 수 없어요. 우리는,》

<레기온>이니까..

62
《내가 대화할 수 있는 것은, 구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센서가 봉쇄되어,
당신이 앞에 있어도 센서 상에서는 인식할 수 없죠. 그렇지 않으면 인간 앞에서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이성 따위는 유지할 수 없으니까. <양치기>가 되는 건 그
런 겁니다. 인격 같은 것이 있을 뿐, 파괴충동에 지배된 괴물이 되는 것.》

맹약동맹에서 제레네의 손은. 86구의 전투에서, 형의 손은. 살의로 뻗었지만 파괴


되는 순간에는 부드럽게 만졌다.

《그건 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착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지만 그럼에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제레네의 목소리는 순간 확실히 살의를 띠었다.


<레기온>특유의 영혼없는. 이유도 필요 없이 사람을 죽이는, 자율무기의 부조리
한 살의를 띤다.

- 《형님도 그건 마찬가지겠죠》

《<양치기>인 형님은, 인간인 당신을 죽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살육기계의


본능은, 눈앞의 인간을 죽이려 했고, 형님은 그에 항거할 수 없는 <아마이저(척후
형)>이라면 몰라도, <디노자우리아(중전차형)>으로는 구속도 못 할 테니, 그러니까,》

《……당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신은 고개를 들었다.
제레네는 컨테이너 안에, 눈앞에는 없지만, ……모르는 누군가의 상냥한 눈동자와
눈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러니까 나한테 물어본거고 좋아요, 대답하

63
죠. 그때 형과 당신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을 구하는 길도, 더불어 사는
길도,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형님이 <양치기>가 되었을 때 결정
되었고……당신의 실수나 태만으로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당신 탓이 아니라고.

《그때도, 앞으로도.<레기온>을 상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쓰러뜨리고, 그리


고 재워주는 것뿐입니다》

레나의 보고를 받고 통신 홀로윈도우 맞은편에서 그레테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고했어.……미안해, 밀리제 대령. 말괄량이들을 맡겨버려서』
“아니요. 대령님이야말로 다음 파견의, 노일랴나루세 성교국과의 절충을 담당해주
시고”
그레테는 이번에는 제1기갑반도, 맹약동맹 남부전선에서 대륙 남쪽 국가들과 연결
로를 복구하는 제4기갑반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기동타격군의 작전부대는 한 번에 2개의 기갑그룹이 해당되지만, 파견지의 필요
에 따라 2개 그룹이 합동하는 경우도 있고, 이번처럼 각각 다른 지역으로 파견되
기도 한다.
결국 그것뿐.
레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다.
『끊임없이 파견 요청을 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여기저기 너덜너덜했을
줄이야……』
방문해서 본 선단국군의 전쟁터는
가혹한 공세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방어진지대와, 분명히 숫자가 부족한
지친 병사와 피폐한 뒤쪽 거리와 해안에 누누이 누워 있는 군함의 시체로 눈이
뒤집힐 듯한 참상이었다.
연방과의 연락이 복구되자마자 도움을 청해 온 것도 당연하다. 기동타격군 정도

64
의 예비전력조차 성교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없었다.
과연 벌써 10년이다. 끝나지 않는 전란에 견딜 수 있는 나라만 있는 건 아닐테
니.
전선 배후에서는 아직 여유가 있었던, 연방이나 연합왕국 같은 엄청난 대국이나
맹약동맹 같은 천연의 요충지를 가진 나라들과는 달리.
그 일에 문득, 걸림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어째서.……선단국도, 성교국도, 어느 나라나 연락이 복구
되자마자 구원을 요청하는 걸까. 지난 10년의 전란과 1년전의 대공세는 간신히나
마 자력으로 버텼다는데.
마치 대공세 이후 불과 1년 사이에 급속히 전황이 악화된 듯 무거운 침묵을 토하
듯 그레테가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그런데 대령. 또 하나, 보고가 있는 것을 잊었어.』
“네?”
황급히 기억을 더듬는 레나에게 그레테는 싱긋 웃는다.
『노우젠 대위에 대한 회답은 어떻게 됐을까?』
설마 했던 상관으로부터의 추격이었다.
“무무무무, 무슨 얘긴가요?!”
『사내아이를 애태우는 것도 여자아이의 특권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애태우면 미
움받을 걸. 실제로 대위도 그 후로 굉장히 침울해 있었거든.』
말하다 말고 그레테는 무언가 끔찍한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 얼굴을 찡그렸다.
홀로윈도우 앞에서 레나는 새빨갛게 변해갔다.
『그 사마귀마저 동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니까 말이야. ……
그러고 보니 빌렘은, 여행에 얼굴을 내밀었던 목적의 예의 건은, 그 후 어떻게
된 걸까』

“연합왕국에서의 지각 동조 정보 유출이라고 하는데.”

65
이번 파견에서는 역할이 없기 때문에 기동타격군의 근거지인 뤼스트 카머 기지
연구반에 남은 그녀의 사무실에서 방문객을 상대로 의심스럽게 아네트는 말한다.
거의 안면이 없는 상대가, 방문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그건 지각 동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했을 겁니다.—엘렌프리트 참모장님”
“알고 있다. 하지만,……그것은 어떨까. '앙리에타 펜로즈'”
되받아친 시선 끝에
빌렘 에런프리트 참모장은 얇은 칼날처럼 비웃는다.

300킬로미터 저쪽 앞바다에 있는 해상요새의 공략작전, 또 우군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적지 한복판으로의 돌격작전을 눈앞에 두고.
에이티식스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날을 얌전히 보내지 않고, 함께 거리 바
로 옆 바다로 놀러갔다.
원래부터 86구의 죽음과 가까웠던 전쟁터를 고향으로 삼고 살아온 그들이다. 전
투에 이은 전투의 나날 속에서 사소한 이벤트를 즐기는 것조차 에이티식스에겐
사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바다이며 바다 근처에서 태
어나 자란 극소수에게도 처음 보는 북쪽 바다.
그들에게는 아직 전투야 말로 일상이지만.
그러니까 작전을 앞두고 조심하고는 있지만, 긴장해서 아무것도 즐길 수 없는 것
은 아니다.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물고기 그림자를 찾아보거나, 부상해 온 그것이 의외로 커
서 황급히 도망쳐 보거나. 떼지어 있는 바닷새를 흩어 버리거나 바닷가에서 게나
작은 물고기를 잡거나. 놀이는 거의 할 수 없지만, 억지로라도 모르는 환경을 만
끽하는 형태로.
그 평소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들으며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해면을 바위 끝
에 서서 말없이 신은 바라본다.

66
몇 번을 봐도 이곳은
옆에서 똑같이 눈을 빼앗기고 있던 라이덴이 감을 길이 없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 굉장하네. 이게 정말 다 물인가.”
오늘은 다행이라고 할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있고 하늘은 북쪽 지방의 옅은 푸
른색이고 바다색도 어제보다 어둡지 않다. 멀리 희미하게 뿌연 수평선과 야옹하
면서 우는 고양이처럼 서로 우는 바다새.
덧붙여서 진짜 고양이 티피는, 계속 놓고가는 것도 불쌍하다고 이번 파견에는 데
리고 왔기 때문에, 지금은 레나의 거실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맹약동맹 여행에서
봉변을 당한 파이드는 화가 치민 듯 직접 대기명령을 단호히 무시하고 해안까지
따라와 리토와 마르셀과 낚시에 매달리고 있다.
“게다가 이만큼의 물에 맛이 들어가 있다든가. 솔직히 믿을 수 없지……”
“핥아봤어?”
설마 어린애도 아니고 라고 생각하면서 신은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미묘한 침묵
이었다, 호기심에 핥아본 것 같다.
“참고로 무슨 맛이었는데?”
“평범히 소금이야.……아니, 좀, 뭔가 비릿했어. 그 명란이라는 생선알을 소금에
절인 것, 그걸 얇게 한 것 같은 느낌이야.”
말하고 나서 뭔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보니 너 말이야, 그게 정말 맛있다고 생각해? 난 솔직히 비릿해서 안 되
겠던데.”
묻는 말에 신은 고개를 갸웃한다. 토스트에 올리는 것 중 하나로 주둔기지 식당
테이블에 잼이나 버터와 함께 상비되어 있던 붉은 알젓. 선단국군 전통 식품이라
는 것에는 신기해서 많은 이들이 손을 내밀어 권유를 받았고 신도 먹어 보았다.
“아니? 별로 못먹을 것도 아니었지만”
맛있냐고 하면 그것도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너 정말 편식이 없네.……”
근처에서 조개껍질을 줍던 프레드리카가 끼어 든다.
“신에이의 미각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적어
도 나는 좋아한다만.”

67
“그러고보니 확실히 너 엄청 먹었지. 토스트에 사워크림이랑 산더미처럼 얹어서.”
“아니, 토스트 말고도 산더미처럼 먹었지만 말이야.”
“이놈들, 레이디에게 무슨 말투냐! 분명 체중은 늘었지만 이건 성장기라서 그런
것 이다!”
시뻘겋게 달아오르는데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놀리려는 의지도 없이 당
연한 일인 듯.
“알고 있어. 좋은 거라고 한창 먹을 때니까 말이야.”
“성장하기 위해 식사량도 체중도 느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맘껏 먹는 게 좋을
거야”
음, 하고 프레데리카는 입을 다문다.
그러고는 묘하게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성장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어린애는 아니니깐.”
어딘가 비장함마저 감도는 그 핏빛 눈동자.
“그럼… 난 캬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주운 조개껍데기를 내던졌다.
“지금 저것이 움직였다!?”
……역시 아직 어린애라고 두 사람은 생각한다.
기분 나쁘게 하고 있는 프레데리카의 옆에, 라이덴이 시야를 가리고 말한다.
“뭐야, 내용물이 들어있었어?”
“…아니…”
반면 그것을 대충 주워본 신은 잠깐 침묵한다.
뭐야? 하고 보러 왔다가 역시 라이덴도 입을 다물었다.
조개껍질 속에서 본체가 나와선 움직이는 등껍질로 뒤덮인 다리.
“소라게…일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왠지 거북하군.…”

“경의 일이다. 지휘관인 자, 임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밀리제.”


주둔기지의 임시 사무실. 이슈마엘에게 부탁해 공개 가능한 최근 전투 기록을 살

68
펴보던 레나에게 비가는 탄식한다. 어이없다는 듯한, 그 자영종의 두 눈.
“별로 한숨 돌리기 위해 바다에서 노는 것쯤이야 상관없을 텐데. 내가 안 가는
건 단순히 바다 같은 건 많이 봐서 신기하지 않다는 것뿐이지만.”
“연합왕국 최북 국경인 설화연산의 북쪽 가장자리 절벽 아래가 그대로 바다니까
요. 겨울에는 얼음으로 채워지는 바다는 장관입니다.”
늘 곁에 있는 레르케가 보충하자 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신은 동료들과 놀러 간 것 같아서 자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뇨……바다는 어제는 무심코 봐버렸고, 이후의 작전에서도 보겠지만……”
내가 바다를 보러 가는 건, 전쟁이 끝나고 가는 것이니까.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고 신이 말했으며. 그 부탁에 자신은 응했다.
그래서 고백받은 소망에는 아직 보답하지 못했으니까, 적어도 그 소원 정도는.
“전쟁이 끝나면 바다를 보러 가자고 그러더군요. 그 약속은 지키고 싶으니까요”
흥, 하고 코를 울리는 비카에게 미소를 지우고 돌아섰다.
“그것보다 비카. 확인할 것이.”
이슈마엘에게 부탁해서 보게 된 지난번 대공세 이후의 선단국군 전황. 개개의 전
투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 정확한 숫자가 아닌 탓도 있겠지만, 전투의 규모와
전사자 수가 맞지 않는다. 전투 중에 행방불명 상태로 있는 사람이 많다. 그만한
격전과 그만한 혼란. 그리고 목격자가 증가하고 있는, 본래라면 후방 지원의 병종
일 터인 <타우젠트페슬러(회수수송형)>
그레테를 통해 경유해 확인받았지만 연방에서는 같은 사례가 보고되지 않았다.
“연합왕국에서는 어떨까요. 그리고 그녀에게 들었다는 <레기온> 전략 변경에 대
해서도 자세히 상의할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모든 동료들은 제각기 놀거나 떠들고 있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파도의 저편을 바라보며 무심코 생각에 잠겨 버린 세오와는 거리가 멀다.
바다
언젠가 보고 싶다, 라고 말다툼을 한 것이 불과 1년 전, 기이하게도 똑같이 <모
르포(전자가속포형)>의 추격 작전 때다. 보고 싶은 것은 보고 싶었지만, <모르포(전자

69
가속포형)>에 져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은 그것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단지 막연한 목표였던 장소에 의외로, 산뜻하게, 도달해 버렸다.
물론 세오가 그때 떠올린 것은 이 북쪽 바다가 아닌, 바다라는 낯선 곳의 상징으
로 였지만.
그래서일까, 이렇게 바다를 보고 느끼는 것은 처음 봤다는 감동도, 상약에 도달했
다는 감회도 아니고, 멍하니 의식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한 공허함이다.
푯말을 잃어버린채 서서 버려진 것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도 86구를 나온 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본
적이 없는 경치에 오는 만큼 와버렸다. 그게 뭔가 허무하다.
걸음을 멈추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있어도,……무엇을 목표로 하면 좋을지 모르
는 채에서도, 무엇인가의 흐름을 타 버리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장소에도 와
버릴 수 있다.
그것은 연합왕국이든 맹약동맹이든 지금 생각해보면 2년 전, 연방의 보호를 받아
수도에 있는 에른스트의 저택으로 끌려온 것조차 그렇지만.
눈앞의 바다는 어제의 둔탁한 검은 빛에 비하면 햇살이 나와 있는 것만도 낫지만
검푸르고 사뭇 음산하며 바람은 차갑고 비릿해 어딘가 비웃음을 받고 있는 것 같
았다.
눈으로 본, 도달한 바다라고 하는데,……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오랜만에 의식했다. 86구에서는 어느새 스며들어 버린 그 인식.
인간이란 이 세계에는 필요 없다.
형편도 심정도 감개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 죽은 밤 저물어 가는 별의 달밤을
천구에 펼쳐 놓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조촐한 축하를 계획하던 날 큰비를 내리게
한다. 세상은 차라리 심술궂을 정도로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것을 왠지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더는 배길 수 없어 발길을 돌려 거리로 돌아왔다.

70
“전쟁터 밖은 평화로운 거리라고, 어쩐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혼자 앙쥬는 탄식한다. 지역 축제 시기라고 기지의 식당 아주머니가 말했기에, 기
지가 속한 항구거리.
뱃공주의 축제라고 불리는 이 축제는 옛날에는 어느 도시나 정해선단에 속하는
배를 가지고 있었고, 그 배의 뱃머리에 머무는 정령을 뱃공주라고 불렀다. 그 정
령을 일 년에 한 번 모시는 제사라던가.
시청 앞 광장은 과연, 중앙에 세워져 있는 작은 여자의 상이 많은 양의 꽃으로
장식된 축제 분위기이다.
하지만 그 시청 앞 광장의…86구의 폐허와도 혼동되는 황폐함은.
흙먼지와 낡은 건물과 갈라진 도로, 말라 버린 거리 노수. 건물의 기능이야 그럭
저럭 유지하고 있지만 보수의 여력은 없어진 지 오래일 것이다. 오가는 아이들,
깨끗하면서도 온통 헝클어진 자국투성이의 낡은 옷, 축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노점과, 마치 합성품의 사사로운 과자류.
반면 주민의 수는 작은 거리에 비해 마치 북적거리는 것 같다, 광장이나 공원에
빽빽하게 늘어선 조립식 주거. 지난 10년 동안 계속 후퇴한 전선의 뒷배에서 도
망쳐온 수많은 피난민들을 위한 것이다.
소국이면서 10년 동안 <레기온>과 계속 싸워 온 선단국군의, 이것이 그 대가였
다.
“연방이나 연합 왕국이 특별할 뿐이었군요.…다른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한계였
네요”
계속 싸우는 힘도 없는 것에, 그럼에도 살아남으려고 온갖 것을 다 끊어가며 싸
우고 그 끝에 힘이 다해서,—결국에는 헛되이 소멸한
그 현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함께 축제를 보러 온 미치히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축제를 하는군요.”
작은 여자상을 장식하는, 한 송이 한 송이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대량의 꽃들. 적
어도 이것만으로도 거리 안의 사람들은 웃음소리와 함성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생활도 고달프다고. <레기온> 전쟁으로 멸망까지 내몰리고 있는 여실
히 알 수 있는 거리의 모습은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어딘가 필사적으로 웃으며

71
영을 이어가는 민족의 축제.
미치히가 말한다. 공화국에서의 마이너리티였던 에이티식스, 그중에서도 더 희귀
한 동쪽의 오리엔탈 대륙의 동방의 극동흑종(오리엔트)의 피와 짙은 용모로
“저는 축제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왜냐하면 계속 받을 수 없었어요. 고향은
기억나지 않고, 가족들은 모두 죽었고, 그래서 외롭고 이상으로, 부러워요. 이런
식으로 괴로워서 몸부림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 그만큼 소중한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있다는 것이 부러워요.”
-중요한 것들. -자신의 형체를 규정하는 것들.
에이티식스에게는 그것은 유일하게 품은, 싸운다는 자랑 이외에는…… 아직 아무
것도 없는데.

해변을 떠나 거리로 돌아왔지만 시끄러운 거리 역시 세오에겐 불편했다.


작은 거리인데도 사람은 많이 있고, 그 대부분이 그와 같은 취록종(제이드)의 핏
줄이다.
취록종(제이드)을 포함한 ,녹계종은 대륙 남방의 연안부 일대를 세력권이로 하는
민족이다. 이들 중 일부는 원생해수를 따라, 이 땅으로 이주한 것이 선단국군 11
국 중 7개의 선단국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혈족이나 지기는 없다.
이 축제도 모른다.
바다에서 들떠있는 동료들도, 사실 얼마간은 이 축제의 거리에 있기 힘들기도 해
서 바다에 있을 것이다.
거리 밖 사람들의 세상 그 바깥 86구와 같은 사람이 아닌 자가 지배하는 곳에
거기서라면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 의지할 곳이 없이 지낼 수 있
으니까
자기와 동료만을 믿고 전쟁터에 살았다.
그것은 곧 나 말고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 거리의 주민들과 달리
의지할 곳이라곤 세상 어디에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 것은 86구를 나와서 몇 번인가 자각했음에도 왠지 아프다.

72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쟁 종결이 근거 없는 소망
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라고 의식하게 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 신이, 그를 이어서 라이덴과 리토와 앙쥬가, 미래를 보
기 시작했다.
신은 더 편하게 살아도 되겠지 하고 언젠가 말했다. 형이나 먼저 전사했던 동료
들, 또는 죽은자라는 과거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들이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좋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나도 이제 손을 놓지 않으면 안 되는데……동시에 그것은 지독하고, 불안한 감각
이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이다.
의지할 곳이 없어서, 있을 장소 따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그럼에도 신은
구원과 미래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원이
란 그렇게 쉽지 않고, 나에겐 뭐가 희망이나 미래인지도 모르는데 얻을 수 있다
고도 생각되지 않고, 하지만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
르겠어서 무섭다.
어디까지라도 떠나지 않고 따라온다, 그림자에서 도망칠 듯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어느새 기지로 돌아와, 정해함의 독1)에 들어가 있었다.
몇 층 분량을 털어놓은 <저거노트>의 격납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독이
라고 하는 것에, 함교는 캣워크2)와 같은 높이에 있어서 그 거대함을 재차 알 수
있었다. 바닷속에 잠복해, 덮쳐오는 무수한 — 그야말로 <레기온>과 같이 무수히
많은 — 원생해수를 탐지하기 위한 해양 초계기와, 그것의 제거를 담당하는 함재
전투기를 먼 해양으로 운반하는 해상 기동 기지의 그 웅장함.
바닷속에 숨어 있는 원생해수를 탐지하고 요격하려면 함선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
라, 음향탐사장치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초계기 운용을 위해서는 해양의 하늘을
가로막는 원생해수의 최대종, 포광종(무스쿠라)을 전투기로 낚아내 제거할 필요가
있다.
원생해수와의 투쟁의 선진으로서 중요한 것이 함재기이며 그것을 운반하는 정해

1) 선박의 건조나 수리 또는 짐을 싣고 부리기 위한 설비.


2) 경비행선에서 다리로 사용하는 플로어나 좁은 구조재

73
함이다.
그 함교 앞 맨 위에 놓인 작은 여인상을 올려다보고 있던 사람이 발소리에 기세
등등하게 돌아보았다. 금발의 머리와 취록의 두 눈, 남색의 군복에 불사조의 문신
의 이슈마엘이다.
“어라, 기동타격군의 꼬마”

“…………그러니까”
“내 이름은 릿카다만”
“오, 미안. 우리들은 상대를 문신으로 구분하니까, 얼굴만 가지고는 좀 구별이 안
돼서”
문신으로?
하고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문신을 한 것은 아무래도 부족의 특징인 것 같지만 세오 눈에는 거의 똑같아 보
인다. 가문에 따라 각기 다른 의장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이슈마엘의 불사조 무늬에 에스텔의 비늘무늬, 극동혹종(오리엔트)의 꽃무늬과 금
정종(토파즈)의 덩굴풀무늬와 천청종(셀레스타)의 기하무늬
취록종(제이드)과 취수종(에메로드), 금록종(아벤투라) 외에 물결무늬라든가 뇌명
무늬이라든가 나선무늬이라든가.
…………이슈마엘과 같은 불사조 무늬의 취록종(제이드)을 얼핏 본 기억이 그러고
보니 없다.
“다른 녀석들처럼 바다를 보러가지 않는거냐? 공화국도 연방도 바다가 없다던데”
“갔어, 근데…… 질렸으니까”
“마을에서 축제도 하는데 그쪽은?”
“별로”
왠일인지 이슈마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 말이야, 취록종(제이드)이지?, 어디 출신이지? 공화국으로 이민 오기 전 조상
들은”
“……? 엄밀하게는 여러 가지 섞여있는 것 같은데”
“아이고, 잘못 말했군. 그런 말하면 누구나 그렇잖아. 온전한 순혈 이라고 하는

74
건, 연합왕국이니 제국이니 하는 귀하신 족속이나, 공화국만으로 족하다.……너의
부대의, 미녀 지휘관이라든가, 왕자님이라든가, 총대장 형씨를 말하는 게 아니야.”
신은 부모님은 순혈이지만 본인은 혼혈이라 그 예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하여튼.
“남쪽의 엘렉트라'라는 곳. 이제 200년 정도는 전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아, 그럼 역시 뿌리는 똑같나? 우리 집 조상도 그 다리에서 여기까지 왔나봐.
대략 천년전의 이야기지만 일단은. 어서와라 소년.”
완전히 장난스런 말투였다.
그럼에도 세오가 순간적으로 품은 것은 엄청난 반발이었다.
이 사람은 같은 색을 하고 있을 뿐인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이야.
이 나라는 조상과 같이 있을 뿐 200년 전 조상의 고향땅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오에게 있어서 동포라고 하는 녀석들은 서로 다른 색채를 띠었지
만, 같은 전쟁터에서 함께 싸워온 에이티식스의 동료들이다.
고작 같은 색이라는 것만으로 동포 같은 얼굴을 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조국과 고향으로 이어받은 문화화와, ……아버지라 부르는 함대사령도 가
족도 있을 것이다.……자신들은 가지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
그만 말없이 받아친 세오에게 이슈마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이야, 아무래도 놀리고 싶어지는 건 말이야.……털이 곤두선 고양이 같다
고, 너뿐만이 아니라, 에이티식스라는 놈들은 말이야. 끼리끼리 뭉쳐서 벽을 만들
고 닥치는 대로 주변 사람을 튕기고"
그렇지 않은 녀석도 있지만, 하고 웃으며 말한다. 총대장 형씨라던가 부장님이라
던가 정해함보고 느리다고 하던 빌어먹을 녀석이라던가.
똑같았을 텐데 어느새 변하기 시작한 그들. 문득 떠오른 말에 마음이 식었다.
동포라고 하면서 같은 삶의 방식을 자랑하던 에이티식스들. 하지만 그 동료들조
차 지금.

75
“뭔가 하나 둘씩 깨져버리고 말았네.”
“……그렇지”
어느새 세오가 없어졌고 축제에 흥미를 끌린 것 같은 앙주는 고사하고 크레나는
바다를 보러 오지도 않는데 당연히 라이덴이 눈치채고 그건 신도 마찬가지일 것
이다.
바다를 보고 싶지 않아서 이 해안에 없는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거리가 불편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과. 처음 보는 바다에 떠들고 있는 녀석들이나, 모르는 거리와
축제를 보러 간 무리들이 저마다 뒤섞여, 그렇지만 거기에, 단절이 있다. 서로 뭔
가 잘못되어 버리고 있다.
절사의 전장을 그 끝까지 싸워 나갔던. 피도 다르고 물려받는 색채도 달랐지만,
그 자랑으로 묶였던, 그 자랑으로 동일했던 그 자신들 에이티식스에게,……어느새
분열이 생기고 있다.
“그렇지만 네가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그 갈라진 한 사람인 옆의 동포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흘끗 핏빛
눈동자가 향하는 것을 역시 대꾸하지 않고 계속한다.
“두고 갔다든지, 버리고 갔다든지, 그런 게 아니야. 그 녀석의 페이스와 선택이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뭘 선택하든 다른 건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알고 있어.”
이 목소리는 분명 이해하지만 납득은 안 될 때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내버려둘 수 있는 것도 힘들어서, 나는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때는.”
나도 모르게 라이덴은 쓴웃음을 짓는다.
이 바보, 아직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건가? 도움을 받아온 것은 오히려, 지금까
지 쭉.
“그건 됐어.……이젠 충분하다. 저승사자.”

“—네네, 다녀왔습니다. 아저씨”


그 농담에 응하자, 생각한것보다 토라진 목소리가 되었다.

76
초조해하며 세오는 다른 화제를 내민다.
……그래, 아무 생각도 없어. 겁먹은 고양이 같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그냥 잡담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바깥에 무슨 축제야?”
“어? 아, 뱃공주의 축제. 정해선단의, 배의 신들의 축제다. 이 거리에서는 어뢰정
의……”
세오는 모르는, 기술의 발전으로 소멸된 군용 함선의 카테고리를 입에 대고 의아
해했다.
“뭐였더라.”
“저기”
"아니……그치만 나도 이 동네 출신도 아니고"
올려다본 다음 이슈마엘은 세오를 보지 않는다.
듣지 못한 건가……들었을 리가 없나? 선단국군은 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구성
국 중 한 나라를 통째로 포기하고 요격을 위한 전장으로 만들었어. 방어진지의
종심이 부족해서, 그러니까 <레기온>의 침공경로가 된 가장 동쪽의 나라를 그대
로 말이야. 그게 나의 조국 클레오선단국.
“…아,”
들은 적 있다. 파견 전에 레나에게 물었다.
단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조국을 빼앗긴 사람의 말로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레기온>의 침공에 국토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포기한 국토에 국민
들을 버려서, 86구라고 하는 이름의 사상자 제로의 전쟁터로 바꾸어 버린, 공화
국과 같다.
뚫어져라 쳐다봤는지. 이슈마엘은 팔딱팔딱 한 손을 흔든다.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아도, 너희들만큼 귀찮은 취급은 받지 않아. 총으로 위협
받은 것도 아니고, 전부 빼앗긴 것도 아니야. 가진 것은 가지고 도망갔고, 도망간
곳도 특별히 구별이 없었어. 뭐 사는 곳은 가설이기도 했지만, 괴로운 것은 피난
한 곳도 마찬가지니까.……우리 함대사령 따위는 정해함과 함대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도망친 셈이니까.”
농담조로 말하며 웃는다.

77
아버지, 함대사령이라는 사람도 그렇게 말했다.
그 녀석은 죽은 함대사령의 이름이니까, 라고.
죽었다. ……아마 전사했을 것이다.
이슈마엘과 같은 문신을 한 사람도 작전을 앞둔 이 기지에서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함대사령이외에도 어쩌면, 아니, 어쩌면 그 이외는 이제 전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비슷했다. 우리 에이티식스처럼 고향도 가족도 그들로부터 물려받아
야 할 전통과 문화도 모두 빼앗기고 잃어버린 자신들과.
그러니까.
혹시라도 같은 처지의 에이티식스를……. 걱정해 줬던 거였나.
“미안……그리고 그”
리토의 말이 살아난다. 걱정된다. 86구 밖에서는 스스로라도.
그랬다.
그것도 에이티식스와 비슷한 처지의 자랑스러운 사람을 만나서.
“고마워.”
그것은 어둠 속에서 아직 멀지만 불쑥 하나 켜진 등불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물어가는 햇빛에 바다는 무수한 거울을 깔아놓은, 그 반짝임과 지는 햇빛의 황


금빛으로 물들여져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눈이 부실정도로 찬연했다.
거기서부터라면 별의 동그라미가 눈에 보인다며 파수함의 함장이라는 모란 문신
의 여인의 가르침을 받고 올라간 변두리의 등대. 전망대로 개방된 그곳에서는 확
실히 느슨하게 호를 그리는 수평선과 해질녘의 낮은 광선이 무수한 파도에 반사
되는 찬란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산조각으로 깨진 거울이 비추듯, 이 세상이 아닌 금빛 불길에 타오르는, 황혼의
해상.
이것은 어딘가 거부하는 듯한 아름다움이라고 유트는 생각한다.
근처에는 같은 것을 듣고 왔을 다른 누군가, 시덴과 샤나가 있고, 똑같이 금빛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같은 부대지만 친하게 이야기하는 관계도 아니고, 특히 유

78
트는 과묵한 부류기 때문에 말도 시선도 주고받지 않고, 조금 먼 거리를 거절하
지도 않은 채 그저 나란히 알지 못하는 해질녘을 본다.
“선단국은 나라별로 1개의 정해함대를 편성합니다. 군부대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집단에 가까운 집단입니다.”
새롭게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에스텔로, 함께 올라온 것은 뜻밖에도 크레나다. 짐작건대 몸을
맡길 곳이 거리에도 바다에도 없어 기지에 남아 있다가 에스텔이 발견해 데려온
것 같았다.
시덴이나 샤나나 자기랑 똑같이
에스텔이나, 유트에게 말을 건 여성에 한하지 않고, 선단국 주민들은 군인도, 거
리의 사람들도 바다니 축제니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거나 거리의 볼거리를
가르쳐 주거나 하는 등, 이것저것 돌봐주러 하고 있었다. 멸망 직전에 방문한 구
원 부대에 대한 감사나, 10년만의 타국인이라는 신기함일 것이라고 처음은 생각
했었지만,……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선단국군으로서도 수백년, 선단국으로서는 수천년에 걸쳐, 해양의 패권을 두고 원
생해수와 계속 싸워 왔다 바꾸어 말하면 수천년에 걸쳐, 패배를 거듭하면서 아직
도 싸워 온 사람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무엇 하나 자신에게는 없다고 외치듯이.
“공감하는 건가.……우리 에이티식스에게”

에스텔의 이야기는 담담하게 이어진다.


“그래서 그의 함장을 부장인 저는 오빠라고 부릅니다. 비록 혈육은 아니라지만.”
“저어…….”
분명히 기운을 찾으면서 크레나는 에스텔을 돌아본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분
명히 혈육은 아닌 연하의 이슈마엘이 형이냐고 잡담하는 김에 들었을 뿐이었지
만.
“...미안,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상대가 대령이기에 뒤에 높힘말을 붙힌다.

79
다행이랄까 에스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까요. 당신들이 에이티식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관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놀란 듯 크레나는 눈을 한번 깜빡인다.
“우리랑?”
“예를 들어 당신과 전대 총대장 노우젠 대위는 처음 봤을 때 남매인가 싶었습니
다. 물론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요.”
비슷하기 이전에 타고난 색채가 전혀 다른, 하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눈빛을 가진
소년 소녀들.
피는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 에이티식스는…그렇습니다, 영혼이라고도 부
르는 것의 형태가 같습니다. 같은 전쟁터에 살고, 같은 무덤을 목표로 하고, 같은
삶의 방식을 옳고, 같은 모습을 자랑으로 삼는. 피의 관계가 아니라 영혼의 짝을
서로의 끈으로 삼는다.……정해라는 긍지를 일족의 유대로 한 선단국의, 그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왠지 떨리듯 감미로운 말이었다.
들뜬 듯 크레나는 반복한다. 목마른 끝에 한 줌의 맑은 물을 받은 사람처럼.
“영혼의 짝”
“그렇습니다. 그것은 핏줄보다도, 조국을 같이 하는 것보다 더 해롭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스텔이 말한다. 황금빛 빛 속에서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이.
“그러니 앞으로 뭐가 달라지더라도 그분이 내 오빠이고, 노우젠 대위도 분명 무
슨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나 당신의 오빠임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거리도 수도 떨어져 있으니까 대충이라고 하지만, 이것만 알면 꽤 편해지겠군요.


양동 부대도 물론 우리도.”
대학 건물을 접수한 기지의 원래 예배당이었던 곳은 브리핑룸이 되었다.
낡았지만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불빛이 들어오는 그곳에서 커다란 테이블에 펼

80
쳐놓은 자료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파안한다. 관측기 모함의 수와 대략적인 배치
를 신이 확인하고 기록한 해도.
“아아, 대신 들어오면 술 한 잔 쏘겠네, 대위. 선단국군 전통 해물포도 안주 삼
아.”
“........................”
물고기도 조개도 아닌 그다지 해산물 언저리의 촉감을 짐작하며 신은 침묵하고,
대신 세오가 받아친다.
“함장님, 그게 그거 아니야? 현지인이 여행자를 놀리려는 진미 같은 거겠지.”
“그런거 아니야……원 생물이, 겉모습이 좀 재밌는거 뿐이야."
꽤 마음을 터놓았구나, 에이티식스들과 이슈마엘을 비롯한 선단국 사람들도.
그 모습에 레나는 흐뭇하게 생각한다.
선단국군은 군인들도, 거리 사람들도 밝은 사람이 많다. 그 때문일까.
“아, 오늘 저녁은 기대해라. 마침 축제 때고 너희들이 와줘서 살았다고 주방 아줌
마들이 엄청 좋아했으니까.”
자, 하고 마지막으로 한손을 들고 이슈마엘은 브리핑룸을 나간다. 웃으며 그를 배
웅하며 레나는 다시 실내에 죽 늘어선 기동타격군의 대대장과 막료들을 둘러봤
다.
“그럼……우리도 시작합시다.”
덩달아 웃어 버린 정보 참모나, 어안이 벙벙해 있던 자이샤가 표정을 가다듬는다.
에이티식스들이 별다른 긴장감도 없는 자연체임은 이제 늘 있는 일이다. 신경 쓰
지 않고 레나는 홀로윈도우를 켰다.
“우선 이것이 이번 제압 목표 <마천패루>의 전체 그림입니다.”
조사선이 취득한 광학 영상을, 해석해 만들어 낸 입체 지도를 표시. 철골의 뼈대
만으로 이루어진, 어딘가 생물의 시체 같은, 그러면서도 거대한, 해상의 요새.
“최상부까지의 높이는 추정 -20미터. 7기의 탑이, 중앙에 본채가 하나,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으로서 6개. 내부는 열에서 열두 개 정도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요새의 제어기능과 최상부 <모르포(전자가속포형)>를 파괴하
기 위해 돌입담당과 포병사양 <저거노트> 등 총 3개 지대를 투입, 공략하겠습니
다."

81
병력을 줄이는 것은 수송력의 문제다.
<스텔라마리스>에 탑재 가능한 <레긴레이브>는 150대 정도, 원래 정해함 소속의
최소한의 초계헬기를 원정함에 옮겨 싣고, 그것밖에 옮길 수 없다.
남는 전력은 선단국군의 전선에, 만약을 위한 경비로서 남기고 갈 예정이었던 것
이다.
리토 올리야 소위, 레키 미치히 소위. 당신들의 부대는 육상에 남아주세요. 당신
들은 선단국군 전선의 기동 방어를 위해 전선 후방에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리토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저랑 미치히는 공략조가 아닌가요? 그리고 기동방어라니.”
“마천패루 거점을 선단국군 주력 시점으로 삼고 거점에서의 전투 개시와 동시에
반응하여 <레기온> 육상부대가 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기부대에도 일
정한 전력을 남겨두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틀림없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인다.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적 편성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처에 대해서도 추후 설명할 테니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하십시오.
흘끗 비카가 시선을 보냈다.
“연방에 탄종을 추가로 부탁한 건 그래서였나.……<알카노스트>도 이 작전에서는,
내가 지휘하는 척후병 이외는 방어선배치지? 자이샤를 지휘관으로 남겨두고 갈
테니 합쳐서 써 달라.”
수송 가능한 총 중량에 제한이 있는 이상, 종합적인 전투 능력에서 <알카노스트>
보다 높은 <저거노트>를 요새 공략의 전력으로서 우선할 필요가 있다.
이어서 신이 입을 열었다.
“목표가 되는 <양치기>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양은 두 대, <모르포(전자가속포형)>
과 거점이 공장이라고 하면, <바이젤(자동공장형)>이라고 하면 그 제어 중추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숫자 밖에 모르지만,
가까워지면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레르케들을 척후로 제가 앞장
설려고 하는데 문제없겠습니까?”

