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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스) 정복자의 침실
(파토스) 정복자의 침실
파토스 장편 소설
|차례|
1. 앞을 볼 수 없는 자
2. 신들의 세계
3. 인간의 굴레
4. 꽃과 새벽별
1. 앞을 볼 수 없는 자
[테베레와 키쉬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오랜 문화를 형성한 테베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키쉬르에 무릎을 꿇는다. 테베레는 적의 장군을 포로로 붙잡고 휴전 협정을 제안한다.]
테베레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인한 분열 때문에 적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 국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인질 협상을 기회로 키쉬르를 몰아내고 내부 정리도 할 생각이었다.
“어디를 원했지?”
“리기아입니다.”
이들이 사는 땅, 아카이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르는 유피테르의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피네오스도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트리온은 빈정거렸다. 이에 에우한은 코웃음을 쳤다. 이 자리에 모인 트리온, 피네오스 그리고 에우한은
테베레를 이끄는 세 명의 왕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매우 싫어했다.
키쉬르의 왕인 루키페르는 전장에서 투구를 쓴 채 전차를 끌며 절대적인 무력을 휘둘러 테베레 군사들을
도륙 냈다. 신위와도 같은 마상 창술과 훌륭한 근육질 몸 외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소문만 무성했다. 굉장한 거구에 전쟁의 신의 아들이라는 소문부터 소의 머리를 가진 반인반수로 인육을
즐긴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예.”
“오호, 그래?”
“뭐라?”
***
방 안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컴컴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알테미온은 돌아보지 않았다. 창가에서 희미한 빛줄기를 좇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빛줄기만으로도 미의 여신이 축복을 내린 듯한 찬연한 금발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게 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윤곽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구나, 알테미온.”
“네가 할 일이 생겼다.”
“무엇입니까.”
“너도 야만인들과 싸우는 테베레의 전사들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놈들과 대화로 풀기로 하여 그놈들의
왕이 리기아로 오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정말입니까?”
“넌 고분고분할 때 가장 예쁘지.”
치욕적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클리티에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트리온은 그의 손에 천을 쥐여 주었다.
“그 애가…….”
횡설수설 변명하는 게 거짓을 입에 담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트리온은 아들을 잡아끌고 위층으로 올라가
회랑 끝으로 몰았다. 그리고 일갈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알테미온이 가진 아름다움 앞에 개처럼 발정하는 놈이 한둘이 아니었고 아들도 예외가 없었다. 이따금
밤마다 장난질을 하러 그 방에 숨어드는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케레스는 몹시 당황하여 낯을 붉혔다.
“아버지, 그자는 신벌을 받은 자입니다. 유피테르의 하늘 아래 사는 제가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놈은 낯짝이 반반하다는 것 외에 쓸모가 전혀 없지. 그러니 테베레를 위한 거사를 성공시킨다면 그제야
밥값을 하게 될 것이다.”
“안 됩니다. 알테미온은…….”
트리온은 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
“루키페르요.”
낮고 차가운 목소리. 잘 단련된 전사의 육체가 중압감을 더했다. 트리온은 관록 있는 정치가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먼 길을 오셨소. 내가 테베레의 삼왕 중 트리온이오. 그대가 직접 정한 리기아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거짓이 아니었다. 길리포스를 비롯한 키쉬르의 병사들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은 에우한이었다. 그 때문에
전쟁을 종결할 왕으로 삼왕 중 에우한의 말과 행동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고 트리온은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도 평범한 인간이니 걱정 마시오. 나의 장군과 병사들은 어디 있지?”
당장 포로 협상을 진행할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돌려서 표현한 트리온은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화려하게
꾸민 미녀들이 양손 가득 술과 음식을 들고 살랑살랑 들어왔다. 뒤를 따라 들어온 여자들은 악기를 들고
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루키페르의 신하들은 이미 안면이 반쯤 풀려 있었다. 트리온은 루키페르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으나 가면이
방해했다.
***
‘그는 운명의 정복자다. 결코 적에게 패하지 않고 어떠한 죽음의 꾀에도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가 아카이아에서 머나먼 땅에는 있다는 만물이 얼어붙는 추위를 연상하게 했다.
루키페르는 버릇처럼 가면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날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것임에도 어둠을 틈탄 자는 놀라울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검사? 아니, 상대는 무술을 모르는 자다. 단지 물건처럼 미동도 없을 뿐.
“그대는 누구냐?”
“알테미온이라 합니다.”
알테미온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갈증이 일었다.
“무슨 경고?”
촛대를 내려놓은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의 흰 목을 위협하듯 움켜쥐었다. 맥박이 손아귀에서 가늘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힘을 세게 주면 목을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장님인가?”
루키페르는 눈이 먼 대신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신의 사자를 떠올렸다.
이미 신탁을 받았다고? 알테미온은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내보이고 말았다. 어쭙잖은 예언가 흉내나마
성공한다면 그를 겁주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을 치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놓, 아 주세요.”
“놔……!”
고쳐 쓰려던 루키페르는 마음을 바꾸고 가면을 벗었다. 어차피 이자의 눈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도 상관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므로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결코 벗지 않던 것이었다.
묘하게 해방감이 들었다.
“네 할 일을 다해.”
“아윽.”
아까부터 씹어 보고 싶었던 입술을 물어뜯었다. 고통으로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침입했다. 벗어날 수
없는 악력에 알테미온은 꼼짝없이 폭력적인 탐닉을 받아 내야 했다.
피가 끓었다. 정신이 아찔할 만큼 취향이었다.
***
루키페르는 앞섶을 풀어 헤치고 알테미온의 맨가슴을 진득하게 매만졌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황홀한
촉감이었다. 살 내음을 맡으며 살을 베어 물자 아랫배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흐으…….”
당장 그를 취하고 싶었다. 왼손이 아래로 내려가 허벅다리 안쪽을 잡아 올리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려 할
때였다.
“멈추세요.”
“그럼 찔러.”
그는 처분을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알테미온의 머리는 재빨리 올바른 해답을 토해 냈다.
도저히 못 해.
나른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에는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누그러들어 있었다. 그러나 감히 그 말을 어기고
시험했다가 괜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에 대한 소문이 많았지. 엄청난 추남에다 흉측한 상처가 있다는 말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말까지.’
호기심이 일었다. 루키페르 깊게 잠들어 있었으니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가슴팍에
모으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진짜 괴물이면 어쩌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루키페르의 무자비한 성격상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
“루키페르시여, 날이 밝았습니다.”
신하들은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결코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엄격한 규칙이었다. 그러한 실수를
한 자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즉결 처분으로 목이 잘렸으니까.
깨워서 울리고 싶었다.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 때까지 몰아붙이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그가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 대려 할 때였다.
“루키페르시여?”
신하가 재차 부르자 그는 뒤늦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 예.”
“트리온은 어디 있지?”
“…….”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헛기침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없었다. 철저히 혼자였다.
낯선 공간을 더듬어 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나 아무리 조심해도 허점은 있었다. 낮은 탁자에 걸려
균형을 잃은 것이다.
“아!”
차가운 돌바닥에 넘어진 알테미온은 욱신거림을 참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잘 여며 두었던 옷자락이
풀어져서 다시 매만지는데 옷 속에 넣어 둔 것이 만져졌다.
“클리티에…….”
***
“오래 걸리는군.”
키쉬르의 신하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트리온은 아침부터 신전에 들어가 제를 올린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뻔한 수작이었다.
“잊지 마십시오. 테베레는 왕이 셋이란 걸. 머리가 세 개인 괴물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의 머리를
잘라 봤자 다른 두 머리가 공격해 올 것이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키페르는 한동안 트리온의 수작질에 놀아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방심해야 단숨에 목 세 개를 쓰러뜨릴 수 있을 테니까. 아니면 머리끼리 서로 싸우게 하거나.
“신전을 둘러보겠다.”
“함께 하겠습니다.”
“저들은 누구요?”
“유피테르 님의 아이들입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아코이테스이옵니다.”
“테베레에서 태어났나?”
아코이테스의 고개가 숨어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동글동글한 머리들을 향해 돌아가자 그들은 이크,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고아들은 흉측한 상처를 단 아코이테스를 꺼려 했으므로 그는 외톨이었다. 그는 가면
너머 키쉬르 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루키페르여.”
***
태양이 저물어 감에 따라 하늘빛이 붉게 물들었다. 트리온은 핑계를 대며 저녁 식사 자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키쉬르의 신하들의 안색이 나빠졌으나 루키페르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잘만 자는군.”
“이건 뭐지?”
“제 것입니다. 돌려주십시오!”
“…….”
알테미온은 수건을 품속에 넣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눈썹을 추켜세운 루키페르는 방 안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탁자가 흐트러진 것 외에 누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철저하게 혼자 남겨져 있었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때마침 알테미온의 배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는 민망함을 참으려 입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그것은 긍정의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루키페르는 텅 비었음에도 지극히 아름다운 푸른 눈을 응시했다. 확실히 알테미온의 뻣뻣한 태도는 누구의
앞에서도 자의로 구부러진 적 없음을 증명했다. 볼품없는 천 쪼가리는 그토록 귀히 여기면서 어쩌면
이토록 무심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저절로 사내의 오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좋아. 내 비위를 맞춰 봐. 난 가시가 있는 아름다움은 싫거든. 마음이 동하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어. 음식이든, 하인이든, 보석이든, 아니면 내 약점이든. 충분한 대가를 치른다면 네가 바라는
걸 하나씩 쥐여 주지. 어때?”
“진심입니까?”
“일단 웃어 봐.”
***
“벌써부터 글러 먹었군.”
“지금 웃겠습니다.”
“자, 보셨지요.”
“난 원래 이렇게 웃습니다.”
“너 설마 웃을 줄 모르는 건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죠.”
“진심으로 크게 웃어 본 적이 없나 보군.”
루키페르는 아래에 누운 미인의 눈꼬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호소하는 듯한 촉촉한 눈가는 기쁨으로 휘어져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얼마나 많은 권력자들의 침실에서 굴렀을까. 그때마다 이렇게 뻣뻣하게 굴었나? 그들은 네가
원하는 것을 자진해서 가져다 바치고?”
“너…….”
“오만하구나.”
“루키페르여. 카우노스이옵니다.”
“곧 나가겠다.”
“어디라고 하지?”
“있는 듯하다?”
“문지기?”
“성을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이온데 입구를 지키는 괴물이 있습니다. 염탐꾼 중 하나가 통과를
시도했으나 무참히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
“어떤 괴물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결국 괴물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겁니다. 아마……
테베레의 왕이라면 알고 있겠지요.”
“괜찮습니까?”
북풍처럼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듯 바닥을 짚으려 했다. 팔짱을 낀
루키페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
“돌봐 주는 이가 없단 말입니까?”
“아코이테스야.”
“키쉬르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무거운 물 항아리를 내려놓은 아코이테스가 인사올렸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영양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도 타고난 근골이 좋아 보였다. 훌륭한 전사가 될 소질이였다. 이는
루키페르가 그를 보는 순간부터 눈여겨보았던 사실이었다.
“매일 일을 하는구나.”
몹시 불퉁한 태도의 소년에게 카우노스 또한 말을 붙였다. 왕이 관심을 보이니 이 아이라면 사적인 공간에
드나들 기회를 줄 가능성이 높았다.
