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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의 침실

파토스 장편 소설

|차례|

1. 앞을 볼 수 없는 자

2. 신들의 세계

3. 인간의 굴레

4. 꽃과 새벽별

1. 앞을 볼 수 없는 자

[테베레와 키쉬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오랜 문화를 형성한 테베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키쉬르에 무릎을 꿇는다. 테베레는 적의 장군을 포로로 붙잡고 휴전 협정을 제안한다.]

“루키페르, 그자가 직접 온다고 합니다.”

먼 길을 달려온 사자가 간신히 숨을 고른 후에 보고했다.

중년의 트리온은 눈을 번뜩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건 중대한 기회였다.

테베레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인한 분열 때문에 적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 국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인질 협상을 기회로 키쉬르를 몰아내고 내부 정리도 할 생각이었다.

“흥, 그자가 길리포스와 죽마고우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군.”

“다만 이곳까지 올 마음은 없다고, 다른 장소를 제시했습니다.”

“어디를 원했지?”

“리기아입니다.”
이들이 사는 땅, 아카이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르는 유피테르의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피네오스도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신의 눈과 목소리가 가장 가까운 곳을 택하다니. 의외로 신실한 자인가.”

“태도가 상당히 고압적이었습니다.”

예상이 가는 바였다. 그자가 마음먹었다면 그들의 피를 더 흘렸을지언정, 이 땅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생긴 놈이더냐? 소문대로 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더냐?”

트리온은 빈정거렸다. 이에 에우한은 코웃음을 쳤다. 이 자리에 모인 트리온, 피네오스 그리고 에우한은
테베레를 이끄는 세 명의 왕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매우 싫어했다.

“보여 주지 않아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나 목소리로 보아 상당히 젊었습니다.”

키쉬르의 왕인 루키페르는 전장에서 투구를 쓴 채 전차를 끌며 절대적인 무력을 휘둘러 테베레 군사들을
도륙 냈다. 신위와도 같은 마상 창술과 훌륭한 근육질 몸 외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소문만 무성했다. 굉장한 거구에 전쟁의 신의 아들이라는 소문부터 소의 머리를 가진 반인반수로 인육을
즐긴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하! 오만한 젊은 왕이라. 감히 축복받은 테베레 땅을 정복할 혈기를 드러냈다면 그럴 만도 하지.”

에우한은 손을 내젓더니 사자에게 명했다.

“좋아. 그자에게 리기아에서 만나자고 전하게나. 즉시 떠나게.”

“예.”

트리온은 명을 수행하러 가는 듯 보였던 사자와 회랑의 구석에서 다시 만났다.


“루키페르는 어떤 자였지?”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키쉬르의 군사들조차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듯했습니다.”

“오호, 그래?”

그가 황금이 든 주머니를 품에서 짤랑이자 사자는 자신이 적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말했다.

“약점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혼인하지 않은 남색가인 듯합니다.”

“뭐라?”

“하인들이 하는 말을 엿들은 거라 확실하지 않으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여인을 안지 않는다


들었으니까요.”

***

방 안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컴컴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알테미온은 돌아보지 않았다. 창가에서 희미한 빛줄기를 좇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빛줄기만으로도 미의 여신이 축복을 내린 듯한 찬연한 금발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게 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는 아름다우나 아무 감정이라곤 없는 조각상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누군들 제대로 된 관찰력을


가졌다면 알테미온의 마음에 자리한 뿌리 깊은 불행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나 그를 만나는 소수의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질투하거나 그저 바라보기에 바빴다.

“오랜만이구나, 알테미온.”

이름이 불리자 알테미온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푸른 눈에는 빛이 돌지 않았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다.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상대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어서 놀라지
않았다.

“트리온 님이군요.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고운 미성에서는 감추지 못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트리온은 의자에 앉아 알테미온을 응시했다.

“네가 할 일이 생겼다.”

“무엇입니까.”

“너도 야만인들과 싸우는 테베레의 전사들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놈들과 대화로 풀기로 하여 그놈들의
왕이 리기아로 오기로 했다.”

“키쉬르인들과 협상을 할 생각이시군요.”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고운 아미가 의문으로 들렸다가 살짝 찌푸려졌다. 트리온의 속내를 금세 읽은 탓이었다. 승세가 강하던


상대와 협상하면 양보해야 할 것이 많다. 내주지 않으려면…… 함정을 팔 생각이겠지.

“소문에 그자는 남색가라고 하더구나. 네가 나서야겠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알테미온은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루기 힘들 만큼 영악한 구석을 보일 때도 있었다. 트리온은


그를 비웃으며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의 침실에 넣어 줄 테니 밤 시중을 들어라. 그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찾아.”

루키페르를 파멸시켜야 했다. 저주스러울 만큼 뛰어나다는 그가 없다면 키쉬르도 별 볼 일 없어질 테니까.

그 공을 트리온 자신이 세운다면 멍청한 피네우스와 에우한을 몰아내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그의 약점을 잡아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군요. 야만인도 비웃을 비열한 수작을…….”

곧게 뻗은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분노를 숨기며 움츠러들었다.

트리온의 손바닥이 그의 뺨을 쳤다. 철썩 소리가 났던 것에 비해 약한 힘이었으나 여린 뺨은 붉게


부어올랐다. 필시 입안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알테미온은 입술을 꾹 깨물기만 할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주둥이까지 잃고 싶지 않다면 입조심을 하는 게 좋겠지.”

약점을 잡는 것. 그건 두 사람 다 잘 아는 방식이었다. 알테미온의 입술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조소로 얇게 비틀렸다.

“네 누이는 꽤 건강해졌더군. 식사량이 늘었다고 들었어.”

“……정말입니까?”

무슨 말을 해도 변함없던 알테미온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병을 앓는 여동생 클리티에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가 트리온의 말에 꼼짝 못 하게 된 유일한 이유.

“그래. 잘 해낸다면 내 약속하지. 너와 네 누이를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마.”

“클리티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괜찮은지 보고 싶습니다.”

“누이를 보면 보이지 않던 눈이 갑자기 보이게라도 되나?”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만나게 해 주십시오.”

트리온은 이제야 순종적인 기색을 보이는 잘난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넌 고분고분할 때 가장 예쁘지.”
치욕적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클리티에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트리온은 그의 손에 천을 쥐여 주었다.

“네 누이의 손수건이다. 직접 수놓았다고 하더군.”

“그 애가…….”

그 말에 알테미온은 천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정성을 들인 수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실패할 걱정은 되지 않아. 어떤 사내라도 네 다리 사이에 품을 수 있을 테니.”

턱을 쥔 손을 거둔 트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 내킬 때 알테미온을 억지로 품었지만 이젠 첩자로


가야 하는 나름대로 귀한 몸이었다.

“채비를 도와줄 사람이 올 테니 준비하도록. 성공하면 네 누이를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될 테니까.”

트리온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케레스가 그를 보더니 계단참에 멈춰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네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그, 그게, 잘못 내려왔을 뿐입니다.”

횡설수설 변명하는 게 거짓을 입에 담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트리온은 아들을 잡아끌고 위층으로 올라가
회랑 끝으로 몰았다. 그리고 일갈했다.

“네가 그놈에게 은밀히 욕정을 품는 것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알테미온이 가진 아름다움 앞에 개처럼 발정하는 놈이 한둘이 아니었고 아들도 예외가 없었다. 이따금
밤마다 장난질을 하러 그 방에 숨어드는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케레스는 몹시 당황하여 낯을 붉혔다.
“아버지, 그자는 신벌을 받은 자입니다. 유피테르의 하늘 아래 사는 제가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두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신이 내린 벌 때문이다. 알테미온을 아는 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트리온은 두 손을 저으며 거부하는 아들을 쏘아보았다.

“그렇다면 그놈을 다시 볼 생각을 하지 마라. 아주 재수 없는 놈이니.”

“예? 알테미온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케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울 좋은 왕자인 케레스는 감히 아버지에게 대들


자격이 없었다.

“그놈은 낯짝이 반반하다는 것 외에 쓸모가 전혀 없지. 그러니 테베레를 위한 거사를 성공시킨다면 그제야
밥값을 하게 될 것이다.”

“안 됩니다. 알테미온은…….”

트리온은 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다음 날, 알테미온을 포함한 소수의 무리가 먼저 리기아로 떠났다.

***

[테베레의 세 명의 왕 중 트리온이 리기아로 가게 된다. 그는 유피테르의 신전에 제물을 바친 후에


루키페르를 만나러 간다.]

“루키페르요.”

낮고 차가운 목소리. 잘 단련된 전사의 육체가 중압감을 더했다. 트리온은 관록 있는 정치가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먼 길을 오셨소. 내가 테베레의 삼왕 중 트리온이오. 그대가 직접 정한 리기아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중한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루키페르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저 난 거래를 하러 왔을 뿐이오. 그대들이 잡아간 나의 장군과 병사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지.”

“그들을 사로잡은 건 내가 아니고 에우한이오.”

거짓이 아니었다. 길리포스를 비롯한 키쉬르의 병사들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은 에우한이었다. 그 때문에
전쟁을 종결할 왕으로 삼왕 중 에우한의 말과 행동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고 트리온은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테베레가 한 짓이지.”

“테베르의 상황은 키쉬르와 같지 않소.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건 알아야 할 것 같소.”

루키페르는 코웃음 쳤다. 상대의 태도에 트리온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어째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오?”

무례하게도 그는 단 한 순간도 가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비협조적인 태도에 더해 상대는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다.

“내가 괴물일까 두려운가?”

루키페르는 차갑게 비웃었다.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도 평범한 인간이니 걱정 마시오. 나의 장군과 병사들은 어디 있지?”

그는 자신이 이곳까지 온 목적 외에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듯했다.


테베레에서 가까스로 인질로 잡은 장군 길리포스는 과연 루키페르에게 꽤 중요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사나운 공격 태세를 멈추고 무려 친히 협상의 자리에 앉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트리온은 오만한 상대에게 뻣뻣하게 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장 고개를 숙인다면 후에는 저 목을 칠 수


있으리라.

“물론 그는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소.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당신의 백성들이 살아갈 땅은 남지 않을 것이오.”

오만한 젊은 놈. 그는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테베레인들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시간을 보낸 사람들만을 신뢰하오. 그것이 이 테베레 땅의 규칙.


모쪼록 먼 길을 온 당신에게 준비한 선물을 즐겨 주시오.”

당장 포로 협상을 진행할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돌려서 표현한 트리온은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화려하게
꾸민 미녀들이 양손 가득 술과 음식을 들고 살랑살랑 들어왔다. 뒤를 따라 들어온 여자들은 악기를 들고
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테베레 여자들이 아름답다더니…….”

루키페르의 신하들은 이미 안면이 반쯤 풀려 있었다. 트리온은 루키페르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으나 가면이
방해했다.

“두 나라의 교류를 위해 그리고 앙금을 풀기 위해 준비한 자리니 마음껏 들어 주시오.”

음식을 내려놓은 여자들은 사뿐사뿐 걸어가 신하들에게 인사하고 손을 내밀었다.

트리온은 웃는 얼굴로 술을 마시면서 탁자 건너편에 있는 적을 관찰했다. 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포로의 목숨이 중요하다면 이 연회를 엎을 순 없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후에도 루키페르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흥을 즐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술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여인의 조심스러운 손길을 떨쳐 내지 않아도 완벽히 무관심했다.
‘정말 소문대로 남색가인가 보군.’

추측은 점차 확신이 되었다.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났다.

***

[결코 잠들지 않는 운명의 여신이 딱 한 번 꾐에 넘어가 잠든 적이 있었다. 그 틈에 태어나 인간에게


내려지는 죽음의 운명을 안배받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깨어난 여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이를 만회할
방법을 강구했다. 여신은 신탁을 통해 말했다.

‘그는 운명의 정복자다. 결코 적에게 패하지 않고 어떠한 죽음의 꾀에도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

루키페르는 술을 꽤나 마셨음에도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그는 유피테르의 사제들이 제공한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작은 인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거슬려 하는 편이라 침실 앞을 지키는 병사도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깊게 잠들어 본 지 오래되었다.

어둠 속에서 예상에 없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키페르여, 당신에게 경고를 전하러 왔습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가 아카이아에서 머나먼 땅에는 있다는 만물이 얼어붙는 추위를 연상하게 했다.
루키페르는 버릇처럼 가면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어슴푸레하게 형체가 보였다. 침실에 남몰래 숨어든 자라. 단숨에 칼을 날릴 수도 있었다. 하나


암살자였다면 공격에 앞서 말을 거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척을 살피면서 검을 빼
들었다.

날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것임에도 어둠을 틈탄 자는 놀라울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검사? 아니, 상대는 무술을 모르는 자다. 단지 물건처럼 미동도 없을 뿐.
“그대는 누구냐?”

“알테미온이라 합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알테미온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저는 신의 사자입니다. 제가 들은 바를 전해야 합니다.”

검을 든 루키페르는 촛대를 들어 의자에 앉아 있는 낯선 이, 알테미온의 눈앞 가까이 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불길에 드러난 고혹적인 아름다움 한 자락에 흠칫 미간을 찡그렸다. 온 아카이아에 자랑이라도 할
듯이 당당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여기에 있었다.

갈증이 일었다.

“무슨 경고?”

촛대를 내려놓은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의 흰 목을 위협하듯 움켜쥐었다. 맥박이 손아귀에서 가늘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힘을 세게 주면 목을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도 알테미온의 숨은 힘겹게 넘어갔다. 흰 얼굴에 핏기가 쏠려 붉게 달아올랐다. 하나 그의 눈은


단 한 순간도 루키페르를 응시하지 않았다.

손을 놓아 주자 그는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목을 잡고 밭은 숨을 쉬었다. 루키페르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숨을 되찾은 후에도 자칭 신의 사자는 그를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것이다.

눈길은 줄곧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장님인가?”
루키페르는 눈이 먼 대신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신의 사자를 떠올렸다.

“저는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내게 내려진 바 있는 신탁에 대해서도 알겠지?”

이미 신탁을 받았다고? 알테미온은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내보이고 말았다. 어쭙잖은 예언가 흉내나마
성공한다면 그를 겁주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을 치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답을 못 하는군. 나는 이미 예언가를 본 적이 있다. 넌 가짜다. 내게 목숨을 구걸해야 할 자가 경고라


…….”

비웃음에 알테미온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는 들은 바를 전할 뿐입니다. 루키페르여, 테베레에서 나가십시오. 이곳은 당신을 위해 준비된 땅이


아닙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우겼다. 루키페르는 달싹거리는 붉은 입술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입술을 만져 보았다.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안쪽은 어떨까. 생각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치열과 혀를 거칠게 매만졌다. 따뜻하고 미끈거리고 부드럽고 좁았다.

강한 악력에 알테미온은 반항하지 못하고 입안을 휘젓는 긴 손가락들을 견뎌야 했다.

“신의 사자가 아니라 남창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

“놓, 아 주세요.”

몸부림을 치자 어깨끈이 흘러내려 희고 상처 하나 없는 피부가 드러났다. 옷감이 피부를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네 정체를 맞춰 볼까. 뻔해. 넌 테베레에서 내 밤 시중을 들도록 보내진 첩자겠지.”


정곡을 찔렸다. 수치심에 알테미온의 얼굴이 주체할 수 없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내 침실에 제 발로 들어온 상대를 그냥 내보낼 생각은 없어.”

알테미온은 손가락을 할 수 있는 한 세게 깨물었다. 손이 떨어지자마자 일어나려 했으나 의자에 걸려


바닥을 굴렀다. 우당탕 소리가 요란했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 알테미온의 몸이 공중으로 가뿐히
들렸다. 루키페르는 가벼운 그 몸을 침대 위로 던졌다.

“그 멍청한 왕이 의외로 내 취향을 맞췄거든.”

그는 가느다란 사지를 누르며 올라탔다.

“그런 얼굴로 찾아온 주제에.”

“놔……!”

알테미온이 몸부림을 치면서 잠시 자유로워진 팔을 휘두르자 우연히 맞은 가면이 삐뚤어졌다.

고쳐 쓰려던 루키페르는 마음을 바꾸고 가면을 벗었다. 어차피 이자의 눈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도 상관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므로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결코 벗지 않던 것이었다.
묘하게 해방감이 들었다.

많은 자의 예상과 달리 그 자리에는 소 머리가 아닌 이목구비가 뚜렷한 푸른 눈의 미남이 있었다. 하나


알테미온은 그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듯, 루키페르의 얼굴 또한 보지 못했다.

“네 할 일을 다해.”

“아윽.”

아까부터 씹어 보고 싶었던 입술을 물어뜯었다. 고통으로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침입했다. 벗어날 수
없는 악력에 알테미온은 꼼짝없이 폭력적인 탐닉을 받아 내야 했다.
피가 끓었다. 정신이 아찔할 만큼 취향이었다.

***

루키페르는 앞섶을 풀어 헤치고 알테미온의 맨가슴을 진득하게 매만졌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황홀한
촉감이었다. 살 내음을 맡으며 살을 베어 물자 아랫배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흐으…….”

당장 그를 취하고 싶었다. 왼손이 아래로 내려가 허벅다리 안쪽을 잡아 올리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려 할
때였다.

“멈추세요.”

말씨만큼이나 서늘한 칼날이 그의 가슴팍을 가리키고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있던 루키페르의 눈이 천천히


다리에서 칼날로 향했다. 귀엽게도 옷 속에 단검을 숨겨 온 모양이었다. 검을 쥔 가느다란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한 번도 누굴 찔러 본 적이 없나 보지?”

당황과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이 스며 있는 목소리였다. 드러내 놓고 비웃음을 사자 알테미온은 단검을 쥔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만두지 않으면 찌르겠어요.”

“그럼 찔러.”

그는 처분을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알테미온의 머리는 재빨리 올바른 해답을 토해 냈다.

‘찌르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트리온은 이자를 해치우고 싶어 했다. 지금 목숨을 끊어


버린다면 앞으로 어렵고 복잡한 일들을 해 나갈 것도 없다. 약속대로 동생 클리티에와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찌르기 한 번이면 끝난다. 혹여나 틈이 있을까 싶어 가져온 단검이 이 순간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정확히 여기를 말이야.”

그런 마음을 부추기듯 루키페르는 검을 잡은 떨리는 손 위를 겹쳐 잡아 제 가슴팍을 가리키도록 고정했다.


그는 몸에 상흔이 가느다랗게 새겨지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알테미온의 결연한 얼굴을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각오를 다진 그는 손끝을 살짝 밀었다. 날이 미세하게 살을 더 파고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흘러내린 피가


칼날을 타고 검 자루를 쥔 손에 닿았다.

도저히 못 해.

알테미온은 무능한 스스로를 저주하며 손을 쳐 내고 침대 위에 단검을 떨어뜨렸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심장 박동을 감추고 싶어 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키페르는 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회를 줘도 못 하는군. 너희 왕이 기뻐했을 텐데.”

“마음껏 비웃어요. 날 취하고 싶다면 뜻대로 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단검을 멀리 쳐 내 바닥에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알테미온은 침대가 흔들리며 건장한 몸이 옆에 눕는 것을 느꼈다.

단단한 손이 다가오더니 몸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목덜미에서 적의 숨소리가 느껴져 오싹했다.

루키페르는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려움으로 온몸을 긴장시켰던 알테미온은 그가 그저 잠들


생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째서 날 욕보이지 않죠?”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이 내려가 경고하듯 둔부를 세게 쥐었다. 깜짝 놀란 알테미온의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한 마디만 더 해 봐. 밤새 괴롭혀 줄 테니까.”

나른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에는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누그러들어 있었다. 그러나 감히 그 말을 어기고
시험했다가 괜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더해, 처음 보는 단단한 몸에 안겨 잠든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알테미온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잔뜩 긴장한 상태로 불편한 잠자리를 견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명백하게 잠든 상태에 빠졌다는 걸 알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척 잠을 잘 자는


모양이지. 자신이 얼마나 하찮게 보였으면 목숨을 위협당한 직후에도 잠에 빠져들 수가 있는 걸까.
이자는 자신과 다르게 담이 큰 모양이었다.

그는 제 몸을 감싼 팔을 풀어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부쩍 애를 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결에 그를 고쳐 안은 루키페르 탓에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숨에서 진한 포도주 향이 풍겼다. 아까 강제로 입술을 겹칠 때까지만 해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잠깐의 소리 없는 반항으로도 기운이 다 빠진 알테미온은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에 빠졌다.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에 대한 소문이 많았지. 엄청난 추남에다 흉측한 상처가 있다는 말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말까지.’

호기심이 일었다. 루키페르 깊게 잠들어 있었으니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가슴팍에
모으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망설임을 이기고 턱선에 잠시 닿았던 손가락이 불에 덴 듯 떨어졌다.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적장에 대한 두려움과 알지 못하는 자에 대한 두려움은 발칙한 호기심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키쉬르의 충직한 신하들조차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들었다.

진짜 괴물이면 어쩌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루키페르의 무자비한 성격상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밤이 아카이아를 건너는 동안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의 여신이 태양 수레를 불러낼 때쯤이


되어서야 간신히 깊은 잠에 빠졌다.

***

태양 빛이 온 아카이아의 땅에 은혜를 베풀 때였다. 키쉬르의 신하가 침실 밖에 당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 그들의 왕을 깨웠다.

“루키페르시여, 날이 밝았습니다.”

신하들은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결코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엄격한 규칙이었다. 그러한 실수를
한 자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즉결 처분으로 목이 잘렸으니까.

루키페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기분 좋은 숙면을 취한 것이 얼마 만일까. 그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잠들어 있는 남자의 평온한 낯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왜 어젯밤에 그를 안지 않았을까. 스스로도 이유를 말하기 어려웠다. 루키페르는 골치 아픈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 단잠으로 회복한 아침의 원기 때문에 심하게 마음이 동했다.

깨워서 울리고 싶었다.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 때까지 몰아붙이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그가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 대려 할 때였다.

“루키페르시여?”
신하가 재차 부르자 그는 뒤늦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 자리에서 기다려라.”

“예.”

하마터면 해야 할 일들을 잊을 뻔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실로 위험한 자였다. 가면을 들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내 얼굴을 가린 후 밖으로 나갔다.

“침실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도록. 무슨 소리가 나도 두어라.”

언제든 발톱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를 침실에 오래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어여뻐도


엄격하게 길들여야 했다.

“예? 예.”

신하는 어리둥절했으나 왕의 명령은 언제나 절대적이었기에 수긍했다.

“트리온은 어디 있지?”

“신전에 제를 올리러 갔다고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어젯밤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폴로의 빛이 중천에 이르렀을 때 알테미온은 잠에서 깨어났다. 약간의 빛을 느낄 수 있는 그는 날이


밝았음을 깨달았다. 밤새 자신을 속박하고 있었던 이는 떠나고 없었다. 몸을 일으키자 부드러운 이불이
흘러내렸다. 그는 인기척을 느껴 보려 귀를 기울였다.

“…….”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헛기침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없었다. 철저히 혼자였다.

‘알아서 살아남아. 가끔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갈 테니.’


트리온이 그렇게 못 박았으니 테베레에서 도와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침실의 주인은 밖으로 나갔고
남겨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 저쪽에 의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 그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낯선 공간을 더듬어 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나 아무리 조심해도 허점은 있었다. 낮은 탁자에 걸려
균형을 잃은 것이다.

“아!”

차가운 돌바닥에 넘어진 알테미온은 욱신거림을 참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잘 여며 두었던 옷자락이
풀어져서 다시 매만지는데 옷 속에 넣어 둔 것이 만져졌다.

“클리티에…….”

그는 그리운 풀 향기가 나는 손수건에 코를 묻었다. 며칠 동안 닳도록 만져 보았던 수건에 놓인 수는


무엇인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꽃. 자신의 이름이었다.

‘오빠가 눈을 뜬다면 왜 오빠 이름이 알테미온인지 알게 될 텐데.’

그렇게 말하는 동생이 마치 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달기만 한 옛 추억에 잠겨 있던 그는


괴물 같은 자에게 팔리듯 떠밀려 온 처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카이아의 지배자 유피테르시여, 태양의 주인 아폴로이시여, 저를 굽어살펴 주세요.’

그는 쓸쓸히 벽에 기댄 채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 쪽을 보며 빛을 느껴 보려 애썼다.

***
“오래 걸리는군.”

“의도된 것일 겁니다. 젠체하면서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키쉬르의 신하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트리온은 아침부터 신전에 들어가 제를 올린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뻔한 수작이었다.

“차라리 저자의 목을 벨까요?”

키쉬르인들은 저들의 왕을 닮아 용맹하며 진취적인 자들이었다. 애매한 수작에 놀아나느니 검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택했다.

“잊지 마십시오. 테베레는 왕이 셋이란 걸. 머리가 세 개인 괴물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의 머리를
잘라 봤자 다른 두 머리가 공격해 올 것이오.”

조용히 있던 카우노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키쉬르의 재상이자 왕의 오랜 친구였다. 그의 말에


신하들의 낯빛이 단번에 흐려졌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키페르는 한동안 트리온의 수작질에 놀아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방심해야 단숨에 목 세 개를 쓰러뜨릴 수 있을 테니까. 아니면 머리끼리 서로 싸우게 하거나.

“신전을 둘러보겠다.”

“함께 하겠습니다.”

카우노스는 루키페르의 뒤를 따랐다.

중앙 홀에 자리한 위풍당당한 유피테르의 모습을 딴 조각상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도 머리를 보기 힘들


만큼 높았다. 신성하리만큼 희게 빛나는 상아와 황금과 귀물들을 두른 신은 어깨 위의 독수리와 함께
벼락을 든 손을 지상으로 향한 채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카이아의 모든 인간들은 그를 우러러보았고 또 두려워했다. 루키페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궁금했다. 신들의 의지는 과연 어디까지 개입한단 말인가? 테베레와 키쉬르의 싸움도 눈여겨보고 있을까?
그는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신전의 넓은 회랑에는 어린아이들이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고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제에게 물었다.

“저들은 누구요?”

“유피테르 님의 아이들입니다.”

신전이 맡아 기르는 고아들이란 뜻이었다. 그들은 가면을 쓴 루키페르를 보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하던


일도 잊고 멀찍이 도망갔다. 자신에 대한 악명이 이미 퍼진 모양임을 알아차린 루키페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의아하게도 한 사내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무슨 행동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흙을 파고 잡초를 골라


뽑고 있었다. 애초에 다른 아이들과 친하지 않은지 홀로 멀찍이 떨어져서 일했다. 루키페르는 호기심이
일어 그에게 다가갔다. 솜씨는 서툴렀다.

“뿌리까지 뽑으려면 흙을 더 깊이 파야 한다. 그렇게 뽑으면 줄기는 사라져도 뿌리는 남게 되지.”

그는 아이의 옆에 앉아 시범을 보였다. 아이의 눈이 그의 능숙한 손놀림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이의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러운 검상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아코이테스이옵니다.”

“테베레에서 태어났나?”

“모릅니다. 고아는 뿌리 없는 잡초니까요.”

루키페르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 게 말재간이 제법이구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떠돌이 음유시인의 손에 자랐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 생활이 배짱도 키워 준 듯했다.


“내가 무섭지 않으냐? 네 또래들은 모두 겁먹은 듯한데.”

아코이테스의 고개가 숨어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동글동글한 머리들을 향해 돌아가자 그들은 이크,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고아들은 흉측한 상처를 단 아코이테스를 꺼려 했으므로 그는 외톨이었다. 그는 가면
너머 키쉬르 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면은 무서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리기 위한 것 아닌가요?”

눈에 띄는 상처를 가진 아이의 말이라 더욱 의미심장하였다. 이 맹랑한 말에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카우노스가 왕의 눈치를 보며 끼어들지 말지를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루키페르는 화내지도 웃지도 않았다. 가면 뒤에서 지극히 무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말없이 맹랑한


아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회랑을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뒤에서 카우노스가 그를 불렀다.

“루키페르여.”

“어린아이가 한 말이야. 꽤 정확하지. 안 그래?”

“왕께서 어떤 운명을 타고난 자인지 알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똑똑한 친우의 말에 루키페르는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멈췄다.

“카우노스, 말은 바로 해야지. 난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니라 운명이 없는 인간이나 다름없어.”

“그건 지나치게 비관적인 말씀입니다. 왕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어찌나 많은데요.”

어느새 두 사람은 다시 유피테르의 조각상이 자리한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를 우러러보면서 그는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유피테르 신께서 나를 굽어보실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운명의 여신은 항상 날 주시하고


계셔. 언제라도 내가 미끄러져서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길 바라시겠지.”

***
태양이 저물어 감에 따라 하늘빛이 붉게 물들었다. 트리온은 핑계를 대며 저녁 식사 자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키쉬르의 신하들의 안색이 나빠졌으나 루키페르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포로가 된 길리포스의 목숨만 구한다면 이깟 테베레는 언제든 쓸어 낼 수


있었으니까. 아폴로의 은총을 받는 나라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침실이 가까워지자 방 안에 두고 온 남자가 생각났다. 그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문을 열자 싱겁게도 알테미온은 잠들어 있었다. 웬 수건에 코를 박은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걸까.

“잘만 자는군.”

차가운 목소리에 알테미온은 화들짝 깨어났다. 허둥거리는데 갑자기 손에 쥐어져 있던 손수건이 휙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루키페르가 호기심에 빼앗아 든 것이다.

“이건 뭐지?”

“제 것입니다. 돌려주십시오!”

지체하지 않고 화를 낸다. 살펴보니 무명천에 꽃을 수놓은 것에 불과했다. 특별한 구석은 전혀 없는


수건이었다.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부탁하는 자세가 글러 먹었는데.”

“키쉬르의 왕은 시정잡배만도 못합니까?”

붉어진 얼굴을 찡그리며 가차 없는 말을 쏟아 냈다. 부끄러움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근본 없이 뜨내기들이 세운 나라라고들 하지.”


팔딱거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루키페르는 희고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검은커녕 책은 들 수 있을까
싶었다. 움찔거리며 벗어나려는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자 반항이 멈췄다.

“한번 살펴본 것뿐이야. 독이라도 숨겨 놓았다가 자는 내 목숨이라도 노릴까 봐 말이지.”

“…….”

알테미온은 수건을 품속에 넣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눈썹을 추켜세운 루키페르는 방 안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탁자가 흐트러진 것 외에 누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모양이지? 돌봐 주는 이가 없다니.”

철저하게 혼자 남겨져 있었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때마침 알테미온의 배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는 민망함을 참으려 입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그것은 긍정의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루키페르는 침대에 누워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뭐라도 먹어야 기운 내 날 유혹하지 않겠어?”

알테미온의 입술이 야릇하게 비틀렸다.

“당신은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난 누구도 유혹한 적 없습니다. 그들이 멋대로 내게 발정할 뿐.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으니 당신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얄미울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태도였다. 아양을 떨어 본 적도, 사랑을 구걸해 본 적도 없다. 원치 않는


욕망은 늘 넘칠 만큼 그에게 퍼부어졌다. 저도 모르게 매끄러운 턱을 향해 손을 뻗던 루키페르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얼굴로 여기에 버려진 건 너야. 내가 널 취하든, 죽이든, 굶어 죽게


방치하든 아무도 모르지 않겠어?”

루키페르는 텅 비었음에도 지극히 아름다운 푸른 눈을 응시했다. 확실히 알테미온의 뻣뻣한 태도는 누구의
앞에서도 자의로 구부러진 적 없음을 증명했다. 볼품없는 천 쪼가리는 그토록 귀히 여기면서 어쩌면
이토록 무심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저절로 사내의 오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좋아. 내 비위를 맞춰 봐. 난 가시가 있는 아름다움은 싫거든. 마음이 동하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어. 음식이든, 하인이든, 보석이든, 아니면 내 약점이든. 충분한 대가를 치른다면 네가 바라는
걸 하나씩 쥐여 주지. 어때?”

정체를 간파해 놓고서도 첩자질을 도와주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자의로 감겨 오는 걸 본다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으니까.

“진심입니까?”

꼼짝없이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한 임무에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스틱스 강이라도 걸고 맹세할까?”

“감히 신들의 맹세를 흉내 낼 생각은 마세요. 그보다, 뭘 원하죠?”

“비위를 어떻게 맞출지도 설명해야 한다니.”

한숨을 쉰 그는 알테미온의 어깨를 누르고 몸 위로 올라탔다. 알테미온은 하체가 겹치자 생생하게


느껴지는 촉감에 볼 안을 깨물었다. 허벅지에 닿는 것은 모조리 단단했다.

루키페르는 불쾌하게 일그러진 그 얼굴을 보며 명령했다.

“일단 웃어 봐.”

***

[키쉬르를 구해 낸 것은 루키페르, 길리포스, 카우노스 3 인이었다. 그들은 여행 중 분노한 바다 괴물에


의해 왕족들이 모두 희생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바다 괴물은 이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해안가에 있는
인간들의 목숨을 탐했다.]
기대와 달리 알테미온의 얼굴은 훨씬 더 일그러졌다. 이상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글러 먹었군.”

“지금 웃겠습니다.”

결의를 다진 그는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당겼다.

“자, 보셨지요.”

“그걸 웃음이라고 볼 사람이 세상천지에 있을 것 같나?”

“난 원래 이렇게 웃습니다.”

놀리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진지했다.

“너 설마 웃을 줄 모르는 건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죠.”

“진심으로 크게 웃어 본 적이 없나 보군.”

루키페르는 아래에 누운 미인의 눈꼬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호소하는 듯한 촉촉한 눈가는 기쁨으로 휘어져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알테미온은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볼 수 없었음에도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히 불쌍히


여기고 있겠지. 앞 못 보는 처지에 웃을 만한 일도 없는 인생.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비소를 지었다.
동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비켜 주시지요. 더우니까.”

단단한 몸과 겹쳐져 있어서 높은 체온이 닿은 살갗으로 여실히 전해졌다. 하나 얼굴에 열이 오르게 하는


원인은 체온보다 특정 신체 부위의 접촉 때문이었다.
“순진한 척하는구나. 이게 네 수법 중 하나인가?”

“순진한 척이 아니라 그저 싫은 겁니다.”

“네가 얼마나 많은 권력자들의 침실에서 굴렀을까. 그때마다 이렇게 뻣뻣하게 굴었나? 그들은 네가
원하는 것을 자진해서 가져다 바치고?”

속삭임을 들은 알테미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하는 짓들이 무슨 의도인지 이제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이자는 자신을 능욕하고 싶은 것이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장난감이 재미가 없으니 자진하여
발아래 엎드릴 때까지 괴롭힐 작정이겠지. 자존심만 남아 있는 불쌍한 인생에게 주제 파악이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 걸까.

트리온만큼이나 화를 돋우는 작자였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빈정거렸다.

“그래요. 더럽게 구른 몸이라도 안고 싶은 모양이죠? 당신 또한 그런 권력자들 중 하나니까.”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굴고, 뜻에 맞춰 살랑거리면 기뻐하며 사냥개로 삼겠지.


곧게 뻗은 다리를 들어 루키페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 팔로 목을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 너른
가슴팍을 진득하게 애무했다. 욕지기를 참은 유혹이었다. 결국 원하는 건 이런 것이겠지.

아름다운 얼굴의 옆선을 느리게 쓸던 루키페르의 손이 멈췄다. 반면 그의 가슴을 쓸던 알테미온의 손은


정확히 심장 위에서 멈췄다. 숨길 수 없는 물증이 그곳에 있었다. 빨라지는 박동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확실히 마음이 동하셨군요, 키쉬르의 왕이여.”

“너…….”

“왕께서는 어떤 청부터 들어주시겠습니까?”

“오만하구나.”

속살거림은 따뜻한 손과 달리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상처가 남아 있는 입술을 다시 잡아 뜯을까, 아니면


옷을 벗겨 달큰한 체향에 취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루키페르는 냉정한 얼굴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제 말에 질질 끌려오는 꼴을 꼭 보고 싶었다. 당장의


육욕을 참아 내는 것은 무심한 꽃의 향기에 감겨드는 멍청이가 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팽팽한 침묵을 깬 것은 문밖에서 들린 외침이었다.

“루키페르여. 카우노스이옵니다.”

루키페르는 습관대로 가면을 매만진 후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곧 나가겠다.”

옷자락을 정리한 그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침대 위에 남겨진 남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카우노스는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다.

“침실에 다른 객이 있으시온지요?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저 창부다. 무슨 일이지?”

“예. 길리포스 장군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어디라고 하지?”

테베레 놈들이 포로를 어디에 억류했을까를 찾기 위해 보낸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들 중 일부가 마침내


포로의 소재를 파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테베레의 주성에서 얼마간 떨어진 작은 성의 민가에 있는 듯하다고 했습니다.”

“있는 듯하다?”

“예. 그게 포로들의 상황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 작은 성을 지키는 문지기 때문입니다.”

“문지기?”

“성을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이온데 입구를 지키는 괴물이 있습니다. 염탐꾼 중 하나가 통과를
시도했으나 무참히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

루키페르는 인상을 쓰며 가면을 짚었던 손을 세게 쥐었다.

“어떤 괴물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결국 괴물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겁니다. 아마……
테베레의 왕이라면 알고 있겠지요.”

“믿는 구석이 있어 이렇게 나오는 거였군. 알았다. 염탐을 계속하도록 지시해라.”

카우노스는 망설이다 질문을 던졌다.

“예. 왕께서는…… 장군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카우노스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길리포스를 아끼는 마음은


루키페르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카우노스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때 침실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카우노스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반면 무슨


일일지 예상한 루키페르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옆의 벽에 붙어 있던 장식장이 흐트러져
있고 바닥에는 화병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바닥에는 알테미온이 어두운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대화를 자세히 엿들으려다 실수한 게 분명했다.

카우노스는 당황한 눈으로 왕과 창부를 번갈아 보았다.

“괜찮습니까?”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으나 남자는 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바닥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나운 표정과, 헝클어진 옷과 머리카락에도 불구하고 몹시 매혹적이었다. 카우노스는
자신의 친우이자 왕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고 긴 금발의 조각 같은 미인은 어딜 보아도 그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그는 머쓱하게 손을 치우며 어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키쉬르의 재상인 카우노스입니다.”

“아까 들었습니다. 귀는 먹지 않았으니까요.”

북풍처럼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듯 바닥을 짚으려 했다. 팔짱을 낀
루키페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자기 조각에 손과 발에 구멍 나고 싶다면 계속하도록.”


루키페르의 말과 달리, 남자가 짚으려 한 바닥 쪽에는 날카로운 조각이 흩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카우노스는 그제야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왕의 얕은 거짓말에 속은 남자의 창백한 얼굴에는 굴욕감이 서려 있었다. 자존심에
피멍이 든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제가 돕겠습니다.”

카우노스가 주저하다 나서자 루키페르는 바닥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아니. 넌 저것들을 치우도록.”

알테미온은 몸을 말고 누워, 얼굴을 파묻어 보이지 않게 했다. 깨어져 나간 병 조각들을 정리한


카우노스는 방 안에 흐르는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

“돌봐 주는 이가 없단 말입니까?”

자초지종을 캐물은 카우노스는 경악했다.

“테베레인들이 보낸 것이니 그들이 돌봐야지, 안 그래?”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루키페르여, 그건 고문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홀로


두고 식사까지 챙기지 않는다니요.”

“그렇다면 내 방을 벗어나면 될 일이지. 내게 바랄 일은 아니지 않나?”

“무슨 사연이 있겠지요. 하인 하나를 붙이면 됩니다.”

“내 사람이라면 붙여 줘도 거부할 것이다.”

카우노스는 심드렁한 대답 아래에 깔린 의외로 복잡한 심경을 엿보았다. 강인함으로는 아카이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영웅의 재목으로 태어났으나 그 속마음은 결코 보여 주지 않는 얼굴만큼이나 묘연했다.
심기를 단단히 뒤틀리게 한 원인은 알 수 없어도 잔인한 처사였다. 그는 지나가는 신전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들 중 하나라면 어떻습니까? 신전에서도 협력할 겁니다.”

루키페르의 눈에도 아침 햇살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아이들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얼굴에


상처가 있는 소년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가까이 지나갈 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왕은
소년을 불렀다.

“아코이테스야.”

“키쉬르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무거운 물 항아리를 내려놓은 아코이테스가 인사올렸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영양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도 타고난 근골이 좋아 보였다. 훌륭한 전사가 될 소질이였다. 이는
루키페르가 그를 보는 순간부터 눈여겨보았던 사실이었다.

“매일 일을 하는구나.”

“예. 신전은 일이 많아요. 대신 야생 동물에 위협받지 않는 식사와 잠자리를 줍니다.”

몹시 불퉁한 태도의 소년에게 카우노스 또한 말을 붙였다. 왕이 관심을 보이니 이 아이라면 사적인 공간에
드나들 기회를 줄 가능성이 높았다.

“너 말이야,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나?”

“예?”

“식사와 잠자리만 해결되면 되는 것 아니냐. 언제까지 고아원에서 힘들게 지낼 수 없지 않겠어?”

“원하는 것은 있으나 뜻대로 되나요. 그런 생각 하는 고아가 한둘이 아닙니다.”

카우노스는 왕에게 제안했다.

“신전의 아이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끝내 루키페르를 설득했다. 아코이테스에게는 시중을 들고 나면 이곳을 떠나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약조했다. 재상의 꾐에 넘어간 아코이테스는 루키페르가 머무는 침실로 함께 갔다.