82
담담하게 말하는 그 말에 레나는 그 지시를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린다. 이 작전
의 실행에 앞서, 그레테를 경유해 서방 방면군으로부터 전해진, 불가사의하고, 엉
뚱한 지시.
“적정 분석을 위해 가능하면 제어 중추를 빼앗아오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무리
하지는 마세요. 저는 우선도는 낮다고 판단됩니다.”
신은 순간 침묵하는 듯했다.
의아스러운 것 보다 먼저 그의 냉철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에이”
숙소 거실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고 작전시간에 맞춰 잠을 자고 있는 지금,
기상시간에도 그 바다는 어둡다.
시각은 이른 아침은커녕 아직도 한밤중. 고요한 거리의 정적을 넘어 바닷바람만
이 낮게 들린다. 끊이지 않는 <레기온>들의 절규와 비슷한 조용한 속삭임과, 마
주보는 듯 귀를 기울이던 신은 열려있던 문간에서 조심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아직 살짝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온 사람은 프레데리카다.
“뭘 보고 있나? 무언가 희귀한 것이라도 보이는가.”
“아아…아니, 본 게 아니라”
“<레기온>의……<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있었던 건가.”
잠자는 마을의 정적 너머, 조수 저편의 마천패루의 <양치기>와 휘하의 망령의 가
벼운 소리.
발자국 소리를 내며 프레데리카는 옆에 와서 나란히 선다. 잔뜩 찌푸린 핏빛 눈
동자가 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신에이”
프레데리카는 지금도 그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체격이 비슷한 그녀의 전속기사였던 키리, 라고 애칭으로 부르던 그 상대와 혼동

83
하지 않기 위한 자계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다.
“신에이. ……요새에 있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
한 박자
두려워하는 듯한 사이가 벌어졌다.
“키리야, 인가……?”
“?안 보였던 것 아닌가?”
알고 있는 사람의 현재를, 비록 그 상대가 망령이 되어 있어도 볼 수 있는 프레
데리카의 이능.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들을 줄 알고 되물었고 되묻고 나서야 깨
달았다.
보지도 못하는 거였다. 혹시나 또 키리야가 보일까봐 무서워서.
“네 기사가 아니야. 목소리도 틀려.”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국인이긴 하지만 적어도 네 기사와는 다른 사람이야.……에른스트가 말하는 정
보원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
침통하며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숙인 후 입술을 깨물고 똑바로 올려다보며 호소한
다.
“신에이, 역시 때가 되면 당장이라도 나를 이용해라. 시간을 많이 들이면 그만큼
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것이 언제 연방에 이를지 모른다. 그때 죽는 것이 그대
들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나 혼자라면 작은 희생이니까……”
“안 된다”
“신에이!”
덤벼들었지만 체격은 비교도 안 되니까 그 정도로는 흔들리지도 않는다.
마음은 알 수 있다. 같은 입장에 선다면 자신도 그렇게 말할 것이고……실행 해
본 적조차 있다. 자신을 희생 하면 동료는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2년 전의
특별 정찰의 마지막에서.
그래서 그녀의 초조도 각오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혼자라면 작은 희생이다.……수가 적은 쪽을 희생해야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런

84
이치로 86구에 내던져진 것이 우리 에이티식스야.”
프레데리카가 조그맣게 눈을 부릅떴다.
내려다보며 신은 말을 이었다. 초조도 각오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것만은 —
양보할 수 없다.
“너 혼자만 희생하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공화국과 같은 일을 나는 하
고 싶지 않아.”

85
3장 In to the Storm

다른 사람에게는 좁은 대사의 거실도 정해함의 좁은 침대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너무 넓어 좀 달갑지 않다.
뭍에서는 어수선해서 깊은 잠도 이루지 못한다. 선단국의 선단장인 함대사령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함상에 살고 있던 이슈마엘에게는 발밑이 흔들리지 않는 육지
는 평소 어색하다.
그래서 밤도 되기 전에 울린 휴대전화 알람에도 바로 응답했다.
“.오오”
목소리만은 자다 일어나서 살짝 쉬었다.
“형님. 새벽에 무례를”
“에스텔”
정해함대에서는 함대사령관은 아버지나 어머니, 함장들은 형제이며 총 수천 명의
승조원은 동생이다. 가문의 연장자 전원이 부모이고 태어난 자식은 그 전원의 자
식이다. 한 가문, 한 마을에서 각각의 배를 가지고, 가족으로 정해씨족 하나를 편
성하는, 그 관습에서 생겨난 독특한 상관에의 호칭이다.
이슈마엘이 있던 곳과는 별개의 정해씨족 출신인 에스텔은, 그래서 진짜 여동생
은 아니지만 서로에 속하는 함대를 잃고 오합지졸 정해함대를 편성한 지금은 그
를 오빠라고 불러도 틀린것은 아니다. 정해함 이외에는 가족 전원을 잃은 함장과
함도 가족의 대부분도 잃은 부장. 그 아래 동생들도 비슷비슷하다. <오펀 플리
트>에게는 선단국군의 11개국 마지막 생존자가, 출신국도 모함도 뒤섞여 각자의
상실을 안은 채 어깨를 맞대고 있다.
오합지졸의 고아 함대
선장인 함대사령관은 너나 할 것 없이 정해함과 운명을 같이하거나 아버지로서
부하들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희생됐다.

86
그러니까 <오펀 플리트>에 함대사령관은 없다. 맏형인 정해함 함장의 마지막 생
존자인 이슈마엘이 이었어야 했지만 그것도 왠지 싫었다.
“폭풍우가 옵니다. -드디어”
“아아”
마침내 ­인가.

밤의 어둠을 틈타, 정해함 <스텔라마리스>는 항구를 나선다.


다행히 초승달과 별의 그림자 외에는 비출 것이 없는 어둠은 깊으니 이는 폭풍에
휩싸여 나아가는 다음날 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은밀한 출항이다. 무선봉쇄에 더해 등화관제가 된 비행갑판에 에이티식스 몇 명
은 올라가 본다.
<스텔라마리스>의 승무원은 출항 시 각자의 일이 있지만, 수송되는 화물인 프로
세서에는 할 일이 없다. 등불을 꺼내지 말고 또 뱃머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
바다에 떨어지지 말라고 갑판 요원들로부터 주의를 받으며 몇몇이 갑판에서 멀어
지는 육지를 본다.
한밤중 출항이다. 원래 사람은 자야하는 한밤중이다.
하지만 멀어지는 바위 해변. 항구가의 주민들이 거기에 모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혹시라도 눈치채지 못하게 불빛 하나 없이 어른뿐 아니라 아이까지 부모에게 이
끌리거나 안겨서. 말없이 누구나 그냥 손을 흔든다. 은밀한 출항이기에 <스텔라
마리스>가 경적으로 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잇달아 모여, 손을 흔들고 이쪽
을 계속 응시한다.
그 모습이 묘하게 인상에 남았다.

밤이 짧은 고위도 지방의 여름에 밤의 어둠을 틈타 접근하기 위해 정해함대가 각

87
항구를 떠난 것은 작전 전날 밤.
모항에서는 북동에 위치하는 마천패루 거점에 똑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북상해
집결 지점인 카자키리제도에서 합류. 바다새 정도만 살 수 있는 바위섬 무리 가
운데 바닷물에 침식된 절벽 그늘에 숨어 작전 개시까지 하루를 숨죽이고 대기한
다.
그 <스텔라마리스>에서 함교 최상층, 시그널 브릿지를 신기한 듯 레나는 둘러본
다.
이제 꼬박 하루 대기를 시작했고. 발견되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정숙해야 하지
만, 그것은 익숙하기 때문에 신경쓰이지 않는다.
최대 반년에 걸친 항해를 가정한 정해함은 내부에는 예배당이나 도서실도 있고,
이 시그널 브릿지를 포함해 대기하는 동안은 견학하고 돌아다녀도 좋다고 이슈마
엘에게 들었다.
응? 하고 경쾌하게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나며 에스텔이 얼굴을 내비췄
다.
“밀리제 대령님. 갑판으로 내려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재미있는 걸 볼 수 있답니
다.”
“갑판……인가요? 아니요, 저는”
에스텔과 승무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바다는 보지 않기로 마
음먹었으니까.
그런데도 무심코, 흘끗 아래쪽으로 눈을 돌려 버려 저런 것을 깨달았다. 파란, 노
을빛
역시 보고 싶다, 라고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레나는 힘들게 시선을 뗀다. 왜
냐면 약속했으니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둘이서 보자고

잠깐 나와보라는 승무원들 때문에 갑판으로 나온 앙쥬와 더스틴은 나란히 숨을


삼켰다. 별빛이 눈부신 듯 밤바다를 비출 정도가 아니라 그 호사스러운 어둠의
하늘 아래.

88
“굉장해.”
“파도가. 빛나고 있어..?”
어둡게 빛나는 바다가 마치 별빛이나 반딧불이 떼를 가둔 듯 푸르스름한 환상 같
은 빛의 입자로 채색되고 있다.
유난히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솨 하고 해상을 달릴 때마다, 암벽이나 현측에
서 부서져 떨어질 때마다 그 궤적이 희미하고 푸르게 발광한다. 야광충이라고 하
면사 데려다 준 승무원이 말했다.
열이 없는 푸른 망초에 말없이 두 사람은 응시한다. 다른 프로세서들도 승조원들
이 각자 찾아 데려와 주는 형국으로 비행갑판 곳곳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인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말 예쁘다.…예쁘다고 큰 소리로 말하기 아까울 정도야.”
“여기도 전쟁터, 뭐냐.……그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한 번 보러 오고 싶네.”
앙쥬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더스틴은 제레네에게 들은 정보 따위는 모른다. 그저 근거 없는 소망으로
말했을 뿐. 끝났으면 좋겠다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뿐이
다.
“더스틴 군은...”
자신은 아직 그 앞을 뚜렷하게 점찍지 못했다.
그는 어떨까. 공화국의 현실에 의분을 품고 조국의 오명을 씻기 위해 조국을 떠
나 벽 밖의 전쟁터에 서기를 선택한 그는, 그 전쟁터가 없어진다면.
“전쟁이 끝나면 공화국으로 돌아갈 거야?”
“……아마도, 재건할 인력이 필요할 테니까, 다만, 그, 저기……”
만약, 앙쥬가 싫다고 한다면 안 돌아가겠지만, 이라고 계속 말해도 좋을지 더스틴
은 고민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게 보이는 그 옆얼굴을 보며 앙쥬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해도 좋은 것일까.
지금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놀려도 되는건가?
나란히 선 더스틴과의 거리는 다이야와 나란히 섰을 때보다는 멀지만 처음 만났
을 때보다는 훨씬 가깝다.

89
어색한 듯 하면서도 기분 좋은, 이상한 거리감에 앙쥬는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함재기 발착을 위한 공간인 비행갑판에는 난간이나 난간 같은 게 설치돼 있지 않


다.
시야를 가릴 수 없는 그 한구석에 나란히 앉아 세오는 옆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내밀고 있는 크레나에게 말한다.
“뭐, 이건 이거대로, 푸른 바다이긴 하네.”
"응!"
가고 싶다. 남쪽 바다를, 전쟁이 끝나면
1년 전, 그때도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을 쫓던 중. 그렇게 말하던 크레나는 눈을 반
짝이며 멍하니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 위의 별빛과 같은 호사스러운 듯하면서도 어둠을 비추지는 않는 환상적인
푸른 빛.
극히 희미하게 파도를 비칠 뿐인, 빛의 담담함은 오히려 밤바다의 혼미를 두드러
지게 하는 것 같다.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어두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떠오
르는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들어 말이 그만 주르르 흘러나왔다.
“와버렸네…… 바다에”
크레나가 웃는다.
“와버렸다니. 그러면 오고 싶지 않았던거야?”
“응……아직 오고 싶지 않았나?”
신이나 라이덴, 레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 크레나가 상대라서 한 말이었다.
아마 크레나도 그것은 똑같을 테니까
“조금 더 여러가지, 결말이 나오고 나서 보고 싶었어. 내가 어떻게 되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그 답이 나오고 나서, 보고 싶었어.”
“…억지로 찾지 않아도 괜찮아”
크레나가 말한다. 말과는 달리 불안한 아이처럼 무릎을 껴안고.
뒷 구석에 안도한 듯한, 아기 고양이와 같은, 온화한 금빛 눈동자로.
우리는 한패니까. 동포니까. 그건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럴 거라고 에스텔

90
대령이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설령 무언가 잘못돼도
같은 삶의 방식을 처음으로 택한, 에이티식스인 것만은.
“그런가?”
에스텔이나 이슈마엘이나……이 나라에서 만난 정해선족의 후예들. 자신들과 마찬
가지로, 고향도 가족도 전쟁으로 빼앗기고 잃어버렸지만 자랑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들.
“……물론이지.”
만나서 좋았다.
이 나라 오길 잘한 거 같다.
다 잃고, 자랑밖에 없게 되고, 그럼에도 웃으며 사는 사람들.
똑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도 살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들 에이티식스도 분명, 지금 이대로도 살아갈 수 있어.
“여러가지 조금, 초조했지만.……분명 괜찮을 거야.”

머리 위의 별빛들은 예전의 86구의 인공 불빛이 없어 밤의 어둠이 짙게 지배하


기 때문에 더욱 호사스럽고, 눈 아래 펼쳐지는 이곳까지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며,
반딧불이를 닮은 무수한 푸른 빛 같았다.
86구에 있을 무렵에는 아무런 감개도 없이 올려다본 그 반짝임의 희미함을, 그로
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신은 조금 외롭다고 느꼈다. 86구의 전쟁터도, 이 뭍을
떠난 대양도, 사람의 세계는 아니다. 그 적막이 이제는 웬일인지 묘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전장 30미터의 광대한 비행갑판에는 레나의, 그에게 있어서는 헷갈리지 않는 은
발의 긴 머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권유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
지 바다는 보지 않기로 한 것 같다고 비카에게 들었다.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내 말에 대한 보답으로.
그것은 기쁘지만, …… 그것보다는 과연 슬슬 대답해 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때 문득 선수 근처에 선 이슈마엘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91
쳐다보는 신을 눈치 채지 못한 듯 비행갑판에 무릎을 꿇는다. 그대로 이마를 찧
으며 아마도 비행갑판에 입을 맞추었다. 늙은 어머니에게 입 맞추는 존경심의 표
의로.
“…?”
무엇일까, 라고, 의문이라고 할 정도도 없이 신은 생각한다.
신에이,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프레데리카가 불러서, …그 후 신은 이 일은
잊어버렸다.

『아르셀 제8함대 처리, 미시아 제9함대. 데코 5번의 상실을 확인. 교전개시다』

양동인 2개 함대가 교전에 들어가자, 은신처로 삼았던 밤의 어둠을 아군으로 나


아가는 정해함대의 거주 구획. 작전지역에 도달을 몇 시간 앞두고, 갈아입은 레나
는 선실의 입구에서 복도를 엿봤다.
그렇다, 바로 <찌카다>를 장착한 것이다.
입은 것은 벌써 세 번째이지만, 그렇다고해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군복도 연합왕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준비시켰는데 깜빡 잊고 왔던 것이
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몸의 선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의상으로 정해함 승무원들 앞
에 서고 싶지도 않다.
지금부터 대장격과의 브리핑도 있기 때문에, 신과도 얼굴을 마주치게 된다.
지금 앙주나 샤나에게 군복을 빌리자싶어 레나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둘러본다.

92
레나보다 큰키의 이들의 군복이라면 <찌카다> 위에서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조건에는 시덴도 들어가지만, 그녀에게 빌리는 것은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
다.그냥 왠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만 내밀고 복도 끝까지 들여다본 뒤 거꾸로 바라보니 신이 서 있었다.
사고가 경직된다.
응연히 잠시 눈을 감은 채 신은 멍하니 서 있다.
<찌카다>기장을 두른 레나를 내려다보며 자은색의 의사신경섬유가 외장 유사뇌로
피부를 덮고, 덮는 것만으로 지탱해주지 않을까
여러가지로 흔들리고 몸의 선도 선명하게 나와 버리고 있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
보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앙주와 더스틴이 그것을 모르고 분위기가 좋아지는 대형사
고가 있었는데.
발소리 안 내고 걷는 버릇과.
정말 무시무시한, 길고 긴 침묵 뒤에.
"-연합왕국에서 비카에게 수령했다는 <찌카다>에 대해서"
신은 말한다. 부글부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눌러 담은, 험상궂은, 차가운
눈빛으로.
“어쩐지 내게는 전혀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니까 묘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레비치 기지에서는 레르케가 어째선지 사과한
셈이 됐었죠.”

93
94
그야 그렇지.
레나도 혹시 자신이 입은 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것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마르셀에 이르러서는 물어보면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든가 하면서 도망치
고.…….적당히 봐두지 않고, 빈틈없이 따져 두었어야 했어요.”
“봐두지 않고, 라니……마르셀은 특사학교 동기잖아요? 너무 괴롭히면…”
“레나. 말 돌리지 마세요. 지금 마르셀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 신 혹시 화가 많이 난건가?
코끝이 맞닿을 듯할 정도로 다그쳐서 조금 넘어지면서 현실도피 기미를 느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빠 보이는 신은 처음이다. 신선하고 약간 기분 좋다
고 레나는 생각했다.
“아니요, 그 특별한 건 아니지만 유용하긴 유용하고요. 좀.”
너무나도 부끄럽다
길게, 내압을 내뿜는 한숨을 쉬고 신은 소리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비카를 처리하고 바다로 던져 넣겠습니다.”
“신?! 무슨 소리예요?!”
“권총은 격납고에 맡겨 놨지만 삽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젊었을 때는 그걸로 적
병을 죽인 적도 있다고 신부님이 말씀하셨죠.”
“저 신부님은, 자식에게 뭘 가르친 건가요! 삽 같은 게 애초에 정해함에 있을 리
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삽으로는 자주지뢰조차 이길 수 없기 때문에(대인형 자주지뢰가
내장되어 있어있는 것은 유효 사정거리 5.미터 지향성 산탄지뢰다), <레기온>과
의 전투에 나서는 신에게 삽질로 하는 전투방법 따위는 가르칠 이유가 전혀 없
다.
레나의 추궁도 그것은 그것대로 어긋나 있다.
“그럼 그냥 바다에 던져버리겠습니다. 그걸로도 충분할 테니까. 외양은 사람을 처
넣으면 대체로 가라앉으니까 시체의 인멸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이슈마엘 함장이.”
“신!”

95
“……응?”
작전 개시 전 마지막 브리핑에 대비해 임시 회의실로 지정된 함교 1층의 비행데
크 통제실에서, 비카는 몸을 떨고 있다.
“뭐지, 이상한 오한이 드는군.”
레르케가 고개를 갸웃한다.
“멀미인가요?”
“그것보단 누군가 내 무덤을 파는 느낌이야 나쁜 예감이 들어”
듣고 있던 크레나가 끼어들었다.
“연합왕국의 작전에서 나나 앙주나 레나가 입었던 그 에로 슈트 말이야”
비카는 생김새가 좋은 눈썹을 품위 있게 올렸다.
“<찌카다>다만”
앙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농담이겠지만 입어본 사람으로서는 전혀 웃을 수 없단 말이지”
“……뭐, 확실히 그 비방은 면할 수 없는가. 그럼 계속해 다오.”
시덴까지 반쯤 눈을 뜨며 가세했다.
“솔직한건 좋지만, 그렇다고 무슨 속죄가 되지는 않으니까, 변태 슈트는”
사정없는 공격에 약간 움츠러든 비카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크레나가 말했다.
“신에게 결국 들켰나봐”
“아아…”
작은 신음과는 달리 크게 초조해하지도 않고 호들갑을 떨었다.
“큰일이군. 정보 유출은 어디서 나온 거지?”
흘끗 고개를 돌리자 마르셀이 황급히 고개를 흔든다.
“아니, 저, 내가 말할 리가 없잖아요 전하?! 무심코 말실수 했다가는, 우선 노우
젠 한테 맞아 죽고 전하한테도 맞아 죽을텐데!?”
“잘 알고 있군, 마르셀. 만약 경이 말실수를 한다면 노우젠의 손에 죽은 뒤, 내가
직접 소생시켜 다시 한 번 머리에서 가죽을 벗겨 줄거야.”
“헉……!?”
“전하…그러한 표현은 <시린>을 설계하신 전하께서 말씀하시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삼가시는 편이……”

96
새파랗게 질린 마르셀을 측은하게 여기는 듯 레르케가 살짝 보조한다.
언제나처럼 재미있는 주종 두 사람과 외부인 한명을 기분 나쁜 고양이처럼 본 채
크레나는 말한다.
“그래서, 지금은 왕자 전하를 <스텔라마리스>에서 던져 버리거나, 보수용이라고
놓여 있는 도끼로 머리를 깨뜨리기 직전처럼 되어 있지만……어떻게 할 거야 전
하?”
“아니, 문제는 없다. 어차피 성녀 같은 밀리제는 나 같은 살모사조차 감싸줄 것이
고, 밀리제가 기다리라고 하면 노우젠도 일단 멈출 테니까.”
“…………”
뭐, 레나니까 그건 그렇겠지, 신도 분명 그렇겠지만.
“왕자 전하. 다음 작전 때 오발해도 돼?”
이 녀석 한번 가볍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크레나는 생각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을, 한 팔을 양손으로 잡고 힘껏 버티며 어떻게든 레


나는 신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또한 <찌카다>를 얇게 걸쳤을 뿐인 그녀의 거의 맨발의 발가락이 군함의 투박한
복도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신은 결국 멈춰 섰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거라도 입어 주세요. 갈아입을 때까지 반납하지 않아도 되니
까.”
휙휙 근무복 상의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그것을 어깨너머로 고쳐 걸치면서 레나는
그를 올려다본다.
아직 미묘하게 언짢은, 그러나 기가 한숨 꺾인 것 같은, 핏빛의 두 눈이 있었다.
“………”
그대로 이상한 침묵이 떨어진다. 서먹서먹한 것과는 다르지만, 왠지 사이가 가지
않는다고나 할까.
할 얘기는 이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나 할까.
망설이는 틈이 보이자 신이 결국 말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바다가 전쟁터가 되어 버린 것은 유감입니다.”

97
그 말에 레나는 흠칫 놀란다.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당신과 함께 바다를 보고 싶다.
한달 전, 무도회의 밤의, 불꽃아래에서 맡겨진 그 소망으로부터 이어지는 말은,
레나가 아직도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말이다.
“저어. 그…”
요약하자면
아무래도 1개월이나 지나고, 벌써 작전이 시작되고, 이렇게 잡담도 할 수 있을 정
도로 어색함도 사라졌으니 슬슬 대답해 주지 않겠느냐고 신은 언외에 말하고 있
다.
레나도 그것은 알고 있지만, 막상 의식하고 있으면 또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예뻤어요! 저 바다는 처음 봤으니까.”
결국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잡담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당연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나는 더욱 맞춰진다.
“저어, 그……그러면 신은, 이능의 제어, 연방군으로부터 제안이 왔었다고 하셨
죠? 신의 외갓집에 협조를 구한다고. 근데 지금은 어떤 느낌이에요?”
“당분간은 면담뿐입니다. 우선은 신뢰 관계가 있어야 하니까, 라고.”
“그런가요, 하지만 빨리 제어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분명 그 편이 신도 편해질
거라. 계속 걱정스러웠죠?”
“………”
“저기요. 저……”
이어갈 말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하게 안겼다.
에?,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이에 입술이 겹쳐진다.
한 달 전 밤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신 쪽에서부터 깨무는 듯한 키스였다.
갈망과 충동과 모종의 굶주림이 뒤섞인 알 수 없는 사나운 입맞춤이었다.
레나는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시간이 되돌아간 것처럼, 그날 밤처럼 가슴이 뛰고, 머리에 피가 너무 많이 올라
혼란스럽고. 그녀는 아직 모르는 남자의 사나움이 조금 무서워서 그렇지만 그 이
상으로 접촉하는 열의 감미로움에, 어쩔 수 없이 취해버려서 서로 요구하는 듯이,
서로의 피의 뜨거움을 나누듯 마치 어딘가 녹아내린 것처럼

98
시간이 이번엔 도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입술이 떨어지고, 저절로 숨을 내쉬었다. 하, 하고 다시 섞이는 한숨.
레나는 귀까지 빨갛게 되고 경직된다. 설마 이렇게 기습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혼란해져 버려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한 달 전 기습에 대한 답례입니다.”
올려다보니 신은 왠지 어린애 같은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다.
“레나의 대답은……대답할 마음이 준비 된다면 가르쳐 주세요.”

높은 파도를 가르며 두 척후함을 앞세우고, 정해함을 중심으로 나아가는 정해함


대 <오팬 플리트>는 곧 폭풍의 세력권으로 침투한다.
두껍고 무거운 불길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때리는 듯한 폭우가 하얗게
시야를 흐릿하게 하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람이 바뀌는 바람이 빗방울을 사방
에 흩날리며 장갑된 비행갑판에 내리친다. 함을 둘러싼 파도는 예각으로 치솟고,
넘실거리는 해류가 함체를 위아래로 흔들며 삐걱거리게 만든다. 마천패루 거점으
로 남은 거리, 180km.

정해함의 함교는 항해지휘와 함대 전체의 전투지휘를 지휘하기 위한 통합함교가


두 계층을 관통하는 형태로 놓여져 조선사 요원과 지휘통제 요원이 채워지고 이
번 작전에서는 기동타격군 지휘관인 레나와 관제요원이 예비공간을 사용한다.
벌써 5년 전, 마지막으로 정해함대로 전장에 나갔을 때보다 훨씬 인원이 많은 통
합함교를 마음 깊은 곳에서 감개 깊은 이슈마엘이 보고있다.

99
통합함교의 창문은 전투에 대비해 장갑판으로 막고 대신 펼쳐진 무수한 홀로스크
린에 더더욱 세차게 몰아치는 비와 바람과 사나운 파도가 비친다. 강풍권에서 폭
풍권으로 풍속이 실로 33미터 초과, 직풍이라고 불리는 정의상의 최대 풍속이 휘
몰아치는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
압착 공기 빠지는 소리에 등 뒤의 문이 열리고 눈을 돌리니 레나가 있었다.
왠지 오늘은 연방군의 강철색, 그것도 아무래도 본인사이즈가 큰 남성용 군복을
입고 약간 들썩들썩, 믿음직스럽지 못한 발걸음으로.
함 밖의 아마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폭풍우에 숨을 삼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은빛 눈동자가 짜릿한 긴장감을 되찾는다.
“함장님, 이제 최종 브리핑을.”
“좋아. ……에스텔. 지휘를——……”
“형님”
말을 가로막고 덩굴 모양의 문신을 한 통신사관이 말한다. 그 날카롭고 어딘가
식은, 금정종(토파즈)의 금빛 눈으로.
“미시아 제9함대입니다.”
“...벌써, 빨리 왔군.”
그 목소리의 약간 나지막한 울림.
레나는 그 옆모습을 쳐다본다. 차갑고 단단한 취록색 눈동자는 옆의 레나를 돌아
보지 않는다.
“……내줘”
“알겠습니다”
통신 사관이 콘솔을 조작하자 미시아 함대로부터의 통신이 통합 함교에 울려 퍼
진다.
연방이 레이드 디바이스를 제공했음에도 지각 동조가 아닌 무선으로.
『괴멸 직전의 아르셀 제8함대, 들리는가!』
첫 트레이너는 눈을 부릅뜬다.
무용지물을 막기 위해 군의 무선교신은 정형화돼 있다. 아무리 혼란에 빠져 있어
도 이런 어리석은 어조로 통신 상대를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르셀 8함대로의 통신이 아니라 <오펀 플리트>에게 들려주기 위한 방송이다.

100
<레기온>에 감청되어도 문제없도록, 혹시라도 제3 함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않도
록, 아르셀 제8함대로의 통신으로 가장했다.
『이쪽은 미시아 제9함대, 쾌속함 <아스트라>. 기함 <에우로파>를 대신하여 교신
하고 있다! —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포격으로 인해, <에우로파>는 굉침. 함대
의 나머지는 쾌속함 3척! 그곳은 지금도 프리깃함 2척, 쾌속함이 전부인가!?』
굉침. 기함이, 오히려 일곱 척과 여덟 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양동함대가 모두
벌써 절반 이하로.
나도 모르게 레나는 숨을 삼킨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슈마엘의 함교 선원들의 얼어붙은 듯한 평정심에 놀라
고, 그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전력 부족으로, 관측기 모함 소탕의 임무는 단념. 최우선 임무를 속행한다. 적의
잔탄수 추정은 현시점에서 65, ……지금 64.가능한 한 제로에 가깝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우선 임무, 즉 정해함대를 마천패루에 가까이 접근시키기 위해 그 시간을 버는
것. 몇 척이 가라앉든, 함대의 전멸과 맞바꾼다고 해도 <모르포(전자가속포형)>를 끌
어들이는 것
『성 엘모의 가호를, 아르셀 제8함대. 항해별아래로!』
『아르셀 8함대, 알겠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성 엘모의 가호를. 항해성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멍하니 레나는 이슈마엘을 쳐다본다. 분명히 양동이라고는 했다 말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양동함대는”
“……들려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우리 선단국군의, 선단국 해군의 문제로, 당
신들 기동타격군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니까.”
탄식하며 이슈마엘은 말한다. 화염의 새를 본뜬 것 같은, 왼쪽 눈의 가장자리 문
신.
“아, 애당초 양동부대는 결사대다. 참가하고 있는 것도 손상된 함선이나 연습함,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퇴역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이런 생환율이 낮은 양동
작전에 얼마 남지 않은 제대로 된 함 따위 선단국군은 더 이상 내놓을 수 없으
니까.”

101
그래서 레이드 디바이스도, 주어졌지만, 가지고 가지 않고…….
“선단국군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을 쓰러뜨려야 한다. 어
떻게 해서든 <스텔라마리스>를, 거기까지 보내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러기 위해
서는 희생을 치러야지. 양동함대가 전멸하면 다음에는 <오팬 플리트>의 파수함이
동생들 넷으로 된다.
응연해지는 레나와는 달리 담담하게 이슈마엘은 말한다. 눈가에 문신 있는 얼굴
로속한 선단국, 올라타는 배, 부모님의 혈통을 나타낸다는, 불길한 새와 같은 문
신의 얼굴로.
똑같은 무늬가 온몸 곳곳에 새겨진 정해씨족 누구나 그렇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은 바다 생물이나 파도의 힘에 무너져서 때때로 얼굴
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예로부터,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한 사람은 고유의 문신이나 무늬의
옷으로 신원을 증명해 왔다.
그 증명을 어딘가 한 곳이 아닌 전신에.
얼굴을 알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다. 원생해수와의 싸움에서 죽는다는 것
은 제대로 시체도 남지 않고 죽는다는 것이다. 살점 하나밖에 건지지 못하는 그
정도의 격전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그 장절을 운명으로 삼킨 얼굴로.
“……전쟁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희생은 나온다. 일방적으로 이쪽이 과녁에 몰리
는 초장포를 고철들이 들고 나오는 것을 허용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일년 전 대공세로 연방은 대량의 순항미사일로 포화공격을 가해 <모르포(전자가속
포형)>를 대파했다.100km를 수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지면효과익기를 투입해 1
개 전대를 그 목구멍까지 보냈다.
값비싼 순항미사일을 보유할 국력도, 혼자 힘으로 지면효과익기를 개발할 기술력
도 없는 소국의 선단국군이 똑같이 사거리 40km의 적 포격지역 돌파를 실행한
다면 인혈로 속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비도라고 규탄하는 것뿐이라면 간단하지만.
“죄송합니다.”
“……왜 당신이 사과하는 거야?”

102
이스마엘은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하늘이 뚫린 듯한 폭우로 홀로스크린에 비치는 함외 정경은 거의 하얗다. 짓누르
는 듯한 압박과 뭔가 큰 존재의 악의마저 느끼게 하는 폭풍우.
“그래도 뭐. 그렇다면 들은 김에……조금만 알아줘”
우리의 일을
<오팬 플리트>는 과연, 당초의 예정대로 가져온 레이드 디바이스에 한 번 손가락
을 대고 기동시킨 후 함내 방송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300미터 함의 구석구석까지 닿는 함내 방송. 지각 동조 대상은 정해함대 전 구
성함의 함장과 부장, 통신사관 등.
“각자, 이쪽은 <스텔라마리스>의 함장, 이슈마엘 아하브다.”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다. 하지만 함의 전체, 정해함을 움직이는 핏줄인 승무원들
의 근청의 기색.
“본 함대는 현재 적 본거지까지 직선거리 180km의 위치에 있다. 양동함대 2개는
적포와 교전 중 안타깝게도 궤멸 직전이다. 우리 <오펀 플리트>의 전쟁 발발도
예정보다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믿음직스럽게 그것을 느끼면서, 우선은 부하도 정해씨족도 아닌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티식스들 마천패루 거점에 도착하고 나서가 그쪽에서 나갈 차례다. 잠시 흔
들리겠지만 쫄지 않아 좋아. 오히려 흔치않은 놀이기구라고 생각하고 즐겨주길
바래.
정해함은, 이 함선만은 가라앉히지 않을 것이다.”
누차 한 말이다.
기함의 함장이자 사실상의 함대사령관인 자신의 책임에 있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소임이다. 자기 나라를 지키는 데 다른 나라의 군대의 그것도 소년병의 힘을 빌
리게 됐다. 물론 그 모국인 연방이 선의만으로 기동타격군을 이끌었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자신들 선단국군이, 자국의 실태에 말려들어 버린 아이들은.
무조건 살아서 돌려보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만은 무사히 뭍까지 데려
다 줄 것이다.
때문에 자신과 <스텔라마리스>가, 혹독한 수모를 당한다고 해도…

103
“승무원 각위 -정해씨족 11족, 그 마지막 생존자인 여동생들, 남동생들. 가장 먼
저 형을 따라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고맙워. — 그리고 조국을 위해 흩어지
겠다고 각오를 하고 출항하는 길에 경의를.”
<스텔라마리스> 단 한 척을 적 거점에 도달시키기 위해, 미끼가 될것이 정해진
정해함대의 11척.
구난함을 뒷배에 두고 있지만 폭풍의 바다, 그리고 요새조차 유지하지 않는
800mm포가 상대다. 구조가 제때에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이 폭풍의 바닷속에서
는 시신조차 항구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적미답의 바다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정해씨족의 명예지만.
그래
“마지막 적이 원생해수가 아니라 고철들로 변했지만 명예로운 죽음임에는 다름이
없다. 먼저 간 함대사령관들이 울고 분할만한 항해를 하자. 여행 이야기를 듬뿍
들려주자. 천년을 구전할 수 있는 용맹과 과감함을 보여주자.………이것이야말로”
천년 후, 얼굴도 모르는 후손들은 말할 것이다.
이제 정해함도 정해함대도 그 웅장함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됐다고 해도 말할
것이다

“우리가 선단국군이 과거에 가졌던 정해함대—그 마지막 정해함대였다고 일컬어


질 수 있도록”

등 뒤에 앉아있던 레나는 눈을 부릅뜬다.


눈앞에 말없이 주먹을 치켜들고 이웃끼리 그 주먹을 맞대고 있는 선단국군 사관
들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찍이 가졌던? 마지막?
그렇다면 마치 정해함대 자체가 선단국군에서도 이제 이 한 대밖에 남지 않은 정
해함대가 이 작전으로 영원히 상실되어 버린다는 건가?
함교 1층의 비행 데크 컨트롤러 룸, 이 작전에서는 함재기의 운용 예정이 없기
때문에 임시 회의실로 한 거기서 기다리는 비카가 지각 동조 너머로 말한다.
『항공모함은』

104
정해함의 근원이 된, 항공기의 해상 플랫폼은.
『군함으로는 최대의 화력 투사 능력을 갖지만 그것 한 척으로는 극히 취약한 함
종이다. 주위를 호위와 경계, 방공을 담당할 구축함과 순양함이 받쳐줘야만 전투
에 전념할 수 있다.……호위를 잃으면 쉽게 격침된다. 정해함대에서도 마찬가지겠
지』
정해함만 살아남아도 요함이 사라진다면 정해함대로서는 끝이다. 전시중인 지금,
한계까지 감소된 지금, 본래라면 선단국군 정도의 국력으로는 건조도 운용도 할
수 없는 값비싼 파수함이나 원정함은, 더 이상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정해함대가 상실된다면 그것은 렉키드 정해선단국군이 그 국호로까지 내
걸었던 정해의 자긍심 또한 상실된다는 것이다.
정말, 자랑조차 내던지고서라도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그 소국의 힘없는 현실.
뒤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이슈마엘이 말한다.
기대했던 하이킹에 동생을 이끌고 가는 형님 같이.
서로 웃으며 레기온 지배지역으로 사라져간 스피어헤드 전대의 모습같이.
“너희들의 싸움과 죽음은 내가 맡는다. 나와 <스텔라마리스>가 이야기꾼이 된다.
백 년이 지나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마지막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말해 주겠지.
그래서 천 년 후에는 <스텔라마리스>가 그녀만이 정해함대와 정해씨족의 존재,
선단국군의 옛 자랑의 기념비로 증명해 줄 거야. 그러니까, 모두들. 마음껏 멋있
게, 화려하게……. 흩어지고 와라.”

“………그래서 마중을 나온건가.”


함재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관리탁자가 중앙에 놓인 임시 브리핑룸. 그 실내
에서 신은 생각했다.
심야의 출발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모여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던 배웅객들.
그들도 혹은 선단국군의 국민 모두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 작전이 유일하게 남은 정해함대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정해선단국군이 국호로 내걸었던 정해라는 명예를 마지막으로, 잃는 것이라고.

105
정해함대는 무선봉쇄 중이지만 이 작전에서는 함장, 부장과 통신사관은 연방에서
제공한 레이드 디바이스를 사용하며, 함을 사이에 둔 통달도 지각동조로 즉시 전
달된다. 이슈마엘의 말은 그대로 주변을 굳히는 3척의 원정함과 한 바퀴 작은 6
척의 파수함, 두 척후함에도 전해진다.
땅거미와 비바람의 장막 속에서 간신히 보이는 좌현측 전방 원정함 <베나트나
슈>의 함교에서 실루엣이 움직인다. 최저한의 빛만을 광원으로 한 항해 함교에서
함장과 부장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하이파이브 하고 있는 모습을 <스텔라마리
스>의 함교 5층, 플래그 브리지에서 크레나는 바라본다.
어째서, 하고 멍한 머리의 한구석이 생각했다.
어째서, 긍지를, 자신들을 형성하는 그 마지막 조각까지 잃어버리는 순간인데.
우리와 같다고 말해준 사람들이. 어째서
웃고있다.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 동포와의 유대감.
그것은 혹시. 모든 것을 잃어도 그래도 동료는 남는다고, 그때 에스텔은 말할려고
했던 것은.
“……그런 거.”