“예?”
“...당신을 도울 자를 데려왔소.”
“아, 아코이테스입니다.”
“무슨 생각이죠?”
“날 감시할 자가 아니랍니까?”
***
[세 사람은 끝내 바다 괴물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키쉬르인들은 영웅들을 후하게 대접하면서 그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청했다.]
“예.”
달려 나가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키쉬르의 왕이 남자를 품으로 안아 올리는 모습이었다. 환자를
살피는 것에 불과한데 손길이 진했다.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코끝이 간질거렸다. 아코이테스는 검지로
코끝을 문지르며 의원을 찾아 데려왔다.
“의원을 데려왔어요.”
루키페르는 정말 트리온을 만나러 갔다.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에 협상을 청하여 놓고 실제로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홀로 향했다. 보필할 호위 하나 없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꾀가 있는 능구렁이 같은 자.
루키페르는 정중한 말투로 핵심을 찔렀다. 치켜세우는 것처럼 들렸으나 기실 빈정거리기 위한 것이었다.
“무슨 의미요?”
“…….”
“나를 보아라.”
나직한 명령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무사의 눈이 루키페르의 눈동자로 향했다. 푸른색.
무사는 키쉬르의 왕이 가진 눈동자 색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어쩌면 금사와도 같은 속눈썹까지도.
우습게도 그 순간 무척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으아악!”
그것이 오른쪽 눈이 본 마지막 세상이었다. 어느새 루키페르의 손을 빠져나간 표창은 주인의 눈에 박혀
있었다.
“아악! 내 눈! 내, 내 눈이!”
피가 흐르는 눈을 붙잡고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는 무사와 그를 감싼 사람들 틈에서 트리온은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 적국의 왕을 노려보았다.
“저런. 잘 받았어야지.”
***
“히아신스구나.”
“깨어나셨습니까?”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거렸다. 소년은 꽃다발을 얼른 내려놓고 준비해 두었던 물 주전자와
잔을 들었다.
“알테미온 님, 물을 드셔야 기운을 차릴 수 있다고 했어요.”
“어서요.”
“그래.”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함부로 나갈 수 없어.”
“루키페르 님이 안 된다 하시나요?”
알테미온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꽃병을 찾아낸 손끝을 따라 강하디강한 꽃향기에 코를 가져다 댔다.
“그럼 누가 키웠지?”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아코이테스는 어색한 기분에 손바닥에 배어든 꽃내음을 맡았다.
알테미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코이테스는 자신이 한 말에 놀라고 말았다. 알테미온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꽤나 거친 소년으로 서투르게 남의 기분을 맞추는 데에는 그동안 전혀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경솔하셨습니다.”
재상이 굳이 제 방으로 초대했다는 것부터 질타를 예상했던 루키페르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재상으로서
충언한다기보다는 형제와도 같은 오랜 친구로서 하는 잔소리였기 때문이다.
“누가 모릅니까! 그들이 길리포스에게 해악을 끼칠까 걱정되는 것이죠.”
“엄청난 미인이던데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나긋한 태도로 전하의 심신을 녹일 자도 아닌 듯한데 굳이
머물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사심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루키페르여.”
“하지만.”
‘그는 운명의 정복자다. 결코 적에게 패하지 않고 어떠한 죽음의 꾀에도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성년의 밤이 지난 후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된다. 세상의 눈에 얼굴을 들킨다면 운명의 고삐에
사로잡히게 되리라.’
***
“여위었군. 어찌 된 일이지?”
물조차 주지 않으며 시들어 꺾일 때까지 기다리던 남자를 생각하며 그는 자신만만한 거짓 미소를 지었다.
“루키페르는 포로를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장군과 재상을 아끼는 것이 분명합니다. 포로들의 위치를
알아낸 모양인지 괴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트리온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거기까지 알아냈다니. 하나 그들은 결코 그 괴물을 지나가는 방법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래?”
아코이테스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말을 멈췄으나 알테미온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았을
뿐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랬구나.”
자의든 타의든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두려웠으나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해야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잔혹한 트리온의 명을 받았다 한들, 살해 대상 또한 잔혹한 사내였다. 그런 자가 죽는다
하여 연민할 필요는 없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표정과 눈빛을 알 수 없는
자들의 앞에 서 있는 것만큼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었으니까.
“질 좋은 포도주를 가져다줘.”
오늘 밤을 위해 술이 필요했다. 이게 다 동생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 되뇌었다.
***
“늦으셨군요.”
“뭐 하는 거지?”
“이게 네 방식이다?”
“이리 와 앉으시지요.”
긴 의자 위로 쭉 뻗은 다리와 반쯤 누워 옷깃 사이가 드러나는 상체를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루키페르는 같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테미온은 그의 옷자락이 무릎에 닿는 것을 느꼈다.
“물론 있습니다.”
끝났다. 그렇게 직감한 알테미온은 자신이 저질러 버리고만 일에 술잔을 아플 만큼 꽉 쥐었다. 트리온이
마시면 즉사를 장담했으니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무슨.”
루키페르는 거슬리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알테미온의 뒷목을 잡아챘다. 당황한 손에서
꽉 쥐고 있던 술잔이 바닥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놔! 이거 놓아요!”
“어, 어떻게?”
“설마 시, 신이십니까?”
이따금 아카이아 땅에 인간이나 동물을 가장하여 내려온 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린 알테미온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루키페르는 겁에 질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박또박 대드는
앙칼진 자가 신의 위용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우스웠다.
“말해 보아라.”
“숲에서 나고 자랐던 저와 동생은 디아나 여신의 미움을 사 일찍 부모를 여의고 요정들의 돌봄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숲에서 쫓겨나 떠돌다 신전에 몸을 의탁하려 했습니다. 신전의 사제는 제 눈이 먼
이유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신벌이 내린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저를 꺼렸습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어떤
치유의 신도 고쳐 줄 수 없다 했습니다.”
바닥을 짚은 알테미온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울분으로 곱아들었다. 누구라도 애처롭게 보았을 자태였다.
“그때 트리온이 나타나 달콤한 말로 꾀었습니다.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이르게 태어난 클리티에는 병약하여
돌봄이 필요했는데 그자가 자청하여 돕겠다 하였죠. 하지만 그날 이후로 동생을 보지 못했습니다.
트리온은 클리티에를 인질로 잡고 제가 그를 돕도록 협박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올랐고 비옥한 테베레의
전부를 통치하고 싶어 하니까요.”
“예?”
루키페르는 가면을 다시 써서 얼굴을 가렸다. 약점을 모두 드러내 인간들의 의도에 흔들리는 알테미온과
달리 그는 완벽히 스스로를 지켰다.
***
“뭐?”
트리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알테미온이 실패했단 말인가? 간밤 사이에 적을 죽여서 협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그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일어났다.
“예.”
“루키페르여, 일찍 나오셨소.”
“힘들었소. 어젯밤에 마신 술이 꽤나 독했거든. 포도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인 줄 알았소.”
조롱을 더한 조롱으로 받아치는 대화는 마침내 카우노스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든 후에야 멈췄다.
“포로들이 본디 그들이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옳은 것이지요. 테베레의 성들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전설적인 무구를 내놓으라니. 침묵을 지키던 키쉬르의 신하들의 낯빛이 불쾌감으로 하얗게 질렸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전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이건 협상을 빙자한 날도둑질이오! 우리도 테베레 전사들을 포로로 잡고 있소! 우리가 이 자리를 원한
건 정당한 포로 교환이었지 터무니없는 장난질이 아니란 말이오!”
2. 신들의 세계
분기탱천한 양국의 신하들이 서로에게 고성을 지를 때, 알테미온은 숙취를 견디고 있었다. 간밤에 놀라서
기절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밤새 농락당하거나 아니면 발목이라도 잘릴 줄 알았기에 멀쩡한
신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꿈이었을까.”
“아코이테스?”
“누구냐.”
“알테미온, 나야.”
“예?”
늙다리 에우한을 감시하는 게 지겹다, 금화로 사람을 포섭해 배편을 마련해 두었으니 이 땅을 떠나 새로운
섬에 정착하자는 말을 늘어놓았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멀리 떠나자니. 제안한 상대가 못 미더운
케레스였어도 그는 일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알테미온이 제 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앞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케레스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심해하는 투였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매몰찬 냉대에 케레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배신감에 목소리가 떨리자 알테미온은 대놓고 비웃었다.
“굴러먹으면서 목숨 부지하는 주제에 하찮은 자존심과 입만 살았구나. 평생 남들의 호의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재수 없는 놈 따위. 네 여동생처럼 괴물의 먹이로나 바쳐질 것이지.”
하지만 케레스는 욕설을 퍼부으며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알테미온 님!”
***
제물을 올렸던 트리온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 전쟁의 결말을 구하는 제물을 올렸던
것이다.
싸움의 끝이 허무할 것임을 알리는 신탁에 좌중은 고요해졌다. 싸우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무엇 하러
말뿐인 승리를 쟁취한단 말인가?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더 큰 권력을 원했던 트리온은 문득 루키페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쉬르가 침략한 이유가 넓은 영토와 명예욕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을
뿐.
“당신들이 테베레의 땅을 유린한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건 확실해졌군. 안
그렇소?”
“루키페르여.”
루키페르는 당황한 친구의 어깨를 짚은 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웃음소리를 들은 키쉬르의
전사들은 자세를 고쳐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경험상 그들의 왕이 웃는 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요?”
“예!”
루키페르는 죽지 않을 뿐 죽음에 필적하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질 뿐이었다. 표창을
뽑아내면 피가 흐르겠지만 곧 멎을 것이다. 그리고 흉터만 남긴 채 아물겠지.
***
누군가 화롯불을 쓰러뜨렸다. 불이 옮겨붙은 관목이 타면서 매캐한 연기가 퍼져 나갔다. 비명 소리와
달음박질 치는 소리 외에 거리는 조용했다. 신전 옆으로 형성된 주택가에서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조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은 까닭이었다.
“예? 어디 가십니까!”
“뭣들 하는 짓이지?”
“루키페르 님!”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자 아코이테스는 구원자가 도착했다는 반가움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루키페르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딱 굳어 버리고 말았다. 특히 흰 가면을 물들인 채 말라붙은 핏자국은 기괴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였음이 분명한 검에 눈길이 간 소년은 꽉 붙잡고 있던 케레스의 다리를
놓아 버렸다.
케레스 또한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한참 당황했다. 침실의 주인과 마주칠 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웬
꼬마의 손에 잡혀 발이 묶인 꼴에 불운을 탓하며 애써 배짱 좋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시선으로 루키페르의 발치를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알테미온은 축 늘어진 채로 이상할 정도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케레스가 자신을 찌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단검을 든 손이 떨렸기 때문에 날에 살갗이 긁혀 피가 맺혔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뭐?”
“괜찮으십니까?”
아코이테스는 여전히 루키페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며 알테미온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알테미온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소년이 루키페르를 향해 애매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자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두 남자를 가볍게 짊어진 채 그는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코이테스가 어째서 움츠러든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꽤나 당돌한 첫인상을 심어 주었던 아이조차 막상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자
무서워진 것이겠지.
