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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 화

Chapter01. 신의 문장

[신의 문장] 속 비운의 악역, 아제프 란델. 그는 이유 있는 악역이었다.

그의 불행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다.

아제프는 한미한 남작 가문의 후계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이라기보다는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었지만, 아버지인


휴버트는 기사 작위가 있었고 녹봉을 받아 생활할 수 있었다.

아제프가 아주 어렸을 때, 그들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세 가족이 오순도순 살았다.

서로를 사랑했던 그의 부모는 사랑으로 그를 키웠다. 어린 아제프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애썼고,
그에게 다정한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가 2 살이 될 때까지만.

아제프 란델, 겨우 생후 2 년 만에 그의 운명은 비틀리기 시작했다.

아제프가 2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는 고위귀족의 정부가 되었다. 소피아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다.

다만 평민과 다를 바 없이 한미한 가문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의 미모는 독이 되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고위귀족에게 그녀를 팔아넘겼다.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지 못한 남자는 미쳐버렸다. 그는 갓 2 살이 된 아들의 얼굴을 보며 발광했다.

“그년을 닮았어! 내 자식이 아니야! 너도 다른 놈의 자식인 거야! 그년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른 남자가
있었어!”

휴버트는 겨우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몸에 손을 댔다. 화풀이하듯 아기의 몸을 발로 찬 남자는 너부러져 신음하는


아이에게 달려가 울며 빌었다.

“아니야……. 우리 아들……. 내 아들……. 다 내가 못나서……. 네 어미를 지키지 못하고 너를 이렇게…….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미쳐서 너를 이렇게…….”

휴버트는 피멍이 든 아이의 하얀 피부를 만지며 울었다. 아버지에게 처음 맞은 아제프는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휴버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흐아아앙!”

휴버트는 목덜미에 닿는 새하얀 팔을 보고 실성한 듯 몸을 떨며 아제프를 내쳤다.

“이 악마 같은 새끼! 어디서 사람을 홀려! 제 어미를 닮았어! 그년을 닮았다고!”


“흑……. 아아악!”

아이를 때리는 소리와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직접 씻겨주고 얼러주던 새하얀 몸에 보랏빛
꽃이 피고, 새빨간 상처가 죽죽 그어졌다.

미쳐버린 아버지와 팔리듯 고위귀족의 정부가 된 어머니. 아제프의 불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아제프가 5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아는 쫓겨나듯 집으로 돌아왔다. 휴버트는 돌아온 소피아를 보고
얼핏 정신을 차리는 듯싶었다.

“소피아, 당신 탓이 아니야. 내가 미친놈이지. 다 내 탓이야. 소피아……. 사랑해.”

휴버트는 광기를 털어내고 다시 복직했다. 술병을 찾는 대신 검을 들었고, 꼬박꼬박 녹봉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피아의 배가 점점 불러왔다. 휴버트는 돌아온 지 몇 달 안 되어 산기를 보이는 아내를
보고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제프와 소피아는 매일 휴버트에게 맞았다. 때릴 곳 하나 없는 가녀린 임산부와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 울고 애원했다. 그는 늘 때리고 나서 용서를 구했다.

“아제프! 소피아! 미안해…….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용서해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소피아는 항상 휴버트를 용서했다. 하지만 그는 늘 말뿐이었다. 아름답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피멍으로
물들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휴버트는 이미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소피아를 때리고, 아제프를 때렸다.


소피아는 아버지에게 맞는 아들에게 미안하다 속삭이며 아제프를 감싸 안았다.

“아제프……. 못난 어미라 미안해…….”

“나쁜 년! 다른 놈의 자식을 내 앞에서 감싸 안아? 죽여 버릴 거야!”

소피아가 아제프를 보호할수록 휴버트는 점점 더 난폭해졌다. 그는 소피아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가 방문을


닫아버렸다. 아제프는 어머니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문 앞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울었다.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앙상해진 몸은 피멍으로 가득했다. 그는 어디 한 군데 안 다친 곳 없는 몸을 끌어안고


혼자 울었다.

‘아파. 외롭고 무서워…….’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린 몸은 열로 들끓었다. 겨울에도 장작 하나 없어 훈기가 돌지 않는 방 안은 차가웠다.


몸을 둥글게 말고 추위를 견디던 어린 아제프는 눈물을 흘리며 방문을 두드렸다.

“아파요. 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아파요.”

열로 들떠 힘 하나 없는 손짓이 겨우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방문을 두드렸다.

“꺄아아아!”
“미친년! 당장 이리 안 와?”

어린아이의 애타는 몸짓에도 방 안의 소란스러움은 멈추지 않았다. 열로 발개진 귓가로 소피아의 비명과 휴버트의
욕설이 들려왔다.

“어머니, 아버지……. 아파요. 아파.”

어린 아제프는 아무리 애원해도 그의 부모가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제프는 늘 혼자였다. 혼자서 모든 걸


버텨냈다.

아이는 그저 몸을 말고 견뎠다. 외로움과 고독감이 그의 마음을 좀먹어도 어렸던 소년은 부모를 원망하지 못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처럼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기다렸다.

세월이 조금 흘러, 소피아의 배는 금방이라도 아이를 낳을 듯 남산처럼 부풀었다. 휴버트의 난동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날은, 휴버트가 소피아를 쥐 잡듯 팬 날이었다. 남편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 소피아의 안색은 시꺼멓게
죽어버렸다. 아제프는 피를 토하며 헉헉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창백하게 질렸다.

“어머니!”

소피아의 하얀 얼굴은 원래의 색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아제프가 소피아의 몸에 손을 대자 불에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린 아제프는 어머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버트는 소피아의 안색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술을 마셨고, 아제프는 비틀비틀 뛰쳐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약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 죽지 마세요……. 제발…….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아제프는 그날 처음으로 나쁜 짓을 했다. 돈이 없던 아제프는 근처 약초상에 들려 아무 약초나 마구잡이로 훔쳤다.


중간에 주인에게 걸려 흠신 두드려 맞으면서도 독하게 약초를 놓지 않던 소년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집을 향해
달렸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담한 저택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시뻘건 화마가 저택을 삼키고 그의 가족을 삼켰다. 몸을 후려치는 폭력에도 놓지 않던 약초가 툭 떨어졌다.
힘없이 풀린 동공 위로 화마가 일렁였다.

그날, 아제프는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를 때리던 아버지도, 힘없이 울던 어머니도, 뱃속에 있었던 동생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혼자가 되었다.

가족과 집을 잃은 다섯 살 꼬마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뒷골목에 들어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삶의


고단함에 지친 그가 최초로 판 건 웃음이었다.

그는 웃음을 팔다 몸을 팔았다. 가진 게 그것뿐이었던 아이는 몸을 팔아 배를 채웠다. 곰팡내가 나는 더러운 빵


한 조각에 웃음을 팔았고, 조금 자라자 더 나은 음식을 먹기 위해 몸을 팔았다.

그가 겨우 13 살 때, 그는 한 미망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편을 잃은 후작 부인이 그를 애틋하게 여겨 좋은 어머니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이미 내정된 비틀림이 그의 운명을 덮쳤다.

아제프의 우아한 양어머니, 그라시아 란델은 그에게 집착했다. 그녀의 사랑은 그가 바란 것과는 달랐다.

“아제프, 엄마는 널 사랑한단다.”

“아아아악!”

“쉬이- 시끄럽게 굴면 못써요. 엄마가 다른 사람이랑 말 섞지 말라고 했잖니. 엄마 말 잘 들어야지?”

그라시아 란델의 우아한 손이 한번 휘둘릴 때마다, 상처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라시아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옷을 벗었다.

그의 삶은 또다시 폭력으로 점철됐다.

진창에서 피어난 가장 비참한 꽃. 그게 바로 아제프 란델이다.

***

“어머, 부인. 아이가 참 예쁘네요.”

“아제프, 백작 부인께 인사해야지?”

그라시아는 대외적으로는 훌륭한 양모인 양 행동했다. 그의 몸은 푸르게 질리고 빨갛게 꽃필망정 얼굴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제프가 성장하며 강인해질수록 그녀의 집착은 더 심해졌다.

“나만 보라고 했잖아! 감히 내 말을 어겨?”

“…….”

아제프는 더는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그 시간이 지나기를 감내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역겨운지 스스로 제일 잘 알면서도,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살아남고 싶었다.

‘죽기 싫어. 살고 싶어……. 나는 살면 안 돼? 나도, 사랑받고 싶어.’

세상의 신기함에 눈을 반짝이던 맑은 벽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울며 애원하던 소년은 인형처럼 무감각해져 갔다.

아제프는 체념을 배웠다. 그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라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저 여자에게 애원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아제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하나둘, 사라졌다. 사랑을 갈구하며 뜨겁게 뛰던 심장은 서늘하게 식어 두꺼운 벽을
둘렀다. 스스로 만든 새하얀 얼음이 그의 몸을 단단하게 둘렀다.

‘다시는……. 애원하지 않아. 울지 않아. 믿지 않아. 기대하지…… 않아.’


성장한 아제프는 그라시아처럼 우아하게 웃으며 사람을 속이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께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아제프가 새빨간 와인 잔을 우아하게 들며 싱긋 웃었다. 다음 순간, 흐드러진 꽃처럼 어여삐 웃는 얼굴로 다가간
아제프가 그녀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너! 끄윽……. 네가, 끅! 감히! 누구……. 누구 없,”

“어머니, 아무도 오지 않아요. 이 방에서 비명이 들리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가시는 길이 부디, 다신 없을


지옥길이기를.”

새빨갛게 칠한 손톱이 그의 팔목을 북북 찢으며 발버둥 쳤다. 홉뜬 눈은 괴로워 발버둥 치는 몸짓과 희미한
숨결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아제프가 17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결국 사람을 죽였다. 그의 양어머니 그라시아 란델은 그의 손에 죽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보는 아제프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지켜봤다.

덜덜 떨리는 손끝만이 그의 두려움을, 그의 죄악감을 애처롭게 표현했다.

아제프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

사는 게 더럽고 끔찍했다. 죽어버린 시체 앞에서 그는 고민했다.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인지, 더 살아볼 것인지.


역시 죽고 싶지 않았다.

“복수……. 할까?”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소년은 그렇게라도 살아가려 했다.

‘복수하자. 찾아내서 나를 이리 만든 놈들의 머리를 시궁창에 처박고 팔과 다리는 잘라 새의 먹이로 주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여 버릴 거야.’

음울하게 가라앉았던 입가가 싱긋, 부드럽게 휘어졌다.

얼마나 허무한 길인 줄도 모르고, 얼마나 더 그를 외롭게 할 줄도 모르고.

그는 아프고 서글픈 가시밭을 묵묵히 걸었다. 그는 그저 복수만을 위해 살아갔다.

그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유 있는 악역이었다. 사랑을 갈구하며 울던 소년은 그렇게 악역이


되었다.

그에게 구원은 있을까?

신이시여, 비참한 소년에게 부디 구원을 내려주소서.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 화
2

사람들은 때때로 책을 읽으며 책 속 인물과 동화된다. 주인공이 억울한 일을 겪을 때 함께 울분을 터트리고,


기나긴 인내 끝에 시련을 이겨냈을 때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신의 문장]을 읽던 한 소녀도 그랬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소녀는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살아가는 데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늘 허무했다. 무언가를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소녀는 [신의 문장]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장은 천천히 넘어갔다. 아직 글의 초반인데, 눈물이 흘렀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남자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서술하는 장면이었다. 그 남자는, 아제프 란델이었다.

‘아제프, 란델? 주인공인가? 책이 좀, 슬프네.’

소녀, 제이의 감수성이 풍부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너무도 쉽게 아제프에게 동화됐다. 그의 고단한 외로움에
가슴이 아프고,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그가 불쌍했다.

처음에는 그저 불쌍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어느 책을 읽든지 불쌍한 인물은 있었다. 가엽고 안타까웠지만,


그뿐이었다. 뒤돌아서면 잊혔다. 소녀는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제이는 조금 넘기던 책장을 닫고 잠에 빠져들었다.

‘이건, 내일 마저 읽어야지.’

문제는, 제이가 안타깝게 여겼던 인물이 그녀의 꿈속에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꿈속의 그는 늘 혼자였다. 그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 매달려 있을 때도 있었고, 두 손이


묶여 채찍질을 당할 때도 있었다. 그는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아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소녀의 귓가에 울렸다. 소름이 돋도록 처절한 음색에 제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 남자가
눈앞에서 고문당하는 악몽.

공포로 떨리는 눈이 [신의 문장]으로 향했다. 어제 펼쳐 놓은 대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책 삽화에는 꿈속에서


본 것과 같은 얼굴이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제이는 책을 덮어 서랍 속에 던져버렸다.

‘책에 너무 몰입했나? 그냥 꿈이겠지?’

그저 꿈이라고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가 나오는 꿈은 1 년간 지속되었다. 제이를 진득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은 책 속에서 등장도 안 한 그의 어린 시절을 꿈꿀 때도 있었다. 시간대는 날마다 달랐지만, 제이는 한


남자의 인생을 꿈으로 경험했다.

1 년이었다. 무려 1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지옥에서 사는 남자의 처절함을 함께 경험했다. 처음에는 의미


없는 꿈이라고 지워내려던 소녀는 점점 더 아제프 란델이라는 인물에게 동화되었다.

“아제프,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해.”

가장 징그러운 여자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붉은 피가 흐르는 등에 손톱을 파묻고 자신이 남긴 상처에 황홀한
얼굴을 했다.

“…….”

“대답을 안 하다니 못된 아이구나. 엄마가 그러면 화낸다고 했잖아.”

“…….”

새까만 채찍이 하얀 등을 내리치고, 시뻘건 인두가 피부를 지졌다. 살이 타오르는 역겨운 냄새와 축축하고 음산한
습기가 느껴졌다.

아제프는 언제나 텅 빈 동공으로 그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만둬……. 그만해!]

제이는 묵묵부답인 남자를 대신해 울었다.

제이는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았다. 아제프 란델은 그저 꿈속의 인물일 뿐이며, 모든 게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꿈이 반복될수록 텅 빈 남자의 눈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소녀는 우는 법을 잊어버린 아제프를 대신해 울었다. 그의 꿈이 이어질수록 제이가 몸서리치며 깨어나는 일도


잦아졌다.

그저 악몽이라 믿으며 지켜만 보던 제이는 달라졌다.

아제프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도망가라고 소리쳤고, 그가 나쁜 길을 걸으려 할 때,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모든 건 의미 없는 메아리였다. 소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에게 닿지 않았다.

1 년이란 시간 동안 소녀는 이 처절한 꿈속 남자에게 애정을 품었다. 그를 동정했고, 사랑해버렸다.

‘왜 내 꿈에 나타나는 거야……. 그저 책 속의 존재일 뿐인데, 꿈속의 허상일 뿐인데, 내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왜 1 년이나 내 꿈에 나오는 거야? 왜?’

마음을 줘버렸는데, 이미 빼앗겼는데, 마음을 받을 이가 허상이었다. 소녀는 꿈을 거부하려 며칠간 잠을 자지


않기도 하고, 꿈에서 깨어나려 발버둥치기도 했다.

사람은 자지 않고 살 수 없었고, 소녀는 계속 꿈속의 남자를 만나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또 꿈을 꾸었다.


그날의 아제프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비를 맞고 있었다. 추운 걸 끔찍해 하던 남자는 겨울날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번 꿈은 책 속에 나온 상황이었다. 제이는 그가 자신을 사랑해줄 존재를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는다. 제이는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애타게 소리쳤다.

[들어가!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기다리는 애는 오지 않아……. 추운 걸 싫어하면서 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름다운 백금발은 물에 젖어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는


파란 눈을 들어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창문을 올려다봤다.

“엘리사.”

추위에 젖어 눅눅해진 음색이 애처롭게 흘렀다. 아제프는 대답 없는 창문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무리 기다려도 어두운 커튼이 드리운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추위에 파묻힌 그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이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돌아가지 않는 남자를 보며 애원했다.

[돌아가! 그렇게 떨면서 왜 안 가는 거야! 추운 걸 싫어하잖아!]

“엘리사……. 제발. 엘리사.”

축 늘어진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고여 뚝, 떨어졌다. 제이는 오지 않을 여자를 애타게 부르는 그를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왜 아무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아? 왜 당신에게는 문장이 없는 거야? 당신은 왜 늘 혼자인 거야. 당신은, 왜…
…. 내 꿈에 나와? 왜!]

미련할 정도로 버티던 아제프는 솟구치는 고열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파랗게 질린 남자는 우는 법을 잊은
것처럼 또 그렇게 텅 빈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인의 사랑이 떠나 더러운 길가에 버려진 인형 같았다. 무색의 감정이 뒤얽힌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왜……. 내 목소리는 당신에게 닿지 않아? 왜……? 닿을 수 없는데, 왜 자꾸 나오는 거야! 왜!]

투명한 몸을 한 제이가 그를 끌어안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꿈, 그에게는 현실. 그와 그녀는 만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소녀는 튕겨나듯 꿈에서 빠져나왔다. 꿈에서 나오기 직전 소녀는 또 혼자 남게 된 아제프를 보며
손을 뻗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함께 있게 해줘…….]

소녀는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눈을 감으며 애탄 얼굴을 했다. 소녀는 꿈을 현실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책
속의 존재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사랑해버렸다.
그렇게 소녀는 또 한 번, 과거와 같은 선택을 했다.

소녀가 그에게 동화될수록 흔적 없이 소멸하던 문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소녀의 가슴 위로 초록빛


문장이 자리 잡았다.

얼어붙은 땅 위로 초록빛을 품은 새싹 하나가 내려앉았다. 누구보다도 외로울 운명을 지닌 남자에게 작은 새싹


하나가 다가갔다.

비틀렸던 운명이 또 한 번, 변하기 시작했다.

***

잠에서 깬 제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저 꿈이라고, 책 속의 이야기라고, 현실과 혼동하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어보지만 잘 안 되었다.

긴 시간 동안 이 허망한 꿈을 꾸고, 또 꾸었다.

“꿈속의 아제프가 한 번이라도 행복한 얼굴을 했다면 이처럼 슬프지 않았을까?”

제이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어린 아제프는 늘 폭력에 시달리며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성장한 아제프는


표정을 잃어버린 무감각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제이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침대 맡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신의 문장]

책의 삽화 속 행복해 보이는 주인공 남녀의 뒤로 무표정한 아제프가 보였다.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엘리사와
알체스테의 뒤로 홀로 서 있는 아제프의 얼굴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제이는 삽화 속 아제프의 얼굴을 쓸어보며 울었다.

‘마음이 아파. 매일 밤 당신을 봤어. 내 꿈에서 당신은 늘 울고 있어. 당신은 늘 외로워 해. 나는 늘 당신에게
말을 걸지만 당신은 듣지 못해. 이럴 거면 나한테 나타나지 말지……. 함께할 수도 없는데, 왜…… 자꾸 보이는
거야?’

눈을 감아도 잊히지 않는 미안이 제이의 눈을 홀리고 마음을 끌어당겼다. 제이는 아제프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성장한 후까지의 삶을 모두 경험했다.

한두 달은 참을 만했다. 어린 소년이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악몽이었지만, 상관없는 이라 생각하면, 꿈이라고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1 년은 너무 길었다. 이쯤 되니 제이는 가슴이 아파 미칠 것 같았다.

꿈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맞거나 학대당할 때, 제이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조그만 몸에 피멍이


들고, 아름다운 몸에 상흔이 생길수록 제이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겼다. 그의 트라우마 하나하나가 가슴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당신은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비참했을까…….’


아제프는 자신의 몸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걸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어린 날 배를 곯지 않으려 스스로 몸을
팔았다 해도 그건 학대였다. 아제프는 성적으로 학대받아 사람의 손길을 싫어하고, 사랑을 의심하고 혐오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바랐다.

사람의 손길을 혐오하면서도 그리워했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를, 따뜻한 품에 안아주고 사랑을
속삭여주기를 바랐다. 그는 사랑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사랑받고 싶어! 나를 사랑해줘…….]

아제프는 온몸으로 외쳤다. 누군가가 마음속 깊이 자신을 원해주기를. 사랑을 나눠줄 누군가가 다가와주기를.
아제프는 사랑을 믿지 못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다.

아제프는 그의 얼굴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달래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온화한 가면 속에
감춰진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줄 운명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에게 ‘신의 문장’이라는 건 의심 많은 남자에게 내리비치는 한 줄기의 희망이었다.

사랑의 여신 프리멧사가 아름다운 연인을 위해 내려준다는 신의 문장은 그 사랑이 영원할 것임을 확증하는 달콤한
것이었다. 그는 신의 문장을 탐했다.

아제프는 끝나지 않을 맹목적인 사랑을 바랐고, 그걸 이뤄줄 신의 문장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너무 갖고 싶어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 자신에게도 운명이 있다는 걸 믿고 싶어서, 그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사랑을 의심하면서도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던 남자에게는 처음부터 자신의 짝이 없었다.

정해진 짝이 없음에도 인연을 탐한 죄. 가질 수 없는 걸 바란 죄.

그게 아제프가 악역이 된 이유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 화
3

제이가 처음 [신의 문장]을 읽었을 때는 아제프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여자주인공에게 마음을 치료받는
치유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했기에 첫 부분이 조금 슬펐어도 견디며 읽었다.

책의 반도 못 읽고 잠에 빠진 날, 처음 그의 꿈을 꿨을 때. 삽화를 확인한 제이는 무서웠다.

제이는 자신이 그 정도로 책에 빠져 있었던가 고민하며 책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로 당분간 꺼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꿈은 계속됐다. 그렇게 또 두 달이 지났다.

그쯤 되자 외면할 수가 없었다. 책의 뒷내용이 궁금해졌다. 제이는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그때만 해도 제이는 아제프 란델이 남자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소설의 끝은 보통 해피엔딩이니 행복한
결말을 보면 꿈속의 비참한 남자를 동정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책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책 속 전개는 제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아제프는 엘리사가 그토록 찢어 죽이고 싶어 하던 원수의 딸이라는 것에 광분했다. 그는 애증이 뒤섞인 눈으로
엘리사를 보다가 갈등했다.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과 그녀의 아비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에서 그는
부표 잃은 배처럼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뒤틀어 놓은 엘리사의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에 끌려 엘리사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제이는 이제 그에게도 해피엔딩이 올 줄 알았다. 고단했던 마음에 쉴 수 있는 쉼터가 생기고 치유 받을 순간이
오리라 생각했다.

엘리사의 태도가 너무 담백하고 뒷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작은 고난일 뿐 결국에는 그의 사랑이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에게도 안식과 평화가 찾아오리라 기대하며 책을 읽었다.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그렇게 힘들었는데……. 조금쯤은 행복해도 되잖아! 그깟 문장! 그에게도 줬으면
되잖아…….’

주인공인 줄 알았던 아제프는 악역이었다. 모든 책이 그렇듯 악역의 인생은 뒤로 갈수록 비참해졌다. 복수를
다짐했던 아제프는 원수의 딸인 엘리사를 사랑해버렸고, 그녀에게는 이미 운명의 상대가 있었다.

주인공인 알체스테가 돌아오자 전개는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더는 아제프가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은 알체스테였다.

알체스테에게는 있고 아제프에게는 없는 것. 신의 문장. 운명은 잔인하게도 처음부터 그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주지 않았다.

누구보다 외로울 운명!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을 빛나게 할 뿐인 악역!

고독한 시간 속에 파묻혀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는, 악역이었다. 외롭고 괴로워 찢어진 마음은 기워지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럴 수 없는 게 그의 운명이란 걸 알았을 때, 그는 산산이 부서졌다.

사랑의 신 프리멧사가 아름다운 연인에게 선물한다는 신의 문장은 달콤한 분홍빛으로 빛나며 알체스테와 엘리사의
손등에 자리 잡았다. 처음부터 엘리사의 사랑은 아제프를 향한 게 아니었다. 엘리사는 아제프를 등지고
알체스테에게 달려갔다.

“사랑해요. 황자님.”

사랑스러운 얼굴이 수줍게 피어나고 달콤한 분홍색 눈은 설렘으로 빛났다. 그녀는 비운의 황자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헌신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의 인생은 똑같이 비극적이었다. 둘은 같지만 달랐고, 다르면서도 같았다.

누구보다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음에도 시샘을 받아 낙오된 황자는 그 고결함으로 제 것을 하나하나 되찾았다.

아제프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뒹굴다 죽고 싶지 않아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진창을


뒹굴며 살아남았다. 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다.
아제프와 알체스테의 손에는 진득한 피가 말라붙어 뚝뚝 떨어졌다. 아제프는 살아남기 위해 온몸에 상흔이 생겼고,
알체스테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굳었다.

아제프의 마음은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찢겨 나갔고 알체스테의 마음은 서리처럼 얼어붙었다.

찢기고 상처 난 마음을 가진 남자들은 한 소녀에게 구원을 바랐다. 아제프가 속삭였다.

“엘리사, 이걸 봐주세요. 저는 아프고 고단했어요. 이제 너무 지쳤어. 저를 도와주세요.”

아제프는 따뜻한 소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바랐다. 그는 제 몸에 난 고문의 흔적을 보여주며 매달렸다.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가 도와달라고 하자 엘리사는 고민했다.

엘리사가 그에게 손을 내밀려 할 때쯤, 그가 나타났다. 알체스테는 그녀와 똑같은 분홍빛 문장을 보여주며 단번에
그녀의 시선을 뺏었다.

엘리사는 핏물이 망울망울 흐르는 아제프의 몸보다 알체스테의 피곤한 안색을 더 걱정했다. 아제프가 사랑을
갈구하며 매달리자 엘리사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면서도 그를 딱 잘라 거절했다.

“아제프……. 당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저는 알체스테의 사람이잖아요.”

엘리사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소녀는 알체스테가 불안해한다는 이유로 더는
아제프를 보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소녀의 손등에는 달콤한 문장이 일렁일렁 빛나고 있었다.

아제프는 신의 문장이 얼마나 강력하고 달콤한지 보여주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엘리사는 더는 아제프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제프는 엘리사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차가운 겨울비가 쏟아져 그의 몸을 적시고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어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차가운 비가 그의 얼굴을 때리고 온몸을 적시는데도, 그가 오한과 발열로 괴로워하며 그녀를 기다리는데도
엘리사는 오지 않았다. 엘리사는 알체스테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아제프가 찬비에 몸을 떠는 것을 내버려 뒀다.

‘고작, 그런 이유로!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어. 그가 추운 걸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사람이라도 보냈어야지! 누군가 그를 데려가게 했어야지!’

매서운 겨울바람에 몸을 떨던 소년은 자라고 난 뒤에도 추위와 배고픔을 싫어했다. 그에게는 이제 훈기가 도는
방이 있었고 만찬이 차려지는 식탁이 있었지만 혼자 있는 방은 서늘했고 혼자 먹는 만찬은 차가웠다.

엘리사는 그가 추위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아 매몰차게 그를 외면했다.

그쯤 되자 제이는, 뒷내용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제이의 떨리는 손을 따라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등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은 아제프는 서글픈 몰골로 몸을 말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눈을 감고 있던


아제프는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맑은 청남색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그의 얼굴에 피어난 설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확인하고
사그라들었다.

맑은 눈 위로 천둥이 몰아쳤다. 적개심과 증오를 담은 섬뜩한 벽안에도 알체스테는 차가운 얼굴을 했다. 그는
파란 입술을 쳐다보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돌아가라. 네가 이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선택했고, 나 또한 양보하고 싶지 않아. 이러고 있는


건 추태일 뿐이다.”

“추태……. 저는 타고나기를 더럽게 태어났나 보군요. 제가 하면 추태고 당신이 하면 사랑이니……. 전하, 그거


아세요? 전하와 저 참 닮았다는 거. 똑같이 밑바닥을 구르고, 똑같이 일어섰는데……. 왜! 당신에게는 있고
제게는 없죠? 왜!”

알체스테는 소리치는 아제프를 외면하고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 위로 동정의 빛이 스쳤다. 알체스테도 알았다.


그에게 신의 문장이 없고 아제프에게 있었다면 둘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알체스테는 손등 위에서 빛나는
분홍빛 문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네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내게도 엘리사가 필요하다. 머리카락 한 올도, 눈길 한 번도. 어느 것 하나 네게


뺏기고 싶지 않다.’

알체스테와 아제프.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둘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고 서로 공존할 수 없었다. 비를 헤치고 걸어가는 다부진 손등 위로 사랑스러운 문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제프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 따위는 없다는 듯 눈부시게 빛나는 분홍빛은 솜털처럼 사랑스러웠다. 주인을 닮아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문장이 아제프의 각막을 찔렀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문장을 보다가 이를 갈았다.

“다 뺏어올 거야……. 엘리사도, 문장도, 베아르시 제국도.”

***

여기까지가 [신의 문장] 1 부의 반 정도 되는 내용이었다. 제이가 구매한 책은 1 부뿐. 그녀는 1 년간 이 책을


그냥 두고 계속 읽어나가지 못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무서워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 허무함과 닿지 못하는 갈망에
뒷내용이 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제이는 1 년이 흘러서야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

그날 이후, 그는 가질 수 없는 걸 탐했다. 아제프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신의 문장을 만들었다. 어둠으로


점철된 문장은 달콤한 분홍색이 아니라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사랑의 신 프리멧사는 분노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장을 더럽혔다며 아제프를 저주했다. 신의 저주에 아제프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타락했다.

신의 저주는 그의 몸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발끝이 펴지지 않는
추위가 그를 찾아왔다. 영혼까지 떨게 하는 시린 한기가 그를 찾아왔다.

새까만 인장과 신의 저주는 그의 신경을 벌레처럼 갉아먹었다. 난폭해진 남자는 더욱더 잔인해졌다.

알체스테는 핏빛 시체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새하얀 얼음이 그의 몸을 감싸고 얼어붙어


있었다.

아제프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뚝뚝한 턱 위로는 눈물이 매달렸다. 알체스테는 망가진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아제프를 동정하다가 그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치열한 다툼 후, 승리는 알체스테의 것이
되었다.

아제프 란델은, 알체스테 베아르시의 손에 사망한다.

아제프를 죽이고 알체스테는 영웅이 되었다. 알체스테가 악마를 물리친 제왕으로 칭송 받고 사랑하는 연인과
국혼을 치를 때, 아제프의 영혼은 악마의 손에 들어갔다.

악마는 오랫동안 노리던 먹잇감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그는 킬킬 웃으며 아제프의 영혼을 차디찬 빙산에 가뒀다.

아제프는 죽어서도 고통 받았다.

제이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하얀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소리쳤다.

“그의 운명이 이렇게 끝난다고? 살아서도 고통 받고, 죽어서도 고통 받는 게……. 아제프의 운명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제이는 이슬비에 젖듯 천천히 바뀌었다. 그의 감정을 함께 느끼기 시작했다.

비참하도록 슬프고, 처절할 정도로 외로운 감정에 동화되었다.

한 해를 함께 보내며 매일 밤 만났던 남자였다. 사는 게 지옥이었던 남자였는데, 죽어서 진짜 지옥으로


떨어져버렸다.

제이는 부모 잃은 짐승처럼 애달프게 울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오열이 절로 터져 나오고 숨이 막힐 듯이 괴로워졌다. 먹먹해진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아려왔다.

그녀가 소리치고 울부짖을수록 가슴의 문장이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저 책 속의 존재라고 여겼어야 했는데, 제이는 그럴 수 없었다. 매일 밤 그녀의 꿈에 찾아오는 남자가 가여워


눈물짓는 날이 늘었다. 그를 동정했고 끝내는 사랑하고 말았다.

그가 제이를 찾아와 애원하는 것 같았다. 나를 봐 달라고! 나를 도와 달라고!

[도와줘. 제발, 나를 구해줘…….]

괴로움에 잠긴 비통한 음색이 제이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제이가 그를 생각할수록, 그를 가엽게 여길수록 제이는
그에게 동화되어갔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그라들었다.

꿈으로만 경험했던 목소리가 현실에 내려앉았다. 제이는 더는 그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생각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도와주고 싶어. 구해주고 싶어……. 이럴 거면, 함께 있게 해줘. 제발……. 아제프.”

제이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하얀 가슴 위로 문장이 돋아났다.

[아이야……. 너는 또, 같은 선택을 하는구나. 너를 어찌하면 좋을지……. 이번에는 부디,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신록의 푸름이 깃든 문장은 숲의 싱그러움을 담은 신의 축복. 얼어붙은 대지를 위로하고 그를 녹여주기를 바라는
신의 자비였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신의 문장이 제이의 가슴 위에 새겨졌다. 초록색 광채가 제이의 몸을 집어삼키고, 제이는
한제이가 아닌 엘제이 티아세가 되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 화
4

제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책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여고생 한제이가 아니라 티아세 家의
장녀 엘제이 티아세가 되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공간이 소름 끼치도록 익숙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명의 기억이 공존했다. 처음부터 엘제이
티아세였다는 듯, 생경해야 할 방 안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침대 맡에 놓인
잔을 들었다.

당황으로 떨리는 손이 잔을 쥔 채 흔들렸다. 화려한 크리스털 잔 안으로 햇살이 고여 빛을 뿌렸다. 엘제이는 손


안에 감기는 화려한 잔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냉수를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을 긁고
내려가는 느낌이 섬뜩했다.

꿈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평소처럼 투명하지도 않았고, 책 속 세상에서 눈을 뜨면 늘 보이던 남자도 없었다.


그녀는 혼자였다. 밝게 변한 초록색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이게 뭐지? 누구의 기억이야?”

엘제이가 된 소녀는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며 유연하게 휘어진 머리카락을 주워들었다. 한제이의 머리는 탐스러운
흑발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밀색이었다.

소녀는 허리를 타고 흐르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모았다. 손 안에 착 감기는 그것은 한제이의 것이 아니라
엘제이의 것이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길을 잃고 흔들렸다 19 년간 한제이로 살아왔던 정체성이 흔들렸다. 한제이가 엘제이가 된 건지


엘제이가 한제이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초점을 잃은 눈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없었던 기억이 새롭게 생겨난 게 아니었다.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과 한제이의 기억 모두가 잠잠한 호수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두 소녀의 인생을 산 것처럼.

“이게 뭐야……. 나는 누구야? 엘제이 티아세……. 티아세는,”

“언니!”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그녀와 똑같은 밀빛 머리를 한 소녀가 뛰어왔다. 하얀 잠옷을 입은
소녀는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분홍빛 눈의 소녀는 익숙하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언니는 부지런한데, 나는 아직 졸려. 우리 더 자자!”

“엘리사?”

“왜? 또 잔소리하려고? 좀만 더 자고 일어날게. 언니도 알다시피 내 방에서 자려면 세라가 자꾸 재촉한단 말이야
…….”

울상을 지은 엘리사는 앉아 있는 엘제이의 손을 끌고 와 자신의 옆에 눕게 했다. 엘리사는 언니의 품을 파고들며


기분 좋게 웃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쌍둥이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다. 엘리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엘리사……. 내 쌍둥이 동생…….’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랑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어미의 품을 찾듯 엘제이를 파고드는 엘리사가 애틋하고
소중했다. 그건 엘제이 티아세의 감정이었다.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엘리사의 오른쪽 손을 쳐다봤다. 희고 고운
손은 아직 운명을 만나지 않았다는 듯 깨끗하기만 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의 책 속으로 들어왔다. 소녀가 차지한 몸은 주인공의 쌍둥이 언니였다.

책 속이라 생각했던 [신의 문장]. 매일 반복되는 꿈. 책 속에는 없었던 존재. 엘제이 티아세.

‘여기가 정말 책 속인가? 나는 그저 한제이일 뿐인가? 처음부터 엘제이 티아세였던 건 아니고?’

한제이가 꿈속에 들어온 건지, 엘제이가 꿈을 꿨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언니, 더 자자니까?”

엘리사가 칭얼거리며 그녀의 몸에 팔을 둘렀다. 엘제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제이 티아세는 [신의 문장] 속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아제프가 처음 엘리사에게 접근한 이유도 엘리사가
티아세 공작가를 물려받을 외동딸이기 때문이었다.

공작 위를 노리고 엘리사를 찾았던 아제프는 나중에야 진심으로 소녀의 사랑을 바라게 되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대로라면 둘은 아직 만나지 않았다. 무분별한 혼돈 속에서도 엘제이는 자신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챘다.

‘바꿀 수 있어. 둘을 만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나는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나? 엄마는? 아빠는?’

그녀는 뒤늦게 한제이의 가족과 한제이의 삶을 떠올리며 혼란에 빠졌다.


엘제이 티아세로서의 삶도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두 개의 기억과 두 개의 인연. 소녀는 어느 것 하나 택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갈 수는 있나? 꼭 돌아가야 할까? 그럼 리사는? 아버지는? 아제프……는?’

두 인생의 각기 소중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엘제이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하게 흔들렸다.

엘리사는 쌍둥이의 불안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엘리사는 장난스럽게 엘제이를 끌어안다가 살짝 벌어진 실크
옷자락 틈에서 옥빛 문장을 발견했다.

엘리사는 무척 놀란 듯 눈을 비볐다. 햇살을 받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에! 언니 가슴에 문장이 생겼어! 우와, 진짜 신기하다!”

엘리사가 해맑게 소리치며 잠옷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행동에 가슴이 반쯤 드러난 엘제이가 당황하며 동생을
말렸다.

“리사! 너 어렸을 때부터 조심성 없이 행동하지 말라고 언니가, 언니가…….”

엘제이의 입에서 동생이라는 호칭이 무척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호칭에
당황하여 고장 난 기계처럼 목을 삐걱거렸다.

엘리사는 잔소리를 시작하는 엘제이를 보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잔소리쟁이! 참! 아버지를 모셔와야겠다! 얼마나 좋아하실까?”

“리사! 잠깐, 리사…….”

엘제이는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가는 엘리사를 보며 저도 모르게 또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모든 건 자연스러웠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건 오직 엘제이, 그녀뿐이었다.

엘제이는 살랑살랑 경쾌하게 흔들리는 엘리사의 옷자락을 보며 눈을 감았다.

“리사, 아버지……. 엄마, 아빠……. 이게 뭐야?”

그녀는 자신이 엘제이 티아세인지 한제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엘제이가 혼란의 파도에 집어 삼켜지고 있을 때
엘리사가 돌아왔다.

“보세요, 아버지! 언니 문장 생겼죠? 우리 축하파티 할까요?”

딸의 재잘거림에 온화하게 웃은 남자는 엘제이에게 다가와 흐트러진 잠옷을 잘 여며주었다. 그는 다정한 얼굴로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편안한 품이었다. 엘제이는 심장에서 올라오는
푸근한 기운에 눈을 깜빡였다.

“잘됐구나, 제이. 너희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더 좋은 말을 해줬을 텐데……. 말주변이 없는 아비는 그저


축하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구나.”

“아버지.”

엘제이는 눈앞의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고 말았다. 그녀는 호소하듯 튀어나간 울먹임에 몸을 흠칫 떨며 그를
올려봤다.

아이젠 티아세. 티아세 공작가를 이끄는 수장이자 엘리사 티아세의 다정한 아버지.

그는, 아제프 란델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남자였다.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엘제이를 쓰다듬고 있는 남자는 제이의 꿈속에서는 악마였다.

새빨간 화마가 넘실넘실 흔들리며 불꽃을 토해낼 때, 부드러운 색감의 밀색 머리도 바람에 흩날렸다.

아제프의 가족이 모두 죽은 그날, 그 집에 불을 붙인 건 아이젠 티아세, 그녀의 아버지였다.

[후회? 내가 후회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너를 살려둔 것! 그것이 내 유일한 실책이다. 괜한 동정으로 너를


살려 화근이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후회하는 게 있다면 바로 너를 놓아 보낸 것이다. 끝까지 찾아내 너 같은
악마를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내 유일한 한이다!]

아이젠은 혹시 자신의 가족을 죽인 걸 후회하냐는 아제프의 질문에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아제프를 보며 다시는 딸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어깃장을 놓았다.

아제프는 잔인하게 일갈하며 돌아서는 아이젠을 보면서도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그가 엘리사의 아버지였으니까.

자신의 인생을 망친 주범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라는 걸 알았을 때. 그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꿈속의 악마는 부드러운 얼굴로 웃으며 딸의 손을 잡았다. 엘제이는 나이가 들어 주름진 손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엘제이의 애틋한 마음과 한제이의 원망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이젠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딸을 위로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반려를 만나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그러니? 아버지가 네 반려를 찾아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반려를 찾아
데려올 테니 불안해하지 마라. 알겠니?”

같은 문장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만나게 되는 필연.

너무 늦게 만나게 되어 반평생을 텅 빈 가슴으로 지새우는 이들도 있기에, 아이젠은 그것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네 문장이 발현했으니 네 반려도 문장이 생겼겠구나. 아버지가 신전에 연락을 넣어둘 테니 걱정 말아라. 누구든
초록빛 문장을 가진 자가 나오면 바로 대조할 수 있게 조치해둘 테니.”

“언니, 걱정하지 마! 보통은 1 년 안에 찾잖아.”

“……문장? 신전?”

“그래. 아비가 꼭 찾아서 네게 데려오겠다고 약속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당장 신전에 연락부터 해야겠구나.”

엘제이는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젠의 옷자락을 급히 붙잡았다.

“제이야? 왜 그러니?”

아이젠은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섰지만, 엘제이의 손길에 따라 다시 침대 위로 앉았다. 엘제이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러셨어요? 왜,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리셨어요? 왜요!’

아이젠을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뒤섞였다. 맑은 녹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엘제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할 말을 고민했다.

아이젠은 평소 내성적이었던 첫째 딸을 떠올리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가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이런, 아가야……. 울지 말렴. 공개적으로 찾는 게 부끄러워 그러니? 그럼, 아비가 몰래 알아봐주마. 네가


원한다면 네 문장에 관한 소문은 돌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할 말을 고민하던 엘제이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친 비바람을 만나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그가 걱정되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가


생각났다.

엘제이는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미안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녹색 문장이 요동쳤다.

문장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가 너의 운명이라고. 너는 그를 찾아 들어온 거라고.

엘제이는 기대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그의 운명인 걸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 화
5

아이젠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젓는 엘제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재촉하거나 윽박지르는 대신, 그는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엘제이는 따뜻한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비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머리가 무질서하게 얽혔다. 그의 도움을 받아도 될까 의심스러운 한편,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뭐가
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엘제이는 결국, 아이젠의 온화한 눈길에 흔들렸다.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실 수…… 있어요?”


“네가 먼저 부탁을 청해오는 건 오랜만이구나. 문제가 있는 거니?”

“혹시 란델 후작님의 몸에……. 저와 같은 문장이 있는지 알아봐주실 수 있으세요?”

“란델 후작?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니?”

“……네.”

이런 상황에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엘제이는 제가 지금 무얼 하는 걸까 고민하면서도 그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아이젠은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엘리사도 호들갑을 떨며 방방 뛰었다. 엘제이는 그 사이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몰래 알아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으렴.”

엘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혹시 당신이 내게 손을 뻗은 거라면……. 그래서 내가 책 속으로 들어온 거라면. 이게 꿈이 아니고 당신의


현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살짝 떨렸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그가 이곳에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며칠 뒤, 아이젠이 가져온 소식은 그녀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두근거렸던 마음은 난감하게 서 있는 아이젠을
보고 굳어졌다.

“음……. 혹시나 해서 확실해질 때까지 몇 번 더 알아봤는데, 아제프 란델 후작은 문장 보유자가 아니더구나.”

“아니, 에요? 아니구나.”

아이젠은 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굳어진 딸의 얼굴을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많은 삶이 증명하지 않았니. 문장의 힘은 절대적이란다. 네 짝을 만나게 되면 곧 그를 잊게 될


거다. 그를 좋아했던 마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열병처럼 앓던 마음도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단다.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아이젠은 표정이 좋지 않은 엘제이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지만, 그녀의 표정은 혼이 빈 인형처럼 무채색으로


일그러졌다.

‘착각이구나. 바보같이 착각을 했어.’

언제 누구에게 나타날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신의 문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같은 문장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두 명뿐이다.


둘째, 같은 문장을 가진 자들은 모든 걸 초월해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셋째, 문장의 발현은 같은 날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이젠의 말이 맞을 것이다. 문장을 원했던 아제프가 문장을 숨길 리 없었다. 발견했다면 바로 신전에 신고했을
텐데, 아이젠이 모른다는 건 진짜 없는 거였다.

‘당신이 애틋해서……. 나도 모르게 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그럼 나는 왜 이곳에


있을까? 이건 꿈?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나는……. 누구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한제이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를 사랑해버려서 자신은 둘이 되어버렸다. 한제이도, 엘제이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되어 살아가야 했다.

‘사랑하지 말 것을. 당신을 안타깝다고 여기지 말 것을. 그 책의 뒷내용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구나.’

엘제이에게는 문장이 있고, 아제프에게는 없었다.

엘제이는 그의 짝이 아니고, 언젠가는 그가 아닌 문장의 반려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그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는 계속 혼자다.

***

엘제이는 그 후로 고열에 시달렸다.

엘제이 티아세와 한제이.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거기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를 도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기도 했고,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모든 게 혼란, 혼란, 혼란.

아제프를 보는 게 두려웠다. 한제이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혹여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그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자신을 혐오할까 봐 두려웠다.

아제프를 보고 싶었다. 그가 잘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궁금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모든 건 뒤엉키고, 복잡한 생각들은 그녀의 몸을 축축 처지게 했다.

아픈 언니를 간호하기 위해 들어온 엘리사는 열이 들끓는 엘제이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엘리사가 이마
위에 얹진 수건을 갈아주며 뜨거운 볼을 손으로 매만졌다.

“언니, 많이 아파? 열이 계속 올라서 어떡하지? 반려가 그리워서 그래? 곧 코르디스가 열리면 사람들이 수도로
모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코르디스……?”

엘제이는 코르디스라는 말에 눈을 반짝 떴다. 엘리사가 19 살인 해에 열리는 코르디스는 아제프와 엘리사의


만남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엘리사는 안 돼. 나도 안 되고……. 누군가 그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야 해.’

엘제이는 책 속의 인물들을 떠올리며 그를 사랑해줄 사람을 생각했다. 직접 나설 수는 없어도 좋은 짝을 붙여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모든 건 그가 외로웠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견딜 수 없는 고독에 지쳐 남의 사람을 탐냈고, 가질 수 없는 걸


넘봤다.

불행의 시작이 그것이라면, 그를 외롭지 않게 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미래를 아는 만큼 그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었다. 그가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이 마음이 언젠가 사라질 찰나의 감정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실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제게 당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다면……. 바꿔주고 싶어요. 당신이 외롭지
않게, 혼자 남지 않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게, 그럴 수 있을까요?’

견디기 힘든 일이 닥쳐오면 사람은 그 일을 회피하거나, 맞섰다.

엘제이는 몇 달간 고민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돌아가고 싶은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하고 싶은 일을 하자.’

혼란스럽고 두렵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엘제이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끙끙 앓으며 시간을 흘려보낸 건
지금으로 충분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었다.

책 속으로 들어온 지 2 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엘제이는 몸을 추스르고, 밥을 먹고, 마음을 달랬다.

사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항상 꿈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남자. 그가 정말 이


세계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또 그에게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길까 봐 참았다. 작정하고 유혹하는 남자를 뿌리칠
용기가 없었다. 그를 만나는 건 그에게 짝을 붙여준 후여야 했다.

아제프는 티아세 家를 갖고 싶어 했다. 티아세의 딸을 붙들어 제 옆에 앉히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원했다.

현재 그의 목표는 엘제이, 그녀일 터였다.

“시아.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종이와 붓을 좀 가져다줄래?”

“네! 금방 준비할게요.”

엘제이는 책상에 앉아 익숙하게 베아르시 언어를 사용했다. 차분한 그녀의 성격처럼 우아하게 휘어지는 서체가
정갈하게 움직였다.

[티로시 영애에게.]

이름을 적자마자, 붓 끝이 삐걱 갈라지며 글씨가 흉하게 번졌다.

엘제이는 한숨을 삼키며 편지지를 새로 꺼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을 붙여주겠다고 결정했을 때, 마음이 아프지만
그를 위해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획과 실제로 행동하는 건 많이 달랐다.

엘제이는 울적한 기분에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그의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걸 상상하면 가슴이 아렸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그를 직접 볼 용기도 없으면서.’

엘제이는 스스로를 조소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천천히 편지를 써내려갔다.

아제프는 엘리사에게 끌렸다. 엘리사를 만나기 전에 그녀와 비슷한 영애와 함께할 기회가 있다면 그쪽에 끌리지
않을까, 하는 게 엘제이의 막연한 기대였다.

세시아 티로시. 티로시 백작 家의 둘째로 태어난 그녀는 천성이 상냥하고 애교가 많았다. 엘리사나 엘제이처럼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달콤한 연갈색 머리와 눈동자는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이미 후작 家를 집어삼킨 아제프가 만족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책 속에서는 접점이 없었지만, 세시아는 그를


흠모하는 영애 중 한 명이었다. 가면을 쓰고 상냥하게 행동하는 데 익숙한 남자에게 영애들은 열렬한 사랑을
보냈다.

조금만 더 생각을 버리고 시선을 낮추면 그와 사랑을 나눌 존재가 있었을 텐데, 염세적인 남자는 그를 향한
사랑을 믿지 않았다.

아마, 사랑을 속삭이며 그를 채찍질하던 그라시아 란델의 영향이 컸을 게 분명했다.

엘제이는 완성한 편지에 밀랍 인장을 찍고 옆에 서 있는 시녀에게 편지를 건넸다.

“메이, 그 편지를 티로시 家의 세시아 티로시 양에게 전해주겠어?”

엘제이가 살짝 웃으며 부탁하자 어린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엘제이는 처음 보는 얼굴에도 무심코 튀어나온 시녀의 이름에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서글픈 얼굴을 했다.
적응해야 하는데 낯설면서도 생경한 느낌이 씁쓸했다.

발랄하고 달콤한 엘리사와 상냥하고 아름다운 엘제이.

티아세 家의 두 공녀는 시녀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시녀들은 우아하고 상냥한 주인들을 사랑했다.
그녀들은 부쩍 우울해 하는 날이 많은 엘제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엘제이를 오랫동안 모신 시녀, 시아는 울적한 엘제이를 보며 화사한 드레스를 꺼내왔다.


“아가씨, 날씨도 좋은데 근처에 나가 보시겠어요? 엘리사 아가씨도 외출한 모양인데,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평범한 소시민 한제이가 봤으면 손을 덜덜 떨며 만져볼 아름다운 드레스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묘한 괴리감에 서글프게 웃은 엘제이가 그녀를 걱정하는 시아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지내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모처럼 결심한 외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 화
6

엘제이는 맑은 하늘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네가 흔들리자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산뜻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엘제이는 모처럼 시녀와 기사를 물린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즐거웠다. 한제이로 살 때는 혼자서 아무


곳이나 갈 수 있었는데, 엘제이 티아세가 되니 몸의 운신조차 마음대로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엘제이가 어린아이처럼 발을 굴리며 그네를 흔들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거추장스럽게 발을 휘감았지만
엘제이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제 손으로 그의 사랑을 찾아줘야 한다는 서글픔, 한제이의 삶에 대한 향수, 혼란스러운 세상. 엘제이는 그녀를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듯 자유롭게 몸을 움직였다.

한동안 눈을 감고 그네를 타던 엘제이는 사박사박 밟히는 잔디 소리에 눈을 떴다.

‘다른 사람이 왔나?’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면 물러나 있던 기사들과 시녀들도 돌아와야 하는데 발소리는 하나였다. 엘제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문장을 가진 아이야, 운명을 사랑하라.]

프리멧사의 전언을 담은 봄바람이 그녀의 귀를 간질였지만, 엘제이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빛을 찾은 사람처럼 모든 감각을 한곳에 집중했다.

겨우 발끝만 보이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엘제이는 새까만 구두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

파란색과 남색을 섞어놓은 오묘한 색감의 눈동자가 엘제이를 향했다. 그네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색감이 옅은 백금발, 오른쪽 눈 밑의 눈물점. 상아를 깎아 만든 것처럼 고아한 미안.

지나친 아름다움이 독이 되어 스스로 독을 품은 독화(毒花). 아제프 란델.

늘 부드럽게 웃고 다니는 얼굴이 상냥하게 휘어졌다.

“영애께 실례가 되었나요? 조용히 있고 싶어서 찾아왔다가 선객이 있는 걸 알았어요. 기껏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아제프가 특유의 처연한 얼굴로 난감한 듯 웃었다. 부드러운 백금색 속눈썹이 처마처럼 내려와 긴 음영을
만들었다.

‘거짓말.’

조용히 있고 싶었다면 사람이 붐비는 정원을 찾지 않았을 남자였다. 꽃을 싫어하는 남자가 일부러 찾아온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티아세 家의 장녀, 엘제이 티아세. 그가 원하는 건 티아세의 장녀였다.

충족되지 않은 갈증에 더 높은 곳을 바라고, 끝내는 제국의 정점을 노리고, 황족의 여자를 탐해 파멸해버린
비운의 남자.

‘살아 있네요. 살아서 내 앞에 존재해.’

엘제이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는 녹안이 호수에 잠긴 것처럼 흐려졌다.

“음, 안 될까요?”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아제프는 눈을 부드럽게 내리깔며 볼을 긁적였다. 민망하다는 듯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


싱그러웠다.

부드럽게 깔린 목소리에, 곤혹스럽게 내려간 눈썹에, 망설이듯 달싹이는 입술에, 엘제이는 모든 걸 알면서도
넘어갔다.

“아니요. 괜찮아요.”

“친절하신 분. 감사해요.”

엘제이는 뒤늦게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름이 신음처럼 흘렀다.

“아제프…….”

“제 이름을 아세요? 저도 당신을 알 것 같네요. 엘제이 티아세.”

엘제이의 말에 살짝 이마를 찡그리던 남자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엘제이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환하게 웃고 있지만 눈은 차디찬
한설처럼 북풍이 몰아쳤다. 그녀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자리가 없는데……. 그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니, 제가 그냥,”

“그럼 제가 미안해지잖아요. 자리가 넓으니 같이 앉아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앉아 있는 나무그네를 손으로 잡아 멈추게 했다.

그의 손에 우악스럽게 비틀린 그넷줄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아제프는 실수인 척 엘제이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촉감이 선명하게 들이박혔다.

“아, 미안해요, 손이 좀 차갑죠?”

“괜찮아요.”

엘제이는 그의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졌는지 알았다. 엘제이는 그가 불쾌해 할 걸 알았기에, 슬쩍 손을 물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바다를 담아 놓은 벽안과 따스한 생명을 품은 녹안이 마주쳤다. 그가 실제로 존재했다. 엘제이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그녀의 눈 위로 눈물이 아롱아롱 맺혔다.

“왜……. 울어요?”

“…….”

엘제이는 답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서럽게 흔들리는 어깨가 이상할 정도로 애처로웠다.

아제프는 눈물 고인 눈가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평소라면 진저리쳤을 다른 사람의 피부가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아제프는 처음 느끼는
기이한 감정에 당황스러운 듯 표정을 굳혔다.

아제프는 손끝에 묻은 눈물방울을 보고 흠칫했다. 투명하게 고인 눈물이 천천히 그의 피부 위로 스며들었다.

잠시 동요하듯 눈을 떨던 남자는 곧 표정을 감추고 웃었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니요.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아제프는 그걸 캐묻지는 않았다.

“반가워요, 엘제이 양.”

매혹적인 얼굴 위로 찬란한 미소가 걸렸다. 천사처럼 선한 미소를 지은 남자는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티아세 家의 장녀. 운이 좋았다. 당신을 이렇게 쉽게 만다다니. 그럼 엘제이 양, 저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세요.’
그는 독을 품은 천사였다. 독을 감춘 독화가 눈을 휘며 엘제이의 볼을 다시 매만졌다. 차가운 손이 볼을 감싸자
숨을 죽이고 있던 엘제이의 문장이 요동치며 빛났다.

비틀린 운명을 가진 남자와 그를 구하고 싶은 여자. 둘의 인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알싸한 감각과 함께 찾아온 문장의 박동에 엘제이는 가슴을 쥐고 몸을 웅크렸다.

심장에 화마가 번진 듯 지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분홍빛 드레스에 가려진 문장이 초록색 빛을 뿜자 그녀의
주변에 반딧불 같은 빛이 일렁거렸다.

“엘제이 양?”

아제프가 의아한 듯 중얼거리며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는 볼에 닿는 따스한 느낌에 손을 들어 빛을 매만졌다.


초록색 반딧불을 닮은 빛이 봄날을 수놓으며 빛을 흩뿌렸다.

‘문장?’

아제프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인상을 썼다. 문장이 있는 여자라면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문장이 있는 사람은
그 반려만을 사랑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게 빠질 리 없었다.

‘이 여자에게 문장이 있다고?’

아제프는 뱃속을 긁는 불쾌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엘제이는 고개를 숙여 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미안은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심장을 갉작이는 끔찍한 감각에
주먹을 꽉 쥐고 웅크린 등을 노려봤다.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저 여자가 안 된다면 둘째인 엘리사를 노리면 될 터였다. 목표를 바꾸면 될 일인데, 더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인
일인데, 기분이 나빴다.

‘바꾸고 싶지 않아……. 왜지? 저 여자가 첫째라서? 그럼 첫째를 죽여 둘째를 첫째로 만들면 될 일인데.’

아제프는 눈앞의 여자가 죽는 모습을 생각했다.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가늘게 뻗은 목덜미에 손을 박아
넣고 힘을 주기만 하면 몸을 파르르 떨다가 숨이 끊길 것이다.

어릴 때는 좀 힘들었지만, 단련한 몸은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청초한 얼굴과는 달리 그는 온몸이 무기인


사람이었다.

그가 힘을 줘 목을 부러트린다면 고통으로 질린 안색은 파리하게 물들고 뽀얗게 빛나는 얼굴은 차갑게 식을 터였다.
고통에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고, 박동하는 심장은 서서히 죽어갈 것이었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살아남고,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기 위해 무수히 해왔던 일이었다. 다만,
내키지 않았다. 저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과거의 인연을 털어버린 남자는 제 부모가 살아와도
필요하다면 죽일 수 있었다. 그가 복수를 결심한 건 저 때문이지 죽어버린 가족 때문은 아니었다.

사랑을 잊어버린 남자.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만, 죽이기 싫다는 것만 알았다.

‘왜 죽이기 싫지? 왤까?’

아제프가 저도 모르는 감정에 잠식됐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엘제이를 쳐다보다가 둥근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아…….”

살이 닿은 것도 아닌데 큰 눈을 둥글게 뜨고 경계하는 모습이 신경을 긁었다.

엘제이가 겁먹은 동물처럼 그의 손을 떨어트리고 뒤로 물러났다. 나무 그네가 끼릭-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제프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부드럽게 표정을 펴려 했지만 잘 안 되었다. 웃으려던 얼굴이 기이하게
찌그러졌다.

거부당했다. 저 여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문장이 있다면, 영원히 그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문장이 있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아…….’

불현듯 떠오른 깨달음에 아제프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릿한 심장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촉촉이 물이 고인
눈가가 상처 입은 백합처럼 아련하고 애달팠다. 그는 몰랐지만,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문장……. 문장 보유자세요?”

“아니요. 그냥……. 성력이에요.”

엘제이는 제 대답에 너무 놀라 혀를 씹을 뻔했다. 문장 보유자가 맞고, 이미 정해진 짝이 있으니 당신은


아니라고, 사실대로 대답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럴 리 없는데. 그런 남자가 아닌데. 다 연기라 생각하면서도 상처 입은 표정이 가련해서 저도 모르게


거짓말했다. 엘제이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사실은,”

“쉿, 괜찮아요. 말하기 싫은 거예요? 성력이 있다는 걸 밝히기 싫은 거라면 비밀로 해줄게요.”

아제프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 닿자 엘제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서늘한 손이 하얗게 질린 손을 주물렀다. 엘제이는 그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친근한 접촉에 놀란 얼굴을 했다.

“아, 심장이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성력으로?”

“……네.”

“실례 좀 할게요. 이렇게 하면 좋다고 들어서요.”

그가 짐짓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며 조그만 손을 주물렀다. 실례라고 중얼거리면서 손을 떼지 않는 모습이 그답지


않았다. 엘제이가 입안 살을 깨물며 탄식을 삼켰다.

엘제이만큼이나 아제프도 놀란 상태였다. 봄볕같이 따스한 손은 그의 것보다 한참 작았는데도 온기를 나눠줬다.


손끝이 따뜻한 봄에 젖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 화
7

아제프는 엘제이를 힐끗 보다가 산뜻하게 웃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수줍게 내리깐 속눈썹이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싫어 피한 게 아니었다. 수줍어하고 있었다. 얼굴에
떠오른 도홧빛은 호감이었다.

기분이 붕 뜬 것마냥 좋았다. 뱃속을 덥히는 기이한 충족감이 나쁘지 않았다. 따뜻한 손을 손에 쥐고 있으니
잠이 올 것처럼 편안했다.

“손이……. 따뜻하네요. 저는 차가워서 그런지 따뜻한 손이 좋아요.”

그의 눈이 나른하게 깔리자 청초한 낯이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빛났다. 엘제이는 또 그 얼굴을 홀린 듯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 위로 복숭아꽃이 피었다.

“이제 그만……. 놔주세요.”

엘제이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손을 물렸다.

아제프는 놀란 토끼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그녀를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몸에서 빛이 나는 건 문장이 아니라 성력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아제프는 너무도 당연하게 문장일 거라 생각했던
자신을 멍청하다 생각하며 웃었다.

그녀는 문장 보유자가 아니었다. 제 것이 될 수 있었다. 아제프는 그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워 햇살같이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외모가 미소를 그리자 너무 예뻤다.

“제가 원래 이렇게 경계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엘제이 양은 편하네요. 기분 나빴나요?”

“…….”

싱긋 웃는 얼굴을 보니 볼이 너무 화끈거렸다. 엘제이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훔쳐보듯 그를 주시했다.

꿈속이 아니었다. 서늘하긴 했지만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체향이 맡아졌다. 허상 같은 투명한 몸이 아니라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세상에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엘제이는 벅찬 감동을 느끼면서도 얼굴을 흐렸다. 지금이라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 미루고
싶었다. 혹시 아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볼까 봐 두려웠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야.’

엘제이는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결국 입을 떼지 않았다.

아제프는 딴생각에 빠진 듯 몽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제이에게 부드럽게 웃어줬다. 그는 대답 없는


엘제이를 재촉했다.

“저랑 말하기 싫어요? 아니면 성력에 대해 말하기 싫은 건가?”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사실, 사실……. 하아…….”

엘제이가 탄식하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입에 고인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입안만 맴돌았다. 그가 없었다면


자신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자신이 미친년 같았다. 그를 위하겠다고, 그를 도와주겠다고 해놓고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고 있었다.


엘리사처럼 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그를 거절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지금, 진실을 밝혀야 했다.
엘제이가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아제프는 파리하게 질리는 얼굴을 보며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듯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여자의 얼굴이 파리해질수록 그의 기분도 급격히 나빠졌다. 아제프는 엘제이 티아세의 몸이 안 좋았던가
생각하며 혀끝을 씹었다.

‘어차피 죽일 거……. 아프면 좋은 일이다. 내가 필요한 건 지위지 여자가 아니니, 쓸모가 다하면 그뿐.
그뿐인데……. 기분이, 더러워…….’

신경질적으로 혀끝을 물자 어느새 입안 가득 비릿한 혈향이 번졌다. 아차 싶은 아제프가 자신의 혀를 짓씹는


행동을 멈추며 살기 띤 얼굴로 엘제이를 노려봤다.

‘저 여자를 만나고부터 뭔가 이상해. 당신, 대체 뭐지?’

한숨을 쉬던 엘제이가 그네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따라 아제프도 굽혔던 몸을 폈다.


그녀는 최대한 반짝이는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어물쩍 중얼거렸다.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란델 경은 계속 쉬다 가세요. 그럼 이만.”

“아, 제가 귀찮게 했나요? 아직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당신이 가버린다면 저는 무척 속상할 거예요.”

그는 발길을 돌리려는 그녀를 붙잡고 웃었다. 가늘게 뻗은 손은 아름다웠지만 단단했다. 엘제이는 족쇄처럼
단단히 얽힌 손을 보다가 얼굴을 흐렸다.

냉정하게 일갈하며 그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하다못해 아까처럼 몸을 피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녀의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충동적인 거짓말이 튀어나가고, 이성을 잃은 입술은 진실을 내뱉지 못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미쳤어? 그를 놔. 그는 내 사람이 아니잖아…….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셈이야?’

엘제이가 자신을 질책하며 차가운 얼굴을 했다. 당당히 그의 눈을 향해 얼굴을 든 엘제이의 시선은 기대하듯
반짝이는 청안에 길을 잃고 턱 끝으로 떨어졌다.
예쁜 얼굴을 보니 차가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엘제이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말을 내뱉었다.

“란델 경……. 일단은 손을 놓아주세요.”

“아, 불쾌하셨어요?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서……. 따뜻함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붙잡았나 봐요.”

‘거짓말.’

그는 필요하지 않은 신체 접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상냥한 가면을 쓰기 위해 온몸에 벌레가 기는 듯 불쾌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독하게 참아내는 남자였다. 그는 예기치 않은 접촉, 이익이 없는 접촉은
하지 않았다.

그가 제 손을 붙잡은 걸 진심으로 기뻐할 리 없었다. 다 거짓이고 연기였다. 엘제이는 꿈속에서 그의 얼굴에


덮이는 가면을 수십 번 지켜봤다. 그럼에도,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를 거부할 수 없는 게 그녀의 운명이었다.

“란델 경, 손을…….”

아제프는 자꾸만 손을 놓아달라고 청하는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이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놓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정에 굶주린 아이처럼 엘제이를 보며 호소했다.

“어머니가 생각나서……. 아시겠지만, 저는 조실부모했어요. 제 어머니도 이처럼 따스한 손을 가지셨는데…….


당신 앞에서는 아이가 된 기분이에요. 놓아줘야 하는 걸 알면서도 놓아주기가 싫어. 우습죠?”

그가 피식 웃으며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쓸쓸해서 엘제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일까? 아니야……. 다 거짓말, 거짓말일 텐데…….’

아제프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더욱 애처롭게 웃었다. 그는 이제는 다 사그라진 감정과 추억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그가 눈을 촉촉하게 적시고 엘제이를 쳐다봤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는 제 손에 꽃을 쥐여 주며 이렇게 속삭이셨어요.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인내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꽃을 쥐여 주는 손가락이 지금처럼 따뜻했어요.”

맑은 청해의 눈에 엘제이가 담겼다. 색감을 정의할 수 없는 그만의 청남빛. 그의 어머니를 닮은 눈이었다.


엘제이는 드물게도 그가 진실을 말했다는 걸 알았다.

아제프는 허리를 숙여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아제프,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랜 시간 기다렸기 때문이란다. 비바람이 꽃줄기를 흔들고, 해충이 잎을


갉아먹어도, 인내하고 참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거란다. 보렴. 아름답지? 네게도 꽃이 될 순간이
있을 거란다. 가여운, 내 아기.]

‘우스운 소리. 아름다운 꽃은 결국 인간에게 꺾일 뿐인걸요, 어머니.’

그는 묘한 충동감에 꽃줄기를 끊을 듯 힘을 줬다가 곁에 서 있는 엘제이를 보며 힘을 풀었다. 그가 그녀의 손바닥


위로 꽃을 올려줬다. 그의 손이 스치자 엘제이의 손이 움찔 떨렸다.

아제프는 바르르 떨리는 손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하죠? 당신이 꼭 저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제가 엘제이 양에게 실례되는 일을 한 적이 있나요? 그렇게
피하면……. 저도, 상처받아요.”

[외로워……. 나를 사랑해줘……. 나도, 사랑받고 싶어.]

꿈의 아제프와 현실의 아제프가 겹쳤다. 그의 표정이 너무 애련해서, 그가 상처받는 것처럼 보여서, 엘제이는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엘제이는 꿈속의 허상에게 끌렸던 것처럼 눈앞의 남자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에게 그녀가 연인이 아니라면, 그저 친구나 어머니처럼 그를 쉴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가 품은 애정이 다르다면……. 괜찮지 않을까.

엘제이는 자신을 속이고, 그를 속였다. 그녀는 거짓말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자신의 몸을 기만의 늪에 던졌다.

달콤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을 낳는 법임에도.

‘그가 나를 사랑할 리 없어. 그는 날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그에게 다가가면 안 될까? 물거품이라
해도,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지금 이것보다 소중한 감정은 없는데……. 혹시 나중에 나로 인해 상처를 입으면
어쩌지? 그를 기만하는 건 아닐까?’

엘제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무수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투명한 녹색 눈동자에 담긴 다양한 감정들이
별빛처럼 솟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기대와 두려움.’

아제프는 다양한 감정이 요동치는 눈을 보며 티 나지 않게 눈을 찡그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엘제이 티아세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지나갔다.

그녀의 취향, 성격, 행동. 모든 걸 조사했다. 하지만 엘제이 티아세의 반응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가 조사한
것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그렇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 알 듯 말 듯한 상태에 아제프의 눈이
찌푸려졌다.

엘제이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냥 어색해서……. 당신이 싫거나 무서운 게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오히려?”

아제프가 엘제이의 말을 길게 늘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화려한 색감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고, 풍성한
백금색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휘어졌다. 나비가 춤을 추듯 찬란하게 빛나는 얼굴에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혀끝을 씹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혀끝을 감싸는 비릿한 맛에 정신을 차린 엘제이가 그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 제가요?”


아제프가 눈을 둥글게 뜨고 자신을 가리켰다. 아제프 란델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상냥하고 정의로웠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그렇게 큰 자극을 준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정말 놀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제이의 눈이 축 처진 강아지처럼 둥글게 내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으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 화
8

그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착하고 다정한, 한없이 부드러운 성품의 소년이었다. 한때
화목했던 가정이 비틀렸다는 증거, 이부동생의 존재가 미울 법도 한데 그는 어머니 배 속의 동생을 사랑했다.

5 살 소년은 어디서 들었는지 아기는 예쁜 것만 봐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매일 꽃을 따왔다. 아버지의 모진


폭력에도, 매서운 바람에도, 손끝이 얼어붙는 추위에도. 그는 작은 동산을 올라 동생을 위해 소담한 꽃을 따왔다.

어여쁜 동생이 태어나길 바라며 꽃을 따오던 소년 아제프는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제 모습을
감추고 차가운 빙벽에 자신을 가뒀다.

엘제이는 꿈속에서 만난 어린 소년이 누구보다 정답고, 상냥했음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처럼 빛나는 햇살
같은 마음이 사랑스러웠던 소년이었다.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닿기를.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악역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몽환이 아닌 실재하는 아제프. 엘제이는 그에게 닿고 싶어 하는 손을 내리누르며 눈을 감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에 물기가 고여 결국, 힘없이 낙하했다. 아제프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이상하네요. 당신도, 저도.”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 그는 부드럽게 웃던 입꼬리를 내리고 떨어지는 눈물을 받았다. 엘제이
티아세와 아제프 란델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스쳐가듯 지나간 것이 인연의 다일 텐데. 저 여자는 왜 우는 거고, 나는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평정심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혼돈의 중심은 엘제이 티아세였다. 그녀가 그를 흔들고, 그는 그녀를 흔들었다.
기분은 오락가락 제 마음대로고, 심장이 들쑥날쑥 멋대로 박동했다.

아제프가 엘제이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여자에게 속내를 보이고 있었다.
방금 한 행동도 원래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저 여자가 왜 우는지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르고
달래 마음을 빼앗을지를 신경 써야 했다. 그는 오늘은 이만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봤다.

여자가 우는 걸 지켜보는 사이 봄날의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봄의 따스함을 시기한 찬바람이 밤을 지배하려


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요. 어두워질 때까지 당신 곁에 머무르는 실례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면 저도 민망한데, 다음에는 목소리를 더 들려줘요.”

“다음이요?”

“네. 다음이요.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날이 서늘해지네요.”

아제프는 얇은 드레스만 입은 엘제이를 쳐다보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여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엘제이에게 손을 뻗던 아제프는 잠시 멈칫했다.

‘미치겠군. 내가 정말 미친 건가? 왜……. 저 여자를 걱정하고 있지?’

성공을 위한 도구. 쓸모를 다하면 없애버릴 존재. 결국 그뿐일 텐데. 그래야만 하는데,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 여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뒤숭숭한 마음에 알 수 없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의 마음은 서리가 꼈는데, 그의 심장만은


살아남아 거칠게 요동쳤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아직도 울음기가 남아 울먹이는 하얀 얼굴을 보다 겉옷을 벗어 어깨 위에 둘러줬다. 가녀린


어깨 위를 커다란 쥐스토코르가 뒤덮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담백하게 옷을 걸쳐준 남자는 매혹적인 얼굴로 속삭였다.

“제 옷. 돌려주세요.”

“네? 아……. 네. 꼭 돌려드릴게요.”

감상에 젖어 있던 엘제이가 쥐스토코르 자락을 감싸며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 물건이 남의 손을 타는


걸 싫어했다. 엘제이는 집에 돌아가면 당장 이 코트를 세탁해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단정한 얼굴을 단단히
굳혔다.

아제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제이를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아……. 실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청명한 소리가 주홍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갈랐다.

‘웃었어…….’

꿈속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표정 없이 공허한 얼굴은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 희망의 새싹이 움트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옷을 꽉 쥐었다.

아제프는 웃음기를 떨어트리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이
우스우면서 귀여웠다. 그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제게 소중한 옷이니 돌려주러 저를 찾아와 주세요. 란델 家의 저택은 아름다운 편이죠.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요.
꼭, 돌려주러 와주세요.”

“네…….”

엘제이는 찡긋 깜빡이는 눈을 망연하게 쳐다보며 빠르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울음기가 남은 얼굴이 홀린


것처럼 멍하니 풀어졌다.

그 후 아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 티아세 家의 시녀들에게


엘제이를 데려다준 후 등을 돌렸다.

엘제이는 뉘엿뉘엿 떨어지는 주홍빛 햇살을 맞는 남자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제프의 옷이 그녀의 등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엘제이는 따스한 봄 노을을 맞으며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멍한 얼굴로 돌아온 엘제이는 그의 옷을 받아가려는 시녀를 만류하고 코트를 침대맡에 놓아뒀다.

씻고 잠자리에 누운 엘제이는 협탁 위에 놓인 옷을 보며 화끈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를 만났다는 선명한


흔적이 곱게 개여 놓여 있었다.

그를 속였다는 불안감과 그의 환한 미소를 봤다는 설렘 속에서 엘제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저택에 놀러 오라고 했어.’

엘제이는 헤어짐의 순간 꽃처럼 흐드러지던 미소를 떠올리며 발긋하게 물드는 얼굴을 매만졌다. 늘 차분하던 얼굴
위로 분홍빛 생기가 반짝거렸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우울한 낯을 한 엘제이가 한숨을 내쉬며
옷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미련이 남은 듯 어물쩍 손을 움직이다가 손끝으로 쥐스토코르 자락을 매만졌다. 그녀의 얼굴 위로 짙은


갈등이 드리웠다.

‘그에게 다가가면 안 되는데……. 멀리서 보기로 했잖아. 아니야. 이번까지만, 옷을 돌려줄 때까지만…….
갑작스럽게 책 속으로 떨어진 내게 주는 보상이라 생각하자. 그의 유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티로시
영애를 붙여주자. 코르디스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그의 옷을 가지고 있자.’

결국 옷자락에 손을 올린 그녀는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불안감과 설렘 속에서 잠을 청하던


엘제이는 악몽을 꿨다.

[나 말고 네 진짜 모습을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너를 사랑해주는 건 나뿐이야!]

둥글게 만 소년의 등 위로 거친 채찍질이 이어졌다. 소년이 어린 시녀에게 웃어줬다는 이유로 어린 시녀는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렸다. 사람의 신체가 잘려나가는 걸 본 소년이 몸을 떨며 물러나자 곧바로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매서운 채찍이 날아들었다.

[아제프, 엄마에게 오렴. 너를 사랑하는 건 엄마뿐이야. 그러니 엄마 말만 들으면 돼. 알겠니? 사랑한다,


아제프. ……쓰레기 같은 놈! 나를 배신하고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다 죽여 버릴 거야!]

붉은 피에 젖어 간신히 숨만 헐떡이는 소년에게 그라시아는 사랑을 속삭였다. 그가 응답하지 않자 그라시아는


그를 차가운 감옥에 가두고 떠나버렸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악독한 태도에 소년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피가 빠져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공허하게 빛났다.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댄 소년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자
몸속에 갇힌 열기가 빠져나왔다. 뇌가 흐물거리는 열에도 소년은 남 일 보듯 무감각한 얼굴로 비틀비틀 누웠다.

뜨거운 뺨이 더러운 돌바닥에 닿았다. 피를 뒤집어쓰고도 찬란함을 잃지 않은 미모가 가련하고, 애달팠다.

울어도 달라지지 않고, 애원해도 바뀌지 않는다. 모든 건 그 혼자서 감내해야 할 일. 그는 차가운 감옥에서
체념을 배우고, 고독을 쌓았다. 흐려진 눈 위로 열에 들뜬 생리적인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죽은 생선처럼 흐리멍덩한 눈은 언제나, 비참하고 고단했다.

[악마 같은 놈! 너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쓰레기야!]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라시아를 죽인 날, 그는 오랜만에 그라시아 앞에서 울었다. 끔찍하게 하얀 목덜미를


움켜쥐자 일그러지는 양어머니의 표정이 너무 더럽고 추악해서 그는 울며 웃었다.

[어머니께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너! 끄윽……. 네가, 끅! 감히! 누구……. 누구 없,]

[어머니, 아무도 오지 않아요. 이 방에서 비명이 들리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가시는 길이 부디, 다신 없을


지옥길이기를.]

제법 단단해진 손끝이 목덜미를 파고들자 끅끅거리는 숨소리와 버둥대는 몸이 악독함을 담아 아제프의 몸을


할퀴었다.

시뻘겋게 터진 눈이 아제프를 저주했다. 부릅뜬 눈 위로 독기가 고였다. 아제프는 그녀의 몸을 올라타 온 힘으로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버둥대는 몸은 잠잠해졌지만 저주하듯 홉뜬 눈은 감기지 않았다.

소년은 눈을 독하게 뜨고 자신이 죽인 양어머니의 시체 앞에 다가가 칼을 뽑아 들었다. 새까만 밤에 젖은 소년은


단검을 뽑아 죽어버린 시체를 난도질했다.

그날 아침, 그라시아 란델은 아제프를 처음 만났던 홍등가에서 나체로 사지가 찢긴 채 발견됐다.

한 번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다음부터는 쉬웠다. 아제프는 비밀을 알고 있던 그라시아의 수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라시아의 애동으로 살았다는 그의 수치를 아는 자들은 모두 죽음으로 입이 막혔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혼자만의 고독한 길. 성에 낀 가시밭길을 아제프가 걸어가고 있었다. 가시에 걸린


발톱이 죄다 뽑히고, 얼어붙은 발은 핏빛 서리가 내려앉아 동상을 입었다.

걸어가던 소년은 점점 자라나 성인이 되었다. 그는 자랐지만, 그가 가는 길은 여전히 가시밭이었다. 오히려 더


험난해진 길은 아제프의 살점을 취하고, 뼈를 탐했다. 온몸이 피로 물들어서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던 남자는
결국 커다란 가시에 목이 잘려나갔다.

아름다운 얼굴은 열흘만 붉은 꽃처럼 툭, 떨어졌다.

“아니야!!!!”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이불을 박차고 나갔다.

‘잊고 있었어……. 왜 잊고 있었지? 오늘은……. 안 돼, 그에게 가야 해.’

베아르시 제국력 816 년 아 10 일. 그날은 아제프 란델이 첫 살인을 한 지 4 년째 되는 날이자, 그의 양모인


그라시아 란델이 사망한 지 4 년째 되는 날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 화
9

엘제이가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정신없는 손길로 침대맡에 놓아둔 아제프의 옷을 챙기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을 지키던 시녀, 시아가 잠옷 차림으로 나온 엘제이를 보며 경악했다.

“아가씨!”

엘리사가 잠옷 차림으로 저택을 돌아다니는 일은 늘 있는 일상 속 풍경이었지만, 고상하고 차분한 엘제이가


저지를 일은 아니었다. 얇은 잠옷 사이로 보이는 흰 살결에 시아가 입을 크게 벌리고 서둘러 다가왔다. 엘제이의
방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엘제이는 기사들을 흘긋 쳐다보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시아를 붙잡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마차를 준비해줘. 란델 家로 가야겠어.”

“이 시간에, 그 차림으로요?”

시아가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죽이며 대답했다. 시아의 놀란 얼굴에 그제야 제 옷차림을 둘러본
엘제이가 머뭇거리자 시아가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복잡한 귀족의 드레스는 입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다고 아가씨를 잠옷 차림으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시아는
다급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고민했다.

늘 차분하던 엘제이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과 안절부절못하는 손끝이 다급함을


담아 덜덜 떨렸다. 시아가 고민하자 엘제이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속삭였다.

“나는 가야 해. 날이 밝기 전 란델 家에 도착해야 해.”

엘제이는 아직 깜깜한 새벽의 하늘을 보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해가 완전히 뜰 때쯤이면 늦을 것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더라도 어떻게 이날을 잊고 있었는지……. 엘제이는 자책했다. 오늘 일이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임을 알았다.

엘제이는 오늘 일어날 살인을 막아야 했다. 그녀가 도와달라고 간절히 속삭이자 시아는 얼굴을 흐렸다.

‘뭔가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 나는 아가씨의 수족이야. 아가씨가 원하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줘야 해.’

시아가 다부진 얼굴을 했다. 시아는 엘제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속삭인 뒤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엘제이가 방
안을 서성거리며 잠시 그녀를 기다리자 시아는 커다란 로브를 들고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 새벽에 란델 家로 가시면 갖은 소문이 돌 거예요.”

“상관없어. 나는 가야 해…….”

“그럼 저랑 같이 가요. 기사분들에게는 아가씨가 소란스러워서 못 잔다고 대충 둘러대고 물러나게 했어요. 아마,
아침이 오기 전까지 돌아온다면 별일 없을 거예요. 제가 마차를 몰게요.”

엘제이는 시아를 따라가면서도 그의 목이 뚝 떨어지던 악몽을 잊지 못했다. 그 길이 아프지 않았을 리 없다.


온몸이 찢기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마, 멈출 수 없었던 것이리라. 엘제이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하늘을 원망스럽게 올려봤다.

‘아제프……. 제발, 제가 당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기를. 오늘 일어날 살인을 막을 수 있기를.’

가문의 문장을 감춘 마차 한 대가 란델 家로 들어섰다.

란델 家의 젊은 집사 알모어는 문지기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저택의 문 앞으로 달려갔다. 까만 로브를 쓴


엘제이는 살아 있는 알모어를 보며 안도했다.

알모어는 아제프를 위하는 충직한 가신이었다. 눈치가 빨라 아제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눈치챘음에도


그를 경멸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하던 마음 따뜻한 집사. 원래대로라면 오늘 새벽, 알모어는 아제프의 손에 죽게
된다.

엘제이는 황망한 얼굴로 다가오는 알모어를 보고 로브를 내렸다. 풍성한 밀색 머리가 차가운 밤바람을 맞고
흔들렸다. 처연한 얼굴이 그를 응시하자 알모어는 고개를 숙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공녀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늘 후작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으세요. 더군다나, 이 새벽에…….”

“꼭 그를 만나야 해.”

알모어는 매년 이날만 되면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아제프를 떠올리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날의 그는 누군가 자신을 찾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끔찍해하는 그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악몽의 하루를 보냈다.

“안 됩니다. 오늘은 후작님의 심기가 불편하시니 이만 돌아가 주세,”

엘제이는 알모어의 말을 듣지 않고 성큼성큼 저택 내부로 걸어갔다. 아제프가 어디 있을지는 지난 1 년간의


꿈으로 알고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의 몸으로는 처음 찾아온 저택이었지만 내부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의 절규가 가득한 비통의 공간이자, 그가 스스로 일어선 성장의 공간, 그리고 그를 벼랑 끝으로 이끄는 자멸의
공간. 란델 저택.

엘제이는 화려한 저택을 힐끔 보고 휘황찬란한 계단을 따라 성큼성큼 올라갔다. 폭이 넓은 로브가 그녀의 몸짓을
따라 휘청휘청 흔들렸다.

알모어는 감히 공녀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를 말릴


아제프가 없으니 알모어는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따라가며 이러시면 안 된다 중얼거릴 뿐이었다.

오늘 아제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쳐가는 광기의 첫걸음을 떼는 날. 굶주린 맹수의 갈급함은 이성을 잃고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지도 몰랐다.

‘설령 내가 다치더라도, 죽게 되더라도……. 오늘만은, 나가면 안 돼요. 아제프.’

그의 운명을 알면서, 그가 비참해질 걸 알면서, 스스로 자멸하게 될 걸 알면서! 어찌 막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은 어찌 돼도 좋았다. 그를 막을 수 있다면, 그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비틀 수 있다면,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제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엘제이는 하얀 대리석 문 앞에 손을 올리고 망설임 없이 그 공간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뿌연 연기가 틈새를 따라


흘러나왔다.

공간을 매운 자욱한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맴돌자 엘제이는 당황하는 알모어와
시아를 밀치고 문을 닫아버렸다. 달칵이는 문소리가 나자 음산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미쳤나?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알모어, 죽고 싶나?”

‘아직 나가지 않았어…….’

엘제이가 안도하며 한 걸음 더 내딛자 커다란 도자기가 날아왔다. 쐐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커다란 물체에
엘제이가 주저앉으며 반사적인 비명을 토해냈다.

“꺄악!”

맑고 높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느껴지는 기척이 가냘팠다. 아제프가 흐릿한 안개를 젖히고 걸어와 주저앉아
있는 엘제이를 보며 멈칫했다.

“……영애?”

“옷을 돌려주러 오라고 하셔서, 저를 저택에 초대해주셨잖아요.”

엘제이가 다급하게 말하며 그를 향해 옷을 내밀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머리가 몽롱해졌다. 천 자락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얀 팔목이 힘없이 떨어졌다.

늘 냉정하던 아제프가 아연한 얼굴로 주저앉은 엘제이를 쳐다봤다.

밖은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겨우 해의 끄트머리가 조금 고개를 내민 새벽녘 남자 혼자 사는 공간에 찾아와


옷을 내민다? 정순하고 차분한 엘제이 티아세가 할 행동은 아니었다.

“영애……. 이게 무슨?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밤중에 혼자 여길 찾아오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생각이 없는 겁니까?”
그가 엘제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피운 마약에 취해 몽롱해진 엘제이는 어떻게든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엘제이가 더듬더듬 그의 팔목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같이, 같이 있어 주세요. 나가지 마시고 저랑 같이,”

“……”

아제프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엘제이를 노려봤다. 그의 사나운 눈길에도 엘제이는 휘청휘청 흔들릴 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넘어가기 힘든 악몽의 밤. 아제프는 마약에 젖어 하루를 보냈다. 이제는 내성이 생겨 아무리
피워도 어릴 때처럼 취하지 않고 악몽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끔찍한 밤을
혼자 보낼 수가 없어 멈추지 못했다.

아제프는 어젯밤부터 피운 아텐의 향으로 가득한 침실 내부를 바라보며 엘제이를 안아 들었다. 하는 말은 밤을


같이 보내달라는 유혹 같았지만, 그녀의 눈은 아이같이 순진했다.

밤늦게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나중에 들어도 늦지 않았다. 우선은 이 향으로부터 여자를 떨어트려야 했다.

아제프는 저절로 굴러온 먹이를 발로 차는 자신의 행동에 한숨을 삼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밑에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이 그의 발을 할퀼 것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엘제이는 가시밭길에서 피를 흘리던 그의 발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가지 마세요. 여기 있어요. 네? 제발, 아제프…….”

란델 경이라고 꼬박꼬박 부를 때는 언제고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가 입매를 비틀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제 방입니다. 당신은 다른 곳에서 쉬다가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안 돼, 아제프, 제발……. 여기서 나가지 말아요. 네?”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손이 그의 팔목을 붙잡고 흐물거렸다. 엘제이가 고개를 흔들자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처연한 얼굴이 애달픈 표정을 달고 그를 올려봤다. 숨 막히도록 애처로운 얼굴에 정신이
빼앗긴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발 앞에는 깨진 조각들이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흩뿌리며 애원하는 엘제이의 태도에 한숨을
쉬며 발을 돌렸다. 그의 발을 향하던 날카로운 조각들이 멀어졌다.

여자가 멋대로 제 공간을 침범했다. 화가 나고 불쾌해야 했다. 당장 꺼지라고 소리치고 쫓아내야 했다. 그래야
정상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아제프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약에 취해 휘청거리는 여자를 제 침대 위에 눕혔다. 그가 자욱한


연기를 보며 창문을 열 생각으로 등을 돌리자 엘제이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제발 가지 마, 제발…….”

툭 치면 떨어져 나갈 힘없는 손이 그의 팔목 위로 올라왔다. 힘을 줘 붙들지도 못하고 그저 얹어놓은 가냘픈


손짓에도 그는 망설였다. 그가 마약에 취해 풀린 초록색 눈을 바라보다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창문을 열고 돌아올 겁니다.”

“가지 마, 가지 마세요…….”

“……당신이 마시고 있는 연기는 아텐입니다. 기사도 아닌 당신이 자칫 중독되기라도 하면 나중에,”

“가지 마세요……. 아제프…….”

설득해보려 해도 돌아오는 말은 가지 말라는 애원뿐이었다. 아제프는 제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속삭이는 엘제이를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당신, 제정신 아니야. 나도 아니고.”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 화
10

그가 뭐라 하든 엘제이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가지 말라는 웅얼거림뿐이었다. 아제프가 한숨을 내쉬며 큰 소리로


알모어를 불렀다.

“알모어!”

안절부절못하고 방문을 지키던 집사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알모어는 무사한 엘제이를 보며 안도했다. 혹여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티아세 家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힐긋 주인을 쳐다본 알모어는 평온한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매년 이날마다 그는 지극히 냉담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무기질적인 얼굴과 불쾌감에
찌푸린 얼굴로 하루를 꼬박 환각에 시달리던 아제프가 오늘은 괜찮아 보였다.

아 10 일의 아제프가 안정적으로 보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알모어가 멍하니 아제프를 올려다보자 아제프가 턱
끝으로 창문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창문 열고, 의원을 불러와. 그리고 공녀께서 여기 있다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그는 말하다 말고 입술을 멈췄다. 이 새벽에 그를 찾아온 건 명백히 그녀의 실수였다. 그가 고의로 소문을 흘려
그녀의 혼삿길을 막아도 엘제이는 아무 변명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새벽녘 그녀 혼자 그를 찾아왔다는 소문이 나면 여자의 평판이 깎이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될 터였다. 그러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그리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여자의 평판을 신경 쓰는 거지? 여기서 잤다는 소문이 나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도망갈 수 없을
테니…….’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알모어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를 불렀다.


“후작님?”

“……소문이 나지 않도록 입단속 단단히 시켜라.”

알모어가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자 맑은 공기가 방 안을 채웠다. 새벽을 틈타 은밀하게 찾아온 의원이 엘제이를
진찰하고 몇 가지 약을 조제했다.

쓰러진 엘제이를 보며 경악하던 시아는 아제프의 차가운 시선에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서신을 전하러
티아세 家로 돌아갔다.

아제프는 혼곤한 얼굴로 잠에 빠진 엘제이의 뺨을 만졌다. 타인의 피부 따위가 불쾌하기는커녕 따스하기만 했다.
그는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주며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엘제이는 자면서도 그의 팔목을 놓지 않았다. 한쪽 팔을 그녀에게 내준 아제프는 왠지 떨칠 수 없는 하얀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알 수가 없어……. 당신은 대체 뭐지?”

소리 없이 들어온 입 무거운 시녀 둘이 바닥에 떨어진 깨진 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햇빛이 반사되어 쨍한 빛을


뿜던 조각들이 시녀들의 손에 하나둘 사라졌다.

그의 발을 위협하던 날카로운 가시들이 힘을 잃고 수그러들었다. 그날, 아제프는 엘제이의 간청대로 방 밖을


나가지 않았다.

***

처음 맡아보는 마약에 취한 엘제이는 아제프 대신 꿈속에 갇혔다. 그를 찾아가던 악몽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를
비껴 기꺼이 모든 걸 감내할 엘제이를 향했다.

그녀의 꿈은 칠흑같이 어둡고, 시뻘건 선혈로 가득했다.

온몸이 난자당한 채 죽어 있던 그라시아 란델이 눈을 부릅떴다. 새빨간 립스틱이 흉하게 번져 괴기스러운 입술이
저주를 토해냈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제프가 따라하듯 중얼거렸다. 퇴폐적인 얼굴로 물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입술을 한껏 비틀며 자신을 저주하는
환각을 노려봤다.

[그래! 너는 영원히 외로울 거다! 누구도 너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너를 위하지 않으며, 누구도 너를 바라지
않는 고독 속에서 평생을 살 거야! 벌레보다 흉악하고 악귀보다 극악한 네놈에게 딱 맞는 인생이지!]

그라시아가 입술을 째지게 올리며 깔깔깔 그를 비웃었다.

아 10 일. 4 년간 그를 찾아오던 악몽. 아제프는 귓가를 울리는 이명과 눈앞을 스치는 환각에도 냉담한 얼굴로
그것을 무시했다. 그가 입술을 벙긋 움직일 때마다 아텐 연기가 자욱하게 뒤덮였다.

첫 살인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 동요도 줄 수 없다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꾹꾹 눌렀던 죄악감은 새까만 밤이


오면 폭발하듯 일렁거렸다. 아제프는 그의 몸을 탐하는 광기를 마약으로 짓누르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허의 시간. 하필 그날 운명의 고리가 이리저리 엮이지
않았다면 힘겹기는 해도 평소와 같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그날따라 알모어가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어버린 시체가 어른거리지 않았다면, 정처 없이 흘러가 닿은


곳이 어릴 적 그가 지내던 홍등가가 아니었다면, 젊은 남창이 그를 알아보지 않았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주홍빛 노을은 시체의 산을 비췄다. 홍등가 거리는 난자당한 시체로 가득했고, 시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가득 적시며 피바다를 만들었다.

작은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참상 속 홀로 마약을 피우던 남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질질 끌며 새빨간


홍등이 걸린 거리를 지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핏빛 시체가 얼룩지고, 그날 밤 그를 본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살인멸구 당했다.

산더미 같은 시체의 길을 걸어가는 남자의 흰 뺨에는 선홍빛 핏물이 묻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퇴폐적인 얼굴은
지독하게 아름다웠지만 텅 빈 눈은 공허했다. 죽이고, 죽여도 텅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어차피 썩어버린 몸뚱이, 시궁창을 뒹굴던 몸이 이제 와 깨끗해질 리가 없지. 그러니……. 사랑받지 않아도,
상관없어.]

핏빛 길을 걷는 남자의 등 뒤로 핏물 고인 검이 덜컥덜컥 위태롭게 흔들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목적 없는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이 쏜 화살이 제 심장을 꿰뚫을 줄


모르고 한 행동은 고스란히 돌아와 그를 자멸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그가 타고난 운명. 하지만 그의 운명은 슬프게 절규하는 엘제이로 인해 달라졌다. 정해진 미래가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

아제프는 밝은 햇살을 뿌리는 창밖을 보며 잠에 취한 엘제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얇은 침의 자락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아기자기하게 수놓은 레이스가 괜히 그의 손을 간질였다. 손을 타고 오르는 달콤한 감각에 그가
손을 떼어내고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생각이 없는 여잔가?”

불편할까 봐 로브를 벗겨주니 드러나는 잠옷에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엘제이는 모를 일이었다. 그는 하얀


레이스 자락을 보며 그녀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차분하게 내려온 밀빛 속눈썹은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자면서도 그의 팔만은 절대 놓지 않은 작은 손을 보며 조그만 새끼손가락을 만졌다. 손마디에 굳은 살


하나 없는 보드라운 손은 흰 빵처럼 부드러웠다.

오밀조밀 말랑거리는 손가락이 그의 손에 꾹 눌렸다 돌아왔다. 갓 빨아놓은 솜이불에 잠긴 듯 포근한 감각이 그를


타고 올랐다.

제 영역을 침범하고, 제 침대까지 차지한 여자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워야 정상인데,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체향을 품은 침대 위에 감싸인 모습이 보기 나쁘지 않아 아제프는 괜히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 위에 넓게 펼쳐진 부드러운 밀색 머리는 햇살이 비쳐 부드러운 빛을 품었다. 그 성품처럼 따사로운 색감이


침대 위에 부드럽게 번졌다. 아제프는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곳으로 모아주며 자신도 모르게 풍성한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름다운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들이 하프의 줄처럼 유연하게 휘어졌다. 그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리며 잠든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새하얀 얼굴이 아까보다 더 희게 질린 것 같았다. 아제프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다가 눈을 돌려 침대맡에
놓인 약을 훑었다.

“아제프…….”

“영애? 일어났어요?”

신음처럼 흘러나온 가냘픈 목소리에 아제프가 황급히 눈을 돌리며 엘제이를 쳐다봤다. 또다. 그녀는 또 울고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가를 타고 흘러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시는 눈물을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울렁거리는 심장이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불쾌했다. 저 여자가 울기만 하면 제 의지를 벗어난 심장이 멋대로
발광했다. 아제프는 불쾌한 감각을 참아내며 우는 여자를 흔들었다.

“영애?”

“안 돼……. 제발, 하지 마……. 아제프…….”

무슨 꿈을 꾸는지 닫힌 눈가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코끝이 서럽게 우는 아이처럼
안쓰러웠다. 그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엘제이를 흔들었다.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엘제이!”

그가 이름을 부르자 엘제이의 눈이 열렸다. 고통에 젖은 초록빛 눈동자가 아제프를 향하자 아제프는 벼랑 끝에서
밀쳐지는 것처럼 섬뜩해졌다. 뭔지 정의할 수 없는 아리송한 감정에 그의 얼굴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아제프…….”

몽롱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며 다시 울먹울먹 젖어갔다. 비통에 젖은 눈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제프가 그녀의 등을 받쳐 일으키고 입술에 물 잔을 대줬다.

“악몽 꿨어요? 천천히 마셔 보세요.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

엘제이는 투명하게 출렁이는 물을 보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꿈속에서와 같은 하얀 셔츠는 깨끗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얼굴도 상한 곳 없이 말끔했다. 엘제이는 평온해 보이는 그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입술을 물로 축였다.
차가운 물에 목을 축이자 정신이 들었다.

원래의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이 저택에 없어야 했다. 아침에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으니까.


엘제이는 깨끗한 손을 보며 안도했다.

‘꿈……. 그는 나가지 않았어. 아침은 밝았고,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엘제이는 여전히 그의 손을 붙든 자신의 손을 떼어내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함부로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잠든 사이 마음껏 그녀를 만지던 아제프를 모르는 엘제이는 혹시 그가
불쾌해 했을까 봐 걱정하며 눈꼬리를 내렸다.

“란델 경.”

아제프는 다시 란델 경으로 돌아온 호칭에 살짝 인상을 썼다.

제멋대로였다. 허락도 없이 이름을 불렀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엘제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화가 났나?’

순한 얼굴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울적하게 변했다.

아제프는 서글픈 듯 흐려진 얼굴을 보며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가 침대맡에 놓인 약봉지를 꺼내 들며 그걸


엘제이에게 먹이려다 멈칫했다.

‘빈속에 먹여도 되나?’

독한 향을 가득 들이마셨으니 속이 좋을 리가 없었다. 괜히 밥을 먹였다가 탈이라도 날까 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약을 지금 먹일지 아니면 식사를 한 뒤에 줄지 고민하며 다시 인상을 썼다.

엘제이는 그가 화났다고 판단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가 앉은


의자 위에 있는 쥐스토코르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옷을 돌려달라고 하셔서……. 갑자기 옷을 돌려주고 싶어서, 이른 아침에 죄송해요.”

“아침이 아니라, 이른 새벽이었죠. 그것도 기사도 없이 달랑 시녀 하나만을 데리고 오시다니,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

그가 비꼬듯 말하다 말고 혀를 깨물었다.

대외적인 아제프 란델의 이미지는 이런 게 아니었다.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는 상냥한 사람. 아제프는 어젯밤
했던 말들과 마약 피우는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약봉지가 우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봤네? 내 모습.’

그가 조금 차가운 얼굴로 시무룩한 엘제이를 쳐다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 화
11

다른 건 그렇다 하더라도 아텐을 피우는 건 명백히 불법이었다. 엘제이는 입이 가벼운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믿을 수 없었다. 표정을 바꾼 아제프가 달콤한 얼굴로 웃으며 엘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했잖아요. 엘제이.”

“네? 제 이름을…….”

“엘제이가 제 이름을 불러서 저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기분 나쁘세요? 제가 당신을 불쾌하게 했나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는 나비를 유혹하는 꽃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엘제이가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찌푸려도 천상의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눈꼬리를 휘고 웃을 때면 살랑거리는 속눈썹에 홀릴 것
같았다.

“그럼 이름을 불러도 되죠? 엘제이도 저를 아제프라 불러도 좋아요.”

엘제이. 제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름 세 글자가 그의 입술에서 나오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발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엘제이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눈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남자가 매달리듯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애틋한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 위태로운
눈물이 청남빛 눈을 적시고 바다처럼 흔들렸다. 촉촉이 젖은 눈을 한 미인이 그녀를 애처로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엘제이, 사실 저는 어머니가 많이 그리워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이거든요.


사람들이 워낙 쉬쉬하는 사건이라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머니의 죽음이 평범하지 않았어요.”

목덜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가 그렇게 만든 거였다. 어렸던 소년이 고위 귀족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썼던 방법은 잔인했다. 그는 증거를 멸하기 위해 그라시아 란델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선사했다.

정순하다고 소문난 귀족 부인이 홍등가에서 난잡하게 찔려 나체로 죽었다.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는 품위를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귀족들 사이에서 황급히 무마됐고, 그라시아의 사체는 아무 부검 없이 장례가 치러졌다.

엘제이는 그라시아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듯 울먹이는 눈동자에는 소름이
돋았다. 몰랐다면, 저 연기에 깜빡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매년 이날만 되면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요.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저도 모르게, 아텐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어요.”

“그래도 그건, 몸에 안 좋으니까 계속 하시면 안 돼요.”

“그럼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면, 저는 어머니의 기일에 마약을 피운 패륜아가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비밀로 해줄래요?”

그가 간청하듯 애절하게 속삭이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촉촉한 눈이 물기를 한가득 머금었다가 절묘하게
떨어트렸다. 상아빛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이 청아한 얼굴을 애처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무감각한 여자라도 저런 처연한 미인의 눈물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리라. 엘제이는 진실을
알면서도 무심코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밀로 할게요.”

“고마워요, 엘제이.”

그가 어미 품을 찾는 아이처럼 엘제이를 끌어안고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하얀 등을 감싸 쥐자


오싹한 열감이 등을 따라 흘러내렸다. 차가운 손인데도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아제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도홧빛 뺨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무척이나 작은 몸이었는데 품에 안으니 따뜻했다. 그는 차가운 체온을 덥히는 따스한 체온에 눈을 감았다. 이
여자의 피부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온기와 도홧빛 피부를 타고 오르는 향내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당신은 봄이네요. 따뜻해요.”

뜨거운 심장을 누르던 얼음벽에 금이 갔다. 사르르 떨어지는 얼음조각이 툭툭 떨어져 빛처럼 사라졌다.

그의 봄. 엘제이 티아세는 그의 봄이 될 운명이다.

아제프는 나른한 맹수처럼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뻣뻣이 굳어버린 등가를 응시했다.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자 긴장했는지 바르르 떨리는 등이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안고 있다가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중독된 것처럼 빠져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그의 몸을 달구자
놓아주기가 싫었다. 그는 팔에 힘을 줘 그녀를 더 바싹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몸이 그의 품에 밀착되어 따사로운
온기를 전해줬다.

아제프는 아무 반항도 없이 얌전히 안겨 있는 엘제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또 한 번 확신했다. 엘제이


티아세는 아제프 란델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고 있어…….’

온몸을 붉게 물들인 몸은 두근두근 박동하며 그녀의 설렘을 전달했다. 아제프는 예민한 귀에 들리는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폭 끌어안고 발긋한 피부를 응시했다.

생크림처럼 하얀 피부에 꽃내음이 묻어 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등가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우아한 선을 그리며 이리저리 휘어졌다.

따스한 밀색 머리카락은 대지의 축복처럼 아름다웠고,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는 갓 피어난 신록처럼 싱그러웠다.
차분하고 따스한 성품처럼 부드러운 몸이, 얌전히 품을 내어주는 태도가, 갓 움트는 새싹처럼 연약하고 따스했다.

그녀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봄이었다.

“당신은 정말 봄이로군요. 엘제이.”

그가 엘제이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자 엘제이가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엘제이는 귓가를
스치는 옅은 숨결과 부드러운 저음에 몸을 떨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어지러운 머리가 더욱
아찔해졌다.

아제프는 긴장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못 본 척하며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는 계절. 나의…… 봄. 엘제이 티아세.’

힘없이 올라온 손은 결국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아제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품에 몸을 묻고 봄을 느꼈다.

성에가 끼고 피멍울이 맺힌 가슴이 따스한 계절을 맞아 새 단장을 시작했다. 언 땅이 녹아내리고, 얼어붙은


서리가 걷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저는 혼자 남았어요. 외롭고, 힘들었어요. 당신은 봄이니, 봄의 충만함으로 저를


감싸주세요.”

그의 중얼거림에 엘제이의 눈이 또 울먹울먹 일렁였다.

거짓말 속의 진실. 단단한 껍데기 아래 숨겨진 연약한 피부. 그는 위로를 바라고 있었고 엘제이는 그를 안아줄
손이 있었다.

그의 봄이 될 소녀는 그의 등 위로 따스한 손을 올렸다. 하얀 손이 부드럽게 등을 감싸자 그가 나른하게 숨을


몰아쉬며 잠들 것처럼 눈을 감았다.

엘제이가 위로하듯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얀 셔츠 위로 봄볕처럼 따사로운 손길이 온기를 전해주며


살랑살랑 흔들렸다.

‘당신이 외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많이 아팠죠? 이제 행복해도 되잖아.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아 10 일. 지옥 같았을 그 날은, 봄에 젖고 봄에 물들었다. 아제프의 감긴 눈매와 입이 평화로운 오수를 즐기는


것처럼 부드럽게 풀렸다.

‘어쩌면, 당신은…… 정말,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도.’

똑똑-

대리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풀린 공기를 꿰뚫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엘제이가 몸을 화드득 떨자


아제프가 얼굴을 와락 찌푸린 채 떨어졌다. 모처럼 맞이한 평화가 깨졌다. 그는 엘제이를 놓아주고 성큼성큼
걸어가 짜증스럽게 문을 열었다.

“뭐야?”

문이 열리자 황급히 고개를 숙인 알모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작님, 의원님께서 공녀님이 식사하신 후 약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침 드실 때가 되었는데, 식사는 어떻게


…….”

아제프가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자 알모어의 소리는 점점 흐려졌다. 아제프는 아직도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약봉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가 엘제이에게 닿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녀께서 이곳에 계신 건 비밀이니 적당히 준비해서……. 아니,”

이를 갈듯 사납게 튀어나오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제프는 고개를 돌리고 발긋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엘제이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정한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엘제이, 이곳에서 식사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속이 안 좋을 테니 부드러운 미음 종류로 준비해도


될까요?”

솜털같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냥하게 울려 퍼졌다.

알모어는 어쩐지 조금 억울해서 어깨가 처져 있다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제프를 보고 살며시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주인은 조금…… 기뻐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제프의 팔목이 엘제이에게 잡혔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시선에 그가 허리를 숙이고 상냥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엘제이가 불안한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속삭였다.

“아직은, 나가시지 말고 저랑,”

“당신이랑 같이 있어 달라고요? 곤란한 분이세요. 겨우 몇 발자국도 떨어지지 못하게 하시니…….”

“그게 아니라, 저는 그저…… 멀리 나가지 않으셨으면 해서요.”

“당신이 정한 ‘멀리’의 기준이 뭐죠? 저는 이제 방 밖도 나갈 수 없나요?”

그답지 않은 장난이었다. 웃음기를 매단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머뭇머뭇
손을 떼어냈다.

아제프는 주춤주춤 물러나는 손을 보다가 엘제이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차가운 손이 허벅지
아래를 스치자 엘제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한 손으로 등과 허벅지를 감싸고 그녀를 안아 든 아제프가
알모어에게 시녀들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제가 욕실까지 같이 가줄 수는 없으니 당신은 여기서 씻고, 저는 당신을 기다릴게요. 이건 당신의 기준에서
괜찮은 일인가요?”

엘제이는 미칠 듯 부끄러웠다. 그녀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도 마치 자신이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구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제프가 그녀를 내려줬다. 들어온 시녀들이
엘제이의 몸을 부축했다.

엘제이는 욕탕을 보다가 가슴 위에 자리 잡은 초록빛 문장을 떠올리고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시녀들을 손길을 물렸다.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 불편해서……. 저를 따라온 아이가 있을 텐데…… 그 아이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될까요?”

아제프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을 보다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딱거렸다.

“다 비슷하지 않나요? 혼자 씻어본 일도 없을 텐데…… 당신의 시녀는 제가 잠시 돌려보냈습니다.”

“시아가…… 돌아갔나요?”
“오늘 안에 오긴 하겠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냥 제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어떤지요?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뇨. 제가, 혼자 할게요!”

엘제이가 다급히 대답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반응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촉이 곤두선 남자가 가는 눈으로 엘제이를 훑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 화
12

“혼자서 하시려면, 불편하실 텐데요?”

“그……. 낯선 이에게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혼자 할게요.”

아제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을 보다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저절로 혼자 씻는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럼 방문 앞을 지키게 할 테니까 혹시라도 불편한 일이 생기면 부르세요.”

그가 등을 돌리자 또 쪼르르 따라온 엘제이가 그의 손을 잡았다가 황급히 놓고 다시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엘제이가 눈을 질끈 감고 웅얼거렸다.

“아, 그……. 멀리 가지는 마시고, 방에서 기다려주시면…….”

“방에서?”

그가 진심이냐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바닥을 힐끔 쳐다봤다. 욕실과 방 사이에 문이 있다고는 해도 방 안에서


씻고 있는 레이디를 기다리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씻는 소리도 들릴 테고, 젖은 몸으로 나올 그녀의 모습이
훤히 보일 것이 분명해서 잠시 망설였지만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방에서 기다려 주세요.”

“진짜 알 수가 없네요. 저를 유혹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하아……. 아무튼, 알겠어요.”

그는 뭐라 입에 맴도는 말을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이게 무슨 꼴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저 여자에게 속절없이 끌려가고, 그럴 의도가 없는 여자에게 유혹당하고 있었다.

그에게 여자는 역겨운 존재거나 이용할 만한 도구, 딱 그 정도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저 여자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보드라운 피부는 역겹기는커녕 따사롭기만 했고, 상냥한 미성은 새의 지저귐처럼 맑았다.
‘죽일 수 있을까?’

아제프는 안도한 듯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여자의 목을 분지르는 상상을 했다. 하얀 목이 뜯겨나가는 상상을


하자 곧바로 섬뜩한 감각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무수한 피를 묻힌 손이 새삼 살인을 망설였다. 아제프는 몰랐지만,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아제프는 손을 말아 쥐며 손톱으로 손바닥을 내리눌렀다.

일이 끝나고 무사히 공작의 지위를 얻으면 빼앗을 목숨, 그뿐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고작
연약한 여자 하나 옆에 둬도 그를 위협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오히려 귀찮은 일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그래, 괜히 일을 크게 키울 필요는 없지. 계속 주변 사람이 죽으면 의심받을지도


모르고, 그녀가 곁에 있으면 다른 여자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제프는 죽이지 않는 쪽이 이득이라고 속으로 변명하며 결혼 후에도 엘제이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살며시
돌아서는 등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씻고 나오시면 저랑 얘기를 좀 나누는 게 좋겠네요. 왜 당신이 새벽에 저를 찾아왔는지, 나가지 말라고 청하는
이유는 뭔지, 꽤 궁금하거든요.”

그의 속삭임에 울상이 된 엘제이는 못 들은 척 문을 닫았다. 옷을 벗은 엘제이는 첨벙첨벙 걸어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 몸을 담근 엘제이는 자학하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뭐라고 변명하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새벽에 그를 찾아온 이유가 납득이 갈까? 그에게 나가지 말라 간청했던
일은? 생각이 안 나……. 그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엘제이는 왠지 모를 억울함과 서글픔에 고개를 숙이고 물속에서 발버둥 쳤다. 욕탕을 가득 메운 물이 출렁출렁
흔들리다 욕탕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문 앞에 서 있던 아제프는 물이 쪼르르 떨어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그에게는 별것


아닌 일. 겨우 여자 한 명이 그의 방에서 씻고 있을 뿐인데, 새삼 그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제이는 몸을 최대한 느릿하게 씻으며 그에게 할 변명을 고민했고, 아제프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엘제이를
기다리며 찰랑찰랑 움직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미치겠군.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왜 저딴 물소리를 듣고 있지? 미쳤나?’

엘제이의 목욕이 끝날 동안 두 남녀는 고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와 있는 시간만큼은 단 한 순간도 그라시아 란델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엘제이의 씻는 모습이 가득 차서 그라시아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는 마약의 도움 없이, 4


년 만에 그라시아의 환각을 떨쳐냈다.

아제프는 화끈한 얼굴을 감싸며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를 보면,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제프는 괜히 발을 꼬았다 풀었다 뒤척이며 소파 위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눈을 감으면 물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눈을 뜨면 엘제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제프가 짜증을 내듯 몸을
뒤척이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의 유난한 행동에 욕실 앞을 지키던 시녀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수그렸다. 힐긋 바라본 아제프의 얼굴


위에는 꽃봄이 내려앉았다.

굳게 닫혀 있던 욕실 문이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빼꼼히 열렸다. 아제프는 듣지 않으려 외면했지만 덜컥거리는


문소리는 그의 귓가에 미치도록 크게 울려 퍼졌다.

욕실 안에 준비된 수건과 옷을 대충 갈아입은 엘제이는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발끝을 보며 조심조심 걸어오는


엘제이의 등 뒤로 촉촉이 젖은 머리 타래가 흔들렸다.

평소에도 향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씻고 나오니 짙은 꽃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제프는 괜히 방 안이


후끈거리는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가 지금 여자의 씻고 나온 몸 따위를 궁금해 하는 건가? 미쳤나?’

보지 말아야지, 듣지 말아야지……. 계속 되뇌어 보지만 눈이 가고 귀가 가는 걸 막기가 힘들었다. 그의 감각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엘제이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머리를 살뜰하게 말려주고 얇은 옷 위에 커다란 숄을
걸쳐주었다. 아제프는 힐끔 눈이 돌아가려는 걸 막으며 창밖을 쳐다봤다.

“알모어에게 식사를 들이라 전해라.”

아제프가 여전히 창밖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시녀 한 명이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씻고 나오는 걸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는데 기분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아제프는 제멋대로 쿵쾅이는


심장을 무시하며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따사로운 봄볕이 대지에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며 환하게 비춰오는 햇볕이 유난히 따뜻했다.
싱그러운 태양 빛이 그의 손에 올라 차갑게 언 체온을 녹였다. 그는 햇살을 쥐려는 듯 손을 몇 번 움직이다가
사뿐사뿐 내딛는 발소리에 손을 내렸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머리카락을 말린 엘제이가 사뿐히 걸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부드러운 밀색 눈썹이 혼이 난 강아지처럼 휘어졌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지……. 나를 뭐라 생각하실까? 새벽에 다짜고짜 찾아와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미친 사람?
당신에게 닿을 수는 없어도 나쁘게 기억되기는 싫었는데.’

엘제이는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엘리사처럼 활달하지는 않았지만, 세심하고 차분한 엘제이는
좀처럼 실수를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제프의 앞에서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결심했던 일도 자꾸만 흔들렸다.


엘제이의 눈썹이 끝도 없이 하강했다.

그녀가 곁에 다가오자 꽃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아제프는 고개를 돌리며 엘제이를 쳐다봤다. 그의 눈치를 보듯
우물쭈물 움직이는 입술과 눈꼬리까지 내려간 팔자 눈썹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는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사랑스러워? 뭐가? 저 여자가?’

아제프는 여자를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자신에 크게 당황하며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올 때 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엘제이의 몸 상태를 고려해 약간의 수프와 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로 차린
소박한 식사였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앞에도 그녀의 것과 같은 묽은 수프가 놓인 것을 보고 더 우울해졌다. 엘제이는


어물쩍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속삭였다.

“제가 큰 실례를……. 사과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정말 너무 죄송합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고,


아침부터 저 때문에 정신없으셨죠?”

아제프는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었다고, 위험한데 무슨 짓이냐고 쏘아주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축 처진 눈썹을
내려다봤다. 너무 울적해 하니까 뭐라고 더 화내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대외적인 아제프의 모습만 보여주기로
했다.

상냥한 미소를 건 남자가 그녀의 손에 스푼을 쥐여 주며 대답했다.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요. 다만, 다음부터는 수행기사라도 데리고 놀러 오세요.”

“다음이요?”

엘제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이만큼 추태를 부렸으니 속으로는 진저리가 난다고 생각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을 입에 담았다.

‘다시…… 초대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옷을 드리고 나면 다시는 그에게 다가가지 말자고


결심했는데.’

아제프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결심을 산산이 조각내는 재주가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놀란 반응이 오히려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고 처연한 얼굴을 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밝은 빛이 긴 속눈썹을 비추자 반짝반짝 빛나는 백금색이 그녀의 눈을 현혹했다.

“그럼 한 번만 오고 안 올 생각이셨어요? 그러셨으면, 저는 좀 서운하네요. 오늘은 가족들이 걱정하실 테니,


식사를 끝낸 후 돌아가시고 다음에 제대로 초대할게요.”

설령 그의 말이 거짓이더라도 엘제이가 그를 서운하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엘제이가 버둥거리며 손과 머리를


동시에 도리도리 저었다.

아제프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봄꽃 향을 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화사하게 웃자 얼굴을 붉힌 엘제이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럼, 다음에는 먼저 연락드리고 올게요. 아! 제가 가더라도 오늘은 나가지 마셨으면 좋겠는데, 혹시…
… 나가야 할 일이 있으세요?”

엘제이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집을 나가는 건 그의 마음이었다. 아무 상관 없는


그녀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언짢게 생각할까 봐 걱정된 엘제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썹만 축 내려트렸다. 스스로가 한심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저러는 게 나쁘지 않았다. 뭐 때문에 필사적으로 말리는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그녀의 부탁을
못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그는 어리숙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답답함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좀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그가 피식 웃으며 잘 먹지 않는 그녀의 손에 다시 스푼을 쥐여 줬다. 그녀가 그의 눈치를 보며 한입 삼키자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바빠도 나가지 말라고요? 정말 궁금하네요.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꿀꺽. 황급히 수프를 삼킨 엘제이가 스푼을 내려놓고 망설였다.

“천천히 드셔야죠.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아제프가 선선히 웃으며 엘제이의 손에 물 잔을 쥐여 줬다. 그녀는 또 엉겁결에 물을 마시고 그의 재촉에 수프를
먹기를 반복하다 간신히 대답했다.

“사실 제가 꿈을 꿔서……. 악몽을 꿨는데, 거기서 후작님이…… 음,”

“제가 죽기라도 했어요?”

가볍게 묻는 아제프의 목소리에 엘제이의 안색은 하얗게 내려앉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 화
13

아제프는 자면서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다른
사람이 죽는 꿈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엘제이에게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저 여자에게 특별한 걸지도 모르겠군. 저 여자는 내게 호감이 있으니까.’

아제프는 뱃속을 홧홧하게 달구는 만족감에 부드럽게 웃으며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한입도 먹지
않은 그의 그릇을 보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손에 스푼을 쥐여 줬다.

“경도 드세요.”

“저도 먹으라고요?”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제프가 그녀의 체온이 남아 따뜻한 스푼을 쥐고 수프를 떠먹었다. 최근
들어서 거의 혼자만 식사하다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다 식어버린 수프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는
살며시 웃으며 몇 번 더 수프를 떠먹었다.
엘제이는 식사를 시작하는 그를 보다가 다시 한 번 간청했다.

“아무튼 불안해서……. 오늘은 안 나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침은 밝았지만 오늘은 그의 기분이 안 좋을 게 분명하니 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혹여 다른 일이 일어나거나


그의 심기가 뒤틀려 또 한 번 자멸의 길을 걷게 될까 봐 두려웠다.

엘제이는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할까 봐 망설이면서도 계속 애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면……. 당신이 저를 껄끄럽게 생각하더라도, 제가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막고


싶어요.’

아제프는 촉촉하게 젖어드는 초록색 눈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원래 어머니의 기일에는 잘 나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겨우 악몽을 무서워하시다니 아직 어린


분이시네요.”

“감사, 합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드릴 테니, 당신도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아……. 네! 뭐든 말씀만 하시면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엘제이는 드디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엇을 요청하든


들어주고 싶었다. 한제이는 평범한 소녀였지만 엘제이 티아세는 제법 가진 게 많았다.

아제프가 원한다면 제 앞으로 된 광산이라도 팔아서라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엘제이가 말만 하라는 듯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제프가 피식 웃었다.

저 여자가 저렇게 굴 때마다 뱃속이 간질거렸다. 아제프는 일이 잘 진행되어 느끼는 만족감이라 생각하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네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고, 이번 코르디스 때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실래요?”

“…….”

귀를 쫑긋거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엘제이의 얼굴이 한순간 확 굳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올해 그의 코르디스


파트너가 되는 건 엘리사고, 모든 걸 알고 있는 엘제이는 이번 그의 파트너로 티로시 영애를 붙여줄 계획이었다.

아제프는 아까보다 창백해진 안색을 보며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여자는 뭐든 들어줄 것같이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로 한 발 물러나는 습관이 있었다. 아제프는 겁먹은 초식동물을 위해 한 발자국 물러날 필요성을
느꼈다.

“부담스럽나요? 저희는 친구잖아요.”

“친구……?”

그래. 친구. 아제프가 선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연인 관계로 시작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얼마든지 저렇게 말해줄 용의가 있었다.

“네. 제가 인덕이 없어서 그런지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거든요. 엘제이가 부디 저를 가엽게


여겨주세요. 코르디스 때 파트너가 없으면 좀 창피하잖아요.”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의 파트너를 하겠다고 나서는 영애들이 줄을 이을 터였다. 단지 귀찮았을


뿐이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엘제이는 그의 속내를 짐작하면서도 또 그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제프가 웃으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제 부탁, 들어줄래요? 엘제이.”

“네. 그럴게요.”

엘제이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홀린 듯 또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는 듯 웃으면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엘제이는 자신이 그에게 이토록 약할 줄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 이상으로 약했다.

그녀는 또 어그러지는 계획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차마 안 된다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아제프는 축 늘어진 눈썹을 보며 사납게 뒤틀리는 마음을 숨겼다. 또다. 그녀는 매번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저
망설임을 부술 묘책이 필요함을 알았다.

‘다 줄 것같이 굴다가 물러나면 나도 좀 화가 나잖아? 나는 욕심이 많아 다 가져야겠는데……. 이거 어쩌지?’

그는 독기를 드러내는 대신 찬란하게 웃었다. 밝은 미소 아래 숨겨진 맹독이 그의 눈을 어둡게 뒤덮었다. 그는


간교함을 숨기고 선하게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럼 마저 드세요. 밥을 잘 먹어야 약을 드실 테니까요. 한 번 정도로는 중독되지 않지만, 집에 가서도


꼬박꼬박 약 잘 챙겨 먹어요.”

아제프는 말 안 듣는 어린애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민망함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쓸 테지만, 아- 하세요.”

“……아…….”

엘제이는 엉겁결에 환으로 된 약을 받아먹으며 물을 삼켰다. 옳지, 잘한다. 칭찬하는 눈이 너무 낯설어 볼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제프는 남은 약을 엘제이의 손에 꾹 쥐여 주며 싱그럽게 웃었다.

“단거라도 하나 드릴까요?”

“괜찮,”

“자. 먹어요.”

엘제이는 아이처럼 대하는 그의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사탕 하나를 받아먹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거기로


들어가고만 싶었다.
‘놀리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아제프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겉옷을 하나 들고 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 위로 걸쳤다.

“제가 아끼는 옷이에요. 다시, 돌려주러 와주세요.”

그녀가 힘겹게 돌려줬던 옷은 다시 돌아왔다. 엘제이는 어깨 위를 부드럽게 휘감는 천자락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디스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가지고 있자. 그리고 돌려주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러운 천자락이 그녀의 몸 위에서 넘실넘실 흔들렸다. 까만 겉옷은 뱀이 똬리를 틀듯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어깨를 살짝 끌며 문 앞으로 걸어가자 알모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후작님, 티아세 家의 엘리사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화들짝 놀란 엘제이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녀와 똑 닮은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와 엘리사가 만난다. 엘제이는 악몽이 반복되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그녀가 황급히 눈을 돌려 아제프를
쳐다봤다.

아제프가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제프가 엘리사를 바라본다. 그가 엘리사를 사랑한다. 그가 악역이 된다. 그가…… 비참하게 죽는다.

엘제이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리사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엘제이의 얼굴에 대치시켰다.

‘흠……. 확실히 닮긴 닮았네.’

쌍둥이라 그런지 확실히 엘제이와 엘리사는 닮아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기에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요리조리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꽤 많았다.

아제프는 1 층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는 엘리사를 보며 우물쭈물 망설이던 엘제이를 떠올렸다.

‘항상 뭘 그리 망설이는지…….’

그가 옅게 웃으며 계단 난간을 잡았다. 등 뒤로 곱슬곱슬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라든가, 둥근 이마, 자매가


똑같이 불안하게 서성이는 모습 등.

아제프는 엘리사를 보며 엘제이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를 보며 수줍어하는 모습이라든가,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 등이 그의 머릿속에 튀어 올랐다. 아제프는 옆에 서


있는 엘제이를 의식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엘리사를 보며 웃었어. 벌써……? 아직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지?’


엘제이는 엘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제프를 보고 희게 질렸다. 책 속에서도 아제프는 엘리사를 처음 본
순간 묘하게 끌리게 된다.

[신의 문장]은 엘리사의 시점에서 주로 서술되기 때문에 아제프가 그녀의 외모에 끌렸는지, 그녀의 활달함에
끌렸는지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아마 파트너 없이 코르디스에 나간 그를 위해주는 엘리사의 착한 마음과 당찬 성격에 마음이 갔으리라고


생각했다.

엘제이는 초조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를 힐끔 바라봤다. 옅게 웃던 미소가 점점 진해질수록 그녀의 가슴은


낭떠러지로 밀쳐졌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절벽에 선 엘제이가 간절히 그를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아제프가 또 엘리사를 사랑하면 어쩌지? 코르디스 때도 만나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나 때문에 더 일찍


만나버렸어.’

엘제이는 그가 엘리사를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

웃는 모습을 보니 벌써 사랑에 빠진 걸지도 몰랐다. 이 세계에는 비운의 황자 알체스테도 분명 존재했다.


코르디스가 끝나면 곧 그가 돌아올 것이고, 엘리사의 문장도 드러나게 된다.

달콤한 분홍빛 문장은 알체스테의 것이었다. 그는 꿈속에서처럼 엘리사를 빼앗기고 혼자 남아 자멸할 것이


분명했다. 오늘 하루, 그의 운명을 돌려 그가 덜 비참해지더라도 그는 악역으로 남을 것이고, 사랑받길 원하는
남자는 결국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아제프, 엘리사를 사랑하면 안 돼요.’

엘제이는 엘리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는 그를 보며 상처 입었다. 제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는 주제에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섭고 싫었다. 엘제이는 그런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러지 말자고 다독였다.

엘제이가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아제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얀 셔츠가 잡아당겨지는 모습에
아제프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늘 그와의 접촉을 조심에 조심했다. 스푼을 쥐여 줄 때도 손이 닿지 않도록 신경 썼고, 손을 잡아도 될


일을 꼭 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제프는 그게 조금 불만스러웠다.

‘손을 잡으면 될 일을……. 내가 만지면 화들짝 놀라기만 하고. 나를 좋아하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다른 사람이 멋대로 손을 잡았으면 끔찍하게 여겼을 남자는 엘제이를 향해서는 반대로 생각했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엘제이는 특별했다.

“아제프.”

조그만 속삭임이었다. 바람결이 이지러질 듯 연약한 소리에, 아제프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창백한 안색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아제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 화
14

“엘제이? 왜 그래요?”

푹 쉬게 하고, 밥을 먹이고, 약을 먹여 화사해졌던 안색이 다시 파랗게 죽어버렸다. 반짝이던 초록빛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초조하게 입술을 무는 모습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아제프의 얼굴이 사납게 찌그러지자 엘제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물러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엘제이에게는 그것이 위협으로 느껴졌다.

‘화내고 있어……. 기분이 나빠 보여. 왜? 엘리사를 보는 걸 막아서?’

지금껏 아제프를 귀찮게 해도 그는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무수한 폐를 끼쳤음에도 부드럽게 웃으며 넘어갔다.


설령 그게 진심이 아니더라도 그는 늘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상냥하게 웃어넘기는 아제프가 가면을 버릴 정도로 엘리사가 보고 싶은 걸까? 심장이 따끔따끔
아프고 숨이 탁탁 막혔다. 결국 운명은 바뀌지 않는 걸까? 그는 엘리사를 사랑하게 될까?

엘제이의 눈이 슬픔에 젖었다. 누군가 가슴 위에 칼을 꽂고 문장을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엘제이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엘제이? 어디 아파요?”

그는 처음 만났던 순간 심장을 부여잡던 엘제이를 떠올리고 질린 안색을 했다. 아까 의원이 왔을 때 더 정밀하게


진단받게 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한 남자는 휘청거리는 허리를 붙들었다.

‘심장이 정말 많이 아픈 거라면, 무슨 지병이 있어 티아세 家에서 숨긴 거라면, 내가 죽이지 않아도 그녀가 먼저


죽는다면…… 어쩌지?’

어쩌면 엘제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제프는 그제야 제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목숨은 순전히 제 손에 달린 줄 알았다. 다른 변수로 그녀가
죽을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질려가는 안색을 보며 애타게 말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예요? 네?”

걱정을 담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엘제이는 저게 다 거짓임을 알았다. 그는 엘리사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 끌릴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를 의심하자 문장은 피를 토해내듯 거세게
꿈틀거렸다.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엘리사를 사랑하는 게 당신의 운명이라면 만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당신을 찾아와, 원래 정해진 것보다 더 빨리 만나게 해버렸어요. 미안해요, 아제프.’

엘제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를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문장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숨길 수 있으면 숨기고 싶었다.
엘제이의 입에서 색색거리는 숨결이 거칠게 나왔다. 심장이 조여든 듯 아팠다.

차마 문장이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미워서 엘제이가 자책하며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픈 게 아니라……. 방에서 나오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서는…… 왜, 나오셨어요?”

아제프에 대한 미안함과 작은 원망. 엘제이는 원망하듯 튕겨 나간 목소리에 자책감이 들었다.

아제프를 멋대로 좋아한 것도 자신이고, 그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한 것도 혼자만의 생각이면서 이제 와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것 같았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속상해서 엘제이는 울보가 되었다. 원래 눈물이
많은 건 아니었는데, 요즘은 매일 우는 것 같았다. 꾹꾹 내리누르려 애썼지만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제프는 서럽게 우는 얼굴을 보며 서둘러 표정을 풀었다. 그가 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얼굴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냈다.

“쉬이, 제가 미안해요. 약속을 어겨버렸네요. 이제라도 들어갈까요? 응?”

아제프는 다정한 얼굴로 볼을 닦아주며 속살거렸다. 그의 음색은 깃털처럼 부드럽고 바닐라처럼 달콤했다.

저 여자는 아픈 게 아니라, 자신을 걱정해서 우는 거였다. 우는 모습을 보면 화딱지가 났지만 저를 그만큼


걱정한다는 뜻이니 나쁘지 않았다.

“…….”

“제가 잘못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데려다주지도 말라고? 저는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자꾸 어린애처럼 장난이 치고 싶었다. 그가 농담처럼 덧붙이자 엘제이의 눈이 살짝 뾰족해졌다.

“장난치지 마세요.”

아제프는 제법 새침한 얼굴을 하는 엘제이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가슴이 간질간질 따스했다.

오늘이 아 10 일이라는 것도, 그가 처음 살인을 한 날이란 것도,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가슴을 채우는
왠지 모를 충만감에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농담이에요. 그럼 오늘 하루, 저는 이 방 안에만 있어야겠네요. 당신이 원한다면 이곳에 있을 테니 울지


마세요.”

아제프가 상냥하게 웃자 엘제이의 얼굴도 살며시 풀렸다.

엘제이는 어느새 잠잠해진 심장과 편안하게 내뱉어지는 숨에 얼굴을 풀었다. 이제야 추태를 부렸다는 게 떠올랐다.
엘제이가 살며시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안해요. 제가, 실례를…… 계속, 여러 번. 미안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뭘. 그보다 열나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빨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제프는 떨어지려는 엘제이의 손목을 잡아끌며 둥근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음……. 제 손이 찬 편이라 열이 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어디가 아픈 거면 바로 돌아갈 게 아니라 제


집에서 조금 더 쉬는 게 어떨까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제 공간 안에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제 시야 안에 그녀가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그리 꽁꽁 숨기고 있는지, 왜 저만 보면 우는지, 왜 자신을 걱정하는지, 그리고……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지금처럼 그녀가 우는 이유를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이 싫었다. 저 여자의
뼛속까지 낱낱이 파헤쳐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아제프는 욕심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게 생겼으니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알 듯 말 듯, 가질 듯 말 듯,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한데도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유가 뭔지 알아내서 그 벽을 깨부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관계개선이 필요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저 여자가 한 발짝 더 다가올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야 해. 뭐가


좋을까? 엘제이 티아세. 뭘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게 줄 거지?’

저 여자를 온전히 가지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지의 무언가.

아제프는 그걸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그녀의 시간을 뺏고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다. 의외로
허술한 사람이라 물으면 틈을 보였다.

아제프는 계단에서 서성이는 엘리사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좀 더 쉬다 가라고 엘제이를 달랬다. 엘제이가 조금
망설이자 그는 아름답게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아픈 사람을 이대로 보내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요. 당신이 아픈 것도 엄연히 제 탓이고…….
저랑 좀 더 얘기를 나누면서 쉬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리사가 와서…… 돌아가 봐야 해요.”

“동생분은 제가 살짝 돌려보낼게요. 저랑 들어가요. 네?”

아제프의 목소리에 현혹되던 엘제이는 그가 엘리사를 만나겠다고 하자 정신을 차렸다. 그가 엘리사와 둘만 얘기를
나눈다는 게 무서웠다.

‘또 속절없이 끌리게 될 거야.’

엘제이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물어물 변명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제가 자꾸 귀찮게 하고……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언니!”

죄송하다 사과하고 오늘은 이만 가겠다고 말하려던 엘제이는 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무릎까지 올리고 계단으로
돌진하는 엘리사를 보며 경악했다.
엘제이의 눈물진 얼굴을 본 엘리사는 콧김을 슝슝 내뿜으며 황소처럼 돌진했다.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오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매끈한 다리를 반쯤 내놓은 채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아연함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엘제이는 아찔해지는 기분에 서둘러 달려가 엘리사의 등짝을 찰싹 때리며 소리쳤다.

“세상에……. 리사! 드레스를 그렇게 들면 어떡해!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잖아!”

“아! 아프잖아…….”

엘제이의 손은 작지만 매웠다. 엘리사는 따끔한 등짝을 어루만지며 툴툴거렸다. 등짝을 문지르던 엘리사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매를 지켜보는 아제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저희 언니를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티아세 家의 차녀, 아니, 엘제이 티아세의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 엘리사 티아세라고 합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을 품고 그를 향했다.

이미 코뿔소처럼 달려오던 그녀를 본 아제프는 새삼 우아한 척 고상 떠는 엘리사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하며 싱긋 웃었다.

“네, 엘리사 양. 반가워요. 아제프 란델입니다.”

엘제이의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시작점이었다. 둘은 천적이라도 만난 듯 소리 없이 으르렁거렸다.

엘리사는 엘제이를 울린 것 같은 아제프를 보며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저 얼굴만 잘난 남자가 하나뿐인 언니를
울렸다고 생각하니 화가 들끓었다. 그녀가 억지로 웃으며 그를 노려보자 고깝게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은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스콤 기질이 있는 엘리사는 소중한 언니를 울린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제프는 고작 가족이라는 이유로
엘제이에게 친근하게 구는 엘리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제프와 엘리사가 동시에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어.’

엘리사와 아제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동정과 사랑을 품었던 달콤한 분홍색 눈과 아름다운 청해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엘제이만 모르는 스파크가 번개처럼 사납게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빤히 노려봤다. 초원 위에서 마주친 맹수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처럼 둘은 소리
없이 으르렁거렸다. 까칠한 시선이 서로를 할퀴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쌍의 눈 사이로 불똥이 튀는데도 엘제이는 둘의 속내를 몰랐다. 그녀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둘을 보며


아제프와 엘리사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엘제이의 표정이 울적하게 변했다.

‘엘리사에게 끌리는 게 그의 운명이라면, 어떻게 막아야 하지?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아제프는 원래 모든 여자를 싫어했으나 엘리사에게만큼은 첫 만남 때부터 끌렸다. 그건 책 속에 분명히 서술된
내용이었다.

모든 여자를 혐오하던 남자의 유일한 사랑. 유일한 허용. 엘리사는 그에게 선 안의 사람이 될 테고, 자신은 선
밖에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경계선이 더는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 같아서 엘제이는
씁쓸해졌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바라보다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엘리사의 얼굴이 흉흉하게 변했다. 엘제이는 남한테
실례를 저지를 성격이 아니었다. 분명 아제프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한 엘리사의 오해는 커졌다.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도록 억지웃음을 짓고 있던 엘리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붙였다.

“저희 언니가 실례를 저질렀,”

엘리사가 말을 하다 말고 엘제이를 돌아봤다. 엘제이의 얼굴은 여전히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언니의 흐린 안색을
걱정스럽게 살피던 엘리사는 엘제이를 보호하듯 자신의 뒤로 숨기고서 코뿔소처럼 콧김을 슝슝 내뱉었다.

‘교양? 상식? 그딴 게 다 뭐야! 제이가 울었는데!’

원래 엘리사는 사고를 수습하기보다는 일을 키우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사과하며 실례가 많았다고
인사해야겠다는 계획을 취소하며 황소처럼 머리를 들이박았다.

“저지르긴 했는데, 울린 거예요? 우리 제이, 당신이 울렸어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5 화
15

아제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느낌에 엘리사의 말을 따라했다.

“우리…… 제이?”

제이라는 이름은 아마 엘제이의 애칭인 것 같았다. 언니보다 키도 큰 주제에 엘제이를 가리고 서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제 시야 안에 두고 살피고 있었는데, 쌍둥이라는 여자가 와서 그녀를 가리자 아제프의 입꼬리도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 망할 여자가?’

‘저 요괴 같은 남자!’

두 남녀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야차처럼 흉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다만, 고개를 숙인 엘제이만 둘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땅굴을 파고 있었다.
‘제이.’

고개를 숙이고 손만 만지작거리는 엘제이의 소심한 행동을 지켜보던 아제프는 속으로 그녀의 애칭을 읊조렸다.

왠지 제이라고 부르는 쪽의 어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가 엘제이를 바라보자 얄밉게 웃은 엘리사가 들으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네. 우리 제이요.”

아제프는 엘리사를 살쾡이처럼 난폭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아까 했던 생각을 바꿨다.

둘은 쌍둥이지만 하나도 안 닮았다. 엘제이는 햇살처럼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봄볕처럼 따사로웠다. 반면 저


여자는 교양 없고 무식해 보였다.

‘하나도 안 닮았어……. 저딴 게 제이의 쌍둥이라니…….’

아제프는 이미 속으로 엘제이를 제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엘리사를 무시하듯 그녀를 지나쳐 엘제이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었다.

“제이가 애칭인가요? 저 여자가 당신의 애칭을 부르네요?”

“저 여자……요?”

엘제이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하며 선하게 웃고 있는 아제프를 쳐다봤다. 엘리사가 지금 저 여자라고


했냐며 펄쩍 날뛰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무시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왜 저 여자가 당신의 애칭을 부르는 거죠?”

“아……. 그거야 엘리사는 제 동생이니까 당연히 제 애칭을,”

엘제이가 얼빠진 표정으로 엉겁결에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지가 않았다. 그가
아직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엘리사를 저 여자라 칭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제프는 처음부터 엘리사에게 상냥했다. 아니,
엘리사가 아니더라도 아제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저렇게 쉽게 무례를 저지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제이를 다시 제 품으로 끌어들이며 아제프를 경계했다. 살쾡이처럼 눈을 매섭게 뜬 소녀는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뭐? 저 여자?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아……. 들으셨어요? 그보다, 처음 보는 사인데 반말이라니 조금 무례하지 않나요? 제가 당신보다 2 살 더


많은 걸로 아는데요.”

“하! 그러세요? 그런데 무례는 그쪽이 먼저 저지르지 않았나요? 엄연한 레이디한테 그 여자라니요. 그게 무슨
무례죠?”

엘리사의 말에 콧방귀를 뀐 아제프가 그녀를 기분 나쁘게 훑어봤다. 그가 무해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독설을
내뱉었다.
“아, 레이디요? 제가 미처 못 알아봤네요. 하도 콧김을 뿜어대기에 저는 웬 짐승 한 마리가 제 집에 와 있는 줄
알았죠.”

“뭐? 짐승? 당신 지금 해보자는 거야?”

엘제이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둘은 투견처럼 난폭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아제프는 날카로운 혀를 장착해


엘리사를 비꼬았고, 엘리사는 콧김을 슝슝 내뿜으며 펄쩍펄쩍 날뛰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엘제이는 아연한 얼굴로 둘을 지켜보며 머리를 짚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자 머릿속이
과부하라도 걸린 것처럼 멍해졌다.

엘리사를 지나쳐 힐끔 엘제이를 본 아제프가 엘리사를 밀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서둘러 엘제이를 부축하며
하얗게 질린 안색을 살폈다.

“엘제이? 어디 아파요?”

“당신 지금 쳤어? 아니 그보다, 제이! 어디 아파?”

그에게 밀린 엘리사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서며 후다닥 엘제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은 엘제이를 사이에 두고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제이, 제 집에 좀 더 있다 가세요. 네? 몸이 안 좋으신데 마차까지 타시면 더 안 좋을 거예요.”

아제프가 곱다란 속눈썹을 유혹적으로 팔랑이며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그가 걱정을 한껏 담아 부드럽게
속살거리자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엘리사가 그에게서 엘제이를 빼앗아 안았다.

“제이? 언니! 이 남자한테 애칭 허락했어?”

‘이 남자……라고? 이 남자랑 저 여자?’

엘제이는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사이가 나빠 보이는 둘을 보며 몹시 당황했다.

[신의 문장]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른 세계인 걸까? 아니면, 그녀의 개입으로 둘의 인연이 꼬인 걸까?
알 수 없는 상황에 엘제이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엘리사는 그를 가엽게 여기고, 그는 엘리사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엘리사는 상냥한 성격이라 남을 쉽게 미워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활달하기는 해도 저렇게 공격적으로


쏘아붙이거나 화내는 아이는 아니었다. 엘제이는 팔을 걷어붙이며 불량스럽게 손을 까딱이는 엘리사를 보며 몹시
당황했다.

‘엘리사는 저런 애가 아닌데……?’

엘제이가 시선을 돌려 아제프를 쳐다봤다. 그녀가 바라보자 냉랭한 조소를 단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냥하게 풀어졌다.

‘아제프도 이상해……. 이게 뭐지?’


엘제이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많이 다른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둘을 지켜봤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대답 없이 서 있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긴 엘리사가 아제프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보세요! 남의 애칭을 함부로 부르는 건 뭐 예의가 흘러넘치는 행동인가 보죠?”

엘리사의 비아냥거림에 얼굴을 왈칵 찌푸린 아제프는 살기 띤 얼굴로 엘리사를 노려보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풀었다. 허락받지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받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는 둘 사이에 끼어 찌부가 된 엘제이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이미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본 상태인데도 천사처럼 보일 만큼 예뻤다. 엘제이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바라보자 아제프가 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허락을 받으면 되겠네요. 제이, 허락해줄 거죠?”

“아……. 네, 편하게 부르셔도…….”

그녀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은 아제프가 뽐내듯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네. 제이.”

엘리사는 얼굴로 제 언니를 현혹하는 아제프를 보며 턱을 벌렸다. 엘제이는 미모에 홀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저
남자가 워낙 독살스러워 순진한 언니가 홀라당 넘어갔다고 생각한 엘리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언니! 아무 남자에게나 애칭을 허락하면 어떡해!”

“제이가 허락한다는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제가 제이 동생이거든요? 아무 사이 아닌 당신이랑 달리 저는 친동생이에요. 그것도 쌍둥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다고!”

왕왕. 앵알앵알. 쩌렁쩌렁. 둘은 두 마리의 사나운 맹수 같았다. 조금 전까지 엘제이가 서러워 울던 공간은
난장판이 되었다.

엘제이는 고래 싸움에 끼여 등이 터진 새우처럼 찌그러들었다. 그녀는 고막을 울리는 시끄러운 난투에


고문당하다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돌아가는 순간까지 한시도 조용하지 않았다.

“제이, 아프면 좀 더 쉬고 가도 되는데……. 지금이라도 저 여자 먼저 보내고 저랑 같이 쉴까요?”

아제프는 아쉬운 듯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그가 유혹하듯 엘제이의 손을 만지작거리자


엘제이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엘리사가 힘들게 찾아왔는데 어떻게 그러겠냐고 변명했다.

“당신 또 그 소리야? 제이한테는 우리 집이 더 편하거든?”

아제프가 엘제이 몰래 차가운 눈으로 엘리사를 쏘아봤다. 저 여자만 난입하지 않았으면, 아니 알모어가 저 여자가
찾아온 걸 말하지 않았으면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따사로운 그의 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는데…….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일까?’

그가 무감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동생을 잃어버리고 슬피 우는 엘제이를 달래며 그녀의 옆자리를 꿰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죽여야 흔적도 남지 않을까 고민하며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안 보이는 아제프를 보며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속삭였다.

“다음에, 이 옷 돌려주러 올게요.”

“네. 제게 소중한 것이니 부디, 빨리 돌려주러 와주세요.”

천 따위가 소중할 리 없었지만 그는 그녀를 빨리 보고 싶어 그렇게 말했다. 마음속으로 옷을 주는 날, 그를


떠나겠다고 생각한 엘제이는 빨리 돌려달라는 말에 몸을 움찔 떨며 흐린 얼굴을 했다.

아제프는 또 내려간 우미한 눈썹을 보며 계획을 수정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괜히
쌍둥이를 죽였다가 몸도 안 좋은 엘제이의 건강이 안 좋아질까 봐 망설여졌다.

아제프는 그냥 엘리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으며 방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의 겉옷을 잘 여민 엘제이가 그를


따라 손을 흔들며 엘리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맹세코 말하는데, 아제프와 헤어지는 순간 아쉬움이 아니라 해방감을 느꼈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

아제프는 마지막까지 방에서 나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엘제이 때문에 창문으로 떠나는 마차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6 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를 보다가 등을 돌렸다.

평소처럼 혼자 남은 방 안이 유난히 텅 비어 보였다. 그는 엘리사와 유치하게 다퉜던 걸 생각하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다가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가 누워 있던 모양대로 주름진 침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아제프는 침대보를 매만지다가 그녀의 향이 남은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열린 창문 아래로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햇살을 따라간 창가로 보이는 풍경은 완연한 봄의 것이었다.
엘제이의 눈처럼 푸르른 나무들은 앙증맞은 신록을 틔우고 봄볕을 즐겼다.

아제프는 어쩐지 좀 나른해진 얼굴로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예민한 귀에 시끄러운
새소리가 들리고 환한 햇빛이 눈을 간질였지만, 그는 모처럼 푹 잠이 들었다.

아 10 일.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자지 않던 남자는 포근한 햇살 향이 남은 이불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악몽의 끝자락을 떨쳐내고 평화에 잠겼다.

아제프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꼬박 반나절을 잠에 취해 있었다. 평화로운 봄날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6 화
16
엘제이가 돌아가고 난 뒤 3 일이 지났다. 아제프는 그녀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그가 방 밖을 나간다고 해서
돌아간 그녀가 알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왠지 그녀의 말에 따라주고 싶었다. 그는 그날 하루 동안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을 지켜줬는데…… 3 일이나 아무 연락이 없어? 가만 보면 사람 성질 돋우는 재주가 있어. 이러면,
봐주고 싶지가 않잖아?’

가만히 앉아 날짜를 가늠하던 아제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서류 위에 사뿐히 놓여 있던 펜대가 그의 손에 우지끈


휘어졌다. 새까만 잉크가 활자 위를 뒤덮었다.

그의 곁에서 사무를 보던 다이크가 히끅- 소리를 내며 온몸으로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는 아제프를 지켜봤다.

아제프는 나쁜 상관은 아니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교묘하게 돌려 까며 깎아내리기 일쑤였지만 불공평한 사람은
아니었다. 화가 났을 때조차 상냥하게 웃던 사람이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숨 막힐 듯 무서웠다.

“다이크 경.”

“네? 네!”

“제가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좀 일찍 출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웃고 있었지만 안 된다고 하면 죽여 버릴 듯 살벌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눈치 빠른 다이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비켜섰다.

아제프는 의외로 문신이었다. 그는 외교부 소속으로 외교 협상에 능한 달변가였다. 늘 칼같이 입궁해 칼처럼
출궁하던 남자가 웬일로 일찍 가겠다고 하니 슬그머니 궁금증이 올랐지만, 눈치 좋은 다이크는 여기서 이유를
물어봤다가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걸 알았다.

다이크는 거친 손길로 셔츠를 풀어헤치고 쥐스토코르를 걸치는 아제프를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날씨가 꽤 풀려서 베스트만 입어도 됐을 텐데? 후작님이 추위를 많이 타셨나?’

다이크는 남색 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그를 쳐다보다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했는지
숨 한 번 깊게 내뱉지 못했다. 다이크는 아제프가 빠져나가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사각사각 펜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제프가 떠난 자리에는 잉크로 얼룩진 서류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

엘제이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아제프는 먹이를 사냥하러 나가는 맹수마냥 흉흉한
낯빛으로 성을 가로질렀다.

성난 얼굴로 걸어가던 아제프는 부드러운 밀색 머리를 보고 멈춰 섰다.

‘아이젠 티아세.’

다른 귀족들과 웃으며 걸어오던 아이젠도 아제프를 발견했다. 그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젠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란델 후작 아닌가? 잘 지냈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아제프는 엘제이와 닮은 머리카락 색을 흘깃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역시 그녀의 아버지라고 다를 건


없는지 손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은 불쾌하기만 했다. 아제프는 동요 없는 얼굴로 무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그래. 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일세.”

아이젠이 그를 기다리는 무리에게 먼저 가라 손짓하며 고개를 숙여 아제프에게 속삭였다.

소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이는 아이젠의 태도에 아제프는 조금 의아해졌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요?”

아이젠은 그를 기다리던 무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며 약간 망설였다. 그는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첫째 딸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셨다.

“하아…….”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이젠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그래. 음……. 실례가 아닐지 모르지만, 혹시 자네…… 문장보유자인가?”

아제프는 뜬금없는 아이젠의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장이요? 아니요.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

아이젠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첫째 딸을 떠올리고 한숨을 삼켰다. 아비로서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편하지 않았다. 한시바삐 제 짝을 찾아주고 싶은데 그의 능력으로도 초록빛 문장을 가진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지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고 몇 날 며칠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니 아이젠의 애간장도
타들어갔다.

목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힘겹게 삼킨 아이젠이 아제프의 매끈한 얼굴을 살피며 아쉬워했다. 사윗감으로 탐이
나는 사내기는 했으나 인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엘제이의 반쪽을 찾으면 그에 대한 연정도 사라질 테니…….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아이젠은 요즘 따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눈물짓는 날이 많은 딸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온화한


안색이 꺼멓게 죽었다.

아이젠의 얼굴에 드러난 부정을 영민하게 감지한 아제프가 말을 늘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 공작님. 일전의 일은…….”


“일전의 일?”

아이젠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쓸었다. 아이젠은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제프는 자연스럽게 아이젠의 표정을 살피며 여유롭게 웃었다.

‘모르는군.’

평소 아이젠의 딸 사랑은 유명한 것이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엘제이가 혼이라도 날까 봐 엘제이의


시녀에게 그녀의 쌍둥이 동생만 몰래 불러오라 전했다. 아제프는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아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번에 논의했던 일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알체스테 황자님께서 곧 돌아오실 것 같아서요.”

“흠……. 황상께 버림받은 황자가 돌아올 수 있겠는가?”

“네. 그는 곧 돌아올 겁니다. 섣불리 루드비히 황자님을 지지하시기보다는 조금 기다리는 게 어떠실지…….”

아제프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주제를 유려하게 흐리며 아이젠의 관심을 돌렸다. 아이젠은 애초부터 루드비히를
지지할 마음이 없었지만, 아제프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이젠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살짝 웃었다. 고맙다는 듯 아제프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다정한 듯했다.

“그런가? 자네의 안목은 믿을 만하지. 알려줘서 고맙네. 내 참고하지.”

함부로 어깨를 건드는 손 때문에 청남색 눈은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제프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돌리며 엘제이를
똑 닮은 부드러운 밀색 머리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제이가 아버지를 닮은 거겠지.’

나이를 먹어서도 새치 하나 없는 부드러운 밀색을 보자 목 끝을 점령한 역겨움이 어느 정도 가시는 것 같았다.

아제프의 어깨를 도닥이던 아이젠은 겉옷을 차려입은 아제프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닌데, 어디 가는 길인가?”

“네.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요.”

‘당신 딸을 잡으러 가는 길입니다. 도통 손에 떨어지지 않으니 벼랑 끝에서라도 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제프는 유려하게 웃으며 사나운 얼굴을 숨겼다.

그렇게 애절하게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발길을 끊는 태도가 신경을 거슬렀다. 일이 끝났다고 입을 싹 닦고


찾아오지 않는 태도에 뱃속이 부글거렸다.

엘제이가 오지 않는다면 그가 가면 되었다. 다만, 심기가 사나워진 그의 심술이 그녀를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제프는 어떻게 해야 그녀를 온전히 틀어쥘 수 있을지 고민하며 무구하게 웃었다.

아이젠은 아제프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먹기 좋은 떡이 눈앞에 있는데 삼킬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아이젠은 또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 제이랑 인연이 닿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딸 걱정으로 안색이 죽어버린 아이젠의 얼굴 위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아제프는 아까부터 뭔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아이젠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요즘 내 딸이 몸이 좀 안 좋다네……. 아비로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서 말일세.”

‘아프다고? 어디가?’

아제프의 머릿속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던 엘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제이를 향해 갈았던 칼날이 아프다는 소리에 흐물거리며 무뎌졌다. 아제프는 아이젠을 재촉해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물어보고 싶은 기분을 참아내며 손을 꾹 눌러 쥐었다.

아이젠 티아세, 저렇게 인자한 얼굴로 웃는 남자는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런……. 걱정이 많으시겠군요. 속히 편안해지기를 빌겠습니다.

“하아. 요즘은 한숨만 나온다네. 걱정해줘서 고맙네.”

“별, 말씀을요.”

황소처럼 기운 좋던 엘리사가 아픈 건 아닐 터였다. 아니, 그의 머릿속에 엘리사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창백한 안색으로 가슴을 쥐던 엘제이만 떠올랐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지, 평소에도 몸이 안 좋은지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제프는 조급함을 느끼며
초조하게 손을 까딱였다.

엘제이의 눈에 눈물이 걸리며, 아제프는 저도 모를 감정으로 흔들리곤 했다. 그녀의 눈물은, 금방 사라질
신기루처럼 애틋했다.

아제프는 가슴에 콕콕 닿는 날카로움을 애써 씹어 삼켰다. 노력했지만, 동요하는 낯빛을 온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조금 흐려진 얼굴로 침묵했다.

‘아파서, 못 온 건가?’

아제프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아이젠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멀어졌다.

“그럼, 나중에 봄세.”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디가 안 좋은 거라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뒤를 돌아 걸어가는 아제프의 발걸음이 뛰어가는 것처럼


빨라졌다.

***
엘제이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우울하게 내려앉은 눈가는 울었는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지붕을 그리듯 내려간 눈썹이 울적해 보였다.

엘제이는 고뇌를 담아 글을 쓰고 있었다.

[그에게 옷을 돌려준다. 만다. 그를 찾아간다. 다시는 찾지 않는다. 미래가 바뀌었다. 정해진 운명도 바뀌는가?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그가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를 계속 볼 수 있을까…
….]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는데 고민이 가득한 글이 되어버렸다. 엘제이는 그를 계속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끝맺은 글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개입으로 책 속의 내용이 틀어졌어. 근데 이게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게 맞을까?’

아제프와 엘리사가 예정보다 빨리 만났고, 둘은 서로를……. 정말 믿기지 않지만, 둘은 서로를 싫어하게 된 것


같았다.

엘리사에게 넌지시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아제프에 대한 욕뿐이었다. 엘제이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둘의 사이가
그렇게 틀어진 건지 궁금했다.

‘혹시 나 때문에? 나라는 변수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버리는 건 아닐까? 괜히 내가 끼어들어 미래가 뒤틀리고
그의 운명이 더 가혹해지지는 않을까?’

책 속에서 엘리사는 아제프의 구원이었다.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는 짝사랑이었더라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조금이나마 상처를 치유 받는 순간도 있었다.

이 모든 건 엘리사가 그를 동정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엘리사는 아제프를 몹시 싫어하고 미워했다. 엘리사가 손을 건네지 않으면 그의 운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으로 점철되는 건 아닐지 불안했다.

방관과 개입 사이. 엘제이는 어느 것 하나 선택할 수 없었다. 꿈결처럼 빛나는 초록빛 문장이 그녀의 족쇄였다.

‘문장이 없었더라면, 정해진 짝이 없었더라면, 내가 다가가도 되지 않았을까? 이런 문장……. 그의 것이


아니었다면 원한 적 없었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 겨우 이딴 문장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계속 그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그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걸까?’

엘제이가 손톱을 세워 가슴을 내리누를 때, 똑똑- 창문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엘제이가 투명한 창문 아래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7 화
17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는 아제프 란델이었다. 깜짝 놀란 엘제이가 쪼르르 달려가 닫힌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실려 코끝을 스치는 향은 그의 것이었다. 진짜 아제프였다.

엘제이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불렀다.

“아제프!”

“쉿! 저 몰래 들어온 거예요. 지금 저는 불법 침입자니 우리만의 비밀로 해줄래요?”

아제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엘제이의 눈가를 보며 장난스럽게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몰래 들어왔다는 말에
소리를 죽인 엘제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저 서운해요. 계속 기다렸는데……. 제이가 오지 않으니 당신을 보고 싶은 제가 올 수밖에요.”

아제프는 살쾡이 같은 속내를 누르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1 층 창문이었지만 밖과 안의 높이 차이가 있는 터라


엘제이는 그보다 한참 높이 서 있었다.

아제프는 발긋한 눈가를 매만지다가 미끄러지듯 손을 내렸다.

“이리 나올래요?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탁이에요.”

“아, 잠시만요…….”

부탁한다는 말에 엘제이가 허둥지둥 창가를 서성이며 뭔가 딛고 넘어갈 만한 것을 찾았다. 그는 어물쩍대는


엘제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갈급함이 그의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눈앞에 먹이가 있는데 기다리는 맹수는 없었다.

“실례할게요.”

아제프는 당황한 듯 허둥대는 엘제이를 보며 그녀의 팔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에


가뿐히 들려 그의 품에 쏟아졌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가 바람결에 나부끼고 커튼처럼 쏟아져 내렸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아제프의 등 뒤에서 노을이 일렁일렁 흔들렸다. 주홍빛 노을은 엘제이의 머리카락에 맺혀
그의 품에 쏟아졌다.

아제프가 싱그럽게 웃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계속 이렇게 하고 싶었어.”

아제프가 낮게 읊조리며 엘제이를 품 안에 가뒀다.

그래. 아제프는 부족했던 것이다. 엘제이가 부족해 자꾸만 화가 나고 엘제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품에 안으니
따뜻했다. 놓고 싶지 않았고, 놓을 이유가 없었다.

아제프는 생크림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보고 싶었어요. 제이.”

달에게 밀려나던 봄의 햇살이 놀라 크게 벌어진 초록색 눈을 비추고, 하얀 얼굴을 주황빛 봄볕으로 물들였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내려주는 대신 품에 꼭 끌어안고 새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향긋하고 따뜻한 그녀는 봄이었다. 그의 품에 봄이 쏟아졌다.

차갑고 서늘한 가슴이 따사로운 숨결로 물들었다.

아제프는 숨을 작게 내쉬며 자신에게 폭 안겨 있는 엘제이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엘제이는 긴장한 듯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얼굴만 가리면 다 해결된다는 듯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모습이 얼굴만 숨기고 적의 기척을 살피는 다람쥐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카락이 다람쥐의 털과 조금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저랑 산책,”

“아?”

피식 웃으며 엘제이의 의사를 물어보던 아제프가 사박사박 잔디 밟히는 소리에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녀를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드디어 엘제이와 단둘이 만났는데, 다른 이에게 방해받는 건 질색이었다.

아제프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품에 안겨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인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어설픈 사람.’

아제프는 제 말에 순순히 따르는 엘제이를 보며 만족스러워 하다가도 다른 사람에게도 이리 쉽게 넘어갈까 봐 조금


언짢은 얼굴을 했다. 사박사박 잔디가 밟히는 소리에 엘제이가 더 긴장하며 몸을 움찔 떨었다.

아제프는 제 걱정을 하는 게 분명한 엘제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풀며 다정하게 웃었다. 어설프기는
했지만 귀여운 사람이었다. 곁에 두면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편안해졌다. 그가 너그럽게 웃으며 생각했다.

‘뭐. 곁에 두고 차근차근 알려주면 되니까.’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갑옷이 철컥철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티아세 家의 기사들인 듯했다. 아제프는
긴장한 듯 떨고 있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까 분명 사람 목소리가 들렸는데?”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엘제이가 꼴깍 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웃으면 안 되는데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아제프는 혀를 깨물며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기사들은 침입자를 찾으려는 듯 수풀을 헤집으며 걸었다. 아제프는 사실 들켜도 크게 상관없었다. 저들의 입을
막는 일쯤이야 그에게는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숨을 죽인 채 기사들의 눈치를 보는 엘제이가 너무 진지해서
그걸 망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수풀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분명 들었는데…….”

“거봐. 아무도 없잖아. 이만 가자!”

기사 한 명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다른 기사가 그만 가자며 동료를 이끌었다.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엘제이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제프는 여전히 제 품에 안겨 있는 엘제이를 보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누가 보면 제이가 침입자인 줄 알겠어요. 이 상황을 보면, 악역은 저고 당신은 인질쯤 되지 않나요? 범인을
위해주는 인질이 어디 있어요.”

엘제이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는 모르겠지만 그가 저 스스로 악역이라 칭하는 말이 듣기 거북했다. 그는


악역이 아니었다. 이곳은 책 속이 아니고, 그와 그녀는 실제로 살아가고 있었다. 악역이 그의 운명이라도 반드시
바꿔 보이리라.

잠시 침묵하던 엘제이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인질은 범인에게 강제로 잡혀 있는 사람이지만 저는 아니니까요. 저는 제 의지로 당신을 따라왔으니 인질이


아니고, 당신은 저를 억지로 끌고 온 게 아니니 범인이 아니에요. 우리 집에 멋대로 들어왔어도 주인인 제가
허락했으니 악역이 아닌걸요.”

아제프는 처음 보는 엘제이의 단호한 얼굴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왜일까? 저 여자는 무조건 신뢰한다는 듯
그를 믿었다.

그가 나와 달라고 부탁하자 의심 없이 몸을 내밀었고, 그가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자 무슨 상황인 줄도 모르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제프는 어쩐지 더 시험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여자가 정말 저를 떠나지 않을지,
끝까지 저를 믿어줄지 궁금했다.

‘당신에게 저는 정말 악역이 아닌가요? 저를 끝까지 믿어줄 건가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저를 외면하지 않을


건가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도 달라지지 않을 건가요?’

아제프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쁜 짓을 해도요? 그래도 저는 당신께 악역이 아닌가요?”

엘제이는 나쁜 짓이라는 말에 조금 망설이다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만약 당신이 악역이라면 저는 공범자가 될 테지요. 나쁜 짓을


하는 당신을 말리지 못하고 도와줬으니까요.”

그래. 설령 그날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면 엘제이는 그 비밀을 숨기기 위해 다른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운명을 막을 수 있다면 저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그게 조금 두려우면서도 평생을 혼자 살아온 남자에게 차마 당신은 악역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제프는 또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계속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더 나쁜 짓을 할 건데, 그래도 제 공범자가 되어주실 건가요?”


“많이, 나쁜 짓인가요?”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을 한다는 말에 엘제이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몇 번


망설이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에 아제프가 활짝 웃었다. 언제 진지했냐는 듯 표정을 푼 아제프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엘제이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남의 집 담을 넘는 짓이니 많이 나쁘죠. 음……. 제이의 경우에는 자기 집 담을 넘는 거니까 형량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요? 혹여 들키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주동자니 제가 제이 몫까지 벌 받을 테니까요.”

“아니요, 그건 싫어요. 저도 도왔으니 벌을 받아도 함께 받을래요.”

엘제이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말렸다. 더는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별 의미 없이


한 말이겠지만, 책 속 세상을 보고 그의 비참한 최후를 알고 있는 엘제이에게는 벌을 받는다는 말이 가슴을 파는
송곳 같았다.

엘제이는 그의 관심을 돌리려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제프는 빠져나가는 온기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몸을 놓아주었다.

담으로 걸어간 엘제이가 허둥지둥 담벼락에 발을 걸쳤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어설픈 움직임을 조금 아연한 얼굴로
보다가 먼저 담을 넘어가 내려오는 그녀를 받았다.

엘제이가 그의 품에 떨어졌다. 그는 어쩐지 유쾌해지는 기분에 미소를 덧그리며 말했다.

“공범자가 조금 어설프네요. 도와줄 의지는 충만한데 몸은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이 제 도움이


필요하겠죠?”

그의 농담에 부끄러워진 엘제이의 몸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워낙 흰 살결이라 조금만 빨개져도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엘제이가 담에서 내려오자 바람이 장난을 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멀리 날려 보냈다. 옅은 분홍빛으로 물든


우아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저도 모르게 진득한 눈으로 하얀 목덜미를 보던 아제프는 엘제이를 땅에 내려주며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핥으면 꽃내음이 날 것같이 달콤해 보였다.

