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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4. 빈 정원

5. 웅크린 꽃망울

6. 다시 피어나는 백합(1)

4. 빈 정원

카시엘 디에드반은 구불구불 굽이치는 금발이 아름다운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자상하고 섬세했으며,
그만큼 심약하고 예민했다. 작은 새가 죽는 것도 마음 아파했다.

「사냥은 하지 말아요, 여보.」

카시엘의 아버지인 디에드반 공작은 공작부인의 말 한마디에 좋아하는 사냥을 끊었다. 자연스레 그가 즐겨
가던 사냥터 또한 출입이 뜸해졌다. 동생과 함께 사냥터에 자주 드나들었던 카시엘 또한 그곳에 잘 가지
않게 됐다.

카시엘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무뚝뚝하면서도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불쑥 찾아온 낯선 여자 두 명이 의아했다. 은색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와, 그 여자를 닮은
조그마한 여자아이. 어린 카시엘의 눈에도 그 둘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여자 두 명을 보고서는 숨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시엘 또한 그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정부가 있으리라고는 예상지 못했던 것이다.

낯선 이들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공작과 공작부인은 매일 같이 부딪히고 싸웠다. 어린 아들들에게 숨기기


위해 둘의 방에서 싸웠으나,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몰래 숨죽여
보았다.

「왜 굳이 우리 가문이어야 하는 건데요!」

「폐하께서 그리 명하셨습니다. 부인, 오해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전부 폐하의 명으로, 제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정말로 오해할 일 없는 것 맞아요? 정말? 설령 당신 말이 맞다 해도 그 여자가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공작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배가 조그맣게 솟아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자주 어머니의 배에 달라붙어 귀를
대곤 했다. 공작부인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녀의 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부인, 제발 화내지 말아요. 이곳에는 잠깐 머무르고, 곧 떠난다고 전해 들었으니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벌써 보름째 눌러앉아 있는데도요? 게다가 그 여자가 절 보는 눈빛이 어떤 줄 알아요? 마치 가소롭다는


듯…… 난 그 눈빛만 생각하면…….」

공작부인은 그 아름다운 여자가 저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공작부인은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그 여자와 똑같이 생긴 그 애는요.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또 나를…….」

심약한 공작부인은 제 남편과 하나도 닮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 볼 때마다 사로잡히는 악랄한 감정을


스스로 못 견뎌 했다.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 아이가 싫었다. 그게 그녀를
괴롭게 했다.

「다들 그 여자가 당신 정부인 줄 알잖아요! 그 애는 당신 딸인 줄 알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요!


폐하께선 왜 그런 명을 내린 건가요? 왜 그런 거짓을 퍼뜨려야 하죠? 왜?」

설령 남편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녀는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남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으나, 그녀는 한번 생긴 의심의 싹을 지우지 못했다.

마음이 약한 그녀는 한번 생긴 미움과 의심에 정신적으로 점차 쇠약해졌다. 저 여자가 다른 이들의 말대로


정말 정부라면? 남편이 폐하를 들먹이며 변명한 거라면? 설령 그의 말이 맞는다 해도, 나중에 언젠가 또
정부랍시고 다른 여자를 데려온다면? 그런 생각들이 연달아 떠올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타고나기를 귀족으로 태어나 고귀하게 자랐다. 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기는 죽어도
싫었다. 그녀의 신경쇠약은 나날이 심해졌다.

「내 눈에 안 보이게 가두라고요!」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공작은 낯선 여자 두 명을 별관에 가뒀다.

호기심이 많은 페르닌드는 틈만 나면 카시엘에게 그 조그마한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형, 그 여자애 또 보고 싶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페르닌드.」

「보고 싶단 말이야. 저기 별관에 있다며. 가보자, 응?」

「어머니께서 싫어하실 거야.」

「몰래 보고 오면 되잖아.」

「안 돼.」

카시엘이 단호하게 말하자 페르닌드의 얼굴에 심통이 올랐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갈 거야.」

페르닌드는 카시엘보다 세 살 어렸다. 동생의 치기 어린 행동에 카시엘은 한숨을 쉬며 보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잠깐이야.」

「응!」

슬픈 어머니의 얼굴이 카시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카시엘은 이내 재빨리 지우고 동생과 손을 잡은


채로 유모와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그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그 여자아이는 혼자 밖에 나와 있었다. 심심한 듯 발로 땅을 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마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은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찰랑였다.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그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형, 나 쟤한테 말 걸러 갈래.」

「안 돼.」

「왜? 남매잖아. 유모가 그랬어. 쟤가 내 누나래.」

「…….」

카시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페르닌드는 입을 다문 형에게 연신 속닥거렸다.

「여동생을 갖고 싶었지만 누나도 좋아. 같이 놀자고 하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할 거야.」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카시엘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또한 저 어린 여자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다만 어머니가 슬프게 울던 얼굴 때문에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있자, 페르닌드가 대답을 듣지 않고 쏜살같이 그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카시엘은 튀어나가는 동생을 막지 못했다.

다가간 페르닌드와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무어라 대화를 했다. 카시엘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도 저 아이와 대화하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도 궁금했다. 하지만 다가갈 순
없었다. 그는 그저 멀리서 그들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페르닌드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 애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 애 또한


페르닌드가 웃는 대로 따라 웃었다. 웃는 그 애의 얼굴을 보자 카시엘의 심장이 이상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술렁임은 그들이 대화를 마치고, 페르닌드가 웃으며 다가왔을 때 끝이 났다.

「형! 이름이 이네트고, 나이는 6 살이래! 나보다 한 살 많아!」

그 애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찰나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 그는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유모였다.

유모는 서슬 퍼런 눈동자로 카시엘과 페르닌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련님들, 이곳에는 왜 오신 겁니까?」

유모의 차가운 물음에 페르닌드가 익,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자
페르닌드는 제 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대신 말하기를 종용했다. 카시엘은 그런 페르닌드를 한번
차갑게 노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저 애 때문에 힘들어하잖아.」

「……도련님들께서 신경 쓸 부분이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두세요.」

유모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땅을 노려보던 페르닌드가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유모가 그랬잖아! 쟤가 내 누이라며!」

「그 뒤에 제가 한 말은 잊으셨나요? 더러운 사생아이니 어울리면 안 된다고 덧붙였지요.」

「그렇지만…….」

어린 페르닌드는 사생아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 형제라니 좋았고, 예쁘고


조그마하니 시선이 절로 갔다. 예쁜 여동생을 곧잘 갖고 싶다고 어머니께 졸랐으므로, 그저 여자 형제라
가까이 다가가고 싶을 뿐이었다.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유모가 앞장서는 대로 그 뒤를 따라갔다. 뒤따른 길의 끝은 어머니의 곁이었다.

「카시엘, 페르닌드.」

눈에 띄게 얼굴이 상한 공작부인이 조용히 아들 둘의 이름을 읊조렸다.

「어딜 갔다 왔니?」

「……저, 정원에서 놀다 왔어요.」

페르닌드가 거짓을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창백하게 질린 공작부인의 얼굴에 대번 노기가 서렸다.

「거짓말하지 마. 별관에 갔다 왔잖아.」

얼굴이 붉게 변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페르닌드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악!」

난생처음 맞은 손찌검에 페르닌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맞은 뺨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며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왜…….」

「들었을 것 아냐! 더러운 사생아라고! 마주치면 안 된다고! 왜 어미 말을 안 들어! 왜 너희마저 나를


힘들게 해!」

장작처럼 말라버린 공작부인의 손이 연신 페르닌드의 몸을 때렸다. 악악,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페르닌드는 폭력이 멈추지 않자 이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쏟아지는 손길을 감내했다.
꾹 감긴 눈에서 사탕 같은 눈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그 옆에서 카시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동생이 어머니께 연신 맞고 있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5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은 정부가 무엇인지, 사생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여자 형제라기에 좋다고 다가간 것뿐이었다. 그렇게 옹호해야 했지만, 어머니의 필사적인 얼굴과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는 유모의 차가운 시선에 카시엘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말뚝처럼 서
있었다. 환영처럼 아까 보았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어른거렸다.
* * *

디에드반 공작부인은 아이를 밴 지 6 개월 만에 산고에 시달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삐쩍 마른 그녀는 결국 이르게 찾아온 출산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다했다. 아이 또한 죽은 채 나왔다.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허옇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카시엘은 죽음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기만 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와 책에서 본 것을 통해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잠잠했다.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았다.

요 몇 개월 동안 어머니는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울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슬픈 얼굴로 카시엘과


페르닌드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비명처럼 그 애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어머니의 얼굴은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창백했다. 다시 벌떡 일어나 울 것 같았다.

굳어 있는 카시엘의 손을 페르닌드가 가볍게 쥐었다.

「형, 어머니 죽은 거야?」

「그래.」

페르닌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며칠 뒤, 공작부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그녀의 친정에서 디에드반 공작저에 관을 묻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요구했기에, 그녀의 시체가 담긴 관은 마차에 실렸다. 공작저의 사람들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치들은 왜 왔대요?」

그리고 낯선 여자와 조그마한 여자아이, 이네트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낯짝도 두껍지. 공작부인이 왜 돌아가셨는데.」

그들은 혐오스러운 눈길로 둘을 흘겨보았다. 이네트는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만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번들거렸다. 슬퍼하는 걸까? 카시엘은 멀찍이서 그 애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다 물기 어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어머니의


관을 태운 마차가 떠나는 데도, 그 애가 그것을 바라본다고 고개를 돌려도, 그는 그 애에게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 * *
공작부인이 죽고 저택에는 스산한 한기가 감돌았다. 장례식 때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 그 여자는
들이닥쳤을 때처럼 갑작스레 저택을 떠났다. 공작은 여자가 떠나는데도 마중은커녕 창밖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지도 않았다.

「폐하께서 그리 명하셨습니다. 부인, 오해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전부 폐하의 명으로, 제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카시엘은 그리 말하던 아버지의 애원 섞인 음성을 떠올렸다. 차갑게 돌아선 아버지 대신, 카시엘이
떠나는 마차를 창을 통해 멀리서 바라보았다. 더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그 여자도, 그 여자의 딸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이제 그 애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심장이 요동쳤다.

카시엘은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여자 미친 게 틀림없어! 딸을 두고 갔대!」

「뭐? 그 어린애를 두고 갔다고?」

「그렇다니까!」

카시엘이 벽 뒤에 숨어 떠드는 두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작게 소근대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 여자와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 계속 그 별관에 있는 거야?」

「그래! 다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어. 정말 미친 여자 아니야? 이런 곳에


딸을 두고 가다니!」

카시엘은 요동치던 심장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 애는 떠나지 않은 것이다.

「그 여자는 이곳에서 일한 게 맞긴 해? 예전에 한 번도 그 여자를 본 사람이 없다던데.」

「공작님의 침실 시중이나 들어주던 여자였겠지.」

「하긴…… 하녀장님께서 아무 말 없는 걸 봐선.」

그 여자의 파렴치한에 대해서 오래도록 험담하던 두 사용인은 점점 하녀장과 그 외의 일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카시엘은 흥미를 잃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식사시간이 되자 카시엘은 공작부인이 없는 식탁에서 동생 페르닌드와 아버지 디에드반 공작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낯으로 식사를 하던 공작부인은 없었다.

페르닌드는 비어 있는 자리를 보고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옆에 앉은


카시엘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제 없어?」

「없어.」

「못 봐?」
「그래.」

「왜?」

5 살인 페르닌드는 공작부인의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고 얌전했다. 그건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형제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공작이 거칠게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도 그는 등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시엘은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도 없이 훌쩍 식당을 떠나는 걸 바라보았다. 페르닌드는 여전히


침울한 얼굴이었다.

「형, 다들 어머니가 죽었대. 죽으면 못 보는 거야?」

「그래.」

「죽으면 어디에 가?」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왜 갔어? 페르닌드가 싫어서?」

「아니.」

카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죽은 건 그 여자 때문이었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는 울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카시엘은 어머니가 죽기 직전까지 지금이라도 제발 진실을 말해달라고 비명을 지르던
목소리를 방문 너머로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떠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카시엘은 어머니가 그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치를 떨며 싫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
여자는 어머니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보며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치곤 했다. 그에 어머니는 더욱
괴로워하고 의심했다. 정말로, 제 남편의 정부가 아닌가 하여. 실은 그 여자가 정말로 제 남편의 정부라
기세등등한 것인가 하여. 속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워 비웃는 것인가 하여.

여자가 오기 전에도 임신 때문에 다소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있었던 공작부인은, 여자가 온 이후 그것이


정점에 달했다. 무던한 카시엘조차 어머니인 공작부인을 대하는 것을 버거워할 정도였다.

어머니가 변한 것은 그 여자 때문이다. 이제 어머니는 없다.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카시엘조차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뒤늦게 밀려오는 상실감과 허무함,
분노에 그가 몸을 떨었다. 이제 어머니는 없다. 다시는 보지 못한다. 그 여자 때문에.

차라리 떠날 거면 진즉에 떠나지, 어머니가 죽고 나서 떠난 여자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뒤늦은


분노로 몸을 떠는 카시엘 옆에서 페르닌드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보고 싶어.」

「…….」

「보고 싶어…….」

카시엘은 차마 울 수 없었다. 울어서는 안 됐다. 대신 우는 동생 옆에서 그저 자리를 지켰다. 동생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 * *

카시엘 디에드반은 대부분 방 안에서 지냈다. 매일 오는 과외 선생에게 수업을 받고, 비는 시간에는


공부를 했다. 그런 카시엘과 달리 페르닌드는 밖에서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허공에다 휘두르며 놀기를 좋아했다. 페르닌드가 놀자고 졸라도 카시엘은 거절하고 방 안에서 책을 읽었다.

공작부인이 죽고 난 이후로 한동안 침울했던 페르닌드는 그 우울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서
쏘다니길 원했다.

「형, 나 나갔다가 그 여자애 봤어.」

나갔다 온 동생의 목소리에 책의 페이지를 넘기던 카시엘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디서?」

「저택 앞에서. 여기 오고 싶은지 계속 기웃거리고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같이 놀자고 했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페르닌드의 얼굴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카시엘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그 애의 어미 때문이라는 것을 5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이 이해할까? 그는 입을 다물기로
선택했다.

「같이 돌로 그림 그리고 놀았어. 나뭇가지로 칼싸움도 했어.」

그렇게 말하는 페르닌드는 근래 들어 가장 들뜬 목소리였다.

「내가 누나라고 부르니까 깜짝 놀라더라. 동생이 있을 줄 몰랐대.」

「…….」

책을 덮는 카시엘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 애와 가까이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또한 그 애와 가까이하고 싶었다. 그 애의 어미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형도 같이 나가서 놀자. 매일 별관 안에만 있어서 심심하대.」

「…….」

「형 안 가면 나 먼저 간다?」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몸짓에 의자에 앉아있던 카시엘이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

이러면 안 돼, 안 되는데……. 이성이 그를 뜯어말렸으나, 그는 이미 페르닌드와 함께 그 애가 있을 저택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 밖에는 밖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빠져나온
도련님 둘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그들을 한 번 흘깃 보고서는,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형.」

페르닌드가 카시엘의 옷깃을 거머쥐더니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저택 뒤편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

페르닌드의 말대로 저택 뒤편에 조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혹여나 누가 보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빤히 보였다. 페르닌드는 저택 뒤편에 있는 이네트에게 저택 근처의 나무가 무성한
수풀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이네트가 살금살금 엎드린 채로 조용히 수풀 쪽으로
움직였다.

「형, 가자.」

페르닌드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수풀 쪽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몸이 조그마해서 수풀에 충분히 몸이


가려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리고는 페르닌드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카시엘이 그 뒤를 뒤쫓자, 너른 평지와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네트가 보였다.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이토록 가까이서 다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멀리서 본 것보다 눈 색이 조금 더 푸르고 빛을 머금은 채


아롱거렸다. 그가 가만히 서 있자 페르닌드가 이네트에게 먼저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많이 안 기다렸어.」

서로 반말을 하며 살갑게 구는 것이 퍽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카시엘이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자 페르닌드가 제 형을 향해 손짓했다.

「형, 뭐 해? 이리 와서 같이 놀자.」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나뭇가지를 들고 싸우는데도, 무어라 둘이서 대화하는데도 카시엘은


말뚝처럼 우뚝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저 애와 가까이해서는 안 돼.

그의 이성이 말했다. 머릿속에선 생전의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싫어하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말라비틀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던 높다란 목소리. 잊어서는 안 됐다. 그러니 저 애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도…….

페르닌드와 나뭇가지를 두고 싸우던 이네트가 제 나뭇가지가 부러지자 소리 내어 꺄르르 웃었다. 청량한


웃음소리에 멍하니 둘을 바라보던 카시엘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흠칫했다.

분명히 어깨까지 닿았던 머리가 이제는 어깨를 넘어서 쇄골 밑에 와 있었다. 우울해 보이던 얼굴도 전보다
훨씬 생기 있었다. 웃는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카시엘이 퍼뜩 놀라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간질거리는
가슴에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들었을 때에는 그 애의 얼굴에 스민 웃음기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페르닌드와 이네트가 오래도록 노는 동안, 카시엘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페르닌드는 이네트와 노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제는 매일 같이 몰래 아지트로 튀어 나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네트와 함께 놀았다. 카시엘은 그런 페르닌드에게 적당히 하라며 만류하는 척하면서도
그들 뒤에 서서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형은 왜 같이 안 놀아?」

페르닌드의 물음에 카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균열은 서서히 일어났다.

시초는 이네트의 웃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카시엘은 페르닌드에게 곧잘 보이는 이네트의 웃음이


싫어졌다. 저와 눈이 마주칠 때는 놀란 듯 얼굴을 굳히면서도, 페르닌드와 얘기를 나눌 땐 슬며시 짓는
그 미소가 싫었다.

어머니가 죽은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카시엘은 그 애에게 다가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다가가지 못해 망설이는 저 대신 그 애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친하게 지내는 페르닌드가 미워진 것은
그조차 알지 못하는 어느 무렵부터였다.

어머니가 왜 죽었는지 알아? 하루에도 수십 번, 공부하기 싫다며 딴청을 부리는 페르닌드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싶었다. 정부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저 애의 어미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하나 말하지 않고 묻어둔 것은, 그로 인해 일어날 일들을 구태여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형, 나 공부하기 싫어. 검술 선생님만 오라고 하면 안 돼?」

페르닌드는 아버지 대신 형에게 조르며 공부하기 싫다고 노래를 불렀다. 공부 대신 검술 선생에게 검술


수업을 받고 싶었고, 수업에서 배운 걸 이네트에게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최근 들어 페르닌드는
이네트에게 검을 가르쳐주느라 바빴다.

「이넷이랑 노는 거 재밌어.」

처음에는 누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이넷이라는 애칭까지 붙일 정도로 긴밀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이넷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의 가슴이 쿵, 둔한 충격으로 울렸다.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페르닌드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이네트에 대해 얘기해댔다.

「이넷은 그래도 나보다 누나라고 어른인 척 굴어. 안아줄 때마다 좋아. 여동생보다는 누나가 더 좋은 것
같아.」

쿵, 쿵, 쿵. 카시엘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그는 이상하게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턱에 힘을 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페르닌드. 이제 그 애와 만나는 건 그만둬.」


「그 애? 이넷?」

그는 망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아버지께서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안 그래도 사용인들이 눈치챈 듯 보였다. 이미 아버지에게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만나봤자 좋을 게 없었다.

「왜? 누이잖아.」

페르닌드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네트와 가까이


지냈다. 카시엘은 기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뒤틀린 속내를 감추고 무표정하게 페르닌드의
팔을 잡아챘다.

「그 애와 더는 만나지 마.」

「왜? 싫어! 이넷 좋단 말이야!」

이넷이라는 애칭에 뒤틀린 기분에 더욱 균열이 갔다.

「이넷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만둬!」

답지 않게 카시엘이 소리를 높이자 페르닌드가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 형이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형…….」

「이제 그 애와 만나지 마.」

그의 말에 페르닌드가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조그맣게


「왜?」하고 물었다. 카시엘은 여전히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동생에게 천천히 일렀다.

「그 애의 어미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으니까.」

「왜?」

「페르닌드, 모두가 그렇게 떠들었던 걸 들었을 거 아냐. 이네트의 어미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유모가 그랬어. 근데 왜? 직접 죽인 거야?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 죽었잖아.」

「그 여자가 어머니를 그렇게 죽게 만든 거야. 서서히.」

페르닌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될 것이었다.


카시엘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페르닌드, 그 애의 어미는 더러운 창녀야. 그 애는 창녀의 딸이고.」

「창녀?」

고개를 갸웃거리던 페르닌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어린 페르닌드여도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았다.

「그래. 그러니 그 애와 친해져서는 안 돼.」


페르닌드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눈길로 형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나면 안 돼. 카시엘은
고개 숙인 동생에게 그렇게 또 강조했다.

어머니를 위한 거야. 그렇게 합리화하며.

* * *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아지트에 오던 페르닌드와 카시엘이 오지 않자 이네트는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슬슬 올 시간인데 왜 안 오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녀는 혹시 모를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며 조그마한 몸으로 수풀 안까지 샅샅이 뒤지고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넷! 하며 달려오는
저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는 페르닌드가 온 줄 알고 활짝 웃으며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뛰어갔다.

「페르닌드!」

그렇게 이름을 부르며 마주한 인영을 바라본 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페르닌드가
아니었다. 이복오라비인 카시엘이었다.

「어…….」

이네트가 당황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는 이복오라비인 카시엘이 불편했다. 페르닌드처럼 먼저


다가오지도 않았고, 매일 멀찍이서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기만 하는 그가 불편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시선을 느낄 때면 가끔씩 뒷목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페르닌드를 기다렸어?」

그의 물음에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닌드는 이제 여기 안 와.」

「왜, 왜요?」

이네트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카시엘의 외모는 공작과 흡사하여 쉽게 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갈팡질팡했다.

「페르닌드는 수업을 듣느라 바쁘거든.」

「그럼 이제 여기 나올 필요 없는 거예요……?」

「그래.」

하루 만에 페르닌드를 볼 수 없다는 통보를 들었다. 오랜 시간은 아니어도 페르닌드와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정이 든 이네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라도 볼 수 없는 건가요?」

「글쎄.」

그는 확답하지 않았다. 대신 뜸을 들이다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에게 잘 부탁해보든가. 그러면 별관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을지 모르지.」

「그, 그렇지만 공작님께서는 별관에 아예 오지 않으시는데…….」

이네트가 긴장한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카시엘은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이네트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올 시간에 맞춰서 부탁하면 되잖아.」

「그, 그래도 돼요?」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

시선을 어느 곳에도 두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던 이네트가 고개를 살짝 들어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왜


매일매일 뒤에서 지켜보다가 오늘은 갑자기 다가와서 말을 건 걸까? 오라비와 말을 나눈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그릇된 속내로 그리 제게 말했을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고마워요, 카, 카시엘.」

그리고 어색하게나마 제 오라비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네트가 부른 제 이름에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등을 돌려 아지트를 벗어났다.

그녀는 이 외로운 저택에서 믿을 만한 형제가 생긴 것 같다 생각하며 뿌듯하게 웃었다. 물론 그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 * *

이네트는 그 뒤로 공작은커녕 카시엘과 페르닌드와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녀와 형제들의 만남을 눈치챈
사용인이 그 사실을 공작에게 일렀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이네트가 아무리 저택 근처에서 그를 기다려도
만나주지 않았다.

참다못한 그녀가 공작의 뒤에 따라붙어 매달려도 공작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공작의 방
안까지 쫓아오든, 무릎 꿇고 빌든, 그는 그녀를 철저히 무시했다. 하녀장과 사용인들 모두 처절하게 비는
이네트를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했다. 공작이 그녀에게 흥미를 잃으면서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녀는 본관에 발 한 짝도 들일 수 없게 됐다.

공작은 이네트를 아는 사용인들을 모두 해고하고, 그녀를 별관에 아예 가둬버렸다. 그녀는 별관에


감금되다시피 지냈다. 저택 근처에도 갈 수 없었고, 그저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네트는 카시엘과 페르닌드와 우연으로라도 마주치지 못했다. 철저히 그들은 분리된 채 생활했다. 마치
누군가 그렇게 의도한 것처럼.

마침내 카시엘과 페르닌드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16 살, 카시엘 디에드반이 열여덟이 되어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부터였다. 그녀는 그때가 돼서야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별관에서 벗어나 드디어 본관으로 온 그녀와 마주친 카시엘은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훑어보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벌레 같은 것. 여태까지 살아있었구나.」

믿었던 동생, 페르닌드가 그렇게 얘기했을 때……. 그리고 그 옆에 서 카시엘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을 때, 그녀는 이 저택에 제 편이라고는 로잔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비참하리만치 확실하게
깨달았다.

희미하기만 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사로잡힌 제가 바보였음을, 그들에게는 그저 한순간의 기억이었음을.


그들이 혐오스럽다는 듯 흘겨보는 눈동자로 철저히 느껴야만 했다.

이네트는 본관으로 온 첫날부터 이 저택과 관련된 모든 기대와 미련을 모두 버렸다. 얄팍하게나마 희망을
걸었던 남매에 대한 애정마저 모두.

* * *

결국 또 잡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네트는 분노를 토해낼 기력조차 지금 없었다. 그저 허탈하면서도 어딘가 덤덤하기까지 했다. 별다른
결단이나 굳은 다짐 같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따금 벨라가 도와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그녀의 친아비와 친어미는 제게 지대한 관심 따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그녀를 도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희박한 가능성에 불과했다.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나는 도움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만 새었다.

이네트가 오로지 희망을 갖는 것은 그들이 경계심을 풀 때까지 최대한 숨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녀가 도망칠까 가시를 잔뜩 세우고 그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심이 허물어질
때까지 그들에게 녹아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도망칠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저택 내부는 맘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던 페르닌드의 웃음기 섞인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이대로 미치기 전에 발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아무리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했다 하나, 그마저도 사용인 몇몇이 뒤에 바짝 따라붙어


허튼짓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손 한쪽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따라붙었다.
도망치지는 않을까 호시탐탐 감시하는 눈길이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네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저를 못 잡아 안달이란 말인가? 왜 굳이 나를?

이네트는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1 층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뒤에 따라붙은


사용인 두 명에게 흘긋 눈짓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허튼짓 하려는 거 아냐. 승마를 하고 싶어서 그래.”

“안 됩니다.”

두 사용인은 마치 답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이네트는 미련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저택 안을 몇 바퀴 돌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진절머리 나는 저택 산책이었다. 어린 시절,


별관에 갇혀 있을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본관에 들어가지만 못할 뿐, 바깥공기라도
맡을 수 있었으니 지금보다는 나았다.

방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자 카시엘이 돌아왔다. 옆에는 페르닌드도 함께 있었다. 이네트는 그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이넷.”

페르닌드가 덥썩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가 놀라 상체를 허물어트리자 그가 자연스레 그녀의 몸을


침대에 눕혔다. 졸지에 침대에 누운 채 페르닌드와 껴안은 자세가 됐다. 이네트는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미친놈. 이네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페르닌드는 이네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그녀의 머리카락과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시엘이 입을 열었다.

“승마를 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

이네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새 카시엘에게 그대로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승마를 할 줄 알게 된 거지?”

이네트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페르닌드가 그녀를 품에서 떼어냈다. 이네트는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페르닌드의 눈길에 못 이겨 눈을 위로 치떴다. 새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페르닌드 또한
답을 묻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았다고 또 옷을 벗기고 들지도 몰랐다. 이곳에 온 뒤로 아직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지만, 혹시 몰랐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녀의 몸을 유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워 결국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요.”

“그놈한테서 배운 건가?”

서늘한 목소리였다. 이네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 혼자 배웠어요. 에일은 같이 타주기만 하고…….”

에일이라는 이름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아차, 했다. 불길한 예감대로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제 실수에 입술을 사려 물고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때까지 그녀는 에일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백작가의 막내이니 함부로 죽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니, 아니다. 이네트는 이전에 카시엘이 저와 결혼하기로 했던 늙은 백작을 죽인 것을 떠올렸다. 그는
충분히 누군가를 죽일 수 있었다. 그 신분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설마, 에일을 죽였을까……?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그녀는 애써 부정하며 떨림을 멈추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에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고는 했다. 이곳에서 아무리 고민해봤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낸 이후로 애써 에일의 생각을 지우려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일은 잊고자
한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승마는 안 돼.”

페르닌드가 이네트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당연히 허락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피어올랐다. 승마조차 하지 못하게 하면 이곳에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저택 내부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녀가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 하루 종일 저택만 돌아다니라는 거야? 영지라도 돌아다니게 해주든가!”

이네트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페르닌드가 고민하듯 으음,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놓칠세라 페르닌드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도망치지 않을게. 부탁이야. 저택 밖이라도 돌아다니게 해줘. 이곳에 갇혀 지내다간 미쳐버릴지도 몰라.
응?”

이네트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애원하자 페르닌드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몄다. 그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부탁하는 모습이 예쁘긴 하지만, 안 돼.”

“뭐?”

“이넷, 너는 전적이 있잖아. 못 믿어.”

“왜? 도망치지 않겠다고 하잖아!”

“그래놓고 도망치면? 안 돼.”

페르닌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반항하는 그녀를 꽉 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뺨은 품 안에서 몸을 뒤트는 그녀와 달리 부드러웠다. 페르닌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그녀의 냄새와 그녀의 품이 그리웠다.

“없는 동안 미치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페르닌드의 입술이 이네트의 얼굴 곳곳에 닿았다. 이네트는 발버둥이라도 쳐서 품에서 빠져나올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이제 그런 의욕마저 사라졌다. 대신 품 안에서 고개를 틀어 가만히 서 있는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저런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줄곧 쳐다보기만 했다. 페르닌드와 제가 어렸을


적 친하게 지낼 때도, 지하실에 갇혔을 때도 내내. 늘 저런 표정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녀는 저 속내를 알 수 없는 오라비가 무슨 생각으로 제게 이러는 것인지


궁금했다. 페르닌드는 그보다는 비교적 속내가 드러나는 편이었다. 어린애처럼 치기 어린 애정을
갈구하며 들러붙었으니까. 그녀는 페르닌드가 단순히 제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여겼으나, 카시엘에게서는
그런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녀는 목덜미 깊숙한 곳에 입을 맞추는 페르닌드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반쯤 감았다.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입술을 문지르는 페르닌드의 움직임이 좀 더 농염해졌다. 입술로 목덜미를 세게 빨아들이는
느낌에 이네트가 저도 모르게 앗, 짧게 비명을 질렀다.

마주하고 있는 금색 눈동자가 순간 일렁였다.

“……페르닌드.”

카시엘이 페르닌드의 이름을 불렀다. 페르닌드는 이네트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왜?”

대답하면서 뱉어진 숨이 이네트의 목덜미를 뜨겁게 덥혔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그녀는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카시엘과 페르닌드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등에서 머무르던 페르닌드의 손이 점차 가슴 쪽으로 슬금슬금 향했다. 가슴 밑을 스치듯 만지던 손이


어느새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세지 않게 주물렀다. 이네트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이넷, 참지 마.”

페르닌드가 눈을 감은 이네트의 눈가 위에 입맞춤을 흩뿌리며 말했다. 그는 어느새 이네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자리 잡은 뒤였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며 제 몸 위를 뒤덮은 페르닌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페르닌드를 사랑스럽다고 여긴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한 예전만 해도, 그녀는 페르닌드를
귀여운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왜…….

이네트는 버석 마른 눈을 깜빡거리며 다리를 벌렸다. 이미 그들과의 정사는 익숙했다. 페르닌드는


익숙하게 그녀의 몸을 애무하며 옷을 위로 들춰 올렸다. 하얀 가슴이 드러나자 그는 그곳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녀의 다리 사이를 허벅지로 은근하게 문질렀다. 이미 정사에 길든 그녀의 몸은 그저 가슴을
빨고 허벅지를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젖었어.”

페르닌드가 가슴을 주무르며 아래의 젖은 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질구 근처를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올 듯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위아래로 애무가 이어지자 그녀는 제 몸을 희롱하는 이가 페르닌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가 타 견딜


수가 없었다. 숱하게 반복된 행위로 인해 몸은 곧 있을 삽입을 미리 알고서 안을 촉촉하게 적시고 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녀는 제 안이 벌름대는 것을 스스로 느끼며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페르닌드는 붉어진 이네트의 얼굴에 짧게 입맞춤 한 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래를 핥는
습한 느낌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하으응!”

그녀의 반응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붉은 속살을 헤치고 동그랗게 솟은 정점을 꾹
눌렀다. 그녀가 꺅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뺐다.

“움직이면 안 돼, 이넷.”
페르닌드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녀의 골반을 꽉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게걸스럽게 정점을 핥고 혀로
문질러댔다. 벌어진 그녀의 다리가 잘게 흔들리며 발가락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흐윽, 하앙! 아읏!”

눈앞에서 불이 번쩍거리는 듯했다. 쾌락의 극치가 연이어 이어지자 그녀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지르며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페르닌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시엘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흣, 페르, 닌드, 잠시…….”

이네트가 페르닌드의 이름을 부르며 바르작거리자 가만히 우뚝 서 있던 카시엘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으응, 아! 앗!”

절정에 임박한 이네트가 연신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흰 목덜미가 아찔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래에서 울컥, 액이 토해지는 걸 느끼며 절정에 다다랐다. 페르닌드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액을
핥아 먹는 걸로도 모자라 꿀꺽 삼켰다. 고개를 든 그의 입가가 액으로 미끈하게 젖어있었다.

이네트가 젖은 페르닌드의 입술을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다가와 이네트에게 깃털 같은 입맞춤을 했다.


쪽, 쪽, 몇 번 닿았다가 떨어지더니, 이내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이네트는 저항 없이 입술을 열었다. 입술을 다물어봤자 어떻게든 혀를 쑤셔 넣을 게 뻔했으니까.


페르닌드는 그러고도 남았다. 혀를 섞는 와중에 눈을 뜨자, 그녀는 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금색
눈동자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그저 지켜볼 생각인 건가? 그녀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 뒤에서 쳐올리는 감각에 눈을 감아버렸다.

페르닌드와 한바탕 정사를 다 치르고 난 뒤에도 카시엘은 그녀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다만 힘이 빠져


기진맥진한 그녀를 흘긋 내려다보더니 방 밖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이네트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신경 쓰기 싫었다. 눈을 감으니 빤히


저를 바라보는 페르닌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것도 신경 쓰기 싫어 이네트는 아예 몸에서 힘을 뺐다.
자고 싶었다.

* * *

눈을 떴을 땐, 곁엔 아무도 없었다. 이네트는 시트를 걷어내고 몸을 확인했다. 그들이 닦아주었는지


찝찝함은 없었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복도가 보이는 동시에 문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와 사용인 두 명이 보였다.

정말이지 철저하기 짝이 없었다. 문 앞에 기사와 사용인을 붙여두다니. 그녀는 그들에게 흘긋 시선을 준


후 복도를 쭉 걸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사용인 두 명이 이네트 뒤를 따랐다.
“공작님께서 저택 밖으로 나가시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순간, 앞서 걷던 이네트의 걸음이 멈췄다.

“뭐?”

“영지 내를 돌아다니는 건 괜찮다고 하십니다.”

카시엘이? 그녀는 믿기지 않아 고개 숙인 사용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번복하지 않는 걸로 보아


사실인 듯했다.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카시엘은 페르닌드보다 유한 면이 있었다. 이전에도 그녀가 애원하면 못 이긴 척


들어주고는 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것일까? 이네트는 도무지 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만약에 기회를 잡아야 한다면 페르닌드보다 카시엘 쪽을 붙잡는 게 좀 더 유리했다. 이네트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허점을 노려 또 탈출할 수 있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네트는
간만에 미소 지으며 저택 바깥을 거닐었다. 첫날부터 너무 멀리 나가면 의심할 것이니 일부러 저택
근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따금 당장이라도 마구간에 쳐들어가 말을 타고 싶었지만 꿋꿋이 참았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었다.

그렇게 내내 저택 근처를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쉬기 위해 저택에 몸을 기대고 있자, 멀리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마차의 고급진 외관으로 보아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예상대로 저택 근처에 선 마차에서 그들이 내렸다.

“뭐야?”

페르닌드가 나오자마자 이네트에게 불쑥 다가가 팔을 잡아챘다.

“이넷, 네가 왜 밖에 나와 있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사나웠다. 그녀는 잠시 페르닌드가 꽉 쥔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가 뒤에 선


카시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형에게 물어봐.”

“……형이 허락했어?”

페르닌드의 시선이 이네트에게서 카시엘로 옮겨졌다. 카시엘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그 말에 페르닌드가 쳇, 혀를 차고는 이네트의 팔을 쥔 채 앞으로 이끌었다. 그가 쥔 팔목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 말 않고 그들 뒤를 따랐다.

이네트가 지내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페르닌드가 쥐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놓고 소리를 높였다.

“형, 왜 허락한 거야? 저번에는 내 실수로 일을 그르친 거지만, 이제는? 괜히 허튼 짓하지 말기로
했잖아! 또 병신처럼 놓치려고?”
“페르닌드. 말조심해라.”

페르닌드의 무례한 언행에 카시엘이 낮게 읊조렸다. 그럼에도 페르닌드는 더 할 말이 남은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밖에 나가는 걸 허락했으면 내게 말을 해줬어야지.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네가 이렇게 나올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 한심한 짓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풀어준 건데? 그러다 또 놓치면!”

소리치는 페르닌드의 눈에 핏줄이 돋았다. 그는 초조한 듯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옆에 선 이네트를


노려보았다.

“이네트, 머리 굴리지 마.”

