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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슬아) 악역의 구원자 完
(연슬아) 악역의 구원자 完
악역의 구원자 1 화
Chapter01. 신의 문장
서로를 사랑했던 그의 부모는 사랑으로 그를 키웠다. 어린 아제프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애썼고,
그에게 다정한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가 2 살이 될 때까지만.
다만 평민과 다를 바 없이 한미한 가문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의 미모는 독이 되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고위귀족에게 그녀를 팔아넘겼다.
“그년을 닮았어! 내 자식이 아니야! 너도 다른 놈의 자식인 거야! 그년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른 남자가
있었어!”
휴버트는 피멍이 든 아이의 하얀 피부를 만지며 울었다. 아버지에게 처음 맞은 아제프는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휴버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흐아아앙!”
아이를 때리는 소리와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직접 씻겨주고 얼러주던 새하얀 몸에 보랏빛
꽃이 피고, 새빨간 상처가 죽죽 그어졌다.
아제프가 5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아는 쫓겨나듯 집으로 돌아왔다. 휴버트는 돌아온 소피아를 보고
얼핏 정신을 차리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피아의 배가 점점 불러왔다. 휴버트는 돌아온 지 몇 달 안 되어 산기를 보이는 아내를
보고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소피아는 항상 휴버트를 용서했다. 하지만 그는 늘 말뿐이었다. 아름답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피멍으로
물들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꺄아아아!”
“미친년! 당장 이리 안 와?”
어린아이의 애타는 몸짓에도 방 안의 소란스러움은 멈추지 않았다. 열로 발개진 귓가로 소피아의 비명과 휴버트의
욕설이 들려왔다.
아이는 그저 몸을 말고 견뎠다. 외로움과 고독감이 그의 마음을 좀먹어도 어렸던 소년은 부모를 원망하지 못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처럼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기다렸다.
세월이 조금 흘러, 소피아의 배는 금방이라도 아이를 낳을 듯 남산처럼 부풀었다. 휴버트의 난동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날은, 휴버트가 소피아를 쥐 잡듯 팬 날이었다. 남편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 소피아의 안색은 시꺼멓게
죽어버렸다. 아제프는 피를 토하며 헉헉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창백하게 질렸다.
“어머니!”
어린 아제프는 어머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버트는 소피아의 안색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술을 마셨고, 아제프는 비틀비틀 뛰쳐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약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뻘건 화마가 저택을 삼키고 그의 가족을 삼켰다. 몸을 후려치는 폭력에도 놓지 않던 약초가 툭 떨어졌다.
힘없이 풀린 동공 위로 화마가 일렁였다.
그날, 아제프는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를 때리던 아버지도, 힘없이 울던 어머니도, 뱃속에 있었던 동생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혼자가 되었다.
아제프의 우아한 양어머니, 그라시아 란델은 그에게 집착했다. 그녀의 사랑은 그가 바란 것과는 달랐다.
“아아아악!”
그라시아 란델의 우아한 손이 한번 휘둘릴 때마다, 상처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라시아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옷을 벗었다.
***
그라시아는 대외적으로는 훌륭한 양모인 양 행동했다. 그의 몸은 푸르게 질리고 빨갛게 꽃필망정 얼굴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
세상의 신기함에 눈을 반짝이던 맑은 벽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울며 애원하던 소년은 인형처럼 무감각해져 갔다.
아제프는 체념을 배웠다. 그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라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저 여자에게 애원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아제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하나둘, 사라졌다. 사랑을 갈구하며 뜨겁게 뛰던 심장은 서늘하게 식어 두꺼운 벽을
둘렀다. 스스로 만든 새하얀 얼음이 그의 몸을 단단하게 둘렀다.
아제프가 새빨간 와인 잔을 우아하게 들며 싱긋 웃었다. 다음 순간, 흐드러진 꽃처럼 어여삐 웃는 얼굴로 다가간
아제프가 그녀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새빨갛게 칠한 손톱이 그의 팔목을 북북 찢으며 발버둥 쳤다. 홉뜬 눈은 괴로워 발버둥 치는 몸짓과 희미한
숨결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복수……. 할까?”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소녀는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살아가는 데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늘 허무했다. 무언가를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
책장은 천천히 넘어갔다. 아직 글의 초반인데, 눈물이 흘렀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남자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서술하는 장면이었다. 그 남자는, 아제프 란델이었다.
소녀, 제이의 감수성이 풍부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너무도 쉽게 아제프에게 동화됐다. 그의 고단한 외로움에
가슴이 아프고,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그가 불쌍했다.
‘이건, 내일 마저 읽어야지.’
“아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소녀의 귓가에 울렸다. 소름이 돋도록 처절한 음색에 제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 남자가
눈앞에서 고문당하는 악몽.
가장 징그러운 여자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붉은 피가 흐르는 등에 손톱을 파묻고 자신이 남긴 상처에 황홀한
얼굴을 했다.
“…….”
“…….”
새까만 채찍이 하얀 등을 내리치고, 시뻘건 인두가 피부를 지졌다. 살이 타오르는 역겨운 냄새와 축축하고 음산한
습기가 느껴졌다.
[그만둬……. 그만해!]
“엘리사.”
추위에 젖어 눅눅해진 음색이 애처롭게 흘렀다. 아제프는 대답 없는 창문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무리 기다려도 어두운 커튼이 드리운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추위에 파묻힌 그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이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돌아가지 않는 남자를 보며 애원했다.
[왜 아무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아? 왜 당신에게는 문장이 없는 거야? 당신은 왜 늘 혼자인 거야. 당신은, 왜…
…. 내 꿈에 나와? 왜!]
미련할 정도로 버티던 아제프는 솟구치는 고열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파랗게 질린 남자는 우는 법을 잊은
것처럼 또 그렇게 텅 빈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인의 사랑이 떠나 더러운 길가에 버려진 인형 같았다. 무색의 감정이 뒤얽힌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시간이 흐르자 소녀는 튕겨나듯 꿈에서 빠져나왔다. 꿈에서 나오기 직전 소녀는 또 혼자 남게 된 아제프를 보며
손을 뻗었다.
소녀는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눈을 감으며 애탄 얼굴을 했다. 소녀는 꿈을 현실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책
속의 존재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사랑해버렸다.
그렇게 소녀는 또 한 번, 과거와 같은 선택을 했다.
***
[신의 문장]
책의 삽화 속 행복해 보이는 주인공 남녀의 뒤로 무표정한 아제프가 보였다.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엘리사와
알체스테의 뒤로 홀로 서 있는 아제프의 얼굴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마음이 아파. 매일 밤 당신을 봤어. 내 꿈에서 당신은 늘 울고 있어. 당신은 늘 외로워 해. 나는 늘 당신에게
말을 걸지만 당신은 듣지 못해. 이럴 거면 나한테 나타나지 말지……. 함께할 수도 없는데, 왜…… 자꾸 보이는
거야?’
눈을 감아도 잊히지 않는 미안이 제이의 눈을 홀리고 마음을 끌어당겼다. 제이는 아제프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성장한 후까지의 삶을 모두 경험했다.
사람의 손길을 혐오하면서도 그리워했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를, 따뜻한 품에 안아주고 사랑을
속삭여주기를 바랐다. 그는 사랑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아제프는 온몸으로 외쳤다. 누군가가 마음속 깊이 자신을 원해주기를. 사랑을 나눠줄 누군가가 다가와주기를.
아제프는 사랑을 믿지 못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다.
아제프는 그의 얼굴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달래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온화한 가면 속에
감춰진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줄 운명을 만나고 싶어 했다.
사랑의 여신 프리멧사가 아름다운 연인을 위해 내려준다는 신의 문장은 그 사랑이 영원할 것임을 확증하는 달콤한
것이었다. 그는 신의 문장을 탐했다.
아제프는 끝나지 않을 맹목적인 사랑을 바랐고, 그걸 이뤄줄 신의 문장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너무 갖고 싶어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 자신에게도 운명이 있다는 걸 믿고 싶어서, 그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 화
3
제이가 처음 [신의 문장]을 읽었을 때는 아제프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여자주인공에게 마음을 치료받는
치유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했기에 첫 부분이 조금 슬펐어도 견디며 읽었다.
제이는 자신이 그 정도로 책에 빠져 있었던가 고민하며 책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로 당분간 꺼내보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리사가 그토록 찢어 죽이고 싶어 하던 원수의 딸이라는 것에 광분했다. 그는 애증이 뒤섞인 눈으로
엘리사를 보다가 갈등했다.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과 그녀의 아비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에서 그는
부표 잃은 배처럼 흔들렸다.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그렇게 힘들었는데……. 조금쯤은 행복해도 되잖아! 그깟 문장! 그에게도 줬으면
되잖아…….’
주인공인 줄 알았던 아제프는 악역이었다. 모든 책이 그렇듯 악역의 인생은 뒤로 갈수록 비참해졌다. 복수를
다짐했던 아제프는 원수의 딸인 엘리사를 사랑해버렸고, 그녀에게는 이미 운명의 상대가 있었다.
주인공인 알체스테가 돌아오자 전개는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더는 아제프가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은 알체스테였다.
고독한 시간 속에 파묻혀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는, 악역이었다. 외롭고 괴로워 찢어진 마음은 기워지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럴 수 없는 게 그의 운명이란 걸 알았을 때, 그는 산산이 부서졌다.
사랑의 신 프리멧사가 아름다운 연인에게 선물한다는 신의 문장은 달콤한 분홍빛으로 빛나며 알체스테와 엘리사의
손등에 자리 잡았다. 처음부터 엘리사의 사랑은 아제프를 향한 게 아니었다. 엘리사는 아제프를 등지고
알체스테에게 달려갔다.
“사랑해요. 황자님.”
사랑스러운 얼굴이 수줍게 피어나고 달콤한 분홍색 눈은 설렘으로 빛났다. 그녀는 비운의 황자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헌신했다.
누구보다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음에도 시샘을 받아 낙오된 황자는 그 고결함으로 제 것을 하나하나 되찾았다.
아제프는 따뜻한 소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바랐다. 그는 제 몸에 난 고문의 흔적을 보여주며 매달렸다.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가 도와달라고 하자 엘리사는 고민했다.
엘리사가 그에게 손을 내밀려 할 때쯤, 그가 나타났다. 알체스테는 그녀와 똑같은 분홍빛 문장을 보여주며 단번에
그녀의 시선을 뺏었다.
엘리사는 핏물이 망울망울 흐르는 아제프의 몸보다 알체스테의 피곤한 안색을 더 걱정했다. 아제프가 사랑을
갈구하며 매달리자 엘리사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면서도 그를 딱 잘라 거절했다.
엘리사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소녀는 알체스테가 불안해한다는 이유로 더는
아제프를 보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소녀의 손등에는 달콤한 문장이 일렁일렁 빛나고 있었다.
아제프는 신의 문장이 얼마나 강력하고 달콤한지 보여주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엘리사는 더는 아제프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제프는 엘리사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차가운 겨울비가 쏟아져 그의 몸을 적시고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어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차가운 비가 그의 얼굴을 때리고 온몸을 적시는데도, 그가 오한과 발열로 괴로워하며 그녀를 기다리는데도
엘리사는 오지 않았다. 엘리사는 알체스테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아제프가 찬비에 몸을 떠는 것을 내버려 뒀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몸을 떨던 소년은 자라고 난 뒤에도 추위와 배고픔을 싫어했다. 그에게는 이제 훈기가 도는
방이 있었고 만찬이 차려지는 식탁이 있었지만 혼자 있는 방은 서늘했고 혼자 먹는 만찬은 차가웠다.
맑은 청남색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그의 얼굴에 피어난 설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확인하고
사그라들었다.
맑은 눈 위로 천둥이 몰아쳤다. 적개심과 증오를 담은 섬뜩한 벽안에도 알체스테는 차가운 얼굴을 했다. 그는
파란 입술을 쳐다보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둘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고 서로 공존할 수 없었다. 비를 헤치고 걸어가는 다부진 손등 위로 사랑스러운 문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제프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 따위는 없다는 듯 눈부시게 빛나는 분홍빛은 솜털처럼 사랑스러웠다. 주인을 닮아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문장이 아제프의 각막을 찔렀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문장을 보다가 이를 갈았다.
***
세월이 흐를수록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무서워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 허무함과 닿지 못하는 갈망에
뒷내용이 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사랑의 신 프리멧사는 분노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장을 더럽혔다며 아제프를 저주했다. 신의 저주에 아제프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타락했다.
신의 저주는 그의 몸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발끝이 펴지지 않는
추위가 그를 찾아왔다. 영혼까지 떨게 하는 시린 한기가 그를 찾아왔다.
새까만 인장과 신의 저주는 그의 신경을 벌레처럼 갉아먹었다. 난폭해진 남자는 더욱더 잔인해졌다.
아제프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뚝뚝한 턱 위로는 눈물이 매달렸다. 알체스테는 망가진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아제프를 동정하다가 그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치열한 다툼 후, 승리는 알체스테의 것이
되었다.
아제프를 죽이고 알체스테는 영웅이 되었다. 알체스테가 악마를 물리친 제왕으로 칭송 받고 사랑하는 연인과
국혼을 치를 때, 아제프의 영혼은 악마의 손에 들어갔다.
악마는 오랫동안 노리던 먹잇감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그는 킬킬 웃으며 아제프의 영혼을 차디찬 빙산에 가뒀다.
제이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하얀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소리쳤다.
“그의 운명이 이렇게 끝난다고? 살아서도 고통 받고, 죽어서도 고통 받는 게……. 아제프의 운명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괴로움에 잠긴 비통한 음색이 제이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제이가 그를 생각할수록, 그를 가엽게 여길수록 제이는
그에게 동화되어갔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그라들었다.
꿈으로만 경험했던 목소리가 현실에 내려앉았다. 제이는 더는 그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생각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신의 문장이 제이의 가슴 위에 새겨졌다. 초록색 광채가 제이의 몸을 집어삼키고, 제이는
한제이가 아닌 엘제이 티아세가 되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 화
4
제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책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여고생 한제이가 아니라 티아세 家의
장녀 엘제이 티아세가 되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공간이 소름 끼치도록 익숙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명의 기억이 공존했다. 처음부터 엘제이
티아세였다는 듯, 생경해야 할 방 안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침대 맡에 놓인
잔을 들었다.
엘제이가 된 소녀는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며 유연하게 휘어진 머리카락을 주워들었다. 한제이의 머리는 탐스러운
흑발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밀색이었다.
소녀는 허리를 타고 흐르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모았다. 손 안에 착 감기는 그것은 한제이의 것이 아니라
엘제이의 것이었다.
없었던 기억이 새롭게 생겨난 게 아니었다.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과 한제이의 기억 모두가 잠잠한 호수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언니!”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그녀와 똑같은 밀빛 머리를 한 소녀가 뛰어왔다. 하얀 잠옷을 입은
소녀는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분홍빛 눈의 소녀는 익숙하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엘리사?”
“왜? 또 잔소리하려고? 좀만 더 자고 일어날게. 언니도 알다시피 내 방에서 자려면 세라가 자꾸 재촉한단 말이야
…….”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쌍둥이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다. 엘리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랑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어미의 품을 찾듯 엘제이를 파고드는 엘리사가 애틋하고
소중했다. 그건 엘제이 티아세의 감정이었다.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엘리사의 오른쪽 손을 쳐다봤다. 희고 고운
손은 아직 운명을 만나지 않았다는 듯 깨끗하기만 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의 책 속으로 들어왔다. 소녀가 차지한 몸은 주인공의 쌍둥이 언니였다.
책 속이라 생각했던 [신의 문장]. 매일 반복되는 꿈. 책 속에는 없었던 존재. 엘제이 티아세.
“언니, 더 자자니까?”
엘제이 티아세는 [신의 문장] 속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아제프가 처음 엘리사에게 접근한 이유도 엘리사가
티아세 공작가를 물려받을 외동딸이기 때문이었다.
공작 위를 노리고 엘리사를 찾았던 아제프는 나중에야 진심으로 소녀의 사랑을 바라게 되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바꿀 수 있어. 둘을 만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나는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나? 엄마는? 아빠는?’
엘리사는 쌍둥이의 불안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엘리사는 장난스럽게 엘제이를 끌어안다가 살짝 벌어진 실크
옷자락 틈에서 옥빛 문장을 발견했다.
엘리사가 해맑게 소리치며 잠옷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행동에 가슴이 반쯤 드러난 엘제이가 당황하며 동생을
말렸다.
엘제이의 입에서 동생이라는 호칭이 무척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호칭에
당황하여 고장 난 기계처럼 목을 삐걱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엘제이 티아세인지 한제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엘제이가 혼란의 파도에 집어 삼켜지고 있을 때
엘리사가 돌아왔다.
딸의 재잘거림에 온화하게 웃은 남자는 엘제이에게 다가와 흐트러진 잠옷을 잘 여며주었다. 그는 다정한 얼굴로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편안한 품이었다. 엘제이는 심장에서 올라오는
푸근한 기운에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
엘제이는 눈앞의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고 말았다. 그녀는 호소하듯 튀어나간 울먹임에 몸을 흠칫 떨며 그를
올려봤다.
아이젠 티아세. 티아세 공작가를 이끄는 수장이자 엘리사 티아세의 다정한 아버지.
새빨간 화마가 넘실넘실 흔들리며 불꽃을 토해낼 때, 부드러운 색감의 밀색 머리도 바람에 흩날렸다.
아이젠은 혹시 자신의 가족을 죽인 걸 후회하냐는 아제프의 질문에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아제프를 보며 다시는 딸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어깃장을 놓았다.
꿈속의 악마는 부드러운 얼굴로 웃으며 딸의 손을 잡았다. 엘제이는 나이가 들어 주름진 손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반려를 만나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그러니? 아버지가 네 반려를 찾아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반려를 찾아
데려올 테니 불안해하지 마라. 알겠니?”
너무 늦게 만나게 되어 반평생을 텅 빈 가슴으로 지새우는 이들도 있기에, 아이젠은 그것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네 문장이 발현했으니 네 반려도 문장이 생겼겠구나. 아버지가 신전에 연락을 넣어둘 테니 걱정 말아라. 누구든
초록빛 문장을 가진 자가 나오면 바로 대조할 수 있게 조치해둘 테니.”
“……문장? 신전?”
“그래. 아비가 꼭 찾아서 네게 데려오겠다고 약속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당장 신전에 연락부터 해야겠구나.”
“제이야? 왜 그러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 화
5
머리가 무질서하게 얽혔다. 그의 도움을 받아도 될까 의심스러운 한편,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뭐가
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네.”
여전히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그가 이곳에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며칠 뒤, 아이젠이 가져온 소식은 그녀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두근거렸던 마음은 난감하게 서 있는 아이젠을
보고 굳어졌다.
아이젠의 말이 맞을 것이다. 문장을 원했던 아제프가 문장을 숨길 리 없었다. 발견했다면 바로 신전에 신고했을
텐데, 아이젠이 모른다는 건 진짜 없는 거였다.
그는 계속 혼자다.
***
거기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를 도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픈 언니를 간호하기 위해 들어온 엘리사는 열이 들끓는 엘제이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엘리사가 이마
위에 얹진 수건을 갈아주며 뜨거운 볼을 손으로 매만졌다.
“언니, 많이 아파? 열이 계속 올라서 어떡하지? 반려가 그리워서 그래? 곧 코르디스가 열리면 사람들이 수도로
모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코르디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제게 당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다면……. 바꿔주고 싶어요. 당신이 외롭지
않게, 혼자 남지 않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게, 그럴 수 있을까요?’
혼란스럽고 두렵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엘제이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끙끙 앓으며 시간을 흘려보낸 건
지금으로 충분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또 그에게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길까 봐 참았다. 작정하고 유혹하는 남자를 뿌리칠
용기가 없었다. 그를 만나는 건 그에게 짝을 붙여준 후여야 했다.
“네! 금방 준비할게요.”
엘제이는 책상에 앉아 익숙하게 베아르시 언어를 사용했다. 차분한 그녀의 성격처럼 우아하게 휘어지는 서체가
정갈하게 움직였다.
[티로시 영애에게.]
엘제이는 한숨을 삼키며 편지지를 새로 꺼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을 붙여주겠다고 결정했을 때, 마음이 아프지만
그를 위해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엘제이는 스스로를 조소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천천히 편지를 써내려갔다.
아제프는 엘리사에게 끌렸다. 엘리사를 만나기 전에 그녀와 비슷한 영애와 함께할 기회가 있다면 그쪽에 끌리지
않을까, 하는 게 엘제이의 막연한 기대였다.
세시아 티로시. 티로시 백작 家의 둘째로 태어난 그녀는 천성이 상냥하고 애교가 많았다. 엘리사나 엘제이처럼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달콤한 연갈색 머리와 눈동자는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더 생각을 버리고 시선을 낮추면 그와 사랑을 나눌 존재가 있었을 텐데, 염세적인 남자는 그를 향한
사랑을 믿지 않았다.
“네, 아가씨.”
엘제이는 처음 보는 얼굴에도 무심코 튀어나온 시녀의 이름에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서글픈 얼굴을 했다.
적응해야 하는데 낯설면서도 생경한 느낌이 씁쓸했다.
티아세 家의 두 공녀는 시녀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시녀들은 우아하고 상냥한 주인들을 사랑했다.
그녀들은 부쩍 우울해 하는 날이 많은 엘제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묘한 괴리감에 서글프게 웃은 엘제이가 그녀를 걱정하는 시아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지내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 화
6
엘제이는 맑은 하늘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네가 흔들리자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산뜻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엘제이가 어린아이처럼 발을 굴리며 그네를 흔들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거추장스럽게 발을 휘감았지만
엘제이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제 손으로 그의 사랑을 찾아줘야 한다는 서글픔, 한제이의 삶에 대한 향수, 혼란스러운 세상. 엘제이는 그녀를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듯 자유롭게 몸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면 물러나 있던 기사들과 시녀들도 돌아와야 하는데 발소리는 하나였다. 엘제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프리멧사의 전언을 담은 봄바람이 그녀의 귀를 간질였지만, 엘제이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빛을 찾은 사람처럼 모든 감각을 한곳에 집중했다.
겨우 발끝만 보이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엘제이는 새까만 구두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
파란색과 남색을 섞어놓은 오묘한 색감의 눈동자가 엘제이를 향했다. 그네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영애께 실례가 되었나요? 조용히 있고 싶어서 찾아왔다가 선객이 있는 걸 알았어요. 기껏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아제프가 특유의 처연한 얼굴로 난감한 듯 웃었다. 부드러운 백금색 속눈썹이 처마처럼 내려와 긴 음영을
만들었다.
‘거짓말.’
조용히 있고 싶었다면 사람이 붐비는 정원을 찾지 않았을 남자였다. 꽃을 싫어하는 남자가 일부러 찾아온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충족되지 않은 갈증에 더 높은 곳을 바라고, 끝내는 제국의 정점을 노리고, 황족의 여자를 탐해 파멸해버린
비운의 남자.
“음, 안 될까요?”
부드럽게 깔린 목소리에, 곤혹스럽게 내려간 눈썹에, 망설이듯 달싹이는 입술에, 엘제이는 모든 걸 알면서도
넘어갔다.
“아니요. 괜찮아요.”
“친절하신 분. 감사해요.”
“아제프…….”
엘제이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환하게 웃고 있지만 눈은 차디찬
한설처럼 북풍이 몰아쳤다. 그녀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자리가 없는데……. 그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니, 제가 그냥,”
“괜찮아요.”
바다를 담아 놓은 벽안과 따스한 생명을 품은 녹안이 마주쳤다. 그가 실제로 존재했다. 엘제이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그녀의 눈 위로 눈물이 아롱아롱 맺혔다.
“왜……. 울어요?”
“…….”
평소라면 진저리쳤을 다른 사람의 피부가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아제프는 처음 느끼는
기이한 감정에 당황스러운 듯 표정을 굳혔다.
“어디 안 좋아요?”
매혹적인 얼굴 위로 찬란한 미소가 걸렸다. 천사처럼 선한 미소를 지은 남자는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심장에 화마가 번진 듯 지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분홍빛 드레스에 가려진 문장이 초록색 빛을 뿜자 그녀의
주변에 반딧불 같은 빛이 일렁거렸다.
“엘제이 양?”
‘문장?’
아제프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인상을 썼다. 문장이 있는 여자라면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문장이 있는 사람은
그 반려만을 사랑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게 빠질 리 없었다.
엘제이는 고개를 숙여 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미안은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심장을 갉작이는 끔찍한 감각에
주먹을 꽉 쥐고 웅크린 등을 노려봤다.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저 여자가 안 된다면 둘째인 엘리사를 노리면 될 터였다. 목표를 바꾸면 될 일인데, 더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인
일인데, 기분이 나빴다.
‘바꾸고 싶지 않아……. 왜지? 저 여자가 첫째라서? 그럼 첫째를 죽여 둘째를 첫째로 만들면 될 일인데.’
아제프는 눈앞의 여자가 죽는 모습을 생각했다.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가늘게 뻗은 목덜미에 손을 박아
넣고 힘을 주기만 하면 몸을 파르르 떨다가 숨이 끊길 것이다.
그가 힘을 줘 목을 부러트린다면 고통으로 질린 안색은 파리하게 물들고 뽀얗게 빛나는 얼굴은 차갑게 식을 터였다.
고통에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고, 박동하는 심장은 서서히 죽어갈 것이었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살아남고,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기 위해 무수히 해왔던 일이었다. 다만,
내키지 않았다. 저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과거의 인연을 털어버린 남자는 제 부모가 살아와도
필요하다면 죽일 수 있었다. 그가 복수를 결심한 건 저 때문이지 죽어버린 가족 때문은 아니었다.
사랑을 잊어버린 남자.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만, 죽이기 싫다는 것만 알았다.
아제프가 저도 모르는 감정에 잠식됐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엘제이를 쳐다보다가 둥근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아…….”
아제프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부드럽게 표정을 펴려 했지만 잘 안 되었다. 웃으려던 얼굴이 기이하게
찌그러졌다.
거부당했다. 저 여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문장이 있다면, 영원히 그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불현듯 떠오른 깨달음에 아제프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릿한 심장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촉촉이 물이 고인
눈가가 상처 입은 백합처럼 아련하고 애달팠다. 그는 몰랐지만,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문장……. 문장 보유자세요?”
“그게 사실은,”
“쉿, 괜찮아요. 말하기 싫은 거예요? 성력이 있다는 걸 밝히기 싫은 거라면 비밀로 해줄게요.”
“……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 화
7
아제프는 엘제이를 힐끗 보다가 산뜻하게 웃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수줍게 내리깐 속눈썹이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싫어 피한 게 아니었다. 수줍어하고 있었다. 얼굴에
떠오른 도홧빛은 호감이었다.
기분이 붕 뜬 것마냥 좋았다. 뱃속을 덥히는 기이한 충족감이 나쁘지 않았다. 따뜻한 손을 손에 쥐고 있으니
잠이 올 것처럼 편안했다.
그의 눈이 나른하게 깔리자 청초한 낯이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빛났다. 엘제이는 또 그 얼굴을 홀린 듯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 위로 복숭아꽃이 피었다.
몸에서 빛이 나는 건 문장이 아니라 성력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아제프는 너무도 당연하게 문장일 거라 생각했던
자신을 멍청하다 생각하며 웃었다.
그녀는 문장 보유자가 아니었다. 제 것이 될 수 있었다. 아제프는 그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워 햇살같이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외모가 미소를 그리자 너무 예뻤다.
“…….”
꿈속이 아니었다. 서늘하긴 했지만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체향이 맡아졌다. 허상 같은 투명한 몸이 아니라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엘제이는 벅찬 감동을 느끼면서도 얼굴을 흐렸다. 지금이라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 미루고
싶었다. 혹시 아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볼까 봐 두려웠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야.’
아제프는 파리하게 질리는 얼굴을 보며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듯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여자의 얼굴이 파리해질수록 그의 기분도 급격히 나빠졌다. 아제프는 엘제이 티아세의 몸이 안 좋았던가
생각하며 혀끝을 씹었다.
‘어차피 죽일 거……. 아프면 좋은 일이다. 내가 필요한 건 지위지 여자가 아니니, 쓸모가 다하면 그뿐.
그뿐인데……. 기분이, 더러워…….’
“아, 제가 귀찮게 했나요? 아직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당신이 가버린다면 저는 무척 속상할 거예요.”
그는 발길을 돌리려는 그녀를 붙잡고 웃었다. 가늘게 뻗은 손은 아름다웠지만 단단했다. 엘제이는 족쇄처럼
단단히 얽힌 손을 보다가 얼굴을 흐렸다.
엘제이가 자신을 질책하며 차가운 얼굴을 했다. 당당히 그의 눈을 향해 얼굴을 든 엘제이의 시선은 기대하듯
반짝이는 청안에 길을 잃고 턱 끝으로 떨어졌다.
예쁜 얼굴을 보니 차가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엘제이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말을 내뱉었다.
‘거짓말.’
“란델 경, 손을…….”
아제프는 자꾸만 손을 놓아달라고 청하는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이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놓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정에 굶주린 아이처럼 엘제이를 보며 호소했다.
아제프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더욱 애처롭게 웃었다. 그는 이제는 다 사그라진 감정과 추억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그가 눈을 촉촉하게 적시고 엘제이를 쳐다봤다.
꿈의 아제프와 현실의 아제프가 겹쳤다. 그의 표정이 너무 애련해서, 그가 상처받는 것처럼 보여서, 엘제이는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엘제이는 꿈속의 허상에게 끌렸던 것처럼 눈앞의 남자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에게 그녀가 연인이 아니라면, 그저 친구나 어머니처럼 그를 쉴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가 품은 애정이 다르다면……. 괜찮지 않을까.
엘제이는 자신을 속이고, 그를 속였다. 그녀는 거짓말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자신의 몸을 기만의 늪에 던졌다.
‘그가 나를 사랑할 리 없어. 그는 날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그에게 다가가면 안 될까? 물거품이라
해도,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지금 이것보다 소중한 감정은 없는데……. 혹시 나중에 나로 인해 상처를 입으면
어쩌지? 그를 기만하는 건 아닐까?’
엘제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무수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투명한 녹색 눈동자에 담긴 다양한 감정들이
별빛처럼 솟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기대와 두려움.’
그녀의 취향, 성격, 행동. 모든 걸 조사했다. 하지만 엘제이 티아세의 반응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가 조사한
것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그렇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 알 듯 말 듯한 상태에 아제프의 눈이
찌푸려졌다.
“오히려?”
아제프가 엘제이의 말을 길게 늘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화려한 색감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고, 풍성한
백금색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휘어졌다. 나비가 춤을 추듯 찬란하게 빛나는 얼굴에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혀끝을 씹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혀끝을 감싸는 비릿한 맛에 정신을 차린 엘제이가 그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 화
8
그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착하고 다정한, 한없이 부드러운 성품의 소년이었다. 한때
화목했던 가정이 비틀렸다는 증거, 이부동생의 존재가 미울 법도 한데 그는 어머니 배 속의 동생을 사랑했다.
어여쁜 동생이 태어나길 바라며 꽃을 따오던 소년 아제프는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제 모습을
감추고 차가운 빙벽에 자신을 가뒀다.
엘제이는 꿈속에서 만난 어린 소년이 누구보다 정답고, 상냥했음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처럼 빛나는 햇살
같은 마음이 사랑스러웠던 소년이었다.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닿기를.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악역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 그는 부드럽게 웃던 입꼬리를 내리고 떨어지는 눈물을 받았다. 엘제이
티아세와 아제프 란델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평정심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혼돈의 중심은 엘제이 티아세였다. 그녀가 그를 흔들고, 그는 그녀를 흔들었다.
기분은 오락가락 제 마음대로고, 심장이 들쑥날쑥 멋대로 박동했다.
아제프가 엘제이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여자에게 속내를 보이고 있었다.
방금 한 행동도 원래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저 여자가 왜 우는지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르고
달래 마음을 빼앗을지를 신경 써야 했다. 그는 오늘은 이만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봤다.
“…….”
“다음이요?”
성공을 위한 도구. 쓸모를 다하면 없애버릴 존재. 결국 그뿐일 텐데. 그래야만 하는데,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 여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제 옷. 돌려주세요.”
‘웃었어…….’
아제프는 웃음기를 떨어트리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이
우스우면서 귀여웠다. 그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제게 소중한 옷이니 돌려주러 저를 찾아와 주세요. 란델 家의 저택은 아름다운 편이죠.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요.
꼭, 돌려주러 와주세요.”
“네…….”
엘제이는 뉘엿뉘엿 떨어지는 주홍빛 햇살을 맞는 남자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제프의 옷이 그녀의 등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
그를 속였다는 불안감과 그의 환한 미소를 봤다는 설렘 속에서 엘제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엘제이는 헤어짐의 순간 꽃처럼 흐드러지던 미소를 떠올리며 발긋하게 물드는 얼굴을 매만졌다. 늘 차분하던 얼굴
위로 분홍빛 생기가 반짝거렸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우울한 낯을 한 엘제이가 한숨을 내쉬며
옷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그에게 다가가면 안 되는데……. 멀리서 보기로 했잖아. 아니야. 이번까지만, 옷을 돌려줄 때까지만…….
갑작스럽게 책 속으로 떨어진 내게 주는 보상이라 생각하자. 그의 유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티로시
영애를 붙여주자. 코르디스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그의 옷을 가지고 있자.’
둥글게 만 소년의 등 위로 거친 채찍질이 이어졌다. 소년이 어린 시녀에게 웃어줬다는 이유로 어린 시녀는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렸다. 사람의 신체가 잘려나가는 걸 본 소년이 몸을 떨며 물러나자 곧바로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매서운 채찍이 날아들었다.
피가 빠져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공허하게 빛났다.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댄 소년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자
몸속에 갇힌 열기가 빠져나왔다. 뇌가 흐물거리는 열에도 소년은 남 일 보듯 무감각한 얼굴로 비틀비틀 누웠다.
울어도 달라지지 않고, 애원해도 바뀌지 않는다. 모든 건 그 혼자서 감내해야 할 일. 그는 차가운 감옥에서
체념을 배우고, 고독을 쌓았다. 흐려진 눈 위로 열에 들뜬 생리적인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시뻘겋게 터진 눈이 아제프를 저주했다. 부릅뜬 눈 위로 독기가 고였다. 아제프는 그녀의 몸을 올라타 온 힘으로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버둥대는 몸은 잠잠해졌지만 저주하듯 홉뜬 눈은 감기지 않았다.
“아니야!!!!”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 화
9
엘제이가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정신없는 손길로 침대맡에 놓아둔 아제프의 옷을 챙기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을 지키던 시녀, 시아가 잠옷 차림으로 나온 엘제이를 보며 경악했다.
“아가씨!”
“이 시간에, 그 차림으로요?”
시아가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죽이며 대답했다. 시아의 놀란 얼굴에 그제야 제 옷차림을 둘러본
엘제이가 머뭇거리자 시아가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복잡한 귀족의 드레스는 입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다고 아가씨를 잠옷 차림으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시아는
다급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고민했다.
엘제이는 아직 깜깜한 새벽의 하늘을 보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해가 완전히 뜰 때쯤이면 늦을 것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더라도 어떻게 이날을 잊고 있었는지……. 엘제이는 자책했다. 오늘 일이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임을 알았다.
엘제이는 오늘 일어날 살인을 막아야 했다. 그녀가 도와달라고 간절히 속삭이자 시아는 얼굴을 흐렸다.
‘뭔가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 나는 아가씨의 수족이야. 아가씨가 원하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줘야 해.’
시아가 다부진 얼굴을 했다. 시아는 엘제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속삭인 뒤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엘제이가 방
안을 서성거리며 잠시 그녀를 기다리자 시아는 커다란 로브를 들고 돌아왔다.
“상관없어. 나는 가야 해…….”
“그럼 저랑 같이 가요. 기사분들에게는 아가씨가 소란스러워서 못 잔다고 대충 둘러대고 물러나게 했어요. 아마,
아침이 오기 전까지 돌아온다면 별일 없을 거예요. 제가 마차를 몰게요.”
엘제이는 황망한 얼굴로 다가오는 알모어를 보고 로브를 내렸다. 풍성한 밀색 머리가 차가운 밤바람을 맞고
흔들렸다. 처연한 얼굴이 그를 응시하자 알모어는 고개를 숙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꼭 그를 만나야 해.”
알모어는 매년 이날만 되면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아제프를 떠올리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날의 그는 누군가 자신을 찾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끔찍해하는 그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악몽의 하루를 보냈다.
그의 절규가 가득한 비통의 공간이자, 그가 스스로 일어선 성장의 공간, 그리고 그를 벼랑 끝으로 이끄는 자멸의
공간. 란델 저택.
엘제이는 화려한 저택을 힐끔 보고 휘황찬란한 계단을 따라 성큼성큼 올라갔다. 폭이 넓은 로브가 그녀의 몸짓을
따라 휘청휘청 흔들렸다.
오늘 아제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쳐가는 광기의 첫걸음을 떼는 날. 굶주린 맹수의 갈급함은 이성을 잃고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지도 몰랐다.
공간을 매운 자욱한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맴돌자 엘제이는 당황하는 알모어와
시아를 밀치고 문을 닫아버렸다. 달칵이는 문소리가 나자 음산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엘제이가 안도하며 한 걸음 더 내딛자 커다란 도자기가 날아왔다. 쐐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커다란 물체에
엘제이가 주저앉으며 반사적인 비명을 토해냈다.
“꺄악!”
맑고 높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느껴지는 기척이 가냘팠다. 아제프가 흐릿한 안개를 젖히고 걸어와 주저앉아
있는 엘제이를 보며 멈칫했다.
“……영애?”
“……”
아제프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엘제이를 노려봤다. 그의 사나운 눈길에도 엘제이는 휘청휘청 흔들릴 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넘어가기 힘든 악몽의 밤. 아제프는 마약에 젖어 하루를 보냈다. 이제는 내성이 생겨 아무리
피워도 어릴 때처럼 취하지 않고 악몽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끔찍한 밤을
혼자 보낼 수가 없어 멈추지 못했다.
밤늦게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나중에 들어도 늦지 않았다. 우선은 이 향으로부터 여자를 떨어트려야 했다.
아제프는 저절로 굴러온 먹이를 발로 차는 자신의 행동에 한숨을 삼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밑에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이 그의 발을 할퀼 것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란델 경이라고 꼬박꼬박 부를 때는 언제고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가 입매를 비틀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의 발 앞에는 깨진 조각들이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흩뿌리며 애원하는 엘제이의 태도에 한숨을
쉬며 발을 돌렸다. 그의 발을 향하던 날카로운 조각들이 멀어졌다.
여자가 멋대로 제 공간을 침범했다. 화가 나고 불쾌해야 했다. 당장 꺼지라고 소리치고 쫓아내야 했다. 그래야
정상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제발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가지 마세요…….”
설득해보려 해도 돌아오는 말은 가지 말라는 애원뿐이었다. 아제프는 제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속삭이는 엘제이를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 화
10
“알모어!”
안절부절못하고 방문을 지키던 집사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알모어는 무사한 엘제이를 보며 안도했다. 혹여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티아세 家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힐긋 주인을 쳐다본 알모어는 평온한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매년 이날마다 그는 지극히 냉담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무기질적인 얼굴과 불쾌감에
찌푸린 얼굴로 하루를 꼬박 환각에 시달리던 아제프가 오늘은 괜찮아 보였다.
아 10 일의 아제프가 안정적으로 보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알모어가 멍하니 아제프를 올려다보자 아제프가 턱
끝으로 창문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그는 말하다 말고 입술을 멈췄다. 이 새벽에 그를 찾아온 건 명백히 그녀의 실수였다. 그가 고의로 소문을 흘려
그녀의 혼삿길을 막아도 엘제이는 아무 변명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가 왜 이 여자의 평판을 신경 쓰는 거지? 여기서 잤다는 소문이 나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도망갈 수 없을
테니…….’
알모어가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자 맑은 공기가 방 안을 채웠다. 새벽을 틈타 은밀하게 찾아온 의원이 엘제이를
진찰하고 몇 가지 약을 조제했다.
쓰러진 엘제이를 보며 경악하던 시아는 아제프의 차가운 시선에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서신을 전하러
티아세 家로 돌아갔다.
아제프는 혼곤한 얼굴로 잠에 빠진 엘제이의 뺨을 만졌다. 타인의 피부 따위가 불쾌하기는커녕 따스하기만 했다.
그는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주며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
처음 맡아보는 마약에 취한 엘제이는 아제프 대신 꿈속에 갇혔다. 그를 찾아가던 악몽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를
비껴 기꺼이 모든 걸 감내할 엘제이를 향했다.
온몸이 난자당한 채 죽어 있던 그라시아 란델이 눈을 부릅떴다. 새빨간 립스틱이 흉하게 번져 괴기스러운 입술이
저주를 토해냈다.
아제프가 따라하듯 중얼거렸다. 퇴폐적인 얼굴로 물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입술을 한껏 비틀며 자신을 저주하는
환각을 노려봤다.
[그래! 너는 영원히 외로울 거다! 누구도 너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너를 위하지 않으며, 누구도 너를 바라지
않는 고독 속에서 평생을 살 거야! 벌레보다 흉악하고 악귀보다 극악한 네놈에게 딱 맞는 인생이지!]
아 10 일. 4 년간 그를 찾아오던 악몽. 아제프는 귓가를 울리는 이명과 눈앞을 스치는 환각에도 냉담한 얼굴로
그것을 무시했다. 그가 입술을 벙긋 움직일 때마다 아텐 연기가 자욱하게 뒤덮였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허의 시간. 하필 그날 운명의 고리가 이리저리 엮이지
않았다면 힘겹기는 해도 평소와 같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주홍빛 노을은 시체의 산을 비췄다. 홍등가 거리는 난자당한 시체로 가득했고, 시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가득 적시며 피바다를 만들었다.
산더미 같은 시체의 길을 걸어가는 남자의 흰 뺨에는 선홍빛 핏물이 묻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퇴폐적인 얼굴은
지독하게 아름다웠지만 텅 빈 눈은 공허했다. 죽이고, 죽여도 텅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어차피 썩어버린 몸뚱이, 시궁창을 뒹굴던 몸이 이제 와 깨끗해질 리가 없지. 그러니……. 사랑받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것이 그가 타고난 운명. 하지만 그의 운명은 슬프게 절규하는 엘제이로 인해 달라졌다. 정해진 미래가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
새하얀 얼굴이 아까보다 더 희게 질린 것 같았다. 아제프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다가 눈을 돌려 침대맡에
놓인 약을 훑었다.
“아제프…….”
“영애? 일어났어요?”
신음처럼 흘러나온 가냘픈 목소리에 아제프가 황급히 눈을 돌리며 엘제이를 쳐다봤다. 또다. 그녀는 또 울고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가를 타고 흘러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시는 눈물을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울렁거리는 심장이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불쾌했다. 저 여자가 울기만 하면 제 의지를 벗어난 심장이 멋대로
발광했다. 아제프는 불쾌한 감각을 참아내며 우는 여자를 흔들었다.
“영애?”
무슨 꿈을 꾸는지 닫힌 눈가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코끝이 서럽게 우는 아이처럼
안쓰러웠다. 그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엘제이를 흔들었다.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엘제이!”
그가 이름을 부르자 엘제이의 눈이 열렸다. 고통에 젖은 초록빛 눈동자가 아제프를 향하자 아제프는 벼랑 끝에서
밀쳐지는 것처럼 섬뜩해졌다. 뭔지 정의할 수 없는 아리송한 감정에 그의 얼굴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아제프…….”
엘제이는 투명하게 출렁이는 물을 보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꿈속에서와 같은 하얀 셔츠는 깨끗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얼굴도 상한 곳 없이 말끔했다. 엘제이는 평온해 보이는 그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입술을 물로 축였다.
차가운 물에 목을 축이자 정신이 들었다.
“란델 경.”
‘화가 났나?’
대외적인 아제프 란델의 이미지는 이런 게 아니었다.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는 상냥한 사람. 아제프는 어젯밤
했던 말들과 마약 피우는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약봉지가 우그러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 화
11
다른 건 그렇다 하더라도 아텐을 피우는 건 명백히 불법이었다. 엘제이는 입이 가벼운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믿을 수 없었다. 표정을 바꾼 아제프가 달콤한 얼굴로 웃으며 엘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했잖아요. 엘제이.”
“네? 제 이름을…….”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는 나비를 유혹하는 꽃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엘제이가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찌푸려도 천상의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눈꼬리를 휘고 웃을 때면 살랑거리는 속눈썹에 홀릴 것
같았다.
엘제이. 제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름 세 글자가 그의 입술에서 나오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발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엘제이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눈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남자가 매달리듯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애틋한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 위태로운
눈물이 청남빛 눈을 적시고 바다처럼 흔들렸다. 촉촉이 젖은 눈을 한 미인이 그녀를 애처로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목덜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가 그렇게 만든 거였다. 어렸던 소년이 고위 귀족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썼던 방법은 잔인했다. 그는 증거를 멸하기 위해 그라시아 란델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선사했다.
정순하다고 소문난 귀족 부인이 홍등가에서 난잡하게 찔려 나체로 죽었다.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는 품위를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귀족들 사이에서 황급히 무마됐고, 그라시아의 사체는 아무 부검 없이 장례가 치러졌다.
엘제이는 그라시아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듯 울먹이는 눈동자에는 소름이
돋았다. 몰랐다면, 저 연기에 깜빡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럼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면, 저는 어머니의 기일에 마약을 피운 패륜아가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비밀로 해줄래요?”
그가 간청하듯 애절하게 속삭이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촉촉한 눈이 물기를 한가득 머금었다가 절묘하게
떨어트렸다. 상아빛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이 청아한 얼굴을 애처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무감각한 여자라도 저런 처연한 미인의 눈물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리라. 엘제이는 진실을
알면서도 무심코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엘제이.”
무척이나 작은 몸이었는데 품에 안으니 따뜻했다. 그는 차가운 체온을 덥히는 따스한 체온에 눈을 감았다. 이
여자의 피부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온기와 도홧빛 피부를 타고 오르는 향내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뜨거운 심장을 누르던 얼음벽에 금이 갔다. 사르르 떨어지는 얼음조각이 툭툭 떨어져 빛처럼 사라졌다.
아제프는 나른한 맹수처럼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뻣뻣이 굳어버린 등가를 응시했다.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자 긴장했는지 바르르 떨리는 등이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안고 있다가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중독된 것처럼 빠져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그의 몸을 달구자
놓아주기가 싫었다. 그는 팔에 힘을 줘 그녀를 더 바싹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몸이 그의 품에 밀착되어 따사로운
온기를 전해줬다.
온몸을 붉게 물들인 몸은 두근두근 박동하며 그녀의 설렘을 전달했다. 아제프는 예민한 귀에 들리는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폭 끌어안고 발긋한 피부를 응시했다.
따스한 밀색 머리카락은 대지의 축복처럼 아름다웠고,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는 갓 피어난 신록처럼 싱그러웠다.
차분하고 따스한 성품처럼 부드러운 몸이, 얌전히 품을 내어주는 태도가, 갓 움트는 새싹처럼 연약하고 따스했다.
그가 엘제이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자 엘제이가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엘제이는 귓가를
스치는 옅은 숨결과 부드러운 저음에 몸을 떨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어지러운 머리가 더욱
아찔해졌다.
거짓말 속의 진실. 단단한 껍데기 아래 숨겨진 연약한 피부. 그는 위로를 바라고 있었고 엘제이는 그를 안아줄
손이 있었다.
‘당신이 외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많이 아팠죠? 이제 행복해도 되잖아.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똑똑-
“뭐야?”
아제프가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자 알모어의 소리는 점점 흐려졌다. 아제프는 아직도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약봉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가 엘제이에게 닿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녀께서 이곳에 계신 건 비밀이니 적당히 준비해서……. 아니,”
이를 갈듯 사납게 튀어나오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제프는 고개를 돌리고 발긋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엘제이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정한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알모어는 어쩐지 조금 억울해서 어깨가 처져 있다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제프를 보고 살며시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주인은 조금…… 기뻐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제프의 팔목이 엘제이에게 잡혔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시선에 그가 허리를 숙이고 상냥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엘제이가 불안한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속삭였다.
그답지 않은 장난이었다. 웃음기를 매단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머뭇머뭇
손을 떼어냈다.
아제프는 주춤주춤 물러나는 손을 보다가 엘제이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차가운 손이 허벅지
아래를 스치자 엘제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한 손으로 등과 허벅지를 감싸고 그녀를 안아 든 아제프가
알모어에게 시녀들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제가 욕실까지 같이 가줄 수는 없으니 당신은 여기서 씻고, 저는 당신을 기다릴게요. 이건 당신의 기준에서
괜찮은 일인가요?”
엘제이는 욕탕을 보다가 가슴 위에 자리 잡은 초록빛 문장을 떠올리고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시녀들을 손길을 물렸다.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 불편해서……. 저를 따라온 아이가 있을 텐데…… 그 아이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될까요?”
“시아가…… 돌아갔나요?”
“오늘 안에 오긴 하겠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냥 제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어떤지요?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반응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촉이 곤두선 남자가 가는 눈으로 엘제이를 훑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 화
12
“방에서?”
그에게 여자는 역겨운 존재거나 이용할 만한 도구, 딱 그 정도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저 여자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보드라운 피부는 역겹기는커녕 따사롭기만 했고, 상냥한 미성은 새의 지저귐처럼 맑았다.
‘죽일 수 있을까?’
일이 끝나고 무사히 공작의 지위를 얻으면 빼앗을 목숨, 그뿐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고작
연약한 여자 하나 옆에 둬도 그를 위협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오히려 귀찮은 일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아제프는 죽이지 않는 쪽이 이득이라고 속으로 변명하며 결혼 후에도 엘제이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살며시
돌아서는 등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씻고 나오시면 저랑 얘기를 좀 나누는 게 좋겠네요. 왜 당신이 새벽에 저를 찾아왔는지, 나가지 말라고 청하는
이유는 뭔지, 꽤 궁금하거든요.”
‘뭐라고 변명하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새벽에 그를 찾아온 이유가 납득이 갈까? 그에게 나가지 말라 간청했던
일은? 생각이 안 나……. 그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엘제이는 왠지 모를 억울함과 서글픔에 고개를 숙이고 물속에서 발버둥 쳤다. 욕탕을 가득 메운 물이 출렁출렁
흔들리다 욕탕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엘제이는 몸을 최대한 느릿하게 씻으며 그에게 할 변명을 고민했고, 아제프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엘제이를
기다리며 찰랑찰랑 움직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아제프는 화끈한 얼굴을 감싸며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를 보면,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제프는 괜히 발을 꼬았다 풀었다 뒤척이며 소파 위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눈을 감으면 물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눈을 뜨면 엘제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제프가 짜증을 내듯 몸을
뒤척이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엘제이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머리를 살뜰하게 말려주고 얇은 옷 위에 커다란 숄을
걸쳐주었다. 아제프는 힐끔 눈이 돌아가려는 걸 막으며 창밖을 쳐다봤다.
따사로운 봄볕이 대지에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며 환하게 비춰오는 햇볕이 유난히 따뜻했다.
싱그러운 태양 빛이 그의 손에 올라 차갑게 언 체온을 녹였다. 그는 햇살을 쥐려는 듯 손을 몇 번 움직이다가
사뿐사뿐 내딛는 발소리에 손을 내렸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머리카락을 말린 엘제이가 사뿐히 걸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부드러운 밀색 눈썹이 혼이 난 강아지처럼 휘어졌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지……. 나를 뭐라 생각하실까? 새벽에 다짜고짜 찾아와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미친 사람?
당신에게 닿을 수는 없어도 나쁘게 기억되기는 싫었는데.’
엘제이는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엘리사처럼 활달하지는 않았지만, 세심하고 차분한 엘제이는
좀처럼 실수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곁에 다가오자 꽃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아제프는 고개를 돌리며 엘제이를 쳐다봤다. 그의 눈치를 보듯
우물쭈물 움직이는 입술과 눈꼬리까지 내려간 팔자 눈썹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는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사랑스러워? 뭐가? 저 여자가?’
아제프는 여자를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자신에 크게 당황하며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올 때 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엘제이의 몸 상태를 고려해 약간의 수프와 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로 차린
소박한 식사였다.
아제프는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었다고, 위험한데 무슨 짓이냐고 쏘아주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축 처진 눈썹을
내려다봤다. 너무 울적해 하니까 뭐라고 더 화내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대외적인 아제프의 모습만 보여주기로
했다.
“다음이요?”
엘제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이만큼 추태를 부렸으니 속으로는 진저리가 난다고 생각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을 입에 담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놀란 반응이 오히려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고 처연한 얼굴을 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밝은 빛이 긴 속눈썹을 비추자 반짝반짝 빛나는 백금색이 그녀의 눈을 현혹했다.
“그…… 그럼, 다음에는 먼저 연락드리고 올게요. 아! 제가 가더라도 오늘은 나가지 마셨으면 좋겠는데, 혹시…
… 나가야 할 일이 있으세요?”
그가 언짢게 생각할까 봐 걱정된 엘제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썹만 축 내려트렸다. 스스로가 한심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저러는 게 나쁘지 않았다. 뭐 때문에 필사적으로 말리는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그녀의 부탁을
못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그는 어리숙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답답함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아제프가 선선히 웃으며 엘제이의 손에 물 잔을 쥐여 줬다. 그녀는 또 엉겁결에 물을 마시고 그의 재촉에 수프를
먹기를 반복하다 간신히 대답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 화
13
아제프는 자면서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다른
사람이 죽는 꿈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엘제이에게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뱃속을 홧홧하게 달구는 만족감에 부드럽게 웃으며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한입도 먹지
않은 그의 그릇을 보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손에 스푼을 쥐여 줬다.
“경도 드세요.”
“저도 먹으라고요?”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제프가 그녀의 체온이 남아 따뜻한 스푼을 쥐고 수프를 떠먹었다. 최근
들어서 거의 혼자만 식사하다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다 식어버린 수프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는
살며시 웃으며 몇 번 더 수프를 떠먹었다.
엘제이는 식사를 시작하는 그를 보다가 다시 한 번 간청했다.
“감사, 합니다.”
아제프가 원한다면 제 앞으로 된 광산이라도 팔아서라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엘제이가 말만 하라는 듯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제프가 피식 웃었다.
저 여자가 저렇게 굴 때마다 뱃속이 간질거렸다. 아제프는 일이 잘 진행되어 느끼는 만족감이라 생각하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
아제프는 아까보다 창백해진 안색을 보며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여자는 뭐든 들어줄 것같이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로 한 발 물러나는 습관이 있었다. 아제프는 겁먹은 초식동물을 위해 한 발자국 물러날 필요성을
느꼈다.
“친구……?”
그래. 친구. 아제프가 선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연인 관계로 시작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얼마든지 저렇게 말해줄 용의가 있었다.
“네. 그럴게요.”
아제프는 축 늘어진 눈썹을 보며 사납게 뒤틀리는 마음을 숨겼다. 또다. 그녀는 매번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저
망설임을 부술 묘책이 필요함을 알았다.
“네.”
“좀 쓸 테지만, 아- 하세요.”
“……아…….”
“단거라도 하나 드릴까요?”
“괜찮,”
“자. 먹어요.”
그녀가 힘겹게 돌려줬던 옷은 다시 돌아왔다. 엘제이는 어깨 위를 부드럽게 휘감는 천자락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러운 천자락이 그녀의 몸 위에서 넘실넘실 흔들렸다. 까만 겉옷은 뱀이 똬리를 틀듯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와 엘리사가 만난다. 엘제이는 악몽이 반복되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그녀가 황급히 눈을 돌려 아제프를
쳐다봤다.
아제프가 엘리사를 바라본다. 그가 엘리사를 사랑한다. 그가 악역이 된다. 그가…… 비참하게 죽는다.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기에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요리조리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꽤 많았다.
‘항상 뭘 그리 망설이는지…….’
[신의 문장]은 엘리사의 시점에서 주로 서술되기 때문에 아제프가 그녀의 외모에 끌렸는지, 그녀의 활달함에
끌렸는지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았다.
엘제이가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아제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얀 셔츠가 잡아당겨지는 모습에
아제프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을 잡으면 될 일을……. 내가 만지면 화들짝 놀라기만 하고. 나를 좋아하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다른 사람이 멋대로 손을 잡았으면 끔찍하게 여겼을 남자는 엘제이를 향해서는 반대로 생각했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엘제이는 특별했다.
“아제프.”
조그만 속삭임이었다. 바람결이 이지러질 듯 연약한 소리에, 아제프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창백한 안색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아제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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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제이? 왜 그래요?”
아제프의 얼굴이 사납게 찌그러지자 엘제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물러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엘제이에게는 그것이 위협으로 느껴졌다.
대부분의 경우 상냥하게 웃어넘기는 아제프가 가면을 버릴 정도로 엘리사가 보고 싶은 걸까? 심장이 따끔따끔
아프고 숨이 탁탁 막혔다. 결국 운명은 바뀌지 않는 걸까? 그는 엘리사를 사랑하게 될까?
“엘제이? 어디 아파요?”
아제프는 그제야 제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목숨은 순전히 제 손에 달린 줄 알았다. 다른 변수로 그녀가
죽을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질려가는 안색을 보며 애타게 말했다.
차마 문장이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미워서 엘제이가 자책하며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속상해서 엘제이는 울보가 되었다. 원래 눈물이
많은 건 아니었는데, 요즘은 매일 우는 것 같았다. 꾹꾹 내리누르려 애썼지만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제프는 서럽게 우는 얼굴을 보며 서둘러 표정을 풀었다. 그가 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얼굴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냈다.
아제프는 다정한 얼굴로 볼을 닦아주며 속살거렸다. 그의 음색은 깃털처럼 부드럽고 바닐라처럼 달콤했다.
“…….”
“제가 잘못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데려다주지도 말라고? 저는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장난치지 마세요.”
오늘이 아 10 일이라는 것도, 그가 처음 살인을 한 날이란 것도,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가슴을 채우는
왠지 모를 충만감에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엘제이는 어느새 잠잠해진 심장과 편안하게 내뱉어지는 숨에 얼굴을 풀었다. 이제야 추태를 부렸다는 게 떠올랐다.
엘제이가 살며시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제프는 욕심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게 생겼으니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제프는 그걸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그녀의 시간을 뺏고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다. 의외로
허술한 사람이라 물으면 틈을 보였다.
아제프는 계단에서 서성이는 엘리사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좀 더 쉬다 가라고 엘제이를 달랬다. 엘제이가 조금
망설이자 그는 아름답게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아픈 사람을 이대로 보내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요. 당신이 아픈 것도 엄연히 제 탓이고…….
저랑 좀 더 얘기를 나누면서 쉬는 게 어떨까요?”
아제프의 목소리에 현혹되던 엘제이는 그가 엘리사를 만나겠다고 하자 정신을 차렸다. 그가 엘리사와 둘만 얘기를
나눈다는 게 무서웠다.
“언니!”
죄송하다 사과하고 오늘은 이만 가겠다고 말하려던 엘제이는 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무릎까지 올리고 계단으로
돌진하는 엘리사를 보며 경악했다.
엘제이의 눈물진 얼굴을 본 엘리사는 콧김을 슝슝 내뿜으며 황소처럼 돌진했다.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오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매끈한 다리를 반쯤 내놓은 채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아연함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 아프잖아…….”
엘제이의 손은 작지만 매웠다. 엘리사는 따끔한 등짝을 어루만지며 툴툴거렸다. 등짝을 문지르던 엘리사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매를 지켜보는 아제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저희 언니를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티아세 家의 차녀, 아니, 엘제이 티아세의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 엘리사 티아세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엘제이를 울린 것 같은 아제프를 보며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저 얼굴만 잘난 남자가 하나뿐인 언니를
울렸다고 생각하니 화가 들끓었다. 그녀가 억지로 웃으며 그를 노려보자 고깝게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스콤 기질이 있는 엘리사는 소중한 언니를 울린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제프는 고작 가족이라는 이유로
엘제이에게 친근하게 구는 엘리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엘리사와 아제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동정과 사랑을 품었던 달콤한 분홍색 눈과 아름다운 청해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빤히 노려봤다. 초원 위에서 마주친 맹수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처럼 둘은 소리
없이 으르렁거렸다. 까칠한 시선이 서로를 할퀴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든 여자를 혐오하던 남자의 유일한 사랑. 유일한 허용. 엘리사는 그에게 선 안의 사람이 될 테고, 자신은 선
밖에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경계선이 더는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 같아서 엘제이는
씁쓸해졌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바라보다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엘리사의 얼굴이 흉흉하게 변했다. 엘제이는 남한테
실례를 저지를 성격이 아니었다. 분명 아제프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한 엘리사의 오해는 커졌다.
엘리사가 말을 하다 말고 엘제이를 돌아봤다. 엘제이의 얼굴은 여전히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언니의 흐린 안색을
걱정스럽게 살피던 엘리사는 엘제이를 보호하듯 자신의 뒤로 숨기고서 코뿔소처럼 콧김을 슝슝 내뱉었다.
원래 엘리사는 사고를 수습하기보다는 일을 키우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사과하며 실례가 많았다고
인사해야겠다는 계획을 취소하며 황소처럼 머리를 들이박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5 화
15
“우리…… 제이?”
제이라는 이름은 아마 엘제이의 애칭인 것 같았다. 언니보다 키도 큰 주제에 엘제이를 가리고 서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 망할 여자가?’
‘저 요괴 같은 남자!’
두 남녀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야차처럼 흉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다만, 고개를 숙인 엘제이만 둘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땅굴을 파고 있었다.
‘제이.’
고개를 숙이고 손만 만지작거리는 엘제이의 소심한 행동을 지켜보던 아제프는 속으로 그녀의 애칭을 읊조렸다.
왠지 제이라고 부르는 쪽의 어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가 엘제이를 바라보자 얄밉게 웃은 엘리사가 들으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네. 우리 제이요.”
아제프는 이미 속으로 엘제이를 제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엘리사를 무시하듯 그녀를 지나쳐 엘제이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었다.
“저 여자……요?”
엘제이가 얼빠진 표정으로 엉겁결에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지가 않았다. 그가
아직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엘리사를 저 여자라 칭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제프는 처음부터 엘리사에게 상냥했다. 아니,
엘리사가 아니더라도 아제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저렇게 쉽게 무례를 저지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제이를 다시 제 품으로 끌어들이며 아제프를 경계했다. 살쾡이처럼 눈을 매섭게 뜬 소녀는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하! 그러세요? 그런데 무례는 그쪽이 먼저 저지르지 않았나요? 엄연한 레이디한테 그 여자라니요. 그게 무슨
무례죠?”
엘리사의 말에 콧방귀를 뀐 아제프가 그녀를 기분 나쁘게 훑어봤다. 그가 무해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독설을
내뱉었다.
“아, 레이디요? 제가 미처 못 알아봤네요. 하도 콧김을 뿜어대기에 저는 웬 짐승 한 마리가 제 집에 와 있는 줄
알았죠.”
엘제이는 아연한 얼굴로 둘을 지켜보며 머리를 짚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자 머릿속이
과부하라도 걸린 것처럼 멍해졌다.
엘리사를 지나쳐 힐끔 엘제이를 본 아제프가 엘리사를 밀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서둘러 엘제이를 부축하며
하얗게 질린 안색을 살폈다.
“엘제이? 어디 아파요?”
아제프가 곱다란 속눈썹을 유혹적으로 팔랑이며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그가 걱정을 한껏 담아 부드럽게
속살거리자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엘리사가 그에게서 엘제이를 빼앗아 안았다.
[신의 문장]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른 세계인 걸까? 아니면, 그녀의 개입으로 둘의 인연이 꼬인 걸까?
알 수 없는 상황에 엘제이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엘리사는 저런 애가 아닌데……?’
엘제이가 시선을 돌려 아제프를 쳐다봤다. 그녀가 바라보자 냉랭한 조소를 단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냥하게 풀어졌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은 아제프가 뽐내듯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네. 제이.”
엘리사는 얼굴로 제 언니를 현혹하는 아제프를 보며 턱을 벌렸다. 엘제이는 미모에 홀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저
남자가 워낙 독살스러워 순진한 언니가 홀라당 넘어갔다고 생각한 엘리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왕왕. 앵알앵알. 쩌렁쩌렁. 둘은 두 마리의 사나운 맹수 같았다. 조금 전까지 엘제이가 서러워 울던 공간은
난장판이 되었다.
아제프가 엘제이 몰래 차가운 눈으로 엘리사를 쏘아봤다. 저 여자만 난입하지 않았으면, 아니 알모어가 저 여자가
찾아온 걸 말하지 않았으면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따사로운 그의 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는데…….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일까?’
그가 무감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동생을 잃어버리고 슬피 우는 엘제이를 달래며 그녀의 옆자리를 꿰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죽여야 흔적도 남지 않을까 고민하며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안 보이는 아제프를 보며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속삭였다.
아제프는 또 내려간 우미한 눈썹을 보며 계획을 수정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괜히
쌍둥이를 죽였다가 몸도 안 좋은 엘제이의 건강이 안 좋아질까 봐 망설여졌다.
맹세코 말하는데, 아제프와 헤어지는 순간 아쉬움이 아니라 해방감을 느꼈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
아제프는 마지막까지 방에서 나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엘제이 때문에 창문으로 떠나는 마차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6 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를 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녀가 누워 있던 모양대로 주름진 침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아제프는 침대보를 매만지다가 그녀의 향이 남은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열린 창문 아래로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햇살을 따라간 창가로 보이는 풍경은 완연한 봄의 것이었다.
엘제이의 눈처럼 푸르른 나무들은 앙증맞은 신록을 틔우고 봄볕을 즐겼다.
아제프는 어쩐지 좀 나른해진 얼굴로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예민한 귀에 시끄러운
새소리가 들리고 환한 햇빛이 눈을 간질였지만, 그는 모처럼 푹 잠이 들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6 화
16
엘제이가 돌아가고 난 뒤 3 일이 지났다. 아제프는 그녀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그가 방 밖을 나간다고 해서
돌아간 그녀가 알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왠지 그녀의 말에 따라주고 싶었다. 그는 그날 하루 동안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을 지켜줬는데…… 3 일이나 아무 연락이 없어? 가만 보면 사람 성질 돋우는 재주가 있어. 이러면,
봐주고 싶지가 않잖아?’
아제프는 나쁜 상관은 아니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교묘하게 돌려 까며 깎아내리기 일쑤였지만 불공평한 사람은
아니었다. 화가 났을 때조차 상냥하게 웃던 사람이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숨 막힐 듯 무서웠다.
“다이크 경.”
“네? 네!”
아제프는 의외로 문신이었다. 그는 외교부 소속으로 외교 협상에 능한 달변가였다. 늘 칼같이 입궁해 칼처럼
출궁하던 남자가 웬일로 일찍 가겠다고 하니 슬그머니 궁금증이 올랐지만, 눈치 좋은 다이크는 여기서 이유를
물어봤다가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걸 알았다.
다이크는 거친 손길로 셔츠를 풀어헤치고 쥐스토코르를 걸치는 아제프를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이크는 남색 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그를 쳐다보다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했는지
숨 한 번 깊게 내뱉지 못했다. 다이크는 아제프가 빠져나가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사각사각 펜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엘제이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아제프는 먹이를 사냥하러 나가는 맹수마냥 흉흉한
낯빛으로 성을 가로질렀다.
‘아이젠 티아세.’
다른 귀족들과 웃으며 걸어오던 아이젠도 아제프를 발견했다. 그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젠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란델 후작 아닌가? 잘 지냈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물어보고 싶은 것이요?”
“하아…….”
“역시 그런가.”
왜 그러는지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고 몇 날 며칠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니 아이젠의 애간장도
타들어갔다.
목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힘겹게 삼킨 아이젠이 아제프의 매끈한 얼굴을 살피며 아쉬워했다. 사윗감으로 탐이
나는 사내기는 했으나 인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젠의 얼굴에 드러난 부정을 영민하게 감지한 아제프가 말을 늘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모르는군.’
아제프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주제를 유려하게 흐리며 아이젠의 관심을 돌렸다. 아이젠은 애초부터 루드비히를
지지할 마음이 없었지만, 아제프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이젠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살짝 웃었다. 고맙다는 듯 아제프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다정한 듯했다.
함부로 어깨를 건드는 손 때문에 청남색 눈은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제프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돌리며 엘제이를
똑 닮은 부드러운 밀색 머리를 바라봤다.
“네.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요.”
엘제이가 오지 않는다면 그가 가면 되었다. 다만, 심기가 사나워진 그의 심술이 그녀를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제프는 어떻게 해야 그녀를 온전히 틀어쥘 수 있을지 고민하며 무구하게 웃었다.
‘아프다고? 어디가?’
엘제이를 향해 갈았던 칼날이 아프다는 소리에 흐물거리며 무뎌졌다. 아제프는 아이젠을 재촉해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물어보고 싶은 기분을 참아내며 손을 꾹 눌러 쥐었다.
“별, 말씀을요.”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지, 평소에도 몸이 안 좋은지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제프는 조급함을 느끼며
초조하게 손을 까딱였다.
엘제이의 눈에 눈물이 걸리며, 아제프는 저도 모를 감정으로 흔들리곤 했다. 그녀의 눈물은, 금방 사라질
신기루처럼 애틋했다.
‘아파서, 못 온 건가?’
***
엘제이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우울하게 내려앉은 눈가는 울었는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지붕을 그리듯 내려간 눈썹이 울적해 보였다.
[그에게 옷을 돌려준다. 만다. 그를 찾아간다. 다시는 찾지 않는다. 미래가 바뀌었다. 정해진 운명도 바뀌는가?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그가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를 계속 볼 수 있을까…
….]
엘리사에게 넌지시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아제프에 대한 욕뿐이었다. 엘제이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둘의 사이가
그렇게 틀어진 건지 궁금했다.
‘혹시 나 때문에? 나라는 변수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버리는 건 아닐까? 괜히 내가 끼어들어 미래가 뒤틀리고
그의 운명이 더 가혹해지지는 않을까?’
책 속에서 엘리사는 아제프의 구원이었다.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는 짝사랑이었더라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조금이나마 상처를 치유 받는 순간도 있었다.
지금의 엘리사는 아제프를 몹시 싫어하고 미워했다. 엘리사가 손을 건네지 않으면 그의 운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으로 점철되는 건 아닐지 불안했다.
방관과 개입 사이. 엘제이는 어느 것 하나 선택할 수 없었다. 꿈결처럼 빛나는 초록빛 문장이 그녀의 족쇄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7 화
17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는 아제프 란델이었다. 깜짝 놀란 엘제이가 쪼르르 달려가 닫힌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실려 코끝을 스치는 향은 그의 것이었다. 진짜 아제프였다.
엘제이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불렀다.
“아제프!”
아제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엘제이의 눈가를 보며 장난스럽게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몰래 들어왔다는 말에
소리를 죽인 엘제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아, 잠시만요…….”
“실례할게요.”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아제프의 등 뒤에서 노을이 일렁일렁 흔들렸다. 주홍빛 노을은 엘제이의 머리카락에 맺혀
그의 품에 쏟아졌다.
그래. 아제프는 부족했던 것이다. 엘제이가 부족해 자꾸만 화가 나고 엘제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품에 안으니
따뜻했다. 놓고 싶지 않았고, 놓을 이유가 없었다.
달에게 밀려나던 봄의 햇살이 놀라 크게 벌어진 초록색 눈을 비추고, 하얀 얼굴을 주황빛 봄볕으로 물들였다.
얼굴만 가리면 다 해결된다는 듯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모습이 얼굴만 숨기고 적의 기척을 살피는 다람쥐 같았다.
“저랑 산책,”
“아?”
피식 웃으며 엘제이의 의사를 물어보던 아제프가 사박사박 잔디 밟히는 소리에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녀를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드디어 엘제이와 단둘이 만났는데, 다른 이에게 방해받는 건 질색이었다.
아제프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품에 안겨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인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아제프는 제 걱정을 하는 게 분명한 엘제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풀며 다정하게 웃었다. 어설프기는
했지만 귀여운 사람이었다. 곁에 두면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편안해졌다. 그가 너그럽게 웃으며 생각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갑옷이 철컥철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티아세 家의 기사들인 듯했다. 아제프는
긴장한 듯 떨고 있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엘제이가 꼴깍 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웃으면 안 되는데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아제프는 혀를 깨물며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기사들은 침입자를 찾으려는 듯 수풀을 헤집으며 걸었다. 아제프는 사실 들켜도 크게 상관없었다. 저들의 입을
막는 일쯤이야 그에게는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숨을 죽인 채 기사들의 눈치를 보는 엘제이가 너무 진지해서
그걸 망칠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제이가 침입자인 줄 알겠어요. 이 상황을 보면, 악역은 저고 당신은 인질쯤 되지 않나요? 범인을
위해주는 인질이 어디 있어요.”
아제프는 처음 보는 엘제이의 단호한 얼굴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왜일까? 저 여자는 무조건 신뢰한다는 듯
그를 믿었다.
엘제이는 그의 관심을 돌리려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제프는 빠져나가는 온기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몸을 놓아주었다.
담으로 걸어간 엘제이가 허둥지둥 담벼락에 발을 걸쳤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어설픈 움직임을 조금 아연한 얼굴로
보다가 먼저 담을 넘어가 내려오는 그녀를 받았다.
저도 모르게 진득한 눈으로 하얀 목덜미를 보던 아제프는 엘제이를 땅에 내려주며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핥으면 꽃내음이 날 것같이 달콤해 보였다.
아제프가 은근슬쩍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거리자 엘제이가 손으로 목을 감싸고 빠르게 물러났다. 엘제이의 얼굴이
잘 익은 앵두처럼 붉게 물들었다.
“이게 뭐…….”
아제프는 금세 습기를 머금는 눈가를 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새빨간 혀가 모습을 드러내자 엘제이가 숨을
삼키며 그의 선홍빛 입술을 바라봤다. 엘제이가 희롱당한 처녀처럼 울먹거리자 아제프가 산뜻하게 웃으며 물었다.
“제이? 왜 그래요?”
아제프는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듯 선하게 웃으며 물러나는 엘제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가를 만졌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톡 건드리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엘제이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장인의 걸작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제이를 보고 있었다.
‘착각……인가?’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8 화
18
엘제이는 목덜미를 찌르르 울리던 촉촉한 촉감을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착각한 거라면 너무 부끄러웠다.
엘제이는 화사하게 웃고 있는 붉은 입술에 시선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자의 목덜미에 집착하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엘제이의 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초원을
거니는 우아한 사슴처럼 곧게 뻗은 목덜미와 목을 타고 유려하게 휘어진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당신이 좋아서……. 멀어져야 하는데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곁에라도 있고 싶어서…… 자꾸 욕심이
나요. 너무 좋아하는데,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을 사랑한 게 당신에게 독이 될까 봐 무서워요. 제가
언젠가는 이 마음을 잊게 될까 봐 두려워요.’
그는 언제나 웃었고, 그녀는 언제나 울었다. 선하게 웃는 남자의 미소는 대부분 거짓된 것이었고, 그를 보며
울먹이는 여자의 눈물은 대부분 진심이었다.
아제프가 그렇게 속삭이며 여전히 눈물을 달고 밝게 웃는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아까처럼 장난치듯 그녀를
희롱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리했던 것처럼 위로하듯 품을 내어줬다.
아제프는 축축이 젖어가는 옷을 느끼며 힘주어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구슬피 우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온몸으로
슬픔을 토해내는 여자가 보이는데……. 그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뭐
때문에 우는 모습이 싫은지, 왜 자꾸 눈에 밟히는지, 그걸 이해하기에는 아제프는 너무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아제프는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았다. 그가 모르는 뭔가가 그녀의 마음을 제지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대외적으로 좋은 남편감이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성격, 아름다운 외모, 어린 나이에도 외교부 수장을
맡을 만큼의 능력. 아제프는 자신이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상당히 후한 점수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엘제이가 그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데는 분명 그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제프는 서러운 듯 눈물을
토해내는 엘제이의 등을 토닥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젠 공작 때문인가?’
아제프는 엘제이의 부친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다니지만, 잔뼈가 굵고 머리 회전이
빠른 자였다.
아제프는 최근 들어 황위 다툼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젠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젠은 이미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었다. 결혼처럼 확실한 결합이 없는 만큼 아이젠이 차기 황권을
거머쥘 황자에게 엘제이를 바칠 생각인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딸을 걱정해 안색이 까맣게 죽었던 아이젠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이젠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엘제이가 이렇게 울며불며 하루를 보내는데 굳이 엘제이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제프는 울먹이며 뭔가를 써내려가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엘제이가 필요했고, 가지고 싶었다.
엘제이는 가만히 품을 내주는 그의 행동에 참아왔던 설움을 토해냈다. 그가 불쾌해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울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아제프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리한다면 티아세를 노리는 남자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몰랐다.
설령 그게 거짓일지라도, 그의 품에 안길 수 있고 어쩌면 그와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자신의 원수를 찾고 있었고, 엘제이 티아세는 바로 그 원수의 딸이었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살인자의 딸.
‘그가 알면, 나를 경멸할 거야. 끔찍하다는 눈으로 바라볼 거야. 나는 엘리사처럼 그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가 알게 되면 아버지와 척을 질지도 몰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서로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아제프와 아이젠을 생각하자 너무 두려웠다. 아이젠이 저지른 짓이 너무 끔찍해서
그에게 용서를 청할 수도 없었다. 책에서는 분명히 나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정부로 삼은 걸지도 몰랐다.
아버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황을 살펴볼 때 아이젠이 그랬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아제프의 집에 불을 지른다는 말인가?
적어도 그들이 죽지만 않았어도 아제프는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정상적인 가족은 아니었어도 그의 곁에
소중한 존재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배 속의 동생이 살아남았다면, 그는 이부동생을 사랑했을 거다.
그를 기만하는 행동이란 걸 알면서도 숨기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그가 모르기를 바랐다. 그가 얼마나
그 사람을 원망하고 찾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도 엘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엘제이는 그에게 미안해서 울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자신이 비참해서 울고, 그를 기만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울었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버겁고 어떻게 하면 그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두려웠다.
‘미안해요. 말하지 못해서, 알려주지 않아서 너무 미안해요. 대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운명을 바꿔줄
테니까……. 그러니, 죽지만 마세요. 제발,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마세요.’
아제프는 시간이 흘러도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엘제이를 보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이렇게 울기만 하다가는 혼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제프가 우는 엘제이를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낸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반가워서 우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아제프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드는 비밀을 그녀에게서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는 그녀를 몰아세우기보다는 그녀 몰래 엘제이의 속마음을 알아볼 생각이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9 화
19
아제프는 날이 어두워도 하얗게 빛나는 부드러운 뺨을 보며 더 화사하게 웃었다. 부드러운 게 좋다면 맞춰줄
생각이었다. 괜히 울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았다.
단정한 눈썹이 서글프게 내려갔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휘어진 눈썹을 손으로 콕 찔렀다.
탐스러운 머리카락만큼이나 고아한 밀색 눈썹은 무척 부드러웠다. 그가 엘제이의 눈썹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
아제프가 시범을 보이듯 화사하게 웃었다. 까만 밤을 밝히는 화사한 미소 위에 달빛이 고여 아름다운 얼굴이
꽃처럼 빛났다. 그는 밤의 천사 같았다.
“멀리 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주변을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우리, 서로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제게 당신을 알려주세요. 엘제이.”
저렇게 착하게 웃는 사람이, 저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이 일부러 제 말을 무시할 리 없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가 작았나?’
엘제이는 까마득히 높아진 시야를 보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엘제이 티아세의 몸은 말에 익숙했지만
한제이에게는 처음이라 좀 어색하고 무서웠다.
귀족 영애는 대부분 승마를 배우는 편이었다. 드레스 차림이라 좀 불편하기는 해도 무서운 건 아닐 텐데 엘제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슴에 따뜻한 체온이 옮겨 붙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뱃속을 홧홧하게 덥히는 열기에 그가 눈웃음치며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엘제이는 좀 당황했는지 그의 품에서 몸을 떼어내려 했다.
“이랴.”
그가 가볍게 땅을 박차자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거세게 흔들리는 느낌에 엘제이의 몸이
저절로 아제프의 품에 달라붙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따스한 감촉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추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당신이 추울까 봐 좀 걱정되기는 하는데, 시원한 밤바람이 기분 좋거든요.
혹시 너무 추우면 말하세요. 제가 따뜻하게 안아줄 테니까요.”
산뜻한 얼굴이 된 아제프가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를 바라보다 말의 옆구리를 세게 눌렀다. 달리라는 주인의
신호에 말의 발이 빨라졌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스치고,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땅을 갈랐다. 엘제이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팔을 세게 잡았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를 감싸 안고 밤하늘로 달려갔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엘제이의 뺨을 쓸고, 아제프의
얼굴을 스쳤다.
아제프는 고삐를 놓고 흩날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잘 정리했다. 고삐를 놓고 달리는 모습에 아제프의 팔을 잡은
엘제이의 손이 창백하게 질렸다.
“란, 란델 경…….”
누가 봐도 겁먹은 모습이었는데 아제프는 춥냐고 물어올 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삐를 놓고 왠지
모를 상쾌한 얼굴로 그녀 몰래 미소를 그렸다. 도와달라고, 멈춰달라고 애원하기 전에는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엘제이의 안색은 곧 사라질 것처럼 투명하게 질렸다.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엘제이가 아제프를 더듬더듬
붙잡으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아제프가 엘제이 몰래 냉소를 지었다. 저렇게 질려서도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괘씸했다. 희게 질린
얼굴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우선은 제 욕심이 먼저였다. 아제프는 조금 조급해하고 있었다.
엘제이는 속도를 더 높인다는 아제프의 말에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말에서 떨어질 것
같은 낙하감이 온몸을 강타하자 엘제이는 그에게 무섭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저었다.
바람을 따라 제멋대로 흔들리는 고삐를 거세게 움켜쥔 아제프가 천천히 말을 멈췄다. 그의 위험한 곡예가 멈추자
엘제이가 무서워서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에 엘제이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아제프가 손을 뻗어 엘제이를
내려줬다. 외곽으로 빠져나왔는지 정돈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초원이 보였다.
엘제이는 땅에 발이 닿는 느낌에 안도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잡았다. 아제프가 휘청거리는 몸을 서둘러 받으며
안장 위에서 까만 로브를 꺼냈다. 그는 천자락을 바닥에 깔고 엘제이를 그 위에 앉혔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투명하게 변해 있어, 그제야 아제프도 제가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에
한해서는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죄책감도 느껴졌다. 아제프가 진심을 담아 질려 있는 뺨을 매만졌다.
“제 욕심이 과했어요. 제이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이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미안해요,
제이.”
엘제이의 머리가 천천히 기울어져 그의 어깨에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0 화
20
바람이 솔솔 불어오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엘제이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아제프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마음껏 안았지만, 떨어져 있는 순간이 아쉬웠다. 이 여자는 자신의 봄이었다. 반드시 가져야 할
자신만의 봄. 아제프는 몸을 타고 오르는 음습한 집착을 숨기고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고단하고 힘들었을 다부진 등. 이처럼 자라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불쌍해 또
바보처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엘제이는 입술을 뜯으며 밀려 나오는 눈물을 꾹꾹 내리눌렀다.
‘당신에게는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저처럼 고백도 못 하는 반푼이가 아니라, 시한부 같은 감정이
아니라, 영원히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여줄 상냥한 사람. 그런 사람이 생길 테니까…… 외로워하지 마세요.’
엘제이를 조금 떨어트린 남자가 일어나려는 듯 다리를 세웠다. 그가 몸을 구부리자 벌어진 옷깃 사이로 뭔가가
떨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내린 엘제이는 떨어진 물담배를 들고 흔들리는 눈을 했다.
‘매일, 마약을 하는 건가? 계속 피우면 중독될 텐데. 판단력이 흐려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시한폭탄 같은
사람.’
아제프는 일부러 아텐을 떨어트렸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엘제이는 그가 혼자라는 말을 할 때나, 쓸쓸한
얼굴을 할 때, 그리고 위험한 일을 할 때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제프는 느릿하게 아텐을 뺏어들며 겸연쩍게 웃었다.
