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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2018 년 11 월 01 일
저자명|한시내
발행처|동아
발행인|박성면
E-mail|donga6370@hanmail.net
ⓒ 한시내. 2018
※ 이 전자책은 동아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을 통해 발행한 전자책 입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 본 전자책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 목 차 |
프롤로그
1. 갈림길
2. 의심의 기간
3. 좋은 동료
4. 무도회
프롤로그
“……됐다, 가자.”
- 투명 시약
재료: 100 년산 달맞이꽃, 파르트의 날개 조각, 토치의 이빨, 500 년산 카놀라틴 뿌리, 타이탄의 발톱
가루 200g, 타린의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잎 4 장, 탄화산 용암 1L
기대 효과: 은신, 잠입 등
고모의 글씨만 잠시 보려고 했는데, 책을 펼치자 흥미로운 내용이 너무 많아 리젠은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거의 대다수가 현존하는 약제술을 훨씬 더 뛰어넘은 기술이 많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시약 제조법들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괜히 르엘라가 왕국 역사 최고의
천재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르엘라는 왕립 산하기관인 약제국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거의 대다수가
군대와 수사에 필요한 목적으로 개발된 약물이었다.
효능: 계약자의 머리카락이 든 시약을 마신 사람의 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평범한 꿈보다 기억이 생생함.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 회성으로 꿈에 나온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르엘라는 군사 목적으로 이 시약을 개발한 것 같았지만…… 조금 더 로맨틱하게 생각하면,
원하는 상대를 꿈에서 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재료와 냄비를 챙겨 다락방을 나섰다. 다니엘이 꿈에 나타나 달라고 매일 밤
빌었었다. 한 번만, 고모, 한 번만 사적으로 고모의 약 좀 쓸게. 어차피 다니엘하고 잘 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한 번만이라도, 꿈속에서라도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서 그래. 그날 밤, 리젠은 물처럼 투명한
무색무취 무미의 시약을 하나 만들었고 조심스럽게 가방에 챙겼다.
아셰가 팔짝팔짝 뛰면서 다니엘을 응원할 동안, 리젠은 손에 물병을 잡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대련 중이었다. 아메탄 왕국의 셋째 왕자, 다니엘 라티니스 아메탄 3 세는
리젠의 오랜 짝사랑 상대였다. 그리고 리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은 다니엘과
배다른 동갑내기 여동생이었는데, 리젠은 왕립고등학교 재학 당시 왕녀랑 친해졌다가 그녀의 오빠인
다니엘에게 완전히 반했었다.
게다가 카이든과 리젠은 왕립고등학교 시절부터 수사국 지망인 라이벌 관계였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전교 1 등과 2 등을 번갈아 가며 했었는데, 둘 다 수사국 지망이라 선생님들과 동급생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누가 수사국 수석으로 들어갈지 암암리에 내기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 대학 졸업도
가까워지고 슬슬 어느 부서에 들어갈지 원서를 쓸 때가 되었는데, 그래서 카이든과 리젠의 신경은 서로
날카로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수사국 수석 입사는 승진이 확실히 빠르다. 리젠은 오랜 라이벌 관계인
카이든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은 붙임성 없는 자신의 친구, 카이든을 손짓으로 불렀다. 카이든이 마지못해 다가온다는 듯 검을
검집에 꽂고 다가왔다.
다니엘은 리젠이 건넨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오늘 밤에는
꿈에서 다니엘을 만날 수 있다. 적어도 손을 붙들고 좋아한다는 말을 꿈에서라도 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무의식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똑똑하고 예쁜 애
정도로 말해 주기만 한다면……. 리젠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다니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리젠의 눈이 접시처럼 커졌다. 다니엘이 어색하게 서 있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리젠의
물병을 카이든에게 넘긴 것이다. 리젠이 당황해서 어떻게 하기도 전에, 카이든은 다니엘이 넘긴 물병의
물을 다 마셔 버리고는 옆의 수도에서 다시 채워서 다니엘에게 건넸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맞잖아.”
“너무 연구실에 혼자서 처박혀 있으니 미친 게 분명해. 난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활동적이니까 수사국이
더 잘 맞아.”
꿈속이었기 때문에 대련장은 현실과는 달리 묘하게 왜곡이 되어 있었다. 고모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꿈속의 공간은 전적으로 시약을 마신 사람의 무의식에 달려 있었다.
리젠은 조심스럽게 훈련장 구석에 앉았다. 종합 시험 중에 1:1 대련이 있다. 발로 뛰는 수사국의 특성상
전투 능력이 당연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성별의 차이가 있으므로 리젠은 선택 과목인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었지만 마법은 1:1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카이든의 움직임을 잘 봐 둘 필요가
있었다.
“아, 카이든.”
리젠은 눈을 깜빡이며 심호흡했다. 괜찮아, 저건 카이든이 아니라 카이든의 무의식이고, 어차피 하룻밤
꿈이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돼. 그녀의 어설픈 웃음을 보며 그가 무표정으로 물었다.
“대련!”
“대련하지 않을래?”
“그래.”
“어, 여긴…….”
“하앗!”
카이든의 가슴은 밀리지 않았고, 다만 한순간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의자로 내리찍었다. 그녀는 한
바퀴 돌아 펄쩍 뛰어 다른 책상을 밟고 섰다. 꿈인데도 욱신욱신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도약하여
카이든의 얼굴을 노리고 크게 발을 찼다. 카이든은 쉽게 피했고, 살짝 피한 카이든의 배에 주먹을 밀어
넣었다. 반동으로 내려오는 그의 턱에 두 번째 일격을 가하려는 차였다.
“악!”
“항복해.”
“절대 못 해.”
“마법을 쓰면 또 다르다고!”
“다를 것 같아?”
“싫어!”
“움직이지 마.”
“웃겨, 난 포기 안 해.”
“……못 참겠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처음 느끼는 남자의 입술 감각에 리젠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목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며 순간 신음이 흘렀다. 그의 자유로운 오른손이 그녀의 교복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리젠은 다시 버둥거렸으나 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강의실에서, 의자에 포개 앉아서, 꼼짝도 못하고 이런 꼴이라니! 블라우스의 교복 단추가 모두 풀어지고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근육이 단단한 배로 움직였다.
“안 돼! 아, 안 돼!”
“……싫어?”
카이든의 검은 눈동자가 리젠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젠의 묶었던 머리가 어느새 풀려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 잘생긴 건 알았어도 다니엘을 보느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눈매가 깊고 코도 높다. 다니엘이 여성스럽게 예쁘장하다면 카이든은
정말 남자답게 선이 굵고 잘생겼다. 리젠이 그를 바라보는 도중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탐하고
있었다. 탐욕스럽게 움켜쥐다가, 소중하게 주무르다가, 그녀의 가슴 중앙 주변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안 돼!”
“힘 빼.”
그가 그녀의 맨 어깨에 입술을 대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녀의 다리가 의자에서 속절없이 벌어지고,
치마는 기어 올라가 허벅지 위까지 위태롭게 올라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갈
때였다.
리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에서 깬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화끈하여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이제 교실이 아니라 그녀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잠옷을 내리고
오른 어깨를 확인했다. 꿈속에서 그의 입술이 남긴 상처가 남았을 어깨는 거짓말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정말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1. 갈림길
리젠은 자신과 수석을 다투는 인재로 꽤나 귀염성 있는 얼굴과 활달한 성격을 가진 꽤 괜찮은
여자아이였지만, 어쨌든 자타가 공인한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와 가장 친한 다니엘과 붙어 다니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젠은 다니엘을 좋아한다. 그녀의 시선이
다니엘에게 못 박힌 걸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니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런 여자들이
너무 많아 아예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어차피 약혼자가 정해진 몸이니.
지금의 왕은 처음에 왕비와 비 둘을 두었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적통 아들이 첫째인 윌리엄과 셋째인
다니엘이다. 그리고 왕비는 죽었고, 원래 비였던 테스티가 정비로 올라왔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둘째
왕자인 루벤이다. 그리고 계속 별다른 욕심 없이 조용히 살고 있던 나머지 하나의 비가 낳은 딸이
다니엘과 동갑인 아셰다.
카이든의 눈이 또 리젠의 오른쪽 목으로 향했다. 어제의 꿈이 무색할 정도로 하얗고 매끈했다. 저 길고
하얀 목에 이를 박고, 입술로 물어 보라색으로 멍들게 했었던 어젯밤의 잔상이 생각나 그의 아래가
묵직해졌다.
“카이든, 가자.”
다니엘이 그를 툭 치며 말했다.
꿈속을 떠올리니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무슨 그런 이상한 꿈을 꿔서! 카이든은 자신의
꿈속이라고 생각할 테니 무의식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생생하게 기억까지 한다고
했으니 카이든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리젠은 한참이나 딴생각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풀썩 엎드렸다.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다만 다니엘과 현실이 아닌 곳에서 한 번만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리젠이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왕자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왕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남자였으면 했다. 성적이 모자라 왕립종합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계속 좋아했을 것 같다.
산하기관에 들어가면 월급도 많은데 그냥 그녀가 부양하고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혼자가
이미 정해진 왕자라니. 물론 그 정혼자와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이라고 해도 그를 향한 감정을 숨겨야
할 당위성으로는 충분했다. 원칙적으로 국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왕족은 계승자뿐이다. 국내에 애인을
둔다는 것은 공공연한 반란을 암시하는 뜻이기도 했다.
다니엘이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그것은 왕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베푸는 매너일 뿐이다. 그녀는 언감생심 왕족의 일원이 되겠다는 마음도 품은 적 없다. 다만,
다만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아직 추스르지 못한 것뿐이다. 그녀는 왕궁 직속 기관인 수사국에서 충성을
다 할 테고 그러다 보면 다니엘을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이 많아져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체력 단련이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개인 이용 시간 초과되었는데.”
“이제 나 좀 쓸게.”
“옆방 쓰면 되잖아.”
“어.”
“다니엘한테 들었어.”
“늦은 시간에 훈련실 오니까 좋네. 한적하고, 편하고, 조용하고. 넌 매일 이 시간에 와?”
“거의 매일.”
“리젠.”
“어?”
카이든의 말에 리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리젠의 고모, 르엘라가 약제국의 굉장한 인재였기 때문에
누구나 리젠에게 약제국을 권했다. 리젠의 약초학 성적이 월등하게 좋기도 했고, 보통 여성들은
약제국이나 행정국으로 많이 지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수사국을 쓴다고 했을 때 말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는 체술도 뛰어나고, 마법도 꽤나 쓰며, 활동적이고 대담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다 별별 꼴 못 보는 건 아니니까.”
“그럴 리가.”
“난 열심히 안 사는데?”
카이든이 씩 웃었다.
“재수 없긴.”
“하앗! 탓!”
“그래.”
“다녀오겠습니다.”
“모든 것을 밝혀내겠습니다.”
“리젠?”
그녀는 그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음…… 괜찮아?”
리젠이 다소 망설이며 물었다. 카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열일곱 살이면, 그녀가 고모를
잃었을 때보다 어린 나이다. 온갖 감정을 다 누른 무표정을 보며 리젠이 천천히 말했다.
“……고마워.”
“리젠.”
그냥 꿈인 걸까? 그냥 꿈이겠지? 밀려오는 엄청난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니엘. 다. 니. 엘.”
“어어…….”
“얼른 불러 봐.”