알테미온은 기운이 빠져 누워 있는 와중에도 발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루키페르였고 다른 쪽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걸음걸이가 어린아이 같았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3 일째 물 한 모금 달라고 청하지 않고 버텼다. 현기증이 일어서 생각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당신을 도울 자를 데려왔소.”

아코이테스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긴 금발의 미인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는


수줍어하며 루키페르의 뒤로 숨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의 마음에는 부지불식간에 애정과
호기심이 솟아났다.

“아, 아코이테스입니다.”

심한 어지러움을 참은 알테미온은 루키페르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흘겼다. 아코이테스는 그


서늘한 눈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주 귀한 분인 걸까.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악으로 버티는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무슨 생각이죠?”

“신전에서 기르던 아이요.”

“날 감시할 자가 아니랍니까?”

쌀쌀맞은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알테미온의 얇은 팔에서 남아 있던 힘이


빠져나가며 그는 바닥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아코이테스는 남자가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세 사람은 끝내 바다 괴물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키쉬르인들은 영웅들을 후하게 대접하면서 그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청했다.]

루키페르는 그의 머리를 안아 올리고 안색을 살피며 아코이테스에게 외쳤다.

“속히 의원을 불러와라.”

“예.”

달려 나가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키쉬르의 왕이 남자를 품으로 안아 올리는 모습이었다. 환자를
살피는 것에 불과한데 손길이 진했다.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코끝이 간질거렸다. 아코이테스는 검지로
코끝을 문지르며 의원을 찾아 데려왔다.

루키페르는 팔짱을 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는데 자신도 화가 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리석을 만큼 고집이 센 자였다. 버텨 봤자 꺾이는 것은 제 몸뿐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놀라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는 꽤 성공한 셈이었다. 루키페르는 자신의 맥박과 알테미온의 맥을


동시에 짚었다.

“의원을 데려왔어요.”

턱선 외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의원은


엉거주춤 인사를 올렸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다소 겁에 질린 채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눈을 뒤집어
보고 손톱 끝을 눌러 보고 맥을 짚어 보는 등 자세히 살핀 의원이 입을 열었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물을 마시지 못해 그런 듯합니다. 수건에 물을 적셔 입에 대어


주고 깨어나면 천천히 물을 마시게 해야 합니다.”

이를 들은 아코이테스는 황당했다. 어째서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지냈을까? 그는 의문을 품고 루키페르를


돌아보았으나 의원을 내보낸 후 남자가 깨어날 때까지 보살피라고 명령할 뿐이었다.

“왕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테베레의 왕을 만나러. 그동안 자리를 지켜라.”

아픈 이를 두고 떠나 버리는 냉혹함이란. 아코이테스는 못마땅하여 뭐라 따지려 했으나 왕은 이미 나가


버린 후였다. 그는 별수 없이 방 안을 정돈하고 환자의 옆자리를 지키며 하품했다.

루키페르는 정말 트리온을 만나러 갔다.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에 협상을 청하여 놓고 실제로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홀로 향했다. 보필할 호위 하나 없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화려하게 꾸며진 방 안에서 여인들이 건네는 올리브를 받아먹고 있던 트리온은 꽤나 놀랐다.

“이런 식으로 방문할 줄은 몰랐소.”

루키페르와 달리 그의 옆에는 검을 든 무사들이 함께였던 것이다. 하나 키쉬르의 왕은 두려워하는


기색은커녕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트리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훌륭한 기백에 트리온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쪽에서는 언제든 그에게 칼을 겨눌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루키페르는 다리를 꼰 채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침실 장식이 인상적이더군요.”

아하. 트리온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잡혀간 포로들조차 잊은 모양이지.

“테베레인들은 취향을 아는 자들이지요. 그게 우리의 자부심이라오.”

꾀가 있는 능구렁이 같은 자.

“취향이라. 당신 같은 자가 어째서 왕관을 나눠 쓰고 있는지 의문이군요.”

루키페르는 정중한 말투로 핵심을 찔렀다. 치켜세우는 것처럼 들렸으나 기실 빈정거리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테베레의 국력이 약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니겠소?”


“무례하오!”

키쉬르의 야만인이 들어올 때부터 줄곧 노려보던 무사 하나가 소리치며 검을 빼어 들려 하자 트리온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루키페르를 최대한 이용할 작정이었다.

“테베레 땅에 침입한 자의 입에서 훈수를 듣게 될 줄은 몰랐소. 그런 이유로 내 호위 또한 분노하게 되는


것이지.”

“내가 이유 없이 테베레를 점령하려 든다 생각하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에게도 실망이군.”

트리온의 여유 가득하던 미소가 잠시 굳었다.

“무슨 의미요?”

“난 당신과 사연을 나누러 온 게 아니라 직접 경고하러 온 거요. 내일부터는 협상 자리에서 보고 싶군.


키쉬르인들은 인내가 부족해서 말이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등 뒤로 참지 못한 무사가 표창을 날렸다. 놀랍게도 루키페르는 이를 피하지


않고 손끝으로 잡았다.

보고도 눈을 믿지 못한 테베레인들이 입을 딱 벌렸다. 전장에서 날뛰는 모습이 무신과도 같다더니.


허명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날파리라도 잡은 듯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

야비하게도 등을 노렸던 무사는 가면 뒤의 눈이 조용히 자신에게로 향하자 침을 삼키며 숨을 곳을 찾으며


눈을 굴렸다. 루키페르의 넓은 가슴이 한숨과 함께 들썩였다.

“나를 보아라.”

나직한 명령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무사의 눈이 루키페르의 눈동자로 향했다. 푸른색.
무사는 키쉬르의 왕이 가진 눈동자 색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어쩌면 금사와도 같은 속눈썹까지도.
우습게도 그 순간 무척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으아악!”
그것이 오른쪽 눈이 본 마지막 세상이었다. 어느새 루키페르의 손을 빠져나간 표창은 주인의 눈에 박혀
있었다.

“아악! 내 눈! 내, 내 눈이!”

피가 흐르는 눈을 붙잡고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는 무사와 그를 감싼 사람들 틈에서 트리온은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 적국의 왕을 노려보았다.

“저런. 잘 받았어야지.”

루키페르는 바람처럼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잡고 칼을 겨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굳어 있던 트리온은 찻잔을 닫힌 방문에 내던졌다. 감히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수하의 눈을 없애 버리다니.


이에 더해 저도 모르게 저자의 신출귀몰한 실력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에 마음이 크게 상했다.

***

아코이테스는 잠들어 있는 알테미온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히아신스구나.”

힘이 빠졌음에도 고운 목소리. 보라색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던 아코이테스는 깜짝 놀랐다.

“깨어나셨습니까?”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거렸다. 소년은 꽃다발을 얼른 내려놓고 준비해 두었던 물 주전자와
잔을 들었다.
“알테미온 님, 물을 드셔야 기운을 차릴 수 있다고 했어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알테미온은 손에 든 물 잔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몹시 목이 탈 것임에도


생명수처럼 느껴질 물을 어찌하여 마시지 않는 것일까.

“어서요.”

그는 느릿느릿 마지 못하여 물 잔에 입을 대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경계심이 무척 강한 새끼 동물


같은 태도였다.

“콩수프와 빵, 그리고 올리브도 있습니다. 조금씩 드셔야 해요.”

“루키페르가 그러라고 시켰나?”

“의원님이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원님을 부르라 하신 건 루키페르 님입니다.”

알테미온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앞에서 쓰러지다니. 철저히 진 기분이었다. 루키페르는 무패의


싸움꾼이라 들었다. 그러니 자기 따위에게 질 리는 만무했다.

빵이 부스러기가 될 때까지 뜯고 또 뜯은 후에야 약간이나마 먹었고 묽은 수프로 입술을 적셨다. 그


침울한 얼굴과 몸짓에 관련 없는 아코이테스마저 기운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소년이 질문으로 어색한 정적을 깨뜨렸다.

“저, 제가 히아신스를 가지고 온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향이 진하니까. 그걸로 알 수 있어.”

그는 빈 꽃병에 푸른 꽃을 꽂아 알테미온이 향을 맡을 수 있도록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부러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밖에 꽃이 만개했거든요. 아카시아와 극락조도 피었고 달콤한 향이 가득하여 산책하기 좋은 날이에요.”

“그래.”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안내할 테니 잠시 걷는 건 어떠세요? 기운이 없으신가요.”

“함부로 나갈 수 없어.”

“루키페르 님이 안 된다 하시나요?”

“아니. 그자는 그럴 수 없지.”

알테미온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꽃병을 찾아낸 손끝을 따라 강하디강한 꽃향기에 코를 가져다 댔다.

“너 말이야, 고아라고 했지?”

“예. 부모를 모릅니다.”

“그럼 누가 키웠지?”

“자칭 음유시인 할아버지가 키웠습니다. 시를 읊는 것보다 주정 부리는 것에 가까웠지만요.”

알테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굉장히 우울해 보였다. 온 아카이아를 유랑해


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아코이테스는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그 말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말해도 난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는걸.”

“태어날 때부터 안 보이셨나요?”

“몰라. 아마 그럴 거야. 뭔가를 본 기억이 없으니까.”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아코이테스는 어색한 기분에 손바닥에 배어든 꽃내음을 맡았다.

“아, 이 꽃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나요. 히아신스는 알테미온 님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고 하는데


아폴로께서 귀애하셨다고 해요.”

그는 유랑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말없이 귀담아들었다.


그런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알테미온 님의 아름다움에도 신의 은총이 깃들어 있을 거예요.”

알테미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코이테스는 자신이 한 말에 놀라고 말았다. 알테미온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꽤나 거친 소년으로 서투르게 남의 기분을 맞추는 데에는 그동안 전혀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새 옷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수와 장식은 중요하지 않으니 아마로 짠 것으로 말이야. 이 옷은


답답하구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코이테스는 긴말 없이 침실을 나갔다. 머지않아 누군가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침입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온 남자가 태양 빛을 가렸다.

“트리온 님께서 찾으신다.”

***

[태양의 신 아폴로는 신들의 제왕 유피테르와 마찬가지로 테베레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후손들이 통치하고 있거니와 아폴로를 섬기는 나라가 유린당하는 것을 걱정했던 까닭이었다.]

“경솔하셨습니다.”

루키페르가 트리온에게 한 행동을 알게 된 카우노스는 왕을 질타했다.

“경고할 필요가 있었어. 그들이 누구를 상대하는지는 알아야지.”

재상이 굳이 제 방으로 초대했다는 것부터 질타를 예상했던 루키페르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재상으로서
충언한다기보다는 형제와도 같은 오랜 친구로서 하는 잔소리였기 때문이다.
“누가 모릅니까! 그들이 길리포스에게 해악을 끼칠까 걱정되는 것이죠.”

“그게 테베레의 유일한 패인데 이 정도로 그리 행동할까. 멀리 숨겨 둔 길리포스보다는 나를 공격하려


들겠지. 밤에 자객이라도 보내려나.”

무서운 일을 쉽게 입에 담는 루키페르의 모습은 카우노스로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목숨에 관한 소재로 더


떠들고 싶은 마음이 없던 그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말을 돌렸다.

“침실에 그자는 괜찮아졌습니까.”

“돌보는 이가 알아서 하겠지.”

“엄청난 미인이던데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나긋한 태도로 전하의 심신을 녹일 자도 아닌 듯한데 굳이
머물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사심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친구의 말에 루키페르는 폭소를 터뜨렸다. 손뼉까지 마주쳤으나 전혀 기분 좋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심? 카우노스여, 넌 나를 그렇게 봐 오고도 모르는 것이냐?”

“루키페르여.”

“그자는 트리온이 보낸 선물에 불과해.”

“예? 그럼 함정이지 않습니까.”

의외의 정체에 카우노스는 깜짝 놀랐다.

“내보내 봤자 또 다른 함정을 팔 텐데 다를 게 있겠어?”

“하지만.”

루키페르는 심각하게 주름을 잡고 있는 재상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 알지 않나. 그자가 무슨 짓을 해도 난 죽지 않아.”


결코 패배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확신. 카우노스는 루키페르가 어째서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정확한
이유를 알았다.

‘그는 운명의 정복자다. 결코 적에게 패하지 않고 어떠한 죽음의 꾀에도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성년의 밤이 지난 후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된다. 세상의 눈에 얼굴을 들킨다면 운명의 고삐에
사로잡히게 되리라.’

루키페르는 죽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는 목숨을 건 전투를 거치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명의 정복자인 그에게 모든 인간의 정해진 운명, 죽음의 그림자조차 접근하지 못했다.

신계에서 그에게 내린 구속의 말은 이 신탁이 고작이었다. 이 신탁의 내용을 아는 자는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과 붙잡힌 길리포스까지 3 인이 전부였다.

루키페르는 친구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안심해. 난 운명을 내어 주는 바보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어느 어리석은 인간이 스스로 버릴까.”

카우노스는 흰 가면 틈으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왕의 푸른 눈 한 쌍을 응시했다. 가면을 쓰기 전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간의 말만큼 차갑고 냉혹한 남자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오래 고립되어 있었을 뿐이다.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두 명의 친우 외에 내밀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는 전무할 정도였다.

세상을 떠돌던 세 사람에게 세상은 무자비했고 그들은 서로에게만 의지했다. 멸망해 가던 작은 나라


키쉬르에 자리 잡기 전까지 루키페르는 여러 차례 두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카우노스는 루키페르가 아카이아 땅에 살았던 어느 영웅에 비견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전사라


여겼다. 어쩌면 그 신탁조차 변덕스러운 신들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하게 되었다.

“그를 내쫓으십시오. 전하를 방심하게 만들 겁니다.”

창공의 신인 유피테르의 눈에 띄었다면 신계로 불려 갔을 법한 미인이 불온한 마음을 품고 왕의 옆에 붙어


있다니.
“재미있지 않나? 하필이면 그자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게 마음에 드십니까?”

카우노스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루키페르는 그를 등지고 창밖을 응시했다. 어둠 속을 요요히 밝히는


초승달은 절묘하게도 높이 자란 물푸레나무 끝에 걸려 있었다.

“그래. 그자가 무슨 수작을 부려도 날 보진 못하겠지.”

***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의문의 남자에게 알테미온은 대답 없이 일어나 따랐다. 침입자의 팔을 잡고 걷던


그는 남자가 멈추자 따라 멈췄다. 트리온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여위었군. 어찌 된 일이지?”

알테미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트리온이 추궁할 것이라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자와 밤낮없이 뒹굴었기 때문이죠. 식사조차 잊더군요.”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건가? 네게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속삭이더냐?”

물조차 주지 않으며 시들어 꺾일 때까지 기다리던 남자를 생각하며 그는 자신만만한 거짓 미소를 지었다.

“그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지? 모두 털어놓아 보아라.”

“루키페르는 포로를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장군과 재상을 아끼는 것이 분명합니다. 포로들의 위치를
알아낸 모양인지 괴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트리온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거기까지 알아냈다니. 하나 그들은 결코 그 괴물을 지나가는 방법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약점이라 할 만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빈틈이 없는 자니까요. 차라리 밤중에 엄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야. 넌 좀 더 열심히 할 필요가 있겠구나. 몸을 내주기만 하는


멍청이라선 곤란하지.”

알테미온은 힘겹게 분노를 감췄다. 할 수만 있다면 이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신께 얼마나 빌고 또


빌었나. 트리온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그러나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이는 신은 아무도 없었다.

트리온은 애써도 감정의 흔적이 드러나는 알테미온의 손에 작은 약병을 쥐여 주었다.

“그자의 목에 흘려 넣어라. 아주 효과가 좋거든.”

***

“제가 돌아왔습니다.”

아코이테스는 새 옷 여러 벌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알테미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침대 끝에


기대앉은 그의 주변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흘렀다.

날아들어 온 벌이 꽃 주변을 오가는 것을 보고 아이는 손을 저어 쫓아냈다. 그런데 창문을 열어 놓고


나갔었나? 의아해하며 벌이 쫓겨 나간 창문을 닫았다.

“오가며 들었는데 내일부터 협상이 시작된다고 해요.”

“그래?”

“예. 그게 루키페르 님이 단신으로 트리온 왕의 침실로 찾아갔는데.”

아코이테스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말을 멈췄으나 알테미온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았을
뿐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트리온 왕 앞에서 그의 부하의 눈에 표창을 꽂아 넣었대요.”

“그랬구나.”

트리온이 얼마나 분노했을지 짐작한 그는 보일 듯 말 듯 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하루라도 빨리 적을 죽이고 싶어 초조한 마음에 독약을 쥐여 줬을 거라 생각하니 즐겁기까지 했다. 옷
소매에 넣어 둔 약병을 생각했다. 오래 소지하고 있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망설이지 말고 실행하는
것이 낫겠지.

자의든 타의든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두려웠으나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해야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잔혹한 트리온의 명을 받았다 한들, 살해 대상 또한 잔혹한 사내였다. 그런 자가 죽는다
하여 연민할 필요는 없었다.

“새 옷을 몇 벌 가져왔는데 만져 보세요. 갈아입는 것을 도와드릴게요.”

손끝으로 옷감을 느껴 본 알테미온은 스스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고 하며 은밀히 약병을 새 옷소매로


옮겨 넣었다.

“홀로 계시면 심심하지 않으신가요.”

“그다지. 소리에 예민해서 번잡한 것은 좋아하지 않아. 자주 나가지도 않고.”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표정과 눈빛을 알 수 없는
자들의 앞에 서 있는 것만큼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햇볕에 타지 않으셨군요. 피부가 상한 곳 하나 없으니 귀한 분이라 짐작했지만.”

알테미온은 아코이테스가 중얼거린 ‘귀한 분’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타고난 기구한 운명에 대해 설명하여 관련 없는 소년의 환상과 오해를 깰 생각은 없었다.

“질 좋은 포도주를 가져다줘.”
오늘 밤을 위해 술이 필요했다. 이게 다 동생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 되뇌었다.

***

루키페르는 회랑을 걸으며 평화로운 리기아가 어둠에 잠긴 풍경을 눈에 새겼다.

지긋지긋한 신들의 세계. 그는 아카이아 땅을 혐오했다. 신들의 의지에 의해 장난감처럼 움직이는


아카이아인들은 비굴할 만큼 무력했다. 그러니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처지에 화려한 신전을 세워 놓고
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것들만 가져다 바치는 것이겠지.

가볍게 조소하며 침실 문을 연 그는 의외의 광경을 보았다. 긴 의자에 모로 누운 알테미온이 늘씬한 팔을


뻗어 포도주가 든 넓은 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잔에 입술을 대려던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들었다.

“늦으셨군요.”

“뭐 하는 거지?”

“잠이 쉬이 오지 않아 술을 가져다 달라 했습니다.”

이미 꽤 마신 모양인지 등잔불에 비친 흰 뺨은 홍조를 띠었다. 취한 까닭일까, 말투도 나긋나긋하여


서풍의 신이 몰고 온 봄기운이 번진 듯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른하게 잔을 내려놓는 동작에는
권태로움이 묻어 있었다. 몹시 태평한 모습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기운을 차리더니 엉뚱한 짓을 하는군.”

“비위를 맞추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네 방식이다?”

알테미온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젖혔다. 머리카락이 어깨 뒤로 흘러내리자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이리 와 앉으시지요.”
긴 의자 위로 쭉 뻗은 다리와 반쯤 누워 옷깃 사이가 드러나는 상체를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루키페르는 같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테미온은 그의 옷자락이 무릎에 닿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루키페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라도 고지가 가까웠다.


알테미온은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낮에 화를 내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술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좋은 포도주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니까요.”

“웃기는 소리. 넥타르를 독차지한 신들이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지.”

“신전이 지척인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신들이 쉬이 인간의 청을 들어준다면 너는 어째서 눈이 보이지 않는 거지? 신께 네 운명에 대해 탄원해


본 적 없나?”

성미를 긁으려는 것처럼 냉정하게 이죽거린 루키페르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빛이 돌지 않는 그


눈은 자신을 보는 눈도 똑같이 푸른빛을 띤다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테다.

“물론 있습니다.”

입술을 깨물었던 알테미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들이 들어주었나?”

경계심이 강한 상대의 긴장을 푸는 수단으로 옛이야기만 한 것도 없지. 알테미온은 낮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잔을 들어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루키페르에게 건넸다. 검을 오래 쥔 무장의 손이 술잔을
받아들었다.

넥타르는커녕 독배를 건네는 차분한 손과 달리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가 알아차릴까? 평소처럼


냉혹하고 이죽거리는 키쉬르의 왕은 눈치가 빨라도 독심술사는 아니었다. 이 순간만 완벽하게 속이면 된다.
그러면 모두 끝날 테니까.

알테미온 또한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의 잔이 부딪히는 순간 그는 한탄하듯 낮게 속삭였다.


“신조차 내 눈을 보이게 할 순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긴장으로 바짝 마른 목을 술로 적셨다. 그는 루키페르가 술을 마시는 소리를 들었다. 빈 잔이


탁자에 부딪치는 소리도.

끝났다. 그렇게 직감한 알테미온은 자신이 저질러 버리고만 일에 술잔을 아플 만큼 꽉 쥐었다. 트리온이
마시면 즉사를 장담했으니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입술에서 피가 날 만큼 세게 깨문 채 몸을 움츠렸다. 성공했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왜 웃지 않지? 기뻐해야 하지 않나.”

냉혹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알테미온은 귀를 의심했다. 잦은 기침 외에는 지나치게 멀쩡한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칭찬해 주고 싶은데. 검을 겨눌 때보다 훨씬 태도가 좋아졌거든. 정말 속을 뻔했어.”

루키페르는 거슬리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알테미온의 뒷목을 잡아챘다. 당황한 손에서
꽉 쥐고 있던 술잔이 바닥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뻣뻣하게 굴던 네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의심스러웠긴 했지. 꽤 앙큼했어.”

악력에 의해 머리가 젖혀지자 알테미온은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다 들켰으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놔! 이거 놓아요!”

손이 옷 속을 파고들자 질겁한 그는 몸부림치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옷 속에


숨겨져 있던 약병을 찾자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발로 툭툭 차며 빈정거렸다.
“약이 바짝 오른 트리온이 이걸 건네줬나 보지.”

“그래요. 죽이고 싶다면 지금 죽여요.”

“아니. 그 정도로 끝낼 수 없지.”

알테미온은 보지 못했으나 루키페르는 단순히 기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독배를 비웠고, 피를 토했다.


입가를 엉망으로 물들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는 알테미온의 옷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알테미온의 얼굴 위로 툭 떨어뜨렸다.

진한 혈향을 맡자 알테미온은 그가 독을 완전히 피한 것이 아니라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인간이라면 살아 있을 수 없었다.

“어, 어떻게?”

“궁금하다면 어떤 맛이었는지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는데.”

“설마 시, 신이십니까?”

이따금 아카이아 땅에 인간이나 동물을 가장하여 내려온 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린 알테미온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루키페르는 겁에 질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박또박 대드는
앙칼진 자가 신의 위용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우스웠다.

“알테미온아, 넌 어째서 간악한 자 트리온을 위해 일하지?”

그는 은근한 말로 진실을 추궁했다. 단단히 착각에 빠진 알테미온은 두려움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제 동생 클리티에 때문입니다.”

“말해 보아라.”

“숲에서 나고 자랐던 저와 동생은 디아나 여신의 미움을 사 일찍 부모를 여의고 요정들의 돌봄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숲에서 쫓겨나 떠돌다 신전에 몸을 의탁하려 했습니다. 신전의 사제는 제 눈이 먼
이유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신벌이 내린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저를 꺼렸습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어떤
치유의 신도 고쳐 줄 수 없다 했습니다.”

바닥을 짚은 알테미온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울분으로 곱아들었다. 누구라도 애처롭게 보았을 자태였다.
“그때 트리온이 나타나 달콤한 말로 꾀었습니다.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이르게 태어난 클리티에는 병약하여
돌봄이 필요했는데 그자가 자청하여 돕겠다 하였죠. 하지만 그날 이후로 동생을 보지 못했습니다.
트리온은 클리티에를 인질로 잡고 제가 그를 돕도록 협박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올랐고 비옥한 테베레의
전부를 통치하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너를 신들이 가엾이 여기며 돕지 않더냐? 아니, 애초에 네 눈을 앗아 간 것이 신이 아니더냐?”

알테미온은 침묵을 지켰다. 루키페르의 어조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어리석은 알테미온아, 널 기구한 운명으로 밀어 넣은 것이 신들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구나.”

“예?”

“난 신이 아니야. 하지만 그래, 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지.”

알테미온은 그 수수께끼 같은 말에 혼란스러웠다.

“멋대로 속아 넘어가 떠드는 것이 봐 줄 만했어. 넌 날 한 번 속였고 나도 널 속였으니, 이걸로 무승부로


해 두지.”

루키페르는 가면을 다시 써서 얼굴을 가렸다. 약점을 모두 드러내 인간들의 의도에 흔들리는 알테미온과
달리 그는 완벽히 스스로를 지켰다.

“하지만 신벌이 내린 자라니, 마음에 드는군.”

그런 운명을 타고난 자라면 결코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을 들어 올려 침대 위로


던졌다.

알테미온은 어째서 그가 괴물이라 소문이 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수치심으로 낯을 붉힌 알테미온이


손으로 밀치려 애쓰며 외쳤다.

“오만한 루키페르야, 언젠가 네게도 하늘의 벌이 내릴 것이다.”

손톱 끝이 가면에 빗맞고 눈가를 찔렀다. 핏방울이 맺힌 눈꺼풀을 깜빡인 루키페르는 긴 머리카락을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날 죽여도 좋아. 칼로 찌르든, 독을 먹이든.”

***

“루키페르가 신전에 나타났다 합니다.”

“뭐?”

트리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알테미온이 실패했단 말인가? 간밤 사이에 적을 죽여서 협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그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신하가 전하는 탐탁지 않은 소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케레스 님께서 리기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녀석이 왜? 내가 분명히 에우한을 감시하고 있으라 일렀거늘.”

아쉽게도 멍청한 아들이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내가 협상하러 간 사이에 케레스가 멋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해라.”

“예.”

트리온은 표정을 바꾸고 신전으로 향했다. 이미 도착해 있던 루키페르는 전과 같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를 맞이했다.

트리온은 아침 인사와 함께 날카로운 눈으로 적의 상태를 관찰했다. 중독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아주


멀쩡했다. 루키페르는 트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빤히 알고 있었다.

“루키페르여, 일찍 나오셨소.”
“힘들었소. 어젯밤에 마신 술이 꽤나 독했거든. 포도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인 줄 알았소.”

뼈가 있는 말에도 트리온은 너털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키쉬르에도 맛을 구분할 만큼 취향이 있는 자들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야만인 취급하는 도발에 루키페르는 픽 웃었다.

“키쉬르인들은 뭐든 소화시키긴 하오. 작은 상처에도 유난 떠는 테베레인들이라면 피를 토하고 죽을 법한


것도 삼켜 내지.”

조롱을 더한 조롱으로 받아치는 대화는 마침내 카우노스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든 후에야 멈췄다.

“협상을 먼저 제안한 것은 테베레 측이었음을 잊지 마시오.”

고개를 끄덕인 트리온은 사람을 미치도록 만드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포로들이 본디 그들이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옳은 것이지요. 테베레의 성들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빼앗긴 땅덩어리를 돌려 달라는 요구였다. 그의 요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땅을 짓밟는 데 사용되었던 전차와 무구들도 물론이오. 그런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니


말이지. 또, 당신에게 영웅의 망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전설적인 무구를 내놓으라니. 침묵을 지키던 키쉬르의 신하들의 낯빛이 불쾌감으로 하얗게 질렸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전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이건 협상을 빙자한 날도둑질이오! 우리도 테베레 전사들을 포로로 잡고 있소! 우리가 이 자리를 원한
건 정당한 포로 교환이었지 터무니없는 장난질이 아니란 말이오!”
2. 신들의 세계

분기탱천한 양국의 신하들이 서로에게 고성을 지를 때, 알테미온은 숙취를 견디고 있었다. 간밤에 놀라서
기절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밤새 농락당하거나 아니면 발목이라도 잘릴 줄 알았기에 멀쩡한
신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꿈이었을까.”

그는 홀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익숙한 촉감의 천이 잡혔다.


클리티에의 손수건에서는 확실히 피 냄새가 났다. 중독당한 루키페르가 피를 묻혔던 일과 또한 죽지 않은
일이 선명히 떠올랐다.

얼마든지 또 죽여도 좋다 했던 광기 어린 속삭임을 떠올리니 루키페르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목숨을 노렸던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워 보였을까. 그러니 마음에 든다는 말로 조롱할 수 있었겠지.

자신의 약점과 불행을 손쉽게 어리석음으로 치부했던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인간에게 어떻게 상처를 줄 수 있단 말인가? 루키페르에게 뼈저린 후회의 감정을 알려 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테미온이 분노의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코이테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아코이테스가 아님을 깨닫고 긴장했다. 소년이었다면 들뜬 듯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와 큰 목소리로 방문을 알렸을 것이다.

“누구냐.”

“알테미온, 나야.”

이곳에서 들을 리 없는 목소리에 알테미온은 깜짝 놀랐다.


“케레스 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트리온의 하나뿐인 아들 케레스. 친부 못지않게 욕심이 많지만 반항 한번 못 하던 이 왕자는 트리온의


빈자리를 틈타 알테미온의 침실에 숨어들어 오곤 했다. 멍청한 그가 애정을 갈구하며 귀찮게 굴기에
알테미온은 편히 지내기 위해 그에게 착각과 환상을 심어 놓았다.

케레스는 헉헉거리며 숨을 돌리더니 달려와 가느다란 두 팔을 꽉 잡아챘다. 알테미온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간신히 신하들을 따돌렸어. 잘 들어, 알테미온아. 난 널 위해 이곳에 온 거야.”

“예?”

“내 아버지 탓에 나와 함께 하지 못한다 하였지. 나도 이 테베레가 지겨워졌다. 함께 멀리 떠나자. 더는


이용당할 필요 없어.”

늙다리 에우한을 감시하는 게 지겹다, 금화로 사람을 포섭해 배편을 마련해 두었으니 이 땅을 떠나 새로운
섬에 정착하자는 말을 늘어놓았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멀리 떠나자니. 제안한 상대가 못 미더운
케레스였어도 그는 일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알테미온이 제 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앞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 여동생은 어찌합니까? 클리티에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갑니다. 그 애는 어디 있습니까?”

케레스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심해하는 투였다.

“바보 같긴. 아버지가 아무 쓸모 없는 병약한 여자아이를 아직까지 살려 뒀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진작


죽었을 것이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발밑이 확 꺼지는 기분이었다. 트리온같이 비겁한 자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를 의심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기에 애써 외면하고 희망적으로 생각했을 뿐. 그 사실을
트리온의 아들이 언급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알테미온은 케레스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허튼 말로 사람을 꾀는 건 당신 아버지와 똑같군요. 지긋지긋하게.”


“그게 무슨 말이냐? 내 곁에 있고 싶다 속삭인 그 말만 믿고 이곳까지 널 데리러 왔는데. 설마 다
거짓이었어?”

매몰찬 냉대에 케레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배신감에 목소리가 떨리자 알테미온은 대놓고 비웃었다.

“그저 몸이 달아 발정 난 개처럼 구는 자를 진심으로 연모하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이 방에


눈이 먼 자가 나 하나가 아닌가 보군요.”

뺨에 불이 일었다. 케레스가 홧김에 휘두른 손에 맞아 중심을 잃은 알테미온은 삽시간에 부어오른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그는 미묘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뜻에 맞지 않으니 쉽게 폭력을 휘두르는 꼴이 퍽도 믿음직스러웠다. 그가
아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이었다.

“굴러먹으면서 목숨 부지하는 주제에 하찮은 자존심과 입만 살았구나. 평생 남들의 호의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재수 없는 놈 따위. 네 여동생처럼 괴물의 먹이로나 바쳐질 것이지.”

폭언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불길한 마지막 말에 알테미온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클리티에가 괴물의 먹이가 되었다는 겁니까?”

하지만 케레스는 욕설을 퍼부으며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알테미온 님!”

그때 아코이테스가 문가에 나타났다. 그의 품에서 갓 꺾어 온 붉은 아네모네가 후두둑 떨어졌다.

***

이미 일부 전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서로를 노려보는 회의장에 갑자기 난입한 자들이 있었다.


신관들이었다. 그들은 흉흉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 이유를 전했다.
“유피테르 님께서 종의 입을 빌어 말씀하셨습니다.”

“응답이 내려왔단 말인가?”

제물을 올렸던 트리온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 전쟁의 결말을 구하는 제물을 올렸던
것이다.

젊은 신관 하나가 사제의 말을 받아 적은 석판을 그에게 전달했다.

“최후에 월계관을 차지하는 자는…….”

내용을 확인한 트리온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석판을 떨어뜨렸다. 땅에 부딪쳐 금이 간 석판에 적힌


글자가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보였다. 카우노스는 트리온의 말을 받았다.

“전투의 승리 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싸움의 끝이 허무할 것임을 알리는 신탁에 좌중은 고요해졌다. 싸우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무엇 하러
말뿐인 승리를 쟁취한단 말인가?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더 큰 권력을 원했던 트리온은 문득 루키페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쉬르가 침략한 이유가 넓은 영토와 명예욕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을
뿐.

“당신들이 테베레의 땅을 유린한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건 확실해졌군. 안
그렇소?”

빈정거림에도 팔짱을 낀 루키페르는 묵묵부답이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저 답답한 가면을 부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카우노스는 그의 왕에게 속삭였다.

“루키페르여.”
루키페르는 당황한 친구의 어깨를 짚은 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웃음소리를 들은 키쉬르의
전사들은 자세를 고쳐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경험상 그들의 왕이 웃는 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사들을 휙 둘러본 루키페르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트리온과 테베레인들을 향해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소. 지금 당신들을 모두 죽여야겠어.”

“뭐, 뭐요?”

당황한 트리온이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을 가려 방어적인 태세를 취했다.

“키쉬르의 전사들이여, 쓸어 버려라.”

“예!”

충성심이 강한 전사들은 망설임 없이 덤벼들었다. 루키페르 또한 검을 뽑았다. 트리온은 루키페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에 몹시 놀라 물러섰다. 왕을 지키기 위해 테베레의 전사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감히 신전의 땅에서 아폴로의 가호를 받는 테베레를 공격하다니! 저주가 내릴 것이오!”

트리온은 루키페르의 검이 제 수하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는 모습을 보았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손속이었다. 어째서 루키페르가 전쟁터의 괴물로 불렸는지, 어떤 힘으로 진짜 괴물들을 무찔렀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질겁한 그는 목숨을 걸고 활로를 뚫는 수하들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곳곳에서 피가 터져 신전


바닥을 붉게 적시자 신관들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루키페르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전사들을 말없이 살육했다. 카우노스는 그런 그의 뒤를 지키며 자비


없는 칼날 끝에 담긴 분노를 읽었다. 테베레를 침략해야 했던 사정을 아는 그로서는 무정한 신탁이
루키페르에게 가져다줬을 허무함에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그때 루키페르는 가슴에서 통증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표창이 꽂혀 있었다. 이를 해낸 것은 어제


그에게서 한쪽 눈을 잃었던 자였다. 복수를 해냈다는 희열에 물든 테베레의 전사는 조롱 어린 웃음을
지었다.
“명계로 꺼져라.”

루키페르는 죽지 않을 뿐 죽음에 필적하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질 뿐이었다. 표창을
뽑아내면 피가 흐르겠지만 곧 멎을 것이다. 그리고 흉터만 남긴 채 아물겠지.

그는 승리감에 도취된 자의 목을 베었다. 입가에서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숨이 멎었다. 그자의 목에서


튄 피가 흰 가면의 이마를 타고 일직선으로 흘러내렸다. 얼굴이 반으로 갈라진 듯한 악귀의 모습을 하고
가슴팍에서 표창을 손수 뽑자, 남아서 싸우던 테베레의 전사들이 전의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

누군가 화롯불을 쓰러뜨렸다. 불이 옮겨붙은 관목이 타면서 매캐한 연기가 퍼져 나갔다. 비명 소리와
달음박질 치는 소리 외에 거리는 조용했다. 신전 옆으로 형성된 주택가에서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조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은 까닭이었다.

“쥐새끼처럼 어디로 도망갔을까.”

루키페르는 앞을 막아서는 테베레 전사들을 도륙하는 사이 트리온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번뜩였다.

카우노스는 깨끗한 천으로 왕의 팔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가슴 외에 다친 곳이 더 없는지 자세히


살폈으나 몸에 묻은 피는 거의 다 적군이 흘린 피였다. 그는 트리온을 찾아 추격하려는 루키페르를
만류했다.

“루키페르여, 키쉬르의 아들들도 피를 흘렸습니다. 이미 유피테르의 땅에서 흉한 꼴을 보였으니 한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알고 있어. 가자.”

천을 받아 들고 직접 몸을 닦으며 걸음을 옮기려던 루키페르는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먼저 리기아 바깥의 전사들과 합류해라. 곧 따라갈 테니.”

“예? 어디 가십니까!”

카우노스는 정반대 방향으로 걷는 왕을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대답 없이 멀어졌다.

트리온이 급히 도망치면서 알테미온을 챙겼을 리 없었다. 그자는 그 방에 그대로 남겨져 있겠지. 그가


마음에 들었다. 간만에 만난 재미있는 상대를 위해 잠깐의 귀찮음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고요할 것이라 생각했던 침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코이테스의 외침이었다.

“귀한 분을 건드리지 말란 말입니다!”

“언제부터 알테미온이 귀한 몸이었지? 우리 집안 몸종이나 다름없는 놈을! 멍청한 데다 건방지기까지


하구나. 놓지 못해?”

문가에 선 루키페르는 방 안의 몰골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보는 사내가 아코이테스를 걷어차고


있었다. 악이 남은 소년은 사내의 다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알테미온은 벽에 붙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뭣들 하는 짓이지?”

“루키페르 님!”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자 아코이테스는 구원자가 도착했다는 반가움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루키페르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딱 굳어 버리고 말았다. 특히 흰 가면을 물들인 채 말라붙은 핏자국은 기괴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였음이 분명한 검에 눈길이 간 소년은 꽉 붙잡고 있던 케레스의 다리를
놓아 버렸다.

케레스 또한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한참 당황했다. 침실의 주인과 마주칠 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웬
꼬마의 손에 잡혀 발이 묶인 꼴에 불운을 탓하며 애써 배짱 좋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시선으로 루키페르의 발치를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루키페르?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놈이군. 난 내 몸종을 찾으러 왔을 뿐이다.”


케레스는 당당하게 알테미온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급변한 바깥 사정을 알지 못했다. 트리온을
비롯한 테베레 전사들이 리기아를 떠난 것을 모르니 마치 뒷배가 있는 것처럼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건 트리온의 선물이었는데. 네 것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지?”

여유롭게 팔짱을 낀 루키페르는 한 발짝씩 케레스에게로 다가갔다. 제 발로 찾아온 놈이 트리온의


아들이라. 정원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꽃을 보고 날아든 멍청한 날파리를 곱게 돌려보낼 마음은
없었다.

케레스는 붉게 물든 가면 너머의 눈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가까이 오지 마라!”

케레스는 주저앉아 있던 알테미온을 끌어당겨 그 뒤로 몸을 숨기려 했다.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가느다란


목을 그을 듯 가깝게 댔다. 비겁한 태세 전환에 루키페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찾으러 온 몸종을 이젠 죽일 생각인가?”

알테미온은 축 늘어진 채로 이상할 정도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케레스가 자신을 찌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단검을 든 손이 떨렸기 때문에 날에 살갗이 긁혀 피가 맺혔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루키페르는 잠시 그 의욕 없는 얼굴을 날카롭게 응시했다가 이내 무어라 대답하려는 케레스의 긴장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내 소유에 흠집 낸 벌은 받아야지.”

“뭐?”

그 순간 아코이테스가 몸을 던졌다. 케레스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소년은 알테미온을 온몸으로 감쌌다.


그 틈을 타 루키페르는 케레스의 뒷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일격에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충격을 받은
케레스가 그대로 기절했다.

루키페르는 바닥에 축 늘어진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단번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잘했다, 아코이테스야.”

“괜찮으십니까?”

아코이테스는 여전히 루키페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며 알테미온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알테미온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소년이 루키페르를 향해 애매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자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먼저 기절한 케레스를 왼쪽 어깨에 짊어진 뒤 움직이거나 말할 생각이 없는 알테미온을 강제로 들어 올려


반대쪽 어깨에 짊어졌다. 정신을 차리게 하여 스스로 걷게 하느니 이게 빠르다는 판단이었다.

“우린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예? 어디로 갑니까?”

“협상이 깨졌어. 다시 전쟁이다. 넌 따라올 건가?”

두 남자를 가볍게 짊어진 채 그는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코이테스가 어째서 움츠러든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꽤나 당돌한 첫인상을 심어 주었던 아이조차 막상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자
무서워진 것이겠지.

아코이테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루키페르의 어깨 위에 매달려 있는 알테미온의 뒤통수를 슬쩍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길 떠나고 싶어요.”

“그럼 따라와라.”

루키페르는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걸음걸이가 무척 빨라서 아코이테스는 바삐 쫓아가야 했다.

***

“루키페르여, 걱정했습니다.”
막사 바깥을 초조하게 맴돌던 카우노스는 루키페르가 나타나자 가장 먼저 반겼다. 왕을 기다리고 있던
전사들 또한 테베레 때문에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성이 난 얼굴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왕에 대한 충성심만큼이나 길리포스 장군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던 탓이었다.

