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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빈 정원
5. 웅크린 꽃망울
6. 다시 피어나는 백합(1)
4. 빈 정원
카시엘 디에드반은 구불구불 굽이치는 금발이 아름다운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자상하고 섬세했으며,
그만큼 심약하고 예민했다. 작은 새가 죽는 것도 마음 아파했다.
카시엘의 아버지인 디에드반 공작은 공작부인의 말 한마디에 좋아하는 사냥을 끊었다. 자연스레 그가 즐겨
가던 사냥터 또한 출입이 뜸해졌다. 동생과 함께 사냥터에 자주 드나들었던 카시엘 또한 그곳에 잘 가지
않게 됐다.
「왜 굳이 우리 가문이어야 하는 건데요!」
공작부인은 그 아름다운 여자가 저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공작부인은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타고나기를 귀족으로 태어나 고귀하게 자랐다. 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기는 죽어도
싫었다. 그녀의 신경쇠약은 나날이 심해졌다.
「내 눈에 안 보이게 가두라고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페르닌드.」
「몰래 보고 오면 되잖아.」
「안 돼.」
「아주 잠깐이야.」
「응!」
「안 돼.」
「…….」
다가간 페르닌드와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무어라 대화를 했다. 카시엘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도 저 아이와 대화하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도 궁금했다. 하지만 다가갈 순
없었다. 그는 그저 멀리서 그들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유모의 차가운 물음에 페르닌드가 익,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자
페르닌드는 제 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대신 말하기를 종용했다. 카시엘은 그런 페르닌드를 한번
차갑게 노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저 애 때문에 힘들어하잖아.」
「그렇지만…….」
「카시엘, 페르닌드.」
「어딜 갔다 왔니?」
페르닌드가 거짓을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창백하게 질린 공작부인의 얼굴에 대번 노기가 서렸다.
「악!」
「왜…….」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허옇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래.」
「저 치들은 왜 왔대요?」
* * *
공작부인이 죽고 저택에는 스산한 한기가 감돌았다. 장례식 때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 그 여자는
들이닥쳤을 때처럼 갑작스레 저택을 떠났다. 공작은 여자가 떠나는데도 마중은커녕 창밖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지도 않았다.
카시엘은 그리 말하던 아버지의 애원 섞인 음성을 떠올렸다. 차갑게 돌아선 아버지 대신, 카시엘이
떠나는 마차를 창을 통해 멀리서 바라보았다. 더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그 여자도, 그 여자의 딸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이제 그 애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심장이 요동쳤다.
「그 여자 미친 게 틀림없어! 딸을 두고 갔대!」
「그렇다니까!」
「어머니 이제 없어?」
「없어.」
「못 봐?」
「그래.」
「왜?」
형제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공작이 거칠게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도 그는 등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아니.」
카시엘은 어머니가 그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치를 떨며 싫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
여자는 어머니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보며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치곤 했다. 그에 어머니는 더욱
괴로워하고 의심했다. 정말로, 제 남편의 정부가 아닌가 하여. 실은 그 여자가 정말로 제 남편의 정부라
기세등등한 것인가 하여. 속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워 비웃는 것인가 하여.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카시엘조차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뒤늦게 밀려오는 상실감과 허무함,
분노에 그가 몸을 떨었다. 이제 어머니는 없다. 다시는 보지 못한다. 그 여자 때문에.
「어머니 보고 싶어.」
「…….」
「보고 싶어…….」
공작부인이 죽고 난 이후로 한동안 침울했던 페르닌드는 그 우울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서
쏘다니길 원했다.
「……어디서?」
「…….」
「…….」
「형 안 가면 나 먼저 간다?」
「……나도 같이 가.」
「형.」
「저기 있어.」
페르닌드의 말대로 저택 뒤편에 조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혹여나 누가 보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빤히 보였다. 페르닌드는 저택 뒤편에 있는 이네트에게 저택 근처의 나무가 무성한
수풀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이네트가 살금살금 엎드린 채로 조용히 수풀 쪽으로
움직였다.
「형, 가자.」
「많이 기다렸어?」
「아니, 많이 안 기다렸어.」
「형, 뭐 해? 이리 와서 같이 놀자.」
저 애와 가까이해서는 안 돼.
그의 이성이 말했다. 머릿속에선 생전의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싫어하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말라비틀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던 높다란 목소리. 잊어서는 안 됐다. 그러니 저 애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도…….
분명히 어깨까지 닿았던 머리가 이제는 어깨를 넘어서 쇄골 밑에 와 있었다. 우울해 보이던 얼굴도 전보다
훨씬 생기 있었다. 웃는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카시엘이 퍼뜩 놀라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간질거리는
가슴에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들었을 때에는 그 애의 얼굴에 스민 웃음기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페르닌드와 이네트가 오래도록 노는 동안, 카시엘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형은 왜 같이 안 놀아?」
어머니가 왜 죽었는지 알아? 하루에도 수십 번, 공부하기 싫다며 딴청을 부리는 페르닌드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싶었다. 정부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저 애의 어미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하나 말하지 않고 묻어둔 것은, 그로 인해 일어날 일들을 구태여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이넷이랑 노는 거 재밌어.」
처음에는 누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이넷이라는 애칭까지 붙일 정도로 긴밀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이넷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의 가슴이 쿵, 둔한 충격으로 울렸다.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페르닌드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이네트에 대해 얘기해댔다.
「이넷은 그래도 나보다 누나라고 어른인 척 굴어. 안아줄 때마다 좋아. 여동생보다는 누나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는 망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사용인들이 눈치챈 듯 보였다. 이미 아버지에게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만나봤자 좋을 게 없었다.
「왜? 누이잖아.」
「그 애와 더는 만나지 마.」
「형…….」
「왜?」
「페르닌드, 모두가 그렇게 떠들었던 걸 들었을 거 아냐. 이네트의 어미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창녀?」
* * *
「페르닌드!」
그렇게 이름을 부르며 마주한 인영을 바라본 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페르닌드가
아니었다. 이복오라비인 카시엘이었다.
「어…….」
「페르닌드를 기다렸어?」
「페르닌드는 이제 여기 안 와.」
「왜, 왜요?」
「그럼 이제 여기 나올 필요 없는 거예요……?」
「그래.」
「글쎄.」
「고마워요, 카, 카시엘.」
* * *
이네트는 그 뒤로 공작은커녕 카시엘과 페르닌드와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녀와 형제들의 만남을 눈치챈
사용인이 그 사실을 공작에게 일렀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이네트가 아무리 저택 근처에서 그를 기다려도
만나주지 않았다.
참다못한 그녀가 공작의 뒤에 따라붙어 매달려도 공작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공작의 방
안까지 쫓아오든, 무릎 꿇고 빌든, 그는 그녀를 철저히 무시했다. 하녀장과 사용인들 모두 처절하게 비는
이네트를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했다. 공작이 그녀에게 흥미를 잃으면서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녀는 본관에 발 한 짝도 들일 수 없게 됐다.
이네트는 본관으로 온 첫날부터 이 저택과 관련된 모든 기대와 미련을 모두 버렸다. 얄팍하게나마 희망을
걸었던 남매에 대한 애정마저 모두.
* * *
결국 또 잡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네트는 분노를 토해낼 기력조차 지금 없었다. 그저 허탈하면서도 어딘가 덤덤하기까지 했다. 별다른
결단이나 굳은 다짐 같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따금 벨라가 도와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그녀의 친아비와 친어미는 제게 지대한 관심 따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그녀를 도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희박한 가능성에 불과했다.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나는 도움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만 새었다.
이네트가 오로지 희망을 갖는 것은 그들이 경계심을 풀 때까지 최대한 숨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녀가 도망칠까 가시를 잔뜩 세우고 그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심이 허물어질
때까지 그들에게 녹아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도망칠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저택 내부는 맘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던 페르닌드의 웃음기 섞인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이대로 미치기 전에 발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네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저를 못 잡아 안달이란 말인가? 왜 굳이 나를?
“안 됩니다.”
방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자 카시엘이 돌아왔다. 옆에는 페르닌드도 함께 있었다. 이네트는 그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이넷.”
“보고 싶었어.”
미친놈. 이네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페르닌드는 이네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그녀의 머리카락과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시엘이 입을 열었다.
“…….”
“……어쩌다 보니요.”
“그놈한테서 배운 건가?”
에일이라는 이름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아차, 했다. 불길한 예감대로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제 실수에 입술을 사려 물고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때까지 그녀는 에일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백작가의 막내이니 함부로 죽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니, 아니다. 이네트는 이전에 카시엘이 저와 결혼하기로 했던 늙은 백작을 죽인 것을 떠올렸다. 그는
충분히 누군가를 죽일 수 있었다. 그 신분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승마는 안 돼.”
페르닌드가 이네트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당연히 허락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피어올랐다. 승마조차 하지 못하게 하면 이곳에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저택 내부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녀가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네트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페르닌드가 고민하듯 으음,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놓칠세라 페르닌드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도망치지 않을게. 부탁이야. 저택 밖이라도 돌아다니게 해줘. 이곳에 갇혀 지내다간 미쳐버릴지도 몰라.
응?”
“뭐?”
“……페르닌드.”
“왜?”
“이넷, 참지 마.”
“젖었어.”
페르닌드는 붉어진 이네트의 얼굴에 짧게 입맞춤 한 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래를 핥는
습한 느낌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하으응!”
그녀의 반응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붉은 속살을 헤치고 동그랗게 솟은 정점을 꾹
눌렀다. 그녀가 꺅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뺐다.
“움직이면 안 돼, 이넷.”
페르닌드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녀의 골반을 꽉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게걸스럽게 정점을 핥고 혀로
문질러댔다. 벌어진 그녀의 다리가 잘게 흔들리며 발가락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거리는 듯했다. 쾌락의 극치가 연이어 이어지자 그녀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지르며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페르닌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네트가 페르닌드의 이름을 부르며 바르작거리자 가만히 우뚝 서 있던 카시엘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으응, 아! 앗!”
절정에 임박한 이네트가 연신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흰 목덜미가 아찔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래에서 울컥, 액이 토해지는 걸 느끼며 절정에 다다랐다. 페르닌드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액을
핥아 먹는 걸로도 모자라 꿀꺽 삼켰다. 고개를 든 그의 입가가 액으로 미끈하게 젖어있었다.
오늘은 그저 지켜볼 생각인 건가? 그녀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 뒤에서 쳐올리는 감각에 눈을 감아버렸다.
* * *
“뭐?”
다만, 만약에 기회를 잡아야 한다면 페르닌드보다 카시엘 쪽을 붙잡는 게 좀 더 유리했다. 이네트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허점을 노려 또 탈출할 수 있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네트는
간만에 미소 지으며 저택 바깥을 거닐었다. 첫날부터 너무 멀리 나가면 의심할 것이니 일부러 저택
근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따금 당장이라도 마구간에 쳐들어가 말을 타고 싶었지만 꿋꿋이 참았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었다.
“뭐야?”
“이넷, 네가 왜 밖에 나와 있어?”
“네 형에게 물어봐.”
“……형이 허락했어?”