이네트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노려보는 페르닌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대답하기도 싫어 고개를


돌렸다. 페르닌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듯 입 안으로 욕설을 짓이기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방 안에 카시엘과 단둘만 남았다. 카시엘은 여전히 속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공작과 결혼하지도 않은 저가 공작부인의 방에서 형제들과 몸을


섞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는 예전과 달리 제 존재가 이 저택에 드러났다. 다만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저택 밖으로 소문이 흘러나갈지도 몰랐다. 어련히 소문을 잘 관리하겠지만……
언젠가는…….

이네트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가만히 서 있는 카시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허락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허공에 있던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침대 맡에 걸터앉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와서 동정심이라도 든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다물린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내 곁에 있는 거니까.”

그 말은 즉, 풀어주긴 하되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어찌 됐든…… 형제의 결론은 똑같았다.

“계속 이곳에 있으란 말이군요.”

“그래, 그러니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

“승마도요?”

“내키지 않지만, 그것도.”

“……정말로?”

“그래.”
허락의 말이 떨어졌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왜일까. 이네트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끝없는 추락을
맛보는 것 같았다. 사무치도록 에일이 보고 싶었다.

원래 같았으면…… 도라 위에 올라타 승마를 하고, 에일과 함께 식사를 했을 텐데……. 꿈같았던 그때를


떠올리자 눈물이 고였다.

“이네트. 네가 원한다면 이 저택의 모든 곳에 가도 좋아.”

카시엘이 손을 뻗어 이네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는 눈물이 고인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 네 발이 닿지 못할 곳은 없다. 하지만…….”

그가 이네트의 눈가를 쓸었다.

“사냥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의 금빛 눈동자가 선연하게 빛났다. 숨막히는 눈빛에 이네트가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눈물의 궤적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어 눈물이 맺힌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는 눈물이 말라버린 뺨을 응시하더니 이내 몸을 뒤로 물렸다.

* * *

정사를 하루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괜찮아졌다. 이네트는 일어나자마자 몸을 씻고는 문을 열어


사용인에게 부탁했다.

“셔츠와 바지를 갖다 줘.”

“바지요?”

사용인이 당황스러워했다. 에일의 저택에서 보았던 반응이랑 비슷했다. 이네트는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 두 명은 난감한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이네트가 번복하지 않자 허리를 굽히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이네트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머리를 대충 질끈 묶었다. 긴 머리는 승마를 할 때 불편했으니까.
기다리고 있자 사용인이 셔츠와 바지를 들고 왔다. 원피스 대신 셔츠와 바지를 입고서 방 밖을
빠져나갔다. 뒤따르는 사용인이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이 보였으나 이네트는 무시했다.

그대로 저택 밖으로 나가 곧바로 마구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구간 안으로 들어서자 처음 보는


마구간지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마구간지기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녀는 마구간지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현 듯 에일을 떠올렸다.
분명히 지하실에서의 그는 스스로를 마구간지기라고 소개했다. 말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극진한 애정이
묻어나기도 했다.

‘네. 마구간 안에 있는 말들은 전부 제가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마리는 몸이 약하긴 하지만 사람을


좋아해서, 절 보면 울면서 꼬리를 흔들어대죠.’

‘…동물을 좋아하나 봐?’

‘계속 보다 보니 애착이 생겨서요. 보면 볼수록……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와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한 이네트는 그때 그가 말했던 마리라는 말을 기억해냈다.

“마리라는 말은 어떻게 됐어?”

“마리요? 잘 모르겠습니다.”

답을 듣고서야 지금 마구간지기가 모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에일 혼자 이름을 붙여주었을 테니,


새로 들어온 마구간지기가 모를 만했다.

“날 때부터 병약한 말이 있다고 들었어.”

“……글쎄요. 아마 죽지 않았을까요.”

마구간지기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건강해 보이는 말을 가리켰다.

“이 말로.”

“네, 아가씨.”

마구간지기는 말에게 묶인 끈을 풀고 밖으로 끌었다. 그녀는 그것을 흘끔 보고는 미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말이 나온 즉시 바로 능숙하게 위로 올라탔다. 사용인 두 명은 난처한 듯 말 위에 올라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돌아올 테니 따라오지 마. 공작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하지만 아가씨…….”

말리려는 그들의 뒷말을 무시하고 이네트는 곧장 말에게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나갔다. 어차피 저택
앞에는 경비가 삼엄할 것이다. 나갈 마음은 애초부터 먹지 않았다. 이네트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사냥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꼭 무엇이라도 숨겨둔 사람처럼 그리 말하던 카시엘의 눈빛. 무엇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네트는 말을


타고 영지 내를 내달리면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카시엘은 녹록지 않은 상대였다. 영지 곳곳에
기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첫날부터 사냥터에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네트는 영지 내부를 산책하는 척 말을 타고 둘러보면서


사냥터가 어디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디에드반 저택에서 살면서 사냥터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폐쇄되었다고만 들었을 뿐, 왜 그런지는 알지 못했다.

디에드반 공작가의 영지는 데반 백작가만큼은 아니지만 넓은 편이었다. 이네트는 쭉 둘러보다가 낡은


울타리가 처진 곳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으나, 지나치기엔 영 수상하여 말의
고삐를 잡아 속도를 늦췄다.
낡은 울타리가 처진 곳인데도 주변에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근처에 기사들을 배치시키고, 울타리를
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걸로 보아 이곳이 폐쇄된 사냥터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카시엘은 이곳에 들어가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 기사까지 배치시켰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에일. 그가 있는 곳이다.

이때까지 에일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그들 때문에 이네트는 가끔 에일과 관련된 악몽을 꾸곤 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를 그리워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고 있으나 속은 야금야금 점차로 갉아 먹히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저택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이 에일이었다. 저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그를


수렁에 빠트리다니……. 죄책감과 자괴감이 폭우처럼 쏟아져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저를 도와준 그를 이번에는 제가 도울 차례였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하고 싶었다.

만약 이 사냥터에 에일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쓴다 하더라도, 설령 제가 이곳에서 다시 빠져나갈


수 없다 해도 그를 도울 것이었다.

에일…….

이네트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눈치챌까 싶어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사냥터에서 멀어졌다.

카시엘, 그를 사로잡아 이용해야 했다.

* * *

일전의 경험으로 이네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일이 행해져야 함을 깨달았다. 괜히 허튼짓을 했다가는 들통


나기 십상이었다. 카시엘은 제법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자비로우나,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이네트는 그의 바람대로 조용히 영지 내에서만 지냈다. 괜히 빠져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 승마를 하면서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정문과 후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속도를 빨리해서 달리지도 않았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가시를 세우고 감시하던 기사들의 기세도 조금
누그러졌다.

페르닌드는 그마저도 석연치 않아 매일 같이 이네트를 몰아세우거나 카시엘에게 투덜거리고는 했다.

허나 공작가의 실세는 공작인 카시엘이었다. 작위를 이어받지 못한 페르닌드는 제 형의 뜻을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이 못내 굴욕적인 듯, 그 화는 고스란히 이네트에게로 향했다.

“이네트, 스스로 벌려봐.”

페르닌드가 이네트의 몸 위로 상체를 드리운 채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그녀가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자 그가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보지 벌려, 당장.”


목구멍까지 욕이 차올랐다. 이네트는 차오른 욕을 삼키고서는 덜덜 떨면서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가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엄지와 검지로 스스로 속살을 벌렸다. 이미 애액으로 흥건한 곳이
쿨쩍거리며 울컥, 또다시 액을 토했다.

“너는 참 물이 많아.”

페르닌드가 어느새 시트까지 적신 애액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차마 아래를 스스로 내려다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이 순간조차도 카시엘의 시선이 느껴져 더욱 몸이 떨렸다. 그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모든 상황을 관망했다. 꼭 페르닌드의 아래에 깔려 반항 없이 아래를 벌리는 그녀를 책망하듯이.
그것이 이네트를 더욱 수치스럽게 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감았던 눈을 반쯤 뜨자, 페르닌드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계속. 물이 마를 때까지.”

이네트가 와락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벌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에서 계속 물이 질질 나오잖아, 이넷.”

“…….”

“음탕하긴.”

이네트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식으로 몸이 길들여진 것은


지하실에서 매일 같이 몸을 부딪혀 왔던 그들의 탓이 컸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페르닌드는 그녀의 턱을 붙잡아 뒤로 젖히고는, 그녀의 입술에 성기를 문질렀다.

“빨아. 저번처럼 이로 긁지 말고.”

누운 자세로 위에서 아래로 성기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래를 손으로 벌린 자세라 숨이 막혀


컥컥거려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흐읍, 흑.”

성기가 입 안을 오고 가며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목구멍을 찔렀다. 아래를 벌리고 있던 손을 떼자


페르닌드가 고개를 저었다.

“손 떼지 마. 벌리고 있어.”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아래에 다시 가져다댔다. 그녀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다시 아래를


벌렸다. 그는 그것마저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와중에도 안에서 흘러나오잖아, 이넷.”

페르닌드가 이네트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며 성기를 목구멍 안까지 깊게 찔러 넣었다. 숨이 막힌 이네트가


컥, 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가 이네트의 머리채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다시금 성기를 입에 문
이네트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페르닌드의 어깨를 붙들었다.

“흐윽, 흡…….”

목구멍이 찔릴 때마다 그녀의 눈꼬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물기 어린 젖은 눈동자가 일렁이며 이내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넷, 못 하겠다고 빌어봐.”

그가 흡사 장난감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얼굴로 이죽거렸다.

“빌어보라니까?”

“흐으으…….”

눈물 때문에 그녀의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성기를 문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페르닌드의


어깨를 붙잡은 그녀가 손톱을 세우며 살을 긁어내리자 그가 또 한 번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페르닌드, 그만해.”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 순간, 페르닌드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이네트는 그 틈을 타 물고


있던 성기를 뱉고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형은 하지도 않으면서 뭔 상관이야?”

“……적당히 하란 소리다.”

“형은 상관 마!”

페르닌드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제 성기를 이네트의 젖은 입술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들어올 듯 찌르면서도, 카시엘의 저지 때문인지 안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이네트는 입술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비릿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머금고 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았다.

대신 페르닌드는 몇 번 성기를 입술에 문지르다가, 이내 이네트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단단한 허벅지가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그는 늘어진 그녀의 다리를 한 손으로 잡아 제 어깨에
올리고는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성기를 질 입구에 맞췄다.

삽입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두꺼운 귀두를 넣음과 동시에 뿌리 끝까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으응!”

성기가 자궁에까지 닿을 것처럼 안쪽 깊숙한 곳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아찔한 감각에 이네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트를 그러쥐었다. 페르닌드는 처음부터 빠르게 허릿짓을 해댔다. 퍽, 퍽, 퍽, 그가 안을
찌를 때마다 고환이 그녀의 엉덩이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아앙, 하앗, 하!”

평소보다 너무 빨랐다. 시트를 움켜쥔 그녀의 몸이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가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골반을 붙잡았다.

“페르, 으응, 닌드! 빨라, 흐윽!”

그가 우악스럽게 가슴을 주무르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유두를 입에 머금고 희롱했다. 그러면서도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유두를 혀로 꾹 누르다가, 이어 이로 가볍게 짓씹었다. 이로 씹을 때마다
그녀가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휘었다. 그녀의 높은 신음에 그가 피식 웃으며 머금고 있던 유두를
뱉어내고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그녀의 가슴을 후려쳤다.
“앗!”

약간의 알싸한 느낌과 함께 미묘한 여운이 남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흐윽!”

또다시 손바닥이 가슴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강도가 더 셌다. 홧홧한 느낌과 함께 아까보다 더
큰 여운이 감돌았다. 그가 은근하게 귀두 끝으로 질 내벽을 문지르며 또 한 번 세게 가슴을 후려쳤다.

“아흐으읏!”

철썩 내리친 손바닥이 유두를 스치듯 만지고 지나갔다. 요동치는 쾌감에 그녀가 밭은 숨을 내쉬며
헐떡거렸다. 아프면서도 동시에 느껴지는 쾌락에 둔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또 해줘?”

“흐윽, 하…….”

“네가 계속 질질 싸대는 바람에 시트까지 다 젖잖아, 이넷.”

페르닌드가 손자국이 남은 가슴을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푸른 눈동자가 욕망이 뒤섞여 뿌옇게 빛났다.

“이넷, 그놈이랑도 이 짓거리 했지?”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놈도 네 가슴을 빨아줬을 거 아냐, 이렇게. 응?”

이렇게, 라고 말하며 그가 그녀의 가슴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혀로 유두를 누르는 것도 잊지 않으며.

“흐읏…….”

“그때도 이렇게 질질 쌌어?”

그가 손을 내려 철퍽거리는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액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녀에게서 계속 대답이 없자


휘어 있던 그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죽여 버리고 싶어.”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액을 훔친 손가락을 그녀의 입 안에 처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아앙! 흑, 아흑!”

이네트는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킨 와중에도 아래는 착실하게 쾌락을 받아들였다. 신음이라도 참고
싶었으나 입 안을 휘적거리는 페르닌드의 손가락 때문에 신음조차 삼킬 수 없었다.

“씨발…….”

그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리고 거칠게 아래를 쑤셨다. 사정감이 고조되는 듯 그가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숨이 귓속으로 스며들어오자 그녀의 허리가 찌르르,
떨렸다. 그녀는 제 품을 껴안은 그의 등에 마주 손을 두르며 그가 안에 사정할 때, 그녀 또한 같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네트가 탄식 같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페르닌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안에 쌌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눈을 크게 떴다.

“너, 안에……!”

그녀가 놀라 숨을 들이키며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녀를 꽉 껴안았다.

“이제 피임할 필요 없잖아. 안 그래?”

페르닌드가 등 뒤의 카시엘을 흘긋 바라보며 물었다. 카시엘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당장 빼!”

그녀가 벼락처럼 소리를 질러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왜. 일부러 못 흐르게 막아두고 있는 건데.”

“싫어……!”

임신이라니. 죽어도 싫었다. 이네트가 아무리 페르닌드의 등을 두들겨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에 머금은 그의 성기가 흥분한 듯 크기를 불렸다.

“이넷, 난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 흥분돼.”

그 말에 이네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붉게 상기된 그녀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

“더 화내줘. 난 그게 좋아.”

“……이 미친 새끼가.”

“그래, 그렇게 말해. 더 흥분되니까.”

싫어……. 이네트의 얼굴에 울음기가 서렸다. 그녀는 페르닌드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벽에 기대 선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카시엘…….”

그녀가 중얼거리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라앉아있던 그의 눈에 안광이 서리며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그를 향해 애원하듯 손을 뻗으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도와주세요, 제발.

애처로운 눈길에 그의 무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그는 저를 향한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다가, 그녀를 꽉


안은 페르닌드의 뒤통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물린 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페르닌드. ……다 했으면 나가.”

“뭐?”

“이제 내 차례니까 나가라고.”

이네트를 껴안은 페르닌드가 씨발,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가까이 몸을 붙인 이네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카시엘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자 페르닌드가 실소를 내뱉으며 성기를 빼냈다.
아까 한 차례 했음에도 여전히 꼿꼿한 성기가 공기 중으로 빠져나왔다. 서로를 바라보는 형제의 눈길은
마치 불꽃이라도 붙을 것처럼 매서웠다.

한동안 말없이 시선이 오고 가다가, 페르닌드가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이네트는 페르닌드가


나가자마자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허겁지겁 물을 틀고 페르닌드가 안에 싸지른 액을 손가락으로 긁어냈다. 허연 액이 뭉쳐서 나올 때마다


울컥, 울음 섞인 울분이 터졌다. 왜, 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빼내고, 빼내어도 안에 스며든 정액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임신하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고 안에 싸지 않는다 해도, 쿠퍼액만으로도 임신할 가능성이 극히 낮지만 존재하기는 했다. 애초부터
피임약도 먹지 않고 섹스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짓이었다. 그리 생각하자 이때까지 임신하지 않고 꾸준히
생리를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그녀가 풀썩, 욕실 바닥에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피임약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 한
명만 먹으면 됐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들이 그녀에게 약을 먹인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이 대신 먹는
것 같지도 않았다.

피임약이라도 어떻게 구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인들 모두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으며, 그녀가 따로 아는 친한 사용인도 하나 없었다. 그녀가


찬물을 고스란히 맞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이네트.”

어느새 다가온 카시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패닉에 빠진 그녀는 그가 부른 것도 알지 못하고 연신


손톱을 물어뜯기에 바빴다.

“물어뜯지 마. 다쳐.”

물이 쏟아지는데도 그가 아랑곳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그 또한 찬물을 맞아


옷이고 머리카락이고 흠뻑 젖었다. 그는 손바닥에 물을 맞으며 물의 온도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네트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카시엘…… 저 임신하기 싫어요.”

이네트가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페르닌드 아이, 임신하기 싫어요…….”

아직도 안에 정액이 고여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네트가 잔뜩 젖은 손으로 카시엘의


소매를 붙잡았다.

“피임약, 구해줄 수 있죠?”

“…….”

“제가 페르닌드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니잖아요, 그렇죠……?”


요 사이 미묘하던 형제의 분위기를 모를 수 없었다. 그것을 이용해 페르닌드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를
애절하게 바라보자 예상대로 반응이 돌아왔다.

이제 이네트는 그의 표정에 담긴 속내를 점점 알 듯싶었다. 무표정한 것처럼 보여도 심기에 따라 미묘하게


표정이 달랐다. 그녀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양을 부리듯 그의 손에 제 손가락을 슬며시 끼워 넣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손깍지를 완전히 끼자 그의 손이 움찔거리더니 뒤로 빠졌다. 그녀는 놓치지 않고 다시 그의 손을 붙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네트. 또 말하지만, 만약 허튼 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안 되나요?”

이네트가 말을 끊고 물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

그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마주하자 이네트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화를 낼


때조차도 특유의 나른한 여유로움을 내뿜던 그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변화와 동요를 기민하게 감지했다. 직감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가
느낀 것이 맞는지 확신하기 위해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카시엘.”

이름이 불리자 다물린 카시엘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과,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하며 이네트는 확신했다.

비 온 뒤, 흐린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끔한 깨달음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나직한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이때껏 왜 다른 여자에게 손 뻗지 않고 자신을 붙잡아 두는가 알지 못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것의 정답이었다.

그는 누이가 아닌 이성으로 저를 원했다.

이름이 불리거나 먼저 손 뻗어오면 늘 단정하고 초지일관하게 일자로 유지하던 입꼬리가 깨어질 만큼.
고른 숨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떨릴 만큼. 그는 그녀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진득하게 달라붙던 시선도, 이곳에 다시 붙잡혀오고 나서 느꼈던 끈질긴 시선도 전부 다…
….

이제야 깨달은 그의 마음에 그녀는 다가온 희망에 기쁘면서도 거부감 또한 함께 느꼈다.

그는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다 해도, 누이를 마음에 품은 거로도 모자라, 좋아하는 사람에게 행할 수


없는 짓을 했다. 가두고, 겁탈하고, 강제로 붙잡아두었다. 싫다고 애원하는 입술을 입술로 틀어막으며
아래를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어서는 안 됐다.

그녀는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천천히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얼굴 위에 덧그리며 그녀에게 얌전히 붙잡힌 그의 손등을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손을 대고 있음에도 힘을 주어 주무르거나 조심스레 만지지
않았다.

이네트는 용기를 내어 카시엘의 손가락을 잡고 제 유두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스칠 때마다 잘 길들여진 그녀의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그녀가 스스로 그의 손가락을 붙잡은 채 유두를
누르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리자 그가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흐읏….”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한 채로 그의 손이 제 가슴을 꽉 움켜쥐게끔 했다. 이곳에 다시 붙잡혀 온 뒤로,


그와 한 번도 몸을 섞은 적 없었다.

왜 먼저 손을 대지 않는 걸까. 그녀는 늘 의아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관음증이라도 생겼나 보다,


하며.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에도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저택에 돌아온 뒤로 손대지 않는


걸까……. 이네트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그의
손으로 제 가슴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그는 손안 가득 들어오는 말캉한 감촉에 이때껏 참아 왔던 욕구가
샘솟아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네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부풀어 오르는 그의 것을 확인했다.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심적인 문제일 것이다.

이네트는 그의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가슴에 올려두었던 카시엘의 손을 아래로 내리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좋아요?”

이네트의 물음에 카시엘이 숨을 멈췄다. 살짝 벌어진 잇새 사이로는 그 어떠한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이네트는 카시엘의 무표정한 가면이 천천히 부서지는 것을 눈에 담았다. 흔들리는 동공과 정처 없이


떠도는 눈길, 그리고 달싹거릴 뿐, 결코 부정을 내뱉지 않는 벌어진 입술을.

“……찬물을 맞고 나서 말리지 않으면 감기 걸려, 이네트.”

반응 없던 그가 돌연 이네트의 팔을 붙잡고 욕실 밖으로 이끌었다. 표정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돌아선


뒷모습과 팔뚝을 움켜쥔 강한 손힘. 그녀는 반항 없이 그의 손길에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도 그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답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네 시중을 들어줄 이를 부르겠다. 나는 잠시…….”

어떻게든 대답하지 않으려고 피하는 모습에 순간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잠시만요.”

이네트가 급히 방 밖으로 나서려는 그의 젖은 옷자락을 거머쥐고 말했다.

“젖었잖아요. 그 꼴로 나가려고요?”

“…….”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네트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카시엘, 피임약을 구해다 줘요.”

그는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거야. 이네트는 기묘한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요구했다.

“구해다 줄 수 있죠?”

그리고는 젖은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그녀는 일부러 눈을 감지 않았다. 마주한 금색 눈동자가


크게 뜨이고, 이내 가늘어진다 싶더니 그가 손을 들어 이네트의 뒤통수를 그러쥐었다.

“이네트, 너는…….”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급작스럽게 입술을 맞댔다. 마치 사막에서 샘물을 찾은


방랑자처럼 갈급한 손짓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그녀의 타액이 샘물이라도 되는 양 빨아들였다.
입 안을 종횡무진하며 들쑤시는 혀의 감촉에 이네트는 눈을 반쯤 감고 그의 목을 휘감아 안았다.

“……이네트.”

허리를 끌어안는 손짓조차 조급했다. 이미 위로 곧추선 성기가 이네트의 배 언저리를 찔러댔다. 그간의
금욕을 발산하기라도 하듯 젖은 천 너머로 그가 여실히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허겁지겁 위로 끌어올리며 드러난 하얀 젖가슴을 한입에


베어 물었다. 젖은 입술이 가슴을 빨아들이고 곤두선 유두를 할짝거렸다. 그녀는 작게 신음하며 그의
얼굴을 껴안고서 물었다.

“들어줄 거죠?”

“……그래. 도망치지 않고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하면.”

너무나도 손쉽게 내려오는 대답. 그녀는 그의 흑발을 손안에 거머쥐며 또 한 번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카시엘 당신하고만 잘래요…….”

“…….”

“페르닌드랑 자기 싫어요…….”

그가 홀린 듯 대답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를 이용하는 법은 이다지도 쉬운 것이었다. 사로잡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 혼자만 오랜 시간 몰랐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간 있었던 행위들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애무는 조급했다. 카시엘은 페르닌드가 남긴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듯 붉은 자국에 하나하나 입술을 대었다.
놓치는 것이 있을세라 뒷목덜미와 등줄기에도 입맞춤이 내려왔다.

그는 옆에 침대가 있는데도 이네트를 바닥에 눕힌 채 마치 짐승처럼 올라타 교접했다. 육중하게 선 성기를


그녀의 허벅지에 비벼댔다. 젖은 살끼리 마찰하며 찰싹거리는 소리가 났다.

“으읏…….”
마찰이 계속 되자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네트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이제 그만…….”

“그만?”

“……넣어주세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를 비비던 성기가 단숨에 안을 꿰뚫고 들어왔다.

“으응!”

아까 이뤄졌던 정사로 인해 풀려 있던 내벽이 안을 꽉 메우며 침입한 성기를 꽉 죄였다. 바닥에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안을 찌를 때마다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쿵, 쿵 찧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품에 안았다.

껴안은 자세로 처박혔다. 이네트는 카시엘의 쇄골에 더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안으로
묵직하게 파고드는 느낌에 절로 허리가 그 쾌락을 좇아 움직였다. 카시엘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이네트의 엉덩이를 꽉 쥐고 그간 쌓아왔던 것을 다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거칠게 안을 쑤셨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부딪히고,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비벼졌다. 흥분이 고조된 이네트는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단단한 가슴이 유두를 스칠 때마다 아찔한 쾌감에 헐떡거렸다. 엉덩이를 꽉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를 아프게 움켜쥐는데도 고통보다 쾌감이 더 컸다.

“흐으읏, 좋아……!”

이네트가 내뱉은 좋아, 라는 말에 카시엘의 움직임이 더 격해졌다. 그녀의 몸이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흣, 아! 아앙! 아앗!”

접합부가 부딪혔다 떨어질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벅차오르는 쾌감에 이네트가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미칠 것 같았다. 카시엘이 바닥을 긁는 이네트의 손을 제 등에 두르게 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등을 할퀴어도 그는 상관 않고 허리를 계속 움직였다.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던 그가 양옆으로 벌어져 흔들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하나로 모아 잡고는 다시 안을


찔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쫙 뻗치고서는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새어나가는데도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읏! 아! 좋아, 흐응!”

돌연 카시엘이 접었던 다리를 놓고 이네트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혀가 뒤섞이고 그의 타액이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그가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더, 더 말해, 이네트.”

“으응, 좋아…….”

“더.”

“아! 좋아, 흐으읏!”

그녀가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반쯤 연기였으나, 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를 어떻게든 사로잡기


위해 애를 쓰며 그녀는 쾌락에 이성의 끈을 놓았다.

마구 뒤흔들리다가 시야가 뒤집혔다. 카시엘이 이네트의 몸을 뒤로 돌린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뒤에서


꿰뚫어 오는 감촉을 느끼며 허리를 휘었다. 아까보다 성기가 더 깊숙이 안을 찔러댔다.

“흐윽, 깊, 어…… 앗!”

이네트가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를 허물어뜨렸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상체를


위로 일으켰다. 그의 가슴과 그녀의 등이 한 몸처럼 달라붙었다.

“흣! 아! 으응!”

이번에는 앉은 자세로 꿰뚫렸다. 그가 뒤에서 그녀의 가슴을 여전히 주무르며 강하게 껴안았다. 아래에서
위로 퍽, 퍽 찍어 올릴 때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흔들렸다.

“흐으으응…….”

그녀가 야릇하게 신음하며 제 가슴을 주무르는 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치고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 야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에 그의 아래로 피가 쏠렸다. 그가 크읏, 낮게 신음하며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이네트…….”

사정감을 참을 수 없었다. 카시엘이 깊숙이 안으로 한 번 쳐올리더니, 그대로 성기를 급하게 빼내고서는
그녀의 엉덩이에 사정했다. 그는 엉덩이에 흩뿌려진 정액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바닥에 엎어져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또……?”

이네트의 물음에 카시엘은 대답 없이 벌어진 다리 사이로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는 액에 흠뻑 젖은


그곳에 혀를 집어넣었다.

“앗!”

그녀가 놀라 까무러치듯 신음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거침없이 액에 젖은 그곳을 혀를 세워 찔러댔다.


입술로는 동그랗게 솟아오른 정점을 꾹 눌렀다. 그녀가 몸을 뒤틀고 허리를 바르작거렸다. 참을 수
없었다.

“아! 읏! 하! 그만, 아앙, 아! 제발……!”

혀가 안을 휘저어대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이네트는 저도 모르게 카시엘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아, 아, 아! 변주처럼 쏟아지던 신음이 이내 멎었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삼킨 채, 신음도 내지르지 못하고 절정을 맞았다.

그는 안에서 울컥 터져 나온 그녀의 액을 꿀꺽 삼켰다. 음핵과 질 입구 근처에 있는 애액까지 혀로 핥아


먹고서 젖은 입술을 뗐다. 혀를 내어 입술에 묻은 액까지 마저 핥아 먹었다.

이네트는 넋을 잃은 채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밭은 숨을 내뱉었다. 아까 느꼈던 절정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 눈빛은 여전히 몽롱했다.

카시엘은 늘어진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욕실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을 발부터 천천히
흩뿌렸다. 발에 뿌리다가 종아리로, 허벅지로, 점점 위로 올라갔다. 따듯한 물이 맞자 그제야 이네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에 말라붙은 정액을 살살 문질러 씻기고, 몸에 비누칠을 해주었다. 이네트는 몸을
쓸어내리는 두터운 손의 감촉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다 씻은 다음에도 그가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말려주었고, 이네트는 꾸벅꾸벅 졸면서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앉은 자세로 졸자 그가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 들고는 침대로
옮겨졌다.

“잘 건가?”

그가 눈을 반쯤 감은 그녀를 향해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은 정사와 극치의 오르가즘을


맛본 탓인지 몸이 노곤하고 졸렸다. 그는 눈을 감은 그녀를 품에 안고,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느새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금색 눈동자에 흐릿한 빛이 섞였다. 그의 품에 그녀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 순간조차 그녀가 사라질까 싶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제 곁에…….

그 사실을 되새김질하듯 그가 그녀를 품에 껴안고 그녀에게서 나는 체취를 흠뻑 들이켰다. 뒤통수를


그러쥐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체온을 느끼고 체취를 맡아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동안, 그의 낮과 밤은 모두 어둠으로 물들었다. 달이 뜬 새벽에도 그는 눈 감지 못했다.

이따금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지하실에 갔다.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으면 그제야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 때문에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꿈속에서 이네트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도, 결코 붙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아무리 뒤쫓아도


잡을 수 없었다.

새벽 내내 무력한 악몽에 시달리다, 낮에는 환청을 들었다.

‘카시엘…….’

틀림없는 이네트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돌아온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창으로라도


들어올까 싶어 창문을 연 채 온 방 안을 헤집었다.

‘이네트,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이네트…… 돌아와.’

미치고 만 것이었다. 저택의 맨 위층에 자리 잡은 그의 방에 그녀가 창을 통해 들어올 일 따위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을 정도로 그의 판단력이 흐트러지고 만 것이었다.

언제나 찾아가면 있던 그녀가 없다. 달아났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한시도 눈을 뗀 적 없었는데. 네게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의 인생에 온통 그녀가 발자국처럼 존재하는데, 흉터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는데.

방 안을 쑥대밭으로 헤집어 놓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아…….’
카시엘이 나직이 탄식했다. 그리고는 몸을 무너트렸다. 없다. 아무리 찾아 헤매도 그녀는 없었다.
이네트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 그의 마음에 상흔이 일었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그는 숨을 멈췄다. 고통스러웠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지독한 깨달음은 잠조차 들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새벽 내내 이네트의 환청을 들으며 괴로워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던 카시엘이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환영이 아닌 진짜 이네트가 온기를 머금고 그의 품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불안해


견딜 수 없어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따스했다. 손 안에 있다. 그런데도…….

그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감정에 눈을 감았다. 이제는 괜찮을 것이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테니까.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전부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이전처럼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고,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녀가 제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하지 못할 짓이란 없었다. 떠나지 않는다면…….

‘좋아…….’

아까 정사에서 그녀가 신음하며 내뱉은 그 말이 그의 귓가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도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벌어진 잇새 사이로 달뜬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래로 손을 뻗었다.

아까 한 차례 사정을 했음에도 성기가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그는 천 너머로 발기한 성기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읏…….”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이네트의 목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 아래에 있는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이전에 잠든 그녀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수음했던 것처럼.

그가 잠든 그녀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몇 번 어루만지자 그녀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약에 취해 잠들었을 때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그는 조심스레 하얀 젖가슴을 손에 쥐고 주물렀다. 풍만한 젖가슴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것이


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결국 입고 있던 옷자락을 젖히고 성기를 꺼냈다. 이미 액이 방울져 있는
귀두를 엄지로 스치고, 한 손으로 성기를 그러쥐고 피스톤질 했다. 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크읏….”

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혹여나 그녀가 깰까 싶어 손을 뗐다. 그리고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아래로 열이 몰리고 쾌락이 고조되었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카시엘.’

눈을 감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 이네트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성기에서 액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정액이 그의 얼굴과 가슴 곳곳에 튀어 올랐다.

카시엘이 정액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물끄러미 액에 흠뻑 젖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잠든 그녀가 신음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기묘한 충족감에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몄다. 얌전하게 벌어진 젖은 입 안을 손가락으로 쑤시다가
손을 뗐다.

그녀가 아까 욕실에서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제가 좋아요?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아직도 제 감정에 이름 붙이지 못했다.

‘제발 지금이라도 진실을 알려줘요!’

카시엘은 여전히 어머니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그 여자와 이네트를 증오하고,
남편을 의심하며 죽었다.

이네트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여자와 무척이나 닮았다. 그럼에도 그는…….

상념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는 물끄러미 아까 그녀의 입 안을 쑤시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가, 잠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웠다. 오래도록 그 감촉을 음미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계속해서 맞아도 그는 오래도록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조차 답을
알 수 없었으므로.

* * *

늦은 오후에야 이네트는 눈을 떴다. 알몸으로 잠들었던 어제와 달리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가


입혀주고 나간 듯했다.

이네트는 하얀 원피스를 흘긋 내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겹도록 본 탓에 저 얼굴들이 이제 질릴 정도였다.

“아가씨,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래.”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소메와


샐러드, 시럽을 잔뜩 올린 팬케이크가 식사로 나왔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콩소메는 국물이 진하고 맛있었으며, 샐러드도 아삭하니 먹기 좋았다. 팬케이크 또한 그녀가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을 잔뜩 올려 달달했다. 이네트는 몇 번 수저를 움직여 그것들을 먹다가 반쯤 남겼다.

눈짓을 해서 사용인들을 내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승마를 하러 가기 위해 저택 밖을 나섰다. 어젯밤 격하게 이어진 정사 때문에 아래가 살짝
쓰라렸으나 못 달릴 것도 없었다.

하루 종일 할 것이라고는 승마밖에 없었으니까. 매번 감시자와 다름없는 두 명이 따라붙으니 허튼짓도


섣불리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이네트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따라붙는 사용인 두 명을 어떻게든 따돌리고,


사냥터로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사냥터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을뿐더러, 기사들이 호시탐탐 들어가는 이가 없나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서 숨어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울타리가 쳐진 곳만이 입구일까? 다른 곳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때껏 주변을 살펴보면서
따로 들어갈 만한 곳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네트는 울타리가 쳐진 곳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어 그 근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곳……. 곳곳에 기사들이 서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할 만한


삼각지대는 찾기 영 어려웠다.

차라리 기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교대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었다. 그때를 노려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게 더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교대하는 시간을 알아내는 것과, 매일 같이 제 뒤에 따라붙는 저 사용인 두 명을


따돌리는 것뿐이었다.

약. 사용인들을 잠재울 만한 약이 필요했다. 약을 떠올린 이네트는 불현듯, 페르닌드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 몰래 손을 뻗쳤다고…….

그때 제게 쓴 약. 아직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이네트는 어떻게 그들의 방에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카시엘의 방은 아무리 저라 해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시엘의 방보다 우선 페르닌드의 방부터 먼저 접근하는 것이 더 나았다.

카시엘에게 피임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동시에 페르닌드와 더는 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카시엘은


그러겠노라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페르닌드와 마주치는 일은 없는 것일까?

그들이 오는 시간이 되어서야 확실한 답을 알 수 있었다. 이네트는 오랜 시간 승마를 하다가, 그들이 올


시간에 맞춰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처럼 그들을 기다린 적 없었다. 이네트는 방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바람대로 문이 열리고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페르닌드는 없었다. 카시엘뿐이었다.

“……페르닌드는요?”

그녀가 묻자 그는 방문을 닫더니 나지막이 대답했다.

“페르닌드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거 아니었나?”

그랬다. 이네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누운 이네트를 흘긋 확인한 카시엘은 곧바로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남자 사용인과 함께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멍한 듯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나, 눈빛은 또렷하게 빛났다.

* * *
이네트의 말 한마디 이후, 더 이상 이네트의 방에 페르닌드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작위를 이어받지
못한 공작가의 차남이란 공작의 명령에 그토록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이네트는 그 사실이 제법 고소했다.

페르닌드를 상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매번 몰아붙이는 그를 상대할 때마다


고역이었으니까.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네트에게 수치스러운 짓을 시켰으며, 그녀가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낼수록 기뻐하며 좋아했다. 악질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밝은 목소리로 이넷, 누이, 그리 부르며 따랐으면서…… 왜 그토록 변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페르닌드가 함부로 굴 때마다, 그녀는 묘한 배신감을 느끼곤 했다. 그녀에게 서슴없이 야한
말을 지껄일 때, 우는 것이 예쁘다며 울라고 강요할 때, 안을 거침없이 꿰뚫을 때…… 그와 하는 모든
행위가 이네트는 수치스럽고, 화가 났고, 무엇보다 슬펐다. 어린 시절 짧게나마 나누었던 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네트는 씁쓸하게 그에 대해 회상하다 애써 생각을 지웠다.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페르닌드를 보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자연스럽게 페르닌드의 얼굴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혔다. 카시엘이 오고 나면 쭉 같이 있기 때문에 페르닌드와 마주칠 일도 없었다.

카시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녀는 비록 연기일지라도 그에게 편한 오라비 대하듯 굴며


무엇이든 부탁했다. 입 안의 혀처럼 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값비싼 액세서리, 화려한 드레스, 두터운 양장본, 달달한 디저트,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면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하는 부탁을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피임약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부탁 이후 카시엘은 꼬박꼬박 그녀에게 피임약을 챙겨주었다. 그것의


보답으로 이네트는 그가 이따금 잠자리를 요구할 때면 별다른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숱하게 몸을 섞었는데,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만 피임약을 먹었으니 정사를
나눌 때마다 내심 임신에 대한 걱정이 덜어 안심되기도 했다.