“아코이테스야, 막사로 데리고 들어가라.”

“예.”

루키페르는 넓은 천으로 대강 감싸 놓은 알테미온을 짐짝 건네듯 아코이테스에게 떠넘겼다. 소년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카우노스는 루키페르가 굳이 챙겨 온 사람이 알테미온이라는 사실이 조금 의아했으나
앞을 보지 못한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음을 떠올리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괜한 호기심을 자아내기 쉬운
저자의 존재가 키쉬르의 충성스러운 전사들에게라도 자세히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루키페르는 케레스를 바닥에 거칠게 던졌다. 기절해 있던 케레스는 강한 충격을 받자
고통으로 신음하며 꿈틀거렸다.

“밧줄을 가져와라.”

“이자는 누구입니까?”

모두의 이목이 아코이테스와 알테미온이 아닌 케레스에게로 쏠렸다.

“트리온의 아들 케레스다.”

“예? 이자를 어디서 잡으셨습니까?”

카우노스가 손짓하자 전사 하나가 밧줄을 가져와 간신히 눈을 뜰까 말까 하는 케레스의 사지를 결박했다.


루키페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 발로 찾아왔던데. 잘 감시하고 있도록.”

알고 있는 내용을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고문할 생각을 하니 즐거워졌다. 같은 생각을 한 카우노스는


결박한 케레스를 오래된 나무 기둥에 묶어 두고 충성스러운 전사 셋에게 감시하게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막사로 들어간 소년과 남자는 어떻게 할까요.”

“먹을 것을 주고 쉬게 해라.”

“예. 새 옷이 준비되어 있으니 샘으로 가 피와 상처 부위를 씻어 내십시오. 근처에 아무도 오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루키페르는 키쉬르인들이 진을 친 곳에서 가까운 숲속으로 향했다. 야생 물망초가 흐드러지게 핀 맑은


샘에 다다른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겁 없는 아코이테스가 두려워할 법도
했다.

가면을 벗자 맨얼굴이 물에 비쳤다. 이런 일이 아니면 스스로의 얼굴을 빤히 보는 일도 드물었기에 그는


물에 비친 사내의 얼굴이 낯설다 생각했다. 눈가와 볼에 손을 대려다가 수면에 비친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자 물결이 일면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런 감상적인 행동은 잠시뿐이었다. 짧게 스스로를 비웃은 루키페르는 샘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과
목을 씻었다. 말라붙어 있던 피와 흙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시원했다. 옷을 벗고 근육질의 나신을
드러낸 그는 샘에 몸을 깊숙이 담갔다.

아직 태양이 지지 않아 수면에는 늦은 볕이 넓게 퍼졌으나 흐르는 물은 지면보다 신선하고 시원했다. 짧은


머리카락이 수면 위로 퍼졌다가 루키페르가 몸을 일으키자 물방울을 멀리까지 흩날리며 밝은 금빛을
자랑했다. 수중에서 숨을 참았던 그는 두 손으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 냈다.

표창이 박혔던 가슴팍이 물에 닿자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며칠 뒤면 거짓말처럼 사라질 고통이니


아프다 호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해도, 테베레의 씨를 말리고 명계의 신 플루토의 권속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게 죽은 어머니 아에로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라면 말이다.

루키페르는 더는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 물에서 나와 새 옷을 입고 새 가면을 썼다.

***
루키페르가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카우노스가 그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해 둔 후였다. 그는 왕이 벌인
우발적인 상황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변덕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틈나는 대로 불평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하는 정도였다.

“미리 일러둔 대로 신전 사람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신전에서 피를 흘린 것을 두고


유피테르께서 노하실지도 모르니 넉넉한 제물을 올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결정을 두고 루키페르는 짜증스러워했을 뿐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가 항상 ‘유피테르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벼락 맞을 수도 있다.’고 누누이 말했던 것이다. 신들의 변덕스러움은 혐오해도
그들의 힘은 부정하지 않는 루키페르였기에 신전에서 검을 뽑은 것은 경솔했음을 인정했다.

“트리온의 아들은 어떻지?”

“발버둥을 치다 기운이 빠진 모양입니다.”

검을 받아 말끔하게 손질해 두었던 카우노스는 몹시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검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단번에 죽이지 않을 거라 믿겠습니다.”

“설마.”

루키페르는 짧게 웃은 뒤 검을 허리에 찼다. 종려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케레스를 지키고 있던 전사들은


그들의 왕이 나타나자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케레스는 사태를 파악한 듯했다. 애써 의연한 척해도 턱이 흔들려 이가 딱딱 부딪치는 티가 났다.

“이렇게 쉽게 협상이 깨질 줄 몰랐나 보지? 네 아버지는 신하들이 목숨 바쳐 뚫어 놓은 길로 가장 먼저


도망치더군. 멍청한 아들이 몸이 달아서 스스로 안전한 땅을 벗어날 줄 미처 몰랐겠지.”

“힘 좀 세다고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 꼴이 우습구나, 루키페르여. 감히 유피테르께서 직접 귀를 열고


계시는 리기아에서 테베레 형제들의 피를 흘리게 하다니. 네 오만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으냐?”

기세 좋게 외쳤으나 케레스의 속내는 몹시나 초조했다. 그가 키쉬르의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을 테베레
측에서 알기나 할까? 구출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표정조차
보여 주지 않는 키쉬르의 왕을 속여 넘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의 침실에 좀도둑처럼 숨어들었다 잡힌 주제에 말이 많군. 네 몸종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나
본데.”

“흥, 미의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해 추악하게 생긴 놈들은 아름답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지?


알테미온을 탐내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루키페르는 허리춤에 찬 검을 살짝 두드렸다.

“어리석은 케레스야. 아직 네가 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구나. 내게 필요한 것은 네 가벼운


입뿐이다. 그 말은 내가 하나씩 자를 수 있는 네 사지는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바로 검을 뽑았다. 케레스의 안색이 대번에 새파랗게 질렸다. 손속이 잔인하기 그지없다는 소문이
틀린 데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 잠깐. 난 네 요구도 듣지 못했단 말이다!”

“일단 발목부터 자르고 이야기를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까.”

루키페르가 눈짓하자 옆을 지키던 전사 하나가 오른쪽 다리의 결박을 풀어 억지로 앞으로 내밀게 했다.

겁주는 게 아니라 진짜다. 그 생각이 스치자 케레스는 이성을 잃었다.

“뭐든 알고 있는 건 다 말하겠어! 그러니 제발 그 칼을 치워!”

루키페르가 땀이 뚝뚝 떨어지는 케레스의 관자놀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전사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루키페르가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뭘 궁금해할 줄 알고?”

“키쉬르의 발목을 잡은 건 인질이 된 전사들이니, 장군과 전사들을 잡아 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겠지.”

“어디 있는지는 이미 파악했다. 네 목숨을 스스로 구하고 싶다면 그 이상을 털어놔야 할 거야.”
케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번쩍이는 칼날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 작은 성을 괴물이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나?”

“그래. 어떤 괴물이지?”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 괴물이 에우한의 자랑거리라 그가 떠드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다.”

그는 더듬거리며 떠오르는 순서대로 입에 올렸다,

“뱀의 머리가 100 개라고 했어. 눈도 100 개에, 목소리도 100 가지를 낼 수 있다고 들었지. 머리는
번갈아 휴식을 취하므로 결코 잠들지 않고, 강력한 독을 가지고 있어서 신조차 그 괴물에게 공격당하길
원치 않는다 들었어.”

“그런 괴물이 에우한의 말에 복종한단 말인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 앞을 지나가는 방법은?”

케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귀한 정보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더는 아는 게 없어. 정말이다.”

루키페르는 혀를 차고 구부렸던 무릎을 폈다. 그가 똑바로 서자 뒤에서 비치는 태양 빛 때문에 가면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렇다면, 이만 죽어라.”

“뭐? 야, 약속이랑 다르지 않나.”

“난 아무것도 약속한 게 없어.”

이를 드러내 웃은 그는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사지를 잘라 죽여라. 트리온에게 선물로 줘야 하니 머리는 베어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 줘라.”
“예.”

곧이어 등 뒤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

피 냄새가 지독하다. 코끝이 아릿할 정도였다. 알테미온은 들쳐 업힌 채 이동하는 동안 줄곧 역한 냄새를


맡으며 동생을 생각했다.

몇 년을 얼굴도 보지 못한 클리티에가 적어도 살아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트리온이 시키는 일을 다


해냈으니 언젠가는 동생과 함께 소박하게 살고 싶은 희망으로 버텼는데.

괴물에게 바쳐졌다면 죽기 전에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알테미온은 동생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비참함에 사로잡혔다. 몸이 굳고 혀도 얼어붙었다. 그동안 그가 한 노력은 모두 의미가 없는
허무한 짓이었다. 어둠 속을 살아온 그로서는 그보다 깊은 심연으로 발아래가 푹 꺼지는 듯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자신의 안위가 어찌 되든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알테미온 님.”

아코이테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막사에 무사히 도착한 후에도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괴이해 보였던 것이다. 흰 얼굴은 창백하게 가라앉아 흡사 죽은 사람 같았다.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불한당 같은 작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안절부절못하던


소년은 바깥에 묶여 있는 케레스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테미온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준
것이 그 작자라면 용서를 구할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던 아코이테스는 그저 알테미온의 눈치만 보았다.

“네 꼴도 꽤나 더럽구나. 더 어두워지기 전에 씻고 오도록.”


막사 입구를 젖히고 들어오자마자 소년을 타박한 사람은 루키페르였다. 새 가면을 쓴 모습을 본
아코이테스는 묘하게 안도했다. 키쉬르의 왕 앞에서 건방을 떤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아까 봤던
모습은 그간의 태도를 후회하게 할 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알테미온이 걱정되어 잠시 뒤를 힐끔거렸지만.

소년이 나가자 루키페르는 막사의 가장 좋은 침상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알테미온에게로 다가갔다.

“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는 알테미온의 턱을 잡아 치켜세워 시체와도 같은 얼굴을 확인했다. 악이


사라지고 절망으로 물든 낯. 그는 이런 상태를 잘 알았다. 이대로 두면 식음을 전폐하고 그대로 시들어
죽을 것이 확실했다.

그는 그런 꼴을 두고 볼 만큼 비위가 좋지 못했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뺨을 쳤다. 철썩, 소리가 날 만큼


힘이 들어갔다. 여린 살은 금세 부어올랐고 아픔으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정신 차려. 누구 보라고 이러고 있는 거지?”

“……꺼져.”

목을 긁어서 나온 듯 쉰 목소리였다. 턱을 잡았던 손을 놓자 고개는 그대로 툭 떨어졌다.

“날 죽여서라도 행복해지고자 했던 네가 어째서 이 꼴이 된 건지 맞춰 볼까.”

루키페르는 봐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트리온의 아들을 만난 뒤니 어떤 끔찍한 소식이라도 전한 모양이지. 네게 충격을 줄 만한 이야기라면 네


피붙이. 이름이 클리티에라고 했던가?”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알테미온의 어깨가 동요로 인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차 없는 말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 애가 없으면 네 인생도 끝난 건가?”

“당신이 뭘 알아?”

“내가 정곡을 찔렀나 보군. 지금 삶을 포기하면 언젠가 명계에서 네 동생과 해후할 수도 있겠지.”

알테미온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말라 있던 눈물샘이 터져 메마른 얼굴을 흠뻑


적셨다. 온 힘을 다해 꼿꼿하게 버텼던 시간들이 쌓이니 웃을 일도 울 일도 없었다.

냉정하게 미래를 읊어 주는 루키페르 때문에 싸늘한 현실이 못 견디게 느껴졌다. 격정적인 감정을 잊고
살았던 알테미온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릿한 가슴의 고통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상대는 이런 고통 따위 알 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비웃음이나 싸구려 동정심을 던져 주겠지.

“지상에 남겨진 자에게는 의무가 있다. 떠난 자가 하지 못한 복수를 해야지.”

“…….”

“손에 잡히는 건 다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미약한 몸부림이라도 쳐야지. 너와 네 동생을 힘들게 만들었던


자들이 비참하게 죽을 때까지 고통을 씹고 밟고 버텨.”

루키페르는 냉혈한에게 어울리는 말을 했다. 상실과 허무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에게 삶의 의지를


주기에는 지나쳤다.

알테미온은 자존심이 상해서 숨을 멈추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키페르는 그가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두 뺨을 세게 잡았다.

“놔.”

“울 줄 아는군.”

루키페르는 붉어진 눈과 눈물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손길을 떨쳐 버리려는 미약한 힘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눈물에 얼룩져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에 매혹당했다. 돌에 새겨진 미인처럼 차갑고 거리감
있었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기가 갖는 호소력은 훌륭했다.
“이제 좀 감고 싶은 얼굴을 하는데.”

“닥쳐요.”

하지만 독기가 다 빠진 경고 따위야 처연함 이상의 감상을 주지 못했다.

“트리온의 아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나?”

“뭐라고요?”

“그자와 잔 적 있을 것 아닌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말이지.”

알테미온은 노골적인 질문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공기는 날이 서 있었다. 루키페르는 격한 감정과 흥분으로 상기된 뺨을 천천히 쓸었다.

“그자는 어떻게 되었죠?”

목소리는 울먹거려 물기가 느껴졌다. 루키페르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녹아내린 밀가루 반죽을 떠올렸다.

“걱정되나?”

“그럴 리가요. 그런 아둔한 쓰레기 따위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네 바람대로 될 거야. 굳이 트리온을 겁박하겠다고 저런 성가신 자를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대답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흠칫 떠는 알테미온의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알테미온은 속삭이듯 물었다.

“케레스를 죽였나요?”

소식을 들려주면 이자는 기뻐할까, 아니면 두려워할까.

“그래. 지금쯤 머리만 남았을 거다. 트리온 앞에 던져 줄 생각이지.”


냉정한 말에 잠시 침묵했던 알테미온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흐르지 않은 눈물이 눈가에 고여 있다가
웃음과 함께 떨어졌다.

“꼴좋군요. 그게 버러지 같은 케레스의 최후라니.”

절망은 슬픔으로, 슬픔은 다시 날 선 복수심의 충족으로 이어졌다.

루키페르는 더는 죽음의 기운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표정에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나약한 자들이란
욕망을 충족하는 차디찬 즐거움을 모르는 자들일 뿐이었다. 원수진 자들은 반드시 자신보다 먼저 명계의
땅을 밟게 하는 것. 케레스의 죽음이 이자에게 그런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 듯했다.

그는 고개를 젖힌 가느다란 목에 남은 상처 자국을 발견했다. 낮에 케레스가 만들어 놓은 자국이었다.


그는 그 자리를 꾹 눌렀다.

“트리온 또한 그 아들이 간 저승길을 따라가게 되겠지. 그리 외롭진 않을 거다. 그가 사랑하는 테베레의


멸망 또한 함께 할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게 테베레의 완벽한 멸망이란 말인가요? 삼왕과 궁성을 지키는 모든 신하들을 말이죠.”

“그래. 아카이아 땅에서 그 이름을 없애 버릴 것이다.”

궁벽을 메운 화려한 모자이크, 잔마다 새겨진 황금 문양, 훌륭한 전차와 갑주들.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진
성안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쩔 셈인가요?”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떨리는 물음에 곧바로 반문했다. 손가락은 여전히 목 위의 흉터에 닿아 있었다.

“원하는 걸 말하면 그대로 해 줄 건가요?”

“참고는 해 보지.”
알테미온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느끼지 못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가늘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루키페르의 손끝에서 스무 번은 더 미끄러진 후에야 입술이 열렸다.

“모르겠어요.”

뒤늦은 대답은 허무했다.

“동생이 없으면 돌아갈 곳도 없어요. 되찾아야 할 것도, 그리운 것도 없죠.”

“하지만 트리온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겠지?”

“오, 그럴 수만 있다면.”

작게 탄식했다.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을 놓아주기 위해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람이든 무기이든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그는 자신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텅 빈 눈동자가 좋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알테미온이라면 언제까지라도


곁에 둘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 옆을 지켜. 그 날을 즐길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스틱스 강을 두고 맹세하지.”

눈물은 말랐다. 어둠이 깔린 바깥에서는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날 원하나요?”

“그래.”

“당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날 원한다고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단단한 손가락이 섬세한 턱 끝을 매만졌다.

“넌 네 얼굴을 본 적이 있나?”
“아뇨. 남들이 뭐라 떠들든, 난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참 우스운 꼴이죠.”

의심이 강한 미인은 자조적인 어조로 읊조렸다.

“그게 마음에 들어.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도, 내 얼굴도 보지 못하지.”

결코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루키페르가 조금이나마 본심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테미온은


그가 모종의 이유로 얼굴을 보이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체가 어떻든 늘 가면을 쓰고 사는
자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납득되었다.

“그런 이유로 마음에 든다고 하는 사람은 당신뿐이군요. 어지간히도 당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나 봐요.”

“마음대로 생각해.”

알테미온의 손등이 루키페르의 단단한 가슴팍 위로 미끄러졌다. 완벽한 전사의 육체. 이런 훌륭한 몸을
가졌고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다는 남자가 결핍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남의 약점을 마음에 들어
하는 혐오스러운 솔직함이 자신과 닮아 있었다.

“좋아요. 원하는 대로 해요.”

그는 자신이 그동안 한 번도 허락의 말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칼에 베인 상처 위로 입술이 부딪쳤다. 알테미온은 힘에 떠밀려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휘청이는 몸을 루키페르의 팔이 감싸 안아 천천히 눕혔다.

목덜미에 닿은 뜨거운 입술과 힘 탓에 금세 핏기가 쏠렸다. 꺾일 듯 젖혀진 목덜미는 몸이 뉠 곳을 찾자


안도감에 힘이 빠졌다. 옷깃을 헤집는 마디가 굵은 손이 미려한 어깨선과 허리를 지났다.

알테미온은 자신의 위로 올라탄 남자의 단단한 체구 때문에 몸에 열이 올랐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거친 손길과 흐트러진 숨소리에서 상대의 흥분이 전해졌다.

“흣.”
그는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급작스럽게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짓에서는 그다지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다.

“좀, 천천히.”

천천히 인내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루키페르는 답답한 가면을 벗고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싫어.”

낮은 읊조림에 알테미온은 얼굴을 찡그렸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목소리에 담긴 끈적한 열기가
그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 피 또한 몸속을 빠르게 도는 기분이었다.

그는 루키페르의 숨소리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살짝 떨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자극적이었다.

성질 급한 루키페르가 손가락으로 둔부 사이를 가르자 알테미온은 그의 어깨를 다급하게 잡았다. 손바닥


안에서 단단한 근육이 매끈하게 꿈틀거렸다. 조금도 밀어낼 수 없었다.

“읏, 아파요.”

루키페르는 힘이 들어간 둔부를 조급하게 때렸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자 그는 가차 없이 내벽을


넓혔다. 다음 일을 예상한 알테미온은 애원조로 말했다.

“제발.”

그는 숨죽여 웃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손가락들은 빠져나가고 그보다 훨씬 묵직한 것이 아래로 와 닿았다.

“큿!”

알테미온은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전희랄 것도 없이 이뤄진 삽입에


잘못될까 두려워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밭은 숨을 뱉자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루키페르는 긴장하자 목과 뺨이 붉어진 알테미온을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좀처럼 하지 않던
애원에 착각하여 안심하는 모습까지 제법 재미있었다.

“아직 다 안 들어갔는데.”

“거짓말.”

정말이었다.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의 뒷목을 잡고 천천히 하체를 내리눌렀다. 장기가 짓눌리는 느낌에
빨갛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예민한 내벽이 죄다 눌렸다. 금방이라도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터질
듯했고, 배를 만지면 안에 들어간 성기의 모양이 그대로 잡힐 것 같았다.

두려움에 알테미온은 움찔거리며 상체를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이 목을


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흐읏, 으.”

루키페르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니 알테미온은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점차 빨라지는 허리 짓에


그는 손가락을 깨물면서 소리를 죽였다. 그 억눌린 신음이 루키페르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지금 당신 얼굴, 직접 볼 수 있다면 놀랄걸.”

루키페르는 질끈 감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바라보며 희롱했다.

“아으, 흣…….”

알테미온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의 추삽질이 오가자 몸이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달아오르는 듯한 감각이 턱 끝까지 숨이 차게 했다.

루키페르는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희고 여린 어깨를 잡아챘다. 그게 신호였다. 훨씬 빨라진


추삽질에 몸이 밀릴 듯했으나 어깨를 잡은 단단한 힘 때문에 알테미온은 깊은 곳까지 박혀 드는 성기를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으흣, 읏, 응!”

살갗이 벗겨질 만큼 강하게 손가락을 물어도, 신음이 새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감한 부위는
모조리 건드리는 거대한 성기가 잔인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한 번 밀고 들어올 때마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느껴졌다.

알테미온은 차라리 루키페르가 빨리 사정하도록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아래를 힘껏 조였다.

“끊어 먹기라도 할 건가.”

루키페르는 삐딱하게 비웃으며 좁은 틈을 더 세게 파고들었다.

“으흑! 아!”

알테미온의 허리가 무너져 내릴 듯이 바르르 떨렸다. 미칠 것 같았다.

***

알테미온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잠에 빠졌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해 대던 남자가


자신을 놔준 게 먼저인지, 아니면 기절한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허리와 다리 사이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중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지나치게 정력적인 사내를 상대한 대가였다.

습관처럼 근처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곁에 잠든 남자의 느리고 평온한 숨소리만 들렸다.


루키페르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어젯밤에 했던 대화를 떠올린 알테미온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떠올렸다. 어떻게 생겼을까. 굉장한
추남이라는 말과 얼굴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다는 말까지.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자는 틈을 타 가면을 벗겨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도 손끝으로 만져 보면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깰까 봐 겁이 나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리고 확인할 결과가 두렵기도 했다. 만약


가장 나쁜 소문처럼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또 루키페르가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알테미온은 결국 숨죽여 잠든


남자의 턱 끝을 짚었다. 그리고 입술 선을 거쳐 뺨을 타고 콧등으로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손끝에 걸리는
게 없었다.

‘잘 때는 가면을 쓰지 않는구나.’

그의 숨소리는 여전히 느리고 차분했기에 손끝은 점차 대담하게 움직였다. 매끄러운 뺨을 지나 높다란


콧날을 거쳐 단단한 이마에 이르렀다. 그 어디에도 상대가 괴물이라는 증거나 흉터의 흔적은 없었다.

당황한 알테미온은 처음의 조심성은 잊고 재차 만져 보고 또 만져 보았다. 변하는 건 없었다. 손끝에서


상상되는 상대의 얼굴은 오히려 굉장한 미형이라 의아할 지경이었다.

철저히 얼굴을 감추기에 최소한 결점이 있으리라는 상상이 무색해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가면을
쓰면서 사람들에게 결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걸까.

의구심에 빠져 있는 그때 그의 손목을 확 잡는 악력이 느껴졌다. 알테미온은 무척 놀라 어깨를 떨었다.

“간지러운데.”

볼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의외로 낮고 잠긴 목소리에서는 화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기분이 짐작되지 않아 알테미온은 손을 잡아 빼면서도 침묵했다.

루키페르 또한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구가 들썩이더니 그는 신을 찾아 신고


이내 바깥으로 나갔다. 가면 또한 잊지 않고 쓴 채로.

남겨진 알테미온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침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기분 상했을까?

***

루키페르는 모래바람이 강하게 불어오자 눈을 찡그렸다. 눈에 들어간 먼지가 간지러웠다. 아까 얼굴을


만지던 손길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자와 있으면서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큼이나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기에 그는


알테미온과 있을 때면 자꾸 가면을 벗게 되었다. 좋지 않은 습관이었다. 누구라도 우연히 그의 얼굴을
보게 되는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키쉬르의 아들들은 아침을 준비했다. 그들의 왕이 지나가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루키페르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카우노스는 식사를 권했다. 말린 고기와 갓 끓인 수프가 놓였다.

“막사 생활이 길어서 좋을 건 없죠.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면 빨리 도시를 차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답은 짧았다. 그 안에 담긴 고민을 읽은 카우노스가 말했다.

“새로운 신탁이 신경 쓰이십니까?”

카우노스는 그의 친우가 이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바람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한 신탁 내용이 어째서 그를 분노하게 했는지도.

“아니. 신탁 따위 뭐라고 말하든 내 뜻대로 할 생각이다.”

“당신의 뜻이 확고하다면 저 또한 그에 따르겠습니다. 전과 마찬가지로요.”


“넌 도무지 날 의심하지 않는구나.”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카우노스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테베레의 멸망. 루키페르가 원하는 것은 알테미온에게 말했던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신들의 세계의 완전한 붕괴였다. 한낱 인간이 꿈꾸기에는
허황되게 들리는 목표임에도 카우노스는 의심하지 않았다.

신들의 힘을 유지시키는 것은 인간들의 믿음. 그 믿음이 무너지면 결국 신들 또한 유지되지 못했다. 강한


신앙심을 가진 인간들이 많은 테베레를 멸망시키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신들의 변덕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해악을 생각하면 그에게는 너무 당연했다.

“그런데 유피테르가 어떻게 알았을까.”

“주신의 눈과 귀야 아카이아 땅 어디에나 존재하겠죠. 당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경계하니까요. 조심하십시오.”

“물론.”

루키페르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테베레 놈들이 주성에 연락하여 지원받기 전에 선공해야겠다.”

“네.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카우노스는 말을 전하러 갔고, 루키페르는 홀로 진영 주변을 걸었다. 어제 물가에 핀 물망초를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의 어머니 아에로페를 묻은 곳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자리에 물망초가
만개했던 건 뚜렷했다. 그러니 꼭 한 해의 이 시기쯤이었다.

주저 없이 공격하자고 명해 놓고도 그는 줄곧 길리포스를 생각했다. 그라면 카우노스처럼 자신의 행동을


지지해 주겠지. 하지만 이로 인해 그의 목숨은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표정을 굳힌 채 샘까지 걸어간 루키페르는 물망초를 바라보다 물에 비친 자신의 뒤로 낯선 사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에 비친 잔영으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자가 입을 열었다.
“길리포스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습니다.”

루키페르는 휙 돌아보았다. 마음속 우려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나 상대는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넌 누구지?”

챙 넓은 모자 때문에 머리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매우 경계했으나 남자가 휘두를 수
있는 것이라곤 손에 짚은 나무 지팡이뿐이었다.

“그자는 살아 있고 당신이 그를 구하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는 루키페르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방법이 있다는 거군.”

“하지만 그 대가로 당신의 목표는 포기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남자.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 루키페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서 그래야 하지?”

“그게 당신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뭐?”

“당신의 아버지, 마르스의 뜻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제 아버지가 누구라고?

“내 아버지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테베레의 왕비였던 아에로페는 왕의 아이가 아니라 신의 아이를 품었습니다.”

“허튼소리. 신들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더는 들을 생각도 없었다. 루키페르는 그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루키페르여, 어리석구나.”

갑자기 상대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엄숙한 노인의 음성은 밝고 가벼운 청년의 것이 되었다. 변화를
감지한 루키페르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신이거나 반신이라 짐작했다.

“네 무력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지? 넌 신의 아들.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다. 네가 겪은 방황은 널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

“웃기는군. 난 운명이 없는 존재다.”

“네가 운명의 여신이 잠든 틈에 태어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그건 마르스의 안배였다.
정말이지 젖먹이일 때부터 귀염성이 없는 건 조금도 바뀌지 않았군.”

루키페르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는 그제야 상대의 나무 지팡이가 뱀 두 마리가 얽힌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팡이 카두케우스를 짚는 신들의 전령이라면 아카이아에 단 한 존재뿐이었다.

“내 아버지가 신이라면 내 어머니가 고통을 겪을 때 어디에 있었지? 내가 온 아카이아를 떠돌던 시기에는


또 어디에 있었지?”

“네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와서 내 삶에 개입할 생각은 마라.”

단호히 외친 그는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걷다 돌아보았다. 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

“아코이테스구나.”

막사로 살금살금 들어왔던 아코이테스는 알테미온이 발소리를 듣고 자신을 알아맞히자 어색하게 웃었다.
“예.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식사를 챙겨 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물음에 알테미온은 비죽하니 웃었다.

“바깥이 소란스럽구나.”

“예. 곧 여길 떠난답니다. 다시 싸운다고 하니까요. 그러니 잘 드셔야 합니다.”

“그래. 매번 실려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코이테스는 전날과 확연히 달라진 알테미온의 상태에 깜짝 놀랐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건 여전했으나
기운은 차린 듯 보였다. 이럴 줄 몰랐기에 어떻게 하면 반응이 없는 그에게 식사를 권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네가 날 위해 용감하게 나섰지. 고맙구나.”

“벼, 별것 아닙니다.”

“케레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는걸.”

칭찬을 받을 줄은 더욱 몰랐기에 소년의 뺨은 금세 타올랐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같은 이름을 가진 자는 그런 식으로 죽지는 못할 겁니다.”

그의 대답에 알테미온은 작게 큭큭대며 웃었다. 아코이테스의 뜻은 ‘편하게 죽는 자’였던 것이다.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수프를 드는 모습에 소년은 괜히 코끝을 긁었다.

차마 어색하게 이유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확실히 그는 기력을 되찾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아코이테스는 냉정한 말투를 가진 표정을 알 수 없는 루키페르를 떠올렸다. 그는 결코 사람을 달래는
데에 능숙한 자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그런데 당신은 어떤 분인가요?”

“뭐?”

“그 케레스라는 자가 이상한 소리를 해 대지 않았습니까.”


“…….”

알테미온은 입을 다물었다. 정작 대답이 들려온 것은 막사 입구였다.

“보면 모르나?”

천을 젖히며 들어온 것은 루키페르였다. 그는 제멋대로 찾아와 허튼소리를 늘어놓고 사라진 신들의 정령,
메르쿠리우스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단순히 무시하고 돌아섰으나 뒤늦게 그놈을 패기라도 했어야
했다는 생각과,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심란한 생각들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 곳이 없어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내 침실을 지키고 함께 잠드는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다니. 영특하다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본 것이냐.”

소년은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에 얼굴을 붉혔다. 알테미온은 다 비우지 않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짜증스레
대꾸했다.

“적당히 하는 게 어떤가요.”

“다 먹지? 널 매번 모시고 다닐 자는 없으니.”

아코이테스는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서로를 싫어하는지. 한 공간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코이테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소년의 정성 때문에 조금이나마 먹어 볼까 했던 알테미온은 곧바로 수프


그릇을 밀어 놓고 단단히 팔짱을 꼈다. 농담 덕분에 느슨히 풀려 있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

“꼭 어린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해야 하나요?”

짜증이 서려 있는 얼굴과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방어적인 자세. 루키페르는 그 모습을 훑어보곤


날카롭게 대꾸했다.

“네가 주제넘게 간섭할 일이 아닐 텐데?”


루키페르는 자신의 삶을 가볍게 농락하려는 신의 오만한 태도에 단단히 심기가 뒤틀렸기에 알테미온의
행동이 평소보다 더 건방지게 느껴졌다. 엉망이 된 속내를 풀어 버릴 상대를 찾은 것이다.

“이제 와서 비위 맞추며 다리를 벌리는 역할이 부끄럽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뭐, 뭐라고요?”

가차 없는 언사에 충격을 받은 알테미온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손끝과
팔에 힘을 준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루키페르는 한발 더 나아갔다.

“하긴 그 정도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형편없는 남창이긴 하지.”

“……하, 상대하고 싶지 않은 저질 종자답군요.”

알테미온이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기가 막혔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렇지 않았다. 전날


밤의 대화와 몸정 때문인지 그가 조금쯤은 상대할 만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무엇 때문에 심사가 뒤틀린 것인지 몰라도 그는 지금 극도로 짜증 나는 존재였다.

루키페르는 입꼬리를 비웃듯 비틀었다. 그는 알테미온이 확실히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나. 네가 살아가려면 나 같은 저질 종자에게 아양 떠는 수밖에 없는데.”

그가 비아냥거리며 알테미온의 섬세한 턱 끝을 잡았다. 알테미온은 턱 끝에 더러운 것이라도 붙은 것처럼


그 손을 세게 쳐 냈다.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전날 밤에 저자와 제대로 살결을
나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루키페르는 져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뻣뻣하게 나오는 이자를 열받게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희고 고운 두 뺨을 억센 손아귀로 잡아챈 채 속삭였다.

“죽을 용기도 없는 주제에 호사스럽게도 음식을 거부하다니. 깡마르면 이렇게 손에 잡히는 것도 없겠지.
그런 몸을 어느 사내가 원할까?”

단단한 손을 떨쳐 내기 위해 알테미온은 안간힘을 다했다. 힘으로 되지 않자 손톱으로 상대의 손등을 살이


팰 만큼 긁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이 더러운 자식.”

“입 벌려.”

“놔, 놔……!”

하지만 루키페르는 그가 반항하면 할수록 더 거칠게 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는 힘으로 찍어 눌러


굴복시키면 된다. 반항이 심할수록 무릎 꿇릴 때의 기쁨도 커지는 법이었다.

몸으로 찍어 누르면서 한 손으로 여린 턱뼈를 아프게 누르자 고통으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릇을 들어 억지로 수프를 먹이려 했다. 그릇이 입술에 닿는 감촉에 알테미온이 헛발질을 하며
몸부림쳤다.

이, 나쁜 새끼.

속이 단단히 꼬인 루키페르가 원하는 대로, 정말로 화가 난 알테미온이 입술이 찢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릇을 턱으로 쳐 내고 루키페르의 손가락을 이로 세게 물었다.

“윽!”

“놓으라고 했잖아, 이 괴물 같은 자식아!”

턱을 잡고 있던 아귀힘이 풀린 틈을 타 알테미온이 크게 소리쳤다. 옆 막사로 충분히 전달될 만큼 큰


소리였다.

“무슨 소란입니까?”

고성을 들은 카우노스가 황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떨어져 깨진


그릇과 루키페르의 손등을 물고 있는 알테미온이었다. 그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루키페르여, 이, 이게 무슨……?”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니겠지요. 평소처럼 사람 갖고 장난쳤을 뿐이니.”


루키페르의 냉랭한 대답에 지지 않고 알테미온도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카우노스의 시선이 손톱자국과 잇자국으로 엉망이 된 루키페르의 손등과, 화와 울분으로 붉게 물든


알테미온의 눈가를 오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그릇을 다시 본 그가 상황을 파악했다.

“식고문이라도 할 생각이셨습니까?”

“그럴 리가. 귀한 음식을 줘도 먹을 줄 모르는 멍청이라 먹는 법을 가르치려 했지. 어찌나 들짐승처럼


살았는지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군.”

루키페르가 빈정거렸다. 알테미온도 지지 않고 씩씩거렸다.

“개새끼. 너 같은 놈은!”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어지러워진 카우노스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두 손을 내저었다. 루키페르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이런


식으로 계속 대드는 것이 그를 더 화나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키페르는 이조차도 못마땅한지 눈을 가늘게 뜨고 친우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런 일에도 끼어들었나? 주제넘는다는 생각은 안 드나?”

빈정거릴 때보다 더 싸늘해진 어조였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카우노스가 한숨을 참으려 볼 안을


깨물었다. 막사 내부에는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루키페르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카우노스가 고개를 숙였다. 영문을 몰랐지만 그의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에는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화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알테미온은 기가 막혔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화를 내고 있는 건 루키페르였으며


사과해야 할 사람도 루키페르였다.

“왜, 보다 보니 너도 이놈을 품고 싶나? 네가 원한다면 하룻밤 정도 빌려줄 수 있어.”

“절대 아닙니다.”

두 사람을 동시에 모욕하는 언사. 알테미온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었으나, 카우노스는
모욕당한 사람답지 않게 차분하게 대꾸했다. 루키페르의 분노를 받아 내느니 그가 짜증 내고 사납게
노려보는 걸 참는 게 속 편했다.

“극구 아니라니 믿어 보지. 내 침대에서 다리 네 개가 뒤엉켜 있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사람을 화나게 하는 말만 골라 한 그가 마침내 막사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

알테미온은 얼얼한 턱을 감싼 채 어떻게든 화를 삭이려고 애썼다. 카우노스는 조용히 어질러진 막사 안을


정리했다. 날카로운 파편들을 줍고 천으로 바닥을 닦은 후 돌아섰다,

“전에 만난 적이 있지요.”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우노스여.”

낮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곱지만 청년의 것임이 분명한, 그런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에도 꽃병 하나가 부서졌고 그 조각들을 카우노스가 치웠었다.

“키쉬르의 왕을 대신해 내가 사과드리지요.”

“남이 하는 사과 따위 필요 없습니다.”

카우노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상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냈다.

“이해합니다. 왕의 까다로운 성미는 오래 겪은 나조차 맞추기 힘드니까요. 화를 내는 게 당연합니다.”


그가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차분하게 위로하자 알테미온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쌀쌀맞던 태도를 조금
풀었다. 아무 잘못 없는 재상에게 괜히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죠?”

“글쎄요.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기가 많이 상하신 듯 보이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진정하실 겁니다.”

“하, 평소의 그도 진정한 사람이라 볼 수 없는걸요. 저런 자의 곁을 지키는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는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모욕했잖아요.”

“뭐, 이해를 바라진 않습니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카우노스의 대답은 차분하다 못해 건조했다. 그는 괜한 시비를 걸고 간 왕의 말처럼 알테미온에게


매혹되어 있지 않았다. 누구의 마음이라도 살 법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쌀쌀맞은
낯빛의 미인에게는 슬픔과 불행이 고여 있는 듯했고, 카우노스는 그런 아름다움에 손을 대어 심연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당신이 왕의 옆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내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루키페르께서 당신에게 약속한 것이 있겠지요.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떠나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까.”

“…….”

알테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왕의 오랜 친우로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군요. 그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루키페르가 패악을 부림에도 불구하고 이자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간 왕의 침실에서 쫓겨 나간 창부들의 수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는 침실
상대들을 믿지 않아 쉽게 내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키페르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까지 이자를
막사까지 손수 데려왔다.

“하, 그때까지 난 참기만 하라는 뜻이군요.”

알테미온이 팔짱을 풀자 흐트러진 옷자락이 흘러내려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옷 주름 사이로 살결


곳곳에 찍힌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정리해 주기 위해 손을 뻗었던 카우노스가 손길을
거두었다. 멋대로 손대면 싫어할 것 같았다.

“내겐 당신 또한 무척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예, 당신 말대로 원하는 게 있다면 그때까지


참으십시오. 견디지 못하겠다면 떠나도 상관없습니다. 견딜 수 있다면…… 원하는 걸 얻은 후 떠나면
됩니다.”

그가 차갑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

“그자가 그렇게 무식하게 나올 줄은 몰랐소.”

“트리온이여, 큰일입니다. 틀림없이 그자를 리기아에 발 묶어 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트리온을 포함하여 리기아에서 살아서 도망친 테베레 전사들은 몹시나 동요한 기색이었다. 협상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오만한 루키페르조차 성질을 꽤나 죽이고 임하기에 제대로 키쉬르의 약점을 잡았다
생각했다.

“그들이 테베레의 주성을 노리면 우리는 어찌합니까?”

“아폴로의 가호를 빌어야지. 그분의 도움이라면 무엇이 무서울까.”

트리온은 그렇게 말했지만 불안했다. 태양의 신이 테베레를 아끼는 것은 삼왕 중 한 사람인 에우한이


아폴로의 아들의 손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자손들이 통치하고 온 나라가 정성을 다해 신을 섬기니 그
땅에 해가 잘 들고 곡식이 잘 자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아폴로의 도움을 받게 되면 에우한의 입지만 높아지게 된다. 트리온이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자가 지금보다 더 큰소리를 치고 다니는 꼴을 어찌 눈 뜨고 볼 수 있을까. 자신의 역할로 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런데 내 아들 케레스는 어디에 있지?”


트리온은 케레스를 감시하도록 명했던 신하들을 찾았다.

“그, 그게, 그분께서 틈을 타 나가셨습니다.”

“뭐? 그럼 아직 리기아에 남아 있단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빠져나오기 직전까지 찾으려 애썼지만…….”

변명을 하기에 급급한 신하에게 그는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리기아로 돌아가서 내 아들을 찾아내!”

“네, 네!”

분노하여 붉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감시에서 벗어난 케레스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알테미온을 리기아에 데려간다 했을 때 몹시 꺼렸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어쩌면 그놈을
찾으러 간 걸지도 모른다. 그랬다가 만약 키쉬르인들과 마주쳤다면? 추측은 점점 좋지 않은 쪽으로
향했다.

“주성으로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대로면 언제 몰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지금 인원으로는 키쉬르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어떤 식으로 급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사들은
무척 위축되어 있었다.

“지금 테베레에 그놈을 막을 만한 인물이 있나?”

“폴룩스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장군이 출정하면 제아무리 루키페르라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테베레의 아들들은 동시에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묘하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트리온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그래. 그 외에는 쓸 만한 전사가 없지.”

테베레 제일의 전사, 폴룩스. 그는 테레베의 삼왕 중 하나인 피네오스 왕의 아들이었다.


강인한 몸과 준수한 외모는 겉모습만으로도 영웅의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폴룩스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다정했기에 테베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최고인 전사였다. 그런 그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지만 트리온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폴룩스 장군을 생각하면 속에서 열이 났다. 그의 못난 아들 케레스와 엄청나게 비교가 된 까닭이었다.