“좋아, 리젠.”
다니엘이 그녀의 갈색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한다며 뛰어갔다. 리젠은 그 뒷모습을
보며 짝사랑이 시작된 것을 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또래 남자애들과는 다르다며 동경해 왔던
왕자님이 일시적이지만 동급생이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을 안 뺏길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왕립고등학교도,
왕립종합대학도 무조건 연애 금지였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해 볼 여지도 없었지만, 그래도 다니엘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이후 5 년이다. 5 년 동안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그를 좋아해 왔다.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자꾸 카이든이 나오니 요즈음은 카이든 생각도 자주하게 된다. 어젯밤 꿈을 생각하며
조용히 걷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아셰가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발걸음을 멈췄다.
“고마워! 얼른 올게.”
아셰는 파일을 하나 꺼낸 그녀의 가방을 리젠에게 맡기고 쏜살같이 달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리젠은
가방을 두 개 들고 터벅터벅 식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왜 카이든의 꿈을 꿨을까,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개꿈일까 생각하느라 바빴다. 터덜터덜 식당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아셰의 가방을 누가 번쩍 들었다.
“……어?”
“이거 아셰 가방 아니야?”
“응.”
그의 뒤에는 카이든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카이든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리젠이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설레는 목소리로 말하자 다니엘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홀린 듯
다니엘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쿡쿡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카이든이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좀 뛰어야 하는 것 아니야? 다섯 종류의 과일 푸딩을 먹으려면 일찍 가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식권 사 올 테니까.”
“……포기하는 게 좋아.”
“뭐, 뭐를?”
“내년이면 유부남이야.”
“……알고 있어.”
“그럼 어쩌겠다고?”
“……간직만?”
리젠이야 이미 부서 희망을 예전부터 확고히 했던지라 별생각이 없었지만, 요즈음 학교는 학생들의 부서
지망 때문에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오고갔다. 특히나 성적이 중위권인 학생의 경우 상위권 학생들이
어디를 1 지망으로 썼는지 암암리에 캐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고, 각각의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교수들도
뛰어난 학생들을 자신의 부서에 데리고 오기 위한 작업을 하는 데에 바빴다.
리젠 역시 사파엘에게 약제국으로 오라는 제안을 처음부터 받았다. 약제국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르엘라의 하나뿐인 조카였으며 역시 피가 무서운지 약초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리젠은 뛰어난 학생이지 르엘라만큼의 탁월한 인재는 아니었다.
“그럼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해!”
아셰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 후, 리젠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앉아서 일단 과제를 다 한
뒤에, 천천히 일어나 서고로 향했다. 오늘 하루 종일 궁금한 것이 있었다. 서고에 들어선 그녀는 아무도
없는 종합자료실로 들어갔다.
“여기 있다.”
2170 년의 기록물은 다른 년도의 기록물보다 압도적으로 두꺼웠다. 그녀는 쌓인 먼지에 콜록콜록 기침을
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4 월 5 일……. 어?”
“아, 이날…….”
다니엘과 윌리엄 태자의 친모였던 스잔나 왕비가 죽은 날이다. 서쪽 땅의 별장인 히람궁의 완공식이 있던
날인데, 왕은 정사가 바빠 왕비가 대표로 갔고 그래서 서쪽 지방 영주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연회에서 불이 나 모두 몰살당했다. 루스 지방 역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카이든의 부모님도 그때 연회에 참여했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는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어머…… 어떡해.”
새삼 카이든이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생각에 리젠의 호흡이 떨렸다.
그녀가 예언자도 아니고, 무슨 꿈속에서 카이든의 부모님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가 어제도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상한데…….”
그럼 오늘 밤은…… 괜찮을까?
“또 너야?”
그녀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카이든의 기숙사 방인가? 역시 오늘 밤도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방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벽 한쪽에는
교복과 도복, 운동복이 걸려 있었고 책상에는 전공책들이 쌓여 있었다. 리젠은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꿈이고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카이든은 순전히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3 년 전 다니엘이지.”
“아…… 그건…….”
리젠의 눈을 보던 카이든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힘주어 그녀를 옆에 눕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리젠은 꼼짝 없이 그의 옆에 눕게 되었다.
“……올려다보기 목이 아파서.”
왕립고등학교 입학은 5 월이었다. 4 월 5 일에 그 화재가 났고, 카이든의 부모와 다니엘의 친모가 죽었다.
아직까지 연결하지 못했던 사실에 그녀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둘 다 같은 사건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얼마 되지 않아 같은 학교에 입학한 거구나.
‘이건 감정이 아니야……. 이렇게 잘생긴 남자애랑 이렇게 붙어 있으면 누구나 기분이 이상할 거라고.
그건 카이든도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얘는 무의식이잖아.’
리젠은 재빠르게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리젠의 등을 감쌌다.
“어?”
“난리 치면…….”
리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놔줄 거야?”
“아니.”
“아, 안 돼…….”
“나 첫 키스라고…….”
“어차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리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꿈이야, 꿈이라고.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은 세차게 뛰고,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하지?
“……다니엘하고는 못할걸.”
‘어차피 꿈이잖아.’
그래서 그녀는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교복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을 때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이를 훑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녀의 혀를 감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며 천천히 가슴의 둔덕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드는 기대감에 허리를 움찔했다.
사실은, 사실은 그저께 밤에 가슴을 유린하던 그의 손길이 순간순간 기억났다고, 특히나 교실에서 얌전히
수업을 듣고 있을 때에도 그 기억에 혼자 숨이 멎었었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유두를 머금고, 한참을 혀로 동그랗게 감싸다 부드럽게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가 살짝 튕겨져 오르며 교복 치마가 무릎까지 내려왔다. 그의 한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꿈이잖아, 꿈이잖아…….’
“기분이, 기분이…….”
리젠이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아!”
“카, 카이든…….”
“그때…… 그때 분명히…….”
“어, 어떡해…….”
이런 대단한 노트가 노트로만 남아 있는 이유가 있었다. 르엘라는 엄청난 약들을 만들어 낼 아이디어가
너무나 풍부했지만 해독제까지 다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독제가 없는 약들만 적어 놓은
노트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도 열일곱의 카이든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루스 영지는 한순간에 주인을 잃었고, 형은 열아홉의
나이에 영지를 떠맡게 되었다. 모두들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열일곱의 소년을
위로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리젠이 나타나 그를 안아 주다니. 그 위로가 왠지
벅차서 그는 그녀의 이마에 깊게 입 맞추었다.
“카, 카이든?”
“도서관에는 웬일이야?”
카이든이 도서관에 온지도 모르고, 그녀는 열심히 서고에서 잔뜩 가져온 약초학 책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지만, 꿈이 연결되는 시약을 언급한 문구조차 못 찾았다. 대다수의 서적이 모두 모여 있는
왕립마법대학 도서관에 없다면 다른 서고에 가 볼 필요조차 없었다. 종합 시험 준비도 미루고 하루 종일
책을 찾아봤지만 보람이 없었다. 도서관이 마감 시간이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윌리엄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제펠탄의 또 다른 후궁인 샤틴은 감기를
핑계로 오지 않았지만, 테스티의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 때문에 거의 왕궁의 꽃병 수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왕의 침실을 나오자마자 테스티의 유일한 아들, 루벤이 선언하듯 말하고 그들과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쪽 복도로 걸어갔다. 그는 윌리엄과 다니엘, 그리고 아셰와 평소에도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윌리엄은 천천히 자신의 궁으로 걸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이 듬직한 형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태자인 윌리엄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며 거의
대다수의 정사를 보고 있었다. 윌리엄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좋아 훌륭한 왕의 재목이라
평가되었는데, 과연 왕의 빈자리에 혼란이 없도록 꼼꼼하고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되면…….”
“재조사해 줘.”
“…….”
“시간이 많이 지나 어렵겠지만…….”
“그래.”
그녀는 입을 삐죽대 보았지만, 그 나이의 혈기 왕성한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았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꿈속의 자신이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리젠 하카트!”
“너, 너…….”
리젠의 단호한 말에 카이든도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따라 나섰다. 리젠은 그의 팔을
끌고 성큼성큼 걸어가 도서관 앞 분수대에 섰다. 시초왕의 거대한 동상이 물을 뿜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저녁, 바람이 기분 좋게 한 번 불자 낙엽이 춤을 추며 떨어졌다.
리젠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부루퉁하게 물었다. 카이든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내 팔 좀 놓을래?”
“아, 미안.”
그녀가 여전히 잡고 있던 그의 팔목을 흠칫 하며 놓았다. 매우 부자연스럽게 그들의 손이 떨어지고,
카이든은 다소 어색한지 두 손을 교복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리젠은 순간 꿈을 꾸나 싶었다. 매일 밤 꿈속에 함께 있다 보니 이제는 단둘이 있으면 꿈만 같았다.
“응.”
“대체 왜?”
“왜라니?”
“사람 적성이야 바뀌는 거잖아. 르엘라 하카트 몰라? 우리 고모, 고모의 뒤를 이어 볼까 해서 사실은
예전부터 고민이었어.”
“거짓말.”
“사파엘 교수님이 네게 아무리 약제국을 권해도 고모의 재능은 못 따라간다며 단칼에 거절했던 게 너야.
근데 이제 와서 고모의 뒤를 잇겠다고?”
“너 참 이상하다.”
“내가 수사국 안 쓰면, 네 수석이 확정되는 거잖아? 근데 왜 좋아는 못할망정 추궁하듯이 이래?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피엔딩이잖아. 너는 수사국 수석, 나는 약제국 수석. 둘 다 윈윈이라고 볼
수 있지.”
“리젠 하카트.”
리젠은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렵한 턱 선과 쭉 뻗은 콧날이 꿈에서 본 것처럼 조각상 같다.
그의 무의식은 그녀와 붙어 있으면 무조건 덮치기 일쑤였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이처럼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다. 그녀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는 그가 낯설면서도 새로워서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든.”
“미안해.”
그동안 열심히 책을 뒤지며 안 사실인데, 이렇게 유효 기일이 영원에 가까운 시약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왕국 여성들이 많이 복용하는 시약 중 하루 동안 피부가 뽀얘지는 약이
있는데, 지속적으로 효과를 주는 약을 계속 복용하게 되면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지속해서 몸에 효과를
나타내는 유효 기일이 없는 약들은 해독제를 1 년 안에 마시지 못하면 수명을 갉아 먹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다. 리젠은 그녀가 카이든에게 먹인 시약이 카이든의 수명을 갉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너무 미안한 일이다. 반드시 1 년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내야 한다.
“리젠.”
“해야만 하는 일이 뭐지?”
“응?”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고모가 그랬어. 부끄럽지 않게,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희생시키고 태어났으니까. 쉽지 않은 삶이니까 반드시 낭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만큼
잘 살겠다고. 그러니까 난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약제국 가서도 엄청 열심히 살 거라고.
수사국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
아마 꿈에서 본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가깝게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카이든도 그러니까 자신에게 일부러
이렇게 말도 걸고 있는 것이겠지. 게다가 자신은 열일곱의 카이든을 보았다. 리젠은 그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하나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수사국이랑 약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래. 뭐 온갖 범죄에 약물은 기본이니 당연한 거겠지.
우리 각자 다른 부서에서 좋은 동료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러니 자극이 필요하면 약제국의 동료를 찾아.”