“형, 왜 허락한 거야? 저번에는 내 실수로 일을 그르친 거지만, 이제는? 괜히 허튼 짓하지 말기로
했잖아! 또 병신처럼 놓치려고?”
“페르닌드. 말조심해라.”
이제는 예전과 달리 제 존재가 이 저택에 드러났다. 다만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저택 밖으로 소문이 흘러나갈지도 몰랐다. 어련히 소문을 잘 관리하겠지만……
언젠가는…….
이네트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가만히 서 있는 카시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허락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다물린 그의 입술이 열렸다.
“승마도요?”
“……정말로?”
“그래.”
허락의 말이 떨어졌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왜일까. 이네트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끝없는 추락을
맛보는 것 같았다. 사무치도록 에일이 보고 싶었다.
“사냥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 *
“바지요?”
이네트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머리를 대충 질끈 묶었다. 긴 머리는 승마를 할 때 불편했으니까.
기다리고 있자 사용인이 셔츠와 바지를 들고 왔다. 원피스 대신 셔츠와 바지를 입고서 방 밖을
빠져나갔다. 뒤따르는 사용인이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이 보였으나 이네트는 무시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마구간지기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녀는 마구간지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현 듯 에일을 떠올렸다.
분명히 지하실에서의 그는 스스로를 마구간지기라고 소개했다. 말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극진한 애정이
묻어나기도 했다.
“마리요?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아마 죽지 않았을까요.”
마구간지기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건강해 보이는 말을 가리켰다.
“이 말로.”
“네, 아가씨.”
“하지만 아가씨…….”
말리려는 그들의 뒷말을 무시하고 이네트는 곧장 말에게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나갔다. 어차피 저택
앞에는 경비가 삼엄할 것이다. 나갈 마음은 애초부터 먹지 않았다. 이네트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사냥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 카시엘은 이곳에 들어가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 기사까지 배치시켰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에일. 그가 있는 곳이다.
에일…….
이네트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눈치챌까 싶어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사냥터에서 멀어졌다.
* * *
페르닌드가 이네트의 몸 위로 상체를 드리운 채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그녀가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자 그가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너는 참 물이 많아.”
페르닌드가 어느새 시트까지 적신 애액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차마 아래를 스스로 내려다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이 순간조차도 카시엘의 시선이 느껴져 더욱 몸이 떨렸다. 그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모든 상황을 관망했다. 꼭 페르닌드의 아래에 깔려 반항 없이 아래를 벌리는 그녀를 책망하듯이.
그것이 이네트를 더욱 수치스럽게 했다.
“계속. 물이 마를 때까지.”
“…….”
“음탕하긴.”
“흐읍, 흑.”
“손 떼지 마. 벌리고 있어.”
“흐윽, 흡…….”
“빌어보라니까?”
“흐으으…….”
“페르닌드, 그만해.”
“……적당히 하란 소리다.”
“형은 상관 마!”
페르닌드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제 성기를 이네트의 젖은 입술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들어올 듯 찌르면서도, 카시엘의 저지 때문인지 안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이네트는 입술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비릿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머금고 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았다.
삽입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두꺼운 귀두를 넣음과 동시에 뿌리 끝까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으응!”
평소보다 너무 빨랐다. 시트를 움켜쥔 그녀의 몸이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가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골반을 붙잡았다.
그가 우악스럽게 가슴을 주무르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유두를 입에 머금고 희롱했다. 그러면서도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유두를 혀로 꾹 누르다가, 이어 이로 가볍게 짓씹었다. 이로 씹을 때마다
그녀가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휘었다. 그녀의 높은 신음에 그가 피식 웃으며 머금고 있던 유두를
뱉어내고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그녀의 가슴을 후려쳤다.
“앗!”
약간의 알싸한 느낌과 함께 미묘한 여운이 남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흐윽!”
또다시 손바닥이 가슴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강도가 더 셌다. 홧홧한 느낌과 함께 아까보다 더
큰 여운이 감돌았다. 그가 은근하게 귀두 끝으로 질 내벽을 문지르며 또 한 번 세게 가슴을 후려쳤다.
“아흐으읏!”
철썩 내리친 손바닥이 유두를 스치듯 만지고 지나갔다. 요동치는 쾌감에 그녀가 밭은 숨을 내쉬며
헐떡거렸다. 아프면서도 동시에 느껴지는 쾌락에 둔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또 해줘?”
“흐윽, 하…….”
페르닌드가 손자국이 남은 가슴을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푸른 눈동자가 욕망이 뒤섞여 뿌옇게 빛났다.
“흐읏…….”
“아앙! 흑, 아흑!”
이네트는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킨 와중에도 아래는 착실하게 쾌락을 받아들였다. 신음이라도 참고
싶었으나 입 안을 휘적거리는 페르닌드의 손가락 때문에 신음조차 삼킬 수 없었다.
“씨발…….”
“너, 안에……!”
“당장 빼!”
“싫어……!”
임신이라니. 죽어도 싫었다. 이네트가 아무리 페르닌드의 등을 두들겨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에 머금은 그의 성기가 흥분한 듯 크기를 불렸다.
“더 화내줘. 난 그게 좋아.”
“……이 미친 새끼가.”
“카시엘…….”
“뭐?”
빼내고, 빼내어도 안에 스며든 정액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임신하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고 안에 싸지 않는다 해도, 쿠퍼액만으로도 임신할 가능성이 극히 낮지만 존재하기는 했다. 애초부터
피임약도 먹지 않고 섹스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짓이었다. 그리 생각하자 이때까지 임신하지 않고 꾸준히
생리를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그녀가 풀썩, 욕실 바닥에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피임약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 한
명만 먹으면 됐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들이 그녀에게 약을 먹인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이 대신 먹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네트.”
“물어뜯지 마. 다쳐.”
“…….”
“부탁이에요, 제발….”
“안 되나요?”
이네트가 말을 끊고 물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
그녀는 그 변화와 동요를 기민하게 감지했다. 직감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가
느낀 것이 맞는지 확신하기 위해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카시엘.”
이름이 불리자 다물린 카시엘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과,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하며 이네트는 확신했다.
이름이 불리거나 먼저 손 뻗어오면 늘 단정하고 초지일관하게 일자로 유지하던 입꼬리가 깨어질 만큼.
고른 숨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떨릴 만큼. 그는 그녀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진득하게 달라붙던 시선도, 이곳에 다시 붙잡혀오고 나서 느꼈던 끈질긴 시선도 전부 다…
….
그녀는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천천히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흐읏….”
“제가 좋아요?”
이네트의 물음에 카시엘이 숨을 멈췄다. 살짝 벌어진 잇새 사이로는 그 어떠한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잠시만요.”
“젖었잖아요. 그 꼴로 나가려고요?”
“…….”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네트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구해다 줄 수 있죠?”
“이네트, 너는…….”
“……이네트.”
허리를 끌어안는 손짓조차 조급했다. 이미 위로 곧추선 성기가 이네트의 배 언저리를 찔러댔다. 그간의
금욕을 발산하기라도 하듯 젖은 천 너머로 그가 여실히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들어줄 거죠?”
“…….”
“페르닌드랑 자기 싫어요…….”
그가 홀린 듯 대답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어쩌면,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간 있었던 행위들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애무는 조급했다. 카시엘은 페르닌드가 남긴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듯 붉은 자국에 하나하나 입술을 대었다.
놓치는 것이 있을세라 뒷목덜미와 등줄기에도 입맞춤이 내려왔다.
“으읏…….”
마찰이 계속 되자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네트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이제 그만…….”
“그만?”
“……넣어주세요.”
“으응!”
껴안은 자세로 처박혔다. 이네트는 카시엘의 쇄골에 더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안으로
묵직하게 파고드는 느낌에 절로 허리가 그 쾌락을 좇아 움직였다. 카시엘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이네트의 엉덩이를 꽉 쥐고 그간 쌓아왔던 것을 다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거칠게 안을 쑤셨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부딪히고,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비벼졌다. 흥분이 고조된 이네트는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단단한 가슴이 유두를 스칠 때마다 아찔한 쾌감에 헐떡거렸다. 엉덩이를 꽉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를 아프게 움켜쥐는데도 고통보다 쾌감이 더 컸다.
“흐으읏, 좋아……!”
접합부가 부딪혔다 떨어질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벅차오르는 쾌감에 이네트가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미칠 것 같았다. 카시엘이 바닥을 긁는 이네트의 손을 제 등에 두르게 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등을 할퀴어도 그는 상관 않고 허리를 계속 움직였다.
“으응, 좋아…….”
“더.”
“흣! 아! 으응!”
이번에는 앉은 자세로 꿰뚫렸다. 그가 뒤에서 그녀의 가슴을 여전히 주무르며 강하게 껴안았다. 아래에서
위로 퍽, 퍽 찍어 올릴 때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흔들렸다.
“흐으으응…….”
“이네트…….”
사정감을 참을 수 없었다. 카시엘이 깊숙이 안으로 한 번 쳐올리더니, 그대로 성기를 급하게 빼내고서는
그녀의 엉덩이에 사정했다. 그는 엉덩이에 흩뿌려진 정액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바닥에 엎어져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또……?”
“앗!”
카시엘은 늘어진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욕실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을 발부터 천천히
흩뿌렸다. 발에 뿌리다가 종아리로, 허벅지로, 점점 위로 올라갔다. 따듯한 물이 맞자 그제야 이네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에 말라붙은 정액을 살살 문질러 씻기고, 몸에 비누칠을 해주었다. 이네트는 몸을
쓸어내리는 두터운 손의 감촉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잘 건가?”
이따금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지하실에 갔다.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으면 그제야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 때문에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카시엘…….’
‘이네트, 돌아와.’
‘이네트…… 돌아와.’
‘아…….’
카시엘이 나직이 탄식했다. 그리고는 몸을 무너트렸다. 없다. 아무리 찾아 헤매도 그녀는 없었다.
이네트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감정에 눈을 감았다. 이제는 괜찮을 것이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테니까.
‘좋아…….’
“읏…….”
“크읏….”
‘카시엘.’
카시엘은 여전히 어머니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그 여자와 이네트를 증오하고,
남편을 의심하며 죽었다.
* * *
“아가씨,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래.”
눈짓을 해서 사용인들을 내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승마를 하러 가기 위해 저택 밖을 나섰다. 어젯밤 격하게 이어진 정사 때문에 아래가 살짝
쓰라렸으나 못 달릴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울타리가 쳐진 곳만이 입구일까? 다른 곳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때껏 주변을 살펴보면서
따로 들어갈 만한 곳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네트는 울타리가 쳐진 곳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어 그 근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교대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었다. 그때를 노려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게 더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그때 제게 쓴 약. 아직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이네트는 어떻게 그들의 방에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카시엘의 방은 아무리 저라 해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시엘의 방보다 우선 페르닌드의 방부터 먼저 접근하는 것이 더 나았다.
오늘처럼 그들을 기다린 적 없었다. 이네트는 방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페르닌드는요?”
그랬다. 이네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누운 이네트를 흘긋 확인한 카시엘은 곧바로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남자 사용인과 함께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멍한 듯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나, 눈빛은 또렷하게 빛났다.