이 <스텔라마리스>를 포함해 빅토리아급 정해함의 함실은 밀폐된 둘러싸인 바이


다. 격납고에도 그 옆의 대기실에도 비바람은 들어오지 않지만 소리만은 희미하
게 흐리면서도 울린다.
빗방울이라기보다 이제는 돌멩이로 내리친 듯 단단한 빗소리, 높고 낮은 수천명
의 적들의 소리처럼 울리는 바람의 신음소리, 절연체인 대기를, 무리하게 찢어대
며 달리는 번개의, 파쇄음과도 비슷한 무시무시한 천둥소리.
사람의 본능에 새겨진, 조건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태고의 폭위 소리다. 하늘
의 분노, 신이나 괴물의 포효라고 오랫동안 사람이 믿어온 대음향이다.
준비를 마친 대기실 안에서 프로세서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보이지 않

106
는 하늘을 본다.
폭풍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가로막는 것 하나 없는 대해의 폭풍우.
그 이상으로 조금 전 함내 방송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에 평소에는 무의식적
으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불안과 의심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겨내는, 자랑. ……그것밖에 아직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들 에이티식스다.
그것만 있다면, 싸우게 되면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
에이티식스다.
그런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자랑조차 내던지고 더 싸울 수 있는 정해씨족의 선단
국군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형체를 정할 자긍심마저 잃고 어
떻게 아직도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아직도, ……살 수 있는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다. 다 뺏기고 마지막 남은 자랑마저 잃어버리면 이제 내 형체를
유지할 수 없다.
그 마지막 남은 그 자랑마저, ……때로는 이렇게 용이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빼앗
겨 버리는 것이라면…….
바다를 모르는 이들은 경험하지 못한 거친 진동이 발밑에서 치받친다.
파도의 힘으로 들어올려졌다가 내리꽂히는 위아래 흔들림은 끝없이 반복된다.
<저거노트>의 가혹한 기동에 적응해, 작전전의 긴박감 속에서, 이상하게 취할 일
은 없지만, 자신들이 있는 것이 철판 한 장뿐인, 광대무변한 지옥의 위라고 생각
날 듯한 흔들림.
생각이 미치면 그것은 몹시 불안한 감각이다.
불변의 지지대는 어디에도 없다. 서 있으려 하는 그 발판은 사실 무르고 불확실
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뼈저리게 느낀 일이다. 86구의 싸움터에서, 눈의 요새에서 이
푸른 지옥의 전쟁터에서도
몇 번이고 뼈저리게 느낄 정도로 자부심이란 사실은 불확실하다.
깨지지 않는 것은 없다. 없어지지 않는 보증이라니,…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공포가 역전의, 소년들의 말을 빼앗는다. 겁에 질린 아이의 울음에 어느덧 누
구나 분노에 질려 울부짖고, 하늘을 쳐다보고 숨을 죽였다.

107
마이크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며 이번엔 이슈마엘이 함장석을 떠난다.
“에스텔, 브리핑 동안 지휘권을 맡길게……기다리게 했어, 밀리제 대령.”
“알겠습니다, 형님”
“아니… 저기, 이슈마엘 함장님.”
뒤돌아본 뒤, 이번에는 왠지 울음을 터뜨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나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않아도 돼. 정말로. ……가끔 그런 나라도 있었다, 정
도로, 생각해 준다면 …라는 이야기야”
통합함교에서 할 얘기가 아니다. 브리핑을 위해 모인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복도로 나와 걸으면서 계속했다.
“원래 변변한 산업도 없는 소국이, 무리해서 분수에 맞지 않는 정해함대 따위를
안고 있었어. 전쟁이 길어지면서 모든 것이 힘들어졌고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은
시간문제였던거야.”
군함 특유의 좁은 계단을 내려와 함교 1층으로. 빠른 걸음으로 엇갈린 승무원이
경례하며 길을 틔운다.
“그게 오늘이었다는 얘기고. 마지막이라고는 해도 제대로 역할을 다하는 마지막이
니까 뭐, 그래도 괜찮아.”
“나을 리가 없잖아.”
비행 덱 컨트롤러 룸의 문에 손을 댄 그때, 등 뒤에서 말을 건드렸다.
돌아본 이슈마엘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계단 앞 그의 눈에서는 성장 중인 소년
의 체구에 육중한 강철색 탑승복을 걸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 있던 것은 세
오였다.
“릿카 소위….”
타이르기 위해 입을 열려던 레나를 막으며 이슈마엘은 몸을 돌린다. 먼저 들어가
라고 반쯤 억지로 그녀의 가는 등을 밀어 넣고 나서 문을 닫았다.
그 이슈마엘 나름대로의 배려도 모르고 세오는 말한다.
“고향을 빼앗기고 진짜 가족도 그 후 잃어버렸잖아. 게다가 자존심까지 버리게

108
됐고……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적어도 자신은 할 수 없다. 에이티식스 누구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세오는 생각
한다.
가야 할 고향도 없고 지켜야 할 가족도 없고 물려받은 문화도 없다. 끝까지 해내
는 자부심 말고는 형상을 규정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자랑마저 빼앗기는 것을 자신도 동료들도 무엇보다 싫어하고…… 두려
워하고 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고향을 잃고 가족을 잃고, 게다가 정해라는 자랑마저 전쟁에게 빼앗
기려 하고 있는 이슈마엘과 이 정해함대의 승무원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어딘가 필사적인 그 외침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이슈마엘은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생각하다가 문을 열었다.
“‘니콜’은… 저 원생해수의 뼈는 원래 내 고향인 궁전에 장식되어 있었지.”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세오가 묻는다. ‘니콜’ 기지의 홀에 장식되어 있던 원생해
수의 뼈.
“전쟁이 시작되고 국토를 포기하게 됐을 때 함대사령관은 정해함대에 넣을 만한
피난민과 니콜도 싣고 항구를 떠났다. 전쟁은 아마, 금방 끝나지 않을 테니까. 조
국에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테니 니콜을. 조국의 상징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
면 모두의 마음의 보금자리가 될 거라고.”
클레오 선단국 소속 정해함대가 상징으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라고 함대사령관은
이미 그때 각오하고 있었다. 기함<스텔라마리스>도, 함대에 속하는 정해씨족의
아이들조차.
그 예측은 유감스럽게도 옳았다. 10년에 걸친 <레기온>과의 격전으로 함대사령관
도 클레오 정해함대 소속함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스텔라마리스> 승무원들도 지난해 대공세로 방어진지대의 구멍
을 메우기 위해 낯선 육전에 나섰다가 흩어져 갔다.
이제 니콜과 <스텔라마리스>, 그리고 클레오 정해함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슈마
엘만이 조국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며, 그 <스텔라마리스>와 이슈마엘도 이 작전으

109
로 자신의 역할을 끝낸다.
그 상실을, 그렇지만.
“지금 니콜이 있는 그 홀은 사실 그녀를 위한 게 아니야. 원래 저 곳에는 그 마
을의 대를 이어 내려온 어뢰정의 그 마지막 용골이 장식돼 있었어.”
보답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를 위해, 선단국군 전체를 위해 조국을 잃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긍지를 간
직한 채 양보했다. 그 마을도 고향도. 그곳이 지금은 내 고향이야. 그래, 얻을 수
있지. 설령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살아 있다면 언젠가, 비슷할 정도로 소중한 것
을, 거짓이라 해도 대신할 수 있는 부분이 되어줄 수 있는 게"
말과는 달리. 이슈마엘은 어딘가 사라져 버릴 듯 광막한 바다에 녹아 사라져 버
릴 듯 깔깔 웃었다.
선단국군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다. 원생해수뿐 아니라 이웃 강대국 두 나라에 업
신여김을 당하고 다소 멀쩡한 땅은 다 잘라내고 그래도 남은 국토와 정해함대를
유지하는 데 어렵게 돌아다니며 살아남았다. 몇백년이나 빼앗기고, 계속 패배하며
살아왔다.
“패배하고 잃어도 살아야 돼. 원래부터 그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게 정해씨족
이다. 그러니까……또다시 무언가를, 목표로 하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다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떼쓰는 아이처럼 고개를 흔들며 세오는 그 말을 부인한다. 비명같은 소리가 났는
데 그걸 멈출 수가 없었다.
“빼앗기기만 하고, 잃어버리기만 하고, ……그러다가 결국 대체할 무엇 같은 건
손에 넣지 못한 채 죽어버리면—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한 채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전대장님처럼
미래도 가족도 버리고 그 최후엔 전사하고. 조국으로부터는 어리석은 자식이라고
조롱당하고, 아들에게조차 그 선택과 죽음의 의의가 의심받고,……죽음 직전에조
차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86구에서 싸우면서, 마지막까지 동료 한사람도 얻지 못한 채, 고독하게.
전대장님. 당신은 왜 그런 전쟁터에서 그럼에도.

110
이슈마엘은 웃는다.
“그런 건……내게 부끄럽지 않다면 괜찮고 그걸로 충분하잖아.”
바보같이 쾌활하고 바보같이 강했다. 전대장과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아버지(함대사령관)에게 미안하니까. 아버지(함대
사령관)는 나와 씨족을 지키려다 죽었는데 내가 고개를 숙이고 산다면 헛죽음을
당한거잖아.”

“형님, 지휘권을 돌려드리겠습니다.……양동 함대는 15분전에 양쪽 모두 통신 두


절.마지막 통신은 『이제 45 발. 행운을 빈다』입니다”
“알았다.…다음은 우리 차례군.”
적의 잔탄수 45발 남은 거리 140

직전까지 작전지휘관과 상황을 공유하기 위해 전대 총대장인 신과 그 부장인 라


이덴, 유트와 나머지 부장들은 함교 5층, 플래그브리지에서 대기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두꺼운 유리 창밖은 끊임없이 내리치는 비바람으로 거의 아무것
도 보이지 않는다.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불을 끈 어두운 실내에서
찰칵, 창문 자체가 발광하는 듯한 강렬한 뇌광이 천지간의 색채를 순백으로 바꾼
다.
간발의 차도 없이 빙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지척의 천둥소리. 서로 납빛
으로 물들어 경계도 모르는 하늘과 바다의, 아마도 구름 사이로 보라색 번개가
달린다.

111
그것은 고대, 하늘을 정벌하는 용이라고도 비유된 그대로, 어딘가 신화의 생물과
같은 유기적인 궤적으로. 검고 흐린 날씨에, 높은 하늘의 대기에 흐르는 금의 형
상을 가지고.
“……어이.”
말도 못 하고 멍한 라이덴의 목소리에 눈을 돌렸고 그래서 신도 알아차린다.
뇌광이 꺼져도 희미한 바깥의 밝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달이나 하물며 태양의 어둠을 쫓는 불빛이 아니다. 별빛과 같은, 눈빛과 같은, 야
광충이 발하는 푸른빛과 같은, 어둠에 녹아들뿐인 희미한 빛.
비록 직격탄을 맞는다고 벼락을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인 조
심하며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숨을 삼켰다.
빛나는 것은 <스텔라마리스> 그 자체였다.
선체의 가장자리. 비행갑판의 한 단계 아래, 좌우에 놓인 40센치 연장포 2기와
그 포구. 아마도 이 함교도, 함수도 보이지 않을 어둠 속에서 대전한 그것들이
장막과 빛을 발하고 있다.
열도 없이 타오르는, 푸른 도깨비불처럼.
도깨비불을 등불 삼아 찢어진 돛대와 부러진 돛대로 영겁의 바다를 헤맨다는 유
령선처럼.
환상적인 그 광경에
어쩌면 세계마저도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역사도, 긍지도. 사람 사는 것 그 자체조차. 사람이 가치 있다고, 자신들
이 소중하다고 품은 것은 모두 무의미한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단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뇌리를 스쳐간 공허를 그 일련으로 눌러 죽였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난폭하게 문이 열리고 승조원 사관 한 명이 얼굴을 내비친다.
“소년들! 슬슬 마천패루 거점 근교의 해역이다! 준비를!”
“-알겠다.”
우렁찬 천둥소리가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신과 라이덴들을 등 뒤에서 배웅한다.

112
통합함교에 있던 레나의 눈에도 비친다.
이건.
천공을 가르는 천둥소리가 전염된 듯 희디흰 푸른 빛. 열이 없는 불꽃처럼, 깜빡
이며 흔들린다.
흔치 않은 일은 아니었던 건지, 이 폭풍과 파도에선 그럴 만도 한듯. 함선을 나
아가는 이슈마엘들은 보지도 못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경보와 켜지는 경보. 노
도처럼 지시가 날아온다.
양동부대 2개 함대는 전멸했고, 관측기 모함은 찌그러뜨리지 못한 채의 침공이다.
바다에 익숙한 정해씨족이라도 평소에는 피하던 거친 해역을 굳이 진로로 택하며
<오펀 프리트>는 나아간다.
이미 멸망한 듯한 타국의 상선이나 어선의 유용으로, 파도가 거친 원양 전용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관측기 모함은 이 해역에는 들어갈 수 없다, 원생 해수의 영역
과는 거리가 있는 여기에서도, 고도를 넘는 <라베(경계관제형)>은 격추되기 때문에
날 수 없고 관측기도 고도를 잡을 수 없다. 발견될 가능성은 낮다.
그 해역도 드디어 빠져나갈 때가 왔다.
남은 거리 -0km.
바깥쪽 6척의 파수함이 키를 돌려 원을 펼친다. 앞서가는 두 척후함이 횡대의 폭
을 열어 색적 범위를 넓힌다. 소노부이3)같은 투사역탐지가 쉬운 대공레이더는 사
용하지 않은 채 관측기 모함의 접근에 대비한다. 격납고로 이동한 신으로부터, 저
공의 <레기온>의 관측기의 진출과 접근의 보고가 들어간다.
바깥 둘레를 나아가는 파수함으로부터 지각 동조가 연결된다, 지금은 사라진 베
레니 정해함대의 마지막 파수함.<호크락시몬>.
『-형님. -각원. 슬슬 가겠습니다. 자,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호크락시몬>의 함장은 여성으로 아직 젊다. 뭍에 두 아들과 정해씨족 출신이 아
닌 남편을 남겨둔 그녀가 가볍게 웃는다.
『그리고 무운을 에이티식스들 언젠가 평화로워지면 다음에는 놀러와』
<호크락시몬>이 침로를 변경하고 동쪽으로 향하는 함대로부터 뱃머리를 잘라 떨

3) 음향 탐지기를 갖춘 부표(浮標). 소나 탐측기((잠수함·고기떼·지형 등의 탐색용)).

113
어지며 남하를 개시한다.
조금 늦게 파수함 <알비레오>가 그 뒤를 잇는다.
함영이 파도 너머로 사라지고 충분히 거리가 벌어진 곳에서 대공레이더를 기동.
무선봉쇄를 해제. 가락이 좋은 노래를 전 대역에서, 아무래도 함장 이하 선원 전
원이 부르며 나아간다. 아득한 해양으로 나아가는 뱃사람의, 모험의 노래, 이루어
지지 않은 꿈.
레이더도 무선도 전방위로 무차별하게 전파를 뿌리는 역탐의 우려가 있는, <레기
온>에 발견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봉쇄했던 그것들을, 모두 해방시켜.
이윽고 파도의 대산 너머 이제는 함영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곳에서 다연장로켓
포의 무수한 화선이 불길을 내뿜으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관측기의 한 대가, 새로 접근하는 함의 레이더를 탐지했다.


선단국군이 마천패루 거점이라고 부르는 해상 거점의 최상층. 보고를 받고 <모르
포(전자가속포형)>은 그 거대한 800mm포를 선회시킨다.
«콜라레 원, 알았다. 사격을--»
적함-혹은 적 함대의 예측 위치, 그 조금 먼저 조준을 맞춰야 감지하는. <레기
온> 최대의 위력과 사거리를 가진 <모르포(전자가속포형)>는 자기방어를 위한
대공레이더를 보유하고 있다. 그 레이더에
«주포, 사격 취소. 대공방어»
무수한 비상체의 반응을, 포착했다.
연동되는 8개의 대공회전식 기관포가 자동으로 비상체를 조준했고, 날아오는 로
켓포탄의 대부분을 떨어뜨린다.
«요격 불능으로 판정»
빗나간 일발을 총탄
지근거리에서 작동한 벌집탄의 비가 <모르포(전자가속포형)>으로 세차게 내리친
다.

114
선단국군의 로켓포는 명중 정확도가 매우 나쁘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다연장,
그리고 복수기의 일제사격. 수백 개나 되는 비상체 무리가 하늘을 메우는 불길로
쇄도해오니 감당하기 어렵다.
폭발반응장갑이 작동해 관철을 막았지만 다음에 같은 장소에 맞으면 이번엔 상처
없이는 끝나지 않는다.
«콜라레 원거리 관측기 모함. 지정좌표로»
탄도를 역산해, 다연장 로켓포를 탑재한 적함의 위치를 산출. 굉, 하고 바람을 가
르며 주포의 조준을 그 방향으로. 조준 한다.
«탄착 관측 요청. 포격 개시»

“<호크락시몬>, <알비레오>, 통신 두절. 격침된 모양입니다”


파수함이 반격을 받고 있는 동안 <오펀 플리트> 본대는 더 많은 거리를 벌었고
문자 그대로 몸을 바쳐 시간을 벌기 위해 파수함의 동생들이 전한 것을 신호로,
조금식 이동한다.
동시에 이번에는 우현측 후방에서 떨어져 나간, 두 척의 파수함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온다.
“계속해서 <알타르>, <미라>,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스텔라마리스>”

다시 한 번 포격을 당기며 이번에는 척후함 2척을 본대에서 떼어내고, 함대의 남


아있는 함은 <스텔라마리스>외에는 원정함 3척과 파수함 2척. 남은 거리는
40km.
벽처럼 막아선 파도를 피해 탁 트인 시야에 이번엔 하얗게 안개의 벽이 막아선
다. 이제 날이 밝아야 하지만 이 해역에서 아침안개를 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
다. 가까이 가면 안개의 고요함도 없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그것은, 수온이 상승
해서 발생한 수증기다. 해상에 따로 고립되어 있는 마천패루 거점, 여기가 아마도

115
동력원일 것이다. 열원인 해저 화산의 그 위에 수증기의 발생은, 그 열이 바다
속으로 빠져 나와 버린 것인가.
북쪽의 대기가 차게 되어 하얗게 연기가 나면서, 수증기는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를 그리며 고공으로 상승한다.
그 근원이 되는 흰 사막을 함수로 찢어, 뚫고 정해함은 더욱 나아간다.
안개의 장막을 돌파하자. 마천패루 거점까지 앞으로 30km. 함포의 사정거리.
『원정함, 파수함 전함, 조준을 맞춰라. 차라리 여기서 쏘아 떨어뜨려도 상관없어,
쏴라!』
살아남은 5척이 사격을 개시.
탑재하는 모든 포문, 모든 로켓포의 폭염과 탄막으로 <모르포(전자가속포형)>으
로 몸을 끌게 하고, 또한 <스텔라마리스>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한 전력사격이다.
일방적인 사격에 노출된 울분을 터뜨리듯 흩어져간 2개 양동함대, 파수함과 척후
함의 전우들에 대한 조포라도 되는듯 거센 포성이 울린다. 순식간에 자욱한, 포연
이 이 폭풍에도 불구하고 함 주위에 감돈다.
그 잿빛 안개를 가르며 맹렬한 천둥소리가 날아왔다.
소리를 내며, 충격파를 휘감고 비스듬히 추락해 온 800mm 포탄이 척후함을 대
신해 전위인 파수함<티코>의 갑판에 제대로 착탄. 상부 갑판, 여러 층에 걸친 정
비 갑판과 거주 구획, 함저 가까이의 기관부까지 꼬챙이로 관통했고, 보다 강고한
장갑이 이루어진 함저에서 간신히 멈추어, 거기서 작렬한다.
내리꽂힌 엄청난 운동 에너지와 폭약의 폭음에 <티코>는 일격에 앞뒤가 두 동강
난다. 단말마의 몸부림을 치지 않도록 하늘을 가리키던 함수와 함미가 다음 순간
요동치는 옆 파도에 휩쓸려 파도 아래로 내려쳐진다. 그 파도를 헤치고 뒤따르는
본대가 진공한다.
안개의 벽과 비바람의 장막에 희미하게 서린, 아득한 저편. 검고 어두운 바다와
하늘에 녹아 버리는 촌스러운 쇠빛 칼끝이 높은 파도 너머에 드디어 살짝 보였
다.

『목표를 시인, 나갈 차례다! 준비해라 꼬마들아!』

116
뛰어들던 사관이 드디어 그 지시를 격납고에 울린다. 갑판요원의 조작 아래 맨
앞을 지나 요새로 진입하는 첫 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행갑판으로 올라간다.
다리를 접고 6대 소대가 한꺼번에 올라간다. 그 한 대인 <언더테이커> 속에서
신은 거센 바람의 신음소리와 그에게 익숙한 날벼락 같은 <양치기>의 절규를 올
려다본다. 아직도 포격을 반복하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단 한 대로 만군이 쏟
아져 나왔다.
사람이 아닌 함재기를 갑판에 올리기 위한 엘리베이터는 비행갑판 현측에 있고,
파도 바람을 막는 벽과 천장 등은 불가능하다. 격납고를 나오자마자 몰아치는, 맹
렬한 비바람.
한 층을 올라가 비행갑판까지 올라가면 그것은 더욱 강해진다. 해상은 가로막는
것은 없다. 10톤이 넘는 <레긴레이브>조차 날아갈것같은 공포감을 떨칠 수 없는
폭풍이다.
바람에 날려 버린 비행갑판에서, 경량의 <레긴레이브>는 부주의하게 높은 자세를
취하면 넘어질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다리 부분의 잠금을 풀고, 반쯤 기어가는
낮은 자세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선수 쪽, 선체에 평행하게 뻗어 있는 발진용
활주로를 함의 진행 방향으로 나아간다. 활주로를 넘어 함수 바로 앞에 엎드리듯
대기하면 구름 그 자체를 빛나게 하는 바로 위의 번갯불이 내동댕이쳐져 나오는
빗방울에 반사돼 시야는 하얗게 흐려진다. 망막하게 눈 아래 펼쳐진 검은 바다의
그 밑바닥 깊숙이 가라앉은 듯한 어두움과 굉음과 압박감. 먹구름이 소용돌이치
는 하늘이 해면, 호우에 하얗게 끓는 갑판이 해저다. 햇빛을 가리는 두꺼운 비구
름과 시야를 가린 폭우에 세계는 혼탁해지고 무수한 빗방울이 비행갑판을 때리는
굉음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파도의 술렁임처럼 울려 퍼진다.
하늘 그 자체가 떨어진 듯한 엄청난 양의 물과 대기가 가져다주는 숨 막힐 정도
의 압박감.
실제로 <저거노트> 밖으로 나왔다면, 이 폭풍우에 몸을 날렸다면 분명 숨도 제대
로 쉴 수 없을 것이다. 그만한 물과 바람이 장갑 한 장 사이에 낀 밖에서 사납게
날뛰고 있다.
그 너머 하늘로 솟은 강철탑이 희미하게 보였다.

117
118
정상위에, 구름에 갇힌 밤하늘을 배경으로, 아직도 검은 거대한 물체가 천천히 몸
을 일으킨다.
방어일 것이다, 갈고리 모양으로 굽은 금속주군이 조개의 딱딱한 껍질처럼 머리
위를 덮는 천장 아래에서 진행된다. 푸른 광학 센서를 도깨비불처럼 빛나게 하고,
한 쌍의 창과 비슷한 포신에 희미하게 자전을 켜며, 그것은 확실히 이쪽을 응시
한다.
오만하고 냉연하게
부스럭거리는 듯 인광을 띤 두 쌍의 은날개가 하늘에 퍼진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

『남은 거리 5, 적 추정 잔탄수 1!』


『허공에 쏴봐라 이놈아!』
포전은 여전히 계속된다.
최후의 파수함을 잃으면서도, 정해함대는 최후의 50미터를 질주한다.3척 모두 살
아남은 원정함, 그 한 척인 <바실리스코스>가 증속해 돌출, 2개의 40센치포를
연사하면서 마천패루 거점으로 돌진한다. 포격에 서치라이트를 켜고, 레이더와 무
선의 출력을 최대로 하여 전 대역을 쏘라고 절규하면서까지 자신을 조준하게 했
던 <바실리스코스>의 우직한 돌격에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포구가 바라는
대로 향한다.
철탑의 정상에서 번쩍이는, 뇌광. 이 지근거리에서는 초속 8000미터의 초속을 자
랑하는 레일건의 탄체는, 섬광을 보는 것과 동시에 착탄한다.
그 초고속의 사선을, <바실리스코스>는 조타를 가쁘게 휘둘러 돌려 비킨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에 깃든 망령의 조준 버릇을, 이 포전만으로 간파한 신예
그 자체의 회피기동.
마지막 80밀리 포탄이 파도를 뚫는다. 동심원상으로 퍼지는 큰 파도를<바실리스
코스>, 계속해서 원정함 <베나트나슈>,<데네볼라>의 포격이 넘는다. 잔탄이 있을
경우를 대비한 폭염과 충격파가 한때 요새의 탑, 최상부 거포를 원뚜껑 밑으로
물러나게 하고 그 센서를 빈틈없이 칠한다.

119
그 아래로 최대 전속을 유지한 채 <스텔라마리스>가 곧장 내달렸다.
마천패루가 다가오다.
이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그 위용을 통합함교에서도 알 수 있다.
물속에서 수직으로 솟은, 그것 하나로 빌딩을 여러 채를 묶은 굵기의 콘크리트
기둥,
여섯 개의 기둥이 육각형을 그리는 그 위에, 그 기둥을 정점으로 하는 육각기둥
모양의 요새가 높이 솟아 있다.
비늘과 같이 구조물의 외부를 덮는 것은 반투명의 태양광 발전 패널로, 쏘아 올
리는 비로 새하얗게 탁해져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전체 높이는 무려 -20미터.
어딘가 바다에 산다는 신화의 거대한 용을 연상시키는 그 형상은. 아무리 올라가
도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끝없이 겹쳐진다.
요새의 기부, 6개의 콘크리트 기둥 중 하나에 접근.
조타수는 도대체 어떤 솜씨와 배짱을 부리고 있는지. 속도도 늦추지 않고 그대로
들이받고 기둥에 현측을 문지르는 족보에 갖다댄다. 그러면서도 금속의 비명은
하나도 세울 수 없는 가공할 정밀함으로 깎아지른 콘크리트 절벽에 접안했다.

그 광경은 비행갑판에 대기하는 신들에게는 거의 자살행위 그 자체로 비친다. 순


식간에 다가오는 콘크리트 절벽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고 눈을 부릅뜬 채
무의식적으로 그때를 대비한다.
충돌하기 직전 정해함은 직전에 약간 키를 돌려 함수 옆의 현측을 옆으로 대는
형태로 요새에 접안. 여기라면 기둥의 기부가 방해되고 적어도 돌입부대가 오르
는 동안에는 적의 포격도 받기 어렵다.
작전 개시.
의식이 싹 바뀌었다. 빗방울에 엎드려 있던 <언더테이커>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으킨다. 그 순간 자연의 사나움에 대한 경외도 압박도 전투에 최적화된 의식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레나의 구령이 떨어진다.

『포병전대, 스피어헤드 전대 진출해라』

120
4장 The Tower (Uplight)

군함으로서도 거대한 정해함은, 해면에서 비행갑판까지의 높이도 20미터 가깝다.


콘크리트 기둥에 의지한 요새의, 최하층 밑바닥 바로 머리 위에 오는 높이다. 철
골 을 격자로 짠 거대한 거미줄처럼.
철골이라고 하지만 높이 100m가 넘는 거대한 요새를 구성하는 플로어는 <저거
노트>의 가로폭 정도도 되고, 틈새는 <저거노트>는커녕 <뢰베(전차형)>도 쉽게 빠
져나갈 수 있을 정도다. 최하층 요격부대를 포병으로 쳐내고 이어 선두에서 스피
어헤드 전대가 진출. 와이어 앵커를 각각 플로어에 걸고 도약, 발표한 앵커를 회
수하면서 플로어 위에 착지한다.
마천패루 거점 내부에는 복수의 플로어가 줄지어 있어, 이 작전에서는 편의상, 그
플로어를 3개씩 정리해 계층 A부터 E라고 호칭했다. 그 제1층과 요새 최하층의
층에 서서, 신은 머리 위에 펼쳐진 요새, 그 내부를 올려다본다.
밖에서 봐도 거대한 건물이었지만 안쪽으로 침입해 보면 그 엄청난 넓이를 잘 알
수 있다. 기지 하나, 공창 하나, 가 각 층에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광대함이다.
세 개의 플로어가 정삼각형의 각 변을 이루고, 그 삼각형이 무수히 이어져 격자
상태의 바닥면.
요새 전체는 위에서 볼 때 육각형 형상이다. 지탱하는 기둥은, 기부의 콘크리트
기둥으로부터 그대로의 굵기와 수로 6개. 육각형의 꼭짓점 위치에서 이쪽은 금속
구조재를 드러내며 아득히 머리 위까지 올라간다. 수직 구조재와 트러스 구조의
그것을 조합한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의 상통을 꿰뚫은 기둥이다.
요새 벽면 역시 반투명 발전 패널 아래는 수직 구조재만 규칙적으로 들어설 뿐
비바람은 통하지 않고 바깥에서 내리쬐는 빛은 희미하게 비친다. 밤은 햇빛이 폭
풍에 막혀 이 해상에서는 아직 떠나지 않고, 얼마 안 되는 빛이 굴기의 관계인

121
지, 마천패루 거점 내부를 파랑색으로 짙게 물들였다. 해는 졌지만 밤의 어둠도
찾아오지 않는, 낮과 밤의 틈새로 대기마저도 어슴푸레하고 차가운 푸른빛으로
물드는 한때.
그 군청색에 역시 정삼각형 격자형태의 각 층층이 겹겹이 레이스 모양을 새긴다.
모든 구조재가 <저거노트>를 실었거나 달았을 만큼의 거대함이다.
최상층 <모르포(전자가속포형)>에 탄약 및 소모부품을 보충하기 위한 것인지 복복선
에 해당하는 폭의 레일이 호를 그리며 최하층 서쪽 끝에서 꼭대기층으로 각 층을
관통한다.
그 그림자와 망령들의 비탄, 영원한 박명과 기하학 무늬의 그림자를 배경으로.
<레기온>특유의 철색의 그림자가, 무수히, 일제히 일어났다.

“-저승사자님. 예정대로 우리 <알카노스트>가 척후를 맡겠습니다.”


말하면서 레르케의 <챠이카>를 뛰쳐나온 후 <알카노스트>의 무리가 계속 이어진
다. 위층에 오르기 위한 발판은 레일 외에는 요새 중앙부를 이중으로 접선을 그
리며 오르는 이것도 철골 계단뿐이다. 당연히 어느 쪽이나 적이 매복해 있다. 특
히 레일은 차폐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아가면 위에서부터 포격을 당한다. 그러
니까 본래의 발판이 아닌 발판, 벽면의 구조재나 층에 점재하는 지주를 경량을
살려, 수직 이동이 많은 이 작전을 위해 증설한 와이어 앵커를 감아 일직선으로
뛰어 올라간다.
이윽고, <레기온>도 잠자코 보고만 있지는 않고 제1층 제2층에 <알카노스트>가
뛰어올라 진출하자, 직후에 그녀들을 둘러싼 형태로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의 군
단이 내렸다.
그 배후는 <스티어(대전차포병형이)>가 포구를 나란히 하고 일어나는 곳으로, 방위
부대의 주력은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과 <스티어(대전차포병형이)> 2종이다. 발판
이 나쁜 이 요새에서 중량급의 <뢰베(전차형)>이나 <디노자우리아(중전차형)>보다는
경량 및 운동성능이 높은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과 화력이 높은 <스티어(대전차포
병형이)>가 효과적이다.
다른 <레기온>들의 눈이 되는 <아마이저(척후형)>이, 그늘에 숨어 복합 센서로 이

122
쪽을 비추지만 신의 이능으로, <레기온>의 위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척후들이 하는 일은 위치는 알아도 무엇이 있는지 판별할 수 없는 신 대
신 그 자리에 있는 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눈이 되는 것. 그리고 적 전력을
후에 에이티식스들이 진출할 때까지 가능한 한 감소시키는 것이 <시린>들의 역
할이다.
“우선은 눈을 멀게 만들어야 하니... <아마이저(척후형)>부터 사냥합니다.”

돌입하는 <저거노트>2개 지대를 상륙시키고, <스텔라마리스>는 마천패루를 떠나


약 1km 앞으로, <뢰베(전차형)>의 전차포의 사정권 밖으로 후퇴한다. 정해함은 취
약한 함종이다. <레기온>이 올라타 파괴되면 돌입부대의 퇴로가 끊겨버린다.
그렇다, 육지에서 훨씬 멀리 고립된 이 해상의 요새에서 바다를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스텔라마리스>가 이 작전의 최대의 약점이다.
마천패루의 정상, 제5층. 탄약 고갈로 몰았던 <모르포(전자가속포형)>가 뚜껑을 열
고 몸을 내민다. 최대 부각을 잡은 800밀리 레일건이 천둥 치는 하늘을 배경으
로 창백한 번개를 감싼다. 포격의 전조
이제 곧 멀어지는 800mm 포탄에는 마치 무력하고 무방비적인 <스텔라마리스>.
“그거야 그렇겠지. 나도 그럴 거야.”
이슈마엘이 신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마천패루를 3면에서 둘러싸는 위치에 전개하고 기다리고 있던 원정함 3척이 주
포, 40cm연장포를 발사했다.
바다에 잠복해 있는 원생해수의 적으로 추정되는 정해함의 주력 포는 수륙양용기
와 육상시설 파괴가 아니라 수십 km 떨어진 곳에서 폭발물을 투사해 살포하기
위한 것이다.. 수상목표에 대한 함포사격의 정확도는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대형 생물도 죽이기 위해 초속 780m 이상의 초음속으로 30km 떨어진 곳에서
강력한 내부폭발을 발사하는 게 주포다. 갑옷을 뚫도록 설계되지 않았더라도 숨
겨진 파괴력은 엄청나다.
<스텔라마리스>를 포격하기 위해 차폐된 덮개에서 나와, 거친 하늘에 몸을 노출
시킨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삼면에서 포탄이 다가온다. 가까운 곳에서 외각의

123
신관이 작동하고, 내장한 폭뢰를 사출. 대형종용 폭뢰가, 옆으로 퍼지며 <모르포
(전자가속포형)>에게 내려쳐진다. 대부분은 본체의 장갑에 튕겨져 그렇지만 포신 기
부에 하나가 직격한다.
긴 레일의 한쪽이, 뿌리로부터 구부러져 날아갔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포신 파괴 성공. ……역시, 한 번에 발사할 수 있는 총
알의 수가 지난 한 해 동안 증가했나.』
머리를 내미는 순간에 요함이 포격할 상정이었다고는 해도, 미끼가 된 정해함 속
이다. 과연 긴장했던 것인지, 은방울의 목소리가 아직 약간 강렬해서, 신은 애써
평정한 목소리로 응한다. <알카노스트>에 이어서 올라간 두 번째 층 공략 중.
탄약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상관없이 탄환의 개수와 수명은 향
상될 수 있으며, 이는 각 구성 요소의 무게로 인해 단축되기 어렵다. 지난해 대
공습에서 나온 100발 한도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다.
“네, 하지만 목소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요. 남은 총알이 남아 있는 한, 탄을
교체하는 즉시 <스텔라마리스>에 대한 사격은 재개될 것입니다.”
결국 그때까지 거점 제압과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격파를 완료해야 한다.
공창으로 지목되던 마천패루지만 실제로는 모든 층이 비어 있어 거점의 제어중추
로 여겨진 두 번째 <양치기>도 <모르포(전자가속포형)>과 같은 최상층에 있는 것
같다. 격파 목표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좋지만,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아
닌 2기의 정체는 아직 불명하다.
『환장 완료까지 예상 시간은?』
“이 1개월의, 선단국군에 대한 포격 인터벌은 최소 6시간. 작전 완료까지 <스텔
라마리스>를 쏘지 않을 때까지의, 타임리미트는. …… 같다고 생각합니다.”

적재 중량이 한정되는 가운데, 분석을 위한 연산능력을 위해 가져왔던 레나의


<바나디스>와 비카의<가듀카>는, 어느 쪽을 우선할지 검토되었고, 만일의 경우의
화력의 크기를 결정적인 수단으로 정해서 옮겨진 <가듀카>의 안.
척후로서 선행하는<알카노스트>를 관제하면서, 그 <알카노스트>와의 데이터 링
크를 통해서 공유되는 마천패루 거점 내부의 광경에 비카는 눈을 가늘게 뜬다.