그녀는 마치 그에게 감겨든 듯이 싱글거리면서도, 그가 없는 시간엔 승마를 핑계로 밖에 나가 기사들의


교대 시간이 언제인지 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매번 티 나지 않게, 매일매일 다른 시간에 승마를
한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기사들이 교대를 하는 시간이 점심때 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


오래도록 승마에 몰두한 척하며 기사들이 교대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정확히 1 시였다.

남은 것은 수면제였다. 그걸 먹여 제게 따라붙는 사용인 두 명만 어떻게든 따돌리면…….

“이네트.”

그녀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자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있던 카시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거짓말.”

그의 어조에 날카로움이 서렸다. 이네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풀고서는 꾸며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이렇게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고 좋은데…… 혼자 있을 땐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거짓인 걸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내뱉는 거짓조차도 기꺼워하는 것이었다. 바보 같게도.

그녀는 그런 그를 맘속 깊이 경멸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당연히 그녀가 그의 소유인 줄 터럭처럼
믿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 * *

카시엘은 애무에 공을 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입술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부터 시작해서, 입술이 맞닿을 때부터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가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가슴을 주물렀다. 흰 가슴이 그의 손아귀에서 뭉개졌다. 그는 가슴을 몇


번이고 주무르며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희롱했다. 이네트가 몸을 움찔 떨며 눈을 반쯤 감았다.

“눈 떠, 이네트.”

카시엘이 가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네트가 작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그의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혀가 섞이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쉬지 않았다. 가슴을 주무르고 아래를 헤집었다. 음순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그 사이를 문질렀다. 그녀가 헐떡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카시엘이 이네트의 입천장을 긁으며 동그랗게 솟은 클리토리스를 꾹 눌렀다. 이네트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으으응!”

“소리 참지 마.”

그가 이네트의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제 목에 휘감게 했다. 아래를 헤집는 손은 여전했다. 갈수록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액으로 흥건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허리를 바르작거리며 그의
목을 강하게 껴안았다.

손가락이 마침내 안으로 하나 들어갔다. 안은 기다렸다는 듯 카시엘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몇 번


삽입을 반복하던 그가 한 번에 손가락 두 개를 더 넣었다.

이네트가 느껴지는 이물감에 몸을 움찔 떨었다. 손가락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배가 조였다. 그가 안에 넣은 채로 손가락을 꺼떡거리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흐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이를 세우며 손을 빠르게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읏!”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액이 부딪혀 찰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가 강하게 몰려오는 감각에 어찌할
바 모르고 몸을 꿈틀거리자 카시엘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눌러 움직이지 못하게끔 했다.

“하윽, 아, 제발, 으응!”

벌어진 다리가 덜덜 떨리고 몸을 가만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몸이 비틀릴 때마다 그가 힘을 주어 몸을


억눌러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배가 꽉 조여오고 아래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흐으윽!”

이네트가 참지 못하고 카시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발끝이 곱아짐과 동시에 이네트는 고조되는 성감에 숨도 쉬지 못하고 절정에 다다랐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 쾌감에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로 몸을 늘어트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시엘은 그녀의 안에서 젖은 손가락을 빼고는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흥건한 액에도
이네트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그저 바라만보고 말았다. 그가 젖은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왜 먹어요, 더럽게…….”

“안 더러워.”

어느새 끈적이고 질척이던 액은 카시엘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늘어진 이네트의 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몸에 제 몸을 겹쳤다.

오늘은 페르닌드의 방에 가볼 생각이었다. 카시엘과 섹스를 하다가 힘들어 도중에 잠이 들면 곤란했다.


이네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힘들어요…….”

솟은 아래가 허벅지에 닿았다. 이네트는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어요.”

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결국 그녀의 몸 위에서 물러났다. 대신 그녀의 옆에 누운 채 바지를 내렸다.


곧 흉흉하게 곧추선 성기가 드러났다. 이미 끝에는 쿠퍼액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카시엘이 손을 뻗어 이네트의 손을 성기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손가락 끝을 움찔 떨었다. 성기 끝에


맺힌 액이 닿았다 떨어지면서 기다란 실을 만들어냈다.

그는 말없이 그녀가 제 성기를 감싸 쥐게끔 했다. 이네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그와 눈을 맞췄다. 그가 그녀를 바라본 채로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감쌌다.

카시엘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손도 같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네트는 맥동하는 아래와, 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에
사로잡힌 채 그가 이끄는 대로 손을 움직이기만 했다.

카시엘의 눈이 가볍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입술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손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탁탁, 탁탁……. 소리와 함께 성기 끝에서 흐른 액
때문에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그럴 때마다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읏.”

“…….”

“헉.”

카시엘이 숨을 들이키더니 이네트의 몸에 제 몸을 붙이고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하아…….”

이가 목덜미에 박히는 순간, 그가 진한 한숨과 함께 허리를 꿈틀거리며 파정했다. 이네트는 제 손바닥을


적시는 뜨거운 액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 손바닥은 물론이고 그의 손까지 싸지른 정액으로 흥건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네트가 손을 들어 젖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카시엘이 그녀의 몸을 껴안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녀를 껴안은 채로 젖은 손바닥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이 손수건…….”

이네트가 입을 열었다. 손수건 가장자리에 그려진 검과 장미 그림이 낯익었던 탓이었다.

“어느 분한테 받은 거예요?”

반쯤은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좋다는 여인들이 많을 텐데도 굳이 제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너.”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준 거다.”

“제가 줬다고요……?”

이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기억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어린 이네트는 제가 스스로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그녀가 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고작 별관


앞의 나뭇가지와 돌이 전부였다. 다른 것은…… 어머니가 떠나기 전 두고 간 손수건 두 개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어린 이네트가 입기에 옷은 너무 컸다.

어린 이네트는 저를 챙겨주는 페르닌드가 고마웠고,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두고 간 손수건 중 하나를


페르닌드에게 선물했다. 가장 하얗고 깨끗한 것을. 페르닌드는 손수건은 이미 많다며 궁시렁거리면서도
기쁜 낯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내 건?」

옆에 있던 어린 카시엘이 이네트에게 물었다. 이네트는 몹시 당황했다. 페르닌드에게 줄 것만 생각했지,


카시엘에게 줄 건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선물을 바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허둥거리다가 결국 별관에 가 남은 손수건 하나를 그에게 건네줬다.

너무 어린 시절 이야기이고, 기억에도 그리 남지 않는 일이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가 그 손수건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너무, 오래된 손수건이잖아요. 새 걸로 바꿔도 될 텐데…….”

“됐어. 이게 좋아.”

이네트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이어지고, 숨소리만 이어졌다. 이네트는 등 뒤에서 저를 껴안은 온기를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페르닌드의 방으로 향해야 했다. 그녀는 그가 잠들 때까지 잠든 척,


죽은 듯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이네트는 카시엘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이전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 품을 조심스레 뒤적인 것만으로도 잠에서 깼으니, 지금도 무언가 알아차리고 깼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여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직 그의
감긴 눈은 깊이 잠든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깨지 않은 걸까, 아니면 깨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걸까.

그녀는 그의 굳게 감긴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갈 때까지 그의 눈이


감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문밖으로 나가자 기립하고 서 있는 기사 두 명과 눈이 마주쳤다. 늦은 시각인데도 그들의 눈빛은 졸음의


흔적 따위는 없이 또렷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답을 구하는 눈빛을 하고
있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페르닌드에게 가는 거다.”

“공자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만나기로 했어.”

“……그럼 따라가겠습니다.”

역시나 철저했다.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과 함께 페르닌드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카시엘의 귀에 들어가는 것 정도야 예상하고 벌이는 짓이었다. 이 정도쯤은 그가 눈감아줄 테니까. 변명


거리야 많았다. 어쩌면 아까 전,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던 걸 수도 있었다.

페르닌드의 문 앞에 도착하고, 이네트가 문을 두어 번 노크했다. 밤이 무르익은 시간이기 때문에 그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예상외로 잔뜩 날 선 고함이 들려왔다.

“다 꺼지라고 했잖아!”

거친 음성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네트가 몸을 살짝 굳혔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쥔 순간,


안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씨발, 말귀…….”

욕설을 퍼부으려던 페르닌드가 눈앞에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말을 멈췄다. 그가 굳은 얼굴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이넷?”

“페르닌드.”

이네트가 페르닌드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꿈인가……? 네가 날 찾아올 리 없는데.”

이네트는 대답 없이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방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빈 술병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그에게서도 강한 술 냄새가 풍겼다.

“술 마신 거야?”

“왜 네가…….”

꿈이 아닌 건가? 페르닌드가 중얼거리며 앞에 선 이네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만져지자 그가 놀란 듯


손을 떼었다.

“진짜 이넷이야?”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선 기사들을 향해 눈길을 건넸다. 그러자 그들이 그 눈빛을 오해한 듯 방
안으로 발을 한 발짝 들였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페르닌드, 저 뒤에 있는 기사들 좀 내보내 줘.”

이네트가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페르닌드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페르닌드가
일갈했다.

“뒤의 둘, 꺼져.”

기사들이 그의 명령에도 우뚝 서 있자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꺼지란 말 못 들었어? 꺼지라잖아!”

고막을 울리는 큰 목소리에 기사 두 명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이내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겠습니다.”

다시 소리치려는 페르닌드의 어깨를 이네트가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얼렀다.

“그 정도면 됐어.”

그리고는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페르닌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듯 그의 방에 제 발로


들어온 이네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아한 빛을 내던 눈은 어느덧 무언가를 생각해낸 듯
순식간에 비틀렸다.

“형에게 나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며? 근데 왜 네 발로 여길 들어와?”

그가 이죽거렸다. 휘어진 눈동자와 비틀린 입매가 마치 엇갈린 이중주처럼 한데 섞였다.

“무슨 수작이야? 이젠 형이 싫증 났어? 나한테 들러붙어서 뭐 하나 캐가려고?”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왔어?!”

들끓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페르닌드가 화를 내리라고는 예상했다. 이네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금씩 그에게 다가갔다. 거친 그의 성격에 뺨 한 대 정도는 맞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손을 치켜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비틀린 입매가 점점 굳어갔다.

“네가 날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며?”

“…….”

“나와 마주치기도 싫다며.”

그가 쏘아붙였다.

“왜 왔어? 말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이네트는 곰곰이 고민하다 대답했다.

“계속 생각이 나서.”

“……뭐?”

“안 보니 보고 싶어서.”

무표정하게 흘러나온 말에 페르닌드가 하, 실소를 터트리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지금 나 놀리냐? 네 입으로 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 보고 싶어서? 누가 속을 줄


알아?”

페르닌드가 분에 겨운 듯 이를 으드득, 갈며 이네트의 양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형 말 한마디면 네 얼굴을 볼 수 없는 내가 이제 와 불쌍했어? 아니면, 뒤늦게 이용 가치를 떠올렸냐?


그래? 젠장!”

붙잡힌 어깨가 아팠다. 이네트가 작게 신음했다.

“아파…….”

“아파? 이 정도로 아프다고?”

말을 내뱉을 때마다 술 냄새가 끼쳤다. 이네트는 핏발이 선 페르닌드의 푸른 눈을 마주하며 제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등에 손바닥을 덮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으면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놔.”

그녀가 등을 돌리려하자 그가 돌아서는 그녀의 몸을 잡아 돌렸다.

“네 발로 들어와 놓고 간다고? 아니, 안 돼.”

젖은 숨이 쏟아졌다. 이네트가 고개를 위로 올려 페르닌드를 노려보았다.

“이런 취급 받으려고 온 거 아니야. 돌아갈래.”


돌아갈 생각 따위 없었다. 몸을 섞든, 무얼 하든 페르닌드의 방 안에서 약을 가져갈 생각으로 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반쯤은 떠보려는 속셈으로 던진 말이었다. 손에 힘을 주며 그의 팔을 밀어내려고
하자, 팔 힘이 더욱 거세졌다.

“못 놔.”

페르닌드가 이네트를 품 안에 꽉 껴안았다. 이네트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밀어내려 애를 써도 그는


끄떡없었다.

“왜 왔는지 말해.”

“말했잖아, 보고 싶,”

“거짓말이라는 거 아니까 진짜 이유를 말해!”

이네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부딪혀보자는 마음가짐부터 앞서 찾아왔지만, 페르닌드는


쉽사리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것 같지 않았다. 이네트는 몸에 힘을 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페르닌드는 아무 말 없이 이네트를 껴안은 채 숨만 몰아쉬었다. 더운 숨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에 이네트조차 품속에서 겨우 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비틀리고 어그러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풀 꺾인 젖은 목소리였다. 물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에 이네트가


몸을 굳혔다.

“내가 그동안 이상한 거 시켜서 그런 거야?”

“…….”

“싫으면, 이제 안 하면 되잖아.”

이네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가 가슴 밑으로 손을 둘렀다. 손은 풍만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닿을


듯하면서도, 결코 닿지 않고 그 밑을 서성거리기만 했다.

애초에 그와 한바탕 잔 다음에, 그가 잠든 틈을 타서 약을 찾아 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덮치지


않고 마치 제 의사가 중요하다는 듯 굴자 머리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가 이래서는 안 됐다. 그는 여전히 빌어먹을 쓰레기여야 하고, 제 의사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야 했다.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면 묻지 않고 무턱대고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그래야 그를 마음껏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상처받은 소년인 척 굴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가진 약이 필요했다. 이네트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
애를 쓰며 몸을 돌렸다. 술 때문인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붉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어 손을 뻗어 뺨을 움켜쥐었다. 전보다 마른 뺨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감겼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넷…….”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너와 나, 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분명히 어릴 적엔…… 이렇지 않았는데. 이네트가 작게 속삭이며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그는 저항감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미련한 이네트. 병신 같은 이네트.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단 말이야. 희미한 과거의 잔재에 휘둘릴


필요도 없고, 약해진 그의 모습에 흔들릴 필요도 없었다. 바보 같은 이네트, 멍청한 이네트…….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가슴에 뺨을 묻었다. 차라리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나을 듯해서.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형제이나 풍기는 체취부터가 달랐다. 카시엘에게서는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고,
페르닌드에게서는 짙은 풀 향과도 같은 냄새가 났다.

풀 향과 술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아찔했다.

“술, 얼마나 마신 거야?”

이네트가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을 눈으로 가늠하며 물었다. 족히 4 병은 넘었다. 그가 말하기 싫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단 누워. 너 많이 취했으니까.”

“이넷. ……정말로,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그가 그녀에게 이끌려 침대로 가는 와중에 물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으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누워. 너 많이 취했어.”

그리고는 페르닌드를 침대에 눕히고, 이네트는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그가 제 머리맡에 앉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일도 올 거야?”

그건 알 수 없었다. 카시엘이 어떻게 나올지 그녀도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자 그가 씁쓸한 듯 웃으며 그녀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지 마. 계속 있어 줘.”

“잠들 때까지 있을게.”

“……내일.”

말과 침묵의 사이가 아물거렸다. 그 간극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며 달싹이던 그의 입술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살처럼 열렸다.

“내일도 와줘.”

이네트는 대답 없이 페르닌드의 뒤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성스레 정리해주었다. 이것 외의 답은


없었다. 이윽고 그가 크게 숨을 한번 들이키더니, 치뜬 눈을 내리감았다. 잘게 떨리던 속눈썹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떨림이 멎었고, 이내 완만해졌다.
그녀는 아직 소년티가 남아 있는 어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마가 그를 완전히 끌고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높게 뜬 달이 방 안을 비췄다.

이네트는 달빛과 술병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이어 방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점점이 흩뿌려진 술과, 나동그라진 술병들, 깨진 유리 파편…… 그런 것들에 이따금 시선을 주다가, 약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찾았다.

유리 파편이 떨어진 자리 바로 앞에 놓인 서랍장. 이네트의 시선이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는 그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려 눈을 감은 페르닌드를 바라보았다.

허리에 휘감은 손에 힘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제 허리에서 풀었다. 그리고 일어나


서랍장 앞으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에 발이 닿지 않도록 옆으로 돌아가 서랍장을 열었다.
아무리 조심해서 연다고 해도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네트는 그 소리에 저 스스로 놀라 고개를
돌려 페르닌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첫 번째 서랍장 안에는 약이 없었다. 다만, 눈에 익은 손수건이 하나 보였다. 낡고 흙이 군데군데 묻은


손수건……. 이네트는 낯익은 그 손수건을 몇 초간 바라보았다. 페르닌드도 간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페르닌드라면 당연히 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제게 짙은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누구보다 저를


혐오하고 벌레라고 칭했던 것은 페르닌드, 그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예 손수건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서랍장을 닫았다.

두 번째 서랍장을 열고, 세 번째 서랍장을 연거푸 연 뒤에야 그녀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하얀 가루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찾았다!

그녀는 곧바로 유리병을 낚아채듯이 품 안에 넣었다. 찾았다는 기쁨에 가슴이 작게 두근두근 뛰었다.
천천히 등을 돌린 순간, 이네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또렷한 눈동자에
숨이 잠깐 멎었다.

“……페르닌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녀는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아까 누운 자세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감긴 눈이 뜨였을 뿐.

침묵 속의 숨이 완서조처럼 새어 나왔다. 그녀의 입술에서 뭉개진 언어의 나열이 흘러나오기 전에, 그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이리 와.”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리 와, 이넷. 다시 안아줘.”

시트 위에 가만히 놓인 손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의 손가락이 제게 까딱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가까워지자 그가 손을 뻗었다. 마치 안아달라는 듯이. 그녀는 그 손을 당황한 듯 보다가 열린 그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품은 따스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코끝을 스쳤으나 가슴에서 피어나는 풀 향과 뒤섞여 달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냄새에 심취해 있다가,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찰나에 스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의 등을
두른 그의 팔은 햇살처럼 안온했고, 그늘처럼 안락했다. 그것에 오히려 겁이 나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페르닌드, 아까…….”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이넷.”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천천히 매만졌다. 긴장한 듯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의 혀가 움직였다. 그 혀를 보자마자 그의 아래가 본능처럼 반응했다.

서서히 부피감을 늘려가는 아래의 느낌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들쑤시고 싶었다. 제 가슴에 닿은 그녀의 젖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주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뺨에만 머물렀다. 허나 붉은 입술과 붉은 혀는 아직도 요사스럽게 그의


시야를 흔들었다. 까만 색채 위로 기어 다니는 붉은 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입술…….”

뺨을 더듬거리던 엄지가 그녀의 입술 근처로 향했다. 여전히 긴장한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입술 근처를
배회하는 그의 손가락에 눈을 내리깔았다.

“입 맞추고 싶어.”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더욱 열렸다.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와 똑같은 푸른색이나, 그보다는 좀


더 푸르고 진한 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맞부딪힌 입술 사이로 숨이 새어나가고, 타액이 뒤엉켰다. 그는 그녀의 입속을 유영하며 아까 그토록


휘감고 싶었던 그녀의 혀에 제 혀를 비볐다. 달콤했다.

오래도록 그녀의 혀와 혀 밑의 살을 쓸어내리다,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그녀가 으흣, 짧게 신음하며 그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페르닌드는 이네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비비며 그녀를 꽉 껴안았다. 온기가 따스했다.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하지만 잠들면 그녀는 곧장 품 안에서 빠져나갈 것이 뻔했다. 그는 입술을 떼며 그녀의
입가에 달라붙은 은색 머리카락 가닥을 하나하나 떼 주었다.

아무 말 없이 시선만 오고 갔다. 언제나 쉬는 법 없이 이네트를 닦달하거나 다그치고는 했는데, 오늘의


그는 그저 조용했다. 술 때문일까.

“……잠들면 갈 거야?”

그가 물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선이 어긋났다. 그는 대답을 듣기 두려운 듯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네트는 대답 대신 아무 말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 얽히는 내밀스러운 감촉에 그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페르닌드는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오늘의 그녀는 이상했다. 먼저 찾아오는 걸로도 모자라
그가 보고 싶다고 했으며, 그를 안아주기까지 했다. 손을 뻗어 잡아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까…
….

그는 흐린 눈을 하고서 생각을 지웠다. 다만 또 물었다.

“갈 거야?”

“술 많이 취한 것 같아. 얼른 자.”

페르닌드가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점차 그의 눈빛에 스민 날카로운 기색이 닳아 없어졌다. 그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이네트가 내리깔린 그의 눈을 주시하다 손을 뻗어 그의 눈두덩을 덮었다. 손의 온기에 페르닌드가


미약하게 신음했다.

그녀의 품은 따스했고, 눈두덩을 누른 손바닥 또한 온기를 머금어 나른했다. 연거푸 마신 술기운이


이제야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잇새로 고른 숨이 색색 새어 나왔다.

자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이네트의 품과 눈두덩을 누른 그녀의 손바닥이 따듯해 수마가 몰려왔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닌드가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이네트는 눈두덩에 올려놓았던 손을 떼고 품 안에 잠든 페르닌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순해 보였다.

밝은 금색 머리카락과 굳게 감긴 눈 위로 드리워진 금색 속눈썹, 매끈하게 높이 선 코, 다물린 입술.


그는 아름답다는 말에 가까운 미남이었다. 어릴 때보다 골격과 이목구비가 진해진 걸 제외하면 변한 게
없는 얼굴이었다.

얼마간 바라보았을까.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줄기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녀가 페르닌드를 껴안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익숙한 인영이 똑바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네트, 마음이 바뀌었나?”

카시엘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네트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시선을 내렸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무어라 대답하든 좋을 게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축였다.

이네트가 침묵하자 카시엘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품속에서 아이처럼 눈을 감고 있는


페르닌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가, 뒤이어 얽혀 있는 둘의 손가락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늦었어.”

술기운에 잠든 페르닌드는 잠에서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네트는 결국 껴안고 있던 페르닌드의 몸을


침대 위에 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침대에서 벗어나자마자 카시엘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잡힌 채 끌려갔다.

“아파요…….”

묵묵부답이었다. 어느새 문 밖에 기립하고 서 있던 기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기사들은 어떻게 됐어요?”

여전히 그에게서 대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후우, 한숨을 쉬고는 더 묻기를 포기했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잡혔던 손목이 놓였다. 놓이자마자 그녀가 손목을 확인했다. 그의 손자국이 붉은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다시는 새벽에 쥐새끼처럼 몰래 나가지 마.”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 아니었어요?”

“…….”

또 대답이 없었다. 역시, 어쩌면 그는 저를 떠보려고 잠자코 보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네트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얌전히 침대로 가 누웠다. 하지만 카시엘은 여전히 서서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이네트, 네가 아무리 나가려고 애를 써도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입을 꾹 다물고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던 그가 기어코 하는 말이라곤 고작 저런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을 다물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래, 약을 챙겼으면 됐지.

그녀는 품 안의 유리병을 흘긋 보고는 눈을 감았다. 얼른 사냥터에 가서 에일을 찾고 싶었다.

이네트가 눈을 감고 잠에 막 빠져들기 직전에야 카시엘이 그녀 옆에 누웠다. 뒤에서 그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이 제 목덜미를 비비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 * *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기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이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시간이 다가오기 1 시간 전,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가루약을 차에 탔다. 그리고는 감시자이자 사용인인 여자 두 명에게 약을 탄 차를
권했다.

“그렇게 서 있으면 힘들잖아. 마셔.”

뜻밖의 호의에 사용인들이 의구심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뭐야, 줘도 안 먹겠다는 거야? 내가 주는 건 먹기 싫니?”

그녀가 쏘아붙이자 사용인들의 표정에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그녀가 더욱 쏘아붙였다.

“왜? 내가 주는 건 더러워?”

“그게 아니라…….”
“그럼 마셔. 마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이럴 거면 괜히 너희들 것까지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먹겠습니다.”

그제야 사용인들이 난감한 기색을 하면서도 그녀가 준 차를 마셨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고
그들이 차를 마시고 삼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꿀꺽. 목 안으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이네트의 표정이 일변했다. 약효가
얼마 만에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약이 들어갔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잠이 들 것이었다.
그녀 또한 이전에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은 듯 잠이 들었으니까. 그때는
정신적인 피로감이 극심해 그런 줄 알았는데, 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사용인들의 또렷한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들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사용인들이 그녀가 무언가를 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대답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들이 또 한 번 그녀를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오려 애를 썼다. 그녀는 몸을 가뿐히
움직여 그들을 피했다.

몸이 허물어질 때쯤이 돼서야 다급해진 듯 연거푸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쓰러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잠이 올 거야. 좀 자고 있으렴.”

이네트는 싱긋 웃은 후,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복도를 쭉 둘러보며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필요한 호신용품을 찾아다녔다. 조그마한 칼 같은 것이라도 필요했다. 하지만 칼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비어 있는 손님방에라도 들어가 찌를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그러다 겨우 쓸
만한 걸 발견했다.

만년필. 이것이라면 눈을 찌를 용도쯤은 될 것이었다. 이네트는 만년필을 품에 챙겨 넣었다.

에일, 기다려.

이네트는 마구간으로 가 말을 꺼내어 그 인장 위에 올라탄 후, 곧바로 사냥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교대를 하는 시간인지라 기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하지만 이조차 찰나의
순간이었다. 얼른 들어가야 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르려 애를 쓰며 능숙하게 울타리를 넘어갔다.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온 사냥터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람의
손길을 거의 타지 않은 듯 긴 풀이 자라있었다. 말의 다리를 뒤덮을 정도로. 그녀는 말에게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뒤지다 보면 어딘가에 에일이 있을 것이었다.

말의 다리를 뒤덮는 풀을 헤치고 또 헤치고 나서야 그녀는 한 오두막을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그 오두막은
세월의 흔적이 여실함에도 누군가 드나든 흔적이 보였다.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은 깨끗하게 닦여있었고,
오두막의 문과 문고리도 깨끗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에일이 있다면 저곳이었다. 그녀는 오두막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두고는
오두막 문을 향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눈앞에 있을 에일을 상상하고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에일이 아니었다.

“어…….”

그녀의 숨이 멎었다. 그녀는 제 시야를 채우고 있는 것을 보고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연거푸


깜빡였다. 허공에서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리다가 이내 오두막 벽을 짚었다. 그녀가 짚은 벽에 붙은
종이가 팔랑거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오두막 안에는 에일이 없었다. 그림만이 가득했다.

이네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그림들이 빼곡하게. 그녀조차 모르는 그녀의
모습들까지도.

그녀의 입에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림이 또렷하게 보였다.

텅 빈 오두막에는 그저 벽에 붙여진 그림으로만 가득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네트는 세차게 일렁거리는 눈으로 왼쪽 벽에 붙여져 있는 그림부터 확인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별관에 있을 때의 모습이었다. 별관 앞에서 괜히 나뭇가지로 흙을 파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솜씨는 엉망이었다. 삐뚤삐뚤 그린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그림이었는데, 그래서 더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그 외에도 별관에 있는 그녀를 그린 그림이 많았다. 별관 문에 기대어 있는 그림, 가만히 서 있는 그림,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울고 있는 그림, 바닥에 앉아있는 그림, 그와 비슷한 다른 그림들…….

오두막 안을 빼곡하게 채운 그림들의 수도 물론이거니와, 그림 속의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등줄기에 오한이 돌아 몸을 떨었다.

어린아이가 그렸음직한 삐뚤거리는 그림도 어느새 점차 바른 선의 모양을 갖추고, 좀 더 면밀하게


묘사하는 그림 솜씨로 변모했다.

“아…….”

본관으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까지 그려진 것에 그녀는 탄식했다. 별관에 있을 때의 모습은 멀리서 지켜본
듯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본관에 있을 때의 그림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마치 가까이서 관찰한 것처럼 얼굴만 그린 것도 있었다.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다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젖히니 천장에도 그림이 붙어 있었다. 바닥을 제외하고 온 오두막을 빼곡하게
메운 제 그림에 그녀는 소름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다. 무서웠다.

누가…… 누가 이런 그림을…….

그녀의 시선이 곧, 오두막 오른쪽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곳엔 그녀의 가장 최근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벽을 보고 누운 그녀의 모습이…….

이네트는 설마, 하던 생각이 들어맞음에 숨이 짧게 멈추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뒤돈 자세로 자는 최근


제 모습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벼락같은 깨달음과 함께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미쳤어…… 정상이 아냐…….

그녀가 주춤주춤 뒤로 걷다 문에 툭, 부딪혔다. 그 서슬 퍼런 느낌과 동시에 그녀가 달음박질치며 묶어둔


말에게로 향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미친 새끼. 미쳤어…….

‘사냥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이 이런 뜻이었다니. 바보 같게도 에일을 숨겨놓았다고 그녀 스스로 헛발질하여 잘못 생각한


셈이었다. 어떻게든 에일을 구해보겠다고 애를 쓴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런 걸 알려고 한 짓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말에 올라탄 채, 긴 풀이 우거진 사냥터를 벗어나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울타리 근처에 서 있던
기사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이때껏 말을 탔던 경험을 괜히 쌓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삐를 틀어 그들을 잽싸게 지나쳐갔다.


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잡아!”

그녀는 어떻게든 기사들을 피해가며 저택의 후문 쪽으로 달렸다. 정문보다는 후문 쪽의 경비가 덜할


거라는 예상에서였다. 그녀가 말을 타고 달리자 이윽고 다른 기사들도 말에 올라타 그녀를 뒤쫓았다.

싫어, 잡히기 싫어!

그녀는 어떻게든 말의 박차를 가하며 속으로 빌었다. 제발 빨리 달려달라고.

하지만 후문 쪽에도 기사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그녀는 쯧, 혀를 차며 앞뒤 양옆으로 포위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아까 챙긴 호신용품을 이런 용도로 사용하게 되다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품에 넣어놨던 만년필을 꺼내 제 목에 갖다 댔다.

“막아서면 죽을 거야.”

죽이는 게 아니라 죽을 것이라 협박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동요했다. 만년필 갖고 어떻게 죽을 수


있겠냐는 듯 헛웃음을 치는 기사도 있었다. 그녀는 그 기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뾰족한 만년필 촉으로
목을 그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에서 새빨간 피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알싸하고 따끔거리는 고통에 턱에
힘을 주었다.

“죽어버린다는 말이 거짓말 같아?”

솟구친 피가 그녀의 목과 얼굴, 입고 있는 하얀 원피스까지 적셨다. 기사들의 동요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아까 그었던 곳이 아닌 그 밑의 부분을 그었다. 피가 또다시 솟구쳤다. 하얀
천이 피로 뒤덮였다.

“비켜!”

그녀는 한 손에 만년필을 그대로 댄 채,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기사들이 그녀를 예의주시하며 숨을


죽였다. 1 초가 1 분 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만년필을 다시 목에 찔러 넣을 것처럼 눈을
매섭게 뜨며 문으로 점차 향했다.
그러다 문 근처에 서 있던 기사가 그녀를 덮치려 했다. 그녀는 기민하게 그 움직임을 알아채고는 고삐를
재빠르게 틀어 기사를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보란 듯이 목을 그었다. 덮친 기사가 놀라 입을
벌렸다. 피할 줄은 예상조차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녀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녀는 그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가 죽어서 좋을 게
없었다. 아니, 죽지 않고 그저 다치기만 해도 문제일 것이다.

“문 열어.”

그녀가 문을 지키고 선 기사한테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기사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열라고!”

피가 빠져나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얼른 나가야 했다. 그녀가 만년필로 다시 목을


그어버리려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주춤거리던 기사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재빨리 말의 박차를 가해
문밖을 빠져나갔다. 머리가 어지러워 먼 곳까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공작가의 영지를 벗어남에 안도함과 동시에 걱정에 사로잡혔다.

데반 백작가로는 갈 수 없었다. 그곳은 여기서 멀뿐더러, 또다시 찾아가 그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에일만으로도 족했다.

간다면 황궁, 그곳으로 가야 했다. 이네트는 혼미한 정신으로 말을 몰았다. 목에 피 칠갑을 하고 하얀


원피스를 피로 적신 채 도로 위를 달리자 사람들이 그녀를 미친 여자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황궁으로 말을 몰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말 위에서 몸이 들썩거리자 상처가 더 벌어졌다. 피가 빠져나가 어지러우면서도 따끔거리는 고통 때문에


깨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황궁 앞에 도착했을 땐, 눈이 가물거리며 감기고 있었다. 그녀는 육중하고 거대한 황궁의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들을 보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벨라…….”

이네트가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는 목을 움켜쥐며 제 어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경비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피에 젖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있는 자라면 벨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황후가 있을 때부터 황궁을 몰래
드나들던 황제의 정부였다. 황후가 죽기 전에는 그래도 조심하는 듯하더니, 그마저도 죽고 나니
공공연하게 황궁을 드나들며 제 존재를 과시하고 다녔다. 남편이 사별하여 죽고 없는 과부라고 하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우뚝 서 있는 경비 기사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설 때마다 피 묻은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들은 그녀의 얼굴이 황제가 총애하는 정부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벨라를 찾아왔다고 전해…….”

더듬거리며 말한 그녀가 그 한마디를 끝으로 몸을 무너뜨리며 정신을 잃었다.


5. 웅크린 꽃망울

이네트가 눈을 뜬 것은 정신을 잃고 약 3 일이 지난 뒤였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가늘게 뜰 때부터 머리가 몽롱한 것을 느꼈다. 몸이 뜨겁고 무거웠다. 그녀는 손가락만 꿈틀거리며
부스스 눈을 떴다.

시야가 흐렸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이었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에 벨라가 저를 버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커튼과 그 커튼 끝을 장식한 커튼 술이었다.
뒤이어 침대, 탁자, 탁자 위를 장식한 화분, 옷장 같은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고 목을 들어 올리자마자 날카로운 고통에 이네트가 작게 신음했다. 목의 상처가 아직도


따끔거렸다. 결국, 고통에 끙끙 앓다가 침대 옆에 달린 줄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메이드 복을 입은 사용인이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온 사용인을 향해


손짓했다.

“벨라를… 불러줘.”

그녀가 가장 궁금한 것은 에일의 근황이었다. 그가 살아있기는 한지, 살아있다면 괜찮은지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다. 저 때문에 다치기라도 했다면, 그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끔찍했으니까.

이네트는 손을 들어 제 목을 쓸어보았다. 붕대가 감겨 있어 상처가 만져지지 않았다. 버려두지 않고


치료를 하고, 이 방에 데려다 놓은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우스워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켜주겠다 하여 놓고서는 결국엔 납치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던가? 그리고 구하러 오지 않아 직접


탈출하기까지 했다. 그건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처럼.

이제 이네트는 제 어미에 대해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애초에 이해가 가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기다려도 그녀가 부른 이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화가 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어머, 하는 감탄사가 들렸다.

“제법 멀쩡하네? 3 일 만에 눈뜬 것치고는.”

이네트는 분노에 덜덜 떨리는 턱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일부러 무표정을 가장하며 제게 다가오는


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래, 왜 불렀니?”

“에일은요?”

“아, 에로드.”

벨라는 제 얼굴을 보자마자 에일에 대해 꺼내는 이네트를 보고서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절박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벨라는 그녀가 에일을 제법 크게 마음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부터
눈치채긴 했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에로드는 무사해, 얘.”

“어디에 있어요, 지금? 무사한 거 맞아요?”

“그래. 내가 괜한 짓 하지 말라고 했어. 걔가 나서봤자 좋을 일 없으니까.”

이네트가 허, 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왜…… 왜 안 왔는데요? 내가 거기서 어떤 짓을 당하는지 알고?”

“뭐, 어쨌든 지금 여기 왔잖니? 생각보다 명분 없이 공작가에 들이닥치기는 어렵단다. 누구 한 명을 몰래


보낼 수는 있어도, 공작이 철저하게 사람을 받지 않던걸?”

벨라의 어투는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네가 내 딸이라는 게 밝혀진 상황도 아니고, 넌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았잖니. 네 존재를 아는


이가 공작가 사람들이랑 나랑 에로드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래서…… 안 찾았다고요?”

“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야. 누가 언제 안 찾았을 거라고 했니? 이제 데넌도 널 궁금해 하는


눈치더라.”

“데넌?”

“네 아비 말이야. 황제.”

아무렇지 않게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자연스러움에 이네트는 순간 놀랐다. 황제의 이름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벨라는 그 이름을 부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황제의 정부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실제로 황후 외의 정부를 벨라 밖에 두지 않았고, 그녀 외의 다른 여자와 만난 적 또한 없었다.


황후와의 사이에 난 아이는 둘뿐이었다. 첫째가 아나스타시아 황녀였고, 둘째는 황태자인 지크프리트였다.

그 둘을 끝으로 황제는 황후를 찾지 않았고, 공식적인 행사에서조차 그녀를 냉대했다. 행사에 참여한
귀족들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황후는 그럴 때마다 늘 평온을 가장한 척 입꼬리를
올렸으나, 그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황제의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죽었다.

이네트는 저와 눈 색만 빼고 닮은 어미를 바라보며 또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전 어떻게 되나요?”

“글쎄. 그건 데넌이 결정할 일이지. 그는 제멋대로라서 나도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잘 없었단다?”

역시나 그녀가 그녀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뜻대로 이렇게 되었다, 저렇게


되었다 반복하며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오로지 이네트, 그 자신뿐이었다.

“날 사랑하긴 하나요? 딸이라 생각하긴 해요?”


“넌 내 딸이지. 나와 데넌을 닮았으니까.”

“……그게 다인가요?”

“그것 외에 뭘 바라?”