* * *
이네트의 말 한마디 이후, 더 이상 이네트의 방에 페르닌드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작위를 이어받지
못한 공작가의 차남이란 공작의 명령에 그토록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이네트는 그 사실이 제법 고소했다.
이상하게도 페르닌드가 함부로 굴 때마다, 그녀는 묘한 배신감을 느끼곤 했다. 그녀에게 서슴없이 야한
말을 지껄일 때, 우는 것이 예쁘다며 울라고 강요할 때, 안을 거침없이 꿰뚫을 때…… 그와 하는 모든
행위가 이네트는 수치스럽고, 화가 났고, 무엇보다 슬펐다. 어린 시절 짧게나마 나누었던 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네트는 씁쓸하게 그에 대해 회상하다 애써 생각을 지웠다.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값비싼 액세서리, 화려한 드레스, 두터운 양장본, 달달한 디저트,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면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하는 부탁을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이네트.”
그녀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자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있던 카시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거짓말.”
그의 어조에 날카로움이 서렸다. 이네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풀고서는 꾸며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이렇게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고 좋은데…… 혼자 있을 땐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 * *
“눈 떠, 이네트.”
카시엘이 이네트의 입천장을 긁으며 동그랗게 솟은 클리토리스를 꾹 눌렀다. 이네트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으으응!”
“소리 참지 마.”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액이 부딪혀 찰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가 강하게 몰려오는 감각에 어찌할
바 모르고 몸을 꿈틀거리자 카시엘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눌러 움직이지 못하게끔 했다.
“흐으윽!”
“왜 먹어요, 더럽게…….”
“안 더러워.”
“너무 힘들어요…….”
“못 하겠어요.”
그는 말없이 그녀가 제 성기를 감싸 쥐게끔 했다. 이네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그와 눈을 맞췄다. 그가 그녀를 바라본 채로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감쌌다.
“후…….”
손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탁탁, 탁탁……. 소리와 함께 성기 끝에서 흐른 액
때문에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그럴 때마다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읏.”
“…….”
“헉.”
“하아…….”
“이 손수건…….”
“너.”
“네가 준 거다.”
“제가 줬다고요……?”
「내 건?」
“됐어. 이게 좋아.”
이네트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이어지고, 숨소리만 이어졌다. 이네트는 등 뒤에서 저를 껴안은 온기를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페르닌드에게 가는 거다.”
“만나기로 했어.”
“……그럼 따라가겠습니다.”
“다 꺼지라고 했잖아!”
“씨발, 말귀…….”
“페르닌드.”
“술 마신 거야?”
“왜 네가…….”
“진짜 이넷이야?”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선 기사들을 향해 눈길을 건넸다. 그러자 그들이 그 눈빛을 오해한 듯 방
안으로 발을 한 발짝 들였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네트가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페르닌드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페르닌드가
일갈했다.
“뒤의 둘, 꺼져.”
“……문 앞에 서 있겠습니다.”
“그 정도면 됐어.”
그리고는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그럼 왜 왔어?!”
“…….”
그가 쏘아붙였다.
“왜 왔어? 말해.”
“……뭐?”
“안 보니 보고 싶어서.”
“아파…….”
“못 놔.”
“왜 왔는지 말해.”
“말했잖아, 보고 싶,”
“어떻게…….”
“…….”
“…….”
“싫으면, 이제 안 하면 되잖아.”
이제 와서……?
그러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가진 약이 필요했다. 이네트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
애를 쓰며 몸을 돌렸다. 술 때문인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붉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어 손을 뻗어 뺨을 움켜쥐었다. 전보다 마른 뺨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감겼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넷…….”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형제이나 풍기는 체취부터가 달랐다. 카시엘에게서는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고,
페르닌드에게서는 짙은 풀 향과도 같은 냄새가 났다.
그가 그녀에게 이끌려 침대로 가는 와중에 물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으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올 거야?”
“가지 마. 계속 있어 줘.”
“……내일.”
“내일도 와줘.”
이네트는 달빛과 술병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이어 방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점점이 흩뿌려진 술과, 나동그라진 술병들, 깨진 유리 파편…… 그런 것들에 이따금 시선을 주다가, 약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찾았다.
찾았다!
그녀는 곧바로 유리병을 낚아채듯이 품 안에 넣었다. 찾았다는 기쁨에 가슴이 작게 두근두근 뛰었다.
천천히 등을 돌린 순간, 이네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또렷한 눈동자에
숨이 잠깐 멎었다.
“……페르닌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녀는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아까 누운 자세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감긴 눈이 뜨였을 뿐.
“이리 와.”
그 냄새에 심취해 있다가,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찰나에 스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의 등을
두른 그의 팔은 햇살처럼 안온했고, 그늘처럼 안락했다. 그것에 오히려 겁이 나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페르닌드, 아까…….”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천천히 매만졌다. 긴장한 듯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의 혀가 움직였다. 그 혀를 보자마자 그의 아래가 본능처럼 반응했다.
“입술…….”
뺨을 더듬거리던 엄지가 그녀의 입술 근처로 향했다. 여전히 긴장한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입술 근처를
배회하는 그의 손가락에 눈을 내리깔았다.
“입 맞추고 싶어.”
페르닌드는 이네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비비며 그녀를 꽉 껴안았다. 온기가 따스했다.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하지만 잠들면 그녀는 곧장 품 안에서 빠져나갈 것이 뻔했다. 그는 입술을 떼며 그녀의
입가에 달라붙은 은색 머리카락 가닥을 하나하나 떼 주었다.
“……잠들면 갈 거야?”
페르닌드는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오늘의 그녀는 이상했다. 먼저 찾아오는 걸로도 모자라
그가 보고 싶다고 했으며, 그를 안아주기까지 했다. 손을 뻗어 잡아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까…
….
“갈 거야?”
“술 많이 취한 것 같아. 얼른 자.”
페르닌드가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점차 그의 눈빛에 스민 날카로운 기색이 닳아 없어졌다. 그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자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이네트의 품과 눈두덩을 누른 그녀의 손바닥이 따듯해 수마가 몰려왔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닌드가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카시엘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네트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시선을 내렸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무어라 대답하든 좋을 게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축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늦었어.”
“아파요…….”
여전히 그에게서 대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후우, 한숨을 쉬고는 더 묻기를 포기했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잡혔던 손목이 놓였다. 놓이자마자 그녀가 손목을 확인했다. 그의 손자국이 붉은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 아니었어요?”
“…….”
이네트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얌전히 침대로 가 누웠다. 하지만 카시엘은 여전히 서서 꿈쩍을 하지
않았다.
* * *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기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이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시간이 다가오기 1 시간 전,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가루약을 차에 탔다. 그리고는 감시자이자 사용인인 여자 두 명에게 약을 탄 차를
권했다.
뜻밖의 호의에 사용인들이 의구심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 내가 주는 건 더러워?”
“그게 아니라…….”
“그럼 마셔. 마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이럴 거면 괜히 너희들 것까지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먹겠습니다.”
그제야 사용인들이 난감한 기색을 하면서도 그녀가 준 차를 마셨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고
그들이 차를 마시고 삼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꿀꺽. 목 안으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이네트의 표정이 일변했다. 약효가
얼마 만에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약이 들어갔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잠이 들 것이었다.
그녀 또한 이전에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은 듯 잠이 들었으니까. 그때는
정신적인 피로감이 극심해 그런 줄 알았는데, 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사용인들의 또렷한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들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사용인들이 그녀가 무언가를 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대답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들이 또 한 번 그녀를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오려 애를 썼다. 그녀는 몸을 가뿐히
움직여 그들을 피했다.
몸이 허물어질 때쯤이 돼서야 다급해진 듯 연거푸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쓰러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에일, 기다려.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온 사냥터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람의
손길을 거의 타지 않은 듯 긴 풀이 자라있었다. 말의 다리를 뒤덮을 정도로. 그녀는 말에게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뒤지다 보면 어딘가에 에일이 있을 것이었다.
말의 다리를 뒤덮는 풀을 헤치고 또 헤치고 나서야 그녀는 한 오두막을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그 오두막은
세월의 흔적이 여실함에도 누군가 드나든 흔적이 보였다.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은 깨끗하게 닦여있었고,
오두막의 문과 문고리도 깨끗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에일이 있다면 저곳이었다. 그녀는 오두막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두고는
오두막 문을 향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눈앞에 있을 에일을 상상하고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에일이 아니었다.
“어…….”
이네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그림들이 빼곡하게. 그녀조차 모르는 그녀의
모습들까지도.
“아…….”
본관으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까지 그려진 것에 그녀는 탄식했다. 별관에 있을 때의 모습은 멀리서 지켜본
듯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본관에 있을 때의 그림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젖히니 천장에도 그림이 붙어 있었다. 바닥을 제외하고 온 오두막을 빼곡하게
메운 제 그림에 그녀는 소름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다. 무서웠다.
누가…… 누가 이런 그림을…….
그녀의 시선이 곧, 오두막 오른쪽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곳엔 그녀의 가장 최근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벽을 보고 누운 그녀의 모습이…….
미친 새끼. 미쳤어…….
‘사냥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말에 올라탄 채, 긴 풀이 우거진 사냥터를 벗어나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울타리 근처에 서 있던
기사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경계 태세를 갖췄다.
“잡아!”
“막아서면 죽을 거야.”
“비켜!”
그녀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녀는 그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가 죽어서 좋을 게
없었다. 아니, 죽지 않고 그저 다치기만 해도 문제일 것이다.
“문 열어.”
그녀가 문을 지키고 선 기사한테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기사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열라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벨라…….”
황궁에 있는 자라면 벨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황후가 있을 때부터 황궁을 몰래
드나들던 황제의 정부였다. 황후가 죽기 전에는 그래도 조심하는 듯하더니, 그마저도 죽고 나니
공공연하게 황궁을 드나들며 제 존재를 과시하고 다녔다. 남편이 사별하여 죽고 없는 과부라고 하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야가 흐렸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벨라를… 불러줘.”
“그래, 왜 불렀니?”
“에일은요?”
“아, 에로드.”
벨라는 제 얼굴을 보자마자 에일에 대해 꺼내는 이네트를 보고서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절박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벨라는 그녀가 에일을 제법 크게 마음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부터
눈치채긴 했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에로드는 무사해, 얘.”
“그래서…… 안 찾았다고요?”
“데넌?”
“네 아비 말이야. 황제.”
아무렇지 않게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자연스러움에 이네트는 순간 놀랐다. 황제의 이름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벨라는 그 이름을 부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 둘을 끝으로 황제는 황후를 찾지 않았고, 공식적인 행사에서조차 그녀를 냉대했다. 행사에 참여한
귀족들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황후는 그럴 때마다 늘 평온을 가장한 척 입꼬리를
올렸으나, 그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황제의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죽었다.
“……그게 다인가요?”
“그것 외에 뭘 바라?”
* * *
“괜찮으니 나가렴.”
에일이 보고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불안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그를 만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제게 다정한 햇살 같던 그가 그리웠다.
* * *
“왜?”
“그래, 그렇지.”
황제가 수긍하며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그에게 반말을 하는 이는 벨라만이
유일했다.