“그럼 따라와라.”
***
“루키페르여, 걱정했습니다.”
막사 바깥을 초조하게 맴돌던 카우노스는 루키페르가 나타나자 가장 먼저 반겼다. 왕을 기다리고 있던
전사들 또한 테베레 때문에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성이 난 얼굴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왕에 대한 충성심만큼이나 길리포스 장군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던 탓이었다.
“예.”
두 사람이 사라지자 루키페르는 케레스를 바닥에 거칠게 던졌다. 기절해 있던 케레스는 강한 충격을 받자
고통으로 신음하며 꿈틀거렸다.
“밧줄을 가져와라.”
“이자는 누구입니까?”
“트리온의 아들 케레스다.”
“먹을 것을 주고 쉬게 해라.”
“알겠다.”
하지만 그런 감상적인 행동은 잠시뿐이었다. 짧게 스스로를 비웃은 루키페르는 샘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과
목을 씻었다. 말라붙어 있던 피와 흙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시원했다. 옷을 벗고 근육질의 나신을
드러낸 그는 샘에 몸을 깊숙이 담갔다.
이 전쟁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해도, 테베레의 씨를 말리고 명계의 신 플루토의 권속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게 죽은 어머니 아에로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라면 말이다.
***
루키페르가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카우노스가 그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해 둔 후였다. 그는 왕이 벌인
우발적인 상황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변덕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틈나는 대로 불평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하는 정도였다.
“설마.”
그동안 케레스는 사태를 파악한 듯했다. 애써 의연한 척해도 턱이 흔들려 이가 딱딱 부딪치는 티가 났다.
기세 좋게 외쳤으나 케레스의 속내는 몹시나 초조했다. 그가 키쉬르의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을 테베레
측에서 알기나 할까? 구출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표정조차
보여 주지 않는 키쉬르의 왕을 속여 넘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의 침실에 좀도둑처럼 숨어들었다 잡힌 주제에 말이 많군. 네 몸종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나
본데.”
그리고 바로 검을 뽑았다. 케레스의 안색이 대번에 새파랗게 질렸다. 손속이 잔인하기 그지없다는 소문이
틀린 데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루키페르가 눈짓하자 옆을 지키던 전사 하나가 오른쪽 다리의 결박을 풀어 억지로 앞으로 내밀게 했다.
“어디 있는지는 이미 파악했다. 네 목숨을 스스로 구하고 싶다면 그 이상을 털어놔야 할 거야.”
케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번쩍이는 칼날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래. 어떤 괴물이지?”
“뱀의 머리가 100 개라고 했어. 눈도 100 개에, 목소리도 100 가지를 낼 수 있다고 들었지. 머리는
번갈아 휴식을 취하므로 결코 잠들지 않고, 강력한 독을 가지고 있어서 신조차 그 괴물에게 공격당하길
원치 않는다 들었어.”
“그 앞을 지나가는 방법은?”
“그렇다면, 이만 죽어라.”
“사지를 잘라 죽여라. 트리온에게 선물로 줘야 하니 머리는 베어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 줘라.”
“예.”
***
“알테미온 님.”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던 아코이테스는 그저 알테미온의 눈치만 보았다.
“너.”
“……꺼져.”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알테미온의 어깨가 동요로 인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차 없는 말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 애가 없으면 네 인생도 끝난 건가?”
“당신이 뭘 알아?”
“내가 정곡을 찔렀나 보군. 지금 삶을 포기하면 언젠가 명계에서 네 동생과 해후할 수도 있겠지.”
냉정하게 미래를 읊어 주는 루키페르 때문에 싸늘한 현실이 못 견디게 느껴졌다. 격정적인 감정을 잊고
살았던 알테미온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릿한 가슴의 고통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
“놔.”
“울 줄 아는군.”
그는 그보다 눈물에 얼룩져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에 매혹당했다. 돌에 새겨진 미인처럼 차갑고 거리감
있었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기가 갖는 호소력은 훌륭했다.
“이제 좀 감고 싶은 얼굴을 하는데.”
“닥쳐요.”
“뭐라고요?”
알테미온은 노골적인 질문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공기는 날이 서 있었다. 루키페르는 격한 감정과 흥분으로 상기된 뺨을 천천히 쓸었다.
목소리는 울먹거려 물기가 느껴졌다. 루키페르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녹아내린 밀가루 반죽을 떠올렸다.
“걱정되나?”
“케레스를 죽였나요?”
루키페르는 더는 죽음의 기운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표정에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나약한 자들이란
욕망을 충족하는 차디찬 즐거움을 모르는 자들일 뿐이었다. 원수진 자들은 반드시 자신보다 먼저 명계의
땅을 밟게 하는 것. 케레스의 죽음이 이자에게 그런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 듯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테베레의 완벽한 멸망이란 말인가요? 삼왕과 궁성을 지키는 모든 신하들을 말이죠.”
궁벽을 메운 화려한 모자이크, 잔마다 새겨진 황금 문양, 훌륭한 전차와 갑주들.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진
성안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쩔 셈인가요?”
“참고는 해 보지.”
알테미온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느끼지 못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가늘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루키페르의 손끝에서 스무 번은 더 미끄러진 후에야 입술이 열렸다.
“모르겠어요.”
“오, 그럴 수만 있다면.”
“날 원하나요?”
“그래.”
“넌 네 얼굴을 본 적이 있나?”
“아뇨. 남들이 뭐라 떠들든, 난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참 우스운 꼴이죠.”
“그런 이유로 마음에 든다고 하는 사람은 당신뿐이군요. 어지간히도 당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나 봐요.”
“마음대로 생각해.”
알테미온의 손등이 루키페르의 단단한 가슴팍 위로 미끄러졌다. 완벽한 전사의 육체. 이런 훌륭한 몸을
가졌고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다는 남자가 결핍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남의 약점을 마음에 들어
하는 혐오스러운 솔직함이 자신과 닮아 있었다.
“흣.”
그는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급작스럽게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짓에서는 그다지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다.
“좀, 천천히.”
천천히 인내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루키페르는 답답한 가면을 벗고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싫어.”
낮은 읊조림에 알테미온은 얼굴을 찡그렸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목소리에 담긴 끈적한 열기가
그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 피 또한 몸속을 빠르게 도는 기분이었다.
“읏, 아파요.”
“제발.”
“큿!”
“아직 다 안 들어갔는데.”
“거짓말.”
정말이었다.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의 뒷목을 잡고 천천히 하체를 내리눌렀다. 장기가 짓눌리는 느낌에
빨갛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예민한 내벽이 죄다 눌렸다. 금방이라도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터질
듯했고, 배를 만지면 안에 들어간 성기의 모양이 그대로 잡힐 것 같았다.
“흐읏, 으.”
“아으, 흣…….”
살갗이 벗겨질 만큼 강하게 손가락을 물어도, 신음이 새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감한 부위는
모조리 건드리는 거대한 성기가 잔인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한 번 밀고 들어올 때마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느껴졌다.
“으흑! 아!”
***
어젯밤에 했던 대화를 떠올린 알테미온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떠올렸다. 어떻게 생겼을까. 굉장한
추남이라는 말과 얼굴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다는 말까지.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자는 틈을 타 가면을 벗겨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도 손끝으로 만져 보면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잘 때는 가면을 쓰지 않는구나.’
철저히 얼굴을 감추기에 최소한 결점이 있으리라는 상상이 무색해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가면을
쓰면서 사람들에게 결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걸까.
“간지러운데.”
***
키쉬르의 아들들은 아침을 준비했다. 그들의 왕이 지나가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루키페르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막사 생활이 길어서 좋을 건 없죠.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면 빨리 도시를 차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물론.”
루키페르는 휙 돌아보았다. 마음속 우려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나 상대는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넌 누구지?”
챙 넓은 모자 때문에 머리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매우 경계했으나 남자가 휘두를 수
있는 것이라곤 손에 짚은 나무 지팡이뿐이었다.
“뭐?”
“루키페르여, 어리석구나.”
갑자기 상대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엄숙한 노인의 음성은 밝고 가벼운 청년의 것이 되었다. 변화를
감지한 루키페르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신이거나 반신이라 짐작했다.
“네가 운명의 여신이 잠든 틈에 태어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그건 마르스의 안배였다.
정말이지 젖먹이일 때부터 귀염성이 없는 건 조금도 바뀌지 않았군.”
***
“아코이테스구나.”
막사로 살금살금 들어왔던 아코이테스는 알테미온이 발소리를 듣고 자신을 알아맞히자 어색하게 웃었다.
“예.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식사를 챙겨 왔습니다.”
“바깥이 소란스럽구나.”
“그래. 매번 실려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코이테스는 전날과 확연히 달라진 알테미온의 상태에 깜짝 놀랐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건 여전했으나
기운은 차린 듯 보였다. 이럴 줄 몰랐기에 어떻게 하면 반응이 없는 그에게 식사를 권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벼, 별것 아닙니다.”
“케레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는걸.”
“뭐?”
“보면 모르나?”
천을 젖히며 들어온 것은 루키페르였다. 그는 제멋대로 찾아와 허튼소리를 늘어놓고 사라진 신들의 정령,
메르쿠리우스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단순히 무시하고 돌아섰으나 뒤늦게 그놈을 패기라도 했어야
했다는 생각과,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심란한 생각들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 곳이 없어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소년은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에 얼굴을 붉혔다. 알테미온은 다 비우지 않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짜증스레
대꾸했다.
“적당히 하는 게 어떤가요.”
아코이테스는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서로를 싫어하는지. 한 공간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뭐, 뭐라고요?”
가차 없는 언사에 충격을 받은 알테미온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손끝과
팔에 힘을 준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루키페르는 한발 더 나아갔다.
“죽을 용기도 없는 주제에 호사스럽게도 음식을 거부하다니. 깡마르면 이렇게 손에 잡히는 것도 없겠지.
그런 몸을 어느 사내가 원할까?”
“입 벌려.”
“놔, 놔……!”
몸으로 찍어 누르면서 한 손으로 여린 턱뼈를 아프게 누르자 고통으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릇을 들어 억지로 수프를 먹이려 했다. 그릇이 입술에 닿는 감촉에 알테미온이 헛발질을 하며
몸부림쳤다.
이, 나쁜 새끼.
“윽!”
“무슨 소란입니까?”
“루키페르여, 이, 이게 무슨……?”
“별것 아니다.”
“식고문이라도 할 생각이셨습니까?”
“개새끼. 너 같은 놈은!”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루키페르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두 사람을 동시에 모욕하는 언사. 알테미온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었으나, 카우노스는
모욕당한 사람답지 않게 차분하게 대꾸했다. 루키페르의 분노를 받아 내느니 그가 짜증 내고 사납게
노려보는 걸 참는 게 속 편했다.
“…….”
“전에 만난 적이 있지요.”
낮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곱지만 청년의 것임이 분명한, 그런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에도 꽃병 하나가 부서졌고 그 조각들을 카우노스가 치웠었다.
“남이 하는 사과 따위 필요 없습니다.”
카우노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상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냈다.
“……그건.”
“…….”