과연 영웅의 피를 타고났다며 시민들의 칭송을 받는 장군 덕분에 아들 외에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는


피네오스는 점잔을 뺐다. 그에 비하면 능력 없이 밥만 축내는 케레스 때문에 트리온은 입지를 다지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알테미온을 이용해 미인계로 테베레의 유력자들을 제 편으로 만들고, 금화를 뿌려 지지 세력을 유지했다.
트리온은 경황이 없어 그의 소중한 패인 알테미온을 되찾아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놈!”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트리온이 고함을 지르며 나무를 치자 신하들은 매우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아비의 속도 모르고 케레스 그놈은 어딜 간 걸까.

하지만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을 틈도 없었다. 정찰하러 갔던 전사가 새파랗게 질려서 저 멀리서


절뚝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트리온이여!”

트리온을 둘러싼 전사들은 깜짝 놀라 무기를 집어 들고 주변을 살폈다.

“위치를 들켰습니다. 도망가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소리치기가 무섭게 덤불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찰병의 등에 꽂혔다. 단박에 고꾸라졌다.

모여 있던 테베레의 전사들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벌써 키쉬르인들이 여기까지 추격했단 말인가? 설마


루키페르도 왔을까? 그자가 왔다면 살아날 희망은 없었다. 신전에서 그의 무위를 목격했던 자들은
두려움에 손을 떨었다.

***

[마르스는 숲속에서 쫓기던 아에로페를 구했다. 신의 도움과 사랑으로 목숨을 구한 그녀는 자신이 신의
아들을 잉태하였음을 알아차렸다. 산달이 가까워진 아에로페는 마르스에게 태어날 아이를 보호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마르스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 운명의 여신을 속여 잠들게 했다.]

알테미온은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카우노스가 불러 놓은 아코이테스가 영문을 모른 채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소년이 하는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전히 루키페르가 한 짓으로


인해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그 짐승 같은 작자는 남의 기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뭐든 자기 뜻대로
하는 폭군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곱씹을수록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키쉬르의 재상의 말이 정곡을 찔렀던 까닭이었다.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처지라면, 루키페르가 막돼먹게 굴 때 그에게 맞서거나 떠날 수 있었겠지. 그런
꼴을 당하고도 그의 침대에 청승맞게 누워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이 그럴 힘이 없어서였다.

‘트리온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겠지? 그렇다면 내 옆을 지켜. 그 날을 즐길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여동생을 잃고도 복수를 제힘으로 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겼다. 복수는커녕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장님이라 제 갈 길도 몰랐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는 밑바닥 인생.

그래도…… 눈이 보였다면 달랐겠지.

알테미온은 부질없는, 오래된 소망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신벌이 내렸다지만 왜 벌을 받았는지 이유조차
몰랐다. 그러니 다시 눈이 보인다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어리석은 알테미온아, 널 기구한 운명으로 밀어 넣은 것이 신들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구나.’


어쩌면 루키페르의 말이 옳을지도.

나약한 인간이라 신들의 세계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복종하며 살아가는 그와 달리, 루키페르는 강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당당히, 신들을 모욕할 수도 있었다. 그런 사내에게 제 꼴이 얼마나 우습고
하찮게 보일지는 분명했다.

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던 강인함, 그리고 몸정을 나눌 때 손에 잡히던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떠올리자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알테미온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혐오했다. 자신의 이름도 끔찍했다. ‘꽃’이라니. 아무나 꺾어서
아름다움과 생기를 즐기다 시들면 던져 버리는 꽃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남에게 동정심을 사 구걸하듯 살아야 하는 불쌍한 놈.’

트리온에 의해 강제로 몸을 팔았던 날, 테베레의 어느 부자가 그렇게 조롱하기도 했다. 날이 새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가지고 놀던 자였는데.

지금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알테미온이 자조하며 쓰게 웃었다. 자꾸 잔기침이 나왔다.

거센 모래바람이 자꾸만 막사의 두꺼운 천을 흔들어 놓는 탓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두껍고 질 좋은, 새


깃털로 만든 이불을 덮어도 서늘함이 느껴졌다.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한심함과 자책이 그의 내면을 장악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같았다.

생각할수록 그는 루키페르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더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혐오와 자포자기. 감정의 폭풍은 모래바람보다 거세었고, 그는 가슴 아픈 감정을 느리게 곱씹었다.


막사로 들어오던 빛이 점차 줄어들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막사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사들의
심부름을 하며 틈틈이 들르던 아코이테스도 더는 알테미온을 조심스럽게 살피러 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던 발소리들이 잦아들고 장작이 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릴 때쯤,
알테미온은 그대로 풋잠에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루키페르는 종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래 묵은


물푸레나무의 높은 가지에 올라가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쪽을 노려보았다. 버림받아 무너진 낡은 돌담과 그 위로 돋아난 잡초만이


무성했다. 황량한 풍경에 익숙했다. 저런 잡초들 중 무엇이 먹을 만한지도 잘 알았다. 그런 삶을
살았으니까.

‘당신의 아버지, 마르스의 뜻입니다.’

그 자리에서 단호히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이명처럼 그의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아버지라.

그가 평생토록 증오했던 남자가 친부가 아니라니. 출생의 진실에 충격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 남자’가
아버지이든 아니든, 복수의 대상인 건 여전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데 일조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마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한낱 인간 사내처럼 아에로페와 그를 두고 떠났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신들에 대한 증오심만 깊어질 뿐.

하지만 자신이 지닌 무력의 근원이 신력이라니.

그는 아폴로의 태양이 멀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어둠이 내리면 태양이 없는 하늘에 밝은 새벽별이 보일
것이다.

‘아들아, 네 이름은 저 새벽별과 같단다. 깊은 밤중 길 잃은 나그네들의 친구지. 어두운 순간일수록 그


위대함이 드러난단다.’
루키페르는 아에로페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으나 이 말만은 단어 하나하나 선명하게 새기고
있었다.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을 알아낸 밤에도 새벽별은 밝게 타올랐다. 이깟 사실에 이제 와서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힘의 근원이 무엇이든, 복수를 위해 훌륭히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밤길을 헤매지 않고 키쉬르의 진영으로 돌아오자 미동도 없이 보초를 서는 전사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루키페르가 조용한 막사의 입구를 젖혔다.

“…….”

세상모르고 속 편하게 잠들어 있군.

이불 속에 몸을 만 채 잠든 남자의 모습에, 혀로 입술을 축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 늘씬한 다리를 보면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겠지.

다음 순간, 그는 알테미온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

무방비한 상태였던 알테미온은 뭔가가 제 몸을 짓누르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헉……!”

생존 본능으로 버둥거림에도 위에 올라탄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깃을 풀어 헤쳤다. 이미 옷을 벗어


던진 루키페르였다.
여전히 전날 밤의 흔적으로 물들어 있는 가슴팍을 확인하고 그 위에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무도 이자를 건드리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루키페르는 아무 말 없이 나신이 된 알테미온을 탐하는 데 열중했다. 동요로 붉게 물든 알테미온의 표정과


파르르 떨리는 매끄럽고 촉촉한 살갗이 색정적이었다.

음심이 동한 순간 하복부와 가운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잔뜩 괴롭혀 주고 싶었다.

낮에 저 입술로 차갑게 거절의 말을 했지. 뻣뻣하고 냉정한 놈이 쾌락에 들떠 저에게 빈다면 어떨까.
꽤나 봐주었던 지난밤에 했던 애원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온몸을 떨면서도, 결국 더해 달라고 자진해서 다리를 벌리게 만들 작정이었다. 크고 거친 손이 다리


사이를 억지로 파고들었다.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 알테미온은 곧 말 한마디 없이 몸을 탐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밀어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근육으로 꽉 짜인, 탄력 있는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했던 것이다.

“놔, 꺼져, 읏……!”

여린 허벅지 살을 거칠게 훑고 은밀한 곳까지 나아가려는 손길, 복부를 찌르는 사내의 상징.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한 알테미온이 다급하게 발길질했다.

낮에 제멋대로 굴고 나갔던 자가 화도 풀리지 않은 제게 이런 식으로 굴다니.

하지만 반항해 봤자 힘과 체력 차이가 현격했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뭐로 보나 짐승 같은 사내는


알테미온의 귓불을 세게 깨물었다.

“흣, 으흣, 싫어, 하지 말, 라고.”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없이 몸을 더듬는 손길이 끔찍이도 무서웠으나 알테미온 또한 황소 같은


고집이라면 지지 않았다. 낮에 재상이 뭐라고 했든 상관없었다. 참을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으니까.
루키페르는 길고 흰 목을 집요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당황하여 연신 오르내리는 목덜미에서 미미한
열감이 느껴졌다. 목덜미를 이로 물어뜯어서라도 파고들고 싶은 향도 났다.

알테미온은 그자의 떡 벌어진 어깨를 연신 밀어냈으나 전투로 단련된 정력적인 근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내주고 싶지 않아서 있는 힘껏 반항하는 애처로운 모습이 루키페르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하지 마, 싫어, 싫다고, 흐읏!”

그의 나체 위를 덮은 육체의 흥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근육의 탄력 있는 꿈틀거림과 자꾸만 맞닿아 오는


성기, 그리고 루키페르의 거친 숨소리 탓에 알테미온도 열이 올랐다. 어젯밤의 일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키페르는 애무하던 목과 가슴팍을 타고 내려가 알테미온의 중심에 다다랐다. 반쯤 서 있는 그곳은


주인의 입과 반응이 달랐다.

“흐응, 아, 안 돼!”

그가 성기를 입에 넣고 빨기 시작하자 알테미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이런 자극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간 상대해 온 사내들은 모두 아랫도리를 파고들어 저들의 성욕을 풀기 급급했기에 그의 중심은 제대로
자극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피가 아래로 몰렸다. 강렬하고 거침없는 자극에 이를 질끈 물고 양손으로 침대를 긁었다. 굴복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혀와 입술이 주는 자극은 성감을 돋웠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허벅지 안쪽과 둔부가 바르르 떨렸다. 제발 놓아주었으면 싶었다. 사정감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이를 알고도 끈덕지게 놓아주지 않으며 사출을 유도했다.

“싫어, 흣……!”

알테미온은 마지막 순간까지 손으로 루키페르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입에 사정하고 만
것이다.

“하…….”

몸에 힘이 빠지면서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수치심에 미칠 것 같았다. 루키페르의 혀 놀림에 가 버리다니.


심지어 몸을 달궈 놓은 욕정은 여전히 꺼질 줄을 몰랐다. 몸을 건드리는 손길이 아까보다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알테미온의 귀에도 제 숨소리가 열감에 들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루키페르는 수치심과 감추지 못하는 흥분에 물든 알테미온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입으로 받아


낸 정은 다시 알테미온의 아랫도리에다 뱉었다. 희고 끈덕진 욕정이 다리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볼만했다.

그는 허벅지의 부드러운 살결을 베어 문 뒤 아랫도리를 핥기 시작했다.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단단히 벌려 놓은 뒤였다.

“흐읏, 무슨 짓이야, 읏…….”

알테미온은 신음했다. 혀가 아랫도리 속까지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발가락까지, 다리가 잘게 떨렸다.
흥분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아래에도 하나 있는 것 같았다.

혀에 이어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꾹꾹 누르고 돌리다가 금세 빠져나갔다. 분명


루키페르의 것은 진작에 서 있었다. 그것이 제 안을 꿰뚫었을 때의 감각을 알고 있었던 알테미온은 감질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싫다고 하지 말라고 반항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중심과 유두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만져 주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다음 순간이 오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아랫도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떻지?”

“넣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알테미온의 입은 몸과 다른 말을 했다.

“그래? 어떻게 죽여 줄지 기대가 되는걸.”

이죽거린 그가 흉흉하게 선 것을 알테미온의 다리 사이에 바투 붙였다. 배가 붙어 서로의 것에서 떨림이


전해질 정도였다.

들어올 듯 말 듯 한 상태. 침을 삼키는 알테미온의 목젖과 유두를 슬쩍 건드렸다. 예민한 곳에 손이 닿자


알테미온의 하복부가 분명하게 떨려 왔다. 이에 루키페르가 비웃었다.

“어제처럼 끊어 먹을 기세로?”

“닥쳐.”

“시험해 볼까. 어떤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중심이 알테미온의 둔부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허리를 조금


물렸다가 다시 치받았다.

“흐읏, 으응…….”

명백하게 흥분에 찬 신음 소리. 알테미온은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참으려 애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낮에 깨물어서 난 상처가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흥분이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잘만 먹어 치우는데. 발정 난 개처럼.”

루키페르는 허리를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여유가 달아나기란 그도 마찬가지였다. 꽉 조여 오는


아랫도리와 수치심에 물든 알테미온의 얼굴은 인내심을 순식간에 바닥나게 만들었다.
제기랄.

자세를 고쳐 잡은 그가 빠르게 허리 짓을 시작했다.

“으흥, 응, 응…… 앗, 흐응!”

알테미온이 참지 못하고 교성을 질렀다. 안 된다는 거절의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몸의 감각이 전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하늘 높이 들린 두 발이 가늘게 떨렸다. 배 속을 두드리는 느낌에 몸이 떨리다
못해 머리끝까지 흔들어 놓았다.

“응, 흣, 으읏, 아!”

치받는 힘이 강해서 몸이 자꾸만 위로 밀렸다. 그는 루키페르의 등을 끌어안고 버텼다. 그러자 아래가 더


깊게 맞물렸고 그가 만족감에 바르르 떨었다.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단단한 등 근육들까지도 자신을 먹어 치우는 것 같았다.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자


발끝이 자꾸만 곱아들고 허리가 떨려 왔다.

“흐응, 아, 아! 아! 좋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령한 감각이 전부였다. 수치심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온전한 흥분만이 남았다.

땀으로 미끌거리는 두 사람의 몸이 늘씬하게 뒤엉켰다.

“더, 더, 으응, 흣, 해 줘!”

루키페르는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강렬한 흥분에 휩싸였다. 알테미온의 가느다란 손이, 힘이 들어간 그의
둔부를 탐욕스럽게 잡고 허리 짓을 도왔을 때 극에 달했다. 그가 짐승이 낼 법한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세차게 올려 쳤다.
“흐응, 아앗!”

아랫도리는 남성을 문 채 놓으려 들지 않았다. 딱 죽을 만큼 흔들리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이 상태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막사 안이 흥분에 찬 신음 소리로 물들었다.

***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눈을 감지 않았던 것 같다. 지쳐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던 듯했다. 과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통증을 호소했다. 깨어나긴
했어도 몸을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깼나 보군.”

루키페르의 목소리였다. 그는 한참 전에 일어나 병장기들을 손수 점검하고, 각 부대를 이끄는 장수들과


전투 작전과 상세한 이동 경로를 논의했다. 그리고 막사로 돌아와 표창과 단검을 손질하고 있던 중이었다.

작은 소음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잠들어 있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알테미온은 몹시 목이 말랐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가 물병을 두는 탁자 위로 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조심스레 탁자 위를 쓸어 보아도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종일 막사에 아무도 드나들지 말라고 말해
둔 탓에, 아코이테스가 물을 길어다 놓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지?”

나름대로 다정하게 말한답시고 말한 것이었지만 알테미온에게는 비아냥거림으로만 들렸다.

물 마시고 싶어요.
“큭…….”

대답하려던 알테미온은 당황하여 두 손으로 목을 그러쥐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목덜미에서는


열감이 느껴졌다. 소리를 내려 하면 목 안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막으로 다 막지 못한 바람에 잔기침을 했던 것과 함께 어젯밤 내내 소리 질렀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후회해 봤자 목은 완전히 상한 뒤였다.

한심한 꼴이었다.

장님이 말까지 못 하게 되다니.

목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던 루키페르가 다가와 성의 없는 손길로 목을 잡고 입안을


들여다보았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전날 일을 떠올린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에, 알테미온은 더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말간 낯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빛으로 물들자
루키페르는 한발 더 나아갔다.

“더 해 달라고 밤새 애원하느라 바빴으니까.”

그 입 닥치라고 외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짜증 난 알테미온이 걸터앉아 있던 침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깃털로 만든 이불이 손 모양대로 풀썩 파이자, 루키페르의 웃음소리가
멎기는커녕 오히려 높아졌다.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가?”

미친놈.

알테미온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떨었다. 저런 놈 품에 안겨 밤새 하고 또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웃음을 뚝 그친 루키페르가 헝클어진 긴 머리채를 쓸어 넘겨 주며 낮게 속삭였다.

“그게 네 방식의 미인계라면 지금쯤 넘어가 줘야겠지.”

그리고 입술로 귓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밤새 하고도 또 발정이 날 수 있단 말인가?

괴물 같은 체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본격적으로 범할 요량인지 가면을 벗어 던진 후 알테미온을 뒤로


넘어뜨렸다.

“크윽!”

과격한 움직임에 알테미온은 허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러다 죽을 것만 같았다.

“어제처럼 울어…….”

이죽거리던 루키페르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알테미온이 퍽,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그의 뺨을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만하라고.

몸살이 심한 데다 목소리까지 잃은 알테미온이 할 수 있는 거부 표시였다.

“하.”

몸을 일으킨 루키페르가 맞은 뺨을 감싸 쥐었다. 살갗에 닿은 남의 손길이 어색했다. 맨뺨을 맞아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생소한 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용한 상대가 더 무서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알테미온은 곧이어 터진 호탕한 웃음에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제법인데.”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왜 저렇게 즐겁다는 듯 웃는 걸까. 멋대로 화내고, 멋대로 기뻐하고.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작자였다.

“주먹질에 재능이 있군.”

미친놈의 목소리가 다정한 어조마저 띠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알테미온이 얼마나 질색하고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겠지만 내게 부탁하고 싶지 않겠지? 아마도 아코이테스를 부르고 싶을 거야.”

그 말은 정곡을 찔렀다. 루키페르 앞에서는 손짓 발짓 해 가며 부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어. 너도 지금 네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내 말에 따를 거야. 밤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무척이나…… 야하거든.”

알테미온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옷자락을 들어 살갗을 가리려 애썼다. 루키페르는 또다시


웃음을 참지 않았다.

“난 이대로도 좋지만, 네가 싫다면 씻을 수 있도록 샘으로 데려다주지. 네 꼴을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안전하게 업어서 말이야. 어때, 그러고 싶나?”

알테미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저 작자는 정말 자신을 이 꼴 그대로 막사에


남겨 두고도 남을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품삯을 받아야겠는데.”


물론 루키페르는 호락호락하게 자비를 베풀 성미가 못 되었다.

“별건 아니고, 다음에 한 번 빨아 주면 돼.”

***

루키페르는 약속을 지켰다. 넓은 천으로 감싼 알테미온을 들쳐 메고 인적이 없는 샘으로 데려갔다 왔다.


몸을 완전히 감싸는 새 옷을 입은 후에야 아코이테스를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

말을 못 하니 종일 인상을 찡그리며 의사 표현을 하는 알테미온을 두고, 루키페르가 막사 밖으로 다시


나온 것은 해가 진 뒤였다.

키쉬르의 아들들은 이곳저곳에 불을 피워 놓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모닥불 위로 꼬챙이에 꿰인 고기들이


익어 가자 연기를 타고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퍼져 나갔다. 여유롭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카우노스 또한 포도주를 부은 갈빗살을 솜씨 좋게 꼬챙이에 꿰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다가왔다.

“마침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알리려 했는데. 딱 맛 좋게 구워진 참입니다.”

“냄새가 기가 막히는군. 양은 충분한가? 싸움이 머지않았으니 모두 잘 먹어 둬야 하는데.”

“예,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루키페르가 카우노스의 옆에 자리 잡았다. 먹음직스럽게 익힌 넓적다리살에서는


기름기가 흘렀다. 뜨겁게 달궈진 꼬챙이에서 고기를 능숙하게 빼내 한입 베어 물었다.

막 익혀 뜨거운 김이 오르는 고기에 물에 탄 포도주를 곁들여 마시는 동안, 전사들은 점차 흥이 올랐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또 다른 누군가가 추임새를 넣었다. 전쟁 중인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확신과 여유가 있었기에 사기는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간밤에 소리가 대단했습니다.”


보릿가루를 뿌려 올린 고기를 씹어 삼킨 후 카우노스가 결국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잠들었어야 할 키쉬르의 전사들을 모두 깨웠을 게 분명했다. 왕의 막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 명도 빠짐없이 들었겠지. 루키페르가 입꼬리를 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계속하려던 카우노스는 왕의 기분이 어제보다 훨씬 나아 보이자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루키페르가 괜찮으면 상관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소리를 낮춘 채 곧바로 중요한 보고를 했다.

“좀 전에 선발대의 일부가 돌아왔습니다. 도주하던 트리온 일행을 찾아내 몇 명의 전사를 죽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트리온은 약삭빠르게도 도망쳤다고 합니다.”

“도망치는 데 재주가 있는 놈이군. 더러운 시궁창 생쥐처럼 말이지.”

“예. 그 커다란 생쥐가 작은 성채로 들어가 더 이상 쫓지 못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명계로 떠날 날을


늦추고 싶겠지만 오래가지 못하겠지요.”

자신들이 결국 테베레를 멸망시킬 것이다. 카우노스는 확신했다. 테베레의 삼왕 또한 그들의 나라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트리온, 피네오스, 에우한. 순서가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에우한입니다. 그자를 건드리면 아폴로의 분노를 살 것이 분명하니까요. 신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꼬일 수도 있습니다.”

“테베레를 건든 이상 아폴로의 분노를 피하긴 어려워. 하지만 네 말대로 에우한을 먼저 건드려서 좋을 건


없겠지. 아, 삼왕들은 서로를 매우 싫어한다더군.”

“예. 어쩌면 이미 내분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린 그걸 이용해야겠지요.”

그는 왕의 잔이 비자, 재빨리 물과 포도주로 채웠다.

“물론 피네오스가 가장 먼저다.”

루키페르가 불쑥 말했다. 그는 카우노스가 아닌 모닥불을 노려보듯 보고 있었다.

“그 망할 신탁이 말했지.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라고 말이야. 신들의 뜻대로 될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그놈만큼은 내 손으로 잡아야 해.”

카우노스는 대답 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하는 두 사람의 곁에서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울렸다. 불씨가 튀어 하늘로 올라갔으나 높이 다다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오래 함께했기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그의 기분이 어떤지 추측할 수 있었다. 왕이자 친구인
불사의 인간은 심란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정말 결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까? 단지, 확답을 받고 싶습니다.”

그들은 형제처럼 자랐다. 아카이아 땅에 버려진 고아들이 지켜야 할 것이라곤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의리뿐이었다. 그러니 루키페르의 원한이란 카우노스에게도 똑같이 중요했다.

루키페르는 피네오스를 증오했다. 그의 모친 아에로페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고도 여전히 왕위를 지키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자.

“물론. 목숨에는 목숨으로 갚아야지. 그놈이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면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어야겠어.”

루키페르가 남은 뼛조각을 멀리 던져 버렸다. 그자가 자신의 부친이건 아니건 아에로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카우노스여.”

“예.”

잠시 망설였던 그가 무거운 어조로 진실 하나를 전했다.

“길리포스는 무사하다.”

“정말입니까? 정말, 길리포스가! 무, 무사하다니…….”

흥분한 카우노스가 술잔을 세게 내려 놓는 바람에, 술이 조금 쏟아졌다. 그의 선한 눈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길리포스가 살아 있다는 건 무척 기쁜 소식이었다. 그만큼이나 길리포스와 친했던 카우노스라면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그의 죄책감과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전해야 하는 소식이었건만, 루키페르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카우노스가 어떤 질문을 할지 너무나 뻔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십니까?”

“메르쿠리우스가 날 찾아와서 알려 주더군.”

거짓을 말할 수 없어서 그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의외의 대답에 카우노스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신들의 정령 말입니까?”

“그래. 웃기는 수작이지.”

이미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을 갈무리한 후였음에도 그의 마음에는 다 타지 않은 감정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그들이 벌써 지켜보고 있다면…….”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아니, 나아진 것이군. 길리포스를 구할 길 또한 여전히 남아 있을 테니까.”

***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전사들의 손에 돼지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코이테스 또한 거구의


사내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한자리를 잡은 채 허겁지겁 고기를 뜯고 있었다. 뼈까지 씹어 삼킬 기세였다.

“어이, 아코이테스야.”

“예?”

이미 식사를 마친 후 여유롭게 반쯤 드러누워 무화과를 껍질째 먹고 있던 전사 하나가 소년을 툭툭 쳤다.

“너는 루키페르 님의 막사에 드나들지 않냐?”

“그런데요.”
끝까지 핥다가 더 이상 먹을 게 없자 목뼈를 던진 소년이 남은 고기가 없나 모닥불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이렇게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건 아니었다. 아코이테스는 아직 식사를 덜
마친 저쪽 무리에 고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솥뚜껑만 한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먼저 형님과 대화를 마치자꾸나.”

“에, 나중에 물어보세요.”

저쪽 무리에서도 고기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소년의 눈길이 안타깝다는 듯 자꾸 고기로 향했다.

“더 먹고 싶으냐? 형님들이 가져다줄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휘휘 젓자, 옆에 앉아 있던 보병 하나가 얼른 일어나 꼬챙이 하나를 통째로 들고 왔다.

소년이 기뻐서 양손을 내밀었으나 그들은 바로 잘 익은 고깃덩어리를 주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답해 주면 이건 전부 다 네 것이다.”

“무엇인데 그럽니까?”

아코이테스가 안달복달하며 재촉했다. 전사 몇 명이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소년을 둘러쌌다.

“그, 말이다.”

남은 무화과를 씹어 삼킨 전차병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왕의 막사에 있다는 그자 말이다. 네가 시중을 들고 있겠지?”

“……예에.”

묻고자 했던 게 알테미온 님이었나. 소년은 어쩐지 위협당하는 느낌에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렇게 어여쁘냐?”

“예에?”

뜬금없는 질문에 아코이데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가 들을라. 목소리 좀 낮추고 대답이나 해라.”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소년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뭐, 궁금하니까……. 모습 한번 드러내지 않는데 그, 소리가 좀…….”

전차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전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코이테스만 어리둥절했다. 소년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지곤 했기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건지. 이런 걸로 놀리면 절 괴롭힌다고 루키페르 님께 이르겠습니다.”

소년은 밉살스럽게 쏘아붙이고 보병의 손에 들려 있던 꼬챙이를 날래게 빼앗아 들고 저만치 멀어졌다.

저 쥐방울만한 걸 쥐어박을 수도 없고. 남겨진 전사들은 민망해서 뒷머리를 긁었다.

저 혼자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니. 그들 때문에 홀로 있을 알테미온을 떠올린 아코이테스가


멍청한 자신을 자책하며 음식을 챙겼다.

“알테미온 님, 저 아코이테스입니다.”

소년은 큰 소리로 외친 후 잠시 막사 밖에서 기다렸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알테미온을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일부러 발소리를 타박타박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 밖에서 푸짐한 식사를 하고 있어서…… 고깃국을 가져왔습니다. 아플수록 더 잘 먹어야 합니다.”
밖에서 장정들을 쏘아붙일 때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톱풀을 달인 차도 있습니다. 마시면 목이 한결 편해질 거예요.”

죽은 듯 누워 있던 알테미온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년의 시중을 받아 가며


식사했다. 목은 모래가 잔뜩 들어가 있는 것처럼 버석거리는 느낌이었다.

“…….”

말없이 주는 대로 먹는 맑은 얼굴이 유독 지쳐 보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데다 몸 상태가 나쁘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소년은 굉장히 신경 쓰였다.

“국은 입에 맞으시나요?”

알테미온은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대답했다.

“돼지를 잔뜩 잡고 배불리 먹는 게 여길 떠난다는 신호래요. 아마 내일 대낮쯤.”

그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머무르기 좋은 곳이 아니지만, 이동하면 더 힘들 텐데…….”

아코이테스가 말끝을 흐렸다. 길바닥에서 자라서 눈치가 빨랐기에 이제 알테미온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전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몸으로 전쟁터에 따라다녀야 한다니.

“그래도 따라갈 생각이십니까?”

알테미온이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소년의 질문에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좋게 대해 주는 법이 없는 자의 옆을 굳이 선택하는 것이니까.
루키페르는 영웅이 아니라 악한이었다. 그래도 트리온보다 나았다. 그는 클리티에가 죽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케레스를 끝장냈다. 복수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였다. 그런 이유에 대해 소년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알테미온은 목의 통증을 완화시켜 준 차를 더 달라고 손짓했다. 목소리를 되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윽한 어둠은 진영이 있는 언덕 위에 내렸다. 그러나 잔치의 열기와 전사들의 혈기를 앗아 가진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이들은 횃불을 세워 둔 채 참나무 가지에 걸린 과녁을 향해 표창을 던졌다.

알테미온은 떠들썩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금세 잠들 채비를 했다. 눈을 감고 누운 그를 위해 소년이


초들을 껐으나 바깥을 밝힌 횃불들 때문에 막사 안까지 빛이 어른거렸다. 천막 위로 드리운 짙은
그림자들이 춤추듯 움직였다.

“잠드실 때까지 여기서 지키겠습니다.”

알테미온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물건들을 최대한 조용히 정돈한 아코이테스는 자리에 앉아 한편에 정리되어 있는 루키페르의
무구들을 동경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자루를 만든 창과 날이 잘 서 있는 거대한 장검, 황금 투구, 황소 가죽으로 만든


방패, 갑옷과 억센 활. 보기만 해도 경탄이 나왔다. 힘이 놀라울 만큼 세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루키페르가 저것들을 갖춰 입고 전장을 달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런 것을 들고 휘두를 수 있을까? 소년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장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목이 나가고 싶지 않다면 잡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차가운 경고에 아코이테스가 놀라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무구의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빛을 등진 채


소년을 내려다보는 그의 가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져서 한층 무섭게 느껴졌다.
“왕이시여.”

소년이 고개를 숙이며 잠든 알테미온을 힐끗거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잠드신 지 얼마 안 되셨습니다.”

루키페르는 코웃음 쳤다. 잠든 게 아니라 잠든 척이었다. 여러 밤을 함께 보낸 터라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나가 봐라.”

“예.”

소년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잠든 척해 봤자 소용없어.”

알테미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비죽대듯 입꼬리를 올린 루키페르가 가면을 벗고 그의 옆에 누웠다.


건장한 몸을 누이자 침상이 삐걱거렸다. 전날의 후유증을 앓는 건 알테미온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팔을 뻗어 알테미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기가 위협하지 못할 만큼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알테미온이 불편한 듯 팔을 쳐 내려 하자 이렇게 못 박았다.

“아픈 놈 건드릴 생각 없어. 시체 치우기도 싫고, 나만 곤란하지.”

열띤 숨소리에 섞여 술 냄새가 풍겼다. 카우노스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더니 루키페르답지


않게 다소 취했다. 주신 바쿠스의 은총으로, 그의 날 선 품성도 누그러진 상태였다. 여전히 고약한
말버릇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듣는 사람을 열받게 하는 투가 아니었다.

“필멸이 운명이란 것도 우스워……. 있다 한들……, 그조차 정복해 버리면 그만이지.”

혼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어지간히 많이 마셨나 보지. 알테미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찍 잠이 들기 위해 애쓴 보람이 없게도
취기가 오른 루키페르가 먼저 깊은 잠에 빠졌다.

“…….”

괴이한 작자.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숨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단정했다. 알테미온은 숨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미려한


손가락을 뻗었다. 괜한 호기심의 발동으로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던 저번 일을 반복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는 쉬웠다.

금방 잠들었으니 쉽게 깨지 않겠지.

손가락은 곧은 콧대 옆으로 움푹 파인 눈가와 솟은 광대뼈를 지나며 유려한 선을 그렸다. 우아한 광대뼈


위에서 머물던 손가락이 망설이다 눈꺼풀로 향했다. 긴 눈꼬리를 지나자 속눈썹이 손끝을 간질였다. 눈을
깜빡이면 부드럽게 사부작거릴 듯했다.

단단한 눈썹뼈를 만지다 옆선을 타고 귀의 형태도 따라 그렸다. 귓불에서 턱뼈로 이어지는 곳이 절륜했다.

알테미온은 이전에 손으로 감상한 적이 있는 신전의 조각상을 떠올렸다. 찬란한 광휘를 발한다는 아폴로나,
연정을 일깨운다는 쿠피도의 모습을 묘사했다던 그 조각들과 지금의 감각이 겹치는 것은 왜일까.

***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는 한 사내가 테베레의 주성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아 뒀던 천을 높이 흔들어 성을 지키는 병사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천에 새겨진 표식을 확인한 병사가 황급히 성문을 열었다.


“리, 리기아에서 왔, 소……!”

성안으로 무사히 들어오자 해냈다는 안도감에 그의 무릎이 푹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병사가
황급히 마실 물을 건넸다.

리기아에서 온 전령이라니. 협상이 깨진 걸까? 병사가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소?”

물을 조금 마시고 정신을 차린 전령이 대답했다.

“결렬이오. 루키페르가 신전에서 공격을 감행했소.”

“오, 유피테르여……! 속히 왕궁으로 갑시다.”

쉬지 않고 달려온 전령은 맨발이었다. 샌들의 가죽끈이 끊어졌으나 다시 꿰어 신을 틈도 없었기에


발바닥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일어나 병사를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그들의 등장에 시종들이 바삐 왕들을 모셔 왔다. 먼저 나타난 것은 피네오스였다. 그는 테베레의 삼왕 중


가장 침착한 성품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도 지금만큼은 튜닉에 달린 술 장식이 흔들릴 정도로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되었나?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

“루키페르가 갑자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불경하게도 신전 내부에서 말입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대처도
못 하고 당했습니다. 그나마 일부는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고…… 트리온께서도 무사하십니다. 증원을
요청하셨습니다.”

전령이 한참 설명하고 있는 중에 에우한이 느긋하게 등장했다. 그 때문에 전령은 다시 처음부터 설명해야


했다.

늙은 에우한은 능구렁이 같은 자로 그다지 동요하지도 않으며 전령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루키페르가 공격했지? 무엇 때문에? 그는 내가 잡아 둔 포로 때문에 그럴 생각이 없었지 않나.”

“그, 그것이…….”

“설마 트리온과 그의 신하들이 망친 것은 아니겠지? 사실대로 전하거라.”

“협정의 방식을 두고 키쉬르와 언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는데, 그것이
루키페르의 성미를 건드린 것 같았습니다.”

“오, 신탁이! 무슨 내용이었지?”

눈을 가늘게 뜬 에우한이 하얗게 센 수염을 어루만지며 추궁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진 화려한
금반지가 광채를 발했다.

“‘최후에 월계관을 차지하는 자는 전투의 승리 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자의 분노를 샀군. 결국 키쉬르 놈들이 이곳으로 향할 것은 분명해졌구나. 우리까지 곤란하게
되었어, 안 그렇소?”

에우한이 피네오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욕심 많은 트리온이 일을 그르쳤다는데 공감을 얻고자 함이었다.

“트리온께서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전사들을 구하려면 속히 병력을 보내야 합니다.”

“살아남은 전사가 몇이나 되지?”

“서른 명 정도는 됩니다.”

“흠, 주성을 지켜야 할 전사들을 빼내 지원하기에는 위험한 구석이 있군그래.”

에우한이 증원 요청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키쉬르가 트리온을 처치해 줄


것이다. 약삭빠른 그자는 갈수록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런 자를 구하기 위해 소중한 테베레의
아들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전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그를 지켜 주는 아폴로의 은혜가 있거니와,


길리포스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잡아 둔 사람도 그였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간 트리온 따위를 신경 써 줄 자비 따위 없었다.

에우한은 전령을 치하하며 그를 위해 목욕물을 준비하라 명한 뒤 피네오스와 함께 중앙 정원을 걸었다.


“피네오스여, 테베레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필요로 하오.”

그가 테베레의 자랑, 폴룩스 장군을 언급했다.

“잘 알고 있소.”

“어디 핏줄인지, 출신인지도 모를 자가 스스로 왕관을 썼을 따름이오. 잔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그대의


아들인 폴룩스만 하겠소?”

“과찬이시오.”

피네오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미도 없이 당신의 힘으로 키운 아들인데 자랑스러워하는 게 당연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에우한이 일부러 폴룩스의 모친을 언급하자 피네오스가 정색했다.

“오, 말 그대로라오. 내 오해를 산 듯하군. 당신의 죄의식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소.”

“…….”

피네오스는 작별 인사 없이 휙 돌아섰다. 에우한은 창공으로 번지기 시작한 노을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서쪽을 향해 약간 기울었을 때. 키쉬르의 아들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테베레의


주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트리온이 숨어든 성채를 먼저 공격할 것이라 했다.

알테미온은 모래바람 때문에 잔기침을 했다. 하루의 휴식으로 몸 상태는 나아졌으나 목은 여전히 타는 듯
아팠다. 그는 커다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움직이는 수레 안에 앉아 있었다.

“저, 박하 잎이라도 드릴까요?”

기침 소리에 걱정스러운지 아코이테스가 권했다. 알테미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작은 주머니에 챙겨


온 박하 잎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소년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가린 천을 살짝 들고 박하 잎을 씹었다.

얼굴을 가린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피 끓는 무인들이 드글거리는 전쟁터에서 신분을 훤히 드러내는


바보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옆에는 항상 아코이테스가 붙어 있었기에 키쉬르의 전사들과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이따금 괜히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수군대는 말소리로 보아 하니 왕의
매춘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가 건조하게 웃었다. 그 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전쟁터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몸종까지 데리고 있으니. 수레 하나 끌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어 이렇게 편하게 전쟁터로 향했다.

‘아카이아 땅에서 그 이름을 없애 버릴 것이다.’

루키페르의 호언장담을 떠올렸다.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이지 강했으니. 테베레는 잘 훈련된


충성스러운 전사들을 바탕으로 탄탄한 군사력을 가졌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망해 가던 키쉬르를 살려
대적하는 능력은 신이 내린 재능에 가까웠다.

미치도록 질투 났다. 루키페르의 오만함에는 근거가 있었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힘과, 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 생명력,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카리스마.

태양 아래 아카이아의 만물조차 보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그는 그 땅을 정복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갖고 싶은 건 뭐든 갖겠지.

“왕께서 군장을 하시니…… 더 무서워 보입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코이테스가 루키페르 이야기를 소곤거렸다.


“아까 정찰 다녀온 형님이 말해 줬는데, 저 방패만 해도 황소 가죽 아홉 겹으로 만든 거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가누기도 힘들다지요. 그리고 저 갑옷의 일부는 바다 괴물의 가죽이라고 합니다.
키쉬르인들을 괴롭히던 바다 괴물이 있었다는데, 그 뿔만 해도…….”

알테미온의 적적함을 덜어 주기 위해 시작한 설명이었으나 소년이 그만의 관심사에 몰두했다.

루키페르의 무구라니. 훌륭한 무기가 없다고 해서 못 싸울 리도 없는데. 아무래도 좋은 것 아닌가.

알테미온은 문득 이제 지킬 이유가 없어진 트리온의 명령을 떠올렸다.

‘그자의 약점을 찾아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루키페르에게 약점이 있을까.

독으로 죽지 않는 그런 인간에게? 신을 혐오하는 그가 신일 리 만무했기에 괴물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손으로 확인한 그의 외관은 분명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사의 인간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준다는 신의 음료,
넥타르를 훔치기라도 한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에 알테미온의 호기심은 날로 조금씩 더해 갔다.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을 모르는 아코이테스는 계속 눈에 들어오는 광경들이나 전쟁에 대해 주워들은


바를 늘어놓았다.

“산비탈이 계속되는군요. 수레가 많이 흔들리는데, 속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가파르고 자갈이 가득한 길 탓에 바퀴가 빠질 듯 흔들렸다. 알테미온이 미처 의사 표현을 하기 전에


수레가 급하게 멈춰 섰다.

“으아앗!”
예고 없이 수레가 크게 흔들리자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넘어질 뻔한 알테미온을
두 팔로 잡았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소년의 의문에 응답이라도 하듯, 화살 하나가 수레바퀴에 꽂혔다.

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화살이 동시에 키쉬르 일행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들을 노리는 활이
산비탈 위쪽 덤불들 틈으로 보였다.

기겁한 아코이테스가 수레에 실려 있던 방패를 끌어당겨 그 자신과 알테미온을 가렸다.

“제기랄, 습격이다!”

전사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졌다. 그들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소란에 무슨 사태인지
알아차린 알테미온이 두 손을 꽉 쥐었다.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알테미온 님,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가리고 있으니까……!”

알테미온이 소년의 팔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을 맞은 병사가 있지만 위급한 사람은 없다는 걸 확인한 루키페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틈을 주지 마라! 멈추지 마라!”

그 순간 정확히 그를 겨낭해 집채만 한 바위가 굉음을 내며 굴러 내려왔다. 힘 좋은 장정 열은 들러붙어야


밀어 볼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비탈길을 굴러오는 무시무시한 광경에 루키페르의 옆에 있던 자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루키페르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바위가 굴러오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를
압사시킬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이르자 두 손을 뻗어 바위를 막았다.
손가락 마디를 거쳐 손목과 팔꿈치, 어깨와 등에 이르기까지 잘 짜인 팔 근육이 크게 꿈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바위가 멈췄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전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이라 보기 힘든 엄청난 괴력이었다.
그들의 왕이 얼마나 강한지 이미 여러 번 본 바가 있어도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진
않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크게 놀란 적들이 기세가 눌려 차마 활을 쏘지 못하는지 화살 비가 그쳤다.