하지만 다음 잠행 때조차 우연처럼 그녀를 만나고, 그녀를 희롱하고 있는 남자를 단박에 죽이고 나서야
그는 이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누구에게도 동하지 않았던 심장이 고작 평민
여자에게 뛴다는 사실은 그에게 제법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노골적인 회피와 도망에도 번번이 그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고작 가난하고 예쁜 평민 여자에 불과했으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벨라는 평생 정부로 종속될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데넌은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가 생겼을 땐 족쇄가 생겨 기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서 마구 소리를 지르던
벨라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배를 마구 때리며 차라리 애를 죽이겠다던 그 광기에 사로잡힌 붉은 눈.
애증으로 범벅된 그 눈동자. 그는 그 눈동자마저 사랑했다.
그는 아이가 족쇄가 되리라 생각해 그녀의 행동을 막았고, 결국엔 아이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족쇄가
되리라 생각했던 아이는 족쇄가 되지 못했고, 그렇게 아이의 가치는 사라졌다.
그가 아이의 가치가 사라졌음에도 아이를 죽이지 않고 공작가에 버리듯이 떠맡긴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벨라와 닮아서. 그뿐이었다. 그리고 공작이 지나치게 올곧고 고지식하며 유능한 신하인 탓도 있었다.
그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면서도, 반기조차 들지 않고 꿋꿋하게 참을 만한 개는 공작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명분을 위해서라도 한미한 남작 가문과 결혼하지 않았고, 작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자의 성으로 불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으니. 차라리 성이 없는 비천한 평민 여자로 남는 것이 나았다. 권력은 그가 쥐여주면 되는
문제였다.
“지금도 널 닮았어?”
그래……? 데넌이 피식 웃었다. 벨라와 닮았다는 말에 흥미가 치솟았다. 어떨까. 그가 손가락으로 벨라의
은색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난 너 말고 다른 거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벨라의 뺨과 입술을 손가락으로 스치듯 만지던 데넌이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제 아래에 깔아 눕혔다. 이제
서른여덟이 된 그는 전조도 없이 그녀에게 발정하고는 했다. 그녀는 또다시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그를
흘겨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몸 위로
그림자를 뒤엎었다. 아직 밤은 길었다.
* * *
벨라를 두어 번이고 찾고 나서야 드디어 부름을 받았다. 이네트는 그간 응답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희미한
불쾌함을 느끼며 사용인들이 안내하는 대로 뒤따랐다.
“아니, 전혀.”
벨라의 물음에 데넌은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못 박은 듯 가만히 서 있는
이네트를 향해 손짓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젊고 아름다운 미모에 그녀는 조금 당황하였으나, 이내 갈무리한 표정으로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당당한 시선에 데넌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었다.
“너처럼.”
이네트는 저를 앞에 두고 말을 주고받는 그들을 차가운 눈동자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네트가
그런 눈동자로 바라보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원하는 것을
내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결국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본론부터 꺼냈다.
그녀의 물음에 황제는 눈썹만 까딱였다. 그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더니 아, 하며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겠지.”
벨라의 말대로 이네트에게 주어진 것은 황제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언제든 황제의 말 한마디면 번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녕 부모가 맞단 말인가? 지금마저도 저울질하듯 구는 태도에 이네트는 당장이라도 길길이 날뛰며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란 물건들은 그들에게 힘껏 던져버리고 싶었다.
확실한 패가 필요했다.
“…….”
벨라는 얼마간 이네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농염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여전히 그녀는 그에게 묶여있었고, 그녀 또한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고 제 감정을 인정하고서 자유를
포기했다. 수치와 손가락질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다 감내한 결과였다.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마른 딸의 몸에서 제 과거의 잔영이 보였다. 벨라는 가난했던 젊은 시절이 시야에서
아물거리자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그녀도 저 애처럼 자유를 꿈꾸며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정말?”
“그래, 정말로.”
“네.”
이네트가 곧바로 대답했다. 많은 사람에게 밝혀지면 더 좋았다. 사생아라는 모욕도 좋았다. 황제의
피라는 그것만으로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지고의 위치에 서게 될 테니까. 사생아라 무시당한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함부로 건들 수 없는 황제의 피가 섞였으니까. 그녀는 지위와 명예 따위엔 관심
없었다.
* * *
아니면, 그 남자 때문에?
어떻게 해야 도망치지 않지? 어떻게 해야? 카시엘조차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묶어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이네트야. 이넷이라고.”
어느 누구는 황제의 새로운 정부일 것이라 떠들었고, 어느 누구는 황제의 정부가 몰래 숨겨두었던
딸이라고 떠들었다. 그 누구도 갑작스레 등장한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나, 소문을 들은 카시엘은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이네트였다.
“이넷…….”
술에 취한 페르닌드의 입에서 연이어 이네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그가
이윽고 비틀거리며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에는 힘이 없었다.
‘카시엘.’
또 환청이 들렸다.
‘카시엘.’
* * *
황제가 드물게 대규모 연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황제의 뜻에 따라 황궁에서 보낸 초대장이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수도를 제외한 영지에 있는 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황제가 먼저 나서서 연 연회는
굉장히 오래간만이었기에 귀족들 사이에서 연회의 주인공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말로는 연회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이네트의 존재를 알리는 데뷔탕트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에
이네트는 날마다 황실의 예법과 춤에 대해 배워야만 했다.
이네트는 목의 상처를 가려주는 화장을 하고, 사용인들이 입혀주는 드레스를 입은 뒤 밖으로 나섰다.
바람은 쌀쌀하지만 날이 따스했다. 얼굴을 비추는 햇빛에 이네트는 미약하게 눈을 찌푸리며 넓은 복도를
지나 가까운 정원으로 향했다.
“나보다 누이인가?”
휘파람 같은 목소리였다. 이네트는 남자의 경쾌한 어조에 굳었다가 수 초가 지나서야 그들이 입은 옷이나
뒤에 따라붙어선 사용인들을 알아차렸다. 남자의 머리 색이 황제의 머리 색과 복사한 듯이 똑같았다.
이네트는 황급히 그들이 황태자와 황녀라는 것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 한 채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여전히 웃음을 매단 얼굴로 이네트에게 악수를 권했다. 이네트는 당황하여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의 악수를 받았다.
“아나스타시아다.”
“이네트입니다.”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눈빛 같기도 했다. 그 애매모호함이 섣부른
행동을 유보시키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쩌면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둘의 태도는 담백하면서도 애매했다. 이네트는 제 배다른
형제자매를 보며 어색한 침묵을 곱씹었다. 입 안의 말이 모래알처럼 씹히다 삼켜지기를 반복했다.
이네트는 폭풍처럼 왔다가, 고요하게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 * *
연회를 앞두고 이네트는 황실에서 가르치는 예법과 춤 교육에 매진했다. 매일매일 시간에 맞춰 예법
선생과 춤 선생이 와서 그녀를 교육했다.
그 때문에 이네트는 방 안에서 홀로 스텝을 밟으며 발목을 유연하게 움직이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수로라도 스텝을 잘못 밟아 상대의 발을 밟으면 안 되니까. 괜히 구설수에 올라 망신을 사기는 싫었다.
이네트는 당연히 찾아온 사람이 벨라인 줄 알고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춤 연습에만 몰두했다.
“누이.”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네트는 제 눈앞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벙찐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네트의
어리둥절한 얼굴에도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것도요.”
기본적인 것쯤은 배웠기에 능숙하진 못하더라도 할 줄 알았다. 저를 놀렸다는 생각에 그녀가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리자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뇨.”
“잘하는걸?”
“밟아도 돼.”
“반말해도 되는데.”
“아니, 그래도…….”
“누이 편한 대로 해. 난 괜찮으니까.”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운 대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을 뒤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앞으로
가면 그가 뒤로 가고, 그러다 그의 등이 벽에 닿으면 그가 다시 앞으로 가고, 그녀가 뒤로 가기를
반복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점차 스텝에 리듬감이 붙어 움직임이 경쾌해졌다.
“잘하는데? 그럼 또.”
“누이, 소질 있는데?”
“하하. 응, 그렇게.”
긴장한 얼굴로 잔뜩 움츠린 초식동물 같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느새 긴장과 경계를 푼
그녀의 모습은 생기발랄한 소녀 같았다.
“아뇨.”
황태자의 첫 춤 상대? 이네트는 사교계에 데뷔한 적도 없고, 복잡한 사교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황태자의 첫 춤 상대가 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돼요……?”
“손…….”
그날과 같았다. 폭풍처럼 갔다가, 고요하게 다시 사라지는 것이. 이네트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는 그가 사라진 문을 수 초 동안 바라보았다.
* * *
페르닌드가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며 카시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카시엘이 유리병 안에 든 가루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페르닌드가 덧붙였다.
기어코 페르닌드는 일을 저질렀다. 식사시간 때마다 제 누이를 바라보던 눈길은 결코 남동생의 눈동자가
아니었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음에도, 이렇듯 직접적으로 손을 뻗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카시엘의 싸늘한 눈빛에도 페르닌드는 삐뚤게 입매를 올린 채 등을 돌렸다.
「으음….」
「으응…….」
「아…….」
「흐읏….」
카시엘은 페르닌드의 손가락이 이네트의 붉은 속살을 매만지고 짓누르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그녀가 흘린 애액으로 흥건히 젖은 손가락이 그녀의 구멍 안으로 서서히, 집어 삼켜지듯 들어갔다.
「아… 아응….」
그러다 그녀의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들은 순간, 견고하리라 믿었던 자제심은 얄팍한
종이 한 장처럼 덧없이 무너졌다.
페르닌드가 카시엘의 손안에서 뭉개진 이네트의 가슴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내벽을 문지르며 안을 넓혔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갈 땐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갈 땐
쯔걱거리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렸다. 연신 그녀의 안을 넓히던 페르닌드가 못 참겠다는 듯 잠든 이네트의
입술을 덮쳤다.
「윽, 씨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입술에 쌀 것 같았다. 페르닌드는 사정감을 억누르며 이네트의 입술에 젖은 성기를
문댔다.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성기에 닿았다. 그의 입에서 연거푸 욕설이 터져 나왔다.
결국 이네트의 입가에 성기를 몇 번 문지르던 페르닌드가 얼마 안 가 그녀의 입술에 정액을 싸질렀다.
예상보다 빠른 사정에 페르닌드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카시엘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채, 제 동생이 그녀의 입술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죄다 싸지르는 광경을
고스란히 목도했다. 페르닌드는 「젠장.」 나지막이 욕을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입술에 묻은 제 정액을 입
안으로 남김없이 넣어 삼키게끔 했다. 페르닌드의 입술에 묘한 웃음이 매달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카시엘을 바라보았다.
* * *
“누이, 나 왔어.”
“…알겠어요.”
“연습하고 있었어?”
“네. 가볍게…….”
“배우긴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실제로 소문은 과장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여인을 숱하게 봐온 지크프리트조차 이네트를 처음 보자마자 시야에 들어찬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그녀 한 명만 보였으니까.
원래 잘 웃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면으로 눈빛을 마주하면 그녀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는 했다.
“로사? 그게 뭐죠?”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지크프리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 뺨이 부딪혔다. 이네트는 몸이 움직일 때마다 허리를 움켜쥔
그의 손을 적나라하게 느껴야만 했다.