“왕의 오랜 친우로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군요. 그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
트리온을 포함하여 리기아에서 살아서 도망친 테베레 전사들은 몹시나 동요한 기색이었다. 협상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오만한 루키페르조차 성질을 꽤나 죽이고 임하기에 제대로 키쉬르의 약점을 잡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폴로의 도움을 받게 되면 에우한의 입지만 높아지게 된다. 트리온이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자가 지금보다 더 큰소리를 치고 다니는 꼴을 어찌 눈 뜨고 볼 수 있을까. 자신의 역할로 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
“네, 네!”
분노하여 붉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감시에서 벗어난 케레스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알테미온을 리기아에 데려간다 했을 때 몹시 꺼렸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어쩌면 그놈을
찾으러 간 걸지도 모른다. 그랬다가 만약 키쉬르인들과 마주쳤다면? 추측은 점점 좋지 않은 쪽으로
향했다.
지금 인원으로는 키쉬르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어떤 식으로 급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사들은
무척 위축되어 있었다.
테베레의 아들들은 동시에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묘하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트리온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알테미온을 이용해 미인계로 테베레의 유력자들을 제 편으로 만들고, 금화를 뿌려 지지 세력을 유지했다.
트리온은 경황이 없어 그의 소중한 패인 알테미온을 되찾아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놈!”
“트리온이여!”
그가 그렇게 소리치기가 무섭게 덤불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찰병의 등에 꽂혔다. 단박에 고꾸라졌다.
***
[마르스는 숲속에서 쫓기던 아에로페를 구했다. 신의 도움과 사랑으로 목숨을 구한 그녀는 자신이 신의
아들을 잉태하였음을 알아차렸다. 산달이 가까워진 아에로페는 마르스에게 태어날 아이를 보호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마르스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 운명의 여신을 속여 잠들게 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곱씹을수록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키쉬르의 재상의 말이 정곡을 찔렀던 까닭이었다.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처지라면, 루키페르가 막돼먹게 굴 때 그에게 맞서거나 떠날 수 있었겠지. 그런
꼴을 당하고도 그의 침대에 청승맞게 누워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이 그럴 힘이 없어서였다.
알테미온은 부질없는, 오래된 소망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신벌이 내렸다지만 왜 벌을 받았는지 이유조차
몰랐다. 그러니 다시 눈이 보인다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나약한 인간이라 신들의 세계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복종하며 살아가는 그와 달리, 루키페르는 강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당당히, 신들을 모욕할 수도 있었다. 그런 사내에게 제 꼴이 얼마나 우습고
하찮게 보일지는 분명했다.
알테미온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혐오했다. 자신의 이름도 끔찍했다. ‘꽃’이라니. 아무나 꺾어서
아름다움과 생기를 즐기다 시들면 던져 버리는 꽃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바깥에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던 발소리들이 잦아들고 장작이 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릴 때쯤,
알테미온은 그대로 풋잠에 들었다.
아버지라.
그가 평생토록 증오했던 남자가 친부가 아니라니. 출생의 진실에 충격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 남자’가
아버지이든 아니든, 복수의 대상인 건 여전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데 일조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는 아폴로의 태양이 멀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어둠이 내리면 태양이 없는 하늘에 밝은 새벽별이 보일
것이다.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을 알아낸 밤에도 새벽별은 밝게 타올랐다. 이깟 사실에 이제 와서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힘의 근원이 무엇이든, 복수를 위해 훌륭히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밤길을 헤매지 않고 키쉬르의 진영으로 돌아오자 미동도 없이 보초를 서는 전사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루키페르가 조용한 막사의 입구를 젖혔다.
“…….”
***
“헉……!”
낮에 저 입술로 차갑게 거절의 말을 했지. 뻣뻣하고 냉정한 놈이 쾌락에 들떠 저에게 빈다면 어떨까.
꽤나 봐주었던 지난밤에 했던 애원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여린 허벅지 살을 거칠게 훑고 은밀한 곳까지 나아가려는 손길, 복부를 찌르는 사내의 상징.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한 알테미온이 다급하게 발길질했다.
“…….”
알테미온은 그자의 떡 벌어진 어깨를 연신 밀어냈으나 전투로 단련된 정력적인 근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흐응, 아, 안 돼!”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허벅지 안쪽과 둔부가 바르르 떨렸다. 제발 놓아주었으면 싶었다. 사정감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이를 알고도 끈덕지게 놓아주지 않으며 사출을 유도했다.
“싫어, 흣……!”
알테미온은 마지막 순간까지 손으로 루키페르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입에 사정하고 만
것이다.
“하…….”
알테미온은 신음했다. 혀가 아랫도리 속까지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발가락까지, 다리가 잘게 떨렸다.
흥분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아래에도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넣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알테미온의 입은 몸과 다른 말을 했다.
“어제처럼 끊어 먹을 기세로?”
“닥쳐.”
“흐읏, 으응…….”
명백하게 흥분에 찬 신음 소리. 알테미온은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참으려 애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낮에 깨물어서 난 상처가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흥분이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흐응, 아, 아! 아! 좋아……!”
루키페르는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강렬한 흥분에 휩싸였다. 알테미온의 가느다란 손이, 힘이 들어간 그의
둔부를 탐욕스럽게 잡고 허리 짓을 도왔을 때 극에 달했다. 그가 짐승이 낼 법한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세차게 올려 쳤다.
“흐응, 아앗!”
***
“깼나 보군.”
물 마시고 싶어요.
“큭…….”
한심한 꼴이었다.
미친놈.
“크윽!”
“어제처럼 울어…….”
그만하라고.
“하.”
“제법인데.”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왜 저렇게 즐겁다는 듯 웃는 걸까. 멋대로 화내고, 멋대로 기뻐하고.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작자였다.
미친놈의 목소리가 다정한 어조마저 띠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알테미온이 얼마나 질색하고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
카우노스는 대답 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하는 두 사람의 곁에서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울렸다. 불씨가 튀어 하늘로 올라갔으나 높이 다다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오래 함께했기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그의 기분이 어떤지 추측할 수 있었다. 왕이자 친구인
불사의 인간은 심란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형제처럼 자랐다. 아카이아 땅에 버려진 고아들이 지켜야 할 것이라곤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의리뿐이었다. 그러니 루키페르의 원한이란 카우노스에게도 똑같이 중요했다.
루키페르는 피네오스를 증오했다. 그의 모친 아에로페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고도 여전히 왕위를 지키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자.
“물론. 목숨에는 목숨으로 갚아야지. 그놈이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면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어야겠어.”
“카우노스여.”
“예.”
“길리포스는 무사하다.”
“……신들의 정령 말입니까?”
***
“어이, 아코이테스야.”
“예?”
“그런데요.”
끝까지 핥다가 더 이상 먹을 게 없자 목뼈를 던진 소년이 남은 고기가 없나 모닥불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이렇게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건 아니었다. 아코이테스는 아직 식사를 덜
마친 저쪽 무리에 고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솥뚜껑만 한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쪽 무리에서도 고기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소년의 눈길이 안타깝다는 듯 자꾸 고기로 향했다.
“무엇인데 그럽니까?”
“그, 말이다.”
“……예에.”
묻고자 했던 게 알테미온 님이었나. 소년은 어쩐지 위협당하는 느낌에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렇게 어여쁘냐?”
“예에?”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알테미온 님, 저 아코이테스입니다.”
“저, 밖에서 푸짐한 식사를 하고 있어서…… 고깃국을 가져왔습니다. 아플수록 더 잘 먹어야 합니다.”
밖에서 장정들을 쏘아붙일 때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
“국은 입에 맞으시나요?”
그윽한 어둠은 진영이 있는 언덕 위에 내렸다. 그러나 잔치의 열기와 전사들의 혈기를 앗아 가진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이들은 횃불을 세워 둔 채 참나무 가지에 걸린 과녁을 향해 표창을 던졌다.
흐트러진 물건들을 최대한 조용히 정돈한 아코이테스는 자리에 앉아 한편에 정리되어 있는 루키페르의
무구들을 동경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잠드신 지 얼마 안 되셨습니다.”
“나가 봐라.”
“예.”
“잠든 척해 봤자 소용없어.”
“…….”
괴이한 작자.
금방 잠들었으니 쉽게 깨지 않겠지.
단단한 눈썹뼈를 만지다 옆선을 타고 귀의 형태도 따라 그렸다. 귓불에서 턱뼈로 이어지는 곳이 절륜했다.
알테미온은 이전에 손으로 감상한 적이 있는 신전의 조각상을 떠올렸다. 찬란한 광휘를 발한다는 아폴로나,
연정을 일깨운다는 쿠피도의 모습을 묘사했다던 그 조각들과 지금의 감각이 겹치는 것은 왜일까.
***
성안으로 무사히 들어오자 해냈다는 안도감에 그의 무릎이 푹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병사가
황급히 마실 물을 건넸다.
“어찌 되었소?”
“루키페르가 갑자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불경하게도 신전 내부에서 말입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대처도
못 하고 당했습니다. 그나마 일부는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고…… 트리온께서도 무사하십니다. 증원을
요청하셨습니다.”
“그, 그것이…….”
“협정의 방식을 두고 키쉬르와 언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는데, 그것이
루키페르의 성미를 건드린 것 같았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에우한이 하얗게 센 수염을 어루만지며 추궁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진 화려한
금반지가 광채를 발했다.
“그것이 그자의 분노를 샀군. 결국 키쉬르 놈들이 이곳으로 향할 것은 분명해졌구나. 우리까지 곤란하게
되었어, 안 그렇소?”
“잘 알고 있소.”
“과찬이시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
***
알테미온은 모래바람 때문에 잔기침을 했다. 하루의 휴식으로 몸 상태는 나아졌으나 목은 여전히 타는 듯
아팠다. 그는 커다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움직이는 수레 안에 앉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미치도록 질투 났다. 루키페르의 오만함에는 근거가 있었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힘과, 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 생명력,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카리스마.
하지만 불사의 인간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준다는 신의 음료,
넥타르를 훔치기라도 한 걸까?
“으아앗!”
예고 없이 수레가 크게 흔들리자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넘어질 뻔한 알테미온을
두 팔로 잡았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화살이 동시에 키쉬르 일행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들을 노리는 활이
산비탈 위쪽 덤불들 틈으로 보였다.
“제기랄, 습격이다!”
전사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졌다. 그들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소란에 무슨 사태인지
알아차린 알테미온이 두 손을 꽉 쥐었다.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화살을 맞은 병사가 있지만 위급한 사람은 없다는 걸 확인한 루키페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루키페르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바위가 굴러오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를
압사시킬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이르자 두 손을 뻗어 바위를 막았다.
손가락 마디를 거쳐 손목과 팔꿈치, 어깨와 등에 이르기까지 잘 짜인 팔 근육이 크게 꿈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바위가 멈췄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전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이라 보기 힘든 엄청난 괴력이었다.
그들의 왕이 얼마나 강한지 이미 여러 번 본 바가 있어도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진
않았다.
“루키페르여, 길이 막혔습니다.”
“저 위로 다시 던질까?”
루키페르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조금 비틀더니 바위의 반대편으로 가 힘주어 밀었다. 그들이 선 길보다
지대가 낮은 쪽으로 굴러떨어진 바위가 굉음을 냈다.
“다시 출발한다!”
“예!”