아제프는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계속 그의 눈치만 살피며 맴도는 엘제이를 보며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품에 손을 넣어 아텐을 꺼내자 엘제이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제프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의 얼굴은 매캐한 마약 연기에 뒤덮인 듯 지독하게 썼다. 아제프가 쓸쓸한 눈을
내리깔고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제가 아텐을 끊었으면 좋겠어요? 아텐은 중독 성분이 강해 쉽게 끊기가 힘들어요. 저는 매일이 고단한 걸요…….
그게 없으면 버티기가 힘들어요.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요. 한심하죠?”
엘제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좋은 의원이 필요하다면 누구든 동원해서 데려올 것이고,
귀한 약초가 필요하다면 제 몸을 절벽에 밀어 넣어서라도 구해올 것이었다.
계절은 언제나 바뀐다. 봄이 있다면 겨울이 찾아온다. 아제프는 추운 겨울이라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그러니
그는 봄을 가둬두고 싶었다.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족쇄에 묶어 제 품에 가둬두고 싶었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향해 바짝 붙었다. 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엘제이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황해서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의 피부에 닿을 것 같았다.
어두운 목소리가 엘제이의 귀를 강타했다. 그가 어두운 청해의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보자 엘제이는 사나운 이빨을
가진 맹수에게 집어 삼켜지는 것 같았다.
아제프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늘 다정한 척 속살거리던 부드러운 음색을 버리고 맹수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허한 가슴은 자꾸만 더 큰 걸 원했다. 무엇을 밀어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그를 탐욕의 늪으로 빠트렸다.
란델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한 남자는 티아세를 노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착각이야. 모든 게 내 착각.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엘제이는 눈앞에서 일렁거리는 청남색 눈을 피하며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았다. 아제프는 시선을 피하는 엘제이의
몸짓에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피하는 조그만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별빛을 받아 요요하게 빛났다. 그가 모처럼 가면을 벗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왜? 못 하겠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1 화
21
아제프의 입에서 나온 반말에 엘제이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바짝 붙인 얼굴을 떼어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아텐을 꺼내들었다.
아제프는 자신의 달라진 태도에 혼란스러운 듯 입을 멍하니 벌리는 엘제이를 보며 조소를 그렸다.
핏물이 고인 것처럼 붉은 입술이 고혹적으로 뒤틀렸다. 타락한 천사가 혼란스러워하는 엘제이를 비웃으며 그녀를
현혹했다. 그가 유려한 손끝을 뻗어 담뱃대를 움켜쥐자 엘제이의 시선이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을 향했다.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예술품을 만지는 것처럼 우아하게 아텐 가루를 물담배에 넣었다. 매캐한 증기가
별빛을 덮었다.
자욱한 연기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악마의 손에 떨어진 아제프처럼 보여서, 그 모습이 눈이
멀 만큼 고혹적이어서, 엘제이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게요. 뭐든지 할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이러지 말아요. 네?”
“늦었어.”
아제프는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꾹 누르며 담뱃대를 빼내려고 하는 여자를 보며 입꼬리를 만족스럽게 올렸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서둘러 담뱃불을 껐다. 매캐하게 올라오던 씁쓸한 향기가 사그라들었다.
표정을 싹 바꾼 남자가 맹수처럼 위협하던 것은 꿈이라는 듯 달콤하게 웃었다. 엘제이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눈물이 흐른 볼을 상냥하게 닦아준 남자가 엘제이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정말 약속할 거죠? 나중에 딴소리하면 더 심한 짓을 할 거니까. 다음에는, 뭐…… 당신만 잘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어서 약속한다고 말해요.”
“약속할게요!”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아도 그의 끝이 마약에 전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싹해졌다. 엘제이는
사람이 없는 주변을 살피며 떨리는 가슴을 그러쥐었다.
아제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는 엘제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에게도
도박이었지만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엘제이는 일어나는 아제프를 바라보며 불안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가 아직 그의 손에 들려있는 담뱃대를 바라보자
아제프가 산뜻하게 웃으며 그걸 흔들었다.
엘제이의 시선이 다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엘제이가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가방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가볍게
웃으며 주머니를 흔들었다.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알고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모른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엘제이는 그의 운명을 알고 있으니 더 간절했다.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해사하게 웃은 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제 허벅지에 앉혔다.
사이좋은 연인이나 할 법한 농밀한 접촉에 엘제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제프는 긴장한 듯한 엘제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주머니에서 약과 물을 꺼내 그녀의 입술 근처에 대줬다.
엘제이는 약을 다시 주머니로 넣으려는 아제프를 힐끔 바라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엘제이의 눈썹이 잘못을
저질러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내려갔다.
“경은…… 안 드세요?”
“무서워요.”
엘제이는 그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아제프는 무섭다는 말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다정한 손길로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니 둘만 있는 공간에서 무서웠으리라. 그럼에도 자신을 선택한 여자에게 좀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다정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지금처럼 제 곁에 있어준다면 계속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줄게요. 제이가
도망가지 않는다면 계속 상냥한 사람으로 있을 거예요.”
부드러운 미성이 귀를 간질였다. 상냥하게 토닥이는 손길에 세차게 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엘제이는
달래듯 온화한 목소리를 내는 그를 느끼며 눈물을 삼켰다.
‘저는 계속 도망가야 하는데,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 사실을 말한다면, 당신은 또 화를
내겠죠? 당신은 티아세를 원하니까…….’
아제프의 협박에 밀려 엉겁결에 약속을 해버렸지만,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두려웠다. 엘제이가 지키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스스로 그녀를 밀어낼 순간이 올 터였다.
엘제이는 슬픈 얼굴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을 받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더라도 한 번쯤은 마음껏 그를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제발, 여신님. 멋대로 저를 데려오시고 원하지도 않는 문장을 주셨잖아요. 제게 미안하시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저도 너무 힘들어요. 문장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라리,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으면…
….’
아제프는 제 품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 다정하게 웃었다. 늘 달아나려 애쓰던 몸이 제 품을
파고들었다.
“아니요. 저도 미안해요.”
“제이가요? 무엇이요?”
아제프는 제 품에서 살랑살랑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보다가 엘제이가 추울까 싶어 옷자락을 단단히 덮어줬다.
엘제이는 몸을 감싸는 천자락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한 것도, 잘못한 것도 다 저예요. 당신은 솔직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저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속이고 기만해서 미안해요. 나중에 다 갚을 테니까…….
오늘은, 용서해주세요.’
그녀를 안고 있자 추운 밤바람에도 햇살처럼 따스한 기운이 밀려왔다. 제 품에서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그를 믿는 듯했다. 아제프의 얼굴 위로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이유만 없다면 울리고 싶지 않아…….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나를 자극하지 마. 그래야 당신과
나, 우리 둘 모두가 평화로울 테니까.”
그는 듣지 못할 엘제이에게 조그맣게 속삭이며 일어났다. 새까만 밤하늘을 등진 남자는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말에게로 걸어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2 화
22
훈련이 잘 된 말은 묶어두지 않아도 주위를 서성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제프가 다가가자 풀잎을 뜯던
말이 다각다각 걸어 아제프에게 다가왔다.
“히이잉!”
“쉿!”
말이 반갑게 소리를 내어 울자 아제프가 서둘러 말에게 다가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리한 말은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제프가 옅게 웃으며 잘했다는 듯 말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수많은 별빛이 총총히 박혀 영롱한 기운을 내뿜는 밤하늘 아래, 순한 암갈색 말과 새근새근 잠든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품은 남자.
아제프는 은하수가 넘실거리는 은빛 하늘을 올려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환한 보름달과 그 옆을 지키는 밤빛을
바라보던 남자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잠에 빠진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달이 얼마나 밝은지 엘제이의 얼굴에 달빛이 스며들어 보름달처럼 빛났다. 결이 고운 피부의 솜털 하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건 심장이 뛰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상실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힘찬 움직임. 아제프는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충동감과 기대감에 엘제이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어쩌면 그녀가 제게 부족한 어떤 것을 채우리라는 막연한 믿음. 엘제이 티아세를 가지면 뭔가가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는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비논리의 향연에도 부드럽게 웃었다.
‘네 앞에서는 논리가 서지 않아. 왜일까? 너는 내게 뭘까? 나는 네게 뭐지?’
상대를 현혹하고 방심시키는 미소가 아닌, 목덜미를 노려 살을 찢어발기고 탐하기 위해 짓던 작위적인 웃음이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울림. 그는 아직 그 감각을 몰랐다.
따스한 봄볕 기운에 몸은 나른해지고, 꿈결이 내려앉은 밤하늘이 그를 꿈의 늪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아제프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최대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지금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지니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아제프는 아주 오랜만에 그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더디게 걸었다.
아제프는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단단한 품에 엘제이를 가두고 아주 부드럽게 말을 몰았다. 말이 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른한 문장의 울림을 따라 잠에 취해 있던 엘제이를 차가운 밤바람이 흔들었다. 엘제이는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
“깼어요?”
“우음…….”
아제프는 나붓이 내려앉은 밀색 속눈썹을 난감하게 바라보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듯 물었다.
“아제프?”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제 집에 데려가 엘제이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계속 제 시야에 가두고 조금씩 그녀를
잠식해 다시는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게, 그렇게 품에 가둬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내일 무슨 사달이 날지 몰랐다. 성가신 아이젠을 떠올린 아제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노렸던 이유가 그 못마땅한 티아세 家 때문이라는 걸 잊어버렸다. 어느새 티아세가 아니라
엘제이를 원하게 되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엘제이는 자신이 아제프 품에 안겨 잠들어버렸다는 걸 파악하고 경악했다.
아무래도 엘제이 티아세는 몸으로 하는 건 재주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각하는 것도 둔하고, 행동도 느렸다. 매번
느리고 어설픈 그녀를 보는 게 나쁘지 않았다. 느린 만큼 똑똑했기에 하나하나 짚어주고 알려주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아하하!”
청명한 웃음소리가 적막을 깨고 부드럽게 퍼져갔다. 엘제이는 유쾌하게 휘어진 청남빛 눈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휙
떨어트렸다.
‘또, 웃었다.’
“제가, 그랬나요?”
수줍게 웃고 있던 입가가 당황으로 흐려지고, 꽃잎을 머금은 분홍빛 입술이 방황하며 흐트러졌다.
뒤에서 엘제이를 끌어안은 남자는 진득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엘제이의 반응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저는 당신이 너무 걱정돼요. 괜찮으면 제게 병명을 알려주지 않을래요? 제이의 부친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저도 제법 가진 힘이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딱히 병명이 있는 건 아니고 남들보다 심장이 조금 약해서, 그래요. 어떻게 고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어서
……. 그냥, 요즘 좀 피곤할 뿐이에요. 평소에는 괜찮아요.”
‘거짓말이군. 이게 벌써 몇 번째지?’
“성력을 숨기려 한 것 같은데, 굳이 제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만큼 아팠다는 이야기니까요. 몸이 안 좋아서
어쩌죠? 저는 당신이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고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조소하듯 싸늘히 웃은 입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
걱정스럽다는 듯 속삭였다.
‘저것도 거짓이고.’
“그래요? 그거 기대되네요.”
화사한 꽃처럼 상냥한 목소리가 가시를 품고 내려앉았다. 왠지 차가워진 듯한 그의 목소리에 엘제이는 가슴이
따끔거렸다.
뭔가를 더 물어볼까 봐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버린 둥근 등이 보였다. 아제프는 솟구치는 열분을 내리눌렀다.
성격대로 했다가는 이미 파리하게 질린 안색이 시꺼멓게 죽을 것 같았다.
아제프가 냉정하게 생각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기겁하고 도망가면 큰일이었다. 아제프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참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엘제이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아제프가 상냥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자 머뭇머뭇 몸을
움직인 엘제이가 두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어깨를 타고 내려온 그의 겉옷을 꼼꼼히 둘러줬다. 어두운 색감의 쥐스토코르가 엘제이의 몸을
질척하게 휘감았다. 그는 늪에 빠진 여자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엘제이는 다정한 몸짓으로 단추를 여며주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단추를 조금 풀어냈다.
아제프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자 엘제이가 셔츠 한 장만 걸친 그를 보며 설득하듯
소곤거렸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이렇게 있어야 제 마음이 편하니까 그냥 입고 있어 주세요. 그래줄 수
있죠?”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그녀의 성품을 닮은 듯했다. 그는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엘제이가 풀어 내린 단추를 다시 꼼꼼히 여몄다.
진득한 집착을 담은 어두운 손이 엘제이를 꼼꼼히 휘감았다. 다시는 벗어나지 못하기를 빌면서,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기를 빌면서, 그는 단추를 채웠다.
화사한 꽃넝쿨은 어두운 마음을 숨기고 엘제이를 칭칭 휘감았다.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가리켰다.
밝은 백금의 실 아래로 진득한 어둠이 감춰졌다. 그가 애처롭게 웃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연함을 한껏
담은 목소리가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아제프는 당황으로 온몸이 굳은 엘제이를 보며 음습한 감정을 감추고 애처롭게 웃었다. 나를 봐달라고,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알아달라고, 그가 소리 없이 애원했다.
폐부를 꽉 쥐어짜는 쓸쓸함. 엘제이는 지독하게 쓴 그의 표정을 보며 간신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완전히
현혹됐다.
핑계가 없으면 변명할 거리를 주겠다. 항상 물러서는 그녀를 위해 아제프는 매일 겉옷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녀의
드레스 룸이 그의 옷으로 파묻히고, 돌려주고 돌려줘도 끝이 없을 때까지.
엘제이는 파르르 떨리는 백금빛 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쓸쓸히 웃는데,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도 그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가 왜 하나씩 돌려달라고 하는지, 겨우 옷가지 따위로 왜 저리도 애원하는지, 그런 기본적인 의혹은 엘제이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즐거운 듯 속삭이며 환하게 웃었다. 엘제이는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며 대답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디스가 끝나기 전까지는 더 이상 이 문제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아제프.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으니 괜찮을 거예요. 친구라도 좋으니,
당신 곁에 잠깐만 있을게요. 아주 잠깐이니까, 저도 힘들어서 그러니까……. 제발,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눈앞에서 반짝이는 청해의 파도가 마음을 휩쓸자 엘제이는 청해에 홀려 모든 걸 등져버렸다. 엘제이는 잠시간
모든 걸 놓아버리기로 했다. 그녀의 팔이 둥글게 휘어져 아제프의 등을 끌어안았다.
“내일이요?”
아제프가 예쁘게 웃으며 엘제이를 재촉했다. 어린 소년이 누이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싱그럽고, 맹수가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위험한, 의뭉스러운 미소였다.
엘제이는 조르듯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럴, 까요?”
‘아직도…… 많이 외로우세요?’
아제프에게는 우정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고, 사랑을 줄 연인도 필요했다. 말라붙은 가슴에 온기를 나눠줄 사람이
필요했다.
연인이 될 수 없다면 마음을 나눌 친구가 되리라. 엘제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당신을 돕고 싶어요.”
“저를요?”
“그럴 리가요. 저 보기보다 연약해요.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기 싫어 꽁꽁 숨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제이가
많이 도와주세요.”
저 여자를 갖겠다는 진득한 욕망이 끓어오를수록, 자신만 보게 하고 싶다는 독점욕이 폐부를 채울수록, 그는
질척한 감정을 숨기고 더욱 가련하게 웃었다. 툭 치면 떨어져 나갈 연약한 백합처럼 애련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애처로움이 깃들길, 그녀의 마음에 안쓰러움이 피어나길, 그래서 서서히 잠식되어 가길. 그는
그렇게 바라며 웃었다.
[도와줘. 나를 구해줘.]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슬프고 아팠다. 엘제이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 도와달라는 목소리. 자신의
도움을 구하던 간절한 목소리. 그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진실한 온정을 나눠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더 외롭지 않으리라. 그의 곁을 지키며 그에게 우정을 알려주리라.
사람과 교류하며 마음을 쌓아가는 법을 알려주리라.
속은 열화에 휩싸여 부글부글 끓는데 아제프의 얼굴은 여전히 꽃처럼 해사했다. 아제프는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을 피해 몸을 숙이며 엘제이의 귀에 속삭였다.
“승마, 요?”
원래부터 워낙 조그만 목소리라 들키지는 않았지만, 아주 작은 속삭임은 아니었기에 아제프는 주의를 줬다. 그는
제 귓가를 톡톡 두드리며 귓가에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굳이 지금이 아니라 기사들이 지나가면 해도 될 말이었지만, 엘제이는 사람을 홀리는 백금빛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엘제이가 더듬더듬 수줍게 속삭이는 사이, 보초를 서던 기사들은 지나갔다. 아제프는 멀어지는 기사의 기척을
읽었으면서도 엘제이의 귓가로 입술을 내렸다.
‘조금, 괴롭혀줄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4 화
24
아제프는 귓바퀴에 입술을 내리는 대신,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우거진 정원의 수풀 너머로 동그란 머리
두 개가 솟아올랐다.
“갔어요?”
“네. 승마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달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죠? 아까 자고 일어났을 때는 괜찮았잖아요.”
그건 아제프의 품에서 잠든 것에 대한 놀람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였다.
오매불망 아가씨를 기다리던 시아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며 창문을 열었다. 엘제이를 걱정하느라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녀인 척 누워 있던 시아가 엘제이를 보고 울 것처럼 얼굴을 흐렸다.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제 시녀를 보며 입을 벌리자, 시아를 협박한 남자는 뻔뻔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엘제이는 그와 있느라 걱정할 가족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걸 떠올렸다. 세심하게 배려해준 아제프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고마워요.”
엘제이가 부드럽게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안전하게 발을 내딛는 걸 본 뒤에야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봐요.”
아제프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는 게 너무 신기하고 행복했다. 엘제이가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고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음산하게 굳었다. 아제프는 창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뒤를 돌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던 제 손을 쥐며 생각했다.
[친구, 니까요.]
손을 잡아도 거부하지 않고, 덥석 끌어안아도 싫어하지 않았다. 아마, 그보다 더한 짓을 했더라도 자신이
애처롭게 애원하면 얌전히 몸을 맡겼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관찰해도, 그녀는 자신을 좋아했다.
그런 확신은 드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제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멈춰 섰다. 봄볕이 지고 차가운 달그림자가 뒤를 비췄다. 그는 봄날이 사라진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
‘아아, 알겠다.’
아제프는 입꼬리를 말고 피식 웃었다. 자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라는 말이
기분 나빴다. 아직 명확히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하나는 알았다. 친구는 싫었다.
“이거 어쩌지? 나는 싫은데. 친구는 당신을 온전히 가질 수 없잖아. 나는 다 가지고 싶은데. 그러니 이제 친구
따위는 안 해. 다른 게 하고 싶어졌어.”
***
엘제이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시아는 엘제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무척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시아는 할 수 없이 엘제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와 다시 만나겠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오늘의 만남은 끝났지만, 내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엘제이가 하얀 베개 위로 얼굴을 깊숙이 묻고 눈앞에 없는 상대에게 용서를 빌었다. 미리 용서를 빈다고 그녀가
한 짓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그를 기만한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엘제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기만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기만의 순간이 길어지기를 바랐다.
엘제이는 지독한 이기심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결국, 또 외면해버렸다. 그를 도와주기 위한 일이었다고 정당화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엘제이는 그녀를 덮치는 지독한 수마에 의아해하면서도 속절없이 끌려갔다. 수마는 그녀의 하얀 손을 붙잡고
고민이 없는 평온의 세계로 엘제이를 끌고 갔다. 그녀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엘제이의 요청에 시아가 화사한 진줏빛 드레스를 꺼내왔다. 보석이 박힌 것은 아니었지만 귀한 천에 자수를 새긴
드레스는 은은하게 예뻤다. 시아는 드레스를 한쪽에 잘 내려놓고 다가갔다.
시아가 허리에 달린 코르셋을 단단히 조이며 엘제이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아제프가 어젯밤 불쑥 찾아와 엘제이가 혼나는 게 싫으면 협조하라고 협박하듯 말하는 통에 시아는 할 수 없이
엘제이가 된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몸을 편안하게 감싸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혹시나 누군가에게 이 모습을 들켜 얻어맞고 쫓겨나는 건 아닐지
무서웠다. 다행히 시녀들이 안쪽까지는 확인하지 않아 침대에 누운 실루엣만 보고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언니!”
엘제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시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엘제이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엘제이의
방으로 다다다 들어온 엘리사는 막 코르셋을 여미고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엘제이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뛰어왔다.
그녀의 눈 색깔과 닮은 연한 분홍빛 드레스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쏜살같이 뛰어온 엘리사가 엘제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언니의 볼에 얼굴을 비볐다. 엘제이보다 조금 큰 엘리사가 복숭앗빛 뺨을 들이대며 친애를 표시하자
엘제이가 살짝 웃었다.
엘리사의 옷장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드레스가 많았지만 엘제이는 주로 차분하고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엘리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하게 자수가 놓인 진주색 드레스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엄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뛰면 안 된다고? 알아, 알아. 그것보다, 언니랑 같이 벨가못 영애가 주최하는 티파티 가자고 하려 했는데 언니
약속 있어? 누구랑?”
속사포처럼 빠르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사는 화장대 위에 곱게 개켜놓은 아제프의 옷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도 질척하게 달라붙으며 계속 겉옷을 걸쳐주는 태도에 확실히 기억했다. 엘리사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무례한 후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귀여운 얼굴에서 나오는 빠드득거리는 살벌한 소리에 엘제이가 아연한
얼굴을 했다.
엘리사가 저럴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엘리사와 아제프가 서로를 경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개입으로 책 속의 내용이 바뀔 수 있음을 확인했다.
엘제이의 말에도 엘리사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데 경어를 쓰기는 싫었다.
엘리사는 저를 밀쳐버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뭐 하게…….”
“세상에! 언니 그 남자 보러 가?”
“언니는 그냥 있어도 말 잘 타는데 연습은 왜 해! 흥! 그러지 말고, 나랑 티파티 가자. 그런 시시한 남자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야. 응?”
엘리사는 무구한 척 예쁘게 웃으며 언니를 현혹하던 남자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
엘리사가 마차에 난 창문을 열고 와락 소리를 질렀지만, 엘제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제이는 왕왕
소리치는 동생을 피해 마부를 재촉했다.
“빨리 출발해줘!”
***
“약병은 어디 있지?”
알모어가 서둘러 상자 하나와 말고삐를 아제프에게 건네줬다. 귀족 여인이 탈 법한 화려한 백마는 언뜻 보기에도
혈통이 좋은 준마였다. 아제프는 푸른 눈을 가진 백마를 바라보며 웃었다. 첫 선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니. 다른 말을 가져와라.”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말이었다. 아제프가 상자에서 꺼낸 약병을 꾹 쥐었다 놓으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알모어가 그의 눈치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원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자 찌르는 것처럼 차가운 눈이 알모어를
쏘아봤다. 목이 떨어지는 것 같은 오싹한 감각에 알모어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살벌한 분위기를 뚫고 알모어를 구원할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아제프를 보며 울상을
짓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보고하자 살벌한 공기가 탁 풀렸다. 아제프가 빠른 손길로 옷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알모어가 속으로 안도하며 숨을 길게 내뱉자 아제프의 걸음이 딱 멈췄다. 알모어가 다시 흠칫 긴장하며 그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아제프는 흐트러진 목깃을 잘 매만지며 정문으로 뛰어갔다. 뒤뜰을 넘어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저 멀리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봄이 보였다.
“제이!”
멀리 뻗어 나간 남자의 목소리에 마차에서 내리던 엘제이가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아제프를 발견한 엘제이의 얼굴이 수줍게 피어올랐다. 엘제이가 살짝 웃으며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오늘도 빛이 났다. 뛰어오는 탓에 바람결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백금발이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예쁘게 접힌
얼굴은 오늘따라 더 해사해 보였다. 엘제이는 승마복을 갖춰 입은 채 제 앞에 당도한 남자를 내려다봤다.
“제이, 이리 와요.”
엘제이는 티아세 家 기사의 손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아제프는 얼른 뛰어가 기사를 뒤로 물리며 엘제이의 손을
잡아챘다. 그가 소유를 주장하듯 기사를 날카롭게 쏘아보다가 엘제이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그보다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엘제이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올 때마다 눈높이가 조금씩 낮아졌다.
계단 하나를 남겨두고 엘제이의 눈과 아제프의 눈이 일직선으로 놓였을 때, 그는 참지 못하고 엘제이의 허리를
휘감아 땅으로 내려줬다.
“잘 왔어요.”
티아세 家의 기사라서 그런지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아제프는 찡그려지려는 이마를 펴며 엘제이 몰래 기사를
노려봤다. 그의 오싹한 시선에 기사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아제프는 재촉하듯 엘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
그녀의 가족들만 부르는 애칭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티아세 家의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둘 사이를 곁눈질했다.
아제프가 그녀의 손을 살짝 누르자 엘제이가 눈을 깜빡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엘제이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만족스럽게 웃은 아제프는 잘했다는 듯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연스럽게 엘제이를 이끌고 걸어갔다.
엘제이가 사납게 앞발을 휘두르는 동생에게서 지켜낸 그의 옷이었다. 아제프는 수줍게 옷을 내미는 엘제이를
보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입가는 못마땅함으로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옷…… 가져왔네요?”
“…….”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6 화
26
엘제이가 아연한 얼굴로 날아가는 옷을 지켜봤다. 뒤에 서 있던 알모어가 황급히 옷을 받으러 뛰어가는 게 보였다.
엘제이는 알모어가 겨우 받아든 옷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관심을 능숙하게 끌고 왔다. 그가 어깨에 달린 레이스 자락을 손끝으로 만지며 물어보자
엘제이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화사하게 달아올랐다. 예쁘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도홧빛 볼을 보자 괜스레 간질거리는 마음에 더 예쁘게 웃었다.
그녀는 저에게 조금씩 물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바들바들 떨던 여자가 이제는 먼저 손을
잡아 왔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손가락부터 시작해 손등을 타고 오르고, 팔을
물어뜯고, 결국에는 뼈 한 점 남기지 않고 모두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말이요? 아!”
그는 서투르게 구는 사람을 싫어했다. 승마하러 오면서 승마복도 안 챙기다니, 속으로 자신을 뇌 없는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랑스럽게 피어나던 얼굴이 울적하게 흐려졌다.
“왜 그래요? 무슨 걱정 있어요?”
“선물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래도, 되나요?”
어여쁜 새끼강아지가 맹수의 아가리로 팔을 밀어 넣었다. 아제프는 애원하듯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음습하게
쳐다보다가 곧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물음에 엘제이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햇살을 받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해사하게 웃었다. 속이 시꺼멓게 그을린 남자였지만, 그 얼굴만은 꽃망울이 터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
“어, 저희 둘만 가요?”
아제프가 노리는 게 그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아제프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제이는 제가 지켜드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기가 좋죠?”
엘제이는 목소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라 그런지 크게 무섭지 않았다. 그는 실력 좋은 기사니 크게
위험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의 발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꽃이 있나 보네요.”
달콤한 향기로 동식물을 유혹하는 아나이샤는 그 향만큼은 무해했다. 무해하고 애처로운 향기에 홀려 꽃을 꺾을
때, 그때야 아나이샤는 독니를 드러냈다.
울리는 것까지는 허용범위였지만, 이 여자가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기분이 좋은지 코끝을
찡긋거리며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말이 달리고 있는 숲을 살폈다.
아제프는 신중한 얼굴로 지형을 살피다 바위들이 보이지 않고, 촉촉한 흙이 가득 메워진 좁은 공터가 나타났을 때,
바늘을 세게 쥐고 말의 허벅지에 쑤셔 넣어 비틀었다.
“히이잉!”
말의 울부짖음과 엘제이의 비명이 같이 들려왔다. 요동치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은 남자는 빙긋 웃으며 오른쪽
손으로 엘제이의 머리를 꽉 감싸 안고 뛰어내렸다.
‘이걸 보여주면, 너는 얼마나 울 거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찬 남자는 정확히 자신이 원하던 지면으로 떨어졌다. 아제프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엘제이를
자신의 위로 올린 다음 흙이 푹신하게 깔린 곳에 어깨를 가져다 댔다. 그의 몸이 왼쪽 어깨부터 천천히 떨어졌다.
“윽!”
고통으로 찡그려진 이마와 촉촉하게 젖어든 눈, 고통으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남자의 얼굴을 가련하게
만들었다.
엘제이가 자책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엘제이는 자신이 방심하고 그의 품에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기에 그가
다친 것이라 믿었다.
아제프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았다. 저 때문에 그가 다쳤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싱그럽게 빛나던 초록색 눈이 눈물로 얼룩져 흐려졌다.
아제프는 제 뺨 위로 흐르는 눈물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속눈썹이 가련하게
떨렸다.
‘나쁘지 않군.’
한쪽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남자가 흰 뺨에 맺힌 눈물을 오른쪽 손으로 닦아주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처롭고 연약한지 툭 치면 떨어져 나갈 꽃잎 같았다.
“원한, 이요?”
“저길 보세요.”
엘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영애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았지만, 아제프는 사업가이자 외교관이었다. 일할
때의 그는 악랄했고, 아제프에게 원한을 가진 자 또한 많았다.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겠네요. 처음 사귄 인연인데, 이 일로 당신이 멀어질까 봐
두려워요. 제가 무서워졌나요?”
아제프의 눈가로 떨어진 빛나는 머리카락들이 얼굴을 가리고, 긴 음영을 만들어 그의 표정을 숨겼다.
아제프의 질척한 속내를 모르는 엘제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손이 흙이 묻은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슬픔에 젖은 듯 촉촉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외롭고 적적해 보였다. 슬픔이 차오른 파란 호수가 쓸쓸함을
호소하며 물기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제프는 진득한 집착을 숨기고 가련하게 엘제이를 쳐다봤다. 그의 청초한 낯빛에 홀린 엘제이의 눈가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
아제프가 대답을 재촉하며 엘제이에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숨결처럼 작았고, 꺼질 것처럼 연약했다.
일부러 낸 울먹이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촉촉이 젖은 목소리가 늑대의
아가리에 내려앉았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기회를 포착한 늑대는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잎사귀를 물어뜯어 제
뱃속으로 삼켰다. 푸른 잎을 한가득 매단 나무를 노리는 늑대의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윽!”
“아! 찾았어요!”
엘제이의 외침에 아제프는 떨어진 장갑을 자근자근 밟아 으스러트리며 엘제이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발에 짓밟힌
까만 장갑 위로 더러운 흙이 묻었다. 장갑은 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제가 찾는다니까요. 무섭지 않았어요? 다행히 근처에 다른 살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조그만 정도인 것
같은데……. 말려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붕대랑, 간단한
약초는 있는 것 같아요.”
엘제이가 안장에 달려 있던 주머니를 뒤지며 속삭였다. 미리 준비해둔 붕대와 약초들이 열린 주머니 사이로 힐긋
보였다.
“다행히 알모어가 준비를 철저히 해둔 모양이에요. 돌아가면 상이라도 줘야 할까요? 어깨를 다쳐서 혼자서는 못
할 것 같고, 제이가 좀…… 도와줄래요?”
“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네?”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얼굴을 붉히던 엘제이는 방금 자신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며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벗겨주세요.”
아제프는 산뜻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샐쭉
휘어진 눈꼬리에 달린 눈물점이 그의 얼굴을 유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아제프의 장난에 엘제이의 얼굴이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크게 당황해 손과 머리를 휘휘 저으며
최대한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울먹울먹하는 하얀 얼굴이 아제프의 탐심을 부르는 매개라는 것도 모르고 엘제이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는 어두움이 번지는 눈꼬리를 화사하게 접으며 선하게 웃었다.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처럼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분명 착하고 무구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 어쩐지 그가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제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뭐라 더 변명하지는 못하고 입을 어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벗어요?”
“제, 제가요?”
“풀, 풀게요…….”
돌아오는 대답이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은 반말이었지만, 긴장으로 손을 떠는 엘제이는 전혀 몰랐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르르 떨리는 손이 단추를 쥐고 몇 번이나 헛손질을 반복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는 엘제이를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유쾌해 죽을 것 같았다. 이 정도 고통쯤은
별거 아니었다.
화끈거리는 어깨의 통증에도 녹빛 잎사귀를 야금야금 물어뜯는 그의 얼굴은 반질반질 빛났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릴수록 하얀 셔츠에 둘러싸여 있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엘제이는 셔츠 사이로 흘깃흘깃
보이는 피부를 외면하려고 애쓰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풀어 내렸다.
“제이, 긴장돼요?”
선하게 웃은 맹수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겁먹은 새끼강아지를 툭툭 건드렸다. 덜덜 떨리는 손의 진동이
심해졌다.
엘제이는 하도 긴장을 많이 해서 배가 아프고,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눈앞이 새하얀 상태로 겨우 단추만 풀어
내리는 엘제이에게 그의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다, 다 했어요.”
“붕대랑 약초 주셔야죠.”
“아, 아! 네!”
엘제이가 더듬더듬 대답하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얼기설기 그어진 상흔이 가득한, 그의 참혹한
상체가 드러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8 화
28
맑게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 위로 상흔투성이의, 아픔이 가득한 그의 몸이 따갑게 스며들었다. 너덜너덜 찢어진
살가죽을 따라 그어진 상흔들이 발긋하게 피어나던 눈에 담겼다.
흘깃흘깃 보이는 그의 나신을 보고 부끄러움으로 발긋하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수줍음으로
물들었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쁘게 오물거리던 입술이 파랗게 죽어버렸다.
‘이게 다, 뭐야?’
몸은 자라도, 상처는 자라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컸다. 분명 그가 소년 때 입었을 상처인데도 흉터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란델 경, 그 상처…….”
아제프의 상흔 위로 희고 고운 손이 올라왔다.
눈물을 닦아내 촉촉하게 젖은 손으로 아제프의 상처를 쓸어 내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럽고, 애달팠다. 위로하듯
부드럽게 상처를 덧그리던 손은 손끝에 툭툭 걸리는 상처의 느낌을 참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제프의 몸에 무수한 흉터가 남았음을 알았다. 알고 있음에도, 꿈속에서 지켜봤음에도, 실제로 보니 숨이 멎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를 만나러 곱게 차려입은 드레스에 흙먼지가 쌓이고, 예쁘게 단장한 얼굴이 눈물로 말라붙고, 단정한 머리가
흐트러지도록, 그녀는 그렇게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오열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살심이 들었다.
그라시아 란델이 살아 있었다면 기필코 제 손으로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의 감정을 앗아가고, 그의 소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그의 몸에 뿌리 깊은 상흔을 남겨놓은 그 여자가 눈앞에 있다면 그와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그라시아 란델은 그의 몸과 마음을 다 망가뜨렸다. 그에게 그 흉악한 탐심을 사랑이라 속삭이며 엘제이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유년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누구의 사랑도 믿을 수 없는…… 혼자만의 단절된 세상에서,
당신은 얼마나 외로웠나요? 얼마나 아팠나요? 얼마나 사무치게, 슬펐나요?’
엘제이의 눈물이 대지를 적시고, 하늘을 깨웠다. 비통한 오열이 공간을 뒤엎고, 시간을 뒤덮었다. 싱그럽게
돋아나던 새싹이 비애의 이슬을 대지로 떨어트렸다.
아제프는 온몸으로 우는 엘제이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기 시작하면 달래주고, 아름답게 웃으며 그녀를
현혹하고 유혹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모습을 보자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숨통을
막은 듯 답답한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박동했다.
아제프는 길을 잃은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임기응변에 능숙한 남자도 그녀의 비통한 울음에 행동을 멈추고 시간이
멈춘 듯 멍하니 그녀만 바라봤다.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니 동정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일부러 다쳤고, 일부러 오래된
상흔을 보여줬다. 그가 다 계획한 것이었다. 그녀를 향한 지독한 집착을 채우려 스스로 계책하고 간교한 늪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아제프가 생각했던 반응은 저런 게 아니었다. 그는 엘제이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는데, 엘제이는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몸을 말고 오열했다.
‘그저 조금만 동정해주기를. 눈물을 글썽거리며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봐주기를. 딱 그 정도만 바랐을 뿐인데
…….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당신, 도대체 뭐야.’
아제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마음이 망가진 남자는 그녀의 울음이 제게 독화살이 되어 돌아올 줄 몰랐다.
저 여자가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이 너무 한심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끄윽, 읍!”
엘제이는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지 가슴을 부여잡고 손끝을 세워 바닥을 긁어 내렸다. 연약한 손톱이
흙바닥을 애처롭게 파고들고, 비통에 물든 피를 흘렸다. 따사로운 대지가 핏빛에 물들었다.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감싸며 흔들리는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흙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눈물을
토해내는 여자가 너무 슬퍼 보여서 마음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괴감이 거센 물살처럼 들어왔다. 벌레가 온몸을 파먹어도 지금처럼 불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갉작갉작
잠식되는 끔찍한 감각에 아제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제이는 여전히 몸을 말고 오열했다. 그는 웅크린 등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하다 혀를 씹었다.
다시는 저 여자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저 여자를 울리지 않겠다. 울리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길 바랐다.
너무 끔찍해서, 저런 모습 따위 다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보던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톱이 갈라져 핏물이 고인 걸 보고 달려가 엘제이의
한쪽 손을 붙들었다.
“그만해.”
아제프의 입술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그는 애초의 계획을 잃고 흔들렸다. 엘제이가 저렇게
된 게 다 그 때문이었다. 그가 엘제이를 울린 거였다.
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저런 모습도 볼 일이 없었다. 아제프는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끔찍한 기분에 이를
갈며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엘제이를 노려봤다.
“됐으니까! 울지 마…….”
아제프의 목소리는 엘제이에게 닿지 않는 듯 그녀는 땅을 붙들고 우는 걸 멈추지 못했다.
그에게 붙들리지 않은 엘제이의 오른쪽 손이 여전히 땅을 파고들고 흙을 짚었다. 예쁘게 정리된 연약한 손톱이
그녀의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꺾여 나갔다.
“그만하라고!”
아제프의 목소리에 엘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엘제이는 눈앞에 보이는 그의 상체에 손을 올리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보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소년의 신음이 귓가를 댕댕 울렸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고, 비명을
질러도 들리지 않는, 꿈이 떠올랐다.
“……아팠어.”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피 튀기는 고문 속에서 괴롭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고독함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아……. 아흑,”
아제프는 제 몸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름다운 독화가 독니를 감추고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달래듯 속삭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프지 않았어. 적응하니까 다 참을 수 있었어. 아주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렇게 울지 마.”
사막의 태양 아래에 장시간 달궈지고 태워져 버석거림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도 이 메마름을 채워주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녹색은 생명의 빛이었다. 엘제이의 녹안을 가득 적신 생명이 또르르 떨어져, 그의 상처에 닿았다.
엘제이의 눈물이 그의 온몸을 적시고, 온몸을 타고 흐르며 어린아이가 한 장난처럼 그어진 상처를 다독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9 화
29
후회라는 뒤늦은 감정이 찾아왔다. 느리게 공명하는 두 개의 심장이 서로의 아픔을 쓸었다. 아제프의 눈가도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흰 뺨을 눈물로 적시고, 어여쁜 얼굴에 눈물을 한 가득 단 채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그의 몸에 눈물이 떨어져
그가 그녀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엘제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아프지 마세요. 다치지 마세요. 제발, 당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요.”
엘제이는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외롭지 않기를 바랐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아제프는 그녀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슬프게 우는 대신, 예쁜 웃음을 짓길 바랐다.
그것만이 그의 바람이었다.
아제프의 심장에 아주 작은, 초록빛 씨앗이 내려앉았다. 불길할 정도로 시꺼멓게 죽은 대지 위로 싱그러운 봄빛
씨앗이 몸을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불어온 것일지 모를 미풍을 타고, 초록색 빛무리가 날아들었다. 허공을 빛내는 초록 물결이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이게 무슨…….”
빛무리는 넘실넘실 흔들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따스한 초록빛이 인사를 건네듯 그의 손을 톡톡 쳤다. 손에 닿는
느낌에 깜짝 놀란 아제프가 엘제이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아제프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물러났다. 그가 경계하자, 새파란 마나가 공기 중에서 윙윙거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제프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빛무리들이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그의 거부에 슬퍼하는 것 같았다.
산산이 부서져 빛무리가 되었던 것들이 아제프의 가슴을 간질이고,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산들산들 솔바람을 타고 흐르던 빛무리는 천천히 아제프의 피부를 타고 올랐다. 그의 팔 끝부터 느긋하게 적신
빛들은 가슴에 닿자 쏜살같이 쏟아져 스며들었다.
빛으로 뒤덮였던 잔혹한 상처들이 투명하게 변해 피부 밑으로 사라졌다. 엘제이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붉은
상흔들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매끈한 피부만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하!”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성력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따스했고, 부드럽게 넘실거리던 그것들은 자애의 빛이었다.
“제이?”
엘제이는 이상하리만큼 얌전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아제프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엘제이를 흔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제프는 어느새 멀쩡해진 어깨를 느끼며 엘제이의 팔 밑쪽에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부드럽게 감싸 안는
손길에도 엘제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혼곤하게 풀린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갓 피어난
새싹처럼 싱그럽던 녹안이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여전히 몽롱한 얼굴을 한 엘제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항상 따뜻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열이 났다.
“아파.”
엘제이가 울먹이며 고통스러운 속삭임을 토해냈다.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목소리에 피가 바짝 마르고, 온몸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갓 태어난 아기를 대하듯 보드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쥐어짜낸 상냥함에 울먹임이 번졌지만, 엘제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엘제이는 아프다고만 속삭였다. 아제프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엘제이를 안아들고 일어났다.
피이이잉, 쾅!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해둔 것이었는데, 만약 이것조차도 없었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 상황이 끔찍했다.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일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아제프는 시종들을 모두 놔두고
떠나온, 아니 애초에 이런 계획을 짠 자신을 원망했다.
새빨갛게 번지는 핏물에 엘제이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며 올라온 손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헐떡거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뭔가 잘못될 것 같아서, 힘들게 찾아온 그의 봄이
허상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죽고 싶었다. 과거의 저를 죽여 버리고만 싶었다.
“당신을 괴롭히지 말걸.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줘요. 제가
금방, 고쳐줄게요. 그러니 제발, 제이.”
엘제이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에게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고통에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제프가 저렇게 우는데, 떠날 수 없었다.
계속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아제프는 점점 감기는 초록색 눈을 보고 엘제이를 흔들었지만 몽롱하게 풀린 눈은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엘제이가 실신하듯 잠들었다.
“제이!!!”
엘제이가 성력을 쓴 게 아니라 미지의 무언가에 공격받은 거라면 뭔가 이상했다. 왜 그에게는 호의를 베풀던 빛이
엘제이에게만 고통을 준다는 말인가.
아제프는 수척한 얼굴로 잠든 엘제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펄펄 끓던 열은 가라앉았다.
파랗게 질렸던 얼굴도 조금 수척할 뿐 생기가 돌았다.
“하아.”
“아제프……. 아제프.”
“글쎄요…….”
아제프는 자신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의원을 매섭게 노려봤다. 수도에서 저명한 의원이라는 자가
하는 말이 저따위라니 기가 막혔다. 그의 살기 띤 눈에 의원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이불로 꽁꽁 싸매놓고 겨우 손목 진맥만 시키는데 어떻게 모든 병을 알아내겠는가. 의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아제프의 흉흉한 눈을 보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아제프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낙마할 때 머리를 잘 감쌌고, 제 위에 올려 충격을 줄여줬지만
워낙 허약한 사람이니 그 정도로도 다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진?”
아제프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이불에 둘둘 말려 있는 엘제이를 바라봤다. 급해서 저렇게 두기는 했는데, 그러고
보니 좀 씻겨야 할 것 같았다.
아제프는 복진을 위해서는 코르셋을 벗겨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불을 벗겨내자 흙바닥에 주저앉아 풀물이 짙게 밴 진줏빛 드레스가 침대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그렇게
무거운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코르셋이 답답할 거라는 생각이 든 아제프가 목 아래에 달린 리본 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답답한 드레스만 벗겨줄 생각이었다. 안에 페티코트를 입었으니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하는 건
치료행위였다.
순진한 처녀를 희롱하고 있다는 묘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는 양심이 찔리는 걸 느끼면서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아제프는 날이 더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살며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돌아왔다. 상쾌한 봄바람이 불어오자 좀
괜찮은 것도 같았다. 아제프는 이제야 겨우 끈 하나를 풀었을 뿐이었다.
‘드레스가 원래 이렇게 복잡하던가? 풀어야 할 게 하나, 둘, 셋……. 이런 젠장!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거야.’
“우음.”
“……!”
“제이?”
“하아.”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잠든 누군가를 위해 숨죽여 소리를
삼키는 건 아직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엘제이의 등에 겹겹이 매달린 리본 끈을 보자 또 한숨이 나왔다. 원래 이렇게 복잡한
것이지만 오늘따라 정도가 더 심해 보였다.
같은 이불을 덮고 한 침대에 누워 평안한 오수를 즐기는 것. 가슴 따뜻한 편안함에 아제프의 신경이 느슨하게
풀렸다.
주인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소리였다. 두근두근 두 개의 심장이 공명하는 소리에 아제프의 눈에도 졸음기가
쏟아졌다.
아제프는 심각한 불면증 환자였다. 의심이 많아 다른 사람 옆에서는 절대 잠들지 못했는데, 엘제이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놀랐던 가슴이 진정되고 평화로운 숨결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그 포근한 솜털 같은 보드라운 감각은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도 평화롭게 잠들도록 했다.
두 심장이 나란히 공명하자 잠든 엘제이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흰
뺨 위로 떠오르는 생기가 꽃처럼 사랑스러웠다.
아제프는 경계심을 버린 맹수처럼 배를 내보이며 자신의 품 안으로 작은 새끼강아지를 감췄다. 맹수의 꼬리같이
강건한 팔이 엘제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경계심이 많아 성인이 되어서는 방문 앞을 지키는 기사의 기척에도 잠을 청하지 못했던 아제프는 얌전히 자는
엘제이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후작님이요.”
알모어는 그것도 기억 못 하냐는 듯 미묘한 얼굴로 아제프를 쳐다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분명 공손한
어조였는데, 아제프는 왠지 모를 기분 나쁜 느낌에 얼굴을 콱 찌푸렸다.
“…….”
알모어의 눈이 힐끔 벗겨진 엘제이의 드레스를 향했다가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둘을 쳐다봤다. 엘제이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는데, 드레스가 벗겨져 있다.
알모어의 공손한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일류 집사다운 능숙한 태도로 감정을 감추고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아제프에게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북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차가운 얼굴이 알모어에게 바짝 다가갔다. 알모어의 귓가 바로 옆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네! 그렇습니다!”
“목소리를,”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1 화
31
아까까지 음산하게 읊조리던 남자는 천사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다정한 음색으로
말하며 몽롱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엘제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제프…….”
아제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의원에게 손짓해 그녀를 불렀다. 의원이 누워 있는
엘제이에게 다가왔다. 엘제이는 멀쩡한 자신에게 손을 올리는 의원을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엘제이의 물음에 아제프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가 의원을 조금 물리고 엘제이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제프가 철없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히 속삭이자 엘제이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치료 먼저 받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팠다. 그가 잘 감싸줘서인지 말에서 떨어졌을 때도 자신은 멀쩡했다. 엘제이는 자신이 왜 복진을
받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의원이 뒤로 물러나자 엘제이가 서둘러 옷자락을 여몄다. 아제프의 재촉에 복진을 받기는 했지만, 천이 가리지
않았다면 문장을 보일 뻔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
의원의 말에 다행이라는 듯 숨을 길게 내쉬던 아제프가 식은땀이 몽골몽골 맺혔던 하얀 이마를 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의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약을 지어 올리겠다고 이어서 말했다. 아제프는 의원의 말을 들으며 뼈대만
남은 가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빠진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끼릭-
아제프에게 빠져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던 엘제이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알모어가 의원을 데리고 나가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잠깐,”
아제프가 한숨을 삼키며 엘제이의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이 사고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다정하고, 엄했다.
아제프의 말에 엘제이가 기억을 더듬듯 생각에 잠겼다. 엘제이가 기억하는 건 그의 옷을 벗겨주던 것뿐이었다.
흘깃흘깃 보이던 그의 몸을 떠올린 엘제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는 깜빡했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며 화사하게 웃었다. 예쁘게 웃은 남자가
제 어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엘제이를 달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위험한 능력이었다. 아니, 그게 엘제이의 것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고, 아직
모른다면 굳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 몸은 기억나요?”
“……일부러 본 거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더 부끄러운지 엘제이가 이불을 코끝까지 올리고 눈만 살짝 내놨다. 그의 눈치를 살피듯 데굴데굴
구르는 초록빛 눈동자는 진실만 말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정신없이 굴러가는 초록색 눈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역시 기억이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기억이
끊긴 지점이 옷을 풀어준 후라는 걸 대강 짐작했다.
아제프의 눈이 작게 좁혀졌다. 그가 고심하며 머리를 굴렸다. 사람은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오면 저
스스로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아제프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주먹을 옴팡지게 쥐고 본인의 결백을 호소하는 엘제이의 모습을 보니 장난기가 솟구쳤다. 아제프는 짙은 웃음기를
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에 속아 넘어간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이제 알았다는 듯
흘러나오는 탄식에 아제프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정말 간신히 참아냈다.
장난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무척 진지했다. 아제프는 이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놀리듯 피식 웃었다.
“다음에 또 하려고?”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2 화
32
“…….”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는지 엘제이가 잠시 머뭇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일부러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지만, 오늘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당연히 도와야 할 터였다.
엘제이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당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그건 배 속이 뜨거워지는 감각이었다. 몸 안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온몸을 빠르게 달궜다. 늘 차가웠던 체온이
올라가고, 더없는 만족스러움으로 배가 불렀다. 뱃속을 채우는 충만감이 몸을 뜨겁게 달구며 뭉텅이째로 굴러오는
느낌.
“아니에요!”
“난 또 해도 되는데.”
“네?”
아제프는 가장 화려한 장미였다. 가시를 삼킨 장미가 고혹적인 향을 뿜으며 유혹하자 엘제이의 얼굴이 홀린
것처럼 몽롱해졌다.
아제프는 유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아직은 지켜줘야
할 선이 있었다.
아제프는 아까의 색향이 거짓이라는 듯 선하고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걱정을 한껏 담은 손이 엘제이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엘제이는 그제야 고통을 느끼는지 조금 놀란 얼굴로 붕대가 감긴 손끝을 내려다봤다. 손끝을 조금 오므리자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손톱이 다친 듯 따가운 감각이 몰려오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언제 다쳤지?’
엘제이는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제프는 갸우뚱 움직이는 얼굴을 진득하게
쳐다봤다. 엘제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물었다.
“아- 제 손이 왜 이러죠?”
엘제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에서 떨어질 때 다친 것은 아니었다. 엘제이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손끝을
보다가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그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엘제이가 막 아제프의 상처에 대해 생각했을 때, 슬프게 내리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제프가 미안한 감정을
한가득 담아 엘제이의 손끝을 매만졌다.
“하아-”
아제프가 뜨끈해지는 눈가를 누르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용암을 삼킨 것처럼 온몸이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아파요?”
두 사람의 무게를 받아낸 몸이었다. 어깨만 다치고 끝난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바로 움직이면 좋지
않을 터였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중간에 속도를 늦춰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제프는 걱정스러운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왼쪽 어깨가 아픈 척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미간을 힘겹게
찌푸린 그가 깜빡했다는 듯 당황스럽게 웃으며 왼쪽 어깨로 손을 올렸다.
“습관이라 저도 모르게 다친 쪽으로 누웠네요. 아까 약을 먹었더니 고통이 둔해졌었나 봐요. 시간이 지나니
아프네요.”
다쳤다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 멀쩡하게 움직였지만, 그의 걱정으로 울상이 된 엘제이는 깊게 의심하지 못했다.
엘제이는 찡그려도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아제프는 특히 자신의 안전에 신경을 세우는 엘제이를 떠올리며 불쌍한 척 얼굴을 흐렸다. 그가 고통을 참아내듯
붉은 입술을 짙게 깨물고 가느다란 속눈썹을 팔랑였다.
아제프는 페티코트 차림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갈 듯 몸을 뒤트는 엘제이를 황급히 잡아챘다.
그가 엘제이 몰래 눈을 움직여 그녀의 몸을 쭉 훑어봤다.
절절하게 튀어나간 목소리는 쉽게 그녀의 긍정을 받아냈다. 엘제이가 죄책감 섞인 눈으로 그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제프는 있지도 않은 고통을 느끼는 척 엄살을 부렸다. 홀라당 넘어간 엘제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좀 더 쉬라는 듯 그를 눕히려 했다.
아제프는 자신을 눕히려는 가는 손목을 잡아 냉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렇게 누워서도 별 위기의식이 없는지
순하기만 한 엘제이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지만, 부끄러운지 수줍은 안색을 보며 언짢음을 감췄다.
그렇게 둘이 잠시 쉬고 있자, 방문을 살며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제프는 알모어에게 시녀를 데려오라
명령했던 것을 떠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중에,”
“아, 좀 비켜보세요.”
그의 평화를 망치러 온 방해꾼을 발견하자 아제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처럼 흉흉한
얼굴이 된 남자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눈을 노려봤다.
“티아세 양이 여긴 웬일이죠?”
사탕처럼 달콤한 분홍빛이 지지 않고 맞섰다. 새침하게 올라간 눈이 언니를 찾아 삭삭 빠르게 움직였다. 엘리사의
눈이 문틈 사이로 보이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분노로 타올랐다.
‘이 막돼먹은 놈!’
아제프는 도전적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엘리사를 보며 코끝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엘제이와 평화롭게 쉬고 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방해꾼이 나타났다. 엘제이가 이 여자를 발견하면 돌아간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떠올랐다.
둘은 날카로운 혀를 장착하고 서로를 쭉 훑어봤다. 공격 태세에 들어간 둘의 사나운 기세에 알모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 도망갔다. 괜히 곁에 있다가 불똥 맞고 싶지 않았다.
두 마리의 흉포한 야수가 형형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눈빛으로 몸을 할퀴고 때렸다. 간을 보듯 서로를
노려보던 중 성격 급한 엘리사가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후작님, 비켜주시죠?”
아제프는 귀청을 때리는 꾀꼬리처럼 낭랑한 목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제 동생이 찾아왔음을 알았는지
엘제이가 침대 위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3 화
33
아제프가 차가운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엘제이가 보이지 않으니 대놓고 불량한 얼굴이 된 남자가 삐뚜름한
얼굴로 까딱까딱 목을 풀며 천천히 읊조렸다.
“당신이나 좀 비키시죠?”
‘막았다 이거지?’
입꼬리를 한쪽만 말고 놀리는 것처럼 얄밉게 웃은 엘리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한껏 미안하다는 듯 얄궂은 음색을
냈다.
“어머, 이거 죄송해서…….”
“……해보자는 겁니까?”
아제프는 아직도 허둥지둥 움직이는 엘제이의 기척을 살피며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그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그가 보호해야 하는 건 엘제이뿐이었다.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둘 사이로 짙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둘은 머릿속으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을
고심하며 동시에 코끝으로 서로를 비웃었다.
“하!”
“흥!”
엘리사가 넘어진 걸 보면서도 팔짱만 끼고 있던 아제프가 문 쪽으로 다가오는 엘제이의 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엘제이가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돌린 아제프가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리사의
팔을 꽉 비틀어 눌렀다.
‘좀 아플 거다. 요놈아.’
‘이 빌어먹을 여자가!’
엘제이는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것 같은 둘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의 모습에 둘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예쁘게 웃다가 서로의 팔을 툭 놓고 엘제이를 향해 달려갔다.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밀치며 문틈을 벌리고 들어온 엘리사와 아제프가 엘제이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엉겨 붙었다.
그건 지독한 동족혐오였다.
엘리사는 제집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걸어가 중환자 모시듯 엘제이를 침대 위에 앉혔다. 여기가 저 남자의
방이라는 게 껄끄러웠지만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는 언니를 보자 저절로 나온 행동이었다.
엘제이는 걱정하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에 난 상처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엘제이는
심하게 다쳤던 아제프를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니, 나는 별로 안 다쳤는,”
“아니, 난 괜찮은…….”
아제프는 정신 산만하게 발을 쿵쾅쿵쾅 구르는 엘리사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여자만 없었어도 엘제이와 낮잠을 즐기고, 제 마음에 드는 옷으로 골라 입힌 다음, 즐겁게 식사할
생각이었다.
그놈의 가족, 가족. 아제프가 당당한 얼굴로 엘제이의 가족이라 주장하는 엘리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뜩이나 엘제이를 돌려보내야 하는 게 짜증이 나는 참이었는데, 가족이라는 여자가 튀어나와 그녀와의 시간을
방해하자 화가 솟구쳤다.
아제프는 엘리사를 고문하는 잔인한 상상을 하며 오싹한 눈으로 엘리사를 노려봤다. 엘제이가 아끼는 동생만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끌고 와 엘제이의 정보를 토해내라고 심문하고 싶었다.
아제프는 엉엉 울던 엘제이를 떠올리고 취소한 계획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왕왕거리며
떠드는 엘리사를 시퍼런 눈으로 노려보며 비꼬았다.
주인을 차지하기 위한 용맹한 짐승 두 마리는 서로를 거칠게 물어뜯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엘제이만 없었으면
진작 피가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둘 사이 이간질해요?”
화르르, 콰지직, 우당탕, 평화로웠던 방 안이 순식간에 으르렁거리는 맹수 두 마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엘제이는
아파지는 머리를 짚었다.
“둘 다 그만하고, 일단,”
엘제이의 작은 목소리에 잠시 싸움을 중단한 것처럼 보이던 둘이 서둘러 엘제이의 머리를 짚어보거나, 뺨을
만지는 등 난리를 부렸다.
아제프의 얼굴 위로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거치적거리는 엘리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더 정신없어지는 상황에 엘제이는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배에
힘을 준 엘제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둘 다, 그만 좀 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4 화
34
‘이크. 언니 화났다.’
“했어.”
“했어요.”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잘못했어, 언니.”
둘의 입에서 나오는 잘못했다는 시인에 엘제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저게 거짓말이고 연기인 줄은 알지만,
반성한다는 듯 기가 죽은 얼굴들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뾰족한 삼각귀가 축 늘어진 고양잇과 맹수 두 마리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아기강아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조금 딱딱한 엘제이의 얼굴을 본 아제프가 옆에서 불쌍한 척 꼬물거리는 엘리사를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며
못 본 척 얼굴을 돌려버렸다.
엘리사는 이게 다 아제프 탓이라고 생각하며 엘제이 몰래 그의 발을 자근자근 밟으려 했다. 이 자리에서 아제프가
화를 내 엘제이한테 혼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짓이었지만 엘리사의 생각보다 아제프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발을 쓱 피하며 애처로운 얼굴로 일어나 미안하다는 듯 제이의 손을 잡았다. 눈부신 미안에 처연함이
빗장처럼 걸려 애달픔을 자아냈다.
엘리사는 하얀 팔뚝을 내보이며 칭얼거리듯 엘제이에게 매달렸다. 귀여운 얼굴이 아프다는 듯 울먹울먹 흐려졌다.
엘제이는 살갗이 발갛게 달아오른 엘리사의 팔을 보며 저도 모르게 아제프를 쏘아봤다.
아제프는 속으로 엘리사를 때려죽이는 상상을 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엘리사가 비명을 지를수록 마음이 점점
가뿐해졌다.
순식간에 서글픈 표정을 자아낸 아제프가 엘리사에게 쥐어 뜯겨 피가 비치는 팔뚝을 내밀며 저도 속상하다는 듯
가련하게 말했다.
“둘 다 서로에게 사과하세요.”
“리사!”
‘빌어먹을 여자.’
돌아서 있느라 그를 보지 못한 엘제이와는 달리 그의 입모양을 똑똑히 본 엘리사는 뒷목 잡고 넘어갈 뻔했다.
아제프가 고소해하면서도 불쌍한 척 눈썹을 내리고 자신도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엘제이는 좀 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었다. 아제프는 곧 다가올 포상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무척 여유로웠다.
날라리 환자지만, 환자 버프를 받은 승리자 아제프에게는 엘제이와의 달콤한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패배자
엘리사가 결국 언니한테 혼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나가는 엘리사를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속이 후련하고 시원했다. 이제 엘리사만
떠나면 엘제이가 다시 제 차지가 될 걸 안 남자는 언니 손을 꼭 잡고 가기 싫다며 빈둥거리는 엘리사를 자비로운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엘제이는 옷차림 때문에 엘리사를 방문 앞까지밖에 마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무룩해 하는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엘리사는 살쾡이처럼 튀어나가려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불쌍한 척 말끝을 흐렸다. 누가 보면 영원히 헤어지는 것줄
알 만큼 절절한 모습이었다.
아제프는 툭 튀어나온 입으로 불퉁히 바닥을 차는 엘리사를 서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엘제이가 돌아갈 곳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를 다 치워버리고 저 혼자만 유일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엘리사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새침한 얼굴로 그를 휙 노려보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엘제이는 엘리사가 계단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그녀가 내려가자 창문으로 다가가 동생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 것이라고 여겼던 애정이, 그녀의 동생에게도 똑같이 향해 있었다. 아제프는 그의 것이라 믿었던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손을 꽉 쥐어짜며 웃고 있는 엘제이를 바라봤다.
“아제프,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아제프?”
엘제이는 갑자기 달라진 아제프의 반응에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숨이 막히도록 꼭 끌어안아
오는 모습이 어쩐지 이상했다.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불안정해진 모습이 마음 아팠다.
몸은 다 컸지만 마음이 어긋나게 자라버린 사람. 그래서 누구보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사람.
혼자 살아온 세월이 누구보다 길지만, 그렇기에 혼자 남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강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어딘가 망가진 불안정한 사람이었고,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5 화
35
엘제이의 마음은 그를 향해 있었고, 아제프는 그 마음을 붙잡아 둘 자신이 있었다. 그 마음만 확실하다면, 조금
더디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아직은 포기하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많은 것이 탐났다. 하지만 엘제이만 곁에 있어준다면,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제나 허기지게 만들던 알 수 없는 갈증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긴 보폭으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간 아제프는 막 복도를 걸어오는 알모어를 발견하고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집무실로 끌고 들어갔다.
쾅-
“알모어.”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나오는 뜨거운 숨결과 긴장으로 핏대가 설 만큼 꽉 쥔 손.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반질거리는 짙고 푸른 눈.
“후작님?”
약자가 되는 느낌. 그 끔찍한 세월이 떠올라 진저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걷다 보면 굽이진
골목길에 소담히 피어 있는 들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부드럽게 피어나는 미소와 깊게 팬 볼우물을 생각하며 잔인한 충동을 참아냈다. 오랜 시간 엘제이와
함께 있다 보면, 어쩌면, 자신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늘 나른하고 퇴폐적이던 남자의 분위기가 변했다. 가까이 가면 그 향기에 질식할 것 같은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누구든 찔러버릴 듯 가시를 세우던 사람이 부드럽게 풀렸다.
알모어는 최근에 생겨난 아제프의 변화가 무척 기꺼웠다. 서릿발 같은 시선과 냉랭한 명령은 여전했지만 늘
신경질적이던 사람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알모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후작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알모어를 바라보던 아제프의 얼굴이 괴기한 것을 본 듯 일그러졌다. 뭔가
굉장히 기분 나빠졌다. 아제프가 소름 돋은 팔을 쓱쓱 문지르며 알모어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그를 쳐다봤다.
“네?”
감동에 젖어 있던 알모어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알모어는 진지하게 그의 못생김을 관찰하는 아제프를 보다가
입꼬리를 씰룩씰룩 흔들었다.
물론 아제프에 비교한다면 심해의 해양생물 같은 얼굴이었지만 알모어는 제 나름대로 깔끔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좀 억울한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하자 금세 감정을 수습했는지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 아제프가 냉랭하게 물었다.
알모어는 그간 들여보냈던 간자들이 한 짓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암살, 독살, 질식사 등. 대부분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던 간자들의 일을 떠올리며 알모어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는 당황한 얼굴을 한 알모어를 천하의 멍청이를 보듯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휙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시간을 꽤 끈 것 같은데 그사이에 엘제이가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쭈뼛쭈뼛 저에게 걸어오는 몸짓, 그 순간을 또 한 번 보고 싶었다.
***
엘제이의의 문장이, 곧 사라질 듯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엘제이는 망연한 얼굴로 문장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문장을 문질렀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옅어진 문장이 아롱아롱 흔들렸다.
문장 위를 뒤덮었던 빛무리들이 모두 사라지고 작은 흔적처럼 옅어진 문장은 문지르면 지워질 듯 연약해 보였다.
엘제이에게는 문장의 유무를, 아제프에게는 문장이 발하는 방법을. 신은 그들에게 기회를 줬고, 이제 문장의
행방은 둘의 손에 달렸다.
엘제이는 핏물이 망울진 가슴을 내려다봤다. 따갑지도 않은지 몇 번 더 문장을 문지르던 엘제이는 사그라질
것처럼 연약하게 흔들리다가도 끝내 없어지지는 않는 문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엘제이가 문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말라는 듯 웅웅거림을 토해내는 문장이 미웠다. 저를 미워하지
말라는 듯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문장이 싫었다.
문장이 너무 밉고 싫은데, 그래도 문장이 있었기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엘제이는 가엽게 웅웅거리는 문장을 노려보며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문밖에서 엘제이를 기다리던 아제프는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섬뜩한 고통을 느끼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엘제이의 비명 섞인 외침에 놀란 아제프가 서둘러 달려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아-”
그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엘제이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곧 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쿵쾅 문을 두드리는 아제프의 힘에 문이 거칠게 요동쳤다.
많이 다치기라도 했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그는 유독 솔솔 풍기는 향내에 고개를 갸우뚱 흔들며
엘제이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몸을 꼼꼼히 살펴봤다.
‘어디서 나는 거지?’
주변을 맴돌다가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는 아제프의 행동에 하얗게 질렸던 엘제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제이…….”
“제가 지금 달거리를,”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6 화
36
엘제이의 대답에 한 걸음 물러난 아제프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아제프는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엘제이를 보며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아제프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혀끝이 저리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하며 엘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청초하면서도, 고혹적이었다.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사과를 반복하며 엘제이의 목덜미를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다시 한 번 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꽃잎을 뭉개듯 아프지 않게 화인을 찍고 제 것이라는 표시를 남겨두고
싶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살짝 고개를 들었던 엘제이가 푸르게 번뜩이는 청안을 마주보다 다시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엘제이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발끝을 향하고 있었다. 한동안 목덜미에서 시선을 못 떼던
아제프는 시선 둘 곳을 찾아 여기저기 눈을 돌렸다.
그는 어디서 들은 게 있는지 담요를 받아와 엘제이에게 다가왔다. 몸을 스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남자의 탄탄한 손이 담요를 살짝 떨어트렸다. 그는 차마 덮어주지는 못하고 머뭇머뭇 손을 떼어냈다.
“괜, 찮아요.”
재빨리 돌아온 엘제이의 대답에 아제프는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면서도 연신 눈을 흘깃거리며 엘제이를 살폈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엘제이가 손끝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해요.”
아제프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연신 엘제이에게 향하는 시선을 막을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담요를
꾹 쥐고 있는 엘제이를 바라본 아제프가 시선을 내려 작은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는 놓지 않을 것처럼 담요를 꼭
붙든 앙증맞은 손가락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식사하는 내내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에도 어색하게 가라앉았던 공기는 부드럽게
풀리고 달콤하게 달아올랐다.
식사가 끝나자, 가볍게 차를 마시던 아제프는 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너무 늦기 전에
돌려보내 줘야 했다. 원래는 새벽이 다 되도록 보내줄 마음이 없었지만, 엘제이가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아제프가 불긋한 마음을 숨기며 가볍게 말했다. 발끝을 보고 있던 엘제이는 사뿐히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았다.
부드럽게 풀린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보며 손을 잡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그의 눈은 혹시 그녀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그녀의
주위를 바쁘게 살폈다.
엘제이는 밥을 맛있게 먹고 고롱고롱 애교를 피우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해사한 얼굴 위로
사랑스러운 볼우물이 깊게 팼다. 그게 무슨 이유에서든 아제프의 기분이 좋다면 엘제이 또한 그랬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옅은 희망으로 조금 들뜬 상태였다. 아직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문장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계속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
그가 원하는 게 자신이 아니라 티아세 家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엘리사는 알체스테를 만나 황궁에 갈
것이었고, 그녀는 공작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계속 그의 옆에서 지금처럼 있고 싶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는 티로시 영애에게 보냈던 편지를 떠올리며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아제프를 보면 마음이 무척 아플 것 같았다.
엘제이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지만 오늘도 낙마한
걸 봐서는 자신은 승마에 재주가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한번 있고 나니 사실, 말을 타는 게 조금
무서워졌다.
아제프는 오늘 일부러 그녀를 떨어트린 것이 너무 미안해졌다. 다치게만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탓에 그녀를 상처 입혔다. 아제프가 미안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엘제이는 그의 대답이 두려워서, 아제프는 엘제이가 물러설 게 두려워서, 그들은 속내를 감추고 서로를 바랐다.
곧 끊어질 듯 연약해진 인연. 하지만 달리 본다면 그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서로를 간절히 바라는
시작점에서 둘의 인연이 얼기설기 엮이기 시작했다.
아제프는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끼며 살갑게 웃었다. 그는 말간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싱그럽게 웃었다.
‘이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7 화
37
경계를 세운 말에도 아제프는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엘제이의 머리를 상냥하게 토닥였다.
저 상냥한 얼굴에 숨겨진 속내는 시꺼먼 감정들로 들썩인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엘제이는 그런 건 생각하기
싫었다. 저 다정한 얼굴이, 상냥한 미소가, 부드러운 손길이, 모두 진짜라고 믿고 싶어졌다.
만약 문장이 사라진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를 친구라 여기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 꽃처럼 화려하게 웃으며 제 마음을 채갈 거예요. 당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까. 당신에게는 티아세가, 그리고 어쩌면…… 저도, 필요하니까.’
아제프는 주홍빛 노을이 사라지고, 새까만 밤빛이 내려앉는 하늘을 보며 엘제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서늘해지는 공기로부터 그녀를 지키며 노을처럼 온화하게 속삭였다.
***
“그 대가가 당신이었으니 저는 도둑이어도 좋아요. 그날, 도둑이 되었기에 제 곁에 영원히 있어 주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받았잖아요.”
“왜, 요?”
오지 말라는 말에 일순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희망에 들떴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엘제이가 말을
흐리다가 그를 올려봤다.
아제프는 또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준비를 잘 해서 더 멋지게 하고
싶었다. 어쩌면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순간을 초라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제이. 제가 당신이랑 살고 싶다고 한다면, 오늘처럼 헤어지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당신을 기다리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할 건가요?’
엘제이는 그가 자꾸 말을 흐리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봤다. 시린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색감의 눈과 마주치자
섬뜩한 감정만 담던 푸른 눈도 그녀를 따라 맑게 물들었다.
“아제프?”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이
악기의 선율처럼 나부꼈다.
“제이.”
아제프가 엘제이의 이름을 부르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넘겼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사르르
넘어갔다. 가닥가닥 흐트러진 밀색 사이로 희고 고운 이마가 살며시 드러났다.
그는 무언가를 덧그리듯 엄지로 하얗고 보드라운 이마를 어루만졌다.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살결이 고운 살결
위를 간질였다. 앞머리가 날아가자 조금 부끄러워진 엘제이가 그의 옷깃을 흔들며 물었다.
“아제프……. 왜 그러는,”
아제프가 엘제이의 말을 잘라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가 짐승의 하울링처럼 오싹하고
뜨거웠다.
델 것처럼 달궈진 소리에 엘제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그녀의 얼굴을 보던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쪽.
인주를 묻힌 듯 붉은 입술이 하얀 살결을 만나 매끄러운 소리를 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덜미를 깨물어 지독할
정도로 모든 걸 탐하는 대신, 그저 부드럽게 입술을 내렸다.
원래의 온도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볼 위로 차가운 손이 올라가자 엘제이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가 아래를 향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진흙탕처럼 역겹고 끔찍하게 느껴지던 행위가 그녀에게만은 달랐다. 다른 사람의 피부 따위는
손끝 하나만 닿아도 벌레가 득실거리는 것처럼 혐오스러웠는데, 엘제이의 모든 곳에 닿고 싶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이 예뻤고,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손이 귀여웠다. 아제프는 제 옷깃을 쥐고 발끝만
바라보는 엘제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부끄러워요?”
아제프의 직설적인 물음에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다 제 발을 밟고 휘청거렸다. 아제프가 재빨리
엘제이의 허리를 붙들며 그녀를 바로 세워줬다.
밤빛이 내려앉아 남색으로 물든 그의 눈이 엘제이를 향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진득한 시선에 엘제이가 더듬더듬
서툴게 말하며 웅얼거렸다.
“음, 저는…….”
엘제이는 귀 끝까지 발긋하게 물든 채 온몸으로 수줍음을 토해냈다. 아제프는 어린아이가 된 사람처럼 웅얼거리는
엘제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제이는 관통할 것처럼 쏘아지는 시선에 숨을 삼켰다. 시선을 가로채고 놓아주지 않는 매혹적인 색감에 엘제이는
바다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엘제이의 머릿속을 떠돌던 온갖 문제들이 푸른 파도에 휩쓸려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간신히 그의 이름만,
숨결처럼 연약하게 토해냈다.
“아제프.”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제프는 어쩌면, 자신은 지금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제프의 생에 몇 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평소에 그가 선을 넘으려 들며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던 사람이 오늘은 다른 얼굴을 했다. 아제프가 성큼성큼
다가섰음에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닌, 다른 빛깔을 머금었다.
그건 환희의 빛이었다. 아제프는 기대와 옅은 희망을 품고 반짝반짝 움트는 신록의 빛에 눈길을 주며 생긋 웃었다.
일부러 꾸미지 않았음에도 화사한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그의 시선이 흰 뺨으로 향했다.
엘제이의 보조개는 주인을 닮아 수줍음이 많았다.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보조개는 그녀가 환하게 웃을 때나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엘제이를 온종일 곁에 둬도 잘 볼 수 없는 보조개가 지금 이 순간, 무척 보고 싶었다.
“네?”
“웃어주세요. 예쁘게.”
“아-”
엘제이가 환하게 웃자 아제프가 다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감상하며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문득, 떠오른 감정이
있었다.
‘사랑스럽다.’
눈은 마음의 창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데 정말 아무 마음이 없는
걸까. 그의 마음이 진심인 것 같아 엘제이는 괜히 기대되고 떨렸다.
아제프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용기가 났다. 엘제이는 당장에라도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제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8 화
38
늘 조그맣고 차분하게 말하던 사람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이름을 힘차게 불렀다. 아제프는 감정의
파도로 출렁이는 초록색 눈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네.”
엘제이는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그녀의 부름에 답했다. 밝은 빛을 뿜는 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워 무거운
돌로 꾹꾹 누르고 몇 번이나 힘주어 삼켰던 감정이 엘제이의 눈 위를 점령했다.
‘문장이 있어요. 문장이 있는데, 사라져가고 있어요. 저도 당신 옆에 계속 있고 싶어요.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 되고 싶어요.’
“아제프. 저는,”
아마 그대로 시간이 지났다면 횡설수설 어수선한 마음이 진솔하게 새어 나왔을 것이었다. 엘제이가 막 정리되지
않은 문구들을 힘겹게 뱉으려 할 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입을 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위에 밤자락이 걸려 숨을 죽이던 티아세 家는 주인이 돌아오자
북적북적 흔들렸다.
엘제이의 눈에 우아한 날갯짓을 시작하는 백조의 문양이 깊숙이 박혀들었다. 들끓는 용암처럼 치솟던 감정이
빗물을 맞은 모래처럼 사그라들었다. 엘제이는 입술을 다물고 마차의 문이 열리는 걸 망연히 지켜봤다.
“제이 아버지가 오셨나 보네요. 늦은 시간에 데려다줘서 어쩌죠? 제이, 혼나는 거 아니에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아이젠이 돌아온 게 퍽 기꺼운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는 빳빳이 굳어버린 엘제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같이 가요.”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돌린 아이젠이 아제프와 엘제이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얼굴
곳곳에 주름이 팼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은 중년의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야?”
“아, 아버지.”
“공작님, 안녕하세요.”
엘제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해 아제프가 아이젠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 아이젠은 엘제이 어깨
위에 있는 아제프의 겉옷과 꼭 붙들린 손을 보다가 얼굴을 살짝 들어 온화하게 웃었다.
“우리 제이가?”
“흠, 그렇군. 자네에게 신세를 졌어,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한번 우리 집에 초대하면 좋겠군. 내 딸을
데려다줘서 고맙네.”
아이젠은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딸아이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애칭을 부르는 아제프를 흘깃 쳐다봤다. 배포가 크고,
사람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할수록 더 아까워지는 기분에 아이젠이 입맛을 쩝
다셨다.
아이젠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부드럽게 엘제이를 재촉하며 어서 들어가자는 몸짓을 했다.
아제프가 아이젠을 관찰하며 석연치 않은 얼굴을 했다.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리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로 엘제이가 매번 물러나는 건 아닐까, 짐작한 아제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 두 쌍이 허공을 배회하며 서로를 지그시 쳐다봤다. 명백히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에도 휘어진
눈가는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엘제이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아이젠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였다. 그는 좋은 부친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숨길 수 없는 사랑을 담아 온화하게 빛났다.
감추려 하지도 않는 그 선연한 감정에 아제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그의 화답에 엘제이가 조금 웃었는지 위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망막에 맺혔다. 제법 멀어진 거리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임에도 살짝 올라간 입매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서툴고 나약한 사람을 경멸했다.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천치라 생각했다. 아니, 모든 사람이 혐오스러웠다.
그의 삶이 너무 더럽고 비참했기에 어쩌면 세상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달콤한 색감의 꽃이 꽃망울을 톡, 터트렸다. 갓 세상에 드러난 연약한 꽃잎이 화사한 빛깔을 뽐내며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꽃잎이 붓처럼 휘어질 때마다 미지의 감정이 써내려졌다.
“사랑해요. 제이.”
주인 없는 고백은 허공으로 띄워져 이내, 부서지듯 흐트러졌다.
체온이 낮던 몸이 유독 달아오른 느낌에 아제프가 가벼이 몸을 털며 하늘을 올려봤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밤하늘을 보며 문득, 기억 저편으로 치워버린 어느 날의 일이 떠올랐다.
“다시는, 소중한 걸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생겨버렸어.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까, 빼앗기지 않아. 빼앗길
바에는 힘으로라도…….”
그는 밤하늘을 보며 속삭이다가 말끝을 흐렸다. 힘으로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걸어와 주기를 바랐다.
힘으로라도 뺏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번 자각한 이상 엘제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엘제이는 5 살 이후, 처음 생긴 소중한 것이었다. 엘제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때의 솜이불이 생각났다.
하늘과 호수 위를 거니는 자유로운 백조를 땅속 식물로 휘감았다. 백조가 날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화려한 숨결을
토해내는 꽃들이 진득한 집착을 담고 있었다.
말없이 티아세 家의 문양을 보던 아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보통 한 번 정해진 문양은 그 정통성 때문에 쉬이
바꾸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아이젠 티아세는 약 20 년 전 그가 공작으로 즉위하자마자 문양을 바꿔버렸다.
“취향 한번 이상하지.”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9 화
39
“아할테케구나. 보기 드문 명마지.”
엘제이는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손을 흔들며 화답해 왔다.
엘제이의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헤어지는 연인처럼 애틋하고, 갓 맺어진 인연처럼 달콤한 둘의 인사를 지켜보던 아이젠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네.”
아이젠과 엘제이 사이로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엘제이는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고, 아이젠은 속이 답답했다.
아이젠은 혹여 자신의 말이 엘제이에게 상처를 줄까 봐 저어했다. 그가 말끝을 흐리자 엘제이가 고개를 돌리고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엘제이의 눈 위로 언뜻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아버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음색이 엘제이의 귓가에 닿았다. 엘제이는 걱정스레 웃고 있는 아이젠을 보며
매달리듯 물었다.
“제이야. 네 마음은 알겠지만, 문장은 완전한 것이다. 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고 애달파도 모두 한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테고, 오히려 상처를 씻지 못하는 건 그일 테지. 그러니 여기서 멈추렴.”
베아르시 제국민이 대부분 그러하듯 아이젠도 문장의 절대적인 힘을 믿었다. 아이젠은 매달려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버지, 제 문장이, 옅어졌어요. 분명 사라지고 있어요.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혹시, 이건…
… 그와 함께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닐까요?’
아이젠에게 알렸다가는 당장 신전에 찾아가자고 할지도 몰랐다. 그는 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게
안전에 관련된 것이라면 단호하게 변했다.
아이젠이 입막음을 단단히 해두어 아직 엘제이가 문장 보유자라는 사실이 소문나지 않았지만, 혹여 딸의 문장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아이젠이 알게 되면 그도 더는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문장통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보통 문장이 발현한 후 수개월 안에 반려를 찾기 위해 발악하는 문장통이 덮쳐온다.
“하지만,”
아이젠은 뭐라고 반박하려는 엘제이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었다. 열린 문 사이로 엘제이가 들어가고 문은
곧바로 닫혔다.
“이게, 뭐예요?”
엘제이는 그저 하얗게 빛나는 신석을 노려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신석이 풀잎 색으로 물드는 순간이
찾아올까 봐 두려워졌다.
“…….”
엘제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아이젠은 조가비처럼 꾹 다물린 엘제이의 입술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곧 코르디스가 열리면, 많은 사람이 수도로 올라오게 되겠지. 아비는 그때까지는 네가 네 반려를 찾길 바란다.
그날이 지나면,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네 문장의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구나.”
“아버지!”
엘제이가 기함을 토해내며 아이젠을 불렀다. 확실히 문장의 존재를 숨기는 것보다는 알리는 편이 상대방을 찾기에
더 쉬울 것이었다. 하지만 엘제이는 그가 아닌 반려 따위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지만, 부정을 담은 눈이 단호하게 빛나며 고집을 피우는 딸을 말렸다.
“문장통은 네 생각처럼 그냥 만만히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강건한 기사들도 통증을 참아내지 못하는데,
네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사람 마음이 문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니…….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요. 저는, 저는 싫어요. 그 사람이 좋아요.
제 마음은 진짜란 말이에요.”
늘 얌전하고 차분한 딸이었다. 아이젠은 울먹울먹 흐려진 눈가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눈물짓는 딸의
얼굴을 보는 그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제이야.”
아이젠이 얼굴을 손으로 쓸며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엘제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문장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면, 아이젠에게 말해서 그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엘제이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를 떠올리며 다정한 얼굴을 한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한참을 망설이던 엘제이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놓으며 어설픈 질문을 토해냈다.
뜬금없이 나온 질문이 이상한지 아이젠이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던 남자는 이내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싶은데 자꾸 망설여졌다. 엘제이는 아버지의 입으로 듣게 될 대답이 두려운 걸지도
몰랐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또 한참 고민하던 엘제이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속삭였다.
엘제이의 물음에 아이젠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부녀 사이라 해도, 그의 부정을 의심하는 말에 아이젠의
얼굴이 조금 불쾌하게 찡그려졌다.
아제프는 이상한 질문을 던져놓고 눈치를 보듯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엘제이를 보며 이내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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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제이는 목에 걸린 하얀 신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영롱한 소리와 환한 빛이 신물임을
증명했다.
엘제이가 부친의 말끝을 따라하며 중얼거렸다. 기이할 정도로 단호한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엘제이는
차오르는 의문에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엘제이의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 젖히던 아이젠이 곧 따뜻하게 웃으며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형제가 없으니 티아세도 우리 셋밖에 남지 않았구나. 가족은 서로 의지해야 하지. 그러니 제이야.
무슨 걱정이 있다면 꼭 아버지에게 말해야 한다.”
“아버지, 저…….”
저토록 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어쩌면 그녀가 엘제이 티아세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엘제이의 몸이니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엘제이의 기억이 있는 그녀는 아이젠의 차가운 눈길이 두려웠다.
아제프가 괜히 아이젠을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따뜻한 부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냉혹한 지배자이기도 했다.
그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놓쳤던 아이가 아제프라는 걸 알았을 때, 부친이 보일 반응이
무서웠다.
