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130

꿈속의 기분 1

전자책 발행일|2018 년 11 월 01 일

저자명|한시내

발행처|동아

발행인|박성면

E-mail|donga6370@hanmail.net

ⓒ 한시내. 2018

※ 이 전자책은 동아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을 통해 발행한 전자책 입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 본 전자책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 목 차 |

프롤로그

1. 갈림길

2. 의심의 기간

3. 좋은 동료

4. 무도회

프롤로그

“그래…… 아마 여기 있을 거야. 아, 찾았다!”


리젠은 다락방에서 몇 개의 상자를 헤집어 놓고 나서야 약초를 하나 찾아냈다. 약초학 수업에 필요한 학교
준비물이었는데 까먹고 있다가 밤 늦게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동네 약초상들은 이미 문을 다 닫았을
때라 막막했는데 번개같이 다락방이 기억났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다락방에는 예전에 함께 살던 고모 르엘라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르엘라는 천재 약제사로 왕국 전체에 이름을 날렸으나 수많은 약을 개발한 뒤 젊은 나이에 미쳐 버렸다.
르엘라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리젠은 그래서 왕립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미쳐 버린 고모를 부양했었고,
리젠이 성년이 되는 해에 르엘라가 죽고 나자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근데 별별 것들이 다 있네…….”

찾던 약초를 손에 쥐고 나니 새삼 이런저런 것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성년이 되고 그녀는 왕궁을 위해


일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추가 교육을 받는 왕립종합대학에 입학했는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약제 수업을 받고 나니 이제야 고모의 유품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구하기
힘든 약초들도 꽤 많았고, 몇백 년 동안 숙성시킨 약들도 많았다.

“……됐다, 가자.”

리젠은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억지로 들어 상자를 다시 닫았다. 다시 끙끙대며 상자를 원래 있던 자리로


옮기는데, 노트 한 권이 툭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쳐 들었더니 미치기 전 르엘라의 악필이
한눈에 들어왔다.

- 투명 시약

재료: 100 년산 달맞이꽃, 파르트의 날개 조각, 토치의 이빨, 500 년산 카놀라틴 뿌리, 타이탄의 발톱
가루 200g, 타린의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잎 4 장, 탄화산 용암 1L

효능: 1 시간 동안 사람의 몸을 투명하게 한다.

기대 효과: 은신, 잠입 등

한계: 물리적인 질량은 보존되므로 벽이나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이런 걸 어떻게 개발해 냈지?”

고모의 글씨만 잠시 보려고 했는데, 책을 펼치자 흥미로운 내용이 너무 많아 리젠은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거의 대다수가 현존하는 약제술을 훨씬 더 뛰어넘은 기술이 많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시약 제조법들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괜히 르엘라가 왕국 역사 최고의
천재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르엘라는 왕립 산하기관인 약제국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거의 대다수가
군대와 수사에 필요한 목적으로 개발된 약물이었다.

“그런데 파르트의 날개는 어떻게 얻고, 타이탄의 발톱 가루는 어디서 나는 거야?”

하지만 그다지 지금 리젠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은 없었다. 대다수가 너무 터무니없이 오래 숙성하는


약초를 요구하거나, 대체 어디 사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는 마물들의 신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약은 2,000 년 된 민들레 뿌리가 재료였는데, 2,000 년 된 민들레 뿌리를 어디서 구하라는 건지 리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대다수의 시약이 제조가 어려운 현실성 없는 제조법을 무심히 읽고 있던
리젠의 눈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 꿈 연결 시약

재료: 나비잠꽃 100g, 틸다 뿌리 200g, 나그다의 진흙 한 줌, 라타의 발톱 50g, 계약자의 머리카락 한


효능: 계약자의 머리카락이 든 시약을 마신 사람의 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평범한 꿈보다 기억이 생생함.

기대 효과: 타국의 스파이와 증거 없이 연결 가능

한계: 1 회성이므로 지속된 연결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마셔 주어야 한다. 두 사람 이상 사용 시에


끔찍한 부작용이 우려된다.

“어? 이건 재료가 왜 이렇게 간단하지?”

리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몇 번이고 그 페이지를 읽었다. 다른 사람의 집이라면 이런 재료가 다 있을 리


없겠지만, 나그다의 진흙 빼고는 확실히 다락방에 다 있는 재료였다. 그리고 왠지 기억을 뒤져 보니 아까
나그다의 진흙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그녀는 홀린 듯이 다락방을 뒤져 지저분한 진흙 통을 하나
찾아냈다.

“나그다의 진흙도 찾았고…….”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 회성으로 꿈에 나온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르엘라는 군사 목적으로 이 시약을 개발한 것 같았지만…… 조금 더 로맨틱하게 생각하면,
원하는 상대를 꿈에서 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리젠은 일단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 뽑았다. 재료는 모두 있다. 그리고 이런 시약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한 번쯤 해 본다 해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할 수 있다. 내일 다니엘한테 먹이면,
다니엘과 꿈속에서 한 번은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재료와 냄비를 챙겨 다락방을 나섰다. 다니엘이 꿈에 나타나 달라고 매일 밤
빌었었다. 한 번만, 고모, 한 번만 사적으로 고모의 약 좀 쓸게. 어차피 다니엘하고 잘 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한 번만이라도, 꿈속에서라도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서 그래. 그날 밤, 리젠은 물처럼 투명한
무색무취 무미의 시약을 하나 만들었고 조심스럽게 가방에 챙겼다.

“다니엘! 잘한다! 다니엘!”

아셰가 팔짝팔짝 뛰면서 다니엘을 응원할 동안, 리젠은 손에 물병을 잡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대련 중이었다. 아메탄 왕국의 셋째 왕자, 다니엘 라티니스 아메탄 3 세는
리젠의 오랜 짝사랑 상대였다. 그리고 리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은 다니엘과
배다른 동갑내기 여동생이었는데, 리젠은 왕립고등학교 재학 당시 왕녀랑 친해졌다가 그녀의 오빠인
다니엘에게 완전히 반했었다.

“으아! 안 돼! 한 번 더 찔러! 아아!”

다니엘과 아셰는 꽤나 사이가 좋은 오누이였는데, 그래서 리젠은 아셰가 다니엘을 보러 가자고 할 때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젠은 다니엘에게 평생 고백 한 번 못 해 볼 것이 뻔했다.
왜냐하면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왕자나 왕녀는 거의 대다수가 외교적 목적으로 정략혼을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이미 제국의 황녀와 약혼 이야기가 나온 상태였고 아셰 역시 사막 국가인 한스팀의 왕자 중
하나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리 평상시에 친구처럼 지낸다 하더라도 왕족은 왕족인 것이다.
“윽, 져 버렸네. 역시 카이든 이기는 건 무리였나 봐.”

다니엘의 대련 상대는 카이든으로, 숨을 헉헉거리는 다니엘과 비교해서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카이든이 다니엘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고 리젠은 다소 얄밉다고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이겨 먹을 필요는 없었잖아! 상냥하고 언제나 다정한 다니엘과는 반대로 카이든은 무뚝뚝하고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게다가 카이든과 리젠은 왕립고등학교 시절부터 수사국 지망인 라이벌 관계였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전교 1 등과 2 등을 번갈아 가며 했었는데, 둘 다 수사국 지망이라 선생님들과 동급생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누가 수사국 수석으로 들어갈지 암암리에 내기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 대학 졸업도
가까워지고 슬슬 어느 부서에 들어갈지 원서를 쓸 때가 되었는데, 그래서 카이든과 리젠의 신경은 서로
날카로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수사국 수석 입사는 승진이 확실히 빠르다. 리젠은 오랜 라이벌 관계인
카이든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리젠, 저 녀석 점점 더 괴물 같아져. 수사국 수석하려면 엄청 노력해야겠어.”

다니엘이 키득대며 아셰와 리젠 곁으로 다가왔다. 아셰가 다니엘의 땀을 닦아 줄 동안 리젠은 물병을 들고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이거 마시라고 하면 되는데……. 그녀가
기계처럼 뻣뻣하게 손을 뻗어 물병을 내밀 때였다.

“아, 카이든! 뭐 해? 이리 와. 관객분들한테 인사는 해야지.”

다니엘은 붙임성 없는 자신의 친구, 카이든을 손짓으로 불렀다. 카이든이 마지못해 다가온다는 듯 검을
검집에 꽂고 다가왔다.

“다, 다니엘, 목마르지 않아? 이거 마실래?”

“아, 고마워, 리젠.”

다니엘은 리젠이 건넨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오늘 밤에는
꿈에서 다니엘을 만날 수 있다. 적어도 손을 붙들고 좋아한다는 말을 꿈에서라도 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무의식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똑똑하고 예쁜 애
정도로 말해 주기만 한다면……. 리젠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다니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카이든, 너부터 마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리젠의 눈이 접시처럼 커졌다. 다니엘이 어색하게 서 있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리젠의
물병을 카이든에게 넘긴 것이다. 리젠이 당황해서 어떻게 하기도 전에, 카이든은 다니엘이 넘긴 물병의
물을 다 마셔 버리고는 옆의 수도에서 다시 채워서 다니엘에게 건넸다.

“왜 그렇게 둘이 내외하고 그래? 너무 공인된 라이벌이라서 그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리젠은 다니엘의 농담에도 웃을 수가 없었다. 카이든이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대충 대답했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맞잖아.”

아셰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둘 다 수사국 수석 노리고 있는 것 아니야?”


“선택 과목이 다르니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지.”

“에이, 선택 과목은 성별 차이 때문에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머지 기준이 똑같은 점수들의


배점이 훨씬 높잖아.”

그새 리젠은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1 회성이다. 카이든에게는 그냥 하룻밤 꿈에 자신이 나오게 될


뿐이었다. 심각한 일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리젠은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지. 어차피 동료로 일할 건데 라이벌 의식 가져서 뭐 해?”

다니엘 앞이라서 천사처럼 말했지만, 속으로 리젠은 이를 갈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전교 1 등과 2 등


사이로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쟁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수사국에서 꼭 수석을 해서
카이든보다 내가 더 낫다는 걸 남들에게 알려 줘야지. 그 마음은 카이든도 같은지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런데 의외야. 리젠 정말 약제국 지원할 줄 알았는데.”

아셰가 고개를 갸웃하며 백 번도 더 말한 이야기를 했다.

“약초학 엄청 잘하잖아. 심지어 르엘라의 조카에.”

“난 고모처럼 미치기 싫어.”

리젠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너무 연구실에 혼자서 처박혀 있으니 미친 게 분명해. 난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활동적이니까 수사국이
더 잘 맞아.”

“와, 이렇게 된 이상 수석이 누가 될지 너무 궁금한데. 미리 둘이서 대련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니엘이 웃을 땐 파란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면서 예쁜 곡선을 만든다.


리젠은 하얗고 고운 다니엘의 얼굴과 찰랑이는 금발 머리, 반짝이는 푸른 눈을 바라보며 잠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그냥 카이든 꿈을 꾸고 내일 기필코 다시…….

“세기의 대결을 왜 벌써부터 보려고 그래?”

아셰가 다니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어차피 둘 다 결정타는 보여 주지 않을 텐데, 뭐 하러 대련을 시켜. 수사국 입사 시험 때 보면 되지.”

“아, 너무 기대돼. 진짜 모르겠어.”

“난 리젠! 리젠이 이겼으면 좋겠어!”

“카이든은 괴물 같아. 이기기 힘들걸.”

두 남매가 신나게 떠들 동안, 리젠과 카이든은 별말 없이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것도 왕립마법대학 재학 중일 때뿐이다. 졸업한 뒤에는 어차피 리젠도 카이든도 왕족에게 충성을
바치는 산하기관의 직원이 되는 것이다.

그날 밤, 리젠은 카이든의 꿈을 꿀 것이 분명하니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고 말았다. 의식이 몽롱했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얼마나 떠돌았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오후에 있었던 대련장이다. 카이든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와, 이 자식은 꿈에서도 훈련이야? 독한 놈.’

꿈속이었기 때문에 대련장은 현실과는 달리 묘하게 왜곡이 되어 있었다. 고모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꿈속의 공간은 전적으로 시약을 마신 사람의 무의식에 달려 있었다.

‘무슨 기술 쓰나 볼까? 이참에 종합 시험 대비도 할 겸.’

리젠은 조심스럽게 훈련장 구석에 앉았다. 종합 시험 중에 1:1 대련이 있다. 발로 뛰는 수사국의 특성상
전투 능력이 당연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성별의 차이가 있으므로 리젠은 선택 과목인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었지만 마법은 1:1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카이든의 움직임을 잘 봐 둘 필요가
있었다.

‘음……. 잘한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어.’

카이든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었는데, 카이든의 검은 눈이 문득 자신을 향했다. 눈을 마주친 리젠이


흠칫했다.

“아, 카이든.”

리젠은 눈을 깜빡이며 심호흡했다. 괜찮아, 저건 카이든이 아니라 카이든의 무의식이고, 어차피 하룻밤
꿈이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돼. 그녀의 어설픈 웃음을 보며 그가 무표정으로 물었다.

“리젠 하카트, 여기는 무슨 일이지?”

와, 꿈에서도 살벌하네. 리젠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순발력 있게 대답했다.

“대련!”

조금 야비한가. 혹시나 필살기가 들킬까 봐 실제로는 절대 대련하지 않는데.

“대련하지 않을래?”

그녀는 다니엘만 앞에 없다면 굉장히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밝게 웃어 보이는 리젠을 보며


꿈속의 카이든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이 왜곡되었다. 카이든의 꿈속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원래 꿈은 무의식에 따라서


자꾸만 비상식적으로 바뀌니까. 리젠은 순간 어지러워 고개를 흔들었다.

“어, 여긴…….”

강의실이었다. 대체 왜 대련하는데 강의실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카이든의 꿈속이니까.


어느새 그녀의 옷도 교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블라우스의 맨 위 단추를 하나 풀고, 리젠은 책상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쥐었다. 카이든 역시 맨손으로 격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너무하네.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하나도 없고.’

남녀가 함께 대련할 때 원래 규칙은, 성별에 따른 신체적 격차를 보정하기 위해 여자에게 무언가 세부


전공을 하나 더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녀의 경우 마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무런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봐서 꿈속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카이든에게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그래도 순수하게 주먹다짐을 해 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리젠은 먼저 책상을 박차고 올라가 발로 카이든의 가슴을 찼다.

“하앗!”

카이든의 가슴은 밀리지 않았고, 다만 한순간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의자로 내리찍었다. 그녀는 한
바퀴 돌아 펄쩍 뛰어 다른 책상을 밟고 섰다. 꿈인데도 욱신욱신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도약하여
카이든의 얼굴을 노리고 크게 발을 찼다. 카이든은 쉽게 피했고, 살짝 피한 카이든의 배에 주먹을 밀어
넣었다. 반동으로 내려오는 그의 턱에 두 번째 일격을 가하려는 차였다.

“악!”

그녀의 발이 카이든의 발에 휙 걸렸다. 순간적으로 회전을 걸었으나 그의 팔에 목이 단단히 붙들렸다.


카이든이 책상 하나를 발로 차서 의자에 앉았다. 한 번 제압되니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카이든 위에 안긴 꼴이 되어 버둥거렸다. 한쪽 팔로는 카이든에게 목이 감겨 있었고, 한쪽
팔로는 상체가 완전히 제압되어 있었으며 두 다리는 카이든의 단단한 다리에 잡혀 있었다.

“항복해.”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몸을 바둥거리며 이를 갈았다.

“절대 못 해.”

“패배를 인정하지 그래. 다른 건 나와 비등비등하다고 해도, 격투만은 안 돼.”

리젠이 분해서 콧김을 내뿜었다. 그래, 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왠지 무시하는 것 같았던 그 눈빛이 그


뜻을 품고 있었구나. 아무리 왕립종합대학 여자 대련 1 위라고 해도 전혀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 표정이
생각나 리젠이 짜증을 냈다.

“마법을 쓰면 또 다르다고!”

“다를 것 같아?”

그가 쿡쿡 웃었다. 그는 리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고 놀리듯 웃었다.

“난 한 손만으로도 널 이렇게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데?”

그의 왼쪽 팔은 그녀의 팔과 몸통을 완전히 포박한 상태였다. 그녀는 약이 올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제압될 줄 몰랐다. 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여자들 사이에서는 정말 압도적인 체술(體術)을 갖고 있었고, 어지간한 남자들과는 격투를 해도 쉽게
이겼다. 그래서 꽤나 호각을 다툴 줄 알았는데…….

“패배를 인정하지 그래, 리젠 하카트.”

“싫어!”

리젠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은 뭘로 만들어져 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움직이지 마.”

“웃겨, 난 포기 안 해.”

“진짜…… 움직이지 마. 못 참겠다고.”


리젠은 갑자기 잠겨 버린 것 같은 카이든의 목소리에 놀라 흠칫하여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 바둥거리느라
몰랐는데 그의 몸이 뜨거웠다. 게다가 포개 앉은 엉덩이 밑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리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직 학생이고, 이성 교제 경험도 없어 당연히 리젠은 남자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카이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왕립학교에 다니는 이상 나랏돈으로 공부를 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력을 아끼라고
이성 교제는 물론 관계도 금지된다. 그러나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는 여자들끼리 돌려 보았던 책에 의해 알
수 있었다.

“……못 참겠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처음 느끼는 남자의 입술 감각에 리젠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목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며 순간 신음이 흘렀다. 그의 자유로운 오른손이 그녀의 교복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리젠은 다시 버둥거렸으나 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강의실에서, 의자에 포개 앉아서, 꼼짝도 못하고 이런 꼴이라니! 블라우스의 교복 단추가 모두 풀어지고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근육이 단단한 배로 움직였다.

스물둘이라면 한창 나이다. 왕궁의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 억지로 모든 욕망을 참아 왔던 그였고, 사실


기억이 안 날 뿐이지 여자가 나오는 꿈은 많이 꾸던 차였다. 다만 리젠은 무의식의 카이든이 이렇게
대중없이 성적으로 다가올 줄 몰라서 몹시 당황했다. 양손이 그에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욱신거렸다.
그의 손이 블라우스 속 브래지어로 훅 들어왔다.

“안 돼! 아, 안 돼!”

브래지어가 올라가며 그녀의 상반신은 거의 나신이 되었다. 블라우스는 다 풀어헤쳐지고, 속옷은


굴욕적으로 올라갔다. 그의 혀가 이제는 혈관이 부풀어 올라 얼얼한 그녀의 목을 핥았다. 처음 느껴지는
감각에 리젠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자 이를 악물었는데도 신음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아……. 이러지 마…….”

그의 입술이 물었던 어깨와 목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그의 흔적을


카이든이 야릇하게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싫어?”

카이든의 검은 눈동자가 리젠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젠의 묶었던 머리가 어느새 풀려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 잘생긴 건 알았어도 다니엘을 보느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눈매가 깊고 코도 높다. 다니엘이 여성스럽게 예쁘장하다면 카이든은
정말 남자답게 선이 굵고 잘생겼다. 리젠이 그를 바라보는 도중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탐하고
있었다. 탐욕스럽게 움켜쥐다가, 소중하게 주무르다가, 그녀의 가슴 중앙 주변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그녀는 펄쩍 일어날 뻔했으나 단단히 잡힌 그의 다리 때문에 다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매일 차가운


모습만 보이고, 공부 아니면 수련에만 몰두하는 카이든에게서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매일같이 수업을 같이 듣는 강의실이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짓을! 그의 두 다리가 단단히 그녀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가 다리를 휙 벌렸다.

“안 돼!”

“힘 빼.”
그가 그녀의 맨 어깨에 입술을 대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녀의 다리가 의자에서 속절없이 벌어지고,
치마는 기어 올라가 허벅지 위까지 위태롭게 올라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갈
때였다.

“거기, 거기는 안 돼……. 아, 제발…….”

[따르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에서 깬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화끈하여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이제 교실이 아니라 그녀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잠옷을 내리고
오른 어깨를 확인했다. 꿈속에서 그의 입술이 남긴 상처가 남았을 어깨는 거짓말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정말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해…….”

그녀는 알람시계를 누르며 울먹였다.

“오늘 카이든 얼굴을 어떻게 봐…….”

1. 갈림길

“다음 주까지 1 지망에서부터 3 지망까지 부서를 써 온다. 부서 배정 발표는 다음 달 1 일에 나고, 2


일에는 졸업식이다. 다음 주가 종합 시험 주간이니 공부 열심히들 하고. 이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조교의 안내를 들으며 카이든은 천천히 책을 가방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어젯밤


꿈이 너무 생생해서 하루 종일 잔상으로 남았다. 남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한창 나이에 왕궁의 인재로
뽑혀 금욕 생활을 하고 있으니 간간히 여자 꿈을 꾸는 건 당연했고 몽정도 가끔 했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이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애써 앞쪽의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의 여학생을 보지 않으려고 괜히 책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떻게 리젠 하카트가 꿈에 나올 수 있지? 그리고 이 강의실에서, 이 의자에서, 둘이 정말 낯 뜨거운


짓을 했다. 꿈이기 때문에 카이든이 뭐 어떻게 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눈을 떠 보니 너무
생생한 꿈이 기억났을 뿐이다. 너무나 꿈이 생경하여 오늘 식당에서 슬쩍 리젠의 오른쪽 목을 보았으나
자신이 낸 자국이 있을 리 없었다.

리젠은 자신과 수석을 다투는 인재로 꽤나 귀염성 있는 얼굴과 활달한 성격을 가진 꽤 괜찮은
여자아이였지만, 어쨌든 자타가 공인한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와 가장 친한 다니엘과 붙어 다니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젠은 다니엘을 좋아한다. 그녀의 시선이
다니엘에게 못 박힌 걸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니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런 여자들이
너무 많아 아예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어차피 약혼자가 정해진 몸이니.

“리젠, 리젠. 어디 쓸 거야?”

하필 리젠과 아셰가 앞자리에 앉아 있다. 아셰가 다니엘의 근처에 앉겠다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둘의


대화가 의식하지 않아도 들려왔다.
“1 지망은 수사국일 테고. 수석은 몰라도 바로 들어가겠지? 2 지망하고 3 지망은?”

“2 지망은 정보국, 3 지망은 의료국.”

“어차피 수사국 바로 들어갈 테니 의미는 없겠지만, 약제국 하나도 안 쓸 거야?”

왕립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인재들은 왕국에서 추가 교육을 시켜 바로 왕국 직속 기관으로 편입시킨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다니고 있는 왕립마법대학의 학생들은 모두 성적순으로 원하는 기관을 지망하게
되는데, 리젠이나 카이든은 어차피 1 등과 2 등이었기 때문에 1 지망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약초학 성적이 그렇게 좋은데도?”

“안 써. 난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 처박혀서 연구만 하다가는 고모처럼 미쳐 버릴지도 몰라.”

한 번 꿈에 나왔다고 이렇게 의식하게 될 줄 몰랐다. 다행히도 리젠과 이상하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평소라면 다니엘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꼭 한두 번씩 마주쳤을 텐데 오늘은 그들의 앞자리에 앉아서도
공부만 열심히 할 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아셰 너는…… 이제 졸업하면 시집가겠네?”

“그렇지, 뭐. 나도 그냥 왕족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진짜 약제국 가고 싶은데. 그냥 평범하게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았으면 좋겠지만.”

아셰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왕위 계승권에서 먼 왕족들의 운명이란 다 정략혼이다. 그의 옆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다니엘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다니엘은 셋째 왕자로 적통이기는
하지만 왕위 계승권이라고 볼 수 없었다. 비의 소생이자 여자인 아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셰의 경우
다른 나라로 가야 하므로 더 비참한 처지였다.

지금의 왕은 처음에 왕비와 비 둘을 두었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적통 아들이 첫째인 윌리엄과 셋째인
다니엘이다. 그리고 왕비는 죽었고, 원래 비였던 테스티가 정비로 올라왔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둘째
왕자인 루벤이다. 그리고 계속 별다른 욕심 없이 조용히 살고 있던 나머지 하나의 비가 낳은 딸이
다니엘과 동갑인 아셰다.

왕족들은 향후 인맥관리와 엘리트들과의 교류를 위해 왕립고등학교와 왕립마법대학을 평범한 학생처럼


다니지만, 졸업 이후로는 이제 그들에게 꼬박꼬박 왕자님과 왕녀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지금은 친한
친구이지만 반년만 더 지나면 완벽한 군신 관계가 되는 것이다.

윌리엄이 건강하고 선량한데다가 첫째 아들이며 정통성까지 있으니 후계는 탄탄하다고 봐야 했다.


다니엘도 아셰도 자신들이 정략혼으로 외교 도구 중 하나로 쓰인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리젠이 저런 눈빛을 하고 다니엘을 보면서도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있는 거겠지.

카이든의 눈이 또 리젠의 오른쪽 목으로 향했다. 어제의 꿈이 무색할 정도로 하얗고 매끈했다. 저 길고
하얀 목에 이를 박고, 입술로 물어 보라색으로 멍들게 했었던 어젯밤의 잔상이 생각나 그의 아래가
묵직해졌다.

“카이든, 가자.”

다니엘이 그를 툭 치며 말했다.

“어, 잠시. 뭐 하나만 확인하고.”

그가 분주히 아무 책이나 훑으며 머뭇거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아셰와 리젠이 지나갔다. 리젠의 교복


치마를 보니 또 그 속으로 들어갔던 자신의 오른손이 생각나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저녁, 리젠은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공부 중이었다. 어쨌든 다음 주가 종합 시험이다. 원하는
수사국에는 당연히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수석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가장 큰 경쟁자가 카이든이다.
대련에서는 마법을 써도 이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꿈속에서 그가 마법을 써도 자신을
못 이긴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꿈속을 떠올리니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무슨 그런 이상한 꿈을 꿔서! 카이든은 자신의
꿈속이라고 생각할 테니 무의식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생생하게 기억까지 한다고
했으니 카이든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리젠은 한참이나 딴생각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풀썩 엎드렸다.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다만 다니엘과 현실이 아닌 곳에서 한 번만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리젠이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왕자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왕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남자였으면 했다. 성적이 모자라 왕립종합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계속 좋아했을 것 같다.
산하기관에 들어가면 월급도 많은데 그냥 그녀가 부양하고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혼자가
이미 정해진 왕자라니. 물론 그 정혼자와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이라고 해도 그를 향한 감정을 숨겨야
할 당위성으로는 충분했다. 원칙적으로 국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왕족은 계승자뿐이다. 국내에 애인을
둔다는 것은 공공연한 반란을 암시하는 뜻이기도 했다.

다니엘이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그것은 왕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베푸는 매너일 뿐이다. 그녀는 언감생심 왕족의 일원이 되겠다는 마음도 품은 적 없다. 다만,
다만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아직 추스르지 못한 것뿐이다. 그녀는 왕궁 직속 기관인 수사국에서 충성을
다 할 테고 그러다 보면 다니엘을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이 많아져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체력 단련이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개인 이용 시간 초과되었는데.”

카이든은 체력단련실에서 샌드백을 치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운동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묶은 리젠이


팔짱을 끼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체력단련실의 개인 이용 시간은 2 시간이지만 보통 늦은 시간에는 아무도
안 오기 때문에 카이든은 항상 저녁 늦게 와서 양껏 운동을 하다 가곤 했다.

“이제 나 좀 쓸게.”

리젠이 딱딱하게 말했다. 카이든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다니엘이고, 리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셰다.


다니엘과 아셰는 사이가 좋은 오누이 사이다. 그러다 보니 넷이 가끔 함께 있을 때도 있었지만 리젠과
카이든은 좀처럼 친해지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카이든의 문제였는데, 그는 다니엘 외의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하루 종일 생각한 보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하루 종일 운동을 하며 몸을 혹사시켜서


그런지, 하루가 여물어 가는 저녁이 되자 카이든은 리젠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옆방 쓰면 되잖아.”

“샌드백 있는 건 여기밖에 없어서.”

카이든은 두말하지 않고 짐을 챙겨 옆방으로 옮겼다. 규정상 리젠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력단련실은 모두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서로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을 잡고 목각 인형을 치며 옆방에서 샌드백을 치는 리젠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그녀가
체력단련실에 오는 것이 처음이라, 훈련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녀의 주먹질과 발차기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그녀와 대련을 하던 어젯밤 꿈이 떠올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리젠 쪽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평소 같으면 소 닭 보듯 하며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상대가
괜히 꿈에 한 번 나타났다고 엄청 신경 쓰였다. 검을 휘두르는 카이든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그의
어깨가 넓다는 생각을 멍하니 하다가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 시간에 그가 훈련실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왜 하필 둘밖에 없어서…… 그녀는 다니엘을 생각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서로 의식하며 각자의 훈련을 하던 그들이 다시 마주친 것은 훈련실에 하나뿐인 개수대에서였다. 각자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천천히 물을 마셨다. 리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려다가, 왠지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 목을 가다듬었다. 꿈속의 일을 자신도 알고 있다고 티내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같은 동급생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웃기니까. 게다가 자신은 남에게 말을 거는
것이 원래 아무렇지도 않은 활달한 성격이니까. 그녀는 속으로 말을 고르며 가볍게 대화를 걸었다.

“카이든, 너도 아직 수사국 지망이지?”

“어.”

사실은 너무나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전교생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든의 짧은


대답에 리젠이 살짝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도 수사국이 1 지망인데.”

“다니엘한테 들었어.”

리젠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할 말이 없어 머쓱해졌다. 카이든과 괜히 친해지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는 대화를 이어갈 의지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잊어버린 건지, 평소보다도 더 무심해 보여서 리젠은 속으로 안도했다.

“늦은 시간에 훈련실 오니까 좋네. 한적하고, 편하고, 조용하고. 넌 매일 이 시간에 와?”

“거의 매일.”

“그래서 도서관에서 안 보였구나. 그럼 공부는 언제 해?”

나름의 견제가 담긴 질문이었지만, 카이든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시간 날 때. 책 내용은 며칠 지나도 기억이 나지만, 운동은 하루하루가 다르니까.”

재수 없기는. 책 내용도 안 보면 하루하루가 다른데. 리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다


마셨다.

“그럼, 열심히 해.”

리젠이 싱긋 웃고 뒤를 돌던 참이었다. 카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리젠.”

“어?”

“수사국에 가면 별별 꼴 다 봐야 한다는데, 그래서 여성의 지원율이 낮다는데 왜 굳이 수사국에 지원하는


거지?”

카이든의 말에 리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리젠의 고모, 르엘라가 약제국의 굉장한 인재였기 때문에
누구나 리젠에게 약제국을 권했다. 리젠의 약초학 성적이 월등하게 좋기도 했고, 보통 여성들은
약제국이나 행정국으로 많이 지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수사국을 쓴다고 했을 때 말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는 체술도 뛰어나고, 마법도 꽤나 쓰며, 활동적이고 대담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다 별별 꼴 못 보는 건 아니니까.”

리젠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혹시나 너랑 같이 근무하면 내가 짐이라도 될까 봐?”

“그럴 리가.”

카이든이 표정의 변화 없이 중얼거렸다.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누군가한테 짐이 될 리 없지.”

“너는 열심히 안 사는 것처럼 말한다?”

이미 빈정이 상한 리젠이 대차게 대꾸했다.

“너나 나나 모든 성적이 비슷한데.”

“난 열심히 안 사는데?”

카이든이 씩 웃었다.

“운동은 몸 움직이는 게 좋아서 하는 거고, 별로 열심히 안 하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는 거야.”

“재수 없긴.”

리젠이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까치발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든의 검은 눈동자의 그녀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종합 시험에서 보자고. 수사국 지원 애들만 격투 대련하는 거 알고 있지? 그때 내가 꼭 열심히 살아서


너 이겨 준다. 기대해!”

반응이 당차고 활달한 리젠다웠다.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고 홱 돌아 걸어 다시 훈련실로 향했다.


카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높게 묶은 머리와 땀에 젖은 운동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그저 라이벌
관계의 그저 성격 좋고 예쁘장한, 다니엘을 좋아하는 여학생일 뿐이었지만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지
오늘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앗! 탓!”

훈련실에 도착한 카이든은 샌드백을 열심히 치고 있는 리젠을 바라보았다. 저 작은 몸으로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래.”

카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종합 시험 대련에서 보자.”

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리젠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을 하다가 녹초가 되어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왔다. 르엘라가 죽고 난 뒤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이나 체력단련실에서 보냈다.
집에 오기 직전에 체력 단련을 하니 씻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잠이 쏟아졌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리젠은 처음 보는 곳에 혼자 서 있었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멀리에 푸르게 빛나는 호수가 보였다.
아메탄 왕국의 수도, 아메니티는 아닌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저 멀리
양들이 온순하게 모여 풀을 뜯고 있었다. 그녀는 정처 없이 걸었다. 산책로가 예쁘고 공기가 좋아 마치
소풍을 온 것 같았다. 리젠이 걷는 산책로는 양지바른 언덕으로 이어졌다.

“다녀오겠습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젠은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리만큼 똑똑히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머리의 소년이 두 개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 뒤로 살며시
다가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무덤 앞에 묘비가 있었다.

[알버트 루스, 왕국력 2132.10.10.-2170.04.05.]

[나탈리 루스, 왕국력 2135.02.24.-2170.04.05.]

루스라면 카이든의 성이다. 리젠은 등 뒤에 큰 검을 메고 무표정으로 묘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지만 분명
카이든이었다.

“지켜봐 주십시오. 반드시 수사국에 들어가겠습니다.”

리젠은 입술을 깨물었다. 카이든은 형이 하나 있고, 그 형이 영지를 물려받았다고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부모가 없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이 묘지는 루스 지방의 영주였던 카이든의 부모님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모든 것을 밝혀내겠습니다.”

카이든은 묘지 앞에 꽃을 두고, 양피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왕립고등학교 합격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열일곱 살이다. 5 년 전이구나. 5 년 전에도 그는 리젠보다 키가 훌쩍 컸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한동안 무덤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리젠을 바라보았다.

“리젠?”

그녀는 그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음…… 괜찮아?”

리젠이 다소 망설이며 물었다. 카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열일곱 살이면, 그녀가 고모를
잃었을 때보다 어린 나이다. 온갖 감정을 다 누른 무표정을 보며 리젠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부모님 같던 고모를 잃었어.”

카이든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도…… 정말 하루하루가 상실감에 고통스러워도 어떻게든 살더라고.”

리젠은 카이든의 얼굴에 깃든 깊은 슬픔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열일곱 살에 이미 세상을 다 산 표정을


하고 있는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큰 그를 가만히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너는 아메니티에 가서 좋은 친구도 사귈 거고, 또 수사국에도 들어갈 거야.”

카이든은 그녀의 포옹에 눈을 감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고마워.”

그가 한참 동안을 그녀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두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손이 커서


그녀의 두 볼이 한꺼번에 감싸졌다.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얘는 뭐
열일곱 살에 벌써 성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리젠.”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못 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따뜻한 숨이 솜털을


건드리는 것까지 느껴졌다. 들판에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고, 카이든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이마에 꾹 눌러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그의 경건한 입맞춤에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따르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과 현실이 혼동되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또 꿈에 카이든이 나왔다.
분명히 약은 1 회성이라고 했는데?

“……그냥…… 그냥 카이든이 꿈에 나온 건가?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냥 꿈인 걸까? 그냥 꿈이겠지? 밀려오는 엄청난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맨 처음 다니엘과 만난 것은 열세 살 때였다. 약제국에 근무하는 고모, 르엘라는 어린 왕족들의 약물


교육을 맡아 했었다. 왕족들은 필연적으로 늘 약물에 의한 독살을 주의해야 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약물에 대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왕궁에서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이 리젠과 동갑이라며, 르엘라는
리젠을 한껏 꾸며 왕궁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살짝 새침했던 아셰의 태도에 비해 다니엘은 맨 처음 약간 주눅 든 리젠을 만났을 때부터 친절했다.


