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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 3
NL 3
※이 작품은 2013 년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작품의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현재의 상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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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Ⅸ. Slow March
“마틴―.”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싱클레어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현기증이 가시지 않는지 마틴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어지럼증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시야가 엉망으로 꼬였다. 이마를 감싼 그
는 괴로운 신음을 토해 냈다.
“으으….”
“마틴, 괜찮습니까?”
“으윽―.”
마틴은 괴로워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손가락에 너무 세게 힘이 들어가서 어깨까지 떨렸다. 고통으로
이를 악물고 신음을 억누르는 게 고작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몸은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고 있었다. 말
도 안 된다며 참아 보지만 채워지지 않은 욕구는 점점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 마틴의 이성을 위협하며 줄곧 널
름거리는 혀를 내밀던 욕구는 곧 그의 이성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닥쳐―!”
“지금 무슨 짓을―!”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거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싱클레어를 윽박지른 마틴은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무릎을 꿇었다. 입술과 코
로 불룩한 브리프 밖을 비비는 와중에도 손이 급하게 움직여 다짜고짜 그의 페니스를 꺼낸다. 묵직한 무게로
가랑이 사이에 떨어진 사내의 수컷을 몹시도 탐을 내며 뺨에 비비던 마틴이 입을 크게 벌려 그것을 물었다.
“읏…! 마틴!”
싱클레어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마틴은 탐욕스럽게 사내의 페니스를 핥기 시작했다. 귀두를 입에 물고 우물거
리듯 빨며 깊숙이 목까지 집어넣어 입술을 잔뜩 오므리기를 반복하자 이 거대한 흉물은 금방 위용스런 모습을
갖추었다. 곧 입안에 담기 힘들 만큼 무섭게 일어나 마틴의 목젖을 찔러 댔다.
마틴은 사내의 수컷을 더 깊게 물었다. 오므린 입술로 연신 앞뒤를 오가며 페니스를 목젖 너머까지 푹푹 박히
도록 끼웠다. 입술이 무섭게 몸을 부풀린 페니스를 훑을 때마다 춥춥거리는 야한 소리가 울렸다.
“제길―.”
사내는 마틴의 목구멍을 확장시키며 굵직한 귀두를 끼우고서 페니스를 뒤흔들었다. 맺혀있던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마틴이 버둥거렸다.
“우으읍―.”
힘겹게 바짓자락을 붙잡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과 동시에 싱클레어가 그의 입에 진득한 정액을 쏟아냈
다. 그 순간만을 기다렸는지, 마틴은 허겁지겁 사내의 정액을 삼켰다. 혀를 내밀어 그의 귀두에 묻은 여남은 정
액까지 깨끗하게 핥고서야 막힌 숨을 토해 내며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진다.
“하아….”
“……으….”
“마틴,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옷차림을 정돈한 싱클레어가 힘없이 늘어뜨린 팔을 붙잡고 마틴을 일으켜 세웠다. 기가 막히고 혼이 빠져서,
마틴은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주체를 못했다. 꽤 손이 가는 연상의 연인을 다정하게 안아 일으킨 싱클레어
는 혹여 마틴이 쓰러질까 계속해서 그의 어깨를 감싼 채였다.
“마틴…?”
이름을 불러 보나, 허망하게 풀린 동공은 좀처럼 초점을 잡지 못하고 종잡을 수 없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
다. 눈앞에 손을 흔들어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아무리 침대 위에서―종종 침대가 아닐 때도 있지만―야하게
돌변하는 팜므파탈(남성형의 옴므파탈보다 마틴에게는 팜므파탈 쪽이 어울린다)의 치명적인 매력이 있지만,
공공장소에서 페니스를 입에 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거라면 미리 언질을 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아무리 당신과 미리 경험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당하는 쪽은
익숙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런 건 퍽 당혹스럽군요.”
“그러니까―.”
“아아….”
마틴은 억울해하며 싱클레어에게 눈빛을 쏘았다. 그래도 여유만만한 이 남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입을
연다.
“무엇을 말입니까? 서브센서들은 능력을 사용하면 제약의 구속을 받고, 제약에 사로잡히면 이성을 잃어버려
서 어떻게든 그것을 먹으려 한다는 점을 말합니까?”
“으….”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마틴은 스스로의 얼굴을 감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자코 싱클레어의 말을 듣던 마틴은 물끄러미 사내를 보더니 그럴 일은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어.”
“와…! 기쁜데요.”
“어째서?”
“……넌 ‘팬텀’이잖아.”
아주 미미한 반응이나, 싱클레어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원래의 다정한 표정으로 되돌아
갔다. 그는 기운 빠진 마틴의 어깨를 잡고서 그에게 시선을 맞추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싱클레어가 비
밀스러운 이야기라도 꺼내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런….”
‘잠깐…!’
싱클레어는 팬텀이었다.
이 순혈통 뱀파이어가 세상에 나오자면 당연히 부모도 팬텀이어야 한다. 싱클레어의 말에 따르면 그의 부모님
은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뱀파이어 헌터의 무기를 찾고 있었다.
“…어…째서….”
“네?”
무심코 나온 말을 삼키는 마틴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저어서 부정을 해
본들, 머릿속의 의혹들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의혹은 오히려 차츰 정교하고 선명하게 형체를 갖추며 마틴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심장이 갉아 먹히는 듯 굉장히 탐탁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알고 계셨습니까?”
“―!”
정적을 깨고 스윽, 차갑게 공기를 베는 싱클레어의 목소리에 마틴은 놀라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바로 앞에
서 무심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마틴을 더 불안으로 몰아붙였다. 마틴은 마른 입술을 달싹여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알고… 있냐니?”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마틴의 앞에 느닷없이 싱클레어가 고개를 쑥 들이민다.
“읏…!”
“…!”
마틴의 불안에서 빗겨 나가는 화제였다. 안도감에 일순간 기분이 일신되어 마틴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
앉을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싱클레어가 지적한 것처럼, 주위는 색이 없었다.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를 이루는 수많은 경계선의 색깔들로
만 이루어졌다.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하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알았는지 모르겠다며 마틴은 정
신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너와 나만 색이 있어…!”
마틴은 자신의 손이나 옷가지를 확인하며 말했다. 서로를 잠시 응시한 두 남자는 본격적으로 주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천장과 벽을 둘러보는 마틴과는 달리 싱클레어는 장식된 조형물을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두드렸다.
“…?”
그것들은 손으로 만져지는 촉감은 있으나 움직일 수는 없었다. 더 힘을 줘서 움직여 보려고 하자, 손이 물건을
통과해서 반대면으로 튀어나가 버린다. 뚫고 나갈 때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지긴 하나, 그뿐이다. 자신은 이 물
건에 그 어떤 힘도 가할 수 없었다.
메모리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능력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영상을 보는 것처럼 ‘과거의 기
억’을 체험할 수는 있으나, 개입은 불가능했다.
“싱클레어?”
“아, 네.”
“…….”
그의 능력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의문을 놓치고 있었다. 16 세기 엘리자베스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장식된 내부 구조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싱클레어는 마틴에게 넌지시 물었다.
“네가 준 반지.”
“아….”
사내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웃음을 누그러뜨린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싱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좀체 알아챌
수 없는 표정의 변화였다.
슬쩍 어깨를 틀어 자세를 돌린 남자가 비죽비죽 올라가려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뭉갰다. 본격적으로 능력을 쓰
지는 않더라도 그저 반지의 기억이 무언지 살짝 보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가 손수 자신을 이끌고 이 ‘과거’로 넘
어와 주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는 마지막 발악으로 싱클레어는 몇 차례 헛기침을 더했다. 가끔이지
만, 이렇게 표정이 관리가 안 돼서야 어쩌나 싶어진다.
“…하….”
마틴을 데리고 줄곧 오고 싶었던 바로 그 ‘과거’.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참혹한 진실이 숨겨져 있어, 진실을 확
인한 순간 사랑에 애달프면서도 고통스러운 가슴을 끌어안아야 한다.
영혼을―.
“여기가 어디냐니까?”
마틴은 재차 물었다.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싱클레어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마틴은 자신의 눈으로 실체를
확인하려는지 먼저 걸어가 버린다. 싱클레어는 반걸음 뒤에서 마틴을 따라갔다. 그는 방관자의 자세를 고수할
모양인지 마틴이 어디로 가고 무엇을 보든 딱히 개입하지 않았다.
모퉁이를 꺾자마자 반대편에서 앞이마를 드러낸 각진 게이블 후드로 머리를 가린 여인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리넨으로 만든 듯한 소박한 후드와 장식이 화려하지 않은 드레스를 입은 것으로 보아, 이곳의 일을 돕는 하녀
들인 듯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무채색이었다.
“뭐?”
“―!”
“뚫고 지나갔어…!”
마틴은 중얼거리며 말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침착하게 검은 눈동자를 굴리던 마틴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네 말대로 영국이긴 하고, 시기는 튜더 왕조쯤으로 보인다만.”
“역시 알고 계셨군요.”
“건축이야 이전 시기에 지은 건물일 수도 있지만, 방금 지나간 여자들 때문에 확신이 들었어. 이마 가운데 각이
져서, 꼭 오각형에 밑면만 없는 것 같은 형태의 게이블 후드는 ‘영국’에서, 그것도 튜더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로
여인들의 쓴 두건이니까. 거기다 중간중간 보이는 가구도 이탈리아나 프랑스 쪽에서 보이는 르네상스 양식하
고는 전혀 다르니까.”
싱클레어의 나이가 327 살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그가 태어나기 한 세기 전의 일이다. 자신이 반지를 통해 남은
잔상을 보려고 시도했을 때, 싱클레어의 모습이 보였으니 어떻게든 서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되지만,
반지는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으으음….”
돌아갈 일을 고민하는 싱클레어를 잡아당기며 마틴은 복도의 저 멀리까지 걸어간 여인들을 가리켰다. 그녀들
은 막, 그 끝에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마틴은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복도 끝에 있는 육중한 장식의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른하고 무심한, 거기
다 무력한 기운까지 풍기던 평소와는 달리, 지금은 반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장을 한 상태였다.
“엇…!”
“무슨 소리야.”
“흠, 그럼 다른 방법을….”
두 남자는 문을 뚫고 나왔다.
“이런….”
황당해하는 싱클레어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마틴은 실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웅장한 실내의 광경에 마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싱클레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런 식의 별스럽지 않다는 행동이 도리어 마틴을 꺼
림칙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잔뜩 의심에 찬 눈초리로 싱클레어와 화려한 복장의 팬텀들을 번갈아 보던 마
틴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가문이….”
“왕가요.”
“―로얄 패밀리?”
“―!!!”
“새삼 반하셨습니까?”
기다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싱클레어가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이 부담스러운 남자를 냅다 떠다민 마틴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부담스러워졌어.”
‘부담’의 뜻을 뭐라고 알아들은 것인지 싱클레어는 진지하게 푸른 눈을 빛낸다.
“그러면 황제는요?”
“아니 글쎄 관두라니까!”
팬텀이 뱀파이어의 순혈통을 지칭하는 단어라고만 알고 있었지, 가문까지 특별할 줄은 몰랐다. 뱀파이어는 타
고난 그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그리고 웨어울프는 타고난 집단폐쇄주의로, 서로는 서로의 종족에 대해 너무
무심했던 것이다.
“아아….”
“…?”
“…주인공?”
반문해 보았으나, 싱클레어는 대답이 없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자, 진지한 듯, 한편으로 호기
심이 가득한 흥미로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두 남녀에게로 시선을 옮긴 마틴은 조금 더 가까
이 보기 위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슴 부위가 사각으로 파인 드레스는 곱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역삼각 모양으로 가슴 앞부분을 장식한 스터머커는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아져서 여린 신
체를 화사하게 부각시킨다. 특히나 스터머커에 눌려 위로 바짝 모아진 가슴은 회반죽을 바르지 않았는데도 희
다 못해 창백한 빛을 띠어서 그 호화로운 보석을 더 눈부시게 만들고 있었다. 반면, 치마는 타이트하게 조인 상
체와 달리 허리를 경계로 고래수염으로 만든 파딩게일을 입어 잔뜩 부풀려졌다. 질 좋은 공단으로 만들어진 드
레스는 색은 보이지 않아도 질감만은 생생하게 느껴져서 여인이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광택
을 냈다.
등 뒤에서 싱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마치 거기에 답이라도 하듯 경건한 종소리가 울렸다. 무겁게 울
리는 종소리가 실내를 맴돌며 바닥에서 천장까지 장엄하게 퍼졌다.
“서로의 피를?”
“그거 다행이네.”
“왜 다행입니까?”
“흐음….”
뱀파이어 앞에서 뱀파이어가 되기 싫다고 당당히 말하는 마틴을 바라보며 싱클레어는 망연자실한 심정을 담
아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상대가 마틴이 아니었더라면, 팬텀의 위대한 권능을 온갖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서
똑똑히 보여 줬을 테지만, 연인의 앞에서는 미간을 찌푸리는 게 고작이다.
아래라든지.
“…….”
이 남자를 확―!
“어라? 토라지셨습니까?”
“그 뜨거운 시선은 다른 뱀파이어는 싫을지 몰라도, 저만은 허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죠?”
“…….”
“아니면 저만 좋다거나….”
“읏―!”
스멀스멀 허리춤으로 기어오는 손길을 떨쳐내며 마틴은 방금 전까지 싱클레어의 뜨거운 입김이 닿은 귀를 손
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아무리 이곳이 과거고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못 본다고 하더라도, 마틴은
이런 곳에서 대담하게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게 민망했다.
“그만 좀 해.”
“…! 어!?”
처음에는 유일하게 색이 있어서 놀랐으나 곧 짙푸른 보석의 생김새가 마틴의 두 눈을 사로잡았다. 때마침 반지
를 들고 여인의 손가락에 끼우고 있는 중이라, 그 바람에 아주 적나라하게 반지의 모양새가 보였다.
짙푸른 보석.
“…!”
“!!!”
그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저기 여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것과 하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마틴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막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도 숨이 좀처럼 잘 쉬어지지 않는다. 폐로 향하는 기관
을 실로 동여맨 듯 산소가 급해진다.
“싱―.”
“…?”
“싱, 싱, 싱클레어!”
“네. 아주 잘 어울리시는군요.”
잘 좀 보라고 손을 바짝 올려 주자, 싱클레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하다고 마틴은 생각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흥분에 가득 찬 어조로 외쳤다.
“―!!”
다급하게 외친 자신의 말에 사내는 심드렁히 대답한다. 마틴은 새파랗게 질렸다. 뻣뻣한 뒷목을 잡고 비틀거린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겨우 말을 꺼냈다.
“―! 그걸 왜 날 줘?!”
“그럼 누굴 줍니까?”
“!!!”
앞으로 골치가 썩을 일은 많지만 지루한 일은 없겠다고 마틴은 생각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그런 건 미리 말을 했어야지!”
“…….”
이제는 아주 대놓고 협박을 한다. 어이가 없어서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어찔어찔하다. 현기증이 난
다며 휘청거리자 싱클레어가 팔을 쓱 내밀어 그의 허리를 감쌌다. 여느 때 같으면 낯을 붉히며 그를 밀쳤을 마
틴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마저 생각나지 않았다.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무지막지한 짓을 마음껏 해 대는
싱클레어의 행동에 잔뜩 얼이 빠졌던 마틴은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잠깐…!”
“음?”
“―!!!”
“아파도 내가 아파.”
이해가 안 된다고 인상을 쓰자, 싱클레어가 웃는다. 마틴은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싱클레어는 마틴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그리고 그를 앞장세우듯, 앞으로 천천히 밀어서 자신의 부모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했다. 이제 그들은 이곳에 있는 여느 사람들보다도 부부의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는 위치
에 이르렀다.
“싱클레어, 숨막혀.”
“…?”
“하….”
때마침 남자는 여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애정으
로 가득 차 있었다. 흑백의 세상이었으나, 싱클레어의 부친이라면 그도 싱클레어 못지않은 짙푸른 눈동자를 가
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틴을 스쳤다.
가면에 가리어 보이는 부분은 고작해야 눈과 부분적인 입매가 전부였으나, 저 따스한 눈빛은 그 속에 담긴 열
망, 사랑의 갈구, 그리고 극진한 경애까지, 종종 싱클레어가 자신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 아주 흡사했다. 남자는
여인의 손끝을 살짝 끌어 잡았다. 여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영롱하게 빛을 뿜었다. 다른 손으로 나머지
손까지 잡고서, 그는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여인의 손을 돌렸다. 모두들 숨을 삼키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와
중, 여인의 오른손 그리고 왼손 손바닥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는 그 두 손을 모아 자신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남자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여인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입술을 벌려 감격에 벅찬 뜨거운 한숨을 내뱉자, 마틴은 작은 가시가 박히기
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더 아릿하게 저려왔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는데도 자꾸만 심
장이 미어진다.
“……그 손바닥에 키스하는 것은 상대에게 그 둘을 모조리 바치겠다는 의미의 맹세죠. 그리고 마지막에 두 손을
모아 자신의 이마를 누르는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전한 진실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서약
입니다.”
“…!!”
“사실 저 서약은 팬텀의 일생에 한 번밖에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전 때때로 가슴이 벅차서 매번 맹세를 하지 않
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제 마음을 당신에게 전하지 않으면 이 들끓는 마
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불안했습니다. 당신은 항상 어느 때라도 저를 떠날 수 있다는 듯, 한 발자국의 여지를 두
고 있었으니까요.”
무릎을 꿇고 있었던 싱클레어의 부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서 그들은 행복
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복한 기운을 받으려는지 이 의식에 참가한 팬텀들이 차례로 그들의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싱클레어….”
“…….”
“때때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스스로가 추악한 영혼을 가진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
니다.”
“…읏…!”
“마틴…. 저는 벌을 받을까요?”
“벌이라니…?”
“…….”
“저는 원래 잔인하니까요.”
“그럴 리가…. 넌 잔인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만큼은 아니야.”
“팬텀에게 피의 계약은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오만하고 방종한 종족이 한 상대만 바라보는 것을
맹세하는 장이지요. 계약을 맺고 나면 상대의 피밖에 마실 수 없으니, 사냥의 본능까지 억눌러야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싱클레어의 말이 달콤한 무게감을 띤 채 마틴의 귓가에 녹아들었다.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
받은 부부는 다시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가면을 벗
기 시작했다.
“…….”
그저 싱클레어의 미소와 닮았다고 여기기에는, 기시감이 짙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잔인한 향기를 풍겨 대고
있기까지 했다. 마틴은 손가락 끝을 움츠렸다. 불안의 정체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하고 싶은 대비되는
마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했다.
가면을 장식했던 타조 깃털이 팔랑이며 떨어져 공기 중에 부유했다. 하지만 깃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마틴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야 말았다.
“―.”
입을 벌려 소리 잃은 피맺힌 절규를 내뱉는 순간, 길쭉이 벌려진 공간이 두 남자를 빨아들였다.
320 년 전의 끔찍한 사건이 고스란히 마틴의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음습하고 고요한 숲, 너도밤나무, 죽은 팬텀
부부, 촘촘히 달린 단추와 금 트리밍으로 장식된 남자의 웨이스트 코트. 리본 다발로 화려하게 장식된 여자의
로코코풍의 치마.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은색 홍채를 지닌 어린 남자아이까지.
그 아이가 다름 아닌 싱클레어였다.