아제프가 은근슬쩍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거리자 엘제이가 손으로 목을 감싸고 빠르게 물러났다. 엘제이의 얼굴이
잘 익은 앵두처럼 붉게 물들었다.

엘제이는 목덜미에 닿았던 말캉거리는 감촉에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당황으로 물든 초록빛 눈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엘제이가 울 것처럼 눈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

아제프는 금세 습기를 머금는 눈가를 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새빨간 혀가 모습을 드러내자 엘제이가 숨을
삼키며 그의 선홍빛 입술을 바라봤다. 엘제이가 희롱당한 처녀처럼 울먹거리자 아제프가 산뜻하게 웃으며 물었다.

“제이? 왜 그래요?”

아제프는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듯 선하게 웃으며 물러나는 엘제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가를 만졌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톡 건드리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제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나만 보면 울지? 내가 슬프게 생겼나? 아니면, 내가 당신을 슬프게 하는 건가? 그건 좀 싫은데……. 저는


웃는 쪽이 더 좋거든요.”

엘제이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장인의 걸작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제이를 보고 있었다.

엘제이는 그의 눈에 고인 걱정을 읽고 혼란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목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엘제이가 아는 아제프는 굳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착각……인가?’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8 화
18

엘제이는 목덜미를 찌르르 울리던 촉촉한 촉감을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착각한 거라면 너무 부끄러웠다.
엘제이는 화사하게 웃고 있는 붉은 입술에 시선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에 가려진 하얀 목덜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하얀 목덜미를 이로 잘근잘근


씹고 그 목에서 흘러나오는 향취를 마음껏 들이키고 싶었다. 식욕이 돋는 얼굴이었다.

그는 여자의 목덜미에 집착하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엘제이의 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초원을
거니는 우아한 사슴처럼 곧게 뻗은 목덜미와 목을 타고 유려하게 휘어진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제프는 더 했다가는 엉엉 울 것 같은 얼굴을 보고 또 한 발 물러나야 했다. 필요에 의한 게 아니라면 울리고


싶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저 여자가 울면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섬뜩해졌다.

아제프는 약간의 경계심을 띠고 자신에게서 한 발짝 멀어진 엘제이를 보며 슬픈 듯 얼굴을 흐렸다. 그가 엘제이를


마주보며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가 당신을 슬프게 했나요? 저는 단지 당신이 다칠까 봐 편히 내려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제가,


불편해요?”

엘제이가 청해라고 생각했던 오묘한 눈동자가 슬픔을 담고 일렁거렸다. 빛이 절대 닿지 않을 깊은 바닷속에


햇살이 닿은 것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는 언제나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설령 거짓이더라도 그가 슬픈 얼굴을 한다면 엘제이는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을 슬프게 할 리가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은 엘제이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와의 순간순간이 더 없이 귀하고 소중해서, 그와 만났고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만큼 놀랍고 아름다워서 엘제이는 언제나 약자였다.

“불편하지 않아요. 그냥…… 며칠 만에 보는 거니까……. 드디어 당신을 만났으니까……. 반갑고, 반가워서…


…. 그래서 눈물이 나나 봐요.”

엘제이가 그를 보며 웃었다. 울먹이느라 붉게 물든 눈가가 곱게 접히고 분홍빛 입술이 호를 그렸다. 그녀가 웃자


흰 뺨 위에 볼우물이 깊게 팼다.

하얀 뺨을 가로지르는 보조개와 환하게 접힌 눈을 본 아제프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엘제이의 미소를 처음 봤다.

설령 이게 꿈일지언정,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한부의 마음일지언정 엘제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엘제이는 눈물을 매달고 환하게 웃었다. 볼우물이 더 깊게 패고 눈꼬리가 예쁘게 접혀갔다.

‘당신이 좋아서……. 멀어져야 하는데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곁에라도 있고 싶어서…… 자꾸 욕심이
나요. 너무 좋아하는데,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을 사랑한 게 당신에게 독이 될까 봐 무서워요. 제가
언젠가는 이 마음을 잊게 될까 봐 두려워요.’

그는 언제나 웃었고, 그녀는 언제나 울었다. 선하게 웃는 남자의 미소는 대부분 거짓된 것이었고, 그를 보며
울먹이는 여자의 눈물은 대부분 진심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보조개가 있다는 것도 조금 전 처음 알았다. 그는 한 번도 그녀를 웃게 해주지 못했다. 늘 저


여자를 울리면서도 자신을 위해 우는 여자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슬퍼서 우는 걸까, 왜 나를 보고 울까……. 그런 걸 궁금해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 눈물짓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코끝이 찡하게 울리는 낯선 느낌에 아제프가 표정을 무너트렸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요.”

아제프가 그렇게 속삭이며 여전히 눈물을 달고 밝게 웃는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아까처럼 장난치듯 그녀를
희롱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리했던 것처럼 위로하듯 품을 내어줬다.

엘제이는 그의 품에 안겨 결국 입꼬리를 내리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까 봐. 정말 이 감정이 허상처럼 사라질까 봐 너무 두려워서 문장 따위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제프, 당신이랑 함께 있는 게 너무 무서워요. 그리고…… 너무 기뻐.’

아제프는 축축이 젖어가는 옷을 느끼며 힘주어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구슬피 우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온몸으로
슬픔을 토해내는 여자가 보이는데……. 그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뭐
때문에 우는 모습이 싫은지, 왜 자꾸 눈에 밟히는지, 그걸 이해하기에는 아제프는 너무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그걸 알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엘제이를 끌어안고서도 그는 아직까지 제 마음을 몰랐다.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지, 이미 자신은 망가진 게 아닐지 두려웠다. 계속 저 여자를 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꽤,
슬펐다.

아제프는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엘제이의 머리를 꼭 감쌌다.


‘친구하기 싫다고 한다면…… 내가 당신과 친구하기 싫다고 하면, 당신은 뭐라고 할 거지? 엘제이 티아세.’

아제프는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았다. 그가 모르는 뭔가가 그녀의 마음을 제지하고 있었다.

엘제이는 그와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있다는 듯 일정 이상은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가 찾아와서


반가워하는 게 보이는데도 먼저 오려 하지 않았고, 뭐든 들어줄 듯 굴다가도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하자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분명 뭔가 있어……. 왜지?’

아제프는 대외적으로 좋은 남편감이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성격, 아름다운 외모, 어린 나이에도 외교부 수장을
맡을 만큼의 능력. 아제프는 자신이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상당히 후한 점수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엘제이가 그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데는 분명 그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제프는 서러운 듯 눈물을
토해내는 엘제이의 등을 토닥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젠 공작 때문인가?’

아제프는 엘제이의 부친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다니지만, 잔뼈가 굵고 머리 회전이
빠른 자였다.

‘제이를…… 황후로 올릴 생각인가?’

아제프는 최근 들어 황위 다툼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젠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젠은 이미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었다. 결혼처럼 확실한 결합이 없는 만큼 아이젠이 차기 황권을
거머쥘 황자에게 엘제이를 바칠 생각인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딸을 걱정해 안색이 까맣게 죽었던 아이젠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이젠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엘제이가 이렇게 울며불며 하루를 보내는데 굳이 엘제이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제프는 울먹이며 뭔가를 써내려가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엘제이가 필요했고, 가지고 싶었다.

‘모르면 알아보면 될 일이고, 갖고 싶다면 가지면 될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제프의 눈에 일순 잔혹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확실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다그치는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아제프는 울음을 토해내는 엘제이를 내려다보다가 그녀 곁에 제 심복을 심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엘제이는 가만히 품을 내주는 그의 행동에 참아왔던 설움을 토해냈다. 그가 불쾌해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울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아제프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리한다면 티아세를 노리는 남자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몰랐다.
설령 그게 거짓일지라도, 그의 품에 안길 수 있고 어쩌면 그와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쉬운 일이었다. 딱 한 번만 눈을 감으면, 조금만 용기를 내면, 허울뿐이라도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요시하고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엘리사와의 사이가 틀어졌으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제가 될 것 같아서 자꾸 욕심이 났다.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해도 계속 그의 곁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이 마음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혼자만의 짝사랑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어떤 사실 하나가 엘제이를 막아섰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너무 힘겹고, 그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무의식적으로 멀리하던


진실이 생각났다. 그와 자신을 막는 울타리는 문장 하나가 아니었다.

아제프는 자신의 원수를 찾고 있었고, 엘제이 티아세는 바로 그 원수의 딸이었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살인자의 딸.

‘그가 알면, 나를 경멸할 거야. 끔찍하다는 눈으로 바라볼 거야. 나는 엘리사처럼 그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가 알게 되면 아버지와 척을 질지도 몰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서로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아제프와 아이젠을 생각하자 너무 두려웠다. 아이젠이 저지른 짓이 너무 끔찍해서
그에게 용서를 청할 수도 없었다. 책에서는 분명히 나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정부로 삼은 걸지도 몰랐다.

아버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황을 살펴볼 때 아이젠이 그랬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아제프의 집에 불을 지른다는 말인가?

아제프의 가정을 파탄 낸 고위귀족이 어쩌면 그녀의 소중한 가족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들이 죽지만 않았어도 아제프는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정상적인 가족은 아니었어도 그의 곁에
소중한 존재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배 속의 동생이 살아남았다면, 그는 이부동생을 사랑했을 거다.

‘적어도 지금처럼, 사랑을 모르는 상태는 아니었을 텐데!’

엘제이는 아이젠이 원망스럽고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그녀의 아버지와 사랑하는 이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까 두렵고, 그리하여 누군가가 죽어 나갈까 봐 무서웠다.

그를 기만하는 행동이란 걸 알면서도 숨기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그가 모르기를 바랐다. 그가 얼마나
그 사람을 원망하고 찾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도 엘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엘제이는 그에게 미안해서 울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자신이 비참해서 울고, 그를 기만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울었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버겁고 어떻게 하면 그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두려웠다.

‘미안해요. 말하지 못해서, 알려주지 않아서 너무 미안해요. 대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운명을 바꿔줄
테니까……. 그러니, 죽지만 마세요. 제발,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마세요.’

아제프는 시간이 흘러도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엘제이를 보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이렇게 울기만 하다가는 혼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제프가 우는 엘제이를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낸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엘제이가 눈을 깜빡이자 아제프는 화사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같이 산책 가려 했는데, 산책을 하기도 전에 당신이 쓰러질까 봐 무섭네요. 제가 그렇게 반가워요?”

반가워서 우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아제프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드는 비밀을 그녀에게서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는 그녀를 몰아세우기보다는 그녀 몰래 엘제이의 속마음을 알아볼 생각이다.

‘당신은 계속 모른 척해. 그게 편하다면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물어보는 게 당신을 슬프게 한다면


물어보지 않아. 당신은 가만히 지금처럼 가만히 있어. 내가 전부, 알아낼 테니까.’

아제프는 속마음을 감추고 밝게 웃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9 화
19

엘제이가 우는 동안 태양이 떨어지고 환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아제프는 입을 어물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엘제이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제프가 이렇게 웃으면 엘제이는 지금처럼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였다.

아제프는 날이 어두워도 하얗게 빛나는 부드러운 뺨을 보며 더 화사하게 웃었다. 부드러운 게 좋다면 맞춰줄
생각이었다. 괜히 울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았다.

“저 아까 제이가 웃는 거 처음 본 거 알아요?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참 많이 후회했어요. 내가 당신을


슬프게 해서 제이가 웃지 못했구나 싶어서.”

“아니, 아니에요. 란델 경은 저를 슬프게 하지 않았어요. 저는 언제나 당신이 반가웠어요.”

예뻤다는 말에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히던 엘제이는 아제프가 조금 속상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자 급히 손을


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엘제이는 오히려 속상했다. 울 자격도 없는 자신이 괜히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 것 같았다.

단정한 눈썹이 서글프게 내려갔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휘어진 눈썹을 손으로 콕 찔렀다.
탐스러운 머리카락만큼이나 고아한 밀색 눈썹은 무척 부드러웠다. 그가 엘제이의 눈썹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

“반가우면 예쁘게 웃어줘요. 아까처럼.”

아제프가 시범을 보이듯 화사하게 웃었다. 까만 밤을 밝히는 화사한 미소 위에 달빛이 고여 아름다운 얼굴이
꽃처럼 빛났다. 그는 밤의 천사 같았다.

아제프가 재촉하듯 엘제이의 뺨에 손을 올리자 엘제이는 뺨에 닿은 차가움에 몸을 떨다가도 그를 따라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아까 봤던 수줍은 보조개가 하얀 눈꽃처럼 예쁘게 피어났다. 차가운 얼음 속에서도 고개를 내민 작은 눈꽃이 그의
눈에 사르르 내려앉았다. 아제프가 잘했다는 듯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밤이 늦어버려서 얼굴만 보고 갈까 고민했는데…… 그러기 싫어졌어요.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저랑 같이


갈래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엘제이를 쉽게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그녀가 나간 걸 알고 티아세 家가


소란스러워지지 않게 이미 조치도 취해놓은 상태였다. 아제프는 그런 사실을 숨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어디를……. 일단 저를 좀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엘제이가 살며시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또 피부를 피해 옷만 잡는 행동을 보며


조금 삐뚤어지려는 마음을 숨겼다. 그는 엘제이의 물음을 사뿐히 무시하며 선하게 웃었다.

“멀리 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주변을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우리, 서로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제게 당신을 알려주세요. 엘제이.”

엘제이는 자신을 내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제프를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다시 한 번 청해 봐도 그는 듣지


못했다는 듯 딴 얘기만 했다. 엘제이는 천사처럼 웃으면서도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무시하는 남자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듣지 못한 건지 헷갈렸다. 이성은 그가 못 들은 척하는 거라고 속삭이는데 예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정말 못 들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착하게 웃는 사람이, 저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이 일부러 제 말을 무시할 리 없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가 작았나?’

엘제이가 고민하며 다시 내려달라고 물어볼까 고민하는데, 아제프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순한 갈색 말을


어루만지며 엘제이를 말 위에 올렸다.

엘제이는 까마득히 높아진 시야를 보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엘제이 티아세의 몸은 말에 익숙했지만
한제이에게는 처음이라 좀 어색하고 무서웠다.

“무서워요? 당신에게는 좀 높은가?”

귀족 영애는 대부분 승마를 배우는 편이었다. 드레스 차림이라 좀 불편하기는 해도 무서운 건 아닐 텐데 엘제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제프는 말을 무서워하는 것 같은 엘제이를 의아한 듯 쳐다보다가 말 등에 손을 짚고 그녀의 뒤로 가뿐히


올라탔다. 그의 무게에 말이 조금 흔들리자 엘제이가 자신을 감싼 팔을 덥석 쥐며 그의 품에 등을 바짝 기댔다.

‘이거 생각보다, 의외의 수확인가? 엘제이 티아세가 말을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가슴에 따뜻한 체온이 옮겨 붙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뱃속을 홧홧하게 덥히는 열기에 그가 눈웃음치며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엘제이는 좀 당황했는지 그의 품에서 몸을 떼어내려 했다.

‘안 되지. 내가 봤을 때 이건 좋은 기회인 것 같거든.’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곁에 있는 사람을 의지했다. 아제프는 물러나려는 엘제이를 바싹 끌어안아
제 품에 기대게 했다. 따뜻한 체온이 그의 가슴을 덥혔다.

“쉬이,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안 떨어트릴 테니까.”

그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겉옷을 벗어 엘제이의 어깨 위에 잘 둘러줬다. 밤바람이 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아제프는 무서운 듯 몸을 떨면서도 슬며시 떨어지려고 하는 엘제이를 보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자꾸 피하면 당신만 힘들 텐데? 기대오지 않는다면 기대게 하면 되는 일 아니겠어?’

“이랴.”

그가 가볍게 땅을 박차자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거세게 흔들리는 느낌에 엘제이의 몸이
저절로 아제프의 품에 달라붙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따스한 감촉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제프는 무서워하는 엘제이를 모른 척하며 걱정스럽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추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당신이 추울까 봐 좀 걱정되기는 하는데, 시원한 밤바람이 기분 좋거든요.
혹시 너무 추우면 말하세요. 제가 따뜻하게 안아줄 테니까요.”

산뜻한 얼굴이 된 아제프가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를 바라보다 말의 옆구리를 세게 눌렀다. 달리라는 주인의
신호에 말의 발이 빨라졌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스치고,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땅을 갈랐다. 엘제이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팔을 세게 잡았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를 감싸 안고 밤하늘로 달려갔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엘제이의 뺨을 쓸고, 아제프의
얼굴을 스쳤다.

아제프는 고삐를 놓고 흩날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잘 정리했다. 고삐를 놓고 달리는 모습에 아제프의 팔을 잡은
엘제이의 손이 창백하게 질렸다.

“란, 란델 경…….”

“네? 제이, 추워요?”

누가 봐도 겁먹은 모습이었는데 아제프는 춥냐고 물어올 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삐를 놓고 왠지
모를 상쾌한 얼굴로 그녀 몰래 미소를 그렸다. 도와달라고, 멈춰달라고 애원하기 전에는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내게 애원해. 한 발짝 더 걸어와서 도와달라고 해. 그럼,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아제프는 옆으로 앉은 엘제이가 떨어지지 않게 한쪽 팔로 그녀를 감싸 안고 나머지 한쪽 팔로는 엘제이의 머리를


장난치듯 쓸어 넘겼다. 주인을 잃은 고삐가 바람에 거칠게 요동치며 엘제이의 시야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머릿속이 희게 질리고 눈동자가 팽팽 돌아가는 느낌에 식은땀이 흘렀다. 겁을 먹어 눈도 질끈 감고 입술도


앙다물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고 가여웠지만 찾아온 기회를 뿌리치기는 아쉬웠다.

바들바들 떠는 몸이 자신을 의지하며 꼭 달라붙었다. 배를 감싼 팔을 세게 쥐고 놓지 않는 모습이 옷자락만


잡아오는 평소와 달라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엘제이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눈을 뜨면 몇 배는 높아진 시야가 속을 메스껍게 만들었고, 눈을


감아도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엘제이는 뒤쪽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아제프에게 슬금슬금 몸을 밀어 넣으며 무서움을 참아내려 애썼다.

‘무섭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엘제이 티아세는 말을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아제프는 하얗게 질려서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엘제이를 보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초원 쪽으로 달려 나와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제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갈색 말이 자유롭게 땅을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엘제이의 안색은 곧 사라질 것처럼 투명하게 질렸다.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엘제이가 아제프를 더듬더듬
붙잡으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란, 란델 경……. 속도를 좀, 어지러워서…….”

“속도를 높이라고요? 바람이 상쾌해서 머리가 시원해지죠?”

아제프가 엘제이 몰래 냉소를 지었다. 저렇게 질려서도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괘씸했다. 희게 질린
얼굴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우선은 제 욕심이 먼저였다. 아제프는 조금 조급해하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해. 무서우니까 멈춰달라고 네 입으로 말하기 전까지는 계속 달릴 거니까.’

엘제이는 속도를 더 높인다는 아제프의 말에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말에서 떨어질 것
같은 낙하감이 온몸을 강타하자 엘제이는 그에게 무섭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저었다.

“무서, 무서워서……. 말 좀 멈춰주세요.”

아제프가 눈을 질끈 감고 도움을 청하는 엘제이를 보며 배부른 맹수처럼 웃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는 거야.’

바람을 따라 제멋대로 흔들리는 고삐를 거세게 움켜쥔 아제프가 천천히 말을 멈췄다. 그의 위험한 곡예가 멈추자
엘제이가 무서워서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꾸며낸 남자가 창백하게 질린 뺨을 쓸며 다정하게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그가 엘제이의


귀에 입술을 내리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속삭였다.

“무서웠어요? 저는 제이가 무서워할 줄은 모르고……. 정말 미안해요. 제이, 괜찮아요? 말에서 내릴까요?”

낮고 다정한 목소리에 엘제이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아제프가 손을 뻗어 엘제이를
내려줬다. 외곽으로 빠져나왔는지 정돈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초원이 보였다.

엘제이는 땅에 발이 닿는 느낌에 안도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잡았다. 아제프가 휘청거리는 몸을 서둘러 받으며
안장 위에서 까만 로브를 꺼냈다. 그는 천자락을 바닥에 깔고 엘제이를 그 위에 앉혔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투명하게 변해 있어, 그제야 아제프도 제가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에
한해서는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죄책감도 느껴졌다. 아제프가 진심을 담아 질려 있는 뺨을 매만졌다.
“제 욕심이 과했어요. 제이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이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미안해요,
제이.”

아제프가 부드럽게 엘제이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엘제이의 머리가 천천히 기울어져 그의 어깨에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0 화
20

엘제이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탄탄한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엘제이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아제프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바람이 너무 좋네요. 별도 예쁘고요.”

엘제이가 맑은 별들로 총총 뒤덮여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말을 타고 달릴 때는 눈을 감고


있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밤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한제이의 기억 속에는 없는 별밤이 빛을 쏟아내며
하늘을 수놓았다.

아제프도 엘제이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빛 비단을 펼쳐 그 위에 한 땀 한 땀 빛을 꿰어 만든 듯 신비하게


빛나는 하늘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름다웠다.

아제프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듯 무표정하게 하늘을 보다가 엘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움에 취해 입을 살며시 벌리고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엘제이가 보였다. 그는 어느새 제 품에서 또


도망가 있는 엘제이를 보며 혀를 짓씹었다. 저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여자는 밤하늘의 별 같았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지만 절대 만질 수는 없는 허상 같은 사람. 언제라도 때가


되면 제 곁을 떠나야 한다는 듯 일정 선 이상으로 넘어오려 하지 않았다. 냉소를 숨긴 아제프가 입꼬리를 내리고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손을 뻗어 엘제이의 머리를 다시 제 어깨 위에 올려두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아름답죠? 제이와 함께 보고 싶었어요. 눈이 멀 것처럼 예쁜 풍경도 혼자 보면 쓸쓸하니까.”

그의 얼굴을 본 엘제이가 입을 벌리고 멍한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밤하늘을 등진 남자의 처연한 얼굴이


무척 구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엘제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초록빛 눈은 습기에 젖어갔다.

아제프는 촉촉한 눈을 보며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써야 했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이 여자는 제게


약했고, 지금처럼 슬픈 표정을 짓거나 쓸쓸하다는 듯 속눈썹을 내리깔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제프는 자신의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하얀 손을 가로채 깍지를 꼈다. 그가 놔주지 않을 것처럼 손을
단단하게 얽으며 깨질 것처럼 연약한 목소리를 냈다.

“저, 외로워요. 저는 늘 혼자예요.”

“아…….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제가, 같이 있잖아요.”

엘제이가 그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으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한 손을 뻗어


도자기처럼 매끈한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밤바람의 장난에도 온기를 잃지 않은 따스한 손이 그의 뺨을 데웠다.

한쪽 뺨을 겨우 덮을 정도로 작은 손을 욕심껏 낚아챈 남자가 엘제이의 두 손을 끌어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오늘 하루 마음껏 안았지만, 떨어져 있는 순간이 아쉬웠다. 이 여자는 자신의 봄이었다. 반드시 가져야 할
자신만의 봄. 아제프는 몸을 타고 오르는 음습한 집착을 숨기고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는 빠져나가려는 듯 작게 바동거리는 몸을 꼭 끌어안고 온기를 취하듯 눈을 감았다. 그가 엘제이에게 속삭였다.

“정말 그러네요.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다음부터는 당신이 함께 와줄래요? 혼자는 외롭잖아요.”

아제프의 부드러운 속살거림에도 엘제이는 눈을 꾹 감고 입을 꼭 다물었다. 엘제이는 대답 없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고단하고 힘들었을 다부진 등. 이처럼 자라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불쌍해 또
바보처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엘제이는 입술을 뜯으며 밀려 나오는 눈물을 꾹꾹 내리눌렀다.

‘당신에게는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저처럼 고백도 못 하는 반푼이가 아니라, 시한부 같은 감정이
아니라, 영원히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여줄 상냥한 사람. 그런 사람이 생길 테니까…… 외로워하지 마세요.’

얌전히 안겨 있는 주제에 대답은 없었다. 엘제이가 항상 이런 식으로 구니 그도 조바심이 났다. 아제프는 그녀


몰래 흉흉한 눈을 뜨고 얌전히 안겨 있는 등을 노려봤다. 질척하게 말라붙은 집착과 탐심이 어둡게 맴돌다
사라졌다.

호수 위에 비친 허상.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놓고서 손을 뻗으면 파도에 밀려 사라질 신기루.

그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제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이 따스했다. 이처럼 온기를 줄


때는 언제고 금방이라도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게 괘씸했다. 이가 갈리는 불쾌감에도 아제프는 그녀를 다그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썼다.

엘제이를 조금 떨어트린 남자가 일어나려는 듯 다리를 세웠다. 그가 몸을 구부리자 벌어진 옷깃 사이로 뭔가가
떨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내린 엘제이는 떨어진 물담배를 들고 흔들리는 눈을 했다.

그가 아 10 일 외에도 마약을 하는 줄은 몰랐다. 책 속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은 엘제이가 알 수 없었고,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알체스테의 등장 이후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매일, 마약을 하는 건가? 계속 피우면 중독될 텐데. 판단력이 흐려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시한폭탄 같은
사람.’

아제프는 일부러 아텐을 떨어트렸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엘제이는 그가 혼자라는 말을 할 때나, 쓸쓸한
얼굴을 할 때, 그리고 위험한 일을 할 때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제프는 느릿하게 아텐을 뺏어들며 겸연쩍게 웃었다.

엘제이가 아연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어머니 기일에만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아제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손짓으로 아텐이 들어있는 담뱃대를 잘 챙겨 넣었다. 엘제이의 눈이 그의 품 안에 흘깃


보이는 아텐에 닿았다. 그는 엘제이의 말을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딴소리를 했다.

“약은 잘 챙겨 먹었어요? 얼굴이 계속 창백한 것 같아요. 바람이 너무 차가운가?”

그의 말이 선을 긋는 것 같아 엘제이는 조금 울적해졌다. 엘제이는 열린 깃 사이로 보이는 아텐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물어봐도 될까? 내게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던 엘제이가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이제 거의 다 먹어 가는데, 저는 다 먹어 가는데……. 음,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겠지만,


아텐은 몸에 안 좋으니까……. 계속 하시면 란델 경이 기사라고 해도 좋지 않을 테니까…….”

아제프는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계속 그의 눈치만 살피며 맴도는 엘제이를 보며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품에 손을 넣어 아텐을 꺼내자 엘제이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제프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의 얼굴은 매캐한 마약 연기에 뒤덮인 듯 지독하게 썼다. 아제프가 쓸쓸한 눈을
내리깔고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제가 아텐을 끊었으면 좋겠어요? 아텐은 중독 성분이 강해 쉽게 끊기가 힘들어요. 저는 매일이 고단한 걸요…….
그게 없으면 버티기가 힘들어요.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요. 한심하죠?”

물론 거짓말이었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남자가 몸을 망가뜨리는 마약을 지속해서 피워왔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아직 완전히 미치지 않았고 대부분 절제하며 살고 있었다.

아제프는 안절부절못하는 엘제이를 보며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런 그를 모르는 엘제이만이 그의


손을 간절히 붙잡고 설득하듯 빠르게 속닥거렸다.

“아, 그래도 계속하시면 몸에 안 좋으니까 끊을 수 있을 때 빨리 끊어버려야……. 저처럼 약을 먹으면,”

“그럼 제이가 도와줄래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제가 도울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엘제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좋은 의원이 필요하다면 누구든 동원해서 데려올 것이고,
귀한 약초가 필요하다면 제 몸을 절벽에 밀어 넣어서라도 구해올 것이었다.

엘제이가 뭐든 하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아제프가 입꼬리를 내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제가 아텐을 끊을 수 있다면 그게 뭐든, 도와줄 건가요? 약속할 수 있어요?”


“네. 그게 뭐든, 약속할 수 있어요.”

엘제이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절박한 눈을 본 아제프가 고개를 숙이고 엘제이에게 다가왔다. 몸을 한껏 낮춘 맹수의 움직임에 묘한


불안감이 든 엘제이가 몸을 움찔 떨자 그가 엘제이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계절은 언제나 바뀐다. 봄이 있다면 겨울이 찾아온다. 아제프는 추운 겨울이라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그러니
그는 봄을 가둬두고 싶었다.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족쇄에 묶어 제 품에 가둬두고 싶었다.

이 여자를 가지면 영원한 봄에 잠식될 것 같았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향해 바짝 붙었다. 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엘제이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황해서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의 피부에 닿을 것 같았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진득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맞출 것처럼 얼굴을 바짝 붙였다. 그는 밀어내려는 손목을


내리누르고 검게 눌어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를 돕고 싶어? 영원히, 네가 죽는 순간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맹세해. 그럼 끊을 테니까.”

어두운 목소리가 엘제이의 귀를 강타했다. 그가 어두운 청해의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보자 엘제이는 사나운 이빨을
가진 맹수에게 집어 삼켜지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맑은 청남색 눈에 담긴 어두운 감정을 보고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아제프의 두 손에 내리눌린 손목이


바르르 떨렸다.

아제프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늘 다정한 척 속살거리던 부드러운 음색을 버리고 맹수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엘제이는 이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 더는 아버지에게 맞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편히 잘 수 있는 소박한


집을 꿈꾸던 어린 소년은 거친 풍파를 맞으며 변했다. 몸이 난자당하고 마음이 찢겨나간 소년은 빠르게 자라나 더
큰 것을 원했다.

허한 가슴은 자꾸만 더 큰 걸 원했다. 무엇을 밀어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그를 탐욕의 늪으로 빠트렸다.
란델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한 남자는 티아세를 노렸다.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건 티아세였다. 엘제이는 그가 티아세를 원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둡게 물든 눈동자가 저를 핥아 내릴 듯 보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마치 그가 티아세가 아니라 자신을


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착각이야. 모든 게 내 착각.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엘제이는 눈앞에서 일렁거리는 청남색 눈을 피하며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았다. 아제프는 시선을 피하는 엘제이의
몸짓에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피하는 조그만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별빛을 받아 요요하게 빛났다. 그가 모처럼 가면을 벗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왜? 못 하겠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1 화
21

한껏 비틀린 입매가 퇴폐적으로 올라갔다.

아제프의 입에서 나온 반말에 엘제이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바짝 붙인 얼굴을 떼어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아텐을 꺼내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표정. 아마 그것이 그의 내면이리라. 엘제이는 그가 가면을 벗고 내면을 드러낸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제프는 자신의 달라진 태도에 혼란스러운 듯 입을 멍하니 벌리는 엘제이를 보며 조소를 그렸다.

‘나를 사랑해줄 거면 이 모습도 사랑해야지. 못 하겠어?’

핏물이 고인 것처럼 붉은 입술이 고혹적으로 뒤틀렸다. 타락한 천사가 혼란스러워하는 엘제이를 비웃으며 그녀를
현혹했다. 그가 유려한 손끝을 뻗어 담뱃대를 움켜쥐자 엘제이의 시선이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을 향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엘제이는 완전히 그에게 사로잡혀버렸다.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예술품을 만지는 것처럼 우아하게 아텐 가루를 물담배에 넣었다. 매캐한 증기가
별빛을 덮었다.

엘제이는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담뱃대를 보며 더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자욱한 연기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악마의 손에 떨어진 아제프처럼 보여서, 그 모습이 눈이
멀 만큼 고혹적이어서, 엘제이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게요. 뭐든지 할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이러지 말아요. 네?”

“늦었어.”

아제프는 엘제이의 간절한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건 엘제이가 더 빨리 대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작은


보복이었다. 그게 단지 심술이라는 걸 모르는 엘제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희게 질린 얼굴로 매달렸다.

“약속, 약속할게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영원히 당신 곁에 머물 테니까……. 제발…… 하지 마세요.”

아제프는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꾹 누르며 담뱃대를 빼내려고 하는 여자를 보며 입꼬리를 만족스럽게 올렸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서둘러 담뱃불을 껐다. 매캐하게 올라오던 씁쓸한 향기가 사그라들었다.

표정을 싹 바꾼 남자가 맹수처럼 위협하던 것은 꿈이라는 듯 달콤하게 웃었다. 엘제이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눈물이 흐른 볼을 상냥하게 닦아준 남자가 엘제이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정말 약속할 거죠? 나중에 딴소리하면 더 심한 짓을 할 거니까. 다음에는, 뭐…… 당신만 잘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어서 약속한다고 말해요.”

“약속할게요!”

엘제이가 비명을 토해내듯 소리치며 그의 손에 꺼진 물담배를 초조하게 바라봤다. 그가 금방이라도 다시 저걸


피울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암암리에 마약을 피우는 귀족은 많았지만, 항상 그 끝이 좋지 않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아도 그의 끝이 마약에 전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싹해졌다. 엘제이는
사람이 없는 주변을 살피며 떨리는 가슴을 그러쥐었다.

아제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는 엘제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에게도
도박이었지만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그러게 처음부터 선을 긋지만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는 안 하잖아.’

그는 제 걱정으로 희게 질린 얼굴을 매만지며 웃었다. 애처롭게 달린 눈물방울이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온몸을 뜨겁게 달구는 만족감이 먼저였다. 그가 예쁘게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저를 떠나지 않을 건가요?”

“네. 당신이 원한다면 떠나지 않아요.”

엘제이가 빠르게 대답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떠나지 않을게요.’

진실을 알게 되면 그가 먼저 등을 돌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가 계속 저를 원한다면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제이가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너그러운 마음이 된 아제프가 그녀를 살짝 떼어놓고
일어났다.

엘제이는 일어나는 아제프를 바라보며 불안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가 아직 그의 손에 들려있는 담뱃대를 바라보자
아제프가 산뜻하게 웃으며 그걸 흔들었다.

“아, 이거요? 이제 필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손에 힘을 주자 담뱃대가 우지끈 휘어졌다. 그가 대충 그걸 아무렇게나 던지며 얌전히 근처를


거니는 말에 다가가 안장에 매달린 주머니를 떼어 왔다.

엘제이의 시선이 다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엘제이가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가방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가볍게
웃으며 주머니를 흔들었다.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안 한다니까요. 제가 그렇게나 걱정돼요?”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알고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모른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엘제이는 그의 운명을 알고 있으니 더 간절했다.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해사하게 웃은 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제 허벅지에 앉혔다.
사이좋은 연인이나 할 법한 농밀한 접촉에 엘제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제프는 긴장한 듯한 엘제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주머니에서 약과 물을 꺼내 그녀의 입술 근처에 대줬다.

“이상한 거 아니니까 먹어요. 밖이라 향이 많이 날아가기는 했지만,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

떨리는 입술로 그가 내미는 약을 받아먹고 물을 삼킨 엘제이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텐을 끊는 거랑 내가 곁에 있는 게 무슨 상관이지? 그러고 보니 왜 곁에 있어달라고 하는 걸까? 그것도


영원히……. 결혼 때문에?’

엘제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그를 자극해 아제프의 본모습이 튀어나올까 봐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떤


비논리적인 일을 강요당해도 그에게만큼은 약자가 되는 엘제이는 그에게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엘제이는 약을 다시 주머니로 넣으려는 아제프를 힐끔 바라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엘제이의 눈썹이 잘못을
저질러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내려갔다.

엘제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은…… 안 드세요?”

“저요? 저는 이미 내성이 생겨서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제가 필요한 건 다른 거니까. 그것보다, 제이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네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엘제이는 그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아제프는 무섭다는 말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다정한 손길로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엘제이는 눈을 내리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제가 무서워하는 건 좀 다른 거예요. 저는 당신이 아까처럼 솔직하게 구는 것보다 당신이 미쳐버릴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외로워할까 봐 두렵고, 그로 인해 끝내 자멸할까 봐 무서워요.’

아제프는 두려움에 떠는 듯한 여자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니 둘만 있는 공간에서 무서웠으리라. 그럼에도 자신을 선택한 여자에게 좀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다정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지금처럼 제 곁에 있어준다면 계속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줄게요. 제이가
도망가지 않는다면 계속 상냥한 사람으로 있을 거예요.”

아제프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가녀린 등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미성이 귀를 간질였다. 상냥하게 토닥이는 손길에 세차게 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엘제이는
달래듯 온화한 목소리를 내는 그를 느끼며 눈물을 삼켰다.

‘저는 계속 도망가야 하는데,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 사실을 말한다면, 당신은 또 화를
내겠죠? 당신은 티아세를 원하니까…….’

아제프의 협박에 밀려 엉겁결에 약속을 해버렸지만,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두려웠다. 엘제이가 지키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스스로 그녀를 밀어낼 순간이 올 터였다.

‘언젠가는 미움 받을 테니까. 지금처럼 상냥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경멸한다는 듯 나를 노려볼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엘제이는 슬픈 얼굴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을 받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더라도 한 번쯤은 마음껏 그를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엘제이는 그를 기만하는 짓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울음을 꾹 참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발, 여신님. 멋대로 저를 데려오시고 원하지도 않는 문장을 주셨잖아요. 제게 미안하시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저도 너무 힘들어요. 문장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라리,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으면…
….’

아제프는 제 품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 다정하게 웃었다. 늘 달아나려 애쓰던 몸이 제 품을
파고들었다.

엘제이가 저를 믿고 몸을 맡겼다. 그리 생각하자 마음 속 깊은 곳이 봄에 젖고 나른하게 풀렸다. 아제프는 그의


봄을 안고 다정함을 한가득 담아 엘제이의 등을 토닥였다.

“아까, 미안했어요. 많이 놀랐죠? 당신이 계속 저를 밀어내는 것 같아 화가 나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제이.”

“아니요. 저도 미안해요.”

“제이가요? 무엇이요?”

엘제이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제프는 제 품에서 살랑살랑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보다가 엘제이가 추울까 싶어 옷자락을 단단히 덮어줬다.
엘제이는 몸을 감싸는 천자락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한 것도, 잘못한 것도 다 저예요. 당신은 솔직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저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속이고 기만해서 미안해요. 나중에 다 갚을 테니까…….
오늘은, 용서해주세요.’

아제프의 품에 안겨 있자 모든 고민이 날아간 것처럼 평화로웠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자 부드럽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엘제이는 귀를 적시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그녀를 안고 있자 추운 밤바람에도 햇살처럼 따스한 기운이 밀려왔다. 제 품에서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그를 믿는 듯했다. 아제프의 얼굴 위로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개의 심장이 같은 속도로 박동하며 공명했다.

엘제이는 그의 화를 받아내는 게 힘들었는지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버렸다. 아제프도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나른하게 깔며 잠들어버린 엘제이를 살폈다.

‘약에 수면 성분이 있었나?’

아직 벽이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어도 조금 허물어진 게 느껴졌다. 저걸 완전히 깨부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엘제이 티아세는 이제 겨우 19 살이었다. 아직 시간이 많다는 걸 상기한 남자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너무 다그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직 이 감정이 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몇 가지는 알았다. 웬만하면 이 여자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울리고 싶지 않았다. 무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다정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나도 이유만 없다면 울리고 싶지 않아…….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나를 자극하지 마. 그래야 당신과
나, 우리 둘 모두가 평화로울 테니까.”

그는 듣지 못할 엘제이에게 조그맣게 속삭이며 일어났다. 새까만 밤하늘을 등진 남자는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말에게로 걸어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2 화
22

훈련이 잘 된 말은 묶어두지 않아도 주위를 서성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제프가 다가가자 풀잎을 뜯던
말이 다각다각 걸어 아제프에게 다가왔다.

“히이잉!”

“쉿!”

말이 반갑게 소리를 내어 울자 아제프가 서둘러 말에게 다가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리한 말은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제프가 옅게 웃으며 잘했다는 듯 말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수많은 별빛이 총총히 박혀 영롱한 기운을 내뿜는 밤하늘 아래, 순한 암갈색 말과 새근새근 잠든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품은 남자.

아제프는 은하수가 넘실거리는 은빛 하늘을 올려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환한 보름달과 그 옆을 지키는 밤빛을
바라보던 남자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잠에 빠진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달이 얼마나 밝은지 엘제이의 얼굴에 달빛이 스며들어 보름달처럼 빛났다. 결이 고운 피부의 솜털 하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너와 함께라면, 어쩌면, 저 하늘도 아름다울지도…….’

그건 심장이 뛰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상실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힘찬 움직임. 아제프는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충동감과 기대감에 엘제이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어쩌면 그녀가 제게 부족한 어떤 것을 채우리라는 막연한 믿음. 엘제이 티아세를 가지면 뭔가가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는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비논리의 향연에도 부드럽게 웃었다.
‘네 앞에서는 논리가 서지 않아. 왜일까? 너는 내게 뭘까? 나는 네게 뭐지?’

상대를 현혹하고 방심시키는 미소가 아닌, 목덜미를 노려 살을 찢어발기고 탐하기 위해 짓던 작위적인 웃음이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울림. 그는 아직 그 감각을 몰랐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제프 란델에게는, 엘제이 티아세가 필요했다. 그것만이 확실한 진리였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안장 위에 올려줬다. 부드럽게 올라간 몸이 따뜻한 말을 감싸 안으며


늘어지자 그가 엘제이의 몸을 붙잡고 재빨리 뒤에 올라타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리 안배해둔 듯 정확하지만, 그도 모르는 다급함을 담은 소년의 열병 같은 그 움직임.

아제프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다.

따스한 봄볕 기운에 몸은 나른해지고, 꿈결이 내려앉은 밤하늘이 그를 꿈의 늪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아제프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최대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지금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지니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아제프는 아주 오랜만에 그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더디게 걸었다.

누군가를 위해 느리게 걷는 법. 그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아제프는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단단한 품에 엘제이를 가두고 아주 부드럽게 말을 몰았다. 말이 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른한 문장의 울림을 따라 잠에 취해 있던 엘제이를 차가운 밤바람이 흔들었다. 엘제이는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 작게 하품하던 엘제이가 다시 자려는 듯 눈앞의 물체를 파고들었다. 귓가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깼어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깨어났는지만 확인하려는 듯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낮고 부드러운 웃음과 봄바람의


속삭임처럼 조그만 목소리.

엘제이는 그게 무엇인 줄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우음…….”

“이런, 다 와버렸는데 어쩌죠? 한 바퀴 더 돌까요?”

아제프는 하늘 끝에 걸린 보름달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 바퀴 더 도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옷을


단단히 입혀도 날이 추운지라 엘제이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망설여졌다.

아제프는 나붓이 내려앉은 밀색 속눈썹을 난감하게 바라보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듯 물었다.

“제이, 졸려요? 더 자고 싶어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졸린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엘제이는 코끝을 스치는 향내와 뺨을 간질이는 마른 옷자락에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확인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네. 잘 잤어요? 이제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제이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자요.”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제 집에 데려가 엘제이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계속 제 시야에 가두고 조금씩 그녀를
잠식해 다시는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게, 그렇게 품에 가둬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내일 무슨 사달이 날지 몰랐다. 성가신 아이젠을 떠올린 아제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제프는 쓸데없이 직위만 높은 티아세 家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노렸던 이유가 그 못마땅한 티아세 家 때문이라는 걸 잊어버렸다. 어느새 티아세가 아니라
엘제이를 원하게 되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엘제이는 자신이 아제프 품에 안겨 잠들어버렸다는 걸 파악하고 경악했다.

놀란 엘제이가 한 박자 늦게 아제프의 가슴을 밀치며 물러나려 했다. 아제프는 말 위에서 크게 휘청거리는


엘제이의 팔을 끌어당겨 그녀를 제 품에 넣었다.

“놀랐어요? 말 위라 당신 혼자는 위험하니까 가만히 계세요.”

“아……. 미안해요. 놀라서, 싫었던 건 아니에요!”

“알아요. 그런데, 반응이 좀 느리지 않나?”

아무래도 엘제이 티아세는 몸으로 하는 건 재주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각하는 것도 둔하고, 행동도 느렸다. 매번
느리고 어설픈 그녀를 보는 게 나쁘지 않았다. 느린 만큼 똑똑했기에 하나하나 짚어주고 알려주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아제프는 그렇게 엘제이를 제 것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엘제이는 짙은 소유욕을 담은 눈을 보지 못하고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매번 민폐가 따로


없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저 자신을 원망하며 땅을 파고들었다.

‘싫어했을 텐데. 다른 사람의 몸이 닿는 걸 싫어하는데……. 여기까지 끌어안고 오게 했으니 속으로는 얼마나


싫었을까?’

아제프는 엘제이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울상을 짓는 엘제이를 보며 아까 봤던 서툰


움직임을 떠올렸다.

혼자 담벼락에 발을 걸치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갓 태어난 강아지가 어미를 따라 높은 턱을 올라가려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재미난 상상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제프는 제 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꼬물거리는 엘제이를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청명한 웃음소리가 적막을 깨고 부드럽게 퍼져갔다. 엘제이는 유쾌하게 휘어진 청남빛 눈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휙
떨어트렸다.

‘또, 웃었다.’

아제프가 웃었다. 저렇게 소리 내어 웃는 건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는 지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으며 말 등을 내려다봤다.

조그맣게 피어오른 보조개가 움푹 파여 볼 깊숙이 음영을 만들었다. 아제프는 웃고 있는 엘제이를 꼭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런데 제이, 어디가 많이 안 좋아요?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 것 같아서…….”

“제가, 그랬나요?”

수줍게 웃고 있던 입가가 당황으로 흐려지고, 꽃잎을 머금은 분홍빛 입술이 방황하며 흐트러졌다.

엘제이는 몰랐다는 듯 변명했지만, 거짓이었다.

뒤에서 엘제이를 끌어안은 남자는 진득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엘제이의 반응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저는 당신이 너무 걱정돼요. 괜찮으면 제게 병명을 알려주지 않을래요? 제이의 부친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저도 제법 가진 힘이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딱히 병명이 있는 건 아니고 남들보다 심장이 조금 약해서, 그래요. 어떻게 고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어서
……. 그냥, 요즘 좀 피곤할 뿐이에요. 평소에는 괜찮아요.”

갈피를 잃고 요동치는 눈동자, 당황으로 떨리는 목소리, 힘주어 쥔 손.

엘제이 티아세는 거짓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군. 이게 벌써 몇 번째지?’

하늘로 치솟던 기분이 나락으로 뚝 떨어졌다.

아제프는 어두운 눈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저는 혹시 제이가 큰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지 걱정했거든요.”

“큰 병은 절대 아니에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성력을 숨기려 한 것 같은데, 굳이 제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만큼 아팠다는 이야기니까요. 몸이 안 좋아서
어쩌죠? 저는 당신이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고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조소하듯 싸늘히 웃은 입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
걱정스럽다는 듯 속삭였다.

엘제이는 진득한 집착으로 일렁이는 얼굴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은


거짓투성이였다. 그가 알면 얼마나 화를 낼지 무서웠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았다고 후회하며 그를 속인 자신을
노려볼 게 뻔했다.
경멸로 물든 청남색 눈이 자신을 쏘아보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해쓱해진 얼굴로 고개 숙이자 차가운 손이 다가와
보드라운 뺨을 매만졌다. 아제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엘제이를 떠봤다.

“제이의 성력, 너무 아름다웠어요. 싱그러운 잎새 같은 예쁜 초록빛. 다시 보고 싶은데…… 다음에 한번


보여줄래요?”

“아, 네. 다음에, 다음에 꼭 보여드릴게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엘제이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죄책감에 짓눌린 목소리가 어스름하게 번져


사라졌다.

‘저것도 거짓이고.’

“그래요? 그거 기대되네요.”

화사한 꽃처럼 상냥한 목소리가 가시를 품고 내려앉았다. 왠지 차가워진 듯한 그의 목소리에 엘제이는 가슴이
따끔거렸다.

‘견딜 수 있을까? 그가 나를 싫어하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거짓말이 주는 달콤함에 취한 엘제이는 멈출 수 있는 순간을 지나쳐버렸다. 그녀는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언젠가 말해줘야지 했던 결심은 흐려지고 되도록 숨기고 싶다는 욕망만 커져갔다.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군. 뭐, 당신에게서 알아내는 건 포기했으니까. 그건 됐어.’

뭔가를 더 물어볼까 봐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버린 둥근 등이 보였다. 아제프는 솟구치는 열분을 내리눌렀다.
성격대로 했다가는 이미 파리하게 질린 안색이 시꺼멓게 죽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오늘 한 번 몰아세웠는데, 더 다그치다가는 놀란 여자가 몸을 말고 다시 벽을 쌓을지도 몰랐다.

‘달래고 협박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아제프가 냉정하게 생각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기겁하고 도망가면 큰일이었다. 아제프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참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리 오세요. 늦은 밤이니까 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또 멋대로 제이의 집에 발을 들여야겠는데,


용서해주실래요?”

그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엘제이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아제프가 상냥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자 머뭇머뭇 몸을
움직인 엘제이가 두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너를 가질 거다. 엘제이 티아세.’

어둡게 눌어붙은 집착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놓아주는 게 아니었다. 물러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다만 기회를


노릴 뿐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3 화
23

아제프는 자신의 목을 꼭 감싸는 손의 감촉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엘제이를 내려줬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어깨를 타고 내려온 그의 겉옷을 꼼꼼히 둘러줬다. 어두운 색감의 쥐스토코르가 엘제이의 몸을
질척하게 휘감았다. 그는 늪에 빠진 여자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엘제이는 다정한 몸짓으로 단추를 여며주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단추를 조금 풀어냈다.
아제프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자 엘제이가 셔츠 한 장만 걸친 그를 보며 설득하듯
소곤거렸다.

“저는 이제 들어갈 거니까, 이건 란델 경이 입는 게 좋겠어요. 아직 날이 차잖아요.”

“당신이 아니라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이렇게 있어야 제 마음이 편하니까 그냥 입고 있어 주세요. 그래줄 수
있죠?”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그녀의 성품을 닮은 듯했다. 그는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엘제이가 풀어 내린 단추를 다시 꼼꼼히 여몄다.

진득한 집착을 담은 어두운 손이 엘제이를 꼼꼼히 휘감았다. 다시는 벗어나지 못하기를 빌면서,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기를 빌면서, 그는 단추를 채웠다.

화사한 꽃넝쿨은 어두운 마음을 숨기고 엘제이를 칭칭 휘감았다.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가리켰다.

“이것도 많이 아끼는 거예요. 아주 많이.”

“네.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그가 강조하듯 힘을 줘 속삭이자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옷에 뭐 묻은 건 없는지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에도 흠이 나지 않게 소중히 끌어안고 들어가고 싶은데 그의 눈치가 보였다.

엘제이가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그를 올려보자 화사하게 웃은 아제프가 엘제이의 뺨을 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밤이라 그런지 어두운 남빛으로 물든 심해와 같은 눈이 엘제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번에는 기다릴 테니까 제이가 먼저, 저를 만나러 와줬으면 좋겠네요.”

깊은 청해의 빛이 질척한 어둠을 품고 밤빛처럼 빛났다. 엘제이는 남빛 파도에 집어삼켜진 듯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엘제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밝은 백금의 실 아래로 진득한 어둠이 감춰졌다. 그가 애처롭게 웃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연함을 한껏
담은 목소리가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저 지금 제이에게 애원하는 거예요. 저를 외면하지 말고, 찾아와 달라고.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죠?”

꾹꾹 눌러놓은 목소리가 애절한 파동을 싣고 엘제이의 귓가와 눈을 현혹했다.


아제프에게 집어삼켜진 엘제이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엘제이는 꼼짝도 못 하고 멍하니 그만
바라봤다.

아제프는 당황으로 온몸이 굳은 엘제이를 보며 음습한 감정을 감추고 애처롭게 웃었다. 나를 봐달라고,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알아달라고, 그가 소리 없이 애원했다.

폐부를 꽉 쥐어짜는 쓸쓸함. 엘제이는 지독하게 쓴 그의 표정을 보며 간신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완전히
현혹됐다.

현혹의 늪에 빠져 몸을 허우적거리는 엘제이를 발견한 남자는 손을 뻗어 그녀를 구하기보다는 질척이는 넝쿨을


휘감아 그녀를 끌어내렸다.

“돌려주러 와주세요. 매일 하나씩, 그 옷을 들고 저를 만나러 와주세요.”

핑계가 없으면 변명할 거리를 주겠다. 항상 물러서는 그녀를 위해 아제프는 매일 겉옷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녀의
드레스 룸이 그의 옷으로 파묻히고, 돌려주고 돌려줘도 끝이 없을 때까지.

‘비참할 정도로 간절하게 늘어지면, 당신은 결국 내게 오겠지.’

아제프의 겉옷은 엘제이를 묶는 사슬이었다. 그의 겉옷은 엘제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엘제이를 위해 매일,


겉옷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엘제이는 파르르 떨리는 백금빛 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쓸쓸히 웃는데,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도 그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옷 하나씩 돌려주러 찾아가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그를 위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었다.

그가 왜 하나씩 돌려달라고 하는지, 겨우 옷가지 따위로 왜 저리도 애원하는지, 그런 기본적인 의혹은 엘제이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엘제이를 늪으로 밀어 넣었고, 그녀는 늪에 빠졌다.

“네? 확실히 대답해주세요. 그래줄 거죠? 저를 위해 그렇게 해줄 수 있죠?”

그가 재촉하며 유려하게 웃었다. 유혹하는 꽃의 진한 향내에 나비는 팔랑거렸다. 그 향기 속에 저를 꿰뚫으려는


작살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비는 슬픔에 젖은 꽃의 연기에 속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긍정을 얻어냈다.

만족스러운 듯 눈가를 곱게 접은 남자가 얼굴을 살며시 떼어내며 서 있는 몸을 와락 껴안았다.

“정말? 그래줄 거라 믿었어요. 고마워요, 제이.”

“별것도 아닌데요. 뭘…….”

그가 즐거운 듯 속삭이며 환하게 웃었다. 엘제이는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며 대답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디스가 끝나기 전까지는 더 이상 이 문제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가까이서 그를 보고, 그의 곁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엘제이는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을 발긋하게 물들이는 그와의 시간을 놓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아제프.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으니 괜찮을 거예요. 친구라도 좋으니,
당신 곁에 잠깐만 있을게요. 아주 잠깐이니까, 저도 힘들어서 그러니까……. 제발,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엘제이는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외면해버렸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청해의 파도가 마음을 휩쓸자 엘제이는 청해에 홀려 모든 걸 등져버렸다. 엘제이는 잠시간
모든 걸 놓아버리기로 했다. 그녀의 팔이 둥글게 휘어져 아제프의 등을 끌어안았다.

얇은 셔츠만 입은 채 찬바람을 맞아 식어버린 등 위로 따스한 손이 내려앉았다. 아제프는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손길을 느끼며 몸을 조금 떼어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엘제이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럼 내일은 어때요?”

“내일이요?”

“네. 내일이요. 저 내일 휴무예요. 집에 있으니까 놀러 오세요.”

아제프가 예쁘게 웃으며 엘제이를 재촉했다. 어린 소년이 누이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싱그럽고, 맹수가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위험한, 의뭉스러운 미소였다.

엘제이는 찬란한 빛에 둘러싸인 그의 내면을 꿰뚫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보지 않았다.

엘제이는 조르듯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럴, 까요?”

“잘됐다! 너무 좋아요. 뭘 하지? 오늘 가서 고민해봐야겠어요.”

아제프는 쉽게 긍정하는 엘제이를 보며 내일 날이 밝자마자 휴가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엘제이는 밝게 웃는 아제프를 보며 아까의 간절함을 떠올렸다. 뭐가 그를 불안하게 했을까, 뭐가 그를 애처롭게


했을까. 모든 것이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찰나에 보인 쓸쓸한 감정은 그의 진심처럼 보였다.

‘아직도…… 많이 외로우세요?’

아제프는 외로움에 울부짖으면서도 제 곁에 다가서려는 자들을 거세게 쳐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가 너무 큰


나머지 항상 경계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누구도 제 선 안으로 들이지 못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아제프에게는 우정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고, 사랑을 줄 연인도 필요했다. 말라붙은 가슴에 온기를 나눠줄 사람이
필요했다.

연인이 될 수 없다면 마음을 나눌 친구가 되리라. 엘제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당신을 돕고 싶어요.”
“저를요?”

“네. 란델 경은 강한 사람이라 제 도움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돕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제프는 성급하게 엘제이의 말을 끊으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저 보기보다 연약해요.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기 싫어 꽁꽁 숨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제이가
많이 도와주세요.”

‘그래. 나를 도와줘. 내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를 사랑해줘. 내 것이 되어줘.’

저 여자를 갖겠다는 진득한 욕망이 끓어오를수록, 자신만 보게 하고 싶다는 독점욕이 폐부를 채울수록, 그는
질척한 감정을 숨기고 더욱 가련하게 웃었다. 툭 치면 떨어져 나갈 연약한 백합처럼 애련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애처로움이 깃들길, 그녀의 마음에 안쓰러움이 피어나길, 그래서 서서히 잠식되어 가길. 그는
그렇게 바라며 웃었다.

[도와줘. 나를 구해줘.]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슬프고 아팠다. 엘제이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 도와달라는 목소리. 자신의
도움을 구하던 간절한 목소리. 그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아제프가 쳐내지 않는 지금이 기회였다. 꼭 연인이 될 필요는 없었다.

진실한 온정을 나눠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더 외롭지 않으리라. 그의 곁을 지키며 그에게 우정을 알려주리라.
사람과 교류하며 마음을 쌓아가는 법을 알려주리라.

이미 제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찼지만 엘제이는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그를 속였다.

아스러질 것같이 서글픈 목소리가 단단함을 담아 먹먹하게 내려앉았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저는 항상 당신을 도울 거예요. 저는 당신의 친구, 니까요.”

순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제프는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몰아세웠음을 깨닫고 입안을 질끈 깨물었다. 혀를 아릿하게 물들이는 쇠 맛이


입안으로 고였다. 그는 텁텁해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냉랭한 얼굴을 감췄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겠다고? 당신 선택 잘못했어. 내가 좀 화났거든.’

아제프가 원하는 건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건 그의 사랑이었다.

아제프는 제 마음을 알지 못해 줄 수 없었고, 엘제이는 제 마음이 시한부라 믿어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줄 수 없다고 믿는 걸 탐했다.

속은 열화에 휩싸여 부글부글 끓는데 아제프의 얼굴은 여전히 꽃처럼 해사했다. 아제프는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을 피해 몸을 숙이며 엘제이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내일은 승마 연습을 해볼까요?”


아제프를 따라 주저앉아 수풀에 몸을 숨긴 엘제이가 아까 탔던 말을 떠올리며 울적한 얼굴을 했다. 그와 하는 건
뭐든 좋았지만, 아까처럼 달리는 건 무서웠다.

“승마, 요?”

“쉿! 기사가 가까이에 있어요.”

원래부터 워낙 조그만 목소리라 들키지는 않았지만, 아주 작은 속삭임은 아니었기에 아제프는 주의를 줬다. 그는
제 귓가를 톡톡 두드리며 귓가에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빛나는 백금색 머리카락 아래로 둥근 귓바퀴가 솟아 있었다. 엘제이가 머뭇거리자 그가 귓바퀴를 다시 톡톡


건드렸다. 아제프의 손을 따라 백금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굳이 지금이 아니라 기사들이 지나가면 해도 될 말이었지만, 엘제이는 사람을 홀리는 백금빛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사실, 제가…… 말에 익숙하지 못해서요.”

엘제이가 더듬더듬 수줍게 속삭이는 사이, 보초를 서던 기사들은 지나갔다. 아제프는 멀어지는 기사의 기척을
읽었으면서도 엘제이의 귓가로 입술을 내렸다.

‘조금, 괴롭혀줄까?’

아제프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조그만 귀를 보며 고민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4 화
24

아제프는 일부러 몸을 더 가까이에 가져갔다. 다가가자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괜히 가학심을 자극했다.

핥아 내리기라도 하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 후 달래주고


실수였다고 속삭이면 저 여자는 또 금세 넘어올 것이 뻔했다.

아제프는 어린애처럼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다정한 척 웃었다.

앞으로 울릴 계획이 많으니 오늘은 그만 울릴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귓바퀴에 입술을 내리는 대신,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우거진 정원의 수풀 너머로 동그란 머리
두 개가 솟아올랐다.

“갔어요?”

“네. 승마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달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죠? 아까 자고 일어났을 때는 괜찮았잖아요.”
그건 아제프의 품에서 잠든 것에 대한 놀람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였다.

엘제이는 부드럽게 흔들리던 말 등을 떠올리며 조금 고민했다. 곧 그녀의 고개가 두어 번 끄덕여졌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천천히 달리거나, 그래도 무서우면 이번처럼 저랑 같이 타요. 그럼 괜찮죠?”

그의 물음에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도둑처럼 조심스럽게 걷던 둘은 어느새 엘제이의 창문 앞에 도착했다.


아제프는 제집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럽게 창문을 몇 번 두드렸다.

오매불망 아가씨를 기다리던 시아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며 창문을 열었다. 엘제이를 걱정하느라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녀인 척 누워 있던 시아가 엘제이를 보고 울 것처럼 얼굴을 흐렸다.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제 시녀를 보며 입을 벌리자, 시아를 협박한 남자는 뻔뻔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제가 부탁했어요. 제이가 혼나면 안 되잖아요.”

“아……. 고마워요. 시아, 너도 고마워.”

엘제이는 그와 있느라 걱정할 가족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걸 떠올렸다. 세심하게 배려해준 아제프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엘제이가 좀 감동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제프는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웃었다. 마음 넓은 척 꾸며낸 미소였지만, 엘제이는 그저


고마움에 눈을 빛낼 뿐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안아 들어 창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발 다치지 않게 조심히 넘어가요.”

“고마워요.”

엘제이가 부드럽게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안전하게 발을 내딛는 걸 본 뒤에야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봐요.”

“네.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제프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는 게 너무 신기하고 행복했다. 엘제이가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고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제프는 흰 뺨을 가로지른 보조개를 바라보다 상냥하게 웃으며 재촉했다.

“밤이라 날씨가 서늘하니 창문 꼭 닫으세요. 어서요.”

아제프의 재촉에 몇 번 망설이던 엘제이가 결국 내일 보자고 작게 속삭인 뒤 문을 닫았다.


아제프는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한없이 다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창문이 작은 소음을 내며 완전히 닫히고, 그와 그녀의 공간이 단절됐다.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음산하게 굳었다. 아제프는 창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뒤를 돌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던 제 손을 쥐며 생각했다.

[친구, 니까요.]

손을 잡아도 거부하지 않고, 덥석 끌어안아도 싫어하지 않았다. 아마, 그보다 더한 짓을 했더라도 자신이
애처롭게 애원하면 얌전히 몸을 맡겼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관찰해도, 그녀는 자신을 좋아했다.
그런 확신은 드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친구? 내가 뭘 해도 거부하지 않으면서, 나를 좋아하면서, 그런 주제에 아직 친구란 말이지?”

아제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멈춰 섰다. 봄볕이 지고 차가운 달그림자가 뒤를 비췄다. 그는 봄날이 사라진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

‘아아, 알겠다.’

아제프는 입꼬리를 말고 피식 웃었다. 자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라는 말이
기분 나빴다. 아직 명확히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하나는 알았다. 친구는 싫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기다려주려고 했다.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덜덜 떠는 게 가여워서 조금 양보해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기다리면 제 손에 떨어질 사람이라 믿었으니까.

“이거 어쩌지? 나는 싫은데. 친구는 당신을 온전히 가질 수 없잖아. 나는 다 가지고 싶은데. 그러니 이제 친구
따위는 안 해. 다른 게 하고 싶어졌어.”

홀로 나오지 않겠다면 그 벽을 깨부숴서라도 강제로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두려워 꽁꽁


싸맸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힘으로라도 부숴야 하지 않겠나?

엘제이가 혼자 나올 생각이 없다면, 자신이 깨부수고 취할 것이다.

아제프는 기꺼이 약탈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

엘제이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시아는 엘제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무척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시아는 할 수 없이 엘제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엘제이는 침대에 누워 문이 꼭 닫힌 창문을 힐끔 쳐다봤다. 창문을 사이로 그녀를 안아 올려주고,


내려주던 손길이 생각났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은 말이 연인의 밀회처럼 달콤했다.

엘제이의 두 뺨이 향내가 날 것처럼 달아올랐다. 숨길 수 없는 설렘은 꽃이 되어 엘제이의 볼 위로 내려앉았다.

그와 다시 만나겠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오늘의 만남은 끝났지만, 내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친구라는 선만 지키면 돼. 나중에, 그가 나를 쳐내더라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하자.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할 테니까, 당신을 위해 노력할 테니까,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아제프.’

엘제이가 하얀 베개 위로 얼굴을 깊숙이 묻고 눈앞에 없는 상대에게 용서를 빌었다. 미리 용서를 빈다고 그녀가
한 짓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그를 기만한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알고서도 모른 척한 일. 그가 원하는 진실을 알고서도 제 편의를 위해 외면한 일. 그건 모두 기만이었다.

엘제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기만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기만의 순간이 길어지기를 바랐다.
엘제이는 지독한 이기심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결국, 또 외면해버렸다. 그를 도와주기 위한 일이었다고 정당화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싶었지만, 피곤함에 지친 몸은 이만 자라는 듯 무겁고 나른해졌다. 그를


만난 게 이른 저녁이었기에 아직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품에 안겨 자기까지 했는데, 몸은
부족하다는 듯 잠을 강요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엘제이는 그녀를 덮치는 지독한 수마에 의아해하면서도 속절없이 끌려갔다. 수마는 그녀의 하얀 손을 붙잡고
고민이 없는 평온의 세계로 엘제이를 끌고 갔다. 그녀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시아, 그 드레스 말고 좀 화사한 색감의 드레스가 낫지 않을까? 너무 화려하지는 않은 단정한 것으로.”

얇은 속옷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머리를 빗던 엘제이가 시아가 들고 온 푸른빛 드레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아하게 내려오는 남빛 드레스는 엘제이가 평소 즐겨 입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그를 만나는 날이니 좀 화사한


색감의 것을 입고 싶었다.

엘제이의 요청에 시아가 화사한 진줏빛 드레스를 꺼내왔다. 보석이 박힌 것은 아니었지만 귀한 천에 자수를 새긴
드레스는 은은하게 예뻤다. 시아는 드레스를 한쪽에 잘 내려놓고 다가갔다.

“아가씨, 어제는 너무 위험하셨어요. 공작님께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이번에도, 저번에도.”

시아가 허리에 달린 코르셋을 단단히 조이며 엘제이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아제프가 어젯밤 불쑥 찾아와 엘제이가 혼나는 게 싫으면 협조하라고 협박하듯 말하는 통에 시아는 할 수 없이
엘제이가 된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몸을 편안하게 감싸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혹시나 누군가에게 이 모습을 들켜 얻어맞고 쫓겨나는 건 아닐지
무서웠다. 다행히 시녀들이 안쪽까지는 확인하지 않아 침대에 누운 실루엣만 보고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시아의 한숨 소리에 엘제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시아의 손을 잡았다.

“어제 많이 놀랐지? 걱정할 너희들은 신경 쓰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가버려서 미안해. 하지만 그는,”

“언니!”

엘제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시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엘제이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엘제이의
방으로 다다다 들어온 엘리사는 막 코르셋을 여미고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엘제이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뛰어왔다.
그녀의 눈 색깔과 닮은 연한 분홍빛 드레스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쏜살같이 뛰어온 엘리사가 엘제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언니의 볼에 얼굴을 비볐다. 엘제이보다 조금 큰 엘리사가 복숭앗빛 뺨을 들이대며 친애를 표시하자
엘제이가 살짝 웃었다.

언니의 웃음소리에 몸을 떼어낸 엘리사가 환호하며 엘제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끈을 여몄다.

“언니, 어디 가? 원래 이런 색상 잘 안 입잖아. 거봐, 내가 화사한 색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했지? 너무


예쁘다! 언니도 마음에 들지?”

엘리사의 옷장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드레스가 많았지만 엘제이는 주로 차분하고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엘리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하게 자수가 놓인 진주색 드레스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가 팔랑팔랑 뛰어다니며 엘제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엘제이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엄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리사……. 언니가 집에서는,”

엘제이의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자 엘리사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끊으며 주제를 돌렸다.

“뛰면 안 된다고? 알아, 알아. 그것보다, 언니랑 같이 벨가못 영애가 주최하는 티파티 가자고 하려 했는데 언니
약속 있어? 누구랑?”

속사포처럼 빠르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사는 화장대 위에 곱게 개켜놓은 아제프의 옷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저 옷은…… 저거 그놈 옷이잖아?”

하도 질척하게 달라붙으며 계속 겉옷을 걸쳐주는 태도에 확실히 기억했다. 엘리사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무례한 후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귀여운 얼굴에서 나오는 빠드득거리는 살벌한 소리에 엘제이가 아연한
얼굴을 했다.

“그놈이라니……. 란델 경이라고 불러야지…….”

엘리사가 저럴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엘리사와 아제프가 서로를 경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개입으로 책 속의 내용이 바뀔 수 있음을 확인했다.

엘제이의 말에도 엘리사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데 경어를 쓰기는 싫었다.
엘리사는 저를 밀쳐버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저 옷……. 분명히 소중하다고 했겠다?’

엘제이는 금방이라도 옷을 찢어버릴 듯 사납게 노려보는 엘리사를 보며 조심스럽게 걸어가 그의 옷을 끌어안았다.

엘리사가 뾰족한 발톱을 세우고 아제프의 옷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5 화
25

휙- 힘차게 휘두른 손은 언니의 일 차 방어로 무산됐다. 엘리사는 안 그런 척 휘파람을 불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거 잠시만 줘봐.”

“뭐 하게…….”

엘제이는 분홍색 눈의 고양이가 금방이라도 옷을 찢을 듯 갸르릉거리는 모양에 당황하며 옷을 감싸 안고 피하듯


뒤를 돌았다.

“언니, 나 못 믿어? 그냥 보기만 하려는 거야. 절대 찢거나 불태우려는 거 아니다? 나 믿지?”

엘리사는 금방이라도 천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듯 아르릉거리면서도 자신은 그런 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목표를 노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은 정확히 옷자락에 닿아 있었다. 그가 소중한 것이라고 했는데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만약, 엘제이가 옷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아제프는 그걸 빌미로 다른 걸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좋아했겠지만, 그의 속내를 모르는 엘제이는 앞발을 슝슝 휘두르는 엘리사를 피해 달아났다.

“오늘 돌려드려야 해.”

“세상에! 언니 그 남자 보러 가?”

엘제이가 정신없이 엘리사를 피해 밖을 향해 내려가자 엘리사가 따라붙으며 쫑알거렸다. 자매의 쫓고 쫓기는


뜀박질에 티아세 家의 가솔들이 눈을 크게 뜨고 두 자매를 바라봤다.

종종 바쁘게 걷는 발이 타다닥 소리를 내려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사는 매일 뛰지 말라고 잔소리하던 언니가


자신을 피해 달아나자 새침한 얼굴을 했다.

“옷 안 찢는다니까! 정말이야! 그것보다, 그 남자는 왜 만나는데?”

“그냥…… 친구가 되기로 해서……. 승마 연습 시켜주신다고 하셨어.”

“언니는 그냥 있어도 말 잘 타는데 연습은 왜 해! 흥! 그러지 말고, 나랑 티파티 가자. 그런 시시한 남자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야. 응?”

얼굴만 뺀질뺀질한 능구렁이에게 언니를 뺏긴 게 분한 듯 꽉 쥔 주먹을 샥샥 흔들던 엘리사가 달콤한 목소리로


엘제이를 꾀어내듯 속삭였다. 동생의 조름에 엘제이가 살짝 머뭇거리자 엘리사가 귀여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언니~ 제이야, 나랑 가자~ 응?”

“선약을 잡은 건데 어떻게 취소하겠어……. 대신 다음번에는 너랑 같이 갈게.”


“치……. 안 넘어가네. 나 그 남자 마음에 안 들어. 언니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친구를 보는 눈은 절대
아닌데…….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엘제이가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며 미안한 듯 거절하자 엘리사의 얼굴이 대번 불량스러워졌다. 두 손을 모으고


귀엽게 어깨를 흔들던 엘리사가 짝다리를 짚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귀족 영애가 하기에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었다.

엘리사는 무구한 척 예쁘게 웃으며 언니를 현혹하던 남자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그 남자가 싫지? 보면 볼수록 짜증 나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게 동족 혐오라는 걸 모르는 엘리사가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며 칭얼거렸다.

“일찍 들어올 거지?”

“글쎄……?”

엘제이가 말을 어물거렸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민폐가 되지 않는 한 오래 지내다 올 생각이었다.


엘제이가 동생의 시선을 피해 옷을 꽉 끌어안고 바삐 뛰어가 마차에 올라탔다.

“빨리 올 거지? 나 기다린다? 몇 시에 올 건데!”

엘리사가 마차에 난 창문을 열고 와락 소리를 질렀지만, 엘제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제이는 왕왕
소리치는 동생을 피해 마부를 재촉했다.

“빨리 출발해줘!”

엘리사는 떠난 마차를 분한 듯 바라보다가 왈칵 얼굴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언니! 제이! 몇 시에 올 거냐니까!”

***

엘제이가 란델 家로 향한 그 시각, 이미 엘제이를 맞이할 준비를 끝낸 아제프는 뒤뜰에 나와 말의 콧잔등을 쓸고


있었다. 딱히 정을 주는 동물은 없었지만, 어젯밤 제법 영리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훈련만 잘 시키면 제법 쓸 만할지도 모르겠군.’

검은 장갑을 낀 채 승마복을 입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아제프의 얼굴은 원래도 그랬지만, 최근


들어서는 무슨 기운이라도 받은 듯 더 반질거렸다.

‘이런 말 하면 실례지만, 후작님…… 참 새끈하시네요.’

매끈한 승마복이 그의 몸에 달라붙어 다부진 몸을 감싸 안았다. 아제프는 요즘 들어 부쩍 외모에 신경을 썼다.


가꾸지 않아도 빛이 나는 외모에 관리가 더해지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알모어는 왠지 모를 광채에 눈을 깜빡이며
보고했다.

“후작님, 상단에서 말 한 마리와 약병 하나를 보내왔던데……. 후작님께서 부탁하신 거라고 했습니다.”

아제프는 문무를 모두 갖춘 인재였지만, 상단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직접 키운 상단에서는 주로 그가 외교를


맡은 나라의 문물을 교역하거나 정보를 모으는 일을 했다. 아제프는 어제 지시했던 명령을 떠올리며 다각다각
걸어오는 백색 말을 쳐다봤다.

“약병은 어디 있지?”

알모어가 서둘러 상자 하나와 말고삐를 아제프에게 건네줬다. 귀족 여인이 탈 법한 화려한 백마는 언뜻 보기에도
혈통이 좋은 준마였다. 아제프는 푸른 눈을 가진 백마를 바라보며 웃었다. 첫 선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말들에게 안장을 올려둘까요?”

“아니. 다른 말을 가져와라.”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말이었다. 아제프가 상자에서 꺼낸 약병을 꾹 쥐었다 놓으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러니, 친구라는 말로 나를 자극하지 말았어야지. 자꾸 그러면, 울리고 싶잖아.’

차가운 병을 터트릴 듯 한 번 꾹 눌러 쥔 남자는 주머니에 약병을 잘 챙겨 넣고 고개 숙인 알모어에게 물었다.

“알모어, 엘제이 티아세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

“그건 조만간……. 워낙, 경계가 심한지라…….”

알모어가 그의 눈치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원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자 찌르는 것처럼 차가운 눈이 알모어를
쏘아봤다. 목이 떨어지는 것 같은 오싹한 감각에 알모어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저…… 후작님, 공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공녀님께서…… 도착하시면 바로 전해 올리라고 하셔서…….


응접실로 모실까요?”

살벌한 분위기를 뚫고 알모어를 구원할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아제프를 보며 울상을
짓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보고하자 살벌한 공기가 탁 풀렸다. 아제프가 빠른 손길로 옷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알모어가 속으로 안도하며 숨을 길게 내뱉자 아제프의 걸음이 딱 멈췄다. 알모어가 다시 흠칫 긴장하며 그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알모어, 머리 좋은 시녀 하나를 뽑아 적당히 훈련시켜라. 티아세 家로 들여보낼 테니까.”

아제프가 알모어를 돌아보며 빠른 속도로 말하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제프는 흐트러진 목깃을 잘 매만지며 정문으로 뛰어갔다. 뒤뜰을 넘어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저 멀리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봄이 보였다.

“제이!”

멀리 뻗어 나간 남자의 목소리에 마차에서 내리던 엘제이가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아제프를 발견한 엘제이의 얼굴이 수줍게 피어올랐다. 엘제이가 살짝 웃으며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오늘도 빛이 났다. 뛰어오는 탓에 바람결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백금발이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예쁘게 접힌
얼굴은 오늘따라 더 해사해 보였다. 엘제이는 승마복을 갖춰 입은 채 제 앞에 당도한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는 언제나 제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였다.

“제이, 이리 와요.”

엘제이는 티아세 家 기사의 손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아제프는 얼른 뛰어가 기사를 뒤로 물리며 엘제이의 손을
잡아챘다. 그가 소유를 주장하듯 기사를 날카롭게 쏘아보다가 엘제이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아제프의 미소는 오늘도 참 아름다웠다. 그를 따라 살짝 웃은 엘제이는 까만 가죽장갑을 낀 남자의 손을 붙든 채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왔다.

그보다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엘제이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올 때마다 눈높이가 조금씩 낮아졌다.
계단 하나를 남겨두고 엘제이의 눈과 아제프의 눈이 일직선으로 놓였을 때, 그는 참지 못하고 엘제이의 허리를
휘감아 땅으로 내려줬다.

“잘 왔어요.”

아제프의 친밀한 행동에 후작 家의 가솔들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엘제이는 빙긋 웃고 있는


남자를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며 품에 쥔 남자의 옷을 꽉 끌어안았다. 그가 저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제프가 싱그럽게 웃으며 엘제이를 내려다보다가 옆에 서 있는 기사에게 냉랭한 얼굴로 명령했다.

“경은 이만 돌아가라. 공녀께서 돌아가시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니, 가실 때 내가 직접 모셔다드리겠다.”

“……후작님, 저는 아가씨를 지켜야 할…….”

티아세 家의 기사라서 그런지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아제프는 찡그려지려는 이마를 펴며 엘제이 몰래 기사를
노려봤다. 그의 오싹한 시선에 기사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아제프는 재촉하듯 엘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

그녀의 가족들만 부르는 애칭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티아세 家의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둘 사이를 곁눈질했다.
아제프가 그녀의 손을 살짝 누르자 엘제이가 눈을 깜빡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 먼저 돌아가 주세요. 란델 경이…… 데려다, 주실 거예요.”

엘제이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만족스럽게 웃은 아제프는 잘했다는 듯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연스럽게 엘제이를 이끌고 걸어갔다.

혼자 남은 기사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할 수 없이 마부의 옆에 올라타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제프는


사라지는 마차의 소리를 들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이, 와줘서 고마워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리고 이거…….”

제이는 제 손을 꼭 붙든 아제프의 손을 내려다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맨손도 아니고, 장간 낀 손을 잡은


것뿐인데 힘주어 맞잡아 오는 느낌이 왠지 부끄러워 가슴이 두근거렸다. 엘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발끝을
힐끔 내려다보며 그의 옷을 건넸다.

‘굳이 꼬박꼬박 챙겨올 필요는 없는데, 쯧.’

엘제이가 사납게 앞발을 휘두르는 동생에게서 지켜낸 그의 옷이었다. 아제프는 수줍게 옷을 내미는 엘제이를
보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입가는 못마땅함으로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옷…… 가져왔네요?”

그의 말이 꼭 왜 가져왔냐고 타박하는 것 같아 이상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 소중한 것이라고 하셔서…….”

“네. 잘하셨어요. 아주, 잘했어요.”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줘 내뱉었다. 엘제이의 앞이 아니었다면 이를 벅벅 갈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

엘제이는 분명 그에게 칭찬을 듣고 있는데, 혼이 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쁘게 웃고 계시는데…… 왜 혼나는 것 같지?’

아제프는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고 그녀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옷을 빼냈다. 그녀 몰래 옷을 찢어버릴 듯


노려보던 남자는 옷을 뒤로 휙 던져버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6 화
26

옷이 날아가자 속 시원한 얼굴로 웃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엘제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엘제이가 아연한 얼굴로 날아가는 옷을 지켜봤다. 뒤에 서 있던 알모어가 황급히 옷을 받으러 뛰어가는 게 보였다.
엘제이는 알모어가 겨우 받아든 옷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소중한 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소중해요. 그것보다, 제이. 오늘 예쁘네요. 저 보러 오려고 예쁜 옷 입은 거예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관심을 능숙하게 끌고 왔다. 그가 어깨에 달린 레이스 자락을 손끝으로 만지며 물어보자
엘제이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화사하게 달아올랐다. 예쁘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도홧빛 볼을 보자 괜스레 간질거리는 마음에 더 예쁘게 웃었다.

“아제프도, 오늘…… 멋있어요.”

엘제이가 까만 장갑 낀 손을 쥐며 수줍게 속삭였다. 아제프가 그러냐고 답하며 제 손을 잡아 오는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저에게 조금씩 물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바들바들 떨던 여자가 이제는 먼저 손을
잡아 왔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손가락부터 시작해 손등을 타고 오르고, 팔을
물어뜯고, 결국에는 뼈 한 점 남기지 않고 모두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제 뱃속으로 사부작사부작 걸어오는 엘제이를 느끼며 나른하게 웃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아침은 먹고 왔어요.”

엘제이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아제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조그만 얼굴 위로 어여쁜 보조개가


피어오르자 청초한 미모가 사랑스럽게 변했다. 그는 하얀 뺨 위로 입술을 내리고 조그맣게 피어오른 볼우물을
잘근잘근 씹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찬란하게 웃었다.

“그럼 점심때가 될 때까지 말 타러 갈래요?”

“말이요? 아!”

엘제이가 그의 말을 따라하다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엘리사에게 쫓겨 급하게 나오느라 그의 옷은


챙겼지만, 자신의 승마복은 챙기지 못했다. 엘제이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치렁치렁 내려오는 드레스 자락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서투르게 구는 사람을 싫어했다. 승마하러 오면서 승마복도 안 챙기다니, 속으로 자신을 뇌 없는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랑스럽게 피어나던 얼굴이 울적하게 흐려졌다.

“왜 그래요? 무슨 걱정 있어요?”

“사실은……. 제가 승마복을 깜빡하여…….”

그는 엘제이의 흐려진 얼굴을 보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가 그녀의 말에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어차피 오래 태울


생각도 아니니 드레스를 입고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풍성한 드레스가 충격을 완화해줄 테니 더
좋았다.

아제프는 그녀를 말 위에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그는 울상인 얼굴을 살며시 붙잡아 들며 울적한 초록색 눈을 보고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럼 제가 어제처럼 태워드리면 되니 걱정하지 말아요. 밥 먹기 전에 가볍게 산책만 하고 돌아와요. 제이에게


줄 선물이 있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든요. 점심때쯤에는 올 테니까 그때 보여줄게요.”
엘제이의 눈을 마주 보자 깊은 심해를 담은 눈 위로 초록색 잎사귀가 내려앉았다. 엘제이는 남빛 바다에 내려앉은
제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선물이요……?”

“네. 세스티안 제국에서 들여온 명마인데, 그 나라 말이 아주 예쁘거든요. 동물 좋아한다고 하셨죠? 우리가


다녀올 때쯤에는 도착해 있을 거예요. 저도 아직 못 봤는데, 아주 예쁜 말이래요.”

알모어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능숙하게 거짓말하는 아제프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 우리 후작님, 거짓말 진짜 잘하시네……. 나도 한순간 오늘 데려온 말이 그 말이 아닌 줄 알았네.’

알모어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끙끙거렸다. 알모어는 독을 품고 예쁘게 웃고 있는


아제프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말했다가는 저 예쁜 남자의 손에 죽을 것이 분명했다.

엘제이는 반짝반짝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아제프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그가 주는 거니 받고 싶기는 했는데,


덥석 받자니 쑥스러웠다. 엘제이는 곱게 휘어진 눈 밑에 매끈하게 자리 잡은 그의 눈물점을 보며 어물어물 말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좋아서 그래요.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다음에는 제이가 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주는 건 어때요?”

그가 상냥하게 속삭이자 엘제이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그가 자신이 준 선물을 착용해준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엘제이는 평소 생각만 했던 걸 그에게 직접 줄 수 있다는 소리에 아제프의 팔을 꼭 쥐고 되물었다.

“그래도, 되나요?”

어여쁜 새끼강아지가 맹수의 아가리로 팔을 밀어 넣었다. 아제프는 애원하듯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음습하게
쳐다보다가 곧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 기쁠 거예요.”

“그럼……. 말은 기쁘게 받을게요.”

“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이제 말 타러 갈까요?”

그의 물음에 엘제이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햇살을 받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해사하게 웃었다. 속이 시꺼멓게 그을린 남자였지만, 그 얼굴만은 꽃망울이 터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걷자 그의 주머니에 담긴 약병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주머니 안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

“어, 저희 둘만 가요?”

엘제이는 말이 한 마리밖에 없는 걸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어젯밤이야 몰래 나온 거니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안은


숲인데, 둘만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제프가 노리는 게 그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아제프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제이는 제가 지켜드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기가 좋죠?”

“숲속이라 그런가 봐요. 란델 家 근처에 이런 숲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엘제이는 어느새 그와 함께 말 위에 올라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가 가볍게 말의 배를 누르자 말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제이는 멀어지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웃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곱게 휘어진 눈매와 그 아래에 콕 찍힌 눈물점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보란 듯 엘제이에게 눈웃음치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는 엘제이는 그냥 참 예쁜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천천히 가니 참을 만하죠? 아주 조금만 달려볼까요? 무서우면 바로 말해요. 속도를 늦출 테니까요.”

엘제이는 목소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라 그런지 크게 무섭지 않았다. 그는 실력 좋은 기사니 크게
위험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의 발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란델 家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한 손에 고삐를 쥔 남자는 말의 속도를 늦추고, 남은 한 손을 천천히


돌려 주머니로 가져갔다.

아제프는 약병을 든 손을 등 뒤로 돌리고 약병을 열었다. 독액을 가득 묻힌 바늘이 딸려 나왔다.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바늘을 꺼내고 뚜껑을 닫은 남자는 바늘만 남긴 채 병을 수풀 속으로 던져버렸다.

“숲이라서 그런가? 달콤한 냄새가 나요.”

“근처에 꽃이 있나 보네요.”

아제프는 달콤한 냄새가 좋은 듯 깊게 숨을 들이쉬는 엘제이를 보며 여상하게 대꾸했다.

바늘에 묻은 독은 아나이샤라고 불리는 꽃에서 채취한 독극물이었다. 독을 품은 꽃은 어떤 꽃보다도 화려하게


피어나 사람을 현혹했지만, 그 줄기를 꺾어 꽃을 취하려고 들면 피부를 파고들어 몸을 마비시키는 맹독을 가지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로 동식물을 유혹하는 아나이샤는 그 향만큼은 무해했다. 무해하고 애처로운 향기에 홀려 꽃을 꺾을
때, 그때야 아나이샤는 독니를 드러냈다.

울리는 것까지는 허용범위였지만, 이 여자가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기분이 좋은지 코끝을
찡긋거리며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말이 달리고 있는 숲을 살폈다.

아제프는 신중한 얼굴로 지형을 살피다 바위들이 보이지 않고, 촉촉한 흙이 가득 메워진 좁은 공터가 나타났을 때,
바늘을 세게 쥐고 말의 허벅지에 쑤셔 넣어 비틀었다.

“날씨가 너무, 꺄악!”

“히이잉!”

말의 울부짖음과 엘제이의 비명이 같이 들려왔다. 요동치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은 남자는 빙긋 웃으며 오른쪽
손으로 엘제이의 머리를 꽉 감싸 안고 뛰어내렸다.
‘이걸 보여주면, 너는 얼마나 울 거지?’

일부러 뛰어내린 남자는 곧 다칠 걸 알면서도 흐드러진 독화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말의 옆구리를 걷어찬 남자는 정확히 자신이 원하던 지면으로 떨어졌다. 아제프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엘제이를
자신의 위로 올린 다음 흙이 푹신하게 깔린 곳에 어깨를 가져다 댔다. 그의 몸이 왼쪽 어깨부터 천천히 떨어졌다.

“윽!”

폐부가 쥐어 짜인 듯한 애처로운 소리가 아제프의 입속에서 흘러나왔다. 떨어지기 전 말의 속도를 늦췄음에도


내장이 진탕되는 것 같은 울렁거림과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추락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엘제이가 그의 신음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고통으로 찡그려진 이마와 촉촉하게 젖어든 눈, 고통으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남자의 얼굴을 가련하게
만들었다.

엘제이는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제프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엘제이는 그의 품에서


내려와 그를 만지지도 못하고 울먹였다.

“아제프! 괜찮아요? 어떡해……. 미안해요. 제가 서툴러서, 저 때문에…….”

엘제이가 자책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엘제이는 자신이 방심하고 그의 품에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기에 그가
다친 것이라 믿었다.

‘나만 없었어도, 혼자 뛰어내릴 수 있었을 텐데.’

아제프는 오랜 시간 몸을 단련한 기사였다. 그런 그가 저를 감싸 안느라 제대로 된 낙법도 못 쓰고 뛰어내렸다고


짐작한 엘제이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울먹울먹 흐려졌다.

아제프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았다. 저 때문에 그가 다쳤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싱그럽게 빛나던 초록색 눈이 눈물로 얼룩져 흐려졌다.

무릎을 모으고 그의 곁에 앉아 눈물을 똑똑 흘리는 엘제이의 턱 끝을 따라 투명한 눈물이 고여 아제프의 볼 위로


떨어졌다.

아제프는 제 뺨 위로 흐르는 눈물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속눈썹이 가련하게
떨렸다.

엘제이의 눈에서 괴로운 눈물이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흡…….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제프.”

파르르 눈을 떨며 시간을 보내던 아제프는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치지 않은 것


같은 엘제이를 음습한 눈으로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쁘지 않군.’

포식한 맹수처럼 나른하게 웃던 남자는 엘제이가 고개를 들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7 화
27

“제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제 잘못이죠. 아마 제게 원한을 품은 자의 짓인 것 같아요. 저, 누군가에게 미움


받고 있나 봐요.”

한쪽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남자가 흰 뺨에 맺힌 눈물을 오른쪽 손으로 닦아주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처롭고 연약한지 툭 치면 떨어져 나갈 꽃잎 같았다.

“원한, 이요?”

“저길 보세요.”

아제프는 쓸쓸한 얼굴로 경련하는 말을 가리켰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말의 발굽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지금 보니 말의 상태가 이상했다. 일어나고 싶은 듯


헛발질하는 말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누군가 말에게 살수를 쓴 것이다.

“어떻게 이런 짓을……. 당신이 맞기라고 했으면,”

엘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영애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았지만, 아제프는 사업가이자 외교관이었다. 일할
때의 그는 악랄했고, 아제프에게 원한을 가진 자 또한 많았다.

아제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며 입 안쪽 살을 질끈 물었다. 저 표정을 보니 뱃속이 화끈거려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고개 숙여 표정을 가리며 쓸쓸하게 속삭였다.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겠네요. 처음 사귄 인연인데, 이 일로 당신이 멀어질까 봐
두려워요. 제가 무서워졌나요?”

아제프의 눈가로 떨어진 빛나는 머리카락들이 얼굴을 가리고, 긴 음영을 만들어 그의 표정을 숨겼다.

아제프의 질척한 속내를 모르는 엘제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손이 흙이 묻은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슬픔에 젖은 듯 촉촉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외롭고 적적해 보였다. 슬픔이 차오른 파란 호수가 쓸쓸함을
호소하며 물기를 머금었다.

‘외롭나요? 사람이 그리운 거예요?’

아제프의 표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엘제이는 그를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 떠나지 않을 거예요? 늘 제 곁에 있어줄 건가요?”


아제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망설이는 여자니 몇 번이나 맹세를 받아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제프는 진득한 집착을 숨기고 가련하게 엘제이를 쳐다봤다. 그의 청초한 낯빛에 홀린 엘제이의 눈가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

“네? 정말, 당신만은 저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하아……. 저를,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아제프가 대답을 재촉하며 엘제이에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숨결처럼 작았고, 꺼질 것처럼 연약했다.

일부러 낸 울먹이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촉촉이 젖은 목소리가 늑대의
아가리에 내려앉았다.

“네. 하나도 안 무섭고, 하나도 안 싫어요. 저는 항상 당신 옆에 있겠다고 맹세했잖아요.”

“고마워요. 당신까지 휘말려들게 해서 미안해요.”

아제프가 엘제이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기회를 포착한 늑대는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잎사귀를 물어뜯어 제
뱃속으로 삼켰다. 푸른 잎을 한가득 매단 나무를 노리는 늑대의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미안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거든. 나는, 다 가질 거다.’

아제프가 한쪽 팔로 자신을 끌어안자 엘제이는 얌전히 몸을 맡겼다. 가만히 숨만 쉬며 그의 품에 기대던 엘제이는


미동도 안 하는 어깨를 보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윽!”

아주 살짝 건드렸는데도 아제프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품에서 벌떡 일어난 엘제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란델 家가 있을 곳을 쳐다봤다. 말도 없는데 그곳까지는 너무 멀었다.

“어깨 다치신 거예요? 많이 다쳤어요? 여긴 사람도 없는데, 지혈이라도, 아니, 피를 흘린 게 아니니……. 일단


부목이라도!”

엘제이가 횡설수설하며 그의 팔에 댈 나무를 찾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엘제이의 시야로 축 늘어진 말이


들어왔다. 죽어버린 동물을 보며 안타까움에 얼굴을 흐리던 엘제이는 말 밑에 깔린 안장을 보며 소리쳤다.

“아! 안장주머니에 뭐가 있나요? 제가 가서 꺼내 올게요.”

엘제이는 죽었는지 꼼짝도 안 하고 쓰러진 말을 보며 소리쳤다.

아픈 척 눈을 감고 있던 아제프는 속으로 혀를 차며 벌떡 일어났다. 아제프는 다정한 얼굴로 고개 저으며 잠시


기다리라는 듯 그녀를 말리고 말에게 걸어갔다.

“쉬이, 말이 죽어서 무섭잖아요. 제가 다녀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그래도, 다치셨으니까 제가, 할 수 있어요.”

엘제이가 그를 졸졸 쫓아갔다. 먼저 말 근처에 도착한 아제프는 햇살을 받아 예리한 빛을 뿜고 있는 바늘을 죽은


말 사체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다친 왼쪽 어깨가 고통스럽지도 않은지, 아제프는 뭔가를 찾는 척하며 왼쪽 손으로 바늘을 밀어 넣었다. 바늘


끝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떼고 일어났다.

아제프가 손을 움직여 뭐가 묻었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장갑을 벗었다.

용도를 다한 검은 가죽 장갑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다친 손을 덥석 잡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독을 모두 처리한 남자는 가뿐한 얼굴로 눈을 들어 낑낑거리며 말 근처를 헤매는 엘제이를 바라봤다.

“아! 찾았어요!”

엘제이의 외침에 아제프는 떨어진 장갑을 자근자근 밟아 으스러트리며 엘제이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발에 짓밟힌
까만 장갑 위로 더러운 흙이 묻었다. 장갑은 더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한껏 미안하다는 얼굴을 한 아제프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물었다.

“제가 찾는다니까요. 무섭지 않았어요? 다행히 근처에 다른 살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조그만 정도인 것
같은데……. 말려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붕대랑, 간단한
약초는 있는 것 같아요.”

엘제이가 안장에 달려 있던 주머니를 뒤지며 속삭였다. 미리 준비해둔 붕대와 약초들이 열린 주머니 사이로 힐긋
보였다.

아제프는 다행이라는 듯 살며시 웃으며 거짓말했다.

“다행히 알모어가 준비를 철저히 해둔 모양이에요. 돌아가면 상이라도 줘야 할까요? 어깨를 다쳐서 혼자서는 못
할 것 같고, 제이가 좀…… 도와줄래요?”

“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아제프는 의뭉스럽게 말을 늘였지만, 의심 한 자락 없는 순진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눈을 반짝 뜨고 도와주고


싶다는 듯 간절하게 저를 보는 엘제이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그럼 일단, 저 좀 벗겨주실래요?”

“……네?”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얼굴을 붉히던 엘제이는 방금 자신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며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제프는 여전히 순진한 얼굴을 보며 유혹하듯 나른하게 속삭였다.

“벗겨주세요.”

“벗, 벗기라고요? 뭐, 뭐를요?”


아제프의 속삭임에 엘제이는 새빨간 사과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눈이 저도 모르게 힐끔 그의 몸을 보며 눈
둘 곳을 찾아 헤맸다. 엘제이의 손끝이 당황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아제프는 산뜻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샐쭉
휘어진 눈꼬리에 달린 눈물점이 그의 얼굴을 유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셔츠요. 옷을 벗어야 치료하죠. 야한 생각 했어요?”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아닌데…….”

아제프의 장난에 엘제이의 얼굴이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크게 당황해 손과 머리를 휘휘 저으며
최대한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울먹울먹하는 하얀 얼굴이 아제프의 탐심을 부르는 매개라는 것도 모르고 엘제이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는 홍시처럼 달아오른 얼굴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당신은 알까? 나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는 걸.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파.’

뱃속에 그의 봄을 채워 영원한 봄을 품에 묻고 싶었다.

아제프는 어두움이 번지는 눈꼬리를 화사하게 접으며 선하게 웃었다.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처럼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알아요. 설마 제이가 다친 저를 보고 야한 생각을 했겠어요? 저는 제이를 믿어요.”

분명 착하고 무구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 어쩐지 그가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제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뭐라 더 변명하지는 못하고 입을 어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벗어요?”

“네. 벗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으니까요. 어깨를 다쳐서 저는 좀 힘드니까 제이가 벗겨주세요.”

“제, 제가요?”

“네. 제이가요. 셔츠 단추들만 좀 풀어주세요.”

그는 뻔한 걸 뭘 물어보냐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손으로 겉옷을 벗으며 눈짓으로 얼른 단추를


풀라는 듯 시선을 보내자 엘제이의 하얀 손이 그의 셔츠 자락에 닿았다.

“풀, 풀게요…….”

“그래. 마음껏 해.”

돌아오는 대답이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은 반말이었지만, 긴장으로 손을 떠는 엘제이는 전혀 몰랐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르르 떨리는 손이 단추를 쥐고 몇 번이나 헛손질을 반복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는 엘제이를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유쾌해 죽을 것 같았다. 이 정도 고통쯤은
별거 아니었다.
화끈거리는 어깨의 통증에도 녹빛 잎사귀를 야금야금 물어뜯는 그의 얼굴은 반질반질 빛났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릴수록 하얀 셔츠에 둘러싸여 있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엘제이는 셔츠 사이로 흘깃흘깃
보이는 피부를 외면하려고 애쓰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풀어 내렸다.

“제이, 긴장돼요?”

“네? 조금, 이요.”

아제프가 말을 걸자 제이의 손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어물쩍 떨어진 하얀 손끝에


그의 가슴이 닿았다. 엘제이가 허둥지둥 당황하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선하게 웃은 맹수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겁먹은 새끼강아지를 툭툭 건드렸다. 덜덜 떨리는 손의 진동이
심해졌다.

몇 번 더 장난치듯 숨을 들이마시던 아제프는 더한 쾌감을 위해 조금 참기로 했다.

아제프가 몸을 좀 물려주자 터질 듯 달아오른 엘제이의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단추를 푸는


엘제이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벗는 건 전데, 제이가 더 긴장한 것 같아요.”

엘제이는 하도 긴장을 많이 해서 배가 아프고,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눈앞이 새하얀 상태로 겨우 단추만 풀어
내리는 엘제이에게 그의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아제프는 천천히 풀어지는 단추들을 보며 오늘, 단추 많은 셔츠를 입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 다 했어요.”

엘제이는 겨우 다 푼 단추를 보며 몇 발짝 물러났다.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두 손을 모으고 뒷걸음치는 엘제이를


본 아제프가 피식 웃었다.

아제프는 고개 숙인 엘제이를 맹렬하게 바라보며, 한쪽 팔로 뜯어내듯 옷을 벗었다.

‘많이 울고, 실컷 동정해. 나는 우는 너를 달래며 너를 갖겠다.’

몇 번의 손짓으로 셔츠를 벗은 남자는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머니를 꼭 쥐고 있는 엘제이에게 손짓했다.


고개를 푹 숙인 엘제이의 눈앞에 단단한 팔이 나타났다.

“붕대랑 약초 주셔야죠.”

“아, 아! 네!”

엘제이가 더듬더듬 대답하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얼기설기 그어진 상흔이 가득한, 그의 참혹한
상체가 드러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8 화
28

맑게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 위로 상흔투성이의, 아픔이 가득한 그의 몸이 따갑게 스며들었다. 너덜너덜 찢어진
살가죽을 따라 그어진 상흔들이 발긋하게 피어나던 눈에 담겼다.

흘깃흘깃 보이는 그의 나신을 보고 부끄러움으로 발긋하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수줍음으로
물들었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쁘게 오물거리던 입술이 파랗게 죽어버렸다.

‘이게 다, 뭐야?’

옷 틈으로 볼 때는 미처 몰랐다. 살짝살짝 보이는 살결은 상아를 깎아 빚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가슴에서


배꼽까지 유려하게 뻗어 있는 근육들과, 새하얀 피부가 무척 아름다웠다.

굴곡진 근육들을 따라 움푹 패어 있는 골짜기들과 매끄럽게 뻗어 있는 몸 선이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살결이 가시나무에 휘감긴 것 같았다.

몸은 자라도, 상처는 자라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컸다. 분명 그가 소년 때 입었을 상처인데도 흉터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단순히 채찍 자국만 나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나 다양한 고문기구들을 그에게 시험했던 건지 몸에 나 있는


상처의 모양이, 크기가 제각각 달랐다.

어떤 것은 그의 아버지가, 어떤 것은 그의 양어머니가, 또 어떤 것은 이름 모를 거리의 불량배가, 그렇게 하나둘


찍어놓은 낙인이 그의 몸을 끔찍스러울 정도로 가득 메웠다.

엘제이는 다른 의미로 그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란델 경, 그 상처…….”

“아? 뭐, 별거 아니에요. 어머니의 훈육법이 조금 거칠었거든요. 보기 흉하니 보지 마세요.”

아제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유려하게 웃었다. 상처 하나 없이 아름다운 얼굴과는 달리 찢기고 팬 상처가


온몸을 흉물스럽게 뒤덮고 있는데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대꾸했다.

“그게, 별거 아니라고요? 그 상처가 별거 아니라고? 어떻게! 어떻게 그게 별것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말을,


흡……흐아,”

엘제이가 숨을 잘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슴을 붙들고 휘청거렸다.

엘제이의 반응에 놀란 아제프가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심하긴 한데,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럽지?’

아제프의 상흔 위로 희고 고운 손이 올라왔다.

눈물을 닦아내 촉촉하게 젖은 손으로 아제프의 상처를 쓸어 내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럽고, 애달팠다. 위로하듯
부드럽게 상처를 덧그리던 손은 손끝에 툭툭 걸리는 상처의 느낌을 참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제프의 몸에 무수한 흉터가 남았음을 알았다. 알고 있음에도, 꿈속에서 지켜봤음에도, 실제로 보니 숨이 멎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엘제이는 떨리는 손길로 그의 흉터를 만지다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를 만나러 곱게 차려입은 드레스에 흙먼지가 쌓이고, 예쁘게 단장한 얼굴이 눈물로 말라붙고, 단정한 머리가
흐트러지도록, 그녀는 그렇게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오열하기 시작했다.

“흑, 흐윽……. 흐아아앙.”

엘제이는 등을 둥글게 말고 무릎 위에 얼굴을 숨긴 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꿈속의 그가 고문을 받을 때,


그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몸을 꿈틀꿈틀 말며 힘겹게 채찍질을 피하던 핏빛 소년은 자라나 저를 향한 채찍에도, 인두에도, 그 어떤


날붙이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게 되었다.

아제프의 몸에 셀 수도 없이 자리 잡은 빼곡한 흉터는 대부분 그라시아 란델의 비틀린 욕망의 잔재였다.

‘죽여 버리고 싶어. 당신을 이렇게 만든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어.’

난생 처음 살심이 들었다.

그라시아 란델이 살아 있었다면 기필코 제 손으로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의 감정을 앗아가고, 그의 소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그의 몸에 뿌리 깊은 상흔을 남겨놓은 그 여자가 눈앞에 있다면 그와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그라시아 란델은 그의 몸과 마음을 다 망가뜨렸다. 그에게 그 흉악한 탐심을 사랑이라 속삭이며 엘제이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유년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아제프가 얼마나 아팠을지, 그가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아 더


괴롭고 슬펐다.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렇게 아파야 했을까. 그가 무슨 죄가 있어서 혼자만의 상처를
끌어안고 외롭게 살아가야 했을까.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누구의 사랑도 믿을 수 없는…… 혼자만의 단절된 세상에서,
당신은 얼마나 외로웠나요? 얼마나 아팠나요? 얼마나 사무치게, 슬펐나요?’

엘제이는 그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아니, 지금도 얼마나 아플지 상상이 되지 않아 반쯤 미친 사람처럼


비통하게 울음을 토해냈다.

항상 외로웠을 사람을 더는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그를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왜! 왜, 당신만…… 왜!”

엘제이의 눈물이 대지를 적시고, 하늘을 깨웠다. 비통한 오열이 공간을 뒤엎고, 시간을 뒤덮었다. 싱그럽게
돋아나던 새싹이 비애의 이슬을 대지로 떨어트렸다.

아제프는 온몸으로 우는 엘제이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기 시작하면 달래주고, 아름답게 웃으며 그녀를
현혹하고 유혹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모습을 보자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숨통을
막은 듯 답답한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박동했다.
아제프는 길을 잃은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임기응변에 능숙한 남자도 그녀의 비통한 울음에 행동을 멈추고 시간이
멈춘 듯 멍하니 그녀만 바라봤다.

‘당신, 대체 뭐야……. 왜 그렇게 우는 거야. 왜?’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니 동정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일부러 다쳤고, 일부러 오래된
상흔을 보여줬다. 그가 다 계획한 것이었다. 그녀를 향한 지독한 집착을 채우려 스스로 계책하고 간교한 늪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만족스러웠다. 원하는 대로 막힘없이 흘러가는 상황이 더없이 흡족했다. 다친 건 저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제프가 생각했던 반응은 저런 게 아니었다. 그는 엘제이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는데, 엘제이는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몸을 말고 오열했다.

‘그저 조금만 동정해주기를. 눈물을 글썽거리며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봐주기를. 딱 그 정도만 바랐을 뿐인데
…….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당신, 도대체 뭐야.’

아제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마음이 망가진 남자는 그녀의 울음이 제게 독화살이 되어 돌아올 줄 몰랐다.
저 여자가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이 너무 한심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끄윽, 읍!”

엘제이는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지 가슴을 부여잡고 손끝을 세워 바닥을 긁어 내렸다. 연약한 손톱이
흙바닥을 애처롭게 파고들고, 비통에 물든 피를 흘렸다. 따사로운 대지가 핏빛에 물들었다.

그녀의 처절한 울음에 아제프의 심장이 지끈거리는 비명을 토해냈다.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감싸며 흔들리는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흙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눈물을
토해내는 여자가 너무 슬퍼 보여서 마음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괴감이 거센 물살처럼 들어왔다. 벌레가 온몸을 파먹어도 지금처럼 불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갉작갉작
잠식되는 끔찍한 감각에 아제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제이는 여전히 몸을 말고 오열했다. 그는 웅크린 등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하다 혀를 씹었다.

다시는 저 여자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저 여자를 울리지 않겠다. 울리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길 바랐다.
너무 끔찍해서, 저런 모습 따위 다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보던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톱이 갈라져 핏물이 고인 걸 보고 달려가 엘제이의
한쪽 손을 붙들었다.

“그만해.”

아제프의 입술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그는 애초의 계획을 잃고 흔들렸다. 엘제이가 저렇게
된 게 다 그 때문이었다. 그가 엘제이를 울린 거였다.

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저런 모습도 볼 일이 없었다. 아제프는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끔찍한 기분에 이를
갈며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엘제이를 노려봤다.

“됐으니까! 울지 마…….”
아제프의 목소리는 엘제이에게 닿지 않는 듯 그녀는 땅을 붙들고 우는 걸 멈추지 못했다.

그에게 붙들리지 않은 엘제이의 오른쪽 손이 여전히 땅을 파고들고 흙을 짚었다. 예쁘게 정리된 연약한 손톱이
그녀의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꺾여 나갔다.

“그만하라고!”

아제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아제프의 목소리에 엘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엘제이는 눈앞에 보이는 그의 상체에 손을 올리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보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소년의 신음이 귓가를 댕댕 울렸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고, 비명을
질러도 들리지 않는, 꿈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달랐다. 엘제이는 아제프를 만질 수 있었고, 물어볼 수 있었다.

“아팠어요? 많이, 아팠어요? 아직도…… 흡, 아파요?”

“……아팠어.”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피 튀기는 고문 속에서 괴롭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고독함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아팠다. 힘들었다. 슬펐다. 외로웠다. 내 편이 아무도 없어서, 그게 더 고단하고 괴로웠다.

아팠어- 그 한마디 속에 온갖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아제프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그의 등을 끌어안자 내려다보이는, 가슴보다 심한


상처에 엘제이는 흐느낌을 참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며 울었다.

“아……. 아흑,”

퉁퉁 부은 눈 위로 고인 눈물이 힘없이 툭툭 떨어져 아제프의 상흔을 타고 흘렀다.

아제프는 제 몸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름다운 독화가 독니를 감추고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달래듯 속삭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프지 않았어. 적응하니까 다 참을 수 있었어. 아주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렇게 울지 마.”

사막의 태양 아래에 장시간 달궈지고 태워져 버석거림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도 이 메마름을 채워주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있었다.

아제프는 이제야 다른 이를 아프게 하면 그 상처가 제게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웠다.


아제프는 지독한 후회와 뉘우침 속에서 천천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고 있었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엘제이도 그만 울고 싶었다. 더는 그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울고 그를 다독이고 싶은데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녹색은 생명의 빛이었다. 엘제이의 녹안을 가득 적신 생명이 또르르 떨어져, 그의 상처에 닿았다.

‘없어져! 없어져버려. 이런 흔적들 따위는 제발, 없어져버려!’

엘제이의 눈물이 그의 온몸을 적시고, 온몸을 타고 흐르며 어린아이가 한 장난처럼 그어진 상처를 다독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29 화
29

그라시아가 남긴 마지막 발악은 찢어진 가죽을 이리저리 봉합해 놓은 듯 참혹하기만 했다.

엘제이의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져 그의 온몸을 축축하게 적셨다.

‘보여주지 말 걸 그랬다.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냥, 당신이 탐이 났을 뿐인데.’

후회라는 뒤늦은 감정이 찾아왔다. 느리게 공명하는 두 개의 심장이 서로의 아픔을 쓸었다. 아제프의 눈가도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제이는 그를 대신해 온몸으로 울었다.

흰 뺨을 눈물로 적시고, 어여쁜 얼굴에 눈물을 한 가득 단 채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그의 몸에 눈물이 떨어져
그가 그녀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엘제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아프지 마세요. 다치지 마세요. 제발, 당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요.”

엘제이는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외롭지 않기를 바랐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그래. 약속할게. 그러니, 그만 울어. 제이.”

아제프는 그녀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슬프게 우는 대신, 예쁜 웃음을 짓길 바랐다.
그것만이 그의 바람이었다.

서로를 바라고, 서로를 위했다.

그가 망가지지 않길 원했던 엘제이의 바람. 그녀가 울지 않기를 바라던 아제프의 바람.


둘의 바람이, 둘의 간절한 마음이, 프리멧사의 자비를 이끌었다.

[너는 또! 너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아이구나.]

엘제이가 저지른 짓에 깜짝 놀라 그들을 내려다보던 프리멧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둘의 주변으로 싱그러운 초록빛이 기적처럼 모여들었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빛이 그의 가슴으로, 엘제이의 가슴으로, 그렇게 스며들었다.

아제프의 심장에 아주 작은, 초록빛 씨앗이 내려앉았다. 불길할 정도로 시꺼멓게 죽은 대지 위로 싱그러운 봄빛
씨앗이 몸을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티끌만 한 작은 시작점은 신이 아니라, 둘의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어디서 불어온 것일지 모를 미풍을 타고, 초록색 빛무리가 날아들었다. 허공을 빛내는 초록 물결이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햇살을 품에 안은 것처럼 따사로웠다. 눈을 뜬 아제프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아제프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빛무리는 넘실넘실 흔들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따스한 초록빛이 인사를 건네듯 그의 손을 톡톡 쳤다. 손에 닿는
느낌에 깜짝 놀란 아제프가 엘제이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아제프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물러났다. 그가 경계하자, 새파란 마나가 공기 중에서 윙윙거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게 대체 뭐지? 빛?’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를 제 품에 숨기고 주위를 둘러봤다.

날카롭게 선 그의 마나에도, 빛무리들은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초록빛이 그의 눈에 고여 빛무리를 터트리니, 그의 눈이 일순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주인을 잃었던 빛이 다시


소생하며 기쁨에 겨운 춤을 췄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눈앞에서 빛이 터졌는데도 뜨겁거나 아프지 않았다.

‘내 힘으론 막을 수 없는 건가? 저게 뭐지? 이상해.’

아제프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아제프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빛무리들이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그의 거부에 슬퍼하는 것 같았다.

엘제이의 눈 색을 닮은 싱그러운 빛이 따사롭게 흔들리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빛무리들이 엘제이에게서


멀어져 제게로 오자 아제프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마치 엘제이의 눈에 갇힌 듯 그녀와 닮은 빛에 마음이 저절로 풀리고, 따뜻해졌다

산산이 부서져 빛무리가 되었던 것들이 아제프의 가슴을 간질이고,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산들산들 솔바람을 타고 흐르던 빛무리는 천천히 아제프의 피부를 타고 올랐다. 그의 팔 끝부터 느긋하게 적신
빛들은 가슴에 닿자 쏜살같이 쏟아져 스며들었다.

빛으로 뒤덮였던 잔혹한 상처들이 투명하게 변해 피부 밑으로 사라졌다. 엘제이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붉은
상흔들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매끈한 피부만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하!”

아제프는 직접 봤음에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헛숨을 내뱉었다. 동화 속 환상을 체험한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성력?”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성력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따스했고, 부드럽게 넘실거리던 그것들은 자애의 빛이었다.

성력 외에도 두 가지 정도의 다른 가설이 떠올랐지만, 모두 그의 상식에 어긋났다.

셋 중 그래도 가장 설득력 있는 건 성력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성력은 손 안에서 빛을 뿜는 것에 그쳤다.


이처럼 온몸을 감싸 안는 것은 많은 신관을 만나본 아제프에게도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전에 봤던 엘제이의 빛을 떠올리며 품 안에서 미동도 안 하는 엘제이를 살며시 흔들었다.

“제이?”

엘제이는 이상하리만큼 얌전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아제프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엘제이를 흔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제프는 어느새 멀쩡해진 어깨를 느끼며 엘제이의 팔 밑쪽에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부드럽게 감싸 안는
손길에도 엘제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제이, 왜 그래요? 응?”

아제프가 엘제이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혼곤하게 풀린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갓 피어난
새싹처럼 싱그럽던 녹안이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화들짝 놀란 아제프가 엘제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거 당신 짓이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름다운 얼굴을 가득 찡그린 채 그녀를 흔드는 모습이 아주 다급해 보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여전히 몽롱한 얼굴을 한 엘제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항상 따뜻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열이 났다.

“아파.”

엘제이가 울먹이며 고통스러운 속삭임을 토해냈다.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목소리에 피가 바짝 마르고, 온몸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꼭 끌어안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이마를 쓸었다.

“당신 왜 이래……. 응? 말을 해야 알죠. 화 안 낼 테니까, 내게 말해줘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아제프는 갓 태어난 아기를 대하듯 보드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쥐어짜낸 상냥함에 울먹임이 번졌지만, 엘제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제프는 창백하게 질린 손을 매만지며 몇 번 더 물었다.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요. 네?”

“아파, 흑……. 아파.”

엘제이는 아프다고만 속삭였다. 아제프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엘제이를 안아들고 일어났다.

엘제이가 한쪽에 잘 놓아둔 안장주머니를 꺼내 든 아제프는 그 안에 숨겨진 신호탄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피이이잉, 쾅!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해둔 것이었는데, 만약 이것조차도 없었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 상황이 끔찍했다.

아제프는 일단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와 엘제이를 옷 속에 돌돌 말아 넣었다. 작은 누에고치를 만들어


안아 든 아제프가 엘제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애처롭게 말했다.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요. 그래야 저도 뭔가를 하죠. 그거 성력이에요?


성력을 많이 사용해서 그래요?”

이유를 알아야 신전에 찾아가는 게 먼저인지 의원에게 보이는 게 먼저인지 알 수 있었다.

아제프는 답답한 가슴을 누르며 엘제이의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애썼다.

큰 외상은 없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초조하고 괴로웠다.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의 몸이 이렇게 깨끗하게 치유됐는데, 막상 엘제이의 몸은 그대로였다.

아제프는 손톱이 꺾여나가 핏물이 고인 손을 보며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후회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일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아제프는 시종들을 모두 놔두고
떠나온, 아니 애초에 이런 계획을 짠 자신을 원망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책하는 일은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조함이 그를 갉아먹었다. 아제프가 입술을 독하게 물어뜯자 피가 툭, 고였다.

새빨갛게 번지는 핏물에 엘제이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며 올라온 손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아파, 너무…… 아파.”


심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엘제이를 덮쳤다. 누군가 몸속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피부와 장기가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에 엘제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어디가, 어디가 아픈데? 응? 제이, 제발.”

아제프가 엘제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제 뺨에 닿은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의 애탄 부름에도 엘제이는


아프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고통이 심한지 새하얗게 질려서 몸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창에 찔려 몸이 관통되는 것 같은 격통에 혀를 짓씹으며 눈을 감았다. 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얼굴을 보니 숨이 막혔다. 누가 악독한 힘으로 목을 잡아 뜯어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파하는 능력이라면 쓰지 않는 쪽이 좋았다. 이미 오래된 상흔 따위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는데,


고작 그것을 없애기 위해 엘제이가 아픈 것이라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되었다.

헐떡거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뭔가 잘못될 것 같아서, 힘들게 찾아온 그의 봄이
허상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죽고 싶었다. 과거의 저를 죽여 버리고만 싶었다.

“당신을 괴롭히지 말걸.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줘요. 제가
금방, 고쳐줄게요. 그러니 제발, 제이.”

아제프에 눈에 눈물이 고여 엘제이의 뺨 위로 떨어졌다.

새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은 눈물방울이 엘제이의 얼굴 끝에 애처롭게 걸렸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는 엘제이 앞에서 갈수록 약해져갔다.

아제프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엘제이를 꼭 끌어안았다.

엘제이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에게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고통에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제프가 저렇게 우는데, 떠날 수 없었다.
계속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고통에 잠식된 몸은 그만 자라는 듯 수면의 안락함으로 엘제이를 인도했다.

“제이? 제이, 자면 안 돼요. 제이!”

아제프는 점점 감기는 초록색 눈을 보고 엘제이를 흔들었지만 몽롱하게 풀린 눈은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엘제이가 실신하듯 잠들었다.

“제이!!!”

아제프의 애탄 목소리만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의 처절한 외침에 신호탄이 터진 곳을 찾아 헤매던 후작가의 시종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0 화
30

신관은 아제프의 몸에 성력을 쓴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엘제이가 성력을 쓴 게 아니라 미지의 무언가에 공격받은 거라면 뭔가 이상했다. 왜 그에게는 호의를 베풀던 빛이
엘제이에게만 고통을 준다는 말인가.

환상과도 같았던 빛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그에게 벌을 주는 거라면 고통을 받는 이는 몹쓸 짓을 한


그여야만 했다.

‘왜 제이만. 뭔가 이상한데, 실마리를 못 잡겠어.’

단순히 엘제이의 지병이라고 여기고, 아까 봤던 빛을 환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제 몸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상흔들이 마음에 걸렸다. 고위급 신관마저도 이미 아문 상처는 치유할 수 없었다.

아제프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아…… 제이, 언제 일어나줄 거예요?”

아제프는 수척한 얼굴로 잠든 엘제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펄펄 끓던 열은 가라앉았다.
파랗게 질렸던 얼굴도 조금 수척할 뿐 생기가 돌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듯 위험해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피곤해서 잠든 것 같았다. 아제프는 고르게 숨 쉬는


엘제이에게 귀를 기울이며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제프……. 아제프.”

엘제이는 꿈이라도 꾸는지 자는 내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반응은 없지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니, 시퍼렇게 날이 섰던 신경이 차츰 가라앉았다.

아제프의 불안함과 달리 그의 몸은 최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쉽게 말해 날아갈 것 같은 몸 상태에도 그는 울


것처럼 얼굴을 흐렸다.

아제프는 치료 받는 엘제이의 손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의원에게 물었다.

“신관은 성력 때문이 아니라던데, 왜 이러는 거지?”

“글쎄요…….”

아제프는 자신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의원을 매섭게 노려봤다. 수도에서 저명한 의원이라는 자가
하는 말이 저따위라니 기가 막혔다. 그의 살기 띤 눈에 의원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이불로 꽁꽁 싸매놓고 겨우 손목 진맥만 시키는데 어떻게 모든 병을 알아내겠는가. 의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아제프의 흉흉한 눈을 보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이 재주가 미천해 진맥만으로는 모든 걸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일단 손발이 무척 차가워지신 것과 신관의


성력으로도 나아지지 않는 걸 볼 때, 내상을 입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럴 리 없다. 말에서 떨어질 때도 내가 분명……. 그때 다치기라도 한 건가?”

아제프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낙마할 때 머리를 잘 감쌌고, 제 위에 올려 충격을 줄여줬지만
워낙 허약한 사람이니 그 정도로도 다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 감싸셨더라도 떨어지는 충격이 있으셨을 테니 내장이 상한 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복진을 한번


해보면,”

“복진?”

아제프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이불에 둘둘 말려 있는 엘제이를 바라봤다. 급해서 저렇게 두기는 했는데, 그러고
보니 좀 씻겨야 할 것 같았다.

아제프는 복진을 위해서는 코르셋을 벗겨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이를 씻길 시녀와 여의원을 데려와라.”

아제프는 쭈뼛거리는 의원을 노려보며 곁에 서 있는 알모어에게 가볍게 명했다. 눈치 빠른 알모어가 머뭇거리고


서 있는 의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제프는 하얀 이불에 칭칭 감겨 있는 엘제이에게서 이불을 떼어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이불을 벗겨내자 흙바닥에 주저앉아 풀물이 짙게 밴 진줏빛 드레스가 침대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그렇게
무거운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코르셋이 답답할 거라는 생각이 든 아제프가 목 아래에 달린 리본 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훔쳐보는 거 아니에요. 제 옆에 있어주기로 했으니, 당신은 제 사람이잖아요.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을…….


조금 빨리 보는 것뿐이고, 그냥, 겉옷만 벗기는 것뿐이니까요.”

왠지 추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 든 아제프가 손을 떼어내고 주절주절 변명했다.

답답한 드레스만 벗겨줄 생각이었다. 안에 페티코트를 입었으니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하는 건
치료행위였다.

그가 속으로 뭐라 뭐라 빠르게 변명하며 엘제이의 목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진주색 리본 끈을 잡아당겼다.

그의 손을 따라 툭- 하고 힘없이 풀린 끈이 부드럽게 늘어지며 엘제이의 빗장뼈 위로 흩어졌다. 목과 앞가슴


사이에서 곧게 뻗어나간 뼈가 무척이나 우아했다.

아제프는 살짝 보이는 쇄골을 보며 엘제이에게서 손을 떼어내 입을 가렸다.


‘치료다. 이건 추행이 아니라, 치료야.’

순진한 처녀를 희롱하고 있다는 묘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는 양심이 찔리는 걸 느끼면서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아제프는 날이 더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살며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돌아왔다. 상쾌한 봄바람이 불어오자 좀
괜찮은 것도 같았다. 아제프는 이제야 겨우 끈 하나를 풀었을 뿐이었다.

‘드레스가 원래 이렇게 복잡하던가? 풀어야 할 게 하나, 둘, 셋……. 이런 젠장!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거야.’

어느새 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제프는 복잡한 드레스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시녀에게 명하면 될 것인데, 그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제프의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엘제이의 몸을


옆으로 돌렸다.

“우음.”

“……!”

아제프가 드레스 뒤에 달린 끈에 손을 대자 웅얼거리는 엘제이의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온몸으로 놀람을 표현하며,


엘제이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제이?”

단순히 잠꼬대인 듯 엘제이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아제프는 새근새근 잘 자는 엘제이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아.”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잠든 누군가를 위해 숨죽여 소리를
삼키는 건 아직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아제프는 낯설게 행동하는 자신이 싫지 않은지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엘제이의 등에 겹겹이 매달린 리본 끈을 보자 또 한숨이 나왔다. 원래 이렇게 복잡한
것이지만 오늘따라 정도가 더 심해 보였다.

‘한 번에, 신속하게, 해치우자.’

아제프가 엘제이를 끌어안듯 손을 돌려 복잡한 끈을 이리저리 잡아 당겼다. 그의 손이 바삐 움직일수록 엘제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느슨하게 늘어났다. 등 끝까지 이어진 답답한 리본 끈을 풀어내자 꽉 조여 있던 몸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아제프는 소년같이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천천히 옷을 벗겨주다가 멈칫했다.

“하, 이걸 당신답다고 해야 할지.”

아제프의 입에서 피식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묘한 아쉬움과 웃음기를 달고 있었다. 드레스와 거의 비슷하게, 쇄골


바로 아래까지 오는 페티코트는 묘하게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아제프는 페티코트의 용도를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보통의 것은 이렇게까지 높이 올라오지 않는데 오히려
엘제이는 이런 페티코트가 더 어울렸다.

아제프는 살며시 웃으며 드레스를 한쪽에 잘 정리해 두고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한쪽에 말려 있는 이불을 다시 끌어와 엘제이를 잘 덮어주고 자신의 몸도 이불 아래에 넣었다.

같은 이불을 덮고 한 침대에 누워 평안한 오수를 즐기는 것. 가슴 따뜻한 편안함에 아제프의 신경이 느슨하게
풀렸다.

엘제이는 원래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곁에서 잠든 모습이 더 기꺼웠다.


아제프는 예민한 귀를 기울여 아주 조그만 소리를 내며 뛰고 있는 엘제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주인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소리였다. 두근두근 두 개의 심장이 공명하는 소리에 아제프의 눈에도 졸음기가
쏟아졌다.

‘내가 지금, 잠이 오는 건가?’

아제프는 심각한 불면증 환자였다. 의심이 많아 다른 사람 옆에서는 절대 잠들지 못했는데, 엘제이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놀랐던 가슴이 진정되고 평화로운 숨결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그 포근한 솜털 같은 보드라운 감각은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도 평화롭게 잠들도록 했다.

두 심장이 나란히 공명하자 잠든 엘제이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흰
뺨 위로 떠오르는 생기가 꽃처럼 사랑스러웠다.

아제프는 경계심을 버린 맹수처럼 배를 내보이며 자신의 품 안으로 작은 새끼강아지를 감췄다. 맹수의 꼬리같이
강건한 팔이 엘제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오고, 나른한 두 개의 심장소리가 조곤조곤 말을 거는 따뜻한


봄날이었다.

경계심이 많아 성인이 되어서는 방문 앞을 지키는 기사의 기척에도 잠을 청하지 못했던 아제프는 얌전히 자는
엘제이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아제프가 막 잠이 들려는데, 신경을 거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온유하게 풀려 있던 눈매가 단번에 사나워졌다. 그는 싸늘해진 청안으로 말도 없이 들어온 알모어를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누가 멋대로 들어오라고 했지?”

“후작님이요.”

알모어는 그것도 기억 못 하냐는 듯 미묘한 얼굴로 아제프를 쳐다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분명 공손한
어조였는데, 아제프는 왠지 모를 기분 나쁜 느낌에 얼굴을 콱 찌푸렸다.

“…….”
알모어의 눈이 힐끔 벗겨진 엘제이의 드레스를 향했다가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둘을 쳐다봤다. 엘제이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는데, 드레스가 벗겨져 있다.

‘후작님이, 저렇게 하신 건가?’

알모어의 공손한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일류 집사다운 능숙한 태도로 감정을 감추고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아제프에게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후작님이 공, 아니, 아가씨가 깨신다고 그냥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한시가 바쁘다고요.”

알모어가 곁에 시립해 있는 의원을 힐끔 보다가 엘제이를 지칭하는 말을 바꿨다.

아제프는 조심스럽게 이불 안에서 빠져나와 발소리를 죽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북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차가운 얼굴이 알모어에게 바짝 다가갔다. 알모어의 귓가 바로 옆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너는 그 입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안 그런가?”

한껏 소리를 죽인 목소리가 귓가를 예민하게 할퀴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알모어는 제 입이 방정이라고 생각하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말하지 못하는 신분 차이를 탓했다. 그가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귀청을 터트릴 듯 거세게 튀어나온 고함에 아제프의 얼굴이 악귀처럼 찌그러졌다.

워낙 아름다운 얼굴이라 저런 모습도 사람을 홀릴 것처럼 요요했지만 푸르스름하게 날이 선 살기가 온몸을 찢을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목을 물어뜯길 것 같은 아찔한 감각에 알모어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아제프는 손을 꽉 쥐며


분노를 참아냈다. 그가 잇새에 힘을 주고 씹어 뱉듯 말했다.

“목소리를,”

아제프가 목소리를 낮추라고 지시하기 전에, 엘제이가 바스락 움직이며 깨어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1 화
31

초식동물의 발자국 같은 작은 기척도 예민하게 감지한 남자가 한 번 더 알모어를 노려보고 등을 돌려 엘제이에게


다가갔다.
“제이? 괜찮아요?”

아까까지 음산하게 읊조리던 남자는 천사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다정한 음색으로
말하며 몽롱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엘제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제프…….”

혼곤한 눈을 뜬 엘제이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아제프의 어깨를 빤히 쳐다봤다. 다친 상처가 심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치료도 안 받았는지 부목도 없이 있는 모습에 걱정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당신이 자신의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겨줬으면 좋겠어요. 아제프.’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보며 침대 위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녀가 몸에 힘을 주자


재빨리 다가온 아제프가 그녀를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복진을 좀 해보려 하는데 잠시만 가만히 있어요.”

아제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의원에게 손짓해 그녀를 불렀다. 의원이 누워 있는
엘제이에게 다가왔다. 엘제이는 멀쩡한 자신에게 손을 올리는 의원을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멀쩡한걸요. 그보다 아제프는요? 당신 치료는 어떻게 해요?”

엘제이의 물음에 아제프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가 의원을 조금 물리고 엘제이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하면 안 돼요. 위험하잖아요.”

아제프가 철없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히 속삭이자 엘제이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치료 먼저 받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저는, 멀쩡한데요. 아제프부터,”

“쉿! 비밀이니까, 조금만 이따가 다 내보내면 말해요.”

아제프는 쓴 약을 먹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엘제이는 묘한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결국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가 의원에게 다시 손짓하자 의원이 다가와 하얀 천을 몸 위에 씌운 채 엘제이의 앞섶을 풀고 하얀 배 위에


손을 올려 복진을 시작했다.

“아프면 꼭 말해주셔야 합니다. 여기, 어떠세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팠다. 그가 잘 감싸줘서인지 말에서 떨어졌을 때도 자신은 멀쩡했다. 엘제이는 자신이 왜 복진을
받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의원이 뒤로 물러나자 엘제이가 서둘러 옷자락을 여몄다. 아제프의 재촉에 복진을 받기는 했지만, 천이 가리지
않았다면 문장을 보일 뻔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

엘제이가 서늘해진 가슴을 쓸며 눈썹을 축 내려트렸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얼굴에 아제프가 부끄러워 그런 거라고 착각하며 달래듯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그가


작은 등을 부드럽게 도닥이며 의원에게 물었다.

“좀 어떻지? 어디 다친 곳이나, 병이 있는 건 아닌가?”

엘제이 옆에 모로 누워 얼굴을 괸 채 물어보는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다.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환자분께서는 크게 상하신 곳이 없으십니다.”

“그럼 왜 이러는 거지? 계속 아프다고 중얼거리며 울었는데…….”

의원의 말에 다행이라는 듯 숨을 길게 내쉬던 아제프가 식은땀이 몽골몽골 맺혔던 하얀 이마를 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크게 상하신 곳은 없지만, 기력이 많이 쇠약해지셨습니다. 혹시 신경 쓰시는 일이 있으신가요? 맥박이 불규칙한


걸 보니 크게 놀란 일이 있으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몸이 전체적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여서 신경을 많이
써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약을 지어 올리겠다고 이어서 말했다. 아제프는 의원의 말을 들으며 뼈대만
남은 가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빠진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런가. 알겠으니 그만 나가봐라. 알모어, 조금만 이따가 제이를 씻길 시녀를 데려와.”

아제프는 좀 씁쓸한 표정으로 의원을 물렸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그는 다음부터는 오늘처럼


실수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다치지 않는 것만 신경 썼는데, 이제는 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엘제이는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긴장되는지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아제프는


수줍어하면서도 피하지는 않는 엘제이를 보며 다정한 얼굴을 했다.

끼릭-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에게 빠져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던 엘제이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알모어가 의원을 데리고 나가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떠나는 의원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며 말리려 했다.

“잠깐,”

“미안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괜히 당신을 심란하게 해서, 당신이 아픈가 봐요.”

“아니에요. 저는 정말 멀쩡한걸요. 그보다 란델 경이 치료를,”

“쉿! 그건 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남들과 다르다는 건 위험한 거예요. 오늘 일은 저와 제이 사이의


비밀이에요. 알겠죠?”

아제프가 한숨을 삼키며 엘제이의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이 사고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다정하고, 엄했다.

엘제이는 그가 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아제프가 착하다는 듯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그의 상냥한 표정에 엘제이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뭐를 말하면 안 되는데요? 아니, 그보다 란델 경은 치료 안 해요? 많이 다쳤잖아요.”

그때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아제프가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이고 몽롱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제이를 보며 의뭉스레 말을 흐렸다.

“……저 치료받았잖아요. 같이 있었는데, 기억 안 나요?”

‘당신이 치료해줬잖아. 기억 안 나?’

아제프는 몇 가지 단서를 숨기고 시험하듯 물었다.

아제프의 말에 엘제이가 기억을 더듬듯 생각에 잠겼다. 엘제이가 기억하는 건 그의 옷을 벗겨주던 것뿐이었다.
흘깃흘깃 보이던 그의 몸을 떠올린 엘제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제가 깨어 있었나요? 저는 왜 기억이 안 나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의 단추를 풀어준 뒤 땅 끝을 쳐다봤는데 그 뒤의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끊긴 것 같은 느낌에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었다.

엘제이는 모르겠다는 듯 순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 저 정도로 능숙하게 나를 속인다고? 아니. 저건 진짜다.’

아제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는 깜빡했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며 화사하게 웃었다. 예쁘게 웃은 남자가
제 어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엘제이를 달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이가 자고 있을 때 치료받았어요. 크게 다친 건 아니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이.”

그의 말에 엘제이가 잠시 그의 어깨를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웃고 있는 그를 보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가 착하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제이를 끌어안아 표정을 숨긴 남자의 얼굴이 차분하고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위험한 능력이었다. 아니, 그게 엘제이의 것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고, 아직
모른다면 굳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가 그 능력을 가진 본인이더라도 모르는 편이 나았다. 아제프는 경계심이 약한 엘제이를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모르는 쪽이 나았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몸을 떼어내고 초록빛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의심 한


자락 없는 순한 눈이 데구루루 수줍게 움직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도홧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우물쭈물
움직였다.
작은 걱정은 담겨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슬픈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 신경 쓰는
듯 쭈뼛거리는 느낌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아제프는 그녀의 반응을 세세하게 관찰하며 싱그럽게 웃었다.

“제 몸은 기억나요?”

요염하게 접힌 눈매가 눈웃음을 치며 짙은 향기를 발했다.

엘제이는 매혹적으로 올라간 눈꼬리와 휘어진 눈물점을 보며 이불을 꽉 쥐었다. 엘제이의 얼굴 위로 작은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알알이 피어올랐다.

엘제이가 앵두같이 붉게 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놓았다. 그녀는 억울함이 짙게 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본 거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더 부끄러운지 엘제이가 이불을 코끝까지 올리고 눈만 살짝 내놨다. 그의 눈치를 살피듯 데굴데굴
구르는 초록빛 눈동자는 진실만 말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정신없이 굴러가는 초록색 눈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역시 기억이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기억이
끊긴 지점이 옷을 풀어준 후라는 걸 대강 짐작했다.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의아했다.

‘견뎌내기가 힘들어 스스로 지운 걸까? 아니면, 제 3 의 존재가 엘제이의 기억을 지운 걸까?’

아제프의 눈이 작게 좁혀졌다. 그가 고심하며 머리를 굴렸다. 사람은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오면 저
스스로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아제프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아제프는 환상 같았던 빛무리를 떠올리며 의심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뭔가를 의심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며 이불을 조금 내렸다.

엘제이는 무척 억울했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눈앞에 보여서 단추를 풀기 위해 눈을 떴을 뿐이었다.


엘제이가 억울함을 담아 힘주어 말했다.

“……진짜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보이기에 본 것뿐이고, 많이 본 것도 아니에요. 잘 안


보였어요.”

엘제이의 중얼거림에 아제프가 표정을 감추고 다시 상냥하게 웃었다.

주먹을 옴팡지게 쥐고 본인의 결백을 호소하는 엘제이의 모습을 보니 장난기가 솟구쳤다. 아제프는 짙은 웃음기를
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부끄러움을 생각하셨다면 눈을 감아주셨어야죠.”

“아-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그럴게요.”

그의 표정에 속아 넘어간 엘제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이제 알았다는 듯
흘러나오는 탄식에 아제프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정말 간신히 참아냈다.
장난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무척 진지했다. 아제프는 이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놀리듯 피식 웃었다.

“다음에 또 하려고?”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2 화
32

“…….”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는지 엘제이가 잠시 머뭇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일부러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지만, 오늘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당연히 도와야 할 터였다.

엘제이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당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씹어 삼키고 싶다.’

그건 배 속이 뜨거워지는 감각이었다. 몸 안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온몸을 빠르게 달궜다. 늘 차가웠던 체온이
올라가고, 더없는 만족스러움으로 배가 불렀다. 뱃속을 채우는 충만감이 몸을 뜨겁게 달구며 뭉텅이째로 굴러오는
느낌.

아제프는 몸을 솜방울처럼 말고 그에게 굴러오는 아기강아지를 잡아채 뱃속에 숨겼다.

늘 무엇 하나가 부족한 듯 삐걱거리던 몸 위를 봄볕이 덮었다. 아주 오랜 시간 비워진 상실의 자리를 빠르게


채우는 봄빛이 싹을 틔우고 환한 빛무리를 뿜었다.

아제프는 울리지 말자고 다짐했던 걸 잊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엘제이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정말? 다음에 또 할 생각이에요?”

“아니에요!”

엘제이는 정말 억울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그에게 놀림을 잔뜩 받아 울먹울먹한 눈이 가여웠다.

아제프가 피식 웃으며 눈물 고인 눈동자를 바라봤다.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걸려 있는 눈물 아래로 손을 뻗은


남자는 엄지로 눈가를 쓸어내리며 유혹적으로 말했다.

“난 또 해도 되는데.”

“네?”

“원한다면, 벗어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어디까지 벗을까요?”

아제프는 가장 화려한 장미였다. 가시를 삼킨 장미가 고혹적인 향을 뿜으며 유혹하자 엘제이의 얼굴이 홀린
것처럼 몽롱해졌다.

아제프는 유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아직은 지켜줘야
할 선이 있었다.

유혹하듯 웃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가 손을 살래살래 저으며 선하게 웃었다.

“장난이에요. 그것보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여기는 안 아파요? 다쳤잖아요.”

아제프는 아까의 색향이 거짓이라는 듯 선하고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걱정을 한껏 담은 손이 엘제이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너는 왜 잊은 걸까? 나는 이토록 선명한데……. 기억하기 싫어서 잊은 거라면 떠올리지 마. 그게 뭐였는지는


내가 알아볼 테니까.’

엘제이는 그제야 고통을 느끼는지 조금 놀란 얼굴로 붕대가 감긴 손끝을 내려다봤다. 손끝을 조금 오므리자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손톱이 다친 듯 따가운 감각이 몰려오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언제 다쳤지?’

엘제이는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제프는 갸우뚱 움직이는 얼굴을 진득하게
쳐다봤다. 엘제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물었다.

“아- 제 손이 왜 이러죠?”

“말에서 떨어졌을 때 다쳤나? 나중에 보니 이렇게 손이 상해 있더라고요.”

아제프가 뻔뻔한 입술을 움직여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엘제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에서 떨어질 때 다친 것은 아니었다. 엘제이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손끝을
보다가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그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제가 잘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제이.”

엘제이가 막 아제프의 상처에 대해 생각했을 때, 슬프게 내리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제프가 미안한 감정을
한가득 담아 엘제이의 손끝을 매만졌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던 엘제이는 다친 왼쪽 손으로 얼굴을 괴고 누운 아제프를 보고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제이가 다급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 아제프는 그렇게 있어도 어깨 안 아파요? 아까 많이 다쳤잖아요.”

“하아-”

엘제이의 눈에 울먹울먹 차오르는 걱정에 아제프가 탄식처럼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곧 죽어도 좋을 것 같은


기묘한 만족감에 저절로 새어나오는 탄식이었다.

‘완전히 가지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야. 당신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아제프가 뜨끈해지는 눈가를 누르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용암을 삼킨 것처럼 온몸이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아파요?”

아제프의 뜨거운 숨결에 엘제이가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깃털처럼


연약한 움직임이 얇은 셔츠 아래의 상처를 확인하듯 옅게 흔들렸다.

두 사람의 무게를 받아낸 몸이었다. 어깨만 다치고 끝난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바로 움직이면 좋지
않을 터였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중간에 속도를 늦춰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제프는 걱정스러운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왼쪽 어깨가 아픈 척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미간을 힘겹게
찌푸린 그가 깜빡했다는 듯 당황스럽게 웃으며 왼쪽 어깨로 손을 올렸다.

“습관이라 저도 모르게 다친 쪽으로 누웠네요. 아까 약을 먹었더니 고통이 둔해졌었나 봐요. 시간이 지나니
아프네요.”

다쳤다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 멀쩡하게 움직였지만, 그의 걱정으로 울상이 된 엘제이는 깊게 의심하지 못했다.
엘제이는 찡그려도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그는 속상한 듯 울상 짓는 얼굴을 보며 샐쭉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렸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걸 저만 알고 있는


것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이었다.

아제프는 특히 자신의 안전에 신경을 세우는 엘제이를 떠올리며 불쌍한 척 얼굴을 흐렸다. 그가 고통을 참아내듯
붉은 입술을 짙게 깨물고 가느다란 속눈썹을 팔랑였다.

한껏 연약하게 떨리는 속눈썹이 애처롭게 흔들리며 고통 섞인 음색을 토해냈다.

“심하지는 않은데, 따끔따끔 아프네요. 저, 많이 아팠어요. 제이.”

촉촉하게 젖은 눈가와 가련하게 새어 나오는 음색이 고통에 젖어 있었다. 엘제이는 얇은 셔츠만 입고 있는 그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따뜻한 수건이라도 올려두면 좋을 텐데,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제프는 페티코트 차림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갈 듯 몸을 뒤트는 엘제이를 황급히 잡아챘다.
그가 엘제이 몰래 눈을 움직여 그녀의 몸을 쭉 훑어봤다.

보기 좋아 이렇게 둔 것이었지만 일단 씻기고, 밥도 먹이고, 예쁜 말도 보여줄 생각이었다. 저녁 해가 떨어져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을 생각을 한 아제프가 서글프게 웃었다.

“낯선 사람은 불편해요. 제가 이렇게 아픈데, 오늘 일찍 갈 거 아니죠? 내일도 와줄 거죠?”

“네. 저 때문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절절하게 튀어나간 목소리는 쉽게 그녀의 긍정을 받아냈다. 엘제이가 죄책감 섞인 눈으로 그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말은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고, 그냥 좀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정도였다. 저만 없었더라면 많이 다치지 않았을


텐데 괜히 폐가 됐다고 생각한 엘제이가 그의 어깨를 쳐다보며 미안한 듯 눈짓했다.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잡아두고 여기서 재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잡스러운 소문이 따라붙을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제프가 좀 고민하다가 애달프게 엘제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오늘은 저녁 먹고 늦게 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오면 되겠네요. 제 말대로 할 거죠? 저 많이 아파요.”

아제프는 있지도 않은 고통을 느끼는 척 엄살을 부렸다. 홀라당 넘어간 엘제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좀 더 쉬라는 듯 그를 눕히려 했다.

“혼자는 싫은걸요. 같이 있어주세요.”

아제프는 자신을 눕히려는 가는 손목을 잡아 냉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렇게 누워서도 별 위기의식이 없는지
순하기만 한 엘제이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지만, 부끄러운지 수줍은 안색을 보며 언짢음을 감췄다.

그렇게 둘이 잠시 쉬고 있자, 방문을 살며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제프는 알모어에게 시녀를 데려오라
명령했던 것을 떠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만 좀 더 누워 있어요. 제가 돌려보내고 올게요.”

아직 점심밖에 안 됐고 시간은 많으니 씻는 건 좀 늦어도 괜찮았다. 일단은 한숨 자고 싶은 나른함이 몰려왔기에


아제프는 문고리를 확 밀어젖히고 알모어에게 그만 돌아가라는 눈짓을 했다.

“나중에,”

“아, 좀 비켜보세요.”

알모어 뒤에 서 있던 엘리사가 알모어를 밀치며 튀어나왔다.

그의 평화를 망치러 온 방해꾼을 발견하자 아제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처럼 흉흉한
얼굴이 된 남자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눈을 노려봤다.

“티아세 양이 여긴 웬일이죠?”

“우리 제이 데리러 왔죠! 제이 여기 있죠?”

사탕처럼 달콤한 분홍빛이 지지 않고 맞섰다. 새침하게 올라간 눈이 언니를 찾아 삭삭 빠르게 움직였다. 엘리사의
눈이 문틈 사이로 보이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분노로 타올랐다.

‘이 막돼먹은 놈!’

아제프는 도전적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엘리사를 보며 코끝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엘제이와 평화롭게 쉬고 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방해꾼이 나타났다. 엘제이가 이 여자를 발견하면 돌아간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떠올랐다.

‘가족이라고 참아줬더니……. 또 찾아와? 성가셔…….’

엘제이와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받은 자의 분노와, 페티코트만 입은 채 누워 있는 언니를 발견한 시스콤의


격노가 불꽃처럼 튀어 올라 강렬하게 맞부딪혔다.
엘제이를 고달프게 할 엘리사와 아제프의 2 차 전쟁이 막을 올렸다.

둘은 날카로운 혀를 장착하고 서로를 쭉 훑어봤다. 공격 태세에 들어간 둘의 사나운 기세에 알모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 도망갔다. 괜히 곁에 있다가 불똥 맞고 싶지 않았다.

두 마리의 흉포한 야수가 형형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눈빛으로 몸을 할퀴고 때렸다. 간을 보듯 서로를
노려보던 중 성격 급한 엘리사가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후작님, 비켜주시죠?”

엘리사는 아제프의 배에 날카로운 칼을 푹푹 찍어 넣는 상상을 하며 해맑게 웃었다. 입꼬리는 방긋 올라가 있는데


차갑게 굳은 눈매가 전혀 웃지 않았다.

아제프는 귀청을 때리는 꾀꼬리처럼 낭랑한 목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제 동생이 찾아왔음을 알았는지
엘제이가 침대 위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엘제이가 순한 초식동물이라면, 엘리사는 초식동물인 척하는 포식자였다. 아제프는 거의 노려보다시피 자신을


보면서도 빙긋 웃고 있는 눈을 보며 저 눈을 뽑아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동시에 빙긋 웃었다. 화사한 꽃이 주변에 돋아나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왠지 살벌한 바람이 쌩쌩 불었다.

화향을 짙게 머금은 독화 두 송이가 아름다움을 뽐내며 기 싸움을 시작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3 화
33

아제프가 차가운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엘제이가 보이지 않으니 대놓고 불량한 얼굴이 된 남자가 삐뚜름한
얼굴로 까딱까딱 목을 풀며 천천히 읊조렸다.

“제가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죠?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방문을 불쑥 열고 들어오시다니……. 티아세 양은 무척


무례하네요.”

“……멋대로 들어온 게 아니라, 후작님 댁 집사가 열어줬는데요. 전 손님이니, 어서 안내나 해주시죠?”

주인의 허락 없이 저택에 들어오는 건 대단한 무례였다. 잠시 멈칫했던 엘리사는 곧 당당하게 턱 끝을 치켜들며


말했다.

아제프는 계단 끝으로 사라지고 있는 알모어의 까만 뒤통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허락도 없이 도망갔다는 것에 더 화가 났다.

이를 드러내고 섬뜩한 얼굴을 하던 아제프가 곧 화사하게 웃으며 당장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엘제이가 나오기 전에 엘리사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싫은데요. 제이는 안정을 좀 취해야 하니까 티아세 양이나 물러나시죠?”

“당신이나 좀 비키시죠?”

엘리사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그의 살벌한 눈빛에도 기세가 죽지 않은 엘리사가 그를 밀쳤다. 엘리사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발을 굴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긴 다리가 성큼성큼 다가와 엘리사를 막았다.

‘막았다 이거지?’

엘리사가 악동처럼 웃으며 맨발로 서 있는 남자의 발을 잘근 밟아 뭉갰다. 악의를 한가득 담아 꾹꾹 짓밟는


느낌에 아제프의 얼굴에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입꼬리를 한쪽만 말고 놀리는 것처럼 얄밉게 웃은 엘리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한껏 미안하다는 듯 얄궂은 음색을
냈다.

“어머, 이거 죄송해서…….”

“……해보자는 겁니까?”

아제프는 아직도 허둥지둥 움직이는 엘제이의 기척을 살피며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그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그가 보호해야 하는 건 엘제이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티 나지 않게 공격하는 건 아제프가 한 수 위였다. 아제프는 엘리사에게 밟힌 발을 물끄러미


노려보다가 발에 힘을 줘 교묘하게 엘리사의 발을 툭 밀었다.

그의 힘에 중심을 잃은 엘리사가 꽈당 소리를 내며 넘어지자 아제프가 싸늘한 냉소를 지은 채 엘리사를 내려다봤다.

비웃듯 피식 말아 올린 입매가 엘리사의 기분을 서늘하게 달궜다.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은 엘리사는 밟아도


굴하지 않는 잡초처럼 아랑곳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지지 않고 시린 청안을 노려봤다.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둘 사이로 짙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둘은 머릿속으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을
고심하며 동시에 코끝으로 서로를 비웃었다.

“하!”

“흥!”

엘리사가 넘어진 걸 보면서도 팔짱만 끼고 있던 아제프가 문 쪽으로 다가오는 엘제이의 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엘제이가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돌린 아제프가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리사의
팔을 꽉 비틀어 눌렀다.

“이런, 티아세 양. 조심하셨어야죠. 자, 제 팔을 잡고 일어나세요.”

“미쳤, 음……. 호의에, 감사해요.”

미쳤냐고 쏘아주려던 엘리사는 다가오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혀를 깨물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엘리사는 제 팔을


잡아 오는 손에 손톱을 세우고 그의 피부를 쥐어뜯으며 웃었다.

‘좀 아플 거다. 요놈아.’
‘이 빌어먹을 여자가!’

둘의 소리 없는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그들은 서로의 팔을 뜯어버릴 듯 힘주어 잡았다.


따끔한 고통에도 화사하게 웃은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며 정답게 웃었다.

이불을 둘둘 감고 나타난 엘제이가 이불자락을 바닥에 끌며 다가왔다. 엘제이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방문 앞에서 치열하게 전투 중인 둘을 바라봤다.

‘오늘은 둘의 사이가, 괜찮아 보이네?’

엘제이는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것 같은 둘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엘제이의 모습에 둘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예쁘게 웃다가 서로의 팔을 툭 놓고 엘제이를 향해 달려갔다.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밀치며 문틈을 벌리고 들어온 엘리사와 아제프가 엘제이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엉겨 붙었다.

엘리사는 이불을 둥둥 말고 있는 엘제이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가, 안에 페티코트만 입고 있는 걸 보고 입을


벌렸다.

“언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옷은 어디다 두고. 일단 빨리 들어가.”

“제이, 그 차림으로 나오면 어떡해요. 일단 어서 들어가세요.”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엘제이를 안으로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제프와 엘리사는 모처럼 의견이 맞는 게


기분 나쁜지 엘제이의 등 뒤로 살벌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건 지독한 동족혐오였다.

엘리사는 제집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걸어가 중환자 모시듯 엘제이를 침대 위에 앉혔다. 여기가 저 남자의
방이라는 게 껄끄러웠지만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는 언니를 보자 저절로 나온 행동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다쳤어!”

엘리사가 엘제이의 손끝에 달린 붕대들을 보며 소리쳤다. 손끝에만 감아놓은 붕대 탓에 개구리의 손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엘리사는 그 모습도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운 얼굴로 손을 매만졌다.

엘제이는 걱정하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에 난 상처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엘제이는
심하게 다쳤던 아제프를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니, 나는 별로 안 다쳤는,”

“별로 안 다쳤다니요. 예쁜 손끝이 다 엉망이 되었어요. 아직 좀 쉬어야 하니까 더 누워 있어요.”

아제프가 엘제이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가 은근슬쩍 발로 엘리사를 밀어버리며 엘제이의 옆을 차지했다. 그가


이불채로 엘제이를 끌어안고, 한껏 안타깝다는 얼굴로 엘제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니, 난 괜찮은…….”

“후작님! 제가 한마디 하고 싶은데요. 우리 제이가 왜 저 차림이죠?”

엘제이의 말은 동생으로 인해 또 끊기고 말았다.


카르릉거리는 엘리사가 아제프를 노려보며 엘제이를 손으로 척 가리켰다. 이불벌레가 된 엘제이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새삼 그의 앞에서 이 차림으로 있었다는 게 떠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면 아제프는 당당한 얼굴로 곧바로 맞부딪쳤다. 엘제이가 다친 건 그의 탓이 맞았으나, 엘제이가 저 차림이 된


건 치료를 해주려고 한 것뿐이었다.

아제프는 나쁜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낙마를 해서 혹시 내상이라도 입었을까 봐 복진을 했기 때문입니다. 티아세 양.”

“흥! 후작저가 언제부터 그렇게 가난하셨죠? 우리 제이에게 빌려줄 옷 한 벌이 없던가요?”

엘리사가 코끝으로 아제프를 비웃었다. 엘리사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방 안을 휙 둘러보면서 이를 갈았다. 옷을


벗긴 거야 다쳐서 그랬다 쳐도 분명 여벌의 옷 정도는 있었을 텐데, 추운(?) 봄날 언니를 속옷만 달랑 입히고
눕혀 놓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리사는 아제프가 엘제이의 헐벗은(?) 몸을 본 것보다 엘제이가 추울까 봐 더 신경 썼다.

아제프는 정신 산만하게 발을 쿵쾅쿵쾅 구르는 엘리사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여자만 없었어도 엘제이와 낮잠을 즐기고, 제 마음에 드는 옷으로 골라 입힌 다음, 즐겁게 식사할
생각이었다.

아제프가 사납게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티아세 양이 시기부적절하게 찾아오신 건 생각 안 하나 보죠? 이제 막 제이를 도와줄 시녀를 부르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제이를 왜 이곳에서 씻겨요? 제이가 다쳤으면 당장 우리 쪽에 연락을 해주셨어야죠. 아침 일찍


나간 제이가 밤늦게, 밤늦게는 아니지만 어쨌든 오후가 되어서도 안 오니 가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가
타는데요.”

그놈의 가족, 가족. 아제프가 당당한 얼굴로 엘제이의 가족이라 주장하는 엘리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뜩이나 엘제이를 돌려보내야 하는 게 짜증이 나는 참이었는데, 가족이라는 여자가 튀어나와 그녀와의 시간을
방해하자 화가 솟구쳤다.

아제프는 엘리사를 고문하는 잔인한 상상을 하며 오싹한 눈으로 엘리사를 노려봤다. 엘제이가 아끼는 동생만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끌고 와 엘제이의 정보를 토해내라고 심문하고 싶었다.

아제프는 엉엉 울던 엘제이를 떠올리고 취소한 계획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왕왕거리며
떠드는 엘리사를 시퍼런 눈으로 노려보며 비꼬았다.

“어떤 가족이요? 티아세 공작님께서는 아직 업무 중인 걸로 아는데요.”

“저요! 제가 제이 가족이거든요. 하나뿐인 동생!”

엘제이는 사이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진 둘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거칠게 흔들리는 동공이 둘을 번갈아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엘제이는 머리가 아프고 귀가 너무 따가웠다. 양옆에 앉은 둘이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소유권을 주장하듯 싸워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엘제이는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벙긋대다가도 성량이 남다른 둘을 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둘의 실랑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의 말이 끝나면 곧바로 아제프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네. 제이 동생분. 동생분께서는 걱정도 참 많으시죠. 제이가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고, 이상한 곳에 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제이, 여기 온다고 말하고 왔죠?”

“아- 그러기는 했는데……. 그것보다, 이제 그만,”

드디어 발언 기회가 왔을 때 힘겹게 입을 연 엘제이가 둘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둘은 상냥한 주인 아가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주인을 차지하기 위한 용맹한 짐승 두 마리는 서로를 거칠게 물어뜯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엘제이만 없었으면
진작 피가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둘 사이 이간질해요?”

“이간질이요? 제가요? 언제요?”

화르르, 콰지직, 우당탕, 평화로웠던 방 안이 순식간에 으르렁거리는 맹수 두 마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엘제이는
아파지는 머리를 짚었다.

“둘 다 그만하고, 일단,”

엘제이의 작은 목소리에 잠시 싸움을 중단한 것처럼 보이던 둘이 서둘러 엘제이의 머리를 짚어보거나, 뺨을
만지는 등 난리를 부렸다.

“제이, 괜찮아요? 저 여자가 너무 시끄러웠죠?”

“언니, 이 남자가 너무 시끄러웠지? 얼른 우리 집으로 가자.”

아제프의 얼굴 위로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거치적거리는 엘리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제이는 지금 쉬어야 한다고 말했던 거 같은데?”

반말에는 반말이었다. 팔을 쓱쓱 걷어붙인 엘리사가 턱을 치며들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 집으로 가겠다는 거거든?”

천지개벽. 둘이 만나기만 하면 천지가 개벽했다. 둘은 금방이라도 다시 난투를 시작할 듯 아르릉거렸다.

더 정신없어지는 상황에 엘제이는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배에
힘을 준 엘제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둘 다, 그만 좀 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4 화
34

아제프는 처음 들어보는 엘제이의 높은 언성에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늘 엘제이를 제 손 안에 감싸 쥐었던


남자가 이번에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예쁜 속눈썹을 깜빡깜빡 흔들었다.

섣불리 말을 했다가는 자신이 온통 뒤집어쓸 것 같았다. 아제프는 숨을 죽이고 엘제이를 살펴봤다.

반면, 엘제이의 화난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는 엘리사는 차렷 자세로 돌아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크. 언니 화났다.’

원래 얌전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서운 법이었다. 엘리사도 엘제이의 눈치를 살피며 엘제이를 따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엘제이가 엄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벌떡 일어났다. 둘은 그녀를 따라 일어나고 싶은 눈치였지만 화가 난


엘제이의 얼굴에 얌전히 침대에 앉아 그녀의 눈치를 봤다.

“제가 그만하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

“했어요.”

둘의 입에서 나온 시무룩한 대답에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기가 죽은 듯 보이지만 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엘제이는 저게 다 연기임을 알았다. 그녀가 장난꾸러기 아이를 다루듯 한 번 더 엄한 어조로 물었다.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잘못했어, 언니.”

“제이, 제가 참았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둘의 입에서 나오는 잘못했다는 시인에 엘제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저게 거짓말이고 연기인 줄은 알지만,
반성한다는 듯 기가 죽은 얼굴들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뾰족한 삼각귀가 축 늘어진 고양잇과 맹수 두 마리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아기강아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조금 딱딱한 엘제이의 얼굴을 본 아제프가 옆에서 불쌍한 척 꼬물거리는 엘리사를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며
못 본 척 얼굴을 돌려버렸다.

엘리사는 이게 다 아제프 탓이라고 생각하며 엘제이 몰래 그의 발을 자근자근 밟으려 했다. 이 자리에서 아제프가
화를 내 엘제이한테 혼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짓이었지만 엘리사의 생각보다 아제프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발을 쓱 피하며 애처로운 얼굴로 일어나 미안하다는 듯 제이의 손을 잡았다. 눈부신 미안에 처연함이
빗장처럼 걸려 애달픔을 자아냈다.

그가 웃자 엘제이는 순간 마약이라도 삼킨 듯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엘제이는 용서해달라는 듯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는 아제프를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엘리사는 언니에게 끼 부리는 아제프를 보며 이를 벅벅 갈았다. 몸을 한껏 낮추고 착한 척 웃는 걸 보니 그
간악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엘리사는 기가 죽은 척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얄미운 아제프
때문에 더는 참지 못했다.

엘리사가 가슴을 거칠게 퉁탕퉁탕 내리치며 엘제이의 시선을 끌었다.

“언니, 내 말 좀 들어봐. 이 남자가 글쎄 아까 나를 밀었다니까? 나 여기 다쳤어.”

엘리사는 하얀 팔뚝을 내보이며 칭얼거리듯 엘제이에게 매달렸다. 귀여운 얼굴이 아프다는 듯 울먹울먹 흐려졌다.
엘제이는 살갗이 발갛게 달아오른 엘리사의 팔을 보며 저도 모르게 아제프를 쏘아봤다.

내 동생을 이렇게 만든 놈이 너냐는 듯한 시선에 아제프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저를 항상 소중하게


쳐다보던 엘제이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적의에 좀 놀란 얼굴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 품에 안겨 그녀 몰래 혀를 내미는 엘리사를 보며 핏대를 세웠다. 그는 마녀 같은 여자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화를 참아냈다.

아제프는 속으로 엘리사를 때려죽이는 상상을 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엘리사가 비명을 지를수록 마음이 점점
가뿐해졌다.

순식간에 서글픈 표정을 자아낸 아제프가 엘리사에게 쥐어 뜯겨 피가 비치는 팔뚝을 내밀며 저도 속상하다는 듯
가련하게 말했다.

“……제이, 미안해요. 저는 그게 아니라 저 여자가 먼저,”

누가 봐도 아제프의 상처가 더 심했다. 엘제이는 상처가 가득 남은 아제프의 팔을 경악한 얼굴로 보다 이번에는


엘리사를 쏘아봤다.

엘리사가 아픈 척 슬그머니 팔을 만지며 엄살을 부렸다. 아제프도 질 수 없다는 듯 고운 입술을 깨물며 한껏


불쌍한 척을 했다.

아픈 척 낑낑거리는 둘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엘제이가 차분한 얼굴로 냉랭하게 말했다.

“둘 다 서로에게 사과하세요.”

저 남자에게 사과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참을성이 좀 더 부족한 엘리사가 이를 빠드득 갈며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막돼 처먹은 놈!”

“리사!”

동생에게서 나온 말에 엘제이가 경악하며 동생을 말렸다. 엘리사는 참지 못하고 몇 번 더 아르릉거리다 결국


엘제이에게 등짝을 맞고 말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혼나는 엘리사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가 입꼬리를 비죽 말아 올리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빌어먹을 여자.’
돌아서 있느라 그를 보지 못한 엘제이와는 달리 그의 입모양을 똑똑히 본 엘리사는 뒷목 잡고 넘어갈 뻔했다.

그녀는 억울한 듯 입술을 잘근 물면서도 증거가 없어 고자질할 수 없었다. 증거 없이 몰아붙였다가는 저 간교한


놈이 또 무슨 말로 언니를 꼬드길지 몰랐다. 엘리사는 분함에 입술을 뜯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결국, 2 차 대전은 아제프의 승리로 돌아갔다.

엘제이는 어서 사과하라며 엘리사를 다그쳤고, 엘리사는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고 진심은 한 점도 담기지도 않은


사과의 말을 뱉었다.

아제프가 고소해하면서도 불쌍한 척 눈썹을 내리고 자신도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엘제이는 좀 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었다. 아제프는 곧 다가올 포상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무척 여유로웠다.

날라리 환자지만, 환자 버프를 받은 승리자 아제프에게는 엘제이와의 달콤한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패배자
엘리사가 결국 언니한테 혼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나가는 엘리사를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속이 후련하고 시원했다. 이제 엘리사만
떠나면 엘제이가 다시 제 차지가 될 걸 안 남자는 언니 손을 꼭 잡고 가기 싫다며 빈둥거리는 엘리사를 자비로운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엘제이는 옷차림 때문에 엘리사를 방문 앞까지밖에 마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무룩해 하는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란델 경이 저렇게 된 게 내 탓인데, 어떻게 그냥 가겠어. 금방 갈 테니까, 먼저 자고 있어.”

“나 잠든 뒤에나 올 거야? 금방 온다고 하고서는! 안 자고 기다릴래…….”

엘리사는 살쾡이처럼 튀어나가려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불쌍한 척 말끝을 흐렸다. 누가 보면 영원히 헤어지는 것줄
알 만큼 절절한 모습이었다.

동생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속아 넘어간 엘제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리사를 달랠 뿐이었다.

“오늘 안에는 갈 거야. 평소에는 리사랑 계속 같이 있잖아.”

해사하게 웃고 있던 아제프의 얼굴이 굳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엘제이가 돌아갈 곳은 그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끊어지지 않을 가족이라는 연으로 묶인


자매와는 달리 그와 그녀는 알량한 친구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툭 튀어나온 입으로 불퉁히 바닥을 차는 엘리사를 서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엘제이가 돌아갈 곳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를 다 치워버리고 저 혼자만 유일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엘리사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새침한 얼굴로 그를 휙 노려보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치! 최대한 빨리 와!”

엘제이는 엘리사가 계단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그녀가 내려가자 창문으로 다가가 동생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 것이라고 여겼던 애정이, 그녀의 동생에게도 똑같이 향해 있었다. 아제프는 그의 것이라 믿었던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손을 꽉 쥐어짜며 웃고 있는 엘제이를 바라봤다.

이렇게 매달리는데 일정 이상 다가가면 선을 그어버리는 엘제이의 태도에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상처 입히지도, 울리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초조하고, 비참한데 그는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그녀의 동생도 결국, 엘제이의 핏줄이란 이유로 아무 짓도 안 하고 넘어갔다.

그는 자신이 무력해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다시 아무것도 못 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약한 건


죄였다. 그는 약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제프의 혈색이 창백하게 죽고, 화사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사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뒤를 돈 엘제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우뚝 서 있는 아제프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아제프,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엘제이가 이마에 송송이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그의 손을 잡아왔다. 따스한 손이 차게 질린 손을 주무르며


애정을 나눠줬다.