키쉬르의 전사들은 군기가 잘 잡혀 있어서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들에게는 루키페르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군신과도 같은 존재가 함께하는데 두려울 게 어디 있을까? 방패와 투구로 몸을 가린
채, 주춤했던 행군을 계속했다.
“겁먹지 마라. 너희들은 모두 리기아에서 살아남은 전사들 아니냐! 루키페르가 강하다 한들, 저자 하나일
뿐이야! 키쉬르의 병사들이 모두 강한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트리온은 애써 침착한 척했다. 하지만 테베레의 전사 여럿이 간신히 굴린 바위를 저렇게 가볍게 움직이는
루키페르의 모습에 공포감이 치솟는 건 마찬가지였다.
전사들은 공포에 질려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완전한 패배감이 그들 사이로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전의를 상실한 데다 도망갈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망치자.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군요.”
카우노스는 지시대로 불을 피우고 약초를 가져오라 명했다. 루키페르는 중간쯤에서 따라오던 수레 쪽으로
향했다.
“다친 곳은 없나?”
“잘 숨었겠지.”
“그놈이 또 도망쳤어.”
***
까마귀가 창공을 가로질렀다. 검은 깃털을 떨어뜨린 새는 시야에 테베레의 주성이 들어오자 하강했다.
단단히 쌓아 올린 성벽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미처 행인들이 새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다시 날개를
폈다.
“아, 아탈란테.”
손질에 집중한 폴룩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탈란테는 수없이 망설인 끝에 결국 진심을 입에 담았다.
폴룩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 이해심 많고 다정한 성품인 그라 아내의 기분을 모르지
않았으나, 지금만큼은 단호하기만 했다.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오?”
그런 탓에 오히려 전사다운 혈기와 호기심이 샘솟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괴물
같은 자’라고 한단 말인가. 그는 그런 자와 꼭 겨뤄 보고 싶었다.
지극히 다정한 말에 아탈란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속삭였다.
3. 인간의 굴레
루키페르와 그의 전사들은 소마라고 불리는 도시에 다다랐다. 테베레가 거느린 도시 중 하나였으나 그들은
처음부터 이들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키쉬르인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입성해 민가를
차지했다.
루키페르는 전사들을 시켜 도시 안을 샅샅이 뒤졌다. 도시민들은 트리온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전사들을 이끌고 전날 떠났다고 증언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트리온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시간문제일 뿐이지.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마라. 음식과 수면에 있어서는 더욱.”
그들은 산에서 사냥해 온 산양 고기를 먹었다. 막사 생활에서 벗어나 모처럼 모래바람이 통하지 않는
튼튼한 벽돌집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클리티에 생각이 났다. 여동생에게 자신이 아니라 루키페르와 같은 오빠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가지 않았을 텐데.
일찌감치 침실로 들어온 그가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참고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바람이 불어닥치지
않는 따뜻한 곳에 있으니 금세 긴장이 풀렸다.
“…….”
전투와 관련 없는 남자와 소년의 낯에는 평화와 안식이 서려 있었다. 거대한 바위 앞에서도 물러서는 법을
몰랐던 루키페르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인기척에 아코이테스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눈을 뜬 소년이 그를 발견하고
재빨리 일어섰다.
“아, 왕이시여, 돌아오셨군요. 깜빡 졸긴 했지만, 정리해 두었습니다.”
혼나기라도 할까 봐 멋쩍게 웃으며 수건을 챙긴 소년은 졸려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만 나가 봐라.”
“예. 쉬십시오.”
루키페르는 가면을 벗고 맨뺨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침실을 밝히는 촛불 때문에 민낯이 거울에 어른어른
비쳤다. 그의 푸른 눈이 거울에 비친 자신과 마주하기 무섭게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편안히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소하며 베갯잇을 움켜쥐고 잡아 뜯었다. 단번에 찢긴 천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동시에 뛰듯이 일어나 어둠 속의 누군가를 걷어찼다. 매서운 북풍 위에 올라탄 것처럼 가차 없는
움직임이었다.
“크윽……!”
군마와도 같이 잘 단련된 다리가 불청객의 복부에 맞았고, 그자가 억눌린 침음을 뱉었다.
“끄악!”
“사, 살려…….”
“피 냄새…….”
“무슨 일이죠?”
“불청객이 있었다.”
“죽였나요?”
“그래.”
알테미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누웠다. 잠을 방해하는 혈향이 거슬릴 뿐 여전히 졸음이 쏟아졌다.
“루키페르여!”
뒤늦게 나타난 카우노스가 문밖에서 외쳤다. 루키페르는 가면을 제대로 쓴 뒤 그에게 출입을 허락했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
“보초 세 명이 죽어 있었습니다.”
바닥에 촛불을 비춰, 죽어 있는 암살자를 발견한 카우노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라고 해서
루키페르의 무력이 약해지는 건 아니나 혹시라도 얼굴이 드러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를 따라 들어온
병사들이 시체를 끌고 나갔다. 그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잠든 듯 보이는 알테미온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카우노스여.”
“듣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그들은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카우노스는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내게 테베레를 포기하라 하더군. 내 아버지 마르스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 하면서 말이지.”
“……예?”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헛소리도 했어. 신들의 변덕스러운 뜻에 따라 능력을 바쳐 헌신하는 멍청이들
말이지.”
“…….”
“내가 누구의 씨에서 태어났든, 누구의 피가 흐르든, 상관하지 않아. 네게 털어놓는 건 숨기지 않고자
하려는 것뿐이다. 너와 나는 우리가 할 일을 할 것이다.”
두 사람의 나직한 대화는 의식이 절반만 이곳에 머물고 있는 알테미온의 귀에도 들렸다.
‘클리티에?’
‘때가 되었으니까요.’
알테미온은 꿈속에서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물이 찬 바구니 쪽으로 저울이 기울듯, 그의
의식은 다시 소마의 작은 침실로 돌아왔다.
자주 듣는 목소리였다.
아침이 밝음과 동시에 키쉬르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들은 많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질서
정연하여, 도시를 점령했음에도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간밤에 침실에 숨어든 자의 목이다. 항복한 도시민들 사이에 뒤통수치는 걸 도운 자들이 있는 모양이야.
색출해라.”
“예!”
“테베레의 왕 트리온이 코앞에서 도망쳤다. 말이 없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테지. 수색해 그놈을 잡아라.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와야 한다. 성공하는 자에게 포상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각, 알테미온은 아코이테스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날의 아침은 부드러운 밀빵과
양유였다.
소년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침실은 전날의 치열했던 기억을 잊은 듯 평화로운 공기가
흘렀다. 열어 둔 창가에서 오가는 발소리와 말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어왔다. 태양이 만들어 낸 긴 빛의
무리가 방 안 구석구석 내려앉았다. 알테미온이 태양 빛으로 달궈진 탁자 위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밖이 소란스러운데.”
“키쉬르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여긴 작은 도시라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잠귀가 어두운 소년은 지난밤의 소란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굳이 이야기하여 겁주고 싶지 않았다.
자객이 들었던 것을 떠올리니 그 뒤로 꾸었던 꿈 내용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여동생이 있으십니까?”
그가 보일 듯 말 듯 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소리가 무척 듣기 좋구나.”
“내 어머니에 대해 아십니까?”
“사냥 솜씨가 뛰어나고 노래를 잘해 여신이 어여삐 여겼어. 숲에 새를 사냥하러 들어왔던 청년과 사랑에
빠져 너와 네 동생을 몰래 낳으려 하기 전까지는 그랬지.”
“팔로스 숲의 샘…….”
“네 뜻대로 살게 될 것이다.”
“아……!”
처음으로 자신의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손끝으로 느껴 보기만 했던 것들을 보다니. 탁자며,
꽃이며, 천과 같은 것들의 황홀한 색감이 햇빛을 받으며 선연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환희에 들떠,
눈으로 모든 것을 열렬히 탐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잡아끈 것은 거울이었다. 거울은 세상 모든 것들이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바로
알테미온 그 자신까지도.
하지만 가슴이 저릿한 슬픔조차 오래 느낄 수 없도록, 주어진 시간은 짧기만 했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지 못했던 세월에 비하면 잔인할 정도로 짧은 찰나였다. 당황한 그가 거울을 붙잡았다.
“아, 안 돼, 제발!”
조금만 더 보게 해 주세요.
밖으로 나가 걸으며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이야기로만 듣던 꽃이 가득 피어난 들판과 장엄한 신전도
보고 싶었다. 다시 태어난 것과도 같은 희망이 솟구쳤던 것이다.
분명히 문을 잡은 그의 마디진 손이 흐릿한 시야에 담겼고…… 얼굴도 보였다. 흰 가면에 완전히 가려진
얼굴이.
짧게 한숨을 쉰 알테미온이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도 모르는 진실의 코앞까지 다가갔다가
실패하니, 긴장이 탁 풀렸다. 그가 기대어 서 있던 탁자 위를 손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리라를 떨어뜨렸어요.”
역시 착각이었군. 그럴 리가 없지.
“…….”
“이봐.”
“네?”
“트리온을 잡아 왔다.”
“저, 정말인가요?”
순식간에 몽상에서 깨어났다. 트리온의 미래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방금 겪은 놀라운 일조차 잊게
할 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
트리온은 언덕 위 떡갈나무에 묶여 있었다. 도망칠 길은 요원했다. 사지가 결박당한 데다 무서운 눈을 한
키쉬르의 전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장대 위에 매달린 누군가의 머리가 있었다. 곧
자신의 신세도 저리될 것이라고 경고하듯. 무시하고 싶었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로 자꾸
시선이 향했다.
처음부터 에우한과 피네오스를 제치고 리기아로 자신이 가겠다고 우기지만 않았다면. 두 왕을 밀어내고
테베레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만용을 부렸다.
알테미온, 저놈이.
“오, 더한 것도 생각해 봤지만 약속한 게 있어서 그럴 수 없었지. 어떻게 당신을 반길지는 내가 결정하지
않기로 했거든.”
“뭐?”
클리티에의 이름을 말하며 알테미온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결코 울거나 흥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자신이 무너질 순간이 아니라 트리온이 무너져야 했고, 자신은 그 꼴을 웃으며
즐겨야 했으니까.
“뭐?”
“……설마!”
“오, 유피테르여, 아폴로여! 테베레의 아들에게 안식을, 불온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그가 루키페르를 향해 돌아섰다.
“네 뜻대로 하지.”
***
그날 밤에는 포도주를 마셨다. 죽은 트리온의 피라고 생각하니 잘 넘어갔다.
알테미온은 그자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 순간을 즐겼다. 원하던 대로 최고의 복수를 이뤘다. 그런 만큼
혀끝에 닿는 술이 달콤하게만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주신 바쿠스가 인간들에게 포도주를 알려 주며
가르쳐 준 망각과 끝없는 활기, 해방감을 느끼진 못했다.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말없이 나른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얼굴에 드리운 수심의 그늘조차 몹시
매혹적이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루키페르가 중얼거렸다.
취했나.
“그래.”
“누굴 위한 것이죠?”
“내 어머니.”
루키페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알테미온은 그가 느끼는 짙푸른 슬픔을 엿들은 기분이었다.