“…허윽….”
사랑을 절실히 깨닫자마자, 그것은 비극의 서막이 되었다. 이 지독한 운명을 원망하고 저주해 본들 자신의 손
에 묻은 피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낙인처럼 새겨져서 줄곧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다.
“마틴―! 피해요!”
갑자기 들려온 싱클레어의 말에 멀어졌던 의식이 깨어났다. 마틴은 뒤늦게, 자신과 그가 반지의 기억으로 들어
갔던 바로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문틈으로 불쑥 들이닥친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재빨리 마틴을 감싼 싱클레어의 팔을 물었다. 으그적, 팔꿈치
아래의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 싱클레어!”
“제길―.”
입술을 비죽거리며 올린 사내는 손끝으로 무섭게 분노를 토해 냈다. 한순간이었다. 공기가 팽팽하게 진동하나
싶더니,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웨어울프들은 사방으로 피와 체액을 날리며 터져 버렸다.
“!!”
팔의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불같은 욕정이 싱클레어의 내면에서 끓어올랐다. 그리고 폭동을 일으
키는 것처럼 제약과 합쳐져서 그를 엉망으로 뒤흔들었다. 사내는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
다. 팔 안에 안긴 이 여린 연인의 무력한 몸뚱이가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
“…제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연거푸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욕지거리를 내뱉은 싱클레어는 마틴의 허리를 휘
어 감았다. 그는 저항 없이 품에 안겼다. 가느다란 몸뚱이에서는 언제나처럼 뜨겁고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서
싱클레어의 머리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아….”
뜨거운 한숨을 쏟아내며 온몸으로 밀어붙여 마틴의 몸뚱이를 갈구하던 싱클레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목
에 이를 박았다.
“흐으….”
가늘게 신음하는 소리가 사내를 더 거칠게 만들었다. 떨리는 몸을 힘주어 껴안고, 그의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목을 빨아들이자 마틴은 더 아슬아슬한 신음으로 울었다. 뜨겁고 향기로운 피가 왈칵 입안으로 들어
왔다. 혀를 축축하게 휘감는 그 달콤한 맛에 취해 싱클레어는 깊은 쾌락에 탐닉했다.
힘없이 늘어지려는 마틴의 허리를 더 단단히 껴안고 더 강하게 그의 목덜미를 깨물려던 때였다. 몇 차례 헛손
질을 하던 마틴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 늘리며 부들부들 떨렸다.
“…!”
“…죄송합니다.”
창백하게 질린 마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마틴은 결
국 잡고 있던 싱클레어의 옷자락을 놓치며 쓰러졌다.
“마틴―!!”
***
“이게 도대체….”
끔찍한 지옥을 실감나게 그렸다는 디에릭 보우츠가 이 장면을 보았더라면 진정한 지옥이 무언지 깨달을 수 있
었으리라. 헐벗은 죄인들, 유황불, 지진, 용암, 그리고 거뭇한 털가죽의 악마들로 가득 채우지 않아도, 더 구역
질나고 섬뜩한 광경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처참한 광경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피와 살점이 벽과 천장에
들러붙어 느릿하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 ‘광경’이 낯익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작은 참상을 외면하며 실내로 들어갔다. 신발 밑창에 진득한 피가 묻어 그가 걸어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기
고 있었다. 자신이 남긴 흔적을 발견한 아이작은 얼굴을 굳히며 카펫에 신발을 문질러 닦았다.
“빌어먹을….”
“이리 줘 봐.”
“―!!”
“싱클… 레어….”
숙박객의 이름을 확인한 아이작은 비로소 스노우의 정체를 확신했다. 마틴 스코필드. 그를 당장 찾아야 했다.
눈언저리가 빛으로 어루만져지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마틴은 깨어났다. 넓은 침대에는 자신만 혼자 누워 있었
다. 높은 천장, 그리고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을 기다란 창문이 조금 열린 채, 그곳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은 침대 위, 베개 맡까지 자국을 남겼다.
마틴은 그 빛에 이끌린 듯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깨어나자마자 본 그 아름다운 광경은
말을 잊게 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새가 지저귀고 그리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창가에서 멀지 않은 느릅나
무에는 싹이 움트고 있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벽을 보자 건물이 상당히 오래 전에 지어진 듯, 고풍스러운 벽
돌 위에는 인동 덩굴이 덮인 흔적이 있었다. 세로 창살의 창문을 좀 더 열자,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는 와중에도, 귓가에 장엄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맴돌았다. 마틴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면을 벗었을 때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320 년 전의 일.
‘복수’.
마틴은 이를 악물고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일단은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생각을 되짚어 봐도 딱
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호텔에서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뜬 곳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기억
이 분질러진 것처럼 사라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을 하기에는 결심이 서질 않았다. 저 문을 나서면 이 섬세한 세계
가 완전히 깨질 것만 같아서 두려움이 몰려왔다. 마른 입술을 축이며 문을 바라보는데, 몸이 굳어 움직일 생각
을 않았다. 결국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마틴은 문을 등지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이런 와중에 공복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하루를 꼬박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먹을 것을 넣어 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마틴은 허망한 얼굴을 했다. 이 와중에도 어째서 굶주린 감각은 남아
있냐며 자신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간 잘 먹은 탓인지, 이렇게 허기가 지는데도 뱃가죽은 푹 꺼지지
않았다. 먹은 보람은 있으나, 오늘 같은 날은 헛헛해지기만 한다.
“…….”
이제껏 그가 한 말은 모두 그랬다.
아니다.
그게 아니라.
“…….”
이렇게 무섭게 자신의 마음을 파헤칠 남자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접근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가
슴을 치고 통탄을 하며 지난날을 후회해 봐도, 이미 가 버린 세월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
진실조차 거부해 버릴 강력한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언젠가
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어이 그 남자가 자신의 심장을 파탄냈다.
전혀 다른 의미지만.
“…….”
묵묵히 반지를 바라보고 있던 마틴은 힘주어 반지를 빼려고 했다. 그다지 관절이 굵지 않은 평범한 손가락인
데, 반지는 어디에 걸렸는지 아무리 힘을 줘도 제자리에 멈춰서 요지부동이다. 마틴은 벌겋게 달은 얼굴로 더
힘주어 반지를 잡아당겼다. 새끼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
등 뒤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싱클레어의 목소리에 마틴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빠지지 않는다니?”
마틴은 상당히 놀란 듯 크게 눈을 떴지만, 그 너머의 무력한 기운을 감지하며 싱클레어는 비죽이 입술을 올렸
다. 사내는 심신이 지친 마틴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도중부터는 조금 더 상냥하게 미소를 고치며 말했다.
“…어째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마틴의 심장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죄로 깊은 심장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그의 부
모가 혼인의 맹세로 꼈던 반지가 이제 자신의 손가락에 족쇄처럼 끼워져 있었다. 꼭, 어서 죗값을 치르라는 것
처럼 새끼손가락을 무겁게 한다.
“걱정 마세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 그때 팔이…!”
웨어울프의 이빨에 팔꿈치 아래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뒤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으그적거리는
소리만은 귓가에 달라붙어서 아직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마틴은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치유가… 돼?”
“그럼요. 저를 인간과 똑같은 취급을 하시는 겁니까? 전 팬텀입니다. 어지간한 상처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리
고 금방 낫죠.”
“…밖.”
“그럼 갑시다.”
마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는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모르는 것인가. 아는 것인가. 알고도 접근했을
까. 자신이 그의 부모를 죽이고 그에게 발목이 물려 달아난 뱀파이어 헌터라는 것을, 싱클레어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수없는 질문들이 봇물이 터진 듯 한꺼번에 쏟아져서 꽉 막힌 가슴 안에서 욱시글거렸으
나, 그 작은 접촉만으로 질문은 산산이 조각났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상대로 이렇게 상냥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못 읽는 팔푼이라지만,
싱클레어가 속삭이는 사랑에 관한 밀어만큼은 티끌 하나 없는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짓
도, 가끔 물끄러미 응시하며 미소를 지을 때도, 열정적으로 퍼붓던 키스와 등 뒤에서 껴안는 단단한 팔도, 모조
리.
그 말에 낯을 붉히고 그 행동에 가슴을 설렜던 게 고작 얼마 전이다. 하지만 이제는 차라리 자신을 매도하고 외
면하고 욕질을 하며 걷어차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난 세월 겹겹이 쌓인 싱클레어의 고통이 희석
되어 조금이나마 옅어지기라도 한다면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빌었을 터다.
그러나 자신은 사람의 죄가 그리 단순한 방법으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안전한 곳입니다.”
“…안전한 곳이라면…?”
호사스러운 호텔에 거처를 마련한 남자가 별장을 가지고 있단 말에 일순간 그 저택이 마틴의 눈길을 끌었다.
잠시 그 등에 시선을 주었던 마틴은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자신의 시선을 긁어모아 바닥으로 뿌렸다.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는데, 낯짝은 이리도 멀쩡해질 수 있다니, 자신도 어지간히 오래 산 모양이다. 하긴 400
년이라는 세월이 거저 흘렀던가. 차라리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으면 사람이 없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기대도 없
이 숨죽여 살아가겠건만, 복잡한 군중 속에 자신만 암석에 부딪쳐 좌초한 나룻배인 양 너울너울 맴돌았으니,
고독은 이빨로 입술을 짓이겨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줄곧 심장이 발악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살아와서 망정이지, 그 피맺힌 절규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있었더라면 진즉 미쳤다.
“!! 그럴 리 없잖아.”
마틴은 퍼뜩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싱클레어는 미소를 보이며 접시를 앞에 내밀었다. 두툼한 베이컨과 잘 구운
소시지, 포슬포슬한 스크램블 에그, 다갈색으로 노릇노릇한 팬케이크가 있었다. 홍차가 담긴 찻잔을 내주며,
사내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라면 이 긴 테이블 끝과 끝에 앉아서, 목청 높여 말하지 않으면 대화도 못
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해야 하는데, 그는 바로 옆에서 밥을 먹겠단다. 말이 좋아 밥이지, 접시를
보는 횟수보다 자신을 보는 횟수가 더 많으니 먹느니만 못 하다.
“왜 저 끝에 앉지 않고?”
배가 고파 일단은 부드러운 스크램블을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으며 말하자 거긴 너무 멀어서 싫단다. 팬텀
은 왕족이라면서 싱클레어는 이런 일에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하긴 왕족 행세를 하고 다녔더라면 버틸 수 없
었던 세월이었을 것이다.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져서, 마틴은 서둘러 숟가락을 놀렸다. 허겁지겁 씹고 삼키자 옆에서 천천히 먹으라는 부
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념에 젖을 새도 없었다. 고작해야 와인만 홀짝이는 싱클레어 옆에서 자신은 미련스
레 배를 채웠다. 생에 관해서는 왜 이리도 우악스럽게 집착을 하는지, 몸은 굶주림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
다. 아우성을 치는 이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먹어야 했다.
정신이 괴로워 말라비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뚱이 하나는 배불리 채워야 하는지 그 많은 양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하긴 죽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을 때, ‘아사’란 것에 도전해 보았는데, 가
만히 누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되똑 정신을 차려 보니 맨발로 거리에 나가 음식을 사고 있
었다. 자신의 몸은 죽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요? 괜찮습니다. 당신은 배가 나와도 귀여울 겁니다. 토실토실한 늑대라서 잡아먹는 맛이 있겠네요.”
식당의 반대편에는 응접실이 있었다. 응접실도 역시 휑했다. 그 살풍경한 이미지가 싱클레어의 전매특허라도
되는지 집은 몹시도 서늘했다. 식당과 같은 긴 테이블마저 없는 이곳은 묵직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랜드 피아노
만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흔한 그림 장식 대신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아편의 몽환을 노래한
드 퀸시(1785~1859)의 책이나 사랑을 찬미한 헨리 콘스터블(1562~1613)의 소네트 시집, 혹은 고딕 소설로 꽤나
유명세를 얻은 호레이스 월플(1717~1797)의 책에 이르기까지, 소설, 역사서, 시집, 18~19 세기 영국 탐험의 시
대에 발맞춘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의 《잠베지 강과 그 지류:Zambesi and its Tributaries》 같은 탐험
기 등, 전혀 취향의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고서들이 꽂혀 있었다.
수많은 고서들을 제외하면 벽난로 주위도 쓸쓸하긴 매한가지라, 벽난로 쪽을 향한 흔들의자 하나와 선반 위를
장식하고 있는 은촛대가 전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삭막한가 싶어서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싱클레어
는 장작창고에서 장작을 꺼내왔다.
“오후엔 역시 쌀쌀하네요.”
“당신은 가만히 앉아 계세요. 다시 쓰러지시면 이번엔 제가 기절할 겁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서라도 안정을 취
하고 쉬시는 편이 좋겠어요.”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었어?”
“호레이스 월플까지?”
“‘이 세상은 생각하는 사람에겐 희극이요, 느끼는 사람에겐 비극이다.’ 그 녀석이 한 말이죠. 우울할 때마다 의
뭉스런 소릴 지껄이는 데다가 편지를 엄청 써 보내서 사람을 귀찮게 한 기억이 납니다.”
“설마, 아는 사람이었어?”
“루벤스 경?”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루벤스 경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브리의 여동생은 이미 뱀파이어
의 갈증을 채워 주고 말았던 것이다….”
“…!”
“―라고 끝을 맺는 소설입니다.”
“네 실화야?!”
“…으음….”
“맞습니다. 남편인 P.B. 셸리도 그녀의 아버지인 W. 고드윈의 정치적 추종자여서 이미 알고 있었죠. 그래서 부
부의 초청을 받아서 폭풍우를 피하게 됐습니다. 딱히 바쁜 일도 없었고 그냥 비도 아닌 폭풍우 속을 산책하는
취미도 없었으니 괜찮겠다 싶었죠. 헌데 가 보니 다른 사람도 있더군요. 시인인 바이런과 바이런의 주치의로
온 폴리도리였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폭풍우에 발이 묶인 거였죠.”
바이런도, 셸리도 유명한 작가이니 이름을 들은 기억은 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마틴을 확인한 싱클레어
가 뒤이어 이야기했다.
“날도 궂고 잠자기는 이른 밤이라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던 차에, 각자 여행한 곳을 이야기하기 시작해
서 화제가 독일로 맞춰지나 했더니 결국 독일 괴기담 이야기까지 대화가 흘러가더군요. 한참을 떠들더니, 갑자
기 절 보고는 독일에서는 악마가 외모 수려한 젊은 귀족으로 변한다던데…. 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잖습
니까? 악마라니, 전 뱀파이어란 말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난 영국인이라고 못을 박으니, 가만있던 폴리도
리가 ‘당신 같은 영국 신사가 혹시 뱀파이어이면…’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귀찮아져서 괴물은 자고로 무시
무시하게 생겨야 하지 않느냐고 부추겼더니, 메리 셸리가 맞장구를 치면서 말을 시작하다가 결국 ‘제네바의 물
리학자 프랑켄슈타인’까지 탄생한 거지요.”
“어디까지나 우연입니다.”
싱클레어는 서 있는 마틴의 어깨를 잡고 흔들의자 위에 앉혔다. 진정을 시키는 듯 어깨를 상냥한 손길로 쓰다
듬는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그를 잠시 보더니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다시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응접
실로 돌아온 싱클레어의 손에는 모포가 들려 있었다.
“…….”
아무것도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마틴은 흔들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서 가만히 있었
다. 벽난로의 불구덩이가 밖까지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른어른거렸다.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고서도 몸은 쉽사
리 지쳐서 자꾸만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위장을 그리도 채워 넣었으니 소화를 하려면 온몸의 피를 그
리로 돌려도 바쁠 터였다.
뱃속에 있는 내장이란 내장이 다 꼬여서 피를 토해도 모자랄 판에 소화나 시키겠다고 혈액을 돌리고 있으니 자
신은 참으로 염치도 없었다. 입이 쓴데 뱉을 침도 없이 바짝 말랐다. 그 와중에도 옆얼굴에 닿는 시선이 몹시도
따스하여, 마틴은 차마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를 볼 낯이 없었다.
***
남자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싱클레어….”
“제가 깨웠나요?”
“아니, 그냥 눈이 떠졌어.”
싱클레어는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말했다. 손길에 의지하듯 잠시 머리를 기울인 마틴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이죠? 예전에는 흔적이 남는 것이 싫어서 장식이고 뭐고 몽땅 가져다가 불태워 버렸는데, 문득, 이
벽에 그림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이라면, 윌리엄 터너는 어때? 바이런과 셸리하고도 친했던 것 같은데. 나한테 스케치가 몇 장 있긴 한데,
이런 벽에 건다고 하면 역시 《펫워스 공원》같이 대작이 좋겠지.”
“영국 낭만주의입니까?”
싱클레어가 웃었다.
“난 어차피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에 머물러 있으니까. 모더니즘도 간신히 소화해. 그 이후는 절망적
이지. 곰브리치가 예술은 곧 사망을 고할 거라고 했는데, 내겐 그 말이 맞아 떨어진 셈이야. 포르말린으로 절인
상어에게서 죽음을 성찰하기에는 난 너무 오래 살았는지도.”
마틴은 영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젠 더 이상 젊지 않은―그는 여전히 YBA(Young British Artist)로 불
리고 있다―한 예술가를 떠올리며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소머리에 파리도 꼬이고, 해골에 다이아가 번쩍거리
고, 오래 살다 보면 별꼴을 다 보게 되는 법이다.
“예술은 사망했고, 제프 쿤스가 베르사유를 뚫었을 땐 이젠 예술이 아니라 세상이 종말될 거라고 사람들은 말
하더군요.”
“프랑스 놈들만 불쌍하게 됐지. 그 저속한 미국 놈이 베르사유가 아니라 버킹엄을 뚫었다면, 난 그놈의 머리에
총질을 했을 거야. 이제는 워홀의 캠벨 수프 캔도 클래식해보일 지경이니 원.”
가치가 평가되고 시장이 그 가치를 교환하는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는 시장이 가치를 조작해 대고 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수백 억대의 일부 현대예술품은 고목나무에 핀 곰팡이와도 같았다. 씁쓸한 표정의 마틴은 벽
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넌 어떤 그림을 걸고 싶은데?”
“음…. 17 세기 복장을 한 당신의 초상화, 18 세기 복장을 한 당신의 초상화, 19 세기 복장을 한 당신의 초상화, 그
리고 20 세기와 최근에 이르는 당신의 초상화요. 응접실은 넓으니 높은 벽 위에 차례로 늘어놓으면 참으로 그
럴싸할 겁니다. 반신상과 전신상을 적당히 섞는 편이 좋겠네요.”
“―!”
“…….”
마틴은 할 말을 잃었다.
저 남자는 과거를 기억하려 하고, 자신은 과거를 지우려 한다. 하지만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며칠 전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다. 그가 그때 자신이 죽인 팬텀 부부의 아들인 것을 안 순간부터,
인두로 지진 것처럼 심장에 피멍이 들었다. 낙인이라도 찍힌 모양이다.
싱클레어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상화에 대해 대답하지 않은 마틴을 추궁할 생각은 없어 보였
다.
“칠 수 있어?”
“그럼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하며 싱클레어가 웃었다. 당신이 자는 사이에 잠깐 만져 놓길 잘했다며 사내는 의자에 앉
아서 고개를 돌렸다.
“자, 어떤 곡을 쳐 드릴까요?”
“…….”