벨라라고 이네트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말의 죄책감과 미안함을 갖고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였다. 사생아는 그저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존재만으로도
명예와 위신을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짐. 그리고 제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꾸역꾸역 아등바등 살아남은 게 조금 가엽긴 하여 에로드를 보내어 어찌 지내는지 알려


달라 한 것이었다. 이복오라비라 믿는 이들에게 미움을 살 것만 알았지, 그들이 이네트에게 탐욕을
드러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벨라는 조금 안타깝다는 듯 침대에 누워 있는 이네트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이따 몸이 괜찮아질 때 즈음에 부를 테니 그때까지 푹 쉬렴. 적어도 여기선 너를 쫓아내지 않을


테니까.”

이네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벨라는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뒤돌아 방을 나갔다.

그녀는 몰려오는 씁쓸함과 허무함에 그저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싶었다.


그녀는 생각을 지우기라도 하듯 눈을 감았다.

* * *

목의 상처는 점점 아물어갔다. 하지만 남은 흉터만큼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아 희미하게나마 남았다.


의원은 유감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흉터를 지우는 화장이 있습니다. 그걸로라도…….”

“괜찮으니 나가렴.”

이네트는 의원의 말을 자르고 넌지시 문을 향해 고갯짓했다. 의원은 짤막한 인사와 함께 허리를 숙인 후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따끔거리는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따금 목을 매만지다가 상처를 만지고


그제야 아, 하며 깨닫는 정도였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짓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곳의 방은 호화로워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었다. 욕조 안을 채운 따스한


물에서는 장미 향기가 났고, 침대도 넓고 푹신했으며 방 안의 가구들도 화려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기다리며 기약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에일이 보고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불안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그를 만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제게 다정한 햇살 같던 그가 그리웠다.

언제까지고 그와 만날 날을 기다릴 순 없었다. 이네트는 그녀가 먼저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 * *

벨라는 거의 황궁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일 밤 당연하다는 듯 황제의 침실을 차지한 그의 정부는 저를 또


찾고 있다는 딸의 소식을 떠올리고선 흐음, 낮은 한숨을 흘렸다. 황제가 한숨을 쉬는 벨라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으며 물었다.

“왜?”

“이네트가 날 찾는다잖아. 도대체 언제쯤 만날 자리를 마련할 거야? 이런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 네가


할 일이잖아.”

“그래, 그렇지.”

황제가 수긍하며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그에게 반말을 하는 이는 벨라만이
유일했다.

그는 이전과 달리 스스럼없이 제 품에 파고들며 안기는 그녀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이제야 제 손아귀에


들어온 비천한 피를 가진 고귀한 여인이었다. 갖고 싶어 마지않았던…….

“그러게, 진작에 이렇게 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웃었다.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았고, 갖지 못하면 죽여 버리고 싶었던


여자였다.

“내가 널 죽이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가 고저 없이 읊조리며 그녀와 있었던 숱한 날들을 떠올렸다.

잠행을 나갔을 때 우연히 만난 예쁘장하게 생긴 평민 여자. 첫인상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다음 잠행 때조차 우연처럼 그녀를 만나고, 그녀를 희롱하고 있는 남자를 단박에 죽이고 나서야
그는 이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누구에게도 동하지 않았던 심장이 고작 평민
여자에게 뛴다는 사실은 그에게 제법 충격적인 일이었다.

여자는 돈과 지위를 사랑했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권위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귀족인 줄 알고


그에게 알랑거리던 그녀는 제법 귀엽고 봐줄 만했다. 그러나 그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녀의
행동은 돌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노골적인 회피와 도망에도 번번이 그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고작 가난하고 예쁜 평민 여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는 이미 혼인하여 황태자비를 두고 있었다. 황태자비는 황족과 혼인할 만한 백작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의 의사는 개입되지 않은 철저한 정략 상대. 그게 다였다. 비와 다르게 안타깝게도 그는 제 비에게
아무런 사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상조차 흐릿했다.

자유를 사랑하는 벨라는 평생 정부로 종속될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데넌은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가 생겼을 땐 족쇄가 생겨 기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서 마구 소리를 지르던
벨라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배를 마구 때리며 차라리 애를 죽이겠다던 그 광기에 사로잡힌 붉은 눈.
애증으로 범벅된 그 눈동자. 그는 그 눈동자마저 사랑했다.

그는 아이가 족쇄가 되리라 생각해 그녀의 행동을 막았고, 결국엔 아이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족쇄가
되리라 생각했던 아이는 족쇄가 되지 못했고, 그렇게 아이의 가치는 사라졌다.

어떻게 생겼더라. 그는 잔상처럼 남은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은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졌다는 점뿐이었다. 그와 그녀의 결합이라는 것의 증명.

그가 아이의 가치가 사라졌음에도 아이를 죽이지 않고 공작가에 버리듯이 떠맡긴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벨라와 닮아서. 그뿐이었다. 그리고 공작이 지나치게 올곧고 고지식하며 유능한 신하인 탓도 있었다.
그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면서도, 반기조차 들지 않고 꿋꿋하게 참을 만한 개는 공작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어찌 되었든 벨라는 지금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릴 때도 있었다. 그는 그녀의 폭력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가 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겨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가 그런 것처럼 그녀에게 소중한 것은 오롯이


그여야만 했고, 그가 아닌 다른 것을 손아귀에 쥐어서는 안 됐다. 전부 그의 뜻 아래 이루어져야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명분을 위해서라도 한미한 남작 가문과 결혼하지 않았고, 작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자의 성으로 불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으니. 차라리 성이 없는 비천한 평민 여자로 남는 것이 나았다. 권력은 그가 쥐여주면 되는
문제였다.

기억을 되짚은 그가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물었다.

“지금도 널 닮았어?”

“그래. 잘못하면 착각할 정도로. 눈 색은 너와 같고.”

그래……? 데넌이 피식 웃었다. 벨라와 닮았다는 말에 흥미가 치솟았다. 어떨까. 그가 손가락으로 벨라의
은색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한 번쯤은, 만나볼 만했다.

“데넌, 나 좀 귀찮게 하지 말고 네가 알아서 해.”

“…난 너 말고 다른 거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벨라의 뺨과 입술을 손가락으로 스치듯 만지던 데넌이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제 아래에 깔아 눕혔다. 이제
서른여덟이 된 그는 전조도 없이 그녀에게 발정하고는 했다. 그녀는 또다시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그를
흘겨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몸 위로
그림자를 뒤엎었다. 아직 밤은 길었다.
* * *

벨라를 두어 번이고 찾고 나서야 드디어 부름을 받았다. 이네트는 그간 응답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희미한
불쾌함을 느끼며 사용인들이 안내하는 대로 뒤따랐다.

이 넓은 황궁에 대해서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지나갈 때마다 이곳에 있는 사용인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고귀한 이에게 그러하듯이. 실은 모든 제국민들이 깔보며 수군거리는
사생아인데도.

황궁은 넓었고 화려했다. 화려하지 않은 게 없었다. 지나갈 때마다 사용인이 아닌 다른 귀족들과도


마주쳤으나, 이네트는 고개를 숙이며 따라붙는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황제가 있는 태양궁에 도착했다. 삼엄한 경비병들을 지나쳐 황제가 있는 집무실 앞에 섰다.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이 이네트가 왔음을 알렸다.

얼마 있지 않아 안에서 문이 열렸다. 이네트는 안에서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그 문 틈새 안으로 비치는


광경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황제와 벨라는 당연하다는 듯 함께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멀리서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데넌이 눈을 휘었다.

“정말이네. 벨라, 너와 닮긴 했어.”

그는 이네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벨라와 비슷했으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랐다. 농염한 인상의 벨라와 달리 이네트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벼랑 위의
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흰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이 긴장한 듯 작게 떨렸다.

“착각할 만하지 않아?”

“아니, 전혀.”

벨라의 물음에 데넌은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못 박은 듯 가만히 서 있는
이네트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

이네트는 제게 손짓하는 황제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와 벨라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황제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짙은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남색
머리카락과 그녀와 닮은 푸른 눈동자에 그녀는 순간, 황제가 새벽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젊고 아름다운 미모에 그녀는 조금 당황하였으나, 이내 갈무리한 표정으로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당당한 시선에 데넌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었다.

“오, 이런 태도는 벨라 너와 닮은 것 같아.”

“맹랑한 구석이 있긴 해.”

“너처럼.”
이네트는 저를 앞에 두고 말을 주고받는 그들을 차가운 눈동자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네트가
그런 눈동자로 바라보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원하는 것을
내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결국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본론부터 꺼냈다.

“에로드 데반은 어떻게 되었죠?”

그녀의 물음에 황제는 눈썹만 까딱였다. 그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더니 아, 하며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데반 백작가의 막내아들 말인가?”

“네. 어떻게 되었죠? 무사한가요?”

“이네트. 그 애는 잘 있다고 말했잖니. 지금 백작 가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대수롭지 않은 어조에 이네트가 발끈 했다.

“그렇다면 보게 해줘요. 여기로 부르든, 내가 가든. 얼굴이라도 봐야겠으니까.”

그가 안전하다는 확신을 받고 싶었다. 지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리움에 속이 타들어갔다.

“무사히 백작가에 있는 건가요? 아무 일 없는 게 맞아요?”

“그렇겠지.”

벨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이네트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렇다면 그와 얼굴 한 번 보게 해달라고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그가 무사한 걸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게!”

그녀가 드물게 소리 높이며 악을 쓰자 벨라가 어머, 감탄사를 내뱉더니 후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확실히 에로드에 관한 일이라면 예민하구나. 그가 마음에 드니?”

“그와 함께 수도를 떠나 살기로 했어요. 제게 로델리아라는 성과 남작 작위를 준 건 어머니잖아요! 내가


그와 어떤 마음으로 결혼할 마음을 먹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그래. 정확히 말하면 그 성을 준 건 황제인 네 아버지지.”

벨라의 말대로 이네트에게 주어진 것은 황제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언제든 황제의 말 한마디면 번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녕 부모가 맞단 말인가? 지금마저도 저울질하듯 구는 태도에 이네트는 당장이라도 길길이 날뛰며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란 물건들은 그들에게 힘껏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네트는 이제 더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품고 싶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기 바라는 것이 이리 힘든


일이란 말인가? 그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에일과 함께 약속했던 리고르 해안으로 내려가, 그들의 간섭
없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들이 그녀를 찾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오두막에서 보았던 그 그림들이 떠올랐다. 그 집요함에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어디로 가든 집념


어리게 뒤쫓아 올 것 같았다.
어쩌면…… 다시 잡힌다면 아예 지하실에 가둔 채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황제와 벨라는 늘 그랬듯이
나서서 이네트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에일 또한 아무리 도와주려 애써도 저를 꺼내주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금 혼자 발버둥 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끔찍했다.

확실한 패가 필요했다.

“제가 황제의 피라는 걸 밝혀주세요.”

흥미롭다는 듯 반짝이던 그의 눈이 단박에 굳었다.

“그래야 그들이 절 함부로 붙잡지 못할 테니까요.”

그녀 또한 이제 그들처럼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받을 수 있는 것,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요구할 것이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사생아라는 모욕, 수치, 그런 것 따위 다 상관없었다.

“이때까지 방치한 대가치고는 크지 않을 텐데요.”

“…….”

“제가 그 저택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치욕을 맛보았는지 모른다면…… 감히 안 된다고 해선 안 돼요.”

이네트의 턱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황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떠는 가느다란 몸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벨라를 바라더니 무언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벨라, 네가 했던 말과 비슷한 거 같지 않아? 내가 일개 귀족인 줄 알았을 때 말이야. 설마 네 처음을


가져가 놓고서는 책임지지 않을 생각이었냐고 하면서 돈을 요구했잖아.”

벨라가 피식 웃었다. 데넌의 말 대로였다.

벨라에게도 이네트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다. 빛바랜 가난한 시절이면서, 또 그만큼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다. 온 제국 곳곳을 쏘다니며 방랑하였으니까. 이제는 희미한 옛 기억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추가 발목에 달려있었다. 그녀는 제 딸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제 얼굴이


겹쳐 보였다. 우습게도.

벨라는 얼마간 이네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농염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데넌은 벨라를 가만히 끌어안은 채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그녀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

“이제야 밝히는 건 좀 늦은 것 같긴 한데, 벨라 네 생각은?”

“……이제 와서 밝히자고? 수치와 불명예가 뒤따를 텐데?”

“네가 원한다면. 이미 곤두박질 칠 명예도 없잖아, 우리.”

그의 말이 맞았다. 이미 떨어질 명예도 없었다. 벨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표정을 흐렸다.

그의 정부로서 산 시간만 20 여 년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의 말대로 변심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녀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그에게 묶여있었고, 그녀 또한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고 제 감정을 인정하고서 자유를
포기했다. 수치와 손가락질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다 감내한 결과였다.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마른 딸의 몸에서 제 과거의 잔영이 보였다. 벨라는 가난했던 젊은 시절이 시야에서
아물거리자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그녀도 저 애처럼 자유를 꿈꾸며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그래. 그렇게 해줘, 데넌.”

“정말?”

“그래, 정말로.”

뜻밖이라는 듯 데넌은 흐음,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 네가 원한다면. 그래, 어떻게 밝혀줄까? 늦게나마 너를 위한 연회라도 열어줘?”

“네.”

이네트가 곧바로 대답했다. 많은 사람에게 밝혀지면 더 좋았다. 사생아라는 모욕도 좋았다. 황제의
피라는 그것만으로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지고의 위치에 서게 될 테니까. 사생아라 무시당한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함부로 건들 수 없는 황제의 피가 섞였으니까. 그녀는 지위와 명예 따위엔 관심
없었다.

이네트는 드물게 진심으로 기뻐서 웃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이네트는 에일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 * *

이네트가 사라진 뒤, 페르닌드는 전보다 더욱 술에 더 빠졌다. 술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술에 취해 비틀거렸고, 기사단에도 드문드문 출근했다.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기사단 내에서도 뒤에서 말이 많이 오고가고 있었다. 공작가의 자제이자, 형이


기사단의 단장이기에 곧바로 사임당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술에 취해 사용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방 안의 물건들을 부수는 건 예사였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매일 같이 울렸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시엘은 또 한 번 제 곁을 떠난 이네트를 떠올렸다.

가둬두었다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그가 아는 이네트는 그렇지 않았다. 아슬아슬하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꼿꼿이 섰다. 가두고, 꺾고, 억지로 붙들어봤자 언젠가는 빠져나가고 말 것이었다. 그렇기에
느슨하게 풀어두고, 경비를 삼엄하게 강화했다. 하지만 그녀는 제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까지 처절하게
도주했다.

오두막에 있던 것들을 봐서?

아니면, 그 남자 때문에?

어떻게 해야 도망치지 않지? 어떻게 해야? 카시엘조차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묶어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제나 그는 답을 찾아냈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답을 찾지 못하고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이네트, 그녀가 유일했다.

희멀건 얼굴로 곧 죽을 것처럼 앓다가도, 결국엔 그의 품에 파고들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품 안에 있었다. 허나, 신기루처럼 그녀는 또다시 사라졌다.

여전히 카시엘은 답을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한 페르닌드가 카시엘에게 원망을 쏟아부었다.

“황궁에 황제의 정부랑 닮은 여자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해. 알아?”

“…….”

“이네트야. 이넷이라고.”

이미 황궁뿐만 아니라 제국에 있는 귀족들에게도 알음알음 퍼진 소문이었다.

황제의 정부와 닮은 여자. 은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미인.

어느 누구는 황제의 새로운 정부일 것이라 떠들었고, 어느 누구는 황제의 정부가 몰래 숨겨두었던
딸이라고 떠들었다. 그 누구도 갑작스레 등장한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나, 소문을 들은 카시엘은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이네트였다.

그래, 이네트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한눈에 띌 만큼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랬기에 더욱 꽁꽁


숨겨두었어야 했다. 오로지 제 곁에만 있어야 했다. 오로지 이곳에서 저만을 바라보며…….

“이넷…….”

술에 취한 페르닌드의 입에서 연이어 이네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그가
이윽고 비틀거리며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에는 힘이 없었다.

카시엘은 술기운에 쓰러져 잠든 제 동생을 내려다보며 얼음장처럼 굳은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못 박히기라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카시엘.’

또 환청이 들렸다.

‘카시엘.’

귓가에서 스러지는 조그마한 목소리…….

그가 아무리 듣지 않으려 해도 귓가에서 계속 울렸다. 카시엘, 오라버니, 놔줘요, 그만해요, 그만…….


우는 얼굴과 흐느끼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들었다. 그는 또다시 홀린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유리 파편들을 밟으며 창으로 향했다. 창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네트의 눈과 닮은 달만
휘영청 떠 있을 뿐이었다.

* * *
황제가 드물게 대규모 연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황제의 뜻에 따라 황궁에서 보낸 초대장이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수도를 제외한 영지에 있는 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황제가 먼저 나서서 연 연회는
굉장히 오래간만이었기에 귀족들 사이에서 연회의 주인공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말로는 연회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이네트의 존재를 알리는 데뷔탕트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에
이네트는 날마다 황실의 예법과 춤에 대해 배워야만 했다.

귀족들에게는 물론이고 아랫것들에게도 소문이 퍼졌는지 그녀를 대하는 사용인들의 태도가 더욱


극진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활동 반경 또한 넓어졌다. 황제가 전속 시녀까지 붙여주어 이제는 궁
안뿐만 아니라 궁 밖에 있는 정원에도 갈 수 있었다.

이네트는 목의 상처를 가려주는 화장을 하고, 사용인들이 입혀주는 드레스를 입은 뒤 밖으로 나섰다.
바람은 쌀쌀하지만 날이 따스했다. 얼굴을 비추는 햇빛에 이네트는 미약하게 눈을 찌푸리며 넓은 복도를
지나 가까운 정원으로 향했다.

이네트가 있는 곳은 서쪽 궁이었다. 황제의 궁은 북쪽에, 황태자의 궁은 동쪽에, 여인들의 궁은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넓은 황궁에는 궁마다 정원에 있었고, 그 정원의 크기조차 남달랐다. 유리 온실
또한 존재했다.

이네트는 정원에 한 아름 핀 꽃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드물게 느끼는 평화였다. 이제 연회가


열릴 날을 기대하며 예법과 춤을 갈고닦기만 하면 되었다. 그때, 에일도 볼 수 있겠지.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꽃에 맺힌 물방울을 툭, 건드리며 의미 없는 손장난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가 소리가 나는 쪽을 고개를 돌렸다.

남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와 그와 달리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이네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느낄 수 있는 확연한 존재감에 이네트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제게 다가오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가온 그들 중에 만면에 웃음을 띤 남자가 이네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보다 누이인가?”

휘파람 같은 목소리였다. 이네트는 남자의 경쾌한 어조에 굳었다가 수 초가 지나서야 그들이 입은 옷이나
뒤에 따라붙어선 사용인들을 알아차렸다. 남자의 머리 색이 황제의 머리 색과 복사한 듯이 똑같았다.

이네트는 황급히 그들이 황태자와 황녀라는 것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 한 채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 예법은 그만둬. 필요 없으니까.”

남자는 여전히 웃음을 매단 얼굴로 이네트에게 악수를 권했다. 이네트는 당황하여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의 악수를 받았다.

“지크프리트 마르델 아르비스. 편하게 지크라고 불러도 돼. 누이니까.”

이네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 손을 붙잡고 흔드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스스럼없는 탓이었다. 지크프리트의 옆에 선 이네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나스타시아다.”

둘 다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에게 하대하는 태도가 몸에 익어 보였고, 눈빛 또한


오만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당당했다. 목소리 또한 힘이 있는 어조에 또렷했다. 그들이 가진 품위에
이네트는 순간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의식적으로 몸을 펴고 그들과 눈을 마주했다.

“이네트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뒤, 이네트는 그의 손에 쥐인 제 손을 빼려고 했다. 허나 그가 씩 웃으며 도리어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녀의 머리가 그의 가슴에 약하게 부딪혔다.

놀란 이네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휘어진 회색 눈 안에 그녀가 담겨있었다.

“나도 아버지와 취향이 비슷한가 봐.”

그는 능숙하게 품 안에 들어온 이네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이었다. 황제와


비슷한 이목구비임에도 확연히 다른 태도와 분위기에 이네트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어깨를 지나 제 손등을 어루만질 때 즈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며 멀어지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웃는 낯은 여전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시아가 지크프리트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적당히 하렴, 지크. 배다른 누이에게까지 네 더러운 아랫도리를 휘두를 셈이냐?”

“누이, 말이 너무 심하잖아. 더러운 아랫도리라니.”

아나스타시아의 신랄한 쏘아붙임에도 지크프리트는 익숙하다는 듯 장난기가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네트를 향해 말했다.

“무례를 저지르려고 한 건 아니야. 다만 반가워서.”

회색 눈이 천천히 이네트의 얼굴을 훑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누이가 생겼다잖아.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은근히 탐색하는 눈길에 이네트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탐색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계산적인 눈빛을 간파한 그녀는


구겨지는 표정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눈빛 같기도 했다. 그 애매모호함이 섣부른
행동을 유보시키고 있었다.

“춤과 예법을 배운다던데…… 어렵진 않아?”

“……괜찮아요.”

지크프리트가 걱정 섞인 어조로 물었고, 이네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세세한 자세까지 교정시키려 드는


것은 힘들었으나, 감내할 만했다.

“언제든 상대가 필요하면 불러.”

그는 얼마든지 되어주겠다는 듯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네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옆에 선 아나스타시아를 향해 시선을 건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사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둘의 태도는 담백하면서도 애매했다. 이네트는 제 배다른
형제자매를 보며 어색한 침묵을 곱씹었다. 입 안의 말이 모래알처럼 씹히다 삼켜지기를 반복했다.

침묵을 깬 것은 예상외로 아나스타시아였다.

“어미와 달리 움츠러든 것이 마치 초식동물 같구나.”

그녀는 이네트의 마른 몸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저 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 태도로 황궁에서 살아남기는 힘들 텐데.”

조언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이었다. 이네트가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시아는 그 말 이후로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르다가, 지크프리트가 “그럼 이만.” 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등을 돌렸다.

이네트는 폭풍처럼 왔다가, 고요하게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 * *

연회를 앞두고 이네트는 황실에서 가르치는 예법과 춤 교육에 매진했다. 매일매일 시간에 맞춰 예법
선생과 춤 선생이 와서 그녀를 교육했다.

예법은 자세부터 시작해서 걸음걸이, 손의 위치 같은 것까지 세세하게 교정하려 들어서 피곤했으나 춤은


나름 재미있었다. 몸을 움직이며 이리저리 발을 움직이고, 회전하는 동작 같은 것들은 능숙하지 못해도
즐기기엔 충분했다. 춤 선생은 그녀가 춤에 흥미를 붙이자 좋은 태도라며 칭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미를 느끼는 것뿐이지, 실력은 그리 능숙하진 못했다. 연습이 더 필요했다.

그 때문에 이네트는 방 안에서 홀로 스텝을 밟으며 발목을 유연하게 움직이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수로라도 스텝을 잘못 밟아 상대의 발을 밟으면 안 되니까. 괜히 구설수에 올라 망신을 사기는 싫었다.

벽을 붙잡고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데, 방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방에 먼저


찾아올 사람은 벨라 밖에 없었다.

이네트는 당연히 찾아온 사람이 벨라인 줄 알고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춤 연습에만 몰두했다.

“누이.”

하지만 들린 목소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의 목소리였다. 이네트가 놀라 연습하던 것을 멈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며칠 전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지크프리트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더욱 깊이 지어 보이며 살짝 열린 문을 마저 닫았다.

“춤 연습은 잘 되어가고 있어?”

며칠 전 그가 한 말이 이네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제든 상대가 필요하면 불러.’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네트는 제 눈앞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벙찐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네트의
어리둥절한 얼굴에도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춤 상대가 되어준다고 했잖아.”

그가 능숙하게 스텝을 밟으며 이네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연스러운 몸짓에 그녀가 몸을 뒤로 물릴 새도


없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스텝도 못 밟아?”

그의 물음에 그녀가 순간 발끈하여 눈을 샐쭉하게 떴다.

“스텝 정도는 저도 할 줄 알아요.”

“아, 그래? 그럼 턴은?”

“그것도요.”

기본적인 것쯤은 배웠기에 능숙하진 못하더라도 할 줄 알았다. 저를 놀렸다는 생각에 그녀가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리자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 괜찮으면 나를 상대로 해봐. 남자를 상대로 춰본 적 있어?”

“……아뇨.”

“그럼 내가 누이의 첫 상대가 되겠네.”

그는 기쁜 듯 눈을 휘며 이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찾아와 퍽이나 오래 만난 사이처럼


자연스레 구는 그가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이네트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지크프리트의 손은 크고 따듯했다. 그는 이네트의 손을 꽉 쥐더니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그녀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가락에 상처가 있어, 누이.”

며칠 전, 꽃을 만지다가 가시에 찔려 난 상처였다. 그리 크지 않은 상처인데도 용케 알아본 것에 놀라


이네트가 눈을 토끼처럼 댕그랗게 떴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눈에 보여서 한 말이야.”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누이, 내 어깨에 손을 얹어.”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쥔 채 위로 올리고, 나머지 손은 겨드랑이 밑에 두르더니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가 스텝을 밟는 대로 따라가듯 발목을
움직였다. 배웠던 대로 속으로 숫자를 세며 발을 움직였으나 이상하게도 발이 꼬였다.

“긴장하지 마. 발 밟아도 되니까 편하게 움직여.”

지크프리트가 가볍게 턴을 하며 말했다. 이네트는 앗, 작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회전시켰다. 빙그르르 도는 시야에 그녀는 순간 아찔해졌다.

“잘하는걸?”

누가 봐도 뒤늦게 따라 한 어색한 턴이었음에도 그는 정말 잘했다는 듯이 칭찬하며 싱긋 웃었다. 그


태도에 이네트는 더 부끄러워져 괜스레 그의 발끝을 툭, 쳤다. 발끝이 채인 그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누이, 생각보다 성격 있는데?”

그가 웃으며 이네트의 어깨를 잡은 채 또다시 턴을 시도했다. 이네트가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지크프리트의 발을 콱 밟으며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묵직하게 밟히는 촉감에 이네트는 순간 ‘뭐지?’
하며 멈칫했다가 이내 그의 발을 밟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 발을 뗐다.

“밟아도 돼.”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녀의 발에 제 발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는 가까이 당겨 안으며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그녀는 그와 발을 딱 붙인 채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슬쩍 시선을 위로
올리자 여전히 휜 눈동자와 함께 그의 어깨너머로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이 친근한 사이처럼
달라붙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 모습임에도 낯설어, 이네트는 거울 속의 모습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고정했다.

“누이. 발 전체를 바닥에 두지 말고, 앞코만 바닥에 대어 봐.”

지크프리트의 말에 이네트가 발을 세워 앞코만 바닥에 대었다. 자연스레 그에게로 무게가 쏠렸다. 그는


그 무게를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받아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누이의 오른발을 내 발 사이에 두고.”

그녀가 그의 말에 그대로 따라하자 그가 잘했다는 듯 그래, 속삭였다.

“그렇게 스텝을 밟아. 왼쪽 발은 오른쪽 발 뒤에 두고. 그렇지.”

지크프리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이네트의 손등을 다정하게 쓸었다. 그녀가 몸을 살짝 떨었다.

“내가 가는 대로 따라가듯 움직이면서 스텝을 밟아봐. 알았지?”

“응. 아니, 네…….”

긴장감이 풀려 반말을 했다가 놀라 바로 존댓말로 정정하자 그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반말해도 되는데.”

“아니, 그래도…….”

“누이 편한 대로 해. 난 괜찮으니까.”

“……네.”

어릴 때부터 남매로 지낸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인 데다 그는 황제 다음으로 지존이라 할 수


있는 황태자 신분이었다. 아직까지는 동생이라기보다는 황태자라는 느낌이 강하여 반말하기엔 어색했다.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까와 표정이 그린 듯이 똑같았다. 그녀는 늘 미소를


유지하는 그의 표정이 이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이네트의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스텝을 반복해봐, 누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운 대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을 뒤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앞으로
가면 그가 뒤로 가고, 그러다 그의 등이 벽에 닿으면 그가 다시 앞으로 가고, 그녀가 뒤로 가기를
반복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점차 스텝에 리듬감이 붙어 움직임이 경쾌해졌다.

“그 리듬감을 유지하면서 그대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봐.”

이네트가 시계 방향으로 빙글 돌자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움직임에 맞게 그 또한 따라 턴을 했다. 아까보다


한결 턴이 부드러웠다. 경쾌한 스텝과 부드러운 턴이 이어지자 그녀의 표정에 웃음기가 서렸다.

“잘하는데? 그럼 또.”

그녀가 다시 또 그의 다리 사이에 오른발을 넣은 채로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누이, 소질 있는데?”

다시 몇 번이고 턴이 반복됐다. 계속 한 방향으로 돌아 머리가 어질거리자 그가 반대 방향으로 턴을


유도했다. 이네트가 발을 바꿔가며 턴을 하고, 뒤이어 스텝을 연이어 밟았다.

신발 앞코를 이용해서 통통 튀듯이 스텝을 밟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지크프리트는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임에도 마치 그녀를 어린 여동생을 보듯이 이네트를 쳐다보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응, 그렇게.”

어느새 이네트는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스텝을 밟고, 턴을 하며 넓은 방을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춤을 추는 이네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긴장한 얼굴로 잔뜩 움츠린 초식동물 같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느새 긴장과 경계를 푼
그녀의 모습은 생기발랄한 소녀 같았다.

눈동자는 활력을 머금어 반짝거렸고, 뺨은 생기 가득한 혈색이 돌아 불그스름했다. 움츠러든 며칠 전에도


제 취향을 빼다 박았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더욱 마음이 동했다.

누이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지크프리트는 아쉽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트리면서도, 형식적인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온 미소를


입꼬리에 매달았다.

“누이, 첫 춤 상대는 정해졌어?”

“아뇨.”

“잘됐다. 내가 누이의 첫 춤 상대가 되면 되겠어.”

황태자의 첫 춤 상대? 이네트는 사교계에 데뷔한 적도 없고, 복잡한 사교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황태자의 첫 춤 상대가 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돼요……?”

이네트가 망설이며 묻자 지크프리트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연회의 주인공은 누이잖아. 그 옆에 서 있으면 내가 더 영광일 것 같은데.”

그가 그녀를 품 안으로 바짝 당겨 안으며 말했다. 긴밀해진 접촉에 그녀가 몸을 살짝 굳히며 뒤로 물리자


그는 순순히 그녀를 품에서 놔주었다.

이네트는 아직도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손…….”

그녀가 중얼거리듯 작게 말하자 그제야 그가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는 떨어진 온기에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기 싫지만 이제 슬슬 가야 해. 누이, 시간이 나면 또 올 테니 그땐 반겨줘야 해?”

지크프리트가 가볍게 이네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문을 열었다. 나갈 때까지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과 같았다. 폭풍처럼 갔다가, 고요하게 다시 사라지는 것이. 이네트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는 그가 사라진 문을 수 초 동안 바라보았다.

* * *

「형, 밤이 되면 이넷의 방으로 와.」

페르닌드가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며 카시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카시엘이 유리병 안에 든 가루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페르닌드가 덧붙였다.

「깊은 잠에 빠지게 해주는 약이야.」

기어코 페르닌드는 일을 저질렀다. 식사시간 때마다 제 누이를 바라보던 눈길은 결코 남동생의 눈동자가
아니었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음에도, 이렇듯 직접적으로 손을 뻗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카시엘의 싸늘한 눈빛에도 페르닌드는 삐뚤게 입매를 올린 채 등을 돌렸다.

처음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허나, 밤이 무르익은 늦은 밤. 카시엘은 홀린 듯 그들이 있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시엘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그의 동생 페르닌드가 잠든 이네트의


옷자락을 위로 들춘 채, 그녀의 배와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가 그녀의 쇄골 위로 끌어 올려져 상체의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카시엘은 못 박힌 듯 문


앞에 서서 페르닌드가 그녀의 굴곡진 허리의 선을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으음….」

잠든 이네트가 잠꼬대를 하며 몸을 가볍게 뒤틀었다. 페르닌드는 그런 이네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좀 더 위로 올려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얀 가슴이 페르닌드의 손아귀에서 뭉개지며 유두가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페르닌드는 손가락
사이에 낀 탐스러운 유두를 혀로 핥았다. 이네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숨소리도 일정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카시엘이 그들 곁으로 점차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이네트는 더욱 아름다웠다.


젖가슴에 미약하게나마 남은 손자국에 카시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페르닌드가 한쪽 젖가슴을 주무르며 손을 아래로 내려 다물린 이네트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이미 속옷은


아래로 끌어 내려져 그녀의 발목에 걸려 있었다. 페르닌드의 손가락이 메마른 밀지를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중지를 밀지 안에 조심스레 삽입했다. 아직 뻑뻑한지라 한마디만 겨우 들어갔다.

「으응…….」

눈을 감고 있는 이네트가 몸을 움찔하며 벌어진 다리를 작게 움직였다. 페르닌드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후, 넣었던 손가락을 빼고 구멍 근처를 손가락으로 배회하며 아직 부풀지 않은 클리토리스를
튕기듯 만져댔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금이 갔다.

「아…….」

깊이 잠든 몸이어도 계속되는 자극에 아래에서 점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읏….」

카시엘은 페르닌드의 손가락이 이네트의 붉은 속살을 매만지고 짓누르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그녀가 흘린 애액으로 흥건히 젖은 손가락이 그녀의 구멍 안으로 서서히, 집어 삼켜지듯 들어갔다.

이네트의 숨이 가파르게 달아올랐다. 카시엘은 점점 묵직해지는 아래를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잠든 여동생을 바라보며 욕정하는 오라비라니.

역겨움과 동시에 그는 강렬한 욕망에 잠식당했다. 페르닌드의 손가락이 안팎을 왔다 갔다 반복하면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올 때마다, 그의 자제심 또한 강하게 뒤흔들렸다.

「아… 아응….」

그러다 그녀의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들은 순간, 견고하리라 믿었던 자제심은 얄팍한
종이 한 장처럼 덧없이 무너졌다.

카시엘이 페르닌드가 물고 빨았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체에 한 번도 손 댄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세게 문질렀다.

「형, 너무 세게 문지르지 마. 그러다 깨.」

페르닌드가 카시엘의 손안에서 뭉개진 이네트의 가슴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내벽을 문지르며 안을 넓혔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갈 땐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갈 땐
쯔걱거리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렸다. 연신 그녀의 안을 넓히던 페르닌드가 못 참겠다는 듯 잠든 이네트의
입술을 덮쳤다.

닫힌 입술을 혀로 열어젖히고 축축하고 습한 입 안을 훑고 쓸었다. 가슴을 주무르고, 아래를 쑤셔도


그녀의 입에서는 옅은 신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오랜 키스 끝에 페르닌드가 짧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바지의 버클을 내리고 이미 액을 질질 흘리는 성기를 꺼내어 이네트의 입술에 문질렀다.

「윽, 씨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입술에 쌀 것 같았다. 페르닌드는 사정감을 억누르며 이네트의 입술에 젖은 성기를
문댔다.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성기에 닿았다. 그의 입에서 연거푸 욕설이 터져 나왔다.
결국 이네트의 입가에 성기를 몇 번 문지르던 페르닌드가 얼마 안 가 그녀의 입술에 정액을 싸질렀다.
예상보다 빠른 사정에 페르닌드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카시엘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채, 제 동생이 그녀의 입술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죄다 싸지르는 광경을
고스란히 목도했다. 페르닌드는 「젠장.」 나지막이 욕을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입술에 묻은 제 정액을 입
안으로 남김없이 넣어 삼키게끔 했다. 페르닌드의 입술에 묘한 웃음이 매달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형, 우리는 공범이야. 그렇지?」

마치 저만 이네트에게 욕정한 게 아니라는 듯이.

「형이 그랬잖아. 이넷은 더러운 창녀의 딸이라고.」

카시엘이 어린 페르닌드의 면전에다 대고 말했던 창녀라는 단어가 이제 와 흘러나왔다. 페르닌드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떠들던 말을 모조리 이해했다. 창녀, 정부, 사생아, 조산……
그리고, 제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서도.

카시엘은 제 동생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았음에도, 아무 말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와 제가 한 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잘 알았기에.

그조차 그녀를 눈에 담고, 그 순간을 종이로 담아 몰래 오두막 안에 전시하지 않았던가.

그는 짧은 비웃음을 내뱉은 후 고개를 돌려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붉어진 입술이 액에 젖어


번들거렸다. 그 입술을 바라보며 카시엘 또한 앞섶을 풀어헤쳤다.

* * *

시간이 날 때 오겠다던 지크프리트는 하루에 한 번, 2 시 즈음이 되면 출석 체크 하듯 방문을 두들기고


이네트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생긋 웃으며 들어오는 얼굴이 이제는 익숙했다.

“누이, 나 왔어.”

이네트는 그의 상쾌한 인사에 살짝 손을 흔들었다가 이어 고개를 까딱 숙였다. 지크프리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방 안에 그의 웃음소리가 들어찼다.

“누이도 참. 그렇게 인사 안 해도 된다니까. 나한테 고개 숙일 필요 없어.”

그가 괜찮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신분을 무의식이 계속해서 체감하는지 손을 흔들다가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네트가 작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이어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희미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연습하고 있었어?”
“네. 가볍게…….”

그가 올 시간에 맞춰서 함께 추면 되기에 이전보다는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스텝과 턴은 그와


반복적으로 연습하다 보니 실력이 이전보다 월등히 늘어 춤 선생이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에 실력이
늘었냐며 감탄하기까지 했다. 황태자와 춤 연습을 함께 했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은 리르넷(*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 말고 에데이아(*여러 명이 함께 추는 춤)를 연습해볼까?


에데이아는 출 줄 알아?”

“배우긴 했어요.”