엘제이의 애정이 엘리사에게 있다고 한들 자신을 사랑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걸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머나먼 길을 걸어왔다.

그는 따스한 색감의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보는 걸 느끼며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제 품에 있었다. 제 손에 쥐고


있는데, 언제라도 떠나버릴 사람 같아서 때때로 두려웠다.

아제프가 힘 하나 없는 서글픈 목소리로 엘제이에게 애원했다.

“영원히 제 곁에 있겠다고 다시 한 번 말해줘요.”

“아제프?”

엘제이는 갑자기 달라진 아제프의 반응에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숨이 막히도록 꼭 끌어안아
오는 모습이 어쩐지 이상했다.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불안정해진 모습이 마음 아팠다.

‘당신은, 이런 사람인데……. 모든 걸 알고 있는 저조차 깜빡 잊을 뻔했어요. 미안해요, 아제프.’

몸은 다 컸지만 마음이 어긋나게 자라버린 사람. 그래서 누구보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사람.

혼자 살아온 세월이 누구보다 길지만, 그렇기에 혼자 남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강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어딘가 망가진 불안정한 사람이었고,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엘제이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따스한 손을 올리고 아제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약속했잖아요. 당신이 저를 바란다면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겠다고.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게요.”

“당신이 약속했다는 걸 저도 아는데……. 가끔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해요. 어느 순간 당신이 떠날 것 같아.


나는 이제 혼자가 싫은데, 눈을 뜨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요. 빨리 이 두려움을 끝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아제프가 깨질 것같이 연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무서웠다.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정했다. 당장 무언가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 일이 너무


더뎌서 이대로 있다가는 기다리던 순간이 허공으로 흩어질까 봐 두려웠다.

엘제이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꼭 잡은 그의 손을 다독이며 포근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우리 천천히 해요. 그게 뭐든, 천천히.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너무 빨리 갈 필요는 없어요.


때론 천천히 가는 길이 더 많은 걸 볼 수 있는 법이에요.”

천천히 가는 법. 더디더라도 천천히 차근차근 간다면 결국 그도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엘제이는 혹시 그에게 제가


안정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그를 천천히 토닥였다.

‘사랑해요, 아제프……. 제발, 외로워하지 마세요.’

아제프는 꽤 오랜 시간 엘제이를 힘주어 끌어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힘을 풀고 엘제이를 놓아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5 화
35

아제프는 혼자 욕실로 들어가는 엘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욕실 문이 달칵 닫히자 소리 없이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엘제이의 말이 맞았다. 아제프는 초조하게 생각할 것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엘제이의 마음은 그를 향해 있었고, 아제프는 그 마음을 붙잡아 둘 자신이 있었다. 그 마음만 확실하다면, 조금
더디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돌아갈 길을 모두 빼앗아 영원히 묶어두고 싶었지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아이젠을 죽이고 티아세 家를 집어삼키겠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아주 오랜 시간 계획해 오고 탐낸 것이었지만, 아버지를 잃은 엘제이가 그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할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포기하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많은 것이 탐났다. 하지만 엘제이만 곁에 있어준다면,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제나 허기지게 만들던 알 수 없는 갈증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긴 보폭으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간 아제프는 막 복도를 걸어오는 알모어를 발견하고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집무실로 끌고 들어갔다.

쾅-

아제프의 성급한 행동에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알모어는 박력 넘치는 아제프의 행동에 당황한 얼굴을 하며 자신이 한 잘못들을 떠올렸다. 오늘 잘못한 일이
한둘이 아닌 알모어가 침을 꿀꺽 삼킬 때, 아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모어.”

새파랗게 물든 눈이 어떤 기대를 담고 반질거렸다. 매끈한 홍채가 짙은 열감에 달아올라 무서울 정도로 빤히


알모어를 쳐다봤다. 아제프는 어쩐지 초조하고 긴장되어 보였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나오는 뜨거운 숨결과 긴장으로 핏대가 설 만큼 꽉 쥔 손.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반질거리는 짙고 푸른 눈.

그래. 그는 마치, 사랑 고백을 하기 전의 남자 같았다.

“후작님?”

“코르디스가 끝나면, 제이에게 청혼할 거다. 티아세 家로 보낼 예물을 준비해.”

아제프는 말을 뱉어놓고도 뭔가 불안한지 입술을 달싹이며 한숨을 내셨다. 바로 앞에 빠른 길이 있는데, 굽이진


골목길로 돌아가려니 익숙지 않은 답답함에 힘이 들었다.

[너무 빨리 갈 필요는 없어요. 때론 천천히 가는 길이 더 많은 걸 볼 수 있는 법이에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약자가 되는 느낌. 그 끔찍한 세월이 떠올라 진저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걷다 보면 굽이진
골목길에 소담히 피어 있는 들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부드럽게 피어나는 미소와 깊게 팬 볼우물을 생각하며 잔인한 충동을 참아냈다. 오랜 시간 엘제이와
함께 있다 보면, 어쩌면, 자신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불확실한 걸 싫어하는 남자는 어쩐지 그런 막연한 기대를 믿어보고 싶어졌다.

‘내 곁에 있어준다면……. 너를 나로 물들이는 게 아니라, 너는 나를, 나는 너를, 그렇게 서로에게 물들어


간다면…….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럴까?’

아제프는 달라진 자신이 초라해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엘제이의 말을 믿고 더디게 가는 법을 배워보기로 했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까맣게 그을려 버렸던 마음이 환한 빛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음의 행방. 그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늘 나른하고 퇴폐적이던 남자의 분위기가 변했다. 가까이 가면 그 향기에 질식할 것 같은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누구든 찔러버릴 듯 가시를 세우던 사람이 부드럽게 풀렸다.

요즘 아제프가 내리는 명령은 대부분 엘제이에 대한 것뿐이었다. 누군가를 협박하고 죽여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일에 집착하던 사람이 달라졌다. 그는 이제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알모어는 최근에 생겨난 아제프의 변화가 무척 기꺼웠다. 서릿발 같은 시선과 냉랭한 명령은 여전했지만 늘
신경질적이던 사람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알모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후작님…….”

알모어가 감동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아제프를 보며 울먹울먹 그를 불렀다. 진심으로 그의 삶을 축복해주는 눈


위로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알모어를 바라보던 아제프의 얼굴이 괴기한 것을 본 듯 일그러졌다. 뭔가
굉장히 기분 나빠졌다. 아제프가 소름 돋은 팔을 쓱쓱 문지르며 알모어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그를 쳐다봤다.

아제프는 처음 만난 미지의 생명체를 관찰하듯 알모어를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 원래 그렇게 못생겼었나?”

“네?”

감동에 젖어 있던 알모어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알모어는 진지하게 그의 못생김을 관찰하는 아제프를 보다가
입꼬리를 씰룩씰룩 흔들었다.

물론 아제프에 비교한다면 심해의 해양생물 같은 얼굴이었지만 알모어는 제 나름대로 깔끔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좀 억울한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하자 금세 감정을 수습했는지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 아제프가 냉랭하게 물었다.

“아니, 됐다. 그보다, 똑똑한 시녀를 알아보라고 했던 건 준비됐겠지?”

“찾긴 했는데, 청혼하신다면서, 왜…….”

알모어는 그간 들여보냈던 간자들이 한 짓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암살, 독살, 질식사 등. 대부분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던 간자들의 일을 떠올리며 알모어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내게 말대꾸를 하는 건가? 죽고 싶나?

“그게 아니라, 청혼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일 들여보낼 테니 제이가 가면 내 방으로 불러와라.”

아제프는 당황한 얼굴을 한 알모어를 천하의 멍청이를 보듯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휙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시간을 꽤 끈 것 같은데 그사이에 엘제이가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쭈뼛쭈뼛 저에게 걸어오는 몸짓, 그 순간을 또 한 번 보고 싶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

욕실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살며시 옷을 벗은 엘제이는 조심스럽게 걸어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놀란 몸을 풀고 시녀들이 준비해 놓은 수건으로 살결을 문지르던 엘제이의 손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엘제이의의 문장이, 곧 사라질 듯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엘제이는 망연한 얼굴로 문장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문장을 문질렀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옅어진 문장이 아롱아롱 흔들렸다.

문장 위를 뒤덮었던 빛무리들이 모두 사라지고 작은 흔적처럼 옅어진 문장은 문지르면 지워질 듯 연약해 보였다.

처음 봤을 때의 문장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의 푸르름을 품고 있었다면, 지금의 것은 갓 움튼 아기 새싹의


잎새처럼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연약하고 나약한 것이었다.

엘제이는 곧 끊어질 것처럼 연약하게 피어 있는 문장을 지워버리려는 듯 홀린 것처럼 문장 주변을 벅벅 문질렀다.


살갗이 붉게 부르트고, 핏물이 아롱아롱 맺힐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엘제이는 결국 지워지지 않은 문장에
울음을 터트리며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뭐야. 지워지려면 아주 지워져버리지! 프리멧사 님, 당신께서 제게 준 문장을 부디 거둬가 주세요. 이런


문장, 다른 사람 주세요. 거둘 것이라면 하루빨리, 없애주세요.’

신은 둘에게 각각 한 가지씩만 알려줬다.

엘제이에게는 문장의 유무를, 아제프에게는 문장이 발하는 방법을. 신은 그들에게 기회를 줬고, 이제 문장의
행방은 둘의 손에 달렸다.

엘제이는 핏물이 망울진 가슴을 내려다봤다. 따갑지도 않은지 몇 번 더 문장을 문지르던 엘제이는 사그라질
것처럼 연약하게 흔들리다가도 끝내 없어지지는 않는 문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왜 옅어진 걸까? 혹시, 문장이 내게 잘못 온 건 아닐까? 어쩌면, 지워지는 게 아닐까?’

엘제이의 눈 위로 희망 같은 게 반짝반짝 떠올랐다. 눈이 부시도록 광채를 뿜던 문장이 힘을 잃고 스러졌다.


엘제이는 죽어가는 문장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라져버려. 원한 적 없었으니까 이대로…… 없어졌으면 좋겠어. 네가 미워. 싫단 말이야. 그러니 없어져버려,


제발…….”

엘제이가 문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말라는 듯 웅웅거림을 토해내는 문장이 미웠다. 저를 미워하지
말라는 듯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문장이 싫었다.

문장이 너무 밉고 싫은데, 그래도 문장이 있었기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엘제이는 가엽게 웅웅거리는 문장을 노려보며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의 것이 아니라면, 필요 없어. 없어져버려!”

문밖에서 엘제이를 기다리던 아제프는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섬뜩한 고통을 느끼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엘제이의 비명 섞인 외침에 놀란 아제프가 서둘러 달려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제이? 왜 그래요? 제이!”

“아-”

그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엘제이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곧 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쿵쾅 문을 두드리는 아제프의 힘에 문이 거칠게 요동쳤다.

엘제이가 다급한 걸음으로 문 근처에 다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넘어져서……. 이제 괜찮아요. 다 했어요. 금방 나갈게요.”

엘제이는 핏물이 밴 수건을 한쪽에 잘 접어두고 시녀가 준비해 놓은 옷을 꺼내 입었다.

이번에도 그녀 혼자서는 모든 걸 끝낼 수 없어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린 엘제이가


쭈뼛쭈뼛 그에게로 걸어갔다.

엘제이가 수줍게 볼을 물들이고 저를 향해 걸어오는데, 아제프는 기다렸던 순간이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그는


예민한 후각에 닿는 옅은 피 냄새에 코끝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디 다쳤어요? 피 냄새가 나는데? 한번 봐요.”

많이 다치기라도 했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그는 유독 솔솔 풍기는 향내에 고개를 갸우뚱 흔들며
엘제이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몸을 꼼꼼히 살펴봤다.

‘어디서 나는 거지?’

그는 근원지를 찾으려는 듯 코끝을 찡그리며 연신 향을 맡았다.

주변을 맴돌다가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는 아제프의 행동에 하얗게 질렸던 엘제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파헤치는 그의 행동에 엘제이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밀어버렸다.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작은 몸짓이었지만 그녀가 거부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아제프가 충격 받은 얼굴로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

붉게 핀 얼굴이 다시 파랗게 질렸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엘제이가 잔뜩


일그러진 음색으로 변명을 토해냈다.

“제가 지금 달거리를,”

아제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6 화
36

엘제이의 대답에 한 걸음 물러난 아제프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아제프는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엘제이를 보며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더라? 한번 보자고 했던가? 빌어먹을. 이 미친놈.’

아까 했던 말을 떠올리자 저 자신에게 하는 욕설이 더 거칠어졌다. 그래. 욕실에서 다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저


안에는 날카로운 물건은 거의 없었다. 뭔가 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통 여자들이 피를 흘릴 일이
그것밖에 없기는 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 생각해 낸 변명이 그것이었다. 엘제이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에 울먹울먹한 눈으로 땅끝을 내려다봤다.

아제프는 제가 성급했음을 알고 너무 미안해졌다. 그가 속으로 과거의 저를 때려죽이는 상상을 하며 서둘러


사과했다.

“그……. 미, 미안해요.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제가 다 미안해요.”

아제프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혀끝이 저리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하며 엘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청초하면서도, 고혹적이었다.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사과를 반복하며 엘제이의 목덜미를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다시 한 번 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꽃잎을 뭉개듯 아프지 않게 화인을 찍고 제 것이라는 표시를 남겨두고
싶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살짝 고개를 들었던 엘제이가 푸르게 번뜩이는 청안을 마주보다 다시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엘제이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발끝을 향하고 있었다. 한동안 목덜미에서 시선을 못 떼던
아제프는 시선 둘 곳을 찾아 여기저기 눈을 돌렸다.

절절매던 아제프가 정신을 차리고 시녀를 불러 두툼한 방석을 가져오게 했다.

방석을 받은 아제프는 중환자를 모시듯 방석을 잔뜩 깔고 엘제이를 폭신한 의자 위에 부드럽게 앉혔다.

그는 어디서 들은 게 있는지 담요를 받아와 엘제이에게 다가왔다. 몸을 스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남자의 탄탄한 손이 담요를 살짝 떨어트렸다. 그는 차마 덮어주지는 못하고 머뭇머뭇 손을 떼어냈다.

사슴같이 유려한 목덜미가 분홍빛으로 물든 걸 조금 쑥스러운 기분으로 지켜보던 아제프는 이 말을 해도 되나 몇


번이나 망설이다 물었다.

“음……. 따뜻한 거라도 좀 먹어야, 아니, 혹시 아프지는 않으세요?”

“괜, 찮아요.”

재빨리 돌아온 엘제이의 대답에 아제프는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면서도 연신 눈을 흘깃거리며 엘제이를 살폈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엘제이가 손끝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제프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엘제이를 보며 또 사과했다.

“제가 괜히,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해요.”

이번에도 엘제이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어린 나이에 외교부 장관직에 앉을 정도로 화려한 능변가인 아제프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계속


미안하다고만 속삭이다 입을 꾹 다물었다.
시녀들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 둘의 눈치를 살피다가 하나둘씩 음식을 내어왔다.

어색한 시선과 어색한 공기.

아제프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연신 엘제이에게 향하는 시선을 막을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담요를
꾹 쥐고 있는 엘제이를 바라본 아제프가 시선을 내려 작은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는 놓지 않을 것처럼 담요를 꼭
붙든 앙증맞은 손가락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상황이 무척 어색했지만,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하지는 않았다. 둘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연신 매만지다가 침묵에 휩싸인 식사를 시작했다.

아제프는 식사를 하는 내내 정중하고 다정했다. 그는 먹기 좋게 자른 음식을 엘제이에게 조금씩 건네며 그녀가


급히 먹지 않게 살폈다. 어미 새가 아기 새의 식사를 챙기듯 잘게 찢은 음식들은 몇 번 씹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엘제이는 제가 한 거짓말 때문에 중환자 취급을 받는 게 민망하고 면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다감한


행동에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해졌다. 엘제이는 부끄러워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 하던 처음과 달리 거짓말하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다친 어깨가 조금 불편한 듯 어색해하면서도 능숙하게 칼질을 했다. 엘제이는 혼자 먹기도 불편할 텐데 제


것을 챙기느라 바쁜 그를 보며 많이 미안해졌지만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가만히 아제프를 살피며
얌전히 그가 주는 것들을 받아먹었다.

식사하는 내내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에도 어색하게 가라앉았던 공기는 부드럽게
풀리고 달콤하게 달아올랐다.

굳이 억지로 대화 주제를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처럼 평화로운 분위기.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나 가족들이 낼 수 있을 법한 그런 따사로운 빛이 둘 사이에도 스며들었다.

식사가 끝나자, 가볍게 차를 마시던 아제프는 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너무 늦기 전에
돌려보내 줘야 했다. 원래는 새벽이 다 되도록 보내줄 마음이 없었지만, 엘제이가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아제프는 차를 다 마셨는지 손끝만 우물쭈물 만지며 얌전히 앉아 있는 엘제이를 보며 살짝 일어났다. 늘 온순한


양 같은 사람이었는데, 오늘 처음 화내는 모습을 봤다. 아제프는 언젠가 다른 모습들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가 당신께 드리는 선물, 만나러 갈래요?”

아제프가 불긋한 마음을 숨기며 가볍게 말했다. 발끝을 보고 있던 엘제이는 사뿐히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았다.
부드럽게 풀린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보며 손을 잡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그의 눈은 혹시 그녀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그녀의
주위를 바쁘게 살폈다.

다른 사람을 보고 그리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유독 엘제이는 작은 것 같았다. 그는 조그만 손가락을 꼭 말아 쥐며


보들보들한 손마디를 장난치듯 만졌다. 아까 담요를 꼭 쥐고 있던 모양이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엘제이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열감과 간지러움에 몸을 움찔거리다가 부드럽게 웃고 있는 아제프를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 때문인지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식사가 맛있었나?’

엘제이는 밥을 맛있게 먹고 고롱고롱 애교를 피우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해사한 얼굴 위로
사랑스러운 볼우물이 깊게 팼다. 그게 무슨 이유에서든 아제프의 기분이 좋다면 엘제이 또한 그랬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옅은 희망으로 조금 들뜬 상태였다. 아직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문장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계속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

그가 원하는 게 자신이 아니라 티아세 家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엘리사는 알체스테를 만나 황궁에 갈
것이었고, 그녀는 공작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계속 그의 옆에서 지금처럼 있고 싶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는 티로시 영애에게 보냈던 편지를 떠올리며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아제프를 보면 마음이 무척 아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금 걷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인 듯 각종 무기가 공터


한구석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시선을 돌려 공터를 살피던 엘제이는 다각다각 걸어오는 말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짙푸른 눈을 한 말 한 마리가 순한 눈을 깜빡이며 걸어왔다. 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밖에 노을이 져서


그런지 금빛으로 물든 것 같기도 했다. 엘제이는 우아한 갈기를 반짝이며 걸어오는 말을 보고 아제프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눈 색도, 털 색도 그를 빼닮아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에도 은은한 광채를 뿌리는 말의 모습이 마치 전설 속의


신수 같은 느낌이었다. 엘제이가 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아제프가 하인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세스티안에서 들여온 아할테케라는 말이에요. 마음에 들어요?”

세스티안은 드넓은 제도 끝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였다. 말로 달려도 수십 일이 걸리는 곳에서 데려왔다는 말은


엘제이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는 아제프를 닮은 푸른 눈을 바라보다 손을 얹어 콧잔등을 살짝 쓸었다.

“이런 말은, 처음 봤어요. 정말 너무 예쁜데……. 제가 승마에 서툴러서 좋은 명마를 썩히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워요.”

엘제이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지만 오늘도 낙마한
걸 봐서는 자신은 승마에 재주가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한번 있고 나니 사실, 말을 타는 게 조금
무서워졌다.

엘제이는 그의 다친 팔을 힐끔 바라보며 속상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는 오늘 일부러 그녀를 떨어트린 것이 너무 미안해졌다. 다치게만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탓에 그녀를 상처 입혔다. 아제프가 미안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원한다면 제가 더 가르쳐드릴게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잖아요. 다음번에는 절대,


죽어도 떨어트리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정말 미안했어요.”

엘제이는 벌써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은 그의 사과에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사과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과하는 걸 지는 것으로 생각해 애초에 그럴 일을 만들지 않던 사람이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여오자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혹시 아제프도, 나를 받아들여준 건 아닐까?’

아제프는 남녀 간의 애욕에 대해 지독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자신과 같은 마음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친구 정도는 되었을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자신의 마음이 희망으로 들떠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화사하게 웃고 있는 아제프를 힐끔


곁눈질했다.

‘당신께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엘제이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같은 걸 궁금해했지만 막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그의 대답이 두려워서, 아제프는 엘제이가 물러설 게 두려워서, 그들은 속내를 감추고 서로를 바랐다.

곧 끊어질 듯 연약해진 인연. 하지만 달리 본다면 그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서로를 간절히 바라는
시작점에서 둘의 인연이 얼기설기 엮이기 시작했다.

아제프는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끼며 살갑게 웃었다. 그는 말간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싱그럽게 웃었다.

“이름을 지어주는 건 어때요?”

‘이름?’

엘제이가 그를 닮은 말을 쳐다봤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말인지 낯선 사람의 손에도 얌전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하얀 속눈썹인 푸른 청해를 눈꽃처럼 뒤덮었다.

그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그를 닮아 있어서 엘제이는 충동적으로 말의 이름을 지었다.

“아즈(Aze). 아즈라고 부를래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7 화
37

“아즈? 혹시, 제 이름을 붙인 거예요?”

아제프가 잠시 생각하다가 알겠다는 듯 웃었다. 그의 이름인 아제프(Azef)에서 따온 이름이 분명했다.

온종일 그에게 놀림을 받아서인지 엘제이는 옅은 웃음기를 달고 나온 말을 경계했다. 그녀는 예쁘게 웃는 그를


보다가 미리 방어하는 사람처럼 몸을 움찔 떨었다.

“……이름을 붙이는 건 제 마음이니까요. 제게 주셨으니, 제 말이잖아요.”


“저는 좋아서 그러는걸요. 이 말을 볼 때마다 당신이 제 생각을 할 테니까.”

경계를 세운 말에도 아제프는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엘제이의 머리를 상냥하게 토닥였다.

구밀복검. 배 속에 서늘한 칼날을 품고도 달콤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

저 상냥한 얼굴에 숨겨진 속내는 시꺼먼 감정들로 들썩인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엘제이는 그런 건 생각하기
싫었다. 저 다정한 얼굴이, 상냥한 미소가, 부드러운 손길이, 모두 진짜라고 믿고 싶어졌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돼요?’

만약 문장이 사라진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를 친구라 여기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 꽃처럼 화려하게 웃으며 제 마음을 채갈 거예요. 당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까. 당신에게는 티아세가, 그리고 어쩌면…… 저도, 필요하니까.’

아제프는 주홍빛 노을이 사라지고, 새까만 밤빛이 내려앉는 하늘을 보며 엘제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서늘해지는 공기로부터 그녀를 지키며 노을처럼 온화하게 속삭였다.

“해가 저무네요. 몸이 안 좋으니까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

“티아세 家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온 건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밤도둑이 되어버려서.”

아제프는 헤어지는 아쉬움을 뒤로 삼킨 채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눅눅하게 젖은 음습함을 삼키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엘제이는 그의 말이 싫었다.

“도둑 아니에요. 제가 따라간 것을 왜 자꾸 도둑이라고 하세요.”

“그 대가가 당신이었으니 저는 도둑이어도 좋아요. 그날, 도둑이 되었기에 제 곁에 영원히 있어 주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받았잖아요.”

그의 얼굴에서 마약 같은 사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희고 고운 얼굴은 해사했지만, 깊은 심해의 눈은 무슨


생각을 담았는지 알 수 없게 반질거렸다.

엘제이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아제프는 이내 생긋 웃으며 질척거리는 마음을 털어냈다.

“제이. 내일은 오지 말아요.”

“왜, 요?”

오지 말라는 말에 일순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희망에 들떴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엘제이가 말을
흐리다가 그를 올려봤다.

아제프는 볼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엘제이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아제프를 보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발긋한 감정이 전염되어 엘제이의 뺨을 달궜다.

“그거, 음, 아프다고 들어서…….”


아제프가 엘제이의 배를 힐긋 내려다보며 말을 흐렸다. 그의 목소리에 엘제이의 얼굴이 불긋한 단풍처럼
달아오르자 아제프가 탄식 같은 뜨거운 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제가 가끔 미친 사람처럼 느껴져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또 금세 취소하고 싶어져요. 이틀 뒤에는


코르디스가 열리는데, 그때가 되면……. 아니에요.”

아제프는 또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준비를 잘 해서 더 멋지게 하고
싶었다. 어쩌면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순간을 초라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제이. 제가 당신이랑 살고 싶다고 한다면, 오늘처럼 헤어지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당신을 기다리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할 건가요?’

엘제이는 그가 자꾸 말을 흐리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봤다. 시린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색감의 눈과 마주치자
섬뜩한 감정만 담던 푸른 눈도 그녀를 따라 맑게 물들었다.

“아제프?”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이
악기의 선율처럼 나부꼈다.

작은 욕심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에게는 티끌만치 작은 욕심이었다. 그는 더한 걸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말처럼 모든 걸 천천히, 그녀와 함께 걸어가고 싶었다.

“제이.”

아제프가 엘제이의 이름을 부르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넘겼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사르르
넘어갔다. 가닥가닥 흐트러진 밀색 사이로 희고 고운 이마가 살며시 드러났다.

그는 무언가를 덧그리듯 엄지로 하얗고 보드라운 이마를 어루만졌다.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살결이 고운 살결
위를 간질였다. 앞머리가 날아가자 조금 부끄러워진 엘제이가 그의 옷깃을 흔들며 물었다.

“아제프……. 왜 그러는,”

“저는 지금, 참아내는 중이니까 제가 뭘 하더라도 가만히, 가만히 계세요.”

아제프가 엘제이의 말을 잘라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가 짐승의 하울링처럼 오싹하고
뜨거웠다.

델 것처럼 달궈진 소리에 엘제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그녀의 얼굴을 보던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타오르는 촛불처럼 뜨거운 입술이 엘제이의 이마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쪽.

인주를 묻힌 듯 붉은 입술이 하얀 살결을 만나 매끄러운 소리를 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덜미를 깨물어 지독할
정도로 모든 걸 탐하는 대신, 그저 부드럽게 입술을 내렸다.

붉은 입술이 집착 어린 소유의 감정을 묻혀 그녀를 제 것이라 주장하듯 보이지 않는 화인을 남겼다.


이마에 닿은 화끈거리는 감촉에 배 속이 찌릿 울리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엘제이가 숨을 멈추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눈과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우아한 턱 끝이 보였다. 엘제이가 그의 턱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허락을 내리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고 한 번 힘주어 입술을 꾹 내리찍던 남자는 곧 새털 같은 숨결을 내뱉고 허리를 폈다. 욕심이 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이것으로 참을 수 있었다.

아제프의 생각대로 엘제이는 아무 반항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은 밀색


속눈썹을 바라보며 엘제이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원래의 온도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볼 위로 차가운 손이 올라가자 엘제이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가 아래를 향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진흙탕처럼 역겹고 끔찍하게 느껴지던 행위가 그녀에게만은 달랐다. 다른 사람의 피부 따위는
손끝 하나만 닿아도 벌레가 득실거리는 것처럼 혐오스러웠는데, 엘제이의 모든 곳에 닿고 싶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이 예뻤고,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손이 귀여웠다. 아제프는 제 옷깃을 쥐고 발끝만
바라보는 엘제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얌전하고 순한 성격, 따뜻한 색감의 머리카락과 눈, 웃을 때 보이는 작은 보조개, 제 앞에서 늘 발긋하게


달아오르는 뺨, 그는 엘제이의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다 마음에 들었다.

“부끄러워요?”

아제프의 직설적인 물음에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다 제 발을 밟고 휘청거렸다. 아제프가 재빨리
엘제이의 허리를 붙들며 그녀를 바로 세워줬다.

밤빛이 내려앉아 남색으로 물든 그의 눈이 엘제이를 향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진득한 시선에 엘제이가 더듬더듬
서툴게 말하며 웅얼거렸다.

“음, 저는…….”

엘제이는 귀 끝까지 발긋하게 물든 채 온몸으로 수줍음을 토해냈다. 아제프는 어린아이가 된 사람처럼 웅얼거리는
엘제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좋은데. 또 하고 싶어요. 저는 이제 당신과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요.”

그가 다정한 음색으로 속삭이며 엘제이를 빤히 바라봤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아제프의 눈은 짙고 푸른


청남빛이었다.

엘제이는 관통할 것처럼 쏘아지는 시선에 숨을 삼켰다. 시선을 가로채고 놓아주지 않는 매혹적인 색감에 엘제이는
바다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엘제이의 머릿속을 떠돌던 온갖 문제들이 푸른 파도에 휩쓸려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간신히 그의 이름만,
숨결처럼 연약하게 토해냈다.

“아제프.”

엘제이는 이런 순간에는 꼭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는 당황하거나 놀란 상황에서는 꼭 성이 아닌 제 이름을


부르는 엘제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서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선량한 얼굴을 했다. 그의 얼굴에 감도는 빛이 꼭
제게 애정을 품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엘제이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대답은 나중에 들을 거예요. 그러니 아직은 하지 말아요.”

아제프는 아직 그녀가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겁이 많은 하얀 강아지에게는 쉬어갈 틈이


필요했다. 아제프는 오늘 유독 경계가 옅어진 엘제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 건가?’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제프는 어쩌면, 자신은 지금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제프의 생에 몇 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평소에 그가 선을 넘으려 들며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던 사람이 오늘은 다른 얼굴을 했다. 아제프가 성큼성큼
다가섰음에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닌, 다른 빛깔을 머금었다.

그건 환희의 빛이었다. 아제프는 기대와 옅은 희망을 품고 반짝반짝 움트는 신록의 빛에 눈길을 주며 생긋 웃었다.
일부러 꾸미지 않았음에도 화사한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그의 시선이 흰 뺨으로 향했다.

엘제이의 보조개는 주인을 닮아 수줍음이 많았다.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보조개는 그녀가 환하게 웃을 때나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엘제이를 온종일 곁에 둬도 잘 볼 수 없는 보조개가 지금 이 순간, 무척 보고 싶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산호색 입술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재촉하지 않을 테니 대신, 웃는 거 보여주세요.”

“네?”

“웃어주세요. 예쁘게.”

“아-”

그의 재촉에 엘제이가 입꼬리를 조금 말아 올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눈꼬리가 곱다랗게 접히고 그가


좋아하는 볼우물이 깊게 팬 환한 미소였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아제프.’

엘제이가 환하게 웃자 아제프가 다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감상하며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문득, 떠오른 감정이
있었다.

‘사랑스럽다.’

아제프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는 길게 음영이 진 보드라운 볼을 바라보며 말없이 옷을 벗어 엘제이의 어깨


위에 걸쳐줬다. 다시, 그를 찾아오라는 마음의 표현, 또 돌려주러 오라는 약속이었다.

한동안 아제프는 작은 미소를 머금고 예쁘게 접힌 입꼬리와 눈 모양을 파란 눈에 담았다. 그의 눈 위로 꽃잎 같은


아름다운 감정들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아제프의 눈빛이 꼭 저와 닮은 것 같아서, 그도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엘제이의 가슴이 두근두근


맥동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데 정말 아무 마음이 없는
걸까. 그의 마음이 진심인 것 같아 엘제이는 괜히 기대되고 떨렸다.

아제프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용기가 났다. 엘제이는 당장에라도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제프!”

참고 참았던 감정을 토해내듯 질끈 쥐어짠 목소리가 선연한 감정을 담고 툭 튀어나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8 화
38

늘 조그맣고 차분하게 말하던 사람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이름을 힘차게 불렀다. 아제프는 감정의
파도로 출렁이는 초록색 눈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네.”

엘제이는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그녀의 부름에 답했다. 밝은 빛을 뿜는 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워 무거운
돌로 꾹꾹 누르고 몇 번이나 힘주어 삼켰던 감정이 엘제이의 눈 위를 점령했다.

그녀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장이 있어요. 문장이 있는데, 사라져가고 있어요. 저도 당신 옆에 계속 있고 싶어요.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 되고 싶어요.’

지극히 충동적인 기분이 든 엘제이가 막 샘솟는 감정을 고백하려 했다.

“아제프. 저는,”

아마 그대로 시간이 지났다면 횡설수설 어수선한 마음이 진솔하게 새어 나왔을 것이었다. 엘제이가 막 정리되지
않은 문구들을 힘겹게 뱉으려 할 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입을 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위에 밤자락이 걸려 숨을 죽이던 티아세 家는 주인이 돌아오자
북적북적 흔들렸다.

엘제이가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뒤를 힐끔 돌아봤다. 8 마리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가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희고 고아한 백조를 꽃넝쿨이 휘감은 문양, 순수를 상징하는 티아세 가의 문양이었다.

엘제이의 눈에 우아한 날갯짓을 시작하는 백조의 문양이 깊숙이 박혀들었다. 들끓는 용암처럼 치솟던 감정이
빗물을 맞은 모래처럼 사그라들었다. 엘제이는 입술을 다물고 마차의 문이 열리는 걸 망연히 지켜봤다.
“제이 아버지가 오셨나 보네요. 늦은 시간에 데려다줘서 어쩌죠? 제이, 혼나는 거 아니에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아이젠이 돌아온 게 퍽 기꺼운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는 빳빳이 굳어버린 엘제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응? 아버지 오셨는데,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인사를 드려야…….”

“같이 가요.”

엘제이가 뭐라 뭐라 웅얼거리며 망설이자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꼭 쥐고 마차에서 내려온 아이젠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돌린 아이젠이 아제프와 엘제이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얼굴
곳곳에 주름이 팼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은 중년의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야?”

“아, 아버지.”

“공작님, 안녕하세요.”

엘제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해 아제프가 아이젠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 아이젠은 엘제이 어깨
위에 있는 아제프의 겉옷과 꼭 붙들린 손을 보다가 얼굴을 살짝 들어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 자네 오늘 휴가를 냈다고 들었는데, 내 딸과 함께 있었나?”

“네. 제이가 승마에 서툴러서 제가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제이가?”

엘제이가 승마에 서투르다는 말에 아이젠이 의아한 눈을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딸아이를 쳐다봤다. 그는 눈치껏


모른 척하며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군. 자네에게 신세를 졌어,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한번 우리 집에 초대하면 좋겠군. 내 딸을
데려다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제가 제이를 붙잡아 둔 것이니 늦었다고 혼내지는 마세요.”

아이젠은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딸아이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애칭을 부르는 아제프를 흘깃 쳐다봤다. 배포가 크고,
사람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할수록 더 아까워지는 기분에 아이젠이 입맛을 쩝
다셨다.

“내가 그럴 리 있나. 내 딸과 놀아줘서 고맙지. 나는 이만 들어갈 테니 자네도 조심히 가게나.”

아이젠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부드럽게 엘제이를 재촉하며 어서 들어가자는 몸짓을 했다.

아제프가 아이젠을 관찰하며 석연치 않은 얼굴을 했다.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리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로 엘제이가 매번 물러나는 건 아닐까, 짐작한 아제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 두 쌍이 허공을 배회하며 서로를 지그시 쳐다봤다. 명백히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에도 휘어진
눈가는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아이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엘제이를 또 한 번 재촉했다.

“제이야, 날이 추우니 어서 들어가자.”

아이젠과 아제프의 미묘한 신경전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엘제이가 흘깃 아제프를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저, 란델 경……. 그럼, 안녕히 가세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네. 감기 걸리지 않게 이불 꼭 덮고, 창문 잘 닫고 주무세요.”

아제프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조금 안심한 얼굴을 한 엘제이가 아이젠을 따라 발을 옮겼다.

아름다운 봄날을 시기한 찬바람이 휭- 불어와 얇은 셔츠만 입고 있는 아제프의 등을 때렸다. 그는 멀뚱히 서서


집 안으로 걸어가는 부녀를 지켜보았다. 똑같은 색감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산들산들 흔들렸다.

엘제이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아이젠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였다. 그는 좋은 부친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숨길 수 없는 사랑을 담아 온화하게 빛났다.

감추려 하지도 않는 그 선연한 감정에 아제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문득, 엘제이가 뒤를 살짝 돌아보며 우뚝 서 있는 그에게 한 차례 손을 흔들었다. 그가 알 수 없는 감정이라


정의했던 무언가가 거센 물살처럼 밀려와 그의 온몸을 강타했다. 아제프는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기분에 혀를
씹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화답에 엘제이가 조금 웃었는지 위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망막에 맺혔다. 제법 멀어진 거리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임에도 살짝 올라간 입매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아제프는 뜨겁게 달궈지는 심장을 느꼈다. 알지 못한 게 아니었다. 인정하는 순간 약자가 될까 봐 한없이


두려워져 외면했다.

서툴고 나약한 사람을 경멸했다.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천치라 생각했다. 아니, 모든 사람이 혐오스러웠다.
그의 삶이 너무 더럽고 비참했기에 어쩌면 세상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데,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이 싫었다. 가끔 아무 고민 없이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이들을 보며 숨이 막힐 것 같은 경멸감이 솟구쳤다.

그런데 그녀는 아니었다. 언제나 엘제이 티아세만은 그의 예외였다.

달콤한 색감의 꽃이 꽃망울을 톡, 터트렸다. 갓 세상에 드러난 연약한 꽃잎이 화사한 빛깔을 뽐내며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꽃잎이 붓처럼 휘어질 때마다 미지의 감정이 써내려졌다.

아제프는 알 수 없다고 외면하던 감정을 자각했다. 그건 사랑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입속에 맴도는 말을 조그맣게 내뱉었다.

“사랑해요. 제이.”
주인 없는 고백은 허공으로 띄워져 이내, 부서지듯 흐트러졌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텅 빈 손을 들어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의


고백은 결국 허공으로 흩어졌고, 그녀에게 닿을 리 없는데도 괜스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체온이 낮던 몸이 유독 달아오른 느낌에 아제프가 가벼이 몸을 털며 하늘을 올려봤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밤하늘을 보며 문득, 기억 저편으로 치워버린 어느 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가 막 5 살이 되었을 때, 늘 의젓했던 아제프가 단 한 번 소피아를 졸랐던 적이 있었다. 어린 날의 그는 솜털이


보송보송 들어 있는 솜이불을 사달라고 소피아를 졸랐다. 소피아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에도 아제프의 조름은 계속됐다. 당시 그들은 제대로 된 음식 하나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뭐 때문인지 아제프는 고위귀족들이나 얻을 수 있을 법한 솜이불을 사달라고 계속해서 청해 왔다.

광인처럼 살벌한 아버지에게 눌려 떼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어리광 한 번 피우지 못한 어린 아들이 안쓰러웠던


소피아는 들어줄 수 없는 청에 몇 날 며칠 눈물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아는 우연히 만난 옛 인연의 도움으로 아제프를 위한 솜이불을 받아왔다. 낡고 가난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 보드라운 이불은 곧 의심 많은 휴버트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 밤, 오늘처럼 별이 무척 밝은 날 밤, 휴버트는 누구에게서 솜이불을 받아왔냐고 소피아를 닦달했고 소피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휴버트는 광분하여 날뛰며 어린 아들이 꼭 쥐고 있는 이불을 빼앗아 불태워버렸다. 솜을


가득 머금은 이불은 화마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유년기를 박탈당하고 잘 울지 않게 된 소년은 솜이불을 뺏긴 날만큼은 서글프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미


사라져버린 이불의 흔적을 찾으며 잿더미를 더듬었지만, 솜이불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소중한 걸 만들지 않았다.

“다시는, 소중한 걸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생겨버렸어.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까, 빼앗기지 않아. 빼앗길
바에는 힘으로라도…….”

그는 밤하늘을 보며 속삭이다가 말끝을 흐렸다. 힘으로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걸어와 주기를 바랐다.
힘으로라도 뺏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번 자각한 이상 엘제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입을 다문 아제프는 밤빛을 받아 고아하게 빛나는 저택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엘제이는 5 살 이후, 처음 생긴 소중한 것이었다. 엘제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때의 솜이불이 생각났다.

그 이불 안에 몸을 말고 들어가면 코끝으로 파고드는 달달한 햇볕 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포근하고 안락했던


그만의 요새. 그 속에서만큼은 어떤 고민이나 걱정 없이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아제프 란델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란델 家의 마차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아제프는 옆에 세워진 티아세 家의 마차를 힐끔 바라봤다. 호수 위에 발끝을


담근 백조가 막 날개를 펼치고, 그 우아한 자태를 꽃넝쿨이 휘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핏 보면 청아한 백조와 아름다운 꽃의 어우러짐에 화사한 느낌을 받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괴이한 문양이었다.

하늘과 호수 위를 거니는 자유로운 백조를 땅속 식물로 휘감았다. 백조가 날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화려한 숨결을
토해내는 꽃들이 진득한 집착을 담고 있었다.

말없이 티아세 家의 문양을 보던 아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보통 한 번 정해진 문양은 그 정통성 때문에 쉬이
바꾸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아이젠 티아세는 약 20 년 전 그가 공작으로 즉위하자마자 문양을 바꿔버렸다.

“취향 한번 이상하지.”

아제프가 여상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마차 위에 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엘제이로 차올라 문양에 대한 생각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39 화
39

“아할테케구나. 보기 드문 명마지.”

엘제이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걸어가던 아이젠이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엘제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든 엘제이가 하인들의 손에 마구간으로 옮겨지는 말을 힐끔 쳐다봤다.

“후작님께서 선물로 주셨어요.”

엘제이가 그렇게 대답하며 힐끔 아제프를 돌아봤다. 그는 아직 가지 않았는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엘제이는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손을 흔들며 화답해 왔다.
엘제이의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헤어지는 연인처럼 애틋하고, 갓 맺어진 인연처럼 달콤한 둘의 인사를 지켜보던 아이젠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손은, 어쩌다가 다친 거니?”

“아- 제가 실수로. 음…… 날카로운 걸 만져서, 베였어요.”

엘제이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아이젠은 딸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쉽게 알아챘다.

자상한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더 추궁하는 대신, 붕대에 감긴 엘제이의 손을 다정하게 쓸었다.

“조심해야지. 예쁜 손에 상처가 남겠구나. 많이 다친 거니?”

“아니에요. 그냥 조금 까진 정도라 금방 나을 거예요.”


“그러니?”

“네.”

아이젠과 엘제이 사이로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엘제이는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고, 아이젠은 속이 답답했다.

아이젠은 한숨을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란델 후작은 강단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지. 나도 네 짝으로 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제이야…….”

아이젠은 혹여 자신의 말이 엘제이에게 상처를 줄까 봐 저어했다. 그가 말끝을 흐리자 엘제이가 고개를 돌리고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엘제이의 눈 위로 언뜻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나무의 밑동을 닮은 갈색 눈과, 나무의 잎을 닮은 초록색 눈이 이리저리 얽혀들었다.

가만히 딸의 눈을 바라보던 아이젠이 다시 한숨처럼 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야. 네가 그를 좋아한다면 더 자중해야 하지 않겠니.”

아이젠이 온화하고 자애로운 음색으로 속삭였다. 아이젠에게는 제 딸들이 가장 소중했다.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후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아버지…….”

엘제이가 안타까운 얼굴을 한 아이젠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그런 짓을 하셨어요? 왜 그의 집에 불을 지르셨나요?’

또 묻지 못한 말이 목 끝에 걸려 목구멍을 아리게 했다. 지독하게 씁쓸한 감정이 복잡하게 걸려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지 않았다. 엘제이는 목이 막힌 사람처럼 그를 부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젠은 말을 잇지 못하는 엘제이를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상한 눈길로 딸을 바라보며 둥근


머리를 토닥였다.

“결국 상처받는 건 란델 후작이란다. 그를 위한다면 여기서 멈추렴.”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음색이 엘제이의 귓가에 닿았다. 엘제이는 걱정스레 웃고 있는 아이젠을 보며
매달리듯 물었다.

“아버지, 혹시 문장이 지워진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보셨어요?”

“제이야. 네 마음은 알겠지만, 문장은 완전한 것이다. 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고 애달파도 모두 한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테고, 오히려 상처를 씻지 못하는 건 그일 테지. 그러니 여기서 멈추렴.”

베아르시 제국민이 대부분 그러하듯 아이젠도 문장의 절대적인 힘을 믿었다. 아이젠은 매달려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버지, 제 문장이, 옅어졌어요. 분명 사라지고 있어요.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혹시, 이건…
… 그와 함께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닐까요?’

엘제이는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젠에게 알렸다가는 당장 신전에 찾아가자고 할지도 몰랐다. 그는 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게
안전에 관련된 것이라면 단호하게 변했다.

‘괜히 소란스러워져 그가 알게 되면 안 돼. 그건 싫어…….’

아이젠이 입막음을 단단히 해두어 아직 엘제이가 문장 보유자라는 사실이 소문나지 않았지만, 혹여 딸의 문장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아이젠이 알게 되면 그도 더는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정보력이 빠른 아제프가 제 문장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변할지 두렵고, 무서웠다.

이제야 간신히 그와 마음이 통하는 중이었다. 겁이 많고 신중한 엘제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을 입 밖에


내뱉고 싶지 않았다.

“네가 란델 후작 때문에 반려를 찾는 걸 꺼리는 것 같아서, 잠시 기다리려 했지만, 제이야. 더는 위험하다는 걸


너도 알지 않니? 곧 문장통이 덮쳐올 거다. 아비는 네가 고통 받길 원하지 않아.”

문장통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보통 문장이 발현한 후 수개월 안에 반려를 찾기 위해 발악하는 문장통이 덮쳐온다.

아이젠은 지금 그것을 걱정하는 중이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딸의 반려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도 점점 인내심을 잃고 초조해졌다.

“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렴. 밖이 춥구나.”

아이젠은 뭐라고 반박하려는 엘제이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었다. 열린 문 사이로 엘제이가 들어가고 문은
곧바로 닫혔다.

아이젠은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을 물리며 엘제이에게 새하얀 목걸이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신석으로 만든 목걸이다. 이제 네 반려를 찾아야 하지 않겠니? 그와 더 가까워지기 전에 말이다.”

진주를 깎아 만든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신석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번쩍였다. 엘제이는 눈을 시리게 하는


빛에 눈을 움찔 감았다가 뜨며 신석을 내려다봤다.

근처에 반려가 있으면 문장의 빛으로 물드는 돌은 반려를 빨리 찾길 바란 프리멧사의 자비였다.

엘제이는 그저 하얗게 빛나는 신석을 노려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신석이 풀잎 색으로 물드는 순간이
찾아올까 봐 두려워졌다.

신석의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작 10 보 정도의 거리만 가늠할 수 있는 힘이었으니 큰 도움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아이젠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힘들게 그것을 구해온 참이었다.


“잊지 말고 걸고 다니렴.”

“…….”

엘제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아이젠은 조가비처럼 꾹 다물린 엘제이의 입술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곧 코르디스가 열리면, 많은 사람이 수도로 올라오게 되겠지. 아비는 그때까지는 네가 네 반려를 찾길 바란다.
그날이 지나면,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네 문장의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구나.”

“아버지!”

엘제이가 기함을 토해내며 아이젠을 불렀다. 확실히 문장의 존재를 숨기는 것보다는 알리는 편이 상대방을 찾기에
더 쉬울 것이었다. 하지만 엘제이는 그가 아닌 반려 따위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지만, 부정을 담은 눈이 단호하게 빛나며 고집을 피우는 딸을 말렸다.

“문장통은 네 생각처럼 그냥 만만히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강건한 기사들도 통증을 참아내지 못하는데,
네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버지! 제발……. 아직, 아무렇지도 않아요. 문장통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이번만큼은 나도 물러설 수 없다. 네가 이러는 게 란델 후작 때문이라면, 아비로서 그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겠다.”

보기 드문 그의 단호함에 엘제이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엘제이는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을지 고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은 안 돼. 아제프가 알게 되면, 그건 절대…… 안 돼.’

아직은 털어놓을 수 없었다. 엘제이가 고개를 빠르게 흔들며 부친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사람 마음이 문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니…….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요. 저는, 저는 싫어요. 그 사람이 좋아요.
제 마음은 진짜란 말이에요.”

늘 얌전하고 차분한 딸이었다. 아이젠은 울먹울먹 흐려진 눈가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눈물짓는 딸의
얼굴을 보는 그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제이야.”

“아버지 제발, 제발요.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제발…….”

란델 후작의 옆에 선 딸을 봤다. 예쁜 미소를 걸고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아이젠으로서도 이러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애가 타다 못해 절절 끓는 딸아이의 표정을 보며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하아. 네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내가 성급했구나.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 대신 신석은 꼭 가지고


다니거라.”

아이젠이 얼굴을 손으로 쓸며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엘제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문장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면, 아이젠에게 말해서 그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그 후에 풀어갈 문제도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엘제이는 그런 것들은 잠시 지워버렸다. 일단 문장만 해결된다면


다른 것들도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엘제이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를 떠올리며 다정한 얼굴을 한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한참을 망설이던 엘제이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놓으며 어설픈 질문을 토해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어요?”

뜬금없이 나온 질문이 이상한지 아이젠이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던 남자는 이내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네 어머니는 내게 유일한 사랑이었다.”

아이젠은 지금도 그의 아내를 잊지 못하여 그 어떤 추문 없이 홀로 지내고 있었다. 엘제이는 그의 침대맡에 항상


놓인 어머니의 초상화를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싶은데 자꾸 망설여졌다. 엘제이는 아버지의 입으로 듣게 될 대답이 두려운 걸지도
몰랐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또 한참 고민하던 엘제이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속삭였다.

“그…… 얼마 전에, 엘가 家에 사생아가 찾아왔다는 소문이 들려서요. 아버지는, 아니시죠?”

엘제이의 물음에 아이젠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부녀 사이라 해도, 그의 부정을 의심하는 말에 아이젠의
얼굴이 조금 불쾌하게 찡그려졌다.

아제프는 이상한 질문을 던져놓고 눈치를 보듯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엘제이를 보며 이내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아이젠은 엘제이가 꼭 쥐고 있는 신석을 그녀의 손에서 받아와 걸어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사생아?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이 세상에 티아세는 너와 나, 그리고 리사, 우리 셋뿐이다.”

신석이 짤랑- 맑은 소리를 내며 엘제이의 목에 걸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0 화
40

엘제이는 목에 걸린 하얀 신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영롱한 소리와 환한 빛이 신물임을
증명했다.

“티아세는 이 세상에 셋뿐…….”

엘제이가 부친의 말끝을 따라하며 중얼거렸다. 기이할 정도로 단호한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엘제이는
차오르는 의문에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엘제이의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 젖히던 아이젠이 곧 따뜻하게 웃으며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형제가 없으니 티아세도 우리 셋밖에 남지 않았구나. 가족은 서로 의지해야 하지. 그러니 제이야.
무슨 걱정이 있다면 꼭 아버지에게 말해야 한다.”

‘아버지, 정말 그것뿐이에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아이젠은 제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그녀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책에서도 문장이 발현된 엘리사를 위해 조금도 주저 없이 알체스테의 편을 들었다.

황제에게 미움 받는 황자의 손을 망설임 없이 붙잡아줄 정도로, 부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엘제이는 아이젠의 다정한 눈을 볼 때마다, 모든 걸 털어놓으며 물어보고 싶었다.

“아버지, 저…….”

“제이야, 할 말이 있으면 뭐든 편하게 말하렴.”

저토록 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어쩌면 그녀가 엘제이 티아세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엘제이의 몸이니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엘제이의 기억이 있는 그녀는 아이젠의 차가운 눈길이 두려웠다.

아제프가 괜히 아이젠을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따뜻한 부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냉혹한 지배자이기도 했다.
그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놓쳤던 아이가 아제프라는 걸 알았을 때, 부친이 보일 반응이
무서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엘제이는 끝내 묻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편히 주무세요.”

“그래. 오늘은 날씨가 유독 서늘하구나. 창문 꼭 닫고 이불 잘 덮고 자렴. 우리 제이는 리사처럼 이불을


차내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네. 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꿈 꾸렴.”

“아버지도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언제든 해도 좋단다.”

아이젠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조용한 성정을 가진 딸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이만 들어가보렴.”

아이젠은 자상한 얼굴로 엘제이를 토닥이며 어서 들어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엘제이는 아이젠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을 닫고 들어선 엘제이가 책상에 앉아 종이를 꺼냈다.

‘좀 더 신중해져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야 해. 우선은, 그날 일을 좀 더 더듬어보자.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엘제이는 조각조각 남아 있는 기억들을 떠올리며 종이에 적었다.

똑똑-

시간이 얼마 지나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를 잘 접어 책상 밑에 넣은 엘제이가 책상에서 조금


떨어지며 말했다.

“들어와, 시아.”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시아가 살짝 웃으며 걸어왔다. 늦게 들어온 엘제이의 옷시중을 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가씨, 저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 시간에 내 방에 올 만한 사람은 너랑 리사뿐인데, 리사라면 아마 노크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아마 엘리사는 잠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문을 부술 기세로


뛰어왔을 것이 뻔했으니까.

동생 생각에 조금 웃음이 난 엘제이가 킥킥거리며 거울 앞에 섰다.

시아는 드레스 룸에 들어가 가벼운 잠옷을 하나 꺼내왔다. 익숙한 듯 엘제이 곁으로 걸어가 코르셋을 풀어주던
시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옷 갈아입으셨어요?”

“풀물이 들어버려서.”

“풀물이요? 어디 잔디밭에 앉기라도 하셨어요?”

“음, 그냥…….”

시아는 궁금해하면서도 엘제이에게서 별다른 답이 없자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복잡한 리본 끈을 천천히


풀어주던 시아가 까먹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냈다.

“아! 아가씨, 내일은 아마 새로운 시녀가 올 것 같아요. 메리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었거든요.”

“메리가? 그 아이가 왜?”

메리는 엘제이의 시녀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아이였다. 그래서 시아 다음으로 곁에 두고 예뻐하던 아이였는데


갑자기 그만둔다니 조금 아쉬웠다.

“좀 더 좋은 일자리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나 봐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럼 잘된 일이네. 인사도 못 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네. 메리도 바삐 떠나야 하는 사정이 생겨 아가씨를 뵙고 가지 못해 죄송해 했어요.”

“조금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아! 시아, 이 다음부터는 내가 할게.”

시아가 겉옷을 다 벗기고 페티코트에 손을 데려고 하자 엘제이가 황급히 말리며 손을 저었다. 시아는 어쩐지 조금
난감해 보이는 엘제이를 의아하게 보면서도 그녀 말대로 물러나 문을 닫고 나갔다.

시아가 나가자 혼자 남은 엘제이는 조심조심 페티코트를 젖혔다. 달빛을 받은 하얀 가슴 위에 자리 잡은 문장은


아까 봤던 그대로 옅게 흐려져 있었다.

하얀 얼굴이 환희에 차 반짝였다. 엘제이가 방긋 웃으며 몇 번이나 문장을 만졌다.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빛을
잃은 문장이 기꺼웠다.

옷을 다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도 엘제이는 문장을 빤히 바라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제프의 입맞춤을
받았던 기억까지 떠오르자 엘제이의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행복한 듯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엘제이는 문장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제발……. 없어져줘. 내 몸에서 나가줘. 부탁이니까 제발, 사라져줘.’

문장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엘제이의 염원이 계속되었다.

***

제국력 816 년 아 20 일, 코르디스가 열리는 날이 밝았다.

몸을 씻고 나온 아제프는 옷시중을 받고 있었다. 어제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한 탓에 그의 기분은 무척 저조해져


있었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된 시녀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최선을 다해 빠르게 움직였다.

“젠장.”

흉흉한 얼굴을 한 아제프를 보고 긴장한 어린 시녀가 실수로 그의 팔 끝을 스쳤다. 역겨운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더러운 감각에 아제프가 욕설을 지껄이며 화를 냈다. 그의 험악한 얼굴에 어린 시녀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후작님.”

아제프가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 싸늘한 얼굴로 시녀를 쏘아보자 그에게서 풍기는 음산한 기운에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짝 긴장했다. 어린 시녀는 덜덜 떨리는 몸을 감추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고 아제프의
기분은 끝도 없이 하락했다.

아제프의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자 알모어가 어린 시녀를 가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후작님, 아직 어린 시녀입니다. 제가 단단히 혼을 내겠습니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데리고 나가!”

“후우…….”
아제프는 어린 시녀를 데리고 나가는 시녀무리를 보다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문득 찾아오는 광기와 충동감에 하마터면 별일 아닌 일로 사람을 죽일 뻔했다. 그는 조금 전 검에 손을 댈 뻔했던


것을 떠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요즘 살심이 잘 절제되지 않았다.

“후작님?”

알모어가 조심스럽게 아제프를 부르며 그를 관찰했다. 분명 엘제이와 헤어지고 돌아왔을 때까지는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그날 자고 일어난 후부터 저 상태였다.

“기분이 개같이 더러워.”

아제프가 욕설을 입에 담는 건 정말 기분이 안 좋다는 신호였다. 알모어는 연신 욕설을 지껄이는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그가 좋아할 만한 화제를 꺼냈다.

“그……. 오늘은 코르디스가 열리는 날이잖아요. 곧 공녀님을 뵐 수 있을 테니, 그 생각을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아제프가 모처럼 시녀들의 손길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워낙 사람들의 손길을 진저리치는지라 목욕도 혼자


하고 의복도 혼자 갈아입던 사람이었는데, 최근 들어 엘제이를 만나는 날에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고는 했다.

아제프는 초록색 커프스를 소매에 끼우며 알모어의 말대로 엘제이를 떠올려보기로 했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울화가 치밀었다.

“여성용 보닛. 내가 골라놓은 건 어디 있지?”

아제프는 전날 골라놨던 보닛을 찾으며 화를 달래기로 했다. 알모어가 얼른 잘 포장된 상자를 들고 와 내밀었다.
예쁜 꽃으로 장식된 보닛을 쓴 엘제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제프가 상자를 잘 챙기며 겉옷을 입었다. 옷을 팔에 끼우는 동작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예술품 같았다.

“꿈자리가 사나운데, 기억이 안 나. 제이랑 같이 잘 때는 괜찮았는데.”

아제프가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알모어의 얼빠진 얼굴을 보다 보면 그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이것도 엘제이를 만난 후부터 바뀐 변화였다.

아제프가 물끄러미 제 침대를 바라봤다.

알모어의 시선이 아제프를 따라 또르르 굴러갔다. 엘제이를 반쯤 벗겨놓고 제 마음대로 끌어안고 있던 아제프가
떠올랐다.

‘설마, 납치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공녀님을?’

아제프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남자였다. 알모어는 예비 범죄자를 보듯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제프는 불쾌한 시선을 빠르게 눈치챘다.

“죽고 싶나? 그 눈빛은 뭐지?”

“살고 싶습니다! 제 눈빛은 언제나 올곧게 후작님만을,”


“됐으니까 입 다물어. 그것보다, 티아세에 들여보내기로 한 시녀는?”

“네! 오늘 아침부터 그 메이라는 시녀가 하던 일을 맡기로 했답니다.”

알모어는 가슴을 펴고 뿌듯하게 외쳤다. 이번에도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의 대답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예물은?”

“네! 그건, 후작님께서 뭐든 다 최상급으로 준비하라고 하셔서 계속 물색 중입니다만…….”

우렁차게 대답하려던 알모어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뭐.”

애처로운 집사의 얼굴에도 아제프의 험악한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제프가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자 알모어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해 핼쑥해진 얼굴로도 어쩔 수 없이 긍정을 말해야 했다.

“아닙니다! 집사 알모어! 영혼을 탈탈 털어서라도 원하시는 날까지 준비하겠습니다.”

알모어가 수면을 포기하자, 아제프가 표정을 풀고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어디 흠 잡힐 데는


없나 살피던 아제프가 옷깃을 잘 정리하며 거울에서 눈을 뗐다.

알모어는 반질반질 빛나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알모어가 직접 재봉한 예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잘 어울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오늘도 끝내주십니다.”

“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더러워진다.”

아제프는 진심이라는 듯 옆에 찬 검을 스르륵 꺼내 보였다. 화려한 예식용 검이 아니라,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검신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알모어는 슬금슬금 물러났다. 알모어는 언제나 주인에게 천대받는 집사였다.

아제프는 다람쥐처럼 숨어드는 알모어를 노려보다가 마차가 대기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엘제이를 데리러 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아제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타자, 그를 실은 마차가 티아세 家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1 화
41

마차는 티아세 家 정문에 도착했다. 아제프는 마차 안에서 엘제이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아직 준비 중이라는 엘제이의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결혼을 했다면, 이리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것을!’

아제프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마냥 기다리는 일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엘제이가 늦는 건 화가 나지 않았다. 아제프는 분명 예쁘게


치장하느라 정신없을 엘제이를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날씨가 좋은 봄날이 화사했다. 그가 햇볕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자, 소문으로 들었던 란델 후작의 용모를 처음
본 시종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후작님이신가 봐.”

“우리 아가씨 뵈러 오신 걸까?”

“그렇겠지. 얼마 전에 아가씨가 후작님 댁에 가시기도 했고.”

워낙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외모인지라 아제프는 익숙한 시선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곧 엘제이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제프가 정문 밖을 조금 서성일 때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아제프는 조그마한 마차의 존재가 의아했지만 곧


신경을 끄고 문을 바라봤다.

곧 정문이 열리고,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온 티아세 家의 집사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나오신답니다.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들어오시라고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시각보다 오래 걸리는 게 미안했는지 집사의 목소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물끄러미 집사를 바라보던
아제프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에게 화낼 마음은 없었다.

“나는 괜찮으니 천천히 나오시라고,”

아제프가 막 말을 꺼내는데,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아니라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여성의
발걸음이었기에 아제프는 뒤를 돌아봤다.

“후, 후작님! 안녕하세요. 저는 티로시 家의 차녀, 세시아 티로시라고 합니다!”

티로시 家의 차녀라고 신분을 밝힌 영애는 멋대로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얼굴을 와락 찌푸린 아제프가 참지 못하고 세시아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아…….”

멋대로 잡은 주제에 빨개진 손을 붙잡고 울먹거리는 얼굴에 짜증이 치밀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만
아제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절제심이 약해진 탓에 그의 입술에서 냉랭한 말이 나왔다.

“영애, 무슨 일이시죠? 저희 초면인 것 같은데 함부로 남의 손을 잡으시다니 무례가 좀 지나친 거 아닌가요?”

세게 내쳐진 탓에 화끈거리는 손등을 어루만지던 세시아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초면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 못 할지 모르지만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도 똑같이 손을 잡았음에도 부드럽게
넘어갔었다.

기분이 안 좋은 아제프는 찡그린 이마를 펴지 못했다. 세시아는 평소와 다른 그를 보며 엘제이가 그를 기다리게


해 화가 난 것이라고 멋대로 착각했다. 울먹울먹 눈물이 차오른 세시아가 아제프를 올려다보며 또 한 번 손을
뻗었다.

아제프는 화를 냈음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세시아를 야차처럼 노려보며 손을 피했다. 뒤로 한 발


물러섰음에도 끊임없이 제게 다가오는 모습이 좀비 같았다. 게다가 그라시아를 연상하게 만드는 사향내를 풍기고
있어 아제프의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소녀처럼 어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사향내에 그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제프는 아직 앳된 얼굴을


보며 일단 화를 참아냈다. 그가 경계하듯 조금 떨어져서 물었다.

“저를 부른 용건이 뭐죠?”

“그냥,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티로시 영애.”

아제프가 세시아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내며 그만 가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좀 꺼지라는 의미였지만 세시아는 애교


어린 몸짓으로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아제프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듯했다.

“저는 둘째라 그냥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제프.”

아제프는 제 이름을 부르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차갑게 웃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엘제이의 경우에는 그녀의 신분이 공녀인 탓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크게 무례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백작가의 차녀 따위가 후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은 대단한 무례였다.

본인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허락 없이 부른다는 건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행위다. 한마디로 그를 얕잡아 본다는 의미였다.

아제프는 장갑 낀 손을 보며 주근깨 박힌 뺨에 장갑이라도 던져줘야 하는 건 아닐지 고민했다. 그는 지금


세시아에게 하대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제게 하대를 하신 건가요?”

아제프의 싸늘한 말에 세시아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서둘러 손을 저었다. 세시아가 귀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움직이며 연갈색 눈을 깜빡거렸다.

엘제이처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당황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귀여워 보일지 아는 자 특유의
행동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제프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애초에 그는 사랑받고 자랐다는 티가 나는 철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애교 섞인 눈짓과 몸짓 모두가


볼품없는 광대의 재롱처럼 우습기 짝이 없었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아제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세시아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조곤조곤 말했다.

“아니, 후작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무례를 범했네요. 죄송해요. 그런데 저희 한번 본 적 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에티아 家의 티파티에서 한 번 뵈었을 때는 무척 친절하셨는데……. 티아세 양 때문에 화가 나신
건가요?”

“티아세 양?”

티아세 양이라면 둘이었다. 엘제이는 그와 선약이 있으니 엘리사를 찾아온 거라 생각하면서도 아제프는 그 호명에
신경이 쓰였다. 무심하게 서 있던 아제프가 팔짱을 풀어내며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게 좋았는지 세시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엘제이 티아세요. 그녀는 무척 무례한 사람이에요. 제게 먼저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아 놓고는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어요. 당신을 계속 밖에 세워두다니 그녀는 정말 너무해요. 저는 서 있는 당신을 보고 깜짝 놀라,”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아제프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여자의 말에 욕을 지껄이며 세시아를 노려봤다. 세시아는 그의 험악한 언행에


놀랐는지 한 발짝 떨어졌다.

오늘따라 성격을 건드리는 여자가 많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보다 조금 큰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문득 떠올랐다.

‘이 여자가 그 세시아 티로시인가?’

엘제이가 세시아와 선약이 있었다는 건 아제프도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티아세 家의 경계는 허술하지 않았지만
목적지인 티로시 家가 허술했기에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엘제이가 저 여자와 약속했던 건 코르디스 날 같이 구경하자는 것뿐이었고, 약속을 취소할 때도 며칠의 여유를
두고 정중하게 편지를 보냈다.

엘제이의 편지를 무시한 채 답장도 안 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와 그녀의 집 앞에서 이러는 걸 보면 이유가 뻔했다.
그냥 피해자인 척을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게다가 엘제이의 이름을 존칭 없이 함부로 부르는 것도 기분 나빴다.

아제프는 어린 자식을 보호하는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공격태세를 갖춘 아제프는 엘제이가 오기 전에 세시아를


치워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칼날 같은 혀를 장착했다.

“이거 완전히 미친 여자잖아.”

“네?”

세시아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며 얼빠진 얼굴로 아제프를 올려다봤다. 언제나 선량하게 웃고 다니던
남자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서 있으니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당황한 세시아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며 얼굴을 들고 눈물을 짜냈다.

아제프를 이길 수 없으니 연약한 척 눈물을 짜내는 쪽이 이로웠다. 아주 멍청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아제프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척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네가 편지를 받았다는 건 제이의 시녀가 증명할 텐데, 답장도 안 보낸 주제에 여기 와서 괜히 피해자인 척하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렸어?”

“후작님…….”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꺼지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안 드나? 나는 성격이 더러운데, 다른 사람한테 들키고 싶지


않거든. 네가 알아버렸으니 나는 그 입을 틀어막고 싶어지잖아.”

아제프는 다정하게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서늘한 바람 소리를 닮은 냉한 목소리가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싱긋
웃은 아제프가 세시아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척 세게 눌렀다.

“아!”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세시아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아제프가 화사하게 웃으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입 조심해. 죽어 나자빠진 모양으로 발견되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그 향수, 내가 제일 역겨워 하는 거거든.”

“이건, 당신 어머니의…….”

세시아가 뿌린 향수는 생전 그라시아 란델이 즐겨 쓰던 것이었다. 그걸 알고 일부러 웃돈을 얹어 어렵게 구한


향수였는데, 그가 역겹다고 말하자 무척 당황스러워졌다.

세시아의 몸에서 손을 떼어낸 아제프가 눈을 슬프게 내리깔고 속삭였다.

“그래서 가장 역겨워하는 거야. 베티, 로라, 샌디, 사라. 그 외에도 몇 명이나 더 있을까? 네가 그들을
쫓아내면 나는 몇 명을 더 보낼까? 내 어머니와 같은 꼴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잘 간수해.”

아제프가 최근 들어 바뀐 티로시 家 시녀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산뜻하게 웃었다. 예쁘게 휘어진 눈을 마주하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세시아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덜덜 떨자 아제프가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털며
잠시 넣어두었던 장갑을 꺼내 천천히 착용했다.

“아, 말해봤자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테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다 죽였거든.”

아제프가 깜빡 잊었다는 듯 덧붙이며 얼른 꺼지라는 듯 세시아를 향해 고갯짓했다. 야생의 맹수처럼 흉흉한 파란


눈이 싱긋 휘어지자 다리가 떨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제프! 많이 기다렸어, 아…….”

따라오겠다는 엘리사를 말리느라 시간을 많이 쓴 엘제이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다가 다정하게 붙어있는 둘을 보며


멈칫했다.

예쁜 리본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엘제이를 발견한 아제프가 만족스럽게 웃다가 곧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흐리며 말했다.

“아- 제이, 이분이 어디가 많이 아픈가 봐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아제프는 걱정이 절절 담긴 목소리를 내며 세시아의 어깨를 조금 흔들었다.

“영애, 괜찮아요?”

아까 겁박하던 모습이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안타깝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무척 선한 사람 같아 보였다. 표정은


놀랄 정도로 온화한데 시리도록 푸른 눈은 역겨움을 담고 있어서 더 무서웠다. 그라시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린 세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제이는 세시아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2 화
42

“티로시 양? 괜찮으세요? 티아세 家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니, 아무것도……. 그냥, 우, 우연히…….”

“의원을 불러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엘제이의 상냥한 목소리에도 세시아는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엘제이가 사지를 덜덜 떠는 세시아를 보며
의원을 부르려고 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아제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영애? 괜찮으세요? 제가 시녀를 붙여드릴까요?”

“아, 아니요. 제가, 제가 갈게요.”

아제프의 걱정스럽다는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시녀를 붙여주겠다는 말에 기겁한 세시아가 흉악한 것을 본 듯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절뚝절뚝 뛰쳐나갔다.

엘제이는 망령에 홀린 것 같은 세시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보내도 될지 모르겠네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남을 위하는 마음 따위는 없애버리고 저만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녀의 따뜻함이
좋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는 앞으로도 주인을 지키는 투견처럼 그녀 앞에 놓인 더러운 것들을 치워낼
생각이었다.

“혼자 온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그것보다 제이, 이리 와봐요.”

아제프는 세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엘제이를 마차로 끌고 갔다. 엘제이를 뒤따라 나온 시녀가 그녀의
승마복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지만 아제프는 모른 척 엘제이만 끌고 갔다.

“아! 시아, 마차를 타고 따라와 줄래?”

다행히 엘제이는 시아의 존재를 잊지 않고 그녀가 티아세 家의 마차를 탈 수 있게 해주며 그를 따라갔다.


아제프는 란델 家의 마차에 엘제이를 태우고 문을 닫아버렸다.

좁은 공간에 둘만 남게 되자 자연스레 긴장이 되었다. 엘제이는 떨리는 속내를 감추려고 노력하며 옆에 앉아


은근슬쩍 몸을 맞대 오는 그를 힐끔 바라봤다.

아제프가 연약한 척 속눈썹을 깜빡이며 엘제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작은 목걸이 하나 걸지 않은 새하얀 피부
결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엘제이가 흠칫 몸을 굳히자 그가 어린애가 된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으며 불쌍한 척을 했다.

“제이, 저 요즘 악몽 꾸는 것 같아요. 잠을 너무 못 자서 피곤하고 힘들어요.”

“경기에 참가하셔야 할 텐데……. 잠시 눈이라도 붙이세요.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잖아요. 어깨는 좀,


괜찮아요?”

피곤한 사람치고는 과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이었지만 엘제이의 얼굴에는 걱정이 차올랐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피곤하다는 말에 얌전히 어깨를 내어주며 그를 토닥였다.

“그럼요. 다 나았어요. 그것보다 제이, 저 아까 더러운 걸 만져서 기분이 안 좋아요. 정화도 할 겸 기분전환이
필요한데…… 좀 도와줄래요?”

아제프가 나른한 눈으로 장갑 낀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손등과 손바닥을 천천히 뒤집으며 아무것도 묻지


않은 까만 장갑을 내려다봤다. 팔랑팔랑 부채춤을 추는 속눈썹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정화요? 어떻게 하는 건데요?”

엘제이는 물이라도 떠와야 하나 고민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제프는 가만히 엘제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장갑을 벗어던진 매끄러운 손이 천천히 엘제이의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양쪽에서 올라온 손이 엘제이의 목덜미를
간질이고, 예쁘게 땋은 옆머리를 스쳤다.

어느새 마차의 벽과 그의 팔 틈에 갇힌 엘제이가 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장, 난치지 마세요.”

“장난? 내가?”

목을 긁으며 새어나온 목소리가 맹수의 하울링처럼 그르렁거렸다. 왠지 위험한 상황이 된 것 같아서 엘제이가
그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머뭇거렸다.

머뭇머뭇 망설이다가도 결국 밀어내지는 못하고 떨어지는 손에 그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거렸다. 엘제이는 사나운 이빨을 가진 맹수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것
같았다.

어디를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잡아먹힐 것 같았다. 한입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소멸할 것
같았다. 엘제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장난치지 마세요.”

“틀렸잖아. 나는 장난치는 게 아니라, 유혹하는 거야. 제이.”

나른하게 깔린 얼굴에서 퇴폐적인 음색이 깔려 나왔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음색은 엘제이의 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나게 했다. 엘제이는 마른 목을 축이려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을 피해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제프의 눈을 보면 깊고 푸른 바다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엘제이는 제가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바다에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심해 깊은 곳으로 끌려갈 것을 알았다. 아직 문장의 유무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엘제이를 모르는지, 혹은 알아서 그러는지 아제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제프가 제 가슴에서 조금 떨어진 하얀 손목을 낚아채 빠르게 박동하는 동맥 위로 입술을 내렸다. 이를 세워


살갗을 긁어내리는 행동에 발끝이 곱아들었다. 날카롭게 버려진 이가 얇은 피부를 스치자 흐느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무얼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노골적으로 유혹하는데,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넘어갈 게
뻔했다. 그의 몸에 닿은 피부가 화마에 휩싸여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녹아버릴까 봐 무서우면서도 닿은 느낌이
너무 좋아 그대로 몸을 맡기고만 싶어졌다.

여기서 입을 벌리면 필시 달콤한 숨결이 쾌감을 담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문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내가 뭘 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그녀의 말에 가볍게 대꾸한 아제프는 피식 웃으며 여전히 손목을 지분거렸다. 웃을 때 터져 나온 가느다란 숨결이
손목을 스치고, 타액에 젖은 피부가 반들거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느새 수치도 모르고 그에게 매달리며 끌려갈 걸 알았다. 엘제이가 그를 거부하려고 애쓰며
조그만 속살거림을 토해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엘제이는 문장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끝이 얼마나 허망할지 알면서도 감히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나온 말은 거부도 저항도 아닌, 그저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다였다. 엘제이가 손목에 힘을 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작게 바동거렸다.

연약한 반항 정도는 가뿐히 누를 수 있었지만, 겁먹은 듯 떨리는 음색이 그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할 수 없이


엘제이의 손목을 놔준 아제프가 그녀의 턱 끝에 손을 대고 그를 보게 만들었다.

“이왕이면 무서워하지 말고, 넘어와 줬으면 좋겠는데. 나, 어제부터 기분이 안 좋거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퇴폐적인 분위기에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인 채 미동도 안 하던 엘제이의 눈이 쓱 올라왔다.
맑은 색감의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아제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왜……. 어디가 안 좋으세요?”

따뜻한 손의 온기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맹목적인 눈이 그를 향하자 아제프는 뇌를 강타하는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린 아제프가 엘제이를 벽에 바짝 붙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렇게 볼 때마다 죽을 것 같아. 입 맞춰도 돼?”

아제프가 뽀얀 뺨을 핥아 내릴 듯 보다 그 강렬한 시선을 분홍빛 입술로 옮겼다. 시선만으로도 불에 타는 느낌에


엘제이의 몸이 화끈거렸다. 엘제이는 입술을 물어 숨기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

차마 싫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소심한 행동에 아제프는 엘제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붙잡고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애초부터 강한 인연으로 맺어진 듯 맹목적인 애정을 담은 초록색 눈이 미치도록 좋았다. 저 눈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제프는 립밤을 바르고 왔는지 달콤한 향이 나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그걸 게걸스럽게 빨아올리는 상상을 했다.
조그만 얼굴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제 아래에서 숨이 차 헐떡거릴 엘제이를 상상했다.

예쁜 손을 또 바르르 떨면서도 결코 밀어내지는 못할 걸 알았다. 둘밖에 없는 마차 안,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엘제이는 완벽하게 거부하지 못할 거였고,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터였다. 아제프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유혹하듯 말했다.

“하고 싶은데, 하면 안 돼?”

그의 시선에 관음 당하는 것 같았다. 어떤 보석도 그의 눈과 같은 색감을 내지는 못했다. 남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오묘한 눈이 색정적으로 일렁거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수차례 이뤄진 능욕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시선으로 저를 보고, 어떤 의도로


저렇게 말하는지는 알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안 돼?”

엘제이가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아이의 칭얼거림 같은 항변이 돌아왔다. 그가 무해해 보이는 얼굴을 반짝반짝
빛내며 간절하게 쳐다봤다. 무해한 얼굴과는 달리 살쾡이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눈빛이 광포해 엘제이는 물러날 곳
없는 벽에 몸을 밀착했다.

“아직은 조금, 무서워서……. 겁이 나요.”

빨리 문장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가 원하는 걸 다 주고 싶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저렇게 예쁜 얼굴로 매달리는 사람을 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제이가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자 아제프가 먹이를 노리듯 날카롭게 벼린 눈매를 조금 풀었다.
아쉽긴 했지만, 강탈하듯 빼앗고 싶은 건 아니었다. 상처 주지 않기로 했으니 무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맞춤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는 항변이 머릿속에 조그맣게 떠올랐지만 새끼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
조금이라도 강제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제프가 몸을 조금 물리며 다정하게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사하게 휘어진 눈매에 부드러운 감정이
담겼다. 그가 어린아이를 쓰다듬듯 엘제이의 머리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알았어. 심한 짓은 안 해.”

“하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숨 쉬면 나라도 상처 받는데? 심술이 나잖아.”


아제프가 엘제이의 턱을 바투 당겼다. 엘제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제프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엘제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까 말했던 정화만 도와줘.”

“정화, 요?”

“넌 가만히 있어, 가져가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아제프가 싱그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엘제이는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절제를 잘 못 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걸까?’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얌전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제프가 입꼬리를 당겨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내렸다.

쪽. 부드러운 볼을 스치듯 훔친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3 화
43

이마에 입을 맞출 때처럼 짧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볼에 닿는 말캉한 입술에 손으로 볼을 가리던 엘제이는 그의


품에 와락 끌어당겨졌다.

“살 것 같아.”

아제프가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턱 끝을 올리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많이 지친 목소리에 엘제이의 마음이 조여 왔다.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지도 못한 채 그의 품에 얌전히 몸을 내어주자 아제프가 욕설 섞인 짜증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특히 오늘 아침은 최악이었어.”

“……안 좋은 일이, 있으셨어요?”

“응.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너랑 있으니 괜찮아졌어.”

아제프가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엘제이의 몸을 꼭 끌어안고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 아까의
짜증이 착각이라는 듯 달아나는 게 우스웠다.

‘나는 네가 정말 좋은가보다. 제이.’


엘제이는 그의 품에 안겨 눈만 도르륵 굴렸다. 그는 그 후로 아무 말 없이 휴식을 취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엘제이는 피곤하다던 아제프를 떠올리고 얌전히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엘제이는 혼자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의 옆자리가 제 것이 된 것 같았다.


아제프의 말이 너무 달콤하고 행복했다.

둘은 연인 사이의 밀회를 나누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 사이로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박동했다.

아제프는 나른함에 취할 것 같았다. 그가 개다래나무 향을 맡은 고양잇과 맹수처럼 몸을 축 늘어트리고 엘제이의


몸에 무게를 실었다. 무거울 테니 이만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몽롱하게 잠기는 기분이 너무 좋아
이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아제프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깜빡 흔들자 마차 한쪽에 잘 놓아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한 상자는 엘제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저 보닛이 엘제이에게 얼마나 잘 어울릴지 상상하며 아제프가 신중하게 고른 것이었다. 아제프는 빨리 저걸


씌워줄 생각으로 나른한 몸을 쭉쭉 펴며 일어났다.

엘제이는 육중한 무게감에 버거워하다가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새삼 그의 신체가 탄탄하다는 걸 느꼈다.


얼굴이 워낙 아름다워 그쪽으로 시선이 몰리는 탓에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잘 짜인 근육들이 매끈한 등을
뒤덮었다.

옷깃 사이로 언뜻 보이던 날렵하고 탄탄한 복근이 숨을 쉴 때마다 조였다 풀어지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뭘 생각하는 거람.’

엘제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흔들리는 머리 위에 무언가가 씌워졌다.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엘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예쁘네요, 제이.”

아제프가 환하게 웃으며 보닛 끈을 묶어줬다. 엘제이의 눈을 닮은 초록색 비단 끈이 리본 모양으로 예쁘게 묶였다.


보닛 안에 달린 꽃 모양 장식들이 이마를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엘제이는 적당히 조여진 끈 끝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청아한 얼굴 위에 화사한 모자를 씌우니 예쁜 얼굴이 더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제프는 조그맣게 피어난
보조개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참, 그거 선물 아니에요.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세요.”

고맙다고 말할 순간을 재고 있던 엘제이가 선물이 아니라는 말에 조금 당황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빌려주는


건가 싶어서 흘깃 모자를 바라보던 엘제이가 천천히 어물거렸다.

“아- 네. 언제, 돌려드릴까요?”


“음……. 대여 기간은 평생? 빚으로 달아놓을 거니까 잊지 마세요.”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엘제이는 선물이 아닌데 대여기간은 평생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한쪽 고개가 갸우뚱 움직이자 엘제이 머리 위를 덮은 모자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선물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네. 선물 아니에요. 그러니 돌려주세요.”

“평생이면 언제 돌려드려야, 하는 거죠?”

엘제이가 이해하지 못한 듯 울상을 지으며 속삭이자, 아제프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저럴 때마다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아제프가 손가락으로 찡그려진 이마를 피며 상냥하게 말했다.

“제이는 어리숙한 모습도 귀여워요. 제가 친절하게 알려드릴게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아제프가 어린 강아지 부르듯 손짓하며 엘제이를 불렀다. 얼굴을 붉힌 채 쪼르르 다가온 엘제이가 그의 앞에 섰다.

마차는 흔들리고 있었고, 엘제이는 조금 휘청거렸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하얀 귀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힘주어 깨물었다.

“아!”

아프지는 않았지만, 치아 사이로 귀가 씹히는 느낌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발끝이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엘제이가 몸을 조금 물렸지만, 아제프는 놔주지 않았다.

아제프는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혀로 핥으며 음습하게 속살거렸다.

“내가 너를 잡은 거야. 너는 빚을 진 거니 달아나서는 안 돼. 알겠어?”

***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엘제이는 홍시가 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엘제이는 불타는 나무토막 같았다.
뻣뻣하게 굳어 그저 눈만 깜빡이는 모습에 아제프는 제가 좀 지나쳤나 반성하며 순하게 웃었다.

“제이, 날씨가 참 좋죠?”

그가 다정한 손길로 주름진 드레스를 펴주며 선량한 얼굴을 했다. 마차에서의 진득한 눈길이 거짓인 것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돌변한 남자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한 번 더 싱긋 웃었다.

엘제이는 아까보다 훨씬 반질거리는 얼굴을 보다 대답할 순간을 놓쳐버렸다. 그가 싱긋 웃으며 바라보자 엘제이는
멍한 얼굴로 뒤늦은 대답을 토해냈다.

“……네.”

아마 그녀는 그가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단지 사람이 어쩜 저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신기했다. 그는 배가 부른 맹수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엘제이는 유쾌해 보이는 그를 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는 열이 오른 것처럼 몽롱한 엘제이를 살피며 볼 위로 차가운 손을 올렸다. 열을 재듯 신중히 얼굴을


만져보던 아제프가 화사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어지러워요? 산책 좀 할까요?”

엘제이는 그가 예뻐 죽을 것 같았다.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아제프가 잡아 오는 손을 내려다봤다.


온종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니 열에 들뜬 사람처럼 어지러웠다.

제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는 남자의 말에 엘제이는 혼몽한 머리로 아제프는 참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제프는 여전히 제정신 못 차리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참아냈다. 더 했다가는 소심한 강아지가 바르르
떨다가 픽 기절할 것 같았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마차를 세운 넓은 공터를 지나 나무가 우거진 삼림 안으로 들어갔다. 강한 햇볕을 막은 시원한
나무 아래에서 그들은 손을 마주 잡고 정답게 걸어갔다.

새된 외침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험악하게 들려왔다. 아제프가 옆에 있으니 별일은 없을 테지만 우거진 삼림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몸을 좀 움츠렸다.

“여기서 누가 싸우나 봐요. 어쩌죠?”

아제프는 남 일에 신경 끄고 그냥 지나가고 싶었지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흘깃 숲속을 바라보는 엘제이 때문에 좀


고민했다. 그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뭘 부수기라도 하는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아제프가 해사한 얼굴로 웃으며 음산하게 지껄였다.

“시끄러우니 입을 다물라고 말해주죠, 뭐.”

“위험하면 어떡해요. 그냥 빨리 돌아가서 위병을 불러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제프가 그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엘제이가 그를 말리며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상대가 다수거나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아제프는 가까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척에 상대가 성인 2 명이라는 걸 알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 1 명과 여자
1 명 같았기에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에서 돌아가자는 말을 나오게
한 놈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가 허리에 찬 검을 흘긋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제이, 최근 든 생각인데요. 저는 아무래도 제이랑 둘이 있을 때 방해하는 사람이 제일 싫은 것 같아요. 돼지


멱따는 소리가 점점 더 불쾌해지는 걸 보니 말이에요.”

돌아갈 바에는 저걸 해결하고 이곳에 더 있겠다는 말이었다. 엘제이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으로
떨어졌다.

그의 검은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배운 것이었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기에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워낙


악귀처럼 덤벼든 탓에 아제프의 검술은 아름답기보다는 폭력적이었다. 엘제이는 화려한 예검 대신 꽂힌 투박한
검을 보며 그를 말렸다.

“사람을 죽이시면 안 돼요.”


“그럼요. 저를 뭐로 보시는 거예요. 제가 당신 앞에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아제프가 무해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엘제이의 손목을 붙잡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숲속에 혼자 두는 것보다는 제 곁에 두는 게 훨씬 안전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더 명확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남녀 치정문제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니 남자 혼자서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

아제프는 누군가를 신랄하게 욕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상한 얼굴을 했다. 무성한 수풀이 횡단으로 베여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황궁 근처라 숲길이 잘 정돈되어 있기에 수풀이 상한 흔적이 더 눈에 띄었다.
아마 화를 참지 못한 남자가 검을 휘두른 것 같았다.

“아제프, 그 개새끼가! 언젠가는 죽여 버릴 거야.”

그들 가까이에 도착하자 아제프는 드디어 저 남자가 누군가를 욕하는지 알아냈다. 아제프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도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고 협박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세시드! 말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세시드라고 불린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에 곁에 있던 여자가 그를 말리며 주위를 살폈다. 세시드는 저를 말리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왜? 그딴 고아 따위가 무서워? 어차피 길거리에서 입양된 놈이잖아. 더러운 놈. 거기서 뭘 했을지 어떻게 알아?
지금도 그 낯짝만 믿고 설쳐대는데! 혹시 모르지, 그라시아 란델이랑도 그런 더러운 사이였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땅을 발로 차며 악을 쓰는 모습에 엘제이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녀는 서리가 내려앉은 얼굴로 세시드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욕을 들었다고, 화를 내주려는 건가?’

아제프는 엘제이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4 화
44

세시드의 말은 그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저런 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비루먹은 놈들뿐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반응에 그녀 몰래 눈을 휘며 웃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대로라면 그녀의
동정심을 사 이것저것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해달라고 하지? 아까 하던 거 마저 하자고 할까?’

생각지 못했던 수확에 아제프가 생글생글 웃다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생각만 해도 배 속이 화끈거리는 게 무척
유쾌했다. 그가 어떤 걸 해달라고 할지 고민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불쌍한 척하며 그녀의 시선을 끌 생각을 한 아제프가 막 슬픈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려고 할 때, 엘제이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초록색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강렬한 시선에 아제프가 흠칫 놀랐다.

그의 당황한 얼굴에 엘제이는 아제프의 속이 상한 것 같다고 착각하며 하필이면 오늘 장갑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개 같은 새끼.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르는 똥개 따위만 할 수 있는 더러운 방식이잖아. 내 말이 틀려?”

아제프가 안쓰러워 촉촉이 젖었던 눈이 차게 식었다.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으로 세시드를 노려보던 엘제이는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계속 나불대는 목소리에 더는 참지 못했다.

엘제이가 손을 뻗어 아제프의 장갑을 벗겨냈다. 거침없는 행동에 아제프가 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제이?”

엘제이가 아제프의 장갑을 강탈하듯 빼앗아 수풀을 헤치고 달려갔다. 엘제이의 모습에 흥분해 날뛰는 엘리사의
모습이 겹쳐지자 아제프가 일순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말려야 한다는 걸 잊어버렸다.

땅을 박차고 나간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세시드에게 장갑을 던졌다. 검은색 가죽 장갑이
명중하며 세시드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찰싹-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엘제이가 세시드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 입 다무세요. 당신께 결투를 신청합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엘제이의 모습에 당황했던 세시드는 그의 뺨을 맞고 떨어진 장갑을 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너 미쳤어?”

엘제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넋이 나가 있던 아제프가 엘제이를 한 대 치려는 세시드를 보고 깜짝 놀라 내려갔다.


그가 사나운 얼굴로 엘제이를 감싸며 제 뒤로 물리자, 세시드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자기야! 티아세 영애야.”

세시드 옆에 있던 여자, 실비아가 그를 말리며 속삭이자 세시드의 얼굴에 짙은 곤란함이 내려앉았다. 당사자에게
뒷말하는 걸 들켜버렸고, 그보다 신분이 높은 공녀에게 막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세시드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엘제이가 아제프 뒤에서 나오며 그를 노려봤다. 늘 순하게 내려와 있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엘제이가 이를 악물고 덩치 큰 남자를 올려보며 쏘아붙였다.

“아직 나이도 젊으신데 귀가 안 좋기라도 하세요? 아니면 제 말이 말 같지가 않아서 집중하지 않았나요?”

“네? 무엇을…….”

세시드는 투견처럼 왕왕거리는 엘제이를 보며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실컷 그를 욕할 때는 언제고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이 비굴하다 못해 역겨웠다. 엘제이가 얼굴을 콱 찌푸리고


부드러운 눈썹을 위로 확 치켜세웠다. 쥐어짜듯 나온 카르릉거리는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결투를 신청한다고 했잖아요. 머리가 나쁜 겁니까? 페이칸 경.”

저 남자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사사건건 아제프에게 열등감을 불태우며 그를 깎아내리기 바쁜 백작 영식이었다.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짓뭉개듯 발음하며 이를 갈았다. 아마 한두 번 그를 욕한 게 아니었을 거다. 자기 능력은
생각도 안 하고 막 뱉는 말에 속이 상했다.

저도 이렇게 아픈데 아제프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지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대결도 없이 패배를 시인하겠다는 건가요? 도망자가 되실 생각이세요?”

“하지만 티아세 양. 당신은,”

세시드는 그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엘제이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있으면 할퀴기라도 할 듯 쏘아보는


얼굴에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괜히 엘제이와 싸워 현 재상인 아이젠의 분노를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인 엘제이와 결투를 해봤자 그의 평판만 나빠질 뿐이었다. 검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사람과
무엇으로 결투하란 말인가. 세시드는 감출 수 없는 곤란함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늘 얌전하고 순했던 엘제이가 세시드를 비꼬자 아제프조차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도
자매라는 건지 엘리사가 앞발을 슝슝 휘두를 때와 같은 모습에 아제프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아제프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씩씩거리는 엘제이를 보고 정신을 차리며 그녀를 말렸다. 아마 직접 결투를
하지는 않겠지만, 먼저 싸움을 걸었음에도 기사를 내세우는 모습도 좋지는 않았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괜찮았겠지만, 아제프와 그녀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관계가 이렇게 불안하다는 것에 이를 갈면서도 일단은 그녀를 말렸다.

“제이, 저는 괜찮아요.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지렁이의 말에 괜히 마음 쓰지 마세요.”

“아제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어요. 저는 저 무뢰배에게서 사과를 받아낼 거예요.”

둘에게 무지렁이와 무뢰배로 지칭된 페이칸이 울컥한 얼굴로 둘을 노려봤다. 아제프에게 밀려 늘 2 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페이칸은 그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

페이칸은 고작 백작가의 차남인데 나이도 훨씬 어린 아제프가 후작 위를 가진 것도 모자라 외교부 수상의 지위를


얻자 아제프를 향한 반발과 증오심이 커졌다.

게다가 반반한 얼굴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주변인의 호의를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시드는 엘제이도
그에게 꼬인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참지 못했다.
“좋습니다, 티아세 양.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요.”

“페이칸 경의 어리석은 머리에 화가 날 지경이네요. 이곳이 어딘지 잊으셨어요? 여기는 코르디스가 열리는
승마장. 이곳에서의 결투는 코르디스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엘제이가 그를 무시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며 약을 올렸다. 모두 다 엘리사에게 보고 배운 것이었다. 동생에게 배운


나쁜 짓을 요긴하게 써먹은 엘제이가 팔짱을 끼며 세시드를 무시하듯 그가 팔에 찬 완장을 쳐다봤다.

본선 진출자에게만 주어지는 완장에 시선을 준 세시드가 아제프의 팔에도 같은 것이 있음을 확인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사사건건 무시하는 게 아제프와 닮았다.

“제가 이기면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죠? 저도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이칸은 엘제이 옆에 서서 애처로운 얼굴로 그녀를 말리는 아제프를 노려보며 뇌까렸다. 엘제이는 말로
설득하려는 아제프에게 고개를 저어 말리고, 세시드에게 냉정하게 일갈했다.

“당신이 이기면 이 일을 없던 걸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아제프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시고,


다시는 그따위 말을 입에 담지 마세요.”

세시드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생각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 눈이 승부욕으로 불타올랐다.

***

아제프는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엘제이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내기에 진다고 해도 본 이도 없고


조건도 별거 아니라 큰 타격이 없었지만 혹시 무리하다가 그녀가 다치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제이, 괜찮겠어요? 말, 무서워했잖아요.”

“전 괜찮아요. 집에서 연습 많이 하고 왔는걸요. 어차피 참전할 경기 포상이 따르는 것뿐이에요.”

어제 온종일 아제프가 선물해준 아즈와 승마 연습만 했다.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온종일 승마에만
매달렸더니 몸은 좋지 않았지만, 원래 엘제이 티아세가 가졌던 승마 센스는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말을 아주 잘 탔다. 한제이의 기억이 남아 조금 무서운 것뿐이지 익숙해진다면 원래의 그녀처럼
탈 수 있었다. 꼭 이겨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놈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

엘제이는 세시드의 무례한 말이 그의 아픔을 들춰냈을까 봐 걱정되었다. 엘제이가 속상한 얼굴로 그의 뺨을


만지며 애잔하게 물었다.

“그보다 아제프는…… 괜찮아요?”

엘제이가 저렇게 속상한 얼굴을 하니 아제프의 기분도 저조해졌다. 단순히 그녀의 동정을 이끌어내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나불대던 입을 방치한 걸 후회했다. 아제프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입을 찢어서라도 막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손, 이제 나았어요?”

그의 시선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하얀 손으로 향했다. 얼마 전 난 생채기는 대부분 아물었는지 손은 깨끗하게


돌아와 있었다. 아제프는 이제는 정말 조금도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엘제이의 손을 잡았다.
“네? 아! 이제 괜찮아요.”

“네. 저도 그런 말, 신경 쓰지 않아요.”

“아…….”

아제프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는 엘제이를 보며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오싹하게 웃었다.

“하지만, 당신을 슬프게 했으니 가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뜨거운 별을 품은 것처럼 화끈거리는 가슴에 엘제이가 왼쪽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시 인상을 썼다. 슈팅스타가
가슴에서 팡팡 터지는 것 같은 오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곧 사라진 감각에 얼굴을 편 엘제이는 시간이 다 되자 울리는 뿔각 소리를 듣고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나가요. 당신께 꼭 승리를 안겨드릴게요.”

예쁜 보조개가 장난스럽게 쏙 피어나자 아제프가 흰 뺨 위에 눈길을 주며 엘제이의 손을 꾹 눌러 잡았다.

“든든하네요. 승리의 여신이 함께 있으니 우승은 제 것이군요.”

코르디스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승마대회가 지금 시작되었다.

***

문이 열리고 등장을 알리는 뿔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즈의 고삐를 쥔 아제프가 차분한 얼굴로 걸어갔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남자와 그를 닮은 말은 동화 속 환상 같았다. 엘제이는 아즈의 목덜미를 긁어주는 아제프를 보며
물었다.

“아제프……. 제이드가 아니라 아즈로 나가도 괜찮겠어요?”

제이드라고 발음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아제프는 엘제이와 처음 밤산책을 갔던 날 데려왔던 말의 이름을


엘제이에게서 따왔다. 애칭인 제이를 붙여 제이드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말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괜스레
부끄럽고 설렜다.

“그럼요. 저는 제이가 편한 쪽이 좋아요.”

아제프는 승부욕으로 불타던 눈은 어디 갔는지 다시 수줍은 얼굴로 돌아온 엘제이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는
사실 어떤 말이나 상관없었다. 원래 우승할 생각 없이 그냥 본선에 진출하는 것에서 만족하려던 남자는 이렇게 된
이상 우승을 노리고 싶었다.

“그동안 제이와 호흡을 같이 했으니, 내가 없을 때 제이를 잘 부탁해, 아즈.”

아제프가 말의 이마에 그의 이마를 맞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와 달리 아즈의 이름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지 그의 목소리는 산뜻하기만 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5 화
45

예선과 달리 본선 코르디스의 승마경기는 조금 특별한 룰이 있었다. 바로 파트너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는데,


파트너는 본선 진출자가 깃발을 가져오는 사이 돌아야 할 바퀴 수를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

코르디스의 룰은 간단했다. 총 8 명의 본선 진출자 중 10 바퀴를 먼저 도는 쪽이 우승자가 된다. 본선 진출자들은


파트너와 함께 말에 오른 뒤 출발하고, 5 바퀴를 돈 후 말에서 내려 각자 정해진 포인트에 놓인 깃발을 가지러
간다.

이때, 파트너는 멀리 떨어진 깃발을 가지러 간 본선 진출자의 바퀴 수를 줄여주기 위해 혼자 달리게 되는데,


보통은 한 바퀴만 돌고 파트너와 합류한다.

그 외에도 높은 허들 같은 장애물을 신경 써야 하지만, 파트너들의 실력이 본선 진출자들보다 아래인 만큼 깃발을


빠르게 가져와 먼저 합류하는 것이 경기의 키포인트였다.

만약 본선에 진출했다고 해도 파트너가 없다면 우승을 할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다른


말들과 달리 혼자 참가한 출전자의 말은 부담이 훨씬 덜하기에 형평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엘리사가 아제프의 파트너가 되어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코르디스 본선 진출자에게 파트너가


없다면 비겁하다는 욕을 듣게 된다. 원작의 아제프는 체면상 어쩔 수 없이 본선에는 진출해야 했지만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꺼리기에 파트너 없이 참가하려 했다.

페이칸같이 그를 시기하는 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안타까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게 엘리사였다.

엘제이는 환한 햇볕이 쏟아지는 경기장에 서서 긴장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리사보다 잘할 수 있을까?’

원래의 엘제이는 엘리사보다 말을 잘 탔지만, 한제이의 기억이 겹쳐 겁이 많아진 게 문제였다. 과감함이 떨어진
탓에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저도 모르게 말의 고삐를 세게 쥐게 되었고 아즈는 그걸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로
알아들었다.

거세지는 긴장감에 엘제이가 끙끙거리며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으으- 긴장해서 아제프를 다치게 하면 어쩌죠? 아제프가 오르거나 내리기 전에 제가 출발해버리면 어떡해요?”

“……그렇게나 빨리 달리고 싶은 거예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긴장하면서도 승부욕에 불타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제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하라고 속삭이자 주먹을 불끈
쥔 엘제이가 다짐하듯 말했다.

“두 바퀴는 돌 거예요.”

“제이.”

“우승을 노려야죠. 그 남자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사과도 받아내고, 으으으- 아무튼 꼭 이길 거예요!”


엘제이가 힘껏 소리를 지르다가 옆에 서 있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며 소리를 죽였다.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일은 언제나 부끄러웠다.

엘제이의 부끄러움은 곧 트랙을 정해주는 사회자의 목소리 묻혔다. 아제프는 시끌벅적한 관중석을 보며
엘제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말했죠? 가만두지 않겠다고. 제이는 한 바퀴만 도세요. 당신이 얼마나 빨리 돌아오든 제이가 도착하기
전에 마중 나갈 테니까.”

그녀가 얼마나 빨리 달리든, 혹은 느리게 달리든 아제프는 우승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니 최선을
다해줄 생각이었다. 엘제이에게 부족한 점은 그가 채워주고 싶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한 얼굴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Green, 아제프 란델!”

아제프의 트랙이 배정되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초록색 깃발이 펄럭이는 깃대를 살폈다. 암석으로 만든 지형이
험준하긴 했으나 디딜 곳만 잘 찾는다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태연한 아제프의 안색과는 달리 엘제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깃대가 꽂힌 곳을 살펴보며 울상을 지었다.

“하필이면, 저기가 제일 힘들어 보여요. 아제프,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그럼요. 그리고 전 저기가 마음에 들어요. 꼭 제이가 함께하는 것 같잖아.”

아제프가 엘제이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경기인 만큼 출전마들은 예쁘게 치장되어 있었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먼저 아즈 위로


올려주고 그 뒤에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트랙 배정이 모두 끝나고, 출전자들이 말 위에 오르자 사회자가 깃발을 들었다. 곧 대회가 시작할 것 같아


엘제이의 등이 긴장으로 바짝 곱아들었다. 엘제이는 빨간 깃을 배정받은 페이칸을 노려보며 전투력을 다졌다.

“저 치는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목표는 우승이니까.”

아제프는 제법 용맹한 얼굴을 한 새끼강아지를 토닥이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엘제이의 숨도 한결 편안해졌다.

“살리브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아제프가 가볍게 출발 신호를 보내자 아즈도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우아한 준마의 발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백금색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한 갈래로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거세게 나부꼈다. 눈이 시리도록 부는 바람에도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던 엘제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장애물에 아찔한 얼굴을 했다.

말의 키를 가뿐히 넘는 거대한 장애물은 화려하게 채색되어 넘을 수 없는 산처럼 웅장해 보였다. 엘제이의


기억에는 이 정도로 거대한 장애물은 넘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가 있으니 괜찮았지만, 혹시 그가 없을 때
제가 실수해 실격하거나 아즈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

“제이, 이제 넘을 거예요. 주인이 겁을 먹으면 말도 두려움을 느껴요. 아즈는 훌륭한 말이니 이렇게,”

그의 말과 동시에 짧게 당겨진 고삐에 아즈가 다리를 크게 들고 시원하게 장애물을 넘었다. 굽어졌던 말의


뒷다리가 펴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낙하하는 공포와, 세찬 바람 소리를 동반한 쾌감이 함께 번졌다.

엘제이의 얼굴에 짜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했어요. 승마는 용기와 아름다움을 함께 뽐내는 경기예요.”

아제프가 환하게 웃는 엘제이를 칭찬하며 그 뒤로도 말을 잘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나긋하게 속삭이는
아제프의 음색과 달리 아즈는 무척 빠르게 달려 초반 2 위를 꿰찼다.

힘차게 뛰어나가는 말발굽 소리와, 조곤조곤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엘제이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아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알려주는 걸 주의 깊게 들었다.

세찬 바람을 얼마나 맞았을까. 아즈는 순식간에 트랙을 돌았고, 엘제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초록색 깃발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달려간 말이 그의 신호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아직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지만 아제프는 말고삐를
엘제이에게 넘기고 속삭였다.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꼭 올 테니까, 마음껏 달려요.”

“아제프!”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튼 남자가 그대로 땅 위로 뛰어내렸다. 두툼한 모래가 깔린 승마장 위로 안정적으로


착지한 남자가 그대로 뛰어가 깃발을 향해 달려갔다.

엘제이의 시선이 뜀박질을 시작하는 아제프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크게 다칠 수 있는데,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볍게 흩날리는 백금발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완전히 멈춰선 말이 그녀의 신호를 기다렸다. 지금부터는 엘제이의 싸움이었다.

“아즈, 부탁해.”

엘제이가 아즈의 고삐를 단단히 쥐며 달리기 시작했다. 두툼한 안장을 깔았는데도 허리가 뭉근하게 아파졌다.
뒤를 받쳐주던 아제프가 사라지자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혼자 말 위에 남았다는 사실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엘제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자 아즈도 불안감을 느꼈는지 말의 속도가 늦춰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곧 닥쳐올 장애물이 두려웠다. 엘제이가 아득히 높은 장애물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장애물을 보기 두려워진 엘제이가 시선을 조금 돌리는데, 빨간 깃발 아래에 서 있는 페이칸이 보였다. 아제프는


험한 산악지대가 걸려 바위를 넘나들어야 하는데, 운이 좋았는지 평지를 달리는 그를 보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추첨으로 결정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지만, 아제프만 가시밭길인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에게
꽃길을 깔아주고 싶은 엘제이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승마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거의 없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힘이 세지 않은 엘제이가 당당히 페이칸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승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용기와 믿음.’

숨을 길게 쉰 엘제이가 말의 옆구리를 누르며 아즈의 이름을 불렀다.

“아즈!”

속도를 늦췄던 말이 그녀의 부름에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큰 체격이라 꽤 무거웠던 아제프가 내려가고
엘제이만 남게 되자, 아즈의 속력은 그가 있을 때보다 빨라졌다.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울리자 엘제이의 코앞에 높은 허들이 나타났다.

[주인이 겁을 먹으면 말도 두려움을 느껴요.]

[승마는 용기와 아름다움을 뽐내는 경기예요.]

조곤조곤 속삭이던 그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용기가 났다. 그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고삐를
바싹 당기고 허들을 향해 달리자 아즈가 백금빛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엘제이의 가슴이 말에 닿을 듯 가까워지고, 앞발을 한껏 치켜든 말은 주인이 원하는 것처럼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심장을 철렁이게 하는 낙하감이 지나고 무사히 장애물을 넘자 빠르게 몰려오는 환희가 엘제이를 강타했다.
덜컥거리며 땅에 착지하자 엘제이가 환하게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그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이미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아제프가 보였다.

찬란한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제프!’

엘제이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몇 번 더 장애물을 넘었다. 그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엘제이는 이번엔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엘제이가 아즈의 고삐를 당기자 아즈의 속력이 느려지고 바로 앞에 다가온 말을 본 남자가 말 등 위로 손을 짚고


그녀의 뒤로 올라탔다.

“하!”

짧은 구호와 함께 아즈가 다시 출발했다. 몸을 강타하는 전율에 엘제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온 힘을 다해


뛰어온 아제프의 심장도 힘차게 박동했다.

온몸을 순환하는 피가 그들의 심장에서부터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힘차게 박동하는 아제프의 심장 위로 엘제이의
심장이 겹쳐졌다.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이 공명하듯 울었다.

가슴을 덮는 흥분감과 함께한다는 전율에 아제프가 한 손으로 엘제이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잘했어요. 아주 멋졌어.”

숨이 차 거칠게 나간 소리는 고양감에 가득 차 있었다. 엘제이가 고삐를 잡는 동안 3 위로 떨어진 아즈가 둘을


태우고 빠르게 뛰어갔다.

노란색 깃발의 말을 제치고 튀어나가자 우승 후보였던 은발의 쌍둥이가 보였다. 남은 바퀴 수는 양쪽 모두 한


바퀴. 엎치락뒤치락 승패가 갈리는 절묘한 상황에 은빛 머리가 반짝거렸다.

‘은발의, 쌍둥이.’

헤집어진 기억은 바로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눈앞을 스치는 은발의 잔재가 한 번 뒤엎어진 기억을 건드렸다.

‘어떻게, 잊고 있었을 수 있지?’

엘제이의 눈에 커다란 동요가 스며들었다. 이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기억이 이상할
정도로 흐렸지만, 정신이 없어 엘제이는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여기서 멈춰야 했다. 엘제이는 다급하게 아제프의 옷깃을 붙들었다.

“아제프!”

“와아아아아!!!!!”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아즈의 앞발이 먼저 하얀 선을 넘어버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6 화
46

말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던 관중석의 함성이 거세게 쏟아졌다. 엘제이는 우승을 축하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은발의 쌍둥이를 바라봤다.

우승의 기쁨이 아닌, 짙은 낭패감이 찾아왔다. 엘제이가 망연한 얼굴을 한 쌍둥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안 돼…….”

은발의 쌍둥이가 원했던 광영을 엘제이가 뺏어버렸다. 그녀는 절대 우승해서는 안 될 경기에서 이겨버렸다.

***

원작 소설은 코르디스가 열린 날 아제프와 엘리사가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원작의 첫 장면에서 코르디스가 부각된 이유가 있었다. 코르디스가 열린 날부터 운명의 사슬이 겹겹이 엮이기
때문이었다.

엘리사와 알체스테가 만나려면, 황자는 황도로 돌아와야 했다.

황제의 칙서로 변경을 벗어날 수 없는 황자가 수도로 돌아올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 것.

반역을 꾀할 만큼 황제를 미워하지 못한 알체스테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황제의 마음을 돌려 당당하게 황도로
귀환하는 것. 알체스테가 귀환할 수 있도록 한 시작점이 오늘의 코르디스였다.

알체스테의 소꿉동무인 은발의 쌍둥이는 마술이 뛰어났다. 그들은 알체스테를 불러들이기 위해 코르디스에서
우승하기를 원했다.

코르디스의 우승자에게는 우승 후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주어졌고, 많은 대소신료와 백성들의 눈앞에서 황제에게
호소한다면 들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체스테가 안정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한 가지 도박이 필요했는데, 그는 제 친우들이 우승 후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전제하에 행동해야 했다. 황제의 칙서가 미처 변경에 닿기 전 그를 막으려는 루드비히의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지금쯤 알체스테는 이미 수도에 올라올 준비를 끝내고, 말에 올라탔을 때쯤일 터였다.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지? 뭘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엘제이는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쌍둥이를 보며 제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린 걸 알았다. 그녀는 엘리사의
짝을 벼랑 끝으로 몰아버렸다.

만약, 황제의 칙서 없이 황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는 황제의 명령을 어긴 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엘제이는 제가 그들의 계획을 망쳐버렸음을 알고 희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엉킨 매듭을 그녀의 손으로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알체스테 황자의 귀환을 요청한다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엘리사가 그렇듯 엘제이도 알체스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보다 나이가 꽤 많은 비운의 황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 황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황자를 불러들이라고 호소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엘제이는 황제의 옆에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아이젠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실수로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이 사태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엘제이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갈 때, 말에서 내린 아제프는 엘제이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를 내려줬다.

아까 맛봤던 함께한다는 전율이 가시지 않아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안아든 채 환하게
웃었다.

“제이, 아주 잘했어요. 사실, 저 이번에 꼭 우승하고 싶었거든요.”

“네……?”
아제프는 애초에 우승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코르디스에도 파트너 없이 참가하려 했고, 엘리사와 함께
출전한 날에도 대충 중위권에 머물렀다. 엘제이는 예상치 못한 그의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아제프는 단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황제를 알현할 기회는 엘제이가 아니라, 본선 진출자인
아제프의 것이었다. 함께했지만 우승의 영광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다.

아제프의 것을 달라고 청하기가 미안했다. 엘제이는 제가 망쳐버린 일에 신음하며 도움을 청하듯 아제프를
올려다봤다.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알체스테를 살려야 했다. 곧 엘리사의 문장이 발현될 시기였다. 반려가
없다면 엘리사는 평생 문장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아제프……. 사실,”

엘제이가 그에게 솔직하게 토해놓고 도움을 구하려고 하자 아제프의 얼굴이 의아하게 물들었다. 그는 희게 질린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굳히고 뭐라 말하려 입을 떼었다.

“제이, 왜 그러는,”

“란델 경! 이쪽으로!”

코르디스에서 우승한 이가 즉각 황제에게 가지 않고 어물쩍거리자 담당관이 그를 호명하며 아제프를 불러들였다.

“아, 제이. 금방 다녀올게요.”

엘제이는 걱정스럽게 저를 쳐다보고 뛰어가는 아제프를 보고 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여기서 그를 붙잡으면
아제프가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내가 저질렀으니 내가 수습해야 해.’

엘제이는 일단 알체스테의 발을 막아놓을 생각을 했다. 아직 변경을 벗어나지는 않았을 테니 황도로 올라오지만
않으면 그도 무사할 수 있었다. 엘제이가 아이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젠의 도움이 필요했다.

엘제이가 아이젠을 설득할 말을 고민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저를 향해 뛰듯이 걸어오는 딸을 본 아이젠이


의아한 얼굴로 황제 곁을 떠나 내려왔다.

“제이야, 어디가 안 좋은 거니? 혈색이 안 좋구나.”

“아버지, 당장 이그린에 사람을,”

엘제이가 다급하게 말하며 아이젠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알체스테가 지나올 곳을 안다는 게 천운이었다. 황도로
올라오기 전 알체스테를 막을 생각으로 엘제이가 빠른 목소리로 속닥거리는데 황제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황제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제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그 소리에 놀란 엘제이가 말을 멈추고 아제프를 돌아봤다. 황제의 분노에도 태연한 얼굴로 웃은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한 번 더 고했다.
“알체스테 황자님을 황도로 불러들이시라 청했습니다.”

“란델 경! 이미 폐하의 칙서가 내려진 일이네!”

황제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 돌아온 쪽은 루드비히였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황자가 황제를 돌아보며
허락하면 아니 된다고 청했다. 차기 황권을 거머쥘 확률이 가장 높은 황자의 분노에도 아제프의 혀는 매끄러웠다.

“그러니 폐하께 고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신, 얼마 전 변경에 방문했을 때 늠름하게 성장한 황자님을
뵈었습니다. 용안이 어찌나 눈이 부신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한 황자님을 한 번도 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아제프가 부정을 호소하듯 황제를 바라보며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가슴 시린
목소리에 주변이 술렁술렁 흔들렸다.

“…….”

황제는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이 한 자리에서 모인 축제의 날, 영악한 부탁을 해오는 아제프를 말없이 응시했다.
아제프에게는 알체스테를 도울 이유가 없었기에 황제는 저와 루드비히를 등지면서까지 아제프가 이러는 이유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폐하, 저는 황자님의 발을 영원히 풀어달라는 청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다만 부자 간의 관계가 걱정이 되어 딱


한 번만 황자님을 불러들이시라 청을 드리는 겁니다. 곧 우기가 찾아와 마물의 습격도 뜸해질 테니 황자님의 공도
치하할 겸, 부자 간의 정도 다질 겸, 그분을 불러들이시는 게 어떠신지요.”

황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제프가 나긋한 어조로 말하며 속살거렸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외모와
화려한 언변에 그에게로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는 무척 교묘했다. 마치 알체스테를 영원히 불러들이라 말하는 듯하다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발을


빼버렸다.

사람은 앞서 부탁한 큰일을 거절한 후라면, 작은 일은 쉽게 들어주는 법이었다. 아제프는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며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으냐며 간교하게 속삭였다.

“네 이놈! 네가 나를 끌어내리겠다는 말이냐!”

루드비히가 참지 못하고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공적인 행사에서 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황자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황제는 그렇지 않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아제프를 보며 루드비히를 말렸다.
여기서 더 해봤자 잃을 것이 컸다.

“설마 그럴 리가요. 황자님을 불러 치하하신다면, 백성들은 나라의 영웅을 존중하는 폐하께 감읍할 것입니다.
모든 건 그저, 충심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아제프는 제 승리를 짐작했다. 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황제를 치켜세우는 척 알체스테를 추어올렸다.

알체스테가 변방을 지킨 후로 크고 작은 사고가 끊겼다. 변경에는 단단한 성벽이 세워지고, 체계적인 관리 하에


마수의 수를 줄여나갔다. 매년 마수들의 횡포에 가족을 잃었던 백성들 사이에서 알체스테의 인기가 높은 것도
당연했다.

황제는 술렁이는 민심을 들으며 저를 등진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오랜 시간 황권을 지켜온 남자의 눈이


무감각하게 빛났다.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물끄러미 아제프를 바라보던 황제는 잠시, 아제프를 도와줬던 엘제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딸 옆에 서 있던
아이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소신, 신하 된 입장에서 감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제 아이의 목숨이 또 한 번 위태로워진다면


아비로서 피눈물이 나겠지요. 아이를 잃은 아비의 비통이 광증이 되어 주인을 물 수도 있는 법입니다. 이 모든
건 그저, 충심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엘제이를 한 번 바라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까 화를 냈던 게


거짓인 것처럼 차분한 시선으로 아제프를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아’ 달이 끝나는 날까지 알체스테의 황도 출입을 허하겠다.”

“만백성이 폐하의 선택을 칭송할 것입니다.”

황제의 허락에 아제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멈출 수 없는 말 위에 서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고 버티기가 힘들 테지만, 그 끝에는 그가 원하는 게 있을 터였다.

엘제이가 원했던 대로 잘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의 상황이 위태로워졌다. 멍하니 서서 그와 황제의 대담을


지켜보던 엘제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떡해. 원작이…… 시작됐어.”

아제프는 그전까지 알체스테에게 관심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저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날씨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법이었다.

‘내 행동으로 미묘하게 변하고 있어.’

엘제이는 나비효과라는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7 화
47

넋이 나간 것 같은 딸의 모습에 아이젠이 엘제이의 팔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제이야? 란델 후작 때문에 이러니?”

“아버지, 저 때문에 그가 위험해진 것 같아요.”

얼굴을 찌푸린 엘제이가 고해하듯 속삭이며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저렇게까지 대놓고 등져버리다니 성격
급한 루드비히가 당장 암살자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엘제이를 바라보던 아이젠이 바짝 긴장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제프가 우승한 건 저 때문이에요. 제가 우승에 욕심내지 않았으면, 그도 저 자리에 서지 않았을 텐데…….”

엘제이가 횡설수설 대답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이젠이 이해되지 않는 딸아이의 태도에 이마를 찌푸렸을 때
아제프가 다가왔다.

“공작님, 제이.”

아이젠은 대놓고 황제에게 등을 돌린 주제에 태연한 얼굴을 한 아제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대범함을 높이


샀다. 하지만, 그 일에 제 딸이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다.

“……란델 후작, 왜 그런 거지? 위험한 선택이었다.”

“위험한 도박일수록 얻는 게 많은 법이죠. 킹이 될 수 없다면 킹메이커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요.”

“숨기지도 않는군. 내가 자네에게 해를 끼칠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난 황제의 사람인데.”

아이젠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대놓고 알체스테에게 붙겠다는 말에 아이젠이 인상을 찡그렸다. 뭘 믿고 제게


당당히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당신은 좋은 아버지니까요. 그리고 저는, 진심입니다.”

허를 찔린 사람처럼 아이젠이 눈을 홉떴다. 이성만을 믿어야 할 소리 없는 전쟁터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아이젠은 그들 사이에 끼여 눈치를 보는 엘제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이야, 아버지는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괜찮겠니?”

“제가 곁에 있을 겁니다.”

아제프의 말에 아이젠이 애매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신석 목걸이를 하지 않은 엘제이를 바라봤다.

묵묵히 입을 닫은 아이젠이 엘제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등을 돌렸다. 의심 많은 황제가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이젠이 떠나자, 엘제이가 아제프의 옷깃을 붙들고 속삭였다.

“당신이 너무 위험해졌어요. 몸을 소중히 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아제프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엘제이는 그 말을 한 날의 기억을 잊어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인지 아니면


기억을 되찾은 건지 살피며 그가 관찰하듯 엘제이를 바라봤다.

“……언제?”

“네?”

“언제 그런 약속을 했지?”


“아-”

엘제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을 닮은 소리가 나왔다. 그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제프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엘제이를 보며 아이젠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도닥거렸다.

“걱정하지 마. 안 죽고, 안 다칠 테니까. 나처럼 독한 사람은 잘 죽지도 않아. 그리고 너랑 같이, 오래도록
살아야 하잖아.”

아제프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단순한 친구 혹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남는 게 아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끝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삶.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며, 돌아갈 집이 되어주는 삶.

아제프 란델이 엘제이 티아세에게 원하는 건 그것이었다.

엘제이는 어느새 저와 같아진 청명한 푸른 눈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에 맹목적인 애정이 가득했듯이 그의 눈


또한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맑게 풀리고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그가 달라졌다. 거친 황무지 같았던 눈이 맑은 호수를 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다른 선택을 했고 그의 세계가 변했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죄악이 되었던 남자의 운명이 변했다. 그는 더는 엘리사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제프 란델은 엘제이 타아세를 사랑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그의 마음이 화인처럼 내리찍혔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낙인이 엘제이의 마음에 벗어나지
못할 울타리를 휘감았다. 선명히 드러난 그의 속내에 엘제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엘제이는 잔잔한 호수처럼 모든 걸 비추는 그의 눈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아제프랑 함께,”

“쉿!”

엘제이의 두 눈을 마주하던 아제프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승마장을
보며 조금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이런, 아직은 안 돼요. 정말 멋지게 하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자꾸 이러네요. 절제가 안 된다고 할까요?
서로를 향한 맹세를 이런 흙바닥에서 나누면 제 체면이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 아직은 아니에요. 저를
기다려줄래요?”

그는 제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운 듯했다. 엘제이는 귀 끝이 빨개진 그를 보며 수줍은 마음을


숨기기 힘들었다.

아제프가 멋쩍어 하는 얼굴을 보다니. 눈앞에 확연하게 보이는데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엘제이의 얼굴마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이 오면, 모든 걸 말해주고 그에게 함께 이겨내자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엘제이는 아침에 보았던 투명한 문장을 생각하며 생긋 웃었다.

“……기다릴게요.”

긍정과 허락이 담긴 얼굴에 아제프의 얼굴도 화사하게 펴졌다. 그가 착한 아이를 칭찬하듯 엘제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다정한 얼굴을 했다.

“착하네요.”

엘제이는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다가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주변을 인식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제프의 쓰다듬는 손길은 언제나 좋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조금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이 많은
뽀얀 얼굴이 새빨간 목각처럼 삐걱거리자 웃음을 삼킨 아제프가 선선히 물러났다.

아제프의 웃는 얼굴이 무척 부끄러워 딴청을 피우던 엘제이는 문득 시선을 돌리다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세시드를
발견했다.

봄날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장밋빛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까의 부끄러움을 모두 잊어버린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이?”

엘제이가 그의 손을 먼저 잡아온 건 처음이었다. 아제프는 손을 꼭 잡고 세시드를 향해 돌진하는 엘제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를 위해 성난 얼굴로 다다다 걸어가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몹시 사랑스러웠다.

엘제이는 극성맞은 엄마처럼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분노를 표출했다. 자신들을 발견했으면 재깍재깍 찾아와
사과했어야 도의에 맞는 일일 텐데, 그녀가 다가오기 전까지 모른 척하는 모양이 괘씸했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꼭 잡으며 서슬 퍼런 눈으로 세시드를 노려봤다. 얼른 사과하라는 소리 없는 압박에도


세시드는 불그죽죽한 얼굴로 우왕좌왕했다.

엘제이는 손을 쥐었다 폈다 부산을 떨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 세시드를 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제프는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튀어나가 세시드의 뺨을 올려붙일 것 같은 엘제이의 태도에 애매한 얼굴로
웃으며 그녀를 꼭 잡았다.

“그, 그게……. 음…….”

세시드는 몹시 어려운 말을 꺼낸다는 듯 우물쭈물했다.

말끝을 흐리는 건 엘제이 본인이 무척 잘하는 행동이었지만, 엘제이는 그걸 몰랐다. 그녀는 다 커서 한심하게
말도 못하는 남자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세요.”

세시드는 또 울컥 터지려는 열등감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세시드는 빨간 문어처럼 익은 얼굴로 아제프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아……. 란델 경, 미안합니다. 제가 경솔하게 말했어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든 면에서


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요. 그걸 인정하기 싫어 당신을 욕하고 미워했던 걸 압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세시드는 그간 솔직하지 못했던 걸 반성했다. 코르디스에서 아제프는 세시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오히려 그의 뒤만 바라보며 열등감에 휩싸여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건 세시드 쪽이었다.

모든 걸 인정하니 후련해졌다. 뉘우침이 있어야 나아갈 길도 있는 법이었다. 아제프처럼 되고 싶다면 열등감에


휩싸여 남의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제프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무척 의외네요.”

아제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세시드를 보며 큰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무덤덤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제프는 표정 없는 얼굴을 까딱이며 고민했다.

엘제이를 화나게 하고 그녀와의 산책을 방해한 게 거슬려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으므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변방으로 좌천시키는 정도로 화풀이할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곧 모든 게 귀찮아져 버렸다. 눈앞에 있는 벌레 하나 거슬린다고 굳이 치워버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가 손을 살래살래 흔들며 엘제이의 손을 잡고 세시드를 지나쳤다.

“앗, 아제프, 아직!”

엘제이는 뭐라고 더 쏘아주려다가 아제프 손에 끌어당겨졌다. 그녀는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좀 씩씩대다가


아제프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줬다. 그녀가 버둥거리자 아제프는 힘으로 제압하는 대신 가만히 멈추어
섰다.

아제프는 반항하며 낑낑거리는 어린 강아지를 부드럽게 바라보다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는 뭐라 입을 열려는


엘제이의 귀에 입술을 내려 속닥거렸다.

“제이, 오늘 예쁜 드레스 준비했어요?”

엘제이는 목을 살짝 움츠렸다. 귓바퀴를 뱅그르르 도는 숨결에 소름이 돋았다. 발끝이 하얗게 곱아드는 감각에
엘제이는 눈을 꾹 감으며 겨우 답했다.

“드레스, 요?”

“응. 나는 이왕이면 목덜미가 예쁘게 보이는 쪽이 좋은데. 가끔 당신의 하얀 목을 핥아 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 내가.”

고혹적인 음색이 나른하게 내리깔렸다. 아제프는 정말 엘제이의 목을 핥아 내릴 듯 그녀의 목덜미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후후- 불어오는 공기가 바람인지 그의 숨결인지 알 수 없었다. 엘제이의 목이 몸살이 난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긴장하지 마. 아직은, 아니니까.”

아제프가 빙긋 웃으며 엘제이의 목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러났다.

화산이 폭발하듯 뜨거운 기운이 몰려왔다. 하얀 목이 그의 시선에 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종일 그 때문에 열이 올랐다가 내렸다가 정신없이 반복하는 뇌가 흐느적흐느적 풀렸다. 뇌가 진탕된 느낌에
엘제이는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따라갔다.

얌전해진 엘제이의 손을 쥔 남자가 해사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아제프는 몽롱하게 풀린 엘제이의 얼굴을 감상하며 가볍게 걸어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8 화
48

코르디스는 승마경기와 무도회 2 가지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승마대회로 화려하게 막을 올린 후, 뒤이어 열리는


무도회에서 승마대회 우승자는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춤의 영광을 가져갔다.

승마대회가 끝난 뒤 몇 시간 후 무도회가 열리기 때문에 황실에서는 본선 진출자와 그들의 파트너에게 객실을


제공했다.

아제프는 마차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몽롱한 상태인 엘제이를 힐끔 보고 예쁘게 웃었다. 여기서 진짜로
목덜미를 핥아 내리기라도 했다가는 온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는 선량한 얼굴로 엘제이의 뺨을 살며시 쥐고 사근사근 속삭였다.

“제이, 기다릴 테니 예쁘게 하고 나와요.”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듯한 천사의 얼굴에 휘광이 맴돌았다. 엘제이는 반짝반짝 예쁜 아제프를 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고개만 끄덕이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엘제이를 웃으며 바라보다가 그녀의 등을 방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엘제이는 그가 미는 대로 뻣뻣한 몸을 이끌고 객실로 들어갔다.

티아세 家의 마차를 타고 온 시아가 휘청휘청 흔들리는 엘제이를 챙기고 아제프를 향해 목례를 했다. 시아가
조심조심 엘제이를 부축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따라 들어가는 다른 시녀들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바로 옆의 객실을 열고 들어갔다.

화려한 예복을 준비하고 서 있는 알모어를 발견한 아제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제프가 문을 꼭 닫고
들어가 소파 위에 앉았다. 아제프는 흉흉한 얼굴로 옷을 천천히 풀어헤쳤다. 상흔이 죄다 사라진 아름다운 상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제프는 알모어에게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잇새 틈을 비집고 나온 음색이 오싹하리만큼 섬뜩했다. 옷을 찢어발길 듯 벗어던진 남자가 새하얀 제 손을


나른하게 바라보며 알모어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제프가 손을 바라볼 때는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였다. 저렇게 싸늘한 눈으로 손을 내려다볼 때는 꼭 누군가를
해하는 일을 계획했다. 알모어는 흉기처럼 단련된 몸을 흘깃 바라보다가 긴장한 어조로 빠르게 속삭였다.

“네. 후작님의 말씀대로 경매는 포기했습니다. 아첼의 신록은 지금쯤 루드비히 전하의 내실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아나이샤의 뿌리도…….”

알모어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아제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웃고 있는 얼굴이 기묘하게 어그러져


야차처럼 흉흉했다.

아제프가 눈을 지그시 감고 화를 참아내듯 손을 꽉 쥐었다.

승마대회가 열리기 전 환복을 할 때, 알모어의 보고가 없었다면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귀환을 청하지 않았을
터였다.

루드비히의 계획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제프와 루드비히가 같은 것을 원했기에 생긴 우연.

둘은 아첼의 신록을 원했다. 아첼의 신록은 생명의 여신 에테미아가 사랑하는 딸 아첼에게 선물했다는 전설이
남은 녹색 보석이었다. 에메랄드나 사파이어 같은 일반적인 녹색 보석과는 달리 아첼의 신록은 가장자리에서부터
색이 점점 진해지는 독특한 것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광물은 그 주인을 지켜준다는 말이 있어 많은 호사가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전대 주인이


죽고 다시 세상에 나온 보석이 경매로 넘어왔다.

베아르시에는 청혼할 때, 여자의 눈 색과 닮은 보석을 건네는 풍습이 있었다.

아제프 역시, 그 때문에 아첼의 신록을 엘제이에게 청혼 예물로 보낼 생각이었다.

루드비히와 마찬가지로.

“아첼의 신록과 아나이샤의 뿌리. 멍청한 놈이 아니냐. 원하는 바를 이 정도로 극명하게 드러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나이샤의 뿌리는 사지를 굳히는 특수한 마비독을 만드는 재료였다. 어떤 재료를 섞어도 결국에는 마비독이 될
정도로 강력한 뿌리는 들어간 재료만 안다면 해독제를 만들기도 쉬웠다. 다만, 아나이샤 뿌리와 함께 갈아 넣은
재료를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조제법이 각양각색인 만큼 마비독을 제조한 본인이 아니라면 아무도 해독제를 만들 수가 없다는 점이 흉악했기
때문에 아나이샤의 뿌리는 국법으로 금지된 약재였다.

“……공녀님께 배정된 시녀들은 모두 루드비히 전하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제프가 화려한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일어났다. 짙은 살기가 해사한 얼굴 위를 뒤덮었다. 아제프가 이를
빠드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루드비히……. 그 멍청한 놈이 결국, 화를 자초하는구나.”


“후작님! 이곳은 황성입니다. 부디, 말을 조심해주세요.”

알모어가 기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아제프를 말렸다. 예민하고 신중한 사람이니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확신하고 한 말일 테지만, 이곳은 그의 저택이 아닌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하는 황궁이었다.

“새삼스레 겁이 나나?”

“제 목숨은 이미 후작님의 것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미 멈출 수 없는 화살이다. 화살대가 다 부러지고 망가져도 화살촉만은 남아 그놈의 머리를 꿰뚫을


테지.”

“후작님.”

“나처럼 본데없이 태어난 놈은 말이야……. 절대 내 것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몇 없는 내 것마저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거든. 내 것을 건드린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될 일이다.”

***

엘제이는 땀을 꽤 흘린 몸을 씻으러 황성에 준비된 욕실로 들어갔다.

시아가 있기는 했지만 사그라지는 문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며칠간 엘제이는 혼자 씻고 혼자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도 없는 욕실 안에서 속옷을 벗은 엘제이가 옷을 가지런히 정리하다가 손을 멈췄다. 엘제이의 시선이 하얀


가슴 위로 향했다.

행복으로 상기되었던 얼굴이 아연하게 질렸다. 엘제이는 망연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생의 몸부림. 문장이 꾸역꾸역 되살아나고 있었다.

“왜? 왜, 살아난 거야? 왜?”

엘제이는 씻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허탈한 얼굴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황홀한 빛을
되찾아가는 문장이 반짝반짝 빛났다. 전처럼 광채를 뿌리지는 못했지만 은은한 빛무리가 흘러가는 모습이 무척
고아해 보였다.

엘제이는 눈을 홀릴 만큼 예쁜 문장을 보면서 눈물을 줄줄 쏟았다.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산산이 부서진 마음이


흘러내렸다.

쨍그랑-

엘제이의 귓가로 날카로운 금속이 터지는 굉음이 맴돌았다. 옅은 희망으로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마음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하얀 턱 끝을 타고 흐른 눈물이 아롱아롱 고여 들어 문장 위로 떨어졌다. 신록을 머금고 빛나는 잎사귀가 그녀의


비애를 받아 반들반들 빛났다.

엘제이는 전처럼 문장을 지워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장이 밉거나 혐오스럽지도 않았다. 엘제이는 그저 무저갱에
빠진 사람처럼 희망을 잃고 망연하게 허공을 볼 뿐이었다. 탈색해버린 얼굴을 가로지르는 눈물만이 그녀의 슬픔을
대변했다.

“아가씨?”

승마대회 참가로 안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해 시간이 촉박했다. 시아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욕실 문을 두드리며
엘제이를 불렀다.

시아의 목소리가 엘제이를 재촉했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텅 비워진
머리가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했다. 뜨거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지끈 아파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시아는 엘제이에게서 대답이 없자 좀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그녀를 불렀다. 엘제이는 기절할 것처럼 급격하게
쇠약해진 몸을 느끼며 손을 바르작바르작 움직였다. 문장이 살아난 게 너무 큰 충격이었는지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시아, 너만 들어와 줄래?”

엘제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금기를 머금고 흘러나온 눈물이 마른 입술에 맺혀
짜디짠 비통을 토해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아가 바닥에 주저앉은 엘제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조심스레 엘제이의
몸을 일으켜 준 시아가 눈물만 죽죽 뽑아내는 엘제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낯선 황실 시녀들을 의식했는지 아주 조그만 목소리가 엘제이의 귓가에 닿았다. 엘제이는 그저 망연하게 고개를
저으며 욕조를 향해 손짓했다.

“몸이 안 좋으시면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시아의 걱정스러운 말에 엘제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시아의 품에 고개를 숙였다. 애처로운 신음이 시녀복에 파묻혀
아스라이 사라졌다.

기다린다고 말했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것을 기다리며 그와의 삶을 꿈꿨다. 확실치도 않은 문장의


상실을 믿고 희망에 부풀어 앞을 보지 못했다. 그와 함께하는 삶에 눈이 멀고, 그의 옆이 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취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버렸다.

존재 자체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질 거라 믿었던 문장은 되살아났다. 문장이 밀어내고 있는 건 그를 향한


마음일 터였다.

문장의 빛은 언제나 환하게 빛났다. 엘제이의 몸에 달라붙어 그를 향한 엘제이의 사랑을 언제든지 집어삼킬
것처럼 기회를 엿보는 문장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누군가가 심장을 할퀴는 것처럼 따가운 격통과 타오르는 문장의 아픔에 문장을 그러쥐고 소리를 삼키며
울었다. 이게 문장통인지 그녀가 느끼는 허통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엘제이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아가씨, 문장이! 문장통이 시작되었나 봐요. 당장 의원을 불러야겠어요!”


시아는 번쩍이던 광택을 잃은 엘제이의 문장을 보며 하얗게 질렸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지 엘제이는 온몸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시아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거부하는 엘제이를 보며 여기가 황궁이라는 사실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문장통은 신력이나 의술로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시아는 그저 하얀 등을 감싸며 엘제이가 고통을
삭여낼 수 있도록 등을 다독거렸다.

***

문이 열리고, 표정 없는 기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힌 여인이 들어왔다. 은밀하게 열린 문은 소리 없이 닫혀버렸다.

기사들이 앞으로 가라는 듯 등을 조금 밀자 황성 시녀들에게만 주어지는 의복을 입은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와 털썩


엎드렸다. 시녀의 눈은 검은 천이 가리고 있었고, 그녀는 어디를 향해 고해야 하는지를 몰라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알모어는 무감각한 얼굴로 옷을 입는 아제프를 흘깃 쳐다봤다. 감정 한 자락 보이지 않는 무표정이었지만,


시녀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던 알모어가 시녀를 향해 속삭였다.

“공녀님은 지금 뭐하고 계시지?”

“그게- 욕실에 들어가신 뒤로는 나오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옷을 갈아입던 아제프의 손이 뚝 멈췄다. 아제프의 시선이 엎드린 시녀의 등을 향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49 화
49

눈이 가려진 시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알모어는 싸늘해진 아제프의 얼굴을 살피며 눈을 가린 시녀에게
물었다.

“우는 소리?”

“네. 티아세 家에서 나온 시녀가 워낙 앙칼지게 막는지라 아무도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분명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시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들은 대로 고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는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작게 퍼지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온 뒤에 씻는 소리도 들렸다는 시녀의 말에
아제프가 손가락으로 톡톡 의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시녀의 말이 끝나자, 적막이 흐르는 공간에서 신경질적인 손가락 소리가 빠르게 울려 퍼졌다. 언짢음을 감추지
않는 아제프 때문에 훈훈한 봄날의 거실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알모어는 냉한 기운이 감도는 벽안을 살피다가 한숨처럼 물었다.

“그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나?”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으셔서…….”

“그럼 됐다. 이만 가봐라.”

이 시녀가 아는 정보는 더 이상 없을 테고 더 들어봤자 아제프의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다. 알모어가 손짓을 하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남자들이 시녀의 팔을 붙잡고 끌고 나갔다.

알모어는 얌전히 끌려 나가는 시녀를 잠시 동정을 담은 얼굴로 보다가 다시 옷을 입기 시작하는 아제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단추가 채워지고, 옷 사이로 팔을 넣는 행동이 빨라졌다. 아제프는 조금 초조한 것 같았다.

엘제이에게 그의 눈이 되어줄 시녀를 보낸 건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단지 자신이 없을 때도 제 눈 밖으로


벗어나는 걸 견디지 못하는 남자의 강박증 같은 거였다. 항상 엘제이가 그가 만든 울타리 안에 얌전히 있기를
바라는 남자의 집착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녀를 부른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엘제이에게 붙여둔 황실 시녀는 그가 심어놓은 수많은


간자 중 하나였고,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아마 왜 자신이 엘제이에게 배정이 되었고, 그녀에 대해 보고하는지도
모를 터였다.

아제프가 갑작스레 간자로 심어둔 시녀를 부른 건 기분이 점차 나빠졌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좋았던 기분도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다른 이의 손이 제 피부에 달라붙는 것처럼 벌레가 모공 위를 기는 불쾌감과 숨이 콱 조이는 불안감이 아제프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갉작갉작 신경을 거스르는 불쾌감에 예쁘게 잘 쉬고 있을 엘제이의 소식을 들으려던 것뿐이었다. 직접 보지는
않아도 예쁘게 치장하며 착하게 그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더러운 벌레들이 드글거리듯 썩어가는 마음이
편해질까 봐 그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 그의 예상과 달라 아제프의 기분은 점점 더 저조해졌다.

“왜 울었을까?”

아제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제이가 울 일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걱정할 만한 일을


두고 보지 않았고, 엘제이는 그가 만들어 놓은 안락한 요새에서 그저 평화로이 무도회를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아제프가 손을 까딱거리며 두터운 벽 너머를 넘볼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황궁은 기본적으로 방음에 충실한
구조였다. 그가 저 벽에 귀를 기울여도 들릴 리 없었고, 두꺼운 벽 때문에 방 너머의 기척을 살피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제프가 못마땅한 듯 화사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알모어를 노려봤다.


“왜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 없는 알모어는 그의 살벌한 시선에 목이 콱 졸리는 기분을 느끼며 토해내듯 간신히 말했다.

웬만한 여자보다 고운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질 때면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시선만으로 질식될
것 같았다. 알모어는 꽉 조여진 숨통 사이로 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아제프를 쳐다봤다.

아제프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그의 하얀 손등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어내렸다. 기분이 나쁠 때 하는 강박적인


행동이었다. 저 깨끗한 손이 했던, 혹은 할 수 있는 잔인한 행동들을 알기에 알모어는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몇 번 더 손을 쓸어내리던 아제프는 참기 힘든 감정을 쏟아내듯 주먹을 꽉 쥐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여기는 그의


저택이 아니었다. 함부로 물건을 망가트려서도, 사람을 망가트려서도 안 되었다. 책잡힐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그의 광포한 살기를 내리눌렀다.

아제프는 꽤 오랜 시간 숨을 골랐다.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 애처롭게 흔들리는 고삐가 간신히 제 역할을 하며


그를 말렸다.

시간이 좀 흐르자 아제프는 바짝 긴장한 알모어를 보다가 흉흉한 기세를 억누르며 거울 앞에 섰다. 그가 찡그린
이마를 펴며 옷을 가지런히 다듬자 알모어가 슬금슬금 다가가 그에게 상자를 건네줬다.

“오늘 공녀님의 기분이 안 좋으시면 다음에 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알모어. 내가 언제 너에게 그런 걸 물었지?”

알모어의 걱정스러운 말에 아제프가 차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라고 하는 눈빛에


알모어가 입을 달싹이다가 안타까운 듯 한숨을 흘렸다. 알모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제프는 온전히 알모어에게
기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푹 수그린 음울한 등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제프는 차게 식은 얼굴로 알모어를 등지고 문을 직접 열었다. 은밀한
기운이 감돌던 내실이 열리고, 환한 복도가 드러났다. 엘제이는 그의 옆방에 있을 터였다.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간 아제프는 엘제이가 들어간 객실 문 옆에 등을 기대고 섰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남자의 모습이 새하얀 고니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거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엘제이가 나왔다. 아제프는 바닥만 보고 있는 엘제이를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제이, 준비 다 했어요?”

화장으로 울음기를 가린 엘제이의 얼굴은 꽃이 핀 것처럼 화사했지만 표정이 탈색되어 어쩐지 음울한 빛이
감돌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표정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생긋 웃었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엘제이를 보며 시험하듯 물었다.

“예쁘게 입었네요. 아까 제가 했던 말 기억나요?”


“……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대답하며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싱그러웠던 녹안이 거친 황무지처럼 아스라하게


변했다.

유혹을 담은 아제프의 말에 엘제이가 반응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제프는 욕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을


참아내며 웃었다.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펴낸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을 마주잡았다. 손의 체온이 높아 맞잡으면 따뜻한 하얀


손이 그의 마음을 조금 안정시켰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당장 엘제이를 추궁해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을 참아냈다. 엘제이는
겁이 많으니 그가 여기서 화를 내며 꼬리를 말고 도망갈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홍염처럼 치솟는 울화를 참아내려
이를 악물었다.

화를 삼킨 아제프와 울음을 참아내는 엘제이는 말없이 무도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엘제이는 슬픈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아제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리 슬퍼도 참아내야 했다. 코르디스의 무도회에서는 승마대회 우승자인 아제프와 파트너인 엘제이가 첫 춤을
함께 춰야 했다.

여기서 도망쳤을 때 아제프가 받을 조롱과 비웃음이 엘제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상처가 많은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입양아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그를 헐뜯는 세시드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망가서는 안 됐다.

아제프는 지독할 정도로 말이 없는 엘제이를 보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울리지 않고 상처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도 지금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보니 절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엘제이가 몸을 물리고 도망갈 것을 알았다. 그는 이미 도망갈 준비를 한 엘제이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설마, 내가 널 놓아주리라 믿는 거야?’

며칠 뜸하더니 오늘은 또 재발한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일정거리 이상 다가오려 하지 않았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입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이유를 깨부술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엘제이는 말간 눈을 들어 금빛 문을 쳐다봤다. 황궁에서 직접 주관하는 행사가 열릴 때만


개방하는 이스안 홀이 엘제이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슬픔으로 일렁거리는 눈이 쨍한 황금빛을 담았다.

엘제이는 흔들흔들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저는 당신 옆에 있을 자격을 잃었어요. 그동안 미안했어요. 오늘이 지나면, 정말 안녕이에요. 아제프…….’

희망을 빼앗긴 자의 고통은 컸다. 이지를 잃은 엘제이는 아제프와의 첫 춤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 안녕을 고할
생각이었다.

***

“아제프 란델 후작님, 엘제이 티아세 공녀님이 도착했습니다!”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금빛 휘장이 길게 드리워진 홀이 드러났다. 온갖 보석과 꽃들, 그리고
예쁘게 놓인 음식들로 가득한 파티장은 무척 화려했다. 어두운 밤에도 빛을 머금고 번쩍이는 샹들리에가 영롱하게
흔들리며 대리석 위를 비췄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은 반질반질 빛났고, 엘제이가 걸을 때마다 높은 굽이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오늘의
주인공인 둘을 바라보며 시선을 모았다.

코르디스의 영예를 안은 승마대회 우승자는 황제보다도 늦게 도착하는 게 관례였다. 아제프와 엘제이가 발맞추어
걸어가 이미 도착해 있는 황제 앞에 섰다.

거대한 단상 위에서 흔들리는 샹들리에가 어지러운 시야를 현혹했다. 엘제이는 지끈지끈 아픈 몸과 머리에
식은땀이 났다. 지금이라도 도망가 편안한 침대 위에 몸을 누이고,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다.

엘제이는 몸살기가 있는지 눅진하게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우며 등을 천천히 굽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엘제이와 아제프가 황제에게 축언을 하자 화려한 예복을 입은 채 높은 단상 위에 서 있던 황제, 에이든이 천천히


내려왔다. 색감이 흐린 눈동자가 둘의 맞잡은 손을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아제프 란델, 엘제이 티아세. 그대들이 코르디스에서 보인 용기와 아름다움을 치하한다. 코르디스의 모든
명예로움이 그대들의 것이니, 이 무도회가 그대들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

황제의 엄중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엘제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금방이라도 비집고 나올 틈을 기다리는
눈물을 억눌렀다. 축복받아야 하는 순간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0 화
50

울먹이는 흐느낌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숨통을 콱 조였다. 축 늘어져 헐떡거리는 심장에 숨이 부족한 뇌가 곤죽이
되어 이지가 흐려졌다.

엘제이는 눈앞이 핑핑 도는 어지러움과 메슥거리는 속을 간신히 참아냈다. 엘제이의 머릿속에는 빨리 이 춤을


끝내고 아제프에게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만 강박처럼 자리 잡았다.

황제는 짧은 축언을 끝으로 등을 돌리고 단상 위로 올라가 버렸다. 엘제이는 무거운 발을 힘겹게 움직이며
아제프를 따라 중앙으로 걸어갔다.

엘제이가 짙은 우울과 불안함에 잠식될수록 아제프도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그의 자리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사그라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이성이 멀어지는 감각에 아제프가 입 안쪽 살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엘제이의 숨줄을 잡아채려는 광포함을 숨겼다.
불안하게 뛰는 두 심장에 부드러운 왈츠곡이 퍼부어졌다. 3/4 박자의 느린 음악은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흘렀고,
두 사람은 마음을 채 정돈하기도 전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몸을 맞췄다.

서로의 등 위로 손이 올라가고 땀이 차 축축하게 젖은 엘제이의 손 위로 아제프의 손이 올라왔다. 차게 식은


시원한 손이 닿자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엘제이는 그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제프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어지러운 머리와 달리 학습된 몸은 무의식적으로 우아한 풋워크를 시작하고 엘제이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잡으며 메스껍게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냈다.

엘제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이젠과 엘리사가 그녀의 시야에 스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황제와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루드비히의 얼굴이 지나갔다.

홀 안의 사람들은 모두 둘을 주시했다. 그들의 비애를 모르는 사람들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둘을 보며 입을 벌렸다.

끝단이 풍성한 엘제이의 분홍빛 드레스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붉은 꽃을 수놓은 드레스가 흔들릴 때마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화려한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슬픔과 번민에 엘제이는 의식적으로 아제프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를 본다면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진실을 고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 남아 있고 싶을까 봐 무서웠다.

‘처음부터 다가가지 말 것을……. 당신을 지키고 싶다면 멀리 떨어졌어야 했는데. 리사처럼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엘제이는 아제프의 발끝을 보며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애썼다. 멍청하고 한심한 자신이 밉고 혐오스러웠다.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을 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너는 지금 도망갈 생각이야. 나는 너를 놓지 않을 생각이고.’

아제프와 엘제이는 우아하게 춤을 추며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엘제이는 그에게서 달아날 생각을 했고, 아제프는
그녀를 사냥해 제 곁으로 끌어올 생각을 했다.

격정적으로 터지는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잠잠하기만 한 왈츠는 서서히 흘러가 곧 잠잠해졌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춤을 멈추고 바로 섰다. 춤이 끝났음에도 엘제이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새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점점 몽롱해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열이 오르는지 눈가가 뜨거웠다.

아제프는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엘제이를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연주가 시작되지 않은 홀은 그들을


주시하는 적막으로 가득했다. 아제프는 제게 모여든 시선에 일부러 더 화사하게 웃었다.

“제이.”

“…….”

그가 가볍게 웃으며 부른 이름에 엘제이는 답하지 않았다.

엘제이의 머릿속에는 얼른 무도회장을 벗어나 그에게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는 강박이 가득했다. 엘제이가 떨어진
그의 손을 보며 어떻게 해야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제프는 답 없는 엘제이를 보며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냉한 시선이 무도회에 모인 이들을 스쳤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삼키고 찬란하게 웃었다.

무도회장의 중앙. 사람들의 시선이 우승자인 그에게 모두 쏠린 때에, 아제프는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그의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요, 제이.”

신이 빚은 가장 찬란한 얼굴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며 사랑을 속살거렸다. 독을 품은 속삭임은 적막을 가로지르고


모두의 귀로 들어갔다.

엘제이의 고개가 번쩍 올라왔다. 둥글게 커진 녹안이 아스러질 듯 흔들리며 그를 담았다. 아제프는 이래도 도망갈
거냐고 묻는 것처럼 예쁘게 웃었다.

“세상에…….”

“란델 家와 티아세 家 사이에 혼담이 오갔던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제프는 삐뚜름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고 엘제이를 응시했다.
그는 엘제이를 시험하는 듯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의 체면이 떨어질 것을 알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그에게 이별을 고하려던 엘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엘제이가 두 손을 꼭 잡으며 터지려는
울음을 참아냈다.

물기를 머금어 반들거리는 녹안이 화사하게 웃는 아제프를 담았다. 엘제이가 여기서 한 발짝 물러난다면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분명 여기서 청혼을 하거나 엘제이가 도망갈 수 없게 묶어둘 속셈이 보였다. 엘제이가 거절하려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아제프가 엘제이의 팔을 잡으며 또 한 번 고백했다.

“사랑해요.”

엘제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진심을 담았음에도 간교한 고백이었다. 그의 사랑이 시린 칼날처럼 독살스럽게


내리꽂혔다.

엘제이가 모질게 그를 외면하면 눈을 질끈 감았다. 화려한 얼굴 위를 뜨거운 눈꺼풀이 뒤덮자 암흑이 찾아왔다.
엘제이는 입술을 터트릴 것처럼 질끈 물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엘제이가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덤덤한 척 떨리는 목소리를 숨겼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딱 잘라 그를 끊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그를 거부하지 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마음을 숨겼는데, 그게 독이 되어 엘제이의 발목을 휘감았다.

엘제이의 죄책감 어린 표정에 아제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그녀의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그를 봐달라는 소리
없는 호소에 엘제이가 입술을 꾹 누르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울 자격도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그를 기만하고 말았다.
그의 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그를 속인 기만자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게 내 탓. 이렇게 되기 전에 당신을 밀어냈어야 했는데! 좋은 짝을 붙여줬어야 했는데! 내 욕심이 당신을


망쳐버렸어요. 미안해요. 아제프.’

이쯤 하면 엘제이의 입에서 아니라는 말이 나와야 했다. 그가 울듯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열에 아홉은 져주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에게 지독하게 약했던 엘제이 티아세가 달라졌다. 정말 그를 끊어내려는 듯 독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제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해줄 거라 믿었다.

‘그게 다 내 착각이라고? 다시 당신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라고?’

아제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냉혹한 기운이 맴도는 얼굴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놓아줄 수 없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제 것이었다.

‘이것 참,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은데, 정말…… 이러면 곤란해.’

푸른 눈에 태풍이 불었다. 광기가 휘몰아치는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화려한 얼굴이 애달프게 젖어갔다. 아제프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해도, 안 되겠어요? 저는 아닌데,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정말
아닌가요? 그럼 왜 그렇게 굴었어요? 왜 제게 틈을 주고, 받아줄 것처럼 그렇게 굴었어요! 왜!”

죄책감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엘제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뜨거운 눈가를 비집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엘제이의 눈을 적셨다.

‘당신을 사랑해서요. 당신을 좋아해서, 미안해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해요.
아제프…….’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아제프가 거친 손길로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구경하듯 서 있는 사람들을 오싹한 눈으로
노려보며 그녀를 테라스로 끌고 갔다. 엘제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를 말리려 했다. 테라스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란델, 웁!”

입을 열자마자 화끈한 감각과 함께 부드러운 살덩이가 밀려왔다. 아제프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엘제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요, 아제프.’

그녀의 손이 그를 두드리자 화를 내듯 입술을 거칠게 빨던 남자는 입을 떼어냈다. 눈물을 매달고 그를 거부하는


모습도 지독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울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미친 것처럼 발광하며 지끈거리는 통증을
토해냈다.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결박하듯 하얀 손목을 내리누른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왜? 싫어요? 그럼 소리를 지르세요. 소리를 질러서! 란델 후작이 당신을 모욕했다고 모두에게 알리세요. 저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 제 명예를 떨어트리고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보세요.”
“…….”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그건 못 하겠어?”

그가 비웃듯 조소했다. 상처 입은 맹수가 공격적으로 발톱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깊은 절망이 엘제이를


내리눌렀다. 엘제이의 문장이 아릿한 통증을 토해내며 그녀를 괴롭혔다.

“란델 경, 저는,”

아제프는 뭐라 변명하려는 엘제이의 말을 차갑게 끊어냈다.

“내가 그건 알지. 당신은 못 해. 당신은 내게 그럴 수 없거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 거짓말이야.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은 소리 지르지 않아. 시험해볼까? 나도 가끔 알고 싶거든. 당신이 언제까지 나를
참아줄지.”

그녀가 다가갈수록 맑게 빛나던 청남색 눈이 흉흉하게 흐려졌다. 모든 게 그녀의 탓이었다.

‘이렇게 될지, 정말 몰랐어? 모든 게 내 탓이야.’

엘제이가 자책하며 눈물을 떨어트리자 아제프가 상처 입은 표정으로 그 눈물을 보다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아름다운 미안이 울먹이는 아이처럼 애처롭게 변했다. 슬픈 표정을 짓던 남자는 이내 독기 품은 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싫으면 제 혀라도 깨무세요. 그러기 전에는 절대 안 물러날 거니까. 울어도, 나를 미워해도…….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아.”

엘제이는 물어뜯을 듯 거칠게 덮쳐오는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고통을 토해냈다.
서로에게 상처를 준 남녀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며 그러지 말라 애원했다.

그녀에게는 있는 문장이 그에게는 없었다. 달콤한 사랑의 문장은 그녀의 가슴에서만 빛났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문장이 가슴 위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는 그 문장의 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는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다.

악역이 되어 비참하게 죽을 운명을 가진 남자와, 책 속의 남자를 사랑한 여자.

[신의 문장] 모든 건 그 책 속에서 시작되었다.

[신의 문장] 속에서 주인공들의 인연을 축복하던 문장은 두 사람의 앞을 막았다. 어떤 것보다 강하게 엘리사와
알체스테를 끌어당겨 알체스테를 치유하던 신의 자비가 아제프와 엘제이에게는 족쇄였다.

문장이 있었기에 엘제이는 솔직해지지 못했고, 아제프는 선을 긋는 엘제이에게 상처받았다.

아제프가 내리누른 하얀 손목이 움찔거리며 곱아들었다. 게걸스레 입술을 빨아올리는 남자의 행동이 광포할
정도로 무자비해서 엘제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르릉거리는 짐승 같은 소리가 아제프의 목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광기에 침식된 짐승은 여린 입술에 이를 세워 물어뜯을 듯 씹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1 화
51

“아-”

입술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엘제이가 신음을 토해내며 힘겹게 바르작거리자 아제프가 한숨 같은 숨결을
쏟아내며 새빨갛게 부은 입술을 핥아 내렸다.

백금색 비단구렁이가 엘제이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엘제이는 온몸을 꽉 조인 거대한 구렁이에게 몸을 빼앗기고


있는 듯했다.

도망가는 엘제이를 따라와 뿌리를 긁어내리고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던 순결한 입술을 집어삼킬 듯 빨아댔다.
입술을 잡아 뜯을 듯 힘을 주다가도 아픔에 엘제이가 신음을 토해내면 움직임을 멈췄다.

잔인할 정도로 흉포하게 날뛰다가도 부드러운 혀로 쓸어내리는 통에 엘제이가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문을 열라고 협박하다가도 애원하듯 매달리는 움직임에 엘제이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제프는 보란 듯이 엘제이의 입속을 들락거리며 작은 치아 끝을 핥았다. 어금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혀가 물


테면 물어보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결코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못함을 알고 있는 행동이었다.

아제프는 제 소유권을 주장하듯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흔적을 남겼다.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타액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빨아들인 남자가 거침없이 몰아치며 으르렁거렸다.

“밀어내지 않을 거면, 가만히 있어.”

“아제프. 잠깐, 읍!”

아제프의 난폭한 행동에 엘제이가 헛숨을 크게 삼키며 물러날 곳 없는 벽으로 몸을 붙였다.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무자비했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움직임에 엘제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엘제이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팔목에 들어갔던 힘이 점점 약해지자 아제프의 움직임도 부드러워졌다. 아제프는
휘청거리는 몸을 부드럽게 지탱하며 조그만 얼굴을 위로 꺾었다.

“우음, 흐…….”

아제프가 예상했듯 엘제이는 결국,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혀를 깨물기는커녕 그를 밀어내는 것조차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녀가 결국 반항을 포기한 채 얌전히 몸을 내어주자 그가 칭찬하듯 입술을 부드럽게 빨며 엘제이의 턱 끝을


들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안 곳곳을 맛보겠다는 듯 깊숙하게 들어가 곳곳을 훑었다.

그의 행동이 조금씩 부드러워지자 아릿한 통증을 토해내던 문장도 잠잠해졌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문장은
따스한 봄바람을 숨결처럼 불어넣었다. 따뜻한 문장의 힘이 엘제이의 몸을 부드럽게 달래며 이완시켰다.
축 늘어진 몸이 그의 손에 간신히 매달려 숨만 힘겹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숨이 부족한지 그의 밑에서 헐떡거리는 장밋빛 얼굴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얼굴에 열이 올라 뜨끈한 숨결이
할딱할딱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체온이 조금 높았다. 아제프는 몸이 안 좋은 것 같은 엘제이의
상태에 인상을 쓰고 물러났다.

그가 엘제이의 상태를 살피듯 그녀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열이 오른 이마를 한 번 짚어본 아제프가 겉옷을 벗어
엘제이의 어깨에 둘러줬다. 견장이 가득 달린 화려한 예복이 엘제이의 몸을 감쌌다.

그가 제 몸을 매만지는데도 엘제이는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를 돌리고 부족한 숨을 몰아쉬었다.

하얀 셔츠만 입은 아제프가 엘제이의 턱 끝을 든 채 나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눈물을 머금은 녹안을


쏘아보며 입꼬리를 삐뚤게 올렸다.

“싫다며?”

“…….”

결국 그를 밀어내지 못한 엘제이를 조롱하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또 돌리려 했다.
아제프는 손에 힘을 줘 돌아가려는 턱을 붙잡으며 얼굴을 바짝 내밀어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분홍빛 입술을
핥았다.

엘제이의 몸이 움찔 떨리고 애처로운 눈물이 볼을 그으며 떨어졌다. 정말 몸이 안 좋은지 평소보다 붉게 물든


얼굴에 아제프의 마음도 아려왔다. 그가 뜨거운 볼에 제 볼을 대보며 한숨을 삼켰다.

아제프는 이 애처로운 모습에 물러났다가는 엘제이가 티아세 家로 도망가 꼭꼭 숨어버릴 걸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만든 요새에 숨어 그를 보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아제프로서는 강제가 아니고서야 그녀를 잡아 올 방법이
없었다.

지금 밀어붙여야 했다. 아제프는 그 지긋지긋한 이유가 뭔지 오늘은 꼭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는 대답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엘제이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며?”

“……사랑하지 않아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기계적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제프는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지
않는 엘제이의 눈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몇 걸음 물러났다.

스릉-

날카로운 검날이 검집을 할퀴는 소리가 확 트인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난데없는 쇠붙이 소리에 엘제이의 눈이
그를 향했다. 예리하게 버려진 칼날이 달빛을 머금고 스산하게 빛났다.

아제프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검을 앞뒤로 뒤집었다. 새하얀 손에 들린 단검이 금방이라도 그의 손을 베어낼 듯


날카로운 빛을 토해냈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멍하니 그를 보던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발짝
다가갔다.
“아제프!”

“당신은 이럴 때만 내 이름을 불러. 멋대로 이름을 불렀다가 또 멋대로 란델 경이 되어버리지.”

아제프가 비꼬듯 말하며 엘제이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그리 넓지 않은 테라스 안은 어두운 커튼이 쳐져 있었고,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그녀를 걱정한 누군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게 뻔했다.

아제프는 난간에 등을 붙이고 시린 눈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그가 잔혹한 입술을 비틀어 엘제이의 마음을
후벼 팠다.

“당신은 날 절벽에서 밀어낸 거야.”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난간 아래로 몸을 조금 젖히자 그의 몸이 금방이라도 난간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밤바람에 차게 흔들리는 백금색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을 숨겼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섰다. 엘제이는 날이 선 칼날과 곧 떨어질 듯 흔들리는 아제프의 몸을 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아제프,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전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멋대로 다가와 천상으로 끌고 가더니 또 제멋대로 나락으로 떨어트렸어. 당신 참 대단해?”

비꼬듯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사나운 잇새가 드러났다. 그가 으르렁거리며 엘제이를 노려보자 엘제이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기절할 것 같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시린 눈이 저를 향하자 엘제이가 움찔 몸을 물리며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엘제이는 그의 비난과 질책에 채찍질 당하는 것 같았다. 온기를 담았던 벽안이 차게 식자 숨이 턱턱 막히고,
괴로움에 질식될 것 같았다.

엘제이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떨어트리며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아제프, 제발 제 얘기를 좀,”

“이럴 때만 이름을 부르지. 이럴 때만!”

“아제프…….”

차갑게 내쳐진 손에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신음처럼 부르며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냉랭한 거부에 심장이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엘제이가 문장 위에 손을 올리며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소리 없는 애원에도 아제프가 장난치듯 입꼬리를 올리며 손바닥에 단검을 툭툭 내리쳤다.

탁탁- 손바닥을 가볍게 누른 단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장난을 치는 그의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오싹했다.

음울하게 내리깔린 푸른 눈에 기묘한 귀기가 서려 오니의 불처럼 요요하게 빛났다. 곧 음울한 표정을 지워낸
아제프가 눈꼬리를 싱긋 접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제이,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내 곁을 떠나면 더 심한 짓을 한다고 했잖아.”

“당신을 떠난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다만 계속 친구로 지냈으면 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요. 그러니 제발, 검은 내려놔요. 네?”

엘제이가 빠르게 변명하며 그와 문이 닫힌 테라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소리를 질러 도와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밀색 머리를 보며 엘제이의 손을 덥석 잡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그의 힘에 강제로 끌려온 엘제이가 제 가슴팍에 바짝 붙여진 단검을 보며 숨을 삼켰다. 덜덜 떨리는 눈이


금방이라도 온몸을 찌를 듯 흉흉하게 빛나는 단검으로 향했다.

아제프는 바르작거리는 엘제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광기 어린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번들 빛나며 샐쭉 접혔다.

“다 필요 없어. 네가 아니면 무의미한 것을. 네가 먼저 약속을 어겼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 하잖아?”

아제프가 나른한 눈으로 하얀 목덜미를 보며 검등으로 엘제이의 목을 쭉 훑어 내렸다. 열이 올라 뜨거운 목덜미를


차가운 날붙이가 스치자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아제프.”

그의 난폭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엘제이의 음색이 형편없이 떨렸다. 아제프는 무서워하는 엘제이를 흘끔
바라보고는 검을 치웠다. 그가 한 손을 뻗어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무서워?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해칠 리 없잖아. 네가 나를 해한다면 몰라도.”

“아제프!”

엘제이가 아제프를 해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엘제이는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서리가 내려앉은 파란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잔인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제부터 더 심한 짓이 뭔지 보여줄게. 기대해도 좋아."

스산한 목소리가 길게 내리깔리자 본능적인 불안감에 엘제이가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발버둥 쳤다.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제발, 아제프!”

힘없는 반항을 가뿐히 제압한 남자가 엘제이의 손을 끌어와 검을 쥐게 만들었다. 살짝 스쳐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검이 향하는 곳은 그 자신이었다.

엘제이가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든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녀의 강한 거부에 엘제이의 어깨에 아슬아슬 걸려 있던 아제프의 옷이 툭 떨어져 나갔다. 아제프는 못마땅한
얼굴로 떨어진 옷을 흘금 바라보다가 엘제이의 손을 단단하게 움켜잡았다.

팔에 힘을 주고 버둥거리는데도 바위에 눌린 것처럼 꿈쩍도 안 하는 몸에 엘제이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경악한 음색에 아제프가 입꼬리를 올리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달빛을 머금은 남자의 얼굴이 처연하게 빛났다.
처연한 얼굴 속 피처럼 붉고 요사스러운 입술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입술을 뒤틀자 여린 꽃봉오리가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약속 지키라고 했잖아.”