“……그래.”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니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선선한
밤에 서로의 진로를 앞두고 카이든과 한 대화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이든, 네게도
수사국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리젠은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래, 바보야.”
“어이가 없네.”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상한 꿈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만 탐하느라 바빴지만,
현실에서 눈에 담기 시작한 그녀는 삶의 모든 어둠을 딛고 씩씩하게 살아 나가는 당찬 여자아이였다. 그는
그러지 못했다. 슬픈 그림자를 뒤에 두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무뚝뚝하기만 했다. 밝고 다정한 다니엘을
보며 ‘너는 왕족이니까’라고 합리화만 했다. 카이든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꿈이구나.’
“카, 카이든?”
“카이든! 뭐 하는 거야?”
“마지막이잖아.”
“어?”
“그, 그렇지…….”
“이렇게 같은 옷을 입는 것도 마지막이야.”
“제발, 카이든!”
“아무도 안 와.”
카이든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리젠은 불안해서 심장이 뛰었다.
무대에서는 유진이 행정국 임명장을 받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헐렁한 리젠의 학위복으로 들어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리젠.”
그의 손이 학위복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능숙하게 그녀의 속옷을 끌어 올린 그가
리젠의 팔을 뒤로 잡아 밀착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카이든!”
“쉿.”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진이 올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학위복 안의 교복이 다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발자국은 무심하게 무대 뒤를 지나가 멀어졌다.
“젖었네?”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젠은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밖에서, 남들은
졸업식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너무 외설적이잖아. 카이든, 이 변태 자식. 내일 진짜 있을
졸업식에서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은데…….
“여기야?”
“아니면 여기?”
“조, 조금 위…….”
“아…….”
아셰의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자국이 오도도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든의 한쪽 손이
다급하게 신음 소리를 흘리던 리젠의 입을 막았다.
“그러게. 엇갈렸나?”
다니엘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든이 그녀의 돌기를
원을 그리며 세게 문질렀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쾌감에 그녀는 울 것 같았다. 몸 전체로 느껴져 오는
압박, 그 와중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카이든의 손, 학위복 속에 다 풀어헤쳐진 교복 속의 가슴이 카이든의
단단한 가슴과 밀착하여 흔들렸다.
“……으으…….”
그녀는 필사적으로 신음 소리를 참았다. 아무리 꿈이어도 이런 걸 아셰와 다니엘에게 보여 주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꿈이어도 싫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몸은 얄궂게도 카이든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에 반응하고 있었다. 머리를 쨍하고 울리는 쾌감이 지나가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여성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손가락의 빠른 왕복 운동에 그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니엘의 말에 그들의 발자국이 멀어졌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작은 한숨을 쉬었다.
카이든은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다시 그녀의 학위복에 넣어 유두를 두 손가락 사이에 넣었다.
양쪽으로 주어지는 자극에 리젠은 참기 힘든 신음을 토해 냈다.
“리젠.”
“널 갖고 싶어.”
“아, 안…….”
“그리울 거야.”
“뭐, 뭐가?”
“네가 있던 이 학교가.”
“그만…….”
“그럼 뭐 어때.”
리젠이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제 마지막인데.”
정말로 졸업식이다. 이제 그녀와 그는 다른 부서에 소속되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볼 일이 없어진다.
꿈속의 카이든이 한 말처럼, 그녀도 뭔가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물론 다니엘이 그리울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니엘은 동급생이 아니라 모셔야 하는 왕자가 된다. 더
이상 다니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곧 국혼도 빠르게 추진될 것이다. 상대는 제국의 황녀라고 들었다.
그래도 한때나마 짝사랑했던 남자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것은 좋은 추억이다. 그러나, 그 옆의 얄미웠던
라이벌도 더불어 그리울 것 같았다.
꿈과는 다르게 졸업식은 무사히 아무 일도 없이 치러졌고, 그다음 날부터 그들은 부서 배정을 받아 근무가
시작되었다.
2. 의심의 기간
“당연하겠지.”
다니엘이 씩 웃었다.
“제국에서 아직 상대가 안 정해진 모양이야. 황제의 오누이인 황녀가 자그마치 12 명이라고 하니…… 7
황녀 아니면 8 황녀라는데, 또 6 황녀라는 말도 있고. 그래도 다음 달에는 식을 올릴 거야.”
“아셰는?”
“……제국에서 또?”
“그렇군.”
“너야말로 연애라도 시작하지 그래. 잘못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걸. 수사국엔 그렇게 독신 부장님이
많다며. 일에 치여 여자를 못 만나서.”
“다니엘.”
“왜?”
“뭐야, 이건?”
“간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리젠은 출근 전에 아셰의 궁에 들렀다. 다과를 가져오라며 분주한 아셰의 옆에서 리젠은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어제 새벽에는 카이든과 꿈으로 연결이 되었다. 입사를 하고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꿈 연결은 자신과 카이든이 둘 다 잠들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수사국에 들어간
카이든의 수면 시간이 뒤죽박죽이었으므로 한참 동안이나 꿈에서 못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아, 진짜!”
아셰가 볼을 부풀리며 짜증을 냈다. 달콤한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싫은데.”
“고마워, 잘 볼게.”
아셰는 르엘라에게 학교에 오기 전, 어린 시절에 약초학을 배웠다. 왕족으로서 약초학은 당연히 배워야
할 교육이다. 르엘라가 얼마나 재미있게 잘 가르쳤는지, 다니엘과 아셰는 학교에 와서도 약초학 성적이
다른 과목 성적보다 좋았다. 특히 아셰는 자신이 왕녀만 아니었다면 약제국에 들어갔을 것이라면서 늘
아쉬워하곤 했다.
“나 제국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국?”
“세상에.”
리젠이 숨을 들이켜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이라면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메탄
왕국 또한 공물을 바치고 있는 나라다. 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화려하고 대단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당연하겠죠.”
“그래도 아메탄과 제국이 같나요? 게다가 혹시라도 황제가 아셰를 총애하게 된다면…… 정말 비할 바 없는
권력을 갖게 되시는 거예요.”
“윌리엄 생각이 바로 그거인 것 같아. 뭐, 나야 그렇게 해서 윌리엄의 힘이 되어 준다면 백 번이라도
가겠지만.”
“윌리엄의 힘이요?”
“리젠, 왕위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악해지는데. 지금도 사실 윌리엄은 얼음길을 걷는 것 같을걸. 왕비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치적 노선이 달라서 루벤의 세력도 굉장히 강력해.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흠을 잡히면 정말 폐위당할 수도 있어.”
“……그렇군요.”
“리젠, 미안해.”
“네?”
“나 사실…… 알고 있었어.”
“……뭘요?”
“너 다니엘 좋아하잖아.”
“그땐 그게 현명한 건 줄 알았는데……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어차피 다들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결혼할
거, 그때만큼이라도 감정에 충실할 걸 그랬어.”
“그냥 그때, 네 고민도 들어주고, 다독여 주고, 같이 슬퍼하고, 그럴걸.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몰랐어. 모르는 척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네가 날 편하게 대하고, 정말 평범한 사람들처럼 우정과
사랑을 논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다시는 안 오는데…… 그때의 널 혼자 둬서 미안해……. 르엘라를
생각해서도 그러면 안 됐는데.”
“어차피 안 될 걸 알아서, 그렇게 괴롭지도 않았어요. 짝사랑하면서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왕녀님
덕분에 다니엘 곁을 맴돌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왕녀님 입장이야 충분히 이해해요. 그리고
고모도…….”
그때였다. 밖에서 재빠르게 달려오는 발자국이 들렸다. 리젠과 아셰는 대화를 멈추고 벌컥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왕녀님.”
“무슨 일이야?”
아셰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리젠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젠, 오랜만이야.”
“그러게.”
사실은 어젯밤에 꿈에서 만났지만, 카이든과 리젠은 실제로는 꽤 오랫동안 못 만났다. 특히 카이든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그들은 출퇴근길에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카이든은 충혈된 눈을 비볐다. 거의 3 일을
밤샘 근무하고 오늘 사실 며칠 만에 받은 휴가였는데, 왕이 서거하며 긴급히 출근한 것이다.
“그러게. 너무 바빠.”
리젠은 카이든이 왜 약제국에 온지 알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당연히 수사국에서는 혹시나 계획된 암살은
아닌가 조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약제국과 의료국에 협조를 구하는데, 약제국에서는 독극물에
의한 암살이 아닌지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시약에 의한 암살은 반드시 어떠한 증거를 남겨. 우리는 알려진 모든 시약 반응을 다 해 봤는데…… 독에
관련한 건 그 어떤 것도 안 나왔어. 자연사야.”
카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국에서도 원래부터 자연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지금 시기에
왕이 죽어서 이득을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익을 보는 사람을 따지자면 윌리엄이었는데,
호시탐탐 그의 태자 자리를 노리던 테스티가 왕을 부추겨 폐위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테스티가 윌리엄 대신 자신의 아들 루벤을 왕위로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은 수사국 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 왕이 죽어서 가장 패닉에 빠진 사람은 아마 테스티와
루벤일 것이다.
“리젠.”
수사국의 제복을 입은 그는 교복을 입었던 작년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약제국은 흰 실험복을 입는다.
그녀가 커다란 실험복의 앞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른 해결하려고 노력 중인데, 어려워. 약제국 일도 많은 편이라 내 일 하기도 벅차고.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
“몰랐는데, 학교 다닐 때가 좋았지.”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리젠은 자신이 정말 자연스러워 보이기를 기도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지난밤 꿈에서도 꽤나
깊게 키스했던 것 같은데…… 카이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카이든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리젠은 쿵 내려앉은 심장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환히 웃었다.
“리젠! 리젠!”
“무슨…… 일손이요?”
“뭐, 뭐라고요?”
“말도 안 돼…….”
“아니야.”
“절대 아니야.”
“리젠.”
리젠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다리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카이든을 향했다.
“밝혀 줘, 카이든.”
리젠이 카이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지트를 향해 이제 가자고 말한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빠르게 추스르고 얼른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카이든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그녀 역시 아셰의
결백을 밝혀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리젠!”
“나야 뭐…….”
울고불고 매달릴 줄 알았던 아셰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멍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리젠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네.”
아셰는 기꺼이 팔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은 사파엘을 도와 그녀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 장소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울컥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아셰가 다니엘에게 물었다.
리젠은 다니엘의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는 항상 다정하게 웃었고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부정적인 언어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다니엘은 아셰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담고 있는 사파엘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다니엘.”
아셰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다니엘을 꽉 끌어안았다.
어차피 아셰는 지지를 받고 있는 기반도 없고,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도 없어 보였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
“그래.”
“그래도 좋은 일도 있어.”
아셰가 설명하듯 ‘의심의 기간’의 약혼에 대해서 읊는 것은 다니엘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리젠은 아셰의 얼굴에 살짝 걸린 미소를 보았다.
“다니엘, 왕이 되고 나서, 외교국의 일이 정지되었을 때 재빨리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해 버려. 오빠는
이제 굳이 외국의 여자랑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
다니엘이 왕이라고……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상대가 더 멀어지고 있었다. 아셰는 그녀에게 다니엘의
약혼이 파기되었다고 희망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리젠은 왕비라는 자리에 앉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신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던 다니엘은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만 가둬
두어야 했다. 그는 이제 왕위를 노리는 왕자가 된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 왕궁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곳이니까.”