에데이아는 리르넷보다 쉬운 편이었다. 어려운 동작이 없는 데다 다른 사람과 함께 추며 그럴듯하게


스텝을 밟고 움직이면 되기 때문에 웬만한 몸치도 출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춤이었다.

“그럼 어느 정도는 하겠네. 누이, 손 줘 볼래?”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자 그가 손을 옆으로 길게 쭉 뻗더니


경쾌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연회에 참석한 남자들 모두 누이와 손을 잡고 싶어 안달이 날 거야.”

그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쥔 채 장난스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그의 너스레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장난 같아 보이겠지만 장난 아니야. 누이는 아름다우니까, 누이를 본 모든 남자가 누이에게 반하고


말겠지. 그런 누이의 옆자리는 내 것이겠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정말인걸. 지금도 누이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황궁은 물론이고 수도에도 퍼졌어.”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사실이었다. 황궁에 들어온 미인에 대한 소문은 황궁은 물론이고 제국에도


파다했다. 그녀가 얼굴을 딱히 가리지 않고 궁 안을 자유롭게 쏘다녔기 때문에 지나가다 마주치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아랫것들까지 그녀의 외모에 대해 떠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문은 과장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여인을 숱하게 봐온 지크프리트조차 이네트를 처음 보자마자 시야에 들어찬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그녀 한 명만 보였으니까.

“누이는 아름다워. 진심이야.”

지크프리트의 회색 눈동자가 이네트의 얼굴 곳곳에 닿았다. 그녀는 그의 다정한 눈길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이따금 그의 눈빛이 애정을 머금을 때마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곧바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했다.

이전에 황녀가 했던 ‘더러운 아랫도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여자관계가 복잡한 것 같던데, 정말로 그는 바람둥이인 걸까? 그 때문에 원래 눈빛이 저런 걸까? 나


말고도 누구에게나 이런 눈빛을 보내는 걸까?

원래 잘 웃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면으로 눈빛을 마주하면 그녀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는 했다.

지크프리트는 이네트의 딱딱한 반응에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손을 잡고 옆으로 걷다가, 다른 파트너와 또 손을 잡고 턴을 하는 동작만 반복하면 돼.”


“응, 그렇게 배웠어요.”

“어차피 에데이아는 딱히 배울 것 없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면 되긴 해. 그럼, 로사는


배웠어?”

“로사? 그게 뭐죠?”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가면무도회 같은 곳에서 주로 추는 춤이야. 황궁에서 열리는 고상한 연회 같은 곳에서 출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배워두면 좋잖아? 춤이 재미있기도 하거든.”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몸을 바짝 붙였다. 바짝 가까워진 거리에 그녀가 당황하여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평소와 달리 그가 휘어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손을 잡은 채로 움직일 거야. 누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여 봐.”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지크프리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숨결이 이네트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시선을


위로 치뜨자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인 그가 보였다.

“발은 리르넷과 같이 내 발 사이에 오른발을 둬.”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리르넷과는 다르게 턴을 반만 돌았다. 이네트는 제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뚝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춤이라도 이렇게 긴밀한 접촉을 꼭 해야 하는 건가.

지크프리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 뺨이 부딪혔다. 이네트는 몸이 움직일 때마다 허리를 움켜쥔
그의 손을 적나라하게 느껴야만 했다.

로사는 춤 동작이 크고 다소 격했다. 그의 리드에 휩쓸리듯 따라가면서 이네트는 왜 이 춤을 공식적인


연회에서 출 수 없는지 몸소 실감했다. 지금도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서로의 내밀한 숨소리와
진하지 않은 듯 진한 접촉이 오히려 더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몸이 다소 격하게 흔들리다가, 허벅지끼리 마주 붙은 순간, 이네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 오늘은 이만 됐어요. 그만 출래요.”

그녀가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 아등바등하자 그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에서


놓아주었다.

“춤이 싫다면 같이 정원 산책이라도 할까?”

“둘이서요?”

“불편하면 아샤 누이와도 함께 가도 좋고. 아, 아샤는 아나스타시아 누이의 애칭이야.”

“……좋아요.”

고민하던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크프리트의 제안에 응했다. 그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누어 가까워지는
것도 좋을 듯했다. 특히, 아나스타시아 황녀와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아직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 때문에 그녀가 제게 가진 감정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전하라니, 누이. 지크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

“……지크. 당신은 제가 불편하지 않으세요?”

“누이가 불편할 게 뭐 있어? 괜찮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가 활짝 웃었다. 이네트는 그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습관처럼 웃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미소만큼은 한 점의 거짓 없는 진심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자라온 그이니 인위적으로 짓는 미소쯤이야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지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이네트는 이 웃음마저 불안해하며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미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녀도 따라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함께 황녀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확실히 황녀의 궁답게 이네트가 머물고 있는
궁보다 훨씬 더 호화롭고 사용인들의 수도 많았다. 사용인들은 지크프리트와 이네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예를 갖췄다. 처음에는 그것이 다소 부담스러웠으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탓이었다.

얼마 안 가 호화스러운 문이 드러났다. 지크는 두어 번 문을 노크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침없는


방문이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난데없이 들어온 불청객을 보는 양 지크프리트를


훑어보았다가 그 옆에 선 이네트에게 시선을 흘긋 주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둘이 요새 사이가 좋다더니. 진짜구나.”

“누이, 내가 이네트 누이와 친하게 지내니까 질투하는 거야?”

“제발 헛소리 말렴.”

아나스타시아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군. 궁은 좀 적응한 건가?”

아나스타시아는 자연스럽게 이네트에게 말을 걸었다. 여상한 표정이었다. 이네트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제법 지리도 익혔어요.”

“그것 참 다행이구나.”

지크프리트가 이네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문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산책하러 나가자. 아샤 누이도 같이.”

그는 마치 이네트를 에스코트하듯 문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레 이네트가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아나스타시아도 그 뒤를 따랐다.

나란히 세 명이 서서 궁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뒤로 수많은 호위기사와 시중들이 따라붙었으나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이네트가 살짝 고개를 돌려 우르르 뒤따라오는 기사들과 시중들을 흘끔 보자
지크프리트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거리 좀 더 벌려.”
그의 말에 곧바로 호위기사들과 시중들이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보며 ‘나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네트는 헛웃음처럼 피식 웃고만 말았다.

익숙한 서쪽 궁의 정원을 쭉 거닐던 중에, 지크프리트가 돌연 제안했다.

“내 궁에 가볼래? 이곳의 정원보다 더 넓은데.”

“전 좋아요.”

이네트는 황제가 있는 북쪽의 궁과, 여인들이 모여 있는 서쪽 궁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되었으니 둘이 가봐. 걷기 귀찮아.”

아나스타시아는 귀찮은 듯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듯


고개를 슬쩍 돌려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흘긋 주는 눈인사에 이네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아나스타시아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궁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과 시종들이 우르르 그녀를 따라갔다.

가타부타 별다른 말 없이 사라진 황녀에 이네트는 조금 당황했다.

“아샤 누이는 원래 저러니까 신경 쓰지 마.”

“네….”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함께 그가 지내는 궁으로 단둘이서 향했다.

동쪽에 자리잡은 황태자의 궁은 황제의 궁만큼은 아니지만 호화스럽고 웅장했다. 이네트가 입을 벌리고
감탄하자 지크프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누이, 심심하면 언제든 놀러 와.”

“정말로요?”

흔쾌한 어조에 이네트가 다시 한번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라면 언제든. 내 방에 미리 와 있어도 되고, 서재도 마음껏 이용해도 좋아.”

서재 이야기는 좀 솔깃했다. 이네트는 정말로 그래도 되는 것인지 긴가민가해하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대로 황태자의 궁에 있는 정원은 서쪽의 궁보다 넓었다. 화려함은 다소 덜하여도 정원이 넓은데다
서쪽의 궁과는 분위기가 달라 색다른 풍경에 가슴이 뛰었다.

이네트는 정원 곳곳을 둘러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서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건…….”

순간 그녀는 제가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의심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히 맹수였다. 가까이


있지 않아 무슨 짐승인지 제대로 알 순 없어도, 덩치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맹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게 굳었다.

“지크, 저기에 짐승이…….”

이네트가 덜덜 떨며 눈이 마주친 맹수를 가리켰다. 지크프리트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 이내 푸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아, 레오 말하는 거야? 누이,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내가 기르고 아끼는 아이거든. 레오! 이리와!”

그가 소리 높여 이름을 부르자 곧장 맹수가 한달음에 그에게로 다가왔다. 눈 깜짝할 새도 없었다.


이네트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뒤에 몸을 숨겼다.

“하하, 레오는 새끼 때부터 내가 키워서 사람 손을 탄 아이야. 사람은 해치지 않아. 자, 무서워하지


말고 봐봐.”

지크프리트는 제 뒤에 숨어 레오를 흘끔거리고 있는 이네트를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오가 그르릉,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제야 이네트가
쭈뼛거리며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는 주인의 손길이 좋은 듯 여전히 골골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맹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고양잇과 맹수 중 하나인 표범이었다. 털 색깔이 하얗긴 했지만.

우아한 몸 선과 포동포동한 털, 그르릉거리는 입속으로 언뜻 보이는 커다란 송곳니, 긴 수염, 그리고 몸


곳곳에 있는 검은색 점박이……. 두려움이 조금 가시고 나니 맹수가 가진 귀여운 외형에 이네트의 마음이
동했다.

그녀가 레오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누이, 만져 볼래? 레오는 사람이 만져주는 걸 좋아하거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그가 조심스레 레오에게로 손을 갖다 대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침내 부드러운 털에 손끝이 닿았을 때, 그녀가 작게 숨을
들이켜며 레오와 눈을 마주했다.

회색 눈동자는 맹수의 것이 분명했으나, 유순하고 온화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네트는 천천히 몸의


긴장을 풀고 손바닥까지 레오의 몸 위에 올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폭신폭신했다. 그러자 레오가
지크프리트에게 했던 것처럼 그르릉, 소리를 내며 이네트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레오도 누이가 마음에 들었나 봐. 이렇게 애교 부리는 건 나랑 아샤 누이 말고는 없는데.”

“정말요?”

이네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레오가 그르렁거리며 여전히 그녀의 몸에 제 머리를 비볐다. 몸의
털만큼 폭신폭신한 꼬리가 시야 너머로 보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제 배에 비비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신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

긴장한 게 언제였냐는 듯 이네트가 웃음을 매달고 레오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과감하게 머리를
껴안기까지 했다. 폭신한 털이 몸을 스칠 때마다 구름 위를 둥둥 걷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부드럽고 좋아요…….”

“누이가 그렇게 기쁘게 웃는 건 처음 봐.”

이네트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지크프리트 또한 기쁜 듯 활짝 웃었다.

“누이, 레오와 함께 산책할까?”

“네, 좋아요.”

그녀의 흔쾌한 수락이 내려지자마자 그가 손짓으로 레오를 불렀다. 그가 손짓하자마자 레오가 곧바로 그의
옆에 섰다. 그가 앞으로 걷자 레오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퍽 익숙한 모양새였다.
“레오와 자주 산책을 하나요?”

“응. 원래 비는 시간 때마다 레오와 산책을 했는데… 요샌 누이를 만나느라 좀 줄었지.”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녀가 놀라 몸을 뒤로 물려도 여전히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누이, 아직도 내가 어색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니까….”

“싫었어? 싫으면 안 할게.”

“…싫진 않아요.”

싫은 것보다는 당황스러운 것에 가까웠다. 그녀 주변에는 지크프리트 같은 이가 없었다. 그가 갑작스레


스킨십을 하면서 다가올 때마다 깜짝 놀라는 건 본능적인 방어기제기도 했다.

이네트는 슬쩍 시선을 돌려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레오가 다시 그릉,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인사를 해주는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이 따스하게 녹아들었다.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레오와 함께 넓은 정원을 평화로이 쏘다니다가 멀리서 누군가 절박하게 외치는
‘전하’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지크, 당신을 부르는 소리 아니에요?”

“응, 맞아.”

저를 부르는 소리임에도 태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네트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 가봐도 되는 거예요?”

“이제 슬슬 가야 해.”

지크프리트가 아쉬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이네트의 손을 잡았다.

“누이, 바빠서 미안해. 그래도 내가 일국의 황태자라. 내일 또 보러갈게, 응?”

그녀가 가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는 마치 그녀가 가지 말라고 매달린 양 굴고 있었다. 이네트는 허,


헛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털었다.

“얼른 가 봐요. 전 레오랑 좀 더 있다 갈게요.”

“알겠어. 누이, 언제든 내 궁에 와도 돼. 알겠지?”

“알겠으니까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 가요.”

“응, 누이. 그럼 내일 봐!”

지크프리트가 손을 휘휘 흔들며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아쉬운 듯 몇 번 뒤돌아 손을 또 흔들다가


이네트가 얼른 가란 듯 손짓을 하고 나서야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를 완전히 떴다.

그가 가고 난 후, 이네트는 레오와 함께 정원을 몇 바퀴 돈 다음에야 서쪽 궁으로 돌아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며, 이네트는 이러한 생활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때를 떠올렸다. 고작
이 정도 평화가 그때는 그다지도 어렵고, 비참하고, 서러웠다.

가지고 난 지금에야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이마저도 나중에는 익숙함에 길들여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때가 오겠지만, 이네트는 지금 같은 나날들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잠든 이네트의 몸을 탐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형제의 행동 또한 거침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그녀의 몸에


손대기를 저어했던 카시엘조차도 이제 거리낌이 없어졌으니까.

「으음…….」

그러면 그럴수록, 이네트의 식사에 들어가는 약의 양은 점점 더 많아졌다. 같은 약을 계속 먹이다가, 그


약의 효능이 떨어지는 것 같으면 다른 약으로 바꾸거나 섞어 먹이기도 했다. 이네트는 여전히 꿈에서조차
피를 나눈 이들에게 범해진다는 것을 한 치도 알지 못했다.

카시엘은 잠든 이네트의 팔을 벌리고, 그녀의 두 팔을 제 목에 휘감았다. 인형처럼 축 늘어진 팔이 그의


등줄기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아찔해졌다.

이 손이 먼저 그의 몸을 껴안고 쓰다듬어준다면…….

욕망이 깊어질수록 갈증도 더해졌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끼우며 아직 젖지 않은 곳을


비볐다. 몇 번을 빨고 쑤셔도 속살은 여전히 붉디붉었고, 온몸에 정액와 타액이 쏟아져도 그녀는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카시엘은 이네트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고 있는 페르닌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아무리 등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어.」

「흐음….」

페르닌드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녀의 하얀 등에서 입술을 뗐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 듯,
그녀의 등줄기에 입술을 비비며 허리를 지분거렸다. 카시엘은 페르닌드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안을 벌렸다. 손가락으로 아직 서지 않은 돌기를 애무하다가, 몸을 내려 그녀의 안에 혀를
넣고 빨았다. 점점 안쪽이 미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질구 바깥까지 액으로 젖어들 때까지 안을 빨고 혀를 쑤셨다. 잠든 이네트가 다리를 움찔거리며 얕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 조그마한 소리에 그의 아래로 피가 몰렸다. 천을 찢을 듯 팽팽하게 곧추선 것이
그를 재촉했다.

허나 페르닌드가 좀 더 빨랐다. 이네트의 가슴과 등, 엉덩이, 종아리와 발을 연거푸 애무하던 페르닌드가


가로채듯 이네트의 몸을 제게 끌어당기고선 곧바로 카시엘이 애무한 이네트의 안으로 제 성기를
집어넣었다. 페르닌드가 크읏, 신음하며 이네트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약효가 세서, 후우… 좋네. 이렇게, 꽉… 쥐어도, 모르니까.」


페르닌드가 동의를 구하듯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카시엘은 불쾌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페르닌드를
짧게 노려보며 그녀의 안을 들락거리는 페르닌드의 성기를 흘긋 바라보았다. 얼마간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네트의 다물린 입술에 거칠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두 손으로 이네트의 머리통을 붙잡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는 다물린 잇새 사이를 뚫고


따스하게 젖어든 입 안을 휘적거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혀끝이 스칠 때마다 그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낮게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안에 삽입한 것도 아닌데 고작 키스로 절정에 이르렀다. 카시엘은 제가 싸지른 액으로 점점 젖어드는


아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기는 한 번의 파정 이후로도 꼿꼿했다. 페르닌드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뒷보지에 넣어보던가, 형.」

그가 무표정하게 페르닌드를 바라보았다. 페르닌드는 제가 여전히 들락거리고 있는 쪽이 아닌 뒤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말의 뜻을 알아차린 카시엘이 피식 웃었다.

「한 번도 넣어본 적 없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카시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 번도 넣어본 적 없는 곳. 그가 처음으로 넣어보는 곳.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술렁거리며 동했다.

여전히 방 안에는 철퍽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카시엘은 아직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메마른 그곳은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다물려있었으나, 질구에서 흐른 액
때문에 다소 젖어있었다. 그는 메마른 구멍 안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으읏….」

이네트가 앓는 신음을 흘리며 안을 꽉 조였다. 페르닌드도 그것이 느껴졌는지 씨발, 욕설을 흘리며
고환이 달라붙어 철퍽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성기를 깊숙이 처박았다.

카시엘은 손가락을 끊을 듯 죄이는 안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넓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버거운 듯 꽉 죄이던 내벽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질구에서 흐르는 액도 그것에 한몫했다.

「아으응….」

이네트가 잠결에 헐떡거렸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이네트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는 어느새 손가락 세


개를 집어삼킨 내벽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을 빼자 넓어진 구멍이 벌어진 채 뻐끔거렸다. 그는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다. 불거질 대로 불거진


성기를 내벽에 파묻는 순간, 카시엘은 강렬한 사정감을 느끼며 입술을 물었다. 앞뒤로 다 처박은 것
때문인지 이네트의 안이 경련하고 있었다.

「아, 씨발… 헉.」

페르닌드가 이네트의 어깨에 이를 세웠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격하게 허릿짓을 하더니 거친 호흡과 함께


성기를 빼냈다. 정액이 이네트의 몸 곳곳에 흩뿌려졌다. 페르닌드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카시엘은 제 동생이 싸지른 정액을 바라보며 이네트의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미끈거리는
안과 다르게 구멍 안은 뻑뻑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이네트의 몸이 실 달린 인형처럼 흔들렸다. 그는
흔들리는 젖가슴에 입을 맞추며 내벽 안에 마음껏 제 것을 내보냈다. 그녀가 모르리라고 확신하며.
* * *

이네트는 연회 준비를 하면서도 이따금 무료해질 때면 지크프리트와 함께 그의 정원을 산책했다. 정원을


거니는 그들 옆에는 늘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처음부터 이네트에게 호의적이었으나, 보는 날이 잦아지자
어느 때는 지크프리트보다 이네트를 반길 때도 더러 있었다.

산책에 아나스타시아도 함께할 때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는 동안 이네트는 점점


지크프리트의 여유와 스킨십, 넉살 같은 것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이네트는 우르르 몰려온 사용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옷 치수를 점검 받았다.


연회의 주인공이 될 그녀를 위해 황제는 돈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금액을 상관하지 않고 골랐다.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해주는 드레스까지 여러 벌
맞췄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외모에 화려한 액세서리까지 더해지자 사용인들이 감탄하며 그녀의 외모를


칭찬했다.

“어쩜 이리 아름다우실 수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우세요!”

그들의 칭찬에 이네트는 짧은 미소만 보이고 말았다. 이네트가 바라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연회의 주인공이자 그녀가 가진 지위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으므로.

이네트는 이 정도면 완벽하다는 말을 들어도 연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찾아오는 지크프리트와


함께 가볍게라도 연습하다가 그의 궁으로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누이, 서재에 가보지 않을래?”

지크프리트의 궁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가 제안했다. 그의 서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 하기만 했지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이네트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홀을 지나 넓고 긴 복도를 걸어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들어가기 전, 지크프리트가 그들을


뒤따라오는 기사들과 시중들에게 일렀다.

“먼저 부르기 전에 들어오지 마.”

“네, 전하.”

지크프리트가 먼저 서재 안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이네트가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닫혔다. 이네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가 말했던 대로 서재는 넓고 광활했다.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은 책장들이 가득했고, 그 책장들 안에 책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네트가 입을 벌렸다.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어봤어요?”

“아니? 설마. 아무리 나라도 다 못 읽어, 누이.”


그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미간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책 읽는 것이 취미라 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럼 좋아하는 책은요? 책 읽는 것 좋아한다면서요.”

“내 취향은 소설 쪽이야. 고리타분한 역사서 같은 것보다는 재미있는 책이 좋아서. 로맨스도 좋아하고.”

그가 책장을 둘러보더니 찾았다, 하며 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에 제목만 쓰여있었다. 이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지에 제목만 쓰여있네요?”

“응. 왜냐면…….”

지크프리트의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그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가 은근한 눈길로 그녀에게


시선을 건네며 천천히 책을 펼쳤다.

“아…….”

이네트가 눈앞에 펼쳐진 살색의 향연에 숨을 들이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펼쳐진 책 안에는 다 벗은
남녀가 뱀처럼 서로의 몸을 껴안고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의 머리카락이 남자의 몸을 칭칭 휘감은
것이 마치 족쇄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그림에 이네트는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속지야. 아름답지? 속지도 아름답지만, 나는 이 책 속에 담긴 내용을 좋아해, 누이.”

지크프리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복수를 담고 있거든.”

여전히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복수. 그 단어에 그의 입가에서 느리게 맴돌았다.

“파격적인 내용이라 평은 많이 나뉘는 소설이지만, 나는 좋아해.”

이네트가 속지를 넘기고 책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책 군데군데 삽화가 수록되어 있었다. 삽화 속의
여자와 남자는 아름다웠다.

“남자주인공이 무고한 여자주인공의 부모를 반역죄로 죽여. 여자주인공은 복수를 위해 남자주인공에게


몰래 접근해서 유혹하고, 남자주인공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를 죽이지.”

“…….”

“남자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죽는 것은 나쁘지 않다며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여자주인공이


허탈함과 공허함을 느끼면서 소설이 끝나.”

이네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수초가 흘러서야 입을
열었다.

“그건 복수가 아니네요.”

“왜? 죽었는데.”

“죽으면서 기뻐했잖아요. 상대가 기뻐했으면, 그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이네트는 그가 들고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른 책들을 둘러보았다. 빼곡한 책장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공작가에 갇혀 지내면서, 늘 보던 책만 봤어요. 어느 책은 내용까지 외울 정도로 달달 읽었죠.


비치되어 있는 책이라고는 아주 기본적인 역사서나 어린아이가 읽을 법한 동화책이었지만, 그것만이
무료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흘러가게 했으니까요.”

갇혀 있는 시간 동안 미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은 본 저택보다 작은 별관과,


그 앞의 조그마한 공터 수준의 마당 정도였다. 그곳에는 디에드반 공작가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꽃과
나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흙밖에 없는 허허로운 부지였고, 간혹 가다 그곳에 잡초라도 피면 기뻐했을
정도였다.

잡초를 바라보던 그때, 느껴졌던 은근한 시선…….

이네트는 그것을 떠올렸다가 숨을 멈췄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거다. 감시자의 시선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시선이…… 계속해서 이어져…….

이네트는 생각을 멈추고 눈에 띄는 책을 아무거나 꺼내어 펼쳤다. 손가락만 한 자그마한 글자가 빼곡한
책이었다.

“누이, 누이는 이런 게 좋아?”

“싫은 건 아니에요.”

“……나는 아무리 읽어도 싫던데. 누이, 대단해.”

그녀가 아예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자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도 책을 하나 꺼내어 그녀 옆에


앉았다.

“나는 소설이 좋아.”

그리고는 들고 온 책을 그녀 옆에서 몇 번 흔들어 보이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적막한 도서관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고요하게 울렸다.

책을 절반 즈음 읽었을 때,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가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지크프리트로 소리를 들었는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전하!”

그때 정원에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또 지크를 찾는데요.”

“응, 그러네.”

“……지크. 일은 해야죠.”

“누이랑 있으면 시간을 잊어버려서 그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요.”

이네트가 제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리듯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를 밀어냈다. 그는 못내 아쉬운 듯
일어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또 그런다. 얼른 가요.”

“응……. 내일 봐, 누이.”

또다시 전하, 소리가 들리기 전에 그가 서재를 나갔다. 그녀는 그가 나가 혼자 남은 서재 안에서 아까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옆에서 들렸던 그의 숨소리와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인기척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고요함만이 남았다.

책을 다 읽었을 땐 이미 창밖이 어둑해진 상태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다 읽은 이네트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읽고 나서야 배고픔이 몰려왔다.

서재를 나서고 황태자의 궁에서 빠져나왔다. 이미 그녀를 아는 여러 사용인들은 그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그녀는 고갯짓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둑어둑한 궁을 쭉 걸었다. 밤을 머금은 화려한 정원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이네트는 암흑이
서린 꽃들을 쭉 살펴보며 걷다가 문득 사람의 인영을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어둠 속에 홀로 우뚝 선 한
남자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이네트는 그녀도 모르게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넓은 어깨와 등, 길게 뻗은 팔다리,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에일……?”

그녀가 반신반의하며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이름을 불린 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네트는 다리에 힘이 빠져 가볍게 몸을 비틀거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마주친 그조차 놀란 얼굴로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아가씨?”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가 여전히 놀란 얼굴로 이네트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녀는 울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왈칵 깨물었다. 에일이 맞았다. 회색빛 섞인 갈색 머리칼과 녹음 같은 녹색 눈동자,
따스한 눈빛과 커다란 손 모두 에일이 맞았다. 그라는 확신이 서자마자 이네트는 무너지듯 그의 품에
안겼다.

“에일!”

청량한 냄새가 콧속까지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에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품 안의 이네트를 연신


쓰다듬었다.

“정말, 아가씨입니까?”

마른 뺨, 퀭한 눈……. 그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자 이네트의 가슴에 찌릿한 고통이 스쳐지나갔다.

“그새 날 잊은 거야? 난 하루도 널 잊은 적 없는데!”

“잊다뇨,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감정이 벅차오른 듯 에일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넘나들었다.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 어깨, 허리를
쓰다듬던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말, 아가씨가 맞군요…….”

그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네트는 떨림이 멎지 않은 그의 몸을 꽉 껴안았다. 고개를


들자 젖은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이네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가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몇 번이고 궁에 찾아왔는데도…….”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숨결이 그녀의 정수리에 쏟아졌다. 뜨거웠다.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궁으로 찾아왔었다고?”

“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벨라 님께 찾아가 아가씨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네트는 순간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왔다고? 그녀는 들은 바 없는


소리였다. 에일이 보고 싶다고 아무리 말해도 연회 때만을 기다리라며 미루고 미루었던 것이 벨라
아니었던가.

벨라는 이네트와 에일, 둘 다 서로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배신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난, 난 한 번도 네가 찾아왔다는 소릴 들은 적 없어…….”

“……단 한 번도 듣지 못하셨던 건가요?”

“단 한 번도. 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가서 보게 해달라고 했는데…… 연회 때만을 기다리라며


만나지 못하게 했어.”

슬픔에 젖어 있던 에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어두운 기색이 스쳤으나,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머금은 다시 따스한 눈빛으로 돌아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마주하게 됐으니 괜찮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가
갑자기 사라지신 후, 저는…….”

그간의 일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그의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느린 곡조처럼 낮게 일렁이던 그의 숨이 그녀의 아스라한 신음에 묻혀들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그녀가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꽉 안고서는 눈을 감았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다시금 입술을 목덜미에 댔다. 이네트는 숨 막힐 듯이 안아오는 너른 품에 뺨을 비비며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금은 듣지 않을래요. 그냥 계속 이렇게…….”

오래도록 포옹이 이어졌다. 에일은 흐트러진 얼굴로 연신 이네트의 목덜미에 숨을 쏟아내었고,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숨을 받아들였다. 두근거림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 * *

다음날이면 연회였다. 이제 코앞까지 목도한 상황에 이네트는 부산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드레스부터
시작해서 장신구까지 모두 최종적으로 선택을 마쳤고, 연회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철저하게 공부했다.
사생아를 혐오스럽게 여기는 귀족 사회에 그녀의 존재가 일으킬 파장은 그리 좋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럴수록 더욱 완벽해야만 했다.

“이미 누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설마 황제의 사생아일 거라고는 다들 예측하지 못하는
분위기야. 새 정부인가, 아니면 정부의 딸인가 그런 말만 분분하지.”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말하며 찻물을 삼켰다. 이네트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는 생각보다 음습해, 누이. 조심해야 할 거야.”

“……알겠어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만 어떻게든 참으면 에일과…….

“그런데 누이. 그 남자와는 무슨 사이야?”

“네?”

“데반 백작가의 영식과 말이야.”

그녀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늦은 밤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몰래 밀회를 가졌는데, 그걸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걸 어떻게…….”

“누이, 궁에는 보는 눈이 많아.”

그가 그렇게 얘기하며 눈을 초승달처럼 접어 웃었다. 평소 그녀에게 보여주던 해사한 미소와는 다른


은근한 미소에 그녀가 눈을 가볍게 끔뻑였다.

“그와는…….”

운을 띄운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예요.”

“이런.”

그가 탄식을 내뱉더니 하하,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친밀한 사이인 것 같긴 했지만,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일 줄이야. 이건…… 정말 예상외인데.”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에선 그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크프리트와 있을 때 느낄 수 없었던 기묘한 적막감에 이네트가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제가 곤경에 처했을 때 절 구해준 게 에로드…예요. 그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전 여기 오지 못했을 수도


있고, 지크…… 당신과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제가 의미가 큰 사람이에요.”

“…그래?”

그렇게 의미가 큰 자라고? 그가 말을 덧붙이더니 손가락으로 턱을 몇 번 쓸어내렸다. 내리깐 눈 밑으로


그늘이 졌다. 평소의 유쾌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가 제게 과분하다고 여겨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혹시라도 결혼 상대로 생각해둔 상대라도…….”

“아니, 그런 건 없어. 결혼 상대라니.”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그가 피식 웃었다. 사선으로 올라간 그의 입매가 비틀리더니 또 한 번 헛웃음이


터졌다.

“그자와 결혼하려는 생각은 아직도 유효해?”

“……물론이에요.”

뜸을 들이다가 이후 확실한 어조의 대답에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쳐대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봐야겠어.”

“벌써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함께 춤 연습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원 산책과 티타임까지 모두 가지는


걸로도 모자라 보좌관이 쫓아와 그를 부르짖을 때까지 그녀와 오래도록 함께 있으려고 했던 그였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급한 일…… 응. 급한 일이 생겼어.”

그가 싱긋 웃더니 따라 일어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연회 날에 봐, 누이.”

깃털 같은 입맞춤이 사라지고 그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네트는 이제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그녀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연회 당일, 이네트는 무거울 만큼 화려한 목걸이를 목에 차고 어깨선이 은근하게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채


지크프리트와 아나스타시아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미 귀족들이 앞다투어 황궁에 도착한 덕분에
황궁은 다소 번잡스러울 만큼 북적거렸다. 사용인들이 바쁜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연회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네트는 긴장이 되어 침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누이, 긴장하지 마.”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지크프리트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렸고, 이네트는


쏟아지는 시선에 숨을 들이켰다.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들과 우뚝 선 남자들이 황족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서도


지크프리트와 아나스타시아의 옆에 선 이네트에게 호기심 어린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폐하의 정부가 아니라 태자 전하의 정부인가?”

누군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이네트가 순간 숨을 멈췄다. 아나스타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입이 참 자유분방하군.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아나스타시아의 말에 그 귀족이 아차,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네트는 다시 고르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해사하게 웃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마주 바라보았다.

“누이, 괜찮아?”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바라보며 마치 들으란 듯이 누이, 라는 호칭을 쓰자 주변에 선 귀족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나스타시아에 이어 지크프리트까지 이네트를 감싼 것이다.

“자, 앞만 보고 가면 돼.”

그의 시선 끝에 닿은 곳은 데넌,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황제는 이네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흐음,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황후 마냥 제 옆에 자리 잡은 벨라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벨라가 무어라 대답하자마자 데넌이 앞을 보고 말했다.

“내 딸이 왔군.”

파장은 컸다. 좌중이 동시에 술렁거리며 경악스러운 얼굴로 이네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 예상했던
것이다. 이네트는 쏟아지는 시선에도 당당히 고개를 든 채 지크프리트의 말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옆에서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무덤덤한 지크프리트와
아나스타시아의 반응에 귀족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하랑 황녀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건가?”

“딸이라니!”

황제의 사생아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강렬하게 연회장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도
제국 역사상 최초였다. 그만큼 사생아라는 존재가 제국에서 갖는 오명이란 드높았다. 쉬쉬하는 존재이지,
결코 드러내는 존재는 아니었다.

경악스러운 반응 가운데,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이네트는 좌중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 잠시 몸을 굳혔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페르닌드 디에드반이었다. 못 박힌 듯 굳어버린 그들의 얼굴과 마주한 이네트는 순간,
그녀의 평정이 깨졌다. 눈이 마주치자 카시엘이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페르닌드는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그녀에게 튀어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가 카시엘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네트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지크프리트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공작가 형제들과는 사이가 안 좋나봐? 어린 시절 같이 지냈다면서.”

“그들이 제게 한 짓을 생각하면 절대 좋을 수 없어요.”

“무슨 짓을 했는데?”

“…….”

이네트는 대답 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입꼬리만 올리고 말았다.

이윽고 황제의 손짓으로 연회의 춤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크프리트는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이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누이, 약속했지? 내 첫 춤 상대가 되어주기로.”

“네, 그랬죠.”

“그런 약속까지 했니, 지크? 정성이 갸륵하구나.”

“아샤 누이도 참.”

아나스타시아가 가볍게 핀잔을 주어도 그는 웃고 말았다. 이네트도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를 발견하고는 손을 멈췄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위로 올리고, 화려한 제복을 입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르른 녹색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네트가 그녀도 모르게 손을 살짝 뒤로 물리자마자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에일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손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초승달처럼 눈을 휜 채 웃고 있었으나, 왠지 그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누이, 약속을 깨버릴 셈은 아니겠지?”

“아…….”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허리를 휘어 안은 손길에 이네트가 당황하여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가씨.”

뒤에서 에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가 그녀를
리드하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그 스텝에 리드당하며 결국 배웠던 대로 그녀도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굳은 얼굴로 지크프리트를 바라보고 있는 에일의 얼굴이
엿보였다.

“누이, 어딜 봐?”

지크프리트가 귓가에 속삭이며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앗.”

순식간에 그의 가슴팍에 시선이 가려 더 이상 에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지크프리트가 자연스레


스텝을 밟으며 점점 에일에게서 먼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겨우 몸을 뒤로 물리며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땐, 이미 에일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누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긴장한 거야?”


지크프리트가 손을 올려 이네트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자연스러운 스킨십은 이제 익숙했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연습한 대로 물 흐르듯 발이 움직였다. 이네트는 춤이 끝나는 대로 에일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춤추는 것에 집중했다.

* * *

멀리서 황태자와 이네트가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닌드의 표정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황태자는
그녀와 친밀한 사이인 걸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를 휘어 감은 손과 그린 듯이 위로
올라간 입술, 바라보는 눈빛 같은 것들은 그녀를 단순히 누이로 보는 남동생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마침내 이네트의 뺨을 부드럽게 훑어 내렸을 때, 페르닌드가 빠득 이를 갈았다.

이네트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보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곁이 아니라 다른 이의 옆에 선 것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이복누이라고 하지 않았어? 황태자의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제 누이에게도 손을


대는 건가, 지금?”

카시엘은 입을 다물고, 달라붙은 두 인영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으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 안으로 그것을 감추며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느리게 요동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라고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간신히 제 발을
막고, 아까 튀어나가려던 페르닌드를 막은 것은 그의 이성이었다. 그의 이성이 간신히 본능을 자제하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이네트…….’

굳게 다물린 입에서 곧바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디에드반 공작님.”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시엘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공작님.”

다시 한번 불리고 나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르블랑 자작가의 둘째
여식, 엘리아나 영애였다. 카시엘은 사무적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영애.”

“반가워요, 공작님. 공작님께서 연회에 참석하신다는 말을 듣고 저도 참석했어요.”

“…그렇군요.”

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선을 살짝 틀었다. 희미하게나마 띄고 있던 미소도 점차 사그라졌다. 엘리아나는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말을 붙였다.
“그동안 초대장들을 다 거절하셨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께서도 공작님께서 클럽에 나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다고 말씀하셨어요.”

“네. 가지 않은지 제법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의무적으로나마 클럽에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그곳 근처로 발걸음하지도 않았다. 귀족가의


남성들끼리 모여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으며 하는 정치 이야기와 사업 이야기들은 그에게 있어
그다지 큰 흥밋거리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필요에 의해 드나들 뿐이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의욕을 잃었다.

쳇바퀴처럼 황궁과 저택으로 오가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이네트가 또 다시 사라진 뒤로 그는 그저 숨을


쉬고, 해야 할 일만 하며 고요하게 살았다. 금방이라도 뒤틀릴 것 같은 감정을 어떻게든 삭이고, 또
삭여가며.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시죠? 조금 있으면 제 여동생의 성인식이에요. 공작님께서 그 자리에


참석해주신다면…….”

엘리아나가 의아한 얼굴로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허공 어딘가로 향해있었다.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느닷없이 황제의 딸이라며 나타난 여자가 황태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소문이 무성했던 그 여자군요. 폐하의 새로운 정부일 거라는 말이 파다했는데 딸이라니, 조금 놀랐어요.
게다가 폐하의 정부와 쏙 빼닮은 딸이라니…….”