아제프가 활짝 웃으며 속삭이는 말에 엘제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엘제이의 손이 주르륵 끌려와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금방이라도 그의 가슴을 꿰뚫을 것 같은 검에 놀란 엘제이가


버둥거릴수록 아제프의 가슴팍에 핏물이 배어나왔다. 얇은 셔츠자락은 금방 붉은 피를 잔뜩 머금었다.

“하지,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엘제이가 손에서 힘을 빼며 그에게 애원했다. 날카롭게 제련한 검은 조금의 움직임에도 그의 살점을 베어냈다.
뜨거운 핏물이 흐르고 아제프의 셔츠가 축축하게 젖는데도 그는 남 일 보듯 무감각한 얼굴을 했다.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나도 이제 지키지 않을 거야. 몇 번을 그어야, 아니, 어디를 그어야
사람이 죽는지 시험해볼래?”

죽을 생각은 없었다. 심하게 다칠 생각도 없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그가 앓아누울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적당히 치명적이면서도 죽지 않을 부분을 골라 검끝이 향하게 만들었다.

죽는다는 말에 엘제이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에요. 다 거짓말이에요. 제발, 제발……. 아제프!”

아제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엘제이가 비명 섞인 외침을 토해내며 간절하게 비는데도 아제프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색감이 옅은 백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무감각한 푸른 눈이 엘제이를 향하자 엘제이는 졸도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엘제이가 손을 움직여 검날을 잡으려 하자 인상을 찌푸린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단단히 틀어쥐며 그녀의 손이 상하지 않게 단단하게 고정했다.

“쉬이, 다치잖아. 가만히 있어야지.”

그가 말썽을 피우는 아이를 혼내듯 엄하게 말하며 엘제이를 질질 끌고 왔다. 그의 몸에 밀착된 엘제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아제프, 이러지 마세요. 제발…….”

“이미 늦었어.”

아제프가 사형선고를 내리듯 냉랭하게 말하며 엘제이의 손을 잡은 곳에 힘을 줬다. 가볍게 몇 곳 찔러볼


생각이었는데, 겨우 가슴을 적신 피만으로도 엘제이는 쓰러질 것 같았다.

팔뚝을 몇 번 후벼 파면 엘제이가 먼저 혼절할 게 뻔했기에 아제프는 한 번으로 끝내줄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상태를 살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생 내 곁을 떠나지 마.’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터였다. 사람의 육신을 헤집은 파육감이 손끝에 남아 악몽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를 알면서도 아제프는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거세게 움직이며 그를 말리는데도 이성을 잃은 광기 어린 집착이 그의 얼굴을 음습하게 뒤덮었다.

“놓아주지 않아.”

그가 맹세하듯 작게 속삭이자 엘제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제프가 손에 힘을 주고 단검을 힘껏 치켜들었다. 엘제이는 허공을 가르고 빠르게 올라가는 검끝을 눈으로
좇으며 입을 벌렸다. 금방이라도 그의 몸을 찌를 듯 흉흉하게 선 칼날이 아제프의 피를 머금고 번들거렸다.

칼날을 타고 뚝 떨어진 피가 엘제이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 섬뜩한 감각에 엘제이가 몸을 떨며 더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토해냈다.

“문장이 있어요!”

제 몸으로 칼을 내리꽂으려던 아제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2 화
52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동안 몸을 굳힌 채 움직임이 없던 아제프가 몸을 움찔 떨며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아제프는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렸다. 기이할 정도로 아파지는 머리에 그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렸다.
사특한 것에 미혹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제프가 멍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엘제이는 그의 말에 대답해줄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힘이 풀린 아제프의 손아귀에서 힘껏 손을 빼냈다. 아제프가


뒤늦게 손에 힘을 줬지만 엘제이의 손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그녀가 그의 눈치를 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검이 엘제이의 손으로 들어가자 아제프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녀가 갖고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주인의


피를 머금은 칼날에서 피가 주르륵 떨어졌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이리 주세요.”

그가 위험한 걸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목소리를 깔며 속삭였다. 어린 짐승을 훈계하듯 그르렁거리는


음색이 당장에라도 엘제이의 손에서 검을 뺏어올 듯 위험하게 들렸다.

엘제이의 눈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에게 돌려줄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갖고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그의 손에 검을


뺏길 것 같았다. 엘제이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조금 더 물러났다.
아제프가 곧장 엘제이에게 다가왔다. 그의 걸음이 떼어질 때마다 그를 경계하며 몸을 떨던 엘제이가 눈을 돌렸다.

엘제이는 테라스 곳곳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난간 쪽으로 검을 휙 던져버렸다. 엘제이는 검을 던지고서도 불안한지
난간 너머를 살폈다. 무거운 단검이 빠르게 낙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제프는 떨어지는 단검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다가오지 않는 엘제이에게
빠르게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제이. 뭐라고 했냐고.”

아제프가 엘제이의 애칭을 단호하게 부르며 어서 말하라는 듯 압박했다. 시린 눈에 초조한 빛이 감돌았고, 목을


긁고 튀어나온 음색에는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쩐지 좀 화난 것 같은 목소리에 엘제이가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더듬다가


곧 문장이 있다고 말했음을 깨닫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에게 이미 손목이 잡힌 엘제이는
멀리 도망갈 수 없었다.

아제프는 두려움에 질린 엘제이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엘제이가 지금 두려워하는 건 그가 알아내고 싶던 어떤


것 때문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제프는 직감적으로 그걸 알아채고 엘제이의 손목을 붙잡고 벗어나려는 그녀를 제
앞으로 끌고 왔다.

“말해. 뭐라고 했냐니까?”

날이 선 물음에 엘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아연하게 풀렸다. 입술을 질끈 깨문 얼굴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탈하게 질렸다.

더는 숨길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숨겼기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엘제이는 이제 더는 숨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는 모든 걸 알 자격이 있었다.

엘제이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드레스 윗자락을 풀었다. 연분홍색의 공단 리본이 엘제이의 손에 풀리자 하얀
살결이 조금 드러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의미 모를 그녀의 행동에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말렸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살결이 곱게
이지러졌다. 아제프가 그곳에서 눈을 돌리며 옷자락을 다시 여며주려고 손을 뻗었다.

엘제이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입술을 잘근 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오자 아제프가


기겁한 얼굴로 엘제이의 입술을 손으로 벌렸다. 붉게 떨어지는 핏물이 그의 손등을 적셨다.

아제프가 옷소매로 입술을 눌러주며 흰 턱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아연한 얼굴로 그걸 보던 아제프가 곧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미쳤어?”

화가 난 듯 흉흉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 엘제이의 눈에 눈물이 아롱아롱 고였다. 그의 걱정을 받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숨긴 걸 고백하는 순간 그의 눈이 얼마나 시리게 빛날지 두려웠다.

아제프가 저를 혐오하는 게 무서웠다. 싫어하고 원망하는 게 두려웠다. 그 생각만 하면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숨통이 바싹 조여들었다.
엘제이는 무서움에 떨면서도 옷자락을 젖혔다. 하얀 페티코트를 억지로 끌어내리자 꼭꼭 숨겨두었던 문장이
드러났다. 그녀를 말리려던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뽀얀 살결 위로 녹색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더 말하지 않아도 선명한 빛을 머금은


존재만으로도 엘제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의 자비라 불리는 문장이 아름다운 색을 뿜으며 하얀 가슴 위를 맴돌았다. 곱게 얽힌 나뭇잎들이 춤을 추듯


흔들리는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고운 색감이 물든 살결이 끔찍할 정도로 예쁘고 잘 어울려 아제프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문장을 노려봤다. 기이하게도 그에게 없는 문장을 처음 본 순간 느낀 감정은


사랑스럽다는 거였다. 문장에 홀린 것처럼 빠져들던 아제프가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일의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갔다.

엘제이가 저를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도 꺼리고 물러나려던 이유는 문장 때문이었다.

멍하니 문장을 바라보던 아제프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넘어갔던 엘제이의 어설픈 거짓말도 함께 떠올렸다.

[문장……. 문장 보유자세요?]

[……아니, 성력이에요…….]

그때 뿜어져 나온 빛은 지금 엘제이의 가슴 위의 문장과 같은 빛깔이었다. 그의 물음에 성력이라고 대답하던


목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떨렸는데 그걸 믿고 싶지 않아 그냥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믿고 싶은 쪽으로 믿는 것이 인간의 본능임을 알았으나 저토록 어설픈 거짓말에 제가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다.


아제프는 새삼 허술했던 엘제이의 변명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힘없는 소리에 엘제이는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문장이 있어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

아제프가 냉랭하게 말하며 하얀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둥글게 솟아 있는 가슴에 손을 대자 희고 고운 살결이


생크림처럼 뭉개졌다.

차가운 손이 몸에 닿자 엘제이가 흠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몸을 떨자 하얗게 드러난 가슴도 움찔 흔들리며


그의 손안에 짓눌렸다. 조그만 손짓에도 말랑말랑 흔들리는 고운 살결에 아제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제프가 문장을 확인하듯 더듬으며 오싹한 눈으로 문장을 쏘아봤다.

‘파낼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얀 살결에 칼을 대는 것이었다. 그는 잔인한 눈으로 어여쁜 문장을 노려보며 엘제이의


몸에 칼을 대는 생각을 했다. 마약을 먹이고 향을 피워 고통을 줄인 뒤 겉가죽만 도려내면 될 일이었다.

“빌어먹을.”

아제프가 짧게 욕설을 지껄이며 구역질을 참아냈다. 저 몸에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철렁거리며
흔들렸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느끼고 나서야 도저히 못 할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른 이를 시킬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설령 그의 명을 받은 자라 해도 저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죽여


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명이 입 밖으로 나갈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개 같은!”

그가 욕을 하며 바닥을 발로 차자 엘제이가 놀란 듯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그녀의 몸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문장이 두려움에 질려 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 별 같잖은 것도 주인을 닮은 문장의 모습에 아제프가
욕설을 짓씹었다.

점점 험해지는 욕설에 엘제이는 차마 옷을 수습할 생각도 못 하는 듯 아제프의 옷소매를 쥐고 고개를 떨구었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걸까?’

엘제이는 빗물처럼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말없이 아제프의 옷깃을 놨다. 더는 그를 붙잡을 용기가 없었다.

아제프는 아스라이 사라질 듯 떨어지는 손을 보며 거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속이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힘없이 떨어진 손이 천천히 앞으로 모여들었다. 엘제이가 축축한 두 손을 모으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속여서 미안해요.”

엘제이의 사과에 아제프가 성난 얼굴로 쭈그린 등을 노려봤다. 치솟는 울화에 아제프가 이마를 짚고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는 서릿발처럼 나가려는 비난을 최대한 삼켰다. 그에게 잘못한 건 맞았지만, 죄인처럼 구는 모습이
언짢고 거슬렸다.

아제프는 입안을 맴도는 욕설을 죄다 삼키고, 자신을 속인 거냐고 비아냥거리려는 물음을 억눌렀다.

“알고는 있어?”

결국 튀어나간 목소리에는 채 누르지 못한 사나움이 가득 담겼지만, 예상한 것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제이는 그마저도 서러운 듯 숨을 크게 삼켰다.

눈앞이 어질어질 흔들렸다. 눈물이 그녀의 기운도 다 앗아가는지 시야가 어둡게 뒤덮였다. 엘제이는 일렁이는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며 그에게 천천히 사과했다.

“네……. 제가 잘못했어요.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이랑 있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 자꾸 숨겼어요.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까이 가고 싶은 욕심에 당신을 기만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울먹거리는 음색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뭐라고 더 쏘아주려다가 하얗게 드러난 가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린 밤바람이 옷자락을 흔드는 게 보였다. 더군다나 지금 엘제이는 몸이 좋지도 않았다.
아제프가 천천히 몸을 굽혀 떨어진 옷을 주우며 손으로 그것을 몇 번 털었다. 깨끗해진 옷이 엘제이의 어깨 위로
걸쳤다. 그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둥글게 뜬 녹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아제프가 손을 뻗어 연분홍색 공단
리본을 천천히 묶었다.

그의 손에 옷자락이 여며지자 시린 밤바람은 더는 그녀의 몸을 할퀼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짓을 알았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다정한 행동에 엘제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제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엘제이가 그를 올려보며 조그맣게 물었다.

“왜, 화 안 내요?”

“착각하지 마. 용서하는 거 아니니까. 난 지금 네 손에 놀아난 듯한 기분이 들어.”

아제프가 냉랭하게 말하며 엘제이의 머리 위로 손을 짚었다. 몸이 정말 안 좋기는 한지 아까보다 심해진 열에


아제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엘제이가 원한 일은 아니겠지만, 더 화낼 수도 없게 아프다고 시위하는 몸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지자 엘제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 미안해요.”

“사과를 듣는다고 내 기분이 나아져? 감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거짓말한 대가는 제대로 받아야겠어.”

거짓말한 대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엘제이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까 그가


하려던 짓이 떠오르자 엘제이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엘제이가 비명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나는 문장이 있는데! 당신은 문장이 없대! 그래서 제 마음은 시한부래요. 언젠가는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거라고, 당신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제 목숨보다 소중한데……. 근데, 그런
마음이 언젠가는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없이 소멸한대요. 그런 제가 어떻게 감히……. 당신을 좋아한다 말해요!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입에 담아요!”

엘제이의 비명에도 아제프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냉랭한 시선에 기세 좋게 소리치던
엘제이의 손이 쓱 하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제프는 멋대로 잡아 온 주제에 또 멋대로 도망치려는 발칙한 손을
붙잡으며 냉랭하게 물었다.

“그래서?”

“좋아해.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니,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3 화
53
엘제이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몸이 한계에 달했는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아제프는
휘청거리는 몸을 잡아채 안아 들었다. 숨을 길게 내쉬는 얼굴이 열에 들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픈 거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엘제이가 이러는 건 신경이 쓰였다. 아제프가 말없이 열로
발개진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를 속이고 비참하게 만든 사람이 하필이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사지를 찢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데 엘제이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의미 모를 얼굴로 엘제이를 내려다보던 아제프가 그녀의 눈 위에 손을 올려 눈을 감게 했다.

“너는 일단 좀 자.”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열에 들뜬 엘제이는 그의 목소리에 취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자 아제프가 엘제이의 고개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없는 몸이 곧 그의 품에 안겨 축 늘어졌다.

엘제이가 쓰러지듯 잠들자 아제프의 몸 주위로 음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싸늘하게 식어 일렁거리는 벽안이 모든
걸 없애버릴 듯 짙은 광기와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

날카롭게 벼린 기운이 주변을 음울하게 뒤덮었다. 아마, 그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오싹함에 다리가
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까드득- 이를 악무는 살벌한 소리와 꽉 쥔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분노가 그의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말해줬다.
아제프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서서 잠이 든 엘제이를 복잡한 심경으로 노려봤다.

분노와 짙은 소유욕이 범벅된 눈에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눈앞에 있는 걸 모두 부수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광기가 그를 재촉했지만, 아제프는 참아냈다.

이 정도로 화가 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 정도로 기분이 나빴던 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제프가


싸늘하게 식은 푸른 눈으로 망연히 서서 그를 이렇게 만든 원흉을 노려봤다.

그의 품에 흐트러져 열로 달아오른 몸은 추운 듯 꼬물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엘제이의 손이 그의


가슴팍으로 올라왔다. 그에 비하면 아주 작은 손이 꼬물거리며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다른 이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때려죽여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들개에 던져줬을 터였다. 푸른 눈이


잔혹함을 담고 술렁술렁 흔들렸다. 어떤 잔인한 방식으로 보복해도 속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그의 품에 안긴
엘제이는 순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제프의 머릿속에 납치와 감금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이대로 엘제이를 데려가 어딘가에 숨겨두고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막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제프…….”

그의 마음을 모르는지 엘제이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며 그를 꼭 붙잡아왔다. 뭘 잘했다고 그러는지 자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우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팔자 좋게…….”


잔뜩 이를 간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려 퍼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무척 작았다. 잠이 든 엘제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당장 쌍욕을 퍼부으며 뺨을 내리쳐 깨워도 모자랐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그의 손을 적시고 가볍게 닦였다.

아제프가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두운 감정들로 잔뜩 흐려진 눈에 조금 맑은 기운이 돌아왔다. 일단은
엘제이를 좀 눕히고 의원에게 보여주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아제프는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며 이대로 여기서 뛰어내려 저들 몰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테라스에서 나오지 않는 둘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겠지만, 피가 묻은 꼴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가 막 2 층 난간을 붙잡을 때, 테라스를 기웃거리는 기척이 심해졌다. 익숙한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곧 둘이
다투는 소리가 나더니 테라스 문이 벌컥 열렸다.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니까요!”

“리사! 나는 충분히 기다렸다.”

아이젠을 말리는 엘리사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테라스 문을 여는 아이젠의 모습이 보였다.

아제프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냥 사라질까 고민했지만, 엘제이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참았다. 엘제이가 그냥 사라진다면 무척 걱정할 것 같았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엘제이를 끌어안은 모습이 달빛 아래에서 스산하게 빛났다. 테라스 안을 둘러보던
아이젠은 아제프의 피를 배 쪽에 묻힌 엘제이를 보고 경악했다. 문을 꼭 닫은 엘리사도 축 늘어져 쓰러져 있는
엘제이의 모습에 입을 크게 벌렸다.

늘 온화하게 웃고 다니던 아이젠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피를 흘리는 딸을 보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네놈! 감히, 내 딸에게…….”

단련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아이젠은 타고난 지배자였다. 중년의 서슬 퍼런 기백에 아제프도 조금 놀란 눈으로
아이젠을 바라봤다. 오싹한 눈으로 그를 노려오며 다가오는 모습이 야차처럼 흉흉했다.

웬만한 이들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흉한 기세였지만, 아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아이젠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 아제프의 멱살을 잡아 비트는 통에 아제프가 인상을
쓰며 잠든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너무 소란스러웠다. 아제프가 아이젠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속삭였다.

“제가 당신의 딸을 해한 게 아닙니다. 반대지요.”

그의 차분한 말에 얼굴을 와락 찡그린 아이젠이 엘제이에게서 눈을 못 떼고 딸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다친 건


엘제이가 아니라 아제프였다. 아제프의 왼쪽 가슴팍에 고인 피가 떨어져 그의 품에 안긴 엘제이에게로 묻어
있었다.

다치진 않았지만 뜨거운 엘제이의 몸을 짚어보던 아이젠이 아제프에게서 엘제이를 뺏어오려고 손을 뻗자 아제프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으르렁거렸다.
“제 것입니다.”

아제프의 단호한 말에 아이젠이 순간 얼이 빠진 것처럼 그를 쳐다보다가 곧 노성을 토해냈다.

“네놈이 미친 거냐? 감히! 뭘 믿고 함부로 지껄이는,”

“당신의 딸이 저를 찔렀습니다.”

아제프가 뻔뻔하게 말하며 푸른 눈으로 아이젠을 내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말간 눈이


무감각하게 반질거렸다. 심연처럼 깊은 눈이 고요하게 아이젠을 쳐다보자 얼굴을 찡그린 아이젠이 그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뭐?”

“저는 저를 해하려던 살수를 붙잡은 것뿐입니다. 드물게 관용을 베풀어 아무 흠집도 내지 않았지요. 어디
처음부터 끝까지 저랑 함께 진흙탕 싸움에 빠져 보시겠습니까?”

아제프가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다갈색 눈을 노려보며 맞받아쳤다. 아이젠은 어린놈이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상황을 살폈다. 그와 엘제이가 단둘이 테라스로 향하는 걸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실제로 다친
건 아제프 혼자였다.

아이젠은 엘제이가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정황상 엘제이가 범인 같았다. 아제프가 단련된
기사라 할지라도, 방심한 순간 찔렸다고 주장한다면 엘제이 쪽이 불리해졌다.

애초에 아이젠은 딸을 재판에 서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적당한 이였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될 텐데


쉽게 사라질 놈이 아니었다.

베아르시 제국은 신분사회였고, 귀족이 귀족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는 재판이 열렸다. 정당하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찔렀다고 주장한다면 재판 결과가 어떻든 엘제이에게 갖은 소문이 따라붙을 것이었다.
아이젠은 엘제이가 그런 걸 감내하길 원하지 않았다.

차분한 얼굴을 한 아이젠이 아제프를 매섭게 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네 거짓말에 놀아나는 게 아니나, 내 아이가 불리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것이라고. 청혼서를 보낼 겁니다. 저를 제이의 짝으로 인정하세요. 그거면 됩니다.”

아제프의 말에 아이젠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피가 좀 나기는 했으나 과한 상처는 아니었다. 문장이


있는 엘제이를 그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아이젠은 엘제이가 제 짝을 만나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했다.

아이젠이 차가운 눈으로 아제프의 상처를 훑어보며 이를 갈았다.

“……겨우 그딴 생채기 정도로,”

“지금 당장 상처를 더 내볼까요? 티아세가 셋. 저는 혼자.”

아제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품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왔다. 원래 무기는 여유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단검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피식 웃자 아이젠이 입을 다물었다.

“…….”
아제프는 숨은 실력자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문신이었고, 아제프가 가진 능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가
건장한 청년이라 해도 쪽수에서 밀렸다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제가 상처 입은 채 여기서 나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원칙적으로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검을 반입하는 건 금지였으니 지금이라도 위병을 불러 아제프를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아제프가 그것이 엘제이의 것이라 주장하면 또 곤란해졌다. 아이젠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아제프를 노려봤다.

아제프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는 아이젠에게 상냥하게 웃었다. 그가 보란 듯이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그녀에게 진심이고, 제 것을 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가 아닌 루드비히, 그 멍청한 놈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루드비히?”

“네. 그가 아첼의 신록과 아나이샤의 뿌리를 은밀히 구하더군요.”

아제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젠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살기가 폭사했다. 그의 곁에 있던 엘리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아이젠을 건드리자 곧 갈무리되기는 했지만 아이젠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아이젠이 사나운 이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아나이샤의 뿌리, 또 그 빌어먹을 것을…….”

‘또, 라고?’

생각보다 거센 아이젠의 반응에 아제프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아이젠은
더는 아제프에게 아무런 정보도 내어주지 않았다.

아제프는 좀 초조해져 있었다. 엘제이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데 아이젠이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냥 갈 것을 괜히 시간만 지체했다고 후회하며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가여워서 아제프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며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온기에 아이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새끼를 지키는 짐승처럼 그의 딸을 꼭 끌어안은 모습을


보자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되었다.

드물게도 침착한 눈으로 둘을 살피던 엘리사는 시끄러운 상황에도 깨지 않는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4 화
54
오늘, 아제프의 파트너로서 실수하고 싶지 않다던 엘제이가 떠올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치장에 신경 쓰고
발긋하게 상기된 뺨으로 그를 기다리던 언니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저 남자도 언니와 같은 마음임을 알았다. 신의 축복이라는 문장이 싫다며
울먹이던 엘제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엘리사는 언니가 좋았다. 하나뿐인 쌍둥이였고, 쌍둥이의 슬픈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란델 후작님. 당신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요. 언니도 당신을 많이 좋아해요. 이러는 걸 보니, 혹시
문장에 대해 알게 된 건가요?”

엘리사가 한숨처럼 묻자 잠시 뻣뻣하게 굳었던 아제프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건 쌍둥이의 직감 같은 거였다. 잠들었음에도 간헐적으로 아제프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엘제이를 보자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엘리사가 천천히 다가가 우는 엘제이의 얼굴을 닦아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나란히 엘제이에게 모였다.

“아제프…….”

꿈속을 헤매는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계속되는 잠꼬대에서 들려오는 건 그의 이름뿐이었다.
아이젠도 그걸 알았는지 착잡한 얼굴을 했다.

오늘의 엘리사는 꼭 엘제이 같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홍색 눈이 아제프를 직시했다. 아제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많이 닮은 엘리사의 얼굴을 가라앉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엘리사가 엘제이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언니는 문장을 싫어했고, 그걸 들키는 걸 두려워했어요. 다 당신이 좋아서 그랬던 걸 거예요. 아버지, 언니가
이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아등바등 숨기려 했어요. 두 분이 싸우신다면 언니가
슬퍼할 거예요.”

“문장이라는 건 완전한 거다.”

아이젠은 딸에게는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가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말하자 엘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엘제이를 가리켰다.

“신이 정해준 반려 따위 알 게 뭐예요. 정해진 운명 따위 부수고 이겨내 보세요. 저는 저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아이젠의 시선이 엘리사의 손을 따라 울먹이며 아제프의 이름만 불러대는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가슴 시린 부정이
그의 눈을 촉촉하게 젖게 했다. 문장이 생긴 후 상사병을 앓듯 도무지 기운이 없던 엘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고서에도 문장을 이겨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모두가 제 반려만을 사랑했다. 그런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엘제이는 아제프만을 원했다. 아이젠은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쉽게 허락할 수 없었다. 그의 방식대로라면 무슨 사정인지 좀 더 물어보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어야 했다. 감정에 이끌리면 일을 망치기 일쑤였다. 아이젠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자, 아제프가
초조한 듯 속삭였다.

“제이가 많이 아픕니다.”
아이젠도 알고 있었다. 이마에 열이 오른 모습이 몸살 기운이 있는 듯했다. 아이젠은 감정에 이끌려 일을 망친
적이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역시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여기는 내가 정리할 테니, 딸을 부탁하겠네.”

결국, 흘러나온 건 암묵적인 허락이 담긴 차분한 목소리였다.

***

아제프는 뜨거운 온탕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있었다.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사이로 물기를 머금어 착
가라앉은 백금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몸을 가볍게 씻은 남자는 나른한 몸을 욕조에 기댄 채
눈을 떴다.

수증기로 희뿌옇게 뒤덮인 천장이 보였다. 저걸 보고 있자니 아텐을 피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축축이 젖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며 마약에 대한 갈증을 훔쳐낸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뜨거운 물이 그의 몸 아래로 쏟아지며 물방울들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옅은 생채기가 남은 가슴팍을 제외하고는


깨끗한 나신에 물방울이 고였다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욕조 밖으로 걸어가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던 아제프가 몸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피딱지가 길게 앉은 왼쪽 가슴을


냉한 얼굴로 노려보던 아제프가 이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꽤 한심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씻고 찾아본다고 없던 문장이 돋아나는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몸을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한심한 짓이군.”

조소하듯 자신을 비웃은 아제프가 선반에 잘 놓인 옷을 집어 들어 입으며 문을 달칵 열었다. 대충 가운을 여미며


문을 연 아제프가 앞에 보이는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여름에 가까워져 일찍 눈을 뜬 햇살이 새하얀 캐노피에 걸려 흔들렸다. 따사로운 태양을 머금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밀빛 소녀는 배 위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새근새근 잠든 채였다.

아제프는 슬리퍼를 신고 소리 없이 다가가 잠든 엘제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밤새 열이 많이 떨어졌는지 조금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몸을 깨끗이 닦고 옷을 갈아입혀 놓았기에 엘제이는
얇은 슈미즈 차림이었다.

침대 위에 앉은 아제프가 슈미즈 앞자락에 달린 레이스를 헤쳤다. 어깨에 걸린 얇은 끈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하얀


가슴이 반쯤 드러났다. 아제프는 밝은 낮에 드러난 초록빛 문장을 두꺼운 손으로 뒤덮듯 눌렀다.

그렇다고 가려지는 건 아닌지, 아제프의 벌어진 손 틈 사이로 예쁜 색감의 빛무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새하얀
우유처럼 몽글몽글한 피부를 뭉근하게 만지던 남자는 이내 손을 떼어내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얇은 이불을 끌어와 엘제이의 몸에 덮은 그는 이불에 말린 엘제이를 안아 제 품으로 끌고 왔다.

“우음- 아제프…….”

잠든 몸이 흔들리자 작게 얼굴을 찡그린 엘제이가 어젯밤부터 계속 부른 남자의 이름을 칭얼거렸다. 아제프는


엄지로 문장을 문지르며 부드러운 살결을 음미했다. 아기의 피부처럼 희고 고운 살결이 말캉거리며 흔들렸다.
허락도 받지 않고 추행하는 주제에 아제프의 얼굴은 뻔뻔했다.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던
아제프가 곧 손을 떼고 문장을 찢어버릴 것처럼 노려봤다.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자 연약한 살결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아제프는 얼굴을 찌푸린 채 붉은 선으로 반 토막이 난 문장을 노려봤다. 시린 벽안에 담긴 문장이 따스한 빛을
뿜어대며 미워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저건 요물이었다. 신의 자비라더니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제프는 사특한 것을 보듯 흉흉한 눈으로 감히 그를


유혹하는 문장을 쳐다봤다. 당장 파내지 않은 건 순전히 엘제이의 몸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장을 신성시하는 베아르시 제국에서는 문장을 도려낸 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파낸 자가 있어도 그걸
드러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어떤 기록도 없기에 아직 참아주는 것이었지만, 언젠가는 저걸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보류한 것뿐이다. 언젠가는 뜯어낼 거야.”

아제프가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요사스러운 것을 찌릿- 노려봤다. 그녀의 가슴에 기생한 무생물 주제에 그의
차가운 시선에 움찔 몸을 떠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지나친 환각에 혀를 씹으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알려지지 않은 문장 보유자를 은밀히 찾아보는 중이었다. 보통은 신전에 바로 고하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자들을
해치는 건 위험했다. 찾는 게 힘들겠지만 막 문장이 발현한 자를 잡아와 그것으로 먼저 실험해보고 저 사특한
것도 처리할 생각이었다.

‘파내면 없어질까? 아니, 파낼 수는 있을까?’

저걸 파내는 모습을 자세히 생각하자 또 구역질이 올라왔다. 겨우 피부를 조금 도려내는 행위가 뭐 그리 어려운지
짜증이 솟구쳤다.

아제프가 흉흉한 얼굴로 문장을 보다가 엘제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가해지는 힘에 엘제이가 놀랐는지
작게 버둥거렸다. 그는 놀란 것 같은 엘제이를 무시하며 얼굴을 내려 문장을 물어뜯듯 깨물었다.

“아! 아읏!”

피부가 씹히는 감각에 잠에서 깬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아제프가 놓아주지 않고 문장을
씹어대자 고통에 눈물이 고인 엘제이가 놀란 듯 몽롱한 눈을 깜빡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반짝반짝 빛나는
익숙한 백금발이 보였다.

“아-”

제 몸을 끌어안은 존재를 확인하자 버둥거리던 엘제이의 몸이 얌전해졌다. 그녀가 저항을 멈추고 몸을 내어주자
아제프가 빨갛게 부어오른 살결을 혀로 핥았다. 짐승이 상처를 치료하듯 핥아대는 혀에 엘제이는 배 속이
찌릿찌릿 울렸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다가 확인하듯 그를 불렀다.

“하아. 아제프?”

“가만히 있어.”

마음대로 행동해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운 게 미안하지도 않은지 아제프는 폭군처럼 굴었다. 잇새 사이로 들어간
피부가 잘근잘근 깨물렸다가 핥아지기를 반복했다.

“아제, 프. 아, 그만…….”

아픔과 찌릿한 감각이 번갈아가며 느껴지자 엘제이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아제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그만하라고 애원하는데도 그는 화풀이하듯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그가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많이 버둥거리지도 않았던 엘제이는 억울해졌지만, 그의 말대로 얌전히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멋대로 깨물고 핥아대는데 가만히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엘제이는 발끝이 곱아드는 감각에
흐느끼듯 울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엘제이는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었다. 엘제이는 과부하가 걸린 사람처럼 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단 아제프의 얼굴과 목소리에 얌전히 몸을 내어줬지만, 다른 이가 이런 식으로 굴었다면 당장 뺨을 올려붙였을
것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엘제이는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을 더듬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

“딴생각하지 마.”

엘제이가 멍하니 천장을 보자 아제프가 저에게 집중하라는 듯 신경질적으로 문장을 물었다. 피가 나올 정도로
물어뜯지는 않았지만 붉게 부어오른 문장이 애처로웠다.

“아제프, 아파요…….”

부어오른 살결을 깨물자 더 아팠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엘제이가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촉촉한 목소리에
아제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이것보다 훨씬 더 아팠어.”

엘제이의 문장에서 입술을 뗀 아제프가 울먹이는 녹안을 빤히 바라봤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꼭, 네가 얼마나


나를 아프게 했는지 아느냐? 나는 이 정도는 해도 괜찮다-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오늘도 예쁜 얼굴을 바라보던 엘제이는 새삼 하얗게 드러난 가슴으로 시선을 내리고 얼굴을 확 붉혔다.
제가 왜 몸을 겨우 가린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이곳에 누워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제프, 여기가 어디에요? 제가 왜, 여기에 있어요?”

엘제이는 마지막에 끊긴 기억이 그와 단둘이 서 있던 테라스였음을 기억하고, 더듬더듬 물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는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제프는 몸을 수그리고 제 눈치를 보는 엘제이를 보며 삐뚤게 웃었다.

“내가 잡아왔어. 너는 앞으로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 네가 먼저 지키지 않은 약속이야. 이 정도 대가쯤은


있어야지.”
그 얼굴이 얼마나 사악한지 엘제이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5 화
55

엘제이의 동공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여기에 잡혀 있으면 그녀의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단둘이 테라스로 나간 걸 본 사람이 몇 명인데, 어떻게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제이는 어떤 상황이어도 그를 두둔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아버지마저 같을 순 없었다. 엘제이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아제프의 어깨를 잡아 왔다.

“아제프, 이러면 안 돼, 아!”

엘제이가 뭐라고 설득하려 하자 아제프가 손끝을 세워 문장을 꾹 눌렀다. 많이 쓰라렸는지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자 아제프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뭐라고 욕을 빠르게 내뱉었다.

제가 한 짓임에도 살벌한 얼굴로 빨간 피부를 노려보던 아제프가 곧 손을 뻗어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왔다. 이


정도로 심하게 깨물 생각은 아니었는데, 화가 나니 저도 모르게 심하게 문 모양이었다.

아제프가 진지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며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연고를 발라줬다. 세심한 손길이 쓰라린 가슴을
스치자 엘제이가 발긋한 얼굴로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멋대로 물어댈 때는 언제고 치료라니,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엘제이는 그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치료를 끝낸 아제프가 냉랭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다 밑으로 떨어진 어깨끈을 위로 올리고 헤집어진 옷도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가 연고를 조금 흔들며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미리 준비했어. 나는 그 빌어먹을 문장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내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어?”

사실 치료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흉터처럼 남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하얀 살결 위에


상흔이 남는다니 그건 그것대로 끔찍했다. 아제프가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엘제이를 차갑게 쳐다봤다.

화가 난 것 같은 아제프의 얼굴에, 지은 죄가 많은 엘제이는 당황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감금이라도 해두겠다는


말 같은데, 여기는 감옥도 아니었고 몸을 구속하는 어떤 것도 없었다.

엘제이는 볕이 잘 드는 방을 멍하니 둘러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긴 한데,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엘제이는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아제프를 보며 얼굴을 갸웃거렸다.

“아제프, 여기가 어디예요?”


“왜?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돌아오는 대답이 더 묻지 말라는 것처럼 차가웠는데, 또 크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화가 난 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무섭게 하려는 것 같은데, 엘제이는 왠지 무섭지 않았다.

엘제이가 둥근 눈을 들어 그의 눈치를 살피다 천천히 고개 숙여 그의 가슴 위로 머리를 살짝 기댔다. 단단한 몸이


움찔 흔들렸다. 엘제이는 모른 척 그의 몸에 얼굴을 붙이며 두근두근-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편안해.”

위험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엘제이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만을 위한 요람 안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바위처럼 단단한 피부 위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아버렸다. 더 자려는 듯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는


엘제이를 보며 아제프는 기가 막힌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저 맹목적인 믿음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 맹목적인 애정이 정말 내 것이 맞는 걸까?’

그런 의문들이 아제프의 머리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엘제이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더 무서워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정상인데 엘제이는 편안해 보였다.

모른 척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에 아제프가 뭐라고 빠르게 욕설을 쏟아냈다.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말에도 엘제이의 얼굴은 편안했다. 엘제이는 제 몸에 올라간 손을 끌고 와 그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런데, 아제프……. 제가 계속 여기 있으면 아버지랑 리사가 걱정할 거예요.”

돌려보내 달라는 말이었다. 아제프는 시선을 내려 제 손을 꼭 붙든 하얀 손을 내려다봤다. 간밤에 열이 많이


내려 혈색이 도는 얼굴도 보였다. 경계심이 부족하다 못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제프는 태연한 얼굴을 보며 차갑게 얼굴을 굳히려 노력했다. 다른 놈에게 잡혀가도 이 모양일까 상상하니 절로
화가 솟구쳤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목을 콱 눌러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엘제이의 눈이 조금 둥글게 떠졌다가 다시 순하게 내려갔다. 남자가 그녀의 몸을 누르는데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아제프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 차림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내가 너를 납치해서 여기 감금해둔 거야. 그런데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내가 너를 억압하고 누르는 중인데 좀 더 무서워해야 할 거 아니야!”

그의 버럭 소리 지르는데도 엘제이는 말똥말똥 순한 눈으로 가만히 그를 올려볼 뿐이었다. 갓 움튼 새싹처럼 연한


초록색 눈에는 그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이 가득했다. 그 눈과 마주하자 아제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엘제이도 그게 참 이상한데, 무섭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해칠 수 없듯이 그도 저를 해칠 수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가 진짜 두려워하거나 거부한다면 멈출 걸
알았다.

엘제이가 막 그에게 대답하려는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작았지만, 다급한 감이 있었다. 빠르게 두드려지는 문에도 아제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은 엘제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제프의 강렬한 시선에 눈만 깜빡이던 엘제이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흘깃 보다 손을 살며시 들었다.


엘제이가 움직이자 아제프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평소의 화사한 웃음이 아닌, 차갑게 노려보는 눈빛에 엘제이가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우물쭈물 말했다.

“아제프, 누가 노크하는 것 같은데…….”

“넌 신경 쓰지 마. 안 보내줄 테니까.”

송곳처럼 날카로운 대답이 단호하게 나왔다.

엘제이는 울상을 지었다. 여기서 계속 지내도 상관없었다. 아제프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고, 이 정도로 그의


마음이 풀린다면 협조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걱정되었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이런 짓을…….’

엘제이는 그의 밑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눈매가 사나워지는 아제프를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엘제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입술만 오물오물 움직였다.

“……언제까지 안 보내주려고 하시는,”

“후작님! 티아세 家의 마차가 도착했어요! 공작님인 것 같습니다.”

아제프가 대답을 안 해주자 알모어의 다급한 목소리가 방문을 넘었다. 무덤덤하게 흘려듣는 아제프와 달리
엘제이는 홉뜬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제프의 얼굴이 콰직- 사정없이 일그러졌지만, 당황한 엘제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엘제이가 이불 속에서 버둥버둥 움직이다가 이불을 빠져나와 침대 위를 종종 걸어 다녔다. 한껏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아제프의 눈매가 조금 내려앉았다.

엘제이는 방 안을 둘러보며 어디 숨을 곳이 없는지 살폈다. 거칠게 떨리는 동공이 한껏 수축한 채 좌우를


살피다가 아제프가 나온 욕실로 향했다. 엘제이가 후다닥 침대 밑으로 내려와 이불을 끌어당겼다.

뭐하는 거야- 아제프는 그리 묻는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몸을 쓱 비켜 이불을 가져갈 수 있게 도와줬다.

얇은 슈미즈만 입고 있는 게 부끄러웠던 엘제이가 하얀 이불을 애벌레처럼 말았다.

얼굴만 빼꼼 내밀고 이불로 몸을 감싼 모습에 아제프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갔다. 그가 불량스러운 얼굴로
애벌제이를 바라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리 와.”

엘제이는 강아지 부르듯 제게 손짓하는 아제프를 힐긋 보다가 삐뚤게 올라간 그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인상이 다양한지, 오늘의 아제프는 무척 나쁜 사람 같았다.

엘제이는 불량스러운 모습으로 흑화한 아제프를 보며 머뭇머뭇 손을 파닥거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불에 돌돌 말린 뚱뚱한 팔이 파닥거리며 움직였다. 하얀 펭귄 같은 모습에 아제프의 차가운 얼굴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제게 올 생각이 없는 엘제이를 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리 오라니,”

“미, 미안해요.”

엘제이는 성이 난 아제프를 보며 버둥버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욕실로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에 아제프가 기가
막힌 사람처럼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는 이불을 소중히 끌어안고 뛰어가는 엘제이를 보며 이불을 콱 밟아버렸다.

“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엘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아제프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제이는 히끅- 숨을 삼키다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겁을 먹은 모습에 아제프가 한숨 같은 걸 내쉬며 엘제이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녀의 의사를 배제한 행동이었지만


안아 드는 손길은 무척 상냥했다.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간 엘제이는 어느새 침대로 이동되어 아까처럼 그에게
깔려버렸다.

아제프가 지그시 엘제이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빤히 보는 시선에 엘제이는 짐승의 앞발에 콱 짓눌린


느낌이었다. 그의 아래에 갇힌 엘제이가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고 이불을 끌어가 코끝까지 덮었다. 눈만 내놓은
얼굴은 이마까지 빨개져 있었다.

“어디 숨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불에 가려진 입술이 우물거리며 변명 같은 소리를 했다. 아제프는 미지의 생명체를 관찰하듯 오묘한 눈으로
엘제이를 쳐다봤다.

그녀가 도망가는 이유야 뻔한 것이고 예상했던 거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깨어나면 실컷 괴롭혀줄
생각이었는데 한계가 있었다. 아제프는 어쩜 저리도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는지 고민하며 엘제이를
관찰했다.

날 것 그대로의 시선이 얼굴 위로 빠바박- 내리꽂히자 엘제이의 얼굴에서 곧 연기가 뿜어나올 것 같았다.

쾅쾅쾅-

둘이 그러고 있는 사이 문을 쿵쾅쿵쾅 두드리는 소리가 더 급해졌다.

“후작님! 후작님!”

알모어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제프를 열렬하게 불렀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는데도 아제프는 무관심했다.
알모어는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울먹거렸다.

어느새 문 앞으로 걸어온 아이젠은 울먹거리는 알모어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점잖게 말했다.

“비키시게.”

“히이익!”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당장 비키지 않으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듯 기백이 대단했다. 알모어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바짝 물러났다.

아이젠은 알모어에게 한 치의 관심도 주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6 화
56

햇볕이 가득한 방에 들어온 아이젠은 누에고치가 된 딸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아이젠이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엘제이는 화가 난 것 같은 아이젠을 보며 아제프에게서 후다닥 물러났다. 그녀가 재빨리 침대 밑으로 내려가


아이젠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버지! 이건, 그러니까, 제가, 납치당하고 싶어서! 후작님한테 여기로 데려와 달라고, 제가 먼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아제프가 산발이 된 엘제이의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한심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깃장을 놓는 모습에 엘제이의 얼굴이 울상으로 흐려졌다.

엘제이의 횡설수설에 아이젠마저 ‘그걸 지금 말이냐고 하느냐’는 눈으로 딸을 쳐다봤다. 두 남자의 시선에
엘제이는 점점 작아졌다.

아이젠은 불퉁한 얼굴로 서서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겨주는 아제프를 보다가 발긋한 얼굴로 바닥을 보는
엘제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옳은 선택이 맞는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둘을 떼어 놓는다면 나날이 말라갈 엘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아직 찾지 못한 엘제이의 반려를 다른 자들이 먼저
알아챈다면 좋을 것 없었다.

문장을 숨긴 건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 되었다. 아이젠은 지금부터 더 철저하게 그 사실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상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제이야, 란델 후작이 좋으니?”

“아버지?”

뜻밖의 말을 들은 듯 엘제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아제프에게 화를 내거나 윽박지를 것으로 생각했다. 아제프는
그녀를 납치했다고 얘기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이젠이 이토록 온화한 게 이상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와 아이젠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알기 힘들었지만,


싸우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고민하던 엘제이는 차분한 얼굴로 아이젠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네. 좋아해요. 저는, 이제 문장은 무시할래요. 아버지가 준 신석도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힘들게
구해오셨는데……. 죄송해요. 저는, 아제프가 아니면 안 되는걸요…….”

그래. 이게 맞는 거였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만큼은 물러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지를 잃었던
눈이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문장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피해 아제프가 크게 다칠 뻔했다. 엘제이는 그때의 오싹함과 다급함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젠이 둥근 이마 위로 손을 짚었다. 간밤에 다녀간 신관의 치유가 도움이 되었는지 몸살로 앓던 몸은 괜찮아진
듯싶었다. 엘제이가 골골대는 아이는 아니었으나 이처럼 신력이 잘 드는 애도 아니었는데 빠르게 치유된 게
이상했지만, 아이젠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엘제이의 머리를 도닥이고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말리지 않으마.”

“정말요?”

엘제이가 아이젠에게 바싹 다가가며 눈을 반짝거렸다. 마지막까지 반대할 거라 생각했던 아이젠의 허락이


기꺼웠지만, 그녀가 잠든 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변한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간신히 허락을 받았는데 왜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던 엘제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황도 안 좋으니 문장에 대한 건 계속 비밀로 하려무나.”

“상황이요?”

엘제이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이 시점에서 뭔가 문제가 될 것이 있나 생각해봤다.


아제프와 주된 갈등이 시작되는 건 겨울이었고, 아직은 봄의 끝자락이었다. 게다가 아제프는 엘리사가 아닌,
엘제이를 좋아했다. 갈등을 빚을 상황이 아니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

엘제이가 고민하며 아이젠에게 물어보려고 할 때 아제프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알모어 곁에 서 있는 시녀를
가리켰다.

“제이, 시녀를 따라가서 씻고 오세요.”

그러고 보니 어제 열이 많이 나 땀도 많이 흘렸을 텐데 아직 씻지도 못했다. 그 상태로 아제프와 얽혀 있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민망했다. 엘제이가 얼굴을 확 붉히며 물러났다. 대답도 안 하고 말없이 시녀를 향해 도도도
걸어가는 모양이 많이 당황한 듯했다.

아제프는 여전히 누에고치가 되어 이불을 질질 끌며 사라지는 엘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기도 욕실이
있었지만, 엘제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한동안 방 안에서 못 나오게 하며 괴롭혀줄
생각이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다치면 어쩌려고…….”

가볍게 혀를 차는 목소리와 함께 혼잣말 같은 타박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던 알모어가 천천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아이젠은 이미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아제프를 보며 오묘한 얼굴을 했다. 무엇이 그토록 서로를 끌리게
하였을까. 하긴, 꼭 문장이 있어야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젠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상념을 날리며 아제프를 똑바로 바라봤다.

“말하지 않은 건가?”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아제프는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불퉁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가 예민해지려는 신경을 누르며 조금 서늘하게 말했다.

“심술을 좀 부린 겁니다.”

제 딸에게 심술을 부렸다는 말에 아이젠의 눈꼬리가 파들, 떨렸다. 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도 아제프는
덤덤했다. 그는 잠시 한숨 같은 숨을 쉬며 천천히 말했다.

“공작님도 자세히 말해주지는 마세요. 분명, 겁먹을 겁니다.”

아제프가 담담하게 말하자,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해봤자 좋을 것 없었다. 누가 제 목숨을 위협한다는
소리를 굳이 해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젠이 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제프에게 맡겼던
또 다른 딸을 찾았다.

“그렇군. 리사는 아직 안 일어난 건가?”

“그래도 언니는 소중한지 제이가 나을 때까지 나름 열심히 보살피더군요. 밤늦게 자러 갔으니 그녀는 아직
한밤중일 겁니다.”

엘리사는 원래 일찍 자도 늦잠을 자는 아이지만, 아이젠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도 이른 아침부터 엘리사가


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말없이 걸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잠시 뒤 방으로 돌아온 아제프가 문을 열었고, 아이젠은 그가
안내하는 대로 저택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씻고 나온 제이는 이곳이 수도에서 꽤 떨어진 란델 家의 별장이라는


것과, 그녀와 엘리사가 여기서 요양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엘제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저택 앞마당을 산책했다. 아제프와 아이젠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엘리사는 자고 있었다.

엘제이는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시녀 무리를 보며 더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시녀 무리가 말없이 자신을 따르자, 엘제이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겨우 산책 조금 나온 것에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기사도 아니고, 겨우 그녀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을
법한 젊은 시녀들이었다.

‘란델 家는, 원래 저렇게 예쁜 시녀들이 많나?’

실없는 생각을 하던 엘제이는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나풀나풀 날아가는 나비를 발견했다. 봄을 묻힌 듯 샛노랗게
빛나는 작은 나비가 담벼락 쪽으로 날아갔다.

나풀거리는 날갯짓을 바라보던 엘제이는 별생각 없이 나비를 따라갔다.

시녀들을 달고 얼마쯤 걸었을까. 담벼락 가까이 갔을 때, 엘제이는 처음 보는 새까만 눈과 마주쳤다.

온통 시꺼먼 로브를 걸친 장신의 남자가 엘제이에게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대, 혹시 문장보유자인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였다.

환한 낮이라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인데, 어두운 로브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음울했다. 남자의 이마까지 내려온
새까만 후드가 남자의 표정을 가리고 바람결에 조금씩 흔들렸다. 얼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얼굴을 뒤덮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어두운 로브 속 유일하게 반질거리는 까만 눈이 엘제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사술에


걸린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엘제이는 천천히 다가오는 장갑 낀 손을 보며 뒷걸음질 치려 했다.

몸을 물리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엘제이의 머리는 뒤로 물러나라는 를 계속해서 내리는데, 그녀의 몸은
단단한 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속박된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는 엘제이가 움직이지 못하는 걸 아는 듯 느긋하기만 했다. 간을 보듯 느릿하게 뻗은 오른손이 엘제이의 손을


끌어당기려 했다. 제 허락도 없이 손을 만지려는 게 불쾌해 뭐라 말하려 했으나, 목구멍이 큰 돌에 압사당한
것처럼 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게 뭐지?’

엘제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새까만 눈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몸이 지배당하고, 목소리가 막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엘제이의 머리가 적색경보를 울리며 그녀를 패닉에 빠트렸다. 조금의 빛도 없이 새까만 암흑이 그녀를
뒤덮자 엘제이의 눈이 공포로 흐려졌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의미 없는 벙긋거림이 몇 번 반복되자 간신히 그의 사슬을 푼 시녀가 엘제이의 몸을 물리며


차갑게 말했다.

“이분에게 손대지 마세요.”

아제프가 붙여준 시녀 무리의 장인 율리아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말끝을 적신 긴장감만은 물리치지 못했다.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율리아는 여기서 어떤 짓을 해도 그녀들만으로는 이자를 막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허벅지에 꽂힌 검이라도 뽑으려 했지만, 남자는 조금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검을 뽑는
순간, 제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율리아가 엘제이의 앞을 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보통의 시녀가 아닌 건가?”

새까만 눈을 엘제이에게서 떼어내고 율리아를 바라보던 사내는 느릿하게 말했다. 원래의 성정이 그러한 듯
느긋하기만 한 목소리가 더 섬뜩했다. 착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았지만, 율리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침에 갈아입은 시녀복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어 달라붙었다. 질척질척해진 몸은 식은땀을 흘렸고 관자놀이에
맺힌 땀은 도르륵 굴러 떨어지며 턱 끝에 맺혔다.

눈꼬리를 사납게 세운 율리아의 경계에도 남자는 율리아에게 관심을 내어주지 않았다.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다시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엘제이에게로 향하자 주변에 서 있던 시녀들이 검을 뽑아들고
남자의 앞길을 막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7 화
57

갑작스러운 대치에 정신이 혼미한 엘제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를 따르는
시녀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어 남자를 위협했고 처음 보는 남자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율리아는 섣불리 공격하는 순간 전멸할 것을 알았다. 율리아는 이 사실을 알리러 간 시녀 한 명이 저 멀리


뛰어가는 걸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도망치듯 뛰는 시녀를 막지 않았다.

막내가 후작님을 불러오기까지 어떻게 해서든 저 남자를 막아야만 했다. 그게 율리아에게 내려진 사명이었다.

율리아가 다짐하듯 눈을 빛내며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흘깃 남자가 곁눈질하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공녀님, 천천히 물러나세요.”

율리아는 조그맣게 속삭이자 엘제이도 뭔가 상황이 안 좋은 걸 알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가 뒷걸음질
치며 자리에서 벗어나자 율리아가 그녀의 앞을 단단히 엄호하고 다른 시녀들이 남자의 앞길을 막았다.

까만 남자는 제게 뻗어지는 검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 상황이 그저 귀찮은 듯 무기질적인 눈으로
시녀들을 응시했다. 그가 발을 한 걸음 내딛으려 하자, 율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경계했다.

사아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분명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는데, 남자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율리아가 막 그걸 인식했을 무렵, 등 뒤가 서늘해지며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뒤를 돌아본 율리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엘제이 뒤로 이동한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율리아는 엘제이의 뒤에 서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는 남자를 보고 서둘러 엘제이에게 손을 뻗었다. 남자의
무기질적인 눈이 귀찮음으로 일그러졌다. 공기가 움푹 팬 것처럼 몸이 눌려 숨이 막혔다.

‘어떻게! 이건, 후작님의…….’

짧은 찰나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그를 인식하는 순간 몸을 날렸다. 그녀의 반응이 느린 건 아니었다. 다만, 남자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남자의 손에서 뽑힌 검이 쏜살처럼 쏟아져 율리아의 배를 내리쳤다. 작은 체구의 몸이 검격에 맞아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쿨럭!”

“언니!”

내장이 다 으스러지고, 뼈가 으깨지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려 살아남았으나,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반 토막이 났을 몸이었다. 율리아의 입에서 쏟아진 피가 바닥에 줄줄 흘렀다.

피가 섞인 기침을 쏟아내던 율리아가 흐트러진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앞을 바라봤다.

“공녀님!”

율리아가 절규하듯 외치며 엘제이를 불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엘제이가 율리아를 돌아보기도 전에 하얀
손목이 남자의 손에 잡혔다. 차가운 손에 움칠, 몸을 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엘제이는 어떻게 된 건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옆에 있던 시녀가 검에 맞아 날아갔고, 그녀의 눈앞에는 대검을
든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안과 마주친 맑은 녹안에 짙은 두려움이 깔렸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발광하며 얼른 벗어나라 소리쳤다.

‘이 남자, 누구지?’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눈을 더듬으며 얼굴을 눈가를 파들파들 떨었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제이가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당신, 누구?”

***

누에고치가 된 엘제이가 방을 빠져나간 후, 아제프와 아이젠도 별장 깊은 곳으로 다가갔다.

1 층으로 내려간 아제프가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린 복도를 지나쳐 가장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별장
집무실에 놓인 커다란 책장을 미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깜깜한 지하실을 뒤덮었다. 어디서 물이 고여 떨어지는지 똑똑- 소리가 음침한 곳을
적시며 울려 퍼졌다. 폐가도 아닌데, 일부러 이렇게 해둔 건지 어두운 공간은 음울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제프와 아이젠이 계단을 내려가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지하실 곳곳에 환한 불을
밝혔다. 드러난 바닥은 깨끗했지만, 거칠거칠한 돌바닥은 아이젠의 신경에 거슬렸다.
“음침한 곳이군.”

“제 어머니인 그라시아 란델께서 만드신 곳이죠. 좀 음침하긴 하지만, 은밀한 일을 하기에는 제격입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어둠만 한 것도 없으니까요.”

아제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상히 말했다. 어린 시절 이곳에 갇혀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던 소년은 과거를
모두 청산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아이젠은 지하실 곳곳에 걸린 괴상한 도구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걸린 날붙이들이
불꽃을 머금고 섬뜩하게 일렁거렸다.

새삼 이런 것에 겁을 먹을 정도로 나약한 남자는 아니었으나, 이런 공간을 익숙하게 다니는 아제프가 신경 쓰였다.


아이젠이 아제프를 관찰하듯 쳐다봤다.

“내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내게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누구보다 잔인해질 필요가 있지. 멋모르는
무뢰배에게 를 해줘야 할 터이니.”

아제프는 저를 관찰하듯 훑어보는 시선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가 만든 공간은 아니었지만, 지금 요긴하게
사용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행하는 은밀한 행위가 발각되지 않도록 깊은 곳까지 파낸 지하는 끝도 없이 내려가야 했다. 아제프의 얼굴
위로 주홍빛 불꽃이 어슴푸레 비췄다가 사라졌다. 그는 하얗기만 한 제 손을 흘깃 내려다봤다.

아이젠은 그가 하는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제 새끼를 지키려는 짐승의 눈이 어두운 공간에
형형하게 떠다니며 반질거렸다. 부드러운 갈색 눈이 발하는 진득한 시선에 아제프는 살짝 웃을 뿐이었다.

“공작님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제가 요긴하게 사용 중이긴 해도 제이에게는 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정한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아이젠은 오늘 도착한 아제프의 청혼서를 떠올리며 혼자 끙끙거렸다. 여기 오기까지 그가 보낸 청혼서만 수백


번은 읽은 것 같았다. 아제프는 어디를 봐도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사윗감이었지만, 성정이 잔혹한 구석이
있었다.

문장이 없다는 걸 제외하고도 혹여 아제프가 제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제 아이를 해할까 봐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젠이 확답하지 못하고 고민하자 아제프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불쾌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조급해졌다. 아제프는 제 손을 흘깃 바라보다가 저보다 좀 아래에 있는 밀색 머리를


응시했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어찌 되었건 엘제이를 낳아주고 지금까지 키워준 남자였다.

아제프가 가볍게 눈을 깜빡이다가 믿어달라는 듯 아이젠을 빤히 바라보며 간청했다.

“맹세하겠습니다. 저는 제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아요. 공작님도 그걸 믿고 제게 두 딸을 맡기신 게


아닙니까?”

푸른 밤처럼 아름다운 눈이 맑게 빛나며 애원했다. 아련한 남자의 표정은 어느 정도는 연기였지만, 엘제이에게서
떼어지지 않던 눈은 진심이었다.

그들은 이미 한 배를 탄 운명이었다.
이이젠은 그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딸을 떠올리며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혹여, 조금이라도 그런 흔적을 발견하면 내가 자네를 찢어 죽일 걸세.”

“물론입니다. 제가 제이에게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아제프는 음침한 속내를 누르며 선량하게 웃었다. 물론 그는 엘제이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반려 쪽은 달랐다. 엘제이의 문장통을 걱정해 은밀히 반려를 찾는 아이젠과는 달리 그는 그 짝이라는 놈을
먼저 찾아내 흔적도 없이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어두운 감정을 숨긴 아제프가 선한 얼굴로 살갑게 말을 걸며 아이젠을 데리고 지하실 끝으로 내려갔다.

지하 밑바닥에는 아제프의 수하들이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는 남자가 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 주술사군.”

아이젠은 남자의 피부 반을 뒤덮은 검은 문양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을 배반하고 악마에게 혼을 판 자의


증표였다.

“루드비히 황자의 궁에서 빠져나오는 걸 제 수하가 은밀하게 잡아온 참입니다. 반항이 심해서…… 제 수하들의
손속이 무자비해진 것 같습니다.”

아제프가 자못 안타깝다는 얼굴로 거짓말하며 제 손으로 고문한 남자를 가리켰다. 재갈을 문 채 숨을 헐떡거리는
남자는 온몸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지만, 치명상은 모두 피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이젠은 손발톱이 모두 빠지고, 양팔의 살점이 얇게 저미어진 남자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잔인한 광경이긴
했으나, 저놈이 했을 짓을 생각하면 저보다 더한 짓을 해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새삼 그런 걸로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내 아이들에게 벌써 사특한 수를 쓴 건 아닌가?”

“어리석지만 겁이 많은 자입니다. 배포가 작은 놈이 황제의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요.


그리고 둘의 몸을 살펴본 바,”

아제프가 말을 하다 말고 심장을 콱 움켜잡았다. 심장에 찬물이 콸콸 쏟아진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등줄기까지 소름이 돋는 오싹한 느낌에 아제프가 허리를 수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기이한 불안감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란델 후작?”

아이젠이 의아한 듯 아제프를 불렀지만, 아제프는 가슴에 올린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
시꺼먼 손이 심장을 움켜쥔 채 놔주지 않았다.

‘이게 뭐지?’

그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섬찟한 두려움에 아제프가 흔들리는 눈으로 땅을 내려다봤다.

그때, 그를 찾아온 시녀가 지하실 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후작님! 공녀님이 위험하세요!”

아제프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폭사했다. 무언가를 느낀 듯 끔찍하도록 서늘해지는 심장에 차갑게 굳은
아제프가 벌떡 일어나 위를 향해 달렸다.

***

누구냐고 물어보는 엘제이의 질문에도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그저 엘제이의 손목을 잡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뭔가 괴로운 걸 참아내는 것처럼 찡그려진 이마가 어두운 로브자락 사이로 얼핏
보였다.

엘제이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위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을 뿜어대는 자인데,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이 남자……. 대체, 누구지?’

흐린 기억이 일렁거리며 흔들렸다. 아주 얇고 치밀한 여러 겹의 장막이 기억을 뒤덮어 파헤치지 못하게 막아 놓은


느낌이었다. 엘제이는 거치적거리는 장막을 파헤치며 두뇌 깊은 곳에 파묻힌 기억의 저편을 허우적거렸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애매함에 엘제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남자에게 붙잡힌 손목을 바라봤다. 그냥 잡고만 있을
뿐인데 살을 에는 감각이 전류처럼 흘렀다.

“문장 보유자군. 문장은 어디 있지?”

남자는 엘제이가 문장을 가졌다고 단정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8 화
58

어떻게 안 걸까? 분명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남자는 엘제이에게 문장이 있느냐고만 물어봤을 뿐 문장이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제이는 계속 제게 손을 뻗던 남자를 떠올리고 그에게 잡힌 손목을 바라봤다.

시선을 돌리자 아무것도 없는 무감각한 까만 눈이 보였다. 새까만 눈과 마주치자 또 심장이 술렁거리며 어서


피해야 한다고 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엘제이가 시선을 잡아채는 남자의 눈길을 피해 주변을 둘러봤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율리아와 그의 구속에 묶인
듯 꼼짝도 못 하게 된 시녀들이 보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런 걸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본 적 있어. 어디서 봤지?’

엘제이의 눈 위로 여러 의문과 당장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공포가 떠올랐다. 그녀는 일단 팔목에 힘을 주며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놓으세요!”

“문장은 어디 있지?”

엘제이의 반항을 가볍게 누른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무저갱처럼 시꺼먼 흑안은 암흑처럼 짙었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차가운 어조가 시리도록 무서웠다.

엘제이가 남자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자 가해지는 압력이 커졌다.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목이 꺾일 것처럼
아파졌다.

“아아아악!”

심한 고통을 참지 못한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자 남자의 눈은 더 음산해졌다.

“문장 냄새가 네게서 진동해. 다른 이들보다도 특히 심하군. 더럽고 역겹다.”

남자가 음울해진 눈으로 예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젖혔다. 엘제이에게서 무슨 냄새라도 난다는 듯 코를 찡그린
남자가 얼굴을 멀찍이 떨어뜨리며 꺾어버릴 듯 세게 쥔 손목을 노려봤다. 새까만 장갑 위로 까만 연기 같은 게
솟았다.

손목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순간 용암이 들이부어져 손목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엘제이가 몸을 웅크리며 헐떡였다.

“아읏, 흐…….”

“문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남자는 엘제이의 가여운 모습에도 당장 말하는 듯 팔을 위로 잡아당겼다. 장신의 남자가 팔을 위로 들자 조그만


체구의 엘제이가 허공으로 들렸다. 팔이 뽑혀나갈 것 같았다. 고통을 참지 못한 눈 위로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고,
하얀 피부가 창백하게 질려 애처롭게 떨렸다.

“어디 있지?”

알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주면 죽을 거라는 확신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아니,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엘제이가 답하지 않자 남자는 귀찮은 듯 이마를 찌푸리다가 엘제이를 내려줬다.

계속되던 고통이 멈추자 잠시 숨을 고르던 엘제이에게는 절망적이게도 남자는 엘제이의 팔을 틀어쥐고 질질 끌고


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데도 남자는 무자비했다. 아제프가 밤새 간호하며 사랑스럽게 도닥이던 몸을 남자는


무참히 끌어당겼다.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태도에 팔이 끊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아악! 이거 놔!”

엘제이가 버둥거리며 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반항하자 남자의 차가운 인상이 냉랭하게 굳었다. 그는 엘제이가
정말 싫은 듯, 혹은 더럽다는 듯 그녀의 몸에서 일정 거리만큼 떨어진 채였다.
“공녀님! 막아!”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던 율리아가 남자의 힘에 짓눌린 시녀들을 재촉하며 소리쳤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는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끊기고 시녀들이 움직였다.

남자는 타오르는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의미한 공격을 하는 시녀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귀찮은 듯
손을 휘젓자 전보다 강해진 압력에 서 있던 시녀들의 무릎이 저절로 꿇렸다.

‘마나의, 자질.’

어둡게 가라앉았던 저편의 기억이 떠올랐다. 공포로 홉뜬 녹안이 바람결에 일렁이는 검은 로브 자락을 향했다.
새까만 로브 속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얼핏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귀찮다. 이왕이면 살려서 뽑는 쪽을 선호하지만…… 너는 이상할 정도로 유독 불쾌해.”

무감각했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남자는 웃는 게 아니라 사나운 잇새를 드러낸 거였다. 그는
혐오로 가득한 눈으로 엘제이를 쏘아보며 검을 들었다.

새까만 검신을 가진 대검은 산 자의 피를 묻히고도 티 하나 나지 않았다. 녹슨 곳 하나 없이 매끄러운 검날이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꼼짝도 안 했다. 엘제이가 허망한
얼굴로 까만 검신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감춰진 기억을 떠올렸다.

얼굴이 보이진 않는 새까만 로브. 암흑 같은 대검. 엘제이를 향한 짙은 혐오.

엘제이는 저 남자가 자신을 노리는 이유를 알았다. 남자의 정체를 안 순간 엘제이는 그녀의 힘으로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몸은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당신이 왜, 벌써……. 아직은 당신이 나타날 때가 아닌데…….’

남자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남자가 자신을 죽이리라는 건 확실하게 알았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그에게 문장을 털어놨는데. 시간이 많은 줄 알았는데, 그가 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공포도 두려움도 남지 않은 하얀 얼굴이 짙은 후회와 체념으로 탈색됐다. 남자는 도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최고다-’라고 중얼거렸다. 일그러진 쾌감과 환희로 범벅된 까만 눈이 엘제이를 바라봤다.

남자가 보드라운 뺨에 손을 올리고 눈물을 닦아주며 광기에 찬 속삭임을 토해냈다.

“그대, 죽기 전에 할 말 있나? 네 짝이 네 유언을 들었을 때, 일그러질 얼굴이 궁금하거든.”

차갑고 시려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뺨에 닿은 축축한 가죽에 몸서리가 쳐졌다. 숨통을 콱 조이는 공포에도
엘제이가 흐린 눈을 들어 아제프가 있을 별장을 바라보며 숨결 같은 이름을 토해냈다.

“아제프…….”
“전해주지. 넌 최고의 사냥감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제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적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하루는
그녀의 목숨으로 만족할 남자이기에 다른 이들은 무사할 거라 생각했다.

‘아제프. 계속 당신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약속 어겨서, 미안해요.’

엘제이는 괴로운 얼굴로 저를 사랑해달라고 청하던 아제프를 떠올렸다. 또 그를 혼자로 만들었다는 미안함과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후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엘제이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나왔을 때, 어둠을 품은 검날은 엘제이의 가슴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제이!!!!”

막 지하에서 빠져나온 아제프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포효하듯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 마나가 크게
일렁거리며 그의 염원에 응답했다. 짙푸른 반달 모양의 검기가 쏟아지듯 튀어나갔다.

툭-

엘제이의 손목을 붙들었던 팔이 잘려나가 땅 위로 떨어지자 엘제이의 몸도 힘을 잃고 낙하했다. 새까만 남자는


그의 지배에서 벗어난 마나를 보며 조금 놀란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남자가 흠칫 놀란 찰나를 이용해 성큼 다가온 아제프가 쓰러진 엘제이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무리해가며
갑작스럽게 마나를 끌어낸 탓에 내장이 진탕된 듯 울렁거렸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긴 백금발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새빨갛게 부어오르다 못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짓무른 엘제이의 손목에 아제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귀기 서린 푸른 눈을 들었다.

시녀들을 무참하게 짓누르던 남자도 오싹함에 몸을 떨 정도로 섬뜩한 푸른 눈이었다. 엘제이에게 이상이 생기자
시녀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아제프를 찾으러 간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들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위험한 남자를 만났음에도 지켜야 할 주인을 부른 이유. 보초를 서는 기사들을
제치고 아제프에게 달려갔던 이유. 아이젠이 두 딸의 안전을 그에게 맡겼던 이유.

그가, 아제프 란델이 이 별장 내의 누구보다도 더 강한 자였기 때문이다.

아제프가 지닌 능력은 단순히 신체가 뛰어나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아제프는 검술에도 두각을 드러냈으나, 살기 위해 아등바등 배우던 검술이 능숙함을 넘어서 난폭해진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에게 마나의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기 중에 안온하게 누워 있던 마나가 요동치며 흔들렸다. 추운 걸 가장 싫어하는 남자는 모순되게도 겨울을 품은


능력을 가졌다. 아제프가 마나를 작게 빙결시켜 엘제이의 짓무른 손목을 감쌌다.

하얀 손목에 흉이 질지도 몰랐다. 그조차 손대지 않는 몸이었다. 조금의 상처도 허용하지 않아 그 빌어먹을
문장도 파내지 못하던 중이었다. 아제프는 기절한 듯 미동도 안 하는 엘제이의 뺨을 만져보다가 이를 갈았다.

“죽여 버리겠어.”
문신의 직위인 외교부 수뇌로 일하면서 능력을 감췄던 이유가 있었다. 사용하기 싫었으니까. 아제프는 시리도록
추운 제 능력을 꺼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제가 가진 능력을 활짝 개방했다.

오랜만에 풀려나온 자질이 매섭게 일렁거리며 공기 중으로 뻗어나갔다. 푸른 자질이 마나를 지배했다.

남자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주변을 맴도는 마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얼핏 흔들리는 로브
사이로 새까만 자국들이 보였다.

“화가 난 건가?”

아제프의 눈이 아무 죄책감도 없는 까만 눈으로 향했다. 남자처럼 시꺼먼 검이 보였다. 그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검이 엘제이의 몸을 꼬챙이처럼 꿰뚫고 그 피를 머금었을 터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온몸을 찢어버리겠어!”

공기 중에 일렁거리는 마나가 그의 지배에 응답했다. 한쪽 팔이 잘려나간 남자는 북풍이 휘몰아치듯 냉기를 품은


마나를 보며 입꼬리를 째지게 올렸다. 과연 저 여자는 최고의 사냥감이었다.

“마나의 역린을 건드린 자, 자비를 얻지 못하리……. 최고다!”

저 여자는 그의 역린인 듯했다. 남자는 성서의 구절을 떠올리며 아까 엘제이를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왕이면 저자의 눈앞에서 죽여 버려야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남자는 광소를 터트리며 그의 몸을
찌르듯 일렁거리는 마나를 돌아봤다.

시전자의 염이 강력한지 남자의 지배를 거부하는 공기 중의 마나가 푸른 바다처럼 물결치며 냉기에 찬 결정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알체스테 말고는 처음 보는군. 자질이 푸른색이라니- 최고잖아!”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아름다운 물결을 돌아봤다. 마나라는 건 원래 염(念)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자질을 가진
자의 염이 강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능력은 누군가를 지킬 때 가장 크게 요동쳤다.

이미 남자의 지배에서 벗어난 마나였다. 남자는 두 팔을 벌리며 기쁘게 받아들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59 화
59

강자에게 짓눌린 듯 오싹하게 돋아나는 소름이 꼭 알체스테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엘제이를 안고 있던 아제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단순히 미친놈 같지는 않은데, 너무 태평했다. 반항하며
대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로운 창이 된 마나를 살폈다. 그가 시험하듯 한 손으로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명했다.

“찢어 죽여라.”

검 끝에 모인 얼음송곳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매서운 냉기를 품으며 남자의 몸으로 쏟아졌다.

기절하며 감겼던 엘제이의 눈이 뜨인 것도 그때쯤이었다.

‘차가워.’

눈을 뜬 순간 엘제이는 제 몸이 바닷속에 잠긴 줄 알았다. 차가운 빙결의 기운이 아제프의 주위를 휘감으며


눈꽃처럼 빛났다. 푸른 바다 위를 떠다니는 얼음결정이 날카로운 모양으로 깨어져 어딘가로 향했다.

파르르 떨리는 초록색 눈이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좇았다. 몽롱한 녹안 위로 두 팔을 벌린 남자의 신형이 비치는
순간, 초록색 눈이 물결 같은 잔상을 그리며 동요했다.

푸르게 빛나는 얼음들이 차랑차랑-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송곳처럼 얇고 뾰족한 얼음뭉치들이 하늘을 수놓으며
얼음꽃처럼 모여들었다.

찢어 죽이라는 주인의 영창에 흥분한 마나가 길길이 날뛰며 목표를 향해 동시에 쏟아졌다. 수없이 많은 작은
결정들이 남자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엘제이는 꿈에서 여러 번 봤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되는 걸 숨죽이고 지켜봤다. 사람을 닮은 육신을 산산조각
나는 걸 보니 속에서 토악질이 치밀었지만, 면역이 생겨서인지 참을 만했다.

남자의 몸을 찢어 살점을 머금고 툭툭 떨어지는 얼음조각 위로 새까만 진액 같은 게 흘렀다.

아제프는 찐득한 진액이 꿀렁꿀렁 흐르는 걸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지는
모습이었다. 그가 관찰하듯 신중한 얼굴로 얼음에 꿰인 사체를 살펴봤다. 인간이면 마땅히 흘려야 할 피가 없었다.

“인간이 아닌 건가?”

아제프의 목소리를 듣자, 몽롱했던 정신에 맑은 기운이 쏟아졌다. 엘제이는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에
괴로워하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아제프의 손목을 잡았다.

“제이?”

“독연기가, 피어오를, 거예요. 아제프, 피해요.”

조그만 목소리가 색색거리며 힘겹게 새어 나왔다. 아제프는 푸르게 질려가는 엘제이의 손목을 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단순한 열상은 아닌 것 같았다.

아제프가 몸을 물리며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시녀들에게 소리쳤다.

“뒤로 물러나!”

얼음에 꿰뚫린 남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진 진액이 바닥을 적시고 용암처럼 끓기 시작했다. 증발하는 연기를 본
아제프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쇄애액-

냉풍을 탄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쏟아져 둥근 반원 모영의 얼음벽을 만들었다. 아제프의 마나가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감싸자 순식간에 달아오른 새까만 연기가 얼음벽을 쾅쾅 두드리며 빠져나오려 했다.

단단한 성벽에 부딪힌 연기가 틈새를 찾아 헤매며 진득할 정도로 얼음을 더듬어댔다. 얼음 안은 점점 더 새까맣게
차올랐고, 음습한 기운은 벽 안에 갇혀 갈 길을 잃었다.

“저게……. 뭐야…….”

처음 보는 괴이한 광경에 아연실색한 시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제프의 능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언제든지 쏘아질 준비를 하는 연기가 구역질 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동생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피신한 율리아도 꼭 의지를 가진 듯 꾸물거리는 것들을 보며 창백한 얼굴을 했다.
저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아제프가 없었다면 이곳은 전멸이었을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새까만 것들이 대지를 뚫고 나오려는 걸 보며 땅 아래로 빙벽을 둘렀다. 검 끝에 힘을 주어 빠르게


내리긋자 검격을 따라 생긴 강풍이 땅 밑으로 빠져나온 연기들을 날려 보냈다.

아무래도 저것들은 마나로 만든 빙벽은 뚫지 못하는 듯했다. 아제프는 그것들을 조금 더 관찰하다가 숨이 찬 듯


헐떡거리는 엘제이를 살펴봤다.

“제이, 괜찮아요?”

엘제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리며 색색거렸다. 손목을 타고 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바짝바짝


태우고, 내장을 녹이는 것 같았다. 참기 힘든 고통에 엘제이가 바르작거리며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저게, 끝이 아니, 에요. 흐읍, 곧 부활을…….”

벌려진 입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엘제이의 반응에 헛숨을 삼킨 아제프가 흘러내리는
타액을 닦아주며 엘제이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

“괜찮으니 말하지 마세요.”

피부가 괴사되는 것처럼 푸르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제프는 빙벽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연기를 흘긋 바라보다가
엘제이의 팔을 팔꿈치 아래까지 얼려버렸다.

“아-”

송곳처럼 몸을 찌르던 열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갑자기 멀쩡해진 상태에 엘제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아제프의
품에서 조금 일어났다. 푸르게 얼어버린 팔이 눈에 들어왔다. 제 몸에 일어난 사태를 확인한 엘제이의 눈에 옅은
공포와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흔들리는 녹색 눈을 본 아제프가 서둘러 엘제이를 끌어안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그가 희게 질린 귓가에 입을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쉬이, 좀 차갑죠? 동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는 마물의 피랑 비슷한 것
같아요. 신관을 불러 정화하고, 흉터도 안 남게 할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저것을 치울 때까지 아주
조금만, 기다려요. 참을 수 있죠?”
그가 조곤조곤 말하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도닥거렸다. 순간 팔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얼어붙었던
몸이 그의 달램에 천천히 이완됐다.

타락하지 않은 아제프의 능력은 알체스테와 같은 것이니 그의 말대로 괜찮을 걸 알았다.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푸르게 질린 손을 내려다봤다.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않고 조금 차갑기는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제프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그란 두상을 보며 옅게 웃었다. 엘제이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준 아제프가 얼음에
부딪혀 승화하는 연기를 바라봤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착하네요. 그럼 저쪽으로 가 있을래요? 제가 금방 해결하고 갈게요.”

그의 목소리에 먼발치에 떨어져 있던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엘제이를 부축했다. 제가 여기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았기에 얌전히 그녀들을 따라가려던 엘제이가 걸음을 멈추며 속삭였다.

“저 사람, 아니, 저 남자는 마물이에요.”

“아는 자예요?”

아제프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아제프는 그녀가 어떻게 저런 위험한 놈의 정체를 아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일단은 물러나는 게 좋겠군.’

굳은 얼굴을 보니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이 상황이 끝난 후 다정하게 달래면서 캐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아제프의 머릿속으로 엘제이에게서 답을 끌어낼 여러 묘안이 스쳐지나갔다.

엘제이는 아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기려고만 하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게 아제프에게 도움이 된다면 설령 이상하다는 의심을 받더라도 말해줘야 했다.

엘제이는 이상하리만큼 흐린 기억을 간신히 헤집으며 저것의 정체를 떠올렸다.

“이름은 지켈리온 힐데. 원래는 하스틴 절벽에 기거하는 자인데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

엘제이가 빠르게 속삭이다가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엘제이가 저자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지켈리온 힐데는 아제프의 사후,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1 부의 악역이 아제프 란델이라면, 2 부의 악역은 지켈리온 힐데였다.

신의 문장은 크게 2 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1 부에서는 알체스테가 아제프를 죽인 후 황제로 즉위한다. 엘제이는


2 부는 보지 않았지만, 아제프가 죽은 후 1 부 끝에서 잠시 등장하는 지켈리온에 대한 서사를 기억했다.

2 부의 부제는 <문장 사냥>.

지켈리온 힐데는 아제프 란델과는 다르게 문장 자체를 혐오해 문장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문장을 뽑아낸 후 그
반응을 보고 죽이는 걸 즐기는 자였다.
엘제이는 한겨울이 되었을 때나 하스틴 절벽을 벗어나던 지켈리온이 왜 벌써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얼굴을
좀 찌푸렸다.

“하스틴 절벽?”

아제프는 지켈리온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엘제이를 말간 눈으로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지켈리온이 알체스테 어쩌고 했던 걸 들었는데, 이제 이해가 갔다.

하스틴 절벽은 마물의 성지. 그리고 그곳과 맞닿아 황폐하게 죽은 베아르시의 변경을 다스리는 게 알체스테였다.

“네. 아마 본체가 아니라 분신일 거예요. 약점이 있는데 만든 분신마다 달라요. 아마, 어느 신체 한 부위를
보호하려고 한다면 그곳이 약점일 거예요.”

엘제이가 빠르게 말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인간 십여 명을 가볍게 제압하던 자이지만, 아제프는 겨우 지켈리온의 분신에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뛰어난 전투 센스와 두뇌로 금방 분신의 약점을 알아차렸을 남자였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엘제이는 시녀들을 따라 몸을 돌리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제프, 조심하세요.”

아제프의 눈이 둥글게 뜨였다. 그는 선하게 웃으며 엘제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안전한 곳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던 아제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그럼요. 본체가 아니라니…… 제대로 죽이지 못해 아쉬울 정도인걸.”

휭- 불어온 바람이 그의 말소리를 채갔기에 엘제이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새까만 어둠이 가라앉고 다시 인간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연기가 남자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건지 아제프의 빙결에 뜯겨 승화된 것들만큼 남자의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구릿빛 피부 위를 진득하게 기어 다니는 까만 문양들은 주술사들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찢긴 로브를 벗어던진 남자는 검을 들어 얼음벽을 깨부쉈다. 콰지직- 금이 가다가 결국 부서지고 마는


얼음을 보며 아제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아- 얼어 죽은 건 처음이야. 이건 좀 멋이 없지 않나? 그대는 너무한 사람이군.”

지켈리온이 이곳저곳 뜯겨나간 살점을 보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가 날카로운 맹수에게 물어뜯긴 듯 뭉텅뭉텅
떨어진 살점들이 푸른 마나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며 검을 들었다. 검 손잡이가 손바닥을 타고 휙- 회전하고, 투박한 모양의 바스타드
소드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땅을 타고 솟아난 끝이 뾰족한 얼음들이 바닥을 뚫고 정확하게 남자의 왼쪽 발등을 노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0 화
60

지켈리온이 땅을 굴러 아제프의 공격을 피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똑똑하잖아! 알체스테 말고는 나를 이 정도로 흥분시킨 놈이 없었는데!”

아제프는 엘제이의 말이 맞았다는 것에 기이한 얼굴을 했다. 지켈리온의 몸은 이곳저곳 찢겨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왼쪽 발만은 깨끗한 신발을 신은 채 그대로였다.

“하하하하! 최고다!”

지켈리온이 웃음을 터트리며 지면을 달려왔다. 기이하게 꺾인 두 팔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덜컹거리다가
대검을 휘둘렀다.

엘제이가 어떻게 저놈을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음이 못마땅했다. 아제프가 주름이 깊게 팬 얼굴로 고민하다가


손목을 비틀어 검을 뽑아냈다.

두 개의 검신이 카랑-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아제프와 지켈리온의 얼굴도 한 마디 정도의


간격만 두고 가까워졌다.

지켈리온은 오싹하게 가라앉은 벽안을 보며 히죽 웃었다, 온몸에 돋는 소름과 흉흉한 살기가 그렇게 기꺼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강한 사냥감이었다.

지켈리온은 차갑게 가라앉은 무표정한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분명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지켈리온의 기준에서 아제프는 매우 이상한 자였다.

“그대, 진짜 이상해. 분명 나와 동류인데…… 왜 알체스테의 껍질을 쓰고 있지? 아니, 알체스테의 몸에 나를


두른 건가? 신기하단 말이지.”

“동류?”

동류라는 말이 기분 나쁜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아제프가 지켈리온의 검을 쳐내며 손목을 비틀어 그의 팔을


잘랐다. 엘제이의 손목을 비틀었던 팔이었다.

한 번 떨어졌던 팔은 회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지켈리온은 떨어진 팔이 꽁꽁 얼어붙은 걸 보며


눈을 빛냈다.

“역시 똑똑해. 알체스테도 이만큼은 아니었어.”

“알체스테? 너, 도대체 뭐지?”

얼어붙은 팔은 독액을 흘리지 못했고, 지켈리온은 떨어진 팔을 빠르게 포기했다. 분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지켈리온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절규하는 인간의 감정과, 얼굴이 좋았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최고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제프에게서 등을 돌린 지켈리온이 엘제이를 빤히 응시하며 그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만큼 맛있는 게 없지! 그대, 저자의 역린이겠지?”

시녀들이 엘제이의 앞을 빠르게 가로막았지만, 흉흉한 살기에 놀란 초록색 눈이 아제프의 눈에 파문을 일으켰다.
저놈의 팔에 매달려 허공에서 축 늘어져 있던 손끝이 잔상처럼 피어올라 아프게 내리박혔다.

아름다운 얼굴이 짜증과 분노로 찌그러졌다. 기분이 나빠 죽을 것 같았다. 새파란 귀기가 서린 눈이 난폭한
살기를 쏟아냈다.

“조금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가 뇌까리듯 짓씹으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아제프의 손에 움켜진 검이 빠르게 휘어지며 둥근 파문을 그렸다.


푸른 마나가 그의 분노에 동조하듯 넘실거리며 앞으로 쏘아졌다.

폭사되는 나오는 살기가 지켈리온의 숨통을 콰득- 조였다.

“크윽, 허으……. 최고다!”

숨통이 콱 조여들어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켈리온은 힘을 짜내 환희에 찬 목소리를 냈다. 시선을 내리니
날카로운 얼음에 꿰뚫려 갈기갈기 찢겨버린 왼쪽 발등이 보였다.

지켈리온은 뾰족한 얼음에 발등이 뚫린 걸 쾌감 어린 눈으로 보다가 결국 힘을 잃고 쓰러졌다. 거대한 몸체가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쿵.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남자가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며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 끈질긴 모습에
아제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뼛속까지 물어뜯어라.”

아제프가 가볍게 영창하며 푸르게 빛나는 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푸른 수증기가 뿌옇게 흘러나와 쏘아졌다.

어떻게든 엘제이에게 가려는 듯 꿈틀꿈틀 땅을 기는 지켈리온의 몸 위로 새하얀 성에가 빠르게 내려앉으며 몸이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결정이 몸에 떨어지고 투명한 성에꽃들이 남자의 몸 위를 빠르게 뒤덮으며 꽃을
피워냈다.

검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걸어온 아제프가 얼어붙은 지켈리온의 발등을 밟아 뭉갰다. 지켈리온의 몸 위로 피어오른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들이 파사삭- 깨지는 소리를 내며 으깨져 피부 아래로 침식했다.

“나는 말이야, 내 것을 건드리는 게 제일 싫단 말이지. 다음에는 본체를 가져오도록 해. 그때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찢어 죽일 거다.”

선한 얼굴에서 풍기는 짙은 살심과 음습한 기운에 지켈리온의 얼굴이 돌아갔다. 삐걱삐걱- 어긋난 기계처럼
작위적으로 돌아간 목이 180 도로 꺾여 굳어 있는 엘제이를 올려다봤다.

동공이 구분되지 않는 새까만 눈이 엘제이를 향했다. 새까만 눈은 얼핏 그녀를 보며 휘어지는 듯했다. 빤히


그녀를 보던 눈의 흰자위가 먹물에 잠식되듯 시꺼멓게 죽어버렸다. 온통 새까맣기만 한 소름 끼치는 눈에
엘제이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지켈리온의 입이 딱딱 부딪히며 기괴한 소음을 냈다.

“너구나. 네 짓이야. 그대, 무슨 짓을 한, 끅!”

콰직- 두개골이 으깨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켈리온의 말이 멈췄다. 덜덜 떨고 있는 엘제이의 눈을 가린


아제프가 서늘한 얼굴로 지켈리온의 몸체를 노려보며 그의 머리를 천천히 지근지근 밟아 뭉갰다.

미처 막지 못한 귓속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콰직- 콰직-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엘제이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너구나. 네 짓이야. 그대, 무슨 짓을 한, 끅!]

끽끽거리는 쇳소리를 내면서도 제게 뭐라고 중얼거리던 덜컥거리는 입술과, 흰자위까지 새까맣게 물든 짐승의
눈이 반질반질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엘제이의 몸이 움찔 떨리자, 그녀의 눈을 막고 있던 아제프가 반대쪽 손을 휘둘러 서둘러 마무리했다.

파사삭- 소리를 낸 얼음이 죽어버린 몸체를 파고들며 몸 전체를 얼리자 죽어버린 몸체가 까만 진액이 되어
흘러내렸다.

피처럼 질척질척한 진액이 얼음에 묶여 속박되는 걸 냉랭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제프가 덜덜 떨고 있는 엘제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쉬이. 그 누구도, 내 품에 있는 당신을 해칠 수 없어요. 그러니 잊어버려요.”

아제프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입을 맞추고 희게 질린 뺨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시린
손이었지만 그 단단함에 두려운 마음이 서서히 풀렸다.

엘제이는 심호흡을 하며 마지막까지 저를 응시하던 새까만 눈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다는 건지. 분명 자신은 지켜보기만 했을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엘제이가 제 마음을 다독거리며
되뇌었다.

아제프가 파르르 몸을 떠는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보듬었다. 괜찮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무척 상냥해서 엘제이의
떨림도 점점 줄어들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등을 도닥거리며 곁에 서 있는 시녀들을 흘긋 바라봤다. 그녀들은 지켈리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아제프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짙은 책망과 실망이 담긴 눈에 율리아는 치명상을 입고도 허리를 숙였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젓자 두 명의 시녀가 율리아를 부축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제프가 눈을 감고 별장 주변에 다른 위험인물은 없는지 살폈다. 찡-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가 얼어붙고 파란


물결이 파동처럼 번졌다.

별장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은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젠을 막기 위해 그의 발치에 매달려 있었고, 엘리사는 대체


어떻게 된 신경인지 이 난리에도 자고 있었다.

가만히 티아세의 안전을 확인하던 아제프가 꿈틀,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가 초대하지 않은 방문객이 한 명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 하나가 느껴졌으나, 삿된
것은 아니었다. 황홀할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기척은 누구의 것인지 분명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제프가 찡그린 이마로 생각하다 이내 상관없다는 듯 눈을 떴다. 대기를 얼리던 마나가 풀리며 투명하게 번져
사라졌다. 새파란 눈을 뜬 아제프가 그의 몸에 기대어 있는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꽁꽁 언 그녀의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 끝났어요. 이제 팔 좀 볼까요?”

아제프가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세심한 손길로 엘제이의 팔을 보며 푸르게 얼어붙은 살결을 손으로 쓸었다.
혹시 몰라 팔꿈치까지 얼려놨던 빙결이 그의 손에 천천히 해동되며 내려왔다.

“아……!”

꽁꽁 얼었던 팔이 녹진하게 풀리는 느낌에 엘제이가 작게 인상을 쓰고 신음했다. 아제프는 그녀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잡아챘다.

“아파요?”

“아픈 게 아니라, 조금 놀라서, 그래요.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제프.”

반 정도 해동시킨 팔을 다시 살펴보던 아제프가 어스름하게 떠오르며 엘제이의 손목에서 발버둥 치는 까만 기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것이 그녀의 몸에 있다는 게 불쾌해서 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많이 다친 건 아니라, 신관이 간단하게 정화해주면 될 거예요. 제가, 함부로 담장 옆으로 갔어요. 미안해요.”

엘제이는 화가 난 것 같은 아제프의 얼굴을 살피며 변명하듯 사과했다. 얌전히 안에 있었으면 낯선 이를 볼 일도


없었고, 지켈리온을 이곳으로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거였다.

왜 하스틴 절벽을 넘어왔는지는 몰라도 아제프의 별장으로 온 이유는 그녀의 문장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지켈리온은 공기 중에 떠도는 문장의 파동에 가장 민감한 자였으니까.

문장의 파동이라는 건 문장을 지닌 자가 내뿜는 고유한 기운 같은 건데, 밀폐된 공간이나 건물 내에 있었다면


지켈리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산책 나오지 말 것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같았다. 엘제이의 얼굴이 미안함과 후회로 흐려졌다.

엘제이의 흐려진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아제프는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있었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턱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이상하군. 제이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말이야.]

아이젠은 그동안 엘제이가 몇 번이나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젯밤 엘제이를
진찰한 치료사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기력이 약하다는 돌팔이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아제프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이마를 좁혔다. 뭔가 놓친 것이 분명했다.

‘별 이상은 없다는데 왜 자꾸 툭툭 쓰러지는 거지? 휴식이 필요한 건가?’

그가 본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였다. 아제프가 찡그린 얼굴로 엘제이를 빤히 쳐다봤다. 지레 찔린 엘제이가


눈을 깜빡이다가 얼지 않은 팔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자질을 풀어서 그런지 무척 차가워진 손이
안쓰러웠다. 엘제이가 차가운 손에 제 손을 얽어 꼭 붙잡았다.

“미안해요. 정말.”

엘제이가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1 화
61

손이 차가워졌다고 건강에 나쁜 건 아니었다. 정결한 기운을 가득 받아낸 후라 오히려 몸에는 더 좋았을 거였다.
다만, 그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싫어하고 꺼리는지 알고 있어 자꾸 미안해졌다.

아제프가 사과를 반복하는 하얀 얼굴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제 눈 안에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평소에


건강했다던 엘제이가 계속 쓰러지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대로 넘기기에는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아제프의 마음은 기이한 초조함과 불쾌감, 그리고 그녀를 향한 걱정과 분노로 술렁거리며 흔들렸지만,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달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제가 바로 왔으니 운이 좋았지만, 제이는 당분간 방에서 감금이에요. 꼼짝도 하지 말고 며칠은 그


안에서 푹 쉴 필요가 있어요. 당신 동생은 아직 꿈나란데, 왜 벌써 일어난 거예요. 쓰러지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밖에 나와서는! ……아무튼, 알아듣겠어요?”

성질을 죽이고 나긋나긋 시작된 잔소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잇새를 타고 흐르는 그르렁거림이 심해지자, 어느
순간 말을 뚝 멈춘 아제프가 말을 자르며 엘제이의 대답을 종용했다.

반말에서 존댓말로 돌아온 걸 보면 화가 풀린 것 같기도 한데, 어서 대답하라는 듯 응시하는 눈이 매서웠다.


거대한 살쾡이가 얼른 대답하라는 듯 몸을 툭툭- 건드리며 괴롭혔다.

엘제이의 얼굴에 얼핏 억울한 기운이 스쳤다. 잘 자는 그녀를 깨운 게 아제프가 아니었던가?

심술로 그녀를 깨운 주제에 까맣게 잊은 걸까. 아니, 그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니 잊은 게 아니라 뻔뻔한
것뿐이었다. 어쨌든 잔소리를 하는 아제프는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 아제프는 억울해
보이는 그녀를 뱁새눈을 떠 바라보며 압력을 가했다.

“대답하세요.”

“……네.”
엘제이는 제 몸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대로 방 안에 앉아
좀 쉬며 일그러진 기억들을 정리해봐야 할 것 같았다. 분명 그녀의 기억들인데 누군가 어질러 놓은 듯 군데군데
흐려진 부분이 있어 이상했다.

아제프는 뭐라고 더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참았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일찍부터 다그칠


필요는 없었다. 아제프는 언젠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도록 샅샅이 파헤칠 걸 다짐하며 시녀에게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신관을 은밀하게 불러들여라.”

아제프가 땅 위에 떨어진 새까만 얼음조각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제프에게 꼭 안겨 있던 엘제이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밀고, 결정들을 바라봤다.

인간의 육신을 입었던 마물이 녹아내려 시커멓게 변한 안개가 아제프의 능력에 승화되어 언 채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아제프의 자질에 속박된 연기는 어떻게든 빠져나오고 싶은지 꿈틀거렸다.

‘아제프가 가진 마나의 자질.’

마나의 자질이란, 쉽게 말해 마나의 사랑을 받는 걸 말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정결한 기운들이 사랑하는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일, 그게 바로 마나의 자질이었다.

아제프는 마나의 사랑을 받은 자였다. 마나에게 사랑받는 일이 쉬운 일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드넓은 땅을 지닌 베아르시 제국 내에서도 올바른 자질을 가진 자는 알체스테와 아제프를 포함해 단 몇 명뿐이었다.

마나의 자질은 개인마다 고유한 특색을 지니는데 아제프의 경우는 빙(氷), 쉽게 말하자면 모든 걸 얼리는
능력이었다.

아제프의 자질이 발할 때 일렁이는 푸른 물결은 무척 차갑고 시려 시전자의 몸마저 냉랭하게 얼어붙게 했다.
아제프의 검술이 사나워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추운 걸 싫어하는 아제프는 자질을 쓰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마나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파괴력 높은 검술을 익혔다.

그 사실이 훌륭한 원동력이 되어 아제프를 성장시킨 건 사실이나 엘제이는 악착같이 검을 붙잡던 소년 시절의
아제프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하늘의 수놓은 푸른 마나는 바닷속에 잠긴 듯 아름다웠지만, 목표를 쫓아 물어뜯고야 마는 치밀함이 잔인하고


포악했다.

‘마나의 자질을 가진 자. 아제프와 알체스테.’

엘제이가 알고 있는 또 한 명의 자질을 가진 자. 알체스테의 능력은 아제프와는 달리, 무척 따뜻한 느낌이었다.


새하얀 고니처럼 우아한 마나는 깃털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아 마물을 집어삼켰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알체스테뿐만 아니라 다른 자질 보유자들도 생각나지 않았다. 엘제이는 왜 이렇게 기억이
흐려졌을까, 고민하며 알체스테에 대해 생각했다.
‘알체스테의 능력이, 정확히 뭐였더라?’

엘제이가 어지러운 기억들을 헤집으며 알체스테의 능력에 대해 떠올릴 때, 그 당사자가 저벅저벅 걸어와 아제프의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상상이 현실이 되자 엘제이는 순간 제가 헛것을 본 줄 알고 눈을 부릅떴다.

“내려앉아 섬멸하라.”

마나를 지배한 중저음의 영창이 파동에 실려 다가왔다. 새하얀 검을 든 남자의 옷이 투명한 바람을 타고 휘날리고,
그의 검 끝에서 뿜어진 마나가 희고 깨끗한 섬광이 되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마물에게 맞서기에 가장 적합한 능력. 알체스테의 자질은, 빛(光)이었다.

새하얀 섬광 기둥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마당에 내려앉은 섬광은 지켈리온의 사체를 뒤덮고 얼음에 낀
까만 연기를 집어삼켰다.

주술사나 마물이 가장 두려워하는 능력, 삿된 것들을 정화하는 것이 알체스테가 가진 마나의 자질이었다.

새까만 연기를 사각사각 좀먹던 빛은 할 일을 끝내자 새하얀 깃털처럼 흩날렸다. 폭발하듯 내리꽂혔던 빛은 곧
무해하게 변해 허공으로 뿌려졌다.

엘제이는 제 뺨을 간질이고 지나가는 빛이 무척 따뜻하다는 걸 느끼며, 저도 모르게 아제프의 눈치를 보듯 그를


올려다봤다.

몸이 덜덜 떨리도록 추운 제 자질을 싫어하는 아제프에게 따스하기만 한 알체스테의 자질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제이의 걱정과는 달리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능력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차가운 손을 꼭 붙들고 저를
올려보는 엘제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매만지며 왜 그런 표정이냐는 듯 상냥한 얼굴을 했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는 사이 별장으로 저벅저벅 걸어온 알체스테가 그들 앞에 섰다.

“란델 경, 오랜만이군.”

별장의 문지기들은 흰 섬광을 꽂은 남자가 소문으로만 듣던 비운의 황자임을 알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제프의
능력과는 달리 알체스테의 자질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존경하는 것이었다.

마나의 자질을 발휘한 건 후의 일이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뛰어났던 알체스테를 향한 시샘과 질시는 결국, 아비의
눈까지 멀게 했다. 무엇이 그리 황제의 마음을 가렸는지는 몰라도 현황 에이든은 5 살이었던 죄 없는 알체스테를
변방으로 쫓아낼 만큼 아들인 알체스테를 매우 꺼렸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위험한 곳에 내몰려 벼랑 끝에서 시작했지만, 태양처럼 밝은 남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수도에서 치워버리면, 위험한 변방으로 보내버리면 그 뛰어남이 가라앉을 거라 생각해 쫓겨나듯 변방으로 내려
보낸 알체스테는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훌륭히 성장해버렸다.

아제프는 제게 인사를 건네는 알체스테를 보며 못마땅한 듯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허락도 없이 제 별장에


들어서서는 엘제이를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제프가 제 영역을 주장하듯 엘제이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을 제 품으로 당긴 아제프가 곧 표정을
풀며 해사하게 웃었다.

“알체스테 황자님을 뵙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그대는 여전하군.”

알체스테는 무덤덤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고서는 고개를 돌려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무감각하게 빛나는 금안이
조금 커진 것도 같았다.

“흐음…….”

“……?”

엘제이는 알체스테가 왜 저를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체스테의 성정은


잔인하거나 포악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무심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드물었다.

아제프와 마찬가지로 다른 이에게 정을 주는 걸 꺼리고, 다른 이의 손이 제게 닿는 걸 혐오하는 결벽증이 있었다.

둘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존재했고, 자라온 환경이 비슷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둘 마나의 자질이
있었다. 묘한 동질감. 둘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원래 둘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눌 정도는 아니었지만, 둘의 성격과 아직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무척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아마 한 여자를 동시에 원하지 않았다면, 그런 공통점들이 모여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엇갈리지만 않았다면 알체스테는 분명 좋은 친구로 아제프의 곁에 남아줬을 터였다.

‘어쩌면 이번에는 아제프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엘제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기묘하게 번뜩이는 금안을 올려다봤다. 아마 별 생각 없이 바라보는 거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엘제이가 저도 모르게 몸을 물리며 아제프의 뒤로 돌아가 숨어버렸다.

알체스테의 시선이 또르르 따라가 숨어버린 엘제이의 흔적을 더듬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집중하는 알체스테를 보며 얼굴을 포악하게 찌푸렸다. 해사한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일그러진 채 제 것을 바라보는 남자를 경계했다.

“전하. 제 약혼녀에게 뭐 하시는 겁니까?”

알체스테가 묘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으르렁거리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얼핏 살의까지


내보이는 경계에 짙은 눈매가 기묘함을 느끼고 깜빡깜빡 흔들렸다.

알체스테는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제프를 바라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약혼녀? 경이 약혼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는데 이상하군.”

아제프의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저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의도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곧 할 겁니다. 티아세 家로 청혼서를 보냈고, 공작께서도 제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그런가?”

알체스테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덤덤히 응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아제프의 말에 가장 놀란 건 당사자인 엘제이였다. 그녀는 아제프의 등 뒤에 숨어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였다.

‘약혼? 언제 그렇게 된 거지?’

그녀가 쓰러져 있던 시간이라고 해봤자 겨우 몇 시간 정도였다. 아제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 빠르게
움직인 것뿐이었지만, 엘제이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기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고, 싫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꾹 쥐며 그의 등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그녀의 행동에 살짝 움찔한 등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엘제이는 가만히 아제프의 단단한 등에 기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꺄아!”

눈을 뜬 순간 보이는 커다란 손에 질겁한 엘제이가 몸을 물리며 비명을 질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2 화
62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뻗은 손을 중간에서 붙잡으며 이를 까드득- 갈았다.

“전하! 뭐 하시는 겁니까?”

음산할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에도 알체스테는 동요 없는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그는 아까부터 간질간질
흔들리는 기묘한 느낌에 엘제이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않으며 그녀의 손목을 가리켰다.

“손목을 물렸군. 치료해주겠다.”

그러고 보니 알체스테의 자질은 빛, 특기는 정화였다. 웬만한 신관보다 더 뛰어난 효과니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지켈리온에게 입은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엘제이가 좀 망설이며 아제프를 올려보자, 아제프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면서도 조심스럽게 엘제이의 팔을 붙잡아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치료해주겠다는데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알체스테는 툭 끊어질 듯 얇은 팔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내렸다. 뭔가 못마땅한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빤히 손목만 바라보던 알체스테가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하얀 손을 저도 모르게 덥석 잡았다.

“앗!”

갑자기 끌어당겨지는 기분에 엘제이가 어깨 쪽을 만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제프는 치료를 시작하는 듯 하얀
반원이 드리워지는 엘제이의 손목을 힐끔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만져봤다.

“탈골된 정도는 아니지만, 다친 것 같은데……. 정말, 눈을 못 떼겠군. 시선을 돌리자마자 이렇게 되다니.”

아제프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엘제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를 책망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자책이 더 짙게 밴 느낌이었다.

‘화났나? 나한테 화가 난 걸까?’

울상이 된 엘제이는 저를 책망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소심하게 고민하며 그의 눈을 피해 힐끔 고개를 돌렸다.

하얀 반구가 드리워진 손목을 꼭 붙잡은 알체스테가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치료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별 의심
없이 알체스테를 보고 있었지만, 엘제이의 얼굴은 기묘하게 굳었다.

다른 사람의 접촉을 꺼리는 탓에 항시 장갑을 끼고 다닐 정도인데, 그런 남자가 엘제이의 손을 먼저 잡아챘다.


게다가 그의 치료는 분명 신체에 접촉하지 않고도 할 수 있었다.

엘제이는 알체스테가 제 손목을 잡은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얼굴만 작게 찌푸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알체스테의 치료는 무척 길었다. 겨우 조금 다친 정도인데 저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길게 드리워질 무렵 알체스테는 깔끔한 태도로 그녀의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아제프는 물러나는 알체스테를 힐끔 봤다가 엘제이의 손목을 붙잡아 잘 치료되었는지 살펴봤다. 음산한 기운이
사라진 손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해졌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목을 매만지며 살짝 웃었다. 엘제이도 그의 웃는
얼굴에 안심하며 작은 보조개를 피워냈다.

‘정말 이상하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알체스테는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는 둘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제 것이었던 자리를 뺏긴 것처럼


언짢아졌다. 알체스테는 제가 왜 이럴까 고민하며 한숨을 쉬었다. 약혼할 사이라고 했으니 둘이 다정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체스테는 제 속내를 능숙하게 갈무리하며 표정을 폈다.

“그러고 보니, 경에게는 빚이 생긴 셈이 되었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다 살펴보겠다는 듯 엘제이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던 아제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저는 장사치이니, 다 받아낼 겁니다. 전하께서 순순히 인정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름다운 입술이 매끄럽게 열리며 알체스테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한 일이었지만,
굳이 빚이라는데 되었다고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아제프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알체스테를 보며
눈가를 조금 좁혔다.
“그런데, 전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신 거죠? 전하께서 계시던 곳에서 여기까지는 말을 타고도 일주일은
걸리는데.”

“경 덕에 수도로 입성하던 중 지켈리온의 움직임이 수상해 일행과 떨어졌다. 그의 흔적을 쫓아왔는데 이미 경이


해결한 모양이군. 경에게 감사를 전한다.”

알체스테가 푹 팬 자국이 남은 땅을 보며 천천히 읊조렸다.

말을 타고는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가 자질을 사용한다면 짧은 시간 내에 이곳에 오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만, 많은 체력을 빼앗길 뿐이었다.

“여전히 괴물 같으시네요.”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막말을 했다. 엘제이가 홉뜬 눈으로 경악하며 그를 바라봤지만 아제프는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황족을 모욕하는 말에도 알체스테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조금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괴물이면 경 또한 그런 게 아닌가. 우리는 결국 같다.”

아제프의 얼굴이 묘해졌다. 알체스테는 결코 우둔한 자는 아니었으나 눈치가 없는 건지 무심한 건지 비꼬는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었다. 그저 우직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금안에 아제프가 혀를 찼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비꼬고 싶은 마음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알체스테가 좋아서


그런다기보다는 제 행동이 부질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알체스테의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조금 피곤해
보였다.

아제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알체스테를 보다가 별장 쪽으로 손짓했다.

“괴물이라도 피곤함은 느끼니까요. 일단 들어와서 쉬세요.”

아제프의 손을 따라 별장을 바라보던 알체스테가 곧 고개를 돌리고 엘제이를 빤히 응시했다. 꿰뚫을 것처럼
직시하는 금안에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인사했다.

“아! 제가 아직 인사를……. 티아세 家의 장녀 엘제이 티아세, 알체스테 황자님을 뵈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황족을 보고도 힐끔힐끔 피하기나 하고 인사도 하지 않는 건 무척이나 무례한 태도였다. 엘제이는 제 잘못을
떠올리고 울상이 되어 서둘러 사과했다.

“제가 미처 정신이 없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알체스테는 몸을 파닥거리며 사과하는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인사를 못


받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바라본 건 아니었지만, 당황한 하얀 얼굴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체스테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제프의 말을 듣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켈리온은 왜 이곳에 있었을까? 분신으로 여기까지 와서, 굳이 자질을 지닌 아제프의 별장을 습격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원래 지켈리온은 때를 기다리던 자였다. 밖으로 나올 수 있음에도 스스로 하스틴 절벽에 기거해가며 자신이
등장할 적기를 기다렸다. 위험한 자임에도 나오지 않았기에 알체스테도 어느 정도 신경을 끌 수가 있었다.

나태하게 세월을 보내던 지켈리온이 갑작스럽게 움직인 건 알체스테에게도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문장을 쫓는 지켈리온이 이 별장에 들어온 이유. 그건 아마, 여기 있는 누군가가 문장 보유자기 때문일 터였다.

아마, 그 사람은 엘제이 티아세. 자신일 거라는 확신 같은 게 들었다.

“그것보다, 영애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제게요?”

엘제이는 알체스테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둥글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체스테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쫓아다녔다.

담백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진득한 눈빛이었다. 알체스테를 주시하던 아제프는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황자의
앞을 막아서야 할지 고민했다. 위기를 느낀 아제프의 손이 그도 모르게 허리에 걸린 검 쪽으로 향했다.

아제프가 움직이기 전에 알체스테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장갑을 휙- 당겨 벗었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엘제이 앞으로 쓱 내밀어졌다.

“영애, 혹시 이 문장을 아는가?”

알체스테의 행동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아제프였다. 아제프는 무서울 정도로 희번덕이는 눈으로 알체스테의
손등을 쏘아봤다.

그다지 희지 않은 거칠거칠한 손등 위에 옅은 분홍 문장이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가는 눈으로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제프는 천천히 몸을 이완시켰다.

그는 반쯤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긴장으로 수축했던 몸을 쭉쭉 폈다. 무리한 몸이 꽤 긴장했는지


찌뿌드드했다.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제이 앞에서 짝이라고 생각되는 놈을 죽이려 한 걸 보니.

‘죽이더라도 몰래, 사고사로 위장시켜야 하는데…….’

아제프가 속으로 반성하며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내려다봤다. 아제프는 매우 치밀한 사람이었다. 여러 변수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또 여러 갈래로 준비한다. 임기응변에도 누구 못지않게 능했으나, 미리 준비한 쪽이
안정감 있는 게 사실이었다.

아제프는 언젠가는 엘제이의 반려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었다. 물론, 엘제이에게 보이기 전에 먼저 만나
처리하는 쪽이 가장 좋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녀의 눈앞에서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주 은밀하고 치밀한 덫을 짜서, 누구도 생각 못 한 방법으로 죽여 버릴 것이다. 결코 사고사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하고 신중한 방법으로 죽인 뒤, 울며 슬퍼하는 엘제이를 달래며 다시 그 자리를 꿰차면
된다.

다행히 이번에 나타난 알체스테는 엘제이와 같은 문장은 아니었지만, 아제프는 다음번부터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상상과 실제는 조금 다른 면이 있군. 이 정도로 이성을 잃다니, 나도 제정신은 아니군.’

아제프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공기 중으로 뻗어 나간 마나와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살벌한 기운을 머금고 거칠게
요동치던 허공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저렇게 대놓고 행동하는데 그와 동급인 알체스테가 모를 리는 없었다.

알체스테는 검을 뺐다가 도로 집어넣는 아제프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황상께 버려진 몸이라고 하나 겨우 제


연인에게 문장의 유무를 묻는 정도로 황족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들려고 했다.

황족시해죄가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는 걸 떠올리면 역시 보통 담이 큰 게 아니었다.

‘나를 죽이고, 증인도 모두 죽일 생각이었나?’

담이 크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를 오래 봐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떤 자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끈질길 정도로 인내하는 게 익숙하고, 어설픈 짓은 절대 하지 않는 자였다.

아제프라면, 이렇게 탁 트인 공간이 아닌 곳에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외교부 수뇌에 오른 자였다.

‘경이 이성을 잃을 정도인가…….’

알체스테는 새삼 놀란 눈으로 아제프를 응시했다. 아제프는 미묘한 감정을 담은 금안을 피하지 않았다.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소리 없이 대치하며 서로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3 화
63

둘 사이에 낀 엘제이는 홉뜬 눈으로 알체스테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알고 있냐고 물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문장은 책의 표지에 딱 박혀 있던 것이었으니까.

꽃잎이 휘날리는 분홍빛 문장. 알체스테와 엘리사의 문장이었다.

‘아니, 저게 왜 벌써, 저기 있는 거야?’

엘제이가 놀란 이유는 좀 다른 것 때문이었다. 시기가 너무 빨랐다. 원래대로라면 엘리사와 알체스테의 문장은


둘이 만난 후 조금 뒤인 여름에나 발현한다.
엘제이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신록으로 가득한 정원은 알록달록한 봄꽃들을 품고
있었다. 봄에만 피어나는 노란 알샨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특유의 달콤한 꽃향기를 풍겼다.

하늘은 깨끗했고,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 좋은 온도였다.

그래. 지금은 여름이 아닌, 완연한 봄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1 부의 끝자락인 다음 해가 되어서나 하스틴 절벽을 벗어나야 했던 지켈리온이 벌써 이곳을


찾아왔고, 여름에 발현되어야 했을 분홍빛 문장이 봄날에 꽃을 피웠다.

마치 촉매가 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었다.

엘제이가 마지막으로 본 엘리사의 손등에는 문장이 없었다. 알체스테의 손등에 문장이 자리 잡았으니 곧
그녀에게도 문장이 생기거나, 벌써 생겼을 터였다.

‘모든 게 빨라지는 건 내 영향일까?’

엘제이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엘제이는 그을린 피부와 어울리지 않는 연한 분홍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 저었다.

“아니요. 저는, 모르는 문장인데요…….”

거짓말에 서툰 엘제이의 얼굴은 숨기지 못한 어색함이 가득했다. 모른다고 딱 잡아떼기는 했으나 끝처리가
미흡했다.

눈치 빠른 아제프의 눈에 의심이 차올랐다. 같은 문장은 반드시 두 개가 존재하고, 같은 문장을 지닌 자만이


반려가 되었다. 저건 분명 그녀의 문장은 아니지만, 엘제이는 저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엘제이를 의심하며 거짓말의 이유를 추적하던 아제프는 곧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알체스테가 불편한 듯 엘제이가 슬금슬금 몸을 빼내며 아제프의 뒤로 숨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엘제이는


알체스테에게 관심 한 자락도 없었다. 알체스테가 왜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엘제이의 마음은 여전히 아제프의
것이었다.

“전하, 제 약혼녀에게 왜 전하의 문장을 보여준 겁니까?”

알체스테가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피하는 엘제이를 쫓다가 얼굴을 들었다. 엘제이는 진득하게 따라붙던 금안이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제프의 옷자락을 꾹 잡았다. 정말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알체스테는 날선 아제프의 반응을 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반응을 보니, 경은 문장 보유자가 아니고 영애만 문장을 지녔나 보군. 그런데도 약혼할 생각인가?”

어떤 비꼼도 없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제프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요즘 그를 가장


화나게 하는 문제가 남의 입에서 들려오자 기분이 폭삭 내려앉았다. 저조해진 아제프의 얼굴 위로 음울한 기운이
감돌며 얼핏 살기가 맴돌았다.

아제프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자 고개를 내민 엘제이가 조금 불퉁한 얼굴로 알체스테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문장 따위에게 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했어요.”

당당하게 말한 뒤 다시 빤히 바라보는 알체스테의 시선을 피해 숨기는 했지만, 아제프는 꽤 감동한 것 같았다.


마치, 풀 한 포기도 제대로 못 꺾는 연약한 강아지가 저를 위해 맹수에게 앞발을 휘둘러준 기분이었다.

아제프가 잘했다는 듯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묘한 만족감과 충족감이 물처럼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시는
것 같았다. 그가 바라왔던 감정, 그가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온갖 긍정적인 감정을 잔뜩 담아놓은 호수에 몸을 담그고 나온 느낌. 그건 생각보다 더 좋은 기분이었다.

알체스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제이에게 문장이 있다는 건 그녀의 손목에 남은
흔적이나 그들의 반응을 통해 확신했지만, 사실 그녀가 제 짝이 아닐까 했던 건 확신은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에게 끌리는 것처럼 술렁이면서도 묘하게 잠잠하기도 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가.”

알체스테는 애매모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실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엘제이는 평소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남자가 축 처진 듯이 보여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알체스테가 곧 엘리사의 남편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리사에게 문장이 있을 텐데……. 말해줘야 하나? 아니, 그럼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곧 만나게 되겠지?’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별장 내로 초대할 생각인 것 같으니 엘제이가 말하지 않아도 잘 해결될 터였다. 엘제이는
그리 생각하며, 관심을 끊으려고 했지만 우울해 보이는 금안이 신경 쓰였다.

“전하의 생각대로 제게 문장이 있는 건 맞지만, 제 것은 녹색이에요.”

엘제이가 한숨 쉬듯 말하며 알체스테를 올려다봤다. 이제 그만 쳐다보라는 암묵적인 표현이었지만, 알체스테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엘제이를 주시하는 눈을 떼어내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만 바라보는 알체스테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다른 문장이 있으니 곧 제 짝을 찾아갈 거라


생각하며 못마땅함을 참아냈다. 일단 황자고 자질이 있는 자이니, 그의 능력으로도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황자님. 이제 그만 눈을 떼지 않으시면 제가 그 눈, 파버릴지도 모릅니다.’

호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또 애정은 아닌 것 같은 모호한 얼굴이었다. 아제프는 갓 태어난 새 새끼가 어미


새를 쫓듯 엘제이를 따라다니는 알체스테의 시선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것보다 제이, 문장은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요.”

아제프가 보란 듯이 예쁜 얼굴로 웃으며 엘제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긋나긋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지만, 엘제이의 눈은 이미 몽롱하게 풀린 뒤였다.
꽃이 피는 것처럼 만개하는 아름다움에 잠시 홀렸던 엘제이가 뒤늦게 그의 말을 떠올리고 헛숨을 삼켰다.

“……헙! 어쩌죠?”

“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죠. 황자님은 입이 무거우시니 말하고 다니시진 않겠지만, 언제나 주위를 경계하고
조심해야죠. 이렇게 아기 같아서야……. 제이와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저야말로…… 어쩌죠?”

아제프가 일부러 말을 길게 끌며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곤란하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이 무척 선량해 보였지만


얼핏 축축하게 젖은 질척함이 맴돌았다. 진득한 집착을 숨긴 목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와 엘제이에게 닿았다.

“평생……?”

“네. 평생을 함께. 죽어서도 함께하는 거예요.”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그의 말을 따라 하자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꾹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손의


온기를 영원히 갖고 싶었다. 찰랑거리면 흔들리는 백금발 사이로 숨어든 눈이 섬뜩하리만큼 강하게 빛나며 진득한
소유욕을 품었다.

‘죽어서도, 놓지 않을 거다.’

시리게 빛나는 벽안을 모르는 엘제이는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수줍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좋아하는 볼우물이 깊게 패자 아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뚱하게 서 있는 알체스테를 응시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비밀을 지켜주셔야겠네요.”

아제프는 확인하듯 속삭였지만, 알체스테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와의 대화를 즐기는 남자가


아니었고, 함부로 말을 흘릴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얼굴에 깃든 질척한 감정과 위험할 정도로 짙은 소유욕을 엿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도 다른 이에게 말할 생각은,”

“언니!”

알체스테의 말이 옥구슬처럼 맑은 목소리에 뚝 끊겼다. 순간 그 목소리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체스테는 귀를 맞은 사람처럼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본 알체스테의 눈이 둥글게 확장됐다. 엘제이를 쫓으면서도 덤덤하게 가라앉아 있던 금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리사! 제이!”

잠옷만 입은 밀색 머리의 소녀가 사나운 기세로 뛰어왔다. 소녀를 뒤쫓는 기사와 아이젠이 아연한 얼굴로 그녀를
말렸지만, 소녀는 무척 빨랐다.

축축한 잔디를 밟으며 뛰어온 소녀는 순식간에 알체스테를 지나쳐 엘제이에게 뛰어갔다.

“세상에, 땅이 왜 이 모양이야! 우리 제이,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세상이 멈추고 오직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알체스테는 못이 박힌 것처럼 서서 멍한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봤다. 간질거리다 못해 타오르는 가슴에 뜨거운 물이 콸콸 부어졌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으로 흠뻑 젖은 알체스테는 확신했다.

그가 찾던 이는 엘제이가 아니었다. 왜 착각했나 싶을 정도로 달랐다. 그의 문장이 원하는 사람은 엘제이가


아니라, 엘리사였다.

들끓는 감정으로 이글거리는 금안이 도르륵 떨어져 엘리사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새하얀 오른손 위로 엘리사의
분홍색 눈을 꼭 빼닮은 문장이 물결치듯 흩날리고 있었다.

알체스테 베아르시는 문장이 생긴 지 몇 시간 만에, 그의 운명을 만났다.

***

엘리사는 알체스테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움푹 팬 땅을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엘제이의
몸을 살펴보았다.

엘제이의 몸을 휙휙 돌려보던 엘리사는 상처를 발견하지 못하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언니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언니.”

일어나자마자 바로 달려왔는지 엘리사의 발은 맨발이었고, 얼굴에는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엘제이는


잠옷차림인 엘리사에게 잔소리를 잔뜩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냈다.

엘제이는 아무 말 없이 저보다 커버린 동생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녀는 다정한 언니의 얼굴이 되어 산발이
된 동생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엘리사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뒤늦게 달려온 아이젠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걸어와 제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내 아이,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제이야…….”

아이젠도 기사와 실랑이를 하느라 평소의 단정함을 많이 잃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중년의
남자가 두 딸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4 화
64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정신없이 뛰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딸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또 한 번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콱 조여졌다.

겨우 살려낸 아이들이었다. 그의 실수로 잃어버릴 뻔한 여린 생명이었다. 오래전 아이젠은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과거의 정에 끌려 한 아이를 살려주려다가 목숨보다 소중한 두 딸을 잃을 뻔했다.

특히, 생사를 오갔던 엘제이를 생각하자 아이젠은 아직도 손이 벌벌 떨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아이젠은 눈을 돌려 멀뚱히 서 있는 아제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딸을 습격한 이가 어떤 이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르나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 아이젠은 쿵쿵- 울리던 소음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이 잘못되면 아비는 더는 살 수가 없어.’

아이젠이 속말을 삼키며 그와 닮은 밀색 머리카락을 타고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아세들이 그러는 사이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병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족애를 나누는 티아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둘에게는 제대로 된 가족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둘 모두 아비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남아서일까?

그들에게 아이젠 티아세는 신기한 존재였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덜덜 떨리는 아이젠의 손끝을 바라보며 말없이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와 똑 닮은 엘리사를 바라보며 아이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사랑 제이.’

제이라는 건 아제프의 약혼자를 칭하는 말이니 그가 바라보는 소녀의 이름이 리사인 모양이었다. 알체스테는 얇은
잠옷만 입고 서 있는 엘리사를 보며 손을 쥐었다 폈다 허둥거렸다.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또 엘제이를 바라보는 줄 알고 신경을 곤두세웠다가 금안이 향하는 이가 엘리사라는 걸 알고


눈꼬리를 내렸다. 내내 엘제이만 바라보던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향하는 시선을 따라가 엘리사의 문장을 발견했다.

알체스테와 똑같은 연분홍빛 문장은 희고 보드라운 손등에서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알체스테와 달리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문장……? 쌍둥이가 둘 다 문장보유자가 된 건가?’

문장이 발현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흔하지 않았기에 제 짝을 빨리 찾을 수 있었고, 모두가 신의


축복이라고 칭송했다. 한 가문의 한 세대에서 두 개의 문장이 나왔다는 건 전례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매우
드문 일인 건 분명했다.

아제프는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엘리사의 문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그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거슬리던 알체스테는 엘리사가 주워갈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아제프가 눈을 크게 떴다.

잘 생각해보니, 이건 무척 좋은 일이었다. 사사건건 제 언니에게 매달리는 엘리사를 멀리 떨어트릴 좋은 기회였다.


엘리사를 알체스테에게 맡기고 엘제이와 단둘이 이 별장에서 지낸다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아제프의 눈 위로 알체스테를 향한 호감이 반짝 떠올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벽안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알체스테를 빤히 바라봤다. 그전과는 다른 미미한 호감을 품은 파란


눈에 눈치가 없는 알체스테도 아제프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알체스테는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아제프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일행이랑 떨어졌다고 하셨지요? 제 별장에서 편히 쉬면서 티아세 양과 함께! 며칠 머무르시면 되겠네요.
어차피 전하의 일행이 수도에 도착하려면 며칠 걸릴 테니까요.”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엘리사를 가리켰다. 갈 때는 엘리사도 데려가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지만, 알체스테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하루만 머물게 하고 당장 쫓아낼 것 같았던 아제프가 나긋나긋 말해오자 놀란 얼굴을 하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경의 배려에 감사한다.”

알체스테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곧 신경을 끄고 엘리사에게 집중했다. 작은 발에 흙이 묻어 있는 게


여간 신경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얼른 하얀 발을 털어주고,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눈치 없는 그라도 지금 저들 사이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참고 있었지만, 빨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초조함이 생겼다. 엘제이에게 느꼈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엘제이에게 모호한 호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나 이처럼 강렬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엘리사를 본 순간부터는 그 애매한 호감도 사라져버렸다. 알체스테는 제 것인 듯 아닌 듯 기묘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엘리사를 향한 고집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저를 바라보는 강한 시선에 가족들의 품에서 살짝 빠져나온 엘리사가 알체스테를 발견했다.

“응? 누구시죠?”

누군데 저를 그리 빤히 보냐는 의미였다. 알체스테가 긴장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고양이처럼


매끈하게 걸어온 엘리사가 그의 앞에 서서 그를 관찰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알체스테가 슬금슬금 손을 숨기며 다시 장갑을 꼈다. 인사도 하기 전에 문장부터 보여주는
건 조금 이상할 것 같았다. 말주변이 없는 알체스테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한 분홍색 눈에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가 비쳐들었다. 옅은 분홍색 꽃잎이 호수에 내려앉으며 둥근 파문을
그렸다. 진득한 시선 때문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취향이었다.

아제프처럼 능글거리는 예쁜 남자는 엘리사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알체스테처럼 남자다운
얼굴을 선호했다.

다부진 턱 선과 진한 눈매, 날카로운 콧날이 보였다. 언뜻 보면 서늘한 인상 같아 보이는데, 당황으로 떨리는


눈을 보면 그냥 요령이 없는 우직한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알체스테는 정말 드물게도 말끝을 흐렸다. 그는 누구냐고 묻는 엘리사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면인데 바로 문장을 내밀어도 될지, 아니면 그냥 이름을 밝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저 소녀는 아마 티아세 家가의 영애인 것 같았다. 귀족 가의 여식인 소녀에게 그의 이름을 밝힌다면 알체스테가
소문으로 들리던 비운의 황자임을 알아챌 터였다. 알체스테는 혹시라도 엘리사가 자신을 불편해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이 여자를 어려워하는 숙맥 같아서 엘리사의 눈이 샐쭉 접혔다.

‘뭐야. 내 취향이잖아. 그것도 완벽해. 얼굴도, 몸매도, 목소리도……. 그리고 성격도 내 취향일 것 같잖아?’

취향을 발견한 엘리사가 제 차림을 한번 점검했다. 맨발에 잠옷만 입고, 자다 일어나서 눈곱도 잔뜩 낀 상태지만
여전히 예쁠 걸 알았다.

엘리사는 일단 눈을 거칠게 비벼 눈곱을 떼어냈다. 박박 눈을 긁는 행동에 알체스테가 당황하며 그녀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 사이 눈곱을 다 털어낸 엘리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꼬리를 화사하게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달콤한 분홍빛 눈이 꽃잎처럼 접히고, 하얀 볼이 방긋 올라갔다. 엘리사는 제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알체스테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으며 예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름 모를 기사님. 초면에 실례지만, 저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

알체스테는 굳은 듯 말이 없었다. 대답 없는 남자의 반응에 제 매력이 죽은 걸까 고민하던 엘리사가 살며시 눈을


들었다. 남자의 귀 끝이 달아오른 걸 발견한 엘리사가 여우처럼 샐샐 웃으며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균형 잡힌 늘씬한 몸이 알체스테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엘리사는 당황한 얼굴로 도망가려는 알체스테의 옷을


꼭 쥐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머뭇머뭇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꽃잎처럼 화사한 분홍빛 입술이 촉촉하게 번져가자 알체스테의 눈도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알체스테의 눈이
화르르 타오르며 입술에서 힘겹게 시선을 떼어냈다.

그가 간신히 엘리사의 어깨 부근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자 엘리사가 눈을 나붓이 내리깔았다.

“아이참, 제가 이렇게 얇은 옷만 입고 있는데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운걸요. 기사님의 옷을 빌려주신다면 좋을 것


같은데……. 안 될까요?”

“……그렇군. 미안하다.”

알체스테가 빠르게 사과하며 엘리사의 말대로 옷자락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손이 몸에 스치지 않게
조심조심 옷을 둘러주는 모습에 엘리사가 눈을 번뜩 빛냈지만, 일단은 초면이니 얌전히 있었다.

엘리사의 어깨 위로 옷을 걸쳐준 알체스테가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물러나려 하자 엘리사가 그를 따라 한 걸음


내딛다가 연약한 비명을 질렀다.

“아앗!”

“무슨, 괜찮나?”

아제프가 보기에는 그냥 엄살이었지만, 알체스테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알체스테는 함부로 엘리사의 몸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엘리사를 살펴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얼간이 같은 알체스테의 모습에 아제프가 한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제프가 어떤 생각을 하든
엘리사의 연기는 절정을 향했다.

엘리사가 분홍빛 눈을 촉촉하게 적시고 비 맞은 고양이처럼 알체스테를 올려다봤다. 미안하다는 듯 축 처진


눈꼬리가 가련한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발을 다쳤나 봐요. 언니가 걱정되어 맨발로 나오느라……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려요.
기사님.”

엘리사가 안아달라는 듯 작게 손을 벌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알체스테의 시야에 분홍빛 문장이 흔들흔들 비췄다.

‘안으라고? 저렇게 작은데?’

무뚝뚝한 턱이 단단하게 경직됐다. 결벽증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몸을 안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 쥐기라도 했다가는 뚝, 부러질 것 같아서 알체스테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엘제이와 다르게, 문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문장의 주인이든 아니든 마음에 들었으니
가지고 싶었다. 눈을 나붓이 내리깐 엘리사가 민망한 듯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안 될까요……?”

엘리사보다 6 살이 많은 알체스테는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소녀의 몸을 함부로 안아 들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불편하면, 말해라.”

“헤헤. 고마워요, 기사님.”

엘리사가 애교 있게 속삭이며 은근슬쩍 알체스테의 옷자락을 손으로 꾹 잡았다.

“하!”

아제프는 그 꼴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그가 원한 일이긴 했지만 하는 꼴이 가관이었다.

‘아주 제멋대로군.’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 같은 눈을 한 주제에 한껏 가련한 척, 연약한 척 내숭을 떠는 모습에 아제프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건, 지독한 동족혐오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5 화
65

한동안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마음을 다스리던 아이젠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둘째 딸의 부재를 느꼈다.
과거를 회상하느라 꼭 감겼던 눈이 뜨이고 부드러운 다갈색 눈이 둘째 딸을 찾아 헤맸다.
“세상에……. 리사.”

그제야 엘리사를 발견한 아이젠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흐려졌다. 아이젠 역시 알체스테를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알았다.

외간 남자, 게다가 황자의 몸에 덥석 올라타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히 늘어져 있는 딸의 모습에 아이젠이 차마
뭐라고 훈계하지는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엘리사는 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기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꼭


그녀를 지키는 튼튼한 요새에 들어온 듯 편안하고 포근했다. 엘리사가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아버지의 부름을
무시했다.

“리사!”

아이젠의 얼굴이 당황으로 흐려졌다.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둘째 딸이 큰 사고를 친 것 같았다. 그가 아비 된


자로서 황자에게 사과를 하러 다가갔다.

무뚝뚝한 금안이 아이젠을 담고 빛났다.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들이 합쳐졌다. 이 소녀의 언니는 엘제이
티아세였으니, 아비는 저기 있는 아이젠 티아세일 게 분명했다.

‘저쪽도 어려 보이는데 언니라니, 도대체 몇 살인 거지?’

수도에서 떨어져 있던 알체스테는 영애들의 신상을 잘 알지 못했다. 둘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알체스테의
이마가 난감함으로 좁아졌다. 그는 한숨처럼 아이젠을 불렀다.

“티아세 공작.”

“티아세의 가주 아이젠 티아세, 알체스테 베아르시 황자님을 뵈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아이젠은 당장에라도 딸의 몸을 알체스테에게서 뺏어오고 싶었지만, 황자에게 예의를 갖췄다.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알체스테가 동글동글한 흰 뺨을 힐끔 보았다. 시선을 조금 올리니 둥글둥글
순해 보이는 분홍빛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무척 어려 보였다.

잠시 난감한 얼굴을 하던 알체스테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려 보이는 건 어려 보이는 것이고, 그의 본능은 제


짝을 옆에 두라고 명했다.

“인사는 되었다. 그보다, 티아세에 청혼을 하고 싶다.”

알체스테는 엘리사의 눈을 피해 잠시 감춰뒀던 손의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청혼……. 말씀입니까?”

아이젠이 아연한 얼굴로 물었으나, 알체스테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란 듯이 제 손등을 내밀 뿐이었다.

그렇게 아이젠에게는, 졸지에 마나의 자질을 가진 예비 사위가 둘로 늘었다.

***

정신없는 일들이 많아서인지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밤이 되자 마사지를 받은 뒤,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씻은 엘제이가 피곤한 안색을 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깨어난 곳이 그녀의 방인지 시녀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한 채 방문을 열어주고 멀리 떨어졌다.

‘왜 같이 안 들어가는 거지?’

보통은 시녀들이 이불을 정리해준 뒤 잠자리에 드는 걸 확인하고 가기에 엘제이는 의문이 들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제이는 아무러면 어떠냐 싶어 그냥 문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 왔어요?”

“아제프?”

아제프는 마치 제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제이의 침대에 누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는 란델 家의


별장이니 어디든 그의 것이지만, 여기는 엘제이가 배정받은 방이 아니던가. 엘제이는 편안하게 누워 서류를
읽어보는 아제프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하는 아제프도 참 멋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피부가 매끄러워 보였고, 화사하게
올라간 입매가 무척 예뻤다. 화장한 것도 아닐 텐데 빛 가루라도 뿌린 듯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가 눈이 부셔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 아제프 란델은 오늘도 말로 표현이 안 될 만큼 무척 아름다웠다.

엘제이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으니 서류에서 눈을 떼어낸 아제프가 해사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피곤하죠? 얼른 이리 오세요.”

옆으로 오라는 듯 침대 위를 탕탕- 치는 손이 경쾌하기까지 했다. 엘제이는 기분이 상승하다 못해 지붕을


뚫으려는 아제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백금색 구렁이가 제 침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분이었다. 뭔가 위기감을 느낀 엘제이가


머뭇거리며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자려면 문은 닫아야죠.”

엘제이가 문만 보고 있자 서류를 한쪽에 치우고 성큼 다가온 아제프가 문을 힘주어 닫아버렸다.

달칵- 작은 소음이 들리고, 엘제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지만, 그만큼 위험한 남자와 밤중에 둘만 남아버렸다.
엘제이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자 아제프가 엘제이를 안아 들고 침대로 걸어갔다.

“아제프!”

“쉿! 다른 사람들 깨우면 안 되잖아요.”

아제프가 엘제이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주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뭔가 떨떠름하긴 한데 일단 그가 시키니


얌전히 입을 다문 엘제이가 눈을 도르르 굴려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화사한 미모에 버프라도 건 듯 반짝반짝 빛나는 외양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아제프는 몽롱해진
엘제이의 상태를 잘 아는지 그녀의 허리에 덥석 매달리며 그녀 위에 누웠다.
커다란 몸체에 깔린 엘제이가 작게 버둥거리다가 그녀의 배를 베고 누워버린 아제프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
모습이 몹시 편안해 보였던 것이다.

아제프가 손을 들어 부드럽게 엘제이의 배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묻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엘제이 옆에서 빨빨거리며 붙어 다닐 엘리사가 알체스테에게 홀딱 빠져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고, 그녀의


아버지인 아이젠도 황자와의 이야기가 먼저라고 생각됐는지 엘제이가 괜찮아지자 그녀를 아제프에게 맡기고
가버렸다.

한마디로, 아제프는 아무 방해도 없이 엘제이와 단둘만 남게 된 상황이었던 거다. 갸름한 허리와 부드러운 배의
감촉에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제프가 뭉근한 손길로 엘제이의 배를 만지며 숨을 편안하게 내쉬었다.

“제이, 오늘 무서웠죠? 괜찮은 척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일 테니까 제가 더 잘 처신했어야


했는데, 그런 무서운 장면을 보여줘서 미안해요.”

아제프는 두려움에 떨던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렇게 속삭였다. 지켈리온이 엘제이에게 향할 때, 그녀가
느꼈을 엘제이의 공포가 아프게 다가왔다. 축 늘어져 허공에 매달려 있던 엘제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많이 아프고, 무서웠을 걸 알았다. 누군가 저를 해하려는 상황에서 자신은 아무 힘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의 반항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제프는 새삼 그걸 떠올리기에는 너무 커버렸지만,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의 가슴에 오싹하게


내리꽂혔던 불안감이 혹시, 엘제이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녀가 너무 무서워서, 견디기 힘들 만큼 두려워서, 혹시 저를 불러준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엘제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하는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정말 무서웠다. 사실은
지금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눈만 감으면 소름 끼치는 지켈리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노려보던 짐승의 안광이
밤에 찾아와 그녀를 괴롭힐 것만 같았다.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는 달랐다. 정말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서워 미칠 것 같다는 게 그런 기분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더 아제프가 떠올랐다. 매일 죽음의 위기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어린 소년이 떠올랐다.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매일 밤 꿈에서 만난 소년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봐, 그래서 두려웠어요. 저는, 당신이랑 함께하기로 했는데 제가 먼저 떠나서
당신이 외로워질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미안해서 눈물이
나왔어요.”

아제프가 따뜻한 배 위에 기대어 상냥한 목소리를 음미했다. 엘제이는 이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제가 무척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그게 뭐. 나쁜 놈이면 어때? 나는 그런 걸 배우고, 그렇게 살아남았는데.’


아제프는 달라질 마음도 없었고, 자신이 달라질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이렇게 다정하게 굴다가도 마음이 뒤틀리면
다시 괴롭힐 테고, 여전히 엘제이의 짝이라는 놈은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아제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엘제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그녀를 아끼는 마음도 모두 온전한 그의
진심이었다. 심술을 부려도 심하게 괴롭히지 않을 테고, 엘제이를 때린다거나 그녀의 몸을 해하는 일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엘제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도 최대한 조심해볼 생각이었다. 많이 달라진다는 약속을 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줄 것이었다.

“화가 났어요. 제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내게 없는 문장이 내 앞에 나타난 순간.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당신을 무섭게 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미안해요, 제이.”

아제프는 이렇게 사과할 수 있었다. 많이 부족한 건 알지만 이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고,


양보였다.

‘그래도 최대한 상냥하게 대해줄 테니까, 너는 날 떠나서는 안 돼.’

아제프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젯밤의 일을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 앞에서 자해하려 했던 일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과가 좋았으니 시간이 돌려져 다시 그 자리로 간다면 똑같이 할 생각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엘제이는 미안하다는 듯 다정한 손길로 그녀를 쓰다듬는 아제프에게 팔을 살짝 벌렸다. 안아달라는 청에 아제프가
조금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도 거짓말하고 숨겨서 미안했는걸요. 그러니 괜찮지만, 그래도…… 아제프의 몸은 소중히 여겨주세요.
자해라니, 그건 정말…… 아프잖아요. 저도, 아제프도.”

엘제이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아제프는 확답을 해주진 않았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얀 얼굴 위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뺨에 닿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 입맞춤은
지금껏 그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얌전히 재워줄 생각은 아니었다. 얼굴을 떼어낸 아제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졌다. 사랑스럽고 예뻤다.
그의 것이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자신에게 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처음이었는데, 내가 너무했죠? 그러니 이번에는 안 그럴게요. 자, 가만히 있어요.
괜찮죠?”

아제프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싱긋, 눈을 접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6 화
66

아제프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시선에 낙인찍히고,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유달리 반짝이는 얼굴이 싱긋 휘어지자 엘제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바짝 다가오자 움찔, 몸을
떤 엘제이가 그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조그만 목소리로 애원했다.

“무섭게 하시면 안 돼요.”

“내가 너에게 그럴 리 없잖아.”

눈을 둥글게 뜬 아제프가 조금 물러나며 예쁘게 웃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 찍힌 눈물점이 야하게 일그러져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아제프는 뻔뻔했다.

“천천히, 하셔야 해요.”

아제프는 점점 타오르는 기분을 느꼈지만, 일단 겁먹은 강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선한 얼굴로 웃었다. 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거칠게 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렇게 겁이 많으니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제프는 이 이상 나갈 진도를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졌지만, 천천히 그녀를 물들이는 것도 좋았다.

“정말 겁이 많아. 약속할게. 이제 괜찮지?”

엘제이가 겨우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오랜 시간 인내했던 입술이 그녀를 삼켰다.

그녀의 청대로 처음에는 부드러웠다.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떠는 손을 부드럽게 끌고 와 잡아줬고,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핥아주고, 입안을 열었다.

꿀을 머금은 듯 달기만 한 입술을 파고들어 그 향내를 취했다. 서툴게 움직이고, 수줍게 도망가는 모습도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아제프도 그냥 부드럽게 입안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으응, 흐…….”

문제는 너무 달았다는 것이었다. 괴롭히듯 아프게 하던 전과는 달리 뭉근하게 핥아 내리는 탓에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젖은 소리를 내며 매달렸다. 이대로 녹아내려 흐를 것만 같아 의지할 곳을 헤매던 팔이 아제프의 앞섶을
쥐고 매달렸다.

아제프가 혀뿌리를 긁고 입안 쪽 연약한 살을 문지를 때마다 몸속 어딘가가 화끈거리고, 차마 막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바르작거리자 인상을 쓴 아제프의 얼굴도 야하게 흐트러졌고, 결국 그는 그녀의 입을
게걸스레 탐닉했다.

겨우 입을 맞추고 있는 것뿐인데 너무 달고 좋았다. 어디서 올라오는지 모를 찌릿한 열감에 자제심 많은 남자의


얼굴도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엘제이의 몸을 누르고 올라탔다.

보통 사람보다 따스한 체온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오늘은 자질을 꺼낸 터라 아제프의 몸은 많이 차가워져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그녀와 더 닿고 싶었다. 아제프가 욕심을 부리자 엘제이의 헐떡거림이 심해졌다.

“흐응, 으으…….”

헐떡헐떡 넘어가는 숨소리에 아제프가 입술을 살짝 떼어내고 축축하게 젖은 입 주변을 야하게, 탐욕스레 핥아
올렸다. 아제프는 기분이 좋은 듯했고, 그의 얼굴에는 붉은 기가 감돌았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옷을 들췄다.
뱀처럼 차가운 손이 몸 안을 파고들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말리듯 그의 손목을 잡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제프, 으응…….”

아제프의 손이 허벅지 안을 파고들자 엘제이가 그의 탐심에 젖어 흐트러졌다.

엘제이는 자신과는 다른 종족인 것 같았다. 온통 차갑고 단단한 제 몸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뜨거워진 머리와 눈가가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맞닿기를 원했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만지기만 한다고 맹세할게. 그냥 느낌이 좋아서……. 이 정도는 괜찮잖아.


허락해줘. 응?”

아제프가 초조하게 말하며 엘제이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민한 살결에 차가운 손이 닿자 간지러움과
함께 묘한 쾌감이 일었다. 오싹할 정도로 발이 곱아드는 느낌에 엘제이가 들썩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꽃물이 든 것처럼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 줄줄 흘러 고일 듯 예쁘지만, 좁아진


미간이 괴로워 보였다. 야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본 엘제이는 숨이 막혀왔다. 색기를 주르륵 쏟아내는 얼굴을 보자
저절로 손끝이 곱아들었다.

허락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엘제이는 그의 손목을 놓으며 암묵적으로 허락했다. 아제프가 얇은 슈미즈를 들어
올리며 그녀의 배를 간질이고 움푹 팬 배꼽 주변을 쓸어내렸다. 보들보들 부드럽기만 한 흰 살결이 손에 가득
들어왔다.

만지고 또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그는 거의 넋을 잃고 엘제이의 몸을 더듬었다.


차가운 손이 온기를 흠뻑 받고 데워졌다.

심장에 따뜻한 기운을 붓는 것 같았다. 심장을 타고 흐르는 피가 온몸을 맴돌았다. 그의 몸이 따뜻하게 젖어들며
그를 외롭게 하던 한기가 밀려 나갔다.

아마, 봄에 젖는다면 이런 기분일 것 터였다.

“하아- 진짜 기분 좋아. 사랑해, 제이.”

아제프가 눈을 감고 엘제이의 가슴 쪽에 머리를 기대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뭘 먹고 자라면, 뭘 보고 자라면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는 영혼까지
홀리는 기분으로 그녀의 가슴 쪽에 누워 아이처럼 뺨을 비비적거리는 아제프를 내려다봤다.

평소 아제프의 얼굴은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하얀색이었다. 저렇게 달뜬 아제프의 얼굴은 꿈에서도 본 적 없었고,


현실에서도 처음이었다. 상아로 조각한 듯 희고 깨끗한 얼굴 위로 발긋한 꽃이 내려앉으니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아제프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엘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었다. 색색- 나른하게
번지는 숨소리가 평온하게 들렸다.

그의 숨소리에 조금 고민하던 엘제이는 반짝거리는 백금발 위로 손을 내려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


머리카락에 숨겨져 있던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저도, 좋아해요. 문장에 있든 없든 아제프만, 좋아할 거예요.”

엘제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몸을 웅크리고 얌전히 누워 있던 맹수의 눈이 반짝 뜨였다. 얼굴을 들어 올린


아제프가 천천히 일어나 엘제이의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붉은 기가 내려앉은 얼굴 위에 콕 박혀 있는 눈물점이
가늘게 휘어졌다.

누구나 홀릴 것 같은 관능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느낌에 엘제이가 숨을 삼켰다.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그와는 별개로 단단한 몸은 무척 컸다. 얼굴에 혼이 팔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아제프는 굉장한 장신이었다.

아제프가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자, 침대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나른한 맹수처럼 거대한 몸체를
움직인 남자는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엘제이를 덮은 남자는 빤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숙였다.

그의 팔이 엘제이를 칭칭 휘감고 그의 다리가 엘제이의 다리 옆으로 바짝 붙었다. 체온이 낮은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 엘제이를 집어삼키려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순간적으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그러지 않았다. 말캉거리는 입술은
사뿐히 내려앉아 부드럽게 눌렸다가 떼어졌다. 인사를 나누듯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에 엘제이가 눈을
둥글게 떴다.

“아, 아제프…….”

“정말 좋아해. 어떨 때는 제이, 네가 너무 좋아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아제프의 목소리에 엘제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톡- 치면 연기를 뿜을 것 같은 귀여운 모습에


아제프가 고개 숙이고 소리 내어 웃었다. 개구쟁이처럼 웃은 남자가 장난치듯 엘제이의 목덜미를 깨물었다가
놓아주며 그녀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조금 따뜻해진 차가운 손은 선이 우아한 허벅지를 지나 둥글게 휘어진 둔부를 따라갔다. 남이 만져보리라 생각한
적 없는 곳에 그의 손이 닿자 엘제이가 숨을 꽉 참았다가 뱉어냈다.

“읏,”

눈앞에 놓인 부드러운 것을 탐험하던 맹수는 엘제이의 작은 소리를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귓바퀴를
울리는 애처로운 음색에 나른하게 웃다가 엘제이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우아한 선이 아름다워 한 번쯤 깨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부분이었다. 아제프는 그녀의 목가를 자근자근
물다가 고개를 들어 뜨거운 귓바퀴도 핥아 내렸다.

“흐아,”

엘제이가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얼핏 사납게 올라간 남자의 입꼬리가
보인 것도 같았다.

아제프는 바르르 떨리는 목선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아제프가 잔뜩 흐트러진 엘제이의 옷을 보며
축축한 입술을 혀로 핥았다. 짙은 탐심이 그의 눈에서 뚝뚝 떨어져 고일 것만 같았다. 질척질척하게 젖은 청남색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건드리지 않기로 했는데 자꾸 시선이 갔다. 그의 손을 따라 골반까지 올라온 슈미즈가 엘제이의 허벅지에
애처롭게 걸려 있었다. 아제프는 불을 끄지 않은 게 낭패였다고 생각하며 뽀얗게 드러난 살을 쳐다봤다.

“보이니까 자꾸 딴짓이 하고 싶어져…….”

아제프가 그르렁거리는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자질을 개방했다. 차가운 게 싫어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쓰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겨우 불을 끄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간단한 행동쯤이야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제프의 손끝을 타고 오른 마나가 마나로 돌아가는


샹들리에에 닿아 그것을 꺼버렸다.

어둠이 내려앉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환경에 엘제이의 평범한 눈은 적응하지 못했다.
엘제이는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캄캄한 상황에 그의 몸을 더듬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이제 안 볼 테니까, 소리 내지도 말고 자꾸 더듬지도 마. 나, 참는 중이니까.”

아제프는 제 가슴팍을 더듬어대는 손을 잡아 내리고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너무 닳고 닳아 이런 것에 욕정이


치밀 줄은 몰랐다. 그는 어느새 딱딱해져버린 신체를 느끼며 엘제이를 안아 제 몸 위로 올렸다.

보드랍고 말캉거리는 피부가 그의 몸을 눌렀다. 가벼운 무게감이었지만 보드라운 피부가 밀착되는 느낌이 좋았다.
맨살로 이러고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지만, 엘제이가 기겁할 게 뻔해 참기로 했다.

그의 몸 위에 올라가 허둥지둥 움직이던 엘제이는 문득 허벅지에 닿는 딱딱한 물체를 느꼈다.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딱딱해?’

뭔가 싶어 살짝 그 부분에 허벅지를 눌러보던 엘제이가 움직이는 느낌에 눈을 둥글게 떴다.

잠시 생각하던 엘제이는 이내 그게 뭔지 깨달았다. 한껏 당황해 굳어버린 눈이 공처럼 데구루루 굴렀다.

아제프는 실눈을 뜨고 엘제이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으음…….”

엘제이는 모르는 척 웅얼거리며 슬쩍 다리를 피해버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7 화
67

아제프는 제 위에서 파닥거리는 엘제이를 귀여운 듯 바라보다가 이불을 끌고 와 엘제이 위로 덮어줬다. 옷 속을


뚫고 들어간 손이 뽀얀 피부를 살살 매만졌다. 사람 피부가 어쩜 이리도 좋은지 맞대고 있으면 온몸이 녹아내려
그녀와 하나가 될 것 같았다.

부드럽고 좋은 기분만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너무 역겹고 더러운 행위에 정상적인 기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반응하지 않아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약물과 향으로 강제하던
것이었는데 오늘은 스스로 일어났다.

그라시아가 죽은 게 4 년 전이었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생리적인 반응을 빼면 4 년 만의 일이었다.

아제프의 손이 매끄러운 등을 천천히 타고 올랐다. 환한 빛이 없어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니 제가 좀 참기로 했다. 솜털까지 부드러운 피부를 음미하듯 만지던 아제프가 손끝을
세워 등을 천천히 긁어내렸다.

“아읏!”

소리를 참으려 했지만, 이건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아제프의 몸에 올라가 있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긁어내리니 소름이 오싹 돋아나고 감각이 절로 예민해졌다. 엘제이는 등까지 올라간 슈미즈를 내릴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달뜬 숨을 내뱉으며 엎어졌다.

한숨을 삼킨 아제프는 옷 속에서 손을 빼내며 이불을 잘 덮어주고 엘제이를 토닥거렸다. 잔뜩 성이 난 것을 보니


더 했다가는 못 참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천천히,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부드럽고, 따뜻해. 이제 알겠어. 원래 이런 게 정상이겠지? 아름답고 따스한 느낌이 들어.”

그래. 원래대로라면 이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서 강탈해 오는 게 아니라 서로를 나눠주는
행위인 것이다. 굳이 사람을 꿰뚫고 쥐어 짜내지 않아도, 그냥 닿는 것만으로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었는데
아제프는 그걸 몰랐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트라우마가 남지 않은 줄 알았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그런 행위를


당하지 않을 만큼 자랐고, 그의 비참한 시절을 아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보복을 가했다.

쉽게 죽여주지 않았다. 그가 비참했던 것만큼, 그의 어린 시절이 절규로 물들었던 것만큼 보복해줬다.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던 이들에게 벼랑 끝을 보여줬고, 산 채로 사지가 뜯기는 절망을 안겨줬다.

필요 없는 기억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

아제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에서야 모든 걸 털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제프는
비로소 그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이 모든 게 그의 품에 있는 엘제이 덕이라는 걸
알았다.

“제이, 내 가족을 죽이고, 나를 비참하게 만든 원수가 있어요. 몇 년을 찾아 헤맸는데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어요.”

“원수……?”

“누구인지도 모르고 몇 명인지도 몰라요. 계속 그들을 찾아 헤맸는데…… 바보 같은 일이었어요. 눈앞에 있다면


찢어 죽일 테지만 이젠 굳이 찾아보지는 않으려고 해요.”

그래. 바보 같은 일이었다. 몇 년을 발버둥 쳤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16 년 전의 일이었다. 흔적이 남아


있는 게 더 어려울 터였다.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살아 있을 이유를 찾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제프. 저는,”

“다 잊고 살고 싶은 걸까요? 이젠 좀 평화로워지고 싶은 것 같아요. 아등바등 사는 게 아니라, 다 잊고 남들처럼


그렇게…… 사랑받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제이가 계속 내 곁에 있어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언제나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함께 있어줄, 읍!”

아제프가 조금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엘제이의 얼굴을 끌어왔다.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제이의 입술 위로 축축한 눈물이 조금씩 떨어졌다.

아제프는 어미젖을 찾는 아이처럼 엘제이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울었다. 스스로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오랜 시간 참아왔던 울분과 서러움이 눈물 한 방울에 고스란히 담겨 툭- 떨어졌다.

아제프는 많이 울지 않았지만, 한참이나 오열을 쏟아내듯 엘제이의 입술을 빨고 탐했다. 엘제이의 입술이 퉁퉁
부어 안쓰러워질 때까지 탐하고, 그녀가 피곤함과 고단함에 지쳐 잠이 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엘제이는 한참을 그렇게 시달리다가 뭐라고 말도 못 꺼내보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견디지 못한 피곤함에
엘제이가 나가떨어지자 아제프는 그제야 퉁퉁 부어오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고 무서웠을 테니, 다정하게 달래주며 재워줄 생각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으나 다음으로
밀어둔 것도 엘제이의 정신이 멀쩡할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달래주려고 왔는데, 반대가 되어버렸어.’

어쩐지 좀 허탈해진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기운을 잔뜩 받아 이상할 정도로 힘이 솟구쳤다.
아제프는 많이 피곤했는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진 엘제이의 뺨을 만져보다가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엘제이가 모르는 어두운 일들을 처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아제프가 언제 나른하게 젖어 있었냐는 듯 매서운 얼굴을 하고 서류를 정리했다. 한구석에


잘 놓아둔 서류가 조그만 소리를 내며 가지런해질수록 아제프의 얼굴에는 차가운 서리가 번져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문을 열고 나간 아제프가 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시녀들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뇌까렸다.

“너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내 말의 의미를 알고 있나?”

하나만 하라는 소리였다. 아제프는 애초에 그녀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목숨을 바쳐 엘제이를 지키고,
그들 선에서 제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꼭 한 명은 빠져나와 그에게 상황을 보고할 것. 그게 아제프가 지시한
것의 다였다.

“베풀어주신 은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아제프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시녀들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눈을 떼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새파란 마나가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와 허공을 스산하게 맴돌았다. 아제프는 차가워진 손을 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웅웅거리며 빛을 발하는 마나들이 북극에 피워진 오로라처럼 신비하게 일렁거렸다. 냉한 기운 때문에 가까이는
다가가지 못한 채 방문을 맴도는 마나가 매서운 눈으로 주인이 바라는 자를 지켰다.

“흐읏, 안, 돼! 아제프.”

아제프가 빠져나가고 얼마 뒤, 누워 있던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아제프의 마나가


다가온 것도 아닌데, 엘제이의 몸은 한기로 덜덜 떨렸다.

몽글몽글한 분홍빛 기운이 엘제이를 찾아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아제프의 마나는 살아 있는 것들만 감지했다.
마나들은 산 자의 것이 아닌 분홍빛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유유히 주위를 맴돌았다.

형체가 불분명한 그것은 여신, 프리멧사의 기척이었다. 솜사탕처럼 말랑거리는 기운에서 새하얀 팔이 빠져나왔다.

팔만 빼낸 프리멧사가 안쓰러움을 담아 차가워진 엘제이의 이마를 매만졌다. 여신의 손이 닿자 고통으로 흐려진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너는, 어쩜 매번! 똑같은 선택을 하는 거니?]

무수한 아이 중 유난히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아이였다. 여신의 사랑을 한껏 받고 태어났음에도 제 명대로
살지 못한 가련한 아이. 저 스스로 짝을 찾고 또 제 목숨을 바쳐 짝의 운명을 바꿔버린 애처로운 아이.

신이 정한 운명을 바꿔버렸으니, 따라오는 대가가 있었다. 아이는 기꺼이 제 짝에게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줬다.

아이는 목숨을 바친 대가로 짝을 살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짝의 운명이 가혹하여 결국 편히 잠들지 못한 불쌍한
영혼이었다.

선하고 고결한 영혼이 안쓰러워 먼 곳으로 보내줬으나, 다시 태어나서도 제 짝을 잊지 못한 아이는 매일 밤


울었다. 프리멧사는 예외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처럼 애달픈 아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여신은 선택의 기회를 줬고, 아이는 과거와 똑같은 선택을 했다.

이대로 두고 보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임을 안 프리멧사는 아이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건의 축을


조금 비틀었고, 둘 모두를 살렸다. 비틀린 운명에게 기회를 줬다.

여신은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모든 자비를 베풀었다.

[부디 이번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프리멧사의 축복이 엘제이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엘제이에게 닿았던 한기가 여신의 축복에 밀려 소멸해버렸다.

프리멧사는 조금 지친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숨결처럼 사라져버렸다.

***

혹시 악몽을 꾸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 품이 너무 좋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아제프는 할 일이


있었다. 서류 한 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제프가 이내 서류를 내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컴컴한 밖을 보니,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엘제이를 품에 안고 재워주다 보니 그도


모르는 새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모양이었다.

조용한 1 층 복도를 걷는 소리가 저벅저벅 울려 퍼졌다. 걸어가던 아제프는 문득 기이할 정도로 기분이 좋고,
상태가 좋은 몸을 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자질이라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잘 익히고 다룬다면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될 수 있었지만, 마나의 길을 제대로


열 능력이 없다면 마나에 집어삼켜질 수도 있었다. 자질을 가진 자가 드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약, 자질이 있어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깨우지 말아야 한다. 자질을 깨웠지만 감당하지 못한 사람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 그건 마나를 지배하지 못한 허울뿐인 지배자에게 주어지는 숙명이었다.

아제프가 자질을 발견한 건 17 살 때의 일이었고, 늘 신중하게 자질을 개방했다.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을 아까처럼 급박하게 이끌어내면 당연히 내장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제프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갑자기 몸이 좋아진 것 같은데……. 죽거나, 치료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군.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자고 일어난 것도 아니고 잠깐 누워 있었을 뿐인데 몸이 유난히 가뿐해졌다.

내장에는 통점이 없으니 단순히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꿈결처럼 편안하던 엘제이의 품을 떠올리며 나긋하게 웃었다.

“어쩌면, 제이 덕분인지도 모르겠군. 정말, 나쁘지 않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8 화
68

엘제이와 함께 있으면 그런 일이 종종 생겼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거나, 피곤함에 지친 몸이 가벼워지곤


했다.

아제프는 제 품에서 흐트러지던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고 옅게 웃었다. 성정이 순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곁에 두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뜻했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잠이 올 때도 있었다.

심지어 자질을 꺼낸 뒤였음에도 엘제이가 있다는 이유로 기분이 저조해지지 않았다. 이건 아제프도 꽤 놀란
일이었다.

전에는 자질을 사용한 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무서울 정도로 몸이 떨려왔다. 그게 부작용이 아닌 신경이 과민해
생기는 일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몸은 떨림을 멈추질 못했고 아제프의 신경은 절로 날카로워졌다. 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혀 떨림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최악이었다.
나약하고 비참해지는 기분. 힘을 잃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아제프는 그걸 견딜 수 없어 했다.

사실 아제프는 지금 꽤 놀라는 중이었다. 몸은 떨리지 않았고, 마음은 평온했다. 오히려 평소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것 같기도 했고 몽글몽글 모여 있는 구름 위에 몸을 맡긴 것처럼 편안하기도 했다.

아제프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자신의 상태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곧 신경을 끊어버렸다.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편인데 아무려면 어떠냐는 마음이 들었다.

란델 家의 별장은 무척 넓어서 아제프는 복도를 한참 걸어야 했다. 좀 더 걸어가자 1 층에 있는 집무실이 나왔다.


아제프는 집무실을 지키는 기사를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

“안에 누가 있지?”

“공작님께서는 잠시 받아올 게 있다고 나가셨고, 황자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아제프는 조금 더 천천히 와도 될 뻔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잘 자는 사람을 깨우려는 건


아니었지만, 좀 더 함께 있을 수 있는데 너무 서두른 것 같았다. 어서 일을 끝내고 그 방으로 돌아가 엘제이를
품에 안고 잠들고 싶었다.

아이젠이 알면 화를 낼 테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혹시 몰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찾아갔다가 피곤해서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고 하면 뭐라 하겠는가.

아침에 볼 엘제이의 놀란 얼굴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지금 그의 영역 안에 있었고 엘제이가


어디를 가든 그의 눈과 귀가 따라붙었다. 아제프는 그게 퍽 만족스러워 입꼬리를 올렸다.

아제프는 내일 아침 놀랄 엘제이의 얼굴과 그녀에게 할 여러 변명을 떠올리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왔나?”

기분 좋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싸늘하게 내려왔다. 엘제이를 상상하며 문을 열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시꺼먼
황자 따위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제프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없이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알체스테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자로 뻗은 입꼬리는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반짝거리는 금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기분이 좋은지 눈치챈 아제프는 시선을 내려 알체스테의 손을 응시했다. 맨날 장갑을 끼고 다니던 사람이
장갑은 어디에 뒀는지 맨손이었다. 그건 아제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제프가 고개 숙여 제 맨손바닥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알체스테가 무슨 생각으로 장갑을 벗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장갑을 끼고 있으면 보드라운 피부를 마음껏 느낄 수가
없었다. 닿을수록 기분이 좋은 것인데 장갑을 끼면 느낄 수 없으니 엘제이를 만날 때는 저도 모르게 장갑을 찾지
않았다.

아제프는 이런 기이한 동질감과 이해 때문에 알체스테가 꺼려졌다. 그가 고개를 저어 감상적인 마음을 쫓아내며
일렁거리는 알체스테의 문장을 바라봤다.

문장의 빛은 알체스테와 지독하리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덩치 큰 무뚝뚝한 사내와 벚꽃 같은 연분홍빛이라니,


신의 악취미로 보일 지경이었다.
알체스테의 문장은 그의 그을린 피부색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연한 분홍빛이었다. 오히려 저것은 아제프에게 더
어울렸을 터였다.

알테스테에게는 있고, 아제프에게는 없었지만, 아제프에게는 열등감처럼 쓸모없는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엘제이와 같은 게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없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문장이라는 건 두 명에게 동시에 생기는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건 하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그는 문장이 없다.

아제프 란델은 운명이 정한 엘제이 티아세의 짝이 아니다.

운명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엘제이의 짝이 있다면, 이왕이면
잔인하게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알체스테의 것은 탐나지 않지만, 엘제이와 짝을 이루는 문장은 다르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그걸 가진 놈을


가만둘 마음은 없었다.

아제프가 잔혹한 눈을 반짝이며 빙긋 웃었다.

“황자님께서는 그놈을 아시는 것 같던데 혹시, 그놈이 왜 여기로 온 줄 아십니까?”

아제프는 엘제이와 시녀들에게 들어서 몇 가지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의심이
많은 자였고, 생판 남인 알체스테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제프의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은 알체스테가 아제프를 무뚝뚝하게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빛나는 금안이
자취를 감췄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아제프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역시


알체스테는 껄끄러운 놈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경, 나는 경을 좋아한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아제프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알체스테를
기이하게 쳐다보며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저런 남자에게 좋아한다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에게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좋아 헤실헤실 풀리는 것


같았는데, 저 남자에게 그 말을 들으니 얼굴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졌다.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한껏
찌푸린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저는 엘제이 티아세가 좋습니다.”

“나도 엘리사가 좋다.”

“…….”

어쩌라고- 그리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황자였다. 아제프는 지금 자신이 머저리를 상대하고 있나 고민하며
우직한 인상의 남자를 응시했다. 꼭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만큼의 말주변이 없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면서 이걸 어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알체스테의 곁에는 마음을 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는 아제프를 처음 본 몇 년 전부터
아제프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경과 내가 티아세와 결합하면 우리는 가족이 되는 게 아니겠나? 그러니, 좀 더 나를 편히 대해도 좋다.”

아제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편히 대하라는데 못 할 것 없었다. 눈을 휘며 상냥하게 웃은 아제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 우둔하고 멍청해 보인다고 솔직히 말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감읍한 일이지만,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달콤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신랄하게 귓전을 때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알체스테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놓았다.

“……나를 그리 생각하고 있었나?”

“네. 조금 전에는 전하의 옥체가 상하신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멀쩡한 귀가 보이는데 제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이상한 말만 하시더군요. 순간 전하께서 머저리가 되신 건 아닌지…… 소신, 걱정이 많았습니다.”

알체스테의 떨떠름한 얼굴에도 아제프는 화사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매우 선량한 얼굴로 독설하는 게
아제프다웠다.

아제프처럼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는 알체스테는 찻잔을 톡톡 두드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도, 자신도 벽을 두른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물러나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 대치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보다 4 살이 많았다. 그는 연장자로서 아제프에게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중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내 말은 숨기지 않고 바로 물어봐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경의 적이 아니고, 지금은 예비 가족쯤이 된 게


아니겠나?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물어봐도 좋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말해줄 테니.”

아제프의 얼굴이 파삭, 일그러졌다. 저 반질반질한 금안이 꺼림칙했다. 꼭 제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다는 듯
이해자의 눈을 한 금안이 마음을 꿰뚫을 듯 바라보는 게 싫었다. 도대체 당신이 나의 뭘 아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부황에게 쫓겨 척박한 땅에 버려진 황자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겠지만, 나락은 아니었을 터였다. 아제프는
나락에서 살았다. 지옥이었다. 누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겠는가. 그는 몸이 부서지고 영혼이 깨지는 고통
속에서 바득바득 기어올라 여기까지 왔다.