리젠은 고급진 옷을 입고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왕자님에게 금세 시선을
뺏겨 버렸다. 그녀가 정원을 걷다가 한 번 넘어지자, 다니엘이 직접 일으켜 세워 주기까지 했다. 그 이후
학교에 다니면서 리젠은 다른 또래의 남자애들이 시시해졌다. 지금 왕궁에는 나랑 동갑내기인, 금발
머리의 파란 눈을 가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친절한 왕자님이 산다고!

그 기억 이후, 왕립고등학교에서 열일곱 살 때 처음 만난 다니엘과 아셰는 리젠을 당연히 기억했다.


아셰와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다니엘과도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았던
왕자님은 그녀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수업을 들었다. 꼬박꼬박 왕자님이라고 불렀었는데, 학교에
같이 다니는 이상 이름을 부르며 다른 동급생들처럼 대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어, 어떻게…… 왕자님을…….”

망설이는 리젠에게 열일곱 살의 다니엘이 씩 웃으며 얼굴을 들이 밀었다.

“다니엘. 다. 니. 엘.”

“어어…….”
“얼른 불러 봐.”

리젠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씩 웃고 대답했다.

“다니엘, 앞으로 잘 지내자.”

“좋아, 리젠.”

다니엘이 그녀의 갈색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한다며 뛰어갔다. 리젠은 그 뒷모습을
보며 짝사랑이 시작된 것을 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또래 남자애들과는 다르다며 동경해 왔던
왕자님이 일시적이지만 동급생이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을 안 뺏길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왕립고등학교도,
왕립종합대학도 무조건 연애 금지였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해 볼 여지도 없었지만, 그래도 다니엘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이후 5 년이다. 5 년 동안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그를 좋아해 왔다.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자꾸 카이든이 나오니 요즈음은 카이든 생각도 자주하게 된다. 어젯밤 꿈을 생각하며
조용히 걷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아셰가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발걸음을 멈췄다.

“어떡해! 율법학 과제 안 내고 왔어!”

그녀들은 식당으로 이동 중이었다.

“얼른 다녀와. 식당 자리는 내가 맡고 있을게. 가방도 줘. 빨리 다녀와.”

“고마워! 얼른 올게.”

아셰는 파일을 하나 꺼낸 그녀의 가방을 리젠에게 맡기고 쏜살같이 달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리젠은
가방을 두 개 들고 터벅터벅 식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왜 카이든의 꿈을 꿨을까,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개꿈일까 생각하느라 바빴다. 터덜터덜 식당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아셰의 가방을 누가 번쩍 들었다.

“……어?”

“이거 아셰 가방 아니야?”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 같았다. 다니엘이었다. 그가 아셰의 가방을 받아 들고 씩 웃었다. 하얗고


귀티 나는 얼굴이 생긋 웃었다.

“무거워. 내가 들고 있을게. 식당 가는 거야?”

“응.”

그의 뒤에는 카이든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카이든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셰는 과제 내러 갔어. 금방 식당으로 올 거야.”

“그럼 같이 가자. 우리도 식당 가는 길이니까.”

“그럴까? 오늘 사람들 꽤 많을 거야. 후식이 과일 푸딩이래. 그것도 다섯 종류!”

리젠이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설레는 목소리로 말하자 다니엘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홀린 듯
다니엘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쿡쿡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카이든이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좀 뛰어야 하는 것 아니야? 다섯 종류의 과일 푸딩을 먹으려면 일찍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어차피 아셰도 좀 늦을 텐데.”

“그럼 카이든하고 먼저 배식 줄 서 있어.”

다니엘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식권 사 올 테니까.”

리젠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짝사랑을 하면 뒷모습을 실컷 보게 된다. 뒷모습을


보는 것은 들키지 않는다. 보고 싶을 때까지 볼 수 있다. 그는 누구에게나 다정했고, 리젠에게도
친절했다. 왕자라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들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사실 리젠은 식권을 이미 한 달 전에 대량 구매해 놨지만, 살짝 바꿔치기 해서 다니엘이 사 준 식권은


간직할 속셈이었다. 그녀는 가벼워진 아셰의 가방 무게만큼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아 혼자서 바닥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웃었다.

“……포기하는 게 좋아.”

그녀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든이었다. 카이든도 똑같은 꿈을 꿨을 텐데, 그는 그녀보다는


침착해 보였다.

“뭐, 뭐를?”

“내년이면 유부남이야.”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아니면 다 알겠는데, 뭐.”

리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든은 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마음 접어. 상처만 될걸.”

리젠은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이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가 정혼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아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리젠의 표정을 보며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민망했던 꿈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현실의 무게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정혼자가 있고, 왕위에 관심이 없으니 애인도 두지 않을걸.”

“……알고 있어.”

“알면 포기해. 사랑 같은 것에 눈 뒤집힐 녀석이 아니야.”

“포기하긴 뭘 포기해? 뭘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다니엘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어쩌겠다고?”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뭘 어째?”

이해가 안 된다는 카이든의 표정에 리젠이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좋아하는데 뭘 어쩌겠어? 마음이 안 접히는데 어떡해? 그냥 좋아하는 거지. 혼자만 그런 마음 품고 있는
건 잘못이 아니잖아. 다니엘한테 부담을 준다거나, 욕심을 낸다거나,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냥, 그냥 내
마음을 간직만 하겠다는 거야.”

“……간직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만 해도 행운이지. 다니엘하고 같은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졸업하고, 이러다가 눈에서 멀어지면 멀어지고 나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겠지. 그 전까지는 열심히
기억하고 열심히 좋아할 거야. 이건 다니엘도 상관없는 내 전적인 개인적인 감정이니 걱정하지 마.”

카이든은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저 멀리서 뛰어 오는 아셰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겨우겨우 과제를


내고 왔다며 입을 내미는 아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리젠을 보며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만 하겠다고? 오롯이 자신의 사정이라고? 다니엘도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좋아하면 당연히 함께하고 싶은 것이고, 사정상 그게 안 된다면 얼른 마음을 접는 게 낫지 않나?

그러나 리젠이라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 악바리 리젠 하카트라면 그런 식의 짝사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에게 절대 티를 내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대가가 전혀 없는 짝사랑.

저 멀리서 다니엘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리젠, 오늘도 도서관?”

방과 후, 강의실에서 짐을 정리하며 아셰가 말했다. 왕녀인 아셰는 부서 배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종합


시험을 치지 않았고, 그래서 리젠은 거의 혼자 남아 도서관에서 공부하곤 했다.

“쉬엄쉬엄해. 수석 하려다 몸 다 버리겠어.”

“다음 주만 지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놀 거야. 두고 봐.”

“아까 과제 내러 가다가 사파엘 교수님 만났는데, 엄청 시무룩해 계셨어.”

사파엘은 약제국 연구원이자 왕립마법대학 약초학 교수였다.

“약초학 성적 A+을 받은 상위 다섯 명 중 한 명도 약제국을 지망하지 않는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당황하시더라.”

“다섯 명? 1 등이 나, 2 등이 너, 3 등이 카이든, 4 등이 유진, 5 등이 다니엘이었나? 나랑 카이든이야


수사국 지망이고, 다니엘이랑 너는 왕족이라 어쩔 수 없고, 유진은 행정국 쓴다고 들었어. 진짜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가 봐.”

리젠이야 이미 부서 희망을 예전부터 확고히 했던지라 별생각이 없었지만, 요즈음 학교는 학생들의 부서
지망 때문에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오고갔다. 특히나 성적이 중위권인 학생의 경우 상위권 학생들이
어디를 1 지망으로 썼는지 암암리에 캐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고, 각각의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교수들도
뛰어난 학생들을 자신의 부서에 데리고 오기 위한 작업을 하는 데에 바빴다.

리젠 역시 사파엘에게 약제국으로 오라는 제안을 처음부터 받았다. 약제국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르엘라의 하나뿐인 조카였으며 역시 피가 무서운지 약초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리젠은 뛰어난 학생이지 르엘라만큼의 탁월한 인재는 아니었다.
“그럼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해!”

아셰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 후, 리젠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앉아서 일단 과제를 다 한
뒤에, 천천히 일어나 서고로 향했다. 오늘 하루 종일 궁금한 것이 있었다. 서고에 들어선 그녀는 아무도
없는 종합자료실로 들어갔다.

“2170 년…… 2170 년…….”

꿈이 생생하여 오늘 하루 종일 잊히지 않았다. 이틀 연속 카이든의 꿈을 꾼다는 것도 찝찝했다. 그녀는


종합자료실의 사망 명부를 뒤져 2170 년을 찾아냈다.

“여기 있다.”

2170 년의 기록물은 다른 년도의 기록물보다 압도적으로 두꺼웠다. 그녀는 쌓인 먼지에 콜록콜록 기침을
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4 월 5 일……. 어?”

2170 년 4 월 5 일에 멈춘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4 월 5 일에는 충격적으로 많은 인원이 적혀 있었다.


영주 이상의 사람들만 적어 놓은 명부라 하루에 많아 봤자 두세 명이었는데 4 월 5 일에는 100 명이
넘어갔다.

“아, 이날…….”

다니엘과 윌리엄 태자의 친모였던 스잔나 왕비가 죽은 날이다. 서쪽 땅의 별장인 히람궁의 완공식이 있던
날인데, 왕은 정사가 바빠 왕비가 대표로 갔고 그래서 서쪽 지방 영주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연회에서 불이 나 모두 몰살당했다. 루스 지방 역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카이든의 부모님도 그때 연회에 참여했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는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어머…… 어떡해.”

막상 100 명이 넘는 사람들의 사망 명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하나하나 이름을 짚어 가던


그녀의 손이 ‘알버트 루스’와 ‘나탈리 루스’에서 멈췄다. 그녀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명단을 탁
덮었다.

새삼 카이든이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생각에 리젠의 호흡이 떨렸다.
그녀가 예언자도 아니고, 무슨 꿈속에서 카이든의 부모님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가 어제도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상한데…….”

그녀가 종합자료실을 나오며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분명히 하룻밤이라고 했는데…… 1 회성이라고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았나? 그래서 이틀인가? 서서히


사라지나?”

그럼 오늘 밤은…… 괜찮을까?

“또 너야?”

리젠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메니티에 집이 없는, 지방 출신의 학생들이 지내는 왕립마법


기숙사 방이다. 카이든이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리젠은 숨을 삼켰다. 이불 밖에 나온 카이든의
상체가 탈의 상태였다. 상상은 했지만 잔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그의 몸이 탄탄해서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대 대륙에서는 남자의 몸이 여자의 몸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데 그 이유가 단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 어…… 그러게…….”

그녀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카이든의 기숙사 방인가? 역시 오늘 밤도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방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벽 한쪽에는
교복과 도복, 운동복이 걸려 있었고 책상에는 전공책들이 쌓여 있었다. 리젠은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꿈이고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카이든은 순전히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흑백사진이 꽂힌 액자가 두 개 단정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젊은 부부와 어린 형제가 들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고, 하나는 왕립고등학교 시절 수련회에서 다니엘과
둘이 찍은 사진이었다.

“3 년 전 다니엘이지.”

사진을 보고 있는 리젠을 보며 뒤에 누워 있던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못할 줄 알았는데 다니엘하고는 친해졌어.”

“아…… 그건…….”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다니엘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하니까…….”

“다정? 친절? 그렇게 보이나?”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가 뒤를 돌았다.

“그 자식하고 나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어.”

리젠의 눈을 보던 카이든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힘주어 그녀를 옆에 눕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리젠은 꼼짝 없이 그의 옆에 눕게 되었다.

“……올려다보기 목이 아파서.”

카이든의 말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다니엘의 이야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든은 다니엘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자신이 몰랐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숨을 죽이고 나란히 카이든을 보고 누웠다. 좁은 1 인용 침대에 붙어 누워서 리젠은
그의 숨결마저 느낄 수 있었다.

“같이 속이 문드러진 상태였거든. 내가 상황은 좀 더 나았지. 빌어먹을 왕족이 아니었으니까 애써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서.”

왕립고등학교 입학은 5 월이었다. 4 월 5 일에 그 화재가 났고, 카이든의 부모와 다니엘의 친모가 죽었다.
아직까지 연결하지 못했던 사실에 그녀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둘 다 같은 사건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얼마 되지 않아 같은 학교에 입학한 거구나.

“시간이 지우지 못하는 건 없어서…… 이젠 그런 격렬했던 감정은 다 잊고 차가운 분노만 남은 것


같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마 카이든의 기억 속에 그녀는 항상 교복을 입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침대가 좁아 그녀는 살짝 몸을
움직였는데, 결국엔 카이든의 몸에 밀착하는 결과가 되었다. 리젠은 또다시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었다.

‘이건 감정이 아니야……. 이렇게 잘생긴 남자애랑 이렇게 붙어 있으면 누구나 기분이 이상할 거라고.
그건 카이든도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얘는 무의식이잖아.’

리젠은 재빠르게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리젠의 등을 감쌌다.

“역시 넌 다니엘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고 있네.”

“어?”

“평소 같았으면 네 성격에 난리였을 텐데.”

“난리 치면…….”

리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놔줄 거야?”

“아니.”

그가 천천히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밑을 걸치고 있던 이불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그는 속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중심이 커다랗게 팽창한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양손은 그에게 붙잡혀 침대 옆으로 고정되었다.

‘괜찮아. 꿈이잖아? 어차피 꿈이라고.’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카이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자신의


눈도 저렇게 탁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무게가 적당히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 안 돼…….”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첫 키스라고…….”

“어차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리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꿈이야, 꿈이라고.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은 세차게 뛰고,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하지?

“……다니엘하고는 못할걸.”

그녀의 숨이 헉 하고 멎었다.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놀란 것은, 그의 혀를 확 깨물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꿈이잖아.’

어설프게 되는 합리화 때문에 그녀는 온몸에 힘을 뺐다. 처음 느껴 보는 기분, 처음 느껴 보는 몸의 감각,


처음 느껴 보는 저 몸 깊숙한 간지러움이 계속해서 궁금했다. 사실 친구들과 이런 남녀 간의 정사를 다룬
책이나 그림을 몰래 볼 때에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할 생각을
아예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교복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을 때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이를 훑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녀의 혀를 감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며 천천히 가슴의 둔덕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드는 기대감에 허리를 움찔했다.
사실은, 사실은 그저께 밤에 가슴을 유린하던 그의 손길이 순간순간 기억났다고, 특히나 교실에서 얌전히
수업을 듣고 있을 때에도 그 기억에 혼자 숨이 멎었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술이 밑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희고 매끈한 오른쪽 목에 잠시 머물던 그의 입술은 세게 그 살을


깨물어 잇자국을 내고, 또 세차게 물어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아아……. 아파, 아파.”

리젠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중얼거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붉은 꽃이 크게 피어날 만큼 그의 입술은


그녀의 목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큰 두 손이 점차 내려와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그의 입술은 더 내려와 그녀의 가슴골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교복 치마를
내리는 그의 손길에 리젠이 그의 머리를 감쌌다. 그가 상체를 탈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살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살과 살이 마주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 그녀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누군가와 맨살을 대고 체온을 느끼는 것이 처음이라 배가 간질간질했다.

“아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유두를 머금고, 한참을 혀로 동그랗게 감싸다 부드럽게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가 살짝 튕겨져 오르며 교복 치마가 무릎까지 내려왔다. 그의 한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꿈이잖아, 꿈이잖아…….’

리젠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난 항상 이성적으로만 살았다고…… 꿈에서는 그냥 나 자신을 놔 버려도 되는 거잖아…….’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 부근에서 작은 원을 그렸다. 그녀는 속옷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기분이…….”

리젠이 중얼거렸다.

“기분이?”

카이든이 입술에 그녀의 유두를 물고 반문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여 또 다른 자극으로 간지러웠다.

“……이상해.”

그가 훅 올라와 그녀의 눈에 입 맞췄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골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더한 느낌이 있을 것 같아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카, 카이든…….”

“너도, 너도 원한다고 말해 줘.”


그의 눈이 탁해져 있었다.

“리젠 하카트…… 너도 원한다고.”

그의 손이 그녀의 작은 돌기를 매만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허리가 살짝 튕겨 올라갔다.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찌릿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카이든 루스…… 너…….”

[따르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번쩍 눈을 떴다.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저분하고, 책이 바닥에 멋대로 흩어져 있는 걸


보니 자신의 방이 분명했다. 그녀는 알람시계를 누르며 생생하게 느껴지는 입술의 감촉 때문에 한쪽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재빨리 거울로 오른쪽 목을 확인했지만 역시 거짓말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꿈이었으니까…… 그래, 꿈이었으니까.”

그녀는 숨을 가다듬다가, 엎드려서 베개에 머리를 쾅 박았다.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매일 밤 카이든의 꿈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남자와 단둘이 밀폐된 장소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 꿈속에서 이성을 잃은 채 벌어지는 셈이었다.

“왜…… 왜 하루로 안 끝나는 거야……. 뭐야, 고모…… 이거 뭐냐고.”

리젠이 끙끙거리다가, 갑자기 번개처럼 스치는 기억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실내화도 꿰어 신지 않고


맨발로 황급히 다락방에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 살짝 균형을 잃고 삐끗할 정도로 그녀의 발걸음이
급했다.

“그때…… 그때 분명히…….”

그녀는 다락방에서 다시 르엘라의 노트를 펼쳤다.

“나비잠꽃 100g, 틸다 뿌리 200g, 나그다의 진흙 한 줌, 라타의 발톱 50g, 계약자의 머리카락 한 올…


….”

리젠의 다급한 손이 재료들을 아무렇게나 둔 테이블을 향했다. 그녀는 정리 정돈에는 항상 젬병이었기


때문에, 맨 처음 시약을 만들 때 골라 둔 재료 그대로 테이블에 남아 있었다. 하나하나 확인하던 그녀의
가슴이 툭 떨어졌다.

“니, 니그다의 진흙?”

나그다의 진흙인 줄 알고 넣었던 재료 앞에 야속하게 ‘니그다의 진흙’이 붙어 있었다. 명찰이 너무 낡아


지저분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그다’가 아니라 ‘니그다’였다. 명찰에
흙들이 말라붙어 있는데다가 르엘라가 워낙에 악필이었기 때문에 대충 보면 ‘나그다’라고 읽을 법했다.
어쩐지, 나그다의 진흙은 구하기 몹시 어려운 재료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 어떡해…….”

약초학 우수생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나라도 재료가 잘못되거나 양을 잘못 넣으면 아예 다른 증상이


나타나거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지금 그녀가 나그다의 진흙 대신 니그다의 진흙을 넣어서,
일회성이라는 제한이 사라진 듯했다.

“안 돼……. 어떡하면 좋아…….”


그녀는 머리가 핑 돌아 다락방에 주저앉았다. 해독약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대로 평생 매일 밤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고모, 난…… 어떻게 해야 해…….”

르엘라가 미치기 전, 이런저런 약초를 보여 주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리젠, 모든 약은 해독제와 함께 만들어야 해. 약제학은 인위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리는 것까지 완성으로 친단다. 나는 약이라면 생각한 그대로 거의 다 만들 수 있어. 다만
해독제를 만들지 못해서 상용화를 시킬 수 없을 뿐이야. 그만큼 해독제를 만드는 것이 약을 제조하는
것만큼 힘들어.’

이런 대단한 노트가 노트로만 남아 있는 이유가 있었다. 르엘라는 엄청난 약들을 만들어 낼 아이디어가
너무나 풍부했지만 해독제까지 다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독제가 없는 약들만 적어 놓은
노트임에 틀림없었다.

르엘라도 못한걸, 그것도 내가 멋대로 바꿔 버린 잘못된 시약의 해독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리젠은 밀려오는 절망감에 머리를 감싸 안았다.

리젠이 저녁에 체력단련실으로 온 것은 단 하루뿐이었다. 카이든은 샌드백을 치며 자신이 은근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에 운동하니까 좋다며 중얼거리는 것을 분명히 들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는다. 그는 몸에 힘이 다 빠질 정도로 움직이고 나서 털썩 벽에 주저앉았다. 3 일 연속
리젠의 꿈을 꾸었다.

종종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다. 가장 많이 꾸는 꿈은 부모님 묘지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수도 아메니티에


오던 날이다. 그저께도 그때의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게 리젠이 나타났다. 꿈이어서 17 살의 그도 리젠을
알아보았다. 리젠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토닥여 주었다.

아무도 열일곱의 카이든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루스 영지는 한순간에 주인을 잃었고, 형은 열아홉의
나이에 영지를 떠맡게 되었다. 모두들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열일곱의 소년을
위로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리젠이 나타나 그를 안아 주다니. 그 위로가 왠지
벅차서 그는 그녀의 이마에 깊게 입 맞추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젯밤에도 또 그녀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욕구불만인가 하였다. 여자를 안는 꿈은


자연스럽게 가끔씩 꾸어 왔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인 대상이 생생하게 자꾸만 나타나는 경우는
없었다.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애라고 생각했던 리젠은 어젯밤 꿈에서는 거의 말이 없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리젠이 자꾸 눈에 보였다. 그녀는 밝고 명랑했지만 친구가 많지는 않았고, 모든


수업에 열심히 집중했으며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심지어 답이 없는 짝사랑까지 열심히
하는 여자애였다. 그는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조금 이르게 체력단련실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걸음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미 늦은 밤, 도서관에 띄엄띄엄 앉아 있는 학생들 중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보였다.

“카, 카이든?”

카이든이 아무 자리에나 앉는데, 여학생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도서관에는 웬일이야?”

그녀의 속삭임에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보통 도서관에는 잘 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대충


듣는 것만으로도 성적은 잘 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여학생 뒤로 다른 여학생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냥.”

그는 대충 대답하고 고개를 숙여 책을 꺼냈다. 여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키득대기


시작했다. 공부도 잘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무예가 뛰어난 그는 얼굴까지 남자답게 잘생겼기
때문에 여학생들에게서 항상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5 년 동안 한 번도 여자에게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 일 동안 꿈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한
여자아이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가 갸웃하며 늘씬하게 뻗은 팔이 작은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흰색 교복


블라우스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카이든은 얼굴을 한 번 쓸었다. 그녀의 옆에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가 다 약초학 책들이었다.

‘시험 범위가 아닌 책들인데…….’

시험 범위를 훌쩍 벗어난 심화 책들이었다. 고모가 그렇게 약제국에서 탁월한 연구원이었다는데 그 핏줄을


이어받았는지 그녀는 약초학에서 우수함을 보였다. 물론 카이든은 가장 못하는 과목이 약초학이었는데,
외울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카이든이 도서관에 온지도 모르고, 그녀는 열심히 서고에서 잔뜩 가져온 약초학 책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지만, 꿈이 연결되는 시약을 언급한 문구조차 못 찾았다. 대다수의 서적이 모두 모여 있는
왕립마법대학 도서관에 없다면 다른 서고에 가 볼 필요조차 없었다. 종합 시험 준비도 미루고 하루 종일
책을 찾아봤지만 보람이 없었다. 도서관이 마감 시간이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그녀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에는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열 명 내외였는데


오늘은 서른 명이 넘게 있었다. 게다가 거의 다 여자였다. 그녀의 무심한 눈이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닿았다. 카이든이었다.

‘카이든이 도서관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리젠은 화들짝 놀라 가방을 재빨리 챙겨 도서관 문을 나섰다. 그제야 여학생들이 왜 그렇게 많이 몰려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들 카이든을 보러 몰려온 것이다. 카이든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꽤 좋았는데,
그동안은 다니엘에게 정신이 팔려 몰랐지만 꿈속에서 가까이 보고 나니 왜 그렇게 카이든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무뚝뚝하고 다소 건방진 면이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보듬어 주고 싶은 면도 있다. 왠지 자꾸 보니까 눈도 살짝 우수에 차 있는 것 같고, 검은색 머리카락도
왠지 시크해 보이는 것 같고.

“무슨 미친 생각이야, 리젠 하카트.”

리젠은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더 도서관을 뒤져 봐야 하겠지만, 만일


끝까지 해독제에 대한 단서를 못 찾으면 어떡하지? 결국은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지기만 했다.

왕립마법대학의 서고로 해결이 안 된다면, 시약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숨이 안정되셨으니 이제 푹 주무시면 당분간 괜찮으실 겁니다.”


아메탄의 23 대 왕, 제펠탄은 가느다란 숨을 고르며 누워 있었다. 어의의 침착한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나는 전하의 옆에 있겠다.”

왕비인 테스티가 도도하게 앉아 말했다. 제펠탄의 총애를 여전히 한 몸에 받고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늘씬한 여자였다. 원칙대로라면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제펠탄이 태자 시절부터 연인
관계였던 테스티를 변함없이 사랑했던 제펠탄은 온갖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시죠. 그러면 저희들은 물러나겠습니다.”

윌리엄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제펠탄의 또 다른 후궁인 샤틴은 감기를
핑계로 오지 않았지만, 테스티의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 때문에 거의 왕궁의 꽃병 수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연무장에 가겠다.”

왕의 침실을 나오자마자 테스티의 유일한 아들, 루벤이 선언하듯 말하고 그들과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쪽 복도로 걸어갔다. 그는 윌리엄과 다니엘, 그리고 아셰와 평소에도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윌리엄은 천천히 자신의 궁으로 걸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요새 이런 일이 느는군. 아바마마의 병환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형이 워낙에 정사를 잘 돌보니 다행이지.”

다니엘이 듬직한 형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태자인 윌리엄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며 거의
대다수의 정사를 보고 있었다. 윌리엄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좋아 훌륭한 왕의 재목이라
평가되었는데, 과연 왕의 빈자리에 혼란이 없도록 꼼꼼하고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이번에 세금의 자유도를 높인 거, 평가가 진짜 좋아. 학교에서 다들 칭찬하고 있어.”

아셰가 부드럽게 동의하며 말했다.

“그럼 나도 엄마한테 가 봐야겠다! 아마 직접 못 왔어도 궁금해하시고 계실 거야. 윌리엄 오라버니는


고생하시고, 다니엘, 내일 봐!”

길고 곧게 뻗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셰가 복도를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학교와는 달리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학교에서만큼은 일반인처럼 휘젓고 살 수 있었지만, 왕궁에서는 그저 힘없는 후궁의
딸일 뿐이었다. 샤틴은 외국에서 외교 목적으로 얻은 후궁으로, 제펠탄과는 그다지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은 것 같았다.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답게 샤틴은 거의 외부에 나오지 않았고, 딸인 아셰만
참새처럼 왔다 갔다 하며 이곳저곳의 소식을 물어다 줄 뿐이었다.

그래서 복도에는 다니엘과 윌리엄만 남게 되었다. 전 왕비 스잔나의 소생인, 배가 같은 유일한 형제였다.

“형, 힘내. 다 예상한 시기였잖아.”

다니엘은 윌리엄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말했다. 둘 다 예상하고 있었다. 왕은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다.


왕조가 시작한 뒤 계속해서 반복하여 온 일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왕이 죽고 그의 후계자가 왕이 된다.
윌리엄은 장남이자 적통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군의 재목이라 칭송받아 왔기 때문에 안정된
후계자였다.

“물론 테스티가…… 얌전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을 거야.


내가 힘이 되어 줄게. 제국의 황녀가 오면 그것만으로도 큰 상징이 될 거야.”
테스티는 정치적인 여자여서, 내각 관료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태후가 된 그녀도
문제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바가 짐작이 가기 때문에 그 또한 문제가 됐다. 모든 후궁이 꿈꾸는 것,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 게다가 윌리엄과 루벤은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루벤파 귀족들의
수가 상당했다.

지금 루벤 역시 후궁의 자식에서 왕비의 적통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계승 2 위이다. 윌리엄이


버티고 있는 한 아무런 정당성이 없었지만. 왠지 쉽지 않을 것 같아 다니엘은 일찌감치 제국의 황녀로부터
결혼 제안을 받았을 때 바로 승낙했다. 아무리 아메탄이 독립된 왕국이라 해도 군신의 예를 맺은 제국의
눈치는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이 되면…….”

다니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재조사해 줘.”

“…….”

“알잖아. 서쪽 별궁의 화재.”

전 왕비 스잔나는 서쪽 별궁의 연회에 갔다가 화재로 죽었다. 1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 사건은 말 그대로 대참사였다. 그러나 아주 괴이쩍은 부분들이 많았는데, 왕은 더
이상의 조사를 멈춘 채 테스티를 왕비로 앉혔다. 이 일련의 일들로 이익을 얻은 사람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의심은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렵겠지만…….”

다니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희생자들이 많아. 나도 마찬가지의 마음이고.”

“그래.”

윌리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바마마가 조금만 더 버텨 줬으면 좋겠군.”

다니엘과 똑같이 닮은 그의 파란색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너와 아셰가 졸업하고,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왕궁의 조용한 밤이 깊어 갔다. 왕의 침실에서는 윌리엄과 같은 어조로 테스티가 거칠해진 제펠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아직 안 됩니다…….”

리젠은 며칠째 방과 후가 되자마자 도서관에 달려가 모든 약초학 책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에 빠지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매일 밤 그녀는 카이든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숨을 곳이
있어 보이는 공간이면 밤새 숨어서 카이든의 눈에 띄지 않았고, 숨을 곳이 없어 보이거나 처음부터
카이든과 붙어 있게 된다면 꿈이라는 이유만으로 점차 자신을 놓아 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점차
대담해져서 먼저 입을 맞추거나 그의 단단한 등근육을 스스로 만져 보곤 했다.
‘욕구 불만도 아니고, 진짜 뭐 하는 짓이야. 리젠, 너 정말 추하다.’

리젠은 눈을 문지르며 두꺼운 약초학 사전에 머리를 박았다. 정말 이러다가 정신 분열이라도 겪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눈은 다니엘을 좇는데, 밤마다 꿈에서는 카이든을 만난다.

‘이게 다 카이든 때문이지. 무의식이 뭐 그렇게 변태 같아서, 조금만 붙어 있어도 그 난리야?’

그녀는 입을 삐죽대 보았지만, 그 나이의 혈기 왕성한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았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꿈속의 자신이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리젠 하카트!”

조용한 도서관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리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숨을 헉헉대며 카이든이 무릎을 짚고 어느새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너…….”

리젠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분노와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댔으니 도서관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눈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리젠은 심장이 쿵 떨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설마 들켰나?

얼음처럼 얼어 있는 그녀의 앞으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흰색 교복 블라우스가


반쯤 땀에 젖어 있었다. 답답한지 넥타이를 살짝 푸르며 그가 리젠이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와
책상을 짚었다.

“카, 카, 카이든…… 지, 진정하고…….”

“어째서 약제국을 썼지?”

침을 꼴깍 삼키며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자리에도 못 일어나고 있던 리젠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수사국이 1 지망이라고 했잖아. 왜 약제국을 1 지망으로 썼어?”

“그, 그,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리젠은 천천히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얕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들킬 리가 없지.


그제야 도서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것을 느낀 리젠이 벌떡 일어나 그의 팔목을 잡았다.

“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

리젠의 단호한 말에 카이든도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따라 나섰다. 리젠은 그의 팔을
끌고 성큼성큼 걸어가 도서관 앞 분수대에 섰다. 시초왕의 거대한 동상이 물을 뿜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저녁, 바람이 기분 좋게 한 번 불자 낙엽이 춤을 추며 떨어졌다.

“내가 약제국을 쓴 게 뭐 어떻다고 이 난리야?”

리젠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부루퉁하게 물었다. 카이든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내 팔 좀 놓을래?”

“아, 미안.”
그녀가 여전히 잡고 있던 그의 팔목을 흠칫 하며 놓았다. 매우 부자연스럽게 그들의 손이 떨어지고,
카이든은 다소 어색한지 두 손을 교복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리젠은 순간 꿈을 꾸나 싶었다. 매일 밤 꿈속에 함께 있다 보니 이제는 단둘이 있으면 꿈만 같았다.

“나는 네가 수사국을 쓸 줄 알았는데.”

카이든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약제국을 쓴 거야?”

“응.”

리젠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왜라니?”

“넌 약제국은 전혀 생각도 안 한다고 들었어. 3 지망 안에도 없다고 분명히 그랬다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약제국이야? 5 년 내내 수사국 지망이다가 일주일도 안 남은 기간에 약제국을 들어간다는 게 말이
돼?”

“사람 적성이야 바뀌는 거잖아. 르엘라 하카트 몰라? 우리 고모, 고모의 뒤를 이어 볼까 해서 사실은
예전부터 고민이었어.”

“거짓말.”

카이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파엘 교수님이 네게 아무리 약제국을 권해도 고모의 재능은 못 따라간다며 단칼에 거절했던 게 너야.
근데 이제 와서 고모의 뒤를 잇겠다고?”

“너 참 이상하다.”

리젠이 팔짱을 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속마음을 감추고 도리어 화를 내는 것을


택한 리젠은 새초롬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수사국 안 쓰면, 네 수석이 확정되는 거잖아? 근데 왜 좋아는 못할망정 추궁하듯이 이래?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피엔딩이잖아. 너는 수사국 수석, 나는 약제국 수석. 둘 다 윈윈이라고 볼
수 있지.”

“리젠 하카트.”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국 수석을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너와 승부를 겨뤄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그동안


우리는 성적으로 엎치락뒤치락만 했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련 한번 안 해 봤으니까.”

거짓말. 첫날밤 꿈에, 당연히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면서 거만한 모습을 보일 땐 언제고. 리젠은


튀어나오려는 빈정거림을 꾹 누르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승부를 떠나서 함께 근무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카이든이 시선을 돌렸다. 머쓱한 것 같았다. 그가 괜히 발끝으로 땅을 쿡쿡 찼다.

“너처럼 에너지가 넘치고…… 삶을 열심히 사는 애랑 동료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리젠은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렵한 턱 선과 쭉 뻗은 콧날이 꿈에서 본 것처럼 조각상 같다.
그의 무의식은 그녀와 붙어 있으면 무조건 덮치기 일쑤였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이처럼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다. 그녀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는 그가 낯설면서도 새로워서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수사국으로 와.”

“……카이든.”

“나한테도……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은데.”

“미안해.”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시약의 해독제를 얼른 만들어 내려면 왕국 최고의 시약


연구기관인 약제국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약제국에서 하는 것이 약초를 연구하고 온갖 시약을 만들어
내는 일이니까,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도 잔뜩 있다고 들었으니까 열심히 하면 해독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약제국의 사람들은 거의 다 르엘라를 기억하고 있으므로 지내기도 편하고
흔치 않은 약초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하고 싶은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그동안 열심히 책을 뒤지며 안 사실인데, 이렇게 유효 기일이 영원에 가까운 시약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왕국 여성들이 많이 복용하는 시약 중 하루 동안 피부가 뽀얘지는 약이
있는데, 지속적으로 효과를 주는 약을 계속 복용하게 되면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지속해서 몸에 효과를
나타내는 유효 기일이 없는 약들은 해독제를 1 년 안에 마시지 못하면 수명을 갉아 먹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다. 리젠은 그녀가 카이든에게 먹인 시약이 카이든의 수명을 갉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너무 미안한 일이다. 반드시 1 년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카이든에게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와 꿈속에서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또 그리고 나서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꿈에서 만날 텐데 뒷감당을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해독제가 만들어지면 그때 말할지라도,
지금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제국을 갈 수밖에 없거든. 너는……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리젠은 살짝 웃고, 터벅터벅 걸어 다시 도서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사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가장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가 벌인 일이고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다. 몇 년이 걸리든, 아니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녀의 손으로 시작한 일이니
그녀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리젠.”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가는 팔을 잡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 뭐지?”