“둘이서요?”
“……좋아요.”
고민하던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크프리트의 제안에 응했다. 그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누어 가까워지는
것도 좋을 듯했다. 특히, 아나스타시아 황녀와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아직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 때문에 그녀가 제게 가진 감정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함께 황녀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확실히 황녀의 궁답게 이네트가 머물고 있는
궁보다 훨씬 더 호화롭고 사용인들의 수도 많았다. 사용인들은 지크프리트와 이네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예를 갖췄다. 처음에는 그것이 다소 부담스러웠으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너희들, 거리 좀 더 벌려.”
그의 말에 곧바로 호위기사들과 시중들이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이네트를 보며 ‘나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네트는 헛웃음처럼 피식 웃고만 말았다.
“전 좋아요.”
“네….”
동쪽에 자리잡은 황태자의 궁은 황제의 궁만큼은 아니지만 호화스럽고 웅장했다. 이네트가 입을 벌리고
감탄하자 지크프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요?”
그의 말대로 황태자의 궁에 있는 정원은 서쪽의 궁보다 넓었다. 화려함은 다소 덜하여도 정원이 넓은데다
서쪽의 궁과는 분위기가 달라 색다른 풍경에 가슴이 뛰었다.
“어…… 저건…….”
그녀는 주인의 손길이 좋은 듯 여전히 골골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맹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고양잇과 맹수 중 하나인 표범이었다. 털 색깔이 하얗긴 했지만.
“정말요?”
이네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레오가 그르렁거리며 여전히 그녀의 몸에 제 머리를 비볐다. 몸의
털만큼 폭신폭신한 꼬리가 시야 너머로 보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제 배에 비비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신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
긴장한 게 언제였냐는 듯 이네트가 웃음을 매달고 레오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과감하게 머리를
껴안기까지 했다. 폭신한 털이 몸을 스칠 때마다 구름 위를 둥둥 걷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부드럽고 좋아요…….”
“네, 좋아요.”
그녀의 흔쾌한 수락이 내려지자마자 그가 손짓으로 레오를 불렀다. 그가 손짓하자마자 레오가 곧바로 그의
옆에 섰다. 그가 앞으로 걷자 레오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퍽 익숙한 모양새였다.
“레오와 자주 산책을 하나요?”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녀가 놀라 몸을 뒤로 물려도 여전히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싫진 않아요.”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레오와 함께 넓은 정원을 평화로이 쏘다니다가 멀리서 누군가 절박하게 외치는
‘전하’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응, 맞아.”
“이제 슬슬 가야 해.”
가지고 난 지금에야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이마저도 나중에는 익숙함에 길들여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때가 오겠지만, 이네트는 지금 같은 나날들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으음…….」
이 손이 먼저 그의 몸을 껴안고 쓰다듬어준다면…….
「흐음….」
페르닌드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녀의 하얀 등에서 입술을 뗐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 듯,
그녀의 등줄기에 입술을 비비며 허리를 지분거렸다. 카시엘은 페르닌드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안을 벌렸다. 손가락으로 아직 서지 않은 돌기를 애무하다가, 몸을 내려 그녀의 안에 혀를
넣고 빨았다. 점점 안쪽이 미끈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넣어본 적 없잖아.」
「으읏….」
이네트가 앓는 신음을 흘리며 안을 꽉 조였다. 페르닌드도 그것이 느껴졌는지 씨발, 욕설을 흘리며
고환이 달라붙어 철퍽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성기를 깊숙이 처박았다.
카시엘은 손가락을 끊을 듯 죄이는 안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넓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버거운 듯 꽉 죄이던 내벽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질구에서 흐르는 액도 그것에 한몫했다.
「아으응….」
카시엘은 제 동생이 싸지른 정액을 바라보며 이네트의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미끈거리는
안과 다르게 구멍 안은 뻑뻑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이네트의 몸이 실 달린 인형처럼 흔들렸다. 그는
흔들리는 젖가슴에 입을 맞추며 내벽 안에 마음껏 제 것을 내보냈다. 그녀가 모르리라고 확신하며.
* * *
그들의 칭찬에 이네트는 짧은 미소만 보이고 말았다. 이네트가 바라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연회의 주인공이자 그녀가 가진 지위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으므로.
“네, 전하.”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어봤어요?”
“응. 왜냐면…….”
“아…….”
이네트가 눈앞에 펼쳐진 살색의 향연에 숨을 들이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펼쳐진 책 안에는 다 벗은
남녀가 뱀처럼 서로의 몸을 껴안고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의 머리카락이 남자의 몸을 칭칭 휘감은
것이 마치 족쇄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그림에 이네트는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복수를 담고 있거든.”
이네트가 속지를 넘기고 책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책 군데군데 삽화가 수록되어 있었다. 삽화 속의
여자와 남자는 아름다웠다.
“…….”
이네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수초가 흘러서야 입을
열었다.
“왜? 죽었는데.”
“그건 그렇지.”
이네트는 그가 들고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른 책들을 둘러보았다. 빼곡한 책장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네트는 그것을 떠올렸다가 숨을 멈췄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거다. 감시자의 시선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시선이…… 계속해서 이어져…….
이네트는 생각을 멈추고 눈에 띄는 책을 아무거나 꺼내어 펼쳤다. 손가락만 한 자그마한 글자가 빼곡한
책이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
“전하!”
“또 지크를 찾는데요.”
“응, 그러네.”
“……지크. 일은 해야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요.”
이네트가 제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리듯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를 밀어냈다. 그는 못내 아쉬운 듯
일어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또 그런다. 얼른 가요.”
“응……. 내일 봐, 누이.”
어둑어둑한 궁을 쭉 걸었다. 밤을 머금은 화려한 정원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이네트는 암흑이
서린 꽃들을 쭉 살펴보며 걷다가 문득 사람의 인영을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어둠 속에 홀로 우뚝 선 한
남자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에일……?”
그녀가 반신반의하며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이름을 불린 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네트는 다리에 힘이 빠져 가볍게 몸을 비틀거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마주친 그조차 놀란 얼굴로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아가씨?”
“에일!”
“정말, 아가씨입니까?”
감정이 벅차오른 듯 에일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넘나들었다.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 어깨, 허리를
쓰다듬던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궁으로 찾아왔었다고?”
“어쨌든 지금이라도 마주하게 됐으니 괜찮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가
갑자기 사라지신 후, 저는…….”
오래도록 포옹이 이어졌다. 에일은 흐트러진 얼굴로 연신 이네트의 목덜미에 숨을 쏟아내었고,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숨을 받아들였다. 두근거림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 * *
다음날이면 연회였다. 이제 코앞까지 목도한 상황에 이네트는 부산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드레스부터
시작해서 장신구까지 모두 최종적으로 선택을 마쳤고, 연회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철저하게 공부했다.
사생아를 혐오스럽게 여기는 귀족 사회에 그녀의 존재가 일으킬 파장은 그리 좋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럴수록 더욱 완벽해야만 했다.
“이미 누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설마 황제의 사생아일 거라고는 다들 예측하지 못하는
분위기야. 새 정부인가, 아니면 정부의 딸인가 그런 말만 분분하지.”
“……알겠어요.”
“네?”
“그걸 어떻게…….”
“그와는…….”
“이런.”
“…그래?”
“……물론이에요.”
“가봐야겠어.”
“벌써요?”
“그럼 연회 날에 봐, 누이.”
* * *
“누이, 괜찮아?”
“자, 앞만 보고 가면 돼.”
“내 딸이 왔군.”
파장은 컸다. 좌중이 동시에 술렁거리며 경악스러운 얼굴로 이네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 예상했던
것이다. 이네트는 쏟아지는 시선에도 당당히 고개를 든 채 지크프리트의 말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옆에서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무덤덤한 지크프리트와
아나스타시아의 반응에 귀족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딸이라니!”
황제의 사생아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강렬하게 연회장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도
제국 역사상 최초였다. 그만큼 사생아라는 존재가 제국에서 갖는 오명이란 드높았다. 쉬쉬하는 존재이지,
결코 드러내는 존재는 아니었다.
경악스러운 반응 가운데,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이네트는 좌중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 잠시 몸을 굳혔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페르닌드 디에드반이었다. 못 박힌 듯 굳어버린 그들의 얼굴과 마주한 이네트는 순간,
그녀의 평정이 깨졌다. 눈이 마주치자 카시엘이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페르닌드는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그녀에게 튀어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가 카시엘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네트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지크프리트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공작가 형제들과는 사이가 안 좋나봐? 어린 시절 같이 지냈다면서.”
“무슨 짓을 했는데?”
“…….”
이윽고 황제의 손짓으로 연회의 춤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크프리트는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이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네, 그랬죠.”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위로 올리고, 화려한 제복을 입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르른 녹색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네트가 그녀도 모르게 손을 살짝 뒤로 물리자마자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에일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손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초승달처럼 눈을 휜 채 웃고 있었으나, 왠지 그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아…….”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허리를 휘어 안은 손길에 이네트가 당황하여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가씨.”
뒤에서 에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가 그녀를
리드하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그 스텝에 리드당하며 결국 배웠던 대로 그녀도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굳은 얼굴로 지크프리트를 바라보고 있는 에일의 얼굴이
엿보였다.
“누이, 어딜 봐?”
“앗.”
* * *
멀리서 황태자와 이네트가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닌드의 표정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황태자는
그녀와 친밀한 사이인 걸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를 휘어 감은 손과 그린 듯이 위로
올라간 입술, 바라보는 눈빛 같은 것들은 그녀를 단순히 누이로 보는 남동생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마침내 이네트의 뺨을 부드럽게 훑어 내렸을 때, 페르닌드가 빠득 이를 갈았다.
심장이 느리게 요동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라고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간신히 제 발을
막고, 아까 튀어나가려던 페르닌드를 막은 것은 그의 이성이었다. 그의 이성이 간신히 본능을 자제하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이네트…….’
“디에드반 공작님.”
“공작님.”
다시 한번 불리고 나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르블랑 자작가의 둘째
여식, 엘리아나 영애였다. 카시엘은 사무적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영애.”
“…그렇군요.”
그곳엔 느닷없이 황제의 딸이라며 나타난 여자가 황태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소문이 무성했던 그 여자군요. 폐하의 새로운 정부일 거라는 말이 파다했는데 딸이라니, 조금 놀랐어요.
게다가 폐하의 정부와 쏙 빼닮은 딸이라니…….”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엘리아나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어느새 카시엘이 그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님?”
* * *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알겠어, 알겠어.”
“그 남자 찾아?”
지크프리트가 뒤에서 물었으나 이네트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그녀가 앞으로 걸을 때마다 주변에서
그녀를 흘긋거렸다. 그녀는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아까 보았던 에일을 찾기 위해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회갈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가 에일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에일이니까.
“아가씨.”
이네트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으려고 했다. 허나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잡으려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네.”
“그래 보여요. 안색이 좋아요! 그동안 에로드는 밥도 못 먹고…….”
“에밀리 누이.”
에밀리가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에일이 막았다. 에밀리는 칫, 소리를 내며 잠시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고 이네트를 향해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오, 정말 그러네요.”
“아가씨.”