“루키페르여, 길이 막혔습니다.”

카우노스가 힐난하듯 말했다. 그의 힘 자랑 덕분에 사기가 올라갔으나 멈춰 놓은 바위가 그들이 나아갈


길을 막아 놓은 것이다.

“저 위로 다시 던질까?”

“자칫하면 우리 병사들이 다칩니다.”

루키페르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조금 비틀더니 바위의 반대편으로 가 힘주어 밀었다. 그들이 선 길보다
지대가 낮은 쪽으로 굴러떨어진 바위가 굉음을 냈다.

“다시 출발한다!”

“예!”

키쉬르의 전사들은 군기가 잘 잡혀 있어서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들에게는 루키페르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군신과도 같은 존재가 함께하는데 두려울 게 어디 있을까? 방패와 투구로 몸을 가린
채, 주춤했던 행군을 계속했다.

선봉에 선 루키페르가 냉정히 생각했다. 테베레 주성의 전사들이 벌써 이곳까지 왔을 리는 만무했다.


살아남은 트리온 일당이겠지. 이따위 허접한 수작으로 막으려 들다니. 그들이 저 위에서 내려와 검을
맞댈 만큼 배짱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활을 쏘던 이들은 루키페르의 예상대로 트리온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키쉬르 병사들이 바위와 화살
때문에 당황하는 틈을 타 아래로 뛰어 내려가 공격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키쉬르인들이 동요 없이 빠른 속도로 길을 벗어나는 것을 보자 그들이 역으로 당황하였다. 저들이 불리한
지형에서 벗어난다면 끝장나는 건 자신들일지도 몰랐다.

“트리온이여, 이제 어, 어떻게 합니까?”

“겁먹지 마라. 너희들은 모두 리기아에서 살아남은 전사들 아니냐! 루키페르가 강하다 한들, 저자 하나일
뿐이야! 키쉬르의 병사들이 모두 강한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트리온은 애써 침착한 척했다. 하지만 테베레의 전사 여럿이 간신히 굴린 바위를 저렇게 가볍게 움직이는
루키페르의 모습에 공포감이 치솟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 하지만 결국 저자의 손에 찢겨 죽을 겁니다!”

“오, 유피테르시여, 부디 저희를 가엾이 여기소서!”

전사들은 공포에 질려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완전한 패배감이 그들 사이로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전의를 상실한 데다 도망갈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애초에 습격 계획을 짠 것은 트리온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지원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주성에 남은 두 왕이 굳이 자신과 소수의 전사들을 살리기 위해 지원군을 보낼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리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제 그가 뭐라 말해도 전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트리온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자.

결심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등지고 숲을 향해 달려갔다. 그에게는 자신의


한목숨 부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었다. 겁에 질린 그의 걸음은 여느 때보다 빨랐으며 혼자의 몸이기에
추격을 피하기도 쉬웠다.

반면 의지를 상실하고 신을 찾던 신하들은 응답을 받았다. 신실한 인간들이 잔혹하게 죽을 것을 불쌍하게


여긴 유피테르가 그들을 온순한 산양 떼로 둔갑시킨 것이다.

젊은 혈기로 가득했던 듬직한 몸은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였으며, 짧은 머리털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뿔이


솟았으며 주둥이가 길어졌다. 발은 짧고 두꺼워졌으며 발굽이 생겨났다.

루키페르와 키쉬르인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마침내 적들이 있던 위치에 도착했다. 그 자리에는 버려진


무기들과, 그들을 보자 찢어지는 듯 우는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산양들만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군요.”

루키페르는 우왕좌왕하며 날뛰는 산양들을 노려보다 돌아섰다. 전부 남김없이 죽일 생각이라 솟구쳤던


살심을 억눌렀다. 그 쥐새끼 같은 트리온이 또다시 도망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피해 상황은 어떤가?”

“대수롭지 않은 정도입니다. 팔과 다리에 화살을 맞은 병사가 여덟입니다. 스친 자는 조금 더 되고요.


치료하고 움직일까요? 아니면 도망친 놈들을 쫓을까요?”

“급할 것 없지. 치료해라.”

카우노스는 지시대로 불을 피우고 약초를 가져오라 명했다. 루키페르는 중간쯤에서 따라오던 수레 쪽으로
향했다.

소년은 알테미온에게 속사포처럼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방패 뒤에 숨어 떨 때는 언제고


용기가 생기자 눈을 밖으로 내놓고 상황을 구경했던 것이다.

“다친 곳은 없나?”

“예! 왕이시여, 제가 지켰습니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대답에 루키페르가 빈정거렸다.

“잘 숨었겠지.”

하지만 소년의 눈에는 그가 어느 때보다 위대하게 보였기에, 소년은 화내지 않고 속도 없이 웃었다.


알테미온은 조금 놀란 것 외에 괜찮았다. 습격보다 집채만 한 바위를 막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놈이 또 도망쳤어.”

루키페르가 트리온을 언급했다. 알테미온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건 없어. 곧 잡아 줄 테니까.”

이 좁은 아카이아 땅에서 언제까지나 피해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

까마귀가 창공을 가로질렀다. 검은 깃털을 떨어뜨린 새는 시야에 테베레의 주성이 들어오자 하강했다.
단단히 쌓아 올린 성벽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미처 행인들이 새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다시 날개를
폈다.

새가 향한 곳은 성 중앙에 자리한 왕궁이었다. 붉은 지붕을 가진 2 층 주택은 창문이 열려 있어 내부가


훤히 보였다.

방 안에 홀로 있던 남자는 단단한 몸의 테베레의 영웅, 폴룩스였다. 손수 병장기를 손질하고 있던 그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숱이 많고 윤기 나는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의 이름은 아탈란테,
폴룩스의 아내였다. 샌들 굽이 매끄러운 돌바닥에 부딪쳐 발소리를 울리자 그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

“아, 아탈란테.”

“벌써 채비하시는 건가요?”

아탈란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무기들을 보았다. 성실한 폴룩스는 결코 무구


손질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행했다.
“한시 바삐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이 도시가 위험에 처할 테니 말이오.”

손질에 집중한 폴룩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탈란테는 수없이 망설인 끝에 결국 진심을 입에 담았다.

“……나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장군인 내가 나가지 않으면 테베레인들은 누가 지킨단 말이오?”

폴룩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 이해심 많고 다정한 성품인 그라 아내의 기분을 모르지
않았으나, 지금만큼은 단호하기만 했다.

“테베레에 장군이 당신 혼자는 아니잖아요. 적장이 잔혹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데…… 좀 더 지켜보다가.”

“사람들이 나를 믿고 있소, 아탈란테.”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제대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잘 익은 올리브빛 이마와 그 아래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걱정으로 가득한 아내의 눈과 마주쳤다.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오?”

아탈란테는 살면서 폴룩스보다 강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 또한 스스로 자부심이 있는 전사였기에


남편의 강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승전하여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것이라 믿어야 했다. 하지만 자꾸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올곧은 눈빛에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을 믿어요. 그저 꿈자리가 사나워서…….”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는 걸 잘 알지 않소. 그리고 테베레를 지키는 게 내 역할이오.”

그런 탓에 오히려 전사다운 혈기와 호기심이 샘솟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괴물
같은 자’라고 한단 말인가. 그는 그런 자와 꼭 겨뤄 보고 싶었다.

“오, 폴룩스. 당신은 기다리는 내 마음을 절대 모를 거예요.”


더는 참지 못했는지 목소리가 울음기로 떨렸다. 마음이 약해진 폴룩스가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아탈란테, 난 우리가 나고 자란 이곳을 지킬 거요. 테베레는 축복받은 땅이지. 볕 좋은 날에는 광장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경연을 하잖소. 웃고, 환호하고, 때론 눈물도 흘리지만 그건 훌륭한 이야기를 위한
것이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것도 경연을 하던 광장이었다.

아탈란테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그래요. 난 평화로운 테베레가 좋아요. 도대체 이런 아름다운 땅을 왜 짓밟으려 드는 걸까요!”

“당신이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비극보다 희극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은 눈물 흘리는 걸


싫어하니까. 그런 당신을 내가 울릴 리 있을까?”

지극히 다정한 말에 아탈란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속삭였다.

“다치지 않고 돌아오겠다고 맹세해 줘요.”

“물론이오. 난 질 생각은 조금도 없소.”

그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 마오. 당신은 이 땅에서 가장 강한 남자의 아내일 테니.”

3. 인간의 굴레

루키페르와 그의 전사들은 소마라고 불리는 도시에 다다랐다. 테베레가 거느린 도시 중 하나였으나 그들은
처음부터 이들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키쉬르인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입성해 민가를
차지했다.
루키페르는 전사들을 시켜 도시 안을 샅샅이 뒤졌다. 도시민들은 트리온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전사들을 이끌고 전날 떠났다고 증언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트리온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루키페르여, 걱정 마십시오. 곧 잡힐 겁니다. 지원군이 내일이면 합류할 테니 이 근처를 훑기에 충분한


인원이 될 겁니다.”

“그래. 시간문제일 뿐이지.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마라. 음식과 수면에 있어서는 더욱.”

그들은 산에서 사냥해 온 산양 고기를 먹었다. 막사 생활에서 벗어나 모처럼 모래바람이 통하지 않는
튼튼한 벽돌집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물론 알테미온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트리온이 코앞에서 도망쳤으나 초조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루키페르의 말대로 곧 잡힐 테니까. 그도 점차 키쉬르인들이 어째서 루키페르를 절대적으로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왕은 그의 사람들을 지킬 만한 능력이 있었고, 그 힘을 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클리티에 생각이 났다. 여동생에게 자신이 아니라 루키페르와 같은 오빠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가지 않았을 텐데.

일찌감치 침실로 들어온 그가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참고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바람이 불어닥치지
않는 따뜻한 곳에 있으니 금세 긴장이 풀렸다.

전사들을 살핀 뒤 뒤늦게 침실에 들어온 루키페르는 세상모르고 자는 알테미온과 수건을 든 채 의자에


앉아 잠든 아코이테스를 발견했다.

“…….”

전투와 관련 없는 남자와 소년의 낯에는 평화와 안식이 서려 있었다. 거대한 바위 앞에서도 물러서는 법을
몰랐던 루키페르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가 가면을 벗고 비로소 홀로 휴식하는 침실이란 이런 곳이 아니었다.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아 한기가


돌고, 평화가 아니라 싸늘한 적막이 머무는 곳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온기가 임시로 머무는
침실에조차 스며들었다.

인기척에 아코이테스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눈을 뜬 소년이 그를 발견하고
재빨리 일어섰다.
“아, 왕이시여, 돌아오셨군요. 깜빡 졸긴 했지만, 정리해 두었습니다.”

혼나기라도 할까 봐 멋쩍게 웃으며 수건을 챙긴 소년은 졸려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만 나가 봐라.”

“예. 쉬십시오.”

그는 소년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소년이 사라지자 침실 분위기는


한층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잠든 알테미온은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깨어난다고 해서 다를 것도 없지만.

흰 이불보 사이로 황금 실타래와도 같은 긴 머리카락에 휘감긴 웅크린 몸이 보였다. 깊은 잠에 빠진 그는


얕은 숨소리만 냈다. 말 한마디 지지 않고 화내는 서늘한 목소리가 사라지니 지나치게 조용한 것 같았다.

루키페르는 가면을 벗고 맨뺨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침실을 밝히는 촛불 때문에 민낯이 거울에 어른어른
비쳤다. 그의 푸른 눈이 거울에 비친 자신과 마주하기 무섭게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그는 촛불을 꺼 어둠 속에 자신을 숨겼다. 태양이 뜨기 전까지 그대로 잠들 수 있었다면. 그에게도


잠깐의 안식이라는 축복이 내린 셈일 것이다. 그러나 루키페르 본인이 신의 축복을 믿지 않듯이, 그에게
안식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침상에 누웠던 그가 눈을 번뜩 떴다.

살갗을 스치는 미풍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미미한 살기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소하며 베갯잇을 움켜쥐고 잡아 뜯었다. 단번에 찢긴 천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동시에 뛰듯이 일어나 어둠 속의 누군가를 걷어찼다. 매서운 북풍 위에 올라탄 것처럼 가차 없는
움직임이었다.

“크윽……!”
군마와도 같이 잘 단련된 다리가 불청객의 복부에 맞았고, 그자가 억눌린 침음을 뱉었다.

루키페르가 눈을 번뜩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한 손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야음을 틈타면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나?”

목소리에 깃든 조롱과 여유로움에 암살자의 기가 꺾였다. 달빛조차 숨은 밤, 어둠 속의 상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소름 끼쳤다. 그의 특기는 조용히 숨어들어 상대가 알아차리기
전에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었지, 인간 같지 않은 상대와 대결하는 게 아니었다.

들킨 이상 승산이 없었다. 그는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손에 쥔 단검을


루키페르 쪽으로 날린 뒤 창가로 몸을 던졌다.

그 바람에 그는 루키페르가 날아드는 칼날을 손가락 사이로 잡아낸 후 다시 도망치는 그의 등을 향해


날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끄악!”

어찌나 세게 날렸던지 등에 깊게 꽂혔다. 척추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불청객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곤히 잠든 사람들을 모두 깨울 만큼 큰 소리였다.

공포에 물든 그의 눈에 루키페르의 새파란 눈이 보였다. 웃고 있었다.

“사, 살려…….”

그가 내지른 비명에 잠에서 깬 사람 중에는 알테미온도 있었다. 찢긴 베개 탓에 머리카락과 얼굴에 새


깃털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살갗을 간질이는 깃털들을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피 냄새…….”

비릿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깜짝 놀라 목을 잡았다. 다시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따분한 놈이군.”

루키페르는 자신의 장검을 들어 암살자의 목을 베었다. 누가 보냈는지 캐묻기도 귀찮았다. 목이 떨어지는


걸 확인한 후 얼굴을 대충 가렸던 천을 휙 던져 버렸다. 손에 피가 튄 데다 침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무슨 일이죠?”

“불청객이 있었다.”

생각 없이 턱을 쓸고 난 뒤에야 손가락에 피가 묻었다는 걸 알아차린 그가 작게 욕설을 뱉었다. 식수로


가져다 놓은 물을 흘려 턱과 손을 닦았다.

“죽였나요?”

“그래.”

알테미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누웠다. 잠을 방해하는 혈향이 거슬릴 뿐 여전히 졸음이 쏟아졌다.

“루키페르여!”

뒤늦게 나타난 카우노스가 문밖에서 외쳤다. 루키페르는 가면을 제대로 쓴 뒤 그에게 출입을 허락했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

“보초 세 명이 죽어 있었습니다.”

바닥에 촛불을 비춰, 죽어 있는 암살자를 발견한 카우노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라고 해서
루키페르의 무력이 약해지는 건 아니나 혹시라도 얼굴이 드러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를 따라 들어온
병사들이 시체를 끌고 나갔다. 그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잠든 듯 보이는 알테미온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그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루키페르가 소리 없이 웃었다.

“달빛조차 없는 밤이니 아무래도 좋았지.”

“부디 조심하십시오.”

암살자가 빠져나가려 했던 창문에서 어둠이 넘실거리며 그를 끌어당기는 듯하였다. 그는 충동적으로,


떠나려는 카우노스를 잡았다.

“카우노스여.”

“듣고 있습니다.”

“나와 너, 그리고 길리포스 사이에는 비밀이 없기로 맹세했지.”

“그랬습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그들은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카우노스는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메르쿠리우스가 날 찾아왔을 때, 그는 길리포스의 소식을 전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이미 홀로 생각을 정리했던 루키페르가 친우의 정직한 눈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또한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외로이 떠돌던 고아였다. 그들은 서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살기로 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내게 테베레를 포기하라 하더군. 내 아버지 마르스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 하면서 말이지.”

“……예?”

카우노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면 뒤에 숨은 루키페르의 표정이 쓴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뜻하지


않은 출생의 비밀 자체가 옛 결의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그는 여느 때처럼 강하고 차갑게
말했다.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헛소리도 했어. 신들의 변덕스러운 뜻에 따라 능력을 바쳐 헌신하는 멍청이들
말이지.”
“…….”

“내가 누구의 씨에서 태어났든, 누구의 피가 흐르든, 상관하지 않아. 네게 털어놓는 건 숨기지 않고자
하려는 것뿐이다. 너와 나는 우리가 할 일을 할 것이다.”

“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카우노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루키페르는 말없이 그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놓았다.

두 사람의 나직한 대화는 의식이 절반만 이곳에 머물고 있는 알테미온의 귀에도 들렸다.

절반의 의식은 어둠뿐인 꿈속에 빠져 있었다. 앳된 목소리가 속삭였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세요.’

그건 여동생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클리티에?’

‘때가 되었으니까요.’

알테미온은 꿈속에서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물이 찬 바구니 쪽으로 저울이 기울듯, 그의
의식은 다시 소마의 작은 침실로 돌아왔다.

‘……메르쿠리우스가 날 찾아왔을 때…… 테베레를 포기하라 하더군. 내 아버지 마르스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 하면서…….’

자주 듣는 목소리였다.

루키페르가 군신의 아들이라고.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깊은 잠의 수렁으로 끌려 들어갔다.


***

아침이 밝음과 동시에 키쉬르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들은 많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질서
정연하여, 도시를 점령했음에도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루키페르가 언덕 위에 올라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옆에 세운 깃대에는 간밤에 침실에 숨어들었던


자의 목이 걸려, 바람에 나부꼈다. 전사들은 침묵을 지키며 왕의 말을 경청했다. 젊고 강인한 그들의
왕을 모두 마음 깊이 존경하며 따랐다.

“간밤에 침실에 숨어든 자의 목이다. 항복한 도시민들 사이에 뒤통수치는 걸 도운 자들이 있는 모양이야.
색출해라.”

“예!”

전사들은 기세 좋게 대답했다. 우렁찬 목소리에 언덕 위 월계수 잎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루키페르는


수색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테베레의 왕 트리온이 코앞에서 도망쳤다. 말이 없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테지. 수색해 그놈을 잡아라.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와야 한다. 성공하는 자에게 포상이 있을 것이다.”

명령을 받든 그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그 시각, 알테미온은 아코이테스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날의 아침은 부드러운 밀빵과
양유였다.

“목소리가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소년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침실은 전날의 치열했던 기억을 잊은 듯 평화로운 공기가
흘렀다. 열어 둔 창가에서 오가는 발소리와 말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어왔다. 태양이 만들어 낸 긴 빛의
무리가 방 안 구석구석 내려앉았다. 알테미온이 태양 빛으로 달궈진 탁자 위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밖이 소란스러운데.”
“키쉬르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여긴 작은 도시라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진한 양유를 마신 알테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고 신선한 맛이 났다. 몸 상태가 좋아지니 입맛이 돌고


기분이 상쾌하기까지 했다.

“간밤에 푹 주무셨나 봅니다.”

“잠깐 깨긴 했어도 달게 잤어.”

잠귀가 어두운 소년은 지난밤의 소란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굳이 이야기하여 겁주고 싶지 않았다.
자객이 들었던 것을 떠올리니 그 뒤로 꾸었던 꿈 내용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꿈에서 여동생 목소리를 들었어.”

그는 루키페르에게 속아 여동생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외에, 스스로 그녀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이 없었다.

“여동생이 있으십니까?”

“응.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그가 보일 듯 말 듯 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세상을 보라고 하던데. 방법도 알려 주지 않고 말이야. 그리고…….”

클리티에의 목소리 뒤로 들렸던 루키페르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이었을까?


루키페르는 신들을 혐오하고 신에게 복종하는 인간들을 조롱했다. 그런 자가 군신의 아들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신이 내린 능력을 가졌다면, 왜 그렇게까지 그들에게 반항하며 살아가는 걸까?

알테미온은 말끝을 흐리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야. 식사를 도와줘서 고마워.”


***

그날 알테미온은 그보다 기이하고, 두려우면서도 희망이 있는 일이 일어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어둠 속을 헤매는 그의 일상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코이테스가 적적함을 달래 주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있었지만 이날 소년조차


카우노스에게 불려 가 자리를 비웠다.

카우노스와 아코이테스를 제외하면 왕의 침실에 드나들 수 있는 키쉬르인이 없었다. 따라서 혼자 남겨진


알테미온을 찾아올 수 있는 방문객도 없었다.

그는 벽을 짚고 움직여, 한편에 놓인 리라를 집어 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악기를 탈 때도 있었다는


말에 소년이 구해다 준 것이었다.

너무 오랜만인데. 소리가 잘 날까.

자리에 앉아 줄을 퉁기며 소리를 가늠해 본 뒤, 익숙한 노래 한 자락을 연주했다. 듣는 이가 없는


연주였기에, 한낮의 연주는 느긋하고 감미로웠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연주 소리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타박거리는 소년의


발소리나, 일정하고 묵직한 루키페르의 발소리나, 조심성 가득한 카우노스의 발소리와는 달랐다.

“소리가 무척 듣기 좋구나.”

불쑥 그자가 말을 걸었을 때, 놀란 알테미온의 손가락이 현 위로 미끄러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언제 들어온 걸까.

“당신은 누구죠? 내가 아는 자의 발소리도, 목소리도 아닌데.”

리라를 세게 끌어안은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설마 한낮에 자객이 숨어든 게 아니라면…….


“카리클로의 사랑스러운 아들, 알테미온아.”

그자는 온화한 목소리로 알테미온의 이름을 불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름에 알테미온이 몹시 놀라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물었다.

“내 어머니에 대해 아십니까?”

“그래. 아르카디아의 숲에서 디아나 여신을 섬기는 물의 요정이었지.”

젊은 청년의 음성에서 어떠한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못 다정한 어조였다.

“사냥 솜씨가 뛰어나고 노래를 잘해 여신이 어여삐 여겼어. 숲에 새를 사냥하러 들어왔던 청년과 사랑에
빠져 너와 네 동생을 몰래 낳으려 하기 전까지는 그랬지.”

“그걸 어찌 아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니. 그는 더 자세히 캐묻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상대를 경계했다. 그럴듯한 말에 속아 마음이 흔들렸던 건 루키페르와의 일로 충분했다.

“난 네가 아카이아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전하러 왔단다. 네 탄생을 마땅치 않게 여긴 내 누이가 내린 벌을


거둘 때가 되기도 했고.”

“벌을 거두신다니, 설마……!”

손에 힘이 빠져 악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말에서 늘 품고 있던


간절한 소망이 이뤄질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 앞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방법을 알고 싶으냐?”

“항상, 원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을 간절히 원하여 목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테베레의 주성 근처에 팔로스 숲이 있다. 그곳의 중심에 흐르는 샘은 나의 누이 디아나의 의지가 깃들어
있지.”

“팔로스 숲의 샘…….”

“그곳으로 가라. 그리고 샘물에 눈꺼풀을 세 차례 적시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네 눈을 가린 신벌의


흔적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정말일까? 만약 거짓이라 하더라도 믿고 싶었다.

“저는 의심이 많은 인간입니다. 당신의 지시가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십시오.”

“좋다. 내가 가진 힘으로 세상의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도록 해 주마. 눈을 감아라.”

알테미온은 지시에 따라 눈을 감으면서 떨림을 가라앉히려 숨을 참았다.

햇살과도 같이 따뜻한 손길이 눈꺼풀 위를 스쳤다.

“네 뜻대로 살게 될 것이다.”

곧이어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정말 잠깐만이라도 볼 수 있는 걸까. 그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

정말로 보였다. 처음 겪는 눈부심에 자연스레 눈을 깜빡였던 그는 그 순간 검은 깃털을 가진 새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놀라움과 감격에 뺨을 감싸 쥔 그가 홀린 듯 일어섰다. 리라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면서 흉한 소리를 냈다.

처음으로 자신의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손끝으로 느껴 보기만 했던 것들을 보다니. 탁자며,
꽃이며, 천과 같은 것들의 황홀한 색감이 햇빛을 받으며 선연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환희에 들떠,
눈으로 모든 것을 열렬히 탐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잡아끈 것은 거울이었다. 거울은 세상 모든 것들이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바로
알테미온 그 자신까지도.

그는 처음으로 해 질 녘의 들판에 띤다는 황금빛이 무엇인지 이해했고, 창공의 색과 같다는 푸른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 아름다운 빛깔이 자신에게 있었다.

‘오빠가 눈을 뜬다면 왜 오빠 이름이 알테미온인지 알게 될 텐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자, 클리티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동생 생각에 서글픈 표정을 짓자, 거울 속의


그의 눈매도 일그러졌다.

지금의 모습을 동생이 봤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지만 가슴이 저릿한 슬픔조차 오래 느낄 수 없도록, 주어진 시간은 짧기만 했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지 못했던 세월에 비하면 잔인할 정도로 짧은 찰나였다. 당황한 그가 거울을 붙잡았다.

“아, 안 돼, 제발!”

조금만 더 보게 해 주세요.

밖으로 나가 걸으며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이야기로만 듣던 꽃이 가득 피어난 들판과 장엄한 신전도
보고 싶었다. 다시 태어난 것과도 같은 희망이 솟구쳤던 것이다.

신께 애원하듯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뿌옇게 흐려진 시야는 점차 좁아져만 갔다.

탁자를 짚은 채 마지막까지 자신을 눈에 담으려 거울을 간절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익숙히 아는 자의 걸음걸이였다.

루키페르. 그자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 감춰 왔던 얼굴도 볼 수 있을까? 침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알테미온이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극도로 긴장하여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분명히 문을 잡은 그의 마디진 손이 흐릿한 시야에 담겼고…… 얼굴도 보였다. 흰 가면에 완전히 가려진
얼굴이.

이를 알아보자마자 암흑이 덮쳐 왔다. 그의 눈은 빛을 잃고 다시 익숙한 어둠 속으로 잠겼다. 잠시나마


세상이 보였던 것이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라도 있나?”

묘한 느낌을 받은 루키페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알테미온의 기색을 살폈다. 뒤를 돌아본 알테미온이


평소답지 않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것이겠지만 어쩐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이상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뇨. 잠깐 앉아서 졸아서.”

짧게 한숨을 쉰 알테미온이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도 모르는 진실의 코앞까지 다가갔다가
실패하니, 긴장이 탁 풀렸다. 그가 기대어 서 있던 탁자 위를 손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리라를 떨어뜨렸어요.”

엉뚱한 곳을 손끝으로 더듬는 모습에 루키페르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역시 착각이었군. 그럴 리가 없지.

그는 바닥에 떨어진 리라를 주워 들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알테미온에게 안겨 주었다.

“이런 걸 연주할 줄 아는지 몰랐는데.”

“…….”

윤기 나는 악기 몸체를 끌어안은 뒤로도 알테미온은 아무 대답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는 미지의


방문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디아나 여신을 누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 치유의 힘을 가진 존재는 단
하나, 아폴로밖에 없었다.

크게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모습에 루키페르가 그의 양어깨를 세게 그러쥐었다. 어떤 소식을 들고 온


그로서는 얼빠진 모습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이봐.”

“네?”

불에 덴 듯 놀라는 반응에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트리온을 잡아 왔다.”

그가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제대로 된 반응이 돌아왔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어떻게 처분하고 싶지?”

순식간에 몽상에서 깨어났다. 트리온의 미래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방금 겪은 놀라운 일조차 잊게
할 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이용하고, 그 대가로 약속한 여동생의 삶조차 지켜 주지 않았다. 그러고도 세 치 혀로


끝까지 자신을 속이려 했다.

“지금 그놈은 어디 있지요?”

그 징그러운 악인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

***
트리온은 언덕 위 떡갈나무에 묶여 있었다. 도망칠 길은 요원했다. 사지가 결박당한 데다 무서운 눈을 한
키쉬르의 전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장대 위에 매달린 누군가의 머리가 있었다. 곧
자신의 신세도 저리될 것이라고 경고하듯. 무시하고 싶었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로 자꾸
시선이 향했다.

제기랄. 조금만 더 빨리 도망쳤다면, 배를 탈 수 있었는데.

테베레의 주성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걸 깨닫자마자 왕의 지위를 버리고 다른 섬으로 떠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재수 없게도 배를 타고 출항하려는 찰나에 키쉬르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처음부터 에우한과 피네오스를 제치고 리기아로 자신이 가겠다고 우기지만 않았다면. 두 왕을 밀어내고
테베레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만용을 부렸다.

트리온이 후회를 곱씹고 있을 때, 언덕 아래에서 걸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자들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더욱 끔찍하게 느껴지는


루키페르와, 그 옆에서 한 소년의 손을 잡고 걷는 알테미온이 보였다.

알테미온, 저놈이.

화가 난 그가 이를 부득 갈았다. 거두어 준 은혜도 모르고, 적에게 붙어 주인을 배신하다니.

혈색 좋은 피부와 엉키지 않게 잘 관리된 머리카락, 그리고 자수가 놓인 깨끗한 키톤을 입은 말끔한


행색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를 보여 주었다.

알테미온은 새삼 태양 빛이 따스하고 품이 넓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과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세상의 찬란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한낮의 밝은 언덕엔 미풍이 불어 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의 인도에 따라 살랑였다.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복수를 앞둔 심장이 기쁨으로 벅차게 뛰었다.


그 모습이 성스럽게까지 보였기에, 트리온을 감시하고 있던 키쉬르의 병사들은 넋을 잃고 알테미온을
바라보았다.

아카이아 땅에 저와 같은 존재도 있었단 말인가? 미의 현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군, 트리온이여. 아니 그런가?”

팔짱을 낀 루키페르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트리온은 초조함을 애써 숨기며 대꾸했다.

“키쉬르에서는 반가운 이를 이렇게 대하나 보지?”

“오, 더한 것도 생각해 봤지만 약속한 게 있어서 그럴 수 없었지. 어떻게 당신을 반길지는 내가 결정하지
않기로 했거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테미온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나 태도나 트리온이 틀림없군요.”

“알테미온아, 네가 나에게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여동생의 행방은…….”

트리온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이미 케레스가 찾아와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뭐?”

“당신의 멍청한 아들이 내게 푹 빠져 있었죠. 어찌나 멍청한지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착각하더군요.


당신이 싫고 테베레도 싫다면서 함께 도망치자고 하면서 클리티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 줬어요.
그래서 케레스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클리티에의 이름을 말하며 알테미온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결코 울거나 흥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자신이 무너질 순간이 아니라 트리온이 무너져야 했고, 자신은 그 꼴을 웃으며
즐겨야 했으니까.

“그 한심한 작자도 얼마 전 당신과 같은 꼴이었죠. 나무에 묶여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목숨을


구걸했죠.”
트리온의 안색이 단번에 돌변했다. 분노와 초조함과 불안함은 표정뿐만 아니라 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 내 아들은 어디 있지? 어디 있어!”

“케레스는 우리와 함께 당신을 기다렸어요.”

“뭐?”

루키페르가 손짓하자 병사 하나가 궤짝을 들고 와 내려놓았다.

“……설마!”

궤짝이 열리고 트리온이 상상했던 실체가 드러났다.

고통에 찬 표정으로 눈조차 감지 못한 채 굳어 버린 케레스의 머리.

알테미온이 참혹한 모습에 잠시 굳어 버린 트리온을 조롱하듯 덧붙였다.

“쓸모없는 몸은 들개에게 던져 주어서 남아 있지 않군요.”

“감히 너 따위가 내 아들을!”

분노한 트리온이 몸부림을 치자 그가 묶여 있는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면서 설익은 도토리들이 떨어졌다.

“괴물에게 들러붙어서 그 힘이 네 것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과연 신벌을 받은 놈답구나! 네놈들이


받드는 왕이라는 괴물은 신들의 진노를 산 지 오래다! 어리석은 알테미온아, 이용만 당하는 네 인생이
달라질 것 같으냐! 루키페르가 널 놓아줄 거라 보느냐!”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이 마음의 동요를 숨기지 못해 표정이 굳는 것을 보았다. 협박과 고문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지독해지는 법을 모르는 모양이지. 결국 그가 끼어들어 조롱했다.
“어리석은 것이 누구일까? 충고를 내릴 만큼 현명한 자라면 제 처지를 먼저 돌아볼 텐데. 자비를 구해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

트리온이 하늘을 향해 외쳤다.

“오, 유피테르여, 아폴로여! 테베레의 아들에게 안식을, 불온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하지만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묶여 있었고, 그의 적들에게 갑작스러운 불벼락이


내리지도 않았다.

알테미온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트리온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으나 조금 전의 그는 신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그치고, 그가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를 띤 채 싸늘하게 대꾸했다.

“신의 이름을 빌려 탐욕만 추구하던 작자를 가엾이 굽어보는 자비로운 신은 없는 것 같군요.”

그가 루키페르를 향해 돌아섰다.

“일단 눈부터 불로 태우죠. 그런 후에 사지를 찢을지, 산 채로 땅에 묻을지, 솥에 넣고 끓일지


결정하겠어요.”

“네 뜻대로 하지.”

루키페르는 그답지 않게 꽤 부드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고통 어린 비명이 산천을 찢어 놓을 듯 울렸다.

***
그날 밤에는 포도주를 마셨다. 죽은 트리온의 피라고 생각하니 잘 넘어갔다.

알테미온은 그자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 순간을 즐겼다. 원하던 대로 최고의 복수를 이뤘다. 그런 만큼
혀끝에 닿는 술이 달콤하게만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주신 바쿠스가 인간들에게 포도주를 알려 주며
가르쳐 준 망각과 끝없는 활기, 해방감을 느끼진 못했다.

반대로 취기가 오를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말없이 나른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얼굴에 드리운 수심의 그늘조차 몹시
매혹적이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당신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죠?”

루키페르의 질문에 그는 질문으로 답했다.

“확실한 건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는군. 어째서지?”

“포도주 때문이죠. 이건 도무지 바쿠스의 은총이 내린 맛이라 보기 어려운걸요.”

알테미온은 쉬이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자신이 종일 겪은 감정의 풍랑을 루키페르가 이해하리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폴로의 은혜로 잠시나마 되찾았던 눈과 처음 본 세상과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느낀 감동, 다시 시야가


닫히면서 찾아온 어둠과 좌절. 트리온의 저주와 죽어 가던 그의 비명 소리, 그리고 고통을 즐기던 자신의
웃음.

그 모든 것을 겪은 날이니 그의 마음은 거센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거렸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동요를


누군들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상대가 루키페르라면 더욱.

알테미온은 맛이 없다면서도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루키페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중드는 사람 하나


없이 두 사람만 있었기에, 술이 술잔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생선 요리와 소시지, 고기 수프와
신선한 무화과와 올리브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아폴로가 다녀갔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알테미온의 기분이 상한 두 번째
이유만큼은 이미 짐작했다. 그는 그가 원하던 복수를 이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복수의 즐거움
뒤에 찾아오는 기나긴 공허와 권태만이 남았겠지. 그런 상태를 알아보긴 쉬웠다.

“술 때문이라 생각되지 않아.”

혀에 닿는 순간 달콤했던 술맛조차 뒤끝은 씁쓸한 법이었다.

“참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루키페르가 중얼거렸다.

“무슨 일을 해도 옛일을 돌이킬 순 없는 법이지. 기쁘다고 해서 옛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아니,


오히려 더 강렬하게 느껴지지.”

마치 자신의 속내를 읽은 듯한 말에 알테미온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그런 감정이 있어요?”

촛불이 실바람에 흔들렸다. 알테미온의 모습도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취했나.

루키페르는 눈가를 문질렀다.

“감정이란 인간의 숙명이지.”

알테미온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당신이 테베레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요?”

“그래.”

짧은 긍정이 돌아왔다.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털어놓지 않던, 그답지 않게 솔직한 태도였다.

“누굴 위한 것이죠?”

알테미온은 지금의 그라면 대답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어머니.”

루키페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알테미온은 그가 느끼는 짙푸른 슬픔을 엿들은 기분이었다.

“테베레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어. 목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쫓겼지.”

어머니를 잃은 소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집채만 한 바위를 맨손으로 막아 내고, 사람을 죽이는 데 거침이 없는 잔인한 성정을 가진 데다, 마음을
교묘히 조종하고 협박하는 데 능한 냉혈한. 인간 같지 않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질투했다. 그런
루키페르조차도 살갗을 헤집으면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인간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아버지는…….”

“내겐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를 버리는 데 일조한 사내가 있을 뿐. 그 또한 트리온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한다. 테베레는 폐허가 될 테고 그는 도시와 함께 불탈 거야.”

알테미온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도 루키페르와 같은 힘이 있었다면 클리티에를 위해 그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 못지않게 불우한 과거에 저도 모르게 동정심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루키페르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알테미온의 얼굴에 서린 감정을
읽어 보려 했다.

“설마 날 걱정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을까요.”

알테미온이 즉시 부정했다. 우습게도 순간적으로나마 그를 연민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걸 드러냈다간 그의 성미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 것이 분명했다.

“난 그저 당신이 맹세를 지킬 거라 생각했을 뿐이에요. 오늘과 같이.”

루키페르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좀처럼 진심으로 웃지 않는 그에게는 드문 미소였으나


알테미온은 늘 그렇듯 보지 못했다.

“날 미워하는 것 아니었나.”

“오, 당신이 내게 했던 짓을 잊은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지킨 신의에 감사를 표한 것이죠.”

신의와 감사라. 자신에게 썩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다.

“배짱도 좋군. 천지에 기댈 곳 하나 없는 네가 갖기엔 지나치지.”

“더 이상 잃은 게 없는데 두려울 게 또 어디 있겠어요?”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알테미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 암흑 속을 헤매며, 유일하게 사랑했던


동생과의 영원한 이별을 했다. 그를 이보다 더한 절망에 몰아넣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키페르는 차가운 말만 쏟아 내는 알테미온이 자신 못지않게 단단히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자기 자신의 이면을 보는 듯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만큼 꼭 닮아 있었다. 잃어버린 그림자처럼.

“넌 꽤나 뻔뻔하고 지독한 놈이다. 널 원하는 자들을 얼마든지 피 말려 죽일 수 있겠지.”

“오, 당신도 그런 시시껄렁한 자들 중 하나인가요?”

“네 뜻대로 원하는 걸 쥐여 주었으니 그렇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전혀 안달 난 목소리가 아니군요.”

술병이 비었다. 병을 흔들어 확인한 알테미온이 기대어 누워 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순간


머리에서 진한 현기증이 일었다. 과음한 게 분명했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야 바쿠스의 의지가
찾아온 것처럼 포도주의 향이 달큰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잔이 비었으니 당신 몫이라도 마셔야겠어요.”

알테미온이 루키페르를 향해 술잔을 뻗었다. 루키페르가 제 몫을 알테미온의 술잔에 채워 주었다.

“좀 더 안달 난 연기라도 해 봐요. 도무지 속아 줄 수 없으니.”

루키페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찬 웃음소리가 났기에 알테미온도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과음을 해서 그런지 그 웃음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도 취한 걸지도 몰랐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농담에 웃어 줄 리가 없으니까.

루키페르 또한 그 사실을 깨닫고 돌연 웃기를 멈췄다. 그는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해 냈다. 그의 침실에


어느 순간 스며들었던 안온한 공기. 그런 분위기가 다시 흐르고 있었다. 침실을 차지한 이 긴 금발 사내
때문이었다. 그가 있는 한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알테미온이 아니더라도 그의 침실에 잠시 머물다가는 나비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루키페르는 그들 중


누구의 옆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기에, 그들은 금으로 된 장신구들을 받고 금세 내쫓겼다.

변화를 원치 않는다면. 알테미온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되어야 했다. 그를 날려 보낼 때가 지금이라는 걸.

술잔이 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취할 대로 취한 알테미온의 손끝에서 떨어져서, 바닥을 빙빙
돌다 멈췄다.

그는 몰려오는 잠이 앉아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현실과 잠의 경계를 넘으려 할 때였다.

“이봐.”

“음…….”

“떠나고 싶나?”

루키페르가 질문을 던졌다. 잠이 들기 직전의 사람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도.


“떠나고 싶다면 지금 떠나. 하지만 오늘 밤이 지나도 여기 남아 있다면…… 그땐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아니,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분명히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니 알테미온이 이곳에 머무는 건 루키페르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의 뜻인 것이다.

루키페르의 생각대로 알테미온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잠에 빠져들었다.

“루키페르…….”

그는 잠결에 말했다.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달빛이 밝았다. 기묘한 밤이었다.

***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극심한 숙취와 함께 깨어난 알테미온은 흉통을 유발할 만큼 그의 상체 위를


누르고 있는 단단한 팔을 밀어내려 애썼다.

“으음…….”

루키페르의 숨소리에서 포도주 향이 났다. 똑같이 만취해 잠든 모양이었다. 숨쉬기 힘든 자신과 달리


지극히 편안해 보였다.

팔을 치우려 안간힘을 쓰다 화가 난 알테미온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루키페르의 얼굴을 찾았다. 역시나


가면을 쓰지 않은 매끈한 피부가 손에 잡혔다. 잠자리에 들 때만큼은 늘 무방비 상태인 듯했다.
알테미온의 손이 턱을 타고 올라가 높다란 코를 움켜잡았다.
똑같이 당해 보라지. 자다가 숨 막히는 경험이 어떤 건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좋지 않은 성미와
울렁거리는 속이 합쳐지니 앞뒤 가릴 것이 없었다.

코가 막혀 숨이 쉬어지지 않자 루키페르의 생존 본능이 그의 잠을 깨워 놓았다. 그가 알테미온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던 팔을 들어 코를 잡고 있던 손가락들을 떼어 냈다.

“날 죽일 셈인가?”