엘리아나는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저 쉬쉬할 뿐 다들 아는 사실이죠. 그래봤자 사생아에 천한 핏줄이니까요.”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엘리아나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어느새 카시엘이 그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님?”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끼며 엘리아나가 그를 되불렀다. 공작이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다는 것은 이미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에 대화를 나눌 때만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이토록 싸늘한 표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아나가 더 말을 잇기 전에 카시엘이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인사도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은


숙녀에게 큰 모욕을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엘리아나가 뒤늦게 그의 무례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지만 이미
그는 자리를 뜬 후였다.

* * *

춤을 연이어 계속 추어 지치는데도 지크프리트는 도통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 곡 쯤에 이르자


이네트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지크, 언제까지 출 거예요?”

“누이가 지쳐서 다른 남자랑 춤을 출 수 없을 때까지.”

“장난하지 말고 이제 그만 놔줘요. 정말 힘들어요. 목도 마르고…….”

그녀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춤을 멈췄다. 허나 품에서 놓진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알겠어, 알겠어.”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그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이네트는 그에게서 떨어지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에일을 찾기 시작했다. 워낙 사람이 많아 그를 찾기


어려웠다.

“그 남자 찾아?”

지크프리트가 뒤에서 물었으나 이네트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그녀가 앞으로 걸을 때마다 주변에서
그녀를 흘긋거렸다. 그녀는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아까 보았던 에일을 찾기 위해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회갈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가 에일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에일이니까.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를 뻔했다. 겨우 그것을 참아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그에게로 걸어올 때부터 그 또한 그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가씨.”

이네트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으려고 했다. 허나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잡으려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머, 이네트. 날 잊은 거예요?”

낯익은 발랄한 목소리.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에밀리였다.

“날 잊었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나 기억하죠?”

“그럼요, 에밀리. 어떻게 잊겠어요?”

전에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장난기 어린 얼굴과 활달한 인상을 한 에밀리가 밝게 웃으며 이네트를


반겼다. 스스럼없이 손을 붙잡는 게 여전히 에밀리다웠다. 그녀와 마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음에도,
이네트는 그녀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에밀리 또한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어색함 한 점 없이
이네트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간 잘 지냈어요? 이네트, 말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 걱정 많이 했어요.”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그땐…….”

“알아요. 이네트. 지금은 괜찮은 거죠?”

“네.”
“그래 보여요. 안색이 좋아요! 그동안 에로드는 밥도 못 먹고…….”

“에밀리 누이.”

에밀리가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에일이 막았다. 에밀리는 칫, 소리를 내며 잠시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고 이네트를 향해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에이든 백작님은 어디 가셨나요?”

“오빠는 지금 약혼녀인 아델 영애와 함께 있어요. 저기 행복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잖아요. 보이죠?”

“오, 정말 그러네요.”

이네트가 웃음을 흘리며 에밀리의 말대로 행복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부러울 정도로…….

“아가씨.”

에일이 그녀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이네트는 춤을 추고 있는 행복한 연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에일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그래, 내게는 에일이 있어.

이네트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망설임 없이 붙잡았다. 그 또한 그녀처럼 따라 웃으며 그녀를 부드럽게


품으로 이끌었다.

“아가씨, 저는 안타깝게도 춤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에일이라면 괜찮아.”

“아가씨의 발을 밟을지도 모르는데도요?”

“응. 그래도 좋아.”

이네트가 키득거리며 그의 어깨를 쓸었다. 단단한 어깨와 너른 품, 그가 가진 청량한 냄새. 그녀는


연인의 향을 만끽하며 그와 함께 스텝을 밟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춤에 서툴렀다. 이따금 발이 꼬였는지 멈칫거릴 때도 있었고, 다소 긴장한 듯 움직임이


뻣뻣했다. 그럼에도 이네트는 즐거웠다.

“에일, 정말로 서툴구나?”

“……아가씨, 부디 놀리지 말아 주세요. 저는 충분히 부끄러우니까요.”

에일이 마치 표정을 숨기듯 눈을 내리깔고 입매를 굳혔다. 허나 붉게 물든 귀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이네트는 불쑥 솟은 충동에 손가락으로 그의 귀를 스치듯 훑고 지나쳤다.

“아가씨!”

“쉿. 에일, 여기서는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돼.”

“…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곡이 끝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춤을 멈췄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은 채 가볍게
스텝을 밟아 보였다. 에일은 표정으로 설마 또 춤을 추냐는 거냐고 물었다. 이네트는 그의 표정이 묻고
있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결국 에일은 다시 뻣뻣한 움직임으로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이네트가 그의 손을 놓은 것은 갈증에 못 이길 때 즈음이었다. 목이 퍼석하게 메마르는 것 같았다. 목을


축이고 싶었다.

목이 마른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실 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나 눈으로 훑었다. 저 멀리


트레이를 끌고 다니는 사용인이 보였다.

“나 목 좀 축이고 올게.”

그녀가 에일에게 이르고는 곧장 트레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연이은 춤으로 갈증이 인 그녀가 트레이
위에 있는 주황빛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 옆에 있는 노란빛의 음료도
들이켰다. 주황빛 음료보다는 단맛이 덜하지만 맛있었다. 끝 맛이 오묘하게도 신맛과 쓴맛이 섞여서 났다.

이네트는 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음료가 아니라 술인 모양이었다. 뒤늦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두 잔을 들이켠 뒤였다.

에일이 뒤늦게 따라와 빈 잔을 바라보았다. 이어 붉게 달아오른 이네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낭패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음료가 아니라 술을 마시셨군요.”

이네트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술을 마신 게 처음이라는 자각을 이제야 했다.


단숨에 오른 취기에 그녀는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작 두 잔을 먹고 이런 반응이라니.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에일이 그녀의 몸을 부축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네트는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조금만…… 쉴래. 두 잔만 마셨으니까 얼마 안 가 깰 거야.”

“휴게실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에밀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 둘이서 자리를 벗어나는
건 다른 이의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소재였다.

눈치 빠른 에밀리는 곧장 그들의 옆에 붙어서는 이네트의 얼굴을 살폈다.

“이네트, 괜찮아요?”

“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데다 걸을 때마다 발이 휘청거리고, 발음이 어눌한 걸로 보아 괜찮지 않은 상태였다.


에밀리가 슬쩍 웃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걸요? 일단 휴게실에 가서 쉬어요. 같이 있어 줄게요.”

“네…….”
따로 마련된 휴게실 중의 한 방으로 들어가 이네트를 앉혔다. 다행히 휴게실은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에밀리는 비몽사몽하며 눈을 어물거리는 이네트를 의자에 기대게끔 해주었다. 의자에 등을 파묻고 편한
자세로 기댄 이네트는 얼마 안 가 눈을 감았다.

“에로드, 내가 이네트의 곁에 있어 줄 테니까 연회장으로 돌아가. 네가 여기 있어봤자 괜한 소문만 날


거야.”

“알겠습니다, 누이.”

에일이 에밀리의 말에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에밀리는 가만히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다시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로드, 왜 다시…….”

허나, 문을 열고 들어선 자의 얼굴을 보고선 에밀리는 표정을 굳혔다.

“에밀리.”

문을 열고 들어온 황녀가 에밀리의 이름을 불렀다. 에밀리는 이름을 듣고서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황녀 옆에 있는 황태자에게만 인사하고 황녀에게는 인사를 생략했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아나스타시아는


그것을 알면서도 에밀리에게 다가갔다. 아나스타시아와 거리가 좁혀질수록 에밀리의 입술이 비틀렸다.

“지크, 그녀를 궁에 데려다줘.”

아나스타시아가 이네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의자에 기대고 있는 이네트를 품에 안았다. 반쯤 잠든 이네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지크프리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이네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멀어지는 방 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시아와 에밀리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면서 그 모습은 사라졌다. 그럼과 동시에 이네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지크프리트는 이네트를 안고 서쪽 궁으로 향했다. 연회 때문에 서쪽 궁은 사용인도 몇 없이 조용했다.


술에 취한 그녀의 몸은 무더운 한낮의 여름처럼 뜨거웠다. 그는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제 차가운 손으로
식혀주며 그녀의 궁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을 물리고,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으응…….”

잠꼬대처럼 이네트가 응석을 부렸다. 누이는 제법 귀여운 면이 있구나.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에 걸린 무거운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귀걸이와 반지, 각종 장신구들을 빼서는 탁자 위에 올려두고,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흘긋 보았다.

몸을 옥죄고 있는 드레스는 자는 데 불편하기만 하지 좋을 것은 없었다. 망설이던 그는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천천히 벗기기로 마음먹었다. 어디까지나 사심 없는 마음에서였다.

드레스 앞섶의 끈과 등에 있는 단추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었다. 골반에 걸린 드레스를 조금 힘주어


잡아당겨 내렸다. 화려한 드레스가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드레스가 벗겨지고 나서 드러나는 코르셋에 지크프리트는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동물의 뼈로 만드는
코르셋은 여인의 몸에 있어 해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굴곡진 몸매를 좀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드레스의 모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입는다고는 하지만, 불필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코르셋의 끈을 풀어헤쳐서 벗겼다. 벗기자마자 억센 조임에서 벗어난 이네트가 하아,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뷔스티에와 스타킹만 입은 하얗고 야한 몸이 드러났다. 풍만한 가슴이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했다. 지크프리트는 애써 그것에서 시선을 돌리며 시트를 그녀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응….”

그러자 이네트가 미약하게나마 손을 뻗어 지크프리트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붙잡힌 팔목을 바라보았다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늘게 뜨인 눈은 분명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벌린 붉은 입술을 보자,
그의 아래가 꿈틀거렸다.

“누이. 나를 유혹하는 거야, 지금?”

여전히 팔목을 붙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의 입에서도 그 어떤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혀를 쑤시고
싶었던 붉은 입술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붙잡은 건 누이야. 지금이라도 어서 밀어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술 냄새 섞인 달큼한 숨만 새어 나올 뿐, 거절의 답은 없었다. 그는 지체 없이


뜨겁고 습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의 상상대로 그녀의 입속은 요사스러웠다. 타액은 달콤했으며 숨은 뜨거웠다. 뜨겁고 촉촉한 점막을
쓸어내리고 능숙하게 혀를 섞었다. 그녀는 앓는 신음을 내며 웅크린 몸을 펴고 입술을 더욱 열었다. 그는
드넓은 입 안을 종횡무진하며 그녀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혀를 들쑤셨다. 맞닿은 가슴이 뜨겁고 말캉했다.

잇새 사이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에…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거침없이 그녀의 입 안을 훑어 내리던 그의 혀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팔목을 동아줄처럼 움켜쥐고 있던 그녀가 손을 놓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에일…….”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지크프리트가 하, 헛웃음을 터트리며 제 어깨 위에 다소곳이 올린 손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팔목과 부드러운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있음에도 그의 기분이 수직하강했다.

“누이, 날 누구로 착각한 거야?”

필시 그 남자겠지. 지크프리트가 어깨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입꼬리를 일그러트렸다.


손안에 쥐인 그녀의 손이 가볍게 뒤틀렸다.

그는 시선을 내려 무방비한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어…….

부푼 젖가슴과 뷔스티에 밑에 숨은 분홍빛 유륜을 떠올렸다. 손에 감기는 하얀 살결과 달콤한 숨 같은


것들이 그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는 팽팽하게 곧추선 바지의 앞섶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이네트의 몸을 덮은 시트를 걷어냈다.

헐벗은 것과 같은 하얀 몸이 드러나자마자 그가 나직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피가 몰린 아래가 터질 듯 아려왔다. 그는 입 안에 맴도는 상스러운 말을 꾸역꾸역 집어삼키고는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지가 내려가고 중앙이 젖은 드로어즈가 드러났다. 그는 젖은
드로어즈를 흘긋 바라보고는 망설임 없이 잡아 내렸다. 흉흉하게 위로 올라선 성기가 꺼떡거리며 선액을
질질 흘려댔다.

두텁고 긴 성기는 금방이라도 정액을 싸지를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는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를
엄지로 쓸어내리며 핏줄이 불거진 기둥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두 손으로 성기를 쥐어도 다 잡히지
않을 만큼 성기가 컸다. 그는 단잠에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후…….”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허벅지를 젖히고, 그 사이의 은밀한 곳으로 헤쳐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아, 누이…….”

그가 나직하게 읊조리며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성기의 표피가 그의 손바닥에 휩쓸려 드러났다가 다시


덮이기를 반복했다. 그가 무릎을 굽히며 그녀의 향이 물씬 나는 시트에 코를 박았다.

“윽…… 하아…….”

콧속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향에 충동을 못 이긴 그가 머리를 들고 침대 위에 흐트러진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아 벌렸다. 급작스럽고도 강하게 가해진 악력에 스타킹이 형편없이 뜯겼다.

그는 올이 나간 스타킹에 이를 대고 짐승처럼 물어뜯었다. 찌익, 소리와 함께 허벅지의 살이 드러났다.


그는 부드러운 살결에 입술을 대고 부드러운 살결을 혀로 훑어 내렸다. 누이는 살조차 달았다.

당장에라도 스타킹을 마저 다 뜯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젖은 살을 마구 쑤시고 싶었으나 그는 참았다.


자신을 다른 남자와 착각하여 붙잡는 누이와는 살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깨어있는 누이와, 술에
취하지 않은 제정신으로 눈을 마주치고서 몸을 섞고 싶었다. 누이의 푸른 눈에 자신이 온전히 담긴 채로.

허벅지에 파묻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이를 세워 허벅지를 물었다. 종아리를 붙잡은 손등에 푸른


핏줄이 섰다.

숨이 가파르게 일렁였다. 지크프리트는 아래로 몰리는 열기에 눈을 감고 그녀의 냄새에 오롯이 취했다.
손아귀가 성기를 강하게 압박하는 순간, 피가 몰린 아래에서 정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읏!”

사정의 쾌락에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바닥에 닿은 무릎이 새의 날개처럼 꿈틀거렸다. 벌어진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다 주르륵 흐르는 정액으로 물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제가 싸지른 정액을 흘긋 내려다보며 눈을 휘었다. 정액이 손바닥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흥건히 적셨다. 그는 대충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것을 닦았다. 비릿한 밤꽃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흠뻑 젖은 손수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혀를 차고는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얼마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네트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종아리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길게 뻗은 종아리에 그가 마치 여신상에 경배하듯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종아리에 닿은 입술은 점점
밑으로 내려가 발에 닿았다. 스타킹에 덮인 발등과 발가락을 혀로 조심스레 핥았다. 그녀는 발마저
아름다웠다.

오래도록 발에 입을 맞춘 그가 다시 이네트의 몸 위로 시트를 덮어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깊이


잠든 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은근히 방 안에서 감도는 비릿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창문을 살짝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어오는 데도 그녀의 자세는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짧게 소리 내어 웃고는
자리를 떴다.

* * *

잠에서 깬 이네트는 찡― 하고 울리는 머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뻑뻑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이네트는
가슴과 배를 조이는 것 없이 가벼운 몸과 침대 밑으로 떨어진 옷가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드레스는커녕
위에는 뷔스티에밖에 입고 있지 않았고, 밑에도 스타킹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스타킹은 올이
나간 걸로도 모자라 엉망진창으로 찢겨 있었다.

내가 어제 옷을 벗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옷을 벗은 기억은 없었다. 기억을 더듬거리던


이네트는 찰나 스쳐 간 잔상 같은 기억에 몸을 굳혔다.

‘누이. 나를 유혹하는 거야, 지금?’

흐릿하지만, 기억 속에서 그녀의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지크프리트였고, 내뱉는 목소리 또한 그였다.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해 봐도 이어서 기억이 떠올랐다.

‘붙잡은 건 누이야. 지금이라도 어서 밀어내.’

그 목소리가 이어지고 나서 얼마 안 가 그가 입을 맞췄다. 기억 속의 그녀는 밀어내기는커녕 눈을 감고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스스로 다시 떠올려봐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를
에일과 착각할 수가 있지?

이네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하고 내려다본 허벅지에는 붉은 자욱이


가득했다. 입을 막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

그가 남겼을 게 뻔한 자국이었다. 설마 어젯밤 그와 몸을 섞은 것일까? 술에 취해?

이네트는 우선 찢어진 스타킹을 마저 벗고 줄을 흔들어 사용인을 불렀다. 오랫동안 뜨거운 물에 몸을


담아도, 자욱이 남은 부분을 내리 씻어도 반쯤 넋이 나간 정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는 보통 3 일 정도 진행되었다. 이제야 하루가 지났으므로, 이틀은 더 연회장에


얼굴을 비쳐야 했다. 그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대에
기댄 채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노크 소리가 들려도 애써 무시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이네트, 안 나갈 건가?”

노크 소리가 두어 번 이어지더니, 이윽고 아나스타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이네트의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연회가 시작됐어. 오늘은 가장 중요한 둘째 날이니 나가봐야 한단다.”

아나스타시아의 말이 맞았다. 연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둘째 날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올뿐만


아니라, 첫째 날에 오지 않은 귀족들도 둘째 날에는 모두 참석했다. 권위 있는 고위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폐하께서 너와 춤을 추겠다고 하셨어. 가지 않으면 안 돼.”

“…….”

어쩔 수 없었다. 이네트는 겨우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아나스타시아는 가벼운 차림의 이네트를


보고는 눈썹을 까딱이더니 근처에 선 사용인에게 턱짓했다. 사용인들이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와 이네트를
단장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푸른빛 드레스였다. 골반에 딱 맞게 떨어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이네트가


문밖을 나섰다. 문밖으로 발을 내딛고, 아나스타시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이네트의 얼굴이 바싹
마른 낙엽처럼 굳었다.

“……지크도 와 있었나요?”

“응. 내 목소리 들으면 안 나올 거 같아서 얌전히 숨어 있었어.”

어제 일을 알고 있는 게 확실한 어투였다. 이네트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지크프리트의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그녀는 아나스타시아와 지크프리트와 함께 다소 느릿한 걸음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어제만큼 연회가


긴장되진 않았으나, 간밤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피가 섞인 남동생과…… 혀를
섞고…… 어쩌면…….

회상이 끝나자마자 에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향해 언제나 녹음처럼 새파란 미소를 건네고, 따스한
눈빛과 다정한 말을 건네주었던 그. 그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기에 더욱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런 그를 그 모르게 배신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핑,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술에 취해 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혀를 섞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죄책감에 몸이 떨렸다.

이네트의 안색이 좋지 않자 지크프리트가 그녀 옆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누이, 속이 안 좋아?”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가 봐요.”

“그래?”

그는 창백한 이네트의 뺨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시선을 뗐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어제보다 훨씬 많은


인파에 이네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은 바스타드 왕국의 사절단까지 왔어.”


바스타드 왕국은 이곳 일리아드 제국에서 바다 건너 위치한 게르단 대륙에 있는 나라였다. 오려면 족히 2
주는 배를 타고 와야 할 정도로 오기 쉽지 않은 나라였다.

“폐하께서 먼저 주최하신 연회는 거의 10 년 만이니까.”

이네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걷는 내내 어제와 같이 아닌 척 흘끔거리는 시선들을


받아야만 했다.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들이 대부분이었다. 지크프리트와
아나스타시아와 함께 걷는데도 그랬다. 어제와 달리 그녀를 두고 숙덕거리는 일은 없었으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귀족 대부분은 그녀를 고깝게 보고 있었다.

시선에 굳은 그녀를 기민하게 눈치챈 지크프리트가 이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이, 걷기 힘들면 내게 팔짱을 껴.”

“……괜찮아요.”

이네트는 그 손을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거절당했음에도 지크프리트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누이의 첫 춤은 아쉽게도 폐하께서 가져가셨지만…… 그다음 춤은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게,


누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점점 황제가 앉아 있는 높은 단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개를 위로 들자 황금이 칠해진 화려한 의자에 앉은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옆에는
당연하게도 벨라 또한 있었다.

이네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허리를 숙인 뒤, 입을 열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과 달을 뵙습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벨라가 우습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답지 않게 왜 그러냐는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황제의 정부에게 달이라니, 과분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었다. 허나 그녀가 말만 정부일 뿐, 황후의 위치와
버금가는 여인이라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네트는 굽혔던 허리를 편 뒤 단상보다 좀 더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 이곳은 공식적인 자리였다. 원래
같았으면 격식 차린 인사 따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이 필요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높은 단상 위에서 계단을 타고 저벅저벅 내려오는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제와 점점 가까워졌다.

“왜 눈을 까는 거지?”

그 말에 이네트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황제가 그녀와 똑같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황제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냉기에 잠시 몸이 굳을 만큼.

손을 잡는 순간, 단상 뒤에 대기하고 있던 오케스트라단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네트는 냉기에


손을 잠시 움찔 떨었다가, 황제가 잡아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주변 이들 모두가 황제와 황제의 딸이라 급작스럽게 발표된 사생아에게 시선을 모았다. 어미가 누군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네트는 벨라와 복제한 듯 닮았으니까.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알음알음 모두가 아는 소식이기도 했다.

귀를 두드리는 음악 소리는 섬세하고 유려했고, 춤 또한 부드러웠다. 모든 것이 그럴듯했다. 다만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렇지 못했다.

“벨라와 다르게 넌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아. 벨라는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지 말라는


것투성인데.”

“폐하께선 하지 말라는 짓을 다 하신 거고요?”

“으음…… 생각해보니 그렇군.”

이네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녀의 표정에도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데반가의 막내 영식과 수도를 떠나 사는 건가?”

“그래요.”

“그걸 위해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달라 부탁하고?”

“네.”

황제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닮은 딸의 얼굴을 살펴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숙이는 것 없이 지나치게 당당한 게 맹랑하기 그지없지만 벨라의 몸을 통해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그리
고깝진 않았다. 그녀를 닮아 제법 귀여웠고.

“꼭 그 영식과 결혼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그와 나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니까요.”

이네트는 당연하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그는 왜 벨라가 에로드와 이네트를 연회 전까지


만나지 못하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로드 데반은 시도 때도 없이 귀찮을 정도로 알현을 요청했다. 데반 백작가의 광산에서 나오는 원석을
싼값에 황궁에서 사들이고 있으므로 그들은 제법 황궁의 비호를 받는 편이었다. 게다가 데반 백작가
일원들은 벨라와 오래 본 사이였다. 웬만해서는 그들의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는 벨라임에도,
그녀는 칼같이 알현을 거부했다.

‘아직 만날 수 없어.’

풋사랑을 보기 고까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심술이었던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데넌은 그마저도 우스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요?”

“벨라 생각이 나서.”

이네트는 질린다는 표정을 넘어 정색을 했다. 허나 이내 주변을 의식하여 가식적인 미소를 덧그렸다.

“그보다 너, 공작과 사이 안 좋은 것 맞아? 너를 꼭 잃어버린 여동생 보는 양 쳐다보고 있는데.”

“…….”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사실을 황제가 다시 일깨웠다. 이네트는 입술을 가볍게 한 번 짓씹었다.


카시엘에게서 비롯된 시선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무의식중에 그것이 익숙해진
탓인지 어떤 때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녀가 황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황제의 말대로 그는 홀에서 떨어진 커튼 쪽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인파에도 아랑곳 않고서.

눈이 마주치자 멀리서도 그의 동요가 엿보였다. 그가 무어라 말을 전하려고 입술을 여는 순간, 이네트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네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전 할 말 없어요.”

“그래?”

곡이 점점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제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얼어붙은 유리


조각처럼. 이네트는 그 서늘한 냉기를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에로드의 약혼식을 치르게 해주세요.”

“결혼식이 아니라 약혼식?”

“결혼식은 저와 에로드, 둘이서 따로 해도 되니까요.”

황궁에서 치러질 성대한 결혼식보다는 그보다 간소한 약혼식이 더 나았다. 어서 빨리 공식적으로 관계를
발표하고, 그와 함께 단둘이서 리고르 해안으로 떠나 둘만의 결혼식을 치르고 싶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야. 물론 결정은 벨라, 그녀가 하겠지만.”

“허락하겠노라 믿어요.”

그 말과 끝으로 음악이 끝났다. 그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조차도 서늘했다. 그녀는 냉기를 흩뿌리고 떠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등을 내렸다.

황제는 해야 할 일을 마치고는 다시 단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잘했냐고 묻듯이 벨라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감추지 않는 애정표현에 벨라가 잠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밀어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결국 못 이겼다는 듯 황제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이네트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누군가 그녀에게 불쑥 다가왔다.

“이네트.”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나, 언젠가는 마주쳐야 했을 사람이었다. 이네트는 그를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이런 자리에서 내 이름을 불러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이네트의 말대로 주변에서 공작과 이네트의 조합을 신기하다는 듯 아닌 척 흘끔대고 있었다. 그 또한


그것을 인식한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나가서 대화 좀 하지.”

“할 얘기 없어요.”

“아주 잠깐이면 된다.”

“그럼 여기서 하면 되잖아요?”

그 말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할 얘기는 아닌지 그는 그녀가 다시 대답을 번복하기를 기다리며


굳은 듯 서 있기만 했다. 그녀 또한 대답하지 않고 버티자,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목에 스스로 상처를 냈다고 들었다.”

“덕분에요.”

“상처는…… 괜찮은 것이냐?”

그의 시선이 화장으로 가린 목덜미에 닿았다. 흉터가 없음에 안도하는 듯 샅샅이 훑어보던 눈길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이네트는 삐져나오는 비웃음을 겨우 눌러 삼켰다. 그 때문에 생긴 상처를 보고 괜찮은 것이냐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상처를 내게 하면서까지 도망치게 만든 것이 바로 그였다. 오롯이 그로 인해 생긴
상처를 두고 감히, 가증스럽게도.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던 가면이 파스스 깨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절벽의 바위처럼 굳었다.

“지금…… 내게 괜찮냐고 묻는 거예요?”

서리처럼 굳은 입매는 금방이라도 그를 원망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녀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다가와 하는 말이 고작…….

다시 벌어지려는 입술이 닫힌 것은, 그녀 곁으로 다가와 드리워진 그림자 덕분이었다. 이네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이.”

지크프리트였다. 그는 분노로 인해 살짝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가, 이내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황제와는 달리 사람의 온기를 머금고 있는
따스한 손이었다. 겹쳐진 두 손을 바라본 카시엘의 눈가가 뒤틀렸다.

“두 번째 춤은 내 것인 걸로 아는데. 혹시 디에드반 공작이 춤을 신청한 거야?”

“아뇨.”

이네트가 카시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뒤틀린 눈가가 깨어지는 것을 눈에 똑똑히 담으며, 그녀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미 곡은


연주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녀가 당기는 대로 연회의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카시엘은
그곳에 못 박힌 듯 서서, 멍하니 멀어지는 이네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6. 다시 피어나는 백합(1)

지크프리트는 시선을 내려 이네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살짝 굳어 있었다. 그는 굳어 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이. 공작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알려주지 않을 거야?”

“…….”

다물린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라 지크프리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지었다.

“누이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내 뒷조사를 하겠단 말이에요?”

“누이가 말해주기만 하면 그럴 일 없어.”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이네트는 미간을 확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가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날 저택에 감금했어요.”

“전대 공작이 아니라 지금 공작이?”

“네. 전대 공작은 어렸을 때 저를 별관에 가둬두고, 결혼할 나이가 되니 저와 상의도 없이 저를 웬 늙은


남자에게 보내버리려고 했죠. 그걸 저지하고 다시 가둬놓은 게 두 형제고요.”

“……어디에?”

“지하실에.”

지크프리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회색 눈이 일렁거렸다.

“누이를 지하실에 가둬놓았다고……?”

“네.”

멍하니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점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분노로 타오른 얼굴은 언제나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평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언제나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입매가 사납게 다물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이 아직도 멀리서 이네트를
바라보고 있는 공작에게로 향했다. 눈동자에 살의가 스몄다.

“내가 대신 죽여줄까, 누이? 시간은 제법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냐.”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이네트가 그를 당황스러운 낯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죽는다고 한 번도 가정한 적이 없었다. 이때껏 그들에게서 벗어날 생각만 했지, 그들을
죽일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페르닌드 디에드반이 죽는다면…….

가정해본 이네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그리 쉽게 죽어서는 안 됐다. 제가 겪은 고통의 절반은


못 되더라도 살아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 건 복수가 아니었다. 그러긴
싫었다.

“……그건 안 돼요.”
“누이 손으로 직접 죽이려고?”

“아뇨, 왜 죽여요? 보란 듯이 잘사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아무리 꺾고, 짓밟고, 핍박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고.

아무리 내 다리를 억지로 벌려 나를 겁탈해도, 난 절대로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행복해질 수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이 아무리 저를 붙잡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네트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행복해질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적성에도 맞지 않는 연회까지 열어 달라 사정까지 했죠.”

“……누이의 행복에 나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가 바라듯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법 익숙하게 그의 눈빛을 받아쳤다. 점점 면역이


생긴 탓이었다. 그녀의 능숙한 거절에 그는 나른한 한숨을 쉬며 심통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누이는 냉정해.”

“원래 그렇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말이라도 해주면 좀 좋아.”

“괜히 오해 사는 건 싫어요.”

“그렇지만…… 누이.”

지크프리트가 눈을 한 번 내리깔았다가 위로 뜨며 그녀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혹시 어젯밤 일, 잊은 거 아니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네트는 귓가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에 몸을 화들짝 떨었다. 스텝이


어긋나 비틀거리는 그녀를 지크프리트가 가볍게 감싸 안았다.

“역시 기억하고 있구나. 기억하면서 모른 척하지 않으리라 믿었어.”

“그건…….”

어젯밤 일은 사고였다. 술에 취해서 벌어진 사고. 그녀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냐. 그냥 날 너무 쉽게 내치지 말라는 소리야.”

오래도록 침묵이 이어졌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이네트는 결국 지크프리트가 몇 번이고 대답을 재촉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음악이 끝나자 이네트는 기다렸다는 듯 지크프리트의 손을 놓았다.

“더 안 출 거야?”

“네. 힘들어요.”
전혀 힘들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지크프리트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못 이긴 척 속아
넘어갔다. 이 정도 거짓말은 새끼고양이처럼 귀여운 수준이니까.

“그럼 아샤 누이에게 가자. 오늘은 되도록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이 맞았다. 연회 둘째 날이라 어제보다 인파가 많았고, 누군가 제게 말을 걸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되도록 그와 황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그에게 팔짱을 끼며 황녀가 있는 쪽을 향해 걸었다. 멀리서 황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에밀리도 함께 있었다.

“앗, 황녀님과 에밀리가 함께 있네요.”

그 둘이 함께 있는 모습에 지크프리트가 걸음을 멈칫했다. 그리고는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음,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왜요?”

그녀가 물으며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둘의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언제부터 둘이 아는 사이였을까? 둘의 조합은 신선하면서도 조금 놀라웠다.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마치,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에도 그 둘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익숙한지
얼굴을 맞붙이고 무어라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네트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난처해하는 모습


또한 뜻밖이었다.

“누이, 어쩔 수 없이 나와 단둘이 있어 줘야겠어.”

허나 그의 바람은 짧은 바람으로 끝났다.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네트는


고개를 돌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이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허리를 숙인 이는 황태자를 향해 인사하며 허리를 폈다. 지크프리트의 옆에 있는 이네트에게는 차가운


시선만 흘긋 줄 뿐이었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르왈드 후작. 무슨 일이지?”

적색 머리카락을 위로 깔끔하게 올린 남자가 이네트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듣는 귀가 없었으면 합니다만.”

“그때 그 이야기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 으음……. 누이, 미안하지만 잠시만 기다려줄래?”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 걸까? 이네트는 의아해하면서도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는 남자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연회장에 홀로 남은 이네트는 많은 인파 사이에서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서인지 에일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넓은 연회장 안을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회장 안을 홀로 거닐어도 말을 걸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무리가 형성되어 그녀에게


은근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그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네트는 괜히 그것에 상처받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연회장 구석구석까지도 샅샅이 훑어보았다.
혹시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출입문을 한 번 흘긋 보았다가 이내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괜히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발코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색 커튼을 걷자 넓은
발코니와 함께 어둠이 서린 하늘이 보였다.

발코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네트는 조용한 발코니를 둘러보다가 잠시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댔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발코니에서 보는 황궁의 풍경은 찬연했다. 나무는 기둥이 단단해 보였고,
가지에 붙어 있는 꽃잎은 이따금 발코니 바닥에 뚝 떨어졌다. 발코니 바닥에 떨어진 붉은 잎은 마치
인공적으로 조형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네트는 붉은 잎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붉은 잎과 닮은 짙은 붉은색의 커튼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마주친 푸른 눈동자에 숨을 삼켰다.

고요가 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넷…….”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거칠었다. 푸른 눈동자에 돋은 실핏줄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난관을 붙잡았다.

“왜, 또 도망가려고?”

페르닌드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너 또 술 마셨어?”

“응. 냄새나?”

그가 씩 웃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네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발코니


커튼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튼만 걷으면 됐다.

“이넷, 그러지 마.”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딱 멈추었다. 페르닌드가 여전히 웃음기가 스민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거짓말 했어?”

“뭐?”

“그때, 나한테 보고 싶었다고 말했잖아.”

설마 그 말을 진심이라고 믿은 건가? 그때도 못 믿어서 길길이 날뛰었던 주제에? 이네트가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어? 네가 한 짓을 생각해봐.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널 보고 싶을 리가 없잖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그제야 이네트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페르닌드가 흥분했을 때 괜히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다. 듣기 좋은 말로 구슬린 다음,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이넷.”

어느새 그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네트는 고개를 들어 전보다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마른 나무의 가지처럼 흔들렸다.

“다시 시작하자.”

“뭐……?”

뭘 다시 시작해? 이네트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싫어하는 짓 안 한다고 했잖아. 나 이제 잘할 수 있어.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

“…….”

“돌아가자. 돌아가서 옛날처럼…… 나랑 놀자. 검 놀이 하는 거 좋아했잖아. 응?”

그는 지금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빛바랜 추억을 끔찍한 악몽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이네트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치밀어 오르는 격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벼락처럼 가까이 붙어선
그의 뺨을 내리쳤다.

짝―!

거센 마찰음과 함께 페르닌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것으로도 참을 수 없어 다시 손을 들어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

페르닌드는 연달아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반쯤 죽은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고는 맞은 뺨을 문지를 뿐이었다.

이네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더 때려줘.”

“……뭐?”

“더 때려달라고…….”

그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치켜든 손이 허공에서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다시 그의 뺨을 가격했다.

“미친 새끼!”

다시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이네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손을 휘둘렀다. 뺨을


계속해서 때려도 넘쳐흐르는 분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손이 얼얼해질 때까지 휘두른 이네트는 맞은 반동에 의해 아까보다 뒤로 밀려난 페르닌드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던 폭력이 멈추자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붉게 부어오른 두 뺨과 터진 입가가 보였다. 페르닌드는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훔쳤다. 그렇게나
세게 때렸는데도 저 정도 상처밖에 내지 못했다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

페르닌드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그를 여전히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제 뺨으로 가져가 머리를 기울였다. 그녀는 손바닥에 퍼지는
열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돌아가자. 이제 다 괜찮을 거야. 우리…… 잘할 수 있어.”

“우리?”

우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멍해졌다. 우리라니. 그녀와 페르닌드, 카시엘까지 묶어 말하는 것인가?
생각이 스치자마자 그녀는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우리라니! 그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미쳤어? 우리라고?”

어이가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벌어진 입술에선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너한테 함부로 굴 일 없을 거야.”

“이제 함부로 굴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는 거겠지!”

이네트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먹었다 해도, 그녀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 그러는 것은 하등 소용이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그게?
상황에 맞춰 행동을 바꾼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냐, 난…….”

그녀는 더 듣기 싫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그를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커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게. 다신 찾아오지 마.”

그녀의 냉정한 일갈에 페르닌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가 행여 붙잡을까 황급히 커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나 예상했던 대로 커튼을 걷기 직전,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몸이 비틀거렸다.

“놔.”

페르닌드가 대답 없이 이네트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풍기는 술 냄새와 익숙한 품에 이네트가 발작하듯이


몸을 버둥거렸다.

“싫어! 놓으라고!”

그녀가 작살에 걸린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버둥거리자 그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는 곧바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원래 같으면 버둥거리든 말든 꽉 껴안고서 제멋대로 해야 했다. 놓으라고 하니 바로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빠져나오고 나서도 무언가 의아하여 눈썹을 찌푸렸다. 마주 선 페르닌드의
표정은 여전히 멍했다.

아직도 저런 표정이라니……. 무언가 이상했다.

“네가 싫어하는 건…… 이제 안 할게.”

스쳐지나가는 갈대 잎처럼 그가 속삭였다.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부어오른 얼굴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미안해, 그러니까…….”

더듬거리던 페르닌드가 그녀의 앞에 엉거주춤 가까이 다가섰다. 부어오른 두 뺨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가까이 있는 이네트에게 두 팔을 뻗었다가 이내 힘없이 떨구었다.

일그러진 눈가가 정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하염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목울대를 움직였다.


이네트는 적막하다 못해 압박감까지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에 숨을 들이마셨다. 등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그가 천천히 무릎을 아래로 내렸다.

“……!”

이네트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숨을 멈췄다. 그녀의 아래에 파고들어 게걸스럽게 음부를 핥을 때에만
무릎 꿇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채 울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페르닌드의 푸른 눈동자에서 끝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흐르는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매달렸다.


매달린 눈물은 얼마 안 가 그의 허벅지로 점점이 떨어졌다. 손등과 천이 순식간에 눈물로 흠뻑 젖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와 주면 안 돼?”

“…….”

“이제, 제발 그만…….”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젖은 바짓단이 모이며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네트는 울고 있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망연자실했다. 왜…… 왜 이제 와서……?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거, 늦었다는 거 알아. 널 볼 수 없는 동안 나도 다시 생각해봤어.”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네트는 아까까지만 해도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은 것을


느꼈다. 전신이 서늘했다.

“난, 난 그냥… 너를 미워하고 싶었던 거였어.”