“…….”
“잠시만요.”
“그 차…….”
“저도 검사해 주세요. 약제국에는 아무 해독제도 흡수가 되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잖아요. 그래서 시약에
중독되면 다들 약제국 밖에 나가서 해독제를 마시는데, 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약제국에 있었고요.”
다음 날 새벽, 다니엘은 긴급히 귀족원 회의를 개최했다. 누구나 윌리엄과 루벤의 대립 구도만 생각했지,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의 다니엘을 왕위와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테스티는 무표정으로 고고하게
앉아 귀족원들을 내려다보았고, 그 아래에 루벤과 다니엘, 아셰가 나란히 앉았다. 귀족들은 하루 만에
일어난 얼떨떨한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둥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아주 특이한 상황임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아바마마가 예상외의
기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그날 밤에 건강하던 윌리엄 형님이 돌아가셨어요. 게다가 약제국의
의견서에 따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에 의한 암살이라고 합니다.”
뒤이어 행정국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귀족원 투표가 이루어졌다. 찬성표가 과반이 나왔으므로, ‘의심의
기간’이 두 달 동안 운영되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두 달 후, ‘최종 재판’에서 그동안의 미심쩍었던
증거를 모아 발표하며 투표로 다음 왕이 결정된다. 다니엘은 두 달 동안 테스티와 루벤이 윌리엄을 암살한
증거를 찾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6 년 전 서쪽 지방의 대화재를 가능하다면 엮어 보려고 생각
중이었다.
‘의심의 기간’이 결정되었지만 루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무표정이었고, 야심
외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았다.
대다수가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귀족원들의 동요는 없었다. 그녀가 강단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윌리엄의 편이었으니까요.”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하루아침에 지도자를 잃은 윌리엄을 지지했던 귀족원들이 어디를 택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했다. 눈가를 살짝 훔치는 것으로 극적인 효과를 더한 그녀가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왜?”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울리며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구두 소리에 가려진
테스티의 낮은 목소리가 호위 무사에게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그 약제국 직원’ 리젠은 밤을 새고 자신의 자리에서 반쯤 졸면서 산처럼 쌓인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너무 바쁘고 피곤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녀는 약제국에 남아 있던 르엘라의 개인 연구 기록과
약제국에 남아 있는 희귀한 고대 서적 등을 뒤져 꿈 연결 시약의 해독제를 만들 단서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리젠, 퇴근 안 해?”
“네.”
그녀의 눈이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시야에 르엘라의 악필이 어지러이 펼쳐지면서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꿈인가?’
근데 그러기에는 풍경이 완벽한 약제국인데. 카이든이 이렇게 완벽하게 약제국을 상상할 수 있었던가?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리젠을 보며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의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리젠은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비비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도
없는 약제국에 카이든과 단둘이 있는 것은 꿈만 같고, 꿈이라고 하기엔 약제국의 풍경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카이든에게 슥 들이댔다.
“뭐, 뭐야?”
카이든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슥 뒤로 밀며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리젠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제야
현실임을 확실히 알았다. 꿈이라면 카이든이 이렇게 멀어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키스를 하면 키스를 했지.
“왜 이래?”
“미안. 네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서.”
“근데 넌 왜 퇴근 안 했어?”
“아…….”
“그때 말한 그 일이구나.”
“그런 셈이지.”
“……아쉬움.”
“이렇게 해도 안 될 수도 있겠지.”
카이든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에는 그저 악바리같이 뭐든지 열심히 하는, 그냥 성취 지향적인
여자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 갈수록 생각보다 부정적인 애다. 이 아이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성공보다 실패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꼭 성공해야지, 라는 마음보다는
실패하더라도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인 듯했다.
“근데 여긴 웬일이야?”
“일 때문이야.”
“많이 기다렸어?”
카이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펜을 돌렸다. 편안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리젠은 흠칫해서 그의 어깨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수사국 참 대단하네.”
“거기서 차를 마셨나?”
“30 분 정도?”
“또?”
“또라니?”
“30 분 동안 그런 얘기만 했을 리 없잖아. 모든 대화 내용을 다 말해 줘야지.”
리젠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카이든이 조용히
기다렸다.
“……학창 시절에…….”
리젠은 이상하게 카이든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이유도 없는데. 어차피 카이든도
그녀가 학창 시절 때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카이든.”
“왜?”
리젠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민망한 기분을 잊으려고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일어나 온갖 실험 기구들을 이용하여 현란하게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여러 비커와
증류기관을 거쳐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실험관에 담아 건네며 그녀가 씩 웃었다.
“그래.”
“어.”
그녀가 대화를 시도해 봐도 카이든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 이래서 내가 얘랑 5 년 동안 친해질 수가
없었지. 원래 이렇게 말이 짧은 애였으니까. 다만, 꿈속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조금 친밀해진 것 같았던
생각이 들었다.
“리젠.”
“……어?”
“다니엘 파혼했더라.”
“아, 응. 뭐.”
“음…….”
“다니엘이 왕이 된다면…….”
“카이든.”
“……잘 가.”
“아, 긴 하루였다.”
‘이딴 생각을 하면서…… 내 앞에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고. 하여간 인간미 없다, 카이든 루스.’
“카이든.”
“그래.”
꿈속의 그는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평소에 온갖 신경이 그
화재에 쏠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찬찬히 보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이 유리창에서 내려다보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쪽에 테스티의 왕비궁이 보여. 테스티가 그 화재의 배후에 있다는 건 왕궁의 누구나가 의심하는
사실이야. 그녀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받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믿겨져? 무고한 사람을 백 명 넘게 죽인 여자가 한 나라의 왕비라는 사실이…….”
그녀는 천천히 걸어서 카이젠의 옆에 섰다. 저 멀리 테스티의 화려한 왕비궁이 보였다. 카이젠이
실험복만 걸친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등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어? 정말이네?”
리젠이 유리창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흥미롭게 말했다. 숲길을 따라 외진 곳에 건설된 동그란 약제국
건물이 있었다. 약제국의 위치는 다른 직속 기관과는 다르게 왕궁과 가까운 정원에 붙어 있었는데,
약제국 전체에 걸린 해독제 방지 마법과 관련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륙의 마력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왕궁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2,000 여
년 전에는 강력하고 다채로운 고대 마법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왕궁 전체에 시약 효과 방지
마법을 걸었는데, 그 마법이 점차 줄어들어 최초의 마법 발현지인 지금의 약제국 건물에서만 해독제에
한해서 유효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런 마법을 걸 수도 없고 방법도 모른다.
마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마법의 힘도 정말 고대에 비해 약해졌다. 옛날엔 전쟁의 무기로도 쓰였다던
화염 마법의 경우, 대련 시에 성별을 고려한 선택 과목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약해졌다.
농담으로 화염 마법을 쓰느니 토치를 들고 다니겠다는 말도 공공연히 있을 정도였다.
“왕비궁을 보고 다시 분노하고…….”
“카이든, 이것 좀 놔줘…….”
“아…… 바보야.”
“으음…….”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과 유리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자 그녀의 입김이
유리창에 하얗게 번졌다. 등 뒤로 카이든의 제복 셔츠가 닿아서 사각거렸다. 발밑에 흰 실험복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바보야.”
리젠은 그가 손을 밑으로 내리며 더 몸을 밀착하자,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유리창을 짚었다. 그 반동으로 그녀는 살짝 엎드린 것처럼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이 그녀의 젖은 은밀한 곳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다니엘이 왜 좋아?”
“아아…… 뭐?”
“미쳤어?”
“……그러지 마.”
“아!”
“해도 돼?”
“……어?”
“아…… 뭐야.”
“글쎄요.”
이미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몸 하나는 젊은이 못지않게 단단한 수사국장 루카스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십니까.”
“수사국에 정식으로 의뢰하겠습니다. ‘최종 재판’에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윌리엄 시해 사건에 대해
조사서 및 의견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수사 직원은 카이든 루스로 지정하겠습니다.”
“상심이 크시지요.”
“아.”
“카이든을 보고 가도 될까요?”
“네.”
수사국을 나서, 숲길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거닐기 시작하며 다니엘이 조용히 말했다.
“6 년 전, 그 화재처럼.”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 당시 후궁이었던 테스티의 왕궁에 엄청나게 드나들던 마법사가 있어. 캐서린이라는 여자인데 테스티의
사촌 동생이야. 작은 마법 약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특이 사항은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점이야. 나도 몇 번 본 것 같아. 무도회란 무도회에는 온갖 보석을 두르고 항상 참석하거든.”
“뭔데?”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약제국.”
카이든은 자신이 왜 이렇게 둘러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말했다. 다니엘은 카이든의 약간
못마땅한 듯한 어조를 눈치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대답했다.
“…….”
약제국장은 출타 중이었다. 카이든의 말대로 약제국은 2 차 기관이고, 직접적인 왕궁의 의뢰를 받기보다는
수사국에게 증거를 넘겨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니엘의 등장에 꽤나 당황한 듯했다. 약제국장이
출타했는지라, 다니엘의 접대는 그를 직접 대학에서 가르쳤던 사파엘이 맡았다.
“왕자님의 선의와 안타까움은 당연히 짐작하는 바지만…… 이런 사건에 있어서 약제국은 사실 수사국에
자문을 해 줄 뿐이고, 원래의 설립 목표는 국가 경쟁력을 위한 신약 개발과 각종 불법적인 약물
단속입니다.”
“……네.”
르엘라는 왕족들에게 기본적인 약초학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했었다. 르엘라의 이름이 나오니 사파엘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사파엘에게 인사를 하고 약제국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런 책임감이 없는,
왕위에서 멀었던 왕자 시절에는 몰랐다. 예전에는 가볍게 했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약제국 뒤의 정원으로 향했다. 약제국은 왕궁과 가까운
위치에서 숲에 둘러싸여 있어 바람을 쐬고 산책을 하기에 좋았다. 카이든에게 리젠을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얘기했었는데, 과연 작은 벤치에 리젠과 카이든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왕자님, 오셨습니까.”
리젠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슬퍼할 틈도 없어.”
그가 리젠을 보며 환히 웃었다.
“네 덕분에 아셰의 감금이 풀렸어. 어차피 결정적 증거가 없어 체포까지는 못 했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혐의가 풀렸다는 게 어디야.”
“정말 고마워.”
다니엘을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당연히 없다! 다니엘은 정말로 고귀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어떻게 불순하게,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 뻔한 남자를 대상으로 낯
뜨거운 상상을 한단 말인가. 물론 카이든과는 너무 꿈을 자주 꾸니까 몇 번 해 본 적이 있지만…… 리젠은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상한 잡생각들을 멈추려고 애를 쓰면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여기요?”
“보통 여기서 멈췄지. 조금만 더 가면 루벤의 궁이 나오니까. 약제국 위치가 워낙 궁하고 가까워서.”
“아…….”
“리젠.”
“……네?”
“네.”
리젠이 밝게 웃었다.
“카이든하고는 이미 좋은 동료인데요.”
* * *
테스티는 차가운 표정으로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왕립종합대학의 졸업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길이 구불구불한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야무지게 살짝 미소를 지은 리젠의 흑백사진을
향했다.
“이 아이라고?”
“예.”
“르엘라 하카트의 조카입니다. 약제국에 들어오자마자 시간만 되면 르엘라의 각종 연구물을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체계적인 연구 기록뿐만 아니라 온갖 연습장이나 노트 같은 개인적인 자료도요.”