124
조금 전까지 이 자리를 메우고 있던<저거노트>는 출격해, 텅 빈<스텔라마리스>
의 격납고.
뼈대뿐인, 선 채로 썩은 거수의 백골과 같은, 이 이상한 형상의 요새.
이 요새의 건조 목적은 뭐지?
공창이라고 자이샤는 말했지만 공창처럼 생긴 설비는 없다. 지금부터 운반할 생
각이었던 것이 그 전에 발견된 것뿐일까. <모르포(전자가속포형)> 포진지로서의 요
새도 아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런 원양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 출처도 모를 만큼 많이 투입된 철재와 <레기온>이 만든
것 치고는 이 요새의 가치는 낮은 것 같았다.
아니야.
“출처에 대해서는 다 아는가?”
<아인탁스플리게(방전교란형)>의 전자방해에 갇힌 많은 국가와 세력권은 아직도 연
락이 닿지 않아서 생존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대공세로 망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연합왕국에도 연방에도 전달되지 않는다.
멸망이 확인 되어 있지 않은 것은,……어느 나라도 멸망하고 있지 않은 것과 같
은 것이 아니다.
그래, 제레네도 말했어. 대공세가 실패한 전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밀리제의 예측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높은 화력과 가벼운 무게의 <스티어(대전차포병형이)>는 기동성이 낮고 갑옷이 적


은 데다 각 층마다 두터운 불주머니를 갖추고 발밑의 나락에도 일체의 공포 없이
날아올라 수직면을 와이어의 버팀목없이 질주해 달려든다.
무엇보다 이 3층에서는 훨씬 높은 5층의, 바닥에 무리지은 <아인탁스플리게(방전교
란형)>의 은색 베일을 뚫고 쏟아지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6연장 회전식 기관포
의 기총 소사.
지각동조로 공유하는, 신이 듣는 <레기온>들의 탄식 속에서 <모르포(전자가속포형)>
의 절규가 높아지는 것을 듣고, 라이덴은 <베어볼프>를 급정지하고, 후방으로 튕
겨나간다. 추호를 두고 그 코끝을 기관포탄의 탄도가 비스듬히 베어버리며 일격

125
에 부러진 철골보가 접합부에서 빗나가 떨어진다.
탄속이 빠르고 탄체가 거대한, <레긴레이브>는 커녕 <바나르간드>조차도 바로
위에서만 먹으면 관철되는 것이 40밀리 기관포탄이다. 본래는 대공 무기였지만,
<모르포(전자가속포형)>과<저거노트>사이에 겹치는 강철의 플로어의 틈새를 전투
기계의 정밀함으로 꿰매, 적열하는 호우로 내동댕이쳐지고, 장갑채로 펠드레스를
베는 척으로 베어 넘긴다.
한 호흡에 수백 발의 탄약을 소모하고, 그래서 포신도 기관부도 과열되기 쉬운
대공 기관포는 장시간 연사를 할 수 없지만 사격 간격이 생각만큼 열리지 않는
다. 1년 전 <모르포(전자가속포형)> 가진 6기에서 <언더테이커> 단 한기로 모두 없
어졌으니 대공 기관포를 어느 정도 늘려야 했다.
시야 끝에, 신이 이끄는 스피어헤드 전대에 속하는 <저거노트>의 한 대가 등반하
려던 수직 기둥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눈에 비친다.
바로 아래에 고주파 블레이드의 칼끝을 향해 똑바로 지주를 미끄러져 내려온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의 함성을 회피한 참이다. 와이어 앵커를 상층 플로어에
붙이고 기둥을 멀리 차면서 궤적을 벗어난다. 목표를 잃고 그대로 허무하게 미끄
러져 내려가는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의 키를, <저거노트>는 늘어뜨린 채 조준
한다. 그 직후 상층 플로어에 엎드려 있던 자주지뢰가 그 <저거노트>로 달려들었
다.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에 주의가 간 틈을 타는, 완벽한 타이밍.
『앗……?!』
거기까지를 우연히, 보고 있던 라이덴이 간발의 차로,<베어볼프>가 소사한 한 뭉
치로 비상한 중기관총탄이 자주지뢰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그대로 두 동강 낸 뒤
날려버린다.
뒤이어 미끄러져 떨어진 <그라우볼프(근접엽병형)>도, 역시 직전에 위기를 깨달은
듯 <언더테이커>가 포격해 격파. 등 부분의 미사일에 유폭하여 산화했다.
과연 허를 찔렸는지, <저거노트>의 광학 센서는 그 폭염을 응시하고 있다.
『……미안, 둘 다. 덕분에 살았다……』
“아니야 조심하라고”
반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듯 고개를 숙인 신이 휘하의 전대와 유트와의 지각동

126
조를 다시 연결한다. 평온한, 그러면서도 위엄이 살아 숨쉬는 소리가 전장을 건넌
다.
『각기. 적 요격 부대에 자주지뢰를 확인. 소형으로 간과하기 쉬운 기종이다. 데이
터 링크에 너무 기대지 마. 경계를 엄중히』
본래대로라면 말할 것도 없는 당연한 주의를 새삼 촉구하며 평온한 음성으로 문
득 그들의 저승사자는 덧붙였다.
『작전시간은 그렇게 느긋하지도 않지만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1층 제 3플로어 북동블록의 마지막 적 소대를 격멸하고, 마침내 제 1층의 제압이


완료된다. 신이 인솔하는 스피어헤드 전대를 대신해 유트 휘하의 썬더볼트 전대
가 제2층으로 진출, 제2층 제 1플로어의 공략을 시작한다. 그 사이에 앙쥬의 <스
노우위치>를 포함해 스피어헤드 소대는 소비한 탄약을 보급한다.
경계 부대를 1층과 3층에 남겨두고, 일단 2층까지 내려간 그녀들 아래로, <저거
노트>를 추종하기 위해 와이어 앵커를 4기 증설된 <스캐빈저>들이 천천히 올라
간다.……맨 먼저 도달한 <파이드>가 즉시 <언더테이커>에 서둘러 달려간다.
이 요새는 수평방향은 광대하지만 수직방향으로는 꼭대기에서 최하층까지 100여
미터, 킬로미터 단위의 유효사거리를 가진 대전차포와 중기관총, 대전차미사일 하
물며 본래는 대공포인 40밀리 회전 기관포에 있어서는 지근거리 범주다
전투를 교대하고 보급과 휴식의 시간이라 해도 정신은 뺄 수 없다. 방심없이 위
쪽으로 광학센서를 향하는 <저거노트>의 군중, 문득, 샤나가 입를 열었다.
『역시 조금, 생각 하게 되네.』
정해씨족들에게 뼈저리게 느껴졌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자랑 같은건 언제,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다고해도
『그렇게 눈앞에서 그것도 버젓이 잃어버리면. 그렇게 되면 우리 에이티식스는 어
떻게 될까…저 사람들처럼, 그래도 웃을 수 있을까, 라고…』
눈썹을 기댄 것 같은 생각하기를 거부하듯이,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크레나
가 잘라 버린다.
『샤나. 그런 거 지금 생각할 거 없어.』

127
『그렇다면 언제 생각할까?』
응수당한 크레나의 말문이 막힌다.
반쯤 사고에 잠긴 목소리로 샤나가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생각을 많이 안 했던 것 같아. 자존심을 잃는다면 싸울 수 없는
상황이 될 지도 몰라, 설령 이겨냈다고 해도 말로는 레비치 요새의, <시린>의 시
체더미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싸울 수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는 생
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것은 이 작전으로 그렇게 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으니까.
그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야, 샤나. 신경 쓰이는 건 알지만.』
어이없다는 듯 시덴이 끼어들었고 앙쥬도 고개를 끄덕인다. 말대로 이곳은 전쟁
터다.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하지만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고, 그리고 아마, 샤나의 말이야말로 사실은, 옳은
것일 테니까.
싸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에 필요 없는 사고나 감정을 잠재우고,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전쟁터에서 사는 것 이외를 생각하지 않게 되고.
『그래, 나중에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이 작전이 끝나면 바다를 보면서라도』
그 때는 나중에라든가……변명할 수 없는 시간을 골라서.

항공기보다 큰 <레긴레이브>의 고출력과 이동성은 이 요새에서 수평 이동을 하


기에는 조금 과한 편이다. 신은 <언더테이커>를 조종하면서 무리하지 말자고 생
각했다.
마천패루 거점 내부는 어느 층에나 수평 발판이 플로어밖에 없다. 연속되는 삼각
형의 세 변 외에는 거대한 나락이 활짝 열린 상태다. 플로어 위를 똑바로 질주하
면 좋지만 옆으로 뛸 때는 인접한 비스듬한 플로어에 정확히 착지해야 하고 그
플로어까지의 거리는 일일이 확인해야 안다.
섣불리 평소처럼 감각으로 도약하면 발판을 뛰어넘으면 스스로 나락으로 뛰어들
수 있고 제동거리도 플로어 폭의 사정으로 잡기 어렵기 때문에 아무래도 짧은 도
약이 기본이다. <레긴레이브>의 본질인 날아다니는 제비 같은 질주가 이 전쟁터

128
에서는 발휘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직적 이동에 고출력과 고기동성은 큰 무기다.
시야의 가장자리, 철골을 짜서 만든 듯한, 요새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 안에서. 적
이 있으면 그의 이능은 이미 파악하고 있던 그 자리에, 철색의 거구가 일어선다.
그 자체로 흉기가 달린 팔각의 쇠말뚝. 장갑에 두툼하게 갑옷을 입은 포탑. 특징
적이고 위압적인, 싫을 정도로 익숙한 ­20밀리 활강포. <뢰베(전차형)>
...대부분의 고정식 포를 운용하고 있지만, 특히 튼튼한 구조물을 갖춘 이곳이라면
중량급 <뢰베(전차형)>도 배치할 수 있었던 건가.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는 하나,<뢰베(전차형)>을 배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구조재가 복잡하게 얽힌 기둥 속이다. 터뜨리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
발사되는 고속철갑탄을 피해 발판으로 하고 있던 플로어에서 스스로 굴러떨어지
지 않도록 한 단계 아래의 제3층 제1플로어로 피한다. <뢰베(전차형)>을 포함하여
기갑무기의 상당수는 위아래로 포를 겨누는데 서툴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조
준할 수 없는 아래쪽에서 <언더테이커>가 거의 한 번에 최고속도에 이르는 급가
속으로 <뢰베(전차형)>가 잠재된 기둥에 도달한다.
질주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수직 구조체에 다리를 걸어 그대로 곧장 뛰어올랐
다.
<뢰베(전차형)>의 포탑이 회전하였고, 회전된 포구를 구조재를 발로 차 비스듬한
도약으로 피하고 다른 구조재를 더욱 수직으로 질주한다. 순식간에 <뢰베(전차형)>
의 위쪽으로 점위, 트러스 구조의 틈새를 몸을 비틀어 빼내며, 좁은 장소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는 그 포탑으로 날아갔다.
병장 선택. 다리부분 57mm 대 장갑 파일 드라이버. 격발.
격진
전자파일에 맞아 경련된 <뢰베(전차형)>이 한 박자 뒤로 퍽 쓰러진다. 전달된 진동
에 외벽 패널이 지르르 울렸다.
단말마의 절규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그만,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발을 헛디디면 곤두박질치는 높은 곳의 전쟁터 전투다. 평소 거리 역시 신경을
쓴다. 3층, 3플로어 2플로어 진출했지만 꼭대기까지는 4 층.
머리 위, 층의 연결을 올려다보면, 의식의 어딘가가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언제

129
까지나 날이 새지도 않는 희미한 푸른색 속의 겹치는 무수한 기하학 무늬. 외벽
을 덮는 반투명 패널과 정확한 육각기둥 통 모양의 요새 형상도 어우러져 만화경
속으로 빠져든 듯한 광경이다.
끝없는 연속을, 그 끝없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들겨 맞은 기분이 든
다.
어차피 눈앞에 있는 것조차 사실은 전부는 인식할 수 없는, ……날벌레와 같은,
자신의 왜소함을.
……인간이란, 이 세계에는.
문득 깨어난 86구에서 찌든 사고가 뇌리를 스쳤기에 머리를 흔들어 내쫓았다
.……<스텔라마리스>에서 들은, 이슈마엘의 말 때문인가. 이 작전을 끝으로 정해
라는 민족의 역사와 긍지를 잃는 그들. 에이티식스도 언젠가 그럴지 모른다고 마
치 들이대듯.
그 함장은 그럴 생각은 없었겠지만.

푸른 공간과 그림자, 머리 위와 발아래의 기하학 무늬. 철색을 한 무수히 많은


<레기온>
가도 가도 전혀 바뀌지 않는 광경에 세오는 왠지 어질어질해진다. 지금 어디까지
갔지?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 동안 싸우고 있는 거야?
끝없이 이어지는 허상의 공간, 무수한 거울이 늘어선 거울의 지옥에, 헤매는 것
같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자신이 어디까지 나아가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디
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공간에서 자신의 형태도 금방이라도 잃어버릴
것 같은 이런 세계에서.
나는……

『노우젠, 네 번째 층이야. 교대하자!』


『그래, 부탁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썬더볼트 전대가 달려와 있고, 다음 층으로 향하지 않

130
으면 안 된다고 세오는 생각한다. 그 썬더볼트 전대와 그들을 이끄는 유트가 갑
자기 지각동조를 연결한다.
『릿카? 교체다 내려와』
“어라?”
지시를 못 들어서 다시 되묻고, 그제서야 세오는 정신을 차린다.
“……미안”
각 층의 제압은 세 계층마다 신이 이끄는 스피어헤드 전대와 유트 휘하의 선더볼
트 전대가 번갈아 담당한다. 탄약과 연료 보급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인간의 집중
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신과 같은 스피어헤드 전대에 속한 세오는 당연히 선더볼
트 지대의 전투 동안에는 교대로 물러나게 된다.
조금 황급히 진로를 연 세오에게 문득 유트가 말을 이었다.
『어느 전승에서는 사람을 초월하려는 자는 탑을 올라간다고 하나봐.』
“응?”
『세계의 끝에 있는 탑이야. 나선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으며 계단을 올라갈 때마
다 감정과 욕심, 악심과 오뇌를 버리고 정상에 도달할 때는 대략 인간의 모든 고
뇌를 벗어 던지는.』
뜬금없이 무슨 얘기를
“유트, 혹시 혼란스러워?”
말하고 나서 눈치챘다
반대였다, 동요하고 있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한, 잡담이다. 듣고 말았다. 작전 중
에 할 얘기가 아니야 하고 그냥 내뱉는 것도 아니고.
……나선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모든 고뇌를 잘라버린다.
그것은 마치 행복의 기억을, 압도적인 적과의 사투,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나 비
분을 생물로서의 당연한 생존욕구마저도 깎아내리면서 싸웠다.
예전에 에이티식스가 갇혔던 86구 같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학 센서의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유트가 말한다.
『아. 아까 이야기 때문일 테고, 이 탑은 그것이 생각난다.』
그것은 정말로,……유트의 일인가.
거울 너머로 거울이랑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세오 자신은 봉쇄하려고 했던

131
동요와 의심을, 유트가 비추어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세오는 기억한다.
『86구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잠깐 생각했다. 만일 올라간 게 에이티식스라면
이겨낼 자부심을 버리지 못하고 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랑조차도, 잘라 버
리는 것일까, 라고』
언젠가 죽을 때. 여기서 죽는다면 이겨낸 자랑은 적어도 이 손안에 있을 거라고.
그것도 정해씨족들처럼.

쿨럭, 하고 바다가 울렸다.

아래에서 들린 듯한 목소리에 신은 눈을 깜빡인다.


사람의 목소리와도, 지금까지 들은 <레기온>의 목소리와도 다른 탄식. 기계의 말
도 사람의 규환도 아니다 비슷한 것도 모르는 그냥 이질적인 목소리
아래.
“바닷속……인가?”
돌입부대의 현재 진출 위치는 제4층, 그 최하층인 제4층 제 1 플로어는 썬더볼트
전대가 전투중이며, 신과 그의 휘하 스피어헤드 전대는 제4층 제압이 완료되는
대로 제5층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기다리고 있는 정상으로의 진출을 대비해
제3층에서 마지막 보급을 받고 있다
제압된 제3층에는 적의 그림자는 없지만 머리 위 제4층에 아직도 북적대는 적기
군과 제5층 밑면에 겨울잠을 자는 나비들의 날개에 떼지어 모여드는 <아인탁스
플리게(방전교란형)> 무엇보다 그 은빛 날개가 방해되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꼭
대기의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을 경계하며 지나쳐온 아래로 의식을 돌렸다.
이 폭풍우 속에서는 내다볼 수 없는, 그렇지 않아도 아득히 밑바닥까지 꿰뚫어볼
수 있을 만큼 얕지 않은 어두운 깊은 바다. 지상과는 다른 형태의 세계. 빛과 대

132
기가 아니라 물과 어둠이 지배하는 피가 차가운 생물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기분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레나. 바닷속의 색적은 할 수 없습니까? 왠지 무언가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닷속 말인가요? - 확인할게요”


이에 레나는 이슈마엘에게 눈을 돌린다.
간단하게 요망을 전하면, 소나에는 현재, 반응은 없지만 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면
서도 수긍한다. 대기 중 처리도 전파가 감쇠되기 쉬운 수중에서는 레이더가 도움
이 되지 않는다. 소리의 반향을 이용해 먼 적함이나 심해에 숨어 있는 원생해수
의 위치를 알아내는 소나가 바다 속에서는 색적의 주류다.
지시를 받은 소나실에서 응답이 돌아온다.
『형님. 원생해수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꽤 멀지만…… 그 탓이 아닌지?』
“진짜냐?”
이슈마엘은 나지막하게 신음한다. 이번에는 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한편, 힘겹게
하늘을 쳐다보자 눈이 부셨다.
“이렇게 코앞에서 시끄럽게 한다면 기분 나쁠텐데. 지금은 안 된다. 제발.”

“원생해수, 입니까? …과연 그 목소리를 <레기온>이라고 오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레나를 거쳐 돌아온 대답에 신은 눈을 깜빡인다.
나의 이능이 포착하는 것은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 죽어서도 살아남는 망령들의
생전 마지막 말과 사유다. 생물인 원생해수의 울음소리와 혼동될 것 같지는 않지
만.
그렇다고 다르다는 확증도 없다. 원생해수의 소리는 선단국군에서 처음 해안을
찾았을 때, 멀리 희미하게나마 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바다는 저 해안에서는
수백 km나 저쪽이다. 그 소리가 그렇지만 뭍까지 닿는다면, 혹은 원생해수가 발
하는 '노래'는 소리라기보다는 <레기온>의 한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133
“-네, 그렇지만 계속 경계를.”
『네. 그건 원래보다 그……대위야말로 몸조심 하세요』
빠르게,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로 덧붙여진 말에 한번 눈을 깜빡였다.
『침공 페이스가, 예정보다 훨씬 빨라요. 만약, 무엇인가 초조해하고 있다면』
“……아아”
<모르포(전자가속포형)>과의 포전이 시작되기 전 이슈마엘의 이야기인가.
시간은 그로부터, 몇 시간 정도 지났기 때문에 누구나 겉으로는 침착하지만 사실
몇몇 사람은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고 지휘권을 가진 신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
래서 의식적으로 주변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고 있었지만 협착된 시야에서 싸우지
않도록 반복해서 있었는데, 그럼에도 신중하지 못했던 걸까.
“알겠습니다. 작전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피로가 몰려올 때이니. ……조심하
도록 하겠습니다.”
『저, 결코 당신의 지휘를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레나. 적어도 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연합왕국 때처럼 현혹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댈 곳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보여준 것과 같다. 아마 이슈마엘은 그럴
생각도 있었던 것이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변하
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걱정해야 할 것은 이 작전에서는 자신이 아니라.
잠시 생각하다가 무전을 모두에게 바꿔놓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원생해수의 뼈, 니콜이었나요. 사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본 적이 있습니
다.”
갑작스런 화제 전환, 그것도 작전에는 무관한 잡담이다. 레나는 미심쩍은 듯 고개
를 끄덕이는 기색이다.
『네…』
“이 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계기가 돼 연구쪽에 진출했을 것이라고는 생
각했어요. 어렸을 때는, 남들처럼 괴수 같은걸 좋아했으니까.”
레나도 헤아린 것 같다. 애써 새침한, 놀리는 말투를 만들어 은해준다.
『알고 있습니다. 신이 86구에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보내온 엉터리 전투보고서

134
로, 마지막에는 쓰기가 곤란했겠지요. 옛날 애니메이션 괴수와 싸우고 있었으니까
요』
예상 밖의,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신은 이상한 신음을 토해내고 만다. 그러고 보니
어차피 핸들러는 읽지 않는다고 매회 사용하던 건의 보고서는, 진지하게 쓸 생각
은 조각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내용이 엉터리인 것이다. 처음 썼을 당시는 종
군직후로 11살인가 그 정도였던 것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뭐랄까, 머리를 싸매
는 듯한 진품이다.
『보고서, 지금은 잘 쓰고 있나요?』
“쓰고 있습니다. 라고 할까, 읽고 있겠지요. 설마 종이비행기로 가지고 노는겁니
까?”
『언제까지나 날아가는 것은 내용이 얇고 가벼워 형편없는 보고서라고 판단합니
다.』
“너무하네요……”
이쪽 전대와 대장격만 연결한 지각 동조 저편에서, 몇 사람이 실소한다. 덕분에
긴박감이 약간 풀린다.……자신답지 않은, 잡담의 효과는 있었던 건가.
『……조심하세요』
“예”

세오는 특이한 잡담에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예상대로 과도한 긴장감, 열정, 동
요는 작전에 해가 되며, 그럴 때 가벼운 잡담이나 웃음은 유용한 대책이다. 그렇
지만 설마, 저승사자 신과 고지식한 레나가.
이들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유트에게도 비슷한 잡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려 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했다.
“참고로 말인데. 신, 리토와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
미묘하게 사이가 벌어진 것은 아무래도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인 것 같다.
“가보는게 어때? 연구쪽. 지금부터라도 리토와 함께”
『연구는 뭐 나쁘지 않을지 모르지만. 리토의 부적은 이제 싫어』

135
“킥”
낄낄거리며 웃고는 그대로 계속했다.
“신은 말이야”
가벼운 대화의 연속으로서 말하려 했지만 그렇게 잘 되진 않았다.
“정말 이 작전에 — 와도 괜찮은거야?”
힐끗 <언더테이커>의 광학 센서가 이쪽을 본다.
그 너머, 같은 색채의, 그렇지만 같은 무기질함은 꽤 불식된 핏빛 눈동자를 생각
했다.
신은 변했다.
살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행복해지고 싶다고 빌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전쟁으로 헤어져 버린, 만난 적도 없는 조부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86구의 전쟁터에서, 누구라도 구해줬지만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 저승
사자였을 그를 유일하게 구해 준 울보 핸들러에게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전할
수 있었다.
아직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나와는 달리.
“아직 우리랑 같이 싸우는 거라든가. 아직 전쟁 같은 거 하면서, 프로세서 그대로
인 지금이 정말로 좋은거야? 이제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말하면서 눈치챘다.
아니
싸우지 않아도 돼,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다.
왜냐면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자부심 말고는 아무것
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전쟁터 말고는 살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쟁터 따윈 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쟁터에 있으면 뺏기고 만다. 이슈마엘이, 정해함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것이 아무리 소중해도 아무리 애써 껴안고 있어도 코웃음치듯 쉽고 어이없이 빼
앗기고 만다.
뼈저리게 느꼈는데 86구를 나와 어느새 잊어버렸다.
최후까지 싸워낸다는,……그것밖에 없는, 자랑.

136
그런 것은 불확실하다.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 빼앗기지 않는 것은 이 세계에는
없다. 오히려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
그렇다면 적어도 신은. 너만이라도
뺏기기 전에 또 잃어버리기 전에
전대장처럼 잃어버리기 전에
“전쟁 따윈 넌 그만해도 돼. ……잊어도 이젠 괜찮으니까.”
에이티식스에게는 모욕일 수도 있다, 적어도 세오 자신이 들었다면 분명 심하게
분노했을 것이다.
신은 조그맣게 웃었다.
『세오. ……지금 그 말,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 하고 싶었던거지?』
뜨끔하고 세오는 경직된다.
신에게 전대장을 겹쳤던 걸. 사실은 전대장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어느새 그에게
하고 있었던 것을 간파 당했다.
지각 동조는 어느새 자기 혼자만 이어지고 있다.
『그래, 그 말대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자랑밖에 없다고는 이제 말하지
않고, 전쟁터 이외에 있을 곳이 없다고도, 더이상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싸
우지 않으면 가고 싶은 곳에 도달할 수 없고,…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부끄러워지
면서 까지 살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잖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함대사령관(아버지)에게 미안하니까.
『그러니까 ……—』
느닷없이 지각 동조 대상이 한 명 늘어나면서 무기질하게 평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우젠. 제4층, 제압 완료했다』
갑자기 신이 입을 다물었다.
다음 순간 지각 동조가 이어진다. 세오에서 그의 휘하 전원에게.
응하는 목소리는 이제 그 개인이 아니라 기동타격군 전대 총대장으로서.
어딘가 멀게 느껴지듯
『그래. 전원. 이제 꼭대기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 공략에 들어간다.』

137

적 부대가 드디어 눈 밑으로 진출했고 교전 거리까지 파고들었다.


그렇게 <모르포(전자가속포형)> 은 그 내부에 숨어 있는 망령은 씹는다. 이 방위 기
능의 사용은, 거점의 운용 목적을 감안하면 피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완성되
기 전에 파괴되기라도 하면 본전도 못 찾는다.

《콜라레 원으로부터 콜라레•신시시스. - 방어 메커니즘의 최소 사용》

시야의 가장자리에 폭발 볼트가 작동하고 고정돼 있던 철골 플로어가 모두 떨어


진다. 요새 꼭대기의 바로 아래 4층 3플로어의 레이스 아니면 만화경 같은 바닥
면의 그 모든 것이
“뭐야…?”
그곳에 앵커를 걸고 방금까지 4층 3플로어로 진출했던 <언더테이커>의 칼날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낙하한다, 마찬가지로 4층 3플로어에서 그들의 전진을 엄
호하던 유트 휘하의 썬더볼트 전대까지.
계속해서 그 아래 4층의 2 플로어 역시 폭발 볼트가 작동해서 붕괴된다.
4층 1 플로어의 전대가 황급히 기동 옆으로 다가가 또 3층으로 뛰어내려 착지를
위한 공간을 뚫는다.
비처럼 퍼붓는 철골들을 간신히 피하면서, 4층 2플로어 벽면에 경량의 <알카노스
트> 만이 달라붙어 남는다.
4층 3플로어 위로 뛰어오른 그 순간의 붕괴였기에 자세가 나쁘다. <언더테이커>
의 자세를 공중에서 제어하며 어떻게든 4층의 제 1 플로어의 플로어 중 하나에
착지한다.
“………!”

138
고기동 전투용으로 개발되어 <바나르간드>에 비해 강력한 충격 흡수장치를 탑재
한<레긴레이브> 라고는 해도 예상치 못한 붕괴와 추락이다. 되돌아오는 충격에
한순간 의식이 가셨다. <언더테이커>의 다리가 멈춘다.
주위의 <레긴레이브> 또한 무리하게 앵커를 감아 착지했을 때의 충격에 숨이 막
힌다.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모습.
그 틈을 타 <아인탁스플리게(방전교란형)>의 은색 망사를 유연히 쪼개 회전식 기관
포가 들여다본다. 원래는 대공병장인 여덟 기가 아득히 아래쪽 해면으로 향한다.
하늘과 바다 사이, 이상하게 걸음을 멈춘 네 발의 거미떼.
게다가 주위의, 요새의 외벽을 따라 무엇인가가 강하하는 것을 신은 듣는다. 플로
어의 붕괴 사이에 동결을 해제해, 눈을 뜬 무엇인가. 레이더에도 광학센서에도 잡
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거기에 망령이 있다고 들을 수 있었다, 기계장치의
망령의…….
아드레날린의 작용으로 느리게 느낀다. 하지만 눈 한 번 깜박거릴 정도의 시간.
차마 그렇지는 않지만 피할 수 없다. 눈만 허공이고 모터로 회전을 시작하는 기
관포를 올려다보고.
『—이얏』
『뜻대로』
그 직후에 제4층 제3플로어에서 <알카노스트> 8대가 스스로 뛰어내리며 <저거
노트>와 회전 기관포의 사선상에 끼어드는 궤도로 낙하한다. <알카노스트>의 기
체는 특히 작지만, 기관포탄이 다 퍼지지 않는 총구의 지근에 충분히 <저거노트>
를, 감싸주는 위치에서
『여러분, 그럼 다음에』
회전 기관포가 소사된다.
40밀리 기관포탄의 막대한 파괴력에 찢긴, <알카노스트>의 가냘픈 기체가 콕피
트 속 <시린>을 통째로 갈기갈기 찢는다. 자폭용의 고성능 폭약에 유폭해, 수기
가 산화하고 간신히 회피 행동으로 옮긴 <저거노트>의 흰 장갑을 붉게 비추었다.

139
추락한 <저거노트>는 물론이고 기관포 소사에서도 이어진 열선의 사폭에서도 벗
어났다.
올려다보고 무심코 휴우 하고 숨을 쉰 후, 레나는 씁쓸하게 입술을 뗐다. 그것으
로 좋다고 그녀들은 말하지만,……레나로서는 익숙해져 좋은 희생이라고는 생각하
고 싶지 않다.
“비카, 죄송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상관없어. 저것들의 역할이야.』
전투는 아직 속행중이다. 쓸데없이 시간낭비하지 말라고 언외에 포함한 짤막한
말만 되풀이된다.
'“지금의 함정은”
『다음은 없을거다. 몇 번이나 할 수 있다면 원래,<저거노트>가 돌입한 단계에서
하고 있었겠지』
……견해는 같은가.
이 마천패루 거점은 레일건의 포진지다. 그것도 높은 탑 형상으로 때로 맹렬한
폭풍우에도 휩쓸리는, 가릴 것 없는 해상이다. 옆의 힘을 견디는 대들보를 떨어뜨
리면 그만큼 옆바람에 약해진다. 레일건의 명중 정확도를 유지하기 위해 허용할
수 없는 악조건이다.
그렇게 용이하게, 플로어는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제 2의 불명기의 공격이 귀찮을 것이다.……그쪽의 해석은 맡는다. 베라,
야니나, <저거노트>가 피할 수 없을 때는 자기 판단으로 커버에 들어가라』
인간이 아닌 <시린>이지만 단순한 행동이라면 핸들러의 관제 없이도 실행할 수
있다.
소대장격의 기계장치의 소녀들에게 자율 행동을 명하고, 비카는 아무래도, 해석을
위해서<가듀카>의 시스템을 시작한 것 같다.
『레르케. 일단 내려서 <찌카다>를 전개해서. ……전부 관측해라』

휘몰아진 폭풍에,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의 약한 나비의 날개는 펄럭이며 풀


이 휘날리듯 일제히 하늘을 날았다. 그 짜임새 있는 베일이 한순간 벗겨진다.

140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위용이 한순간 <레긴레이브>의 앞에 드러난다.
기본적인 형상은 1년전 신이 가까이서 본 그대로이다. 하늘에 펼쳐진 은실을 짠
두쌍의 날개가 검은 황천에 푸른 광학 센서가 도깨비불처럼 뿌옇게 뜬다.
장갑 모듈을 늘어놓은 용의 비늘 같은 칠흑 같은 장갑. 전체 높이 10미터의 올려
다볼 정도의 거구. 그리고 무엇보다 특징적인 한 쌍의, 지금은 한쪽이 아직 부러
진 채로 있는 창과 같은 포신.
천둥치는 천공과 사나운 비바람과 어울려 바다에서 나와 하늘에 도전하는 악한용
과 같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두 날개의 날개 사이로 뻗어나가는 네 대 여덟 개의 강철
다리이다.
은색 실의 중심에 앉은 거미의 길고 요염한 다리 같다. 병들어 날개가 빠진 새의
날개와 같은 그 끝에 40밀리 회전 기관포를 번쩍이게 하는 건 마운트 암.
기관포가 회전하며 각각 다른<저거노트>를 향해 조준한다.
소사
비스듬히 베어넘긴 철갑탄의 폭풍을, 이번에는 피하며 <저거노트>는 산개. <저거
노트>가 타기에는 아슬아슬한 폭의 철골이지만, 1층부터 이 4층까지의 전투로 슬
슬 익숙한 같은 삼각형의 패턴이다.
신 또한 작은 도약으로 <언더테이커>를 대피시키고 소사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제동하고 반격을 위해 <모르포(전자가속포형)>에 조준을 맞춘다.
꼭대기 층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다 - 그러나 소리도 들리지 않는 허공에서 갑자
기 화선이 뿜어져 나왔다.
“윽!?”
사격을 취소하고 옆의 다른 플로어로 옮긴 후 <언더테이커>는 일직선에 육박하
는 그 죽음의 창을 피한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추가공격의 전조이다. 다리를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보로 도약하는 순간, 뒷 방향에서 40mm 기관포탄 사격을
받고 떨어진다.
계속해서 이쪽도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신음과 오열의 소리를 지르며 미끄러져
내려온 적기군이, <언더테이커>를 둘러싼 위치로 점위한다. 공간을 수평으로, 격
자에 새기듯이, 붉게 반짝이는 열선을 사폭. <바이젤(자동공장형)>의 자기 호위기,

141
<비네(공격자기형)>.
“쳇...”
와이어 앵커 아래쪽, 제3층 3 플로어에 매달려 수직낙하 형태로 회피하며, 혀를
한 번 차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비네(공격자기형)>.도 그렇지만 회전기관포 사격도
몇 개는 보이지 않았다. 이쪽도 역시.
옆에서 시오가 작게 신음한다.
『광학 위장.』
가시광을 포함한 전자파를 산란시켜 굴절시키는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을 입
어, <포닉스(고기동형)>에 실현되고 있던 광학적, 전파적인<레기온>의 「투명화」기
술.……같은 기술을 고기동형 이외의 다른 병종도, 마침내 응용해 왔다.
회전기관포의 사격의 고열에, <비네(공격자기형)>.의 열선에 타버린 나비의 날개 재
가 아슬아슬하게, 꼭대기 바닥면의 철골에 무리지어 내려오는 <아인탁스플라게(방
전교란형)>의 일부가 내려와, 재가 태어나는 근원에서 당돌하게 사라진다.……미채
를 낳는 무리와 합류해 불타 없어진 부분을 보충한다.
반격을 위해서 기관포를 향하지만 쏠 수 없고, 반대로 회전 기관포에 조준되어
물러나면서 라이덴이 씁쓸하게 흘린다.
『안되나? 귀찮은 둥지에 틀어박혀선』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진좌하는 꼭대기와 그 밑의 4층 사이, 사폭 후 <공격자기
형(비네)>이 도망친 끝인 정상의 저면은 그곳만이 겹겹의 강철보가 철창이나 방벽
위로 복잡하게 걸쳐져 있다. 직선적으로 날아가는 전차포, 기관포의 사선은 이래
서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공격자기형(비네)>도 사폭 때 이외는, 나오지 않을 생각이야. 귀찮게 됐네.”
이어 앙쥬가 탄식한다.
탄식의 소리가 들리는 이상, 광학 미채에 숨어있더라도 신에게는 <비네(공격자기
형)>.의 움직임은 쫓을 수 있다. 쫓을 수는 있지만……수가 너무 많다. 사폭 때마
다 전원에게 경고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게다가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회전 기관포에 대해서는, 기총 하나하나에 제어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쪽은 움직임조차 간파할 수 없다.
……회피의 타이밍만이라도, 어떻게든 경고할 수 있을까.

142
어중간해 보이는 만큼 아무래도 주의를 끌리게 되는 위장 없는 8기의 회전포를
바라보면서 이 전투에서는 문자 그대로 생명줄이 될 와이어 앵커의 표시에 이상
이나 경고가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공격자기형(비네)>의 움직임은, 모두는 쫓을 수 없다. 기관포에 이르러서는 그 움
직임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회피만 시키면 전력은 유지한 채 시간을
벌고 정보가 모아지면 그 시간으로.
“레나”

“…예. 광학 위장술에 대해서는 제가.”


연방군복 아래 걸친 <찌카다>를 은은히 비추며 레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 이
를 위해 돌입부대의 기수를 줄이면서까지 데려온 포병사양기다.
단지, 요새를 덮는 외벽 패널이 의외로 튼튼하고, 포병 사양의 <저거노트>의 88
밀리 캐니스터탄 정도로는 파괴할 수 없다. 정상계 상부의 차폐, 대형의 포탄을
막기 위한 덮개는 빠져 나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화력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
에…….
그러면서도 이슈마엘과 에스텔이 나지막하게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돌입 부대의 고전에,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안타까운 것일 것이다. 데이터 링
크로 공유되어 홀로 스크린에 비춰지는 요새 내부의 영상을 보면서, 빠르게 작은
소리로.
“엄호사격은, <스텔라마리스>의 주포 사격을 해도 안 될까?”
“아마 관철하기에는 부족할 겁니다. 게다가 지척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우군오발이
라도 된다면.”
“<레긴레이브>의 장갑으로는, 오발은 아니더라도 40센치 유탄은 안될 것 같
고……주포 이외라면 어때?”
“파룡포를요? 이 거리와 바람 속에서 말입니까?”
“……미안, 더 무리군.”
바람………바람!!
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겉으로는 어렵다고해도.

143
“함장님,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텔라마리스>의 주포를 빌려주세요.”

레나의 방안을 자각동조 너머로 듣고 이어서 <챠이카>의 광학 센서로 기록시킨


<공격자기형(비네)>의 사격 패턴을, <가듀카>의 홀로 윈도우에 비추며 비카가 말
한다
“이쪽의 해석은 좀 더 데이터가 필요하다. 노우젠, 크로우, 미안하지만 잠시만 버
텨다오”
에이티식스의 그들이, 이제와서 이 정도의 엉터리 주문에 불만을 가질 리 없다.
신도 유트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조차 하지 않고 대신 레나가 계속한다.
『해석하는 대로 반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보고를 — 유트, 신』
명하기 전에 역전의 86구의 부호들은 선뜻 응한다.
『먼저 회전기관포와 <비네(공격자기형)>.이겠죠?』
『회피를 우선시하고, 그런 생각으로 배치해 두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 보이지 않는 탄막과 사폭에 노출될지 모르는 극한의 긴장감,


게다가 발판에 늘 주의를 기울이며 여기까지 등반하며 의식하지 못한 채 쌓였던
신경의 피로감은.
퇴로를 잘못해 사격을 받아서, 바로 근처의 동료의 기체의 존재를 실념해 충돌
혹은 발을 헛디뎌서 아래층으로 추락하는 전사자와 부상 탈락자 수는 점점 늘어
난다. 그 모습에 크레나는 꽉 깨문다.
자신의 역할은 동료나 신을 위험하게 하는 적기의 배제다. 그야말로 이런 그물눈
도 피해 <모르포(전자가속포형)>같은 고가치 목표를 포착하는 것이, 저격포를 장비
하며 <건슬링거>에게 기대되는 역할로 신 곁에서 계속 싸우기 위해 자신이 갈고
닦은 기능이었을 것이다.
그럴 텐데도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을 조준하는 것조차 아직 크레나는 할 수 없었
다.
마음만 조급해진다

144
보이지 않는 사격이 거추장스럽다. 합계하면 아무래도 24기가 있는 듯한 회전기
관포의 파상 공격과 요새의 외주에서 수평 격자를 그려 중앙에서 전방위로 방사
상으로, 꼭대기의 바닥면 전체에서 수직으로, 한 방향에서 사선의 각도로 랜덤하
게 조준되는 <비네(공격자기형)>.의 열선.
둘 다 수가 많고 사격 범위도 넓기 때문에 회피에 전념할 수밖에 없고 신도 아
무래도 경고가 먼저다. 강철 보에 틀어박히는 동안에는 어설픈 포격에 지나가지
않는다. 반격할 수 없다.
바싹바싹 초조가 뱃속을 태운다.
나는, 동포인데. 신과 같은 언제까지나 같은 에이티식스인데.
싸우는 사람인데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가르쳐 준 사람이 오늘 그들 자신의 긍지를 잃는 것을 못 들은 척했다.
시덴의 <키클롭스>를 쫓으려던 회전기관포의 조준이 갑자기 정지하고 <건슬링
거>로 바뀐다. 어두운 포구가 노려보고 나서야 크레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145
146
숨을 삼켰다. 회피는 늦었다. 단지 앞으로의 충격을 예견하며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내려치는 어마어마한 88mm 전차포의 포호와 함께 회전 기관포의 측면에 착탄.
불을 뿜어낸 회전 기관포의 기능 정지되고 다음 순간에 곤충들이 다리를 자르듯
분리되어 연기 꼬리를 끌며 떨어진다.
쏜 것은 — <언더테이커>.
신.
“괜찮아? 크레나”
귀에 익은 그의 평온한 목소리가 물어오자. 크레나는 숨을 쉬었다.
뭐랄까, 너무 안도한 나머지 눈물마저 나왔다.
그래, 분명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든, 반드시 지금처럼 어떻게든 될 거다. 그녀의 저승사자는 이렇게, 결
코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괜찮아.
“응!”

드물게 노골적인 함정에 걸려든 <건슬링거>에 대한 엄호가 간발의 차로나마 시


간에 맞춰진 것을 확인하고 신은 작게 숨을 쉰다.
그의 이능이 포착하는 탄식은 물리적인 음성이 아니다. 레이더 탐지처럼 한꺼번
에 데이터링크에서 모든 기기와 공유할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게 처음 느껴졌다.
<레기온>의 위치를 알아들을 수 있어도, 공격의 타이밍을 도모할 수 있어도, 그
것만으로는 전원은 도와줄 수 없다. 그게 싫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프레데리카와 똑같다.
기적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다. 그 이상으로 그녀를 희생시키고 싶지도 않고, 하지
만 그 결과로 동료가 죽는 것도 용인하고 싶지 않다.
에이티식스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다.