“응?”

“너처럼,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갑자기 전혀 열의 없던 진로를 선택하니까…….”


“그게 왜?”

“……네게서 생기가 사라질까 봐.”

리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나?”

“응, 없어.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야. 최선을 다할 거니까 걱정 마.”

리젠은 씩 웃었다. 그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길이 갈라진 라이벌으로서, 그녀의


생기를 보기 좋아했던 동급생으로서, 그리고 며칠간 꿈속에서 나타난 이상한 상대로서. 그리고 그는 그녀
때문에 수명이 줄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려 오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태어나면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해. 아빠는 나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고모에게 떠맡기고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나는 이미 탄생부터 두 개의 삶을 망가트린 애야.”

카이든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왜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고모가 그랬어. 부끄럽지 않게,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희생시키고 태어났으니까. 쉽지 않은 삶이니까 반드시 낭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만큼
잘 살겠다고. 그러니까 난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약제국 가서도 엄청 열심히 살 거라고.
수사국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

아마 꿈에서 본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가깝게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카이든도 그러니까 자신에게 일부러
이렇게 말도 걸고 있는 것이겠지. 게다가 자신은 열일곱의 카이든을 보았다. 리젠은 그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하나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수사국이랑 약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래. 뭐 온갖 범죄에 약물은 기본이니 당연한 거겠지.
우리 각자 다른 부서에서 좋은 동료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러니 자극이 필요하면 약제국의 동료를 찾아.”

“……그래.”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니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선선한
밤에 서로의 진로를 앞두고 카이든과 한 대화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이든, 네게도
수사국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리젠은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카이든 루스, 수사국에서 너도……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랄게.”

늦게까지 학생의 신분이었던 그들이 교복을 벗고 왕국 직속 기관의 일원으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반쯤은 설렜지만 반쯤은 불안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한 시간과 아직 정착하지 못한 마음이 그들에게 작은
유대감을 주었다. 공교롭게도 각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모두 왕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분을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바보야.”

카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리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뭐…… 라고? 바보? 너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그랬니?”


“응.”

“잘난 척은 아닌데…… 나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거든?”

“잘 되지도 않을 사람을 열심히 좋아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데 바보 아니냐?”

“어이가 없네.”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뭐든지 똑 부러지게 해내는 리젠에게는 항상 ‘악바리’같은 별명이 붙었었다.


아마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성적에 부담을 갖지 않는 왕족인 아셰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멍청하다거나 바보 같다거나 하는 형용사와 거리가 멀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기분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허허 웃고 말았다.

“혹시나 약제국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네 일이라면 내가 무조건 봐준다.”

리젠은 주먹을 말아 쥐고 가볍게 그의 어깨를 친 뒤, 다시 뒤를 돌아 춤추듯 도서관 안으로 사라졌다.


카이든의 눈이 그녀의 희고 매끈한 오른쪽 목덜미와 날씬한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고모의 손에
컸고, 그 고모마저도 미쳐서 일찍 죽었고, 그래서 혼자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날 저녁,
체력단련실에서 지칠 때까지 몸을 움직이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가 감명 깊게 다가왔던
것은 그녀에게 짐작하지 못할 슬픔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상한 꿈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만 탐하느라 바빴지만,
현실에서 눈에 담기 시작한 그녀는 삶의 모든 어둠을 딛고 씩씩하게 살아 나가는 당찬 여자아이였다. 그는
그러지 못했다. 슬픈 그림자를 뒤에 두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무뚝뚝하기만 했다. 밝고 다정한 다니엘을
보며 ‘너는 왕족이니까’라고 합리화만 했다. 카이든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이후, 졸업 시험과 배서 부정은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었다. 카이든은 수사국 수석으로, 리젠은


약제국 수석으로 입사가 결정됐다. 졸업식 하루 전날, 예행연습에서 그들은 학사모를 쓰고 줄을 맞춰
졸업장과 동시에 부서 배정을 받는 연습을 했다.

‘꿈이구나.’

리젠은 둘째 날 밤 이후로는 항상 카이든의 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꿈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졸업식이었다. 학장 교수님이 지루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 예행연습을 한 것처럼
리젠과 카이든은 다른 부서 수석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나면 한 명씩 앞으로 나가 부상과
함께 임명장을 받을 것이다.

수사국인 카이든이 가장 먼저였고, 그다음이 약제국인 리젠이었다. 그녀 뒤로 행정국의 유진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리젠은 교복 위에 걸쳐 입은 헐렁하고 큰 학위복의 소매를 애써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은 부서 배정 및 수석대표 임명장 수여가 있겠습니다. 먼저, 수사국 카이든 루스.”

카이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리젠은 초조하게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가 무대


옆에서 기다렸다. 수사국 임명장을 읽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다음, 약제국 리젠 하카트.”

리젠은 예행연습 때 연습한대로 당당히 걸어 학장 앞에 섰다. 전교생과 각 부서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성적과 평소 학업 태도, 그리고 형식적인 약제국 업무에 대한 소개와 임명한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그녀는 학장 교수님께 인사하고 임명장을 받아 뒤로 돈 뒤 전교생에게도 인사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무대 뒤로 돌아가는데, 단단한 손이 그녀를 확 낚아챘다.

“카, 카이든?”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무대 뒤쪽의 판넬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리젠이 눈을 치켜뜨며 속삭였다.

“카이든! 뭐 하는 거야?”

“마지막이잖아.”

“어?”

“우리, 내일부터는 다른 소속이야.”

“그, 그렇지…….”

“이렇게 같은 옷을 입는 것도 마지막이야.”

“제발, 카이든!”

그녀가 판넬 뒤로 몸을 붙이며 말했다.

“이러다가 남들이 오해하면 어떡해? 할 얘기 있으면 나가서 하자.”

“바보야, 이 으슥한 곳을 누가 보겠어?”

“그래도 바로 무대 앞에는 전교생이 있고, 남은 대표들도 저 뒤로 지나갈 텐데!”

“아무도 안 와.”

카이든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리젠은 불안해서 심장이 뛰었다.
무대에서는 유진이 행정국 임명장을 받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헐렁한 리젠의 학위복으로 들어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리젠.”

“응? 카이든, 제발 이것 좀 놔. 나 무서워.”

“함께 수사국에 가고 싶었는데.”

그의 손이 학위복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능숙하게 그녀의 속옷을 끌어 올린 그가
리젠의 팔을 뒤로 잡아 밀착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카이든!”

“쉿.”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진이 올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학위복 안의 교복이 다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발자국은 무심하게 무대 뒤를 지나가 멀어졌다.

‘꿈이야, 꿈이잖아.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 괜찮아.’


리젠은 몸의 긴장을 풀고 카이든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다가 갑작스럽게 깊숙이 들어왔다. 그녀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낀 그가 그녀의 유두를 살짝살짝 꼬집었다. 판넬이 점차 기울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이 점차 내려와 교복 치마를 올렸다. 그 사이에 다른 수석대표의 발걸음이 무심히 다가왔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또다시 무대 뒤를 지나가며 멀어졌다. 분명히 누군가가 볼까 봐 너무 불안한데, 그만큼
짜릿하기도 했다. 리젠은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벽에 가로막혔고, 카이든은 더 그녀의 몸에 밀착하여
몸을 숨겼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속옷 속으로 들어와 곡선을 따라 움직였다.

“젖었네?”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젠은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밖에서, 남들은
졸업식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너무 외설적이잖아. 카이든, 이 변태 자식. 내일 진짜 있을
졸업식에서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은데…….

“여기야?”

충분히 그녀의 몸을 알고 있을 텐데, 그가 장난스럽게 다른 곳을 건드리며 물었다. 리젠이 울상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여기?”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작은 돌기를 스쳐 지나가며 바로 옆을 쓰다듬었다. 리젠의 여성 주변에서


장난스럽게 원을 그리는 그의 손길에 신음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 명의 대표들이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조, 조금 위…….”

리젠이 반쯤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그가 씩 웃으며 천천히 그의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돌기를 살살


문지르다가 진동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녀가 거의 그의 몸에 갇히다시피 해도 밀려오는 쾌감에
발뒤꿈치를 들었다.

“아…….”

그때였다. 심장이 툭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 없어? 대체 얘네는 왜 안 오는 거야? 이 길로 온다며?”

아셰의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자국이 오도도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든의 한쪽 손이
다급하게 신음 소리를 흘리던 리젠의 입을 막았다.

“그러게. 엇갈렸나?”

다니엘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든이 그녀의 돌기를
원을 그리며 세게 문질렀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쾌감에 그녀는 울 것 같았다. 몸 전체로 느껴져 오는
압박, 그 와중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카이든의 손, 학위복 속에 다 풀어헤쳐진 교복 속의 가슴이 카이든의
단단한 가슴과 밀착하여 흔들렸다.

“여기에는 없나? 그런데 왜 이렇게 기다려도 안 와?”

“……으으…….”
그녀는 필사적으로 신음 소리를 참았다. 아무리 꿈이어도 이런 걸 아셰와 다니엘에게 보여 주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꿈이어도 싫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몸은 얄궂게도 카이든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에 반응하고 있었다. 머리를 쨍하고 울리는 쾌감이 지나가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여성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손가락의 빠른 왕복 운동에 그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시 가 보자. 임명장 받은 애들 모여 있는 데 있겠지.”

다니엘의 말에 그들의 발자국이 멀어졌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작은 한숨을 쉬었다.
카이든은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다시 그녀의 학위복에 넣어 유두를 두 손가락 사이에 넣었다.
양쪽으로 주어지는 자극에 리젠은 참기 힘든 신음을 토해 냈다.

“리젠.”

잔뜩 낮아진 카이든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널 갖고 싶어.”

“아, 안…….”

“계속 좋은 동료가 되어 준다고 약속했어, 바보야.”

리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리울 거야.”

“뭐, 뭐가?”

“네가 있던 이 학교가.”

카이든이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한 번 입을 맞췄다.

“너랑 1, 2 등을 다투던 그 기억이.”

자꾸만 묵직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때문에 리젠은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열심히 수업을 듣던 네 뒷모습이.”

“그만…….”

“그리고 너, 운동할 때도 정말 예뻐. 사실은…….”

[따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꿈꾸듯 일어났다. 눈을 쉽게 뜨지 못했다. 마지막 카이든의 말들은 다 진심일까? 아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카이든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저 꿈속에서 무의식이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꿈에
어떤 여자가 나오더라도 그의 무의식은 이렇게 육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리젠의 몸을 언제나
원했으나 정말로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거의 대다수의 말들이 좋은 라이벌이자 동료로
남자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럼 뭐 어때.”

리젠이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제 마지막인데.”
정말로 졸업식이다. 이제 그녀와 그는 다른 부서에 소속되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볼 일이 없어진다.
꿈속의 카이든이 한 말처럼, 그녀도 뭔가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리울 것 같아.”

물론 다니엘이 그리울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니엘은 동급생이 아니라 모셔야 하는 왕자가 된다. 더
이상 다니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곧 국혼도 빠르게 추진될 것이다. 상대는 제국의 황녀라고 들었다.
그래도 한때나마 짝사랑했던 남자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것은 좋은 추억이다. 그러나, 그 옆의 얄미웠던
라이벌도 더불어 그리울 것 같았다.

꿈과는 다르게 졸업식은 무사히 아무 일도 없이 치러졌고, 그다음 날부터 그들은 부서 배정을 받아 근무가
시작되었다.

2. 의심의 기간

“아직 뭘 조사해 볼 수조차 없어.”

카이든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잠도 제대로 못 자. 수사국이 일이 많다더니 진짜였어. 훈련도 진짜 장난 아니야.”

“당연하겠지.”

그의 옆에서, 다니엘이 느긋하게 웃었다. 그들은 지금 다니엘의 별궁에 있는 정원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카이든이 지금 퇴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 만남도 일주일 만에
성사된 것이었다. 카이든이 워낙에 바빴기 때문이다.

“원래 수석은 승진 빨리 시키려고 일도 몰아주잖아.”

“그러니까. 아메탄 왕국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어디 작은 지방 영주 아들이


바람난 것까지.”

별로 징징거림이 없는 카이든인데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가 보다. 다니엘이 쿡쿡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수사국 신입인 카이든은 입사한 한 달 동안 잠을 50 시간도 못 잔 것 같다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이 어느 커다란 음모의 일부일 수 있으니…… 다 정리해 놔야지.”

“마음 천천히 먹어.”

다니엘이 씩 웃었다.

“우리는 6 년 가까이 기다렸어. 조바심 갖지 말자.”

6 년 전, 서쪽 지방 히람궁에서 일어난 엄청난 화재에서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카이든은 그


화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국에 들어간 것이다. 다니엘의 진심 어린 다독임에 카이든은 한숨을 쉬며
피곤한 눈을 비볐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냐?”

“제국에서 아직 상대가 안 정해진 모양이야. 황제의 오누이인 황녀가 자그마치 12 명이라고 하니…… 7
황녀 아니면 8 황녀라는데, 또 6 황녀라는 말도 있고. 그래도 다음 달에는 식을 올릴 거야.”

“아셰는?”

“걔는 더 복잡해. 원래 사막 국가인 한스팀 왕국에 갈 예정이었는데, 지금 제국에서 동시에 혼담이 또


들어왔어.”

“……제국에서 또?”

“황제가 아직 정정한 모양이야. 심지어 황제의 비로.”

카이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제국의 황제는 이미 황비가 있으므로 후궁 자리일 것이다. 아무리 후궁


자리라고 해도, 아셰가 후궁의 딸인데다가 아무런 배경도 없는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조건이다. 제국의
후궁이라면 한스팀 왕국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마 아셰는 그 자리에 가면 윌리엄과도 동등해진 위치로
대접받을지 모른다.

“성사된다면 아마 내 결혼은 좀 미뤄질 거야. 아무래도 황제의 국혼에는 비할 바가 아니니까.”

“그렇군.”

카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연애라도 시작하지 그래. 잘못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걸. 수사국엔 그렇게 독신 부장님이
많다며. 일에 치여 여자를 못 만나서.”

“아직은 별생각 없어.”

“한창 나이에 왕립학교 다닌다고 여자 못 만나, 입사 후에는 바빠서 여자 못 만나. 너 그러다가 총각


귀신으로 죽겠다.”

“잘 시간도 없어. 여자는 무슨.”

“참한 귀족 영애 하나 소개시켜 줘?”

“난 간다. 잠이라도 자야겠어.”

카이든은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다니엘이라도 꿈에 리젠이 나오고, 그녀를 자신이 미친 듯이 탐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요즈음은 밤과 낮이 바뀌어서 그런지, 쪽잠을 자서 그런지 옛날처럼 잘 때마다
나타나지는 않지만.

“다니엘.”

“왜?”

키득거리던 다니엘을 보며 카이든이 무언가를 휙 던졌다. 몇 개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였다.

“뭐야, 이건?”

다니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렇게 엄청난 화재를 인위적으로 낼 수 있는 건 마법사뿐일 거야. 그 정도 화재라면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테고. 이건 그 이후 1 년 안에 죽은 마법사들 명단이야. 특이 사항은 여기 동그라미 친 마법사들이 모두
같은 증상으로 죽었다는 거야. 마력 역류에 의한 급사.”

그가 메모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왕궁의 기록은 아무리 수사국이어도 내가 못 봐. 이 마법사들의 왕궁 출입 기록이나 연결 고리를 찾아봐


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현 왕비 테스티가 그 화재를 일으켰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추측이었다. 그 화재로 인해 지금 왕비로


올라올 수 있었으니. 다니엘이 씩 웃었다.

“역시 카이든. 죽는소리하더니 할 건 다 하고 있었구나.”

“간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다니엘이 카이든의 등을 툭 치며 가볍게 말했다.

“이 정도 능력이면 여자도 잘 만나겠어.”

리젠은 출근 전에 아셰의 궁에 들렀다. 다과를 가져오라며 분주한 아셰의 옆에서 리젠은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어제 새벽에는 카이든과 꿈으로 연결이 되었다. 입사를 하고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꿈 연결은 자신과 카이든이 둘 다 잠들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수사국에 들어간
카이든의 수면 시간이 뒤죽박죽이었으므로 한참 동안이나 꿈에서 못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제는 꿈에서 카이든을 만났고, 삼 일 만에 집에 들어왔다는 카이든의 불만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연구가 주목적이라 언제나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약제국은 삶의 질이 좋은
편이었다.

“새로 우린 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맛이 좋을 거야. 엄청 비싼 거거든.”

“지금도 이른데, 아침 일찍부터 누가 다녀가셨나요?”

“윌리엄 오라버니 혼담 때문에.”

“왕녀님, 이 정도면 됩니다. 너무 많아요.”

“아, 진짜!”

아셰가 도끼눈을 떴다.

“정말 왜 이래? 둘만 있을 땐 그냥 반말 쓰고 이름 부르라니까.”

“체통 떨어지십니다. 그러지 마세요.”

“하여간, 이런 건 르엘라랑 똑같아.”

아셰가 볼을 부풀리며 짜증을 냈다. 달콤한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르엘라도 절대 나를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제자라고 해도.”

“당연한 겁니다. 나중에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하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요.”


리젠이 어른스럽게 타이르며 말했다.

“졸업식에서도 단단히 교육받았잖아요. 왕족들과 반드시 군신간의 예의를 지키라고. 제 생각에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싫은데.”

아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리젠 역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존대를 쓰니 어느 정도 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씁쓸함을 감추고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여기 부탁하신 책.”

“고마워, 잘 볼게.”

“약초학을 좋아하신다는 건 알았지만, 웬 제국의 약초 책인가요?”

아셰는 르엘라에게 학교에 오기 전, 어린 시절에 약초학을 배웠다. 왕족으로서 약초학은 당연히 배워야
할 교육이다. 르엘라가 얼마나 재미있게 잘 가르쳤는지, 다니엘과 아셰는 학교에 와서도 약초학 성적이
다른 과목 성적보다 좋았다. 특히 아셰는 자신이 왕녀만 아니었다면 약제국에 들어갔을 것이라면서 늘
아쉬워하곤 했다.

“나 제국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리젠의 눈이 커졌다.

“제국?”

“혼담이 들어왔어. 황제의 아홉 번째 비 자리. 아까 윌리엄은 그것 때문에 온 거야. 혼담이 들어온 지는


꽤 됐는데, 내가 의사를 밝히지 않았었거든.”

“세상에.”

리젠이 숨을 들이켜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이라면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메탄
왕국 또한 공물을 바치고 있는 나라다. 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화려하고 대단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윌리엄은 내가 갔으면 하는 눈치야.”

“당연하겠죠.”

리젠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게 보통 자리인가요? 만일 아드님이라도 낳으시면…… 그러다가 그가 황제라도 되시면…….”

“리젠, 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약소국에서 온 후궁이 무슨 힘이 있겠어? 우리 엄마 봐. 테스티 눈에 띌까 봐 궁에 갇혀 살잖아.


외국에서 와서 친구도 없고. 게다가 황제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그래도 아메탄과 제국이 같나요? 게다가 혹시라도 황제가 아셰를 총애하게 된다면…… 정말 비할 바 없는
권력을 갖게 되시는 거예요.”
“윌리엄 생각이 바로 그거인 것 같아. 뭐, 나야 그렇게 해서 윌리엄의 힘이 되어 준다면 백 번이라도
가겠지만.”

“윌리엄의 힘이요?”

“테스티의 아들이 왕이 되는 꼴은 못 봐. 테스티가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데.”

“에이, 윌리엄 태자님이 강건하신데 무슨 그런 불손한 말씀을 하세요?”

“리젠, 왕위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악해지는데. 지금도 사실 윌리엄은 얼음길을 걷는 것 같을걸. 왕비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치적 노선이 달라서 루벤의 세력도 굉장히 강력해.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흠을 잡히면 정말 폐위당할 수도 있어.”

리젠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아셰는 다도에도 능해서, 그녀가 직접 끓여 주는 차는


정말로 맛있었다. 아마 제국의 황제도 아셰의 궁에 차를 마시러 오다가 진심으로 그녀에게 반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속으로 로맨스 소설 한 권을 쓸 동안 아셰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다니엘도…… 아마 다음 달에는 국혼을 할 것 같아. 황제의 여동생 중 하나라는데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고. 다니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야. 테스티만큼은 안 되어도 힘이 되어 줘야지.”

“……그렇군요.”

리젠이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했다. 아셰는 속눈썹을 길게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리젠, 미안해.”

“네?”

“나 사실…… 알고 있었어.”

“……뭘요?”

“너 다니엘 좋아하잖아.”

리젠은 아셰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감정을 못 숨겼나 보다. 아주


옛날에, 카이든도 대놓고 다니엘을 좋아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안 될 사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네게 물어보지도 않았어. 네가 가끔 다니엘 뒷모습


보면서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 그러면서도 내가 다니엘을 보러 가자고 하고, 그럴 때
자꾸만 데려가고.”

“왕녀님, 그게 왜 저한테 미안한 일인가요?”

“그땐 그게 현명한 건 줄 알았는데……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어차피 다들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결혼할
거, 그때만큼이라도 감정에 충실할 걸 그랬어.”

아셰가 리젠의 손을 잡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때, 네 고민도 들어주고, 다독여 주고, 같이 슬퍼하고, 그럴걸.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몰랐어. 모르는 척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네가 날 편하게 대하고, 정말 평범한 사람들처럼 우정과
사랑을 논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다시는 안 오는데…… 그때의 널 혼자 둬서 미안해……. 르엘라를
생각해서도 그러면 안 됐는데.”

“왕녀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그게 현명한 결정 맞아요.”


리젠이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펄쩍 뛰었다.

“어차피 안 될 걸 알아서, 그렇게 괴롭지도 않았어요. 짝사랑하면서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왕녀님
덕분에 다니엘 곁을 맴돌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왕녀님 입장이야 충분히 이해해요. 그리고
고모도…….”

그때였다. 밖에서 재빠르게 달려오는 발자국이 들렸다. 리젠과 아셰는 대화를 멈추고 벌컥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왕녀님.”

“무슨 일이야?”

아셰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장이 털썩 엎드리며 고했다.

“왕녀님, 전하께서, 전하께서…….”

아셰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리젠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으흐흐흐흑…….”

왕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은 다들 짐작하는 바였다.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어의도 최대 1 년은 더 사실 수 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펠탄의 죽음에 테스티는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왕족들이 다들 장례식을 준비하며 국상을 선언할 동안 왕국의 직속기관들 역시 충격에
휩싸였으면서도 일을 시작했다. 재무국은 국상을 치를 금전적 계산을 시작했고, 행정국은 윌리엄을
중심으로 차기 왕의 호칭을 정하고 모든 문서와 책들의 연도 및 호칭을 다시 지정하기 시작했다. 모든
부서들이 각자의 일로 바쁜 와중에 수사국과 약제국도 바빴다.

“리젠, 오랜만이야.”

“그러게.”

사실은 어젯밤에 꿈에서 만났지만, 카이든과 리젠은 실제로는 꽤 오랫동안 못 만났다. 특히 카이든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그들은 출퇴근길에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카이든은 충혈된 눈을 비볐다. 거의 3 일을
밤샘 근무하고 오늘 사실 며칠 만에 받은 휴가였는데, 왕이 서거하며 긴급히 출근한 것이다.

“엄청 피곤해 보여. 일이 많은가 봐.”

“그러게. 너무 바빠.”

“여기, 약제국의 의견서야.”

리젠은 카이든이 왜 약제국에 온지 알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당연히 수사국에서는 혹시나 계획된 암살은
아닌가 조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약제국과 의료국에 협조를 구하는데, 약제국에서는 독극물에
의한 암살이 아닌지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자세히 읽어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약에 의한 암살은 아닌 것이라고 결론 냈어.”

“……의료국에서도 자연사 같다고 하던데.”

“시약에 의한 암살은 반드시 어떠한 증거를 남겨. 우리는 알려진 모든 시약 반응을 다 해 봤는데…… 독에
관련한 건 그 어떤 것도 안 나왔어. 자연사야.”

카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국에서도 원래부터 자연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지금 시기에
왕이 죽어서 이득을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익을 보는 사람을 따지자면 윌리엄이었는데,
호시탐탐 그의 태자 자리를 노리던 테스티가 왕을 부추겨 폐위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테스티가 윌리엄 대신 자신의 아들 루벤을 왕위로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은 수사국 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 왕이 죽어서 가장 패닉에 빠진 사람은 아마 테스티와
루벤일 것이다.

어쨌든 윌리엄의 알리바이는 확실했고, 아직 조사 중이지만 윌리엄을 따르는 신하들도 그런 것을 계획할


정도의 야심가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었다. 카이든은 리젠이 건넨 의견서를 받아 대충 읽고는 서류
가방에 챙겼다.

“리젠.”

수사국의 제복을 입은 그는 교복을 입었던 작년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약제국은 흰 실험복을 입는다.
그녀가 커다란 실험복의 앞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잘 되어 가고 있어?”

“음, 그래야 할 텐데.”

리젠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얼른 해결하려고 노력 중인데, 어려워. 약제국 일도 많은 편이라 내 일 하기도 벅차고.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

리젠은 그녀의 꿈 연결 시약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아주 조금만이라도


언급하니 속이 후련함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털어놓은 상대가 사실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카이든에게 ‘너는 어때?’라고 물어보려다가 꾹 참았다. 밝힐 것이 있어 수사국에 반드시


들어가겠다는 것은 꿈속의 어린 카이든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카이든은 한 번도 현실의 그녀에게
목적이 있어 수사국에 들어간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리젠은 꿈과 현실을 혼동하면 정말로 큰일 난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수사국 생활은 어때? 한때 내 꿈이었는데.”

“삶의 질 최악이야. 네가 이런 걸 왜 꿈꿨는지 모를 정도로.”

“조금 위안이 되네.”

리젠이 환히 웃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그들의 수면 패턴이 같았기 때문에 매일 밤 그의 꿈속에


들어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간헐적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 아셰와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해서 그런지, 옛날의 학교 다니던 시절이 아련하게 그리웠다.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카이든과
이야기하는 지금도 꼭 옛날 생각이 나서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동기랑 얘기하니까 좋다. 옛날 생각나고.”

“몰랐는데, 학교 다닐 때가 좋았지.”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사실 어젯밤 꿈에 네가 나왔어.”


쿡쿡 웃고 있던 리젠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을 뻔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카이든은 이제 수면
시간이 불규칙해져서 잘 때마다 리젠이 나오지 않는 것뿐인데, 정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오늘 우연히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아, 아하하, 맞아. 그, 그랬나 봐. 무슨…… 꿈이었길래?”

리젠은 자신이 정말 자연스러워 보이기를 기도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지난밤 꿈에서도 꽤나
깊게 키스했던 것 같은데…… 카이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깨고 나니 별로 기억은 안 났어.”

“그렇…… 구나. 신기하네.”

다행히 카이든은 그녀의 연기력에 넘어간 것 같았다. 하긴, 그 어떤 사람도 꿈 연결 시약 같은 건 들어


본 적이 없을 테니 상상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잘 지내.”

카이든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리젠은 쿵 내려앉은 심장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환히 웃었다.

“그래, 잘 가.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 연락…….”

“리젠! 리젠!”

저 멀리, 약제국에서 선배가 하나 뛰어오고 있었다. 리젠은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약제국은 급할 것이


없는 부서다. 갑자기 저렇게 리젠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큰일이 났다는 말이었다. 카이든
역시 뒤를 돌려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지트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지트는 붉은 머리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는데, 안경이 비뚤어졌는데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원, 지원 나가야 돼. 얼른 들어와. 일손이 너무 부족해.”

“무슨…… 일손이요?”

“윌리엄 태자님이 돌아가셨어.”

리젠과 카이든은 동시에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윌리엄이? 왕이 죽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뭐, 뭐라고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한 나라의 국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나라를 물려받아야 할


태자가 죽었다.

“급히 주요 시약 반응을 했는데, 시암 반응이 양성이야.”

“……그렇다면…… 약물에 의한 시해일 가능성이 있군요.”

“맞아. 그래서 지금 용의자들을 긴급 체포했는데…….”


연달아 들리는 참담한 소식에 리젠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침에 아셰 왕녀님 궁에서 차를 드셨다네. 일단은 아셰 왕녀님과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하녀들이


감금당한 상태야.”

“말도 안 돼…….”

카이든도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리젠을 일으키려고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그녀는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다.

“아니야.”

그녀가 카이든에게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아니야.”

“리젠.”

“윌리엄한테 도움이 된다며 제국으로 가겠다고 했던 애야. 내가 오늘 아침에 들었단 말이야.”

지트가 그녀의 앞에 섰다.

“리젠, 왕녀님과 무슨 사이인지는 몰라도 지금 얼른 가야 해. 정신 차려.”

리젠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다리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카이든을 향했다.

“밝혀 줘, 카이든.”

카이든과 그녀의 시선이 얽혔다.

“약속해. 정말로 윌리엄 태자님을 죽인 사람을 밝혀내겠다고. 약속해 줘.”

“그건 당연한 일이야.”

리젠이 카이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지트를 향해 이제 가자고 말한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빠르게 추스르고 얼른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카이든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그녀 역시 아셰의
결백을 밝혀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약제국에서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카이든은 그녀를 잘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꿈을 꾸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관찰해
왔기 때문이다.

리젠이 감금되어 있는 아셰를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다니엘이 그녀와 함께 있는 상태였다. 왕녀이기


때문에 감옥에 가둘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는 궁에 남을 수 있었으나, 외부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아셰의
작은 궁 전체에 군인들이 서 있었다. 리젠은 자신을 대학에서 가르쳤던 스승이자 약제국의 부장 중 하나인
사파엘에게 부탁하여, 막내이지만 함께 올 수 있었다. 아셰와의 우정을 알고 있었던 사파엘은 사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그녀를 동행했다.

“리젠!”

리젠을 보고 아셰가 벌떡 일어났다.


“왕녀님, 괜찮으세요?”

“나야 뭐…….”

울고불고 매달릴 줄 알았던 아셰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멍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리젠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사파엘이 다니엘과 아셰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뒤,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약제국에서 왔습니다. 약물 검사를 위해 온 것은 아시고 계시지요? 채취하고 가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먼저 혈액과 타액 채취가 있겠습니다.”

“네.”

아셰는 기꺼이 팔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은 사파엘을 도와 그녀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 장소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울컥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아셰가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루벤이 왕이야?”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윌리엄이 왕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다니엘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리젠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2 왕자인 루벤과 3 왕자인


다니엘, 그리고 후궁 소생인 아셰다. 아셰는 후궁 소생인데다가 여자이므로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멀지만
루벤과 다니엘은 다르다. 리젠은 채취한 아셰의 혈액을 실험관에 소분하며 다니엘의 고뇌에 찬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및 손톱 채취를 하겠습니다.”

사파엘이 표정 없이 채취를 계속하면서 말했다. 아셰는 이번에도 순순히 협조하며 두 눈은 다니엘에게


고정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니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했다. 리젠은 정말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은 두 오누이를 보며 때려 죽어도 왕족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게 왕비가 원하는 것이겠지.”

리젠은 다니엘의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는 항상 다정하게 웃었고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부정적인 언어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다니엘은 아셰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담고 있는 사파엘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분명 불리한 위치겠지만, 꿈틀이라도 해 봐야지. 아침에 있을 긴급 귀족원 회의에서 왕위 계승에 ‘


의심의 기간’을 선언할 거야.”

리젠은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아셰의 혈액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의심의 기간’이라면 왕위 계승이


꺼림칙한 경우에 왕위 승계를 미루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왕위 계승을 막는 것이므로 왕족 중 한 명이
선언할 수 있고, 귀족원들의 절반 이상 찬성표를 얻어 내야 성립할 수 있다.

“테스티의 편이 많다 해도 윌리엄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절반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 낼 수 있을


거야.”

“다니엘.”
아셰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다니엘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지? 나는 오빠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고, 후계자 후보에서 빠질 거야.”

어차피 아셰는 지지를 받고 있는 기반도 없고,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도 없어 보였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꼭 이겨서 왕이 되어야 해, 다니엘.”

“…….”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는 것 알아. 하지만…… 그래도 부탁해, 다니엘.”

“그래.”

리젠과 사파엘은 조용히 채취 기구들을 챙겨 일어났다. ‘의심의 기간’이 진행되면 일단 정사는


원칙적으로 왕비인 테스티가 맡는다. 윌리엄에게는 이제 두 살인 딸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년이 아니어서
후보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루벤, 다니엘, 아셰가 동등한 왕위 계승권자로 ‘의심의 기간’ 동안
상대에게 치명적으로 결정적인 증거들을 모으며, 귀족원뿐만 아니라 각 왕국 직속 기관 전원과 영지의
영주들까지 참석하는 공개적인 ‘최종 재판’에서 상대가 왕이 되면 안 되는 증거들을 모아 제출한다.
그리고 전체 투표로 왕을 결정한다. 그런데 아셰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다니엘의 편에 서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평안하던 왕궁에 정치 싸움이 일겠구나. 아주 크고 복잡한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리젠은 사파엘을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녀는 약제국의 막내일 뿐이고, 주어진 일에 그저 매뉴얼대로
최선을 다하는 직원일 뿐이었다.

“그래도 좋은 일도 있어.”

아셰가 리젠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의심의 기간’이 진행되면 우리 약혼은 자연적으로 다 파기잖아.”

리젠이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왕족들의 규칙들에 대해 세세하게 몰랐기 때문에 처음으로 아는


사실이었다.

“누가 왕이 되고 누가 범죄자로 갇힐지도 모르는데 어떤 나라에서 약혼을 감행하겠어? 특히나 우리는


관례적으로 외국인을 왕비 자리에 앉히지 않잖아. 그래서 ‘의심의 기간’에 들어가면 무조건 약혼 파기로
법이 정해 놨어. 상대 국가의 불이익을 감소시키기 위해 그 기간만 파혼이 아니라, 아예 파혼이야. 다시
결혼하려면 ‘의심의 기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아예 처음부터 혼담이 오고 가는 거야.”

아셰가 설명하듯 ‘의심의 기간’의 약혼에 대해서 읊는 것은 다니엘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리젠은 아셰의 얼굴에 살짝 걸린 미소를 보았다.

“다니엘, 왕이 되고 나서, 외교국의 일이 정지되었을 때 재빨리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해 버려. 오빠는
이제 굳이 외국의 여자랑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리젠은 사파엘을 따라 고개를 숙여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했다. 당장 오늘


밤도 아셰의 샘플을 파악하느라 흔치 않은 야근을 하게 되겠지만, 그것보다도 내일부터 불어 닥칠 왕궁의
정치 싸움과 그에 휘말릴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되었다.

다니엘이 왕이라고……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상대가 더 멀어지고 있었다. 아셰는 그녀에게 다니엘의
약혼이 파기되었다고 희망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리젠은 왕비라는 자리에 앉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신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던 다니엘은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만 가둬
두어야 했다. 그는 이제 왕위를 노리는 왕자가 된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 왕궁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곳이니까.”

약제국으로 돌아가는 길, 사파엘이 실험복을 여미며 말했다.