아제프는 술렁거리며 깨지려는 마음을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흔들릴 것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면 되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제프에게 소중한 것은 엘제이 티아세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다 똑같았다. 알체스테라고 다를 것 없었다.

“전하를, 가족으로 여기라고요?”

“그래.”

달칵- 아제프는 곁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르- 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 제이에게는 가족이 있지.’

엘제이에게는 아제프 외에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알체스테는 엘제이의 소중한 사람인 엘리사를 지켜야 하는
운명이었다.

얼추 이해관계가 맞았다. 마음을 내주려는 게 아니라 손을 잡는 것뿐이었다. 아제프가 그렇게 되뇌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알체스테는 싱긋 웃는 아제프의 얼굴이 작위적이라는 걸 알았으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풀어질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체스테는 그저 천천히 그의 마음이 풀리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인데 다 물어도 좋다.”

아제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걸 먼저 물어볼까 고민했다. 역시 가장 궁금한 건 엘제이의 문장에 대한


것이었다.

엘제이의 문장이 없어질 수 있는가, 문장이 없어져도 엘제이에게는 타격이 없는가, 그게 제일 궁금했다.

엘제이의 곁에 뒀던 시녀들은 모두 아제프의 눈과 귀였다. 그녀들은 아제프가 없을 때, 엘제이의 곁에 머물며


모든 걸 기억하고 아제프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들의 보고를 받으며 여러 가지를 알아냈다.

‘문장의 비밀. 황자님.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69 화
69

지켈리온은 엘제이에게서 문장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는 엘제이의 몸에서 뭔가를 뽑아내려 했다. 그건 분명
문장이다. 지켈리온은 전에도 사람에게서 문장을 뽑아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켈리온이 머무는 하스틴 절벽은 알체스테가 지키는 곳이다. 둘은 서로를 알고 있었고 싸워본 적도 있는 듯했다.
알체스테가 지켈리온과 싸울 이유는 문장 때문일 확률이 높다.

지켈리온이 알고 있는 알체스테는, 높은 확률로 문장이 뽑힌 사람을 알고 있다.

아제프는 잔혹하게 물드는 새파란 눈을 화사함으로 숨기며 웃었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웃음을 단 아제프가
매끄러운 입술을 열었다.
“전하, 문장이 뽑힌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

아제프의 얼굴이 너무 선량했다. 알체스테는 약간의 시간을 들여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알체스테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가만히 있어도 아름다운 얼굴이 호선을 그리며 접히자 무척 선량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꽤 어렸었지. 이제 21 살이니.’

알체스테는 왠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에 손을 뻗었다가 해사한 입꼬리와 달리 광기가 서린 벽안을 보고


손을 거둬들였다.

어두운 밤에도 푸른 안광을 토해낼 괴물의 눈이었다. 저 남자는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흉포하고 무자비한 숲의
지배자. 양인 줄 알고 함부로 손을 뻗었다가는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 뜯겨 손이 잘릴지도 몰랐다.

알체스테는 광기가 그득그득 차오른 눈을 보며 참아지지 않는 한숨을 내뱉었다. 깨끗한 금안 위로 걱정과


안타까움이 흐리게 떠올랐다.

“전하?”

“……문장을 뽑힌 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본 이들은 모두 문장을 뽑힌 지 얼마 안 되어


죽어버렸으니까.”

아제프는 생각보다 무덤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르시 제국이 세워진지 816 년. 이 무수한 세월 동안 문장을
뽑아낸, 혹은 뽑힌 자가 한 명도 없지는 않을 터였다. 문장을 뽑아도 사람이 멀쩡하다면 이야기가 전승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기록이 없는 건 이유가 있겠지.’

문장을 뽑아내는 게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하다면 엘제이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 한해서는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 빌어먹을 문장이 계속 엘제이의 몸
위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참아냈다.

별로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체스테의 말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알체스테는 거짓말을 하느니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고, 정황 역시 그의 말에 들어맞았다.
그렇다고 실험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군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죽었나요?”

“그래. 내 기사 중에는 문장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 기사는 운이 좋게도 소꿉친구와 문장을 나눈 사이였지.


그리고 둘은, 지켈리온에게 문장이 뽑혀 죽어버렸다.”

지켈리온은 ‘문장을 뽑는다’는 말을 사용했다. 아제프는 그것이 좀 이상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문장을
파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잘라낸다’, ‘제거한다’, ‘뜯어낸다’, 등 많은 서술어가 있었다. 별 의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뽑는다’는 서술어가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문장이 뽑힌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죠? 문장만을 가져간다는 이야기입니까?”

“지켈리온의 경우, 문장이 있는 신체 부위를 말 그대로, 손으로 뽑아내는 방법으로 가져가더군. 떨어져 나간
신체에서는 문장이 사라진다.”

알체스테는 문장이 뽑히던 기사를 떠올렸다. 제 짝이 없어지고 하루 뒤, 기사는 연인을 찾으러 하스틴 절벽으로
올라갔다. 워낙 마물이 많이 출몰하는 곳이라 다들 말렸지만 기사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알체스테가 기사와 동행하기로 했고, 둘은 절벽에서 신체 일부가 뽑혀나간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 순간 기사의 오열이 터져 나왔고, 비통에 젖은 인간의 냄새를 맡은 지켈리온이 나타났다.

알체스테는 어쩌면 방심했는지도 몰랐다. 강하기는 했으나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지켈리온은 부활했다. 알체스테는 내뿜는 독연기를 정화하고 제 몸을 보호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기사의 문장이 뽑히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새까만 손이 사람의 육신을 파고들어 문장이 있는 부위를 뽑아냈다. 문장은 새까맣게 물들었다가 부서져서 허공에
흩어졌다.

서둘러 기사를 구해내었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미친 사람처럼 자해하다가 하루도 안 되어 자살해버렸다.

“문장이 뽑히는 순간, 문장보유자는 즉사하나요?”

“그렇지는 않았다. 지켈리온의 말에 따르면 문장을 잃는 순간, 인간은 지독한 공허를 느끼게 된다고 하더군. 내
기사는 즉사하지 않았지만, 미쳐가다가 하루도 안 되어 자살했다. 지켈리온, 그는 살아 있는 자의 문장을 뽑고
그 눈을 마주하는 걸 즐기는 자다.”

그 뒤로도 지켈리온과 종종 마주쳤다. 지켈리온은 항상 본체가 아닌 분신으로 밖에 나왔다.

아무리 죽이고 뒤져도 본체가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처리를 고민하던 중 지켈리온은 문장 보유자가
아닌 인간에는 관심이 없고, 하스틴 절벽에서 나갈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때를 기다리는 자다! 알체스테, 네가 문장을 가질 날이 왔으면 좋겠군. 그럼, 너의 짝은 내가 꼭, 네


눈앞에서 죽이겠다.]

알체스테는 수도와 근접한 곳까지 나타난 지켈리온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왜 마음을 바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체스테의 말이 사실인지는 직접 시험해봐야 확신할 수 있을 테지만 엘제이의 것을 건드리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았다. 아제프는 살려달라는 듯 몸을 떨던 가증스러운 문장을 떠올리며 얼굴을 팍- 구겼다. 기생충처럼 요망한
것이 도움 될 때도 있었다.

“그렇군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제프는 미련 없이 싱긋 웃었다. 그의 시커먼 속내와는 다르게 해사한 얼굴이 선하게 접혔다. 자신은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얼굴 때문에 사람들은 아제프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다.

알체스테는 달랐다. 알체스테는 눈치가 빠른 자는 절대 아니었으나 그가 가진 자질 때문에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그가 가진 자질은 빛. 그 자질 덕에 알체스테는 사람을 볼 때 종종 그 사람이 가진 어두운 생각과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잘 알아챘다. 알체스테가 아제프를 친근하게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기묘한 사람이었다. 화사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언제나 위태롭게 흔들렸다. 시꺼먼 연기가
자욱해 숨이 막힐 정도인데 잘도 저리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호롱불 같은 심지가 그 안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강인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너는 나와 같구나- 하고.

알체스테, 그 또한 그랬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아비에 대한 원망이 새까맣게 차올랐다. 그의 자질이 빛임에도
알체스테는 제 몸의 빛을 잘 볼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까만 먹물들이 그의 빛을 좀먹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타고난 빛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알체스테는 저 빛이 끝나는 순간 그의 자질도 끝임을 알았다. 마음을 다스리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원망을
죽여야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그건 상당히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빛이 어둠에 잡히지 않도록 그는 항상 억눌리며 살았다. 그의 성격이


무감각해진 건 다 그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에 무뎌졌을 때, 아제프를 만났다.

저와 똑같이 활활 타오르는 빛을 품었음에도 천천히 어둠에 잠식되는 아제프를 봤다. 동정해버렸고, 이해해버렸다.

알체스테는 맑은 금안을 깜빡이며 아제프의 본질을 꿰뚫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반짝반짝 타오르는 그의 빛이


보였다.

“아제프.”

“……그 호칭은 뭐죠? 기분이 좀 나쁩니다만?”

아제프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엘제이뿐이었다. 아제프는 이미 알체스테에게 선을 그었는데, 알체스테는 늘


아제프의 의사를 무시한 채 그걸 뛰어넘으려고 했다.

아제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삐뚤어진 얼굴로 알체스테를 쏘아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너를 위한 충고다. 다른 이의 문장을 뽑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아마, 다른 이의 문장을 훼손하면 여신의


저주를 받는 것 같다.”

“저주?”

“그래. 문장이 뽑히는 순간, 여신의 비명이 들렸다. 문장을 뽑은 손은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처음부터 악마의 종속이기에 상관없을지 모르나 너는 위험해. 너 또한 여신의
아이다.”

“문장도 없는 제가 여신의 아이라고요?”


아제프는 싸늘한 얼굴로 알체스테의 말을 비웃었다. 여신이 자신을 제 아이라고 생각하면 이리 둘 리 없었다.
엘제이에게 이렇게 빠져들 걸 알았다면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아닌가?

아제프는 얼굴을 찌푸리며 알체스테의 문장이 여신이라도 되는 양 노려봤다.

“삐뚤게 받아들이지 마라. 모든 인간은 신의 권속으로 태어난다.”

“그저 허울뿐인 말 아닙니까? 여신이 공평하다면, 왜 문장의 유무가 사람에 따라 나뉜단 말입니까?”

알체스테는 날카로운 혀를 장착한 아제프를 이길 수 없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를 어린 동생처럼 여겼고,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나도 좀 궁금한 게 있다. 티아세 양의 짝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가? 그녀의 문장이 발현한 지는


얼마나 되었지?”

“그건 왜요?”

물론 엘제이의 짝은 나타나지 않았다. 짝을 발견했으면 초반에 알체스테에게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았을 터였다.

알체스테도 아제프의 반응을 통해 그걸 알았을 텐데, 새삼 확인하듯 물어보는 것에 아제프는 기분이 나빴다.

‘오락가락 제멋대로군.’

아제프는 조금씩 저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한 홍차가 바싹 마른 입안을 축축하게
적셨다.

아제프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눈앞이 벌게지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알체스테는 답지 않게 조금 망설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 말을 들은 아제프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요령이 없는 남자는, 그저 자신이 느낀 걸 담담히 이야기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쌍둥이라서일까? 엘리사를 보기 전에는 티아세 영애가 내 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새파랗게 날이 선 눈이 금방이라도 알체스테를 찢어버릴 것처럼 살기를 내뿜었다. 차랑차랑- 맑은 소리를 내며


떠오른 마나가 음울해진 아제프의 기분에 따라 음산한 기운을 발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0 화
70

알체스테는 순식간에 온도가 확 내려간 방 안을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알체스테도 추운 날에 겪은 고생이


많아서인지 추운 건 질색이었다. 그는 오싹한 마나를 빛으로 흩트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경,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맹세하건대 지금 나는 티아세 양에게 티끌만 한 관심도 없다. 그저
엘리사의 언니라는 생각뿐이지.”

“계속해 보세요.”

아제프는 알체스테 앞에서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편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으나 어디까지가 허용범위인 줄은
잘 알고 있었다. 알체스테는 유독 아제프에게 유하고 약한 면모를 보였다.

‘내가 자기 동생이라도 되는 양, 본인이 내 형이라도 되는 양, 당신은 항상 그렇게 멋대로 굴지. 조금이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안달이니까.’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관심이었다. 아제프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조소하며 알체스테를 응시했다. 그의


기분이 차분하게 내려오자 공기 중을 떠돌던 마나도 착 가라앉아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순간, 엘제이 티아세에게 흔들렸다.”

“저랑, 싸우자는 겁니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엘리사를 본 순간 확신했다. 그녀야말로 내 반려임을. 티아세 양에게 느꼈던
기묘한 의문과는 달리 확연한 확신이었다.”

“조신하지 못한 태도십니다? 이리 흔들렸다가 저리 흔들렸다가. 황자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아제프가 입꼬리를 확 비틀며 알체스테를 비꽜다. 엘제이를 이성으로 봤다면 저 눈을 뽑아내고 싶었다.
알체스테는 문장을 가진 자이기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싸우자는 게 아니다. 본질을 이야기하자는 거지. 혹시 쌍둥이가 동시에 문장을 가졌다는 전례를 본 적
있나?”

아제프의 눈이 조금 둥글게 커졌다.

아제프는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손을 모았다. 드문 일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전례가 없다.
역대 문장 보유자의 생애 대부분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걸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아는 한은 없는 것 같군요.”

“나 또한 그렇다. 쌍둥이와 문장 모두 드물어서 생긴 단순한 확률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확률로 따지자면, 쌍둥이가 동시에 문장을 가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겠군요. 둘 다 드문 일이니.”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그럴 수 있겠지만, 뭔가 꺼림칙했다. 아제프는 미간을 좁혔다.

알체스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뭔가 이상해. 그녀의 문장은 좀 이상하다. 나 역시 많은 문장을 봐온 건 아니나,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군. 이


사실이 너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내 직감은 꽤 잘 맞는 편이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체스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것을 알지 못해 이것을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는데, 뭐가 이상한지는 알체스테도 몰랐다.

“글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알겠는데, 뭐라 단정할 수가 없다.”

아제프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묻는 눈으로 알체스테를 쏘아봤다. 알체스테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보였고, 아제프의 얼굴은 기이한 것을 본 듯 일그러졌다.

똑똑.

“후작님,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바로 안으로 들이도록 허락을 해둔 상태였기에 문은 곧바로 열렸다. 싸늘한 적막이 가득한 방 안으로 아이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젠은 어쩐지 조금 싸늘한 방 안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젠의 손에는 아제프와 마찬가지로 하얀 종이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아이젠이 그걸 손으로 한 번 꾹 쥔 다음


아제프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아이젠은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며 칼칼한 목을 차로 축였다.

아제프와 알체스테.

아이젠이 어두운 얼굴로 둘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엘제이와 엘리사는 그녀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
일생을 평화롭게 살게 하고 싶었다. 아이젠이 복수를 포기한 것도 다 딸들의 앞날을 위한 것이었다.

위험한 복수보다는 딸들의 앞날을 우선시했기에 감히 황족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더는 딸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충직한 심복으로 살아갈 거라고 황제 앞에서 맹세했다.

그 당시 황제는 그러겠다고 약조했지만, 교활한 사내는 약조를 지키지 않았다. 아이젠이 시선을 내려 서류봉투에
찍힌 티아세 家의 문장을 흘끔 내려다봤다.

달칵-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차갑게 굳은 얼굴을 든 아이젠이 엘리사의 짝이 되어버린 알체스테를 응시했다. 버림받기는 했으나 그는 황제의
친자였다.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황자님, 황자님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말해라.”

“제 딸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아버지인 황제를, 죽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린 나무처럼 온화했던 갈색 눈이 증오와 미움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세 남자의 찻잔은 움직이지 않았고, 시간만 째깍째깍
흘렀다.

알체스테는 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아까 아제프와 대화할 때 꽤 다채로운 표정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는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했다.
일국의 공작이 황제 시해를 입에 담았다. 그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고, 진심이었다. 너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늘 침착한 알체스테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알체스테는 옅은 다홍빛으로 일렁거리는 찻잔을 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주홍빛 노을을 닮은 물결이
출렁출렁 흔들렸다. 코끝에 차의 향기로움이 스며들었다. 알체스테는 가만히 차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착-
내리깔았다.

“공작의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낮게 내리깐 목소리는 위협적이었지만, 별다른 감정은 담지 않은 그저 무덤덤한 물음이었다. 그가 입을 열자


아제프와 아이젠의 눈썹이 동시에 위를 향해 치솟았다.

아제프는 제게 물은 질문이 아니기에 입을 다물었다.

‘저토록 훤히 보이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닌데, 증오? 혐오?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지?’

아제프는 고민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젠이 황제의 사람이라는 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제프는
아이젠이 루드비히가 아니라 황제를 노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이젠의 눈에 떠올랐던 선명한 적의는 금세 사라져 그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웃었다.

“압니다. 그래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만약 황제와 엘리사, 둘 중 한 사람의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황제는 이유 없이 알체스테를 꺼렸다. 알체스테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그의 부황은 언제나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는 했다.

언젠가 실수로 부황에게 손을 뻗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끔찍한 걸 보았다는 듯 알체스테를 내쳐버렸다.


알체스테는 흐릿한 기억을 뒤지며 쓰게 웃었다.

“이런 걸 묻는 이유에 대해 먼저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공작과 같은 배를 탈 수 없겠지. 그건 싫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 엘리사 쪽이다. 부황은 내게 남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면 내쳐지지 않을 정도가 되겠는가?”

“……설마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황자님께서는, 우리 리사의 짝이신걸요.”

아이젠이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속삭였다. 사실 눈앞에 뺀질뺀질한 태도로 앉아 있는 두 남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슬슬 혼기가 찰 나이니 약혼이든 결혼이든 준비해야 하는 게 맞았지만, 맡겨놓았다는 듯 뻔뻔하게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냥 제 두 딸을 싹 다 채가려는 도둑놈들이 짜증스러웠다.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막상 보내려니 또, 아쉽군. 여보, 보고 있소? 우리 딸들이, 정말 많이


자랐는데.’

아이젠은 어릴 때부터 천사같이 예쁘던 두 딸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었다. 눈물이 눅눅하게 고인 것도 같았다.

아이젠은 금세 연약한 감정을 털어냈다. 서운함과 미련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우리 애들이 백 번, 천 번 아까운 것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들이라 장중보옥처럼 곱고 예쁘게 키웠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저들은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딸들이 좋아하니 보내기는 해야겠지만 여간 떨떠름한 게 아니었다.

아이젠이 주도하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제프는 생긋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공작님께서는 아무래도 황자님이 그리 마음에 차지 않는 것 같네요. 그러니 좀 더 잘 대답하지 그러셨어요.


공작님, 저는 언제나 제이 하나만 보고 살 겁니다. 약속드릴 수 있어요.”

아제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뱀 같은 자였다.

알체스테는 예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근사근 말하는 아제프를 보며 무척 부러워했다. 아제프는 아이젠의
마음을 독차지할 생각인지 알체스테를 향해 얄밉게 웃어 보이며 보란 듯이 속닥속닥했다.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는데 아주 잘 들렸다.

황궁은 외로울 거라는 둥, 엘리사같이 활발한 영애는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둥, 엘리사가 걱정되어 어찌하냐는 둥,
자신은 가까운 곳에 살며 매일매일 뵈러 가겠다는 둥. 정답게 속삭이는 말에 알체스테의 얼굴이 점점 침울하게
변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를 말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니라고 반박하면 생글생글 웃는 남자에게 돌려 깎일 게 뻔했다.

알체스테는 점수가 다 깎여 앙상하게 남을 것만 같아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나도 다 할 수 있다. 그게 리사를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하겠다.”

짧은 몇 마디가 알체스테가 할 수 있는 말의 다였다. 알체스테는 겨우 그 몇 마디를 한 후 뻣뻣이 굳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아이젠은 곰같이 미련한 알체스테와 여우처럼 살랑거리는 아제프 사이에 끼여 머리를 짚었다. 우직하면서 진심
어린 말에 감탄하면서도 꿀처럼 속삭이는 말에 끌리고 있었다.

아제프는 아이젠의 반응을 살피며 눈꼬리를 애교 있게 접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여우의 꼬리가 아이젠의 얼굴을
간질였다.

“제이랑 매일 갈 거예요. 저는 조실부모했기에, 항상 부모님이 그리웠거든요. 제이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아이젠은 매일 오겠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아이젠이 점잖게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아제프를 떠봤다.

“흠흠- 공사가 다망한데, 매일 오는 게 말처럼 쉽겠나.”

“제이를 위한 일인데, 그 정도쯤이야 어떤가요. 가까운 데로 거처를 옮겨도 되는 일인걸요. 아니면, 잠시


티아세 家에 살아도 되고요.”

황제가 되면 황궁에 살아야 하는 알체스테에 비해 아제프는 비교적 거주가 자유로웠다. 솜사탕처럼 살살 녹는


말에 아이젠의 몸이 반쯤 아제프를 향해 돌아갔다. 아이젠이 아제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신체가 맞닿자 아제프의 얼굴이 살짝 꿈틀거렸지만, 그리 티 나지는 않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1 화
71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했군. 경에게 감사한다.”

엘제이를 향해 뛰쳐나가려던 아이젠은 아제프의 기사들에게 발이 묶였다. 엘제이가 위험한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게 괘씸했지만,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제프가 지켈리온을 막아냈고 무예를 익히지 않은 아이젠이 갔더라면 방해만 되었을 게 뻔했다.

아제프는 맨손을 힐끔 바라보다가 선하게 웃었다.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엘제이를 똑 닮아서
그런지 예전보다는 참을 만했다.

아제프는 평소와 달리 구역질이 치미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해사하게 웃었다.

“뭘 이 정도로요. 저는 제 약혼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 것뿐이니, 굳이 인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잖아요? 제 약혼녀를 지키는 일은요. 제이가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인 걸요.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 저는, 저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진심이 섞이니 눈치 빠른 아이젠도 홀랑 넘어갔다. 약혼녀라고 강조하는 말이 두


번이나 퐁퐁 솟아올랐다.

아직 약혼도 안 했는데 엘제이를 약혼녀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눈가를 꿈틀하던 아이젠은 촉촉하게 적신 아제프의
눈을 보고 조금 감동한 얼굴을 했다.

알체스테는 아이젠의 마음속 제 입지가 개미 콧구멍만큼 좁아지는 환상을 봤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말은 뭔가. 내게 그걸 물어본 연유가 있을 터인데.”

아제프는 잘 되고 있는 일을 방해받아 눈을 날카롭게 떴지만, 곧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생긋 웃었다.

말이란 믿을 게 못 되는 거였다. 아제프는 하루 빨리 가문의 인장이 콱- 찍힌 약혼서를 교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까지는 못된 심보가 들키지 않게 꾹 참아야 했다.

아이젠도 곧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는 걸 떠올렸는지, 표정을 수습했다. 도둑놈이 둘인데, 하나가
워낙 영악하게 구니 이놈도 똑같은 도둑이라는 걸 자꾸 잊었다.

아이젠이 찌릿- 매서운 눈으로 아제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후작에게도 잠시 확인할 게 있다.”


“편하게 이름을 부르셔도 됩니다. ‘아제프’라고.”

알체스테는 제 이름을 달게 발음하는 아제프를 보며 서운한 얼굴을 했다. 무뚝뚝한 곰이 꿀단지를 빼앗긴 울적한
얼굴을 했지만, 여우는 개미 코털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젠은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며 싱긋 웃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면서 입술을 꾹 눌렀다. 두 딸만 있어서 아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아제프가 워낙 사근사근 구니 아들 같고, 귀여웠다.

아이젠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휘둘리지 말자고 되뇌었다. 매번 저 예쁜 얼굴에 홀랑 넘어가는 딸에 비하면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흠흠. 자네, 제이에게 자네의 눈을 심었더군?”

아제프는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미리 말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내리며 한껏


죄스러운 얼굴을 꾸몄다.

“그게, 루드비히 전하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유사시에도 전투가 가능한 아이를 붙였습니다. 미리 말하려 했지만,
저를 믿어주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내 아이들 곁에 믿지 못할 이를 두는 걸 싫어한다네.”

“믿지 못할 이라고 생각하여 불안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곁에 두면 쓸모가 많은 아이입니다.


다음부터는 먼저 말씀드리고 붙이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고, 이제는 대놓고 제 눈을 심어두겠다는 단언이었다. 게다가 아이젠이 반박할 구멍도 스스로
빠르게 메꿔버렸다.

아이젠도 그걸 눈치챘지만, 엘제이를 걱정해서 그랬다는데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늘 아제프가 도착하기 전까지 엘제이를 지켜낸 것도 그가 붙인 시녀들이었기에 아이젠은 쓸개 씹은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젠은 떨떠름한 기색을 완전히 감춰내지 못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먼저, 16 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케케묵은 이야기라 많이 길어질 듯싶지만, 모든 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이젠이 분노로 떨리는 손을 감추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리멧사가 비틀어버린 사건의 축, 엘제이와 아제프의 인연이 시작된 그날의 이야기가 아이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생글생글 웃으며 이야기를 듣던 것도 잠시, 아이젠의 말이 길어질수록 아제프의 얼굴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굳어갔다.

워낙 포커페이스라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제프 앞에 놓인 찻잔은 그 후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 식어버린 차만 불안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
“그런가. 모든 건 아나이샤의 뿌리로부터 시작된 거군.”

“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이 중독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폐하는 예나 지금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20 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단단하게 지킨 사람입니다. 속에 무엇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죠.”

“한 번 당했다고, 폐하를 따라하다니. 루드비히는 예나 지금이나 멍청한 자다. 아첼의 신록은 그가 내세운
마지막 회유책인 건가?”

알체스테의 입에서 루드비히를 깎아내리는 말이 신랄하게 흘러나왔다.

현황 에이든은 친아들도 겨우 체스 위의 장기 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든이 어디까지 간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예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방관인지 개입인지는 모를 일이나, 물증을 남기지 않고 교묘하게 조종하기 때문에 후에 모든 걸 들키더라도


루드비히에게 떠넘기면 그뿐일 터였다.

“아마, 리사보다는 얌전한 제이 쪽이 다루기 쉽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16 년 전, 그것 때문에 제 딸이 죽을


뻔했음에도! 똑같이 그 빌어먹을 아나이샤의 뿌리를!”

“그날, 공작님께서 놔줬던 소년이 나중에 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이 가족을 죽인 원수라고 생각할
텐데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었던 아제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침착한 파란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아제프는 그저 궁금한 걸 묻는다는 듯 담담한 얼굴을 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아이가 내게서 달아났던 게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눈이 벌게져
있었으니 눈앞에 보였다면 틀림없이 죽였을 테지. 판단력이 흐려져 죄 없는 그 아이를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했으니.”

“원흉이 맞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지 않았다면,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았겠죠. 자매가 아나이샤의 뿌리를
먹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황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몰랐던 내 잘못이지만 말이다. 아마, 제이가 죽었더라면 살려두지 않았을 걸세. 그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찾지는 않을 생각이네. 그저, 아이 엄마의 바람대로 잘 살면
좋을 것 같군.”

아이젠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달아나던 상처투성이의 소년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꽤 예쁜 소년일 것
같았는데, 맞아서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때는 보호해주려 한 행동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이가 달아난 것도 당연했다. 집은 불타는 중이었고, 불을


지르던 기사들이 소년을 뒤쫓았으니 죽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을 터였다.

아제프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바로 앞에 그토록 찾던 이가 있었다. 화마로 넘실거리는 불꽃이 그의 얼굴을 가려


아제프도 아이젠을 보지 못했다. 다만, 저를 향해 뻗던 손이 끈질길 정도로 따라와 죽을힘을 다해 뛰었을
뿐이었다.

“가문을 문양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후회하지 않습니까?”


희고 고아한 백조를 꽃넝쿨이 휘감은 문양. 새하얗고 깨끗한 이성을 놓지 않겠다는 아이젠의 다짐이 담긴
문양이었다. 아이젠이 손으로 가문의 문양이 찍힌 종이를 한번 쓸어보았다.

엘제이는 그때 몸이 안 좋았다. 폐렴기가 보이던 아이에게 마비독을 먹였으니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엘제이는 열꽃이 핀 얼굴로 색색- 뜨거운 숨을 뱉으면서도 소년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분명 잔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일어나 들었는지 그리 애원하는 딸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일으킨 거였다.

“물론 후회한다. 특히 제이는 아무 장애가 남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하더군. 그때 외면했더라면, 내 아이들이


아프지 않았겠지. 하지만, 돌아가도 난 또 그리할 것 같네.”

“후회했기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문양을 바꾼 거 아닙니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네. 그때 보았던 제이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서, 지금도 잊히지 않으니까. 겨우 세
살이었는데 말이야. 제이가 아니었다면 살리지 않았을 걸세.”

아제프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 단정한 눈가에 꽃물을 터트렸다. 꾹 감긴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연약하게 흔들렸다.

‘나를 망친 자만 생각했는데, 살리려고 한 이도 있었다. 너는 처음부터, 내 삶 그 자체였다. 살아남아서, 너를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제이.’

힘주어 눈을 꾹 한 번 눌렀다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별이 잔잔하게 빛나는 새벽하늘이 보였다.

아이젠의 이야기가 너무 길었는지, 알게 된 사건이 충격적이었는지, 아제프는 그만 쉬고 싶었다. 얼른


엘제이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드디어 원수의 정체를 알았다는 쾌감과, 복수를 꿈꾸는 악의, 그리고 그녀를 향한 고마움.

시꺼멓고 하얀 감정이 얼기설기 뒤섞여 소용돌이쳐졌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은 그녀의 곁에서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엘제이가 잠든 방이 나올 터였다. 아제프는 밀려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결이 좋은 백금발이 단정하게 늘어졌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아래 그늘진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했다.

알체스테는 꾹 내려간 아제프의 입꼬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제프?”

알체스테가 제 이름을 부르자 아제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것도 잠시, 금세 표정을 수습한 아제프는 곧
선하게 싱긋 웃었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그런가? 나는 상관없다. 바쁘다면 얼른 가봐야지.”

알체스테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이젠도 창밖을 내다봤다. 훌쩍 지난 시간이 그제야 느껴졌다.

“후작도, 황자님도 다들 해야 할 일이 있으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군요. 급한 일이 있다면 편히


가보게.”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나누며 꾸벅 고개를 숙인 그는 정말 급한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바쁜 몸짓으로 방 안을 나갔다.

달칵- 하는 작은 문소리와 함께 공간이 단절되자 아제프는 문고리를 놓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이 가득한
긴 복도를 가로 지르는 남자의 발소리가 탁탁탁- 빠르게 들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2 화
72

아제프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게 싫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증오하고 원망하여 복수를 결심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과거의 한 자락을 풀어 떠올려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떠오르는 무력하게 우는 소년이 본인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짜증이 났다.

멍청한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는 겨우 저런 일에 가슴 아파하거나 울지 않는다. 강해졌다고 생각했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게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거다.

독니를 머금은 독사가 아제프의 발목을 콱 물고는 놔주지 않았다. 차츰차츰 올라오는 독은 발목을 삼키며 온몸을
집어삼킬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참고 참았던 진득한 감정에 무너져 넘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제프는 구원받았다. 저를 향해 간절히 뻗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꽉 붙잡았다. 하얀 손에 끌려 음습한


공간을 벗어나 빛이 차오른 세상으로 이끌렸다.

아제프가 마침내 제 트라우마를 깨닫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과거를 잊기로 하자 독사는 숨겨 왔던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아제프의 발목을 칭칭 휘감고 무릎을 향해 아가리 쩍 벌리던 독사는 누런 황금빛을 두른 커다란
비단구렁이였다.

‘그렇게 찾아도 누군지 알 수 없었는데 말이야. 다 포기하려고 하니 나타나는군.’

우아한 얼굴 위로 싸늘한 냉소가 걸렸다. 그걸 생각하자 또 까만 구렁텅이가 그를 집어삼킬 듯 검은 손길을


뻗쳐왔다. 아제프는 겨우겨우 빛을 머금은 몸을 시꺼멓게 집어삼키는 악의를 보며 발작적으로 손을 털었다.

다 잊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삶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 것 같았다. 모르면 넘어가겠다고 했지만, 눈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릴 거라고 말했다.

아제프는 신중히 해야 할 작업에 이성이 흐려지는 걸 막고 싶었다. 그는 이제 잃을 게 생겼다. 지켜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은 이가 생겼다.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았고, 언제나 다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아는데,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닌데, 제이. 혼자는…… 혼자서는, 아직 힘이 들어.’

아제프는 거의 뛰어가듯 걸어가 엘제이가 자고 있는 방 문 앞에 섰다. 달리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용솟음치는


맥박이 얼마나 그가 흥분했는지 알려주었다. 아제프는 뭐라고 말을 거는 시녀들을 제치며 문고리를 빠르게 돌리고
들어갔다.

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방 안에는 엘제이가 숨을 새근새근 내쉬는 소리만 들렸다. 파란 마나의 빛을 머금은 하얀


이불이 신비롭게 빛나며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파란 빛무리를 뿌려 놓은 이불에 푹 둘러싸여 평화롭게 숨을 쉬는 그녀를 보자, 자근자근 흔들리던 신경줄이 툭-


하고 느슨하게 풀어졌다.

성질 나쁘게 올라갔던 눈꼬리도 순하게 내려왔다. 엘제이는 잘 자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방 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마나를 손으로 흩트린 뒤, 엘제이가 잠든 침대로 올라갔다.

그나마 방을 비춰주던 빛무리마저 사라지자, 방 안은 어두컴컴해졌지만 하얀 얼굴이 얼핏 보였다. 아제프가 손을


들어 천천히 엘제이의 얼굴을 만져보며 살며시 웃었다.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시꺼먼 악의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다가 겁에 질린 듯 물러났다.

“하아…….”

아제프가 나른하게 숨을 몰아쉬며 이불뭉치를 꼭 끌어안았다. 잠결에 끌어올렸는지 목 끝까지 덮인 하얀 이불


때문에 엘제이가 애벌레처럼 보였다.

아제프는 자그만 어깨를 감싼 이불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엘제이를 꼭 끌어안고 그 품에서 눈을 감았다. 솔솔
풍기는 햇볕 말린 향기와 푸푸- 하는 작은 숨소리가 사랑스럽고 편안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비천한 나락으로 떨어트려 오물 위를 기며 구걸하는 그놈의 얼굴을 보고, 사지를
천천히 찢어 들개의 먹이로 던져주고 싶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놈의 얼굴을 비웃으며 그 비명을 듣는다면 온몸을 터트릴 듯한 카타르시스가 몰려올 것 같았다.
그것만이 제 삶의 길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제이를 안고 있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었다. 새빨간 피가 주르륵
쏟아지며 살점이 개에게 뜯겨나가는 걸 보는 건 한순간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이 지나면 그는 허망함에 몸부림치며 또 다른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허덕일 터였다.

그의 적은 오랜 시간 살아온 꽤 큰 독사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같이 싸워줄 이들이 있었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놈이 저열한 수로 제게 했던 일을 똑같이 갚아줄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나락이었던 아제프와 달리 모든 걸 가진 놈이니, 조그마한 구덩이로 떨어져도 전전긍긍하며 안달 낼 게


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생겼어.’

아제프에게는 이제 잔혹한 복수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를 몰아세우는 지독한 악의보다는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보드라운 감정이 더 우선이었다.
아제프는 한순간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걸 느끼면서도, 생각을 차츰차츰 정리했다. 따뜻한 이불뭉치를 안고
있으니 복수보다는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애정이 더 커졌다. 눈앞이 흐려져 섬뜩한 악의로 타오르던 순간,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당신이 계속 나를 지켜줬어. 그걸 이제야 알아서 미안해. 당신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알았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보통 성인이 되면 유아기적 기억을 잊어버린다. 아마, 엘제이에게도 3 살 당시의 기억은 남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그는 기억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가 살 수 있도록 지켜줬던 게 눈앞의 사람이었다는 걸.

고마운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랐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미움이 아니라 저를 사랑해주는 이를
먼저 알았다면, 삶이 지옥은 아니었을 텐데. 그 사람을 만나고 말겠다는 희망이었을 텐데. 복수에만 사로잡혀
숨겨진 진실을 엿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엘제이는 그저 잠만 자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냉혹한 남자를 천사처럼 순하게 만들었다. 이리저리 뒤섞인
감정으로 차분함을 잃고 서성이던 이를 한순간에 잔잔하게 만들어버렸다.

엘제이 티아세는 그의 안식, 그 자체였다. 고요한 평화가 밤빛에 녹아내렸다.

아제프는 내일 아침, 엘제이에게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불면증을 앓는 남자는 그 병명을 비웃듯 빠르게 잠들었다. 예민한 남자를 포근히 감싸 안은 평화는 그를 깊은
밤으로 데려가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인도했다.

다만, 그 대가를 다른 누군가가 고스란히 치러야 할 뿐이었다.

순하게 내리깔린 밀색 속눈썹이 불안하게 흔들린 것도 그때쯤이었다.

공명(共鳴)의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

꿈이었다. 엘제이는 자신이 또 꿈속으로 들어왔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몸은 반투명하게 흐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투과해 지나갔다. 몸서리쳐지는 느낌에 엘제이는 몸을
덜덜 떨며 사람들 없는 곳으로 피했다.

“아?”

엘제이는 그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람이 없었다. 항상 함께하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했던 꿈. 늘 눈을 뜨면 눈앞에


보이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거짓말.’

당황스러운 듯 눈을 홉뜬 엘제이가 그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꿈속은 겨울인지, 발밑에는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지만, 그녀의 발자국은 찍히지 않았다. 사박사박 밟히는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제이는 무기물처럼 그 안을 부유하며 애타게 그를 찾았다.

‘어디 있어요? 아제프!’


어린 소년이어도 좋았고, 다 자란 성인이어도 좋았다. 다만, 눈앞에 보이기를 바랐다. 그가 존재하는 곳에 있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

무심코 생각하던 엘제이가 놀란 얼굴로 멈추어 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 그를 절절히 찾아 헤맸다. 엘제이의 눈 위로 옅은 의아함이 맴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런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찾아야 했다. 얼른 찾아서 곁에 있어줘야만 했다.


그녀가 꿈속에 들어왔는데,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덜컥덜컥-

기이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부산스러운 사람들 틈으로 들리는 틈으로 비집고 나와 옷자락을 잡아당기듯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 바쁘게 그를 찾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끌렸다. 엘제이는 소리 나는 곳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길게 풀어진 밀색 머리가 나풀거리며 흔들렸다.

덜컥거리는 소리는 화려한 꽃문양이 찍힌 마차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였다. 엘제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의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크게 들리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마차를 눈으로 좇았다.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조그만 여아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 얼굴을 인식하는 순간, 엘제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건,’

엘제이의 눈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어찌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한 그녀는 그저 제자리에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마차는 덜컥덜컥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고, 심장은 미친 듯이 질주했다.

심장에 용암을 부은 듯 뜨거웠다. 타는 듯한 괴로움에 엘제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자 좁아진 시야
안으로 바짝 다가온 마차의 바퀴가 끼리릭- 구르며 멈추어 섰다.

“제이야, 고개를 그렇게 내밀면 위험하잖니. 밖에 재미난 거라도 있니?”

아이를 혼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무척 온화한 목소리였다. 엘제이는 저 부드러운 목소리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아이젠 티아세. 다정한 얼굴로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남자는 엘제이, 그녀의 아버지였다. 고통으로
침식된 엘제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상했다. 꿈인데 아팠고, 꿈인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젠은 늘 차분하고 얌전하던 아이가 드물게 보여준 아이다운 행동에 살며시 웃었다. 장중보옥처럼 곱게만
키웠는데 일찍 철이 든 건지 애답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아이젠이 가볍게 손짓하자 마부가 고삐를 놓고 기지개를 켰다. 마차는 밖을 구경하는 소녀를 위해 잠시 멈추어 선
것 같았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오동통한 볼을 한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정말 놀랐다는 듯 감탄했다.

“예쁘다.”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한 목소리가 제법 명확하게 발음되며 귀에 콱- 박혀들었다. 아이는 무언가를 보며 통통한
볼을 발긋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초롱초롱 맑게 빛나는 녹색 눈이 하얀 눈 속 세상을 담았다.

부드럽게 굽이치며 내려오는 밀색 머리카락과, 신록처럼 푸른 눈, 곱다랗게 휘어지는 눈가와 새하얀 뺨. 무척


어리기는 했지만, 저 아이는 분명, 엘제이 티아세, 그녀 본인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3 화
73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뗀 아이젠이 밖을 바라봤다. 순간 눈을 마주친 것 같아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꿈속에선


늘 그렇듯 아이젠은 고통으로 헐떡거리는 엘제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이젠은 그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무엇이 예쁘니?”

아이젠의 물음에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저렇게 반짝반짝 빛을 내는 사람이 있는데, 모르는
아버지가 이상했다. 아이는 눈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소년을 눈에 담으며 다시 한 번 그쪽으로 손가락질했다.

“저 아이요. 무척 아름다워요…….”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단어가 또박또박 발음되어 흘러나왔다. 아이젠과 엘제이의 눈이 아이의 통통한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혹여 미끄러질까 봐 조심하며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소년이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뺨


위로는 새파란 멍이 가득하고, 눈도 퉁퉁 부어올랐음에도 찰랑찰랑 흔들리는 미색의 머리카락이 무척 우아한 소년.

어린 엘제이 티아세가 보고 있는 소년은, 그녀가 그토록 찾던 아제프 란델이었다.

무수히 많은 공명의 밤을 거치면서도, 단 한 번도 접근할 수 없었던 인연의 시작. 사건의 끈.

견딜 수 없는 힘에 어린 몸이 부서지고 여린 정신이 붕괴했지만, 신음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몸을 간헐적으로 떨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의지였다.

커다란 운명의 바위에 짓눌리면서도 어린 몸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작은 손으로 아득바득


틈새를 비틀었다. 온몸에 박혀 드는 불창에 까맣게 타면서도, 다 뭉개진 손으로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렇게 애원하고 희생하여 바꿔놓은 운명이었다.

처절했던 운명의 시작점. 엘제이는 오늘 밤, 비틀린 사건으로 들어갔다.

***

엘제이의 눈에 멍이 가득한 아제프가 담겼다. 사라질 듯 흐려진 보랏빛 멍 위로 자리 잡은 초록색 멍이


알록달록한 꽃처럼 슬프게 흐드러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그의 몸을 담던 눈이 눈물로 흔들렸다.
“아제프…….”

아슬아슬하게 고인 뜨거운 눈물이 아롱져 흔들리다가 차가운 눈밭 위로 툭- 떨어졌다. 이건 꿈이고, 그녀는


허상이니 눈은 녹지 않았다.

엘제이는 변하지 않는 눈밭을 보며 울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입술을 꾹 깨문 엘제이가 눈에 힘을


줘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상처 가득한 아제프를 지켜봤다.

아버지에게 잔뜩 맞았는지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소년은 어머니 소피아의 손을 꼭 잡고 해사하게 웃었다. 어린


소년이 웃자 부은 살 틈 사이로 겨우 보이는 눈물점이 예쁘게 휘어졌다.

“정말, 안 돼요? 어머니, 제발요. 꼭 갖고 싶단 말이에요.”

아제프는 무엇이 갖고 싶었던 걸까. 엘제이는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흐린 눈을 들어 그를 살폈다.


고통에 잠긴 몸이 축축 늘어졌지만, 뭘 가지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 귀를 꼭 기울였다.

엘제이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테니 들어도 소용없겠지만, 언젠가는 꼭 그가 원하는 걸 주고 싶었다.

아제프의 손을 꼭 잡은 소피아는 웃지 못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휘청휘청 나약하게 걸어가던 소피아는


웃으며 애교 있게 손을 흔드는 아제프에게 아무런 대답도 없이 거친 황무지 길을 올랐다.

축축한 눈이 가득 쌓인 언덕길은 무척 미끄러워 보였다. 소피아는 조심조심 신중한 얼굴로 발을 내디디며


아제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소피아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속상한 얼굴을 하던 아제프가 꼭 잡아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살며시 웃었다.

사랑스럽게 휘어지는 아이의 얼굴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감정을 꾹꾹 내리누른 엘제이가 늘
그렇듯 아제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꿈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한 발짝 걷는 일도 무척 더디고 힘들었다. 엘제이는 고통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뒤를 쫓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혀끝에 힘을 줘 또박또박 발음하는 어린 엘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솜이불……. 솜이불을 갖고 싶어 해요.”

발음이 유난히 어려웠는지 느릿느릿하게 나온 목소리였지만, 단단하게 뭉쳐진 발음은 꽤 정확했다.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체구를 보았을 때, 그건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젠은 오랜만에 보는 옛 친구의 모습에 홀린 듯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이야?”

“아버지, 솜이불을 가지고 싶어 했어요. 주고 싶어요.”

어린 엘제이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제 의사를 전달했다. 미간을 좁힌 아이젠이 엘제이의 말을 들으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엘리사와 달리 엘제이는 무척 조숙한 아이라 아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번만큼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말이니?”
“저 아이. 저 아이에게 제 것을 주고 싶어요.”

어린 엘제이의 눈은 단 한 번도 아제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제 어린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엘제이가 흠칫 얼굴을 굳혔다. 맑은 녹안에 신비한 색감의 빛무리가
환상처럼 흘러다니고 있었다. 잎사귀를 닮은 눈 위에 내려앉은 수많은 초록색 빛무리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반짝였다.

가벼운 눈송이처럼 유유히 부유하며 눈 속을 떠다니는 모습에 홀린 것처럼 눈을 못 떼던 엘제이의 눈과 어린


엘제이의 시선이 잠시 맞부딪힌 것도 같았다. 그저 우연이라는 듯 아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지만, 엘제이의
눈은 경악으로 홉떠졌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이의 눈에서 떠다니던 빛무리들도 일제히 모습을 감추고 평범하게 돌아갔다. 그와
함께 몸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거센 썰물에 혼이 밀려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가위눌린 것처럼 무겁고,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몸을 간신히 붙들며 고개 돌린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가, 아니, 내가…… 했던 짓이야.’

뒤죽박죽 섞인 기억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몸이 허공으로 내던져지는 감각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밀려나지 않으려 애썼지만, 꿈은 그녀를 튕겨냈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천 길 낭떠러지로 훅- 떨어지는 추락감에
엘제이의 눈이 꼭 감겼다.

심장을 허공에 두고 몸뚱이만 떨어지는 것 같은 거센 추락감과 오싹한 소름을 견디며 엘제이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뜬 눈에 보이는 풍경은 어두컴컴한 방 안이었다. 혼란스럽게 도르륵 굴러가던 눈이 향한 곳은 숨을 색색


내쉬며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새근새근 내뱉는 부드러운 숨결이 밀색 머리카락 몇 가닥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깎아 만든 듯 우아한 턱선과
날렵한 콧대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꽤 선명하게 보였다. 원래의 색감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늘진 얼굴도
아름다웠다.

엘제이가 물기 어린 눈으로 곁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편안한 낯으로 잠든


남자의 얼굴 위로 퉁퉁 부어오른 어린아이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물기 고인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
아롱아롱 흔들렸다.

엘제이는 숨이라도 잘못 내뱉어 예민한 남자를 깨울까 봐 걱정하며 눈만 깜빡였다. 아제프를 마주 본 상태로
옆으로 누운 엘제이의 몸에는 단단한 팔이 안착해 있었다. 아마, 엘제이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기라도 했다면
바로 잠에서 깨어났을 남자다.

그걸 알기에 숨을 낮게 죽이고 눈을 감았지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저 멀리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마구잡이로 부유했고, 제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낙엽처럼 추락했다. 무의식이 올라와 자아를 침식했다.

자아를 잃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제 것이라고 믿었던 기억과 생각을 더는 신뢰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구지?’
원초적인 물음과 혼란이 떠올랐다. 뭐라고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분명 이곳에 존재하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책 속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달라졌다.

이야기는 뒤틀려버렸고, 방금 누가 정해진 이야기를 뒤틀었는지 깨달았다.

18 살의 엘제이 티아세와 3 살의 엘제이 티아세.

‘둘 중 누가, 아니, 둘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원래부터 한 명인걸. 한 명? 나는 엘제이 티아세인가? 아니야.


내 이름……. 내 이름이 뭐지?’

엘제이 티아세. 엘제이 티아세. 엘제이 티아세.

온통 이 이름만 떠올랐다. 분명 다른 이름이 있었고 다른 삶을 살았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잊어버렸다.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삶을 살다가 우연히 [신의 문장]이라는 책을 읽었고, 그 책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으며,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것만 기억났다.

분명 그 삶에서도 소중한 것들이 있었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아끼던 물건, 소중한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잊히고 지워졌다.

빗물에 몸을 내어주고 차츰차츰 젖어갔다. 처음은 가장 중요하지 않았던 기억부터 시작했다.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전날 챙겼던 책가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다음날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런 사소한
게 지워졌다.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떠올리지 않아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젖는지도 모르고 서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빗물에 몸 전체를 내어준 후였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잊은 후였다. 그 삶을 살며
소중하게 생각했던 걸 잊어버렸다.

몸 한쪽이 텅 빈 듯 지독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너무 공허하고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며 울고 싶은데, 곧 그


감정도 빼앗길 것 같았다. 왜 슬퍼해야 하는지 그 이유마저 잊을 것 같았다.

미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싶었다. 자아를 잃어버리는 고통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이상한
기억들이 쏟아졌다. 인간이라면 무의식 속에 가둬두고 잊어버렸어야 할 유아기적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이 쏟아져
내렸다.

사라지는 것들과 채워지는 것들이 서로 엘제이의 머릿속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다툼을 시작했다. 뇌가 곤죽이 된
듯 흐물거리고 관자놀이가 뜨겁게 타올랐다. 열이 바짝 오른 머리가 터질 것 같이 괴로워서 엘제이의 숨이 가쁘게
내뱉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미칠 것처럼 혼란스러운데 몸도 죽을 것처럼 아팠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호흡이
흔들렸다.

어떻게든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엘제이의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하얀 이불보가 손끝에 걸려 사정없이


구겨졌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온몸을 빳빳하게 긴장시켰지만, 견디기 힘든 괴로움에 온몸이 바르작바르작
경기하듯 떨렸다.

엘제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입술을 독하게 물고 소리를 참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버텼지만, 위험을 감지한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오싹한 감각에 눈을 치뜬
아제프가 졸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달게 자던 중이라 몸을 흔드는 불쾌한 감각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그는 눈을 떠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4 화
74

“제이?”

숨을 헉헉- 내뱉으며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엘제이를 발견한 아제프가 엘제이의 몸에 올려뒀던 팔을 조심스럽게


치우며 일어났다. 그는 덜덜 떨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엘제이를 살폈다.

하얀 이불로 동동 감아놓은 모습 그대로 얌전히 누워 있었지만, 몸이 평소보다 더 뜨거웠다.

아제프는 파리하게 질린 뺨 위에 손을 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제이, 괜찮아요?”

“흐윽, 추워……. 아제프…….”

혼자 참아내려고 애쓰던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엘제이가 연약한 짐승처럼 울며 안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보며 황급히 엘제이를 안아 올린 아제프가 그녀를 제 허벅다리 위에 앉히고 꼭 끌어안았다.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얼굴을 사납게 찌푸린 아제프가 엘제이의 등을 도닥거리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와!”

밖이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인상을 찡그린 아제프가 문밖을 불안한 듯 바라봤다. 그는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의원의 멱살을 잡아 끌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제이가 저를 두고 가지 말라는 듯 그의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며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흐으- 아제, 프…….”

엘제이는 그만이 간절하게 필요하다는 듯 몸을 찰싹 붙이고 매달렸다. 놀란 얼굴로 엘제이를 살피던 아제프가
몸에 힘을 준 그녀를 다독거리며 달랬다.

“쉬이, 금방 의원이 올 거예요. 저 아무데도 안 가니까, 몸에 힘을 풀고 나한테 기대요. 내가 붙잡을 테니까.


응?”

그가 여린 팔목을 주무르며 속삭이자 엘제이의 몸에 힘이 빠졌다. 아제프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미끄러지려는


엘제이의 몸을 한 손으로 단단히 받치고 다른 한쪽 손으로 뺨을 쓸어보았다.

많이 힘든지 엘제이의 몸이 달달 떨렸다. 아제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붉게 짓무른 눈가에
서늘한 손을 올려 매만졌다.

분명 아까까지 잘 자는 걸 확인했고, 몇 시간 전에 진찰받았을 때는 몸에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제프가 덜덜 떠는 엘제이를 꼭 끌어안으며 파리한 얼굴에 달래듯 입을 맞췄다.

엘제이는 뜨거운 눈을 떠 그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도와달라는 듯 저리 애타게 부르는데, 아제프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끙끙거리며 몸을 뒤트는 엘제이를


보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무서울 정도로 열이 오르는데 엘제이는 춥다는 듯 몸을 덜덜 떨었다.

분명 편안한 얼굴로 잠든 걸 보고 눈을 감았는데, 이상했다. 악몽을 꾼 것이라도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일


리는 없었다. 엘제이는 마치 저주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자,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거예요. 호흡이 너무 빠르니까, 힘들어도 천천히.”

엘제이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울먹울먹 서럽게 얼굴을 흐렸다. 그를 따라 천천히 숨을 쉬고
있지만, 몸이 너무 아팠다.

누가 날카로운 창으로 온몸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거대한 바위에 눌려 압사당하는 것처럼 숨
쉬기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가위에 눌린 걸지도 몰랐다.

몸도 너무 아프지만, 제정신도 아니었다. 엘제이는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에 저항하려 애쓰며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

거친 황무지처럼 갈라진 목구멍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엘제이는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뻐끔뻐끔 입을 벌리며 그의 이름을 부르려 애썼다.

“쉬이, 말하지 말고 진정해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제가 옆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눈을


감아보세요.”

엘제이의 눈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혼란스럽고, 아팠다.

‘아제프……. 제 기억이, 이상해요.’

엘제이는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끈질긴 공명의 밤이 다시, 어둡게 드리웠다.

사건의 축은 그날 밤, 기울기 시작했다.

***

시야가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눈부신 빛에 미간을 좁힌 엘제이가 시야를 확보하려고 애쓰며 머리를 붙잡았다.
눈을 뜨고 앞을 보는데도 화이트아웃 현상처럼 눈앞이 온통 하얗게 빛났다.

지잉- 울리는 이명에 귀를 벅벅 긁고만 싶어졌다. 결국 귀를 감싸고 주저앉은 엘제이는 혼자만 남은 하얀


공간에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귀를 막 긁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촉감이 느껴지자 어지러웠던 시야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엘제이가 차가운 손을 꼭 붙잡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 손을 살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눈송이처럼 새하얀 아름다운 손이었다. 여자의 손이라기에는 제법 굵었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손톱까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손은 그녀가 몇 번이나 꼭 붙잡았던 손이었다. 손의 주인을 떠올린 엘제이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제프.”

“…….”

그녀의 부름에 늘 상냥하게 대답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엘제이가 멍하니 하얀 손을 붙잡았다. 손을
꼭 붙잡고 있으니 하얀 손은 자꾸만 작아졌다. 엘제이의 손보다 커다랬던 손이 줄어들어 보송보송한 아이의
손으로 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제프? 손이 왜 이래요?”

“…….”

그의 손이 아이같이 어려진 게 이상했지만, 솜털까지 새하얀 아이의 손이 너무 차가워 엘제이는 그 손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숨결을 호호 불었다. 이곳은 겨울인지 그녀가 숨결을 불어넣을수록 따스한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아제프, 왜 그래요? 이상해……. 왜 내 말에 대답을 안 해주는 거예요?”

이상했다. 그녀가 칭얼거리듯 속삭이는데도 부드러운 중저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그는 평소와 달리 엘제이를 다독여주지 않았다.

눈물이 고일 만큼 서러워 울먹울먹한 얼굴이 된 엘제이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겨우 그녀의 앉은키와 비슷한 작은 소년의 모습이 차츰차츰 드러났다.

그녀에게 뻗은 손을 지나자 다 낡아 찢어진 신발이 보였다. 고개를 더 들자 뼈만 남은 발목과 멍이 가득한


종아리도 보였다. 이 추운 날, 옷을 벗고 있는 게 몹시 이상해 엘제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확
끌어왔다.

추울까 봐 안아주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힘없이 딸려온 소년은 그녀의 품에 툭- 무너졌다.

“아악! 아니야……. 아제프……? 아니야! 아니야!!!!”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은 엘제이가 반쯤 타버린 시꺼먼 시체를 안고 덜덜 떨었다. 겨우 그녀에게 뻗은 한 손만


남기고 다 타버린 소년의 시체에는 까만 진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누가 그를 산 채로 태우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운 얼굴로 죽어버린 소년의 시체에는 눈이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 니야. 아제프- 꿈, 꿈이야!”

엘제이가 발작적으로 외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꿈에서 탈출하기 위해 엘제이가 벌떡 일어나자 툭- 굴러간
소년의 시체에서 발이 쪼개져 떨어졌다. 엉거주춤 일어나던 엘제이의 몸이 뚝 멈췄다.
온몸을 덜덜 떤 엘제이가 소년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 떨어진 발을 붙이려고 하자 까맣게 탄 발은 잿더미가 되어
가라앉았다.

“아니야……. 침착해. 다 꿈이야. 아제프는 벌써 스물한 살인데, 이 아이는 어린아이잖아! 아니야!!!”

엘제이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손톱을 달달 깨물었다.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헤집던 엘제이가 소년의 시체에게서 떨어지려는 듯 몸을 조금씩 물렸다.

엉덩이로 주저앉아 몸을 물리자 눈 속에 파묻혀 축축하게 젖은 몸이 곧 감각을 잃었다.

차가웠다. 저 아이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차가움을 느꼈다.

꿈속이라고 외면하던 엘제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꿈이 아니었다. 엘제이의 고개가 끼리릭- 녹슨 철문처럼
움직이며 까맣게 탄 얼굴을 바라봤다. 까만 그을음이 내려앉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분명 아제프였다.

그녀가 꿈속에서 만나던 어린 아제프였다.

“아제프……. 아니잖아요. 이런 거, 없었는데, 지금 나랑 같이 있는데, 왜…… 왜 거기서 죽어있어요?”

엘제이가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턱을 바르르 떨었다. 울음이 서린 얼굴이 덜덜 떨리고, 그를 향해 뻗었던


손이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떨렸다. 그녀가 확인해보려는 듯 까맣게 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불타서 괴사한 뺨에 손이 닿았다. 뜨거울 줄 알았는데, 무척 차가웠다. 시체의 냉기에 놀란 그녀가 손을


치우자마자 아제프의 몸이 폭삭 무너졌다.

“아악!!! 아니야!!!”

엘제이가 사라진 그의 시체를 찾으려고 눈을 잔뜩 헤집었다. 그녀가 눈을 마구 파내자 까만 잿더미가 된 그의


몸에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그 옆에 툭 떨어진 손 하나가 보였다. 손목도 남지 않고 타버렸지만,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던 한쪽 손만은 깨끗하게 남아 자리를 지켰다.

손을 찾아 다행이라는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던 엘제이가 하얀 손을 가슴에 품고 그의 몸을 찾아 헤맸다.

“손이……. 왜, 손만……. 몸은 어디에……?”

잿더미로 가라앉는 순간을 봤음에도 그녀는 그의 몸이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손이 빨갛게 부르트고
손톱이 다 벗겨지도록 하얀 눈을 파내던 엘제이의 뺨 위로 새하얀 눈송이가 톡- 떨어졌다.

뺨에 닿는 차가움에 엘제이가 고개를 들자, 그때를 놓치지 않은 눈이 남은 아제프의 손마저도 집어삼켰다. 눈이


닿자마자 까맣게 부서지는 손에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아니야! 가지 마. 아제프, 제발…….”

아주 천천히 부서지던 손끝이 애처롭게 떨리며 우는 그녀를 달래려는 듯 그녀 쪽으로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헛된 저항이라는 듯 눈은 손을 집어삼켰고, 그나마 남아 있던 그의 손도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엘제이의
손아귀에는 이내 까만 잿더미만 남았다.

엘제이는 다시 손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아주 작게 부서진 잿더미는 까맣게 흩날리며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꿈이야.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어. 꿈이야…….”


엘제이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는 꿈을 꾸면 이게
꿈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엘제이는 아제프를 꿈속에서 만날 때, 항상 꿈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이성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녀는 폐인 같은 얼굴로 주저앉아 멍하니 꿈이라고만 중얼거렸다. 이런 게 아제프의 과거일 리가 없었다. 다


꿈이었다. 꿈이어야만 했다. 어서 깨고만 싶었다. 살아 있는 그의 품에서 무서운 꿈을 꿨다고 칭얼거리며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5 화
75

탁탁탁- 급하게 뛰어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약초를 한 움큼 품에 안고 급하게 뛰어오는 어린아이. 그는 아제프였다. 살아 있는 아제프를 발견한 엘제이의


흐릿한 눈에 반짝, 빛이 돌았다.

“뭐야……. 이럴 줄 알았어.”

아까까지는 환상을 본 게 틀림없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엘제이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차가운 눈이 손에


닿아 부르튼 손이 따가웠지만, 엘제이는 그 모든 걸 외면하며 뛰어오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이는 발을 헛디뎠는지, 엘제이의 코앞에서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아제프, 조심해야죠.”

엘제이가 그를 붙잡아주려 손을 뻗었지만, 아이는 그녀를 휙- 통과해 지나가버렸다.

“아깐 분명 만졌는데……. 아, 그게 환상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얀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 모를 정도로 일그러졌다.

엘제이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던 차가운 감촉을 떠올리며 멍한 얼굴을 하다가 곧 환상이라는 단어에 그 모든 걸
끼워 맞춰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엘제이는 저 멀리 뛰어가는 아제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금 뛰어가니 그가 어릴 적 살던 집이 보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집은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엘제이는 어느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제프를 따라 서둘러 움직였다.

“엄마? 아빠?”

벽을 통과해 들어가자마자 아제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막 벽을 가로지른 엘제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그의 부모님이 보였다.

아제프의 손에서 약초가 투두둑 떨어졌다. 바닥에 흩어진 마른 약초를 바라보던 남자 한 명이 아제프의 뒷덜미를
잡아 그를 들어 올렸다.

“아! 네가 이 집 아들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 추운 날 멀리 나가야 하는 줄 알았다고! 그럼 이제 묻으러


가자!”

다른 남자 두 명이 각각 소피아와 휴버트의 시체를 들어 올리자 아제프가 그쪽으로 손을 뻗으며 몸을 흔들었다.

“엄마! 아빠! 이거 놔! 읍!”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인 남자에게는 미약한 반항이었다. 남자는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아제프의
입을 천으로 막고 그를 대충 어깨에 둘러멨다. 배가 짓눌린 아이가 신음을 토해내며 허덕였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엘제이 역시 아제프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은 그들을 통과할 뿐이었다. 엘제이가
아무리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도 그들은 아무 방해도 없이 아제프를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이쯤이면 될 것 같은데? 추운데 멀리 가지 말자고. 불도 잘 안 켜지고.”

그들이 멈추어 선 곳은 처음 엘제이가 아제프의 시체를 발견했던 곳이었다. 아까 봤던 까만 잿더미는 내리는 눈에


파묻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엘제이가 파놓은 눈뭉치가 한쪽에 쌓여 있어 알 수 있었다.

“아까는 됐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 거지?”

엘제이가 멍하니 그 눈뭉치에 손을 뻗었지만, 아까의 일이 거짓이라는 듯 눈뭉치는 그녀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사이 소피아와 휴버트의 시체에 기름을 뿌리고 장작을 깐 이들은 곧 그들의 몸에 불을 붙였다. 시체 두 구가


나무 위에서 빨갛게 타올랐다.

“읍! 으읍! 으으으으!!!”

아제프가 부릅뜬 눈으로 새빨간 화마를 담으며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두 손이 붙잡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저항이라도 남자는 귀찮았는지 아이의 배에 칼을 찔러버렸다.

“아제프!!!”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배에서 피를 쏟아내는 그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아제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제프가 꿈틀꿈틀 눈밭을 기며 타오르는 시체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눈의 핏줄이 터졌는지, 맑은 청안을 담았던
흰자위는 온통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셋 중 가장 체구가 작은 한 남자가 눈밭에 뿌려지는 아이의 피를 보며 불길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야! 애는 좀 고통 없이 죽이라고 했잖아! 바로 숨이 떨어지게 했어야지! 저주받는다고!”

“아! 넌 그딴 미신 좀 믿지 마. 빨리 끝내기나 해!”


“뭐? 산 채로 태우라고? 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찝찝하다고!”

남자들이 아제프의 목숨을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다. 엘제이는 그사이 어떻게 해서든 아제프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투명하게 변해버린 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제프의 입을 가렸던 천이 풀렸는지 아제프가 끅끅 소리를 내며 그들을 노려봤다. 핏줄이 터진 눈이


불처럼 타오르자, 한 남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죽여 버릴, 끄으, 거야! 다 죽여 버릴, 크읍! 아아아아!!!”

저주를 받는다고 중얼거리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제프의 눈에 단도를 박고 그의 눈을 파내버렸다.

“아아아!!! 아제프!!!”

엘제이가 눈밭에 쏟아지는 아제프의 눈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엘제이가 바닥을 기며
아제프의 눈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남자가 그걸 들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아아- 아…….”

엘제이가 멍하니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그가 받은 무수한 고문 중에 눈을 뽑는 일은 없었다.


이건 꿈이었다. 엘제이가 아름다운 벽안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젠장. 저 꼬맹이 기분 나빠. 저런 녀석은 눈을 뽑아버려야 저주를 안 받아!”

“엄마, 아빠, 저…… 쿨럭, 저, 아파요…….”

아제프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얼굴에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가 헛손질하며 바닥을 기었다. 오한이 든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며 꿈틀꿈틀 기어간 엘제이가 그를 가슴에 품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끈질긴 놈.”

미신을 믿는 남자가 아직 살아 있는 아제프를 끔찍하다는 듯 바라보며 타오르는 불 속으로 아이의 몸을 휙 던졌다.


아제프를 품고 있던 엘제이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닿지 않았다.

“뭐야. 네가 죽은 다음에 넣으라며.”

“뭐. 저놈이 저러는 게 한두 번이야? 이만 가자. 눈이 많이 와서 어차피 묻힐 테니까.”

아제프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제이는 그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 아윽, 아아아!!! 아제프!!!”

바닥을 거의 기다시피 뛰어간 엘제이가 타오르는 불을 헤집으며 아제프를 찾으려 애썼다. 타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야가 붉어 아제프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 밖으로 튀어나온 손을 발견한 엘제이가 보송보송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안 돼! 죽지 마! 아제프! 아제프…….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줘. 아제프.”

하얀 손끝이 그녀를 향해 살짝 움직였다. 엘제이가 꿈틀거리는 하얀 손을 보며 제발 가지 말라고 속삭였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가 타오르는 불에 삼켜졌다.
타닥타닥- 그의 몸을 삼키는 악독한 화마의 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나무가 다 타고 하얀 눈밭에 불이 닿자 불은 저절로 꺼졌다. 엘제이는 불이 꺼지고 남은 까만 잿더미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백치가 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얀 얼굴은 표정 변화 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려보냈다.

“돌아가고 싶어. 다 꿈이잖아. 아제프……. 무서워요. 깨워줘……. 아제프, 어디 있어요?”

이게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녀가 꿨던 꿈 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그런데, 꿈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너무 무서웠다. 밤낮이 한 번 바뀔 때까지 돌아가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영원히 여기 갇힌 거라면 죽고만
싶었다.

그때, 저벅저벅 울리는 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작고 조그만 발이 눈을 사박사박 밟는 소리에 엘제이의 눈에
옅은 희망이 떠올랐다.

새하얀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언니, 모든 걸 바꾸지 않을래요? 우리가 함께.”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한 소녀가 눈물을 쏟아내며 서 있었다. 잡아달라는 듯 손을 뻗은 소녀는 3 살의 엘제이


티아세였다.

엘제이가 본 아제프의 죽음은, 그녀와 어린 엘제이가 바꾸기 전의 과거였다.

***

엘제이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봤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새싹처럼 포근한 눈은 형광을 띤
형안(螢眼)이었다.

“너는, 어떻게 나를…… 봐?”

“어떻게 언니를 보는지 궁금하세요?”

아이는 엘제이의 놀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슬픔으로 얼룩진 어린 얼굴은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듯 옅은 동질감을 띠고 있었다. 엘제이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꿈속에서 다른 사람이 그녀를 자각하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엘제이 티아세의 유년에는 이런 기억이 없었다.
정말 악마에게라도 홀린 것 같았다.

엘제이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아이는 잡아달라는 듯 손가락을 살짝 들썩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어린 손이 불타 죽은 아제프의 것과 닮아서 엘제이는 쉽게 그 손을 맞잡지 못했다.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았다. 또 잿더미가 되어 부서져 흔적도 없이 가라앉고, 그 비통한 까만 흔적들을 끔찍할
만큼 하얀 눈송이가 집어삼킬 것 같았다. 엘제이는 송이송이 내리는 하얀 눈을 증오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 어디 있어요? 이상해……. 저 무서워요.”

엘제이가 넋을 놓고 중얼거리며, 무릎을 모았다. 저 아이는 환상인지도 몰랐다. 아까 눈을 만졌던 것처럼,


환상이라 저를 보는 게 틀림없었다. 엘제이는 돌아가고 싶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랐다.
아까 들은 아이의 처절한 비명이, 부서져 내리던 하얀 손이, 너무 큰 악몽이었다. 옅은 희망이 떠올랐던 눈에
무채색이 번져 탁하게 흐려졌다.

“바꿀 수 있어요. 바꿀 수 있는데, 아제프를 저리 둘 거예요? 저렇게 죽게 놔둘 거냐고!”

아이가 얼어붙은 입술로 소리치며 소복하게 쌓이는 눈무덤을 가리켰다.

벼락같은 외침이 가슴을 찔렀다. 송곳에 후벼 파인 것처럼 피가 철철 났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저
차가운 곳에 내버려둘 거냐고 물었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도록 불탄 어린 생명은 그렇게 죽어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자들에게
짓밟혀 꺼져도 되는 불씨가 아니었다.

그에게 정해진 운명이 겨우 저딴 것일 리 없었다. 매일 아버지에게 얻어맞아 하루라도 멍이 사라질 날이 없었던


겨우 5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저렇게 죽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된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제이.]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해사하게 접히던 아름다운 얼굴. 부드러운 산들바람을 닮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온유하고 부드럽게 가라앉던 맑은 벽안.

이 모든 게 그가 가져야 할 것이었다. 저토록 아름답고 화사하게 피어날 꽃이었다. 꽃망울도 터트리지 못한 채


저리 가냘프게 져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처럼 그렇게……. 사랑받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래. 그게 진짜 당신의 운명이야. 저딴 게 아니라 남들만큼, 아니, 남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한 삶이 그가


누려야 마땅한 것이었다.

엘제이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엘제이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눈으로 눈무덤을 바라봤다. 저건 허몽(虛夢)


이다. 그래야만 했다.

“뺏기게 두지 않아.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6 화
76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연약하게 부서지던 마음을 꽉꽉 동여맸다. 여기서 그녀가 무너지면, 그는 끝이었다. 정말
저렇게, 죽는 거다.

두려움으로 질려 있던 텅 빈 눈에 의지가 깃들고, 강한 집념이 서렸다. 엘제이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

거울에 비친 자신처럼 두 명의 엘제이가 똑같이 말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고, 두 사람의
얼굴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같은 빛을 머금었다. 초록빛을 머금은 맑은 물에 곱게 간 빛가루를 뿌려 만든 듯 오묘한


빛깔이, 두 사람의 눈에 새겨졌다.

두 개의 형안(螢眼)이 서로를 바라봤다. 엘제이가 천천히 일어나며 아이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저벅저벅.

또 한 번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다른 묵직한 발소리가 연달아 빠르게 들려왔다. 저벅저벅 눈을 밟는


소리는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두 명의 엘제이가 발소리를 쫓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눈에 파묻혀 아주 작게


튀어나와 있는 나뭇조각을 보며 소리쳤다.

“이쪽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몇 개의 발이 또 사각거리며 눈 밟는 소리를 냈다. 발목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고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버지…….”

조금 침통한 얼굴을 한 아이젠이 하얀 눈무덤을 손으로 헤치며 그 안에 파묻힌 나뭇조각을 꺼냈다. 끝이 다


타버린 나무가 덜컥 흔들리며 쪼개져 떨어졌다. 아이젠은 잿더미가 묻은 손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피아.”

옅은 미안함과 슬픔이 섞인 목소리가 잔잔히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하얀 눈뭉치를 바라보던 아이젠은
입술을 열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중얼거렸다. 아주 짧은 시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곧 몸을 돌려 돌아갔다.

“남아 있는 유골을 수습해 좋은 곳에 묻어줘라.”

아이젠은 그것만으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미련을 두지 않았다. 우두커니 남은 남자들이 눈뭉치를 헤집었다.


그들은 두 명의 엘제이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여기 있는 거 맞아? 안 보이잖아.”

“탔으니까 그렇지. 죽어가면서 거짓말하지는 않았을 테니, 여기 있겠지.”

남자들은 추운 겨울날 눈밭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 귀찮은지 투덜거리며 눈을 팠다. 간밤에 뽀얗게 쌓였던
눈이 거친 삽에 헤집어져 까만 그을음을 토해냈다. 남자들은 하얀 원형의 도자기에 그것들을 대충 눌러 담았다.

삽에 꾹꾹 눌러지는 눈은 그의 몸이었고, 그의 영혼이었다.

뼈조차 으스러져버렸으니 저렇게밖에 수습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엘제이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까만 잿더미를 끌어안았다. 떠나는 길만이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데, 엘제이는 그를 품어줄 몸이 없었다.
그게 죽고 싶을 만큼 슬퍼서 엘제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다.

“모든 걸 되돌려야 해요. 이제 가요.”

아이가 다시 잡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엘제이는 어린 태가 나는 보드라운 손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힘주어


붙잡았다. 새하얀 두 개의 손이 서로를 넝쿨처럼 타고 올라 단단히 얽혔다.

맑은 녹안에 가라앉아 있던 빛무리가 소용돌이치며 휘몰아쳤다. 이미 망가져 깊게 가라앉아 있던 자질을 툭툭


건드리는 거센 바람에 엘제이가 아이의 손을 놓고 몸을 구부리며 주저앉았다.

“크읍! 쿨럭!”

엘제이가 침을 흘리며 입을 고통스럽게 벌렸다. 목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안에 있는 장기를 들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땅을 짚은 손이 흙바닥을 긁고 애처로운 손자국을 냈다. 아이는 고통스러워하는 엘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조그만 어깨에 헉헉거리는 숨결이 닿았다. 엘제이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고통으로 헉헉거리던
엘제이는 뜨거운 무언가가 몸 위로 쏟아지자 고개를 들고 앞을 보려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피 묻은 손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아윽, 아아!”

누가 아이의 손을 바위로 내리치기라도 한 듯 형편없이 짓뭉개진 손이 덜덜 떨며 엘제이의 눈을 가렸다. 더는


보지 말라는 듯 엘제이의 눈을 덮은 자그만 손에서 피가 쏟아졌다.

엘제이만 고통을 겪은 게 아니었다. 그녀만큼, 아니, 그녀보다 더한 고통을 아이는 견뎌내고 있었다.

운명을 바꾸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 새빨갛게 물이 든 아이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해요. 여기, 부터는…… 언니 혼자, 가야 해.”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몸뚱이가 겨우 숨결을 내뱉으며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뜨거운 것이 왈칵 터져 엘제이의 몸


위를 덮었다.

“흐윽- 커헉!”

온기를 담은 인간의 체온이 싸늘한 바람에 걸려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차갑게 변한 살덩어리는
흡수되듯 엘제이의 몸 아래로 스며들었다.

아이가 전해주고 싶어 했던 지식과 소망이 엘제이에게 밀려들어왔다.

‘너는…… 아제프를 살리고 싶어서 나를 부른 거구나. 저렇게 죽는 게 정말, 그의 끝이야. 아제프는 이미


처음부터, 악마에게 노려지고 있었어. 이 따위로 죽는 게, 이번 생이! 정말 당신의 마지막이었어.’

엘제이 티아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엘제이는 아이의 죽음을 서글퍼할 시간도 없었다. 아직 기회가 있었다. 흐느껴 울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몸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고, 누군가 생살을 쥐어뜯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엘제이는 손을 뻗어 바닥을
내리쳤다.

그때, 뜨거운 불이 몸 위로 번졌다. 욕심 많은 화마가 운명의 길을 여는 대가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화마는


엘제이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살과 뼈를 취했다.

엘제이는 그렇게 살점을 빼앗기며 천천히 줄어들었다. 화마는 엘제이의 몸을 반쯤 집어삼키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고, 시야는 다시 흔들렸다.

파지직- 파지직-

하얀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고, 거울에 금이 가는 것처럼 대기가 부서졌다. 엘제이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풍경을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쩍쩍 갈라지던 틈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큰소리를 내며
터졌다.

쾅!!!

귀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길을 열어준 화마가 잿더미를 토해내듯 그녀를 버리고 물러났다.

운명의 길이 열렸다. 윤회를 반복하는 인간의 혼이 지나가는 어둡고 컴컴한 길.

이 길을 지나가야 했을 아제프는 그 틈에 끼어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윤회를 반복하지 못한


그의 영혼이 울부짖으며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엘제이는 3 살의 아이처럼 작아져 바닥을 기었다. 새까만 바닥에 어린 피가 고여 주룩주룩 흘렀다. 거친 바닥이
여린 살결을 긁었지만, 엘제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윽, 제발.”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미 엉망진창으로 뜯기고 빼앗긴 자질이 마지막 생명을
토해내듯 환하게 빛나며 길을 비췄다.

엘제이 티아세, 그녀의 자질인 공명(共鳴)은 짝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제공했다. 다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를 뿐이었다.

저 길을 가야 했다. 틈에 끼여 지나가지 못하고 구슬피 우는 아제프의 혼을 꺼내줘야만 했다.

하얗고 어린 손이 구원을 바라며 흔들렸다. 운명의 틈에 끼여 짓뭉개진 몸뚱이가 살려달라는 듯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끝내 닿지 못하고 부서져버린 손을 향해서 엘제이는 기어갔다.

예외를 용서하지 않는 운명이 엘제이의 몸을 짓눌렀다. 견딜 수 없는 힘에 꿰뚫린 엘제이가 표본틀 위의 나비처럼


바르작거렸다. 너무 고통스러워 정신이 붕괴될 것 같았다.

“어억, 흐으…….”

눈물이 줄줄 흘렀다. 너무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듯 축 늘어졌다.

[제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낯설다는 듯 놀란 눈을 하던 해사한
얼굴이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그가 가져야 할 미래였다. 악마 따위가 넘보면 안 되는 영혼이었다.

그녀가 포기하면, 그는 정말 끝이었다.

엘제이가 포기하지 않고 뭉개진 손에 힘을 주자 운명이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어린 몸을 짓눌렀다.

쿵!

“아아아아악!!!”

엘제이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잔뜩 쉰 목소리가 쇳소리를 토해내며 꺽꺽거렸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눈앞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하얀 손에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며 달라붙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질척하게 달라붙은 혀가 탐욕스럽게 손을 타고 흐르며 하얀 살을 칭칭 감았다.

[예쁘네요, 제이.]

아름다운 사람이 꽃향기를 품은 모자를 꾹 눌러 씌우고 손으로 턱을 간질이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사근사근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엘제이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뼈가 하얗게 드러난 어린 손이 바위틈으로 들어가 힘을 줘 운명의 틈새를 비틀었다.

끼릭-

바위가 거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운명이 바뀌려는 신호였다.

“쿨럭, 끄윽, 돌려줘……. 그를, 헉! 돌려줘!”

새빨갛게 넘실거리던 혀가 불창을 토해내며 다가오지 말라는 듯 엘제이를 내리찍었다. 엘제이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른 채 끅끅거렸지만, 그 덕에 아제프의 손이 조금 드러났다. 엘제이가 온 힘을 다해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눈을 가렸던 어린 손처럼 다 뭉개진 손이 아제프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흔들거렸다.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요.]

울음을 토해내며 다 잊고 살고 싶다고 속삭였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다. 저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엘제이의
몸이 또 한 번 꿈틀, 움직였다.

“아제프…….”

손톱이 없는 빨간 손이 하얀 손을 꽉 얽어매고 그것을 힘주어 당겼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바위틈이 떨리며


금방이라도 손이 빠져나올 것처럼 휘청거렸다. 아니, 이미 바위는 손을 놓아줬는데, 욕심 많은 악마의 혀가
날름거리며 엘제이의 몸도 삼키려 했다.

[제이, 사랑해요.]

아름다운 얼굴이, 햇살 같은 미소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엘제이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다른 손을


뻗어 혀를 잡아 뽑으며 아제프의 손을 꺼냈다.

아제프의 손을 완전히 꺼내자 갈라진 바위틈으로 혓바닥은 사라져버렸고, 뒤틀린 운명에 공간이 들썩거렸다.
엘제이의 몸을 짓누른 바위도 덜컹덜컹 흔들리며 엘제이의 몸을 계속 눌렀다.

흔들리던 바위가 살짝 공중으로 띄워졌다. 잠시 숨이 돌아오자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놔주며 흐리게 웃었다.

“사랑해…….”

쿵!!!

새빨간 피가 자욱하게 번져 하얀 손을 덮었다. 언제나 운명은, 예외를 허락하지 않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7 화
77

[신의 문장] 속 엘제이는 그를 지키고 이렇게 죽어버렸다. [신의 문장]은 엘제이가 이렇게 해서 한 번 바꿔놓은
운명의 이야기였다. 겨우 3 살에 생을 마감한 어린 꽃은 이미 져버렸기에 책 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또 한 명의 목숨이 필요한 법. 3 살의 엘제이는 그 시기에 죽었어야 했다.

그녀를 사랑한 신의 개입이 없었다면.

엘제이 티아세와 아제프 란델이 모두 살 수 있던 이유는 또 다른 이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준 이는, 여신 프리멧사였다.

***

겨우 시야를 구분할 만한 옅은 빛만 돌 뿐, 새까맣기만 한 장소에 옅은 분홍색 빛이 솜사탕처럼 넘실넘실 흘렀다.


분홍빛 구름같이 몽글몽글한 기운은 곧 저들끼리 뭉치고 흩어지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분홍빛 구름에서 천천히 빠져나온 이는 프리멧사였다. 긴 분홍빛 속눈썹을 든 프리멧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바위에
짓눌린 엘제이를 바라봤다. 사람의 형상도 거의 남지 않은 육체는 기계에 갈린 고깃덩어리처럼 짓눌려 있었고,
아제프의 손은 어떻게 해서든 엘제이에게 닿고 싶은지 가련하게 흔들렸다.

프리멧사가 손가락을 딱- 움직이자 여신의 팔에 생채기가 나면서 아제프의 손이 천천히 날아와 바위틈에 낀
엘제이의 손 옆에 안착했다. 여신은 피가 주르륵 흐르는 하얀 팔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프리멧사는 운명의 바위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청했다.

[네가 삼킨 내 아이를 돌려주렴.]

여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운명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건 신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바위는 묵묵부답으로


저항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신이 하얀 이마를 바위에 대고 바위에게 애원해 보았으나 바위는 이번에도
여신의 숨결에 답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나 또한 포기할 수 없단다.]


프리멧사가 운명의 바위를 바라보며 사과했다. 이 바위에게도 죄는 없었다. 프리멧사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인
운명의 지킴이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미안해 한동안 바위를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바위를 달래듯 어루만지던 하얀 팔이 앞으로 올라왔다. 눈을 감은 여신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며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파직- 스파크가 튀며 여신의 팔과 다리에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신음 한 번 하지 않은 여신은
그대로 무언가를 움켜쥐고 안으로 확 끌고 들어왔다.

휘이잉-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돌풍이 불어왔다. 피를 머금어 눅눅하고 습해진 공기를 죄다 날려버릴 듯 거세게


부는 강풍이었다. 그와 동시에 바위가 흔들리며 덜컥덜컥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덜컥덜컥. 끼이익!

여신이 좀 더 힘을 주자 바위에 금이 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흔들렸다. 아이를 놓아줄 듯 말 듯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바위에 여신이 있는 힘껏 손을 움켜쥐었다.

끼릭! 탕!

결국 엘제이를 토해낸 바위가 한쪽으로 굴러가며 벽면에 부딪혔다. 그쪽을 조금 미안하다는 듯 보던 여신이
바닥에 앉아 짓눌린 살결을 보듬었다. 여신의 손이 닿자 엘제이의 몸 위에 신비로운 색감의 꽃이 피어나 꽃망울을
톡톡, 터트렸다.

[아이야.]

여신의 음색이 엘제이를 부드럽게 달래자 넝쿨처럼 엘제이의 몸을 감싼 꽃들의 잎사귀가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살랑살랑 움직였다. 꽃들과 잎에서 초록색 빛무리가 쏟아졌다. 곱게 갠 가루가 뭉개진 살 아래로 스며들었다.

피가 난 상처에 물을 붓는 것처럼 시원하고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따가워 엘제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을 들었다. 핏물이 고인 밀색 속눈썹이 힘겹게 경련하며 앞을 바라봤다.

여전히 핏물이 고인 손이었지만, 그래도 형태는 알아볼 수 있게 치료된 손이 움찔- 흔들렸다. 엘제이는 손에
닿는 어린 살결에 흐린 눈을 팔랑거리며 눈에 힘을 줬다.

“아제프…….”

[일어날 시간이란다. 그가 널 기다리고 있어.]

모든 걸 품는 대지처럼 자애로운 음색이 젖과 꿀처럼 풍요롭게 흘렀다. 귓가를 촉촉하게 적시는 음색에 앞을
바라보자 하얀 공간이 떠올랐다.

갈라진 공간의 틈 사이로 쓰러진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제프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채 달뜬 소리를
내는 엘제이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뺨을 맞댄 채 그가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쥐어뜯었다. 필사적일 만큼 손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속삭였다.

“아제프, 아윽!”

[그래. 네가 돌아갈 곳이란다. 이리 와보렴.]

이번에는 죽어 손만 남은 어린 손이 보였다. 엘제이는 손만 남아서도 그녀를 붙잡은 어린 손을 보며 그걸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또르르-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두운 시야를 밝히는 분홍색 빛을 따라 홀린 듯 고개를 돌리던 엘제이가


축축하게 고이는 신혈(神血)에 슬픈 얼굴을 했다.

그녀의 자질은 공명, 다른 이의 마음에 동화해 위로하며 그들의 앞날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었다.

어렴풋이, 여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이해하게 된 엘제이가 슬픈 얼굴로 여신을 바라봤다. 힘이


약해 완전히 현신하지 못해 투명한 팔과 다리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와 고였다.

[걱정해주는 거니? 괜찮으니, 이리와 보렴.]

엘제이가 투명하게 빛나는 손을 잡았다. 상처가 좀 생겼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손이었다. 여신이 엘제의 손을
잡고 그녀의 품에 안긴 아제프의 손을 가리키자 환한 푸른색 꽃이 움트며 그의 혼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냈다.

엘제이가 텅 빈 손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온유한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녀를 달랬다.

[걱정하지 말렴. 그는 네가 지켜냈단다.]

“저는…… 죽었어야 했는데, 여신님이 저 때문에, 죄송해요.”

엘제이의 눈이 죄책감으로 흐려졌다. 조금씩 낫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몽글몽글한 피를 토해내는 상처는 그녀를
돕느라 생긴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그건 슬픈 일이 아니란다. 네가 그를 지켰듯 나 또한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지킨 거란다.


아이야, 이리 와 내 이야기를 들어주렴.]

여신이 자책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손을 휘젓자 깜깜한 공간에 하얀 창이 다시 떠올랐다. 하얀 빛을 토해내는


창은 세상의 저편을 비췄다.

온통 하얗기만 한 공간에서 달리고 있는 소년을 본 엘제이가 눈을 뜨며 창 가까이 다가갔다. 살아 있는


아제프였다.

[저 아이는 똑같이 달렸지만, 다행히 너는 네 아버지를 보내 아이를 살리게 했지.]

여신이 다시 손을 젓자, 이번에는 고열로 들뜬 어린 엘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젠은 아픈 엘제이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 한 명이 저잣거리의 양아치들이 소피아의 집을
찾아갔다며 보고했다.

갑자기 옛 친구를 만나게 된 게 우연일까, 의심하던 아이젠이 습관적으로 제 눈을 남겨놨기에 알 수 있던


일이었다.

소피아의 가족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들은 아이젠은 아픈 엘제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도와줄
이유는 없었고, 어쩌면 함정일지도 몰랐다.

신중한 남자는 쉽게 선택하지 않고 더 자세히 알아오라며 기사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 사이 눈을 힘겹게 뜬


엘제이가 울음을 토해내며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청했다.

아이젠이 놀란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뜨거운 이마를 짚어보는데, 어린 엘제이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얼른 가달라며 애원하고 매달렸다. 아이의 간절한 청에 어쩔 수 없이 아이젠이 일어나자 엘제이는 다시 죽은 듯
잠들었다.

첫 번째 운명과는 달리, 기사들을 데리고 소피아의 집으로 찾아간 아이젠은 아제프보다 빨리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칼에 찔린 소피아와 휴버트를 발견하고 둘을 음해한 이들을 붙잡았다. 아이젠은 누구의 사주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자신들도 누구의 명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던 소피아가 눈을 떴다. 소피아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아이젠의 발을 잡고 아이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딸의 부탁을 들은 아이젠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하자 소피아는 집에 불을 질러 아이도 함께 죽은


것처럼 꾸며달라는 부탁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이젠은 배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찝찝했다. 괜히 그가 이곳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남기는 걸 원하지 않은


아이젠은 흔적을 지우려 소피아의 말대로 모든 걸 태웠고, 집이 불타는 중에 아제프가 돌아왔다.

아이젠이 아제프를 발견하고 그를 데려오라고 기사들을 향해 손짓하자 아제프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내달렸다.
딸에게 약속한 바가 있는 아이젠이 아제프에게 손을 뻗으며 그를 잡으려 했지만, 조그만 아이는 재빨랐다.

작은 체구를 이용해 숲으로 들어간 아이를 결국 찾지 못한 아이젠은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건 우연이었지만, 매사에 신중한 네 아버지는 쉽게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않았겠지. 네가 아니었다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서 혼란스러워요…….”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를 지키고 싶다는 강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자질이라는 건 의지에 달린 것이니,


그를 살리고 싶다는 그 간절함만이 남아 엘제이에게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섞이고 지워진 기억은 흐리게 남아
엘제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프리멧사는 공황에 빠진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엘제이의 눈을 바라봤다.

[자질이라는 건 양날의 검이지. 너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네 자질을 깨워버리고 말았단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질을
깨우쳐버리면 정신과 몸이 그걸 감당하지 못해야 정상이지만, 네 자질은 특별했단다. 남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었으니 마나의 힘이 부드러울 수밖에 없지. 네가 쌍둥이로 태어난 것도 천운이었어. 네 동생이 네
몸에서 폭발하는 자질의 일부를 감당해 네가 살 수 있었던 거니까.]

“리사가요……?”

[그래. 그 아이는 자질이 없지만, 너와 쌍둥이였기에 너의 불완전한 자질로도 쉽게 공명할 수 있었고 덕분에
너는 마나를 다스릴 시간을 벌고 좀 더 안정될 수 있었어. 하지만, 완전한 안정은 아니었을 테니 조절이 쉽지
않아 어린 나이에 많은 이들과 공명하고 말았어. 네가 애늙은이가 된 것도 그 때문이지.]

프리멧사는 조금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엘제이는 그때 본 침착한 아이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머리를 조금 긁적이던 엘제이의 손이 딱- 멈췄다.

엘제이의 유년에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8 화
78

“왜, 제가 가진 기억에는 왜 저 상황이 없죠? 저는 3 살 때, 19 살의 저를 만난 적이 없는걸요. 아, 원래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너무 어릴 때라서?”

[조금 복잡한 이야기지만, 정확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란다. 너는 어린 나이부터 어른의 정신을 가져버렸으니,
아마 그대로 자랐다면 기억했겠지. 네 기억이 불안정한 건 네 자질 때문이란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렴. 우선,
네가 방금 봤던 불타 죽는 아제프는……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원래 그가 가져야 할 운명이란다. 그는 5 살에
죽을 운명이었어.]

“그럴 수가……. 하지만! 왜……? 아제프는 겨우 5 살이었어요!”

[운명을 정하는 건 내가 아니란다. 잔인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슬픈 운명이, 누군가에는 행복한 운명이
내정된 거지. 그 모든 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일정하게 돌아간단다. 그러나, 때때로 운명을 거스르는 이들이
있어. 사람의 의지. 그것만큼은 신들과 운명조차 어찌할 수 없는 일이란다. 네가 바로 운명을 거스른 이 중 한
사람이지. 아까 직접 했던 것처럼 너 스스로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그를 살렸어.]

톱니바퀴의 한쪽이 잘리면, 모든 체계가 무너진다. 때문에 정해진 운명이 비틀려면, 그만큼의 살을 채워 넣어야
했다. 운명을 비트는 인간은 꽤 있다. 다만, 그들은 원래 그들이 가져야 했던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정해진 것을
바꿀 수 있었다.

[원래의 너는, 그러니까 3 살의 너는, 아제프의 운명을 엿봤어. 네가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 테지. 네 자질이
네 짝을 찾아낸 것뿐이니까. 쌍둥이에게 그랬듯 네 짝에게도 너는 쉽게 공명하고 만 거란다.]

“제 짝이요……? 아제프가요?”

[그래. 그 아이는 원래 5 살 때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번 생의 짝은 아니지만. 아마, 다음


생이나 다다음 생쯤에는 서로를 만날 수 있었겠지. 그가 악마에게 혼이 노려지지 않았다면 말이야. ……모든 걸
이야기해주기에는 시간이 짧구나. 이리 와보렴.]

프리멧사가 조금 초조한 음색으로 말하며 엘제이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강제적인 방법이라 머리가 좀 아플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프리멧사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시야가 또 복잡하게 얽히며 깊게 파묻혔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몇 가지 정보가 간추려졌다. 그건 아! 하는 깨달음이었다.

***

아제프 란델은 원래 5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운명이었다. 반면, 엘제이 티아세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오래 살 운명이었다. 아제프의 길은 가시밭, 엘제이의 길은 꽃밭. 그게 원래 이들에게 내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자질이라는 건 언제나 변수였다. 그것만큼 인간의 의지가 깃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엘제이의 자질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공유해주며 그들을 가볍게 위로해주는 것에서 끝나는 능력이었다. 가끔
사람의 미래를 보기는 하지만, 애어른 엘제이는 사람들의 미래에 쉽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가 처음 미래를 바꾸기로 한 건, 아제프를 보고 난 뒤였다. 홀리듯 그를 본 순간, 그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평소보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바라는 걸 들어주고 싶었다.

아제프의 기억을 읽고 그가 솜이불을 바란다는 걸 알게 된 엘제이는 아이젠에게 부탁해 아제프에게 그걸


전달해주었다.

멀리서 솜이불을 받아가는 아제프를 본 엘제이는, 좋아하는 그를 보며 그의 미래를 읽어버렸다. 그녀가 원했던 게
아니었고, 그토록 많은 미래를 한꺼번에 본 것도 처음이었다.

원래 엘제이가 가진 자질은 그만한 힘이 없었지만, 미래의 짝인 아제프에게만큼은 깊이 개입할 수 있었다.

평범하게 생을 마감하는 미래였다면 엘제이도 끼어들지 않았을 터였다. 생명은 윤회를 반복하고, 그 틈에 끼이지
않으려면 엘제이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이미 비틀려 있었다.

단순히 5 년의 생을 마감하는 데 그쳤어야 할 운명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비틀렸다. 악마가 그의 영혼을 탐냈다.

아제프는 원래 그 정도로 비참하게 죽지 않는다. 엘제이가 봤던 미신을 믿는 남자는 아이는 고통 없이 죽어야


탈이 없다고 믿었다. 남자는 아제프가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 단칼에 그를 즉사시킨다.

이게 처음 아제프에게 내정된, 그의 운명이었다.

원망과 증오를 느끼기도 전에 생을 마감했어야 할 어린 생명을 악마가 개입해 뒤바꿔 놓았다.

악마는 미신을 믿는 남자의 등에 업혀 혀를 날름거리며 아제프를 지켜봤다. 악마는 먹음직스러운 영혼을 빼내


오기 위해 남자를 조정해 아제프의 영혼을 나락으로 빠트렸다.

푸르게 빛났어야 할 영혼을 미움과 증오로 까맣게 타락시킨 악마는 새빨간 혓바닥으로 그의 혼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이미 한 번 비틀린 운명이었다.

악마에게 혼을 뺏긴 영혼은 환생하지 못한다. 머나먼 미래에 함께해야 할 짝이 그대로 이탈하고 만 것이다.

엘제이는 한 번 비틀려버린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방법을 알고 싶어 이미 한계라고 신음하는
자질을 쥐어짜다시피 해 운명을 바꿀 방법을 알아냈다. 무리해서 망가뜨린 자질은 몸까지 집어삼켰다. 그때, 3
살의 엘제이가 고열에 시달렸던 건 그 때문이었다.

엘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걸 희생한 만큼,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간단한 것이었다. 하나를
살리려면 하나를 포기하면 되었고, 엘제이는 기꺼이 그를 위해 제 생명을 내어줬다. 아까 19 살의 엘제이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운명을 또 한 번 비틀었다.

그렇게 하여 새롭게 짜인 운명이 [신의 문장]이었다.

목숨을 바친 엘제이가 허탈하게도 악마는 기어코 아제프의 영혼을 놓지 않았다. 그의 혼에 꿀이라도 발라놓았는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악마는 아제프의 짝인 엘제이의 쌍둥이를 이용해 그의 마음을 현혹한다.

엘제이의 희생은 결국, 5 년을 살았어야 할 그의 삶을 17 년 더 연장해준 것에 그치고 말았다. 아제프 란델은 22


살에 죽어 그 영혼마저 악마에게 빼앗겨버렸다.
프리멧사는 더는 엘제이가 그의 운명에 간섭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끼고 사랑하는 영혼이 그의 운명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것도 원통한 일이었는데, 아제프가 악마에게 홀려 스스로 엘제이의 문장을 까맣게 물들이자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프리멧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제프에게 벌을 주며 엘제이의 혼을 먼 세상으로 보내 한제이로 탄생시켰다. 더는


그의 삶에 간여하지 말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며 한 행동이었지만, 엘제이는 프리멧사의 바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혼이 또 한 번 까만 구렁텅이에 빠졌기에, 엘제이의 혼은 오열하며 울었다. 그녀의 혼은 이미 망가지고


부서진 자질을 어떻게든 쥐어짜내 그를 치료하려고 들었다.

환생한 뒤에도 매일 밤 꿈속에 들어가, 그의 안타까운 생을 보고 함께 울었다. 그렇게 치유하고 고치려 애써도
엘제이의 자질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망가진 것이었으니 제 기능을 발할 리 없었다.

꿈이 끝난 엘제이는 왠지 모를 공허를 느끼면서도 제가 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기억도 없이 의미


없는 발버둥만 계속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프리멧사가 엘제이의 세상에 [신의 문장]이라는 책을 내려 엘제이가 그걸 발견하게 했다.


엘제이가 그걸 읽고 꿈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리멧사는 또 한 번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에서 엘제이가 편안한 삶을 선택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그때와 같은
선택을 했다. 어떤 걸 희생해서라도 그를 구원하고 싶어 했다.

결국, 프리멧사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신의 피를 내주었다. 운명은 여신의 피를 머금고 또 한 번 운명을 뒤틀


기회를 줬고, 프리멧사는 엘제이와 아제프, 둘 모두를 살렸다.

그게 엘제이가 [신의 문장]에 들어와서 바뀌게 된 새로운 운명의 길이었다.

다만, 차원 사이의 시간 뒤틀림은 프리멧사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엘제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19 살의 운명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사이 이미 상처가 가득 난 아제프의 영혼은 엘제이의 치료가 필요했고, 엘제이는 또 무리해가며 그의 영혼을
치료하려 들었다. 그토록 무리했으니 몸과 정신 중 하나가 붕괴되는 건 당연했다. 엘제이의 의지는 오로지 아제프
하나만을 위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사랑하고, 그와의 추억이 서린 엘제이 티아세의 몸과 정신이 붕괴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티가 나지 않게 야금야금 기운을 내어줬고, 그와의 관계에게 덜 중요할 한제이의 정신을 붕괴시켜 그를
치료할 힘을 얻었다.

그렇게 한제이의 정신은 붕괴되었고, 그녀는 한제이로서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

엘제이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동안 자주 아팠던 일과, 한제이의 기억이 소멸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녀가 한제이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한제이를 죽이고 있었다. 엘제이는 이미 많이 흐려져버린 한제이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슬픈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의 머리가 아프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주던 여신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너는 또!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너라는 아이는 정말! 나는 널 어찌하면 좋을까. 한제이로서의 삶을
모두 버려도 정말 괜찮겠니? 지금이라도 돌아가려면 방법이 있단다. 아직 감정까지 지워지지는 않았잖니. 넌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프리멧사는 엘제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데도
엘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그분들은 외롭지 않을 거예요.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 이겨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아니에요. 그는
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함께 있어달라고…… 제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어요.”

선하고 고결한 영혼. 이토록 아름다운 아이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은 낮게 한숨을 쉬며 충고했다.

[정리를 해보자면, 그의 운명은 총 3 번 바뀐 거란다. 하나, 원래의 그는 5 살의 나이로 즉사한다. 둘, 악마의


개입으로 그는 5 살의 나이에 불타 죽고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다. 셋, 너의 개입으로 5 살의 위기를 모면하지만,
악마의 유혹에 꾀여 22 살에 영혼을 빼앗긴다. 그리고 넷, 이번이 내가 개입해 바꾼 마지막 기회란다.
신중해져야 해.]

“신중하게…….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요?”

[아이야, 운명을 바꾸는 일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너는 한 번 해내었잖니. 두 번째는 더 쉬울 거란다.


하지만, 네가 책에서 본 미래는 모두 내가 개입하기 전의 것이란다. 이제는 그 미래를 신용해서는 안 돼. 모든
건 다 바뀌고 말았어. 부디, 네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모든 걸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프리멧사는 이미 힘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렇게 현신하기 위해 이미


많은 힘을 소비한 그녀는 몸이 축축 늘어지는 걸 느꼈다. 이 상태에서 천기누설을 또 한다면, 프리멧사는 강제로
잠에 빠질지도 몰랐다.

아직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이상은 계속 이 아이를 지켜봐야 했다. 프리멧사는 여기까지라는 걸 깨닫고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했다.

[이제 돌아가 보렴. 네 짝의 곁으로. 나도 좀, 피곤하구나.]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79 화
79

“아! 여신님, 그럼 제 문장은…… 대체 뭐죠? 아제프는 문장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제 반려일 수가 있죠?
문장은, 동시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요?”

프리멧사는 간절하게 바라보는 엘제이의 눈을 보며 조금 웃었다. 그녀는 중대한 비밀을 말해준다는 듯 비밀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사실은 말이다, 아이야. 문장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란다. 그건 내가 주는 게 아니야. 내가 주는 건 그저


예쁜 색감을 더한 어떤 형태일 뿐이지. 모든 건 너희에게 달렸단다. 너와 네 짝은…… 아마, 도달할 수 있을
거란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엘제이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다가 가라앉았다. 프리멧사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금 지쳐
보였다. 엘제이는 신혈을 머금었던 프리멧사의 팔을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엘제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여신은 조금 뚱한 얼굴로 그녀의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말썽꾸러기 아이를


혼내는 느낌에 엘제이가 코를 쥐고 놀란 토끼 눈을 했다.

프리멧사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엄한 어조로 엘제이를 타일렀다.

[내가 걱정스럽다면, 이제 그를 치료하려는 건 그만두렴. 정말…… 그의 몸에 있는 상처를 싹 다 가져가려고 할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그 또한 너를 위했기에 기회를 준 거야.]

그 괘씸한 녀석이 옷을 홀라당 벗으며 보란 듯 상처를 보여줄 때는 기가 찼지만, 참을 만했다. 하지만, 그걸 본


엘제이가 세상이 무너진 듯 오열하며 그의 몸을 치료하려고 하자 기겁한 프리멧사는 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멧사는 인간의 의지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분명 한계의 한계까지 긁어모아 썼을 텐데, 어디서 또 그런 힘을
끌고 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프리멧사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단한 말썽쟁이를 바라보듯 엘제이를 힐끔 훑었다.

“저는, 여신님의 말씀을, 잘 모르겠어요.”

엘제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프리멧사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건 이 아이들이


해결할 문제였다.

여신은 그 능구렁이 같은 녀석에게 맨날 당하기만 하는 아이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예쁜 건 왜 그리도


좋아하는지 매번 그 얼굴에 홀려 홀랑 넘어가기만 하니 속이 꽉꽉 막혔다.

[그는 이제 거의 다 나았으니…… 네가 곁에 있어주면 나머지도 자연히 나을 거란다. 그러니, 그만 좀!


치료하렴. 아! 돌아가면 많이 힘들 테니, 그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당기면서 참아보렴. 그 꼴을 보면 나도 조금
시원할 것 같구나.]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억양에 힘을 준 프리멧사는 허리에 올린 손에 힘을 주며 악동같이 웃었다. 그 모습이


엘리사와 묘하게 닮아 엘제이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네?”

[트라우마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 그럼 그 꼴을 다 봤는데, 네가 멀쩡하겠니?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보렴. 만신창이잖니.]

프리멧사가 엘제이의 손을 들어 올리며 엄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저곳이 다 상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 흔들자 프리멧사가 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덕이지, 뭐. 그렇지만, 나도 한계란다. 더 도와줬다가는, 중요한 시기를 놓칠지도 몰라. 돌아가면, 그의


도움을 받으렴. 네가 한 만큼 그도 너를 도와줘야 하지 않겠니? 머리카락도 뜯어내면 더 좋고.]

프리멧사는 엘제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일단 그리 말했다. 이제는 하품까지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정말 돌려보낼 시간이었다. 프리멧사가 졸린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급해서
우아하게 돌려보낼 정신은 없었다.

“아? 꺄아아아!”
엘제이는 발밑이 푹 꺼지는 걸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환한 분홍빛 구멍이 엘제이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제는
그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눈앞에 환한 빛이 터졌다. 달게 잠든 감각을 깨우듯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손끝의 감각이 돌아왔다. 차가웠다. 서늘한 체온이 손 하나를 꼭 감싸고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미동도
하지 않던 손이 움찔, 흔들렸다.

“제이?”

그가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응답하듯 엘제이의 손끝이 그의 손등에 살짝 닿았다.

“제이…… 일어나요. 응?”

그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을 것 같은 얼굴과는 달리 오싹할 정도로 낮은 음역이 고막을 건드리고
흔들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뇌로 흘렀다. 그에게 동화되어 울음이 터질 것처럼 애달픈 소리였다.

‘당신이 나를 부르면,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곱게 감겨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엘제이는 일어나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바람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 그가 있는 곳에 닿았다.

일어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무거운 속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엘제이는 눈을 떴다. 혼탁한 시야에 반짝이는
백금색이 걸렸다.

“제이!”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꼭 쥐고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몸을 살피며
몸 이곳저곳을 건드는 것 같았다.

‘몸이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예쁜 얼굴이 달걀귀신처럼 흐리게 보이고, 귀에는 이명이 들리고, 모든 감각이 둔했다. 엘제이는 돌아가면 좀
힘들 거라는 프리멧사의 충고를 떠올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목구멍에 모래를 한가득 채워 넣은 듯 말이 탁탁 걸려 아픈 몸을 만지는 손길을 거부하지도


못했다.

순하고 얌전한 엘제이도 아픈 몸을 누가 자꾸 건드리자 짜증이 났다. 괴롭게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도와달라는 듯
아제프를 찾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뭐라고 성을 내고 있었다.

멍멍한 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엘제이는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손에 손끝만 조금 움직여 아제프의


손등을 천천히 톡톡, 두들겼다.

곧바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쁜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잘 안 보이는 눈으로도 그가 많이


지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볼을 보던 엘제이는 그의 얼굴을 매만져주고 싶었지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파…….”

“쉿! 말하면 안 돼. 당신 3 일 만에 깼어.”

아제프가 하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뭐라고 다그쳤다. 아마 저 사람은 의원인 것 같았다. 그가 의원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자 의원이 무언가를 그에게 건넸다. 축축하게 젖은 수건이 엘제이의 입술을 툭툭 눌렀다.

온몸이 화끈거려서 작은 자극에도 아팠다. 마치 화상을 입은 피부를 손톱으로 잘근잘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울먹임으로 흐려지던 눈에 그녀만큼 아픈 얼굴을 한 얼굴이 걸렸다.

다시 입을 열어 고통을 호소하려던 엘제이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

“제이, 당신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나는,”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며 애처롭게 말했다. 까끌까끌한 목 안을 적시는 물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그가 주는 물을 야금야금 마시던 엘제이가 그에게서 나올 뒷말을 기다렸다.

“세상을 다 부숴버렸을 거야.”

정말 그다운 말이었다. 어쩜 저렇게 심보가 꼬였는지 몰라- 엘제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웃었다. 평소라면
저 예쁜 얼굴에 홀려 사람 인성이 좀 나쁠 수도 있지- 하고 말았겠지만, 시야가 흐려 좋아 죽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다시 탁하게 흐려졌다. 까무룩 잠기는 시야에 불안한 표정을 한 그가 걸린 것도 같았다. 엘제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조금 웃었지만, 그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뭐라고 또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난 얼굴이 보이고, 이번에는 신관들의 신력이 가득 퍼부어졌다. 조금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원래 엘제이는 성력이 잘 듣는 몸은 아니었다. 엘제이는 다시 솔솔 몰려오는
잠기운에 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정말이야. 다 없애버릴 거야. 그러니까 다시 자지 마……. 응? 나랑 있어줘. 눈 감지 마. 나, 불안해서,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아제프는 불안한 듯 잔뜩 흔들리는 얼굴을 하면서도 못된 말만 뱉어냈다. 엘제이는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듯 그를


밉지 않게 흘기다가 잠기운이 섞인 말을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그래도, 사랑해요.”

“안 돼! 제이!”

누가 보면 엘제이가 벌써 죽은 줄 착각할 정도로 처절한 목소리였다. 엘제이를 저를 부르며 애원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곁에서 다시 눈을 뜨려면, 몸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밤이었다. 이번에는 몸에 힘이 좀 들어갔다. 눈도 비교적 잘 뜨이고 시야도 꽤 확보되어서,
엘제이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곧바로 그를 찾아냈다.

“아…….”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는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물론, 그는 잘 때도 엘제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엘제이의 손을 떼면 그녀가 달아나기라도 할 거라고 믿는 듯 잠들어서도 절대로 놓지 않은 손은 강박적이었다.

하지만 집착이 덕지덕지 묻은 하얀 손을 보고 엘제이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엘제이는 다른 손으로는 하얀 수건을 꼭 쥐고 축 늘어져 있는 남자를 보며 감동한 얼굴을 했다. 그가 지금껏 손을


잡아주고, 옆에서 돌봐줬음을 알았다. 지독한 악몽 속에서 이 손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자 지지대였다.

엘제이가 애틋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에 살짝 손을 올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수척하면 수척한 대로 가녀린
꽃처럼 아름다웠으니 또 저 얼굴에 홀린 게 틀림없었다.

아제프의 손이 턱, 올라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눈을 또렷하게 뜬 아제프가 엘제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살피듯 그녀의 몸을 돌려보며 이마에 손을 짚어보던 아제프는 곧 그녀의 체온이
정상이란 걸 느끼고 손을 뻗었다.

그보다 한참이나 작은 몸이 폭 파묻혔다. 엘제이는 얼굴을 조금 들어 그를 올려보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

“당신 그러고도 반나절을 더 잤어. 나는, 정말……. 하아,”

그는 투정하는 아이 같았다. 아제프가 습기 어린 한숨을 토해내며 엘제이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지분거렸다. 흰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엘제이가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감싸고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그래도 약속했잖아요. 떠나지 않기로. 당신이 부르면 나는 언제나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거예요.”

“난, 진짜…… 너무 무서웠어. 제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0 화
80

잠시 깨어난 후로는 무서울 정도로 오르던 열이 빠르게 내려갔다. 온종일 고열에 시달리며 회복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이던 몸이 또 기적같이 괜찮아졌다. 아제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그녀가 잠든 지 이틀째 되는 밤에는 잠시 엘제이의 심장이 멈추기도 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의원을 노려보며 검을 뽑아 들던 그를 말린 건 알체스테였다. 그들의 대치가 이어지던 중 다시 엘제이의
숨이 돌아왔고, 의원은 목숨을 건졌다.
이번 일은 엘제이에게도 지옥이었지만, 아제프에게도 만만치 않은 지옥을 보여줬다.

“미안해요.”

“후……. 당신이 사과할 건 또 뭐야. 제이 잘못도 아닌데. 그보다 몸은 좀 괜찮아? 수도에서 좀 떨어졌더니
다들 돌팔이밖에 없나 봐. 멀쩡한 의사가 한 놈도 없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병이든 저주든,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어. 그들이 아픔을 느낄까?”

아제프는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며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진지한 눈에 섬뜩할 정도로 잔인한 빛이 맴돌았다.
평소라면 엘제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엘제이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제프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엘제이의 머릿속에 스스로 몸을 자해하는 아제프가 퐁퐁 떠올랐다. 그녀는 식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제프가 원인인 것 같은데요. 아니, 나 때문인가?’

엘제이는 차마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그냥 그를 마주 안았다. 그녀가 느낀 고통과 슬픔은 원래는 다


그의 몫이었다. 엘제이는 그게 너무 슬프고 속상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엘제이는 모든 걸 다 가져가고 싶었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그가 느끼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은 아제프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엘제이의 자질, 공명은 원래 그가 가져야 했을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꿈을 꾼다. 엘제이가 잠들면 아제프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꿈은 현실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인간의 무의식이 꿈과 현실에서의 강도를 달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꿈은 그저


꿈이었구나, 위안하며 털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서 겪는 일은 꿈에서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충격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의 고통은 원래 그가 느껴야 할 고통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엘제이의 몸이 아픈 건 그녀의 자질이 이미 망가진 것이기 때문이지, 그의 고통을 치유해서 생긴 부작용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원인인 건 맞지만, 엘제이가 자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몸이 아플 일도 없다.

아제프가 자질을 사용하고 난 뒤에 몸이 차가워지는 것처럼, 엘제이는 원래 자질 발현 후 가벼운 악몽을 꾼다.


하지만 자질이 망가진 지금은 그 강도가 말 못 할 정도로 심해졌다.

초콜릿괴물이 그녀를 쫓아와 괴롭히는 귀여운 수준의 악몽으로 끝났어야 할 후유증이 망가진 자질로 인해 심해진
거다.

지독한 악몽은 물론이고, 몸과 정신에도 부작용이 쏟아졌다. 엘제이는 더는 제 자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바꿀 수가 없다. 아제프와 달리 엘제이는 자질을 조절할 자격도 잃었다.

단순히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질이 발동해버리니 조절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리멧사는 그를 그만 좀 치료하라고 했으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안타까움은 인간의 감정이었다.

막으려고 한다고 막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아는데, 마음이 그러니 자꾸만 무리한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걸 모르는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덜미에 화인을 콱콱 남기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다들 원인을 모른다는 소리만 하고. 제발, 아프지 마. 응?”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베이비키스를 남기며 조르듯 칭얼거렸다. 그의 말에 애매하게 웃은 엘제이가 작게


속삭였다.

“아제프가 아프지 않으면, 저도 아프지 않을 거예요.”

“그게 뭐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나 역시 당신만 멀쩡하다면 괴롭지 않아. 나의 천국과 지옥은


모두 당신에게서 나오니까.”

아제프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제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체온과 숨소리 모두 정상이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아제프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엘제이의 입술을 핥았다.

엘제이의 입술을 빨며 한참을 입가 주위를 맴돌던 아제프가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참기 힘들어.”

그는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머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두운 조명 사이로 번들거리는 벽안이 푸르게 빛났다.
엘제이의 입술에서 잠시 떨어진 그가 엘제이의 타액이 묻은 입술을 핥아 올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았다.

“나, 하고 싶어. 당신 괜찮아?”

“뭐, 뭐를요? 저, 씻지도 않았고…….”

색기에 젖은 눈이 그녀를 향하자 한껏 당황한 엘제이가 팔로 몸을 가리며 더듬거렸다. 새빨개진 엘제이의 귀를


핥을 듯 바라보던 아제프는 금세 눈을 순하게 뜨고 놀란 듯 손사래를 쳤다.

“응? 제이, 이상한 생각했어요? 제가 짐승도 아니고, 갓 깨어난 당신에게 하면 무슨 짓을 한다고……. 제이,
야해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듯 크게 뜬 눈이 순진한 척 반짝거리며 엘제이를 현혹했다. 그에게 또 홀라당


넘어가고 있었지만, 엘제이는 고개를 저으며 저 눈빛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그녀도 억울했다.

“아제프가 먼저, 했잖아요!”

“제가요? 저는 그냥 입을 맞추고 싶다고 한 것뿐인걸요?”

“하지만,”

엘제이를 놀리던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입술에 엘제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뭐라고 할 듯 말 듯 망설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술에 쪽쪽, 몇 번 더 베이비키스를 남기다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무해한
얼굴로 웃었다.

“제가 씻겨줬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 그렇구나. 고마워요, 아? ……네?”


“봐요. 향긋하죠?”

아제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들어 장난스럽게 엘제이의 코를 간질였다. 코끝을
살살 간질이는 느낌에 넋을 놓고 있던 엘제이가 코끝을 찡그리며 얼굴을 돌렸다. 향긋한 향이 났고, 3 일 잔
사람치고는 몸도 찝찝하지 않았다.

엘제이가 입을 탁 벌리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아제프에게 툴툴거렸다.

“시녀들이 도와준 거죠? 깜짝 놀랐잖아요. 장난하지 마세요.”

“장난 아닌데?”

“…….”

그가 진지한 얼굴로 반박하자 엘제이가 입을 다물고 긴가민가한 얼굴로 제 몸을 살폈다. 그런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엘제이는 연신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제프는 그런 그녀를 침착하게 관찰했다. 그의 눈이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형형하게 빛났다.

가벼운 질문을 통해 사람의 긴장을 풀어내고, 그 행동을 관찰해 심리를 파악하는 건 아제프의 특기였다. 특히
엘제이의 감정에 예민한 아제프는 그녀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지금의 엘제이는 조금, 이상했다.

3 일이나 잤다는데 별 반응이 없었고, 왜 그런 건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손끝 하나 제대로 못 움직이다가


반나절 만에 다시 멀쩡해졌는데, 이상해하지도 않았다.

그래. 꼭 자기가 쓰러진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처럼.

‘제이, 알고 있는 거야?’

아제프는 3 일 내리 앓다가 일어난 사람치고는 매우 멀쩡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제
몸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도 아닌데 엘제이는 어디 하나 그늘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걱정을 털어버린 듯
홀가분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거리며 제 몸을 살펴보는 엘제이를 관찰하며 확신했다. 엘제이 티아세는 그녀가
쓰러진 이유를 알고 있다.

“아제프?”

엘제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아제프를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왜 그렇게 보냐고 묻는


시선에 아제프는 싱긋 웃으며 엘제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촉촉한 머리카락이 엘제이의 뒷덜미에 닿았다.

“좋아서요. 제이가 깨어난 게 너무 좋아서, 그래요. 있잖아요, 제이. 사실, 장난이에요.”

“네? 무엇이요?”

“목욕. 제가 제이 허락도 없이 그런 무례한 짓을 할 리 없잖아요. 설마, 저를 의심한 건 아니죠?”

자기가 의심하게 한 주제에 아제프는 뻔뻔했다. 엘제이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무척 많이 의심했기 때문에 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뻔뻔한 아제프는 그런 엘제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불퉁한 얼굴로 칭얼대듯 말했다.
“설마 저를 의심한 거예요? 저는 항상 제이를 믿는데, 제이는 어떻게 제게 그러실 수 있어요?”

그냥 나오는 말을 마구잡이로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아제프는 무엇을 숨겼는지


털어놓으라고 당장 엘제이를 압박하기보다는 시간을 들이는 쪽을 택했다. 엘제이는 알면 알수록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제프 그보다 더.

지켈리온 힐데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상태까지, 뭐 하나 분명한 게 없었지만 그는 일단 곁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가 그의 영역 안에 있기에 그 정도는 물러설 수 있었다.

아제프의 컴컴한 속내를 짐작도 못 하는 엘제이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아제프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제 목덜미에 볼을 비비적거리는 아제프의 손을 잡으며 조금 웃었다.

고개를 숙이자 배를 감싼 단정한 손이 보였다. 엘제이가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주무르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의심한 거 아니에요. 저는 언제나 아제프를 믿어요. 세상이 무너져도 저만은 당신 편이에요.”

일부는 진실, 일부는 거짓말. 엘제이는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었으나 가지고 있는 비밀을 먼저
털어놓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배를 감은 손에 좀 더 힘을 줬다. 엘제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간지럽다는 듯 발버둥 쳤다.

엘제이의 몸을 따라 움직이는 밀색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스치기도 하고 그의 손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아제프는 가만히 결 좋은 머리카락과 그 향내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일단 가벼운 식사부터 하고 약을 좀 먹어요.”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가 엘제이의 뺨에 닿았다.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설렘에 엘제이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여신님은 분명 아제프가 그녀의 짝이라고 말해줬다. 엘제이는 지금 그것만으로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

대답하는 엘제이의 목소리에는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아슬아슬한, 평화가 계속되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1 화
81

수프를 후후 불어 식히던 아제프가 뜨거운 수프를 입술에 살짝 대고 먹을 만큼 식었는지 확인했다. 뜨거운 수프가
적당히 식은 것 같자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수프를 핥으며 엘제이에게 스푼을 내밀었다.
“자, 아- 하세요.”

“제가 먹을 수 있는데요…….”

엘제이는 부끄러운 듯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도 아기 새처럼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아제프가 후후 불어 식힌 묽은


수프가 엘제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3 일 굶은 엘제이의 속을 걱정해서 간도 최소한으로 한 식사라 별 맛은
없었지만 지금의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엘제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스푼이 다가올 때마다
입술을 벌렸고, 그가 주는 걸 다 받아먹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안 된다는 의원의 말에 스푼이 몇 번
오가지 않은 게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다.

엘제이는 접시들을 치우는 시녀들을 바라보며 어물쩍어물쩍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으려 했다. 온종일 잤는데 또
자기는 싫었지만, 그는 자야 할 것 같기도 해서 엘제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제프는 아직 자러 갈 마음이 없는 엘제이를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그는 그녀에게도 좋고 자신에게도 좋을 여러


주제 중에 적당한 걸 골라 빼 들었다.

“제이, 우리 소풍 가지 않을래요?”

“소풍이요?”

“네. 이곳은 수도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거든요. 봄이라 예쁜 꽃들이 많은 숲도 있고, 배를 띄울 수 있는 호수도


있어요. 같이 나들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아제프가 예쁘게 웃으며 제안했다. 굳이 소풍을 가자고 한 이유는 엘제이의 정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엘제이는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악몽에 시달렸다.

죽지 말라고 울기도 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하는데 대충 무슨 꿈인지는 짐작이 되었다. 아제프가 궁금한 건
엘제이의 악몽 속에서 그가 계속 죽는 이유였다. 단순히 그가 죽는 게 제일 무서워 그런 악몽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꺼림칙했다.

악몽이라는 건 당사자가 직접 쫓기고 죽는 꿈이 보통이었다. 타인이 죽는 꿈을 그렇게 계속해서 꾸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아제프는 소풍 따위는 가본 적도 없고 소풍을 간다고 해서 평화로움을 느낄 사람도 아니었지만 엘제이는 다를


것이다. 그녀는 예쁜 풍경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아제프는 모처럼 엘제이와 둘이서
함께하는 데이트를 상상하며 입꼬리를 말았다.

아제프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엘제이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소풍은 무척
좋은 생각 같았다. 그녀에게 남은 기억에 의하면 그는 단 한 번도 소풍을 가본 적이 없으니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들고 싶었다.

“그럼, 피크닉 도시락을 준비해야겠어요.”

“제이가요? 힘들 텐데요.”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아제프가 제 요리를 먹으면 좋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아요.”


엘제이는 칼질을 잘하지도 못하고, 만들 수 있는 요리도 한정적이어서 겨우 삐뚤삐뚤한 샌드위치 정도가 다일지도
모르지만, 손수 만든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별 생각 없이 소풍을 가자고 했던 아제프도 엘제이가 직접 만든 음식에는 흥미가 가는지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같이 할까요?”

“아제프가요? 음……. 그건 부끄러워서 안 돼요. 제가 좀 더 잘하게 되면…… 그때 같이 해요.”

엘제이는 고르게 썰지 못한 양상추나 베이컨 같은 게 그의 눈에 보인다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와 같이


하는 건 좋지만 그에게는 잘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게 엘제이의 마음인지라 그녀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렇게 흔들면 안 어지러워요?”

아제프가 소리 내어 웃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엘제이의 머리를 조심히 붙잡았다.

엘제이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행복함을 느꼈다. 그는 부쩍 웃는 날이 많아졌다. 특유의 퇴폐적인 기운도 많이


사라져서 좀 더 어려 보이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아! 아제프! 다른 분들에게도 말해서 다 같이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소풍은 원래 시끌벅적해야 재미있는


거거든요.”

엘제이는 오늘따라 유난히 아이 같은 그를 보며 손가락을 꼽아 한 명씩 나열했다. 엘리사, 아이젠, 알체스테


등등 한 명씩 이름이 호명될수록 예쁘게 웃고 있던 입가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그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고
엘제이 외의 인간은 그게 누구든 다 싫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시아와 알모어까지 호명하자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가락을 쫙쫙 폈다.

“지지예요. 알겠죠?”

그가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엘제이의 손가락을 털어주며 싱긋 웃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아제프의 예쁜 얼굴과 본능적인 오싹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엘제이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제프는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반박했다.

“자, 생각해보세요. 공작님은 지금 수도에 계시고.”

엘제이가 아픈데도 아이젠이 수도로 간 건 다 아제프 때문이었다. 그가 휴가를 더 연장하기 위해서는 그의 일을


대신할 이가 필요했고, 아제프는 아이젠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며 애처로운 얼굴로 호소했다. 아이젠 또한 떠나기 싫었지만, 둘 중
한 명은 수도로 가야 했기에 불쌍한 아이젠은 등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엘제이가 계속 아제프만 찾았던 것도
한몫했다.

잠든 사이 아제프가 아버지를 수도로 떠밀듯이 보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엘제이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버지가 여기 안 계시구나……. 그럼 리사랑 황자님은요?”

엘제이는 그제야 잊고 있던 가족들을 떠올리며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다들 걱정했을 텐데 아제프와


하하호호 즐겁게 지내느라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티아세 양은 늘 그렇듯 지금은 취침 중이고, 황자님과 티아세 양은 곧 수도로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제프는 이 저택에 빈대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알체스테는 황도 귀환


문제 때문이라도 곧 수도로 가야 했지만, 거머리 같은 엘리사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아제프는 엘리사의 거머리 빨판을 알체스테에게 찰싹 붙여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이를 꽉 물고 웃었다.

화났다. 엘제이는 웃는 얼굴로 빠드득 이 가는 소리를 내는 아제프를 보며 확신했다.

엘제이는 학창시절 소풍 같은 느낌을 그가 겪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지만, 그는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다 같이 가는 건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바쁜 모양이니 우리끼리만 가야겠네요. 그런데 아제프는 계속 휴가여도 돼요?”

“그럼요. 저는 그동안 일만 해서 쌓인 휴가서가 꽤 있거든요. 원래 외무부의 일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저


하나 없어도 다들 잘할 테니까요.”

아제프에게 훅 늘어난 업무량에 죽어 나갈 부하직원과 아이젠은 중요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외무부에 그렇게 일이
없었던가 하는 착각에 빠졌지만, 곧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먼저 하품을 시작한 건 엘제이였다. 엘제이는 온종일 잤음에도 금세 피로함을 호소하는
신체에 어쩔 수 없이 침대로 들어갔다. 아제프는 꾸물꾸물 침대에 누워 졸린 얼굴로 잠을 청하는 엘제이를
지켜보며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켰다.

웬일로 엘제이는 아제프의 이름을 부르며 신음하지 않았다. 그게 더 큰 악몽의 시작점이라는 걸 모르는 아제프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나가기 전에 불안한 듯 그녀를 한번 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유를 꽤 부리기는 했지만, 엘제이가 아픈 사이 미뤄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엘제이만 있으면 하루쯤은 안 자도
끄떡없는 아제프는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갔다.

그는 엘제이가 잠든 사이에 일을 끝내놓을 생각이었다.

***

아제프는 건드리지 말라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하기 싫은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있었다. 신들린 듯
움직이는 펜대가 사인을 휘갈기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달칵, 아제프의 집무실이 살짝 열리고 알모어가 들어왔다. 노크를 해서 집중을 깨는 것보다는 이렇게 들어오는 게
현명하다는 건 오랜 집사생활의 노하우였다.

알모어는 급하게 보고할 게 있어서 들어오긴 했는데 이게 중요한 게 맞는지도 판단이 안 되었고, 아제프는 집중할
때 건드리는 걸 워낙 싫어하는 사람이라 들어와서도 한참이나 고민하고 있었다.

“후작님, 잠시 이걸 좀…….”

아제프는 온갖 욕설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뒷골목의 양아치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욕을 줄줄이
쏟아내던 아제프가 곧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중요한 볼 일이 아니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 살벌한 목소리였다. 알모어는 부디 이 정보가 쓸모 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종이 다발을 내밀었다.

“티아세 家로 보낸 아이가 이상한 문자를 필사해서 보냈는데, 공녀님이 직접 쓰신 글을 옮겨 적은 거라고


합니다.”

아제프가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그걸 받아들고 살폈다.

하얀 종이에는 동그라미와 작대기로 이루어진 기묘한 문자체계가 단정한 글씨로 나열되어 있었다.

아제프는 몇 장의 종이를 빠르게 훑었다. 아제프의 손에서 종이가 팔랑팔랑 넘어가자 그 옆에 서 있던 알모어도
종이 속 글자들을 살피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이건…… 주술사들의 몸에 난 문양이랑 비슷하지 않습니까?”

알모어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아제프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제프의 손에서 마지막 종이가
팔랑- 넘어갔다.

아제프는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필사된 글을 샅샅이 훑었다.

아제프는 외교부의 수장이었고, 그가 모르는 언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는 대부분 공통어를 사용하지만,
작은 소국들 중에는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도 있었고 그는 외교부 수장인 만큼 대부분의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아제프가 모른다면, 이 문자는 아주 작은 소민족의 것이거나 누군가 독자적으로 만든 암호인 게 분명했다.


베아르시 제국에서만 자란 엘제이가 소민족의 언어를 알 리 없었으니 이건 암호인 것 같았다.

아제프는 하얀 종이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글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니. 주술사들의 것은 문양에 가깝다. 이건 문자고. 이 점이 우리가 사용하는 마침표라고 가정하였을 때,


문장의 첫마디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만약 이 글자의 어순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보면 이건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겠지.”

아제프.

아제프가 손으로 쓸어보는 단어는 그의 이름을 한글로 적은 것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2 화
82

암호를 필사할 때는 그 원형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해 아래가 비치는 얇은 종이를 위에 얹어 원본의 글자체를
그대로 필사하는 게 기본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서체일 게 분명한 글을 보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문자는 꽤 정교했다.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계속 반복되는 단어들을 봤을 때 단순히 장난으로 써내려간 건
아니었다. 다만, 암호를 익힌다는 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평범한 귀족영애인 엘제이가 왜
간자들이나 쓸 법한 새로운 암호를 만들었는지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제프가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쳤다.

“긁어 부스럼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서야…….”

아제프가 짧게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암호문은 뭔가를 숨기기 위해 만든 것 같았는데, 직접적으로 이를


추궁하기에는 엘제이의 상태가 불안정했다. 괜히 무서운 상황을 연출해 그녀의 심리를 불안정하게 할 수 없어서
아제프는 이 또한 일단 묻어둬야 했다.

“그럼, 그 아이는 계속 티아세 家에 둘까요?”

“또 이런 게 있는지 찾아보게 하고, 있다면 그걸 모두 들고 티아세 家에서 나오라고 전해라.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입 조심하고.”

아제프는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까 보았던 기묘한 문자와 주술사의


문양이 겹쳤다. 얼굴을 조금 찌푸리던 아제프는 곧 동요 없이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암호든 뭐든 다 좋은데, 왜 하필 저런 식의 구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술사의 문양과 닮은 암호문이라니,


마녀로 몰리기에 딱 좋지 않은가. 이 일은 제 손에서 다 끝내야 했다.

아제프는 다시 펜대를 들고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 소리가 빠른 속도로 울려 퍼졌다. 알모어는


집중하기 시작하는 아제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쾅!

갑자기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기겁한 알모어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봤다. 일을 하고 있던 아제프가


흉흉한 낯빛으로 서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의 뒤에는 넘어진 의자가 바닥을 시끄럽게 굴러다녔고, 셔츠를 꽉 쥔
손에 잡힌 주름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후작님……! 왜 그러시는,”

“후작님! 공녀님이 또!”

알모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밀치고 들어온 시녀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까지 아제프 손에


잡혀 있던 펜대가 뚝- 소리를 내며 반으로 부러졌다.

***

또 꿈이었다. 엘제이는 눈을 뜨기도 전에 이곳이 꿈 속 세상임을 알았다. 눈을 뜨기가 무서워서 밀색 속눈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엘제이는 한숨을 쉬며 꼭 눈을 떠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때, 엘제이의 손을 꼭 잡은 손이 눈을 뜨라는 듯 그녀의 손을 조금 흔들었다.

솔바람처럼 아주 가볍게 흔들리는 손이 보송보송한 아이의 손이어서 엘제이는 또 홀린 듯 눈을 떴다. 어린아이


특유의 통통하고 짤막한 손가락이 엘제이의 손을 버겁게 감싸 쥐고 있었다. 또 손목만 남은 시체를 보게 될까 봐
엘제이는 눈만 떴을 뿐 뻣뻣하게 굳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꽃?”

간신히 맞잡은 손만 바라보는 그녀의 시야로 옅은 분홍색 풀꽃이 들어왔다. 조막만한 손으로 풀꽃을 꼭 쥔 아이는
어서 받아달라는 듯 풀꽃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제야 엘제이는 목 뒤에 힘을 줘 고개를 들어올렸다.

휘잉-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엘제이의 앞머리를 간질였다. 예쁜 동산이었다. 꽃들이 한 가득 피어난 동산 위에는 봄
색을 입은 바람개비들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동산에는 오색 옷을 입은 봄꽃들이 피어
있었다.

“예쁘다.”

꼭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생각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에 엘제이는 그제야 용기를 내어 옆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줬다.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는 그녀의 생각대로 아제프였다. 그는 모처럼 상처 하나도 없는 건강한 모습으로


엘제이에게 꽃을 내밀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바람에 결 좋은 백금발이 흔들렸다. 아이 특유의 순수한 눈망울과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백금색 속눈썹은 파란 바다와 그 위에 비친 햇살 같았다.

“저 주는 거예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접힌 볼은 발그레하고 통통했다. 하얀 젖살이 오른 볼은


꼭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엘제이는 아기천사 같은 그를 바라보며 또 홀린 듯 눈을 깜빡였다.

“우리 집에 데려가고 싶다…….”

아제프와 어린 아제프 사이에 끼여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제이는 아이의 뺨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꽃을 받아들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다소 위험한 충동이 들었지만, 엘제이는 고개를 흔들며 그
충동을 참아냈다.

아이는 엘제이가 꽃을 받아준 게 기쁜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뜻인 것 같아서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허벅지에 팔을 두르고 제법 무거운 소년을 끌어안았다. 방싯방싯 웃는 아이에게서
아기 특유의 분내가 달달하게 퍼졌다.

“진짜, 귀여워.”

엘제이는 볼을 빨갛게 붉힌 채로 아제프의 볼에 제 볼을 비비며 웃었다. 보들보들한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구름을 안은 기분이었다. 엘제이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해서 멍하게 풀린 얼굴로 아이를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팔 힘이 다소 강했는지 얌전하게 안겨 있던 아이가 다소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엘제이의 팔을 가리켰다.


“아, 미안해요. 아팠어요?”

엘제이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아제프를 다시 놓아줬다. 아제프는 새침한 얼굴로 일어나 엘제이의 허벅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척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에서 꽃을 빼와 그녀의 귓가에 꽂아줬다. 여린
꽃잎이 귀를 스치고 그 꽃물이 그녀의 얼굴로 옮겨왔다.

새침한 눈물점에 빠져들 것 같아서 엘제이가 헉헉거리며 가슴을 움켜잡다가 아제프를 다시 세게 끌어안고 어린
얼굴에 입을 쪽쪽 맞췄다.

“귀엽다. 저 죽을 것 같아요! 여기서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 아제프, 이렇게 귀여웠구나……. 진짜 귀엽다.


사진 찍고 싶어……. 아, 아제프! 너무 귀여워!”

엘제이는 연신 감탄을 쏟아내며 깨물어주고 싶은 오동통한 볼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분내가 온몸을 적시는 것
같았다. 달콤하고 포근한 구름에 파묻혀도 이렇게 녹아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이 뭔지 느끼며 아제프와 같이 꽃밭을 뒹굴었다.

아제프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싫은 기분은 아닌지 엘제이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얌전하고
귀여운 아제프라니,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엘제이는 이 치명적인 귀여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입술만
어물거렸다.

“으으- 너무 귀여워! 아제프!”

엘제이가 잔디에 누워 발광하며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앉은 아제프는 아기천사의
재림이었다. 어쩜 저렇게 보드랍고 예쁜지 설탕으로 만든 인형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 것 같다.

커다랗고 순둥순둥한 눈 아래 콕 찍힌 눈물점도 사랑스러움의 극치라 엘제이는 한동안 그렇게 구르며 아제프의
얼굴을 감상했다.

아제프는 통통한 손가락을 움직여 꽃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엘제이는 집중하느라 조금 내밀어진 입술이
귀여워 바닥을 구르며 즐거워했다.

바스락바스락.

수풀에서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하얗고 몽실몽실한 토끼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왔다. 뒷발을 앙증맞게
움직이며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는 토끼는 아제프의 주위를 맴돌았다. 동물과 어린 아제프의 조합이라니 엘제이는
이 꿈을 꾸기 위해 살아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엘제이는 토끼가 예뻐 죽을 것 같았는데, 아제프는 별 관심이 없는지 등을 돌려 토끼를 외면했다. 그러고도


토끼가 계속 그의 주변을 돌아다니자 순식간에 싸늘한 표정을 지은 아제프가 매섭게 토끼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토끼를 세게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하늘을 날아 풀밭에 힘없이 툭 떨어진 토끼가 몸을 버둥거렸다. 당황한 엘제이가 토끼를
살피며 엄한 얼굴을 했다.

“아제프! 어린 동물을 때리면 안 돼요.”

“…….”

그 순간, 순하게 있던 아제프가 얼굴을 야차처럼 구기며 엘제이의 손에 들린 토끼를 쥐어 터트릴 듯 꽉 붙잡고
당겼다. 당황한 엘제이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버티자 둘 사이에서 토끼가 크게 휘청거렸다.

이러다가 토끼가 다칠까 봐 걱정이 된 엘제이가 결국 토끼를 놔줬다. 아제프는 눈을 잔인하게 번뜩이며 두 손을
번쩍 들어 토끼를 패대기쳤다.

철퍽-

바위에 세게 부딪힌 토끼의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질척하게 흘러나와 그때까지 평화롭던 동산을 적셨다. 아제프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토끼의 시체를 철천지원수 보듯 쏘아보며 발로 토끼의 온몸을 자근자근 밟아댔다.

퍽. 콰직.

토끼의 시체가 아제프의 발에 뭉개지는 잔인한 광경에 엘제이가 입술을 벌리고 멍하니 아제프를 바라봤다. 콱콱,
잔인한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자 정신을 차린 엘제이가 아제프의 팔을 잡으며 그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제프! 아제프, 왜 그래요? 이러지 마요. 응?”

아제프는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토끼의 시체를 노려봤다. 그의 이상 행동에 엘제이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변화는 일어났다.

쉭쉭-

죽은 토끼에게서 뱀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청명하던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몰려와 환하던 동산이 어둠에
잠겼다. 먹구름이 몰고 온 눅눅한 비가 쏴아아- 쏟아져 엘제이의 몸을 순식간에 적셨다.

쉭쉭.

뱀 소리가 조금 더 세게 울려 퍼졌다. 엘제이가 멍하니 죽은 토끼를 바라보자 토끼의 빨간 눈알이 히죽,


휘어졌다. 소름끼치는 모습에 엘제이가 아제프를 안아 들고 더듬더듬 뒷걸음질을 쳤다. 토끼의 새빨간 안광이
빠르게 굴러 아제프를 향했다.

쉭쉭. 쉭쉭. 캬아아아!

빨라진 뱀 소리와 함께 입을 쩍 벌린 토끼의 새빨간 혀가 내장처럼 쏟아져 바닥에 늘어졌다. 그제야 뭔가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엘제이가 아제프를 안고 달렸다. 세찬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거추장스럽게
달라붙었고, 쉭쉭-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혀가 지척에 다가왔다.

날름거리는 새빨간 혀가 엘제이의 발목에 막 닿을 때쯤 얌전히 안겨 있던 아제프가 엘제이를 세게 밀쳤다.

작지만 강한 손길에 퍽 밀쳐진 엘제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제프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 아제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3 화
83
조그만 발을 휘감은 긴 혓바닥이 아제프의 온몸을 꽁꽁 묶고 그를 끌어당겼다. 빠르게 끌려가는 아제프의 모습에
엘제이가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았다.

숨이 헉헉 차오르도록 뛰는 엘제이의 거친 숨소리가 벼락처럼 쏟아지는 빗소리에 섞여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긴


혓바닥인지 엘제이는 끝을 향해 한참이나 뛰어야 했다.

토끼의 시체가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엘제이는 보고 말았다. 토끼의 시체를 깔고 뭉갠 남자를.

그는 어린 아제프의 눈을 파고 그를 불에 던졌던 미신을 믿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미치광이처럼 공허한 얼굴로


입술을 찢어 웃으며 온몸을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덜덜 떠는 남자의 위에는 그를 칭칭 둘러 감은 까만 것이 새빨간 혀를 휘두르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시뻘건 눈알이 또록또록 굴러 엘제이를 바라봤다.

“악마…….”

악마는 또 한 번 히죽, 웃었다.

길게 찢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혀뿌리가 요사스럽게 휘어졌다. 길게 뻗은 혀가 아제프의 몸을 칭칭


휘감아 끌고 갔다.

휘리릭- 움직이는 빨간 것에 아제프의 몸이 덜컥덜컥 흔들렸다.

“아제프!”

눈으로 그걸 좇던 엘제이가 허겁지겁 달려가 아제프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악마는 마치 아제프와 엘제이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때 고개를 든 아제프가 멍하니 엘제이를 바라보며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처럼


뻗어지는 손에 엘제이의 시야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어두운 먹구름을 머금은 꽃잎이 얼굴을 요란스럽게 때렸다.

“아제프……. 건드리지 마. 손대지 마!”

엘제이가 비명처럼 소리 지르며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처럼 주위에 휘날리던 혀의 일부가
엘제이의 손아귀에 잡혔다.

“으윽!”

독이라도 머금은 듯 순식간에 타들어가는 손바닥에 엘제이가 신음하며 악마 놈의 혀를 틀어쥐었다. 엘제이의


손에서 연한 초록색 잎사귀가 돋아나며 혀뿌리를 휘감았다. 아픔을 참고 힘주어 당기자 혀에 감긴 아제프가
딸려왔다.

푸른 잎사귀들도 힘을 내어 빠르게 혀뿌리를 잠식했다. 어느 정도 힘을 주자 혀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돌처럼 딱딱하게 변한 혀가 석회가루처럼 변해 흩어졌다.

“아제프! 이리 와요!”
엘제이가 손을 뻗으며 외치자 아제프도 엘제이를 향해 힘껏 발버둥 쳤다. 그를 감았던 혀가 툭- 끊어지고
아제프는 떨어졌다. 엘제이는 떨어지는 아제프를 무사히 안아 들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끄윽, 크아아아아!!!!!!”

아제프를 놓치자 악마의 숙주가 된 남자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벅벅 긁었다. 피부에 손톱을 박은 채로
사정없이 벅벅 긁어내리는 통에 남자의 얼굴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러고도 남자는 참을 수 없는지 발을 광광
구르며 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눈꺼풀을 헤집고 꾸역꾸역 들어간 손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르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으- 저게, 뭐 하는 거야.”

토할 것 같은 광경에 엘제이가 입을 가리며 신음하자 아제프의 손이 올라와 보지 말라는 듯 엘제이의 눈을 가렸다.


까무러칠 듯이 질러대는 남자의 비명도 점점 거세졌다.

“으아아아아!!!”

작고 따뜻한 생명의 무게에 엘제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엘제이가 발을 돌려
도망치려는데 그녀의 발아래로 눈알 두 개가 뚝뚝 떨어졌다.

“크크, 크크크…….”

눈을 잃은 남자가 팔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며 얼굴을 엘제이 쪽으로 끼익끼익- 돌렸다. 괴물처럼 킬킬 웃는


남자의 얼굴에 엘제이의 눈이 공포로 흐려졌다. 눈도 없는 남자는 어떻게 엘제이가 있는 곳을 아는지 몸을
덜컹덜컹 흔들며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을 따라 악마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숙주의 몸을 꽁꽁 휘감은 악마의 손이 인간의 살을 꿰뚫을 듯


안으로, 더 안으로,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그런데, 당신. 왜…… 웃고 있어?”

숙주는 괴로워하며 발버둥 치는데 악마의 입술은 여전히 호선을 그렸다. 씨익, 웃는 괴기스러운 입술에 엘제이가
도망가는 걸 멈추고 악마를 노려봤다. 가만 보니 악마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끼릭, 끼익!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덜커덕덜커덕 움직이며 아제프를 향해 기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무섭지
않았다. 저게 마지막 생명을 불태운 헛된 노력이라는 걸 짐작한 탓이었다. 엘제이가 아제프를 끌어안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하지 마. 두려운 티를 내어서는 안 돼.’

아제프를 껴안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엘제이는 다가오는 남자를 보면서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꺼억! 끄으으…….”

어깨가 탈골된 것처럼 늘어져 있던 손이 엘제이에게 올라왔지만, 닿지 못했다.

숙주가 된 남자는 몇 번을 더 엘제이를 향해 손을 뻗다가 돌처럼 굳어 부서져 내렸다.


[캬하하하하!!!!]

숙주를 잃은 악마가 허공에 붕 뜨며 광소를 터트렸다.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깔 웃는 악마의 얼굴이 엘제이의
코앞에 보였다. 악마는 다 뜯겨나간 혀뿌리로 입술을 날름 핥으며 엘제이를 노려봤다.

[네가 이긴 것 같지? 다 끝났을 것 같지? 아니야……. 나는 또! 돌아올 거다!]

새빨간 안광이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리며 분노로 떨렸다. 날카롭게 벼린 손톱이 당장에라도 엘제이의 목덜미를
꿰뚫을 듯 다가왔다. 하얀 목에 손톱을 세워 죽죽 긋는 감각에도 엘제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지지 않고 악마를
노려봤다.

“몇 번을 반복해도, 그는 네 것이 되지 않아. 그의 혼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아!”

[크아아아아!!!!]

충분한 두려움을 보여줬는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는데 저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악마가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옅은 녹빛으로 일렁거리는 파도에 악마의 손톱 끝이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어떻게든 엘제이의 목을 꿰뚫으려 까득까득 움직이던 손톱은 녹아 사라졌고, 악마는 대신 엘제이의 품에 안겨


있는 아제프의 얼굴을 두 손으로 휘어잡았다.

순간, 아제프의 등 뒤에 악마가 업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싹 돋아나는 몸서리쳐지는 감각과 함께 새까만 손톱이 아제프의 몸을 파고드는 환상이 보였다. 소름 끼치도록
두려웠지만, 엘제이가 얼른 아제프를 붙잡은 악마의 손을 쳐냈다.

“건드리지 마!”

퍽- 소리와 함께 내쳐진 손은 회백색의 석회질로 뒤덮여 파스스- 부서졌다. 손목째로 날아간 손에 악마가 입술을
콰직 짓씹으며 뒤로 몸을 물렸다.

[죽는 건 숙주뿐. 나는 또 살아나 너를! 그리고 네 짝을! 노릴 거다. 나는 보기 드문 미식가니까.]

물러난 악마의 앞으로 인간의 형체가 부스스 일어났다. 악마는 얼굴이 흐린 인간의 뺨을 남은 손으로 어루만졌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까만 손이 인간의 가슴을 콱- 움켜쥐고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악마의 유혹에 꾀여 타락할 인간은 어디에나 있었다. 악마가 보란 듯 엘제이를 응시하며 천천히 새로운 숙주의 몸
위로 뻐걱뻐걱 기어올랐다. 새까만 몸이 축 늘어지며 영양분을 흡수하듯 인간의 몸에 더 깊이 손톱을 박았다.

악마는 성가신 능력의 여자를 짝으로 둔 사랑스러운 먹잇감을 바라보며 남은 혀를 날름 움직였다. 입에 침이 고여


죽을 것 같았지만, 다시 기회를 노려야 했다.

[보다 신중하게, 보다 노련하게. 이번에야말로 너를 집어삼키겠다.]

악마가 거친 목울대를 그르렁거리며 속삭였다. 곧 까만 구멍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며 악마와 새로운 숙주를
삼켜버렸다.

강렬한 등장을 생각한다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퇴장이었다.


어느새 먹구름은 가시고 동산은 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의 지시 아래에 다시
살랑살랑 불러오는 따뜻한 바람이 비로 폭삭 젖은 엘제이의 옷을 잡고 흔들었다.

엘제이는 이제는 사라진 악마의 흔적을 더듬으며 아제프를 꼭 끌어안았다. 정신적 탈력감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지만, 어쨌든 지켜내었다. 엘제이는 살아 있는 아제프를 보며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피부는 평온함을 줬지만, 안개 낀 듯 흐릿하던 새 숙주의 얼굴과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도 끈질기게
숙주의 몸을 파고들던 악마를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새로운 숙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새 숙주를 찾았으니 조심하라는 거야?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걸리네.”

엘제이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아제프가 두 손을 올려 엘제이의 뺨을 감쌌다. 통통한 손이 뺨을 꾹 누르자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된 엘제이가 조금 웃으며 또 한 번 아제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아제프에게 그 토끼를 밀어 넣어서요. 혼을 낸 것도요.”

눈물점이 콕 박힌 아이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 의젓한 얼굴을 하는 아이의 모습에 이
아이가 진짜 5 살이 맞는지 아니면 어른 아제프 속에 있는 건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피곤해서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는 그 사랑스러움에 또 홀딱 넘어가 옅게 웃었다. 끔찍한 광경을 본 게 조금


전인데, 아이가 예쁜 짓을 하니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엘제이는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은 아제프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아이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말은 알아듣는데, 왜 말은 하지 못할까?”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자 아제프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아서
엘제이는 편안한 얼굴을 하려 했지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제프는 손을 뻗어 엘제이의 손을 꼬옥 쥐었다. 오동통한 손가락이 힘겹게 틈을 벌리며 하얀 손가락을 얽고


깍지를 꼈다. 두 사람의 손이 담쟁이덩굴처럼 얽혔다.

“계속 붙잡고 있어줬죠? 손만 남아서도 저를 계속 기다려줬어요. 고마워요.”

아제프는 더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 그저 엘제이의 손을 꼭 잡아줬다. 큰 정신적 충격으로 피곤에 젖었던


엘제이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움텄다. 아이는 제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 가만히 손을 내어주기만 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아이는 많이 안정되어 보이는 엘제이의 손을 놓고 하얀 공간을 가리켰다.

[제이!]

“어?”

하얀 공간에서 들리는 아제프의 목소리에 엘제이의 귀가 쫑긋 섰다. 나이가 들어 낮아진 목소리는 다 자란


아제프의 것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4 화
84

[제이…….]

또 한 번 애달픈 목소리가 들렸다. 엘제이는 자신을 간절히 부르는 아제프의 목소리와 품에 안긴 아제프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얼굴을 했다. 여기서 떠나면 다시는 어린 아제프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아이는 고요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꿈이니까, 여기에 미련을 두면 안 돼요. 어서 가요.”

담담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무척 낭랑해 엘제이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말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면 엘제이가 이 꿈에 더 미련을 둘까 봐,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떠나지 않으려고 할까 봐, 아이는 입을 다물었던 거였다.

엘제이는 그저 덤덤한 푸른 눈을 바라보며 울 것처럼 속삭였다.

“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질투가 많은 사람이니, 둘이 되지 않아요.”

알 듯 말 듯 모호한 말이었다. 아이는 어서 가라는 듯 엘제이의 품에서 내려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하얀


공간에 선 엘제이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여기 두고 자신만 가야 한다는 게 싫었다.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같이 가자는 듯 아이의 팔을 잡자 그는 엄한 얼굴을 하며 엘제이를 타일렀다.

“가면 똑같은 게 하나 더 있는데, 뭘요. 지긋지긋하게 붙어 있을 테니까 어서 가세요. 그가 저고, 제가


그인걸요.”

아제프치고는 꽤 점잖은 자아였다. 그 묘한 대비감에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 흔들자, 아이는 더는 기다려주지 않고


엘제이를 팍 밀쳐버렸다. 엘제이의 몸이 하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꺄아아아!!!”

아직 마음의 준비를 끝내지 못했는데, 프리멧사 때와 똑같은 추락감이 엘제이를 덮쳤다.

***

눈을 부시게 하는 하얀 빛이 망막을 간질였다. 사방은 조용했고, 엘제이를 깨우는 건 하얀 빛뿐이었지만, 그녀는


눈을 떴다.

‘아침이구나.’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이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햇살은 따사로운 봄볕 기운을 물리고 강렬한 여름의 태양을
닮아가고 있었다. 잘 잔 것 같은데 몸이 좀 뻐근한 느낌에 엘제이는 하품을 하면 몸을 조금 뒤척였다.

“응?”

손이 조금 부자유스러운 느낌에 시선을 내리니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또 여기서 잤나 싶어서 아제프의 얼굴을 찾아 조심조심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 잤구나…….’

엘제이는 햇살을 맞으며 자는 아제프를 조금 수줍은 얼굴로 바라보며 그를 관찰했다. 햇살이 쭉 미끄러지는 것
같은 콧대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를 깨우게 될 게 분명해서 엘제이는 손을
꼬물거리기만 했다.

허공을 짚으며 살금살금 움직이는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아제프는 왜 자꾸 여기서 자는 걸까?’

엘제이는 매번 제 방이 아닌 이곳을 찾는 그가 의아했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가 티아세에 청혼서를


보냈다고 했으니 그는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었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제프의 체온을 느끼는 게 좋아 엘제이는 조금 서늘한 손을 힘주어 잡아버렸다. 힘을 너무 줬던 걸까?


곤히 자던 아제프의 눈꺼풀이 한 차례 떨리더니 그가 눈을 떴다.

“앗, 미안해요. 깼어요? 좋은 아침이죠?”

엘제이가 깍지 낀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싱긋 웃었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침대가 뽀송뽀송한 햇볕 향을 내는 것


같아서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새의 지저귐처럼 흥얼거리는 음색에 아제프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젯밤의 악몽을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사람 같았다. 시녀의 애타는 목소리를 듣고 아제프가 달려왔을 때,
엘제이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살려 달라, 돌려 달라,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수백 번 반복됐다.

혹여 아제프가 조금이라도 엘제이의 몸에서 손을 떼면 발작이 더 심해지는 탓에 아제프는 밤새 그녀를 끌어안고


곱아드는 손을 잡아줘야 했다.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듯 울며 덜덜 떠는 엘제이를 달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아제프는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제이…….”

어쩐지 슬프게 들리는 음색에 엘제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바다를 닮은 벽안에 습기가 고인 것 같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아무 일도요.”

아제프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엘제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는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으며
그저 다정하게 웃었다.
“아! 눈곱 묻었어요?”

“네. 잘 잤나 보네요. 제가 다 닦아줄게요.”

아제프는 간밤에 흘린 엘제이의 눈물을 닦아내듯 소금기가 남은 눈가에 입술을 내렸다.

밤의 고통이 그녀의 것이라면 그 후의 고뇌는 아제프, 그의 몫이었다.

***

“우리, 소풍 갈래요?”

밝은 햇살 아래에 선 남자의 한마디에 엘제이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대충 시녀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아제프를 뿌리치고 주방으로 내려간 엘제이는 몇 시간 만에 커다란 소풍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왜 이걸 제이가 들고 있어요?”

아제프가 제법 무거운 바구니를 받아들며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시녀들을 노려봤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 붙여놓은 인간이 몇인데, 다들 단체로 실성했나 싶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시선에 시녀들은 뭐라고 변명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엘제이는 그의 굳은 턱보다는 자신의 수줍음이 더 컸다. 엘제이는 그의 손아귀에 꽉 붙잡힌 바구니를 보며


손가락을 비비꼬았다.

“제가 다 만들었어요.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

아제프는 꾸물거리는 손가락에 시선을 주다가 엘제이의 어깨를 감싸며 빙긋 웃었다. 그가 선물한 보닛을 쓴
모습이 무척 예뻤다.

“그래서 들고 온 거예요? 안 그래도 되는데 무겁게……. 이제는 제가 들고 갈게요. 기대되네요. 얼른 풀어보고


싶어요.”

“근데, 조금 못생겼어요. 칼질이 서툴러서…….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으니까요. 들춰보시면 안 돼요? 알겠죠?”

엘제이는 샌드위치 안에 그럭저럭 감춰진 못생긴 채소들이 튀어나올까 봐 걱정하며 빠르게 종알거렸다.

“약속할게요. 눈이라도 감고 먹을까요?”

“아니에요. 그냥 들추지만 않으시면 돼요.”

“네. 걱정 마세요. 제이와 함께 열어볼 때까지 들여다보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거 만들었는지 궁금한데, 빨리


도착해야겠네요. 어서 가요.”

아제프가 엘제이의 등을 살짝 떠밀며 채근했다.

최근 들어서는 온갖 진미만 입에 담았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는 수프도 곧잘 먹었던 시절이 있으니 엘제이가
아무리 맛없는 음식을 만들었어도 환하게 웃으며 먹어줄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아제프는 바구니에 담긴 것이 맛있을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

아제프가 소풍 온 호수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천을 깔아 엘제이를 앉히고 그 앞에 바구니의 음식을


나열하는 일이었다.

“와! 이거 진짜 제이가 만든 거예요? 칼질 못 한다더니 깔끔하잖아요.”

아제프가 그냥 평범한 샌드위치를 보며 칭찬했다. 깔끔하기는커녕 사선으로 잘린 게 훤히 보이는데도 그는 그것을


무시하며 평범한 것에서 온갖 장점을 끌어내려고 애썼다.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래도 자르는 건 제가 했어요.”

“너무 예뻐서 못 먹겠어요. 이건 딸기네요? 딸기도 무척 예쁘게 잘랐네요! 크기가 다 똑같아요.”

똑같기는커녕 들쭉날쭉했지만, 아제프는 뻔뻔했다. 빨갛게 익은 과실은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물렁물렁한 탓에


반듯하게 잘라지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뭉텅뭉텅 잘린 딸기를 보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네. 몇 번 더 하면 금세 늘 것 같아요! 제이가 만들어준 건데 아깝지만, 맛을 봐야 하니 먹어야겠네요. 뭐부터


먹을까요?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네요.”

두 종류의 샌드위치랑 딸기가 다였지만, 아제프는 혼란스럽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아, 그럼 이거 먼저 드세요. 채소가 많이 들어가서 더 먹기 편할 거예요.”

엘제이는 삐죽삐죽 튀어나온 양상추들을 피해 가장 멀쩡해 보이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요.”

싱긋 웃으며 한입 깨무는 아제프의 손 틈으로 엉성하게 뭉쳐진 채소가 쭉 밀려나왔다.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해본 일이라 예쁘게 되지 않아 속상했다.

‘그래도 아제프는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엘제이가 조금 안심하며 입을 우물거리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아제프는 입을 크게 벌려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혀에 닿는 부드러운 빵의 느낌과 신선한 채소의


조합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샌드위치는 재료만 좋으면 실패할 확률이 적은 음식이기도 했다. 황홀한 진미는
절대 아니지만, 기대치가 낮았던 탓에 꽤 맛있게 느껴졌다.

생글거림을 유지하던 아제프는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빠각- 아제프의 입안에서 무언가 씹히는 소리가 났다.

“으응?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아! 야채가 신선하고, 맛있네요! 제이는 이쪽 거 먹어요. 이건 제가 다 먹을래요.”

아제프가 황급히 말을 돌리며 손을 저었다. 엘제이의 손에 억지로 달걀이 안 들어간 샌드위치를 쥐여 준 아제프는
다시 음식을 꼭꼭 씹어 먹었다. 빠르게 우물거리자 빠각- 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이 느낌은…… 달걀 껍데기인가?’

아제프는 혀 안을 채우는 삶은 달걀의 부드러움과 입안의 식감을 더해주는 달걀 껍데기의 조화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는데, 예상외의 복병이었다. 아제프는 흘깃 눈을 돌려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의 수를 셌다.


넉넉히 만들었는지 꽤 많은 숫자에 아제프는 해탈하기로 했다.

‘얼음을 씹는다고 생각하자. 티 내지 말고, 얼음이라고 생각해.’

빠각- 빠각-

“으응?”

세게 울리는 소리에도 아제프의 미소는 단정하기만 했다. 엘제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그의 웃는
얼굴에 의심을 거뒀다.

“이거 자주 해주면 좋겠어요. 너무 맛있는걸요. 누군가 애정을 담은 요리를 만들어준 게 너무 오랜만이라,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럼, 매일매일 만들어볼까요? 저 베이킹 배우고 싶었어요!”

단 건 딱 질색인 남자는 베이킹을 혐오했지만, 베이킹을 배워보고 싶었다는 엘제이에게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눈꼬리를 길게 내리며 웃은 남자는 반쯤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벌써 신혼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나중에 제이를 닮은 딸이 있어도 좋겠어요. 제이가 엄마가 되면
아이를 위해 베이킹을 해줘도 좋을 텐데요.”

그러니 좀 미루라는 뜻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5 화
85

아제프의 심오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엘제이는 마침 떠오르는 어린 아제프의 모습에 신나하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어제 아제프 꿈을 꿨어요!”

“꿈이요……?”

“네. 5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아제프랑 꽃밭에서 굴러다니기도 하고, 뽀뽀도 했어요. 너무 귀여웠는데! 꼬마


아제프가 꽃도 주더라고요! 진짜 사랑스러웠어요. 통통한 볼이랑 오동통한 손가락……. 으으! 너무 예뻐서
꿈에서 나오기 싫었어요. 계속 거기서 살고 싶었어요!”
엘제이는 다시 생각해도 좋은지 몸을 부르르 떨며 좋아했지만, 아제프의 눈은 점점 더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악몽 뒤에 잠깐, 아제프 뽀뽀해요-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꼬마 아제프라니, 아제프가 못마땅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기다랗고 하얀 손은 전혀 오동통하지


않았다. 물론 볼 살도 없었다.

아제프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엘제이 꿈속의 아제프는 제가 아니었다.

“다른 놈이랑 뽀뽀하고 껴안고 뒹굴었다고요? 꽃까지 받아가며? 그놈이 고백한 거예요?”

“네? 그건 다른 놈이 아니라 아제프,”

“제 어디가 통통하죠? 그게 저라면 저는 왜 그 기억이 없나요? 같이 뒹굴고 뽀뽀까지 했는데!”

괴상한 논리였다. 엘제이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너무 황당해서 입에 무언가
턱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

“게다가 뭐? 사랑스러워? 거기서 계속 살고 싶어? 그놈이 그렇게 예뻤어? 응?”

아제프는 흡사 엘제이가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래. 다른 건 다 넘어가도 거기서 계속 살고 싶었다는 말만은 참을 수 없었다. 엘제이가 악몽에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아제프는 몇 번이나 엘제이를 불렀다.

제발 일어나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하며 애간장을 다 태웠는데, 알고 보니 웬 놈이랑 시시덕거렸다니, 아제프의


눈이 점점 더 사나워졌다.

엘제이는 문장을 물어뜯을 때처럼 위협적인 눈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나무 그늘에 천을 깐


터라, 조금 물러나니 등에 커다란 나무가 걸렸다. 엘제이는 더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닫고 바짝 다가온 그에게
변명했다.

“아제프……. 그게 아니라요. 저는 그냥 꼬마 아제프가 귀여워서요…….”

그냥 아제프가 아니라 빌어먹을 꼬마 아제프라는 소리에 아제프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엘제이는 최소한
거기서 계속 살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제프가 나무에 팔을 걸치며 지그시 엘제이를 쳐다봤다.

“당신, 벌을 받아야겠어.”

엘제이는 나무를 누른 아제프의 팔을 힐끔, 바라봤다. 단단한 오른팔이 나무 기둥을 억세게 짓눌러서 그의 힘에
일순 흔들린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졌다.

엘제이는 어쩐지 우지끈 팬 것 같은 나무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날씨가 좋고,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곳에서의 정다운 소풍이 왜 이렇게 될 것일까?

꿈에서 본 것과 닮은 듯 다른 묘한 데자뷔에 엘제이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19 살 먹고, 벌이라니. 물론 잘못이 있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엘제이는 억울했다.
“벌이라니……. 저는, 그저 꿈을 꾼 것뿐인데요.”

“꿈에서 살고 싶었다면서? 꿈을 꾼 게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게 문제야.”

아제프가 왼쪽 손으로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비비꼬았다. 왠지 모르게 야릇한 둘의 분위기에 주변에 서 있던


시종들이 하나둘씩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엘제이는 저 멀리 사라지는 시종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제프는 남이 있든 없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사람이지만, 그래도 동지 하나 없이 그의 화를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한 번 질투에 휩싸인 남자는 속 좁게 굴었다.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잡아당긴 아제프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저것들이 신경 쓰여?”

“아니에요. 그냥 다들 바쁘신 것 같아서…….”

엘제이는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에 보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눈가에 콕 찍힌 눈물점이 새초롬하게 빛났다.


화난 얼굴도 무척 예뻐서 엘제이의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대답해. 정말 그놈이랑 살고 싶었어? 나도 없는데?”

‘말을 먼저 돌린 건 당신인데…….’

엘제이는 가슴을 콩콩 찍고 싶을 정도로 억울했지만, 차마 입으로 말하진 못하고 같은 주장만 반복했다.

“그건 아제프였어요. 분명, 당신이었다고요.”