“…….”

“어머니가 죽은 것도 너 때문이고, 계속 눈앞에 얼쩡거리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도 너고, 네가,


네가 날 계속 무시하니까……!”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던 페르닌드가 숨을 들이켜더니 말을 끊었다. 이네트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날 지하실로 끌고 가서 가둬놓고 겁탈했어?”

페르닌드는 입술을 달싹이며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비친 달빛 탓에 마른 뺨과 축축한 입술에 어린


물기가 선연히 빛났다. 수척해진 낯에도 유려한 미모는 여전했다. 그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제 다리에 젖은 뺨을 문대는 그를 허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사, 사랑해….”

“…….”

“이넷. 나 버리지 마…….”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가슴이 싸해졌다. 가냘프게까지 느껴지는 사랑 고백에도 전신이 서늘하다 못해


안의 내장까지 차게 식었다. 그저 미워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 그랬단 말인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감정에서 비롯된 일이 제게 있어 얼마나 끔찍하고, 역겹고, 치열한 악몽이 되었는지 그가 알긴 할까?


지금 이 순간조차 그녀는 그 끔찍한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인형처럼 매끄러운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서렸다. 그녀도 모르게 고인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페르닌드, 난 용서할 수 없어.”

어릴 적, 그 낯선 저택에서 유일하게 제 손을 잡아주고 먼저 찾아와준 이는 오로지 페르닌드뿐이었다.

‘같이 놀자!’

천사 같은 외모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내가 네 동생이래!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손을


내민 그 아이는 처음 봤음에도 눈이 부실 만큼 반짝반짝 빛났다. 이네트는 그 조그마한 아이에게 단숨에
마음이 빼앗겼다.

커다란 돌을 어디선가 주워 와서는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던 것이 페르닌드였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고선 그녀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쿡쿡 찔렀던 것도
페르닌드였고, 우울해하는 이네트를 위로해준 것도 페르닌드였다.

그래서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의지했던 자신을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별관에서 지냈던 오랜 칩거 생활에서 벗어나 본 저택으로 오게 되었을 때, 저를 벌레처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페르닌드는 어떻게 자랐을까? 여전할까? 왜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별관에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던가. 이네트는 페르닌드가 어린 시절의 그 반짝반짝 빛나던 모습처럼
아름답게 자랐으리라 믿었고, 그리 상상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페르닌드는 천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유려한 미남으로 성장해 있었다. 비단결처럼 고운
머릿결, 섬세한 이목구비, 밝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혈색 좋은 두 뺨과 붉은 입술 모두,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려는 순간, 차가운 눈빛에 허공에 든 손이 멈칫 굳었다.

‘창녀.’

매끄러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한 단어.

이네트는 그녀를 경멸하는 그의 눈빛과 혐오와 증오를 담은 그 단어에 가슴 깊이 상처받았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던 것만큼이나 큰 상처였다.
상처를 떠올리자 한줄기 흘러내리던 눈물은 어느새 쏟아지는 빗줄기가 되어 뺨을 적셨다. 페르닌드가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이넷…….”

“페르닌드, 너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미안, 미안해.”

“카시엘, 그는 몰라도 너만큼은…… 너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러고도 모자라 지하실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배신감, 허탈함은…… 지금 생각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세월이 흘러 아름다웠던 추억은 빛바랬고, 빛바랜 추억은 그로 인해
처절한 악몽으로 변했다.

무얼 기대했던 걸까? 그녀는 제 마음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페르닌드가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고


사과해도 그녀의 마음에 남은 앙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상처는 끊임없이 떠올랐다.

“난 너랑 같이 못 있어.”

“이넷, 제발……!”

“그건 안 돼, 안 되겠어.”

너를 볼 때마다 나는 괴롭고 고통스러울 테니까. 이네트가 낮게 뇌까리자 그녀의 종아리를 붙든


페르닌드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정말 안 되겠냐고, 눈빛으로, 눈물로 호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했다.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라도 움직여 커튼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으려는 순간, 뒤에서 페르닌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넷, 지금 이렇게 가면… 후회할 거야.”

무얼 후회한단 말인가? 이네트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이어 젖은 눈가와 뺨을 손등으로 닦았다. 눈물에


젖은 손을 드레스에 닦아내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튼을 걷었다.

확 넓어진 시야에 수많은 인파가 들어옴과 동시에 먹먹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네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을 가장하며 그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열심히 연회장을 쏘다니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한달음에 그녀에게로 뛰어왔다.

“누이! 어디 갔었던 거야? 안 보여서 걱정했잖아!”

“잠시 발코니에 있었어요.”

“발코니? 그보다 잠시…… 얼굴이 왜 이래?”

그가 그녀의 붉은 눈가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녀의 얼굴 곳곳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네트가 시치미를 떼자 지크프리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는 그녀의 눈가에 고인 물기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수군거렸다. 이네트가 당황스러워하며 입을 벌렸다.

“지금 사람도 많은 곳에서 뭐 하는 거예요?”

그는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누이의 가벼운 거짓말은 귀여워서 몇 번 넘어갔지만…… 이번 건 못 넘어가겠는데. 무슨 일이야?”

가벼운 거짓말이라는 말에 그녀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했다. 그녀는


망설이다 결국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발코니에서, 누굴 좀 만났어요.”

“누구?”

“……페르닌드 디에드반. 공작가의 둘째요. 한때는 제 동생이었던…….”

한때는, 이라는 말이 이네트의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바스스 굴렀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누이를 지하실에 감금했다던 그놈 말이군.”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사선으로 비꼈다. 아까 그 일을 상기하니 마음이 뒤숭숭하고 속이


답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회장 안은 음악 소리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 음식과 술 냄새로 가득했다.
정신 사나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밖에 나가면 안 될까요?”

“좋아, 누이.”

그가 흔쾌히 수락하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녀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운 채로 웅성거리는 연회장을


벗어났다. 지겨운 악기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줄어들자 그제야 속이 트이는 듯했다.

널따란 궁을 쭉 걷다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이네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녀의 곁에 가까이 몸을 붙였다.

“만나서 무슨 얘기 했어?”

“…네?”

“그 디에드반 공작가의 둘째와 말이야.”

앞으로 걷던 이네트의 걸음이 멈췄다. 몇 초간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대답 없이 다시 앞으로 걸었다.

“말해주지 않을 거야?”

“굳이 치부를 드러낼 필요 없죠.”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처였다. 지독한 악몽을 공유하는 것은 에일로 족했다. 아무리
절반의 피를 이은 이복동생이라 하여도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크프리트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곳에 편승할 생각은 없는 거야, 누이?”

“제가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만 알려지면 돼요. 그 이상 바라지 않아요. 이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거고요.”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고?”

“네. 에로드와 약혼식을 치를 거예요. 치르자마자 궁을 떠날 거고요.”

그녀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눈이 서늘하게 돌변했다.

“언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요. 왜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을 본 그녀가


몸을 흠칫 떨며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설마 누이, 나와 그런 짓까지 해놓고… 그냥 덮으려고?”

“그런 짓이라니.”

“어젯밤 나와 혀를 섞고 몸을 뒤엉켰잖아. 기억 안 나?”

이네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기억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수치심, 죄책감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건…… 실수였어요.”

“그래, 실수겠지. 하지만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아. 누이가 내게 먼저 손을 뻗었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에일로 착각해 먼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상태였고, 그라고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인 일이었다. 억울했다.

“그건, 당신을 에일로 착각해서……!”

“그가 이 일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네트의 벌어진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이해해줄 거예요. 다정한 사람이니까…….”

카시엘과 페르닌드와 난잡하게 뒤엉키던 모습을 보고도 저를 품어준 사람이었다. 술에 취해 일어난 일을


가지고 그녀를 손가락질하거나 다그칠 사람이 아니었다.

별개로 그를 향한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실수라고 한들, 에일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부정하고 싶은 일이었다.

“설령 그자가 이해해준다 한들…… 난 어젯밤 일을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진 않아.”


지크프리트가 이네트에게 가까이 몸을 붙였다. 훅 다가오는 그의 체향에 이네트가 몸을 굳혔다. 그의
얼굴 위로 음영이 짙게 드리웠다. 그녀는 남동생이 아닌 남자의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컸나? 이다지도 큰 존재였던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황태자라는 신분의 위압감보다 더한 무거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가 아무리


그녀보다 나이가 두 살 어리다 해도,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덩치도 큰 편이었다. 옷 안에는
승마와 검술 훈련, 마상 시합 연습 때문에 탄탄하게 단련된 근육질의 몸이 숨겨져 있었다.

커다란 손이 이네트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가 은밀히 속삭였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덮을 순 없잖아. 그렇지, 누이?”

그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와 부딪혔다. 그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같이 춤을 연습하며


몸을 맞부딪힌 적은 많았지만, 이토록 얼굴끼리 가까이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이네트가 눈을 아래로
깔며 시선을 피했다.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멀리서 그와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 두 명과 눈이


마주쳤다. 회색빛이 섞인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경악에 입을 벌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보란 듯이 활짝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자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멀리 있어도 느껴지는 흉흉한 기세에 그는 우월감에 휩싸였다.

그래봤자 저 남자는 기사서임을 받지 못하고, 작위도 이어받지 못할 백작가의 막내에 불과했다. 데반


백작가가 가진 금광과 광산 때문에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데반
백작’의 것이지, 저 애송이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은 언제든 변할 수 있었다. 만나지 못하게 하면 그만 아닌가. 그럼에도 끊어지지 않는


감정이라면, 제가 식고 나서 다시 만나면 될 일이었다. 지크프리트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이네트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그만해요…….”

품 안에 갇힌 이네트가 작게 속삭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내려다 본 그녀의 얼굴에 난감함과 초조함이


물씬 묻어났다.

이쯤 하면 충분하겠지. 지크프리트는 옆을 슬쩍 확인하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눈빛으로 살기를 내뿜던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크, 어젯밤 일은 정말…… 실수였어요. 나와 당신은 비록 반쪽일지라도 피를 나눈 남매잖아요. 옳지


않은 일이에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는 이네트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내가 착각으로 당신을 끌어들인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도 잘한 건 없어요. 그때 난 당신과 에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였는데…… 그런 나와 몸을 섞다니!”

미약하게 떨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힘을 얻고 또렷해졌다. 지크프리트는 끝까지 가지 않았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다지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안해, 누이.”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어깨를 늘어트리고선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마치 혼이 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내 실수가 맞아. 잘못했어.”

그가 굽히고 들어오자 이네트는 예상하지 못한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능글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거듭 이어진 사과에 이네트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말에 단번에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며
사과하는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낯설고, 기이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사과를 바랐던 게 아닌 걸까? 뭘 원했던 거지? 이네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날 용서해줄 순 없을까? 누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미움이라뇨…….”

이네트는 왜인지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피가 섞인 것을 떠나, 황궁에서 외로이 지낼 때 그녀에게


붙임성 있게 다가오고 그녀를 챙겨준 것은 지크프리트뿐이었으니까. 아나스타시아는 원래 무심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어젯밤 일만 아니었다면, 그와 스스럼없이 장난을 쳤겠지.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이네트는 착잡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크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제 일은 없었던 일로 했으면 좋겠어요.”

지크프리트는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분수대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따금 열린 창문 사이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네트는 이름 모를 이들의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수다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반짝거리는 하늘은 아름다웠고, 공기도 청량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들고 있던 고개를 내리자 지크프리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이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이, 바람이 차. 이제 그만 슬슬 들어갈까?”

“……네.”

이네트는 결국 원하는 답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어 그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은 황제의 손과는 다르게 따스했다.

궁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쭉 걷다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 소리에 이네트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크, 무슨 소리가…….”

“문을 제대로 안 닫고 하고 있나 보네.”

의아해하는 이네트와 달리 그는 익숙한 듯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살짝 열려 있는


문으로 향했다.
“조심성 없긴.”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이네트는 애써 그 소리를 무시하며 지크프리트를 잡아끌었다.

“빠, 빨리 가요…….”

“왜? 조금 놀려주고 싶은데. 감히 지엄한 황궁에서 몸을 섞다니.”

연회 날, 암암리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몸을 섞는 일이 벌어지긴 했으나 이렇듯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조심성 없이 구는 이는 드물었다.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기겁하며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괜히 그러지 말고요!”

“알겠어. 장난이야, 장난. 그래도 문은 닫아주고 와야지. 우리 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보면 놀랄 테니까.


그렇지, 누이?”

“지크, 당신은 정말…….”

이네트가 못 이기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가 걷는 대로 뒤를 따랐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희미한 신음 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흐읏, 으응…!”

여자의 높고 가냘픈 소리에 이네트는 저도 모르게 목 뒤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열린 문 틈새로,


뒤엉킨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으나, 달빛 때문에 뱀처럼 난잡하게 몸을
얽은 남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였다. 이네트는 낯익은 남자의 얼굴에 눈을 깜빡였다.

저 남자는…… 발코니에 가기 전, 지크프리트에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그 남자였다. 인기척을 알아챈


남자가 이네트와 지크프리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격하게 흔들리던 남자의
허릿짓이 멈추었다.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가 간드러지는 신음을 흘리더니 다시 움직이라며 남자를 재촉했다. 남자가
아무 반응 없이 문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여자 또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듯 이네트와
지크프리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쾌락에 잠식되어 있던 여자의 눈이 토끼처럼 커다랗게 뜨였다.

“재미있는 광경이네.”

지크프리트가 어이없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르왈드 후작. 그대는 내 누이의 약혼자일 텐데…… 그 밑의 여인은 아샤 누이가 아닌 체스콧


남작부인이로군?”

아나스타시아의 약혼자라고? 이네트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황녀의 약혼자가


부정을 저지르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제롬 르왈드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여자의 질에서 성기를 빼냈다. 쿨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인 액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노골적인 광경이었다.

바지를 위로 올려 입고 옷매무새를 단장한 제롬이 지크프리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정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전하.”


“그 사과는 내가 아닌 아샤 누이에게 해야지.”

그 말에 제롬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정사를 나누었던 여자가 페티코트와 풀어헤쳐진 슈미즈를 정리하더니


허겁지겁 지크프리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그대는 늙은 남작에게 썩 만족을 못 한 모양이야?”

그가 조롱이 여실히 담긴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체스콧 남작부인이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모습은 왜인지 측은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그래, 뭐. 나중에 얘기하지.”

지크프리트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네트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었다. 정신을 차린 이네트가


그와 걸음을 맞추며 정사의 향기가 아직 남아있는 방 앞에서 벗어났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못 박힌
것처럼 우뚝 서 있는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난잡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까 그 남자…… 황녀 전하의 약혼자예요?”

“응. 원래 방종한 놈인 건 알고 있었는데, 약혼을 치른 뒤에도 저럴 줄은 몰랐네.”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지크, 당신도 방탕한 걸로 알고 있는걸요.”

그가 아차, 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난감한 듯 미간을 좁히며 그가 답지 않게 궁색한 변명을 했다.

“누이…… 그건 오해야. 아샤 누이가 날 놀리기 위해 과장해서 말하는 거지, 난 그렇게 더러운 놈이


아냐.”

“놀아나긴 했나 봐요?”

이네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할 말이 없는지 그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면서도 아예 입을 다물긴 뭣했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며 할 말을 골랐다.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아
올린 그가 간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누이, 나는 누이를 만나고 난 뒤에는 다른 여자와 놀아난 적 없어. 이건 정말이야. 믿어줘.”

애처로운 눈길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이네트는 그가 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변호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와 만난 뒤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 않았다는 걸 내게 증명해서 뭐 하려고요? 나 덕분에 방탕한 생활을


정리했다는 말이에요?”

“아…….”

그녀의 말에 그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식을 내뱉더니 넋 나간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누이를 만난 뒤 다른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네…….”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가 잡고 있던 이네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멍한 표정과는 달리 이네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요. 지크의 인생이니까.”

그녀가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그는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이네트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심장의 맥동이 그 스스로 느껴질 만큼 빨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 오고 뭐 해요?”

앞서거니 걷던 이네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향했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온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팔짱을 낀 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 곳곳을
둘러보아도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군가를 찾는 기색을 보이자 지크프리트가 슬며시 물었다.

“누구 찾아?”

“에로드와 아나스타시아 황녀 전하요.”

“으음…… 아샤 누이라면 아마 여기 없을 거야. 아마 에밀리 데반과 함께 있을 거거든.”

“에밀리와요?”

“응. 아샤 누이와 에밀리 데반은 사이가 정말 좋거든. 지나칠 정도로.”

지크프리트가 알 만하다는 듯 출입구 쪽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와 둘이 있는 게 좋을걸. 괜히 다른 남자랑 붙어 다니다가 시비 걸릴 수도 있고,


오늘은 타국의 귀족들도 참여했으니까.”

“그렇지만…….”

“내일도 있잖아? 내일을 기약해, 누이.”

지크프리트가 눈을 휘어 보였다. 꾸며낸 듯 지나치게 화사한 미소였다. 이네트는 눈썹을 까딱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주변에서는 일리아드 제국이 장악하고 있는 로아드 대륙의 로아드어뿐만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타 대륙의 언어가 들렸다. 일리아드 제국인과 확연히 다른 피부색과 머리 색, 복장까지 갖춘 자들이
연회장 곳곳에 있었다.

“타 대륙 사람은 처음 봐요.”

“타 대륙에 가본 적 없어, 누이?”

“네…… 한 번도.”

그야말로 새장 속의 새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일리아드 제국뿐만 아니라, 이곳 수도에서 벗어난 적도


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이네트는 더욱 이곳에서 벗어나 에일과 함께 자유로이 여행을 다니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수도에서 벗어나면 에일, 아니 에로드와 함께 타 대륙으로 여행을 가봐야겠어요.”

그녀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프리트는 대답 없이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보다는 내가 더 나을걸? 난 게르단어(*바스타드 왕국이 있는 대륙의 공용어)를 현지인처럼 능숙하게
쓸 수 있거든. 그리고 좋은 여행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 게르단 대륙은 기후가 습하고 더워서 해변이
관광명소거든. 특히 바스타드 왕국의 해변이 가장 아름답고, 드네아라는 특산물이 정말 맛있어.”

“그래요?”

“응. 그리고 게르단 대륙뿐만 아니라 에벨루넨 대륙도 있어. 그곳은 1 년 내내 춥지만 대신 온천 사업이
발달해 있지. 귀족들이 요양을 목적으로 자주 떠나기도 해. 물론 난 에벨루넨어도 가능해.”

“온천이요? 와.”

온천이라는 말에 이네트의 뺨에 발그레 화색이 돌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에로드와 함께 가면 정말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의기양양하던 지크프리트의 웃음이 바스스 깨어졌다. 그는 쳇, 혀를 차며 입술을 내밀었다.

“누이는 머릿속에 그 남자 생각밖에 없지?”

“네? 그야…… 당연하죠.”

이네트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크프리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한 말인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철벽인 건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끼어들 틈은 확실히 없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긴 일렀다. 그는 제법 끈기와 집념이 있었다. 허구한 날 그를 무시하고 놀리는


아나스타시아도 인정한 부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끔찍이 싫어해, 하기 싫은 마상
시합 연습과 검술 훈련도 빼먹지 않고 참여해 어떻게든 1 등을 거머쥐었다. 순전히 지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고작 백작가의 막내한테 빼앗기기엔, 누이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지크프리트는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트레이 위의 음료를 한 잔 집어 들었다. 붉은색의


음료는 한눈에 봐도 시원해 보였다.

“누이, 이거 마셔봐. 산수유 차인데 적당히 시큼하고 시원해서 맛있어.”

이네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가 입을 벌렸다.

“나 의심하는 거야? 내가 누이에게 약이라도 먹일 놈으로 보여?”

그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의심되면 내가 먼저 한 모금 마실게. 됐지?”

잔을 흔들어 보인 그가 보란 듯이 한 모금을 꿀꺽 마셨다. 삼키는 소리와 동시에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어때. 아무 일 없지? 나 좀 믿어줘, 누이.”

그가 믿어달라는 듯 간곡한 어조로 말하며 재차 잔을 들이밀었다. 이네트는 소리 내어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시큼한 맛이 입 안에 가득 들어찼다. 나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는 남잔가……?”


그가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끄응, 하는 소리까지 내기에 이네트가 웃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밀었다.

“그냥 놀린 거예요, 지크. 당신이 그러니까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날 놀리는 데다 내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밀 수 있는 사람은 누이뿐일 거야.”

그가 밀려난 어깨를 흘긋 보며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장난이 너무 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그는 황태자였다.

“미안해요, 지크. 당신이 너무 편해졌나 봐요.”

“미안할 필요는 없어. 나한테 함부로 굴어도 되는 이는 아샤 누이랑 누이. 아, 그리고 폐하까지 총 세
명뿐이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능청스럽게 미소 지었다. 역시 편하게 대하게 되는 건 그의 태도 탓도 있었다.


이네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황녀 전하께서는 어디 계신 걸까요? 연회장 안에는 없는 것 같은데……. 아까 분명히 에밀리와


함께 있지 않았나요?”

“그 둘은 그냥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다녀. 아마 둘이 노느라 바쁠 테니까.”

“두 분이 그렇게 친한 사이세요?”

“응. 죽고 못 사는 사이야.”

왠지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미묘해 보였다. 이네트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더


가까이서 지켜본 그가 더 잘 알 것이었다.

결국 이네트는 연회 둘째 날을 통째로 지크프리트와 함께 보내야 했다. 그와 함께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음료나 홀짝홀짝 마시고, 몇 번 춤을 추다 보니 시간은 훌쩍 갔다.

누군가 이따금 말을 걸기도 했는데, 전부 황태자와의 친목 도모가 목적이었다. 그 옆에 있는


이네트에게는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인사치레 정도의 말만 건넸다. 차라리 그녀는 그게 더 편했다. 옆에
가만히 서서 지크프리트와 낯선 이가 대화하는 것을 멍하니 듣기만 했다.

허나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한계였다. 지루해진 이네트는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연회장 밖을 빠져나왔다.


지크프리트가 그녀를 궁에 데려다주었다.

“누이, 내일도 데리러 올게.”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내일은 에일과 함께 있으려고요.”

“그자와 약속이라도 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일단 나와 함께 연회장으로 가. 그리고 둘이 만나면 되잖아. 그렇지?”

“으음…… 그래요. 그럴게요.”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 인사에 화답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네트는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대기하고 있던 여자 사용인 두 명이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그녀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양해를 구한 후,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슈미즈, 페티코트, 스타킹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벗겼다. 이네트는 벽에 반쯤 기댄 채로 시중을
받았다.

“목욕하시겠습니까?”

“응.”

“물을 받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네트는 나체 위에 가운을 한 장 걸친 뒤, 물이 다 받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뿌연 김이 올라오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욕조 안으로
발을 넣자 나른한 감각이 몸에 퍼졌다.

아까 지크프리트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벨루넨 대륙이 온천이 유명하다고 했지. 이렇게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을 게 분명했다. 달아오른 물이 몸을
감싸고, 위로는 차가운 공기가 스쳐 지나가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 평화로운 상상 속에는 당연하다는 듯 에일도 함께 있었다.

연회가 열린 뒤로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멀리서나마 마주치긴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와 둘만


있을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내일은 꼭 마주칠 수 있기를…….

이네트는 그렇게 바라며 눈을 반쯤 감았다.

* * *

정오를 넘긴 낮 즈음이 되자 지크프리트가 노크 소리와 함께 방을 찾았다. 그가 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네트를 보자마자 흐응,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뭐야, 누이. 그 남자와 단둘이 있다고 그렇게 예쁘게 꾸민 거야?”

“어제랑 다를 바 없는 걸요, 뭘.”

“아냐. 누이 표정부터가 달라. 반짝반짝해서 기분 나빠.”

“꼬였기는…….”

“뭐라고?”

이네트가 냉큼 그를 지나쳐 앞으로 훌쩍 걸었다. 뒤에서 그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그가 누이, 부르며 뒤쫓아 왔다.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이네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에일이 어디 있나 찾기 시작했다. 뻔히 보이는


행동에 지크프리트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에일의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다니…….

이네트의 얼굴색이 어두워질 찰나, 그녀의 시선 끝에 에이든과 그의 약혼녀가 보였다. 그녀가 화색을
지었다.

“지크, 나 데반 백작님에게로 가볼게요!”

그녀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또한 가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이네트는 빠른 걸음으로 데반 백작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백작님.”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부르며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에이든이 웃으며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옆에 있던 에이든의 약혼녀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네트 님, 아니, 화…….”

이네트가 손을 내저으며 에이든의 말을 끊었다.

“호칭은 그걸로 충분해요. 그런데 에로드는 어디 갔나요?”

“누군가 불러서 잠시 밖으로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네요.”

누군가 부르다니, 친구인 걸까? 이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친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친구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곧 돌아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좀 기다리죠, 뭐.”

이네트는 에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에이든과 그녀의 약혼녀, 레지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혹여나
그들의 평판에 흠이 될까 봐 걱정했으나 에이든은 걱정할 필요 없다며 그녀를 달랬다.

“어차피 저희 가문은 황족과 깊은 관계를 맺은 가문인지라……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이미 데반 백작가는 한 번 무너졌다가 황제의 정부인 벨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선 가문이었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맺어진 거래라고는 하나, 귀족들로 똘똘 뭉친 의회파보다 황족과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가 직접 딸이라고 밝힌 이네트와 친목을 도모한다 해서 더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다만, 걱정했어요. 갑자기 사라지셔서…… 물론 그 뒤 사정을 듣긴 했습니다만.”

“미안해요. 그땐 불가항력이었어요.”

“사과해야 할 건 저죠. 마차를 들여보낸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관련된 사용인들 모두를 해고했어요.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 알아요. 미안해요, 영애.”

그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하자 이네트는 도리어 당황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러지 말라고
그를 만류했다.

그 이후 형식적인 화젯거리가 오고 갔다. 이야기할 화젯거리는 점점 떨어지는데, 좀처럼 에일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네트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에요?”

“으음…….”

에이든도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네트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다 결심한 듯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제가 찾아보고 올게요.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이네트가 에이든과 로지나에게 밝게 인사했다. 그녀는 그들이 제대로 답인사를 하기도 전에 이네트가 훌쩍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이른 낮이라 그런지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빈 그릇을 수거하는 사용인과 새 음식을
갖다 나르는 사용인, 청소를 하는 사용인 등…… 인원이 제법 많았다.

이네트는 고민하다가 그중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거기 너. 갈색 머리의 귀족 남자를 본 적 있니? 키와 덩치가 크고, 눈꼬리는 아래로 쳐진 인상 좋은


남자인데.”

복도를 청소하던 사용인이 화들짝 놀라며 밀대 걸레를 바닥에 놓쳤다.

“아, 아뇨…… 갈색 머리의 영식을 몇 분 보긴 하였지만, 말씀하신 분은 모, 못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알겠어.”

이네트가 후우, 짤막하게 한숨을 쉬며 다시 쭉 앞으로 걸었다. 이따금 간간이 지나가는 귀족 무리가
보였으나, 그중에 에일은 없었다. 정원까지 나오는 길에도 그를 찾지 못했다. 혹시나 정원에 있나 싶어
이네트는 정원 깊숙이 들어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보이는 것은 아름답게 핀 꽃과 울창한 나무뿐이었고, 들리는 것은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다. 멀리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에일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궁에도, 정원에도 그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반쯤 포기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걸음을 돌린 순간, 이네트가 몸을 굳혔다.

“이네트.”

카시엘 디에드반이었다.

이네트는 순간 숨을 멈추고 빠르게 눈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고요했다. 그녀가 드레스를 움켜쥐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디에드반 공작저에 온지 얼마 안 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저택으로 다시 붙잡혀 들어갔을 때까지의 그림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오두막의 벽면과 천장에 붙어 있던
것이 떠올랐다. 빼곡한 종이의 향연을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네트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카시엘이 입을 열었다.

“……내가 무서운가?”

상념에 빠져 있던 이네트가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섭냐고? 다소 황당한 물음에 순간 맥이 풀렸다. 그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인지, 그 어떤 이유든 간에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그를 노려보자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그러니까…….”

그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이리저리 황망하게 시선을 굴리며 그녀가 어디론가 또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듯 그녀의 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시엘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초조한 기색을 비쳤다. 잘 정돈한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따라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내리쬐었다. 햇빛을 머금은 금색 눈동자가 넘실대는 감정에 일렁거렸다. 그녀의 발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는 이윽고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토해내듯 물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뭐라고요?”

“그때 분명히 약속했잖아. 도망치지 않고 곁에 있겠다고.”

이네트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믿은 거예요?”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그가 숨을 멈췄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던 그의 눈이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네트는 오히려 그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납치하고, 감금하고, 겁탈까지 한 주제에 자신이
진심으로 그를 떠나지 않으리라 믿었단 말인가?

몇 번이고 벗어나려고 애를 썼고, 이미 속인 적도 한 차례 있었다. 그런데도 의심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어서 합리화라도 한 것일까? 어떤 이유든 간에 가증스러웠다.

어떻게, 어떻게 그와 내가…… 그때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일을 묻고서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내게 사과한 적도 없는데? 그는 그 사실을 그저 덮으려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치부하는데?
그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걸까?

이네트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들끓었다.

“약속했지 않으냐고요……? 그게 어떻게 약속이에요?”

노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마른 나무의 가지처럼 흔들렸다.

“내가, 진심으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을 거라 생각해요?”

말을 하면서도 끔찍한 나머지 이네트가 몸을 떨었다. 가느다란 몸이 넘어질 것처럼 흔들리자, 카시엘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손길을 느끼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몸을
세게 밀쳐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턱이 돌아갔다.

이네트는 손에 남은 얼얼한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그의 턱을 바라보았다. 발간 자국과 함께 방금


생긴 긁힌 상처가 보였다.

카시엘이 손가락으로 상처를 더듬거렸다.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는 피를 보고서도 조용했다.


대신 주먹을 쥐어 피를 감췄다.

“그러면…… 전부 다 거짓이었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게 순순히 안긴 것도, 내게 먼저 입을 맞춘 것도, 날 바라보았던 눈빛도 전부?”

이네트가 할 말을 잃고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배신당한 옛 연인처럼 굴고 있었다.

“그자에게 가기 위해서?”

에일을 향한 서슬 퍼런 원망을 숨기지 않으며.

우스운 일이었다. 왜 그녀가 에일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는지 안다면…… 저런 질문 따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을 텐데.

분노로 들끓던 이네트의 눈동자가 서리처럼 차게 식었다. 카시엘이 그녀의 침묵을 달리 해석했는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네트, 그자는 우리 가문에 몰래 숨어든 간자다.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고, 어쩌면 지금도
너를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자는 작위도 이어받지 못할뿐더러 정식 기사서임도 받지 않았어.
그 하등한 벌레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그러는 오라버니는, 내게 어울리나요?”

횡설수설하던 카시엘이 말을 멈췄다.

그의 턱에 맺힌 핏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다. 그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 멀거니 물었다.

“나는 왜 안 되지?”

“…….”

“그자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돼?”

꼭 목이 졸린 사람처럼, 곧 죽을 사람처럼.

그가 눈을 일그러트리더니 이윽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가 평소와 다르게


말을 길게 늘였다.

“이전에 네게 함부로 군 것 때문에 내가 원망스러운 건가? 그건…… 후회하고 있다. 반성하고 있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너를 저택으로 다시 데려왔을 때부터 나는 네게 함부로 굴지 않으려 노력했어. 난,
결코…… 너를 상처 입히려고…….”

“가증스러워.”

이네트가 카시엘의 말을 잘랐다. 그를 사로잡기 위해 보였던 알량한 겉모습이 아닌, 진실로 그를


증오하며 혐오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자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실은 알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할 일 없다는 거.”

“…….”

“연회장에서 마주쳤을 때조차, 난 당신이랑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는 거.”

지크프리트와 춤을 추는 내내 따라붙었던 시선을 기억했다. 그는 춤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크프리트조차 눈치를 채고 물어올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그 시선은…… 질리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이네트는 불어난 강물과도
같은 카시엘의 감정을 알기에 더욱 그가 가증스러웠고, 피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상처 입을 테니까. 그녀는 보답받지 못하는 애정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고 있었다. 디에드반 공작저 별관에서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그는 높게 솟은 벽을 마주한 사람처럼 막막한 얼굴을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흘러넘쳐 불어난 감정은 배출부터 잘못되었고, 불어난 감정에 그가 잠겨 죽는다 해도 그 감정을 받아줄
이는 없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을뿐더러,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네트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냥 내 앞에서 사라져주면 돼요.”

카시엘이 어떻게든 저를 옆에 두고 싶어 한다면, 저는 반대로 그의 곁에 있지 않으면 되었다. 자신은


결코 그가 원하는 걸 이뤄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는 감정의 배출조차 막히자 영혼의 일부를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에서는 얕은 숨만 새어 나왔다.

이네트는 넋이 나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녀가 제 곁을 떠나


뒷모습을 보이는데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결국 붙잡지 못했다.

* * *

정원을 빠져나온 이네트는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체득된
두려움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에일이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궁 밖을 서성거리다 그를 찾지 못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에이든과 함께 있는 에일이 눈에 보였다. 이네트는 멀리서도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몰려오는 반가움에 한달음에 에일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네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에이든과
레지나가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에일이 다가오는 이네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녹색 눈이 헐거운 자물쇠처럼


삐걱거렸다. 허나 이내 그 기색은 지워지고, 초승달처럼 휜 눈이 남았다.

“오래간만입니다, 아가씨.”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평소와 같은 다정한 모습인데도 그녀는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에 흐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오래간만에 만났음에도, 그는 그녀를 반가워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영문 모를 태도에


이네트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는 저를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를 찾겠다고 정원과 궁을 오고
갔기에 그 실망감은 컸다.

“에일, 너…… 나 안 보고 싶었어?”

이네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에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면서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회피했다.

눈을 피하는 모습에 이네트는 순간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에일이 먼저 저를 피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전하와 함께 계시던 게 아니었습니까?”

“오늘은 너와 단둘이 있을 거야.”

“……전하께서 따로 용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아냐, 내가 너와 단둘이 있겠다고 했어.”

“그렇습니까.”

에일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늘 이네트를 볼 때마다 옅은 미소를 띄웠기에, 그녀는 그의 무표정이


어색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언제나 다정할 거라 믿었기에,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자 그 믿음의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침묵을 깼다.

“에일, 잠시 발코니로 가서 이야기할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입술을 앙다물기만 했다.

“아까 널 찾으러 다녔어. 백작님께서 네가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나갔다고 해서……. 어디 갔다 온


거야?”

이네트가 다시 물었다. 그가 그제야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친구? 어떤 친구?”
그가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와 만나고 왔습니다.”

그녀는 그 친구가 누구냐고, 어디에 있었기에 찾아도 보이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으나 너무 캐묻는
모양새인 거 같아 물음을 삼켰다.

그는,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도 저처럼 반가워하리라 믿었기에 이네트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아가씨, 저는 속이 좋지 않아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간다고? 아직 얼마 보지도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그녀가 당황스러운 낯을 숨기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가씨께서도 전하께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에일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지,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바로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네트는 그런 그를 쫓아가려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그러지 못했다. 전하께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설마 그는 저와 지크프리트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일까? 그건 정말로 오해였다. 하지만…….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있었던 모종의 사건들을 열거하듯 떠올렸다. 만약 그가 직접 보았다면 오해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어떤 걸 보았기에, 무얼 들었기에 그가 저러는 것인지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연회장 밖으로 벗어나는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없다면 그녀도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네트는 잠시 벽에 기대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쭉 걷는 와중에
그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제롬 르왈드 후작, 아나스타시아의 약혼자이자 지난 밤, 부정한 짓을 저지른 자였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얼굴만 알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괜히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반대였는지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황녀 전하.”

이네트는 그 호칭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제롬의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르왈드 후작.”

“데반 영식과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런.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그가 조롱을 머금은 눈을 하고선 허리를 굽혔다. 이네트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삐딱한 웃음을 숨기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대체 뭐지? 이네트는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혼란스러웠다. 에일의 태도
변화도,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 제롬 르왈드 후작의 태도도, 일전에 페르닌드가 했던 말도 모조리
다.

‘이넷, 지금 이렇게 가면… 후회할 거야.’

페르닌드가 무슨 일이라도 벌린 걸까?

그녀는 이 황궁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황제와 벨라, 지크프리트와 아나스타시아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지크프리트를 제외하면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황궁에 고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는 귀족도 에이든과 에밀리, 카시엘과 페르닌드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그녀의 인간관계는 좁은


섬과 같았다. 게다가 에밀리는 에일의 누나였다. 에밀리 또한 오해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입
안의 침이 말랐다. 이네트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거처하고 있는 궁으로 돌아갔다.

에일과의 약혼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때까지 버틸 생각만 했다. 에일과 오해가 생기고, 그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에 그녀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계획 모두가 어그러졌다.

그와 함께 약혼식을 치른 다음, 리고르 해안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에벨루넨 대륙의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가기를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그와 사이가 나빠진다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이네트는 새삼 자신의 상황이 가느다란 촛대의 촛불과 다를 바 없으며, 에일에게 지나치게 의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일, 변하면 안 돼…….’

‘네.’

‘날 배신하면 안 돼.’

‘네.’

그때의 매달림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네트는 사용인의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하고 좌절감에 침대에 몸을
늘어트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네트는 망망대해에 사로잡힌 기분에 눈을 감았다.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려오는 후폭풍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 * *

‘왜, 실은 알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할 일 없다는 거.’


카시엘 디에드반은 아까부터 귓가에서 어른거리는 목소리에 몸을 멈칫했다. 그 반동으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곁에 있던 사용인이 익숙한 듯 떨어진 포크를
치우고 새 포크를 식탁 위에 올렸다. 그가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연회장에서 마주쳤을 때조차, 난 당신이랑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는 거.’