비극은 싫다. 스노우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을 적부터, 그리고 무리에서 빠져나와 끊임없이 도망쳐 다
녔을 때부터, 비극은 줄곧 싫어했다. 감정이 고조되다가 나락으로 탁, 떨어져 버리는 그 감각을 그다지 좋아하
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진창 인생은 자신이 개척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이들의 고난을 보고 동정
하며 눈물을 흘리고는, 한편으로 자신의 삶을 위안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자신은 추억을 먹고 사는 생물이 아니다. 과거의 일들을 추억으로 덧입히고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누구
에게도 동정받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선율이 몽환적인 기분을 들게 했다. 5 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그 잔잔한 곡조에 취해서 마음이 꿈속
에서 부유한다. 마틴은 저 부드럽게 움직이는 사내의 손가락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답고 길고 곧은 그
하얀 손가락이 천사의 날갯짓처럼 우아해서 두 손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강하게 열
망하다가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쳤다며 비웃었다.
무려 5 분 동안.
5 분 동안 자신을 비웃었다.
“어떻습니까?”
연주를 마치고 돌아보는 싱클레어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놈의 심장은 돌이라도 박혔는지, 웃을 때마다 자꾸 가슴이 시큰거렸다. 마틴은 쓰라린 심장을 달래기라도 하는
지 옷자락을 말아 쥐며 말했다.
“평온한 꿈을 꾸는 것 같네.”
“그렇습니까? 극찬이네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미술작품도 같은 맥락이지요. 사람들은 작가와 함께 환희를
느끼고 슬퍼하고 때로는 아련한 기분에 잠깁니다. 작가가 작품에 마음을 담아내면, 세월이 지나 작품은 낡아도
그의 마음은 고스란히 살아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법이지요.”
“…그래?”
“―라고 들었습니다.”
입술을 움직여 열의에 찬 어조로 예술에 대해 논파하던 것과는 달리, 싱클레어는 감흥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
다. 전부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으음, 그거 좋은 뜻이야?”
“…!”
“…….”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중하고 몰두했지만 제 연주는 점점 더 광기를
띠더군요. 쇼팽의 《이별의 왈츠》까지 무섭게 들렸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누군가는 쇼팽이 무덤에서 일어나
겠다고 저주를 하더군요. 아, 《이별의 왈츠》는 이런 곡입니다.”
싱클레어는 손가락을 풀지도 않고 곧장 건반을 두드려 앞의 한 소절을 쳤다. 마리아 보젠스카에게 띄우는 쇼팽
의 사랑의 연서는 한때 싱클레어에 의해 죽음의 연서로 바뀐 적이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죽음을 속삭
였으니 이 남자는 여러모로 몹쓸 짓을 했던 것이다. 재해석도 그 정도면 절망급이다.
“으음….”
귀를 기울이던 마틴이 애매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이야 마틴 때문에 제대로 사랑의 연서가 된 《이별의 왈츠》
였으니 과거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곡이 무서워지자면, 오죽 살벌하게 쳐야 했을까. 마틴은 좀체 짐작
이 가지 않았다.
“……그래.”
“어째서…?”
“제가 아무리 연습해도 광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그 곡이니까요. 드뷔시의 《꿈》입니다. 당신이 좋은 꿈을
꾸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연주해 보았던 겁니다.”
“…!”
자신은 마음을 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별 의
미 없는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이 기분을 숨기기 위해, 뻔뻔한 얼굴로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즐기다니?”
“괜한 지식만을 쌓아 하인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하는 우울한 귀족들이 제 연주에 새파랗게 질려
서 사지를 떨어 대는 꼴이 꽤 그럴싸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놈들도 있었거든요.”
싱클레어는 자신의 삐딱한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가끔 보이는 저런 얼굴도 마틴은 마
음에 들었다.
“…하하….”
마틴은 다시 건반을 두드려 무언가 따스하고 평온한 곡조를 연주하는 싱클레어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은 아프지만 아프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감정을 쉽사리 숨길 수 있었을 때가 죽도록 그리울 만큼, 마음을
숨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가 상냥하면 상냥할수록, 죄책감은 더 깊어져만 갔다. 속이 패이고 가시가 박히고 엉망으로 찢겼다.
그의 얼굴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한
편, 그마저 자신의 이기심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 남자에게 또 다른 잔인한 기억을 남
기는 것만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는 사이 시간은 다시 지나갔다.
시간만 자꾸 흘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별장인데, 의외로 매일매일 할 일은 넘쳐났다.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향해 죄다 잘라 버릴
것들만 남았다고 무섭게 투덜거리는 싱클레어의 푸념을 들으며 그가 타 준 홍차를 마시고(홍차를 마시는 내내
싱클레어는 그 짙푸른 눈으로 정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햇살이 부드럽고 바람도 제법 따스하면 싱클레어의 손
을 잡고 새싹이 돋기 시작하는 가로수 길을 함께 걷고, 그리고 황혼에 물들어 가고 있는 하늘이 창문을 두드릴
무렵에는 와인을 가지러 간다는 싱클레어를 따라 고서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빈티지 와인을 소장하고 있는 지
하의 와인창고를 구경했다.
그 말에 기뻤다.
하지만 섣불리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 행복한 계획을 들으면서도 혀가 잘린 사람처럼 듣기만 했다. 자신은 기
쁨을 처음 맛본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그의 관심을 구걸했다. 싱클레어가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자신은 그에 관한 건 뭐든 다 알고 싶었다. 욕심이 생긴 것도 처음이고 사랑을 한 것도
처음이었으니, 전혀 모를 만도 했다.
자신은 묻기만 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것저것 묻기 바쁜 자신이 귀찮을 만도 한데, 싱클레어는 전혀 그런
내색도 없이 시종일관 상냥했다. 오히려 자신의 관심이 기쁜지 손을 잡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곰살맞게 굴
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싱클레어는 잠투정을 하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자신을 도닥였다. 그의 잠까지 깨우는 것
같아서 마틴은 숨을 고르며 움직임을 멈췄다. 창문으로는 그날따라 밝은 달빛이 이 따스한 잠자리까지 넘보고
있었다.
달빛을 보자 마틴은 아련한 기분이 샘솟았다. 아주 오래 전, 초원을 달리던 기억이 어슴푸레한 의식을 헤집고
떠올랐다. 달빛에 홀린 것처럼 시선을 뿌리칠 수 없어졌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감각과 풀내음도 몹시 그리
웠다.
싱클레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틴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맨발로 풀을 밟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정
원 밖으로 라임나무 가로수 길이 늘어져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새어 발치를 아련하게 물들인다.
새벽의 연못은 싱클레어처럼 싸늘한 한기를 뿌리고 있었다. 마틴은 그 곁에 멈춰서 웅크리고 앉았다. 멍하니
연못을 바라보자 눈알이 욱신거리며 수마가 덮쳤다. 마틴은 그 손길을 거절해야 할 아무 이유도 찾을 수 없었
다. 그저 몸을 맡기고 앞이마까지 몽롱하게 휘젓는 수마의 손길에 속절없이 당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싱클레어는 눈을 떴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사내는 내리깐 눈을 옆으로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틴이
어디에 있는지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싱클레어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제 마틴을 데리러 갈 시간이
었다.
사내는 붕대를 풀었다. 피와 고름이 살갗과 붕대에 뒤엉켜 말라붙어 있었다. 좀처럼 붕대가 풀리지 않자 싱클
레어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신경질적으로 붕대를 잡아 뜯었다. 찌직―, 아물지도 않은 살갗이 다시 터지는 소
리가 났다. 웨어울프에게 물린 상처는 여전히 깊었다. 인간에 비해 뛰어난 치유 능력이었으나 그래도 상처가
원체 깊었다.
고통이라면 마틴 쪽이 더 심할 것이다.
그의 고통이 또한 자신의 고통이지만, 때로는 이 모진 감정이 필요한 일도 있다. 비극은 싫다고 말했지만 마틴
만큼 비극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음의 고통이 심화될수록 그는 한층 아름다워지고 한층 처연해졌다. 그
리고 마침내 종종 내비치던 강렬한 욕망을 오래도록 드러내서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그 눈빛에서 싱클레어는 늘 마음의 여지를 두고, 도망갈 자리를 찾고 있던 자신의 연인이 다듬어지지 않은 거
친 소유욕을 불태우며 자신의 사랑을 갈구하고 욕심을 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걸 원했다.
그는 320 년간, 자신이 끊임없이 찾던 상대였다. 복수와 증오로 시커멓게 물든 마음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온
갖 고문을 대입시켜 상상해 왔던 대상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다. 살을 찢고 뼈를 바스라
트리고 내장을 비틀어 뽑아내고 싶었다. 목이 피거품으로 가득 차 그르륵 소리를 내며 숨이 끊기는 그 고통스
러운 얼굴을 상상해야지만 잠들 수 있었다. 꿈속의 자신은 악마였고 살인마였고 고문관이었다.
고요한 밤중에 여린 연인은 하얀 몸을 구부리고 잠들어 있었다. 신의 은총을 영원히 거부한 채 습지를 떠돌며
인간을 홀리던 북유럽 신화 속의 네켄처럼, 연못의 물안개로 뒤덮인 그는 이곳이 원래 머물던 곳처럼 편해 보
인다. 사락사락 흩어지는 숨소리,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몸을 확인하지 않아도 마틴이 잠들어 있다는 걸 싱클레
어는 알 수 있었다. 마틴의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내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새벽의 물안개처럼 창백한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온기가 닿자,
갑자기 마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검은 눈이 어둠을 가르며 번쩍 떠졌다.
“싱클레어! 싱클레어!!”
“―!”
축 늘어뜨리고 있던 두 팔을 높이 들어 마틴은 사내의 품에 매달렸다.
“마틴?”
마틴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내뱉었다. 초점이 싱클레어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바르르 떨리며 제멋대로 흔들렸
다. 그는 손을 뻗어 정신없이 싱클레어를 잡아당기기만 했다. 고개를 휘젓고 싱클레어의 몸을 흔들면서 악을
썼다.
“마틴?! 마틴!!”
“안 돼――!!!”
“마틴, 날 봐요!”
싱클레어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마틴은 사내의 목에 더 힘주어 팔을 둘렀다. 전력을 다해 그에게 매달리며 마틴
은 애끓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입을 벌려 뜨거운 숨을 토해 낼 때마다 마틴은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
고 애원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보다 많았을지 모르나, 마틴의 떨리는 입술은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아니요.”
“…….”
“그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마틴은 털썩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얗게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가 어깻죽지까지 처연
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팔을 내밀어 마틴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울음기를 억누른 목소리, 가쁜 호흡을 감춘 뜨거운 몸뚱이.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매달린 마틴을 온몸으로 받아
들였다. 가슴이 충만해졌다. 싱클레어는 돌연 짙푸른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리깔고는 뺨을 비죽이 잡아당겨 미
소를 지었다.
“…?”
몽마에 시달린 사람처럼 버둥거리다 말고, 마틴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틴?”
그를 불러 보나 대답이 없었다.
“하아….”
싱클레어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입술을 비죽이 당겼다. 고대하던 마틴의 영혼이 자신의 품에 떨어졌다. 지
금 입을 열어, 환희의 찬가를 불러도 될는지. 싱클레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민을 끝냈는지, 교교한 달빛이 내리쬔 길을 맨발로 밟으며, 사내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환희의 찬가’를 흥
얼거렸다.
***
먼발치에 있던 저택의 지붕이 성큼 모습을 드러내자 기분 좋은 흔들림에 마틴은 눈을 떴다. 사내는 자신을 소
중히 품에 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
“내가 왜 밖에 있어?”
마틴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눈썹을 힐끗 올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 그 표정 위에 상
냥한 미소를 덧입히고는 고개를 숙여 마틴을 바라보았다.
“내가?”
마틴은 혀를 차며 말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싱클레어의 시선이 따스하다.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전 당신의 그런 면이 좋습니다.”
“또 뜻 모를 소리 한다.”
“괜찮아요. 저만 알고 싶으니까.”
“…으….”
싱클레어의 말에 마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에 물든 창백한 얼굴과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이 여느 때보다
아름다워서 마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니.”
마틴은 딱 잘라 말했다.
그의 곁에 있고 싶다.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
좀 더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마땅하건만, 자신은 망설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주저했다. 차라리 눈을 뜨자마자
꼴딱 숨이라도 거뒀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이 무어라고 계속해서 연민하고 발광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 처참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맞서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할 줄은 몰랐다. 어
지간히 독한가 보다. 마틴은 스스로를 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제 눈을 찔러 피눈물은 못 낼 망정, 저 남자 곁에
남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들이었다. 죽여 달라고 호소했다가 살려 달라고 빌었
다가 사랑한다고 애원했다가 차라리 자신을 버리라고 발악했다가, 머릿속에서 수없이 마음을 바꾸며 요란을
떠는 말들만 듣고 있자면, 이 세상에 자신만큼 미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지독하다.
악착스럽게 질긴 목숨을 이어 왔더니, 아주 하는 짓도 끔찍하다. 마음에 독기가 단단히 어려서, 이래서 사백여
년을 시퍼렇게 살아올 수 있었나 싶어진다.
“가자.”
“…? 어디를요?”
“런던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아직….”
걱정스러운 표정의 싱클레어를 설득하듯 마틴은 웃었다. 푸른 달빛에 비친 미소를 띤 뺨이 파르라니 빛났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응.”
억지로 숨을 끄집어내고.
“괜찮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최근 그가 뭘 먹는 꼴을 못 봤다. 눈빛은 점점 싸늘해지고 얼굴도 창백해져 갔다. 식욕이 없어도
뭐라도 먹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오히려 자신의 뺨을 감싸며 괜찮으냐
고 물었다. 자신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괜찮다는 말의 의미를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말로 괜찮은 사람은 오히려 그 말을 부정한
다. 엄살이라도 떨며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육체가
병이 난 사람이 굳이 괜찮다고 말한다. 그 말이 무어라고 그리 얽매이는지.
싱클레어를 생각하는 사이, 또 다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마틴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벽에 기댄 몸을 고쳐 앉았다.
싱클레어가 그랬듯.
“저 왔어요!”
한 박자 늦게, 그녀의 어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달려가 버린 리사를 뒤쫓아 왔는지 멜리사 역시 상
기된 얼굴이었다.
혼날 땐 역시 애칭이 아니라 풀 네임이다. 아이는 금방 풀죽은 얼굴로 엄마의 치마폭으로 달려가서 얼굴을 묻
는다.
“미안해요, 엄마.”
하지만 혼을 내는 멜리사도, 사과하는 아이도 어딘가 애정이 묻어 있다. 치마폭에 얼굴을 비비는 아이를 혼낼
만큼 매몰차지 않은지 멜리사 윈크로프트는 “어휴, 얘두 참.”이라며 리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신나게
뛰어오느라 헝클어졌던 샛노란 금발을 원래대로 돌리며 멜리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소란스러웠죠?”
마틴은 웃었다. 웃음소리에 쭈뼛거리며 치마폭에서 고개를 쏙 내민 리사는 살그머니 엄마의 안색을 살피나 싶
더니 금세 기운을 차리며 엄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이 손에 카운터까지 끌려온 멜리사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마틴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운터보다 조금 작은 리사는 마틴의 놀란 얼굴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는지 조그마한 입술
을 꾹 다물고 있다.
“저기…. 이게 뭔가요?”
“와! 정말로?”
“정말요?!”
옆에서 아이의 성장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멜리사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 때, 아빠와 생일파티를 할 거예요. 하지만 아빠한테는 아직 비밀! 저녁때 리사의 생일이라고 놀라게
해 주려고요.”
“네!!”
싱클레어와 있다 보니 자신도 이상한 심술을 부린다고 마틴은 생각했다. 그리고 의외로 자신은 아이들과 잘 놀
아 줄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잠시 해 본다. 부질없다. 그리고 버겁다. 그 버거운 운명을 받아들일 자신은 없었다.
동그란 펜던트에는 날갯짓하는 흰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었다. 리사는 정신없이 펜던트를 내려다보
았다.
“예쁘다!”
***
부서는 발칵 뒤집혔다.
기어이 이놈이 사고를 치겠구나 싶어서 간을 졸이며 기다렸다. 하지만 세상은 잠잠했다. 최소한 ‘런던 탑’이라
고 내기를 걸었던 놈들까지 죄다 돈을 잃었다. 그렇다고 부서 내의 다른 누가 돈을 딴 것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모두 건물이 무너진다고 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작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버킹엄 궁
전에다가 돈을 걸었었다.
결론적으로 무너진 건물은 없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썩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
에는 며칠 전의 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매일 밤, 죽도록 고민을 했지만 아직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아니요. 저도 다른 말은 못 들었습니다.”
“후….”
“으으…. 위장약으로.”
“여기 있습니다.”
“보았습니다.”
“……엄청난 상처였어.”
그런데 오늘 아침, 휴가를 갔다던 싱클레어가 알버트에게 와서는 대뜸 팔을 내밀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다
말고 “보스는 기름값이 덜 들어서 좋겠네요.”라며 이상한 소리를 하던 싱클레어는 치료를 해 달라고 뒤이어 말
했다. 붕대가 묶여 있어서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는데, 어디를 다쳤는지 묻기도 전에 이놈이 먼저 붕대를 잡
아 뜯는지 푸는지 모를 손길로 붕대를 거침없이 벗겼다.
가관이었다.
“거기다 치료라니. 그놈은 여간해서는 치료를 받으러 안 가잖아? 자기 생살을 이어붙이는 꼬락서니가 비위가
상한다고 하면서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는데. 크으…. 하긴 그 팔로 뭘 어쩔 수 있겠느냐마는.”
“아, 네. 그랬죠.”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무서워서다. 그에게는 태초부터 인간의 본성에 깊숙이 자리한, 그 본연의 공
포를 건드리는 면모가 있었다. 무표정으로 있다 말고 입술을 비틀어 웃거나,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거나
하면 공포는 배가 되었다. ‘버리자니 아깝고 나 가지자니 싫고’라는 몹쓸 말이 있지만, 그 말을 싱클레어에게 대
입하면 ‘버리자니 무섭고 가지자니 두렵고’였다. 제아무리 숱한 서브센서들을 관리해 온 기관이지만, 싱클레어
를 상대로는 도무지 뭘 어째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이 아까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기관으로서는 자처해서 시한폭탄을 품에 안은 꼴
이 되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선임요원도 아니고, 파트너도 아니다. 하지만 한 번 동료라는 인식이 박혀 버리니, 그
놈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다. 아주 몹쓸 딱지가 붙어 버렸다고 아이작은 생각
했다. 덕분에 ‘스노우’의 위치를 파악하고도, 차마 보고를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말이지…. 상부에서는, 지난번 살해당한 크레이턴의 일이 혹시 싱클레어 짓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
“―!!”
아이작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제게…!”
아이작은 분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상부의 결정이라지만 마음속으로는 좀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는 꽤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다. 감정기복이 조금 심한 편일지 모르나 장난스러운 구석도 있었고 분
노할 일에는 평범하게 분노하고 기뻐할 일에는 평범하게 기뻐했다. 보스인 알버트 테일러는 그런 아이작이 싱
클레어와 어떻게 지낼지 내심 불안했었다. 한쪽은 동료애가 투철한 요원이고 다른 한쪽은 아주 전무했다. 싱클
레어는 동료애로 보이거나, 그 비슷한 것조차 가지지 않았다. 몇몇은 내기를 걸었다. 이곳 부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부서라, 거기에다 과반수가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데에서 오는 미묘한 딜레마를 등에 업고 사는
놈들이라 소소한 놀이에 굉장히 집착했다. 마치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 사막에서 팬티만 입고 네 근육이 크
네, 내 근육이 크네, 실랑이하는 군인들처럼.