“내가 어린애야? 그 어린놈과 나, 어디가 똑같다는 거야?”

“하지만, 이름도 같고 생김새도 같고, 성격도 똑같……. 음……?”

엘제이는 어린아이치고는 꽤 침착하던 아이를 떠올리며 말을 멈췄다. 성격은 아이 쪽이 좀 더 착한 것도 같았다.

‘때가 덜 묻은 느낌이랄까? 아이답게 순진해 보이기도 했고……. 얼굴이 더 귀여워서 그런가? 아……. 오동통한
볼이 귀여웠는데, 어린 아제프. 또 만나고 싶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딴생각 중이라는 걸 빠르게 눈치챘다. 한 번도 자신 앞에서 다른 사람 생각을 한 적 없었던


사람인데, 그놈을 떠올렸는지 발긋하게 부푼 볼이 빌어먹게도 사랑스러웠다.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긴 아제프가 나무를 한번 꾹 내리누르며 으르렁거렸다.

“왜 성격을 말하다가 망설여? 그놈 성격이 더 좋았어? 내 성격은 별로야?”

“아니, 그놈이 아니라 아제프라니까요. 꼬마 아제프의 성격이 아이치고는 좀 점잖아서…….”

‘하! 점잖아? 그 시건방진 놈. 감히 내 얼굴로 제이를 꼬여내?’

아제프는 눈앞에 그 꼬마 놈이 보이기만 하면 얼굴을 터트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엘제이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제프에게 꼬마 아제프는 예쁘게 웃으며 엘제이를 살랑살랑 꼬시려는 사특한 것이었다.
“그 꼬마 놈은 어른스럽고, 어른인 나는 점잖은 성격이 아니란 말이야?”

“그게 아니고, 꿈속의 아제프는 좀 애어른 같아서요.”

“그놈을 어른으로 봤어? 어른으로 봤는데도 안고 뒹굴었단 말이야? 나는 점잖은 성격이 아니어서 그냥은 못
넘어가겠는데, 이거 어쩌지?”

삐뚤게 뒤틀린 입술이 험악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트집에 엘제이의 눈에 억울함이 그득그득
차올랐다.

‘그냥 아이일 뿐이잖아요! 비꼬지 마세요!’

이렇게 외치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엘제이는 손에 쥔 딸기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냥 아이일 뿐이에요.”

아제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시무룩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자 마음이 또 약해졌다. 기분 좋으라고 데려온 건데,
너무 따지고 들었나 싶어 아차한 아제프가 몸을 조금 물리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진짜 꼬마라도 됐나? 내가 생각해도 유치한 짓이다.’

아제프는 시무룩하게 떨구어진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기회를 줬다.

“좋아요. 제이. 솔직히 말해봐요. 저 호수에 저랑 그놈이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거예요?”

“저는 수영을 못하는데요.”

망설임 없이 저를 가리키리라 생각했던 아제프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뒤틀렸다. 그는 치솟는 화를 참으며 더


살갑게 미소 지었다.

“이럴 땐 당연히 수영을 잘한다는 가정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화 안 낼 테니 솔직히 말해 보세요.”

꽃이 꿀벌을 유혹하듯 달달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엘제이는 그만 긴장을 풀어버렸다.

“그야 당연히 꼬마 아제프가 아이니까, 헙!”

“아이니까?”

“…….”

웃고 있는데 무서웠다. 엘제이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 말했음을 깨달았다. 푸른 벽안이 질투로 가득 차올라


엘제이의 숨통을 꾹, 짓눌렀다.

아제프는 아까처럼 화를 내는 대신 나무에 올려놓았던 손을 주르륵 미끄러트리고 가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군요. 제이는, 제가 죽든 말든 아이 먼저 구할 생각이네요. 저는 다섯 살배기든 신생아든 상관없이 당연히


제이를 먼저 구할 텐데.”

엘제이는 이 순간, ‘당신은 수영 잘 하잖아요-’라고 말하지 않을 눈치 정도는 다행히 갖고 있었다.


“저……. 아제프, 미안해요. 손이라도 들까요?”

엘제이가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무룩하게 가라앉아 있던 얼굴이 맹수처럼 번뜩인 것도


그때였다. 눈만 형형하게 뜨고 여전히 가련한 자세를 유지한 아제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벌을 받을 거예요? 뭐든?”

“뭐든……. 네. 그럴게요.”

아제프의 고개가 스르르 들렸다. 엘제이는 뱀 꼬리처럼 싱긋 휘어지는 눈동자를 보며 불안함을 느꼈다.

엘제이의 몸을 샅샅이 훑던 아제프는 마침 좋은 걸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 엘제이 손에


들린 딸기를 뺏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는…… 딸기를, 좋아했죠?”

“네. 딸기 좋아하죠.”

엘제이는 저 사람이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볼까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엘제이의 걱정과는 달리 그저 선량하게 미소 지은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가에 딸기를 물려주며 속삭였다.

“딸기를 먹지 않는 게 당신의 벌이에요.”

“아?”

엘제이는 딸기를 문 채로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의문이 가득 찬 엘제이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 아제프가 햇살처럼
밝게 웃으며 벌을 선고했다.

“쉿. 벌써 딸기가 뭉개지고 있잖아요. 딸기를 먹지 않는 게 당신 벌이라니까요. 먹지 마세요. 뱉지도 말고요.”

엘제이는 여전히 아제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말캉거리는 과육이 치아에 눌려 빨간 즙이 살짝


새어나왔다. 엘제이는 그의 말 때문에 딸기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상태로 굳어버렸다.

“당신은 딸기를 물고 가만히 있어요. 그게 당신에게 준 제 벌이에요.”

‘이 상태로 계속 있으라고? 언제까지?’

그냥 딸기 하나를 물고 있는 것뿐인데 묘하게 부끄럽고 얼굴이 빨개졌다. 엘제이가 떨리는 시선을 들어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바라봤다.

아제프는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리는 엘제이를 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이건 처음부터 그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시간도 정해주지 않았고, 저렇게 멀쩡하게 버텨내게 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제이는 머릿결이 참 좋아요. 생머리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물결치듯 내려가니까.”

아제프가 낮게 읊조리며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모아 등 뒤로 넘겼다. 수도에서 유행하는 오픈 숄더 드레스를 입은


탓에 하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아제프가 큰 손바닥으로 엘제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차가워…….’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에 엘제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차가운 게 닿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아제프는 솜털이
쭈뼛 손 엘제이의 가슴께를 바라보며 무해하게 웃었다.

“날씨가 좀 더워지지 않았어요? 당신을 위해 손을 식혀뒀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아아……흡,”

차갑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딸기가 걸리적거렸다. 엘제이는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아제프의 손을 보며 몸을 움찔


떨었다.

아슬아슬하게 문장을 가리고 있던 드레스를 살짝 젖히자 문장이 드러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6 화
86

드레스 윗단을 장식한 레이스가 그의 손끝에 툭툭 걸려 흔들렸다. 엘제이는 드레스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것처럼
천천히 가슴을 만지는 손길에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아으,”

엘제이가 손을 내려 그를 살짝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햇살이 저렇게 반짝이는데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쉿! 당신은 가만히 있는 거라고 했잖아요. 차가워서 그래요?”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인 남자는 엘제이의 두 손을 붙잡아 다시 허벅지 위로 내려주었다. 손목을 누르거나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간질거리는 목소리에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엘제이가 드레스 자락을 꾹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황하는 와중에 딸기를 조금 깨물었는지 하얀 턱을 타고 새빨간 과즙이 흘러내렸다.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벌이라고.”

아제프가 입술을 내려 엘제이의 턱을 길게 핥았다. 분도 칠하지 않은 보송보송한 피부는 딸기를 머금어 묘하게
달았다.

아제프가 잇새를 세워 턱을 자근자근 물자 나무에 눌려 더 도망갈 곳 없는 허리가 다른 각도로 이리저리 꺾였다.

“흣, 아응…….”

하얀 이에 힘이 꾹 들어갔다. 엘제이는 덜덜 떨리는 턱에서 힘을 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반쯤


깨물린 딸기 한 조각이 땅으로 톡, 떨어졌다.

엘제이의 턱을 깨물고 빨며 괴롭히던 남자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뱉었네요?”

즐겁다는 듯 생글생글 휘어진 눈동자가 몸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입안 가득 퍼지는 딸기 향에 그걸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어물어물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딸기를 목 안으로 넘기며 항변했다.

“뱉으려고 한 게 아니라,”

“이제 삼켰는데요. 아- 해봐요. 없잖아요. 먹기도 하고 뱉기도 했죠? 잠깐을 못 참아서.”

“…….”

엘제이의 눈이 수치심으로 발긋하게 물들었다. 겨우 딸기 하나 먹은 건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대단히 부끄러운


짓을 한 것 같았다. 도홧빛으로 물든 채 울먹거리는 얼굴이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제프는 짙게 침전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질척한 감정을 조금 털어냈다. 여린 사람이니 선은 지켜야 했다.
엘제이를 상처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아제프는 조금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쉬, 괜찮아요. 제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조금 실수할 수도 있죠. 하지만…… 혼은 나야겠어요. 그렇죠?”

아제프는 울먹이는 뺨에 짧게 입을 맞추며 엘제이를 천천히 눕혔다. 긴장으로 곱아든 손이 아제프의 가슴으로
살짝 올라왔다. 엘제이는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 흔들렸다.

“밖이 너무 밝은데, 이러시면 안 돼요.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면 제가 바로……. 이런.”

아제프는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급하게 삼키며 눈을 감았다. 배 속에 들끓던 화마가 다른 의미로 활활 타올랐다.

‘어쩐지 이상하게 조용하다 했더니…… 저 빌어먹을 여자가 또!’

맛있는 먹잇감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는 멈춰야 했다. 분노로 눈꺼풀을 파르르 떤 아제프는 일단 감정을 수습하며
엘제이를 일으켰다.

“다 장난이에요. 무서웠어요?”

싱긋 웃은 남자가 엘제이의 옷을 잘 정리해주며 발긋한 눈가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눈가를 닦고 핥아


올리는 감촉에 엘제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반쯤 드러날 정도로 내려갔던 드레스가 남자의 손에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아제프는 콩닥콩닥 귀엽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엘제이의 등을 살살 도닥였다.

수습된 상황에 조금 진정한 엘제이가 깔끔한 태도로 물러난 그를 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좀 놀라서요. 아제프가 무서웠던 건 아니에요.”

아제프가 엘제이를 달래는 사이 멀찍이서 느껴지던 기척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아제프는 손을 꾹 쥐고 분노를
사리물었다.

“하……. 둘이서만 있고 싶었는데요.”


“네?”

“언니!!!”

밝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앙숙이 찾아왔다.

옅은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달려오는 엘리사의 뒤로 알체스테가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왔다. 드레스를 반쯤 걷어


올리고 우다다 뛰어가는 모습에 알체스테의 수명이 반쯤 줄어든 듯했다.

“리사! 뛰지 마라.”

“이 정도는 괜찮아요! 넘어지기 전에 잡아주실 거죠?”

달콤하게 속삭이는 얼굴은 뛰는 와중에도 싱긋 미소를 덧그렸다. 그 얼굴에 화도 못 내게 된 알체스테는 엘리사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잡아주긴 할 테지만, 산이라 땅이 울퉁불퉁하니 조심하는 쪽이 더 좋다.”

“네.”

왈가닥처럼 뛴 게 언제냐는 듯 금세 얼굴을 발그레 붉힌 엘리사가 알체스테의 손을 맞잡으며 천천히 드레스를


놓았다. 이제 엘제이가 코앞에 보이니 굳이 뛰어갈 이유가 없기도 했다.

아제프는 가까이 다가오는 엘리사와 알체스테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엘리사의 배를 주먹으로
후려치는 상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몰래 배라도 한 대 때려 기절시킬 수 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망할 여자 같으니. 여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분명 입조심하라고 이르고 왔는데.’

아제프는 저 밀색 머리카락을 다 뜯어놓고 싶다고 생각하며 잇새를 꽉 물었다. 엘제이와의 달콤한 한낮을
꿈꿨는데, 제일 성가신 방해물이 도착해버렸다.

후- 아제프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속에서 들끓는 울화를 날려 보냈다.

그는 곧 유혹적으로 웃으며 엘제이의 시선을 끌어왔다.

“제이, 저는 제이랑 둘만 있고 싶어요. 동생분은 보내버리고 우리끼리 있어요. 네? 제가 무릎베개 해줄게요.


햇살 맞으며 낮잠 자면 좋을 것 같죠? 아까 누웠을 때 편안하지 않았어요?”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그의 하얀 손가락에 걸려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제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며 조르는 모습에 엘제이가 그의 품에 갇혔을 때를 떠올렸다.

‘편안……했나? 낮잠? 그게 낮잠을 위한 거였다고?’

분명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달콤한 오후의 낮잠을 위한 자세는 아닌 것 같았다. 엘제이의 눈이 의구심을
품고 아제프를 올려다봤다.

아제프는 살짝 흐트러진 엘제이의 보닛을 다시 잘 씌워주며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았다.

“우리, 좋았잖아요. 제이가 좋아하는 딸기도 먹고요. 저랑 둘만 있어서 좋았죠?”


“네……. 좋았어요.”

몽롱하게 달뜬 뺨이 발긋한 기운을 머금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좋았던 것 같다. 햇살 아래
서 있는 그는 날개 없는 천사 같았다. 특유의 해사한 얼굴에 선량한 미소가 더해지자 신성한 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엘제이의 생각이 물결처럼 흘러 다시, 꼬마 아제프에게 닿았다.

‘아제프가 치명적으로 아름답다면, 꼬마 아제프는 곧 죽어도 좋을 만큼 귀여웠는데. 천사처럼 웃는 아제프가


둘이면 더 좋을 텐데. 꼬마 아제프랑 큰 아제프를 양옆에 두면…… 나는, 행복해 죽어버릴 거야. 어떻게 해야…
…. 아!’

엘제이의 입술이 생각의 흐름대로 열렸다.

“우리…… 아이를 낳을까요?”

“…….”

엘제이의 거침없는 발언에 아제프는 드물게도 침묵했다. 그는 제 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귀를 톡톡 만지다가, 곧 엘제이의 몽롱한 눈과 헤실헤실 풀린 뺨을 발견한 아제프는 엘제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또 그 빌어먹을 꼬마 생각을,”

“언니! 오늘 언니가 직접 샌드위치 쌌다면서? 그건 어디 있어? 식사 다 했어? 나는 아직 배고픈데.”

어느새 다가와 아제프의 말을 재빠르게 가로챈 엘리사가 엘제이의 손을 붙잡으며 붕붕 흔들었다. 내심 엘리사와도
소풍을 오고 싶었던 엘제이는 흘깃 아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강아지처럼 순둥순둥한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흔들렸다. 말해도 돼? 같이 놀아도 돼? 허락을 구하는


시선에 아제프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옷자락을 쥐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저절로 부드럽게 풀렸다.

“네. 그럼요. 동생분이랑 같이 놀면 좋죠. 제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그렇지만, 아까는…….”

“아깐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죠. 마음이 바뀌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언니! 얼른 가자!”

엘리사가 그 틈을 타 얼른 엘제이의 팔짱을 끼며 그녀를 안쪽으로 데려갔다. 두 개의 드레스 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음?”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이던 아제프는 어느새 휙- 돌며 혀를 내미는 엘리사를 발견하고 굳어버렸다.


그 요망한 문장이 누구를 닮아 요망해졌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제프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망발을
지껄인 입술을 경악스럽게 내려다봤다.

‘미친 건가? 제이랑 둘이서 도망가려고 했는데, 어쩌자고 저 여자를 제이 옆에 둔 거야? 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황망히 굳은 얼굴이 팔랑팔랑 뛰어가는 자매의 뒷모습에 닿았다. 엘리사는 신이 나 재잘거리며 피크닉 천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니랑 다정하게 딸기 하나씩을 주고받는 모습이 무척 정다워 보였다.

“이런, 미친……. 저 빌어먹을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인 아제프의 입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번졌다. 저 머리카락을 다 뜯어놓고 차가운 호수에 풍덩


빠트려놔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제프가 위험한 눈을 하고 깊은 호수를 바라봤다.

어느새 아제프의 곁으로 다가온 알체스테는 사납게 일그러진 안색을 살폈다. 무덤덤한 얼굴이 옅은 동정을 담고
혀를 찼다.

“미안하다. 말리려 해보았으나, 보다시피 소용없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리셨어야죠. 대체 제 집에 머무르며 하시는 일이 뭡니까? 수도에 안 올라가십니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얼른 가버리시고, 저 여자도 좀 데려가세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찌푸려진 얼굴에서 사나움이 뚝뚝 떨어졌다. 제발 좀 엘리사를 데리고 꺼져달라는 압력에도
알체스테는 그저 덤덤한 얼굴을 했다.

“곧 가야겠지. 하지만, 경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거다. 루드비히가 주술사를 모으고 있다더군. 경의 저택이 더


이상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든다. 차라리 눈이 많은 수도가 나을 수도 있다.”

“이런, 빌어먹을. 다들 미친 거 아닙니까? 신을 모시는 황족이 주술사를 모아? 경솔해도 정도가 있지.”

“글쎄. 황제가 허락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

알체스테가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드비히 황자에 비하면 황제는 훨씬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쉽게 그런 위험한 일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기가 차서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늘 아버지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연명하던 놈이 무슨 배짱인지


모를 일이었다.

루드비히는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아니라, 그저 둥지를 잃고 낙하한 새일 뿐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7 화
87
“하아……. 그딴 놈도 황족이라고 황좌가 탐이 나는 거겠죠. 직계 서열을 볼 때, 황자님께서 계승서열이 더
높으시고 백성의 지지 또한 높습니다. 게다가 루드비히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던 티아세 家와, 대놓고 전하를
지지한 저 사이에 청혼서가 오가니 불안해진 것일 테지요.”

“궁지에 몰린 짐승은 발버둥을 치는 법이다. 곧 아이젠 공작이 돌아서고, 나는 상경한다. 점점 숨통은 조여 오고


그는 발버둥 치기 시작하겠지.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 짐작도 안 되는군.”

“원래 머리가 좋은 이의 생각보다 미친놈 생각이 더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라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머물렀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저택의 위치도 알았겠죠. 황자님께서는 제이와 티아세 양이 목표가 될 거라고 보십니까?”

“16 년 전, 황제는 티아세 자매에게 아나이샤의 뿌리를 먹여 공작을 협박했다. 공작은 황제에게 대항하는 대신
황제의 개가 되어 사는 걸 택했고, 자매는 해독제를 얻었다. 한 번 성공한 전적이 있으니 두 번이라고 못 할 게
없지. 사람의 약점을 잡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으니.”

그 후로 아이젠은 티아세 자매의 식선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자매 곁에 붙여둔 시녀들도 모두 직접 뽑고 키운


이들이었으며, 호위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티아세 家는 무가가 아니었다. 자금력을 지닌 가문이기는 했으나, 황제의 손아귀에서 자매를 지키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아이젠은 자질 보유자인 아제프 옆에 자매를 두고 떠났지만, 나라의 녹봉을 먹는 아제프가


무한정 휴가를 쓸 수는 없었다.

주의를 기울이고,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이 온다. 아제프는 그 미칠 듯한 불안함에 신경이
자근자근 밟히는 것 같았다.

‘내가 평화에 젖을 틈을 안 주는군. 나는 날 때부터 불행한 운명이라도 되나? 드디어 행복을 가졌는데, 사랑을
받았는데…… 잃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행복해지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는 이제야 사랑받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영원한 행복의 끝에
머물며 살 수 있는데,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시덩굴처럼 복잡한 생각이 얼기설기 얽혔다. 아제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복잡함을 떨쳐냈다. 그는 다시,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저들이 티아세 양과 황자님의 관계도 알고 있을까요?”

알체스테가 이곳에 오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자질로 순식간에 도달했으니 누군가 그의 흔적을 쫓을 수도


없었을 거다.

“아마, 모를 확률이 높겠지. 루드비히 입장에서는 내가 제일 성가신 존재일 거다. 그러니 내가 엘리사와 문장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리사가 목표일 테고, 아니라면 엘제이 티아세가 더 위험하겠지. 경과의 관계가
있으니까.”

“솔직히 저는 문장을 알려 엘리사 양을 미끼로 쓰고 싶습니다.”

“경!”

“끝까지 들어보세요. 전의 저였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보세요.”


아제프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매를 가리켰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꽃을 엮으며 예쁘게 웃는 두
사람은 똑 닮아 있었다. 세상에 단둘뿐인 쌍둥이 자매. 서로에게 지니는 의미가 결코 작지는 않을 터였다.

아제프는 처음에 알체스테와 완전히 한 배를 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은 우선순위가 달랐다.

알체스테는 꽤 점잖았지만, 둘 중 하나의 목숨만 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엘리사를 택할 냉정함이 있었다.
아제프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알체스테와 아제프의 엇갈림이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계산적인 생각이 사라졌다. 아제프는 여전히 엘리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어여쁜 볼우물을 접으며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엘제이, 그 한 사람만 보였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잡을 수 있었던 그 순간 하나하나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이었고, 삶이었다.

그의 삶이 달라졌다. 엘제이를 만나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엘제이는 지금, 혼자 웃는 게 아니라


엘리사와 함께 웃는 거였다.

엘제이는 그와 달리, 그 하나만을 보고 살 수는 없었다. 엘제이에게는 엘리사가 필요했고, 아이젠이 필요했다.

아제프는 겨우, 이 순간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우리와 다릅니다. 둘은 어쩔 수 없이 티아세인 거지요. 저는 지금도 엘리사 양이 진절머리 나게


싫습니다. 꾸역꾸역 여기까지 찾아와 방해하는 것도 싫고, 제이 옆에서 아양을 떠는 것도 역겹습니다.”

알체스테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모처럼 진지한 아제프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

아제프의 눈에 웃음을 터트리는 엘제이가 담겼다. 서툴게 엮은 화관을 서로의 머리에 씌워주는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에도, 그녀는 저렇게 웃을 줄 알았다.

아제프는 그 별것 아닌 일을 지켜주고 싶었다.

“저는 소중한 걸 잃었을 때의 제이가 어떻게 변할지 무섭습니다. 요즘은 특히나 그래요. 저렇게 평범해 보이지만,
많이 불안정해 하고 있어요.”

“악몽이 심하다고 들었다.”

“평범한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제가 곁에 있어주지 않으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합니다. 그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저 작은 몸으로…… 그렇게 견딥니다. 가끔은 제이보다 먼저, 제 가슴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아제프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시린 칼날처럼 냉혹했던 눈이 눈물로 젖었다. 눈가가 발개진 남자가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물기 고인 눈을 부릅떴다.

“…….”

자존심이 강한 아제프가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알체스테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정말 괴로워하고


있었다. 엘제이가 악몽을 꾼다는 사실과, 매일 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다는 사실에 그 역시 절망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버석하게 메마른 눈물을 떨어트리며 꺼질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더는, 그녀가 괴롭지 않기를…….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 순간, 아제프의 가슴 속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던 초록빛 씨앗이 꿈틀, 태동(胎動)했다.

아제프는 왠지 알싸한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쓸었다. 화끈한 뭔가가 가슴 속에 퍼진 것 같았다. 그는 먹먹한


속내가 겉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엘제이가 서 있었고, 그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눈동자를 위로 올려 눈물을 참아낸 아제프가 찡한 코끝을 조금 쓸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백금색 속눈썹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벽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제프가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시야에 하얀 손수건이 들어왔다.

“뭡니까?”

“써라. 리사 거다.”

아제프는 하얀 꽃이 수 놓인 손수건을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봤다. 알체스테의 투박한 손과 너무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제프는 몹시 흉물스러운 걸 본다는 듯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손을 팔랑팔랑 저었다.

“싫습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가 거부하자마자 손수건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주름이라도 갈까 봐 걱정되었는지,


투박한 손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저럴 거면 빌려주지를 말든가.’

사실 빌려주기 아까웠다는 듯 재빠른 몸놀림에 아제프의 얼굴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걸 왜 황자님이 챙기십니까?”

“리사는…… 아직 어려서, 가끔 물건을 잊어버린다.”

아제프가 픽- 코끝으로 비웃었다. 알체스테는 엘리사가 어디 놔두고 깜빡 잊은 걸 챙긴 듯했다.

아제프는 늘 꼼꼼하고 차분한 엘제이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한쪽만 말아 올렸다. 아름다운 얼굴에서 비웃음이 뚝뚝
떨어졌다.

“제이는 안 그러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티아세 양은 우리 제이보다 여러모로 어린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겨우 몇 분 차이라고 들었는데요.”

“……아주 가끔이다. 평소에는 잘 챙긴다.”

알체스테는 최선을 다해 변명해보려 했지만,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저 말이 다였다. 아제프는 저 성깔 나쁜


여자를 책임지게 된 비운의 황자를 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관심이 가진 않았다.

눈시울을 손으로 톡톡 건드려보던 아제프는 마른 눈가를 확인하고 싱긋 웃었다. 엘제이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때, 숲을 다 울릴 것처럼 우렁찬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이 에그 샌드위치 맛있겠다! 나 먹어도 돼?”

아제프가 그건 다 제 몫이라고 못을 박아두었지만, 엘제이는 차마 동생의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엘제이는


함박웃음을 짓는 엘리사를 보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건 아제프, 음…… 그래.”

아제프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는 알체스테의 옷을 뒤져 손수건을 꺼낸 뒤 그걸 냅다 엘리사의


얼굴로 던졌다.

퍽-

샌드위치를 깨물려고 입을 벌리던 엘리사의 입속으로 손수건이 쏙 들어갔다.

“아제프!”

알체스테의 당황한 목소리를 뒤로 한 아제프가 후다닥 엘제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엘리사를 견제했다. 그는


몹시 부드러운 얼굴로 싱긋 웃으며 얄밉게 속삭였다.

“이런……. 미안해서 어쩌죠? 그만 손이 미끄러졌지 뭐예요? 엘리사 양이 두고 갔다고 해서 전해주려는


것뿐이었는데. 분실물에 귀소 본능이 있나? 주인을 찾아가네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에 엘리사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보지는 못했으나 평소 남자의 성격으로 보아 고의임이
분명했다.

‘이 남자가! 숙녀의 얼굴에 손수건을 던져? 또 해보자는 거야?’

엘제이가 걱정스러운 손길로 엘리사의 얼굴에서 손수건을 떼어줬다. 손수건이니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놀랐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리사, 괜찮아? 아제프……. 설마,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죠?”

아제프는 흘긋, 엘제이의 눈치를 보며 기가 죽은 사람처럼 눈꼬리를 내렸다. 방금 울다 와서 묘하게 발긋한


눈가와 축축한 벽안이 어린 강아지의 눈처럼 변했다.

“제이, 그럴 리가 있나요? 전 정말 억울해요. 세상엔 우연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냥 엘리사 양이 운이 안


좋았을 뿐인걸요.”

“……언니, 맞아. 그럴 수도 있지.”

엘리사가 이를 빠드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일부러 했다고 화를 내면 온갖 피해자인
척은 다 할 남자가 눈에 선했다. 엘리사는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일단, 유연하게 넘겼다.

찌릿, 두 사람의 눈이 맹렬하게 맞부딪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8 화
88

아제프는 고작 2 개밖에 안 남은 달걀 샌드위치를 어디서 찾았는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엘리사를 보며 기회를


노렸다. 그토록 많은 달걀 껍데기를 씹으며 참았는데, 이제 와 들킬 수는 없었다. 그는 얼른 엘리사의
샌드위치부터 빼앗았다.

“이런……. 미안해요. 엇! 샌드위치가 손에 묻으셨네요. 마침 손수건이 있으니 닦으시면 되겠어요. 이건……


황자님이 드시면 되겠네요.”

“나는, 읍!”

알체스테는 제 입에 쑤셔 박히는 샌드위치에 눈을 크게 떴다가 어쩔 수 없이 그걸 씹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에 뭐가 걸렸다.

빠각-

제 입에서 난 소리에 알체스테가 무척 느리게 반응하며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다.

“흠? 이게 뭐,”

“쭈욱- 드세요. 꼭꼭 씹어서요. 네?”

아제프는 눈치 없는 알체스테의 발을 몰래 툭툭 차며 샌드위치를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제프의 다른


손에는 남은 달걀 샌드위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제프는 엘리사를 믿을 수 없었다. 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샌드위치 속에 달걀 껍데기가 있다고 쫑알거릴
엘리사를 생각하자 벌써 속이 쓰렸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입을 막은 뒤에야 여유롭게 남은 샌드위치를 해치웠다. 말없이 샌드위치를 씹는 두 사람의


입에서 빠각- 하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탭댄스를 추는 것 같은 묘한 리듬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리던 엘리사가 눈을 깜빡이며 언니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언니 샌드위치에 뭐 집어넣었어?”

“오이……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당근?”

“엇! 그것보다 에그 샌드위치 하나도 없잖아! 이 망할 남자!”

주먹을 불끈 쥔 엘리사가 어느새 얄밉게 샌드위치를 밀어 넣는 아제프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보란 듯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삼키는 태도에 본색이 튀어나왔다.

아제프는 그녀의 실수가 기쁜지 히죽거리며 웃다가, 엘제이의 눈치를 보며 입꼬리를 내렸다. 그는 곧 입안을 꽉
깨물고 촉촉한 눈으로 호소했다.

“제이……. 엘리사 양이 형부보고 망할 남자라네요. 저 상처 받아서 어쩌죠?”


“…….”

“형부라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망할’이라는 단어는 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었기에 엘제이는 도움을
청하듯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무뚝뚝한 금안이 그녀의 난감함을 알아채고 흐려졌다. 그는 까칠한 아제프보다는 다정한 엘리사를 공략하기로
했다.

“리사. 그만,”

“흐윽…….”

엘리사가 너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원망스럽게 알체스테를 흘겼다. 건조한 눈을 억지로 쥐어짜서 개미
눈물만큼 찔끔 나온 눈물에도 알체스테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나도 아제프가 먼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제이, 두 사람이 치사하게 둘이서 저를 공격해요. 저는 외톨이예요.”

엘제이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말이었다. 외톨이란 단어에 힘준 효과가 있었는지, 움찔한 엘제이가 둘을 보며


제안했다.

“리사, 망……. 그건 너무 심했잖아. 아제프도, 손수건은 잘못했으니까 서로 사과해요.”

“언니…….”

“제이…….”

가만히 셋을 지켜보던 알체스테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을 톡, 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다. 서로에게 딸기 하나씩을 먹여주며 화해하는 거다. 원래 싸운 후의 아이들은 그렇게 화해를
한다더군.”

유아들이나 할 법한 화해법에 둘의 얼굴이 동시에 찌그러졌다.

엘리사는 짜증스런 기색으로 아제프를 노려봤다. 그녀의 머릿속의 아제프는 나무 위에 매달려 쇠몽둥이를 맞고
있었다.

아제프도 지지 않고 엘리사를 비웃었다. 그는 손수건이 아니라 돌이라도 하나 던졌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지 그는, 엘리사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

‘하아……. 그래도 제이 동생이니……. 많이 닮았기도 했고. 결국, 나는…… 저 여자 역시 건드릴 수 없게


되어버렸네요. 당신을 만나고부터 죽일 수 없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요. 제이.’

아제프는 어쩔 수 없이 옆에 아무렇게나 피어오른 꽃 한 송이를 꺾었다. 딸기를 먹여주는 건 끔찍할 정도로


싫었고,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미안합니다.”
“윽!”

엘리사는 툭- 던지는 들꽃을 저도 모르게 받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엘리사의 얼굴이 기분 나쁜 듯 안 나쁜 듯


애매하게 변했다. 그녀는 결국, 조마조마해 하는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저도 심했어요. 사과할게요.”

엘리사는 여전히 아제프를 언니를 훔친 도둑놈 정도로 인식했고, 아제프도 엘리사가 지독할 정도로 싫었다.

그럼에도 둘은, 처음으로 평화로운 화해를 나눴다.

***

어쩔 수 없이 딸기를 나눠 먹기는 했지만, 아제프는 계속 알체스테에게 눈치를 줬다. 얼른 저 여자를 챙겨


사라지라는 신호에 알체스테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화관을 엮을 거면 다른 꽃들도 따오는 게 좋겠군. 리사, 같이 가주겠나?”

삐뚤삐뚤 조악한 솜씨로 만든 화관을 내려다보던 엘리사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하는 거 더 공을 들여


예쁘게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음……. 좀, 엉성하긴 하죠? 색감이 예쁜 꽃이 있으면 좋을 텐데……. 같이 다녀올까요? 언니! 내가 예쁜 꽃


많이 따올게.”

“리사, 드레스 입고 안 불편하겠어?”

“내가 같이 갈 테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자리에서 일어난 엘제이가 알체스테의 손을 잡고 숲길로 들어가는 엘리사를 지켜봤다. 알체스테가 곁에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언니니까 동생이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괜찮아요. 제가 볼 때는 황자님이 고생을 했으면 했지, 엘리사 양은 편안할 것 같네요.”

“풉, 그렇죠? 돌아오시면 황자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금방 오시려나?”

“글쎄요…….”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눈치가 있으면 정도껏 자기네들끼리 놀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는 꽃을 엮느라
풀물이 든 엘제이의 손을 잡아끌며 벌러덩 누워버렸다.

“제이, 그것보다 여기 누워 봐요. 햇볕이 따뜻해서…… 이렇게 누우면 기분이 좋아요. 따뜻하죠? 팔베개 해줄
테니까 여기 누워요.”

아제프가 팔을 톡톡 치며 채근했다. 커다란 백금색 여우가 애교를 피우며 뒹구는 것 같아서 엘제이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엘리사가 빨리 돌아와 이 모습을 보면 좀 부끄러울 것 같았지만, 엘제이는 모른 척 그의 팔을 베고 누워버렸다.


“참 평화로워요. 소풍 나오니까 기분도 좋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 같아요. 그거 알아요? 나무는 숨을 쉴 때마다
사람에게 이로운 향을 내뿜는데요.”

“그래요?”

엘제이는 어느 날 한제이가 책에서 봤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말한 거였고, 아제프는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와 마른 풀잎향이 싱그러웠다.

아제프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엘제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살폈다. 이 평온한 얼굴이 계속되기를 빌었다. 숨이
막힌다는 듯 쌕쌕거리며 괴로워하는 얼굴은 더는 보기 싫었다.

아제프는 가만히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며 매끄러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요즘, 제 머리카락으로 장난 많이 치시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원래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 이유를 알았어요.”

아제프가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는 듯 소리치자, 엘제이의 얼굴에 옅은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뭔데요?”

“그냥…… 별거 아닌데, 궁금해요?”

아제프는 괜히 뜸을 길게 들이며 싱긋 웃었다. 혼자만 알 거라는 듯 샐쭉 휘어진 눈꼬리에 엘제이는 더


궁금해졌다. 원래 숨기려고 하면 더 알고 싶은 법이었다.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아제프의 팔을 조금 흔들었다.

“네. 그렇게 말하시니 더 궁금한걸요. 뭔데요? 말해주세요.”

“그럼, 내가 궁금한 거 먼저 제이가 알려주면 말해줄래요.”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제가 더…… 궁금하니까요.”

아제프가 얼굴을 내려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간질간질하게 속삭였다. 뺨을 쪽쪽 공략하던 입술이 살금살금


내려가 엘제이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엘제이의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놓았다.

쪽. 짧은 입맞춤이 뒤를 이었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심장이 골골 풀어진 엘제이가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물어, 보세요.”

“있잖아요, 제이. 밤마다, 무슨 꿈을 꿔요? 제게 알려줄래요?”

엘제이의 등허리를 꽉 끌어안은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실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햇볕이 주는 나른함에 취해, 그가 건네는 달콤함에 취해 눈을 감았던 엘제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꿈? 내가 꿈을 꾼다는 걸 아제프가 어떻게 아는 거지?’


꿈에서 깬 엘제이는 모든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기제였고, 엘제이가 일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마지노선이었다.

악마의 등장 같은 강렬한 것이 아니면 꿈의 내용은 완벽하지 않았다. 엘제이가 기억하는 건 그저 어떤 꿈을 꿨고,


마음이 어땠는지 정도였다.

엘제이는 제 몸이 밤마다 악몽에 허덕이며 그를 찾는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제가 꿈을 꾸긴 하는데……. 그걸 아제프가 어떻게 알아요?”

“제이가…… 잠투정을, 해요.”

짧은 한마디가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잠투정이라는 귀여운 단어에 감춘 그의 슬픔이 투명하게 녹아 떨어졌다.
뚝뚝 흐르는 감정의 잔재에 엘제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자면서…… 무슨 말을, 하나요?”

“잠꼬대 말인가요? 제이는 자면서 많은 말을 해요. 말이 참 많은데…… 대부분 똑같은 말이에요. 저는 매일 밤


그걸 들어요. 제가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당신은…… 표현하지 못하거든요.”

눅눅하게 젖은 음색이었다. 흐느끼듯 새어 나온 말에 엘제이가 고개를 들려 하자 아제프가 그녀의 머리를 꼭


감싸며 그러지 못하게 했다.

“얼굴 보고 싶은데…….”

“나중에요. 저를 위해 알려줄래요? 무슨 꿈을 그렇게 꾸는지?”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이끼 같았다. 볕이 들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버린 음색이 엘제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잠든 사이 하는 말과 행동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내 옆에서 잤나요? 나를 불러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나를 꺼내줬군요. 내가 잠든 밤, 당신은


잠을 이루지 못했구나.’

그를 치료하기 위해 꿈을 꿨는데, 어쩌면 그에게 더 큰 아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코가 시큰거렸다.

모든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89 화
89

엘제이는 그의 답답함과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숨겨둔 진실이 그에게 너무 큰 슬픔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먹먹한 먹구름에 잠기지 말고, 소나기가 되어
시원하게 퍼부을 수 있기를 바랐다.

엘제이는 가만히 그의 목에 팔을 휘감고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퍼부어졌다.

“좋아해요. 아제프.”

아제프가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살랑 다가와 유려하게 휘감기는 팔이 기꺼웠다. 좋아한다고 애교 있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그는 엘제이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살짝 웃었다.

“말하기 싫어서 이래요? 저는 그냥 안 넘어갈 거예요.”

“말하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수천 번 들어도 좋을 말이긴 한데, 곤란하네요. 넘어가면 안 되는데.”

눅눅하게 젖었던 습지에 볕이 들었다. 아제프는 조금 환해진 얼굴로 엘제이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목덜미를 빨아들이자 엘제이가 목을 움츠렸다.

“으읏,”

“사랑해, 제이.”

아제프는 추지게 젖은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달콤했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말랑한 살결에 몸이 사르르
풀렸다. 그는 긴장을 풀고 엘제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엘제이는 부드럽게 풀리는 그의 몸을 느꼈다. 꽉 조여진 흉부가 나른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그는 가만히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엘제이는 그저 제가 느꼈던 걸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저는 슬픈 꿈을 꿔요. 꿈속의 저는,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견뎌내야 해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 다치고, 아프고,
죽는…… 참혹한 순간이 내게 달려와요. 아무리 도망가고 달려가도, 앞은 새빨갛게 물들어…… 나를 덮쳐요.”

폐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제프는 고통을 견디려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지만, 들어오는 건


공기가 아니었다. 뜨거운 불구덩이가 목구멍을 찢어발기며 폐를 태웠다.

아제프는 울어서 눈이 따갑다는 걸 너무 오랜만에 느꼈다. 그는 빨갛게 짓물러 따가운 눈가를 옷소매로 거칠게
닦으며 숨을 골랐다.

“당신의 꿈에서 죽고, 아파한다는 사람이…… 저예요?”

“아제프,”

“이상하죠? 당신은 잠이 들면 항상 제 이름을 불렀어요.”

처음에는 그게 좋았다. 저 마음에 각인된 게 자신이라는 숨길 수 없는 증거가 기꺼워 더 듣고 싶었다. 일부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잠든 채 꿈을 헤매는 엘제이에게 말을 걸었다.
“…….”

엘제이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아직 꿈의 시초에 관해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묘한 자책이 깃든 목소리에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아제프는 가만히 목덜미에 기대어 숨만 쉬는 엘제이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엘제이를 붙잡을 어떤 것도 없었다. 늘 당당하게 웃고,
아무렇지 않게 잘난 척했지만, 불안해 죽을 것 같았다.

‘당신이 꿈을 꾸고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저게 문장통은 아닐까? 반려가 그리워 발버둥 치는
당신의 영혼이 아닐까!’

그동안 엘제이의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발현한 후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엘제이는 텅 빈 눈을 하지
않았다. 감정으로 충만하게 차오른 눈이, 그 싱그러운 초록빛이, 늘 그를 봄으로 적셨다.

안심했는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면 엘제이는 제 손으로 떨어지고, 소식 없는 반쪽은 그렇게 제 자리를 빼앗길
거라고 믿었다.

제 오만함을 질책하듯 저 빌어먹을 악몽이 시작됐다. 엘제이는 매일 밤마다 고통으로 몸을 뒤틀고, 울고,
애원했다.

숨 쉬는 한순간이 다 피로 점철된 고통이었다.

아제프는 눅눅한 턱을 엘제이의 어깨에 기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체구였다. 뼈대가
가늘고, 몸집이 작아 힘주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비이상적인 고통을 겪으며 매일 밤,
울었다.

‘모든 게 순리를 거부한 내 탓인 거 같았다. 다른 이의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 나의 오만함 때문에


…… 어쩌면, 저러다가 제이, 당신이 죽는 건 아닐까. 신이 정해준 짝을 거부한 당신에게 저주가 내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나를 미치게 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놓아줄 수가 없어.’

처음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쥐어본 적 없던 삶에서, 마음껏 가져본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황홀함에
도취되어 가졌다고 믿었다.

이 작은 사람이 욕심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행복하기를, 편안하기를, 그것만을 죽도록 바라는데…… 아직도


놓아줄 용기는 없었다.

‘당신을 잃는 순간, 내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아. 나를 이루던 모든 감정과 부산물이 물거품처럼 흐려져
녹아내리고, 나는 끝끝내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겠지.’

엘제이를 진정 위한다면 놓아주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뼛속까지 이기적인 자신은 끝내 그 선택만은 하지
않을 터였다. 이런 자신이 구역질이 치밀 만큼 역겨운데, 혐오스러운데, 자신을 나락으로 미는 길만은 걸을
용기가 없었다.

아제프는 너무 조용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기묘한 적막이 엘제이를 불안하게 했다. 엘제이는 놓아주지 않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비틀며 귓가에 웅얼거렸다.

“아제프……. 무슨 생각 해요?”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게 제 탓인 거 같아요. 당신이 문장 보유자도 아닌 저를 만나 이렇게 된
게 아닐까요?”

“아제프!”

아제프, 그 자신에게 보내는 냉소에 엘제이가 몸을 흔들며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이 남자는 또 못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보란 듯이 엘제이를 꽉 끌어안으며 질척하게 물든


응어리를 쏟아냈다.

“제가 억지로 당신을 누르고 억압해서!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협박해서! 제 못난 이기심이, 당신을 갉아먹어서…
…. 그래서, 당신이 잠을 못 자는 겁니다! 제 죄를 당신이 받는 거예요…….”

“아제프!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엘제이는 토해내듯 입을 크게 벌렸다가도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좁은 문틈에서 서로 나가겠다고 싸우느라 정리가 되지 않았다.

“혹시, 어쩌면, 당신의 짝을…… 찾아주지 않아서 당신이 아픈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내 것이 아닌 걸
붙잡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는 또 당신을 찾고, 당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해달라고
애원해요. 저는 어디까지…… 쓰레기죠?”

“아제프……. 오해예요. 당신 탓이 아니고, 미리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이런 생각을 하는 줄 몰라서……


내가 안일했어요. 미안해요.”

“아니요. 이건 그것보다 근본적인 이야기예요. 저는 이미 새까맣게 물들고 때가 타서, 돌이킬 수 없는 걸지도


몰라요. 안타까워 미칠 것 같은데……. 대신 아파주고 싶은데……. 당신보다 내가 먼저야. 당신을 위해 죽어줄
수는 있어도, 내 손으로 당신의 반려를 찾아 바치는 짓만은 못 하겠어요.”

“저는 제 반려가 누구인 줄 알아요! 읍!”

드디어 확실히 대답해줄 수 있는 말이 나와 기쁘게 답하려는데 입이 막혔다. 어느새 그의 안락한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짓눌려진 엘제이가 눈을 크게 뜨고 아제프를 바라봤다.

축축하게 흐르는 눈물이 마른 대지를 적시듯 엘제이의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알고 있었다고?”

“읍! 으으읍!”

엘제이가 놓아달라는 듯 버둥거렸지만, 아제프의 힘은 풀리지 않았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애처로웠고, 여전히 젖은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아제프는 언제 울었냐는


듯 싸한 냉기를 머금은 눈으로 이를 갈았다.

“나는…… 당신의 반려가 누군지 아는 순간, 죽여 버릴지도 몰라. 당신이 놓아달라고 해도, 그놈이 죽으면
당신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멈추지 못할 거야. 어차피 당신이 없다면 내 인생은 썩어빠져서
지옥으로 떨어질 텐데, 인간 하나 더 죽인다고 뭐가 달라져?”
‘당신이라고! 당신이 내 반려라고 여신님이 말씀하셨단 말이야! 저 못된 입!’

엘제이는 못된 말만 내뱉는 아제프가 답답해서 가슴을 쿵쿵 때리고 싶었다. 아제프의 한 손에 우악스럽게 짓눌린
손목이 빠져나가려는 듯 버둥거렸다.

아제프가 일그러진 얼굴로 평소와는 다르게 반항이 심한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는 작전을 바꾼 듯 심호흡을
하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제이, 나랑 살자……. 응? 그놈 말고 나랑 살아요.”

“우웁! 웁!”

입을 놔줘야 대답을 할 게 아닌가. 엘제이가 놓아달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못된 남자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당신! 설마 나를 버리고, 가려는…….”

엘제이는 저 못된 입이 또 나쁜 말을 하기 전에 진실을 말해줘야 했다. 결국 답답해서 속이 터진 엘제이가 그의


손을 꽉 깨물었다.

그동안의 복수를 하듯 힘이 꽉 들어간 잇새에 그의 살이 맞물렸다. 제법 강한 힘에 놀랐는지, 아제프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 틈에 엘제이가 그의 밑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아제프는 아픈 것보다 놀란 게 더 컸는지 이빨 자국이 남은 손을 내려다보며 얼빠진 얼굴을 했다.

“제이가 나를, 물었어……?”

“그래! 물었다! 왜!”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화가 나면 무서워지는 법이었다. 엘제이는 반말을 내뱉으며 그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허리에 손을 탁 올리며 째려보는 엘제이의 눈빛에 아제프의 눈이 덜덜 떨렸다. 엘제이가 저를 깨문 충격도 가시지
않았는데, 째려보는 눈은 타격이 너무 컸다.

아제프는 몹시 충격 받은 듯했다. 치명타를 입은 남자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꿈인가 싶어 혀를 깨물어 봤는데, 아팠다. 아제프의 동공에 콰지직,
지진이 일었다.

“반말……? 제이, 나한테 화났어요? 내가 당신 반려를 죽이겠다고 해서? 놓아주지 않아서?”

둘 다 아니었다. 엘제이는 나쁜 말만 쏟아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새초롬한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는데, 전혀 흉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못된 입을 손으로 때리는 대신 입술로 때려주었다.

쪽. 짧은 입맞춤에 아제프의 눈이 멍하게 깜빡거렸다.

“애초부터 가정이 틀렸단 말이에요. 당신이 내 반려라고요!”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0 화
90

아제프는 엘제이가 말하는 반려의 뜻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던 진리가 깊은 사고를 막았기 때문이다.

문장의 발현은 양쪽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이 절대적인 진리는 베아르시 제국민들에게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것이었다.

“아려……?”

볼이 꾹 눌린 탓에 아제프의 발음이 어눌하게 샜다.

엘제이는 아제프를 좋아했다. 당연히 연인 혹은 반려라고 칭할 수도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저를 반려라고


지칭해준 게 기꺼웠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직, 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 다급하게 굴었나?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아제프는 부모에게 혼나는 어린애처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엘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힘으로 한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제프는 어린애를 혼내듯 엄한 얼굴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엘제이를 향해 눈웃음을 살살 쳤다.

‘붕어 같은데, 귀여워. 꼬마 아제프만큼은 아닌데, 귀여워.’

아제프가 알았다면 또 길길이 날뛸 생각이었다.

“에이, 노아둬요.”

아제프가 평소처럼 싱긋 웃었다. 그는 입술이 좀 튀어나와도 평소처럼 자신이 예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늘


그렇듯 이 얼굴에 사족을 못 쓰는 엘제이가 고민하는 눈을 했다.

볼이 잡혀 툭 튀어나온 입술과 발음이 꽤 귀여워서 엘제이는 마음이 또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못된 말만 하고,
못된 행동만 하는 데 저리 예뻐 보이는 건 다 저 얼굴 탓인지도 몰랐다.

‘풀어줄까? 풀어주고 얘기해도 되잖아. 그렇지? 나이도 많은 사람을 이리 어린애처럼 붙잡는 건 실례잖아…….’

엘제이는 속으로 뭐라 뭐라 빠르게 변명하며 손을 살살 풀었다.

엘제이는 그가 마음속 깊이 그런 고민을 한다는 걸 몰랐다. 늘 당당하게 저를 유혹하는 사람이라,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봐주지 못하고 그 혼자 끙끙 앓게 해서 몹시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 반, 예뻐서 홀린 마음 반이었다. 엘제이가 손을 완전히 풀어주며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얼굴에 홀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제프, 이건 확실히 해야 해요. 아까처럼 저를 누르시면 제가 깜짝 놀라잖아요. 제 말을 들어주시지도 않고!”

“제이, 화났어요? 미안해요.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이가 저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었나 봐요.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속으론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사과는 참 빨랐다. 엘제이의 손에서 풀려나자 평소처럼 말하게 된 아제프가 눈가를
축 늘어트리고 달콤하게 사과를 속삭였다.

화를 낸 지 몇 초도 안 지났는데, 마음이 너무 빨리 풀렸다. 엘제이는 이 고질병에 눈을 질끈 감으며 쉽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이시면 어떡해요.”

“저 정말 반성하고 있어요. 놀랐죠? 손목 괜찮아요? 어디 한번 봐요.”

오늘따라 눈가는 왜 저리 붉으며, 눈은 왜 저리 촉촉한지, 애간장이 살살 녹았다.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줘- 그렇게 속삭이는 눈이 엘제이를 빤히 바라보며 불쌍한 척을 잔뜩 해댔다. 그 눈빛이


어찌나 아련한지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는 게 순식간이었다.

엘제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아제프를 핍박하고 있는 건가, 고민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한껏 가여운 척 속눈썹을 팔랑팔랑 흔들던 남자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엘제이의 손목을 잡을 듯 말 듯 애달프게 굴었다.

“손목 잡아도 돼요? 이제 아프게 안 할게요. 걱정돼서 그래요.”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꿈속에서 그의 아프고 슬픈 모습만 잔뜩 본 터라
엘제이는 유난히 저런 모습에 약하기도 했다.

“이번만 용서해주는 거예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입을 막으시면 제가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요. 절대 안 그럴게요.”

아제프는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재빠르게 엘제이의 손목을 잡고 여린 안쪽 살을 살살 문질렀다.

그 와중에도 다행히 힘 조절은 했는지, 손목은 멀쩡했다. 아제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성하는 척
눈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말로만 반성하는 게 그의 특기였지만, 엘제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제프, 당신이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나는 그냥, 꿈이었는데…… 당신은 현실이었잖아.
나는 알고 나니 괜찮았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어쩌면 아무것도 몰라 더 힘들었을 아제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더 혼낼 수가 없었다. 엘제이는 그에게 확실히
말해주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더 숨기다가는 그의 상처가 곪을 것 같았다.
엘제이가 가슴을 덮은 드레스를 살짝 내리며 문장을 드러냈다.

“여기 만져볼래요?”

“제이, 밖인데…… 이러시면, 참…… 부끄럽잖아요.”

말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슬금슬금 다가와 뽀얀 가슴살을 쓸어내렸다.

크림처럼 새하얀 가슴 위에 떠오른 녹빛 잎사귀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척 예뻤다. 아제프는 생크림 같은 살결을


잘근잘근 깨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엘제이의 눈치를 봤다.

‘여기선, 좀 참는 게 좋겠지?’

아제프의 탐욕어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엘제이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 그녀는 아제프의 뺨을 살살
쓸어보며, 그의 몸 어딘가에 돋아날 문장을 기대했다.

‘같은 문장이라고 꼭 같은 곳에 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같으니까 아제프도 가슴일 확률이 높겠지?’

엘제이가 아제프의 크라바트를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아제프, 이거 풀어도 돼요?”

“……그럼요.”

엘제이는 아제프의 크라바트를 살살 풀어 옆에 잘 놔두고 천천히 그의 단추를 풀었다. 탁탁, 소리를 내며 풀리는
단추와 순진하기만 한 얼굴의 차이에 아제프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뭐지? 뭐 하는 거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아제프의 시선이 질척하게 젖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 집중하는 엘제이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안락한
침대에서도 잘 참았던 충동이 그를 덮쳤다.

아제프의 탐심을 알 리 없는 엘제이는 혹시 모를 문장을 찾아 그의 몸을 더듬었다. 엘제이의 손에 아제프의


셔츠가 휙 젖혀졌다. 그녀는 제가 지금 얼마나 과감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직 없네……. 언제 생기는 거지?’

엘제이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가슴을 보며 실망 어린 탄식을 쏟아냈다. 후- 내뱉는 숨결이 봄바람처럼
불어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제이, 잠깐…….”

“가만히 좀 계세요. 저 할 게 있단 말이에요.”

하얀 대리석 같던 목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아제프가 주먹을 꽉 쥐며 난생처음 겪는 난감한 상황을 버텨내려고


애썼다.

그가 노골적으로 유혹한 적은 많았다. 그때는 미리 생각해두고 대비해둔 바였기에, 유연하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엘제이가 이리 나올 거라는 건 상상만 했기에 아제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기 좀 만질게요.”

“제이, 나 좀 힘들, 윽!”

엘제이의 손이 손가락부터 천천히 그의 가슴에 닿았다.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 딱 그녀의 문장이 있는 자리를 엘제이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빨리 생겼으면……. 빨리 빛을 발했으면 좋겠어. 언제 나타날 거야? 응? 빨리 우리에게 와줘. 너는 왜, 나랑


같이 생기지 않은 거야? 어떻게 하면 나올 거니? 응?’

엘제이가 간절히 바라며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차가운 체온을 달구는 따뜻한 손길에 문장이 아니라 다른 게
먼저 반응했다.

‘화가 나서 나를 고문하는 건가?’

아제프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주변을 훑었다. 날이 화창한 오후의 햇볕이 엉뚱한 상상을 하는 그를 질책했다.

따갑게 내리꽂히는 해의 기운은 아찔한 머리를 더 어지럽게 했다. 아제프는 그 나름대로 지키고 있는 선이 있었다.
한 침대에 자면서도 그녀를 악몽으로부터 지킬 뿐,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정한 빌어먹을 제약을 떠올리며 눈을 꼭 감았다.

“아제프, 저 여신님을 만났어요.”

뜬금없이 여신을 찾는 엘제이의 목소리에 아제프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움찔거렸다. 다른 생각만 잔뜩 하고 있던


머리는 뒤늦게야 엘제이의 말을 입력했다.

“……네?”

“꿈속에서요. 프리멧사 님을 만났어요.”

“아……. 꿈속에서요.”

아제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꿈이라는 말에 그의 뇌는 엘제이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평소의 영민함과 달리 흐물흐물 풀린 뇌는 다른 쪽으로 돌아가느라 바빴다.

엘제이는 별 반응 없이 하늘만 보는 아제프의 가슴을 꾹 눌렀다.

“아제프, 내가 말하는 반려의 뜻이 뭔지 알아요?”

몸을 움찔한 아제프가 그제야 엘제이 쪽으로 시선을 주며 한숨을 삼켰다. 그의 손은 엘제이의 가슴 위에,
엘제이의 손은 아제프의 가슴 위에,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제프는 손을 움츠리지도 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아무리 봐도 아제프는 엘제이의 말에 집중한 상태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엘제이가 아제프의 볼을 다시


손으로 꾹 누르며 집중하라는 듯 그를 째려봤다.
“여신님이 제 꿈속에 찾아와 아제프가 제 문장의 반려라고 하셨어요.”

“문장?”

“네. 프리멧사 님이.”

아제프는 그제야 진지한 엘제이를 보며 그녀가 말한 반려의 뜻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엘제이는 자신이 문장의
반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엘제이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역시, 충격이 컸나? 꿈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건가?’

아제프는 다른 생각을 멈추고 엘제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엘제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제이. 물론 그 말이 맞으면 정말 좋겠지만, 그건 그냥 꿈이에요. 제이가 꾼 꿈.”

“아니요. 제가 꾸는 건 그냥 단순한 꿈이 아니에요.”

단단하게 굳혀 나온 목소리에 아제프의 손짓이 흠칫, 멈추었다. 그제야 멈춰 있던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잦은 악몽, 생생하게 느끼는 고통의 강도,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못하는 엘제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수치를 넘어선 괴이한 현상이었다. 처음에는 저주를 의심할 정도였다.

‘뭘까? 내가 놓친 게 뭐지?’

엘제이는 제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그의 가슴을 손으로 한 번 더 매만졌다. 아제프의 시선이 문장을 향했다.

‘딱 저런 색이었는데……. 그 빛.’

환상처럼 휘날리던 초록색 빛무리가 문득, 떠올랐다. 인간이 지닌 능력 중에 스스로 빛을 내는 건 보통 두


가지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한 가지가 더 있긴 했다.

문장, 성력, 그리고…… 그것.

아제프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하나를 배제했다. 그가 아는 그것은 그토록 온화한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만큼 위험하고 폭력적인, 의지의 발현.

아제프는 설마 하는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제이, 혹시…… 자질 보유자예요?”

어긋나 있던 조각이 끼릭- 맞물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1 화
91

아제프는 제가 말해놓고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 기묘한 이질감은 뭐지? 왜……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엘제이의 상황도 워낙 이상해서 혼란스러워졌다.

녹색 빛이 튀어 오를 때, 엘제이는 아파하거나 기절했다. 자질을 사용할 자격치를 넘지 못한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살금살금 몸에 침투해 사람을 말려죽이지, 엘제이의 경우처럼 티 나게 굴지는 않는다.

아제프의 자질은 빙(氷), 알체스테의 자질은 빛(光)이다. 그 외에도 지금껏 베아르시 제국에 기록된 자질은
원소계열의 공격적인 것이었다.

아제프가 아는 건 그런 것이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자질도 있었을 수 있다. 엘제이의 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제프의 것보다는 조용한 자질인 게 틀림없었다.

아제프는 멍하니 엘제이를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혼란스러운 듯 푸른 눈은 초점을 잘 잡지 못했다.

엘제이는 흔들리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자질 보유자예요.”

숨이 훅, 밀려들어왔다. 아제프는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몸 밖으로 터질 듯 거칠게 맥동하는


그것이 그의 불안함을 대변했다.

아제프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니,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었다. 놓치는 게 있을 테고, 그 중 엘제이의 자질이


들어간 것뿐이었다. 엘제이가 자질 보유자인 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남과 다른 특이한 능력을 갖춘다는 건 무척 큰 장점이었다. 아제프 역시, 이 능력으로 지금껏 살아남았다.


엘제이가 그렇게 살도록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았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은 달랐다.

‘제이.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죠?’

아제프는 가슴을 꾹 누르고 말이 없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엘제이는 아제프의 뺨에 손을


올렸다.

“아제프, 몸이 안 좋아요? 얼굴색이 창백해요.”

아직 충격적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아제프는 이미 그걸 예감한 듯 표정이 몹시 안 좋았다.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라 모든 걸 예감했다는 듯 탈색한 표정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아제프는 몸에서 피가 빠진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토록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꿈이 당신의 자질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꿈은 아니에요. 꿈을 꾸는 건 제 자질이 지닌 능력의 일부예요.”


엘제이는 차분하게 속삭였다. 그녀 또한 입을 떼기가 쉽지 않은데, 아제프는 듣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여기서
멈추는 게 좋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가 더 오해하기 전에 풀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제프는 가만히 앉아 엘제이가 꾸는 악몽을 떠올렸다.

밤마다 거칠게 새어나오는 숨결과 비명을 지르려고 벌어지는 입술. 고통스럽게 벙긋거리는 입속에선 끝내 비명이
나오지 못하고 입안을 맴돌기만 했다.

이불을 파고드는 손가락은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다는 듯 절박했고, 감은 눈으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엘제이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아제프는 알았다. 엘제이는 매일 밤, 아제프 란델이 죽는 꿈, 혹은 그가


괴로워하는 꿈을 꿨다.

‘왜일까? 그녀는 왜 내가 죽는 꿈을 꿨을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더는 생각하지 말라는 듯, 무겁게 뛰는 심장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심장이 한 번 박동할 때마다 발바닥 끝으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제프는 사막의 모래를 가득 머금은 듯 버석거리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당신은, 꿈에서 무얼 하는데요? 왜, 내 꿈을 꿔요?”

“저는 꿈에서 당신을 봐요. 매일 밤……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저는 5 살의 아제프를 보고, 10 살의 아제프를
보고, 20 살의 아제프도 봐요. 저는 늘, 당신 옆에 있었어요. 1 년이 넘도록 매일 밤, 당신을 봤어요.”

아제프가 눈을 내리깔며 그 시절의 자신을 생각했다. 평소 그는 의식적으로 과거를 떠올리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을 뿐더러, 그건 나쁘기보다는 끔찍한 기억들이었다.

몸이 성할 날이 없던 시절, 그는 늘 혼자였다. 혼자라고 믿었다.

“난 혼자였는데…….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있었어요? 왜……?”

‘왜 하필, 그런 꿈을 꿔요? 왜 하필…… 그런 추악하고 험악한 일을 당신이 봐요? 왜?’

밑바닥을 드러낸 수치보다도, 하필 그런 모습을 그녀가 봤다는 사실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겨우 조그맣게 앓는


소리만으로도, 서글픈 표정만으로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이제야 겨우, 엘제이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약했는지 이해했다. 왜 그토록 쉽게 제게 속아주었는지
알았다.

아제프는 모든 걸 알고 난 뒤에야 지난 일을 후회했다. 후회되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 모든 게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아제프는 제 과거를 싫어했다. 누군가 그걸 알아차리면 고문하고, 죽였다.

엘제이는 그가 그토록 드러내기 싫어하는 과거를 제 입으로 들추는 게 미안했다. 그가 느낄 비참함과 고통이
어떨지 상상하면 미안해서 몸속 전체가 먹먹해졌다.

“아제프,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몇 달 전, 당신이랑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당신은 제 이름을 불렀어요. 저를, 알고 있었어요? 1
년이라고 했으니…… 그때도 제 꿈을 꿨나요?”

“네. 알고 있었어요.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담담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자질? 문장? 이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제프는 단지, 미안하다는 듯 내리깔린 밀색 속눈썹이 가슴 아파 미칠 것만 같았다.

‘당신이 왜 미안해해?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왜!’

아제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부릅뜬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벽안에 비친 엘제이의 얼굴이 물에 잠긴 것
같았다.

“내 성격이 어떤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짐작했어요? 내가 당신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도 알아요? 내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다 알아요? 왜 하필…… 당신이 그걸 알아요? 왜!”

“아제프, 미안해요. 제가 멋대로 그걸 말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하나도 더럽지 않아요. 그건 그런 게 아니에요.
네?”

엘제이는 절규하듯 으르렁거리는 아제프를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게 다독이는 손길에도 그는 진정하지 못했다.

그의 턱 언저리가 바르르 떨렸다. 아주 어릴 때도 참았던 오열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토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알아버렸으니까. 빌어먹게 빠른 눈치는 엘제이가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바로 깨달아 버렸다.

아제프는 텅 빈 얼굴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건 저주가 맞았다. 자신이라는 저주가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편했어. 당신은 아픈데! 매일 악몽에 사는데! 나는 이상할 정도로 괜찮았어. 잠을 안 자도
머리가 가벼웠고, 무리해서 자질을 써도 괜찮았어. 왜, 멀쩡했을까?”

“아제프…….”

“그게 다…… 나 때문인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기생충처럼 달라붙어서…… 당신이 그렇게 된 거야?”

“아제프, 그런 게 아니에요. 제 말을 들어봐요. 네?”

엘제이가 아제프를 어르며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제프는 제 자신이 너무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비천하고 더럽게 자랐다.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죽였다. 하얀 손에 말라붙은 피가 씻기지 않을 때, 자신은 이미 늦었는지도 몰랐다.

탐하지 말았어야 했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때, 저와 같은 진창으로 끌고 오는 게 아니라 보냈어야 했다.

이미 너무 더럽고 추악해서, 씻기지 않는 피가 그녀까지 덮쳤다.

더러운 공기가 이미 그녀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는데, 자신은 그걸 몰랐다. 이미 한계라고 울먹이는 사람을
달래는 척 협박했다.

난도질당한 사람 앞에서 자해하고, 별것 아닌 일에 눈멀어 그녀를 괴롭혔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지 않았고,


뭐든 마음대로 하려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소중하고 귀하다고 생각했으면 그리 여겨줬어야 했는데.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나는! 당신에게


너무도 쉽게 상처를 줬어요.”

아제프는 정신없이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 끝에 매달린 눈물이 줄줄 떨어지는데 그는 멈출 줄 몰랐다.

“쉬이, 아제프……, 진정해요. 나는 괜찮아요.”

엘제이가 그를 진정시키려 등을 다독였지만, 그는 쉽게 엘제이를 마주 안지 못했다. 늘 당당하게 그녀의 몸을


탐하고 제멋대로 굴던 과거가 떠올랐다.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뻔뻔하고 끔찍한 과거에 그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며 흔들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멋대로 행동하지 않을게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미안해요. 미안해…….”

아제프가 입을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후회하며 뉘우치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저 때문에 악몽을 번복하고 괴로워하는데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리하면 분명 붙잡혀줄


거라는 걸 예감하는 머리가 오물보다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잡지도 못하고 밀어내지도 못하며 멍하니 흔들렸다.

엘제이는 허공에서 흔들리는 그의 손을 잡아와 제 등에 둘렀다. 그녀가 아제프의 목을 꽉 끌어안자 습기가 맺힌


뺨이 얼굴에 닿았다. 엘제이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하얀 귀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 꿈을 꾸는 건, 내가 그러고 싶어서예요. 내가 원해서, 내 의지로 그 꿈을 꾼 거예요.”

“왜……. 왜 그랬어요? 왜?”

“아제프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워서,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었어요. 허상이라도, 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매일…… 꿈을 꿨어요.”

물기가 가득 고인 푸른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눈물점을 물들이며 지나가는 물줄기에 마음이 아렸다.
엘제이는 도홧빛이 도는 눈가를 손으로 살살 닦았다.

그건 늘,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하는 행동이었다.

“저는 언제나…… 아제프 곁에 오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의 옆에 앉아, 이 손을 잡아주고 싶었으니까요.”

엘제이는 한쪽 팔로 그의 등을 감싸고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시렸다.

시린 겨울에 묻힌 손에 따뜻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러니 가라고 해도 안 가요. 저는 당신만 두고, 떠나지 않아요.”

“이기적이어서 미안해요. 못된 말만 해서 미안해요. 저, 이제 안 그럴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 제발……


제이.”
아제프는 벼랑 끝에 매달렸다. 툭 치면 떨어져 나갈 연약한 지푸라기만 붙잡고 그녀의 심판을 기다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 것만이 그가 참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제프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얇은 유리로 만든 인형처럼 연약한 얼굴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사랑해요. 저는 언제나 아제프, 당신 곁에 있어요.”

운명의 시가 드디어 한 획을 그었다. 빛가루를 묻힌 초록색 붓이 혈관을 타고 올라 내디딜 준비를 마쳤다.

엘제이 티아세, 그녀는 그의 구원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2 화
92

둥글게 확장된 동공이 푸른 홍채에 둘러싸여 흔들렸다. 축축한 해수를 담은 눈이 미안함을 토해냈다.

“미안……. 미안해요.”

이기적인 입술은 곧 죽어도 놓아주겠다는 말을 스스로 내뱉지 않을 터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등을 떠밀 자신이
없음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었다.

옆에 있겠다는 말에 행복해하는 자신이 미안해서 아제프는 그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엘제이는 서럽게 흘러내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손으로 살살 닦아냈다.

“이건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제 의지로 있는 거니까요. 제가 원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이곳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 제 의지니 그걸 당신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

“……이제 그만해요. 제이가 그러는 것보다는 내가 아픈 게 나아요. 좀 아프면 될 일인데…… 왜 계속 악몽을


꾸는 거예요? 이제 그만해요. 네?”

아제프는 엘제이가 이미 자질의 지배권을 놓쳤다는 걸 전혀 몰랐다. 보통 자질의 지배를 잃으면 그 자질에
잡아먹혀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엘제이의 경우에는 가진 자질이 온화해 그럴 일이 없었지만, 엘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걸 설명하자니 간신히


울음을 그친 얼굴이 걸렸다.

어린 아제프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자질을 망쳤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고, 그걸 아는 순간 그는 또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릴 것 같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괜찮다는 걸 알려주면 아제프도 마음고생 안 할 테고.’

엘제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한 번에 다 알려주는 것보다는 그가 오해하지 않을 정도만 천천히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저번에 말했죠? 아제프가 아프지 않으면 저도 안 아파요.”

“저는 이제 아프지 않은데, 제이는 매일 악몽을 꾸는걸요.”

“그동안 쌓인 게 꽤 되어서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차츰 빈도가 줄어들 거고, 괜찮아질 거예요.”

“다시 제게 돌려주면 안 돼요? 그건 힘든가요?”

아제프가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엘제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고 자질은 원래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터라 그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네. 저는 그게 안 돼요. 이미 가져온 건 제 안에서 다 품어야 해요.”

아제프는 엘제이를 봄날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따스해서 그의 마음도 볕에 녹아버렸다. 그는 엘제이의 곁에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엘제이 티아세라는 사람 자체가 그랬기에 상상도 못 했는데, 자질도 꼭 그녀를 빼다 박았다.

‘하필 가져도 그런 걸…….’

아제프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몸에서 자질을 떼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선천적인 능력을 떼어내는 방법은
없기에 그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체념했다.

엘제이가 알려준 건 빙산의 일각도 안 되었다. 천천히 빙산의 모습을 드러나면 그는 좀 더 울부짖으며 괴로워할
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눈치를 살살 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왜 그랬어요. 몸은 그냥 놔둬도 되고, 마음이 힘든 건 당신이 옆에 있으니까 괜찮았는데.”

아제프가 속상한 듯 웅얼거렸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엘제이 앞에서 자해하겠다고 협박하던 옛일이 떠올라 혀를 콱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꿈은 현실과 달라요. 꿈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위안할 수 있어요. 밤에 제가 좀 힘들어해도


꿈에서 깬 저는 멀쩡하잖아요. 저는 제가 가져가는 게 좋았어요.”

“하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요. 저도 이제 다치지 않게 노력할 테니까.”

엘제이의 얼굴이 방긋 피어났다. 그녀는 아제프가 몸조심하겠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는 늘 제


몸을 보살피지 않았다. 엘제이에게는 너무 속상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거짓을 잘 뱉는 입술이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게 너무 고맙고 좋아서 엘제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미안해요. 함부로 굴고 당신을 힘들게 한 것도, 제이를 협박한 것도, 다 미안해요.”

엘제이는 계속 사과만 반복하는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론, 엘제이도 사람이니 상처를 받았다. 그가
날카롭게 굴 때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가 자해한다고 협박했을 때는 손발이 다 후들후들 떨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 용서할 수 있었다. 그가 왜 그렇게밖에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없게 되었는지 알았기에 화가 나지


않았다. 단지, 속이 상할 뿐이었다.

엘제이는 꿈속에서 만났던 꼬마 아제프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남들처럼 성장했을 때의 당신이 아니었을까요? 부모도, 동생도 모두 살아있는 안온한 가족들
품에서 컸다면…… 좀 더…… 온화한 당신이 되지 않았을까요?’

엘제이는 쓰게 올라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저는 당신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서, 늘 공허했어요. 아제프……. 당신의 삶은 어땠나요?”

아제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제프는 삶이 너무 괴로웠다. 몸이 느른하게 처지고, 마음이 곪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마음에 파묻혔다.
텅 빈 그것을 채우려 수없이 발버둥 쳤지만 결국, 마른 우물일 뿐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몹시도 고단했다. 사는 동안 무척, 외로웠다.

“그냥…… 살았어요. 죽고 싶지 않은데, 왜 사는지도 몰랐어요. 날마다 그저 그렇게 살았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갔을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아집만으로.”

하얀 손가락이 그의 가슴 위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오랜 시간 말라붙은 우물의 메마름을 달래는 단비 같은


손짓이었다.

“제가, 당신 옆에 있어 행복한가요?”

“……당신 옆에서 저는, 어린아이가 됐어요. 그때처럼 사소한 것에도 기뻤고, 허한 마음이 차올랐어요. 저는 정말,
말로 담지 못할 만큼 행복했어요.”

“우리는 앞으로 더 행복해질 거예요.”

“제이는…… 어때요?”

저렇게 자신감 없는 아제프는 처음이라 엘제이는 좀 웃음이 났다.

“저는 아제프만을 바랐는걸요. 가장 원하는 걸 얻었으니, 당연히 행복해요. 우리는 이거면 됐어요. 그러니 더는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요.”

스르르 미끄러진 손에 하얀 단추가 걸려들었다. 엘제이는 길을 잃고 흐트러진 그의 옷을 단정히 매만졌다.

아제프는 단추를 채우는 엘제이를 젖은 눈으로 바라봤다. 눈물은 아까 멎었는데, 이미 많이 운 탓에 눈가와


코끝은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제이의 자질은 치유인가요?”

“아니요. 공명(共鳴)이에요.”

정말 듣도 보도 못 한 자질이었다. 아제프는 제가 엘제이에 대해 모른다는 게 답답했다. 제 힘으로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 그녀는 이미 투쟁하고 있었다.

“이름만으로는 짐작이 잘, 안 되네요. 내게 알려줄 수 있어요?”

아제프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그녀가 이 대화를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게 제가 가진 자질이에요. 가끔 동화가 심하게 되면 아주


약간의 미래를 봐요.”

‘이미 망가져 제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요.’

엘제이는 이 사실을 언제 고백하면 좋으려나 고민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었다. 금빛이 살짝 도는 백금발이


하늘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공명?”

‘지켈리온 힐데, 그 남자에 대한 것과 이상한 문자는 그녀의 자질을 사용한 결과인가?’

아제프는 이제야 이해가 되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의 마음을 읽는다면, 지켈리온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테고, 잘 쓰이지 않는 문자를 배울 방법도 있었을 터였다.

진실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제프는 이제야 겨우 이해가 가는 상황에 숨을 길게 내뱉었다. 막혀 있던 속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여러 차례 충격을 받아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 그의 얼굴에 서린 듯했다. 우수에


젖어 푸르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엘제이는 마음이 흔들렸다.

‘우리 둘만 먼저 들어갈까? 아제프,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엘제이는 흘긋, 엘리사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다. 살랑, 불어온 바람이 분홍색 꽃 잎 하나를 엘제이의
발목 위에 툭 올려놨다. 그럴 리 없는데도 꽃잎이 엘리사 같았다.

[언니! 설마, 날 두고 가지는 않을 거지?]

환청이 들리고 환각이 보였다. 순진한 척 눈을 똘망똘망 뜨고 애교를 부리는 동생이 꽃잎처럼 보였다.

엘제이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숨만 색색 내쉬며 가만히 앉아 있는 아제프의 머리 위로 축 처진 동물의 귀가


보였다.

엘제이가 슬쩍 발을 움직여 꽃잎을 털어냈다.

[언니!]

애처롭게 울부짖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제이는 독하게 외면했다.

엘제이는 풀이 죽은 아제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엘제이의 손가락 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제프, 우리끼리 먼저 들어갈까요?”


“우리끼리요? 황자님이랑 티아세 양을 버리고요?”

“……버리는 게 아니라, 먼저 가겠다고 말하면 되지요.”

전이었다면 냉큼 살랑살랑 웃으며 그러자고 했을 테지만, 지금 아제프는 기가 많이 죽은 상태였다. 그는 이게 또


제 이기심에서 나오는 선택이 아닐까, 고민하며 축 처진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늘씬한 재규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혼이 난 강아지 같았다.

아제프는 순하게 내려앉은 눈꼬리로 엘제이를 애절하게 바라봤다.

“그래도…… 돼요?”

살짝 울먹거리는 눈이 여간 애처로운 게 아니었다. 평소 연기라는 걸 알아도 끔뻑 넘어가는데, 진짜는 더했다.


이미 그에게 홀랑 넘어간 엘제이가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엘제이가 좋아죽겠다는 듯 아제프를 꼭 끌어안자 그의 얼굴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엘제이는 오늘따라 유독 순하고
착한 그를 보며 그를 더 힘주어 안았다.

‘귀여워. 오늘 왜 저렇게 귀엽지? 평소에는 이런 생각 잘 안 하는데.’

꼬마 아제프를 좋아했던 것도 평소 아제프에게서 볼 수 없던 귀여움을 볼 수 있어서였다. 엘제이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돌아가서 자장자장할까요? 피곤해 보여요.”

“하지만, 제이 동생이 여기 있잖아요. 제이가 싫다면…… 안 갈래요.”

엘제이의 눈이 착한 짓 하는 아이를 보듯 부드럽게 풀렸다. 엘제이는 기특함을 가득 담아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여기도 날이 좋지만, 부드러운 침대에 몸을 누이면 더 편안할 거예요. 제가 집에 가서 무릎베개 해줄게요.


어때요?”

엘제이는 아이를 달래듯 그를 살살 꼬셨다.

아제프가 솔깃한 듯 고개를 살짝 들자 연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엘제이와 아제프는 먼저 간다는 말을 전할 시종만 남겨두고,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3 화
93

란델 家의 저택으로 돌아온 둘은 막 씻고 나와 다시 만났다.

먼저 씻고 나와 침대에서 서류를 보던 아제프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제이를 발견했다. 벌떡 일어난 그는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달려가 엘제이를 맞았다.
“제이, 다 씻었어요?”

“네. 아제프는 빨리 씻었네요. 그런데, 바쁜 거 아니에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든 서류를 힐끔 바라봤다. 그는 이렇게 오랜 시간 휴가를 즐길 여유가 없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무리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아제프는 티 나지 않게 서류를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바삐 처리할 건 아니고 심심해서 그래요. 습관적으로 챙겨든 거라. 제이가 신경 쓰인다고 하면 다음에는
안 들고 올게요.”

“그런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죠.”

아제프는 엘제이 손을 꼭 잡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는 침대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침대 주위에 멀뚱히 서
있었다.

낮잠을 자기로 했으니 누워도 될 것 같았지만, 살짝 눈치가 보였다. 그는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개처럼 엘제이를
힐끔 쳐다봤다.

“우리 낮잠 자요?”

아제프는 여전히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눈물샘이 고장 난 사람처럼 울었던 게 탈이었는지 그의 눈가는 발갛게
짓물러 있었고, 얼굴색도 좋지 못했다. 엘제이는 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네. 이리 와서 누워볼래요? 제가 자장자장 해줄게요.”

엘제이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허벅지를 톡톡 쳤다.

아제프가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얇은 실크자락을 휘감고 흔들리는 허벅지의 감촉이 절로 상상이
되어 또 몹쓸 짓을 할 것 같았다.

그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되뇌며 얌전히 그녀의 허벅지 위에 누웠다. 조심조심 내려앉은 얼굴이 매끄러운 실크
자락에 닿았다.

“부드러워.”

무심코 나온 감상이었다. 전에도 만져본 적은 있지만, 뺨에 닿도록 누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제프는 제 몸과는
확연히 다른 감촉에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엘제이가 그를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내려다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아제프는 누워서도 굴욕 하나


없었다. 매끄러운 상앗빛 뺨을 타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뺨에 내려앉은 햇살 같았다.

엘제이는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정리하며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불편해요?”

“그게 아니라…… 쥐나면 어떻게 해요? 저, 무거울 텐데요.”

“잠깐 정도야 괜찮아요.”


엘제이는 아제프의 가슴을 천천히 도닥거리며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희미해진 기억은 가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특유의 부드러운 음률은 기억했다.

엘제이의 입술을 타고 부드러운 음률이 흘렀다.

아제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엘제이의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꼭 쥐어봤다. 사람의 피부처럼 부드럽게 휘감기는
천의 감촉이 좋았다.

연약한 손짓이 가슴 위에서 부드럽게 흩날렸다.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춤추는 것 같았다. 규칙적인 속도로
도닥이는 손짓에 그도 졸음이 쏟아졌다.

“몰랐는데, 졸리네요.”

“피곤해서 그래요. 한숨 자요.”

정신이 지치면 육체도 함께 피로를 호소한다. 뭉근하게 열이 오른 머리의 투정에 백금색 속눈썹이 점점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되는데……. 내려와서 자야 하는데…….’

아제프가 속으로 웅얼거렸다.

부드러운 살결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침대에 빛이 들어와 유독 따뜻했다. 그가 사랑하는 목소리가


흥얼흥얼 처음 듣는 자장가를 불렀다.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머물며 그를 수면으로 인도했다.

자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미소 지으며 노래를 부르는 엘제이가 보였다. 하얗고 싱그러워
눈가에 습기가 고였다.

꽃이 떨어지듯 그의 눈도 나붓이 내리깔렸다.

봄이었다. 날이 따뜻하고, 하늘이 청명한 맑은 날이었다. 꽃내음이 선율을 타고 흘렀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부드러운 솔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평범한 봄날이었다.

그는 그가 사랑한 봄의 곁에서 평화로운 오수에 젖었다.

***

눈앞에서 그림자가 흔들렸다. 기척에 예민한 몸은 그만 일어나라고 그를 종용했다. 아제프는 어쩐지 묵직한
눈가에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눈을 떴다. 하늘을 비췄다가 감추기를 반복하는 하얀 커튼이 보였다.

살짝 몽롱한 눈으로 그걸 보던 그가 더 자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음…….”

“…….”

아제프의 얼굴에 미안함이 번졌다. 힘든데 깨우지도 못하고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읏,”
엘제이가 작게 신음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허벅지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저릿한 감각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혹시라도 그녀가 깰까 봐 잔뜩 긴장한 채 눈만 또르르 굴렸다. 다행히 엘제이는 깨지 않고 머리를 침대


헤드에 기대며 다시 잠들었다.

잠시간 꼼짝도 안 하고 그녀의 기척만 살피던 그는 그제야 안도하며 조심조심 엘제이의 목 뒤로 손을 둘렀다.

“깨우지 그랬어요. 아프면 깨우고, 힘들면 내게 말해주지 그랬어요.”

바람에 이지러질 듯 연약한 목소리였다. 축축한 습기를 한입 베어 먹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속눈썹이라도
들어갔는지 눈이 이상하게 아팠다. 아제프는 속눈썹을 팔랑팔랑 흔들며 엘제이를 조심조심 침대 위로 눕혔다.

힘들었을 다리를 손으로 펴주고 이불을 몸 위로 덮어줬다.

이 침대 위에서 그녀의 가슴을 깨물고, 문장을 자근자근 씹던 행동이 떠올랐다. 아파하는 엘제이를 힘으로
억압하고 왜 제 아픔을 알아주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미안해 죽을 것 같아서 아제프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얼굴을 만지려다 멈칫했다. 잔뜩 풀이 죽은 손이 툭 떨어졌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얀 얼굴이 새근새근 숨을 내뱉었다.

‘깨울까 봐 겁이 나 만지지도 못하겠어.’

아제프는 과하게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미련이 남은 듯 흘긋 엘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서류를 챙겨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스르륵, 돌아가는 문고리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고 그의 몸은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헉!”

조심조심 문을 닫으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티 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말없이 얼굴을 찌푸린 아제프가
소리 낸 이를 차갑게 노려봤다.

급하게 아제프를 찾아왔던 알모어는 무척 놀란 사람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아니……. 후작님 눈이, 왜 저렇게……. 밖에서 벌레에 물리셨나?’

아제프는 벌에 쏘인 사람마냥 눈두덩이가 부어 있었다. 짠 눈물을 잔뜩 머금은 피부가 호소하는 심통이었다.


알모어는 저도 모르게 토실토실한 눈가를 빤히 바라봤다. 심각한 상황인데, 아제프의 부은 눈두덩이가 뇌리에
박혀 집중할 수 없었다.

왠지 불쾌한 시선이 얼굴에 닿는 것 같아 아제프의 얼굴에 험악한 빛이 번졌다.

그는 조심히 문을 닫고 알모어의 멱살을 잡아챘다. 셔츠 깃이 목을 꽉 파고들어 알모어는 숨이 막혔다. 알모어는


허공에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아제프에게 끌려갔다.

“무슨 일이지?”
“켁! 일단! 큭, 손!”

알모어는 목이 졸려 캑캑거리며 발버둥 쳤다. 모셔야 할 주인만 아니었으면 정강이를 발로 차 벗어나고 싶었다.
버둥거리는 꼴이 꽤 가여웠지만, 아제프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아제프는 손을 툭 떨어트려 알모어를 내팽개쳤다.

“쿨럭! 하아…… 죽을 뻔,”

“무슨 일이냐고 두 번 물어야 하나?”

아제프는 알모어가 제대로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헉헉거리는 그가 전혀 가엽지 않았다. 아제프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제프가 쉬려면 누군가는 바빠야 했다. 지금쯤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나 처리해야 할 알모어가 엘제이의 방문
앞을 서성거린 건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지금처럼 꺼림칙한 시기에 자신을 급하게 찾는 알모어의 행동은 아제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엘제이에게
주어진 방안은 란델 家의 성역이라, 접근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알모어가 거기까지 와 서성이던 건 뭔가
일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아제프는 점점 인내의 끈이 얇아지는 걸 느끼며 고요하게 알모어를 노려봤다.

“하아……. 그게, 주술사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상한 행동?”

“네…….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알모어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여러 차례의 고문은 사람을 쉽게 피폐하게 했다. 아무리 기가 드세고 독한 사람도 반복되는 고통에는 흔들렸다.
루드비히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수차례 고문당한 주술사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병자처럼 몸을 덜덜 떨며 방 한구석에 박혀 있다가 고문당하기를 반복했다.

육체의 고통이 수십 차례 반복되자, 주술사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발소리만 나도 흠칫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벽에 박았던 남자가 갑자기 달라졌다.

알모어는 조금 전 보았던 기이한 모습에 뒷덜미가 축축하게 젖는 것 같았다. 알모어는 몸을 흠칫흠칫 떨며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아제프는 그의 답답한 모습에 짜증이 솟구쳤다.

“똑바로 안 말해?”

“그게……. 직접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말로 설명하기가 좀…….”

알모어는 차마 제 입으로 설명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제프의 눈치를 봤다.

‘저게 미쳤나?’
전에는 좀 더 두려워했는데, 간이 커졌는지 잘도 저런 행동을 했다. 아제프는 해이해진 알모어를 훈육해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다른 문제가 더 시급했다.

애매하게 말을 듣느니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제프는 발걸음을 돌렸다. 엘제이가 깨기 전에 빠르게


해결할 생각이었다.

아제프가 몇 걸음 걷는데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는 그 한 명의 것이었다. 얼굴을 귀신처럼 일그러트린 아제프가
이를 갈았다.

“당장 안 따라와?”

“……네.”

알모어는 목줄에 꿰인 짐승처럼 아제프에게 끌려갔다. 가기 싫다는 듯 버둥대는 다리가 바닥에 애처롭게 끌렸다.

두 사람은 주술사를 가둔 지하실로 내려갔다.

코끝에 피 냄새가 주렁주렁 걸렸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비릿한 냄새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아제프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섰다.

끼긱- 끽- 끼이익-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 적막한 지하실 아래에서 쇳소리가 났다. 신경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날붙이의 울음이
음산하게 울렸다.

옆에서 덜덜 떨며 긴장하는 알모어와는 다르게 아제프의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서렸을 뿐이었다.

끼릭- 끽! 끼익!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실, 수많은 이들의 공포와 고통이 서린 까만 공간에 퍼지는 소리가 듣기
거슬렸다.

“묶어놓지 않았나?”

“묶어놨는데……. 그게…….”

알모어는 이번에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아제프가 문고리를 확 열어젖혔다.

끼릭! 쿵!

긴장감 없던 푸른 눈이 크게 확장됐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4 화
94
쿵! 쿵!

창살에 머리를 박는 소리가 연달아 두 번 울렸다. 두 팔이 쇠고랑에 얽혀 거칠게 흔들리는데 그는 아랑곳없이 제


머리를 박아댔다.

이마에서 줄줄 나온 피가 눈가를 타고 흘러 꽤 괴기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건 실핏줄이 다 터진 새빨간


눈이었다.

“아흐흐! 흐아!”

주술사는 인간의 언어를 까먹기라도 한 듯 침을 줄줄 흘리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자살을 방지하려 물려놓은
재갈에 거칠게 긁힌 입안에서 새어 나온 침이 피와 한데 섞여 주르륵 흘렀다.

아제프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올라간 눈썹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미친 건지, 미친 척하는 건지.”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척을 해대는 이도 종종 있었다. 아제프는 그걸 시험해보기 위해 주술사 쪽으로


걸어갔다.

목을 90 도로 꺾어 이마를 광광 박아대는 광기 서린 행동에 멀찍이 물러나 있던 알모어가 아제프의 옷자락을


조심히 잡으며 그를 말렸다.

“후작님!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알모어, 방정맞게 굴 거라면 올라가 있어라.”

아제프는 귀찮게 구는 알모어를 한쪽으로 밀쳤다. 아제프가 거침없이 걸어가 감옥의 문을 열자, 알모어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두려움보다는 충성심이 먼저였는지,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도망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히이익! 후작님! 손은 대지 마세요!”

주술사의 저주는 신체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피를 매개로 바쳐 주술을 거는 게 저들의 특긴데


아제프가 함부로 주술사의 몸에 손을 대자 알모어는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알모어,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이놈보다 네가 먼저다. 알겠나?”

아제프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알모어를 사납게 노려봤다. 가뜩이나 해야 할 일이 많아 짜증이 나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말썽이었다.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하얀 손이 위협적으로 빛나자 알모어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끄아악! 커흑!”

아제프의 손에 머리를 붙잡힌 주술사가 허우적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손마디 뼈 하나하나가 다 꺾여 흉측하게


늘어진 손가락이 아제프 쪽으로 꾸물꾸물 기었다.
아제프를 옭아매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손가락이 탐욕스럽게 꿈틀대도 아제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주술사의 입에 걸린 재갈을 툭, 풀었다.

“으아아아! 끄악!”

입이 열리자마자 주술사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아제프 쪽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행동이었다. 그의 살과 뼈를 취할


듯 입을 쩍쩍 벌리는 몸짓이 괴기스럽다 못해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는 아제프의 몸을 씹지 못하자 광분하며 날뛰었다.

우두둑- 우두둑-

결국 탐욕을 주체하지 못한 사나운 송곳니가 스스로 혀를 길게 빼물었다.

아제프는 제 혀를 깨물며 히죽, 웃는 주술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미친 건가? 말이 아예 안 통하는데?”

“끄아아아!”

아제프의 소리가 들리자 그는 곧장 반응하며 아제프 쪽으로 입을 쩌억, 벌렸다.

아제프는 쇠고랑을 부러트릴 듯 발버둥치는 주술사의 머리채를 세게 틀어쥐고 그를 가볍게 제압했다.

핏줄이 다 터진 빨간 눈이 꺼림칙했다. 아제프는 퉁퉁하게 부푼 제 눈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아제프의 손에 새파란 마나가 윙윙 모여들었다. 끝이 뾰족한 얼음송곳은 곧장 주술사의 눈꺼풀을 찌르고 그 안의


동공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 아악! 끄윽,”

아제프가 차가운 송곳으로 눈알을 가볍게 휘저어 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이거 못쓰겠는데? 어쩌다 이렇게 망가진 거지?”

사람의 살가죽을 파고들어 눈알을 뽑아내는 소리가 뿌득뿌득, 울렸다.

평이한 아제프와는 달리 알모어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얼음송곳에 걸려 나오는 눈알을 보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후작님이 다녀가신 후에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갑자기 저렇게 됐습니다.”

“꼭 좀비라도 된 것 같단 말이야?”

아제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상하게 눈알을 파버리고 싶었다. 아제프는 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분노에 의아함을 느끼며 남은 눈알 하나를 파내 바닥에 버렸다.

“캬아아악!”

눈알이 빠진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성은 사라지고 악만 남은 주술사가 몸을 꺽꺽거리며 어떻게


해서든 아제프의 몸에 상처를 남기려 애썼다.

손톱이 죄다 부서진 손이 바닥을 기며 아제프에게로 다가왔다. 아제프는 주술사를 발로 차 바닥에 엎어트렸다.

아제프는 이미 제 스스로 꺾어 놓은 목을 발로 잘근 밟아 누르며 주술사의 몸에 피어오른 문양을 관찰했다.

‘확실히 전보다 심해졌어. 왜지?’

처음 봤을 때보다 새까맣게 죽은 문양에서는 피고름이 흘렀다. 처음에는 상처가 감염되어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양이 자체적으로 사람 몸속을 파고들어 주술사를 괴사시키고 있었다. 몸속으로 꾸물꾸물 기어가는 모양이 꼭
기생충 같았다.

알모어는 눈을 가렸던 손을 살짝 치우며 아제프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죽을 것 같은데요……. 살려두려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건 이미 틀렸다. 버림받은 것 같군.”

“버림을, 받아요?”

“아마 다른 주술사가 저주를,”

발밑에서 끼익- 움직이는 것에 아제프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혼자서는 절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밟았는데,


스스로 목뼈를 꺾으며 목이 핑그르르 돌았다.

아제프를 똑바로 향한 텅 빈 눈이 핏물을 줄줄 흘리며 히죽, 즐겁게 휘어졌다.

‘지켈리온 힐데. 그때와 같군.’

아제프는 조롱하듯 접히는 눈가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분질러진 목뼈를 보면 이미 죽었어야 정상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이빨에 짓이겨져 잔뜩 헌 보랏빛 혀가 피를 줄줄 흘리며 움직였다.

“킥킥킥……. 그대, 벌써 몇 번 죽었더군?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내가 알려줄까?”

제법 명확한 발음을 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제프의 눈이 화사하게 휘어졌다.

“지켈리온? 살아 있구나, 너.”

“나 역시 그대를 환영해. 다음번에는, 그대의 짝을…… 그대의 눈앞에서, 큭!”

콰직- 소리와 함께 주술사의 뇌수가 터졌다. 아제프는 힘 조절을 못 해 다다다 꽂혀버린 얼음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저를 언급하는 건 괜찮았지만, 엘제이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아제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감옥을 나오며 가볍게
손짓했다.
콰지지직!

푸르게 변한 마나가 공기 중에서 번쩍이다가 빠르게 쏟아져 주위를 얼렸다. 감옥 전체를 꽝꽝 얼린 얼음 아래로
새까만 연기가 번졌다.

아제프는 사르르 쏟아지는 냉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황자님께 이곳의 정화를 부탁드려라.”

아제프는 일국의 황자를 정화원 취급했다.

알모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옥을 바라봤다. 거대한 얼음거미가 감옥 안에 둥지를 튼 것 같았다.

얼음에 집어삼켜져 꾸물꾸물 움직이는 까만 연기를 보는 눈빛이 멍하게 풀렸다.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새까만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알모어의 눈이 발갛게 물들자 아제프가
혀를 차며 그의 뺨을 찰싹 때렸다.

“미쳤나? 홀리고 싶지 않으면 쳐다보지 마라.”

“아……. 죄송합니다!”

눈을 번쩍 뜬 알모어가 정말 세게 맞은 뺨을 손으로 쓸었다. 그동안의 불만스러운 심정을 다 실었는지 피부가


따가웠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아제프에게 달라붙은 피 한 방울이 망령처럼 움직여 그를 덮치는 게 보였다.

“후작님!”

“알모어, 소란 떨 것 없다.”

아제프는 제 얼굴 쪽으로 올라오는 그것을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그가 눈짓을 보내자 마나는 바로 화답했다.

아제프는 마나의 가호를 받는 자였다. 아끼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눈을 홉뜬 마나가 스스로 움직여 거머리처럼
꾸물거리는 연기를 집어삼켰다.

쨍-

작게 얼어붙은 얼음조각이 쨍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제프가 그것을 손으로 집어 감옥 쪽으로


대충 던졌다.

거대한 거미의 형상을 한 얼음에 닿자 조각은 스르르 흡수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제프는 볼일을 끝마쳤다는 듯 곧장 걸어 지하실을 벗어났다.

아제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벽면 한쪽에는 쇠고랑으로 긁어놓은 하얀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있었다.

***

끼익- 끼익-
날카로운 손톱으로 벽면을 북북 긁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톱으로 긁어놓은 여러 개의 실선이 그들끼리 겹쳤다.

동굴에 갇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남자는 눈을 감고 평화롭게 잠든 듯했다. 평온히 내리깐 눈과는 달리 느리게
벽면을 긁는 손만이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렸다.

퍽! 부푼 공이 터지듯 세찬 소리가 울렸다.

“윽!”

눈을 번쩍 뜬 지켈리온은 핏물이 주르르 흐르는 눈을 짚으며 일어났다.

눈알 하나가 터지는 고통을 참은 지 얼마 안 되어 또 한 번 퍽, 소리가 울렸다. 양쪽 눈에서 피를 줄줄 흘리게


된 지켈리온이 두 눈을 붙잡고 고통을 삭였다.

“크윽…… .감이 좋은 남자란 말이지. 어떻게 알았지?”

지켈리온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혀로 핥으며 피식 웃었다.

그들과의 만남이 기대되어 죽어버린 심장도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흥분에 들뜬 얼굴로 숨을 들썩이며 뭉근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분간 눈은 보이지 않을 테지만, 감각은 살아 있었다. 미끄러진 손이 그대로 벽면을 타고 올라 그어놓은 실선을
매만졌다. 무표정한 얼굴에 황홀함이 번졌다.

“시대는 일렁이고 때는 도래하는 법.”

시간은 째깍째깍 흘렀다. 더디게 가는 시간이 지나면, 또 한 번 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마물의 몸에 적응하는 동안, 지켈리온의 기억은 봉인되어 있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에게 몇 번 죽으면서 그
봉인은 서서히 약해졌다.

한 올 한 올 풀리는 기억의 실타래가 빠르게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휘감겼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지켈리온 힐데, 그는 스스로를 봉인한 악마의 또 다른 자아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5 화
95

위험도, 위기도 없는 평화로운 며칠이 빠르게 흘렀다.

시간이 흐르자, 아제프와 알체스테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둘은 수도로 귀환해야 했고, 티아세의 두 딸도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아제프는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미리 엘리사와 알체스테를 먼저 올려 보내려고 애썼지만, 거머리 같은 그들은


그의 저택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네 사람이 한 날 한시에 수도로 상경하게 되었다.

아제프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결말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후작님! 헉헉! 준비가 다 끝났답니다.”

알모어는 갑작스레 내린 아제프의 명령을 이행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왔다. 주인이 칭찬해주길 바라는 집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제프는 꽤 더워진 날씨에 땀을 흘리는 알모어를 찝찝한 눈으로 바라봤다. 불쾌감이 역력한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알모어. 시킨 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야 오나?”

“하지만, 후작님께서 너무 갑작스럽게 마차를,”

“나는 요즘 네가 해이해졌다는 생각을 하는데, 넌 어떻지? 내게 항상 말대답하는 것 같지 않나?”

알모어는 일류 집사다운 풍모를 보여줬건만, 자신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 아제프가 얄미웠다.

‘후작님만 아니면……. 후우……. 참자. 힘없는 내가 참아야지.’

알모어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한숨을 삼켰다. 조금 전의 생각을 아제프에게 들켰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죽을


게 뻔했다.

아제프는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길이 점점 더 싸늘해지자 알모어가 아차 하며 허리를 바로 폈다.

“예! 집사 알모어! 앞으로 더 정진하겠,”

“제이, 나왔어요? 안 더워요? 내가 양산 들어줄까요?”

한들한들 꽃바람이 불었다. 알모어를 순식간에 지나친 아제프가 엘제이의 앞으로 다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온갖 비위를 다 맞추기 시작했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양산을 뺏어 엘제이의 키에 맞춰 들어주고, 손으로 부채질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요즘 들어, 엘제이의 발닦개로 전락한 아제프의 모습에 알모어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녹았네. 녹았어.’

알모어의 생각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제프는 연신 웃는 낯이었다. 아제프는 예뻐 죽겠다는 듯 다정히 엘제이를
보며 연신 눈을 쪽쪽 맞췄다.

알모어는 조금 전까지 냉하게 얼어붙었던 눈과, 달콤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 사이의 괴리감에 서러워졌다.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지. 하아……. 눈꼴 시리니까 그만 보고 내 짐이나 챙겨야겠다.’

아제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알모어는 무척 바빴다. 모셔야 할 귀족이 넷으로 늘어났고, 그도 아제프를


따라 올라가야 했으니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는 아제프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맞추기 위해 저 멀리까지 나가 호화로운 마차를 한 대 더


구해야 했다. 알모어는 늠름하게 서 있는 하얀 마차 두 대를 보며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알모어가 모처럼 제 짐을 챙기러 들어가려는데, 아제프가 삐딱한 얼굴로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알모어, 가서 제이가 마실 음료 좀 가져와.”

아제프는 그 한마디만 툭 던지고, 별로 더워 보이지도 않는 엘제이에게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데 열을 올렸다.

알모어는 저게 진짜 주인만 아니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힘이 없는 그는, 오늘도 불만 한 번 내뱉지 못하고 엘제이가 마실 음료를 가져오기 위해 주방으로


뛰어갔다.

***

엘제이는 입으로 구시렁구시렁 혼잣말하다가 뛰어가는 알모어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웃으니까 그저 좋은 듯 생글생글 웃었다.

엘제이는 아제프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제프, 요즘 집사님이랑 보기 좋은 거 알아요?”

“네?”

아제프는 그게 무슨 괴상한 소리냐는 듯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알모어랑 보기가 좋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소리였지만, 엘제이에게 면박을 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찌푸린 미간을 힘겹게 풀어냈다.

“집사님이 전에는 좀 더 아제프를 어렵게 여겼는데, 요즘은 많이 편안해 보여요.”

엘제이에게 알모어는 조금 특별했다. 책 속에서는 원래 단명했어야 할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엘제이는 무척


기뻤다. 아제프의 운명이 점차 변한다는 증거이기도 했고, 알모어의 충성심이 진심임을 알기에 더 기꺼웠다.

엘제이는 사람다워지는 아제프를 보며 즐거운 듯 웃었다.

아제프는 그저 알모어가 해이해졌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엘제이 몰래 기합을 줄


필요성만 느꼈을 뿐이었다.

엘제이와의 시간에 알모어 따위의 주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남자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날씨가 순식간에 더워지네요.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면, 또 봄이 오겠죠. 계절은 계속
돌아오니까요. 다음 봄에도, 그 다음 봄에도, 제 옆에 있어줄래요?”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우리는 계속 함께일 거예요.”

“내년 봄에는,”

“언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목소리와 단어였다. 다정하게 풀렸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제프는 이를
꽉 깨물며 끔찍한 여자를 휙 노려봤다.
아제프 란델에게, 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천적이 있다면 그건 엘리사 티아세였다. 엘제이 모르게 얄밉게 혀를 내민
여자가 엘제이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헤실거렸다.

‘내년 봄에는 제이의 이름이 엘제이 란델이었으면 좋겠어요.’

달콤하게 속삭이려던 순간은 방해꾼의 훼방에 막혀 날아가 버렸다. 아제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음속으로
엘리사를 수백 번 난도질해서 죽여 버렸다.

엘제이는 언니, 언니, 부르며 애교를 떠는 동생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엘리사가 그저 귀엽고
예뻤다.

엘제이는 엘리사의 뒤에 서 있는 알체스테를 뒤늦게 발견했다. 그녀는 엘리사의 언니로서 알체스테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황자님, 잘 주무셨어요?”

“황자님은 잘 주무셨지요! 나도 잘 잤고! 봄이라 잠이 솔솔 쏟아져.”

엘제이는 알체스테의 말을 가로채는 엘리사의 팔뚝을 아프도록 찰싹 때렸다.

“아얏!”

“리사! 너 이제 일어났지? 너랑 아침을 먹은 지가 언젠지 모르겠어. 황자님이 매일 너 때문에 아침 식사가


늦어지시잖아. 다른 사람들도 번거롭게 식사를 두 번 차려야 하고!”

“헤헤. 언니~ 마차 여행 재미있겠다. 그렇지? 창문으로 예쁜 꽃도 보고, 그러면 좋잖아.”

엘리사는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렸다. 능청스럽게 주제를 돌리고 화려한 마차를 살피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른쪽에는 사랑하는 알체스테를, 왼쪽에는 사랑하는 엘제이를 끼고 두 사람 사이에서 향락을 즐기려던 엘리사의
계획이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는 엘리사의 무너지는 표정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마차에 실을 짐이 많아서…… 마차는 두 대로 가야겠어요. 엘리사 양, 이해하시죠?”

“……짐을 마차 한 대에 몰고, 넷이 같이 타면 되잖아요!”

“한쪽에만 무거운 게 쏠리면 말들이 힘들어하잖아요. 말이 가엽지도 않으세요?”

아제프가 뭐 저런 야만인이 있냐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엘리사를 흘겼다. 말이 가엽기는커녕 그들에게 쥐꼬리만
한 동정도 베푼 적 없는 아제프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럼 나는 언니랑! 아니, 황자님이랑도 같이 타고 싶은데…….”

엘리사는 엘제이의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외쳤다가 멈칫했다. 엘제이도 좋았지만, 알체스테도 좋았다. 엘리사는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서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엘리사의 얼굴이 엘제이 쪽으로 휙 향했다가 알체스테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의 팔
하나씩을 차지한 엘리사의 얼굴이 울상으로 물들었다.

이미 출발 준비는 다 끝났는데, 엘리사의 고민은 진전이 없자 엘제이가 엄한 얼굴로 동생의 등을 때렸다.

“얘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철이 덜 들었어! 황자님 서운하게 하지 말고, 얼른 가!”

엘리사는 엘제이의 팔에 밀려 쫓겨나듯 알체스테의 품에 안겼다. 분홍색 눈을 깜빡거리며 제게 일어난 상황을


파악하던 엘리사의 얼굴이 불퉁하게 부풀었다. 이게 다 저 요괴 같은 남자 때문이었다.

“히잉. 우에에엥.”

엘리사는 뒤늦게 애처로운 척 몸을 떨며 우는 척했다. 소리만 시끄럽고, 눈물은 찔끔도 안 나왔지만, 알체스테의
품에 갇혀 얼굴이 보이지 않는 터라 엘제이는 당황했다.

알체스테와 엘제이가 엘리사 곁을 서성이며 그녀를 둥기둥기 달랬다.

“리사……. 미안해. 아팠어?”

“리사, 울지 마라. 왜 우는 거지?”

아제프는 이 상황이 너무 같잖았다. 마음 같아서는 발을 확 걸어 저 얄미운 여자를 넘어트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상황이 불리해질 걸 알았다.

때마침, 음료를 받아온 알모어가 아제프 쪽으로 다가왔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아제프는 입을 벙긋벙긋 벌리며 알모어에게 말을 전달했다.

‘시간 없다고 해.’

최근 아제프가 밀어놓은 업무에 시달려 눈이 좀 침침해진 알모어는 아제프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하시는 거지?’

알모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아제프 가까이에 다가왔다. 저 멀리서부터 계속 말했는데, 알모어는 바로 앞에


와서도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답답한 집사에게 화가 난 아제프는 그에게서 음료를 강탈하고, 그의 정강이를 발로 콱 차며 속삭이듯 잇새를


짓씹었다.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라고. 왜 이걸 못 알아들어?”

알모어는 소리 없이 발을 굴리며 고통을 삭였다. 얼마나 아픈지 신음이 아니라, 침이 먼저 나왔다. 입을 벌리고
고통과 싸우던 알모어는 더 큰 한 방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빨리, 큭, 빨리 출발하셔야 한답니다.”

“왜!”

엘리사가 알체스테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작은 맹수처럼 캬르릉거리는 엘리사에게 기가
눌린 알모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수도에 도착해야 하니까요? 노숙할 수는 없잖아요.”

“리사, 나는 괜찮으니 언니와 타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알체스테는 매서운 눈으로 몸을 찢어놓을 듯 쏘아보는 아제프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리 말했다. 토닥토닥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행동에 엘리사의 눈에 하트가 뿅뿅 터졌다.

엘리사는 엘제이를 애절하게 한번 바라봤다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을 돌렸다.

“아니에요. 황자님이랑 탈래요.”

엘리사는 알체스테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아제프는 이제야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씩 웃었다. 그는 달콤한
딸기 향이 나는 음료를 엘제이에게 먹여주며 더없이 후련하게 웃었다.

“제이, 그럼 우리도 이만 갈까요?”

울음기 없는 동생의 얼굴에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엘제이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네. 리사는 제가 나중에 혼낼게요.”

“아니에요. 언니랑 타고 싶었나 보죠. 이해해요.”

아제프가 마음 넓은 척을 하며 엘제이를 마차 위로 올려주었다. 엘제이가 다 마시지 않고 남긴 음료는 멀뚱멀뚱


서 있는 알모어에게 던지다시피 건넨 후였다.

네 사람이 마차를 나눠 타는 데까지 걸린 시간, 한 시간.

여러 의미로 결코, 편하지만은 않을 마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6 화
96

엘제이는 마차 안을 눈으로 쭉 훑었다.

넓게 트인 창문에는 하얀 커튼이 매달려 살랑살랑 흔들렸고, 마차 내부에는 보송보송한 기운이 감돌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소파는 길게 늘어져 엘제이가 누워서 자도 될 정도로 충분히 널찍해 보였다.

가만히 마차 안을 살피던 엘제이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짐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는 일인걸요. 요즘 알모어가 해이해져서 이런 실수를 한 모양이에요.”

아제프는 여유롭게 웃으며 알모어를 탓했다. 미리 준비된 거짓말이 매끄럽게 흐르자 엘제이는 눈을 깜빡이면서도
넘어갔다.

아제프는 엘제이와 편안하게 가야 할 마차 안에 쓸모없는 짐 따위를 넣어둘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면 엘리사가 발광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면
되었기에 아제프는 걱정 없이 빙그레 웃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독점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능히 해낼 남자였다.

아제프는 씰룩쌜룩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눈을 순하게 뜬 남자는 꼬리 흔드는 개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옆에 앉아도 돼요?”

“그럼요. 늘 옆에 앉았잖아요.”

엘제이는 앞이 아니라 굳이 옆에 앉겠다고 하는 아제프를 말리지 않았다. 늘 그래왔으면서 그녀의 의사를 묻는 게


오히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이 마차에는 진동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장치가 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흔들릴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살짝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점심때가 되어 휴식하기 전에는 계속 이 상태일 텐데. 멀미 안 하겠어요?”

“음……. 딱히 어지럽거나 울렁거리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아제프는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엘제이를 예쁘다는 듯 바라봤다. 엘리사를 퇴치하고 나니 여행의 시작은 꽤
순조로웠다.

아제프는 방석 하나를 엘제이의 허리 뒤에 끼워주며 웃었다.

“허리가 불편하거나 피곤하면 말해요. 참지 말고. 알았죠?”

“…….”

엘제이는 말을 하지 않고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제프는 최근 배려가 많이 늘었고, 엘제이의 의사를 묻는 일이 잦아졌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저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길 바랐다. 아제프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라면,
엘제이에겐 분명 큰 상처가 될 터였다.

아제프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가질 만큼 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엘제이의 마음은 그랬다.

아제프는 저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는 엘제이를 발견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그렇게 봐요? 묻고 싶은 게 있는 얼굴인데?”

“음……. 아제프가 저를 어려워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어요. 부채감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저는 슬플 거예요.”

아제프는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지만, 금세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동안 엘제이에게 했던 수만 가지의 무례와


잘못이 수면 위로 퐁퐁 떠올랐다.
아제프는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았지만, 그렇기에 남들에게 사과할 일을 잘 만들지 않았다. 애초에 남들에게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싫어했고, 굳이 그러면서까지 관계를 이어나갈 인물도 없어서 여러모로 서툴렀다.

아제프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제프가 고민하는 사이, 그의 손은 엘제이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흔들렸다.

“이건 부채감이 아니라, 제가 엘제이를 좋아하니까 나오는 행동이에요.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니까 매사에
신중해지는걸요.”

아제프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녹안이 뱅그르르 한 바퀴 회전했다. 물론 그의 배려는 엘제이도 좋았다. 다만,
저 신중해진 행동 때문에 안 좋은 점도 생겼다.

엘제이는 이걸 말해도 될까 망설이며 주변을 살폈다. 마차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고, 주위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을 때가 아니면, 용기가 치솟지 않았다. 엘제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아니라, 예전처럼, 당신이 너무, 그러니까 저는…….”

엘제이가 빨개진 얼굴로 뭐라 뭐라 횡설수설했다.

아제프는 손끝을 파르르 떠는 엘제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엘제이 관찰일지에 따르면 엘제이는 부끄러울 때,
손끝을 살짝 굽히고 경련하듯 파르르 떠는 버릇이 있었다.

아제프가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빨개진 볼가 귀를 핥듯이 바라봤다. 알았다는 듯 휘어지는 눈꼬리가 퍽 기뻐


보였다.

“이 정도는 허락 없이 해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거죠?”

아제프가 엘제이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반대쪽 손이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사르르 넘겼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흘려보내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이 무척 다정했다.

“……네.”

엘제이는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 손가락을 모으고 시선을 내리는 것도 그녀가 부끄러울
때 보이는 행동 중 하나였다.

아제프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흔드는 유혹에 몸을 빠트리고 싶었다. 그의 손이 엘제이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어깨에 걸쳐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

“이참에 제이의 허락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알아보고 싶은데…… 제이 생각은 어때요?”

아제프 나름대로 허락을 구하려 한 말이었지만, 엘제이는 과부하가 걸린 사람마냥 어버버 했다.

엘제이의 수줍음은 상한선이 너무 낮았다. 아제프는 그것이 한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기로 했기에 아제프는 물러나야 했다.


‘아쉽네. 좋은 생각 났는데. 다음에…… 제이의 기분이 좋을 때, 침대에서 해보자고 할까?’

마차 안이라고는 해도 완전한 실내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바로 뒤를 따라오는 마차에 그녀의 동생이 있기도 했고,
밖이라는 인식이 강할 테니 엘제이의 수줍음 수치가 높아진 상태일 터였다.

아제프는 밖이나 안이나 상관없었지만, 환한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을 보며 욕망을 꾹꾹 내리눌렀다.

엘제이의 손을 꾹 쥔 손에서 푸른 마나가 모여들었다.

“아!”

손을 시리게 하는 차가운 느낌에 엘제이가 그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 그녀의 손과 포개어져 있던 손바닥이


드러났다.

“선물이에요.”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엘제이가 입을 가리고 감탄하며 섬세하게 만들어진 눈토끼를 만졌다. 그의 손에 소복하게 쌓인 작은 눈뭉치는


크기가 조금씩 다른 눈토끼였다.

엘제이는 올망졸망 모여 있는 토끼를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망가트릴까 봐 겁이 나 함부로


만지지는 못했다.

아제프는 허공을 배회하는 손을 조심히 붙잡아 눈토끼들을 옮겨줬다.

“엄마, 아빠, 딸 3 마리. 어때요?”

“너무 작고, 귀여워요.”

엘제이는 눈토끼들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보송보송한 토끼 귀는 눈이 아니라, 진짜


털로 된 것 같았다.

‘자질 쓰는 거 싫어하시면서…….’

아제프는 이미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엘제이는 그걸 몰랐다. 그녀는 아제프가 저를 위해, 별것도


아닌 일에 자질을 썼다는 것에 무척 감동한 상태였다.

그의 음흉한 속내도 모르고.

토끼는 다산하는 동물이었다.

아제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딸 셋만 낳아 잘 키우고 싶었다. 아들 따위는 알게 뭔가. 딸이 최고였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똑 닮은 외양의 세 딸에게 파묻히면 분명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엘제이를 닮았으면, 사랑해줄 수 있을 텐데.’

아제프는 아이젠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보고 배운 게 없어서 서툴겠지만, 그녀를 닮았다면 분명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딱, 이 순간까지만.
“근데 아기토끼는 왜 세 마리예요? 엄마 아빠가 바쁘겠다.”

엘제이가 아기 토끼의 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해맑게 물었다.

넷으로 늘어난 엘제이들에게 파묻혀 살 생각 때문에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제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럼 유모 토끼를 만들까요?”

“아기는 부모 품에서 커야죠. 저는 제가 키울 거예요.”

“…….”

아제프의 손가락이 은밀하게 휘어졌다. 그는 토끼들이 녹지 않게 둘렀던 마나의 힘을 거둬들였다. 아기 토끼는


작으니까 그만큼 빨리 녹을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어서 죽어 없어지라는 듯 강렬한 눈으로 아기 토끼들을 노려봤다.

시간이 좀 흐르자, 엘제이의 손바닥에 물이 살짝 고였다. 아제프가 처음 만들어준 눈토끼인 만큼 꼭 보관하고


싶었던 엘제이는 다급해졌다.

“아제프, 이거 녹는 것 같아요. 어쩌죠?”

“자연의 섭리죠, 뭐.”

아제프가 싱그럽게 웃으며 냉정히 선언했다.

여름이 차츰 다가오고 있어서 토끼들은 더 빠르게 녹아갔다. 아제프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다음에는, 저따위 것 말고…… 꽃을 선물해볼까?’

꽃잎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각된 얼음꽃을 건넨다면 엘제이는 좋아할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저게 다 녹으면
꽃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제프는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톡톡 훔쳤다. 토끼들이 빨리 녹아 없어지길 바라며, 엘제이의 손을 닦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토끼, 죽어요?”

엘제이의 눈썹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팔자눈썹에 약한 아제프의 마음이 금세 흔들렸다.

“……계속 가지고 놀고 싶어요?”

“안 녹게 해주실 수 있어요?”

“제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요.”

괜히 유치한 이유로 엘제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제프는 작은
얼음상자를 만들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옮겨줬다.
“이거 계속 유지되는 건가요?”

“뭐…… 당분간은? 제가 계속 마나를 넣어주면 반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죠.”

“고마워요. 밥 먹을 때 가져가서 리사에게 보여줘도 돼요?”

“제이에게 준 것이니, 좋을 대로 하세요. 이왕 만들었으니, 집도 만들고 눈밭도 좀 만들어 볼까요?”

“귀찮지, 않아요?”

“그럼요.”

아제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관할 줄 알았으면, 더 공들여 만들어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에게 언제나 최고의 것만 주고 싶은 남자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파란색 빛가루가 날릴 때마다 토끼집이
생기고, 하얀 당근이 생기고, 귀여운 눈밭이 생겼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하는 걸 바라보며 행복한 듯 웃었다.

그렇게 평화로웠는데, 아제프가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제프의 무릎에 놓인 상자가 빠르게 떨어졌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뭉개진 눈토끼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엘제이는 귀가 떨어진 토끼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제프, 왜, 꺄아!”

설명도 없이 엘제이의 허리를 붙든 아제프가 마차 문을 열고, 그대로 함께 뛰어내렸다. 몸이 떨어지는 낙하감에


홉뜬 눈이 새빨간 열기를 머금었다.

콰아앙! 콰직-

엘제이의 눈에 비친 것은,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마차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7 화
97

마차는 거대한 불덩이에 부딪혀 순식간에 아스러졌다. 불똥을 머금은 나무토막이 이곳저곳으로 거칠게 튀었다.

콰앙!

마지막까지 마차를 지탱하던 중추가 마침내 부서지며 거친 소리를 냈다. 이글이글 불타는 소리와 말들의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히이잉!

갈기에 불이 붙은 말이 날뛰고, 숲에도 불이 붙었다. 녹색이 드리운 아름다운 숲에는 시뻘건 화마가 번졌다.
불과 마차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이 여럿,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비수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 모든 게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제프가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땅에 무사히 착지하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 엘제이의 눈을 뒤덮은 건 시뻘건


화마와 고통 어린 움직임이었다.

아제프의 발이 땅에 닿자, 그에게 안긴 엘제이의 몸이 휘청, 크게 흔들렸다. 요동치는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건


온통 새빨간 것이었다.

엘제이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앞에서 벌어진 지옥도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게, 뭐야?’

바글바글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긴장이 꿀꺽 넘어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혼잡스러운 상황이었다. 엘제이가 미처 어떤 반응도 보이기 전에, 그녀의 시야로 불덩이가
들어왔다. 점만큼 조그맣던 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엘제이의 코앞에 당도했다.

“굳이 볼 것 없어.”

나직한 소리와 함께 엘제이의 시야가 가렸다.

스릉- 날카롭게 우는 검의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가 검을 휘둘렀는지, 그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피부를 익힐


것처럼 몰아치던 열기가 광풍에 휩쓸려 떠났다.

쩌저적-

공기 중의 수증기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차가운 손바닥 아래로 얼어붙는 결정이 얼핏 보였다. 공기를 타고 빠르게
미끄러져 오른 마나는 금세 새파란 얼음벽을 만들었다.

쾅!

아제프의 검격에 두 개로 갈라졌던 불덩이가 얼음벽에 부딪혔다. 줄줄 흐르는 물과 함께 뿌연 수증기가 대기를


덮었다.

챙! 챙! 채앵!

불덩이를 맞아 조금 녹아든 얼음벽 위로 날카로운 비수들이 내리꽂혔다.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건지 흉기는 꽤


여러 개였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살짝 내리며 앞을 바라봤다.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만나 내뿜는 희뿌연 공기가 시야를 가렸다. 얼핏, 전복된 마차 두 대와 쓰러진
사람들을 봤는데, 지금은 소리가 무성할 뿐 보이진 않았다.

엘제이는 그의 손바닥을 꾹 쥐고 마른 숨을 토해냈다.

“하아- 이게, 뭐예요?”

“굳이 볼 필요 없다는데도, 고집이네요.”


온도가 뚝 떨어져 영점에 이를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였다. 분노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공기를 울렸다.

엘제이는 화가 난 듯한 아제프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주위는 여전히 소란스러운데, 어쩐 일인지 그 이후의
공격은 이쪽으로 쏟아지지 않았다.

“아제프.”

“아아- 정말 화가 난단 말이죠. 제가 말한 적 있나요? 나는, 당신과의 시간을 방해받는 게 끔찍할 정도로,


싫다고!”

아제프가 잇새를 꽉꽉 눌러 소리를 짓씹었다. 아제프의 검이 거대한 얼음벽을 횡으로 길게 베었다. 푸른 검격이
얼음을 뚫고 날아갔다. 새파랗게 몰아친 돌풍이 시야를 가린 수증기를 훔쳤다.

“끄아아아! 차가워! 차가워!”

검을 들고 내달리던 남자는 베어지고 얼어붙은 배를 쥐고 쓰러졌다. 온통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엘제이는 그의 배에 돋아난 날카로운 얼음창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서워. 끔찍해. 도망가고 싶어.’

속이 울렁거렸다. 엘제이는 추지게 젖는 입가를 수습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쓰러진 남자의 종아리가 얼핏 보였다.

새까만 뱀이 종아리를 칭칭 휘감은 듯, 피부 위를 기는 까만 문신이 엘제이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주술사?”

엘제이가 막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무렵, 흑색 무리가 몰려왔다. 코끝까지 내려오는 로브를 쓴 온통 시꺼먼
남자들은 일렬로 서서 아제프의 앞길을 막았다.

그들의 손에서 새까만 연기가 번졌다.

아제프는 새까만 채찍처럼 쏘아지는 검은 덩어리를 보며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제프의 시선이 절로 굳어진 엘제이의 뺨으로 향했다.

“한둘도 아니고. 개미떼처럼, 부산스럽게.”

아제프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며 엘제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엘제이의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코끝이
파묻히도록 엘제이를 꽉 끌어안은 아제프는 한 팔로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아!”

요동치는 검격 아래, 무수한 비명이 모여들었다. 엘제이는 그때마다 움찔, 몸을 움직였다.

아제프에게 방해되고 싶지 않아 숨을 죽이고 미동도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되었다. 무얼 하려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엘제이는 단지, 그에게 방해만은 되고 싶지 않아 숨통을 콱 눌러 죽였다.

“끄륵, 끄읍!”

비명을 지르는 입속으로 투명한 얼음꽃이 피었다. 입안을 가득 메운 얼음의 날카로운 꽃잎이 뇌를 우지끈 꿰뚫어
터트렸다.
아제프는 이 순간, 엘제이의 귀를 막아줄 수 없음이 가장 슬펐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나는 당신이, 이걸 보지 않고, 듣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슬픔과 분노로 눅눅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사람이었다. 악몽은 잦아들고 있었지만, 이런 폭력적인 광경을 봐서 좋을 건 없었다.

‘즐거웠는데. 너에게, 선물을 주며 기뻤는데. 결국, 나는…… 또 이렇게.’

아제프의 자질은 사람을 죽이는 순간, 처음으로 발현됐다. 처음부터 폭력으로 점철된 능력이었다. 늘 그렇듯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인데도, 아제프는 괜히 올망졸망 눈을 흐리던 것들이 생각났다.

모처럼 즐거웠는데, 조금만 행복함을 느끼면 늘 이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이를 갈며 검을 휘둘렀다.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따위는 모두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으아아악!”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얼음이 생살을 꿰뚫었다. 미처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자도 있었지만, 불행히 고통스럽게 죽는 자도 있었다.

고통에 버둥거리는 절규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소름 끼치는 비명에 엘제이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벌써 몇 명째지? 왜 무의미하게 덤벼드는 걸까? 어차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그쯤 되자, 엘제이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뛰어들었다. 꿋꿋이 아제프의


앞길을 막고, 그가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것만이, 그들의 임무라는 듯.

콰아앙!

하늘에서 새하얀 빛기둥이 내리쳤다. 눈을 시리게 하는 빛의 물결이 파도처럼 흘러 엘제이가 있는 곳에 닿았다.

빛에 대응하듯 곧바로 새빨간 불꽃이 번졌다. 너무 새빨개서 얼핏 까맣게 보이기도 했다. 어두운 불꽃은 꽤
강력한 한 방을 안기고 사라졌다.

아제프는 제 목표가 아니라는 듯 그 후로도, 불꽃은 빛과 함께 타올랐다.

엘제이는 그제야 잊었던 동생을 떠올렸다.

“리사!”

아제프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는 엘제이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엘제이의 얼굴이 도로 아제프의 가슴에 꾹
눌렸다.

“뭐, 저쪽에 집중포화가 쏟아지고 있기는 해도, 목숨 걸고 지키는 남자가 하나 있으니 동생 쪽은 걱정 없어


보이네요.”
“리사, 괜찮을까요?”

“일단, 사람 된 도리로 황자님을 걱정하는 게 우선일 것 같네요. 그녀는 멀쩡해 보이거든요.”

엘리사는 알체스테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언니인 엘제이와는 달리 마냥 얌전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몰아치는 불이 무서울 법도 한데, 겁도 없는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에게 비아냥대기


일쑤였다.

[이 시꺼먼 놈이! 너 누구냐니까? 비겁하게, 뒤에서 쳐?]

기가 살아 왕왕대는 엘리사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아제프는 귀를 막을 손이 없음을 한탄하며 벌레 떼처럼


우글거리는 인간들을 베었다.

“엘리사 양은, 정말, 걱정할 필요 없어 보여요. 진심으로.”

아제프는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앞을 바라봤다. 그도 저것들을 뚫고 알체스테 쪽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알체스테 쪽에서 계속 뭔가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데,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 수가 많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좀비 같단 말이지? 애초에 살아 있기는 한 건가?’

가만 보니 복제라도 한 듯 그들의 체형은 엇비슷했다. 펑퍼짐한 로브를 입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로 잰 듯


키가 일정했다.

다치면 비명을 지르고, 치명상을 입으면 죽었다. 꼭 사람인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제프는 그제야 지척에 다가오기까지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복제된 건가? 마물과 자질? 둘 중 뭐지?”

아제프의 혼잣말에 엘제이도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너무 흐려져서 다른 자질 보유자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그들을 공격한 이는 염(炎)계열 능력자 같았다.

화염계는 원소 계열이고 전례도 많은 흔한 능력이지만, 복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혹시 2 부에 나오는 능력자인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제프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엘제이는 끝도 없이 몰려오는 비명에 한숨을 삼켰다. 아제프는 천천히 나아가고
있지만, 시간 끌기가 계속되면 그도 지칠 터였다.

엘제이는 고민하며 몸을 살짝 틀었다.

“윽!”

눈앞으로 핏물이 번졌다. 엘제이는 지척에서 터지는 사람의 머리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둘러보고 싶은데,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아제프가 한숨을 삼키며 엘제이의 머리를 품 안에 넣었다.


“이거 끝나면, 토끼 가족…… 다시, 만들어줄게요.”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엘제이는 하얗게 부서져 일그러졌던 토끼


가족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생각해야 해. 저런 게 있다면, 분명 책에서도 다루었을 텐데.’

엘제이는 티아세 家에 놓고 온 종이가 아까웠다. 기억을 잃을 줄 알았다면, 몸에 꼭 지녔을 텐데, 이 순간 무척


아쉬웠다.

엘제이는 기억의 늪에 차츰차츰 잠겼다. 몸을 끌어당기는 의식 너머의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애를 태웠다.

“으아아아! 후작님!”

익숙한 목소리에 엘제이가 눈을 번쩍 떴다. 알모어가 아제프를 애타게 부르며 꽁지 빠져라 뛰어오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모어의 뒤에는 새까만 남자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달려 있었다. 험악한 기세로 알모어를
쫓는 이들과 죽어라 달리는 알모어 사이의 긴장감이 폐부를 조였다.

“세상에, 집사님!”

“알모어, 뭐 하는 거야?”

애타는 엘제이와는 다르게 아제프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감상했다. 잡힐 듯 말 듯 치열한 달리기가 나름 볼만했다.

“후작님!”

“주인에게 구해달라는 집사라니, 한심하군.”

아제프는 땀을 뻘뻘 흘리는 알모어를 시청하듯 바라보다가 검을 들었다.

누구를 노리는지 모를 푸른 검격이 땅에 내리꽂혔다.

“어?”

크게 쏘아지는 물결 속, 알모어 손에서 둥글게 흔들리는 걸 확인한 엘제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8 화
98

싸늘한 바람과 함께 아제프의 검격이 날아갔다. 알모어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얼음칼날을 보고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그의 주인은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으아아아! 후작님! 저도 죽는다고요!”

알모어는 제 귀 바로 옆을 스치는 바람에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강한 건지, 아니면


아제프가 일부로 빗겨 맞춘 건지 알모어는 다치지 않았다. 움츠리는 동안에도 빠르게 움직인 다리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

“끄으읍! 키에에엑!”

핏물이 터진 입이 날카롭게 벌어지며 괴성을 토해냈다. 얼음에 다리가 묶여서도 알모어를 향해 내뻗는 손은
집착이 가득했다. 아제프는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하실에서 본 주술사 같군. 지켈리온의 짓인가?’

알모어가 가까이 오자 그의 손에 들린 것도 잘 보였다. 말캉거리며 흔들리는 것은 알모어의 손바닥에 곱게 안착해


있었는데, 그는 그걸 쥐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였다.

‘설마, 저거…….’

되직한 점액질이 뚝뚝 떨어져 알모어의 손에 감겼다. 엘제이는 알모어의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빨간 것을 보며


꺼림칙한 얼굴이 되었다.

“미친놈. 남의 눈알은 왜 쥐고 있는 거야?”

엘제이가 곁에 있었음에도 아제프의 입술은 험한 말을 내뱉었다. 내면 그대로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하는


얼굴이 된 아제프가 엘제이의 얼굴을 살피며 헛기침했다.

‘눈알.’

엘제이는 눈알이라는 단어에만 반응을 보였다. 저게 중요한 단서인 듯했다. 가만 보면, 저 좀비 같은 남자들도
계속 알모어의 손바닥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제프가 공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남자들이 다시 몰려왔다. 알모어는 끝도 없이 몰려드는 인간


떼를 피하며 몸을 돌렸다. 그는 헐레벌떡 숨 쉬며 아제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으아아아! 후작님, 저 죽는다고요! 진짜!”

“이상하군. 숫자가 줄었어. 왜지?”

아제프는 태평하게 알모어를 관찰했다. 어쩐 일인지 알모어가 나타난 이후에는 아무도 아제프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알모어에게만 쏠려 있었다. 아제프는 알모어의 등 위로 검을 휘둘러 새까만 것들을 적당히
쳐내며 관찰했다.

엘제이도 그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베어내고 죽여도 끝도 없이 쌓이던 주술사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엘제이는 바닥에 널린 시체들을 보며 입을 가렸다.

“반, 정도…… 준 것 같죠?”

“보지 말라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아제프, 그보다 집사님부터!”


엘제이는 거의 눈앞에 다다른 알모어를 보며 아제프를 재촉했다. 아슬아슬하게 목숨만 붙은 채 계속 관찰당하는
게 너무 불쌍했다.

불쌍한 알모어는 그래도 주인이라고 아제프를 걱정하는 듯했다. 그는 아제프에게 완전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몸을
틀어 주위를 뱅뱅 돌았다.

‘집사님, 불쌍해.’

엘제이의 눈에 연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애타는 얼굴로 알모어를 가리켰다.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뭐.’

아제프는 할 수 없이 짧게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눈치가 빠른 남자는 사실, 엘제이보다 먼저 무엇이 문제인지를 눈치챘다. 다만, 알모어가 하는 짓이 우스워
구경하듯 바라봤을 뿐이었다. 아제프에게 알모어의 몸부림은 가벼운 운동 정도로 보였다.

아제프는 검으로 남자들을 적당히 쳐내며 턱 끝으로 알모어의 손을 가리켰다.

“알모어, 그거 버려라.”

“네?”

“손에 든 거 버리라고.”

“네?”

정신없이 쫓기는 중인 알모어는 아제프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말을 두세 번 반복하기 싫어하는


아제프는 더는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알모어의 손바닥을 향해 파란 검격이 휘몰아쳤다. 알모어는 멍하니 아제프의 검격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손에 쥔
걸 놓쳤다.

“으아! 제 손 잘린다고요!”

“깨부숴라.”

간단한 명령이 떨어지자 푸른 마나가 격동하며 아제프의 손에서 떨어진 눈알을 쥐어 터트렸다. 콰직- 눈알 안에
투명한 얼음꽃이 피었다.

그대로 눈알을 감싼 얼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투명한 얼음 아래로 까만 연기가 그득히 몰려들었다.

“끄아아아아!”

알모어를 쫓던 이들 중 일부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비명을 토해내는 입안에서 꾸덕꾸덕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윽!”

검붉은 핏물에 섞여 나오는 꾸덕꾸덕한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는 보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망막 위에 맺힌 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아. 당신 꿈에는 저 모습이 안 나오면 좋겠네요. 진심으로.”

아제프가 엘제이의 머리를 도닥이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예쁜 것만 보여주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기를 바랐는데,
늘 이 모양인 게 싫었다.

아제프는 심장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우는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차라리 기절시킬까?’

엘제이의 목 뒤를 보는 파란 눈이 고뇌에 젖었다. 전처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어 곤란했다. 아제프는 말없이


엘제이를 기절시키는 대신 가만히 그녀의 등을 도닥였다.

저들끼리 뒤엉켜 죽어가는 모습이 꽤 볼만했지만, 주변에 새까만 연기가 차올랐다. 한둘이 아니라서 연기를 막는
아제프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제프, 눈 하나를 더 찾아야 해요. 그게 매개인 것 같아요.”

엘제이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제프에게 도움을 주려 종알거렸다.

아제프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반으로 줄어든 것도 두 눈이 매개이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저번에도 묘하게 걸리던 주술사의 눈알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자질보다는 마물 쪽인 정답인 것 같네요. 주술사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 존재니, 자질로 만들어 낼
수는 없겠죠.”

“무성생식이라도 하는 걸까요? 아니면 단순한 복제?”

“글쎄요. 일단 저 눈만 없애면 멈출 수 있는 모양이니, 눈부터 찾아야겠어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빠르게 이동하려면 이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짐이 되어서, 미안해요.”

“제이와 저는 할 수 있는 게 다른데, 짐이라고 생각하면 제가 슬퍼져요. 계속 그러면 저도 제이가 악몽 꿀


때마다 옆에서 미안하다고 할 거예요.”

“그건, 의미가 다르지 않나요?”

“다르지 않아요. 저는 제이가 있는 덕분에 다치고 싶지 않아요. 훌륭한 방패가 되고 있으니 뿌듯해 해도
좋아요.”

엘제이는 상황도 잊고 피식 웃었다. 여전히 그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괜히 그가 신경 쓰게 한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고마워요.’

엘제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그를 도와주는 길인 듯했다.

아제프는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채찍을 휙 피하며 움직였다. 지면을 밟고 대충 뛰어가는 것 같은데 속도가 무척
빨랐다.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숨을 헥헥 고르던 알모어는 울상을 지으며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후작님!”

“알모어, 그 눈은 어디서 주운 거지?”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저쪽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생각이
잘 안 납니다.”

“당최 도움이 안 되는군.”

애초에 그딴 건 왜 쥐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모어는 넘어진 김에 우연히 구르는 눈알을 발견했고, 저들이 그쪽으로 손을 뻗으니 일단 들고 뛴 것뿐이었다.
우연이라도 그의 활약 덕에 주술사가 반으로 줄어든 터라 엘제이는 고개를 내밀며 알모어를 칭찬했다.

“집사님, 아주 멋졌어요!”

“그것참, 쑥스럽네요.”

알모어는 칭찬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는 상황도 잊고 헤실헤실 웃으며 손으로 코밑을 닦았다. 아제프는 빨간
핏물 아래 녹아든 까만 것을 보며 남 일 보듯 비웃었다.

“너, 그대로 있으면 곧 죽겠군.”

“네? 헉! 후작님! 제가 앞으로 더 잘할게요.”

알모어가 살려달라는 듯 애타게 매달렸지만, 아제프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절대, 알모어가 엘제이에게 칭찬받아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아제프는 자신이 그 정도로 쪼잔하진 않다고
생각하며 알모어를 외면했다.

“제가 도와줄 수 있,”

“알모어, 손 내놔라.”

아제프가 황급히 멈추어 서서 알모어의 손을 휙 가로챘다. 성난 손길에 막 다뤄졌지만, 임시처방으로 얼음이 꽝꽝


얼어붙었다. 알모어는 더는 올라오지 않는 뭉글뭉글한 연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황자님께 정화를 부탁하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아제프는 답지 않게 친절히 설명했다. 아마 그는 엘제이가 알모어를 치료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자유자재로 자질을 다룰 수 없는 엘제이는 단순히,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던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아제프의 착각으로 살아난 알모어는 한숨을 쉬며 하얗게 얼어붙은 손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집사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이곳까지 함께 온 일행이 몇십 명인데, 다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모어가 살아남은 건, 천운이었다.

아제프가 검을 크게 휘두르며 다가오는 것들을 털어냈다. 검 위에 새하얗게 번진 서리가 그의 손짓에 크게


휘날렸다.

엘제이는 상황과 맞지 않게 아름다운 눈 결정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황자님과 리사는, 괜찮을까요?”

“저 빛이 살아 있는 한, 무사할 겁니다. 꽤 요란한데…… 저쪽은, 자질 보유잔가?”

“아제프처럼 자질을 밝히지 않은 사람일까요? 염(炎), 떠오르는 사람은 없는데, 이상해요.”

당대에 밝혀진 자질 보유자 중 불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제프처럼 숨긴 경우일 수도 있으나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알체스테를 노리는 상황을 볼 때, 저 사람은 루드비히를 따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루드비히의 신중하지 못한
성격을 볼 때, 아직 저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과시욕이 많은 루드비히 황자의 사람이라면 황자의 성격상 벌써 밝혀지고도 남았을 텐데, 확실히 이상하네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것 같고.”

아제프는 비겁하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꽥꽥거리는 엘리사의 음성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질이라는
건 나이가 꽤 들어서야 발현되는 거니, 어쩌면 최근에 발현한 걸지도 몰랐다.

‘그런 것치고는 황자님이 꽤 고전하는 것 같지만. 상성이 나쁜 건가?’

아제프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세가 죽지 않는 빛과 불을 바라봤다.

아제프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비수 하나가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고개를 젖혔지만, 조금 늦었는지 아제프의
뺨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아제프, 괜찮아요?”

엘제이가 아제프의 뺨에 손을 올려 살짝 묻어나는 피를 옷소매로 닦았다. 날붙이로 베인 탓에 알모어처럼 독이


오른 건 아니었지만, 아제프의 기분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푹 숙인 머리카락이 거칠게 흔들렸다. 점점 더 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휘이잉- 울렸다.

아제프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 툭 불거졌다. 쩌저적, 푸르게 번지는 마나의 물결이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온통 파랗게 물든 공기가 윙윙- 신음했다.

“나는…… 다치면 안 되는데 말이지.”

마나의 역린을 건드린 자, 자비를 얻지 못하리.

검을 눌러 쥔 아제프의 손에 스산한 서리가 내려앉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99 화
99

주위로 뻗어 나가는 시린 기운에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얼릴 듯 광분하는 마나의 폭격에 주술사들도 쉽게 아제프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들이


내던지는 비수도 얼어붙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제프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겨우 날카로운 단면에 피부를 조금 내어준 것뿐이고, 피는 금방 멎었다.

볼이 조금 찢어진 걸로 유난을 떠는 일은 과거의 그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매일 살갗이 찢어지고 패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아제프였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았는데.’

아제프의 시선이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맑은 녹안에 핏물이 번지는 게 싫었다. 그녀의 걱정이 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깨끗했던 얼굴에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음울한 먹구름이 가득 몰려들었다. 아제프는 손을 들어 핏방울을


닦으려는 엘제이를 말렸다.

얼음장 같은 손이 엘제이의 손등을 가볍게 꾹, 눌러졌다.

“아제프, 손이 얼었어요!”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보곤 입을 살짝 벌렸다.

얇은 옷을 입은 피부에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엘제이는 입김이 차갑게 얼어붙는 걸 보며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시전자의 몸에 서리가 낄 정도면 아제프에게도 부담이 간다는 소리였다.

“아제프.”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엘제이에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서늘한 얼굴에는 냉기가 고여
있었다. 엘제이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파사삭, 무너져 내렸다.

“추워요?”

아제프는 무의식적으로 솜털이 쭈뼛 선 엘제이의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제 손에 검이 쥐어져 있고, 하얀


서리가 끼었음을 확인하고 동작을 멈췄다.

아제프의 입가로 씁쓸한 그늘이 번졌다. 그는 엘제이를 따뜻하게 해줄 수도 없는 제 몸이 싫었다. 악마가 좋아할
고독과 추위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엘제이가 손을 뻗어 아제프의 손을 붙잡았다. 추운 시련에도 꺾이지 않은 온기가 그의 손끝을 감쌌다.

“더웠는데, 시원하고 좋은걸요.”

입술이 파랗게 질려 덜덜 떨면서도 엘제이는 그렇게 속삭였다. 엘제이는 손에 힘을 주며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꼭


붙잡았다. 피부 표면에 돋아난 서리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제프의 얼굴이 좀 나아졌다. 그는 엘제이를 바싹 끌어안았다.

아제프가 손을 꽉 쥐자 그의 손 위의 말라붙은 서리가 파사삭- 흩어져 내렸다.

“이럴 때, 어리광부려서 미안해요.”

광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이 습습하게 변했다. 폭격하던 감정이 고요하게 젖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검이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기울어진 검날 위로 햇살이 스몄다.

뼛속까지 얼릴 것 같은 시린 바람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검끝부터 천천히 얼어붙어 아제프의 손까지 집어삼킨
마나가 거센 울음을 내질렀다.

치링- 치링- 아제프를 사랑한 마나가 그의 의지에 답했다. 허공에 떠오른 얼음들이 서로 맞부딪히며 크기를
키워나갔다. 얼음들은 중력을 거슬러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햇살을 받은 얼음들이 날카롭게 빛났다. 창을 아래로 향한 채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꽃들의 가시가 점점 더
예리해졌다.

“창천 아래, 최파하라.”

서리가 가라앉아 투명하게 빛나는 검이 공기를 찢었다. 수직으로 길게 벤 검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쐐애액-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컸다. 높이 솟았던 얼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하늘에서
얼음화살이 쏟아져 꽂히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비처럼 내려오는 얼음들을 보다가 눈이 가려졌다.

“보지 마요.”

‘보지 말아주세요. 제발, 당신은 보지 말아요.’

아제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익숙한 광경을 바라봤다.

광역 단위로 쏟아지는 얼음을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지만, 주술사들은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서 새까만 빛이 터졌다.

콰아앙-

새하얀 얼음은,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기 전에 이미 그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콰지직- 머리를 깨부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깜깜하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눈꺼풀을 시리게 찌르는 차가움만이 공존했다. 엘제이의 떨리는 손이 올라와
아제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엘제이는 형편없이 떨리는 손을 바로하려고 애썼다.

“아제프.”

“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단단히 가린 손 너머로 울부짖는 인간의 비명과 살과 뼈가 꺾여나가는 참혹의 소리가
귀를 찔렀다.

남은 눈알 하나도 얼음에 찔려 사라졌는지, 주술사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시체의 산이 빠르게 쌓였다.

“우웨에엑.”

알모어는 견디다 못했는지 속을 게워냈다.

요란한 소리에 마음이 번잡해졌다. 엘제이는 모든 게 빨리 끝나기를 빌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제프도, 담아두지 마세요.”

“다 안다면서 그런 걱정을…….”

쓸데없는 걱정. 아제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 같은 괴물이 저런 걸 담아둘 리 없었다. 아제프는 무딘 얼굴로
피 흐르는 광경을 바라봤다.

터지고 부서진 신체 일부를 보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얼굴은 나는 괜찮다- 그리 주장하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조금씩 주물렀다. 단단한 손이 차갑게 굳으니 얼음을 만지는 것 같았다.

“당신만이, 제 걱정이에요.”

“……저를 걱정한다면, 이런 얕은 상처 치료하지 말아요. 치료하면,”

아제프는 뭐라고 협박을 덧붙이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는 좀 더 험악한 방법을 썼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엘제이의 머리가 갸웃, 움직였다.

“네?”

“……안, 만들어줄 거니까.”

“네? 뭐를요?”

“……토끼.”

엘제이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퍽! 땅이 으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대지를 흔들었다. 엘제이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 사그라들었다.

바닥이 쩌저적- 얼음으로 굳어졌다. 쩌적- 쩌적- 얼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수면 위를
찰랑거리는 파도처럼 제멋대로 얼어버린 얼음에 아제프가 혀를 찼다.

‘왜 이렇게, 감정적이 된 거지? 주제에 부끄럽기라도 한 건가?’

아제프는 그제야 엘제이를 조심스럽게 내려줬다. 자질을 무리해서 이끌어낸 탓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마치
저체온증 환자처럼 느리게 뛰는 심장은 차가운 냉기에 몰려 괴로워했다.

아제프는 알싸한 가슴을 티 내지 않으며 엘제이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그녀의 머리에 걸렸던 눈이 스르르
떨어졌다.

“발 조심하고, 아래는 보지 말아요.”

“……아래를 보지 말고, 발도 조심해요? 어떻게요?”

엘제이는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아제프의 말은 들어주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엘제이의 말에 아제프는 음산한 얼굴로 발밑을 노려봤다.

얼음이 투명한 탓에 안이 너무 잘 보였다. 까만 연기가 두둥실 떠다녔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빨간 것은 좋게


보기 힘들었다.

아제프는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다가 알모어를 손짓해 불렀다.

“알모어.”

“……네.”

핏기가 싹 다 빠져나간 얼굴이 허옇게 둥둥 떠올랐다. 아제프는 비틀비틀 걸어오는 알모어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었다.

“벗어라.”

“네?”

“옷, 벗으라고.”

그들 셋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제프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일정 부위를 제외하고는


바닥 전체가 꽝꽝 얼어붙었다.

알모어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느끼며 콧물을 훌쩍였다.

“크읍!”

“아제프, 그러지 말아요.”

엘제이는 말리고, 알모어는 고개를 수그렸으나 소용없었다.

수초 후, 알모어는 셔츠 하나와 바지 하나만을 남기고 탈의해야 했다.

아제프는 알모어의 조끼와 겉옷을 찝찝한 얼굴로 바라봤다.

“할 수 없지.”

약간의 한숨과 함께 제 옷도 벗은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제 겉옷을 입히고 알모어의 것으로 엘제이를 둥둥 휘감았다.

“아제프, 전 괜찮아요. 춥잖아요. 당신도.”


엘제이가 고개를 들어 아제프의 뺨을 조심조심 만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 같지가 않았다. 얼음 조각을
만지듯 차가운 피부에 엘제이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사람, 추운 걸 싫어하는데…….’

싱그러운 녹안에 먹먹함이 고였다. 아제프는 그게 못내 신경 쓰이고, 서글펐다. 그의 손이 엘제이의 손끝을


가볍게 쥐었다. 엘제이의 손은 그에게 이끌려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제 몸에 손대지 말아요. 아직, 차가우니까.”

아제프는 엘제이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녀의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는 달콤함이 번지는 눈을
하고 뒤에서는 덜덜 떠는 알모어의 발목을 걷어찼다.

“윽! ……집사 알모어! 저는,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혀를 길게 빼물고 고통을 참던 알모어가 반듯하게 서려고 노력하며 외쳤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제프는 보란 듯이 웃었다.

“알모어도 괜찮아 보이네요.”

“세상에……. 집사님 입술, 파란 것 좀 보세요.”

알모어를 향한 아제프의 거친 발길질을 보지 못한 엘제이는 알모어를 걱정했다. 아제프 앞에서 알모어를 걱정하는
게 알모어에게는 더 안 좋은 일이었지만, 엘제이는 그걸 몰랐다.

아제프가 신경질적으로 알모어를 휙, 쏘아봤다. 알모어는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헙! 그것보다 황자님, 왜 저렇게 멀리 떨어지셨죠?”

알모어가 저 멀리 보이는 빛기둥을 가리켰다.

엘리사의 걱정에 엘제이의 시선은 쉽게 그쪽으로 틀어졌다. 싸우는 동안, 알체스테는 꽤 이동한 것 같았다.
엘제이는 빛줄기가 휘몰아치는 평야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저쪽으로 가신 거죠?”

“저건 밀려난 게 아니라, 유도한 거예요. 숲은 아무래도 불이 유리하니까요. 그 사이, 제법 선전하신


모양이에요.”

아제프는 동네 똥개 칭찬하듯 가볍게 알체스테를 평했다.

확실히 기세를 꺾었는지, 불줄기는 더는 높게 솟아오르지 못했다. 아제프는 아까와는 확연하게 다른 위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체력이 형편없는 건가? 기세 좋게 덤벼든 것치고는 오래 못 가는군.’

아제프는 격동하는 두 개의 마나를 감지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주변에 살아 있는 기척은 총 여섯 사람이었다.

아제프, 알모어, 엘제이, 엘리사, 알체스테, 그리고 저 남자.


이 여섯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망했다.

사망한 이들 중에는 아제프가 직접 키운 사병도 속해 있었다. 아제프의 눈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금세


흔들리는 감정을 털어낸 눈은 다시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리사…….”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몸에 제 몸이 최대한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를 들어 올렸다.

“곧, 끝날 것 같지만, 걱정될 테니, 직접 가볼까요?”

그들은 차가운 냉기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

오랜 공방에도 꾹 눌러썼던 까만 로브에 빛이 휘감겼다. 새하얀 빛줄기가 펑 터지며, 까만 로브를 벗겨냈다.

“윽!”

희미한 기억 속,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 남자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드디어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알체스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센 전투로 달구어진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무딘 금안 위로 얼핏, 작은 동요가 스쳤다. 알체스테의 입꼬리에 씁쓸한 감정이 걸쳐졌다.

“새삼, 기대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군.”

“황자님…….”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알체스테를 불렀다. 무뚝뚝하게 불거진 턱과는 다르게 그의 눈에서는 희미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0 화
100

알체스테의 눈에 담긴 동정에 남자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알체스테는 늘 저런 식이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의 사랑도 못 받는 천대받는 자식 주제에 감히, 저런


얼굴을 했다. 루드비히는 저보다 못한 걸 보는 저 시선이 싫었다.

“그렇게 보지 마!”

루드비히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헉헉거리는 숨을 쥐어짰다. 그의 손에서 크기를 키운 불덩이가 튕기듯


쏘아졌다.

이미 화력이 떨어진 불덩이는 새하얀 빛에 금세 사로잡혔다. 빛이 전율하며 우지끈 소리를 냈다.

흔적도 없이 부서진 마나는 시전자에게 타격을 줬다. 루드비히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쿨럭, 빌어먹을!”

입을 가린 손 틈으로 주르륵 흘러나온 피는 선명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잿더미를 머금은 듯 까맣기만
한 혈흔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군. 자질 보유자가 아니야. 설마, 너!’

알체스테가 봤을 때, 루드비히는 자질 보유자가 아니었다. 억지로 자질을 주입하기라도 한 듯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자질은 마나를 지배하는 힘이었다. 마나 스스로 시전자를 사랑해 따르는 것이지, 억압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저런 방법은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알체스테는 엉망이 되다 못해 너덜너덜하게 뒤집힌 루드비히의 속을 꿰뚫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루드비히의 내면이었다. 질척거리는 까만 점액이 바글바글 눌어붙은 영혼이 귀곡성을
내질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흔적이었다.

“황족이란 놈이, 신을 배반하고 악마에게 혼을 판 건가?”

알체스테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악마에게도 지켜야 할 율법은 존재했다. 그들에겐 몇 가지 제약이 존재했는데, 그 중 가장 중한 것은 먼저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악마는 먼저 거래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미 타락한 인간이 악마를 부르는 것이지, 악마가 인간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었다.

루드비히의 얼굴에는 새까만 반점이 그어져 있었다. 감히 황족의 증표라는 빛나는 금안을 가지고도 악마와 사통한
것이다.

“너만 없으면……. 너만 없었어도!”

루드비히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알체스테만 세상에서 사라지면 되었다. 그만 없으면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올 터였다.

루드비히의 몸에 새까만 반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졌다. 쓸 수 없는 힘을 강제적으로 끌어낸 탓에 이성이


잡아먹히고 있는 것이다.

악마라는 존재는 원래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얼굴로 인간을 꾀지만, 결국 원하는 대가 하나 제대로
이뤄주지 않는 잔인한 족속이었다.

알체스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겨우 일회용인 자질을 얻자고……. 미련한 놈!”

“날 때부터 가진 네놈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멍청한 놈! 악마와 사통한 자는 황족이라도 즉결처형이다!”

“네가 뭘 알아! 밖에서 이십 년이나 처박혀 있던 주제에!”

루드비히가 악을 쓰자 새빨갛게 일렁이던 마나가 까맣게 물들었다. 피부를 기어간 괴기스러운 문양이 얼굴 반쪽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까맣게 피어오른 불은 악독하게 타올랐다. 루드비히는 마구잡이로 그것들을 내뿜고 던졌다.

알체스테는 광분하며 날뛰는 루드비히를 멍하니 바라봤다. 추악하게 망가진 이복동생을 보는 눈이 붉게 젖었다.

“황자님! 오른쪽, 피해요!”

엘리사는 정신을 못 차리는 알체스테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주의를 줬다. 다소 험악한 방식이었지만, 효과는
빨랐다.

알체스테의 얼굴을 휙- 스쳐 지나가는 화염구에 서린 독기가 평야를 메울 듯 번졌다.

“멸하라.”

가벼운 영창과 함께 그어진 검격이 투명하게 번져 하늘에서 터졌다. 아름답게 내려오는 빛가루가 까만 그을음을
삼켰다.

알체스테는 제 검에 묻은 그을음을 가볍게 털어내며 루드비히를 향해 걸어갔다.

루드비히는 이미 설 힘도 없는지, 그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마나는 냉정했다. 저를 지배할 자격도 없는


자가 제어력도 잃으니 등을 돌렸다.

루드비히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퍼덕였지만, 그 기세는 전보다 훨씬 꺾여버렸다.

“으아아아!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의미 없는 몸부림은 금세 빛에 삼켜졌다. 가볍게 그것들을 피한 알체스테는 루드비히에게 바짝 다가섰다.

“루드비히.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는, 결국! 아무것도 몰라! 너만 죽으면! 너만 없으면!”

부황은 괴물이었다. 루드비히는 그 괴물의 밑에서 이십 년을 홀로 버텼다. 언젠가 괴물이 남기고 떠날 겉가죽이
너무 갖고 싶어서 아득바득 버텨냈는데, 순식간에 버림받았다.

“다! 너 때문이야! 으아아아!”

“추하다!”

캉- 알체스테가 내지른 검이 루드비히의 검을 날렸다. 챙그르르- 소리를 내며 구른 검이 땅바닥에 부딪히며 저


멀리 굴러 떨어졌다.

알체스테의 검이 날을 바짝 세우고 루드비히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 보았던 그 표정 그대로, 변하지 않은 놈의 얼굴이 보였다.


‘너만! 왜 너만!’

모든 건 알체스테 탓이었다. 저만 깨끗하다는 듯 고결한 표정에 토악질이 났다. 혐오스럽고 끔찍해서 온몸에
벌레가 바글바글 기는 것 같았다.

갉작갉작 쥐어뜯긴 신경이 몸부림치며 악의를 들끓게 했다.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루드비히의 마음에는 알체스테를 향한 짙은 살의뿐이었다. 저놈만 죽일 수 있다면 모든 게 제 것이 될 테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루드비히는 알체스테에게 불을 던지는 걸 그만두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로브에서 빠져나온 손에 날카로운


비수가 걸렸다.

“너 때문에 죽은 이가 몇인 줄은 아나?”

“…….”

알체스테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감지에 걸리는 기척은 단 여섯 명이었다. 거의 백에 가까운 무리로
출발했는데, 다 죽어버렸다.

황족이란 놈이 제 백성 수십 명을 죽인 거다. 오직 제 이기심 때문에.

알체스테에게는 루드비히의 내면이 누구보다도 잘 보였다.

‘왜, 그렇게까지…… 망가진 거냐. 왜.’

아주 어렸을 적, 둘은 함께 자랐다.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였고, 동생이었다. 이십 년간 소식 하나 들려주지


않은 매정한 사람이었지만, 동생이었다.

부릅뜬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축축하게 고인 눈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 한 덩이를 또 토해냈다.

알체스테의 검 끝이 잘게 흔들렸다. 즉결처형해야 했다. 타락한 놈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더 비참해지지


않게 이곳에서 끊어주는 게 형의 도리였다.

하지만, 영혼을 빼앗겨 이미 갈 곳을 잃었다는 게 걸렸다. 이대로 죽으면 루드비히는 정말 끝인 거였다.

“황자님. 꼭 황자님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엘리사는 덜덜 떨리는 알체스테의 검끝을 보여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엘리사도 두려웠다. 아제프와는 달리 알체스테는 루드비히 하나만 상대했기에 크게 험한 꼴은 보지 않았지만, 피


냄새가 너무 무서웠다.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게 된 사람의 신음이 두려움을 안기고 떠났다.

‘그래도 당신이 힘들다면, 제가 대신.’

엘리사의 손가락이 알체스테의 검을 휘감았다.

루드비히는 눈을 들어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형.”

아주 어릴 때, 그렇게 불렸던 적도 있었다.

알체스테는 눈을 힘주어 치떴다. 날카로운 눈매 끝이 연약하게 떨렸다. 알체스테는 따갑다고 비명 지르는 눈을,
감지 않고 버텨냈다.

비수를 꽉 쥐고 있는 얄팍한 속내가 훤히 보였다. 이미 빛 한 점 없이 타락한 놈이었다.

알체스테의 얼굴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것이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더 망설이지 않고 엘리사의


손을 떼어냈다.

하얀 대검이 햇살을 머금고 빛났다.

“혼자는, 안 죽어!”

루드비히는 엘리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나이샤의 독액을 얇게 바른 흉기였다. 살짝만 스쳐도 즉사였기에,


루드비히는 이를 사리물었다.

아제프 일행이 도착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리사!”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엘리사를 불렀다. 엘리사의 눈에 짧은 단검이 들어왔다. 엘리사의 눈을 찌를 듯 다가온
흉기에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미처 검이 그녀에게 닿기 전 알체스테가 검을 놓고 루드비히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잡았다.

뿌드득-

뼈가 꺾이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렸다.

“크아아아! 끄읍! 알체, 스테!”

루드비히는 핏발 선 눈으로 알체스테를 쏘아보며 증오로 이를 벅벅 갈았다. 새빨갛게 변한 눈은 원래의 금빛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알체스테는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루드비히의 목을 발로 꽉 밟았다.

“신을 배반한 자는 즉결처형이다. 네 몸에 남은 문양이 증거가 될 테지.”

“끄윽! 끄아아아!”

루드비히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알체스테는 벌레처럼 기는 동생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잇새를 비집고 거친 음색이 터졌다.

“갈 때만큼은 부디, 품위를 지켜라!”

늘 무표정한 알체스테의 얼굴에서 보기 드문 분노였다. 어느새 알체스테의 품에서 내려온 엘리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우리 황자님……. 울지도 못하고.’

엘리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뜬 그를 대신해 그녀가 울었다. 무딘 금안에서 흐려졌던
감정은 반려인 엘리사에게는 너무 생생했다.

“쯧. 제이, 잠시만 이대로 있어요.”

“아제프?”

알체스테 곁으로 내려온 아제프는 엘제이의 몸을 휘감은 옷 하나를 벗겨 엘제이의 얼굴을 가렸다.

아제프가 빠르게 뛰어내려와 알체스테의 곁에 섰다. 무감정한 얼굴만으로는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황자님은 참, 효율적이지 못하네요. 과거 따위에나 연연하고.”

가볍게 휘두른 검이 퍽- 소리를 내며 뼈를 갈랐다.

알체스테의 발을 피해 정확히 목을 끊어낸 검이 땅에 내리꽂혔다. 툭, 떨어진 목이 조금 굴러 알체스테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아제프! 이건 내 몫이었다!”

“뭐. 아무리 생각해도 악역에는, 제가 제격이니까요.”

아제프는 검을 뽑아 갈무리하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가 아무렇게나 발로 찬 로브는 툭, 떨어져


루드비히의 머리를 덮었다.

로브는 그대로 꽈득꽈득- 소리를 내며 머리를 얼렸다. 황도까지 저 머리를 들고 가야 하니 썩지 않게 보존할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까만 독기를 내뿜는 몸도 같은 방법으로 얼리고 돌아섰다.

“황자님은 정화나 해주세요. 온 땅에 독기가 그득하네요.”

아제프는 곧장 엘제이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는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엘리사는 묘한 표정으로 아제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걱정해, 대신 루드비히를 죽인 거라고.

엘리사는 꺼림칙한 눈으로 아제프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가 걱정할 사람은 알체스테지 아제프는
아니었다.

“황자님, 괜찮으세,”

끼릭-

엘리사의 말은 알체스테의 검 소리에 끊겼다. 동시에 앞을 바라본 두 남자가 자매를 뒤로 물리며 검을 뽑았다.

“설마, 또?”
엘제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다섯 명 중 전력이라고는 아제프와 알체스테 뿐이었는데, 세 명의
짐을 달고 싸우기에는 그들도 너무 지쳤다.

“온다.”

“이미, 알거든요.”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말에 까칠하게 답했다. 검 끝에 고인 빛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예리한 칼날이 향한


끝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다각다각-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반짝이는 은발이 보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1 화
101

바람이 휭, 불자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동요 없이 잔잔하게 흐르던 금안이 살짝 커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황자님!”

알체스테를 부르는지 루드비히를 부르는지 알 수 없는 호칭이었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사태를 주시하는


아제프와는 달리 알체스테는 검 끝을 늘어트렸다.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이었다.

“휴이, 안젤라.”

나지막한 호명에 엘제이가 아제프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느새 코앞에 당도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알체스테의 발아래 부복했다.

“황자님을 뵈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깊게 숙인 고개 위로 단정한 은발이 쏟아졌다. 머리 길이와 체형만 빼고는 똑 닮은 두 얼굴이 알체스테를 향했다.


엘제이는 익숙한 얼굴을 보며 작게 안도했다.

‘코르디스의 은발 쌍둥이! 알체스테 황자님의 사람이구나.’

은발의 쌍둥이, 시스라인 남매는 알체스테의 소꿉친구였다. 알체스테가 워낙 무감각한 성격이라 친구라고 대놓고
칭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알체스테의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알체스테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쌍둥이들을 일으켰다.

“그만 일어나도 좋다.”

“예.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여긴 무슨 일이지?”

“루드비히를 따라왔습니다.”
“휴이!”

안젤라는 경칭도 없이 황자를 칭하는 동생을 작게 나무랐다. 누이의 기겁에도 휴이는 큰 반응 없이 알체스테만
바라봤다. 휴이는 정이 많고 올곧은 성격이었지만, 다혈질이었다.

둘만 온 것도 아니고 시스라인 家의 시중인도 함께하는데 휴이의 말은 너무 거침없었다.

알체스테와 시스라인 남매는 알체스테가 변방으로 떠난 이후에도 계속 교류를 이어왔다. 황제와 루드비히의 눈
밖에 나는 꼴이었지만, 남매는 잊지 않고 알체스테를 찾았다.

알체스테는 골이 잔뜩 난 휴이를 잘 알았다. 그는 짧게 한숨 쉬며 주의를 줬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게 네 유일한 단점이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황자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자격을 잃었다? 설마, 저 꼴을 다 들킨 건가?”

아제프는 꽝꽝 얼어 있는 루드비히의 머리를 가리키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스라인 남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까만 로브에 덮여 있었기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람의 머리와 몸체로 보이는 것이 절단된 모습을 보고 그것이 시체임을 짐작했다. 아제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안젤라가 얼굴을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저거, 설마! 시체입니까? 황자의?”

“너희들이 말하는 게 정확히 뭐지?”

안젤라로서는 드문 호들갑이었지만, 알체스테는 냉정하게 끊어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사태를 파악해야


했다. 알체스테의 뜻을 알았는지, 안젤라의 얼굴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안젤라는 험악한 얼굴로 끼어들려는 동생의 얼굴을 손등으로 후려갈겼다.

“악! 누나!”

옆에서 악악대는 동생 따위에게는 눈길도 안 준 안젤라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루드비히 전하의 궁에서 주술사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신관도 그곳에 사특한 기운이 흐른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황궁의 신관이 증언했다? 아니, 애초에 누가 황자의 궁을 뒤진 거지?”

알체스테의 말에, 아제프의 눈가도 가늘게 좁혀졌다. 이십 년간 다진 입지가 좁은 것도 아니었을 텐데,


루드비히는 너무 쉽게 무너졌다.