“왕녀님이 대학 시절 친구라고 해서 무조건 무고하다고 생각하지 마. 유력한 용의자일 뿐이고, 약제국은


사실에 근거해 사건을 파악해야 해. 어차피 무언가를 우려낸다는 면에서 차와 약은 한 끗 차이야.”

“하지만…… 왕녀님은 정말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요. 윌리엄 태자님하고 사이도 좋았어요.”

“약제국에 오래 있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돼. 산전수전 다 겪고 여러 경험을 하게 되면 ‘정말로


그럴 사람’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게 되지. 나는 정말 르엘라가…….”

사파엘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잇다가 순간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리젠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사파엘과 르엘라는 약제국의 둘도 없는 동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젠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르엘라가요? 고모가, 왜요?”

“……그렇게 죽을지 몰랐다고.”

리젠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말실수를 한 것 같은 어조였다. 이런 말을 하려고 말을


멈췄을 리가 없다. 리젠의 미심쩍음을 눈치채고 사파엘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던 애가, 그렇게 미쳐 버리게 될지도 몰랐고.”

“…….”

“얼른 가자. 할 일이 많아.”

사파엘은 종종걸음을 치며 말을 돌렸다. 리젠은 확실히 수상함을 느꼈지만 지금 더 캐낸다고 해서 뭔가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르엘라에 관해 사파엘이 그녀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똑똑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약제국은 르엘라가 소속되어 있던 직장이다. 자신에게는 차분하고 좋은 고모였지만,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떨떠름해 보이는 사파엘이 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것까지
주의 깊게 보았다.

“그 차…… 아침에 마셨다는 차가 문제인데…… 모든 특이한 성분 반응이 왕녀님에게도 똑같이 나오면


얘기가 복잡해지겠지. 같은 음료를 마셨다는 거니까. 그럼 최소한 태자님이 그 차를 마시고 돌아가시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근데 또 왕녀님이 정말 범인이라면 그동안 해독제 같은 걸 마셨을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정확한 성분 분석은 5 년 후에나 할 수 있겠지만…….”

“잠시만요.”

리젠이 눈을 크게 뜨고 사파엘의 팔을 잡았다.

“그 차…….”

분명히 아셰는 찻물이 한 번 우려낸 것이어서 연할 수도 있다고 아침에 얘기했었다.

“……저도 마셨어요. 분명히 다시 우린 물로, 오늘 아침에.”

사파엘이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저도 검사해 주세요. 약제국에는 아무 해독제도 흡수가 되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잖아요. 그래서 시약에
중독되면 다들 약제국 밖에 나가서 해독제를 마시는데, 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약제국에 있었고요.”

다음 날 새벽, 다니엘은 긴급히 귀족원 회의를 개최했다. 누구나 윌리엄과 루벤의 대립 구도만 생각했지,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의 다니엘을 왕위와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테스티는 무표정으로 고고하게
앉아 귀족원들을 내려다보았고, 그 아래에 루벤과 다니엘, 아셰가 나란히 앉았다. 귀족들은 하루 만에
일어난 얼떨떨한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둥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루벤 형님이 다음 왕위 계승권자임에 이의가 없겠지만…….”

다니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형과 아버지를 잃었지만 눈물을 흘릴 여력도 없어 보였다.

“지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아주 특이한 상황임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아바마마가 예상외의
기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그날 밤에 건강하던 윌리엄 형님이 돌아가셨어요. 게다가 약제국의
의견서에 따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에 의한 암살이라고 합니다.”

이미 다 소식을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테스티와 루벤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바가 많은지라, 저는 왕족의 직계 일원으로서 ‘의심의 기간’을 선언하려고 합니다.


저는 정비 출생인 남자로서 루벤과 동등한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형님 윌리엄의
뒤를 이어 이 일련의 사태를 철저히 조사하고자 합니다.”

뒤이어 행정국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귀족원 투표가 이루어졌다. 찬성표가 과반이 나왔으므로, ‘의심의
기간’이 두 달 동안 운영되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두 달 후, ‘최종 재판’에서 그동안의 미심쩍었던
증거를 모아 발표하며 투표로 다음 왕이 결정된다. 다니엘은 두 달 동안 테스티와 루벤이 윌리엄을 암살한
증거를 찾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6 년 전 서쪽 지방의 대화재를 가능하다면 엮어 보려고 생각
중이었다.

“루벤 시지프 아메탄 2 세, ‘의심의 기간’ 중 왕위 계승권자 후보에 등록합니다.”

‘의심의 기간’이 결정되었지만 루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무표정이었고, 야심
외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았다.

“원래의 왕위 계승권자였으므로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 이상 제가 왕위에 오르겠습니다.”

그가 한마디 덧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이 이어 일어섰다.

“다니엘 라티니스 아메탄 3 세, ‘의심의 기간’ 중 왕위 계승권자 후보에 등록합니다.”

다음은 아셰였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합니다.”

대다수가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귀족원들의 동요는 없었다. 그녀가 강단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다니엘의 지지를 선언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녀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어제 거의 잠을 못 잤음에도 불구하고 한껏 청초하게 꾸민 그녀는


귀족원 사이에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윌리엄의 편이었으니까요.”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하루아침에 지도자를 잃은 윌리엄을 지지했던 귀족원들이 어디를 택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했다. 눈가를 살짝 훔치는 것으로 극적인 효과를 더한 그녀가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원칙대로, ‘의심의 기간’ 중 정사는 제가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귀족원분들의 많은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테스티가 마지막으로 일어나 선언하고, 짧은 귀족원 회의는 끝났다. 이제 2 달 후에 다시 ‘최종 재판’


에서 왕이 결정될 때까지 그들은 이 커다란 회의장에 모일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밀물같이 빠져 나갔고,
천천히 테스티가 일어났다. 기록을 정리하고 있는 행정국 직원 외에 마지막까지 회의장에 남은 사람은
루벤과 테스티였다. 테스티는 루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의심의 기간’이 있는 편이 우리에게도 좋겠지. 나중에 다른 말 나오지 않도록.”

루벤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은


테스티를 닮았다. 행정국 직원이 나가는 것을 보며 테스티가 이를 갈았다.

“아셰, 이 여우 같은 계집애. 마지막에 윌리엄 얘기를 꺼내다니.”

“어차피 지금 윌리엄 시해 사건의 가장 큰 용의자입니다. 별로 영향이 없을 거예요.”

루벤의 말에 테스티 뒤에 있던 호위 무사 겸 정보원이 조용히 말했다.

“약제국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안에 무고가 밝혀질 듯합니다.”

“……왜?”

테스티가 조용히 물었다.

“약제국 직원 중 하나가 아셰 왕녀님과 막역한 사이인데, 윌리엄 태자와 같은 차를 마셨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약제국은 해독제가 흡수가 되지 않는 곳이므로 아셰 왕녀님이 우려 드린 차가 독극성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조사 중이지만, 그 약제국 직원의 의견 자체에 워낙 확신이 있어서 아마 오늘
오후에 발표될 예정이라 합니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울리며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구두 소리에 가려진
테스티의 낮은 목소리가 호위 무사에게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그 약제국 직원에 대해서 알아 와.”

‘그 약제국 직원’ 리젠은 밤을 새고 자신의 자리에서 반쯤 졸면서 산처럼 쌓인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너무 바쁘고 피곤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녀는 약제국에 남아 있던 르엘라의 개인 연구 기록과
약제국에 남아 있는 희귀한 고대 서적 등을 뒤져 꿈 연결 시약의 해독제를 만들 단서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리젠, 퇴근 안 해?”

그녀의 옆자리이자 선배인 지트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일단 가서 한숨 자고 내일 퇴근해. 우리 의견서도 다 제출했고, 그다음은 남의 부서 일이야. 부장님들도


다 퇴근했잖아.”

“저는…… 조금만 더 개인적인 것들 보고 갈게요.”


“개인적인 거?”

“네.”

리젠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고모가 연구하던 것들이요. 보는 것만 해도 재미있어요.”

꿈 연결 시약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고모 핑계를 대는 것이 가장 그럴듯했다.

“그게 재미있어? 난 도대체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도 어렵던데.”

지트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중얼거렸다. 약제국의 역사 자체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르엘라의


업적은 정말 대단해서 약제국 여기저기에도 르엘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르엘라는 워낙에
악필이었고, 누군가와 연구 결과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는지 전혀 체계 없이 끼적이던 쓸모없는 낙서
수준에 가까워 약제국의 사람들은 르엘라의 연구 노트들을 버리지 못해 모아 놓기만 하고 딱히 연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리젠이 르엘라의 조카였다는 것은 약제국 전체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르엘라의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하자 다들 ‘좋은 것 좀 찾아내서 실적 좀 올려라.’ 등의 반응이었고, 지트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럼 문단속 좀 부탁해. 난 들어갈게.”

“네, 들어가세요. 내일 봬요.”

리젠은 약제국에 혼자 남아 무거운 눈을 깜빡이며 르엘라가 휘갈겨 쓴 연습장을 노려보았다. 르엘라는


정말 여러 가지 흔적을 남겨 놓았다. 리젠의 집에도, 약제국에도. 뭐 그렇게 생각나는 약들이 많았는지.
‘꿈 연결 시약’처럼 독창적이고 생각하지도 못한 약들의 조제법이 여러 버전으로 휘갈겨 있었는데,
노트만큼이나 정돈되지 않은 걸 봐서 아예 틀린 조제법일 확률도 높았다.

“마력증폭약…… 이런 건 진짜 개발하기만 하면 마법사들한테 부르는 게 값일 텐데…… 좀 잘해서


유산이나 팍팍 남겨 주지.”

그녀의 눈이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시야에 르엘라의 악필이 어지러이 펼쳐지면서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리젠은 엎드린 팔이 저려 눈을 떴다. 얼마나 잤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려다가 허리가


뻐근하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르엘라의 연습장 위에서 엎드려 잠이 든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카이든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꿈인가?’

근데 그러기에는 풍경이 완벽한 약제국인데. 카이든이 이렇게 완벽하게 약제국을 상상할 수 있었던가?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리젠을 보며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의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리젠은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비비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도
없는 약제국에 카이든과 단둘이 있는 것은 꿈만 같고, 꿈이라고 하기엔 약제국의 풍경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카이든에게 슥 들이댔다.

“뭐, 뭐야?”
카이든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슥 뒤로 밀며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리젠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제야
현실임을 확실히 알았다. 꿈이라면 카이든이 이렇게 멀어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키스를 하면 키스를 했지.

‘와, 나 이제 진짜 미쳤네. 이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왜 이래?”

미간을 찌푸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본 카이든이 쉽게 그녀의 옆에 오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네 무의식이 하도 변태 같아서 그렇다.’

리젠은 목을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미안. 네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서.”

“……나도 너밖에 없어서 놀랐어.”

카이든은 긴 다리를 꼬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그만큼이나 검은 제복과 어울려서, 그의 분위기는 더 차갑고 딱딱해 보였지만 학생 때와 다르게 성숙한
남자의 느낌이 확 들었다.

“다 퇴근했어. 수사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젯밤 우리 밤샘 근무했거든.”

“역시 삶의 질은 약제국이 좋구나. 우리는 밤샘이 일상이라 아무도 퇴근 못 했어.”

“우리는 의견서만 내면 되니까. 상황 판단은 수사국에서 하셔야지.”

“근데 넌 왜 퇴근 안 했어?”

“아…….”

그녀가 책상에 너저분하게 쌓인 연습장들을 황급히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개인적으로 뭐 좀, 공부하는 게 있어서.”

“그때 말한 그 일이구나.”

“그런 셈이지.”

그녀는 밀려오는 하품을 꾹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카이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바보 같네. 어제 같이 특별 근무한 날은 좀 쉬지 그랬냐.”

“그렇게 하루하루 핑계 대고 빠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이건 의지의 문제라고. 끝내 실패한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남으면 안 돼.”

“……아쉬움.”

“이렇게 해도 안 될 수도 있겠지.”

리젠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아쉬움이 없잖아. 나중에 실패할 때, 지금의 나를 원망하긴 싫어.”

카이든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에는 그저 악바리같이 뭐든지 열심히 하는, 그냥 성취 지향적인
여자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 갈수록 생각보다 부정적인 애다. 이 아이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성공보다 실패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꼭 성공해야지, 라는 마음보다는
실패하더라도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인 듯했다.

그래서 전혀 잘될 가능성이 없었던 다니엘도 그렇게 열심히 좋아했었나.

“근데 여긴 웬일이야?”

“일 때문이야.”

그가 서류 가방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며 말했다.

“조사하러 왔다가 너만 있어서 좀 놀랐고, 너무 곤히 자길래 못 깨웠고.”

“많이 기다렸어?”

“아니.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볼게.”

카이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펜을 돌렸다. 편안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리젠은 흠칫해서 그의 어깨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야, 왜 이래? 무섭게.”

“아무리 동기라도 조사 대상자야. 수사국 원칙상 예외를 둘 수는 없어. 너뿐만 아니라, 그게 설사


왕족이라고 하더라도.”

“수사국 참 대단하네.”

차갑게 이어지는 카이든의 말에 리젠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긴, 카이든의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정말


누구보다도 수사국에 잘 어울렸다. 무정하고 무뚝뚝하며 차갑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던 그를 생각하며
그녀가 물어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 올렸다.

“어제 왜 아침에 아셰 왕녀님의 궁에 방문했지?”

“왕녀님이 제국에 갈 수도 있다고, 제국의 약초 책을 부탁했어. 종종 약제국에 있는 희귀 서적을 빌려


달라고 하셨으니까. 알잖아, 왕녀님은 원래부터 약초학을 좋아하셨다고.”

“거기서 차를 마셨나?”

“응, 윌리엄 태자님이 나보다 먼저 다녀가셔서, 이미 한 번 우려낸 차라고 하셨어.”

“그리고 얼마나 거기에 있었지?”

“30 분 정도?”

“무슨 대화를 했어?”

“그냥, 혼담이 들어와 제국에 갈 수도 있다는 얘기…… 옛날이 그립다는 얘기…….”

“또?”

“또라니?”
“30 분 동안 그런 얘기만 했을 리 없잖아. 모든 대화 내용을 다 말해 줘야지.”

“내가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해?”

“말하지 않는 건 자유지만, 그래도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너는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유일한 단서야.”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말해, 리젠. 그게 나아. 어차피 수사국에서 조사해서 안 나오는 건 없어.”

리젠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카이든이 조용히
기다렸다.

“……학창 시절에…….”

못 말할 건 또 뭐야. 리젠은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꺼냈다.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다르다. 게다가


꿈에서 카이든과 별짓을 다했지만 꿈속에서라도 서로 좋아한다는 말은 한 적 없었다. 그저 무의식의
발로였다. 그에 현실을 자꾸 혼동하면 안 된다고 그녀는 더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다니엘 왕자님 좋아하는 거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카이든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 마음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같이 슬퍼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리젠은 이상하게 카이든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이유도 없는데. 어차피 카이든도
그녀가 학창 시절 때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게 다야. 그러다가 전하의 승하 소식을 들었어.”

“……그래.”

카이든이 메모지와 펜을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피곤해서 까칠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리젠이 한숨을 폭


쉬었다.

“카이든.”

“왜?”

“커피 마시고 갈래? 약제국에서 끓이는 커피, 진짜 기가 막히게 맛있다?”

리젠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민망한 기분을 잊으려고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일어나 온갖 실험 기구들을 이용하여 현란하게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여러 비커와
증류기관을 거쳐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실험관에 담아 건네며 그녀가 씩 웃었다.

“이거 쉽게 마실 수 있는 커피가 아니야. 영광으로 알아.”

“그래.”

“나중에 약제국 와서 달라고 하지 마. 아무도 없으니까 한 잔 줄 수 있는 거야.”

“어.”
그녀가 대화를 시도해 봐도 카이든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 이래서 내가 얘랑 5 년 동안 친해질 수가
없었지. 원래 이렇게 말이 짧은 애였으니까. 다만, 꿈속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조금 친밀해진 것 같았던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마시니까 잠도 깨고 좋다. 나도 오랜만에 밤새웠거든. 이제 옛날처럼 밤이 꼴딱꼴딱 안 새지는 것


같아. 수사국 갔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침묵이 민망하여 리젠의 말이 길어졌다. 카이든이 커피를 다 마시자마자 급히 시험관을 받아 든 그녀의


뒤로, 카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젠.”

“……어?”

“다니엘 파혼했더라.”

“아, 응. 뭐.”

카이든은 천천히 일어서서 서류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리젠이 그의 뒷모습에


대고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게 뭐. 어차피 ‘의심의 기간’ 후에는 다시 결혼할 텐데.”

“만일 루벤이 왕이 된다면, 다니엘은 그를 위해 외교의 장기말로 쓰이지는 않을걸.”

“음…….”

“다니엘이 왕이 된다면…….”

“카이든.”

리젠은 그의 말을 자르고 싱긋 웃었다.

“……잘 가.”

카이든은 약제국 문을 나서며, 자신이 고작 이런 대화를 하려고 극도의 초과 근무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을


받아 리젠을 조사하는 일에 자원했나 싶었다. 정리 정돈을 잘 못 하고 난장판인 그녀의 책상은 여전히
너저분했고, 엎드려 잠든 그녀의 몸에 덮인 실험복은 몸집에 비해 너무 헐렁하여 마치 이불 같았고,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들 위에 늘어진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밟혀 그는 눈을 문질렀다.
겉으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가진 작고 큰 빈틈들, 그 의외의 빈틈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 긴 하루였다.”

리젠은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서 잠이 들었는데, 카이든도 마찬가지로 퇴근하여 잠에 들었는지 꿈에 그가


나왔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없이 쌓인 서류들, 각종 시체가 찍힌 흑백사진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와중에 카이든의 책상만 깔끔했다. 모든 서류와 자료들이 철저히 정돈되어 규칙적으로
철해져 있었다. 리젠은 혼자 서류를 보고 있는 카이든의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 이 변태 같은 자식……. 이건 뭐야?’


그녀는 실험복 차림이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하얀 실험복을 꽁꽁 여미며 리젠은
볼을 붉혔다. 입사한 후부터 그를 만날 때마다 실험복 차림이었다. 아마 그의 무의식은 이런 것을
상상했나 보다.

‘이딴 생각을 하면서…… 내 앞에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고. 하여간 인간미 없다, 카이든 루스.’

“분명히 무언가가 있거든.”

카이든이 그녀를 흘끗 바라보고, 확인하던 서류에 볼펜으로 표시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잡히지 않는 큰 화재라면 마법인데, 마법도 이 정도의 마법사 수로는 절대 안 돼. 적어도 이


숫자의 열 배는 있어야 돼.”

“카이든.”

그녀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물었다.

“6 년 전, 서쪽 지방의 화재 말하는 거야?”

“그래.”

꿈속의 그는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평소에 온갖 신경이 그
화재에 쏠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찬찬히 보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법일 확률이 높아.”

“그래?”

“내가 선택 과목이 마법이잖아. 마법으로 만들 수 있는 불꽃은 미약하지만 옮겨 붙으면 잘 꺼지지 않아.


이 정도의 큰 성이 왕비님도 오시는데 화재 대비를 이렇게 못했을 리 없어. 그런데 문제는…… 마법이
만드는 미약한 불꽃이 어떻게 이 성을 다 삼키냐는 거지. 그만한 마력이 있으려면 우리나라의 마법사
절반은 데려와야 될걸.”

“맞아.”

그가 벌떡 일어나서 답답하다는 듯이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래서 조사가 미궁으로 빠졌고, 그 당시 제펠탄 왕이 수사국에 더 이상 수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어. 수사 진행 중이면 왕비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비워 둬야 하니까. 하지만 수사국의 비밀 조사
기록에, 왕비가 되고 싶던 테스티가 끊임없이 제펠탄을 압박했다는 왕비궁 시녀의 증언이 있어.”

리젠은 앉고 있던 의자를 빙빙 돌리다가, 팔짱을 끼고 유리창 밖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카이든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암담함이 느껴졌다.

“이 유리창에서 내려다보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쪽에 테스티의 왕비궁이 보여. 테스티가 그 화재의 배후에 있다는 건 왕궁의 누구나가 의심하는
사실이야. 그녀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받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믿겨져? 무고한 사람을 백 명 넘게 죽인 여자가 한 나라의 왕비라는 사실이…….”

그녀는 천천히 걸어서 카이젠의 옆에 섰다. 저 멀리 테스티의 화려한 왕비궁이 보였다. 카이젠이
실험복만 걸친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등이 느껴졌다.

“그래서 속이 답답할 때, 아무리 뒤져도 뭔가가 막힌 것 같을 때 난 여기에 서서 창밖을 내려다보곤 해.”

“그렇구나.”

“그리고 재미있는 건…… 오른쪽 끝을 보면 약제국이 보여.”

“어? 정말이네?”

리젠이 유리창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흥미롭게 말했다. 숲길을 따라 외진 곳에 건설된 동그란 약제국
건물이 있었다. 약제국의 위치는 다른 직속 기관과는 다르게 왕궁과 가까운 정원에 붙어 있었는데,
약제국 전체에 걸린 해독제 방지 마법과 관련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륙의 마력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왕궁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2,000 여
년 전에는 강력하고 다채로운 고대 마법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왕궁 전체에 시약 효과 방지
마법을 걸었는데, 그 마법이 점차 줄어들어 최초의 마법 발현지인 지금의 약제국 건물에서만 해독제에
한해서 유효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런 마법을 걸 수도 없고 방법도 모른다.

마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마법의 힘도 정말 고대에 비해 약해졌다. 옛날엔 전쟁의 무기로도 쓰였다던
화염 마법의 경우, 대련 시에 성별을 고려한 선택 과목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약해졌다.
농담으로 화염 마법을 쓰느니 토치를 들고 다니겠다는 말도 공공연히 있을 정도였다.

“왕비궁을 보고 다시 분노하고…….”

그녀의 목 뒤로 카이든의 입술이 느껴졌다. 매번 꿈속에서 꽤나 많이 겪는 일인데 적응되지 않아 그녀의


솜털이 비쭉 섰다.

“약제국 건물을 보고 기운을 내곤 해…….”

그가 리젠이 꽁꽁 여민 실험복을 풀곤 그녀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키며 유리창에 그녀의 알몸을 눌렀다.


리젠은 두 가슴에 느껴지는 차가운 유리의 감촉에 팔짝 뛸 정도로 놀랐다. 몸의 앞은 단단하고 차가운
유리에 막혀 눌리고 있는데, 등 뒤로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가 리젠의 손을 자신의 중심에 가져갔다.
이미 크게 팽창되어 있었다.

“저기, 약제국에서는 어떤 바보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을 테니까.”

“카이든, 이것 좀 놔줘…….”

“너는 수사국도 포기하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그는 그녀의 손을 말아 쥐고 자신의 바지 버클을 끌렀다. 리젠은 꼭 자신이 그의 바지 버클을 푼 것 같아


민망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네 말이, 실패하더라도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네 말이 내게 언제나 자극이 되거든.”

그녀는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크고 뜨거운 중심을 살살 쓰다듬었다. 본능과도 가까운 행위였다. 리젠은


남녀의 몸이 갖고 있는 본능에 순간적으로 놀랄 때가 많았다.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면 이성도 감정도
모두 뒤로 물러나 버린다. 그리고 그 후에는 몸이 원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카이든의 고개가 그녀의
어깨로 툭 떨어졌다.

“아…… 바보야.”

그가 이로 그녀의 어깨를 꽉 물었다.


“네가 그러면 참기 더 힘들어.”

그의 밀어붙이는 힘 때문에 그녀의 몸이 더욱 더 유리창에 밀착했다. 아무리 꿈이지만 이럴 땐 정말


부끄럽다. 밖의 누군가가 유리창에 눌린 그녀의 나신이라도 보면 어떡하나. 반대로 그러한 아슬아슬한
상황이 더 자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직장인 약제국이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에서 이런 낯 뜨거운
상황이라니. 그녀는 복수라도 하듯 그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남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으음…….”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과 유리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자 그녀의 입김이
유리창에 하얗게 번졌다. 등 뒤로 카이든의 제복 셔츠가 닿아서 사각거렸다. 발밑에 흰 실험복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바보야.”

리젠은 그가 손을 밑으로 내리며 더 몸을 밀착하자,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유리창을 짚었다. 그 반동으로 그녀는 살짝 엎드린 것처럼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이 그녀의 젖은 은밀한 곳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다니엘이 왜 좋아?”

“아아…… 뭐?”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여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물면서


속삭였다.

“다니엘하고도…… 이렇게 하고 싶어?”

“무, 무슨 소리야? 이 변태 자식!”

“다니엘 볼 때마다…… 너도 상상해? 이런 걸?”

“미쳤어?”

“……그러지 마.”

그의 혀가 그녀의 귀 뒤를 핥았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여 그녀를 절정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이런 건 나랑만 해. 이런 건 나만 생각해.”

“아!”

짧은 쾌락을 느낀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팔이 그녀의 힘이 빠진 몸을 붙들었다. 그리고


유리창에 다시 그녀의 몸을 고정시킨 뒤,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해도 돼?”

“……어?”

“너…… 가져도 돼?”

분명 안 되는데, 그녀는 카이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러지 말라는 말을 못하는 건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나서는 카이든이 먼저
깼는지 의식이 희미해졌다.

[따르르릉! 기상! 기상!]

“아…… 뭐야.”

그녀가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유리창에 몸을 대고 있던 꿈의 영향인지 어느새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카이든, 이 변태 자식. 무의식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카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사할 땐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이상하게 화가 난 그녀가 이불을 차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악! 짜증나!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야?”

다음 날 아침, 다니엘은 수사국에 직접 행차하여 수사국장이 준비해 준 차를 마시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윌리엄 형님의 죽음에 저는 의아한 점이 정말 많습니다. 그 누구도 그날 밤 그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수사국에서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하는 기본적인 가정이겠지만, 이 일련의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쎄요.”

이미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몸 하나는 젊은이 못지않게 단단한 수사국장 루카스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사국에서 가장 지양하는 것이 범인을 정해 놓고 수사하는 겁니다. 물론 유력한 용의자 선에 올릴 수는


있으나 선입견이 생기면 진실을 바로 보기 힘들지요. 사실 왕궁 직속 기관의 기본 윤리이지만,
수사국에서는 더더군다나 중요하죠.”

“그럼 제 의견을 말씀드리죠. 이것 또한 수사국에서 사용할 정보가 될 테니.”

다니엘의 금발 머리가 햇빛에 비쳐서 반짝거렸다. 감정을 담지 않은 푸른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원래 수수한 복장을 즐겨 입었으나 ‘의심의 기간’을 선포한 이후 굉장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옷을 입고
다녔다. 왕위에서 한참 먼 셋째 왕자로, 전혀 권위적이지 않던 그는 단번에 왕위의 유력 후계자가 되었다.

“저는 배후에 왕비 마마와 루벤 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십니까.”

루카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조용히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국에 정식으로 의뢰하겠습니다. ‘최종 재판’에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윌리엄 시해 사건에 대해
조사서 및 의견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수사 직원은 카이든 루스로 지정하겠습니다.”

“친한 대학 동기에게 자율권을 주시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아…… 저와 카이든의 관계를 아셨습니까?”

“수사국에서는 숨기고 싶은 정보까지 알아냅니다.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아 하시는 정보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카이든을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뭐,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전념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부드럽게 웃으며 일어났다.

“부디 최선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상심이 크시지요.”

루카스가 국장실의 문을 열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수사국에서 왕자님의 편을 들어 드린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가치판단은 귀족원들의 몫이죠. 그러나


수사국은 항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

다니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나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카이든을 보고 가도 될까요?”

“안 그래도 막내인데 요새 고양이 손까지 빌리고 싶은지라 너무 많이 부려먹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을


주고 싶었는데 잘 되었군요. 데리고 가서 바람이라도 쐬어 주시지요.”

루카스의 부드러운 말에 다니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국장실을 나가 뚜벅뚜벅 걸어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카이든의 자리에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단정한 검은 제복 차림의 그가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산책 가자. 국장님께 허락 받았으니까.”

“네.”

카이든이 천천히 일어섰다. 다니엘은 일을 해도 변하지 않는 그의 무표정을 보며 씩 웃었다. 좀 반가운


표정이라도 지어 주면 어디 덧나나. 처음 만나는 날부터 지금까지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수사국이 더 바빠질 거야.”

수사국을 나서, 숲길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거닐기 시작하며 다니엘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정식 조사서를 의뢰했거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너 아니어도 윌리엄 태자님의 급사는 조사할 사안이야.”

카이든은 둘만 있을 때에는 반말을 쓰라는 다니엘의 말에 주저 없이 반말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루벤이 왕위에 올라서 조사를 멈추라고 하면 멈췄겠지.”

다니엘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눈에 힘을 주고 중얼거렸다.

“6 년 전, 그 화재처럼.”

“진실 앞에 객관성을 유지할지라도, 수사국은 어쨌든 왕궁 산하기관이니 무조건 왕의 명령을 따르니까.”


“카이든.”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네가 준 명단, 몰래 왕궁 출입 마법사들의 기록과 대조해 봤어.”

카이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당시 후궁이었던 테스티의 왕궁에 엄청나게 드나들던 마법사가 있어. 캐서린이라는 여자인데 테스티의
사촌 동생이야. 작은 마법 약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특이 사항은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점이야. 나도 몇 번 본 것 같아. 무도회란 무도회에는 온갖 보석을 두르고 항상 참석하거든.”

“캐서린. 조사해 볼게. 수상한 냄새가 나는군.”

“나는…… 가능하다면 ‘최종 재판’때 모든 것을 밝히고 싶어.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도, 6 년 전의


화재도. 마음 놓고 조사할 수 있는 지금,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다 밝혀내자. 윌리엄 형이 왕이
되기까지를 기다렸지만, 최악의 경우 루벤이 왕이 되면 영영 기회를 놓칠 거야.”

다니엘이 머리카락을 흔들며, 장식으로 짤랑이는 소매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번 사건으로 느낀 게 있어.”

“뭔데?”

“나중으로 미루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즉시 움직여야 해.


윌리엄이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 당장, 즉시…….”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엘을 따라 걷다가, 흠칫 놀라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약제국.”

다니엘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약제국에도 정식 수사 의뢰를 맡겨야지.”

“약제국의 협조는 수사국이 알아서 구해. 거긴 2 차 기관이라 연구 결과만 전해 줄 뿐이야. 네가 직접 갈


필요 없어.”

카이든은 자신이 왜 이렇게 둘러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말했다. 다니엘은 카이든의 약간
못마땅한 듯한 어조를 눈치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한마디 말을 하는 거랑 안 하는 거랑 다르겠지. 간 김에 리젠도 좀 보고 올까?”

“…….”

어제 카이든은 또 리젠의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니엘과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라는 내용의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는 도대체 꿈속에서 자신이 왜 그렇게 리젠을 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리젠은 다니엘을 좋아하고,
다니엘은 파혼했기 때문에 짝사랑하지 말라는 법도 이제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처지도 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고 복수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살기로 결정했는데. 그때까지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그렇게.

“수사국과 약제국에 우수한 친구들이 있으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다니엘이 카이든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카이든은 차마 그를 보고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약제국장은 출타 중이었다. 카이든의 말대로 약제국은 2 차 기관이고, 직접적인 왕궁의 의뢰를 받기보다는
수사국에게 증거를 넘겨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니엘의 등장에 꽤나 당황한 듯했다. 약제국장이
출타했는지라, 다니엘의 접대는 그를 직접 대학에서 가르쳤던 사파엘이 맡았다.

“왕자님, 이런 전례를 만들까 봐 무섭습니다. 앞으로는 약제국에 되도록 발걸음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실례가 되는 일인지 몰랐습니다. 교수님께서 이토록 당황하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왕자님의 선의와 안타까움은 당연히 짐작하는 바지만…… 이런 사건에 있어서 약제국은 사실 수사국에
자문을 해 줄 뿐이고, 원래의 설립 목표는 국가 경쟁력을 위한 신약 개발과 각종 불법적인 약물
단속입니다.”

“……그렇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매정하다 생각되더라도 왕국 산하기관에서는 원칙을 가장 중시 여기는 것이 기본 윤리이므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파엘이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한때의 제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네.”

다니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르엘라의 영향이 있어서, 제가 약제국을 너무 친근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르엘라는 왕족들에게 기본적인 약초학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했었다. 르엘라의 이름이 나오니 사파엘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연구원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왕족의 이해관계와 얽혀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가 없었습니다.”

사파엘에게 인사를 하고 약제국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런 책임감이 없는,
왕위에서 멀었던 왕자 시절에는 몰랐다. 예전에는 가볍게 했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약제국 뒤의 정원으로 향했다. 약제국은 왕궁과 가까운
위치에서 숲에 둘러싸여 있어 바람을 쐬고 산책을 하기에 좋았다. 카이든에게 리젠을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얘기했었는데, 과연 작은 벤치에 리젠과 카이든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너네 아직도 안 친해졌냐?”

그래도 마음 편한 것은 옛 친구들뿐이라, 그는 어색하게 앉아 있는 그들을 보며 장난을 걸었다. 리젠과


카이든은 이상하게 서로를 의식하며 친해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내외하는 거야?”

“왕자님, 오셨습니까.”
리젠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리젠, 제발 편하게 해. 너무 어색해. 너마저 그러지 마.”

“그럴 수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다니엘이 공손하게 모은 리젠의 두 손을 보고 서운한 듯 허허 웃었다.

“심려가 크시지요. 지난번 아셰 왕녀님의 궁에서 뵈었을 때에는 위로도 못 건네 드렸습니다.”

“슬퍼할 틈도 없어.”

다니엘이 그들의 맞은편에 놓여 있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슬퍼하는 건 ‘최종 재판’이나 끝나고. 사실 윌리엄 형이 죽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은 안 나지만.


어쨌든 고마워, 리젠.”

그가 리젠을 보며 환히 웃었다.

“네 덕분에 아셰의 감금이 풀렸어. 어차피 결정적 증거가 없어 체포까지는 못 했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혐의가 풀렸다는 게 어디야.”

다니엘이 리젠의 어깨를 다독였다.

“정말 고마워.”

리젠의 볼이 살짝 상기되는 것을 보며 카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리젠은 하나로 묶은 머리를 괜스레


매만지다가 슬쩍 카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아, 왜 어젯밤 꿈에 그런 얘기를 해 가지고…… 괜히 사람 어색하게…….’

다니엘을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당연히 없다! 다니엘은 정말로 고귀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어떻게 불순하게,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 뻔한 남자를 대상으로 낯
뜨거운 상상을 한단 말인가. 물론 카이든과는 너무 꿈을 자주 꾸니까 몇 번 해 본 적이 있지만…… 리젠은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상한 잡생각들을 멈추려고 애를 쓰면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감금이고 말고가 있나요. 어차피 아셰는 궁에서 그대로 사는데.”

“그래도, 유력 용의자라고 지목되는 것보다는 낫지. 군인들의 감시에서도 벗어나고.”

다니엘이 금붙이로 번쩍거리는 재킷을 벗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아셰와 함께 르엘라랑 산책 많이 왔었는데.”

“여기요?”

“보통 여기서 멈췄지. 조금만 더 가면 루벤의 궁이 나오니까. 약제국 위치가 워낙 궁하고 가까워서.”

“아…….”

“리젠.”

“……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머뭇거리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리젠이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윌리엄의 죽음에 대해 수사국의 의뢰를 받아 조사하다가, 이상하거나 묘한 일이 있으면 꼭 내게 말해 줘.


약속해 줄 수 있어?”