독한 성격이 아니라 금세 기죽어 돌아올 줄 알았건만 아이작은 죽을상을 하면서도 싱클레어의 파트너이자 동
료를 자처한 것이다. 대단한 희생정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러는 아이작을 두고 머리가 이상하다
고 했다. 혹은 피학적 기질이 있지 않은가 매우 의심하기도 했다.
“부탁하지.”
***
아이작이 싱클레어를 찾는 그 시간, 사내는 화장실에 있었다. 팔은 나았지만,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
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더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고통에 떨렸을 때, 사내는 울컥 속을 게워냈다. 벌건 핏
물이 변기 안으로 후드득 쏟아졌다. 사내는 몇 차례 더 속을 게워 냈다.
“그 새끼가….”
혈액팩을 공급해 주는 ‘닐의 런던 허브숍’의 주인장을 떠올린 싱클레어는 이를 으득거리며 살기를 띤다.
타인의 피를 씻어내자, 색을 잃은 입술이 드러났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같은 낯빛을 하고서 싱클레어
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억지로 삼킬 수는 있을 줄 알았건만.”
피의 계약은 그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자신의 몸은 오로지 마틴의 피만을 원했다. 그의 향기로운, 그의 온기를
띤 최상의 피. 하지만 싱클레어는 지난 열흘간 그러했듯, 자신의 욕구를 억지로 잡아 누르고 있었다. 바싹 고개
를 쳐들고 흉흉한 눈을 부라리는 그 짐승을 몇 번이고 억눌렀다.
몸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상태가 아니었으나, 마틴이 쓰러지던 장면이 자신의 정신을 구속하고 있었다. 피를
마시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가도 팔랑거리는 꽃잎처럼 무너져 내리는 마틴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아련한 잔상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며, 광분해서 날뛰는 욕망의 짐승을 몇 번이고 부드럽게 잠재웠다. 이제
원하면 얼마든지 연인의 여린 목에 송곳니를 내밀 수 있지만, 정신의 거부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
비척거리며 밖으로 걸어나온 싱클레어는 얼마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섰다. 하지만 벽을 잡고 버
틴 손이 얼마 지나지도 못해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싱클레어!!!”
뒤늦게 그를 찾은 아이작이 급히 뛰어와서 사내를 일으켰지만, 사지를 늘어뜨린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한 손
으로, 그 보이지 않던 힘으로 세상을 파괴시켰던 강인한 면모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그 손은 바닥에 처박혀 파
리하게 굳어져 있을 뿐이다. 바닥에 처박혀도 깨어지지 않은 것만이, 이 사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음
을 증명했다.
아이작은 무엇이 이토록 싱클레어를 나약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알던 남자가 아니었다.
무수한 혼란 속에 떠오르는 상대는 마틴뿐이었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싱클레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제아무리 독한 임무를 떠맡겨도 싱클레어는 다치
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힘은 아주 절대적이었다. 사방에 핏발을 날리며 나른하게 입술을 히죽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면 소름 돋으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고작해야 그림자나 드나들고 그 그림자나 움
직거리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완벽한 능력. 동경했고 존경했다. 너무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부러워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대신 마음의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잔인한 감각들, 결코 분출해 본 적 없는
감각들이 그의 잔혹한 행동으로 충족이 되었었다. 가질 수 없는 힘에 대한 집착은 의외로 쉽게 메워진 셈이다.
***
아이작이 싱클레어를 업고 왔을 때, 마틴은 간이 철렁 떨어졌다. 갑자기 회사에서 쓰러졌다고 말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아이작을 이끌고 마틴은 자신의 침대에 싱클레어를 눕히게 했다. 2 층에는 절대 아무도 들여 놓지
않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마틴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싱클레어의 뺨을 쓰다듬었다. 원래도 온기가 없이 싸늘한 뺨이라 상태가 어떤지 좀
처럼 짐작이 안 된다.
“어떻게 된 겁니까?”
“빈혈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늑대라뇨? 지금 그런 장난을 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부의 요원이면 일반인에게 적어도 신뢰는 주어야 한
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이작은 이 남자가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싱클레어가 택했으니 어련할까 싶지만, 크림슨인 자신의
정체를 명백하게 알고 있을 텐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명령을 받았으니 일은 해야 하지만, 그래도 저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도무지 못하겠다. 할 수 없다. 하이에나
처럼 간교해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는 이 자리는 역시 자신과 어울리지 않다고 아이작은 생각했다.
“스코필드 씨. 당신과 함께 있으면 싱클레어도 위험해집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크림슨 전체를
적으로 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겁니다.”
마틴의 다문 입술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작은 자신이 참으로 잔인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신은 인간을 사랑하면서, 그 인간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면서, 그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게 강요하고 있
었다.
이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싫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마틴은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고작해야 이백 년은 됐나?”
“……258 년입니다.”
“어처구니없군.”
마틴은 혀를 차고 있었다. 허공으로 “하―.” 숨을 내뱉으며 서슴없이 눈살을 찌푸린다. 탐탁지 않다는 반응에
아이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놈도 네 새끼를 낳아 달라고 말할 작정이냐?”
“…!”
“…!”
“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짓도―.”
***
처음에는 자신만 마음을 숨기면 곧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다. 죄책감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마음을 다잡고서라
도 싱클레어를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라도 버티고 싶었다. 너무 마음이 급급해서 자신이 쫓기는 몸이라
는 걸 잠시 잊었던 것이다.
어리석었다.
“하아….”
하지만 칼을 들고서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상하게 망설여진다. 한때는 이런 주방용 칼쯤은 문제도 아니었
다. 도망을 치다 길이 막혀 처음으로 형제를 죽였던 그날, 형제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도무지 잠들 수 없는 나날
들을 보내다가 결국 스스로의 심장에 기다란 대검을 쑤셔 박았다. 그때는 피가 콸콸 쏟아졌다. 쓰러진 자신의
몸을 적시고 바닥까지도 남김없이 적셨다. 눈앞이 아득하고 검을 박은 심장은 뜨거운지 차가운지 모를 감각에
휩싸여서 사지가 떨렸다. 이번에야말로 죽나 싶었다. 하지만 깨어났다. 그 후로 몇 차례 시도해도 모두 마찬가
지였다.
자신은 죽지 않는다. 발악하며 날뛰던 그때의 자신은 부지깽이를 사방에 휘저으며 철학적 문제의 비존재에 대
해 설파하던 광분한 비트겐슈타인과도 비슷했다. 그는 칼 포머에게 위협적으로 흔들던 부지깽이를 집어던지
고 사라졌지만 자신은 벌겋게 달아오른 부지깽이로 스스로를 지졌다. 고통은 생생했다. 살이 타는 냄새도 생생
했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오자 시커멓게 타들어갔던 살점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싱클레어….”
이름을 불러 본다. 대답이 없었다. 정신없이 그의 뺨을 쓰다듬고, 그의 머리칼을 만지던 마틴은 고개를 숙여 그
의 입술에 가만히 자신의 입을 대었다. 사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 뜸을 들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셔 보라고 마틴은 계속해서 자신의 피를 흘려보냈다. 핏방울이 제멋대로 입술을 타고 흘렀지만,
마틴은 끈질기게 자신의 피를 사내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좀처럼 미동이 없던 싱클레어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미약한 반응이지만 마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어서…!”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며 자신의 피를 천천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싱클레어의 입술이 손목을 간지럽힌다. 마틴
은 웃음이 번지려는 것을 참았다. 이렇게 무릎 위에 싱클레어의 머리를 두고서 피를 먹이고 있으니, 연인 놀이
라도 하는 것 같다. 벌겋게 물든 손목이 보기에 좀 안 좋아서 그렇지, 싱클레어의 입술은 적당히 붉어져서 사내
의 미모에 빛을 더했다.
“잘 먹네.”
뿌듯해져서 한마디를 해 본다. 그랬더니 정신없이 자신의 피를 받아먹던 사내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
갑자기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번뜩이는 짙푸른 눈동자에 숨이 막히려는 찰나, 자신이 마틴의 손목에서 흘러
나온 피를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아챈 그는 무서운 얼굴로 상처가 난 마틴의 손목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아
직 상태가 썩 좋지 않은지, 싱클레어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으으….” 소리를 내며 미간을 더 찌푸렸다.
“마틴!”
노기 띤 목소리에도 마틴은 무덤덤한 시선을 보냈다. 싱클레어의 속이 울컥 뒤집혔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너, 빈혈이래.”
“마틴….”
“내 피를 마셔.”
“마틴―!”
“지난번에 힘들어 하셨잖아요. 당신이 쓰러지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당신이 제가 흡혈
을 하는 바람에 쓰러졌습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제가 과하게 피를 마신 바람에, 당신이….”
싱클레어는 했던 말을 반복하고, 다시 반복했다. 잔뜩 두 눈을 찌푸리며 정신없이 말을 하고 있기에, 마틴은 고
개를 저었다.
“그건….”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그때 쓰러진 건, 자신이 그의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 하나가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히고, 자신의 살을 바르고 뼈를 깎았다.
“그건, 그냥 좀 놀라서야.”
“…싱클레어, 네 얼굴은 석고상 같아. 대리석으로 깎은 조각상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밀랍으로 만든 것 같기도
하네.”
조금 웃는다.
“그럴 리가….”
싱클레어의 말을 가로막듯 고개를 저은 마틴은 그가 붙잡고 있는 손목을 흔들었다.
“확인해 봐.”
못 미더운 시선으로 팔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푼 싱클레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살갗이 벌어져 있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 마틴?!”
마틴은 두 팔을 벌렸다.
피와 살과 뼈까지.
차라리 그의 손에 죽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조차, 싱클레어를 상처 주는 길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은 그에게 그 무엇도 바라서는 안 된다.
무엇으로 자신에게 벌을 주어야, 이 죄에 합당한 것일까.
차라리 죽어서 죄가 용서된다면.
‘죽여라.’
‘나를 죽여라.’
울걱, 피가 빨려나간다.
햇살이 닿은 다리는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반들반들한 피부는 윤이 나는 듯했다. 가만히 손을 뻗어 어루만지
는 사내의 손길은 여느 때와 달리 정갈했다. 전라의 마틴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이불을 덮어 주면
체온이 높아서인지 자꾸 차 버린다. 그의 등을 껴안고 있을 때는 자신의 체온이 낮아서 얌전히 이불을 덮고 있
는데, 혼자 내버려두면 어김없이 홀라당 이불을 차 버린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 줄 다른 방
법을 고심하고 있기도 했다), 오늘따라 더할 나위 없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겹친 다리 사이로 아슬아슬
하게 드러난 거뭇한 음모도 이 깨끗한 몸뚱이를 장식하는 한 부분으로 보였다.
부드러운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살짝 핏기를 잃은 피부색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압도적인 경건한 분위기에 싱
클레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추악한 욕망도 잠시 내려두었다. 오로지 성스러운 피조물을 어루만지듯
마틴의 나신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리고 숭배라도 하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마틴의 뺨을 감쌌다.
“…당신이 절 살렸습니다.”
사내는 촘촘하게 그늘을 만든 마틴의 속눈썹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며 싱클레어
는 따뜻하게 웃었다.
팬텀에게 있어서 그 맹세의 무게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절대적이었다. 이 남자는 이제, 마틴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육체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팬텀에게 계약은 구속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일평생, 이 영속의 삶 동안 단 한 명뿐이라는 자신의 반려자를 향해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사내는 그의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이상하게 심장이 지끈지끈 아렸다.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의 심장을 매만지던 싱클레어는 곧, 손쓸 수 없을 지경으로 밀어닥치는 울걱거리
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누워 있던 마틴을 세게 끌어안았다. 여린 연인이 팔 안에 가득 차자, 그제야 몸이
평온해졌다.
“으응….”
싱클레어에게는 양쪽 다 해당되었다.
팬텀의 정통성은 범인이 상상하기 힘든 잔혹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 종족에게
있어서는 불운이기도 했다. 냉혹하고 오만한 그 성격적 결함은 어쩌면, 정통성을 잇기 위해 고안된 그들 나름
의 종족적 특성일지도 몰랐다.
팬텀의 부부는 팬텀인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성인식을 치르는 날까지 자유로이 뱀파이어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인간형으로 변하기가 어렵지, 뱀파이어의 모습을 하는 건 아주 쉬웠다. 하지만 성인식을 치르
는 때가 되면 팬텀은 정통성을 이어받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사내는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다. 더불어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에 동화된 낙관주의자도 아니었다. 사내는 신을
믿지 않았다. 이 세계에 있는 악은 세계를 최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서 신이 용인했다는 라
이프니츠의 말은 사내에게는 허설에 불과했다. 그는 라이프니츠를 비웃었다.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싱클레어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뱀파이어 헌터를 찾아 헤맸다. 찾아
서 죽여야만 했다. 그것은 320 년 동안 반쪽짜리 팬텀으로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복수이자, 그리고 정통
성을 받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하나. 부모를 죽인 자와 피의 계약을 맺는다. 이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만을 충족해도 정통성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누구보다 강인한 팬텀의 숫자는 그래서 늘 소수
로 유지되고 있었다. 자연은 신기하리만치 그가 품을 수 있는 한계를 정해 놓고 그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
는 셈이다. 인간은 번식은 자유롭되 여성과 남성으로만, 팬텀에게는 그들 혈족을 죽여야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리고 크림슨에게는 스노우라는 희생양을 던졌다.
그들은 아이를 안지 않고, 아이와 손을 잡지도 않았다. 아이는 대부분 유모에게 맡겨지거나 제 발로 걸을 수 있
을 때부터는 부모의 먼발치를 보고 뒤따라올 뿐이다. 투정을 받아 줄 품도 눈물을 닦아줄 온기 있는 손도 없었
다. 아이도 부모에게 괜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주 독립적으로 자라났다.
화살은 강했고, 그것은 자신보다 먼저 부모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뒤늦게 서브센스를 빼앗았지만 숨이 이미
끊긴 시신의 에너지만 뽑아냈을 뿐이다. 어린 몸은 제약의 구속으로 웨어울프의 피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때,
뱀파이어 헌터였던 그가 나타났다.
“으음…. 싱클레어?”
“창밖을 보세요.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당신이 기다리던 봄입니다. 런던에도 이제 봄이 오나 봅니다.”
보라는 창밖은 보지 않고, 마틴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싱클레어를 정신없이 바라보
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돌아왔네.”
“당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전 뱀파이어인걸요.”
어느 쪽이건 싱클레어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아름답다. 지금은 이 아름다운 사내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
고 그리고 말을 한다. 그걸로 충분했다. 마틴은 그리운 느낌을 듬뿍 담아 손 안의 머리칼을 만졌다. 남자가 곱게
눈을 접는다. 저 살포시 접은 눈웃음은 오로지 마틴만을 위한 것이었다.
“아…!”
“벌써 시간이….”
“얼른 가.”
창밖에 서서, 사내가 보라고 했던 햇살 대신에 그가 떠나가는 등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틴은 그 자리에 쓰러지
듯 주저앉았다.
숨이 막혀 왔다.
하루만 더 그의 곁에 있으려 했는데, 욕심이 무섭게 커져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미련이 없어야 하건만, 이 끈
질긴 덩어리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지문을 남기는 것처럼 곳곳에 묻어서 심장에 엉겨 붙는다.
아이작이 찾아왔을 때 이미 결심은 했는데, 싱클레어가 다치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으니 자신은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라고 그렇게 결심을 했는데. 그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의 형제들을 죽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그토
록 결심을 했는데.
자신은 이 꾹꾹 누른 감정이 언젠가는 터져 버리지 않을까 불안했다. 울며 매달려 볼까도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때가 왔는데도, 그의 앞에서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울음을 삼키지도, 또한 내뱉지도 못하고서, 이 타
들어가는 마음에 눈물이 다 말라 버렸다.
“하….”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자.”
이번에는 한숨 같은 말을 내뱉는다.
“아주 가 버리자….”
***
아이작 패러데이는 이 상황이 어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웨어울프로 일하나 기관에서 능력자로 일하나 딱히 바뀌는 건 없었다. 햇수로 따지면 스노우를 추적하는 일을
더 오래 해 왔으나, 그래도 계급은 별 볼 일 없다. 여기저기 치이는 일만 많지 늘 힘없는 직책이다. 하긴 그 직책
자체가 아래에서는 눈치 없이 졸라 대고 위에서는 구박하는 위치였다. 야욕이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원체 그런 성격도 못된다. 싱클레어의 입을 빌리자면, 병신 같고 귀찮은 성격이란다.
“패러데이.”
좀 더 눈치가 있었더라면, 누구보다 먼저 스노우의 정체를 찾았다고 수장님에게 보고하고, 자신은 그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높은 지위로 승격될 터였다. 그러면 떠돌이 개처럼 냄새를 맡고 사방을 쏘다니는 이런 일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출셋길이 창창하게 열리게 된다.
“네, 수장님.”
마틴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불쌍히 여기기엔 너무도 강인했다. 차라리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수장에게 위치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울며 호소했더라면 마음이 달리 움직였을지
모른다. 값싼 동정은 했겠지만, 고작 이런 남자를 형제들이 죽어가며 찾았나 싶어서 잔뜩 자조적인 기분이 되
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틴은 아니었다. 눈물은커녕 그와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오히려 단단하고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패러데이, 난 사실 좀 질린 참이야.”
“죄송합니다. 수장님―.”
표정에서 분노가 드러나지 않으니 안색을 살피고 미리 위험에 대비할 수도 없었다. 시한폭탄적인 면모는 싱클
레어와 흡사하나, 그 온화한 미소는 싱클레어의 광기 어린 미소와는 다른 경지였다.
어쩐 일인지 자신의 주변에는 성질이 범상치 않은 놈들이 넘쳐났다. 수장님 밑에서 버티다 보니 싱클레어와도
근근이 지내고 있지만, 자신도 감정이 있는 이상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양쪽을 한 번씩 오가
면 됐지, 한꺼번에 얽힐 일은 없었다. 자신은 스노우를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기관 S 의 요원으로서 싱클레어의
동료로 행동하면 됐었다. 아슬아슬하지만 나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균형이 깨진 건, 저들 두 사
람의 사이에 스노우인 마틴이 있다는 걸 알면서부터다.
차라리 마틴의 선택에만 맡겨 둘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마는 스노우는 단 한 마리의 스노우만 낳는다. 그리고
스노우와 수장의 사이에서는 대를 이을 수장이 한 마리만 나온다.
그러니 이 애꿎은 계산법에 의하면, 다음 대의 수장은 새로운 스노우에게서만 태어나는 것이다. 스노우가 여러
마리의 수장을 낳을 수 있었더라면, 크림슨은 지금과 같은 구조가 아니었을 터이다.
“저번 호텔은 확실히 스노우가 있었던 곳이라고 보고를 받았다만. 묵는 곳도 밝혀졌겠다, 더 뜸들일 이유가 없
지 않나? 어째서 아직까지 스노우를 잡지 못하는 건지 궁금한데.”
“현재 추적 중에 있습니다.”
“열흘씩이나 넘게 말이지.”