허나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는 생생하게 들렸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포크를 다시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멀거니 식탁 위의 음식을 바라보다가


기계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감자와 소고기를 넣고 끓인 진한 수프는 맹물처럼 느껴졌고,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돼지고기 미트볼은
입에 넣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억지로 음식을 삼키자 구역질이 일었다.

“우욱.”

카시엘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막았다. 허나 밀려오는 토악질은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방금


먹은 것을 고스란히 토하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이 서둘러 더러워진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카시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날부터였다. 이네트가, 그에게 가증스럽다고 한 그날.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그날.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있던 페르닌드가 비웃음을 흘렸다.

“형, 그러게 내 말을 듣지 그랬어. 내가 말했잖아. 형은 이네트한테 너무 무르다고. 물러서 그렇게 된


거야.”

“아니, 아니다. 처음부터…….”

카시엘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이마를 받혔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식당을 벗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가 승마를 하면서 자주 입었다는 바지와 잘 때 입었던 얇은 슬립, 평상복으로 즐겨 입은 원피스 몇 벌,


지하실에 있을 때 사들였던 각종 장신구와 드레스들만 저택에 남았다. 군데군데 바랜 기억 또한 함께.

그녀가 직접 사들인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모조리 그가 건넨 카탈로그에서, 그의 돈으로 비롯된


물건이었다. 결국 부산물만 손에 넣었을 뿐,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

잡은 줄 알았는데, 잡지 못했다. 당연히 제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 것이 아니었다.

카시엘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떠올렸다. 이네트가 황태자와 모종의 관계라는 부정한 소문이었다.
매일 황태자가 이네트가 있는 방에 들락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연회
때조차 서로 편안한 듯 익숙한 분위기로 내내 붙어 다니고, 황태자의 태도가 뭇 누이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기에 소문은 더욱 불어났다. 황태자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묵인하였고, 보란 듯이 더욱 이네트와
함께 다니고 공공연한 스킨십을 했다.

소문대로 그녀가 황태자와 부도덕한 관계인 걸까? 그 빌어먹을 간자 놈과 더불어? 생각만 해도 카시엘의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둘 다 쳐 죽여 버리고 싶었다.

황태자가 보란 듯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대고 춤을 추던 것을 떠올리자


더욱 열이 올랐다. 늙은 백작을 죽였을 때만큼이나 들끓는 살의였다.
에일, 그 남자와도 몸을 섞었겠지. 그자와 할 때는 서로 사랑을 속삭일까? 사랑하는 연인처럼 몸을
부둥켜안고 부드러운 말을 속삭이며, 그녀가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 말했을까? 저와는 달리,
그와는…….

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가 밭은 숨을 몰아쉬다 책상 위의 시계를 집어 들고는 벽에 던졌다. 퍽,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시계가 망가졌다. 그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보이는 물건을 죄다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던지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엉망이 된 집무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시엘은 숨을 몰아쉬다가 의자에 널브러지듯 등을 기댔다. 최악이었다.

* * *

이네트는 한번 느낀 불쾌함 이후로 꺼림칙한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방으로 찾아온 지크프리트를 다소 풀죽은 얼굴로 맞이했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눈꼬리를 내렸다.

“누이, 무슨 일 있어?”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네트는 저를 걱정하는 얼굴을


마주하자 안 그래도 약해진 마음이 세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고는 사용인을 물렸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말해봐, 왜 그래?”

그녀는 조금 뜸을 들였다. 그에게 얘기해도 될까? 망설여지는 마음이 들었다. 약해진 마음이 헐거운
자물쇠처럼 덜그럭거렸다. 망설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크, 궁 안에 저와 관련된 소문이 돌고 있나요?”

그는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흐음, 낮은 한숨을 쉬더니 이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에 관한 소문이야 전부터 조금씩 돌고 있었지. 하지만 누이가 신경 쓸 건 아냐.”

“도대체 무슨 소문이기에 에일이 나를…….”

이네트가 말을 꺼내놓고선 아차 싶었는지 말을 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크프리트가


우울이 내려앉은 그녀의 뺨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느껴지는 손길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누이를 피해?”

“…….”
이네트는 시선을 아래로 깔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그가 축 늘어진 그녀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누이, 레오 보러 갈까? 레오를 못 본 지 좀 됐잖아.”

그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그녀가 아,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털이 복슬복슬하고 귀여운 레오를 떠올리자 이네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어둠이 조금 가셨다.
그가 다시 한번 더 권했다.

“레오도 누이를 보고 싶어 해. 가자.”

“네…….”

지크프리트가 화사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이네트에게 팔짱을 꼈다. 그의 스스럼없는 스킨십에 익숙해진
그녀는 그에게 이끌리듯 방 밖으로 나섰다.

황태자궁의 정원에 도착한 이네트는 멀리서 레오가 보이자마자 화색을 보이며 레오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축 늘어져 있던 레오 또한 이네트와 지크프리트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레오!”

이름을 부르며 껴안자 레오가 그르릉, 소리를 내며 이네트에게 뺨을 비볐다. 복슬복슬한 털이 뺨에 닿자


이네트의 기분이 순식간에 들뜨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

처음에 무서워서 피했던 게 거짓말처럼 레오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쓰다듬고 품에
안았다. 골골골골, 하는 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와 닿았다.

지크프리트가 레오의 털에 파묻힌 이네트를 향해 물었다.

“누이, 디저트 먹을래?”

“네.”

지크프리트는 이네트가 케이크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곁에 있는 사용인에게


케이크를 빼고 준비해 달라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 바삭하게 구운 쿠키와 두툼한 마카롱,
크림치즈타르트, 스콘이 놓였다.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는 루이보스 차도 함께 놓였다.

달달한 디저트를 입 안에 넣고 씹자 여태껏 우울했던 기분이 좀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도


불쑥불쑥 안 좋은 감정이 치솟았다.

“지크, 에로드가 나를 피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네트가 제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지크를 향해 말문을 텄다. 이 넓은 황궁에서 그녀를 보살펴주고,


챙겨주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결혼해서 함께 수도를 떠날 날만을 고대하며 살았는데…… 그게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
드높은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에일에게 의존했던 자신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 혼자라도…… 떠나야 하나 봐요. 이제 더는 황궁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이네트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면, 난 정말로 혼자 자립해서 살아야겠죠. 언제까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삶을 꾸려나가는 순간마다 옆에 그가 있었는데…… 그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쓸쓸해요.”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에로드가 아니라면 슬플 거예요.”

이네트의 표정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에일이 아닌 다른 누군가 제 옆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한다면 그건 꼭 에일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이네트가 차를 마시고 쿠키를 베어 먹었다. 어지럽게 부유하는 생각을 흩트렸다.

“누이, 꼭 수도를 떠나야 해? 무슨 이유 때문에 수도를 떠나려는 거야?”

“난 그냥 이곳에서 겪었던 경험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을 뿐이에요. 다른 곳으로 떠나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어디로 떠날 생각인데?”

“리고르 해안이요.”

“……여기서 너무 멀군.”

지크프리트가 낮게 읊조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선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침묵을 지켰다.

이네트는 레오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대로 떠나기엔 아쉬웠다. 그와 한 번도 대화하지 않고 떠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그건 아니었다.


오해를 하고 있다면 푸는 것이 옳았다. 설령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해도, 풀려는 시도는 하고 싶었다.

설령 그에게 끝끝내 거절당한다 해도, 저 혼자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를 만나야 했다.

결론에 도달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네트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남은 디저트를 먹으며
싱긋 웃었다.

“지크, 매번 챙겨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줘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이네트가 지크프리트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지크프리트가 몸을 움찔 떨었다가, 이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뒤로 레오와 함께 셋이서 정원을 거닐며 산책을 했다. 서재에 가보지 않겠냐고 지크프리트가
제안했지만 이네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서재에 가봤자 그의 보좌관이 쫓아와 서류 처리 좀
해달라고 애원할 게 뻔했다.

지크프리트와 헤어진 이네트는 방으로 돌아가 전속 시녀에게 내일 오전에 벨라를 만나기 위해 황제궁에
들리겠노라고 미리 언질했다. 시녀는 그리 전하겠노라며 자리를 떴다.

직접 데반 백작 저택으로 가면…… 에일이 만나 줄까? 그래도 쫓아내진 않겠지. 이네트는 고민을 하다가
이내 욕실로 향했다. 괜한 잡생각에 사로잡혀 우울해지긴 싫었다.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머리를 말렸다. 침대에 눕자 다시 부정적인 생각이 흘러들어
왔으나, 그녀는 애써 그 생각을 지우고는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 오전, 이네트는 가볍게 아침을 먹은 다음 바로 황제궁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준비를 다 마친


다음 황제궁으로 바로 향했다.

황제궁 앞에 도착한 이네트는 궁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에게 일렀다.

“벨라 님을 만나러 왔다고 전해.”

“안으로 모시라는 벨라 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드시죠.”

기사는 능숙하게 이네트를 안으로 이끌었다. 이네트는 전속 시녀와 함께 황제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복도에는 기립하고 서 있는 기사들이 무척 많았다. 이네트는 말뚝처럼 서 있는 그들을 흘긋거리고는
익숙한 황제의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벨라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윽고 황제와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무표정한 황제의 보좌관과 전속 기사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황제와 벨라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광경에도 익숙한 듯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이네트가 넓은 집무실을 가로질러 걸으며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왜, 또 뭘 달라고?”

벨라가 다가온 이네트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이네트는 당당한 얼굴로 요구했다.

“에일을 만나러 가려고요. 마차 한 대만 준비해 주세요. 이왕 주시는 거, 제가 언제든 타고 다닐 수 있는


마차를 주시면 되겠네요.”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는 더 해보라는 듯 흥미로운 눈으로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혼을 치른 후, 곧바로 이곳을 뜨려고 해요. 그때 주기로 했던 작위와 저택만 주시면 그곳에서
조용히 살도록 할게요.”

이네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네트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황제 대신 벨라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전송구도 여기서 바로 보내줄 테니 마음대로 해. 로알드, 네가 해.”

“네.”

황제의 기사 중 한 명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이네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네트 곁으로 다가왔다.

“모시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리고는 문 쪽을 향해 눈짓했다.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집무실을 벗어났다.

로알드는 이네트를 마차에 태우기 전, 수하의 기사 몇 명과 함께 호위대를 구성했다.

“황녀 전하, 제 팔을 밟고 올라서십시오.”

그가 당연하다는 듯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이네트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경. 그럴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가 팔을 물리고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네트는 전속 시녀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잘 정비된 황궁의 길을 가로지르고는 이내 궁 밖으로 벗어났다. 이네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이내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따금 덜커덩거리며 머리가 부딪히기도 했다.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잠은 오지 않았다. 이네트는 멀찍이 떨어져 앉은 제 시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네트는 저 시녀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어차피 떠날 곳이기도 하고, 이름을 부를 일도 없어 구태여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너, 이름이 뭐니?”

이네트가 전속 시녀를 향해 물었다. 시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어 대답했다.

“비올레타라고 합니다, 황녀 전하. 로울 자작가의 셋째이기도 합니다.”

“그렇구나. 그래…….”

황족의 전속 시녀로 귀족가의 여식을 붙여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진짜일 줄이야. 이네트는
고개만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마주할 일도, 제가 하대할 일도 없었겠지. 언제나 디에드반
공작저에서 눈칫밥만 먹으며 전전긍긍했으니.

이네트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시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궁에서 나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지?”

시녀는 뜻밖의 질문에 놀란 듯 숨을 크게 집어삼키며 이네트의 눈치를 보았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이네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주렴. 눈과 귀가 막히지 않아 나도 어느 정돈 알고 있으니.”

어쩌면 아랫것들끼리 저를 가지고 숙덕거리는 게 일상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야 예상하던 것이니 괜찮았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에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만


보았다. 이네트가 재촉하듯 눈짓하자 그제야 겁먹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 황녀 전하께서…… 태자 전하와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 소문이 있습니다.”

시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네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크프리트와 자신이 부적절한 관계라고?
이복누이와 남동생의 관계가 부적절하다고?

“그와 내가 피로 이어진 남매간인데도?”


“그, 그렇습니다….”

이네트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왜? 황궁에서는 남매간이라 할지라도 남녀끼리 붙어 다니는 것이


터부시된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이네트는 지난 밤, 술김에 그와 벌였던 실수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날의 일이 누군가의 눈과 귀를 타고


알음알음 퍼져나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크프리트가 몰랐을 리 없다.

허나 그는 제게 이런 소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적 없었다. 어제 물었을 때도 그는…….

‘누이에 관한 소문이야 전부터 조금씩 돌고 있었지. 하지만 누이가 신경 쓸 건 아냐.’

의도적으로 덮은 걸까? 일부러?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아니면, 정말로 몰랐던 걸까? 황태자인 그가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이네트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누이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내 뒷조사를 하겠단 말이에요?’

‘누이가 말해주기만 하면 그럴 일 없어.’

이네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 있자 시녀가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조마조마한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네트는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내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넓은 황궁에서 자신을 챙겨주던 이가 황태자인 지크프리트밖에 없긴 했으나, 그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가 떠올려보면…… 그것은 조금 의문스럽긴 했다. 허나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그밖에 없는 저의
참담한 상황 때문에 그마저도 커 보였던 것뿐이지.

이네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상황을 혼자만의 힘으로
다잡기란 정말 힘들었다. 제 뜻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도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주는 안락함에 녹아 이대로
안주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냥 이대로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포기해 버리면…….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자신이 뭘 포기한다는 것인지, 이대로 지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스스로도 혼란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 치들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과 떨어져 있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정처 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그들에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자신의 앞날도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흔들리고, 고민하고. 끝은 자조와 자기혐오가 씁쓸하게 남았다.

마차가 멈출 때까지 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네트는 눈앞에 보이는 데반 백작가의 모습에 침을 한
번 삼켰다. 두꺼운 철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가 마차로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황궁에서 왔어요. 이네트라고 하면 알 거예요.”

“알겠습니다.”
기사가 말을 전하러 철문 안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시간이 제법 지난 후, 기사가 다시 돌아와 철문을
열었다. 이네트를 태운 마차가 데반 백작가의 넓은 영지를 쭉 내달렸다.

이네트는 낯익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잠겼다. 이 너른 평야를 에일과 함께 달렸던 기억이
선연했다. 도라는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지금 만나면, 나를 알아볼까?

저택의 문이 보이고,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마자 이네트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집사가 이네트를 맞이했다.

“주인님께선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저녁때 즈음이 되어서야 귀가하실 것 같은데……


기다리시겠습니까?”

“저는 백작님이 아닌 에로드를 보러 왔어요. 에로드도 지금 자리를 비웠나요?”

“네. 도련님께서도 현재 없으십니다. 기다리시겠습니까?”

“……기다릴게요.”

이네트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앉아 차와 쿠키를 마시면서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며 에일을 기다렸다.

그가 빨리 오기를. 이네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 * *

‘데를 잡화점 뒤 골목으로.’

에일은 쪽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품 안에 넣었다. 잡화점을 흘긋 바라본 그가 주변에 있던 호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기사 한 명이 잡화점 뒤 골목 쪽을 흘긋 바라보면서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골목 뒤는


으슥하고 인적이 없는 데다 대낮인데도 어둑했다. 아무래도 도련님 혼자 보내기엔 위험해 보였다.

“저 혼자라도 좋으니 따라가겠습니다. 위험해 보입니다, 도련님.”

“괜찮으니 걱정 마. 설마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건가?”

에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에 찬 검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정식 기사서임만
받지 못했을 뿐이지, 에일의 검 실력이 누군가에게 밀릴 정도로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소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얼마 안 걸릴 테니 여기서 기다려.”


에일은 호위 기사들을 쭉 한 번 둘러보고는 혼자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둑해졌다. 에일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쪽지가 말하는 장소는 이곳이었다.

제롬 르왈드는 전에도 몇 번 이런 식으로 그를 부른 적이 있었다. 대부분 황태자와 이네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얘기의 요지는 비슷했다. 황태자와 이네트의 사이가 심상치 않으니, 그대는
알아서 빠지라는 소리였다. 그대는 이네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처음에는 화가 났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의 피가 섞인


그녀는 비록 사생아라 할지라도 황족이었다. 작위를 이어받지 못할 백작가의 막내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로 이미 소문이 무성했고, 그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남자 또한 많았다.
다만, 황태자의 방패 때문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뿐이었다.

황태자는 이네트가 사교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날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를 싸고돌았다. 그녀
곁에서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오려고 하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황태자의 행동은 과보호라고 할 만큼 심했다. 게다가 황태자와 이네트와 관련된 모종의 소문들은 에일의
머릿속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소문과 더불어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날 본 광경이었다. 흔들리던 신뢰는 그날을 기점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대는 빠져주는 게 좋아. 도움 될 게 없거든.’

에일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는 인기척 없는 곳을 둘러보다가 약속 장소가 잘못되었나 싶어 다시 품에서


쪽지를 꺼냈다. 분명히 데를 잡화점 뒤라고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등을 싸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한기에
에일은 허리춤에서 검을 빼냈다.

빼내어 휘두르는 순간, 등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고통에 에일이 숨을 삼켰다. 고통에도 쓰러지지 않고
몸을 돌려 검을 휘두르자 상대가 쯧, 혀를 찼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자였다.

“페르닌드…….”

이름을 부르자 상대가 씩 웃었다.

“날 기억하고 있네, 도둑질을 한 버러지 같은 새끼가.”

에일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검을 꽉 쥐었다. 깊이 베이기 전에 몸을 틀어서 얕게 그였지만 고통은 상당했다.


날카로운 고통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넌 꼭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지.”

페르닌드의 검에 맺힌 피가 검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그가 다시 검을 치켜들고는 에일을 향해 휘둘렀다.


검이 쉭, 허공을 갈랐다.

“어라, 피했네.”

“당신, 이러고도…….”

에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페르닌드가 다시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 이후에는 대화도 오고


가지 않고 그저 검끼리 서로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검이 맞부딪히고, 그 반동으로 뒤로 밀려나는 순간. 에일은 등의 고통 때문에 둔한 와중에도 안간힘을
내어 페르닌드의 가슴을 베었다.

“읏!”

페르닌드가 뒤로 몸을 물린 탓에 깊게 베이지는 않았으나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다. 페르닌드가 상처를


확인하며 빌어먹을,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한 손으로 베인 가슴을 꾹 눌러 압박하자 피가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 개같은 새끼가!”

분을 못 이긴 페르닌드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에일이 몸을 움직여 피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잦은 생채기가 뺨과 몸 곳곳에 생기고, 이어 검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박힌 순간, 에일은 차마 숨을 내뱉지도 못하고 몸을 굳혔다. 머리가 새하얗게 굳어버리는 통증에 잇새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읍…….”

굳건히 서 있던 에일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페르닌드는 에일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피의 홍수를 보고는
이겼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빈틈이었다. 에일은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웃고 있는 페르닌드의 배에 검을 꽂았다.

“아악!”

예상하지 못한 듯 페르닌드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크게 들썩거렸다. 에일은 검을 찌른 손에 힘을


빼지 않고 그대로 깊숙이 날을 배에 욱여넣었다.

“허윽…….”

페르닌드가 고통에 몸서리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에일은 검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흔들리고 시야가 흐릿했다. 피가 위로 넘어와 입 안에 쌉쌀한 피 맛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의 대상이 누군지 에일은 확인하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 * *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분명 도착했을 땐 화창한 오후였는데, 지금은 해가 져서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사용인이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이네트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접시들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에일이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왔다.

지루함을 넘어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이네트는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집사에게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볼게요. 에로드에게는 제가 왔었노라고 전해주세요….”

집사가 면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이네트는 눈인사를 하고는 저택을 빠져나갔다. 만약
에일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언젠가는 연락을 줄 것이었다. 직접 찾아온 것만으로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충분히 표현했노라 생각했다. 그러니 저는 답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이네트는 울컥 솟아오르는 슬픔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와 오늘 만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왔는데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에일은 이제 내가 싫은 걸까?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이네트와 함께 오랜 시간 함께 기다려 준 시녀 비올레타가 그녀를 위로했다.

“황녀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해주는 마음이 고마웠지만 쉽사리 우울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이네트는 몸부터 씻었다. 뜨거운 물에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생각은 거미줄처럼


뒤엉켜 머릿속을 흩트렸다. 그녀는 제 안에 똬리를 튼 슬픔에 휩싸인 채 물이 식을 때까지 오래도록 욕조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 * *

지크프리트는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들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예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

제롬 르왈드였다. 지크프리트는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 상태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위중한 듯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으음……. 죽이진 말고, 그렇다고 치료에 너무 힘쓰지도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페르닌드 디에드반은?”

“자택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전하, 아무래도 디에드반 공작이 상황을 대강 눈치챈 듯합니다.”

지크프리트가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를 챘다 해도 그다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자


또한 저와 페르닌드 디에드반처럼 에로드 데반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일 테니 달라질 건 없었다.

“왜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차라리 죽이는 것이 깔끔할 텐데요.”

“그래. 그렇긴 하지.”

제롬 르왈드의 말이 맞았다. 괜히 에로드 데반을 살려 두어봤자 뒤탈이 나기 좋았다. 하지만 그자를


죽였다간…….

그의 머릿속에 이네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에로드 데반에 대해 말할 때 반짝거리던 그녀의 눈이


잊히지 않았다. 그자를 죽인 게 자신이라는 걸 훗날 그녀가 알게 된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불쑥 솟았다. 자신은 그저 페르닌드 디에드반을 이용해 그 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네트와 에로드 데반이 갈라설 구실만 만들면 됐다.

그녀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의 증오를 받을 대상은 다른 이로 화살이 돌아가야 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은 그녀에게 곁을 의지할 수 있는 친절한 동생으로 남아야 했다.

그리고 데반 백작가와는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으니, 구태여 그 관계를 크게 흠집 내는 일은 지양하는


게 나았다. 적당히 일을 벌이는 것으로 그쳐야지, 크게 키워서 좋을 건 없었다.

“죽이진 마. 그자는 살려둬야 해.”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제롬 르왈드가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지크프리트가 적막이 감도는


집무실 안에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누이가 내 곁에 남을 수 있을까.”

누이가 황궁에서 떠나지 않고 쭉 사는 것.

우선 그녀가 궁으로 떠날 수 없도록 붙잡아 두고,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고를 남자와 결혼시켜야 했다.
그 남자와 함께 황궁과 가까운 수도에서 살게 하는 게 가장 나았다. 에로드 데반, 그자는 이네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치워버려야 했다. 가장 거슬렸다.

제롬을 통해 그 남자와 이네트의 사이를 이간질해 놓았으니 알아서 떨어져 나갈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제풀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날이 되어도 에일에게선 전송구 한 통 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대화 시도조차 거절당했다. 침묵이 그의 답이었다. 이네트는 허탈함과 배신감에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어쩌면 하룻밤쯤 집을 비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며칠 기다리면 답을 줄지도 몰랐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바꾸려 해도 침잠하는 우울은 막을 수 없었다.

입맛이 없었다. 점심을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누이, 노크 소리 못 들었어?”

“아.”

그제야 이네트가 고개를 들고 들어온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누이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서 맛있는 거 들고 왔는데.”

“……지크프리트.”

이네트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멍하니 있던 것과 다르게 빛이 있는 눈동자로


그녀가 물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소문이 돌고 있다던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지크프리트가 평소처럼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누이……. 누구한테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누이가 알아서 좋을 거 없다고 생각했어. 가뜩이나 누이가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거기에 더 불을 지르고 싶지 않았어.”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네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크, 나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 행동하는 척하면서도, 내 뒷조사를


하겠다는 둥 나를 은근히 협박하곤 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크프리트는 부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이네트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맞았다. 그녀를 배려한답시고 에로드 데반도 죽이지 않고 살려두지 않았던가. 순전히
그녀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

“누이, 난 누이를 해치지 않아. 누이를 진심으로 아껴. 이건 정말이야.”

“그렇다면 내게 숨기는 것 없이 얘기해야 해요. 또 내게 숨기는 것 없어요?”

휘어 있는 그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한 그인데도 방금은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가 어색하게 눈을 접었다.

“없어.”

“정말로요?”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이네트가 지크프리트의 눈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말했다.

“날 기만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누이에게 그러겠어.”

그래, 누이를 기만하려고 한 게 아니야. 그 남자가 너무 거슬려서 그런 것뿐이지. 지크프리트가 속으로


그렇게 읊조렸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덜그럭거렸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지 말고 가져온 것 좀 먹어봐. 블루베리 스콘이랑 앙버터야. 누이는 달달한 걸 좋아하니까.


그렇지?”

“……고마워요.”

지크프리트가 스콘을 나이프로 자르고, 버터를 손수 발라주었다. 그리고는 포크로 찍어 이네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제과점에서 사 온 거야. 줄을 서도 못 살 때가 많은 곳이래.”

“……맛있네요.”

스콘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했고, 담백한 끝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이네트는 그가 저를 위해 애써 행동하는 것을 알기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우울이 그에게 전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네트는 부러 밝은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그가 가져온 디저트를 먹어치웠다. 다 먹자마자 그가 산책을


권유했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소문을 더 불리고 싶진 않아요….”

“누이, 헛소문이라는 거 알잖아. 남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건데 말 옮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별나게
구는 거야.”

지크프리트가 이네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녀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가 이어 또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연이어 거절하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누이,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 말해. 갈 테니까.”

“알겠어요.”

방을 나서기 직전까지 지크프리트는 이네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네트는 떠나는 그에게 눈길만 주고


말았다.

* * *

매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페르닌드가 기어이 일을 치고 말았다. 배에 구멍이 뚫린 채로 저택 앞에


널브러진 페르닌드를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저택으로 데려왔다. 주치의와 의사 여럿을 붙이니 눈을 한 번
뜨긴 했으나, 완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목에서는 언어 같지 않은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사들은
페르닌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카시엘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페르닌드는 이네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페르닌드는 정신을 잠깐 차리고 다시 잠든 뒤,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다.


“안 그래도 잦은 음주와 약 복용으로 몸이 약해지셨던 상황에서 큰 부상을 입으신 터라…….”

주치의는 가망이 좋지 않음을 돌려 말했다. 카시엘은 미간을 좁히며 알겠으니 나가보라고 일렀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페르닌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페르닌드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끼긴 했다. 이네트와 떨어트린 그날부터 술독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네트가 탈출하고 황궁에 간
이후부터는 그 심각성의 수위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기어코 독단적으로
사고를 쳤다.

언제부턴가 쏘다니기 시작하더니. 이런 짓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던가.

페르닌드 혼자서 배가 뚫린 채로 저택으로 돌아올 리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시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에로드 데반에게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는 그 황태자의 소행이겠지. 뻔했다.

카시엘은 헛웃음을 흘리며 잠든 동생을 노려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에로드 데반을 시종으로 붙인 건


페르닌드였다. 처음부터 그가 쓸데없는 짓만 벌이지 않았어도 에로드 데반과 이네트가 만날 일은 없었다.

그래, 잠든 이네트에게 손을 대게끔 꼬드긴 건 페르닌드였다. 지하실에 데려와 감금하자고 종용한 것도


페르닌드였으며 이네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함부로 군 것 또한 페르닌드였다. 계속해서 일을
크게 키우고 망치는 동생 때문에 욱신거리는 두통이 일었다. 한심한 놈 같으니.

카시엘은 의자에 풀썩 앉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최근,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입에 넣는 족족 구역질이 밀려와 토를 하기 일쑤였다. 그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식사를 하지 못하면서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황궁에 출근하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이네트, 그 애 생각만으로도 벅찬데…….

카시엘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시야가 가리자 컴컴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네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시엘.’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어른거렸다. 마치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네트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아 카시엘이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그래, 제 발로 돌아올 리 없는데…….

“이네트.”

그가 이네트의 이름을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시엘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 페르닌드를 한번


내려다본 뒤 방을 떠났다.

어미의 뱃속으로 회귀하는 태아처럼 카시엘은 제 안식처를 향해 걸었다. 울타리가 쳐진 사냥터 안으로
훌쩍 들어가 풀을 헤치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려온 이네트의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엔 그가 직접 눈에 담고 손으로 그린


그녀의 모습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초조함으로 떨리던 카시엘의 손끝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는 가장 최근에 그린 이네트의 그림을 보았다. 그에게 모진 말을 하던 그녀의 차가운 얼굴.
그 순간마저도 놓칠 수 없어 종이로 옮겼다. 그림을 보니 그때 느꼈던 가슴 철렁이던 감각이 다시금
느껴졌으나, 그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네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하던 이네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는 말. 그건 카시엘에게 있어 생의 끝을 알리는 선고와도 같았다.

그의 삶 곳곳에는 이네트가 있었다. 그녀가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녀 없이 살 수


없었다.

이네트가 없는 삶에서 카시엘은 점차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 고통을 인내할 수


있을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가질 수 없다는 제 손으로 직접…….

그가 멍하니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그림 속의 이네트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살결에 입 맞추느니만


못했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는 살결의 감촉을 회고하기라도 하듯 그림을 쓰다듬었다.

“이네트, 이네트, 이네트…….”

그가 연이어 읊조리다 결국 눈을 감았다.

* * *

이네트의 우울은 점차 더 심해졌다. 마치 깊은 물에 잠긴 사람처럼 그녀의 심연은 더욱 짙어졌다. 수도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던 의욕조차 꺾여버린 것인지, 그녀는 며칠째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이가 바로 마음을 다잡고 수도를 떠나겠다고 하는 것보다
방에 얌전히 있는 편이 더 계획에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네트 또래의 남자를 물색했다. 황족파에, 다루기 쉽고, 똑똑하지 않고 적당히 멍청한 남자를.
누이에게 너무 하등한 남자를 붙여줄 순 없으니, 작위를 이어받은 귀족으로 추렸다. 그리고 금전과 사탕
발린 말, 지켜야 할 조건을 붙여 남편감을 찾았다.

찾은 다음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지크프리트가 황제에게 이 일을 알리자 그는 그런 일은 알아서 하던가


벨라와 상의하라고 귀찮다는 듯 일을 떠넘겼다. 벨라 역시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에로드와 결혼한다고 하던데?”

“그자와는 일이 틀어진 것 같더군요.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것도 그자와 잘되지 않아 그런


겁니다.”

지크프리트가 빙긋 웃으며 얘기했다. 그리고는 상심한 누이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며 그럴듯한 명분도
덧붙였다. 벨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는 이상하게도 네 이복누이 일에 발 벗고 나서는구나. 설마, 소문대로 이네트와 그런 사이는


아니겠지?”

지크프리트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유지했다. 벨라가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제 허리를
감싸 안은 데넌과 지크프리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너도 네 아비와 다를 바 없구나.”


잠자코 듣기만 하던 데넌이 미간을 좁히며 “벨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크프리트 또한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런 말씀은 조금 섭섭한데요.”

“됐어, 귀찮으니까 이제 알아서 하렴. 말려봤자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이니.”

벨라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내저으며 빨리 나가라며 문을 향해 손짓했다. 지크프리트는 방


밖으로 나서며 그들의 태도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누이, 누이는 정말로 이 황궁에서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구나. 다행이야. 기뻐.

남은 일은 제가 직접 고르고 매수한 남자와 누이를 만나게 할 일만 남았다. 누이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일을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 전에, 누이에게 운을 틔워야 했다.

“누이. 오늘도 나와 산책하지 않을 거야?”

어김없이 이네트를 찾은 지크프리트가 가족을 걱정하는 남동생의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네트는 또
자신을 찾아온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

“그 남자 때문에 그래? 아직도 그 남자를 못 잊겠어?”

이네트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사선으로 비꼈다. 지크프리트가 가만히 이네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그 남자만 그리워할 거야? 누이, 결혼적령기가 지나기 전에 어서 결혼해야 해. 계속 그 남자만


그리워해선 안 돼.”

“하지만…….”

이네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에일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다니…… 제


곁에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니……. 싫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말대로 언제까지고 기약 없이
에일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벌써 에일의 연락을 기다린 지 2 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에일의
소식조차 알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그를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다시 찾아가고 싶었지만,
또다시 겪을 거절의 아픔이 두려웠다.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제 시선을 피하고 자리를 떠나던 그의 뒷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아찔한 통증이 가슴을 쑤셨다.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이, 그 남자는 그만 잊어.”

지크프리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젖은 뺨을 쓰다듬었다가 조심스레 품에 껴안았다.

“누이를 힘들게 하는 남자를 계속 붙잡아 둘 필요 없잖아. 응? 그보다 누이에게 어울릴 만한 남자를 내가


알아봤어.”

바닥을 향해 있던 이네트의 눈이 의아함을 머금고 그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아보다니요.”

“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단 내가 소개해준 남자와 결혼하는 게 낫잖아.”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네트는 그가 한 말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나서야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크, 지금 나보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거예요?”

“응.”

이네트는 맺혀 있던 눈물이 순식간에 마르는 것을 느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저의로 제게 결혼을 강요하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도대체 왜… 결혼하라고 하는 거예요?”

“보통 귀족가의 영애들은 스물이 넘기 전에 결혼하거나 약혼을 해. 누이는 스물인데도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았잖아. 더 나이가 차기 전에 결혼하는 게 좋아서 그렇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마음 없는 결혼을 하란 말이에요?”

그녀의 물음에 지크프리트가 마치 어린아이가 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누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은 잘 없어. 누이도 그때 봤잖아. 아샤 누이와 약혼한 제롬 르왈드가
남작 부인하고 붙어먹는 거. 귀족 사회에선 흔한 일이야.”

“그래서…… 나도 그런 결혼을 하라고요?”

이네트의 표정이 굳어 가는데도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누이.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마. 그저 귀족 사회에 편승하고, 사교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려면


결혼하는 게 더 나아서 그래. 다 누이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라고? 이네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싫다고 하면요?”

그녀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는 흐음, 나른한 한숨을 쉬더니 빙글 웃었다.

“으음…… 그건 안 되겠는걸.”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지만, 이네트는 그것이 실상 강요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다. 이네트는 황당함을
넘어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까지 그가 저를 챙겨주고 아껴주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제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고, 이유를 물으면 ‘다 누이를 위해서’라고 답한다.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건……
그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나를 위해서예요?”

“응. 다 누이를 위해서야.”

누이를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지크프리트의 눈은 천진하기 짝이 없었다.

“누이, 나는 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 알고 있지?”

“…….”
이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심해를 머금은 것처럼 점차 탁해지더니, 이내 체념의 빛을
드리우고선 한풀 꺾인 풀처럼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지크프리트가 그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이가 황궁에서 계속 생활하고, 사교계에 자연스레 녹아들기 위해서 그런 거야. 누이가 부디 내 진심을
알아주고, 너무 괘념치 말아줬으면 좋겠어.”

이네트는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가 저를 진심으로 위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맥없이 끊겼다. 황궁에서 저를 아껴주는
사람은 없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깊은 바다에 잠긴 것처럼 머리가 먹먹해졌다.

그는 나를 기만하지 않는다 하고선, 아무렇지 않게 기만한다.

“누이만 괜찮다면 빠른 시일 내에 데려올게. 괜찮아?”

“내 의사가 중요한가요? 데려오고 싶으면 데려와요…….”

지크프리트가 순순히 대답하는 그녀의 이마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했다. 이네트는 반항하지 않았다.

* * *

“아직 정신을…….”

“……그럼 언제쯤…….”

에일은 희미하게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오래도록 잠이 들었던 것인지 눈가가
무겁고 시야가 어두웠다. 그는 반쯤 열린 시야 사이로 들어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 치료에 힘쓰지 마.”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직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습니다. 다 나으려면 최소 6 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다행히 심장을 비껴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바로 즉사했을 만큼 상처가 큽니다.”

“그래.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연락하고.”

“예예.”

눈을 감은 에일은 부들거림을 참기 위해 애썼다. 페르닌드, 그 작자가 홧김에 제게 일을 저지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 중 한 명은 분명 제롬 르왈드,
르왈드 후작이었다. 평소에도 몇 번 저를 불러내어 이네트와 관련된 말을 흘렸던 황태자의 측근이기도
했다.

충격이 아찔하게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페르닌드가 제게 달려든 것이 황태자의 술수인 건가? 제롬


르왈드가 했던 말 모두 황태자가 직접 그에게 지시한 일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황태자와 아가씨 사이에 있던 질 나쁜 소문 모두, 사실 황태자 측에서 먼저 흘린 것이라면?


추측과 혼란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에일은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이곳을 박차고 당장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에일은 분노를 다스리며 턱에 힘을 주었다. 뚫린 가슴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이 어딘지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적어도 데반 백작
저택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리 친하진 않아도 어렸을 적부터 몇 번 마주한 사이였기에 제게 이리도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에밀리 누이와 황녀 아나스타시아의 사이가 남다르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그도 아는 비밀스러운
사실 아니던가. 그런데도 제게…….

에일은 의사와 남자가 나갈 때까지 죽은 듯 조용히 숨만 고르게 내쉬었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눈을
뜨고 치 떨리는 그들의 행각에 몸을 떨었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저몄다.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등을 침대에 맞댈 수밖에 없었다.

거동이 될 정도로 낫는 즉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어서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이때껏 이네트와 황태자의 사이를 의심하고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잠깐이나마
그녀를 피했다는 사실 또한 그녀에게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실은 치기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질투심이었다는 걸……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부끄러워 더더욱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상처가 되리란 걸 알면서도 부러 눈을
피했다.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황태자의 음모에 빠진 게 분명한 아가씨를 어서 빨리 그곳에서 꺼내야만 했다. 에일은 제 가슴을 감싼


붕대를 흘긋 내려다보며 그녀가 부디 무탈하기를 빌었다.

안개와 속박 2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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