“당연히 국장님께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저 같은 막내에게 그런 중요한 일까지 오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녀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나 카이든이 네게 뭔가 약물적으로 자문을 구하면 꼭 알려 줘. 윌리엄의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네.”

리젠이 밝게 웃었다.

“카이든하고는 이미 좋은 동료인데요.”

좋은 동료……. 카이든은 이상하게 씁쓸해졌다.

* * *

테스티는 차가운 표정으로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왕립종합대학의 졸업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길이 구불구불한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야무지게 살짝 미소를 지은 리젠의 흑백사진을
향했다.

“이 아이라고?”

“예.”

부하는 짧게 대답한 뒤 덧붙였다.

“르엘라 하카트의 조카입니다. 약제국에 들어오자마자 시간만 되면 르엘라의 각종 연구물을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체계적인 연구 기록뿐만 아니라 온갖 연습장이나 노트 같은 개인적인 자료도요.”

“없애 버려. 그런 르엘라의 개인 기록들은 못 없애?”

“그게…….”

부하가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약제국은 왕궁의 명령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2 차 기관이고 기본적으로 연구를 위한 곳이라, 함부로


기록물을 없앨 수 없습니다. 후대의 연구를 위한 포석이 될 수 있으므로 절대 폐기하지 않거든요. 특히나
르엘라는 희대의 천재였기 때문에 약제국에서 모든 자료를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는 사명까지 갖고 있는
듯합니다.”

“루벤이 왕위에만 오르면, 그 거만한 왕국 산하기관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겠어.”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았다.


“객관성과 전문성은 무슨. 결국엔 왕궁의 심부름꾼 주제에 윤리는 더럽게 따진단 말이야.”

테스티가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르엘라의 자료에…… 혹시 뭔가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계집애가 뭔가 눈치채고…… 르엘라의 과거라도 조사하려는 건?”

“가능성은 있습니다.”

“계속 감시해. 특이 사항 있으면 당장 말하고.”

“오늘 다니엘 왕자님이 그녀를 찾아가셨습니다.”

“다니엘이?”

“동기니까, 아무래도 친한 사이인 것 같습니다.”

“그거야 뭐, 입사 초기라서 뭣도 모르고 아직 친구로 알고 있나 보지. 1 년만 지나도 서로의 주제를


깨닫고 멀어질 사이인데.”

“그런데 이 남자 말입니다.”

부하의 손가락이 테스티의 앞에 있던 졸업 앨범 중 같은 페이지에 있던,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무표정의


잘생긴 남자를 찍었다.

“카이든 루스?”

테스티가 선이 굵고 마치 사진 밖을 노려보는 것 같은 강한 눈매를 지닌 청년을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니엘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이번 기수 수사국 수석이지요.”

“아…… 기억나. 제일 먼저 임명장 받은 그, 훤칠하고 자세가 곧던 애.”

“확실하지는 않지만, 6 년 전 화재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뭐?”

“루스 지방의 영주도 그 사건 때 죽었지요.”

테스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좋지 않군. 아셰와 이 계집애가 친한 사이고, 다니엘과 이 남자가 또 친한 사이면, 분명히 이 르엘라의
조카와 루스 집안의 수사국 직원도 연관이 있을 테니.”

“그렇죠. 실제로 다니엘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에도 동행했다고 합니다.”

“유심히 지켜봐야겠군. 물론…….”

그녀가 부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불씨는 없애는 게 좋겠지.”

부하가 충성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테스티가 졸업 앨범을 탁, 하고 덮었다.

“다니엘은 아직 애송이야. 수족이 뻔히 눈에 보이는군. 천천히 없애. 이쪽은 왕위를 오랫동안 준비해
왔어. 두 달 만에 뒤집힐 수는 없지.”

리젠은 퇴근하고 나서 혼자 이것저것 중얼거리며 낮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르엘라의 기일이다.
벌써 르엘라가 죽은 지 5 년이다. 그녀가 수선화꽃 한 다발을 들고 작은 공동묘지로 향했다. 저 멀리에
르엘라의 소박한 묘지가 보였다.

“이번에도 있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르엘라의 비석 앞에 섰다. ‘차르티 수도원’에서 온 흰색 국화 바구니 하나와


붉은 장미 꽃다발. 르엘라의 기일마다 거짓말처럼 놓여 있는 꽃들이다. 차르티 수도원이라면 그녀의
친부가 있는 수도원이다. 리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옛날, 르엘라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수도원에 갈 때마다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거부하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르엘라는 갔다 오는 길, 리젠의 침울한 표정을 보면서 열 살이 된 이후에는 절대 데려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리젠은 아버지를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매년 르엘라의 묘지로 오는
꽃바구니로 존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엄마는 차르티 수도원 앞에 있는 바다에 화장하여 뿌렸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근처에도 못 오게 하니 가


볼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사진도 없어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고모만큼의 애정은 없었다. 르엘라의
묘지 앞에 선 리젠이 붉은 장미 꽃다발 옆에 수선화를 놓았다.

“도대체 누구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고모, 장미꽃 가시 있다고 싫어하는데. 빨간 장미는 제일 싫어하고.”

리젠은 항상 매년 놓인 붉은 장미 꽃다발을 잘못 온 꽃으로 결론 내렸다. 르엘라가 정말 싫어하던 꽃이기


때문이다. 리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르엘라는 핏빛에 가시까지 있다며 붉은 장미를 싫어했다.
어딘가에서 자꾸 잘못 배달 오는 것이 분명했다.

“고모, 잘 지내고 있어?”

그녀가 묘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나는…… 해독제 만드느라 바빠 죽겠어. 고모의 그 악필 쳐다보느라 엄청 힘들어.”

르젠의 조곤조곤한 말이 조용히 묘지에 울렸다.

“가만히 앉아서 연구만 하는 건 내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급하고 절실하니까 그렇게 되긴


하더라. 그래도 꽤 많이 만들었어. 어젯밤에는 거의 성공이다, 싶은 순간도 있었다니까.”

날씨가 좋아서 리젠의 길게 늘어트린 갈색 머리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리젠은 눈물을 꾹 참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왕궁도 난리야. 전하도 저하도 다 돌아가시고, 다니엘 왕자님이 왕위에 오르시겠다고 하고 있어. 나한테
다니엘이라고 말 편하게 하라며 빙긋 웃어 주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왕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것 같아. 요새는 더 빛이 나시는 것 같고……. 에이, 혼자 말하니까 역시 재미없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물을 슥슥 닦고 코를 훌쩍였다. 멍하니 앉아서 파랗게 높은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혼자만의 침묵을 깨고 또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카이든 루스라는 애가 있는데…….”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우우……. 걘 너무 복잡해. 어쨌든, 고모, 난 이제 갈 거야.”

리젠은 깨끗하고 빛이 나는 묘비를 다시 한 번 닦으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고모가 날 이렇게 잘 키워서 나 되게 잘 살아. 고모한테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서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책임지고 걸을 수 있어. 해독제를 다 만들면 휴가 겸 긴 여행을 떠날 거야. 그리고 또 어떻게
잘 살아볼지 고민해야지.”

그녀의 시선이 나란히 놓여 있는 꽃바구니와 두 개의 꽃다발로 향했다. 그녀가 비뚤게 놓인 장미꽃 다발을
바로 하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곳이 제자리가 아니더라도, 그래도 일단 우리 고모 것이니 딴생각하지 마라. 이름 모를 분, 어쨌든


감사해요. 내년에도 봐요.”

3. 좋은 동료

리젠은 출근길에 다니엘을 만났다. 다니엘은 왕궁 산책을 하다가 약제국까지 왔노라고 황급히 둘러댔지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의아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가늘어진 눈을 보고
다니엘이 어색하게 말했다.

“이,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한데…….”

리젠은 감지 않고 대충 묶고 나온 머리와, 처음부터 쓰고 나온 동그란 안경이 신경 쓰였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아…… 네. 10 분 정도만이요. 늦을 것 같아서요.”

“그래.”

그녀는 이것이 꿈인가 싶어 천천히 걸었다. 생각해 보니 다니엘과 단둘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늘
카이든이나 아셰가 곁에 있었다. 다니엘은 ‘의심의 기간’ 중 점점 더 화려한 옷을 입었고, 실제로 이제
더 이상 별다른 권력이 없는 왕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곱상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귀티가 나는 사람이 되었다.

그저 그런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니엘이 은근슬쩍 물어 왔다.


“리젠, 네 선택 과목이 마법이었잖아.”

“네.”

“화염 마법의 경우…… 어느 정도의 불꽃이 나오지?”

“얼마 안 돼요.”

리젠이 공중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리젠의 손바닥에 조그마한 불씨가 생기더니 화르륵 탔다.

“마력 자체가 많이 줄어서, 고대 기록처럼 산을 태우고, 뭐 그런 건 불가능하죠.”

“마법사의 실력의 문제가 아니고…… 마력의 문제인가?”

다니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순수한 마법 그 자체는 점점 더 쇠퇴해 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선택


과목이 마법이 아닌 이상 마법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자연 상태의 마력을 자신의 몸에 갈무리하고, 그 마력을 쓰는 것이 마법 실력이죠.”

“그럼 마력이 엄청나게 많으면, 큰불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그렇죠. 그런데 없는 마력을 어떻게 많이 모으겠어요? 마력증폭약 같은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리젠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고마워.”

다니엘이 씩 웃으며 방향을 돌렸다.

“약제국까지 데려다줄게. 많은 도움이 됐어.”

“왜 이런 것이 궁금하신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 직접 행차까지 하시고.”

“카이든이 지방 출장을 가 버려서, 내가 직접 올 수밖에 없었어.”

리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꿈에 카이든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밤에 정상적으로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수사국은 출장도 많고 하루 일과도 엉망이라는데 아무리 튼튼한 카이든이라도 몸이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까 말한 마력증폭약…… 말인데, 그런 게 진짜 있을 수 있을까?”

“글쎄요. 불가능하다고 봐요. 마력은 위험한 힘이라서.”

리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고모의 연구 노트에서 꽤 많이 보이는데 시도하는 족족 실패해요. 부작용도 다양하고. 고모가 그


정도로 실패했으면 남들은 아예 근처에도 못 갔을 거예요.”

“그렇구나.”

다니엘이 팔짱을 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햇살에 그의 금발 머리가 반짝반짝 빛났고,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가 매끄러웠다. 약제국 입구가 보이자 다니엘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자신의
파란 눈을 맞추었다.
“리젠, 고마워.”

“뭘요, 이런 걸 가지고.”

“안경 잘 어울려.”

“……네?”

리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니엘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네…… 네! 왕자님도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힘내세요. 저는 고모가 돌아가시고…… 망가지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애를 썼어요. 혼자 서는 게


어려워도, 계속 노력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다니엘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나 보이던 다정한 눈동자가 아니라, 다소 놀란 눈동자였다.


리젠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왕자님 생각하는 사람들 생각하며, 이런 화려한 장식들이 너무 무거워도 힘내세요. 이런 거


원래 안 좋아하셨던 거 알아요.”

“……리젠.”

그가 조용히 웃었는데, 처음으로 조금 슬퍼 보였다.

“르엘라가 하늘에서 널 보고 있다면…… 정말로 자랑스러워할 거야.”

“당연하죠!”

리젠이 일부러 과장되게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나이의 르엘라보다 더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고, 약초학에서의 성과 빼고는 훨씬


뛰어난데요.”

다니엘이 그녀를 보며 쿡쿡 웃었다. 별로 웃기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렇게 순수한 유머를 들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씩씩하게 걷고 있는 리젠을 보며 그는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리젠.”

“네?”

“지금 여기, 약제국 뒤편의 정원에서 우리 처음 만난 거 기억나?”

리젠은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르엘라가 열세 살의 그녀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


아셰는 새침하고, 다니엘이 웃어 주었던 그날.

“모든 순간이 다시는 안 와.”

다니엘의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직 아무런 의무도 없고, 모두가 살아 있고, 품어야 할 독기 같은 것도 없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하겠지만……. 리젠, 시간을 돌리는 약 같은 건 없겠지?”

“……없지만…… 연구해 보죠, 뭐.”

그녀는 가볍게 대답하면서도 순간 울컥했다. 열세 살 때, 고모는 미치기는커녕 너무나 멋있었고 처음 와


보는 왕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잘생긴 동갑내기 왕자님을 보고 감격에 겨웠던 그때가 새삼 생각나
그녀도 약간 서러워졌다. 그때는 왜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어른이 되는 시간 동안 슬픈 일도
많이 생긴다는 것을 몰랐다.

함께 옛날 생각에 잠겨 울적해진 리젠은 다니엘과 함께 약제국의 앞까지 왔다가 약제국 정문 앞에 있던


사파엘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다니엘을 공손하게 배웅한 사파엘이 그녀를 끌고 약제국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선 사파엘이 도끼눈을 떴다.

“왜 왕자님과 단둘이 있지? 그것도 직장에서?”

“아, 왕자님이 뭣 좀 물어보시더라고요.”

리젠은 숨을 삼키며 공손히 대답했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리젠은 재빨리 덧붙였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네가 수사국 지망이었다는 건 안다.”

사파엘은 다니엘과 리젠이 함께 있는 것만 해도 큰일이 난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약제국의 사람이잖아.”

대학 시절 교수로 만났던 사파엘보다 직장 상사로 만난 사파엘은 훨씬 더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이었다.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훈계를 들었다.

“마법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약초학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어. 우리는 가장 매혹적이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거야. 왕족들의 정치적 싸움에 개입할 이유가 없고, 특히나 약제국
소속이라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심해야 해. 시끄러운 사건들은 수사국이 알아서 하라고 해.”

“죄송합니다.”

“학교는 졸업했어. 왕자님과 왕녀님은 너와 이제 아주 다른 사람이야. 옛날처럼 친구로 지내면 안 되고,


믿어서도 절대 안 돼.”

“네?”

“왕족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야. 얽혀서 좋을 일 하나 없어. 자기 자신도 도구로
쓰는 사람들인데, 남들은 오죽하겠니.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괜히 이용당하지
말고…….”

사파엘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인 것을 리젠은 놓치지 않았다.

“……왕족하고는 아예 어울리지도 마.”

리젠은 너무 극단적인 말에 눈을 깜빡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파엘이 한숨을 한 번 쉬고 뒤를


돌았다.

“이건 상사가 직원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친구 조카한테 하는 말이야, 리젠 하카트.”


르엘라의 연구 노트는 체계도 없고 깔끔하게 정리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약초학 실력을
늘리는 데에는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리젠은 르엘라의 악필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어떻게 새로운 시약을
만들고, 해독제를 생각해 내는지 독창적인 방법을 많이 익혔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들을 보면서 그녀는 확실히 르엘라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약제국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르엘라의 시약 제조법은 이렇게까지 창의적이지는 않았다. 공식적인


제조법으로 등록하려면 굉장히 보수적이고 안전한 방법으로 제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연구한 흔적들을 보면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엉뚱한 조합들이 많았다.

“나중에, 내가 해독제만 만들고 나면…….”

그녀는 집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녀의 집에도 여전히 르엘라의 연구 노트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약제국에서 대출한 책과 노트들을 대조해 가며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중얼거렸다.

“고모의 이 모든 메모들을 정리해서 책 한 권 써야겠다. 진짜 아메탄 왕국 약초학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짜 천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내지?”

퇴근 후에도 르엘라의 악필을 보고 있자면 머리가 더 핑핑 돌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르엘라를


생각했다.

‘리젠, 시약은 신기하지만, 무조건 위험한 거야.’

르엘라는 어린 리젠을 안고 시약을 만드는 것을 보여 주면서 속삭여 주곤 했다.

‘우리가 시약을 잘못 만들면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무조건 열 배, 백 배 책임을 져야 하고.’

그녀는 르엘라에게 배운 대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카이든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끝도 없는 연구와 공부가 지겨워질 때면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래서 지금 혼기가 찼는데도 자꾸만 들어오는 소개팅조차 거절하고 있지만.

“내가 미쳤었지. 진짜 돌았었어.”

리젠이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놈의 짝사랑이 뭐라고……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그딴 짓을 하다니. 뭐에 홀려 있었지, 뭐. 사랑에


눈 뒤집히면 답도 없다더니…….”

오늘 아침에 만난 다니엘은 여전히 존재만으로도 빛이 났고, 알 수 없는 안쓰러움이 밀려 들어왔지만 왠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마치 같은 교복을 입고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던 그때는 너무나 먼 과거 같고,
이제는 함께 산책을 한 것만으로도 직장 상사에게 호되게 혼나는 상대가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결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다니엘의 생각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벨소리에
깜짝 놀랐다.

[딩동, 딩동.]

리젠은 벌떡 일어났다. 리젠과 르엘라가 둘이 살던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벨을 누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리젠의 유일한 친구인 아셰는 왕궁에 살았으므로 이런 민간인의 집에 출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벨소리가 저런 소리인 줄도 몰랐던 그녀는 살금살금 걸어 문 앞에 섰다.

“누…… 누구세요?”

“나야.”
“카이든 루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 밤 10 시가 넘은 시간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등장에
그녀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흙투성이에 잔뜩 지쳐 보이는 그가 쓰러지듯 들어왔다. 리젠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여 재빨리 그녀의 옷이 잔뜩 쌓인 소파에 앉혔다.

“뭐, 뭐야?”

오늘 아침에 다니엘이 분명 그는 지방 출장 중이라고 했다. 그는 제복도 아니라 사복 차림이었다. 그가


재킷을 벗자 셔츠에 핏물이 보였다. 리젠은 비명을 삼키며 그대로 굳었다.

“……늑대 피야. 사람 피 아니야. 걱정 마.”

“일단 씻을래?”

“그럴 수 있을까.”

“욕실 저쪽이야. 어…… 우리 집엔 남자 옷이 없는데…… 어…….”

“괜찮아. 잠시 실례 좀 할게. 그 전에…….”

카이든이 재킷 주머니에서 부들거리는 손으로 봉투 몇 개를 꺼냈다. 그녀는 무심코 받아 들었다가,


느껴지는 무게감에 휘청거렸다.

“이거 시약 분석 좀 부탁할 수 있을까.”

“……시약 분석?”

“시체 다섯 구에서 얻은 유골이야.”

리젠은 가라앉은 눈으로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오래된 뼈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험한 거 보게 해서 미안해…….”

“웃겨. 왕년의 수사국 지망생을 뭘로 보는 거야? 근데…… 수사국 일이면 바로 약제국에 정식으로
의뢰하지 그래? 원래 그게 원칙이고, 우리 집엔 아주 최신 시약은 거의 없어서…….”

“비밀리에 조사하는 거라 그래. 부탁해.”

“알았어. 씻고 와. 간단한 반응만 좀 보고 있을게.”

그녀는 능숙하게 핀셋으로 유골 조각을 들어, 르엘라의 노트로 가득 차 있던 테이블을 대충 치우고


기본적인 시약 분석에 필요한 약물들을 챙겼다. 보통 집에는 이런 실험 기구들이 당연히 없겠지만,
르엘라는 집에서도 온갖 시약 연구를 했던지라 약제국 못지않은 도구들이 남아 있었다.

머리를 올려 묶고 잠옷 차림 그대로 시약 반응을 검사하고 있다 보니, 카이든이 씻고 나왔다. 옷이 없어


리젠의 목욕 가운을 입은 그는 살짝 우스꽝스러웠지만 작은 가운 사이로 보이는 잔근육 때문에 리젠은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단단한 것 같은데…… 그녀는 생각을 들킬까 봐
그의 눈도 차마 마주치지 못했다.

“옷이 마를 때까지만 신세 질게.”

“그, 그래.”
그녀가 일부러 분주하게 실험 도구들을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근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수사국에서 모르는 건 없어.”

“이렇게 수사국 정보를 사적으로 써도 되는 거야?”

“난 직업윤리가 없어서.”

카이든이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리젠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물었다가는 카이든이 곤란해질까


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원래는 이렇게 함부로 시약 분석을
남들에게 해 주면 안 되지만,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어쨌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리젠은
그에게 큰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리젠이 날카로운 눈으로 시약 반응을 보며 말했다.

“지금 전부 시암 반응을 보이는 걸 봐서, 시약에 의한 죽음일 가능성이 있어. 5 년이 넘은 오래된


유골이라면 성분 분석도 가능해.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이런 시약 반응은 한계가 있어. 뭐든 다 알려
주지는 않아.”

“성분 분석까지…… 가능해? 5 년 정도는 된 듯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원한다면 해 보지, 뭐.”

카이든은 바쁘게 움직이는 리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젠은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쾌활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게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거겠지? 아셰의 누명을 벗기는 일일 테니까 최대한


도와줄게.”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음…… 이제 성분 분석까지 하려면 세 시간 정도 더 있어야 돼. 옷도 말릴 겸 좀 쉬다 가.”

“고마워, 바보야.”

“바보한테 도움 받을 생각하는 너는 뭔데?”

리젠이 살짝 발끈하자 카이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고 더 하려다가,
카이든의 팔에 깊숙이 난 상처를 발견하고 팔짝 뛰었다.

“이건 뭐야?”

“별것 아니야.”

“기다려.”

그녀가 오도도 뛰어 어디론가 향하더니, 붕대와 약병을 하나 가지고 달려왔다. 목욕 가운을 걷어 올리고
그녀는 그의 팔에 붉은 색깔 약을 잔뜩 바르고 붕대를 야무지게 감았다.

“수사국 살벌하네.”

리젠이 씩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안 가길 너무 잘했는데.”

“맞아.”

카이든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넌 그냥 약제국에 가길 잘했어.”

“뭐래? 왜 약제국 썼냐며 도서관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땐 언제고.”

민망한지 그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가 딴청을 부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냥, 위험한 건 하지 마. 생각보다 험한 꼴 많이 봐. 넌 바보 같아서 안 돼.”

“아무래도 수사국 쓸 걸 그랬네.”

리젠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아주, 종합 시험 대련에서 널 완전히 꺾어 버리고 수석으로 들어갈걸. 감히 네가 바보의 바 자도 못


꺼내게.”

그가 소리 낮춰 웃었다. 그의 눈이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 엉망인 리젠의 거실을 훑었다.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는 도대체 언제 적부터 쌓여 있는지 모를 옷들이 뭉텅이로 뭉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뭐라고
알아볼 수도 없는 글자로 뒤덮인 노트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시약 반응 중인 유골들이 있는 테이블
위에는 온갖 책들이 쌓여 있었다.

“너 이러고 사냐?”

“왜?”

“너 지저분한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하다.”

“내가 뭐가 지저분해?”

“네 책상은 도서관에서도, 약제국에서도 정신 사나웠으니까.”

“그래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다 알거든?”

“내가 나중에 이거 다 치우고 만다.”

“야, 그거 건들지 마!”

옷 더미를 살짝 집어 올리는 카이든의 팔을 재빨리 잡으며 리젠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에 속옷 있다고.”

“……아, 진짜.”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더니, 혼자서 나른한 눈으로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네.”

“뭐가?”

“내가 한밤중에 이 꼴로 너희 집에 와도…… 5 년 된 유골을 들이밀어도…….”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넌 안 놀랄 거라고 생각했어.”

“놀랐는데?”

“왠지…… 편안할 것 같더라.”

“난 불편한데?”

부루퉁하게 대답하는 리젠의 머리를 카이든이 꾹 눌렀다. 리젠은 기운을 빼고 앉아 있다가, 속으로 새삼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만일 꿈이었다면, 이렇게 단둘이 있는데 카이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현실에서는 그저 좋은 친구이자 동료일 뿐이다. 좋은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학창 시절에 추억이 없지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사람은 카이든이었다.

“……리젠.”

“왜?”

“옛날에…….”

“어.”

“네게…… 다니엘은 포기하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 걱정이나 해. 수사국에 그렇게 싱글인 부장님들이 많다며. 연애할 시간도 없어서.”

“넌?”

“난 할 일이 많아.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 없어. 연애도 사랑 놀음도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야.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지.”

카이든의 검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맞아.”

“너도 글렀어. 너한테 여유라는 건 고등학생 때부터 안 보였으니까.”

“제대로 봤네. 왕년의 수사국 유망주다워.”


리젠은 카이든의 눈에 걸린 웃음에 살짝 기분이 이상해졌다. 꿈속에서 카이든이 종종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곤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저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면, 정말로 그와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더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기 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핫초코라도 타 올 테니까.”

“먼지 쌓인 머그컵에 주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어? 제일 더러운 머그에 줄 거야.”

그러나 따뜻한 핫초코를 들고 다시 그녀가 거실에 왔을 때에는, 카이든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머그잔을 내려놓고 지쳐 잠든 카이든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성격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자는 그의 얼굴과 살짝 풀어진 가운 사이의 몸을 바라보는 리젠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던 그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이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항상 혼자만 있던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좋았다. 그녀는 르엘라가 죽은 이후 자신이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채울 수 없던 허전함이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녀는 조용히 카이든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르엘라의 노트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잠든 카이든은 리젠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리젠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잠들


정도로 지친 그에게 괜한 꿈을 꾸게 하기 싫어서 그녀는 졸음을 참으며 공부를 계속했다. 이런 연구와
공부만 하는 삶이 지겨워서 약제국에 들어가기 싫었는데 정말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카이든은 곤히 잠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깨지 않았고, 그녀는 잠이 오는 눈을 억지로 뜨며 책에 눈을


고정했다. 눈을 비비던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유골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성분 분석을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래…… 글자 보지 말고 차라리 성분 분석을 하자.”

리젠은 시약을 잔뜩 가져와 이런저런 성분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성분 분석은 죽은 지 5 년 이상 된


유골에서 개인의 마력이 빠지고 난 뒤 이질적인 성분을 추출해 내는 실험으로, 인위적인 성분을 분리해 낼
수 있어 혹시나 시약에 의한 죽음일 경우 그 성분을 추론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 이거…… 뭐지?”

성분 분석의 결과를 하나하나 적어 가며 리젠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다섯 구의 유골에서 나타나는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 그런데 그 성분 분석의 결과가 몹시 의외였기
때문에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아니야.”

백 명의 약제사에게 이 성분 분석의 결과를 물어본다면 백 명 전원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조합이며,


시약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토록 시약의 정석에 따른 조합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예 엉뚱하고 일반적인 시약 제조법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만한, 아주 기괴한 성분들만 모여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이 세상에 이러한 조합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르엘라의 노트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짐작조차 못한 채로 카이든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몸을 옹송그리고 카이든이 잠든 소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왠지 추웠지만
무언가 덮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쳐 잠든 카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든은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깜짝 놀랐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곤히 잠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수사국에 몸담은 이후로 세 네 시간 이상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잠을 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뿐한 몸에 놀라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으면 아침 먹어.”

그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부엌에서 리젠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든은 이미 다 마른 어제 빨아


놓았던 옷을 입고, 왠지 머쓱한 기분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발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한숨도 못 잤는지
리젠의 얼굴이 까칠했다. 별다른 제복이 없는 약제국은 출근 복장이 자유로웠는데, 라인이 예쁜 청바지에
흰 니트를 걸치고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그녀는 어제 잠옷을 입었을 때랑은 또 다르게 어려 보였다.

“이 정도면 되지? 내가 요리엔 소질이 없어서.”

“너무…… 민폐 끼치고 가네.”

그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살짝 탄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막 내린 커피가 굉장히


지저분한 식탁에 어울리지 않게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녀는 부엌 창가에 잔뜩 늘어선 화분에서
이런저런 허브를 뚝뚝 따서 샐러드를 만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출근 늦은 거 아니야?”

“수사국은 정해진 출퇴근 시간 같은 거 없어. 그냥 눈 뜨면 출근이야.”

리젠은 샐러드를 식탁 중간에 턱, 하고 놓은 뒤 자신의 빵에 잼을 바르며 이상한 기분에 피식 웃었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아침을 같이 먹는다. 카이든 역시 어색한지 연신 커피를 마셨다.

“생각해 보니까…….”

리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모 돌아가신 이후에, 이 집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처음이야.”

“그러고 보니, 너 말이야.”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남자한테 벌컥벌컥 문 열어 주고, 그러면 안 돼.”

“뭐?”

“이렇게 막, 하룻밤 재우고, 그러면 큰일 나.”

어이가 없어서 리젠의 눈이 커졌다. 카이든이 마치 여동생을 혼내듯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남자가 벨 누르고, 그러면 집에 없는 척해. 용건은 꼭 집 밖에서 말하라고 하고.”

“이봐요.”

그녀가 허허 웃으며 그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댁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문 두드리고 와서 잠까지 잤는데요?”

“그건 나니까 되는 거고.”

“뭐라고?”

“대다수의 남자들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나처럼 절제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리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꿈속에 있을 때 틈만 나면 낯 뜨거운 짓 일색이었던 카이든이 저런 말을


하니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리젠에게 더 잔소리를 하려던 카이든의 말을
그녀가 막았다.

“어제 성분 분석도 다 해 봤어.”

“……그래?”

“다섯 명 다 같은 성분이 나왔어. 만약 시약 때문에 사망했다면 같은 시약일 가능성이 높아.”

카이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성분을 보여
달라고 말하려는 차에, 리젠이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평온하게 말했다.

“이 다섯 명의 죽음을 왜 조사하고 있는지 말해 줄래?”

“……굳이 알 필요 없어.”

“성별도, 나이도 다 다른 사람들이던데. 다만 마법사인 것 같았어. 아직도 유골에 마력이 남아


있더라고.”

“내 개인적인 조사야. 너까지 낄 필요 없어.”

“그럼 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네가 분석하라고 하면 분석만 해 주면 되는 거야?”

“그런 뜻 아닌 것 알잖아.”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건이야. 널 굳이 끼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어차피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관계있을 것 같아서 그래.”

리젠의 표정에서 드디어 웃음이 사라졌다. 감정을 숨기겠다고 그렇게 밤새 다짐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또 울컥했다. 게다가 카이든은 지금, 옛날에 르엘라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물론 가능성일 뿐이지만, 이 다섯 명의 마법사에게서 검출된 시약이…….”

그녀는 말을 끊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말해 줘. 도대체 뭘 조사하고 있는 거야?”

“진심이야?”

카이든의 표정 역시 굳었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그동안 그가


얼마나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 대다수의 학교생활에서
카이든은 이런 날카로운 무표정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야, 카이든 루스, 지금 무슨…….”

“물론 너를 믿기에 비밀리에 시약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모든 일을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야. 미안하지만


안 돼.”

그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 이미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면 하나만 묻자.”

리젠이 다리를 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 사이에 어제의 편안한 기류와 비교가 되지 않는 긴장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 시약의 제조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예측해?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다섯 명 이상을 죽인 사람이야. 그것도 남들의 눈을 피해서. 당연히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이겠지.
약물에 의한 살인은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비겁하고 계획적인 범죄야. 보통 악한 사람 아니면 할 수
없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예상했던 바였지만 카이든의 망설임 없는 얘기를 들으니 더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약의 성분…… 물론 확실한 건 없지만, 고모의 연구에 자주 나왔던 배합이야.”

“……뭐?”

“하지만 고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 고모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대체 고모가
왜 전혀 연관성도 없는 마법사들을 죽여? 연구 윤리로 치자면 사파엘 교수님만큼이나 꼿꼿한
사람이었다고.”

“수사국에 있으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카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럴 사람’ 같은 건 없어. 한 길 속도 모르는 게 사람이야. 단언하지 마.”

“그러니까 말해 줘.”

정말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에 눈물이 고여서 그녀는 손으로 눈을 거칠게 비볐다.

“무슨 일인데? 네가 조사하는 게 어떤 일인데? 무슨 배경인데? 고모가 잘못했으면 그 잘못을 밝혀야 하는


것도 내 일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 고모가 누명을 쓰면 어떡해? 모든 정황이 고모를
가리키는데, 고모는 이미 죽어서 변론도 못해. 나, 나는 진실을 알고 싶어. 이대로 고모의 흔적이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어.”

“…….”

카이든은 복잡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그들의 식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모의 손에
자랐다고 들었다. 게다가 원래가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 아니라, 르엘라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에 억지로
밝은 척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6 년 전에 서쪽 별궁 연회에 화재가 있었어. 그때의 왕비였던 다니엘과 윌리엄의 어머니, 스잔나가 그


화재로 죽고 100 명 넘는 서쪽 영주들이 죽었지.”

“……알고 있어.”

“이상하지 않아? 새로 지어진 별궁 전체에 그토록 빠르게 큰 화재가 난 것도, 조금의 진압이 안 되었다는
것도,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하고 모두 다 죽었다는 것도. 자연적인 화재라면 분명히 화재 경보 시설이
작동했을 텐데. 마법일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마법으로는 그만한 불을 일으킬 수가 없어. 어마어마한 마법사의 수가 필요할 테고, 그 정도의
마법사가 움직였다면 분명히 문제가 되었을 거야.”

“그래서 수사가 미궁에 빠졌지. 게다가 그때 선왕이 수사를 중지하고 빠르게 지금의 왕비를 그 자리에
앉혔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그때 돌아가신 100 명이 넘는 영주들 중 하나야. 나는 너무 억울하고
분노해서 수도인 아메니티로 올라왔어. 직접 수사해 보려고. 그리고 다니엘을 만났지.”

“…….”

“아무리 선입견을 버리고 사건을 냉철히 보려고 해도, 결론이 명확해. 테스티는 그 화재로 인해 왕비
자리에 앉아 루벤을 두 번째 왕위 계승권자로 밀어 넣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다니엘에게도 승계 순위가
밀렸겠지. 그리고 귀족들을 포섭해 루벤의 편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 놓은 상태야. 윌리엄 태자 폐위까지
도모했다는 것이 수사국의 극비 정보 중 하나로 남아 있어.”

“세상에…….”

“나의 가설은 이거야. 모두가 루벤을 왕으로 앉히기 위한 일이야. 선왕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윌리엄
시해가 이루어졌어. 너무 눈에 보이는 암살이기는 하지만, 급했던 거겠지. 물론 가설을 함부로 세우지
않는 것이 수사국의 수사 원칙이지만…… 너무나 명확하잖아? 모든 것이.”

리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든의 눈이 비통함으로 가라앉았다.

“왕. 그래, 되고 싶을 수도 있겠지. 권력의 정점에 서고 싶겠지. 다 이해해. 높으신 분들의 정치 싸움도,
왕위 다툼도.”

“카이든.”

“그렇지만 그 대단한 왕위 다툼을 위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어. 우리 부모님은 그저 개죽음 당한


거야. 자연스러운 왕비의 죽음을 위해, 누구에게 희생되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셨어. 그런 사람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 나는 그건 너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해. 밝혀낼 거야. 밝혀내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리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 먹지 못한 샐러드만 바라보았다.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너무


큰일이다. 고작 수사국 말단이 왕비를 겨냥한 수사를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니. 물론 뒤에 다니엘이 있는
듯했지만 다니엘도 이제 막 왕위 계승권자에 이름을 올린 기반 없는 왕자일 뿐이다. 리젠이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 동안, 카이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의심의 기간’ 중에 왕족은 공식적으로 수사국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할 수 있어. 다니엘은 수많은
수사국들의 경력자들을 제치고 협조 조사원으로 나를 지목했어. 나는 윌리엄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다니엘의 비호 아래 자율권을 얻은 김에 6 년 전 화재도 조사하는 중이야.”

“아…….”
“마법에 의한 화재라고 가정하고, 당연히 사주한 사람이 다음으로 할 일은 증인을 죽이는 거겠지. 그래서
화재 이후 같은 사인으로 죽은 마법사들의 명단을 찾아봤어.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한 약초상의
고객이었고, 그들 중 다섯 명의 유골을 골라 온 거야.”