아이작은 그의 시선이 닿은 목뒤가 뻐근해졌다. 딱딱한 바닥에 꿇은 한쪽 무릎은 거의 감각이 없어져 있었다.
“일어나.”
저 빛나는 구두는 피가 닦여나간 흔적인 것이다. 온화한 성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저 신발이 그 너머의 실체
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였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전에, 라이너스는 또 다른 누군가의 피로 신발을 적셨으
리라. 아이작은 선뜩하게 소름이 돋았다.
“혹시 내게 숨기는 거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라이너스는 아이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훌쩍 등을 돌린다. 늑대의 모습일 때와는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
의 청년은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가능한 인기척을 죽이며
문 밖으로 나서려던 아이작은 문고리를 잡는 순간, 전에 못 본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전원을 켠다. 눈은 무심코 시간을 살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멜리
사와 그녀의 딸아이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하지만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넉넉했다. 천천히 운전을 해도 도
착하고도 남을 여유로운 시간이다.
안도하며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을 울리며 부르르, 떨린다.
멜리사였다.
의아한 듯 눈이 둥그렇게 떠졌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운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작은 휴대폰을 고쳐 잡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혹여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켜, 그녀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어서였다.
“멜리사?”
수화기 너머로 멜리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아이작을 엄습했
다. 휴대폰을 쥔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리사가 없어졌어요!]
“―!!”
“젠장….”
액정에 뜬 이름은 멜리사가 아니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본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이작은 시동을 걸면서
전화를 받았다.
[아이작, 너 어디야―?!]
“…….”
런던 동물원?
…희―생―자―?
[아이작! 네 녀석 듣고 있어?!]
윽박지르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휴대폰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운전대를 잡는다.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
하게 젖어 있었다.
***
“아이작 씨!!”
“저들이 날 가로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아요. 리사인지 확인을 하려는 것뿐인데, 아직은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
다고 하면서…!!”
“멜리사, 진정해요.”
“막 사진을 찍고,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사진이 잘 찍혔나 확인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던 아이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오늘 생일이었는데….”
“…! 생일이라니―?”
머릿속에는 리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늘어뜨리면 어깨 너머로 찰랑이지만, 늘 양 갈래로 귀엽게 묶은
금발과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아이작은 질퍽한 진흙탕에서 자맥질을 하는 사람처럼 허우적댔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늪처럼 끈적거리
며 자신의 몸뚱이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 빨리 달리려 애쓸수록 발목이 붙잡힌 것처럼 다리가 묶인다.
아이작은 겨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사건 현장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인파가 사라지자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
다. 오늘따라 빌어먹게도 하늘이 맑았다. 구름조차 볼 수 없는 푸른 하늘, 이 짙푸른 하늘에 호사스런 햇빛이 비
치어 축 늘어진 어린 시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비현실적인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이 걸려서야 가까스로 아이의 시신에 다다른 아이작은 떨리는 손가락 끝을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주춤거
리며 눈동자를 시신으로 옮겼다.
“…….”
주먹을 쥔 손이 맥없이 풀렸다. 손가락이 버들버들 떨렸다. 울음을 삼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아이작
이 입술을 움직였다. 메마른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리… 리사….”
이제 겨우 일곱 살이었다.
비록 자신의 아이는 아니지만, 사랑하는 그녀의 아이였기에 친자식처럼 여겼다. 아이는 늘 방긋방긋 웃었다.
그 웃음이 그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를 웃게 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였다.
“으읏….”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이작을 알아본 동료가 그를 일으켜 세웠지만,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
“리사일 리가 없잖아요. 잘 봐요. 여기 사진이 있는데, 리사가! 리사가 오늘은 당신에게 보여준다고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여기, 사진이, 그리고 목걸이를…. 리사가….”
머릿속이 화끈거린다.
아이작은 다시 무너졌다.
“…….”
아이작의 팔을 붙잡고 세게 흔들던 멜리사는 느리게나마 그의 표정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무엇을 쥐려는지 앞으로 뻗어서 연신 허공만 끌어 잡더니, 결국
잡히는 것이 없자 가슴의 옷자락을 쥐었다.
“리사….”
“리사…. 리사…?”
옷자락을 쥐고 흔들던 떨리는 손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멜리사는 더 참지 못하고 맨바닥
에 쓰러졌다. 오열하는 숨소리만이 손바닥을 덮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두 뺨 위로 쏟아지는 눈물을 내버
려둔 멜리사가 힘이 들어가지 않은 팔다리를 놀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어쩐 일이지?”
아이작은 태연하게 말하는 라이너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크림슨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예의도 오늘만은
모두 잊었다. 그런 것 따위 하나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운전을 해서 이곳까지 왔는지도 전혀 기
억이 나질 않는다.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리는 도무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현실과 동떨어
진 곳에서 방황만 하고 있었다.
“음?”
소매의 단추를 잠그던 라이너스가 눈썹을 힐끗 올렸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 남자에게 짙게 깔린 온화한 인상
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제… 제 아이 말입니다.”
피식 웃어넘기며, 라이너스가 반대편 손목의 단추를 잠근다. 웃음 너머에 깔린 멸시를 읽어낸 아이작은 거센
분노로 속이 뒤엉켰다.
“―!!!”
라이너스는 흔쾌히 인정을 했다. 휘청거리며 주저앉으려던 아이작은 벽을 붙잡고 겨우 버티고 섰다. 라이너스
의 가벼운 고갯짓이 이미 넝마가 된 자신의 심장을 짓이기는 듯했다. 너덜너덜해서 더 상처도 나지 않을 거라
고 여겼던 넝마쪽 같던 심장이 짓밟혀서 시커멓게 물들고 찢어져서 형체를 잃어간다. 하지만 차가운 바닥에 누
워 짙푸른 하늘을 향해 허망하게 눈을 뜨고 입술을 벌리고 있던 리사는 그 심장마저 잃었다.
“컥―.”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서 배를 움켜쥐고 꺽꺽,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아이작은 바닥을 기어서 일어
나려 했다.
“끈질기군.”
“크억―!!”
“으아아악――!!”
절규하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라이너스가 발을 떼자, 손등은 살점이 밀려 뼈까지 움푹 파여 있었다. 라이너
스는 구두 뒤축을 카펫에 문질러 피를 닦았다.
“허으…. 허으윽….”
“네 임무는 스노우를 찾는 일이지, 멋대로 인간과 연애를 하라고 보내진 않았다. 패러데이, 일족의 얼굴에 먹칠
을 할 셈인가? 넌 나를 기만했어.”
“!!”
문드러진 심장이 썩어간다. 썩은 심장 주위의 이 몸뚱이도 형체를 잃고 흉한 냄새를 풍기며 곪아가기 시작했
다. 싯누런 고름이 흐르고 물컹한 살이 뼈에서 흘러내린다. 자신은 썩어 가고 있다. 아이작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요즘 따라 이 자리를 넘보는 놈들이 많아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야. 감히 수장의 자리를 엿보고 반역을 일
으키다니. 하지만 나름 심심풀이를 하기에는 적당했어. 물론 능력을 써야 했으니 귀찮은 제약이 따라붙긴 했지
만.”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아이작을 향해 라이너스가 온유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
는 말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미소였다.
“으으으…!!”
바닥에 늘어져 있던 그림자가 위로 무섭게 솟구쳤다. 그리고 날카로운 창살이 되어 라이너스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눈앞으로 내리꽂히는 첨예한 그림자 창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라이너스는 귀찮은 듯 그저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림자 창살은 멈췄다. 아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자신의 코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창살을 피하며 허망하게 커진 눈을 한 아이작을 향해 섰다. 살점
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서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도 허공에 멈춰 있는 듯했다.
“―!”
라이너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
혀조차 단단하게 굳은 듯해서 아이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깜박여지지 않는 눈꺼풀로 라이너스를 바
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던 아이작은 그의 등 너머에 있던 시계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
“내가 널 손수 기관으로 보냈어. 서브센스를 사용하는 기관으로 말이지. 그리고 제약에 시달려 심장을 먹을 수
밖에 없다고 했잖아. 이제껏 수많은 놈들이 내 권력에 도전해도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나의 서브센
스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아? 네 녀석에게 그 생각까지 했으면 바랐건만,
괜한 기대였나?”
“―!!”
놀란 숨조차 내뱉지 못하는 아이작의 앞에서 라이너스는 목에 걸친 넥타이를 여유롭게 매고 있었다. 고아한 분
위기를 풍기는 짙은 붉은 머리칼을 지닌 이 청년은 오늘따라 중요한 손님이라도 만나는 듯 가슴과 등에 우아한
주름이 잡힌 고전적인 형태의 영국 신사복 차림이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라이너스는 설명하는 논조로 말
했다.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마치는가 싶던 그가 아이작의 명치를 걷어찼다. 내장이 뒤엉키는 통증에 시야가 확 좁아
지나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몸이 마비가 된 사람처럼 굳어 있는 자세 그대로 카펫 위로 처박힌 아이작은 라이
너스의 발길질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오로지 고통만이 생생하게 아이작에게 전해졌다.
라이너스는 사지를 가누지 못해 관절이 분리된 꼭두각시처럼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아이작을 아무렇게나
짓밟았다. 팔이 다시 걷어차여, 손가락이 뒤로 뒤집히고 덜렁거리던 살점은 떨어져나갔다.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가던 아이작은 뒤로 완전히 뒤집힌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딱딱하게 굳었다.
“…….”
“패러데이.”
“…….”
“꿀꺽…!”
“!!!”
분노와 절망으로 뒤범벅이 된 아이작의 눈동자가 푸르르 떨리며 몸부림쳤다. 사무치게 몰려오는 무력감을 견
디지 못해 그는 발악하고 절규했다. 하지만 피맺힌 고통과는 달리 주위는 적막했다. 입 밖으로는 아무 목소리
도 나오지 않았다.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이렇게나 비참한 것이었다.
라이너스와 자신과의 격차를 처절히 깨달은 아이작은 자괴감으로 가득 찼다. 뒤틀리는 온몸의 고통보다도 그
것이 더 괴로웠다.
“네놈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살아 있는 편이 네놈에겐
고통이겠지. 안 그래?”
“―!”
“스노우가 돌아왔거든. 그것도 제 발로. 참으로 그다운 등장이지 않아? 이 오랜 세월 동안 아무리 추적자를 보
내도 유유히 따돌린 그가, 하다못해 내가 과거로 손수 돌아가 어떻게든 도망치는 걸 막아 보려고 해도 기막힌
솜씨로 도망친 그가…. 마침내,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났단 말이지.”
“아참, 패러데이, 필요하다면 저기 걸린 목걸이는 가지고 가도 좋아. 기념이 될까 싶어서 가져왔는데, 조잡스러
워서 흥미가 사라졌거든.”
“우으윽….”
***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Schloss Ludwigsburg)처럼 저택의 삼면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규모의 정원은 화려하고
기하학적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패턴화된 카펫의 무늬가 떠오를 만큼, 나지막한 관목인 토파리
아가 파르테르 방식으로 열을 지어 구획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렬을 이루는 식수와 자갈길의 곳곳
에서 엄격한 균형을 흐트러뜨리며 분수나 미로가 등장했다. 이 거대한 정원은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극치로 끌
어올렸다.
신의 권능이 사라지고 왕이 신을 자처한 시대, 라이너스 클리프는 유소년기일 때부터 17 세기의 거만하고 풍족
한 기운에 흠뻑 도취되었다. 영국식 정원의 낭만적인 풍조와는 정반대의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정
원은 그 소산물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광경은 변함이 없었다. 무려 400 여 년이 지나도, 이 정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
중충한 날씨와 상관없이 물을 뿜어 대고 있는 호사스러운 분수를 보며 마틴은 눈살을 찌푸렸다.
밤의 숲에서는 헐떡거리는 짐승의 숨소리와 비명이 섞이어 들렸다. 그리고 그 비명은 어릴 적 높은 다락방에
갇혀 지낸 마틴의 귀에까지 들렸다. 처절하게 울리는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숲은, 마틴에게 있어서 언
제나 무서운 곳이었다.
“…….”
“형. 어서 와.”
“…….”
“하지만 아무리 부인해 본들 형이 조슈아 클리프라는 건 변함이 없지. 나에겐 형은 언제나 조슈아 클리프였어.”
라이너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동안 내가 얼마나 형을 보고 싶어했는데. 형은 그렇지 않았어? 도대체 그렇게 매정하게 어디를 다닌 거야?”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경우는 고통과 관련된 기억들
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기억에 따르면 라이너스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끔찍한 존재였다.
그걸 말리겠다고 뛰어간 둘째는, 저놈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다. 수장에게 반발하면 누구든지 개죽음을 당한다.
그것이 아직 수장에 오르지 않은 자라도 그 막강한 권력은 마찬가지였다. 둘째의 머리를 으스러뜨리며 녀석은
웃었다. 제 형제의 눈알이 튀어나오고 뇌가 뭉개지는데도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절했고, 자신은 이를 악물
었다.
자신을 추적한 이부(異父) 형제들의 목숨을 짓이겨서라도, 저놈의 손아귀에는 절대 잡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
다. 하지만 그 마음도 지금은 다 접었다. 머릿속에, 그리고 심장에다가 한 남자의 기억을 품고 앞으로 남은 날들
을 살 작정이었다.
“…….”
“―!”
“둘째형처럼 말이야.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한 배에서 태어났는데, 형은 스노우고, 나는 수장이고, 그리고 둘
째형은 병신이니. 쪽팔리게.”
“하지만 병신이지.”
상냥하게 웃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철썩, 소리가 나며 마틴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이를 악물고 라이너스를 노
려보자, 찢어진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뭉개며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여전하네?”
“순결을 잃었다고 벌벌 떨기를 바라는 거냐? 그러기엔 400 여 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데 얼굴 붉힐 나이는 지났잖아.”
“그래서 지금, 형이 더럽혀져 왔다고 말하는 거야?”
“…….”
“혹시 지금까지 순결이라도 지키길 바랐던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미안하게 됐어. 난 네놈의 상상처럼 순진무
구한 동정은 아니니까.”
온화하게 웃고 있던 라이너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는 마틴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당
긴 사내가 평온한 표정과는 달리 사정없이 마틴의 셔츠를 찢었다. 단추가 뜯겨나가며 셔츠의 앞섶이 흐트러졌
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마틴이 휘청거렸다. 줄곧 담담한 채, 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던 마틴이 벌어
진 석류처럼 속을 보인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감정의 틈바구니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뒤흔들고 싶어진다. 라이
너스는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속삭이듯 말한 라이너스가 마틴의 상체를 전부 분수의 안으로 처박았다. 버둥거리며 손이 물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억센 손길로 그의 바지까지 벗겨서 몸 전체를 분수 안으로 던지듯 넣었다.
첨벙, 큰 소리가 나며 다리가 떨어졌다.
“―쿨럭, 쿨럭!!”
팔을 짚고 일어서려던 마틴은 막힌 숨을 토해 내며 기침을 했다.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가서 정신이 하나도 없
었다. 일어서려고 애를 썼지만 휘청거리는 손은 허공만 짚는다. 피부가 아릴 만큼 차가운 물에 담긴 몸이 제멋
대로 부르르 떨렸다.
“커억―!!”
“…!”
따사로운 햇살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가 스쳤다. 라이너스는 늑대로 변한 마틴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걷어
찼다.
“컥―!”
숨을 터뜨리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틴이 발작성의 기침을 토해 냈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
며 풀을 그러쥔 마틴은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기침을 토해 내다가 속까지 게워냈다. 빈속이라 멀건 위액만 겨
우 올리며 마틴이 몸을 버들버들 떨었다. 구역질이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마틴은 시야가 잠시 멀어진 듯했다. 하얗게 세상이 침몰했다가 겨우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떠오른다. 그래도 정
신이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뿌옇게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스노우… 라니.”
“어라? 자신의 상태도 모르고 있었어?”
“…!”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
웨어울프와의 교합과는 달리, 타종끼리의 임신은 정신적인 교합도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났다.
멀리 가서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라는 그녀의 말까지 비웃었던 자신이 죽도록 부끄럽고 저주스럽다.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만났는데, 자신이 그의 부모를 죽였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기대된다.
우습다.
이 몸뚱이 하나를 지키겠답시고 형제를 죽이고, 사랑하는 이의 부모도 죽이고, 400 여 년의 긴 시간을 살아오며
줄곧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 수 있었던 자신이, 생명을 가질 수 있다니.
그러고서 사랑도 버리고, 운명도 버리고, 제 발로 끔찍한 놈들의 소굴로 찾아온 이 꼴이.
너무도 우습다.
“읏…!”
마틴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그러자 자신의 손을 밀어내며 배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
주 작은 몸짓이나, 분명히 와닿았다.
“―!”
“저런….”
“라, 라이너스―”
“크윽!”
몸뚱이가 물속으로 굴러 떨어졌다가 다시 떠오른다. 첨벙첨벙 물소리가 참으로 경쾌해서 마치 여름의 물놀이
를 연상시킨다고 라이너스는 생각했다. 햇빛이라도 비추면 정말로 그렇게 느껴지겠건만 날이 흐린 게 유일한
흠이다.
라이너스는 구둣발로 마틴의 배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마틴이
발버둥을 쳤으나 턱없이 나약한 힘이었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서 밀어내다가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는
지 손톱으로 할퀴고 때리고 난동을 부렸다.
라이너스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더 힘주어 배를 밟았다. 앙상한 갈빗대까지 움푹 들어갈 때까지 세게 짓밟자
마틴은 첨벙거리며 사지를 버르적거렸다. 몸이 물밑에 가라앉아 부글부글 물거품이 끓어올랐다.
하는 일마다 엄청나게 꼬여서 평소보다 몇 배로 시간이 들었던 것이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통
신호등이나 엘리베이터에 대고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화풀이를 할 대상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신
경이 거슬리지도 않지, 하나부터 열까지 온갖 무생물들이 자신의 성질을 벅벅 긁는 바람에 울컥 치솟은 분노가
분출도 되지 못하고 고스란히 쌓였다.
오늘따라 기이할 정도로 일이 많아서, 도중에 전화를 할 틈마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본 마틴의 미소가
위안이 되었다. 그 해사한 봄볕 같던 미소가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어서 울컥 짜증이 치밀 때도 상당히
도움이 됐었다. 보통 때라면 무생물이고 뭐고, 냅다 신호등을 뽑았을 텐데 아무것도 부수지 않은 건 어디까지
나 마틴의 미소가 신경안정제 같은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일마다 꼬이고 날씨도 흐렸건만, 파괴의 신도 오늘만은 그를 그냥 지나쳐 갔다. 아무것도 부수지 않았다는 생
각에 싱클레어는 착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괜히 뿌듯해졌다.
“마틴, 저 왔어요.”
싱클레어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으며 실내는 고요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마틴!”
“…….”
“―마틴!!”
“―!”
불현듯 불길한 기운이 싱클레어를 엄습했다. 평소의 생활습관으로 보면 부주의하게 집이고 가게고 문을 모조
리 열어 두고 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재킷의 안주머니를 꺼내 급히 전화를 걸려던 싱클레어는 전화보다 더 좋
은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틴은 자신의 피를 마셨다. 그와 ‘피의 계약’을 맺었으니, 자신은 마틴이 어디에 있어도 이제 그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뭐야 이게?”
“…싱클레어….”
“…?!”