“늦게 깨어났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알테미온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되돌아온 것은 짧은 웃음소리였다. 루키페르는 술이


덜 깼나 싶을 만큼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네 꼴이 우습구나. 얼굴이 부어올랐어.”

“마음껏 비웃으시죠.”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추한 꼴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에, 알테미온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붉게 물든 뺨이 드러났다.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에서 뱀이라도 튀어나오겠군.”

“…….”

계속되는 비웃음에 그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키페르는 그의 불퉁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왜 이럽니까.”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빗질이라도 좀 해야 추한 꼴을 덜 보지 않겠나.”

냉소적인 말을 남기고 루키페르가 방문 밖에 놓여 있던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숙취에 이마를


짚고 있는 알테미온을 끌어당겨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알테미온이 진저리를 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가운 기운이 뺨에 닿자 술기운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꽤 꼼꼼한 손길로 물방울이 맺힌 얼굴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평소 시중을 드는 아코이테스가 하던 일을 자청해서 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더러운 꼴입니까?”

“그래. 아코이테스라고 해도 지금 널 보면 웃을 것이다.”

“그럴 리가.”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것 같거든.”

가차 없는 말투와는 달리 거울 앞에 앉혀 놓고 빗질을 하는 손길은 훨씬 부드러웠다. 목덜미에 그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잘게 소름이 돋았다. 불편한 상황에 긴장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살면서 추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지금 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

“거짓말. 조금 헝클어졌다고 해서 그럴 것 같진 않아요.”

확신하면서도 마음이 상한 알테미온이 쏘아붙였다.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그 말에 알테미온의 기세가 확 꺾였다. 신을 만났다는 것과, 그로 인해 잠깐이나마 앞을 볼 수 있었다는


걸 들킬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가 황급히 둘러댔다.

“……아코이테스가 항상 말해 주니까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루키페르의 성미가 누그러든 것인지는 몰라도, 이 이상한 평화가 지속되는
것이 좋았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결코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을 테니까.

***
“……폴룩스 장군이라고?”

보고를 받은 루키페르가 푸른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예. 그간 그자가 나서지 않는 것이 이상했죠.”

“드디어.”

카우노스는 왕의 입꼬리가 비틀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상대가 어떤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폴룩스. 친애하는 나의 형님.”

낮은 읊조림에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아에로페를 버린 피네오스와 폴룩스 부자는 과연 그 이후로도


뻔뻔하게 살아갔다. 그런 주제에 테베레인들로부터 강직한 영웅 대접을 받는다니. 과연 그들에게
어울리는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루키페르여, 그자와 싸울 생각입니까?”

“나는 테베레 주성에 들어가길 원하고 그는 성을 지키길 원하지. 이 싸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카우노스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좋지 않은 사연이 있다 한들, 반쪽짜리 피를 나눈 형제끼리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는 폴룩스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써 냉정한 척하는
루키페르가 겪을 마음의 풍랑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카우노스가 알고 있는 루키페르는 냉혹해 보여도 살육을 진심으로 즐기거나 감정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그와 그의 어머니가 겪은 어린 시절의 비극에 대한 복수심이 강할 뿐. 오히려 카우노스가 아는
누구보다 감정적인 인간이었다.

“피네오스 왕을 죽이려 마음먹은 내가 장군을 예외로 둘 이유도 없지.”


피네오스가 자신의 아버지이건 아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어머니를 버린 것이
그녀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뿐.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안다, 카우노스여.”

“…….”

“안심해라. 이제 와서 흔들릴 이유가 없다.”

“예.”

“트리온을 제거했으니 남은 건 주성이다.”

루키페르는 진격 명령을 내렸다. 곧 키쉬르인들 사이에도 그들의 왕과 폴룩스 장군이 전투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들은 지난밤 피가 흘렀던 언덕 위에서 한가롭게 원반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테베레에서 창술을 가장 잘한다는 그 폴룩스 장군 말이지?”

멀찍이 날아간 원반을 뛰어가 주워 온 보병이 숨을 몰아쉬면서 대꾸했다.

“그래. 전차 모는 실력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더군. 물론 테베레 놈들이 뭘 알겠냐만.”

“그래. 왕께서 지는 걸 상상하기가 더 어렵다네.”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루키페르보다 강한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오히려
주성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주성을 함락한다면, 아카이아 땅에서 가장 귀한 보물들과 비옥한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테니까.

원반던지기를 구경하던 아코이테스는 그 길로 알테미온에게 뛰어갔다. 주워들은 소문을 전하자,


알테미온은 키쉬르인들과 다르게 반응했다.

“폴룩스 장군이라니.”

“그에 대해 아십니까?”

“물론. 트리온이 가장 싫어하는 자이기도 했지. 강하면서도 신망이 높은 데다…… 약점이 없어서 회유나
협박을 할 수 없는 자였거든.”
그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바위까지 손쉽게 옮기는 루키페르에게 웬만한 자는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알지 못하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걱정되십니까?”

“아니, 내가 무엇 하러 루키페르를 걱정하겠어.”

그가 곧바로 소년의 말과 자신의 마음을 부정했다. 아코이테스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묻지 않았다.

“주성으로 진격한다고 다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렇구나. 내가 할 일은 없지만, 이번 여행길에도 네게 기대어야겠구나.”

“그런 건 걱정 마십시오. 제 일이고 즐거움이니까요.”

떠나기 전, 그가 침실에 돌아올까?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겪었듯이, 진격을 시작하면 병사들을 이끌기
바쁜 루키페르가 자신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알테미온은 루키페르를 걱정하다 못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즉시 부정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자에게 정을 붙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단순히 자신과 비슷한 그의


사정을 알게 되어 누구에게 말하기도 우스운 연민을 품게 되었을 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알테미온이 짐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코이테스야, 너는 키쉬르의 왕이 가면을 벗은 걸 본 적이 있니?”

“예?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

질긴 끈으로 천을 돌돌 말아 묶던 아코이테스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병사들에게 들은 적 있는데, 루키페르께서는 누구의 앞에서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카우노스 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정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걸까? 왜일까?”

“전에 호기심을 품고 왕의 침실에 숨어든 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실패했고, 왕께서 매우 화를


내시어 곧바로 목이 베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어째서일까? 사람들은 추악하게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강인함에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을 살 법한


얼굴을 가린다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알테미온은 그게 답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너는 궁금하지 않니?”

소년이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아니요. 괜한 호기심은 명줄을 재촉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면, 정말 그가 화를 낼까?

‘그게 마음에 들어.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도, 내 얼굴도 보지 못하지.’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 이유조차 그런 것이었다.

알테미온은 비밀스러운 고민을 거듭했다.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는 그와 함께, 키쉬르의 군사들은


거침없이 주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
키쉬르 군사들은 거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했다. 그들이 어찌나 빠르게 이동했던지 그 모습을 목격한
테베레인들은 저승에서 불어닥친 검은 회오리와도 같다고 표현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땅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성까지 가는 길, 테베레에 속한 성들이 모두 키쉬르에게 패배했다.

알테미온은 곁에서 그들이 일으키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키쉬르의 아들들은 무척이나 바삐 움직였다. 패배한 성을 차지해, 사로잡힌 테베레인과 사제들은 다른


성으로 보내 노예로 만들었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여인들과 아이들은 노예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했다. 알테미온은 분명 그가 짧게나마 언급했던 과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성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전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루키페르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신성한 제단과
신상들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값비싼 기물과 황금들은 병사들이 나눠 갖게 했다.

‘그래. 아카이아 땅에서 그 이름을 없애 버릴 것이다.’

루키페르가 당당히 선언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신들을 따르지 않는다 한들 신전을 부술 정도로
조롱하다니.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걸까?

알테미온은 불안했다. 그는 여전히 신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디아나 여신의 요정이면서도 순결을 잃은
어머니 때문에 신벌을 받아야 했던 처지는 어떠한가.

그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결정이랄 것도, 생각이랄 것도 없이


살아왔던 지난 일들이 무색하게, 지금의 그에게 중요한 문제들이 한 번에 불어닥쳤던 것이다.

그들은 팔로스 숲 어귀에 다다라 있었다. 주성이 무척 가까웠다. 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다.

알테미온은 눈을 감고 있었다. 천막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청각이 예민한 그로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뜀박질하는 소리와 오가는 대화 소리, 수레바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없이 바쁜 것이 분명했다.

각자 전투를 대비한다. 그런데 자신은? 운신이 자유롭지 않으니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무력하게 지켜보는 방관자의 역할을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아코이테스는 짐을 옮기는 일에 동원된 터라 알테미온은 혼자 남겨졌다. 그는 루키페르도 소년도 없는
막사에 앉아 적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루키페르와 함께 잠드는 것조차 익숙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행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등골이 서늘해져야 맞으나 공포심에도 적응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알테미온은 자문했다. 더 이상 그가 혐오스럽지 않나?

사람을 화나게 하는 그의 냉정한 말투를 생각하면 여전히 따귀라도 때리고 싶었다.

그자에게 남은 빚도, 받아야 할 것도 없었다. 이렇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왜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나? 그가 붙잡은 것도 아님에도, 그를 두고 떠나는 것은 어쩐지 배신으로 생각되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알테미온은 리라의 줄을 퉁겼다. 그리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그는 나직이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평생 모르고 살았던 눈이 보이지 않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아폴로의 말씀대로라면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될 텐데.

“멍청하구나.”

해결법은 멀리 있지도 않았다. 이 숲 중심부에 있다는 샘이 그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유혹을 외면하면서, 여전히 리라를 끌어안은 채 막사 안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 주성에 다다랐겠지.

우습게도 그는 신께 루키페르의 안녕을 빌었다.

***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때였다.

루키페르와 키쉬르의 군사들은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주성 밖으로 몰려든 그들의 모습에 테베레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성벽 뒤에 숨어, 악명 높은 키쉬르의 정복자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완전히 가린 검은
투구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위압적인 체구는 먼 곳에서도 위용을 발했다.

“테베레의 두 왕은 들으라!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가 입을 열어 외치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성벽 위 사람들의 몸이 떨렸다.

“신의 가호를 바라며 기도라도 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와 싸울 배짱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단 말이냐!”

장군 폴룩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른 도시들이 정복당하기 전에 그들을 지키러 갈 계획이었으나,


무엇보다 주성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피네오스의 만류에 주성의 군사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루키페르의
조롱은 그의 정의감에 불을 질러 놓았다. 폴룩스가 떨치고 일어나 성벽 위에 섰다.

“네가 바로 루키페르로구나! 평화로운 나라를 멋대로 짓밟고도 오만하고 당당하기 그지없구나!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그의 등 뒤로 찬란한 태양 빛이 비쳤기에,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본 키쉬르의 아들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한 빛을 받은 폴룩스의 금빛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입술을 삐딱하게 비튼 루키페르가 응수했다.

“넌 폴룩스로구나! 넌 그 대답을 들을 자격이 없다! 어째서 아직도 숨어 있는가!”

“좋다! 그렇다면 널 죽여서 그 시신에 죗값을 묻겠다! 나와 단판 승부를 하자!”

폴룩스는 많은 이의 피가 흐르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피네오스와 아내


아탈란테가 결연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식솔들…….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추억이 쌓인 그의 삶의 터전과, 아폴로의 신전을 지켜야 했다.

오, 신께서 신실한 종을 보살펴 주시길.

많은 것들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폴룩스는 깊게 심호흡하고 짧게 미소 지었다.

“할 수 있다면 무장을 갖추고 나와라! 네 시신이 매달린 전차를 타고 주성을 정복하리라!”

루키페르가 고함친 뒤 손을 내젓자, 군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성문 앞에 루키페르와 그의


무구가 실린 전차만을 남겨 둔 채 큰 원을 그리며 멈추어 섰다.

이윽고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폴룩스를 태운 전차가 달려 나왔다. 그 또한 루키페르 못지않게 훌륭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루키페르는 창과 방패를 들었다.

“테베레 제일의 창술을 가졌다지? 내게 최선을 보여라.”

“물론.”

두 사람의 새파란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격돌했다.

폴룩스가 힘껏 뛰어올라 침략자의 심장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루키페르는 물러서지 않고 황소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들어 튕겨 냈다. 묵직한 방패로 떠미는 힘이 바위처럼 강했다. 하지만 폴룩스는 당황하지
않고 솜씨 좋게 뒤로 물러났다.
루키페르는 그를 따라가며 그의 허벅지를 창 자루로 내리쳤다. 재빨리 피해 빗맞았음에도 잘 단련된
허벅지에서 둔중한 고통이 느껴졌다.

“윽……!”

폴룩스는 침음을 흘리며 곧장 반격했으나 날카로운 창끝은 루키페르의 갑주 위에서 미끄러졌다.

“생각보다 시시하군.”

루키페르가 말로 도발하며 창끝으로 목덜미를 노렸다. 폴룩스는 몸을 크게 움직여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그는 무척 당황했다. 강하다는 것보다, 적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마치 어떤 공격을
받아도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과도 같았다.

폴룩스의 동요를 알아차린 루키페르가 또다시 목덜미를 노렸다.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기에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의 물푸레나무 창은 폴룩스의 투구에 부딪쳤다. 강한 힘에 투구가 밀려 벗겨졌다.


투구는 모랫바닥에 떨어졌고 폴룩스는 태양을 등진 채 뒷걸음질 쳤다.

강한 태양 빛 때문에 루키페르는 곧바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도 재빨리 위치를 바꾸었다. 빛을 피하자


그는 폴룩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정의로운 청년의 얼굴은…… 루키페르가 샘물에 비춰 보던 그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더욱 놀랄 만큼 비슷하겠지. 하지만 폴룩스는 루키페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그들의 창이 서로 교차해 부딪쳤다.

“크윽!”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폴룩스는 온 힘을 다해 막아 냈으나 점차 힘이 빠져 갔다. 이대로라면 그의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어떤 순간에도 꺾이는 법이 없던, 루키페르의 창이 부러져 나간 것이다.

루키페르는 자신의 힘에 의해 균형을 잃었다.

그건 절대 폴룩스의 힘에 의한 게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꺾을 수 없는 창을 꺾어 놓은 존재는


아폴로였다. 테베레의 멸망을 원하지 않는 그는 줄곧 루키페르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키페르와 폴룩스가 결투하면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폴룩스는 아폴로가 귀애하는 인간이었다. 결코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테베레와 폴룩스를 위협하는 루키페르의 목숨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폴로는 루키페르가 운명의 손아귀에 빠지도록 덫을 놓고 기다렸다. 문제는 키쉬르의 기세가 대단하여,
두 사람의 혈투가 생각보다 빠르게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태양의 신은 어떻게든 폴룩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신력을 발휘해 루키페르의 창을 부러뜨렸다.

노련한 폴룩스는 신이 만들어 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인 루키페르를 창끝으로 찔렀다.

“큭!”

창은 갑옷이 가리지 못한 옆구리를 관통했다. 피가 솟구치면서 루키페르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이 정도 고통도 못 참을 리가.

순간 그가 겪었던 지난 상흔들이 스쳐 지나갔다.

루키페르는 폴룩스가 창을 잡아 빼지 못하도록 잡은 채로, 들고 있던 방패로 상대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컥……!”
다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폴룩스가 창을 놓치고 흙바닥을 흠씬 굴렀다. 그 틈을 타 루키페르가 창을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

그는 장검을 뽑아 들고 다시 몸을 일으킨 폴룩스에게 달려들었다. 폴룩스 또한 방패 뒤에서 검을 뽑아


들고 무기를 맞댔다.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루키페르의 힘은 점차 폴룩스를 압도했다.

과연 굉장한 무골이구나. 폴룩스는 이대로 가면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인으로서, 그는 늘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결투하게 되는 꿈을 꿨다. 테베레에는 그의 상대가 될 만한


자가 없었으니까. 이처럼 강한 자와 당당히 싸우다 죽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면, 적어도 한 명의 장수로서
나쁘지 않았다. 그저 남겨질 이들에 대한 걱정뿐…….

폴룩스는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싸웠다. 하지만 그를 돕는 아폴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는 강한 태양 빛이 루키페르에게 비추도록 하여 그의 시야를 막았다.

하.

아무리 한낮이라 한들, 지나치게 강한 열기였다. 빛의 잔상 때문에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루키페르가 상황을 눈치챘다. 그는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가까스로 검을 받아 내고
있었다.

“과연 테베레의 장수답게 비겁하기 그지없구나! 아폴로의 힘을 빌려 결투에 임하다니, 네 오만함과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폴룩스를 크게 비웃었다. 조롱을 받은 폴룩스의 안색이 변했다.

“난 결단코 신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그럼 너는 오로지 나만을 따라오는 기이한 태양 빛을 어떻게 설명할 테냐? 이러고도 내가 이긴다면 너는
무엇이 될까!”
폴룩스는 방패를 크게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저는 아무 도움도 원하지 않습니다! 테베레의 장수로서 당당히 싸우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태양 빛은 가시지 않았다.

“루키페르여, 난 이렇게 싸우고 싶지 않다. 사흘 뒤, 태양이 저무는 시각에 이곳에서 결판을 짓자.”

루키페르는 상대의 당당하고 곧은 눈빛을 노려보았다. 제 눈은 여전히 얼굴을 가린 두꺼운 투구 뒤에서


그늘져 있었다.

“좋다.”

그가 짧게 응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

“루키페르께서 막 귀환하셨답니다!”

아코이테스가 막사 안으로 넘어질 듯 뛰어 들어왔다. 리라를 내려놓은 알테미온이 즉시 물었다.

“어찌 되었지?”

“승부가 나지 않았답니다. 부상을 입으셨다는데…….”

“뭐? 부상을? 심각한?”

그런 사람이 부상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알테미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 순간 다시 막사가 열리고 바로 그 루키페르가 들어왔다. 그를 치료할 의원과 카우노스와 함께였다.
부축을 거절한 루키페르는 두 발로 서 있었다. 카우노스가 소년에게 곧장 주의를 주었다. 치료받으며
휴식을 취해야 할 막사에서 소란스럽게 굴었다간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루키페르의 화를 자초할 게
뻔했으니까.

“아코이테스, 시끄럽구나.”

“죄송합니다, 알테미온 님이 걱정하고 계신 듯하여 저도 모르게…….”

소년이 뒤로 물러나면서 허리를 숙였다. 갑옷을 벗은 루키페르가 침대에 기대어 누우며 반문했다.

“걱정했다고?”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분명했다.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알테미온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눈치 없게도
아코이테스가 대신 대답했다.

“홀로 리라를 연주하시는데 계속 같은 부분에서 실수하셔서…… 평소에는 절대 그러시지 않는데요…….”

알테미온은 아무도 몰래 볼 안쪽 여린 살을 깨물었다. 민망함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잠시 그를 돌아본 루키페르가 캐묻지 않고 의원에게 손짓했다. 의원이 다가와 상처를 살폈다.

“이런 관통상을, 게다가 창을 다시 뽑으시다니…….”

그는 차마 루키페르를 비난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치명적인 곳은 비껴갔습니다만 완전히 아무는 데 오래 걸릴 겁니다.”


그가 약초를 탄 포도주와 샘물을 이용해 소독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상처
위에서 느껴지는 통증에도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치료가 끝나고 붕대가 완전히 감긴 후, 의원과 소년이 밖으로 나갔다. 루키페르는 친우와 알테미온만
남게 되자, 카우노스를 향해 낮게 말했다.

“이틀 뒤 해가 진 후에 다시 싸우기로 했다.”

“예?”

“문제없어. 아폴로의 장난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겼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우노스의 낯빛이 흐려졌다.

“어찌 된 일일까요. 그가 대놓고 도와주려 하다니. 마음에 걸립니다. 이 정도로 분명한 태도라면 또 어떤
도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재미있지 않나? 신이라는 존재들도 겁을 먹는 모양이지. 두려움에 못 이겨 인간을 돕는 모습이 우습단


말이야.”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루키페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필요한 건 새 창. 그게 전부다.”

카우노스는 잠깐 알테미온을 돌아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저자의 앞에서


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제야 루키페르는 투구를 벗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던 알테미온을


불렀다.

“이리 와라.”
“함께 눕기 어렵지 않습니까.”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사람과 함께 누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상관없어. 별로 아프지 않으니.”

그의 재촉에 결국 알테미온이 다가가 침대 끝에 앉았다.

“괜한 오기 아닙니까.”

“낫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항상 그랬으니까.”

독을 마셔도, 검으로 심장을 찔려도 죽지 않았다. 고통은 느껴졌으나, 목숨을 앗아 갈 정도의 고통을 몇
번 견디고 나니 점차 그런 것에도 무뎌졌다.

“폴룩스라는 자는 어떤가요. 그자도 상처를 입었습니까?”

“오른 무릎이 작살났을 거다. 괜찮은 척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그가 알테미온의 희고 상처 없는 손등을 손끝으로 쓸었다. 알테미온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숨을


죽였다.

“이틀 뒤면 테베레의 주성도 나의 것이 된다. 새 도시에 필요 없는 것들은 사라질 운명이지만…….”

루키페르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다음 말을 어찌 이어 나가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었다. 그는 불쑥 말을


뱉었다.

“원하는 건 뭐든 주겠어.”

“예?”

“침실 가득 황금을 채워 줄 수도 있고, 네가 원하는 이야기를 뭐든 들려줄 시인들을 대령할 수도 있고,


손가락도 까딱할 필요 없을 만큼 많은 하인을 붙여 줄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알테미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키페르가 답할 줄 모르는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무시했다.

“대가는 하나야. 넌 그냥…… 날 계속 걱정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그건가요?”

가만히 붙잡혀 있던 알테미온의 손이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루키페르는 자신의 손가락 마디를 잡은 흰


손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대꾸했다.

“그래. 그게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거든.”

“당신치고도,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아마 피를 많이 쏟았기 때문인가 보지.”

그가 부드러운 손목을 움켜쥐었다.

알테미온은 현기증이 일고, 가슴팍이 뜨거워졌으며,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한 바퀴 구른


뒤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최고의 보물을 선물로 바치겠다고 하는 자들은 루키페르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권력과 재산을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 따위야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키페르의 말에는 그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답지 않게 부드럽고 애처롭기까지 한…… 우습게도 사랑 고백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는 숨을 고른 후 간신히 입을 뗐다.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 전혀 당신답지 않으니.”

회피가 아닌 제대로 된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보다


좀 더 확실한 말을 듣고 싶었다.

“내 마음을 사고 싶다면, 황금이 아니라 정말 귀중한 것을 가져와요. 당신이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그런 것 말이죠.”
“욕심이 많군.”

루키페르가 알테미온의 손목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에서 전해지는 감정에, 알테미온은


냉정을 가장하기 힘들었다.

그는 천천히 루키페르의 맨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턱을 지나 아랫입술을 만졌다.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입술이 뜨겁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진실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그게


전부였다. 그 온기가 알테미온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자신의 의지로 루키페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흣……!”

떨어지려는 찰나에 붙잡은 것은 루키페르였다. 거칠고 다급한 입맞춤이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도록


깊게 뒤엉켰다.

그는 알테미온의 허리를 끌어당겨 몸을 가깝게 붙였다. 다리가 뒤엉키자 알테미온은 그의 상처 부위를


누를까 봐 떨어지려 애썼다.

루키페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이 남자를 굴복시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히마티온을 끌러 속살을 파고들었다.

“그, 만, 아플 거예요.”

“유혹한 건 당신이잖아.”

“아니, 그건……, 읏!”

“날 알고 싶다고 했잖아.”

다리 사이의 중심이 고개를 든 것이 느껴졌다. 옷 틈 사이로 손을 넣어 허벅지 속살을 매만지는 손길도.


열기가 확 쏠려서, 알테미온의 낯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흥분을 숨기려 다리를 오므리니 속살이
긴장과 기대로 파르르 떨렸다.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루키페르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열이 오른 귀에 입김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제발 박아 달라는 표정이야.”

입술을 깨문 알테미온이 손끝으로 루키페르의 탄탄한 가슴 위를 훑었다. 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했던, 잠


못 드는 밤을 떠올리면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고 움찔거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 밤의 일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흥분과 수치심과 쾌락이 순식간에 몸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알테미온의 손끝이 헐벗은 루키페르의 가슴골과 복부를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할 테니까.”

그는 이미 단단하게 선 중심을 입에 담았다. 끝까지 담기에는 버거운 크기라 볼 한쪽으로 튀어나올 만큼


입을 조였다가 기둥을 혀로 쓸어 올렸다. 고간에 고개를 묻은 채 목구멍까지 열어 힘겹게 빨고 조이는
얼굴은 흥분으로 풀어져 있었다.

평소의 냉정한 낯빛에서 볼 수 없던 표정에, 루키페르는 이성을 잃고 허리를 움직이려 들었다. 상처가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컥, 흡…….”

허리 짓에 중심이 목 안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알테미온이 고개를 물렸다. 하지만 빨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적극적인 태도 때문에 사정감을 참지 못하던 루키페르가 전보다 빠르게 사출했다.

이를 입으로 받아 냈기에 알테미온의 입술을 타고 타액과 정이 흘러내렸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모양새가


색정적이었다.
그는 정을 손에 받아 내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향유를 찾을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제 손으로 아랫도리를 파고드는 모습에 루키페르가 낮게 웃었다. 그러나 여유로운 웃음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엎어 놓고 박고 싶다는 초조함이었다.

“날 고문하는군.”

그가 움직임이 자유로운 왼팔을 들어 알테미온의 목덜미를 끈덕지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과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밤은 길지 않습니까.”

“아니, 아닐지도 몰라. 근래에는 밤이 날아가는 화살처럼 빠르게 사라지더군.”

알테미온이 엷은 웃음을 지었다.

“짐승도 상처를 입으면 나약해진다더니, 당신도 같군요.”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남자답지 않았다.

“의기양양하군그래?”

“오, 당신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오겠어요, 루키페르.”

그가 속삭이며 다리를 벌리고 루키페르의 중심 위로 둔부를 겹쳤다.

“흐응, 난 이것만으로도 좋은 것 같은데.”

미끈하게 풀린 아랫도리가 남성의 주위를 놀리듯 간질였다. 순간 루키페르의 허벅지 근육이 더욱 성난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 여기까지야.”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알테미온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두 사람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다.


침대 위로 던져진 알테미온은 한쪽 뺨이 베갯잇 위로 처박혔다.

“아읏!”

둔부만 치켜들린 굴욕적인 자세로 꿰뚫렸다. 잠깐의 인내가 폭풍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묵직한 중심이
복부를 헤집었다. 이미 끈적한 정이 담긴 아랫도리가 힘겹게 이를 받아 냈다.

“사, 상처는……, 읏! 흣.”

루키페르는 허리를 잡고 거칠게 추삽질했다. 알테미온의 몸이 떠밀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 흥분에 교성이


절로 터졌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정력적인 관계에 도무지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루키페르의 거칠어진 숨소리도


한몫하였다.

“다친 짐승 새끼를 잘못 건드리면 더 흉폭해지는 법이지.”

남성을 삼켜 드는 아랫도리의 조임에 그는 상처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파르르 떨며 무너져 침상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뒤태와 숨기지 못하고 흥분에 들뜬 옆얼굴이 성감을 돋웠다.

“으음, 응, 흥, 읏!”

몸이 자꾸 앞으로 자꾸 떠밀렸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을 만큼 침대 머리맡에 바짝 붙게 되자,


루키페르가 알테미온의 어깨를 붙잡고 허리 짓을 계속했다.

근육에 힘이 단단하게 들어간 루키페르의 허벅지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알테미온의 다리는 힘이 풀려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리가 자꾸만 무너지려는 것을 루키페르의 힘으로 붙들고 있었다.

“흐응, 흣, 천천……히!”

“아까 말했잖아, 밤이 짧다고.”


애원하는 어조에, 루키페르가 속삭였다.

***

격렬했던 밤이 지나가고, 알테미온은 다음 날 정오가 지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어찌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루키페르가 나가는 소리나 소년이 조용히 들여다본 발소리 같은 건 전혀 듣지도 못했다.

그는 잠깐 몸을 뒤척였다가, 뻐근함이 느껴지자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나간 모양이지.

태양 빛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한낮이 된 것은 분명했는데, 도무지 단박에 자리에서 일어날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 게으르다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는 잠든 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몸은 피곤했으나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간 잠자리를 갖는다는 건 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어젯밤은 완전히 달랐다. 루키페르의 태도가 달랐던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그보다 알테미온 스스로
변했다고 느꼈다.

그는 루키페르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랐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감정을 품지 않았으니까. 사랑하는 여동생과 끔찍이도 증오했던 트리온 외에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쏟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모래벌판에서 솟아난 샘물과도
같았다.

어째서 그런 것이 가능해졌을까.
그런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느라 누군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침실로 꾸며진
곳과 천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소리는 충분히 들릴 만했다.

평소의 그라면 기척을 내고 누구인지 물었겠으나, 그러기도 전에 그들이 입을 열었다.

“요즘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카우노스여, 그게 무슨 말이지?”

그들은 카우노스와 루키페르였다. 루키페르는 잠시 침실의 천을 걷고 안을 살폈으나, 알테미온은 그가


나갈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겠지요. 지난밤의 일에 듣는 귀가 없었겠습니까. 부상당한 몸으로


어찌…….”

“그들이 뭐라 말했나?”

두 사람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으나, 귀가 밝은 알테미온에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아셔야겠지요. 당신께서 침실의 그자에게 빠졌다는 말이 돕니다.”

“뭐? 설마 카우노스, 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뒤늦게라도 깨어난 기척을 했어야 했는데, 늦어 버렸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엿듣는 꼴이 되었다.
알테미온은 남몰래 베갯잇을 세게 쥐었다.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카우노스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트리온이 죽었습니다. 이제 다 끝난 일 아닙니까. 그간의 일을 비춰 보면, 사람을 자주 바꾸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너무 오래 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사들 중 그의 얼굴을 알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

“그게 하고 싶은 말의 전부인가? 내 침실 사정까지 관여할 줄은 몰랐는데.”


루키페르가 말을 자르고 반문했다. 차가운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 때문에 카우노스는 걱정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했다.

“제 말은…… 혹여라도 그자에게 마음을 주신 건 아니겠지요.”

“…….”

루키페르는 잠시 친우의 눈을 응시했다. 깜빡거리지도 않는 푸른 눈이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카우노스는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을 주다니.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가 변명과 사과를 하기 전에 루키페르가 입을 열었다.

“날 누구보다 잘 아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 텐데.”

침착한 말투였으나 카우노스는 그의 기분이 완전히 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전 그저 사람을 자주 바꾸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하지만 루키페르는 카우노스의 말을 무시하고 탁자 위에 놓인 꽃병에서 아네모네 한 송이를 빼 들었다.


꽃줄기를 손끝으로 돌리자 붉은 꽃잎이 피어나듯 살짝 벌어졌다.

“데리고 놀기 좋은 자 아니냐.”

그가 카우노스를 등진 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꽃줄기는 이내 힘없이 꺾여 버렸다.

“전에도 말한 적 있을 텐데. 그자의 눈이 마음에 든다고 말이야. 그걸로 충분히 설명된 것 아니었나?”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자네도 좀 즐기도록 해. 유랑시인이 왔다고 하지 않았나.”

카우노스는 다행히 왕의 화가 금세 가라앉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은 시인 이야기와


진영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막사를 떠났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막사 안에 다시 혼자 남게 되자 알테미온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방금 들은 말이 맴돌았다.

데리고 놀기 좋은 자. 눈이 마음에 든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루키페르가 직접 언급했던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뭐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렇게 멍청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혼자 기대하고 속았다. 부드러운 말투에 마음이 약해져, 말도 안 되는 의미


부여를 해 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마를 짚고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안정을 되찾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침실 가득 황금을 채워 줄 수도 있고, 네가 원하는 이야기를 뭐든 들려줄 시인들을 대령할 수도 있고,


손가락도 까딱할 필요 없을 만큼 많은 하인을 붙여 줄 수도 있지.’

루키페르가 기꺼이 내주겠다 한 것은 한갓 그런 것들 뿐이었다. 그런 것쯤이야 루키페르가 아니어도


누구에게라도 받아 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순간 알테미온은 마음을 정했다.

‘네 뜻대로 살게 될 것이다.‘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

“밤이니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좀 걷고 싶습니다.”


차분하고 태연한 목소리.

“아코이테스의 말로는 숲의 한가운데에 샘이 있다더군요. 데려다주시겠습니까?”

알테미온 스스로를 놀라게 할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 루키페르는 쉬이 허락했다.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알테미온은 지팡이 없이 루키페르의 팔을 잡고 발을 내디뎠다.

달빛이 밝았다. 마치 디아나 여신이 그들을 팔 벌려 환영이라도 하듯, 숲길에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을
정도였다.

“말이 없군.”

생각에 잠겨 있던 알테미온이 뒤늦게 대답했다.

“숲의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감상적일 때도 있나.”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요. 당신은 아닌가요?”

“전혀.”

멀리서 찌르레기 우는 소리와 발 아래에서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숲의 초목도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기라도 하는 듯 적막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당신조차 피를 흘리지 않습니까.”

“회복하고 있어. 내일 싸워 이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

루키페르가 알 수 없는, 알테미온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미 결심은 섰으나, 결과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자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신의 미움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지금이라도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


결정은 오랜 염원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과 반항심 때문이었다. 가벼운 망설임은 이를 막을 만한 힘이
없었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렸다. 울창한 나무들로 가려진 샘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양버들 몇 그루가 샘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수면 위로는 달빛이 떨어졌다. 밝은 빛이 물 위로 번져 흘러, 그들의 발치에까지
다다랐다. 샘은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루키페르가 히마티온과 가면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힘있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상처에 닿지 않을 만큼의 깊이에서 시원한 밤의 정취를 즐겼다.

알테미온은 그가 옷을 벗어 놓은 물가에 앉아, 샘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물에 닿은 순간 조금 떨렸다.

세 번.

샘물을 뜬 흰 손이 눈꺼풀 위로 세 차례 스쳤다. 손가락이 뺨으로 미끄러지고,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물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이 정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곧 맑게 물 흐르는


소리로만 알고 있던 샘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샘 주변에 자라난 이름 모를 풀들과
수선화의 청초함도, 수양버들의 가느다란 떨림도…….

그리고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오, 신이시여.

마지막까지 속눈썹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눈물처럼 떨어졌다. 세상 빛을 본 순결한 눈에 한 남자가 비쳤다.


알테미온이 처음 보게 된 타인이었다.
루키페르.

그의 눈은 알테미온의 눈과 똑같이 푸른빛을 띠었으며, 물에 젖은 머리카락도 똑같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하지만 단단한 얼굴선과 강인한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숲 너머 먼 곳을 응시하는 진중한 시선에는
냉정함과 무심함에 더하여 우수가 서려 있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감상적인 것 따위 알지 못한다고 말한 사내의 얼굴은 온통 감추지 못한 감정과 생각의 여운들로 물들어


있었다.

손끝으로 그려 보던 사내의 모습에 알테미온은 얼을 빼앗겼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아직 알지 못했음에도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에 비친 달빛조차 그의 강인한 아름다움과 존재감 앞에서 활기를 잃었다.

알테미온은 자신이 목격한 순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루키페르가 저를 돌아볼 때까지.

헐벗은 뺨을 드러낸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미미하게 달아오른 볼과 정확히 그를 응시하며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푸른 구슬 같기만 하던, 생명력
없는 눈이 아니었다.

루키페르가 상황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몹시 당황하여, 큰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너.”

알테미온은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여전히
루키페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가렸음에도 여전히 손 틈 사이로 그의 눈이 보였다.

화살에 찔린 것처럼 상처 입은 눈이었다.


“봤군.”

루키페르는 이미 끝났다는 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운명의 여신들의 실타래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살았던 탓이었다.


알테미온의 묘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가 위협적인 말투로 추궁했다. 알테미온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입술만 달싹이며 떨었다. 홀로


예상해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쁜 반응이었다.

어째서일까. 루키페르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감출 이유라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완벽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놀라고 당황하여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냈다.

“샘에, 눈을 씻으면…… 신벌을 거둘 수 있다고 하여…….”

알테미온은 누가 억지로 고개를 고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루키페르만을 바라보았다. 루키페르의 미묘한
표정만으로는 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신벌을 거둔다니. 누가 그런 방법을 알려 줬지?”

“……아폴로께서.”

알테미온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루키페르가 웃음으로 답했다.

“하, 하하!”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갑게 끊어지는 소리였다. 알테미온은 그제야 그가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교한 신들의 꾀에 당했다. 신성 모독을 해 댄 그를 신들이 눈엣가시로 여길 것임은 분명했으나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운명을 손아귀에 넣고자 할 줄은 몰랐다. 지금쯤 결국 함정에 걸려 넘어진
자신을 보며 만족하고 있겠지.

“그들은 날 가지고 장난칠 심산인가 보지. 그래, 성공했어.”

“그게, 무슨……?”

샘을 빠져나온 루키페르가 알테미온을 마주 보고 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아무


것’도 모르는 듯했다.

“누가 내 얼굴을 보아도 좋다고 했지? 그것도 아폴로가 시켰나?”

“아, 아니에요. 그건…… 절대.”

“그가 시키지 않았다고? 그럼 네 스스로 알아냈나?”

“그저 궁금하여……. 당신이 이렇게 싫어할 줄은.”

그가 알테미온이 주워 삼키는 변명을 잘랐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기가 찼다. 호기심. 그따위 것이 발목을 잡았다.

“몰랐겠지. 궁금했다고? 그래, 네 하찮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그랬단 말이지.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부드러웠던 그간의 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 보듯 알테미온을 보며 쏘아붙였다.

“아폴로가 진정 네게 온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는 네 호기심을 이용했을 뿐이야. 운명이


없어 죽지 않는 나를 손아귀에 넣고 신들의 뜻대로 길들이기 위함이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난
불사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알겠나? 네가 전부 망쳐 놓은 것이다.”
알테미온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이 좋다고 한 것이 그런 의미였나.
그제야 루키페르가 어째서 잠들 때만 가면을 벗었던 것인지 설명이 되었다.

루키페르가 알테미온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손에 조금만 힘을 줘도 가느다란 목은 쉽게 부러질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난…….”

몰랐다는 나약한 항변이 끊겼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루키페르가 나직이 속삭였다.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다고 확신하나? 아니, 넌 날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알테미온이 힘겹게 도리질 쳤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것일까. 세상을 보고 난 후에 죽는 것이니, 적어도 ‘죽기 전에 앞을 보고 싶다.’는


바람은 이루어진 것이겠지.

자신이 바란 건 이런 결과가 아니었는데. 단지 눈을 뜬 자신을 보고 그가 당황하고 조금쯤은 자신의


태도를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에게 자신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루키페르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그를 속이고 보려 하지 않았을 텐데.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 그를 배신하는 순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독한 슬픔과 고통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죽음 이후는, 괜찮을 것이다. 클리티에가 그를 맞아줄 테니까.
하지만 루키페르를 배신한 벌로 죽고 싶진 않았다.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존재가 자신이 되었다니.

루키페르는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곧 죽을 사람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거울상처럼 닮아
있었다.

“…….”

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다시 저 눈이 빛을 잃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떠밀 듯 놓아주었다. 알테미온이 거칠게 기침했다.

“꺼져.”

후회할지도 모를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루키페르는 히마티온을 갖춰 입고 가면을 썼다. 냉정한 눈빛은 눈물을 흘리는 알테미온을 스쳤다.

“내 손에 다시 잡히면, 그때는 끝이다.”

그가 휙 돌아섰다.

그리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숲을 떠났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테베레의 두 왕은 회랑을 걷고 있었다. 분위기가 뒤숭숭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다보이는 광장의 풍경은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은 오늘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동전 하나를 더 벌 심산인 듯했다.
만약 오늘 진다면, 이런 평화로움이 이 땅에 다시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피네오스여, 과연 그대의 아들, 폴룩스 장군은 달랐소. 테베레인들이 모두 그를 찬양하고 있지.”

“과찬이시오.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소.”

아들이 전장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했을 리 없는 피네오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에 반해


에우한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음에도 여유로워 보였다.

“하나 아폴로께서 폴룩스 장군의 뒤에 서 계시지 않소. 그대로 계속 싸웠다면 분명 폴룩스와 우리


테베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오. 폴룩스가 젊은 장군답게, 크흠, 혈기를 발휘하여 적에게 오히려 자비를
베푼 셈이 되지 않았겠소.”

그가 폴룩스를 칭찬하는 척 비난하면서 동시에 아폴로가 내린 가호를 자랑했다. 피네오스는 쉬이 화내지


않고 대꾸했다.

“내 아들 폴룩스는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오.”

결벽적일 정도로 올바른 성격을 지닌 사내로 자랐다. 그런 점이 자신과 꼭 닮았다고 생각하는 피네오스는
아들의 행동을 꾸짖지 않았다.

“그런 걸 갖출 필요가 없는 상대 아니겠소? 그 루키페르라는 자 말이오, 신전을 다 부수고 다닌다고 하지.


아카이아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존재 아니오. 불길하게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 그 지나칠
정도로 강한 힘, 또 극단적인 성미까지.”

에우한이 말을 계속했다.

“신성 모독을 해 대는 오만한 야만인 아니오? 루키페르와 키쉬르를 지지하는 신은 아무도 없소.”