“좋은 꿈 꾸렴.”
“아버지도요.”
“……네.”
“이만 들어가보렴.”
똑똑-
“들어와, 시아.”
시아는 드레스 룸에 들어가 가벼운 잠옷을 하나 꺼내왔다. 익숙한 듯 엘제이 곁으로 걸어가 코르셋을 풀어주던
시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옷 갈아입으셨어요?”
“풀물이 들어버려서.”
“음, 그냥…….”
“아! 아가씨, 내일은 아마 새로운 시녀가 올 것 같아요. 메리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었거든요.”
시아가 겉옷을 다 벗기고 페티코트에 손을 데려고 하자 엘제이가 황급히 말리며 손을 저었다. 시아는 어쩐지 조금
난감해 보이는 엘제이를 의아하게 보면서도 그녀 말대로 물러나 문을 닫고 나갔다.
하얀 얼굴이 환희에 차 반짝였다. 엘제이가 방긋 웃으며 몇 번이나 문장을 만졌다.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빛을
잃은 문장이 기꺼웠다.
옷을 다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도 엘제이는 문장을 빤히 바라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제프의 입맞춤을
받았던 기억까지 떠오르자 엘제이의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행복한 듯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엘제이는 문장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
“젠장.”
흉흉한 얼굴을 한 아제프를 보고 긴장한 어린 시녀가 실수로 그의 팔 끝을 스쳤다. 역겨운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더러운 감각에 아제프가 욕설을 지껄이며 화를 냈다. 그의 험악한 얼굴에 어린 시녀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제프가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 싸늘한 얼굴로 시녀를 쏘아보자 그에게서 풍기는 음산한 기운에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짝 긴장했다. 어린 시녀는 덜덜 떨리는 몸을 감추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고 아제프의
기분은 끝도 없이 하락했다.
“후우…….”
아제프는 어린 시녀를 데리고 나가는 시녀무리를 보다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작님?”
알모어가 조심스럽게 아제프를 부르며 그를 관찰했다. 분명 엘제이와 헤어지고 돌아왔을 때까지는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그날 자고 일어난 후부터 저 상태였다.
아제프는 초록색 커프스를 소매에 끼우며 알모어의 말대로 엘제이를 떠올려보기로 했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울화가 치밀었다.
아제프는 전날 골라놨던 보닛을 찾으며 화를 달래기로 했다. 알모어가 얼른 잘 포장된 상자를 들고 와 내밀었다.
예쁜 꽃으로 장식된 보닛을 쓴 엘제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제프가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알모어의 얼빠진 얼굴을 보다 보면 그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이것도 엘제이를 만난 후부터 바뀐 변화였다.
알모어의 시선이 아제프를 따라 또르르 굴러갔다. 엘제이를 반쯤 벗겨놓고 제 마음대로 끌어안고 있던 아제프가
떠올랐다.
알모어는 가슴을 펴고 뿌듯하게 외쳤다. 이번에도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의 대답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예물은?”
우렁차게 대답하려던 알모어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뭐.”
애처로운 집사의 얼굴에도 아제프의 험악한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제프가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자 알모어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해 핼쑥해진 얼굴로도 어쩔 수 없이 긍정을 말해야 했다.
알모어는 반질반질 빛나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알모어가 직접 재봉한 예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잘 어울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오늘도 끝내주십니다.”
아제프는 다람쥐처럼 숨어드는 알모어를 노려보다가 마차가 대기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엘제이를 데리러 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1 화
41
마차는 티아세 家 정문에 도착했다. 아제프는 마차 안에서 엘제이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아직 준비 중이라는 엘제이의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날씨가 좋은 봄날이 화사했다. 그가 햇볕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자, 소문으로 들었던 란델 후작의 용모를 처음
본 시종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워낙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외모인지라 아제프는 익숙한 시선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곧 엘제이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곧 정문이 열리고,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온 티아세 家의 집사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나오신답니다.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들어오시라고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시각보다 오래 걸리는 게 미안했는지 집사의 목소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물끄러미 집사를 바라보던
아제프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에게 화낼 마음은 없었다.
아제프가 막 말을 꺼내는데,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아니라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여성의
발걸음이었기에 아제프는 뒤를 돌아봤다.
“아…….”
멋대로 잡은 주제에 빨개진 손을 붙잡고 울먹거리는 얼굴에 짜증이 치밀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만
아제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절제심이 약해진 탓에 그의 입술에서 냉랭한 말이 나왔다.
세게 내쳐진 탓에 화끈거리는 손등을 어루만지던 세시아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초면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 못 할지 모르지만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도 똑같이 손을 잡았음에도 부드럽게
넘어갔었다.
아제프는 제 이름을 부르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차갑게 웃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엘제이의 경우에는 그녀의 신분이 공녀인 탓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크게 무례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백작가의 차녀 따위가 후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은 대단한 무례였다.
본인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허락 없이 부른다는 건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행위다. 한마디로 그를 얕잡아 본다는 의미였다.
아제프의 싸늘한 말에 세시아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서둘러 손을 저었다. 세시아가 귀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움직이며 연갈색 눈을 깜빡거렸다.
엘제이처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당황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귀여워 보일지 아는 자 특유의
행동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제프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아제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세시아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조곤조곤 말했다.
“아니, 후작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무례를 범했네요. 죄송해요. 그런데 저희 한번 본 적 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에티아 家의 티파티에서 한 번 뵈었을 때는 무척 친절하셨는데……. 티아세 양 때문에 화가 나신
건가요?”
“티아세 양?”
티아세 양이라면 둘이었다. 엘제이는 그와 선약이 있으니 엘리사를 찾아온 거라 생각하면서도 아제프는 그 호명에
신경이 쓰였다. 무심하게 서 있던 아제프가 팔짱을 풀어내며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게 좋았는지 세시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엘제이 티아세요. 그녀는 무척 무례한 사람이에요. 제게 먼저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아 놓고는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어요. 당신을 계속 밖에 세워두다니 그녀는 정말 너무해요. 저는 서 있는 당신을 보고 깜짝 놀라,”
“아침부터 재수 없게.”
오늘따라 성격을 건드리는 여자가 많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보다 조금 큰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문득 떠올랐다.
엘제이가 세시아와 선약이 있었다는 건 아제프도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티아세 家의 경계는 허술하지 않았지만
목적지인 티로시 家가 허술했기에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엘제이가 저 여자와 약속했던 건 코르디스 날 같이 구경하자는 것뿐이었고, 약속을 취소할 때도 며칠의 여유를
두고 정중하게 편지를 보냈다.
엘제이의 편지를 무시한 채 답장도 안 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와 그녀의 집 앞에서 이러는 걸 보면 이유가 뻔했다.
그냥 피해자인 척을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게다가 엘제이의 이름을 존칭 없이 함부로 부르는 것도 기분 나빴다.
“네?”
세시아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며 얼빠진 얼굴로 아제프를 올려다봤다. 언제나 선량하게 웃고 다니던
남자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서 있으니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당황한 세시아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며 얼굴을 들고 눈물을 짜냈다.
아제프를 이길 수 없으니 연약한 척 눈물을 짜내는 쪽이 이로웠다. 아주 멍청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아제프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척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네가 편지를 받았다는 건 제이의 시녀가 증명할 텐데, 답장도 안 보낸 주제에 여기 와서 괜히 피해자인 척하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렸어?”
“후작님…….”
아제프는 다정하게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서늘한 바람 소리를 닮은 냉한 목소리가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싱긋
웃은 아제프가 세시아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척 세게 눌렀다.
“아!”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세시아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아제프가 화사하게 웃으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건, 당신 어머니의…….”
“그래서 가장 역겨워하는 거야. 베티, 로라, 샌디, 사라. 그 외에도 몇 명이나 더 있을까? 네가 그들을
쫓아내면 나는 몇 명을 더 보낼까? 내 어머니와 같은 꼴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잘 간수해.”
아제프가 최근 들어 바뀐 티로시 家 시녀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산뜻하게 웃었다. 예쁘게 휘어진 눈을 마주하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세시아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덜덜 떨자 아제프가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털며
잠시 넣어두었던 장갑을 꺼내 천천히 착용했다.
“영애, 괜찮아요?”
“의원을 불러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엘제이의 상냥한 목소리에도 세시아는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엘제이가 사지를 덜덜 떠는 세시아를 보며
의원을 부르려고 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아제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제프의 걱정스럽다는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시녀를 붙여주겠다는 말에 기겁한 세시아가 흉악한 것을 본 듯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절뚝절뚝 뛰쳐나갔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남을 위하는 마음 따위는 없애버리고 저만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녀의 따뜻함이
좋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는 앞으로도 주인을 지키는 투견처럼 그녀 앞에 놓인 더러운 것들을 치워낼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세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엘제이를 마차로 끌고 갔다. 엘제이를 뒤따라 나온 시녀가 그녀의
승마복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지만 아제프는 모른 척 엘제이만 끌고 갔다.
아제프가 연약한 척 속눈썹을 깜빡이며 엘제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작은 목걸이 하나 걸지 않은 새하얀 피부
결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피곤한 사람치고는 과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이었지만 엘제이의 얼굴에는 걱정이 차올랐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피곤하다는 말에 얌전히 어깨를 내어주며 그를 토닥였다.
“그럼요. 다 나았어요. 그것보다 제이, 저 아까 더러운 걸 만져서 기분이 안 좋아요. 정화도 할 겸 기분전환이
필요한데…… 좀 도와줄래요?”
엘제이는 물이라도 떠와야 하나 고민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제프는 가만히 엘제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장갑을 벗어던진 매끄러운 손이 천천히 엘제이의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양쪽에서 올라온 손이 엘제이의 목덜미를
간질이고, 예쁘게 땋은 옆머리를 스쳤다.
“장난? 내가?”
목을 긁으며 새어나온 목소리가 맹수의 하울링처럼 그르렁거렸다. 왠지 위험한 상황이 된 것 같아서 엘제이가
그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머뭇거렸다.
어디를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잡아먹힐 것 같았다. 한입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소멸할 것
같았다. 엘제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장난치지 마세요.”
나른하게 깔린 얼굴에서 퇴폐적인 음색이 깔려 나왔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음색은 엘제이의 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나게 했다. 엘제이는 마른 목을 축이려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을 피해 아래를 내려다봤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무얼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노골적으로 유혹하는데,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넘어갈 게
뻔했다. 그의 몸에 닿은 피부가 화마에 휩싸여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녹아버릴까 봐 무서우면서도 닿은 느낌이
너무 좋아 그대로 몸을 맡기고만 싶어졌다.
여기서 입을 벌리면 필시 달콤한 숨결이 쾌감을 담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문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가볍게 대꾸한 아제프는 피식 웃으며 여전히 손목을 지분거렸다. 웃을 때 터져 나온 가느다란 숨결이
손목을 스치고, 타액에 젖은 피부가 반들거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느새 수치도 모르고 그에게 매달리며 끌려갈 걸 알았다. 엘제이가 그를 거부하려고 애쓰며
조그만 속살거림을 토해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엘제이는 문장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끝이 얼마나 허망할지 알면서도 감히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나온 말은 거부도 저항도 아닌, 그저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다였다. 엘제이가 손목에 힘을 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작게 바동거렸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퇴폐적인 분위기에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인 채 미동도 안 하던 엘제이의 눈이 쓱 올라왔다.
맑은 색감의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아제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따뜻한 손의 온기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맹목적인 눈이 그를 향하자 아제프는 뇌를 강타하는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린 아제프가 엘제이를 벽에 바짝 붙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차마 싫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소심한 행동에 아제프는 엘제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붙잡고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제프는 립밤을 바르고 왔는지 달콤한 향이 나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그걸 게걸스럽게 빨아올리는 상상을 했다.
조그만 얼굴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제 아래에서 숨이 차 헐떡거릴 엘제이를 상상했다.
“안 돼?”
엘제이가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아이의 칭얼거림 같은 항변이 돌아왔다. 그가 무해해 보이는 얼굴을 반짝반짝
빛내며 간절하게 쳐다봤다. 무해한 얼굴과는 달리 살쾡이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눈빛이 광포해 엘제이는 물러날 곳
없는 벽에 몸을 밀착했다.
엘제이가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자 아제프가 먹이를 노리듯 날카롭게 벼린 눈매를 조금 풀었다.
아쉽긴 했지만, 강탈하듯 빼앗고 싶은 건 아니었다. 상처 주지 않기로 했으니 무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맞춤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는 항변이 머릿속에 조그맣게 떠올랐지만 새끼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
조금이라도 강제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제프가 몸을 조금 물리며 다정하게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사하게 휘어진 눈매에 부드러운 감정이
담겼다. 그가 어린아이를 쓰다듬듯 엘제이의 머리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알았어. 심한 짓은 안 해.”
“하아.”
“정화, 요?”
아제프가 싱그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엘제이는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절제를 잘 못 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얌전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제프가 입꼬리를 당겨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내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3 화
43
“살 것 같아.”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많이 지친 목소리에 엘제이의 마음이 조여 왔다.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지도 못한 채 그의 품에 얌전히 몸을 내어주자 아제프가 욕설 섞인 짜증을 토해냈다.
아제프가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엘제이의 몸을 꼭 끌어안고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 아까의
짜증이 착각이라는 듯 달아나는 게 우스웠다.
둘은 연인 사이의 밀회를 나누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 사이로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박동했다.
아제프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깜빡 흔들자 마차 한쪽에 잘 놓아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한 상자는 엘제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예쁘네요, 제이.”
청아한 얼굴 위에 화사한 모자를 씌우니 예쁜 얼굴이 더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제프는 조그맣게 피어난
보조개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엘제이가 이해하지 못한 듯 울상을 지으며 속삭이자, 아제프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저럴 때마다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아제프가 손가락으로 찡그려진 이마를 피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제프가 어린 강아지 부르듯 손짓하며 엘제이를 불렀다. 얼굴을 붉힌 채 쪼르르 다가온 엘제이가 그의 앞에 섰다.
마차는 흔들리고 있었고, 엘제이는 조금 휘청거렸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하얀 귀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힘주어 깨물었다.
“아!”
아프지는 않았지만, 치아 사이로 귀가 씹히는 느낌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발끝이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엘제이가 몸을 조금 물렸지만, 아제프는 놔주지 않았다.
***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엘제이는 홍시가 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엘제이는 불타는 나무토막 같았다.
뻣뻣하게 굳어 그저 눈만 깜빡이는 모습에 아제프는 제가 좀 지나쳤나 반성하며 순하게 웃었다.
그가 다정한 손길로 주름진 드레스를 펴주며 선량한 얼굴을 했다. 마차에서의 진득한 눈길이 거짓인 것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돌변한 남자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한 번 더 싱긋 웃었다.
엘제이는 아까보다 훨씬 반질거리는 얼굴을 보다 대답할 순간을 놓쳐버렸다. 그가 싱긋 웃으며 바라보자 엘제이는
멍한 얼굴로 뒤늦은 대답을 토해냈다.
“……네.”
제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는 남자의 말에 엘제이는 혼몽한 머리로 아제프는 참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제프는 여전히 제정신 못 차리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참아냈다. 더 했다가는 소심한 강아지가 바르르
떨다가 픽 기절할 것 같았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마차를 세운 넓은 공터를 지나 나무가 우거진 삼림 안으로 들어갔다. 강한 햇볕을 막은 시원한
나무 아래에서 그들은 손을 마주 잡고 정답게 걸어갔다.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험악하게 들려왔다. 아제프가 옆에 있으니 별일은 없을 테지만 우거진 삼림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몸을 좀 움츠렸다.
아제프가 그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엘제이가 그를 말리며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상대가 다수거나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아제프는 가까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척에 상대가 성인 2 명이라는 걸 알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 1 명과 여자
1 명 같았기에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에서 돌아가자는 말을 나오게
한 놈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돌아갈 바에는 저걸 해결하고 이곳에 더 있겠다는 말이었다. 엘제이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으로
떨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제프가 무해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엘제이의 손목을 붙잡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숲속에 혼자 두는 것보다는 제 곁에 두는 게 훨씬 안전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더 명확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남녀 치정문제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니 남자 혼자서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
아제프는 누군가를 신랄하게 욕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상한 얼굴을 했다. 무성한 수풀이 횡단으로 베여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황궁 근처라 숲길이 잘 정돈되어 있기에 수풀이 상한 흔적이 더 눈에 띄었다.
아마 화를 참지 못한 남자가 검을 휘두른 것 같았다.
그들 가까이에 도착하자 아제프는 드디어 저 남자가 누군가를 욕하는지 알아냈다. 아제프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도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세시드라고 불린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에 곁에 있던 여자가 그를 말리며 주위를 살폈다. 세시드는 저를 말리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왜? 그딴 고아 따위가 무서워? 어차피 길거리에서 입양된 놈이잖아. 더러운 놈. 거기서 뭘 했을지 어떻게 알아?
지금도 그 낯짝만 믿고 설쳐대는데! 혹시 모르지, 그라시아 란델이랑도 그런 더러운 사이였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땅을 발로 차며 악을 쓰는 모습에 엘제이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녀는 서리가 내려앉은 얼굴로 세시드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4 화
44
세시드의 말은 그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저런 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비루먹은 놈들뿐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반응에 그녀 몰래 눈을 휘며 웃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대로라면 그녀의
동정심을 사 이것저것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지 못했던 수확에 아제프가 생글생글 웃다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생각만 해도 배 속이 화끈거리는 게 무척
유쾌했다. 그가 어떤 걸 해달라고 할지 고민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불쌍한 척하며 그녀의 시선을 끌 생각을 한 아제프가 막 슬픈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려고 할 때, 엘제이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아제프가 안쓰러워 촉촉이 젖었던 눈이 차게 식었다.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으로 세시드를 노려보던 엘제이는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계속 나불대는 목소리에 더는 참지 못했다.
엘제이가 손을 뻗어 아제프의 장갑을 벗겨냈다. 거침없는 행동에 아제프가 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제이?”
엘제이가 아제프의 장갑을 강탈하듯 빼앗아 수풀을 헤치고 달려갔다. 엘제이의 모습에 흥분해 날뛰는 엘리사의
모습이 겹쳐지자 아제프가 일순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말려야 한다는 걸 잊어버렸다.
땅을 박차고 나간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세시드에게 장갑을 던졌다. 검은색 가죽 장갑이
명중하며 세시드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찰싹-
갑자기 튀어나온 엘제이의 모습에 당황했던 세시드는 그의 뺨을 맞고 떨어진 장갑을 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너 미쳤어?”
세시드 옆에 있던 여자, 실비아가 그를 말리며 속삭이자 세시드의 얼굴에 짙은 곤란함이 내려앉았다. 당사자에게
뒷말하는 걸 들켜버렸고, 그보다 신분이 높은 공녀에게 막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아직 나이도 젊으신데 귀가 안 좋기라도 하세요? 아니면 제 말이 말 같지가 않아서 집중하지 않았나요?”
“네? 무엇을…….”
게다가 여자인 엘제이와 결투를 해봤자 그의 평판만 나빠질 뿐이었다. 검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사람과
무엇으로 결투하란 말인가. 세시드는 감출 수 없는 곤란함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늘 얌전하고 순했던 엘제이가 세시드를 비꼬자 아제프조차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도
자매라는 건지 엘리사가 앞발을 슝슝 휘두를 때와 같은 모습에 아제프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아제프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씩씩거리는 엘제이를 보고 정신을 차리며 그녀를 말렸다. 아마 직접 결투를
하지는 않겠지만, 먼저 싸움을 걸었음에도 기사를 내세우는 모습도 좋지는 않았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괜찮았겠지만, 아제프와 그녀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둘에게 무지렁이와 무뢰배로 지칭된 페이칸이 울컥한 얼굴로 둘을 노려봤다. 아제프에게 밀려 늘 2 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페이칸은 그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
게다가 반반한 얼굴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주변인의 호의를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시드는 엘제이도
그에게 꼬인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참지 못했다.
“좋습니다, 티아세 양.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요.”
“페이칸 경의 어리석은 머리에 화가 날 지경이네요. 이곳이 어딘지 잊으셨어요? 여기는 코르디스가 열리는
승마장. 이곳에서의 결투는 코르디스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본선 진출자에게만 주어지는 완장에 시선을 준 세시드가 아제프의 팔에도 같은 것이 있음을 확인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사사건건 무시하는 게 아제프와 닮았다.
페이칸은 엘제이 옆에 서서 애처로운 얼굴로 그녀를 말리는 아제프를 노려보며 뇌까렸다. 엘제이는 말로
설득하려는 아제프에게 고개를 저어 말리고, 세시드에게 냉정하게 일갈했다.
***
어제 온종일 아제프가 선물해준 아즈와 승마 연습만 했다.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온종일 승마에만
매달렸더니 몸은 좋지 않았지만, 원래 엘제이 티아세가 가졌던 승마 센스는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말을 아주 잘 탔다. 한제이의 기억이 남아 조금 무서운 것뿐이지 익숙해진다면 원래의 그녀처럼
탈 수 있었다. 꼭 이겨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놈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
엘제이가 저렇게 속상한 얼굴을 하니 아제프의 기분도 저조해졌다. 단순히 그녀의 동정을 이끌어내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나불대던 입을 방치한 걸 후회했다. 아제프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입을 찢어서라도 막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손, 이제 나았어요?”
“네. 저도 그런 말, 신경 쓰지 않아요.”
“아…….”
뜨거운 별을 품은 것처럼 화끈거리는 가슴에 엘제이가 왼쪽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시 인상을 썼다. 슈팅스타가
가슴에서 팡팡 터지는 것 같은 오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
문이 열리고 등장을 알리는 뿔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즈의 고삐를 쥔 아제프가 차분한 얼굴로 걸어갔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남자와 그를 닮은 말은 동화 속 환상 같았다. 엘제이는 아즈의 목덜미를 긁어주는 아제프를 보며
물었다.
아제프는 승부욕으로 불타던 눈은 어디 갔는지 다시 수줍은 얼굴로 돌아온 엘제이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는
사실 어떤 말이나 상관없었다. 원래 우승할 생각 없이 그냥 본선에 진출하는 것에서 만족하려던 남자는 이렇게 된
이상 우승을 노리고 싶었다.
아제프가 말의 이마에 그의 이마를 맞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와 달리 아즈의 이름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지 그의 목소리는 산뜻하기만 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5 화
45
페이칸같이 그를 시기하는 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안타까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게 엘리사였다.
원래의 엘제이는 엘리사보다 말을 잘 탔지만, 한제이의 기억이 겹쳐 겁이 많아진 게 문제였다. 과감함이 떨어진
탓에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저도 모르게 말의 고삐를 세게 쥐게 되었고 아즈는 그걸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로
알아들었다.
“으으- 긴장해서 아제프를 다치게 하면 어쩌죠? 아제프가 오르거나 내리기 전에 제가 출발해버리면 어떡해요?”
긴장하면서도 승부욕에 불타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제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하라고 속삭이자 주먹을 불끈
쥔 엘제이가 다짐하듯 말했다.
“두 바퀴는 돌 거예요.”
“제이.”
엘제이의 부끄러움은 곧 트랙을 정해주는 사회자의 목소리 묻혔다. 아제프는 시끌벅적한 관중석을 보며
엘제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말했죠? 가만두지 않겠다고. 제이는 한 바퀴만 도세요. 당신이 얼마나 빨리 돌아오든 제이가 도착하기
전에 마중 나갈 테니까.”
그녀가 얼마나 빨리 달리든, 혹은 느리게 달리든 아제프는 우승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니 최선을
다해줄 생각이었다. 엘제이에게 부족한 점은 그가 채워주고 싶었다.
아제프의 트랙이 배정되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초록색 깃발이 펄럭이는 깃대를 살폈다. 암석으로 만든 지형이
험준하긴 했으나 디딜 곳만 잘 찾는다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태연한 아제프의 안색과는 달리 엘제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깃대가 꽂힌 곳을 살펴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제프는 제법 용맹한 얼굴을 한 새끼강아지를 토닥이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엘제이의 숨도 한결 편안해졌다.
“살리브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아제프가 가볍게 출발 신호를 보내자 아즈도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우아한 준마의 발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백금색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한 갈래로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거세게 나부꼈다. 눈이 시리도록 부는 바람에도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던 엘제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장애물에 아찔한 얼굴을 했다.
“제이, 이제 넘을 거예요. 주인이 겁을 먹으면 말도 두려움을 느껴요. 아즈는 훌륭한 말이니 이렇게,”
아제프가 환하게 웃는 엘제이를 칭찬하며 그 뒤로도 말을 잘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나긋하게 속삭이는
아제프의 음색과 달리 아즈는 무척 빠르게 달려 초반 2 위를 꿰찼다.
힘차게 뛰어나가는 말발굽 소리와, 조곤조곤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엘제이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아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알려주는 걸 주의 깊게 들었다.
세찬 바람을 얼마나 맞았을까. 아즈는 순식간에 트랙을 돌았고, 엘제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초록색 깃발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달려간 말이 그의 신호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아직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지만 아제프는 말고삐를
엘제이에게 넘기고 속삭였다.
“아제프!”
엘제이의 시선이 뜀박질을 시작하는 아제프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크게 다칠 수 있는데,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볍게 흩날리는 백금발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아즈, 부탁해.”
엘제이가 아즈의 고삐를 단단히 쥐며 달리기 시작했다. 두툼한 안장을 깔았는데도 허리가 뭉근하게 아파졌다.
뒤를 받쳐주던 아제프가 사라지자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혼자 말 위에 남았다는 사실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엘제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자 아즈도 불안감을 느꼈는지 말의 속도가 늦춰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곧 닥쳐올 장애물이 두려웠다. 엘제이가 아득히 높은 장애물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추첨으로 결정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지만, 아제프만 가시밭길인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에게
꽃길을 깔아주고 싶은 엘제이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아즈!”
속도를 늦췄던 말이 그녀의 부름에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큰 체격이라 꽤 무거웠던 아제프가 내려가고
엘제이만 남게 되자, 아즈의 속력은 그가 있을 때보다 빨라졌다.
조곤조곤 속삭이던 그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용기가 났다. 그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고삐를
바싹 당기고 허들을 향해 달리자 아즈가 백금빛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엘제이의 가슴이 말에 닿을 듯 가까워지고, 앞발을 한껏 치켜든 말은 주인이 원하는 것처럼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심장을 철렁이게 하는 낙하감이 지나고 무사히 장애물을 넘자 빠르게 몰려오는 환희가 엘제이를 강타했다.
덜컥거리며 땅에 착지하자 엘제이가 환하게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그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이미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아제프가 보였다.
‘아제프!’
“아제프!”
“하!”
온몸을 순환하는 피가 그들의 심장에서부터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힘차게 박동하는 아제프의 심장 위로 엘제이의
심장이 겹쳐졌다.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이 공명하듯 울었다.
“잘했어요. 아주 멋졌어.”
‘은발의, 쌍둥이.’
엘제이의 눈에 커다란 동요가 스며들었다. 이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기억이 이상할
정도로 흐렸지만, 정신이 없어 엘제이는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제프!”
“와아아아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6 화
46
말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던 관중석의 함성이 거세게 쏟아졌다. 엘제이는 우승을 축하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은발의 쌍둥이를 바라봤다.
우승의 기쁨이 아닌, 짙은 낭패감이 찾아왔다. 엘제이가 망연한 얼굴을 한 쌍둥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안 돼…….”
은발의 쌍둥이가 원했던 광영을 엘제이가 뺏어버렸다. 그녀는 절대 우승해서는 안 될 경기에서 이겨버렸다.
***
원작의 첫 장면에서 코르디스가 부각된 이유가 있었다. 코르디스가 열린 날부터 운명의 사슬이 겹겹이 엮이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칙서로 변경을 벗어날 수 없는 황자가 수도로 돌아올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 것.
반역을 꾀할 만큼 황제를 미워하지 못한 알체스테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황제의 마음을 돌려 당당하게 황도로
귀환하는 것. 알체스테가 귀환할 수 있도록 한 시작점이 오늘의 코르디스였다.
알체스테의 소꿉동무인 은발의 쌍둥이는 마술이 뛰어났다. 그들은 알체스테를 불러들이기 위해 코르디스에서
우승하기를 원했다.
코르디스의 우승자에게는 우승 후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주어졌고, 많은 대소신료와 백성들의 눈앞에서 황제에게
호소한다면 들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쌍둥이를 보며 제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린 걸 알았다. 그녀는 엘리사의
짝을 벼랑 끝으로 몰아버렸다.
엘제이는 제가 그들의 계획을 망쳐버렸음을 알고 희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엉킨 매듭을 그녀의 손으로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제이는 황제의 옆에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아이젠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실수로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이 사태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엘제이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갈 때, 말에서 내린 아제프는 엘제이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를 내려줬다.
아까 맛봤던 함께한다는 전율이 가시지 않아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안아든 채 환하게
웃었다.
“네……?”
아제프는 애초에 우승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코르디스에도 파트너 없이 참가하려 했고, 엘리사와 함께
출전한 날에도 대충 중위권에 머물렀다. 엘제이는 예상치 못한 그의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제프는 단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황제를 알현할 기회는 엘제이가 아니라, 본선 진출자인
아제프의 것이었다. 함께했지만 우승의 영광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다.
아제프의 것을 달라고 청하기가 미안했다. 엘제이는 제가 망쳐버린 일에 신음하며 도움을 청하듯 아제프를
올려다봤다.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알체스테를 살려야 했다. 곧 엘리사의 문장이 발현될 시기였다. 반려가
없다면 엘리사는 평생 문장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아제프……. 사실,”
엘제이가 그에게 솔직하게 토해놓고 도움을 구하려고 하자 아제프의 얼굴이 의아하게 물들었다. 그는 희게 질린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굳히고 뭐라 말하려 입을 떼었다.
“제이, 왜 그러는,”
“란델 경! 이쪽으로!”
엘제이는 걱정스럽게 저를 쳐다보고 뛰어가는 아제프를 보고 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여기서 그를 붙잡으면
아제프가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엘제이는 일단 알체스테의 발을 막아놓을 생각을 했다. 아직 변경을 벗어나지는 않았을 테니 황도로 올라오지만
않으면 그도 무사할 수 있었다. 엘제이가 아이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젠의 도움이 필요했다.
엘제이가 다급하게 말하며 아이젠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알체스테가 지나올 곳을 안다는 게 천운이었다. 황도로
올라오기 전 알체스테를 막을 생각으로 엘제이가 빠른 목소리로 속닥거리는데 황제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황제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제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그 소리에 놀란 엘제이가 말을 멈추고 아제프를 돌아봤다. 황제의 분노에도 태연한 얼굴로 웃은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한 번 더 고했다.
“알체스테 황자님을 황도로 불러들이시라 청했습니다.”
황제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 돌아온 쪽은 루드비히였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황자가 황제를 돌아보며
허락하면 아니 된다고 청했다. 차기 황권을 거머쥘 확률이 가장 높은 황자의 분노에도 아제프의 혀는 매끄러웠다.
“그러니 폐하께 고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신, 얼마 전 변경에 방문했을 때 늠름하게 성장한 황자님을
뵈었습니다. 용안이 어찌나 눈이 부신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한 황자님을 한 번도 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아제프가 부정을 호소하듯 황제를 바라보며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가슴 시린
목소리에 주변이 술렁술렁 흔들렸다.
“…….”
황제는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이 한 자리에서 모인 축제의 날, 영악한 부탁을 해오는 아제프를 말없이 응시했다.
아제프에게는 알체스테를 도울 이유가 없었기에 황제는 저와 루드비히를 등지면서까지 아제프가 이러는 이유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황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제프가 나긋한 어조로 말하며 속살거렸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외모와
화려한 언변에 그에게로 시선이 모여들었다.
사람은 앞서 부탁한 큰일을 거절한 후라면, 작은 일은 쉽게 들어주는 법이었다. 아제프는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며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으냐며 간교하게 속삭였다.
루드비히가 참지 못하고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공적인 행사에서 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황자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황제는 그렇지 않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아제프를 보며 루드비히를 말렸다.
여기서 더 해봤자 잃을 것이 컸다.
“설마 그럴 리가요. 황자님을 불러 치하하신다면, 백성들은 나라의 영웅을 존중하는 폐하께 감읍할 것입니다.
모든 건 그저, 충심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아제프는 제 승리를 짐작했다. 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황제를 치켜세우는 척 알체스테를 추어올렸다.
물끄러미 아제프를 바라보던 황제는 잠시, 아제프를 도와줬던 엘제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딸 옆에 서 있던
아이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황제의 허락에 아제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멈출 수 없는 말 위에 서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고 버티기가 힘들 테지만, 그 끝에는 그가 원하는 게 있을 터였다.
아제프는 그전까지 알체스테에게 관심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저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날씨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법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7 화
47
얼굴을 찌푸린 엘제이가 고해하듯 속삭이며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저렇게까지 대놓고 등져버리다니 성격
급한 루드비히가 당장 암살자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엘제이를 바라보던 아이젠이 바짝 긴장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엘제이가 횡설수설 대답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이젠이 이해되지 않는 딸아이의 태도에 이마를 찌푸렸을 때
아제프가 다가왔다.
“공작님, 제이.”
“제가 곁에 있을 겁니다.”
“……언제?”
“네?”
엘제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을 닮은 소리가 나왔다. 그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제프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엘제이를 보며 아이젠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도닥거렸다.
“걱정하지 마. 안 죽고, 안 다칠 테니까. 나처럼 독한 사람은 잘 죽지도 않아. 그리고 너랑 같이, 오래도록
살아야 하잖아.”
단순한 친구 혹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남는 게 아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끝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삶.
엘제이 티아세,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그가 달라졌다. 거친 황무지 같았던 눈이 맑은 호수를 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다른 선택을 했고 그의 세계가 변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그의 마음이 화인처럼 내리찍혔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낙인이 엘제이의 마음에 벗어나지
못할 울타리를 휘감았다. 선명히 드러난 그의 속내에 엘제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쉿!”
엘제이의 두 눈을 마주하던 아제프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승마장을
보며 조금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이런, 아직은 안 돼요. 정말 멋지게 하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자꾸 이러네요. 절제가 안 된다고 할까요?
서로를 향한 맹세를 이런 흙바닥에서 나누면 제 체면이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 아직은 아니에요. 저를
기다려줄래요?”
아제프가 멋쩍어 하는 얼굴을 보다니. 눈앞에 확연하게 보이는데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엘제이의 얼굴마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이 오면, 모든 걸 말해주고 그에게 함께 이겨내자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엘제이는 아침에 보았던 투명한 문장을 생각하며 생긋 웃었다.
“……기다릴게요.”
긍정과 허락이 담긴 얼굴에 아제프의 얼굴도 화사하게 펴졌다. 그가 착한 아이를 칭찬하듯 엘제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다정한 얼굴을 했다.
“착하네요.”
엘제이는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다가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주변을 인식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제프의 쓰다듬는 손길은 언제나 좋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조금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이 많은
뽀얀 얼굴이 새빨간 목각처럼 삐걱거리자 웃음을 삼킨 아제프가 선선히 물러났다.
아제프의 웃는 얼굴이 무척 부끄러워 딴청을 피우던 엘제이는 문득 시선을 돌리다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세시드를
발견했다.
봄날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장밋빛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까의 부끄러움을 모두 잊어버린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이?”
엘제이는 극성맞은 엄마처럼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분노를 표출했다. 자신들을 발견했으면 재깍재깍 찾아와
사과했어야 도의에 맞는 일일 텐데, 그녀가 다가오기 전까지 모른 척하는 모양이 괘씸했다.
말끝을 흐리는 건 엘제이 본인이 무척 잘하는 행동이었지만, 엘제이는 그걸 몰랐다. 그녀는 다 커서 한심하게
말도 못하는 남자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세요.”
세시드는 또 울컥 터지려는 열등감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세시드는 빨간 문어처럼 익은 얼굴로 아제프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척 의외네요.”
엘제이를 화나게 하고 그녀와의 산책을 방해한 게 거슬려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으므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변방으로 좌천시키는 정도로 화풀이할 생각이었다.
엘제이는 목을 살짝 움츠렸다. 귓바퀴를 뱅그르르 도는 숨결에 소름이 돋았다. 발끝이 하얗게 곱아드는 감각에
엘제이는 눈을 꾹 감으며 겨우 답했다.
“드레스, 요?”
“응. 나는 이왕이면 목덜미가 예쁘게 보이는 쪽이 좋은데. 가끔 당신의 하얀 목을 핥아 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 내가.”
후후- 불어오는 공기가 바람인지 그의 숨결인지 알 수 없었다. 엘제이의 목이 몸살이 난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8 화
48
아제프는 마차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몽롱한 상태인 엘제이를 힐끔 보고 예쁘게 웃었다. 여기서 진짜로
목덜미를 핥아 내리기라도 했다가는 온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듯한 천사의 얼굴에 휘광이 맴돌았다. 엘제이는 반짝반짝 예쁜 아제프를 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고개만 끄덕이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엘제이를 웃으며 바라보다가 그녀의 등을 방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티아세 家의 마차를 타고 온 시아가 휘청휘청 흔들리는 엘제이를 챙기고 아제프를 향해 목례를 했다. 시아가
조심조심 엘제이를 부축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화려한 예복을 준비하고 서 있는 알모어를 발견한 아제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제프가 문을 꼭 닫고
들어가 소파 위에 앉았다. 아제프는 흉흉한 얼굴로 옷을 천천히 풀어헤쳤다. 상흔이 죄다 사라진 아름다운 상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아제프가 손을 바라볼 때는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였다. 저렇게 싸늘한 눈으로 손을 내려다볼 때는 꼭 누군가를
해하는 일을 계획했다. 알모어는 흉기처럼 단련된 몸을 흘깃 바라보다가 긴장한 어조로 빠르게 속삭였다.
“네. 후작님의 말씀대로 경매는 포기했습니다. 아첼의 신록은 지금쯤 루드비히 전하의 내실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아나이샤의 뿌리도…….”
승마대회가 열리기 전 환복을 할 때, 알모어의 보고가 없었다면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귀환을 청하지 않았을
터였다.
둘은 아첼의 신록을 원했다. 아첼의 신록은 생명의 여신 에테미아가 사랑하는 딸 아첼에게 선물했다는 전설이
남은 녹색 보석이었다. 에메랄드나 사파이어 같은 일반적인 녹색 보석과는 달리 아첼의 신록은 가장자리에서부터
색이 점점 진해지는 독특한 것이었다.
루드비히와 마찬가지로.
“아첼의 신록과 아나이샤의 뿌리. 멍청한 놈이 아니냐. 원하는 바를 이 정도로 극명하게 드러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나이샤의 뿌리는 사지를 굳히는 특수한 마비독을 만드는 재료였다. 어떤 재료를 섞어도 결국에는 마비독이 될
정도로 강력한 뿌리는 들어간 재료만 안다면 해독제를 만들기도 쉬웠다. 다만, 아나이샤 뿌리와 함께 갈아 넣은
재료를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조제법이 각양각색인 만큼 마비독을 제조한 본인이 아니라면 아무도 해독제를 만들 수가 없다는 점이 흉악했기
때문에 아나이샤의 뿌리는 국법으로 금지된 약재였다.
아제프가 화려한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일어났다. 짙은 살기가 해사한 얼굴 위를 뒤덮었다. 아제프가 이를
빠드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알모어가 기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아제프를 말렸다. 예민하고 신중한 사람이니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확신하고 한 말일 테지만, 이곳은 그의 저택이 아닌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하는 황궁이었다.
“새삼스레 겁이 나나?”
“후작님.”
***
행복으로 상기되었던 얼굴이 아연하게 질렸다. 엘제이는 망연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제이는 씻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허탈한 얼굴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황홀한 빛을
되찾아가는 문장이 반짝반짝 빛났다. 전처럼 광채를 뿌리지는 못했지만 은은한 빛무리가 흘러가는 모습이 무척
고아해 보였다.
쨍그랑-
엘제이의 귓가로 날카로운 금속이 터지는 굉음이 맴돌았다. 옅은 희망으로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마음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엘제이는 전처럼 문장을 지워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장이 밉거나 혐오스럽지도 않았다. 엘제이는 그저 무저갱에
빠진 사람처럼 희망을 잃고 망연하게 허공을 볼 뿐이었다. 탈색해버린 얼굴을 가로지르는 눈물만이 그녀의 슬픔을
대변했다.
“아가씨?”
승마대회 참가로 안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해 시간이 촉박했다. 시아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욕실 문을 두드리며
엘제이를 불렀다.
시아의 목소리가 엘제이를 재촉했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텅 비워진
머리가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했다. 뜨거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지끈 아파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시아는 엘제이에게서 대답이 없자 좀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그녀를 불렀다. 엘제이는 기절할 것처럼 급격하게
쇠약해진 몸을 느끼며 손을 바르작바르작 움직였다. 문장이 살아난 게 너무 큰 충격이었는지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엘제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금기를 머금고 흘러나온 눈물이 마른 입술에 맺혀
짜디짠 비통을 토해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아가 바닥에 주저앉은 엘제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조심스레 엘제이의
몸을 일으켜 준 시아가 눈물만 죽죽 뽑아내는 엘제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낯선 황실 시녀들을 의식했는지 아주 조그만 목소리가 엘제이의 귓가에 닿았다. 엘제이는 그저 망연하게 고개를
저으며 욕조를 향해 손짓했다.
시아의 걱정스러운 말에 엘제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시아의 품에 고개를 숙였다. 애처로운 신음이 시녀복에 파묻혀
아스라이 사라졌다.
문장의 빛은 언제나 환하게 빛났다. 엘제이의 몸에 달라붙어 그를 향한 엘제이의 사랑을 언제든지 집어삼킬
것처럼 기회를 엿보는 문장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누군가가 심장을 할퀴는 것처럼 따가운 격통과 타오르는 문장의 아픔에 문장을 그러쥐고 소리를 삼키며
울었다. 이게 문장통인지 그녀가 느끼는 허통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문장통은 신력이나 의술로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시아는 그저 하얀 등을 감싸며 엘제이가 고통을
삭여낼 수 있도록 등을 다독거렸다.
***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9 화
49
눈이 가려진 시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알모어는 싸늘해진 아제프의 얼굴을 살피며 눈을 가린 시녀에게
물었다.
“우는 소리?”
“네. 티아세 家에서 나온 시녀가 워낙 앙칼지게 막는지라 아무도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분명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시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들은 대로 고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는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작게 퍼지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온 뒤에 씻는 소리도 들렸다는 시녀의 말에
아제프가 손가락으로 톡톡 의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시녀의 말이 끝나자, 적막이 흐르는 공간에서 신경질적인 손가락 소리가 빠르게 울려 퍼졌다. 언짢음을 감추지
않는 아제프 때문에 훈훈한 봄날의 거실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나?”
아제프가 갑작스레 간자로 심어둔 시녀를 부른 건 기분이 점차 나빠졌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좋았던 기분도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갉작갉작 신경을 거스르는 불쾌감에 예쁘게 잘 쉬고 있을 엘제이의 소식을 들으려던 것뿐이었다. 직접 보지는
않아도 예쁘게 치장하며 착하게 그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더러운 벌레들이 드글거리듯 썩어가는 마음이
편해질까 봐 그런 것뿐이었다.
“왜 울었을까?”
아제프가 손을 까딱거리며 두터운 벽 너머를 넘볼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황궁은 기본적으로 방음에 충실한
구조였다. 그가 저 벽에 귀를 기울여도 들릴 리 없었고, 두꺼운 벽 때문에 방 너머의 기척을 살피는 일도 쉽지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웬만한 여자보다 고운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질 때면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시선만으로 질식될
것 같았다. 알모어는 꽉 조여진 숨통 사이로 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아제프를 쳐다봤다.
시간이 좀 흐르자 아제프는 바짝 긴장한 알모어를 보다가 흉흉한 기세를 억누르며 거울 앞에 섰다. 그가 찡그린
이마를 펴며 옷을 가지런히 다듬자 알모어가 슬금슬금 다가가 그에게 상자를 건네줬다.
“죄송합니다.”
푹 수그린 음울한 등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제프는 차게 식은 얼굴로 알모어를 등지고 문을 직접 열었다. 은밀한
기운이 감돌던 내실이 열리고, 환한 복도가 드러났다. 엘제이는 그의 옆방에 있을 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거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엘제이가 나왔다. 아제프는 바닥만 보고 있는 엘제이를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제이, 준비 다 했어요?”
화장으로 울음기를 가린 엘제이의 얼굴은 꽃이 핀 것처럼 화사했지만 표정이 탈색되어 어쩐지 음울한 빛이
감돌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표정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생긋 웃었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엘제이를 보며 시험하듯 물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당장 엘제이를 추궁해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을 참아냈다. 엘제이는
겁이 많으니 그가 여기서 화를 내며 꼬리를 말고 도망갈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홍염처럼 치솟는 울화를 참아내려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슬퍼도 참아내야 했다. 코르디스의 무도회에서는 승마대회 우승자인 아제프와 파트너인 엘제이가 첫 춤을
함께 춰야 했다.
여기서 도망쳤을 때 아제프가 받을 조롱과 비웃음이 엘제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상처가 많은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입양아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그를 헐뜯는 세시드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망가서는 안 됐다.
며칠 뜸하더니 오늘은 또 재발한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일정거리 이상 다가오려 하지 않았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입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이유를 깨부술 생각이었다.
희망을 빼앗긴 자의 고통은 컸다. 이지를 잃은 엘제이는 아제프와의 첫 춤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 안녕을 고할
생각이었다.
***
새하얀 대리석 바닥은 반질반질 빛났고, 엘제이가 걸을 때마다 높은 굽이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오늘의
주인공인 둘을 바라보며 시선을 모았다.
코르디스의 영예를 안은 승마대회 우승자는 황제보다도 늦게 도착하는 게 관례였다. 아제프와 엘제이가 발맞추어
걸어가 이미 도착해 있는 황제 앞에 섰다.
거대한 단상 위에서 흔들리는 샹들리에가 어지러운 시야를 현혹했다. 엘제이는 지끈지끈 아픈 몸과 머리에
식은땀이 났다. 지금이라도 도망가 편안한 침대 위에 몸을 누이고,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제프 란델, 엘제이 티아세. 그대들이 코르디스에서 보인 용기와 아름다움을 치하한다. 코르디스의 모든
명예로움이 그대들의 것이니, 이 무도회가 그대들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
황제의 엄중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엘제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금방이라도 비집고 나올 틈을 기다리는
눈물을 억눌렀다. 축복받아야 하는 순간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0 화
50
울먹이는 흐느낌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숨통을 콱 조였다. 축 늘어져 헐떡거리는 심장에 숨이 부족한 뇌가 곤죽이
되어 이지가 흐려졌다.
황제는 짧은 축언을 끝으로 등을 돌리고 단상 위로 올라가 버렸다. 엘제이는 무거운 발을 힘겹게 움직이며
아제프를 따라 중앙으로 걸어갔다.
엘제이가 짙은 우울과 불안함에 잠식될수록 아제프도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그의 자리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사그라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이성이 멀어지는 감각에 아제프가 입 안쪽 살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엘제이의 숨줄을 잡아채려는 광포함을 숨겼다.
불안하게 뛰는 두 심장에 부드러운 왈츠곡이 퍼부어졌다. 3/4 박자의 느린 음악은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흘렀고,
두 사람은 마음을 채 정돈하기도 전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몸을 맞췄다.
어지러운 머리와 달리 학습된 몸은 무의식적으로 우아한 풋워크를 시작하고 엘제이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잡으며 메스껍게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냈다.
엘제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이젠과 엘리사가 그녀의 시야에 스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황제와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루드비히의 얼굴이 지나갔다.
끝단이 풍성한 엘제이의 분홍빛 드레스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붉은 꽃을 수놓은 드레스가 흔들릴 때마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화려한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슬픔과 번민에 엘제이는 의식적으로 아제프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를 본다면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진실을 고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 남아 있고 싶을까 봐 무서웠다.
‘처음부터 다가가지 말 것을……. 당신을 지키고 싶다면 멀리 떨어졌어야 했는데. 리사처럼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엘제이는 아제프의 발끝을 보며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애썼다. 멍청하고 한심한 자신이 밉고 혐오스러웠다.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을 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려왔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우아하게 춤을 추며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엘제이는 그에게서 달아날 생각을 했고, 아제프는
그녀를 사냥해 제 곁으로 끌어올 생각을 했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춤을 멈추고 바로 섰다. 춤이 끝났음에도 엘제이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새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점점 몽롱해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열이 오르는지 눈가가 뜨거웠다.
“제이.”
“…….”
엘제이의 머릿속에는 얼른 무도회장을 벗어나 그에게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는 강박이 가득했다. 엘제이가 떨어진
그의 손을 보며 어떻게 해야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제프는 답 없는 엘제이를 보며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냉한 시선이 무도회에 모인 이들을 스쳤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삼키고 찬란하게 웃었다.
무도회장의 중앙. 사람들의 시선이 우승자인 그에게 모두 쏠린 때에, 아제프는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그의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요, 제이.”
엘제이의 고개가 번쩍 올라왔다. 둥글게 커진 녹안이 아스러질 듯 흔들리며 그를 담았다. 아제프는 이래도 도망갈
거냐고 묻는 것처럼 예쁘게 웃었다.
“세상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제프는 삐뚜름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고 엘제이를 응시했다.
그는 엘제이를 시험하는 듯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의 체면이 떨어질 것을 알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그에게 이별을 고하려던 엘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엘제이가 두 손을 꼭 잡으며 터지려는
울음을 참아냈다.
물기를 머금어 반들거리는 녹안이 화사하게 웃는 아제프를 담았다. 엘제이가 여기서 한 발짝 물러난다면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분명 여기서 청혼을 하거나 엘제이가 도망갈 수 없게 묶어둘 속셈이 보였다. 엘제이가 거절하려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아제프가 엘제이의 팔을 잡으며 또 한 번 고백했다.
“사랑해요.”
엘제이가 모질게 그를 외면하면 눈을 질끈 감았다. 화려한 얼굴 위를 뜨거운 눈꺼풀이 뒤덮자 암흑이 찾아왔다.
엘제이는 입술을 터트릴 것처럼 질끈 물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딱 잘라 그를 끊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그를 거부하지 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마음을 숨겼는데, 그게 독이 되어 엘제이의 발목을 휘감았다.
엘제이의 죄책감 어린 표정에 아제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그녀의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그를 봐달라는 소리
없는 호소에 엘제이가 입술을 꾹 누르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울 자격도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그를 기만하고 말았다.
그의 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그를 속인 기만자가 되고 말았다.
이쯤 하면 엘제이의 입에서 아니라는 말이 나와야 했다. 그가 울듯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열에 아홉은 져주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에게 지독하게 약했던 엘제이 티아세가 달라졌다. 정말 그를 끊어내려는 듯 독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제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냉혹한 기운이 맴도는 얼굴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놓아줄 수 없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제 것이었다.
푸른 눈에 태풍이 불었다. 광기가 휘몰아치는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화려한 얼굴이 애달프게 젖어갔다. 아제프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해도, 안 되겠어요? 저는 아닌데,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정말
아닌가요? 그럼 왜 그렇게 굴었어요? 왜 제게 틈을 주고, 받아줄 것처럼 그렇게 굴었어요! 왜!”
죄책감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엘제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뜨거운 눈가를 비집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엘제이의 눈을 적셨다.
‘당신을 사랑해서요. 당신을 좋아해서, 미안해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해요.
아제프…….’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아제프가 거친 손길로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구경하듯 서 있는 사람들을 오싹한 눈으로
노려보며 그녀를 테라스로 끌고 갔다. 엘제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를 말리려 했다. 테라스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란델, 웁!”
입을 열자마자 화끈한 감각과 함께 부드러운 살덩이가 밀려왔다. 아제프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엘제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요, 아제프.’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결박하듯 하얀 손목을 내리누른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왜? 싫어요? 그럼 소리를 지르세요. 소리를 질러서! 란델 후작이 당신을 모욕했다고 모두에게 알리세요. 저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 제 명예를 떨어트리고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보세요.”
“…….”
“란델 경, 저는,”
“싫으면 제 혀라도 깨무세요. 그러기 전에는 절대 안 물러날 거니까. 울어도, 나를 미워해도…….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아.”
엘제이는 물어뜯을 듯 거칠게 덮쳐오는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고통을 토해냈다.
서로에게 상처를 준 남녀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며 그러지 말라 애원했다.
그녀에게는 있는 문장이 그에게는 없었다. 달콤한 사랑의 문장은 그녀의 가슴에서만 빛났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문장이 가슴 위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는 그 문장의 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는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다.
[신의 문장] 속에서 주인공들의 인연을 축복하던 문장은 두 사람의 앞을 막았다. 어떤 것보다 강하게 엘리사와
알체스테를 끌어당겨 알체스테를 치유하던 신의 자비가 아제프와 엘제이에게는 족쇄였다.
아제프가 내리누른 하얀 손목이 움찔거리며 곱아들었다. 게걸스레 입술을 빨아올리는 남자의 행동이 광포할
정도로 무자비해서 엘제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르릉거리는 짐승 같은 소리가 아제프의 목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아-”
입술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엘제이가 신음을 토해내며 힘겹게 바르작거리자 아제프가 한숨 같은 숨결을
쏟아내며 새빨갛게 부은 입술을 핥아 내렸다.
도망가는 엘제이를 따라와 뿌리를 긁어내리고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던 순결한 입술을 집어삼킬 듯 빨아댔다.
입술을 잡아 뜯을 듯 힘을 주다가도 아픔에 엘제이가 신음을 토해내면 움직임을 멈췄다.
잔인할 정도로 흉포하게 날뛰다가도 부드러운 혀로 쓸어내리는 통에 엘제이가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문을 열라고 협박하다가도 애원하듯 매달리는 움직임에 엘제이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제프는 제 소유권을 주장하듯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흔적을 남겼다.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타액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빨아들인 남자가 거침없이 몰아치며 으르렁거렸다.
아제프의 난폭한 행동에 엘제이가 헛숨을 크게 삼키며 물러날 곳 없는 벽으로 몸을 붙였다.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무자비했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움직임에 엘제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엘제이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팔목에 들어갔던 힘이 점점 약해지자 아제프의 움직임도 부드러워졌다. 아제프는
휘청거리는 몸을 부드럽게 지탱하며 조그만 얼굴을 위로 꺾었다.
“우음, 흐…….”
아제프가 예상했듯 엘제이는 결국,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혀를 깨물기는커녕 그를 밀어내는 것조차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의 행동이 조금씩 부드러워지자 아릿한 통증을 토해내던 문장도 잠잠해졌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문장은
따스한 봄바람을 숨결처럼 불어넣었다. 따뜻한 문장의 힘이 엘제이의 몸을 부드럽게 달래며 이완시켰다.
축 늘어진 몸이 그의 손에 간신히 매달려 숨만 힘겹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숨이 부족한지 그의 밑에서 헐떡거리는 장밋빛 얼굴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얼굴에 열이 올라 뜨끈한 숨결이
할딱할딱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체온이 조금 높았다. 아제프는 몸이 안 좋은 것 같은 엘제이의
상태에 인상을 쓰고 물러났다.
그가 엘제이의 상태를 살피듯 그녀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열이 오른 이마를 한 번 짚어본 아제프가 겉옷을 벗어
엘제이의 어깨에 둘러줬다. 견장이 가득 달린 화려한 예복이 엘제이의 몸을 감쌌다.
“싫다며?”
“…….”
결국 그를 밀어내지 못한 엘제이를 조롱하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또 돌리려 했다.
아제프는 손에 힘을 줘 돌아가려는 턱을 붙잡으며 얼굴을 바짝 내밀어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분홍빛 입술을
핥았다.
아제프는 이 애처로운 모습에 물러났다가는 엘제이가 티아세 家로 도망가 꼭꼭 숨어버릴 걸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만든 요새에 숨어 그를 보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아제프로서는 강제가 아니고서야 그녀를 잡아 올 방법이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며?”
“……사랑하지 않아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기계적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제프는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지
않는 엘제이의 눈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몇 걸음 물러났다.
스릉-
날카로운 검날이 검집을 할퀴는 소리가 확 트인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난데없는 쇠붙이 소리에 엘제이의 눈이
그를 향했다. 예리하게 버려진 칼날이 달빛을 머금고 스산하게 빛났다.
아제프는 난간에 등을 붙이고 시린 눈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그가 잔혹한 입술을 비틀어 엘제이의 마음을
후벼 팠다.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섰다. 엘제이는 날이 선 칼날과 곧 떨어질 듯 흔들리는 아제프의 몸을 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비꼬듯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사나운 잇새가 드러났다. 그가 으르렁거리며 엘제이를 노려보자 엘제이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기절할 것 같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시린 눈이 저를 향하자 엘제이가 움찔 몸을 물리며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엘제이는 그의 비난과 질책에 채찍질 당하는 것 같았다. 온기를 담았던 벽안이 차게 식자 숨이 턱턱 막히고,
괴로움에 질식될 것 같았다.
“아제프…….”
차갑게 내쳐진 손에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신음처럼 부르며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냉랭한 거부에 심장이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문장 위에 손을 올리며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탁탁- 손바닥을 가볍게 누른 단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장난을 치는 그의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오싹했다.
음울하게 내리깔린 푸른 눈에 기묘한 귀기가 서려 오니의 불처럼 요요하게 빛났다. 곧 음울한 표정을 지워낸
아제프가 눈꼬리를 싱긋 접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제이,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내 곁을 떠나면 더 심한 짓을 한다고 했잖아.”
“당신을 떠난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다만 계속 친구로 지냈으면 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요. 그러니 제발, 검은 내려놔요. 네?”
“아제프.”
그의 난폭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엘제이의 음색이 형편없이 떨렸다. 아제프는 무서워하는 엘제이를 흘끔
바라보고는 검을 치웠다. 그가 한 손을 뻗어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제프!”
스산한 목소리가 길게 내리깔리자 본능적인 불안감에 엘제이가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발버둥 쳤다.
그녀의 강한 거부에 엘제이의 어깨에 아슬아슬 걸려 있던 아제프의 옷이 툭 떨어져 나갔다. 아제프는 못마땅한
얼굴로 떨어진 옷을 흘금 바라보다가 엘제이의 손을 단단하게 움켜잡았다.
“아제프!”
경악한 음색에 아제프가 입꼬리를 올리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달빛을 머금은 남자의 얼굴이 처연하게 빛났다.
처연한 얼굴 속 피처럼 붉고 요사스러운 입술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입술을 뒤틀자 여린 꽃봉오리가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손에서 힘을 빼며 그에게 애원했다. 날카롭게 제련한 검은 조금의 움직임에도 그의 살점을 베어냈다.
뜨거운 핏물이 흐르고 아제프의 셔츠가 축축하게 젖는데도 그는 남 일 보듯 무감각한 얼굴을 했다.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나도 이제 지키지 않을 거야. 몇 번을 그어야, 아니, 어디를 그어야
사람이 죽는지 시험해볼래?”
아제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엘제이가 비명 섞인 외침을 토해내며 간절하게 비는데도 아제프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엘제이가 손을 움직여 검날을 잡으려 하자 인상을 찌푸린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단단히 틀어쥐며 그녀의 손이 상하지 않게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가 말썽을 피우는 아이를 혼내듯 엄하게 말하며 엘제이를 질질 끌고 왔다. 그의 몸에 밀착된 엘제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이미 늦었어.”
“놓아주지 않아.”
아제프가 손에 힘을 주고 단검을 힘껏 치켜들었다. 엘제이는 허공을 가르고 빠르게 올라가는 검끝을 눈으로
좇으며 입을 벌렸다. 금방이라도 그의 몸을 찌를 듯 흉흉하게 선 칼날이 아제프의 피를 머금고 번들거렸다.
“문장이 있어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2 화
52
아제프는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렸다. 기이할 정도로 아파지는 머리에 그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렸다.
사특한 것에 미혹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제프가 멍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위험하니까 이리 주세요.”
엘제이는 테라스 곳곳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난간 쪽으로 검을 휙 던져버렸다. 엘제이는 검을 던지고서도 불안한지
난간 너머를 살폈다. 무거운 단검이 빠르게 낙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제프는 떨어지는 단검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다가오지 않는 엘제이에게
빠르게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날이 선 물음에 엘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아연하게 풀렸다. 입술을 질끈 깨문 얼굴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탈하게 질렸다.
엘제이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드레스 윗자락을 풀었다. 연분홍색의 공단 리본이 엘제이의 손에 풀리자 하얀
살결이 조금 드러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의미 모를 그녀의 행동에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말렸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살결이 곱게
이지러졌다. 아제프가 그곳에서 눈을 돌리며 옷자락을 다시 여며주려고 손을 뻗었다.
아제프가 옷소매로 입술을 눌러주며 흰 턱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아연한 얼굴로 그걸 보던 아제프가 곧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미쳤어?”
멍하니 문장을 바라보던 아제프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넘어갔던 엘제이의 어설픈 거짓말도 함께 떠올렸다.
[문장……. 문장 보유자세요?]
[……아니, 성력이에요…….]
“하아…….”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힘없는 소리에 엘제이는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파낼까?’
“빌어먹을.”
아제프가 짧게 욕설을 지껄이며 구역질을 참아냈다. 저 몸에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철렁거리며
흔들렸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느끼고 나서야 도저히 못 할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개 같은!”
‘뭘 잘했다고 우는 걸까?’
엘제이는 빗물처럼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말없이 아제프의 옷깃을 놨다. 더는 그를 붙잡을 용기가 없었다.
힘없이 떨어진 손이 천천히 앞으로 모여들었다. 엘제이가 축축한 두 손을 모으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속여서 미안해요.”
엘제이의 사과에 아제프가 성난 얼굴로 쭈그린 등을 노려봤다. 치솟는 울화에 아제프가 이마를 짚고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는 서릿발처럼 나가려는 비난을 최대한 삼켰다. 그에게 잘못한 건 맞았지만, 죄인처럼 구는 모습이
언짢고 거슬렸다.
아제프는 입안을 맴도는 욕설을 죄다 삼키고, 자신을 속인 거냐고 비아냥거리려는 물음을 억눌렀다.
“알고는 있어?”
결국 튀어나간 목소리에는 채 누르지 못한 사나움이 가득 담겼지만, 예상한 것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제이는 그마저도 서러운 듯 숨을 크게 삼켰다.
눈앞이 어질어질 흔들렸다. 눈물이 그녀의 기운도 다 앗아가는지 시야가 어둡게 뒤덮였다. 엘제이는 일렁이는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며 그에게 천천히 사과했다.
울먹거리는 음색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뭐라고 더 쏘아주려다가 하얗게 드러난 가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린 밤바람이 옷자락을 흔드는 게 보였다. 더군다나 지금 엘제이는 몸이 좋지도 않았다.
아제프가 천천히 몸을 굽혀 떨어진 옷을 주우며 손으로 그것을 몇 번 털었다. 깨끗해진 옷이 엘제이의 어깨 위로
걸쳤다. 그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둥글게 뜬 녹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아제프가 손을 뻗어 연분홍색 공단
리본을 천천히 묶었다.
그녀가 한 짓을 알았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다정한 행동에 엘제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제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엘제이가 그를 올려보며 조그맣게 물었다.
“왜, 화 안 내요?”
“미안, 미안해요.”
“사과를 듣는다고 내 기분이 나아져? 감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거짓말한 대가는 제대로 받아야겠어.”
“나는 문장이 있는데! 당신은 문장이 없대! 그래서 제 마음은 시한부래요. 언젠가는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거라고, 당신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제 목숨보다 소중한데……. 근데, 그런
마음이 언젠가는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없이 소멸한대요. 그런 제가 어떻게 감히……. 당신을 좋아한다 말해요!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입에 담아요!”
엘제이의 비명에도 아제프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냉랭한 시선에 기세 좋게 소리치던
엘제이의 손이 쓱 하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제프는 멋대로 잡아 온 주제에 또 멋대로 도망치려는 발칙한 손을
붙잡으며 냉랭하게 물었다.
“그래서?”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3 화
53
엘제이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몸이 한계에 달했는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아제프는
휘청거리는 몸을 잡아채 안아 들었다. 숨을 길게 내쉬는 얼굴이 열에 들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픈 거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엘제이가 이러는 건 신경이 쓰였다. 아제프가 말없이 열로
발개진 얼굴을 내려다봤다.
“너는 일단 좀 자.”
엘제이가 쓰러지듯 잠들자 아제프의 몸 주위로 음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싸늘하게 식어 일렁거리는 벽안이 모든
걸 없애버릴 듯 짙은 광기와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
날카롭게 벼린 기운이 주변을 음울하게 뒤덮었다. 아마, 그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오싹함에 다리가
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까드득- 이를 악무는 살벌한 소리와 꽉 쥔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분노가 그의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말해줬다.
아제프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서서 잠이 든 엘제이를 복잡한 심경으로 노려봤다.
아제프의 머릿속에 납치와 감금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이대로 엘제이를 데려가 어딘가에 숨겨두고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막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제프…….”
아제프가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두운 감정들로 잔뜩 흐려진 눈에 조금 맑은 기운이 돌아왔다. 일단은
엘제이를 좀 눕히고 의원에게 보여주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아제프는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며 이대로 여기서 뛰어내려 저들 몰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테라스에서 나오지 않는 둘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겠지만, 피가 묻은 꼴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가 막 2 층 난간을 붙잡을 때, 테라스를 기웃거리는 기척이 심해졌다. 익숙한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곧 둘이
다투는 소리가 나더니 테라스 문이 벌컥 열렸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엘제이를 끌어안은 모습이 달빛 아래에서 스산하게 빛났다. 테라스 안을 둘러보던
아이젠은 아제프의 피를 배 쪽에 묻힌 엘제이를 보고 경악했다. 문을 꼭 닫은 엘리사도 축 늘어져 쓰러져 있는
엘제이의 모습에 입을 크게 벌렸다.
단련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아이젠은 타고난 지배자였다. 중년의 서슬 퍼런 기백에 아제프도 조금 놀란 눈으로
아이젠을 바라봤다. 오싹한 눈으로 그를 노려오며 다가오는 모습이 야차처럼 흉흉했다.
웬만한 이들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흉한 기세였지만, 아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아이젠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 아제프의 멱살을 잡아 비트는 통에 아제프가 인상을
쓰며 잠든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너무 소란스러웠다. 아제프가 아이젠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속삭였다.
다치진 않았지만 뜨거운 엘제이의 몸을 짚어보던 아이젠이 아제프에게서 엘제이를 뺏어오려고 손을 뻗자 아제프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으르렁거렸다.
“제 것입니다.”
“당신의 딸이 저를 찔렀습니다.”
“……뭐?”
“저는 저를 해하려던 살수를 붙잡은 것뿐입니다. 드물게 관용을 베풀어 아무 흠집도 내지 않았지요. 어디
처음부터 끝까지 저랑 함께 진흙탕 싸움에 빠져 보시겠습니까?”
아이젠은 엘제이가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정황상 엘제이가 범인 같았다. 아제프가 단련된
기사라 할지라도, 방심한 순간 찔렸다고 주장한다면 엘제이 쪽이 불리해졌다.
베아르시 제국은 신분사회였고, 귀족이 귀족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는 재판이 열렸다. 정당하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찔렀다고 주장한다면 재판 결과가 어떻든 엘제이에게 갖은 소문이 따라붙을 것이었다.
아이젠은 엘제이가 그런 걸 감내하길 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것이라고. 청혼서를 보낼 겁니다. 저를 제이의 짝으로 인정하세요. 그거면 됩니다.”
아제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품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왔다. 원래 무기는 여유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단검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피식 웃자 아이젠이 입을 다물었다.
“…….”
아제프는 숨은 실력자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문신이었고, 아제프가 가진 능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가
건장한 청년이라 해도 쪽수에서 밀렸다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검을 반입하는 건 금지였으니 지금이라도 위병을 불러 아제프를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아제프가 그것이 엘제이의 것이라 주장하면 또 곤란해졌다. 아이젠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아제프를 노려봤다.
“루드비히?”
‘또, 라고?’
생각보다 거센 아이젠의 반응에 아제프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아이젠은
더는 아제프에게 아무런 정보도 내어주지 않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4 화
54
오늘, 아제프의 파트너로서 실수하고 싶지 않다던 엘제이가 떠올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치장에 신경 쓰고
발긋하게 상기된 뺨으로 그를 기다리던 언니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저 남자도 언니와 같은 마음임을 알았다. 신의 축복이라는 문장이 싫다며
울먹이던 엘제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엘리사는 언니가 좋았다. 하나뿐인 쌍둥이였고, 쌍둥이의 슬픈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란델 후작님. 당신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요. 언니도 당신을 많이 좋아해요. 이러는 걸 보니, 혹시
문장에 대해 알게 된 건가요?”
그건 쌍둥이의 직감 같은 거였다. 잠들었음에도 간헐적으로 아제프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엘제이를 보자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엘리사가 천천히 다가가 우는 엘제이의 얼굴을 닦아냈다.
“아제프…….”
꿈속을 헤매는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계속되는 잠꼬대에서 들려오는 건 그의 이름뿐이었다.
아이젠도 그걸 알았는지 착잡한 얼굴을 했다.
오늘의 엘리사는 꼭 엘제이 같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홍색 눈이 아제프를 직시했다. 아제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많이 닮은 엘리사의 얼굴을 가라앉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언니는 문장을 싫어했고, 그걸 들키는 걸 두려워했어요. 다 당신이 좋아서 그랬던 걸 거예요. 아버지, 언니가
이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아등바등 숨기려 했어요. 두 분이 싸우신다면 언니가
슬퍼할 거예요.”
아이젠은 딸에게는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가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말하자 엘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엘제이를 가리켰다.
아이젠의 시선이 엘리사의 손을 따라 울먹이며 아제프의 이름만 불러대는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가슴 시린 부정이
그의 눈을 촉촉하게 젖게 했다. 문장이 생긴 후 상사병을 앓듯 도무지 기운이 없던 엘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고서에도 문장을 이겨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모두가 제 반려만을 사랑했다. 그런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엘제이는 아제프만을 원했다. 아이젠은 회의감이 들었다.
“제이가 많이 아픕니다.”
아이젠도 알고 있었다. 이마에 열이 오른 모습이 몸살 기운이 있는 듯했다. 아이젠은 감정에 이끌려 일을 망친
적이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역시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
아제프는 뜨거운 온탕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있었다.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사이로 물기를 머금어 착
가라앉은 백금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몸을 가볍게 씻은 남자는 나른한 몸을 욕조에 기댄 채
눈을 떴다.
수증기로 희뿌옇게 뒤덮인 천장이 보였다. 저걸 보고 있자니 아텐을 피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축축이 젖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며 마약에 대한 갈증을 훔쳐낸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른 아침이지만, 여름에 가까워져 일찍 눈을 뜬 햇살이 새하얀 캐노피에 걸려 흔들렸다. 따사로운 태양을 머금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밀빛 소녀는 배 위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새근새근 잠든 채였다.
그렇다고 가려지는 건 아닌지, 아제프의 벌어진 손 틈 사이로 예쁜 색감의 빛무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새하얀
우유처럼 몽글몽글한 피부를 뭉근하게 만지던 남자는 이내 손을 떼어내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우음- 아제프…….”
아제프는 얼굴을 찌푸린 채 붉은 선으로 반 토막이 난 문장을 노려봤다. 시린 벽안에 담긴 문장이 따스한 빛을
뿜어대며 미워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문장을 신성시하는 베아르시 제국에서는 문장을 도려낸 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파낸 자가 있어도 그걸
드러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어떤 기록도 없기에 아직 참아주는 것이었지만, 언젠가는 저걸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아제프가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요사스러운 것을 찌릿- 노려봤다. 그녀의 가슴에 기생한 무생물 주제에 그의
차가운 시선에 움찔 몸을 떠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지나친 환각에 혀를 씹으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알려지지 않은 문장 보유자를 은밀히 찾아보는 중이었다. 보통은 신전에 바로 고하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자들을
해치는 건 위험했다. 찾는 게 힘들겠지만 막 문장이 발현한 자를 잡아와 그것으로 먼저 실험해보고 저 사특한
것도 처리할 생각이었다.
저걸 파내는 모습을 자세히 생각하자 또 구역질이 올라왔다. 겨우 피부를 조금 도려내는 행위가 뭐 그리 어려운지
짜증이 솟구쳤다.
아제프가 흉흉한 얼굴로 문장을 보다가 엘제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가해지는 힘에 엘제이가 놀랐는지
작게 버둥거렸다. 그는 놀란 것 같은 엘제이를 무시하며 얼굴을 내려 문장을 물어뜯듯 깨물었다.
“아! 아읏!”
피부가 씹히는 감각에 잠에서 깬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아제프가 놓아주지 않고 문장을
씹어대자 고통에 눈물이 고인 엘제이가 놀란 듯 몽롱한 눈을 깜빡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반짝반짝 빛나는
익숙한 백금발이 보였다.
“아-”
제 몸을 끌어안은 존재를 확인하자 버둥거리던 엘제이의 몸이 얌전해졌다. 그녀가 저항을 멈추고 몸을 내어주자
아제프가 빨갛게 부어오른 살결을 혀로 핥았다. 짐승이 상처를 치료하듯 핥아대는 혀에 엘제이는 배 속이
찌릿찌릿 울렸다.
“하아. 아제프?”
“가만히 있어.”
마음대로 행동해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운 게 미안하지도 않은지 아제프는 폭군처럼 굴었다. 잇새 사이로 들어간
피부가 잘근잘근 깨물렸다가 핥아지기를 반복했다.
“아제, 프. 아, 그만…….”
아픔과 찌릿한 감각이 번갈아가며 느껴지자 엘제이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아제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그만하라고 애원하는데도 그는 화풀이하듯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아!”
“딴생각하지 마.”
엘제이가 멍하니 천장을 보자 아제프가 저에게 집중하라는 듯 신경질적으로 문장을 물었다. 피가 나올 정도로
물어뜯지는 않았지만 붉게 부어오른 문장이 애처로웠다.
“아제프, 아파요…….”
부어오른 살결을 깨물자 더 아팠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엘제이가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촉촉한 목소리에
아제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멍하니 오늘도 예쁜 얼굴을 바라보던 엘제이는 새삼 하얗게 드러난 가슴으로 시선을 내리고 얼굴을 확 붉혔다.
제가 왜 몸을 겨우 가린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이곳에 누워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5 화
55
엘제이의 동공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여기에 잡혀 있으면 그녀의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단둘이 테라스로 나간 걸 본 사람이 몇 명인데, 어떻게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제이가 뭐라고 설득하려 하자 아제프가 손끝을 세워 문장을 꾹 눌렀다. 많이 쓰라렸는지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자 아제프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뭐라고 욕을 빠르게 내뱉었다.
아제프가 진지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며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연고를 발라줬다. 세심한 손길이 쓰라린 가슴을
스치자 엘제이가 발긋한 얼굴로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멋대로 물어댈 때는 언제고 치료라니,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엘제이는 그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치료를 끝낸 아제프가 냉랭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다 밑으로 떨어진 어깨끈을 위로 올리고 헤집어진 옷도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가 연고를 조금 흔들며 말했다.
“편안해.”
그런 의문들이 아제프의 머리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엘제이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더 무서워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정상인데 엘제이는 편안해 보였다.
모른 척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에 아제프가 뭐라고 빠르게 욕설을 쏟아냈다.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말에도 엘제이의 얼굴은 편안했다. 엘제이는 제 몸에 올라간 손을 끌고 와 그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제프는 태연한 얼굴을 보며 차갑게 얼굴을 굳히려 노력했다. 다른 놈에게 잡혀가도 이 모양일까 상상하니 절로
화가 솟구쳤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목을 콱 눌러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 차림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내가 너를 납치해서 여기 감금해둔 거야. 그런데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내가 너를 억압하고 누르는 중인데 좀 더 무서워해야 할 거 아니야!”
엘제이도 그게 참 이상한데, 무섭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해칠 수 없듯이 그도 저를 해칠 수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가 진짜 두려워하거나 거부한다면 멈출 걸
알았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작았지만, 다급한 감이 있었다. 빠르게 두드려지는 문에도 아제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은 엘제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넌 신경 쓰지 마. 안 보내줄 테니까.”
엘제이는 그의 밑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눈매가 사나워지는 아제프를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엘제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입술만 오물오물 움직였다.
아제프가 대답을 안 해주자 알모어의 다급한 목소리가 방문을 넘었다. 무덤덤하게 흘려듣는 아제프와 달리
엘제이는 홉뜬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얼굴만 빼꼼 내밀고 이불로 몸을 감싼 모습에 아제프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갔다. 그가 불량스러운 얼굴로
애벌제이를 바라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리 와.”
엘제이는 강아지 부르듯 제게 손짓하는 아제프를 힐긋 보다가 삐뚤게 올라간 그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인상이 다양한지, 오늘의 아제프는 무척 나쁜 사람 같았다.
“이리 오라니,”
“미, 미안해요.”
엘제이는 성이 난 아제프를 보며 버둥버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욕실로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에 아제프가 기가
막힌 사람처럼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는 이불을 소중히 끌어안고 뛰어가는 엘제이를 보며 이불을 콱 밟아버렸다.
“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아제프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제이는 히끅- 숨을 삼키다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이불에 가려진 입술이 우물거리며 변명 같은 소리를 했다. 아제프는 미지의 생명체를 관찰하듯 오묘한 눈으로
엘제이를 쳐다봤다.
그녀가 도망가는 이유야 뻔한 것이고 예상했던 거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깨어나면 실컷 괴롭혀줄
생각이었는데 한계가 있었다. 아제프는 어쩜 저리도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는지 고민하며 엘제이를
관찰했다.
쾅쾅쾅-
“후작님! 후작님!”
알모어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제프를 열렬하게 불렀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는데도 아제프는 무관심했다.
알모어는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울먹거렸다.
어느새 문 앞으로 걸어온 아이젠은 울먹거리는 알모어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점잖게 말했다.
“비키시게.”
“히이익!”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당장 비키지 않으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듯 기백이 대단했다. 알모어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바짝 물러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6 화
56
“아, 아버지! 이건, 그러니까, 제가, 납치당하고 싶어서! 후작님한테 여기로 데려와 달라고, 제가 먼저,”
어느새 다가온 아제프가 산발이 된 엘제이의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한심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깃장을 놓는 모습에 엘제이의 얼굴이 울상으로 흐려졌다.
엘제이의 횡설수설에 아이젠마저 ‘그걸 지금 말이냐고 하느냐’는 눈으로 딸을 쳐다봤다. 두 남자의 시선에
엘제이는 점점 작아졌다.
아이젠은 불퉁한 얼굴로 서서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겨주는 아제프를 보다가 발긋한 얼굴로 바닥을 보는
엘제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옳은 선택이 맞는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둘을 떼어 놓는다면 나날이 말라갈 엘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아직 찾지 못한 엘제이의 반려를 다른 자들이 먼저
알아챈다면 좋을 것 없었다.
문장을 숨긴 건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 되었다. 아이젠은 지금부터 더 철저하게 그 사실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상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아버지?”
뜻밖의 말을 들은 듯 엘제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아제프에게 화를 내거나 윽박지를 것으로 생각했다. 아제프는
그녀를 납치했다고 얘기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이젠이 이토록 온화한 게 이상했다.
“네. 좋아해요. 저는, 이제 문장은 무시할래요. 아버지가 준 신석도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힘들게
구해오셨는데……. 죄송해요. 저는, 아제프가 아니면 안 되는걸요…….”
그래. 이게 맞는 거였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만큼은 물러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지를 잃었던
눈이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문장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피해 아제프가 크게 다칠 뻔했다. 엘제이는 그때의 오싹함과 다급함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젠이 둥근 이마 위로 손을 짚었다. 간밤에 다녀간 신관의 치유가 도움이 되었는지 몸살로 앓던 몸은 괜찮아진
듯싶었다. 엘제이가 골골대는 아이는 아니었으나 이처럼 신력이 잘 드는 애도 아니었는데 빠르게 치유된 게
이상했지만, 아이젠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요?”
하지만, 간신히 허락을 받았는데 왜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던 엘제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요?”
엘제이가 고민하며 아이젠에게 물어보려고 할 때 아제프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알모어 곁에 서 있는 시녀를
가리켰다.
아제프는 여전히 누에고치가 되어 이불을 질질 끌며 사라지는 엘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기도 욕실이
있었지만, 엘제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한동안 방 안에서 못 나오게 하며 괴롭혀줄
생각이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다치면 어쩌려고…….”
가볍게 혀를 차는 목소리와 함께 혼잣말 같은 타박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던 알모어가 천천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아이젠은 이미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아제프를 보며 오묘한 얼굴을 했다. 무엇이 그토록 서로를 끌리게
하였을까. 하긴, 꼭 문장이 있어야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하지 않은 건가?”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아제프는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불퉁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가 예민해지려는 신경을 누르며 조금 서늘하게 말했다.
“심술을 좀 부린 겁니다.”
제 딸에게 심술을 부렸다는 말에 아이젠의 눈꼬리가 파들, 떨렸다. 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도 아제프는
덤덤했다. 그는 잠시 한숨 같은 숨을 쉬며 천천히 말했다.
아제프가 담담하게 말하자,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해봤자 좋을 것 없었다. 누가 제 목숨을 위협한다는
소리를 굳이 해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젠이 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제프에게 맡겼던
또 다른 딸을 찾았다.
“그래도 언니는 소중한지 제이가 나을 때까지 나름 열심히 보살피더군요. 밤늦게 자러 갔으니 그녀는 아직
한밤중일 겁니다.”
아제프는 말없이 걸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잠시 뒤 방으로 돌아온 아제프가 문을 열었고, 아이젠은 그가
안내하는 대로 저택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
“왜 이렇게 된 거지?”
엘제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저택 앞마당을 산책했다. 아제프와 아이젠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엘리사는 자고 있었다.
실없는 생각을 하던 엘제이는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나풀나풀 날아가는 나비를 발견했다. 봄을 묻힌 듯 샛노랗게
빛나는 작은 나비가 담벼락 쪽으로 날아갔다.
“그대, 혹시 문장보유자인가?”
환한 낮이라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인데, 어두운 로브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음울했다. 남자의 이마까지 내려온
새까만 후드가 남자의 표정을 가리고 바람결에 조금씩 흔들렸다. 얼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얼굴을 뒤덮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몸을 물리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엘제이의 머리는 뒤로 물러나라는 를 계속해서 내리는데, 그녀의 몸은
단단한 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속박된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뭐지?’
아제프가 붙여준 시녀 무리의 장인 율리아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말끝을 적신 긴장감만은 물리치지 못했다.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율리아는 여기서 어떤 짓을 해도 그녀들만으로는 이자를 막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허벅지에 꽂힌 검이라도 뽑으려 했지만, 남자는 조금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검을 뽑는
순간, 제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율리아가 엘제이의 앞을 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보통의 시녀가 아닌 건가?”
새까만 눈을 엘제이에게서 떼어내고 율리아를 바라보던 사내는 느릿하게 말했다. 원래의 성정이 그러한 듯
느긋하기만 한 목소리가 더 섬뜩했다. 착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았지만, 율리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침에 갈아입은 시녀복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어 달라붙었다. 질척질척해진 몸은 식은땀을 흘렸고 관자놀이에
맺힌 땀은 도르륵 굴러 떨어지며 턱 끝에 맺혔다.
눈꼬리를 사납게 세운 율리아의 경계에도 남자는 율리아에게 관심을 내어주지 않았다.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다시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엘제이에게로 향하자 주변에 서 있던 시녀들이 검을 뽑아들고
남자의 앞길을 막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7 화
57
갑작스러운 대치에 정신이 혼미한 엘제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를 따르는
시녀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어 남자를 위협했고 처음 보는 남자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막내가 후작님을 불러오기까지 어떻게 해서든 저 남자를 막아야만 했다. 그게 율리아에게 내려진 사명이었다.
율리아는 조그맣게 속삭이자 엘제이도 뭔가 상황이 안 좋은 걸 알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가 뒷걸음질
치며 자리에서 벗어나자 율리아가 그녀의 앞을 단단히 엄호하고 다른 시녀들이 남자의 앞길을 막았다.
까만 남자는 제게 뻗어지는 검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 상황이 그저 귀찮은 듯 무기질적인 눈으로
시녀들을 응시했다. 그가 발을 한 걸음 내딛으려 하자, 율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경계했다.