147
기적을 바라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는 길을, 이룰 수 있다면 선
택하고 싶다.
자신들은 이제, …… 86구를 나왔으니까.

바짝바짝 위 속을 태우는 긴 시간 끝에 드디어 해석완료 보고가 비카로부터 올라


간다. 데이터링크를 통해 통합함교 홀로스크린으로 마천패루 거점의 <저거노트>
각 기에 전송된다.
한눈에 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비카, 화력 구속 및 표면진압장치의 지휘권을 잠시 그쪽으로 넘기겠습니다.”
『그래. 해당 비행기들 모두 들었네. 지금 보낸 대로 조준을 설정하라』
“신, 유트. 전위의 지휘는 그대로. 돌입 타이밍은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포병 대대. 다음 탄환 장전. 총알 유형 ——개인 산탄총”
불에 약한 알루미늄 합금 장갑인 <레긴레이브>가 난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고려
해 소이탄에 더해 가져온 탄약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지휘 아래 있지 않은 정해함대의 사령관을 보았다.
“이슈마엘 함장님”
“그래 맡겨라”
신과 유트, 쌍방에서 배치 완료 보고가 들어온다.
홀로스크린에 마천패루 거점을 내다보고 숨을 한 번 내쉬었고 레나는 그 말을 통
신에 실었다.
“작전 개시.”

마모라면 몰라도 부러진 포신의 교체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다.

148
적 부대의 배제는 아직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대공레이더 이외의 모든 센서와 가지고있는 3대의 24기의 회전기관포를 아래쪽
을 향해 휘하의 <비네(공격자기형)>과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를 지휘 하며 치
열한 사격을 반복하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문득 그 고속의 기관포탄이 연주하
는 규환의 틈새로 이상한 소음을 포착한다.
들릴 리가 없는 희미한 노이즈
<아마이저(척후형)> 이외의 <레기온>의 센서는 별반 성능이 좋지는 않다. 예외 없
이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센서 역시 화력에 비해 빈약하다. 눈앞의 전투에서조
차 거의 마스킹 되어버렸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청음 센서가.

멀리서 울음소리를 희미하게 파악했다

한번 숨을 몰아쉬고 홀로 스크린에 마천패루 거점의 위용을 바라보며 약간 경직


된채 레나는 소리를 지른다.
“작전 개시. <저거노트> 전기 대피.”
“오우”
이슈마엘의 구령에 이어, <스텔라마리스>의 주포, 40센치 연장포 4대가 발사되었
다. 맨몸으로 들이받았다면 부상은 고사하고 내부가 으스러져 즉사할 수도 있는
맹렬한 충격파가 비행갑판을 관통한다. 거리가 가까워 부추긴 포병 사양의<저거
노트>의 비명이 닿아 포탄은 <스텔라마리스>의 함수 방향, 마천패루 거점의 그
위쪽으로 돌진한다.
초속 80미터의 고속으로 거의 바로 위로 비상하여 시한폭탄이 작동.
외장이 터지고 작약에 튕겨진 소형종용이지만 그래도 몇 미터에서 십여 미터의
거구와 장갑을 가진 괴물을 사냥하기 위한 폭뢰가 제4층 외장 패널에 달라붙은
후 폭뢰 작렬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광범위하게 꺾여버린다. 그래.
88mm 유탄은 참을 수 있어도 40cm 유탄은 견딜 수 없다. 그리고.

149
갈라져 부서진 외장 패널이, 그 기세 그대로 안쪽으로 날아간다.
용의 몸을 갑옷으로 삼은 비늘에, 거점 내부를 바람의 폭위로부터 지켜내고 있던
그 파편이 지금까지 방어해 온 폭풍과 함께.
폭풍우가 정면으로 들이치다. 단숨에 침입한 맹렬한 바람에 마천패루 거점의 내
압이 순간적으로 상승한다.
“이 폭풍의 풍압이라면 — 안쪽에서라면 날려버릴 수 있다!”
도망갈 곳을 찾던 풍압이 다음 순간 멀쩡한 외부 패널마저도 제4층 전제 둘레에
걸쳐 거의 폭발과도 비슷한 위력으로 날려버렸다.
부서진 푸른 파편이 요새 주위 바다에 소나기와 함께 내린다. 맹렬한 바람이, 지
금 훤히 지나간 제4층을 휩쓸어 위쪽으로.……광학 미채를 자아내는 <아인탁스플
라게(방전교란형)>의 약하고 여린 나비의 날개는, 이 폭풍에 대항할 수 없다. 에너
지 총량은 크지만 질량 자체는 작은 빔 입자 역시 바람에 밀려 걷잡을 수 없이
흩날린다.
그 간극을 찌르면서.
『포병전대 일제 사격!』
<스텔라마리스> 갑판 위, 포병 사양의 <레긴레이브> 1개 전대의 일제 사격.
대인 산탄을 내장한 캐니스터 탄은 외장 패널이 벗겨진 제4층 측면에서, 혹은 포
물선을 그리며 꼭대기의 더 위쪽으로, 위아래에서<모르포(전자가속포형)>과 그것이
머무는 요새 정상을 향해 다가간다. 공중에서 작렬하는 싸락눈 같은 산탄의 강철
비가, 혹은 거꾸로 섬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창이 꼭대기에 떨어진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 머리 위를 지키는 정상의 꼭대기는 대구경탄의 직격을 막기
위해, 대공포 사선을 차단하지 않기 위해 아래 각 층의 철골을 엮어 만들었다.
40mm 포탄을 통과시키는 그 틈새는 보다 미세한 대인산탄 등 빗방울처럼 훤히
통과시킨다.
펠드레스로서는 최소한의 장비를 가진 <레긴레이브> 장갑에는 물론 장갑 보병의
강화 외골격에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대인산탄은 당연히 <모르포(전자가속포형)>
의 견고한 장갑에는 효과가 없다. 그러나 경량 유지를 위해서 장갑 따위는 사용
할 수 없는 취약한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이라면.
산탄의 폭우와 철골 우리에서는 막을 수 없는 충격파에 날개가 찢겨져 잡히는 다

150
리를 파괴당한 채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 군대는 동료의 기체 위에 머무르
는 법을 상실하고 꼭대기의 바닥면에 부집돼 있던 동류와 함께 폭풍에 날려 보내
진다. 연속적으로 투척되는 유탄의 충격파가 상공에서 새로운 <아인탁스플라게(방
전교란형)>이 날아 내려오는 것을 막는다.
광학 미채에 가려지는 무수한 <비네(공격자기형)>의 16개의 회전기관포가 마침내
드러났다.

『화력 구속 및 표면진압장치 각 기, 조준 보정!』


뒤이어 비카의 지시가 날아온다. 함포사격 이후에는 요새 안과 밖, 동시 작전 진
행이 필요하다. 레나 혼자서는 양쪽의 지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요새 내부, 그
반의 지휘를 그가 담당한다.
기관포나 산탄포, 다연장 미사일을 갖춘 <레긴레이브>는 각각 다른 포격 범위를
할당받고 그 포구 끝에서 폭풍에 시달린 은빛날개가 휘날린다. 사선의 끝에서, 잠
재해 있던 공격자기형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저거노트>를 관철할 만한 열선의 발진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레기온>치고는 소형 병종인 <비네(공격자기형)>은, 보유할 수 있는 에너
지량 또한 작다. 보급도 없이 연속 사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회용의 에너지 팩을 교환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외부로부
터의, 아마도 요새로부터의 공급.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유선 접속되어 있는건지
그렇지 않으면 포격시에만 접속하는 형태인지. 어쨌든 사격 가능한 사점의 위치
는 랜덤으로 한정된다.
<챠이카>의 관측을 바탕으로 해석해 산출한 <비네(공격자기형)>의 사격위치는 <비
네(공격자기형)> 자체보다 훨씬 많다. 그러니까 공격의 순간 그 사점에 들어간다고
는 할 수 없지만, 사점의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그렇다면, 알아낸 사점의 그 모든 곳에 <저거노트>의 포격 범위를 할당하면.
광학적·전파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플로어의 접속 장소나 기둥의 그늘에 자리잡
은 포구의, 그 몇개의 끝으로 풍경이 벗겨진다. 광학 미채에 몸을 숨긴 <비네(공
격자기형)>이, 그 미채를 벗겨내 노출된다.

151
이름 그대로 날개 없는 벌을 연상시키는 육각 형상과 <레기온> 특유의 철색. 바
늘 대신 배에 감싼 열선 발진장치와 광학센서를 푸르게 반짝이고 한 쌍의 곤충
같은 날렵한 끝을 플로어 접속 장소나 기둥 그늘에 뒤섞인 구멍으로 깊숙이 집어
넣었다.
사점의 고정. 즉 요새로부터의 에너지 공급을 위한 전원로의 위치.
단자가 되는 다리 부분을 찌르고 몸을 고정시킨 <비네(공격자기형)>은 순간적으로
도망가지 못한다.
작고 기체 중량이 가벼워 그만큼 바람의 영향을 받기 쉬운 이들이 이 폭풍 속에
일순간 몸을 가눌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발사!”
40mm 기관포와 88mm 산탄포공통적으로 들고 있는 중기관총. 그가 만든 낮은
신음과 포효, 높은 아비규환의 합창이 마천패루 거점에 울려퍼졌다.

이 기회를 노리며 대기하는 <언더테이커>의 눈앞에서도 역시 <아인탁스플라게(방


전교란형)>의 광학 미채는 찢겨 떨어져 나간다. 은빛을 띤 나비의 날개가 휘날린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가진 회전기관포가 무려 3대의 24기나 그것을 지탱하는
건마운트 암이 마침내 모두 드러난다.
조준을 맞춘 곳에 <비네(공격자기형)>이 없었던, 화력 구속용의 <저거노트>가 즉석
에서 조준을 전환해 사격한다. 우선 사격을 위해 늘렸던 두 쌍, 이어 <건슬링거>
를 포함한 저격사양 <저거노트>가 격자 안쪽에 숨어있는 남은 8기를 날려보낸
다.
유탄의 작렬과, 산탄과 기관포탄과 전차포탄의 무수한 발사로 <비네(공격자기형)>의
유폭의 불길이 번진다.
4층 전체를 검붉게 칠하는 그 업화에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센서를 막고 서 있
다. 한순간의 그 폭염을 뚫고, 달음박질친 <언더테이커>가 그 눈앞에 뛰어 올랐
다. 4 플로어로 된 바닥면을 잃은 제4층의 벽면을 발로 차고 앵커를 기둥 접합부
에 붙여 거의 단숨에 달려나가며 복잡한 우리 또는 격자처럼 생긴 정상의 바닥을
고주파 블레이드로 글자 그대로 베고 열고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했다.

152
헉! 하고 울부짖는 기계장치의 망령의 단말마는, 두 개.
모두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안에서 나오는 거라고 신은 생각한다. 아마도 <모르
포(전자가속포형)> 본래의 제어 중추와 1년 전보다 수를 늘리고 자유도 끌어올린 회
전 기관포와 건마운트 암의 제어용 서브 중추.
부서진 오르골이 울리듯 죽음의 순간 사유와 그 원망과 저주를 반복한다.
제국 만세 제국 만세 제국 만세 제국 만세 ……에른스트가 예상했던 대로, 제레
네가 말한 대로 구제국 제실파의 잔당.
열어젖히고 뛰어오른 위치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지근.30미터짜리 포신으로는
설령 포가 무사하다고 해도 사격은 불가능한 장사정포의 사각지대 안이다. 포탑
뒤로 두 쌍, 하늘을 향해 뻗은 방열재의 날개가 무너진다. 확 풀어지면서 근접격
투용 전도 와이어로 변하고 끝 갈고리 발톱을 <언더테이커>를 향해 눈사태를 일
으키려 한다.
근접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마지막 카드.
그렇지만 그것은.
일 년 전에 벌써 한 번 봤어.
풀리면서 날개의 형태를 잃었고 그래도 전도 와이어는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펼
쳐진 형태다.
<언더테이커>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좁히기보다 먼저 포병이 쏜 소이
탄이 도달. 발생한 불이 전도 와이어를 타오르게 하여 무력화된다. 통전 능력을
잃고 떨어지는 와이어를 블레이드를 옆으로 쏘아 떨어뜨리고 <언더테이커>를 포
탑 바로 뒤, 첫 번째 날개 사이 유지보수 해치 위로 착지시킨다.
1년 전에 쓰러뜨린 최초의 <모르포(전자가속포형)>. 제어 중추로 포섭된 프레데리카
의 기사가 숨어 있던 장소로.
그 때와 같다, 흔들리려고 하는 그 때와 같이, 산불을 띤 지네처럼 날뛰는 것이
다. 병장을 다리부분의 57mm 대 장갑 파일 드라이버로 변경하고 4기를 동시에
격발한다. 격진을 대가로 기체와 사선을 고정. 혀를 깨물 것 같은 진동에 견디면
서, 다시 주포를, 88mm 전차포로 병장을 전환해 트리거를 쏘았다.

153
비명처럼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뒤로 젖혀지며 경직된 것은 한순간.
후려치듯 바로 뒤로, 부러진 포신이 선회한다.
“쳇…”
재빨리 피하며 파일을 퍼지하며, 경량인 <저거노트>에는 치명적인 중량인 포신을
피해 <모르포(전자가속포형)> 등에서 뛰어내린다.
우리처럼 얽힌 거리를 뚫고 제4층 제3 플로어 벽면에 앵커를 걸쳤다.
……빠진건가
제어계의 위치는 1년 전과는 달라진 것 같다. 파괴한 것은, 건 마운트 암과 회전
기관포를 제어하는 서브 중추였던 것 같다.
조용히 올려다보는 <언더테이커>를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거만하게 내려다본다.
병장을 모두 잃고 몸을 지키는 동료들도 전멸당하고, 그래도 여전히 <레기온> 최
대의 거포의 위용과 위엄을 갖추고.
그 덕분인지 하늘의 밝음에, 폭풍이 지나간 것을 깨달았다.
탑 전체를 뒤덮는 거꾸로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엷은 회색 벽은 아직 완전히 희미
해지지는 않았지만, 강풍 특유의 낮고 높은 신음 소리는 꽤 누그러졌다. 하늘은
전투 중 새벽이 밝았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구름의 두깨를 줄였다.
그 하늘을 배경으로,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부러진 포신 내부에, 서리가 성장하
듯이 은색의 유체 금속이 솟아난다.
바람이 분다.
상공의 바람은 강한 모양이다. 조금씩 소용돌이치던 속도를 늦추던 검은 구름이
모여드는 힘을 잃고 쫙 흩어지고, 무대 배경이 바뀌는 묘한 극적의 푸른 색채가
구름의 단장 너머로 나타난다.
그 선명한 검푸른 색이 납빛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던 하늘과 바다와 그 사이를
눈부시게 비춘다.

그 창공이 암전됐다.

154
“뭐……?!”
갑자기 올려다보는 시야를 가린 사이에 순간적으로 라이덴은 눈을 감는다.
어둠의 정체는 격렬한 빛이다. 관학 스크린이 과부하로 순간 다운될 정도의, 지원
컴퓨터 보정도 한순간 늦었던 예상치 못한 광량이 허공을 태워 베어 넘겼던 것이
다.
너무나도 눈부셔서 어둠보다도 강하게 시야를 도배하고. 글자 그대로 빛의 속도

소리 없이
무섭도록 긴, 하지만 찰나의 무음의 어둠 뒤, 느닷없이 빛은 사라진다. 보정이 들
어오고 광학스크린이 부활했지만 그래도 시야는 조금 교활하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 아래 어딘지 현실감이 없는 백일몽 속처럼 희뿌옇게 밝아오는 하늘.
그렇지만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그 창궁을 올려다보며 어딘가 멍한 듯이 라이덴
은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납빛으로 뒤덮여 있던, 폭풍이 지나간 지금은 빛의 너무나도
어두운 것 같은 검푸른, 요새를 구성하는 철골의 격자에 금이 간 하늘. … 그래,
그 철골이다. 눈앞을 가로막는 무수한 격자다.

강철로 만든 요새의 정상, 제5층이 통째로 다 타 타오르고 격렬하게 아지랑이를


피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저기 말이야.”
그리고 최상층 중앙에는 더 이상 전경에서 위협이 없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
덕인다.
누군가가 신음한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총열은 가운데가 사탕처럼 휘어졌고, 작동도 하지 않고 타버린 폭발 반동 장갑이
떨어져 아래에 있는 장갑판을 드러냈다. 도료가 모두 증발한 메탈릭 광택의 은색

155
은 표면이 하얗게 탄다.
온몸이 금속으로 밀도가 높은 만큼 초고열 속에서도 녹는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기괴한 나무처럼 변형된 철골 사이, 불에 타 웅크리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움
직이지 않는다.
광학센서의 빛 줄기는 사라지고 파괴된 자리도 뚜렷이 퇴락하여.
탄식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올려다본 채 그제서야 제대로 목소리가 나온 라이덴이 신음한다.
“뭐야, 저건……”

한 순간, 단 한 순간이다.
순식간에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벌레라도 된듯 찌그러지며 파괴됐다. 그걸 본
레나는 깜짝 놀란다.
“무...”
이슈마엘이 신음한다. 깊은 전율과 신화의 괴물이라도 만난 그의 용감한 외포.
“포광종(무스쿠라)…… 하필이면!”
취록색 눈동자는 스크린의 가장 깊은 곳, 격광이 날아온 바다의 저편을 응시하며
눈도 깜박이지 않는다.
눈을 돌린 레나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고도, 혼잣말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투
로 계속한다.
“원생해수들의 가장 큰 종류다. 전투기든 폭격기든 저렇게 레이저로 쏘아버린다.
<레기온>도 정면으로는 승부 할 수 없는, 에누리 없는 괴물이다”
“원생해수……저것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해양 깊은 곳에 거주하며 바다를 지배하며 인간이 대륙
밖으로 나가는 것을 수천 년 동안이나 계속 거부해 온 생물.
세력권 의식이 강한 혹은 영유라는 개념이 있는 그들은 그들의 영역에 침입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침입자를 전력을 다해 배제하고 접근하는 자를 위협
한다.
그것은 <레기온>도, 사람도, 구별 없이.

156
이 요새가 있는 곳은 그런, 그들의 영역인 푸른 해양의 그 조금 앞이다. 요새도
정해함대도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경계선 부근에서의 전투다. 까다로운 그
들에겐 여간 아니었을 게 아니다.
그렇게 잠복한 저쪽을 응시한 채, 이슈마엘이 이를 간다.
용살을 명분으로 바다 제패를 목표로 내세우면서도 끝내 이루지 못한 수천년에
걸쳐 패배한 정해씨족의 후예로서의 증오와 원통함으로.
“…우린 결국 그놈들을 이길 수 없었지.”
“…………”
“소나로는…… 아직 안보이는 건가. 하지만 녀석운 확실히 근처에 있다. 세력권을
침범당할까 봐 위협하러 온 건가? 폭풍이 떠나고 폭풍에 안개도 걷힌 이 순간
에.”
생각났다 진공도중 밟은 두껍게 낀 안개해역
마천패루 거점의 에너지원은 해저화산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열원에서 열이 새
어나와 부차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그게 아니었다. <레기온>들은 의도적으로 저 안개 방패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이다.
레이저는 물로 확산된다. 안개가 두껍게 끼는 동안에는 포광종(무스쿠라)에게 공
격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가로막을 수 없는 망망대해 속, 아득히 먼 곳에서도 보이는 직선
적으로 날아오는 레이저라면 멀리서도 겨냥할 수 있는 이런 장소에 포진지를 유
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안개의 방패도, 태풍이 지나가는 한순간에는 바람의 칼날에 날아가 버린다. 그
시간을
“폭풍을……놈들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예상치도 못했던 그 광경을, 악연히 바라보고 서 있던 것은 잠시.


정신을 차리는 동시에 그 사실을 깨닫고, 세오는 안색을 바꾼다.
“신!?”

157
<언더테이커>는. …<모르포(전자가속포형)>와 근접해 있어서, 조사된 순간에는 정상
의 바로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둘러본 정상에 <레긴레이브>의 하얀 기체는 없다. 그것이 불안을 가속시킨다.
동료의 생사가 불분명할 때는 지각 동조를 확인하는 것이 에이티식스의 상례다.
서로의 의식을 통해 청각을 공유하는 지각 동조는 상대방이 의식을 잃었거나 전
사하면 끊어진다.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면 적어도 무사한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있다.
그 지각 동조를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그 정도로 심하게,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뛰어내리지 않았더라면………위험했어,”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약간의 동요의 빛을 띠었다, 하지만 공황 상태의 눈으로
보면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가 지각 동조 너머로 들렸을 때 세오는 크게
숨을 내쉬고 말았다.
철컥하고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언더테이커>가 제4층 1플로어로 세오와 라이덴
들이 있는 계층으로 내려간다. 조사의 순간, 순간적으로 제4층 제2플로어까지 대
피했는지 <레핑폭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뿐이었던 것 같다.
“이제 그만 좀 놀려줘……”
말과는 달리 들끓은 것은 진심으로 안도였다.
신앙과도 비슷하다.
괜찮아. 신은 이렇게 죽지 않아.
전대장님처럼 죽지 않는다.

지각 동조를 통해 광선의 정체가 레나를 통해 들어온다. 방금 그것이 원생해수,


그 최대종인 포광종(무스쿠라)의 공격이라고.
“저것이. 원생해수.”
“저런 괴물은……그게 뭐냐…”
처음 보는, 그리고 상상 이상의 이질적인 위협이다. 에이티식스들 마저도 동요와
경외감을 떨칠 수 없다.

158
시선은 자연히 광선이 날아온 원양 너머로 집중된다. 수평선을 넘은 앞, 별의 둥
근 곳에 숨겨져 <저거노트>의 광학 센서로는 파악할 수 없는 거리. 그곳에 그들
이 있다, 여기에 해로운 의미를 가진, 본 적이 없는 무언가.
그 순간, 하늘 전체를 후려쳐 불태운 광선을, 발할 수 있는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숨을 하나 내쉬며 신은 머리 위의 <모르포(전자가속포형)> 잔해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불에 타서 표면이 변색되고 바닷바람에 이미 식기 시작했는지 지
금은 아지랑이도 없는 그 무력한 잔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7년을 보내며 이미 낯익은, 파괴된 『죽은』
병기에 특유의 침묵.
제어 중추의 탈취는 이만큼 타버리면 과연 어려운건가.
어쩔 수 없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침묵. 당초 작전 목표는 수행했다고 판단한다.……종료”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군. 상대는 짐승이다. 어떤 이유로 공격해 올지도 몰라”
보기 드물게 눈을 반짝이는 유트에게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콜라레 원, 으로부터 콜라레 신시시스》


《콜라레 투, 상실. 콜라레 원, 기체 대파》
《포광종(무스쿠라)의 사폭 확인. 위협도•극대. 해당 포광종(무스쿠라) 접근 중》
《플랜. 슈베르트발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플랜. 슈베르트발의 자기보존
행동을 권장함》

159
은색의 입자가 눈사태처럼 떨어진다.
아득한 하늘에서 마천패루의 중앙을 빠져나와 어두운 해면으로.
달빛을 조용히 흩뿌리는 소나기가 아닌,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아닌, 빛 입
자의 정체는 은빛의 나비다. <레기온> 중앙 처리계를 구성하는, 유체 마이크로머
신이 분열한 군대. 기체가 대파될 때마다 중앙처리계를 나비 무리로 바꿔 달아났
던 <포닉스(고기동형)>의 그때와 같은 유체의 나비.
옹기종기 모여들며, 다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국 만세. 제국 만세.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 사격 직전에 고공으로 도망쳐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
란형)>에 섞여 있었나…….
“…<모르포(전자가속포형)>,”
그 중앙처리계.
되살아난 원한을 바라보는 신의 앞에 나비 떼가 날개를 접고 하늘을 나는 유성처
럼 마천패루의 쇠바늘 틈을 부수고 충돌한다. 공기 저항으로 인해 느슨하게 나선
형으로 떨어지는 궤도, 그 궤도의 끝에 모여서 함께 녹아서 은 덩어리를 형성한
다.
물방울이 수면에 떨어졌을 때처럼 밀어낸 바닷물을 갓처럼 끌어올려 요새 바로
아래 바닷속으로 가라앉혔다.
일초도 안 되는 그 순간
“바다에 떨어졌다…… 추락했나? —아니”
눈 밑의. 유성의 가라앉은 바다 밑으로부터 함성과 절규가 피어오른다.
지각 동조를 통해 그것은 신과 연결된 모든 프로세서의 귀에 들어간다.
기계 장치 망령의, 생전 마지막 단말마의 사고. 전쟁터에서 끝내 묻히지 못하고
끌려간 전사자의 뇌구조를 복사해 사유의 조각을 집어넣은 <레기온>이 반복되는
탄식이다.
철색을 한 거인이 날아오르며 한 쌍의 창처럼 날카로운 검첨이 해면을 가른다.
30미터는 될까 하는 장대한 그것이, 쭉 뻗어 올라 정상을-곧게 뻗어 <저거노트>
가 서있는 4층을 가리킨다.
무리지어 떨어진 유체 마이크로머신의 은색 나비.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제어계.

160
3 미터의 한 쌍의 창 모양의 포신. 요새를 오르던 중 해저에 들렸어야 하는 듯한
목소리
저것은!
“각기! 제4층에서 대피! 아래로 내려가, 포격이 온다!”

그 순간
레일건이 포효하였다.

시인이 불가능한 속도로 포탄이 날아간다. 방전의 번개가 주위 바다에 마치 금빛


으로 교교하게 찢어진다.
바다의 표면에서 하늘로. 거꾸로 떨어진 별은 마천패루와 4층을 대각선으로 관통
한다.
구경 80mm, 초속 초당 80m의 대질량과 초고속. 그것도 속도가 줄지 않고 운
동 에너지가 손실되지 않는 지근거리다. 사선상에 있던 철골은 모두 마른 가지
위로 꺾인다. 파편으로 날아간 것은 관통하여 날아가는 포탄과 함께 요새 밖으로
던져지지만 이어진 대들보나 지벽을 반쯤 잃은 철골은 남은 접합부에서 떨어지며
간발의 차로, 제4층을 피해 제3층, 또 아래의 제2층까지 산개한 <저거노트>의
머리 위로 추락한다.
『………!』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상처 없는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저거노트>는 그 치
명적인 잔해를 간신히 넘신다. 불길한 바람소리 때문에 추락한 철골이 바닷물을
크게 튀기며 바다로 가라앉는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2층까지 강하해, 전대나 소대를 이 한때 뿔뿔이
흩어지게 해서라도 산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파괴 반경이 넓은 유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밀집하는 것은 전멸이다. 86구의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에이티식스에게 그 교훈은 스며들어 있다. 위기 때
는 오히려 흩어지고 경고에는 먼저 따르는 무의식적인 버릇이 이때도 그들을 편

161
들었다.
바닷속의 적기는 여전히 부상한다.
사납게 울부짖는 절규는 지각 동조를 통해 머리 뚜껑을 찌르르 울리는 울음이다.
그리고.

《콜라레 원, 회수 완료》
《제어계 손상 28 퍼센트. 전투기동에 영향없음》
《콜라레 원, 콜라레•신시시스와 연결 완료 신시시스와 연결 완료》
《플랜•슈베르트바, 통합 제어 회로, 기동 스탠바이》

《플랜 슈베르트바 기동》

칼날 같은 활이 드디어 파도를 가르며 튀어나온다.


급부상의 기세 그대로 비스듬히 해면을 뚫고, 그 거구는 일순간, 지상 수십 미터
의 위치에 있는 <저거노트>를 내려다보는 높이까지 우뚝 섰다. 공중에 노출된 바
닥에, 접힌 무수한 다리. 근처에 좌우로 4쌍이 늘어선 광학 센서가 적기를 비추
며 파랗게 반짝인다.
만재배수량 10만 톤을 넘지 않는 거구가 다음 순간 수면 위로 무너져 내리면서
맹렬한 물기둥과 해수면이 갈라지는 굉음을 토해냈다.
<스텔라마리스>보다 한층 더 크다. 철색의 장갑에 둔탁하게 빛나는 상부 갑판과
측면. 일부는 선수와 선미에서 포신을 반짝이는 40밀리 대공회전기관포. 양현에

162
늘어선 1.5밀리 전자 가속식 속사포. 몇 기씩 대공포로 속사포를 지키면서 각각의
사선을 확보하기 위해 계단 모양으로 포개어 배치된다.
그리고 이 무수한 포로 구축된 성채의 중앙, 모든 대공포와 속사포의 보호를 받
으며 천수각처럼 솟아있는 두 개의 포탑과 그로부터 뻗어나가는 한 쌍의 전체 길
이 30미터짜리 창 모양의 포신이 거구 위에 있어 더욱 원근감이 미쳐 보이는—
80mm구경 레일건.
두 개의
이쪽도 사선 확보를 위해서일 것이다. 선미측 포탑은 선수측보다 높고, <모르포
(전자가속포형)>보다 더 높은 15m 가까운 높이를 가지고 있다. 해면에서 갑판까지의
높이는 <스텔라마리스>보다 낮지만 함교 최상층까지의 높이라면 근소하게 높은
크기다.
누군가 신음하며 두려움에 떨며 멍하니
“뭐야, 이거…!?”
“설마 이놈도- 이 배도 <레기온>이었어?”
갑판 위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바닷물의 장막은 그대로 둔 채 쏴, 하고 2 대의
레일건의 포탑에서 은실이 뻗친다.
순식간에 스스로 짜여져 날개만으로 날개 형상을 만들어 낸 후 그 전체에 담담하
게 인광을 두르고 하늘을 덮듯 펄럭펄럭 나부끼며 펼친다.
방열재 전개. 레일건의 전투 기동.
전모를 드러낸 그 거함은 고래물결처럼, 산성처럼, 유체 마이크로머신의 제어계에
사로잡은 전사자의 단말마로 포효했다.

『아직 죽기■■■■싫어■■■■■■■고양이 없어■■■■아픈 마음이 버팀목


■■■■■■■의 어머니■■루코코■■■■■■■로혜도움■■■■이열■■■■
■■■손■■■■■■■■국이■■■■군의 토마■■■■스케다사라■■■■아프
다■■■■■■■■■가까워 싫어■■■■쿠니■■내열■■■■■■■이모■■■
■■■■다 내가■■■■■■■지사■■■■■■국■■■■■■헤■■엘■■■■
■■국---------------------------------------------------!』

163
『치, 치직』
지각 동조와 심한 노이즈가 켜진 무선의 양쪽에서 신이 괴로운 비명을 참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발언자 본인의 목소리인지, 몸에 울릴 정도의 굉음밖에 전달되지 않는 지각동조
너머로의 절규. 그렇다면 이능한 소유자인 싱에게는 이 규환이 얼마나 괴로울까.
그 고통에 마음을 쓰면서도 레나는 귀를 막고 억누르는 음압을 견디는 데 바쁘
다.
절규를 못 알아듣겠어.
정확하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섞여 말의 의미를 파
악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지만 하나의 성대와 목으로 동
시에 터져 나온 것 같은 그런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뇌를 여러 개, 조각조각 잘라 랜덤으로 갈아 끼우고, 땜질한 그
것을 원래의 두개 속에 넣기라도 한 걸까? 전사자의 의식이, 인격이, 자아가 여
러 갈래로 합쳐져 뒤섞인 그런 혼성 합창.
“이 소리는 도대체!?”

164
165
이 녀석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갑판 중앙, 우뚝 솟은 포탑상에서 거만하게 비스듬히 하늘을 노려보는 2개의 80
밀리 레일건. 또한 22개의 1.5mm 전자속사포와 50여기의 대공 전자기관포. 총
가진 포가 모두 한 쌍의 창 모양의 레일로 포신을 구성한 레일건이다. 위력은 물
론 사정거리에서도 화포의 위력을 능가한다.
소국 정도라면 예를 들어 <모르포(전자가속포형)> 단 한 기에조차 멸망의 테두리까
지 몰린 선단국군이라면 이 단 한 척으로 다 태울 수 있는 화력.
게다가 떠오른 순간 거대한 배의 바닥이 살짝 보였다.
다리가 있었다. 헤엄치기 위해서가 아닌 해저나 육지를 걷기 위한 그것이. 즉 아
마 이대로 상륙이 가능하다.
육상을 이동하는 것은 과연 어렵겠지만, ……해안 부근까지의 진출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스텔라마리스>로부터 각기. 현 시간부로 불명함을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라
고 호칭.』
이 바다는 정해씨족의 바다다.
설령 이 작전으로 정해함대도, 정해의 긍지도 상실된다 해도 우리의 바다다!
쇳덩어리가 제 멋대로 헤엄쳐 다녀서야 되겠는가.
“적성 존재로 처리. 이 자리에서 격침한다!”

갑자기 지각 동조의 대상이 한 명 늘어난다.


『전하!』
비카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본다. 자이시다. 육지에 남겨두고 온 그의 부
장. 평소에는 제쳐두더라도 전장에서 아주 유능한, 그녀가 이 타이밍에 연락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나타났나?”
『예, <레기온> 육상부대가 공세를 개시, 증원을 확인했습니다. 적 증원은…』
그런 그녀가, 한순간 .전율로 목이 메었다.
『<포닉스(고기동형)>. 그 양산기입니다.』

166

선단국군의 진창의 전쟁터에 불비가 내린다.


기동 방어를 위해 방어진지대의 등 뒤에 둔 <저거노트>, 그 포전사양기가 흩뿌리
는 88mm 소이탄의 비다.
전차포탄으로도, 유탄포탄으로도 그리 일반적인 탄종이 아니다. 네이팜의 불은,
기갑 병기에는 효과가 희박하다. 무인기인 <레기온>도 마찬가지다. 그 소이탄이
빗발치듯 계속 쏟아진다.
그 불길에 전장의 일각이 불타며 떨어진다.
얇은 종이 같은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의 나비의 날개는 불에 약하다. 쉽게
불이 붙고, 가시광선의 산란능력을 잃으면서 그 아래에 숨은 것을 드러내 간다.
은빛 날개의 잔해를 털어내며 그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양이과 동물을 연상
시키는 민첩한 팔다리. 새의 날개를 닮은 겹겹이 은색 갑옷. 도마뱀의 등뼈처럼
등까지 뻗어 있는 한 쌍의 고주파 블레이드. 가증스러운 - 차례로. 차례차례.
『레나의 예상대로군요.』
“양산형의 고기동형이 투입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설마, 정말 맞추다니.”
같은 방어선이라고는 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정도의 거리는 있는 각각의 전
쟁터의 토치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지각동조 너머로 미치히와 리토는 이야기를
나눈다.
기체는 다소 대형화 된 것 같았다, 연합왕국에서 장비한 유체장갑은 그대로지만,
화포는 없다. 유일한 고정무기는 몇 개의 관절을 가지며 자유도가 높은 팔과 그
선단의 고주파 블레이드가 쌍으로 대체되어 제어가 복잡한 체인 블레이드는 제외
한 것 같다. ……양산에 있어서 지나치게 복잡한 기능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건
가.
아니면 화포와 마찬가지로 예상 밖의 파괴를 적기에 초래하기 쉬운 체인 블레이
드 역시 양산화에서 그들의 역할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일까.
“목적은 <머리사냥>, 이라는 것까지, 아무래도 맞는 것 같고.……어떻게 하면 이

167
런 것까지, 보고도 없는데 알 수 있을까”
그만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머리사냥>. 전사자의 뇌구조를 포섭함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수명의 족쇄를 풀
고 성능강화를 이룬 <레기온>이, 새로운 고성능 처리계를 찾아 살아있는 인간을
사냥하는 행위. 연방이든 연합왕국이든, 무엇보다 86구에서는 일상적으로 목격한
기계 망령들의 무도.
<포닉스(고기동형)> 대열 바로 뒤에는 평소 전투 중에 먼저 나오지 않던 <타우젠
트페슬러(회수수송형)>이 물러나 있다가 <포닉스(고기동형)> 대신 베어낸 머리를 주워
생포한 사람을 끌고 가는 역할일 것이다. 뇌 조직은 유난히 상하기 쉽다. 날씨
여하에 따라서는 그야말로 반나절도 못 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버린
다. 그 전에 신속히 회수하기 위한 것이겠지.
불쾌하듯 리토는 콧등을 찌푸린다.
<저거노트>의 포격에 -펠드레스든 유탄포든 일반적이지 않은 소이탄의 불길에
방금 전, 산뜻하게 광학 미채를 벗겨냈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탄종을 비처럼 내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만반의 준비가 돼 있
었기 때문이다.
<포닉스(고기동형)>의 양산형 투입을 우려한 이들의 여왕은 그 대책도 이 전쟁터에
마련해 나갔다.
그것이 지금의 광학 위장 나비를 태워 버리는 불길뿐이라고 설마 생각하는 것일
까.
“자.”
“와보라. 이겁니다.”
휘어진 <포닉스(고기동형)>이 그 이상한 짐승무리가 다음 순간 화살처럼 튀어나온
다.
거기에 응하며 두 사람이 이끄는 <레긴레이브>가 업화의 전장으로 떠오른다.

168
그리고 머나먼 육지의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그때 이들은 흔들리는 빛의 굴절을 휘감고, 높은 항모 포탑과 긴 포신을 헤치고
해상요새로 날아갔다.