“옳은 말이오. 나 또한 신께서 테베레를 지켜 주시리라 믿소. 그러하나 그자가 보통 강한 것이 아니지


않소? 테베레가 이 꼴이 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라는 속마음은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에우한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시오. 리기아의 신전에서 내린 신탁에서도, 유피테르께서 그자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것이라
확답을 주지 않았소? 그분도 그자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분명하오. 신들의 미움을 사는,
신성 모독을 행한 자가 아카이아 땅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소? 그럴 리가 없지. 오히려 지금까지
끝장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오.”

그의 생각은 일리가 있었다. 실로 테베레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전쟁의 신
마르스가 루키페르의 걱정을 하고 있다 한들, 이번 전쟁에 끼어들 수 없었다. 마르스 또한 그의 아들이
신을 모독한다는 사실과, 아에로페가 출산할 때에 운명의 여신을 잠들게 수를 써 루키페르의 방자한
행동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비난받고 있었다.

혈기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는 마르스를 막고 있는 것은 메르쿠리우스였다. 그는 유피테르의 뜻을 따라


마르스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다.

이러한 신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피네오스는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 신탁도 묘한 구석이 있소. ‘최후에 월계관을 차지하는 자는 전투의 승리 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라니. 만약 우리 테베레가 이긴다면, 우리의 처지가 어찌 된다는 뜻일지 모르겠소.”

“피네오스여, 그대는 괜한 걱정이 너무 많소.”

하지만 에우한은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손을 저으며 껄껄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난 시인들이 오늘의 일을 두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낼지 기대되기만 하오.”

하늘 높이 떠올랐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갔다. 지평선 위로 마지막 붉은 노을빛을 뿌릴 때가 되면,


다시 결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간 아탈란테는 남편 폴룩스를 살뜰히 보살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 대신 내가 싸우고 싶어요.”

“당신이 강한 여자라는 걸 알지만, 그건 안 될 말이오.”

열심히 치료해도 오른쪽 무릎의 부상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아탈란테의 시선이 남편의 무릎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너무 걱정할 것 없소. 적은 나보다 더한 부상을 입지 않았소?”

그때, 피네오스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부자는 무뚝뚝하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닮았기에, 둘 사이에는
그다지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준비에는 문제가 없나.”

“예.”

피네오스는 부디, 이번 일에 관해서는 에우한의 생각이 옳기만을 바랐다. 그가 갑옷을 입은 아들의


어깨를 어색하게 두드렸다. 그리고 머릿속을 떠도는 걱정들을 누르고 간신히 한 마디 했다. 그에게 있어
폴룩스는 아들이자, 하나뿐인 가족이었으니까.

“……몸조심하거라.”

다시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으니.

***

루키페르가 막사로 홀로 돌아오던 길, 달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환하였다. 그의 하반신에서 흘러내린


물이 발자취마다 검은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기름칠한 횃불로 불을 밝혀 놓은 막사 입구를 병사 몇 명이 지키고 있었다. 루키페르는 병사들의 인사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가슴속에 들끓는 분노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분노를 표한답시고 기물을 부수거나
싸움을 걸거나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소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단지 그림자만이 비치는 빈 막사 천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정신이 지나치게
또렷하여 빈 벽에도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루키페르가
잠깐에 불과했다고 생각한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날이 밝았던 것이다.

그는 막사 천을 통과해 들어오는 태양 빛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의 깊숙한 내면을 헤매고 있었다. 마침내


현실 감각을 깨운 것은 카우노스였다.

“루키페르여, 들어가겠습니다.”

“…….”

루키페르가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우노스는 잠시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상처 부위를 살펴볼까 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

한참 말을 하지 않았던 탓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카우노스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그 남자는 어디 있습니까?”

막사 안 어디에도 알테미온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금발의 남자는 강한 존재감을 갖고 있어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버렸어.”

“예?”

“네가 그놈이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떠나라고 했어.”

마치 계획이라도 했던 것처럼 대답이 술술 나왔다. 루키페르는 상대가 아무리 카우노스라 한들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전투를 앞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카우노스 또한 흔들리고
말 것이다.

루키페르는 저도 모르게 턱 위로 손을 올렸다. 분명히 얼굴은 잘 가려져 있었다.


“정말입니까? 그럼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자인데…….”

“모른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니까.”

매정하리만큼 단호한 말투였다. 카우노스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자에 대해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아코이테스가 이 막사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도록. 의원에게 맡겨서 일을 배우고 잡일을
돕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루키페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우노스가 그만 나가 봐야 할지 고민할 때,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쯤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겠지. 다시 무기를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도록 해라. 주성을
어떻게 칠지 계획했던 대로 말이야.”

“그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루키페르가 폴룩스 장군과의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테베레는 키쉬르의


손에 넘어올 예정이기에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카우노스는
왕이 내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카우노스여.”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워라.”

“예?”

그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루키페르의 화법이 묘하게 들렸던 탓이었다.

“놀랄 것 없어. 단지, 만약을 대비한 말이니까. 저들이 쉽게 굴복할 것 같지 않으니 말이야. 끝까지
성문을 닫고 저항한다 하더라도 성을 정복해야 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에우한을 잡아라. 그놈을
잡아야 길리포스를 지키고 있다는 괴물을 없앨 방법을 알 수 있겠지.”
“루키페르여.”

“할 일이 많지 않겠어, 이만 나가 봐라.”

루키페르가 친우에게서 휙 돌아섰다.

***

태양 빛이 마지막 힘을 짜내듯, 강렬한 붉은빛을 뿌릴 시간이었다.

루키페르는 또다시 성벽을 마주 본 벌판 위에 섰다. 그가 창끝으로 흙바닥을 내리찍음과 동시에 성문이


열렸다. 폴룩스는 아무 말 없이 전차를 끌고 성 밖으로 나왔다.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투레질을
하며 멈춰 섰다.

전차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폴룩스가 창과 방패를 들었다. 루키페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

양쪽 진영에서 어떠한 소음도 내지 않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피네오스 또한 가신들과 함께 성벽 위에


서서 초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창을 치켜들려던 루키페르의 시선이 잠시 피네오스 쪽으로
향했다.

얼굴까지 가린 투구 탓에 정확히 어디를 본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피네오스는 어쩐지 그자가 자신을


정확히 쳐다본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몰랐으나 그 예감은 맞았다. 루키페르는 오래된 분노의 대상을 잠시 바라본 뒤, 창을 들었다.

“와라.”

반드시 이 자리에서 폴룩스를 죽일 생각이었다. 가족을 잃는 고통을,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피네오스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폴룩스는 망설이지 않고 돌진했다. 창끝이 곧장 목으로 향했다. 루키페르가 허리를 숙이며 이를 피함과
동시에 폴룩스의 허벅지를 노렸다. 하지만 루키페르의 창은 방패에 막혀 튕겨 나갔다.

두 사람은 창과 방패를 든 채 몇 합을 호각으로 싸우는 듯했다. 그들의 창이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나가는 순간마다 테베레와 키쉬르 진영의 사람들은 양손을 꽉 움켜쥔 채 안타까움에 신음했다.

아탈란테는 뺨에 손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피네오스는 어찌나 손을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톱으로 팬 자국이 남을 정도였으나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루키페르가 박차고 일어나 창을 휘두를 때마다, 강한 모래바람이 일어나고 흙바닥이 푹 파였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분노가 하얗게 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본능이, 곧 오래된 복수가 이뤄질 것을
알려 주었다.

그의 상대, 폴룩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싸웠다. 고작 이틀 전보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발전해 있었다.


극도로 집중해 있던 그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몰입이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주춤한 순간, 루키페르의 창이 엄청난 힘으로 갑옷을 꿰뚫고 가슴팍을 찔렀다.

“크윽……!”

하지만 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장기가 모조리 끊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꽉 잡고


있던 창으로 루키페르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이틀 전에 다친 곳과 같은 곳이었다.

폴룩스는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루키페르 쪽으로 몸을 가깝게 붙였다. 그 때문에
날카로운 창끝이 가슴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건 루키페르의 옆구리를 찌른 창도 마찬가지였다.

양쪽 진영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만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죽을 것을 각오하고 틈을 내주었던 것이다. 대신 자신의 죽음에 루키페르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
정신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는 데에 온 힘을 다하는 폴룩스는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못했다. 반면 목숨을
잃게 할 만큼 강한 고통을 참는 데에 능한 루키페르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비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테베레 따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멍청이라니.”

전과 같았다면 이따위 허접한 계획이 통할 리가 없었다. 이자는 스스로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절대


모르겠지.

루키페르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고통이


상당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창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목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이 모습 그대로일지도. 그들의 발치에 두


사람이 흘린 피가 섞여 피 웅덩이가 생겼다.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알아 둬라. 테베레는 네…… 어머니의 피를 먹고 자란 나라라는 걸.”

루키페르가 투구를 벗었다. 아직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노을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그 순간 폴룩스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조차 잊을 만큼


충격을 받은 것이다.

“너…….”

폴룩스가 가슴팍을 손으로 잡은 채 헐떡거렸다. 루키페르의 얼굴은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에로페……, 내 어머니이기도 하지.”

바람이 맨뺨 위를 스쳤다.
“서, 설마…… 아버지…….”

폴룩스가 피 웅덩이 위로 주저앉았다. 루키페르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쏘아보았다. 아들보다 더욱


놀란 표정을 한 피네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을 보며 순간 피네오스는 아에로페를 떠올렸다. 오래전 곁을 떠난 자신의 아내를, 그리고 여전히


떨쳐 내지 못한 죄책감을.

‘왕비가 다음번 수태할 아이는 왕을 죽음으로 이끌고 테베레를 피바다로 물들일 것이다.’

제사를 지내던 중 비밀리에 받았던 신탁이 어찌 된 일인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피네오스는 끝까지 아에로페를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젊은 왕이었던 그는 성난 테베레 시민들까지 막을
수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 일어날 불행의 싹을 없애고 싶어 했다

몰려온 군중에 쫓겨 도망치는 아에로페를 도와주지 못했다. 그는 그때 장자인 폴룩스에게 해가 될까


아이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날 이후로 주성 밖으로 쫓겨 도망간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살았다.

폴룩스가 자라나며 점차 아에로페를 닮아 갔다. 처음부터 아내와 꼭 닮아 있던 눈매에다 더해 얼굴선과


이따금 웃을 때 나타나는 분위기까지도 더욱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아들의 얼굴을 차마 자주 볼 수
없었으니 가까이 지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가…….”

그는 그 이후로 다시는 아에로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결코 잊지도 않았다. 심란한 밤이면, 꿈속에 꼭 아에로페가 나타나곤 했으니까.

폴룩스보다도 그녀를 더욱 닮은 얼굴. 틀릴 수가 없었다. 키쉬르의 왕은 분명히 그녀의 아들이었다.


테베레의 모든 이들이 원치 않았던 또 다른 자식은, 결국 그들을 벌하기 위해 온 것이다. 사람들의
적대심이 오히려 그의 복수심을 키워, 신탁이 이뤄지도록 만든 것이다.

“아에로페…….”
피네오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간의 뼈저린 후회와 죄책감이 일순간에 밀려들었다.

미안하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제 그녀의 곁으로 가 사죄할 때였다. 누가 막을 새도 없이, 그는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피가 낭자한 참극에서 잠시 눈을 뗀 사람들은 파랑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추락하는 피네오스의


푸른 히마티온이 펄럭이며 만들어 낸 환영이었다.

그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잠깐에 불과했다. 낙하의 순간은 짧았고, 그의 몸은 마침내 지상에 도달했다.
힘없이 흙바닥 위를 뒹굴며, 고고한 푸른 옷자락까지 선혈로 물들었다.

“아, 아버지!”

폴룩스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미 숨이 끊긴 피네오스의 곁으로 기어갔다. 그가


지나간 뒤로 검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큭.”

투구를 힘없이 떨어뜨린 루키페르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휘청거렸다. 피를 많이 쏟은 까닭이었다.

카우노스는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사태에 경악하며, 그의 친우를 지키기 위해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빠른 존재가 있었다. 인내할 만큼 했다며 아들을 죽도록 놔둘 수 없다며 고함을 지른
마르스였다. 그는 방해하던 메르쿠리우스를 제압하고, 그의 빠르기로 유명한 탈라리아를 훔쳐 신고
달려왔다. 그의 두 아들, 공포의 신 티모루스와 대패의 신 메투스 또한 함께였다.

마르스는 키쉬르의 군사에 광기, 잔혹성과 전의를 불어넣었다. 그의 아들들은 지켜보던 테베레의
군사에게 끔찍한 두려움, 패배감, 극도의 불안을 심어 놓았다.
“다 부숴 버려라!”

“테베레 놈들이라면 한 놈도 살려 두지 말아라!”

신의 가호를 받은 키쉬르의 군사들이 두려움 없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들은 성벽 위로 화살을


쏘아 올리고, 성벽 위를 기어오르며, 성문을 부수려 투석기로 바위를 날렸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성벽
위의 테베레인들은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마르스가 무릎이 꺾인 루키페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테베레를 떠났다. 떠나는 그들의 등
뒤로 테베레 성이 불타고 있었다.

4. 꽃과 새벽별

샘에 남겨진 알테미온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죽을 뻔했다는 충격보다 버려졌다는 충격이 더 컸다.

루키페르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원하는 건 뭐든지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고작 그제의


일이었는데. 알테미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허망한 일이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는 루키페르의 마음이 바뀔 리가 없으며, 따라서 그가 다시 이곳으로 자신을 찾으러


올 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

하지만 몇 걸음 걷기가 무섭게 다시 멈춰 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이제 그가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막사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거니와,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찾아갈 만한 아는 사람이나, 피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늘 아래 철저히 혼자였다. 그게 지금만큼 뼈아프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를 반기는 곳은 없을 것이다.

사방으로 뻗은 땅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는 결국 달빛을 따라 걸었다.

숲을 빠져나오고, 날이 밝은 후에도 쉬지 않고 걸었다. 목적지가 없었음에도, 아니 목적지가 없었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알테미온은 태양 빛이 환하게 비치는 낮이면 천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걸었고, 민가를 지날 때에도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환한 태양 빛 아래,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당당히 걷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이를 이뤄 낸 지금 그의 마음은 치욕과 슬픔과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단
말인가.

세상은 볼 것과 즐길 것으로 가득한데,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가 잃어버린 단 하나의 것에 머물러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는 기이한 고행을 이어 갔다.

“…….”

그렇게 꼬박 이틀을 걸은 후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무릎이 꺾였다. 주저앉는 순간, 알테미온은


엄청난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이 핑 돌았다.

“허억…….”

짧은 침음과 함께 그는 기절했다.

***
몇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다시 눈을 떴다. 그제야 그의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자신이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는 것과, 아직 죽지 않고 이승에 잘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몹시나 허기지다는
것까지.

알테미온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근처 덤불에 달려 있는 산딸기를 허겁지겁 따 입에 넣었다. 시큼한 과즙을


만족할 만큼 삼키니 정신이 들었다. 질긴 목숨이 일깨운 감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낡은 신전이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돌계단과 조금
삭기까지 한 문. 사람들에게 잊힌 지 오래된 신전 같았다. 그 사실에 마음이 이끌린 그가 조심스럽게
신전으로 들어갔다.

“누구 계십니까?”

말을 하지 않아 쉰 목소리가 나왔으나 적막한 신전 내부에는 그를 반기는 자가 없었다. 제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아주 오래전에 사람들이 가져다 바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썩어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

방치되어 더러워진 신상을 보고서야 그는 이곳이 디아나 여신의 신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되돌아 나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디아나는 그에게 벌을 내린 신이면서도 그의 어머니


카리클로가 섬겼던 여신이기도 했다. 또한 벌을 거두고 자비를 베푼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도 하지 못했다.

알테미온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나무 비를 들어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창고를 뒤져 낡은 천을 찾고,


근처에서 샘을 찾아 물을 길어다 신상을 닦았다. 곳곳에 생긴 거미줄을 털어 내고, 내부를 깔끔하게
정돈하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청소를 해 본 적이 없어 몹시 서툴렀던 것이다.

후, 끝났다.

신전을 대신하여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가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대로 떠나기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올려지지 않은 제단이 쓸쓸했던 것이다.

신께 바칠 만한 것이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알테미온은 농부들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낫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평생 기른 기나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낫으로 대강 자른 탓에 짧아진 머리는 들쑥날쑥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길고 탐스러운 금발.


알테미온이 가진 것 중 유일하게 귀한 것이었다. 그는 금사와도 같은 찬란한 머리카락을 제단 위에 바쳤다.

부디 클리티에가 편히 잠들었길,

신께서 루키페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감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망은 오로지 이 두 가지뿐이었다.

그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로, 낡은 신전을 떠나려 했다.

“네 자신을 위한 소원은 어디 있지?”

그때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알테미온은 몹시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제단의 옆, 작은 문을 통해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하리만큼 희게 빛나는 피부, 목소리에 실린 권위, 냉담한 표정, 긴 검은
머리와 등에 멘 활과 화살통…… 그는 이 젊은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설마, 오…….”

그는 어떻게 예의를 갖추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여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달의 여신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알테미온은 여신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건 절 위한 소원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어렵구나. 루키페르를 어여삐 여기는 신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지.”

“그렇다면 그는…… 무사합니까?”

이미 폴룩스 장군과 재차 싸웠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알테미온은


전투의 결과가 어떠했을지 상상했다.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아나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어.”

하지만 그 말은 꼭 그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뜻처럼 들렸다. 알테미온은 두려움에 어깨를 잘게 떨었다.


전쟁의 결과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더는 다치지 않고 무사했으면 했다.

“테베레에서 먼 곳에 있으니, 머지않아 전처럼 회복되겠지. 하지만 테베레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그


패기와 적의는 간데없을 것이다.”

“다 제 잘못입니다.”

그가 죽기라도 했다면 그건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알테미온은 생각했다.

“그래. 내 오라비가 내건 미끼였지.”

디아나의 무심한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겉과 달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여신의 속내에는


알테미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일말의 책임감이 있었다. 끼어들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가 신전을
서투르게 청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누구도 탓할 생각이 없습니다. 앞을 보게 된 것은 제가 원하던 것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알테미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누구에게도 꺼내 놓을 수 없었던 진실된 속내를 말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 입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그에게 어떤
말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그는 분명히 다시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은 모른다.”

흘러내린 눈물이 신전 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디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가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려 주지.”

“예?”

알테미온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붉게 부은 눈은 차가운 신의 마음까지 움직일 만하였다.

“키쉬르의 장군인 길리포스는 한 외딴 성에 갇혀 있다. 루키페르는 줄곧 그를 구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를 지키는 뱀을 지나가는 법을 알지 못하면 절대 그를 구할 수 없어.”

눈물에 젖은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장군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루키페르에게 있어 가족과도 같은


이라고 했다.

“머리가 100 개에, 눈도 100 개, 목소리도 100 가지를 갖고 있어. 모든 머리가 동시에 잠들지 않고,
그의 이에 물리면 누구라도 저승길에 올라서게 된다. 그 뱀은 본래 내 오라비의 자식으로 라돈이라 불리지.
무척 난폭한 성정이라, 신조차 그를 말로 설득할 수 없다.”

“여신이시여, 그를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궁술의 여신이 여전히 쌀쌀맞은 얼굴로 미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딱 한 군데, 알려지지 않은 약점이 있지.”

디아나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잠시 길 잃은 바람이 신전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사라질 때까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여신이 말을 마친 후에도 알테미온은 희망과 경외에 사로잡혀 굳어 있었다. 디아나는 그대로 떠나려다,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카리클로는 내가 아끼던 요정이었다. 넌 그 아이를 많이 닮았어.”

한참 뒤, 알테미온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루키페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째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인지 떠올리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복부에 꽂혔던 창과, 성벽 위에서 떨어지던 피네오스.

“허억……!”

그가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자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복부에서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거의 스틱스 강을 건널 뻔했지.”

누군가 옆에서 불쑥 입을 열었다. 통증으로 눈앞이 돌아, 누구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인 후에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소박한 공간. 젊고 유쾌한 인상의 청년이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넌.”

“여전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지팡이 카두케우스를 짚은 메르쿠리우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마르스에게서 한 대 얻어맞은 데다 샌들


탈라리아까지 빼앗겼던 굴욕적인 기억이 떠오른 까닭도 있었다. 이놈의 아버지에게 당한 것도 갚아 주지
못했는데, 감히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이놈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다.

“여긴 어디지?”

루키페르는 메르쿠리우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신경 쓰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 속으로 욕하면서도 전령의 신은 떨떠름하게 대꾸해 주었다. 물론 신 중의 신,


유피테르의 명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폴로와 마르스가 멱살을 잡고 싸운다
한들, 상관없는 그가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는
것이 그의 성미에 더 맞았다.

“이곳은 티노스 섬이다.”

“날 이곳까지 데려온 건.”

“물론 네 아버지다.”

“뭐?”

루키페르가 인상을 구기며 주변을 살피자 나그네들의 수호신이 어쩔 수 없이 덧붙였다.

“그는 여기에 없어.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 유피테르의 명령을 거부하고 날뛰다가 결국 잡혀갔지. 난 널
치료하기 위해 대신 보내졌다. 네 아버지가 훔쳐 갔던 내 샌들도 되찾아야 했고.”

“도움 따윈 필요 없어.”

“그 오만함과 입만 살아 있군. 내가 곧바로 치료하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쯤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신을 모독했던 네가 곧장 저승으로 갔다면 분명 저 밑바닥 지옥인 타르타로스로 향했겠지. 정녕 그걸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배에 다시 구멍을 내 주마.”

메르쿠리우스의 목소리에 이제 분노가 잔뜩 실려 있었다. 루키페르는 대꾸하지 않고 그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성가셨다. 그는 누가 어떤 기분을 느끼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 없었다.

이미 다 끝났다. 떨어지기 직전 피네오스의 눈빛에 담긴 오래된 회한, 죽어 가던 폴룩스, 자신이


이끌었던 키쉬르의 전사들, 복수심, 야망. 모조리 잃어버렸다. 전투에서 이겼든 졌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이 땅 위에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들조차 신들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졌을 뿐이었다. 자신이


거부했던 아버지 마르스가 아니었다면 목숨이 붙어 있지도 못했겠지.

전령의 신은 눈을 내리감은 루키페르의 얼굴에서 심란함을 기민하게 읽어 냈다.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는 게 좋을 거다. 여긴 바쿠스의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별일 없을 테니까. 네가


한 행동이 아폴로의 성질을 엄청나게 긁어 놓았거든. 테베레는 지금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지. 피네오스와
폴룩스가 죽었고, 주성은 불탔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술에 취한 듯 뭉그러진 소리였으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에 들은 적 있는 노래였으니까. 루키페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에게서 뭘 원하지?”

“조용히 살아라. 신들을 자극하지 말고 인간으로서 네 삶을 살아.”

“차라리 죽는 게 나았겠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발로 바닥을 가볍게 구르는 소리와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메르쿠리우스조차 그의 곁을 떠났고,
적막이 찾아왔다.

***

키쉬르가 주성을 차지했다. 루키페르를 대신하여 군사를 이끈 카우노스는 그가 남긴 말대로 에우한을


잡으려 했다. 삼왕 중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 에우한은 체면도 잊고 도망치려 했으나 결국 카우노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우한이 평소에 보이던 당당함과 오만함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끌려온 그가 대뜸 호통을 쳤다. 전사들의 손에 잡혀 막 왕궁 바닥에 던져진 참이었다. 도망치려던


사람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자리에 테베레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었던 루키페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데다, 기분에 따라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인 키쉬르의
왕 앞에서 함부로 행동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작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로
사라져 버렸고, 테베레를 차지한 건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카우노스라는 자였다.

겉으로만 보아도 굉장한 무골이라는 느낌이 드는 루키페르와 달리, 카우노스라는 재상은 살육과 거리가 먼,
멀건 인상이었다. 분명 루키페르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던 자이겠지. 겨우 이런 자에게 아름다운
왕궁과 그가 애지중지 모은 귀한 보화들을 내주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저자를 당장이라도 끌어 내리고 싶었다. 저자가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도, 에우한이 즐겨 쓰던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손가락 가득 끼고 있던 황금 반지들을 어루만졌다.
허리에 찬 정교한 벨트와 구슬이 화려하게 달린 샌들도. 단 하나도 더 내주고 싶지 않았다.

“국왕 대접을 바라는 겁니까? 멸망한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비록 테베레가 정복당했다고 해도 내가 아폴로의 핏줄임은 변치 않는 사실 아닌가!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태양의 신이 두고 보실 것이라 생각하나?”

에우한의 예상이 맞아 들어간 듯했다. 재상이 조용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 듣고 싶었던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가 손을 들자 가까이에 서서 테베레의 왕을 노려보고 있던 전사들이 뒤로 한참 물러났다. 에우한의 화를


가라앉히고 설득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에우한은 내심 안도했음에도 겉으로 여전히 카우노스를 노려보며 침묵을 지켰다. 먼저 질문하지 않고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당신들이 포로로 잡아간 길리포스. 그가 당신의 명령에 따라 갇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

오호라.
에우한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할지 재빨리 계산했다.

“그 성을 지키는 괴물. 명령을 내린 당신이라면 분명 지나가는 법을 알고 있겠지요.”

카우노스는 사라진 루키페르에 대한 걱정이 굴뚝 같았음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이미 음유시인들은


정복자 루키페르에 대해 비극을 만들어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카우노스로서는 그가 절대 죽었을 리 없다고 믿었다.

전투가 있기 전, 왕의 태도가 묘했을 때, 제대로 캐물었어야 했는데. 예언이라도 하듯 앞날을 내다봤던


루키페르에게 이미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루키페르라면 분명히 어떤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시대로 따르는 데에 망설일
것도, 마음이 흔들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이 아폴로의 핏줄. 그렇기에 난 그에게 접근할 수 있지. 맞소. 당신의 생각대로 난 그의
앞을 지나갈 수 있소.”

에우한이 말끝을 질질 끌었다.

“그 방법은 아폴로께서 내게 은밀히 일러 주신 것이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이유로 알려 주겠소?”

그의 오만한 비웃음에 조용히 지켜보던 키쉬르의 전사들이 성을 냈다.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지르며 장검을
뽑아 들었으나 에우한은 끄덕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카우노스는 그런 에우한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늙은 구렁이와도 같은 저자가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을지 뻔했다.

“알려 주면, 당신을 살려 드리지요.”

“뭐라?”

“아직 모르시겠군요. 바로 옆방에 당신의 식솔들이 모여 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한 명씩 차례로 죽어


나갈 겁니다. 당신 눈앞에서 팔다리를 하나씩 자를 겁니다.”

이제 차분한 카우노스의 어조에는 비웃음과 냉기가 실려 있었다.


“물론 그들이 다 죽고 나면 그다음은 당신입니다. 당신 머리로 제사를 지낼 겁니다. 아직 아폴로의
신전을 파괴하지 않은 게 다행이죠.”

굳게 다물려 있던 에우한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전사들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거요?”

“내가 신에게 벌을 받는다 해도, 당신과 식솔들이 모두 개밥이 된 이후일 텐데 뭘 걱정합니까.”

카우노스가 슬며시 미소를 짓자 그의 안광이 광인의 것처럼 빛났다.

***

차츰 부상에서 회복되자 혼자서도 운신할 만했다. 루키페르는 하릴없이 밖을 걷곤 했다.

티노스 섬의 어딜 가도, 달큰한 포도주 향이 풍겼다. 풍요로우면서도 나른한 곳이었다. 잘 익은 포도가


송이송이 맺힌 늘씬한 덩굴이 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술병을 낀 주정뱅이들이 덩굴 그늘 아래 누워
입을 벌리고 잤다.

취기 어린 웃음과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티노스 섬 사람들은 아카이아 땅 위 여느 도시민들과 달랐다.


그들은 근심과 걱정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니, 느끼기 무섭게 다시 술을 들이켜 다 망각해 버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의 일상은 매일이 축제였다. 북을 치고 노래하며 이들을 이끄는 바쿠스의
여사제들은 요란스럽게 춤을 추곤 했다.

웃지 않고 노래하지도 않는 루키페르는 섬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루키페르에 관한 소문을 들어 본 자가 있다 한들 가면으로 가리고 다녔던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다른 섬에서 일어난 전쟁 소식 따위는 술기운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그들에게 루키페르는 두려운 정복자가 아니라 어쩌다 흘러들어 온 이상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이, 젊은이, 무슨 걱정이 많소?”

그런 그에게 한 호기심 많은 노인이 말을 붙였다.

“신경 끄시오.”

“밤낮으로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다니는 당신을 보니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말이지.”

술기운이 오른 건지, 원래 그런 것인지 노인의 코와 볼은 발그레했다. 그가 딸꾹질하면서도 계속 말했다.

“나, 아코이테스도 젊을 때는 당신처럼 잘생기고 걱정이 많았거든. 거참 욕심이 많았으니 당연했지.”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루키페르가 노인의 이름에 걸음을 멈췄다. 그가 책임지기로 했던 소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남자도.

“거참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살려고 했지. 바보 같은 시절이었어.”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천성이 태평한 것인지 냉정한 루키페르의 인상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난 어차피 편안하게 죽을 터이니 걱정할 게 뭐가 있겠소?”

노인 아코이테스가 술병을 흔들면서 고개를 까닥였다. 술을 권하는 손짓이었다.

루키페르가 그의 앞에 앉아 술병을 받아 든 것은 오로지 그자의 이름 때문이었다. 가만히 술병을


바라보고만 있자 노인이 재촉했다.

“이곳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어울리지 않아. 그저 바쿠스의 뜻에 따라 즐기면서 살면 되거든. 그걸


마시면 근심에서 해방될 거요. 망각을 도와주거든. 그것이야말로 축복이지!”

그 비슷한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남자가 떠오르자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결국 루키페르가 술을 들이켜니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며 좋아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들꽃을 엮어 만든 화환을 쓴 여인들이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아코이테스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커다란 술동이를 놓아 주고 사라졌다. 신선한 포도 향이 진하게 퍼졌다.

“그러고 보니 젊은이 이름을 모르는군.”

“난 당신처럼 훌륭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소.”

그의 이름은 무거웠다.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카우노스와 키쉬르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자리와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 좋을 대로 부르시오.”

그가 대꾸했다.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

목덜미 주위로 달랑거리는 대강 잘린 머리카락. 그 사이로 실바람 한 줄기가 슥 지나쳤다. 날이 무척


맑았다.

디아나 여신이 괴물을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신체적인 능력이 없는


알테미온이 그 앞을 지나는 것이 쉬워질 리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는 괴물이 있다는 곳으로 길을 물어 가며 걸었다.

운이 나쁘게도 그가 넋을 놓고 걸었던 길은 그가 가야 하는 방향과 정반대였다. 한참 더 부지런히 걸어야


했음에도, 괜찮았다. 그동안 그간 하지 못했던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으니까.

여신을 만난 이후로 어쩐지 죄책감이 조금 덜어져, 알테미온은 행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몰랐던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과 호기심 어린 얼굴을 알게 되니 항상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도 약간이나마 풀렸다.

아카이아 땅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를 오랫동안 속박했던 트리온 부자처럼 악랄하지 않았다. 삿된 뜻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알테미온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는 이따금 지나가던 마을의 중심부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와 신이


축복을 내린 듯한 아름다움은 쉽게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멀리 보이는 파르나소스의 언덕으로 오라

노래하는 무희들은 환영받으리니

경쾌한 노래나 구슬픈 노래를 가리지 않고 불렀다. 하지만 어떤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 쓸쓸했다. 노래를 부를 때면 계속해서 한 사람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그의 감정이
전해진 것인지 관객들은 쉽게 눈물을 보이곤 했다.

“마을에 더 머물면서 노래를 계속 들려주시오.”

“부탁이니 아름다운 여행자여, 우리 집에 머물러 주세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에게 구애와 찬사를 던졌다. 여행길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하루를 더
머무른 도시에서는 다음 날 아침 그가 머물렀던 집 문가에 꽃이 수북이 쌓여 있을 지경이었다.

그는 강가에 앉아 도시의 처녀와 아이들에게서 꽃 이름과 풀이름을 배우기도 했다. 향과 이름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그가 새삼 감탄하듯 바라보았다.

“이게 히아신스구나……. 향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화려한 푸른 꽃을 보고 있노라니 일전에 아코이테스가 꽃에 대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났다.


우울한 그의 기분을 달래 주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이제 그 꽃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소년의 얼굴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 솜씨가 좋은 소녀는 마구 자른 그의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다듬어 주었다. 온순하고 착한 인상인 그녀는,


알테미온이 여행길에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소녀의 목소리가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클리티에의 목소리와 비슷했던 것이다. 클리티에가 살아 있었다면 이 소녀보다 컸을까.

“알테미온 님, 꼭 떠나셔야 하나요?”


그의 머리 위에 화환을 올려 놓은 소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테미온은 이미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들은 참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소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답을 잠시
망설였다.

“난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그럼…… 여기로 돌아오시면 안 되나요?”

“글쎄……. 앞날을 전혀 알 수 없군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몰라서, 그가 말끝을 흐렸다.

“위험한 세상이에요. 옆 도시만 해도 전쟁 때문에 시민들이 노예로 팔려 갔던걸요.”

전쟁의 중심에 있던 알테미온은 물론 그런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테베레에 속하지 않는,


전쟁의 피해가 닿지 않은 도시들을 통해 이동 중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래도 가야 해요.”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걱정 말아요.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

그는 작별 인사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

티노스 섬에서는 그날도 어김없이 광란의 축제가 벌어졌다. 만취한 루키페르의 눈은 사물들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떡갈나무와 단풍나무도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날 서 있던 현실 감각도 함께 취기에
휩쓸려 눅진하게 녹아내렸다. 사람들이 외치는 말들도 귓가에 맴도는 이명처럼 의미 없이 반복되다가
사라졌다.
날이 어두워서 군데군데 세워 둔 횃불 빛과 흥에 겨워 울리는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만이 눈과 귀에 제법
날카로운 자취를 남겼다.

노인 아코이테스의 말이 맞았다. 취기가 잊게 만들어 주었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했다.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해방감도 주었다.

루키페르는 고개를 숙인 채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를 알던 사람들이 본다면 누구라도 놀랄 만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와 비슷한 상태에 접어든 사람들은 옷을 벗고 춤을 추거나 눈이 맞은 상대와 손을 잡고 으슥한 숲으로


들어갔다.

웃음을 흘리던 여인들이 다가와 루키페르를 잡아당겼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리라를 연주하던 한
여인은 그의 목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귀찮아진 그가 한 손으로 여인을 떼어 내기 전까지, 그녀는 계속
그의 등짝에 입을 맞춰 댔다.

마침내 들러붙은 여인들을 모두 떼어 내자, 그 모습을 구경하던 노인 아코이테스가 손가락질하며 낄낄댔다.

“뻣뻣한 젊은이, 굴러들어 온 복을 제 발로 차는구만!”

“시끄럽소.”

그때 바닥에 눕다시피 앉아 있는 노인의 다리에 지나가던 한 사내가 걸려 넘어졌다. 노인은 술기운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취기가 꼭 사람들을 즐겁게만 만드는 건 아니었다. 걸려 넘어진 젊은
남자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눈을 치켜떴다. 그가 손짓하자 남자의 일행들이 다가왔다. 전부 젊고
혈기 왕성한 사내들이었다.

“노친네, 지금 날 비웃었나? 내가 우스워?”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미안하게 되었네.”

“목이 부러질 뻔했는데 고작 그따위 사과로 넘어갈 수 있겠어? 어이!”

그들은 아코이테스의 사지를 하나씩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를 들고 바닷가로 향했다. 노인은


비명을 꿱꿱 질러 댔으나 요란한 북소리와 고함 소리 때문에 상황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노인을 들고 가는 장정들을 보고도 질 나쁜 장난으로 생각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웃는 이들만 있었다.
“제기랄.”

루키페르는 이마를 짚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과하게 들이켠 술 때문에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한참


뒤에야 상황을 파악한 그가 남자들이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땅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통에
제대로 걷기 힘들었음에도 굉장한 힘은 그대로라 그가 길을 막는 장애물들을 한 번 치기만 해도 다
부서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내려 줘! 아이고, 바쿠스여! 네놈들은 주신이 두렵지도 않나!”

“시끄러워, 망할 놈의 영감! 바닷물 맛 좀 보라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아코이테스의 팔다리를 잡고 그들은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바닷물에


빠뜨릴 듯했다. 만취한 채 바다에 빠지면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골치 아픈 노인네. 이름값도 못 하는군.

속으로 짜증 내며 루키페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들어라, 지금 내려놓지 않으면 흉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네 명의 장정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리고 취하여 비틀거리며 서 있는 루키페르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주정뱅이 놈이…… 객기가 생겼나 보지? 지금 썩 꺼지지 않으면 다음번은 너다!”

그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루키페르를 조롱했다. 튼튼한 몸을 가졌다 해도 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뭘
하겠는가? 그들은 신이 내린 행운을 낭비했다. 비웃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그가 그들의 앞까지 다다른
것이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네 번 터졌다. 그들은 루키페르가 팔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한
대씩 맞자마자 전부 기절해 버린 것이다. 기절한 남자들과 함께, 얕은 바닷물에 빠진 노인이
허우적거렸다.

루키페르는 비틀거리면서도 노인을 먼저 들어 올려 육지 위에 올려놓고, 그다음 네 명의 장정을 질질


끌어냈다. 아코이테스가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해 댔다.

“아이구, 망할 놈들……. 내 꼴이 우스워질 뻔했군. 그놈들을 바다에 빠뜨려 버리게!”

역정을 내다가 그는 손가락을 입 안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멀리서 춤을 추던 여인들이 달려왔다.


낮에 보았던 화환을 쓴 젊은 여인들이었다. 노인이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자, 여인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절한 장정들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알몸이 된 남자들을 거대한 떡갈나무
가지에다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짐승들을 사냥할 시간이다!”

여인들 중 하나가 외치자 사람들은 함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저마다의 바람을 외치며 나무에 매달린
남자들을 과녁 삼아 돌, 나뭇가지, 표창과 화살들을 던졌다. 머지않아 그들의 헐벗은 몸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루키페르는 어지러워 나무뿌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졸음이 쏟아져서, 이만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월계관을 씌우고 참나무로 만든 가마 위에 태웠다. 그리고
횃불을 든 채 행진을 시작했다. 루키페르는 가마에서 뛰어내릴 여력도 없어서 그 위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

기절하듯 잠들었던 루키페르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여인들의 틈에 끼어 있었다.

엉망이었다. 옷과 살갗 위로 술과 음식이 쏟아져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고, 그건 그를 둘러싸고


잠들어 있는 바쿠스의 여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쓰레기 더미 안에서 다 같이 잠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면 모두 단잠에 빠져 있어, 자신들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벌레가
지나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루키페르는 자신이 제정신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상황에 미간을 확 찡그렸다. 그리고 그의 복부


위에 보란 듯 올라와 있는 한 여사제의 팔을 밀쳐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우욱……!”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엄청난 현기증과 함께 토기가 치밀었다. 그는 뛰어난 자제력으로 한 차례 속을


억누르는 데에 성공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독한 숙취가 밀려왔다. 눈앞이 핑핑 돌고, 속은 요동쳤으며, 머리는 깨질 듯 아파 왔다.

가까스로 네발로 기어 뒤엉켜 잠든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의 참을성도 거기까지였다. 그는


뽕나무를 붙잡고 그 아래에 시원하게 속을 게워 냈다. 다 비운 후에도 헛구역질이 계속 났다.

“……하.”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는 끔찍하게 더러운 옷을 벗고 근처 샘으로 뛰어들었다. 그저 술독이 빠질


때까지 누워 있기엔 너무 지저분했다. 어지러운 탓에 더러운 부분을 대강 씻어 냈다.

물결이 파장을 일으키고 그 위로 태양 빛이 부서질 때마다, 루키페르의 눈에 실제보다 더한 잔영을 남겨


놓았다. 물에 비친 얼굴도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물에 비친 해쓱하고 어두운 인상의 젊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푸른 눈 속에서 푸른 눈을 가진 또 다른 남자를 보았던 것이다. 제 손으로 쫓아낸 그
남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알테미온은 자꾸만 그의 꿈속에 슬픈 표정으로 나타나 그들이 헤어졌던 샘의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런 꿈을 꿨다 깨어날 때면, 루키페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기랄.”

그가 듣는 이 없는 욕설을 내뱉었다. 술이 가져다주었던 비현실적인 해방감과 망각의 즐거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더욱 지독한 현실 감각과 후회가 들어찼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술을 마셔서 모든 것을 잊어 보려 했다니. 그의 얼굴에 묘하게 뒤틀린


쓴웃음이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술기운에라도 애써 잊어 보려 했던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다가왔다.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는 그 남자가 했던 말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성미를 건드리고, 모두가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자신에게 겁도 없이 덤볐던 이상한 자였으니까.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난…….’

그의 말이 맞았다. 루키페르는 그자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려 하지 않았다. 오랜 친우 두 명을 제외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루키페르는 자기 자신에게 속았다. 이미 그 남자에게 마음을 준 지


오래였다. 스스로 이를 믿고 싶지 않아 아닌 척 끝까지 속였을 뿐.

그자를 억지로 떠나게 할 만큼 강하게 부정하며 그가 지켜 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산산이 부서진 자존심과 끔찍한 그리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고요한 샘을 가만히 응시하며 쓰라린
속내를 아프게 곱씹었다.

“여기 있었구먼. 술이 깼나, 이름 없는 젊은이?”

지난밤에 어울렸던 노인, 아코이테스였다.

“숙취가 심한가 보군. 속풀이에는 또 술만 한 것이 없지! 조금 마시면 숙취가 사라질 거라네.”