율리아는 그를 인식하는 순간 몸을 날렸다. 그녀의 반응이 느린 건 아니었다. 다만, 남자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쿨럭!”
“언니!”
“공녀님!”
율리아가 절규하듯 외치며 엘제이를 불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율리아를 돌아보기도 전에 하얀
손목이 남자의 손에 잡혔다. 차가운 손에 움칠, 몸을 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엘제이는 어떻게 된 건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옆에 있던 시녀가 검에 맞아 날아갔고, 그녀의 눈앞에는 대검을
든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안과 마주친 맑은 녹안에 짙은 두려움이 깔렸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발광하며 얼른 벗어나라 소리쳤다.
‘이 남자, 누구지?’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눈을 더듬으며 얼굴을 눈가를 파들파들 떨었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제이가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당신, 누구?”
***
1 층으로 내려간 아제프가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린 복도를 지나쳐 가장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별장
집무실에 놓인 커다란 책장을 미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깜깜한 지하실을 뒤덮었다. 어디서 물이 고여 떨어지는지 똑똑- 소리가 음침한 곳을
적시며 울려 퍼졌다. 폐가도 아닌데, 일부러 이렇게 해둔 건지 어두운 공간은 음울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제프와 아이젠이 계단을 내려가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지하실 곳곳에 환한 불을
밝혔다. 드러난 바닥은 깨끗했지만, 거칠거칠한 돌바닥은 아이젠의 신경에 거슬렸다.
“음침한 곳이군.”
“제 어머니인 그라시아 란델께서 만드신 곳이죠. 좀 음침하긴 하지만, 은밀한 일을 하기에는 제격입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어둠만 한 것도 없으니까요.”
아제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상히 말했다. 어린 시절 이곳에 갇혀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던 소년은 과거를
모두 청산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아이젠은 지하실 곳곳에 걸린 괴상한 도구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걸린 날붙이들이
불꽃을 머금고 섬뜩하게 일렁거렸다.
“내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내게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누구보다 잔인해질 필요가 있지. 멋모르는
무뢰배에게 를 해줘야 할 터이니.”
아제프는 저를 관찰하듯 훑어보는 시선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가 만든 공간은 아니었지만, 지금 요긴하게
사용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행하는 은밀한 행위가 발각되지 않도록 깊은 곳까지 파낸 지하는 끝도 없이 내려가야 했다. 아제프의 얼굴
위로 주홍빛 불꽃이 어슴푸레 비췄다가 사라졌다. 그는 하얗기만 한 제 손을 흘깃 내려다봤다.
아이젠은 그가 하는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제 새끼를 지키려는 짐승의 눈이 어두운 공간에
형형하게 떠다니며 반질거렸다. 부드러운 갈색 눈이 발하는 진득한 시선에 아제프는 살짝 웃을 뿐이었다.
푸른 밤처럼 아름다운 눈이 맑게 빛나며 애원했다. 아련한 남자의 표정은 어느 정도는 연기였지만, 엘제이에게서
떼어지지 않던 눈은 진심이었다.
그들은 이미 한 배를 탄 운명이었다.
이이젠은 그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딸을 떠올리며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제프는 음침한 속내를 누르며 선량하게 웃었다. 물론 그는 엘제이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반려 쪽은 달랐다. 엘제이의 문장통을 걱정해 은밀히 반려를 찾는 아이젠과는 달리 그는 그 짝이라는 놈을
먼저 찾아내 흔적도 없이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어두운 감정을 숨긴 아제프가 선한 얼굴로 살갑게 말을 걸며 아이젠을 데리고 지하실 끝으로 내려갔다.
“아시겠습니까?”
“그래. 주술사군.”
“루드비히 황자의 궁에서 빠져나오는 걸 제 수하가 은밀하게 잡아온 참입니다. 반항이 심해서…… 제 수하들의
손속이 무자비해진 것 같습니다.”
아제프가 자못 안타깝다는 얼굴로 거짓말하며 제 손으로 고문한 남자를 가리켰다. 재갈을 문 채 숨을 헐떡거리는
남자는 온몸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지만, 치명상은 모두 피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이젠은 손발톱이 모두 빠지고, 양팔의 살점이 얇게 저미어진 남자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잔인한 광경이긴
했으나, 저놈이 했을 짓을 생각하면 저보다 더한 짓을 해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아제프가 말을 하다 말고 심장을 콱 움켜잡았다. 심장에 찬물이 콸콸 쏟아진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등줄기까지 소름이 돋는 오싹한 느낌에 아제프가 허리를 수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란델 후작?”
아이젠이 의아한 듯 아제프를 불렀지만, 아제프는 가슴에 올린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
시꺼먼 손이 심장을 움켜쥔 채 놔주지 않았다.
‘이게 뭐지?’
그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섬찟한 두려움에 아제프가 흔들리는 눈으로 땅을 내려다봤다.
아제프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폭사했다. 무언가를 느낀 듯 끔찍하도록 서늘해지는 심장에 차갑게 굳은
아제프가 벌떡 일어나 위를 향해 달렸다.
***
누구냐고 물어보는 엘제이의 질문에도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그저 엘제이의 손목을 잡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뭔가 괴로운 걸 참아내는 것처럼 찡그려진 이마가 어두운 로브자락 사이로 얼핏
보였다.
엘제이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위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을 뿜어대는 자인데,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애매함에 엘제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남자에게 붙잡힌 손목을 바라봤다. 그냥 잡고만 있을
뿐인데 살을 에는 감각이 전류처럼 흘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8 화
58
어떻게 안 걸까? 분명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남자는 엘제이에게 문장이 있느냐고만 물어봤을 뿐 문장이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제이는 계속 제게 손을 뻗던 남자를 떠올리고 그에게 잡힌 손목을 바라봤다.
‘하지만, 어디로……?’
엘제이가 시선을 잡아채는 남자의 눈길을 피해 주변을 둘러봤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율리아와 그의 구속에 묶인
듯 꼼짝도 못 하게 된 시녀들이 보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런 걸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놓으세요!”
“문장은 어디 있지?”
엘제이의 반항을 가볍게 누른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무저갱처럼 시꺼먼 흑안은 암흑처럼 짙었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차가운 어조가 시리도록 무서웠다.
엘제이가 남자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자 가해지는 압력이 커졌다.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목이 꺾일 것처럼
아파졌다.
“아아아악!”
남자가 음울해진 눈으로 예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젖혔다. 엘제이에게서 무슨 냄새라도 난다는 듯 코를 찡그린
남자가 얼굴을 멀찍이 떨어뜨리며 꺾어버릴 듯 세게 쥔 손목을 노려봤다. 새까만 장갑 위로 까만 연기 같은 게
솟았다.
“아읏, 흐…….”
“어디 있지?”
알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주면 죽을 거라는 확신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아니,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아아악! 이거 놔!”
엘제이가 버둥거리며 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반항하자 남자의 차가운 인상이 냉랭하게 굳었다. 그는 엘제이가
정말 싫은 듯, 혹은 더럽다는 듯 그녀의 몸에서 일정 거리만큼 떨어진 채였다.
“공녀님! 막아!”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던 율리아가 남자의 힘에 짓눌린 시녀들을 재촉하며 소리쳤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는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끊기고 시녀들이 움직였다.
남자는 타오르는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의미한 공격을 하는 시녀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귀찮은 듯
손을 휘젓자 전보다 강해진 압력에 서 있던 시녀들의 무릎이 저절로 꿇렸다.
‘마나의, 자질.’
어둡게 가라앉았던 저편의 기억이 떠올랐다. 공포로 홉뜬 녹안이 바람결에 일렁이는 검은 로브 자락을 향했다.
새까만 로브 속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얼핏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무감각했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남자는 웃는 게 아니라 사나운 잇새를 드러낸 거였다. 그는
혐오로 가득한 눈으로 엘제이를 쏘아보며 검을 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꼼짝도 안 했다. 엘제이가 허망한
얼굴로 까만 검신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감춰진 기억을 떠올렸다.
엘제이는 저 남자가 자신을 노리는 이유를 알았다. 남자의 정체를 안 순간 엘제이는 그녀의 힘으로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몸은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남자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남자가 자신을 죽이리라는 건 확실하게 알았다.
공포도 두려움도 남지 않은 하얀 얼굴이 짙은 후회와 체념으로 탈색됐다. 남자는 도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최고다-’라고 중얼거렸다. 일그러진 쾌감과 환희로 범벅된 까만 눈이 엘제이를 바라봤다.
차갑고 시려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뺨에 닿은 축축한 가죽에 몸서리가 쳐졌다. 숨통을 콱 조이는 공포에도
엘제이가 흐린 눈을 들어 아제프가 있을 별장을 바라보며 숨결 같은 이름을 토해냈다.
“아제프…….”
“전해주지. 넌 최고의 사냥감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제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적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하루는
그녀의 목숨으로 만족할 남자이기에 다른 이들은 무사할 거라 생각했다.
엘제이는 괴로운 얼굴로 저를 사랑해달라고 청하던 아제프를 떠올렸다. 또 그를 혼자로 만들었다는 미안함과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후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엘제이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나왔을 때, 어둠을 품은 검날은 엘제이의 가슴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제이!!!!”
막 지하에서 빠져나온 아제프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포효하듯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 마나가 크게
일렁거리며 그의 염원에 응답했다. 짙푸른 반달 모양의 검기가 쏟아지듯 튀어나갔다.
툭-
남자가 흠칫 놀란 찰나를 이용해 성큼 다가온 아제프가 쓰러진 엘제이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무리해가며
갑작스럽게 마나를 끌어낸 탓에 내장이 진탕된 듯 울렁거렸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긴 백금발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시녀들을 무참하게 짓누르던 남자도 오싹함에 몸을 떨 정도로 섬뜩한 푸른 눈이었다. 엘제이에게 이상이 생기자
시녀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아제프를 찾으러 간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들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위험한 남자를 만났음에도 지켜야 할 주인을 부른 이유. 보초를 서는 기사들을
제치고 아제프에게 달려갔던 이유. 아이젠이 두 딸의 안전을 그에게 맡겼던 이유.
물론 아제프는 검술에도 두각을 드러냈으나, 살기 위해 아등바등 배우던 검술이 능숙함을 넘어서 난폭해진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에게 마나의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손목에 흉이 질지도 몰랐다. 그조차 손대지 않는 몸이었다. 조금의 상처도 허용하지 않아 그 빌어먹을
문장도 파내지 못하던 중이었다. 아제프는 기절한 듯 미동도 안 하는 엘제이의 뺨을 만져보다가 이를 갈았다.
“죽여 버리겠어.”
문신의 직위인 외교부 수뇌로 일하면서 능력을 감췄던 이유가 있었다. 사용하기 싫었으니까. 아제프는 시리도록
추운 제 능력을 꺼렸다.
오랜만에 풀려나온 자질이 매섭게 일렁거리며 공기 중으로 뻗어나갔다. 푸른 자질이 마나를 지배했다.
남자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주변을 맴도는 마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얼핏 흔들리는 로브
사이로 새까만 자국들이 보였다.
“화가 난 건가?”
“온몸을 찢어버리겠어!”
저 여자는 그의 역린인 듯했다. 남자는 성서의 구절을 떠올리며 아까 엘제이를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왕이면 저자의 눈앞에서 죽여 버려야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남자는 광소를 터트리며 그의 몸을
찌르듯 일렁거리는 마나를 돌아봤다.
시전자의 염이 강력한지 남자의 지배를 거부하는 공기 중의 마나가 푸른 바다처럼 물결치며 냉기에 찬 결정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아름다운 물결을 돌아봤다. 마나라는 건 원래 염(念)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자질을 가진
자의 염이 강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능력은 누군가를 지킬 때 가장 크게 요동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9 화
59
엘제이를 안고 있던 아제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단순히 미친놈 같지는 않은데, 너무 태평했다. 반항하며
대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로운 창이 된 마나를 살폈다. 그가 시험하듯 한 손으로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명했다.
“찢어 죽여라.”
‘차가워.’
파르르 떨리는 초록색 눈이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좇았다. 몽롱한 녹안 위로 두 팔을 벌린 남자의 신형이 비치는
순간, 초록색 눈이 물결 같은 잔상을 그리며 동요했다.
푸르게 빛나는 얼음들이 차랑차랑-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송곳처럼 얇고 뾰족한 얼음뭉치들이 하늘을 수놓으며
얼음꽃처럼 모여들었다.
찢어 죽이라는 주인의 영창에 흥분한 마나가 길길이 날뛰며 목표를 향해 동시에 쏟아졌다. 수없이 많은 작은
결정들이 남자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엘제이는 꿈에서 여러 번 봤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되는 걸 숨죽이고 지켜봤다. 사람을 닮은 육신을 산산조각
나는 걸 보니 속에서 토악질이 치밀었지만, 면역이 생겨서인지 참을 만했다.
아제프는 찐득한 진액이 꿀렁꿀렁 흐르는 걸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지는
모습이었다. 그가 관찰하듯 신중한 얼굴로 얼음에 꿰인 사체를 살펴봤다. 인간이면 마땅히 흘려야 할 피가 없었다.
“인간이 아닌 건가?”
아제프의 목소리를 듣자, 몽롱했던 정신에 맑은 기운이 쏟아졌다. 엘제이는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에
괴로워하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아제프의 손목을 잡았다.
“제이?”
조그만 목소리가 색색거리며 힘겹게 새어 나왔다. 아제프는 푸르게 질려가는 엘제이의 손목을 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단순한 열상은 아닌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나!”
얼음에 꿰뚫린 남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진 진액이 바닥을 적시고 용암처럼 끓기 시작했다. 증발하는 연기를 본
아제프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쇄애액-
냉풍을 탄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쏟아져 둥근 반원 모영의 얼음벽을 만들었다. 아제프의 마나가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감싸자 순식간에 달아오른 새까만 연기가 얼음벽을 쾅쾅 두드리며 빠져나오려 했다.
단단한 성벽에 부딪힌 연기가 틈새를 찾아 헤매며 진득할 정도로 얼음을 더듬어댔다. 얼음 안은 점점 더 새까맣게
차올랐고, 음습한 기운은 벽 안에 갇혀 갈 길을 잃었다.
“저게……. 뭐야…….”
처음 보는 괴이한 광경에 아연실색한 시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제프의 능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언제든지 쏘아질 준비를 하는 연기가 구역질 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동생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피신한 율리아도 꼭 의지를 가진 듯 꾸물거리는 것들을 보며 창백한 얼굴을 했다.
저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아제프가 없었다면 이곳은 전멸이었을 게 분명했다.
“제이, 괜찮아요?”
벌려진 입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엘제이의 반응에 헛숨을 삼킨 아제프가 흘러내리는
타액을 닦아주며 엘제이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
피부가 괴사되는 것처럼 푸르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제프는 빙벽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연기를 흘긋 바라보다가
엘제이의 팔을 팔꿈치 아래까지 얼려버렸다.
“아-”
송곳처럼 몸을 찌르던 열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갑자기 멀쩡해진 상태에 엘제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아제프의
품에서 조금 일어났다. 푸르게 얼어버린 팔이 눈에 들어왔다. 제 몸에 일어난 사태를 확인한 엘제이의 눈에 옅은
공포와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쉬이, 좀 차갑죠? 동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는 마물의 피랑 비슷한 것
같아요. 신관을 불러 정화하고, 흉터도 안 남게 할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저것을 치울 때까지 아주
조금만, 기다려요. 참을 수 있죠?”
그가 조곤조곤 말하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도닥거렸다. 순간 팔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얼어붙었던
몸이 그의 달램에 천천히 이완됐다.
타락하지 않은 아제프의 능력은 알체스테와 같은 것이니 그의 말대로 괜찮을 걸 알았다.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푸르게 질린 손을 내려다봤다.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않고 조금 차갑기는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제프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그란 두상을 보며 옅게 웃었다. 엘제이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준 아제프가 얼음에
부딪혀 승화하는 연기를 바라봤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 먼발치에 떨어져 있던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엘제이를 부축했다. 제가 여기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았기에 얌전히 그녀들을 따라가려던 엘제이가 걸음을 멈추며 속삭였다.
“아는 자예요?”
아제프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아제프는 그녀가 어떻게 저런 위험한 놈의 정체를 아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엘제이는 아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기려고만 하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게 아제프에게 도움이 된다면 설령 이상하다는 의심을 받더라도 말해줘야 했다.
“이름은 지켈리온 힐데. 원래는 하스틴 절벽에 기거하는 자인데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
엘제이가 빠르게 속삭이다가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엘제이가 저자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지켈리온 힐데는 아제프 란델과는 다르게 문장 자체를 혐오해 문장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문장을 뽑아낸 후 그
반응을 보고 죽이는 걸 즐기는 자였다.
엘제이는 한겨울이 되었을 때나 하스틴 절벽을 벗어나던 지켈리온이 왜 벌써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얼굴을
좀 찌푸렸다.
“하스틴 절벽?”
하스틴 절벽은 마물의 성지. 그리고 그곳과 맞닿아 황폐하게 죽은 베아르시의 변경을 다스리는 게 알체스테였다.
“네. 아마 본체가 아니라 분신일 거예요. 약점이 있는데 만든 분신마다 달라요. 아마, 어느 신체 한 부위를
보호하려고 한다면 그곳이 약점일 거예요.”
“아제프, 조심하세요.”
아제프의 눈이 둥글게 뜨였다. 그는 선하게 웃으며 엘제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안전한 곳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던 아제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연기가 남자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건지 아제프의 빙결에 뜯겨 승화된 것들만큼 남자의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구릿빛 피부 위를 진득하게 기어 다니는 까만 문양들은 주술사들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켈리온이 이곳저곳 뜯겨나간 살점을 보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가 날카로운 맹수에게 물어뜯긴 듯 뭉텅뭉텅
떨어진 살점들이 푸른 마나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며 검을 들었다. 검 손잡이가 손바닥을 타고 휙- 회전하고, 투박한 모양의 바스타드
소드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말이 맞았다는 것에 기이한 얼굴을 했다. 지켈리온의 몸은 이곳저곳 찢겨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왼쪽 발만은 깨끗한 신발을 신은 채 그대로였다.
“하하하하! 최고다!”
지켈리온이 웃음을 터트리며 지면을 달려왔다. 기이하게 꺾인 두 팔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덜컹거리다가
대검을 휘둘렀다.
지켈리온은 오싹하게 가라앉은 벽안을 보며 히죽 웃었다, 온몸에 돋는 소름과 흉흉한 살기가 그렇게 기꺼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강한 사냥감이었다.
지켈리온은 차갑게 가라앉은 무표정한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분명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지켈리온의 기준에서 아제프는 매우 이상한 자였다.
“동류?”
얼어붙은 팔은 독액을 흘리지 못했고, 지켈리온은 떨어진 팔을 빠르게 포기했다. 분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지켈리온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절규하는 인간의 감정과, 얼굴이 좋았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최고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제프에게서 등을 돌린 지켈리온이 엘제이를 빤히 응시하며 그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시녀들이 엘제이의 앞을 빠르게 가로막았지만, 흉흉한 살기에 놀란 초록색 눈이 아제프의 눈에 파문을 일으켰다.
저놈의 팔에 매달려 허공에서 축 늘어져 있던 손끝이 잔상처럼 피어올라 아프게 내리박혔다.
아름다운 얼굴이 짜증과 분노로 찌그러졌다. 기분이 나빠 죽을 것 같았다. 새파란 귀기가 서린 눈이 난폭한
살기를 쏟아냈다.
숨통이 콱 조여들어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켈리온은 힘을 짜내 환희에 찬 목소리를 냈다. 시선을 내리니
날카로운 얼음에 꿰뚫려 갈기갈기 찢겨버린 왼쪽 발등이 보였다.
쿵.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남자가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며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 끈질긴 모습에
아제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뼛속까지 물어뜯어라.”
아제프가 가볍게 영창하며 푸르게 빛나는 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푸른 수증기가 뿌옇게 흘러나와 쏘아졌다.
검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걸어온 아제프가 얼어붙은 지켈리온의 발등을 밟아 뭉갰다. 지켈리온의 몸 위로 피어오른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들이 파사삭- 깨지는 소리를 내며 으깨져 피부 아래로 침식했다.
선한 얼굴에서 풍기는 짙은 살심과 음습한 기운에 지켈리온의 얼굴이 돌아갔다. 삐걱삐걱- 어긋난 기계처럼
작위적으로 돌아간 목이 180 도로 꺾여 굳어 있는 엘제이를 올려다봤다.
미처 막지 못한 귓속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콰직- 콰직-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엘제이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끽끽거리는 쇳소리를 내면서도 제게 뭐라고 중얼거리던 덜컥거리는 입술과, 흰자위까지 새까맣게 물든 짐승의
눈이 반질반질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파사삭- 소리를 낸 얼음이 죽어버린 몸체를 파고들며 몸 전체를 얼리자 죽어버린 몸체가 까만 진액이 되어
흘러내렸다.
피처럼 질척질척한 진액이 얼음에 묶여 속박되는 걸 냉랭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제프가 덜덜 떨고 있는 엘제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제프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입을 맞추고 희게 질린 뺨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시린
손이었지만 그 단단함에 두려운 마음이 서서히 풀렸다.
아제프가 파르르 몸을 떠는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보듬었다. 괜찮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무척 상냥해서 엘제이의
떨림도 점점 줄어들었다.
짙은 책망과 실망이 담긴 눈에 율리아는 치명상을 입고도 허리를 숙였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젓자 두 명의 시녀가 율리아를 부축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제프가 찡그린 이마로 생각하다 이내 상관없다는 듯 눈을 떴다. 대기를 얼리던 마나가 풀리며 투명하게 번져
사라졌다. 새파란 눈을 뜬 아제프가 그의 몸에 기대어 있는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꽁꽁 언 그녀의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 끝났어요. 이제 팔 좀 볼까요?”
아제프가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세심한 손길로 엘제이의 팔을 보며 푸르게 얼어붙은 살결을 손으로 쓸었다.
혹시 몰라 팔꿈치까지 얼려놨던 빙결이 그의 손에 천천히 해동되며 내려왔다.
“아……!”
꽁꽁 얼었던 팔이 녹진하게 풀리는 느낌에 엘제이가 작게 인상을 쓰고 신음했다. 아제프는 그녀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잡아챘다.
“아파요?”
“많이 다친 건 아니라, 신관이 간단하게 정화해주면 될 거예요. 제가, 함부로 담장 옆으로 갔어요. 미안해요.”
왜 하스틴 절벽을 넘어왔는지는 몰라도 아제프의 별장으로 온 이유는 그녀의 문장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지켈리온은 공기 중에 떠도는 문장의 파동에 가장 민감한 자였으니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같았다. 엘제이의 얼굴이 미안함과 후회로 흐려졌다.
엘제이의 흐려진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아제프는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있었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턱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아이젠은 그동안 엘제이가 몇 번이나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젯밤 엘제이를
진찰한 치료사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기력이 약하다는 돌팔이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아제프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이마를 좁혔다. 뭔가 놓친 것이 분명했다.
“미안해요. 정말.”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1 화
61
손이 차가워졌다고 건강에 나쁜 건 아니었다. 정결한 기운을 가득 받아낸 후라 오히려 몸에는 더 좋았을 거였다.
다만, 그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싫어하고 꺼리는지 알고 있어 자꾸 미안해졌다.
아제프의 마음은 기이한 초조함과 불쾌감, 그리고 그녀를 향한 걱정과 분노로 술렁거리며 흔들렸지만,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달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성질을 죽이고 나긋나긋 시작된 잔소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잇새를 타고 흐르는 그르렁거림이 심해지자, 어느
순간 말을 뚝 멈춘 아제프가 말을 자르며 엘제이의 대답을 종용했다.
심술로 그녀를 깨운 주제에 까맣게 잊은 걸까. 아니, 그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니 잊은 게 아니라 뻔뻔한
것뿐이었다. 어쨌든 잔소리를 하는 아제프는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 아제프는 억울해
보이는 그녀를 뱁새눈을 떠 바라보며 압력을 가했다.
“대답하세요.”
“……네.”
엘제이는 제 몸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대로 방 안에 앉아
좀 쉬며 일그러진 기억들을 정리해봐야 할 것 같았다. 분명 그녀의 기억들인데 누군가 어질러 놓은 듯 군데군데
흐려진 부분이 있어 이상했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인간의 육신을 입었던 마물이 녹아내려 시커멓게 변한 안개가 아제프의 능력에 승화되어 언 채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아제프의 자질에 속박된 연기는 어떻게든 빠져나오고 싶은지 꿈틀거렸다.
아제프는 마나의 사랑을 받은 자였다. 마나에게 사랑받는 일이 쉬운 일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마나의 자질은 개인마다 고유한 특색을 지니는데 아제프의 경우는 빙(氷), 쉽게 말하자면 모든 걸 얼리는
능력이었다.
아제프의 자질이 발할 때 일렁이는 푸른 물결은 무척 차갑고 시려 시전자의 몸마저 냉랭하게 얼어붙게 했다.
아제프의 검술이 사나워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훌륭한 원동력이 되어 아제프를 성장시킨 건 사실이나 엘제이는 악착같이 검을 붙잡던 소년 시절의
아제프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알체스테뿐만 아니라 다른 자질 보유자들도 생각나지 않았다. 엘제이는 왜 이렇게 기억이
흐려졌을까, 고민하며 알체스테에 대해 생각했다.
‘알체스테의 능력이, 정확히 뭐였더라?’
엘제이가 어지러운 기억들을 헤집으며 알체스테의 능력에 대해 떠올릴 때, 그 당사자가 저벅저벅 걸어와 아제프의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내려앉아 섬멸하라.”
마나를 지배한 중저음의 영창이 파동에 실려 다가왔다. 새하얀 검을 든 남자의 옷이 투명한 바람을 타고 휘날리고,
그의 검 끝에서 뿜어진 마나가 희고 깨끗한 섬광이 되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새하얀 섬광 기둥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마당에 내려앉은 섬광은 지켈리온의 사체를 뒤덮고 얼음에 낀
까만 연기를 집어삼켰다.
새까만 연기를 사각사각 좀먹던 빛은 할 일을 끝내자 새하얀 깃털처럼 흩날렸다. 폭발하듯 내리꽂혔던 빛은 곧
무해하게 변해 허공으로 뿌려졌다.
몸이 덜덜 떨리도록 추운 제 자질을 싫어하는 아제프에게 따스하기만 한 알체스테의 자질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제이의 걱정과는 달리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능력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차가운 손을 꼭 붙들고 저를
올려보는 엘제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매만지며 왜 그런 표정이냐는 듯 상냥한 얼굴을 했다.
“란델 경, 오랜만이군.”
별장의 문지기들은 흰 섬광을 꽂은 남자가 소문으로만 듣던 비운의 황자임을 알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제프의
능력과는 달리 알체스테의 자질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존경하는 것이었다.
마나의 자질을 발휘한 건 후의 일이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뛰어났던 알체스테를 향한 시샘과 질시는 결국, 아비의
눈까지 멀게 했다. 무엇이 그리 황제의 마음을 가렸는지는 몰라도 현황 에이든은 5 살이었던 죄 없는 알체스테를
변방으로 쫓아낼 만큼 아들인 알체스테를 매우 꺼렸다.
수도에서 치워버리면, 위험한 변방으로 보내버리면 그 뛰어남이 가라앉을 거라 생각해 쫓겨나듯 변방으로 내려
보낸 알체스테는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훌륭히 성장해버렸다.
아제프가 제 영역을 주장하듯 엘제이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을 제 품으로 당긴 아제프가 곧 표정을
풀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대는 여전하군.”
알체스테는 무덤덤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고서는 고개를 돌려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무감각하게 빛나는 금안이
조금 커진 것도 같았다.
“흐음…….”
“……?”
둘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존재했고, 자라온 환경이 비슷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둘 마나의 자질이
있었다. 묘한 동질감. 둘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원래 둘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집중하는 알체스테를 보며 얼굴을 포악하게 찌푸렸다. 해사한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일그러진 채 제 것을 바라보는 남자를 경계했다.
아제프의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저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의도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그런가?”
그녀가 쓰러져 있던 시간이라고 해봤자 겨우 몇 시간 정도였다. 아제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 빠르게
움직인 것뿐이었지만, 엘제이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기에 크게 놀랐다.
“꺄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2 화
62
음산할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에도 알체스테는 동요 없는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그는 아까부터 간질간질
흔들리는 기묘한 느낌에 엘제이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않으며 그녀의 손목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알체스테의 자질은 빛, 특기는 정화였다. 웬만한 신관보다 더 뛰어난 효과니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지켈리온에게 입은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엘제이가 좀 망설이며 아제프를 올려보자, 아제프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면서도 조심스럽게 엘제이의 팔을 붙잡아
내밀었다.
“앗!”
갑자기 끌어당겨지는 기분에 엘제이가 어깨 쪽을 만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제프는 치료를 시작하는 듯 하얀
반원이 드리워지는 엘제이의 손목을 힐끔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만져봤다.
“탈골된 정도는 아니지만, 다친 것 같은데……. 정말, 눈을 못 떼겠군. 시선을 돌리자마자 이렇게 되다니.”
아제프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엘제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를 책망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자책이 더 짙게 밴 느낌이었다.
하얀 반구가 드리워진 손목을 꼭 붙잡은 알체스테가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치료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별 의심
없이 알체스테를 보고 있었지만, 엘제이의 얼굴은 기묘하게 굳었다.
아제프는 물러나는 알체스테를 힐끔 봤다가 엘제이의 손목을 붙잡아 잘 치료되었는지 살펴봤다. 음산한 기운이
사라진 손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해졌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목을 매만지며 살짝 웃었다. 엘제이도 그의 웃는
얼굴에 안심하며 작은 보조개를 피워냈다.
아름다운 입술이 매끄럽게 열리며 알체스테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한 일이었지만,
굳이 빚이라는데 되었다고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아제프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알체스테를 보며
눈가를 조금 좁혔다.
“그런데, 전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신 거죠? 전하께서 계시던 곳에서 여기까지는 말을 타고도 일주일은
걸리는데.”
“여전히 괴물 같으시네요.”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막말을 했다. 엘제이가 홉뜬 눈으로 경악하며 그를 바라봤지만 아제프는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황족을 모욕하는 말에도 알체스테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조금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의 손을 따라 별장을 바라보던 알체스테가 곧 고개를 돌리고 엘제이를 빤히 응시했다. 꿰뚫을 것처럼
직시하는 금안에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인사했다.
“아! 제가 아직 인사를……. 티아세 家의 장녀 엘제이 티아세, 알체스테 황자님을 뵈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황족을 보고도 힐끔힐끔 피하기나 하고 인사도 하지 않는 건 무척이나 무례한 태도였다. 엘제이는 제 잘못을
떠올리고 울상이 되어 서둘러 사과했다.
알체스테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제프의 말을 듣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켈리온은 왜 이곳에 있었을까? 분신으로 여기까지 와서, 굳이 자질을 지닌 아제프의 별장을 습격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원래 지켈리온은 때를 기다리던 자였다. 밖으로 나올 수 있음에도 스스로 하스틴 절벽에 기거해가며 자신이
등장할 적기를 기다렸다. 위험한 자임에도 나오지 않았기에 알체스테도 어느 정도 신경을 끌 수가 있었다.
문장을 쫓는 지켈리온이 이 별장에 들어온 이유. 그건 아마, 여기 있는 누군가가 문장 보유자기 때문일 터였다.
“제게요?”
엘제이는 알체스테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둥글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체스테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쫓아다녔다.
담백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진득한 눈빛이었다. 알체스테를 주시하던 아제프는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황자의
앞을 막아서야 할지 고민했다. 위기를 느낀 아제프의 손이 그도 모르게 허리에 걸린 검 쪽으로 향했다.
아제프가 움직이기 전에 알체스테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장갑을 휙- 당겨 벗었다.
알체스테의 행동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아제프였다. 아제프는 무서울 정도로 희번덕이는 눈으로 알체스테의
손등을 쏘아봤다.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제이 앞에서 짝이라고 생각되는 놈을 죽이려 한 걸 보니.
아제프는 언젠가는 엘제이의 반려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었다. 물론, 엘제이에게 보이기 전에 먼저 만나
처리하는 쪽이 가장 좋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녀의 눈앞에서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나타난 알체스테는 엘제이와 같은 문장은 아니었지만, 아제프는 다음번부터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제프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공기 중으로 뻗어 나간 마나와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살벌한 기운을 머금고 거칠게
요동치던 허공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아제프라면, 이렇게 탁 트인 공간이 아닌 곳에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외교부 수뇌에 오른 자였다.
알체스테는 새삼 놀란 눈으로 아제프를 응시했다. 아제프는 미묘한 감정을 담은 금안을 피하지 않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3 화
63
둘 사이에 낀 엘제이는 홉뜬 눈으로 알체스테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알고 있냐고 물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문장은 책의 표지에 딱 박혀 있던 것이었으니까.
엘제이가 마지막으로 본 엘리사의 손등에는 문장이 없었다. 알체스테의 손등에 문장이 자리 잡았으니 곧
그녀에게도 문장이 생기거나, 벌써 생겼을 터였다.
엘제이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거짓말에 서툰 엘제이의 얼굴은 숨기지 못한 어색함이 가득했다. 모른다고 딱 잡아떼기는 했으나 끝처리가
미흡했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엘제이를 의심하며 거짓말의 이유를 추적하던 아제프는 곧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알체스테가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피하는 엘제이를 쫓다가 얼굴을 들었다. 엘제이는 진득하게 따라붙던 금안이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제프의 옷자락을 꾹 잡았다. 정말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경의 반응을 보니, 경은 문장 보유자가 아니고 영애만 문장을 지녔나 보군. 그런데도 약혼할 생각인가?”
아제프가 잘했다는 듯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묘한 만족감과 충족감이 물처럼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시는
것 같았다. 그가 바라왔던 감정, 그가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알체스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제이에게 문장이 있다는 건 그녀의 손목에 남은
흔적이나 그들의 반응을 통해 확신했지만, 사실 그녀가 제 짝이 아닐까 했던 건 확신은 아니었다.
“그런가.”
알체스테는 애매모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실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리사에게 문장이 있을 텐데……. 말해줘야 하나? 아니, 그럼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곧 만나게 되겠지?’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별장 내로 초대할 생각인 것 같으니 엘제이가 말하지 않아도 잘 해결될 터였다. 엘제이는
그리 생각하며, 관심을 끊으려고 했지만 우울해 보이는 금안이 신경 쓰였다.
아제프가 보란 듯이 예쁜 얼굴로 웃으며 엘제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긋나긋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지만, 엘제이의 눈은 이미 몽롱하게 풀린 뒤였다.
꽃이 피는 것처럼 만개하는 아름다움에 잠시 홀렸던 엘제이가 뒤늦게 그의 말을 떠올리고 헛숨을 삼켰다.
“……헙! 어쩌죠?”
“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죠. 황자님은 입이 무거우시니 말하고 다니시진 않겠지만, 언제나 주위를 경계하고
조심해야죠. 이렇게 아기 같아서야……. 제이와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저야말로…… 어쩌죠?”
“평생……?”
‘죽어서도, 놓지 않을 거다.’
시리게 빛나는 벽안을 모르는 엘제이는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수줍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좋아하는 볼우물이 깊게 패자 아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뚱하게 서 있는 알체스테를 응시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얼굴에 깃든 질척한 감정과 위험할 정도로 짙은 소유욕을 엿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뒤를 돌아본 알체스테의 눈이 둥글게 확장됐다. 엘제이를 쫓으면서도 덤덤하게 가라앉아 있던 금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리사! 제이!”
잠옷만 입은 밀색 머리의 소녀가 사나운 기세로 뛰어왔다. 소녀를 뒤쫓는 기사와 아이젠이 아연한 얼굴로 그녀를
말렸지만, 소녀는 무척 빨랐다.
축축한 잔디를 밟으며 뛰어온 소녀는 순식간에 알체스테를 지나쳐 엘제이에게 뛰어갔다.
들끓는 감정으로 이글거리는 금안이 도르륵 떨어져 엘리사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새하얀 오른손 위로 엘리사의
분홍색 눈을 꼭 빼닮은 문장이 물결치듯 흩날리고 있었다.
***
엘리사는 알체스테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움푹 팬 땅을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엘제이의
몸을 살펴보았다.
엘제이의 몸을 휙휙 돌려보던 엘리사는 상처를 발견하지 못하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언니를 꼭 끌어안았다.
엘제이는 아무 말 없이 저보다 커버린 동생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녀는 다정한 언니의 얼굴이 되어 산발이
된 동생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엘리사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뒤늦게 달려온 아이젠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걸어와 제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아이젠도 기사와 실랑이를 하느라 평소의 단정함을 많이 잃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중년의
남자가 두 딸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4 화
64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정신없이 뛰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딸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또 한 번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콱 조여졌다.
특히, 생사를 오갔던 엘제이를 생각하자 아이젠은 아직도 손이 벌벌 떨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았다.
티아세들이 그러는 사이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병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족애를 나누는 티아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에게 아이젠 티아세는 신기한 존재였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덜덜 떨리는 아이젠의 손끝을 바라보며 말없이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리사랑 제이.’
제이라는 건 아제프의 약혼자를 칭하는 말이니 그가 바라보는 소녀의 이름이 리사인 모양이었다. 알체스테는 얇은
잠옷만 입고 서 있는 엘리사를 보며 손을 쥐었다 폈다 허둥거렸다.
알체스테와 똑같은 연분홍빛 문장은 희고 보드라운 손등에서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알체스테와 달리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제프는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엘리사의 문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그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거슬리던 알체스테는 엘리사가 주워갈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아제프가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일행이랑 떨어졌다고 하셨지요? 제 별장에서 편히 쉬면서 티아세 양과 함께! 며칠 머무르시면 되겠네요.
어차피 전하의 일행이 수도에 도착하려면 며칠 걸릴 테니까요.”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엘리사를 가리켰다. 갈 때는 엘리사도 데려가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지만, 알체스테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하루만 머물게 하고 당장 쫓아낼 것 같았던 아제프가 나긋나긋 말해오자 놀란 얼굴을 하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누구시죠?”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알체스테가 슬금슬금 손을 숨기며 다시 장갑을 꼈다. 인사도 하기 전에 문장부터 보여주는
건 조금 이상할 것 같았다. 말주변이 없는 알체스테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한 분홍색 눈에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가 비쳐들었다. 옅은 분홍색 꽃잎이 호수에 내려앉으며 둥근 파문을
그렸다. 진득한 시선 때문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취향이었다.
아제프처럼 능글거리는 예쁜 남자는 엘리사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알체스테처럼 남자다운
얼굴을 선호했다.
“나는, 그…….”
저 소녀는 아마 티아세 家가의 영애인 것 같았다. 귀족 가의 여식인 소녀에게 그의 이름을 밝힌다면 알체스테가
소문으로 들리던 비운의 황자임을 알아챌 터였다. 알체스테는 혹시라도 엘리사가 자신을 불편해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뭐야. 내 취향이잖아. 그것도 완벽해. 얼굴도, 몸매도, 목소리도……. 그리고 성격도 내 취향일 것 같잖아?’
취향을 발견한 엘리사가 제 차림을 한번 점검했다. 맨발에 잠옷만 입고, 자다 일어나서 눈곱도 잔뜩 낀 상태지만
여전히 예쁠 걸 알았다.
달콤한 분홍빛 눈이 꽃잎처럼 접히고, 하얀 볼이 방긋 올라갔다. 엘리사는 제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알체스테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으며 예쁘게 눈을 내리깔았다.
“…….”
꽃잎처럼 화사한 분홍빛 입술이 촉촉하게 번져가자 알체스테의 눈도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알체스테의 눈이
화르르 타오르며 입술에서 힘겹게 시선을 떼어냈다.
“……그렇군. 미안하다.”
알체스테가 빠르게 사과하며 엘리사의 말대로 옷자락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손이 몸에 스치지 않게
조심조심 옷을 둘러주는 모습에 엘리사가 눈을 번뜩 빛냈지만, 일단은 초면이니 얌전히 있었다.
“아앗!”
“무슨, 괜찮나?”
얼간이 같은 알체스테의 모습에 아제프가 한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제프가 어떤 생각을 하든
엘리사의 연기는 절정을 향했다.
“발을 다쳤나 봐요. 언니가 걱정되어 맨발로 나오느라……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려요.
기사님.”
엘리사가 안아달라는 듯 작게 손을 벌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알체스테의 시야에 분홍빛 문장이 흔들흔들 비췄다.
무뚝뚝한 턱이 단단하게 경직됐다. 결벽증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몸을 안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 쥐기라도 했다가는 뚝, 부러질 것 같아서 알체스테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엘제이와 다르게, 문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문장의 주인이든 아니든 마음에 들었으니
가지고 싶었다. 눈을 나붓이 내리깐 엘리사가 민망한 듯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안 될까요……?”
“불편하면, 말해라.”
“하!”
‘아주 제멋대로군.’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 같은 눈을 한 주제에 한껏 가련한 척, 연약한 척 내숭을 떠는 모습에 아제프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돌려버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5 화
65
한동안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마음을 다스리던 아이젠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둘째 딸의 부재를 느꼈다.
과거를 회상하느라 꼭 감겼던 눈이 뜨이고 부드러운 다갈색 눈이 둘째 딸을 찾아 헤맸다.
“세상에……. 리사.”
그제야 엘리사를 발견한 아이젠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흐려졌다. 아이젠 역시 알체스테를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알았다.
외간 남자, 게다가 황자의 몸에 덥석 올라타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히 늘어져 있는 딸의 모습에 아이젠이 차마
뭐라고 훈계하지는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리사!”
무뚝뚝한 금안이 아이젠을 담고 빛났다.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들이 합쳐졌다. 이 소녀의 언니는 엘제이
티아세였으니, 아비는 저기 있는 아이젠 티아세일 게 분명했다.
수도에서 떨어져 있던 알체스테는 영애들의 신상을 잘 알지 못했다. 둘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알체스테의
이마가 난감함으로 좁아졌다. 그는 한숨처럼 아이젠을 불렀다.
“티아세 공작.”
“티아세의 가주 아이젠 티아세, 알체스테 베아르시 황자님을 뵈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알체스테가 동글동글한 흰 뺨을 힐끔 보았다. 시선을 조금 올리니 둥글둥글
순해 보이는 분홍빛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무척 어려 보였다.
“청혼……. 말씀입니까?”
***
‘왜 같이 안 들어가는 거지?’
보통은 시녀들이 이불을 정리해준 뒤 잠자리에 드는 걸 확인하고 가기에 엘제이는 의문이 들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제이는 아무러면 어떠냐 싶어 그냥 문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 왔어요?”
“아제프?”
일하는 아제프도 참 멋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피부가 매끄러워 보였고, 화사하게
올라간 입매가 무척 예뻤다. 화장한 것도 아닐 텐데 빛 가루라도 뿌린 듯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가 눈이 부셔 죽을
것만 같았다.
“피곤하죠? 얼른 이리 오세요.”
“자려면 문은 닫아야죠.”
달칵- 작은 소음이 들리고, 엘제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지만, 그만큼 위험한 남자와 밤중에 둘만 남아버렸다.
엘제이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자 아제프가 엘제이를 안아 들고 침대로 걸어갔다.
“아제프!”
안 그래도 화사한 미모에 버프라도 건 듯 반짝반짝 빛나는 외양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아제프는 몽롱해진
엘제이의 상태를 잘 아는지 그녀의 허리에 덥석 매달리며 그녀 위에 누웠다.
커다란 몸체에 깔린 엘제이가 작게 버둥거리다가 그녀의 배를 베고 누워버린 아제프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
모습이 몹시 편안해 보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아제프는 아무 방해도 없이 엘제이와 단둘만 남게 된 상황이었던 거다. 갸름한 허리와 부드러운 배의
감촉에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제프가 뭉근한 손길로 엘제이의 배를 만지며 숨을 편안하게 내쉬었다.
아제프는 두려움에 떨던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렇게 속삭였다. 지켈리온이 엘제이에게 향할 때, 그녀가
느꼈을 엘제이의 공포가 아프게 다가왔다. 축 늘어져 허공에 매달려 있던 엘제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엘제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하는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정말 무서웠다. 사실은
지금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눈만 감으면 소름 끼치는 지켈리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노려보던 짐승의 안광이
밤에 찾아와 그녀를 괴롭힐 것만 같았다.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는 달랐다. 정말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서워 미칠 것 같다는 게 그런 기분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더 아제프가 떠올랐다. 매일 죽음의 위기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어린 소년이 떠올랐다.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매일 밤 꿈에서 만난 소년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봐, 그래서 두려웠어요. 저는, 당신이랑 함께하기로 했는데 제가 먼저 떠나서
당신이 외로워질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미안해서 눈물이
나왔어요.”
아제프가 따뜻한 배 위에 기대어 상냥한 목소리를 음미했다. 엘제이는 이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제가 무척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아제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엘제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그녀를 아끼는 마음도 모두 온전한 그의
진심이었다. 심술을 부려도 심하게 괴롭히지 않을 테고, 엘제이를 때린다거나 그녀의 몸을 해하는 일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엘제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도 최대한 조심해볼 생각이었다. 많이 달라진다는 약속을 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줄 것이었다.
“화가 났어요. 제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내게 없는 문장이 내 앞에 나타난 순간.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당신을 무섭게 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미안해요, 제이.”
엘제이는 미안하다는 듯 다정한 손길로 그녀를 쓰다듬는 아제프에게 팔을 살짝 벌렸다. 안아달라는 청에 아제프가
조금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도 거짓말하고 숨겨서 미안했는걸요. 그러니 괜찮지만, 그래도…… 아제프의 몸은 소중히 여겨주세요.
자해라니, 그건 정말…… 아프잖아요. 저도, 아제프도.”
엘제이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아제프는 확답을 해주진 않았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얀 얼굴 위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뺨에 닿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 입맞춤은
지금껏 그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얌전히 재워줄 생각은 아니었다. 얼굴을 떼어낸 아제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졌다. 사랑스럽고 예뻤다.
그의 것이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자신에게 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처음이었는데, 내가 너무했죠? 그러니 이번에는 안 그럴게요. 자, 가만히 있어요.
괜찮죠?”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6 화
66
아제프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시선에 낙인찍히고,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유달리 반짝이는 얼굴이 싱긋 휘어지자 엘제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바짝 다가오자 움찔, 몸을
떤 엘제이가 그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조그만 목소리로 애원했다.
눈을 둥글게 뜬 아제프가 조금 물러나며 예쁘게 웃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 찍힌 눈물점이 야하게 일그러져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아제프는 뻔뻔했다.
꿀을 머금은 듯 달기만 한 입술을 파고들어 그 향내를 취했다. 서툴게 움직이고, 수줍게 도망가는 모습도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아제프도 그냥 부드럽게 입안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으응, 흐…….”
“흐응, 으으…….”
헐떡헐떡 넘어가는 숨소리에 아제프가 입술을 살짝 떼어내고 축축하게 젖은 입 주변을 야하게, 탐욕스레 핥아
올렸다. 아제프는 기분이 좋은 듯했고, 그의 얼굴에는 붉은 기가 감돌았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옷을 들췄다.
뱀처럼 차가운 손이 몸 안을 파고들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말리듯 그의 손목을 잡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제프, 으응…….”
아제프가 초조하게 말하며 엘제이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민한 살결에 차가운 손이 닿자 간지러움과
함께 묘한 쾌감이 일었다. 오싹할 정도로 발이 곱아드는 느낌에 엘제이가 들썩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허락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엘제이는 그의 손목을 놓으며 암묵적으로 허락했다. 아제프가 얇은 슈미즈를 들어
올리며 그녀의 배를 간질이고 움푹 팬 배꼽 주변을 쓸어내렸다. 보들보들 부드럽기만 한 흰 살결이 손에 가득
들어왔다.
심장에 따뜻한 기운을 붓는 것 같았다. 심장을 타고 흐르는 피가 온몸을 맴돌았다. 그의 몸이 따뜻하게 젖어들며
그를 외롭게 하던 한기가 밀려 나갔다.
뭘 먹고 자라면, 뭘 보고 자라면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는 영혼까지
홀리는 기분으로 그녀의 가슴 쪽에 누워 아이처럼 뺨을 비비적거리는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아제프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엘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었다. 색색- 나른하게
번지는 숨소리가 평온하게 들렸다.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그와는 별개로 단단한 몸은 무척 컸다. 얼굴에 혼이 팔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아제프는 굉장한 장신이었다.
아제프가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자, 침대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나른한 맹수처럼 거대한 몸체를
움직인 남자는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엘제이는 순간적으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그러지 않았다. 말캉거리는 입술은
사뿐히 내려앉아 부드럽게 눌렸다가 떼어졌다. 인사를 나누듯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에 엘제이가 눈을
둥글게 떴다.
“아, 아제프…….”
조금 따뜻해진 차가운 손은 선이 우아한 허벅지를 지나 둥글게 휘어진 둔부를 따라갔다. 남이 만져보리라 생각한
적 없는 곳에 그의 손이 닿자 엘제이가 숨을 꽉 참았다가 뱉어냈다.
“읏,”
눈앞에 놓인 부드러운 것을 탐험하던 맹수는 엘제이의 작은 소리를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귓바퀴를
울리는 애처로운 음색에 나른하게 웃다가 엘제이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우아한 선이 아름다워 한 번쯤 깨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부분이었다. 아제프는 그녀의 목가를 자근자근
물다가 고개를 들어 뜨거운 귓바퀴도 핥아 내렸다.
“흐아,”
엘제이가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얼핏 사납게 올라간 남자의 입꼬리가
보인 것도 같았다.
아제프는 바르르 떨리는 목선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아제프가 잔뜩 흐트러진 엘제이의 옷을 보며
축축한 입술을 혀로 핥았다. 짙은 탐심이 그의 눈에서 뚝뚝 떨어져 고일 것만 같았다. 질척질척하게 젖은 청남색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건드리지 않기로 했는데 자꾸 시선이 갔다. 그의 손을 따라 골반까지 올라온 슈미즈가 엘제이의 허벅지에
애처롭게 걸려 있었다. 아제프는 불을 끄지 않은 게 낭패였다고 생각하며 뽀얗게 드러난 살을 쳐다봤다.
어둠이 내려앉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환경에 엘제이의 평범한 눈은 적응하지 못했다.
엘제이는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캄캄한 상황에 그의 몸을 더듬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보드랍고 말캉거리는 피부가 그의 몸을 눌렀다. 가벼운 무게감이었지만 보드라운 피부가 밀착되는 느낌이 좋았다.
맨살로 이러고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지만, 엘제이가 기겁할 게 뻔해 참기로 했다.
“으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7 화
67
부드럽고 좋은 기분만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너무 역겹고 더러운 행위에 정상적인 기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반응하지 않아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약물과 향으로 강제하던
것이었는데 오늘은 스스로 일어났다.
“아읏!”
그래. 원래대로라면 이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서 강탈해 오는 게 아니라 서로를 나눠주는
행위인 것이다. 굳이 사람을 꿰뚫고 쥐어 짜내지 않아도, 그냥 닿는 것만으로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었는데
아제프는 그걸 몰랐다.
아제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에서야 모든 걸 털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제프는
비로소 그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이 모든 게 그의 품에 있는 엘제이 덕이라는 걸
알았다.
“원수……?”
“아제프. 저는,”
아제프는 어미젖을 찾는 아이처럼 엘제이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울었다. 스스로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오랜 시간 참아왔던 울분과 서러움이 눈물 한 방울에 고스란히 담겨 툭- 떨어졌다.
아제프는 많이 울지 않았지만, 한참이나 오열을 쏟아내듯 엘제이의 입술을 빨고 탐했다. 엘제이의 입술이 퉁퉁
부어 안쓰러워질 때까지 탐하고, 그녀가 피곤함과 고단함에 지쳐 잠이 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엘제이는 한참을 그렇게 시달리다가 뭐라고 말도 못 꺼내보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견디지 못한 피곤함에
엘제이가 나가떨어지자 아제프는 그제야 퉁퉁 부어오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고 무서웠을 테니, 다정하게 달래주며 재워줄 생각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으나 다음으로
밀어둔 것도 엘제이의 정신이 멀쩡할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좀 허탈해진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기운을 잔뜩 받아 이상할 정도로 힘이 솟구쳤다.
아제프는 많이 피곤했는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진 엘제이의 뺨을 만져보다가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하나만 하라는 소리였다. 아제프는 애초에 그녀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목숨을 바쳐 엘제이를 지키고,
그들 선에서 제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꼭 한 명은 빠져나와 그에게 상황을 보고할 것. 그게 아제프가 지시한
것의 다였다.
아제프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시녀들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눈을 떼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새파란 마나가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와 허공을 스산하게 맴돌았다. 아제프는 차가워진 손을 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웅웅거리며 빛을 발하는 마나들이 북극에 피워진 오로라처럼 신비하게 일렁거렸다. 냉한 기운 때문에 가까이는
다가가지 못한 채 방문을 맴도는 마나가 매서운 눈으로 주인이 바라는 자를 지켰다.
“흐읏, 안, 돼! 아제프.”
몽글몽글한 분홍빛 기운이 엘제이를 찾아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아제프의 마나는 살아 있는 것들만 감지했다.
마나들은 산 자의 것이 아닌 분홍빛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유유히 주위를 맴돌았다.
형체가 불분명한 그것은 여신, 프리멧사의 기척이었다. 솜사탕처럼 말랑거리는 기운에서 새하얀 팔이 빠져나왔다.
무수한 아이 중 유난히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아이였다. 여신의 사랑을 한껏 받고 태어났음에도 제 명대로
살지 못한 가련한 아이. 저 스스로 짝을 찾고 또 제 목숨을 바쳐 짝의 운명을 바꿔버린 애처로운 아이.
신이 정한 운명을 바꿔버렸으니, 따라오는 대가가 있었다. 아이는 기꺼이 제 짝에게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줬다.
아이는 목숨을 바친 대가로 짝을 살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짝의 운명이 가혹하여 결국 편히 잠들지 못한 불쌍한
영혼이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엘제이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엘제이에게 닿았던 한기가 여신의 축복에 밀려 소멸해버렸다.
***
조용한 1 층 복도를 걷는 소리가 저벅저벅 울려 퍼졌다. 걸어가던 아제프는 문득 기이할 정도로 기분이 좋고,
상태가 좋은 몸을 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만약, 자질이 있어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깨우지 말아야 한다. 자질을 깨웠지만 감당하지 못한 사람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 그건 마나를 지배하지 못한 허울뿐인 지배자에게 주어지는 숙명이었다.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을 아까처럼 급박하게 이끌어내면 당연히 내장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몸이 좋아진 것 같은데……. 죽거나, 치료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군.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내장에는 통점이 없으니 단순히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꿈결처럼 편안하던 엘제이의 품을 떠올리며 나긋하게 웃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8 화
68
아제프는 제 품에서 흐트러지던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고 옅게 웃었다. 성정이 순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곁에 두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뜻했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잠이 올 때도 있었다.
심지어 자질을 꺼낸 뒤였음에도 엘제이가 있다는 이유로 기분이 저조해지지 않았다. 이건 아제프도 꽤 놀란
일이었다.
전에는 자질을 사용한 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무서울 정도로 몸이 떨려왔다. 그게 부작용이 아닌 신경이 과민해
생기는 일이라는 건 알았다.
사실 아제프는 지금 꽤 놀라는 중이었다. 몸은 떨리지 않았고, 마음은 평온했다. 오히려 평소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것 같기도 했고 몽글몽글 모여 있는 구름 위에 몸을 맡긴 것처럼 편안하기도 했다.
아제프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자신의 상태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곧 신경을 끊어버렸다.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편인데 아무려면 어떠냐는 마음이 들었다.
“안에 누가 있지?”
“왔나?”
기분 좋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싸늘하게 내려왔다. 엘제이를 상상하며 문을 열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시꺼먼
황자 따위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제프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없이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알체스테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자로 뻗은 입꼬리는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반짝거리는 금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기분이 좋은지 눈치챈 아제프는 시선을 내려 알체스테의 손을 응시했다. 맨날 장갑을 끼고 다니던 사람이
장갑은 어디에 뒀는지 맨손이었다. 그건 아제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제프가 고개 숙여 제 맨손바닥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알체스테가 무슨 생각으로 장갑을 벗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장갑을 끼고 있으면 보드라운 피부를 마음껏 느낄 수가
없었다. 닿을수록 기분이 좋은 것인데 장갑을 끼면 느낄 수 없으니 엘제이를 만날 때는 저도 모르게 장갑을 찾지
않았다.
아제프는 이런 기이한 동질감과 이해 때문에 알체스테가 꺼려졌다. 그가 고개를 저어 감상적인 마음을 쫓아내며
일렁거리는 알체스테의 문장을 바라봤다.
알테스테에게는 있고, 아제프에게는 없었지만, 아제프에게는 열등감처럼 쓸모없는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엘제이와 같은 게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없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문장이라는 건 두 명에게 동시에 생기는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건 하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그는 문장이 없다.
운명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엘제이의 짝이 있다면, 이왕이면
잔인하게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와 시녀들에게 들어서 몇 가지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의심이
많은 자였고, 생판 남인 알체스테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제프의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은 알체스테가 아제프를 무뚝뚝하게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빛나는 금안이
자취를 감췄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경, 나는 경을 좋아한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아제프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알체스테를
기이하게 쳐다보며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
어쩌라고- 그리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황자였다. 아제프는 지금 자신이 머저리를 상대하고 있나 고민하며
우직한 인상의 남자를 응시했다. 꼭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만큼의 말주변이 없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면서 이걸 어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알체스테의 곁에는 마음을 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는 아제프를 처음 본 몇 년 전부터
아제프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전하께 우둔하고 멍청해 보인다고 솔직히 말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감읍한 일이지만,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달콤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신랄하게 귓전을 때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알체스테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놓았다.
“네. 조금 전에는 전하의 옥체가 상하신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멀쩡한 귀가 보이는데 제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이상한 말만 하시더군요. 순간 전하께서 머저리가 되신 건 아닌지…… 소신, 걱정이 많았습니다.”
알체스테의 떨떠름한 얼굴에도 아제프는 화사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매우 선량한 얼굴로 독설하는 게
아제프다웠다.
아제프처럼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는 알체스테는 찻잔을 톡톡 두드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도, 자신도 벽을 두른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물러나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 대치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보다 4 살이 많았다. 그는 연장자로서 아제프에게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중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제프의 얼굴이 파삭, 일그러졌다. 저 반질반질한 금안이 꺼림칙했다. 꼭 제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다는 듯
이해자의 눈을 한 금안이 마음을 꿰뚫을 듯 바라보는 게 싫었다. 도대체 당신이 나의 뭘 아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부황에게 쫓겨 척박한 땅에 버려진 황자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겠지만, 나락은 아니었을 터였다. 아제프는
나락에서 살았다. 지옥이었다. 누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겠는가. 그는 몸이 부서지고 영혼이 깨지는 고통
속에서 바득바득 기어올라 여기까지 왔다.
아제프는 술렁거리며 깨지려는 마음을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흔들릴 것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면 되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엘제이에게는 아제프 외에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알체스테는 엘제이의 소중한 사람인 엘리사를 지켜야 하는
운명이었다.
엘제이의 문장이 없어질 수 있는가, 문장이 없어져도 엘제이에게는 타격이 없는가, 그게 제일 궁금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9 화
69
지켈리온은 엘제이에게서 문장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는 엘제이의 몸에서 뭔가를 뽑아내려 했다. 그건 분명
문장이다. 지켈리온은 전에도 사람에게서 문장을 뽑아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켈리온이 머무는 하스틴 절벽은 알체스테가 지키는 곳이다. 둘은 서로를 알고 있었고 싸워본 적도 있는 듯했다.
알체스테가 지켈리온과 싸울 이유는 문장 때문일 확률이 높다.
아제프는 잔혹하게 물드는 새파란 눈을 화사함으로 숨기며 웃었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웃음을 단 아제프가
매끄러운 입술을 열었다.
“전하, 문장이 뽑힌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
어두운 밤에도 푸른 안광을 토해낼 괴물의 눈이었다. 저 남자는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흉포하고 무자비한 숲의
지배자. 양인 줄 알고 함부로 손을 뻗었다가는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 뜯겨 손이 잘릴지도 몰랐다.
“전하?”
아제프는 생각보다 무덤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르시 제국이 세워진지 816 년. 이 무수한 세월 동안 문장을
뽑아낸, 혹은 뽑힌 자가 한 명도 없지는 않을 터였다. 문장을 뽑아도 사람이 멀쩡하다면 이야기가 전승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 한해서는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 빌어먹을 문장이 계속 엘제이의 몸
위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참아냈다.
별로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체스테의 말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알체스테는 거짓말을 하느니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고, 정황 역시 그의 말에 들어맞았다.
그렇다고 실험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지만.
지켈리온은 ‘문장을 뽑는다’는 말을 사용했다. 아제프는 그것이 좀 이상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문장을
파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켈리온의 경우, 문장이 있는 신체 부위를 말 그대로, 손으로 뽑아내는 방법으로 가져가더군. 떨어져 나간
신체에서는 문장이 사라진다.”
알체스테는 문장이 뽑히던 기사를 떠올렸다. 제 짝이 없어지고 하루 뒤, 기사는 연인을 찾으러 하스틴 절벽으로
올라갔다. 워낙 마물이 많이 출몰하는 곳이라 다들 말렸지만 기사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알체스테가 기사와 동행하기로 했고, 둘은 절벽에서 신체 일부가 뽑혀나간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 순간 기사의 오열이 터져 나왔고, 비통에 젖은 인간의 냄새를 맡은 지켈리온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지켈리온은 부활했다. 알체스테는 내뿜는 독연기를 정화하고 제 몸을 보호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기사의 문장이 뽑히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새까만 손이 사람의 육신을 파고들어 문장이 있는 부위를 뽑아냈다. 문장은 새까맣게 물들었다가 부서져서 허공에
흩어졌다.
“그렇지는 않았다. 지켈리온의 말에 따르면 문장을 잃는 순간, 인간은 지독한 공허를 느끼게 된다고 하더군. 내
기사는 즉사하지 않았지만, 미쳐가다가 하루도 안 되어 자살했다. 지켈리온, 그는 살아 있는 자의 문장을 뽑고
그 눈을 마주하는 걸 즐기는 자다.”
아무리 죽이고 뒤져도 본체가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처리를 고민하던 중 지켈리온은 문장 보유자가
아닌 인간에는 관심이 없고, 하스틴 절벽에서 나갈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알체스테는 수도와 근접한 곳까지 나타난 지켈리온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왜 마음을 바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제프는 미련 없이 싱긋 웃었다. 그의 시커먼 속내와는 다르게 해사한 얼굴이 선하게 접혔다. 자신은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얼굴 때문에 사람들은 아제프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다.
아제프는 기묘한 사람이었다. 화사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언제나 위태롭게 흔들렸다. 시꺼먼 연기가
자욱해 숨이 막힐 정도인데 잘도 저리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체스테, 그 또한 그랬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아비에 대한 원망이 새까맣게 차올랐다. 그의 자질이 빛임에도
알체스테는 제 몸의 빛을 잘 볼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까만 먹물들이 그의 빛을 좀먹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타고난 빛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알체스테는 저 빛이 끝나는 순간 그의 자질도 끝임을 알았다. 마음을 다스리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원망을
죽여야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저와 똑같이 활활 타오르는 빛을 품었음에도 천천히 어둠에 잠식되는 아제프를 봤다. 동정해버렸고, 이해해버렸다.
“아제프.”
“저주?”
“그래. 문장이 뽑히는 순간, 여신의 비명이 들렸다. 문장을 뽑은 손은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처음부터 악마의 종속이기에 상관없을지 모르나 너는 위험해. 너 또한 여신의
아이다.”
“그저 허울뿐인 말 아닙니까? 여신이 공평하다면, 왜 문장의 유무가 사람에 따라 나뉜단 말입니까?”
“그건 왜요?”
물론 엘제이의 짝은 나타나지 않았다. 짝을 발견했으면 초반에 알체스테에게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았을 터였다.
알체스테도 아제프의 반응을 통해 그걸 알았을 텐데, 새삼 확인하듯 물어보는 것에 아제프는 기분이 나빴다.
‘오락가락 제멋대로군.’
아제프는 조금씩 저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한 홍차가 바싹 마른 입안을 축축하게
적셨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쌍둥이라서일까? 엘리사를 보기 전에는 티아세 영애가 내 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0 화
70
“계속해 보세요.”
아제프는 알체스테 앞에서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편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으나 어디까지가 허용범위인 줄은
잘 알고 있었다. 알체스테는 유독 아제프에게 유하고 약한 면모를 보였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엘리사를 본 순간 확신했다. 그녀야말로 내 반려임을. 티아세 양에게 느꼈던
기묘한 의문과는 달리 확연한 확신이었다.”
아제프가 입꼬리를 확 비틀며 알체스테를 비꽜다. 엘제이를 이성으로 봤다면 저 눈을 뽑아내고 싶었다.
알체스테는 문장을 가진 자이기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싸우자는 게 아니다. 본질을 이야기하자는 거지. 혹시 쌍둥이가 동시에 문장을 가졌다는 전례를 본 적
있나?”
아제프는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손을 모았다. 드문 일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전례가 없다.
역대 문장 보유자의 생애 대부분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걸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체스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것을 알지 못해 이것을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는데, 뭐가 이상한지는 알체스테도 몰랐다.
똑똑.
바로 안으로 들이도록 허락을 해둔 상태였기에 문은 곧바로 열렸다. 싸늘한 적막이 가득한 방 안으로 아이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젠은 어쩐지 조금 싸늘한 방 안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제프와 알체스테.
아이젠이 어두운 얼굴로 둘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엘제이와 엘리사는 그녀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
일생을 평화롭게 살게 하고 싶었다. 아이젠이 복수를 포기한 것도 다 딸들의 앞날을 위한 것이었다.
위험한 복수보다는 딸들의 앞날을 우선시했기에 감히 황족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더는 딸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충직한 심복으로 살아갈 거라고 황제 앞에서 맹세했다.
그 당시 황제는 그러겠다고 약조했지만, 교활한 사내는 약조를 지키지 않았다. 아이젠이 시선을 내려 서류봉투에
찍힌 티아세 家의 문장을 흘끔 내려다봤다.
차갑게 굳은 얼굴을 든 아이젠이 엘리사의 짝이 되어버린 알체스테를 응시했다. 버림받기는 했으나 그는 황제의
친자였다.
“무엇이지? 말해라.”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세 남자의 찻잔은 움직이지 않았고, 시간만 째깍째깍
흘렀다.
알체스테는 옅은 다홍빛으로 일렁거리는 찻잔을 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주홍빛 노을을 닮은 물결이
출렁출렁 흔들렸다. 코끝에 차의 향기로움이 스며들었다. 알체스테는 가만히 차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착-
내리깔았다.
‘저토록 훤히 보이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닌데, 증오? 혐오?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지?’
아제프는 고민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젠이 황제의 사람이라는 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제프는
아이젠이 루드비히가 아니라 황제를 노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압니다. 그래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만약 황제와 엘리사, 둘 중 한 사람의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아이젠이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속삭였다. 사실 눈앞에 뺀질뺀질한 태도로 앉아 있는 두 남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슬슬 혼기가 찰 나이니 약혼이든 결혼이든 준비해야 하는 게 맞았지만, 맡겨놓았다는 듯 뻔뻔하게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젠은 어릴 때부터 천사같이 예쁘던 두 딸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었다. 눈물이 눅눅하게 고인 것도 같았다.
알체스테는 예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근사근 말하는 아제프를 보며 무척 부러워했다. 아제프는 아이젠의
마음을 독차지할 생각인지 알체스테를 향해 얄밉게 웃어 보이며 보란 듯이 속닥속닥했다.
황궁은 외로울 거라는 둥, 엘리사같이 활발한 영애는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둥, 엘리사가 걱정되어 어찌하냐는 둥,
자신은 가까운 곳에 살며 매일매일 뵈러 가겠다는 둥. 정답게 속삭이는 말에 알체스테의 얼굴이 점점 침울하게
변했다.
아이젠은 곰같이 미련한 알체스테와 여우처럼 살랑거리는 아제프 사이에 끼여 머리를 짚었다. 우직하면서 진심
어린 말에 감탄하면서도 꿀처럼 속삭이는 말에 끌리고 있었다.
아제프는 아이젠의 반응을 살피며 눈꼬리를 애교 있게 접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여우의 꼬리가 아이젠의 얼굴을
간질였다.
아이젠은 매일 오겠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아이젠이 점잖게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아제프를 떠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1 화
71
엘제이를 향해 뛰쳐나가려던 아이젠은 아제프의 기사들에게 발이 묶였다. 엘제이가 위험한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게 괘씸했지만,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제프가 지켈리온을 막아냈고 무예를 익히지 않은 아이젠이 갔더라면 방해만 되었을 게 뻔했다.
아제프는 맨손을 힐끔 바라보다가 선하게 웃었다.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엘제이를 똑 닮아서
그런지 예전보다는 참을 만했다.
아직 약혼도 안 했는데 엘제이를 약혼녀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눈가를 꿈틀하던 아이젠은 촉촉하게 적신 아제프의
눈을 보고 조금 감동한 얼굴을 했다.
아이젠도 곧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는 걸 떠올렸는지, 표정을 수습했다. 도둑놈이 둘인데, 하나가
워낙 영악하게 구니 이놈도 똑같은 도둑이라는 걸 자꾸 잊었다.
알체스테는 제 이름을 달게 발음하는 아제프를 보며 서운한 얼굴을 했다. 무뚝뚝한 곰이 꿀단지를 빼앗긴 울적한
얼굴을 했지만, 여우는 개미 코털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젠은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며 싱긋 웃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면서 입술을 꾹 눌렀다. 두 딸만 있어서 아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아제프가 워낙 사근사근 구니 아들 같고, 귀여웠다.
아이젠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휘둘리지 말자고 되뇌었다. 매번 저 예쁜 얼굴에 홀랑 넘어가는 딸에 비하면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그게, 루드비히 전하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유사시에도 전투가 가능한 아이를 붙였습니다. 미리 말하려 했지만,
저를 믿어주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물론 거짓말이었고, 이제는 대놓고 제 눈을 심어두겠다는 단언이었다. 게다가 아이젠이 반박할 구멍도 스스로
빠르게 메꿔버렸다.
프리멧사가 비틀어버린 사건의 축, 엘제이와 아제프의 인연이 시작된 그날의 이야기가 아이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런가. 모든 건 아나이샤의 뿌리로부터 시작된 거군.”
“한 번 당했다고, 폐하를 따라하다니. 루드비히는 예나 지금이나 멍청한 자다. 아첼의 신록은 그가 내세운
마지막 회유책인 건가?”
“그날, 공작님께서 놔줬던 소년이 나중에 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이 가족을 죽인 원수라고 생각할
텐데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아이가 내게서 달아났던 게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눈이 벌게져
있었으니 눈앞에 보였다면 틀림없이 죽였을 테지. 판단력이 흐려져 죄 없는 그 아이를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했으니.”
“원흉이 맞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지 않았다면,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았겠죠. 자매가 아나이샤의 뿌리를
먹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황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몰랐던 내 잘못이지만 말이다. 아마, 제이가 죽었더라면 살려두지 않았을 걸세. 그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찾지는 않을 생각이네. 그저, 아이 엄마의 바람대로 잘 살면
좋을 것 같군.”
아이젠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달아나던 상처투성이의 소년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꽤 예쁜 소년일 것
같았는데, 맞아서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엘제이는 열꽃이 핀 얼굴로 색색- 뜨거운 숨을 뱉으면서도 소년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분명 잔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일어나 들었는지 그리 애원하는 딸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일으킨 거였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네. 그때 보았던 제이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서, 지금도 잊히지 않으니까. 겨우 세
살이었는데 말이야. 제이가 아니었다면 살리지 않았을 걸세.”
아제프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 단정한 눈가에 꽃물을 터트렸다. 꾹 감긴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연약하게 흔들렸다.
드디어 원수의 정체를 알았다는 쾌감과, 복수를 꿈꾸는 악의, 그리고 그녀를 향한 고마움.
시꺼멓고 하얀 감정이 얼기설기 뒤섞여 소용돌이쳐졌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은 그녀의 곁에서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제프?”
알체스테가 제 이름을 부르자 아제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것도 잠시, 금세 표정을 수습한 아제프는 곧
선하게 싱긋 웃었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달칵- 하는 작은 문소리와 함께 공간이 단절되자 아제프는 문고리를 놓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이 가득한
긴 복도를 가로 지르는 남자의 발소리가 탁탁탁- 빠르게 들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2 화
72
아제프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게 싫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증오하고 원망하여 복수를 결심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과거의 한 자락을 풀어 떠올려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떠오르는 무력하게 우는 소년이 본인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짜증이 났다.
독니를 머금은 독사가 아제프의 발목을 콱 물고는 놔주지 않았다. 차츰차츰 올라오는 독은 발목을 삼키며 온몸을
집어삼킬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참고 참았던 진득한 감정에 무너져 넘어지기를 기다렸다.
아제프가 마침내 제 트라우마를 깨닫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과거를 잊기로 하자 독사는 숨겨 왔던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아제프의 발목을 칭칭 휘감고 무릎을 향해 아가리 쩍 벌리던 독사는 누런 황금빛을 두른 커다란
비단구렁이였다.
“하아…….”
아제프는 자그만 어깨를 감싼 이불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그 품에서 눈을 감았다. 솔솔
풍기는 햇볕 말린 향기와 푸푸- 하는 작은 숨소리가 사랑스럽고 편안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비천한 나락으로 떨어트려 오물 위를 기며 구걸하는 그놈의 얼굴을 보고, 사지를
천천히 찢어 들개의 먹이로 던져주고 싶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놈의 얼굴을 비웃으며 그 비명을 듣는다면 온몸을 터트릴 듯한 카타르시스가 몰려올 것 같았다.
그것만이 제 삶의 길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제이를 안고 있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었다. 새빨간 피가 주르륵
쏟아지며 살점이 개에게 뜯겨나가는 걸 보는 건 한순간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아제프에게는 이제 잔혹한 복수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를 몰아세우는 지독한 악의보다는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보드라운 감정이 더 우선이었다.
아제프는 한순간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걸 느끼면서도, 생각을 차츰차츰 정리했다. 따뜻한 이불뭉치를 안고
있으니 복수보다는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애정이 더 커졌다. 눈앞이 흐려져 섬뜩한 악의로 타오르던 순간,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보통 성인이 되면 유아기적 기억을 잊어버린다. 아마, 엘제이에게도 3 살 당시의 기억은 남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그는 기억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가 살 수 있도록 지켜줬던 게 눈앞의 사람이었다는 걸.
고마운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랐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미움이 아니라 저를 사랑해주는 이를
먼저 알았다면, 삶이 지옥은 아니었을 텐데. 그 사람을 만나고 말겠다는 희망이었을 텐데. 복수에만 사로잡혀
숨겨진 진실을 엿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엘제이는 그저 잠만 자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냉혹한 남자를 천사처럼 순하게 만들었다. 이리저리 뒤섞인
감정으로 차분함을 잃고 서성이던 이를 한순간에 잔잔하게 만들어버렸다.
아제프는 내일 아침, 엘제이에게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불면증을 앓는 남자는 그 병명을 비웃듯 빠르게 잠들었다. 예민한 남자를 포근히 감싸 안은 평화는 그를 깊은
밤으로 데려가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인도했다.
공명(共鳴)의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
몸은 반투명하게 흐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투과해 지나갔다. 몸서리쳐지는 느낌에 엘제이는 몸을
덜덜 떨며 사람들 없는 곳으로 피했다.
“아?”
‘거짓말.’
“내가 해야 할 일……?”
무심코 생각하던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멈추어 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 그를 절절히 찾아 헤맸다. 엘제이의 눈 위로 옅은 의아함이 맴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덜컥덜컥-
기이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부산스러운 사람들 틈으로 들리는 틈으로 비집고 나와 옷자락을 잡아당기듯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 바쁘게 그를 찾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끌렸다. 엘제이는 소리 나는 곳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길게 풀어진 밀색 머리가 나풀거리며 흔들렸다.
덜컥거리는 소리는 화려한 꽃문양이 찍힌 마차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였다. 엘제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의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크게 들리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마차를 눈으로 좇았다.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조그만 여아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 얼굴을 인식하는 순간, 엘제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건,’
엘제이의 눈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어찌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한 그녀는 그저 제자리에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마차는 덜컥덜컥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고, 심장은 미친 듯이 질주했다.
심장에 용암을 부은 듯 뜨거웠다. 타는 듯한 괴로움에 엘제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자 좁아진 시야
안으로 바짝 다가온 마차의 바퀴가 끼리릭- 구르며 멈추어 섰다.
아이를 혼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무척 온화한 목소리였다. 엘제이는 저 부드러운 목소리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아이젠 티아세. 다정한 얼굴로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남자는 엘제이, 그녀의 아버지였다. 고통으로
침식된 엘제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이젠은 늘 차분하고 얌전하던 아이가 드물게 보여준 아이다운 행동에 살며시 웃었다. 장중보옥처럼 곱게만
키웠는데 일찍 철이 든 건지 애답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아이젠이 가볍게 손짓하자 마부가 고삐를 놓고 기지개를 켰다. 마차는 밖을 구경하는 소녀를 위해 잠시 멈추어 선
것 같았다.
“예쁘다.”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한 목소리가 제법 명확하게 발음되며 귀에 콱- 박혀들었다. 아이는 무언가를 보며 통통한
볼을 발긋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초롱초롱 맑게 빛나는 녹색 눈이 하얀 눈 속 세상을 담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3 화
73
“무엇이 예쁘니?”
아이젠의 물음에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저렇게 반짝반짝 빛을 내는 사람이 있는데, 모르는
아버지가 이상했다. 아이는 눈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소년을 눈에 담으며 다시 한 번 그쪽으로 손가락질했다.
“저 아이요. 무척 아름다워요…….”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단어가 또박또박 발음되어 흘러나왔다. 아이젠과 엘제이의 눈이 아이의 통통한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
사랑스럽게 휘어지는 아이의 얼굴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감정을 꾹꾹 내리누른 엘제이가 늘
그렇듯 아제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아이젠은 오랜만에 보는 옛 친구의 모습에 홀린 듯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이야?”
“누가, 말이니?”
“저 아이. 저 아이에게 제 것을 주고 싶어요.”
그런 제 어린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엘제이가 흠칫 얼굴을 굳혔다. 맑은 녹안에 신비한 색감의 빛무리가
환상처럼 흘러다니고 있었다. 잎사귀를 닮은 눈 위에 내려앉은 수많은 초록색 빛무리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반짝였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이의 눈에서 떠다니던 빛무리들도 일제히 모습을 감추고 평범하게 돌아갔다. 그와
함께 몸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거센 썰물에 혼이 밀려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가위눌린 것처럼 무겁고,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몸을 간신히 붙들며 고개 돌린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뒤죽박죽 섞인 기억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몸이 허공으로 내던져지는 감각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밀려나지 않으려 애썼지만, 꿈은 그녀를 튕겨냈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천 길 낭떠러지로 훅- 떨어지는 추락감에
엘제이의 눈이 꼭 감겼다.
심장을 허공에 두고 몸뚱이만 떨어지는 것 같은 거센 추락감과 오싹한 소름을 견디며 엘제이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새근새근 내뱉는 부드러운 숨결이 밀색 머리카락 몇 가닥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깎아 만든 듯 우아한 턱선과
날렵한 콧대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꽤 선명하게 보였다. 원래의 색감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늘진 얼굴도
아름다웠다.
엘제이는 숨이라도 잘못 내뱉어 예민한 남자를 깨울까 봐 걱정하며 눈만 깜빡였다. 아제프를 마주 본 상태로
옆으로 누운 엘제이의 몸에는 단단한 팔이 안착해 있었다. 아마, 엘제이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기라도 했다면
바로 잠에서 깨어났을 남자다.
자아를 잃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제 것이라고 믿었던 기억과 생각을 더는 신뢰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구지?’
원초적인 물음과 혼란이 떠올랐다. 뭐라고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분명 이곳에 존재하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책 속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달라졌다.
분명 그 삶에서도 소중한 것들이 있었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아끼던 물건, 소중한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잊히고 지워졌다.
빗물에 몸을 내어주고 차츰차츰 젖어갔다. 처음은 가장 중요하지 않았던 기억부터 시작했다.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전날 챙겼던 책가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다음날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런 사소한
게 지워졌다.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떠올리지 않아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젖는지도 모르고 서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빗물에 몸 전체를 내어준 후였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잊은 후였다. 그 삶을 살며
소중하게 생각했던 걸 잊어버렸다.
미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싶었다. 자아를 잃어버리는 고통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이상한
기억들이 쏟아졌다. 인간이라면 무의식 속에 가둬두고 잊어버렸어야 할 유아기적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이 쏟아져
내렸다.
사라지는 것들과 채워지는 것들이 서로 엘제이의 머릿속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다툼을 시작했다. 뇌가 곤죽이 된
듯 흐물거리고 관자놀이가 뜨겁게 타올랐다. 열이 바짝 오른 머리가 터질 것 같이 괴로워서 엘제이의 숨이 가쁘게
내뱉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미칠 것처럼 혼란스러운데 몸도 죽을 것처럼 아팠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호흡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4 화
74
“제이?”
“제이, 괜찮아요?”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얼굴을 사납게 찌푸린 아제프가 엘제이의 등을 도닥거리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이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인상을 찡그린 아제프가 문밖을 불안한 듯 바라봤다. 그는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의원의 멱살을 잡아 끌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제이는 그만이 간절하게 필요하다는 듯 몸을 찰싹 붙이고 매달렸다. 놀란 얼굴로 엘제이를 살피던 아제프가
몸에 힘을 준 그녀를 다독거리며 달랬다.
많이 힘든지 엘제이의 몸이 달달 떨렸다. 아제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붉게 짓무른 눈가에
서늘한 손을 올려 매만졌다.
“아제프…….”
엘제이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울먹울먹 서럽게 얼굴을 흐렸다. 그를 따라 천천히 숨을 쉬고
있지만, 몸이 너무 아팠다.
누가 날카로운 창으로 온몸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거대한 바위에 눌려 압사당하는 것처럼 숨
쉬기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가위에 눌린 걸지도 몰랐다.
몸도 너무 아프지만, 제정신도 아니었다. 엘제이는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에 저항하려 애쓰며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
***
시야가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눈부신 빛에 미간을 좁힌 엘제이가 시야를 확보하려고 애쓰며 머리를 붙잡았다.
눈을 뜨고 앞을 보는데도 화이트아웃 현상처럼 눈앞이 온통 하얗게 빛났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눈송이처럼 새하얀 아름다운 손이었다. 여자의 손이라기에는 제법 굵었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손톱까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제프.”
“…….”
그녀의 부름에 늘 상냥하게 대답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엘제이가 멍하니 하얀 손을 붙잡았다. 손을
꼭 붙잡고 있으니 하얀 손은 자꾸만 작아졌다. 엘제이의 손보다 커다랬던 손이 줄어들어 보송보송한 아이의
손으로 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제프? 손이 왜 이래요?”
“…….”
이상했다. 그녀가 칭얼거리듯 속삭이는데도 부드러운 중저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그는 평소와 달리 엘제이를 다독여주지 않았다.
눈물이 고일 만큼 서러워 울먹울먹한 얼굴이 된 엘제이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겨우 그녀의 앉은키와 비슷한 작은 소년의 모습이 차츰차츰 드러났다.
엘제이가 발작적으로 외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꿈에서 탈출하기 위해 엘제이가 벌떡 일어나자 툭- 굴러간
소년의 시체에서 발이 쪼개져 떨어졌다. 엉거주춤 일어나던 엘제이의 몸이 뚝 멈췄다.
온몸을 덜덜 떤 엘제이가 소년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 떨어진 발을 붙이려고 하자 까맣게 탄 발은 잿더미가 되어
가라앉았다.
엘제이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손톱을 달달 깨물었다.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헤집던 엘제이가 소년의 시체에게서 떨어지려는 듯 몸을 조금씩 물렸다.