“……사인이 뭐야?”

“마력의 역류.”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있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고모의 자료들을 보면…… 고모가 굉장히 열심히 개발하려다 실패한 시약이 있어. 그런 시약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정말로 많이 연구한 시약.”

“……뭔데?”

“마력증폭약.”

카이든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계속 실패한단 말이야. 계속해서, 엄청난 부작용이 나타나서 결국엔 개발해 내지 못했어. 어제
아침, 다니엘 왕자님이 찾아와 소수의 마법사들이 큰 화재를 낼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한 건 그것 때문이야. 마력증폭약 같은 건 없어. 자연을 거스르는데 어떻게 개발이
가능하겠어.”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그중 하나의 부작용이…… 마력의 역류에 의한 사망이야. 수천 개도 넘는 고모의 낙서같이 널브러진 메모


중 하나지만,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매일같이 들여다본 나는 알아. 아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왕국에 나뿐일 거야. 고모는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약물을 만들어 내던 사람이니까.”

리젠은 카이든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르엘라는 약물에서 생길 수 있는 조금의 부작용도 걱정하여 수많은 연구 결과를 발표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르엘라가 개발해 낸 불완전한 약이 100 명을 넘는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르엘라가 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아니, 만약 르엘라가 누명이라도 쓴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할지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너무 명확하잖아……. 고모가 개발한 마력증폭약을 먹은 마법사들이 화재를 냈고, 부작용으로 죽었어.
아마 부작용에 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겠지. 마법사들이란 마력에 미친 사람들이니 분명 미심쩍은
약이어도 먹었을 테고.”

“리젠.”

카이든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고모…….”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를 카이든이 천천히 감쌌다. 현실에서는 처음으로 느껴 보는 그의 단단한 품이


따뜻해서 그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연사는 맞을까?”

아무 말 없이 안아 주는 카이든의 품에 안겨 그녀는 엉엉 울었다.


“……정말로, 연구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친 건 맞을까?”

카이든은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르엘라가 죽고 나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한 번도 이렇게 울어 보지 않았다. 르엘라는 항상 말해 왔다. 결핍된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굳게 잡고, 밝고 곧게 자라야 한다고. 어지럽고 나쁜 생각들이 그녀를 괴롭히지 않도록 뭐든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엄마가 나 때문에 죽고, 그런 나를 아빠는 버리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내 인생까지 망가트리지 말라고.

그래서 르엘라가 죽고 나서도, 그럴수록 흐트러지거나 망가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았어도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펑펑 우는 것보다 책 한 페이지를 더 보는 것이 르엘라의
가르침이었다. 펑펑 울어 봤자 달래 줄 사람도 없으니까.

“리젠.”

카이든은 문득, 아주 예전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정말 아주 옛날에, 열일곱 살의 그를 리젠이 안아


주는 꿈을 꾼 적 있다. 그때의 그처럼, 르엘라를 잃고 세상에 혼자가 된 그녀를 안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히끅, 아까 전만 해도…… 히끅, 날 어떻게 믿느냐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그런 애한테
안겨서…… 히끅, 뭐 하는 건지…….”

리젠이 훌쩍이며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품이 따뜻해서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미안해.”

“미안하면, 너.”

그녀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네 개인적인 조사에 끼워 줘.”

“……뭐?”

“그 개인적인 조사, 나도 함께하겠다고. 진실을 밝혀야 할 것 아니야. 고모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나도 관계자야. 관계없는 사람 아니야.”

“리젠, 상대는 왕비야. 난 사실 죽음까지 각오한 사람이야.”

“나도 각오하는데.”

리젠이 눈을 비비고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난 수사국 지망이었던 에이스야. 방해가 되지는 않을걸.”

“이건 그거랑 달라.”

“너처럼 수사국에서 이런저런 출장 다니는 척하며 발로 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약속해, 나도 끼워 주겠다고.”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카이든은 그녀의 작은 손을 보며 망설이기만 했다.

“얼른. 언제까지 혼자서 그러고 있을 거야? 다니엘 왕자님이 네 편인 건 알겠지만, 왕족은 왕족이야.
동료가 한 명 정도는 더 있어야 되지 않겠니?”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부어오른 두 볼을 감쌌다. 리젠의 심장이 순간 툭 하고
떨어졌다.

“리젠.”

그녀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있잖아. 요새는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좀 덜한데, 옛날에 한때 네 꿈을 꽤 자주 꾼 적이


있었어.”

“……어?”

그녀의 몸이 굳었다. 카이든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땐 너한테 관심도 없었을 때인데, 왜 이렇게 자주 꿈에 나오나 싶었어. 도대체 왜 그런가 싶었지.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잘 믿지 않지만…….”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는 어떻게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꿈에 나왔나 보다.”

“어…….”

“어둡고 외롭고 힘들던 길에…… 누군가 손 내밀어 줄 사람이 있다고…….”

그가 리젠의 볼에서 손을 떼고, 어설프게 내밀어져 있던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려고 꿈에 나왔나 봐.”

리젠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아프도록 진정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숨겨야 한다는 욕구가 너무 강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숨겨야 한다. 이제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말했을 때의 카이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렵다는 감정을 느꼈다.

* * *

“물론, 개국 기념일 연회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많은 서민들의 삶에 직결되어 있고요.


그렇지만 국상 중입니다.”

테스티는 귀족원 회의에서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국왕과 태자가 하루 만에 다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개국 기념일 연회를 평년과 같이 여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얄궂게도 아메탄 왕국의 개국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개국 기념일은 몇 안 되는 아메탄의 성대한


행사였다. 개국 기념일에는 각 영주들이 여러 지역의 풍토를 반영한 축제를 열고, 가장 화려한 성을 열어
무도회를 개최했다. 개국 기념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설레는 밤을 기도하는 처녀 총각들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들뜬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하루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농수산물과 의류산업,
각종 예술계의 공연팀 등이 1 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 온 터였다.
“하지만 연회를 취소한다면 백성들의 상심이 너무 큽니다. 준비된 행사이니 손해도 막심하고요. 연회까지
일주일입니다. 일주일 안에 모든 것을 취소하라고 하면 연회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손해가 너무 커요.”

귀족원들의 반대가 이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다니엘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아무리 국왕이 백성의 어버이라 할지라도, 왕족의 급작스러운 변고가 개인의 삶을 망가트려서는 안
됩니다. 국상이라는 대의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그 어떤 개인도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다니엘.”

테스티가 어이없다는 듯이 끼어들었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왕궁의 무도회는 최대한 소박하게 축소하되 그 나머지 지역의 축제는 계획대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귀족들은 각자가 관할하고 있는 영주들의 여론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론은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스티는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부릴 만큼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연회를
열지 못하는 것에 잠시 슬퍼하면서 정숙하고 슬픈 부인인 척한 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위해
양보하겠다는 듯한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중간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이미 계산된 것 같은 다니엘의 행동에 그녀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형과 아비가 죽은 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어디 한번 계집애들 손을 붙들고 웃으며 춤을 춰 보려무나.”

그녀는 회의실을 나가며 다니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네가 그토록 앞에 나서고 싶어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미가 돼서 그 정도도 몰랐다니 면목이


없구나.”

테스티가 화려하게 빛나는 다니엘의 금색 장식을 부채로 툭 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녀는 복도를
걸어 나가며 뒤를 따르던 호위 무사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루벤은? 대체 얘는 왜 오늘 회의에 안 나타난 거야?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오늘 비가 옵니다.”

호위 무사의 엉뚱할 수도 있는 대답에 테스티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이후 아무것도 묻지 않고, 테스티는 도도하게 걸음을 걸어
왕비궁으로 향했다.

“왕궁 무도회요?”

“그래.”

아셰가 빛나는 눈으로 리젠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이번 주말이야. 국상 중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우니 축소만 할 뿐 그대로 열린대. 우리는


그동안 학생 신분이어서 참여하지 못했잖아.”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무도회가 열린다는 건 약제국에서 들었던 것 같아요.”

리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고작 그 말을 하려고 하녀까지 시켜서 퇴근길의 그녀를
급히 불러온 것인가 싶었다. 사파엘이 워낙에 그녀가 왕족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만나러
오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 왜…… 다들 예쁘게 차려입고 음악에 맞추어서 춤추는…… 어…… 그런 거 말씀이시지요? 맞죠?”

“뭐, 비슷해. 맛있는 것도 많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행사들도 많고.”

아셰는 왠지 몹시 흥분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리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잘 다녀오세요.”

“응. 난 당연히 갈 거고…… 너도 갈 거야.”

“……네?”

리젠은 뜬금없는 아셰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무도회에 참가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약제국에서도 왕궁 무도회가 계획대로 열린다는 말은 돌긴 했지만 그 누구도 딱히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리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약제국장님을 귀족과 왕족들의 들러리를
서 주러 간다며 불쌍해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왕녀님, 제가 거길 왜 가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춤도 출 줄 모르고, 고모도 그런 데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어서 어린 시절에도 가 본 적이 없어요.


귀족도 아니고, 고위 관료도 아니고 꼭 갈 필요도 없잖아요.”

“리젠.”

아셰가 한숨을 폭 쉬었다.

“무도회가 그냥 춤만 추는 데인 줄 알아? 그럼 그냥 살롱에서 맘 맞는 사람들끼리 스텝이나 맞출 것이지


그런 거대한 행사는 왜 열겠어? 다 숨겨진 목적이 있는 곳이라고.”

“……숨겨진 목적이요?”

“그렇게 젊은 남녀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 삼삼오오 모여서 인맥을 만들기도 좋고,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잘생긴 남자들 구경하기도 좋고. 그러다 마음에 든 상대랑 간질간질한 분위기
만들어 가면서 춤도 추고 말이야.”

“아…….”

리젠이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말했다.

“저는 그중 하나도 관심이 없어요, 왕녀님.”

“넌 계속 약제국에서 연구만 하다가 혼자서 늙어 죽을 셈이야?”

아셰가 쏘아붙였다.

“약제국은 얼마 안 되는 자율 복장인데 맨날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맨날 안경 쓰고 머리는 질끈 묶고


다니고! 넌 어떻게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안 꾸미고 다니는 거야? 나이가 아깝지도 않아? 너, 2 년에서 3
년만 지나면 노처녀 된다고.”

“그럼 2 년에서 3 년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되겠네요.”

“꾸밀 수 있을 때 꾸며야 해. 리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아. 내 짧은 인생 도중 느낀 건 그거야.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돼.”

“전 할 수 있는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무도회에서 바보같이 있기 싫어요. 저는 인맥이


아니라 성과로 말하는 연구원이 되고 싶답니다. 방방곡곡의 잘생긴 남자는 더더군다나 관심 없고, 춤은
단 한 번도 배우지 못했고요.”

“하아…….”

아셰가 안 되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손을 놓은 아셰가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리젠.”

“네?”

“너는 사교계의 동향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이번 무도회에서 모든 영애들의 관심이 누구인지
알아?”

“글쎄요.”

“다니엘 오빠야.”

리젠은 잠시 놀라서 얼굴이 굳었다. 아셰가 그것 보라는 듯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차기 왕이 될 수도 있는 남자야. 윌리엄 오라버니가 워낙에 의문스럽게 죽었으니, 수상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뒤에 서려고 해. 그런데 지금 오빠는 약혼녀가 없는 완벽한 싱글 상태고.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의심의 기간’ 동안 약혼녀가 없다는 건, 그의 옆에 누구나 설 수 있다는 거야.
특히나 왕이 되면 외국인하고 결혼도 안 해도 돼.”

“……뭐, 그건 그렇죠.”

“그건 그렇다니! 그런 반응을 할 게 아니야. 이번 무도회에서 온갖 여자들이 다니엘의 곁에서 눈길 한


번이라도 받아 보려고 난리일 거야. 가만있을 수는 없어.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리젠, 엄청 예쁘게
꾸미고 완벽한 성인 여자의 모습을 다니엘에게 보여 줘. 또다시 뒤에서 바라보는 짝사랑으로 만족할
거야?”

“왕녀님, 저는 일개 연구원일 뿐이에요. 왕자님이 차기 왕이 되신다고 하면 더더군다나 제가 곁에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지금 왕궁 산하기관들이 이렇게 독립성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윤리를 갖게 된 게


언제부터인데? 100 년 전 카를 왕이 행정국의 직원하고 결혼하면서잖아. 그 이후로 내가 보기엔 훨씬 더
왕궁은 합리적으로 변했어.”

아셰가 결정했다는 듯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고압적으로 말했다.

“가자, 리젠. 옷도 보석도 화장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

“왕녀님, 저는 별로 내키지가 않아요.”

리젠은 전혀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그녀는 왕궁 무도회란 정말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정치적인 힘이 필요한, 화려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고 그 시간에 그녀는 그냥 연구나
더 하고 싶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리젠을 보며 아셰가 어조를 바꾸어 말문을 열었다.

“리젠, 나는 남자와의 사랑 같은 건 어렸을 때부터 생각도 안 했어. 아마 왕족이라면 거의 다 그럴 거야.


당연히 정략혼을 해야 하고, 괜히 사랑 같은 것에 빠지면 파란만 일어나. 나는 이 모든 일이, 아바마마가
테스티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왕족이라면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해.
그냥 주어진 대로 의무를 다 해야 해. 아마 다니엘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야.”

“…….”

“내 입장은 여전히 바뀐 게 없어. 난 왕이 될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외국으로 가야겠지. 내가 결혼에


대해 꿈꾸는 유일한 것은, 다니엘 오빠가 왕이 된 뒤 부디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그냥 제일 가깝고
우리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공국의 젊은 귀족한테 보내 주는 거야. 그나마 자유가 좀 있고, 이런 암투
같은 것과 상관없는 곳. 우리 엄마처럼 존재만으로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 가서 숨통 트고
사는 거지.”

“왕녀님……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하지만 내가 지금 사랑을 해 보겠다고, 어떤 남자랑 눈이라도 맞으면 다니엘 오빠에게 고민거리만 될


뿐이야. 어차피 나는 원칙상 외국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데, 다니엘 오빠가 나를 억지로 외국에 보내면
마음이 어떻겠어?”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리젠, 너라도, 자유로운 너라도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 나는 그것조차 금지되어 있어.
마음껏 누구를 좋아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그 두근거림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데.
그런 사람이 나타난 것만 해도,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는 네가 부러워. 이건 정말……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학교 다닐 때 모른 척하고 괜히 다니엘에게 끌고 다니며 네 마음 흔든 건
짝사랑이라도 할 수 있는 네게 질투가 나서였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아요, 왕녀님. 이해해요.”

“다니엘이 널 안 좋아할 수도 있어. 나도 억지로 붙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하지만 그래도 한 번도


다가가 보지 못한 네가, 한 번쯤은 노력해 볼 수 있는 거잖아. 한 번쯤은, 한 번쯤은 그래도 춤 한번 춰
보자고 좋아하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 기회 정도는 가져도 되지 않니? 나는 내 누명을 벗겨 준 유일한
친구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어.”

“……생각해 볼게요.”

아셰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리젠은 가까스로 그 정도의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셰가 정말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혼란스러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분명 어린 시절 내내 그를 좋아했다. 연습장에, 책에, 자신도 모르게 다니엘의 이름을 끄적이고 있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가 말을 걸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몰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강의실에 함께 있으면 아셰와 대화를 하더라도 그에게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훔쳐보며 혼자 견뎌야 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다니엘은 너무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반짝거리고, 여전히 동경하는
사람이지만 곁에 서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엄두도 못 낸 상대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오히려 비틀거리며 그녀의 집 문 밖에 서 있던 카이든을 근래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았었나.

“……가야겠다.”

궁을 나서며 카이든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리젠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카이든의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다니엘에게 쓰이는 마음이 줄었다. 그러나 카이든이 생각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실수로 꿈이 얽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실도 아닌, 그저 꿈에서 육체적 관계가 있었다고 감정을
헷갈리는 건 그녀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가자. 가서 확실히 하자.”

아셰 말대로, 다니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때만큼은


카이든을 신경 쓰지 말고, 다니엘에게 품은 마음을 다시 확인해 보자. 여전히 그를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아하는지, 아니면 첫사랑으로 이미 아스라이 멀어졌는지. 그녀는 마음을 먹고 크게 심호흡했다.

“아직도…… 루벤이 처소에 들지 않니?”

테스티의 걱정 어린 말에 나람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람은 루벤의 비로, 사막 국가 한스팀
출신이었다.

“남자는 다 여자 하기 나름이다. 사근사근하게 잘 구슬려 보렴.”

“하지만…….”

나람이 울먹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예 처소에 들지 않는 걸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아들을 낳아야지. 루벤의 나이가 이미 꽤 많아. 얼른 후계를 공고히 해야 해. 네가 직접 루벤의


궁에 가는 건 어떠니?”

“몇 번 가 보았지만…….”

나람은 이야기하면서도 비참한 듯했다.

“대놓고 귀찮아하셔서요…….”

“왕이 되면 또 달라질 거다.”

테스티가 달래듯 차분히 말했다. 나람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람의 손을 토닥여 준
그녀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 달 안에…… 완성 가능한 거지?”

“네. 이미 5 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가장 까다로운 재료는 그제 준비가 되었어요. 나머지 재료만
준비되면 ‘최종 재판’ 전까지는 간당간당하게 가능해요.”

“그렇구나……. 제펠탄이 조금만 더 버텨 줬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좁은 길이 이어지니 다행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것’이 필요하니?”

“네.”

나람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녀의 표정이 견디기 힘들다는 듯 무너졌다.

“다니엘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여자의…… 피요.”

“그래. 알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자연사까지 가능해요…….”

테스티는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영애들이 다니엘을 모두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차였다. 이번 무도회에서 그중 골라서 피를 얻으면 될 것이다. 왕위에 정신이 없는 다니엘이
누군가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중 가장 반응이 좋은 여자가 있기는 할 테니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연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나람은 가까스로 말을 잇고 훌쩍이며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내가 내 아들을 아는데, 그 녀석은 당차고 꼿꼿한 여자를 좋아해.”

테스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울먹이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야.”

나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분명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테스티는 왜 루벤이


그녀에게 끌리지 않는 건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거칠고 불과 같은 루벤의 마음을 잡기에는 애초부터
역량이 되지 않는 여자였다. 그래도 루벤에게는 정말 필요한 아내였고, 나람이 루벤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천지신명이 도운 일이었다. 테스티는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람의
궁을 떠났다. 참 자식의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왕이요? 당연히 되고 싶죠.”

루벤은 어젯밤 키득대며 말했다. 테스티는 그의 눈에 스며든 광기를 확인하고 살짝 몸을 떨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제 그것뿐인데요.”

“루벤.”

“어차피 너무 멀리 왔습니다. 저는 끝까지 갈 겁니다.”

그는 거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테스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깟 회의 한번 참여 안 한 것이 뭐 어떻다고요? 어차피 어마마마가 저를 위해 피로 물든 왕도를 닦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 * *

“르엘라가 6 년 전 화재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르엘라의 죽음도 재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카이든은 서류 가방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메모를 펼치며 말했다. 리젠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사실 수사국은 사람이 죽은 건 당연히 열심히 수사하지만, 음…… 미친 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나 봐.”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

잠옷 차림의 리젠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미 잘 시간을 넘긴 상태였다.

“약제국의 일개 직원이 그냥 미쳤는데 그걸 수사국에서 왜 조사하겠어. 날짜도 맞지 않아. 우리 고모는


화재 사건이 일어나고 6 개월 뒤에 미치기 시작했으니까.”

“증상이…… 어땠어?”

“그냥 유순한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 말하는 법을 잊고…… 온종일 누워 있거나 과자를 먹었어.
돌보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그러다 어느 날 조용히 잠들었고, 그 이후에 깨어나지 않았어.”

“정말 전형적인 광증이네.”

“그래, 그냥 흔한 광증이야. 너무…… 흔하지.”

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이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막다른
길에 접어드는 것은 수사를 할 때면 언제나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런 경우 정보가 필요했다. 더 발로
뛰어 더 작은 단서라도 잡아내야 했다.

“사실은 그때 사파엘 교수님이 왔었어.”

“뭐?”

“고모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알렸을 때 혼비백산해서 뛰어오셨어. 그리고 여러 가지 시약 반응을


미친 듯이 했던 기억이 나. 내가 그렇게, 정말 평온하게 돌아가셨다고 했는데도 믿지 않으셨어.”

“……결과는?”

“자연사였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사파엘 교수님은 뭔가를 알고 계셨던 것 같아. 자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나 봐.”

“사파엘 교수님께 여쭤 보는 것이 좋겠어.”

“절대 말씀 안 해 주실 것 같던데. 몇 번 내가 운을 띄워 봤지만 칼 같으셨어.”

리젠이 입술을 내밀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막 퇴근하고 와서 검은 제복 차림의
카이든은 리젠과의 대화를 정갈하게 메모에 정리하고 난 뒤,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야, 넌 너희 집처럼 편해 보인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리젠의 말에 카이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는 밤늦게 퇴근하며 리젠의


집을 찾아온 터였다. 이 정도도 일찍 퇴근한 거라면서, 퇴근길에 르엘라에 대하여 조사해야겠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그를 내쫓을 수는 없었다. 리젠은 바닥에 앉아 있다가 카이든이 몸을 소파에 기대는
바람에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남자한테 문 열어 주지 말라니까…….”

“그래? 그럼 얼른 나가.”

“조금만, 조금만 쉬다가. 나 어제도 두 시간밖에 못 잤어.”

그 두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젠이 잠들었던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젯밤 꿈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다니엘과 이런 대화를 할 때가 있었어.”

“무슨 대화?”

리젠이 또다시 하품을 참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상대는 100 명 넘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왕비……. 그땐 왕마저도 철저하게 왕비의 편이고


…… 과연 수사국 말단인 나와, 왕위 계승권에서도 멀었던 다니엘이 뭐라도 할 수 있을까…… 윌리엄이
왕위에 오를 때만 기다려야 하는 무력감……. 과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은 아닌지…….”
리젠은 지쳐 보이는 카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애써 봐도 안 되면 어쩌나, 우리가 뭔가를 한다고 다짐했던 건 10 대의 치기가 아니었나. 뭐가


되기는 하는 건지…… 아무리 걸어도 암흑이고 아무리 다니엘과 등을 대고 있어도 외로웠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카이든의 손을 잡았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카이든의
무릎에 엎드려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다른 어둠 속을 꿋꿋하게 혼자 걸어가는 너를 봤어.”

카이든은 미동도 없이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혼자 걷는 그 모습이 너무 빛이 나서…….”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겼다. 리젠은 그의 느리고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자꾸 보고 싶더라.”

‘자면 안 되는데…….’

“……같이 걷고 싶더라고.”

리젠은 그의 무릎에 엎드려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아……. 여기 오랜만이다.’

대학의 체력단련실이다. 리젠은 운동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언젠가 체력단련실에서 둘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카이든과 제대로 대화를 나눈 첫날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이든이 도복을 입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도가 옆에 구르고 있는 것을
봐서 미친 듯이 검도 훈련을 하고 난 뒤인 것 같았다. 카이든의 검은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운동 열심히 했네. 나, 나는 옆방으로 갈게.”

그의 손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휙 낚아챘다.

“악!”

리젠의 몸이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부상을 면했다. 그녀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뒤이어 카이든의 팔이 그녀를 거세게 안아
버렸기 때문에 결국 카이든의 몸 위로 엎드린 형상이 되고 말았다.

“야! 뭐 하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서.”

“뭐?”

“꼼짝도 하기가 힘들어서, 지쳤어.”

그가 그녀를 안고 쿡쿡 웃었다. 리젠은 그의 몸 위에 엎드려서 그녀가 비치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턱 선과 깊은 눈매, 짙은 눈썹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녀는 새삼 현실에서는 그의
얼굴을 이렇게 뜯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곱상하고 귀공자 같은 얼굴이라면, 카이든은 성숙하고 선이 굵은 남자다운 얼굴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어?”

“너처럼…… 되고 싶었는데.”

“뭐가?”

“그냥, 뒷모습만 봐도 괜찮은 거.”

리젠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카이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게 잘 안 돼.”

눈을 동그랗게 뜬 리젠의 얼굴을 보며 카이든이 힘없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게 난 너무…… 힘들어.”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리젠은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이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나?
그럴 수 있었다. 카이든이라고 좋아하는 여자가 없을 리 없었다. 그냥 리젠은 당연히 카이든은
복수하느라 바빠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을 거라고 예상한 것뿐이었다. 리젠의 머릿속에 카이든과
그래도 대화를 줄곧 잘 나누었던 여학생 이름들이 둥둥 떠다녔다.

“내가 좋은 동료라면…… 그 여자 누구인지 말해 줘.”

리젠과 카이든의 시선이 얽혔다. 리젠은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느리게
그들의 입술이 맞닿았다. 리젠의 수줍은 혀가 부드럽게 그의 입술을 쓸었다. 카이든은 눈을 감고 그녀의
왼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안 돼.”

리젠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든이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리젠은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는 내가 나타나니까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놓고 마음속에서는 다른 여자를 품어? 그래 놓고 좋은 동료? 그러니 이렇게 단둘이
우리 집에 있어도 제정신일 때에는 내 몸에 손끝 하나 안 건드리는구나. 약간의 짜증을 품은 그녀의
손길이 과감해졌다. 오기가 생긴 그녀가 왼쪽 손을 억지로 풀고 그의 허리를 감았다.

“……알고 싶어.”

그녀가 도복 바지를 천천히 벗기며 크고 단단한 그의 중심을 두 손으로 잡았다.

“왜 안 알려 주는 거야?”

“리, 리젠…… 제발…….”

“동료끼리는 비밀 같은 거 없어야 되는데.”

그녀가 말할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간질거려 카이든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나도 다니엘 좋아하는 거, 네게 다 말했잖아.”

“……안 돼.”

그의 단호한 말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서 그의 남성을 쓸었다.

“누구야, 그 여자애?”

“있어.”

옅은 신음 소리를 뱉으며 그가 그녀의 목에 이를 박았다.

“엄청…… 지켜 주고 싶은 여자.”

“……뭐?”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

[따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고개를 벌떡 들었다. 허리가 아팠다. 카이든의 무릎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카이든 역시
그 자세 그대로 잠들었었는지, 소파에 앉아 기댄 그 자세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안 돼. 진짜 절대 얼굴 못 보겠어.’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분명히 카이든도 꿈의 잔상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허리를 펴려다가, 바로 눈앞에 잔뜩 커진 그의 중심을 보고 숨을 삼켰다.

‘아, 말도 안 돼…….’

카이든 역시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토끼처럼 커진 리젠의 눈을 보고 민망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건…… 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지난 꿈에서 직접 카이든의 바지를 벗기며 저 커다란 것을 만졌다.


분명히 카이든도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리젠 역시 같은 꿈을 꿨고 기억하고 있다는 건 정말 죽어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음…… 남자는 원래…… 아침에 일어나면…….”

“아, 알아!”

리젠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 나도 알아. 별거 아니잖아. 음…… 건, 건강하다는 뜻이지?”

그의 귀가 빨개졌다. 리젠은 어쩔 줄 모르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목을 가다듬고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정말 미, 믿음직스럽다. 이렇게 건강한 남자가…… 음…… 좋은 동료라니!”

“……바보야.”
그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해.”

“역시 수사국 남자들은 몸이 튼튼……. 음…….”

“그만하라고.”

“뭐, 곧…… 작아질 거잖아. 그렇지? 이건 뭐, 자연스러운…….”

“리젠 하카트!”

“어어어! 나, 난 먼저 씻을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리젠은 화들짝 놀라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쾅 닫은 그녀가


문 뒤에 기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 세상에……. 최악이다.”

리젠답지 않게 왜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을까. 사람 유골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는데, 정말
자연스러운 현상을 보고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그녀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누구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지키고 싶은…… 바보 같은 여자?”

둘 다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는 선택 과목인 마법까지 포함하여 카이든과 일대일로


대련을 하면 막상막하일 것이라는 동급생들의 평가를 받아 왔다. 온갖 범죄의 온상을 캐고 다니는 수사국
지망이었던 그녀를 도대체 누가 지키고 싶단 말인가. 게다가 바보 같다는 표현은 더더군다나 그녀에게서
멀었다. 세상에서 그녀가 똑똑하지 않다면 누가 똑똑하다는 것인가? 오히려 백치미라고는 전혀 없어
남자애들이 가까이 힘들어하던 그녀였다.

늘 아셰에게 ‘너처럼 빈틈없이 완벽하게 굴면 남자들한테 인기 없어.’ 같은 말이나 듣곤 했다.

“……누구지?”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리젠은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자리에 있는 쪽지를 하나 보고 숨을 삼켰다.

[11 시에, 약제국 뒤편 정원을 죽 가로지르면 나오는 정자에서 봐. - 다니엘]

분명 왕궁의 사람이 몰래 둔 것이 분명했다. 몇 번이고 훔쳐보았던 다니엘의 필체가 확실했다. 그녀는


흘끗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사파엘을 보았다. 사파엘은 약제국의 직원들이 왕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것 같았고, 사실은 그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었다. 산하기관의 가치중립성은 분명 몹시 중요한
윤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왕궁 산하기관마저 왕족들의 정치 놀음에 놀아나게 된다면 어떤 조작이 벌어질지
몰랐다. 사파엘이 염려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쪽지를 받은 것만 해도 정말
잘못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다.
그래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11 시가 되기 직전에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몰래 약제국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어떤 정자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정원을 죽 가로지르면 나온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약제국은 왕궁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산책로가 몹시 잘 되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비가 툭, 툭 하고 떨어졌다.

“아…… 맙소사.”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약제국 안으로 우산을 가지러 들어가기엔 들킬 것 같아 무서웠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실험복을 뒤집어쓰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그 정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외진 데에
있는지 정원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도 나오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두꺼워지고, 그녀가 짜증을
내며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 지붕이 있는 정자가 보였다.

“저긴가?”

연구할 때만 쓰는 안경을 그대로 쓰고 나와, 그 안경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시야가 흐렸다.
금발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와, 왕자님, 늦었어요. 죄송…… 해…… 요?”

정자에 들어와 덮어쓴 실험복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자, 금발 머리의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 정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 넓은 정원에
정자는 여기뿐인 것 같은데?

정자에 미리 와서 앉아 있던 금발 머리의 남자는 자세히 보니 다니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렇게 화려한 옷, 왕궁과 함께 쓰는 산책로, 선왕을 그대로 닮은 금발
머리. 2 왕자인 루벤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려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르엘라?”

그녀가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그녀가 당황한 나머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그…… 그 사람은 제 고모인데요.”

“…….”

루벤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르젠이냐?”

“……리젠이요.”

“아, 맞아. 그랬지…….”

“저를…… 아세요?”

“꼬맹이일 때 봤었지.”

루벤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그녀를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뜯어보았다.

“많이 컸네.”

리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코만 훌쩍거렸다. 인사하기에도 타이밍을 놓쳤고, 친근하게


대하자니 여러 가지 사정이 걸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카이든의 가설에 따르면 이
남자와 왕비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 아닌가.

“갈색 머리 빼고는 생각보다 르엘라를 닮지는 않았구나.”

그건 칭찬 아닌가, 리젠은 코를 긁적였다. 르엘라는 객관적으로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다. 비쩍 말라서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은 항상 퀭했고, 항상 짧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다녔다. 리젠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리젠에게 무슨 일이야?”

다니엘이었다. 우산이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에 잔뜩 경계심을


품은 상태였다. 루벤이 읏차, 하며 일어섰다.

“뭐야, 밀회라도 약속한 거야? 쪼끄만 것들이…….”

“가, 가시게요?”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루벤의 날카로운 눈이 그녀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다니엘과 그녀의
인사조차 받지 않고 우산도 없이 빗속을 저벅저벅 걸어 사라졌다.

“뭐래?”

다니엘이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뭘 캐냈어? 혹시 협박했어?”

“아, 아니요…….”

그녀가 천천히 정자에 앉으며 젖은 머리를 꾹 눌러 짰다.

“별말 안 했어요. 저도 이제 막 와서요.”

“미안. 우산 가져오느라 늦었어.”

그들은 나란히 정자에 앉아 토독토독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푸르른 정원에 비가 내려 시야가


깨끗하고 예뻤다. 리젠이 그녀를 바라보며 ‘르엘라’라고 중얼거리던 루벤의 표정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데, 다니엘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리젠, 사실 부탁이 있어.”

“네…….”

“약제국에서, 불법 약물 단속 때문에 약초 유통 경로를 관리하는 걸로 알고 있어. 맞아?”

“네.”

리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망설이며 메모지 하나를 내밀었다. ‘캐서린 얀슨’이라고 적힌
이름과 약초상 가게의 주소가 적힌 메모였다.

“외울 수 있어?”

“네.”

그녀는 메모지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다 외우고 나서 간단한 마법으로 바로 메모지를 불태웠다.


다니엘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야무지고 똑 부러진 여자애다. 학생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여기 들어간 약초들 유통 경로를…… 추적해 줬으면 좋겠어.”

“또 비공식적인 건가요?”

“왕비한테 들킬까 봐 공식적인 요청을 할 수가 없어…… 지금 내 계획은 이래. 윌리엄 시해 사건을


조사하는 척 모든 곳을 들쑤셔 놓고 뒤로는 6 년 전 화재를 조사하는 거지. 투 트랙이야.”

“그리고…… 카이든이 발굴해 온 유골의 성분과 비교하면 되겠군요.”

“역시 리젠이야.”

다니엘이 쿡쿡 웃었다.

“너무 똑똑해서 설명할 것도 없네.”

“카이든에게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바쁘실 텐데, 괜히 눈에 띄게.”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다니엘이 살짝 당황하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사실 자신도, 카이든에게


시키면 될 걸 굳이 그녀를 보러 온 것이 스스로도 머쓱하던 차였다.

“카이든은 지방에 출장 갔어. 내일 와. 하루하루가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오늘 아침에 부랴부랴 나가더니 지방 출장이 있었구나. 리젠은 순간 출장에서 다녀왔다며 팔에 긴 상처를


안고 돌아온 카이든의 모습이 생각나 입술을 깨물었다. 다니엘은 리젠이 ‘그렇게 하루하루가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같은 말을 할까 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리젠.”

“네?”

“내일 무도회 온다며.”

그러고 보니 내일이 왕궁 무도회였다. 리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씩 웃었다.

“아셰가 너랑 같이 간다고 얼마나 기대에 차 있는지 몰라.”

그의 파란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춤 신청하면, 받아 줘야 해.”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매끄러운지,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리젠은 숨이 막혀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 저, 저 춤 잘 못 추는데요…….”

마치 학교 다닐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니엘에게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긴장했던 바로 그 어린 시절로.

“그럼 잘 출 때까지 내가 가르쳐 주지, 뭐.”

비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다시 구름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 다니엘의 금발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의 파란 눈도 투명하게 빛났다. 리젠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앉아 있을 동안, 카이든은 어느 사지에서 헤매고 있는지 마음 한편으로 계속
걱정이 되었다.

4. 무도회

“거봐요, 왕녀님.”

리젠은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저는 평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 이렇게 화려한 옷도 안 어울리고, 속눈썹도 짧아서 화장도 잘 안
먹어요.”

“아냐. 못 찾은 것뿐이지 정답은 있을 거야. 일단 이건 벗자. 파란색은 진짜 아니다.”