“에일이라면 괜찮아.”
“아가씨!”
“…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곡이 끝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춤을 멈췄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은 채 가볍게
스텝을 밟아 보였다. 에일은 표정으로 설마 또 춤을 추냐는 거냐고 물었다. 이네트는 그의 표정이 묻고
있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나 목 좀 축이고 올게.”
그녀가 에일에게 이르고는 곧장 트레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연이은 춤으로 갈증이 인 그녀가 트레이
위에 있는 주황빛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 옆에 있는 노란빛의 음료도
들이켰다. 주황빛 음료보다는 단맛이 덜하지만 맛있었다. 끝 맛이 오묘하게도 신맛과 쓴맛이 섞여서 났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휴게실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에밀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 둘이서 자리를 벗어나는
건 다른 이의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소재였다.
“이네트, 괜찮아요?”
“네…….”
“네…….”
따로 마련된 휴게실 중의 한 방으로 들어가 이네트를 앉혔다. 다행히 휴게실은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에밀리는 비몽사몽하며 눈을 어물거리는 이네트를 의자에 기대게끔 해주었다. 의자에 등을 파묻고 편한
자세로 기댄 이네트는 얼마 안 가 눈을 감았다.
“알겠습니다, 누이.”
“에로드, 왜 다시…….”
“에밀리.”
문을 열고 들어온 황녀가 에밀리의 이름을 불렀다. 에밀리는 이름을 듣고서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 * *
“으응…….”
잠꼬대처럼 이네트가 응석을 부렸다. 누이는 제법 귀여운 면이 있구나.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에 걸린 무거운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귀걸이와 반지, 각종 장신구들을 빼서는 탁자 위에 올려두고,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흘긋 보았다.
드레스가 벗겨지고 나서 드러나는 코르셋에 지크프리트는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동물의 뼈로 만드는
코르셋은 여인의 몸에 있어 해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굴곡진 몸매를 좀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드레스의 모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입는다고는 하지만, 불필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코르셋의 끈을 풀어헤쳐서 벗겼다. 벗기자마자 억센 조임에서 벗어난 이네트가 하아,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응….”
여전히 팔목을 붙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의 입에서도 그 어떤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혀를 쑤시고
싶었던 붉은 입술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의 상상대로 그녀의 입속은 요사스러웠다. 타액은 달콤했으며 숨은 뜨거웠다. 뜨겁고 촉촉한 점막을
쓸어내리고 능숙하게 혀를 섞었다. 그녀는 앓는 신음을 내며 웅크린 몸을 펴고 입술을 더욱 열었다. 그는
드넓은 입 안을 종횡무진하며 그녀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혀를 들쑤셨다. 맞닿은 가슴이 뜨겁고 말캉했다.
“에…일…….”
“에일…….”
“젠장…….”
두텁고 긴 성기는 금방이라도 정액을 싸지를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는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를
엄지로 쓸어내리며 핏줄이 불거진 기둥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두 손으로 성기를 쥐어도 다 잡히지
않을 만큼 성기가 컸다. 그는 단잠에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후…….”
“아, 누이…….”
“윽…… 하아…….”
숨이 가파르게 일렁였다. 지크프리트는 아래로 몰리는 열기에 눈을 감고 그녀의 냄새에 오롯이 취했다.
손아귀가 성기를 강하게 압박하는 순간, 피가 몰린 아래에서 정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읏!”
* * *
잠에서 깬 이네트는 찡― 하고 울리는 머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뻑뻑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이네트는
가슴과 배를 조이는 것 없이 가벼운 몸과 침대 밑으로 떨어진 옷가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드레스는커녕
위에는 뷔스티에밖에 입고 있지 않았고, 밑에도 스타킹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스타킹은 올이
나간 걸로도 모자라 엉망진창으로 찢겨 있었다.
“아…….”
“…….”
“……지크도 와 있었나요?”
회상이 끝나자마자 에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향해 언제나 녹음처럼 새파란 미소를 건네고, 따스한
눈빛과 다정한 말을 건네주었던 그. 그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기에 더욱 마음이 시큰거렸다.
“누이, 속이 안 좋아?”
“그래?”
“……괜찮아요.”
이네트는 굽혔던 허리를 편 뒤 단상보다 좀 더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 이곳은 공식적인 자리였다. 원래
같았으면 격식 차린 인사 따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이 필요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높은 단상 위에서 계단을 타고 저벅저벅 내려오는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제와 점점 가까워졌다.
“왜 눈을 까는 거지?”
그 말에 이네트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황제가 그녀와 똑같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주변 이들 모두가 황제와 황제의 딸이라 급작스럽게 발표된 사생아에게 시선을 모았다. 어미가 누군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네트는 벨라와 복제한 듯 닮았으니까.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알음알음 모두가 아는 소식이기도 했다.
“그래요.”
“네.”
에로드 데반은 시도 때도 없이 귀찮을 정도로 알현을 요청했다. 데반 백작가의 광산에서 나오는 원석을
싼값에 황궁에서 사들이고 있으므로 그들은 제법 황궁의 비호를 받는 편이었다. 게다가 데반 백작가
일원들은 벨라와 오래 본 사이였다. 웬만해서는 그들의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는 벨라임에도,
그녀는 칼같이 알현을 거부했다.
‘아직 만날 수 없어.’
“왜 웃어요?”
이네트는 질린다는 표정을 넘어 정색을 했다. 허나 이내 주변을 의식하여 가식적인 미소를 덧그렸다.
“…….”
그녀가 황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황제의 말대로 그는 홀에서 떨어진 커튼 쪽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인파에도 아랑곳 않고서.
“네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전 할 말 없어요.”
“그래?”
황궁에서 치러질 성대한 결혼식보다는 그보다 간소한 약혼식이 더 나았다. 어서 빨리 공식적으로 관계를
발표하고, 그와 함께 단둘이서 리고르 해안으로 떠나 둘만의 결혼식을 치르고 싶었다.
“허락하겠노라 믿어요.”
그 말과 끝으로 음악이 끝났다. 그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조차도 서늘했다. 그녀는 냉기를 흩뿌리고 떠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등을 내렸다.
“이네트.”
“할 얘기 없어요.”
“덕분에요.”
그의 시선이 화장으로 가린 목덜미에 닿았다. 흉터가 없음에 안도하는 듯 샅샅이 훑어보던 눈길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던 가면이 파스스 깨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절벽의 바위처럼 굳었다.
“누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6. 다시 피어나는 백합(1)
“…….”
다물린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라 지크프리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디에?”
“지하실에.”
“네.”
언제나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입매가 사납게 다물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이 아직도 멀리서 이네트를
바라보고 있는 공작에게로 향했다. 눈동자에 살의가 스몄다.
그녀는 그들이 죽는다고 한 번도 가정한 적이 없었다. 이때껏 그들에게서 벗어날 생각만 했지, 그들을
죽일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그건 안 돼요.”
“누이 손으로 직접 죽이려고?”
“누이는 냉정해.”
“괜히 오해 사는 건 싫어요.”
“그렇지만…… 누이.”
“그건…….”
오래도록 침묵이 이어졌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이네트는 결국 지크프리트가 몇 번이고 대답을 재촉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더 안 출 거야?”
“네. 힘들어요.”
전혀 힘들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지크프리트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못 이긴 척 속아
넘어갔다. 이 정도 거짓말은 새끼고양이처럼 귀여운 수준이니까.
그녀는 그에게 팔짱을 끼며 황녀가 있는 쪽을 향해 걸었다. 멀리서 황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에밀리도 함께 있었다.
“……왜요?”
그녀가 물으며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둘의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때 그 이야기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네트는 괜히 그것에 상처받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연회장 구석구석까지도 샅샅이 훑어보았다.
혹시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발코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색 커튼을 걷자 넓은
발코니와 함께 어둠이 서린 하늘이 보였다.
발코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네트는 조용한 발코니를 둘러보다가 잠시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댔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발코니에서 보는 황궁의 풍경은 찬연했다. 나무는 기둥이 단단해 보였고,
가지에 붙어 있는 꽃잎은 이따금 발코니 바닥에 뚝 떨어졌다. 발코니 바닥에 떨어진 붉은 잎은 마치
인공적으로 조형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고요가 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넷…….”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거칠었다. 푸른 눈동자에 돋은 실핏줄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난관을 붙잡았다.
“왜, 또 도망가려고?”
“……너 또 술 마셨어?”
“응. 냄새나?”
“왜 거짓말 했어?”
“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그제야 이네트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페르닌드가 흥분했을 때 괜히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다. 듣기 좋은 말로 구슬린 다음,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이넷.”
“다시 시작하자.”
“뭐……?”
“…….”
이네트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치밀어 오르는 격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벼락처럼 가까이 붙어선
그의 뺨을 내리쳤다.
짝―!
“더 때려줘.”
“……뭐?”
“더 때려달라고…….”
“미친 새끼!”
페르닌드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그를 여전히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제 뺨으로 가져가 머리를 기울였다. 그녀는 손바닥에 퍼지는
열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우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멍해졌다. 우리라니. 그녀와 페르닌드, 카시엘까지 묶어 말하는 것인가?
생각이 스치자마자 그녀는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미쳤어? 우리라고?”
이네트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먹었다 해도, 그녀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 그러는 것은 하등 소용이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그게?
상황에 맞춰 행동을 바꾼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냐, 난…….”
그녀의 냉정한 일갈에 페르닌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가 행여 붙잡을까 황급히 커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나 예상했던 대로 커튼을 걷기 직전,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몸이 비틀거렸다.
“놔.”
“싫어! 놓으라고!”
더듬거리던 페르닌드가 그녀의 앞에 엉거주춤 가까이 다가섰다. 부어오른 두 뺨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가까이 있는 이네트에게 두 팔을 뻗었다가 이내 힘없이 떨구었다.
“……!”
이네트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숨을 멈췄다. 그녀의 아래에 파고들어 게걸스럽게 음부를 핥을 때에만
무릎 꿇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채 울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
“이제, 제발 그만…….”
“…….”
“사, 사랑해….”
“…….”
인형처럼 매끄러운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서렸다. 그녀도 모르게 고인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같이 놀자!’
그래서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의지했던 자신을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별관에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던가. 이네트는 페르닌드가 어린 시절의 그 반짝반짝 빛나던 모습처럼
아름답게 자랐으리라 믿었고, 그리 상상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페르닌드는 천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유려한 미남으로 성장해 있었다. 비단결처럼 고운
머릿결, 섬세한 이목구비, 밝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혈색 좋은 두 뺨과 붉은 입술 모두,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창녀.’
“이넷…….”
“미안, 미안해.”
“난 너랑 같이 못 있어.”
“이넷, 제발……!”
“그건 안 돼, 안 되겠어.”
정말 안 되겠냐고, 눈빛으로, 눈물로 호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했다.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라도 움직여 커튼 쪽으로 다가갔다.
확 넓어진 시야에 수많은 인파가 들어옴과 동시에 먹먹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네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을 가장하며 그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그녀의 붉은 눈가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녀의 얼굴 곳곳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발코니에서, 누굴 좀 만났어요.”
“누구?”
한때는, 이라는 말이 이네트의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바스스 굴렀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좋아, 누이.”