꿈속이라고 외면하던 엘제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꿈이 아니었다. 엘제이의 고개가 끼리릭- 녹슨 철문처럼
움직이며 까맣게 탄 얼굴을 바라봤다. 까만 그을음이 내려앉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분명 아제프였다.
“아악!!! 아니야!!!”
잿더미로 가라앉는 순간을 봤음에도 그녀는 그의 몸이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손이 빨갛게 부르트고
손톱이 다 벗겨지도록 하얀 눈을 파내던 엘제이의 뺨 위로 새하얀 눈송이가 톡- 떨어졌다.
아주 천천히 부서지던 손끝이 애처롭게 떨리며 우는 그녀를 달래려는 듯 그녀 쪽으로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헛된 저항이라는 듯 눈은 손을 집어삼켰고, 그나마 남아 있던 그의 손도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엘제이의
손아귀에는 이내 까만 잿더미만 남았다.
엘제이는 다시 손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아주 작게 부서진 잿더미는 까맣게 흩날리며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5 화
75
탁탁탁- 급하게 뛰어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이럴 줄 알았어.”
“아제프, 조심해야죠.”
엘제이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던 차가운 감촉을 떠올리며 멍한 얼굴을 하다가 곧 환상이라는 단어에 그 모든 걸
끼워 맞춰버렸다.
“엄마? 아빠?”
벽을 통과해 들어가자마자 아제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막 벽을 가로지른 엘제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그의 부모님이 보였다.
아제프의 손에서 약초가 투두둑 떨어졌다. 바닥에 흩어진 마른 약초를 바라보던 남자 한 명이 아제프의 뒷덜미를
잡아 그를 들어 올렸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인 남자에게는 미약한 반항이었다. 남자는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아제프의
입을 천으로 막고 그를 대충 어깨에 둘러멨다. 배가 짓눌린 아이가 신음을 토해내며 허덕였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엘제이 역시 아제프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은 그들을 통과할 뿐이었다. 엘제이가
아무리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도 그들은 아무 방해도 없이 아제프를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엘제이가 멍하니 그 눈뭉치에 손을 뻗었지만, 아까의 일이 거짓이라는 듯 눈뭉치는 그녀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제프가 부릅뜬 눈으로 새빨간 화마를 담으며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두 손이 붙잡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저항이라도 남자는 귀찮았는지 아이의 배에 칼을 찔러버렸다.
“아제프!!!”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배에서 피를 쏟아내는 그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아제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제프가 꿈틀꿈틀 눈밭을 기며 타오르는 시체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눈의 핏줄이 터졌는지, 맑은 청안을 담았던
흰자위는 온통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남자들이 아제프의 목숨을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다. 엘제이는 그사이 어떻게 해서든 아제프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투명하게 변해버린 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아아!!! 아제프!!!”
엘제이가 눈밭에 쏟아지는 아제프의 눈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엘제이가 바닥을 기며
아제프의 눈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남자가 그걸 들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아아- 아…….”
아제프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얼굴에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가 헛손질하며 바닥을 기었다. 오한이 든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며 꿈틀꿈틀 기어간 엘제이가 그를 가슴에 품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끈질긴 놈.”
아제프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제이는 그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바닥을 거의 기다시피 뛰어간 엘제이가 타오르는 불을 헤집으며 아제프를 찾으려 애썼다. 타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야가 붉어 아제프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 밖으로 튀어나온 손을 발견한 엘제이가 보송보송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저벅저벅 울리는 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작고 조그만 발이 눈을 사박사박 밟는 소리에 엘제이의 눈에
옅은 희망이 떠올랐다.
***
엘제이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봤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새싹처럼 포근한 눈은 형광을 띤
형안(螢眼)이었다.
아이는 엘제이의 놀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슬픔으로 얼룩진 어린 얼굴은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듯 옅은 동질감을 띠고 있었다. 엘제이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꿈속에서 다른 사람이 그녀를 자각하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엘제이 티아세의 유년에는 이런 기억이 없었다.
정말 악마에게라도 홀린 것 같았다.
엘제이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아이는 잡아달라는 듯 손가락을 살짝 들썩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어린 손이 불타 죽은 아제프의 것과 닮아서 엘제이는 쉽게 그 손을 맞잡지 못했다.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았다. 또 잿더미가 되어 부서져 흔적도 없이 가라앉고, 그 비통한 까만 흔적들을 끔찍할
만큼 하얀 눈송이가 집어삼킬 것 같았다. 엘제이는 송이송이 내리는 하얀 눈을 증오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벼락같은 외침이 가슴을 찔렀다. 송곳에 후벼 파인 것처럼 피가 철철 났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저
차가운 곳에 내버려둘 거냐고 물었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도록 불탄 어린 생명은 그렇게 죽어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자들에게
짓밟혀 꺼져도 되는 불씨가 아니었다.
[제이.]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해사하게 접히던 아름다운 얼굴. 부드러운 산들바람을 닮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온유하고 부드럽게 가라앉던 맑은 벽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6 화
76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연약하게 부서지던 마음을 꽉꽉 동여맸다. 여기서 그녀가 무너지면, 그는 끝이었다. 정말
저렇게, 죽는 거다.
거울에 비친 자신처럼 두 명의 엘제이가 똑같이 말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고, 두 사람의
얼굴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벅저벅.
“이쪽입니다!”
“아버지…….”
“소피아.”
옅은 미안함과 슬픔이 섞인 목소리가 잔잔히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하얀 눈뭉치를 바라보던 아이젠은
입술을 열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중얼거렸다. 아주 짧은 시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곧 몸을 돌려 돌아갔다.
남자들은 추운 겨울날 눈밭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 귀찮은지 투덜거리며 눈을 팠다. 간밤에 뽀얗게 쌓였던
눈이 거친 삽에 헤집어져 까만 그을음을 토해냈다. 남자들은 하얀 원형의 도자기에 그것들을 대충 눌러 담았다.
뼈조차 으스러져버렸으니 저렇게밖에 수습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엘제이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까만 잿더미를 끌어안았다. 떠나는 길만이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데, 엘제이는 그를 품어줄 몸이 없었다.
그게 죽고 싶을 만큼 슬퍼서 엘제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다.
“크읍! 쿨럭!”
조그만 어깨에 헉헉거리는 숨결이 닿았다. 엘제이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고통으로 헉헉거리던
엘제이는 뜨거운 무언가가 몸 위로 쏟아지자 고개를 들고 앞을 보려 했다.
“아윽, 아아!”
엘제이만 고통을 겪은 게 아니었다. 그녀만큼, 아니, 그녀보다 더한 고통을 아이는 견뎌내고 있었다.
“흐윽- 커헉!”
온기를 담은 인간의 체온이 싸늘한 바람에 걸려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차갑게 변한 살덩어리는
흡수되듯 엘제이의 몸 아래로 스며들었다.
엘제이는 아이의 죽음을 서글퍼할 시간도 없었다. 아직 기회가 있었다. 흐느껴 울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몸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고, 누군가 생살을 쥐어뜯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엘제이는 손을 뻗어 바닥을
내리쳤다.
엘제이는 그렇게 살점을 빼앗기며 천천히 줄어들었다. 화마는 엘제이의 몸을 반쯤 집어삼키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고, 시야는 다시 흔들렸다.
파지직- 파지직-
하얀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고, 거울에 금이 가는 것처럼 대기가 부서졌다. 엘제이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풍경을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쩍쩍 갈라지던 틈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큰소리를 내며
터졌다.
쾅!!!
엘제이는 3 살의 아이처럼 작아져 바닥을 기었다. 새까만 바닥에 어린 피가 고여 주룩주룩 흘렀다. 거친 바닥이
여린 살결을 긁었지만, 엘제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윽, 제발.”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미 엉망진창으로 뜯기고 빼앗긴 자질이 마지막 생명을
토해내듯 환하게 빛나며 길을 비췄다.
엘제이 티아세, 그녀의 자질인 공명(共鳴)은 짝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제공했다. 다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를 뿐이었다.
“어억, 흐으…….”
[제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낯설다는 듯 놀란 눈을 하던 해사한
얼굴이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그가 가져야 할 미래였다. 악마 따위가 넘보면 안 되는 영혼이었다.
쿵!
“아아아아악!!!”
엘제이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잔뜩 쉰 목소리가 쇳소리를 토해내며 꺽꺽거렸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눈앞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하얀 손에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며 달라붙었다.
[예쁘네요, 제이.]
아름다운 사람이 꽃향기를 품은 모자를 꾹 눌러 씌우고 손으로 턱을 간질이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사근사근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엘제이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뼈가 하얗게 드러난 어린 손이 바위틈으로 들어가 힘을 줘 운명의 틈새를 비틀었다.
끼릭-
새빨갛게 넘실거리던 혀가 불창을 토해내며 다가오지 말라는 듯 엘제이를 내리찍었다. 엘제이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른 채 끅끅거렸지만, 그 덕에 아제프의 손이 조금 드러났다. 엘제이가 온 힘을 다해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울음을 토해내며 다 잊고 살고 싶다고 속삭였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다. 저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엘제이의
몸이 또 한 번 꿈틀, 움직였다.
“아제프…….”
[제이, 사랑해요.]
아제프의 손을 완전히 꺼내자 갈라진 바위틈으로 혓바닥은 사라져버렸고, 뒤틀린 운명에 공간이 들썩거렸다.
엘제이의 몸을 짓누른 바위도 덜컹덜컹 흔들리며 엘제이의 몸을 계속 눌렀다.
흔들리던 바위가 살짝 공중으로 띄워졌다. 잠시 숨이 돌아오자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놔주며 흐리게 웃었다.
“사랑해…….”
쿵!!!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7 화
77
[신의 문장] 속 엘제이는 그를 지키고 이렇게 죽어버렸다. [신의 문장]은 엘제이가 이렇게 해서 한 번 바꿔놓은
운명의 이야기였다. 겨우 3 살에 생을 마감한 어린 꽃은 이미 져버렸기에 책 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
분홍빛 구름에서 천천히 빠져나온 이는 프리멧사였다. 긴 분홍빛 속눈썹을 든 프리멧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바위에
짓눌린 엘제이를 바라봤다. 사람의 형상도 거의 남지 않은 육체는 기계에 갈린 고깃덩어리처럼 짓눌려 있었고,
아제프의 손은 어떻게 해서든 엘제이에게 닿고 싶은지 가련하게 흔들렸다.
프리멧사가 손가락을 딱- 움직이자 여신의 팔에 생채기가 나면서 아제프의 손이 천천히 날아와 바위틈에 낀
엘제이의 손 옆에 안착했다. 여신은 피가 주르륵 흐르는 하얀 팔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휘이잉-
덜컥덜컥. 끼이익!
끼릭! 탕!
결국 엘제이를 토해낸 바위가 한쪽으로 굴러가며 벽면에 부딪혔다. 그쪽을 조금 미안하다는 듯 보던 여신이
바닥에 앉아 짓눌린 살결을 보듬었다. 여신의 손이 닿자 엘제이의 몸 위에 신비로운 색감의 꽃이 피어나 꽃망울을
톡톡, 터트렸다.
[아이야.]
여신의 음색이 엘제이를 부드럽게 달래자 넝쿨처럼 엘제이의 몸을 감싼 꽃들의 잎사귀가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살랑살랑 움직였다. 꽃들과 잎에서 초록색 빛무리가 쏟아졌다. 곱게 갠 가루가 뭉개진 살 아래로 스며들었다.
피가 난 상처에 물을 붓는 것처럼 시원하고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따가워 엘제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을 들었다. 핏물이 고인 밀색 속눈썹이 힘겹게 경련하며 앞을 바라봤다.
여전히 핏물이 고인 손이었지만, 그래도 형태는 알아볼 수 있게 치료된 손이 움찔- 흔들렸다. 엘제이는 손에
닿는 어린 살결에 흐린 눈을 팔랑거리며 눈에 힘을 줬다.
“아제프…….”
모든 걸 품는 대지처럼 자애로운 음색이 젖과 꿀처럼 풍요롭게 흘렀다. 귓가를 촉촉하게 적시는 음색에 앞을
바라보자 하얀 공간이 떠올랐다.
갈라진 공간의 틈 사이로 쓰러진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제프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채 달뜬 소리를
내는 엘제이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뺨을 맞댄 채 그가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쥐어뜯었다. 필사적일 만큼 손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속삭였다.
“아제프, 아윽!”
그녀의 자질은 공명, 다른 이의 마음에 동화해 위로하며 그들의 앞날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었다.
엘제이가 투명하게 빛나는 손을 잡았다. 상처가 좀 생겼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손이었다. 여신이 엘제의 손을
잡고 그녀의 품에 안긴 아제프의 손을 가리키자 환한 푸른색 꽃이 움트며 그의 혼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냈다.
엘제이가 텅 빈 손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온유한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녀를 달랬다.
엘제이의 눈이 죄책감으로 흐려졌다. 조금씩 낫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몽글몽글한 피를 토해내는 상처는 그녀를
돕느라 생긴 것이었다.
소피아의 가족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들은 아이젠은 아픈 엘제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도와줄
이유는 없었고, 어쩌면 함정일지도 몰랐다.
아이젠이 놀란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뜨거운 이마를 짚어보는데, 어린 엘제이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얼른 가달라며 애원하고 매달렸다. 아이의 간절한 청에 어쩔 수 없이 아이젠이 일어나자 엘제이는 다시 죽은 듯
잠들었다.
첫 번째 운명과는 달리, 기사들을 데리고 소피아의 집으로 찾아간 아이젠은 아제프보다 빨리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칼에 찔린 소피아와 휴버트를 발견하고 둘을 음해한 이들을 붙잡았다. 아이젠은 누구의 사주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자신들도 누구의 명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던 소피아가 눈을 떴다. 소피아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아이젠의 발을 잡고 아이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아이젠이 아제프를 발견하고 그를 데려오라고 기사들을 향해 손짓하자 아제프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내달렸다.
딸에게 약속한 바가 있는 아이젠이 아제프에게 손을 뻗으며 그를 잡으려 했지만, 조그만 아이는 재빨랐다.
작은 체구를 이용해 숲으로 들어간 아이를 결국 찾지 못한 아이젠은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질이라는 건 양날의 검이지. 너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네 자질을 깨워버리고 말았단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질을
깨우쳐버리면 정신과 몸이 그걸 감당하지 못해야 정상이지만, 네 자질은 특별했단다. 남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었으니 마나의 힘이 부드러울 수밖에 없지. 네가 쌍둥이로 태어난 것도 천운이었어. 네 동생이 네
몸에서 폭발하는 자질의 일부를 감당해 네가 살 수 있었던 거니까.]
“리사가요……?”
[그래. 그 아이는 자질이 없지만, 너와 쌍둥이였기에 너의 불완전한 자질로도 쉽게 공명할 수 있었고 덕분에
너는 마나를 다스릴 시간을 벌고 좀 더 안정될 수 있었어. 하지만, 완전한 안정은 아니었을 테니 조절이 쉽지
않아 어린 나이에 많은 이들과 공명하고 말았어. 네가 애늙은이가 된 것도 그 때문이지.]
[조금 복잡한 이야기지만, 정확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란다. 너는 어린 나이부터 어른의 정신을 가져버렸으니,
아마 그대로 자랐다면 기억했겠지. 네 기억이 불안정한 건 네 자질 때문이란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렴. 우선,
네가 방금 봤던 불타 죽는 아제프는……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원래 그가 가져야 할 운명이란다. 그는 5 살에
죽을 운명이었어.]
[운명을 정하는 건 내가 아니란다. 잔인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슬픈 운명이, 누군가에는 행복한 운명이
내정된 거지. 그 모든 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일정하게 돌아간단다. 그러나, 때때로 운명을 거스르는 이들이
있어. 사람의 의지. 그것만큼은 신들과 운명조차 어찌할 수 없는 일이란다. 네가 바로 운명을 거스른 이 중 한
사람이지. 아까 직접 했던 것처럼 너 스스로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그를 살렸어.]
톱니바퀴의 한쪽이 잘리면, 모든 체계가 무너진다. 때문에 정해진 운명이 비틀려면, 그만큼의 살을 채워 넣어야
했다. 운명을 비트는 인간은 꽤 있다. 다만, 그들은 원래 그들이 가져야 했던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정해진 것을
바꿀 수 있었다.
[원래의 너는, 그러니까 3 살의 너는, 아제프의 운명을 엿봤어. 네가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 테지. 네 자질이
네 짝을 찾아낸 것뿐이니까. 쌍둥이에게 그랬듯 네 짝에게도 너는 쉽게 공명하고 만 거란다.]
“제 짝이요……? 아제프가요?”
프리멧사가 조금 초조한 음색으로 말하며 엘제이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강제적인 방법이라 머리가 좀 아플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프리멧사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시야가 또 복잡하게 얽히며 깊게 파묻혔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
엘제이의 자질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공유해주며 그들을 가볍게 위로해주는 것에서 끝나는 능력이었다. 가끔
사람의 미래를 보기는 하지만, 애어른 엘제이는 사람들의 미래에 쉽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가 처음 미래를 바꾸기로 한 건, 아제프를 보고 난 뒤였다. 홀리듯 그를 본 순간, 그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평소보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바라는 걸 들어주고 싶었다.
멀리서 솜이불을 받아가는 아제프를 본 엘제이는, 좋아하는 그를 보며 그의 미래를 읽어버렸다. 그녀가 원했던 게
아니었고, 그토록 많은 미래를 한꺼번에 본 것도 처음이었다.
평범하게 생을 마감하는 미래였다면 엘제이도 끼어들지 않았을 터였다. 생명은 윤회를 반복하고, 그 틈에 끼이지
않으려면 엘제이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단순히 5 년의 생을 마감하는 데 그쳤어야 할 운명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비틀렸다. 악마가 그의 영혼을 탐냈다.
푸르게 빛났어야 할 영혼을 미움과 증오로 까맣게 타락시킨 악마는 새빨간 혓바닥으로 그의 혼을 집어삼켰다.
악마에게 혼을 뺏긴 영혼은 환생하지 못한다. 머나먼 미래에 함께해야 할 짝이 그대로 이탈하고 만 것이다.
엘제이는 한 번 비틀려버린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방법을 알고 싶어 이미 한계라고 신음하는
자질을 쥐어짜다시피 해 운명을 바꿀 방법을 알아냈다. 무리해서 망가뜨린 자질은 몸까지 집어삼켰다. 그때, 3
살의 엘제이가 고열에 시달렸던 건 그 때문이었다.
엘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걸 희생한 만큼,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간단한 것이었다. 하나를
살리려면 하나를 포기하면 되었고, 엘제이는 기꺼이 그를 위해 제 생명을 내어줬다. 아까 19 살의 엘제이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운명을 또 한 번 비틀었다.
목숨을 바친 엘제이가 허탈하게도 악마는 기어코 아제프의 영혼을 놓지 않았다. 그의 혼에 꿀이라도 발라놓았는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악마는 아제프의 짝인 엘제이의 쌍둥이를 이용해 그의 마음을 현혹한다.
환생한 뒤에도 매일 밤 꿈속에 들어가, 그의 안타까운 생을 보고 함께 울었다. 그렇게 치유하고 고치려 애써도
엘제이의 자질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망가진 것이었으니 제 기능을 발할 리 없었다.
프리멧사는 또 한 번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에서 엘제이가 편안한 삶을 선택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그때와 같은
선택을 했다. 어떤 걸 희생해서라도 그를 구원하고 싶어 했다.
그사이 이미 상처가 가득 난 아제프의 영혼은 엘제이의 치료가 필요했고, 엘제이는 또 무리해가며 그의 영혼을
치료하려 들었다. 그토록 무리했으니 몸과 정신 중 하나가 붕괴되는 건 당연했다. 엘제이의 의지는 오로지 아제프
하나만을 위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사랑하고, 그와의 추억이 서린 엘제이 티아세의 몸과 정신이 붕괴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티가 나지 않게 야금야금 기운을 내어줬고, 그와의 관계에게 덜 중요할 한제이의 정신을 붕괴시켜 그를
치료할 힘을 얻었다.
“아……!”
엘제이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동안 자주 아팠던 일과, 한제이의 기억이 소멸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녀가 한제이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한제이를 죽이고 있었다. 엘제이는 이미 많이 흐려져버린 한제이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슬픈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의 머리가 아프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주던 여신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너는 또!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너라는 아이는 정말! 나는 널 어찌하면 좋을까. 한제이로서의 삶을
모두 버려도 정말 괜찮겠니? 지금이라도 돌아가려면 방법이 있단다. 아직 감정까지 지워지지는 않았잖니. 넌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프리멧사는 엘제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데도
엘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그분들은 외롭지 않을 거예요.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 이겨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아니에요. 그는
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함께 있어달라고…… 제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어요.”
선하고 고결한 영혼. 이토록 아름다운 아이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은 낮게 한숨을 쉬며 충고했다.
아직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이상은 계속 이 아이를 지켜봐야 했다. 프리멧사는 여기까지라는 걸 깨닫고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9 화
79
“아! 여신님, 그럼 제 문장은…… 대체 뭐죠? 아제프는 문장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제 반려일 수가 있죠?
문장은, 동시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요?”
프리멧사는 간절하게 바라보는 엘제이의 눈을 보며 조금 웃었다. 그녀는 중대한 비밀을 말해준다는 듯 비밀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프리멧사는 인간의 의지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분명 한계의 한계까지 긁어모아 썼을 텐데, 어디서 또 그런 힘을
끌고 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프리멧사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단한 말썽쟁이를 바라보듯 엘제이를 힐끔 훑었다.
“네?”
“아? 꺄아아아!”
엘제이는 발밑이 푹 꺼지는 걸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환한 분홍빛 구멍이 엘제이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제는
그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눈앞에 환한 빛이 터졌다. 달게 잠든 감각을 깨우듯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손끝의 감각이 돌아왔다. 차가웠다. 서늘한 체온이 손 하나를 꼭 감싸고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미동도
하지 않던 손이 움찔, 흔들렸다.
“제이?”
그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을 것 같은 얼굴과는 달리 오싹할 정도로 낮은 음역이 고막을 건드리고
흔들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뇌로 흘렀다. 그에게 동화되어 울음이 터질 것처럼 애달픈 소리였다.
일어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무거운 속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엘제이는 눈을 떴다. 혼탁한 시야에 반짝이는
백금색이 걸렸다.
“제이!”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꼭 쥐고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몸을 살피며
몸 이곳저곳을 건드는 것 같았다.
예쁜 얼굴이 달걀귀신처럼 흐리게 보이고, 귀에는 이명이 들리고, 모든 감각이 둔했다. 엘제이는 돌아가면 좀
힘들 거라는 프리멧사의 충고를 떠올렸다.
순하고 얌전한 엘제이도 아픈 몸을 누가 자꾸 건드리자 짜증이 났다. 괴롭게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도와달라는 듯
아제프를 찾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뭐라고 성을 내고 있었다.
“아파…….”
온몸이 화끈거려서 작은 자극에도 아팠다. 마치 화상을 입은 피부를 손톱으로 잘근잘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울먹임으로 흐려지던 눈에 그녀만큼 아픈 얼굴을 한 얼굴이 걸렸다.
“…….”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며 애처롭게 말했다. 까끌까끌한 목 안을 적시는 물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그가 주는 물을 야금야금 마시던 엘제이가 그에게서 나올 뒷말을 기다렸다.
정말 그다운 말이었다. 어쩜 저렇게 심보가 꼬였는지 몰라- 엘제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웃었다. 평소라면
저 예쁜 얼굴에 홀려 사람 인성이 좀 나쁠 수도 있지- 하고 말았겠지만, 시야가 흐려 좋아 죽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다시 탁하게 흐려졌다. 까무룩 잠기는 시야에 불안한 표정을 한 그가 걸린 것도 같았다. 엘제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조금 웃었지만, 그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안 돼! 제이!”
***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밤이었다. 이번에는 몸에 힘이 좀 들어갔다. 눈도 비교적 잘 뜨이고 시야도 꽤 확보되어서,
엘제이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곧바로 그를 찾아냈다.
“아…….”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는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물론, 그는 잘 때도 엘제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엘제이의 손을 떼면 그녀가 달아나기라도 할 거라고 믿는 듯 잠들어서도 절대로 놓지 않은 손은 강박적이었다.
엘제이가 애틋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에 살짝 손을 올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수척하면 수척한 대로 가녀린
꽃처럼 아름다웠으니 또 저 얼굴에 홀린 게 틀림없었다.
아제프의 손이 턱, 올라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눈을 또렷하게 뜬 아제프가 엘제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살피듯 그녀의 몸을 돌려보며 이마에 손을 짚어보던 아제프는 곧 그녀의 체온이
정상이란 걸 느끼고 손을 뻗었다.
“아제프.”
“미안해요. 그래도 약속했잖아요. 떠나지 않기로. 당신이 부르면 나는 언제나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거예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0 화
80
잠시 깨어난 후로는 무서울 정도로 오르던 열이 빠르게 내려갔다. 온종일 고열에 시달리며 회복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이던 몸이 또 기적같이 괜찮아졌다. 아제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미안해요.”
“후……. 당신이 사과할 건 또 뭐야. 제이 잘못도 아닌데. 그보다 몸은 좀 괜찮아? 수도에서 좀 떨어졌더니
다들 돌팔이밖에 없나 봐. 멀쩡한 의사가 한 놈도 없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병이든 저주든,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어. 그들이 아픔을 느낄까?”
아제프는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며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진지한 눈에 섬뜩할 정도로 잔인한 빛이 맴돌았다.
평소라면 엘제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엘제이의 머릿속에 스스로 몸을 자해하는 아제프가 퐁퐁 떠올랐다. 그녀는 식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의 자질, 공명은 원래 그가 가져야 했을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꿈을 꾼다. 엘제이가 잠들면 아제프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의 고통은 원래 그가 느껴야 할 고통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초콜릿괴물이 그녀를 쫓아와 괴롭히는 귀여운 수준의 악몽으로 끝났어야 할 후유증이 망가진 자질로 인해 심해진
거다.
지독한 악몽은 물론이고, 몸과 정신에도 부작용이 쏟아졌다. 엘제이는 더는 제 자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바꿀 수가 없다. 아제프와 달리 엘제이는 자질을 조절할 자격도 잃었다.
단순히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질이 발동해버리니 조절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리멧사는 그를 그만 좀 치료하라고 했으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안타까움은 인간의 감정이었다.
막으려고 한다고 막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아는데, 마음이 그러니 자꾸만 무리한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걸 모르는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덜미에 화인을 콱콱 남기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다들 원인을 모른다는 소리만 하고. 제발, 아프지 마. 응?”
아제프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제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체온과 숨소리 모두 정상이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아제프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엘제이의 입술을 핥았다.
“하아……. 참기 힘들어.”
그는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머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두운 조명 사이로 번들거리는 벽안이 푸르게 빛났다.
엘제이의 입술에서 잠시 떨어진 그가 엘제이의 타액이 묻은 입술을 핥아 올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았다.
“응? 제이, 이상한 생각했어요? 제가 짐승도 아니고, 갓 깨어난 당신에게 하면 무슨 짓을 한다고……. 제이,
야해요.”
“하지만,”
엘제이를 놀리던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입술에 엘제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뭐라고 할 듯 말 듯 망설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술에 쪽쪽, 몇 번 더 베이비키스를 남기다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무해한
얼굴로 웃었다.
아제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들어 장난스럽게 엘제이의 코를 간질였다. 코끝을
살살 간질이는 느낌에 넋을 놓고 있던 엘제이가 코끝을 찡그리며 얼굴을 돌렸다. 향긋한 향이 났고, 3 일 잔
사람치고는 몸도 찝찝하지 않았다.
“장난 아닌데?”
“…….”
가벼운 질문을 통해 사람의 긴장을 풀어내고, 그 행동을 관찰해 심리를 파악하는 건 아제프의 특기였다. 특히
엘제이의 감정에 예민한 아제프는 그녀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제이, 알고 있는 거야?’
아제프는 3 일 내리 앓다가 일어난 사람치고는 매우 멀쩡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제
몸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도 아닌데 엘제이는 어디 하나 그늘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걱정을 털어버린 듯
홀가분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거리며 제 몸을 살펴보는 엘제이를 관찰하며 확신했다. 엘제이 티아세는 그녀가
쓰러진 이유를 알고 있다.
“아제프?”
“네? 무엇이요?”
자기가 의심하게 한 주제에 아제프는 뻔뻔했다. 엘제이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무척 많이 의심했기 때문에 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뻔뻔한 아제프는 그런 엘제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불퉁한 얼굴로 칭얼대듯 말했다.
“설마 저를 의심한 거예요? 저는 항상 제이를 믿는데, 제이는 어떻게 제게 그러실 수 있어요?”
아제프의 컴컴한 속내를 짐작도 못 하는 엘제이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아제프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제 목덜미에 볼을 비비적거리는 아제프의 손을 잡으며 조금 웃었다.
일부는 진실, 일부는 거짓말. 엘제이는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었으나 가지고 있는 비밀을 먼저
털어놓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배를 감은 손에 좀 더 힘을 줬다. 엘제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간지럽다는 듯 발버둥 쳤다.
“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1 화
81
수프를 후후 불어 식히던 아제프가 뜨거운 수프를 입술에 살짝 대고 먹을 만큼 식었는지 확인했다. 뜨거운 수프가
적당히 식은 것 같자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수프를 핥으며 엘제이에게 스푼을 내밀었다.
“자, 아- 하세요.”
“제가 먹을 수 있는데요…….”
엘제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스푼이 다가올 때마다
입술을 벌렸고, 그가 주는 걸 다 받아먹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안 된다는 의원의 말에 스푼이 몇 번
오가지 않은 게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다.
엘제이는 접시들을 치우는 시녀들을 바라보며 어물쩍어물쩍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으려 했다. 온종일 잤는데 또
자기는 싫었지만, 그는 자야 할 것 같기도 해서 엘제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제이, 우리 소풍 가지 않을래요?”
“소풍이요?”
아제프가 예쁘게 웃으며 제안했다. 굳이 소풍을 가자고 한 이유는 엘제이의 정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엘제이는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악몽에 시달렸다.
죽지 말라고 울기도 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하는데 대충 무슨 꿈인지는 짐작이 되었다. 아제프가 궁금한 건
엘제이의 악몽 속에서 그가 계속 죽는 이유였다. 단순히 그가 죽는 게 제일 무서워 그런 악몽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꺼림칙했다.
아제프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엘제이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소풍은 무척
좋은 생각 같았다. 그녀에게 남은 기억에 의하면 그는 단 한 번도 소풍을 가본 적이 없으니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들고 싶었다.
“제이가요? 힘들 텐데요.”
“지지예요. 알겠죠?”
아제프는 엘제이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며 애처로운 얼굴로 호소했다. 아이젠 또한 떠나기 싫었지만, 둘 중
한 명은 수도로 가야 했기에 불쌍한 아이젠은 등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엘제이가 계속 아제프만 찾았던 것도
한몫했다.
잠든 사이 아제프가 아버지를 수도로 떠밀듯이 보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엘제이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세 양은 늘 그렇듯 지금은 취침 중이고, 황자님과 티아세 양은 곧 수도로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제프에게 훅 늘어난 업무량에 죽어 나갈 부하직원과 아이젠은 중요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외무부에 그렇게 일이
없었던가 하는 착각에 빠졌지만, 곧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먼저 하품을 시작한 건 엘제이였다. 엘제이는 온종일 잤음에도 금세 피로함을 호소하는
신체에 어쩔 수 없이 침대로 들어갔다. 아제프는 꾸물꾸물 침대에 누워 졸린 얼굴로 잠을 청하는 엘제이를
지켜보며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켰다.
웬일로 엘제이는 아제프의 이름을 부르며 신음하지 않았다. 그게 더 큰 악몽의 시작점이라는 걸 모르는 아제프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나가기 전에 불안한 듯 그녀를 한번 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유를 꽤 부리기는 했지만, 엘제이가 아픈 사이 미뤄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엘제이만 있으면 하루쯤은 안 자도
끄떡없는 아제프는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갔다.
***
아제프는 건드리지 말라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하기 싫은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있었다. 신들린 듯
움직이는 펜대가 사인을 휘갈기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달칵, 아제프의 집무실이 살짝 열리고 알모어가 들어왔다. 노크를 해서 집중을 깨는 것보다는 이렇게 들어오는 게
현명하다는 건 오랜 집사생활의 노하우였다.
알모어는 급하게 보고할 게 있어서 들어오긴 했는데 이게 중요한 게 맞는지도 판단이 안 되었고, 아제프는 집중할
때 건드리는 걸 워낙 싫어하는 사람이라 들어와서도 한참이나 고민하고 있었다.
“후작님, 잠시 이걸 좀…….”
아제프는 온갖 욕설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뒷골목의 양아치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욕을 줄줄이
쏟아내던 아제프가 곧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하얀 종이에는 동그라미와 작대기로 이루어진 기묘한 문자체계가 단정한 글씨로 나열되어 있었다.
아제프는 몇 장의 종이를 빠르게 훑었다. 아제프의 손에서 종이가 팔랑팔랑 넘어가자 그 옆에 서 있던 알모어도
종이 속 글자들을 살피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알모어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아제프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제프의 손에서 마지막 종이가
팔랑- 넘어갔다.
아제프는 외교부의 수장이었고, 그가 모르는 언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는 대부분 공통어를 사용하지만,
작은 소국들 중에는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도 있었고 그는 외교부 수장인 만큼 대부분의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아제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2 화
82
암호를 필사할 때는 그 원형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해 아래가 비치는 얇은 종이를 위에 얹어 원본의 글자체를
그대로 필사하는 게 기본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서체일 게 분명한 글을 보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문자는 꽤 정교했다.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계속 반복되는 단어들을 봤을 때 단순히 장난으로 써내려간 건
아니었다. 다만, 암호를 익힌다는 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평범한 귀족영애인 엘제이가 왜
간자들이나 쓸 법한 새로운 암호를 만들었는지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쾅!
“후작님……! 왜 그러시는,”
***
“……꽃?”
간신히 맞잡은 손만 바라보는 그녀의 시야로 옅은 분홍색 풀꽃이 들어왔다. 조막만한 손으로 풀꽃을 꼭 쥔 아이는
어서 받아달라는 듯 풀꽃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휘잉-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엘제이의 앞머리를 간질였다. 예쁜 동산이었다. 꽃들이 한 가득 피어난 동산 위에는 봄
색을 입은 바람개비들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동산에는 오색 옷을 입은 봄꽃들이 피어
있었다.
“예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바람에 결 좋은 백금발이 흔들렸다. 아이 특유의 순수한 눈망울과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백금색 속눈썹은 파란 바다와 그 위에 비친 햇살 같았다.
“저 주는 거예요?”
“…….”
“진짜, 귀여워.”
엘제이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아제프를 다시 놓아줬다. 아제프는 새침한 얼굴로 일어나 엘제이의 허벅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척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에서 꽃을 빼와 그녀의 귓가에 꽂아줬다. 여린
꽃잎이 귀를 스치고 그 꽃물이 그녀의 얼굴로 옮겨왔다.
새침한 눈물점에 빠져들 것 같아서 엘제이가 헉헉거리며 가슴을 움켜잡다가 아제프를 다시 세게 끌어안고 어린
얼굴에 입을 쪽쪽 맞췄다.
엘제이는 연신 감탄을 쏟아내며 깨물어주고 싶은 오동통한 볼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분내가 온몸을 적시는 것
같았다. 달콤하고 포근한 구름에 파묻혀도 이렇게 녹아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이 뭔지 느끼며 아제프와 같이 꽃밭을 뒹굴었다.
아제프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싫은 기분은 아닌지 엘제이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얌전하고
귀여운 아제프라니,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엘제이는 이 치명적인 귀여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입술만
어물거렸다.
엘제이가 잔디에 누워 발광하며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앉은 아제프는 아기천사의
재림이었다. 어쩜 저렇게 보드랍고 예쁜지 설탕으로 만든 인형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 것 같다.
커다랗고 순둥순둥한 눈 아래 콕 찍힌 눈물점도 사랑스러움의 극치라 엘제이는 한동안 그렇게 구르며 아제프의
얼굴을 감상했다.
아제프는 통통한 손가락을 움직여 꽃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엘제이는 집중하느라 조금 내밀어진 입술이
귀여워 바닥을 구르며 즐거워했다.
바스락바스락.
수풀에서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하얗고 몽실몽실한 토끼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왔다. 뒷발을 앙증맞게
움직이며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는 토끼는 아제프의 주위를 맴돌았다. 동물과 어린 아제프의 조합이라니 엘제이는
이 꿈을 꾸기 위해 살아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하늘을 날아 풀밭에 힘없이 툭 떨어진 토끼가 몸을 버둥거렸다. 당황한 엘제이가 토끼를
살피며 엄한 얼굴을 했다.
“…….”
그 순간, 순하게 있던 아제프가 얼굴을 야차처럼 구기며 엘제이의 손에 들린 토끼를 쥐어 터트릴 듯 꽉 붙잡고
당겼다. 당황한 엘제이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버티자 둘 사이에서 토끼가 크게 휘청거렸다.
이러다가 토끼가 다칠까 봐 걱정이 된 엘제이가 결국 토끼를 놔줬다. 아제프는 눈을 잔인하게 번뜩이며 두 손을
번쩍 들어 토끼를 패대기쳤다.
철퍽-
바위에 세게 부딪힌 토끼의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질척하게 흘러나와 그때까지 평화롭던 동산을 적셨다. 아제프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토끼의 시체를 철천지원수 보듯 쏘아보며 발로 토끼의 온몸을 자근자근 밟아댔다.
퍽. 콰직.
토끼의 시체가 아제프의 발에 뭉개지는 잔인한 광경에 엘제이가 입술을 벌리고 멍하니 아제프를 바라봤다. 콱콱,
잔인한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자 정신을 차린 엘제이가 아제프의 팔을 잡으며 그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제프는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토끼의 시체를 노려봤다. 그의 이상 행동에 엘제이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변화는 일어났다.
쉭쉭-
죽은 토끼에게서 뱀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청명하던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몰려와 환하던 동산이 어둠에
잠겼다. 먹구름이 몰고 온 눅눅한 비가 쏴아아- 쏟아져 엘제이의 몸을 순식간에 적셨다.
쉭쉭.
“안 돼! 아제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3 화
83
조그만 발을 휘감은 긴 혓바닥이 아제프의 온몸을 꽁꽁 묶고 그를 끌어당겼다. 빠르게 끌려가는 아제프의 모습에
엘제이가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았다.
“악마…….”
“아제프!”
엘제이가 비명처럼 소리 지르며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처럼 주위에 휘날리던 혀의 일부가
엘제이의 손아귀에 잡혔다.
“으윽!”
“아제프! 이리 와요!”
엘제이가 손을 뻗으며 외치자 아제프도 엘제이를 향해 힘껏 발버둥 쳤다. 그를 감았던 혀가 툭- 끊어지고
아제프는 떨어졌다. 엘제이는 떨어지는 아제프를 무사히 안아 들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끄윽, 크아아아아!!!!!!”
아제프를 놓치자 악마의 숙주가 된 남자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벅벅 긁었다. 피부에 손톱을 박은 채로
사정없이 벅벅 긁어내리는 통에 남자의 얼굴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러고도 남자는 참을 수 없는지 발을 광광
구르며 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눈꺼풀을 헤집고 꾸역꾸역 들어간 손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르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으아아아아!!!”
작고 따뜻한 생명의 무게에 엘제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엘제이가 발을 돌려
도망치려는데 그녀의 발아래로 눈알 두 개가 뚝뚝 떨어졌다.
“크크, 크크크…….”
숙주는 괴로워하며 발버둥 치는데 악마의 입술은 여전히 호선을 그렸다. 씨익, 웃는 괴기스러운 입술에 엘제이가
도망가는 걸 멈추고 악마를 노려봤다. 가만 보니 악마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끼릭, 끼익!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덜커덕덜커덕 움직이며 아제프를 향해 기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무섭지
않았다. 저게 마지막 생명을 불태운 헛된 노력이라는 걸 짐작한 탓이었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끌어안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꺼억! 끄으으…….”
숙주를 잃은 악마가 허공에 붕 뜨며 광소를 터트렸다.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깔 웃는 악마의 얼굴이 엘제이의
코앞에 보였다. 악마는 다 뜯겨나간 혀뿌리로 입술을 날름 핥으며 엘제이를 노려봤다.
새빨간 안광이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리며 분노로 떨렸다. 날카롭게 벼린 손톱이 당장에라도 엘제이의 목덜미를
꿰뚫을 듯 다가왔다. 하얀 목에 손톱을 세워 죽죽 긋는 감각에도 엘제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지지 않고 악마를
노려봤다.
[크아아아아!!!!]
충분한 두려움을 보여줬는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는데 저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악마가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옅은 녹빛으로 일렁거리는 파도에 악마의 손톱 끝이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오싹 돋아나는 몸서리쳐지는 감각과 함께 새까만 손톱이 아제프의 몸을 파고드는 환상이 보였다. 소름 끼치도록
두려웠지만, 엘제이가 얼른 아제프를 붙잡은 악마의 손을 쳐냈다.
“건드리지 마!”
퍽- 소리와 함께 내쳐진 손은 회백색의 석회질로 뒤덮여 파스스- 부서졌다. 손목째로 날아간 손에 악마가 입술을
콰직 짓씹으며 뒤로 몸을 물렸다.
물러난 악마의 앞으로 인간의 형체가 부스스 일어났다. 악마는 얼굴이 흐린 인간의 뺨을 남은 손으로 어루만졌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까만 손이 인간의 가슴을 콱- 움켜쥐고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악마의 유혹에 꾀여 타락할 인간은 어디에나 있었다. 악마가 보란 듯 엘제이를 응시하며 천천히 새로운 숙주의 몸
위로 뻐걱뻐걱 기어올랐다. 새까만 몸이 축 늘어지며 영양분을 흡수하듯 인간의 몸에 더 깊이 손톱을 박았다.
악마가 거친 목울대를 그르렁거리며 속삭였다. 곧 까만 구멍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며 악마와 새로운 숙주를
삼켜버렸다.
엘제이는 이제는 사라진 악마의 흔적을 더듬으며 아제프를 꼭 끌어안았다. 정신적 탈력감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지만, 어쨌든 지켜내었다. 엘제이는 살아 있는 아제프를 보며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피부는 평온함을 줬지만, 안개 낀 듯 흐릿하던 새 숙주의 얼굴과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도 끈질기게
숙주의 몸을 파고들던 악마를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새로운 숙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새 숙주를 찾았으니 조심하라는 거야?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걸리네.”
눈물점이 콕 박힌 아이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 의젓한 얼굴을 하는 아이의 모습에 이
아이가 진짜 5 살이 맞는지 아니면 어른 아제프 속에 있는 건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엘제이는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은 아제프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아이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자 아제프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아서
엘제이는 편안한 얼굴을 하려 했지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이!]
“어?”
[제이…….]
또 한 번 애달픈 목소리가 들렸다. 엘제이는 자신을 간절히 부르는 아제프의 목소리와 품에 안긴 아제프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얼굴을 했다. 여기서 떠나면 다시는 어린 아제프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담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무척 낭랑해 엘제이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또 만날 수 있어요?”
“아? 꺄아아아!!!”
***
‘아침이구나.’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이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햇살은 따사로운 봄볕 기운을 물리고 강렬한 여름의 태양을
닮아가고 있었다. 잘 잔 것 같은데 몸이 좀 뻐근한 느낌에 엘제이는 하품을 하면 몸을 조금 뒤척였다.
“응?”
‘여기서 잤구나…….’
엘제이는 햇살을 맞으며 자는 아제프를 조금 수줍은 얼굴로 바라보며 그를 관찰했다. 햇살이 쭉 미끄러지는 것
같은 콧대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를 깨우게 될 게 분명해서 엘제이는 손을
꼬물거리기만 했다.
그녀는 어젯밤의 악몽을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사람 같았다. 시녀의 애타는 목소리를 듣고 아제프가 달려왔을 때,
엘제이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살려 달라, 돌려 달라,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수백 번 반복됐다.
“제이…….”
어쩐지 슬프게 들리는 음색에 엘제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바다를 닮은 벽안에 습기가 고인 것 같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아무 일도요.”
아제프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엘제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는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으며
그저 다정하게 웃었다.
“아! 눈곱 묻었어요?”
***
“우리, 소풍 갈래요?”
“왜 이걸 제이가 들고 있어요?”
아제프가 제법 무거운 바구니를 받아들며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시녀들을 노려봤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 붙여놓은 인간이 몇인데, 다들 단체로 실성했나 싶었다.
아제프는 꾸물거리는 손가락에 시선을 주다가 엘제이의 어깨를 감싸며 빙긋 웃었다. 그가 선물한 보닛을 쓴
모습이 무척 예뻤다.
“근데, 조금 못생겼어요. 칼질이 서툴러서…….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으니까요. 들춰보시면 안 돼요? 알겠죠?”
엘제이는 샌드위치 안에 그럭저럭 감춰진 못생긴 채소들이 튀어나올까 봐 걱정하며 빠르게 종알거렸다.
최근 들어서는 온갖 진미만 입에 담았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는 수프도 곧잘 먹었던 시절이 있으니 엘제이가
아무리 맛없는 음식을 만들었어도 환하게 웃으며 먹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가요?”
“잘 먹을게요.”
싱긋 웃으며 한입 깨무는 아제프의 손 틈으로 엉성하게 뭉쳐진 채소가 쭉 밀려나왔다.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해본 일이라 예쁘게 되지 않아 속상했다.
생글거림을 유지하던 아제프는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빠각- 아제프의 입안에서 무언가 씹히는 소리가 났다.
“으응?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아제프가 황급히 말을 돌리며 손을 저었다. 엘제이의 손에 억지로 달걀이 안 들어간 샌드위치를 쥐여 준 아제프는
다시 음식을 꼭꼭 씹어 먹었다. 빠르게 우물거리자 빠각- 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이 느낌은…… 달걀 껍데기인가?’
아제프는 혀 안을 채우는 삶은 달걀의 부드러움과 입안의 식감을 더해주는 달걀 껍데기의 조화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빠각- 빠각-
“으응?”
세게 울리는 소리에도 아제프의 미소는 단정하기만 했다. 엘제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그의 웃는
얼굴에 의심을 거뒀다.
“좋네요. 벌써 신혼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나중에 제이를 닮은 딸이 있어도 좋겠어요. 제이가 엄마가 되면
아이를 위해 베이킹을 해줘도 좋을 텐데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5 화
85
아제프의 심오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엘제이는 마침 떠오르는 어린 아제프의 모습에 신나하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꿈이요……?”
“다른 놈이랑 뽀뽀하고 껴안고 뒹굴었다고요? 꽃까지 받아가며? 그놈이 고백한 거예요?”
괴상한 논리였다. 엘제이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너무 황당해서 입에 무언가
턱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
그냥 아제프가 아니라 빌어먹을 꼬마 아제프라는 소리에 아제프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엘제이는 최소한
거기서 계속 살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당신, 벌을 받아야겠어.”
엘제이는 나무를 누른 아제프의 팔을 힐끔, 바라봤다. 단단한 오른팔이 나무 기둥을 억세게 짓눌러서 그의 힘에
일순 흔들린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졌다.
엘제이는 어쩐지 우지끈 팬 것 같은 나무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날씨가 좋고,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곳에서의 정다운 소풍이 왜 이렇게 될 것일까?
19 살 먹고, 벌이라니. 물론 잘못이 있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엘제이는 억울했다.
“벌이라니……. 저는, 그저 꿈을 꾼 것뿐인데요.”
한 번 질투에 휩싸인 남자는 속 좁게 굴었다.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잡아당긴 아제프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말을 먼저 돌린 건 당신인데…….’
‘때가 덜 묻은 느낌이랄까? 아이답게 순진해 보이기도 했고……. 얼굴이 더 귀여워서 그런가? 아……. 오동통한
볼이 귀여웠는데, 어린 아제프. 또 만나고 싶다.’
“그놈을 어른으로 봤어? 어른으로 봤는데도 안고 뒹굴었단 말이야? 나는 점잖은 성격이 아니어서 그냥은 못
넘어가겠는데, 이거 어쩌지?”
삐뚤게 뒤틀린 입술이 험악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트집에 엘제이의 눈에 억울함이 그득그득
차올랐다.
아제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시무룩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자 마음이 또 약해졌다. 기분 좋으라고 데려온 건데,
너무 따지고 들었나 싶어 아차한 아제프가 몸을 조금 물리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이니까?”
“…….”
“뭐든……. 네. 그럴게요.”
아제프의 고개가 스르르 들렸다. 엘제이는 뱀 꼬리처럼 싱긋 휘어지는 눈동자를 보며 불안함을 느꼈다.
“네. 딸기 좋아하죠.”
“아?”
엘제이는 딸기를 문 채로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의문이 가득 찬 엘제이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 아제프가 햇살처럼
밝게 웃으며 벌을 선고했다.
그냥 딸기 하나를 물고 있는 것뿐인데 묘하게 부끄럽고 얼굴이 빨개졌다. 엘제이가 떨리는 시선을 들어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바라봤다.
아제프는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리는 엘제이를 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이건 처음부터 그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시간도 정해주지 않았고, 저렇게 멀쩡하게 버텨내게 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차가워…….’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에 엘제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차가운 게 닿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아제프는 솜털이
쭈뼛 손 엘제이의 가슴께를 바라보며 무해하게 웃었다.
“아아……흡,”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6 화
86
드레스 윗단을 장식한 레이스가 그의 손끝에 툭툭 걸려 흔들렸다. 엘제이는 드레스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것처럼
천천히 가슴을 만지는 손길에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아으,”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인 남자는 엘제이의 두 손을 붙잡아 다시 허벅지 위로 내려주었다. 손목을 누르거나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간질거리는 목소리에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엘제이가 드레스 자락을 꾹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제프가 입술을 내려 엘제이의 턱을 길게 핥았다. 분도 칠하지 않은 보송보송한 피부는 딸기를 머금어 묘하게
달았다.
“흣, 아응…….”
“뱉으려고 한 게 아니라,”
“…….”
아제프는 짙게 침전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질척한 감정을 조금 털어냈다. 여린 사람이니 선은 지켜야 했다.
엘제이를 상처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아제프는 조금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아제프는 울먹이는 뺨에 짧게 입을 맞추며 엘제이를 천천히 눕혔다. 긴장으로 곱아든 손이 아제프의 가슴으로
살짝 올라왔다. 엘제이는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 흔들렸다.
아제프는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급하게 삼키며 눈을 감았다. 배 속에 들끓던 화마가 다른 의미로 활활 타올랐다.
맛있는 먹잇감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는 멈춰야 했다. 분노로 눈꺼풀을 파르르 떤 아제프는 일단 감정을 수습하며
엘제이를 일으켰다.
“다 장난이에요. 무서웠어요?”
가슴이 반쯤 드러날 정도로 내려갔던 드레스가 남자의 손에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아제프는 콩닥콩닥 귀엽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엘제이의 등을 살살 도닥였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달래는 사이 멀찍이서 느껴지던 기척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아제프는 손을 꾹 쥐고 분노를
사리물었다.
“언니!!!”
“리사! 뛰지 마라.”
“네.”
아제프는 가까이 다가오는 엘리사와 알체스테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엘리사의 배를 주먹으로
후려치는 상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몰래 배라도 한 대 때려 기절시킬 수 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망할 여자 같으니. 여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분명 입조심하라고 이르고 왔는데.’
아제프는 저 밀색 머리카락을 다 뜯어놓고 싶다고 생각하며 잇새를 꽉 물었다. 엘제이와의 달콤한 한낮을
꿈꿨는데, 제일 성가신 방해물이 도착해버렸다.
분명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달콤한 오후의 낮잠을 위한 자세는 아닌 것 같았다. 엘제이의 눈이 의구심을
품고 아제프를 올려다봤다.
몽롱하게 달뜬 뺨이 발긋한 기운을 머금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좋았던 것 같다. 햇살 아래
서 있는 그는 날개 없는 천사 같았다. 특유의 해사한 얼굴에 선량한 미소가 더해지자 신성한 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
“또 그 빌어먹을 꼬마 생각을,”
어느새 다가와 아제프의 말을 재빠르게 가로챈 엘리사가 엘제이의 손을 붙잡으며 붕붕 흔들었다. 내심 엘리사와도
소풍을 오고 싶었던 엘제이는 흘깃 아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지만, 아까는…….”
“언니! 얼른 가자!”
“……음?”
‘미친 건가? 제이랑 둘이서 도망가려고 했는데, 어쩌자고 저 여자를 제이 옆에 둔 거야? 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황망히 굳은 얼굴이 팔랑팔랑 뛰어가는 자매의 뒷모습에 닿았다. 엘리사는 신이 나 재잘거리며 피크닉 천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니랑 다정하게 딸기 하나씩을 주고받는 모습이 무척 정다워 보였다.
어느새 아제프의 곁으로 다가온 알체스테는 사납게 일그러진 안색을 살폈다. 무덤덤한 얼굴이 옅은 동정을 담고
혀를 찼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찌푸려진 얼굴에서 사나움이 뚝뚝 떨어졌다. 제발 좀 엘리사를 데리고 꺼져달라는 압력에도
알체스테는 그저 덤덤한 얼굴을 했다.
“이런, 빌어먹을. 다들 미친 거 아닙니까? 신을 모시는 황족이 주술사를 모아? 경솔해도 정도가 있지.”
알체스테가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드비히 황자에 비하면 황제는 훨씬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쉽게 그런 위험한 일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7 화
87
“하아……. 그딴 놈도 황족이라고 황좌가 탐이 나는 거겠죠. 직계 서열을 볼 때, 황자님께서 계승서열이 더
높으시고 백성의 지지 또한 높습니다. 게다가 루드비히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던 티아세 家와, 대놓고 전하를
지지한 저 사이에 청혼서가 오가니 불안해진 것일 테지요.”
“원래 머리가 좋은 이의 생각보다 미친놈 생각이 더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라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머물렀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저택의 위치도 알았겠죠. 황자님께서는 제이와 티아세 양이 목표가 될 거라고 보십니까?”
“16 년 전, 황제는 티아세 자매에게 아나이샤의 뿌리를 먹여 공작을 협박했다. 공작은 황제에게 대항하는 대신
황제의 개가 되어 사는 걸 택했고, 자매는 해독제를 얻었다. 한 번 성공한 전적이 있으니 두 번이라고 못 할 게
없지. 사람의 약점을 잡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으니.”
하지만, 티아세 家는 무가가 아니었다. 자금력을 지닌 가문이기는 했으나, 황제의 손아귀에서 자매를 지키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고,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이 온다. 아제프는 그 미칠 듯한 불안함에 신경이
자근자근 밟히는 것 같았다.
‘내가 평화에 젖을 틈을 안 주는군. 나는 날 때부터 불행한 운명이라도 되나? 드디어 행복을 가졌는데, 사랑을
받았는데…… 잃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행복해지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는 이제야 사랑받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영원한 행복의 끝에
머물며 살 수 있는데,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시덩굴처럼 복잡한 생각이 얼기설기 얽혔다. 아제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복잡함을 떨쳐냈다. 그는 다시,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마, 모를 확률이 높겠지. 루드비히 입장에서는 내가 제일 성가신 존재일 거다. 그러니 내가 엘리사와 문장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리사가 목표일 테고, 아니라면 엘제이 티아세가 더 위험하겠지. 경과의 관계가
있으니까.”
“경!”
알체스테는 꽤 점잖았지만, 둘 중 하나의 목숨만 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엘리사를 택할 냉정함이 있었다.
아제프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계산적인 생각이 사라졌다. 아제프는 여전히 엘리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어여쁜 볼우물을 접으며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엘제이, 그 한 사람만 보였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잡을 수 있었던 그 순간 하나하나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이었고, 삶이었다.
“…….”
아제프의 눈에 웃음을 터트리는 엘제이가 담겼다. 서툴게 엮은 화관을 서로의 머리에 씌워주는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에도, 그녀는 저렇게 웃을 줄 알았다.
“저는 소중한 걸 잃었을 때의 제이가 어떻게 변할지 무섭습니다. 요즘은 특히나 그래요. 저렇게 평범해 보이지만,
많이 불안정해 하고 있어요.”
아제프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시린 칼날처럼 냉혹했던 눈이 눈물로 젖었다. 눈가가 발개진 남자가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물기 고인 눈을 부릅떴다.
“…….”
“뭡니까?”
“써라. 리사 거다.”
“싫습니다.”
아제프는 늘 꼼꼼하고 차분한 엘제이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한쪽만 말아 올렸다. 아름다운 얼굴에서 비웃음이 뚝뚝
떨어졌다.
눈시울을 손으로 톡톡 건드려보던 아제프는 마른 눈가를 확인하고 싱긋 웃었다. 엘제이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때, 숲을 다 울릴 것처럼 우렁찬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퍽-
“아제프!”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에 엘리사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보지는 못했으나 평소 남자의 성격으로 보아 고의임이
분명했다.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손길로 엘리사의 얼굴에서 손수건을 떼어줬다. 손수건이니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놀랐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엘리사가 이를 빠드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일부러 했다고 화를 내면 온갖 피해자인
척은 다 할 남자가 눈에 선했다. 엘리사는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일단, 유연하게 넘겼다.
“나는, 읍!”
빠각-
“흠? 이게 뭐,”
아제프는 엘리사를 믿을 수 없었다. 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샌드위치 속에 달걀 껍데기가 있다고 쫑알거릴
엘리사를 생각하자 벌써 속이 쓰렸다.
아제프는 그녀의 실수가 기쁜지 히죽거리며 웃다가, 엘제이의 눈치를 보며 입꼬리를 내렸다. 그는 곧 입안을 꽉
깨물고 촉촉한 눈으로 호소했다.
‘망할’이라는 단어는 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었기에 엘제이는 도움을
청하듯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무뚝뚝한 금안이 그녀의 난감함을 알아채고 흐려졌다. 그는 까칠한 아제프보다는 다정한 엘리사를 공략하기로
했다.
“리사. 그만,”
“흐윽…….”
엘리사가 너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원망스럽게 알체스테를 흘겼다. 건조한 눈을 억지로 쥐어짜서 개미
눈물만큼 찔끔 나온 눈물에도 알체스테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손을 흔들었다.
“언니…….”
“제이…….”
“좋은 생각이 있다. 서로에게 딸기 하나씩을 먹여주며 화해하는 거다. 원래 싸운 후의 아이들은 그렇게 화해를
한다더군.”
엘리사는 짜증스런 기색으로 아제프를 노려봤다. 그녀의 머릿속의 아제프는 나무 위에 매달려 쇠몽둥이를 맞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윽!”
엘리사는 여전히 아제프를 언니를 훔친 도둑놈 정도로 인식했고, 아제프도 엘리사가 지독할 정도로 싫었다.
***
“그럼, 잘 부탁드려요.”
자리에서 일어난 엘제이가 알체스테의 손을 잡고 숲길로 들어가는 엘리사를 지켜봤다. 알체스테가 곁에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언니니까 동생이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글쎄요…….”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눈치가 있으면 정도껏 자기네들끼리 놀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는 꽃을 엮느라
풀물이 든 엘제이의 손을 잡아끌며 벌러덩 누워버렸다.
“제이, 그것보다 여기 누워 봐요. 햇볕이 따뜻해서…… 이렇게 누우면 기분이 좋아요. 따뜻하죠? 팔베개 해줄
테니까 여기 누워요.”
아제프가 팔을 톡톡 치며 채근했다. 커다란 백금색 여우가 애교를 피우며 뒹구는 것 같아서 엘제이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그래요?”
아제프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엘제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살폈다. 이 평온한 얼굴이 계속되기를 빌었다. 숨이
막힌다는 듯 쌕쌕거리며 괴로워하는 얼굴은 더는 보기 싫었다.
“뭔데요?”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물어, 보세요.”
엘제이의 등허리를 꽉 끌어안은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실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햇볕이 주는 나른함에 취해, 그가 건네는 달콤함에 취해 눈을 감았던 엘제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짧은 한마디가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잠투정이라는 귀여운 단어에 감춘 그의 슬픔이 투명하게 녹아 떨어졌다.
뚝뚝 흐르는 감정의 잔재에 엘제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 보고 싶은데…….”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이끼 같았다. 볕이 들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버린 음색이 엘제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잠든 사이 하는 말과 행동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닐 것 같았다.
모든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9 화
89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숨겨둔 진실이 그에게 너무 큰 슬픔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먹먹한 먹구름에 잠기지 말고, 소나기가 되어
시원하게 퍼부을 수 있기를 바랐다.
“좋아해요. 아제프.”
눅눅하게 젖었던 습지에 볕이 들었다. 아제프는 조금 환해진 얼굴로 엘제이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목덜미를 빨아들이자 엘제이가 목을 움츠렸다.
“으읏,”
“사랑해, 제이.”
아제프는 추지게 젖은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달콤했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말랑한 살결에 몸이 사르르
풀렸다. 그는 긴장을 풀고 엘제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엘제이는 부드럽게 풀리는 그의 몸을 느꼈다. 꽉 조여진 흉부가 나른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그는 가만히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저는 슬픈 꿈을 꿔요. 꿈속의 저는,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견뎌내야 해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 다치고, 아프고,
죽는…… 참혹한 순간이 내게 달려와요. 아무리 도망가고 달려가도, 앞은 새빨갛게 물들어…… 나를 덮쳐요.”
아제프는 울어서 눈이 따갑다는 걸 너무 오랜만에 느꼈다. 그는 빨갛게 짓물러 따가운 눈가를 옷소매로 거칠게
닦으며 숨을 골랐다.
“아제프,”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엘제이를 붙잡을 어떤 것도 없었다. 늘 당당하게 웃고,
아무렇지 않게 잘난 척했지만, 불안해 죽을 것 같았다.
‘당신이 꿈을 꾸고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저게 문장통은 아닐까? 반려가 그리워 발버둥 치는
당신의 영혼이 아닐까!’
그동안 엘제이의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발현한 후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엘제이는 텅 빈 눈을 하지
않았다. 감정으로 충만하게 차오른 눈이, 그 싱그러운 초록빛이, 늘 그를 봄으로 적셨다.
안심했는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면 엘제이는 제 손으로 떨어지고, 소식 없는 반쪽은 그렇게 제 자리를 빼앗길
거라고 믿었다.
제 오만함을 질책하듯 저 빌어먹을 악몽이 시작됐다. 엘제이는 매일 밤마다 고통으로 몸을 뒤틀고, 울고,
애원했다.
아제프는 눅눅한 턱을 엘제이의 어깨에 기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체구였다. 뼈대가
가늘고, 몸집이 작아 힘주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비이상적인 고통을 겪으며 매일 밤,
울었다.
처음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쥐어본 적 없던 삶에서, 마음껏 가져본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황홀함에
도취되어 가졌다고 믿었다.
‘당신을 잃는 순간, 내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아. 나를 이루던 모든 감정과 부산물이 물거품처럼 흐려져
녹아내리고, 나는 끝끝내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겠지.’
엘제이를 진정 위한다면 놓아주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뼛속까지 이기적인 자신은 끝내 그 선택만은 하지
않을 터였다. 이런 자신이 구역질이 치밀 만큼 역겨운데, 혐오스러운데, 자신을 나락으로 미는 길만은 걸을
용기가 없었다.
아제프는 너무 조용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기묘한 적막이 엘제이를 불안하게 했다. 엘제이는 놓아주지 않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비틀며 귓가에 웅얼거렸다.
“아제프……. 무슨 생각 해요?”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게 제 탓인 거 같아요. 당신이 문장 보유자도 아닌 저를 만나 이렇게 된
게 아닐까요?”
“아제프!”
아제프, 그 자신에게 보내는 냉소에 엘제이가 몸을 흔들며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이 남자는 또 못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제가 억지로 당신을 누르고 억압해서!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협박해서! 제 못난 이기심이, 당신을 갉아먹어서…
…. 그래서, 당신이 잠을 못 자는 겁니다! 제 죄를 당신이 받는 거예요…….”
“혹시, 어쩌면, 당신의 짝을…… 찾아주지 않아서 당신이 아픈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내 것이 아닌 걸
붙잡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는 또 당신을 찾고, 당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해달라고
애원해요. 저는 어디까지…… 쓰레기죠?”
드디어 확실히 대답해줄 수 있는 말이 나와 기쁘게 답하려는데 입이 막혔다. 어느새 그의 안락한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짓눌려진 엘제이가 눈을 크게 뜨고 아제프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다고?”
“읍! 으으읍!”
“나는…… 당신의 반려가 누군지 아는 순간, 죽여 버릴지도 몰라. 당신이 놓아달라고 해도, 그놈이 죽으면
당신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멈추지 못할 거야. 어차피 당신이 없다면 내 인생은 썩어빠져서
지옥으로 떨어질 텐데, 인간 하나 더 죽인다고 뭐가 달라져?”
‘당신이라고! 당신이 내 반려라고 여신님이 말씀하셨단 말이야! 저 못된 입!’
엘제이는 못된 말만 내뱉는 아제프가 답답해서 가슴을 쿵쿵 때리고 싶었다. 아제프의 한 손에 우악스럽게 짓눌린
손목이 빠져나가려는 듯 버둥거렸다.
아제프가 일그러진 얼굴로 평소와는 다르게 반항이 심한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는 작전을 바꾼 듯 심호흡을
하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우웁! 웁!”
입을 놔줘야 대답을 할 게 아닌가. 엘제이가 놓아달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못된 남자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허리에 손을 탁 올리며 째려보는 엘제이의 눈빛에 아제프의 눈이 덜덜 떨렸다. 엘제이가 저를 깨문 충격도 가시지
않았는데, 째려보는 눈은 타격이 너무 컸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꿈인가 싶어 혀를 깨물어 봤는데, 아팠다. 아제프의 동공에 콰지직,
지진이 일었다.
“아려……?”
힘으로 한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제프는 어린애를 혼내듯 엄한 얼굴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엘제이를 향해 눈웃음을 살살 쳤다.
“에이, 노아둬요.”
볼이 잡혀 툭 튀어나온 입술과 발음이 꽤 귀여워서 엘제이는 마음이 또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못된 말만 하고,
못된 행동만 하는 데 저리 예뻐 보이는 건 다 저 얼굴 탓인지도 몰랐다.
‘풀어줄까? 풀어주고 얘기해도 되잖아. 그렇지? 나이도 많은 사람을 이리 어린애처럼 붙잡는 건 실례잖아…….’
“제이, 화났어요? 미안해요.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이가 저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었나 봐요.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속으론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사과는 참 빨랐다. 엘제이의 손에서 풀려나자 평소처럼 말하게 된 아제프가 눈가를
축 늘어트리고 달콤하게 사과를 속삭였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한껏 가여운 척 속눈썹을 팔랑팔랑 흔들던 남자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엘제이의 손목을 잡을 듯 말 듯 애달프게 굴었다.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꿈속에서 그의 아프고 슬픈 모습만 잔뜩 본 터라
엘제이는 유난히 저런 모습에 약하기도 했다.
“그럼요. 절대 안 그럴게요.”
그 와중에도 다행히 힘 조절은 했는지, 손목은 멀쩡했다. 아제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성하는 척
눈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아제프, 당신이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나는 그냥, 꿈이었는데…… 당신은 현실이었잖아.
나는 알고 나니 괜찮았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어쩌면 아무것도 몰라 더 힘들었을 아제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더 혼낼 수가 없었다. 엘제이는 그에게 확실히
말해주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더 숨기다가는 그의 상처가 곪을 것 같았다.
엘제이가 가슴을 덮은 드레스를 살짝 내리며 문장을 드러냈다.
“여기 만져볼래요?”
‘여기선, 좀 참는 게 좋겠지?’
아제프의 탐욕어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엘제이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 그녀는 아제프의 뺨을 살살
쓸어보며, 그의 몸 어딘가에 돋아날 문장을 기대했다.
“……그럼요.”
엘제이는 아제프의 크라바트를 살살 풀어 옆에 잘 놔두고 천천히 그의 단추를 풀었다. 탁탁, 소리를 내며 풀리는
단추와 순진하기만 한 얼굴의 차이에 아제프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제프의 시선이 질척하게 젖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 집중하는 엘제이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안락한
침대에서도 잘 참았던 충동이 그를 덮쳤다.
엘제이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가슴을 보며 실망 어린 탄식을 쏟아냈다. 후- 내뱉는 숨결이 봄바람처럼
불어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제이, 잠깐…….”
엘제이가 간절히 바라며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차가운 체온을 달구는 따뜻한 손길에 문장이 아니라 다른 게
먼저 반응했다.
아제프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주변을 훑었다. 날이 화창한 오후의 햇볕이 엉뚱한 상상을 하는 그를 질책했다.
따갑게 내리꽂히는 해의 기운은 아찔한 머리를 더 어지럽게 했다. 아제프는 그 나름대로 지키고 있는 선이 있었다.
한 침대에 자면서도 그녀를 악몽으로부터 지킬 뿐,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네?”
“아……. 꿈속에서요.”
몸을 움찔한 아제프가 그제야 엘제이 쪽으로 시선을 주며 한숨을 삼켰다. 그의 손은 엘제이의 가슴 위에,
엘제이의 손은 아제프의 가슴 위에,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네. 알아요.”
“문장?”
아제프는 그제야 진지한 엘제이를 보며 그녀가 말한 반려의 뜻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엘제이는 자신이 문장의
반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엘제이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제프는 다른 생각을 멈추고 엘제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엘제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단단하게 굳혀 나온 목소리에 아제프의 손짓이 흠칫, 멈추었다. 그제야 멈춰 있던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잦은 악몽, 생생하게 느끼는 고통의 강도,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못하는 엘제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수치를 넘어선 괴이한 현상이었다. 처음에는 저주를 의심할 정도였다.
‘뭘까? 내가 놓친 게 뭐지?’
엘제이는 제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그의 가슴을 손으로 한 번 더 매만졌다. 아제프의 시선이 문장을 향했다.
‘딱 저런 색이었는데……. 그 빛.’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1 화
91
아제프의 자질은 빙(氷), 알체스테의 자질은 빛(光)이다. 그 외에도 지금껏 베아르시 제국에 기록된 자질은
원소계열의 공격적인 것이었다.
“네. 저는 자질 보유자예요.”
아제프는 몸에서 피가 빠진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토록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밤마다 거칠게 새어나오는 숨결과 비명을 지르려고 벌어지는 입술. 고통스럽게 벙긋거리는 입속에선 끝내 비명이
나오지 못하고 입안을 맴돌기만 했다.
이불을 파고드는 손가락은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다는 듯 절박했고, 감은 눈으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는 꿈에서 당신을 봐요. 매일 밤……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저는 5 살의 아제프를 보고, 10 살의 아제프를
보고, 20 살의 아제프도 봐요. 저는 늘, 당신 옆에 있었어요. 1 년이 넘도록 매일 밤, 당신을 봤어요.”
아제프가 눈을 내리깔며 그 시절의 자신을 생각했다. 평소 그는 의식적으로 과거를 떠올리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을 뿐더러, 그건 나쁘기보다는 끔찍한 기억들이었다.
아제프는 이제야 겨우, 엘제이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약했는지 이해했다. 왜 그토록 쉽게 제게 속아주었는지
알았다.
엘제이는 그가 그토록 드러내기 싫어하는 과거를 제 입으로 들추는 게 미안했다. 그가 느낄 비참함과 고통이
어떨지 상상하면 미안해서 몸속 전체가 먹먹해졌다.
담담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자질? 문장? 이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제프는 단지, 미안하다는 듯 내리깔린 밀색 속눈썹이 가슴 아파 미칠 것만 같았다.
아제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부릅뜬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벽안에 비친 엘제이의 얼굴이 물에 잠긴 것
같았다.
“아제프, 미안해요. 제가 멋대로 그걸 말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하나도 더럽지 않아요. 그건 그런 게 아니에요.
네?”
엘제이는 절규하듯 으르렁거리는 아제프를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게 다독이는 손길에도 그는 진정하지 못했다.
아제프는 텅 빈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건 저주가 맞았다. 자신이라는 저주가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편했어. 당신은 아픈데! 매일 악몽에 사는데! 나는 이상할 정도로 괜찮았어. 잠을 안 자도
머리가 가벼웠고, 무리해서 자질을 써도 괜찮았어. 왜, 멀쩡했을까?”
“아제프…….”
“그게 다…… 나 때문인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기생충처럼 달라붙어서…… 당신이 그렇게 된 거야?”
탐하지 말았어야 했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때, 저와 같은 진창으로 끌고 오는 게 아니라 보냈어야 했다.
더러운 공기가 이미 그녀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는데, 자신은 그걸 몰랐다. 이미 한계라고 울먹이는 사람을
달래는 척 협박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멋대로 행동하지 않을게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미안해요. 미안해…….”
물기가 가득 고인 푸른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눈물점을 물들이며 지나가는 물줄기에 마음이 아렸다.
엘제이는 도홧빛이 도는 눈가를 손으로 살살 닦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2 화
92
둥글게 확장된 동공이 푸른 홍채에 둘러싸여 흔들렸다. 축축한 해수를 담은 눈이 미안함을 토해냈다.
“미안……. 미안해요.”
이기적인 입술은 곧 죽어도 놓아주겠다는 말을 스스로 내뱉지 않을 터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등을 떠밀 자신이
없음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이미 자질의 지배권을 놓쳤다는 걸 전혀 몰랐다. 보통 자질의 지배를 잃으면 그 자질에
잡아먹혀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한 번에 다 알려주는 것보다는 그가 오해하지 않을 정도만 천천히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쌓인 게 꽤 되어서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차츰 빈도가 줄어들 거고, 괜찮아질 거예요.”
아제프가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엘제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고 자질은 원래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터라 그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아제프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몸에서 자질을 떼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선천적인 능력을 떼어내는 방법은
없기에 그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체념했다.
엘제이가 알려준 건 빙산의 일각도 안 되었다. 천천히 빙산의 모습을 드러나면 그는 좀 더 울부짖으며 괴로워할
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제프가 속상한 듯 웅얼거렸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엘제이 앞에서 자해하겠다고 협박하던 옛일이 떠올라 혀를 콱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엘제이는 계속 사과만 반복하는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론, 엘제이도 사람이니 상처를 받았다. 그가
날카롭게 굴 때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가 자해한다고 협박했을 때는 손발이 다 후들후들 떨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건, 남들처럼 성장했을 때의 당신이 아니었을까요? 부모도, 동생도 모두 살아있는 안온한 가족들
품에서 컸다면…… 좀 더…… 온화한 당신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제프는 삶이 너무 괴로웠다. 몸이 느른하게 처지고, 마음이 곪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마음에 파묻혔다.
텅 빈 그것을 채우려 수없이 발버둥 쳤지만 결국, 마른 우물일 뿐 나아지지 않았다.
“그냥…… 살았어요. 죽고 싶지 않은데, 왜 사는지도 몰랐어요. 날마다 그저 그렇게 살았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갔을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아집만으로.”
“제가, 당신 옆에 있어 행복한가요?”
“……당신 옆에서 저는, 어린아이가 됐어요. 그때처럼 사소한 것에도 기뻤고, 허한 마음이 차올랐어요. 저는 정말,
말로 담지 못할 만큼 행복했어요.”
“제이는…… 어때요?”
“저는 아제프만을 바랐는걸요. 가장 원하는 걸 얻었으니, 당연히 행복해요. 우리는 이거면 됐어요. 그러니 더는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요.”
“아니요. 공명(共鳴)이에요.”
아제프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그녀가 이 대화를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공명?”
아제프는 이제야 이해가 되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의 마음을 읽는다면, 지켈리온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테고, 잘 쓰이지 않는 문자를 배울 방법도 있었을 터였다.
엘제이는 흘긋, 엘리사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다. 살랑, 불어온 바람이 분홍색 꽃 잎 하나를 엘제이의
발목 위에 툭 올려놨다. 그럴 리 없는데도 꽃잎이 엘리사 같았다.
환청이 들리고 환각이 보였다. 순진한 척 눈을 똘망똘망 뜨고 애교를 부리는 동생이 꽃잎처럼 보였다.
[언니!]
엘제이는 풀이 죽은 아제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엘제이의 손가락 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도…… 돼요?”
엘제이가 좋아죽겠다는 듯 아제프를 꼭 끌어안자 그의 얼굴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엘제이는 오늘따라 유독 순하고
착한 그를 보며 그를 더 힘주어 안았다.
아제프가 솔깃한 듯 고개를 살짝 들자 연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3 화
93
“그렇게 바삐 처리할 건 아니고 심심해서 그래요. 습관적으로 챙겨든 거라. 제이가 신경 쓰인다고 하면 다음에는
안 들고 올게요.”
아제프는 엘제이 손을 꼭 잡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는 침대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침대 주위에 멀뚱히 서
있었다.
낮잠을 자기로 했으니 누워도 될 것 같았지만, 살짝 눈치가 보였다. 그는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개처럼 엘제이를
힐끔 쳐다봤다.
“우리 낮잠 자요?”
아제프는 여전히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눈물샘이 고장 난 사람처럼 울었던 게 탈이었는지 그의 눈가는 발갛게
짓물러 있었고, 얼굴색도 좋지 못했다. 엘제이는 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제프가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얇은 실크자락을 휘감고 흔들리는 허벅지의 감촉이 절로 상상이
되어 또 몹쓸 짓을 할 것 같았다.
그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되뇌며 얌전히 그녀의 허벅지 위에 누웠다. 조심조심 내려앉은 얼굴이 매끄러운 실크
자락에 닿았다.
“부드러워.”
무심코 나온 감상이었다. 전에도 만져본 적은 있지만, 뺨에 닿도록 누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제프는 제 몸과는
확연히 다른 감촉에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들었다.
“불편해요?”
아제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엘제이의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꼭 쥐어봤다. 사람의 피부처럼 부드럽게 휘감기는
천의 감촉이 좋았다.
연약한 손짓이 가슴 위에서 부드럽게 흩날렸다.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춤추는 것 같았다. 규칙적인 속도로
도닥이는 손짓에 그도 졸음이 쏟아졌다.
“몰랐는데, 졸리네요.”
정신이 지치면 육체도 함께 피로를 호소한다. 뭉근하게 열이 오른 머리의 투정에 백금색 속눈썹이 점점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미소 지으며 노래를 부르는 엘제이가 보였다. 하얗고 싱그러워
눈가에 습기가 고였다.
봄이었다. 날이 따뜻하고, 하늘이 청명한 맑은 날이었다. 꽃내음이 선율을 타고 흘렀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부드러운 솔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평범한 봄날이었다.
***
눈앞에서 그림자가 흔들렸다. 기척에 예민한 몸은 그만 일어나라고 그를 종용했다. 아제프는 어쩐지 묵직한
눈가에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눈을 떴다. 하늘을 비췄다가 감추기를 반복하는 하얀 커튼이 보였다.
“우음…….”
“…….”
아제프의 얼굴에 미안함이 번졌다. 힘든데 깨우지도 못하고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읏,”
엘제이가 작게 신음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허벅지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저릿한 감각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잠시간 꼼짝도 안 하고 그녀의 기척만 살피던 그는 그제야 안도하며 조심조심 엘제이의 목 뒤로 손을 둘렀다.
바람에 이지러질 듯 연약한 목소리였다. 축축한 습기를 한입 베어 먹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속눈썹이라도
들어갔는지 눈이 이상하게 아팠다. 아제프는 속눈썹을 팔랑팔랑 흔들며 엘제이를 조심조심 침대 위로 눕혔다.
이 침대 위에서 그녀의 가슴을 깨물고, 문장을 자근자근 씹던 행동이 떠올랐다. 아파하는 엘제이를 힘으로
억압하고 왜 제 아픔을 알아주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헉!”
조심조심 문을 닫으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티 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말없이 얼굴을 찌푸린 아제프가
소리 낸 이를 차갑게 노려봤다.
“무슨 일이지?”
“켁! 일단! 큭, 손!”
알모어는 목이 졸려 캑캑거리며 발버둥 쳤다. 모셔야 할 주인만 아니었으면 정강이를 발로 차 벗어나고 싶었다.
버둥거리는 꼴이 꽤 가여웠지만, 아제프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아제프가 쉬려면 누군가는 바빠야 했다. 지금쯤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나 처리해야 할 알모어가 엘제이의 방문
앞을 서성거린 건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지금처럼 꺼림칙한 시기에 자신을 급하게 찾는 알모어의 행동은 아제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엘제이에게
주어진 방안은 란델 家의 성역이라, 접근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알모어가 거기까지 와 서성이던 건 뭔가
일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이상한 행동?”
“네…….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여러 차례의 고문은 사람을 쉽게 피폐하게 했다. 아무리 기가 드세고 독한 사람도 반복되는 고통에는 흔들렸다.
루드비히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수차례 고문당한 주술사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똑바로 안 말해?”
알모어는 차마 제 입으로 설명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제프의 눈치를 봤다.
‘저게 미쳤나?’
전에는 좀 더 두려워했는데, 간이 커졌는지 잘도 저런 행동을 했다. 아제프는 해이해진 알모어를 훈육해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가 몇 걸음 걷는데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는 그 한 명의 것이었다. 얼굴을 귀신처럼 일그러트린 아제프가
이를 갈았다.
“당장 안 따라와?”
“……네.”
알모어는 목줄에 꿰인 짐승처럼 아제프에게 끌려갔다. 가기 싫다는 듯 버둥대는 다리가 바닥에 애처롭게 끌렸다.
코끝에 피 냄새가 주렁주렁 걸렸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비릿한 냄새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아제프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섰다.
끼긱- 끽- 끼이익-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 적막한 지하실 아래에서 쇳소리가 났다. 신경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날붙이의 울음이
음산하게 울렸다.
옆에서 덜덜 떨며 긴장하는 알모어와는 다르게 아제프의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서렸을 뿐이었다.
끼릭- 끽! 끼익!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실, 수많은 이들의 공포와 고통이 서린 까만 공간에 퍼지는 소리가 듣기
거슬렸다.
“묶어놓지 않았나?”
“묶어놨는데……. 그게…….”
끼릭! 쿵!
긴장감 없던 푸른 눈이 크게 확장됐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4 화
94
쿵! 쿵!
“아흐흐! 흐아!”
주술사는 인간의 언어를 까먹기라도 한 듯 침을 줄줄 흘리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자살을 방지하려 물려놓은
재갈에 거칠게 긁힌 입안에서 새어 나온 침이 피와 한데 섞여 주르륵 흘렀다.
아제프는 귀찮게 구는 알모어를 한쪽으로 밀쳤다. 아제프가 거침없이 걸어가 감옥의 문을 열자, 알모어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두려움보다는 충성심이 먼저였는지,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도망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제프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알모어를 사납게 노려봤다. 가뜩이나 해야 할 일이 많아 짜증이 나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말썽이었다.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하얀 손이 위협적으로 빛나자 알모어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끄아악! 커흑!”
“으아아아! 끄악!”
우두둑- 우두둑-
“끄아아아!”
“꼭 좀비라도 된 것 같단 말이야?”
아제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상하게 눈알을 파버리고 싶었다. 아제프는 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분노에 의아함을 느끼며 남은 눈알 하나를 파내 바닥에 버렸다.
“캬아아악!”
문양이 자체적으로 사람 몸속을 파고들어 주술사를 괴사시키고 있었다. 몸속으로 꾸물꾸물 기어가는 모양이 꼭
기생충 같았다.
“버림을, 받아요?”
아제프는 조롱하듯 접히는 눈가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분질러진 목뼈를 보면 이미 죽었어야 정상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콰직- 소리와 함께 주술사의 뇌수가 터졌다. 아제프는 힘 조절을 못 해 다다다 꽂혀버린 얼음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저를 언급하는 건 괜찮았지만, 엘제이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아제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감옥을 나오며 가볍게
손짓했다.
콰지지직!
푸르게 변한 마나가 공기 중에서 번쩍이다가 빠르게 쏟아져 주위를 얼렸다. 감옥 전체를 꽝꽝 얼린 얼음 아래로
새까만 연기가 번졌다.
알모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옥을 바라봤다. 거대한 얼음거미가 감옥 안에 둥지를 튼 것 같았다.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새까만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알모어의 눈이 발갛게 물들자 아제프가
혀를 차며 그의 뺨을 찰싹 때렸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아제프에게 달라붙은 피 한 방울이 망령처럼 움직여 그를 덮치는 게 보였다.