맨 먼저 신이 알아봤다.
레이더에는 안 잡힌다. 광학센서도 기만당하는 끊이지 않는 망령의 목소리를 늘
듣는 그 이능은 그들의 출현과 접근을 정확히 포착한다.
“각 기, 경계를! 광학 미채기, 아마도 <포닉스(고기동형)>일 것이다!”
나비 날개의 미세한 날개짓과 같은 빛의 요동을 감싼 무언가가 요새 외벽을 뛰어
오른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속도로 역도를 향해 거의 수직의 철골을 일직선
으로 질주한다. 걷어차인 외벽 패널이 궤적을 쫓는 모양으로 갈라져 벗겨진다. 수
는 4대!
예상 진로 근처에 있던 <저거노트>가 회두해, 통과의 순간을 가늠해 포격.
88mm 전차포로 외벽 패널을 때려부수고, 이어 기관포와 산탄포로 진로상에 탄
막을 전개한다. 그 요격에 세오는 가담하지 않는다. 경고가 나왔을 때에는 흔들리
는 기영은 위쪽, 제3층에 도달하고 있을 뿐 닿지 않는다. 3층에 모든 항공기가
내려서는 산개할 수 없다고 와이어 앵커를 구사해 단숨에 2층으로 강하한 것이
화근이 됐다.
아무리 고기동성을 자랑하는 적기라지만 중력을 거스른 수직 등반이다. 수평 이
동시만큼 불합리한 회피는 어렵다. 탄막이 3기를 쏘아 떨어뜨려, 1기가 돌파. 빠
져 나온 한녀석은 눈앞의<저거노트>를 버려두고, 여전히 정상으로 달린다.
목적은.
『또 신인가? 사랑받는구나!』
“끈질긴 바보들이 좋아해도 말이야.”
입을 가볍게 벌리고 <베어 볼프>와 <언더테이커>가 함께 한다. 그들이 있는 현

169
재의 최상층, 제3층 3플로어에 적기가 뛰어드는 순간을 노려 2기 모두 포격한다.
여전히 적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끊이지 않는 망령의 한탄이, 그 움직임을
신에게 알린다. 회피하여 측방으로 도약. 그대로 발을 멈추지 않고 수직으로 뛰어
올라, <레긴레이브>에서도 불가능한 천장을 발판으로 질주하며 <언더테이커>에
육박했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없지만.”
머리 위, 88mm 캐니스터탄의 1군이 도달하고 작렬한다. 대인산탄이 요새 전체에
쏟아진다.
<포닉스(고기동형)>의 출현을 신이 듣고, 비카가 보고를 받은 직후에 레나가 사격
시키고 있던 포병 부대의 일제사격. 그래, 원래 놈들에 대한 대책으로 레나가 추
가한 포병사양기다.
가로막는 상층은 원생해수와 레일건의 포격으로 반쯤 날아갔다. 소나기처럼 쏟아
진 대인산탄에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 광학 미채가 갈기갈기 찢겨 산산이
흩어진다.
흩날리는 은빛 날개 파편을 향해 움직이는 은색의 장갑이 보이는 순간, 측면에서
<베어볼프>가 포격한다. 차체 상면이라면 전차 장갑까지 꿰뚫는 40mm 기관포
탄의 탄막이, <아인탁스플라게(방전교란형)>과 함께 적의 그림자를 가른다.
눈앞의, 미채가 벗겨지며 떨어진다.
은빛의 기체의. 날렵한 짐승의 체구. 새털 같은 유체장갑. 도마뱀의 가시나 박쥐
의 날개와 같은 한 쌍의 고주파 블레이드가 실려 있는, 지금은 허무하게 기관포
탄에 찢겨 맥없이 쓰러진…… 역시 <포닉스(고기동형)>.
하지만 그 등에 엎드려 있던 또 다른 한 대가 전에 내지 않았던 무기질적인 절
규를 굉하고 울리며 광학 센서에 푸른빛을 밝히고 일어났다.
“뭐…!?”
알아들을 수 없는 기계의 탄식은 눈앞에서 하나 사라지고 하나가 늘어난다. 동결
상태의 레기온은 그것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감지할 수 없다.
날개처럼 등에 업힌 고주파 블레이드가 규환을 터뜨리고 백열한다. 기관포탄이
되고 찢긴 첫 탄을 발판 대신 차며 두 번째 기수가 다가온다.

170
라이덴의 원호를 하며 추격에 나서려던 <언더테이커>는 돌격을 피하지 못했다.
뼈를 닦은 순백과 유동하는 은색의 두 기의 기갑무기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 모습을 제2층, 사투와는 동떨어진 아래에서 세오는 본다.


교착의 순간 <언더테이커>는 몸을 비틀어 <포닉스(고기동형)>의 고주파 블레이드
로부터는 콕피트를 보호함과 동시에 자신의 블레이드를 적기에 관통시켰다. 그러
나 그래서는 관성까지는 죽일 수 없다. 돌진지세로 <언더테이커>는 거세게 들이
받았다.
고주파 브레이드를 꽂을 수 있는, <포닉스(고기동형)>.은<언더테이커>에 서로 얽힌
채 그대로다. <언더테이커>가 블레이드를 퍼지하기보다 먼저, 그 지근거리인 채
유체 장갑이 자폭하고. 튕겨져 나간 <언더테이커>가 요새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그것은 마치 용아대산 거점 바닥의 마그마로 <안더테이커>가 밀어 떨어뜨려 격
파한 오리지널 <포닉스(고기동형)>.의 본 모습처럼.
부러진 블레이드가 고음으로 허공에 날렸다.
『뭐………』
그래도 <언더테이커>는 간신히 고기동형을 — 그 잔해를 걷어차고 좌우 양쪽 앵
커를 사출. 갈라진 외벽 패널 저쪽 철골에 얽어 매달고…
직후에 아래,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선수측의 레일건이 포격하며. 80밀리 포
탄이 이번에는 3층의 기둥의 하나를 스치고 아득히 멀리 날아간다. 스쳐 지나간
만큼의 충격에도 격진이 철탑을 흔든다. 와이어가 풀리고 <언더테이커>가 떨어진
다. 마그마에 떨어진 <포닉스(고기동형)>.의 모습 그대로.
격진에 빗나가 떨어진 철골과 외벽 패널에 앞서서.

삽을 멘 목이 없는 해골 퍼스널 마크가 어이없게도 어두운 바다로 가라앉았다.

지각 동조가 끊어졌다. 동조자가 의식을 잃거나 전사했을 때 끊기는 그것이.


신과 동조하는 동안 끊이지 않는 <레기온>의 절규가, 그때 갑자기 끊어졌다.
그만큼 무심한, 정적이 내렸다.

171
5장 The Tower (Reverse)

“……아,”
순간 세오는 어안이 벙벙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아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때 <래핑폭스>는 <언더테이커>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이”
응하는 소리는 없다.
지각 동조가 끊어져 버렸다.
그때.
전대장을 버렸던 그 순간, 마지막 말을 들은 직후에 무전이 끊긴 거나 마찬가지
로.
까먹고 있었다.
전대장님은
백계종이었다가 스스로 전장으로 뛰어든 전대장은 그 전장에서 죽었다.
소중한 부인이 있었고,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죽으면 애도해줄 누군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함께 사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었다. 살아있었다면 행복도 미래도 가
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것도 상관없이 죽었다. 웃는 여우 퍼스널 마크 말
고는 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미래도, 함께 살 사람도 없는 자신은 살아남았는데.
자신은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 더 이상 가족도 없고 집에 돌아갈 고향도
없다. 오히려 죽으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살아 남는것
은 대장이었어야 했는데.
마찬가지로. 신도. ……겨우 누군가와 함께 사는, 그 미래와 행복을 바랄 수 있었
을 동료조차.
아직 아무것도 바라지 못하고 자신을 다시 남겨두고.

172
까먹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났다
생명의 가치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기도도 남겨지는 자의 눈물도 무관하게 거둬
들인다.
오히려 가치 있는 사람으로부터, 애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부터, 우선적으로 빼
앗아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 터무니없는 세계의 악의를.

“아…”
레나 역시 그 광경에 얼어붙었다.
미세한 파편을 흩뿌리며 <언더테이커>가 추락한다. 멈춘 것처럼 천천히 느껴지
고, 그 실낱같은 낙하의 시간을, 세차게 솟은 물기둥이 끝낸다. 그대로 무력하게
아무런 발악도 보이지 않고 어두운 바닷물에 잠긴다.
“아, 아…”
의자를 박차고 프레데리카가 뛰쳐나가는 발소리가 어딘가 멀리 들렸다.
초조한 나머지 넘어질뻔한 전력질주로, 그 요란한 신발소리 사이로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섞인다.
“구명정. 떨어진 자의 안부는 내가 확인했으니까 빨리 구조하는 거다. 서둘러라!”
들으면서도 레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더테이커>가 신이 추락했어.…
그렇지만,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떨어진 높이는 상당하지만 떨어진 곳은 수면이다. 운동 성
능이 극단적으로 높은 <레긴레이브>는 강인한 충격 흡수장치를 갖추고 있다. 무
엇보다 낙하 중에 <언더테이커>는 와이어 앵커를 걸어 낙하 속도를 감소하는 자
세 제어를 하고 있었다. 곤두박질친 것이 아니니까 분명 괜찮다.
전투 중 낙하에 대비해 <스텔라마리스>의 구명정은 미리 거점 주위에 배치되어
원래 착함에 실패해 추락한 전투기를 인양하기 위한 소형정이다. 보다 경량의
<저거노트>라면, 반드시 곧바로 회수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173
정말 아래가 물이라면 저 높이에서 떨어지는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걸까.
와이어도 낙하 속도를 다 줄이기도 전에 빗나가 버렸다. 아무리 강력한 충격 흡
수장치라고 해도, 그것은 낙하의 충격을 제로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일까. 애
초에 그것보다, 지근거리에서의 <포닉스(고기동형)> 자폭의 피해는?
무엇보다, 만일 무사하다면 어째서.
어째서, 지금도 지각 동조가 연결되지 않는 걸까. 나는 여기 있다고, 구조 요청
소리가 레나의 곁에 닿지 않는다--……
돌아오겠다고 신은 말했다.
그렇게 약속했다. 그 때 설원의 전쟁터에서 서로가 서로를 두고는 가지 않겠다고.
함께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느닷없이 이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의 신과의 대화가 되살아난다.
이번에는 신 쪽에서 했던 불의의 입맞춤. 물어뜯을 것 같은 어딘가 삐진 것 같았
지만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던.
그때 했던 말
레나의 대답은 대답할 마음이 준비 된다면 가르쳐 주세요
아직 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하고 싶은 말을 아직 레나는 돌려주지 못했다.
그런데.
온몸에 힘이 빠져서 휘청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빈혈인 것처럼 피가 내려간다. 눈
앞이 흐릿해졌다.
지휘관이 함교에서. 부하는 물론 남의 나라 군인들의 눈앞에서. 선혈여왕으로서의
체면, 혹은 자부심이라고 할 것이 머리를 스치지만 지금은 그것도 멀다. 무릎이
체중을 지탱할 수 없다. 어떻게 서 있는지, 그 방법을 머리도 몸도 잊어버린 듯.
휘청, 하고 그녀의 가느다란 몸이 흔들린다. 뒤돌아본 마르셀이, 위험하다고 생각
하고 일어난다.
그때 지각 동조 너머로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정신차려 여왕 폐하!』
레나는 뺨을 세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간신히 잡혔
다. 지금 목소리는

174
“시덴”……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망양하게 눈부신 레나에게, 시덴은 크게 숨을 토
해낸 것 같다.
서로의 의식을 통해 들은 소리를 전달하는 지각 동조는 싱크로율을 최소로 설정
해도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는 정도의 감정도 전달된다. 시덴이 조바심에 찬, 동요
를 간신히 억누른 정신 상태임을 레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서로 만나면 싸움만 하고 정말 성격부터 안 맞는 것 같지만 시덴은 그녀 나름대
로 신을 인정하고 있고 그래서 걱정도 되는 것이다.
『녀석이라면 괜찮을거야. 돌아온다고 했잖아. 그걸 네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떡해.
괜찮아. 왜냐하면 그 녀석, 특별정찰조차 살아남았으니까』
레나는 숨을 삼킨다.
86구 절사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에이티식스의 최종처분장인 동부전선 제1전구
제1전대 “스피어헤드." 그 마지막 생존율 제로의 적지행군 임무.
그게 마지막 이별이 될 수도 있었던,
『너도 알잖아. 에이티식스는 질기도록 끈질긴 거. 86구 따위에 내던져져서 여기
서 죽으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죽지 않은게 우리야.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녀석
이, 끈질기지 않을 리가 없잖아』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레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확실히. 정말……그렇습니다.”
다시 일어서자 고개를 들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마르셀과 그녀의 추태에
눈은 돌리지 않은 채, 하지만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이슈마
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인다.
“바나디스로부터, 각위. 스피어헤드 전대의 지휘를 라이덴에게 이관. 작전 목표를
변경 합니다.”
걸쳐 입은 강철색의 연방의 군복. 그 겹옷을 몰래, 움켜쥐었다.
“기동타격군의 임무는 선단국군 해상의 <레기온>의 위협 배제입니다. 출현한 신
형 <레기온>,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또한 배제해야 할 위협입니다. 이 장사정포
에 해상 이동의 자유를 주다가는 선단국군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위태로워집니
다. 따라서……"

175
스크린 중앙, 비춰진 그 거체를 노려본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을 최우선 격파목표로 설정, 총력 섬멸하겠습니다!”

적함, 그것도 2개의 레일건을 주포로 하는 엄청난 거대 전함의 출현은 정해함대


승무원들에게도 충격을 주었지만 80밀리 레일건을 기습적으로 먹고, 게다가 총대
장을 상실한 에이티식스에 비하면 아직 동요가 적다. 당초 작전 목표인 <모르포
(전자가속포형)>의 사격 재개에 대비해 마천패루 거점을 반원형으로 둘러싸 포격 준
비를 갖춘 채였던 것도 있다.
“<스텔라마리스> 각 배! —대상,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목표가 수정되는 즉시
각 개인을 포격!!”
해전의 전단은 정해함대의 주포가 자른다.
원정함은 2대, 정해함은 4대. 소유한 주포, 40cm연장포가 포효한다. 중량의 포탄
이 해풍을 가르며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쇄도한다.

단, 정해함대의 주포는 원래 원거리로 폭뢰를 투사·살포하기 위한 것이다. 해상의


그것도 이동하는 목표에 대한 명중 정밀도는 그리 높지 않다. 값비싼 유도무기를
선단국군은 거의 갖지 못해서 발사된 포탄은 그대로 조준한 곳밖에는 향할 수 없
다.
거함에 있을 수 없는, 그리고 <레기온>에 특유의 이상한 급가감속과 급회두로 해
면에 번개가 치는 항적을 새기고,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시간차를 두고 발사
된 10발의 40cm 포탄, 그 모두를 유유히 피해간다.네 쌍의 날개를 레일건의 포
탑에 펼쳐 회두하는 전함의 함수의 푸른 광학센서가 <스텔라마리스>를 비춘다.
1박자 늦게 2개의 80밀리 레일건이 선회.
선수측 레일건이 <스텔라마리스> 로 향한다 — 군함간 포전은 상정하지 않고 선
회반경이 넓어 적포의 회피는 서툰 정해함을 정조준하려다.
『하게 둘까보냐!』
그 순간, 사격이 종료됨과 동시에 접근하고 있던 장거리 함선 <데네볼라>는 최대

176
전투 속도로 기세를 몰아 측면에서 포효했다.
그것은 아득한 고대 외륜선의 충각 돌격과도 같았다. 장갑된 <노틸루카(전자기포함
형)>의 측면에 선수를 짓눌려, 함체에 금속이 삐걱거리는 비명과 깎여 나는 불꽃
을 올리게 하면서 옆으로 눕혔고, 계류용의 와이어를 전기사출 최첨단의 앵커를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에 끼이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엔진이 역전된다..
만재 배수량 10만 톤을 넘을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을, 그 추력을 전력으로 만류
한다.
『스텔라마리스, 형님! 지금 이틈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2대의 레일건이 <데네볼라>를 향한다. 파릿하고 번갯불이, 한 쌍의 레일 사이에
가득 찬다.
포격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지척의 포호는 그 격렬함에 오히려 무음으로 느껴질 만큼
큰 음향이었다.
제대로 먹힌 <데네볼라>의 함교가 통째로 사라진다. 격심한 포호가 전쟁터에 가
득 찬 소란을 모두 뒤덮는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여전히<데네볼라>는 움직인다.
기관을 역진에 넣은 채, 맹렬히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을 견인한다. 두배도 안되
는 중량이라 무리하게 후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추로서 거함의 발을 묶는
데는 성공한다.
—약한 측면을 …… 왼쪽 뱃전을 남은 3척의 요함에 노출시키는 형태로.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에 있어서는<데네볼라>의 위치설정이 나쁘다. <스텔라마리
스>도 웃도는 대형함으로 포의 위치가 높은 만큼, 딱 바로 옆에 붙인 <데네볼
라>에 대해서는 레일건으로는 최대의 부각을 붙여도 함교 밖에 노릴 수 없다.
함의 기관부는 스크루4)와 연결하는 관계상 함저 근처에 물밑에 놓인다. 이 지근
거리에서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그 최대 위력인 병장으로는 발이 묶인 추를
배제할 수 없다.

4) 회전축 끝에 나선면을 이룬 금속 날개가 달려 있어서 회전을 하면 무엇을 밀어 내는 힘이


생기는 장치

177
그것마저 돌격의 그 순간에, 계산에 넣어서.

함교가 꺼지기 직전, 무선의 향방에 <데네볼라> 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해선단에, 영광......』
누구를 향한 말이 아니다. 결국에, 무엇을 선택했을 뿐인 말이다.
원망하는 말이나 미련을 토로해도 책망할 수 없는 그 순간에, 그렇지만, 조국과
고향, 자신에게 이어지는 역사를 축하하고.
그 장렬함에 이슈마엘은 이를 악문다.……각오한 바이다. 함대를 전멸시켜서라도
정해함대를 다 잃어서라도 해내야 할 작전이다.
아픔도 비분도 꾹 참고 얼굴을 들었다.
“포격을 계속! 고정된 과녁이다. 다음번엔 맞혀라! 바다 밑까지 격추시킨다!”

“포병 부대, 사격준비! 탄종, 소이탄-우선은 적기의 광학 미채를 무효화합니다!”


레나의 명령으로 <스텔라마리스>의 갑판에서 일제사격선이 호를 그린다. 폭풍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개인 하늘은 잠시 흐려져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돌진
한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위쪽에 도달한 소이탄이, 그대로 고공에서 작렬. 내장된
네이팜탄을 터트려 착화. 포신의 과열도 마다하지 않는 맹포격이 검붉은 불꽃의
폭우를 철색 군함으로 몰고 간다.
그 불길이 장갑된 갑판 위로, 성채처럼 치솟은 포탑군의 그 사이로, 두 쌍의 레
일건의 포신 위에 옮겨 붙는다. 은빛날개가 모두 불타 은회색 재가 되면서 해상
의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재와 불똥 너머로 유동하는 은빛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
낸다.
응시한 레나는 눈을 가늘게 뜬다.
확인된 적기는 역시
“<포닉스(고기동형)>.……역시, 양산이”
양산되리라는 것은 이 작전 전에 짐작했다.

178
투입되는 것이 이번 작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광학 미채를 떼어내기
위한 소이탄과 대인산탄의 추가, 대응하기 쉬운 병장의 <저거노트> 증원을 미리
꾀하고 있었다.
대공세 이후 갑자기 전황이 악화된 선단국군과 주변국.
대공세의 실패로 변경된 <레기온>의 전략. 병수의 증강으로 성능 향상.
레비치 요새기지에서 <포닉스(고기동형)>에 대해 비카가 말했다. 무엇을 위한 병종
이냐고. 칼 등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는 일기당천의 영웅들은 현대의 전장에는
비효율적이다. 인류에게는 몰라도 <레기온>에는, 가치가 없을 거라고.
그렇지만<레기온>의, 전략의 변경. 병수의 증가에서 성능의 향상이라면.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그 시민들을 노획하고 <레기온>은 전사자의 손상된 뇌에서
유래한 <흑양>에서 생전의 지성은 남기면서도 인격을 갖지 않은, 보다 고성능의
<목양견>으로 전환되었다. 고성능 잡병의 목은 충분히 뽑았다.
다음으로 노리는 것은 정예의 목이다.
현대의 전쟁터에 영웅은 필요 없다.
<레기온>에게는 다르다. 전략을 바꿔서, 그렇기 때문에 필요해진 취약한 만병의
병정 중 기라성처럼 나타나는 비효율적이지만 강력한 영웅의 목을 사냥하기 위
한, 영웅 사냥의 영웅이.
그것을 위해 가장 적합한 병종.
인간으로서 뛰어난 자도 압도하지만 화포에 맞아 시신을 뇌를 파괴시키지도 않는
다. 현대의 전쟁터에서는 진부한 근접 백병전투를, 감히 치르기에 적합한 병종.
“성능향상의 재료를 얻기 위해 —고기동형은 반드시 양산된다.”
그건…… 예상하고 있었는데.

신과 동조하는 동안의 귀 찢는 단말마의 절규는 비카에게도 힘겹다. <노틸루카(전


자기포함형)>의, 복수의 뇌가 혼합된 이상한 규환은 더욱.
동조와 함께 그 부담이 사라진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그 절규를 어느 정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었음을 깨닫는다. 의미 없는 외침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
던 그 몇 마디가, 다시 생각해 보면 말로써 의미가 있다.

179
어린 시절, 아직 <레기온>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행사에서 들었던 말이었
다.
대륙 서방의 주요 언어가 아니다. 연방과 대륙 동부 국가들 사이에 가로놓인 자
갈사막, 그 통상로를 지배하는 린리우 통상연합과 그 주변 국가와 부족이 사용하
는 언어다. 그중 한 나라의 무관에게서 들은 그들의 전쟁의 신—전쟁의 여신의
기도.
돌이켜보면 비카는 제왕색의 한쪽 눈을 찡그린다.
“섞여 있는 것은 동쪽의 장수인가. <레기온>들의 성능 향상, 으로”
원래의 공화국 시민은 전쟁을 알지 못했고, 전쟁의 지식을 가지지 않는<목양견>
을, 보다 전투에 최적화한 존재로 개량해야한다면. 에이티식스들이 전략은 모르고
지휘관으로는 사실 맞지 않는다고 할 때, <양치기>의 지휘능력을 향상시킨다면.
다음으로 노리는 것은 군인. 그중에서도 고도로 교육받고 훈련받은, 그래서 전선
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상급사관의 목이다.
방위선을 부수고 후방에서 지휘하는 상급 사관을 사냥하기 위해 방위선 타파가
쉬운 소국이 사냥터로 선택됐다.
예를 들면 선단국군. 기동타격군의 파견을 요구하는 각국도. <아인탁스플라게(방전
교란형)>의 전자방해 때문에 연합왕국도 연방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이미 몇
몇 나라는 멸망하고 있을 것이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그 이상한 절규도- 수십 명의 마지막 외침이 아마도 그
뇌구조마다, 연결돼 뒤섞인 비명소리의 군대도, 지휘관으로서의 지식을 갖추지 못
한 <양치기>로 노획한 영관들과 장성들의 기억을 뇌구조별로 뒷받침한 탓일까.
“거추장스럽게……”

<데네볼라>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에게, <스텔라마리


스>와 두 척의 원정함은 여전히 포격을 계속한다. 조준되지 않기 위해 기동하면
서, 요함과 마천패루 거점을 사선에 들어갈 수 없는 위치에서 포탑을 선회시켜,
재포격.
정확도는 비교적 허술한 포라지만 고정된 목표에 명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180
40mm 포탄은, 이번에는, 필중의 궤도에서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쇄도했지
만 그 모든 것이 허무하게 튕겨졌다.
“뭐라고...?!”
“딱딱해…!”
장갑이 두껍다. — 승무원이라는 불필요한 적재 중량을 가지지 않는 만큼 장갑에
중량을 할애한건가.
탄속이 빠른 레일건을 경계하고 거리를 둔 이 위치에서는 위력이 부족하다. 근접
포격으로 갑옷을 부수고 접근하는 <바실리스코스>가 회두한다.
직후에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 반격한다.
정해함대에 좌현을 향해 고정된 거함의, 그 좌측의 1.5밀리 속사포 11대가 맹렬히
화선을 뿜어낸다. 목표물의 넓은 측면은 군함의 약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측면
이 적함을 향하게 하는 자세 또한 가장 많은 포를 적함에 돌려 최대의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탄막이라고 해도 좋은 밀도와 연사속도, 무엇보다 화포로는 불가능한 탄속에 몰
려서 <바실리스코스>가 황급히 키를 돌린다. 주포인 800mm포와 유사한 레일건
속사포
이래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다.

그 고전에 2층 스피어헤드 전대로는 유일하게 유트의 지휘하에 들어간 세오는 이


를 갈았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단 1척 뿐이며, 이동을 봉쇄당했음에도 <노틸루카(전자기
포함형)>과 정해함대의 전투는 마치 쥐때가 호랑이를 사냥하려는 것 같이 일방적
이다.
전해함대의 잔존 전함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를 싣고, 더구나 탄속이 빠른 레
일건의 탄막에 정해함대가 쳐들어가고 있는 탓이다. 22개의 1.5mm 속사포와 2
개의 80mm 주포가 만든 악몽같은 맹포격.
마천패루 거점 2층에 전개하는 세오들, 88mm 전차포 장비인 <저거노트>도 속
사포를 노려, 사격을 반복하고 있지만, 적함에는 50여기의 40mm 6연장 대공포

181
가 있다. 그 가혹한 탄막 때문에, 겨누기는커녕 걸음을 멈추고 사격조차 어렵다.
주포인 80mm 레일건을, 1.5mm 속사포를 지키기 위해 배치한 대공포다. 속사포
를 노릴 수 있는 위치는 반드시 대공포의 십자포화에 노출된다.
드물게 속사포로 사선이 지나가도 전면에 있는 방어막이 딱딱해서 이 거리에선
관통할 수 없다. 확실하게 배제하려 한다면
가까이 가야된다. - 올라타야 하나.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까지의 거리는 <레긴레이브>의 도약 가능한 최대거리보
다 약간 멀다. 평범히 도약한 것으로는 닿지 않는다. 눈을 돌려 뭔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고 안달복달하면서.
—찾았다
“<래핑폭스>로부터 각기. ------엄호를 부탁할게!”
조종간을 전진 위치로 옮긴다. 쏘아지는 화살처럼 <러핑폭스>가 튀어나온다.
3차원 조작이 능숙한 세오에게는 한 층 한 층 내려가서 바깥쪽으로 직진하는 것
이 더 빠르다. 앵커를 걸고 기기를 지지하면서 수직 타워의 측면이 한 번에 아래
로 내려간다.
라이덴이 통신에 끼어든다.
『세오, 너무 무리하지마! 흔들리면 발목만 잡혀!』
“알아. ……괜찮아. 동요 같은 건 하지 않아.”
사실은 거짓말이다. 동요하고 있다. 그 자각은 하고 있을 것이다. 압도당해 냉정
한 판단을 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저미는 감정의 덩어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 미래를 볼 수 있었을 텐데… 행복해질 수 있던 사람조
차, 없어졌다. 무자비하게 어이없게. 이 세계의 유일한, 평등한.
그렇다면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신들은. -틀림없이, 더더욱, 허무하고 무자
비하게.
먹히지 않는다. 먹히면 진짜로 죽는다.
“하지만……무리하지 않는 건 무리야.”
가슴 저미는, 소리치고 싶은 감정을 밀어 넣기 위해서는.
목표는 낙하하는 구조재든 무엇이든 충돌 중간에 부서지고 비틀려 잠수 플랫폼처
럼 바다에 비스듬히 돌출되는 철골이다.

182
“가라……앗!”
실수 없이 착지해 낙하의 기세를 죽이지 않고 질주하며, 최대 전력인 발끝을 차
며 도약한다.

“포병전대, 대인산탄으로 탄종 변경, 장전 즉시 사격!”


<레핑폭스>가 튀어나오자, 즉시 레나는 명령한다. 이쪽도 소이탄과 같이, <포닉
스(고기동형)>의 광학 미채 대책으로서 가져온 탄종이다. 함포 사격도 견디는 <노
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장갑을 찢기에는 부족하지만 폭염으로 그 센서를 기만할
정도라면.
도약의 사이는 회피할 수 없다. 그 사이에 세오를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 쏘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멀리 폭염의 꽃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그림자를 덮고 있다. 포효하는 소리
가 한동안 이 거리까지 닿을까.
“사격 계속! —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탄막을 유지하라!”

자신도 원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머리 한구석으로는 생각하지만 움직일 수 없


다.
고정되지 않은 시선을 따라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안을 날아다니는 레티클이 왠
지 지독하게 눈에 거슬린다. 오른손은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으며 조종간을 잡
고 있는 감각조차 없다.
왜냐하면 신이 떨어졌다.
그 사람만은 없어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과 만나기 전까지 신과 만나서도 많이 죽어간 동료들처럼. 2년 전 스피어헤드
전대의 카이에나 하루토나 쿠죠나 키노나, 장난삼아 죽임을 당한 부모님이나……
사랑했던, 하지만 돌아오지 않은 언니처럼은.
신만은 결코. 나를 두고
가지 말아야 했는데.......!

183
“싫어…싫어.……두고 가지 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사고가 작용하지 않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면서도 손
은 떨리고 시선은 고정되지 않아 단 한 발의 포탄조차 맞을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있을 곳은 그의 옆자리 밖에 없는데. 아무것도 없어도, 자존심마저
설령 잃는다 해도, 그래도 동포라는 것은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을 텐데.
<건슬링거> 옆으로 무언가가 뛰어올랐다. 하얀, 닦은 뼈 같은, 잃은 목을 찾아
전야를 기어나다니는 백골 시체 같은 펠드레스.<레긴레이브>.
……잃어버린 목을, 잃어버리고 빼앗긴 형의 목을. 단 한 사람을 찾아 전장을 헤
매다니, 그런거 나로서는 분명 할 수 없다.
사라져 버린 신을, 자신은 찾을 수 없다.
<레긴레이브>의 붉은 광학센서가 이쪽을 향한다. 누군가의 눈 색깔과도 비슷한
그 빨간 색.
퍼스널마크는 비늘과 날개를 가진 처녀. 샤나의 <멜뤼진>
<고기동형(포닉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보고 브리싱가멘 전대의 전대원
들이 3층으로 올라온 것 같다. 지각 동조가 이어지면서 샤나의 특유의 싸늘한 목
소리가 말한다.
『크레나. 뭐하는거야, 엄호를....』
말하다 말고 샤나는 헤아린 것 같다.
숨길 생각도 없는 혀끝이 지각 동조 너머로 들린다.
『쏘지도 못한다면 방해야. 물러나』
그 말은 무엇보다 강했고, 그대로 쓸모없는 소녀를 때렸다.

<래핑폭스>의 10톤 이상의 기체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푸른 나락 위에서 완만


한 포물선을 그리며, 지지하는 발판이 없는 공중에서 낙하의 궤도에 들어간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갑판에는 아직 조금 닿지 않았다. 와이어 앵커를 쏘아
내 돌출된 레이더 마스트에 걸려 감아올려 그 부족한 거리를 버틴다.
사선에 들어간, 그 순간에 날아온 유탄이 주위에서 차례차례로 자폭한다. 폭염과
충격파가 사선을 가리고 <래핑폭스>의 기체를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가린

184
다.
동시에 시오는 적함에 얽힌 와이어 앵커를 회수, 반대편 앵커를 쏘아냈다.
측면에 앵커가 걸려 고정되고 직후 수거한 쪽 앵커가 소리를 내며 사출기로 돌아
간다. 그 반동과 중력으로 <래핑폭스>는 거꾸로 흔들린다. 대공포의 사선을 빗나
가 고정된 채로 와이어로 고정되어 하향의 호를 그리면서 해상을 이동한다.
와이어를 감아올렸다가 상승세로 돌아서는 궤도를 이용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의 갑판에 뛰어올랐다.
갑판의 관통 여부와 상관없이 추적·연사되는 대공포를 피해, 갑판 위로 접히는
근원지는 요새의 구조재로 보이는 철골 뒤에 있다.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적극적으로 바닥붕괴를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인가.
직후에 역시 와이어 앵커를 구사해, 레르케의<챠이카>와 유트의<베레트라그나>,
전위 담당의 항공기와 살아남은<알카노스트>가 옮겨가며 대인산탄의 연막에 몸을
숨기고 대공포 요격을 뚫고 같은 차폐의 그늘로 파고든다. 세오의 뒤를 따라온
이들이 발판으로 삼은 듯 구부러진 철골이 하중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래핑폭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잠복한 <챠이카>가 비난하듯 이쪽을 바라보았
다.
『귀하께서도 보통 무모한것이 아니었군요, 웃는여우님……!그런 만용은 저승사자
님 한분으로 두었으면 합니다만.』
“잔소리는 나중에 해줘, …모두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레일건을 찌부러뜨린다. 그
렇게되면 정해함이나 원정함이 접근할 수 있게 되는 함포 사격으로 막을 수 있
다.”
전장 30m의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거구에, 무턱대고 포격을 가해도 <저거노
트>의 88mm포로는 소용없다. 격파하기 위해선 제어중추를 정확히 파괴하거나
보다 대구경 함포 사격을 지근거리에서 주입받는 수밖에 없다.
다만 레일건의 장갑을 관철하려면 , <저거노트>의 88mm포로는 지근거리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렵다. 접근하기 위해서는 레일건을 지킬 적 전력의 배제가 필요
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선 방해되는 속사포를 먼저 하고……”
『대공포 배제가 우선이다, 릿카.— 전력은 지금 들어온 이 기체가 전부다. 후속기

185
도 거의 없다. 이 인원으로 무리하게 속사포만 겨냥해도 전멸할 뿐이다』
담담하게 유트가 지적하자 세오는 의식하고 숨을 내쉰다. 발판은 이제 없다. 원래
이런 재주는 전위 중에서도 기동전투를 잘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기계와 이야
기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 유트의 냉정함은 이럴 때 특히 고맙다.
『요새 측에도 대공포를 우선 겨냥하라고 했는데. 무시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우
리도 배제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속사포도 어느 정도는 정해함대에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함포의 영거
리 사격이라도 이 정도의 군함 자체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제어 중추를 겨냥하지
않으면 힘들려나.』
어쨌든 전체 길이 30미터의 거구이다. <스텔라마리스>나 원제함의 40cm포라고
해도, 바늘구멍 정도의 대미지일 것이다. 군함인 이상, 데미지 컨트롤도 —피격해
선체가 손상되었을 경우에 물의 침입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구조도 엄중할 것이
다.
또 이슈마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스텔라마리스>를 포함한 원자력함은, 위력이
강해서 전투기의 특공을 동력 장치가 먹어치워도 원자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보
기에는 굴뚝이 없는 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도 아마 동력은 원자력일 것이다.
동력 장치를 겨냥해도 효과는 희박하다.
제어중추가, 그 단 하나만이, 이 강철 괴물을 일격에 침묵시킬 수 있는 약점으로,
그것은 외관상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레르케를 경유해서 들었는지, 비카의 지각동조가 이어지고 그가 말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조사와 해석을 맡겠다. <포닉스(고기동형)>이 나온 이
상 <시린>의 크기면 침입이 가능하다.』
<알카노스트>의 콕피트 해치가 펼쳐진다. 소녀의 모습을 한 기계인형들이 갑판에
줄줄이 내려앉는다.
『아무래도 중추처리계에 통로가 연결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밖
에서는 모르는 것도 보이겠지.……<레기온> 이라고 해도, 합리적으로 배치한다면
함내 시설의 위치는 어느 정도 기존의 군함과 같을 테고. 전함 혹은 강습상륙함
으로 생각하면 배치는 예측된다.』
그 강습상륙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오는 전혀 모르지만.

186
“잘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맡길게 왕자 전하.”
『그렇다기 보다는,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밀리제도 관제사들도 벅찬 이상 나 말
고는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조금 꺼림칙하게 계속했다.
『노우젠이 있었다면, 이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제어중추 등을 알 수 있을텐
데.』
“……………”
차라리 무작정 도려내라고 세오는 지독하게 이를 악문다. 과연 정이 없는 살모사
라는 걸 누누이 비카 자신이 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그렇지만 없으니까. 우리끼리 어떻게든, 할 수 밖에 없잖아”
차폐에 숨은 채 살폈다. 대공포와 속사포 바늘 더미 깊숙한 곳에서 <언더테이커>
를 밀어 넣은 — 그의 원수 레일건.
그것을 치기 위해서 일단 첫 번째로
“일단 대공포”
『아. 뒤에서 총 맞고 싶지 않으니까. 선수에서 배제하겠다.』

기동형에게 있어서는 발판 투성이인 이 철골의 요새.


입체적으로 뛰어다니며 상하까지 포함한 전방위에서 공격해 오는 <포닉스(고기동
형)>들을 데리고
미끼역의 <저거노트>가 질주한다. 관통력을 중시한 전차포를 장비하여 넓은 범위
를 일제히 쓸어버리는 무장은 고기동형과 양립할 수 없는 격투장식 중기관총으로
기동전에 유리하다.
손으로 조종하는 전위담당 프로세서가 모는 기체.
원래 속도, 운동 성능에서는 <레긴레이브>보다 <포닉스(고기동형)>이 훨씬 앞선다.
이 양산기들도 한 단계 정도 기체의 크기가 커졌다. 중량은 올랐지만 속도는 오
리지널 <포닉스(고기동형)>과 비슷했다. 프레임과 장갑에 가세해 출력도 강화되고
있는 것 같다. 탄속은 빠르지만 바늘끝과 같은 곳에 파괴력을 집중하도록 만들어
진 88㎜ 전차포로는 우선 명중해서 맞출 수 없다.

187
그러니까.
『라이덴! 부탁한다.』
“오우!”
눈앞에서 미끼용 <저거노트>가 통과한 직후, 일어선 라이덴 휘하의 임시소대가
기관포와 격투 암의 기총 2정을 소사. 등부분의 건 마운트 암에 40밀리 기관포
를 장비하는, 기관포 사양기의 임시소대.
예상되는 회피 범위까지 모두 넘긴 강철의 탄우다. 놓칠 리가 없다. 사냥감을 쫓
겠다고 끌려나온 <포닉스(고기동형)>들이 제대로 소사를 받는다.
전차포로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속도에서 뒤떨어지는 이상, 노림수에 쫓기면, 도
망칠 수 없다.
그래서 쫓아오는 걸 이용해서 킬존으로 꾀어낸다.
이미 확립된 대책이다.
양산형의 투입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대응하기 쉬운 병장인 <레긴레이브>를
레나가 증원해 주기도 했다. 기관포에 더해 각 전대에 반드시 여러 기 새로 가한
산탄포 장비인 <저거노트>. 면 제압 소대의 다연장 미사일에 추적 목표의 하나로
설정된 <포닉스(고기동형)> 데이터.
덧붙여 모든 <저거노트>가 공유하는, 오리지널의 <포닉스(고기동형)>으로부터 산출
한 운동범위 예측.
탄막에 스스로 뛰어들듯이 찢긴 <포닉스(고기동형)>의 일군이 맥없이 쓰러진다.
……그들의 목소리는 신이 없기 때문에 원래 들리지 않는다. 소사를 먹인 전기가
영락없이 대파된 것을 죽은 척하는 녀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뗀다.
그 다음.
땀을 닦고 숨을 내쉰다. 숨이 차고 있는 것을 그 일련의 방법으로 깨달았다. 대
비책은 확립하고 대항수단도 갖추었지만 결코 쉬운 싸움은 아니다.
그래도 대책이 서 있는 만큼 낫다. 처음 보는 것으로 레일건 장비의 전함 같은
괴물을 상대로 하고 있는, 세오나 유트에 비하면.
하물며... “앙주, 더스틴 여긴 괜찮아.”
『라이덴군? 하지만 아직 <포닉스(고기동형)>은...』
“아래를 부탁한다. 세오를 엄호해……도와줘.”