집채만 한 바위를 맨손으로 막아 내고, 사람을 죽이는 데 거침이 없는 잔인한 성정을 가진 데다, 마음을
교묘히 조종하고 협박하는 데 능한 냉혈한. 인간 같지 않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질투했다. 그런
루키페르조차도 살갗을 헤집으면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인간이란 말인가.
“내겐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를 버리는 데 일조한 사내가 있을 뿐. 그 또한 트리온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한다. 테베레는 폐허가 될 테고 그는 도시와 함께 불탈 거야.”
“날 미워하는 것 아니었나.”
술잔이 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취할 대로 취한 알테미온의 손끝에서 떨어져서, 바닥을 빙빙
돌다 멈췄다.
“이봐.”
“음…….”
“떠나고 싶나?”
분명히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니 알테미온이 이곳에 머무는 건 루키페르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의 뜻인 것이다.
“루키페르…….”
***
“으음…….”
“날 죽일 셈인가?”
“마음껏 비웃으시죠.”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추한 꼴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에, 알테미온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붉게 물든 뺨이 드러났다.
“…….”
계속되는 비웃음에 그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키페르는 그의 불퉁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왜 이럽니까.”
“그럴 리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루키페르의 성미가 누그러든 것인지는 몰라도, 이 이상한 평화가 지속되는
것이 좋았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결코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을 테니까.
***
“……폴룩스 장군이라고?”
“드디어.”
“나는 테베레 주성에 들어가길 원하고 그는 성을 지키길 원하지. 이 싸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카우노스가 알고 있는 루키페르는 냉혹해 보여도 살육을 진심으로 즐기거나 감정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그와 그의 어머니가 겪은 어린 시절의 비극에 대한 복수심이 강할 뿐. 오히려 카우노스가 아는
누구보다 감정적인 인간이었다.
“…….”
“예.”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루키페르보다 강한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오히려
주성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주성을 함락한다면, 아카이아 땅에서 가장 귀한 보물들과 비옥한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테니까.
“폴룩스 장군이라니.”
“그에 대해 아십니까?”
“물론. 트리온이 가장 싫어하는 자이기도 했지. 강하면서도 신망이 높은 데다…… 약점이 없어서 회유나
협박을 할 수 없는 자였거든.”
그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바위까지 손쉽게 옮기는 루키페르에게 웬만한 자는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알지 못하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떠나기 전, 그가 침실에 돌아올까?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겪었듯이, 진격을 시작하면 병사들을 이끌기
바쁜 루키페르가 자신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렇구나.”
***
키쉬르 군사들은 거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했다. 그들이 어찌나 빠르게 이동했던지 그 모습을 목격한
테베레인들은 저승에서 불어닥친 검은 회오리와도 같다고 표현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땅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성까지 가는 길, 테베레에 속한 성들이 모두 키쉬르에게 패배했다.
성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전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루키페르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신성한 제단과
신상들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값비싼 기물과 황금들은 병사들이 나눠 갖게 했다.
루키페르가 당당히 선언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신들을 따르지 않는다 한들 신전을 부술 정도로
조롱하다니.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걸까?
알테미온은 불안했다. 그는 여전히 신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디아나 여신의 요정이면서도 순결을 잃은
어머니 때문에 신벌을 받아야 했던 처지는 어떠한가.
그들은 팔로스 숲 어귀에 다다라 있었다. 주성이 무척 가까웠다. 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다.
각자 전투를 대비한다. 그런데 자신은? 운신이 자유롭지 않으니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무력하게 지켜보는 방관자의 역할을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아코이테스는 짐을 옮기는 일에 동원된 터라 알테미온은 혼자 남겨졌다. 그는 루키페르도 소년도 없는
막사에 앉아 적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루키페르와 함께 잠드는 것조차 익숙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행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등골이 서늘해져야 맞으나 공포심에도 적응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자에게 남은 빚도, 받아야 할 것도 없었다. 이렇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왜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나? 그가 붙잡은 것도 아님에도, 그를 두고 떠나는 것은 어쩐지 배신으로 생각되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알테미온은 리라의 줄을 퉁겼다. 그리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멍청하구나.”
***
이윽고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폴룩스를 태운 전차가 달려 나왔다. 그 또한 루키페르 못지않게 훌륭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루키페르는 창과 방패를 들었다.
“물론.”
“윽……!”
“생각보다 시시하군.”
루키페르가 말로 도발하며 창끝으로 목덜미를 노렸다. 폴룩스는 몸을 크게 움직여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그는 무척 당황했다. 강하다는 것보다, 적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마치 어떤 공격을
받아도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과도 같았다.
폴룩스의 동요를 알아차린 루키페르가 또다시 목덜미를 노렸다.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기에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크윽!”
루키페르와 폴룩스가 결투하면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폴룩스는 아폴로가 귀애하는 인간이었다. 결코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테베레와 폴룩스를 위협하는 루키페르의 목숨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폴로는 루키페르가 운명의 손아귀에 빠지도록 덫을 놓고 기다렸다. 문제는 키쉬르의 기세가 대단하여,
두 사람의 혈투가 생각보다 빠르게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태양의 신은 어떻게든 폴룩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신력을 발휘해 루키페르의 창을 부러뜨렸다.
노련한 폴룩스는 신이 만들어 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인 루키페르를 창끝으로 찔렀다.
“큭!”
창은 갑옷이 가리지 못한 옆구리를 관통했다. 피가 솟구치면서 루키페르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이 정도 고통도 못 참을 리가.
“컥……!”
다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폴룩스가 창을 놓치고 흙바닥을 흠씬 굴렀다. 그 틈을 타 루키페르가 창을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
하.
“그럼 너는 오로지 나만을 따라오는 기이한 태양 빛을 어떻게 설명할 테냐? 이러고도 내가 이긴다면 너는
무엇이 될까!”
폴룩스는 방패를 크게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루키페르여, 난 이렇게 싸우고 싶지 않다. 사흘 뒤, 태양이 저무는 시각에 이곳에서 결판을 짓자.”
“좋다.”
그가 짧게 응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
“루키페르께서 막 귀환하셨답니다!”
“어찌 되었지?”
“아코이테스, 시끄럽구나.”
소년이 뒤로 물러나면서 허리를 숙였다. 갑옷을 벗은 루키페르가 침대에 기대어 누우며 반문했다.
“걱정했다고?”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알테미온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눈치 없게도
아코이테스가 대신 대답했다.
치료가 끝나고 붕대가 완전히 감긴 후, 의원과 소년이 밖으로 나갔다. 루키페르는 친우와 알테미온만
남게 되자, 카우노스를 향해 낮게 말했다.
“예?”
“어찌 된 일일까요. 그가 대놓고 도와주려 하다니. 마음에 걸립니다. 이 정도로 분명한 태도라면 또 어떤
도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리 와라.”
“함께 눕기 어렵지 않습니까.”
“괜한 오기 아닙니까.”
독을 마셔도, 검으로 심장을 찔려도 죽지 않았다. 고통은 느껴졌으나, 목숨을 앗아 갈 정도의 고통을 몇
번 견디고 나니 점차 그런 것에도 무뎌졌다.
“원하는 건 뭐든 주겠어.”
“예?”
“하고 싶은 말이 정말 그건가요?”
최고의 보물을 선물로 바치겠다고 하는 자들은 루키페르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권력과 재산을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 따위야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키페르의 말에는 그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답지 않게 부드럽고 애처롭기까지 한…… 우습게도 사랑 고백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는 숨을 고른 후 간신히 입을 뗐다.
“흣……!”
“그, 만, 아플 거예요.”
“유혹한 건 당신이잖아.”
“날 알고 싶다고 했잖아.”
“움직이지 말아요.”
“내가 할 테니까.”
평소의 냉정한 낯빛에서 볼 수 없던 표정에, 루키페르는 이성을 잃고 허리를 움직이려 들었다. 상처가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컥, 흡…….”
“날 고문하는군.”
“밤은 길지 않습니까.”
“의기양양하군그래?”
“좋아. 여기까지야.”
“아읏!”
둔부만 치켜들린 굴욕적인 자세로 꿰뚫렸다. 잠깐의 인내가 폭풍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묵직한 중심이
복부를 헤집었다. 이미 끈적한 정이 담긴 아랫도리가 힘겹게 이를 받아 냈다.
남성을 삼켜 드는 아랫도리의 조임에 그는 상처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파르르 떨며 무너져 침상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뒤태와 숨기지 못하고 흥분에 들뜬 옆얼굴이 성감을 돋웠다.
“으음, 응, 흥, 읏!”
“흐응, 흣, 천천……히!”
***
몸은 피곤했으나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간 잠자리를 갖는다는 건 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어젯밤은 완전히 달랐다. 루키페르의 태도가 달랐던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그보다 알테미온 스스로
변했다고 느꼈다.
어째서 그런 것이 가능해졌을까.
그런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느라 누군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침실로 꾸며진
곳과 천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소리는 충분히 들릴 만했다.
“카우노스여, 그게 무슨 말이지?”
“그들이 뭐라 말했나?”
뒤늦게라도 깨어난 기척을 했어야 했는데, 늦어 버렸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엿듣는 꼴이 되었다.
알테미온은 남몰래 베갯잇을 세게 쥐었다.
“…….”
“데리고 놀기 좋은 자 아니냐.”
“전에도 말한 적 있을 텐데. 그자의 눈이 마음에 든다고 말이야. 그걸로 충분히 설명된 것 아니었나?”
“실언을 했습니다.”
‘네 뜻대로 살게 될 것이다.‘
***
달빛이 밝았다. 마치 디아나 여신이 그들을 팔 벌려 환영이라도 하듯, 숲길에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을
정도였다.
“말이 없군.”
“감상적일 때도 있나.”
“전혀.”
멀리서 찌르레기 우는 소리와 발 아래에서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숲의 초목도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기라도 하는 듯 적막했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렸다. 울창한 나무들로 가려진 샘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양버들 몇 그루가 샘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수면 위로는 달빛이 떨어졌다. 밝은 빛이 물 위로 번져 흘러, 그들의 발치에까지
다다랐다. 샘은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루키페르가 히마티온과 가면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힘있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상처에 닿지 않을 만큼의 깊이에서 시원한 밤의 정취를 즐겼다.
손끝이 물에 닿은 순간 조금 떨렸다.
세 번.
오, 신이시여.
알테미온은 자신이 목격한 순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루키페르가 저를 돌아볼 때까지.
미미하게 달아오른 볼과 정확히 그를 응시하며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푸른 구슬 같기만 하던, 생명력
없는 눈이 아니었다.
“……너.”
알테미온은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여전히
루키페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가렸음에도 여전히 손 틈 사이로 그의 눈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알테미온은 누가 억지로 고개를 고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루키페르만을 바라보았다. 루키페르의 미묘한
표정만으로는 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폴로께서.”
“하, 하하!”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갑게 끊어지는 소리였다. 알테미온은 그제야 그가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지독한 슬픔과 고통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죽음 이후는, 괜찮을 것이다. 클리티에가 그를 맞아줄 테니까.
하지만 루키페르를 배신한 벌로 죽고 싶진 않았다.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존재가 자신이 되었다니.
루키페르는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곧 죽을 사람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거울상처럼 닮아
있었다.