“그게…….”
“알 수 없습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런데 이 남자 말입니다.”
“카이든 루스?”
“……뭐?”
“좋지 않군. 아셰와 이 계집애가 친한 사이고, 다니엘과 이 남자가 또 친한 사이면, 분명히 이 르엘라의
조카와 루스 집안의 수사국 직원도 연관이 있을 테니.”
“다니엘은 아직 애송이야. 수족이 뻔히 눈에 보이는군. 천천히 없애. 이쪽은 왕위를 오랫동안 준비해
왔어. 두 달 만에 뒤집힐 수는 없지.”
리젠은 퇴근하고 나서 혼자 이것저것 중얼거리며 낮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르엘라의 기일이다.
벌써 르엘라가 죽은 지 5 년이다. 그녀가 수선화꽃 한 다발을 들고 작은 공동묘지로 향했다. 저 멀리에
르엘라의 소박한 묘지가 보였다.
“이번에도 있네.”
옛날, 르엘라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수도원에 갈 때마다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거부하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르엘라는 갔다 오는 길, 리젠의 침울한 표정을 보면서 열 살이 된 이후에는 절대 데려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리젠은 아버지를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매년 르엘라의 묘지로 오는
꽃바구니로 존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날씨가 좋아서 리젠의 길게 늘어트린 갈색 머리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리젠은 눈물을 꾹 참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왕궁도 난리야. 전하도 저하도 다 돌아가시고, 다니엘 왕자님이 왕위에 오르시겠다고 하고 있어. 나한테
다니엘이라고 말 편하게 하라며 빙긋 웃어 주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왕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것 같아. 요새는 더 빛이 나시는 것 같고……. 에이, 혼자 말하니까 역시 재미없다.”
“그래도, 고모가 날 이렇게 잘 키워서 나 되게 잘 살아. 고모한테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서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책임지고 걸을 수 있어. 해독제를 다 만들면 휴가 겸 긴 여행을 떠날 거야. 그리고 또 어떻게
잘 살아볼지 고민해야지.”
그녀의 시선이 나란히 놓여 있는 꽃바구니와 두 개의 꽃다발로 향했다. 그녀가 비뚤게 놓인 장미꽃 다발을
바로 하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3. 좋은 동료
리젠은 출근길에 다니엘을 만났다. 다니엘은 왕궁 산책을 하다가 약제국까지 왔노라고 황급히 둘러댔지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의아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가늘어진 눈을 보고
다니엘이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
그녀는 이것이 꿈인가 싶어 천천히 걸었다. 생각해 보니 다니엘과 단둘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늘
카이든이나 아셰가 곁에 있었다. 다니엘은 ‘의심의 기간’ 중 점점 더 화려한 옷을 입었고, 실제로 이제
더 이상 별다른 권력이 없는 왕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곱상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귀티가 나는 사람이 되었다.
“네.”
“얼마 안 돼요.”
리젠이 공중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리젠의 손바닥에 조그마한 불씨가 생기더니 화르륵 탔다.
“……그렇구나. 고마워.”
“그렇구나.”
“뭘요, 이런 걸 가지고.”
“안경 잘 어울려.”
“……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네…… 네! 왕자님도요!”
“……리젠.”
“당연하죠!”
“리젠.”
“네?”
“마법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약초학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어. 우리는 가장 매혹적이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거야. 왕족들의 정치적 싸움에 개입할 이유가 없고, 특히나 약제국
소속이라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심해야 해. 시끄러운 사건들은 수사국이 알아서 하라고 해.”
“죄송합니다.”
“네?”
“왕족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야. 얽혀서 좋을 일 하나 없어. 자기 자신도 도구로
쓰는 사람들인데, 남들은 오죽하겠니.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괜히 이용당하지
말고…….”
그녀는 집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녀의 집에도 여전히 르엘라의 연구 노트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약제국에서 대출한 책과 노트들을 대조해 가며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르엘라에게 배운 대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카이든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끝도 없는 연구와 공부가 지겨워질 때면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래서 지금 혼기가 찼는데도 자꾸만 들어오는 소개팅조차 거절하고 있지만.
[딩동, 딩동.]
“누…… 누구세요?”
“나야.”
“카이든 루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 밤 10 시가 넘은 시간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등장에
그녀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흙투성이에 잔뜩 지쳐 보이는 그가 쓰러지듯 들어왔다. 리젠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여 재빨리 그녀의 옷이 잔뜩 쌓인 소파에 앉혔다.
“뭐, 뭐야?”
“일단 씻을래?”
“그럴 수 있을까.”
“……시약 분석?”
“험한 거 보게 해서 미안해…….”
“웃겨. 왕년의 수사국 지망생을 뭘로 보는 거야? 근데…… 수사국 일이면 바로 약제국에 정식으로
의뢰하지 그래? 원래 그게 원칙이고, 우리 집엔 아주 최신 시약은 거의 없어서…….”
“그, 그래.”
그녀가 일부러 분주하게 실험 도구들을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난 직업윤리가 없어서.”
카이든은 바쁘게 움직이는 리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젠은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쾌활하게 말했다.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고마워, 바보야.”
리젠이 살짝 발끈하자 카이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고 더 하려다가,
카이든의 팔에 깊숙이 난 상처를 발견하고 팔짝 뛰었다.
“이건 뭐야?”
“별것 아니야.”
“기다려.”
그녀가 오도도 뛰어 어디론가 향하더니, 붕대와 약병을 하나 가지고 달려왔다. 목욕 가운을 걷어 올리고
그녀는 그의 팔에 붉은 색깔 약을 잔뜩 바르고 붕대를 야무지게 감았다.
“수사국 살벌하네.”
“안 가길 너무 잘했는데.”
“맞아.”
“넌 그냥 약제국에 가길 잘했어.”
“너 이러고 사냐?”
“왜?”
“내가 뭐가 지저분해?”
“안에 속옷 있다고.”
“……아, 진짜.”
“뭐가?”
“넌 안 놀랄 거라고 생각했어.”
“놀랐는데?”
“난 불편한데?”
부루퉁하게 대답하는 리젠의 머리를 카이든이 꾹 눌렀다. 리젠은 기운을 빼고 앉아 있다가, 속으로 새삼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만일 꿈이었다면, 이렇게 단둘이 있는데 카이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현실에서는 그저 좋은 친구이자 동료일 뿐이다. 좋은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학창 시절에 추억이 없지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리젠.”
“왜?”
“옛날에…….”
“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넌?”
“……그렇지.”
그러나 따뜻한 핫초코를 들고 다시 그녀가 거실에 왔을 때에는, 카이든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머그잔을 내려놓고 지쳐 잠든 카이든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성격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자는 그의 얼굴과 살짝 풀어진 가운 사이의 몸을 바라보는 리젠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던 그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이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이 세상에 이러한 조합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르엘라의 노트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짐작조차 못한 채로 카이든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몸을 옹송그리고 카이든이 잠든 소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왠지 추웠지만
무언가 덮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쳐 잠든 카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아침 먹어.”
“출근 늦은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뭐?”
“이봐요.”
“뭐라고?”
“대다수의 남자들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나처럼 절제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그래?”
카이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성분을 보여
달라고 말하려는 차에, 리젠이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평온하게 말했다.
“……굳이 알 필요 없어.”
“그런 뜻 아닌 것 알잖아.”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건이야. 널 굳이 끼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어차피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리젠의 표정에서 드디어 웃음이 사라졌다. 감정을 숨기겠다고 그렇게 밤새 다짐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또 울컥했다. 게다가 카이든은 지금, 옛날에 르엘라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진심이야?”
“다섯 명 이상을 죽인 사람이야. 그것도 남들의 눈을 피해서. 당연히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이겠지.
약물에 의한 살인은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비겁하고 계획적인 범죄야. 보통 악한 사람 아니면 할 수
없어.”
예상했던 바였지만 카이든의 망설임 없는 얘기를 들으니 더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지만 고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 고모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대체 고모가
왜 전혀 연관성도 없는 마법사들을 죽여? 연구 윤리로 치자면 사파엘 교수님만큼이나 꼿꼿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니까 말해 줘.”
“…….”
카이든은 복잡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그들의 식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모의 손에
자랐다고 들었다. 게다가 원래가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 아니라, 르엘라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에 억지로
밝은 척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이상하지 않아? 새로 지어진 별궁 전체에 그토록 빠르게 큰 화재가 난 것도, 조금의 진압이 안 되었다는
것도,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하고 모두 다 죽었다는 것도. 자연적인 화재라면 분명히 화재 경보 시설이
작동했을 텐데. 마법일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마법으로는 그만한 불을 일으킬 수가 없어. 어마어마한 마법사의 수가 필요할 테고, 그 정도의
마법사가 움직였다면 분명히 문제가 되었을 거야.”
“그래서 수사가 미궁에 빠졌지. 게다가 그때 선왕이 수사를 중지하고 빠르게 지금의 왕비를 그 자리에
앉혔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그때 돌아가신 100 명이 넘는 영주들 중 하나야. 나는 너무 억울하고
분노해서 수도인 아메니티로 올라왔어. 직접 수사해 보려고. 그리고 다니엘을 만났지.”
“…….”
“아무리 선입견을 버리고 사건을 냉철히 보려고 해도, 결론이 명확해. 테스티는 그 화재로 인해 왕비
자리에 앉아 루벤을 두 번째 왕위 계승권자로 밀어 넣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다니엘에게도 승계 순위가
밀렸겠지. 그리고 귀족들을 포섭해 루벤의 편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 놓은 상태야. 윌리엄 태자 폐위까지
도모했다는 것이 수사국의 극비 정보 중 하나로 남아 있어.”
“세상에…….”
“나의 가설은 이거야. 모두가 루벤을 왕으로 앉히기 위한 일이야. 선왕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윌리엄
시해가 이루어졌어. 너무 눈에 보이는 암살이기는 하지만, 급했던 거겠지. 물론 가설을 함부로 세우지
않는 것이 수사국의 수사 원칙이지만…… 너무나 명확하잖아? 모든 것이.”
“왕. 그래, 되고 싶을 수도 있겠지. 권력의 정점에 서고 싶겠지. 다 이해해. 높으신 분들의 정치 싸움도,
왕위 다툼도.”
“카이든.”
“‘의심의 기간’ 중에 왕족은 공식적으로 수사국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할 수 있어. 다니엘은 수많은
수사국들의 경력자들을 제치고 협조 조사원으로 나를 지목했어. 나는 윌리엄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다니엘의 비호 아래 자율권을 얻은 김에 6 년 전 화재도 조사하는 중이야.”
“아…….”
“마법에 의한 화재라고 가정하고, 당연히 사주한 사람이 다음으로 할 일은 증인을 죽이는 거겠지. 그래서
화재 이후 같은 사인으로 죽은 마법사들의 명단을 찾아봤어.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한 약초상의
고객이었고, 그들 중 다섯 명의 유골을 골라 온 거야.”
“……사인이 뭐야?”
“마력의 역류.”
“고모의 자료들을 보면…… 고모가 굉장히 열심히 개발하려다 실패한 시약이 있어. 그런 시약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정말로 많이 연구한 시약.”
“……뭔데?”
“마력증폭약.”