“후작님!”
“알모어, 소란 떨 것 없다.”
아제프는 제 얼굴 쪽으로 올라오는 그것을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그가 눈짓을 보내자 마나는 바로 화답했다.
아제프는 마나의 가호를 받는 자였다. 아끼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눈을 홉뜬 마나가 스스로 움직여 거머리처럼
꾸물거리는 연기를 집어삼켰다.
쨍-
***
끼익- 끼익-
날카로운 손톱으로 벽면을 북북 긁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톱으로 긁어놓은 여러 개의 실선이 그들끼리 겹쳤다.
동굴에 갇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남자는 눈을 감고 평화롭게 잠든 듯했다. 평온히 내리깐 눈과는 달리 느리게
벽면을 긁는 손만이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렸다.
“윽!”
그들과의 만남이 기대되어 죽어버린 심장도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흥분에 들뜬 얼굴로 숨을 들썩이며 뭉근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분간 눈은 보이지 않을 테지만, 감각은 살아 있었다. 미끄러진 손이 그대로 벽면을 타고 올라 그어놓은 실선을
매만졌다. 무표정한 얼굴에 황홀함이 번졌다.
마물의 몸에 적응하는 동안, 지켈리온의 기억은 봉인되어 있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에게 몇 번 죽으면서 그
봉인은 서서히 약해졌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5 화
95
알모어는 갑작스레 내린 아제프의 명령을 이행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왔다. 주인이 칭찬해주길 바라는 집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제프는 꽤 더워진 날씨에 땀을 흘리는 알모어를 찝찝한 눈으로 바라봤다. 불쾌감이 역력한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한들한들 꽃바람이 불었다. 알모어를 순식간에 지나친 아제프가 엘제이의 앞으로 다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온갖 비위를 다 맞추기 시작했다.
‘녹았네. 녹았어.’
알모어의 생각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제프는 연신 웃는 낯이었다. 아제프는 예뻐 죽겠다는 듯 다정히 엘제이를
보며 연신 눈을 쪽쪽 맞췄다.
알모어는 조금 전까지 냉하게 얼어붙었던 눈과, 달콤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 사이의 괴리감에 서러워졌다.
***
“네?”
아제프는 그게 무슨 괴상한 소리냐는 듯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알모어랑 보기가 좋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소리였지만, 엘제이에게 면박을 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찌푸린 미간을 힘겹게 풀어냈다.
“날씨가 순식간에 더워지네요.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면, 또 봄이 오겠죠. 계절은 계속
돌아오니까요. 다음 봄에도, 그 다음 봄에도, 제 옆에 있어줄래요?”
“내년 봄에는,”
“언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목소리와 단어였다. 다정하게 풀렸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제프는 이를
꽉 깨물며 끔찍한 여자를 휙 노려봤다.
아제프 란델에게, 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천적이 있다면 그건 엘리사 티아세였다. 엘제이 모르게 얄밉게 혀를 내민
여자가 엘제이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헤실거렸다.
달콤하게 속삭이려던 순간은 방해꾼의 훼방에 막혀 날아가 버렸다. 아제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음속으로
엘리사를 수백 번 난도질해서 죽여 버렸다.
엘제이는 언니, 언니, 부르며 애교를 떠는 동생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엘리사가 그저 귀엽고
예뻤다.
“황자님, 잘 주무셨어요?”
“아얏!”
엘리사는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렸다. 능청스럽게 주제를 돌리고 화려한 마차를 살피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른쪽에는 사랑하는 알체스테를, 왼쪽에는 사랑하는 엘제이를 끼고 두 사람 사이에서 향락을 즐기려던 엘리사의
계획이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가 뭐 저런 야만인이 있냐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엘리사를 흘겼다. 말이 가엽기는커녕 그들에게 쥐꼬리만
한 동정도 베푼 적 없는 아제프가 할 말은 아니었다.
엘리사는 엘제이의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외쳤다가 멈칫했다. 엘제이도 좋았지만, 알체스테도 좋았다. 엘리사는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서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엘리사의 얼굴이 엘제이 쪽으로 휙 향했다가 알체스테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의 팔
하나씩을 차지한 엘리사의 얼굴이 울상으로 물들었다.
“히잉. 우에에엥.”
엘리사는 뒤늦게 애처로운 척 몸을 떨며 우는 척했다. 소리만 시끄럽고, 눈물은 찔끔도 안 나왔지만, 알체스테의
품에 갇혀 얼굴이 보이지 않는 터라 엘제이는 당황했다.
알모어는 소리 없이 발을 굴리며 고통을 삭였다. 얼마나 아픈지 신음이 아니라, 침이 먼저 나왔다. 입을 벌리고
고통과 싸우던 알모어는 더 큰 한 방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왜!”
엘리사가 알체스테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작은 맹수처럼 캬르릉거리는 엘리사에게 기가
눌린 알모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수도에 도착해야 하니까요? 노숙할 수는 없잖아요.”
알체스테는 매서운 눈으로 몸을 찢어놓을 듯 쏘아보는 아제프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리 말했다. 토닥토닥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행동에 엘리사의 눈에 하트가 뿅뿅 터졌다.
엘리사는 알체스테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아제프는 이제야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씩 웃었다. 그는 달콤한
딸기 향이 나는 음료를 엘제이에게 먹여주며 더없이 후련하게 웃었다.
울음기 없는 동생의 얼굴에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엘제이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6 화
96
아제프는 여유롭게 웃으며 알모어를 탓했다. 미리 준비된 거짓말이 매끄럽게 흐르자 엘제이는 눈을 깜빡이면서도
넘어갔다.
아제프는 씰룩쌜룩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눈을 순하게 뜬 남자는 꼬리 흔드는 개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럼요. 늘 옆에 앉았잖아요.”
마차는 곧 출발했다.
이 마차에는 진동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장치가 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흔들릴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살짝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제프는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엘제이를 예쁘다는 듯 바라봤다. 엘리사를 퇴치하고 나니 여행의 시작은 꽤
순조로웠다.
“…….”
엘제이는 아제프가 저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길 바랐다. 아제프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라면,
엘제이에겐 분명 큰 상처가 될 터였다.
“음……. 아제프가 저를 어려워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어요. 부채감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저는 슬플 거예요.”
“이건 부채감이 아니라, 제가 엘제이를 좋아하니까 나오는 행동이에요.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니까 매사에
신중해지는걸요.”
아제프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녹안이 뱅그르르 한 바퀴 회전했다. 물론 그의 배려는 엘제이도 좋았다. 다만,
저 신중해진 행동 때문에 안 좋은 점도 생겼다.
엘제이는 이걸 말해도 될까 망설이며 주변을 살폈다. 마차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고, 주위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을 때가 아니면, 용기가 치솟지 않았다. 엘제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제프는 손끝을 파르르 떠는 엘제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엘제이 관찰일지에 따르면 엘제이는 부끄러울 때,
손끝을 살짝 굽히고 경련하듯 파르르 떠는 버릇이 있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반대쪽 손이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사르르 넘겼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흘려보내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이 무척 다정했다.
“……네.”
엘제이는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 손가락을 모으고 시선을 내리는 것도 그녀가 부끄러울
때 보이는 행동 중 하나였다.
아제프 나름대로 허락을 구하려 한 말이었지만, 엘제이는 과부하가 걸린 사람마냥 어버버 했다.
마차 안이라고는 해도 완전한 실내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바로 뒤를 따라오는 마차에 그녀의 동생이 있기도 했고,
밖이라는 인식이 강할 테니 엘제이의 수줍음 수치가 높아진 상태일 터였다.
“아!”
“선물이에요.”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자질 쓰는 거 싫어하시면서…….’
딱, 이 순간까지만.
“근데 아기토끼는 왜 세 마리예요? 엄마 아빠가 바쁘겠다.”
넷으로 늘어난 엘제이들에게 파묻혀 살 생각 때문에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제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
여름이 차츰 다가오고 있어서 토끼들은 더 빠르게 녹아갔다. 아제프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꽃잎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각된 얼음꽃을 건넨다면 엘제이는 좋아할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저게 다 녹으면
꽃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토끼, 죽어요?”
“안 녹게 해주실 수 있어요?”
괜히 유치한 이유로 엘제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제프는 작은
얼음상자를 만들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옮겨줬다.
“이거 계속 유지되는 건가요?”
“귀찮지, 않아요?”
“그럼요.”
아제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관할 줄 알았으면, 더 공들여 만들어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에게 언제나 최고의 것만 주고 싶은 남자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파란색 빛가루가 날릴 때마다 토끼집이
생기고, 하얀 당근이 생기고, 귀여운 눈밭이 생겼다.
아제프의 무릎에 놓인 상자가 빠르게 떨어졌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뭉개진 눈토끼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엘제이는 귀가 떨어진 토끼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제프, 왜, 꺄아!”
콰아앙! 콰직-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7 화
97
마차는 거대한 불덩이에 부딪혀 순식간에 아스러졌다. 불똥을 머금은 나무토막이 이곳저곳으로 거칠게 튀었다.
콰앙!
마지막까지 마차를 지탱하던 중추가 마침내 부서지며 거친 소리를 냈다. 이글이글 불타는 소리와 말들의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히이잉!
갈기에 불이 붙은 말이 날뛰고, 숲에도 불이 붙었다. 녹색이 드리운 아름다운 숲에는 시뻘건 화마가 번졌다.
불과 마차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이 여럿,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비수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 모든 게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게, 뭐야?’
정신이 하나도 없는 혼잡스러운 상황이었다. 엘제이가 미처 어떤 반응도 보이기 전에, 그녀의 시야로 불덩이가
들어왔다. 점만큼 조그맣던 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엘제이의 코앞에 당도했다.
“굳이 볼 것 없어.”
쩌저적-
공기 중의 수증기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차가운 손바닥 아래로 얼어붙는 결정이 얼핏 보였다. 공기를 타고 빠르게
미끄러져 오른 마나는 금세 새파란 얼음벽을 만들었다.
쾅!
챙! 챙! 채앵!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만나 내뿜는 희뿌연 공기가 시야를 가렸다. 얼핏, 전복된 마차 두 대와 쓰러진
사람들을 봤는데, 지금은 소리가 무성할 뿐 보이진 않았다.
엘제이는 화가 난 듯한 아제프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주위는 여전히 소란스러운데, 어쩐 일인지 그 이후의
공격은 이쪽으로 쏟아지지 않았다.
“아제프.”
아제프가 잇새를 꽉꽉 눌러 소리를 짓씹었다. 아제프의 검이 거대한 얼음벽을 횡으로 길게 베었다. 푸른 검격이
얼음을 뚫고 날아갔다. 새파랗게 몰아친 돌풍이 시야를 가린 수증기를 훔쳤다.
속이 울렁거렸다. 엘제이는 추지게 젖는 입가를 수습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쓰러진 남자의 종아리가 얼핏 보였다.
“주술사?”
엘제이가 막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무렵, 흑색 무리가 몰려왔다. 코끝까지 내려오는 로브를 쓴 온통 시꺼먼
남자들은 일렬로 서서 아제프의 앞길을 막았다.
아제프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며 엘제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엘제이의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코끝이
파묻히도록 엘제이를 꽉 끌어안은 아제프는 한 팔로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아!”
“끄륵, 끄읍!”
비명을 지르는 입속으로 투명한 얼음꽃이 피었다. 입안을 가득 메운 얼음의 날카로운 꽃잎이 뇌를 우지끈 꿰뚫어
터트렸다.
아제프는 이 순간, 엘제이의 귀를 막아줄 수 없음이 가장 슬펐다.
아제프의 자질은 사람을 죽이는 순간, 처음으로 발현됐다. 처음부터 폭력으로 점철된 능력이었다. 늘 그렇듯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인데도, 아제프는 괜히 올망졸망 눈을 흐리던 것들이 생각났다.
“으아아악!”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얼음이 생살을 꿰뚫었다. 미처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자도 있었지만, 불행히 고통스럽게 죽는 자도 있었다.
고통에 버둥거리는 절규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소름 끼치는 비명에 엘제이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콰아앙!
빛에 대응하듯 곧바로 새빨간 불꽃이 번졌다. 너무 새빨개서 얼핏 까맣게 보이기도 했다. 어두운 불꽃은 꽤
강력한 한 방을 안기고 사라졌다.
“리사!”
아제프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는 엘제이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엘제이의 얼굴이 도로 아제프의 가슴에 꾹
눌렸다.
아무래도 알체스테 쪽에서 계속 뭔가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데,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 수가 많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치면 비명을 지르고, 치명상을 입으면 죽었다. 꼭 사람인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제프의 혼잣말에 엘제이도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너무 흐려져서 다른 자질 보유자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그들을 공격한 이는 염(炎)계열 능력자 같았다.
아제프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엘제이는 끝도 없이 몰려오는 비명에 한숨을 삼켰다. 아제프는 천천히 나아가고
있지만, 시간 끌기가 계속되면 그도 지칠 터였다.
“윽!”
눈앞으로 핏물이 번졌다. 엘제이는 지척에서 터지는 사람의 머리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둘러보고 싶은데,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으아아아! 후작님!”
익숙한 목소리에 엘제이가 눈을 번쩍 떴다. 알모어가 아제프를 애타게 부르며 꽁지 빠져라 뛰어오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모어의 뒤에는 새까만 남자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달려 있었다. 험악한 기세로 알모어를
쫓는 이들과 죽어라 달리는 알모어 사이의 긴장감이 폐부를 조였다.
“세상에, 집사님!”
“알모어, 뭐 하는 거야?”
애타는 엘제이와는 다르게 아제프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감상했다. 잡힐 듯 말 듯 치열한 달리기가 나름 볼만했다.
“후작님!”
“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8 화
98
싸늘한 바람과 함께 아제프의 검격이 날아갔다. 알모어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얼음칼날을 보고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그의 주인은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끄으읍! 키에에엑!”
핏물이 터진 입이 날카롭게 벌어지며 괴성을 토해냈다. 얼음에 다리가 묶여서도 알모어를 향해 내뻗는 손은
집착이 가득했다. 아제프는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저거…….’
‘눈알.’
엘제이는 눈알이라는 단어에만 반응을 보였다. 저게 중요한 단서인 듯했다. 가만 보면, 저 좀비 같은 남자들도
계속 알모어의 손바닥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제프는 태평하게 알모어를 관찰했다. 어쩐 일인지 알모어가 나타난 이후에는 아무도 아제프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알모어에게만 쏠려 있었다. 아제프는 알모어의 등 위로 검을 휘둘러 새까만 것들을 적당히
쳐내며 관찰했다.
엘제이도 그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베어내고 죽여도 끝도 없이 쌓이던 주술사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엘제이는 바닥에 널린 시체들을 보며 입을 가렸다.
“보지 말라니까요.”
불쌍한 알모어는 그래도 주인이라고 아제프를 걱정하는 듯했다. 그는 아제프에게 완전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몸을
틀어 주위를 뱅뱅 돌았다.
‘집사님, 불쌍해.’
아제프는 할 수 없이 짧게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눈치가 빠른 남자는 사실, 엘제이보다 먼저 무엇이 문제인지를 눈치챘다. 다만, 알모어가 하는 짓이 우스워
구경하듯 바라봤을 뿐이었다. 아제프에게 알모어의 몸부림은 가벼운 운동 정도로 보였다.
“알모어, 그거 버려라.”
“네?”
“손에 든 거 버리라고.”
“네?”
알모어의 손바닥을 향해 파란 검격이 휘몰아쳤다. 알모어는 멍하니 아제프의 검격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손에 쥔
걸 놓쳤다.
“으아! 제 손 잘린다고요!”
“깨부숴라.”
간단한 명령이 떨어지자 푸른 마나가 격동하며 아제프의 손에서 떨어진 눈알을 쥐어 터트렸다. 콰직- 눈알 안에
투명한 얼음꽃이 피었다.
그대로 눈알을 감싼 얼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투명한 얼음 아래로 까만 연기가 그득히 몰려들었다.
“끄아아아아!”
“윽!”
아제프가 엘제이의 머리를 도닥이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예쁜 것만 보여주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기를 바랐는데,
늘 이 모양인 게 싫었다.
‘차라리 기절시킬까?’
저들끼리 뒤엉켜 죽어가는 모습이 꽤 볼만했지만, 주변에 새까만 연기가 차올랐다. 한둘이 아니라서 연기를 막는
아제프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제프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반으로 줄어든 것도 두 눈이 매개이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저번에도 묘하게 걸리던 주술사의 눈알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자질보다는 마물 쪽인 정답인 것 같네요. 주술사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 존재니, 자질로 만들어 낼
수는 없겠죠.”
“다르지 않아요. 저는 제이가 있는 덕분에 다치고 싶지 않아요. 훌륭한 방패가 되고 있으니 뿌듯해 해도
좋아요.”
‘고마워요.’
아제프는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채찍을 휙 피하며 움직였다. 지면을 밟고 대충 뛰어가는 것 같은데 속도가 무척
빨랐다.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숨을 헥헥 고르던 알모어는 울상을 지으며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후작님!”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저쪽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알모어는 넘어진 김에 우연히 구르는 눈알을 발견했고, 저들이 그쪽으로 손을 뻗으니 일단 들고 뛴 것뿐이었다.
우연이라도 그의 활약 덕에 주술사가 반으로 줄어든 터라 엘제이는 고개를 내밀며 알모어를 칭찬했다.
“집사님, 아주 멋졌어요!”
“그것참, 쑥스럽네요.”
알모어는 칭찬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는 상황도 잊고 헤실헤실 웃으며 손으로 코밑을 닦았다. 아제프는 빨간
핏물 아래 녹아든 까만 것을 보며 남 일 보듯 비웃었다.
절대, 알모어가 엘제이에게 칭찬받아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아제프는 자신이 그 정도로 쪼잔하진 않다고
생각하며 알모어를 외면했다.
“알모어, 손 내놔라.”
“하아…….”
자유자재로 자질을 다룰 수 없는 엘제이는 단순히,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던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아제프의 착각으로 살아난 알모어는 한숨을 쉬며 하얗게 얼어붙은 손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집사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이곳까지 함께 온 일행이 몇십 명인데, 다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모어가 살아남은 건, 천운이었다.
알체스테를 노리는 상황을 볼 때, 저 사람은 루드비히를 따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루드비히의 신중하지 못한
성격을 볼 때, 아직 저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과시욕이 많은 루드비히 황자의 사람이라면 황자의 성격상 벌써 밝혀지고도 남았을 텐데, 확실히 이상하네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것 같고.”
아제프는 비겁하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꽥꽥거리는 엘리사의 음성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질이라는
건 나이가 꽤 들어서야 발현되는 거니, 어쩌면 최근에 발현한 걸지도 몰랐다.
아제프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비수 하나가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고개를 젖혔지만, 조금 늦었는지 아제프의
뺨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아제프, 괜찮아요?”
아제프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 툭 불거졌다. 쩌저적, 푸르게 번지는 마나의 물결이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온통 파랗게 물든 공기가 윙윙- 신음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9 화
99
아제프의 시선이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맑은 녹안에 핏물이 번지는 게 싫었다. 그녀의 걱정이 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아제프, 손이 얼었어요!”
“아제프.”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서늘한 얼굴에는 냉기가 고여
있었다. 엘제이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파사삭, 무너져 내렸다.
“추워요?”
아제프의 입가로 씁쓸한 그늘이 번졌다. 그는 엘제이를 따뜻하게 해줄 수도 없는 제 몸이 싫었다. 악마가 좋아할
고독과 추위가 몰려오는 듯했다.
뼛속까지 얼릴 것 같은 시린 바람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검끝부터 천천히 얼어붙어 아제프의 손까지 집어삼킨
마나가 거센 울음을 내질렀다.
치링- 치링- 아제프를 사랑한 마나가 그의 의지에 답했다. 허공에 떠오른 얼음들이 서로 맞부딪히며 크기를
키워나갔다. 얼음들은 중력을 거슬러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햇살을 받은 얼음들이 날카롭게 빛났다. 창을 아래로 향한 채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꽃들의 가시가 점점 더
예리해졌다.
쐐애액-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컸다. 높이 솟았던 얼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하늘에서
얼음화살이 쏟아져 꽂히는 것 같았다.
“보지 마요.”
콰아앙-
새하얀 얼음은,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기 전에 이미 그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콰지직- 머리를 깨부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깜깜하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눈꺼풀을 시리게 찌르는 차가움만이 공존했다. 엘제이의 떨리는 손이 올라와
아제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엘제이는 형편없이 떨리는 손을 바로하려고 애썼다.
“아제프.”
“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단단히 가린 손 너머로 울부짖는 인간의 비명과 살과 뼈가 꺾여나가는 참혹의 소리가
귀를 찔렀다.
“우웨에엑.”
“다 안다면서 그런 걱정을…….”
쓸데없는 걱정. 아제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 같은 괴물이 저런 걸 담아둘 리 없었다. 아제프는 무딘 얼굴로
피 흐르는 광경을 바라봤다.
터지고 부서진 신체 일부를 보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얼굴은 나는 괜찮다- 그리 주장하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조금씩 주물렀다. 단단한 손이 차갑게 굳으니 얼음을 만지는 것 같았다.
“당신만이, 제 걱정이에요.”
아제프는 뭐라고 협박을 덧붙이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는 좀 더 험악한 방법을 썼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엘제이의 머리가 갸웃, 움직였다.
“네?”
“네? 뭐를요?”
“……토끼.”
바닥이 쩌저적- 얼음으로 굳어졌다. 쩌적- 쩌적- 얼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수면 위를
찰랑거리는 파도처럼 제멋대로 얼어버린 얼음에 아제프가 혀를 찼다.
아제프는 그제야 엘제이를 조심스럽게 내려줬다. 자질을 무리해서 이끌어낸 탓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마치
저체온증 환자처럼 느리게 뛰는 심장은 차가운 냉기에 몰려 괴로워했다.
아제프는 알싸한 가슴을 티 내지 않으며 엘제이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그녀의 머리에 걸렸던 눈이 스르르
떨어졌다.
“알모어.”
“……네.”
핏기가 싹 다 빠져나간 얼굴이 허옇게 둥둥 떠올랐다. 아제프는 비틀비틀 걸어오는 알모어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었다.
“벗어라.”
“네?”
“옷, 벗으라고.”
“크읍!”
“할 수 없지.”
약간의 한숨과 함께 제 옷도 벗은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제 겉옷을 입히고 알모어의 것으로 엘제이를 둥둥 휘감았다.
‘이 사람, 추운 걸 싫어하는데…….’
아제프는 엘제이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녀의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는 달콤함이 번지는 눈을
하고 뒤에서는 덜덜 떠는 알모어의 발목을 걷어찼다.
혀를 길게 빼물고 고통을 참던 알모어가 반듯하게 서려고 노력하며 외쳤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제프는 보란 듯이 웃었다.
알모어를 향한 아제프의 거친 발길질을 보지 못한 엘제이는 알모어를 걱정했다. 아제프 앞에서 알모어를 걱정하는
게 알모어에게는 더 안 좋은 일이었지만, 엘제이는 그걸 몰랐다.
엘리사의 걱정에 엘제이의 시선은 쉽게 그쪽으로 틀어졌다. 싸우는 동안, 알체스테는 꽤 이동한 것 같았다.
엘제이는 빛줄기가 휘몰아치는 평야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확실히 기세를 꺾었는지, 불줄기는 더는 높게 솟아오르지 못했다. 아제프는 아까와는 확연하게 다른 위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리사…….”
***
“윽!”
희미한 기억 속,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 남자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드디어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알체스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센 전투로 달구어진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황자님…….”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알체스테를 불렀다. 무뚝뚝하게 불거진 턱과는 다르게 그의 눈에서는 희미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0 화
100
“그렇게 보지 마!”
입을 가린 손 틈으로 주르륵 흘러나온 피는 선명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잿더미를 머금은 듯 까맣기만
한 혈흔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질은 마나를 지배하는 힘이었다. 마나 스스로 시전자를 사랑해 따르는 것이지, 억압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저런 방법은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루드비히의 내면이었다. 질척거리는 까만 점액이 바글바글 눌어붙은 영혼이 귀곡성을
내질렀다.
악마는 먼저 거래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미 타락한 인간이 악마를 부르는 것이지, 악마가 인간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었다.
루드비히의 얼굴에는 새까만 반점이 그어져 있었다. 감히 황족의 증표라는 빛나는 금안을 가지고도 악마와 사통한
것이다.
악마라는 존재는 원래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얼굴로 인간을 꾀지만, 결국 원하는 대가 하나 제대로
이뤄주지 않는 잔인한 족속이었다.
루드비히가 악을 쓰자 새빨갛게 일렁이던 마나가 까맣게 물들었다. 피부를 기어간 괴기스러운 문양이 얼굴 반쪽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알체스테는 광분하며 날뛰는 루드비히를 멍하니 바라봤다. 추악하게 망가진 이복동생을 보는 눈이 붉게 젖었다.
엘리사는 정신을 못 차리는 알체스테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주의를 줬다. 다소 험악한 방식이었지만, 효과는
빨랐다.
“멸하라.”
가벼운 영창과 함께 그어진 검격이 투명하게 번져 하늘에서 터졌다. 아름답게 내려오는 빛가루가 까만 그을음을
삼켰다.
부황은 괴물이었다. 루드비히는 그 괴물의 밑에서 이십 년을 홀로 버텼다. 언젠가 괴물이 남기고 떠날 겉가죽이
너무 갖고 싶어서 아득바득 버텨냈는데, 순식간에 버림받았다.
“추하다!”
모든 건 알체스테 탓이었다. 저만 깨끗하다는 듯 고결한 표정에 토악질이 났다. 혐오스럽고 끔찍해서 온몸에
벌레가 바글바글 기는 것 같았다.
“너 때문에 죽은 이가 몇인 줄은 아나?”
“…….”
알체스테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감지에 걸리는 기척은 단 여섯 명이었다. 거의 백에 가까운 무리로
출발했는데, 다 죽어버렸다.
알체스테는 눈을 힘주어 치떴다. 날카로운 눈매 끝이 연약하게 떨렸다. 알체스테는 따갑다고 비명 지르는 눈을,
감지 않고 버텨냈다.
“혼자는, 안 죽어!”
“리사!”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엘리사를 불렀다. 엘리사의 눈에 짧은 단검이 들어왔다. 엘리사의 눈을 찌를 듯 다가온
흉기에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뿌드득-
“끄윽! 끄아아아!”
루드비히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알체스테는 벌레처럼 기는 동생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잇새를 비집고 거친 음색이 터졌다.
늘 무표정한 알체스테의 얼굴에서 보기 드문 분노였다. 어느새 알체스테의 품에서 내려온 엘리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우리 황자님……. 울지도 못하고.’
엘리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뜬 그를 대신해 그녀가 울었다. 무딘 금안에서 흐려졌던
감정은 반려인 엘리사에게는 너무 생생했다.
“아제프?”
알체스테 곁으로 내려온 아제프는 엘제이의 몸을 휘감은 옷 하나를 벗겨 엘제이의 얼굴을 가렸다.
“아제프! 이건 내 몫이었다!”
엘리사는 묘한 표정으로 아제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꺼림칙한 눈으로 아제프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가 걱정할 사람은 알체스테지 아제프는
아니었다.
“황자님, 괜찮으세,”
끼릭-
엘리사의 말은 알체스테의 검 소리에 끊겼다. 동시에 앞을 바라본 두 남자가 자매를 뒤로 물리며 검을 뽑았다.
“설마, 또?”
엘제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다섯 명 중 전력이라고는 아제프와 알체스테 뿐이었는데, 세 명의
짐을 달고 싸우기에는 그들도 너무 지쳤다.
“온다.”
“이미, 알거든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1 화
101
“황자님!”
“휴이, 안젤라.”
나지막한 호명에 엘제이가 아제프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느새 코앞에 당도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알체스테의 발아래 부복했다.
은발의 쌍둥이, 시스라인 남매는 알체스테의 소꿉친구였다. 알체스테가 워낙 무감각한 성격이라 친구라고 대놓고
칭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알체스테의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예.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여긴 무슨 일이지?”
“루드비히를 따라왔습니다.”
“휴이!”
안젤라는 경칭도 없이 황자를 칭하는 동생을 작게 나무랐다. 누이의 기겁에도 휴이는 큰 반응 없이 알체스테만
바라봤다. 휴이는 정이 많고 올곧은 성격이었지만, 다혈질이었다.
알체스테와 시스라인 남매는 알체스테가 변방으로 떠난 이후에도 계속 교류를 이어왔다. 황제와 루드비히의 눈
밖에 나는 꼴이었지만, 남매는 잊지 않고 알체스테를 찾았다.
아제프는 꽝꽝 얼어 있는 루드비히의 머리를 가리키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스라인 남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까만 로브에 덮여 있었기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람의 머리와 몸체로 보이는 것이 절단된 모습을 보고 그것이 시체임을 짐작했다. 아제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안젤라가 얼굴을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악! 누나!”
옆에서 악악대는 동생 따위에게는 눈길도 안 준 안젤라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루드비히 전하의 궁에서 주술사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신관도 그곳에 사특한 기운이 흐른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까지 루드비히의 잘못을 묵묵히 넘어가는 태도를 보였다. 호의를 넘어 싸고도는 수준이라,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루드비히를 향한 황제의 총애를 의심치 않았다.
“설명하자면 좀 길지만, 시작은 루드비히 전하의 시종 하나가 실종된 일이었습니다. 사라진 전하의 시종이
주술사가 되어 발견됐고, 그 흔적을 따라 올라가니 루드비히 전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는 지금 주술사에 대한 공포와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제프는 보고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 수도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마땅히 누군가 그에게 연락을 취했을 텐데
이동하느라 연락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산한 예감이 들었다. 아제프는 안젤라의 묘한 말투를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그는 엘제이의 손을 꼭 붙들며
입술을 비틀었다.
알체스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법이 지켈리온과 완전히 같았다. 문장 보유자는 나라에서 보호하는 게 의무였다.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이들의 상징성은 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신이 내려준 문장이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주술사들이 범인으로 몰리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신을
배반하고 힘을 탐한 추악한 이들이라는 게 베아르시 제국민의 생각일 테니까.
문장 보유자는 대부분 귀족이었다. 평민이 문장을 가지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귀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무래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귀족 家 여러 곳에서 한 번에 소란이 일어났다면 소문이 퍼질 만도
했다.
“네. 문장 보유자를 죽인 이에 대한 정체를 밝혀내라는 압박이 커졌고, 황제 폐하께서는 루드비히 전하의 재판을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황제는 루드비히를 버렸다.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긴
했으나, 갑작스러운 감이 있었다.
“네. 저도 그것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재판은 빠르게 준비되었고 조만간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루드비히 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저희는 그분을 추격하는 일을 맡아, 이곳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네?”
“네.”
그사이, 아제프의 품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온 엘제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엘제이는 안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뒤돌아섰다. 다시, 아제프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
일행은 일단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로 했다. 빨리 수도로 가야 노숙하지 않을 거라고 변명한
알모어의 말과는 다르게, 수도로 가는 길에 마을 한두 곳 정도는 있었다.
“네. 다행이에요.”
엘제이는 복잡한 속내를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눈치 빠른 남자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무룩한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접은 아제프가 엘제이를 살살 떠봤다.
“이상하죠. 전에는 제이의 걱정이 마냥 기쁘기만 했는데, 지금은 초조하고 서글퍼. 제가 그렇게 의지가 안
되나요?”
아제프는 진심으로 속상해 했다. 그의 마음을 얼핏 느낀 엘제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런, 그런 게 아니에요!”
아제프는 절레절레 빠르게 젖는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짚으며 멈췄다. 말 위에서 이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엘제이는 오직 아제프밖에 보지 않았다.
간질거리는 숨결이 이마에서 흩어졌다. 냉기가 묻어나는 숨이라 그런지,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럴게요.”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남자의 단단한 손에 정리되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를 손으로 길게 쓸어 넘겼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2 화
102
아제프의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다. 그들 주변을 맴돌며 호위하던 기사들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물러났다.
“크흠.”
다그닥다그닥,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가자 고개 숙인 엘제이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몸을 옆으로 튼
탓에 아제프의 옷깃만 보였는데, 그는 뭘 하고 있는지 옷깃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기사들이 곁에서 떨어지자 아제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제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힌 엘제이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얌전히?”
평소라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캬르릉거렸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리사, 너…….”
어쨌거나 사람이 죽었고, 시체를 운반하고 있었다. 가는 길의 분위기가 음침한 건 당연했다. 엘리사는 음울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안젤라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알체스테를 힐끔 바라봤다. 곤란하다는 듯 푹, 내쉬는 한숨은 작위적이었다.
“그럼요. 영광입니다.”
안젤라와 엘리사는 죽이 척척 맞았다. 알체스테 하나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녀들 때문에,
알체스테는 정작 묻고 싶은 질문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경박하군.’
아제프가 엘제이 몰래 입가를 찌그러트렸다. 그의 눈에는 엘리사가 활달하게 웃는 모습이 즐겁다 못해 경박해
보였다.
엘리사는 눈치가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음침한 이 공간에서 저렇게 눈치 없이 웃는다는 건 알체스테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평소보다 자질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건 분명했고, 어쨌든 이복동생이 죽었으니 그의 마음도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리사. 나는 일을,”
“…….”
아제프는 아제프 나름대로 엘리사를 인정했다. 그는 좋든 싫든 알체스테 진영에 합류해야 했고, 엘리사는 엘리사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아제프의 머릿속에서 엘리사에 대한 평가가 상향 조정됐다. 밉살스러운 여자에서 그래도 도움이 될 구석은 있는
밉살스러운 여자로.
아제프는 엘리사의 관심이 알체스테에게 완전히 쏠린 게 만족스러웠다.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여잔데,
알체스테의 상태가 안 좋으니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동생에 대해 변명해주려던 언니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었다. 엘제이는 그저 외면하듯 엘리사
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꺄하하하, 웃는 소리가 귓가에 질척질척 달라붙었지만 엘제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엘리사의 목소리를
쳐냈다.
쪽.
촉촉한 입술이 아제프의 입술을 내리누르는 감각이 살짝 스쳤다. 전율이 일듯 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이 말캉하게
뭉개졌다.
살짝 붙었다가 떨어진 입술은 꼬리를 말고 금세 도망쳤다. 고개를 푹 숙인 엘제이가 아제프의 가슴팍을 머리로 콩,
때렸다.
“이걸로, 참아줘요.”
엘제이를 바싹 끌어안은 아제프가 모르는 척 엘제이의 귓가에 바람을 후- 불어넣었다. 곧바로 엘제이의 등이
움찔거리며 그녀의 귓가가 더 붉어졌다. 눈앞에서 귀가 붉어지는 걸 감상한 아제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피곤, 해요?”
엘제이는 역시, 아제프의 약한 소리에 금세 흐물흐물 녹았다.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은 엘제이가 작은 손으로
그의 손바닥을 야무지게 눌렀다.
꾹꾹 힘주어 누르는 손길이 제법 시원해서 아제프도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며 웃었다.
샐샐 혓바닥을 내밀던 하얀 강아지가 투견처럼 눈을 빛내는 모습에 아제프가 참지 못하고 엘제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원한다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다.
“그럴 리가 있나요.”
엘제이는 힐끔, 아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전에 딸기를 먹다가 만약이라는 저 한마디에 속아 넘어가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아제프의 내면 깊숙이 쌓였던 꺼림칙함이 몰려갔다. 유쾌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즐거움을 대롱대롱 매달았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이자, 불퉁하게 튀어나왔던 입술이 쏙 사라졌다. 속눈썹을 가볍게 팔랑거린
엘제이가 몸을 끌어안은 그의 손을 꼭 붙들며 살짝 웃었다.
“저도, 좋아해요.”
“겨우 이런 걸로요?”
“네.”
“뭐, 알겠어요.”
단호한 대답에 아제프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와의 시간을 좀 뺏기게 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이잉-
그때, 하늘에서 새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람을 부르는 새의 울음소리는 훈련받은 기사라면 꽤 익숙한
것이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포함한 기사들의 목덜미가 일제히 하늘로 꺾였다.
“흠?”
새의 뒷다리에 동여맨 쪽지를 확인한 아제프는 의아한 얼굴로 팔을 길게 뻗었다. 낙하지점을 확인한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왔다. 아제프는 새의 부리를 익숙하게 긁어주며 쪽지를 빼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3 화
103
새하얀 종이를 빽빽하게 채운 작은 글자는 아이젠의 필체였다. 아제프는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글씨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답신은, 필요 없는 건가?’
답신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서 고민하는데 전령조는 답신은 됐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날카로운 발톱에 힘이
콱, 들어가고 활짝 펼쳐진 날개가 다시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파사삭-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의 손에서 구겨진 종이에 살얼음이 얼었다. 아제프는 둥글게 얼어붙은
종이를 장난스럽게 돌리다가 엘제이에게 내밀었다.
무료한 여행길 속 색다른 상황에 다들 모르는 척 엘제이 쪽으로 흘긋 시선을 보냈다. 많은 사람의 주목에
엘제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팡!
‘차가워.’
“그럼요. 약속이에요.”
아제프는 한 점의 그늘도 없이 해사하게 웃었다. 당당히 끄덕이는 고개에 엘제이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못한 듯,
다시 앞을 바라봤다.
잠깐의 해프닝이 지나가자, 마을을 향해 달리는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제프는 빠르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눈을 나른하게 늘어트렸다.
아제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서신의 내용이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랐고, 그것이 그리 중요한 서신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엘제이의 반응에 주된 이유가 전환되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장난을 건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실제로
아제프가 종이를 장난스럽게 다룬 이후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졌다.
아제프는 여기서 할 말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앞만을 바라봤다. 잠시 그를 주목하던 시선이 바람처럼 흐트러져
사라졌다.
아제프는 죽은 루드비히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문장 보유자 따위가 몇이나 더 죽어 나가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쪽지를 읽은 뒤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얼핏 보면 황제의 일상을 서술한 것 같지만, 묘하게 황제의 행동이 신경을 거슬렀다. 서신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 황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수도의 문장 보유자들이, 문장을 뽑히게 될 거라는 것을.
아제프를 돌아본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살짝 붙잡으며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아제프도 엘제이에게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겠네요.”
잘했다는 듯 부드럽게 머리를 도닥이는 손길이 편안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엘제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엘제이라고 해서 발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저, 놀림 받은 거죠?”
“설마요?”
머리가 데구루루 구르며 또 조금 늦게 판단을 내렸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가슴을 손으로 콩콩 때렸다.
“못됐어, 정말!”
“아하하! 아니라니까요.”
아제프가 웃음을 터트리며 엘제이를 꽉 끌어안았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도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철렁한 엘제이가 또 아제프를 타박했다.
***
방을 잡고 함께 올라온 네 사람은 양쪽으로 갈린 복도에서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나란히 비슷한 디자인의 열쇠를 들고서 흔한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아제프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간 것도 그쯤이었다. 아제프는 열쇠로 저 밉살스러운 입술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소 폭력적인 충동이 일었지만, 힘겹게 자제한 아제프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안
데려가고 뭐 하냐는 공격적인 눈빛에도, 곰처럼 둔한 사내는 한 번에 알아먹질 못했다.
“왜 그렇게 보지?”
“…….”
다행히 아제프의 행동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알체스테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사가 살금살금 언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엘리사는 아쉬운 듯 엘제이를 흘긋거리면서도 알체스테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완벽하잖아?”
“네? 뭐가 완벽해요?”
아제프의 혼잣말에 엘제이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봤다. 엘제이가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지만, 의미심장한
웃음을 감춘 아제프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이만 들어가요.”
아제프의 손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는 열쇠가 무척 경쾌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아제프를 졸졸 따라간 엘제이는
하품을 하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
‘아제프도, 편히 쉴 수 있겠다.’
뒤를 돌아보니 페로몬이 줄줄 흐르는 것 같은 아제프가 서 있었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남자가 생긋, 웃으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것보다, 둘만 남았네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4 화
104
연달아 세 번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손에 턱턱 걸리는 느낌에 아제프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제이.”
벌을 꾀는 꽃처럼 유혹적으로 팔랑거리는 속눈썹에 위험신호가 번뜩, 떠올랐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멍하니
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이?”
아제프는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엘제이를 느꼈다. 해사하게 풀어진 눈매가 또 한 번 곱게 접혔다.
“왜 물러나요?”
순진무구한 척 둥글게 뜬 눈매는 흡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엘제이는 푸른빛을 머금고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말해요.”
“여기서?”
“네.”
위치 선정이 안 좋았던 건지 엘제이의 허벅지가 침대에 덥석 걸렸다. 묘하게 미끄러운 바닥에 딱딱하게 긴장한
엘제이의 몸이 미끄러졌다. 엉겁결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은 엘제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다.
엘제이의 허벅지 옆으로 아제프의 무릎이 천천히 내려왔다. 바짝 다가온 얼굴에 침을 꿀꺽 삼킨 엘제이는 그에게
밀려 천천히 침대 위로 누웠다. 머리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눈이 질끈 감겼다. 달뜬 숨이 색색거리며 흘렀다.
‘죽은 척?’
서운하다는 말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속눈썹이 팔랑, 열렸다. 엘제이는 바로 가까이에 보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확인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제프가, 위험해요!”
아제프의 눈썹이 의아한 듯 위로 솟구쳤다. 이곳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를 위협할 만한 것은 없었다. 굳이 위험한
쪽을 따지자면 굶주린 그의 눈앞에서 죽은 척이나 해대는 엘제이 쪽이 더 위험했다.
“윽!”
엘제이가 짜부라진 신음을 내뱉으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하얀 이빨에 뭉개진 발음이 부정확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채근하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어떻게 할 건지 말해달라고 귓가에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호흡이 팽팽 돌았다. 엘제이는 열기로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저릿한 가슴을 움켜잡았다. 손발 끝이 저절로 곱아들고 뱃속이 뜨거워졌다.
‘해로운, 사람…….’
아제프는 여러 의미로 유해한 사람이었다. 엘제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이불자락을 끌어당겼지만,
어쩐 일인지 잘 올라오지 않았다.
“으으…….”
엘제이는 부끄러웠는지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린 아제프가 엘제이의 뺨 위에
입을 맞췄다. 어린애가 하듯 친애만을 담은 부드러운 감촉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건, 그건…….”
엘제이는 한참 뜸을 들였다. 뭐라고 고민하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는데, 뜨거운 머리는 쉽게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그것 봐. 할 말 없잖아.”
“더워서, 말 안 한 거예요.”
“저도, 그런 짓 안 해요!”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눈이 아이의 것처럼 깨끗했다. 정말 모른다는 듯 뻔뻔한 표정에 엘제이는 숨을 곳을
잃었다.
“…….”
엘제이가 달아오른 얼굴로 눈만 질끈 감자, 아제프는 아쉬워하며 조금 물러났다. 괴롭히지 말아야지, 되뇌는데
자꾸 이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조금 반성하며 혀를 찼다.
담백한 목소리에 엘제이의 눈이 살짝 뜨였다. 그녀는 또 놀림당할까 싶어서 경계하다가, 아제프의 얼굴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연습이요?”
“허락? 뭔데요?”
“그냥, 이런 거?”
아제프는 설명하는 대신 바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가 손바닥을 가볍게 펼치자 손 위에서 몽글몽글 맺힌 마나가
공기 중으로 확 퍼졌다.
엘제이는 별가루처럼 파랗게 허공을 떠도는 마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제프가 암막커튼까지 치고 돌아오니,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다.
파란 마나가 장난치듯 다가와 엘제이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조금 차가운 기운에 엘제이가 손끝을 움직이자
마나는 금세 엘제이의 손끝을 떠나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간질였다.
아제프는 감히, 무생물 주제에 엘제이의 몸을 훑는 마나를 언짢은 얼굴로 바라봤다. 가만히 생각을 이어가던
아제프가 홉뜬 눈으로 마나를 노려봤다.
“예뻐요.”
엘제이가 마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표정을 푼 아제프가 못된 생각은 하지 않은 척,
선하게 웃었다.
“화 안 내니, 다행이에요.”
시원해진 공기를 따라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적당히 솔솔 부는 바람은 뜨겁게 달아오른 귀에 부딪혀 그녀를
식혀주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에 엘제이는 편안하게 웃었다.
“저 정도야 뭐.”
“음……. 그럼, 이렇게 잘까요? 사실, 별들 품에 감싸인 것 같아서 좋아요. 몸에 닿는 느낌도 시원하고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 끝까지 하얀 이불을 덮어주며 토닥였다. 얼굴은 시원한데 몸은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엘제이는 머리카락을 살랑, 간질이는 마나의 장난에 예쁘게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부디, 좋은 꿈만 꾸기를.’
엘제이의 꿈속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아제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의 의지를 느꼈는지 마나가 잔잔한 울음을
토해내며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아제프도, 잘 자요.”
부디, 좋은 꿈 꾸기를.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5 화
105
콩콩.
조그만 손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에도 눈을 번쩍 뜬 아제프는 문을 두드리는 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제프의 얼굴이 오만상으로 일그러졌다.
콩콩.
“언니?”
이번에는 저 빌어먹을 목소리도 함께였다. 아제프는 신경증에 걸릴 것 같았다. 귓가를 웽웽 맴도는 목소리가
짜증스러워 아제프는 몸을 살금살금 일으켰다.
엘제이가 깨어나기 전에, 저 밉살맞은 여자를 돌려보내야 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주며
한숨을 삼켰다.
“우리 언니는요?”
머리가 작은 엘리사는 조그만 문틈 사이로도 제 얼굴을 빼꼼 집어넣었다. 머리만 들어와 좌우로 방 안을 살피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아제프는 이대로 문을 꾹 누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아제프는 치미는 충동을 힘주어 꾹꾹 내리눌렀다.
“문이나 좀 여는 게 어때요?”
“제가 왜요?”
“볼일은 내 쪽이다.”
한숨을 삼키며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알체스테가 끼어들었다. 엘리사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거슬리는데 사람이
둘로 늘어나자 아제프의 눈썹이 높게 치솟았다.
“하아…….”
“그럼 저는 언니랑 이쪽에 있을게요. 여기서 씻고 갈 테니까, 당신도 저 방에서 씻든가 말든가.”
전자는 알체스테에게, 후자는 아제프에게 하는 말이었다. 목소리 톤부터 확 바뀌는 이중성에 아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하!”
엘리사는 어느새 엘제이에게 찰싹 달라붙어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다. 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늠름한 표정을 짓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저 망할 여자…….’
아제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놓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엘리사 대신 알체스테를 추궁하듯 바라봤지만, 저 남자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이 망할 남자.’
“나중에 할 거다.”
“뭐라고요?”
“문틈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이따가 따로 말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공작의 서신이던가?”
“뭐, 그런 셈이죠.”
아제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분명 눈치가 없는 편인데도, 알체스테는 묘하게 사람 심리를 꿰뚫을 때가 있었다.
머쓱해진 아제프는 뒷덜미를 한 번 매만졌다.
“잘했다.”
알체스테가 칭찬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그 나름대로 아이젠을 걱정한 것이다. 부쩍 사람다워진
아제프가 알체스테는 꽤 기꺼웠다.
아제프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알체스테의 귓가를 때렸다. 그만 웃고 정신 좀 차리라는 칼날이 알체스테의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무딘 남자는 그걸 못 느낀 듯했다.
“뭐가 말입니까?”
알체스테는 엘리사를 대하듯 아제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고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였다.
“이야기나 마저 하시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셨지만, 공작님께서는 아마…… 주술사의 배후로 폐하를 의심하는 듯합니다.”
“역시, 그런가?”
어쩌면 황제는 루드비히의 귓가에 그리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알체스테를 죽이면 황위를 잇는 건 루드비히라고.
부친이 형제의 골육상잔을 유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알체스테는 어쩐지 좀 비참해졌다.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미련은 끝이 없는 듯했다.
아제프는 침통한 표정의 알체스테를 흘긋, 바라봤다. 분명 친아들일 텐데, 황제나 아제프의 아버지나 참
비정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마음에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알체스테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황자님도 저도 어느 정도는 생각했던 가설이지요. 서신을 읽을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그의 행동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자의 행동이었습니다.”
“네.”
이유는 모르겠으나, 황제는 악마가 날뛰기를 바라는 듯했다. 혹은, 문장 사냥이 계속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알체스테 역시, 그걸 짐작했다.
“폐하는 악마와 원하는 게 같았고, 자신이 악마와 사통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이목을 끌 누군가가 필요했다.
겸사겸사 그들에게 치명적인 내 능력도 견제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루드비히는, 희생양인
건가?”
어쩌면 처음부터 루드비히를 이렇게 버리려고 데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황제가 총애하는 아들이 주술사가
됐다고 하면 이목이 훨씬 더 쏠릴 테니까.
황제는 주술사가 아니라는 말인데, 어떻게 악마와 교류를 이어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제프는 머리를 붙잡으며 신음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데 짐작도 되지 않았다. 다만, 황제는
여러모로 위험했다. 그가 원하는 게 문장 사냥이라면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제프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았다. 황제에게는 갚아줘야 할 일이 꽤 있었다. 이제, 갚아줄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6 화
106
알체스테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제프 또한 내심 그것이 이상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만,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악마와 손을 잡았을까.
“언제부터?”
아제프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는 16 년 전, 황제의 아이를 뱄다. 황제는 소피아와
그녀의 배 속 태아가 죽기를 원했다.
‘이유는 몰라도 제 새끼를 죽이려 한 걸 보면, 뼛속까지 미쳤던 거지. 혹시, 그때부터 이미…… 타락했던
건가?’
소피아 배 속의 태아는 아제프의 동복동생이자 알체스테의 이복동생이었다. 아제프는 복잡하게 꼬이는 관계를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알체스테는 역시,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글쎄요. 자질은 선천적인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발현하지는 않았더라도 알 방법이 있는지는 또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악마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악마의 유래에 대해서는 무수한 가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지배적인 주장은 악마가 타락한 신이라는 이야기였다.
“악마와의 협력을 위해, 나를 변방으로 내려보냈다. 가능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다만, 왜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
제 아이라서? 그럴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죽였다. 제 아이를.’
아제프가 혀를 콱, 깨물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게도 황제에게는 어린 자식이 없었다. 루드비히와 알체스테를
제외하고도 자식이 더 있었지만, 그들의 나이는 모두 이십대였다.
“우선, 증거를 잡아야 합니다. 황제께서 악마와 사통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야, 우리는 명분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알체스테는 다소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알체스테는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전혀
오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도 정확히 무얼 원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황제에 대한 알체스테의 감정을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건 애증에 가까웠다. 증오만 있었으면 편했겠지만,
그래도 우러러보고 사랑을 갈구하는 심정이 마음 한편에 남아 그를 괴롭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릎 사이로 들어간 그의 두 손은 미동도 안 했다. 아제프는 그 모습을 마땅찮게 바라보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새삼 고민하십니까? 먼저 버림을 받았는데, 지킬 의리가 있습니까? 가만 보면, 황자님은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저라면 안 그럴 겁니다.”
알체스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말은, 저라면 안 그럴 테니 당신도 그러지 말라는 아제프식 조언이었다. 둔한
눈치로도 쉽게 해석되는 아제프의 위로에 알체스테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런가? 미안하군.”
알체스테는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는 농담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고개를 팩
돌리며, 어정쩡한 감정을 털어냈다. 위로는 엘제이의 특기지, 그의 특기는 아니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수도에 흩어져 있는 문장 보유자들도 지켜야 하고, 자매도 지켜야 하지. 둘로 나누는 게 좋겠군.”
“그게 보기에 좋으니까요. 황자님은 지금 덕망을 쌓아야 할 시기입니다. 문장 보유자를 지켜냈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 진영에 이롭지 않겠습니까? 황족이라면 마땅히 백성을 지켜야지요.”
“…….”
아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알체스테를 쭉 훑었다. 자기도 사감 때문에 티아세로 가겠다고 한 주제에 입술은
매끄러웠다. 아제프는 제가 아니라 알체스테가 가야 하는 이유를 백 가지 정도는 더 들 수 있었다.
반박할 준비가 만반인 눈을 보자 알체스테는 싸울 힘을 급격하게 잃었다. 알체스테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아.”
아제프는 엘제이를 만나러 갈 생각에 신이 났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흥얼흥얼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여간 경쾌한 게 아니었다.
***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자리를 비운 사이, 티아세 자매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따뜻한 솜이불에 폭 둘러싸여
서로를 꼭 끌어안은 자매 사이로 적당히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똑똑.
쾅쾅!
“리사?”
쾅쾅쾅!
시끄럽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엘제이는 엘리사의 팔을 치우며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아제프와 엘리사가
언제 자리를 바꿨는지는 모를 일이나 일단, 문 두들기는 소리부터 어떻게 하고 싶었다.
쾅쾅!
“……?”
무심코 문고리를 돌리려던 엘제이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아제프라면,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릴 리 없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기도 할 테고, 그녀를 부르면 불렀지 이렇게 시끄럽게 문을 두들길 사람은 아니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7 화
107
탁-
조심히 놓는다고 놓았는데, 덜덜 떨리는 손끝이 실수한 모양이었다. 엘제이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움찔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똑똑.
문가의 기척이 음산하게 움직였다. 나긋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소름이 바짝 돋았다. 엘제이는 고개를 돌려 깊게
잠든 엘리사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에는 없는 척하는 게 제일 낫다고 배운 것 같은데 이미 틀렸을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고민하며 창가를
바라봤다. 소리를 질러 누군가를 부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단순한 오해일지도 몰라 고민되었다.
철컥! 철컥!
금방이라도 문고리를 끊어낼 듯 거칠게 돌아가는 손길에 엘제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곧이어 사람이 뛰는
소리가 다다다 울렸다.
퍽! 쿠당탕!
밖에서 한 차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한데, 금세
적막감이 찾아왔다.
“누구, 세요?”
***
“감히, 겁을 줘?”
“아제프, 무슨 일이지?”
짓씹어 뭉개진 발음에 머리를 말리건 알체스테가 멈칫했다. 그가 뒤늦게 엘리사의 안전을 확인할 때, 아제프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곧장 도망가려는 행태에 아제프가 자질로 그의 발을 묶었다. 남자가 쓰러지자마자 달려든 아제프가 목덜미를
가볍게 쳐 그를 기절시켰다.
‘질기기도 하지.’
로브를 가볍게 젖혀보니 역시나 주술사의 문양이 보였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행동에 입매가 사납게
뒤틀렸다.
뒤처리하고 올 테니, 두 사람에게 잘 둘러대서 안심시키라는 의미였지만 알체스테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제프는
그가 알아듣는 말든 제 할 일을 하며 주술사를 끌고 나가는 데 집중했다.
‘어떻게 할까?’
“누구, 세요?”
“나다.”
“아…….”
엘제이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문고리를 힘주어 잡았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녹진하게 풀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엘제이는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소리를 질렀으면 민망할 뻔했다. 요란스럽게 울리던 소리가 좀 수상했으나, 이미 경계를 푼 엘제이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나?”
알체스테는 저쪽 방에서 느껴지는 아제프의 행태에 한숨을 삼키며 느릿느릿 몸을 집어넣었다. 엘리사는 분명 저쪽
방에서도 쿨쿨, 잘 잔 것 같은데 여기서도 잘 자고 있었다.
알체스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사를 깨울 마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알체스테의 손짓은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엘제이는 미끄러지듯 흐르는 알체스테의 손짓을 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아낌 받는 동생을 보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엘제이는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아제프도 그렇고, 알체스테도 그렇게 왜 저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엘제이는 감히 황자의 볼을 꼬집는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서 잠시 고민했다.
흐릿한 기억이긴 하지만, 엘리사는 황궁에서도 무척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준다. 황궁의 분위기에 짓눌리기 쉽지만,
엘리사는 아랑곳없이 지금의 밝음을 유지했던 것 같다.
“마음이 통하잖아요. 리사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눈치채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치가 빨랐어요.”
“어린 시절?”
엘제이가 추억에 잠긴 듯 엘리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제프가 들었으면 어렸을 때부터 참 되바라졌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알체스테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군. 고맙다.”
알체스테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암묵적으로 자매에게 이 일을 숨기고
싶어 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제이와 엘리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둘이서 속닥속닥 비밀을 나누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그녀들은 그들의 바람대로 모르는 척해주는 거였다.
“그를 보셨어요?”
‘곧 출발해야 할 텐데.’
“그럼 저는 먼저 좀 씻고 있을게요.”
달칵.
엘제이가 욕실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쇠로 문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엘리사를 재우듯
다독이던 알체스테는 흘긋, 문 쪽을 바라봤다.
아제프는 곧장 방 안 곳곳을 살피며 엘제이를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보아
씻는 중인 것 같았다.
아제프가 눈꼬리를 접으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엘제이가 나오기 전 퇴치해야 하는 벌레가 두 마리
있었다.
“루드비히가 죽었는데, 또 주술사가 왔다. 우리가 이 여관에 머문 건 순전히 우연인데, 이토록 빨리 알아냈다는
건 역시, 간자가 있는 거겠지.”
“시스라인 남매가 데려온 병사가 한둘은 아니니, 솎아내기는 힘들 테고. 그냥 전면전입니다. 빨리 수도로
돌아가는 게 좋겠지요.”
“그렇군.”
알체스테는 고개만 끄덕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제프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는데도 쿨쿨 숨만 내쉬는
엘리사를 짜증스럽게 노려봤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워 눈을 뜰 법도 한데, 어떤 의미로는 참 강적이었다.
“안 깨우십니까?”
“깨울 거다.”
“……리사, 일어나라.”
“우음…….”
“이건 뭐, 누가 보면 벌써 당한 줄 알겠습니다?”
“그게 뭐지?”
“일종의 전리품이랄까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8 화
108
‘전리품?’
“네.”
아제프는 싱긋 웃으며 병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또록또록 구르는 유리병의 촉감이 피부에 착착 감겼다.
건진 게 없는 건 아니어서 아제프의 입술은 호선을 길게 그렸다.
아제프는 여전히 꿈나라에 빠져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엘리사를 가리켰다. 아제프의 생각은 단순했다.
마비독을 먹은 척해서 주술사의 배후를 꼬여내자는 의미였다.
주술사에게 아무리 캐물어도 그들은 쉽게 답을 내뱉지 않는다. 걸릴 위험이 큰 만큼 그들을 보내기 전에 세뇌를
했거나 배후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명확한 증거를 잡으려면, 배후를 끌어낼 미끼를 던져야 했다. 황제는 신중하고 냉철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이미 한 번 성공했던 방법이니까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놓을지도 몰랐다.
“그럼 자매들이 마비된 것처럼 행동해야 할 텐데, 힘들어하지 않겠나? 한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고된
일인데.”
“지금 누워 있는 게 누굽니까? 보세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옆에서 이렇게 떠들어대는데 미동도 안 합니다. 제
생각엔 엘리사 양이 적격이에요.”
“싫다.”
“……좋습니다. 그럼 내기를 하는 거예요. 엘리사 양이 이 연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겁니다.”
엘리사가 게으름을 피우는 게 맞았기에, 알체스테는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했다. 알체스테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지자, 아제프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들의 내기는 이랬다. 엘제이가 나올 때까지, 엘리사 옆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사이 엘리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제프의 승리였고, 반대라면 알체스테의 승리였다.
“그렇군.”
“주술사는 마비독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후 붙잡혔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고마울 텐데요.”
“하지만, 아나이샤 뿌리는 꽤 의외로군. 폐하도 루드비히와 같은 생각을 하신 건가? 괜히 공작의 반감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알체스테는 과거의 냉정했던 부황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통했다고 두 번씩이나 같은 방법을 쓰는
건 루드비히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믿었는데 뜻밖이었다.
아이젠이 들으면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아나이샤 뿌리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그 약을 끔찍해 했다. 또 제
아이들에게 쓰려 했다는 걸 알면, 묻어뒀던 과거의 분노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들킬 확률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 나는 어떻게든 우리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떻지?”
“그분의 속내야 본인이 아니면 정확히 모르는 거지만, 제 생각엔…… 초조하신 게 아닐까요?”
“초조하다고? 그 사람이?”
알체스테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그 정도로 인간적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5 살
이후 부황을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어릴 때 느꼈던 질척한 기운은 아직 선연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흔드는 알체스테의 눈을 단호하게 마주봤다. 알체스테는 부황의 그림자에 눌려 있다. 의식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거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세요? 전하께서 그렇게 믿고 싶으신 게 아니고요? 그렇게 믿는다고 차갑게 버려진 게
없던 일이 됩니까? 정당한 일이 됩니까?”
“하아- 미안하다.”
알체스테는 멍하니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제프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황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는 거였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미련이 발목을 붙잡고 질질 늘어졌다.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 죽으라고 보내는 거니, 살아서 황궁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가?”
알체스테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묵묵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러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방 안은 따스했고 사람의 온기가 돌았다. 엘리사가 있었고, 아제프가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
아제프는 화딱지가 눌어붙는 걸 느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엘리사와 알체스테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가운 호수에 처박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내쫓는 대신, 줄곧 해왔던 생각을 말했다.
“무서워한다고? 나를?”
“…….”
알체스테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꽤 흘렀고 드디어 엘제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제프는 달칵, 열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씩 웃었다.
처음에 엘제이가 나오기 전에 그들을 내보내려던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제프는 당분간 엘리사의
방해에서 해방이라는 걸 떠올리며 산뜻한 얼굴이 됐다.
“제 승리입니다.”
아제프는 내기에서 이긴 게 몹시 기뻤는지, 아니면 엘제이가 나와서 기뻤는지 살랑살랑 눈웃음치며 엘제이에게로
걸어갔다.
알체스테의 망막에 있지도 않을 여우 꼬리가 비쳤다. 알체스테는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의 환영을
보며 잇새를 꽉 물었다.
“……얄미운 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9 화
109
“그럼, 시작하죠.”
“…….”
다시 시작된 마차 여행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다. 주술사들은 간간이 찾아와 마차를 멈춰 세웠고, 그때마다 전투가
벌어졌다.
말은 핏물이 고인 바닥을 밟으며 수도로 향했고, 새벽달이 떠올라서야 일행은 수도에 도착했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티아세 家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아이젠은 정문 앞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홉뜬 눈에 붉은 기가 가라앉아 형형한 안광만이 짐승의 것처럼 빛났다.
다그닥다그닥-
마차가 열리고, 알체스테가 내렸다. 그의 품에는 엘리사가 축 늘어져 안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움직일 때마다
까딱까딱 흔들렸고, 팔다리는 힘없이 흔들렸다.
“리사.”
아이젠이 엘리사의 뺨을 만지며 떨리는 음색으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을 많이 맞아 창백해진 얼굴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엘리사는 그저 눈만 끔뻑이며 아이젠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가?”
“죄송합니다.”
아제프는 휘청거리는 아이젠을 부축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제프의 팔 위로 아이젠의 손가락이 박혔다. 아제프의
팔을 꾹 잡은 아이젠의 턱 끝이 달달 떨렸다.
부릅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줄줄 흘렀다. 주름진 눈가를 가로지른 눈물이 얼굴에 송송히 고여 애처롭게
빛났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
“아버지, 진정하세요.”
“공작!”
***
쾅!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몸을 늘어트렸던 남자가 에이든의 반응을 살피며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치듯 휘잉-
울리는 소리에 에이든의 턱이 툭, 불거져 나왔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버릇이었다. 남자는 붉게 흐려진 금안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느긋하게 와인 잔을
돌렸다.
황제는 오만했다. 필요하기 때문에 참아주고는 있지만, 별로 마음에 드는 행태는 아니었다. 남자는 저를 장기
말처럼 부리려는 황제를 하듯 바라봤다.
“…….”
에이든은 대답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디스의 우승자인 란델 후작이 그런
소원을 빌 줄은 몰랐다.
황제의 체면이 있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서 거절한단 말인가. 그때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고, 에이든은 늘 그렇듯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다.
“닥쳐!”
에이든은 드물게도 언성을 높였다. 남자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황제가 익숙한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붉은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종잇조각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바스락, 울렸다. 알체스테가 돌아왔고, 보고를 올리기 위해 황궁으로 입궁한다는
전언이었다.
나름 좋은 소식도 하나쯤 있었는데, 지금의 에이든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와 나는 계약에 묶이지 않았지. 내가 네 바람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욕심만 많아서는, 추잡한 것.”
“당신이 네게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나? 세상에 가장 더럽고 타락한 것이 있다면, 당신일 거다! 지켈리온!”
“권력, 명예, 칭송, 역사에 기록될 단 한 줄까지. 너는 무엇 하나 양보하기 싫지? 욕심이 많으니까.”
까드득- 잇새가 꽉 다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보다 더
추악한 놈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나야 최고로 추악하지. 나에게는 운명의 소리가 들린다. 네 아들은 언제나 네게 달려오고 있지.”
아비의 손에 죽으면 타락할 것 같아서 공을 들였는데, 황제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주저했다. 미쳐버린 남자는
알체스테를 변방으로 내쫓고 그를 향한 살인 충동이 일 때마다 태어나지도 못한 제 자식을 죽이며 충동을 억눌렀다.
‘미친 주제에.’
지켈리온의 손 안에 뭉글뭉글한 기운이 번졌다. 까만 기운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황제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아버지!]
귓가에 울리는 환청에 에이든이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솜털로 뒤덮인 조막만 한 손이 발아래 매달렸다. 더러웠다.
역겨웠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게, 내가 거듭 말했잖아.”
지켈리온의 손이 에이든의 목 위에서 뱀의 똬리처럼 천천히 휘감겼다. 커다란 손바닥이 에이든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는 에이든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죄악을 속삭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0 화
110
“그래. 맞아. 그대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하나둘 죽였잖아. 제일 멍청한 루드비히만 빼고, 다
황궁에서 내쫓았잖아. 네 자리를 위협할 만한 것은 남겨두지 않았잖아.”
지켈리온은 봉인을 푼 뒤 제법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처럼 부드럽게 풀린 안면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달콤함을 속삭였다.
알체스테를 죽이라고 세뇌했더니, 바보같이 다른 자식을 죽였다. 처음에는 열불이 나고 황당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달콤한 과실이 무르익어 지척에 도달했다. 그들의 문장을 뽑으면, 그들을 타락시키면, 지금껏 맛보지 못한
거대한 쾌락에 밀려 녹아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아버지!]
늘 미적거리고 망설였다. 에이든은 알체스테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숨통을 끊는 짓만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실비아.”
목덜미를 타고 화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에이든은 입가를 가리고 휘청거렸다. 오만한 무릎이 땅에 짓눌렸다.
실비아는 제 소꿉친구를 사랑했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온 다갈색 머리카락의 다정한 청년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 빌어먹을 문장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 문장이 모든 걸 망친 거야. 문장이 없었다면 널, 사랑했을 텐데.”
에이든은 강탈하듯 실비아를 뺏어왔다. 막 그녀를 황궁에 데려다 놨을 때, 실비아의 배에는 은색 문장이 돋아났다.
에이든은 실비아의 반려를 죽이고, 그녀에게 제 아이를 배게 했다. 하얀 배가 둥글게 부풀수록 문장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실비아는 알체스테를 낳고도 계속 시름시름 앓았다. 에이든은 텅 빈 얼굴로 하루를 보내는 실비아를 감시했다.
그녀 스스로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년이 나쁜 거야.”
지켈리온의 입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덧그렸다. 추악한 남자의 내면에서 찌든 때가 눅눅하게 떨어졌다. 지켈리온은
새까만 진액으로 마음이 뒤덮이는 걸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켈리온은 처음부터 타락한 자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깨끗하고 성결한 영혼이 더럽게 물드는 게 좋았다.
“욱!”
에이든이 밀려오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수그렸다. 개처럼 엎드린 남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실비아를 찾아가 사랑을 속삭였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았다. 에이든은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던 여자의 목을 짓누르고 하얀 목덜미를 손수 분질렀다.
실비아의 공허한 눈이 마지막으로 더듬던 건 에이든이 아니었다. 알체스테였다. 그녀는 에이든은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듯 강보에 감싸인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알, 체……스테.]
그 후, 에이든은 실비아를 닮은 여자를 찾아다녔다. 그의 주위에는 비슷한 인상의 여인들이 쌓여갔다. 에이든은
여자를 탐하고 또 탐했다. 갈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실비아의 마지막 흔적은 알체스테뿐이었다. 알체스테를 죽이면,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귀신처럼 들러붙은
여자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우웁! 우웨엑!”
그럴듯한 겉가죽을 쓰고 있지만, 에이든은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았다. 그저 느끼는 척을 할 뿐이었다. 저놈이
저러는 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 미쳐가는 것뿐이었다.
지켈리온은 혀를 쯧, 차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닥쳐!”
“그 여아의 해독제를 쥐고 협박해. 스스로 목을 분지른다면 해독제를 주겠다고 속삭여봐. 그러면 재미있겠지?
너는 네 손에 휘둘리는 알체스테를 보면, 만족할 거잖아. 그를 실비아라고 생각했잖아.”
“실비아를, 그 입에 담지 마!”
지켈리온은, 악마의 또 다른 자아였다. 일종의 분신인 거다. 두 개의 개체로 존재하지만, 지켈리온과 악마는
생과 사를 함께했다. 생각을 공유했다. 기억을 공유했다.
악마와 기억을 공유하는 지켈리온도 그 사실을 알았다. 에이든이 그날 느낀 건, 부성애도 죄악감도 아니었다.
흐리멍덩한 금안이 빠르게 수축했다. 숨기던 내면을 들키자 에이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의 입에서 또 한 번
토사물이 쏟아졌다.
5 살이 되자, 아이는 제법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해왔다.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
저를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황제가, 미쳤으니까.
“알체스테.”
악마는 황제가 타락해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라며 몸을 낮추고 기다렸다. 하지만, 결벽증이 심한 남자는 쉽게
악마를 불러내지 않았다.
“크윽! 끄읍!”
아주 오래 전, 들었던 목소리가 눅진한 귀를 때렸다. 목구멍이 강제로 수축하는 느낌에 버둥거리는 황제의
바짓단으로 누런 위액이 스며들었다.
지켈리온은 몸부림치는 에이든을 흘긋 바라봤다가 그의 목덜미를 놔주었다. 털썩, 쓰러진 에이든의 옷이 축축하게
늘어졌다.
에이든의 몸을 질척하게 휘감은 것들이 까맣고 축축한 습기를 뱉어냈다. 뇌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손발 끝을
시커먼 벌레가 파고들었다. 에이든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버렸다.
“으아아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1 화
111
“아버지!”
엘제이는 아이젠을 부르며 황급히 그를 쫓아갔다. 평소와 달리 딸을 배려해주지 않는 발걸음은 터벅터벅 복도를
울리며 저 끝으로 사라졌다.
엘리사는 아이젠의 허리를 조물조물 만졌다. 아버지가 번쩍 안아들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었다. 그녀는 몸에 힘을
쭉 풀고 들키지 않으려고 꽤 노력해야 했다.
“리사, 쉿!”
아까보다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이젠은 조그만 데다 느릿느릿한 목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웃었다.
“그럼. 괜찮다마다.”
아이젠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알체스테의 멱살을 잡은 건 진심이었다. 아이젠의 속내에는 아제프나 알체스테나
다 똑같은 도둑놈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화풀이를 좀 한 것뿐이었다.
‘도둑놈들.’
아이젠은 티아세 家로 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도둑놈들 앞에서 문을 닫았던 게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둘이서
합이 척척 잘 맞았는지 아이젠이 떠난 뒤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못된 것들.’
“아버지? 무슨 생각 하세요?”
아이젠은 반쯤 진심이었다. 아나이샤 뿌리로 만든 마비약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줄곧, 기분이 안
좋았다.
아제프와는 달리 아이젠은 굳이 복잡한 암호문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전령조를 이용한 것도 들켜도 별로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
아제프는 엘리사를 안고 위풍당당 들어가는 아이젠을 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연기라지만, 이리 대놓고
멸시를 당하니 얼떨떨했다.
‘또 담을 넘어야 하나?’
아제프가 고민하며 엘제이의 방문에 나 있는 창문을 훑었다. 정문을 열어줄 마음은 없는 것 같으니, 오늘도
도둑놈의 본분을 다해야 할 모양이었다.
“지켈리온이 힘을 쓸 때마다 특유의 악취가 고인다. 오늘은 얌전한지 그런 느낌은 느껴지지 않아. 수도에 있는
것 같긴 하다만.”
아제프는 쓸모없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지켈리온이 수도 어디쯤 있다는 건 그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지켈리온은
주술사를 거느리는 능력을 갖춘 듯했다. 만약, 지켈리온과 에이든이 관계가 있다는 게 밝혀지면, 에이든이
황제라도 문책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제프는 좀 못미더운 눈으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그래도 부황이라고 또 잔뜩 흔들리다가 돌아오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걱정하는 건가?”
“주술사의 문양은 힘을 쓸 때마다 커진다. 설령 폐하가 악마에게 혼을 넘겼다고 한들, 문양이 커지게 두지는
않았을 것 같군.”
“놀리는 건가?”
아제프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뒤돌았다. 정문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담으로 향하는 발걸음마저도 알체스테에겐
부러운 일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2 화
112
노랫말처럼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곧 바람에 사그라졌다. 알체스테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말 위에
올라탔다.
조금 전까지는 부황을 만난다는 부담감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룰루랄라 사라지는 아제프에 대한 짜증이 더 심했다.
“가자.”
알체스테가 말의 콧잔등을 손으로 쓸며 말머리를 돌렸다. 말머리가 황궁을 향하고, 그를 태운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다그닥다그닥-
알체스테와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이 말을 달리는 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새벽의 대지를 깨우는 힘찬 말발굽에
새벽이슬이 풀잎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기다리라고 해라.”
알체스테는 입가로 번지는 쓰디쓴 미소를 삼켰다. 어린 시절 이 거대한 문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황금으로 만든
문이 떨어져 어린 몸을 짓누르고 팔다리를 으깰 것 같아 두려웠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어쩌면 일부러 붙잡아두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기감을 기울여 수도를 살폈다.
그리 먼 곳까지 통찰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귀족들의 저택은 대부분 황궁 근처에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알체스테는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뉘엿뉘엿 주홍빛이 스며들었다.
“들어와라.”
“들어가십시오.”
쿵.
거대한 황궁의 문이, 알체스테를 집어 삼켰다. 알체스테는 그 길로 곧장 걸어가 황제의 발아래에 섰다.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에, 황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목덜미에 닿는 따가운 시선으로 짐작하건데, 황제는
저를 보는 듯했다. 꽉 쥔 주먹에 눅눅한 습기가 배어들었다.
황제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알체스테를 살폈다. 다부지게 성장한 몸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입술이 메말라 달싹거렸다.
“알체스테.”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이든은 제 아들이 죽어 지옥불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하게 갸웃, 흔들리는
얼굴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황제는 용좌를 꽉 틀어쥐며 목구멍을 타고 치솟는 시큼한 위액을 내리눌렀다. 저 아이에게 추한 꼴을 보이는
것만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뿌옇게 흐려진 금안이 또로록 굴러 알체스테를 훑었다.
“많이 자랐구나.”
“저는 부황께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제가 건방지다고 느끼셨다면, 그건 부황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에이든은 건방지다고 불호령을 내리는 대신, 알체스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만하게 내리깐 눈이 너는 절대
나와 동등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따스하게 맞아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따스한 품에 안기진
못하더라도 먼 곳에서나마 저 얼굴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하던 어린 날이 산산이 부서졌다.
“……루드비히에 대한 건, 안 궁금하십니까?”
황제는 황급히 손을 움직여 와인 잔을 들었다. 꼴깍꼴깍 억지로 넘긴 술이 목덜미를 따갑게 긁어댔다. 사레가
터질 것 같았지만, 에이든은 티 내지 않았다.
알체스테의 눈에는 에이든이 와인을 마시려 잠시 말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알체스테는 더는 저 헛소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뭐?”
알체스테는 종잇조각처럼 우악스레 구겨지는 미간을 보며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그는 황제가 버리고 주울 수
있는 장난감 같은 게 아니었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나? 몸의 상처도, 마음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묵은 것이 될 텐데 소중히 대할
필요가,]
“…….”
퍽! 쨍그랑-
알체스테가 나간 문에 와인 잔이 부딪혀 깨졌다. 주르륵 미끄러지는 자줏빛이 화려한 금빛을 붉게, 더럽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3 화
113
엘리사는 그렇게 자고도 또 금세 잠들었다. 엘제이와 아이젠은 엘리사가 잠든 걸 확인하고 각각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편히 주무세요.”
‘시아, 갔나?’
엘제이의 눈이 반짝 뜨인 것도 그때쯤이었다. 시아는 나갔는지 어두운 방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내려온 엘제이는 곧바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중요한 서류들을 보관하는 곳에 두었기 때문에 서랍은 열쇠로 열어야만 했다. 열쇠를 넣고 돌리는 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은 침실을 울렸다.
도르륵, 달칵.
엘제이는 서랍을 통째로 들어내고는 그 안을 샅샅이 뒤졌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찾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단정한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어쩌면 다른 곳에 놓아두고 잊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한제이가 아닌 엘제이의
기억은 비교적 멀쩡하지만, 지금 찾는 일기는 한제이의 기억과 밀접하니 지워져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데 넣어뒀나?”
“무엇을요?”
흐음- 아제프가 작게 신음하며 엘제이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결이 좋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하얀
목덜미에 나붓이 내려앉아 그녀를 간질였다.
“……으악!”
엘제이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제프는 하얀 러그 위에 주저앉은 엘제이를 바라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어질러 놓은 서랍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지 티아세 家의
장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제프는 단정한 글씨로 빼곡히 메모해 놓은 장부를 보며 살짝 웃었다.
엘제이는 슬금슬금 아제프의 눈치를 보며 그것들을 정리했다. 아제프는 그것에 대해 알 리 없었지만, 한글로 쓴
종이가 나올까 봐 괜히 긴장되었다. 무슨 글자냐고 물으면 임기응변에 능하지 않은 엘제이는 버벅거릴 게
분명했다.
“제가 도와줄까요?”
엘제이는 손끝을 바르르 떨며 한참 시간을 들여서야 서랍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었다. 열쇠로 꼼꼼히 서랍을
잠근 그녀는 등으로 그걸 가렸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휭- 불어왔다. 하얀 커튼이 바람에 휘감겨 춤을 췄고, 어슴푸레한 달빛이 창가를
물들였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볼에도 시원한 바람이 닿았다. 정신을 깨우는 찬 기운에 엘제이가 눈을 번쩍 떴다.
“네.”
아제프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싱긋 웃으며 엘제이의 볼을 살살 쓸었다. 서랍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이 묘한
충동을 일게 했다. 아제프는 고운 도자기 인형 만지듯 엘제이의 볼을 살살 쓸어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제프는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잠긴 문 정도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살얼음이 낀 창문의 고리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는 보란 듯 문을 닫아 보였다.
창문 틈으로 얼어붙은 얼음이 쩌저적- 부피를 키워가며 창문을 밀었다. 조금의 덜컥임도 없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창문은 사람이 손으로 미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손가락을 딱, 부딪쳐 소리를 내며 창문에 얼어붙은 얼음들을 거두어들였다.
아제프는 엘리사가 엘제이에게 혼나는 모습을 떠올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눈썹이 엘제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녀는 눈을 꾹 감으며 잔소리했다.
아제프의 팔이 미끄러지듯 올라가 엘제이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녀의 고개를 살짝 젖히자 입안이 벌어졌다.
매끄러운 혀가 능숙히 그 안을 파고들며 말간 점막을 간질였다.
“으음, 흐…….”
아제프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것을 능숙하게 잡아채 휘감았다. 혀뿌리를 긁어주고 좋아하는 곳을 간질여주니,
색색 달아오른 숨결이 애달파졌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아제프가 속눈썹을 나붓이 내리깔았다.
아제프의 손이 엘제이의 슈미즈 자락을 파고들었다. 얇은 슈미즈 끝단의 레이스가 엘제이의 허벅지에 걸렸다.
그는 부드러운 살결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흐읏- 으응…….”
질척한 탐심이 하얀 살결에 진득하게 묻었다. 아제프는 하얀 다리 한쪽을 칭칭 휘감으며 제 것으로 온통 물들여
놓았다. 소유권을 주장하듯 진득하게 휘감는 손길에 엘제이가 허리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짤랑, 짤랑.
서랍에 걸린 열쇠가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음란하게 흔들렸다. 율동하듯 꿈틀거리는 복부에 시커먼 기운이
차올랐다. 아제프는 제 몸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미간을 좀 찌푸렸다.
엘제이의 입술이 새빨갛게 부풀도록 물고 빨던 입술이 촉, 짧은 입맞춤을 남기며 떨어졌다.
몽롱한 머리는 조금의 시간이 흘러서야 아제프의 말을 인식했다. 엘제이는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녹진하게 녹은 몸은 그 이상의 깊은 사고를 거부했다.
“아제프?”
눈 깜짝할 사이에 등에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솜이 수북하게 들어간 이불이 하얀 몸을 푹 감싸 안았다. 저항할
틈도 없이 빨려가는 느낌에 엘제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찾아야 하는데.’
아제프는 엘제이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손을 꺼냈다. 익숙하게 가슴 언저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그만 자라는 듯 다정했다.
“저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칭얼거렸다. 졸려서 몽롱해진 눈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아제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엘제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같이 자는 건 아직,”
아제프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야살스럽게 휘었다. 살짝 붉어진 눈가가 접히자 까만 눈물점도 예쁘게 휘어졌다.
엘제이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랬죠.”
“그럼 같이 코코 잘까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볼에 장난스럽게 입술을 비비며 웃었다. 말캉거리는 감각이 볼에서 뭉개졌다. 엘제이는
몽롱하게 풀린 얼굴로 그걸 바라봤다.
“그럴까요?”
“네. 제가 팔베개해줄 테니까 얼른 자요. 피곤하죠?”
아제프가 팔을 움직여 그녀의 목덜미 뒤를 받쳤다. 단단한 팔에 머리를 기대자 잠이 몽글몽글 밀려왔다.
여기가 극락이었다. 엘제이는 감기는 눈을 빼꼼 떠 아제프의 얼굴을 감상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저 얼굴을 보며,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는 지금이 좋았다.
몽롱하게 젖은 머리가 어서 자라는 듯 둔탁한 울음을 토해냈다. 엘제이는 반항하지 않고 수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잘 자요. 아제프.”
“잘 자고, 좋은 꿈 꾸세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배를 부드럽게 도닥이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누워 잠든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의 기척을 살폈지만,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려는지 잠잠했다. 시간은 꽤
흘러 햇살이 창가를 기웃거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4 화
114
“이제 오십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어째 황자님은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엘리사 양보다 나이도 여섯 살이나 많으신데,
슬슬 관리하셔야 할 시기 아닙니까? 주름까지 지시면, 어휴.”
아제프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기를 가늠하듯 알체스테 얼굴 위에서 움직이는 손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지나면, 밝아오는 무지개처럼 아제프 또한 시간이 지나면 저 먹구름마저 사그라들어
빛으로 온몸을 채울 것이 분명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와 똑같이 장난을 쳐보려다가 팽팽한 눈가를 보며 멈췄다. 아제프를 얼굴로 깎아내릴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나 할지 의문이었다. 알체스테의 눈가가 어쩐지 좀 시무룩해진 것도 같았다.
아제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보고는 그럴듯한 형식을 취한 것이고 적의 동태를 알아보는 게
본연의 목적에 가까웠다. 나중에 이 일로 트집이 잡힐 수는 있겠지만, 아제프는 일단 넘어갔다.
“글쎄. 이야기를 나누긴 했으나 밖에 서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부황을 뵐 수 있었던 건 그분의 소세물이
들어간 후다.”
“위로해주는 건가?”
아제프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싸늘한 얼굴로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살기가 몰아쳤는데,
그건 알체스테의 착각이 아니라는 듯 뾰족한 마나가 윙윙 신음해 댔다.
“무얼 말이지?”
“증거라든가, 증거 같은 거 말입니다!”
까드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얼음이 동동 뜬 호수에 저 얼굴을 처박아 정신을 좀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알모어가 저런 식으로 되물었으면 호되게 당했을 테지만, 저 둔치는 다행히 황자였다.
“그걸 굳이 말해야 압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갔으면 그 잘난 후각으로 지켈리온의 기척도 좀 더듬고 그가
있을 만한, 혹은, 있었을 만한 곳의 위치 정도는 알아왔어야 할 게 아닙니까!”