널따란 궁을 쭉 걷다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이네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녀의 곁에 가까이 몸을 붙였다.
“만나서 무슨 얘기 했어?”
“…네?”
“말해주지 않을 거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처였다. 지독한 악몽을 공유하는 것은 에일로 족했다. 아무리
절반의 피를 이은 이복동생이라 하여도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런 짓이라니.”
“그건…… 실수였어요.”
이네트의 벌어진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만해요…….”
“내가 착각으로 당신을 끌어들인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도 잘한 건 없어요. 그때 난 당신과 에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였는데…… 그런 나와 몸을 섞다니!”
“미안해, 누이.”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어깨를 늘어트리고선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마치 혼이 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내 실수가 맞아. 잘못했어.”
거듭 이어진 사과에 이네트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말에 단번에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며
사과하는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낯설고, 기이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미움이라뇨…….”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반짝거리는 하늘은 아름다웠고, 공기도 청량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네.”
궁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쭉 걷다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 소리에 이네트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크, 무슨 소리가…….”
“빠, 빨리 가요…….”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기겁하며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꽉 잡았다.
“흐읏, 으응…!”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가 간드러지는 신음을 흘리더니 다시 움직이라며 남자를 재촉했다. 남자가
아무 반응 없이 문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여자 또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듯 이네트와
지크프리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쾌락에 잠식되어 있던 여자의 눈이 토끼처럼 커다랗게 뜨였다.
“재미있는 광경이네.”
제롬 르왈드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여자의 질에서 성기를 빼냈다. 쿨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인 액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노골적인 광경이었다.
그가 아차, 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난감한 듯 미간을 좁히며 그가 답지 않게 궁색한 변명을 했다.
“놀아나긴 했나 봐요?”
“그렇지만 누이, 나는 누이를 만나고 난 뒤에는 다른 여자와 놀아난 적 없어. 이건 정말이야. 믿어줘.”
“아…….”
“안 오고 뭐 해요?”
앞서거니 걷던 이네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향했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온 이네트는 지크프리트와 팔짱을 낀 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 곳곳을
둘러보아도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찾아?”
“에밀리와요?”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주변에서는 일리아드 제국이 장악하고 있는 로아드 대륙의 로아드어뿐만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타 대륙의 언어가 들렸다. 일리아드 제국인과 확연히 다른 피부색과 머리 색, 복장까지 갖춘 자들이
연회장 곳곳에 있었다.
“타 대륙 사람은 처음 봐요.”
“네…… 한 번도.”
“그래요?”
“응. 그리고 게르단 대륙뿐만 아니라 에벨루넨 대륙도 있어. 그곳은 1 년 내내 춥지만 대신 온천 사업이
발달해 있지. 귀족들이 요양을 목적으로 자주 떠나기도 해. 물론 난 에벨루넨어도 가능해.”
“온천이요? 와.”
“에로드와 함께 가면 정말 좋겠어요!”
“미안할 필요는 없어. 나한테 함부로 굴어도 되는 이는 아샤 누이랑 누이. 아, 그리고 폐하까지 총 세
명뿐이니까.”
“두 분이 그렇게 친한 사이세요?”
“응. 죽고 못 사는 사이야.”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목욕하시겠습니까?”
“응.”
아까 지크프리트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벨루넨 대륙이 온천이 유명하다고 했지. 이렇게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을 게 분명했다. 달아오른 물이 몸을
감싸고, 위로는 차가운 공기가 스쳐 지나가고…….
* * *
“꼬였기는…….”
“뭐라고?”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에일의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다니…….
이네트의 얼굴색이 어두워질 찰나, 그녀의 시선 끝에 에이든과 그의 약혼녀가 보였다. 그녀가 화색을
지었다.
“백작님.”
이네트와 눈이 마주친 에이든이 웃으며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옆에 있던 에이든의 약혼녀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누군가 부르다니, 친구인 걸까? 이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친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친구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네트는 에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에이든과 그녀의 약혼녀, 레지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혹여나
그들의 평판에 흠이 될까 봐 걱정했으나 에이든은 걱정할 필요 없다며 그녀를 달랬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미안해요. 그땐 불가항력이었어요.”
“사과해야 할 건 저죠. 마차를 들여보낸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관련된 사용인들 모두를 해고했어요.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 알아요. 미안해요, 영애.”
그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하자 이네트는 도리어 당황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러지 말라고
그를 만류했다.
“으음…….”
에이든도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네트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다 결심한 듯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네트가 에이든과 로지나에게 밝게 인사했다. 그녀는 그들이 제대로 답인사를 하기도 전에 이네트가 훌쩍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이른 낮이라 그런지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빈 그릇을 수거하는 사용인과 새 음식을
갖다 나르는 사용인, 청소를 하는 사용인 등…… 인원이 제법 많았다.
“그러니? 알겠어.”
이네트가 후우, 짤막하게 한숨을 쉬며 다시 쭉 앞으로 걸었다. 이따금 간간이 지나가는 귀족 무리가
보였으나, 그중에 에일은 없었다. 정원까지 나오는 길에도 그를 찾지 못했다. 혹시나 정원에 있나 싶어
이네트는 정원 깊숙이 들어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네트.”
카시엘 디에드반이었다.
“……내가 무서운가?”
“나는, 그러니까…….”
햇빛이 그의 얼굴을 내리쬐었다. 햇빛을 머금은 금색 눈동자가 넘실대는 감정에 일렁거렸다. 그녀의 발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는 이윽고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토해내듯 물었다.
“뭐라고요?”
이네트는 오히려 그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납치하고, 감금하고, 겁탈까지 한 주제에 자신이
진심으로 그를 떠나지 않으리라 믿었단 말인가?
말을 하면서도 끔찍한 나머지 이네트가 몸을 떨었다. 가느다란 몸이 넘어질 것처럼 흔들리자, 카시엘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손길을 느끼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몸을
세게 밀쳐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턱이 돌아갔다.
“그러면…… 전부 다 거짓이었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자에게 가기 위해서?”
우스운 일이었다. 왜 그녀가 에일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는지 안다면…… 저런 질문 따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을 텐데.
분노로 들끓던 이네트의 눈동자가 서리처럼 차게 식었다. 카시엘이 그녀의 침묵을 달리 해석했는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네트, 그자는 우리 가문에 몰래 숨어든 간자다.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고, 어쩌면 지금도
너를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자는 작위도 이어받지 못할뿐더러 정식 기사서임도 받지 않았어.
그 하등한 벌레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나는 왜 안 되지?”
“…….”
꼭 목이 졸린 사람처럼, 곧 죽을 사람처럼.
“이전에 네게 함부로 군 것 때문에 내가 원망스러운 건가? 그건…… 후회하고 있다. 반성하고 있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너를 저택으로 다시 데려왔을 때부터 나는 네게 함부로 굴지 않으려 노력했어. 난,
결코…… 너를 상처 입히려고…….”
“가증스러워.”
“…….”
어렸을 때부터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그 시선은…… 질리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이네트는 불어난 강물과도
같은 카시엘의 감정을 알기에 더욱 그가 가증스러웠고, 피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흘러넘쳐 불어난 감정은 배출부터 잘못되었고, 불어난 감정에 그가 잠겨 죽는다 해도 그 감정을 받아줄
이는 없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을뿐더러,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감정의 배출조차 막히자 영혼의 일부를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에서는 얕은 숨만 새어 나왔다.
* * *
정원을 빠져나온 이네트는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체득된
두려움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녀는 몰려오는 반가움에 한달음에 에일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네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에이든과
레지나가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아가씨.”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평소와 같은 다정한 모습인데도 그녀는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에 흐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친구? 어떤 친구?”
그가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그녀는 그 친구가 누구냐고, 어디에 있었기에 찾아도 보이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으나 너무 캐묻는
모양새인 거 같아 물음을 삼켰다.
“아가씨, 저는 속이 좋지 않아 이만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에일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지,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바로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네트는 그런 그를 쫓아가려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그러지 못했다. 전하께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설마 그는 저와 지크프리트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일까? 그건 정말로 오해였다. 하지만…….
그녀는 연회장 밖으로 벗어나는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없다면 그녀도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네트는 잠시 벽에 기대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쭉 걷는 와중에
그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황녀 전하.”
“그게 무슨 소리죠?”
“이런.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대체 뭐지? 이네트는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혼란스러웠다. 에일의 태도
변화도,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 제롬 르왈드 후작의 태도도, 일전에 페르닌드가 했던 말도 모조리
다.
에일과의 약혼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때까지 버틸 생각만 했다. 에일과 오해가 생기고, 그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에 그녀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계획 모두가 어그러졌다.
그와 함께 약혼식을 치른 다음, 리고르 해안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에벨루넨 대륙의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가기를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그와 사이가 나빠진다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이네트는 새삼 자신의 상황이 가느다란 촛대의 촛불과 다를 바 없으며, 에일에게 지나치게 의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날 배신하면 안 돼.’
‘네.’
그때의 매달림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네트는 사용인의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하고 좌절감에 침대에 몸을
늘어트렸다.
* * *
허나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는 생생하게 들렸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감자와 소고기를 넣고 끓인 진한 수프는 맹물처럼 느껴졌고,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돼지고기 미트볼은
입에 넣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억지로 음식을 삼키자 구역질이 일었다.
“우욱.”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이 서둘러 더러워진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카시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날부터였다. 이네트가, 그에게 가증스럽다고 한 그날.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그날.
카시엘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이마를 받혔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식당을 벗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카시엘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떠올렸다. 이네트가 황태자와 모종의 관계라는 부정한 소문이었다.
매일 황태자가 이네트가 있는 방에 들락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연회
때조차 서로 편안한 듯 익숙한 분위기로 내내 붙어 다니고, 황태자의 태도가 뭇 누이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기에 소문은 더욱 불어났다. 황태자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묵인하였고, 보란 듯이 더욱 이네트와
함께 다니고 공공연한 스킨십을 했다.
소문대로 그녀가 황태자와 부도덕한 관계인 걸까? 그 빌어먹을 간자 놈과 더불어? 생각만 해도 카시엘의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둘 다 쳐 죽여 버리고 싶었다.
* * *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방으로 찾아온 지크프리트를 다소 풀죽은 얼굴로 맞이했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눈꼬리를 내렸다.
“누이, 무슨 일 있어?”
“말해봐, 왜 그래?”
그녀는 조금 뜸을 들였다. 그에게 얘기해도 될까? 망설여지는 마음이 들었다. 약해진 마음이 헐거운
자물쇠처럼 덜그럭거렸다. 망설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
이네트는 시선을 아래로 깔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그가 축 늘어진 그녀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네…….”
지크프리트가 화사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이네트에게 팔짱을 꼈다. 그의 스스럼없는 스킨십에 익숙해진
그녀는 그에게 이끌리듯 방 밖으로 나섰다.
황태자궁의 정원에 도착한 이네트는 멀리서 레오가 보이자마자 화색을 보이며 레오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축 늘어져 있던 레오 또한 이네트와 지크프리트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레오!”
“보고 싶었어….”
처음에 무서워서 피했던 게 거짓말처럼 레오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쓰다듬고 품에
안았다. 골골골골, 하는 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와 닿았다.