카이든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계속 실패한단 말이야. 계속해서, 엄청난 부작용이 나타나서 결국엔 개발해 내지 못했어. 어제
아침, 다니엘 왕자님이 찾아와 소수의 마법사들이 큰 화재를 낼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한 건 그것 때문이야. 마력증폭약 같은 건 없어. 자연을 거스르는데 어떻게 개발이
가능하겠어.”
리젠은 카이든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르엘라는 약물에서 생길 수 있는 조금의 부작용도 걱정하여 수많은 연구 결과를 발표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르엘라가 개발해 낸 불완전한 약이 100 명을 넘는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르엘라가 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아니, 만약 르엘라가 누명이라도 쓴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할지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너무 명확하잖아……. 고모가 개발한 마력증폭약을 먹은 마법사들이 화재를 냈고, 부작용으로 죽었어.
아마 부작용에 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겠지. 마법사들이란 마력에 미친 사람들이니 분명 미심쩍은
약이어도 먹었을 테고.”
“리젠.”
“우리 고모…….”
“……자연사는 맞을까?”
카이든은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르엘라가 죽고 나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한 번도 이렇게 울어 보지 않았다. 르엘라는 항상 말해 왔다. 결핍된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굳게 잡고, 밝고 곧게 자라야 한다고. 어지럽고 나쁜 생각들이 그녀를 괴롭히지 않도록 뭐든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엄마가 나 때문에 죽고, 그런 나를 아빠는 버리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내 인생까지 망가트리지 말라고.
“리젠.”
“내가…… 히끅, 아까 전만 해도…… 히끅, 날 어떻게 믿느냐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그런 애한테
안겨서…… 히끅, 뭐 하는 건지…….”
“……미안해.”
“미안하면, 너.”
“……뭐?”
“나도 각오하는데.”
“얼른. 언제까지 혼자서 그러고 있을 거야? 다니엘 왕자님이 네 편인 건 알겠지만, 왕족은 왕족이야.
동료가 한 명 정도는 더 있어야 되지 않겠니?”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부어오른 두 볼을 감쌌다. 리젠의 심장이 순간 툭 하고
떨어졌다.
“리젠.”
“……어?”
“그땐 너한테 관심도 없었을 때인데, 왜 이렇게 자주 꿈에 나오나 싶었어. 도대체 왜 그런가 싶었지.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잘 믿지 않지만…….”
“어…….”
* * *
“아무리 국왕이 백성의 어버이라 할지라도, 왕족의 급작스러운 변고가 개인의 삶을 망가트려서는 안
됩니다. 국상이라는 대의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그 어떤 개인도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다니엘.”
“왕궁의 무도회는 최대한 소박하게 축소하되 그 나머지 지역의 축제는 계획대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귀족들은 각자가 관할하고 있는 영주들의 여론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론은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스티는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부릴 만큼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연회를
열지 못하는 것에 잠시 슬퍼하면서 정숙하고 슬픈 부인인 척한 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위해
양보하겠다는 듯한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중간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이미 계산된 것 같은 다니엘의 행동에 그녀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테스티가 화려하게 빛나는 다니엘의 금색 장식을 부채로 툭 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녀는 복도를
걸어 나가며 뒤를 따르던 호위 무사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오늘 비가 옵니다.”
“왕궁 무도회요?”
“그래.”
리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고작 그 말을 하려고 하녀까지 시켜서 퇴근길의 그녀를
급히 불러온 것인가 싶었다. 사파엘이 워낙에 그녀가 왕족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만나러
오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 왜…… 다들 예쁘게 차려입고 음악에 맞추어서 춤추는…… 어…… 그런 거 말씀이시지요? 맞죠?”
“네, 잘 다녀오세요.”
“……네?”
“왕녀님, 제가 거길 왜 가요?”
“리젠.”
“……숨겨진 목적이요?”
“그렇게 젊은 남녀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 삼삼오오 모여서 인맥을 만들기도 좋고,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잘생긴 남자들 구경하기도 좋고. 그러다 마음에 든 상대랑 간질간질한 분위기
만들어 가면서 춤도 추고 말이야.”
“아…….”
아셰가 쏘아붙였다.
“하아…….”
아셰가 안 되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손을 놓은 아셰가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리젠.”
“네?”
“너는 사교계의 동향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이번 무도회에서 모든 영애들의 관심이 누구인지
알아?”
“글쎄요.”
“다니엘 오빠야.”
“……뭐, 그건 그렇죠.”
“…….”
“왕녀님……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니까 리젠, 너라도, 자유로운 너라도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 나는 그것조차 금지되어 있어.
마음껏 누구를 좋아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그 두근거림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데.
그런 사람이 나타난 것만 해도,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는 네가 부러워. 이건 정말……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학교 다닐 때 모른 척하고 괜히 다니엘에게 끌고 다니며 네 마음 흔든 건
짝사랑이라도 할 수 있는 네게 질투가 나서였어. 미안해…… 미안해.”
“……생각해 볼게요.”
아셰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리젠은 가까스로 그 정도의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셰가 정말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혼란스러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다니엘은 너무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반짝거리고, 여전히 동경하는
사람이지만 곁에 서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엄두도 못 낸 상대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오히려 비틀거리며 그녀의 집 문 밖에 서 있던 카이든을 근래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았었나.
“……가야겠다.”
궁을 나서며 카이든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리젠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카이든의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다니엘에게 쓰이는 마음이 줄었다. 그러나 카이든이 생각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실수로 꿈이 얽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실도 아닌, 그저 꿈에서 육체적 관계가 있었다고 감정을
헷갈리는 건 그녀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가자. 가서 확실히 하자.”
테스티의 걱정 어린 말에 나람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람은 루벤의 비로, 사막 국가 한스팀
출신이었다.
“하지만…….”
“몇 번 가 보았지만…….”
“대놓고 귀찮아하셔서요…….”
테스티가 달래듯 차분히 말했다. 나람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람의 손을 토닥여 준
그녀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이미 5 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가장 까다로운 재료는 그제 준비가 되었어요. 나머지 재료만
준비되면 ‘최종 재판’ 전까지는 간당간당하게 가능해요.”
“네.”
“그래. 알았다.”
테스티는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영애들이 다니엘을 모두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차였다. 이번 무도회에서 그중 골라서 피를 얻으면 될 것이다. 왕위에 정신이 없는 다니엘이
누군가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중 가장 반응이 좋은 여자가 있기는 할 테니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연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나람은 가까스로 말을 잇고 훌쩍이며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루벤.”
* * *
카이든은 서류 가방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메모를 펼치며 말했다. 리젠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
“증상이…… 어땠어?”
“그냥 유순한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 말하는 법을 잊고…… 온종일 누워 있거나 과자를 먹었어.
돌보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그러다 어느 날 조용히 잠들었고, 그 이후에 깨어나지 않았어.”
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이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막다른
길에 접어드는 것은 수사를 할 때면 언제나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런 경우 정보가 필요했다. 더 발로
뛰어 더 작은 단서라도 잡아내야 했다.
“뭐?”
“……결과는?”
“자연사였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사파엘 교수님은 뭔가를 알고 계셨던 것 같아. 자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나 봐.”
리젠이 입술을 내밀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막 퇴근하고 와서 검은 제복 차림의
카이든은 리젠과의 대화를 정갈하게 메모에 정리하고 난 뒤,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그래? 그럼 얼른 나가.”
“무슨 대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카이든의 손을 잡았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카이든의
무릎에 엎드려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자꾸 보고 싶더라.”
‘자면 안 되는데…….’
“……같이 걷고 싶더라고.”
‘아……. 여기 오랜만이다.’
“악!”
“야! 뭐 하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서.”
“뭐?”
“어?”
“너처럼…… 되고 싶었는데.”
“뭐가?”
“……나는 그게 잘 안 돼.”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리젠은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이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나?
그럴 수 있었다. 카이든이라고 좋아하는 여자가 없을 리 없었다. 그냥 리젠은 당연히 카이든은
복수하느라 바빠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을 거라고 예상한 것뿐이었다. 리젠의 머릿속에 카이든과
그래도 대화를 줄곧 잘 나누었던 여학생 이름들이 둥둥 떠다녔다.
리젠과 카이든의 시선이 얽혔다. 리젠은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느리게
그들의 입술이 맞닿았다. 리젠의 수줍은 혀가 부드럽게 그의 입술을 쓸었다. 카이든은 눈을 감고 그녀의
왼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안 돼.”
리젠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든이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리젠은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는 내가 나타나니까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놓고 마음속에서는 다른 여자를 품어? 그래 놓고 좋은 동료? 그러니 이렇게 단둘이
우리 집에 있어도 제정신일 때에는 내 몸에 손끝 하나 안 건드리는구나. 약간의 짜증을 품은 그녀의
손길이 과감해졌다. 오기가 생긴 그녀가 왼쪽 손을 억지로 풀고 그의 허리를 감았다.
“……알고 싶어.”
“왜 안 알려 주는 거야?”
그녀가 말할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간질거려 카이든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안 돼.”
“누구야, 그 여자애?”
“있어.”
“엄청…… 지켜 주고 싶은 여자.”
“……뭐?”
리젠은 고개를 벌떡 들었다. 허리가 아팠다. 카이든의 무릎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카이든 역시
그 자세 그대로 잠들었었는지, 소파에 앉아 기댄 그 자세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안 돼. 진짜 절대 얼굴 못 보겠어.’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분명히 카이든도 꿈의 잔상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허리를 펴려다가, 바로 눈앞에 잔뜩 커진 그의 중심을 보고 숨을 삼켰다.
‘아, 말도 안 돼…….’
“아, 알아!”
“……바보야.”
그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리젠 하카트!”
“어어어! 나, 난 먼저 씻을게!”
리젠답지 않게 왜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을까. 사람 유골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는데, 정말
자연스러운 현상을 보고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그녀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누구지?”
“……누구지?”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왕궁 산하기관마저 왕족들의 정치 놀음에 놀아나게 된다면 어떤 조작이 벌어질지
몰랐다. 사파엘이 염려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쪽지를 받은 것만 해도 정말
잘못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다.
그래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11 시가 되기 직전에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몰래 약제국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어떤 정자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정원을 죽 가로지르면 나온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약제국은 왕궁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산책로가 몹시 잘 되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비가 툭, 툭 하고 떨어졌다.
“아…… 맙소사.”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약제국 안으로 우산을 가지러 들어가기엔 들킬 것 같아 무서웠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실험복을 뒤집어쓰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그 정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외진 데에
있는지 정원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도 나오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두꺼워지고, 그녀가 짜증을
내며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 지붕이 있는 정자가 보였다.
“저긴가?”
연구할 때만 쓰는 안경을 그대로 쓰고 나와, 그 안경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시야가 흐렸다.
금발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정자에 들어와 덮어쓴 실험복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자, 금발 머리의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 정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 넓은 정원에
정자는 여기뿐인 것 같은데?
“……르엘라?”
그녀가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그녀가 당황한 나머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
“르젠이냐?”
“……리젠이요.”
“저를…… 아세요?”
“꼬맹이일 때 봤었지.”
“많이 컸네.”
“리젠에게 무슨 일이야?”
“가, 가시게요?”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루벤의 날카로운 눈이 그녀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다니엘과 그녀의
인사조차 받지 않고 우산도 없이 빗속을 저벅저벅 걸어 사라졌다.
“뭐래?”
다니엘이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뭘 캐냈어? 혹시 협박했어?”