“…….”
“꺼져.”
루키페르는 히마티온을 갖춰 입고 가면을 썼다. 냉정한 눈빛은 눈물을 흘리는 알테미온을 스쳤다.
그가 휙 돌아섰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결벽적일 정도로 올바른 성격을 지닌 사내로 자랐다. 그런 점이 자신과 꼭 닮았다고 생각하는 피네오스는
아들의 행동을 꾸짖지 않았다.
에우한이 말을 계속했다.
“신성 모독을 해 대는 오만한 야만인 아니오? 루키페르와 키쉬르를 지지하는 신은 아무도 없소.”
그의 생각은 일리가 있었다. 실로 테베레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전쟁의 신
마르스가 루키페르의 걱정을 하고 있다 한들, 이번 전쟁에 끼어들 수 없었다. 마르스 또한 그의 아들이
신을 모독한다는 사실과, 아에로페가 출산할 때에 운명의 여신을 잠들게 수를 써 루키페르의 방자한
행동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비난받고 있었다.
열심히 치료해도 오른쪽 무릎의 부상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아탈란테의 시선이 남편의 무릎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때, 피네오스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부자는 무뚝뚝하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닮았기에, 둘 사이에는
그다지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예.”
“……몸조심하거라.”
***
가슴속에 들끓는 분노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분노를 표한답시고 기물을 부수거나
싸움을 걸거나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소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단지 그림자만이 비치는 빈 막사 천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정신이 지나치게
또렷하여 빈 벽에도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루키페르가
잠깐에 불과했다고 생각한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날이 밝았던 것이다.
“루키페르여, 들어가겠습니다.”
“…….”
“그럴 필요 없어.”
“버렸어.”
“예?”
“그리고 앞으로 아코이테스가 이 막사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도록. 의원에게 맡겨서 일을 배우고 잡일을
돕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지금쯤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겠지. 다시 무기를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도록 해라. 주성을
어떻게 칠지 계획했던 대로 말이야.”
“그 말은…….”
“카우노스여.”
“예.”
“예?”
“놀랄 것 없어. 단지, 만약을 대비한 말이니까. 저들이 쉽게 굴복할 것 같지 않으니 말이야. 끝까지
성문을 닫고 저항한다 하더라도 성을 정복해야 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에우한을 잡아라. 그놈을
잡아야 길리포스를 지키고 있다는 괴물을 없앨 방법을 알 수 있겠지.”
“루키페르여.”
“할 일이 많지 않겠어, 이만 나가 봐라.”
***
“…….”
“와라.”
“크윽……!”
폴룩스는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루키페르 쪽으로 몸을 가깝게 붙였다. 그 때문에
날카로운 창끝이 가슴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건 루키페르의 옆구리를 찌른 창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
정신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는 데에 온 힘을 다하는 폴룩스는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못했다. 반면 목숨을
잃게 할 만큼 강한 고통을 참는 데에 능한 루키페르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비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루키페르가 투구를 벗었다. 아직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노을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너…….”
바람이 맨뺨 위를 스쳤다.
“서, 설마…… 아버지…….”
‘왕비가 다음번 수태할 아이는 왕을 죽음으로 이끌고 테베레를 피바다로 물들일 것이다.’
“아에로페…….”
피네오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간의 뼈저린 후회와 죄책감이 일순간에 밀려들었다.
미안하오.
그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잠깐에 불과했다. 낙하의 순간은 짧았고, 그의 몸은 마침내 지상에 도달했다.
힘없이 흙바닥 위를 뒹굴며, 고고한 푸른 옷자락까지 선혈로 물들었다.
“아, 아버지!”
“……큭.”
하지만 그보다 빠른 존재가 있었다. 인내할 만큼 했다며 아들을 죽도록 놔둘 수 없다며 고함을 지른
마르스였다. 그는 방해하던 메르쿠리우스를 제압하고, 그의 빠르기로 유명한 탈라리아를 훔쳐 신고
달려왔다. 그의 두 아들, 공포의 신 티모루스와 대패의 신 메투스 또한 함께였다.
마르스는 키쉬르의 군사에 광기, 잔혹성과 전의를 불어넣었다. 그의 아들들은 지켜보던 테베레의
군사에게 끔찍한 두려움, 패배감, 극도의 불안을 심어 놓았다.
“다 부숴 버려라!”
마르스가 무릎이 꺾인 루키페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테베레를 떠났다. 떠나는 그들의 등
뒤로 테베레 성이 불타고 있었다.
4. 꽃과 새벽별
허망한 일이었다.
알테미온은 태양 빛이 환하게 비치는 낮이면 천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걸었고, 민가를 지날 때에도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다.
“…….”
“허억…….”
짧은 침음과 함께 그는 기절했다.
***
몇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다시 눈을 떴다. 그제야 그의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자신이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는 것과, 아직 죽지 않고 이승에 잘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몹시나 허기지다는
것까지.
주변을 둘러보자 낡은 신전이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돌계단과 조금
삭기까지 한 문. 사람들에게 잊힌 지 오래된 신전 같았다. 그 사실에 마음이 이끌린 그가 조심스럽게
신전으로 들어갔다.
“누구 계십니까?”
“아…….”
방치되어 더러워진 신상을 보고서야 그는 이곳이 디아나 여신의 신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후, 끝났다.
신전을 대신하여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가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대로 떠나기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올려지지 않은 제단이 쓸쓸했던 것이다.
신께 바칠 만한 것이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알테미온은 농부들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낫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평생 기른 기나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부디 클리티에가 편히 잠들었길,
그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로, 낡은 신전을 떠나려 했다.
“설마, 오…….”
“그는 아직 죽지 않았어.”
“다 제 잘못입니다.”
알테미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누구에게도 꺼내 놓을 수 없었던 진실된 속내를 말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 입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그에게 어떤
말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그는 분명히 다시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예?”
“머리가 100 개에, 눈도 100 개, 목소리도 100 가지를 갖고 있어. 모든 머리가 동시에 잠들지 않고,
그의 이에 물리면 누구라도 저승길에 올라서게 된다. 그 뱀은 본래 내 오라비의 자식으로 라돈이라 불리지.
무척 난폭한 성정이라, 신조차 그를 말로 설득할 수 없다.”
여신이 말을 마친 후에도 알테미온은 희망과 경외에 사로잡혀 굳어 있었다. 디아나는 그대로 떠나려다,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루키페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째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인지 떠올리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허억……!”
누군가 옆에서 불쑥 입을 열었다. 통증으로 눈앞이 돌아, 누구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인 후에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소박한 공간. 젊고 유쾌한 인상의 청년이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넌.”
“여긴 어디지?”
“물론 네 아버지다.”
“뭐?”
“그는 여기에 없어.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 유피테르의 명령을 거부하고 날뛰다가 결국 잡혀갔지. 난 널
치료하기 위해 대신 보내졌다. 네 아버지가 훔쳐 갔던 내 샌들도 되찾아야 했고.”
“도움 따윈 필요 없어.”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나에게서 뭘 원하지?”
“차라리 죽는 게 나았겠군.”
발로 바닥을 가볍게 구르는 소리와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메르쿠리우스조차 그의 곁을 떠났고,
적막이 찾아왔다.
***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겉으로만 보아도 굉장한 무골이라는 느낌이 드는 루키페르와 달리, 카우노스라는 재상은 살육과 거리가 먼,
멀건 인상이었다. 분명 루키페르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던 자이겠지. 겨우 이런 자에게 아름다운
왕궁과 그가 애지중지 모은 귀한 보화들을 내주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에우한의 예상이 맞아 들어간 듯했다. 재상이 조용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오호라.
에우한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할지 재빨리 계산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루키페르라면 분명히 어떤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시대로 따르는 데에 망설일
것도, 마음이 흔들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이 아폴로의 핏줄. 그렇기에 난 그에게 접근할 수 있지. 맞소. 당신의 생각대로 난 그의
앞을 지나갈 수 있소.”
그의 오만한 비웃음에 조용히 지켜보던 키쉬르의 전사들이 성을 냈다.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지르며 장검을
뽑아 들었으나 에우한은 끄덕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카우노스는 그런 에우한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늙은 구렁이와도 같은 저자가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을지 뻔했다.
“뭐라?”
***
그들에게 루키페르는 두려운 정복자가 아니라 어쩌다 흘러들어 온 이상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이, 젊은이, 무슨 걱정이 많소?”
“신경 끄시오.”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루키페르가 노인의 이름에 걸음을 멈췄다. 그가 책임지기로 했던 소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남자도.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천성이 태평한 것인지 냉정한 루키페르의 인상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의 이름은 무거웠다.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카우노스와 키쉬르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자리와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
여신을 만난 이후로 어쩐지 죄책감이 조금 덜어져, 알테미온은 행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몰랐던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과 호기심 어린 얼굴을 알게 되니 항상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도 약간이나마 풀렸다.
경쾌한 노래나 구슬픈 노래를 가리지 않고 불렀다. 하지만 어떤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 쓸쓸했다. 노래를 부를 때면 계속해서 한 사람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그의 감정이
전해진 것인지 관객들은 쉽게 눈물을 보이곤 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에게 구애와 찬사를 던졌다. 여행길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하루를 더
머무른 도시에서는 다음 날 아침 그가 머물렀던 집 문가에 꽃이 수북이 쌓여 있을 지경이었다.
“난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
티노스 섬에서는 그날도 어김없이 광란의 축제가 벌어졌다. 만취한 루키페르의 눈은 사물들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떡갈나무와 단풍나무도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날 서 있던 현실 감각도 함께 취기에
휩쓸려 눅진하게 녹아내렸다. 사람들이 외치는 말들도 귓가에 맴도는 이명처럼 의미 없이 반복되다가
사라졌다.
날이 어두워서 군데군데 세워 둔 횃불 빛과 흥에 겨워 울리는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만이 눈과 귀에 제법
날카로운 자취를 남겼다.
웃음을 흘리던 여인들이 다가와 루키페르를 잡아당겼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리라를 연주하던 한
여인은 그의 목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귀찮아진 그가 한 손으로 여인을 떼어 내기 전까지, 그녀는 계속
그의 등짝에 입을 맞춰 댔다.
“시끄럽소.”
그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루키페르를 조롱했다. 튼튼한 몸을 가졌다 해도 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뭘
하겠는가? 그들은 신이 내린 행운을 낭비했다. 비웃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그가 그들의 앞까지 다다른
것이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네 번 터졌다. 그들은 루키페르가 팔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한
대씩 맞자마자 전부 기절해 버린 것이다. 기절한 남자들과 함께, 얕은 바닷물에 빠진 노인이
허우적거렸다.
여인들 중 하나가 외치자 사람들은 함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저마다의 바람을 외치며 나무에 매달린
남자들을 과녁 삼아 돌, 나뭇가지, 표창과 화살들을 던졌다. 머지않아 그들의 헐벗은 몸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어지러워 나무뿌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졸음이 쏟아져서, 이만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월계관을 씌우고 참나무로 만든 가마 위에 태웠다. 그리고
횃불을 든 채 행진을 시작했다. 루키페르는 가마에서 뛰어내릴 여력도 없어서 그 위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
“우욱……!”
“……하.”