“차라리 폐하의 옷이라도 벗기시지 그러셨습니까? 소득도 없고, 보고도 제대로 못 하고, 대체 뭘 하신 겁니까!”
“…….”
아제프는 좋은 능력을 두고도 썩히는 알체스테가 답답했다. 그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저렇게 무디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아마 정상이었다면 그도 증거를 찾아보려 했을 터였다.
다만, 그곳은 황궁이었고 알체스테의 트라우마가 집약된 집합체였다. 20 년 만에 황제를 만난다는 생각에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씩씩 올라오는 거친 생각을 잠재우며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자를 털어냈다.”
“뭐요?”
“미쳤나?”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머리에 구멍 난 환자처럼 웃는다고 생각했다. 싸늘한 눈으로 알체스테를 바라보던 아제프는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는 걸 깨달았다.
***
“으으음!”
엘제이가 멍하니 일어나 앉았다. 침대 헤드에 기댄 등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엘제이는 그대로 쓰러져 다시 잠들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겨우 앉기는 했는데. 헤드에 머리를 기대니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몽롱한 기운을 간신히 몰아내며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잠에 푹 절은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갔다.
“아제프?”
엘제이는 옆을 더듬거리며 그를 불러봤지만,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서도 극락을 즐기고 싶었던
엘제이가 눈을 시무룩하게 늘어트렸다. 미차 여행이 피곤했는지 몸은 뻐걱거렸다.
“아제프…….”
엘제이가 한숨을 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정신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스르르- 이불을 젖히는 소리가 흘렀다. 엘제이는 살짝 구겨진 슈미즈를 바로 하며 바닥에 발을 내렸다. 아제프도
없고, 커튼도 쳐져 있으니 이 기회에 얼른 찾아야 했다.
엘제이는 곧장 서랍으로 다가가 종이를 찾아 뒤적거렸다. 중요한 문서만 따로 보관하는 서랍뿐 아니라, 책상에
달린 서랍을 다 뒤져보았는데도 찾는 건 보이지 않았다.
엘제이는 한숨을 삼키며 책장을 바라봤다, 서고가 따로 있으니 엘제이의 책장에는 그리 많은 책이 꽂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족의 기준이었다.
엘제이는 제 키보다 높은 책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혹시라도 저기 어딘가에 둔 거라면 하루를 꼬박
세워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뭐를요?”
“……!”
소리도 없이 돌아간 문은 커다란 남자 하나를 토해냈다. 문을 닫으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엘제이의
어깨가 굳었다. 적당히 변명하면 될 텐데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입은 벌써 어버버 달싹거렸다.
아제프가 커튼을 활짝 젖히며 웃었다. 커튼에 고였던 햇살이 기회라는 듯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몸을 데우는
햇살을 맞던 엘제이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햇살을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며 흘러내렸다.
멍하니 헛생각을 하던 엘제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제프의 손에서 팔랑팔랑 흔들리는 종이
뭉치가 묘하게 익숙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5 화
115
익숙한 굵기, 익숙하게 접힌 모양, 바깥쪽에 쓰인 한글까지. 아무리 살펴도 엘제이의 것이 맞았다. 엘제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아니, 그게 왜…….”
“응? 무엇이요?”
아제프는 세상에서 가장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반짝반짝 스며드는 햇살 때문인지, 원래의 얼굴이
눈이 부셔서인지 엘제이의 마음이 크게 술렁였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가고 눈이 홀렸다. 엘제이는 또 어물쩍 넘어가려는 속내를 억누르며 눈을 꼭 감았다.
“네?”
엘제이의 속눈썹이 팔랑, 흔들렸다. 엘제이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살짝 물러났다.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헤롱헤롱 흔들리는 뇌가 반쯤 몽롱해졌다.
이번 기회에 엘제이의 습관을 어그러트리겠다고 생각한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바짝 다가가 웃었다. 또 눈을 감으며
이번에는 더 짙게 저 입술을 탐할 생각이었다.
푸른 벽안에 산홋빛 입술이 갇혔다. 아제프가 노골적으로 그 부분만 바라보자 엘제이의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엘제이는 눈을 질끈 감고 아제프의 손을 찰싹, 때리며 위기를 벗어났다.
주인 허락도 없이 가져간 주제에 아제프는 뻔뻔했다. 천연덕스러운 그의 대답에 엘제이는 순간적으로 제가 그에게
맡겨둔 걸 까먹었던 건지 헷갈렸다.
분명히 자물쇠로 잠가둔 서랍 안에 있었던 종이가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엘제이는 저 손에
종이가 들어간 과정을 파악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읽었어요?”
“네. 위험한 것일지도 모르니 보호자인 제가 읽어야죠. 우리는 연인 사이니, 저는 제이의 보호자. 제이는 제
보호자. 맞죠?”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산뜻하게 말하고 있지만 얼굴을 보아 안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타락하는 아제프의 영혼을 감상하며 느긋이 웃었겠지만, 지금의 아제프는 타락하기는커녕 시커멓게
말라붙은 잔여물을 빠르게 털어내고 있었다. 그를 노리는 악마가 초조해지는 건 당연했다.
“하아…….”
알체스테는 황제가 되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황제가 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알체스테가 황제가 되는 건 아제프의 죽음 이후란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제프는 손으로 턱을 괴며 진지한 표정의 엘제이를 관찰했다. 흘긋, 까만 글씨를 바라봤지만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르고 해박한 아제프에게 모른다는 건 꽤 낯선 일이었다. 가늘게 좁혀진 벽안이 곧, 샐쭉 휘어졌다.
모르면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아제프는 정확히 제 이름을 짚어내며 물었다. 혼자 고뇌에 빠졌던 엘제이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눈을
굴렸다.
“……!”
아제프.
단정하게 쓰인 그의 이름이 보이자 엘제이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 종이에는 단순히 일어날 일만을
기록해둔 건 아니었다. 생각의 흐름대로 쓰인 글이라 일기와 비슷했다.
[아제프가 너무 예쁘다. 웃어도 예쁘고, 서늘한 표정을 지어도 예쁘다. 예쁘다. 그만 봐야 하는데 너무 예쁘다.
홀리면 안 되는데 아제프에게 자꾸 홀린다. 아제프. 아제프, 아제프, 하…….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다.]
엘제이가 황급히 종이에서 눈을 떼어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기지 못했다.
아제프는 보란 듯이 눈웃음을 살랑살랑 쳤다. 곱게 휘어진 눈만큼이나 단정한 손가락이 주르륵 미끄러져 단어
하나를 더 가리켰다.
예쁘다.
“아아- 그거 일기였구나. 일기에 제 이름 잔뜩 적어둔 거예요? 첫 번째로 가리킨 단어가 제 이름이죠? 앞부분에
유독 반복되는 걸 보니 명사 같던데.”
“……!”
아제프의 벽안에 짙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입꼬리가 절로 스르르 올라갔다. 저 글을 적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저 작은 머리를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다.
“……보지 마세요.”
아제프는 새빨간 사탕을 취하려면, 자극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경계하지 말라는 듯 두 손을 든 아제프가
선하게 웃어 보였다.
꾀 많은 여우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가르쳐 달라는 듯 영롱하게 물결치는
벽안이 아이처럼 빛났다.
이미 사라져버린 유목민의 글자일지도 몰랐다. 혹은, 엘제이가 본다는 미래의 언어이거나. 그렇다면, 저 종이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배워야 했다.
어리광을 부리듯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한글의 시작은 가나다라에서부터였다. 아제프는 뭐든
곧잘 배우기는 했으나, 다 배우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터였다.
‘태울까?’
“그럼요. 저는 여러 언어를 배우는 걸 좋아해요. 저 정말 흥미가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제이만 괜찮다면
알려줄래요?”
물론, 흥미가 있었다. 엘제이가 적어둔 일기에. 아제프는 대체 무슨 글을 써놨기에 얼굴이 저렇게 달아올랐을까
고민하며 눈을 샐샐 휘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가리키는 종이를 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저 종이는 안 볼
생각이었다. 아제프에게는 이미 저것을 베낀 필사본이 있었다.
필사본의 존재를 모르는 엘제이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저렇게 말해 놓고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언어를 다 배우기 전에 글을 옮겨 쓰면 되는 일이었다.
아제프는 기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엘제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엘제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의 티아세 家는 철옹성 같았다. 낯선 이의 출입은 허락하지 않았고, 조금의 정보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황제는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아이젠과 알체스테 때문에 날이 바짝 섰다. 아이젠도 이 행동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짐작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두 진영이 서로를 엿보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이 전쟁이 그리 오래가지 않고 승자를
가리게 될 거라는 게 모두의 짐작이었다.
정문 앞에서 내린 세 사람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걸어갔다. 잘 관리된 정원의 바닥이 푹신푹신하게
짓눌리고 세 사람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제프는 내심 오늘도 알체스테가 눈치 없이 굴기를 바라며 눈을 굴렸다. 알체스테의 손아귀에 붙잡힌 귀여운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아제프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오늘도 눈치 없이 굴어줄 모양이었다.
알체스테는 고민을 끝냈다. 우직한 남자는 미래의 장인보다는 제 연인 쪽으로 마음이 기운 듯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알체스테는 앙증맞은 색감의 종이봉투를 소중히 끌어안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아이젠은 엘리사가 좋아하는
제과점의 마크가 찍힌 봉투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아제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티를 낸다면 지금까지의 눈치싸움이 소용없는 일이 되기에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엘제이는 행동이 자유로우니 오늘 아침에도 식사하며 봤지만, 엘리사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알체스테가 엘리사
방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잦아 둘 사이에 끼기 멋쩍은 아이젠은 쉽게 엘리사를 찾지 못하는 편이었다.
“크흠.”
아이젠은 헛기침하며 마땅찮음을 드러냈다. 아제프는 언짢은 기색인 아이젠을 바라보고 이때다 싶어 속살거렸다.
“어휴. 저렇게 들어가면 또 한참 무소식일 텐데요. 엘리사 양이 잠들기 전에는 안 나올 테니, 오늘도 공작님은
따님의 잠든 얼굴만 보셔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알체스테와 달리 아이젠의 속내를 빠르게 파악한 아제프는 그 모든 화살을 알체스테에게로 돌리는 중이었다.
아이젠은 아제프가 여우처럼 알체스테 흉을 본다는 걸 알아도 아이젠의 마음속에는 알체스테에 대한 못마땅함이
쌓여가는 중이었다.
아이젠이 뾰족한 눈으로 아제프를 흘겼다. 아제프는 살가운 태도로 그의 어깨를 조물거리며 웃었다.
“이런……. 오늘은 그냥 확 올라가 보세요. 사실, 엘리사 양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방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니 티가 안 나는 거지, 지금쯤 공작님을 찾을 게 분명해요.”
아제프는 세뇌하듯 아이젠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아이젠의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아제프는
아이젠의 어깨를 쭉쭉 펴주며 그의 등을 넌지시 밀었다.
“에이- 설마요. 저는 공작님이랑 제이랑 셋이서 알콩달콩 식사하는 게 너무 좋은걸요. 황자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이젠도 아제프의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짐작했으나, 지금의 그는 저런 말을 듣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람은
원하는 대로 믿는 동물인지라, 아이젠은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그럼요. 세 분이서 정답게 식사도 하고, 공작님은 엘리사 양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럼 좋겠네요. 어서 올라가
보세요. 엘리사 양이 분명 기다릴 거예요.”
원하는 걸 얻어낸 아제프가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여러모로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제프는 아이젠이 흘긋 돌아보자 웃음기를 지우고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담백하고 단정한 얼굴에
아이젠은 따뜻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만만하지가 않군.’
아제프는 입안을 깨물며 웃었다. 순하게 말똥거리는 눈매는 아이젠의 의도를 모른다는 듯 부드럽기만 했다.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제프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아이젠을 배웅했다. 평소보다 빠르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내심
아제프가 부추겨준 게 좋았던 듯했다. 아제프의 속내가 복잡하게 얽혔다.
아제프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반듯하게 들었다. 기쁨이 흐르는 아이젠의 뒷모습이 망막에 박혔다. 딸들과 같은
부드러운 밀색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저 남자는 묘하게 싫지 않았다. 저 남자가 엘제이를 따스하게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부드러운 색감의 눈이 부정을 담아 휘어지는 모습을 보면 꽤, 기꺼웠던 것 같다.
아제프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보이지 않아 엘제이는 막 창문을 열어본 참이었다. 엘제이는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제프는 다정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엘제이 앞에
설 수 있었다. 아제프는 정문으로 들어가려는 듯 엘제이를 향해 눈짓했다.
“잘 다녀왔어요?”
아제프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잘 다녀왔어요? 묻는 한마디가 귓가에 내려앉아 떨어지지 않았다. 밀려드는
충동에 아제프는 그대로 뒤돌아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아제프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제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기꺼이
엘제이의 물음에 답했다.
“다녀왔어요. 제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7 화
117
아제프는 어리광을 부리듯 엘제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코끝을 뭉근하게 울리는 엘제이 특유의 살결 냄새가
너무 좋았다. 그는 제 품에 안긴 봄꽃 향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에 빠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힘든 일 있었어요?”
아제프는 떨어지려는 엘제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엘제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결 좋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손 안을 빠져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엘제이의 방으로 직접 통하는 창문이라 기사나 사병들이 꽤 몰려 있었지만, 그들은 눈치 빠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아제프가 돌아온 이상 엘제이의 신변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고, 괜히 그곳에 있다가 신경 예민한 남자의 째림을
받지 않으려면 미리 도망가는 게 좋았다.
엘제이는 천천히 물러가는 그들을 보며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남세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필요하다는 듯 매달리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역시나, 아제프가 원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제프는 실실 흘러나오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연약한 새끼 양처럼
어깨를 좁혔다.
“몰래?”
“네. 이따가 새벽이 되면 아무도 몰래 살짝, 들어오면 되잖아요. 저도 아제프랑 같이 자고 싶으니, 이건 둘만의
비밀로 해요.”
“……그럴까요?”
“그럼요. 일단 어서 들어와요.”
달콤한 숨결을 욕심껏 가로채자, 곤두선 신경이 부드럽게 풀렸다. 뇌 한 곳을 콕콕 쑤시며 그의 신경을 괴롭혔던
감각도 둔해졌다.
정해진 수순대로 날카롭고 과민하게 반응했어야 할 아제프를, 엘제이가 바꿔놓았다. 세상 모두를 싫어하고
혐오했을 남자에게 새로운 세상이 생겼다.
***
“제이가 한입 먹을 때, 저는 두세 입을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도 돼요. 식사야 아침에도, 점심에도 하지만 당신은
늘 새롭잖아요. 조금씩 다 달라.”
아제프는 별 감흥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수십 년간 한글을 써도 지렁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돌을 들고 달려올 소리였다.
무시무시한 속도에 엘제이는 슬슬 제 종이가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아제프는 쉬운 단어를 익히고 있었고,
엘제이는 아제프가 황궁에 간 사이 틈틈이 종이의 글을 옮겨 적고 있었다.
종이에 남겨놓은 찬사를 생각하자, 몸이 꼬물꼬물 말렸다. 엘제이는 혼자서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엘제이는 까만 글자로 빽빽해진 종이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비교적 쉬운 단어인 엄마, 아빠, 우리, 가족,
이런 글자로 도배된 종이는 단정한 글자로 가득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엘제이는 제 지식을 배우다 못해 가로채는 아제프를 뾰로통하게
바라봤다.
“아뇨. 몇 개 더 배운 뒤에 해요.”
엘제이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어려운 단어를 한 번에 알려주면 아제프라도 헷갈릴 것 같았다. 엘제이는
전투적으로 단어를 써내려갔다.
아제프는 종이를 가득 채울 기세로 글자를 쓰는 엘제이를 보며 입꼬리를 아래로 당겼다.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인 듯싶었다. 저 생물체는 도대체 무얼 믿고 저렇게 깜찍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휘휘- 소리를 내며 까맣게 잉크를 토해내는 펜대가 유려하게 움직였다. 아제프는 고민하며 엘제이를 관찰했다.
“자, 다 됐어요.”
엘제이는 차마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한두 글자로 이루어진 그 전의 글자에 비해 확실히 길어졌기
때문이다.
“네. 그 속이요.”
“그렇군요.”
아제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바꾸지 않고 머리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능청스러운 표정에 별
의심을 못 한 엘제이는 다시 단어들을 가리키며 뜻을 읊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가 엘제이에게 한글을 배운 건 엘제이가 쓴 글
때문이었다. 그로서도 모르는 언어로 쓰인 글을 통째로 다 외울 수는 없었기에, 간간이 필사본은 들여다봤다.
책 속.
‘책 속이라, 무슨 의미일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8 화
118
아제프는 벽 한편에 길게 늘어져 있는 책장을 눈으로 쭉 훑었다. 고서가 여러 권 꽂혀 있기도 했고, 한눈에 봐도
수준 높은 책들이었다.
“아제프, 무슨 생각 해요?”
아제프가 피곤하다고 칭얼거리자 엘제이의 눈꼬리가 유순하게 내려왔다. 엘제이도 아버지를 도와 여러 업무를
했지만, 외교부 장관인 아제프만큼은 아닐 터였다. 온종일 일과에 시달렸을 텐데, 또 공부라니 지긋지긋할 만도
했다.
“피곤해요? 여기 누워요.”
가만가만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다정해서 잠이 몰려왔다. 아제프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으며 속삭였지만,
그의 얼굴은 이대로 잠들어도 좋다는 듯 평온했다.
“서로서로 닮아가는 거죠. 저는 아제프를, 아제프는 저를. 서로에게 물드는 게 나쁘지 않아요. 저도 아제프
덕분에 요령이 좀 생기는 것 같고요.”
아제프는 속닥속닥 장난치는 지금이 즐거웠다. 이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다. 팔랑, 눈을 뜨자 시야에 기다란
책장이 들어왔다.
아제프에 놀림에 발끈한 엘제이가 조잘조잘 이야기를 털어놨다. 오래전에 읽었다는 말에 아제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엘제이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하얀 손가락이 하나하나 접히는 모습이
어여뻤지만, 아제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미궁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아제프는 ‘책 속’이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하며 웃었다.
종알종알 말하던 엘제이는 매끈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나붓하게 내려앉은 속눈썹 위로
긴 조명이 미끄러지듯 흘렀다.
“아제프. 못된 생각 했죠?”
아제프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번쩍 뜨고 엘제이를 바라봤다. 강하게 호소하는 눈빛에 확신했던 마음이 긴가민가
흔들렸다. 엘제이는 고민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꼭 못된 생각 할 때 얼굴인데?”
“너무해요. 저 상처받았어요.”
“……삐졌어요?”
황제, 에이든은 커다란 황금색 방 안에 홀로 앉아 와인을 마셨다. 어둡게 곱아진 어깨는 음침하게 내려왔고,
표정 없는 서늘한 얼굴에는 독기가 서렸다.
에이든은 무얼 지시하든 무딘 얼굴로 일관하던 알체스테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아이젠이 뭐라고 물어보자
살짝 미소 짓던 얼굴도 떠올랐다.
쾅! 와장창!
책상 위에 놓인 술병과 술잔이 거친 손길에 휩쓸려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뚝뚝 고인 와인이 피처럼 묽게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찰랑, 까드득.
물 고인 바닥에 닿은 발이 바닥에 엎어진 유리를 자근자근 밟으며 걸어왔다. 지켈리온은 와장창 부서진 와인 병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성마른 음색이 다급하게 쏟아졌다. 에이든은 커지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며 여유로워 보이는 지켈리온을
노려봤다.
지켈리온이 에이든 따위를 무서워할 리 없었다. 에이든은 그저 힘을 잃어가는 이무기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용은
될 수 없었던 천하고 추악한 놈을 내심 비웃으면 비웃었지 두려워 할 일은 절대 없었던 거다.
“잔뜩 먹어 배부르니, 흡수할 시간이 있어야지. 그대는 모르겠지. 신의 문장이라는 그 파편 쪼가리가 새까맣게
물들 때, 내게 얼마나 큰 쾌락을 주는지.”
‘나는 곧, 자유로워진다.’
“실비아…….”
“배에 있는 문장은 한 번도 뽑아본 적 없는데, 분명 황홀했겠지? 내장을 주룩주룩 흘리며 울부짖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나? 그대, 항상 그 문장을 뽑고 싶었겠지?”
뽑아내고 싶었다. 살을 도려내 얇게 저미어 그 짝이라는 놈의 얼굴에 던져주고 싶었다.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내장을 주룩주룩 쏟으며 살려달라고 제게 매달렸다면, 얼마나 황홀했을까.
“크흑, 하하하하!”
알체스테가 했던 말에 충격이 컸는지, 에이든의 이성이 모래성처럼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켈리온은 그간
에이든에게 안 들른 게 아니었다. 에이든이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에이든은 아마 지금의 행동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아집과 자존심만 남아 의식적으로 지금의 행동을 기억하기를
거부할 테니까.
에이든의 입술이 기계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댔다.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하게 풀린 눈에는 새빨간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다른 것?”
“끄윽! 끅!”
“크하하하하!”
지켈리온은 끅끅 숨을 몰아쉬는 목구멍 안에도 독기를 잔뜩 넣어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바르작거리는 인간을 보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은발이 물결처럼 흐르던 여자의 형상 위로 다 자란 아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에이든은 혼곤하게 풀린 입술을
달싹여 알체스테를 불렀다.
“그래. 다음에 보면 장갑을 벗겨보게. 볼 수 있을 거야. 그대가 그리는 여자와 똑 닮은 증표를. 그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생겼거든. 그대는, 어떻게 할 거지?”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9 화
119
단 두 줄로 시작된 소문은 입과 입을 거치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람들은 주술사가 엘리사 티아세를 공격한
이유를 가장 궁금해 했다. 최근 일어난 사건을 살펴볼 때, 엘리사 티아세가 문장 보유자기 때문에 그렇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알체스테 황자님, 전하께 보내는 폐하의 서신입니다. 황자님께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알체스테는 꺼림칙한 얼굴로 서신을 내려다봤다. 그런 중요한 일도 대면해서 말하지 않고 고작 편지로 전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지껄여두었을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렇군.”
알체스테도 무덤덤한 얼굴로 동의하며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뜯었다. 툭, 하고 힘없이 뜯어진 밀랍이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밀랍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불경한 짓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군.”
“중앙회의에 참석하라…….”
서신을 훔쳐본 아제프가 말끝을 길게 늘어트렸다. 어떤 인사말이나 축언도 없이 그저 뜻만 전달한 서신의 필체는
황제의 것이 맞았다. 아제프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지, 그의 얼굴도 조금 찌푸려졌다.
“갑작스럽군.”
권력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회의이기에, 황제와 황태자를 제외한 황족들은 당연히 참여가 제한되었다. 황권을
뒤흔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이젠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칙사를 보내 말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증거까지 손에
들려줬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닐 것이다.
티아세 家와 황궁의 거리는 꽤 가까운 편이었다. 자질을 사용하면 금방 달려올 수 있는 거리였기에 알체스테와
아제프는 함께 황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중앙회의는 달랐다. 회의의 입퇴실은 황제의 허락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켈리온은 자유롭게 움직일 테니, 그런 의도일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내 움직임을 막으려는 생각이거나.”
알체스테는 지켈리온의 흔적을 찾으려 황궁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다. 황궁은 드넓은
곳이기에 아직 잡아내지 못했지만, 조금만 더 파고든다면 꼬리를 잡아챌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우리에게는 좋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 가문을 습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계속 알체스테 황자님을 붙들어 놓는다면 장기전이 될 겁니다.”
***
중앙회의가 열릴 거대한 회의장 문이 열렸다. 황제가 도착하기 전 속속들이 들어온 귀족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알체스테를 훑기 바빴다.
“알체스테 황자님이 아니신가?”
에이든은 루드비히가 멍청해서 그를 곁에 뒀지만,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완벽성을 추구하는 에이든의 눈에는
루드비히가 한참 모자랐기 때문이다.
루드비히가 날뛰고 멍청하게 굴어 제 평판을 깎는 걸 방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했다. 드높은 자존심은 일정선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루드비히는 아무리 졸라도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의자가 보였다. 바로 이 순간, 권력의 중추라는 이곳에 들어와서도 저 자리가 별로
욕심나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다소 염세적인 시선으로 번쩍번쩍한 휘광을 두른 용좌를 살폈다. 저 자리에 앉으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싶어 혐오감이 들었다.
“그런 눈이 아니라, 좀 더 전투적인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자리에 오르고 싶어도 탐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하지만, 내가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버텨야 할 책무가 있다. 문장이 뜯긴 제국민의 귀곡성을 참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일지 모르겠군. 내 아버지의 죄라면, 마땅히 내가 짊어짐이 옳다.”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지그시 바라봤다. 어쩌면 그릇 차이인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제 그릇에 엘제이를 담은
것만으로도 이미 넘쳐흐르는데, 알체스테는 그렇지 않았다.
아제프와 마찬가지로, 제 짝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면서도 다른 곳에도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알체스테는 제 손으로 키운 기사들을 아꼈고, 그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 수도에서 일어난 참사를 진심으로
가슴 아파 했고, 그 일을 막으려 누구보다 더 애썼다.
알체스테가 황제가 되는 일, 나쁘지 않았다. 만만한 황제가 생긴다는 건 농땡이를 칠 기회가 는다는 것과 같았다.
아제프는 이 일이 끝나면 곤란한 일은 알체스테에게 죄다 맡겨두고 엘제이와 함께하고 싶었다.
알체스테에게 일을 떠맡기겠다고 다짐하는 얼굴이 악랄하게 휘어졌다. 그때, 알체스테와 닮은 중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시는군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0 화
120
커다란 외침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자로 잰 듯 일정 높이로 허리를 숙인
이들은 입을 모아 황제에게 축언을 보냈다.
서늘하고 강퍅해 보이는 중년과 무뚝뚝한 인상의 청년이 닮았다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라 사람들의 시선은 두 사람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예.”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관료가 멋쩍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에이든의 시선이 아이젠 곁에 앉아 있는
알체스테에게 닿았다. 서늘한 눈썹이 살짝 움직인 것 같지만, 그리 티 나지는 않을 정도였다.
“알체스테.”
황제의 입으로 부드럽게 발음되는 제 이름이 퍽 낯설었다. 알체스테는 수그렸던 고개를 바로 들고 황제를
마주봤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황제는 평소보다 꽤 온기 고인 눈으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네.”
에이든이 명하자 시종들이 조심히 움직이며 황제의 단상 아래에 의자 하나를 옮겼다. 가까운 곳에 두겠다는 허울
좋은 말로 꾸몄지만, 발아래에 앉으라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명백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알체스테는 새벽녘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나쁘다고 한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저벅저벅- 걷는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알체스테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혹여, 수도가 낯설어 잠을 잘 못 이루는 것이냐. 쯧쯧- 네게는 이곳이 안 맞는
모양이구나.”
위험한 질문이 연달아 흘렀다. 살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이 부자 사이를 감돌자 다른 이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다고 말하면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것이냐 비꼼을 당할 것이고, 싫다고 하면 황제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불충한 놈이 됐다.
“친우?”
“네. 친우입니다.”
에이든은 차가운 눈으로 아제프를 휙 노려봤다. 누구든 저 아이 주변에 걸리는 것들은 다 치워버리고 싶었다. 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낸 것도 다 저런 것들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경전을 벌이면 알체스테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에이든 역시, 날카롭게 박힌 가시를 느꼈는지 얼굴이 서늘하게 일그러졌다. 아랫것을 내려다보듯 오만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잔혹함이 깃들었다.
아제프는 황제가 뭐라고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주제라면 괜히 신경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먼저 말해주는 게 그나마 편한 길이었다.
에이든은 유려하게 대답하는 아제프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저 아이를 물들여 놓은 것도, 저 아이를 멋대로 불러온
것도,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내쫓고 싶은데 그러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고, 토악질이 밀려왔다. 마약에 취한 듯 혼곤한 머리에 예리한 빛이 반짝, 빛났다가 어둠에
밀려 사라졌다.
알체스테는 코를 찌르는 악취를 느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에이든을 뒤덮은 그을음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란델 후작이 말은 바로 했지. 티아세 공녀에 대한 소문 말이다. 공녀가 많이 아프다는데 알체스테,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폐하!”
딸이 불온한 세력에 당했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인 곳에서 한다는 건 아이젠의 가문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거였다.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늘 신중하던 에이든이 선택한 것치고는 꽤 악수였다. 아이젠은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
“아닙니다.”
에이든은 아이젠이 부드럽게 대처하자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렸다. 속에 구덩이가 바글거리는 것처럼 끔찍할 텐데
용케 화를 안 내고 참아내는 걸 보니 독하긴 독한 놈이었다.
“…….”
“공작의 첫째 딸이 후작과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은 들었지. 그럼 둘째가 남는데…… 설마, 마비독에 당한 공녀를
내 아들의 짝으로 붙여주겠다는 말인가?”
알체스테의 시선과 에이든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알체스테의 금안이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에게는 참견할 자격이
없다고. 그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어서 속이 또 울렁거렸다.
총기가 스몄던 눈에는 광증밖에 남지 않았다. 지켈리온이 조절한다고 했지만, 환희에 취했던 탓에 좀 과해진
듯했다.
황제는 멈출 줄 모르는 쏜 살 같았다. 냉기가 내려앉은 회의실 분위기가 보일 텐데, 평소라면 멈췄을 선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불쌍한 공녀를 내가 거둬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움직이지도 못하는 공녀라면, 첩의 지위도 감지덕지가
아닌가.”
들끓던 주전자의 물이 확 쏟아졌다. 해도 해도 너무한 언사에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이젠은 혈색이
어찌나 질렸는지, 그의 얼굴은 공기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폐하.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리사의 옆에 있는 게 누군지. 어떻게 아들의 연인을 탐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질척하게 눌어붙은 금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그 말만을 믿으며 알체스테의 손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젠과 알체스테의 평정심을 빼앗는 게 황제의 목적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저 말을 계속 들어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1 화
121
알체스테가 보란 듯 손등을 내밀어 문장을 자세히 보여줬다. 물끄러미 알체스테의 문장을 보는 에이든의 눈에
벌건 것이 스며들었다.
‘분노?’
아제프는 티 나지 않게 에이든을 관찰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황제는 알체스테의 문장이 신경에 거슬리는
듯했다. 혹은, 문장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아제프는 에이든의 몰골을 꼼꼼히 살폈다. 성마른 몸이야 전부터 그랬지만, 유독 눈 밑이 시커멓고 신경질이 치민
사람 같았다. 예민하면서도 세밀했던 전의 에이든 같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조금 옮기니 황좌를 우악스럽게
쥐고 있는 손이 보였다.
시간이 공기처럼 부유했다. 시간을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속으로 무언가를 삭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황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정무를 볼 시간에 사사로이 황자를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에이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전이라면, 절대 이런 틈을 보이지 않았을
남자였는데 뭔가 이상했다.
“네. 그렇습니다.”
에이든이 알체스테에게 손짓했다.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였다. 알체스테는 한숨을 삼키며 다가갔다.
아제프가 말린 것처럼 이곳에서 황제에게 반항하는 건 좋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은 아니었다.
황제가 고개를 숙여 알체스테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닿을 듯 말 듯 살랑거리는 먹색 머리카락이 부자의
닮은 점이었다.
뱀 같은 혓바닥이 넘실거릴 때마다,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손에 닿는 것도 꺼려질 만큼 음산한 기운이 아비의
몸을 휘감고 그 비열한 혓바닥으로 알체스테의 마음을 희롱하기를 원했다.
에이든이 경박하게 킬킬 웃었다. 배 속에서 벌레 떼처럼 바글바글 움직이는 것이 뜨겁게 몸을 달궜다. 에이든이
이 순간, 느낀 건 쾌감이었다.
“…….”
알체스테의 손에 힘줄이 퍼덕거리며 솟구쳤다. 아직 참아야 하는 걸 아는데, 시간은 그에게만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하기에 알체스테는 두 눈을 감고 침묵을 바랐다.
에이든의 입꼬리가 히죽, 말렸다. 에이든은 알체스테에게 가려 제 얼굴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마음껏 그를 비웃었다.
“감히 나를,”
퍽- 쿠당탕.
“헉! 폐하!”
누군가 급히 숨을 들이키며 신음소리를 냈다. 알체스테의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까이서
던진 탓에 상처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금으로 만든 촛대 끝에 살가죽이 베였는지 피가 흘렀다.
에이든의 심기를 살살 거스르되, 정도를 넘지 않기를 빌었다. 아제프가 강구한 방법은 다른 것이었지만, 지금은
별 쓸모를 보이지 못할 터였다. 방법이 어떻든 결과만 같으면 되는 일이었다.
선택을 끝낸 아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데굴데굴 굴러온 촛대가 그의 무릎에 부딪혀
어두운 색감의 옷에 피를 칠했다.
“폐하, 먼 곳에서 폐하를 뵙고자 찾아오신 황자님이십니다. 서로 떨어져 있던 세월이 긴 탓에 서름한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폐하의 아드님이십니다. 노기를 가라앉히시기를 청합니다.”
절절하게 감읍하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또르르 흘렀다. 적막으로 가득했던 회의실을 뒤덮는 애절한 음색에도 다른
귀족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폐하의 성심을 바라고 한 일입니다. 오랜 세월 황좌를 지키신 폐하께서, 아직 어린 황자님을 너그럽게 봐주실
거라 믿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아들에게, 무얼 그리 동요하십니까?”
“감히,”
퍽-
한 쌍이었던 촛대가 나란히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가격했다. 꾀 많은 남자는 은근슬쩍 고개를 젖혔기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아제프는 많이 다친 척 머리를 조금 흔들며 다시 한 번 청했다.
“폐하, 이곳은 회의실이옵니다. 나라의 정세를 결정짓는 신성한 곳에서 어찌 황족의 피를 흘리려 하십,”
“닥쳐라!”
황제의 입안에서 거친 숨결이 훅훅 흘러나왔다. 그는 도저히 진정하지 못하겠는지 입안을 초조하게 뭉갰다.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알체스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새어 나올 듯했다.
‘나는, 겨우 네깟 것에게…….’
에이든은 고개를 흔들며 망령을 털어내려 애썼다. 토기가 치미는 건 저 얼굴이 역겹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에
울컥울컥 위액이 솟구치는 건 저 표정이 끔찍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짝, 분홍빛의 몽글몽글한 기운이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 있는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인 그 기운은 에이든의 머리를 주무르고 빛을 터트렸다.
“이 시간 이후 너희 둘에게 중앙회의 참여를 금하겠다! 너희의 처벌이 이것으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황제는 자신이 동요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회의를 파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아마,
황제는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이 회의에 묶여 있어야 할 터였다.
***
황제에게 내쫓긴 알체스테와 아제프는 회의실 바로 근처의 빈방에서 치료를 받았다. 황궁 시종들은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겁을 냈지만, 피를 흘리는 황자를 외면하지는 못했다.
지금 회의실 문은 누구의 출입도, 입실도 금하며 굳게 닫혀 있다. 황제가 나오기 전에 치료를 끝낸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
“아주, 잘- 하셨습니다?”
“미안하다.”
“됐습니다. 이렇게 된 거,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황자님이 하실 역할은 스스로 잘 알고 계시겠죠. 오늘 안에
끝을 봐야 합니다. 아니면, 더는……. 선황이 되실 수 없어요. 역사 끝에, 아비를 죽이고 형제를 죽인 비정한
황제로 남을 겁니다.”
이번 기회가 지나면, 에이든을 죽이고 남은 황족도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알체스테도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황좌는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있지만, 도망 다니는 신세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소중한 게 생겼고, 어쩌면
제 가족이 될 이에게 그런 운명을 떠안기고 싶지 않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2 화
122
“저는 도망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산골에 처박혀 살 수도 없어요. 내 아내는, 내 가족은, 지금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제프는 쫓기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했다.
빛이 들지 않는 그늘로 숨어들수록 더러운 때가 끼고, 영혼까지 비천한 구렁텅이에 내던져졌다.
망할 토끼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도,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역시, 그런 일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키링-
푸른 마나가 아제프 옆에서 톡 터졌다. 자질을 가진 그들만이 관찰할 수 있었다. 흰빛이 아닌, 푸른빛.
“이 일마저 해내지 못할 거라면, 하늘은 내게 황제의 자리를 탐하게 하지 않았을 터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명분을 만들어오겠다.”
알체스테는 딱히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턱이 한 차례, 바르르 떨렸을
뿐이었다.
***
얼굴가죽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니 어지간히 웃은 듯했다. 지켈리온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지옥 저편에 잠든 악마의 육체가 켈켈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끄윽, 크하하하!]
“큭, 크……하하하하!”
지켈리온도 악마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끼끼- 두 개의 목소리가 성대를 마구잡이로 긁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뻐걱거리는 두 개의 웃음소리가 겹쳐지고, 다시 하나가 되었다.
지켈리온은 뻐근하게 당기는 배를 살살 문지르며 웃었다. 아직 날이 그리 덥지도 않은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술에 취한 듯도 했다.
키링- 바닥에 얇게 가라앉아 있던 마나가 기이한 신음을 내뱉으며 바르르 떨었다. 흠칫한 지켈리온이 발을
떼어냈지만, 이미 늦었다는 듯 날카로운 얼음이 다발적으로 쏟아졌다.
“큭!”
지배하는 자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마나는 더는 의지를 발현하지 못하고 까만 것들에게 뭉개져 울음을 뚝뚝
흘렸다.
스으으- 흐리게 번진 기묘한 안개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살점을 씹어 삼키고 다시 그의 발목에 모여들었다.
솨아아- 그게 신호라는 듯 대기가 거세게 울음을 토해내며 흔들렸다. 티아세 저택 전체가 꽝꽝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계절감이 바뀌었다. 피부에 소름이 쭈뼛 돋아나고, 얼굴이 시렸다.
“허!”
지켈리온이 몸속 깊이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스산하게 뻗어가는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아제프의 자질이
콰직콰직- 음울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얼음이 쾅쾅- 소리를 내며 쏘아지고, 지켈리온은 그것들을 검으로 쳐내며 저택을
살폈다.
티아세 家 전체를 겹겹이 둘러싼 마나 때문에 속이 매스꺼웠다. 지켈리온은 인간의 의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렁뱅이처럼 미천한 것들이 살아 있다고 꿈틀거리는 게 역겨웠다.
“아제프!!!”
콰다당탕-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켈리온은 그제야 이 저택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를 까드득-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계획이 틀어졌다. 단순히 그를 경계하기 위해 자질을 둘러놓은 것이
아니었다. 농도 짙은 자질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이 저택에는 문장 보유자가 없다는 사실을 지켈리온에게 숨기기 위해 코를 찌르는 제 자질을 알싸하게 뿌려놓은
거였다.
지켈리온이 분기 찬 얼굴로 다가오는 공격들을 쳐내며 코를 씰룩거렸다. 흉흉한 얼굴이 잡히기만 하면 사지를
비틀어버리겠다는 듯 포악했다.
지켈리온이 짓씹듯 두 사람의 이름을 발음하며 흉흉한 낯빛을 굳혔다. 두 놈의 짓임이 틀림없었다. 이곳 말고
진짜 그녀들을 보호한 곳에는 알체스테의 자질을 둘러놓아 문장의 기척을 감춘 게 틀림없었다.
지켈리온이 재빠르게 알체스테의 기척을 더듬었다. 올 때부터 번쩍번쩍 제 존재를 과시하던 아제프의 자질에 비해
알체스테의 자질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피잉-
얼음 하나가 지켈리온의 머리를 노리고 솟구쳤다. 재빨리 고개를 젖혔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목덜미가
길게 베여 피가 송골송골 새어 나왔다.
“이건,”
피잉! 피잉! 지켈리온은 뭐라 판단하는 걸 그만두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남은 의지를 지키는 자질이었다.
지배자를 잃은 이상 이빨이 빠진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것들은 다시 날카로움을 되찾아갔다.
‘설마?’
콰앙!
지켈리온은 사납게 일렁이는 얼음을 피하고, 횡으로 길게 베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이를 꽉 사리물었다.
아제프가 가볍게 손짓했다. 티아세 家를 꽝꽝 얼릴 정도로 퍼트려 놓은 자질들이 즉각 그의 부름에 답하며 윙윙-
울었다. 지켈리온을 노리고 하늘에서 얼음기둥이 쏟아지고, 그는 황급히 아제프의 곁에서 물러났다.
“그대, 설마 이걸 위해?”
확실히 지켈리온은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분신보다 본체가 강한 건 당연했으나, 만만히 봤다가는 아제프가
역으로 당할 터였다.
아제프는 지켈리온의 본체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이는 알체스테도 마찬가지였다. 아제프는 미지의 적을
위해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자질을 얇고 농후하게 깔았다.
티아세 저택에는 무리가 가겠지만, 이곳은 하나의 빙산이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온전히 아제프의 영역이라는
소리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3 화
123
지켈리온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물 외벽이 무너져 떨어졌다.
지켈리온은 바닥을 구르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제프는 굳이 지켈리온에게 답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제프의 손에 유서 깊은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속에는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놈과 여기서 싸운다면, 저택이 다 무너질 겁니다. 아니, 그전에 자질을 퍼트린다면,
분명 건물에 무리가 갈 텐데요. 다시 이곳에서 사시려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겁니다.]
“빌어먹을!”
아제프는 대충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제프의 자질로 범벅된 곳이었으니, 더욱
쉽지 않았다.
아제프는 복수에 불타올라 제 한 몸을 내던져야 했다. 그래야만 악마가 그의 영혼을 갈취할 수 있었다.
퇴로는 막혔고, 사방에 둘러싼 자질들 때문에 쉽게 몸을 물릴 수는 없었다. 지켈리온은 아제프의 정신을 좀
망가트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
“…….”
“…….”
“……헛소리.”
악마는 시간의 궤도가 비틀린다고 해서 달리 영향을 받진 않는다. 악마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신과 세상에 외면받는 비틀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기억을 공유하는 지켈리온 또한 3 살의 나이로 으깨져 죽던 엘제이 티아세를 알았다. 그는 비명을 끅끅
지르며 바동거리던 어린 육체를 떠올렸다.
‘헛소리.’
[제이, 이건 무슨 뜻이에요?]
[삶. 삶이라는 단어예요. 겹받침 단어라 제법 어려운데, 잘 적었네요? 제가 이 단어를 알려준 적 있었나요?]
[네. 전에 배웠어요.]
아제프의 다리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휘청거렸다. 아제프의 검신이 땅으로 깊이 내리꽂혔다. 파도처럼 떠밀린
얼음이 발밑에 솟아오르긴 했으나 지켈리온은 여유롭게 그걸 피하며 아제프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아제프의 주위만 맴돌며 차마 침범하지 못했던 것들이 끽끽- 소리를 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제프…….]
그녀의 고백에 벅차올랐던 가슴에 돌덩이가 우르르 쏟아졌다. 쾅쾅 내려찍는 그것이 가슴을 으깨고, 핏물이 줄줄
흐르는 그곳을 들췄다.
털썩 쓰러진 무릎 위로 진한 흙물이 들었다. 아제프는 더럽게 엉기는 진흙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증거……?”
“이제 말할 마음이 좀 생겼나? 아아-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첫 죽음은 애달프고도 가련했지. 워낙 오래된
일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는, 지금과 같은 예쁜 얼굴로는 죽지 못했네. 몸이 다 으깨졌거든.”
지켈리온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맹렬히 내치는 공격은 매서웠지만, 아제프의
동공은 지켈리온은 너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아제프는 여기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더 들었다가는 그를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가 완전히
열어젖혀질 걸 알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린 마음은 때를 놓쳐버렸다. 호시탐탐 그만을 노리던 검은 것이 비좁은 틈을 비집고 아제프의
두개골을 찌걱찌걱 벌리며 들어갔다.
조그만 엘제이는 예뻤다.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어린 소녀가 어린 아제프를 빼꼼 훔쳐봤다. 매섭게
흔들리는 겨울바람이 하얀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싱그러운 녹안에는 상처투성이의 소년이 비쳐들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늘어진 몸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그녀의 흔적은 피가 뒤엉긴 밀색 머리와 빛을
잃지 않은 녹안뿐이었다.
운명의 바위는 예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운명을 비틀어 놓은 괘씸한 소녀에게 벌을 내렸다. 퉁퉁 부어
흐릿하게 뜨인 눈이 얼핏, 휘어졌다.
엘제이는 또 한 번 그 길을 걸었다.
“아아아악!!!!!!! 아아악!!!!!!”
아제프의 비명이 숨통을 쥐어짜며 흔들렸다. 비통이 검게 눌어붙은 목소리가 처절하게 으깨졌다. 그는 진심으로,
괴로웠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4 화
124
마치 지휘자가 된 것처럼 까딱까딱 움직이는 손가락은 경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켈리온은 한동안 꺽꺽거리는
목소리를 눈을 감고 즐겼다. 그가 저 영혼을 취한다면 매일 저 음률을 즐길 수 있을 터였다.
“제이…….”
아제프가 작은 목소리로 엘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뭉개지던 몸이 눈에 선해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죽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아제프가 흐느껴 울자, 바닥에 눈물이 뚝뚝 고였다. 그를 둘러싼 마나들이 아제프의 감정에 동조하며 윙윙-
시끄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아제프는 확실히 똑똑했다. 유능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기껏 21 년을 살아온 청년일 뿐이었다. 아제프보다
노회한 늙은 영혼도 꺼떡꺼떡 삼켜온 지켈리온에게는 그를 뒤흔드는 것쯤은 큰일이 아니었다.
지켈리온은 오로지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왔다. 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지금처럼 그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악마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극상의 쾌락을 맛보고 싶었다.
세상의 오물을 닮은 남자는 하늘을 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파랗게 일렁이는 벽안을 응시했다.
“그녀의 비명이, 고통이, 신음이, 처절함이, 괴로움이! 누구 때문인지 알려줄까? 그녀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겠지?”
“…….”
텅 빈 얼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제프는 그저 광대처럼 움직이는 지켈리온을 멍하게 바라봤다.
뻐걱뻐걱 신음을 내지르며 돌아가는 머리가 힘겹게 굴렀다. 아제프의 눈에 파란 불똥이 툭 튀었다. 복수심이 그를
일깨웠는지, 아제프의 다리에 힘이 순간적으로 돌아왔다.
지켈리온은 흐느적거리는 아제프를 나른한 눈으로 바라봤다. 맛있는 먹잇감이 그의 목구멍을 향해 꿀떡꿀떡
기어왔다.
“아ㅡ.”
아제프의 귓가에 이명이 맴돌았다. 삐ㅡ 길게 울리는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괄괄 울렸다. 아제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목구멍에 모래알이 낀 듯 버석거렸다.
“아아악! 아아아아아!!!!”
비통에 젖어 대기를 찢어발기는 비명이 다시 시작됐다.
***
프리멧사의 여신상 아래에 무릎을 꿇은 엘제이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열렬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프리멧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아아악!!!!!!! 아아악!!!!!!]
사랑하는 사람의 비명이 귓가에서 맴맴 울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엘제이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언니? 왜 그래?”
“응? 황자님이 그러셨지. 인질로 잡히면 안 되니까 여기 있으라고 하셨잖아. 두 분은 할 일이 있다고. 아버지는
회의실에 계시고.”
엘제이가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엘제이는 아제프 곁에 있어봤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폐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마차가 전복될 때 그의 짐이 되었던 사실을 잘 아는
엘제이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신님? 또 꿈?”
“언니, 왜 그래?”
엘제이는 동생의 걱정에 괜찮다고 해줄 정신이 남지 않았다. 분홍 기운이 뭉글거리며 커지더니 프리멧사의 몸이
조금씩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프리멧사의 기척은 눈치챌 수밖에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콰직- 짓눌리는 느낌과는 달랐지만, 폐부에 들이차는
기운이 여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알렸기 때문이다.
“여신님?”
프리멧사는 여전히 멍한 엘제이의 볼을 매만지며 싱긋, 웃었다. 사랑의 여신다운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어휴! 정신없어! 이리저리 벌여놓은 일은 많지, 수습은 내 몫이지! 하여간, 다들 고상한 척만 하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너무 바빠 이제야 너를 보러 왔구나.]
프리멧사는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주지 않는 다른 신들을 속으로 욕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아이의 목숨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프리멧사뿐인 듯했다.
“......아.”
아제프는 역시 제법 머리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엘리사가 마비독에 당했다는 소문을 퍼트려 에이든과 지켈리온을
안심시키고, 함정을 팠다.
회의실에 제 발을 묶어두려던 황제를 역이용해 황제의 발목을 묶어버렸고, 두 남자가 떠난 티아세 家를
습격하려던 지켈리온을 오히려 그곳에 묶어뒀다. 자매를 황궁의 신전에 두어 알체스테가 가까이서 지킬 수 있게
하였고, 결론적으로 자매는 싸움판에서 멀어졌다.
다만, 아제프는 아직 어렸다. 아제프의 정신은 그의 생각보다 연약한 구석이 있었다. 개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 필요 이상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아제프 혼자 그를 상대하기는 버거워 보였다.
프리멧사는 아제프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움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꼈다. 매번 제 아이를 괴롭히는 놈이
괘씸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아픈 걸 보면 그놈 역시 제 아이인 듯싶었다.
“네?”
[아아악! 아아아아아!!!!]
프리멧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지켈리온이 또 아제프의 마음을 긁는 모양이었다. 피울음이 먹먹한 목소리에
프리멧사와 엘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아제프는 타락하지 않았고, 그 앞에서 엘제이를 죽이겠다는 지켈리온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으니 아직 죽지는
않겠지만, 울부짖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엘제이가 다급히 외치며 프리멧사의 소매를 당겼다. 무엄한 짓이었지만, 귓가에 뎅뎅 울리는 목소리가 애틋해서
엘제이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가만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엘제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괴롭히며 이마를 좁혔다.
프리멧사가 손을 휘저어, 공간을 비틀었다. 뿌옇게 서린 분홍빛 기운이 엘제이의 볼을 간질였다. 프리멧사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엘제이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여신님?”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5 화
125
“……?”
엘제이는 프리멧사가 그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주었는지 잘 알았다.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엘제이는
프리멧사에게 끌렸다.
[어머니.]
엘제이의 속삭임에 프리멧사는 생각도 못 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웃었다. 온화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다정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엘제이가 사과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프리멧사는 단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해 마땅히 그녀가
누려야 할 것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프리멧사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은 계속 엘제이 곁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되도록 천천히 다시 만났으면 좋겠구나. 부디, 네 앞길에 언제나 행복이 넘쳐흐르기를.
빌어먹을 놈도 함께.]
프리멧사가 장난스럽게 아제프를 덧붙이며 손을 휙 휘저었다.
[…….]
프리멧사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엘제이의 귓가를 간질였다. 바람에 꺼질 듯 작았지만, 이미 사라진 엘제이의
귓가에 앉기에는 충분한 목소리였다.
***
“아아ㅡ 끅,”
아제프는 깊이를 모르는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끅끅거렸다. 지켈리온이 그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제프는 제 내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차라리 지켈리온이 아제프를 죽이려는 살심이라도 있었으면 생존본능이 그의 정신을 일깨워줬을지도 모르지만,
지켈리온은 아직 아제프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저벅저벅, 질척하게 말라붙은 진흙이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지켈리온의 신발에서 떨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휘익, 채찍처럼 휘어진 초록빛 줄기가 그 틈을 타 지켈리온을 멀리 내리쳤다. 더러운 것을 치우듯 싸늘하게
내리치는 공격에 휘말린 지켈리온이 저 멀리 날아가 땅에 부딪혔다.
“윽! 우웨에엑!”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목덜미가 타들어갈 것 같았다. 지켈리온은 목덜미를 손톱으로 바득바득 긁으며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소란에 아제프의 얼굴이 살짝 기울었다. 빛이 그를 품듯 쏟아져 그의 귓가에 달콤한 노래를 읊조렸다.
엘제이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닮은 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이건, 설마?”
“꺄아!”
엘제이가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자 굳은살이 박인 손이 올라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당황한 듯 더듬더듬 그녀의
체온을 확인하는 손짓에 엘제이의 속눈썹이 팔랑 흔들렸다.
“…….”
봄이 다가오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풍성하고 안온한 계절은 아무리 혹독한 겨울바람이 불어도
다시 돌아왔다. 찬 기운을 몰아내고, 눈 덮인 땅을 헤집어 녹이는 고된 일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다.
아제프는 검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그러쥐며 지켈리온을 노려봤다. 조금 전에는 이상한 어둠에 홀려 당했다지만,
두 번은 없었다. 그는 엘제이를 죽인 게 제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제프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살려달라고 울고 비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제프는 이제
성장했다. 그에게는 엘제이가 있었고, 그는 더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
프리멧사가 속삭인 음색이 엘제이에게 닿은 건 그때쯤이었다. 아제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안겨 있던
엘제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제이?”
아제프는 지켈리온을 주시하던 시선을 떼어 황망한 표정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데, 아래에서 휙휙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아제프는
장소도 잊고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아제프는 아연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봤다. 저택이 쓰러지고 나무가 뭉개진 장소는 황폐했고, 무엇보다 아직
지켈리온이 살아 있었다.
아제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데굴데굴 굴러오는 토끼를 제 손으로 밀쳐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비록,
상황이 몹시 그러했지만.
“빌어먹을!”
태초의 문장은 언제나 한 쌍이지만, 아제프는 악마에게 집어 삼켜진 후유증이 남아 문장을 가질 수 없었다. 삶이
번복되었지만, 악마는 아제프를 집어 삼켰던 기억을 잊지 않았고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먹물이 번져 싹을 틔울 수
없었다.
아제프를 대신해 엘제이가 한 쌍의 문장을 나란히 품고 있었고, 황폐하게 일그러졌던 밭에 기운이 돌아오자
그에게 그 몫의 하나를 넘겨주었다.
“……그것?”
아제프는 그제야 엘제이가 말하는 게 아기가 아님을 알았다. 엘제이가 아이를 그것이라고 칭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사무친 그리움을 씨앗에 묻히고, 생이 끝나는 순간에도 애절했던 사랑을 씨앗에 품었다. 혼 깊이
숨었던 씨앗이 길게 몸을 일으키며 그들의 마음을 새겼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6 화
126
초록색 섬광이 요동치듯 일렁였다. 마지막 빛을 터트리듯 강렬하게 빛나는 빛의 향연에 지켈리온은 다리가 땅에
박힌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툭. 툭. 작은 소음이 연달아 울렸다. 엘제이의 손목을 적시는 건 아제프의 눈물이었다. 엘제이는 축축하게
번지는 투명한 것들과 눈물이 줄줄 흐르는 뺨을 보며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아제프……?”
아제프는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시간이 꽤 흘러서, 엘제이의 마음을
완전히 확신했을 때, 그는 더는 문장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는 욕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간은 쉽게 달라지지 않아요. 나는 이
순간이, 너무 기꺼워. 당신이 내게서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내게 존재한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뻐.”
아제프는 고해하듯 속삭였다. 엘제이가 죽는 모습을 다 봐놓고도,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면서도,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에 괴로워하면서도, 이 순간이 기꺼웠다.
혹시, 누군가가 이것을 빼앗고자 한다면, 그는 이성을 잃은 개처럼 눈을 빨갛게 물들고 달려들 게 뻔했다.
‘당신의 희생을 딛고 올라선, 당신의 핏물을 머금고 피어난, 이따위 것을 사랑해버려서, 소중하다고
생각해버려서……. 미안해요.’
엘제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게 기댈 듯 휘청거리는 무거운 몸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무겁고, 발목이 금세 꺾일 듯 휘청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억겁 같았던 시간이 지나, 그는 원하던 걸 손에
넣었다. 엘제이는 그저 그에게 이것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엘제이의 눈은 온전한 기쁨만을 담았지만, 아제프는 그렇지 않았다. 마주친 눈은 기뻐하는 듯했지만, 괴로워하는
것도 같았다.
“쿨럭! 젠장!”
엘제이는 악마의 천적이었다. 애초에 엘제이가 악마에게서 아제프의 혼을 돌려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고결한 영혼을 악마가 이해할 리 없었다.
‘프리멧사, 그년이!’
지켈리온은 쿨럭쿨럭 기침을 뱉으며 프리멧사를 욕했다. 깔깔깔 웃는 여신의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녀는
지르밟듯 지켈리온의 속을 진탕으로 만든 뒤에야 물러났다.
[쯧.]
“젠장!!!!!”
지켈리온이 이성을 잃은 것처럼 광분하며 새까만 대검을 휘둘렀다. 휘청거리는 몸과 달리 제법 날렵한 공격에
아제프가 정신을 차리고 엘제이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검격이 검에 부딪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켈리온은 그대로 땅을 밟고 달려 나갔다. 빠르게 이어지는 공격을
육안으로 알아채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엘제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헛소리!”
아제프가 냉정하게 일갈하며 번잡스러운 공격들을 쳐냈다.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지켈리온의 흔적을 더듬었으나,
파란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지켈리온이 이를 꽉 사리물었다.
지켈리온의 망막에 목이 부러져 쓰러지는 엘제이의 환영이 떠올랐다. 새까맣게 그을린 것은 더는 탐할 먹잇감이
없자 지켈리온의 몸을 뒤덮었다.
20 년이란 시간을 들여 조심조심 봉인을 깬 것은 한낱 미물의 몸으로 악마의 힘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 하지만,
지금 지켈리온은 그런 것을 떠올릴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환각이 눈앞을 붉게 물들였다.
“으아아아악!”
아제프는 이성을 잃은 들개처럼 그저 갈급함에 휩싸여 먹이를 물어뜯으려고 하는 지켈리온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멍청해졌군. 왜지?”
아제프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그의 손바닥이 땅을 향했다. 은밀하게 퍼진 마나가 엘제이가
딛고 선 땅에 축축이 내려앉아 한 겹 한 겹 쌓였다.
“아제프!”
‘기분 나쁘군.’
지켈리온은 전의를 상실한 듯 멍하니 서 있는 아제프를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엘제이에게 달려갔다.
“눈 감아요.”
쿠르릉, 콰아아앙!
“쿨럭!”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기둥이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피워냈다. 지켈리온이 피를 내뱉으며 고개를 꺾었다. 온몸을
꽉 옥죈 가시들이 내장 전체를 찔렀다. 그도 살아 있는 몸인 이상, 소생은 불가했다.
“퉤!”
“크윽, 젠장!!!!!!!!!”
지켈리온이 발버둥 치며 얼음을 으깨고 부쉈다. 그의 발버둥이 심해지자 덤불들은 오그라들며 그의 팔을 찌르고,
다리를 베고, 내장을 파고들었다. 지켈리온은 움직임이 점점 멎어들었다.
‘미친 건가?’
너무 쉬워 허무할 정도였다. 프리멧사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아제프는 미심쩍은 얼굴로 지켈리온을
바라보다가 검을 높게 들었다.
하얀 대검이 뚝 떨어져 목덜미를 날카롭게 베어냈다. 일자로 깨끗하게 잘려 떨어진 머리는 땅에 쏟아져
얼어붙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끄윽! 끅! 제기랄!!!!!!]
황급히 지옥에서 벗어나 아제프에게 달려들었던 악마가 핏줄기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거세게
버티더라도, 지켈리온과 악마는 본디 하나. 악마의 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핏물이 번졌다.
서걱-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7 화
127
아제프가 지켈리온을 상대하는 동안, 알체스테는 황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무수히 많은 문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 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서지 못하는, 보루.
알체스테는 황제의 허락도 없이 그곳을 내디뎠다. 황궁을 수비하는 병사가 알체스테의 앞을 막아서고, 덤벼들었다.
황자의 신분으로도 그들을 협박해 막아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제프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알체스테는 증거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되도록 몰래 일을 끝내려고
했지만, 황궁을 지키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빠르게 물리치며 내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황제의 내실에는 알체스테를 말리려는 기사들과, 증거를 찾으려는 알체스테의 싸움이 번졌다.
아마, 그때쯤에는 황제에게도 소식이 들어간 듯했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기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다급해진
알체스테는 결국 제국의 역사가 녹아든 황제의 내실을 부쉈다.
평소라면 검의 길을 걷는 기사를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알체스테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기사들의 얼굴을 외면하며 황급히 벽장을 더듬었다.
더듬거리는 손이 벽장 아래의 무언가를 꾹 눌렀을 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알체스테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내려갔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주술사들, 탁자에 길게 늘여진 저주의 흔적, 희생당한 것 같은 어린아이의 시체.
***
중앙회의가 급하게 파하고 몇 시간도 흐르지 못해, 알체스테에 의해 다시 귀족들이 소집되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는 중앙회의실에 들렀다가 곧장 황제를 가둔 방으로 향했다.
철썩-
지켈리온이 소멸하면서 에이든에게 흡수된 그의 흔적도 소멸했다. 찌걱찌걱 말라붙은 점액질은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였지만, 에이든은 마음은 여전히 새까맣게 타올랐다.
“…….”
말을 섞기도 싫다는 태도에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흘긋, 바라보았다. 알체스테와는 달리 아제프는 꽤 여유가
넘쳤다.
그토록 얻고 싶었던 엘제이의 문장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지켈리온은 죽인 뒤, 회의가 열리기 전 몸을 씻으며
한참이나 문장을 바라봤지만, 또 보고 싶었다.
“아제프.”
“아ㅡ.”
아제프는 상황도 잊고 싱글싱글 웃으며 에이든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이든을 조롱하는 태도였다.
“뭐라고 하셨죠? 해독약? 아아, 그건 감사합니다. 오해해주신 덕에 여러모로 꽤, 쉬웠어요. 권력의 말미가
꽤나 싱겁더군요.”
‘오해?’
에이든은 저잣거리에 소문을 퍼트린 놈이 아제프임을 깨달았다. 워낙 아이젠과 알체스테의 반응이 흉흉했던 탓에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았건만,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던 거였다.
“감히 네놈이!”
에이든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제프의 뺨을 내리치려고 했지만, 아제프는 알체스테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턱-
가볍게 붙잡은 손을 으스러지듯 부여잡자 육체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에이든은 신음을 삼키며 이를
갈았다.
에이든은 줄줄이 두었던 악수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그가 한 짓이 맞았고, 그가 바라는 게 맞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감히 나를 속여?’
“동지를 찾으십니까? 안타깝게도 폐하, 아! 더는 폐하가 아니시니……. 그렇죠. 당신이라고 칭하면 되겠군요.
당신의 동반자는 이미 몸만 남은 상태입니다. 시신이 궁금하시면, 한번 보여드리는 아량 정도야 베풀 수
있습니다.”
“…….”
알체스테는 심기가 복잡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서서 에이든을 서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에이든을 굳이
찾아온 건 해결되지 않은 궁금함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내팽개치듯 에이든의 팔목을 놔주고, 참 이상하다는 듯 에이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에이든은 정말 억울한 듯했다. 뭐든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게 같잖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에이든을 비웃었다.
“하! 됐습니다. 시간낭비하기도 싫군요. 이것만 묻고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겠습니다. 소피아 엘린델. 혹시 이
이름을 기억합니까?”
눈을 가늘게 뜬 에이든이 아제프의 얼굴을 더듬듯 바라봤다. 아제프 란델은 입양아였고, 입양되기 전의 그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자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오래 기억할 것도 없었다. 에이든의 취향은 언제나 실비아를
닮은 여자였으니까.
아제프는 실비아와 닮았다. 정확히는 소피아를 닮은 거였지만, 에이든이 보기에는 그랬다. 실비아의 이목구비가
남자로 바뀐 탓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제프가 더 어릴 적에 그의 얼굴을 봤다면 떠올랐을지도 몰랐다.
“뭐?”
아제프는 그저 아이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는 복수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행복이 흐르는 강물에 굳이 시커먼 진흙을 덕지덕지 펴 바를 이유는 없었다. 아제프는 더 이상 복수에 눈이 멀지
않기로 다짐했다.
에이든은 멍하니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에이든의 눈에 흉악한 기운이
들어찼다. 에이든은 알체스테를 바라보며 실비아를 떠올렸다.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은 그저 저를 마음껏 휘두르고 싶었다는 것을요. 제가 분노해 당신을 죽이기를
기다립니까? 제가 아비를 죽이고 황좌에 오른 패륜아로 남길 원하신다면, 저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뭐?”
“당신은 여전히 황궁에서 머무를 겁니다. 가장 춥고, 어두운 황궁의 독방에 갇혀 평생을 사세요. 돌봐줄 이 없고,
당신의 말에 복종하는 이 없으며, 당신에게 휘둘릴 이 없는 고독한 곳에서 평생을 사는 것. 그게 제 복수입니다.
부디, 허무하게 살아주세요.”
“감히, 감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8 화 (完)
128
엘리사와 아제프는 천적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싫어했고, 사사건건 티격태격 싸웠다. 엘리사가
아제프에게 이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엘리사는 여전히 아제프만 보며 손톱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었고, 아제프는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엘제이는 엘리사와 함께 입궁을 한 뒤, 혼자 황궁의 신전을 종종 찾아들었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의 출입을 묵묵히
허락했고, 아제프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언니! 오늘도 또 신전에 갈 거야?”
황후의 자리가 내정된 엘리사의 명령에 시녀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엘제이를 졸졸 쫓아갔다.
엘제이는 엘리사가 시녀들을 붙였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엘리사가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기도실, 비었나요?”
“물론입니다.”
엘제이가 기도실 문을 열자, 시녀들은 더 이상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엘제이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기도실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이 프리멧사의 여신상을 더듬었다.
“오늘은 프리딘에 들러 아이들의 생활을 살피고 왔어요. 시아가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델릭이라는
아이가 유독 영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엘제이는 프리딘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봐주고는 했는데 시설이
크지는 않아도 꽤 쾌적했다.
엘제이는 베아르시 제국의 어려운 사람 모두를 도와줄 순 없었지만, 프리멧사의 이름을 빌려 종종 선행을
베풀고는 했다.
프리멧사는 그 이후로 현신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신전을 내려다보며 엘제이의 모습을 감상하고는 했다. 흰 뺨이
싱긋 웃으며 씰룩거렸다. 프리멧사는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엘제이의 뺨을 매만지듯 덧그리며 웃었다.
엘제이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시설을 세웠고, 아제프는 그녀를 도와줬다. 프리딘은 완전히 베푸는 게 아니라,
베푼 만큼 거둬들이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다행히 프리딘에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몰리지는 않았다.
프리멧사가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고 아제프를 칭찬하는 엘제이에게 반박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엘제이에게
닿는다면 그리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엘제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프리멧사는 대놓고 투덜거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고 문장을 건네는 건 아니었지만, 프리멧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아제프를
타박했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은 듯 환하게 빛나는 그를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면서도, 괜히 뿔이 났다.
엘제이의 둥근 뺨으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그녀는 프리멧사의 석상을 보다가 그리움이 얼룩진 눈물을 흘렸다.
프리멧사가 엎드렸던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했다.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남신이 없었다면,
프리멧사는 필히 그러했을 거였다.
켈레덴이 무심한 눈으로 한 차례 엘제이를 훑으며 프리멧사를 종용했다. 프리멧사는 아이처럼 볼을 부풀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인만큼,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만약 아제프가 기도실에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프리멧사는 얌전히 켈레덴을 따라갔을 터였다.
[…….]
“조금쯤은, 고마울지도…….”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아제프?”
아제프가 작은 유리상자를 내밀며 웃었다. 엘제이가 잡아도 차갑지 않게 예쁜 유리로 상자를 만들고,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들에 보석을 박아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엘제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신음하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보석이 곳곳에 박혀 다양한 색감을 내는 그것은
토끼의 집이었다.
엘제이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아제프는 싱긋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꼬마 엘제이가 될지 꼬마 아제프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하나면 충분했다.
샐샐 웃으며 미끄러지는 숨결에 엘제이는 호흡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상자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엘제이는 신전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아제프를 말리진 못했다.
“처음……?”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고, 나를 구원해준 것도 당신이 처음이었으며, 내 생에 유일한 것도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러니 책임져주세요.”
“네?”
엘제이는 당당한 얼굴로 책임지라고 선언하는 아제프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제프가 빙긋 웃으며 엘제이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초록빛의 반짝이는 아첼의 신록이 반지로 가공되어 엘제이의 손에서 반짝였다. 베아르시 제국의 남자는 청혼할 때,
여자의 눈 색과 같은 색상의 보석을 선물했다.
“아ㅡ.”
흔들리는 상자를 단단히 쥐다 보니, 엘제이의 등은 어느새 벽에 닿아 있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며 웃었다.
아제프는 제게 들어오는 엘제이의 향기를 맡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키스를 받았다. 말캉거리는 신체가 축축하게
뒤엉겼다.
‘죽어서도 내 옆에 있어줘.’
[저! 저놈!]
아제프의 속내를 읽은 프리멧사가 성을 내며 파닥거렸지만, 켈레덴은 그녀를 붙잡으며 현신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뒤, 신전에서 생긴 일은 아제프와 엘제이의 기억에만 남았다. 별일은 없었다. 아제프는 단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계속 속삭였다.
비틀린 운명은 구원에게 끌렸다. 구원은 그를 놓지 않았으며, 비틀린 남자는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구원은
그의 옆에 존재했다.
-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9 화 에필로그(1)
129
봄이 막 몰려와 씨앗을 한가득 뿌렸고, 겨우내 차가웠던 땅은 봄의 온기와 축복을 받아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우거지는 계절, 푸름에 휩싸여 그들의 인연은 넝쿨처럼 깊숙이 얽혔다.
먼저, 두 사람의 나이가 변했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사이좋게 나이를 한 살씩 먹어, 아제프는 22 살이, 엘제이는
20 살이 되었다.
엘제이의 20 번째 생일은 아제프가 그토록 기다리던 성년의 날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계획했고, 아제프는 그가 원하는 걸 얻어냈다.
엘제이 티아세는 엘제이 란델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티아세 영애가 아닌, 후작 부인 또는 란델 후작 부인으로
불렸다.
바로 지금처럼.
엘제이는 눈을 반짝 떴다. 잠자리에 예민한 아제프의 성격상 그들의 침실에는 늘 암막커튼이 길게 내려와
있었기에,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다.
“하암ㅡ.”
아제프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발끝을 세우고 총총 걸어간 엘제이가 커튼을 살짝 젖혀
창밖을 내다봤다.
따스한 기운이 몸을 훑으며 지나가자, 엘제이의 눈가가 나긋하게 풀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햇살은
더는 엘제이의 눈을 괴롭히지 않았다.
“잘 잤어요?”
신혼생활이 시작된 이후 엘제이가 먼저 일어난 건 처음이라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는 곧 참지 못할 기분을
느끼고 일어났다. 아제프는 곧장 걸어가 엘제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으응- 좋은 아침이에요.”
“졸려요? 더 잘까?”
더 자겠다고 말하면, 다른 의미로 침대에 끌려갈 게 뻔했다. 아제프는 어젯밤의 정념이 가시지 않았는지
지분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둥글게 말려 올라간 슈미즈가 엘제이의 가슴께에 닿았다.
“아제프, 잠깐 으읏,”
아제프는 발발 떠는 다리를 못 본 체하며 엘제이의 배꼽 주변을 느리게 핥았다. 축축한 혀가 미끄러지듯 내려가
얼핏 한 장 남은 얇은 천자락을 들출 듯 말 듯 장난을 쳐댔다.
“아으! 흐응-.”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헐떡거렸다. 힘이 풀린 손가락이 천자락을 놓치자 아제프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실크가
쏟아졌다.
“하지만,”
졸음에 휩싸인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는 침대가 아니었다. 엘제이는 억울했지만, 입술만 웅얼거릴 뿐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미끄러지듯 올라간 손이 슈미즈 자락을 들춰내며 빠져나왔다. 아제프는 다시, 엘제이의 손에 그것들을 쥐여 주며
그녀의 몸을 눈으로 쭉 훑었다.
살짝 들어온 햇살을 탐욕스레 머금은 피부는 하얗게 반짝거렸다. 부서지는 햇살보다 아름다운 피부에 아제프가
성난 사람처럼 돌진했다.
“다리 좀 올려 봐.”
아제프가 엘제이의 귓가에 속삭이며 허벅지 아래에 손을 집어넣었다. 엘제이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아제프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엘제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걸 기다리지 못했다.
늘 그렇듯 부끄러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 아제프가 허벅지를 틀어쥐며 창문 쪽으로 다리를 꺾어
올렸다.
“아악!”
눈을 둥글게 뜬 아제프가 황급히 엘제이의 다리를 내려주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인상을 찌푸린 아제프가 커튼
자락을 확 걷어냈다. 반쯤 헐벗은 몸에 빛이 하얗게, 스며들었다.
“젠장.”
엘제이는 안전하게 침대에 다시 누웠다. 이 자리에 돌아오는 순간 허겁지겁 입술을 삼켜댈 것 같았던 남자는
점잖은 얼굴로 돌아와 엘제이의 뺨을 매만졌다.
“그래도 미안해요.”
아제프는 얇은 천자락 사이로 보이는 울긋불긋한 치흔을 바라보며 반성했다. 그가 종을 살짝 흔들자, 곧 욕실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는 꽤 오랫동안 갈급함에 시달렸다. 결혼 전까지는, 그녀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며 스스로
고삐를 당긴 탓이었다.
아제프는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그는 오늘은 진짜, 아무 짓도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제프, 풉! 아하하하!”
“쉿! 이리 와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더 깊이 반성의 늪에 잠기기 전에 그를 끌어당겼다. 침대에 털썩 쓰러진 아제프 옆으로 재빨리
굴러간 엘제이가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콸콸콸- 욕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제프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물이 다 찼는지 끼릭-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린 아제프는 부끄러움이 많은 엘제이를 위해 한 번 더 기척을 살폈다.
욕실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 벌써 물 다 받았어요?”
“으음-.”
“못 본 척해도, 이미 다 본 거 아는데요.”
아제프는 적당히 뜨거운 물 온도를 손으로 확인해본 뒤 조심조심 엘제이를 바닥에 내려줬다. 아제프는 예술품을
감상하듯 엘제이를 쭉 훑어보다가 장난스럽게 입매를 올렸다.
“자, 이제 벗으세요.”
“……네?”
“안 벗고 들어갈 건 아니잖아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0 화 에필로그(2)
130
“아제프!”
얼굴이 달아오른 엘제이가 거의 울먹이듯 소리치며 그의 팔뚝을 다시 노렸다. 찰싹찰싹, 피부가 마찰되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지만, 아제프는 기꺼이 제 팔뚝을 내주며 싱그럽게 웃었다.
곧 함께 목욕할 생각을 하니,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맞으며 그녀의 옷을 위로
당겼다.
아이처럼 홀라당 벗겨진 엘제이가 미처 가릴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을 쭉 훑어본 아제프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워요.”
“…….”
아제프의 칭찬에 엘제이의 머리에서는 작은 화산이 퐁, 터졌다. 그녀는 해롱해롱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를 때릴 생각도 잊은 듯 무방비하게 서 있는 엘제이를 보며 아제프는 혀를 찼다.
“안 뜨거워요?”
“…….”
엘제이는 아제프의 품에서 도망갔다. 아제프는 물살을 헤치며 도망가는 엘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욕조
끝에 앉아 얼굴을 푹 담갔다.
“…….”
엘제이는 겨드랑이 아래쪽에 손을 넣어 그녀를 들어 올리는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도망갔던 것이 무색하게
엘제이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그의 허벅지에 앉아야 했다.
엘제이는 눈을 데구루루 굴려 싱긋, 눈웃음치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예뻤다. 엘제이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흔들었다.
쪽.
아제프가 킥킥 웃으며 입술을 내렸다. 엘제이의 입술에 닿은 그것은 볼이 홀쭉해지도록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똑똑, 두드리는 몸짓에 엘제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그 안을 파고든 것은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우음ㅡ.”
아제프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가 물 안에서 흔들리는 엘제이의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엘제이의 손가락 틈에 깍지를 꼈다. 따뜻한 물에 잠겨 골골거리는 게 귀여웠다.
아제프가 천천히 엘제이의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가슴 위에 돋아난 문장이 손끝에 톡톡 걸렸다.
“하아-.”
아제프는 동그랗게 솟아난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오밀조밀한 코끝에 하얀 거품이 묻었다.
“앗!”
엘제이가 코를 찡긋거리며 그것을 털어내려 했지만 물속에서 손을 꺼낼 때마다 거품이 딸려와 더 심하게 번지기만
했다.
아제프는 물에 반쯤 잠겨 일렁일렁 흔들리는 녹빛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제프는 더는 문장을 요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뻐요.”
아제프는 조심조심 엄지손가락을 들어, 엘제이의 문장을 덧그렸다. 둥글게 휘어진 부분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은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아제프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그는 거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문장을 더듬듯 찰랑거리는 수면을 바라봤다.
엘제이는 그런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거품을 헤쳤다. 두 손을 모아 거품을 헤치니 아제프의
상반신이 살짝 드러났다. 엘제이는 그의 가슴팍에 자리 잡은 문장을 손으로 콕콕 찔러보며 웃었다.
***
“자, 여기 앉아볼래요?”
엘제이는 물기가 깨끗하게 닦인 아제프의 머리카락을 아쉽게 바라봤다. 내심 그의 머리칼에 물기가 고여 있기를
바랐던 초록색 눈이 시무룩해졌다.
“그랬어요?”
아제프가 눈을 둥글게 떴다. 결혼한 뒤, 둘은 몇 번이나 같이 목욕을 했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엘제이는 늘 아제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싶었으나, 피곤함에 지쳐 떨어지기 일쑤였다. 아침보다는 밤에 욕조로
들어가는 일이 잦았기에 엘제이는 축 늘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아제프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엘제이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올라온 천이 엘제이의 머리를 감쌌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걸 꽤 좋아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너울거리다가, 그의
손에 정리되는 게 만족스러웠다.
목욕을 끝낸 아제프는 침대에 앉아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엘제이는 나긋나긋하게 머리를
누르는 손길을 느끼며 꾸벅꾸벅 졸았다.
까딱까딱 흔들리는 시야로 햇살을 받아 빛나는 유리 상자가 들어왔다. 안에 있는 눈은 햇볕을 고스란히 받고도
전혀 녹지 않았다. 아제프가 종종 제 자질을 채워주는 덕분이었다.
아제프가 청혼하며 건네준 토끼집은 엘제이의 보물 1 호였다. 그녀는 유리 상자를 침대맡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종종 들여다보곤 했는데, 사람의 시선을 앗아간 채 돌려주지 않는 것이 만든 사람을 쏙 빼닮았다.
‘저렇게 예쁜 것이 또 한 사람 있지.’
엘제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금방이라도 뒷다리를 폴짝이며 날아들 것 같은 토끼들은 아쉽게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아제프가 손을 쓰면 조금쯤이야 움직이겠지만 엘제이는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요망한 것.’
아제프가 햇살같이 웃으며 토끼의 눈을 손가락으로 톡, 가리켰다. 단정한 손끝은 엘제이만 허락한다면 저것들의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듯 매섭게 빛났다.
엘제이는 어쩐지 불쌍한 토끼들이 공포에 질려 바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저 모습 그대로가 좋았다.
엘제이는 황급히 말을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무엇이요?”
“저는 아제프와 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요. 아제프를 닮은 푸른 눈도 어여쁠 것 같고
저를 닮은 초록색 눈도 사랑스러울 것 같아요.”
“초록색 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1 화 에필로그(3)
131
아제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바로 옆에 있는 엘제이에게는 잘 들렸다. 엘제이가 고개를 살짝 젖혀 그를
바라봤다.
“계획? 무슨 계획이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을 사근사근 바라봤다. 특이한 색감은 아니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이 정말 좋았다.
그는 말을 걸듯 한참을 더 엘제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리 어색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제프가 창문을 가리키며 소곤소곤 속닥였다. 그의 말대로 봄볕은 겨우내 추위를 죄다 몰아낼 듯 하늘 높이 올라
너르게 번져갔다.
“네!”
아제프는 드레스 룸으로 쏙 들어가는 엘제이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남편이라는 명목상의 위치는 퍽
만족스러웠다. 은근슬쩍 저기 들어가 부인의 옷을 보겠다고 하면 엘제이는 어리바리하면서도 그를 말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엘제이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자, 아제프를 맞이하러 들어온 알모어는 드레스 룸을 뚫어져라 보는 아제프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후작님? 뭐 하십니까?”
“알모어.”
아제프가 알모어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아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싸늘한 얼굴로 알모어를 노려봤다. 엘제이가
잘 받아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알모어의 생각대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후작님! 같이 가요!”
***
아제프는 다급한지 허둥거리는 엘제이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줬다. 엘제이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눈을 흘긋거리며 주변을 훑어봤다.
아제프는 피식 웃으며 엘제이의 보닛 끈을 똑바로 고정했다. 반쯤 미끄러진 보닛이 단정하게 올라갔다. 아제프가
초록색 보닛 끈의 매무새에 신경 쓸 때, 엘제이의 몸은 반쯤 앞으로 나간 상태였다.
“가족들인데, 뭐 어때요.”
아제프는 허둥거리는 엘제이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고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꽤 먼 곳에서 바글거리는 기척을
보니, 가기 싫어 발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꽃놀이하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알록달록 공원을 장식했고,
적당한 온기의 햇살이 엘제이의 머릿결에 머물러 산들산들 춤을 췄다.
엘제이는 평소에 머리를 반으로 묶거나 길게 풀어헤치는 걸 즐겼는데, 오늘은 바깥에 오래 있는 만큼 단정히
묶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머리카락에 대한 고민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엘제이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아제프가 살짝 빈정거리며 폐하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엘제이는 입매를 살짝 비트는 아제프를 발견하고 웃었다.
“…….”
아제프는 못마땅했지만, 표정을 풀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알체스테는 보위에 오르면서 기존의 에이든파
귀족들을 많이 쳐냈다.
에이든파 귀족들은 내쳐진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틈이 보이면 비집어 올라올 게 보여서 알체스테는 새 인재를
뽑아 제 곁에 두는 데에 힘을 쏟았다. 다만, 인재라는 게 쉽게 발굴하기 힘든 게 문제였다.
아제프는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몇 사람분의 몫을 혼자서 해내야 했다. 그토록 바라던 엘제이와의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음에도 신혼여행조차 가지 못한 아제프는 알체스테에 대한 불만이 등등하게 솟아난 상황이었다.
엘제이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제프에게는 가족이 생겼다. 그는 엘제이의 가족이었고, 알체스테의 가족이었다.
가족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속해 안정감을 찾아가는 아제프가 기꺼웠다.
엘제이는 살금살금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밀며 환하게 웃었다. 흐릿해진 시야로 엘제이와 같은 밀색의 머리가
보였다.
“아! 저기 보인다.”
엘제이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도 엘제이와 아제프를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났다.
“리사! 뛰면 안 된다.”
아제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죽이는 데 중점을 뒀던 예전의 상상에 비하면 많이 유순해진 편이었다.
“왔니?”
“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가까이 다가가 미리 깔아둔 천자락에 앉으니 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졌다. 시중인들은 저 멀리 떨어졌고, 평화로운
꽃나무 아래에는 다섯 사람이 정답게 앉았다.
“아버님, 잘 지내셨어요?”
아이젠은 성년이 되기만 기다렸다는 듯 홀라당 엘제이를 데려간 아제프가 못마땅했지만, 그보다 더 못마땅한 놈은
성년이 되기도 전인 엘리사를 홀라당 강탈한 알체스테였다.
엘리사는 황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거동이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다. 반면, 아제프는 약속대로 엘제이를 데리고
종종 아이젠을 찾아갔고 아이젠 마음속의 저울은 아제프에게로 확 기운 상태였다.
아이젠은 양옆에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끼고 있었지만, 그의 무릎은 아제프 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가 있었다.
“리사 말이 맞다.”
아제프는 엘리사의 말이 절대 진리라도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체스테를 마땅찮게 바라봤다.
“우욱!”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2 화 에필로그(4)
132
“저 아니에요!”
“웁! 우욱!”
아이젠이 눈매를 매섭게 치켜세우며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알체스테 역시 아연한 얼굴로 엘리사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요네즈 냄새가…….”
엘리사가 핼쑥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알체스테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도시락 통을 닫으며 벌떡 일어났다.