“아, 아니요…….”
“네…….”
“네.”
리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망설이며 메모지 하나를 내밀었다. ‘캐서린 얀슨’이라고 적힌
이름과 약초상 가게의 주소가 적힌 메모였다.
“외울 수 있어?”
“네.”
“또 비공식적인 건가요?”
“역시 리젠이야.”
다니엘이 쿡쿡 웃었다.
“리젠.”
“네?”
“저, 저, 저 춤 잘 못 추는데요…….”
비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다시 구름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 다니엘의 금발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의 파란 눈도 투명하게 빛났다. 리젠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앉아 있을 동안, 카이든은 어느 사지에서 헤매고 있는지 마음 한편으로 계속
걱정이 되었다.
4. 무도회
“거봐요, 왕녀님.”
“저는 평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 이렇게 화려한 옷도 안 어울리고, 속눈썹도 짧아서 화장도 잘 안
먹어요.”
“얼굴이 귀엽게 생겨서 사랑스러운 스타일이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옷이랑 따로 노네. 아예 다른
쪽으로 가자. 섹시한 연구원!”
리젠은 몸에 달라붙는 붉은 민소매 드레스를 입어 보았고 그제야 아셰와 리젠의 얼굴이 펴졌다. 레이스나
화려한 장식이 없는 드레스가 의외로 잘 어울렸던 것이다.
“다니엘 진짜 깜짝 놀라겠다.”
“왕녀님도 너무 예뻐요.”
“나야 이런 무도회가 처음이 아니니까 나한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고. 어때, 아메탄의 유일한
왕녀 체면은 서겠지?”
“목적이라뇨?”
“내가 봐도 너무 매력적이니까, 리젠. 앞으로 실험복에 운동화 끌고 다니지 말고, 이런 스타일로 입어.”
리젠이 씩 웃었다.
“넌 차기 왕비가 될 수도 있는 몸이라고.”
리젠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핑거푸드를 먹거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셰와 리젠은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와인 잔을
부딪쳤다.
“무도회는 모든 사랑을 하는 소녀들의 꿈이야. 예쁘게 차려입고,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남들의 시선을 느끼며 춤을 추는 것 말이야.”
그녀들이 쿡쿡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사람들 틈에서 멋있게 차려입은 다니엘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 리젠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다니엘이 그들의 테이블에 스스럼없이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기다렸어.”
“춤은 많이 췄어?”
리젠의 볼이 자신도 모르게 발갛게 물들었다. 다니엘은 정말로, 저런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할
때에는 ‘달콤하다’라는 형용사가 너무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셰가 키득대며 리젠의 옆구리를 찔렀다.
리젠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향이 좋은 와인만 한 모금 마셨다.
“리젠, 오늘 정말 예쁘다.”
“아…… 지한 왕자님?”
아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전에 혼담이 들어왔던 사막 국가의 남자였다. 다만 제국의 황제에게서
청혼이 겹쳐 들어오면서 흐지부지되었다가 ‘의심의 기간’ 중 다 없던 일이 되었던 것이다. 아셰는
한때는 결혼할 뻔했으나 얼굴은 지금에서야 처음 보는 젊은 남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아셰는 천천히 일어나 아주 우아한 손짓으로 인사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춤추는 것 같은 살랑거리는
몸짓에 리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 한 곡…… 청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네?”
“너무 예뻐서.”
“아…….”
“이렇게 빨리 배울 줄 몰랐는데.”
리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춤을 추고 있던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다니엘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노래가 바뀌며 다니엘과 리젠의 몸이 더욱 더 밀착했다.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리젠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완벽히 박자를 맞췄다.
“리젠. 신기해.”
“뭐가요?”
“넌 왜 다 잘해?”
“그러는 왕자님은요?”
“아.”
“나는 아직 안 보여 줬고.”
“……그런가요?”
“그런데…….”
“네?”
다니엘과 이렇게 단둘이, 이렇게 밀착하여 이런 달콤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니엘 왕자님.”
“아, 그렇군요.”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테이블로 향했다. 다니엘은 지금 지지 기반이 모두 윌리엄에게서 온 것이라
많은 귀족들의 힘을 얻어야 했다. 이런 사교계 자리에서 많은 영애들과 접하는 것도 정치적인 행동 중
하나였다. 모두 이해하고 또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녀는 별로 마음 상할 것도 없이 원래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달콤한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으며 그녀는 지금쯤 카이든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언제 그런 은밀한 대화를 했냐는 듯, 호위 무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테스티는 인자한 표정으로
무도회 전반을 다시 응시하기 시작했다.
리젠은 혼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귀족들과 별다른 연결점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귀족이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다지 이런 곳에 올 정도로 권력이 있는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외국인들이나 한껏 꾸민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아셰는 다니엘을 단단히 유혹해 보라고 했으나 그녀는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몰라 그저 춤만
추고 와 버렸다. 아셰가 분명히 작은 농담에도 예쁘게 웃어 주고 자꾸 치켜세워 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조언들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춤도 못 추는 척하면서 질질 끌고 있으라고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약간 씁쓸한 마음에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순간 불길한 기운이 덮쳐 왔다.
“이런.”
그녀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재빨리 살짝 비껴서 일어났고, 그녀의 어깨에 보라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리젠은 그녀의 의자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액체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운동신경이 뛰어나 잽싸게
비켜서 그렇지, 정말 와인에 홀딱 젖을 뻔했다, 리젠은 어이가 없어 그 영애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왕립고등학교 학생일 때에도 이런 식의 괴롭힘은 찾아본 적도 없었다!
귀족이라면서 유치하기는.
“뭐, 그래서 이렇게 귀족들한테도 분수 모르고 까부나 보지. 야, 눈 희번덕거리지 마. 산하기관 직원들
신분 상승한 건 고작해야 100 년이야. 귀족의 역사는 2,000 년이 넘었고.”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귀족 영애들이 모여들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리젠은 이래서 약제국
직원들이 하나같이 무도회에 관심이 없었구나 싶었다. 왕국의 산하기관은 신분과 관계없이 우수한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었고, 실질적인 왕국 업무를 담당한다고 하여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한다고
법에 정해져 있었다. 정치는 귀족들이 하는 것이지만, 전문적으로 나라 굴러가는 일은 산하기관에서
주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일 뿐이고 여전히 귀족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듯했다.
“이 시건방진 계집애가…….”
“제가 바락바락 대들어서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어 드리거나, 눈물로 잘못했다고 호소하여 마음을 풀어
드리기엔 제 인생도 충분히 피곤해서요. 영애들께서는 내일 볕 좋은 정원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
얘기를 하셔도 시간이 남아도시겠지만, 저는 당장 오늘 밤에 이만큼 두꺼운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영애들이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에서 테이블로 흐르고 있는 와인 방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자리를
뜨는 와중에 은색 드레스의 영애만이 남아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와, 왕녀님.”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영애의 분함이 리젠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셰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주제에 안 맞게 첩년 짓 하는 건…….”
리젠은 그대로 굳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아셰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허둥지둥
닦기 시작했다.
“뮤엘튼 공작의 맏딸이야. 사실 귀족원 중에서는 권력이 가장 막강하고, 대표적인 윌리엄의 라인이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래도 저년이 정말로 왕비가 된다면…….”
“……아셰?”
진심으로 느껴지는 살기에 리젠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학생 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역시 왕족은 얼굴이 너무 많다. 사파엘이 왕족은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한 것이 조금씩 더 이해가 갔다.
가장 정치적인 위치이니 어쩔 수 없겠지. 왕족들이 산하기관을 존중하는 것도 결국 귀족들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리젠은 아셰가 자신을 왕비로 미는 것도 사실은 산하기관 출신의
왕비가 아메탄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잠시 다녀올게요.”
“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한스팀 왕국의 왕자에게 다가가는 아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리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이 끈적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있었지만 일단 음악 소리가 좀
작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며 그녀는 무도회장 중앙에서 몇 번째일지 모르는 여자와 춤을
추고 있는 다니엘을 보았다. 눈처럼 하얀 흰색 정장, 길쭉한 다리와 매끄러운 살결, 부드럽게 물결치는
금발 머리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었다.
손을 씻고 나서도 리젠은 쉽사리 연회가 한창인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생각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밤공기가 싸늘했지만 더 이상 달콤하고 인위적인 향기를 맡기 싫어서 그녀는 테라스에 나가기로 했다.
무심코 문을 연 첫 번째 테라스에서, 두 남녀가 엉켜 있다가 그녀를 향해 매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본 뒤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지 살피며 걸었다. 그래서 결국엔 가장 구석의 아무도
없는 테라스를 찾아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고모의 손에 컸지만, 그녀에 대해 충분히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생각을 했다. 르엘라가 죽었을
때 그녀는 18 세였다. 르엘라는 그때 리젠을 맡아 키웠는데, 리젠은 그 나이가 되어서도 르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가르침을 받기에만 급급했다. 당장 르엘라의 노트들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었는지 그동안은 짐작만 했을 뿐 전혀 몰랐다. 그녀는 문득 르엘라가 너무 낯선
여자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귀족가의 사교계에 그런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는 건지.
“하앗!”
‘칼!’
‘미안해, 아셰.’
그녀는 다시 달려드는 남자들을 피해 다리에 달라붙은 드레스를 지익, 하고 찢으며 아까 그녀가 들어왔던
문에 몸을 부딪쳤다.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밖에도 동료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급한 대로 한 남자를 걷어찼으나 역시 정제된 요원들인지 제대로 맞지 않았다.
“아악!”
얼굴에 기다란 상처가 난 그가 그녀의 목을 잡고 바닥으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녀는 상체가 제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을 차서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을 신고 있던 하이힐로 긁었다. 죽이려면 꽤나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녀를 제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붙잡힌 그녀가 버둥거리며 마력을 모으고 있는데
한 명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잡으며 눈짓했다.
“꺅!”
“이년이 진짜!”
“아아악!”
리젠은 칼끝이 그녀의 얼굴로 향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머리를
굴렸다. 이 모든 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그녀가 뭐라고 이런 훈련된 괴한까지
고용한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그녀가 이런 남자 둘을 이기기는 어렵다. 약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체력
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기가 생긴 그녀는 다가오는 괴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런 미친년!”
“억!”
“카이든?”
“누구의 사주지?”
“누가 시켰지?”
“카이든! 피!”
“언제부터 여기…….”
“무사해서 다행이다.”
“늦었어.”
“이 바보가 진짜…….”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아서 그녀는 숨을 캑캑댈 수밖에 없었다. 리젠은 그의 어깨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기대고 몸에 힘을 뺐다. 사실은 너무 놀랐다. 그녀는 살의를 가진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카이든도 놀라웠다.
“지방 출장 갔다며.”
“어떻게 알았어?”
“아…….”
“……그렇구나.”
“네 손에 직접 와인 들이붓는 것도 봤지.”
“야!”
“그러게.”
“그러게.”
“그래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내 눈엔 다 똑같아.”
“뭐?”
“그냥 다 똑같다고.”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 리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카이든이 그의 무게를 더 그녀에게 실으며
키득거렸다.
“교복을 입든, 실험복을 입든, 잠옷을 입든, 드레스를 입든, 내 눈엔 그게 그거니까 앞으로 이렇게 괜한
옷 입지 마라. 어깨가 다 드러나고, 이게 뭐냐?”
“……아니야?”