188
앙쥬가 숨을 삼킨다. 그제야 그의 부재를 눈치챈 듯 <스노우위치> 광학센서가 어
딘지 깜짝 놀란 듯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과 그 갑판 위를 날아다니는 <레긴레
이브>의 하얀 기영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세오 군, 무슨 말을…”
“슈가, 에마, 엄호는 우리가 할게. 하지만 가급적 서둘러”
듣고 있던 다른 프로세서가 제의해, <스노우위치>와 <사지타리우스>, 두 사람과
같은 소대의 <저거노트>가 몸을 날린다.
그 너머로 시덴 휘하의 브리싱가멘 전대가 굶주린 듯 날아다니는 <포닉스(고기동
형)>을 쫓아 에워싸고 때려눕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브리싱가멘 전대의 부장인 샤나는 그 전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녀가 모는 <멜
뤼진>은 현재 요새의 최상층, 3층 제3플로어에서 위쪽에서 대공포 저격을 담당하
고 있다.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건슬링거>는, 지금도 혼란에 빠진 모습으로 움직일 수 없
다.
……무리도 아닌가. 크레나도, 세오도 드물게 시야 협착에 빠져 있던 앙쥬도, 지
금은 어쨌든 추락의 순간에는 분명히 공황에 빠졌던 레나도.
라이겐 스스로도 마음이 흔들린다는 그 자각이 있다.
어쨌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늘 함께 있던 그 불길한 망령의 목소
리가. 눈앞의 그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이상한 절규마저도.
벌써 몇 년째 함께 있었다. - 그들을 이끌어온 붉은 눈의 저승사자가.
…그, 바보같은 놈이.
그리고 자신은 그 바보의, 유감스럽지만 부장이다.
그의 부재는 조금이라도, 채워야 한다고 라이덴은 철색의 쌍모를 날카롭게 살펴
본다.

대공포와 속사포를 쏘는 <저거노트>는 마천패루 요새에서 반복적으로 발사하고,


심지어 일부는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옮겨타기까지 하며, 정해함대도 함포로
속사포를 발사한다.

189
다만 지근거리에서 포격으로 제어중추를 파괴하는 역할은 엄청난 함포밖에 할 수
없다. 더 이상 격침될 수도 없기 때문에 적탄을 피할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조준
되지 않기 위한 전침을 반복하면서 하는 포격이 진행된다.

190
191
여전히 포신이 과열될 정도의 맹포격에 <모르포(전자가속포형)>과의 포전을 예상하
고, 본래의 비장의 카드인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과 전
투가 된다면 갖고 싶었던 어뢰를 깎으면서까지 반입한 대량의 포탄이 순식간에
줄어든다.
발걸음이 느린 두 척의 구조함이 조약을 따라잡는다. <데네볼라>의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을 경유하여 엄호함대를 보내면 본국에서 멀리 연락이 온다.
한편으로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또한, 멀쩡하지 않다.
80mm 레일건의 한 쌍의 창이 강력한 포신 안쪽에서, 전자장을 형성하는 은색
유체 금속이 사격의 반동에 격렬하게 날아간다. —포신의 마모.
가루눈이 불타면서 떨어지는 잿더미처럼 은덩이가 해양의 깊은 청색에 떨어진다.

비록 1개의 전대에도 못 미치는 숫자라지만 올라탄 적을 방치할 수는 없다고 판


단했는지 마천패루로 상륙했던 <포닉스(고기동형)> 일부가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으로 돌아온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판단에 세오는 거칠게 혀를 찬다. —도대체 어디까지 훼방을
놓는건지.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올라탄 <저거노트>는 모두 전위담당으로 전차포를
주 병장으로 하는 자들뿐이다. 에이티식스 안에서도 기동전투를 잘하니까 몇 안
되는 발판에만 의지해 탈 수 있었지만 모두 <포닉스(고기동형)>와의 궁합은 그리
좋지 않다.
엄호로서 레나 휘하의 포병전대가, 요새에 남은<저거노트>의 누군가가 보내 주
는, 산탄의 맹포격이 고맙다. 모두 <포닉스(고기동형)> 유체장갑을 흩뜨려 다소나
마 상처를 주는 것 같아, 발을 묶는 것에 도움이 된다.
폭염이 걷힌다. 선수 쪽 레일건의 포탑 위, 다시 돌아온 듯한 새로운 <포닉스(고기
동형)>이 도약, 머리 위에서 <래핑폭스>를 덮치는 것이 광학스크린에 비친다.
“앗……”
비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접근 경보가 울리지만 그 기계 장치의 탄식
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적이 숨어 있는 위치를 전혀 모른다.

192
신이 없으니까.
<레기온>들의 목소리를 듣고, 경고를 주고, 그렇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수의 적
이 주위에 있는지를 지각동조로 공유하고 파악하게 해주는 신이 이 전장에 없는
탓이다.
그가 없는 전투라니, 도대체 벌써 몇 년 만일까?
그 때는 도대체 어떻게 싸우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자신을 세오는 깨닫는다.
그만큼 오랫동안 의지했다.
빠듯하게 끌어당기며 물러선다. 추락하듯 착지한 <포닉스(고기동형)>에 격투 암의
중기관총을 향해 소사. 살육기계 특유의 이상한 반응속도로 뛰는 것처럼 <포닉스
(고기동형)>은 도약해 달아나 떨어진 곳에서, 같은 은색이 무리가 모인 곳으로 착
지한다.
그 발밑에

고주파 브레이드가 1개가, 굴러가고 있었다.

“저것………은”
<언더테이커>의—…….
<포닉스(고기동형)>과의 격돌로 관통시켜 빠져나갔을 것이다. 격투 암의 선택 병장
으로 고주파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것은 기동타격군 전체에서도 신뿐이다. 사정거
리 수 킬로미터의 전차포와 중기관총이 지배하는 전장에서 극단적으로 사이가 짧
은 백병장비를 사용하는 자 따위는 86구에서나 지금이나 그밖에 없다.
그런 장비를, 그 목 없는 저승사자가, 계속 사용하고 있던 것을.
고주파 블레이드를, <포닉스(고기동형)>이 밟는다.
신의 <언더테이커>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지금 유일하게 남은 그의 기체 파편
일 수도 있는 그것을 무정한 살육기계는 아무렇게나 감흥없이 짓밟으려 한다.
그때 솟아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라 각오나 결의라고 불러야 했다.
“앗……”
88mm포를 선회하여, 연사. <포닉스(고기동형)>이 피해 날아가는 것을 더욱 포격
으로 흩뿌려서, 원래 있던 장소로 진출. 적기의 은색의 짐승들의 그 한가운데. 하

193
지만, 그것으로 좋다.
“—파이드!”
외부 스피커를 켜고 울렸다. 마천패루 거점 최하층에서 분명히 신이 떨어진 곳을
걱정하면서 <저거노트>로의 보급 임무를 감행하는, 충실한 <스케벤저>가 되돌아
보았다.
즉시 바깥쪽 가장자리 직전까지 달려오는 것을 노리고, 고주파 브레이드를 걷어
찼다.
<스캐벤저>에 대한 명령으로서는 너무 애매하지만, 파이드라면 이것으로도 알 수
있겠지. 잠깐 건너뛰고 나서, 낙하 예측 지점으로 위치를 조정. 열심히 광학 센서
로 낙하의 궤적을 확인하면서, 등 부분의 컨테이너로 받아들였다.
“확보해! 꼭 네가 가져가!”
고개를 끄덕이는 파이드가 광학센서를 오르내리며 적기를 향해 돌아섰다.
계속 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계속 의지해 주고 있었다. 기계장치의 망령이 반복하는 단말마의 한탄을 듣고,
<레기온>의 위치를 간파하는 이능. 함께 싸우다가 먼저 죽은 전우를 빠짐없이 기
억하여 기억과 마음을 안고 최후까지 데려가 줄 약속.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교
란하는 전위의 역할.
무엇보다 <레기언>들의 귀를 먹먹하게 하는 절규에 직면한 채 누구보다 많은 탄
우와 적의 칼날을 끌어당기는 백병의 틈바구니에서 싸움을 계속한 모습.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그 중에서 내가 물려받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은색의 짐승무리들이 에워싸면서 여러 대가 <래핑폭스>의 퇴로를 끊는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애써 평정한 목소리를 냈다.
“<래핑폭스>로부터 각기. <포닉스(고기동형)>은 내가 유인한다. 그 틈에 제거를.”
내가 그 틈을 줄게. 그 역할을 내가 이을게.
되돌아오는 소리는 확인하지 않고 조종간을 전진으로 내리쳤다. 포위되는 것은
굳이 무시하고, <포닉스(고기동형)> 군의 적기군의 한층 더 안쪽으로.
쳐들어가고, 교란하고, 적기의 사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자신을 위태롭게 하면서
동료가 붙어야 할 틈을 적진에 계속 만든 그들의 저승사자가.

194
신이 항상 그래왔듯이.

산탄포를 연사해 <포닉스(고기동형)> 퇴로를 좁히면서 시덴은 마천패루 거점, 제3


층을 질주한다. 늠름하게 어딘가 사나운 레나의 목소리가 지각동조를 달린다.
『포병전대, 캐니스터탄 발사!』
산탄의 비가 마지막 <포닉스(고기동형)>의 앞을 가로막는다. 피해서 비켜서려던 끝

『핀트 E12, 대기 해제, 소사!』
매복해 있던 <저거노트>가 기총 소사를 내리친다.
그 지휘에 시덴은 속으로 가만히 숨을 내쉰다.
-일어났네, 레나.
그런 놈 따위한테 애당초 그렇게 동요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는 생각하
지만.
분하다. 저승사자의 별명을 가질 정도의 실력이나, 저승사자의 별명을 스스로 짊
어진 바보라고는 인정하지 않지만, 저런 바보같이 둔한 멍청이.
이 전투도 엉거주춤한 곳에서 빠져버리고.
“여기서 정말로 죽으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때려죽여 줄 테니까, 그 녀석.”

마천패루 거점, 상륙한 <포닉스(고기동형)>을 모두 배제 후.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과의 포전의 엄호를 개시한다.
보고를 받고 지켜보며 레나는 작고 날카롭게 숨을 내쉰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아직 건재하다.

벌써 6년이나 전장에 살아 온 세오도 겪어 본 적 없는, 백병거리에서의 <레기


온>과의 전투.

195
그것도 <포닉스(고기동형)> 무리를 상대로. 억누르는 긴장감은 여느 전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벌써 몇 기째인지도 모르게 은색의 짐승이 덤벼드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교차하
는 순간 블레이드처럼 기총소사를 휘두르고 옆으로 후려쳐 총알을 내리친다. 격
파에는 이르지 못한다. 장갑 갑판에서 튀어 다리를 절며 후퇴하는 것은 내버려두
고 <래핑폭스>를 질주하게 한다. 적의, 집단의 한복판이다. 걸음을 멈추면 바로
잡힌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곁에 있으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까지 가죽 한 장 차이로 접한 적
이 없었던 죽음의 기미가, 이 지척의 전투에서는 감돌아 떨어지지 않는다.
생존 본능이 비명을 지른다. 죽고 싶지 않다고 원시의 본능이 아우성치고 있다.
의식의 모든 것이 죽지 않기 위해 가늘고 날카롭게 집중한다.
맞아,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신은 신의 죽음은 보답받지 못한다. 마주보지 못한 채 자신마
저 죽는다면 신은 그대로 헛죽음이다.
전대장님이 누구로부터도 보답받지 못한 것처럼. 지금의 내가 전대장의 희생에
마치 보답받지 못한 것처럼.
……그런 것은 안 된다.
포격이 온다. 포신의 과열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남은 대공포는 <래핑폭스>를 포
함한 <재저거노트>들에게 맹포격을 퍼부어 온다. 그 대공포 바로 위에 날아온
<레긴레이브> 미사일의 무리가 작렬해 장갑 산탄을 쏜다.
이 세상은 악의에 차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은 악의에 굴복하는 것
이다. 빼앗기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존재라고, 짓밟혀 마땅하다고 체념
하는 것이다.
자신도 동료들도, 정해씨족들도 신도 전대장도 빼앗겨 죽어야 마땅했다고.
그런 건 안돼. 그런 건 싫다.
동료들이 확보하고 있는 선수 측 갑판, 철골 차폐 너머로 와이어 앵커가 튕겨 올
라간다. 두 대의 앵커를 갑판에 걸치고 중간에 함체를 박차며 기세를 올리고 새
로운 <저거노트>가 날아오른다. —라이덴의 <베어볼프>와 앙쥬의 <스노우위치>,

196
그리고 더스틴의 <사지타리우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포격으로 빗나가 떨어진 것 같은 철골이, 우연히 외벽
패널이 남아 있어 가라앉지 않았던 것 같던 것을, 요새 옆에 비어 있는 구명정으
로 견인시켜 발판으로 옮겼던 것 같다. 눈 아래, 10톤 이상의 중량에 연달아 짓
밟혀 가라앉는 발판에,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갈 뻔한 구명정이 황급히 견인삭을
떼어내고 떨어져 나가며 착지한다.
동시에 <스노우위치>가 다연장미사일을 발사. <베어볼프>가 소사. 내리치는 장갑
산탄이 후려쳐지는 기관포탄이 <래핑폭스> 주위에 몰려드는 적기를 쫓는다.
『미안해, 세오. 늦었어』
『남은 고기동형은 맡겨라, 세오. ……그러니까 이제 터무니없는 짓 하지마. 그런
것까지 그놈의 흉내내지 않아도 돼』
“…응”
거칠어진 숨을, 길게 내쉰다. 강철비 사이로 두 개의 레일건을 올려다보았다.
전투 전 들었던 말이 되살아난다.
살다 보면 얻는 거니까.
그건 틀림없이 거짓말이다.
이슈마엘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거짓말이다. 그게 아니다,
분명, 사실은 반대였다.
살기 위해서 얻어야 된다. 자신을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잃어도 새롭게 다
시 살기 위해서, 져서 뺏기고 그냥 죽지 않기 위해서 찾아야 한다. 몇 번을 뺏겨
도 무엇을 뺏겨도 거짓이라도 얼굴을 들기 위해서
부끄러운 듯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맞아 신 나도 부끄럽지 않아. 나에게도. 그리고 전대장님에게도.
그래서 그걸 위해서.
패배한 채로 살지 않기 위해서 너를. 전대장님을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내부로 잠입시킨 <시린>의 마지막 기계가 정비기계에 발


견되어 배제된다.

197
“쳇.......”
나도 모르게 비카는 혀를 찬다. 제어중추의 위치는 어느 정도 좁히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됐었는데, 정보 취득 수단이 없는 이
상 완벽을 기해도 소용이 없다. <스텔라마리스>의 잔탄도, 슬슬 위험할 것이다.
지각 동조를 통합함교에 연결하고, 입를 열었다.
“밀리제, 함장. 현시점에서의 제어중추의 위치예측을 보낸다. 후보는 세 곳, 더 이
상의 조사는 불가능하다. 어설프게 돼서 미안하다……….”
대구경포를 이용하는 해상에서의 포전은 전차포의 교전거리보다 길다. <가듀카>
의 25mm포라도 어렵겠지만, 거리에 따라서는 뭔가 보탬이 될 것이다. 데이터를
보내며, 반대의 손으로 전투 기동의 순서를 행하면서 비카는 말하다가…….
시야 가장자리, 격납고 출입구 너머 통로를 스쳐간 강철색에 손을 멈추었다.

대공포의 마지막 1기를, 마천패루 거점으로부터의 사격이 날려버린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남은 마지막 <포닉스(고기동형)>이 누군가의 의도처럼
갑판에서 떠밀려 내려간다.
노호처럼 난무하는 그 보고 속에서 <베나트나슈>의 마지막 주포와 80mm포의
탄도가 교차한다.
40cm 포탄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상방에서 외각을 튕기며 비산된다, 좌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2기의 1.5mm 속사포를 자탄 작렬로 날려버린다. 한편,
<베나토나슈> 또한, 80mm 포탄의 직격을 그 몸에 맞는다.
선미를 잘라낸다. 스크루까지 파손됐거나 속력이 떨어져 바로 정지. —자주 불능.
스크린 속에서 그것을 보며 이슈마엘이 입를 열었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병장은 이로써 고정된 우측 속사포 5개와 귀찮기 짝이 없는 2개의 주포뿐.
하지만 <베나트나슈>는 자주 불능, <바실리스코스>는 주포의 2개가 모두 파손.
<스텔라마리스>도 주포의 잔탄은 이제 예비 탄약고에 남아 있는 분량뿐이다.
그것도 다 해버린다 하더라도 몸을 부딪쳐서라도 가라앉혀줄 생각이긴 하지만.
그전에
“파룡포 발사 준비를. 밀리제 대령.”

198
한편, 아직도 <저거노트>의 지휘를 맡고 있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당신 병사를 데리고 퇴함할 준비를 해라. 구명함에 회수시킬 테니 그 녀석을 타
고 돌아가 줘. 거점의 에이티식스들도 이 상황에서 구명함을 갖다 댈 정도라면
어떻게든 된다.<레긴레이브>는, 투기하게 되어 버리겠지만, 아이들 뿐이라면”
이 작전을 결정한 장성들이 억지를 부려 두 대 붙여준 구명함이다. 최악의 경우
<스텔라마리스>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소년병만은 돌려보내기 위해.
“기동타격군의 임무는 거점제압과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의 배제는 완료됐다. 너희
는 여기까지면 돼. 선단국군인 정해함대의 전쟁에 더 이상 동행하지 않아도 된
다.”
“아니요”
하지만 레나는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그것이 이슈마엘의 책임이고, 각오하고, 긍지라면.
에이티식스들에게는 이것이 긍지이고 그들의 여왕인 자신의 책임이다.
“당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건 저도 마
찬가지고요. 그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다면 저 역시 같은 전쟁터에 서야 합니다.
도망갈 준비는 안 할 겁니다.”
<베나트나슈>의 기울어진 상부 갑판상에, 엘리베이터로 정찰 헬기가 들어 오른
다.
다 오르기 전에 엔진을 걸어 비틀거리면서도 떠오른다.…… 휘청거리는 것은 본
래 파일론5)이 아닌 장소에까지 포탄을 묶어 적재중량을 초과하면서 날아오른 탓
이다. 한눈에 봐도 자폭 목적인 중무장으로 미사일 1개가 되어서 <노틸루카(전자기
포함형)>으로 돌진한다.
그 광경을 배경으로 두 왕은 잠시 노려본다. 무정한 바다를, 이형의 괴물을 상대
로 계속 싸운 정해씨족의 마지막 함장과 죽음의 86구를 살아남은 에이티식스의
여왕이.
“……위험해진다면, 함장 권한으로 퇴함시킨다. 그럼 됐어.”
특공을 가한 정찰헬기가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약간 앞을 선회한 우현의 속사
포의 탄막에 어이없이 격추되는 것이 보였다.

5) 비행장 내에 설치된 항공기의 항로 표지를 위한 탑 따위의 구조물.

199
거의 원형도 없는 금속덩어리가 되어 헬기는 떨어진다. 만재한 포탄에, 유폭하여
불타기 시작했고.
순간 바다가 타오른다.
원정함 자체의 동력은 원자력이지만, 탑재하는 정찰 헬기와 수송 헬기의 그것은
가스 터빈·엔진이다. 보급을 위해 제트연료를 싣고 있는 그 연료가 <데네볼라>로
부터, 그리고 <베나토나슈>로부터도 누출되어 해면으로 퍼진다. 기화한 연료에
인화하여, 투명한 주홍색 불꽃이 해면 전체를 핥으며 달린다.
원양의 푸른 전쟁터가 진홍색 색채로 물들였다.

그 불길에 비춰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기동을 계속 봉쇄하고 있던 <데네볼


라>가 마침내 기관실에 포격을 당한다.
155mm 속사포의 집요한 포격에 함체를 반으로 도려내어 노출된 내부에 드디어
속사포탄이 꽂힌다. 조작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시체나 다름없는 참상으로
기관만 움직이던 <데네볼라>가 힘없이 스크루를 정지시킨다.
그래도 계류선은 집념처럼 배에 매달려 나란히 가라앉는 익사한 망령의 손길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뿌리치기위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 전진했고, 그 기
세로 회두 한다. 계류선의 대부분을 잡아 찢어 아직도 잡히는 군함의 잔해를 끌
고 흔든다.
포효와 같이 기관의 신음 소리를 지른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광학센서가 다시
적의 기함인 <스텔라마리스>로 향한다.

거함이 기울인다.
뒤집힐 수 있을 정도의 급각도로 함체를 기울여 거구로는 있을 수 없는 급회두를
실행한다.
발 아래로 해수면이 보이는 갑판을, 각좌한 <포닉스(고기동형)>과 <저거노트>가 똑

200
같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빌어먹을....!”
순간적으로 앵커를 내리치고 라이덴은 <베어볼프>를 그 자리에 앉힌다. 젠장. 움
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아직 대공포와 <포닉스(고기동형)>을 제거했을 뿐, 속사포
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는데.
선수가 <스텔라마리스>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우현을 돌린다. 멀쩡한 주포와 우측
의 5기만 살아남은 함포. 군함이 적함에 대해 최대의 화력을 발휘하는 자세.
당황한 듯 <스텔라마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멀리서 보인다. 그것을 비웃듯
이, 무겁게 2개의 80mm 레일건이 선회한다.
시킬까보냐
형을 묻어주고 그것만을 이루며 자신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그녀석
에게 누군가와 더불어 사는 미래를 보여줬다.
공화국 시민 대부분이 사생결단의 대공세 와중에 라이덴을 지킨 노부인과 신을
키워준 신부를 살아남게 해 재회시켰다. 그 정도는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남
겨놓은 척했다.
또다시 한번 보여준 준 희망이나 미래와 무자비하게 빼앗아 가는 것 같은 심술궂
음이 이 세계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의도대로 절망으로 멈춰 서거나 할 것인가.
<저거노트>를 직립시킬 수조차 없는 이 경사, 그것도 와이어 앵커로 매달린 자세
로는 포격해 봤자 명중 정밀도는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흔들림이 없게.……고정되어 있으면 되잖아.”
병장 선택, 전환

이글거리는 바다의 불길을 선수로 가르고,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 회전한다.


모든 탄을 쏴 버린 미사일을 던지고 중기관총의 잔탄을 확인한 뒤 급회두한다.
갑판에 남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의 기체를 마찬가지로 와이어 앵커로 자기를 고정
해,<스노우 위치>의 발끝이 갑판에서 멀어질 정도의 경사를 앙쥬도 버틴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주포, 80mm포가 선회하는 것은 눈에 띄었지만, 공격

201
가능한 병장이 더 이상 없다. 중기관총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저 거구에겐 상처도
못 줄 것이다. 레나. 게다가 프레데리카도.
어떡하지, 이를 악물고.
전방, 조금 앞. 경사진 갑판을 미끄러져 내려와 솟은 철골에 걸려 멈춘, <시린>
이 빠져나온 무인의 <알카노스트>를 깨달았다.
<레기온>에게 기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폭용 고성능 폭약을 내장했다.
가까이서 매달리는 <사지타리우스> 속 더스틴이 말한다. 즉석에서 2개 분대를
짜, 서로 팔로우 하면서 <포닉스(고기동형)>을 소탕했던,……함께 탄환이 떨어진 그
가.
<스노우위치>에서는 <알카노스트>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처리 근처에 있는
<사지타리우스>이지만, 이 예당은 <레긴레이브>를 몰고 있는 더스틴에게는 불가
능하다.
『...앙쥬』
“응.”
하지만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하지만, 잊지 마.”
전위라고 해서, 항상 먼저 앞으로 나갔다고 해서 삶의 방식으로까지 가로막는 것
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보여준 희망을. 미래를. 바라야 할 행복이
라고 해야 할 것을. 자신도, 더스틴도
설령 그 사람이 이 전투에서 이대로, 없어져 버렸다고 해도.
『그럼. 잘 기억하고 있어.』
그때 어쩐지 지각 동조 너머로 더스틴이 웃었다.
나는 너를 두고 먼저 죽지 않아

선택 병장을 전환. 다리 부분 대 장갑 파일 드라이버. 4기 동시 기폭 격발.


네 대의 57mm 전자파일이 장갑판 갑판에 쏴져 <베어볼프>를 고정한다. 반동으
로 앵커가 빗나가 높다랗게 와이어의 호를 그리다.
상관없이 라이덴은 병장 선택을 주포로 되돌린다. 각도는 한정되지만 선회 포탑

202
을 가진 <레긴레이브>의, 등부분 건마운트의 40mm 기관포의. 한 번 뗀 트리거
를 바로 긋는다.
“이 정도면!”
시선을 쫓고 미동하며 조준을 조정한 기관포가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빼닮
은 포호를 올린다. 기관포탄의 소나기가 하늘을 달리다.

<사지타리우스>가 다리부분의 파일 드라이버를 전부 쏘아 넣는다. 그 기체가 고


정된다.
“지금이야 앙쥬, 가랏!”
동시에 경사진 갑판을 무리하게 박차고 뛰쳐나온 <스노우위치>가 그 <사지타리
우스>를 발판처럼 짓밟아 재도약해서. 비스듬히 솟은 철골에 착지해 무게를 견디
다 못해 넘어지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알카노스트>를 걷어찼다.
제발 - 가랏!
기도하듯이 올려다보고 양쪽의 중기관총을 소사한다.

<베어볼프>의 기관 포탄은, 선미 측의 80mm포의 포구 근처에 그 안쪽에서 전


자장을 형성하는 유체 금속에 한번에 착탄된다. 포신의 파괴는 아닐지라도 강렬
한 그 임팩트로 유체금속을 유리창에 흩뿌린다.
선수측 80mm포 포탑에 <알카노스트>가 떨어진다.<스노우위치>의 주입된 기관
총탄이 내장된 고성능 폭약을 유폭시켜 초속 80미터에 달하는 폭굉이 역시 유체
금속을 산산조각낸다.
직후에 사격된 80mm 포탄의 탄도를 흩날려 흐트러진 전자장이, 극히 조금이나
마 미치게 한다.
해상포전으로는 근소한 거리라고는 하나 10km 밖이다. 약간의 탄도착오도 탄착
의 차이로 직결된다. 두 발의 탄은 모두 <스텔라마리스>와 크게 떨어진 해면으로
들어간다.
비행갑판이 한순간 휩쓸릴 정도의 파도가 좌우에서 정해함을 덮치지만 만재배수

203
량 10만톤의 인류 최대 군함이 전복될 정도는 아니다. 비행갑판상의 <저거노트>
도, 들어온 파도에 떨어지지 않고 견뎌냈다.
맹렬한 사격의 반동에, 동료들의 기체의 발판이 되어 걸린 상정 이상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파일이 빠진다. 10톤이 넘는 펠드레스로 날아간 철골이, 이상한 소
리와 함께 떨어져 내린다.
기울어진 채로 갑판을,<베어 볼프>가,<스노우위츠>와<사지타리우스>가 굴러 떨
어진다. 와이어 앵커 재사출은 모두 시간에 맞지 않는다.
물기둥이 세 개,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옆쪽으로 드높이 올라갔다.

그럼에도 방해할 수 있던 것은, 일격으로도 치명적인 2개의 80mm포의 사격뿐이


다. 5개의 속사포 포탄은 차단되지 않고 <스텔라마리스>로 질주한다. 약간 각도
를 붙여 부채꼴로, 좌우의 어느 쪽을 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교활한 방향으로.
<스텔라마리스>는 어느 쪽도 향하지 않았다.
단지 약간 회두 해, 선수를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 맞대게 한다. 총 탄환까지
몇 초 동안 총탄 면적이 가장 적은 자세를 취했다.
폭풍우는 지나갔다고는 하나 아직 바람은 세다. 가뜩이나 거센 파도 속에서 쏜살
같이 날아온 80mm 포탄의 큰 파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스텔라마리스>를 속사포
의 탄도에서 살짝 벗어나게 한다.
옆바람에 밀려 파도에 휩쓸려 함수 근처에 명중해야 할 속사포탄마저 지근탄으로
끝난다. 현측을 스치도록 하여, 해면에 착탄한다.
하지만 행운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앗, 두번째 스크루에 착탄?! 떨어진 모양입니다!”
비명 같은 보고에 이슈마엘은 혀를 찬다.
“수중탄? 마지막 순간에.”
일정한 각도로 바닷속으로 진입한 포탄이 물의 저항으로 물밑을 직진하는 현상이
다. <스텔라마리스>를 스친 한 발이, 그 직진의 진로상에 우연히 스크루를 잡은
것 같다.
거구를 움직이는 네 기의 스크루. 그 한 기를 상실한 <스텔라마리스>는 -<노틸

204
루카(전자기포함형)> 앞에서 가뜩이나 빠르지 않은 그 배의 속도를 치명적으로 줄였
다.

“라이덴!? -앙쥬!?”
두명, 심지어 더스틴과도 두절된 지각 동조에 세오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다.
추락한 <저거노트>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유연히 회두를
끝내려고 한다. 급각도로 기울던 자세가 점차 수평으로 다가온다.
공격의 기회다. 레일건의 방어도 상당히 허술하다. 하지만 <스텔라마리스>도 속
사포탄을 피하지 못했는지 지금 걸음이 멈췄다. 하필이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포의 정면으로.
눈앞에 떨어진 동료들의 희생에 마치 떠밀려가듯 세오는 <래핑폭스>를 뛰쳐나가
게 한다.
예측한 것처럼 그 앞에, 두 대의 펠드레스가 가로막는다. 얼음으로 세공된 거미처
럼 생긴 <알카노스트>와 순백의 <레긴레이브>다. 레르케의 <챠이카>. 그리고 유
트의 <베레트라그나>.
함께 옮겨 탔고 이제 갑판에는 자신 외에는 이 둘밖에 없는 두 대.
『적포는 2기 입니다, 여우님. 혼자서는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적은 교활하다. ……이곳에 와서 아직 손을 남겨두고도 있다』
남모르는 소녀의 냉철함과 무신경할 정도로 감정이 옅은 동료의 목소리가 끓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다시금 자신의 시야를 의식하고 숨을 내쉬었다.
“미안. ……고마워”
힐끗 <베레트라그나>가 이쪽을 보았다.
『공격은 맡긴다, 릿카. ……마무리는, 네가 하고 싶겠지』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회두가 끝났다. 갑판이 수평으로 돌아오고 그 직후에


역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부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인 <스텔라마리스>에게 이번에는 선수를 돌리려고 한다.

205
확실함을 기하고 접근해 공격하려는 건가.
갑판의 경사가 최대가 되는 동안은 <레긴레이브>로도 움직일 수 없다. 레일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지금밖에 없고,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은 유트에게도 없다.
자신의 기체인 <베레트라그나>의 광학 센서와 같은, 주홍색의 쌍모를 두 개의 레
일건으로 찍은 채로 입를 열었다.
“<베레트라그나>로부터, 요새의 각기. 적 주포를 파괴하겠다. 선수측을 <프리다>,
선미측을 <기젤라>라고 호칭. 일단 <프리다>를 찌그러뜨리겠다.”
속사포 배제를 우선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증원을 기다릴 유예도 없다.
갑판이 기울었고 질주가 불가능한 각도에 시시각각 다가간다.
“레르케”
『언제든지』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거의 동시에.
-갈게. -갈거야.
소리를 지른다
<챠이카>가 근소하게 선행한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갑판은 함체 중앙을 향
해 가파른 경사를 그렸고 선수에 가까운 이곳에서는 휘어지는 것마저 보였다. 정
상의 2개의 레일건의 그 선수 쪽 포탑으로 불에 탄 장갑을 차고 질주한다.
좌우로 눈부시게 작은 도약을 반복한다, 짐승 같은 난수기동으로 적포의 조준을
자신에게서 흩어진다. 대략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급가속과 급선회.
속사포는 아직 모두 죽지는 않았다. 근처에 있는 속사포 몇 대가 선회하며, 질주
하는 <챠이카>를 조준한다. 탄막이 쳐지려는 그 순간, 요새로부터의 동료들의 포
격. 방어막이 없는 포탑 후부에 88mm 고속 철갑탄의 포화를 관철시켜 날려버린
다.
지근거리의 폭염과 흩날리는 포탑 파편 속에서 겁나 일체의 나약함도 없이 <챠
이카>는 달린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에는 80mm 레일건이 주병장이다. 기껏해야 <펠드레스>
몇 대에 격파될 수는 없다. 무거운 바람막이 소리를 거느리고 선수 측의 <프리
다>, 선미의 <기젤라>, 두 대의 레일건이 함께 선회. 30m에 달하는 장대한 포신
과 구경 80mm 대구경포의 포구를, 그 거구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2기의 펠드

206
리스로 향한다.
조준. 지금이다 ……
『유트! <기젤라>는 맡겨라!』
순간 레일건의 두 대가 모두 함수를 향하던 선미측의 <기젤라>가 <챠이카>를
노린 틈을 타 무방비한 선미로 새로운 전대가 옮겨갔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과 마천패루 거점과의 거리는 이제, <레긴레이브>로는 어
떻게 발버둥쳐도 날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던져 <노틸루카(전자기포함
형)>의 전진을 만류한 원정함 <데네볼라>의 잔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 휘둘
러 지금은 해상을 무력하게 끌고 가는 그 강철의 시체를, 거함과 마천패루 거점
과의 사이에 들어간 곳에서 징검다리로 건넌다.
도약에서 부족한 부분은 와이어 앵커로 거리를 벌어 갑판에 도달했다. 선두는 시
덴의 <키클롭스>. 이어서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5기가 추락해, <멜뤼진>을 요새
에 남기고 남은 17기의 브리싱가멘 전대 전기.
적선에 쳐들어가는 해적처럼 날아든 이들은 곧바로 눈앞의 포탑으로 달려든다.
50기가 모두 파괴된 대공기관포와 좌현 쪽은 전멸한 22기의 속사포. 그것들이
갑판 중앙에 계단상으로 겹치는, 포만으로 짜인 성채와 같은 상부 구조. 다시금
앵커를 쏘아서 받침대로 해서 아주 작은 발판에 <레긴레이브>의 발끝을 비틀어
올려 올라간다.
포신의 길이보다 안쪽으로 침입한 그녀들에게, 겨냥되는 <기젤라>는 포격할 수
없다. 선수측의 <프리다> 또한 <기젤라>가 방해가 되어 조준할 수 없다.
때문에 <기젤라>의 30미터 포신 자체가,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휘둘린다.
옆으로 휘둘린 포신의, 그 자체도 수백 t이 되지 않은 질량이 부주의한 한 대를
튕겨낸다. 바다 위로 굴러 떨어지는 동료의 이름을 외칠 여유조차 없이 또 다른
<저거노트>가 여전히 떠오른다.
날뛰는 말처럼 격렬하게 포신을 휘둘러, 치솟는 날벌레들을 물리치려는 <기젤라>
의 거동에 몇 대가 더 튕겨나가고 있지만, 마침내.

선수 쪽 레일건 <프리다> 눈앞에 <챠이카>가 다가간다.

207
선미 쪽 레일건 <기젤라>의 포탑 위에 <키클롭스>가 얹혀 오른다.

2대의 레일건의 포탑 위에 펼쳐진 방열제의 은빛날개가 스스로 풀어져 단두대 칼


날에 벼룩처럼 내려앉는다. 근접 격투전용 전도 와이어. 꼭대기에서 신과의 전투
에서도,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사용한 레일건의 보호 병
장. 역시 접근을 허락하는 사태에 대비해 아직 비장의 카드를 남겨두고 있었던
건가.
<챠이카>나 <키클롭스>와 전도 와이어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요새의 꼭대기에
서의 <모르포(전자가속포형)>과의 전투에서 레나가 무력화에 이용한, 소이탄으로의
포격은 이것으로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너덜너덜한 손으로 허를 찔릴 줄 알았나? 고철』
<챠이카>가 발을 멈추어 포격.
닳은 갑판이 타는 듯한 급제동으로 다리를 멈추고 떨어지는 전도 와이어에 포구
를 향해서 연사. 신관의 최저 기폭거리 설정을 삭제하고 시한 신관으로 공중에서
기폭. 탄회의 잔탄을 단번에 쏘아 올려 구축한 폭풍의 방패가, 떨어지는 와이어를
튕겨 찢는다.
<챠이카> 역시 스스로 만들어낸 작렬의 폭풍에 휩쓸리는 형태로 추락한다.
포탄의 최소 폭발 거리는 파괴 반경에 기체가 포함되지 않도록 설정된다. 그것을
놓고 포격을 가한다고 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온몸에 지근탄 조각을 맞고 갈기갈기 찢겨져 마침내 <챠이카>가 각좌한다.
펑펑 쏟아지는 그 기체의 그림자에서 마치 떠오른 것처럼 유트의 <베레트라그
나>가 포탄 파편과 와이어의 칼날 폭풍을 뚫고 지나갔다.
포탑까지 남은 거리는 200m. 30m의 포신을 가진 레일건에는 사각이 되는 지
근.
하지만.
……역시, 한 걸음 부족한, 것인가.
<챠이카>를 향해 보내려던 포신이, 그 속도를 줄이는 일 없이 선회해 떨쳐지려
하고 있는 것을 — <베레트라그나>를 때려 부수려고 쫓아오는 것을, 시야의 끝에

208
유트는 파악한다. 포탑 등, 제어중추가 있을 법한 위치에는 아직 까마득하다.
한 쌍의 창 같은 포신이 옆으로 쳐들어온다.
극도의 집중으로 천천히 보여지지만, 직격탄을 맞으면 <저거노트>는 우선 유지조
차 못하는 초중량의 흉기.
그것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벌써 몇 년이나 전에 깎여 없어져 버렸다.
동료가 죽는 것은 기동타격군에게는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익숙해져 버렸다.
포신이 다가온다. 때려눕힐 때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불현듯 생각났다. 세오와 이야기 했다, 탑의 이야기를
올라갈 때마다 감정도 욕심도 오뇌도 내팽개치는, 마치 죽음을 향해 가는 듯한
정죄의 탑, 86구에서는 어딘가 항상 그 탑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올라가지 않는다. 이곳은 86구가 아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목표로 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자랑 이외의 고뇌도 감정도 욕심도 바램도 여기서는 버리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른다.
가로채기에 휘둘리는, <프리다>의 포신.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렇지만 파괴도 방어도 불가능한 그 흉기를, 그러니까 전혀
무시하고 다른 목표.<프리다>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침묵시켜야 할 와이어-나비
날개가 솟아나는 뿌리 같은 그 기부에 88mm 전차포의 포격을 퍼부었다.