엘리사와 알체스테 사이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제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관찰했다. 곧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짚이는 게 있는 것 같네요.”
“…….”
“네!”
시녀의 부름을 받은 황궁의가 허둥지둥 당도했다. 황궁의는 엘리사의 팔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고 향했다. 눈빛에 힘이 있었다면, 엘리사의 팔목이 진작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어떻지?”
베아르시 제국은 황족의 탄생을 여명이 밝았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황궁의의 말이 끝나자 엘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아직 홀쭉한 배를 손으로 쓸어보며 웃었다.
“얼마나 되었는가?”
“여든 일 정도 된 것 같군.”
대답은 황궁의가 아닌, 알체스테의 입에서 나왔다. 엘리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의문이 차오른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리송한 말이었다. 알체스테는 따스한 눈으로 엘리사의 배를 살폈다. 보통 가슴께에서 빛나는 불빛이 엘리사의
배 속에도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알체스테는 어느 정도 짐작한 듯했다.
엘리사가 팔불출처럼 웃어 보이며 어깨를 폈다. 어느 지점에서 뿌듯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사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흘렀다.
“아직은 잘 모르겠군.”
알체스테가 다정한 얼굴로 엘리사의 볼가에 입을 맞췄다. 알콩달콩한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에 머물렀다.
“고맙다, 리사.”
“축하해, 리사.”
“축하드립니다.”
엘리사가 해맑게 웃으며 알체스테의 어깨에 폭 기댔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은 구름 한 점 없이 해맑은 태양인데,
아이젠의 얼굴은 찌그러졌다.
“어머.”
엘제이는 아이젠의 얼굴을 보며 작게 소리를 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능한 아이젠이 저 정도로 얼굴을
구기는 건 쉽게 볼 수 없는 볼거리였다.
마땅찮은 기색이 역력한 장인의 얼굴에 눈치 없는 알체스테도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알체스테는
없는 눈치를 쥐어짜 그나마 무난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게 많다고 들었습니다. 전례를 살펴봐도 황궁에서는 산모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사가로 내려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황궁과 제 저택은 그리 멀지 않으니, 당분간 리사가 친정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제이도 황궁보다는 아버님 댁이 편할 테니, 언니랑 오순도순 노는 날이 많아지겠어요. 폐하는
최근 무척 바쁘시잖아요. 할 일도 많으신데, 혼자 심심하게 계시는 것보다는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것도 물론, 당분간은 폐하께서 힘쓰시면 되겠어요. 설마, 임신 초기신데…… 일을 맡기시려는 건 아니겠죠?
두 분 결혼 전에도 폐하께서 하신 일인데요.”
아제프가 냉큼 끼어들어 엘리사를 아이젠 옆에 붙여두려고 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은근슬쩍 할 일을 젖혀두고
엘리사에게 도피한다는 걸 알았다. 그의 계획이 실현하려면 알체스테가 기계처럼 일해주어야 한다.
“응? 그럴까?”
엘리사가 황후가 되고 나서,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그녀를 황후로 대우했다. 반면, 유일하게 아직 엘리사에게
반말하는 건 의외로 엘제이였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엘제이도 엘리사에게 경어를 썼으나, 가족만 있는 자리에서는 엘리사를 편하게 대하고는
했는데, 그건 한제이의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
알체스테는 시무룩한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미 결정을 끝냈는지, 엘제이와 함께 아기의 배내옷을
만들겠다며 싱글거렸다.
아제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제프는 황궁의 외교부 일을 맡고 있었다. 당연히 낮에는
엘제이와 함께 있을 수 없었고, 그 사이 엘리사가 엘제이와 함께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제프는 오직, 엘제이와 함께할 신혼여행만을 기다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체스테와 아이젠에게 일을 몽땅
미뤄둘 필요가 있었기에 지금부터 차근차근 그 준비를 할 계획이었다.
우선은, 휴가를 달라고 하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는 알체스테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알체스테는 좋아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는 아제프를 얄밉게 보다가 무척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제프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며칠은 어림도 없다는 듯 웃었다. 알체스테의 초조한 얼굴을 훑어본 아제프는
여유로운 얼굴로 잠시 뜸을 들였다.
“뭐……. 조금 심술을 부리시는 것뿐이니 그리 오래가지는 않으실 겁니다. 따님을 사랑하시는 분이니 달을
넘기시진 않겠죠.”
아 달은 92 일까지 있었고, 오늘은 아 9 일이었다. 알체스테의 머릿속에 간단한 산수 문제가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건 아제프의 계획대로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3 화 에필로그(5)
133
‘83 일?’
알체스테는 깔깔깔 웃으며 엘제이와 이야기하기 바쁜 엘리사를 바라봤다. 엘리사는 언니와 아버지를 꽤 좋아했다.
알체스테와 산 지 몇십 일은 되었으니 아마 한동안은 집에 머무르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몰랐다.
알체스테는 황제의 신분이었다. 법도를 중요시하는 그가 황제의 책무를 죄다 팽개치고 엘리사만을 만나러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80 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저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알체스테의 목울대가 꿀꺽, 크게 흔들렸다. 알체스테는 도움을 청하듯 아제프를 간절히 바라봤다.
“조언은, 없나?”
“맨입으로요?”
“……뭘 원하지?”
아제프는 이미 알체스테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아마, 아이젠은 엘리사를 80 일간 붙들고
있을 생각을 없을 테지만, 그 사실을 결코 말해줄 리 없는 아제프는 여유로운 얼굴로 황제에게 사기를 쳤다.
알체스테는 아제프가 사라지면 당장 밀어닥칠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들을 떠올렸다. 공포라는 감정에 무딘 남자도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아제프,”
“보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 보름.”
아제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젠의 사랑을 받기에는 글렀다는 듯 살래살래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아기요. 아기. 그러니, 아기를 빌미로 마음을 살살 녹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말한다거나, 아기가 아버님을 닮으면 좋겠다거나.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공작을 닮은 아기?”
알체스테가 눈을 굴려 아이젠을 바라봤다. 딸들과 오랜만에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젠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부드러운 인상의 미중년이었다. 다만, 자매의 외모는 부친보다는 모친을 많이 닮아 있었다.
“말한다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까? 그 정도는 그냥 말씀하실 수 있어야죠. 사람이 그렇게 답답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렇군. 또 뭐가 있지?”
“중요한 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작정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하지 말고, 아버님의
기분이 좋으실 때를 노리세요. 지금처럼.”
“지금?”
알체스테가 성마른 음색으로 물으며 등을 살짝 돌렸다. 아제프는 기겁한 얼굴로 알체스테의 어깨를 붙들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제프는 느릿느릿 엘리사의 곁으로 돌아가는 알체스테가 못 미더웠지만, 티는 내지 않고 엘제이 곁으로 돌아왔다.
“아제프, 일이 많이 바쁜 거예요?”
“일이 바쁜 게 아니,”
꼭 집어 누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알체스테의 시선은 첫째인 엘제이를 향해 있었다. 알체스테는 곧 엘제이와
닮은 엘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닮지 않았다. 알체스테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런가?”
‘내게 나쁠 건 없지.’
알체스테가 미움 받는다면 그만큼 아제프의 상대평가는 올라갈 터였다. 아제프는 파르르 떨리는 아이젠의
손가락에 딸기 하나를 끼워줬다.
아이젠은 새콤달콤한 딸기 하나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불긋하게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평소라면 엘리사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해줬겠지만, 그녀는 지금 하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암-.”
엘제이는 또다시 재미난 볼거리를 구경하듯 관람하는 태도로 세 사람을 지켜봤다. 꼭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도 하나 먹을래요?”
아제프가 친절하게도 엘제이의 입안에 딸기를 넣어줬다. 입안으로 쏙 들어간 딸기 과즙이 혀끝을 뭉근하게 스쳤다.
아제프는 묘한 눈으로 딸기를 오물오물 씹어 먹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헙!”
딸기 먹다가 체할 뻔했다. 아제프는 아마도 딸기날벼락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엘제이는 작게 콜록거리며
아제프를 바라봤다.
딸기라고 발음하는 혀가 오늘따라 유독 붉은 듯도 했다. 엘제이가 울상을 지으며 딸기를 쪼물거렸다. 아제프는
그때와 같은 엘제이의 행동을 보며 이곳에 둘만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발긋한 시선을 교환했고, 알체스테는 영문도 모르고 아이젠과 눈싸움
중이었으며, 엘리사는 하품을 해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4 화 에필로그(6)
134
이유도 모르는 주제에 아이젠과 끝도 없는 눈싸움을 하던 알체스테는 바닥에 떨어지려는 엘리사의 머리를 황급히
손으로 붙잡았다
“우음……. 졸려요.”
엘리사는 반쯤 졸음에 잠긴 듯 그녀의 목소리는 혼곤하기만 했다. 알체스테는 제 손바닥을 베고 편히 눈감는
엘리사를 말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추어 있다가 조심조심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 위에 올렸다.
“하암-.”
엘리사는 뜨거운 태양 아래의 꽃잎처럼 흐물흐물 흔들렸다. 엘제이는 엘리사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겨주며 작게 속삭였다.
“피곤한가 보네.”
아이젠은 황궁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야 했는데, 베아른이 수도 외곽에 있다 보니 아이젠의 집이 확실히
가까웠다.
엘리사의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녀는 편안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다. 이 상태라면 마차의 흔들림에도 깨어나지 않을 게 뻔했다.
알체스테는 햇살을 머금고 움찔거리는 엘리사의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엘리사가 잠이 들어 빨리 그녀를 눕혀야겠다는 생각이 강한 두 남자는 아제프의 말에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고마운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먼저 들어가 보겠네.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일찍 가서 미안하네. 자네는 제이와 천천히 즐기다
돌아오게나. 오늘은 얼굴을 보았으니, 굳이 집에 들르지 않아도 괜찮다네.”
“미안하지만, 먼저 가겠다.”
아제프는 사르르 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점이 되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제야 입꼬리를 완전히 말아 올렸다. 아제프는 이제야
소풍다워졌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개가 만족스럽게 끄덕여졌다.
“어?”
“어디 가요?”
아제프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쫓으려는 수행원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눈짓을 해 보인 뒤 엘제이만 데리고 작은
동산을 넘었다.
정원이라고 해도, 원래는 산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평지는 아니었다. 아제프는 정원이라기보다는 사냥터에 가까운
베아른을 살피며 씩, 웃었다. 둘만 있기에 참 좋은 장소였다.
울창하게 자란 꽃나무가 꽃잎을 살랑살랑 날려 보냈고, 너울거리는 물 위에는 꽃잎이 둥둥 떠 노닐었다. 봄볕을
머금은 물살은 거울처럼 반짝거렸고, 꽃잎배가 물장구를 치며 수면 아래 갇힌 햇살을 톡톡 건드렸다.
가까이 내려가서 보니 자연의 흥취가 더욱 깊어졌다. 감수성이 풍부한 엘제이는 어느새 촉촉해진 눈으로 계곡을
둘러봤다.
“제가 해도 되는데…….”
천천히 흘러가던 꽃잎은 갑자기 일어난 파도에 뒤집혔다.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꽃잎의 노래가 들렸다. 꽃잎은
뒤집히든 말든 수면 위에서 노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제프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서 뭉쳐진 몇 개의 눈뭉치가 빠르게 회전하며 터졌다. 엘제이의 옆으로
작은 무지개가 여럿 피어났다.
엘제이의 손이 알록달록한 무지개를 톡, 건드렸다. 몽글몽글 부드러운 느낌이 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제프가 피식 웃으며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아제프도 어느새 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엘제이는 고개 숙여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봤다. 아제프의 발등 위로 고동색의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제프는 발등을 간질이고 지나가는 괘씸한 것을 느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계곡이니 물고기가 사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잔뜩 흥분해 발긋하게 달아오른 엘제이의 볼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송사리 정도 되는 것 같네요.”
“귀엽다…….”
송사리는 하얀 손바닥 위에서 몸을 작게 퍼덕였고, 아제프는 상기된 얼굴을 바라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지,
빠르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생산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즐거웠다. 아제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엘제이를 품에 안았다.
엘제이는 여전히 작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땡글땡글한 물고기의 눈동자에 헤실헤실
풀어졌던 뺨이 걱정으로 굳어졌다.
“앗! 차가워!”
한 손으로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모두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는지, 물고기를 놓아주다가 드레스 밑단이
젖어버렸다.
엘제이는 찝찝한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끙끙거렸고, 아제프는 허리를 숙여 드레스 자락을 다시 잘 붙잡았다.
엘제이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아제프는 축축하게 젖은 밑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녀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살짝 후회되었다. 물놀이는 애초의 계획이 아니었으니 여벌 옷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서둘러 뒤돌아섰다.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5 화 에필로그(7)
135
아제프가 만들어둔 무지개는 공기 아래로 투명하게 스며들어 사라졌다. 엘제이는 그 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레이스 소재로 만든 드레스는 물을 많이 먹었다. 아제프가 손으로 짜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질척하게 젖은 터라
드레스가 엉겨 붙은 다리가 불편했다. 엘제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퐁.
발밑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엘제이는 무슨 소린가 싶어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숨을 쉬기 위해서인지
물고기 한 마리가 뻐금뻐금 입술을 벌리며 퐁퐁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귀여워라. 얘는 좀 크네.”
손을 뻗으면 계곡의 작은 친구가 달아날 걸 알았기에 엘제이는 눈으로만 그걸 구경했다. 뻐금뻐금 움직이는
물고기의 입속으로 꽃잎 한 장이 삼켜졌다. 제가 삼켜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물고기는 퉤, 하고 꽃잎을
바로 뱉어냈다.
“응? 푸흡,”
엘제이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트리다가, 물고기가 혹시 달아날까 봐 걱정되어 황급히 입을 가렸다. 곱게
휘어진 눈매가 즐거운 듯 휘어졌다.
엘제이는 조심스럽게 발을 담그고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작은 물결이 톡톡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쳤다. 동글동글한
물고기의 눈이 저를 향하는 것 같아서 엘제이는 숨을 죽이고 긴장했다.
퐁퐁.
“하아…….”
아제프는 엘제이와 함께 지내며 다양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걸 무어라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굳이 칭해보자면 이
마음이 행복인 것 같았다.
뜨거워 데지 않고, 차가움에 놀라지 않으며, 세찬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아제프는 그냥 안온하게 흘러가는 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길게 내려앉은 백금색 속눈썹 위에서 반짝반짝 고갯짓하던 햇살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가슴을 달구던 온기는 배
속 깊숙이 떨어져 손끝으로, 발끝으로 번져갔다.
“앗!”
갑자기 들려온 아제프의 목소리에 놀란 엘제이가 저도 모르게 풍덩, 발을 휘저었다. 덩달아 물고기도 놀랐는지
물고기는 지느러미로 엘제이의 발을 찰싹, 때리고 황급히 도망갔다.
“아제프, 왔어요?”
아제프가 물살을 가르며 들어왔다. 맨발이 물을 철벅철벅 차는 소리가 즐거웠다. 엘제이는 가만히 손을 벌려
아제프를 끌어안았다.
“제가, 따뜻해요?”
아제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크게 확장된 동공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바로 마주 안지 못하고 손끝을 떨었다.
아제프는 어두운 색감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햇살을 품고 따뜻한 체온을 유지했다. 반면 엘제이는 젖은 옷자락
때문에 살며시 추위를 느끼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반대였겠지만, 오늘은 엘제이가 그의 품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멍하니 끌어안고 있다가 그녀의 낮은 체온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엘제이를 안아 올렸다.
“아쉬운데……. 드문 기회잖아요.”
“다음에 또 올 수 있어요. 페하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협박해서라도 기회를 얻어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최측근으로 살다 보면 약점 한둘 정도야 금방이에요.”
새침하게 고개를 들고 속삭이는 말에 아제프가 피식 웃었다. 늘 차갑게 웃었던 입꼬리는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
웃는 입과는 다르게 냉소적이었던 파란 눈은 기쁨을 머금을 줄 알게 되었다.
하얀 종아리를 타고 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얌전히 엘제이를 살피던 단정한 눈매가 노골적으로 깊어졌다. 그는
홀린 듯 엘제이의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읏!”
축축한 물기가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차가운 종아리에 손가락을 얽자 따스한 기운이 엘제이의 다리를 타고
흘렀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다리를 좀 더 치켜들자 엘제이의 드레스가 주르륵 미끄러져 그녀의 배에 떨어졌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하얀 살결을 빨아들이자 생크림 같은 피부에 붉음이 번졌다. 아제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살결을 보다가 뜨겁게 달궈진 손을 엘제이의 허벅지 위로 밀어 올렸다.
보드라운 살결이 뭉근하게 잡혔다. 아제프는 진로를 방해하는 천자락을 들치고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열기에 집어
삼켜진 눈매가 발갛게 들떠 있어서 엘제이의 얼굴에도 붉음이 번졌다.
“나는, 아무 짓도,”
아제프는 허벅지에 달라붙어 주르륵 미끄러지는 드레스를 보다가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눈을 감고 치미는 욕정을
달랜 아제프가 엘제이의 귀를 잘근잘근 깨물며 낮게 속삭였다.
엘제이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눈을 굴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핥아 내리니 몸의 털이
쭈뼛 섰다. 엘제이는 히끅!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밖에서 하면 안 돼요.”
“왜 안 되는데?”
“여긴 사유지야. 황궁 소속이고,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못해. 게다가 내가, 다른 사람이 보게 둘 것
같아?”
“…….”
아제프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가 엘제이를 홍시처럼 익혀준 탓에 추위는
이미 물러가 있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품에서 편안한 자세를 잡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그런 행동이 일종의 강박이라는 걸 알았다. 혹시,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엘제이가 저를
떠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두려움에서 오는 강박.
엘제이는 못된 아제프도, 다정한 아제프도 모두 좋아했다. 엘제이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아제프를
살살 달래며 속삭였다.
“저는 다정한 아제프도 좋지만, 음……. 지금처럼, 유혹하는 아제프도, 좋아요. 당신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아제프가 갑자기 맞이하게 된 크나큰 행운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입을 손으로 척, 막았다. 그녀는 둥글게 뜬 아제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엘제이의 입술이 아제프의 가슴께에 닿았다.
“사랑해요.”
아제프가 다소 더디게 굴어도 괜찮았다. 아제프에게는 두려워하는 그를 달래주고 사랑해줄, 엘제이가 있었다.
“사랑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6 화 에필로그(8)
136
베아른으로 소풍을 다녀온 지 또 몇십 일이 흘렀다. 아제프는 내일부터 휴가였고, 둘은 함께 신혼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잡았다.
“기도실 비었나요?”
엘제이는 늘 그렇듯 같은 질문을 했고, 그녀를 맞아주는 신관도 늘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론입니다.”
엘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실 문을 열었다. 기도실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엘제이의 것이었다. 시녀들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ㅡ.”
시녀가 깜짝 놀란 듯 작은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엘제이는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살짝 웃었다.
“왜 그러니?”
엘제이는 아제프가 오면 놀라는 척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남자는 엘제이의 속내를 금방
알아차릴 테지만, 엘제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들춰내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엘제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혼여행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운지 볼을 살짝 붉혔다. 결혼해서
엘제이 란델이 되었고 후작 부인이라는 칭호로 불렸지만, 아직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엘제이는 몰랐지만, 프리멧사는 엘제이의 기도가 시작되면 늘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얼굴을 붉힌 엘제이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자, 프리멧사의 고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무것도.]
[그렇게 차갑게 구시니 아직 결혼을 못 하신 거예요. 가뜩이나, 켈레덴 님이 형벌의 신이라는 것 때문에 다들
오해하는 모양인데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형벌의 신 켈레덴은 신들의 형벌도 담당했다. 프리멧사도 벌을 받으며 켈레덴을 알기 전에는 그가 아주 무서운
신인 줄 알았다. 서늘한 얼굴로 죄목을 조목조목 읊는 태도에 겁을 먹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무서운 신이
아니었다.
켈레덴이 답하지 않자, 프리멧사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말간 분홍빛 눈망울은 대답을 종용하는 듯해서 켈레덴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방종하게 굴지 마라.’
다른 어린 신이 저렇게 굴었다면 켈레덴은 서늘한 얼굴로 차갑게 읊조렸을 터였다. 지금도 그의 입술이 뭐라
말하려는 듯 움찔거렸지만, 켈레덴은 끝내 말을 내뱉지 못했다.
“다들 안 된다고 했지만, 아제프를 말릴 사람이 없는 터라 결국 여행은 둘만 가기로 했어요. 마차를 끌고 가기로
했는데, 수행원이 없는 터라 저희가 직접 마차를 몰아야 해요. 마부가 된 아제프는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즐거울 것 같아요. 여신님을 뵙지 못하는 건 많이 아쉽지만요.”
엘제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부쩍 아제프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 엘제이는 주로 두서없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옮겨가며 말했다. 이곳에서 한참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면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리사가 임신한 후, 아무래도 그곳이 마음에 걸려서요. 아버지께 결국 그곳의 위치를 물어봤어요.”
[그래? 잘했네. 내가 그럴 때는 물어보는 것이 좋다고 했잖아. 말도 잘 듣고, 예쁜 것.]
프리멧사가 벌떡 일어나자, 켈레덴이 아연한 얼굴로 프리멧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신들 사이에도 율법은 존재했고,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건 큰 죄에 속했다. 프리멧사는 이미 몇 번이나 그어놓은 선을 넘어간 전적이
있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현신은 안 된다.]
프리멧사는 다시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며 엘제이의 목소리에 답해주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아제프의 퇴궐
시간이 되었다.
반면, 켈레덴은 조금 호의 어린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저 인간이 오면 프리멧사가 사랑하는 인간이 기도실을
나갔고, 그러면 프리멧사도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걸 그만두었다.
“제이.”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살피며 안도했다. 그녀가 친근한 태도로 아제프 팔에 팔짱을 끼자 그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가자고 하는 곳이 짐작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지만, 그녀의 부탁을 내치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밥보다는 잠이 우선인 성격으로, 피곤하거나 졸리면 식사를 거르고는 했다. 아제프가 그걸 지적하자
엘제이는 조금 뚱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님, 다녀올게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7 화 에필로그(9)
137
엘제이와 아제프는 신전을 나와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황궁의 문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서는 마차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좀 걸어야 했다.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어깨가 좀 뻐근한 것 같아요. 피곤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새로 등용한 이들을 떠올리며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꽤 우수한 인력들이었지만,
아제프 눈에는 그리 차지 않았다. 다만, 그간 닦달하고 가르쳤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제 몫을 할 거라고
믿기는 했다.
“그나저나, 폐하가 아제프를 용케 놔주었네요. 이번 달에는 절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리사와 폐하도 여행은
못 갔잖아요.”
아제프는 까맣게 죽은 얼굴로 그를 배웅하던 알체스테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야 권력이 좋고 돈이
좋았지만, 지금은 뭐든 적당한 게 좋았다.
엘제이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둘만의 마차 여행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었다. 숲에서 별을
보며 함께 잠들거나,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평화로운 광경이 떠오르자 엘제이의 볼이
발긋해졌다.
아제프는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엘제이의 반응을 살피며 피식 웃었다. 중간중간 마을이 있으니 길에서 노숙하는
일은 최대한 막아보려 했는데, 저렇게 좋아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이 막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들꽃 하나가 아제프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것에 시선을
줬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제프만을 바라보며 종알종알 말을 걸던 엘제이는 아제프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 아제프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작은 꽃이었다. 누가 밟았는지, 꽃대가 꺾인 모습이 가여웠다.
왠지 꽃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엘제이는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멍하니 그 꽃을 바라봤다.
“제이? 왜 그래요?”
아제프가 의아한 듯 엘제이를 불렀지만, 그녀는 갈 길을 재촉하는 대신 그 꽃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오밀조밀 모여 소담하게 피어난 것들이 더 자세히 보였다.
엘제이는 멀쩡한 것은 그대로 두고 꽃대가 꺾여 쓰러진 것들만을 조금씩 꺾어 손에 모았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많이 다친 것들만 꺾었는데 어느새 한 손 가득 꽃들로 차올랐다.
“꽃은 망가지지 않았는데, 이대로 두면 또 누군가에게 밟힐지도 모르니까요. 보세요. 이렇게 모아두니, 예쁘지
않아요?”
엘제이는 한 줌 정도로 모인 들꽃을 꽃대로 가지런히 엮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하얗고 노란 들꽃다발을 흔들며
웃는 엘제이가 밝아서 아제프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네. 예쁘네요.”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전에는 우습다고 비웃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아제프는 뿌옇게
떠오르는 얼굴을 눈을 감는 것으로 없애버렸다.
“이만 가요.”
***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소리가 들리자 아제프가 먼저 내려, 뒤따라오는 엘제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이곳이 어딘지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낯선 곳을 둘러보는 대신 엘제이가 손을 잡기만을 기다렸다.
“저 집에 볼일이 있는 거예요?”
“아니요. 좀 더 가야 해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들꽃다발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제이는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꽃을 건넬 생각이었던 듯, 마차 안에는 백합을 엮어 만든 화려한 꽃다발이 있었다.
“사람이 안 나오네요?”
그쯤 되자 아제프도 엘제이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아제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엘제이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의 처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화가 나지는 않을 테지만, 엘제이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제프는 이쯤에서 대체 뭣 때문에 여기 왔는지 물어봐야 할까, 고민하며 엘제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버님이요?”
아제프의 시선이 아래로 흘러가 엘제이의 꽃다발을 응시했다. 생각해보니 참 이상했다. 이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엘제이와 아제프,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수행원 몇몇밖에 없었다.
가만 살펴보니,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엘제이가 말하는 안쪽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꽃다발. 엘제이는 노란 꽃들도 주섬주섬 엮기는 했지만, 대체로 하얀 꽃의 비중이 컸다. 백합만 봐도
그랬다.
아제프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그의 시야에 둥근 무덤 하나가 들어왔다.
커다란 무덤을 지키는 묘비에는 그저 이름 세 개가 유려한 서체로 단정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제프는 그
서체가 아이젠의 것임을 알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8 화 에필로그(10)
138
아제프는 저 합장묘의 정체를 금세 알아챘다. 죽어버린 그의 가족을 아이젠이 묻어준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엘제이는 여전히 다정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물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아제프의 속삭임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그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아제프는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는 소피아를 어머니라고 칭하지 않았고, 휴버트를 아버지라고도 칭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제이는 그가 하려는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날, 아제프의 다리가 빨랐다면 가족들과 함께 죽었을 터였다. 그날, 아제프는 휴버트를 말렸지만 화가 난
휴버트는 아제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5 살의 어린 몸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5 살의 어린 소년이었던 아제프는 어머니를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날, 아제프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무엇도,”
불타는 집을 두고 혼자만 돌아섰다는 죄책감. 그들이 죽어갈 걸 알면서도 불길에 뛰어들 용기가 없었다는
자기혐오.
기껏 두 방울의 눈물.
[우리엘 엘린델]
티 묻지 않은 그 아이의 이름처럼.
그때, 그 아이는, 태어나지도 못한 핏덩이였다. 소피아와 휴버트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놓을 정신도 없었고,
아제프 또한 동생의 이름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제프는 우리엘이라는 이름을 속으로 불러봤다. 자신을 닮은 어린 여아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감는 것으로 여아의 얼굴을 떨쳐냈다.
“저는 그 아이가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면서 그냥 여동생이 태어날 거라 믿었어요.”
아제프는 아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엘제이에게 하지 않을 터였다. 해묵은 감정은
해소됐고 그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다.
아제프는 단정하게 적힌 천사의 이름을 흘긋 바라봤다. 그는 이번에도 엘제이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걸 선택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별로 화가 나지는 않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는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제프를 따라 분주히 발을 놀렸다. 아제프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다가 엘제이를 안아
올렸다.
아제프는 그 당연한 사실에 분개하는 엘제이가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엘제이의 눈꼬리가 사나워졌다. 아차 한
아제프는 휘파람을 불며 말을 돌렸다.
엘제이는 얼굴을 붉히며 당장 사실대로 말하라고 아제프를 채근했고, 아제프는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
아제프가 여행 갈 준비를 끝내고 나왔을 때는, 엘제이가 방을 분주하게 오가며 무언가를 덥석덥석 챙기고 있었다.
“제가 확인해봤어요. 잘 쌌던데요? 혹시 부족한 게 있더라도 오지로 여행가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드디어 준비를 끝낸 듯한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안이 더 편할 텐데?”
아제프는 말리고 싶었지만, 엘제이는 이미 낑낑거리며 창문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아제프는 말썽꾸러기 아이
보듯 엘제이를 힐긋 바라보다가 할 수 없이 엘제이를 도와줬다.
“역시 옆이 좋아요.”
“그럼, 출발해볼까요?”
신혼여행의 시작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9 화 에필로그(11)
139
여행은 즐거웠다. 엘제이는 나무 위에서 포르르 움직이는 다람쥐에 즐거워했고, 강인한 야생화를 감상하며 웃었다.
휘잉- 바람이 크게 불었다. 숲이 잘잘 흔들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뭇잎이 부딪히는 싱그러운 소리에 엘제이는
활짝 웃었다.
아제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풍성한 녹음이 길게 드리워 있어, 하늘은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마차와 천막은
기름을 먹인 것이었으니 비를 좀 맞더라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엘제이는 봄비의 운치를 기대하는 듯 눈을 빛냈다. 정말 비가 쏟아지려는 건지,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사아아아-
바람도 크게 흔들렸다. 좀 전에는 숲의 노래라고 생각했던 싱그러운 소리가 조금 음울하게 번졌다. 엘제이는
아까와는 묘하게 다른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인위적인 바람 소리가 섞인 것 같았다.
하늘에서 버둥거리던 까만 것이 빠르게 추락했다.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모포 자락을 꽉 잡았다. 시선을 떼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자 떨어지는 까만 물체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새?”
엘제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아제프는 인상을 썼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엘제이의 머리에 모포를
뒤집어씌웠다.
철퍼덕.
살이 짓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아아아- 부는 바람에 뒤섞인 이질적인 소리가 소름 끼쳐서 엘제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제프는 궁금한 듯 고개를 돌리려는 엘제이를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새의 사체도 꺼려지는데,
세크르다는 더했다.
세크르다는 굳이 따지자면 새의 일종이긴 했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날개를 가졌고, 조류다운 날카로운 부리도
있었다. 하지만, 새라고 칭하기에는 덩치가 무척 크기도 했고 선천적으로 외눈박이로 태어나 외모도 흉물스러웠다.
아제프가 세크르다의 시신을 살펴봤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시신이 꽤 훼손되기는 했으나 육안으로 봤을 때
화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면 하늘의 포식자를 사냥할 것이 없기도 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슬쩍 내밀려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황급히 생각을 멈췄다. 그는 다시 엘제이의 머리에 모포를
씌워주며 말을 재촉했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으니, 머리는 내밀지 말아요. 딱히 무기에 찔린 곳은 안 보이지만, 아무래도 사냥당했을
확률이 높겠죠.”
아제프가 뒤쪽의 창문을 열어 보이며 물었다. 창문이라고 칭하기는 했으나 거의 문에 가까운 크기라 드나들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안락해 보이는 마차 내부가 보였다. 엘제이는 마음이 좀 흔들린 듯 포근해 보이는 내부를
살펴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
“또 웃기만 해봐요!”
아제프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협박하는 엘제이 때문에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숨을 참으며 웃음을
간신히 밀어 넣었다. 뛰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웃기만 했는데 호흡이 거칠어졌다.
“…….”
엘제이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제프가 계속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속삭이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엘제이는 선하게 휘어진 아제프의 눈을 보고 또 홀라당 넘어갔다. 꽉 쥐어진 주먹이 은근슬쩍 풀리고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웃지 말라니까요!”
아제프는 참지 못하고 신명나게 웃은 죄로, 엘제이의 토라진 얼굴을 봐야 했다. 물론, 그마저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그리 나쁘지 않은 벌이었다.
엘제이는 여전히 킥킥거리는 아제프를 찌릿, 노려본 후에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엘제이의 손바닥에
톡톡, 내려앉았다.
“어? 비가 와요.”
눈물을 찔끔 매달면서까지 웃던 아제프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봤다. 여전히 우거진 숲길이었지만,
비가 온 이상 말들의 체온이 떨어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아제프는 마차를 세웠다.
마차는 어느 정도의 방수는 가능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챙겨온 커다란 천막은 말들의 위를
모두 다 덮을 정도로 널찍했다.
기피하는 능력이라 세밀하게 제어했던 게 좋게 작용했다. 아제프는 가늘고 긴 얼음을 무한대로 쭉쭉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제어력을 보였다.
“정말 괜찮아요.”
엘제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아제프는 엘제이를 안으로 들여보내는 걸 포기했다. 대신 그는 보금자리를
빨리 만들려는지, 바닥을 눈으로 쭉 살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제프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0 화 에필로그(12)
140
물이 끓기 시작하자 엘제이는 그저 미리 준비해둔 가루를 넣고, 깨끗하게 씻어 썰어둔 채소를 퐁당퐁당 넣었다.
화력이 좋아서인지 수프는 빠르게 끓었다.
엘제이가 직접 요리할 기회가 없다 보니, 아제프는 샌드위치 외에는 그녀의 음식을 먹어볼 일이 없었다.
꿀꺽, 수프를 삼키는 소리가 났다. 별로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나름 제가 만든 요리라 신경이 쓰였는지 엘제이는
아제프의 반응을 신경 썼다.
“어때요?”
“그렇긴 하죠.”
오늘은 소파에 따로 누워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등을 살짝 밀며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제이, 이만 들어가요.”
휘이잉- 끼익-
“이게 무슨 소리죠?”
“놔! 놓으라고!”
“아제프!”
쐐애액-
검을 타고 날아간 얼음이 세크르다의 날개를 공격했다. 쩌저적- 얼어붙은 날개가 휘청거리며 움직임이 둔해졌다.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며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크르다는 날개를 버둥거리며 움직임을 방해하는 먹잇감을
버렸다.
“머리 좋은데?”
아제프는 작게 감탄하다가 엘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아제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아아악!”
“제이, 모포 잘 잡아요.”
아제프는 모포째로 아이를 잘 말아 안아 들었다. 바닥에 슬쩍 내려놓기에는 엘제이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때요? 괜찮아요?”
“낙하 충격에 기절한 것 같아요. 심장이 멎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보기보다 강심장인가 봐요.”
“끼이이이-.”
세크르다가 기묘한 소리로 울며 천막을 찢어발길 듯 발톱을 세웠다. 얼음이 달라붙어 더는 날 수 없었는지 거대한
몸체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아제프는 천막 위로 떨어지려는 세크르다를 옆으로 쳐냈다.
“끽! 끼윽!”
쇠가 긁히는 것 같은 소음에 엘제이가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사람의 고막을 내리찍는 소음에 아제프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움찔거렸다. 아이는 오래지 않아 눈을 떴다. 말간 갈색 눈에 비명을 지르는 세크르다가 담겼다.
‘시끄럽군.’
손으로 귀를 막고 새 울음소리를 견뎌내던 엘제이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듯했다.
저 개체는 마치 사람의 정신을 파괴할 것 같은 기묘한 소음을 냈다. 빨리 제압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오래
들었으면 고막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제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평화로운 신혼여행을 꿈꿨는데, 이 아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건 날아간 모양이었다.
“히익!”
아제프는 엘제이 몰래 한숨을 삼켰다. 누가 세크르다를 돌보든, 잡아먹든 아제프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엘제이는 관심을 가져버린 듯했다. 일이 귀찮아졌다. 어찌 되었건 미아를 맡아버렸으니, 엘제이는 집을 찾아주려
할 터였다.
아제프는 그렇게 다짐하며 멀쩡해진 것 같은 아이를 내려줬다. 땅에 부드럽게 내려온 아이의 시선에 맞춰
아제프가 몸을 숙였다.
“돌본다고? 세크르다를?”
아이는 아제프의 선한 얼굴에 안심한 듯했다. 아제프는 아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제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르다는 여러 이유로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그들을 본 날은 운이
없다는 말도 돌 정도니 세크르다가 마을에 자주 보인다면 입을 다물고 쉬쉬할 법도 했다.
세크르다의 목소리는 저주나 주술과 흡사했다. 아제프는 지긋지긋한 주술사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합니다.”
“세크르다는 몹시 위험한 생물이야. 그 아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돌보려고 하다가는 위험해질지도
몰라. 너도 무척 위험했잖니.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세크르다를 돌보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1 화 에필로그(13)
141
밤에는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세 사람은 마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론의 마을을 찾기로
했다.
아제프는 여행길이 고단한지 엘제이 품에서 잠든 짐덩이를 바라보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못마땅함이 물씬
묻어났지만, 엘제이가 고개를 들면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엘제이는 아론이 5 살이라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그 아이에게 잘 대해주려 애썼다. 아제프는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5 살짜리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엘제이에게 날카롭게 답하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아론을 내려다봤고, 아제프는 그게 못마땅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관심을
끌어오기 위해 눈웃음을 살살 쳤다.
보란 듯이 흐드러지게 웃는 얼굴에 엘제이의 시선이 고였다. 엘제이는 손끝을 우물쭈물 매만지며, 아제프를 따라
웃었다.
“아기, 조금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리사가 임신한 걸 보니 그렇게 먼 것 같지도 않아요. 첫째는 아제프를
닮은 아들, 둘째는 저를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제프 생각은 어때요?”
“폐하의 아이를 사사로이 생각하면 저희의 조카가 되는 것이니, 외동처럼 자라지는 않을 거예요.”
아제프는 나긋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귀족의 아이는 유모가 맡아 기르는 게 보통인데, 몇 번을
넌지시 떠봐도 엘제이에게는 그런 의사가 없었다.
아제프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이면서도 쉽게 마음을 굳히지 않는 엘제이를 보다가 할 수 없이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오래 들여야 할 것 같았다.
어젯밤, 얼음을 녹이고 세크르다의 사체를 살펴보던 아제프는 이 일이 평범한 인간의 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크르다의 목에는 분명히 새까만 술식이 남아 있었다. 이런 일은 주술사만이 할 수 있었다.
“주술사요?”
“네. 저 아이의 말에 따르면 어른들이 그에게 호의적인 성향을 보였다는데 무척 이상하지 않아요? 세크르다를
기르는 걸 비밀에 부친다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에요. 지금처럼 아이들이 잡아먹힐 수도 있는 상황인데요.”
아제프가 조곤조곤 설명하자 엘제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도 처음부터 그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론은 마을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까 봐 어른들이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설명했지만,
석연찮았다.
“글쎄요. 자세한 건 부딪쳐봐야 알겠지만, 저는 세뇌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세뇌당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동조했다면 이야기가 쉬워질 거예요. 아이가 공격당한 순간부터 믿음이 흔들렸을 테니까요.”
“주술사……. 아직 남아 있었네요.”
“선황의 경우, 악마와 계약한 것은 아니기에 악마의 흔적이 없어졌지만, 악마 소멸 전에 계약을 끝낸 자들은
아직 완전히 힘을 잃지 않은 모양이에요. 최대한 잡아내려 했지만, 이런 한적한 마을에 숨었다면 힘들겠죠. 이번
기회에 싹 정리되면 좋을 텐데요.”
“그렇군요.”
엘제이는 다소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제프는 주술사가 사회악이라 생각했고, 무조건 그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엘제이는 아니었다.
엘제이는 주술사에게 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해를 입혔으니 미움이
가장 컸지만, 한편으로는 아제프가 악마와 계약했던 모습이 떠올라 연민도 드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악독한 상황에 몰렸으면, 악마에게 혼을 파는 짓까지 했을까 하는 연민. 뭉근하게 고인 그늘진
감정이 가슴께에 차올랐다. 엘제이는 가슴에 떠오르는 회색빛 감정을 고개 저어 떨쳐냈다.
주술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악마에게 끌려가던 아제프의 영혼이 떠올랐다. 엘제이는 그늘진 얼굴로 꿈을
회상하다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응? 그런데, 주술사들은 죽으면 어찌 되는 거죠? 악마가 소멸했으니, 그냥 단순한 죽음에서 끝나는 건가요?”
아제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주술사의 끝이 어떤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제프는 이
일이 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라며 마차를 몰았다.
마차가 마을에 가까워졌다. 마을 청년 여럿이 외지인을 경계하며 마을 앞으로 나왔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잠든
아론을 깨워 아이를 안아 들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엘제이가 아론을 품에서 내려주자, 아이의 아버지가 빠르게 달려와 아론을 끌어안았다.
“아론!”
“아버지! 어머니!”
아론의 어머니는 아론의 얼굴을 수차례 매만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울자, 그동안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아론도 참지 못하고 어머니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제프는 제법 정상처럼 행동하는 그들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세뇌된 자 특유의 흐리멍덩한 동공이
보이지 않았다.
아제프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아제프는 이곳에 오기 전에 황궁에 연락을 취했다. 신혼여행 중에는 가급적
연락을 취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예 연락을 끊을 수는 없었다.
아제프가 무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자이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은 언제나 벌어질 수 있었다.
알체스테는 여행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하루에 한 번씩 전서구를 주고받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주술사가 있다면 정화의식이 필요할 것 같아 신관을 부르고, 세뇌로 폭동을 일으킬 주민들을 제압하려 기사단을
불렀는데, 일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듯했다.
세뇌가 아니라 동조한 거면 숨기려고 들 테니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나 상관없었다. 대략적인 줄기만 파악하고
기사들에게 사건을 넘기면 될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제프와 엘제이를 여전히 경계했지만, 아론을 데려다줘서인지 대놓고 박대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아이가 세크르다에게 붙잡혀 있더군요. 하마터면 세크르다의 먹이가 될
뻔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론의 아버지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론을 내려주고 아론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보냈다.
아론의 아버지는 꽤 침착하게 거짓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마을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며 말이 끊겼다.
새까만 로브를 쓴 남자와 그를 말리는 마을 사람 여럿이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소리를 낮추고 남자를 말렸지만,
남자는 큰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저었다.
주술사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2 화 에필로그(14)
142
아제프는 싸늘한 얼굴로 바르킨과 주민들을 바라봤다. 주술사는 발견하는 즉시, 즉결 처형 대상이다. 물론,
주술사의 도주를 돕거나 주술사를 보호한 사람 역시 즉결 심판의 대상이었다.
“바르킨!”
바르킨은 저를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굴려는 듯 턱을 바투 당기고 등을
쭉 폈다. 바르킨은 천천히 로브를 벗으며 차분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제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제프는 애초에 주술사라는 존재가 역겨웠다. 주술사들이 신들을 배반했다는
건 그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아제프가 주술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아제프는, 자신이 주술사가 되는 모습을 봤다. 지켈리온이 보여준 환각에는 엘제이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제프는 환각을 통해 그녀가 왜 죽었는지, 만약 그녀가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끝났을지
알았다.
아제프는 다만, 엘제이가 그 모든 걸 숨기고 싶어 했기에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아제프는 허울뿐인 것에 홀려 스스로를 버리고, 엘제이를 아프게 한 그 존재가 역겨웠다. 그 역겨움은 아제프
본인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주술사들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아제프는 나약한 것을 싫어했다. 나약한 것들이 살려고 버둥거리는 꼴은 더 싫었다. 아득바득 절벽을 기며
진창에서 살아가면서도 죽지 못해 꿈틀거리는 것들이 싫었다. 혼을 팔면서까지 무언가를 가지려는 그 버러지 같은
주술사들의 습성에, 토악질이 치밀었다.
그건 일종의, 자기혐오였다.
아제프가 섬뜩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바르킨을 노려봤다.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버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살살 달래는 게 빠르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게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이곳 사람들도 마찬가지. 발
하나쯤 얼려놔도 죽지는 않으니, 도망간다면 내 권한으로 즉결 심판하겠다.”
아제프가 서늘한 얼굴로 주민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반감이 번졌다. 그들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 아제프를 노려봤다.
“당신이 뭔데,”
아제프는 그 별칭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
“나는 모처럼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일은 빠르고 간단한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 생각엔 너는 즉결
처형, 이 마을은 즉시,”
“아제프.”
엘제이는 날카로운 어조로 공격하듯 퍼붓는 아제프의 말을 부드럽게 끊어냈다. 아제프는 아차 한 얼굴이 되어
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엘제이를 바라봤다.
“…….”
“내게 무슨 짓을 했지?”
“제가 한 건 아닙니다. 혹시, 이곳으로 오면서 세크르다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후작님처럼 기감이
예민하신 분은 잠깐 들은 소리로도 영향을 받으셨을 수 있습니다.”
아제프는 어젯밤 들었던 이상한 귀곡성을 떠올렸다. 그가 가만히 눈을 감자 푸른 자질이 일렁거리며 주변 공기를
서늘하게 바꿨다. 혈관을 타고 자질이 졸졸 흐르자 몰래 숨어 있던 까만 기운이 먹구름처럼 피어났다.
***
바르킨이 가리킨 숲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제이는 그저 울창하기만 한 숲길을 바라보면서 뭐가 문제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바르킨이 엘제이를 살짝 바라보며 충고했고, 아제프는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어냈다. 조금 기다리자, 바람이 크게
불었다.
사아아아-
저번과 같았다. 숲이 기묘한 소리로 울며, 신음했다.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더운 기운을
흠뻑 묻힌 햇살을 가로막고 까만 형체들이 날아들었다. 세크르다였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세크르다들은 생각보다 유순했다. 그들은 사람에게 달려드는 대신 얌전히 고기를 받아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튼튼한 턱이 으적으적 뼈를 씹는 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다.
세크르다는 총 8 마리였다.
“먹이를 주지 않으면 인간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세크르다는 기본적으로 무척 영리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이를
직접 사냥하는 것보다 제가 주는 걸 먹는 게 더 편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배가 부르면, 사냥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1 년이라고 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어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먹이가 충분하지 못했고 약한
개체는 낙오된 거겠지. 그래서 한 마리는 동족의 공격을 받아 죽은 채로 발견됐고, 다른 한 마리는 인간을
잡아먹으려다 우리에게 들킨 건가?”
“정확한 추측입니다. 어제 저는, 먹이를 충분히 구하지 못했습니다. 배를 채우지 못한 세크르다는 사냥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군.”
아제프는 뚝 떨어지던 지켈리온의 머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악마와 생사를 함께하는 존재였고,
그는 분명히 죽었다.
대부분의 주술사는 지켈리온을 따랐다. 그들이 악마를 따른다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르킨과 함께
있던 자들은 지켈리온이 그들을 불러들였을 때 모두 황실로 향했고, 엘제이와 엘리사를 향한 저주를 준비했다.
가지 않은 건 바르킨뿐이었다.
물론, 시행하기도 전에 알체스테와 아제프에게 발각되었으니 당연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곳에 가담하지
않은 바르킨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아니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쭉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1 년 전 저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여전히 주술사였지만…… 제 고향은 보시다시피 외진 곳이었고 조용히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선 안 됐는데, 욕심을 부린 거지요.”
바르킨이 주술사가 된 이유는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5 년 전, 그의 마을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그의 연인도, 가족도, 그 전염병으로 죽어버렸다. 바르킨은 누군가 고의로 그 전염병을 퍼트렸다는 걸 알아냈다.
바르킨은 손에 넣은 힘으로 손쉽게 복수했다. 손가락 하나부터 야금야금 신체 부위를 잘랐고, 새까만 어둠을
몸속에 집어넣으며 그 자가 고통 받는 걸 즐겼다. 하지만, 악마가 대가로 준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은 아니었다.
일주일 정도 심한 고문을 반복하자, 그자는 죽어버렸다. 복수를 끝내자 허망함이 남았다. 바르킨은 그자를
고문해 알아낸 전염병 치료약을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고, 그 뒤로 고향을 떠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3 화 에필로그(15)
143
“……정말,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세크르다는 무척 영악합니다. 인간에게 먹이를 받아먹었던 기억이 있는
개체들은 저를 따라왔어요. 사냥하기가 귀찮았던 거겠죠.”
“왜 죽이지 않았지?”
“보시다시피,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먹이만 받아먹죠. 제 힘으로는 죽일 수
없습니다. 지난 1 년간 주술사로서의 힘이 점점 미약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아마, 악마가 소멸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죠.”
아제프는 먹이를 먹는 세크르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직콰직- 얼어붙는 대지에 놀란 세크르다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려 했지만, 이미 다리가 얼어붙은 터라 소용없었다.
“끼아아악-.”
“마을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벌은 그리 무겁지 않겠지. 당분간 세금을 조금 올리는 정도일 거다.”
아제프는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바르킨은 보며 드물게 자비를 베풀었다. 텅 빈 동공에 얼핏 안도가 차올랐다.
“아제프! 잠깐만요.”
“제이?”
기껏해야 제 복수를 하고, 세크르다에게 술식을 걸고, 그들에게 먹이를 잡아주는 정도가 바르킨이 악마의 힘을
빌린 일 전부였다.
엘제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제프를 간절히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제이, 안타까운 건 알지만, 위험을 남겨두는 일일지도 몰라요. 지금은 저리 얌전히 있지만, 또 복수할 대상이
생길지도 모르죠. 예외를 둔다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제이가 정말 원한다면 나는 들어주고 싶지만, 반복은
위험해요.”
엘제이는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보다가 바르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르킨은 아제프가 아니었다. 하지만, 엘제이가 돕지 못했던 아제프의 최후를 떠올리게 했다. 시체로 만든 산
위에 앉아 있던 아제프가 알체스테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던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때의 아제프도, 문양이 넓지 않았다. 책 속의 아제프는, 문장을 가지는 것 외에는 그 힘을 쓰지 않았던 거다.
바르킨은 복수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고 했지만, 엘제이는 그가 소중한 이들을 살리는 걸 더 원했다는 걸
알았다. 그자를 잔인하게 고문한 것도 살리지 못했다는 절망이 커 그랬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문장을 가지고 싶었던 아제프와, 그저 소중한 이들을 살리고 싶었던 바르킨. 두 사람이 자꾸만 겹쳐들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지금은 달라졌고, 아제프는 살아 그녀의 옆에 있었다. 엘제이는 망막을 스치는
아제프의 최후를 힘겹게 삼켜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엘제이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자, 그냥 바르킨을 제 감시하에
두고 살려준다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솟구쳤다.
‘어떻게 할까?’
“네?”
바르킨이 덤덤하게 속삭이며 엘제이를 흘긋 바라봤다. 아제프만 있었다면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엘제이가
있는 이상 변수는 있었다. 바르킨은 가만히 상황을 살피며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했다.
아제프와 엘제이의 사랑 이야기는 꽤 유명한 것이었다. 바르킨은 소문대로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빠르게 알아챘다. 죽고자 했지만, 살 수 있다면 마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간절히 바라보는 바르킨을 마땅찮게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바르킨은 엘제이를 향해
살려달라고 눈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바르킨의 말에 아제프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올라갔다. 어린 날, 살고 싶다고 애원하던 나약한 기억이 떠올랐다.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엘제이는 어두워 보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확, 퍼지자 머리
한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던 망령이 물러갔다.
“……뭐, 실험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니까요. 확실히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다면, 더는 주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테니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렇다고, 주술을 사용했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윽!”
아제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르킨을 바라봤다. 아제프는 바르킨이 아프지 않도록 배려해준 게 아니라, 고통
어린 신음을 듣지 않도록 엘제이를 배려한 것뿐이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엘제이는 살이 떨어지고, 피가 튀는 잔인한 광경에 면역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악마가 사멸한 후, 주술사들의 영혼이 어디로 갈지가 애매해졌다. 신들은 회의 끝에 한 가지 율법을 추가했다.
[흐음- 어쩌실 거예요? 윤회의 궤도로 돌려놓으실 건가요? 저들을 위해 굳이 회의까지 열었으니,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겠지만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4 화 에필로그(16)
144
독기가 다 사라지면 온전히 없어질 문양인데, 그걸 알 리 없는 바르킨은 최대한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세크르다에게 계속 먹이를 공급하기 위해 최소한의 힘만 사용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프리멧사의 눈에는 옅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켈레덴은 프리멧사가 인간을 왜 저렇게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랬다면, 마을의 인간들이 저 짐승에게 잡아먹혔겠지. 더는 저만한 양의 먹이를 사냥할 능력이 없을 테니.
가장 현명한 방법은 마을을 떠나는 거였다. 정말 그들을 위했다면, 왜 외딴 숲으로 가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
사랑의 신인 프리멧사에게 자애가 넘치는 것처럼, 켈레덴 또한 본인의 직책에 맞는 성격을 가진 것뿐이었다.
프리멧사도 그걸 알았기에 켈레덴의 생각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런가?]
켈레덴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인간 때문에 프리멧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제프는 바르킨의 팔이 완전히 얼어붙기를 기다렸다. 감각이 사라진 뒤에 베어야 그가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안고 있으니 제 딸의 얼굴이 하나도 안 보여요! 하여튼 얄미운 놈. 내가 내려갈 수 있었다면 머리카락을
뽑아, 응?]
[저야 당연히 벌을 받는 중이니, 안 되죠. 하지만, 켈레덴 님께는 있으시잖아요. 현신의 자유가.]
프리멧사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옅은 분홍빛 속눈썹이 꽃잎처럼 떨어졌다가 피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에이- 켈레덴 님은 시험하러 가시는 거죠. 저는 켈레덴 님이 볼일을 보시면서 제 아이에게 제 전언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랍니다?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용무는 덤이죠, 덤.]
[프리멧사.]
형벌의 신이 하듯 프리멧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프리멧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켈레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
켈레덴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나왔다. 차갑고 무심한 형벌의 신에게 한숨을 쉬게 할 존재는 거의 없었다.
켈레덴은 간절하게 바라보는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날개를 폈다.
[아! 사랑한다고도 전해줘요!]
켈레덴의 날개가 뻐걱, 소리를 내며 퍼덕거렸다. 프리멧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환하게 웃으며 현신하는
켈레덴을 배웅했다.
***
아제프는 시간이 꽤 지나자 검을 들었다. 이제는 베어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얼어붙었을 듯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주술사에게 주어진 힘을 다 쓰면, 문양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니.]
“윽!”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아제프는 짧은 신음을 내며 엘제이를 끌어안고 물러났다. 새까만 기운이
치지직- 타올랐다. 얼핏 보면 악마의 독기와 비슷했지만, 악마의 것은 저렇게 반짝거리지 않았다.
“천사님?”
“제이, 뭔지 알고 말을 걸어요.”
“……켈레덴 님?”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베아르시 제국은 사랑의 여신 프리멧사를 숭상하는
나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의 정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아제프도 현신하는 신을 보고 멀쩡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켈레덴을
바라봤다.
켈레덴은 눈썹을 파들, 떨었으나 프리멧사가 원할 대답을 들려주었다. 딱딱한 어조에 가슴을 치던 프리멧사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곧 죽어도 사랑한다고 전해주지는 않았다. 프리멧사가 뭐라고 속닥이며 제대로 전해달라고 소리쳤지만, 켈레덴은
들리지 않는 척 그녀를 무시했다.
다정한 프리멧사와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꽤 무서운 인상의 형벌의 신을 대하려니 어려웠다. 어색하게 웃는
엘제이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네? 물론 아제프도 사랑하지만, 여신님도 사랑해요. 의미는 다르지만요. 여신님을 향한 사랑은 아이가 부모를
보는 것과 비슷해요.”
아제프는 순간적으로 엘제이를 향했던 켈레덴의 차가운 눈을 잊지 않았다. 그가 경계하듯 신을 바라보자 켈레덴의
눈에 옅은 흥미가 스쳤다.
‘죽어서도 내 옆에 있어줘.’
꽤 되바라진 생각을 하던 인간이었다. 켈레덴은 프리멧사의 석상 앞에서 무엄한 생각을 일삼던 아제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제프는 저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켈레덴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신이라는 자가 뜬금없이 나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원래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생물이었다. 켈레덴은 아제프가 의아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너는 과거에서도, 현생의 끝에서도, 미래의 예정된 삶에서도 네 짝과 함께한다는 소리다. 죽은 후에도 당연히
네 옆에 있겠지. 그게 너와 네 짝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켈레덴은 아제프가 뭐라 반응하기 전에 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켈레덴이 사사로운 이유로 율법을
어긴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
엘제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켈레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고, 바르킨은 제가 공포에 질려 헛것을 본 거라
믿었다.
엘제이의 안전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선 것뿐이었지만,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꼭 그녀를
훔쳐보는 사람 같았다.
“형!”
“……형?”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5 화 에필로그(17)
145
아제프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주위에는 형이라고 불릴 사람은커녕, 사람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를 형이라 부른 이 아이를 제외하고는.
한적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외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제프는 마을에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고,
신분이 높다 보니 다들 그를 어려워해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이 아이를 빼고는.
아제프는 드물게도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론은 대담하게도 아제프의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기행을
보였다.
“저기, 형.”
“…….”
조막만 한 데다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5 살의 소년은 아제프의 바짓단을 친근하게 잡아당기며 말갛게 웃었다.
더러운 때 하나 물들지 않은 순진한 아이의 얼굴에 아제프는 손끝을 움찔, 떨었다.
“형! 이제 가는 거예요?”
아론은 마땅찮아하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모른 척하는 건지, 아제프를 계속 형이라고 불렀다.
물론, 목적이 있는 대화야 아제프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얻어낼 게 있으니 귀찮은 아이를 살살 달래 원하는 걸
취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아이의 칭얼거림을 들어줘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아제프는 드물게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바짓단을 잡은 아이의 손을 쳐내고 무시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 아이는 엘제이가 특히나 마음에 들어 하던
아이였다. 나중에 엘제이가 말을 걸지도 모르니, 그런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론이 해맑게 웃으며 아제프의 무릎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
같았다.
아이는 생각보다 더 멍청했다. 아제프는 드물게 자비를 베풀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건만, 이 아둔한
생명체는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아제프는 두 번의 시도 끝에 칭호를 정정하는 걸 포기해버렸다.
“그래. 무슨 일이지?”
아론은 까먹었던 걸 떠올린 듯 이마를 탁- 쳤다. 그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내밀었다.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게 제법 예쁘기는 했지만, 값진 보석류는 아니었다.
되바라진 놈이었다. 아제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거의 노려보다시피 아론을 응시했다. 아론은 아제프의 살벌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헤헤 웃었다. 찌든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말간 미소에 아제프의 눈썹이 살짝
내려왔다.
“……고맙다.”
“형, 고개 좀 숙여주세요.”
“…….”
아제프는 왜인지는 몰랐지만, 또 귀찮음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는 제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아이를 위해 쭈그려
앉아야 했다.
아이의 손은 보송보송했다.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이 둥글게 모아져 아제프의 귓가에 닿았다. 아제프는 아이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우유 냄새 같은 걸 맡았다. 아이들 특유의 보드라운 향이었다.
‘젖비린내군.’
“허ㅡ.”
[형!]
“아제프, 왜 그래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어디 아픈 건 아닐지 걱정했다. 아제프는 제 이마를 더듬는 엘제이의 손길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천천히 다리를 펴 일어났다.
엘제이는 꽃을 소중하게 감싸며 방긋, 웃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웃는 얼굴을 보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의 본능은 엘제이가 저걸 받으면 기뻐할 걸 알고 있었다. 아제프는 그래서 꽃을 버리지 않았던 거라
생각했다.
엘제이는 그렇게 물으며 아제프의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아제프의 얼굴이 행복하게 휘어졌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기쁨을 위해 아론의 선물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그의 손에는 엘제이의 기쁨과 관련
없는 하얀 돌이 꽉 쥐어져 있었다.
***
그 뒤의 여행은 순조롭고 편안했다. 아제프는 그가 원했던 것처럼 둘만의 시간을 오붓하게 즐겼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그 감정이 큰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버려 아제프와 엘제이는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아제프는 지난번 길거리 노숙으로 깨달은 게 있었는지, 이것저것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피이잉-
엘제이를 재우려고 그녀의 가슴을 도닥도닥 두드리던 아제프는 뜬금없는 엘제이의 말에 눈을 조금 키웠다. 그는
정말 소원을 비는지 눈을 감고 집중하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너는 과거에서도, 현생의 끝에서도, 미래의 예정된 삶에서도 네 짝과 함께한다는 소리다. 죽은 후에도 당연히
네 옆에 있겠지. 그게 너와 네 짝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엘제이의 말대로 소원을 빈 아제프는 엘제이가 무엇을 빌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아이를
바랄지도 모른다. 엘제이는 아이를 좋아하니까.
아제프가 가만히 그들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 대해 상상할 때, 엘제이는 소원을 빌다가 잠이 든 듯했다.
“제이?”
“으음- 아제프.”
엘제이는 추운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아제프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제프는 기꺼이 제 품을 내주며 그녀의
어깨에 모포를 덮어줬다.
엘제이는 따뜻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코를 비볐다. 목 끝까지 모포를 잘 여며주던 아제프의
손이 멈칫했다.
아제프는 제게 내밀던 보드라운 손을 내치지 않았던 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없을 마지막 기회를
붙잡은 행운아였다.
아제프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의 첫 아이는 엘제이를 닮은 녹안과, 아제프를 닮은 백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갓 눈을 뜬 아이의 신록빛 눈을 바라본 아제프는, 자신이 봄을 태어나게 했음을 알았다. 아제프는 아이의 이름을
플린테아스라고 지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6 화 side story 1
146
side story 에서는 아제프가 엘제이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기 전에, 아이젠이 자신의 원수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본편과는 다른 쪽으로 전개됩니다.
***
하얀 방문 앞으로 걸어간 남자는 열쇠를 꽂고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열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하얀 침대가 보였다.
커다란 창문이 한가득 머금은 햇살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엘제이의 등을 비추고, 부드럽게 흐트러진 밀색 머리를
비췄다. 천사의 깃털처럼 나부끼는 빛무리가 무척 아름다웠지만, 생기가 빠져나간 듯 애처로운 엘제이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고급스러운 가구, 시중을 들어줄 하녀, 호사로운 식사. 생활하기에 불편한 건 없지만, 딱 그 정도였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향해 걸어갔지만, 엘제이는 발소리를 듣고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돌아봐도 그가 아닌 하녀가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아제프의 모습에 한결 나아진 안색을 했다. 뜨거운 뙤약볕에 시들시들 말라가던 풀잎색 눈이
생기를 틔웠다. 그녀는 마치 그가 반갑다는 옅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제프는 납치당해 감금된 주제에 자신을 반가워하는 엘제이를 보며 혀를 깨물었다. 그는 엘제이가 지독한 착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아제프의 눈앞에 도착한 엘제이는 냉랭한 그의 표정에 흠칫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벌써 3 일이
흘렀다. 아직은 무사하다고 해도 여기서 더 지내다가는 언젠가 그녀의 아버지가 이곳을 알아챌지도 몰랐다.
“아제프……. 저는,”
“아ㅡ.”
엘제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3 일간 볕을 못 봐서인지,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 건지,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제프의 시선이 물끄러미 창백한 손을 응시했다. 몸 어딘가가 따끔따끔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저는 되묻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티아세 양, 누가 제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좋다고
했습니까.”
아제프의 날카로운 어조와 냉정한 얼굴에 엘제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이 속눈썹을
적시고 팔랑팔랑 흔들렸다.
울음을 참는 얼굴로 풀이 죽은 엘제이가 청하듯 손을 뻗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그의 손을 스치듯 부여잡았다.
아제프는 함부로 잡아 오는 따스한 손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원수의 딸에게 약해지는 자신이 한심했다.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아제프의 목소리는 차고 따가웠다. 엘제이는 벼린 칼날에 베여 피가 나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손끝이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빌어먹을!”
아제프가 욕을 지껄이며 소파를 발로 찼다. 끔찍하게도 청승맞은 여자였다. 차라리 원망하고 울부짖기를 바랐다.
그를 욕하고 할퀴려 들기를 바랐다. 아제프는 따끔따끔 요동치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날뛰었다.
소파 옆의 책상에 예쁘게 장식되어 있던 화병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지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화병조각이
바닥으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엘제이는 화를 내는 아제프를 말리지도 못하고 덜덜 떨리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고여 흐려진 시야에 예리한 날붙이가 보였다.
아제프의 발 앞에서 위험하게 빛나는 화병 조각을 본 엘제이가 머뭇거렸다. 그녀는 아제프의 앞에 놓인 위협을
참지 못했다. 엘제이는 그의 발아래에 떨어진 조각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아제프의 발 앞에 쭈그려 앉은 엘제이가 울음을 참으며 화병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모았다. 쨍강쨍강, 소리를
내는 유리조각이 그녀의 손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런, 씹, 제기랄!”
저 여자만 보고 있으면 울화병이 도진 것처럼 기분이 불쾌하고 참을 수 없었다. 아제프는 화병을 줍는 엘제이의
손을 펴 조각들을 다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엘제이를 끌고 가 침대로 던져버렸다.
“아악!”
침대가 푹신해 다치지는 않았지만, 아제프의 난폭한 행동에 겁을 먹었는지 엘제이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아제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엘제이를 이런 식으로 거칠게 다루지 않았다. 충격이 컸는지 배 속이 뻐근하게
아팠다. 엘제이는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지만, 줄줄 새는 눈물샘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웅덩이에 돌을 던진 것처럼 일렁거리는 초록색 물결이 심장을 콱, 움켜잡았다. 낯선 감각에 아제프의 얼굴이 와락
찡그려졌다.
“…….”
다 그녀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아제프의 태도에 엘제이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힘없이 툭툭 떨어졌다.
엘제이는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과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가족을 죽인 범인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몸에 빙의된 것뿐일지라도 아제프에게 미안했다.
눈을 감은 엘제이는 보지 못했지만, 아제프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엘제이의 눈물을 닦아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올리고 파르르 떨었다.
“……저는 그게 아니라,”
“…….”
엘제이가 황급히 입을 가리며 끅끅거리는 소리를 감춰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흐끕, 우는 애달픈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아제프는 알았다. 엘제이 티아세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망칠 여자였다. 아제프는 저를 휘두르려는 여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스스로 다짐하듯 쏘아붙였다.
“당신은 평생 여기서, 지금처럼 불행하게, 평생 이렇게 사는 거야. 내가 지난 21 년간 불행했던 만큼 당신도
불행해져. 당신을 살려두는 이유는 그뿐이니까.”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가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아팠던 만큼 그녀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착각이라는 걸 모르고.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7 화 side story 2
147
하물며 공녀 신분의 엘제이를 멋대로 데려와 감금했으니 그 죄질이 무거운 것이 당연했다. 들키면, 아제프는 꽤
곤란해질 터였다.
엘제이가 쓰라린 문장을 그러쥐고 눈물만 뚝뚝 흘리자 아제프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옷을 젖혀 반짝반짝 싱그럽게 빛나는 문장에 손끝을 세웠다. 저 끔찍한 것을 보고 있으니 이가
벅벅 갈렸다.
아제프가 씹어뱉는 것처럼 사납게 소리칠수록 문장이 너무 아팠다. 누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문장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아아악!”
“아으ㅡ. 흐윽!”
“아파?”
바르르 떨리는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제프의 팔뚝에 고였다. 아제프는 제 팔을 축축하게 적시는
엘제이의 눈물을 보다가 침대를 내리쳤다.
쾅!
큰 소리를 내며 내리꽂히는 주먹에 엘제이가 질겁하며 눈을 감았다. 아제프는 창백한 얼굴을 조금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휙 돌렸다.
***
아제프는 그 뒤로, 매일 엘제이를 찾아갔다. 그는 엘제이를 피 말려 죽이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 자신에게
변명했으나, 실제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그저,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서 엘제이가 무얼 하는지를 관찰했다. 엘제이는 주로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말을 걸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전의 일이 위협으로 다가갔는지
쉽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엘제이는 책을 읽고 아제프는 그런 그녀를 관찰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날도, 아제프는 퇴궐을 하고 곧장 엘제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는 뛰지는 않았지만, 발걸음 소리를
저벅저벅, 빠르게 울렸다.
좀 일찍 왔더니, 평소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침 그녀의 식사가 끝났는지 그녀의 방에서 하녀가
트레이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아제프는 나날이 마르기만 하는 엘제이를 떠올리며 트레이의 뚜껑을 열었다. 음식은 조금도 손대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
쾅!
속이 울렁거려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던 엘제이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쇠사슬이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영애, 그거 아십니까?”
“용도를 다하지 못하는 물건은 그저 쓰레기입니다. 주방장이라는 자가 쓰레기 같은 음식을 가져다 바쳤으니,
영애가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게 아닙니까. 저는 주인으로서 주방장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는데, 영애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제프가 속삭이듯 말하며 검을 주방장의 목에 밀어붙였다. 주방장의 목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흘렀다. 그 모습이
꼭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로 엘제이를 벌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엘제이는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무척 당황했다. 가만히 방 안에만 갇혀 있는데 식욕이 돌 리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 식사를 거르는 일이 잦았지만, 아제프가 저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아제프의 화가 풀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데, 상태가 안 좋아지니 화가 난 것일지도 몰랐다.
“애먼 사람? 이자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겁니다. 주방장으로서 책무를 다했다면, 영애의 살이 그렇게
내려앉지도 않았겠죠. 영애의 몸이 상한 건 이자의 탓이니. 직접 고르십시오. 팔? 다리? 그것도 아니면, 목?”
아제프가 차례대로 주방장의 신체에 검을 겨누며 속삭였다. 주방장의 팔과 다리에 새빨간 핏물이 물감처럼 뚝뚝,
번졌다.
엘제이는 며칠간 계속 방 안에만 갇혀 살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으니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겨우 달싹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 속이 안 좋아서? 핑계도 좋지. 이 기회에 그냥 굶어 죽으려 했던 건 아닌가? 아니면 나에게 시위하고
싶었나? 둘 중 어느 쪽이지?”
아제프가 빈정거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엘제이는 그게 아니라고 잘 설명해보려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상태가 안
좋은지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엘제이는 비틀거리며 협탁을 손으로 짚었다.
아제프가 주방장의 턱을 손으로 움켜쥐자 주방장이 꽥꽥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엘제이는
주방장의 입속에 검을 집어넣으려는 아제프를 보다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린 아기의 첫 발걸음처럼 연약한 걸음이 겨우 떨어졌다. 짤랑거리며 흔들리는 쇠고랑 소리에 아제프의 얼굴이
슬쩍 엘제이를 향했다.
엘제이의 핏기 없는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엘제이는 투명하게 녹아 사그라질 물거품 같았다. 아제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왜 그런 얼굴,”
“제발, 그만해요.”
엘제이는 힘없이 속삭인 뒤 쓰러졌다. 아제프가 검을 내팽개치고 달려가 쓰러지는 몸을 황급히 받았다. 축 늘어진
몸이 아제프의 몸에 힘없이 감겼다. 평소보다 체온이 낮았다.
“……의원을 불러와.”
“네?”
아제프가 소리를 지르자 쓰러져 있던 주방장이 헐레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눈이 가려져서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쾅, 소리가 났다.
아제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차가운 뺨을 손으로 만져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8 화 side story 3
148
그 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방 옆에 의원을 기거하게 했다. 엘제이는 매일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고, 시간이 좀
흐르자 엘제이의 몸은 회복됐다.
그녀는 한제이로 살다가 엘제이 티아세에 빙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제프에게 잡혀 왔다. 이 세계에 적응할
틈도 없이 감금생활이 시작되었고, 혹시 아제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조마조마하게 생각하니 시름시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의원은 엘제이의 심리 상태가 불안하니 그녀를 자극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고, 아제프는 꽤 착실히 그것을
지켰다.
외로움이 더 강했던 건지, 엘제이 티아세는 아제프와 함께 식사하는 걸 더 선호했다. 함께하는 식사가 잦아지자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돌고, 식사도 꽤 잘 하게 되었다.
아제프는 놀란 속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묽은 수프와 소화가 잘되는 음식 위주로 식단을 구성하게 했는데,
엘제이는 잘 먹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많이 먹지는 못해서 아제프는 늘 지켜보고 있다가 엘제이의 숟가락이
느려지면 그녀를 말려야 했다.
아제프 기준으로, 엘제이 티아세는 참 이상한 여자였다. 그녀는 종종 납치범을 걱정하고, 궁금해했다. 아제프는
그럴 때마다 배 한구석이 뻐근하게 뭉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 정도만으로 됐어. 배부르면 그만 먹고, 이따 다시 먹어. 옆의 종을 흔들기만 하면, 하녀가 들어와
다른 걸 내어줄 테니까.”
엘제이는 그렇게 자주 먹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려 했으나, 아제프는 듣지 않을 터였다. 고민하던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가족과 헤어졌지만,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감정도
그랬다. 엘제이는 아이젠과 엘리사를 떠올리며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걱정하고 있을 텐데.’
아제프는 무얼 생각하는지 조금 우울해 보이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입안을 씹었다. 그는 결국, 밀려드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랑해요.’
“아제, 음ㅡ.”
아제프는 제 이름을 부르고 흠칫하는 엘제이를 느꼈지만, 전처럼 그녀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걸어와,
엘제이의 발목에 달린 쇠사슬을 풀었다.
짤랑, 소리가 나고 무겁게 발목을 짓누르던 족쇄가 풀렸다. 감금된 이후, 최초의 해방이었다.
“나와.”
엘제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아제프를 졸졸 따라갔다. 아제프가 방문을 열고, 나가라는 듯 엘제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엉겁결에 저를 가뒀던 곳에서 해방된 엘제이가 얼떨떨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제프는 평생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엘제이가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제프는
기대하는 엘제이를 보고 그동안 억누르던 성정을 폭발시켰다.
아름다운 입매가 삐뚜름하게 휘었다.
“왜? 설마, 내가 당신을 놔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내가 당신을 곱게 당신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한
거야? 당신이 어디까지 멍청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군. 고문실이면 모를까.”
뒤에 덧붙인 말에 엘제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고문받는 모습도, 고문하는 모습도
꿈속에서 종종 봤다. 아제프는 저택 지하에 감옥과 고문실을 마련해뒀다.
평범하게 자라온 엘제이가 목적도 없이 가해지는 고문을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엘제이는 날카로운 피붙이가
살갗을 긁어내리는 걸 상상해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
“……!”
“…….”
“아ㅡ.”
“햇빛을 오랜 시간 안 봐서 그래.”
엘제이는 제 얼굴에 닿았던 손길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아제프는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어갔고, 엘제이는 그를
졸졸 쫓아갔다.
엘제이는 딱히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아제프는 속으로 안도하는 저를
느낄 수 있었다.
엘제이는 걱정하기를 그만두고, 오랜만에 보는 햇살을 마음껏 취하기로 했다. 엘제이는 꽃을 구경하기도 하고,
향을 맡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돌아본 엘제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옅게 배어 있었다. 아제프는 후들후들 떨리는 그녀의 무릎을 보며 그저
진실을 얘기하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벌써 힘든 건가?”
정말 짜증 나는 여자였다. 저 여자는 언제나 그를 화나게 했다. 아제프는 언젠가 저 여자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만들 거라는 걸 알았다. 아제프는 미치고 싶지 않았지만, 견고한 이성은 이미 조금씩 모래알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헙!”
흔들릴 때마다 엘제이의 얼굴은 그의 가슴팍에 콩콩, 부딪혔다. 엘제이는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침대에 내던져진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래 안긴 건 처음이었다. 엘제이는 상황도 모르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마음을 졸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다행히 아제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제프가 이 마음을 안다면 틀림없이 불쾌해할 터였다. 엘제이는 제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정원에는 그네가 하나 있었다. 바람을 쐬게 해주려고 그네를 태워줄 생각이었는데, 당사자는 이미 잠든 상태였다.
아제프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엘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으음-.”
아제프는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렸지만, 엘제이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탈한 듯 헛숨을 내뱉던
아제프는 엘제이를 그네 위에 사뿐히 내려놨다.
엘제이는 깨지 않고 잘 잤다. 아제프는 기다란 그네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제 무릎에 올려놨다. 자세가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아제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9 화 side story 4
149
“……!”
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아제프는 저를 부르는 조그만 목소리에 흠칫했지만, 다행히 잠꼬대인 듯 엘제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미쳤나?”
아제프는 자신을 힐난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살결을 만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쉽게 믿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은 이
상황을 만족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아제프ㅡ.”
엘제이는 아제프의 속도 모르고, 그의 이름을 길게 발음했다. 아제프는 왜 엘제이가 꿈속에서 그만을 애타게
찾는지 알 수 없었다.
깃 콧날이 하얀 볼을 뭉개며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깨어날 것이 두렵지도 않은지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것에만 집착했다.
“으음-.”
“젠장.”
아제프는 엘제이의 혀를 휘감아 욕심껏 혀뿌리를 빨았다. 마약에 전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아제프는 질척한
소리를 내며 엘제이의 입안을 욕심껏 훑었다.
빌어먹게도, 기분 좋았다.
***
엘제이는 산책나간 다음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 신세를 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제프,”
“아ㅡ. 미안,”
“미안하다고도 하지 마.”
“아음, 음…….”
“흡, 흐으-.”
엘제이의 입에서 서러움에 젖은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나갔다. 방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아제프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울었고, 아제프는 엘제이의 울음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엘제이는 정해진 시간에 밖으로 산책하러 나갈 수 있었지만, 아제프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혀가 잘린
하녀뿐이었다.
엘제이는 그날, 아제프의 영혼이 악마에게 끌려가는 악몽을 꿨다. 새벽에 벌떡 일어난 엘제이는 종을 요란스럽게
흔들어 하녀를 불렀다.
엘제이는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째깍째깍 흐르는 뻐근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제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제프가 가까이 다가오자 알싸한 향이 났다. 마약의 일종인, 아텐의 향이었다. 엘제이는 코끝을 뒤덮는 매운
향을 느끼며 황급히 아제프의 옷을 붙들었다.
엘제이의 머릿속에는 오늘 그를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만 가득했다. 아제프는 오늘 누군가를 죽일 거고,
그 살인은 크게 불어나 결국에 그를 뒤덮을 터였다.
“뭐?”
아제프의 미간이 콱, 좁아졌다. 마약을 피운 탓에 몽롱해진 머리가 헛것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엘제이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뭐든?”
그 한 단어가 아제프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엘제이는 그가 바라는 걸 들어줄 수 없었다. 아제프가 바라는 건
언제나 하나였는데, 엘제이는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거였다. 적어도 아제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속도 모르고 빠르게 종알거렸다. 엘제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제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가슴께를 노려봤다. 그를 불러놓고 옷도 안 갈아입은 채였다. 아제프는 얇은 슈미즈 끈 사이로
보이는 초록색 문장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당신은 그 얘기가 참 쉬워.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고? 그래. 뭘 해줄 거지? 나를 위해 죽어줄 건가?
아니면 그 문장을 찢어발겨 내 앞에 바칠 건가? 이 중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해?”
“…….”
위협적으로 뇌까리는 음색에 엘제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오금에
침대가 걸리고, 엘제이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제프의 입술이 미끄러질 듯 내려와 엘제이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엘제이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
엘제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증오와 혐오를 담은 아제프의 얼굴이 우악스럽게 일그러졌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에서 짙은 원망과 증오를 읽었다. 그는 미워죽겠다는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그의 시선에 찔려 피가 나고, 그의 감정에 베여 상처투성이가 됐다.
“아니.”
“아니.”
엘제이의 눈이 절망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아제프의 목소리를 듣고 이곳에 왔다. 그를 사랑했기에, 이곳에 오고
싶었다. 엘제이는 그저, 그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엘제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제프는 여전히 미움을 담아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는 엘제이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혐오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모든 게 어긋나버렸다. 망가졌다.
엘제이는 이 모든 걸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하나쯤은 그가 원하는 걸 내어주고 싶어서 엘제이는
간절하게 물었다.
아제프의 눈에 둥근 파문이 일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마약을 피우고 있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괴롭고, 뻐근해서 몸 어느 곳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엘제이는 꺼질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가로지르고, 억눌린 비통이 아래로 쏟아졌지만, 향에
취한 남자는 꺼져가는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50 화 side story 5
150
엘제이는 책상에 앉아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사각사각- 까만 붓이 소리를 내며 종이에 잉크를 묻혔다.
엘제이는 눈물진 얼굴로 종이를 바라보며 염원을 완성했다.
“제발.”
글을 다 쓴 엘제이는 아제프가 완전히 이 방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종을
흔들었다.
엘제이는 등을 돌린 채로 중얼거렸다.
“물 한 잔만, 갖다 줄래?”
두려움을 담고 있었고, 고독함을 품고 있었다. 엘제이는 하나둘 떨어지는 비애의 감정을 손등에 모아 이불로
닦아냈다.
하녀는 힘없는 목소리에 조금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엘제이의 의지에 반하지는 않았다. 협탁에
트레이를 내려놓는 소리가 달칵, 방 안을 울렸다.
엘제이는 단 한 번도 저항하거나 벗어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날카로운 것을 얻어내려
하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그런 쪽으로 엘제이를 의심하지 않았고, 물은 유리컵에 담겨 있었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다른 사람이 놀라 뛰어올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이불보를 살짝 벌리자, 깨진
조각들이 보였다.
엘제이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녀는 힘없는 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리조각은 길고
날카로웠다.
여기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제프는 자신을 미워했고, 오히려 자신 때문에 힘든 것 같았다. 엘제이는 그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영원히 당신만 사랑하겠다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엘제이의 시선이 미끄러져 문장을 더듬었다.
두려움에 떨리던 손끝이 망설임 없이 가슴을 찔렀다. 피가 튀고,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엘제이는
멈추지 않고 유리조각을 쑤셔 넣었다.
***
아제프는 엘제이의 죽음을 품은 종이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보다가,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아으ㅡ. 으…….”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의 손에는 단정한 글씨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가 남아 있었다. 아제프는 죽어가면서도
미련처럼 남긴 엘제이의 마지막 흔적을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아제프……. 부디, 모든 걸 그만두세요.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제 목숨을 드렸으니, 부디 이것만 가지시고
이제 행복해지세요. 복수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아요. 곁을 돌아보면 당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많은데,
그걸 모르는 당신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고독에 지친 삶이 아니라 행복에 물든 삶을 사시고, 복수에 눈먼 삶이
아니라 사랑받는 삶을 사세요. 부디, 행복해지세요. 아제프.]
그녀가 죽었다.
“으아아ㅡ. 아아!”
아제프는 그제야 엘제이가 남긴 쪽지를 이해했다.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제프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비명을 질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에 질척질척하게 젖은 핏물이 들어왔다.
엘제이가 죽었다. 독하지 못했던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가 목숨을 끊도록 독하게 몰아붙인 건,
그였다.
푸르게 질린 입술은 더는 상냥한 목소리를 내뱉지 못할 테고, 따스하다고 생각했던 여린 숨결도 더는 새어나오지
않을 터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애원하듯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문질렀다.
따뜻했던 입술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그를 찔러댔다. 아제프는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화들짝
떼어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제프는 이 순간에도 엘제이를 무어라 칭하지 못했다. 늘 부르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는데, 목구멍이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제프.]
[엘제이.]
엘제이의 입술이 상냥하게 그를 부를 때마다, 아제프는 늘 화답하고 싶었다. 그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럼 가슴 위로 따스한 것이 번질 것만 같았다.
끝내 제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남자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하고 나서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이었음을 알았다.
“아아아악!”
“제가 잘못, 잘못했어요. 다 사과할 테니까……. 다시는 당신 앞에서 험한 말도 안 하고, 당신을 괴롭히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요? 한 번만 일어나주면 안 돼요?”
아제프가 뒤늦게 용서를 빌며 날붙이가 꽂힌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새빨간 선홍빛 피가 아제프의 손을 적셨다.
그는 붉게 물든 손을 보다가 오열했다.
더는 박동하지 않는 심장이 그녀의 죽음을 알렸다. 아제프는 다시는 그녀가 일어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제발
일어나 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했다.
“…….”
부서진 마음을 고백해본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아제프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바라보며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상냥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폭언을 쏟아 부었고, 자신을 걱정해 힘겹게 뱉은 말을 차갑게 뿌리쳤다. 우는
여자를 다그치고, 불행하게 살라고 몰아붙였다.
[아제프.]
“엘제이ㅡ.”
아제프는 한 번도 불러주지 못했던 엘제이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붙잡았다. 늘 이렇게 불러주고 싶었는데,
그녀의 이름을 몰래 발음하며 이렇게 답할 날을 상상했는데, 모든 걸 그가 망쳐버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 불렀지만, 그의 부름을 들어줄 존재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는 그날, 모든 걸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