마치 누가, 그를 벼랑 끝으로 민 것처럼.

‘설마, 황제가 루드비히를 버린 건가? 왜?’


루드비히의 궁을 조사하라고 시킨 사람이 황제라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까지 루드비히의 잘못을 묵묵히 넘어가는 태도를 보였다. 호의를 넘어 싸고도는 수준이라,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루드비히를 향한 황제의 총애를 의심치 않았다.

그 동안은 덮어주던 일을 이제 와 외면했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놓친 게 분명 있는데, 정확한 내막을 모르니 짐작할 수 없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가 더 설명해보라는 듯, 나란히 안젤라를 바라봤다.

“설명하자면 좀 길지만, 시작은 루드비히 전하의 시종 하나가 실종된 일이었습니다. 사라진 전하의 시종이
주술사가 되어 발견됐고, 그 흔적을 따라 올라가니 루드비히 전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겨우 그것만으로 황자를 조사한단 말인가?”

“오늘 아침부터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는 지금 주술사에 대한 공포와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제프는 보고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 수도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마땅히 누군가 그에게 연락을 취했을 텐데
이동하느라 연락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에 담기 힘든 참혹한 일입니다. 어젯밤, 문장 보유자 여럿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문장 보유자가, 살해당했다고?”

“네. 그 수가 열 명을 넘습니다. 연령과 신분이 모두 다른 그들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문장 보유자였다는


것뿐입니다.”

스산한 예감이 들었다. 아제프는 안젤라의 묘한 말투를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그는 엘제이의 손을 꼭 붙들며
입술을 비틀었다.

“문장 보유자였다? 왜 과거형이지?”

“살해당한 이들의 신체 일부가 훼손되었는데,”

“그 부분이 문장이 있던 곳이군. 문장이 있는 신체가 뽑힌 건가.”

“네. 뽑히고 남은 신체에는 문장이 없었습니다.”

알체스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법이 지켈리온과 완전히 같았다. 문장 보유자는 나라에서 보호하는 게 의무였다.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이들의 상징성은 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이들이 하룻밤에 십여 명이나 죽었으니, 수도가 흔들릴 만했다.

더군다나 신이 내려준 문장이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주술사들이 범인으로 몰리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신을
배반하고 힘을 탐한 추악한 이들이라는 게 베아르시 제국민의 생각일 테니까.

“십여 명이 하룻밤에 죽었다. 수도 문장 보유자의 반의반은 되겠군.”


“네. 지금은 문장 보유자들의 호위가 더 강화된 상태입니다. 수도의 소문이 워낙 흉흉하여, 주술사에 대한
반감이 부쩍 거세지는 상황입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알체스테는 미간을 좁혔다. 일그러진 피부가 그의 고뇌를 담았다.

“대체, 다들 뭐 한 거지? 어찌 보면 고작 십여 명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서야 문장


보유자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빨리 번질 수가 있나?”

“그게, 그들이 한 짓 중 무엇보다 극악한 것은…… 죽은 이들의 짝은, 모두 살아있다는 겁니다.”

“……과연. 광분해 날뛰는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 건가?”

문장 보유자는 대부분 귀족이었다. 평민이 문장을 가지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귀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무래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귀족 家 여러 곳에서 한 번에 소란이 일어났다면 소문이 퍼질 만도
했다.

“네. 문장 보유자를 죽인 이에 대한 정체를 밝혀내라는 압박이 커졌고, 황제 폐하께서는 루드비히 전하의 재판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루 만에, 포기를? 빠르군.”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황제는 루드비히를 버렸다.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긴
했으나, 갑작스러운 감이 있었다.

“네. 저도 그것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재판은 빠르게 준비되었고 조만간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루드비히 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저희는 그분을 추격하는 일을 맡아, 이곳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나 하나만 죽으면 된다는 게, 그런 뜻이었나? 멍청한 놈.”

알체스테는 바람에 이지러질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아집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 가엽기까지 했다. 그는 죽은


이복동생의 흔적을 지워내려 애쓰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아제프는 그의 속삭임을 놓치지 않았지만, 안젤라는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네?”

“별거 아니다. 일단 수도로 빨리 돌아가야겠군.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면서 듣도록 하지.”

“네.”

알체스테와 안젤라의 대화가 끝나자, 그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알체스테는 이곳저곳에 퍼진 악한 기운을 정화하느라 바빴고, 아제프에게도 전령이 도착해 그는 보고를 듣는


듯했다. 엘리사는 알체스테 곁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사이, 아제프의 품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온 엘제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저, 시스라인 영애.”

안젤라는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엘제이를 보며 그린 듯 웃었다.


엘제이보다 한참 연상인 그녀는 저보다 작은 엘제이가 마냥 귀여워 보였다. 어린 동생을 보듯 다정히 웃은
안젤라가 사냥하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혹시, 사건명이 따로 있을까요?”

“사건명이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엘제이는 안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뒤돌아섰다. 다시, 아제프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안젤라는 엘제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엘제이 같은 영애가 관심을 둘 법한 일은 아니었는데, 축 처진


등이 시무룩해 보였다.

꼼꼼한 성격의 안젤라는 정해지지 않은 걸 미리 입에 담기 싫어했다. 그녀는 엘제이를 붙잡아 평소에는 하지 않을


말을 했다.

“다만 저희들은 그걸, 문장 사냥이라고 칭합니다.”

뒤돌아 있던 등이 움찔 떨렸다. 고운 선을 그리며 축 떨어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문장 사냥. [신의 문장] 2 부의 부제였다.

시간은 빠르게 휘감겨 예정보다 빠른 폭풍이 몰아쳤다.

***

일행은 일단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로 했다. 빨리 수도로 가야 노숙하지 않을 거라고 변명한
알모어의 말과는 다르게, 수도로 가는 길에 마을 한두 곳 정도는 있었다.

말이 몇 마리 없었기에, 대부분 둘이서 말을 타야 했는데, 아제프는 물론 엘제이를 데리고 말 위에 올랐다.

아제프는 어느 정도 찬 기운이 사라진 몸으로 엘제이를 꼭 끌어안았다. 푸근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마차와 말이 다 망가져서 좀 걱정했는데, 말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네. 다행이에요.”

엘제이는 복잡한 속내를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눈치 빠른 남자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무룩한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접은 아제프가 엘제이를 살살 떠봤다.

“무슨 걱정이 있어요?”

“그냥, 별거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다치지 않았으면 해서요.”

“이상하죠. 전에는 제이의 걱정이 마냥 기쁘기만 했는데, 지금은 초조하고 서글퍼. 제가 그렇게 의지가 안
되나요?”
아제프는 진심으로 속상해 했다. 그의 마음을 얼핏 느낀 엘제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런, 그런 게 아니에요!”

아제프는 절레절레 빠르게 젖는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짚으며 멈췄다. 말 위에서 이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엘제이는 오직 아제프밖에 보지 않았다.

아제프는 부드럽게 웃으며 엘제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알아요. 제이가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저는 당신의 짝이라고 했잖아요. 저를 좀 더 의지해줘요.


제가 당신을 의지하는 만큼.”

간질거리는 숨결이 이마에서 흩어졌다. 냉기가 묻어나는 숨이라 그런지,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산홋빛 입술이 하얀 이빨 아래에서 짓뭉개졌다.

“그, 럴게요.”

아제프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내려앉았다.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남자의 단단한 손에 정리되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를 손으로 길게 쓸어 넘겼다.

“입술, 더 내리면…… 안 되겠죠?”

화사한 얼굴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2 화
102

엘제이는 그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제프의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다. 그들 주변을 맴돌며 호위하던 기사들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물러났다.

“크흠.”

다그닥다그닥,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가자 고개 숙인 엘제이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몸을 옆으로 튼
탓에 아제프의 옷깃만 보였는데, 그는 뭘 하고 있는지 옷깃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기사들이 곁에서 떨어지자 아제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제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힌 엘제이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제프, 일부러 그런 거죠?”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 엘제이가 아제프를 밉지 않게 흘겼다. 암팡지게 쥔 손이 그의 가슴을 콩, 때렸다.


아제프의 얼굴에서는 어색함이 금세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늘 그렇듯 능청스럽게 웃어넘긴 남자는 엘제이의
손을 살살 풀어 제 손가락을 얽었다.

“설마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요.”

“아제프도 피곤할 텐데, 호위를 물리시면 어떡해요. 리사도 저렇게 얌전히…….”

“얌전히?”

아제프는 엘제이가 말을 멈춘 이유를 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았다. 둥글게 휘어 올라가는 미소는 분명


비웃음이었다.

평소의 엘리사라면 언니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아제프의 말을 놓칠 리 없었다. 입을 맞추겠다는 말을


들었으면 분명 날뛸 여잔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캬르릉거렸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동생을 발견한 엘제이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내뱉고 싶다는 듯 씰룩거렸다.

“리사, 너…….”

어쨌거나 사람이 죽었고, 시체를 운반하고 있었다. 가는 길의 분위기가 음침한 건 당연했다. 엘리사는 음울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새의 지저귐처럼 영롱한 목소리가 밝게 터졌다.

“꺄하하하하! 황자님이 그랬어요?”

“네. 황자님은 어렸을 때부터 진지하셨죠. 장난으로 한 말도 늘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안젤라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알체스테를 힐끔 바라봤다. 곤란하다는 듯 푹, 내쉬는 한숨은 작위적이었다.

엘리사는 그런 안젤라가 마음에 드는지 안젤라와 한참 대화를 이어갔다.

“아아- 나도 보고 싶다, 어린 황자님. 언니, 아!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요. 영광입니다.”

안젤라와 엘리사는 죽이 척척 맞았다. 알체스테 하나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녀들 때문에,
알체스테는 정작 묻고 싶은 질문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알체스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굳었다. 둘이서 그를 놀리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농담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얼굴에 엘리사가 그의 볼을 콕콕 찌르며 장난을 쳤다.

‘경박하군.’

아제프가 엘제이 몰래 입가를 찌그러트렸다. 그의 눈에는 엘리사가 활달하게 웃는 모습이 즐겁다 못해 경박해
보였다.
엘리사는 눈치가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음침한 이 공간에서 저렇게 눈치 없이 웃는다는 건 알체스테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제프의 상태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알체스테는 훨씬 심했다. 엇나간 방법이기는 했어도 루드비히는 자질


보유자였다. 그런 그와의 공방전이 길었고, 싸움을 끝내고 나서는 독기에 오염된 숲을 깨끗하게 정화해야 했다.

평소보다 자질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건 분명했고, 어쨌든 이복동생이 죽었으니 그의 마음도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엘리사는 알체스테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거였다.

“황자님, 마을에 들르면 저랑 같이 마차 사러 갈까요? 아니면, 여관에 들어가서 쉴까요?”

“리사. 나는 일을,”

“네? 둘 중 어느 쪽이 좋아요? 저와의 데이트? 저와의 달콤한 낮잠? 저는 낮잠 쪽이 끌리는데. 저랑 자장자장


하러 갈까요?”

엘리사는 무리하려는 알체스테의 말을 애교 있게 끊어내며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혈통 좋은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알체스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안젤라는 푸근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을에서 수습할 일도 있으니 그렇게 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필요한 것은 제가 책임지고


구해오겠습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수도에 도착해야 한다. 그보다 나는 수도에서 일어난 그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세상에! 그래도 될까요? 고마워요! 그럼 황자님은 저랑 자장자장 해요. 제가 자장가 불러 드릴게요.”

“…….”

알체스테는 자장가라는 말에 솔깃한 것 같았다. 고민하며 흔들리던 눈이 곧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말수가 적은


알체스테가 무언의 긍정을 하자 엘리사가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폭 기댔다.

아제프는 아제프 나름대로 엘리사를 인정했다. 그는 좋든 싫든 알체스테 진영에 합류해야 했고, 엘리사는 엘리사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아제프의 머릿속에서 엘리사에 대한 평가가 상향 조정됐다. 밉살스러운 여자에서 그래도 도움이 될 구석은 있는
밉살스러운 여자로.

‘가만 보면, 나쁘지 않단 말이지. 저 조합.’

아제프는 엘리사의 관심이 알체스테에게 완전히 쏠린 게 만족스러웠다.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여잔데,
알체스테의 상태가 안 좋으니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상태가 매일 안 좋도록 노력해야 할까, 고민하며 싱그럽게 웃었다.

“엘리사 양은 여행길에 잘 적응했나 보네요.”

“하아, 리사……. 어쩌면 좋을지. 쟤가 아직 어려서,”


“둘은 쌍둥이잖아요?”

“…….”

동생에 대해 변명해주려던 언니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었다. 엘제이는 그저 외면하듯 엘리사
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꺄하하하, 웃는 소리가 귓가에 질척질척 달라붙었지만 엘제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엘리사의 목소리를
쳐냈다.

‘그나저나, 뭐 하다가 대화가 이리로 튀었지? 아!’

혼자 무슨 상상을 했는지 두 볼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엘제이는 아제프의 크라바트를 살짝 끌어당겼다. 꽤 과감한


행동에 아제프가 눈을 크게 뜨고 엘제이에게 끌려갔다.

쪽.

촉촉한 입술이 아제프의 입술을 내리누르는 감각이 살짝 스쳤다. 전율이 일듯 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이 말캉하게
뭉개졌다.

살짝 붙었다가 떨어진 입술은 꼬리를 말고 금세 도망쳤다. 고개를 푹 숙인 엘제이가 아제프의 가슴팍을 머리로 콩,
때렸다.

“이걸로, 참아줘요.”

아제프는 열기가 고인 하얀 귀를 조물조물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손 안 가득 저것을 쥐고 뭉개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아제프는 이로 잘근잘근 짓씹을 듯 송곳니를 세웠다가 이내,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요. 그보다, 저 감동이에요. 이처럼 과감한 제이라니, 종종 이래주면 좋을 텐데요.”

“종종, 이요? 그건 좀 부끄, 윽!”

엘제이를 바싹 끌어안은 아제프가 모르는 척 엘제이의 귓가에 바람을 후- 불어넣었다. 곧바로 엘제이의 등이
움찔거리며 그녀의 귓가가 더 붉어졌다. 눈앞에서 귀가 붉어지는 걸 감상한 아제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아아-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아제프의 마음속에서 다정한 아제프와 요망한 아제프가 격쟁을 벌였다.

아제프는 귀를 축 늘어트리며 엘제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럼 여기 말고, 우리 둘만 있는 곳에서는 괜찮아요? 우리도 낮잠 자러 갈까요? 나 피곤해요.”

“피곤, 해요?”

엘제이는 역시, 아제프의 약한 소리에 금세 흐물흐물 녹았다.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은 엘제이가 작은 손으로
그의 손바닥을 야무지게 눌렀다.
꾹꾹 힘주어 누르는 손길이 제법 시원해서 아제프도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며 웃었다.

“네. 눈도 감기고 좀 쉬고 싶어요.”

“그럼,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준비하는 동안 우리도, 은근슬쩍 방으로 올라가 있을까요?”

엘제이가 안젤라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주먹을 암팡지게 쥐어 보였다.

샐샐 혓바닥을 내밀던 하얀 강아지가 투견처럼 눈을 빛내는 모습에 아제프가 참지 못하고 엘제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원한다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다.

“시스라인 경이 안 된다고 하면요?”

“그럴 리가 있나요.”

“만약이라는 가정이니까요. 만약, 계속 안 된다고 하면요?”

엘제이는 힐끔, 아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전에 딸기를 먹다가 만약이라는 저 한마디에 속아 넘어가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딸기 날벼락 사건을 기억하는 엘제이로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엘제이는 고심했다. 딸기처럼 붉은 입술이 잘근, 깨물렸다.

“……몰래, 도망갈까요? 방으로?”

“아하하! 저를 위해, 도망가줄 거예요? 방으로? 문 꼭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아제프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알체스테에게 엘리사가 있다면, 아제프에게는 엘제이가 있었다. 각자


공평하게 제 편이 있으니,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알체스테가 엘리사에게 치유 받듯, 아제프 또한 엘제이에게 치유 받았다.

아제프의 내면 깊숙이 쌓였던 꺼림칙함이 몰려갔다. 유쾌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즐거움을 대롱대롱 매달았다.

아제프는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한참을 더 웃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던 엘제이가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진지하게 말했는데, 놀리지 마세요!”

“알았어요. 놀리는 거 아니고, 좋아서 그래요. 저는, 제이가 제일 좋은걸요.”

아제프가 엘제이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이자, 불퉁하게 튀어나왔던 입술이 쏙 사라졌다. 속눈썹을 가볍게 팔랑거린
엘제이가 몸을 끌어안은 그의 손을 꼭 붙들며 살짝 웃었다.

“저도, 좋아해요.”

“아! 치료는 금지예요.”

아제프가 잊을 뻔했다는 듯 황급히 덧붙였다. 그건 엘제이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지만, 좋은 생각이 난


엘제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는 새침한 표정으로 타협책을 제시했다.

“아제프가, 의원에게 진찰도 받고, 치료도 받겠다고 약속하면요.”

“겨우 이런 걸로요?”

“네.”

“뭐, 알겠어요.”

단호한 대답에 아제프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와의 시간을 좀 뺏기게 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이잉-

그때, 하늘에서 새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람을 부르는 새의 울음소리는 훈련받은 기사라면 꽤 익숙한
것이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포함한 기사들의 목덜미가 일제히 하늘로 꺾였다.

“전령조(傳令鳥)? 누구에게서 온 거지?”

“흠?”

새의 뒷다리에 동여맨 쪽지를 확인한 아제프는 의아한 얼굴로 팔을 길게 뻗었다. 낙하지점을 확인한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왔다. 아제프는 새의 부리를 익숙하게 긁어주며 쪽지를 빼냈다.

‘아까 다 보고한 게 아니었나?’

새하얀 종이가 천천히 벌어지며, 까만 글자를 토해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3 화
103

새하얀 종이를 빽빽하게 채운 작은 글자는 아이젠의 필체였다. 아제프는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글씨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요란스럽게 날아온 전령조 때문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서신을


다 훑은 아제프는 그걸로 되었다는 듯 종이를 구겼다.

‘답신은, 필요 없는 건가?’

답신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서 고민하는데 전령조는 답신은 됐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날카로운 발톱에 힘이
콱, 들어가고 활짝 펼쳐진 날개가 다시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아제프는 금세 사라지는 갈색 깃을 쫓다가 곧 고개를 돌려 웃었다.

파사삭-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의 손에서 구겨진 종이에 살얼음이 얼었다. 아제프는 둥글게 얼어붙은
종이를 장난스럽게 돌리다가 엘제이에게 내밀었다.

“제이, 이거 두드려 볼래요?”


“네?”

“재미있는 거 보여줄 테니까, 해봐요.”

아제프의 재촉에 엘제이는 할 수 없이 손가락을 들었다.

무료한 여행길 속 색다른 상황에 다들 모르는 척 엘제이 쪽으로 흘긋 시선을 보냈다. 많은 사람의 주목에
엘제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색한 듯 멋쩍게 웃은 엘제이는 곧 그의 말대로 손가락으로 공을 살짝 두드렸다.

팡!

그저,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수준이었는데, 얼음뭉치는 그대로 잘게 부서졌다. 고운 입자가 흩어지더니 이내


작은 물방울이 공기를 가득 메웠다. 공기 중을 떠도는 작은 물방울에 햇살이 고였다.

햇살이 개성을 토해내며 물방울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작은 무지개가 핀 것이다.

팡, 터지는 감각에 놀라 움츠렸던 엘제이는 곧 환호하며 웃었다.

“예뻐요! 무지개? 아제프,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우연히, 발견한 건데 나쁘지 않죠? 소나기가 온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나 봐요.”

무지개는 긴 시간 동안 유지되지는 못했다. 엘제이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무지개를 아쉬워하는 대신, 쑥스러워


보이는 아제프의 손을 잡았다.

‘차가워.’

평소에도 워낙 체온이 낮은 편이었지만, 자질을 쓴 후에는 유독 차가웠다. 엘제이는 온기 하나 없는 창백한 손을


정성껏 주물렀다.

“무리하지 말라는데도 그러네요.”

엘제이가 가볍게 그를 타박했지만, 아제프는 즐거워 보였다.

이딴 자질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이런 쪽으로는 몇 번 써보지 않아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뭐든 곧잘 해내는 편이니 시간만 조금 있으면 더 화려하고 예쁜 걸 만들어줄
수도 있을 터였다.

아제프는 제 자질을 엘제이를 위해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별거 아닌데요, 뭘. 한 번 더 해볼까요? 마음에 들었어요?”

“물론, 예뻤지만…… 다음에요. 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까 더는 쓰지 말아요. 걱정되니까, 약속해줄래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제 몸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잘 알았다. 최근 들어서는 상처는 안 내는 것 같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이미 생긴 상처에는 관심이 없었다.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언제나…… 당신이 제일 걱정이에요.’


엘제이는 속말을 꿀꺽 삼키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얼른 잡아달라는 듯 흔들리는 하얀 손가락이 어여뻤다.
아제프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그럼요. 약속이에요.”

‘뭐, 오늘은 아닐 테니까 상관없겠지.’

아제프는 한 점의 그늘도 없이 해사하게 웃었다. 당당히 끄덕이는 고개에 엘제이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못한 듯,
다시 앞을 바라봤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푹 쉬는 거예요.”

“네. 오늘은, 푹 쉴게요.”

잠깐의 해프닝이 지나가자, 마을을 향해 달리는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제프는 빠르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눈을 나른하게 늘어트렸다.

아제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서신의 내용이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랐고, 그것이 그리 중요한 서신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엘제이의 반응에 주된 이유가 전환되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장난을 건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실제로
아제프가 종이를 장난스럽게 다룬 이후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졌다.

아제프를 잘 아는 몇몇 이들만 제외하고.

알체스테를 포함한 몇몇 이들이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제프는 여기서 할 말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앞만을 바라봤다. 잠시 그를 주목하던 시선이 바람처럼 흐트러져
사라졌다.

‘아무리 빨라도, 수도에는 새벽녘은 돼야 도착하겠군. 아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어.’

아제프는 죽은 루드비히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문장 보유자 따위가 몇이나 더 죽어 나가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쪽지를 읽은 뒤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이젠이 보낸 쪽지에는 황제의 행동이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황제를 감시할 생각을 하다니, 담이 크단 말이죠. 공작님.’

이 일은 아이젠 티아세가 아니면 알아낼 수 없는 일일 터였다. 긴 세월 동안 황제의 옆을 보필했던 그만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얼핏 보면 황제의 일상을 서술한 것 같지만, 묘하게 황제의 행동이 신경을 거슬렀다. 서신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 황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수도의 문장 보유자들이, 문장을 뽑히게 될 거라는 것을.

‘황제라는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제프의 눈에 얼핏, 작은 분노가 스쳤다.


제 뒤에 앉은 아제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리 없는 엘제이는 빨리 마을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엘제이는 빨리 마을에 도착해서 아제프를 쉬게 해주고픈 마음뿐이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앞만 주시하던 엘제이의 눈에 기쁨이 번졌다.

“어? 마을이 보이네요! 다행히, 꽤 큰 마을인가 봐요.”

엘제이의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날카롭게 치켜떴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아제프를 돌아본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살짝 붙잡으며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아제프도 엘제이에게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겠네요.”

“네! 일단 의원부터 만나고, 식사도 좀 하고, 낮잠도 좀 자요. 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제이는 저를 쉬게 하려고, 방으로 도망칠 준비가 만반이네요. 아주 멋져요.”

아제프가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엘제이를 칭찬했다.

‘칭찬하는, 건가? 놀리는 거 같은데?’

잘했다는 듯 부드럽게 머리를 도닥이는 손길이 편안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엘제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엘제이라고 해서 발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엘제이는 최근 들어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아제프의 얼굴만 보지 않으면 그가 거는 장난에 넘어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가, 이건 놀림을 받은 게 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엘제이는 한 발 늦게 반응했다.

“……저, 놀림 받은 거죠?”

“설마요?”

아제프는 무척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엘제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옷깃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엘제이는 능청스러운 억양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데구루루 구르며 또 조금 늦게 판단을 내렸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가슴을 손으로 콩콩 때렸다.

“못됐어, 정말!”

“아하하! 아니라니까요.”

아제프가 웃음을 터트리며 엘제이를 꽉 끌어안았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도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철렁한 엘제이가 또 아제프를 타박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잔소리에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햇살이 맑은 하늘 아래, 그의 웃음이 고였다.


웃고 떠드는 사이, 그들을 태운 말이 새로운 마을로 들어섰다.

***

마을로 들어서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여관을 잡는 거였다. 신분을 드러내서 좋을 건 없었기에 그들은


수행원 없이 행동했다.

방을 잡고 함께 올라온 네 사람은 양쪽으로 갈린 복도에서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나란히 비슷한 디자인의 열쇠를 들고서 흔한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어차피 몇 시간 뒤에 만날 것,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언니, 잘 지내야 해. 흑!”

엘리사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훌쩍이며 엘제이의 품에 안겼다.

아제프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간 것도 그쯤이었다. 아제프는 열쇠로 저 밉살스러운 입술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몇 시간뿐인데 유난 떨기는.’

다소 폭력적인 충동이 일었지만, 힘겹게 자제한 아제프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안
데려가고 뭐 하냐는 공격적인 눈빛에도, 곰처럼 둔한 사내는 한 번에 알아먹질 못했다.

“왜 그렇게 보지?”

“…….”

아제프는 말하기에도 입 아파,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행히 아제프의 행동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알체스테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사가 살금살금 언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엘리사는 아쉬운 듯 엘제이를 흘긋거리면서도 알체스테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언니, 나중에 봐!”

“푹 쉬어. 황자님 힘들게 하지 말고. 제발, 얌전히 쉬어.”

엘제이는 걱정 어린 눈으로 엘리사를 보다가 손을 살살 흔들었다.

둘둘 나눠지는 게 무척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직 미혼인 남녀 둘이 방을 쓰는 건 꽤 이상한 일인데,


엘제이도 엘리사도 별 위기의식은 못 느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 알체스테는 편했다. 알체스테가 끼고 나서는 엘리사는 셋이 아니라, 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제프의


머릿속에서 알체스테의 효율성이 상향조정되었다.

아제프는 가만히 둘이라는 숫자에 대해 생각했다.

“완벽하잖아?”
“네? 뭐가 완벽해요?”

아제프의 혼잣말에 엘제이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봤다. 엘제이가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지만, 의미심장한
웃음을 감춘 아제프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이만 들어가요.”

아제프의 손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는 열쇠가 무척 경쾌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아제프를 졸졸 따라간 엘제이는
하품을 하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

엘제이는 우선 방 안을 쭉 훑었다. 그녀는 딱히 가리는 게 없었지만, 아제프는 예민한 편이었다. 방 안의 상태가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는 않을지 꼼꼼히 살핀 그녀는 곧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제프도, 편히 쉴 수 있겠다.’

의사는 만나보고 왔으니 이제 재울 차례였다. 아제프를 쉬게 할 생각으로 신이 난 엘제이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방이 나쁘지 않네요. 생각보다 큰 마을이어서 다행이……. 아제프?”

뒤를 돌아보니 페로몬이 줄줄 흐르는 것 같은 아제프가 서 있었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남자가 생긋, 웃으며
엘제이를 바라봤다.

얼굴을 확 붉힌 엘제이가 뒤로 주춤 물러나며 아제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려고 애썼다.

그러지 말라는 듯, 살랑살랑 웃은 아제프가 눈꼬리를 화사하게 접었다.

“그것보다, 둘만 남았네요?”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4 화
104

아제프는 문고리를 손으로 꾹 눌러보며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의 허락 없이 이 방에 들어올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엘제이와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남자는 여러 번 문고리를 꾹
눌렀다.

덜컥, 덜컥, 덜컥.

연달아 세 번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손에 턱턱 걸리는 느낌에 아제프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제이.”

혀가 녹진하게 녹을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제프가 사르르 눈웃음치며 엘제이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벌을 꾀는 꽃처럼 유혹적으로 팔랑거리는 속눈썹에 위험신호가 번뜩, 떠올랐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멍하니
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이?”

아제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살랑거리며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에 엘제이의 마음도 크게 술렁였다.

한 번 홀리면 끝장이었다. 엘제이는 더는 저 얼굴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눈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제프는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엘제이를 느꼈다. 해사하게 풀어진 눈매가 또 한 번 곱게 접혔다.

“왜 물러나요?”

순진무구한 척 둥글게 뜬 눈매는 흡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엘제이는 푸른빛을 머금고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말해요.”

“여기서?”

“네.”

위치 선정이 안 좋았던 건지 엘제이의 허벅지가 침대에 덥석 걸렸다. 묘하게 미끄러운 바닥에 딱딱하게 긴장한
엘제이의 몸이 미끄러졌다. 엉겁결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은 엘제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다.

살짝 숙이던 고개는 턱을 들어 올리는 아제프의 손짓에 멈췄다.

“그래요. 그럼 여기서 말할게요.”

엘제이의 허벅지 옆으로 아제프의 무릎이 천천히 내려왔다. 바짝 다가온 얼굴에 침을 꿀꺽 삼킨 엘제이는 그에게
밀려 천천히 침대 위로 누웠다. 머리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눈이 질끈 감겼다. 달뜬 숨이 색색거리며 흘렀다.

엘제이는 눈과 입술을 질끈 다문 채 미동도 안 했다.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엘제이를 지켜보던 아제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죽은 척?’

엘제이는 흡사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처럼 몸을 납작 엎드리고 죽은 척했다. 이 먹이가 싱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맹수는 손가락으로 툭툭, 엘제이를 건드렸다.

아제프의 손이 엘제이의 흰 뺨을 미끄러지듯 덧그렸지만, 엘제이는 숨만 내쉴 뿐 꿈쩍도 안 했다.

모로 누운 아제프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엘제이를 관찰했다.

“이러면 나도 서운한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서글퍼지잖아. 제이.”

서운하다는 말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속눈썹이 팔랑, 열렸다. 엘제이는 바로 가까이에 보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확인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아니라 아제프가,”


“나? 내가 뭘?”

“아제프가, 위험해요!”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제프의 눈썹이 의아한 듯 위로 솟구쳤다. 이곳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를 위협할 만한 것은 없었다. 굳이 위험한
쪽을 따지자면 굶주린 그의 눈앞에서 죽은 척이나 해대는 엘제이 쪽이 더 위험했다.

눈을 가늘게 뜬 아제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엘제이를 관찰했다. 그의 시선이 붉게 달아오른 귀와 뺨을


질척하게 맴돌았다. 눈치 빠른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제프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아아- 제이가 저를 덮칠까 봐 위험하다는 건가요?”

“윽!”

엘제이가 짜부라진 신음을 내뱉으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하얀 이빨에 뭉개진 발음이 부정확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채근하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응? 나 덮치려고? 어떻게?”

어느새 엘제이의 몸을 칭칭 휘감은 팔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엘제이의 뒷목을 부드럽게 받친 손이


그녀의 얼굴을 끌어왔다.

어떻게 할 건지 말해달라고 귓가에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호흡이 팽팽 돌았다. 엘제이는 열기로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저릿한 가슴을 움켜잡았다. 손발 끝이 저절로 곱아들고 뱃속이 뜨거워졌다.

‘해로운, 사람…….’

아제프는 여러 의미로 유해한 사람이었다. 엘제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이불자락을 끌어당겼지만,
어쩐 일인지 잘 올라오지 않았다.

살짝 눈을 뜬 엘제이의 눈동자 위로 아제프가 가득 차올랐다.

아제프는 낑낑거리며 힘을 주는 하얀 손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아- 정말, 만족스러워.’

여기서 뭘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아제프는 정신적인 충족감을 느끼며 나른하게 웃었다.

엘제이의 손에서 휙 이불을 뺏은 아제프가 엘제이의 몸을 이불로 둥둥 감아 끌어안았다.

“으으…….”

엘제이는 부끄러웠는지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린 아제프가 엘제이의 뺨 위에
입을 맞췄다. 어린애가 하듯 친애만을 담은 부드러운 감촉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코끝을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새침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제이랑 낮잠이나 잘 생각이었는데, 제이는 엉큼한 생각 했어요? 그렇죠?”


“아, 아니에요.”

“그럼 왜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왜 위험해요?”

“그건, 그건…….”

엘제이는 한참 뜸을 들였다. 뭐라고 고민하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는데, 뜨거운 머리는 쉽게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몸이 뜨거워서 덮은 이불이 더웠다. 엘제이는 이불 속에서 슬그머니 팔을 빼내며 허물 벗듯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아제프는 눈으로 엘제이의 행동을 쫓다가 사르르 눈웃음쳤다.

“그것 봐. 할 말 없잖아.”

“더워서, 말 안 한 거예요.”

기껏 한다는 변명이 덥다는 말이었다. 아제프는 빨간 귀를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었다. 잔뜩 삼키면 배가 부를


터인데, 겁주고 싶지 않아 무척 아쉬웠다.

입술을 핥으며 포만감을 덧씌운 아제프가 한쪽 눈만 뜨고, 엘제이를 바라봤다.

“지금도 야한 생각 해서 더운 거죠? 아아- 결혼 전에는 안 되는데, 이 엉큼한 사람을 어쩌면 좋죠?”

“저도, 그런 짓 안 해요!”

“그런 짓? 그런 짓이 뭐예요? 네?”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눈이 아이의 것처럼 깨끗했다. 정말 모른다는 듯 뻔뻔한 표정에 엘제이는 숨을 곳을
잃었다.

“…….”

엘제이가 달아오른 얼굴로 눈만 질끈 감자, 아제프는 아쉬워하며 조금 물러났다. 괴롭히지 말아야지, 되뇌는데
자꾸 이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조금 반성하며 혀를 찼다.

아제프는 나른하게 잠기는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털어냈다.

“흠, 사실 침대에 오면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하고 오늘은 연습이나 해볼까요?”

담백한 목소리에 엘제이의 눈이 살짝 뜨였다. 그녀는 또 놀림당할까 싶어서 경계하다가, 아제프의 얼굴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연습이요?”

“음……. 제이의 허락이 필요한데, 허락해줄래요?”

“허락? 뭔데요?”

“일단 허락해주기 전에는 말 안 할 거예요.”


아제프는 드물게 고집을 부렸다. 그로서는 엘제이가 화내는 게 제일 무서웠다. 전에 반말하는 엘제이에게 깨물린
전적이 있는 아제프는 흘긋, 엘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궁금하네요. 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허락할게요. 이제 알려줘요.”

“그냥, 이런 거?”

아제프는 설명하는 대신 바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가 손바닥을 가볍게 펼치자 손 위에서 몽글몽글 맺힌 마나가
공기 중으로 확 퍼졌다.

엘제이는 별가루처럼 파랗게 허공을 떠도는 마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제프가 암막커튼까지 치고 돌아오니,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다.

파란 마나가 장난치듯 다가와 엘제이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조금 차가운 기운에 엘제이가 손끝을 움직이자
마나는 금세 엘제이의 손끝을 떠나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간질였다.

아제프는 감히, 무생물 주제에 엘제이의 몸을 훑는 마나를 언짢은 얼굴로 바라봤다. 가만히 생각을 이어가던
아제프가 홉뜬 눈으로 마나를 노려봤다.

‘내가 설마…… 무생물에게, 질투하는 건가? 고작, 저것에게?’

아제프는 찝찝해했지만, 마나는 그를 따르는 의지이기에 그가 좋아하는 걸 똑같이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예뻐요.”

엘제이가 마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표정을 푼 아제프가 못된 생각은 하지 않은 척,
선하게 웃었다.

“화 안 내니, 다행이에요.”

엘제이는 착한 아이 보듯 아제프를 바라봤다. 칭찬의 박수를 짝짝짝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 이렇게 착해졌을까?’

시원해진 공기를 따라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적당히 솔솔 부는 바람은 뜨겁게 달아오른 귀에 부딪혀 그녀를
식혀주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에 엘제이는 편안하게 웃었다.

“제가 자질 쓰지 말라고 해서, 허락받은 거예요?”

“네. 제이가 화내면 무서워요.”

“예쁘고 시원해서, 저야 좋은데…… 저렇게 해두면 힘들지는 않아요?”

“저 정도야 뭐.”

저건 원래 엘제이를 보호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기질이 그렇기에 찬 기운을 머금었지만, 원래는


엘제이를 지켜보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아제프는 반짝반짝 제법 예쁜 마나를 보며 엘제이의 손을 잡았다.

“체온도 많이 돌아왔죠? 의원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확실히 의원이 뭘 이런 상처로 찾아왔냐는 눈짓을 보내기는 했다. 엘제이는 신중한 얼굴로 그의 손을 꾹 잡아보고,
뺨에 대보며 체온을 쟀다.

아제프의 체온은 평소와 비슷했다. 확실히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음……. 그럼, 이렇게 잘까요? 사실, 별들 품에 감싸인 것 같아서 좋아요. 몸에 닿는 느낌도 시원하고요.”

“너무 많이 쐬면 추우니까 이불 잘 덮어요. 제가 적당할 때, 치울게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 끝까지 하얀 이불을 덮어주며 토닥였다. 얼굴은 시원한데 몸은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엘제이는 머리카락을 살랑, 간질이는 마나의 장난에 예쁘게 웃었다.

“아제프도 그만 자요. 오늘, 많이 피곤했죠?”

하얀 볼우물이 맺힌 뺨이 싱그러웠다. 그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아제프는 그리 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그녀의 속이 상하지 않을지 고민하던 아제프가 곧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되도록 꿈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아요.”

아제프는 졸린 듯 감기는 엘제이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부디, 좋은 꿈만 꾸기를.’

엘제이의 꿈속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아제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의 의지를 느꼈는지 마나가 잔잔한 울음을
토해내며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아제프도, 잘 자요.”

엘제이가 눈을 감은 채 작게 속삭였다. 그가 잘 쉬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눈이 감겼다. 몰랐는데, 자신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엘제이가 잠이 들고, 아제프도 금세 잠이 들었다.

편안하게 눈 감은 그들 주위를, 영롱한 빛을 흩뿌리는 마나가 감쌌다.

잠시 뒤, 누군가가 찾아올 때까지. 그들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들었다.

부디, 좋은 꿈 꾸기를.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5 화
105

콩콩.
조그만 손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에도 눈을 번쩍 뜬 아제프는 문을 두드리는 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제프의 얼굴이 오만상으로 일그러졌다.

나른하게 감았던 눈을 찌푸리며, 아제프는 침대 위에서 머리카락을 꽉 붙잡았다.

‘이대로 모른 척하면 돌아갈 확률이 얼마나 되지?’

아제프는 머리를 굴려봤지만, 저 집념 어린 여자는 쉽게 물러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이 정답이라는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콩콩.

“언니?”

이번에는 저 빌어먹을 목소리도 함께였다. 아제프는 신경증에 걸릴 것 같았다. 귓가를 웽웽 맴도는 목소리가
짜증스러워 아제프는 몸을 살금살금 일으켰다.

엘제이가 깨어나기 전에, 저 밉살맞은 여자를 돌려보내야 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주며
한숨을 삼켰다.

큰 보폭으로 소리 없이 걸어간 아제프가 문을 살짝 열었다.

“우리 언니는요?”

머리가 작은 엘리사는 조그만 문틈 사이로도 제 얼굴을 빼꼼 집어넣었다. 머리만 들어와 좌우로 방 안을 살피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아제프는 이대로 문을 꾹 누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아제프는 치미는 충동을 힘주어 꾹꾹 내리눌렀다.

저 목이 문틈에 끼여 꽥꽥거리면 즐거울 테지만, 엘제이가 깨어날 게 분명했다. 차마 엘제이의 동생에게


폭력적으로 굴 수 없는 아제프는 그저 문고리를 힘주어 잡았다.

“……제이 자니까 조용히 하세요. 무슨 일인데요?”

엘리사는 문을 열려고 용쓰다가, 꿈쩍도 안 하는 문에 얼굴을 짜증스레 찌푸렸다. 이 망할 남자보다 힘이 약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눈꼬리를 새침하게 올린 엘리사가 그를 공격적으로 바라봤다.

“문이나 좀 여는 게 어때요?”

“제가 왜요?”

“볼일은 내 쪽이다.”

한숨을 삼키며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알체스테가 끼어들었다. 엘리사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거슬리는데 사람이
둘로 늘어나자 아제프의 눈썹이 높게 치솟았다.

알체스테는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할 말이 있다는 무언의 종용에 아제프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알체스테에게 할 말이 있는 건 아제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체스테는 잘 쉬었는지


피부가 매끈거렸다. 아제프는 그런 알체스테를 아니꼽게 바라보다가 문을 열었다.

엘리사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저는 언니랑 이쪽에 있을게요. 여기서 씻고 갈 테니까, 당신도 저 방에서 씻든가 말든가.”

전자는 알체스테에게, 후자는 아제프에게 하는 말이었다. 목소리 톤부터 확 바뀌는 이중성에 아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하!”

쪼르르 달려가 이불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는 머리타래를 잡고 질질 끌고 나오고 싶었다.

엘리사는 어느새 엘제이에게 찰싹 달라붙어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다. 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늠름한 표정을 짓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저 망할 여자…….’

아제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놓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엘리사 대신 알체스테를 추궁하듯 바라봤지만, 저 남자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이 망할 남자.’

아제프는 둘이 똑같다고 생각하며 문을 살짝 닫았다. 문을 닫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불량스럽게 짚은


짝다리가 그의 불만을 드러냈다.

“티아세 양에게 뭐라고 안 하십니까?”

“나중에 할 거다.”

개방된 복도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알체스테의 방 쪽으로 걸어가던 아제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드디어 제정신이 든 건가?’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분명 옹호하는 말이 먼저일 줄 알았는데, 순순히 긍정하는 게


의심스러웠다.

“뭐라고요?”

“문틈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이따가 따로 말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달리 뭐라 대답하기도 목 아팠다. 아제프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온갖 욕설을 삼켰다. 두


남녀가 나란히 신경을 거스르는 재주가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간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열어주는 문을 따라 들어갔다. 내부 구조는 그의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소파에 앉은 알체스테가 앞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제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자리에 앉았다. 곧장 알체스테의 질문이 날아왔다.

“공작의 서신이던가?”

“네. 내용은 황제의 일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일상? 황제를 캘 생각을 하다니, 거침없군. 서신은 그래서 바로 없애버린 건가?”

“뭐, 그런 셈이죠.”

아제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분명 눈치가 없는 편인데도, 알체스테는 묘하게 사람 심리를 꿰뚫을 때가 있었다.
머쓱해진 아제프는 뒷덜미를 한 번 매만졌다.

“잘했다.”

알체스테가 칭찬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그 나름대로 아이젠을 걱정한 것이다. 부쩍 사람다워진
아제프가 알체스테는 꽤 기꺼웠다.

알체스테는 아제프 몰래 그의 속을 꿰뚫었다. 무뚝뚝한 금안에 이채가 스쳤다.

아제프를 좀 먹던 어둠은 갈수록 나아지고 있었다. 까만 그을음이 녹아 눅진하게 쏟아지던 내면에 환한 빛이


차올랐다. 마음을 밝히는 빛이 점점 커지는 게 보였다. 알체스테는 그게 남 일 같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달라졌을까? 리사.’

알체스테는 의식적으로 제 속을 보는 걸 꺼렸다. 겁쟁이 같은 행동일지 모르나 가만히 제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끝도 없이 침체되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아제프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알체스테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풀렸다.

아제프는 저를 보고 헤벌쭉 웃는 알체스테를 보며 진저리쳤다.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았다. 둔치 주제에 겨우 4


살 많은 것 가지고 매번 형인 척 구는 게 못마땅했다.

“그 눈빛, 묘하게 기분 나쁩니다만?”

아제프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알체스테의 귓가를 때렸다. 그만 웃고 정신 좀 차리라는 칼날이 알체스테의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무딘 남자는 그걸 못 느낀 듯했다.

알체스테는 왜 기분이 나쁠까, 고민하다가 눈만 두 번 끔뻑였다.

“그것보다,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경과 이렇게 지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는 말이네. 나는, 경과 대척점에 설 줄 알았다.”

“뭡니까, 그게. 지금이라도 싸우자는 겁니까?”


“그냥, 그랬다는 거다.”

아제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아제프는 끝내 제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지금이라고 살갑게 구는 건 전혀 아니었지만, 아제프는 자신을 동료 정도로는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알체스테는 엘리사를 대하듯 아제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고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였다.

아제프는 바짝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손을 마땅찮게 좇았다. 머리라도 쓰다듬었으면 콱, 얼려주려고 했는데


아쉬웠다.

“이야기나 마저 하시죠.”

“그래. 공작이 고작 황제의 일상에 대해 알려주려고 급히 서신을 보내지는 않았을 터. 무슨 의미가 따로


있던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셨지만, 공작님께서는 아마…… 주술사의 배후로 폐하를 의심하는 듯합니다.”

“역시, 그런가?”

알체스테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걸렸다. 저 말은 곧 루드비히가 알체스테를 추격하도록 유인한 게 그의


부친인, 황제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황제는 루드비히의 귓가에 그리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알체스테를 죽이면 황위를 잇는 건 루드비히라고.

부친이 형제의 골육상잔을 유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알체스테는 어쩐지 좀 비참해졌다.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미련은 끝이 없는 듯했다.

‘새삼, 상처받을 것 없는데 이상하군.’

아제프는 침통한 표정의 알체스테를 흘긋, 바라봤다. 분명 친아들일 텐데, 황제나 아제프의 아버지나 참
비정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마음에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알체스테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황자님도 저도 어느 정도는 생각했던 가설이지요. 서신을 읽을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그의 행동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자의 행동이었습니다.”

“루드비히를 내몬 것도, 폐하신가?”

“……루드비히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폐하십니다.”

“그 후부터는 간단한 추리군.”

“네.”

아제프는 굳이 제 입으로 읊어주지는 않았다. 황제가 수도에서 일어날 문장 사냥을 미리 알았다는 건, 그가


악마와 사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황제는 악마가 날뛰기를 바라는 듯했다. 혹은, 문장 사냥이 계속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알체스테 역시, 그걸 짐작했다.

“폐하는 악마와 원하는 게 같았고, 자신이 악마와 사통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이목을 끌 누군가가 필요했다.
겸사겸사 그들에게 치명적인 내 능력도 견제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루드비히는, 희생양인
건가?”

어쩌면 처음부터 루드비히를 이렇게 버리려고 데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황제가 총애하는 아들이 주술사가
됐다고 하면 이목이 훨씬 더 쏠릴 테니까.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전하께서 상경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입니다.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글쎄, 그는 예부터 생각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폐하께는 주술사의 흔적이 없는데, 어떻게 악마와 사통하는 거죠?”

악마는 인간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악마와 인간의 교류는 주는 것과 받는 게 있어야만 했다. 악마는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영혼을 훔쳤고, 그 흔적을 인간의 몸에 새겼다.

하지만, 황제의 피부는 깨끗했다. 그의 피부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면 아이젠이 놓칠 리 없었다.

황제는 주술사가 아니라는 말인데, 어떻게 악마와 교류를 이어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나도 그 부분이 이상했다. 내가 인간인 걸 보면 그도 인간인데. 어떻게 된 걸까?”

“하아……. 파고들수록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아제프는 머리를 붙잡으며 신음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데 짐작도 되지 않았다. 다만, 황제는
여러모로 위험했다. 그가 원하는 게 문장 사냥이라면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적이 원하는 걸 들어줄 필요는 없죠. 망쳐놔야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습니까?”

아제프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았다. 황제에게는 갚아줘야 할 일이 꽤 있었다. 이제, 갚아줄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알체스테는 악랄하게 웃는 아제프를 보며 입꼬리를 흐렸다. 그가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건 그거다.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왜…… 악마와 손을 잡았지?”

동기는 어느 때나 중요하다. 황제는 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같은 의문을 품은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6 화
106
알체스테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제프 또한 내심 그것이 이상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만,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악마와 손을 잡았을까.

아제프는 소파 위에 몸을 기대고 눈꼬리를 나른하게 늘어트렸다. 소파 팔걸이에 닿는 손가락이 툭툭 소리를 냈다.

“저도 하나 궁금하군요. 폐하께서는, 언제부터…… 이 모든 걸, 계획했을까.”

“언제부터?”

“저는 그게 아주 오래전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제프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는 16 년 전, 황제의 아이를 뱄다. 황제는 소피아와
그녀의 배 속 태아가 죽기를 원했다.

‘이유는 몰라도 제 새끼를 죽이려 한 걸 보면, 뼛속까지 미쳤던 거지. 혹시, 그때부터 이미…… 타락했던
건가?’

소피아 배 속의 태아는 아제프의 동복동생이자 알체스테의 이복동생이었다. 아제프는 복잡하게 꼬이는 관계를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알체스테는 역시,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눈 속에 담긴 복잡한 속내를 읽어내는 재주는 없었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아주


어릴 적을 생각했다.

“나는 천대받는 자식이었네. 폐하의 존안을 뵐 기회도 별로 없었으니 내막을 알 리 없지.”

“왜, 천대받았던 거죠? 변방으로 쫓겨날 당시, 전하는 겨우 5 살이었습니다.”

“그걸 내가 알겠나? 내 기억에 남은 그분의 눈은 늘, 나를 괴물 보듯 바라보았지.”

아제프는 노골적일 정도로 알체스테를 쭉 훑어봤지만, 알체스테는 크게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천대받은 게 한두


해도 아닌데,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건 곪은 상처라 알체스테의 입안이 쓰게 물들었다.

알체스테가 상처받든 말든 아제프는 제 생각을 이어나갔다.

“혹시, 아셨던 건 아닐까요? 전하의 자질이 빛(光)이라는 걸.”

“자질을? 내 자질은, 발현한 지 10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십 년 전에, 내가 자질을 가진 걸 알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자질은 선천적인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발현하지는 않았더라도 알 방법이 있는지는 또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악마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악마의 유래에 대해서는 무수한 가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지배적인 주장은 악마가 타락한 신이라는 이야기였다.

신력과 악마의 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나,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신전에서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고 가르치나, 신은 직접적으로 악마를 벌하지 않는다. 어쩌면 상하관계가 아니기에 못 하는 걸지도
몰랐다.
주술사가 비천한 취급을 받으면서 끝내 악마에게 넘어가는 것도, 악마의 힘이 그만큼 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제프는 제 생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알체스테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악마와의 협력을 위해, 나를 변방으로 내려보냈다. 가능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다만, 왜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
제 아이라서? 그럴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죽였다. 제 아이를.’

아제프가 혀를 콱, 깨물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게도 황제에게는 어린 자식이 없었다. 루드비히와 알체스테를
제외하고도 자식이 더 있었지만, 그들의 나이는 모두 이십대였다.

황제가 아직 40 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건 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설마, 그 후로도 계속 죽여 온 건가? 혹은, 태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든가.’

황제는 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니었다. 루드비히만이 황제 곁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고,


나머지는 다 내쳐졌다.

알체스테만큼 심한 대우를 받은 자식은 없었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은 자식도 딱히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팠다. 아제프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예나 지금이나 속내를 보이지 않는 분이시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군.”

“우선, 증거를 잡아야 합니다. 황제께서 악마와 사통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야, 우리는 명분을 세울 수
있습니다.”

“명분인가. 나와 그분은 결국, 이렇게 되는군.”

알체스테는 다소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알체스테는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전혀
오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도 정확히 무얼 원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제 몸에도 빛이 가득 차오르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황제에 대한 알체스테의 감정을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건 애증에 가까웠다. 증오만 있었으면 편했겠지만,
그래도 우러러보고 사랑을 갈구하는 심정이 마음 한편에 남아 그를 괴롭게 했다.

알체스테는 돌이라도 씹은 듯 입안이 깔끄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릎 사이로 들어간 그의 두 손은 미동도 안 했다. 아제프는 그 모습을 마땅찮게 바라보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새삼 고민하십니까? 먼저 버림을 받았는데, 지킬 의리가 있습니까? 가만 보면, 황자님은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저라면 안 그럴 겁니다.”
알체스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말은, 저라면 안 그럴 테니 당신도 그러지 말라는 아제프식 조언이었다. 둔한
눈치로도 쉽게 해석되는 아제프의 위로에 알체스테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경이 나를 위로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꽤 놀랍군.”

“전혀 안 놀라운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소름 돋습니다.”

“그런가? 미안하군.”

알체스테는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는 농담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고개를 팩
돌리며, 어정쩡한 감정을 털어냈다. 위로는 엘제이의 특기지, 그의 특기는 아니었다.

‘혼자서 털어내지 못한다면, 패배자일 뿐입니다.’

아제프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알체스테를 향한 믿음도 있었다. 알체스테는 저 정도로


주저앉을 남자는 아니었다.

이유를 알지 못해도 걸어가야 하는 게 알체스테의 길이었다. 그라면 능히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을 터였다.

아제프는 아직 해가 쨍쨍한 밖을 흘긋, 내다봤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가득 스며들었지만, 슬슬 출발하는 게


좋을 터였다.

“그것보다, 수도에 가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보세요. 도착하면, 새벽쯤 되지 않겠습니까?”

“엘리사는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군.”

“머리만 닿으면 자나 보죠? 우리 제이는…….”

아제프는 옳다구나 싶어 엘리사를 비꼬다가 말을 멈췄다. 가만 생각해보니 엘제이도 머리만 닿으면 잘 자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왔다 갔다 시끄럽게 굴어도 잘 깨어나지 않던 엘제이를 떠올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자매가 좀 닮은 것도 같았다.

알체스테는 자랑하듯 너스레를 떨다가 말을 멈추는 아제프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중요한 게 아니니 됐습니다. 그보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하시죠.”

“수도에 흩어져 있는 문장 보유자들도 지켜야 하고, 자매도 지켜야 하지. 둘로 나누는 게 좋겠군.”

“그럼 제가 티아세 家에 있겠습니다. 황자님이 수도를 지키는 게 좋겠어요.”

아제프는 당당히 선언했다. 황제의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건 질색이었지만, 그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아제프는 모처럼 알체스테의 쓸모를 발견했다.

아제프가 체스판 위의 말을 보듯 알체스테를 바라보며 선하게 웃었다.

어서 긍정하라는 무언에 압박에도 알체스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한참을 더 망설이다가 말발로는 상대도


되지 않을 아제프에게 덤벼들었다.
“왜지?”

“그게 보기에 좋으니까요. 황자님은 지금 덕망을 쌓아야 할 시기입니다. 문장 보유자를 지켜냈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 진영에 이롭지 않겠습니까? 황족이라면 마땅히 백성을 지켜야지요.”

“…….”

알체스테는 매끄러운 혀가 능숙하게 굴러가는 걸 떨떠름한 눈으로 보았다. 토씨 하나까지 다 맞는 말이어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섣불리 반박해봤자 더한 공격을 받을 게 뻔해서 말을 고르고 있는데, 2 차 폭격이 쏟아졌다.

“설마, 티아세 양과 함께 있고 싶다는 사감에 눈이 멀어 싫다는 말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수도를


정화하려면 어차피 황자님이 필요한 것을요.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 건 효율적인 처사가 아닙니다.”

아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알체스테를 쭉 훑었다. 자기도 사감 때문에 티아세로 가겠다고 한 주제에 입술은
매끄러웠다. 아제프는 제가 아니라 알체스테가 가야 하는 이유를 백 가지 정도는 더 들 수 있었다.

반박할 준비가 만반인 눈을 보자 알체스테는 싸울 힘을 급격하게 잃었다. 알체스테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알체스테도 엘리사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아.”

“좋은 일인데, 한숨 쉴 것 있나요? 그럼, 저 먼저 씻겠습니다.”

곰의 꿀단지를 뺏어 안은 여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만나러 갈 생각에 신이 났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흥얼흥얼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여간 경쾌한 게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뚱한 눈으로 아제프의 뒷모습을 몰래 노려봤다.

‘리사가 왜, 아제프를 얄미운 놈이라고 하는지 알겠군.’

곰은 여우에게서 인생의 쓴맛을 배웠다.

***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자리를 비운 사이, 티아세 자매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따뜻한 솜이불에 폭 둘러싸여
서로를 꼭 끌어안은 자매 사이로 적당히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하루 동안 여러 사건이 있었던 터라 자매는 꽤 피곤해 보였다. 색색, 내뱉는 마른 숨이 번갈아 가며 흘러나왔다.

똑똑.

평화로운 공기를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이 든 자매는 쉽게 깨지 않았다. 그녀들의


반응을 잠시 기다리던 이는 또 한 번 문을 두들겼다.

쾅쾅!

이번에는 다소 거친 소리였다. 그래도 언니라고 동생보다는 좀 나은 엘제이가 졸린 눈으로 일어났다.


“아제프?”

잠에서 깬 엘제이는 제일 먼저 아제프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엘제이는 제 몸에 늘어져 있는 하얀


팔을 보다가 어리숙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리사?”

“우음……. 케이크, 음냐.”

엘리사가 케이크 타령을 하며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쾅쾅쾅!

시끄럽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엘제이는 엘리사의 팔을 치우며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아제프와 엘리사가
언제 자리를 바꿨는지는 모를 일이나 일단, 문 두들기는 소리부터 어떻게 하고 싶었다.

엘제이가 일어나자 그녀 곁을 맴돌던 마나들도 엘제이를 졸졸 따라갔다. 엘제이가 가는 길로 푸른 은하수가 길게


펼쳐졌다.

쾅쾅!

“……?”

무심코 문고리를 돌리려던 엘제이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아제프라면,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릴 리 없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기도 할 테고, 그녀를 부르면 불렀지 이렇게 시끄럽게 문을 두들길 사람은 아니었다.

스산한 예감이 들었다.

하얀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7 화
107

엘제이는 반쯤 돌아간 문고리를 살살 놓았다.

탁-

조심히 놓는다고 놓았는데, 덜덜 떨리는 손끝이 실수한 모양이었다. 엘제이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움찔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엘제이의 불안함을 느낀 마나가 빛을 쭈뼛 세우며 윙윙 울었다.

똑똑.

문가의 기척이 음산하게 움직였다. 나긋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소름이 바짝 돋았다. 엘제이는 고개를 돌려 깊게
잠든 엘리사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에는 없는 척하는 게 제일 낫다고 배운 것 같은데 이미 틀렸을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고민하며 창가를
바라봤다. 소리를 질러 누군가를 부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단순한 오해일지도 몰라 고민되었다.

‘누구냐고 물어나 볼까?’

엘제이가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는데, 문고리가 거칠게 움직였다.

철컥! 철컥!

금방이라도 문고리를 끊어낼 듯 거칠게 돌아가는 손길에 엘제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곧이어 사람이 뛰는
소리가 다다다 울렸다.

퍽! 쿠당탕!

밖에서 한 차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한데, 금세
적막감이 찾아왔다.

“누구, 세요?”

엘제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물었다.

***

알체스테가 아제프의 뒤를 이어 씻고 나왔을 무렵, 아제프는 벌떡 일어났다. 모처럼 남겨둔 마나가 제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곧장 엘제이 방 근처의 기척을 더듬으며 사납게 웃었다.

“감히, 겁을 줘?”

“아제프, 무슨 일이지?”

짓씹어 뭉개진 발음에 머리를 말리건 알체스테가 멈칫했다. 그가 뒤늦게 엘리사의 안전을 확인할 때, 아제프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사태를 파악한 알체스테도 수건을 아무 곳에나 던지며 아제프를 따라 나갔다. 두 방이 꽤 먼 탓에 아제프는


열심히 달려야 했다.

자매가 있는 방 앞을 서성이던 로브 쓴 남자가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발견하고 몸을 뒤틀었다.

곧장 도망가려는 행태에 아제프가 자질로 그의 발을 묶었다. 남자가 쓰러지자마자 달려든 아제프가 목덜미를
가볍게 쳐 그를 기절시켰다.

‘질기기도 하지.’

로브를 가볍게 젖혀보니 역시나 주술사의 문양이 보였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행동에 입매가 사납게
뒤틀렸다.

아제프는 주술사의 머리채를 잡고 그를 질질 끌었다. 아제프는 복도 중간쯤 가서 알체스테를 돌아보며 무어라고


눈짓했다.

뒤처리하고 올 테니, 두 사람에게 잘 둘러대서 안심시키라는 의미였지만 알체스테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제프는
그가 알아듣는 말든 제 할 일을 하며 주술사를 끌고 나가는 데 집중했다.

‘어떻게 할까?’

알체스테는 어느새 홀로 남겨진 복도에서 고민했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참다못한 엘제이가 소리 내어 물었다.

“누구, 세요?”

“나다.”

“아…….”

엘제이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문고리를 힘주어 잡았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녹진하게 풀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엘제이는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무뚝뚝한 얼굴이 보였다. 엘제이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혼자 착각했나 보네.’

소리를 질렀으면 민망할 뻔했다. 요란스럽게 울리던 소리가 좀 수상했으나, 이미 경계를 푼 엘제이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이불뭉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들어가도 되나?”

“아! 그럼요. 들어오세요.”

알체스테는 저쪽 방에서 느껴지는 아제프의 행태에 한숨을 삼키며 느릿느릿 몸을 집어넣었다. 엘리사는 분명 저쪽
방에서도 쿨쿨, 잘 잔 것 같은데 여기서도 잘 자고 있었다.

알체스테는 자연스럽게 침대 가에 앉아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엘제이는 둘을 가만히 감상하며 커튼을 걷었다. 밖은 아직 환하긴 했으나 곧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자고 있는데, 깨울까요?”

“곧 출발할 테니, 일어나는 게 좋겠지.”

알체스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사를 깨울 마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알체스테의 손짓은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엘제이는 미끄러지듯 흐르는 알체스테의 손짓을 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아낌 받는 동생을 보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리사는 원래 밝았지만, 황자님을 만나고 나서 더 밝아진 것 같아요.”

아제프는 그 밝음이 지나쳐 경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엘제이 눈에는 보기 좋을 뿐이었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의 말이 기쁜지 입꼬리를 스르르 올렸다.


“그런가? 하지만, 나는 종종 리사에게 미안하다. 리사에게는 좀 더 자유로운 게 어울리는데 나와 함께라면 아마,
그러지 못할 테니까.”

“황궁에서의 삶이 적막할까 봐 걱정이세요?”

“황궁은, 쓸쓸한 곳이다. 그게 못내 미안하다.”

알체스테는 흐리게 웃었다. 무딘 금안 위로 떠오른 건 걱정과 죄책감이었다.

엘제이는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아제프도 그렇고, 알체스테도 그렇게 왜 저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엘제이는 감히 황자의 볼을 꼬집는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서 잠시 고민했다.

흐릿한 기억이긴 하지만, 엘리사는 황궁에서도 무척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준다. 황궁의 분위기에 짓눌리기 쉽지만,
엘리사는 아랑곳없이 지금의 밝음을 유지했던 것 같다.

“황궁을 쓸쓸한 곳이지만, 황자님이 곁에 있어주면 리사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밝은 만큼 마음이 굳은


아이니까요.”

“내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니, 때론 답답해 보이던데.”

“마음이 통하잖아요. 리사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눈치채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치가 빨랐어요.”

“어린 시절?”

“더 얘기해 드릴까요? 음……. 리사는 꽤 말썽쟁이였는데, 말썽을 부리고 눈치를 보며 눈웃음치는 게 참


예뻤어요.”

엘제이가 추억에 잠긴 듯 엘리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제프가 들었으면 어렸을 때부터 참 되바라졌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알체스테는 그러지 않았다.

일체스테는 나긋나긋 부드럽게 속삭이는 엘제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엘리사를 바라봤다.

알체스테는 엘리사가 저를 황자님, 황자님, 소리 높여 부르는 걸 좋아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빛처럼


밝았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저도, 그렇게 밝아질 것만 같았다.

눅눅한 먹구름도 가리지 못할 차오르는 빛.

아제프에게 엘제이가 봄이라면 알체스테에게 엘리사는 빛이었다.

알체스테는 엘리사에게 시선을 떼어내지 않으며 엘제이에게 사과를 건넸다.

“내가 믿음직하지 못해, 오늘 같은 일을 겪게 했다. 리사에게도, 너에게도 미안하다.”

“그게 황자님 탓은 아니니까요. 사과하실 필요도 없는걸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몸,


조심하세요.”

“그렇군. 고맙다.”

알체스테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암묵적으로 자매에게 이 일을 숨기고
싶어 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제이와 엘리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둘이서 속닥속닥 비밀을 나누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그녀들은 그들의 바람대로 모르는 척해주는 거였다.

엘제이는 기억이 흐려질 대로 흐려져 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종이에 기록해둔 게


있는데, 티아세 家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것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그나저나, 아제프는 어디 간 거지?’

분명 잠들 때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어딜 간 건지 훌쩍 사라졌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흔적을 더듬으며 방


곳곳을 살폈지만, 그런다고 없는 아제프가 나타날 리는 없었다.

알체스테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엘제이가 번잡스럽게 움직이니 대충 그녀의 생각을 파악했다.

“혹시, 아제프를 찾는 건가?”

“그를 보셨어요?”

“흠……. 아제프는 잠시 볼일이 있다고 나갔다. 네가 여기 있으니 금방 돌아오겠지.”

알체스테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니 꽤 공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곧 출발해야 할 텐데.’

알체스테는 걱정스럽게 생각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부드럽기만 했다. 엘리사를 깨우기는커녕 더 재울


손짓이었다.

엘제이는 쉽게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엘리사를 흘긋, 바라봤다가 제 몸을 내려다봤다. 아까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좀 찝찝했다.

“그럼 저는 먼저 좀 씻고 있을게요.”

“그동안 리사를 깨워놓겠다.”

엘제이는 여전히 케이크를 찾는 동생을 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엘제이가 욕실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쇠로 문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엘리사를 재우듯
다독이던 알체스테는 흘긋, 문 쪽을 바라봤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 아제프는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엘제이가 아니라 알체스테라는 것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제프는 곧장 방 안 곳곳을 살피며 엘제이를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보아
씻는 중인 것 같았다.

‘씻는 중이란 말이지.’

아제프가 눈꼬리를 접으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엘제이가 나오기 전 퇴치해야 하는 벌레가 두 마리
있었다.

아제프는 우선, 잠든 엘리사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알체스테 곁으로 다가갔다.

“다 한 건가? 어떻게 했지?”

“뭐, 쉽게 자백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루드비히가 죽었는데, 또 주술사가 왔다. 우리가 이 여관에 머문 건 순전히 우연인데, 이토록 빨리 알아냈다는
건 역시, 간자가 있는 거겠지.”

“시스라인 남매가 데려온 병사가 한둘은 아니니, 솎아내기는 힘들 테고. 그냥 전면전입니다. 빨리 수도로
돌아가는 게 좋겠지요.”

“그렇군.”

알체스테는 고개만 끄덕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제프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는데도 쿨쿨 숨만 내쉬는
엘리사를 짜증스럽게 노려봤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워 눈을 뜰 법도 한데, 어떤 의미로는 참 강적이었다.

“안 깨우십니까?”

“깨울 거다.”

이번에도 말뿐이었다. 아제프는 눈꼬리를 화사하게 접으며 협박하듯 말했다.

“제가 깨우기 전에, 곱게 일으키는 게 좋을 겁니다.”

“……리사, 일어나라.”

“우음…….”

“이건 뭐, 누가 보면 벌써 당한 줄 알겠습니다?”

아제프는 푸푸- 숨만 내쉴 뿐 끄떡도 안 하는 엘리사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손에서 투명한 유리병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게 뭐지?”

“일종의 전리품이랄까요?”

아제프는, 무언가 얻어낸 게 있는 듯 꽤나 상쾌한 얼굴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8 화
108

‘전리품?’

알체스테가 눈을 가늘게 뜨고 투명한 유리병을 살폈다. 투병한 유리병에 갇힌 노란 액체가 그의 손을 따라


출렁출렁 흔들렸다.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꽉 밀봉된 유리병은 빛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아나이샤의 뿌리로 만든 마비독인가?”

“네.”

아제프는 싱긋 웃으며 병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또록또록 구르는 유리병의 촉감이 피부에 착착 감겼다.
건진 게 없는 건 아니어서 아제프의 입술은 호선을 길게 그렸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공작이 봤으면 길길이 날뛸 터인데.”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걸 역으로 이용하면 어떨까요?”

아제프는 여전히 꿈나라에 빠져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엘리사를 가리켰다. 아제프의 생각은 단순했다.
마비독을 먹은 척해서 주술사의 배후를 꼬여내자는 의미였다.

“역으로 이용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굳이 아나이샤를 꺼내든 건 달리 얻어내고 싶은 게 있다는 거니까,


소문이 돌면 먼저 찾아오겠지.”

“네. 저들 입에서 쉬이 배후를 밝혀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우리 쪽에서 구덩이를 파는 겁니다. 홀랑


넘어온다면, 자빠트릴 수 있도록.”

주술사에게 아무리 캐물어도 그들은 쉽게 답을 내뱉지 않는다. 걸릴 위험이 큰 만큼 그들을 보내기 전에 세뇌를
했거나 배후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명확한 증거를 잡으려면, 배후를 끌어낼 미끼를 던져야 했다. 황제는 신중하고 냉철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이미 한 번 성공했던 방법이니까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놓을지도 몰랐다.

알체스테는 엘리사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그럼 자매들이 마비된 것처럼 행동해야 할 텐데, 힘들어하지 않겠나? 한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고된
일인데.”

“굳이 둘일 필요 있습니까? 하나면 되지요.”

아제프가 노골적으로 엘리사를 바라봤다. 가만히 쿨쿨 자는 건 엘리사가 가장 잘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만으로도 이 임무에 적합하다.

알체스테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엘리사를 살짝 바라봤다가 그녀를 위해 나름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왜 그걸 리사가 해야 하나? 사람은 둘인데.”

“그럼 번갈아가며 합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티아세 양도 있지 않나.”

“지금 누워 있는 게 누굽니까? 보세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옆에서 이렇게 떠들어대는데 미동도 안 합니다. 제
생각엔 엘리사 양이 적격이에요.”

아제프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으려면 한 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방 안에는 계속 갇혀


있어야 할 터였다. 사사건건 방해되는 엘리사가 갇혀 있으면 여러모로 좋은 일이라 아제프는 번견처럼 눈을
희번덕였다.

물러날 생각 없으니까, 포기해- 홉뜬 눈이 그렇게 했다.

알체스테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제프 때문에 꽤 당황했다.

‘리사에게, 계속 마비된 척해야 한다고 말하라고?’

알체스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쉽게 꼬리를 말면 안 된다. 엘리사는 방 안에 갇히는 걸 답답하게 여길 게


틀림없었다.

연인을 위해 불타는 눈이 지지 않고 아제프를 바라봤다.

번뜩이는 금안은, 자신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며 제 의견을 피력했다.

아제프는 밀어붙이기를 그만두고 알체스테를 살살 꾀기로 했다.

“황자님이 병간호를 핑계로 자주 들르시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한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지요. 사람들의 눈에


들키지 않을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리사는 활동적인 사람이다. 방 안에 가만히 있는 것 자체를 갑갑해 해.”

“좋네요. 이번 기회에 좀 얌전해져보라고 하세요.”

“싫다.”

알체스테는 생각보다 강경했다. 아제프는 나름 필사적으로 항변 중인 알체스테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좋습니다. 그럼 내기를 하는 거예요. 엘리사 양이 이 연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겁니다.”

“내기? 그걸 왜 리사만 하나?”

“제이는 일찍 일어나 씻고 준비하는데, 엘리사 양은 늘어져라 잔 대가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엘리사가 게으름을 피우는 게 맞았기에, 알체스테는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했다. 알체스테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지자, 아제프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들의 내기는 이랬다. 엘제이가 나올 때까지, 엘리사 옆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사이 엘리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제프의 승리였고, 반대라면 알체스테의 승리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죠.”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지켈리온은 주술사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지켈리온은 악마와 관계된 자다.


그가 안다면, 통하지 않을 거다.”

“눈알을 뽑아봤습니다. 그때와 반응이 달랐어요. 모든 주술사의 눈을 한 번에 감시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주술사가 한둘도 아니니까요.”

“그렇군.”
“주술사는 마비독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후 붙잡혔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고마울 텐데요.”

“하지만, 아나이샤 뿌리는 꽤 의외로군. 폐하도 루드비히와 같은 생각을 하신 건가? 괜히 공작의 반감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알체스테는 과거의 냉정했던 부황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통했다고 두 번씩이나 같은 방법을 쓰는
건 루드비히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믿었는데 뜻밖이었다.

아이젠이 들으면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아나이샤 뿌리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그 약을 끔찍해 했다. 또 제
아이들에게 쓰려 했다는 걸 알면, 묻어뒀던 과거의 분노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공작님이 이성을 잃길 바라는 고도의 수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식하게 덮치는 방법이라니,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으니까요.”

“들킬 확률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 나는 어떻게든 우리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떻지?”

“그분의 속내야 본인이 아니면 정확히 모르는 거지만, 제 생각엔…… 초조하신 게 아닐까요?”

“초조하다고? 그 사람이?”

알체스테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그 정도로 인간적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5 살
이후 부황을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어릴 때 느꼈던 질척한 기운은 아직 선연했다.

아제프는 고개를 흔드는 알체스테의 눈을 단호하게 마주봤다. 알체스테는 부황의 그림자에 눌려 있다. 의식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거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세요? 전하께서 그렇게 믿고 싶으신 게 아니고요? 그렇게 믿는다고 차갑게 버려진 게
없던 일이 됩니까? 정당한 일이 됩니까?”

“……내가 그러고 있나?”

“네. 겁쟁이처럼 굴고 계세요.”

“하아- 미안하다.”

알체스테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몸을 수그렸다. 밑으로 푹 가라앉은 까만 머리가 눅눅하게 젖어있었다.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 위로 젖은 물방울이 뚝뚝, 느리게 떨어졌다.

알체스테는 멍하니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제프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황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는 거였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미련이 발목을 붙잡고 질질 늘어졌다.

황제가 초조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으면, 그가 완벽하게 냉정하지 못하다는 걸 믿으면, 제 자신이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알체스테는 변방으로 떠나기 마지막 날 밤, 황제를 알현했다. 5 살의 나이로도 어린아이 같지 않게 차분했던


알체스테는 그날만큼은 부황의 발아래에 매달려 울었다.
[왜 저를 내치십니까? 저는 부황의 자식입니다!]

[널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너는 그저 역겨운 토사물에 지나지 않아. 너 같은 거, 태어나게 하는


게 아니었다.]

황제는 발아래에 매달린 어린 자식을 냉정히 내팽개치며 뒤를 돌았다. 그의 발에 치여 배를 부여잡던 알체스테가


벌떡 일어나 황제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 죽으라고 보내는 거니, 살아서 황궁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황제는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알체스테의 손을 내쳤다. 달빛이 서렸던 귀기 어린 얼굴은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겹다고 할 때도, 끔찍하다고 말할 때도, 그는 늘 같은 표정이었다. 알체스테와 똑같은 금안만이 끔찍하다는 듯


희번득 번들거릴 뿐이었다.

5 살의 나이에 그 일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알체스테는 아직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때의 일을 완전히


기억했다.

황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그때의 제가 너무 비참하고 서글퍼졌다. 황제는 울며 애원하는


저에게, 단 한 번도 흔들려준 적이 없으니까.

알체스테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얀 러그가 흐려져 물 자국이 남았다. 알체스테는 저 멀리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아제프는 답답한 듯 창밖을 바라보다가 욕실에서 수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알체스테의 머리 위에 수건


하나를 턱, 내려놓는 손길은 그리 거칠지 않았다.

“답답하네요. 그런 걸 왜 생각합니까?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떠올리면 기분만 더러워지는데 굳이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까? 소도 아니고.”

“그런가?”

알체스테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묵묵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러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방 안은 따스했고 사람의 온기가 돌았다. 엘리사가 있었고, 아제프가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제프는 엘리사가 깨지 않았는지, 힐긋 살펴보며 알체스테를 향해 톡 쏘아붙였다.

“저라면 버려지기 전에 먼저 버리겠습니다.”

“…….”

알체스테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답답해. 내가 왜 답답해하는 거지? 내 일도 아닌데?’

아제프는 화딱지가 눌어붙는 걸 느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엘리사와 알체스테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가운 호수에 처박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내쫓는 대신, 줄곧 해왔던 생각을 말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폐하께서는 전하를 싫어하신 게 아니라…… 무서워했던 게 아닐까요?”

“무서워한다고? 나를?”

“네. 그래서 눈앞에서 쫓아내셨고, 황자님이 돌아오는 게 초조하신 겁니다.”

“…….”

알체스테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꽤 흘렀고 드디어 엘제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제프는 달칵, 열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씩 웃었다.

처음에 엘제이가 나오기 전에 그들을 내보내려던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제프는 당분간 엘리사의
방해에서 해방이라는 걸 떠올리며 산뜻한 얼굴이 됐다.

“제 승리입니다.”

아제프는 내기에서 이긴 게 몹시 기뻤는지, 아니면 엘제이가 나와서 기뻤는지 살랑살랑 눈웃음치며 엘제이에게로
걸어갔다.

알체스테의 망막에 있지도 않을 여우 꼬리가 비쳤다. 알체스테는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의 환영을
보며 잇새를 꽉 물었다.

“……얄미운 놈.”

알체스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제프를 욕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09 화
109

아제프는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이들을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그럼, 시작하죠.”

뭐라고 반박할 시간도 없었다. 그동안 늦장 부린 게 더해져서 정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아제프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 이들은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아제프 일행은 잠시 뒤, 마차에 올라탔다.

엘리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축 늘어져서 알체스테의 품에 안겼고,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공녀님은 아직도 주무시나?”

“글쎄요. 어디 아프신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황자님 표정이 안 좋은 걸 봐서는, 아프신 게


아닐까요?”
“하긴, 충격 받으셨을 테니.”

“…….”

알체스테는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말이 없었고, 그건 엘제이와 아제프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시작된 마차 여행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다. 주술사들은 간간이 찾아와 마차를 멈춰 세웠고, 그때마다 전투가
벌어졌다.

말은 핏물이 고인 바닥을 밟으며 수도로 향했고, 새벽달이 떠올라서야 일행은 수도에 도착했다.

새빨갛게 변한 말발굽이 티아세 家의 정문을 넘었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티아세 家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아이젠은 정문 앞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홉뜬 눈에 붉은 기가 가라앉아 형형한 안광만이 짐승의 것처럼 빛났다.

다그닥다그닥-

훈련을 잘 받은 말들이, 정적을 깨고 티아세 家의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바로 앞에 멈춰선 마차가 끼릭,


소음을 냈다.

마차가 열리고, 알체스테가 내렸다. 그의 품에는 엘리사가 축 늘어져 안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움직일 때마다
까딱까딱 흔들렸고, 팔다리는 힘없이 흔들렸다.

맥을 못 추는 딸의 모습에 아이젠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달려갔다.

“리사.”

아이젠이 엘리사의 뺨을 만지며 떨리는 음색으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을 많이 맞아 창백해진 얼굴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엘리사는 그저 눈만 끔뻑이며 아이젠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가?”

분홍색 눈에 말간 빛이 번졌다. 엘리사는 아이젠을 힐끔 보다가, 힘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대답도 없이 눈만 감는 모습에 아이젠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꺽꺽거리더니, 가슴을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죄송합니다.”

아제프는 휘청거리는 아이젠을 부축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제프의 팔 위로 아이젠의 손가락이 박혔다. 아제프의
팔을 꾹 잡은 아이젠의 턱 끝이 달달 떨렸다.

“믿으라고! 괜찮을 거라고! 내게 그렇게 맹세하지 않았나?”

부릅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줄줄 흘렀다. 주름진 눈가를 가로지른 눈물이 얼굴에 송송히 고여 애처롭게
빛났다.

“죄송합니다.”

아제프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이젠은 고개를 돌려 알체스테를 쏘아봤다. 눈도 채 깜빡이지 않아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아이젠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듯 알체스테의 멱살을 잡아챘다.

“아버지!”

아이젠의 과격한 행동에 놀란 엘제이가 진정하라는 듯 아이젠의 팔뚝을 잡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체스테를 닦달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겠다고! 내 아이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고! 그 잘난 입으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

서늘하게 내리깐 금안은 어떤 빛도 토해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이젠의 화를 감내하며 저항하지 않았다. 대답


없는 그의 무뚝뚝한 입매는 독에 당한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알체스테는 아이젠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푹 숙인 눈 위로 까만 머리카락이 내려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아이젠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한 번도 감지 않았다. 희번덕이는 눈은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알체스테를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툭 불거진 눈에 고인 눈물이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약속의 결과가 이겁니까? 황자님은 이리 멀쩡하신데, 왜! 제 아이만 이 모양입니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대체 어디서 뭘 하셨어요!”

“아버지, 진정하세요.”

아이젠은 저를 말리는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제 뒤로 밀어 넣었다. 선을 긋듯 아제프를 한 번 노려보고


알체스테를 한 번 노려본 아이젠은 곧 강탈하듯 엘리사를 빼앗아 안았다.

아이젠의 거친 손놀림에 엘리사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공작!”

알체스테가 처음으로 입술을 떼어냈다. 그는 요동치는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보며 다시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이젠은 그를 노려보며 등을 돌렸다.

“다신 믿지 않을 겁니다! 다신, 제 아이들을 맡기지 않을 겁니다!”

엘리사를 안아 들고 들어가는 아이젠의 등 뒤를, 꽤 많은 눈동자들이 뒤쫓았다.

***

베아르시 제국의 황궁.

찬란한 금빛으로 휘감긴 방 안에 어둠이 들어찼다. 의자에 앉아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은 남자의 등 뒤로 새하얀


보름달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는 베아르시의 황제, 에이든이었다.

에이든은 불을 켤 생각도 없는 듯 숨만 색색 내쉬며 앉아 있었다. 언뜻 고요해 보였지만, 그의 숨결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는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는지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쾅!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몸을 늘어트렸던 남자가 에이든의 반응을 살피며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치듯 휘잉-
울리는 소리에 에이든의 턱이 툭, 불거져 나왔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버릇이었다. 남자는 붉게 흐려진 금안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느긋하게 와인 잔을
돌렸다.

“그대, 너무 흥분하지 말게.”

“흥분하지 말라고? 당신은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지?”

황제는 오만했다. 필요하기 때문에 참아주고는 있지만, 별로 마음에 드는 행태는 아니었다. 남자는 저를 장기
말처럼 부리려는 황제를 하듯 바라봤다.

“그걸 왜 나한테 따지나? 제 아들을 불러들인 놈이 누군데.”

“…….”

에이든은 대답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디스의 우승자인 란델 후작이 그런
소원을 빌 줄은 몰랐다.

황제의 체면이 있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서 거절한단 말인가. 그때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고, 에이든은 늘 그렇듯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다.

에이든은 그렇게 제 잘못을 남에게 떠넘겼다.

에이든은 일이 이토록 망가진 건 다 저 남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나태하게 굴 것이 아니라 직접


내려갔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협력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입매를 꾹 다물고 서늘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에이든의 마음을 읽은 듯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비틀었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 변명이지. 그저 하나라도 놓기 싫은 것뿐이면서.”

“닥쳐!”

에이든은 드물게도 언성을 높였다. 남자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황제가 익숙한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붉은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죽일 생각은 있었나? 막을 생각은? 내가 보기에는, 여러모로 의지가 부족한 것 같거든.”

종잇조각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바스락, 울렸다. 알체스테가 돌아왔고, 보고를 올리기 위해 황궁으로 입궁한다는
전언이었다.
나름 좋은 소식도 하나쯤 있었는데, 지금의 에이든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당신은 어떻지? 이십 년 가까이 그 애 곁에 있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남자는 와인 잔을 탁, 내려놓았다. 잔 안에 고인 와인이 붉은빛을 머금고 흔들렸다. 남자는 입안을 감도는


감미로운 향을 핥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너와 나는 계약에 묶이지 않았지. 내가 네 바람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욕심만 많아서는, 추잡한 것.”

“당신이 네게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나? 세상에 가장 더럽고 타락한 것이 있다면, 당신일 거다! 지켈리온!”

지켈리온은 동요하지 않았다. 에이든의 말이 맞았다. 지켈리온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 가장 추악한


존재였다. 오직 더러운 탐욕밖에 남지 않은 허울뿐인 존재.

하지만, 지켈리온은 허울뿐인 이 자리가 나쁘지 않았다. 욕심껏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그대는 욕심이 너무 많아. 인간 중에서도 그대처럼


탐욕적인 놈은 드물 거다.”

“하아. 당신과 얘기하면 머리만 아프다. 그만 나가.”

에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 위에 몸을 기댔다. 꼭 이런 밤, 그 아이를 보냈다. 이십 년간 안 보고


살던 낯짝을 다시 보려니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장성해버린 그 아이를 본다면, 제 손으로 목을 조르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소파가 끼릭, 신음을 토해냈다. 지켈리온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냈다.

“권력, 명예, 칭송, 역사에 기록될 단 한 줄까지. 너는 무엇 하나 양보하기 싫지? 욕심이 많으니까.”

“그게 뭐가 잘못된 거지? 인간은 원래 그렇다.”

“네가 성군으로 기록되길 바라잖아. 속은 썩어 문드러진 주제에. 추악하고 더러운 놈.”

까드득- 잇새가 꽉 다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보다 더
추악한 놈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추악하면 너는 어떻지?”

“나야 최고로 추악하지. 나에게는 운명의 소리가 들린다. 네 아들은 언제나 네게 달려오고 있지.”

지켈리온은, 아니, 악마는, 처음부터 둘을 노렸다.

아제프의 영혼도, 알체스테의 영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애피타이저였다. 알체스테도 아제프도 둘 모두, 살아 있는 쪽이 좋았다. 그편이 더 즐거웠다.

‘살아남아줘서, 맛있게 무르익어줘서, 고마울 정도다!’

지켈리온은 때를 기다렸다. 동굴에 갇혀 힘을 비축했다. 봉인을 풀려날 순간을 기다렸다.


가장 고귀하고 달콤한 두 영혼이 뿌리 끝까지 타락하는 모습을 볼 최상의 순간! 최고의 쾌락을!

지켈리온은 씩 웃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신경증으로 도배된 남자였다. 무뚝뚝한 얼굴을 가장하지만, 그 안에 내재한 찌든 때가 보였다. 곪은


상처를 후벼 팠는데, 꽤 오래 버티는 모습이 가상할 정도였다.

아비의 손에 죽으면 타락할 것 같아서 공을 들였는데, 황제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주저했다. 미쳐버린 남자는
알체스테를 변방으로 내쫓고 그를 향한 살인 충동이 일 때마다 태어나지도 못한 제 자식을 죽이며 충동을 억눌렀다.

‘미친 주제에.’

지켈리온의 손 안에 뭉글뭉글한 기운이 번졌다. 까만 기운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황제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아버지!]

귓가에 울리는 환청에 에이든이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솜털로 뒤덮인 조막만 한 손이 발아래 매달렸다. 더러웠다.
역겨웠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그 아이가……. 그 아이가,”

“그러게, 내가 거듭 말했잖아.”

지켈리온은 힘겹게 속삭이는 에이든의 말을 끊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친우에게 하듯 매끄럽게 올라간 팔이


천천히 휘어졌다.

지켈리온의 손이 에이든의 목 위에서 뱀의 똬리처럼 천천히 휘감겼다. 커다란 손바닥이 에이든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는 에이든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죄악을 속삭였다.

“죽이라고, 계속…… 말했잖아.”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0 화
110

지켈리온의 속삭임에 에이든의 동공이 힘없이 풀어졌다.

매일 밤, 그 아이의 방으로 찾아가 여린 목덜미를 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상상을 했다.

그날 밤, 아이의 배를 발로 걷어차 떨어트리는 게 아니라, 내팽겨진 아이의 몸에 올라타 그 목을 분지르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어.”

“그래. 맞아. 그대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하나둘 죽였잖아. 제일 멍청한 루드비히만 빼고, 다
황궁에서 내쫓았잖아. 네 자리를 위협할 만한 것은 남겨두지 않았잖아.”

지켈리온은 봉인을 푼 뒤 제법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처럼 부드럽게 풀린 안면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달콤함을 속삭였다.

알체스테를 죽이라고 세뇌했더니, 바보같이 다른 자식을 죽였다. 처음에는 열불이 나고 황당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달콤한 과실이 무르익어 지척에 도달했다. 그들의 문장을 뽑으면, 그들을 타락시키면, 지금껏 맛보지 못한
거대한 쾌락에 밀려 녹아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지켈리온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그 사이, 잠시 정신을 차린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죽여? 죽인다고? 그 아이를?”

지켈리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매번 이 모양이었다. 그가 에이든의 머리를 향해 짜증스럽게 눈짓하자 새까만


기운이 에이든의 눈과 귀, 코로 들어갔다.

기백이 넘치던 중년의 얼굴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불러줬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의 아이가 아버지라고 불러줬는데, 구역질이 났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었다. 낳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아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두는 게 아니었는데.

‘낳은 게 아니었다. 태어나게 하는 게 아니었어.’

늘 미적거리고 망설였다. 에이든은 알체스테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숨통을 끊는 짓만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살기를 담은 눈으로 아이를 볼 때마다, 알체스테의 등 뒤에 달라붙은 그녀의 그림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실비아.”

“그래. 네가 그 여자를 죽였잖아. 문장이 싫다고 했잖아.”

목덜미를 타고 화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에이든은 입가를 가리고 휘청거렸다. 오만한 무릎이 땅에 짓눌렸다.

실비아. 그녀는 알체스테의 모친이자, 에이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였다.

실비아는 제 소꿉친구를 사랑했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온 다갈색 머리카락의 다정한 청년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에이든의 삶은 늘 완벽했다. 모든 건 그의 뜻대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였다. 딱딱딱, 맞물리는 질서 속에 그는 늘


완벽함을 추구했다. 오직 실비아만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만이 그의 손아귀에 휘둘려주지 않았다.

“사랑했는데, 그년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

텅 빈 목소리가 까드득 잇새를 비집고 흘렀다. 지켈리온은 친히 무릎을 굽혀 에이든의 귀에 속살거렸다.


모든 건, 문장 때문이라고.

“그래. 빌어먹을 문장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 문장이 모든 걸 망친 거야. 문장이 없었다면 널, 사랑했을 텐데.”

실비아 베아르시는 문장 보유자였다.

에이든은 강탈하듯 실비아를 뺏어왔다. 막 그녀를 황궁에 데려다 놨을 때, 실비아의 배에는 은색 문장이 돋아났다.

문장의 주인은 실비아의 소꿉친구였다.

에이든은 실비아의 반려를 죽이고, 그녀에게 제 아이를 배게 했다. 하얀 배가 둥글게 부풀수록 문장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실비아는 알체스테를 낳고도 계속 시름시름 앓았다. 에이든은 텅 빈 얼굴로 하루를 보내는 실비아를 감시했다.
그녀 스스로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가슴 한 군데가 휑하니 뚫린 것 같았다. 에이든은 허한 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여자 하나에 휘둘리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년이 나쁜 거야.”

“그래. 처음부터 너를 사랑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널 사랑하지 않았잖아.”

지켈리온의 입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덧그렸다. 추악한 남자의 내면에서 찌든 때가 눅눅하게 떨어졌다. 지켈리온은
새까만 진액으로 마음이 뒤덮이는 걸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남자의 영혼은 쓰레기였다. 가지고 싶지도 않은 더러운 것.

지켈리온은 처음부터 타락한 자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깨끗하고 성결한 영혼이 더럽게 물드는 게 좋았다.

“그래. 그년이 나빴어.”

“그래서 죽였지? 네 손으로 죽였잖아? 버둥거리는 여자의 몸에 올라타 하얀 목을 짓눌렀겠지. 숨이 막혀


꺽꺽거리며 네 손에 매달렸지? 죽이고 나니 속이 시원하지 않았나? 기뻤잖아. 드디어,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렇게 생각했잖아.”

너는 처음부터, 그저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는 실비아를 참을 수 없었던 것뿐이잖아-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갈고리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욱!”

에이든이 밀려오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수그렸다. 개처럼 엎드린 남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날 밤. 새하얀 보름달이 오늘처럼 차오른 밤. 에이든은 만취해 있었다.

실비아를 찾아가 사랑을 속삭였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았다. 에이든은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던 여자의 목을 짓누르고 하얀 목덜미를 손수 분질렀다.

실비아의 공허한 눈이 마지막으로 더듬던 건 에이든이 아니었다. 알체스테였다. 그녀는 에이든은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듯 강보에 감싸인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알, 체……스테.]

으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그 미약한 한 줄기 바람은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붙잡혀 뚝, 끊어졌다.

실비아는 마지막까지 에이든을 바라지 않았다.

그 후, 에이든은 실비아를 닮은 여자를 찾아다녔다. 그의 주위에는 비슷한 인상의 여인들이 쌓여갔다. 에이든은
여자를 탐하고 또 탐했다. 갈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실비아의 마지막 흔적은 알체스테뿐이었다. 알체스테를 죽이면,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귀신처럼 들러붙은
여자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죽여. 죽여. 죽여.’

내면의 자아가 그렇게 속삭였다. 에이든은 어린 알체스테의 목을 분지르는 상상을 했다.

그날 밤, 느꼈던 목이 뚝 끊기는 감각이 온몸을 타고 올랐다. 또 토악질이 밀려왔다. 에이든은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우웁! 우웨엑!”

먹은 게 별로 없어 시큼한 위액만 붉은 혀끝을 타고 흘렀다.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꼭 에이든의 내면 같았다.

그럴듯한 겉가죽을 쓰고 있지만, 에이든은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았다. 그저 느끼는 척을 할 뿐이었다. 저놈이
저러는 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 미쳐가는 것뿐이었다.

몸을 이루는 뿌리 끝까지, 게걸스러운 놈이니까.

지켈리온은 혀를 쯧, 차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게, 죽이라고 했잖아. 죽이면 편할 것을.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닥쳐!”

“그 여아의 해독제를 쥐고 협박해. 스스로 목을 분지른다면 해독제를 주겠다고 속삭여봐. 그러면 재미있겠지?
너는 네 손에 휘둘리는 알체스테를 보면, 만족할 거잖아. 그를 실비아라고 생각했잖아.”

“실비아를, 그 입에 담지 마!”

에이든은 감히 실비아의 이름을 입에 담는 지켈리온을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지켈리온은, 악마의 또 다른 자아였다. 일종의 분신인 거다. 두 개의 개체로 존재하지만, 지켈리온과 악마는
생과 사를 함께했다. 생각을 공유했다. 기억을 공유했다.

그들이 공유하지 않는 건 몸뚱이뿐이었다.

악마가 알체스테를 발견한 건 그가 막 5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끝도 없이 타락하는 황제의 악취를 맡고


다가갔는데, 생각도 못 한 진미를 발견했다.

맛있어 보였다. 가지고 싶었다.

악마는 알체스테와 황제를 지켜봤다. 황제가 알체스테를 타락시키길 기다렸다.

“사실 즐거웠지? 그날 밤, 네 발아래 매달리는 알체스테를 보며 만족감을 느꼈잖아.”

악마와 기억을 공유하는 지켈리온도 그 사실을 알았다. 에이든이 그날 느낀 건, 부성애도 죄악감도 아니었다.

제 발아래 매달려 울부짖는 어린 아들을 보며 그는, 쾌감을 느꼈다.

“아니야. 나는 그 아이가, 그 아이가 항상,”

“항상 두려웠지? 네게 휘둘려주지 않을까 봐. 실비아처럼 네 마음대로 다룰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흐리멍덩한 금안이 빠르게 수축했다. 숨기던 내면을 들키자 에이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의 입에서 또 한 번
토사물이 쏟아졌다.

5 살이 되자, 아이는 제법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해왔다.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
저를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죽일 수 없었다. 죽여선 안 된다는 강박감이 피 묻은 손을 붙들었다.

미쳐버린 황제는, 알체스테를 죽이는 대신 다른 아이를 죽였다. 그는 제 핏줄이 태어나는 걸 더는 참지 못했다.


어린 황족이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황제가, 미쳤으니까.

“알체스테.”

에이든이 무수한 감정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든 안의 알체스테는 5 살에 멈춰 있다.

지켈리온은 알체스테의 이름을 입에 담는 에이든을 보며 입매를 뒤틀었다.

악마는 황제가 타락해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라며 몸을 낮추고 기다렸다. 하지만, 결벽증이 심한 남자는 쉽게
악마를 불러내지 않았다.

몸이 닳은 악마는 제게 영혼을 바친 주술사를 조정해 에이든을 찾아갔다.

알체스테가 5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매일, 에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크윽! 끄읍!”

지켈리온은 숨을 꺽꺽 내뱉는 에이든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게 황제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지켈리온은 악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잊지 않았겠지? 알체스테 베아르시는, 너의 모든 걸…… 앗아갈 거라고.”


속삭임과 함께 지켈리온의 손이 에이든의 목덜미를 강하게 옥죄었다.

[권력, 부, 명예. 너는 모든 걸 빼앗기게 될 거다. 네 아들의 손에. 알체스테 베아르시는 너의 모든 걸……


앗아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그게 네 죄악의 대가니까.]

아주 오래 전, 들었던 목소리가 눅진한 귀를 때렸다. 목구멍이 강제로 수축하는 느낌에 버둥거리는 황제의
바짓단으로 누런 위액이 스며들었다.

지켈리온은 몸부림치는 에이든을 흘긋 바라봤다가 그의 목덜미를 놔주었다. 털썩, 쓰러진 에이든의 옷이 축축하게
늘어졌다.

에이든의 몸을 질척하게 휘감은 것들이 까맣고 축축한 습기를 뱉어냈다. 뇌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손발 끝을
시커먼 벌레가 파고들었다. 에이든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버렸다.

그 아이가 오고 있었다. 5 살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장한 청년이, 황궁으로 다시 발을 디뎠다.

지켈리온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긁는 에이든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게 네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니까. 추악한 놈.”

매일 밤 그를 자극하던 목소리는 현실에 내려앉았다.

“으아아아!”

에이든은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1 화
111

아이젠은 엘리사를 안은 채로 곧장 엘리사의 방으로 걸어갔다. 푹 수그린 그의 얼굴로 밀색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내려앉았다.

심기가 불편한 듯한 아이젠의 모습에 시중인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아버지!”

엘제이는 아이젠을 부르며 황급히 그를 쫓아갔다. 평소와 달리 딸을 배려해주지 않는 발걸음은 터벅터벅 복도를
울리며 저 끝으로 사라졌다.

아이젠 먼저 엘리사의 방 안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엘제이가 헉헉거리며 그를 뒤따랐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잠든 것처럼 얌전히 아이젠 품에 안겨 있던 엘리사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다람쥐처럼 매끄럽게 움직여


아이젠의 품에서 벗어났다.

즐거운 듯 반짝반짝한 눈이 미소를 덧그렸다.


“아버지! 허리 괜찮으세요?”

엘리사는 아이젠의 허리를 조물조물 만졌다. 아버지가 번쩍 안아들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었다. 그녀는 몸에 힘을
쭉 풀고 들키지 않으려고 꽤 노력해야 했다.

“리사, 쉿!”

엘제이는 엘리사의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 주의를 줬다.

“앗, 쉿! 아버지. 허리, 괜찮으세요?”

아까보다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이젠은 조그만 데다 느릿느릿한 목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웃었다.

“그럼. 괜찮다마다.”

“세상에……. 저는 아버지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실 줄은 진짜 몰랐어요. 순간, 아버지가 진짜 모르시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어요.”

“그러니? 알고 있던 너희를 속일 정도면 나쁘지 않았나 보구나.”

“정말 멋졌어요! 저는 황자님 멱살 잡는 거 보고 너무 놀라서 움찔할까 봐 눈도 꾹 감았다니까요!”

아이젠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알체스테의 멱살을 잡은 건 진심이었다. 아이젠의 속내에는 아제프나 알체스테나
다 똑같은 도둑놈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화풀이를 좀 한 것뿐이었다.

사실 모르는 척 뺨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는데, 그 나름대로 참은 거였다.

아비의 속마음을 모르는 엘리사가 발긋한 두 볼을 감싸며 귀엽게 눈을 찡긋거렸다.

“아……. 우리 황자님,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말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게 너무 귀여우셨어.”

아이젠은 이 기회에 한 대 때려주지 않은 걸 후회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꼭 한 대 때려주리라 맹세하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둑놈들.’

아이젠은 티아세 家로 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도둑놈들 앞에서 문을 닫았던 게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둘이서
합이 척척 잘 맞았는지 아이젠이 떠난 뒤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매일 보내던 보고서에도 딸들의 이야기는 없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쓸데없는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못된 것들.’

아이젠은 입꼬리를 비틀며 속으로 두 남자를 욕했다.

“아버지? 무슨 생각 하세요?”

한참이나 말이 없는 아이젠이 이상했는지, 엘리사가 아이젠에게 말을 걸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아이젠은 두


딸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딸들의 모습이 꽤 기꺼웠다.
“흠, 란델 후작과 황자님은 어떻던?”

“아버지의 연기에 두 분 다 넋이 나가시지 않았을까요? 노려보실 때 진짜, 원한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엘제이는 아이젠의 핏발 선 눈을 떠올리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증오심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눈은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웠다.

아이젠은 반쯤 진심이었다. 아나이샤 뿌리로 만든 마비약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줄곧, 기분이 안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황제의 입을 벌려 직접 독약을 털어 넣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젠의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말라 비틀어졌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니. 란델 경의 서신은 잘 전달됐단다.”

아이젠이 두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란델 경은, 확실히 한두 수를 미리 내다보는 데 탁월한 사람이지.’

아제프는 꽤 영리했다. 아이젠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사실, 아이젠이 받은 서신에는 딱 한 줄의 글만이 쓰여


있었다.

[새벽달이 떠오를 때, 닿거나 닿지 않았거나.]

얼핏 보면 단순히 새벽녘에 수도에 도착하거나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지만, 그


문장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을 전달할 때를 위해, 아제프가 미리 정해둔 암호였다.

몇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설명할 암호문을 비밀스럽게 만들어두었는데, 설마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침 해는 엘제이, 새벽달은 엘리사.

떠오를 때, 닿거나 닿지 않았거나- 이 말은 마비약에 당하지 않았으나 당한 척하겠다는 둘만의 암호였다.

아제프와는 달리 아이젠은 굳이 복잡한 암호문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전령조를 이용한 것도 들켜도 별로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젠은 생각보다 더 두 도둑놈을 믿는 걸지도 몰랐다. 두 딸을 맡겨둘 곳이 생기니 별로 삶의 미련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아이젠은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가 나설 것 없이 두 사람의 손에 일이 잘 해결될지도 몰랐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젠은 자신이 새로 뜨는 해에 밀려 떨어지리라는 걸 알았다.

후회는 없다. 미련도 없다.

그게 아이젠과 에이든의 차이였다.

엘제이는 눈을 감은 아이젠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위로 엘리사의 손도 올라왔다. 아직 보송보송한 그녀들의


손과는 달리 주름이 잡힌 투박한 손이었다.

“아버지, 피곤해 보이세요.”


“나도 늙었나 보다. 일이 정리되면 푹 쉬는 게 좋겠지.”

‘복잡한 일 같은 건 다, 사위들에게 맡기는 게 좋겠구나.’

권력 같은 건 결국 덧없는 것이었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피땀 흘려 붙들어 놓았으나 미련은 없었다.


아이젠은 그저 아이들이 떠나기 전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동안 바빴다는 핑계로 오래 곁에 머물러줄 수 없었던 게 늘 미안했다.

아제프는 요 며칠 제 할 일을 모조리 다 아이젠에게 떠넘겼다. 아이젠은 곧 복수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버지 나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벌써 약한 소리세요. 아직 이렇게 팽팽하신데! 저도 번쩍 드시고! 언제


그렇게 운동을 하셨어요? 저 깜짝 놀란걸요.”

“나이가 드니, 게으름이 느는구나. 여행이나 다니며 사는 것도 좋을 텐데.”

“여행이요? 그렇군요. 다 같이 놀러 가도 좋겠어요.”

엘제이는 말하고 나서 몸을 움찔 떨었다. 다 같이 가자는 말에 질색하던 아제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저어 흉흉한 낯을 떨쳐냈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제이, 리사. 너희는 이제 그만 쉬렴. 이러다 해가 밝아오겠구나.”

달은 해의 붉음에 밀려 꺼지고, 오늘 하루를 밝힐 새날의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다.

***

‘즐기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제프는 엘리사를 안고 위풍당당 들어가는 아이젠을 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연기라지만, 이리 대놓고
멸시를 당하니 얼떨떨했다.

아제프는 문을 닫으라고 재촉하는 아이젠을 보며 내심 뻥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알체스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입매가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알체스테야 떠날 사람이라지만, 아제프는 티아세 家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또 담을 넘어야 하나?’

아제프가 고민하며 엘제이의 방문에 나 있는 창문을 훑었다. 정문을 열어줄 마음은 없는 것 같으니, 오늘도
도둑놈의 본분을 다해야 할 모양이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어깨를 톡 쳤다.

“아제프, 난 슬슬 가보겠다. 더 늦으면 안 되겠지.”

“그렇죠. 아무래도 루드비히 전하의 시신을 건네드려야 하니까.”

알체스테는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한 뒤에 새벽 동안 수도의 귀족 家를 돌아보기로 했다. 알체스테는


자질이 빛(光)인 만큼 마물들이나 주술사들에게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 밤은 지켈리온의
흔적이 강하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만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한껏 낮췄다.

“지켈리온이 힘을 쓸 때마다 특유의 악취가 고인다. 오늘은 얌전한지 그런 느낌은 느껴지지 않아. 수도에 있는
것 같긴 하다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단 말씀이죠? 감지 능력이 꽤 광범위하네요.”

아제프는 쓸모없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지켈리온이 수도 어디쯤 있다는 건 그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지켈리온은
주술사를 거느리는 능력을 갖춘 듯했다. 만약, 지켈리온과 에이든이 관계가 있다는 게 밝혀지면, 에이든이
황제라도 문책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증거를 잡기가 힘들겠지.’

아제프는 좀 못미더운 눈으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그래도 부황이라고 또 잔뜩 흔들리다가 돌아오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지그시 바라봤다. 알체스테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쳐다봤다.

“걱정하는 건가?”

아제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알체스테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한 아제프는 그의 말에 답해주지


않고, 제가 할 말만 이어갔다.

“전하, 입궐하시면 폐하의 피부를 한번 살펴보세요.”

“부황을, 벗겨보라는 건가?”

“미치셨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피부를 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열심히 보고 오란 말입니다.”

“주술사의 문양은 힘을 쓸 때마다 커진다. 설령 폐하가 악마에게 혼을 넘겼다고 한들, 문양이 커지게 두지는
않았을 것 같군.”

아제프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늘 다른 시녀들의 목욕시중을 받는 모양인데, 아무 소문도 나지


않았다는 건 문양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이젠도 모르는 눈치였고.

아제프는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설마 오늘 바로 마비약에 대해 묻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만약 그런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거짓말에


서투시면 그냥 입을 다물고 계시라는 말입니다.”

“경. 내가 그렇게 걱정되나?”

“제가 전하 걱정을 왜 합니까? 제이 걱정하기도 바쁜데.”

아제프는 싸늘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알체스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알체스테가 나자빠지면 귀찮아지니까 그러는 것뿐이었다.
아제프는 자꾸 형 노릇을 하려는 알체스테를 까칠하게 노려봤다. 무딘 곰을 놀릴 계책이 여우의 간교한 눈에
떠올랐다.

“전하는 무척 바쁘시겠군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요. 엘리사 양을 다시 만나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군요.”

아제프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폭 내뱉었다. 알체스테의 눈썹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무딘 눈치도


밟으면 꿈틀했다.

“놀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이만 제이 곁으로 돌아갈 테니, 전하께서는 오늘 밤 내내, 쭉- 수고 좀 해주세요.”

아제프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뒤돌았다. 정문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담으로 향하는 발걸음마저도 알체스테에겐
부러운 일이었다.

알체스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못돼 처먹은 놈!]

엘리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왱왱 맴돌았다. 알체스테는 말 등 위에 손을 짚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못돼, 처먹은…… 놈.”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2 화
112

노랫말처럼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곧 바람에 사그라졌다. 알체스테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말 위에
올라탔다.

조금 전까지는 부황을 만난다는 부담감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룰루랄라 사라지는 아제프에 대한 짜증이 더 심했다.

알체스테는 언젠가 그 얄미운 놈에게 되돌려줄 날을 기대하며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알체스테가 말의 콧잔등을 손으로 쓸며 말머리를 돌렸다. 말머리가 황궁을 향하고, 그를 태운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다그닥다그닥-

알체스테와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이 말을 달리는 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새벽의 대지를 깨우는 힘찬 말발굽에
새벽이슬이 풀잎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말의 옆구리에 얹힌 꽉 영근 허벅지가 툭 불거졌다. 알체스테는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알체스테는 곧 거대한 황궁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오래된 성문이 쇳소리를 토해내며 열렸다. 알체스테는 거대한 성문을 지나고도 또 한참 달렸다. 겹겹이
쌓인 문을 수십 번 지나고 구중궁궐에 똬리를 튼 황제를 만나러 갔다.

20 년. 자그마치 20 년의 세월이 흘러, 그는 다시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 황제의 내실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폐하, 알체스테 황자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기다리라고 해라.”

시작부터 박대였다. 새벽에 찾아온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으나, 사태가 중한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이십년


만에 돌아와서 바로 부황을 찾지 않으면 구설에 오르는 건 알체스테였을 터였다.

알체스테는 입가로 번지는 쓰디쓴 미소를 삼켰다. 어린 시절 이 거대한 문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황금으로 만든
문이 떨어져 어린 몸을 짓누르고 팔다리를 으깰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알체스테는 자랐다. 그는 더는 5 살의 아이가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거대한 금문을 두려워하는 대신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어쩌면 일부러 붙잡아두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기감을 기울여 수도를 살폈다.
그리 먼 곳까지 통찰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귀족들의 저택은 대부분 황궁 근처에 있었다.

‘오늘의 화살받이는 나인가 보군.’

그토록 부득불 애써가며 붙잡아둔 것 치고는 허탈한 일이었다. 알체스테는, 오늘 밤 수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알체스테는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뉘엿뉘엿 주홍빛이 스며들었다.

알체스테는 계속 기다렸다. 둥근 해가 모습을 반쯤 드러내고, 황제의 기상시간이 되었다. 거대한 황궁은


알체스테를 세워둔 채 빠르게 돌아갔다. 아침 소세물이 들어가고, 시간이 한참이나 더 흘러서야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와라.”

“들어가십시오.”

알체스테는 헛웃음을 삼키며 묵직한 다리를 움직였다. 몇 시간 동안 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는 건 꽤 고된


일이었다. 알체스테는 뻑뻑한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쿵.

거대한 황궁의 문이, 알체스테를 집어 삼켰다. 알체스테는 그 길로 곧장 걸어가 황제의 발아래에 섰다.

“황제 페하를 뵙습니다.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에, 황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목덜미에 닿는 따가운 시선으로 짐작하건데, 황제는
저를 보는 듯했다. 꽉 쥔 주먹에 눅눅한 습기가 배어들었다.

흐리멍덩한 금안에 까만 기운이 겉돌다가 사라졌다.


알체스테는 코를 찌르는 악취를 맡았다. 지켈리온의 냄새였다. 알체스테의 눈에 짙은 체념이 고여 문드러졌다.

황제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알체스테를 살폈다. 다부지게 성장한 몸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입술이 메말라 달싹거렸다.

황제는 참지 않고, 아들의 이름을 짓씹어 뭉갰다.

“알체스테.”

알체스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감각했던 금안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루드비히도, 당신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왜?’

에이든은 루드비히보다 훨씬 심했다. 까만 진액이 그의 마음에 눌어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완전히 빛을 잃은


그의 마음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동굴과 같았다.

알체스테. 그가 가장 바라지 않던 내면이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더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추악하게 문드러진 모습에 목구멍이 바글바글 타들어갔다.


알체스테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핏발 선 눈을 꾹 감았다.

서늘한 얼굴에서 툭 불거져 나온 턱만이 그의 불편한 속내를 조금 드러낼 뿐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죽으라고 보내놨는데, 기어이 살아 돌아왔구나. 질긴 것.”

“……루드비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그 애를 그렇게 만든 겁니까?’

알체스테의 눈이 호소하듯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다 자라 저보다 커버린 알체스테가 언짢은 듯 턱을


꼿꼿하게 들었다. 바싹 마른 몸이었지만, 알체스테와 많이 닮은 외양이었다.

에이든은 제 아들이 죽어 지옥불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하게 갸웃, 흔들리는
얼굴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네 동생을 죽인 건 네가 아니더냐.”

“악마에게 혼을 판 자는 즉결처형입니다. 저는 율법에 따랐을 뿐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루드비히를 죽인 건 아제프였다. 알체스테는 이 사실을 내색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에이든은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곪게 할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저 아이는 안 그런 척해도 정이 많은


아이었다. 내심 제 동생들을 애틋하게 여겼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꺼낸 말인데, 덤덤하게 받아치는 모습을 보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애어른 같았어도 완전한 아이였던 5 살 때와는 많이 달랐다.

황제는 용좌를 꽉 틀어쥐며 목구멍을 타고 치솟는 시큼한 위액을 내리눌렀다. 저 아이에게 추한 꼴을 보이는
것만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뿌옇게 흐려진 금안이 또로록 굴러 알체스테를 훑었다.

“많이 자랐구나.”

“20 년이면, 다 자랄 나이지요. 폐하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에이든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여전히 싸늘했고, 끔찍하다는 듯 저를 봤다.


알체스테는 따가운 가시처럼 몸에 박히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너는 많이 건방져졌구나. 그러라고 보낸 변방이 아닐 텐데.”

“저는 부황께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제가 건방지다고 느끼셨다면, 그건 부황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에이든은 건방지다고 불호령을 내리는 대신, 알체스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만하게 내리깐 눈이 너는 절대
나와 동등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착각하고 있구나. 새장 안의 새는 아무리 자라봤자, 애완조일 뿐이다. 겁도 없이 주는 먹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먹었다가는 몸이 부풀어 창살이 몸이 옥죄겠지. 아니면, 아름다움을 잃은 죄로 주인의 손에 죽거나.”

눈알이 빠질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눈을 감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체스테는 무거운


속눈썹을 억지로 떨어트렸다.

따스하게 맞아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따스한 품에 안기진
못하더라도 먼 곳에서나마 저 얼굴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하던 어린 날이 산산이 부서졌다.

상상 이상이었다. 알체스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 생각이었다. 알체스테는 저런 괴물 밑에서


살아남겠다고 아득바득 기어왔을 루드비히가 가여워졌다.

그 아이가 불쌍해서, 제 자신이 안쓰러워서, 토기가 치밀었다.

“……루드비히에 대한 건, 안 궁금하십니까?”

“내가 그 애에 대해 궁금해 해야 하나? 너나 그 애나 그저, 내 애완조일 뿐인 것을. 너희들을 대체할 것은


얼마든지 있다. 죽으면 그뿐, 다른 아이를 택하면 될 일이지.”

“그럼 저도, 부황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언제든지 죽는 겁니까? 부황의 손에?”

“너는 단 한순간도 내 마음에 찬 적이 없었다. 새삼 다를 것 없으나, 요즘 네가 내 심기를 어지럽힌 건 사실이지.


처음부터 나는 너를 살려둘 생각이,”

에이든은 목이 콱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아직 죽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뇌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아직 안 돼. 적어도 저 아이가, 진심으로 내 밑에 엎드려 개처럼 헉헉대는 꼴은 봐야,’

지잉- 귀를 울리는 이명이 귓바퀴를 갈고리처럼 긁어댔다.

황제는 눈을 부릅뜨며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그의 등 뒤로 목이 부러진 실비아의 잔상이 떠올랐다. 목구멍에서


시큼한 위액이 올라올 것 같았다.

황제는 황급히 손을 움직여 와인 잔을 들었다. 꼴깍꼴깍 억지로 넘긴 술이 목덜미를 따갑게 긁어댔다. 사레가
터질 것 같았지만, 에이든은 티 내지 않았다.

알체스테의 눈에는 에이든이 와인을 마시려 잠시 말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알체스테는 더는 저 헛소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언제까지 제가 부황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애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에이든은 알체스테 앞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구겼다.

알체스테는 종잇조각처럼 우악스레 구겨지는 미간을 보며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그는 황제가 버리고 주울 수
있는 장난감 같은 게 아니었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나? 몸의 상처도, 마음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묵은 것이 될 텐데 소중히 대할
필요가,]

[황자님. 그런 생각 마세요. 저는 황자님이 제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데, 황자님이 스스로 소중하다고 여기지


않으시면 제 마음이 아픈걸요. 저는 상처받아요. 가슴이 찢겨나갈 것 같아.]

알체스테는,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가 상처 입으면 함께 아파해줄 존재가 생겼다.

그러니 저딴 헛소리에 상처입지 않겠다.

[저라면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리겠습니다.]

그러니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리겠다.

알체스테는 비로소 황제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한층 가벼워진 얼굴로 알체스테는 선언했다.

“저는 더 이상, 부황께 휘둘리지 않습니다.”

에이든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다. 말을 끝낸 알체스테가 허락도 없이 내실을 나갔기 때문이다. 에이든은 표정


없는 얼굴로 알체스테가 나간 문을 보다가 와인 잔을 꽉 틀어쥐었다.

“큭, 크윽, 크하하하하!”

이유 모를 광소가 터져 나왔다. 에이든은 미친 듯이 웃었다. 잔에 고인 와인이 피처럼 붉게 출렁거렸다.


요동치는 몸과 함께 흔들리던 잔이, 기어코 에이든의 손을 적셨다.

“…….”

요란하게 퍼지던 광소가 뚝 멈췄다.

손이 끈적끈적했다. 에이든은 벅벅 닦아도 찐득한 손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퍽! 쨍그랑-
알체스테가 나간 문에 와인 잔이 부딪혀 깨졌다. 주르륵 미끄러지는 자줏빛이 화려한 금빛을 붉게, 더럽혔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3 화
113

엘리사는 그렇게 자고도 또 금세 잠들었다. 엘제이와 아이젠은 엘리사가 잠든 걸 확인하고 각각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는 엘제이를 따라 그녀의 시녀인 시아도 쪼르르 따라왔다.

엘제이는 몰래 할 일이 있었기에, 시아가 침구를 정리해주고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아가씨, 편히 주무세요.”

“응. 시아도 잘 자.”

엘제이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곧 잘 거라는 듯 편히 감은 눈에 시아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 갔나?’

엘제이의 눈이 반짝 뜨인 것도 그때쯤이었다. 시아는 나갔는지 어두운 방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내려온 엘제이는 곧바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중요한 서류들을 보관하는 곳에 두었기 때문에 서랍은 열쇠로 열어야만 했다. 열쇠를 넣고 돌리는 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은 침실을 울렸다.

도르륵, 달칵.

당연히 그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보이지 않았다. 엘제이는 어두워서 못 찾는 거라고 생각하며 옆에 있던


등을 켰다. 책상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불 아래서도 엘제이는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엘제이는 서랍을 통째로 들어내고는 그 안을 샅샅이 뒤졌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찾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단정한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어쩌면 다른 곳에 놓아두고 잊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한제이가 아닌 엘제이의
기억은 비교적 멀쩡하지만, 지금 찾는 일기는 한제이의 기억과 밀접하니 지워져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데 넣어뒀나?”

“무엇을요?”

엘제이의 혼잣말에 답하는 목소리가 샐쭉 휘어졌다. 서랍을 뒤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흐음- 아제프가 작게 신음하며 엘제이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결이 좋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하얀
목덜미에 나붓이 내려앉아 그녀를 간질였다.
“……으악!”

엘제이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제프는 하얀 러그 위에 주저앉은 엘제이를 바라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뭐 찾아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어질러 놓은 서랍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지 티아세 家의
장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제프는 단정한 글씨로 빼곡히 메모해 놓은 장부를 보며 살짝 웃었다.

엘제이는 슬금슬금 아제프의 눈치를 보며 그것들을 정리했다. 아제프는 그것에 대해 알 리 없었지만, 한글로 쓴
종이가 나올까 봐 괜히 긴장되었다. 무슨 글자냐고 물으면 임기응변에 능하지 않은 엘제이는 버벅거릴 게
분명했다.

바삐 움직이는 손에 긴장이 휘감겨 뻐걱거렸다.

“제가 도와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보다 어, 어디로,”

“어디로 들어왔냐고요? 물론, 창문으로 들어왔죠.”

주인 허락도 없이 창문으로 들어왔다면 범죄건만, 아제프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곱게


접힌 눈꼬리를 보면 선하기 짝이 없는 얼굴인데, 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사람의 시선을 홀려놓았다.

엘제이는 손끝을 바르르 떨며 한참 시간을 들여서야 서랍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었다. 열쇠로 꼼꼼히 서랍을
잠근 그녀는 등으로 그걸 가렸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휭- 불어왔다. 하얀 커튼이 바람에 휘감겨 춤을 췄고, 어슴푸레한 달빛이 창가를
물들였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볼에도 시원한 바람이 닿았다. 정신을 깨우는 찬 기운에 엘제이가 눈을 번쩍 떴다.

“창문? 창문으로 들어왔다고요?”

“네.”

아제프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싱긋 웃으며 엘제이의 볼을 살살 쓸었다. 서랍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이 묘한
충동을 일게 했다. 아제프는 고운 도자기 인형 만지듯 엘제이의 볼을 살살 쓸어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창문, 잠가놨을 텐데요.”

“다 요령이 있는 법이죠. 전 꽤 능숙한 도둑이거든요. 잔뼈가 굵고 경험이 많죠.”

아제프는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잠긴 문 정도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살얼음이 낀 창문의 고리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는 보란 듯 문을 닫아 보였다.

창문 틈으로 얼어붙은 얼음이 쩌저적- 부피를 키워가며 창문을 밀었다. 조금의 덜컥임도 없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창문은 사람이 손으로 미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손가락을 딱, 부딪쳐 소리를 내며 창문에 얼어붙은 얼음들을 거두어들였다.

입을 멍하니 벌리며 그것을 바라보던 엘제이가 질책하듯 그의 손가락을 찰싹, 때렸다.

“전 리사 양이 아닌데요. 어째 취급이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아제프는 엘리사가 엘제이에게 혼나는 모습을 떠올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눈썹이 엘제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녀는 눈을 꾹 감으며 잔소리했다.

“자질을 저런 곳에 쓰지 말아요. 무리하게 되잖아요.”

“저 정도는 무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제 건데 뭐가 어떤가요? 제가 쓰고 싶은 곳에 쓰는 거죠.”

아제프는 눈을 꾹 감은 엘제이를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제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듯 눈을 꾹 감은 게


사랑스럽기도 하고, 괴롭혀주고 싶기도 했다. 아제프가 곤혹스럽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꽤, 곤란한 상황인데 어떻게 할까?’

뭉근하게 그녀의 손을 쓸어보던 남자는 곧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말캉거리는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빨리듯 들어갔다.

아제프의 팔이 미끄러지듯 올라가 엘제이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녀의 고개를 살짝 젖히자 입안이 벌어졌다.
매끄러운 혀가 능숙히 그 안을 파고들며 말간 점막을 간질였다.

“으음, 흐…….”

아제프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것을 능숙하게 잡아채 휘감았다. 혀뿌리를 긁어주고 좋아하는 곳을 간질여주니,
색색 달아오른 숨결이 애달파졌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아제프가 속눈썹을 나붓이 내리깔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뇌를 뭉근하게 녹이고 뼛속 깊이 차오르는 이 감각이 좋았다.

그녀의 품에 그가 녹아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을 정도로 차오르는 충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제프는 작게 헐떡이는 숨결을 집어삼키며 엘제이의 턱을 바짝 들었다. 버겁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얌전히 제


품을 내어주는 게 여간 기꺼운 게 아니었다.

아제프의 손이 엘제이의 슈미즈 자락을 파고들었다. 얇은 슈미즈 끝단의 레이스가 엘제이의 허벅지에 걸렸다.
그는 부드러운 살결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흐읏- 으응…….”

질척한 탐심이 하얀 살결에 진득하게 묻었다. 아제프는 하얀 다리 한쪽을 칭칭 휘감으며 제 것으로 온통 물들여
놓았다. 소유권을 주장하듯 진득하게 휘감는 손길에 엘제이가 허리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등허리에 차가운 열쇠가 부딪혔다.

짤랑, 짤랑.

서랍에 걸린 열쇠가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음란하게 흔들렸다. 율동하듯 꿈틀거리는 복부에 시커먼 기운이
차올랐다. 아제프는 제 몸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미간을 좀 찌푸렸다.
엘제이의 입술이 새빨갛게 부풀도록 물고 빨던 입술이 촉, 짧은 입맞춤을 남기며 떨어졌다.

“눈을 감았고, 날 밀어내지 않았으니, 허락한 거예요.”

몽롱한 머리는 조금의 시간이 흘러서야 아제프의 말을 인식했다. 엘제이는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녹진하게 녹은 몸은 그 이상의 깊은 사고를 거부했다.

아제프는 흐트러진 슈미즈 자락을 대충 정리하며,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아제프?”

“잠은 침대에서 자야죠. 바닥에서 자면 몸이 결리니까요.”

눈 깜짝할 사이에 등에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솜이 수북하게 들어간 이불이 하얀 몸을 푹 감싸 안았다. 저항할
틈도 없이 빨려가는 느낌에 엘제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찾아야 하는데.’

아제프는 엘제이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손을 꺼냈다. 익숙하게 가슴 언저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그만 자라는 듯 다정했다.

“저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칭얼거렸다. 졸려서 몽롱해진 눈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아제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엘제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아제프를 보내고 찾아봐야 하는데.’

엘제이가 눈꺼풀에 힘을 주며 저항했다. 무거운 눈꺼풀이 눈을 꾹꾹 눌렀지만, 엘제이는 눈에 힘을 바짝 줬다.


곧 엘제이의 시야에 아제프가 가득 차오를 수 있었다.

“같이 자는 건 아직,”

“왜? 계속 같이 잤잖아. 한 이불 덮고.”

아제프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야살스럽게 휘었다. 살짝 붉어진 눈가가 접히자 까만 눈물점도 예쁘게 휘어졌다.
엘제이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랬죠.”

“그럼 같이 코코 잘까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볼에 장난스럽게 입술을 비비며 웃었다. 말캉거리는 감각이 볼에서 뭉개졌다. 엘제이는
몽롱하게 풀린 얼굴로 그걸 바라봤다.

‘일기는 내일 찾지, 뭐.’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네. 제가 팔베개해줄 테니까 얼른 자요. 피곤하죠?”

아제프가 팔을 움직여 그녀의 목덜미 뒤를 받쳤다. 단단한 팔에 머리를 기대자 잠이 몽글몽글 밀려왔다.

여기가 극락이었다. 엘제이는 감기는 눈을 빼꼼 떠 아제프의 얼굴을 감상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저 얼굴을 보며,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는 지금이 좋았다.

몽롱하게 젖은 머리가 어서 자라는 듯 둔탁한 울음을 토해냈다. 엘제이는 반항하지 않고 수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잘 자요. 아제프.”

작은 웅얼거림이 잠꼬대처럼 흘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진심으로 빌었다.

“잘 자고, 좋은 꿈 꾸세요.”

당신의 꿈이 오늘도 제발, 평안하기를.

엘제이의 안녕을 비는 눈이 잠시 축축하게 젖었다. 애잔한 파란 눈이 먹먹함을 묻혔지만, 수마에 감긴 눈은 그걸


보지 못했다.

곧, 색색거리는 숨결이 잔잔하게 흘렀다. 아제프는 잠들지 않고 가만히 그걸 바라봤다.

“하여튼, 머리만 대면 잘 자.”

아제프는 이게 티아세 자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빼고는 어딜 보나 엘제이가 훨씬 뛰어났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배를 부드럽게 도닥이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누워 잠든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의 기척을 살폈지만,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려는지 잠잠했다. 시간은 꽤
흘러 햇살이 창가를 기웃거렸다.

아제프는 미동도 없이 얌전히 자는 엘제이를 보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암막 커튼을 치자, 기웃거리던 햇살이


자취를 감췄다.

아제프는 소리 나지 않게 창문을 열고 몸을 반쯤 걸쳤다. 파란 눈이 엘제이가 사투하던 서랍을 한 차례 훑었다.

암막 사이에 완전히 묻힌 몸은 곧, 창문을 넘어 사라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4 화
114

창문 위에서 여유롭게 휙 떠오른 발이 잔디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아제프는 창문을 꼼꼼히 닫고 자질로


고리까지 능숙하게 걸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창문이 잠겼다.
엘제이가 잠든 안온한 공간을 빠져나오자 밝은 햇살이 선명하게 내려왔다. 아제프는 눈을 쨍하게 파고드는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저 멀리 걸어오는 알체스테를 지켜봤다.

알체스테는 오직 앞만 보는 사람처럼 엘리사의 방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그의 목표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제프는 빠르게 걸어오는 알체스테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가갔다.

“이제 오십니까?”

대체 뭐 하다가 이제야 왔냐는 비꼼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곧장 엘리사를 찾아가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던 알체스테는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햇살을 받고 서 있는


얼굴빛이 여간 반질거리는 게 아니었다. 알체스테가 황궁에서 부황과 말싸움을 할 때, 아제프는 기분 좋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여튼 여간 얄미운 놈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어째 황자님은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엘리사 양보다 나이도 여섯 살이나 많으신데,
슬슬 관리하셔야 할 시기 아닙니까? 주름까지 지시면, 어휴.”

아제프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기를 가늠하듯 알체스테 얼굴 위에서 움직이는 손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알체스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제프의 마음을 살폈다. 영롱한 빛을 토해내는 중심을 따라 농도 옅은 그을음이


맴돌았다. 까맣고 몽글몽글한 게 먹구름처럼 끼긴 했으나 그의 마음은 비 온 뒤의 하늘이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지나면, 밝아오는 무지개처럼 아제프 또한 시간이 지나면 저 먹구름마저 사그라들어
빛으로 온몸을 채울 것이 분명했다.

“내게 장난을 칠 만큼 내가 편해진 모양이군. 나는 싫지 않다.”

아제프는 샐쭉 말렸던 입꼬리를 바로 했다. 언제 장난쳤냐는 듯 엄정하게 굳은 눈빛이 알체스테를 위아래로


훑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묘하게 후련해 보이기도 한 낯이 수상했다.

“폐하께 보고는 다 드리고 왔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걸 잊었군.”

알체스테가 눈을 둥글게 뜨며 중얼거렸다. 아제프의 얼굴이 깨진 유리처럼 파사삭- 일그러진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와 똑같이 장난을 쳐보려다가 팽팽한 눈가를 보며 멈췄다. 아제프를 얼굴로 깎아내릴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나 할지 의문이었다. 알체스테의 눈가가 어쩐지 좀 시무룩해진 것도 같았다.

아제프는 고운 입매를 음산하게 비틀었다.

“그게 그렇게 당당하게 시인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벽녘부터 간 이유가 뭔데 그걸 잊으십니까?”


“부황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잊었다. 굳이 보고라고 할 것도 없지. 이미 다 알고 계신 듯했다.”

아제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보고는 그럴듯한 형식을 취한 것이고 적의 동태를 알아보는 게
본연의 목적에 가까웠다. 나중에 이 일로 트집이 잡힐 수는 있겠지만, 아제프는 일단 넘어갔다.

“이야기라니……. 지난 20 년간 해묵은 부자의 정을 돈독하게 하신 건 아닐 테고, 이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면, 뭔가 알아 오신 건 있습니까?”

“글쎄. 이야기를 나누긴 했으나 밖에 서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부황을 뵐 수 있었던 건 그분의 소세물이
들어간 후다.”

“그 정도의 박대쯤이야 황자님뿐만 아니라 다른 황족도 마찬가지십니다. 그분은 워낙 제 자식들을 싫어하시니


말입니다.”

“위로해주는 건가?”

아제프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싸늘한 얼굴로 알체스테를 노려봤다.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살기가 몰아쳤는데,
그건 알체스테의 착각이 아니라는 듯 뾰족한 마나가 윙윙 신음해 댔다.

알체스테는 팔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면서도 피식 웃었다. 파랗게 날이 선 마나가 하듯 그의 피부를 찔러댔으나


알체스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바글바글 끓는 울화를 도닥이며 이를 악물었다.

“얻은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시겠죠?”

“무얼 말이지?”

알체스테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 아제프는 무덤덤하게 기울여지는 알체스테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싶어 반질거리는 금안을 살펴보았는데, 이 남자는 진정 모르는 듯했다.

“증거라든가, 증거 같은 거 말입니다!”

“……그걸 알아왔어야 하나? 내게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언제 했나?”

까드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얼음이 동동 뜬 호수에 저 얼굴을 처박아 정신을 좀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알모어가 저런 식으로 되물었으면 호되게 당했을 테지만, 저 둔치는 다행히 황자였다.

아제프는 밀려오는 폭력적인 충동을 애써 꾹꾹 눌렀다.

“그걸 굳이 말해야 압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갔으면 그 잘난 후각으로 지켈리온의 기척도 좀 더듬고 그가
있을 만한, 혹은, 있었을 만한 곳의 위치 정도는 알아왔어야 할 게 아닙니까!”

“폐하는 이미 지켈리온의 악취로 범벅이셨다. 그와 가까이 한 게 확실하시지만, 나만 느낄 수 있으니 이를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신관도 못 알아채는 잘난 감지능력인데 하신 게 정말 그것밖에 없단 말입니까?”


“미안하군. 알아낸 건 정말 그게 다다.”

“차라리 폐하의 옷이라도 벗기시지 그러셨습니까? 소득도 없고, 보고도 제대로 못 하고, 대체 뭘 하신 겁니까!”

“…….”

아제프는 좋은 능력을 두고도 썩히는 알체스테가 답답했다. 그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저렇게 무디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아마 정상이었다면 그도 증거를 찾아보려 했을 터였다.

다만, 그곳은 황궁이었고 알체스테의 트라우마가 집약된 집합체였다. 20 년 만에 황제를 만난다는 생각에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씩씩 올라오는 거친 생각을 잠재우며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됐습니다. 더 이상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죠.”

아제프는 바가지를 득득 긁는 걸 간신히 멈췄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지만, 이건 알체스테의


진영에 들어온 그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아제프는 여러모로 제 위에 사람이 있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저를 누르는 우두머리가 있으면 그 목을


꺾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황족을 데리고 일하려니 영 못마땅했다.

아제프는 마땅찮은 눈으로 알체스테를 보다가 등을 휙 돌렸다.

“그림자를 털어냈다.”

“뭐요?”

갑작스러운 말에 아제프가 뒤를 돌아봤다.

알체스테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등을 꼿꼿이 펴고 바르게 서 있었는데, 해가 움직이면서 그의 등에는


햇살이 묘하게 서려 있었다.

아제프는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시커멓게 말라붙었던 귀퉁이를 한 조각 떼어냈다. 제법 밝아졌더군.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알체스테는 할 말 다 끝났다는 듯 먼저 휘적휘적 걸어갔다. 늘 먼저 등을 돌리는 아제프를 향한 일종의 복수였다.


드디어 소심한 첫 복수를 성공해낸 알체스테의 입가로 만족스러움이 번졌다.

아제프는 실실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알체스테를 기가 차다는 듯 바라봤다.

“미쳤나?”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머리에 구멍 난 환자처럼 웃는다고 생각했다. 싸늘한 눈으로 알체스테를 바라보던 아제프는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는 걸 깨달았다.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던 아제프는 곧 됐다는 듯 알체스테를 따라 티아세 家로 들어갔다.

아마,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뒤따라간 건 그날이 처음일 터였다.

***
“으으음!”

엘제이는 일어나기 싫다는 듯 몸을 바르작거리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잘 때는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베개에


비벼져 흐트러졌다. 잠이 뭉근하게 서린 속눈썹이 가볍게 팔랑거렸다.

방은 온통 깜깜했다. 아직 낮인가 싶어서 눈을 감으려던 엘제이는 암막 커튼을 발견하고 눈을 떴다. 커튼을 치고


잔 기억은 없는데 이상했다.

엘제이가 멍하니 일어나 앉았다. 침대 헤드에 기댄 등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엘제이는 그대로 쓰러져 다시 잠들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겨우 앉기는 했는데. 헤드에 머리를 기대니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몽롱한 기운을 간신히 몰아내며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잠에 푹 절은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갔다.

“아제프?”

엘제이는 옆을 더듬거리며 그를 불러봤지만,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서도 극락을 즐기고 싶었던
엘제이가 눈을 시무룩하게 늘어트렸다. 미차 여행이 피곤했는지 몸은 뻐걱거렸다.

엘제이는 한숨을 쉬며 등을 기댔다. 더 자고 싶었다.

더 잘 변명거리를 찾듯 데구루루 굴러가던 눈이 똑똑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퐁퐁-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제야 잠기운을 헤치고 귓가에 스며들었다.

또 자질을 썼는지 창문에는 축축한 얼음이 고드름처럼 송골송골 매달려 있었다.

“아제프…….”

엘제이가 한숨을 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정신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스르르- 이불을 젖히는 소리가 흘렀다. 엘제이는 살짝 구겨진 슈미즈를 바로 하며 바닥에 발을 내렸다. 아제프도
없고, 커튼도 쳐져 있으니 이 기회에 얼른 찾아야 했다.

엘제이는 곧장 서랍으로 다가가 종이를 찾아 뒤적거렸다. 중요한 문서만 따로 보관하는 서랍뿐 아니라, 책상에
달린 서랍을 다 뒤져보았는데도 찾는 건 보이지 않았다.

“졸려서 정신이 없는 건가? 왜 못 찾는 거지?”

엘제이는 한숨을 삼키며 책장을 바라봤다, 서고가 따로 있으니 엘제이의 책장에는 그리 많은 책이 꽂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족의 기준이었다.

엘제이는 제 키보다 높은 책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혹시라도 저기 어딘가에 둔 거라면 하루를 꼬박
세워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엘제이는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 꽂힌 책을 꺼내 책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설마 책 안에 끼워둔 건 아니겠지?”

“뭐를요?”

“……!”
소리도 없이 돌아간 문은 커다란 남자 하나를 토해냈다. 문을 닫으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엘제이의
어깨가 굳었다. 적당히 변명하면 될 텐데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입은 벌써 어버버 달싹거렸다.

“제이, 불도 안 켜고 뭐 하는 거예요? 눈 나빠지잖아요.”

아제프가 커튼을 활짝 젖히며 웃었다. 커튼에 고였던 햇살이 기회라는 듯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몸을 데우는
햇살을 맞던 엘제이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햇살을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며 흘러내렸다.

‘예쁘다. 여기가 극락인가?’

멍하니 헛생각을 하던 엘제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제프의 손에서 팔랑팔랑 흔들리는 종이
뭉치가 묘하게 익숙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5 화
115

엘제이는 제가 잘못 봤나 싶어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의 미모에 홀려 흐릿했던 시야가 밝아졌다. 엘제이는


눈을 크게 뜨고 아제프의 손에 들린 걸 관찰했다.

익숙한 굵기, 익숙하게 접힌 모양, 바깥쪽에 쓰인 한글까지. 아무리 살펴도 엘제이의 것이 맞았다. 엘제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아니, 그게 왜…….”

“응? 무엇이요?”

아제프는 세상에서 가장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반짝반짝 스며드는 햇살 때문인지, 원래의 얼굴이
눈이 부셔서인지 엘제이의 마음이 크게 술렁였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가고 눈이 홀렸다. 엘제이는 또 어물쩍 넘어가려는 속내를 억누르며 눈을 꼭 감았다.

아제프는 요즘 들어 새로 생긴 그녀의 버릇을 관찰하며 엘제이 쪽으로 고개를 바짝 숙였다.

“입을 맞춰도 된다고요?”

“네?”

엘제이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살짝 떴지만, 아제프의 입술이 내려앉는 게 먼저였다. 촉, 꽃을 탐하는


꿀벌처럼 사뿐히 내려앉은 입술이 엘제이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이며 떨어졌다.

엘제이의 속눈썹이 팔랑, 흔들렸다. 엘제이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살짝 물러났다.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헤롱헤롱 흔들리는 뇌가 반쯤 몽롱해졌다.

아제프는 그런 엘제이를 모르는 척 고개를 까딱였다.

“이상하네. 키스해달라는 거 아니었어요? 눈 감았잖아.”


아제프는 엘제이의 새로 생긴 버릇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빠른 눈치가 그녀의 눈이 감기는 이유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성격 나쁜 남자는 매일매일 그녀를 홀려놔도 부족한데, 저렇게 도망갈 기회를 두고 볼 리 없었다.

이번 기회에 엘제이의 습관을 어그러트리겠다고 생각한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바짝 다가가 웃었다. 또 눈을 감으며
이번에는 더 짙게 저 입술을 탐할 생각이었다.

푸른 벽안에 산홋빛 입술이 갇혔다. 아제프가 노골적으로 그 부분만 바라보자 엘제이의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엘제이는 눈을 질끈 감고 아제프의 손을 찰싹, 때리며 위기를 벗어났다.

“그런 게 아니라, 아제프 손에 들린 거요. 제 것 아니에요? 그게 왜 아제프에게 있어요?”

아제프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물러났다. 모르는 척 더 놀고 싶었지만, 어젯밤부터 애타게 찾는 걸 보아 돌려줘야


할 듯싶었다.

아제프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으로 엘제이를 올망졸망 바라봤다.

“아아- 혹시 어제 찾던 게 이거 맞아요? 그럴 거 같아서 들고 온 건데.”

“아니, 이게 어떻게 아제프 손에 있죠?”

“제가 잠시 맡아뒀어요. 중요한 거 같은데 아무 곳에나 두면 안 되잖아요.”

주인 허락도 없이 가져간 주제에 아제프는 뻔뻔했다. 천연덕스러운 그의 대답에 엘제이는 순간적으로 제가 그에게
맡겨둔 걸 까먹었던 건지 헷갈렸다.

분명히 자물쇠로 잠가둔 서랍 안에 있었던 종이가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엘제이는 저 손에
종이가 들어간 과정을 파악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읽지도 못할 종이였다. 숨기던 걸 들킨 것 같아 좀 놀라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건네는 종이를 받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읽었어요?”

“네. 위험한 것일지도 모르니 보호자인 제가 읽어야죠. 우리는 연인 사이니, 저는 제이의 보호자. 제이는 제
보호자. 맞죠?”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산뜻하게 말하고 있지만 얼굴을 보아 안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엘제이는 화를 내는 대신 아제프를 제 옆에 앉히고 종이를 읽어 내렸다.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근 20 년 가까이


배워온 언어라 그런지 읽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려운 단어 몇몇이 드문드문 기억나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엘제이의 기대와는 다르게 문장 사냥에 대한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었다. 문장 사냥은 2 부에 대한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녀가 기록한 대부분의 것은 아제프가 변화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책 속 전개가 너무 빨라졌다. 문장 사냥은 한 해가 더 지난 뒤에야 시작될 일이었는데, 1 년이나 빨리


시작되어버렸다.

‘악역으로 살았어야 할 아제프의 존재가 달라져서?’


악마가 탐냈던 영혼은 둘이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 문장 사냥의 시기가 빨라진 건 악마가 그들 중 누구의
영혼도 손에 넣지 못해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타락하는 아제프의 영혼을 감상하며 느긋이 웃었겠지만, 지금의 아제프는 타락하기는커녕 시커멓게
말라붙은 잔여물을 빠르게 털어내고 있었다. 그를 노리는 악마가 초조해지는 건 당연했다.

“하아…….”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엘제이는 한숨을 가볍게 쉬며 종이를 쓸었다.

알체스테는 황제가 되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황제가 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알체스테가 황제가 되는 건 아제프의 죽음 이후란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를 보아 알체스테와 현황은 황좌를 두고 알력다툼을 하는 모양이고, 문장 사냥도 시작되었는데, 이 종이를


읽어도 도와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한숨? 왜 한숨을 쉬지?’

아제프는 손으로 턱을 괴며 진지한 표정의 엘제이를 관찰했다. 흘긋, 까만 글씨를 바라봤지만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르고 해박한 아제프에게 모른다는 건 꽤 낯선 일이었다. 가늘게 좁혀진 벽안이 곧, 샐쭉 휘어졌다.
모르면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제이. 이 글자는 뭐예요?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아제프는 정확히 제 이름을 짚어내며 물었다. 혼자 고뇌에 빠졌던 엘제이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눈을
굴렸다.

“……!”

아제프.

단정하게 쓰인 그의 이름이 보이자 엘제이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 종이에는 단순히 일어날 일만을
기록해둔 건 아니었다. 생각의 흐름대로 쓰인 글이라 일기와 비슷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뇌 반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글에도 그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는데, 주로 아제프의


아름다움에 대한 한탄이었다.

[아제프가 너무 예쁘다. 웃어도 예쁘고, 서늘한 표정을 지어도 예쁘다. 예쁘다. 그만 봐야 하는데 너무 예쁘다.
홀리면 안 되는데 아제프에게 자꾸 홀린다. 아제프. 아제프, 아제프, 하…….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다.]

낯 뜨거워서 눈 뜨고는 보지 못할 글이었다. 아제프는 읽을 수 없을 테지만, 엘제이는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엘제이가 황급히 종이에서 눈을 떼어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기지 못했다.

흐음- 아제프가 작게 신음했다. 꽃물이 든 것처럼 열이 오른 표정은 그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아제프는 보란 듯이 눈웃음을 살랑살랑 쳤다. 곱게 휘어진 눈만큼이나 단정한 손가락이 주르륵 미끄러져 단어
하나를 더 가리켰다.

예쁘다.

아제프가 가리키는 건 그의 얼굴에 대한 엘제이의 감탄이었다.

“이 문단에는 이 글자도 계속 반복해요. 이건 무슨 뜻이에요?”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건 나쁜 짓이에요.”

엘제이가 그의 손에서 종이를 빼 오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황급히 종이를 접으면서도 귀퉁이가 딱딱 맞게 접은


걸 보니 꽤 소중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아- 그거 일기였구나. 일기에 제 이름 잔뜩 적어둔 거예요? 첫 번째로 가리킨 단어가 제 이름이죠? 앞부분에
유독 반복되는 걸 보니 명사 같던데.”

“……!”

정확했다. 엘제이는 몸을 움찔 떨며 그의 짐작이 맞는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

아제프의 벽안에 짙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입꼬리가 절로 스르르 올라갔다. 저 글을 적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저 작은 머리를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다.

“이국의 글자로 내 이름을 적어둔 거예요? 뭐라고 적어둔 거지? 응?”

“……보지 마세요.”

아제프가 슬쩍 종이에 손을 뻗자, 엘제이는 경계심이 큰 고양이처럼 캬르릉거리며 종이를 제 뒤로 숨겼다. 많이


부끄러운지 빨갛게 달아오른 볼에서 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새빨간 사탕을 취하려면, 자극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경계하지 말라는 듯 두 손을 든 아제프가
선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봐도 모르는걸요. 처음 보는 문자체계라, 흥미가 있어요. 자질로 배운 거예요? 어느 나라 언어예요?”

아제프가 언어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괜히 외교부로 간 것이 아니라는 듯 그는 꽤 많은 나라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서적을 읽는 것도 좋아했다.

꾀 많은 여우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가르쳐 달라는 듯 영롱하게 물결치는
벽안이 아이처럼 빛났다.

“우연히…… 배운 거예요. 저도, 모르는 나라 언어예요.”

거짓말이었다. 아제프는 능숙하게 그녀의 거짓말을 판별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언어였다. 그 뒤로도 저 종이를


해독하기 위해 여러 책을 찾아보았지만, 단서는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유목민의 글자일지도 몰랐다. 혹은, 엘제이가 본다는 미래의 언어이거나. 그렇다면, 저 종이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배워야 했다.

아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제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럼 그 글자, 저에게 알려줄래요? 제이가 제 선생님이 되어줘요. 응?”

어리광을 부리듯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한글의 시작은 가나다라에서부터였다. 아제프는 뭐든
곧잘 배우기는 했으나, 다 배우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터였다.

‘아제프가 모르는 곳에 이걸 다시 꼭꼭 숨겨두면 되지 않을까? 나무 밑에 묻는다거나.’

엘제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귀신같은 남자를 속이려면 고작 나무 밑에 묻는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아제프는 절벽


끝에 걸어놓은 종이도 능히 구해올 사람이었다.

‘태울까?’

엘제이는 고민하며 종이를 내려다봤다. 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못 태울 것도 없었다. 이


일기에는 흘러갈 책 속 전개와, 아제프에 대한 열렬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이 내용을 알아본다면 물이 고인
접시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역시, 아제프가 봐도 괜찮을 글만 옮겨 적고 태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토록 궁금해 하는데 거절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 엘제이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그럼요. 저는 여러 언어를 배우는 걸 좋아해요. 저 정말 흥미가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제이만 괜찮다면
알려줄래요?”

물론, 흥미가 있었다. 엘제이가 적어둔 일기에. 아제프는 대체 무슨 글을 써놨기에 얼굴이 저렇게 달아올랐을까
고민하며 눈을 샐샐 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엘제이의 일기를 독파하리라 다짐하는 눈이 말갛게 반들거렸다.

“그럼, 이건 다신 안 읽겠다고 약속해요. 다른 사람이 제 일기를 보는 건 부끄럽단 말이에요.”

“좋아요. 그 종이에 적힌 글은 절대 안 본다고 약속할게요.”

아제프는 엘제이가 가리키는 종이를 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저 종이는 안 볼
생각이었다. 아제프에게는 이미 저것을 베낀 필사본이 있었다.

필사본의 존재를 모르는 엘제이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저렇게 말해 놓고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언어를 다 배우기 전에 글을 옮겨 쓰면 되는 일이었다.

“좋아요. 아제프 시간 날 때, 알려줄게요.”

“정말? 고마워요, 제이.”

아제프는 기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엘제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엘제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비밀에 다가갈 열쇠를, 손에 넣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6 화
116

지금의 티아세 家는 철옹성 같았다. 낯선 이의 출입은 허락하지 않았고, 조금의 정보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아이젠은 두 딸이 도작하기 전에 물갈이하듯 고용인들을 또 한 번 점검했다. 그 결과 티아세 家에서 오래 일했고,


곤란한 사정이 없는 이들만 저택에 남았다.

사용인들을 함부로 해고한 건 아니지만, 아이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은 영지로 내려가거나 다른 일을 맡게


되었다. 원래도 결벽증처럼 사람 관리를 철저하게 한 터라, 그렇게 많은 인원이 빠지지는 않았다.

티아세 家가 철옹성으로 변한 것은 아제프와 알체스테의 탓이 컸다. 알체스테가 이끄는 기사단과 아제프의


사병들은 티아세 家 곳곳에 배치되었다. 무家가 아닌 탓에 무력적인 면에는 약했던 티아세 家는 조금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게 단단해졌다.

황제는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아이젠과 알체스테 때문에 날이 바짝 섰다. 아이젠도 이 행동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짐작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두 진영이 서로를 엿보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이 전쟁이 그리 오래가지 않고 승자를
가리게 될 거라는 게 모두의 짐작이었다.

아이젠은 세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듯,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티아세 家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수도에 돌아온 이상, 계속 티아세 家에만 머물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나란히 출궁과 퇴궁을 함께했다.

황궁에서 일을 보고 온 세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제일 먼저 내린 아제프는 알체스테에게는 신경도 안 쓴 채 아이젠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아이젠이 두 번째로


내리자 아제프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공작님,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여름에 가까워지는 터라 해가 일찍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밤이 몰려오는 듯 하늘은 주홍빛으로 울렁였다.


아이젠은 지는 태양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 이만 들어가지.”

정문 앞에서 내린 세 사람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걸어갔다. 잘 관리된 정원의 바닥이 푹신푹신하게
짓눌리고 세 사람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제프는 내심 오늘도 알체스테가 눈치 없이 굴기를 바라며 눈을 굴렸다. 알체스테의 손아귀에 붙잡힌 귀여운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아제프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오늘도 눈치 없이 굴어줄 모양이었다.

“오늘은 좀 늦게 돌아왔으니, 바로 식사하러 가야겠네요. 기다리는 사람은 배가 고플지도 몰라요.”

“그렇지. 오늘은 회의가 좀 길어진 편이니. 그래서 그런지 어깨가 좀 뻐근하군.”

아제프는 노골적으로 아이젠만 바라보며 말을 붙였고, 말재주가 없는 알체스테는 점점 소외되기 시작했다.


알체스테는 없는 눈치를 쥐어짜 아이젠의 얼굴을 흘긋 바라봤다. 오늘도 어제처럼 행동해도 될지 가늠하는 듯했다.
알체스테가 눈치 없이 굴수록 아제프는 이득이었다. 아제프는 속으로 알체스테를 응원하며 웃었다.

알체스테는 고민을 끝냈다. 우직한 남자는 미래의 장인보다는 제 연인 쪽으로 마음이 기운 듯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알체스테는 앙증맞은 색감의 종이봉투를 소중히 끌어안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아이젠은 엘리사가 좋아하는
제과점의 마크가 찍힌 봉투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아제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티를 낸다면 지금까지의 눈치싸움이 소용없는 일이 되기에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저렇게 홀라당 가버리다니, 같이 가자는 말도 없고 너무하네요. 공작님도 엘리사 양이 보고 싶으실 텐데요.”

아제프는 안타깝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종알거렸다.

엘제이는 행동이 자유로우니 오늘 아침에도 식사하며 봤지만, 엘리사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알체스테가 엘리사
방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잦아 둘 사이에 끼기 멋쩍은 아이젠은 쉽게 엘리사를 찾지 못하는 편이었다.

“크흠.”

아이젠은 헛기침하며 마땅찮음을 드러냈다. 아제프는 언짢은 기색인 아이젠을 바라보고 이때다 싶어 속살거렸다.

“어휴. 저렇게 들어가면 또 한참 무소식일 텐데요. 엘리사 양이 잠들기 전에는 안 나올 테니, 오늘도 공작님은
따님의 잠든 얼굴만 보셔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엘제이 방에 한 번 들어가면 감감무소식인 건 아제프도 똑같은 주제에, 그는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듯


웃었다.

아이젠은 자신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딸들의 방을 제 방처럼 들락거리는 두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둘을 집에 들인 걸 매우 후회하는 중이었다.

알체스테와 달리 아이젠의 속내를 빠르게 파악한 아제프는 그 모든 화살을 알체스테에게로 돌리는 중이었다.

아이젠은 아제프가 여우처럼 알체스테 흉을 본다는 걸 알아도 아이젠의 마음속에는 알체스테에 대한 못마땅함이
쌓여가는 중이었다.

“저녁에 가면, 리사는 또 잠이 들었겠지.”

아이젠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노기 서린 얼굴이 풀 죽은 채 흔들렸다. 알체스테는 엘리사를 어찌나 잘


재우는지 아이젠이 찾아가면 엘리사는 숨만 고롱고롱 쉬는 고롱이가 되어 있기 일쑤였다.

“저야 제이와 함께 공부를 하는 중이라 그런 거지만, 황자님은 너무 잦은 거 같아요.”

“잦기는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이젠이 뾰족한 눈으로 아제프를 흘겼다. 아제프는 살가운 태도로 그의 어깨를 조물거리며 웃었다.

“저는 저녁에 제이 데리고 식사하러 가잖아요. 황자님이랑은 다르죠.”


“그렇지. 제이는 아침에도 보고, 저녁에도 보는데 리사는…… 눈 뜬 얼굴을 본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군.”

“이런……. 오늘은 그냥 확 올라가 보세요. 사실, 엘리사 양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방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니 티가 안 나는 거지, 지금쯤 공작님을 찾을 게 분명해요.”

아제프는 세뇌하듯 아이젠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아이젠의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아제프는
아이젠의 어깨를 쭉쭉 펴주며 그의 등을 넌지시 밀었다.

공들인 목소리가 아이젠의 귓가를 간질였다. 아이젠은 내심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내가 끼는 것 같아 함부로 가기가 좀, 주저된다네.”

“에이- 설마요. 저는 공작님이랑 제이랑 셋이서 알콩달콩 식사하는 게 너무 좋은걸요. 황자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제프는 어느 때나 엘제이와 단둘이 있는 게 가장 좋았지만, 매끄러운 혀는 유려한 획을 그었다.

아이젠도 아제프의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짐작했으나, 지금의 그는 저런 말을 듣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람은
원하는 대로 믿는 동물인지라, 아이젠은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그럼요. 세 분이서 정답게 식사도 하고, 공작님은 엘리사 양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럼 좋겠네요. 어서 올라가
보세요. 엘리사 양이 분명 기다릴 거예요.”

아제프는 더욱 살뜰하게 아이젠의 어깨를 조물거렸다. 그리고는 보란 듯 커튼이 쳐진 엘리사의 방을 흘긋거리며,


웃었다.

아이젠도 아제프의 시선을 따라 엘리사 방 창문을 올려봤다. 그는 벌써 삼 일 가량을 알체스테에게 딸을 양보했다.


3 일이나 참았으니 오늘쯤 올라가보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을 끝낸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옮겼다.

“흠. 그럼, 오늘은 리사 곁에 있을 테니, 제이는 자네에게 좀 부탁하겠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이가 저녁 거르지 않도록 제가 잘 챙길게요.”

원하는 걸 얻어낸 아제프가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여러모로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잊은 게 하나 있군.”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제프는 아이젠이 흘긋 돌아보자 웃음기를 지우고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담백하고 단정한 얼굴에
아이젠은 따뜻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없다고 너무 오래 있지는 말게.”

온화하게 웃는 입매는 무척 부드러웠지만, 하듯 노려보는 눈은 꽤 매서웠다. 알체스테는 은근히 고지식해서


밤에는 손님방에서 꼬박꼬박 잤지만, 아제프는 아니었다.
아이젠은 엘제이가 악몽을 꾼다는 핑계로 종종 엘제이 방에서 잠드는 아제프가 내심 못마땅했다. 최근 들어서는
엘제이의 악몽도 멈추었기에 아이젠은 웃으며 했다. 눈치가 없는 알체스테라면 알아듣지 못할 은근한 였다.

‘만만하지가 않군.’

아제프는 입안을 깨물며 웃었다. 순하게 말똥거리는 눈매는 아이젠의 의도를 모른다는 듯 부드럽기만 했다.

“그럼요. 늦지 않게 재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흐음. 그럼, 나도 이만 올라가 보겠네.”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제프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아이젠을 배웅했다. 평소보다 빠르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내심
아제프가 부추겨준 게 좋았던 듯했다. 아제프의 속내가 복잡하게 얽혔다.

‘저 모습이, 정상인 거겠지.’

아제프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반듯하게 들었다. 기쁨이 흐르는 아이젠의 뒷모습이 망막에 박혔다. 딸들과 같은
부드러운 밀색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엘제이와 저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괜한 간섭도 사양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묘하게 싫지 않았다. 저 남자가 엘제이를 따스하게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부드러운 색감의 눈이 부정을 담아 휘어지는 모습을 보면 꽤, 기꺼웠던 것 같다.

엘제이가 아이젠을 닮은 거겠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와 비슷한 저 색감에 괜히 마음이 뭉클했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보이지 않아 엘제이는 막 창문을 열어본 참이었다. 엘제이는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엘제이는 먼 곳에 우뚝 서 있는 아제프를 발견했지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엘제이가 내다본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엘제이는 조금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제프, 거기서 뭐 해요?”

“아- 제이. 잘 있었어요? 이제 막 들어가려고 했어요.”

아제프는 다정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엘제이 앞에
설 수 있었다. 아제프는 정문으로 들어가려는 듯 엘제이를 향해 눈짓했다.

엘제이는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잘 다녀왔어요?”

아제프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잘 다녀왔어요? 묻는 한마디가 귓가에 내려앉아 떨어지지 않았다. 밀려드는
충동에 아제프는 그대로 뒤돌아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아제프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제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제프는 기꺼이
엘제이의 물음에 답했다.

“다녀왔어요. 제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7 화
117

아제프는 어리광을 부리듯 엘제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코끝을 뭉근하게 울리는 엘제이 특유의 살결 냄새가
너무 좋았다. 그는 제 품에 안긴 봄꽃 향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에 빠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엘제이는 고개를 갸우뚱 흔들며 아제프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 듯한데, 피곤한지 안색이 조금 안 좋은 것도


같았다. 엘제이는 그의 이마에 손등을 올리고 가볍게 열을 재봤다. 다행히 아픈 건 아닌지 열은 없었다.

“힘든 일 있었어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조금, 피곤한 것 같아요. 계속 그렇게 해줄래요?”

아제프는 떨어지려는 엘제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엘제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결 좋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손 안을 빠져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엘제이의 방으로 직접 통하는 창문이라 기사나 사병들이 꽤 몰려 있었지만, 그들은 눈치 빠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아제프가 돌아온 이상 엘제이의 신변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고, 괜히 그곳에 있다가 신경 예민한 남자의 째림을
받지 않으려면 미리 도망가는 게 좋았다.

엘제이는 천천히 물러가는 그들을 보며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남세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필요하다는 듯 매달리는 그가 싫지 않았다.

“피곤하면, 안에 들어와서 주무시지. 찬바람 계속 쐬고 있는 것도 안 좋을 텐데요. 봄이라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크잖아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저 오늘, 그 방에서 못 자요.”

아제프가 칭얼거리듯 작게 웅얼거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맹수는 제 연인 앞에 배를 납작 드러내고 기회를


노렸다.

“네? 왜요? 평소에는 잘 주무셨잖아요.”

역시나, 아제프가 원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제프는 실실 흘러나오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연약한 새끼 양처럼
어깨를 좁혔다.

“아무래도, 공작님 눈치가 보이잖아요. 제가 어제도 이 방에서 잔 걸 아시는 눈치채셔서 오늘은 제이 혼자


자야겠어요.”
“아버지가 언짢아하실 수 있죠. 음……. 그러면, 몰래 들어오는 건 어때요?”

고민하던 엘제이가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엘제이가 먼저 같이 자자고 말하는 날은 흔치


않았다. 아제프는 배 속 깊이 차오르는 포만감을 느끼며 나른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몰래?”

“네. 이따가 새벽이 되면 아무도 몰래 살짝, 들어오면 되잖아요. 저도 아제프랑 같이 자고 싶으니, 이건 둘만의
비밀로 해요.”

“……그럴까요?”

아제프는 몹시 망설여진다는 듯 뜸을 들였다. 그는 엘제이가 적극적으로 제 품을 내어주는 게 좋았다. 아제프가


고개를 들고 애달픈 눈으로 엘제이를 보자 그녀는 또 홀라당 넘어갔다.

“그럼요. 일단 어서 들어와요.”

엘제이가 창문에서 몸을 반쯤 비키며 속삭였다. 어느새 엘제이도 아제프가 창문으로 들락날락하는 걸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아제프는 창문에 손을 짚고 능숙하게 그곳을 타고 올랐다. 휙- 넘어온 몸이 엘제이의 방에 발을 붙이자


내려다봤던 남자의 얼굴이 저 높이 치솟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둘의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서 흔들렸다.

“씻기 전에, 식사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되나요?”

엘제이는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시간이 꽤 늦었으니 그는 배가 고픈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는 시아를 불러 식사를 들이게 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식사 먼저, 읍!”

아제프는 엘제이의 대답만 기다렸다는 듯, 급하게 그녀의 숨결을 탐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이 숨결이 그리워서, 이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이 사람이 미칠 만큼 보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달콤한 숨결을 욕심껏 가로채자, 곤두선 신경이 부드럽게 풀렸다. 뇌 한 곳을 콕콕 쑤시며 그의 신경을 괴롭혔던
감각도 둔해졌다.

정해진 수순대로 날카롭고 과민하게 반응했어야 할 아제프를, 엘제이가 바꿔놓았다. 세상 모두를 싫어하고
혐오했을 남자에게 새로운 세상이 생겼다.

아제프는 그 끝을 향해, 악역의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아제프는 배고픔보다 급했던 다른 쪽의 갈급함을 먼저 채우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스테이크를 가져가 잘게 썰어주고, 그녀가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을 느긋이 감상했다.


아이젠이 없는 둘만의 식사는 꽤 오랜만이기에, 아제프는 작정이라도 한 듯 엘제이의 얼굴만 바라봤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그의 시선에 하얀 두 볼이 빨개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제프는 안 먹어요? 저만 먹는 것 같아요.”

“제이가 한입 먹을 때, 저는 두세 입을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도 돼요. 식사야 아침에도, 점심에도 하지만 당신은
늘 새롭잖아요. 조금씩 다 달라.”

아제프는 한참을 더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씹는 속도가 느려지자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려주었다.


체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답지 않게 양보한 것이다.

아제프가 시선을 떼어내자 식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보기보다 꽤 많이 먹는 아제프는 앞서 말한 대로


엘제이보다 훨씬 빠르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칼질이 우아하다는 건 자주 봐도 꽤 신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낸 뒤, 곧장 엘제이 방에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적어 놓은 글자 밑에


자신의 서체로 글을 써내려갔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단정한 글씨를 바라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글씨가 어쩜 이렇게 예쁘죠? 처음에는 좀 삐뚤삐뚤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동그라미와 작대기밖에 없는 문자체계에서, 글씨가 못날 게 있나요. 못하는 사람이 천치죠.”

아제프는 별 감흥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수십 년간 한글을 써도 지렁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돌을 들고 달려올 소리였다.

아제프는 가나다라 같은 건 겨우 수십 분 만에 숙지했다. 언어에 유독 강한 그의 능력에 경악하던 엘제이는


자음과 모음을 모조리 써줬는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우쳤다.

무시무시한 속도에 엘제이는 슬슬 제 종이가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아제프는 쉬운 단어를 익히고 있었고,
엘제이는 아제프가 황궁에 간 사이 틈틈이 종이의 글을 옮겨 적고 있었다.

종이에 남겨놓은 찬사를 생각하자, 몸이 꼬물꼬물 말렸다. 엘제이는 혼자서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아제프는 연체동물처럼 꼬물거리는 엘제이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무슨 생각해요? 내 생각?”

“……아제프는 그거 다 하고 말하기로, 벌써 다 했어요?”

엘제이는 까만 글자로 빽빽해진 종이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비교적 쉬운 단어인 엄마, 아빠, 우리, 가족,
이런 글자로 도배된 종이는 단정한 글자로 가득했다.

아제프는 실수란 걸 하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걸 모를 수는 있어도 한 번 가르쳐 준 건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제프는 성인이니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보다 진도가 쭉쭉 나가는 건 당연했지만, 이쯤 되자 그가 얼마 만에


한글을 다 배울지 궁금해졌다.
‘나는 점점 잊어 가는데, 나중에 아제프가 더 잘하는 건 아니겠지?’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엘제이는 제 지식을 배우다 못해 가로채는 아제프를 뾰로통하게
바라봤다.

아제프는 그런 엘제이를 모른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이 다음은 뭐 배워요? 받아쓰기 할까요?”

“아뇨. 몇 개 더 배운 뒤에 해요.”

엘제이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어려운 단어를 한 번에 알려주면 아제프라도 헷갈릴 것 같았다. 엘제이는
전투적으로 단어를 써내려갔다.

아제프는 종이를 가득 채울 기세로 글자를 쓰는 엘제이를 보며 입꼬리를 아래로 당겼다.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인 듯싶었다. 저 생물체는 도대체 무얼 믿고 저렇게 깜찍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손에 턱을 괸 아제프의 얼굴이 나른하게 풀렸다.

‘내가 쓸 자리도 없이 마구잡이군. 뭐 때문에 골이 난 거지?’