“시덴. 전도 와이어는 이쪽에 맡겨줘.”


동료들이 하층으로 피난해 가는 가운데, 굳이 마천패루 거점, 제3층 제3플로어에
남은 그 일각의, 중도에 꺾여 꽃잎처럼 비스듬히 바깥으로 늘어진 철골 위.
그 선단 근처까지 진출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힌
<멜뤼진>으로 샤나는 별로 자신이 없는 장거리 저격의 조준을 신중하게 맞춘다.
옮겨타기에는 너무 높고 바람이 강해서 저격에도 적합하지 않은 불안정한 발판
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하다간 발판이 부러지거나 실족해서 굴러떨어지
는 위험한 곳까지 진출해야 한다. 잘하지도 못하고 위험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209
않으면 져버리니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죽고 싶지 않다.
이 세계에 인간따윈 필요없다. 인간은, 세상은 악의에 차있고 잔인하다.……그런
것은 알고 있다. 이제 막 크레나나 레나가 깨달은 것처럼 눈앞에서 빼앗겨 버리
지 않아도 이제 새삼스럽게 알고 있다.
세계 라는건, 잔인하다.
죽는 게 차라리 편하다면서 엷은 미소까지 머금고 칼을 들이댄다.
그래, 그래서 죽는다니, 좋아할 수 없는 이런 세계가, 말하는 대로 해서 뭐 하겠
어?
<기젤라>의 등 부분에, 대각선 위에서 포격.
노리는 것은 와이어 다발이 돋아나는 그 밑의 얼마 안되는 장갑 틈새. 마천패루
에서는 이제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 한 점에 정확히 고속철갑탄을 내리쳐 날려
버린다.
죽어가는 뱀이나 짐승의 영리한 장부처럼 몸부림치며 강삭은 떨어진다. 그 틈을
타 <키클롭스>는 포탑 등부, 레일건의 제어장치가 놓여 있을 법한 곳에 산탄포를
들이댔다.
“-먹어라 고철덩어리”
포호하면서 쏘아진 88mm 포탄이 <기젤라>를 등부분부터 관철한다. 비명 대신
유체를 뿌리며 고정돼 있다가 한순간 몸을 뒤로 젖힌 듯한 선미의 80mm 레일
건이 마침내 불을 뿜으며 퍽 쓰러졌다.

한편 선수측, 또 하나의 레일건인 <프리다>는, 전도 와이어를 근원부터 상실한다.


내리꽂힌 성형작약탄에 도전 와이어가 불꽃 올라, 제어를 잃어 힘없이 갑판에 눕
는다.
단, 전도 와이어를 배제해도 <프리다> 자체는 죽지 않았다.
근접한 적기를 배제하기 위해 휘둘린 레일건의 포신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옆으
로 후려갈긴다.
『자기방어병장배제. ……나머지는』

210
순간적으로 유트는 <베레트라그나>를 옆으로 도약시켰던 모양이다. 그 회피도 헛
되이 순식간에 따라잡은 <프리다>의 포신에, 10톤의 <저거노트>가 조약돌과 같
이 튕겨나갔다.
지각 동조가 끊어졌다.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베레트라그나>가 눈 아래 바다로 굴러 떨어
진다.
그 장렬함을 맞바꾸어.
“응, 맡겨 둬 유트. 레르케도.”
아직 남은 폭염을 공중에서 뚫고, <래핑폭스>가 땅을 기듯이 질주한 <챠이카>와
<베레트라그나>를 미끼로, <챠이카>의 폭염에 몸을 숨기고 와이어 앵커와 도약
으로 <프리다>의 머리 위의 공중으로 접근했다.
내려다보는 각도를 최대, 갑판으로 포신과 광학 센서의 초점을 맞추고 있던 <프
리다>는, 그 입체적인 제휴에 불의의 공격을 받는다. 자기방어를 위한 병장은 다
써버렸다.
다만, <프리다> — 레일건 자체는, 아직 포격을 실행하고 있지 않았다. 창과 같
은 포신이 선회하며 <래핑폭스>를 다시 파악한다. 바로 그 전체로 전류의 뱀이
날아다니고 다음 순간 파쇄음과도 비슷한 천둥소리가 울려퍼진다.
<래핑폭스>의 광학 센서에 앙각을 잡고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는 구경 80mm의
포구가 비친다. —거포라지만 과연 <레기온>. 반응이 빠르다. 이쪽도 포의 제어계
를 파괴하기 위해 포탑 등부까지는 도달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나.
사람 한 사람도 삼킬 것 같은 눈앞의, 거대한 공극. 그 안쪽에 장전되어 있을 것
이다, 사격 직전의 80mm 포탄에 조준을 맞추었다.
격발
<레긴레이브>의 88mm 활강포가, 강판을 내리치는 듯한 포성을 높인다.
포신이라고 해도, 비어 있는 것은 구경 80mm의 큰 구멍이다. 이삭을 가지런히
한 창과 같은 레일의 틈새, 그 정확히 중간으로 포탄이 빠진다. 다만 사격 직전
의 조준 변경이 약간이지만 각도가 나쁘다. 80mm 포탄이 더듬어야 할 궤도를,
88mm 성형작약탄은 도중까지는 역주행하다 포신의 중간쯤 지나서부터 전자장을

211
형성하는 유체에 접촉해, 잘라내면서 레일을 따라 방향을 돌려서 신관이 작동하
고 거기서 작렬하며 전자장을 형성하고 있던 유체 일부가 성대하게 흩어졌다.
무게 수백 톤을 넘지 않는 포신이다. 88mm 포탄이 내부에서 작렬한다고 해도
파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안쪽에 차는 유체를 화려하게 날려 회로가 쇼트해 전류가 폭주. 방금까지
쏘려고 했던 80mm 포탄의 <프리다>에게는 불행하게도, 눈앞의 유충을 날려버
리기 위해서 장전하고 있던 산탄의, 그 외각의 신관이 레일 사이에서 오작동했다.
작렬에 겹쳐서,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의 폭발.
발사체를 가속하기 전 - 운동 에너지를 적용하기 전. 요새마저도 날려버릴 수 있
는 본연의 힘과는 거리가 멀지만, 몇 톤의 포탄을 넓은 지역에 퍼뜨리는 폭약의
엄청난 에너지가 <프리다> 자신을 공격했다.
견고하기 짝이 없는 구조의 레일 역시 이 충격을 견디기 어렵다. 낙뢰로 두 동강
난 큰 나무처럼 한 쌍의 레일이 각각 반대 방향으로 꺾이면서 포신이 열렸다. 탄
체를 가속하기 위한 레일이,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없는 형상으로 불가역적으로
변화한다.
반 이상이나 우연이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지만.
“<프리다> 격파 ”
남은 건, 하고 생각했을 때 충격이 왔다.

“세오?!”
지근거리 폭발에 <래핑폭스>는 선수 방향으로 요란하게 튕겨져 나간다.
각좌한 <기젤라>의 포탑 위에서 시덴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데굴데굴 두 번 정도 굴러가고 <래핑폭스>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선다. 연결된 지
각 동조 너머로 아찔한 머리를 누르는 모습으로 세오가 말한다.
『아얏…아, 일단 무사해』
“나 참...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거든……”
이것으로 80mm 레일건은, 어느쪽이나 격파했다.
나머지는 남은 속사포를 찌그러뜨려서 <스텔라마리스>로, 라고 생각했지만, 그

212
<스텔라마리스>가 상처받은 거구를 끌듯이 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좌측으
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다. 원래부터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스스
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과 포격에 총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속사포를 터뜨리는 것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느닷없이 세오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를 했다.
『앗……시덴! 브리싱가맨 전대도 다들 피해! 그건 —....』
초조에 사로잡힌 빠른 말로 경고가 날아온다. 그 목소리가 시덴도 반쯤 잊었던
일 년 전 같은 레일건과의 전투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랑 뮬 정상에서 본 그때는 미처 그럴 줄 몰랐던 <언더테이커>와 <모르포(전자가
속포형)> 아침노을 속의 악몽 같은 일대일 대결. 그 결말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적기를 말려들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체내에 그것
을 안는 전투 기계의 광기의 발악.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은 자폭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경고가 기억나는 것은 아주 조금 늦었다.
<레기온>의 전투 불능을 판단하는 신은 여기에 없었고, 경고는 제때 이뤄지지 않
았다.
무음의 섬광. 연이은 폭굉
충격파와 섬광과 함께 <기젤라>가 그 자체로 1000톤이 될까 하는 레일건이
1000톤 분량의 강철조각에 산산이 부서지며 날아갔다.

자폭한 <기젤라>의 바로 위나 근처에 있던, 브리싱가멘 전대 전기가 충격파에 튕


겨져 파편을 맞고 무력하게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으로부터 굴러 떨어지는 것을
레나는 본다.
“……!”
지를 뻔한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안 돼 아까 시덴한테 뭐라고 했어, 그런데도 또 흔들리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신
이다.
서두르면서 구명정에게 지시를 내리는 에스텔의 목소리가 들린다. 5번, 7번 가고

213
있네요 12번, 수용완료 후 대기위치로. 15번, 이제 한계로 급유를. 구명정은 정해
함대에 속하는 전기가, 한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불바다와 포격의 빗속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녀 주고 있다. 그 누군가가 주워 준다고 믿어야 한다.
해상 구조는 일각을 다툰다. 그 효율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프레데리카가 계
속 이능을 구사하고 있는지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구명정 누군가 말하는 것
이 무선 너머로 들린다.
『아가씨, 이제 정말 됐으니까 그만 봐도 돼. 손상상태는 우리가 보고 있고, 일단
은 훈련도 하고 있어. 네가 무리하지 않아도 돼!』
흐느끼며 프레데리카가 그럼에도 고개를 흔들고 있다.
“아직 아니다. 할 수 있다. 구해야 할 자들은 아직 남아 있는데 할 수 있는 걸
안하면 후회할 뿐이다. 그러니까 — 아직이다.”
“……아아”
입 안에서만 아찔하고 레나는 고개를 든다. 그래, 아직 손을 멈출 수는 없다.
아직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자체는 죽지 않았다.
문득 뭔가가 경종을 울렸다.
……죽지 않았어?
그렇다면 레일건은 죽었을까?
무엇으로 죽었다고 확인했지?
<레기온>의 탄식을 듣는 신은 이곳에 없다. 기계장치의 망령이 이 세상에 머무는
한 반복되는 단말마의, 그 끊어지는 순간을 아무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데도 끌리도록, 올려다본 곳.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상공에 소용돌이치는 은색이
눈에 비쳤다.
햇빛을 흩뜨리고 소리 없이 날아가는, 은빛날개 나비의 무리들이다. <레기온> 제
어계의 특이한 기계 장치 나비.
유체 마이크로머신, 아마도 격파된 <기젤라>의 제어와 화기관제를 위한 것.

214
215
마천패루 거점 최상층의 <모르포(전자가속포형)>이 격파된 직후, 떨어져 내린 은의
제하.
……깨달았어야 했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포닉스(고기동형)>과 같은 불사기능을 가진 지휘관기다.
기체를 파괴한 정도로는 격파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앞으로 대치해 나갈 <양치기>, 어쩌면 잡병들조차도, 혹은.
나비 떼가 눈사태처럼 내려오면서 날개를 접고 불길한 달빛처럼 쏟아진다.
향하는 곳은 세오가 격파한 선수측의 레일건, <프리다>. 내려앉고, 옹기종기 모여
서, 좁은 틈새로 빨려들 수 있도록 장갑의 아주 작은 이음새로부터 비집고 들어
간다. 포신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 레일상의 포신이 그 폭발로 구부러져, 더 이
상 쏠 수 없을 레일건에 타는 듯한 초조가 밀려왔다.
“프로세서 각위, <프리다>의 사선에서 대피…세오, 도망치세요!”
말하면서 눈치챘다.
안 돼, 늦었어, 깨닫는 것이 치명적으로 늦었다. 저 은색나비 무리가 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이에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일건의 포격 때마다 부서져 흩날리던 은빛 비말.
저것은 유체 마이크로머신이다. 포신의 마모란 즉 전자장을 구성하는 유체 마이
크로머신의 손모를 말한다.
자폭으로 몰아넣은 <기젤라>는 차치하고 <프리다>의 파괴된 부위는 포신뿐이다.
탄체를 가속하는 레일건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고, 그것으로 격파했다고 생
각해 버렸다.
그렇지만 전자장을 구성하는 것이, 유체 마이크로머신이었다면.
예를 들어 근처에 동료의 잔해가 있고, 대량의 유체 마이크로 머신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포격이 옵니다! 유체 마이크로머신이 포신이 됐어요!”

무수한 은빛 입자가 선수 쪽, 구부러진 포신을 갑판에 늘어뜨린 <프리다>로 빨려


들어간다. 마른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듯, 눈 깜짝할 사이에 광학 센서에 푸른 빛

216
이 켜진다.
무력하게 기울어져 있던<프리다>의 30m의 포신이, 해풍을 가르며 수평 위치로
올라간다. 황소의 뿔처럼, 동방의 투구 장식처럼 일그러지고 틈이 벌어진 창 모양
의 레일.
그 안쪽에 은색이 번진다.
전자장을 구성하는 유체 마이크로머신. 원래 공간보다 훨씬 크게 벌어진 틈을, 그
렇지만 은빛 유체가 대량으로 솟아나, 서리가 성장하듯이 뻗어올라 메워 나간다.
격파된 <기젤라>의 화기관제계. 그것을 구성하고 있던 유체 마이크로 머신을 수
중에 넣어, 문자 그대로의 보충함으로서.
대기를 가르는 규환으로 자전이 흩어지다.
전자장이 들뜨고 <프리다>의 강철의 총신의 도처로부터, 소규모의 번개가 주위의
갑판이나 포의 잔해에 착탄한다. 포신이 들어왔다. 수평보다 살짝 비스듬히.
조준은 마천패루 거점. 그 위의 <저거노트>들.
80mm 레일건이 포효했다.

지근거리에서 떨어지는 천둥 소리와 같이 80mm포의 포호가 울려퍼진다. 그 이


상으로 파괴적인, 초절의 탄속이 낳는 충격파가 갑판상을 휩쓸고 지나간다.
사격 직전 선수 부근까지 날아가 선수에 와이어 앵커를 걸치고 뛰어내린 <래핑
폭스>는 그 맹렬한 충격파를 모면한다.
하지만 끝까지 버틴 와이어를 감아올리고 기어올라 돌아온 <노틸루카(전자기포함
형)>의 갑판상.
거기서 보이는 참상
...아-
들어본 적 없는 파쇄음이 울린다. 이 지근거리에서 80mm 포탄의 직격을 받은
마천패루거점이, 자신의 중량을 견디지 못해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고 있는 제 3
층의, 전체가.
초고속·대질량의 탄체는 휘감는 막대한 파괴력을 남김없이 강철탑에 쏟아부었다.
고층건축의 방대한 중량을 지탱하기 위한 단단한 기둥이 부러지고 찢겨지며 금속

217
이 삐걱거리는 처절한 소리를 내고 있다.
아직 탑에 있을 거야.
“크레나. 모두 ­”
흩날리는 파편이나 충격파에 당한 것 같다<저거노트>가, 찢어진 철골의 틈새에
누누이 각좌하고 있는 것이 광학 스크린에 비친다.
다행히 대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수는 그리, 많지는 않다. ……아니, 그렇다 치
더라도 너무 적다. 나머지는 날아가서 굴러 떨어졌는지 운 나쁘게 사선상에 있다
가 완전히 지워졌는지 모른다.
근처에 있던 동료 기체들이 달려와서 콕피트를 억지로 열고 있다. 다행히 호흡이
있었던 것 같은 동료를 끌어내고, 자신의 기체의 콕피트까지 옮기고 나서 서둘러
요새를 내려간다.
마천패루 거점이 삐걱거리다.
자신의 엄청난 무게를 견디지 못해 한계에 이르러 여섯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뚝
부러졌다.
강철을 엮은 기둥이 떨어져 내리듯 쓰러진다. 그 자체로 빌딩만한 거대한 기둥이
이어진 대들보를 이끌고. 너무 커서 차라리 느슨해 보이는 움직임으로, 하지만 중
력에 끌려 점차 속도를 늘려 맹렬하게 끌려나오는 신경이나 혈관처럼 철골이 요
새에서 빼내거나 중도에 찢겨 추락한다. 그 사이로 살아남은 <저거노트>들이 죽
기 살기로 뛰어내려간다.
한편 사격을 끝낸<프리다>로부터, 은의 유체 마이크로머신은 선혈과 같이 비산한
다.
포신 대신에 유체 마이크로머신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레기온>이라고 해도
무리가 있을 것이다. 포신을 구성하던 유체는 대부분 부서진 수정 파편처럼 요란
하게 흩날린다.
빛을 튕겨 배 밖으로 흩어지고 작게 오므라들면서 그대로 바다로, 어느 정도 이
상 되는 덩어리는 다 떨어지기 전에 나비로 변해 얇은 종이 같은 날개로 바람을
타고 되돌아온다. 사격의 반동으로 더욱 뒤틀려 벌어진 포신의 틈새를 다시 메운
다.……과연 그것만으로는
다시 채우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프리다>본체로부터도 더욱 유체 마이크로머신

218
의 재가 배어, 서리가 자라듯이 은색을 성장시켜 간다.
<프리다> 자신의 제어용의 유체 마이크로머신까지 포신에 사용한, 재포격의 준
비. 아마 <프리다>에게도—<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에게도 마지막 한 발. 그렇다고
는 해도
다시 쏠 수 있는 건가.
벼락의 포효가 또다시. 레일건의 발사 준비 완료를 새어나온 번개가 충격음으로
알린다.
그 포탑이 부품의 무언가가 간섭하여 삐걱거리는 규환을 올리고 선회한다.
목표는.
“<스텔라마리스>”
움직일 수 있는<저거노트>는, 자신의<래핑폭스>외에는 이제 없다.
라이덴도 앙쥬도 더스틴도, 유트도 시텐도 떨어져 버린 요새에 있는 크레나들은
마천패루 거점이 쓰러지기 전에 안전한 토대까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고, 스크
루를 손상한 위에 유인되어 접근해 버린 <스텔라마리스>는 이 한순간에는 사선
상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사실에 이상하게도, 정신이 잔잔해지는 것을 세오는 느꼈다. 세계에 자신과 눈
앞의 레일건 밖에 없는 것처럼, 가늘고 날카롭게 연마되어 간다.
자신 이외에 다른 누구도, 이 사태를 타개할 수 없다.
<스텔라마리스>의 격침은 안 돼. 저 함을 잃게 할 수는 없다.
레나를 죽게 할 수 없어, 프레데리카나 비카, 마르셀이나, 관제원에 정비 크루도.
이슈마엘들도, 정해함 타기도, 살아 돌아올 때까지가 역할이다. 동포들을 희생하
면서 해로를 열어 자신들만 귀환하는 오명을 짊어지면서까지 관철시켰던 마지막
자긍심이 그 몫이다.
무엇보다 <스텔라마리스>는 돌아가기 위한 배다. 여기 있는 녀석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도
“…돌아가야 해.”
어디에도 갈 곳은 없어도 어디선가 반드시 찾아내고. 만들어야 한다.

219
붕괴하는 철탑은,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측면을 스쳐 해면에 박히는 궤도에
쓰러진다. 그러니까 쓰러지는 도중에 있는 지금, 그 질량의 대부분은 그와 <노틸
루카(전자기포함형)>의 머리 위에 있다.
혹사하는데도 무사한 기동전투를 위해서 완강하게 조성된 와이어 앵커를 왼쪽 위
로 쏘았다. 쓰러져 가는 철탑의 대부분은 해수면과 수평이 된 그 측면의 철골 중
하나로 얽혀 있다. 동시에 도약한다.
와이어를 감아올리고 다리 힘만으로 빠르게 레일건의 머리위로 <래핑폭스>는 올
라갔다.

세상은 잔혹하고 악의에 차있으며 부조리하다.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는 인간은 죽고, 살아야 되는 이유가 없는 인간이 산다.
반대일 거라고 생각해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은 쪽은
살아서 울지 말아야 한다.
죽은 그 녀석에게, 죽어서 이젠 어디에도 없지만, 아직 나는 기억하고 있는 그
녀석에게 얼굴을 돌릴 수 없는 삶의 방식은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행복해야 된다.
혼자서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무서워도, 반드시.

전대장님

용서하지 말아 달라.
자신의 죽음을 저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죽음의 순간까지 사람을 챙
겼다. 끝까지 고결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내겐 그 저주가 아직 필요해.
당신이라는 저주가 없으면 아직 살아갈 수 없으니까.
당신의 죽음에, 죽은 당신에게, 나는 나의 생활 방식으로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
다.누구로부터도 보답받지 못하고 죽은 당신에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아는 유
일한 생존자인 내가, 내 삶의 방식으로 보답하지 않으면 당신을 정말로 헛죽음으

220
로 만들고 만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전대장님
당신은 분명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지만.
세상 누구나가 바보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옳았다.
당신은 올바르게 살았다고, 당신을 어리석다고 하는 세계에 계속 나타내려면……
나는, 내가, 살아서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되니까.
아무것도 없어도, 다 잃어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위해서.
행복해야 한다는 저주와 당신을 바꾼다.

목적은 레일건의 등, 장갑 아래의 제어계. 시덴이 쏘아 맞힌, 일격에 레일건을 침


묵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약점.
그 한 점을 노려 포물선을 그리며 <래핑폭스>는 뛴다.
여기다.
노려야 할 한 점이 눈앞에 온다. 기체를 반전시켜 포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한다.
짧고 날카롭게, 참았던 숨을 무의식중에 내쉬었다. 조준까지 조금 더.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 기능은 없는 <저거노트>는, 공중에서는 포물선으로 밖에
움직일 수 없다. 단순한 그 궤도는 매우 겨냥당하기 쉽다. 시계 끝 살아남은 최
후의 속사포가 돌려지는 것이 눈에 비친다.
피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조준이 맞는다.
트리거에 걸렸어, 손가락을

군함포의 조준 순서를 그는 모른다. 그러니까 알아들은 그대로 전한다.


“선수로부터 20m, 흘수선6) 바로 위.”
만약 육상이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 높이에서의 추락이다. <레긴레이브>의

6) 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배와 수면이 접하는, 경계가 되는 선.

221
고성능 완충계는 그래도 탑승자를 보호하겠지만 안정을 군의관이 엄명하는 정도
의 중상이다.
그래도 필요할 것 같아 치료는 끝내고 통합함교로 왔다.
아직 자신은 살아 있고, 아직 동료들은 싸우고 있고, 그리고 아직 할 수 있는 일
은 남아 있다. 그래인 이상 이행하지 않고 자고 있을 수는 없다.
해석이 허사가 됐다며 어깨를 빌려주는 비카가 쓴웃음을 짓는다. 뒤돌아보며 귀
를 기울이던 이슈마엘이 화기관제사관에게 눈을 돌려 조준의 지시를 내린다.
크게 뜨고 얼어붙는, 백은색의 두 눈을 지금은 외면하고 —단 이정도만으로 끊어
지는 숨결 그대로, 그것의 위치를 나타냈다.
“제어 중추는 그곳이다. 그곳이 가장, 소리가 많다.……조준을!”

정해함<스텔라마리스>의, 비행갑판.
네대의 40cm 연장포가 굉음과 함께 선회한다. 지난 폭풍우의 비바람과 이 전투
에서의 그을음과 상처. 마지막 항해에서 여전히 전상의 명예를 받은 여왕의 그
웅장한 모습.
준비를 마치고 함교 안으로 피신해 있던 캐터펄트 요원들이 새로 알려진 목표로
조정을 마치는 그 거포를 만감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정해함 <스텔라마리스>주포
의 이것이 아마도 마지막 사격일 것이다.
그 마지막 사격에 정해씨족이 아닌, 선단국 군인으로 소심한 이국 병사의 힘을
빌리게 된 것은, 고맙지만 아주 조금, 분한 마음도 든다.
쏴아악!
폭발 투성이의 발사염과 강렬한 사격의 충격파를 흩뿌려 포격하며 잔탄의 전부를
허공에 토해내고, 초연을 일으키게 하여 침묵한다. —서늘하고 긴 침묵.
이어서
“행복해라, <스텔라마리스>. 우리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위대한 어머니. ……최후
의 전투에서 파룡포까지 쏘아 끝낸다.”
캐터펄트 요원 중 한 명이 아찔해진다. 명령을 내리는 그들의 임시 함장, 그렇지
만 위대한 큰형님인 이슈마엘의 마지막 포격 명령.

222
『조준 그대로. 파룡포 발사!』
활주로에 길게 박힌 증기 캐터펄트가 하얗게 수증기의 꼬리를 뿜으며 셔틀이 작
동 순간을 학수고대하듯 사출이 작동한다.
2기의 원자로가 가져온 막강한 파워가 셔틀을 걷어차 중량 30톤의 전투기를 순
식간에 이륙 속도까지 가속시키는 것이 항공모함의 계보인 정해함의 캐터펄트의
역할이다. 그 전투기를 견인하는 셔틀이 함재기가 아닌 쇠사슬의 꼬리를 끌고 질
주한다. 굵은 쇠사슬이다. 반대쪽 끝에는 정해함 <스텔라마리스>의, 실로 중량 15
톤이나 되는 닻을 끌어당겨서.
그것은 비행갑판 위를 셔틀에 이끌려 90미터 활주로를 1초도 안 돼 달려 나간다.
캐터펄트는 원래는 장력과 비틀림의 힘으로 탄체를 쏘아내는 공성병기의 명칭이
다.
그 이름을 가진 전투기의 발진 보조장치가 과거 노포의 역할을 그대로 따르게 된
다. 셔틀이 활주로 끝에 다다르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멈춘다. 기세로
떠오른 와이어가, 포물선 꼭대기에서 닻을 내린다.
시속 30킬로의 속도를 그대로 부여하여 중량 15톤의 거대한 화살촉을 투척하였
다.
파룡포
함재기도 포탄도 떨어지더라도 눈앞의 포광종(무스쿠라)을 도살하기 위한 정해함
의 마지막 병장.
닻이 날아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40cm포의 중량 1톤이나 되는 포탄을 뒤쫓았다.
고대 쇠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원시적이고 난폭한 투척 방법으로 던져진 화살촉
이 인류 어느 나라나 실용화되지 못한 최신예 레일건, 그 예상되는 탄도들과 교
차했다.

포성이 들린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 소리의 도달은 포탄보다 늦다. 탄속이 빠르고 교전거리가 긴 현
대 전쟁에서 포성은 착탄보다 나중에 온다.
하지만 그 포성에 마치 촉을 받는 그의 영은 방아쇠를 당겼다. 상대되는 1.5mm

223
속사포의 포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위에서 내리친 88밀리 고속 철갑탄은,<프리다>의 제어부를 바로 위에서 관
통한다.
들릴 리 없는 장비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로 위로부터의 포격에,<프리다>는 일순간 제어부에서 둘로 부러진 카용이 포신
을 뒤로 젖힌다. 포신에 집중돼 있던 전자력이 갈 곳을 잃고 회로를 역류, 온몸
에서 번개피를 뿜어내며 얼굴을 붉힌다. 직후에 자폭 장치가 작동. 모레의 방면으
로 날아가 버린 80mm 포탄이 원양 저편에 착탄한다.
뒤이어 스텔라마리스로부터의 포격이 전자기포함형으로 착탄. 게다가 착탄.
견고한 장갑을 자랑하는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지만, <스텔라마리스>는 거리를
좁혔고, 또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자신은 정해함에 접근하고 있었다. 탄속을 감
쇠하는 거리와 이점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40cm 포탄의 연사가 현측 한 점에 정확하고, 연달아 내리꽂힌다. 몇 번의 작렬
로 드디어 관통했고 차탄이 함체 내부로 침입해, 거기서 작렬한다.
장갑 내부 충격에 드디어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의 측면에 큰 구멍이 난다.
그 큰 구멍에 날아온 고대의 거대한 화살촉이 다짐하듯 돌입하고 은색 유체 마이
크로머신이 치솟는 선혈처럼 요란하게 흩어진다.
지각동조 너머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이 분노의. 혹은 증오의 포효를 울린다
철색 거함은 그대로 착탄의 기세에 질린 듯 옆으로 쓰러진다. 해일과 같이 바다
를 가르고, 파도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간다.
마지막으로 집착하는 듯한 시선을 바다 건너의 정해함을 향해.
만재배수량 10만톤의 거대한 전함은 어이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어온 지각 동조 너머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탄식의 소리는 아직도 가시지 않


았다.
아직 살아 있다. 그 사실에 레나는 험상궂게 눈을 흘긴다.
가라앉은 것이 아니다. 잠수한 것이다. 애초에 바다속에서 떠오른 <노틸루카(전자
기포함형)>이다.

224
전투는 불가능해도 잠항은 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리를 좁히는 게 아직 부족했다. 잔탄의 대부분이 장갑을 부수는 데 소비된 것
이다. 제어 중추의 완전 파괴에는 이르지 못했다.
상처 입은 물고기 헤엄치듯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 규환이 멀어진다.
알아듣고 레나는 이슈마엘을 돌아보았다.
“함장님, 계속해서 추격을. 아직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은 죽지 않았습니다.”
말하다 말고.
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목과 혀가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아 꼼짝달싹도 못 하고 사고조차 할 수 없게 됐
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렇게 됐다.
외부를 비추는 홀로 스크린.
그 스크린을 가득 메운 거대한 안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운데에 하나 좌우 측면에 하나씩, 안구 하나하나에 인간이 그대로 들어갈 것
같은, 너무나 거대하게 응시하고 있는데도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껴지지 않는, 그
런 눈을 말이다.
사람이라는 생물의 나약함과 왜소함을 더할 나위 없이 깨닫게 해주는 듯.
검은 눈동자와 그 주위의 홍채, 눈꺼풀은 없지만 눈의 흰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
으며, 약간의 차이로 사람이나 짐승의 구조와 구조 자체의 차이는 별로 없는 것
으로 알려져 있는 투명한 동공 구조. 그러나 원형과 방추 대신 날카로운 마름모
모양의 눈동자와 유막의 무지개 빛깔을 닮은 금속광택이 있다.
밝게 빛나는 공작의 날개 같은 홍채.
사람이 아니다, 이형의 존재
마천패루 거점에서 수십 킬로미터 더 떨어진 곳. 바다빛이 변하는 경지, 사람의
영역과 그 바깥의 경계선
그 경계선을 어느새 넘어서 정해함의 코앞에 원생해수 한 마리가 떠올랐다.
치켜든 긴 목과 뾰족한 머리. 그것들은 모두 비늘로 덮여 있고, 그 비늘의 질감
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하다. 금속으로 된 둔탁한 반짝임은 갑옷과 같았고,
나이프와 같은 뾰족한 비늘은 수정처럼 투명 하지만 해파리의 살처럼 부드러운

225
질감의 또 한 장의 비늘 층이 두껍게 덮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목 뒤, 등에 상당
하는 부분에 자란, 깨진 수정의 조각과 같은 등지느러미 모양의 기관.
딱딱한 비늘의 존재와 뾰족한 구순은 굳이 말하자면 파충류이지만 어딘지 부드러
운 실루엣은, 우미우시 같은 연체 생물의 인상이었다.
전체 길이는 추정 330m. 원생해수 최대의 포광종(무스쿠라), 관측 사례 중 그
최대의 300m급의 행차였다.
해양을 지배하는 바다의 왕 그 풍채가 <스텔라마리스>를 정밀하게, 그리고 거만
하게 내려다본다. 정해함 안에 꿈틀거리는 자그마한 육생 포유류의 존재를 분명
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꺼풀 없는 안구는 깜박거리지 않고 함선 내부의 레나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떨어지지도 않는다.
너덜너덜한 인류와 그 함선, 그들의 적이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기계의 일종인 강
철 괴물. 그 양쪽 모두에게 있어서 마치 이질적인, 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질적인 눈빛.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이런 눈빛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포광종(무스쿠라)의 뾰족한 머리가 갑자기 열린다.
안쪽에 둔하고 반짝이는 수정 같은 돌기가 들여다보인다.
하늘을 태우는 레이저의 발진부라는 것을 마비된 생각의 한 구석을 간신히 알아
챘다.
그순간 포광종(무스쿠라)이 포효하였다.

226
227
무거운 <스텔라마리스>의 함체가, 찌르르 떨리고 울릴 정도의 고주파의 시끄러운
소리. 인간의 가청 직전의, 소리와 거의 충격파에 가까운 그것이 전신을 울린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생해수는 말을 다루지 않고, 원생해수끼리 의사소통하는 데 언어가 사용되는지
아닌지 여부도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이 경고라는 걸 누구나 이해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몸도 사고도 얼어붙게 만든다. 인간이란 본래 대지를 기어다니
기만 하는 무력한 짐승의 일종이다. 인간의 지혜도, 살육기계의 전투능력마저 깨
뜨리는, 자연의 절대강자에게 대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리를 열었을 때처럼 느닷없이 다시 찰칵 닫고 포광종(무스쿠라)이 몸을 날린다.
전체 길이에 300미터, 생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거구의 짐승에 걸맞는 어떤 것
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그 긴 머리를 코끝까지 파도 아래로 사라지고 수평선 너머로 헤엄쳐 가기까지 인
간들은 누구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숨조차 최소화하고 몸을 움츠리는, 폭풍우를 지나는 작은 동물들 같은 시간이 지
나간 후 잠시.
길게 숨을 내쉬고, 최초로 움직인 것은 신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 치료도 없이 억지를 부려 통합함
교까지 왔고, 그 무리가 끝내 한계에 다다르지 못해 퇴락한 것이다.
“신!?”
황급히 레나가 달려든다. 어깨를 빌려주던 비카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이지……그러니 무리하지 말라고……!”
“경이 돌아왔다면 나의 일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데려와 주었지만.……뭐, 괜찮겠
지, 얌전하게 치료로 돌아가라. 마르셀, 도와라.”
“그건 전투가 끝난 뒤에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울음이 터질 듯한 레나를 외면하고 탄식하는 비카와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르셀은
일단 무시하고 구조됐을 때 한 번 제외돼 이곳으로 오다가 잡동사니 끼우던 레이
드 디바이스를 다시 켰다.
동조 대상은 당연하다.

228
“크레나, 세오. 걱정을 끼쳤다. 나는 무사해. 다른 사람들은 아직 회수중이라 전부
확인 못했는데.”
크게 크레나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길게, 울음을 터뜨리는 듯이
숨을 쉬는 것도.
『아아……』
『아, 나도 회수가 끝나서, 그래서 일단 살아있어. 앙쥬와 더스틴도 적어도 같이
회수되진 않았지만 살아있고』
계속해서 치료실이나 병실에서 통신만 비집고 들어온 라이덴의 목소리도 들려온
다.
하지만 세오의 말만은 돌아오지 않는다.
눈물을 닦고 레나가 먼저 말한다.
“살았어요, 세오. 당신이 레일건을 파괴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당했을 거예
요.”
응하는 목소리는 역시 없다. 의아해서 신이 입을 연 직후에야.
『다행이다, 레나. 신, 라이덴도……다행이다. 너희들이 무사해서』
그 목소리 상태는.
무언가를 눌러 죽이는 것 같은, 예를 들어 아픔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세오?”
부상당한 것을 눈치채고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낮아진다. 긴박감이 목을 조르는
것을 자각했다.
이 목소리는
참을 수 있도록 꾹꾹 눌러 죽이고, 그리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고
조용했다. 참고 있는 것은 상처의 아픔만이 아니다.
조급하게 물었다.
“부상당한 거야? 혼자 힘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

말을 도중에 끊고, 세오가 말한다.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아마 얼마 없을 거다. 자극이 너무 커서 감각이 마비돼서

229
아무 느낌도 못 느낄 뿐이니, 감각이 돌아온다면 분명 소리도 못 들을것이다.
“아니. 미안.”
마지막에 엇갈렸던, 1.5mm 함포탄은 산탄이었다. 신관설정이 잘못되었는지 <래
핑폭스>옆을 빠져나와 지나가다 자폭했다. 직격탄은 아니었다. 작렬하며 흩어지는
그 파편들도 대부분 등부의 포가 받아주었다.
<노틸루카(전자기포함형)>을 붙들어놓고 있던 원정함 <데네볼라> 의 잔해. 그 위에
서있었던 <레핑폭스> 의 콕피트 안, 폐쇄된 콕피트 안에서 직접은 보이지 않을
터인 <래핑폭스>의 손상을 눈으로 본다. —등 뒤에서 습격한 포탄은 왼쪽 다리부
분을 전후 장갑과 프레임, 심지어 콕피트 블록의 일부에 이르기까지 잘라내서 가
져가 버렸다.
잘려나간 커다란 구멍이 뚫린 프레임에서 파란색이 엿보인다.
하늘의 파랑 바다의 파랑. 비록 잔해라고는 하지만 원정함의 갑판이었던 곳은 해
수면에서는 아직 한참이나 높은 위치에 있고, 그래서 막힐 것 없는 바다의 아득
한 먼 곳까지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라고 해서 연상하는 푸른 색채와 해양의 낯
선 깊은 남벽.
수면으로부터 위에는, 사람이나 짐승은커녕 새도 벌레조차도 살지 않아 맑은 대
기의, 폭풍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검푸른 천공이, 수
평선을 경계로 그 아래, 남벽의 해양과 푸른 바다는, 높은 햇빛에 무수한 파도의
가장자리를 미세한, 오묘한 청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어느 쪽이, 혹은 어느 쪽이든 거울과 같은. 온통 파랑색
어느쪽도 빛나는 것 같고, 그 안쪽의 깊은 어둠은 결코 간파하지 못하게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나락의 표층이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아
름다울까.
전쟁터를, 전투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공화국의 86구에서 무인기 부품으로 전투를 강요당하고, 그 끝에 죽음을 명령받
은 것을 지금도 세오는 원망하고 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것밖에 선택할 길이 없었을 뿐이다.
살아남아서. 자신의 긍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럴 터인데 어째서 일까. 눈물이 흘러내렸다.

230
“나는 이제 — 함께 싸울 수 없겠네.”

231
232
등 뒤에서 덮친, 포탄. 완강한 콕피트까지 찢는 위력의.
파편 자체도, 그 위력도, 대부분 등부의 장갑이 받아주었다. 하지만 스며든 충격
에 내부 부품이 갈기갈기 찢겨 흩날렸고.
그중 하나가 뚫린 왼손은, 손목과 팔꿈치 중간에서 잘려나가 어디에도 없었다.

<계속>

233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