파리하게 질린, 몹시도 지쳐 보이는 얼굴을 한 아이작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삭막한 눈
빛을 한 그는, 그나마 한쪽 눈은 시퍼렇게 부어서 안구가 보이지 않았다. 입술도 터져서 벌겋게 딱지가 앉아 있
었다.
“…….”
“…정체?”
“그가 네게 스노우라고 고백했나?”
“내 팔을 잘 봐.”
“나는 크림슨이야.”
“―크윽!”
“무슨 수작이지?”
“빨리 말해.”
“…스코필드 씨가 제 발로 수장에게 찾아갔다고 들었어. 그는 지금 크림슨의 수장이 있는 영토에 있어.”
매섭게 빛나는 싱클레어의 눈을 보며 아이작은 입안이 터져서 어눌하게 뭉개지는 발음으로 말을 꺼냈다.
“……웨어울프는…, 웨어울프끼리는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아. 인간과의 혼인일 경우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웨어
울프 사이에서는 자식을 기대하기 힘들지. 그나마 그레이는 제멋대로 사는 녀석들이니까 상관없지만, 크림슨
의 경우는 혈통을 중시해서 인간과의 혼인을 거부하고 크림슨의 자손번영을 제일(第一) 과제로 삼고 있어.”
“스노우는….”
“…털이 흰 웨어울프야. 하지만 단순히 털이 희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를 뜻해. 그러
니까, 크림슨과 몸을 섞으면, 대부분 순수한 크림슨들만 태어나. 그는 성별에 상관없이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을
지녔고, 번식에 강하며, 심지어 종족도 가리지 않아서…. 웨어울프 내에서는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는 비밀스
러운 존재로 취급해 왔지. 무엇보다 번식에 강하다는 특성 때문에, 혈통을 중시하는 크림슨은 그와 관계를 맺
어서 번식을 해 왔는데, 문제는 수장과 스노우 사이에서는 한 마리의 스노우만 태어나서….”
“―!!”
마틴과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싱클레어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의혹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젠장―.”
아이작은 그를 뒤따라오며 물었다. 다리가 성치 않은지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한쪽 다리를 연신 절뚝거렸
다.
“기운이라니?”
“하, 하지만 웨어울프가 아니면 입구를 찾을 수 없어―! 아무리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도, 네놈이 웨어울프가 아
닌 이상,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서 숲 속에서 헤매게 될 거라고! 크림슨의 영토에 네가 들어가려면 텔레포
트 능력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해.”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싱클레어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절룩거리느라 겨우 사내의 뒤를 따라온 아이작이
그의 곁에 섰다.
“……그건….”
아이작은 이를 악물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다. 비열하다고 천대받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라도 아이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지만, 싱클레어라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거는 아이작은 불편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
아이작은 눈을 부릅떴다. 분노로 화끈거리는 눈시울을 억지로 참느라 잔뜩 어그러진 눈으로 괴로운 목소리를
토했다.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작은 입술을 악다물고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힐끗 내려다본
싱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네놈의 성미상 그걸 알고도 여기서 노닥거릴 리는 없고. 게다가 그 꼴을 보면 그놈의 짓이라고 알자마자 놈
에게로 곧장 갔다고 생각한다만.”
“…!”
“아아…. 그래서 마틴이 그곳에 있는지 안 거군.”
“그 꼬락서니가 되긴 했지만, 어찌됐건 이 자리에 네놈이 목숨을 붙이고 멀쩡히 살아 돌아와서 내게 그 이야기
를 꺼낸다는 건, 대신 그 수장이란 작자에게 복수라도 해 주길 바란 건가?”
“―!!”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겠지. 상대가 시간을 조정하는 능력을 지녔다면 말이야. 아무리 그림자를 움직여 본들 공격이 닿으
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움직이는 힘이 상대에게 있다면 그 어떤 공격도 하나마나야. 완전히 헛수고
지.”
냉정했으나 모두 맞는 말이었다. 자신의 졸렬한 속셈이 고스란히 드러난 느낌에 아이작은 참을 수 없이 수치스
러워졌다. 하지만 리사를 위해서라면 이 수치도 모두 감당할 수 있었다.
“비겁? 어째서. 그 지경이 됐으면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행동만 두고 보
자면 이제껏 네놈이 한 짓 중에서 가장 영리했어. 울분에 차서 곧장 수장이란 놈에게 달려간 건 가장 멍청한 짓
이었고.”
“당당히 입구로 들어가서 함께 개죽음을 당하잔 말인가? 참으로 낭만적인 계획을 꿈꾸고 있군.”
“아 물론, 마틴이 거기에 없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냥 무작정 들어가서 날 향해 달려드는 크림슨들을 화려하
게 터뜨리고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날리는 가운데서 기분 좋은 한때를 만끽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틴이
없을 때의 이야기고. 마틴이 그곳에 있는 이상 소란을 떨 생각은 없어.”
“하지만―!”
“!!”
“너 이 새끼!!”
아이작은 자신에게서 차갑게 등을 돌리는 싱클레어를 다급히 막아섰다. 급히 움직이느라 다리를 접질려 앞으
로 쓰러질 뻔한 아이작은 벽을 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미믹 사건의 범인으로 널 의심하고 있어. 티시스(T-sis, telegnosis)들이 지금도 네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
고 있을 거다. 듣자하니 조만간 널 심문할 생각인 듯한데, 그게 만약 오늘이라면…! 넌 본부에 가자마자 곧바로
잡혀.”
“티시스라니, 참으로 저열한 놈들이 붙었군. 그놈들은 사생활 보호법도 모르고 사람을 관찰한단 말이지.”
천리안을 가진 서브센서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싱클레어는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그저 아까 아이작이 본성을 보일 때,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그리도 조심한 이유를 깨닫고 혼자 고개
를 끄덕였을 뿐이다.
“일단은…. 티시스의 반경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하는 편이 좋아. 그리고 그 다음에 상황을 봐 가며….”
“포기?”
“…본…부에 있다니?”
아이작의 질문을 무시한 사내는 생각에 빠졌다. 빠르게 본부로 갈 방법을 궁리하던 싱클레어는 비스듬하게 눈
을 내려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하…. 이러고 있으면 모양새가 안 좋아 보이겠군. 그렇다고 해서, 네놈이 내 상대가 될 리 없으니 얌전히 붙잡혀
있는 포즈를 취할 수도 없겠고, 흠…. 이왕이면 대놓고 나쁜 놈으로 보이는 편이 좋으니까 남은 방법은 하나뿐
인데…. 뭐 이대로 두면 나와 접촉한 너도 의심받을 테니, 마틴에 대해 알려준 보답도 할 겸, 특별히 서비스해 주
지.”
“크악―!!”
“…볼 테면 보라지.”
아이작이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싱클레어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머리통을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크으―!”
싱클레어가 한껏 입술을 올려 이죽이죽 웃는다. 어차피 기관의 놈들이 자신을 의심하는 거라면 이런 방식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더는 피할 곳이 없고, 자신은 빨리 마틴에게 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
다. 살아 있는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자, 자, 빨리 날뛰어.”
“허으――크으윽!!”
***
팔과 다리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느낌은 있었으나, 눈을 뜨고 확인한 자신의 모습은 헛웃음이 저절로
나올 만큼 가관이었다. 상반신은 앞으로 교차된 팔이 뒤로 돌려져서 고정되어 있었다. 구속복과 같은 형태이나
질감은 천차만별로 달라서, 단단하지 않지만 그 대신 탄력성이 강했다. 힘을 주자 늘어나는가 싶더니, 힘을 준
세기만큼 자신을 끌어당겨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이 이상한 구속복은 천장의 벽과 연결되어 있어서 싱클레어가 움직일 때마다 벽도 느릿하게 출렁였다.
“뭐야, 이 악취미는.”
본부의 미의식을 불평하며 싱클레어가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은 없으니 이런 식으로
묶어 둘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싱클레어의 ‘생각’에 불과했다. 이 남자를 잡아온 순간부터 기관은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다.
그의 탈출을 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되었다. 싱클레어가 입고 있는 이 구속복 또한 웨이브
능력의 사용을 막기 위한 것으로, 분자 구조를 바꾸는 트랜스와 형태 복원을 하는 리스톨의 합작품이었다. 그
들은 혹여 싱클레어가 구속복을 뚫고 이 취조실을 파괴할까 봐 싱클레어를 위한 특수 취조실을 따로 만들었다.
“좋을 대로.”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서브센스와는 달리, 사람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서브센스를 사용시에는 몇 가
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경찰이 범죄혐의자를 체포하기 전에 미란다 원칙을 읊어 주는 것처럼, 일종의 인권 보
호를 위한 절차인 것이다. 하지만 미란다 원칙이 절대적인 데 반해, 서브센스들의 이 조항은 표면적인 절차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트랜스와 리스톨의 합작품이지. 하나의 능력으론 불완전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 부족을 다른 능력이 메운
다면 서브센스는 더욱 강력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일반 요원은 자신의 능력을 쓰기만도 급급하겠지만 SS 의 경우
는 서브센스의 결합에도 능하지.”
“이럴 거라면 철마스크도 씌우지 그래?”
“하, 그건 그래.”
“어차피 버티면 요원만 괴로워지네. 뇌에 접속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 고통이 덜할 거야. 마취라
도 시켜 주고 싶네만, 그래서야 자네 뇌를 제대로 볼 수 없거든.”
서류가방에서 꺼낸 라텍스 장갑을 손에 끼우며 제프리가 말했다. 불투명한 장갑을 당겼다 놓자, 탁, 소리가 나
며 손가락에 감긴다.
“거짓말 탐지기 짓이라도 할 셈인가? 뇌에 접속하는 방식은 클리너 팀에 있는 딜리터나 스위처와 비슷해 보이
는데.”
“기억을 제거하는 딜리터나 기억을 조작하는 스위처는 목표를 뒤쫓지. 미로에 숨겨진 치즈를 따라 달리는 쥐
처럼. 하지만 그에 비해 난, 뇌 속을 자유로이 헤집을 수 있다. 나는 ‘리더’다.”
“아아….”
취조실에 와서도 저렇게 태평스러운 요원은 거의 없었다. 개중에 태연하게 보이는 몇몇도 한껏 담담한 척을 하
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유약한 속을 감추기 위해 애써 의연한 척을 하는 것뿐이었다. 연기는 곧 들통이 나기 마
련이다. 제아무리 감정을 속이는 데 능해도, 조사관은 그보다 한 수 위라고 제프리는 자부했다.
실력만으로 보자면 이 남자도 충분히 조사관으로 권유를 받았을 것이다. 다만 ‘인성’ 부분이 문제가 되어 늘 리
스트에만 올라와 있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본부의 골칫덩이가 되어 있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혹은.
[성격이 워낙…]
저 남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실제로 감상할 기회를 가지진 못했지만. 소문이 무엇이든, 제프리는 자
신의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을 수 없었다. 소문은 종종 부풀려지기 마련이 아닌가.
“―!”
그러니 훌륭한 ‘리더’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문을 얼마나 잘 열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프리 워즈워스는 단언컨대, 리더들 중에서도 가장 출중하다고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혹
자는 그를 두고, 조사관 SS 가 되지 않았더라면 천재적인 ‘자물쇠 따기’로 알려졌을지도 모른다며 우스갯소리
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농담으로 한 말인지 모르나, 제프리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사람마다 문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일반적인 도어형이나 양문형을 제외하고도, 위로 열어야 하는 셔터형, 옆으로 여는 미닫이형 등등이 있다) 모
두 공통적으로 열쇠구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작은 열쇠 구멍에, 가늘게 구부러진 납작한 쇠를 넣듯 자신의 기
운을 불어넣어 이리저리 신중하게 돌린다. 달칵, 하고 홈이 맞춰지며 마침내 문이 열리는 순간의 쾌감은 사정
을 할 때보다도 더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
제프리는 강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리더로서의 자질이 시험당하는 이 모욕적인 순간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그는 문으로 보이는 왕왕한 망망대해 같은 흰색 벽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으으윽…!”
싱클레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으나 제프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 거세게 기운을 불어넣어 사내의 뇌
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대의 인격 따위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 충격으로 정신을 놓아도 자신
은 싱클레어의 기억에 접속해서 미믹에게 무슨 일을 가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크으윽―!”
“크아아아악―――!!”
뇌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눈앞의 사물조차 제멋대로 엉켰다. 색색의 선명한 색이 번쩍거리며
지나가고 시뻘건 이미지가 온통 사방을 채우던 그때, 싱클레어는 울컥, 피를 토해 냈다.
“―크헉!”
“하아….”
“후….”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와 더불어 오늘도 목구멍에 장갑이 걸리지 않고 훌륭하게 삼켰다는 만족이 섞인 한
숨을 내쉰다.
“여기서 더 버틴다면 자네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없어. 이대로라면 뇌가 터질지도 몰라. 인내력 하나는 인정해 주
겠다만, 살고 싶다면 좀 더 현명한 방법을 택하는 쪽이 좋을 걸. 설마하니 뇌가 터져서 죽는 게 소원일 리는 없
고 말이지.”
제프리는 서류 가방에서 새로운 라텍스 장갑을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버릇처럼 장갑의 소매를 늘려 탁, 소리
가 나게 놓자 안에 발린 옥수수 분말이 뿌옇게 공기를 흐렸다.
“하…. 마지막이라면….”
“…?”
“보스나 불러 줘.”
“…보스?”
“…….”
역시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수많은 요원들을 만나 보았지만 기억으로 통하는 문이 금속성 질감의 어마어마한
흰 벽으로 된 자는 저 다니엘 싱클레어가 처음이었다. 저 자에게는 그런 문을 만들어서까지 보호하고 싶은 기
억이 있는 것이다.
기억이든, 존재든.
“보스라…. 그가 널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이라도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은 찾더군.”
“…구원?”
고개를 숙이고서, 뚝뚝, 핏물을 떨어뜨리고 있던 싱클레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더니 무엇을 생각
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본부에서 이 남자의 서브센스에 무슨 기대를 가지고 있었건 다 쓸데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남자는
미쳤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다.
***
취조실로 들어온 알버트는, 싱클레어를 보자마자 우뚝 멈췄다. 싱클레어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의심이 먼저 앞서 나갔던 기관 S 의 보스는 이 참상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지나친 의심을 자책했다. 언젠가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러기 이전에 싱클레어도 자신의 부하였다.
“이봐, 싱클레어?”
알버트는 싱클레어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푹 숙이고 미동도 없던 사내가 비척비
척 일어났다. 시커먼 구속복에 몸이 묶여 고작 얼굴을 드는 게 움직임의 전부였다. 회반죽이라도 펴 바른 것처
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평소의 수려한 모습을 다 잃고 있었다.
“오셨군요.”
“…끔찍한 몰골이군.”
“하아…. SS 에서 제 팔이 위험하다고 여긴 모양이죠. 하긴 팔을 휘둘러서 웨이브를 쓰니 말입니다.”
“아아, 피….”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긴 했는지 가물가물하게 흐려진 눈이 알버트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자꾸만 깜박깜
박 꺼진다.
“그래요. 제가 피를 좀 많이 토했죠.”
“보시다시피….”
“…고집이라니요?”
“그랬죠. 저도 압니다.”
느릿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던 그가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알버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불규칙
적인 굵기의 선들이 나열된 문양은 흡사 바코드 모양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저 문양을 보고 물건의 가격이라
도 맞추는 능력이라도 있나 싶었다.
“하하….”
웨이브를 사용할 때는 음파를 조정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여야 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과는 달리 손가락으
로 건반을 두드리거나 현을 튕겨 음을 내는 것처럼 꽤나 우아하게 흐느적거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버트의 이마에 나타난 저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싱클레어는 일전에 확인한 바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싱클
레어는 저 능력을 사용하면 교통체증에 걸리지 않거나 기름 값을 절약할 수 있어서 편하겠단 정도로만 생각했
었다.
“…….”
“…?”
“…….”
“…!!”
“물론 동정도 전혀 가지 않지만, 그의 사고체계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사과라도 한마디 건네는 편이 좋겠군
요.”
“싱…클레어?”
“죄송합니다―.”
“―!!”
섬뜩하게 몰려오는 기운을 이기지 못해 알버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을 응
시하는 싱클레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려다만 자세로 알버트는 싱클레어의 눈을 정신없
이 바라보았다.
“…….”
머릿속을 신선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상쾌해진다.
“…바람….”
그것이 알버트 테일러의 마지막 느낌이었다. 고통도 회한도 없이, 지난 삶이 낱낱이 머릿속을 스치는 일도 없
이, 그는 최후의 한마디를 내뱉던 그 상태로 몸이 굳었다.
무게중심을 잃으며 뒤로 기우뚱 기울더니, 구부린 무릎 부위가 절단되는 것처럼 뒤로 밀려서 몸뚱이 전체가 의
자 위로 떨어진다. 툭, 부딪치는 소리는 인간의 몸이 의자에 닿을 때와는 달랐다. 소리를 경계로, 의자의 모서리
에 닿은 몸이 갈라지며 고운 분말로 으스러졌다. 아주 미세한 분말이 수북이 의자 주위로 쌓였다.
“쿨럭―.”
“하아…. 빌어먹을….”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피로 더러워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리더가 마구 들쑤시고 헤집은 뇌는 끔찍
한 감각을 선사했다. 거기에 더해 제약으로 인한 통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망치로 쿵쿵 두드리던 느낌이 점차
세밀하고 강도 높은 통증으로 변해서 급기야는 전동드릴이 관자놀이에 구멍을 뚫는 듯하다.
“으윽….”
“아직은…. 안 돼.”
“…마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떠난 연인을 그리며 아픈 가슴을 쥐고 청승을 부릴 타입은 아니다. 자신의 순정은 끈질기고 잔인했다.
너무 집착해서 마틴을 해칠까 걱정이 되긴 했어도, 이런 일로 감정이 상하거나 포기할 위인은 못 되는 것이다.
나지막이 뇌까리며 싱클레어가 비죽비죽 웃었다. 사내는 고통을 짓밟고서 의식을 집중하려 애썼다. 가느스름
하게 눈을 좁히고 어딘가에 있을 마틴의 흔적을 쫓았다. 그는 몇 차례 피를 더 토했다. 피가 입술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전에 없던 끔찍한 몰골을 하고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널브러진 정신을 긁어모아 파멸 직전으로
광분하는 고통을 억누르고서, 끈질기게 자신의 연인을 찾아 헤맸다.
흡사 방황하는 영혼처럼 마틴의 기척을 쫓아 사방으로 고개를 들이밀던 싱클레어는 마침내 연인의 기운을 읽
을 수 있었다. 그곳은 차가운 돌바닥이었고,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고독한 허공이었다. 첨예한 칼날이 되
어 들쑤시는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며 그는 피에 젖은 입술을 벌려 마틴과 자신의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에
대해 깊게 찬탄했다.
“드…디…어….”
그르륵, 피 끓는 숨을 들이쉰 싱클레어는 죽음의 끝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Ⅸ. Slow March
몸안으로 따스한 느낌이 퍼졌다. 싱클레어는 햇살이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낮에도 신의 손길
이 미치지 않는 어둑어둑한 런던의 뒷골목으로 다니던 자신이 언제부터 빛을 이렇게 편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아….”
“…마틴….”