아셰는 온갖 옷과 장신구들을 늘어놓고 고민 중이었다. 역시 권력 없는 왕녀라고 해도 왕족이라


사치품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리젠은 처음엔 좀 기대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거울을 보았지만,
화려한 옷들을 입으면 입을수록 왜 그동안 그녀가 단순한 옷만 고집했는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슬슬 지쳐 갈 무렵 아셰가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드레스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귀엽게 생겨서 사랑스러운 스타일이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옷이랑 따로 노네. 아예 다른
쪽으로 가자. 섹시한 연구원!”

“이건 노출이 심한데요. 게다가 라인이 너무 붙어요.”

“한번 입어 보기라도 해 봐.”

리젠은 몸에 달라붙는 붉은 민소매 드레스를 입어 보았고 그제야 아셰와 리젠의 얼굴이 펴졌다. 레이스나
화려한 장식이 없는 드레스가 의외로 잘 어울렸던 것이다.

“다니엘 진짜 깜짝 놀라겠다.”

아셰가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액세서리를 고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 악바리 리젠이 이렇게 우아하고 섹시할 줄 몰랐을걸?”

“왕녀님도 너무 예뻐요.”

“나야 이런 무도회가 처음이 아니니까 나한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고. 어때, 아메탄의 유일한
왕녀 체면은 서겠지?”

아셰가 프릴이 화려하게 달린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빙글 돌았다. 아메탄 왕족 특유의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너뿐만 아니라, 나도 오늘 목적이 있어.”

“목적이라뇨?”

“외국에서 이러저러한 남자들이 많이 올 거 아니야? 혹시 아니? 좀 호구 같은, 권력 암투 같은 거 없는


나라의 왕자나 공작쯤이라도 낚을 수 있을지. ‘의심의 기간’ 끝나고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을 때 청혼
시켜 볼까 싶기도 하고.”

“많은 남자들의 눈에 띌 것 같아요.”

리젠이 진심으로 말했다.

“너무 아름다우시니까, 정말로.”

“난 그래도 리젠이 부러워.”

아셰는 그녀에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며 속삭였다.

“한 명, 단 한 명에게만 예쁘게 보여도 되는 삶 말이야.”

리젠은 ‘단 한 명’이라는 말에 왠지 마음이 무거워져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의 ‘단 한 명’


은 다니엘이 맞을까? 어젯밤 꿈에는 카이든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제때 잠을 자지 않았다는 얘기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던 밤이 생각나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니엘이 반할 수밖에 없을 거야. 교복 입던 그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

아셰가 직접 고른 흰색 하이힐을 그녀의 발밑에 놓아 주었다.

“내가 봐도 너무 매력적이니까, 리젠. 앞으로 실험복에 운동화 끌고 다니지 말고, 이런 스타일로 입어.”

“너무 불편한데요. 다리가 요만큼밖에 안 움직여요.”

리젠이 씩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왕녀님. 덕분에 이런 비싼 옷도 입어 보고, 생전 해 보지 않았던 보석도 걸쳐 보고,


이렇게 예쁘게 꾸밀 수 있다니. 정말로 귀족 영애가 된 것만 같아요.”

“기죽지 마. 가면 귀족 영애들끼리 기 싸움이 엄청 날 거야. 되도록 처음엔 내 옆에 붙어 있어.”

그녀가 리젠의 손을 꼭 붙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차기 왕비가 될 수도 있는 몸이라고.”

리젠은 어설프게 웃었다. 너무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도회는 정말 화려했다. 이 정도만 해도 국상 중이라 소박하게 많은 절차를 생략했다고 하니 평상시에는


얼마나 화려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셰의 마차를 타고 함께 입장한 왕궁에서는 어딜 가나 좋은
냄새가 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으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정말 상상도 못한 세상이네요.”

리젠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핑거푸드를 먹거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셰와 리젠은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와인 잔을
부딪쳤다.

“리젠 하카트의 꿈만 같은 밤을 위해!”


아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무도회는 모든 사랑을 하는 소녀들의 꿈이야. 예쁘게 차려입고,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남들의 시선을 느끼며 춤을 추는 것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꿈이네요.”

리젠도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재미있어요. 여기 있는 것만 해도 즐거워요.”

그녀들이 쿡쿡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사람들 틈에서 멋있게 차려입은 다니엘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 리젠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다니엘이 그들의 테이블에 스스럼없이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기다렸어.”

“춤은 많이 췄어?”

아셰가 묻자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최대한 피해 다녔어.”

그가 리젠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춤을 가르쳐 줘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리젠의 볼이 자신도 모르게 발갛게 물들었다. 다니엘은 정말로, 저런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할
때에는 ‘달콤하다’라는 형용사가 너무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셰가 키득대며 리젠의 옆구리를 찔렀다.
리젠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향이 좋은 와인만 한 모금 마셨다.

“리젠, 오늘 정말 예쁘다.”

다니엘 역시 흰색 정장이 몹시 잘 어울렸고, 거의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꽂힐 정도로 수려했다. 그는


왕위 계승권자 후보가 된 이후 더 외모에서 빛이 났는데,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만큼이나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멀어 느껴졌다.

“저기, 아셰 왕녀님 아니십니까.”

그들 사이로 흰 피부에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다소 왜소한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한스팀 왕국에서 온 지한이라고 합니다.”

“아…… 지한 왕자님?”

아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전에 혼담이 들어왔던 사막 국가의 남자였다. 다만 제국의 황제에게서
청혼이 겹쳐 들어오면서 흐지부지되었다가 ‘의심의 기간’ 중 다 없던 일이 되었던 것이다. 아셰는
한때는 결혼할 뻔했으나 얼굴은 지금에서야 처음 보는 젊은 남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입니다.”

아셰는 천천히 일어나 아주 우아한 손짓으로 인사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춤추는 것 같은 살랑거리는
몸짓에 리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 한 곡…… 청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아셰가 리젠에게 눈을 찡긋했다. 잘해 보라는 의미의 윙크를 날린 그녀가 한쪽 손을 지한에게 맡기며


사뿐사뿐 걸었다. 약간 얼떨떨해하는 리젠의 표정을 보며 다니엘이 푸하하 웃었다.

“왕녀로서 당연한 거야. 두 얼굴을 가지는 건 왕족이라면 어쩔 수 없어. 아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럴걸.”

“그런가요? 목소리부터가 제가 알던 아셰가 아닌 것 같아서…….”

“리젠도 내가 알던 리젠이 아닌 것 같은데.”

“네?”

“너무 예뻐서.”

“아…….”

리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제 생각에도요. 제가 꾸미니까 또 꽤나 괜찮더라고요?”

다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능청을 떨며 키득거리고 한술 더 떴다.

“이제 월급 받아서 옷 사고 보석 사는 데 쓰려고요. 매일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다면 돈 버는 보람이


있겠어요.”

“역시 리젠이야. 지금이 무도회 와서 제일 유쾌했어.”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하다가 아셰를 흉내 내어 한쪽 손을 얹었다.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춤…… 가르쳐 줄게, 잘 출 때까지. 약속했으니까.”

“네. 걱정 마세요. 아마 잘할 거예요.”

리젠이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저는 잘 못하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별 반전 없이, 리젠은 몇 번의 스텝을 다니엘에게 배운 이후로 아주 능숙하게 반복되는 스텝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다니엘은 약간 당황하며 웃었다.

“이렇게 빨리 배울 줄 몰랐는데.”

“패턴이 있어서 별로 안 어려운데요. 이런 것보다 백배 어려운 무술 훈련도 예전에 얼마나 많이


했었는데요.”

그녀가 빙글 돌며 우아하게 스텝을 밟았다. 어쨌든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저 멀리서 초록색 드레스의 아셰가 계속해서 한스팀 왕국의 왕자라는 지한과 춤을 추고 있었다.
리젠의 눈이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테스티는 상석에 앉아 그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으며 모든 무도회를
둘러보고 있었고, 그 옆의 루벤은 지루하다는 얼굴로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어…… 저기 저분은 누구세요?”

리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춤을 추고 있던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다니엘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람? 루벤의 부인이야. 결혼한 지 7 년 정도 되었는데 아직 아이가 없어.”

“저분도 외국인이시겠네요, 원칙에 따르면.”

“어. 한스팀 왕국에서 루벤이 사막 여행하다가 직접 데려왔어. 나는 조금 더 강대국의 여자를 데려올 줄


알았는데, 심지어 저 여자는 왕녀도 아니야. 그래도 테스티가 별말 안 하더군.”

노래가 바뀌며 다니엘과 리젠의 몸이 더욱 더 밀착했다.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리젠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완벽히 박자를 맞췄다.

“리젠. 신기해.”

“뭐가요?”

“넌 왜 다 잘해?”

“그러는 왕자님은요?”

“나는…… 왕족이라 어쩔 수 없는 거고. 아셰도 마찬가지잖아.”

저 멀리 아셰가 이제 다른 남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는데, 리젠은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항상 그녀의 앞에서는 꺄르르륵 대며 숨이 넘어가게 웃거나 푼수같이 키득댔기
때문이었다. 살짝 걸린 미소가 그렇게 우아할 수 없었다.

“아셰는 아마 네게…… 편한 모습을 보여 준 거겠지.”

“아.”

“나는 아직 안 보여 줬고.”

“……그런가요?”

“그런데…….”

다니엘의 푸른 눈이 그녀를 가득 담았다. 그의 미소년 같은 얼굴에 아셰처럼 우아한 미소가 걸렸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달콤하게 울렸다.

“그런데 왜 아셰가 리젠을 편하게 대했는지는 알 것 같아.”

“네?”

“그동안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어떤 여자랑 함께 있어야 편안한지 좀 알아볼까 싶기도 하고.”

리젠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사실 이런 시간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열일곱에


그를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다니엘을 좋아했다.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끄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농구라도 할 때면 필사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았다. 그뿐인가, 손 한 번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 꿈 연결 시약까지 만들었다.
“오늘 밤 여기 있는 수많은 여자들과 춤을 춰야겠지만…….”

다니엘과 이렇게 단둘이, 이렇게 밀착하여 이런 달콤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마 지금이 가장 마음 편한 춤이겠지…….”

거짓말같이 그때 음악이 끝났다. 리젠과 다니엘이 살짝 떨어져 숨을 고르는 동안, 푸른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귀족 영애가 다가왔다.

“다니엘 왕자님.”

다니엘은 리젠에게 지어 주던 자상한 미소를 띠고 돌아보았다.

“왕자님과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많습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이 어떨지…….”

“아, 그렇군요.”

다니엘의 부드럽지만 살짝 망설이는 대답을 듣고 리젠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예, 왕자님. 저는 조금 지칩니다. 쉬고 있을게요.”

“그럴래? 조금만 숨 좀 돌리고 있어. 곧 갈게.”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테이블로 향했다. 다니엘은 지금 지지 기반이 모두 윌리엄에게서 온 것이라
많은 귀족들의 힘을 얻어야 했다. 이런 사교계 자리에서 많은 영애들과 접하는 것도 정치적인 행동 중
하나였다. 모두 이해하고 또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녀는 별로 마음 상할 것도 없이 원래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달콤한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으며 그녀는 지금쯤 카이든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테스티는 호위 무사에게 손짓하여 속삭였다.

“저 여자야. 다니엘과 연속으로 세 번 춤을 춘 저 여자애.”

“아셰 왕녀님과 함께 온, 갈색 머리의 여자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저 여자를 볼 때 다니엘의 표정이 완전히 달랐다.”

테스티가 도도하게 어깨를 폈다.

“젊은 남자들은 참 감정을 못 숨겨.”

“저 여자가 리젠 하카트입니다. 르엘라 하카트의 조카이고요.”

“일이 그렇게 되는군.”

“……일단 오늘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언제 그런 은밀한 대화를 했냐는 듯, 호위 무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테스티는 인자한 표정으로
무도회 전반을 다시 응시하기 시작했다.

리젠은 혼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귀족들과 별다른 연결점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귀족이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다지 이런 곳에 올 정도로 권력이 있는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외국인들이나 한껏 꾸민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아셰는 다니엘을 단단히 유혹해 보라고 했으나 그녀는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몰라 그저 춤만
추고 와 버렸다. 아셰가 분명히 작은 농담에도 예쁘게 웃어 주고 자꾸 치켜세워 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조언들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춤도 못 추는 척하면서 질질 끌고 있으라고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약간 씁쓸한 마음에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순간 불길한 기운이 덮쳐 왔다.

“이런.”

그녀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재빨리 살짝 비껴서 일어났고, 그녀의 어깨에 보라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모르는 여자였다. 리젠의 차가운 갈색 눈이 갑자기 나타난 은빛 드레스의 귀족 영애를 노려보았다.

“손이 미끄러져서. 큰일 날 뻔했네요.”

리젠은 그녀의 의자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액체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운동신경이 뛰어나 잽싸게
비켜서 그렇지, 정말 와인에 홀딱 젖을 뻔했다, 리젠은 어이가 없어 그 영애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왕립고등학교 학생일 때에도 이런 식의 괴롭힘은 찾아본 적도 없었다!
귀족이라면서 유치하기는.

“예의가 없으시네. 사람이 사과를 하는데.”

은색 드레스의 영애 뒤에 있던 주근깨를 화장으로 가린 여자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비꼬기 시작했다.

“역시 출신은 못 속인다고, 산하기관 직원답네.”

“진짜 아메탄 왕국은 너무 너그럽다니까. 한낱 왕궁의 산하기관 직원까지도 무도회에 출입 가능하게 해


놓고 말이야.”

“산하기관 애들이 그래서 기고만장하잖아. 맨날 객관성이랑 전문성 운운하면서 왕족들 말도 잘 안 듣는대.


미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기들 월급 주는 게 누군데?”

“뭐, 그래서 이렇게 귀족들한테도 분수 모르고 까부나 보지. 야, 눈 희번덕거리지 마. 산하기관 직원들
신분 상승한 건 고작해야 100 년이야. 귀족의 역사는 2,000 년이 넘었고.”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귀족 영애들이 모여들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리젠은 이래서 약제국
직원들이 하나같이 무도회에 관심이 없었구나 싶었다. 왕국의 산하기관은 신분과 관계없이 우수한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었고, 실질적인 왕국 업무를 담당한다고 하여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한다고
법에 정해져 있었다. 정치는 귀족들이 하는 것이지만, 전문적으로 나라 굴러가는 일은 산하기관에서
주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일 뿐이고 여전히 귀족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듯했다.

“네가…… 감히 학교 좀 같이 다녔다고 왕자님을 넘봐?”

은색 드레스의 영애가 피식 웃으며 눈을 부라렸다. 리젠은 설마설마했던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유치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피식 웃어 버렸다. 그녀가 전혀 수치스러워하지도 않고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귀족 영애들의 무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시건방진 계집애가…….”

리젠은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와인 잔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제가 이런 싸움을 하기에는 좀 바쁘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로 지금의 상황이 귀찮은 말투였다.

“제가 바락바락 대들어서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어 드리거나, 눈물로 잘못했다고 호소하여 마음을 풀어
드리기엔 제 인생도 충분히 피곤해서요. 영애들께서는 내일 볕 좋은 정원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
얘기를 하셔도 시간이 남아도시겠지만, 저는 당장 오늘 밤에 이만큼 두꺼운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의 와인을 자신의 손에 줄줄 따라 내었다. 그녀의 왼손에 붉은 와인이 뚝뚝


떨어졌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죠. 빌린 옷이라 옷을 망칠 수는 없고, 손 정도는 씻으면 되니 양보해 드릴 수


있어요. 충분히 굴욕적인 것 같은데 이 정도로 타협할까요?”

영애들이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에서 테이블로 흐르고 있는 와인 방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자리를
뜨는 와중에 은색 드레스의 영애만이 남아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왕비가 되면…….”

그녀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산하기관부터 손보겠어. 약제국은 첫 번째로 폐쇄하고 말 거야.”

은색 드레스의 영애가 리젠의 뺨을 치기라도 하면, 리젠은 그 전에 팔목을 잡아 비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제대로 다 올라가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네가 왕비가 될 것 같으면 어떻게든 다니엘에게 정신 차리라고 욕해야겠네?”

어느새 다가온 아셰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약제국에서 개발한, 피부 뽀얗게 하는 시약이 얼마나 많이 수출되는지 알아? 너도 얼굴 본새 보니 그거


먹고 온 것 같은데? 탁상공론하는 귀족 나으리들보다 산하기관에서 얼마나 왕국에 많은 도움을 주는데,
과거의 악습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명맥 유지하는 귀족들이 건방지게 폐쇄 운운하고 난리야.”

“와, 왕녀님.”

은색 드레스의 영애가 이를 갈며 일단은 고개를 숙였다.

“왕족들이 엘리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하는 건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몰라도 너무 좋은 아이디어 같아.


안 그러면 귀족들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몰랐을 테니까. 너 약제국 폐쇄하면 그 엄청난 손해 네가 다
메꾸렴. 다니엘이 너 같은 여자를 선택할 정도로 멍청하면 왕도 못 되겠지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영애의 분함이 리젠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셰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아들었으면 벌서지 말고 가 봐.”

영애는 이를 갈며 인사를 하고, 또각또각 걸어 나가는 길에 리젠의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주제에 안 맞게 첩년 짓 하는 건…….”

그녀에게만 들리는 섬뜩한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은색 드레스가 미끄러지듯이 사라졌다.


“네 고모 닮았나 봐?”

리젠은 그대로 굳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아셰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허둥지둥
닦기 시작했다.

“어떡해…… 저 미친 게, 벌써 지가 왕비인 줄 아네. 남들이 차기 왕비라고 떠받들어 주니까 진짜인 줄


아나 봐.”

리젠이 살짝 충격 받은 것을 그 영애의 거만함 때문이라고 오해한 아셰가 짜증을 냈다.

“뮤엘튼 공작의 맏딸이야. 사실 귀족원 중에서는 권력이 가장 막강하고, 대표적인 윌리엄의 라인이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래도 저년이 정말로 왕비가 된다면…….”

아셰가 싸늘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없애 버릴 거야. 건방진 년.”

“……아셰?”

진심으로 느껴지는 살기에 리젠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학생 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왕비가 되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나를 가장 불행한 자리에 밀어 넣고 산하기관 다 없앨걸? 다니엘은


귀족들의 개가 되고 말이야. 뭐, 본인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없앤다’라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리젠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 버린다는 말을 진지하게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됐다. 살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추악한 것 아닌가.

역시 왕족은 얼굴이 너무 많다. 사파엘이 왕족은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한 것이 조금씩 더 이해가 갔다.
가장 정치적인 위치이니 어쩔 수 없겠지. 왕족들이 산하기관을 존중하는 것도 결국 귀족들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리젠은 아셰가 자신을 왕비로 미는 것도 사실은 산하기관 출신의
왕비가 아메탄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오랜 짝사랑을 응원한다는 친구의 순수함마저도 믿을 수 없다면 과연 그녀에게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리젠은 그 영애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충격적인 발언에 대해 혼자 조용히 생각하고 싶었다.

“왕녀님, 아무래도 저 손 좀 씻고 와야 할 것 같아요.”

리젠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잠시 다녀올게요.”

“같이 가 줄까? 화장실은 2 층이야. 또 그것들이 몰려들면 어떡해.”

“그 정도는 이길 수 있어요. 정 짜증나면 때리고 튀죠, 뭐. 그리고 왕녀님도 바쁘신 것 같은데요?”

그녀가 아셰 곁을 아까부터 맴돌고 있던 한스팀 왕국의 지한 왕자를 흘끗 눈짓하며 말했다. 아셰가


짜증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쟤, 내가 좋은가 봐. 자꾸 저러네.”

“호구 같은 남자 하나 물고 싶다면서요. 어때요?”


“호구 같긴 한데, 진짜 너무 재미없어. 자꾸 자기네 사막 왕국이 옛날에는 번영했는데 마력이 줄어들어
흑마법이 사라지며 이렇게 된 거라고 신세 한탄만 하잖아. 피랑 시체랑 저주 얘기만 드글드글한 흑마법
얘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 잠자리 섬뜩하게.”

아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미지 관리는 잘해 봐야지. 그럼 리젠, 다녀와. 분명히 다니엘은 다시 올 게


분명해. 그때 내가 다 일러 줄게. 일단 화장실은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돼.”

“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한스팀 왕국의 왕자에게 다가가는 아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리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이 끈적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있었지만 일단 음악 소리가 좀
작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며 그녀는 무도회장 중앙에서 몇 번째일지 모르는 여자와 춤을
추고 있는 다니엘을 보았다. 눈처럼 하얀 흰색 정장, 길쭉한 다리와 매끄러운 살결, 부드럽게 물결치는
금발 머리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었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본 것이 벌써 6 년. 어디에선가 몰래 바라보기만 했던 그 시간이 이젠 6 년. 말 한마디


못한 채로 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순정이 그새 6 년. 이제 와 조금 더 다가가도 된다고 하니 괜히
뒷걸음질 치게 되는 이 마음은 뭘까. 난 그저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라도 내는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이렇게 주저하며 아무것도 못하는 건 나답지 않은데……. 리젠은 복잡한 심경을
누르며 겨우 걸음을 옮겼다.

손을 씻고 나서도 리젠은 쉽사리 연회가 한창인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생각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밤공기가 싸늘했지만 더 이상 달콤하고 인위적인 향기를 맡기 싫어서 그녀는 테라스에 나가기로 했다.
무심코 문을 연 첫 번째 테라스에서, 두 남녀가 엉켜 있다가 그녀를 향해 매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본 뒤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지 살피며 걸었다. 그래서 결국엔 가장 구석의 아무도
없는 테라스를 찾아 난간에 몸을 기댔다.

“주제에 안 맞게…… 첩년 짓…….”

르엘라와 전혀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리젠은 르엘라가 30 대 중반까지 살아가면서 일생 내내 과연 남자를


한 명이라도 만났을까 의심스러웠다.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리젠보다도 애교 없이 꼿꼿했으며 늘
안경에 실험복 차림이었다. 리젠은 그나마 억지로 만들어 낸 쾌활함이라도 있었지만 르엘라는 한없이
진지하게 연구 윤리를 읊던 사람이다. 정말 고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리젠은 그녀가 과연 누군가의
첩년 짓을 할 만큼의 매력이나 있는 여자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고모에 대해서 뭘 알겠어.”

그녀는 고모의 손에 컸지만, 그녀에 대해 충분히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생각을 했다. 르엘라가 죽었을
때 그녀는 18 세였다. 르엘라는 그때 리젠을 맡아 키웠는데, 리젠은 그 나이가 되어서도 르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가르침을 받기에만 급급했다. 당장 르엘라의 노트들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었는지 그동안은 짐작만 했을 뿐 전혀 몰랐다. 그녀는 문득 르엘라가 너무 낯선
여자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귀족가의 사교계에 그런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는 건지.

“세상 쓸데없는 고민일까?”

리젠은 둥글게 뜬 달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고민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 뮤엘튼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그 영애를 붙들고 와서 몸으로 제압하고 소문의 전말을
듣는 게 더 속이 시원하지 않을까? 어차피 지켜야 할 체통도 없는 평민 출신인데 한번 막 나가 볼까?
그게 더 그녀다운 해결책 아니었나? 대놓고 시원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아서 원래부터 수사국 지원이
아니었나?
밖의 새까만 밤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다시 연회장을 가기 위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하앗!”

본능적으로 그녀는 몸을 굴려 피했다. 문을 등에 댄 그녀의 눈이 차갑게 공격자들을 바라보았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얼굴까지 가린 누가 봐도 암살범 같은 남자들이었다.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그렇게 날래게
피할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듯했다.

‘칼!’

달빛에 반사된 단도가 보였다.

‘미안해, 아셰.’

그녀는 다시 달려드는 남자들을 피해 다리에 달라붙은 드레스를 지익, 하고 찢으며 아까 그녀가 들어왔던
문에 몸을 부딪쳤다.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밖에도 동료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급한 대로 한 남자를 걷어찼으나 역시 정제된 요원들인지 제대로 맞지 않았다.

“아악!”

도약하여 한 명의 목을 밟고 난간으로 뛰려고 했으나 다른 한 명에게 다리를 잡히고 말았다. 종아리 위로


칼이 번득이는 것을 본 그녀가 흠칫하여 주문을 외우고 말았다. 화르륵 붙는 작은 불에 놀란 괴한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젠장, 이 미친년, 마법 써!”

불 한 번 피웠다고 마력이 뚝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괜히 마법이 쇠퇴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조용히 욕을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한쪽 하이힐을 벗어 들었다. 아무리 전투 능력이 상당하다고 해도 이렇게 훈련한
성인 남성 두 명을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그녀가 흰 하이힐의 날카로운 굽으로
가까이 있던 남자의 얼굴을 찍어 내렸다. 피가 튀었다.

“얌전히 살려 주려고 했더니 이 개 같은 년이?”

얼굴에 기다란 상처가 난 그가 그녀의 목을 잡고 바닥으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녀는 상체가 제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을 차서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을 신고 있던 하이힐로 긁었다. 죽이려면 꽤나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녀를 제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붙잡힌 그녀가 버둥거리며 마력을 모으고 있는데
한 명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잡으며 눈짓했다.

“먼저 기절시켜, 그냥!”

“꺅!”

목 위로 떨어지는 육중한 힘을 느끼고 그녀는 간신히 급소를 피했으나 일단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저 기절한 척을 했다. 뭘 하려나 알고 싶기도 하고,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기습할
생각이었다. 칼날이 그녀의 허벅지를 거침없이 파고들었고 그녀는 이를 깨물며 간신히 비명을 참았다.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허벅지에 기다랗게 상흔이 생겼다. 이젠 정말 끝났다는 듯이 그가 품속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내 흘러내리는 피를 담았다.

“모자라는 것 같아. 시간 없어.”

다시 한 번 다가오는 칼을 그녀가 발로 쳐 냈다. 생으로 상처를 입은 다리가 후끈후끈했다. 저 멀리


떨어진 하이힐을 집어 던져 일단 유리병을 깼다. 그녀의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정신없이 피하는데
볼에서 불꽃이 튀었다. 따귀를 맞은 것이다.

“이년이 진짜!”

“아아악!”

머리채가 잡힌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다시 나머지 한 명이 굴러서 구석으로 떨어진 칼을 집었다.

“단단히 잡고 있어. 보통 계집애가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손목 줄을 끊어 동맥혈을 받고 싶군.”

“죽이는 건 위험해. 상판대기가 반반하니 얼굴을 그어 주면 될걸.”

리젠은 칼끝이 그녀의 얼굴로 향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머리를
굴렸다. 이 모든 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그녀가 뭐라고 이런 훈련된 괴한까지
고용한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그녀가 이런 남자 둘을 이기기는 어렵다. 약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체력
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기가 생긴 그녀는 다가오는 괴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런 미친년!”

그때였다. 지붕 끝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려 들어와 그녀에게 달려드는 괴한 중 하나를 난간 밖으로


순식간에 차 냈다. 리젠은 그 틈을 타 자신의 뒤에서 손을 붙들고 있던 다른 괴한의 머리를 뒤로 세게
부딪혀서, 잠시 손아귀의 힘이 줄어든 틈을 타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했다. 헉, 하고 쓰러지는 괴한 뒤로
검은 머리의 청년이 달려들어 머리를 가격했다.

“억!”

“카이든?”

“누구의 사주지?”

리젠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대로 험한 꼴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지붕 위에서 카이든이


나타나 한 명은 2 층 밖으로 떨어트렸고, 한 명은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가 괴한의 목을 꺾으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시켰지?”

괴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문을 웅얼거리더니, 작은 불꽃을 만들어 카이든의 손에 내뿜었다.


위력은 아주 적은 정도였지만 그의 힘을 잠시 빼는 데에는 충분했다. 순간 휘청거리는 카이든의 머리를
벽에 박고 나서, 괴한은 난간을 짚고 2 층 높이를 뛰어 내려갔다.

“……마법사였나 보군. 요즘 마법사는 부업으로 이런 것도 하나 보지?”

“카이든! 피!”

리젠이 정신없이 절뚝이며 다가가 그의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불과 10 분밖에 안 되었던 갑작스러운 습격인데,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좋은 향기와 달콤한


과자,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던 무도회는 아예 다른 세상인 듯했다. 물론 여기까지 웅웅거리며 경쾌한
연주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헛것 같았다.
“리젠…….”

“언제부터 여기…….”

황당해서 말을 더듬거리는 그녀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카이든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리의 부상 때문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아까 테라스에서 뒹굴던 커플들처럼 그들 역시 테라스
구석에서 서로의 몸을 포갠 형상이 되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한숨과 함께 울렸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늦었어.”

리젠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수사국 지망의 에이스였기 때문에 시간을 좀 끌 수 있었던 거지.”

“이 바보가 진짜…….”

“다 내 덕분이라고. 내가 잘났기 때문에 무사한 거야.”

“멍청하긴. 농담이 나오냐?”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아서 그녀는 숨을 캑캑댈 수밖에 없었다. 리젠은 그의 어깨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기대고 몸에 힘을 뺐다. 사실은 너무 놀랐다. 그녀는 살의를 가진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카이든도 놀라웠다.

“지방 출장 갔다며.”

“어떻게 알았어?”

“……다니엘 왕자님한테 들었어.”

다니엘의 이름이 나오자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젠은 숨을 가다듬으며 재차 물었다.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마력증폭약을 거래한 것 같은 작은 마법 약 상점이 있어……. 그곳의 주인인 캐서린이라는 여자가 왕비의


사촌이야. 뭐라도 찾아보려고 잠입했다가, 그 여자가 한껏 차려입고 나가길래 뒤를 밟았지. 근데
무도회였어.”

“아…….”

“‘의심의 기간’ 중 수사 자율권을 획득하니 편하군. 역시 왕자가 뒤에 있으니 든든해.”

“……그렇구나.”

리젠은 상처 입은 다리가 쓰라렸지만 왠지 그의 품을 벗어날 수 없어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그럼 언제부터 무도회에 있었어?”

“네가 다니엘과 춤출 때부터.”


“어머, 나 엄청 예뻤는데 그럼 그것도 봤겠네?”

“네 손에 직접 와인 들이붓는 것도 봤지.”

“그런 건 왜 보냐? 근데 어디 있었지? 난 네가 있는 줄도 몰랐네.”

“수사국 요원이 너한테도 잠입을 들키면 되겠냐?”

“야!”

“화장실까지 따라갈 순 없어서 거기서 널 놓쳤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그러게.”

리젠이 눈을 깜빡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런 공격을 받아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나?”

“그러게.”

카이든이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그의 손길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카이든, 고마워. 덕분에 험한 꼴 안 당했어. 이 예쁜 얼굴에 칼질이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야, 내가 지금 이렇게 피투성이에 머리 엉망이고 드레스 찢어져서 그렇지, 아까는 예뻤다? 봤을 거


아니야.”

“내 눈엔 다 똑같아.”

“뭐?”

“그냥 다 똑같다고.”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 리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카이든이 그의 무게를 더 그녀에게 실으며
키득거렸다.

“교복을 입든, 실험복을 입든, 잠옷을 입든, 드레스를 입든, 내 눈엔 그게 그거니까 앞으로 이렇게 괜한
옷 입지 마라. 어깨가 다 드러나고, 이게 뭐냐?”

“진짜 왕녀님, 가만 안 둘 거야.”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에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무도회는 모든 사랑을 하는 소녀들의 꿈이라더니. 예쁘게 차려입고,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남들의 시선을 느끼며 춤을 추는 그런 곳이라더니.”

“……아니야?”
“피투성이 되어 옷은 넝마가 되고, 남들 몰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오랜만에 격투라는 것도 하는 그런
곳이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좋은 동료가 구해 주고 안아 줬으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휴.”

카이든이 몸을 천천히 떨어트리더니, 리젠의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쓸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왼쪽 머리에서도 피가 아직도 흘렀다. 그의 검은 눈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어, 어? 왜? 무, 무슨 말, 말하는 거야?”

그가 어리둥절한 리젠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젠의 심장이 순간 두근두근 뛰었다.
꿈이었다면 아마 키스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작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머리 위의 상처를 스윽 닦고 태연하게 말했다.

“소란 피워서 좋을 것 없을 듯하니 몰래 나가자.”

“……그래. 일단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근데 어떻게 몰래 나가?”

“놀라지 마.”

“어? 어어어, 야!”

카이든이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리젠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그가 2 층 난간을


뛰어 넘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하늘을 거의 날다시피 하는 곡예 수준의 도약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카이든의 목을 꽉 잡고 매달렸다. 정원의 들길을 따라 그녀를 안고 달린 그는 왕궁과
이어진 약제국을 향했고, 약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호를 그녀가 입력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리젠을 내려주었다.

“야, 이게 인간이 말이 되는 힘이니?”

“이 정도 간단한 마력 운용쯤이야. 수사국에서 엄청 훈련했다고.”

“전혀 간단한 것 같지 않은데? 이런 것도 가르쳐 주다니, 역시 수사국 갈 걸 그랬나 봐.”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어쨌든 훈련에서 배운 비기들은 비밀이니까.”

“더한 것도 있어?”

리젠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카이든은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당하고 방금은
하늘을 날아 놓고서도 쾌활하게 말을 잇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도 그렇고, 이 길도 처음이야. 왕궁이랑 이렇게 이어지나? 저쪽 길은 뭐야?”

“2 왕자궁이랑 이어지는 길. 여기 정원이 복잡해서 다들 잘 모르는 길이긴 해.”

그녀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약제국을 통해 뒷문으로 나갔다. 왕궁을 완전히 벗어난 이후에서야 모든 것이


끝난 듯했다. 그녀의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은 굽이 부러진 하이힐을 신어서 그런지 힘들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본 카이든이 한숨을 쉬며 앞에 섰다.

“업혀.”

“……어?”

“그 다리로, 그 신발을 신고 어떻게 걷겠다는 거야?”

“음…… 미안한데.”

“어차피 집에 혼자 못 보내.”

그녀는 양쪽 하이힐을 손에 들고 카이든의 등에 업혔다. 그가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리고 밤거리를 걸었다.


왕궁에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는지 화려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

“카이든.”

“왜?”

“저녁 먹었어?”

“아니. 어제부터 아직 한숨도 못 자고 한 끼도 못 먹었어.”

“맛있는 거 해 줄까?”

“아니. 너 요리 못하던데.”

“너 진짜…….”

“그리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남자한테 문 열어 주지 말라고.”

“그럼 너도 오지 마.”

“나는 괜찮고.”

“왜?”

“나는 굉장히 자제력 있고, 이성적이고, 하여튼 그런 남자니까.”

꿈속에서는 제일 위험해 보이던데? 리젠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 들었던 말들 중에 제일 웃겼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카이든의 목에 더 세게 팔을 감았다.

리젠이 대충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을 동안 카이든은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는 그를 굳이 깨우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들로 건성건성 요리를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공격받을
만한 이유가 없다. 그들의 대화와 행동들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서 스튜를 끓이다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카이든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아예 자고 있었다.
그가 리젠의 집에 드나든 것은 몇 번 되지도 않는데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사실 그와는 학창 시절
내내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심지어 라이벌 관계라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겨 부정적으로 의식하면 의식했지
절대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연속하여 보기 시작하며 왠지 모르게 친밀해졌다. 그녀는 학교
동창들이 장난삼아 말하던 ‘몸정’ 같은 단어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꿈이어도…… 그게
그렇게 무섭다는데…… 그렇다면 이런 편안한 감정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꿈으로 연결만 되어 있지 않아도 아마 졸업 후에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꿈


연결 시약만 잘못 제조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지금 수사국에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그 사건
하나로 너무 많은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정조차 힘들었다.