그는 여유 있는 표정에 말끔한 행색이었다. 광란의 축제가 그의 엄청난 신경 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듯 보였다.

“간밤에 죽을 뻔한 것은 생각이 안 나나 보오?”


“사소한 건 벌써 다 잊었다네. 술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누릴 가치가 없는 자들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지.”

“속 편해서 좋겠소.”

“이런 경지에 쉽게 다다를 수 없지. 하지만 자네도 가망이 없진 않아.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니.”

루키페르가 노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가늘게 비틀었다. 묘하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신경질적인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런 섬에 있으면 세월이 흘러가는 것조차 잊게 될 것이다. 그는 샘에서 떨어져 비척거리며


버드나무 아래 앉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태양 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왜 내가 이런 섬에 처박혔는지 정확히 알겠군.”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노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조용히 살아라. 신들을 자극하지 말고 인간으로서 네 삶을 살아.’

그들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말이오, 젊은이?”

“영원히 취하게 할 수 있는 술은 없지 않소. 날이 밝으니 고통스럽게 제정신이 돌아와 버리는 것을.”

“…….”

“계속 그런 짓을 반복할 수 없어. 바보 같은 짓이지.”

“자네는 힘들게 살 생각이군. 흥을 모르는 자야.”

“나 자신을 속일 만한 능력이 없소.”

“불쌍할 노릇이구만. 이 섬에서는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텐데.”

노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 떠나야겠지. 아니, 떠날 것이오.”

말을 하는 순간 더욱 명확하게 확신이 섰다.

“갈 곳은 있소?”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존재는 알테미온이었다. 하지만 그는 멀리 떠났을 것이다. 자신이 먼저 그를


버렸다. 이미 자신을 잊고 잘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만약 그가 다 잊고
다른 사람과 웃으며 지내고 있다면.

루키페르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찢어 죽이고 그를 잡아 가두는 상상을 했다.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루키페르다운 행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갈 곳이 없다면 떠날 이유도 없지 않소. 세상을 떠돌며 헤매 봐야 뭐 하겠소?”

루키페르가 고개를 저었다. 노인의 말을 부정하기보단 알테미온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함이었다.

“날 필요로 하는 자가 있소.”

그는 친우 길리포스를 떠올렸다. 자신의 복수 때문에 길리포스가 해를 입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자를 구해야 하오. 그러니 이곳을 이만 떠나야겠소.”

메르쿠리우스의 경고를 무시할 작정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외면했다. 그는 너무나 오래


죽음의 운명을 피해 다녔고, 이제 그런 짓에 진력이 났다.

콧수염을 긁는 아코이테스의 낯에 난처함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메르쿠리우스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술의 힘을 빌려 이자가 과거를 잊고 섬에 정착하도록 만들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능력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나려는 루키페르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는 뼛속까지 나쁜 놈은 아니야. 의외로 신의가 있고 명철하지.”

의미 모를 평가가 뒤따랐다. 붉은 얼굴의 노인이자 충동을 사랑하는 신인 바쿠스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제안했다.

“한 가지 맹세를 한다면 이 섬을 나갈 수 있도록 자네를 도와주겠어. 괜한 살상을 피하고, 자네 말대로


사람을 구하는 일만 하겠다고 말이야.”

“……맹세하겠소.”

“좋아, 돕도록 하지.”

바쿠스는 여사제 한 명을 깨워 약초를 가져오게 했다. 그것을 씹고 나니 두통이 차츰 가셨다. 그리고


늦은 오후가 되자, 바쿠스가 말한 대로 배가 도착했다. 섬에서 만든 술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루키페르는 그가 시킨 대로 빈 술통에 숨어들어 배에 올랐다.

붉은 돛을 단 배가 유유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쯤, 술병을 든 노인은 유유히 혼자 춤을 추었다.

***

에우한은 화를 눌러 참고, 또 참았다. 오만한 그는 테베레가 망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꺾였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감히 평범한 인간이 저에게 명령하다니.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라돈의 몸에는 검은 무늬가 있소. 수많은 머리들 틈에 딱 하나, 검붉은 무늬가 있지. 그 자리를 정확히
맞춰야 하오. 그러면 한동안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소.”

정보를 들은 카우노스는 쓸모를 다한 그를 포로들의 수용소에 집어넣었다. 에우한은 이제 같은 포로가 된


왕실의 식솔들 앞에서 뒤늦게 분노를 터뜨렸다.
“폴룩스가 멍청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감히 아폴로의 도움을 물리쳐 테베레와 내 꼴이 이 모양이 되었어!
피네오스도 똑같지. 제때 그 여자를 없애기만 했어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그놈들은 테베레 왕실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 지금 내 남편을 모욕한 겁니까?”

구석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탈란테였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그녀는 충격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녀는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테베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내 남편, 폴룩스를…….”

거기까지였다. 아무도 말릴 틈 없이 달려든 아탈란테가 엄청난 힘으로 그의 목을 부러뜨렸다. 즉사한


에우한을 털어 버린 그녀는 다시 주저앉아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물만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

키쉬르의 전사들은 카우노스의 명에 따라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테베레의 주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들과 또 괴물과 맞설 만큼 용맹하면서 충성스러운 자들을 나누느라 카우노스는 한참을 고심했다. 그는
물론 직접 길리포스를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가 주성을 지킬 자들에게 바삐 지시를 내리고, 함께 떠날 전사들과 함께 짐을 꾸리고 있을 때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코이테스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 카우노스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코이테스로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소년이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갑작스럽게 모시던 알테미온이 사라졌음에도 제대로 된 이유조차 듣지


못했으며, 그 이후로 왕의 근처에 갈 수 없었으며, 왕조차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몹시나 상심한 터였다.
그 누구도 소년에게 상황 설명을 해 주지도 않았기에 그는 눈치를 보며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괴물이 있는 곳으로요.”

“뭐?”

카우노스가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소년을 제대로 응시했다. 아코이테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굳센
낯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지극히 위험하다. 네가 따라갈 곳이 아니야.”

“전 전쟁터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이유로 절 두고 가지 마세요.”

알테미온과 루키페르처럼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는 말은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속내는 이미 소년의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읽어 내기 무척이나 쉬웠다. 카우노스는 차마 안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거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니까,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도중에 버리고 갈
것이다.”

“네.”

아코이테스가 짧게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짐을 꾸리러 달려갔다. 카우노스는 짧게


한숨을 쉬고 다시 전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유피테르의 명령에 따라 아폴로와 마르스는 인간계에 개입하지 못하지 못했다. 주신은 두 아들이 싸우는
것 또한 금했는데, 둘이 마주치는 날이면 언제라도 하늘이 무너질 법한 싸움이 벌어지려 했던 것이다.

아폴로는 자신을 섬기던 나라가 멸망하였음에도 더 이상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하고
상심하였다. 그의 기분 때문에 태양 빛 또한 기운 없고 시들한 날들이 많아졌다.

신들 중 다수가, 꾀를 내어 신들을 위협하려 한 루키페르의 폭주를 막은 아폴로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신들의 여왕인 유노는 아들인 마르스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자는 모친을 위한 복수심으로 움직였어. 가정을 깨고 아내를 버린 피네오스와 이를 방조한 테베레가


문제 아니겠나? 고작 스스로 자초한 일로 내 적자와 그가 잉태하게 한 영웅을 괴롭힐 것인가?”

미의 여신 베누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한 까닭에, 편을 나눈 신들의 싸움은 신계에서 계속되었다.

***

카우노스를 비롯한 키쉬르의 전사들은 말을 타고 내달렸다. 테베레의 왕궁에서 가장 좋은 여물을 먹고


자란 잘 관리된 말들은 쉬이 지치지 않고 달렸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항해할 때에도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정예의 전사들 틈에 낀 아코이테스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괴물,
라돈을 향해 나아가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들에 비하면 알테미온이 부지런히 걷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훨씬 일찍 출발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렇게까지 오래 걸어 본 적이 없어서, 상한 흔적 하나 없던 발이 온통 짓무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를 계속 걸어 나가도록 도운 건 그의 끈질긴 정신력이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길리포스라는


자가 루키페르라도 되는 것처럼, 알테미온은 그를 반드시 구하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만, 그가 계속 살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괴물에게로 향했다.

그간 루키페르는 어떠했는가? 그는 술통에 숨어 배에 몰래 탄 채 다른 섬으로 이동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배와 선원들을 구해 길리포스가 있는 섬까지 이동했다.

늘 그렇듯 말수 없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를 보는 세상의 시선은 이제 달라졌다. 가면을 쓴


그를 보던 시선은 경계와 두려움에 물들어 있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가 잔인하고
냉혹한 것으로 악명 높았으니 그런 반응도 당연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청년의 매력이 드러난 지금은, 차가운 표정조차 깊고 우수에 찬 분위기를 더할
뿐이었다. 갑판 위에 서서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마음이 급한 것과 달리 좀처럼 그가 원하는 것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사소한 다툼, 결투, 그리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건들은
그의 주의를 전혀 끌지 못했다.

그의 온 신경은 오로지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괴물에 의해 갇혀


있는 자가 길리포스가 아니라 알테미온인 것처럼 생각하며 행동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심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살육과 복수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얻어 낸 것이 그토록 원했던 신들의
세계의 붕괴와 만족감이 아니라, 끔찍한 공허감과 무기력함이라고 한들 상관없었다.

그의 뒤틀릴 만큼 뒤틀려 버린 마음조차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유일한 자를 제 손으로 놓쳐 버렸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뼈아픈 진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몇 번이고 그를 찾아내, 다시 떠나지 못하도록 가두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흔적 없이 떠난 그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키쉬르로 돌아간다면 군사를 풀어 온 아카이아 땅을 뒤지도록 하여 그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손에 다시 잡히면, 그때는 끝이다.’

죽이려 했고 협박까지 했던 자신이 그를 다시 애써 찾는다면, 그자는 어떤 얼굴을 할까. 우습게도


루키페르는 알테미온이 보일 경멸이 두려웠다. 그는 처음 느껴 보는 두려움을 가슴 깊숙이 묻었다.

그 밖에 남은 것이란 지독한 외로움이 전부였다.

그동안 수평선 끝으로 보이던 섬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닻이 내려지고 루키페르가 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잘생긴 선원이여, 어딜 찾으시나요?”

꽃과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함께 팔고 있던 여자가 루키페르에게 말을 붙였다. 배에서 내리는 훤칠한


모습을 봤던 데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이 섬에 괴물이 있다지. 머리가 100 개 있다는 괴물 말이야.”

“거긴 마을에서 멀고,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아요. 그런 곳을 왜…….”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설마 아까 지나간 전사들 때문인가요?”

“전사들? 설마…….”

“한 무리의 사내들이 병장기를 짊어지고 섬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놀라게 했는데, 죄다 그리로 가던걸요.
말려도 소용없었어요.”

루키페르는 그들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카우노스는 그의 말대로 했던 것이다. 아마 에우한을


사로잡아 괴물을 지나가는 법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말하기를 꺼리는 여자를 설득하여 가는 길을 알아냈다.

“듣기론 절벽으로 둘러싸인 동굴이 있다고 해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괴물이 막고
있다지요.”

“……고맙소.”

정보 값으로 꽃 한 송이를 사 주었다. 이름 모를 흰 꽃을 잠깐 바라보던 그는 이를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칼을 산 후 인가와 멀리 떨어진 험한 산을 탔다. 올라가는 길에 적당한
참나무를 잘라 내 둔기를 만들었다.

가는 길에는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여럿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과연 카우노스는 잘 해내고 있을까.


어쩐지 마음이 불안하여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괴물 라돈의 앞에 가장 먼저 도착한 자들은 카우노스 일행이었다. 키쉬르의 전사 중 일부는 이미 이곳을


정찰하고 간 적이 있었기에 길잡이가 있어 길을 쉽게 찾기도 했다. 그들은 괴물의 시야가 닿지 않는 먼
곳에 몸을 감추고 상황을 염탐하고 있었다.

라돈은 거대한 뱀의 모습으로, 절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의 유일한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100 개나
되는 머리 중 일부는 잠들어 있었고 일부는 꿈틀거리며 서로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모두 달라 마치 여러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기묘하고도 무시무시한 광경에, 괴물을
처음 보는 전사들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카우노스여, 어찌할까요?”

“침착해라. 저 괴물을 지나가야 우리의 형제들을 구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그리고 우린 저놈을


죽이러 온 게 아니지 않나. 그저 저 앞을 지나가기만 하면 돼. 계획대로만 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카우노스의 침착한 대꾸에, 전사들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에우한이 털어놓은 비밀을
토대로 계획을 짰다.

라돈의 몸에 있다는 하나뿐인 검붉은 무늬를 정확히 맞추기만 하면 되니, 그들은 검녹빛 몸에 새겨진 검은
무늬들 틈에서 붉은색을 찾으려 애썼다. 아코이테스 또한 그들의 틈에서 괴물을 노려보았다. 100 개의
머리가 조금씩만 움직여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카우노스여, 찾았습니다.”

조용히 집중하고 있던 중, 아코이테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운데 쪽의 가장 긴 목 옆에 짧은 목의 아래를 보십시오.”

“……정말이군.”

카우노스가 짧게 탄성을 흘리며 뒤에 서 있던 전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쉬르의 아들들 중 가장 뛰어난


궁수였다. 활을 들고 있던 그는 길게 숨을 내쉬더니 활을 팽팽히 당겼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검붉은 무늬를 맞췄다.

성공했다. 키쉬르인들이 감격하기 무섭게, 괴물이 몸을 뒤틀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 누구냐?

- 누구야!

- 화살이다! 누군가 숨어 있어!

- 감히 이곳을 찌르다니!

‘그 자리를 정확히 맞춰야 하오. 그러면 한동안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소.’

분명히 에우한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괴물은 기절하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카우노스는 그가 압박 속에서도 태연하게 거짓 정보를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자는 절대로


키쉬르 측이 무사히 괴물을 통과하도록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괴물을 통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공격성을 자극할 방법을 일부러 알려 주었다.

키쉬르의 전사들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100 개의 머리들이 정신없이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숨어 있는 그들을 찾아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카우노스여……!”

“지금은 물러나는 게 낫겠어.”

하지만 그가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100 개의 눈 중 하나가 정확히 그를 쳐다보았다.

- 찾았다!

- 저놈들이야!

괴물은 그들을 향해 구불구불 빠르게 기어 왔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한 카우노스가


재빨리 외쳤다.

“공격 태세를 갖춰라! 두 번째 계획대로 간다.”

두 번째 계획이란 전사들이 괴물의 주의를 끌어 싸우는 동안, 일부 전사들이 그 틈을 타 갇혀 있는


형제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바랐는데.

카우노스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달려드는 괴물들의 머리에 용감하게 맞섰다.

태양 빛에 번쩍이는 병장기를 본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라돈은 강력한 독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에


물리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게 되어 있었다. 어찌나 강력한지, 독이 닿기만 하면
금속조차 녹을 지경이었다.

“끄아악!”

괴물의 입을 방패로 막은 자들은, 방패 끝이 녹아내렸고, 가장 먼저 그 입에 팔을 물린 전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일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으나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계획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100 개의 목이 너무나 재빨라, 괴물의 틈을 노려 길을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모든 전사들이 괴물에 들러붙어 싸우며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제 구출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였다.

그들이 아무리 용맹하다 한들, 신조차 맞서길 원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승산은 없었다. 그들은 한 명씩
차례로 쓰러져 갔다.

이대로 끝인가.

카우노스는 그들이 몰살당한다면 전부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

발자국을 따라 빠르게 걸어온 루키페르는 멀찍이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성한 수풀과 나무들을 뒤로하고 나아가니
과연 이미 전투가 벌어져 있었다. 흉폭하게 날뛰는 괴물을 두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낯익은 자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카우노스여!”

루키페르는 소리치며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참나무 둔기를 휘둘러 괴물의 머리


하나를 가격했다.

- 끄으윽!

둔기에 맞은 머리가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으스러졌다. 그러자 다른 머리들이 일제히 갑작스레


등장한 루키페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루키페르여!”

카우노스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취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의 친우가 이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내고 전투에 끼어들었다니. 그는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하게 흐려졌던 어린 시절 친우의
얼굴이 이제 어떻게 멋지게 자라났는지 보았다.

우습게도 카우노스는 그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이게 마지막이라면 마침내 오랜 친우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 왕의 등장을 알아차린 전사들 틈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강인한 왕에게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었다. 그라면 아무리 두려운 괴물이라도 반드시
처치하고 그들을 구출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괴물의 머리들이 일제히 루키페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왕을 지켜라!”

카우노스가 외쳤다. 루키페르가 하나씩 처치할 수 있도록 뒤에서 공격하는 머리들을 막겠다는 계획이었다.
그의 마음을 읽은 전사들이 일제히 엄호할 태세를 취했다.

과연 루키페르의 무력은 인간의 경지를 한참 뛰어넘었다. 그는 단숨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수 개의


머리를 부서뜨렸다.

어찌나 둔기를 세게 휘둘렀는지, 결국 참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부서진 잔해를 집어
던지고 주먹을 휘둘러 공격해 오는 머리를 쳐 냈다.

“루키페르여, 이걸 받으십시오!”

카우노스가 자신의 검을 던졌다. 루키페르는 검 자루를 잡아챈 다음 곧바로 괴물의 눈을 내리그었다.

- 강한 놈이다!

- 살려 두지 마!

- 독을 뿌려! 아무도 당해 내지 못할걸.

독이 공중에 흩뿌려지자 루키페르는 몸을 굴려 이를 피했다. 옷자락에 조금 떨어진 터라, 소매가


급속도로 타들어 가 재가 되어 버렸다.

그는 베고 또 베었다. 괴물의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는 피에서 흘러나온 맹독으로 인해 풀들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기세가 좋았으나 루키페르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는 괴물과 같은 강대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100 개나 되는 머리는 일일이 베어 쓰러뜨리기에는 너무 많았다. 죽이고 또 죽여도 여전히 멀쩡한
머리들이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독니에 걸려들었다간 그라도 곧바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는 그간 방어에 신경 쓰며 싸워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힘겨운 싸움이었다.

“허억, 헉……!”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뺨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아직도 절반을 넘는 머리들이 빈틈을 노리고


있어 긴장을 풀 새도 없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렇게 싸우다 죽는 것이 낫겠지. 나름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리라.

그가 최대한 많은 머리를 없앤다면, 키쉬르의 아들들이 포로들을 구해 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가치가 있었다. 평생 강한 척 살아 놓고 누구 하나 지키지 못했던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폴룩스 또한 이런 생각으로 그와 싸웠던 것일지도 몰랐다.

루키페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독이 묻어 삭아 버린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

알테미온은 많이 바뀌었다. 그늘에서 자랐던 기운 없는 식물이 양지로 나온 것처럼, 그에게서는 이제


생기와 활기가 넘쳐흘렀다. 햇볕 아래에서 오래 걸었기에, 티 없이 맑던 피부가 그을렸으나 그조차
알테미온에게 보기 좋은 또 다른 매력을 더해 주었다. 밝아진 표정 덕에 청년다운 매력이 피어났다.

예전에 그를 알던 사람이라면, 기운 없이 찡그린 얼굴로 누워 있곤 했던 창백한 미인과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활기 있고 반짝이는 청년이 같은 사람이라 연관 짓지 못했을 것이다.
알테미온은 끊임없이 루키페르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처럼
세상에는 아름답고 온정 어린 것도 많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을 텐데.

하루하루 힘겨웠던 여행 초반보다 체력 또한 좋아졌다. 도중에 길을 헤매서 훨씬 속도를 내 걸었음에도


지치지 않았을 정도였다.

물론, 배를 처음 탔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처음 겪는 배의 흔들림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리는 파도


소리가 심신을 지치게 했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지내다, 마침내 하선한 알테미온의 얼굴은
피로로 물들어 있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괴물이 있다는 섬은,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한 마을도 있었다. 주민은 많지 않아 보였고, 드나드는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자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선원은 아닌 것 같은데, 섬에 묵으러 오셨나요?”

장사가 잘 되지 않는지, 하품을 하고 있던 젊은 여인이 불쑥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걸었다. 알테미온은


행상을 돌아보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찾는 것이 있어서…….”

“설마 당신도 괴물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요?”

여인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다. 앞서 지나간 자들에 비하면, 이 청년은 무척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긴
하여도 싸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청년은 매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괴물을 찾아온 자들이 있습니까?”

“예, 그게…… 한 부대의 사내들이 무기를 쩔그럭거리며 지나갔고, 그다음에는 웬 훤칠한 사내 한 명이


나타나 또 그리로 가는 길을 물었지요.”

“남자 한 명이요? 혹시 짧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자였습니까?”

“오, 맞아요. 키가 아주 크고 싸움을 오래 한 사람 같았지요.”

알테미온의 표정이 단박에 희게 질렸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먼저 도착한 것은 키쉬르의 군사들일 것이고, 뒤에 홀로 도착한 것은 루키페르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지나간 것은 언제쯤이지요?”

그가 간절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자, 여인은 당황하여 눈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디 보자, 먼저 사내들이 지나갈 때의 그림자는 굉장히 짧았는데…… 그다음에 한 사내가 지나갈 때는
그림자가 이 정도 더 늘어났지요.”

여인이 손으로 그림자의 길이를 재어 보였다. 루키페르가 지나간 때를 대충 셈하여 본 알테미온은


불안해져 심장이 급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과연 그는 괴물을 지나가는 법을 알아낸 걸까? 만약 아니라면? 루키페르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전부 자기 때문이었다. 발밑이 확 꺼지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길을 알려 주십시오.”

“하, 하지만, 그곳은 당신 같은 사람이 갈 만한 곳이 아니에요.”

여인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괜히 입을 놀렸다고 후회했다. 앞서간 자들도 지금쯤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알테미온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간절하게 부여잡았다.

“당신이 알려 주지 않으면 영영 그들을 구할 길이 없을지도 몰라요. 제발 알려 주십시오.”

“안…… 되는데…….”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여인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간절한 푸른 눈이 그녀가 살면서 봤던 것들 중


가장 매혹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눈을 보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알테미온의 간절함과 아름다움이 그녀의 의지를 단박에 녹여 버렸다.

여인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알테미온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후, 뛰는 것과 다름없는 모양새로 알려 준 길로 향했다. 여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등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

험준한 산세를 무슨 생각으로 올랐는지 모른다. 신고 있던 샌들의 끈이 끊어지자, 알테미온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바위를 기어올랐다.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생채기가 났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아직 지나간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 발자국들을 열심히 쫓았다. 그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 위로


지나간 한 사람의 발자국을 알아보았다.

이 길의 끝에 다다르면, 그를 볼 수 있을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알테미온의 심장은 불안과 기대로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늦지 않게 빚을 갚고 싶었다. 자신을 본 그가 화가 나서 말했던 것처럼 죽이려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제발…… 신이시여…….”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땀이 비처럼 쏟아져 옷이 흠뻑 젖었으며, 바위를


잡는 손길이 연신 미끄러졌다.

그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비명 소리들.

간절함이 만들어 낸 환청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알테미온은 홀린 듯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나무 틈으로 먼저 보이는 것은 꿈틀거리는 기다란
목이었다. 뱀의 검은 눈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노려보며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누군가 괴물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세상에…….”

“사, 살려 주세요!”

그때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소년이 그를 향해 절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낯선 소년이었으나,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코이테스?

“전부 다 죽게 생겼어요! 오, 신이시여!”

정작 아코이테스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나치게 충격을 받아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듯했다.


횡설수설하더니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도망갈 생각조차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테미온은 수풀을 헤치고 그 틈으로 상황을 엿보았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괴물은 이미 절반 이상의 목이
잘려, 끔찍할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괴물의 피가 흘러내린 자리가 시커멓게 물들어서, 흙바닥을
딛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괴물의 목을 하나하나 일일이 자르고 있었다. 그
뒤를 수호하려 고군분투하는 전사들도.

루키페르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직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으나


피를 대신하여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강인한 그에게도 견디기 힘들 만큼 체력을 소모한 것이 분명했다.

이는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많은 머리가 살아 있긴 했지만 잘린 목에서 나온 출혈이 극심했던 까닭에,


라돈은 처음처럼 민첩하게 공격하지 못했다. 양쪽 다 오래 싸운 탓에 지쳐서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끔찍한 광경에, 알테미온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나무를 짚은 채 비틀거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디아나 여신이 은밀히 가르쳐 주었던 방법을 떠올렸다.

‘라돈의 100 개의 눈이 모두 감겨야 그 앞을 통과할 수 있다. 잠재워야 하지. 아름다우면서도 구슬픈


음악을 들려주어야 한다. 내 오라비가 들려주던 음악에 비견해야 해.’

급하게 뛰어올라 온 알테미온의 손에는 키타라나 리라가 없었다. 노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을
달싹이며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괴물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다.
원초적인 공포에 숨소리가 거칠어질 뿐이었다.

조용히 이를 깨문 알테미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원하는 건 뭐든 주겠어. 침실 가득 황금을 채워 줄 수도 있고, 네가 원하는 이야기를 뭐든 들려줄


시인들을 대령할 수도 있고, 손가락도 까딱할 필요 없을 만큼 많은 하인을 붙여 줄 수도 있지.’

‘대가는 하나야. 넌 그냥…… 날 계속 걱정해. 그게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거든.’

‘아마 피를 많이 쏟았기 때문인가 보지.’

그는 고개를 들어 싸우고 있는 루키페르를 보았다.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직


루키페르에게 들어야 할 말이, 듣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기꺼이 울겠어요.”

거짓말처럼 그는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두려움이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였음에도 풍부한 울림이 있어, 싸우던 전사들에게 전달되었다.

당신을 미치게 해 버린

당신 어머니가 흘린 피를 기리며

그건 정신을 놓기 직전인 괴물과 루키페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슬픔이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를
타고 모두의 귓가에 아름다운 환청처럼 흘러들었다. 그건 마치 놓치고 싶지 않은, 잊고 있던 옛
자장가와도 같았다.
행복은 필멸자에게 지속되지 않지요

신은 작은 배를 폭풍우와 파도로 쉬이 흔들어 놓듯

행복을 고통으로 잠식시켜 버리지요

루키페르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심히 지쳐서, 착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죽기 전에 듣는


환청이라도 기꺼웠다.

지친 그의 손에서 날이 빠진 검이 툭 떨어졌다. 무릎이 풀썩 꺾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죽음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땀이 눈물처럼 고여 흐릿해진 시야에, 괴물의 살아
있는 목들이 축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괴물 라돈은 자신이 지치고 늙었다는 것을 처음 의식한 존재처럼 몸이 거부할 수 없게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안식을 선택했다.

괴물이 잠들었다. 루키페르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지금 포로들을 구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노랫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나직하게 노래하던 자가 모습을 드러내 쓰러진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루키페르는 그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 알고 있던 눈이었다.

“루키페르.”

그자가 노래를 멈추고 이름을 불렀다.

정말 현실이 맞을까. 루키페르는 남은 힘을 그러모아 간신히 속삭였다.

“……가지 마.”
루키페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루키페르!”

알테미온이 단걸음에 쓰러진 그에게로 달려갔다. 잠시 현실 감각을 잊어버렸던 키쉬르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일제히 왕을 부르며 루키페르의 안색을 살폈다. 저 멀리 수풀 너머에 숨어 있던
아코이테스와 의원도 상황을 엿보고 달려왔다.

“다행히 독에 맞지 않으셨습니다. 상처는 긁히고 멍든 것이 전부이니 굉장히 지친 것일 겁니다.”

안도한 전사들이 일제히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들은 잠든 라돈을 불안하게 힐끔거렸다. 혹시라도 다시
깨어날까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당신은 분명…….”

카우노스가 뒤늦게 알테미온을 알아보고 말끝을 흐렸다. 느낌이 많이 바뀌었으나 그가 알던 차가운


분위기의 미인, 알테미온이 분명했다.

“카우노스여, 오랜만이군요.”

알테미온은 목소리를 듣고 카우노스를 즉각 알아보았다.

“어떻게 이곳을……?”

카우노스는 말을 더듬었다. 그와 달리 알테미온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죠. 일단 포로를 먼저 구하세요. 괴물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을지는 저도 알지


못하니까.”

정신을 차린 카우노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전사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알테미온은 루키페르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 내려 했다. 혼자 힘으로 되지 않자 아코이테스와 의원 또한
함께 그를 들어 올렸다. 잠든 괴물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그를 옮기고 나서, 알테미온은 지쳐 쓰러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던 그 얼굴이었다.

정말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까. 그가 분명 자신에게 가지 말라고 한 것이 맞을까.

알테미온은 작별하던 때의 그의 얼굴에 담겨 있던 배신감과 미움을 생생히 기억했다. 잠든 루키페르의


낯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깨어난 그가 또다시 미움으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그동안 독에 당해 죽은 전사들의 시신을 옮기던 아코이테스는 연신 홀린 듯 알테미온을 바라보았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잠시 뒤, 포로들을 구출하러 들어갔던 살아남은 전사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각자 등에 잔뜩 여윈


사내들을 업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길리포스를 업은 카우노스도 있었다. 포로들은 동굴에서 풀과 열매를
먹으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던 터라 기운이 없었다. 형제들을 구출했다는 기쁨에 잠시 젖어 있던 그들은
독에 당해 숨을 거둔 또 다른 형제들을 보고 미소를 거두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길리포스를 업고 있던 카우노스는 굳은 얼굴로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시신들 또한 업어 들었다. 한 사람도 두고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산을 내려가는 길, 키쉬르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마침내 민가로 내려온 그들은 길가에 주저앉았다. 안도감에 피로가 일순간에 밀려온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행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우노스가 주민들에게 값을 치르며 먹고 잘 것을 부탁했다. 키쉬르의 전사들은 오래 함께한 사이이기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 시신을 갈무리하고 서로를 챙기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깨어나지 않는 루키페르의
옆에 줄곧 붙어 있던 알테미온은 그들 틈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키쉬르인들은 그들끼리 무언가 조용히
말하고 있었기에 더욱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카우노스가 그를 루키페르가 쉬고 있는 침실 밖으로 조용히 불러냈을 때,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반박이라도 하듯, 여전히 움직일 수 있는 일부 키쉬르의 전사들이 일제히
돌아서서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알테미온이여, 당신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카우노스를 비롯한 모든 전사들의 눈에는 감사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린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난 그저…….”

알테미온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감사 인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를 바라보는 진심과 존경이


담긴 눈빛들도 전부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당신들의 왕을 돕고 싶었습니다. 난 그에게 큰 죄를 지었어요. 이를 조금이라도 보상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은 몰랐으나, 그가 포로들을 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습니다. 이것 또한 디아나 여신께서 돕지 않으셨다면 하지
못했겠지요. 그분께서 괴물을 지나가는 법을 알려 주셨으니 내가 달리 한 것은 없습니다.”

카우노스 또한 알테미온의 진심을 읽었다. 먼 길을 힘겹게 걸어온 듯 말끔하던 다리와 발에는 붓고 상처


입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럽게 키쉬르의 진영에서 떠났던 그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어떤 결의와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그건 루키페르의 얼굴을 보는 알테미온의
표정을 본다면 누구라도 눈치챌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참 오묘했다. 테베레에서 보낸 첩자로 보내졌던 그가 결국에는 왕과 키쉬르의 아들들을


구하고 말았으니.

“그런 노래를 불러 괴물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이 온 아카이아 땅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카우노스의 말에 전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도 구슬픈 노랫가락이
마음에 와닿아 다치고 고통받은 심신을 어루만지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 은혜에 화답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달리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뭔가 받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포로들을 무사히 구해서 다행입니다.”

알테미온은 자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구했고, 또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이뤄 주었다. 또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러니 이것으로 충분했다.

“부디 안전하게 돌아가시길.”

알테미온이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설마 지금 떠나실 겁니까?”

카우노스가 당혹스러워하며 그를 붙잡았다. 알테미온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지 마세요.”

의원을 도와 다친 전사들을 돌보던 아코이테스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끼어들었다.

“어떻게 절 버리고 떠나실 수 있나요? 알테미온 님이 떠나신 후에 루키페르께서 절 아는 척도 하지 않으려


하셨다고요. 왕께서도 똑같이 느끼신 게 분명해요.”

소년은 말하면서 억울함을 느꼈는지 점차 울먹거렸다. 눈꺼풀이 붉게 물들자 그가 손으로 눈을 세차게


문질렀다. 알테미온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자신을 먼저 버린 자가 루키페르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소년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가 조금쯤은 자신을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떠나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카우노스가 소년을 토닥이며 물었다.

“글쎄요. 이제 뭘 할지 찾아봐야겠지요.”
알테미온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는 방향을 모르는 그에게 공허함
이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런 것이라면…… 왕께서 눈을 뜨시면 분명 당신을 찾으실 겁니다. 분명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시기도 하니 우리에게 당신을 대접할 기회와 시간을 주십시오.”

“……그럴까요.”

대신의 말 또한 믿고 싶었다. 또한 무사히 깨어난 루키페르를 보고 싶기도 했다. 그가 눈을 뜨고 다시


자신을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까. 두려움과 욕심으로 갈팡질팡하며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하루라도 더 머물러 주세요, 제발. 제가 알테미온 님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전


이제 약초를 다룰 줄 안단 말이에요.”

소년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씩씩한 소년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는 마음이 급격히 약해졌다.

아코이테스의 말이 맞았다. 소년은 앞이 보이지 않는 그를 누구보다 성의껏 보살폈다. 그에게는


남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무 말 없이 떠나게 되어 소년에게 설명은커녕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게 화 한번 내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 아코이테스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긴 어려웠다.

“그래, 네 말대로 하겠어.”

그가 약속하자 전사들은 또다시 감사를 표한 후 쉬러 물러갔다. 그는 표정이 한결 밝아진 아코이테스와


함께 소박한 나무 탁자에 앉았다. 소년은 제법 능숙한 손길로 그의 다리를 닦아 주고 약초를 붙였다.

“재주가 늘었구나. 말하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했어.”

치료를 받는 동안 알테미온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히 전했다. 눈이 보이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얼버무렸다. 루키페르의 가면에 얽힌 일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수프를 먹으니 소년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기색이었다. 끔찍한 전투 현장을 본
데다 갑자기 나타난 알테미온 때문에 동요가 심했던 터였다. 소년은 곧 의원의 부름을 받아 다른 병사들을
돌보러 갔다.
혼자 남겨진 알테미온은 잠깐 망설이다 루키페르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라도
실컷 보고 싶었다.

***

의원이 갈아입혀 놓았는지 루키페르는 깨끗한 흰 히마티온 차림이었다. 그가 입었던 더럽고 해진 옷은


서랍장 위에 올려져 있었다. 묘한 것은 옷 위에 흰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꽃잎이 구겨지긴
했어도 아직 싱싱했다.

누가 여기에 꽃을 올려놓았을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알테미온은 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향을 맡았다.

“……꿈이 아니었나.”

잠긴 목소리가 불쑥 말을 걸자,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 날 구한 게, 당신이었어.”

“…….”

알테미온이 천천히 돌아섰다. 피로에 지친 나른한 푸른 두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알테미온은 말문이 막혀 입술을 살짝 벌린 상태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루키페르는 괜히 맨뺨을 문질렀다. 남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에 익숙해졌으나 알테미온의 시선이 닿자 유독


무방비하게 헐벗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그는 어째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알테미온은 이제 그를 바라보는 루키페르 자신의 눈길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루키페르.”

괜찮냐고 묻고 싶고, 또 이제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돌던 말들은 그의
차분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날아갔다.

알테미온은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묻지 않아도 이미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가면 뒤의 그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던 걸까.

이름을 부르자 루키페르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테미온은 천천히 침상 옆에 미끄러져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아니, 설마 아직 꿈속인 건 아니겠지. 어머니 꿈을 꿨거든.”

그가 나직이 속삭이며 알테미온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던 아에로페의 평온한


미소가 선명히 떠올랐다.

“잘 지낸다고 하시더군.”

그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짓눌렀던 후회와 슬픔의 무게가 완전히 떠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감춰져 있던 정열이 그 자리를 채웠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이 떠날지도 모른다기에 일어났어.”

최선을 다해 싸워 극도로 지친 터였다. 그가 지금껏 들어 올렸던 어느 바위보다 눈꺼풀이 더 무거웠다.


그럴 만한 보람은 충분했다. 그의 옆에 이 남자가 있었으니까.

“어째서 내게 돌아왔지?”

“내가…… 밉지 않아요?”

“그건 내가 묻고 싶었는데.”

두 사람은 각자의 두려움에 휩싸여 서로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질문이 아니라 정반대의 질문을 했다.
우습게도 그들은 서로의 진짜 의중을 동시에 알아차렸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사라져서일지도,
아니면 단지 서로의 간절함을 숨기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넘쳐흐르고 있는
감정을.

오, 거짓말.

북받치는 감정에 알테미온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루키페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읊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는 이게 전부였어요.”

“그럼 난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마침내 고개를 든 알테미온이 힘겹게 눈물을 참느라 미간을 구기자, 루키페르가 그의 이마와 눈가를
쓸었다. 상처가 난 거친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된 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루키페르는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애정과 활기를 느꼈다. 이 새로운 정열이란 그간의 무서운
복수심이 가져다준 힘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지치고 피곤한 육체와 달리,
정신은 새로이 태어난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처음부터 언제든 날 사로잡으려 하는 운명을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었어. 바보 같은 짓이었는데 가면을


벗기 전까지는 그런 줄도 몰랐지.”

그가 진심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알테미온이 변화한 것처럼 그 또한 어딘가 단단히


바뀐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제 당신의 눈에 비친 날 볼 수 있으니까.”

알테미온은 웃고, 울었다. 순수한 기쁨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 줘……. 알테미온. 떠나지 마.”


루키페르는 알고 있을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멍해졌던 알테미온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진심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앞이 보이니 자유롭게 돌아다녔지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것을 보았지만…… 달리 갈 방향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돌아갈 곳은 당신 옆뿐이었어요.”

루키페르가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기쁨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알테미온이 자신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은 한 차례 강하게 불었다 영영 떠나가는 바람 자락처럼 사라졌다.

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바람이 지나가고 꽃이 시드는 속도로, 그들의 삶 또한 스러질 것이다.

그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자 긴장이 풀려 졸음을 이기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마 더 자야 할 것 같지만…… 옆에 있어 줘.”

“그러겠어요.”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알테미온이 흰 꽃을 보여 주자 루키페르는 그 꽃이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괴물 라돈은 머지않아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43 개의 머리만이 남았음에도 강인한 생명력 덕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는 이따금 그를 맞닥뜨리는 인간과, 자식을 찾아오는 아폴로에게 자꾸 노래를 하라는
협박과 부탁을 해 댔다.

신들에게 루키페르와 알테미온의 존재는 빠르게 잊혔다. 그들과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괴물들과 신에게
도전하는 또 다른 영웅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굉장한 미인이 나타나 구혼자들이 줄을
이었고, 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도 했다. 그들 때문에 베누스와 유노 여신이 진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루키페르는 정신을 차리고 길리포스와 기쁘게 재회했다. 그들 모두는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키쉬르에는 그 뒤로 50 년간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옛 테베레의 주성을 차지한 키쉬르인들은 평화롭게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갔다.

키쉬르의 주성에는 바쿠스와 마르스, 그리고 디아나의 신전이 세워졌다. 루키페르가 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화가 난 메르쿠리우스가 욕설을 퍼부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코이테스는 키쉬르에서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이 되었다. 그가 지은 희곡을 공연하는 날이면 광장에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루키페르와 알테미온도 그들 틈에 섞이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비극을 마무리하는 훌륭한 합창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저주스러운 신탁을 피하려 애쓰고 노력했던 영웅은 결국 그 노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신탁을 이루게 되었다.
고통 어린 한탄을 하며 죽어 버린 영웅의 모습에 시민들은 일제히 눈물을 훔쳤다.

알테미온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루키페르는 눈물 한 방울 흘린 흔적이 없었다. 희미하게 웃은 그가


루키페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루키페르여, 떠올려 보면 모든 신탁이 이루어진 것 같진 않아요. 리기아에서 있었던 신탁을 생각해


보세요.”

‘최후에 월계관을 차지하는 자는 전투의 승리 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두 사람은 유피테르의 신탁을 떠올렸다. 루키페르는 전쟁에서 이기고도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다.


신탁이 제대로 어긋나 버린 것이다.

루키페르는 그에게 함께 언덕에 오르자고 했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 그들의 금빛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헝클어 놓았다. 시민들은 붉어진 눈가를 연신 훔치면서도 삶의 애환이 풀린 듯 속이 시원해 보였다.
루키페르가 월계수 그늘 아래 앉자 알테미온이 그의 다리에 기대 누웠다.

“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꽤 많을지도 모르지.”


곰곰이 생각하던 루키페르가 뒤늦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제대로 된 신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맞아요. 유피테르께서 내리지 않은 말을 트리온이 거짓으로 꾸며 낸 것일지도 모르지요. 사제의


거짓말일지도 모르고 말이지요. 신탁 또한 인간의 입을 거치니.”

“아니면 정말 유피테르의 뜻이었을지도 몰라. 어떤 신탁들을 꼭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제


진실을 알 길은 없지만.”

“하지만 알 필요도 없겠지요.”

알테미온은 루키페르의 마음을 읽은 듯 그의 말을 뒤따라 끝맺었다. 바람이 불었고, 만개한 장미


덤불에서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알테미온이 홀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루키페르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 정복자의 침실 >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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