“피투성이 되어 옷은 넝마가 되고, 남들 몰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오랜만에 격투라는 것도 하는 그런
곳이네.”
“……어휴.”
“……그런 말 하지 마.”
그가 어리둥절한 리젠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젠의 심장이 순간 두근두근 뛰었다.
꿈이었다면 아마 키스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작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머리 위의 상처를 스윽 닦고 태연하게 말했다.
“놀라지 마.”
“더한 것도 있어?”
리젠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카이든은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당하고 방금은
하늘을 날아 놓고서도 쾌활하게 말을 잇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업혀.”
“……어?”
“음…… 미안한데.”
“어차피 집에 혼자 못 보내.”
“카이든.”
“왜?”
“저녁 먹었어?”
“맛있는 거 해 줄까?”
“아니. 너 요리 못하던데.”
“너 진짜…….”
“그리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그럼 너도 오지 마.”
“나는 괜찮고.”
“왜?”
리젠이 대충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을 동안 카이든은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는 그를 굳이 깨우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들로 건성건성 요리를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공격받을
만한 이유가 없다. 그들의 대화와 행동들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서 스튜를 끓이다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카이든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아예 자고 있었다.
그가 리젠의 집에 드나든 것은 몇 번 되지도 않는데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사실 그와는 학창 시절
내내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심지어 라이벌 관계라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겨 부정적으로 의식하면 의식했지
절대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연속하여 보기 시작하며 왠지 모르게 친밀해졌다. 그녀는 학교
동창들이 장난삼아 말하던 ‘몸정’ 같은 단어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꿈이어도…… 그게
그렇게 무섭다는데…… 그렇다면 이런 편안한 감정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고모처럼 그렇게 천재로 살 생각도 능력도 없었고, 그저 열심히 눈에 보이는 길만 힘차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 삶이었는데, 어쩌다가 누군가에게 시해 사주를 받을 만큼 인생이 이상해져 버렸을까. 그녀는
허브를 뚝뚝 따서 샐러드를 만들며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또 자 버렸네.”
“됐어.”
“딱히 좋은 꿈을 못 꿨거든.”
“와서 밥 먹어.”
“그러고 보니 넌 거기 왜 간 거야?”
“왜? 나는 가면 안 되냐?”
“왕녀님이 끌고 갔어.”
“……좋았겠네.”
“됐어.”
“음, 그 사건 말인데.”
“널 죽이면 왕궁 무도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셈이 돼. 문제가 커져. 수사국도 당연히 개입할 거고.
그렇지만 대체 그럼 죽이지도 않을 걸 널 왜 공격하겠어?”
“……뭐?”
“네 피를 어디에 쓰는데?”
“그러게.”
“일단…… 내가 그 사람들 얼굴을 하이힐로 다 찍어 뒀거든? 혹시나 왕비의 수족들 중 얼굴에 하이힐이
찍힌 상처가 생긴 사람들이 있다면 왕비가 배후라는 것이 확실해지겠지. 그건 수사국인 네가 알아서 해
봐.”
카이든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그것까지 예상하고 그들의 얼굴을 하이힐로
찍었다니.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리젠이 씩 웃었다.
“……바보같이.”
그가 한숨을 쉬었다.
“카이든.”
“어?”
“……흑마법.”
“게다가 한스팀 왕국에서나 좀 있었던 거지, 다른 나라에서는 제대로 연구도 안 됐어. 그것도 부족 간의
내전이 잦아 온갖 저주가 발달한 사막 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가 말을 뚝 그쳤다. 리젠은 그가 자신과 같은 곳까지 생각이 미쳤음을 알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속삭였다.
“……알아봐야겠군.”
카이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흑마법이 사라진 건 대륙에 마력이 점점 더 없어지며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흑마법은 거의 특정한 상대에 대한 저주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재료와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르엘라의 마력증폭약이 연루되어 있다는 가설이 유력한 지금,
흑마법이라고 개입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흑마법에 대해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대학에서도 전혀 배우지 않았던 과목인데…
… 책이라도 있나?”
“……뭐?”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지켜야지.”
“카이든.”
그녀가 새침하게 말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카이든이 이 집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기는 했다. 그녀도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습격을 당하고, 허벅지가 욱신거릴
만큼의 부상을 당했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은 무섭고 얼떨떨했다. 남의 앞에서 징징거리고
싶지 않아 그저 밝은 척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카이든이 스스로 같이 있어 준다고 하니 내심 마음이
놓였다.
“너 잠드는 것 보고 갈게.”
“그래. 얼른 잠들게.”
“……자?”
“아니.”
“무슨 일?”
“캐서린의 마법약 가게…… 뭔가 또 시작했어. 이상한 물건들이 들어오고 있어. 사람들도 급격히 많이
드나들어. 왕비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다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를 과하게 의식하느라 리젠은 몸도 쉽게 뒤척일 수 없었다. 엄청나게
피곤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소 외진 언덕에 위치한 그녀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안 카이든이 문득 말을 걸었다.
“야.”
“왜?”
“괜찮았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카이든의 목소리가 왠지 정말로 씁쓸해 보여서 리젠은 쉽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다소
버벅거리며 말문이 막힌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근데 왜 난 그게 안 될까.”
“무슨…… 소리야?”
리젠은 그의 손을 이끌어 그녀의 허리에 댔다. 춤 같은 건 안 배워도 자신 있다는 아까의 허세와는 다르게
그는 뭔가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곧잘 흉내를 내는 그를 보며 리젠이 키득대고 웃었다. 다니엘과 춤을
출 때에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음악도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 카이든과 엉망인 스텝을 함께 밟고
있으니 굉장히 유쾌했다.
“뭐…….”
“나쁘지는 않네.”
“웃기지 마.”
“흠…… 뭐, 하나 정도는.”
“하나?”
“카이든.”
“왜?”
“너 좋아하는 여자 있지?”
“……무슨 소리야?”
“나보다는 다 멍청해.”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앉아만 있는 행정국 갔지.”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이 없는 채로 자랐다. 열 살 때까지 아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쩔 수 없는 결핍은 받아들이라고 르엘라는 조언했다. 슬픔을 모두 보여 주면 더 슬픈 인생을
살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르엘라가 죽었을 때에도 그 누구에게도 징징대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니까.
“야.”
“왜 그래?”
“……어?”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감쌌다.
“이 길은 뭐야?”
“왕궁 지하엔 이런 미로가 엄청나게 많아. 대피로이기도 하고, 수족을 부리는 길이기도 하고. 왕궁 밑의
이런 길들은 각자 궁의 주인밖에 모르지. 아셰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이 길을 다니엘은 내게 직접
가르쳐 줬어.”
“아…….”
“내가 널 좀 아는데…….”
“넌 이거 다 기억 못 해.”
“이게 진짜!”
“틀려?”
“입구도 기억 안 나.”
“카이든, 왔구나.”
“아아, 리젠.”
“리젠까지 올 줄은 몰랐네.”
“이쪽으로, 레이디.”
“……무슨 소리야?”
“피? 대체 왜?”
“저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선택 과목이 마법이라 잘 알아요. 마력이 조금만 더 많으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불꽃을 일으킬 수 있겠죠. 제가 마법사라고 해도 마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하면
구미가 당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르엘라
하카트뿐이에요.”
“고모는 죽었으니 진실은 모르죠. 그러나 저도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해요.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일에 저희 고모의 광증과 죽음까지 연계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분명히 저희 고모가
개입된 사건이에요.”
“저주?”
“에이, 말도 안 돼.”
“농담이지?”
그가 빙긋 웃었다.
“아셰와 혼약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며 궁으로 부르면 되지. 살살 구슬려서 이것저것 물어보자고. 리젠,
그때 함께 있어 줄 수 있어? 내가 지한이라도 리젠 같은 미녀가 작정하고 웃으며 호기심을 보이면 모든 걸
다 말해 줄 것 같아.”
“맞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약제국 기록과 대조해 봤어요. 몇 군데 유통 경로를 거치긴 했지만 그 재료들이 모두 다
캐서린의 약 상점으로 들어갔더라고요. 분명히 그 약 상점에서 시약을 마실 마법사들을 모으고
마법증폭약을 판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또다시 캐서린이…… 그때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는 듯해요.
최근 각종 재료의 주문량이 급격히 늘었어요.”
“……그래?”
“……걱정해 주는 것 맞지?”
다니엘이 쿡쿡 웃었다.
새삼 그녀는 아셰와 다니엘에게 기시감이 들었다. 길만 해도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왕족이라는 존재가, 과연 그녀가 이해 가능한 인간이기는 할까? 사파엘이 왜 그렇게 경계를 시켰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다니엘에게 꾸벅 인사하고 아셰의 궁을 향해 혼자 나왔다.
“뭐가?”
“흠.”
“……그래?”
“그러게.”
“그다지.”
“춤도 안 췄을 거 아니야.”
“기분 좋은 꿈을 꿨거든.”
“뭐야, 그깟 꿈 가지고.”
“……그냥 계속 생각나네.”
“괜찮아! 뭘 그런 걸 신경 써?”
게다가 그녀를 미끼로 한스팀의 왕자를 부른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리젠은 다니엘이 아까 아셰와의 혼약을 얘기한다며 지한을 꾀어낸다 했을 때 아셰의 동의 없이
그렇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워낙에 왕족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랑조차 걸림돌로
여긴다는 걸 충분히 들어왔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아셰가 다니엘에게 실망할지
아니면 잘했다고, 당연한 일이라고 동의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셰는 다니엘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그게 윌리엄의 뜻이라며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다니엘이 여자한테 어쨌든 그런 신뢰를 보인다는 건…… 리젠, 오빠가 엄청나게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겠지만 사실 속은 엄청 의뭉스럽거든. 뭐, 왕족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런데 이런 비밀스러운 길을
알려 줬다는 건 네가 진짜 특별하다는 거야! 오히려 잘해 주고, 웃어 주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거라고.”
“왕녀님.”
“그런데 저…….”
“왜?”
“……정말 안 설레요.”
“……뭐?”
아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젠.”
“글쎄요……. 그런 건가…….”
“뭐?”
“르엘라가? 대체 왜?”
“안 돼.”
아셰가 이를 갈며 눈에 힘을 주었다. 리젠은 아셰가 종종 뿜어내는 강렬한 살기에 순간순간 놀라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생활을 함께 하고, 시험과 과제에 스트레스를 받던 급우가 맞을까? 이런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 다니엘 말대로 그녀에게만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리젠.”
“네?”
“우리 엄마는 힘없는 공국에서 온 외국인이고, 워낙에 심약한데다가 아바마마의 사랑도 못 받아서 거의
자신의 궁에서 감금되어 있다시피 하지. 나는 그게 감옥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어제도 무도회에
오지 못했잖아. 테스티가 무서워서. 엄마는 매일 울기만 했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모든 걸 두려워만
하며 살았어. 어쩔 수 없지. 힘이 되어 줄 그 무엇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처럼 자랐어.
엄마한테 보호받는다는 기분은 한 번도 못 느낀 것 같아. 아, 엄마가 나한테 절대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얘기는 많이 했다. 그건 마음에 새기고 있지.”
아셰가 처음 하는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동안은 거의 농담처럼 ‘우리 엄마는 왕궁의 꽃병이지.’ 정도로
웃어넘기곤 했기 때문이다.
“왕녀님.”
“리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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