“네.”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어디로 떠날 생각인데?”
“리고르 해안이요.”
“……여기서 너무 멀군.”
지크프리트가 낮게 읊조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선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침묵을 지켰다.
결론에 도달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네트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남은 디저트를 먹으며
싱긋 웃었다.
그 뒤로 레오와 함께 셋이서 정원을 거닐며 산책을 했다. 서재에 가보지 않겠냐고 지크프리트가
제안했지만 이네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서재에 가봤자 그의 보좌관이 쫓아와 서류 처리 좀
해달라고 애원할 게 뻔했다.
지크프리트와 헤어진 이네트는 방으로 돌아가 전속 시녀에게 내일 오전에 벨라를 만나기 위해 황제궁에
들리겠노라고 미리 언질했다. 시녀는 그리 전하겠노라며 자리를 떴다.
직접 데반 백작 저택으로 가면…… 에일이 만나 줄까? 그래도 쫓아내진 않겠지. 이네트는 고민을 하다가
이내 욕실로 향했다. 괜한 잡생각에 사로잡혀 우울해지긴 싫었다.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머리를 말렸다. 침대에 눕자 다시 부정적인 생각이 흘러들어
왔으나, 그녀는 애써 그 생각을 지우고는 잠을 청했다.
* * *
기사는 능숙하게 이네트를 안으로 이끌었다. 이네트는 전속 시녀와 함께 황제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복도에는 기립하고 서 있는 기사들이 무척 많았다. 이네트는 말뚝처럼 서 있는 그들을 흘긋거리고는
익숙한 황제의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벨라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윽고 황제와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무표정한 황제의 보좌관과 전속 기사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황제와 벨라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광경에도 익숙한 듯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왜, 또 뭘 달라고?”
“그리고 약혼을 치른 후, 곧바로 이곳을 뜨려고 해요. 그때 주기로 했던 작위와 저택만 주시면 그곳에서
조용히 살도록 할게요.”
“네.”
“모시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리고는 문 쪽을 향해 눈짓했다.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집무실을 벗어났다.
“아뇨, 경. 그럴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마차는 잘 정비된 황궁의 길을 가로지르고는 이내 궁 밖으로 벗어났다. 이네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이내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따금 덜커덩거리며 머리가 부딪히기도 했다.
“그렇구나. 그래…….”
황족의 전속 시녀로 귀족가의 여식을 붙여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진짜일 줄이야. 이네트는
고개만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마주할 일도, 제가 하대할 일도 없었겠지. 언제나 디에드반
공작저에서 눈칫밥만 먹으며 전전긍긍했으니.
시녀는 뜻밖의 질문에 놀란 듯 숨을 크게 집어삼키며 이네트의 눈치를 보았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이네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쩌면 아랫것들끼리 저를 가지고 숙덕거리는 게 일상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야 예상하던 것이니 괜찮았다.
시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네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크프리트와 자신이 부적절한 관계라고?
이복누이와 남동생의 관계가 부적절하다고?
이네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상황을 혼자만의 힘으로
다잡기란 정말 힘들었다. 제 뜻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도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주는 안락함에 녹아 이대로
안주하고 싶었다.
그 치들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과 떨어져 있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정처 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그들에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자신의 앞날도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흔들리고, 고민하고. 끝은 자조와 자기혐오가 씁쓸하게 남았다.
마차가 멈출 때까지 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네트는 눈앞에 보이는 데반 백작가의 모습에 침을 한
번 삼켰다. 두꺼운 철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가 마차로 다가왔다.
“알겠습니다.”
기사가 말을 전하러 철문 안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시간이 제법 지난 후, 기사가 다시 돌아와 철문을
열었다. 이네트를 태운 마차가 데반 백작가의 넓은 영지를 쭉 내달렸다.
이네트는 낯익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잠겼다. 이 너른 평야를 에일과 함께 달렸던 기억이
선연했다. 도라는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지금 만나면, 나를 알아볼까?
저택의 문이 보이고,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마자 이네트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집사가 이네트를 맞이했다.
“……기다릴게요.”
이네트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앉아 차와 쿠키를 마시면서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며 에일을 기다렸다.
* * *
“하지만…….”
에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에 찬 검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정식 기사서임만
받지 못했을 뿐이지, 에일의 검 실력이 누군가에게 밀릴 정도로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소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골목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둑해졌다. 에일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쪽지가 말하는 장소는 이곳이었다.
황태자는 이네트가 사교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날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를 싸고돌았다. 그녀
곁에서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오려고 하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황태자의 행동은 과보호라고 할 만큼 심했다. 게다가 황태자와 이네트와 관련된 모종의 소문들은 에일의
머릿속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빼내어 휘두르는 순간, 등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고통에 에일이 숨을 삼켰다. 고통에도 쓰러지지 않고
몸을 돌려 검을 휘두르자 상대가 쯧, 혀를 찼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자였다.
“페르닌드…….”
“어라, 피했네.”
“당신, 이러고도…….”
“읏!”
“이 개같은 새끼가!”
“흐읍…….”
굳건히 서 있던 에일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페르닌드는 에일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피의 홍수를 보고는
이겼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악!”
“허윽…….”
정신을 잃기 직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의 대상이 누군지 에일은 확인하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 * *
이네트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접시들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에일이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왔다.
집사가 면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이네트는 눈인사를 하고는 저택을 빠져나갔다. 만약
에일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언젠가는 연락을 줄 것이었다. 직접 찾아온 것만으로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충분히 표현했노라 생각했다. 그러니 저는 답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해주는 마음이 고마웠지만 쉽사리 우울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 * *
지크프리트는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들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예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
“그래, 상태는?”
“알겠습니다.”
“페르닌드 디에드반은?”
“자택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전하, 아무래도 디에드반 공작이 상황을 대강 눈치챈 듯합니다.”
그녀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의 증오를 받을 대상은 다른 이로 화살이 돌아가야 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은 그녀에게 곁을 의지할 수 있는 친절한 동생으로 남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우선 그녀가 궁으로 떠날 수 없도록 붙잡아 두고,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고를 남자와 결혼시켜야 했다.
그 남자와 함께 황궁과 가까운 수도에서 살게 하는 게 가장 나았다. 에로드 데반, 그자는 이네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치워버려야 했다. 가장 거슬렸다.
* * *
다음날이 되어도 에일에게선 전송구 한 통 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대화 시도조차 거절당했다. 침묵이 그의 답이었다. 이네트는 허탈함과 배신감에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어쩌면 하룻밤쯤 집을 비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며칠 기다리면 답을 줄지도 몰랐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바꾸려 해도 침잠하는 우울은 막을 수 없었다.
입맛이 없었다. 점심을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누이, 노크 소리 못 들었어?”
“아.”
“……지크프리트.”
휘어 있는 그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한 그인데도 방금은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가 어색하게 눈을 접었다.
“없어.”
“정말로요?”
“……응.”
“……고마워요.”
지크프리트가 스콘을 나이프로 자르고, 버터를 손수 발라주었다. 그리고는 포크로 찍어 이네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맛있네요.”
“누이, 헛소문이라는 거 알잖아. 남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건데 말 옮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별나게
구는 거야.”
“알겠어요.”
* * *
주치의는 가망이 좋지 않음을 돌려 말했다. 카시엘은 미간을 좁히며 알겠으니 나가보라고 일렀다.
카시엘은 의자에 풀썩 앉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최근,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입에 넣는 족족 구역질이 밀려와 토를 하기 일쑤였다. 그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식사를 하지 못하면서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황궁에 출근하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카시엘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시야가 가리자 컴컴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네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시엘.’
“이네트.”
어미의 뱃속으로 회귀하는 태아처럼 카시엘은 제 안식처를 향해 걸었다. 울타리가 쳐진 사냥터 안으로
훌쩍 들어가 풀을 헤치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이네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하던 이네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는 말. 그건 카시엘에게 있어 생의 끝을 알리는 선고와도 같았다.
* * *
지크프리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이가 바로 마음을 다잡고 수도를 떠나겠다고 하는 것보다
방에 얌전히 있는 편이 더 계획에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네트 또래의 남자를 물색했다. 황족파에, 다루기 쉽고, 똑똑하지 않고 적당히 멍청한 남자를.
누이에게 너무 하등한 남자를 붙여줄 순 없으니, 작위를 이어받은 귀족으로 추렸다. 그리고 금전과 사탕
발린 말, 지켜야 할 조건을 붙여 남편감을 찾았다.
지크프리트가 빙긋 웃으며 얘기했다. 그리고는 상심한 누이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며 그럴듯한 명분도
덧붙였다. 벨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크프리트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유지했다. 벨라가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제 허리를
감싸 안은 데넌과 지크프리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누이, 누이는 정말로 이 황궁에서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구나. 다행이야. 기뻐.
어김없이 이네트를 찾은 지크프리트가 가족을 걱정하는 남동생의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네트는 또
자신을 찾아온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
이네트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사선으로 비꼈다. 지크프리트가 가만히 이네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제 시선을 피하고 자리를 떠나던 그의 뒷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아찔한 통증이 가슴을 쑤셨다.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응.”
“누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은 잘 없어. 누이도 그때 봤잖아. 아샤 누이와 약혼한 제롬 르왈드가
남작 부인하고 붙어먹는 거. 귀족 사회에선 흔한 일이야.”
“싫다고 하면요?”
“으음…… 그건 안 되겠는걸.”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지만, 이네트는 그것이 실상 강요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다. 이네트는 황당함을
넘어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나를 위해서예요?”
“…….”
이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심해를 머금은 것처럼 점차 탁해지더니, 이내 체념의 빛을
드리우고선 한풀 꺾인 풀처럼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지크프리트가 그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이가 황궁에서 계속 생활하고, 사교계에 자연스레 녹아들기 위해서 그런 거야. 누이가 부디 내 진심을
알아주고, 너무 괘념치 말아줬으면 좋겠어.”
어쩌면…… 그가 저를 진심으로 위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맥없이 끊겼다. 황궁에서 저를 아껴주는
사람은 없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깊은 바다에 잠긴 것처럼 머리가 먹먹해졌다.
지크프리트가 순순히 대답하는 그녀의 이마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했다. 이네트는 반항하지 않았다.
* * *
“아직 정신을…….”
“……그럼 언제쯤…….”
에일은 희미하게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오래도록 잠이 들었던 것인지 눈가가
무겁고 시야가 어두웠다. 그는 반쯤 열린 시야 사이로 들어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예예.”
그리 친하진 않아도 어렸을 적부터 몇 번 마주한 사이였기에 제게 이리도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에밀리 누이와 황녀 아나스타시아의 사이가 남다르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그도 아는 비밀스러운
사실 아니던가. 그런데도 제게…….
에일은 의사와 남자가 나갈 때까지 죽은 듯 조용히 숨만 고르게 내쉬었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눈을
뜨고 치 떨리는 그들의 행각에 몸을 떨었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저몄다.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등을 침대에 맞댈 수밖에 없었다.
거동이 될 정도로 낫는 즉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어서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이때껏 이네트와 황태자의 사이를 의심하고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잠깐이나마
그녀를 피했다는 사실 또한 그녀에게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안개와 속박 2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