마틴의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려던 싱클레어는 입술에 닿는 감촉에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느슨하게
늘어졌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놀란 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
마틴이 있는 곳으로 넘어오자마자 극심한 통증으로 잠시 의식을 놓은 모양이었다. 몸속으로 부드럽게 퍼져가
는 따스한 무엇은 바로 자신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왔던 마틴의 피였다.
“―마틴, 다시는 이러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
물어뜯어서 너덜너덜해진 손목은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틴의 말대로 스스로 남긴 상처는 확실히 치
유가 빨랐다.
“…….”
싱클레어는 마틴의 손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마틴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마른 손목을 만지고, 또 매만지던
사내는 그제야 무언가 꺼림칙한 기운을 느꼈다.
“…마틴?”
“마틴…!”
이름을 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지만, 그는 싱클레어를 바라보지 않았다.
허공으로 고정된 검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살짝 벌린 입술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서, 위도 아래도 아닌 곳만 보며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이다.
“마틴? 마틴!”
자신을 보도록 고개를 돌려도 초점이 맞지 않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싱클레어는 마틴의 어깨를 붙잡고 가
볍게 흔들었다. 마른 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이리저리 머리가 풀썩풀썩 꺾였
다.
“왜… 왜 이러십니까?”
떨리는 손가락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겼다. 마틴의 뺨을 감싸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불러 보아도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싱클레어를 바라보지 않았다. 벌려진 입술로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 마… 마틴!!”
“도대체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제가… 제가 많이 늦은 겁니까?”
“…….”
“제길…!”
대답이 없는 그에게 질문하기를 관둔 싱클레어는 마틴의 손목을 잡은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벽과 바닥이 돌로
된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다. 어른 손바닥 정도 크기의 작은 창문 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숲이 보였다. 그에게 일
어난 일을 알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였다.
“일단은 당신부터….”
멀찍이 돌바닥을 걸어오는 소리에 싱클레어가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점점 이곳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계하
는 눈초리로 문을 바라보고 있자, 두터운 나무문이 통, 조심스럽게 울린다. 그리고 뒤이어 문을 두드린다.
[도련님, 유모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저녁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도련님이 좋
아하는 음식으로만 가져왔어요. 아…. 그러고 보니 어… 어릴 때 좋아하셨던 음식이었지요. 지금도 입에 맞으실
지 모르지만, 아유, 이 유모가 그만 마음이 앞서서 여쭙지도 않고….]
[……그러면 문을 열겠습니다.]
열쇠를 꽂고 주렁주렁 달린 자물쇠를 여는지 한참을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다락방의 문이 열렸다.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마틴을 본 바바라 로제티는 가지고 온 저녁 식사를 얼른 내려두고는 그에게 다가갔
다.
바바라는 마틴을 침대에 눕히며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며 바바라는 이마를 찌푸
렸다.
누구보다 마음씨가 곱고, 자신에게도 언제나 친절했던 첫째 도련님은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려 자신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헝클어진 시트를 주워서 침대를 향해 돌아선 바바라는 그새 발딱 일어나 웅크리고 앉은 마틴을 발견하고는 콧
날이 시큰해졌다. 울음을 참느라 잔뜩 멍멍해진 목소리로 바바라가 말했다.
“…….”
자신의 배에 소중한 것이라도 품은 듯 보듬는 마틴의 손을 붙잡자 그가 홱 뿌리친다. 새치름한 눈매로 쏘아보
며 마틴은 다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수장님은 너무도 하지, 다른 새끼를 품었다고 확 잡아떼 버리시고…. 뱃속에 이미 있는 새끼들이 뭔 죄라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린 바바라는 황급히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
“…….”
또다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마틴을 향해, 바바라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정신이 돌아오지 마세요. 그 몹쓸 짓을 말짱한 정신으로 당하느니, 차라리…. 차라리 훨훨 날아가서
좋은 꿈만 꾸고 계세요. 도련님 이 곱게 뱃속에 품고 왔던 아이들과 함께 뛰노는 꿈이라도 꾸세요. 모르긴 몰라
도, 도련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였지요? 그렇지요? 너무너무 좋아해서 마음을 허락한 거지요?”
“…!!”
“―!! 도, 도련님!”
“아이고….”
바바라는 입술을 버르르 떨면서 눈물을 연신 닦았다. 자신의 눈물이 떨어진 마틴의 발등을 치맛자락으로 훔치
며 바바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볼썽사납게 자꾸만 펑펑 눈물이 쏟아져서 그녀
는 쫓기듯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그 슬픔이 무언지 지금으로서는 이해를 못하는 마틴은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자신의 배로 내렸다.
얄팍한 뱃가죽이 들러붙은 마른 배를 문지르며, 그가 슬며시 웃었다. 벌린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는지 연신
우물쭈물 달싹거린다.
“…마틴….”
“…….”
“정말입니까?”
“으응…?”
“그게…. 정말입니까?”
“왜 울어. 울지 마.”
마틴의 무릎을 감싸듯 붙잡았다. 간절하게 호소해 보아도, 마틴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자꾸만 웃는다. 웃음소리가 마른 공기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사내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섞였다. 말갛게 웃으며 눈동자를 굴리던 마틴이 툭툭 떨어지는 물기를 쫓아 손을 움직였다.
“…예쁘다….”
손바닥에 찰박찰박 떨어지는 눈물을 받으며 마틴이 숨죽여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입 밖으
로 꺼내자마자 사박사박 흩어졌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진 싱클레어가 자신의 눈물이 고인 손을 움켜쥐고 오
열했다.
“…응…?”
“…제가…. 당신에게….”
싱클레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의 추악한 욕심이 마틴을 망가뜨렸다. 자신이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내
몰았다. 그러고서 사랑을 말했다. 이 여린 사람을 두고서 온갖 극악무도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으면서, 사랑
을 찬미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광란에 도취되어 한 치 앞도 못 보고 날뛰는 미치광이처럼 그의 심
장을 헤집고 상처를 내고 갈기갈기 찢었는데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줄곧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가 버득버득 갈리고 심장이 찢어질듯 사무친다. 슬픔에 슬픔이 겹겹이 쌓여 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피가 나
도록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고 버티려 해도 소용이 없다. 무너지기만 할 뿐이다. 분노로 거침없이 들끓다가 깊
은 비애에 잠긴 마음은 혼돈에 휩쓸려 들어갔다. 분노는 모조리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마틴을 잃었다.
싱클레어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몸이 떨렸다. 남자는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아이처럼 발악했다. 마틴의 무
릎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몸에 매달려 미어지는 심장을 쥐어짜내며 눈물을 쏟아냈다. 입을 벌려 거친 숨을 토해
내다가 그는 다시 절규했다. 피맺힌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오열하며 몸부림쳐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고통에 몸서리쳤으나 결코 전해지지 않았
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했다. 결코 건널 수 없는 강.
“…하아….”
맥이 풀려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싱클레어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마틴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흘린 눈물로 마
틴의 옷자락은 축축해져 있었다. 사내는 아랑곳 않고 그곳에 얼굴을 비볐다.
싱클레어를 이루는 절대적이고 견고한 팬텀으로서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갈라지며 파탄이 나 버렸다. 사내에
게 남은 것은 이제, 그의 애정에 제대로 답변조차 하지 못하는 마틴의 몸뚱이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돌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은 싱클레어는 마틴의 마른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고, 현실을 회피하듯 그곳에 얼굴을 파
묻었다.
사내는 응석이라도 부르듯 중얼거리며 마틴의 몸을 더듬더듬 만졌다. 앙상한 무릎이 뺨에 닿아서 싱클레어는
헛헛한 심장이 다시 미어졌다. 고개를 든 싱클레어는 마틴의 동그란 무릎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싱클레어의 머리를 마틴은 무신경한 손길로 꾹꾹 민다.
“…마틴?!”
“배고파. 나 배고파.”
“하…. 마틴….”
“배고파.”
배가 몹시도 고프다고 말하며 그가 방싯 웃었다. 좀처럼 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싱클레어는 그 미소에 반
사적으로 움직였다.
“이런, 아무리 이곳에 있다지만 인간의 모습일 때는 식사 예절을 갖추셔야 합니다. 자, 제가 도와 드릴게요.”
크게 입을 벌린 마틴이 덥석 물었다.
“맛있습니까?”
“응.”
“응.”
“자, 이번에는….”
어서 다음 음식을 달라고 입을 뻐끔거리는 그에게 익힌 야채를 내밀어 본다. 그러자 마틴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 좀 더 내밀자 눈썹은 험악하게 되똑 기운다. 바로 여기서 ‘입 짧은 도련님’이 탄생한 모양이다. 그렇게
따지면 유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야채도 드셔야죠.”
타이르는 어조로 말해 보지만 입을 꾹 다문 마틴이 격렬하게 거부한다. 이거 참, 난감하다며 혼잣말하던 싱클
레어가 야채를 빼고 고기를 준다.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마틴이 얼른 받아먹었다. 그 와중에 좀 더 크게 잘라 달라
고 요구하는 것도 있지 않는다.
“크게, 크게.”
큼지막하게 잘라서 내밀자 마틴이 웃는다. 오늘따라 가슴 설레게 왜 그렇게 자주 웃느냐고 볼멘소리로 불평을
해 보지만 마틴은 대답도 없이 고기만 날름 채갔다. 아픈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싱
클레어는 생각했다.
“많이 드세요.”
“전부 다 먹을 거야.”
“―!!”
“마…. 마틴?”
“몰라.”
그를 붙잡고 말을 걸어 보지만 마틴은 귀찮아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사내를 밀어내 버린다. 딱
딱하게 굳어 있는 싱클레어의 앞에 서 마틴은 다시 입을 벌렸다. 싱클레어의 손이 움직이지 않자 마틴의 고개
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응?”
“…….”
싱클레어가 씁쓸한 얼굴을 하며 마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고, 목에 끼워둔 냅킨을 고쳐 줄 때였다. 흰 목덜
미에 못 보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원체 상처가 빨리 사라지는 몸이니 어지간한 일로는 몸에 흔적이
남는 일이 없었다.
“―!!”
마틴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아래위로 불안하게 떨린다. 눈동자에서
다시 초점이 사라졌다.
“…마틴?”
“……안 돼. 안 돼.”
“마틴…!”
“으으….”
“으아아――아아아――아악!!”
“마틴!! 정신 차려요!”
“으아아아―― 아아악!!”
“컥, 컥!”
괴로운 기침소리가 이어졌다. 이제는 토하는 것마저 본인의 원대로 되지 않는지 마틴은 불편한 속을 안고 힘겹
게 끅끅거렸다. 손톱을 세워 배를 할퀴는 것인지 가슴을 할퀴는 것인지 모를 동작으로 스스로의 몸을 쥐어뜯는
다. 손끝에서 피가 맺혔다. 싱클레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으으…. 으…으.”
***
바바라 로제티는 굳게 걸어 잠긴 문 앞에 서서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성에서 제일 높은 이 다락방은 첫째 도련
님이 어릴 때부터 줄곧 갇혀 지내던 곳이었다. 스노우로 태어난 그는 2 차 성징이 나타날 때까지, ‘보호’를 빌미
로 이곳에서 감금을 당했다. 일족의 눈에 공개되는 날까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갇혀서 바깥세상은 고작 손
바닥 크기의 뻥 뚫린 구멍으로만 접한 채, 땅 대신 돌바닥을 밟으며 지내 왔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라고 핑계를 대고, 훌쩍거리는 코는 감기가 걸려서라고 변명하기 일
쑤였다. 그러면 이 착한 도련님은 자신의 간식을 내밀며 이 한낱 보잘것없는 유모를 걱정해서 더 눈물이 나게
했다.
모진 운명을 안고 태어났음에도, 얼굴에는 항상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드물게 쓸쓸한 얼굴을 할 때는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없다고 작게 투정을 부리거나,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하고 동경만 해 온 바깥세상을 꿈꿀 때
였다. 그마저도 문 밖에까지 살짝 발만 내밀어보면 안 되겠냐는 말에 다락방 앞의 복도까지 나오게 했다가 마
침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전대 수장님께 자신이 혼이 난 다음부터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행복을 알아야 할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먼저 쓸쓸함을 익혔다. 그러고서도 어찌나 꿋꿋한지, 자신은 첫째 도
련님이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천진난만한 미소가 몹시도 헛헛하게 바뀌어 갈지라도, 차라리 웃을
지언정 눈물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바라는 그래서 이 첫째 도련님이 누구보다도 강하고 의젓한 줄로만 알았다. 도련님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세상에서 도련님만큼 강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여기저기 떠들어 대고 싶은 걸 참느라 입이 간질간질 하
기도 했었다.
“에구….”
잠시 옛 생각에 잠겼던 바바라는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시간이 주어지면 또 이렇게 청승을
부린다. 저기 있는 도련님이 누구보다 괴로울 텐데, 자신이 이렇게 처량하게 훌쩍거리고 있어서는 안 됐다. 겨
우 결심을 굳힌 바바라는 애끓는 마음을 삼키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뭉치를 꺼냈다. 무거운 마음이 모조리
손에 옮겨갔는지 열쇠 꾸러미를 들어올리는 손은 몹시도 힘겨웠다. 서서히 시간은 자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단걸음에 달려가서 말을 걸어 보나 가뭇한 눈동자는 다시 초점이 맞지 않아서 허공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바바라는 맥이 탁, 풀린 사람처럼 털썩 팔을 늘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자꾸만 잊는다.
“아이고…. 도련님….”
바바라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도 막상 마틴의 앞에서는 혼쭐이 나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자꾸만 정신을 놓고 만다.
“……저는 말이죠. 도련님을 처음 뵈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늑대가 있을까 생각했답니다.”
“…….”
“도련님은 아주 하얗고 작고, 그리고 보들보들했어요. 그래서 인간인 모습은 어떨까 늘 궁금했지요. 너무 생각
을 해서 어느 날은 꿈에 나오기까지 했다니까요. 제 꿈에 나온 도련님은 천사처럼 날개를 달고 있지 뭡니까. 저
바바라는 잠에서 깨고도 한동안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정신이 몽롱했답니다.”
그들은 이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한 계단씩, 그리고 다시 한 계단
씩 밟아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도련님을 깨우러 가 보니까, 정말로 도련님이 인간으로 변해있지 뭡니까. 하얀 시트 속에
서 얼굴을 쏙 내미는데, 그 가뭇한 눈동자며 발그스레한 볼이 어찌나 귀여운지….”
“…….”
“저 바바라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지 뭡니까. 그러자 도련님이 걸어와서 작은 손으로 제
눈물을 닦아 주셨어요.”
호호호, 웃던 바바라는 자꾸만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흰 앞
치마에 남겨진 얼룩이 어둠 탓에 검게 보였다.
“…….”
“아참, 이 유모가 솜씨를 발휘해서 케이크를 구워서 가져온 날이 있었죠. 어찌나 맛있게 잡수시던지. 제가 당근
케이크라고 말하니까 포크를 딱 떨어뜨리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도련님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
“당근이라고 말 안 해 줬다고 삐지셨잖아요. 근데 솔직히 말해 보세요. 맛있으셨죠?”
“…….”
다시, 호호, 웃던 바바라가 정신없이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코를 훌쩍거리며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째서일까요. 그렇게 오래됐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이 다 나네요. 도련님도 그렇죠?”
“…….”
“…….”
“좋은 사람 만나셨어요…?”
“…….”
“도련님은…. 지금 무슨 꿈을 꾸시려나요.”
“…….”
“…….”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지 마세요. 수장님의 아이를 낳고, 술과 약에 흥청망청 취해서 떼로 몰려드는 늑대들에
게 당하고…. 그래서 누군지도 모를 아이를 낳고…. 다시 또 그렇게 유린당하고… 아이를 낳고…. 평생 그렇게밖
에 살 수 없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이 현실은 잊어버리세요. 영영 돌아오지 마세요.”
버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바바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애끓는 가슴을 끌어안고 버티지
만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눈물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
정확히 자정이 되어서 라이너스 클리프는 돌아왔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끄르는 남자는 커다란 소파의 끝부분
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마틴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
마틴은 대답이 없었다. 공허한 눈동자는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바로 옆 벽난로에서 날름날름 타오르는 불꽃이
그 검은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곧 죽어도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독살스런 눈빛을 하던 그였으나, 예전의 모
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숨을 쉬고 심장은 뛰고 있으나 그 너머에 있는 영혼이 잿더미만 남은 것처럼 완전히 죽
어 버렸다. 느슨하게 푼 넥타이를 목에 걸친 채, 라이너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재미없군.”
자체적인 치유력을 지닌 스노우이니 어지간한 상처는 말끔히 나았다. 그리고 그 특성이 있으니 발가벗겨 산을
도망가게 만들거나 밤새도록 윤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검은 동공은 벌겋게 달궈진 쇠막대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눈앞에 대고 흔들어도 초점이 잡히지 않는
다. 공허한 눈동자를 지질 듯 가까이 부지깽이를 들이밀자 뜨거운 열기에 속눈썹이 파스스,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공포도 슬픔도 담기지 않은 허무한 눈동자가 느릿하게 껌벅, 감았다 떠진다.
“오늘 급히 친족회를 소집했지. 영감들이 형이 왔다는 소식에 아주 기뻐서 게거품을 내뿜더군. ‘축제’가 언젠지
묻기 바빠, 아주.”
“축제 말이야. 축제. 친족회의 위원들은 지겨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스노우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격상시
키기 급급했지만, 실상은 형의 구멍에다가 싸고 싶어서 눈을 벌겋게 뜬 노인네들에 불과하잖아. 일족을 지탱할
위대한 모친이자 영광된 임무를 맡은 신성한 육체라니, 참으로 웃겼어. 형은 그냥 크림슨의 성욕처리 도구야.
더불어 정액을 애새끼로 바꿔 주는 적당히 편리한 슬롯머신쯤일까.”
잠깐 그 장면을 생각하던 라이너스가 피식 웃고 만다. 오랫동안 계속된 새로운 스노우의 부재는 크림슨들의 욕
망을 더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했다. 그들의 거칠게 내쉬는 숨과 번들거리는 두 눈은 온갖 추잡한 욕망으로 가
득 차서 라이너스의 흥미진진한 관찰거리가 되었다.
축제는 느슨해져 가는 일족의 결속을 더 탄탄하게 만든다. 공동의 비밀을 공유하고, 공동의 의식을 통해서 크
림슨의 결속력은 더 단단하고 견고해진다. 결함이 있었던 자신의 권력도 이제 더할 나위 없이 굳건해질 것이
다. 광기를 풀어 주고 힘을 모으기 위해, 적당한 폭력과 성적 유희를 제공한다. 집단광기로 물든 저들이 눈을 벌
겋게 치떠, 몇 달에 한 번 있는 축제의 나날을 기다리며 자신을 숭배하기 시작하리라. 전대의 수장도, 그리고 그
전대도.
“옛날처럼 발가벗긴 스노우를 어두컴컴한 산에다가 풀어 놓고, 그걸 크림슨이 쫓아서 집단으로 쑤시는 건 너
무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야만적이기만 하고 전혀 아름답지 못해. 그래서 말인데, 내가 형만을 위해 특별
히 새로운 스타일의 축제를 만들까 해.”
맞붙인 손가락 끝에 힘을 줘 밀어내면서, 그 사이의 공간으로 뜨거운 숨을 내쉬는 라이너스는 잠시, 고개를 숙
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도취된 듯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
“아아….”
“…….”