고모처럼 그렇게 천재로 살 생각도 능력도 없었고, 그저 열심히 눈에 보이는 길만 힘차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 삶이었는데, 어쩌다가 누군가에게 시해 사주를 받을 만큼 인생이 이상해져 버렸을까. 그녀는
허브를 뚝뚝 따서 샐러드를 만들며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또 자 버렸네.”

“출장 가 있는 동안 못 잤다며. 더 자지 그래.”

“됐어.”

그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딱히 좋은 꿈을 못 꿨거든.”

“와서 밥 먹어.”

리젠이 빠르게 말을 끊으며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식탁을 치웠다.

“왕궁에 계속 있었다면 훨씬 더 맛있는 것들이 많았겠지만.”

“아쉽겠네. 그렇게 화려한 무도회에 한 시간도 못 있었다니. 작정하고 꾸미고 갔으면서.”

그녀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드레스도 하이힐도 대충 벗어 두고,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그러게 말이야. 막상 공주 놀이 해 보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

“난 네가 무도회 같은 데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카이든이 식탁에 놓여 있던 먼지가 잔뜩 쌓인 찻잔을 두 손가락으로 아슬아슬하게 집어서 치우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거기 왜 간 거야?”

“왜? 나는 가면 안 되냐?”

“아니, 너무 의외라서…… 보통 산하기관 사람들은 잘 안 가니까.”

“왕녀님이 끌고 갔어.”

리젠은 왠지 가타부타 설명하기가 민망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카이든이 망설이다가 괜히 스튜를 뒤적이며


말했다.

“다…… 다니엘하고, 크흠, 춤은 왜 췄어?”


“가, 가르쳐 준다더라고.”

한동안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뿐 식탁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좋았겠네.”

카이든의 씁쓸한 말에 리젠이 눈을 살짝 굴리다가 좀 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춤 처음 배워 봤어. 귀족도 아니고, 그런 걸 배울 일이 없잖아? 물론 나한테 그 정도 스텝이야 정말


꼬맹이 수준이었지. 별로 어렵지도 않더라고. 사실은 살짝 지루하기도 했어. 너무 뻔한 스텝이 반복되고
몸을 움직이는데 박진감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음, 그래도 너도 한번 배워 볼래? 내가 가르쳐 줄까?”

“됐어.”

그가 피식 웃었다. 리젠은 분위기가 약간 다운되는 것 같으면 억지로 명랑함을 가장하여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냥 밝고 성격이 쾌활한 애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주 관찰하다 보니
그저 발랄한 척을 잘하는, 생각보다 속을 알기 힘든 여자였다. 분명 오늘 있었던 일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닐 터였다. 무슨 상황에 있더라도 일단은 남들 앞에서 웃어 보이고
슬픔이나 분노는 감추는 성격인 듯했다.

“그런 건 딱 봐도 내 스타일 아니야. 여자랑 끌어안고 빙빙 도느니 달리기를 한 번 하고 말지. 그리고


오늘 다리에 칼 맞은 애한테 무슨 춤을 배워?”

“음, 그 사건 말인데.”

리젠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어. 나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 사실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널 죽이면 왕궁 무도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셈이 돼. 문제가 커져. 수사국도 당연히 개입할 거고.
그렇지만 대체 그럼 죽이지도 않을 걸 널 왜 공격하겠어?”

“그걸 전혀 모르겠어. 그런데 그들이 했던 행동이나 대화 같은 걸 봤을 때…… 내 피를 가져가려는 것


같았어.”

“……뭐?”

“이 상처 말이야. 전혀 급소가 아니잖아.”

리젠이 허벅지에 감은 붕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칼로 그어서 유리병에 피를 담더라고. 내가 왠지 느낌이 안 좋아서 깨 버렸지만.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손목을 그어 동맥혈을 받고 싶다느니, 얼굴에 칼을 긋겠다느니 이런 말을 했어. 나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 피를 받는 게 목적인 것 같은…… 물론 나를 기절시키려고 했던 걸 봐서,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네 피를 어디에 쓰는데?”

“그러게.”

또다시 오리무중이었다. 리젠은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피라면…… 시약에 들어가는 재료도 아니야.”

“배후로 추정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야. 왕비 쪽 말고는 우리의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왕비 측에 네가


노출되었다는 게 더 신경 쓰이는데.”

“일단…… 내가 그 사람들 얼굴을 하이힐로 다 찍어 뒀거든? 혹시나 왕비의 수족들 중 얼굴에 하이힐이
찍힌 상처가 생긴 사람들이 있다면 왕비가 배후라는 것이 확실해지겠지. 그건 수사국인 네가 알아서 해
봐.”

카이든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그것까지 예상하고 그들의 얼굴을 하이힐로
찍었다니.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리젠이 씩 웃었다.

“수사국 수석 예정이었던 여자를 얕보면 안 돼.”

“웃기지 마. 네가 수사국 썼어도 수석은 나야.”

“대련하면 내가 이길 수도 있다니까? 마법 쓰면 또 몰라!”

“……바보같이.”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는……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울어. 그런 순간에까지 몇 수 계산해서 괜히 위험해지지 말고.”

그 모든 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카이든이 리젠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르고, 괜히 신경 쓰인다는 듯 그녀의


갈색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피라니……. 섬뜩하게 그게 뭐야?”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걱정과 분노가 함께 담겨 있었다. 섬뜩하다는 말에 리젠의 눈동자가 한 바퀴 굴렀다.


섬뜩하다…… 섬뜩하다…… 평상시에 절대 듣지 못했던 이 단어를 아까 들었던 것 같은데…….

‘호구 같긴 한데, 진짜 너무 재미없어. 자꾸 자기네 사막 왕국이 옛날에는 번영했는데 마력이 줄어들어


흑마법이 사라지며 이렇게 된 거라고 신세 한탄만 하잖아. 피랑 시체랑 저주 얘기만 드글드글한 흑마법
얘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 잠자리 섬뜩하게.’

아셰의 뚱한 목소리가 기억났다.

“카이든.”

리젠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피가 필요한 경우가 있어.”

“어?”

“……흑마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사라진 지가 언젠데.”

카이든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게다가 한스팀 왕국에서나 좀 있었던 거지, 다른 나라에서는 제대로 연구도 안 됐어. 그것도 부족 간의
내전이 잦아 온갖 저주가 발달한 사막 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가 말을 뚝 그쳤다. 리젠은 그가 자신과 같은 곳까지 생각이 미쳤음을 알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속삭였다.

“루벤 왕자님의 아내가…… 한스팀 왕국의 사람이라며?”

“……알아봐야겠군.”

카이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흑마법이 사라진 건 대륙에 마력이 점점 더 없어지며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흑마법은 거의 특정한 상대에 대한 저주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재료와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르엘라의 마력증폭약이 연루되어 있다는 가설이 유력한 지금,
흑마법이라고 개입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흑마법에 대해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대학에서도 전혀 배우지 않았던 과목인데…
… 책이라도 있나?”

“카이든. 지금 왕궁에, 흑마법에 대해 엄청 떠들고 싶어 하는 한스팀 출신의 사람이 있어.”

“……뭐?”

“내가 무도회에서 봤어! 아셰 왕녀님한테 엄청 껄떡거리던 남자.”

리젠이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역시, 나는 아무래도 수사국에 갔었어야 했다니까. 이 정도면 약제국에서 썩기 너무 아까운 인물


아니니?”

카이든은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리젠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막상 혼자 남으면 공격 받던 잔상이 떠올라 불안해질 것이기 때문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올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매일 너만 지키고 있겠냐?”

그의 태도는 굉장히 강경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지켜야지.”

카이든이 그러면서도 못내 신경 쓰인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런데, 나 빼고는 이렇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정말 남자를 들이면 안 돼. 나 같은 남자는 정말


드물어.”

“카이든.”

리젠이 한숨을 쉬었다.

“난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빠도 그만큼 똑같은 잔소리는 계속 안 하겠어.”

“어쨌든 적어도 오늘 밤은 혼자 못 둬.”

“그럼 밤새고 지키렴. 네 맘대로 해.”

그녀가 새침하게 말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카이든이 이 집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기는 했다. 그녀도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습격을 당하고, 허벅지가 욱신거릴
만큼의 부상을 당했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은 무섭고 얼떨떨했다. 남의 앞에서 징징거리고
싶지 않아 그저 밝은 척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카이든이 스스로 같이 있어 준다고 하니 내심 마음이
놓였다.

“나머지 일은 내일 계획하고, 일단 자.”

“왜 들어와? 넌 거실에서 자.”

“너 잠드는 것 보고 갈게.”

리젠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차피 언쟁을 해 봤자 별다른 소득이 없을 것 같아 냉큼 침대에 누웠다.


오늘 밤 꿈에도 그가 나오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런 꿈들이 싫지 않았다. 어차피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게다가 이제는 현실이 꿈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꿈마저 피하면서 살기엔 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무의식의 카이든에게 물어볼 것도 있었다.

“그래. 얼른 잠들게.”

그녀가 이런저런 책들이 굴러다니는 침대의 이불 속에 눕자 맘에 안 든다는 듯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침대에는 책들뿐만 아니라 옷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병까지 굴러다녔다. 용케 자리를
잡고 누운 그녀의 곁에 그가 앉았다.

침묵 중에 숨소리만 흘렀다. 불까지 끄고 나니 더 어색했다. 리젠은 카이든의 넓은 어깨를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자?”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암흑 속에서 카이든이 속삭였다.

“아니.”

리젠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른 자. 내일 아침엔 일 시킬 거야.”

“무슨 일?”

“캐서린의 마법약 가게…… 뭔가 또 시작했어. 이상한 물건들이 들어오고 있어. 사람들도 급격히 많이
드나들어. 왕비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알았어. 그 목록들 주면, 내일 아침에 분석해 볼게.”

“예감이 좋지 않아. 이제 왕비가 노릴 사람은 다니엘뿐이야. 의문사는 윌리엄에서 그쳤으면 좋겠어.”

“내일 내가 꼼꼼히 볼게. 안 그래도 왕자님이 말씀하셔서 유통 경로도 다 정리해 놨어.”

다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를 과하게 의식하느라 리젠은 몸도 쉽게 뒤척일 수 없었다. 엄청나게
피곤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소 외진 언덕에 위치한 그녀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안 카이든이 문득 말을 걸었다.

“야.”

“왜?”

“……다니엘 좋아하면서 힘들지 않았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널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아무 말 못하고 지켜보는 게…… 괜찮았냐고.”

“아무 말 못하지 않았어. 꽤 친했는데. 이런저런 얘기도 꽤 하고.”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바보야.”

리젠은 흥, 하고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10 대 때의 자신을 떠올려 보면 다니엘을


정말 많이 좋아하긴 했었다. 만일 그때 무도회에서 다니엘과 춤이라도 췄다면 몇 날 며칠을 그 생각만
했을 수도 있었다.

“괜찮았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냥, 나쁘지 않았는데. 매일같이 설렐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게. 대화라도 길게 하면 하루 종일 기분


좋고, 수업 시간이 지루할 때 훔쳐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뭐, 왕자님은 다른 여자랑
결혼할 테지만 그래도 혼자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물론 좀 괴로운 날들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설레는 날이 많아서 괜찮았어.”

“……그래? 결국 다른 여자랑 잘될 걸 알면서도?”

카이든의 목소리가 왠지 정말로 씁쓸해 보여서 리젠은 쉽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다소
버벅거리며 말문이 막힌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근데 왜 난 그게 안 될까.”

너무 어두워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길게 늘어진 그녀의 갈색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리젠은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살짝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왜…… 안 괜찮을까.”

정적이 흘렀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서, 리젠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채 잠이 들었다.

그녀는 무도회 차림 그대로였다. 괴한들의 습격도 받지 않았고, 와인을 손에 쏟아 끈적거리지도 않았다.


붉은 드레스는 몸의 라인에 착 달라붙었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수많은 샹들리에 조명에 반짝이며 빛을
뽐냈다. 틀어 올린 갈색 머리는 우아했고, 아셰의 시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한 메이크업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사실상 원래 무도회 때보다 예쁜 것은, 카이든의 상상 속에 그녀가 훨씬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리젠은 사람들 사이에 정신없이 섞여 있다가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검은 제복을 입은 카이든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가득 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리젠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춤 춰 볼래? 좀 시시하긴 했지만.”

리젠은 그의 손을 이끌어 그녀의 허리에 댔다. 춤 같은 건 안 배워도 자신 있다는 아까의 허세와는 다르게
그는 뭔가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곧잘 흉내를 내는 그를 보며 리젠이 키득대고 웃었다. 다니엘과 춤을
출 때에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음악도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 카이든과 엉망인 스텝을 함께 밟고
있으니 굉장히 유쾌했다.

“괜찮지? 혹시 아무래도 네 스타일 아니야?”

“뭐…….”

카이든이 무심한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쁘지는 않네.”

“그으으으래? 너 사실 남들 몰래 잠입해 있으면서, 다니엘이 백 명의 여자랑 춤추는 거 보면서 내심


부러워한 거 아니야?”

리젠이 깔깔거리며 마주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카이든이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더 당기며 으르렁거렸다.

“웃기지 마.”

“하나도 안 부러웠어? 진짜 하나도?”

리젠의 경쾌한 스텝을 따라가며 그가 헛기침을 했다.

“흠…… 뭐, 하나 정도는.”

“하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러웠지.”

왜 무도회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디에선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을 카이든과 함께


밝은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자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카이든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카이든.”

“왜?”

“너 좋아하는 여자 있지?”

“……무슨 소리야?”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무의식중에라도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리젠은


그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가 정말 궁금했다. 지난 꿈에서 살짝 언급했을 뿐이지만 그게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질문을 우회하기로 했다.

“음…… 네가 생각할 때에, 너보다 좀 멍청한 여자애가 누구야?”

“나보다는 다 멍청해.”

리젠은 하마터면 그의 발을 꽉 밟아 줄 뻔했다. 다음 조건이…… 지켜 주고 싶던 여자였나?

“그럼…… 제일 약한 애. 제일 약한 여자애는 누구야?”

“제일 체력이 없는 애? 체술은 유진이 꼴찌잖아.”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앉아만 있는 행정국 갔지.”

유진? 리젠의 눈이 가늘어졌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꽤나 성적이 좋아 행정국 수석으로 들어간


여자애다. 조용조용하고 음침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리젠은 카이든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며 재차
물었다.

“밝고 쾌활한 애보다…… 어두운 애가 좋아?”

리젠은 보통 밝고 명랑하며 악바리 근성이 있는 똑똑한 애로 평가되었다. 다니엘도 그녀에게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잘하냐고 물었을 만큼 그녀는 혼자서도 뭐든 잘했다. 아셰가 가끔 모자란 모습도 보이고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라고 조언할 만큼, 누구에게도 빈틈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밝고 명랑하게 남과 대화하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이 없는 채로 자랐다. 열 살 때까지 아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쩔 수 없는 결핍은 받아들이라고 르엘라는 조언했다. 슬픔을 모두 보여 주면 더 슬픈 인생을
살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르엘라가 죽었을 때에도 그 누구에게도 징징대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니까.

“너무 밝고 명랑한 애는 나랑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카이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서 사실 학창 시절 대부분 너한테 별 관심이 없었어.”

리젠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카이든의 무표정한 검은 눈이 너무 얄미웠다. 굳이 내가 아니라는 걸


그렇게 티를 내야 해?

기분이 단단히 상한 그녀는 그대로 그의 손을 놓고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혼자 걸어갔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멋대로 할 수 있었다. 카이든이 몹시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난 뭐야? 꿈속에서 그냥 나타난 여자라 본능적으로 끌어안고 그런 거야?

정원에 나가 혼자 앉은 그녀는 왠지 모를 속상함에 하이힐을 벗어 던져 버렸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그의 무의식은 그냥 어떤 여자가 나왔어도 입술을 들이 밀었을 것이다. 맨 처음 꿈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대련하다가 갑자기 불이 붙지 않았는가. 다 알면서도 그냥 마음은 다른 여자한테 있는데 욕정의 대상만이
된 기분이 너무 나빴다.

“야.”

어느새 따라 나온 카이든이 그녀의 앞에 섰다.

“왜 그래?”

리젠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막무가내로 자신의 입술을 카이든에게 부딪히며 말했다.

“너도 이런 거 나랑만 해.”

“……어?”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감쌌다.

“나하고만 하자고. 다른 여자 말고.”


그녀가 대담하게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 왕궁에서는
여전히 감미로운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정원의 밤공기는 시원했다. 카이든이 약간의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키스는 더 깊어졌고, 그저 욕정에 의한 꿈속이라고 할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졌다.

무도회 다음 날은 휴일이었지만, 카이든은 리젠을 데리고 비밀리에 다니엘의 궁으로 향했다.

“이미 다니엘은 감시당하고 있을 거야. 궁 곳곳에 왕비의 눈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런 길로 가야 해.”

“이 길은 뭐야?”

리젠은 몇 군데의 갈림길부터 기억을 하지 못하고, 될 대로 되라며 카이든의 손을 잡은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왕궁 지하엔 이런 미로가 엄청나게 많아. 대피로이기도 하고, 수족을 부리는 길이기도 하고. 왕궁 밑의
이런 길들은 각자 궁의 주인밖에 모르지. 아셰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이 길을 다니엘은 내게 직접
가르쳐 줬어.”

“아…….”

“내가 이 길로 들어가 그를 죽이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다니엘은 내게 목숨을 맡긴 거야. 보통


왕족들은 절대 이런 길을 알려 주지 않아. 그의 신뢰에…… 보답을 해야겠지.”

“그런 대단한 길을 나를 알려 줘도 돼?”

“내가 널 좀 아는데…….”

카이든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넌 이거 다 기억 못 해.”

“이게 진짜!”

“틀려?”

리젠은 화가 나서 카이든의 등을 한 대 아프지 않게 때렸다. 사실 거침없이 걸어 나가는 카이든의 걸음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고, 구불구불한 갈림길도 많아 도저히 그녀의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절대 혼자 들어오지 마. 잘못 들어왔다가는 출구도 못 찾고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입구도 기억 안 나.”

리젠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캄캄한 어둠 속을 둘이 걷다 보니 그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카이든의 뒷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팔 전체에 붙은 잔근육, 칠흑같이 검은 까만
머리, 칼같이 다림질하여 입은 검은색 제복, 깊은 눈매 속에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까지. 어젯밤 말마따나
학창 시절 내내 서로 관심 없이 지냈다가, 지금은 서로 둘도 없는 동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시작이 그녀의 어리석은 실수 때문이었다는 걸 그가 안다면…….


그가 길의 끝에서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로 다니엘이 시녀들을 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게도
문을 열자 다니엘의 궁이 나타났다. 다니엘이 계단으로 올라오는 카이든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려 주며
활짝 웃었다.

“카이든, 왔구나.”

그가 훌쩍 뛰어 바닥으로 올라온 뒤, 뒤따라오는 리젠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리젠 역시 날쌔게 뛰어


올라왔다.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아아, 리젠.”

그가 비밀 문을 닫고, 황급히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를 매만졌다.

“리젠까지 올 줄은 몰랐네.”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테이블의 의자를 빼 주었다.

“이쪽으로, 레이디.”

“왕자님, 무도회 한번 갔다고 절 귀족으로 착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리젠이 깔깔거리며 의자에 과장된 몸짓으로 사뿐히 앉았다.

“레이디라니,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인데요. 아니면 어제 너무 ‘레이디’라는 말을 많이 하셔서


습관처럼 나오신 것 같은데.”

“어젠 그 어떤 귀족보다 예뻤거든. 진짜야.”

그의 푸른 눈이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카이든은 무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다니엘이 직접 따라 주는


차를 마셨다.

“언제 갔었어? 밤새 계속 찾았는데 안 보였어.”

다니엘이 턱을 괴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곡 정도는 더 추려고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왔어.”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공격이 있었어.”

“……무슨 소리야?”

내내 웃음기를 머물고 있던 다니엘의 표정도 굳었다.

“어제 복면을 쓴 괴한한테 공격을 받았어요. 저를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제 피를 받아 가려고


했어요.”

“피? 대체 왜?”

다니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리젠이 똑 부러지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우리가 밝혀내야 할 것은 두 개. 6 년 전의 화재와,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이에요. 그렇게 큰


화재가 일어나려면 마법사 몇 명으로 안 되는데…… 마력증폭약이 개입되었다면 이야기는 다르죠. 그리고
그 마력증폭약의 부작용이 마력에 의한 역류였다면 수많은 마법사들이 마력 역류로 죽었다는 것도 설명
가능해요. 그런 부작용은 약의 완성도로는 최악이지만, 사실 증인 인멸에는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리젠은 자신의 손에 자그마한 불꽃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저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선택 과목이 마법이라 잘 알아요. 마력이 조금만 더 많으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불꽃을 일으킬 수 있겠죠. 제가 마법사라고 해도 마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하면
구미가 당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르엘라
하카트뿐이에요.”

“……믿을 수 없어. 르엘라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고모는 죽었으니 진실은 모르죠. 그러나 저도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해요.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일에 저희 고모의 광증과 죽음까지 연계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분명히 저희 고모가
개입된 사건이에요.”

리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다음이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 이것도 지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죠. 그러나 너무 대놓고 이익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왕비 측의 시급한 암살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죽였는지 알 수가 없고, 시암 반응이 나타났기 때문에 당연히 시약에 의한 암살이라고 예상하지만……
사실 우리가 전혀 예상 못 하는 저주 방법이 있기는 해요.”

“저주?”

“왕자님도 아예 예측을 못하시잖아요. 저희도 그랬어요. 사람의 피가 필요한 저주, 흑마법이요.”

“에이, 말도 안 돼.”

다니엘은 처음 카이든이 했던 반응 그대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나마 좀 발달했다는 한스팀 왕국에서도 사라진 흑마법이 왜 아메탄 왕국에 지금?”

“흑마법이 사라진 건,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 때문에 그래요. 그렇지만


마력증폭약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고, 또 까다로운 재료들도 왕비님이라면 구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루벤의 비가…… 한스팀 왕국의 출신이라면서요.”

리젠의 똑 부러지는 말에 다니엘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다니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루벤이 나람을 맨 처음 데려왔을 때…… 다들 몹시 놀랐어. 우리 모두 루벤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 조금 더 힘이 되는 여자를 데려올 줄 알았어. 그런데 한스팀 왕국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여자를 데려왔지. 태자 아니면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법칙을 지켰으니 아무도 막지 않았고,
반대할 것 같았던 테스티도 전혀 아무 말이 없었어.”

다니엘이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이상해. 왜 리젠의 피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흑마법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라.


흑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히는군.”

“이번 무도회 때문에 한스팀 왕국에서 지한이라는 왕자가 왔어.”

카이든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왕자를 납치해서 몇 대 때리면 술술 불겠지.”

“농담이지?”

리젠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외교국에 일 만들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아…… 그 회색 머리? 아셰한테 거의 정신 못 차리던?”

다니엘이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그럼 쉽지. 아직 안 돌아간 걸로 아는데.”

그가 빙긋 웃었다.

“아셰와 혼약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며 궁으로 부르면 되지. 살살 구슬려서 이것저것 물어보자고. 리젠,
그때 함께 있어 줄 수 있어? 내가 지한이라도 리젠 같은 미녀가 작정하고 웃으며 호기심을 보이면 모든 걸
다 말해 줄 것 같아.”

“좋아요. 아셰의 제일 친한 친구라서 불렀다고 하면 되죠.”

의기투합한 다니엘과 리젠의 모습을 보며 카이든이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뭐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해? 내가 알아서 알아 온다니까.”

“넌 할 일이 있잖아. 캐서린의 뒤를 밟아.”

다니엘이 차를 마시며 눈을 찡긋했다.

“분명히 그 약 상점에서 마법사들을 모으고 마법증폭약을 판 것 같으니까.”

“맞는 것 같아요.”

리젠이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약제국 기록과 대조해 봤어요. 몇 군데 유통 경로를 거치긴 했지만 그 재료들이 모두 다
캐서린의 약 상점으로 들어갔더라고요. 분명히 그 약 상점에서 시약을 마실 마법사들을 모으고
마법증폭약을 판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또다시 캐서린이…… 그때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는 듯해요.
최근 각종 재료의 주문량이 급격히 늘었어요.”

“……그래?”

“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6 년 전의 일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리젠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오늘 아침에 내린 결론을 말했다.

“지금 왕비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안 남았어요, 왕자님.”

다니엘은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차를 마셨다.

“……걱정해 주는 것 맞지?”

그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부드러운 눈으로 리젠을 바라보았다. 리젠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능청을


떨었다.
“오래오래 사셔야죠. 왕이 되시면 더 좋고요. 약제국에 지원도 좀 늘려 주시고. 우리 카이든의 든든한
뒷배도 되어 주세요. 중년에 수사국장 정도는 달 수 있게요.”

다니엘이 쿡쿡 웃었다.

“전 이제 아셰 왕녀님 줄도 끊어지게 생겼어요. 그 비싼 드레스며 하이힐이며 다 망가트렸단 말이에요.


가서 빌어야 하는데, 물어내라고 하면 노예 계약이라도 맺어야 할 판이라고요.”

“리젠, 온 김에 아셰한테 들렀다 가.”

그가 일어나서 책장에 숨겨져 있던 뒷문을 열어 주었다. 카이든과 리젠이 둘 다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이 길 역시 나와 아셰만 아는 길이니 왕비의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이 길로 죽 정원을 통과하면 아셰의


궁 비밀 문이 나와. 문을 두 번 두드리면 아셰가 나올걸. 가는 길은 또 아셰가 안내해 줄 거고.”

“무슨…… 비밀스러운 길이 이렇게 많아요?”

“훨씬 더 많아. 왕족들은 항상 위험한 길을 걸으니까. 우리는 형제 살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교육받아.”

다니엘은 부드럽게 웃었다.

“왕비 마마가 뭘 준비하고 계시다며. 그리고 그게 나를 죽이려는 거잖아. 그걸 다 알면서도 오늘 저녁에


아무렇지도 않게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 생활이야.”

새삼 그녀는 아셰와 다니엘에게 기시감이 들었다. 길만 해도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왕족이라는 존재가, 과연 그녀가 이해 가능한 인간이기는 할까? 사파엘이 왜 그렇게 경계를 시켰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다니엘에게 꾸벅 인사하고 아셰의 궁을 향해 혼자 나왔다.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다니엘이 문을 닫았다. 카이든은 아무 말 없이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다니엘은 언제나 말이 없고 무뚝뚝한 그의 유일한 친구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리젠이 오니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뭐가?”

“넌 말이야, 말도 없고 잘 웃지도 않아서 별로 재미가 없는데…… 리젠은 워낙에 밝고 활달하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저렇게 유쾌한 게 대단하지 않아?”

“흠.”

카이든은 동의하지 않는 듯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별로 밝은 것 같지는 않던데.”

“그래? 내가 보기엔 그냥 천성이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애 같은데. 학교 다닐 때에도 항상 뭐든지


열심히 했잖아. 게다가 뭐든지 잘 하기도 하고. 아까 설명하는 것 봤지? 괜히 너랑 수석을 다투던 사이가
아닌 것 같아. 애가 빈틈이 없으면서도 어쩜 저렇게 명랑한지.”

“……그래?”

“학교 다닐 땐 내 앞에서 별로 말도 잘 못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직장 다니니까 더 성격이 나오는 것


같단 말이야. 내숭 떠느라 예쁜 말만 골라하고,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 부여하는 귀족 영애들만 보다가
단순히 밝은 리젠을 보니까 뭔가 치유되는 느낌이야.”
카이든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친구는 언제나 말이 없었으므로, 다니엘은 별다르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천천히 캐서린의 동태를 얘기하던 카이든이 무도회까지 따라온 얘기를 했을 때,
다니엘이 씩 웃었다.

“캐서린 덕분에 무도회도 왔구나. 보통의 너라면 절대 안 왔을 텐데.”

“그러게.”

“끔찍하지 않았어? 모든 것이 네 스타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다지.”

“춤도 안 췄을 거 아니야.”

카이든은 아무 말도 없이 턱을 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카이든이 그런 은근한 웃음을 보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냥 좀 어젯밤에…….”

그가 자신이 말하면서도 머쓱한지 딴청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좋은 꿈을 꿨거든.”

“뭐야, 그깟 꿈 가지고.”

“그냥, 꿈속의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다니엘은 카이든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요즈음 일이 많고 복잡해서 조금 미쳤나 싶어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계속 생각나네.”

“괜찮아! 뭘 그런 걸 신경 써?”

아셰가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나저나, 진짜 이상하네. 도대체 널 왜 노리지? 게다가 피? 그걸 어디다 써? 리젠, 확실히 본 것 맞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리젠은 흑마법에 대하여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셰에게는 이미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윌리엄 태자를 시해한 범인으로도 한 번 몰렸고, 게다가 어디로 시집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은근
초조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 상황에 왕비가 무언가를 또 꾸미고 있으며, 이번 대상은 다니엘일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를 미끼로 한스팀의 왕자를 부른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리젠은 다니엘이 아까 아셰와의 혼약을 얘기한다며 지한을 꾀어낸다 했을 때 아셰의 동의 없이
그렇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워낙에 왕족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랑조차 걸림돌로
여긴다는 걸 충분히 들어왔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아셰가 다니엘에게 실망할지
아니면 잘했다고, 당연한 일이라고 동의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셰는 다니엘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그게 윌리엄의 뜻이라며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그나저나 이 길을 다니엘 오빠가 직접 알려 줬다고?”

아셰가 킬킬거리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리젠, 다니엘 오빠는 아무나한테 이런 길을 알려 줄 사람이 아니야. 널 엄청나게 믿는 거야.”

“……뭐, 그런가 보죠?”

“믿는다는 건, 어쨌든 좋아하는 거, 뭐 그런 거랑 연결되는 거 아니겠어?”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키득거렸다.

“다니엘이 여자한테 어쨌든 그런 신뢰를 보인다는 건…… 리젠, 오빠가 엄청나게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겠지만 사실 속은 엄청 의뭉스럽거든. 뭐, 왕족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런데 이런 비밀스러운 길을
알려 줬다는 건 네가 진짜 특별하다는 거야! 오히려 잘해 주고, 웃어 주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거라고.”

“그거야 같은 배를 탔으니 그렇겠죠.”

“아, 답답하네. 리젠, 조금 더 희망을 가져 봐.”

아셰는 입을 내밀며 테이블을 가볍게 쾅 쳤다.

“무도회에서 세 곡이나 다니엘하고 춤을 춘 사람은 너뿐이야. 누가 봐도 다니엘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으니


뮤엘튼가의 건방진 년도 너한테 위기의식을 느낀 거라고. 게다가 어젯밤엔 나한테 다니엘이 네가 어디
있냐고 묻기까지 했어. 리젠, 이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다니엘의 속마음이야 나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넌
정말 그에게 특별한 여자야. 좀 더 설레는 모습 좀 보여 주면 안 돼?”

리젠이 한숨을 쉬며 그녀가 끓여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아셰는 차를 몹시 잘 우려냈기 때문에


아까 다니엘의 궁에서 마신 것보다 훨씬 더 향이 좋았다.

“왕녀님.”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저…….”

“왜?”

“……정말 안 설레요.”

“……뭐?”

아셰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대로 굳었다.

“저…… 왕자님 정말 좋아했거든요? 왕립고등학교 입학식 날 마주친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10 대 때에는,


왕자님과 나눈 별것 아닌 대화들을 일기장에 그대로 옮겨 적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고요.”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왕자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 단연 가장 잘생긴 사람이에요. 솔직히 정말 빛이 나잖아요.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도, 동그랗고 푸른 눈도, 하얗고 매끈한 조각 같은 얼굴도.”

아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안 설레요. 같이 춤을 춰도, 저를 보고 웃어 주셔도, 예쁘다고 해 주셔도, 그저


너무 잘생긴 외모에 눈길만 뺏길 뿐이지 예전처럼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아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리젠.”

아셰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냥 너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런 것 아닐까? 다니엘이 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네가


너무 멀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야? 계속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갑자기 다가오니 순간
주춤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오랫동안 품어 왔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없어져?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공격도 받고 하니까 그냥 남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 것뿐이야. 에잇, 속상하네. 도대체 왜 널
노리는 거야? 네 피가 뭐라고?”

“글쎄요……. 그런 건가…….”

리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고모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절 노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안 그러면 저를 왜


노리겠어요? 제 특이 사항이라고는 르엘라 하카트 조카인 것밖에 없는데.”

“뭐?”

아셰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르엘라가? 대체 왜?”

“자세히는…… 밝혀진 게 아니지만…… 뭔가 왕비님의 계략 때문에 희생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이제…… 고모가 자연스럽게 미치고 자연스럽게 죽은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안 돼.”

아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르엘라가…… 르엘라가 희생당했다고? 안 돼, 말도 안 돼.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정말로,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가능하다면 지금 왕비를 때려죽이고 싶은 기분이야.”

아셰가 이를 갈며 눈에 힘을 주었다. 리젠은 아셰가 종종 뿜어내는 강렬한 살기에 순간순간 놀라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생활을 함께 하고, 시험과 과제에 스트레스를 받던 급우가 맞을까? 이런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 다니엘 말대로 그녀에게만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리젠.”

“네?”

“네게 말하지 않았지만…… 르엘라는 엄마보다도 날 더 아껴 준 사람이야.”


리젠이 눈을 깜빡거렸다. 르엘라가 아셰에게 약초학을 가르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따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문득 르엘라의 장례식에서 아셰가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운 것이 기억났다.

“우리 엄마는 힘없는 공국에서 온 외국인이고, 워낙에 심약한데다가 아바마마의 사랑도 못 받아서 거의
자신의 궁에서 감금되어 있다시피 하지. 나는 그게 감옥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어제도 무도회에
오지 못했잖아. 테스티가 무서워서. 엄마는 매일 울기만 했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모든 걸 두려워만
하며 살았어. 어쩔 수 없지. 힘이 되어 줄 그 무엇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처럼 자랐어.
엄마한테 보호받는다는 기분은 한 번도 못 느낀 것 같아. 아, 엄마가 나한테 절대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얘기는 많이 했다. 그건 마음에 새기고 있지.”

아셰가 처음 하는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동안은 거의 농담처럼 ‘우리 엄마는 왕궁의 꽃병이지.’ 정도로
웃어넘기곤 했기 때문이다.

“르엘라는 어린 내게 최초의 선생님이자 어른이었어. 작은 세상에 갇혀 있던 내게 처음으로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준 사람이었다고. 난 어린 마음에 르엘라가
좋아서 약초학도 열심히 공부했고, 왕족은 약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게 너무 슬펐어. 그 마음을 다 다독여
준 사람이야.”

“왕녀님.”

“르엘라마저도 편히 눈 감은 게 아니라면, 정말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겠어. 어차피 내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인생, 아등바등 살아 봤자 무슨 의미야?”

“그러지 마세요. 르엘라가 그런 걸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리젠!”

아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화도 안 나? 너는 미칠 것 같지도 않아? 르엘라가 죽기 전에 배시시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 모든 게 어떤 음모의 일부였다면, 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게 안 돼요, 왕녀님.”

리젠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게 안 돼요. 정신을 잃어 가며 화를 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요. 대신 더


열심히 생각하고, 더 냉정하게 사건을 분석하고, 더 정신을 차리고 제가 할 일을 하는 것 밖에
못하겠어요. 너무…… 너무 오래 전부터 무언가를 계속 참아 왔거든요. 어쩌면 제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제 정신을 놓아 버릴 수 있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할걸요.”

[2 권에 계속]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