알테미온은 자꾸만 그의 꿈속에 슬픈 표정으로 나타나 그들이 헤어졌던 샘의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런 꿈을 꿨다 깨어날 때면, 루키페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그 남자가 했던 말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성미를 건드리고, 모두가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자신에게 겁도 없이 덤볐던 이상한 자였으니까.
산산이 부서진 자존심과 끔찍한 그리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고요한 샘을 가만히 응시하며 쓰라린
속내를 아프게 곱씹었다.
“속 편해서 좋겠소.”
“이런 경지에 쉽게 다다를 수 없지. 하지만 자네도 가망이 없진 않아.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니.”
루키페르가 노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가늘게 비틀었다. 묘하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신경질적인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
“갈 곳은 있소?”
그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날 필요로 하는 자가 있소.”
“……맹세하겠소.”
***
“라돈의 몸에는 검은 무늬가 있소. 수많은 머리들 틈에 딱 하나, 검붉은 무늬가 있지. 그 자리를 정확히
맞춰야 하오. 그러면 한동안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소.”
구석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탈란테였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그녀는 충격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녀는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
“아코이테스로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뭐?”
카우노스가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소년을 제대로 응시했다. 아코이테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굳센
낯을 하고 있었다.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거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니까,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도중에 버리고 갈
것이다.”
“네.”
***
유피테르의 명령에 따라 아폴로와 마르스는 인간계에 개입하지 못하지 못했다. 주신은 두 아들이 싸우는
것 또한 금했는데, 둘이 마주치는 날이면 언제라도 하늘이 무너질 법한 싸움이 벌어지려 했던 것이다.
아폴로는 자신을 섬기던 나라가 멸망하였음에도 더 이상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하고
상심하였다. 그의 기분 때문에 태양 빛 또한 기운 없고 시들한 날들이 많아졌다.
***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청년의 매력이 드러난 지금은, 차가운 표정조차 깊고 우수에 찬 분위기를 더할
뿐이었다. 갑판 위에 서서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마음이 급한 것과 달리 좀처럼 그가 원하는 것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사소한 다툼, 결투, 그리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건들은
그의 주의를 전혀 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살육과 복수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얻어 낸 것이 그토록 원했던 신들의
세계의 붕괴와 만족감이 아니라, 끔찍한 공허감과 무기력함이라고 한들 상관없었다.
그의 뒤틀릴 만큼 뒤틀려 버린 마음조차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유일한 자를 제 손으로 놓쳐 버렸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뼈아픈 진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
“잘생긴 선원이여, 어딜 찾으시나요?”
“전사들? 설마…….”
“한 무리의 사내들이 병장기를 짊어지고 섬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놀라게 했는데, 죄다 그리로 가던걸요.
말려도 소용없었어요.”
“듣기론 절벽으로 둘러싸인 동굴이 있다고 해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괴물이 막고
있다지요.”
“……고맙소.”
라돈은 거대한 뱀의 모습으로, 절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의 유일한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100 개나
되는 머리 중 일부는 잠들어 있었고 일부는 꿈틀거리며 서로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모두 달라 마치 여러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기묘하고도 무시무시한 광경에, 괴물을
처음 보는 전사들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카우노스여, 어찌할까요?”
카우노스의 침착한 대꾸에, 전사들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에우한이 털어놓은 비밀을
토대로 계획을 짰다.
라돈의 몸에 있다는 하나뿐인 검붉은 무늬를 정확히 맞추기만 하면 되니, 그들은 검녹빛 몸에 새겨진 검은
무늬들 틈에서 붉은색을 찾으려 애썼다. 아코이테스 또한 그들의 틈에서 괴물을 노려보았다. 100 개의
머리가 조금씩만 움직여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카우노스여, 찾았습니다.”
“……정말이군.”
- 누구냐?
- 누구야!
- 감히 이곳을 찌르다니!
분명히 에우한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괴물은 기절하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카우노스여……!”
- 찾았다!
- 저놈들이야!
“끄아악!”
그들이 아무리 용맹하다 한들, 신조차 맞서길 원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승산은 없었다. 그들은 한 명씩
차례로 쓰러져 갔다.
이대로 끝인가.
설마.
불길한 예감에 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성한 수풀과 나무들을 뒤로하고 나아가니
과연 이미 전투가 벌어져 있었다. 흉폭하게 날뛰는 괴물을 두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낯익은 자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카우노스여!”
- 끄으윽!
“루키페르여!”
뒤늦게 왕의 등장을 알아차린 전사들 틈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강인한 왕에게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었다. 그라면 아무리 두려운 괴물이라도 반드시
처치하고 그들을 구출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왕을 지켜라!”
카우노스가 외쳤다. 루키페르가 하나씩 처치할 수 있도록 뒤에서 공격하는 머리들을 막겠다는 계획이었다.
그의 마음을 읽은 전사들이 일제히 엄호할 태세를 취했다.
어찌나 둔기를 세게 휘둘렀는지, 결국 참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부서진 잔해를 집어
던지고 주먹을 휘둘러 공격해 오는 머리를 쳐 냈다.
“루키페르여, 이걸 받으십시오!”
- 강한 놈이다!
- 살려 두지 마!
그는 베고 또 베었다. 괴물의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는 피에서 흘러나온 맹독으로 인해 풀들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허억, 헉……!”
***
하지만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괴물이 있다는 섬은,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한 마을도 있었다. 주민은 많지 않아 보였고, 드나드는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자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아닙니다. 찾는 것이 있어서…….”
여인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다. 앞서 지나간 자들에 비하면, 이 청년은 무척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긴
하여도 싸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청년은 매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알테미온의 표정이 단박에 희게 질렸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먼저 도착한 것은 키쉬르의 군사들일 것이고, 뒤에 홀로 도착한 것은 루키페르일
것이 분명했다.
“어디 보자, 먼저 사내들이 지나갈 때의 그림자는 굉장히 짧았는데…… 그다음에 한 사내가 지나갈 때는
그림자가 이 정도 더 늘어났지요.”
여인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괜히 입을 놀렸다고 후회했다. 앞서간 자들도 지금쯤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안…… 되는데…….”
***
이 길의 끝에 다다르면, 그를 볼 수 있을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알테미온의 심장은 불안과 기대로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제발…… 신이시여…….”
“세상에…….”
“사, 살려 주세요!”
아코이테스?
알테미온은 수풀을 헤치고 그 틈으로 상황을 엿보았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괴물은 이미 절반 이상의 목이
잘려, 끔찍할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괴물의 피가 흘러내린 자리가 시커멓게 물들어서, 흙바닥을
딛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괴물의 목을 하나하나 일일이 자르고 있었다. 그
뒤를 수호하려 고군분투하는 전사들도.
끔찍한 광경에, 알테미온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나무를 짚은 채 비틀거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디아나 여신이 은밀히 가르쳐 주었던 방법을 떠올렸다.
급하게 뛰어올라 온 알테미온의 손에는 키타라나 리라가 없었다. 노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을
달싹이며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괴물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다.
원초적인 공포에 숨소리가 거칠어질 뿐이었다.
“기꺼이 울겠어요.”
당신을 미치게 해 버린
당신 어머니가 흘린 피를 기리며
그건 정신을 놓기 직전인 괴물과 루키페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슬픔이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를
타고 모두의 귓가에 아름다운 환청처럼 흘러들었다. 그건 마치 놓치고 싶지 않은, 잊고 있던 옛
자장가와도 같았다.
행복은 필멸자에게 지속되지 않지요
하지만 그가 생각한 죽음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땀이 눈물처럼 고여 흐릿해진 시야에, 괴물의 살아
있는 목들이 축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노랫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나직하게 노래하던 자가 모습을 드러내 쓰러진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루키페르는 그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 알고 있던 눈이었다.
“루키페르.”
“……가지 마.”
루키페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루키페르!”
안도한 전사들이 일제히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들은 잠든 라돈을 불안하게 힐끔거렸다. 혹시라도 다시
깨어날까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당신은 분명…….”
“카우노스여, 오랜만이군요.”
“어떻게 이곳을……?”
마침내 민가로 내려온 그들은 길가에 주저앉았다. 안도감에 피로가 일순간에 밀려온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행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난 그저…….”
카우노스의 말에 전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도 구슬픈 노랫가락이
마음에 와닿아 다치고 고통받은 심신을 어루만지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했던 것이다.
“가지 마세요.”
“글쎄요. 이제 뭘 할지 찾아봐야겠지요.”
알테미온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는 방향을 모르는 그에게 공허함
이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럴까요.”
소년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씩씩한 소년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는 마음이 급격히 약해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수프를 먹으니 소년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기색이었다. 끔찍한 전투 현장을 본
데다 갑자기 나타난 알테미온 때문에 동요가 심했던 터였다. 소년은 곧 의원의 부름을 받아 다른 병사들을
돌보러 갔다.
혼자 남겨진 알테미온은 잠깐 망설이다 루키페르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라도
실컷 보고 싶었다.
***
“……꿈이 아니었나.”
“정말 날 구한 게, 당신이었어.”
“…….”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그는 어째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알테미온은 이제 그를 바라보는 루키페르 자신의 눈길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루키페르.”
괜찮냐고 묻고 싶고, 또 이제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돌던 말들은 그의
차분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날아갔다.
알테미온은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묻지 않아도 이미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가면 뒤의 그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던 걸까.
이름을 부르자 루키페르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테미온은 천천히 침상 옆에 미끄러져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잘 지낸다고 하시더군.”
“어째서 내게 돌아왔지?”
“내가…… 밉지 않아요?”
“그건 내가 묻고 싶었는데.”
두 사람은 각자의 두려움에 휩싸여 서로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질문이 아니라 정반대의 질문을 했다.
우습게도 그들은 서로의 진짜 의중을 동시에 알아차렸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사라져서일지도,
아니면 단지 서로의 간절함을 숨기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넘쳐흐르고 있는
감정을.
오, 거짓말.
마침내 고개를 든 알테미온이 힘겹게 눈물을 참느라 미간을 구기자, 루키페르가 그의 이마와 눈가를
쓸었다. 상처가 난 거친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루키페르는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애정과 활기를 느꼈다. 이 새로운 정열이란 그간의 무서운
복수심이 가져다준 힘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지치고 피곤한 육체와 달리,
정신은 새로이 태어난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루키페르가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기쁨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알테미온이 자신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은 한 차례 강하게 불었다 영영 떠나가는 바람 자락처럼 사라졌다.
“그러겠어요.”
***
신들에게 루키페르와 알테미온의 존재는 빠르게 잊혔다. 그들과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괴물들과 신에게
도전하는 또 다른 영웅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굉장한 미인이 나타나 구혼자들이 줄을
이었고, 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도 했다. 그들 때문에 베누스와 유노 여신이 진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키쉬르의 주성에는 바쿠스와 마르스, 그리고 디아나의 신전이 세워졌다. 루키페르가 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화가 난 메르쿠리우스가 욕설을 퍼부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비극을 마무리하는 훌륭한 합창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저주스러운 신탁을 피하려 애쓰고 노력했던 영웅은 결국 그 노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신탁을 이루게 되었다.
고통 어린 한탄을 하며 죽어 버린 영웅의 모습에 시민들은 일제히 눈물을 훔쳤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