웅변가가 되기라도 한 듯, 마틴이 앉아 있는 소파의 주위를 돌며 열변을 토하던 라이너스는 마틴의 어깨를 잡
고 귓가에 속삭였다.
“기대해도 좋아.”
“…….”
“…?”
마틴을 힐끗 곁눈질로 보는 라이너스의 눈꺼풀이 경련하며 떨렸다. 사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가
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에서 물러나 자신이 내팽개친 부지깽이를 다시 들었다.
“―너는 누구냐.”
갑자기 마틴의 얼굴을 이루던 피부 가죽이 일그러지며 변형된다. 그리고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골격이 뒤틀리고 마른 어깨가 불쑥 늘어나며, 몸뚱이를 이루는 가죽과 뼈가 완전히 뒤바뀌어 검던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출렁거리며 늘어지고 초점이 맞지 않던 검은 눈동자도 은빛으로 발광했다.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어떻게 여길?”
“어떻게 알았지?”
싱클레어가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의 허벅지에 꽂힌 삐죽한 쇠막대를 뽑아서 집어던졌다. 타들어가는 것 같은
허벅지를 움켜쥐고서 싱클레어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가, 라이너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싱클레어는 뺨 깊숙이 새겨지도록
입술을 올렸다.
“하, 친형이라니.”
“뭐라고? 연인?”
각자 다른 방향으로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서 한숨을 내쉬던 그들은, 순식간에 돌변하여 서로에게 달려들었
다. 갈고리 모양의 시커먼 발톱이 튀어나온 손이 싱클레어의 얼굴을 향했다. 하지만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그
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크윽―.”
“윽―.”
신음을 삼킨 싱클레어가 바닥을 박찼다. 높이 날아오르더니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라이너스의
목을 잡고 그대로 밀어붙인다. 거세게 침대 기둥에 부딪치자, 단단한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기둥이 쩍 갈라지며
기우뚱 기울었다. 싱클레어는 목을 조른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두 남자는 뒤엉켜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크으으―.”
그 순간―
목이 졸렸던 라이너스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리더니 순식간에 웨어울프로 형체를 바꿨다. 싱클레어가 물러
날 새도 없이 크게 벌린 주둥이가 사내의 팔을 물었다.
“으윽―!
“크아악!”
싱클레어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휘청거리며 무너졌다. 삽시간에 엄청난 양의 피가 솟구쳐 카펫을 시뻘겋
게 물들였다.
“커흑…!”
“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이너스는 찢겨나간 옷 대신, 침실 한쪽에 걸어 둔 가운을 걸쳤다. 이런 불편한 짓이
싫어서 늑대로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봐, 정신 차려.”
“…크윽….”
“죽어가는 마당에 참으로 여유롭군. 뭐…. 어차피 네놈이 안다고 해서 상관은 없지만. 형의 몸에서는 가까이 다
가가면 희미하지만 달짝지근한 체취가 나지.”
“희미? 하…. 웨어울프는 후각이 민감하다더니, 다 글러먹었군. 집 전체를 가득 메워서 정신을 쏙 빼놓는 그 달
달한 냄새가 어째서 희미하게 느껴져?”
“…!”
“그런 꼴이 돼서 잘도 떠드는군.”
“하하….”
녀석이 방심하는 순간, 자신의 승리를 명백히 인식하고 도취되어 있는 순간을 노려 정확히 눈을 마주보아야 했
다. 자신은 이 역겨운 놈의 능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를 잔인하게 죽이고도 싶었다. 단순히 능력을 고통스럽
게 빼앗는 것만으로는 이 불쾌한 심정이 절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잔인하게 죽이고, 능력을 빼앗기 위한 새로
운 시도는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아….”
라이너스는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대수롭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시간의 무게는 성큼 자신을 짓눌러 혀뿌리
까지 굳힌다.
“…….”
움직이지 못하는 싱클레어를 내버려두고 일어난 라이너스는 벽난로 위에 장식된 칼을 가지고 왔다. 장식용이
라고는 하나 때때로 날을 다듬는지, 칼날은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번뜩이는 칼날을 싱클레어의 뺨에 미끄러뜨
리며 라이너스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 읏…!”
“…….”
“이게…. 무슨…!”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저릿저릿한 전류가 머릿속을 겅중거리는가 싶더니 광인처럼 날뛰며 사방으로 퍼덕거렸
다. 손톱을 세워 뇌를 긁는 듯도 하고, 뾰족한 침으로 사정없이 찌르는 느낌도 든다. 끔찍한 두통에 이마를 부여
잡고 고개를 숙인 라이너스가 뻐드득 이를 갈며 버티려 했으나 그것은 쉽사리 사라지는 통증이 아니었다. 살갗
을 벗겨내고 살점을 뼈에서 발라내는 것처럼 적나라한 아픔이 머리를 타고 몸속으로 내려왔다.
“크으윽―!! 제, 제길!”
“크헉!”
거칠게 신음을 토하며 라이너스가 등을 웅크렸다. 숨이 막혔는지 흰자위의 핏줄이 터져 라이너스의 홍채만큼
이나 붉어졌다. 라이너스는 고개를 쳐들며 악을 썼다.
“아아악!! 으아아――아악!!”
내장이 파열되는 고통에 배를 쥐어뜯자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잊어 보려 한 행동이지만 결
단코 전신을 쥐어짜내는 통증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구잡이로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헐떡거리던 라이너스는
움직이지 못하는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악을 써 댔다.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이 높이 들리더니―
“죽어!! 이 개자식아!!”
“―”
허공을 매섭게 가르며 싱클레어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울컥, 솟구치는 피가 싱클레어의 목구멍을 막는다.
라이너스는 온갖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언젠가 아이작이 그랬던 것처럼 카펫의 양털을 모조리 잡
아 뜯으며 버둥거렸다. 얼굴은 고통으로 험악하게 일그러져서 따사로운 성인의 이미지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
다.
[하나의 능력으론 불완전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 부족을 다른 능력이 메운다면 서브센스는 더욱 강력하게 사
용될 수 있다.]
SS 요원에게서 들었던 그 말을 힌트로, 싱클레어는 자신의 테이커 능력과 웨이브 능력을 합쳐서 사용하는 방법
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 가지 능력밖에는 가지지 못하는 다른 능력자들과는 달리, 타인에게 빼앗은 여러 능력
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싱클레어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눈을 뜨자 어두운 밤이었다.
“허윽…. 윽….”
“으….”
“!!”
기억은 분수대에서 분질러진 채,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날개가 부러진 백조처럼 허우적거렸다. 마틴은 혼란
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인간보다 어둠 속을 능히 보는 눈이 이곳이
어디인지 상기시켜 주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어…. 어째서….”
허망한 말을 꺼내 놓고 욕조 밖으로 나온 마틴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 싱…클레어…!”
그를 보았다.
“…읏―.”
울컥 치미는 아픔을 삼키며 마틴은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다. 먼발치에 내팽개쳐져 있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
었다. 자신을 욕조에 내려두는 싱클레어의 모습이었다. 그 남자가 수장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싱클레어!”
아버지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었다. 유모로부터 막냇동생이 새로운 수장 자리에 오른다고 전해 듣게 되었다.
태어나자 곧바로 다락방에 갇혀 지내야 했던 자신이었기에, 그동안 자주 보지 못한 동생이었다. 다음날이면 수
장의 자리에 오른다는 막내가 그저 자랑스러웠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스노우가 무언지, 어떤 역할을 하
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막내가 자신을 처음으로 그 좁은 다락방에서 나오게 해 주었기에, 마냥 기뻤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자신
의 방과 달리 이 성은 창문 너머로 본 들판만큼이나 넓구나 생각하며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있었고, 둘째 동생도 있었다. 막내, 라이너스 클리프가 자신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그리고 행
복의 단꿈에 젖어 있는 자신을 세워 두고, 라이너스는 어머니를 겁간했다. 그리고 울부짖는 둘째를 죽였다.
그곳, 그 장소.
오늘은 자신이 돌아온 날이니, 라이너스는 의식을 위해 부하들을 모두 물렸을 터였다. 하지만 부하들보다 그
라이너스가 더 위험했다.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마틴을 휘어 감았다.
“제… 제발….”
“―!!”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들이쳐,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허나, 지금은 벽과 바닥에 온통 피와 이상한 것들
로 질척해진 이 끔찍한 참상을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싱클레어!”
“어, 어째서…!”
마틴은 당황하며 싱클레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까이에서 눈을 맞추고 뺨을 어루만지며 흔들어 보지만 사
내는 반응이 없었다.
“싱클레어…?”
대답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더듬어 본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다시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차디찬 몸에서는 호
흡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멍해지자, 결코 인정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미뤄둔 잔인한 진실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비집고 튀어나왔다.
마틴은 사내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애타는 손길로 그의 몸을 더듬기도 했다. 끌어당겨도 자꾸만 털썩, 털썩
떨어져 버리는 하나 남은 싱클레어의 팔을 품에 안고, 마틴은 이제 자신을 잡아 주지 않는 손에 깍지를 꼈다. 그
리고 심장에 품고 등을 구부렸다. 온몸에 한기가 든 듯 덜덜 떨렸다.
싱클레어만큼은 자신의 운명에 휩쓸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
고 등을 돌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자신의 불운을 짊어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떨리는 손이 단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주어 뽑아냈다. 상처가 벌어지며 그곳에서도 피가 울걱, 뿜어
져 나왔다. 벌건 피가 마틴의 두 눈을 어지럽혔다. 눈시울이 시큰거리다 못해 화끈화끈 아프다.
참으로 독하게 버텨 왔다. 그것이 마치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비참
한 운명만 계속해서 직면하게 될 뿐이었다.
“아아….”
애간장을 저미는 소리가 계속해서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입은 벌리고 있으나, 소리를 내어 울음을 토하는
것조차 잊었다.
“아… 아아….”
“너라면….”
처음에는 웃으려고 시도하는 듯했으나, 그 표정은 곧 엉망이 되어 버린다. 자꾸만 애를 쓰면 쓸수록 얼룩이 번
지는 것처럼 표정 하나 가누지 못해서 결국 울면서 웃는 듯한 지독하게 슬픈 표정을 짓고 만다.
“…너라면 가능해.”
그래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운명이 하나 남았으니 기쁜 일이지 않느냐며 마틴이 웃음소리를 냈다. 버저적 부
서지는 소리였다. 웃고는 있는데 자꾸만 코가 시큰시큰하다. 이상한 일이라며 코를 훌쩍이다가, 다시 싱클레어
의 이름을 부르고서, 마틴은 칼을 잡은 싱클레어의 손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칼날은 이미 사
내의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맥없는 신음이 마틴의 입술로 새어나왔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맺혔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느릿
하게 흘러내렸다.
서늘하고도 뜨거운 고통이 심장을 가득 메웠다. 마틴은 이 감각이 어쩐지 자신이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
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날이 자신의 심장을 저미는 것처럼 그와의 사랑은 이토록 고통스럽고 이
토록 서늘했다. 그래서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사랑했다.
허나 이제는 부질없는 생각들이다. 문득 머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턱없이 짧았던 겨우내 밤을 떠올리며,
그리고 싱클레어와의 추억을 아로새기며 마틴은 자신에게 주어진 검푸른 죽음의 그림자를 두 팔로 힘주어 껴
안았다.
그것이 더 서럽다.
“……….”
얼마쯤 지났을까.
차디찬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파리한 두 눈덩이에도 핏기가 찾아왔을 때, 사내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끔찍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으아악―!”
억눌린 절규는 거친 호흡으로 변해 와락, 허공으로 터졌다.
싱클레어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뒤엉킨 얼어붙은 눈동자로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마틴을
내려다보았다.
“마… 틴?”
싱클레어가 다시 마틴을 불렀다. 상처가 아물기만을 기다렸지만 피는 계속해서 자신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싱
클레어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 째서?”
사내는 허겁지겁 마틴의 옷자락을 올렸다. 살갗이 찢기고 벌건 핏자국에 엉긴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른
몸은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옷자락으로 그의 몸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몸부
림에 불과했다. 이미 자신의 옷도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검붉게 젖어 있었다. 피의 흔적을 지우려고
버둥댈수록 더 끔찍하게 얼룩진다.
“허으윽―.”
“제발…. 어서….”
“빨리―, 빨리 눈 좀 떠 봐요!!”
결국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심장을 세게 눌렀을 때였다. 손바닥으로는 마틴의 심장박동 대신, 마지막의 잔인했
던 기억이 소름 끼치게 퍼졌다.
「…너라면 가능해.」
“거―, 거짓말이죠?!”
“…마틴…?”
“―마틴!!”
핏기가 돌기 시작하는 입술을 짓이긴다. 입술에 핏방울이 맺힌다. 이번엔 이를 악문다. 관자놀이까지 튀어나오
도록.
“으아아아아아악―――!!”
늘어진 시신을 안고서 단발마의 비명으로 이 비통한 심정을 끄집어내면서도 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싱클레
어는 품 안에 그를 안고 몸부림쳤다. 잘린 어깨에서는 힘을 줄 때마다 피가 솟구쳤다.
“크아아――아아악!!”
피가 맺힌 처절한 절규가 이어졌다. 심장이 사방으로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절절이 괴로워하며 싱클레어는 마
틴을 끌어안았다. 일그러진 눈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다시 비명이 이어지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연인의 목숨은 깊고 차디찬 심해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싱클레어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마틴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털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는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소리도 없이, 안구에 가득 찬 물기가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광대를 타고 뺨에 자국
을 남기며 턱에 맺혀, 마틴의 몸으로 떨어졌다. 멀건 눈물이 피와 섞여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점점이 떨어지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에 진득한 피가 조금씩 지워져 가고 있었다. 그토록 애를 써도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그의 눈물로 희미하게 옅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줄기 희뿌연 햇살이 창문을 뚫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틴의 창백한 몸 위에 내려앉는
다. 스스로가 내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싱클레어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
“…하아…….”
차가운 뺨에 얼굴을 비비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을 때처럼, 겨우 입술을 움
직여 웃는다.
“기다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돌려 놓겠습니다. 당신의 생명과 당신 몸에 자리잡고 있던 당신과
나의 아이까지 전부…. 전부….”
전부.
당신은 런던의 밤보다도 더 강렬하고 깊은 존재여서,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거나 정신
을 차리고 있을 때나, 언제나 뇌리에 박혀 생생하게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때마다 참을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때로는 가슴이 미어지는 감각이 너무도 생생해서 하루 종일 심장을 붙잡고 다녀야 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심장병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 통증은 절대로 웃어넘
길 것이 아니었다. 지끈지끈하고 절절하게 아팠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들 수 없을 만치 아팠다. 처음에는 깜
빡 속아서 의사를 찾아갔으나, 그는 심인성이란 모호한 말만 해 댔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통증
의 원인을 찾았다. 결코 병명을 밝힐 수 없었던 이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통증은 모두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었
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차라리 이렇게 괴로울 거라면 당신을 잊고 싶다고, 허황된 생각도 해 보았더랬다. 그것은 헛되고 황당하며 미
덥지 못한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우중충하고 우울한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마저 오로지 당신 때문이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필요할 때는
날씨가 맑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언젠가 당신이 침실에서 보여 준 그 포근한 봄볕 같던 미소를 떠올렸
다.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따스하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두 다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허나 기억은 잔인한 것이며 동시에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당신을 기억하는 동안은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처럼 아찔해지기도 했다가 아편에 중독된 사람처럼 아지랑이 같은 몽롱한 기운에 심취해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너무 그리워서 스스로의 목숨을 조각내고 싶어질 땐, 미쳤다고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 틈에서 속이 뒤집혀라
웃기도 했다. 혹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런던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렸다.
다시 함께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맹세할 수 있었다. 절대로 당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긴긴 기다림 속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서 혼자 맹세를 한 것
도 여러 번이었다. 허나 입 밖으로 빠져나간 맹세는 허무하게도 금세 사라졌다. 그것들은 내뱉는 숨결보다도
더 빨리 사라져 버렸다.
당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없었고, 미어진 심장만 남아서 런던의 밤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다. 우리가 한때 보냈던 그 달콤한 밤
들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여겨져서 문득 서글퍼지기도 했다. 심장이 시큰거렸다.
당신을 기다렸다.
“후….”
“그렇다고 다른 걸 마실 수도 없고….”
싱클레어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현란한 조명도 없이 어둑어둑한 실내는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오늘
따라 유달리 인파로 더 북적거렸다. 다들 인연을 찾아서 여기까지 기어 나온 모양이었다. 더러는 금요일 밤의
열기를 빌려 몸만 목적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쓸쓸하다거나.
싱클레어는 이마를 찌푸렸다. 예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들은, 그런 식으로 마틴을 떠나보내고서 빈
번히 자신을 찾아왔다. 조류에 휩쓸린 것처럼 감정의 바다가 자신을 뒤덮을 때도 있었다.
“…하….”
때로는 미어지는 심장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라 몸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치거나 잠이 오지 않았다. 미치고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마틴이 떠나고 나서는 줄곧 그런 상태인 것 같다.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는 게 고작이다.
“…….”
오늘은 정말로 그리움을 놓으려 한다. 기다리는 것도 이제 끝이다. 지나온 시간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이런
날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도 있긴 했다.
“하….”
누군가 그의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다. 싱클레어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늦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은 싱클레어를 향해 세상에 더없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고 있었다.
“난 마틴인데, 혼자야?”
드디어―!
허나, 고작해야 일주일 전쯤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싱클레어의 의도와는 달리, 처음 사용해보는 라이너스의 능
력은 너무나도 불안정하여 그의 머릿속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이 남아 있던 320 년 전, 마틴이 자신의 부모를 죽
였을 그 순간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죽은 아이를 되돌려 주기로 약속을 했으니, 모든 건 예전과 같아야 했다. 적어도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달
라지는 것이 없어야 했다. 그가 기억하게 될 자신의 이야기들은, 과거와 추호도 다르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시
간이 되돌아가 버린 바람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눈동자를 하는 마틴의 앞에서, 꼬마의 모습을
한 자신이 울며불며 매달려 볼까도 싶었지만 힘겹게 보내 줘야 했다.
이번엔 복수가 아니라, 마틴을 만나 마틴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이 새로운 320 년을 버텼다. 과거를 또
다시 시작한 것이었으니 그 자신에게만 실제로는 640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이 남자는 640 년간 마틴을
쫓은 셈이 되었다.
어지간한 각오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을 땐 마틴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그가 너무 도망을 잘 다니는 바람에 늘 거처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였으나, 그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자신
이 살 수가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그의 거처가 스코필드의 앤티크숍으로 정해지면서 한결 편해지긴 했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싱클레어는 낙담하며 물러나려는 마틴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아아, 이제야 겨우. 이제야 겨우 잡을 수 있다.
그와 닿고 싶어서 그간 얼마나 안달했는지 모른다.
“이게 무슨…!”
당신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또다시 시작된 지난 320 년간, 이 들끓는 마음을 감추고
어떤 기분으로 당신의 곁을 맴돌았는지, 그 수없는 밤, 뜨겁던 고통, 심장을 살라내는 사랑의 감각들.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킨 채 당신의 곁을 맴돌고 또 맴돌았다.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나이트 오브 런던 完]
하유 지음
표지 일러스트/유일
표지 타이포디자인/89 번가
발행/2018 년 2 월 28 일
펴낸곳/주식회사 북스트림/2014 년 11 월 28 일
신고번호 제 2014-000151 호/
발행인/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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