휘휘- 소리를 내며 까맣게 잉크를 토해내는 펜대가 유려하게 움직였다. 아제프는 고민하며 엘제이를 관찰했다.

살짝 부푼 뺨이 몽글몽글한 흰 빵 같아 마음을 빼앗기고, 도톰하게 부푼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자 눈을 빼앗겼다.


아제프는 본래의 목적을 잊은 채 엘제이를 감상했다.

미끄러지듯 흐르던 펜대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자, 다 됐어요.”

“단어 길이가 길어진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이제 이 정도 단어를 배울 때가 되었어요. 뜻을 하나하나 말해줄 테니, 잘 들어봐요.”

엘제이는 차마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한두 글자로 이루어진 그 전의 글자에 비해 확실히 길어졌기
때문이다.

아제프는 움찔 떨리는 어깨를 보며 짙게 웃었다. 그는 그저 엘제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네. 열심히 배울게요.”

엘제이는 작게 헛기침하며 단어의 뜻을 나열했다. 물 흐르듯 쭉 말해줘도 아제프는 쉽게 외우기 때문에 굳이 두


번 언급해줄 필요는 없었다.

“나뭇가지, 말괄량이, 속삭임,”

“속삭임? 이 단어의 뜻이 속삭임이에요?”

아제프가 그 단어를 손으로 콕 집으며 되물었다. 그가 되묻는 일은 흔하지 않았기에 즉시 말을 멈춘 엘제이는


뭐가 문제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네. 왜 그래요?”

“음……. 그냥, 그 단어가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하면 무슨 뜻이에요?”

아제프는 말을 뭉그러트리며 속삭임, 세 글자 중 뒤의 두 글자를 가렸다. 엘제이는 기다란 검지와 중지가 누른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속. 속이라는 뜻이에요.”

“속? 물체의 안쪽 부분을 가리키는 속 말인가요?”

“네. 그 속이요.”

“그렇군요.”

아제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바꾸지 않고 머리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능청스러운 표정에 별
의심을 못 한 엘제이는 다시 단어들을 가리키며 뜻을 읊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가 엘제이에게 한글을 배운 건 엘제이가 쓴 글
때문이었다. 그로서도 모르는 언어로 쓰인 글을 통째로 다 외울 수는 없었기에, 간간이 필사본은 들여다봤다.

물론, 다 외울 수는 없어도 일부 반복되는 단어 정도야 외워뒀다.

아제프는 조금 전, ‘책’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엘제이의 글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던 글자였다. ‘책’이란


단어를 해석하자 그 옆에 단정히 쓰인 한 글자가 유난히 거슬렸다.

아제프는, 오늘에서야 그 단어의 뜻을 알았다.

책 속.

‘책 속이라, 무슨 의미일까?’

엘제이를 바라보는 푸른 눈에 짙은 의문이 똑, 떨어져 번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8 화
118

겨우 며칠 배운 걸로는 도무지 해독할 수 없었다. 엘제이는 그 글을 일기 식으로 적었다고 했으니 단순히 책


속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말을 적었을 수도 있다.

단순한 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외지의 언어를 써 가며 굳이 숨기려고 든 게 의심스러웠지만, 아제프의 상식으로는


더 이상의 추측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제프는 벽 한편에 길게 늘어져 있는 책장을 눈으로 쭉 훑었다. 고서가 여러 권 꽂혀 있기도 했고, 한눈에 봐도
수준 높은 책들이었다.

‘단순히, 책에서 배운 지식을 기록해둔 건가? 일기에?’


고민하는 아제프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자신이 써 놓은 단어를 줄줄 읊어주던 엘제이는 아제프가 집중하지 않는 것 같자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아제프, 무슨 생각 해요?”

“피곤한 것 같아요. 오늘은 유독 공부하기가 싫네요.”

아제프가 피곤하다고 칭얼거리자 엘제이의 눈꼬리가 유순하게 내려왔다. 엘제이도 아버지를 도와 여러 업무를
했지만, 외교부 장관인 아제프만큼은 아닐 터였다. 온종일 일과에 시달렸을 텐데, 또 공부라니 지긋지긋할 만도
했다.

엘제이는 아제프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의 손을 붙잡고 침대로 걸어갔다.

“피곤해요? 여기 누워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저 혼날 거예요.”

아제프는 말로는 안 된다고 중얼거렸지만, 행동은 재빨랐다. 아제프의 말이 끝날 때쯤, 그의 머리는 이미


엘제이의 허벅지에 기대어 있었다.

엘제이는 말과 행동이 다른 그를 웃으며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 아제프의 머리카락이 솔솔 쓸어 넘겨졌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요령 중 하나죠. 좀 이따가 일어날 테니, 재우면 안 돼요.”

가만가만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다정해서 잠이 몰려왔다. 아제프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으며 속삭였지만,
그의 얼굴은 이대로 잠들어도 좋다는 듯 평온했다.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린가요? 아버지가 물으면 아제프는 먼저 나갔다고 말해줄게요. 피곤하면 걱정하지 말고


자요.”

“공작님은 의심이 많으셔서 쉽게 속여 넘기기 힘들걸요. 제이가 먼저 거짓말하겠다고 말하다니, 저 때문에 나쁜


물이 든 건 아닐지 걱정이에요.”

“서로서로 닮아가는 거죠. 저는 아제프를, 아제프는 저를. 서로에게 물드는 게 나쁘지 않아요. 저도 아제프
덕분에 요령이 좀 생기는 것 같고요.”

나른하게 늘어진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엘제이가 요령 있게 구는 거면 세상 모든 사람이 여우같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아제프는 속닥속닥 장난치는 지금이 즐거웠다. 이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다. 팔랑, 눈을 뜨자 시야에 기다란
책장이 들어왔다.

아제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훑어보며 장난치듯 속삭였다.

“제이, 책 많이 읽어요? 책장이 엄청 큰데? 제이 속도를 보면, 과연 저 책을 다 읽었을지 의문이 드네요.”

“네? 저도 책 많이 읽어요! 저것들도 다 한 번씩 읽은 거예요.”


“언제? 최근에야 다 읽었죠?”

“설마요. 어렸을 때 다 읽은 것들이에요. 오래전에 읽어서, 책 내용도 다 가물가물한걸요!”

아제프에 놀림에 발끈한 엘제이가 조잘조잘 이야기를 털어놨다. 오래전에 읽었다는 말에 아제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눈을 반짝 뜬 아제프는 씩씩거리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샐샐 웃었다.

“그럼 최근에는 마음의 양식을 쌓는 일을, 게을리 했어요?”

“그건 게으른 게 아니라, 다른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미뤄둔 거예요. 대신 아버지를 도왔으니 게으름피운


거라고 보기는 어렵죠.”

엘제이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하얀 손가락이 하나하나 접히는 모습이
어여뻤지만, 아제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종이의 상태를 보건대, 그 글은 최근에야 적은 것이다. 그게 단순한 기록물이거나 일기라면 엘제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찾을 이유도 없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미궁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아제프는 ‘책 속’이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하며 웃었다.

‘이런 식이면, 점점 더 캐내고 싶잖아.’

종알종알 말하던 엘제이는 매끈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나붓하게 내려앉은 속눈썹 위로
긴 조명이 미끄러지듯 흘렀다.

‘얼굴이 반짠반짝한 걸 보니,’

엘제이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괴롭혔다.

“아제프. 못된 생각 했죠?”

“제이, 저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제가 제이 곁에 누워 그럴 리 없잖아요.”

아제프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번쩍 뜨고 엘제이를 바라봤다. 강하게 호소하는 눈빛에 확신했던 마음이 긴가민가
흔들렸다. 엘제이는 고민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꼭 못된 생각 할 때 얼굴인데?”

“너무해요. 저 상처받았어요.”

“……삐졌어요?”

엘제이는 뒤늦게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볼을 콕콕 건드렸지만, 아제프는 잠이라도 든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엘제이가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아제프가 눈을 살짝 떴다.

눈꺼풀에 가려졌던 파란 눈은 의뭉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

황제, 에이든은 커다란 황금색 방 안에 홀로 앉아 와인을 마셨다. 어둡게 곱아진 어깨는 음침하게 내려왔고,
표정 없는 서늘한 얼굴에는 독기가 서렸다.

알체스테는 더는 황제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무시로 일관했다. 원래도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얄팍하게 남았던 부친을 향한 그리움마저 완전히 털어낸 듯 에이든을 바라보는 알체스테의 눈에는 별 감정이
없었다.

에이든은 무얼 지시하든 무딘 얼굴로 일관하던 알체스테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아이젠이 뭐라고 물어보자
살짝 미소 짓던 얼굴도 떠올랐다.

‘너도 실비아처럼, 또 그렇게 나를…….’

버릴 수는 있어도 버림받을 수는 없었다.

이기심으로 점철된 눈에 새빨간 기운이 몰려들었다. 에이든은 최근 들어 뇌가 쪼개질 것처럼 머리가 아픈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이성이 흐려졌고, 기억이 증발한 듯 머리가 텅텅 비워졌다.

에이든은 이성을 흔드는 감각에 몸서리를 치며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쾅! 와장창!

책상 위에 놓인 술병과 술잔이 거친 손길에 휩쓸려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뚝뚝 고인 와인이 피처럼 묽게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찰랑, 까드득.

물 고인 바닥에 닿은 발이 바닥에 엎어진 유리를 자근자근 밟으며 걸어왔다. 지켈리온은 와장창 부서진 와인 병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지켈리온, 당신은 왜 이제야 온 거지? 요 며칠간 도대체 뭘 한 거냐!”

성마른 음색이 다급하게 쏟아졌다. 에이든은 커지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며 여유로워 보이는 지켈리온을
노려봤다.

“아아- 그대, 뭘 그렇게 급하게 구나. 성질머리하고는. 내가 마실 와인도 다 사라졌군.”

“나는 당신에게, 왜 이제야 온 거냐고 물었다.”

에이든이 성난 음색으로 괄괄 쏘아붙였다.

지켈리온이 에이든 따위를 무서워할 리 없었다. 에이든은 그저 힘을 잃어가는 이무기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용은
될 수 없었던 천하고 추악한 놈을 내심 비웃으면 비웃었지 두려워 할 일은 절대 없었던 거다.

지켈리온은 단단한 복부를 손으로 슬슬 쓸어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발갛게 달뜬 눈이 역겨웠다.

“잔뜩 먹어 배부르니, 흡수할 시간이 있어야지. 그대는 모르겠지. 신의 문장이라는 그 파편 쪼가리가 새까맣게
물들 때, 내게 얼마나 큰 쾌락을 주는지.”

괜한 심술로 문장을 뽑는 건 아니었다. 신의 문장이 빛을 잃을 때, 지켈리온은 힘을 받고 쾌락을 얻었다.


지켈리온은 율법을 거스른 가장 극악한 존재였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거부하는 배덕한 존재였으니, 마물의
몸이라도 악마의 자아를 공유하는 한 이 세계에서 밀려날 위험이 있었다.

지켈리온이 신의 문장을 처음 탐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의 파편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했지만, 그만큼 세계에 동화되어 봉인을 풀 수 있었다. 악마의 힘이 지켈리온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곧, 자유로워진다.’

지켈리온은 실컷 먹어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포만감마저 즐기며 배를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지켈리온이


노골적으로 배를 쓸자 에이든의 눈, 코, 입으로 까만 기운이 스며들었다.

얼굴 전체가 까만 구름으로 뒤덮인 에이든은 배에 문장이 있었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실비아…….”

“배에 있는 문장은 한 번도 뽑아본 적 없는데, 분명 황홀했겠지? 내장을 주룩주룩 흘리며 울부짖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나? 그대, 항상 그 문장을 뽑고 싶었겠지?”

뽑아내고 싶었다. 살을 도려내 얇게 저미어 그 짝이라는 놈의 얼굴에 던져주고 싶었다.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내장을 주룩주룩 쏟으며 살려달라고 제게 매달렸다면, 얼마나 황홀했을까.

에이든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그는 새빨갛게 달뜬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실비아. 실비아. 실비아.”

“크흑, 하하하하!”

지켈리온은 무척 우스운 걸 봤다는 듯 손뼉을 짝짝 치며 웃었다. 벌레처럼 추악한 것이 꿈틀꿈틀 바닥을 기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이십 년간 공들여 망가트려 놓은 보람이 있었다.

알체스테가 했던 말에 충격이 컸는지, 에이든의 이성이 모래성처럼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켈리온은 그간
에이든에게 안 들른 게 아니었다. 에이든이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에이든은 아마 지금의 행동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아집과 자존심만 남아 의식적으로 지금의 행동을 기억하기를
거부할 테니까.

지켈리온은 손을 까딱였다. 에이든이 말 잘 듣는 개처럼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지켈리온의 발아래 납작 엎드렸다.

“실비아. 실비아. 실비아.”

에이든의 입술이 기계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댔다.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하게 풀린 눈에는 새빨간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지켈리온은 고개를 숙여 에이든의 귀에 속삭였다.

“여자의 것은 틀렸지만, 다른 건 남아 있지.”

“다른 것?”

“그래.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아직 살아 있지 않나.”


지켈리온이 에이든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쥐었다. 에이든의 얼굴로 새까만 기운이 콸콸콸, 쏟아져 스며들었다.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독기에 에이든은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경련했다.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려
얼굴을 더럽혔다.

“끄윽! 끅!”

“크하하하하!”

지켈리온은 끅끅 숨을 몰아쉬는 목구멍 안에도 독기를 잔뜩 넣어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바르작거리는 인간을 보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은발이 물결처럼 흐르던 여자의 형상 위로 다 자란 아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에이든은 혼곤하게 풀린 입술을
달싹여 알체스테를 불렀다.

“알체스테. 알체스테, 내 아들……. 알체스테.”

“그래. 다음에 보면 장갑을 벗겨보게. 볼 수 있을 거야. 그대가 그리는 여자와 똑 닮은 증표를. 그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생겼거든. 그대는, 어떻게 할 거지?”

지켈리온은 에이든의 귓가에 죄악을 속삭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19 화
119

출처를 알 수 없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이랬다.

엘리사 티아세가 아나이샤 뿌리로 만든 마비독에 당했다. 그녀에게 마비독을 먹인 건 주술사다.

단 두 줄로 시작된 소문은 입과 입을 거치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람들은 주술사가 엘리사 티아세를 공격한
이유를 가장 궁금해 했다. 최근 일어난 사건을 살펴볼 때, 엘리사 티아세가 문장 보유자기 때문에 그렇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바깥 활동이 잦던 엘리사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를 향한 온갖 소문이 들끓는 지금도


그랬다. 신빙성은 점차 더해지고, 사람들은 주술사가 건넨 마비독에 엘리사가 당했다는 소문을 믿게 되었다.

황궁에서 서신이 날아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하고 저택을 나서는 세 남자를 황궁 소속 시종이 붙들었다.

“알체스테 황자님, 전하께 보내는 폐하의 서신입니다. 황자님께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간단한 축언을 읊은 시종은 그걸로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아이젠은 폭탄처럼 갑작스럽게 떨어진 서신을 알 수 없는 눈길로 바라봤다. 워낙 제멋대로 구는 일이 잦았으니,


저게 시한폭탄 같았다. 아이젠은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 머리가 아팠다.
“저는 벌써 머리가 아프군요. 그분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걸 즐기는 분이시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손에 휘둘리는 사람을 보기 좋아하는 거지. 부황의 서신이라……. 내가 처음 이 서신을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오늘이 세 번째군.”

“두 번째는 황도로 돌아오라는 서신일 테고, 첫 서신이라면 설마,”

“그래. 변방에 내려가라는 말이 일방적으로 써 있었지. 겨우 글을 뗀 나이였는데, 마치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내려온 서신에 울며 부황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알체스테는 꺼림칙한 얼굴로 서신을 내려다봤다. 그런 중요한 일도 대면해서 말하지 않고 고작 편지로 전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지껄여두었을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아제프는 흥미로운 눈으로 황금색 편지봉투를 관찰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피한다고 달라집니까? 어차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인데, 즐기기라도 해야죠. 읽어나 보고 판단하죠.”

“그렇군.”

알체스테도 무덤덤한 얼굴로 동의하며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뜯었다. 툭, 하고 힘없이 뜯어진 밀랍이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밀랍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불경한 짓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짧은 문장을 금세 읽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의심하며 미간을 좁혔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군.”

“중앙회의에 참석하라…….”

서신을 훔쳐본 아제프가 말끝을 길게 늘어트렸다. 어떤 인사말이나 축언도 없이 그저 뜻만 전달한 서신의 필체는
황제의 것이 맞았다. 아제프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지, 그의 얼굴도 조금 찌푸려졌다.

“갑작스럽군.”

“중앙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황족은 단 두 명입니다. 황제와, 황태자.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아이젠은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중앙회의는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각 부의 장관을 맡고 있는 고위귀족과 황제가


참여하여 직접 결정을 내리고 이 회의에서 결정한 바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권력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회의이기에, 황제와 황태자를 제외한 황족들은 당연히 참여가 제한되었다. 황권을
뒤흔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되지 못한 황족이 다스리는 영지에 급박한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그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부르는 경우가 있었고, 황제가 직언을 통해 황족을 불러들이는 권한을 가지기도 했다.

“루드비히 전하도 불리지 못했던 회의인데,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제프가 비꼬듯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종이를 살폈다. 서신에는 정말 그 짤막한 한 줄이 다였다.

현황 에이든은 많이 이들이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라고 여겼던 루드비히조차 중앙회의에 부른 적이 없었다. 아들인


알체스테를 부른다는 건 그의 황태자 지위를 인정한다는 말이 되는데, 알체스테에게 악감정이 있다는 듯 구는
황제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의도는 아닐 것 같군. 서신을 보낸 적 없는데 감히 저 무엄한 것이 멋대로 회장 안에 발을 들였다며


쫓아내려는 건가?”

“설마 그런 시시한 종류의 것일 리가요. 이 서신이 있으니,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아이젠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칙사를 보내 말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증거까지 손에
들려줬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닐 것이다.

“부딪쳐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셋 다 중앙회의에 묶어두려는 수작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황자님까지 회의에


참석하시면 이 집이 텅텅 비게 되니.”

티아세 家와 황궁의 거리는 꽤 가까운 편이었다. 자질을 사용하면 금방 달려올 수 있는 거리였기에 알체스테와
아제프는 함께 황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중앙회의는 달랐다. 회의의 입퇴실은 황제의 허락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켈리온은 자유롭게 움직일 테니, 그런 의도일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내 움직임을 막으려는 생각이거나.”

알체스테가 굳이 할 일 없는 황궁을 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간 알체스테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거나, 황궁을 뒤지는 일을 했다.

알체스테는 지켈리온의 흔적을 찾으려 황궁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다. 황궁은 드넓은
곳이기에 아직 잡아내지 못했지만, 조금만 더 파고든다면 꼬리를 잡아챌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어쩌면 에이든은 이 사실을 알고, 알체스테를 불러들이는 걸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우리에게는 좋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 가문을 습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계속 알체스테 황자님을 붙들어 놓는다면 장기전이 될 겁니다.”

소리 없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알체스테 진영이었다. 이미 황제에게 점수를 깎일 짓을 많이 했고,


알체스테는 애초에 황제의 허락으로 이곳에 있었다. 황제가 알체스테에게 허락한 기간이 다 지난다면, 그들은 정
(正)이 아니라, 반(叛)이 되어야 했다.

세 사람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황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할 수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치던 아제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새파랗게 일렁이는 벽안이 호선으로 휘어졌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야 합니다. 어쩌면, 일거양득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네요.”

***

중앙회의가 열릴 거대한 회의장 문이 열렸다. 황제가 도착하기 전 속속들이 들어온 귀족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알체스테를 훑기 바빴다.
“알체스테 황자님이 아니신가?”

“설마, 폐하께서 부르신 건가? 루드비히 전하께도 허락하지 않았던 일을?”

에이든은 루드비히가 멍청해서 그를 곁에 뒀지만,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완벽성을 추구하는 에이든의 눈에는
루드비히가 한참 모자랐기 때문이다.

루드비히가 날뛰고 멍청하게 굴어 제 평판을 깎는 걸 방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했다. 드높은 자존심은 일정선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루드비히는 아무리 졸라도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페하께서, 혹, 알체스테 황자님을 다음 보위에 올리시려는 게 아닐까요?”

“그건 섣부른 추측일세. 두 분의 사이가 어디 보통 부자 같겠는가. 5 살에 쫓아내 20 년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으셨는데.”

“그 말이 맞네. 사실 이번에 불러들이신 것도 란델 후작의 청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변방에


계셨을 테지. 황자님께서 조용하게 계시긴 해도 아마, 원망이 크지 않겠는가?”

속닥속닥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박혀들었다. 기감이 예민하다는 건 이럴 때 좋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멋대로 귀를 덮었다.

알체스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노력하며 단상을 바라봤다.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의자가 보였다. 바로 이 순간, 권력의 중추라는 이곳에 들어와서도 저 자리가 별로
욕심나지 않았다.

‘왜일까. 당신은, 그 아이는, 무엇이 그렇게 탐이 났을까?’

알체스테는 다소 염세적인 시선으로 번쩍번쩍한 휘광을 두른 용좌를 살폈다. 저 자리에 앉으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싶어 혐오감이 들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눈빛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눈이 아니라, 좀 더 전투적인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자리에 오르고 싶어도 탐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경은 저 자리가 탐나는 건가?”

“솔직히 못 가질 것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그저 평온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없이 평화롭게 지낼 오두막이 나와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지.”

“기껏 황족으로 태어나셨는데, 다소 소박한 바람이군요.”

“하지만, 내가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버텨야 할 책무가 있다. 문장이 뜯긴 제국민의 귀곡성을 참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일지 모르겠군. 내 아버지의 죄라면, 마땅히 내가 짊어짐이 옳다.”

아제프는 알체스테를 지그시 바라봤다. 어쩌면 그릇 차이인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제 그릇에 엘제이를 담은
것만으로도 이미 넘쳐흐르는데, 알체스테는 그렇지 않았다.
아제프와 마찬가지로, 제 짝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면서도 다른 곳에도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알체스테는 제 손으로 키운 기사들을 아꼈고, 그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 수도에서 일어난 참사를 진심으로
가슴 아파 했고, 그 일을 막으려 누구보다 더 애썼다.

알체스테는 굳이 아제프가 입을 열지 않아도, 알아서 수도 주위를 경계하고는 했다. 잠을 잘 시간이 부족할 게


틀림없는데도 도와달라는 약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마땅히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제국민을 제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들의 목숨 하나하나를 소중히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알체스테와 아제프를 나누는 선인지도 몰랐다.

‘황제가 될 싹이 보이는 건가.’

알체스테가 황제가 되는 일, 나쁘지 않았다. 만만한 황제가 생긴다는 건 농땡이를 칠 기회가 는다는 것과 같았다.
아제프는 이 일이 끝나면 곤란한 일은 알체스테에게 죄다 맡겨두고 엘제이와 함께하고 싶었다.

알체스테에게 일을 떠맡기겠다고 다짐하는 얼굴이 악랄하게 휘어졌다. 그때, 알체스테와 닮은 중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시는군요.”

아제프가 알체스테의 팔을 살짝 치며 그림자 진 곳을 가리켰다. 황제, 에이든이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0 화
120

“해가 떠오를 때 가장 드높이 빛나실 제국의 광영, 황제 페하께서 듭시옵니다!”

커다란 외침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자로 잰 듯 일정 높이로 허리를 숙인
이들은 입을 모아 황제에게 축언을 보냈다.

“폐하께 프리멧사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그대들에게도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황제가 화답하자 귀족들이 자리에 앉았다.

에이든은 다소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걸 빼고는 알체스테와 많이 닮아 있었다. 황자들 중에서


알체스테가 에이든의 얼굴을 유독 쏙 빼닮았기에 황제가 들어서자 자연히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서늘하고 강퍅해 보이는 중년과 무뚝뚝한 인상의 청년이 닮았다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라 사람들의 시선은 두 사람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자리에서 홀로 일어난 관료가 황제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폐하. 오늘의 안건은,”


“그건 잠시 미루도록 하지. 내겐,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예.”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관료가 멋쩍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에이든의 시선이 아이젠 곁에 앉아 있는
알체스테에게 닿았다. 서늘한 눈썹이 살짝 움직인 것 같지만, 그리 티 나지는 않을 정도였다.

“알체스테.”

황제의 입으로 부드럽게 발음되는 제 이름이 퍽 낯설었다. 알체스테는 수그렸던 고개를 바로 들고 황제를
마주봤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황제는 평소보다 꽤 온기 고인 눈으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네.”

“가까이서 보고 싶구나. 그래. 이 아래가 좋겠군. 이곳에 의자를 하나 더 들여라!”

에이든이 명하자 시종들이 조심히 움직이며 황제의 단상 아래에 의자 하나를 옮겼다. 가까운 곳에 두겠다는 허울
좋은 말로 꾸몄지만, 발아래에 앉으라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명백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새장 안의 새는 아무리 자라봤자, 애완조일 뿐이다. 겁도 없이 주는 먹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먹었다가는 몸이


부풀어 창살이 몸을 옥죄겠지. 아니면, 아름다움을 잃은 죄로 주인의 손에 죽거나.]

알체스테는 새벽녘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나쁘다고 한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저벅저벅- 걷는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알체스테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혹여, 수도가 낯설어 잠을 잘 못 이루는 것이냐. 쯧쯧- 네게는 이곳이 안 맞는
모양이구나.”

뒤의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들을 사람은 다 들은 후였다. 알체스테는 이를 꽉 사리물었다. 표정 변화 없는


황제만큼이나 무딘 얼굴이 황제를 똑바로 직시했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탄복할 뿐입니다.”

“이곳에 들어와 보니 기분이 어떻지?”

위험한 질문이 연달아 흘렀다. 살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이 부자 사이를 감돌자 다른 이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다고 말하면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것이냐 비꼼을 당할 것이고, 싫다고 하면 황제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불충한 놈이 됐다.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저 폐하의 은혜를 얻어 살아가는 처지인 것을요.”

알체스테답지 않은 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꿀을 펴 바른 것처럼 듣기에는 감미로웠지만, 씹는 순간 떫은맛이 확


퍼졌다.

“못 본 사이에 꽤 달라졌구나. 어떤 이의 영향일까?”


에이든은 입꼬리를 비틀며 아제프를 바라봤다. 황제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박혀들었다. 아제프는 그저 순종적인
얼굴로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덕분에 좋은 친우를 만났습니다.”

“친우?”

“네. 친우입니다.”

에이든은 차가운 눈으로 아제프를 휙 노려봤다. 누구든 저 아이 주변에 걸리는 것들은 다 치워버리고 싶었다. 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낸 것도 다 저런 것들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랑하는 이가 생겼다고 했지.’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든은 요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걸 후회하며 이마를 작게 찌푸렸다.


아마, 수하 중 누군가 보고한 일인 듯했다.

“저잣거리에 묘한 소문이 돌더구나. 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최근 도는 제 이야기가 한둘이 아닌데, 그 중 어느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알체스테는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신경 쓰이는지 말투가 다소 날카롭게 뻐걱거렸다.

아제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경전을 벌이면 알체스테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에이든 역시, 날카롭게 박힌 가시를 느꼈는지 얼굴이 서늘하게 일그러졌다. 아랫것을 내려다보듯 오만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잔혹함이 깃들었다.

아제프는 황제가 뭐라고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주제라면 괜히 신경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먼저 말해주는 게 그나마 편한 길이었다.

“제가 감히 성심을 헤아려 보건대, 혹, 엘리사 티아세 양에 관한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란델 후작, 예나 지금이나 눈치는 빠르지만 낄 곳과 끼면 안 될 곳을 분별하는 게 좋을 거다.”

“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심기를 어지럽혀 송구합니다.”

에이든은 유려하게 대답하는 아제프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저 아이를 물들여 놓은 것도, 저 아이를 멋대로 불러온
것도,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내쫓고 싶은데 그러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계획? 무슨 계획이 어그러지지?’

머리가 팽글팽글 돌고, 토악질이 밀려왔다. 마약에 취한 듯 혼곤한 머리에 예리한 빛이 반짝, 빛났다가 어둠에
밀려 사라졌다.

알체스테는 코를 찌르는 악취를 느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에이든을 뒤덮은 그을음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알체스테는 말없이 머리를 짚고 있는 에이든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폐하?”

새까만 어둠이 한 겹 두 겹 촘촘히 거미줄을 쳤다. 흐리멍덩한 금안은 더는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다.

“란델 후작이 말은 바로 했지. 티아세 공녀에 대한 소문 말이다. 공녀가 많이 아프다는데 알체스테,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폐하!”

아이젠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엘리사의 이야기를 언급하다니 공작 家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하물며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는 좋은 소문도 아니었다.

딸이 불온한 세력에 당했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인 곳에서 한다는 건 아이젠의 가문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거였다.

황제는 아이젠의 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표정 없는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그래. 공작에게 물어보면 가장 정확하겠군. 공녀가 마비독에 당한 게 맞나?”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늘 신중하던 에이든이 선택한 것치고는 꽤 악수였다. 아이젠은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

“가만 보면, 공작은 내 앞에서 딸들을 너무 감싸고돌더군.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나?”

“아닙니다.”

“그럼 말해보게. 공녀의 상태는 어떻지?”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듯 말갛게 뜨인 눈동자가 혐오스러웠다. 아이젠은 제 속을 박박 긁어놓는 에이든을


보며 눈을 차분하게 떴다. 화가 치솟다 못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제 딸아이가 아픈 건 사실입니다. 어느 날부터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으니 저 또한 마비독에 당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에이든은 아이젠이 부드럽게 대처하자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렸다. 속에 구덩이가 바글거리는 것처럼 끔찍할 텐데
용케 화를 안 내고 참아내는 걸 보니 독하긴 독한 놈이었다.

에이든은 안타깝다는 듯 부드러운 얼굴을 하며 혀를 쯧쯧 찼다.

“쯧쯧.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나. 하늘도 참 무심하시군.”

“…….”

회의실에는 에이든의 혀 차는 소리만 들릴 뿐 숨 한 번 편히 쉬는 이가 없었다. 에이든은 알체스테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그럼 그 소문은 어떻지? 공작이 예비 사위 둘을 제 집에 앉혀 놓고 다닌다는데. 다들 알겠지만, 공작의 집을


드나드는 건, 란델 후작과 내 아들뿐이 아니겠는가. 란델 후작, 그대가 먼저 말해보겠나?”

“개인적인 일이라 부끄럽지만, 소신과 티아세 家 사이에 혼약서가 오간 것은 사실입니다.”


이쯤 되자 황제가 무얼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서 아제프는 한숨이 푹푹 새어나왔다. 엘제이를 건드는 게 아니니
아제프야 별로 화가 치밀지 않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다른 듯했다.

아제프는 곧 떨어질 폭격을 기다리며, 자신이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작의 첫째 딸이 후작과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은 들었지. 그럼 둘째가 남는데…… 설마, 마비독에 당한 공녀를
내 아들의 짝으로 붙여주겠다는 말인가?”

“폐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알체스테의 시선과 에이든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알체스테의 금안이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에게는 참견할 자격이
없다고. 그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어서 속이 또 울렁거렸다.

‘저런 모습을, 꼭 빼닮았어.’

에이든은 제 속이 긁힌 만큼 다른 이에게도 상처를 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에이든은 노기가 흉흉하게


서린 아이젠과 알체스테를 감상하며 웃었다.

‘아비의 비통함이 광증이 되어 주인을 물 수도 있다? 건방진 놈. 하나같이 다들 건방져.’

총기가 스몄던 눈에는 광증밖에 남지 않았다. 지켈리온이 조절한다고 했지만, 환희에 취했던 탓에 좀 과해진
듯했다.

황제는 멈출 줄 모르는 쏜 살 같았다. 냉기가 내려앉은 회의실 분위기가 보일 텐데, 평소라면 멈췄을 선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불쌍한 공녀를 내가 거둬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움직이지도 못하는 공녀라면, 첩의 지위도 감지덕지가
아닌가.”

들끓던 주전자의 물이 확 쏟아졌다. 해도 해도 너무한 언사에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이젠은 혈색이
어찌나 질렸는지, 그의 얼굴은 공기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알체스테의 턱이 불거져 나왔다. 잇새를 무는 동작 그대로 불거져 나온 턱 선이 한 차례 바르르 떨렸다.

“폐하.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리사의 옆에 있는 게 누군지. 어떻게 아들의 연인을 탐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아아- 그럼 그 말이 사실인가? 공녀는 문장 보유자고 알체스테, 너는 그 짝이라지? 정말인가?”

에이든은 별 다른 사과도 없이 알체스테의 손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누군가가 저 손등 위에 문장이 있다고 했는데,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문장. 저 애도 문장이 있단 말이지.’

질척하게 눌어붙은 금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그 말만을 믿으며 알체스테의 손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보고 싶으셨으면, 보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빙빙 돌리시지 말고.’

어쩌면 아이젠과 알체스테의 평정심을 빼앗는 게 황제의 목적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저 말을 계속 들어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알체스테는 에이든이 바랐던 대로, 장갑을 벗었다.

혼탁하게 풀어진 금안에 너울거리는 분홍빛 문장이 담겼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1 화
121

살짝 그을린 피부 위에 돋아난 옅은 분홍색 색감이 지독스럽게도 안 어울렸다. 그럼에도 그 문장은 알체스테의


것이었다.

“폐하께서 짐작하신 그대로입니다.”

알체스테가 보란 듯 손등을 내밀어 문장을 자세히 보여줬다. 물끄러미 알체스테의 문장을 보는 에이든의 눈에
벌건 것이 스며들었다.

‘분노?’

아제프는 티 나지 않게 에이든을 관찰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황제는 알체스테의 문장이 신경에 거슬리는
듯했다. 혹은, 문장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단순히 문장이 싫어서 지켈리온에게 가담한 건가?’

아제프는 에이든의 몰골을 꼼꼼히 살폈다. 성마른 몸이야 전부터 그랬지만, 유독 눈 밑이 시커멓고 신경질이 치민
사람 같았다. 예민하면서도 세밀했던 전의 에이든 같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조금 옮기니 황좌를 우악스럽게
쥐고 있는 손이 보였다.

아제프의 눈에 옅은 의심이 배었다.

시간이 공기처럼 부유했다. 시간을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속으로 무언가를 삭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황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정무를 볼 시간에 사사로이 황자를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에이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전이라면, 절대 이런 틈을 보이지 않았을
남자였는데 뭔가 이상했다.

침묵의 시간이 허망하게 부유하다 마침내, 툭, 떨어졌다.

“짝이 마비독에 중독됐으니…… 속이, 꽤 타겠군.”

“네. 그렇습니다.”

“이리 다가와 보렴.”

에이든이 알체스테에게 손짓했다.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였다. 알체스테는 한숨을 삼키며 다가갔다.
아제프가 말린 것처럼 이곳에서 황제에게 반항하는 건 좋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은 아니었다.
황제가 고개를 숙여 알체스테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닿을 듯 말 듯 살랑거리는 먹색 머리카락이 부자의
닮은 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라니, 다소 성의 없는 말이 아닌가. 좀 더 애를 태우고, 여차하면 마비독을 건넨 이를


찾아가 빌기라도 해야지. 살리고 싶지가 않은가? 그대로 몸이 굳어 죽는 꼴을 보고 싶어? 저런, 애처롭지 않나?
침대에 누워 꿈틀, 꿈틀. 아! 꿈틀거리지도 못하던가?”

뱀 같은 혓바닥이 넘실거릴 때마다,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손에 닿는 것도 꺼려질 만큼 음산한 기운이 아비의
몸을 휘감고 그 비열한 혓바닥으로 알체스테의 마음을 희롱하기를 원했다.

입술이 저절로 비틀렸다. 알체스테는 똑같이 소리를 낮추고 부황의 귀에 들릴 만큼 속삭였다.

“제게, 주술사를 찾아가 빌란 말씀이십니까?”

“네 생각은 어떻지? 그들이 원하는 게 뭐인 것 같나?”

“저를 노렸다면, 제게 무언가를 얻기 위한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에이든이 경박하게 킬킬 웃었다. 배 속에서 벌레 떼처럼 바글바글 움직이는 것이 뜨겁게 몸을 달궜다. 에이든이
이 순간, 느낀 건 쾌감이었다.

“가여운 것. 너는 꿈틀거리는 네 작은 애벌레를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지?”

“…….”

알체스테의 손에 힘줄이 퍼덕거리며 솟구쳤다. 아직 참아야 하는 걸 아는데, 시간은 그에게만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하기에 알체스테는 두 눈을 감고 침묵을 바랐다.

에이든의 입꼬리가 히죽, 말렸다. 에이든은 알체스테에게 가려 제 얼굴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마음껏 그를 비웃었다.

“더러운 것들에게 네 몸을 납작 엎드리고 개처럼 헉헉 빌 수 있겠나? 똑같이 마비독을 마셔줄 수 있나?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 보일 수 있나? 피를 줄줄 흘리며 심장을 뽑아줄 수 있나? 너는 그 잘난 문장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그깟 문장으로 네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그리 묻는 황제의 벌건 눈이 희번득 흰자위를 드러냈다.

“제가 주술사를 찾아가 빌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폐하께 빌란 말씀이십니까?”

“감히 나를,”

“폐하께서 주술사와 내통했다는 사실이 진정 비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폐하께서야말로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무얼 하실 수 있으십니까? 제게 개처럼 엎드려 비시겠습니까? 제 연인에게 배를 보이고 꼬리를 요란스레
흔드시겠,”

아제프는 바람 소리처럼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퍽- 쿠당탕.

“헉! 폐하!”
누군가 급히 숨을 들이키며 신음소리를 냈다. 알체스테의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까이서
던진 탓에 상처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금으로 만든 촛대 끝에 살가죽이 베였는지 피가 흘렀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대부분 듣지 못했으나, 황자를 저런 식으로 벌주는 건 여러모로 과한 처사였다.

‘참으라고 했는데, 소용없군. 평소에는 과묵한 사람이……. 어쩔 수 없지.’

에이든의 심기를 살살 거스르되, 정도를 넘지 않기를 빌었다. 아제프가 강구한 방법은 다른 것이었지만, 지금은
별 쓸모를 보이지 못할 터였다. 방법이 어떻든 결과만 같으면 되는 일이었다.

선택을 끝낸 아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데굴데굴 굴러온 촛대가 그의 무릎에 부딪혀
어두운 색감의 옷에 피를 칠했다.

“폐하, 먼 곳에서 폐하를 뵙고자 찾아오신 황자님이십니다. 서로 떨어져 있던 세월이 긴 탓에 서름한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폐하의 아드님이십니다. 노기를 가라앉히시기를 청합니다.”

절절하게 감읍하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또르르 흘렀다. 적막으로 가득했던 회의실을 뒤덮는 애절한 음색에도 다른
귀족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후작이 또 내 권위를 거스르는구나. 내 를 잊은 건가?”

에이든이 형형한 눈을 부릅뜨며 아제프를 노려봤다. 피부를 찌르는 거센 노기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한 아제프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의 성심을 바라고 한 일입니다. 오랜 세월 황좌를 지키신 폐하께서, 아직 어린 황자님을 너그럽게 봐주실
거라 믿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아들에게, 무얼 그리 동요하십니까?”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사그라질 듯 작아졌다.

아제프가 파란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며 입매를 작게 비틀었다. 언뜻 보면 씁쓸한 미소인 듯했으나, 분명


황제를 비웃는 것이다.

“감히,”

퍽-

한 쌍이었던 촛대가 나란히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가격했다. 꾀 많은 남자는 은근슬쩍 고개를 젖혔기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아제프는 많이 다친 척 머리를 조금 흔들며 다시 한 번 청했다.

“폐하, 이곳은 회의실이옵니다. 나라의 정세를 결정짓는 신성한 곳에서 어찌 황족의 피를 흘리려 하십,”

“닥쳐라!”

황제의 입안에서 거친 숨결이 훅훅 흘러나왔다. 그는 도저히 진정하지 못하겠는지 입안을 초조하게 뭉갰다.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알체스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새어 나올 듯했다.

알체스테의 피가 황제의 바짓단 아래를 적셨다. 에이든의 눈이 다시 벌게졌다.

‘나는, 겨우 네깟 것에게…….’
에이든은 고개를 흔들며 망령을 털어내려 애썼다. 토기가 치미는 건 저 얼굴이 역겹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에
울컥울컥 위액이 솟구치는 건 저 표정이 끔찍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우 저런 놈에게 흔들릴 수 없었다. 자신을 능멸한 죄를 이곳에서 묻고 끝낼 것이 아니라, 절차대로 철저히


벌해야 마땅했다. 자신은,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반짝, 분홍빛의 몽글몽글한 기운이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 있는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인 그 기운은 에이든의 머리를 주무르고 빛을 터트렸다.

뇌에 찬 뇌액이 울렁울렁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저를 뜯어말리며 괴롭히는 것을 내쳤다. 생각도 안 나는


계획 따위, 제 감정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에이든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황제, 그 자신이었으니까.

‘나는 단지, 네가 언제나…….’

“이 시간 이후 너희 둘에게 중앙회의 참여를 금하겠다! 너희의 처벌이 이것으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권력에서 밀려나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뎅뎅 울렸다.

예상대로였다. 아니, 예상보다 쉬웠다.

황제는 자신이 동요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회의를 파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아마,
황제는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이 회의에 묶여 있어야 할 터였다.

자유롭게 활보하는 둘을 놔두고, 본인이 만든 속박 아래에서 황제 스스로 제 발에 족쇄를 채웠다.

아제프는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며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

황제에게 내쫓긴 알체스테와 아제프는 회의실 바로 근처의 빈방에서 치료를 받았다. 황궁 시종들은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겁을 냈지만, 피를 흘리는 황자를 외면하지는 못했다.

지금 회의실 문은 누구의 출입도, 입실도 금하며 굳게 닫혀 있다. 황제가 나오기 전에 치료를 끝낸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아제프는 하얀 붕대가 휘감긴 알체스테의 머리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제가 신호가 오기 전까지는 참자고 그렇게 말했을 텐데요.”

“…….”

알체스테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아제프가 원했던 건 좀 더 부드러운 방식의 퇴장이었다. 그저


황제의 판단이 흐려질 정도로만 열이 솟기를 바랐는데, 알체스테가 참지 못하고 앞서 나간 게 사실이었다.

아제프를 볼 낯이 없어서 입술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제프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알체스테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미안하다.”
“됐습니다. 이렇게 된 거,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황자님이 하실 역할은 스스로 잘 알고 계시겠죠. 오늘 안에
끝을 봐야 합니다. 아니면, 더는……. 선황이 되실 수 없어요. 역사 끝에, 아비를 죽이고 형제를 죽인 비정한
황제로 남을 겁니다.”

이번 기회가 지나면, 에이든을 죽이고 남은 황족도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알체스테도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황좌는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있지만, 도망 다니는 신세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소중한 게 생겼고, 어쩌면
제 가족이 될 이에게 그런 운명을 떠안기고 싶지 않았다.

“지켈리온을 죽이고, 현황을 보위에서 물러나게 해야 모든 게 끝난다. 내가 오늘 할 짓은 들킬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역적이라는 꼬리가 붙겠지. 선황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계속 폭동이 일어날 거다. 오늘
황제에게 들키기 전, 명분을 얻어야 한다.”

명분(名分). 두 사람에게는 이 일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명분이, 미치도록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온 힘을 다해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킬 것이 많은 자는, 본디 조심스러워지는 법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2 화
122

“저는 도망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산골에 처박혀 살 수도 없어요. 내 아내는, 내 가족은, 지금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제프는 쫓기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했다.
빛이 들지 않는 그늘로 숨어들수록 더러운 때가 끼고, 영혼까지 비천한 구렁텅이에 내던져졌다.

더는 그리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겪은 걸 그녀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망할 토끼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도,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역시, 그런 일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키링-

푸른 마나가 아제프 옆에서 톡 터졌다. 자질을 가진 그들만이 관찰할 수 있었다. 흰빛이 아닌, 푸른빛.

그토록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좋은 소식이다. 적은 그들이 원했던 대로 미끼를 덥석 물어주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서로를 바라봤다. 알체스테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더는 회의실 근처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알체스테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알았다. 달리 둘러보지 못한 장소는 몇 곳, 그중에서도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은


오늘이 아니면 둘러볼 수 없을 터였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렀지만, 그가 해야 할 바는 명백했다.

“찾아내어, 갖추겠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니. 나는 다만, 아제프, 네게 부담을 준 것이 미안하군.”


“걱정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각자의 할 일이 있는 겁니다. 황자님의 일이나 잘하세요.”

아제프는 생각보다 덤덤히 응수했다. 하지만 꾀 많은 머리는 알체스테에게 빚을 떠안긴 걸 잊지 않는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방패가 되어준 대가를 받아낼 사람이었다.

“이 일마저 해내지 못할 거라면, 하늘은 내게 황제의 자리를 탐하게 하지 않았을 터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명분을 만들어오겠다.”

“이 일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으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알체스테는 딱히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턱이 한 차례, 바르르 떨렸을
뿐이었다.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각자의 길로 향하는 등은 어쩔 수 없는 긴장감으로 뻣뻣이


경직했다.

‘나는 나의 길을 기꺼이, 나아가겠다.’

***

얼굴가죽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니 어지간히 웃은 듯했다. 지켈리온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지옥 저편에 잠든 악마의 육체가 켈켈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끄윽, 크하하하!]

“큭, 크……하하하하!”

지켈리온도 악마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끼끼- 두 개의 목소리가 성대를 마구잡이로 긁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뻐걱거리는 두 개의 웃음소리가 겹쳐지고, 다시 하나가 되었다.

지켈리온은 뻐근하게 당기는 배를 살살 문지르며 웃었다. 아직 날이 그리 덥지도 않은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술에 취한 듯도 했다.

지켈리온은 서두르지 말자고 되뇌며 앞을 바라봤다.

유려하게 조각된 하얀 대문이 서슬 퍼런 기색으로 지켈리온을 노려봤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희게 빛나는


대문이 기꺼워 남자는 또 한 번 입꼬리를 비틀었다.

키링- 바닥에 얇게 가라앉아 있던 마나가 기이한 신음을 내뱉으며 바르르 떨었다. 흠칫한 지켈리온이 발을
떼어냈지만, 이미 늦었다는 듯 날카로운 얼음이 다발적으로 쏟아졌다.

“큭!”

순식간에 발바닥이 꿰뚫리고, 피가 몽글몽글 흘렀다. 다른 건 되었다는 듯 한 곳만 무자비하게 물어뜯은 얼음들이


차갑게 빛나며 상처를 콰지직- 으깼다. 지켈리온의 발목이 툭, 하고 잘려 몸에서 떨어졌다.

뒤늦게 검을 뽑아 휘두른 탓에 다른 곳에 큰 부상은 없었지만, 지켈리온은 피가 흐르는 발목을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봤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묘하게 감이 좋은 자다. 아니면, 이것들이 예민한 건가?”


쾌감으로 점철됐던 눈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매개체가 떨어져 나가면 분신과의 연락이 끊기고, 더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전에 한 번 당한 곳이기에 내심, 다음번에 분신을 보낸다면 같은 곳을 매개로 쓸 생각이었다. 또 같은 곳을


택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제프는 운이 좋은 건지, 감이 좋은 건지 지켈리온의 속내를 곧장 꿰뚫곤 했다. 자질은 쓰는 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지만, 날카롭게 벼린 마나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이는, 뭐든 눈치가 빠른 주인의 성향을
그대로 닮은 것이었다.

지켈리온이 기분 나쁜 듯 검을 휘젓자 까만 것들이 얼음에 찌걱찌걱 달라붙어 괴성을 토해냈다. 입을 쩍쩍 벌리고


삼키는 독기에 반항하던 얼음들은 곧 의지를 잃고 흐려져 떨어졌다.

지배하는 자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마나는 더는 의지를 발현하지 못하고 까만 것들에게 뭉개져 울음을 뚝뚝
흘렸다.

스으으- 흐리게 번진 기묘한 안개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살점을 씹어 삼키고 다시 그의 발목에 모여들었다.

지켈리온은 발을 한 차례 털어낸 뒤 멀쩡해진 발목으로 다시 한 번 땅을 내디뎠다. 그는 곧장 걸어가 티아세 家의


정문을 열어젖혔다.

기이한 정적 사이로 키링- 얼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솨아아- 그게 신호라는 듯 대기가 거세게 울음을 토해내며 흔들렸다. 티아세 저택 전체가 꽝꽝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계절감이 바뀌었다. 피부에 소름이 쭈뼛 돋아나고, 얼굴이 시렸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차갑게 얼은 얼음들의 냄새가 은은하게 번지다가 코를 찢을 듯 치솟았다.

지켈리온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답지 않은 짓을 했군. 시간을 버는 건가?”

팽팽하게 막을 펼친 마나가 공중을 스산하게 맴돌았다. 조금만 발을 디뎌도 찢어발기겠다는 듯 흉흉하기만 한


것들이 콰직콰직- 신음을 터트렸다.

지켈리온이 기가 차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그의 뒤에도 길은 없었다. 지켈리온의


주위를 칭칭 휘감은 것들이 너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허!”

너무 같잖아서 코웃음이 흘렀다. 이런 것들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용써봐야 몇 분일 텐데, 고작 몇


분을 빼앗자고 이 고생을 했단 말인가.

지켈리온이 몸속 깊이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스산하게 뻗어가는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아제프의 자질이
콰직콰직- 음울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얼음이 쾅쾅- 소리를 내며 쏘아지고, 지켈리온은 그것들을 검으로 쳐내며 저택을
살폈다.
티아세 家 전체를 겹겹이 둘러싼 마나 때문에 속이 매스꺼웠다. 지켈리온은 인간의 의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렁뱅이처럼 미천한 것들이 살아 있다고 꿈틀거리는 게 역겨웠다.

지켈리온이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제게 오는 얼음을 쳐냈다. 처음에야 갑작스러웠으니 당했던 거지만, 이제 와


이런 것들에게 당해줄 만큼 그의 아량은 넓지 않았다.

쌓인 스트레스만큼, 그들의 짝을 갈기갈기 찢어줄 생각으로 빛나는 눈이 쾌감에 물들었다.

저택 주변을 핥듯이 보며 티아세 家 자매를 찾던 눈에 음울함이 번진 건 그때였다.

“아제프!!!”

지켈리온이 노성을 터트리며 검을 휘둘러 잡았다.

콰다당탕-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켈리온은 그제야 이 저택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를 까드득-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계획이 틀어졌다. 단순히 그를 경계하기 위해 자질을 둘러놓은 것이
아니었다. 농도 짙은 자질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이 저택에는 문장 보유자가 없다는 사실을 지켈리온에게 숨기기 위해 코를 찌르는 제 자질을 알싸하게 뿌려놓은
거였다.

‘그럼, 어디 있는 거지? 어디 숨은 거냐!’

지켈리온이 분기 찬 얼굴로 다가오는 공격들을 쳐내며 코를 씰룩거렸다. 흉흉한 얼굴이 잡히기만 하면 사지를
비틀어버리겠다는 듯 포악했다.

지켈리온이 티아세 家 저택으로 곧장 향한 건, 다른 곳에서 그녀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해둔 건지 수도 내에서는 엘리사와 엘제이 특유의 문장을 감지할 수 없었다.

지켈리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빌어먹을! 알체스테! 아제프!”

지켈리온이 짓씹듯 두 사람의 이름을 발음하며 흉흉한 낯빛을 굳혔다. 두 놈의 짓임이 틀림없었다. 이곳 말고
진짜 그녀들을 보호한 곳에는 알체스테의 자질을 둘러놓아 문장의 기척을 감춘 게 틀림없었다.

지켈리온이 재빠르게 알체스테의 기척을 더듬었다. 올 때부터 번쩍번쩍 제 존재를 과시하던 아제프의 자질에 비해
알체스테의 자질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지켈리온의 눈이 희번덕이며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됐다. 분명 계획대로 잘 되고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비틀렸는지, 알 수 없었다.

지켈리온은 여기서 더 힘을 뺄 게 아니라, 당장 그녀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피잉-

얼음 하나가 지켈리온의 머리를 노리고 솟구쳤다. 재빨리 고개를 젖혔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목덜미가
길게 베여 피가 송골송골 새어 나왔다.
“이건,”

피잉! 피잉! 지켈리온은 뭐라 판단하는 걸 그만두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남은 의지를 지키는 자질이었다.
지배자를 잃은 이상 이빨이 빠진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것들은 다시 날카로움을 되찾아갔다.

‘설마?’

콰앙!

두 개의 검신이 즉각 맞부딪쳤다. 지켈리온은 즐겁다는 듯 휘어진 눈꼬리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분명 에이든을 세뇌해 절대 회의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두었는데,


아제프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켈리온은 사납게 일렁이는 얼음을 피하고, 횡으로 길게 베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이를 꽉 사리물었다.

“아제프! 그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렇게 반가워해주니 기쁜걸? 나도 몹시, 보고 싶었거든.”

아제프가 가볍게 손짓했다. 티아세 家를 꽝꽝 얼릴 정도로 퍼트려 놓은 자질들이 즉각 그의 부름에 답하며 윙윙-
울었다. 지켈리온을 노리고 하늘에서 얼음기둥이 쏟아지고, 그는 황급히 아제프의 곁에서 물러났다.

“그대, 설마 이걸 위해?”

지켈리온은 길게 말을 잇지 못하고 맹렬하게 들이박는 것들을 쳐냈다.

확실히 지켈리온은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분신보다 본체가 강한 건 당연했으나, 만만히 봤다가는 아제프가
역으로 당할 터였다.

아제프는 지켈리온의 본체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이는 알체스테도 마찬가지였다. 아제프는 미지의 적을
위해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자질을 얇고 농후하게 깔았다.

티아세 저택에는 무리가 가겠지만, 이곳은 하나의 빙산이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온전히 아제프의 영역이라는
소리였다.

“당신이 문장 사냥을 준비할 때, 우리라고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아제프가 비웃듯 입매를 한쪽만 비틀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3 화
123

지켈리온은 몸을 옆으로 굴리며 아제프의 공격을 피했다. 죽이고자 하는 아제프와 아직 그를 죽이고 싶지 않은


지켈리온은 공격력 차이가 컸다.

지켈리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살살 좀 하라고!”

“날 죽일 생각이 없나 보지? 내 생각은 다르다. 계속 바라왔다. 이곳이 당신의 무덤이 되기를!”

아제프는 몸을 말며 자리를 피하는 지켈리온에게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저렇게 멀리 도망가더라도


소용없었다. 이곳은 현재, 아제프의 지배하에 있었다.

지켈리온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건물 쪽으로 몸을 피했다. 피부를 찌르듯 맴맴 도는 자질은 건물 안이라고


다르지는 않았지만, 이 건물이 티아세 家의 저택인 만큼 아제프의 공격도 약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켈리온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물 외벽이 무너져 떨어졌다.
지켈리온은 바닥을 구르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대, 미쳐서 이곳이 어딘지 잊었나?”

아제프는 굳이 지켈리온에게 답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제프의 손에 유서 깊은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속에는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아제프는 이미 집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놈과 여기서 싸운다면, 저택이 다 무너질 겁니다. 아니, 그전에 자질을 퍼트린다면,
분명 건물에 무리가 갈 텐데요. 다시 이곳에서 사시려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겁니다.]

[인명보다 소중한 건 없지. 저택 따위야, 다시 지으면 그만 아닌가. 수도에 있는 내 집이 이곳 한 곳뿐인 건


아닐세.]

[과연, 가문의 전통성인 문양을 멋대로 바꿔버리신, 공작님다운 과감한 결정이네요.]

아제프가 손을 들어 무너진 벽면을 들어 올렸다. 돌벽 사이사이에 뭉그러진 물기가 꽝꽝 얼어붙어 그의 의지를


따라 떠올랐다.

휙- 하고 유연하게 휘젓는 손을 따라 벽이 쾅쾅 내리 찍혔다. 큰 물체가 위협적인 힘으로 쏟아지자 대지가 쾅쾅


울렸다. 맞으면 즉사였다.

“빌어먹을!”

지켈리온은 동시에 내리꽂히는 광범위한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날려야만 했다.

아제프는 대충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제프의 자질로 범벅된 곳이었으니, 더욱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타락하지도 않은 아제프를 죽일 수도 없었다. 아제프의 영혼을 얻기 위해 애썼던 시간이 얼만데,


이제 와 그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냥 죽는다면, 아제프의 혼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안착할 것이
분명했다.

아제프는 복수에 불타올라 제 한 몸을 내던져야 했다. 그래야만 악마가 그의 영혼을 갈취할 수 있었다.

얼음이 녹아 질척질척해진 대지가 늪처럼 지켈리온의 발을 휘감았다. 그는 뻑뻑하게 발을 뭉개고 끌어당기는 땅을


신경질적으로 짓이겼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다. 아제프와 싸우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분신이 아닌 본체로 맞서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섣부르게 행동해서 목이라도 꿰뚫리면 그도 죽는다. 지켈리온은 아제프와 즐기는 대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퇴로는 막혔고, 사방에 둘러싼 자질들 때문에 쉽게 몸을 물릴 수는 없었다. 지켈리온은 아제프의 정신을 좀
망가트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엘제이 티아세.”

지켈리온이 빈정거리며 엘제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

아제프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렸지만, 그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안전한 곳에 있었다.


지켈리온의 농간에 넘어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대 앞에서 엘제이 티아세를 죽여주겠다고!”

“…….”

아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짓이 더 빨라지고 흉흉하게 날이 선 마나가 공기 중에서 파르르-


떨리며 그의 분노를 반영할 뿐이었다.

“아아- 이건 관심 없나? 그럼, 다른 건 어떻지? 엘제이 티아세는 이미 그대 앞에서, 두 번 목숨을 잃었다.”

“……헛소리.”

“헛소리라고? 내가 거짓말하는 걸로 보이나? 나는 증명해줄 수 있다. 내가 죽였지. 그대, 앞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엘제이를 죽인 건 지켈리온이 아니었지만, 그는 아제프를 자극할 생각으로 킬킬 웃었다.

악마는 시간의 궤도가 비틀린다고 해서 달리 영향을 받진 않는다. 악마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신과 세상에 외면받는 비틀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기억을 공유하는 지켈리온 또한 3 살의 나이로 으깨져 죽던 엘제이 티아세를 알았다. 그는 비명을 끅끅
지르며 바동거리던 어린 육체를 떠올렸다.

지켈리온의 입매가 히죽, 비웃듯 말려 올라갔다.

‘헛소리.’

아제프는 흔들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는 제 옆에 살아 있었다. 엘제이가 죽었다면, 지금 제 곁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몇몇 단어가 아제프를 혼란스럽게 했다.

[제이, 이건 무슨 뜻이에요?]

[삶. 삶이라는 단어예요. 겹받침 단어라 제법 어려운데, 잘 적었네요? 제가 이 단어를 알려준 적 있었나요?]
[네. 전에 배웠어요.]

아제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제이에게 싱긋 웃으며 거짓말했다. 그는 엘제이가 적은 글을 조금씩 해석하고


있었다. 문장 전체를 해석할 능력은 아직 없었지만, 단어는 제법 많이 알게 되었다.

‘삶. 반복, 기록. 책 속.’

아제프의 다리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휘청거렸다. 아제프의 검신이 땅으로 깊이 내리꽂혔다. 파도처럼 떠밀린
얼음이 발밑에 솟아오르긴 했으나 지켈리온은 여유롭게 그걸 피하며 아제프를 관찰했다.

지켈리온은 봉인을 풀며 한 가지 능력을 더 얻었다. 그는 에이든에게 그랬듯, 환각과 정신 분열을 일으키는 검은


것을 아제프 주위에 둘렀다.

처음에는 아제프의 주위만 맴돌며 차마 침범하지 못했던 것들이 끽끽- 소리를 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제프의 얼굴에 음울한 기운이 번졌다.

[아제프…….]

사그라질 것처럼 서럽게, 그녀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사랑해요. 저는 언제나 아제프, 당신 곁에 있어요.]

그녀의 고백에 벅차올랐던 가슴에 돌덩이가 우르르 쏟아졌다. 쾅쾅 내려찍는 그것이 가슴을 으깨고, 핏물이 줄줄
흐르는 그곳을 들췄다.

절대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가슴을 뭉개며 뻐걱거렸다. 끽끽 신음하던 상자가 입을 쩌억 벌렸다.


아제프는 더는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털썩 쓰러진 무릎 위로 진한 흙물이 들었다. 아제프는 더럽게 엉기는 진흙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번들거리는 핏빛 눈과 마주치자 아제프의 표정이 파삭, 뭉개졌다.

“증거……?”

“이제 말할 마음이 좀 생겼나? 아아-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첫 죽음은 애달프고도 가련했지. 워낙 오래된
일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는, 지금과 같은 예쁜 얼굴로는 죽지 못했네. 몸이 다 으깨졌거든.”

지켈리온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맹렬히 내치는 공격은 매서웠지만, 아제프의
동공은 지켈리온은 너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같은 삶이, 반복되지 않기를.]

엘제이가 여러 번 반복해서 써둔 글은 아제프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뜻이었다. 아제프의 삶이 책 속과 같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였지만, 아제프는 다른 의미로 그녀의 글을 해석했다.

아제프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냈다.

“그녀의 삶이, 반복됐나?”


“알고 있었나? 그래. 이미 두 번 죽었지. 흘러내리는 목숨을 붙잡아 그 몸에 구겨 넣었다. 보고 싶나? 나는,
보게 해줄 수 있네.”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그녀가 왜 죽은 건지, 왜 제 앞에서 죽었다는 건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아제프는 언제나, 엘제이가 숨기려던 것을 궁금해 했다.

아제프는 여기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더 들었다가는 그를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가 완전히
열어젖혀질 걸 알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린 마음은 때를 놓쳐버렸다. 호시탐탐 그만을 노리던 검은 것이 비좁은 틈을 비집고 아제프의
두개골을 찌걱찌걱 벌리며 들어갔다.

깨끗하게 치유되던 영혼에 기회를 노리던 까만 점액이 바글바글 달라붙었다.

아제프의 눈 위로 환각이 스쳤다.

조그만 엘제이는 예뻤다.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어린 소녀가 어린 아제프를 빼꼼 훔쳐봤다. 매섭게
흔들리는 겨울바람이 하얀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싱그러운 녹안에는 상처투성이의 소년이 비쳐들었다.

상기된 볼은 점점 달아올라 열꽃이 피었다. 공간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엘제이는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린 얼굴은 열에 들떠 괴로워 보였다. 엘제이는 조그만 입술을 벌려 빠끔빠끔 숨을 쉬며 아이젠에게 뭐라고
힘겹게 목소리를 토해냈다.

[살려, 끄윽……. 살려, 주세요.]

‘누구를? 제이, 누구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아이젠을 보낸 뒤 엘제이는 몸을 일으켰다. 열꽃이 핀 팔다리가 하느작하느작 늘어졌다. 그 몸을 하고


엘제이는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열이 들끓는 몸에 불이 번지고, 송곳이 꿰뚫리고, 바위가 내려앉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늘어진 몸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그녀의 흔적은 피가 뒤엉긴 밀색 머리와 빛을
잃지 않은 녹안뿐이었다.

통통하고 앙증맞았던 작은 손이 바닥을 벅벅 긁었다. 무엇이 그리도 필사적인지, 엘제이는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갔다.

그녀의 손이 다른 손을 잡았다. 아제프는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그는, 엘제이가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손이 제


손임을 알았다.

운명의 바위는 예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운명을 비틀어 놓은 괘씸한 소녀에게 벌을 내렸다. 퉁퉁 부어
흐릿하게 뜨인 눈이 얼핏, 휘어졌다.

[아제프, 사랑, 해…….]

‘부디, 사랑받고 살기를.’

쾅! 검게 눌어붙은 바위에 핏물이 번졌다. 그게 그녀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제, 이……. 끄읍, 아으으…….”


아제프가 바닥을 기며 신음했다. 방금 제가 본 게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두 번째 죽음이 몰아쳤다.

엘제이는 또 한 번 그 길을 걸었다.

“안 돼, 안 돼. 제이! 제발, 안 돼!”

아제프가 몸서리치며 환각을 향해 버둥버둥 기어갔다. 그의 손은 엘제이에게 닿을 수 없었다.

쾅! 또 한 번 바위가 하얀 몸을 뭉갰다. 새빨간 피가 다시 튀어 아제프의 발밑에 쏟아졌다. 견고한 정신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아아아악!!!!!!! 아아악!!!!!!”

아제프의 비명이 숨통을 쥐어짜며 흔들렸다. 비통이 검게 눌어붙은 목소리가 처절하게 으깨졌다. 그는 진심으로,
괴로웠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4 화
124

지켈리온은 창천 아래 괴롭게 찢기는 비명을 들으며 흥에 겨워 웃었다. 영혼이 찢어발겨져 상처 입고 괴로움을


토해내는 목소리가 그에게는 천상의 하모니보다 아름다웠다.

마치 지휘자가 된 것처럼 까딱까딱 움직이는 손가락은 경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켈리온은 한동안 꺽꺽거리는
목소리를 눈을 감고 즐겼다. 그가 저 영혼을 취한다면 매일 저 음률을 즐길 수 있을 터였다.

“제이…….”

아제프가 작은 목소리로 엘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뭉개지던 몸이 눈에 선해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죽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무능하게 지켜만 보던 저 자신에게 살의가 들끓었다. 아제프는 열이 솟구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눈물샘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아롱아롱 고여 들었다.

아제프가 흐느껴 울자, 바닥에 눈물이 뚝뚝 고였다. 그를 둘러싼 마나들이 아제프의 감정에 동조하며 윙윙-
시끄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지켈리온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의 발현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제프는 확실히 똑똑했다. 유능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기껏 21 년을 살아온 청년일 뿐이었다. 아제프보다
노회한 늙은 영혼도 꺼떡꺼떡 삼켜온 지켈리온에게는 그를 뒤흔드는 것쯤은 큰일이 아니었다.

지켈리온은 무딘 얼굴 근육을 뒤흔들어 입매를 매끈하게 올렸다.

“괴롭나? 화가 나나? 복수심이 들끓나? 누가, 그녀를 저리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아제프의 목이 기이하게 꺾였다. 힘없는 나뭇가지처럼 뚝, 떨어진 목이 녹슨 문처럼 삐걱삐걱 울부짖으며 위를


향했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이 저를 향하자 지켈리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가슴을 활짝 열고, 저를 향해 쏟아지는
햇살을 맛봤다.

이 싱그러운 공기를 늘 망가트리고 싶었다. 지켈리온은 세상이 싫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온갖


미움과 부정적인 감정이 뭉개져 그게 세상에 내뱉어졌다. 지켈리온은, 악마는 그렇게 태어났다.

지켈리온은 오로지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왔다. 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지금처럼 그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악마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극상의 쾌락을 맛보고 싶었다.

세상의 오물을 닮은 남자는 하늘을 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파랗게 일렁이는 벽안을 응시했다.

“그녀의 비명이, 고통이, 신음이, 처절함이, 괴로움이! 누구 때문인지 알려줄까? 그녀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겠지?”

“…….”

텅 빈 얼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제프는 그저 광대처럼 움직이는 지켈리온을 멍하게 바라봤다.

‘복수.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뻐걱뻐걱 신음을 내지르며 돌아가는 머리가 힘겹게 굴렀다. 아제프의 눈에 파란 불똥이 툭 튀었다. 복수심이 그를
일깨웠는지, 아제프의 다리에 힘이 순간적으로 돌아왔다.

아제프가 일어서려고 하자, 지켈리온이 땅을 발로 콱, 뭉개 으깼다.

그 모습이 꼭 바위에 짓눌려 죽은 엘제이를 닮은 것 같았다. 아제프의 발목에서 힘이 쭉 빠졌다.

지켈리온은 흐느적거리는 아제프를 나른한 눈으로 바라봤다. 맛있는 먹잇감이 그의 목구멍을 향해 꿀떡꿀떡
기어왔다.

“그녀의 자질은 항상 너를 향했다.”

“아ㅡ.”

아제프의 귓가에 이명이 맴돌았다. 삐ㅡ 길게 울리는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괄괄 울렸다. 아제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목구멍에 모래알이 낀 듯 버석거렸다.

아제프는 듣고 싶지 않은 듯 귀를 가리려 했다. 파도에 흔들리는 수초처럼 하느작거리는 손목이 삐걱삐걱


움직이며 귓가를 더듬었다.

지켈리온은 아제프가 귀를 가리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를 죽인 것도, 당연히 너다.”

새까만 기운이 아제프의 얼굴 위를 뒤덮었다. 그를 괴롭게 할 환각이 다시 몰아쳤다. 맑고 청명했던 눈이 꺼멓게


물드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손이, 괴로움이 고인 소녀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사무치게 했다.

“아아악! 아아아아아!!!!”
비통에 젖어 대기를 찢어발기는 비명이 다시 시작됐다.

지켈리온은 기운을 잃고 뚝뚝 떨어지는 자질을 헤집으며 아제프를 향해 다가갔다.

***

‘그의 하루가 오늘도 무사하기를.’

프리멧사의 여신상 아래에 무릎을 꿇은 엘제이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열렬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프리멧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엘제이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꾹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아아악!!!!!!! 아아악!!!!!!]

사랑하는 사람의 비명이 귓가에서 맴맴 울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엘제이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언니? 왜 그래?”

엘제이의 곁에 있던 엘리사가 고개를 갸웃, 흔들며 엘제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들은 지금 황궁 내에 있는


신전에 있었다. 자매를 감싼 하얀 마나가 넘실넘실 맴도는 신전은 평화롭기만 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했지? 황자님이.”

엘제이가 멍한 얼굴로 신전을 둘러봤다.

알체스테의 자질은 빛(光). 자질 중 가장 성스러운 기운이었다. 알체스테의 자질은 성(聖)과 가장 닮았기에


신전에 매끄럽게 동화되었다. 지켈리온이 신전에 알체스테의 기운이 흐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멍한 얼굴로 일어서서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언니를 눈을 끔뻑이며 바라봤다.

“응? 황자님이 그러셨지. 인질로 잡히면 안 되니까 여기 있으라고 하셨잖아. 두 분은 할 일이 있다고. 아버지는
회의실에 계시고.”

엘제이가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엘제이는 아제프 곁에 있어봤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폐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마차가 전복될 때 그의 짐이 되었던 사실을 잘 아는
엘제이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도움이 안 될 걸 아는데……. 그냥, 걱정되어서 민감하게 굴었나 봐.”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 언니. 갑자기 신전으로 거처를 옮겨 불안하지만, 별일 없을 수도 있잖아.”

“그렇지…….”

엘제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앉으며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엘제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제프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엘제이는 제 바람이 프리멧사에게 닿기를 바라며 간절히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 순간,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가장 속상했다.


[아니지! 네 도움이 없었다면, 그가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겠지!]

퐁!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툭 튀어나온 얼굴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엘제이는 분홍빛 구름 같은 것에


둘러싸인 얼굴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신님? 또 꿈?”

엘제이가 재빨리 제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뺨이라도 한 대 내리치려는 건지 엘제이의 손이 위로 솟구쳤다.

엘리사는 갑자기 자해하는 엘제이의 손을 붙들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언니, 왜 그래?”

엘제이는 동생의 걱정에 괜찮다고 해줄 정신이 남지 않았다. 분홍 기운이 뭉글거리며 커지더니 프리멧사의 몸이
조금씩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프리멧사의 기척은 눈치챌 수밖에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콰직- 짓눌리는 느낌과는 달랐지만, 폐부에 들이차는
기운이 여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알렸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프리멧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엘리사를 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아이야, 잘 지냈니? 네 동생은 나를 볼 수 없단다.]

“여신님?”

“언니! 왜 그래? 응?”

“리사, 언니…… 물 좀 가져다줄래?”

엘제이는 걱정스럽게 제 얼굴을 붙드는 엘리사를 말리며 그녀를 방 밖으로 보냈다.

프리멧사는 여전히 멍한 엘제이의 볼을 매만지며 싱긋, 웃었다. 사랑의 여신다운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어휴! 정신없어! 이리저리 벌여놓은 일은 많지, 수습은 내 몫이지! 하여간, 다들 고상한 척만 하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너무 바빠 이제야 너를 보러 왔구나.]

프리멧사는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주지 않는 다른 신들을 속으로 욕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아이의 목숨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프리멧사뿐인 듯했다.

프리멧사는 내색하지 않으며 엘제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

엘제이는 제 볼을 꼬집는 감촉을 느끼며 조금 늦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여신님이 그녀 앞에 존재하는 건 현실인


듯했다.

프리멧사는 엉망으로 망가진 에이든의 머리를 조금 복구해두고, 아제프와 알체스테가 하는 짓을 둘러보다가


돌아왔다.

아제프는 역시 제법 머리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엘리사가 마비독에 당했다는 소문을 퍼트려 에이든과 지켈리온을
안심시키고, 함정을 팠다.
회의실에 제 발을 묶어두려던 황제를 역이용해 황제의 발목을 묶어버렸고, 두 남자가 떠난 티아세 家를
습격하려던 지켈리온을 오히려 그곳에 묶어뒀다. 자매를 황궁의 신전에 두어 알체스테가 가까이서 지킬 수 있게
하였고, 결론적으로 자매는 싸움판에서 멀어졌다.

아제프가 오랜 세월 살아온 지켈리온보다도 꾀가 많고 함정을 파는 데 능숙하다는 건 프리멧사도 인정하는 바였다.

다만, 아제프는 아직 어렸다. 아제프의 정신은 그의 생각보다 연약한 구석이 있었다. 개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 필요 이상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아제프 혼자 그를 상대하기는 버거워 보였다.

프리멧사는 아제프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움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꼈다. 매번 제 아이를 괴롭히는 놈이
괘씸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아픈 걸 보면 그놈 역시 제 아이인 듯싶었다.

[게다가 네가 바라지 않을 테지.]

“네?”

[아아악! 아아아아아!!!!]

아제프의 비명이 또 한 번 엘제이의 귀청을 흔들었다.

프리멧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지켈리온이 또 아제프의 마음을 긁는 모양이었다. 피울음이 먹먹한 목소리에
프리멧사와 엘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아제프는 타락하지 않았고, 그 앞에서 엘제이를 죽이겠다는 지켈리온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으니 아직 죽지는
않겠지만, 울부짖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프리멧사는 혀를 한 번 차며 다급히 엘제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들리니? 네 짝의 비통한 울음이?”

“아제프! 아제프가 위험한가요?”

엘제이가 다급히 외치며 프리멧사의 소매를 당겼다. 무엄한 짓이었지만, 귓가에 뎅뎅 울리는 목소리가 애틋해서
엘제이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가만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엘제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괴롭히며 이마를 좁혔다.

프리멧사가 손을 휘저어, 공간을 비틀었다. 뿌옇게 서린 분홍빛 기운이 엘제이의 볼을 간질였다. 프리멧사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엘제이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여신님?”

“그는 위험하지 않아. 다만, 네 도움이 필요할 뿐. 그에게는 언제나, 네가 필요하단다. 네게 그가


필요하듯이.”

프리멧사가 엘제이의 몸을 뿌연 공간으로 밀쳤다. 엘제이의 몸이 분홍빛 구름에 파묻히듯 갇혔다.

프리멧사는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엘제이의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가자. 문장을, 줘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5 화
125

“……?”

엘제이가 미처 프리멧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초록색 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삿된 것을


정화하듯 넘실거리는 빛은 엘제이를 휘감고 그녀를 어딘가로 끌고 갔다.

프리멧사는 빛에 끌려가며 두 눈을 크게 뜬 엘제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너는 지금까지 잘해왔단다. 네 반려도, 너도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내


아이야, 네가 원했던 대로 그와 행복하기를.]

프리멧사의 축언이 둥글게 번져 엘제이의 이마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치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각에 엘제이의 속눈썹이 부드럽게 감겼다. 엘제이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엘제이가 프리멧사를 이번 생에 만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터였다. 여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고난의 끝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엘제이는 더는 프리멧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엘제이는 프리멧사가 그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주었는지 잘 알았다.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엘제이는
프리멧사에게 끌렸다.

엘제이는 프리멧사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싱긋, 웃었다. 푹 팬 보조개가 예쁘게 너울져 흘렀다.

[어머니.]

엘제이의 속삭임에 프리멧사는 생각도 못 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웃었다. 온화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다정스러웠다.

[나를 어머니라 불러주는 거니? 다정한 아이야, 너의 다정함에 나 또한 많이 행복했단다. 그러니, 내게


미안해할 건 없어. 다만, 그놈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건 좀 자제하도록 하렴. 머리채 잡는 걸 기대했는데, 기껏
깨물기라니 조금 아쉬웠단다.]

프리멧사는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엘제이가 입으로 내뱉지는 않아도 제게 많이 미안해한다는 건


알았다. 엘제이의 생각대로 프리멧사는 이 자리에 있기 위해 또 많은 대가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엘제이가 사과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프리멧사는 단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해 마땅히 그녀가
누려야 할 것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프리멧사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은 계속 엘제이 곁을 맴도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프리멧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울 거예요. 그간, 감사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되도록 천천히 다시 만났으면 좋겠구나. 부디, 네 앞길에 언제나 행복이 넘쳐흐르기를.
빌어먹을 놈도 함께.]
프리멧사가 장난스럽게 아제프를 덧붙이며 손을 휙 휘저었다.

프리멧사의 마지막 인사만 기다렸다는 듯 빛은 소용돌이쳐 사라져버렸다. 프리멧사는 빛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바라봤다.

평화로운 적막에 갇힌 시간이 꽤 오래 흘렀다.

프리멧사는 아쉬운 눈으로 그 빛을 흘깃 보다가 씨익 웃었다.

[…….]

프리멧사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엘제이의 귓가를 간질였다. 바람에 꺼질 듯 작았지만, 이미 사라진 엘제이의
귓가에 앉기에는 충분한 목소리였다.

***

“아아ㅡ 끅,”

아제프는 깊이를 모르는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끅끅거렸다. 지켈리온이 그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제프는 제 내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차라리 지켈리온이 아제프를 죽이려는 살심이라도 있었으면 생존본능이 그의 정신을 일깨워줬을지도 모르지만,
지켈리온은 아직 아제프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저벅저벅, 질척하게 말라붙은 진흙이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지켈리온의 신발에서 떨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때, 초록색 빛이 화악, 솟구치며 빛을 콸콸 토해냈다. 갑자기 생긴 빛의 폭포에 지켈리온은 피부가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휘익, 채찍처럼 휘어진 초록빛 줄기가 그 틈을 타 지켈리온을 멀리 내리쳤다. 더러운 것을 치우듯 싸늘하게
내리치는 공격에 휘말린 지켈리온이 저 멀리 날아가 땅에 부딪혔다.

“윽! 우웨에엑!”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목덜미가 타들어갈 것 같았다. 지켈리온은 목덜미를 손톱으로 바득바득 긁으며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소란에 아제프의 얼굴이 살짝 기울었다. 빛이 그를 품듯 쏟아져 그의 귓가에 달콤한 노래를 읊조렸다.
엘제이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닮은 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말캉말캉한 뜨거운 것이 가슴을 맴돌고, 머리를 달구었다.

아제프의 눈에 빛이 슬쩍, 돌아왔다. 빛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감히 아제프를 집어삼킨 그을음들을 아작아작


먹어 삼켰다. 귀곡성을 지르며 괴로워하던 점액들이 빛에 물들어 소멸했다.

“……이건, 설마?”

몇 번 본 적 있는 익숙한 빛이었다. 아제프는 완전히 맑아진 눈으로 빛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팔을 살짝 벌렸다.


의지를 가진 것처럼 힐긋, 아제프를 바라본 빛은 그가 벌린 팔을 보고 입을 쩌억, 벌렸다. 빛이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엘제이가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꺄아!”

엘제이는 중심도 미처 잡지 못하고 엎어졌다. 사람 위에 떨어진 듯 누군가가 그녀를 지탱해주었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엘제이가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자 굳은살이 박인 손이 올라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당황한 듯 더듬더듬 그녀의
체온을 확인하는 손짓에 엘제이의 속눈썹이 팔랑 흔들렸다.

어지러웠던 시야가 올라가고, 빛이 차올랐다. 엘제이는 표정이 좀 그늘지긴 했어도, 크게 다친 곳은 없는


아제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싱그럽게 휘어지는 녹안과, 꽃잎 떨어진 땅처럼 폭 팬 보조개에 아제프의 눈이 술렁술렁 흔들렸다. 그는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묘한 표정을 지은 아제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엘제이는 아이같이 흐려진 아제프의 얼굴을 담다가 팔을 벌려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제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

아제프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꼭 다물었다. 아제프는 제가 봤던 걸 잊을 수 없었다. 으깨지던 살덩이가 눈앞에


생생해서 눈망울이 금세 추지게 그렁거렸다.

아제프는 금방이라도 새어 나갈 것만 같은 비통한 오열을 내뱉는 대신, 엘제이를 힘주어 안았다.

‘제이, 당신은 항상 내게 다시, 그토록 힘든 길을 나를 위해 걸어서, 언제나 변하지 않는 첫봄처럼 내게


다가왔어.’

봄이 다가오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풍성하고 안온한 계절은 아무리 혹독한 겨울바람이 불어도
다시 돌아왔다. 찬 기운을 몰아내고, 눈 덮인 땅을 헤집어 녹이는 고된 일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손이 또 한 번 겨울을 파헤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무언가를 향해


애타게 내달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언제나, 영원한 봄을 붙잡고 싶었다.

‘당신이 다시 첫봄이 되지 않게.’

따스하게 뒤덮이는 온기에 흔들리던 눈이 차분하게 내리 감겼다. 잊은 건 아니었다. 외면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색색거리던 고통 어린 숨결이 귓가에 맴돌고, 뭉개지던 하얀 손이 가슴을 애잔하게 덮었다.

다만, 아제프는 맞설 용기를 얻었을 뿐이었다. 그저 괴로움에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더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내고 싶었다.

아제프는 검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그러쥐며 지켈리온을 노려봤다. 조금 전에는 이상한 어둠에 홀려 당했다지만,
두 번은 없었다. 그는 엘제이를 죽인 게 제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제프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살려달라고 울고 비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제프는 이제
성장했다. 그에게는 엘제이가 있었고, 그는 더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건 다만, 아제프가 파헤치고 나아가야 할 길일 뿐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내려놓고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프리멧사가 속삭인 음색이 엘제이에게 닿은 건 그때쯤이었다. 아제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안겨 있던
엘제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엘제이의 눈에 무너진 티아세 家가 들어왔다. 엘제이는 어린 날의 추억이 가득한 저택을 눈에 담듯


훑어보다가 아제프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엘제이의 손이 맞닿은 자리는, 심장 바로 위의 피부였다. 엘제이는 덧그리듯 그것을 한번 뭉근하게 만져본 뒤,


아제프의 옷 단추를 다급히 풀었다.

“……제이?”

아제프는 지켈리온을 주시하던 시선을 떼어 황망한 표정으로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아제프, 우리 이제 그걸, 가져요.”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데, 아래에서 휙휙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아제프는
장소도 잊고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뭐를? 아기를? 여기서?’

아제프는 아연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봤다. 저택이 쓰러지고 나무가 뭉개진 장소는 황폐했고, 무엇보다 아직
지켈리온이 살아 있었다.

아제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데굴데굴 굴러오는 토끼를 제 손으로 밀쳐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비록,
상황이 몹시 그러했지만.

“제이. 여기서는, 윽!”

아제프가 뭐라 하건 말건 그의 옷 단추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푼 엘제이의 손은 미끄러지듯 그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뭔가를 찾듯 더듬더듬 움직이는 손짓에 아제프가 입안을 깨물었다.

‘꿈? 아직, 환각인가?’

아제프는 급기야 현실을 혼동하며 세이렌에게 홀린 뱃사람처럼 멍하니 엘제이가 하는 짓을 내버려뒀다.

엘제이는 편하게 자리를 잡는 사람처럼 몸을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었다.

[아이야, 문장은 내가 주는 게 아니란다. 문장이라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것이야. 내가 주는 건 어떠한


형태일 뿐. 그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지던 것이란다. 꼭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너희가 주고받았던
마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생기는 거란다.]
아제프의 눈이 혼곤하게 풀렸다. 그는 환각에 홀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기쁜 듯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엘제이를 보자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제이의 기쁨이 커질수록 저 멀리 날아간 지켈리온의 속에서는 토악질이 치밀었다. 그는 뇌를 무자비하게


주무르는 빛에 다리를 비틀거리며 다시 엎어졌다.

“빌어먹을!”

곤죽이 된 뇌가 땅바닥에 엎어져 바닥을 기기를 명했다. 저대로 두면 더는 아제프를 탐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알았다. 지켈리온은 최상의 만찬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팔뚝에 힘을 주며 빛을 뿌리는 엘제이를 노려봤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속삭이렴. 그는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야. 전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어서 어쩔 수 없이


쌍으로 태어난 것을 너 혼자 품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단다. 그는 이제, 가질 수 있을 거야.]

태초의 문장은 언제나 한 쌍이지만, 아제프는 악마에게 집어 삼켜진 후유증이 남아 문장을 가질 수 없었다. 삶이
번복되었지만, 악마는 아제프를 집어 삼켰던 기억을 잊지 않았고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먹물이 번져 싹을 틔울 수
없었다.

아제프를 대신해 엘제이가 한 쌍의 문장을 나란히 품고 있었고, 황폐하게 일그러졌던 밭에 기운이 돌아오자
그에게 그 몫의 하나를 넘겨주었다.

아제프는, 이제 준비가 되었다. 엘제이 역시, 언제나 바라왔다.

“그것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를 향할 테지만, 그래도 당신과 함께하는 게 기뻐요.”

“……그것?”

아제프는 그제야 엘제이가 말하는 게 아기가 아님을 알았다. 엘제이가 아이를 그것이라고 칭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제프, 사랑해요. 언제나 당신만을 기꺼이, 사랑할게요.”

때를 기다린 수풀이 푸르게 우거져 번지며 꽃물을 톡, 터트렸다.

오랜 시간 사무친 그리움을 씨앗에 묻히고, 생이 끝나는 순간에도 애절했던 사랑을 씨앗에 품었다. 혼 깊이
숨었던 씨앗이 길게 몸을 일으키며 그들의 마음을 새겼다.

영혼에 아로새겨진 마음이 마침내, 그 자리에 움텄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6 화
126

초록색 섬광이 요동치듯 일렁였다. 마지막 빛을 터트리듯 강렬하게 빛나는 빛의 향연에 지켈리온은 다리가 땅에
박힌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지켈리온의 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이 둘의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쾅쾅 내리찍었다.


“프리멧사!!!!!!!!!!!!”

증오심을 품은 새까만 목소리가 대지를 찢을 듯 울렸으나, 둘의 주변에서 너울거리는 빛은 안온했다.

아제프는 다소 멍한 얼굴로 제 가슴에 그려지는 초록빛 문장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 길게 획이 그어졌다.


유려한 빛은 둥근 원을 그리고 휙, 꺾여 잎을 그렸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빛이 엘제이의 것과 같은 문장을
새긴 뒤 잠잠히 스며들어 그의 가슴에 묻혔다.

그녀의 것과, 같았다.

툭.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이 하얀 손목에 부딪혀 흐트러졌다. 환하게 웃으며 그의 문장을 바라보던


엘제이는 그 표정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툭. 툭. 작은 소음이 연달아 울렸다. 엘제이의 손목을 적시는 건 아제프의 눈물이었다. 엘제이는 축축하게
번지는 투명한 것들과 눈물이 줄줄 흐르는 뺨을 보며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아제프……?”

엘제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담으며 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제프는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시간이 꽤 흘러서, 엘제이의 마음을
완전히 확신했을 때, 그는 더는 문장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딴 것이 없어도 엘제이는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믿었다.

“더는 욕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간은 쉽게 달라지지 않아요. 나는 이
순간이, 너무 기꺼워. 당신이 내게서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내게 존재한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뻐.”

아제프는 고해하듯 속삭였다. 엘제이가 죽는 모습을 다 봐놓고도,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면서도,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에 괴로워하면서도, 이 순간이 기꺼웠다.

엘제이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 기회가,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애탔다.

고작 피부를 조금 덮는 그림 덩어리, 고작 손바닥 하나에 뒤덮이고 마는 옅은 색감. 엘제이의 희생에 비하면


값지다고 할 수도 없는 작은 것이, 소중해져버렸다.

혹시, 누군가가 이것을 빼앗고자 한다면, 그는 이성을 잃은 개처럼 눈을 빨갛게 물들고 달려들 게 뻔했다.

‘당신의 희생을 딛고 올라선, 당신의 핏물을 머금고 피어난, 이따위 것을 사랑해버려서, 소중하다고
생각해버려서……. 미안해요.’

아제프는 제가 알아낸 사실을 엘제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책 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안에 어떤


세계가 있었는지 아직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몇 번이나 생을 반복했는지, 반복한 삶에서 무얼
했는지도.

아제프는 그저 엘제이가 그러했다는 걸 잊지 않고 제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녀의 숭고한 희생이 죄책감에


뒤덮이지 않기를 바랐기에.
“아제프, 저랑 똑같네요. 저도 처음 문장 생겼을 때 많이 울었는데.”

엘제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게 기댈 듯 휘청거리는 무거운 몸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무겁고, 발목이 금세 꺾일 듯 휘청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억겁 같았던 시간이 지나, 그는 원하던 걸 손에
넣었다. 엘제이는 그저 그에게 이것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엘제이의 눈은 온전한 기쁨만을 담았지만, 아제프는 그렇지 않았다. 마주친 눈은 기뻐하는 듯했지만, 괴로워하는
것도 같았다.

아제프의 삶을 엿봤지만, 그가 되지 않는 한 아제프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엘제이는 그저 그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치솟는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다렸다.

지켈리온은 장막 같은 빛이 사그라지는 걸 느끼며 목구멍에 차오른 것을 긁어 내뱉었다.

“쿨럭! 젠장!”

꺼멓게 눌어붙은 피가 땅에 떨어지자, 치익- 소리를 내며 땅이 오염됐다.

엘제이는 악마의 천적이었다. 애초에 엘제이가 악마에게서 아제프의 혼을 돌려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고결한 영혼을 악마가 이해할 리 없었다.

오직 그것을 위해 태어난 자질을, 마음을, 의지를, 지켈리온이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는 그저 그런


생각 자체가 역겨웠다.

‘프리멧사, 그년이!’

지켈리온은 쿨럭쿨럭 기침을 뱉으며 프리멧사를 욕했다. 깔깔깔 웃는 여신의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녀는
지르밟듯 지켈리온의 속을 진탕으로 만든 뒤에야 물러났다.

지켈리온이 타격을 입은 건 엘제이의 빛이었지만, 이토록 위협적인 빛을 내게 한 건 프리멧사였다. 이미


찢어발겨져 제 자질도 제대로 못 쓰는 쓸모없는 것을 부드럽게 이끌어 지켈리온의 몸을 후려쳤다.

[쯧.]

죽이는 건 제 몫이 아니라는 듯 짧게 혀를 차는 고상한 목소리에 지켈리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맞서 싸워 이긴 게 아니라, 빛이 사그라들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농락했다.

“젠장!!!!!”

지켈리온이 이성을 잃은 것처럼 광분하며 새까만 대검을 휘둘렀다. 휘청거리는 몸과 달리 제법 날렵한 공격에
아제프가 정신을 차리고 엘제이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검격이 검에 부딪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켈리온은 그대로 땅을 밟고 달려 나갔다. 빠르게 이어지는 공격을
육안으로 알아채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엘제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켈리온은 아제프 같은 남자에게는 같은 방법이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걸 알았다. 최상의 먹잇감이었는데, 다


망쳤다.

저것을 먹기 위해 20 년을 납작 엎드려 기다렸고, 답지 않게 봉인까지 해가며 인간 세상에 머물렀다. 근데, 저


여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리숙한 얼굴을 하면서 모든 걸 망쳐버렸다.

엘제이는 그녀 나름대로 필사적이었지만, 적어도 지켈리온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대, 기억나나? 그대 앞에서 저 여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던 거!”

“헛소리!”

아제프가 냉정하게 일갈하며 번잡스러운 공격들을 쳐냈다.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지켈리온의 흔적을 더듬었으나,
파란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지켈리온이 이를 꽉 사리물었다.

‘다 저 여자 때문이다! 저 계집 하나가, 모든 걸 망쳤어!’

지켈리온이 분노하며 으르렁거리자, 새까만 기운이 울컥거리며 흘러 찌걱찌걱 그의 몸을 쑤셨다.

지켈리온의 망막에 목이 부러져 쓰러지는 엘제이의 환영이 떠올랐다. 새까맣게 그을린 것은 더는 탐할 먹잇감이
없자 지켈리온의 몸을 뒤덮었다.

20 년이란 시간을 들여 조심조심 봉인을 깬 것은 한낱 미물의 몸으로 악마의 힘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 하지만,
지금 지켈리온은 그런 것을 떠올릴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환각이 눈앞을 붉게 물들였다.

지켈리온은 그저 살심만 남은 괴물처럼 검을 우악스럽게 휘두르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아제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지켈리온을 바라봤다. 이 한순간, 전세가 뒤집혔다. 땅에 엎드려 바닥을 기는


건 이제 아제프가 아니라 지켈리온이었다.

아제프는 이성을 잃은 들개처럼 그저 갈급함에 휩싸여 먹이를 물어뜯으려고 하는 지켈리온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멍청해졌군. 왜지?”

아제프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그의 손바닥이 땅을 향했다. 은밀하게 퍼진 마나가 엘제이가
딛고 선 땅에 축축이 내려앉아 한 겹 한 겹 쌓였다.

아제프는 지켈리온을 공격을 적당히 쳐내며 공들여 그것을 완성했다.

“그대, 내가 여기서 끝날 거라 생각하나? 그래? 분노가, 탐욕이, 죄악감이! 진정 그대 곁에서 완전히


멀어졌다고 생각하나?”

지켈리온이 새빨간 눈으로 아제프를 노려보며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이성은 같은 수는 소용없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몸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뭇거뭇 번진 기운이 아제프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조금 떨어져서 까만 기운들에게


둘러싸였다.

“아제프!”

“제이, 그곳에 잠시만 가만히 있어요.”

아제프가 작게 속삭이며 엘제이에게 주의를 줬다. 엘제이는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 듯 발을 움찔거렸지만, 그의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엘제이는 그저 아제프를 간절히 바라보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아제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저를 둘러싼 것들을 바라봤다.

‘기분 나쁘군.’

몸 안에 음습한 것이 퍼지듯 눈앞에 쓰러지는 엘제이가 번졌다. 아제프는 저를 바라보는 진짜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으며 그것들을 무시했다. 그의 팔이 의도적으로 길게 늘어졌다.

“큭, 크……. 크흑, 크하하하하하!”

지켈리온은 축 늘어진 팔을 보며 턱을 한 차례 더 훑었다. 꾸역꾸역 새어 나온 검은 피가 입가에 꾸덕꾸덕


말라붙었다.

지켈리온은 전의를 상실한 듯 멍하니 서 있는 아제프를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엘제이에게 달려갔다.

핏발 선 눈에 하얀 몸이 깃들었다. 눈앞에서 저 목을 분지르면, 아니, 문장을 파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 아제프


역시 망가질지도 몰랐다.

지켈리온은 정확히 엘제이의 문장이 있는 곳을 쏘아보며 그녀의 가슴께로 날카로운 검을 내질렀다.

“눈 감아요.”

작은 목소리가 귀에 닿듯 흔들렸다. 엘제이는 즉시 눈을 질끈 감았다.

쿠르릉, 콰아아앙!

“쿨럭!”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기둥이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피워냈다. 지켈리온이 피를 내뱉으며 고개를 꺾었다. 온몸을
꽉 옥죈 가시들이 내장 전체를 찔렀다. 그도 살아 있는 몸인 이상, 소생은 불가했다.

지켈리온이 집념 어린 눈으로 코앞에서 흔들리는 엘제이를 보며 피 섞인 침을 뱉었다.

“퉤!”

치익- 곧바로 솟은 얼음벽이 지켈리온과 엘제이를 갈라놓으며 까만 핏물에 타들어갔다.

“크윽, 젠장!!!!!!!!!”

지켈리온이 발버둥 치며 얼음을 으깨고 부쉈다. 그의 발버둥이 심해지자 덤불들은 오그라들며 그의 팔을 찌르고,
다리를 베고, 내장을 파고들었다. 지켈리온은 움직임이 점점 멎어들었다.

까만 것들을 쳐내고 엘제이에게 다가온 아제프가 떨고 있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지켈리온을 바라봤다.

‘미친 건가?’

너무 쉬워 허무할 정도였다. 프리멧사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아제프는 미심쩍은 얼굴로 지켈리온을
바라보다가 검을 높게 들었다.

“아제프! 후회할 거다! 내게 오지 않은 걸 후회, 큭!”

하얀 대검이 뚝 떨어져 목덜미를 날카롭게 베어냈다. 일자로 깨끗하게 잘려 떨어진 머리는 땅에 쏟아져
얼어붙었다.

좀 더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지만, 엘제이가 옆에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깔끔하게 목을 베어낸 아제프는


죽어서도 부릅뜬 눈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속삭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끄윽! 끅! 제기랄!!!!!!]

황급히 지옥에서 벗어나 아제프에게 달려들었던 악마가 핏줄기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거세게
버티더라도, 지켈리온과 악마는 본디 하나. 악마의 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핏물이 번졌다.

서걱-

겨우 짧은 소리만 남기고, 오랜 세월 인간의 혼을 유린하던 존재는 허무하게 쓰러졌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7 화
127

아제프가 지켈리온을 상대하는 동안, 알체스테는 황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무수히 많은 문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 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서지 못하는, 보루.

알체스테는 황제의 허락도 없이 그곳을 내디뎠다. 황궁을 수비하는 병사가 알체스테의 앞을 막아서고, 덤벼들었다.
황자의 신분으로도 그들을 협박해 막아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켜라. 감히 누구 앞을 막아서는지 알고 있나? 나는 부황의 허락을 받고 이 자리에 섰다. 네가 감히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저는 그런 명, 듣지 못했습니다. 황자님이라고 하셔도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는 이곳에 발을 디디실 수


없습니다!”

알체스테는 결국, 검을 들어야 했다.

한낱 병사는 회의실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알체스테는 중앙회의실의 문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기를 바라며


빠르게 그들을 쳐냈다.
만약 저곳에 기다리던 증거가 없으면, 티아세 家의 사병들과 알체스테가 이끄는 기사단이 그 즉시 황궁을 치게
되어 있었다.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알체스테가 원하지 않아도 그는 반란군이 되어야 했다.

아제프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알체스테는 증거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되도록 몰래 일을 끝내려고
했지만, 황궁을 지키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빠르게 물리치며 내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렸을 때, 분명 부황의 내실에서 다른 공간을 본 기억이 있었다. 워낙 어릴 때라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지만,


알체스테는 황제의 내실을 분주히 오가며 숨겨진 공간을 찾으려 애썼다.

황제의 내실에는 알체스테를 말리려는 기사들과, 증거를 찾으려는 알체스테의 싸움이 번졌다.

아마, 그때쯤에는 황제에게도 소식이 들어간 듯했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기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다급해진
알체스테는 결국 제국의 역사가 녹아든 황제의 내실을 부쉈다.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진 빛기둥이 알체스테와 기사들 사이를 갈랐다.

“황자님, 폐하의 허락 없이 이리 구시는 걸 저희는 더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두고 보지 못하겠다면 그대들이 어쩔 텐가. 그 빛을 넘어설 수 있는 자들은 넘어서라.”

평소라면 검의 길을 걷는 기사를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알체스테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기사들의 얼굴을 외면하며 황급히 벽장을 더듬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 분명, 이 근처에 주술사들이 모여 있었다.

‘아래. 아래로 가는 곳을 찾아야 하는데.’

더듬거리는 손이 벽장 아래의 무언가를 꾹 눌렀을 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알체스테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내려갔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주술사들, 탁자에 길게 늘여진 저주의 흔적, 희생당한 것 같은 어린아이의 시체.

알체스테는, 제 몫을 분명히 해냈다.

황제가 황급히 내실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승패가 확실히 기운 상황이었다.

***

황제는 바로 수감되었다. 말이 수감이지 그저 황궁에 있는 독방에 갇힌 거였지만, 에이든은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으로도 분노로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중앙회의가 급하게 파하고 몇 시간도 흐르지 못해, 알체스테에 의해 다시 귀족들이 소집되었다. 알체스테와
아제프는 중앙회의실에 들렀다가 곧장 황제를 가둔 방으로 향했다.

철썩-

알체스테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노기등등한 에이든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일부러 모멸감을 느끼게 하려는 건지 에이든은 알체스테를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성인 남자의 힘이라 볼이
발갛게 물들었지만, 알체스테는 내색하지 않으며 냉정하게 에이든을 내려다봤다.

“아나이샤의 뿌리! 그 해독약이 누구에게 있는 줄은 아나? 감히 나를 이리 대해?”

지켈리온이 소멸하면서 에이든에게 흡수된 그의 흔적도 소멸했다. 찌걱찌걱 말라붙은 점액질은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였지만, 에이든은 마음은 여전히 새까맣게 타올랐다.

알체스테는 빛이 없는 그의 마음을 지켜보다가 냉소를 지었다. 에이든은 원래부터 돼먹지 못한 인간이었다.

“…….”

말을 섞기도 싫다는 태도에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흘긋, 바라보았다. 알체스테와는 달리 아제프는 꽤 여유가
넘쳤다.

그토록 얻고 싶었던 엘제이의 문장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지켈리온은 죽인 뒤, 회의가 열리기 전 몸을 씻으며
한참이나 문장을 바라봤지만, 또 보고 싶었다.

뜨거운 욕조에 엘제이와 같이 들어가서 함께 문장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같이 목욕하자고 청하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줄지도 몰랐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아제프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으며 눈을 몽롱하게 풀었다.

“아제프.”

“아ㅡ.”

알체스테가 작게 그를 부르자, 아제프가 혀를 차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머릿속에서 잔뜩 괴롭힘을 당하던


엘제이가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아제프는 붉게 물든 얼굴을 아쉽게 쫓다가 해야 할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아제프는 상황도 잊고 싱글싱글 웃으며 에이든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이든을 조롱하는 태도였다.

“뭐라고 하셨죠? 해독약? 아아, 그건 감사합니다. 오해해주신 덕에 여러모로 꽤, 쉬웠어요. 권력의 말미가
꽤나 싱겁더군요.”

‘오해?’

에이든은 저잣거리에 소문을 퍼트린 놈이 아제프임을 깨달았다. 워낙 아이젠과 알체스테의 반응이 흉흉했던 탓에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았건만,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던 거였다.

“감히 네놈이!”

에이든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제프의 뺨을 내리치려고 했지만, 아제프는 알체스테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턱-

가볍게 붙잡은 손을 으스러지듯 부여잡자 육체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에이든은 신음을 삼키며 이를
갈았다.

“크윽- 란델, 윽!”


“너무 시시해서, 얼떨떨합니다. 저희는 꽤 안간힘을 써야 할 줄 알았는데 발버둥 치는 건 그쪽이더군요.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저렇게 증거를 쌓아두셨는지. 덕분에 일이 술술 풀렸습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싱글 웃으며 빈정거렸다.

에이든도 이렇게까지 주술사에게 깊이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체스 위의 말처럼 휘두르고 쓸모없으면


버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그런 건지 생각보다 많이 관여해 있었다.

에이든은 줄줄이 두었던 악수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그가 한 짓이 맞았고, 그가 바라는 게 맞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감히 나를 속여?’

에이든은 이게 지켈리온 탓임을 알고 주먹을 꽉 쥐었다.

“지켈리온. 그놈은 어디 있지?”

“동지를 찾으십니까? 안타깝게도 폐하, 아! 더는 폐하가 아니시니……. 그렇죠. 당신이라고 칭하면 되겠군요.
당신의 동반자는 이미 몸만 남은 상태입니다. 시신이 궁금하시면, 한번 보여드리는 아량 정도야 베풀 수
있습니다.”

아제프가 서늘한 눈을 에이든을 내려다보았다. 아제프보다 키가 작은 에이든은 그 사실에 분통해 하면서도 입을


열면 비명을 내지를까 봐, 소리를 낼 수 없었다.

“…….”

그저 분한 듯 빨갛게 달아오른 눈만이 장성한 알체스테와 아제프를 번갈아 노려볼 뿐이었다.

알체스테는 심기가 복잡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서서 에이든을 서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에이든을 굳이
찾아온 건 해결되지 않은 궁금함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내팽개치듯 에이든의 팔목을 놔주고, 참 이상하다는 듯 에이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이상하죠? 왜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죄를 지은 건 당신인데요.”

“네놈들이 감히 나를 속여 그 자리를 꿰찬 걸 내가 모를 듯싶으냐? 내 자리를 탐내 꾸역꾸역 수도로 들어온 게


누구더냐! 이 자리를 탐해, 저놈을 불러들인 게 누구더냐!”

에이든은 정말 억울한 듯했다. 뭐든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게 같잖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에이든을 비웃었다.

“하! 됐습니다. 시간낭비하기도 싫군요. 이것만 묻고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겠습니다. 소피아 엘린델. 혹시 이
이름을 기억합니까?”

아제프의 첫 성은 엘린델이었다. 겨우 몇 년밖에 쓰지 못해 입에 익지도 않은 성이었지만, 어쨌건 그랬다.

에이든은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비록 가축 버리듯 버렸다고 하나,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노파심에


저를 거쳐 간 여자들의 이름은 다 기억해두는 편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에이든이 아제프의 얼굴을 더듬듯 바라봤다. 아제프 란델은 입양아였고, 입양되기 전의 그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자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오래 기억할 것도 없었다. 에이든의 취향은 언제나 실비아를
닮은 여자였으니까.

‘그래. 유독 실비아를 닮은 것이 있었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닮았군.’

아제프는 실비아와 닮았다. 정확히는 소피아를 닮은 거였지만, 에이든이 보기에는 그랬다. 실비아의 이목구비가
남자로 바뀐 탓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제프가 더 어릴 적에 그의 얼굴을 봤다면 떠올랐을지도 몰랐다.

에이든이 그의 약점을 알아차렸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그 천것의 아들인가 보지? 네 어미에 대해 궁금한가? 아니면, 내게 복수하기를 꿈꾸나?”

아제프는 악랄하게 휘어지는 금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당신이군요. 그걸로 되었습니다.”

“뭐?”

“전하, 제 용무는 끝났습니다.”

아제프는 그저 아이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는 복수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행복이 흐르는 강물에 굳이 시커먼 진흙을 덕지덕지 펴 바를 이유는 없었다. 아제프는 더 이상 복수에 눈이 멀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제프 몫의 복수는 알체스테의 몫에 얹혔다.

아제프는 그걸로 미련이 없다는 듯 뒤돌아 방을 나갔다.

에이든은 멍하니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에이든의 눈에 흉악한 기운이
들어찼다. 에이든은 알체스테를 바라보며 실비아를 떠올렸다.

“너도 네 어미에 대해 궁금하냐? 네 어미가 나를 배신하고 다른 놈에게 몸이나 주는 창녀였다는,”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은 그저 저를 마음껏 휘두르고 싶었다는 것을요. 제가 분노해 당신을 죽이기를
기다립니까? 제가 아비를 죽이고 황좌에 오른 패륜아로 남길 원하신다면, 저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너는 좀 더 내게 매달려야 했다! 살려달라고 빌고, 지켜달라고 애원해야 했어!”

에이든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알체스테에게 우악스레 달려들어 그의 뺨을 내리치려고 했다.

알체스테는 에이든이 제 생각보다 많이 작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저보다 한참 밑에 선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알체스테는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고, 에이든의 귀에 속삭였다.

“제가 아버지께, 드릴 복수의 부산물은 허무함입니다.”

아버지. 그 단어가 퍽 다정하게 들려서 에이든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한 발 늦게 알체스테의 속삭임을


이해한 에이든이 눈꼬리를 휙, 치켜세웠다.

“뭐?”
“당신은 여전히 황궁에서 머무를 겁니다. 가장 춥고, 어두운 황궁의 독방에 갇혀 평생을 사세요. 돌봐줄 이 없고,
당신의 말에 복종하는 이 없으며, 당신에게 휘둘릴 이 없는 고독한 곳에서 평생을 사는 것. 그게 제 복수입니다.
부디, 허무하게 살아주세요.”

알체스테도 미련이 없다는 듯 뒤를 돌았다. 에이든은 덜컥, 닫힌 문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감히, 감히!!!!!!!!!!”

노성이 문을 두드렸으나, 들어오는 이 하나 없었다. 분에 못 이긴 에이든이 물건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렸으나


그가 다치든 말든 신경 쓰는 이 하나 없었다.

에이든은 비로소 제게 주어진 형벌을 이해했다.

“큭, 크윽, 하하하하!”

미쳐버린 광소가 문을 깨부술 듯 흔들었다. 역시, 반응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8 화 (完)
128

에이든을 폐하고, 몇 달이 정신없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바뀐 권력구도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했고, 알체스테는 황권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아제프는 엘제이 곁에 오래 머물 수 없을 정도로 바빠져서 종종 알체스테를 향해 이를 가는 일이
잦았다.

엘제이는 툴툴거리면서도 알체스테를 꽤 성실히 도와주는 아제프를 보며 즐겁게 웃었다.

아제프는 여전히 알체스테에게 툴툴거렸고, 얼핏 그를 귀찮아하는 듯했으나 둘 사이에는 서먹함이 사라졌다. 가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둘을 보면, 사이좋은 형제 같았다.

물론, 이 말을 아제프가 듣는다면 싸늘한 얼굴로 부정할 테지만.

엘리사와 아제프는 천적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싫어했고, 사사건건 티격태격 싸웠다. 엘리사가
아제프에게 이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엘리사는 여전히 아제프만 보며 손톱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었고, 아제프는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간극이었다.

알체스테와 엘리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고, 아제프와 엘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서 달라진 게 있었다면, 자매가 황궁에 찾아가 함께 식사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아! 엘제이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더 생겼다.

엘제이는 엘리사와 함께 입궁을 한 뒤, 혼자 황궁의 신전을 종종 찾아들었다. 알체스테는 엘제이의 출입을 묵묵히
허락했고, 아제프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언니! 오늘도 또 신전에 갈 거야?”

“응. 다녀올 테니까, 먼저 쉬고 있어. 알겠지?”

엘리사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 엘리사는 저를 혼자 두고 방을 나가는 엘제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궁의 시녀들에게 턱짓했다.

황후의 자리가 내정된 엘리사의 명령에 시녀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엘제이를 졸졸 쫓아갔다.

엘제이는 엘리사가 시녀들을 붙였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엘리사가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꽤 먼 거리에서 쫓아오는 시녀들을 뒤에 달고 엘제이는 곧장 황궁의 신전으로 들어섰다, 프리멧사를 경배하는


신전은 언제나 따스한 온기가 흘렀다.

“기도실, 비었나요?”

“물론입니다.”

신전에는 기도실이 여럿 있었지만, 엘제이가 찾는 곳은 프리멧사가 현신했던 그때의 기도실뿐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알체스테의 명으로 엘제이 혼자 그 기도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엘제이는 늘 비어 있는 기도실을 의아하게 여기며 얼핏 눈치를 챘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엘제이가 기도실 문을 열자, 시녀들은 더 이상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엘제이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기도실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이 프리멧사의 여신상을 더듬었다.

옅은 분홍색 드레스가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엘제이는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여신의 석상 아래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오늘은 프리딘에 들러 아이들의 생활을 살피고 왔어요. 시아가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델릭이라는
아이가 유독 영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엘제이는 조곤조곤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 풀었다.

엘제이는 프리딘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봐주고는 했는데 시설이
크지는 않아도 꽤 쾌적했다.

프리딘은 고대어로 ‘축복의 빛’이라는 뜻이었지만, 사실은 프리멧사의 이름을 따 지은 것뿐이었다.

엘제이는 베아르시 제국의 어려운 사람 모두를 도와줄 순 없었지만, 프리멧사의 이름을 빌려 종종 선행을
베풀고는 했다.

[아유, 예쁜 것. 어쩜 저리도 예쁠까?]

프리멧사는 그 이후로 현신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신전을 내려다보며 엘제이의 모습을 감상하고는 했다. 흰 뺨이
싱긋 웃으며 씰룩거렸다. 프리멧사는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엘제이의 뺨을 매만지듯 덧그리며 웃었다.

프리멧사는 프리딘을 세운 이유가 엘제이 나름의 속죄라는 걸 알았다.


엘제이는 아제프에게 문장을 건넨 이후, 그의 자잘한 상처를 죄다 치유하고 자질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제프는
속이 시원해 한동안 웃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지만, 엘제이는 좀 달랐다.

엘제이는 좀 더 많은 이를 위해 쓰지 못하고 아제프 한 사람을 위해 자질을 사용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매번


좀 자제하라고 외치던 프리멧사를 떠올리며 미안해했다.

프리멧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엘제이의 생각은 그랬다.

엘제이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시설을 세웠고, 아제프는 그녀를 도와줬다. 프리딘은 완전히 베푸는 게 아니라,
베푼 만큼 거둬들이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다행히 프리딘에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몰리지는 않았다.

아제프가 중간중간 적당히 쳐낸 덕이었다. 아제프가 엘제이를 걱정해 그런다는 걸 아는 엘제이는 그 역시 모른


척했다.

그들의 관계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엘제이는 제 가슴께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웃었다.

“오늘은 아제프가 남색 쥐스토코르를 입었는데, 무척 잘 어울렸어요. 저도 재주가 늘면 그의 옷을 한번 지어주고


싶어요. 안 그런 척하면서도 가끔 물끄러미 문장을 바라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무척 귀여워요.”

[귀엽기는 개뿔! 징그럽다. 징그러워!]

프리멧사가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고 아제프를 칭찬하는 엘제이에게 반박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엘제이에게
닿는다면 그리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엘제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프리멧사는 대놓고 투덜거렸다.

[하여튼 그놈,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문장을 선물해준 놈 중,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한 건 그놈뿐이야!]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고 문장을 건네는 건 아니었지만, 프리멧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아제프를
타박했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은 듯 환하게 빛나는 그를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면서도, 괜히 뿔이 났다.

딸을 빼앗긴 어머니의 심정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엘제이의 둥근 뺨으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그녀는 프리멧사의 석상을 보다가 그리움이 얼룩진 눈물을 흘렸다.

“여신님, 보고 싶어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 여신님껜 늘, 감사하게 생각해요.”

[세상에! 내가 보고 싶니, 아가야? 그런 거니? 응?]

프리멧사가 엎드렸던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했다.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남신이 없었다면,
프리멧사는 필히 그러했을 거였다.

프리멧사와 함께 있는 형별의 신, 켈레덴은 펄쩍 뛰는 프리멧사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겨주며 엄하게 말했다.

[프리멧사. 현신은 이제 안 된다. 이제 가야 하니, 네 아이를 보는 건 그만두도록 해라.]

[아! 잠시만요! 누가 안 간다고 했어요? 내 아이가 떠날 때까지 있겠다는 약속이잖아요!]

[회의에 늦기 전이라는 조항을 달았을 터. 더는 안 된다.]

켈레덴이 무심한 눈으로 한 차례 엘제이를 훑으며 프리멧사를 종용했다. 프리멧사는 아이처럼 볼을 부풀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인만큼,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만약 아제프가 기도실에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프리멧사는 얌전히 켈레덴을 따라갔을 터였다.

달칵- 문고리가 조용히 돌아가고 아제프가 들어왔다.

[잠깐만요! 저놈이 왜 여기 온 거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태양의 신이 미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다.]

[누가 그걸 몰라요? 모처럼 흥미진진하니까 가만히 좀 계세요!]

[…….]

신이라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니었다. 프리멧사보다 몇천 년은 더 살아온 켈레덴은 태어난 지 고작 천


년밖에 안 되는 어린 신 주제에 저를 막 대하는 프리멧사를 묵묵히 받아넘겼다.

아제프는 벽에 삐뚜름하게 몸을 기대고 서서 프리멧사의 여신상을 흘긋 올려다봤다.

“조금쯤은, 고마울지도…….”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작게 속삭이는 아제프의 말을 놓치지 않은 프리멧사가 화난 듯 콧김을 슝- 내뱉었다.

켈레덴은 흘긋 프리멧사를 바라봤다. 화가 난 듯 버둥거리는 팔과는 달리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하는


애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지간히도 저것들을 좋아하는군.’

켈레덴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시 더 그녀를 기다려주기로 했다.

엘제이는 기도를 다 끝냈는지 눈물을 닦고 일어서다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아제프를 발견했다.

“아제프?”

“이거 주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아제프가 작은 유리상자를 내밀며 웃었다. 엘제이가 잡아도 차갑지 않게 예쁜 유리로 상자를 만들고,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들에 보석을 박아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이건, 와……. 예뻐요. 다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 잊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엘제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신음하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보석이 곳곳에 박혀 다양한 색감을 내는 그것은
토끼의 집이었다.

엘제이는 빨간 루비가 박힌 토끼의 눈과, 에메랄드로 장식한 풀밭 같은 걸 보다가 웃었다. 다시는 없을


호화찬란한 토끼집이었다.

아빠 토끼, 엄마 토끼, 아기 토끼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춰보던 엘제이는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기 토끼가……. 한 마리밖에 없네요? 전에는 아기 토끼, 세 마리였는데.”

“네. 하나면 충분하죠.”

엘제이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아제프는 싱긋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꼬마 엘제이가 될지 꼬마 아제프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하나면 충분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그거 알아요? 저의 처음은 언제나 당신이었어요.”

샐샐 웃으며 미끄러지는 숨결에 엘제이는 호흡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상자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엘제이는 신전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아제프를 말리진 못했다.

“처음……?”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고, 나를 구원해준 것도 당신이 처음이었으며, 내 생에 유일한 것도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러니 책임져주세요.”

“네?”

엘제이는 당당한 얼굴로 책임지라고 선언하는 아제프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제프가 빙긋 웃으며 엘제이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초록빛의 반짝이는 아첼의 신록이 반지로 가공되어 엘제이의 손에서 반짝였다. 베아르시 제국의 남자는 청혼할 때,
여자의 눈 색과 같은 색상의 보석을 선물했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아ㅡ.”

아제프가 살짝 벌어진 입술로 고개를 숙였다. 미끄러운 것이 안을 훑었다.

흔들리는 상자를 단단히 쥐다 보니, 엘제이의 등은 어느새 벽에 닿아 있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며 웃었다.

“처음을 죄다 뺏어갔으니, 끝도 탐해줬으면 하는데……. 당신의 대답은?”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고 싶었어요.”

엘제이가 아제프 손에 상자를 넘기며 그를 끌어안았다. 살짝 세운 발끝이 용기를 담아, 흔들렸다.

아제프는 제게 들어오는 엘제이의 향기를 맡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키스를 받았다. 말캉거리는 신체가 축축하게
뒤엉겼다.

아제프는 눈을 나른하게 깔았다. 그녀의 모든 걸 취할 듯이 탐욕스럽게 구는 건 여전했다.

‘죽어서도 내 옆에 있어줘.’

[저! 저놈!]
아제프의 속내를 읽은 프리멧사가 성을 내며 파닥거렸지만, 켈레덴은 그녀를 붙잡으며 현신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됐다.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가야 한다.]

발버둥치는 프리멧사가 그에게 끌려갔다.

그 뒤, 신전에서 생긴 일은 아제프와 엘제이의 기억에만 남았다. 별일은 없었다. 아제프는 단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계속 속삭였다.

“나의 끝에, 당신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사랑해, 제이.”

비틀린 운명은 구원에게 끌렸다. 구원은 그를 놓지 않았으며, 비틀린 남자는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구원은
그의 옆에 존재했다.

악역은 비로소, 최후를 맞이했다.

-完-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29 화 에필로그(1)
129

베아르시 제국력 816 년 아 9 일, 두 사람은 봄의 시작에서 처음 만났다.

봄이 막 몰려와 씨앗을 한가득 뿌렸고, 겨우내 차가웠던 땅은 봄의 온기와 축복을 받아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우거지는 계절, 푸름에 휩싸여 그들의 인연은 넝쿨처럼 깊숙이 얽혔다.

그로부터 한 해가 빙그르르 돌았다.

베아르시 제국력 817 년 아 9 일, 새로운 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첫날로부터 정확히 1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먼저, 두 사람의 나이가 변했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사이좋게 나이를 한 살씩 먹어, 아제프는 22 살이, 엘제이는
20 살이 되었다.

엘제이의 20 번째 생일은 아제프가 그토록 기다리던 성년의 날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계획했고, 아제프는 그가 원하는 걸 얻어냈다.

역시, 이번 해의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엘제이는 더는 엘제이 티아세가


아니었다.

엘제이 티아세는 엘제이 란델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티아세 영애가 아닌, 후작 부인 또는 란델 후작 부인으로
불렸다.

엘제이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보는 풍경 또한 바뀌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혼자 침대에서 자던


엘제이 곁에 이제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엘제이는 눈을 반짝 떴다. 잠자리에 예민한 아제프의 성격상 그들의 침실에는 늘 암막커튼이 길게 내려와
있었기에,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다.

“하암ㅡ.”

길게 하품한 엘제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옆을 더듬거렸다. 포근한 이불 밑에 깔린 단단한 살결이 손끝을 타고


느껴지자 엘제이는 안심하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을 내딛자 찌릿, 허리가 울렸다. 엘제이는 얼굴을 작게 찌푸리면서도 발끝을 세웠다.

아제프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발끝을 세우고 총총 걸어간 엘제이가 커튼을 살짝 젖혀
창밖을 내다봤다.

어두웠던 방 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졌다. 햇살이 눈을 간질이며 괴롭혔다. 눈이 부셔


눈가를 찡그린 엘제이가 멍하니 서서 햇살을 맞았다.

따스한 기운이 몸을 훑으며 지나가자, 엘제이의 눈가가 나긋하게 풀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햇살은
더는 엘제이의 눈을 괴롭히지 않았다.

해가 높이 떠 있는 걸 보니, 이미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엘제이는 뻐근한 허리를 손으로 주무르며, 그를 깨울지


아니면 다시 살금살금 들어가 더 잘지 고민했다.

“잘 잤어요?”

엘제이의 고민이 무색하게 아제프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신혼생활이 시작된 이후 엘제이가 먼저 일어난 건 처음이라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는 곧 참지 못할 기분을
느끼고 일어났다. 아제프는 곧장 걸어가 엘제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별것 아닌 아침 햇살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아제프는 그가 느끼는 행복감을 표현하기 위해, 엘제이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쪽쪽 소리를 냈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엘제이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으응- 좋은 아침이에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인사에도 멈추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잠이 덜 깬 엘제이는 창문을 손으로 짚었다. 아직 날씨가 서늘한 바깥과 열이 들뜬 손가락이 만나 창문에 뿌연


기운이 스몄다.

아제프는 흘긋, 그걸 바라봤다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졸려요? 더 잘까?”

엘제이의 목덜미를 물고 빠는 걸 멈추지 않는 입술이 미끄러지듯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이


몸 안으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더 자겠다고 말하면, 다른 의미로 침대에 끌려갈 게 뻔했다. 아제프는 어젯밤의 정념이 가시지 않았는지
지분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둥글게 말려 올라간 슈미즈가 엘제이의 가슴께에 닿았다.

“아제프, 잠깐 으읏,”

“들고 있어. 응?”

아제프가 손을 들어 엘제이의 손가락 틈을 벌리고 그 사이에 천자락을 끼워 넣었다. 채근하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은 걸 보니 그를 말리는 건 틀린 듯했다. 엘제이의 허리가 낭창하게 휘어졌다.

아제프는 발발 떠는 다리를 못 본 체하며 엘제이의 배꼽 주변을 느리게 핥았다. 축축한 혀가 미끄러지듯 내려가
얼핏 한 장 남은 얇은 천자락을 들출 듯 말 듯 장난을 쳐댔다.

“아으! 흐응-.”

엘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헐떡거렸다. 힘이 풀린 손가락이 천자락을 놓치자 아제프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실크가
쏟아졌다.

아제프가 킥킥거리며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엘제이의 옷 안에 갇힌 모양새가 꽤 웃긴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손을


들어 올려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피부를 느리게 만지며 웃었다.

“잘 잡으라고 말했을 텐데, 하여튼 말 안 들어.”

“하지만,”

“침대에서, ‘하지만’은 없다고 했잖아.”

졸음에 휩싸인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는 침대가 아니었다. 엘제이는 억울했지만, 입술만 웅얼거릴 뿐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아프다고 하면 분명, 멈출 텐데……. 말할까? 그냥, 참을까?’

엘제이는 끽끽 비명을 지르는 몸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몸을 맡겼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미끄러지듯 올라간 손이 슈미즈 자락을 들춰내며 빠져나왔다. 아제프는 다시, 엘제이의 손에 그것들을 쥐여 주며
그녀의 몸을 눈으로 쭉 훑었다.

살짝 들어온 햇살을 탐욕스레 머금은 피부는 하얗게 반짝거렸다. 부서지는 햇살보다 아름다운 피부에 아제프가
성난 사람처럼 돌진했다.

엘제이의 엉덩이가 창문턱에 걸려 넘어갔다.

“다리 좀 올려 봐.”

아제프가 엘제이의 귓가에 속삭이며 허벅지 아래에 손을 집어넣었다. 엘제이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아제프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엘제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걸 기다리지 못했다.

늘 그렇듯 부끄러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 아제프가 허벅지를 틀어쥐며 창문 쪽으로 다리를 꺾어
올렸다.
“아악!”

눈을 둥글게 뜬 아제프가 황급히 엘제이의 다리를 내려주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인상을 찌푸린 아제프가 커튼
자락을 확 걷어냈다. 반쯤 헐벗은 몸에 빛이 하얗게, 스며들었다.

아제프는 끙끙거리는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이 허리를 짚고 있음을 확인하고 아차 했다.

“젠장.”

아제프는 속으로 뭐라 뭐라 욕을 빠르게 지껄였지만, 평범한 수준을 벗어난 험한 말은 결코 엘제이의 앞에서


내뱉지 않았다. 엘제이의 허벅지 아래로 손을 부드럽게 넣은 아제프가 그대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엘제이는 안전하게 침대에 다시 누웠다. 이 자리에 돌아오는 순간 허겁지겁 입술을 삼켜댈 것 같았던 남자는
점잖은 얼굴로 돌아와 엘제이의 뺨을 매만졌다.

“미안해요. 확인했어야 했는데.”

엘제이는 아제프의 몸 상태를 잘 따라가지 못했다. 아직 며칠 안 되었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고, 그의 체력을


따라가기에는 엘제이의 체력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게 다른 이유의 하나였다.

엘제이는 죄책감이 서려 시무룩해진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버린


엘제이의 잘못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확실히 말하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요.”

“그래도 미안해요.”

아제프는 얇은 천자락 사이로 보이는 울긋불긋한 치흔을 바라보며 반성했다. 그가 종을 살짝 흔들자, 곧 욕실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제프라고 매번 이 상태를 잊는 건 아니었다. 살살 해야지, 적당히 해야지, 매번 되뇌지만 쉽지가 않았다.

아제프는 꽤 오랫동안 갈급함에 시달렸다. 결혼 전까지는, 그녀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며 스스로
고삐를 당긴 탓이었다.

아제프는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자신이 쓰레기인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했다. 그것밖에 모르는 짐승도 아닌데 매번 이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그는 오늘은 진짜, 아무 짓도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정말, 오늘은 정말, 아무 짓도 안 해야지.’

엘제이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아제프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제프, 풉! 아하하하!”

“난 심각한데, 왜 웃는 거예요. 절제가 잘 안 된단 말이에요.”

“아까 침대에서 ‘하지만’은 없다면서요.”

엘제이가 여전히 킥킥거리며 아제프를 놀렸다. 그의 말투를 흉내 내 좀 더 놀려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엘제이도 많이 장난스러워진 것 같았다.

엘제이는 짓궂게 눈을 휘며 아제프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아제프의 뚱한 얼굴이 금세 뭉개지고,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그 말은 취소예요.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순간, 멈췄어야 했는,”

“쉿! 이리 와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더 깊이 반성의 늪에 잠기기 전에 그를 끌어당겼다. 침대에 털썩 쓰러진 아제프 옆으로 재빨리
굴러간 엘제이가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엘제이가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아제프의 팔을 탁탁, 두드렸다.

“편안하고 좋네요. 이렇게 있어요.”

“가만 보면 제이도 꽤 게으르단 말이죠.”

아제프가 피식, 웃으며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몇 달 전, 겨울은 유난히도 매서웠는데 엘제이가 함께 있어서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제프는 따끈따끈한 몸을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콸콸콸- 욕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제프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물이 다 찼는지 끼릭-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아제프가 어젯밤 명령했던 일을 끝마친 시녀는 곧장 몸을 물리고 사라졌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린 아제프는 부끄러움이 많은 엘제이를 위해 한 번 더 기척을 살폈다.
욕실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잠들기 전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어? 벌써 물 다 받았어요?”

“제이는 졸았으니, 시간이 빨리 갔죠?”

“으음-.”

아제프를 졸음기를 가득 매단 초록색 눈을 보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고, 엘제이는 조그맣게 신음하며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못 본 척해도, 이미 다 본 거 아는데요.”

아제프는 장난을 칠 것처럼 그녀를 살짝 흔들었지만, 엘제이가 무서워하거나 다칠 정도로는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욕실 안으로 발을 디디자 뿌연 수증기가 눈앞을 가렸다.

아제프는 적당히 뜨거운 물 온도를 손으로 확인해본 뒤 조심조심 엘제이를 바닥에 내려줬다. 아제프는 예술품을
감상하듯 엘제이를 쭉 훑어보다가 장난스럽게 입매를 올렸다.
“자, 이제 벗으세요.”

“……네?”

“안 벗고 들어갈 건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부끄럽잖아요!”

아제프는 결국, 엘제이의 손에 팔뚝을 찰싹, 얻어맞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0 화 에필로그(2)
130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맞은 팔보다 더 붉게 달아오른 엘제이의 얼굴을 보며 작위적으로 한숨을 푹, 내뱉었다.


하아- 길게 내뱉은 숨결이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을 풍겼다.

“알았어요. 제가 벗기는 걸로 하면 되죠?”

“아제프!”

얼굴이 달아오른 엘제이가 거의 울먹이듯 소리치며 그의 팔뚝을 다시 노렸다. 찰싹찰싹, 피부가 마찰되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지만, 아제프는 기꺼이 제 팔뚝을 내주며 싱그럽게 웃었다.

곧 함께 목욕할 생각을 하니,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맞으며 그녀의 옷을 위로
당겼다.

아이처럼 홀라당 벗겨진 엘제이가 미처 가릴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을 쭉 훑어본 아제프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워요.”

“…….”

아제프의 칭찬에 엘제이의 머리에서는 작은 화산이 퐁, 터졌다. 그녀는 해롱해롱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를 때릴 생각도 잊은 듯 무방비하게 서 있는 엘제이를 보며 아제프는 혀를 찼다.

아제프는 제 옷도 마저 벗고 엘제이를 끌어안아 물속으로 들어갔다. 허벅지 위에 엘제이를 앉힌 아제프가 그녀의


몸 위에 물을 살살 뿌리며 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안 뜨거워요?”

“…….”

이미 혼이 나간 엘제이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흔들었다. 조금 전 그의 시선에 희롱당한


것 같긴 한데, 기분이 오묘했다. 싫은 기분은 아닌데, 굉장히 부끄러웠다.

‘이 사람이랑 있어서 더 어지러운가?’

엘제이는 아제프의 품에서 도망갔다. 아제프는 물살을 헤치며 도망가는 엘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욕조
끝에 앉아 얼굴을 푹 담갔다.

아제프는 코끝까지 담그는 엘제이를 보고 킥킥거리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품이 위에 둥둥 떠 있어서 그의 몸이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거품 코로 들어가면, 매워요.”

“…….”

엘제이는 겨드랑이 아래쪽에 손을 넣어 그녀를 들어 올리는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도망갔던 것이 무색하게
엘제이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그의 허벅지에 앉아야 했다.

“부인, 말이 없으면 부끄러운데. 닫고 있으면 벌리고 싶고.”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엘제이는 눈을 데구루루 굴려 싱긋, 눈웃음치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예뻤다. 엘제이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흔들었다.

쪽.

아제프가 킥킥 웃으며 입술을 내렸다. 엘제이의 입술에 닿은 그것은 볼이 홀쭉해지도록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똑똑, 두드리는 몸짓에 엘제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그 안을 파고든 것은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농염한 몸짓에 엘제이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파르르 흔들렸다.

“우음ㅡ.”

아제프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가 물 안에서 흔들리는 엘제이의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엘제이의 손가락 틈에 깍지를 꼈다. 따뜻한 물에 잠겨 골골거리는 게 귀여웠다.

아제프가 엘제이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가슴 위에 얹었다. 말캉거리는 살결이 물결을 따라 흔들렸다.

아제프가 천천히 엘제이의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가슴 위에 돋아난 문장이 손끝에 톡톡 걸렸다.

아제프는 더한 짓도 하고 싶었지만, 고작 몇 분 전 다짐한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는 아쉬운 듯 엘제이의


혀뿌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탐욕을 부리듯 요동치는 움직임에 엘제이의 몸이 축축 늘어졌다.

“하아-.”

아제프는 흐트러지는 엘제이를 느끼고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엘제이가 눈을 끔뻑거렸다. 나른하게 풀린 눈가는 평소의 청초한 모습을 잃고 잘게 흔들렸다.

아제프는 동그랗게 솟아난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오밀조밀한 코끝에 하얀 거품이 묻었다.

“앗!”

엘제이가 코를 찡긋거리며 그것을 털어내려 했지만 물속에서 손을 꺼낼 때마다 거품이 딸려와 더 심하게 번지기만
했다.

아제프는 거품으로 세수하는 엘제이를 킥킥거리며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멀리 놓인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거품이 눈이나 코로 들어가면 좋지 않았다.

“케이크로 장난친 어린애 같아졌네요.”

“아제프가 먼저 시작했어요. 코가 간지러웠단 말이에요.”

아제프가 부드러운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입을 쪽, 맞췄다. 살짝 들어 올려 계단 위에 앉혀주니,


엘제이의 가슴이 반쯤 물속에서 빠져나왔다.

아제프는 물에 반쯤 잠겨 일렁일렁 흔들리는 녹빛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제프는 더는 문장을 요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뻐요.”

아제프는 조심조심 엄지손가락을 들어, 엘제이의 문장을 덧그렸다. 둥글게 휘어진 부분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은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엘제이는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아제프 것도 예뻐요. 똑같이 생겼으니까.”

아제프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그는 거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문장을 더듬듯 찰랑거리는 수면을 바라봤다.

벌써 1 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아제프는 아직도 종종 멍하니 서서 문장을 들여다보곤 했다.

엘제이는 그런 아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거품을 헤쳤다. 두 손을 모아 거품을 헤치니 아제프의
상반신이 살짝 드러났다. 엘제이는 그의 가슴팍에 자리 잡은 문장을 손으로 콕콕 찔러보며 웃었다.

“아제프 것도, 예쁘네요. 제 것만큼.”

엘제이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씩, 웃은 아제프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문장에 입을 맞췄다. 엘제이는 촉, 닿는


간지러운 감촉에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목욕은 그로부터 한참은 더 지나서야 끝이 났다.

***

“자, 여기 앉아볼래요?”

옷을 갈아입은 엘제이는 아제프가 톡톡 치는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힐긋 올려다본 아제프의 얼굴이


화사하게 반짝거렸다.

엘제이는 물기가 깨끗하게 닦인 아제프의 머리카락을 아쉽게 바라봤다. 내심 그의 머리칼에 물기가 고여 있기를
바랐던 초록색 눈이 시무룩해졌다.

“머리, 제가 말려주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그랬어요?”
아제프가 눈을 둥글게 떴다. 결혼한 뒤, 둘은 몇 번이나 같이 목욕을 했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엘제이는 늘 아제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싶었으나, 피곤함에 지쳐 떨어지기 일쑤였다. 아침보다는 밤에 욕조로
들어가는 일이 잦았기에 엘제이는 축 늘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엘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그러니 다음에는 제게도 기회를 주세요.”

“이런……. 몰랐어요. 다음에는 꼭 기다릴게요. 오늘은, 저만 즐기고요.”

아제프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엘제이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올라온 천이 엘제이의 머리를 감쌌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걸 꽤 좋아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너울거리다가, 그의
손에 정리되는 게 만족스러웠다.

목욕을 끝낸 아제프는 침대에 앉아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엘제이는 나긋나긋하게 머리를
누르는 손길을 느끼며 꾸벅꾸벅 졸았다.

까딱까딱 흔들리는 시야로 햇살을 받아 빛나는 유리 상자가 들어왔다. 안에 있는 눈은 햇볕을 고스란히 받고도
전혀 녹지 않았다. 아제프가 종종 제 자질을 채워주는 덕분이었다.

아제프는 멍한 눈을 하고 그의 손을 따라 끄덕끄덕 춤추는 엘제이의 고갯짓을 바라봤다. 아제프의 시선이


엘제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눈이 햇살을 받으니, 더 예쁜 것 같아요. 반짝반짝 빛나니까, 더 사랑스러워요. 어쩜 이리도 예쁠까?”

아제프가 청혼하며 건네준 토끼집은 엘제이의 보물 1 호였다. 그녀는 유리 상자를 침대맡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종종 들여다보곤 했는데, 사람의 시선을 앗아간 채 돌려주지 않는 것이 만든 사람을 쏙 빼닮았다.

‘저렇게 예쁜 것이 또 한 사람 있지.’

엘제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금방이라도 뒷다리를 폴짝이며 날아들 것 같은 토끼들은 아쉽게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아제프가 손을 쓰면 조금쯤이야 움직이겠지만 엘제이는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엘제이는 토끼집 위에 얹은 구름 모양의 파란 보석을 보며 웃었다.

“얼굴도 예쁘고, 눈도 예쁘고. 몸도, 예뻐요.”

유리 상자에 부끄러움을 묻어 엘제이는 모처럼 솔직하게 속삭였다. 그는 예뻤지만, 직설적으로 말해주기에는


엘제이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상자에 수줍음을 사사삭- 펴 바르고도 부족했는지 엘제이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게 그렇게 예쁜가요?”

아제프는 수줍어하는 엘제이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준 선물을 좋아해주니 뿌듯해하면서도 저깟 무생물


따위에 질투가 이는 것이다. 그는 햇살을 받아 제법 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토끼들을 바라봤다. 그가 만들긴
했어도 요망스러운 것들이었다.
“네. 특히 아기토끼가 제일 귀여워요.”

“…….”

아제프는 요망함의 정점을 찍은 쪼끄만 것을 노려봤다. 새끼들은 사랑받기 위해 어린 시절 둥글고 앙증맞은


외양으로 살아간다. 아제프는 그 습성을 그대로 반영해 둥글둥글 귀엽게 빚어놓은 것뿐이었지만, 감히 갓난이
주제에 엘제이를 홀리다니 여간 요망한 것이 아니었다.

‘요망한 것.’

아제프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 토끼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파도가 요동치는 벽안에 빨간 것이 걸렸다.

“아제프, 그런데 토끼 눈은 왜 빨간색이에요?”

“글쎄요. 큰 이유는 없는데. 그냥 하얀 토끼에는 빨간 눈이 어울릴 것 같아서? 너무 짙은 빨강으로 하면 이상할


것 같아서 좀 밝은 색감으로 고른 건데 마음에 안 들면 눈, 뽑을까요? 다시 새것을 넣으면 되니까요.”

아제프가 햇살같이 웃으며 토끼의 눈을 손가락으로 톡, 가리켰다. 단정한 손끝은 엘제이만 허락한다면 저것들의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듯 매섭게 빛났다.

엘제이는 어쩐지 불쌍한 토끼들이 공포에 질려 바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저 모습 그대로가 좋았다.
엘제이는 황급히 말을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으응- 아니에요. 그것보다, 궁금하지 않아요?”

“무엇이요?”

“저는 아제프와 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요. 아제프를 닮은 푸른 눈도 어여쁠 것 같고
저를 닮은 초록색 눈도 사랑스러울 것 같아요.”

“초록색 눈?”

“네? 아- 저를 닮으면 녹안을 담고 태어나겠죠?”

아제프는 푸른 눈 어쩌고 하는 말은 무시하고 초록색 눈이라는 목소리만 뇌에 입력했다. 어떤 감정을 느낀 듯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제프는 시선을 미끄러트려 엘제이의 눈을 바라봤다.

‘초록색 눈이 두 쌍. 엘제이가 둘로 늘어나는 건가?’

아제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초록빛에 잠식되어 가라앉는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터였다.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있겠어.”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1 화 에필로그(3)
131
아제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바로 옆에 있는 엘제이에게는 잘 들렸다. 엘제이가 고개를 살짝 젖혀 그를
바라봤다.

“계획? 무슨 계획이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을 사근사근 바라봤다. 특이한 색감은 아니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이 정말 좋았다.
그는 말을 걸듯 한참을 더 엘제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리 어색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좀 더 서두를 필요가 있다는 소리예요. 해가 중천에 떴네요.”

아제프가 창문을 가리키며 소곤소곤 속닥였다. 그의 말대로 봄볕은 겨우내 추위를 죄다 몰아낼 듯 하늘 높이 올라
너르게 번져갔다.

엘제이는 그제야 왜 아침부터 목욕하고 수선을 부렸는지를 기억하며 벌떡 일어났다.

“앗! 그럼 저 먼저 옷 갈아입고 올게요!”

“네. 뛰지 말고, 천천히.”

“네!”

엘제이가 침실 옆에 달린 방문 가까이로 다가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시녀가 문을 열어주며 엘제이를 맞았다.

아제프는 드레스 룸으로 쏙 들어가는 엘제이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남편이라는 명목상의 위치는 퍽
만족스러웠다. 은근슬쩍 저기 들어가 부인의 옷을 보겠다고 하면 엘제이는 어리바리하면서도 그를 말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모르는 척 문을 열어봐? 옷 갈아입는 중인 것 같은데.’

파란 눈이 짙은 남빛의 밤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정말 심각한 고뇌에 잠긴 듯 눈매가 깊어졌다. 까딱까딱


흔들리는 손가락이 침대에 부딪혀 톡톡, 소리를 냈다.

엘제이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자, 아제프를 맞이하러 들어온 알모어는 드레스 룸을 뚫어져라 보는 아제프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후작님? 뭐 하십니까?”

“알모어.”

“네! 후작님, 준비 안 하십니까? 이러다 제일 늦으시겠습니다!”

알모어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빠르게 쏟아내고 아제프의 눈치를 봤다. 아제프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알모어는 늘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지금의 아제프는 확실히 많이 유해진 편이라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아제프가 알모어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아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싸늘한 얼굴로 알모어를 노려봤다. 엘제이가
잘 받아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알모어의 생각대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건방진 놈. 그 얼굴이나 치워라.”


아제프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며 짜증스럽게 얼굴을 팍 구겼다. 아침부터 엘제이의 얼굴만 보다가 저것을 보니,
불만족은 더 심해졌다. 아제프는 멀쩡한 알모어의 얼굴을 뜯어놓을 듯 노려보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알모어는 쫓아오지 말라는 듯 코앞에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이 있는데, 내뱉었다가는 귀가


좋은 아제프에게 들킬지 몰랐다. 알모어는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아제프를 쫓아갔다.

“후작님! 같이 가요!”

***

아제프는 다급한지 허둥거리는 엘제이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줬다. 엘제이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눈을 흘긋거리며 주변을 훑어봤다.

“어차피 늦은 거 천천히 해요.”

아제프는 피식 웃으며 엘제이의 보닛 끈을 똑바로 고정했다. 반쯤 미끄러진 보닛이 단정하게 올라갔다. 아제프가
초록색 보닛 끈의 매무새에 신경 쓸 때, 엘제이의 몸은 반쯤 앞으로 나간 상태였다.

“아제프, 우리 많이 늦은 것 같아요. 다들 배고플 텐데, 어쩌죠?”

“가족들인데, 뭐 어때요.”

아제프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제프는 역시 둘이 좋았다. 셋도, 넷도 아니고, 다섯이서 함께 보내는 봄


소풍이라니, 그는 되도록 천천히 가고 싶었다.

아제프는 허둥거리는 엘제이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고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꽤 먼 곳에서 바글거리는 기척을
보니, 가기 싫어 발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와아- 날씨가 참 좋네요. 향긋한 냄새도 나고!”

꽃놀이하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알록달록 공원을 장식했고,
적당한 온기의 햇살이 엘제이의 머릿결에 머물러 산들산들 춤을 췄다.

아제프는 발에 밟히도록 많은 꽃과 나무에 시선을 주는 대신 나비처럼 너울거리는 엘제이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한쪽으로 묶어줄 걸 그랬나? 땋아 내리는 것도 어울렸을 텐데.’

엘제이는 평소에 머리를 반으로 묶거나 길게 풀어헤치는 걸 즐겼는데, 오늘은 바깥에 오래 있는 만큼 단정히
묶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머리카락에 대한 고민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엘제이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꽃향기? 나무 냄새? 좋은 향기가 나요.”

“봄 냄새가 나는 거죠. 꽃가루 날려서 코 간지러우니까 너무 오래 맡지는 마세요.”

아제프는 연신 코를 킁킁거리는 엘제이를 말리며 그녀의 코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아제프는 매끈하게 뻗은 제


코와는 달리 동글동글한 엘제이의 코를 좋아했다.

감촉이 말랑말랑해서 말로 해도 될 걸 굳이 몸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것 중 안 좋아하는 게


있나 의문이지만.
“다들 어디 있어요? 꽤 넓어서 아직 안 보이네요.”

“그래 봬도 폐하시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멀리 들어간 모양이에요.”

아제프가 살짝 빈정거리며 폐하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엘제이는 입매를 살짝 비트는 아제프를 발견하고 웃었다.

“두 분 사이가 참 좋아요. 같이 걷는 걸 보면, 꼭 형제 같아요.”

“…….”

아제프는 엘제이의 말임에도 답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저 말을 듣고서는 결코 좋은 말은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누가 사이가 좋냐며 싸늘하게 노려봤겠지만, 엘제이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마음을 안다는 듯 맞잡은 손을 흔들며 웃었다.

“에이- 아니라고요? 매일 두 분이 같이 다니잖아요. 아마, 저 다음으로 폐하와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길지


않을까요?”

“하아…… 능력이 출중해서 피곤하네요. 부디, 우리 폐하께서 두 명으로 늘어나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아제프는 못마땅했지만, 표정을 풀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알체스테는 보위에 오르면서 기존의 에이든파
귀족들을 많이 쳐냈다.

에이든의 죄목이 너무 명명백백하고 극악무도해서 다시 보위에 올릴 수는 없지만, 에이든의 아들들이 많이 남아


있는 이상 에이든파 귀족들은 여러모로 견제의 대상이었다.

에이든파 귀족들은 내쳐진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틈이 보이면 비집어 올라올 게 보여서 알체스테는 새 인재를
뽑아 제 곁에 두는 데에 힘을 쏟았다. 다만, 인재라는 게 쉽게 발굴하기 힘든 게 문제였다.

아제프는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몇 사람분의 몫을 혼자서 해내야 했다. 그토록 바라던 엘제이와의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음에도 신혼여행조차 가지 못한 아제프는 알체스테에 대한 불만이 등등하게 솟아난 상황이었다.

엘제이는 알체스테를 향해 이를 가는 아제프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항상 폐하의 편에 서주시잖아요.”

“뭐, 제 일신의 안전을 위한 거긴 하지만요. 게다가, 가족이니까.”

엘제이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제프에게는 가족이 생겼다. 그는 엘제이의 가족이었고, 알체스테의 가족이었다.
가족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속해 안정감을 찾아가는 아제프가 기꺼웠다.

엘제이는 살금살금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밀며 환하게 웃었다. 흐릿해진 시야로 엘제이와 같은 밀색의 머리가
보였다.

“아! 저기 보인다.”

엘제이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도 엘제이와 아제프를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났다.

반짝반짝한 눈망울을 한 엘리사가 손을 붕붕 흔들다 못해 드레스 자락을 쥐고 뛰어왔다.


“꺄아아아아! 언니!”

“리사! 뛰면 안 된다.”

알체스테가 뒤늦게 엘리사를 잡아 엘리사는 발만 동동 구르며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에게


손목이 잡혀서도 포기하지 않고 집념 어린 눈을 하는 엘리사를 끔찍하다는 듯 바라봤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둥근 이마를 탁,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제프는 엘리사의 하얀 이마에 빨간 손자국을


내주는 상상을 하며 악랄하게 웃었다.

아제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죽이는 데 중점을 뒀던 예전의 상상에 비하면 많이 유순해진 편이었다.

“왔니?”

“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가까이 다가가 미리 깔아둔 천자락에 앉으니 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졌다. 시중인들은 저 멀리 떨어졌고, 평화로운
꽃나무 아래에는 다섯 사람이 정답게 앉았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와 엘리사는 무시한 채 아이젠을 향해 사근사근 웃어 보였다.

“아버님, 잘 지내셨어요?”

“그래. 어제도 보았지만, 오늘도 보니 더 반갑구나.”

“식사는 먼저 하시지 그러셨어요. 제이가, 과일 예쁘게 깎아왔는데 이따가 맛봐주세요.”

아제프가 살가운 어조로 말을 붙이며 아이젠 옆을 차지했다.

아이젠은 성년이 되기만 기다렸다는 듯 홀라당 엘제이를 데려간 아제프가 못마땅했지만, 그보다 더 못마땅한 놈은
성년이 되기도 전인 엘리사를 홀라당 강탈한 알체스테였다.

아이젠의 머릿속에 아제프가 도둑놈이라면, 알체스테는 강도였다.

엘리사는 황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거동이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다. 반면, 아제프는 약속대로 엘제이를 데리고
종종 아이젠을 찾아갔고 아이젠 마음속의 저울은 아제프에게로 확 기운 상태였다.

아이젠은 양옆에 아제프와 알체스테를 끼고 있었지만, 그의 무릎은 아제프 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가 있었다.

엘제이는 시무룩해진 알체스테를 흘긋 바라보다가 어정쩡하게 웃었다.

“폐하, 요즘 일이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모처럼의 휴일이니 쉬는 게 맞다. 리사도 황궁에만 있었으니 바깥 공기를 쐴 필요가 있지.”

알체스테는 별일 아닌 척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엘리사는 1 년 사이 많이 핼쑥해진 알체스테의 얼굴을 붙들며


울상을 지었다.

“어휴- 진짜 자는 얼굴 본 게 언젠지 모르겠어! 우리 폐하, 눈 밑에 시꺼멓게 내려온 거 보여?”

“리사……. 그러면 안 돼.”


엘제이는 황제의 얼굴을 무엄하게 붙잡는 동생을 보며 잔소리했다. 당하는 알체스테는 그러나 저러나
무표정이었지만, 천방지축인 동생을 둔 언니는 늘 불안한 심정이었다.

엘리사는 혀를 차며 알체스테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알지! 여기는 우리밖에 없는데, 뭘! 황궁에서는 안 이래. 제 말이 맞죠?”

“리사 말이 맞다.”

아제프는 엘리사의 말이 절대 진리라도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체스테를 마땅찮게 바라봤다.

‘저 살쾡이 같은 여자에게 아주 잡혀 사는군.’

아제프 또한 엘제이에게 꼼짝도 못 하는 건 마찬가지면서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아제프나


알체스테나 거기서 거기였다.

엘제이는 피크닉 바구니를 젖혀 그 안에 든 도시락을 꺼냈다. 전문가의 손을 거친 탓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갖가지 음식이 엘제이의 손에 펴졌다.

“우욱!”

올라오는 음식 냄새에 누군가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2 화 에필로그(4)
132

음식에 손을 뻗던 이들이 동작을 뚝 멈췄다.

아제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는 당황스러운 듯 파란 눈이 잘게 떨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입술을 벌렸던 엘제이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저 아니에요!”

엘제이를 향했던 시선이 또르르 굴러 엘제이 옆에 앉아 입을 가리고 있는 엘리사를 향했다. 엘리사는 조금 전


소리를 낸 게 본인이 맞는다고 주장하듯 다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웁! 우욱!”

아이젠이 눈매를 매섭게 치켜세우며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알체스테 역시 아연한 얼굴로 엘리사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엘제이는 흡사 바위산 같은 남자들을 한 번 보고, 동생을 살짝 일으켰다.

“냄새가 역해서 그래? 바람 좀 쐴까?”

“마요네즈 냄새가…….”
엘리사가 핼쑥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알체스테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도시락 통을 닫으며 벌떡 일어났다.

늘 무뚝뚝하게 가라앉았던 까만 눈이 어떤 기대심을 품고 빛났다. 반질반질한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엘리사의 얼굴을 더듬던 알체스테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엘리사와 알체스테 사이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제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관찰했다. 곧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짚이는 게 있는 것 같네요.”

“…….”

아이젠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묘하게 찌그러진 얼굴이 둘을 바라봤다. 아이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화무쌍했다.

엘제이는 이 사태를 확실히 알기 위해 손을 들어 시녀를 불렀다.

알체스테는 황제였다. 나이가 어리지만, 피습이나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황궁의 하나둘쯤은 붙어 있는 게


당연했다. 엘제이는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들을 뒤로하고 차분히 시녀를 바라봤다.

“따라온 황궁의가 있겠지? 의원을 데려와 주렴.”

“네!”

시녀의 부름을 받은 황궁의가 허둥지둥 당도했다. 황궁의는 엘리사의 팔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고 향했다. 눈빛에 힘이 있었다면, 엘리사의 팔목이 진작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긴장된 몇 초가 흐르고, 황궁의는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팔목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떻지?”

“새로운 여명이 떠오를 날을 기다리며, 황후마마의 배 속에 계십니다.”

베아르시 제국은 황족의 탄생을 여명이 밝았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황궁의의 말이 끝나자 엘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아직 홀쭉한 배를 손으로 쓸어보며 웃었다.

“얼마나 되었는가?”

“여든 일 정도 된 것 같군.”

대답은 황궁의가 아닌, 알체스테의 입에서 나왔다. 엘리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의문이 차오른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때쯤부터 희미하게나마 아이가 느껴졌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알체스테는 따스한 눈으로 엘리사의 배를 살폈다. 보통 가슴께에서 빛나는 불빛이 엘리사의
배 속에도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알체스테는 어느 정도 짐작한 듯했다.

“아니, 왜 그걸 제게는 말 안 해주셨어요?”


“확실하지가 않았다.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말하지 못했다.”

“우리 폐하, 생각보다 소심한 면이 있으세요. 성정이 다정하셔서 그런가 봐요.”

엘리사가 팔불출처럼 웃어 보이며 어깨를 폈다. 어느 지점에서 뿌듯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사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흘렀다.

알체스테는 엘리사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어 그녀의 홀쭉한 배를 한번 만져봤다.

“아직은 잘 모르겠군.”

“시간이 꽤 흐르면 배도 많이 나오겠죠? 아직은 아기님이 쑥쑥 자라시는 중이니까요.”

알체스테가 다정한 얼굴로 엘리사의 볼가에 입을 맞췄다. 알콩달콩한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에 머물렀다.

“고맙다, 리사.”

“축하해, 리사.”

알체스테를 따라 엘제이도 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엘리사가 저보다 먼저 임신하다니, 엘제이는 꽤 신기한 기분이었다. 아직 어린애 같은 동생이 새 생명을 품고


있다니, 기쁘고 놀라워서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속 시원하게 웃지 못하는 건 아이젠뿐이었다. 그는 귓가에 계속 맴도는 80 일이란 말에 입가를 씰룩거렸다.


엘리사가 엘제이보다 먼저 시집가기는 했지만, 크게 차이가 난 건 아니었다. 80 일이라면, 결혼도 전에 아이부터
생겼다는 뜻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리 된 이유는 알체스테가 아니라 엘리사 탓이 컸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아이젠의 볼은


경직되어 갔다.

아제프는 재미있다는 듯 아이젠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너무 늦지 않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아- 고마워요. 헤헤.”

평소 같았으면 아제프의 가식적인 미소를 몸으로 들이박았겠지만, 엘리사는 지금 구름 위에 누운 기분이었다.


아제프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엘리사는 유하게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엘리사의 시선이 유일하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아이젠에게로 향했다.

아이젠은 엘리사가 저를 쳐다보자 떨떠름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아주었다.

“축하드립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가장 큰 기쁨이죠. 아비는 마마가 자랑스럽습니다.”

아이젠은 훌쩍 커버린 손을 붙잡으며 감상에 젖었다. 아이들의 어미가 살아 있었다면 더 좋은 말을 해주었을 텐데


그는 이 이상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혼 전에 임신을 하긴 했지만, 뭐 어떤가. 좋은 일에 괜히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던 아이젠은 군소리 없이 이


일을 넘어가기로 했다.

엘리사 옆에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한 황제라는 놈의 작태가 몹시 아니꼬웠지만, 어찌 됐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뒤이어 들리는 엘리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에이- 저 혼자 한 것도 아닌데요. 폐하도 힘썼으니, 함께 칭찬해주세요.”

엘리사가 해맑게 웃으며 알체스테의 어깨에 폭 기댔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은 구름 한 점 없이 해맑은 태양인데,
아이젠의 얼굴은 찌그러졌다.

“어머.”

엘제이는 아이젠의 얼굴을 보며 작게 소리를 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능한 아이젠이 저 정도로 얼굴을
구기는 건 쉽게 볼 수 없는 볼거리였다.

엘제이가 구경이라도 하듯 흥미진진한 얼굴로 세 사람을 살폈다.

“폐하. 축하, 드립니다.”

아이젠이 씹던 껌을 뱉듯 퉤, 하며 대충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마땅찮은 기색이 역력한 장인의 얼굴에 눈치 없는 알체스테도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알체스테는
없는 눈치를 쥐어짜 그나마 무난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고맙군. 공작도 할아버지가 될 테니, 미리 축하하네.”

할아버지라는 말에 살짝 흔들렸던 강직한 눈썹이 다시 단정하게 내려앉았다. 아이젠은 배를 감싸고 헤실헤실 웃는


엘리사를 슬쩍 보며 덧붙였다.

“임신 초기에는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게 많다고 들었습니다. 전례를 살펴봐도 황궁에서는 산모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사가로 내려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황궁과 제 저택은 그리 멀지 않으니, 당분간 리사가 친정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제이도 황궁보다는 아버님 댁이 편할 테니, 언니랑 오순도순 노는 날이 많아지겠어요. 폐하는
최근 무척 바쁘시잖아요. 할 일도 많으신데, 혼자 심심하게 계시는 것보다는 그게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리사에게는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이,”

“그것도 물론, 당분간은 폐하께서 힘쓰시면 되겠어요. 설마, 임신 초기신데…… 일을 맡기시려는 건 아니겠죠?
두 분 결혼 전에도 폐하께서 하신 일인데요.”

아제프가 냉큼 끼어들어 엘리사를 아이젠 옆에 붙여두려고 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은근슬쩍 할 일을 젖혀두고
엘리사에게 도피한다는 걸 알았다. 그의 계획이 실현하려면 알체스테가 기계처럼 일해주어야 한다.

아제프가 싱긋 웃으며 아이젠 편에 붙었다.

엘리사는 엘제이를 흘긋 보며 고민했다. 알체스테는 잠잘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쁜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는


것보다는 오랜만에 아버지, 언니와 함께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너무 긴 시간이 아니라면, 저도 좋을 것 같아요! 언니! 우리 아기 옷 같이 만들까?”

“응? 그럴까?”

엘리사가 황후가 되고 나서, 아제프와 알체스테는 그녀를 황후로 대우했다. 반면, 유일하게 아직 엘리사에게
반말하는 건 의외로 엘제이였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엘제이도 엘리사에게 경어를 썼으나, 가족만 있는 자리에서는 엘리사를 편하게 대하고는
했는데, 그건 한제이의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

알체스테는 시무룩한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미 결정을 끝냈는지, 엘제이와 함께 아기의 배내옷을
만들겠다며 싱글거렸다.

아제프가 알체스테를 조금 밀치며 그들 곁에서 조금 멀어졌다. 아제프는 알체스테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었다.

“폐하, 잘 되었네요. 그동안 황후께서 적적해하신다는 핑계로 많이 도망가신 거 다 압니다. 이제 정사에 좀 더


힘을 쏟으시면 되겠어요.”

“오해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정말 리사를 위한 거였다.”

“네. 그러시겠죠. 저는 그저 이번 기회에 나라를 위해 힘을 더 쓰실 수 있어 축하드린다는 인사를 드리려는


겁니다.”

아제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제프는 황궁의 외교부 일을 맡고 있었다. 당연히 낮에는
엘제이와 함께 있을 수 없었고, 그 사이 엘리사가 엘제이와 함께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제프는 오직, 엘제이와 함께할 신혼여행만을 기다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체스테와 아이젠에게 일을 몽땅
미뤄둘 필요가 있었기에 지금부터 차근차근 그 준비를 할 계획이었다.

우선은, 휴가를 달라고 하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는 알체스테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승기는 내게 기울었군.’

알체스테는 좋아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는 아제프를 얄밉게 보다가 무척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지? 공작이 얼마나 리사를 붙들 것 같은가? 며칠?”

아제프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며칠은 어림도 없다는 듯 웃었다. 알체스테의 초조한 얼굴을 훑어본 아제프는
여유로운 얼굴로 잠시 뜸을 들였다.

“뭐……. 조금 심술을 부리시는 것뿐이니 그리 오래가지는 않으실 겁니다. 따님을 사랑하시는 분이니 달을
넘기시진 않겠죠.”

아 달은 92 일까지 있었고, 오늘은 아 9 일이었다. 알체스테의 머릿속에 간단한 산수 문제가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건 아제프의 계획대로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3 화 에필로그(5)
133

데구루루 굴러간 알체스테의 머리는 간단한 답을 내뱉었다.

‘83 일?’

맙소사, 까마득했다. 무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알체스테는 깔깔깔 웃으며 엘제이와 이야기하기 바쁜 엘리사를 바라봤다. 엘리사는 언니와 아버지를 꽤 좋아했다.
알체스테와 산 지 몇십 일은 되었으니 아마 한동안은 집에 머무르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몰랐다.

알체스테는 황제의 신분이었다. 법도를 중요시하는 그가 황제의 책무를 죄다 팽개치고 엘리사만을 만나러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80 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저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알체스테의 목울대가 꿀꺽, 크게 흔들렸다. 알체스테는 도움을 청하듯 아제프를 간절히 바라봤다.

“조언은, 없나?”

“맨입으로요?”

아제프는 역시 치사한 놈이었다. 알체스테는 큰 걸 원하는 듯한 아제프의 얼굴을 이미 본 후였지만,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조금 고민하던 알체스테는 할 수 없이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원하지?”

“이번 달이 끝나기 전에, 휴가를 주세요. 보름 정도?”

“보름? 지금 상태에서 보름이나 자리를 비우겠다고?”

“날이 좋으니, 여행을 가기 딱 알맞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 미리 말하는데, 혹시라도 휴가 기간을


줄이겠다고 하시면,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늘이시려거든,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휴가를 늘려줄 리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굳이 얄밉게 그 말을 붙였다.

알체스테가 드물게 짜증 서린 눈으로 아제프를 휙 노려봤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아제프는 그걸


모른다는 듯 태평하기만 했다.

“주실 겁니까, 말 겁니까? 둘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

아제프는 이미 알체스테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아마, 아이젠은 엘리사를 80 일간 붙들고
있을 생각을 없을 테지만, 그 사실을 결코 말해줄 리 없는 아제프는 여유로운 얼굴로 황제에게 사기를 쳤다.

‘뭐,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어도 나는 몰랐다고 하면 될 일이니까.’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조금도 변하지 않는 표정은 훌륭한 사기꾼의 기술이었다.

알체스테의 감은 육식동물에 가까웠다. 닥쳐올 위기, 업무에 방해가 되는 징조, 해가 되는 일 등을 날카롭게


알아차리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감을 그쪽으로만 몰아넣었는지, 다른 분야에서는 눈치가 꽝이었다.

아제프의 사기는 딱히 악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쪽의 감은 느리고 서툴러서 알체스테는 아제프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가 사라지면 당장 밀어닥칠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들을 떠올렸다. 공포라는 감정에 무딘 남자도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하지만, 80 일간 엘리사를 안 보는 건 알체스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무게를 단다면 당연히 엘리사


쪽으로 기울었다.

“아제프,”

“아! 혹시라도, 중간에 불러들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혹은 줬다가 뺐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저, 진짜 안 참을


겁니다.”

알체스테가 입을 벙긋거리자마자 아제프의 가 날아왔다.

알체스테가 기가 막힌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는 아제프 같은 사기꾼이 아니었다. 메마른 성미에 불이 타올랐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안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언이나 하는 게 어떤가.”

“보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 보름.”

“흐음- 그럼 거래성립입니다. 뭐……. 저라면 3 일 정도로 줄일 수 있겠지만, 폐하의 능력으로는……?”

아제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젠의 사랑을 받기에는 글렀다는 듯 살래살래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알체스테는 아제프를 몹시 아꼈고, 그를 친동생보다 더 소중히 여겼지만, 저 태도는 그의 낯을 떨떠름하게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이 순간 알체스테는 철저한 약자였기에 저 태도도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게 분했다.

메마른 혀에 까끌까끌한 모래가 번졌다. 알체스테는 모래알을 씹는 기분으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내 눈치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건 잘 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아제프는 절절하게 애원하는 알체스테를 바라보며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둘은 서로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닥속닥


말하고 있었지만, 아제프는 아주 중요한 걸 말해준다는 듯 고개를 더 숙였다.

“아버님은 말입니다. 분명,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이죠.”

“무엇을?”

“아기요. 아기. 그러니, 아기를 빌미로 마음을 살살 녹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말한다거나, 아기가 아버님을 닮으면 좋겠다거나.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공작을 닮은 아기?”

알체스테가 눈을 굴려 아이젠을 바라봤다. 딸들과 오랜만에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젠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부드러운 인상의 미중년이었다. 다만, 자매의 외모는 부친보다는 모친을 많이 닮아 있었다.

아제프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턱이 불거져 나오는 알체스테를 바라보다가 답답한 듯 인상을 썼다.

“말한다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까? 그 정도는 그냥 말씀하실 수 있어야죠. 사람이 그렇게 답답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렇군. 또 뭐가 있지?”

“중요한 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작정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하지 말고, 아버님의
기분이 좋으실 때를 노리세요. 지금처럼.”

“지금?”

알체스테가 성마른 음색으로 물으며 등을 살짝 돌렸다. 아제프는 기겁한 얼굴로 알체스테의 어깨를 붙들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이런 등신 답답이를 봤나!’

입안에 고인 욕이 찌덕찌덕 말라붙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알체스테를 위아래로 흘겨봤다.

모자란 사람도 아닌데, 유독 눈치는 저따위였다. 사랑만 받고 자란 것도 아닌데 저런 걸 보니 타고난 성정이 저


모양인 듯했다. 아제프는 한숨을 한 번 깊게 내뱉었다.

“아니! 지금이랍니까? 지금 말했다가는 역효과입니다. 적어도 며칠은 기다릴 줄 아셔야죠. 제가 말하고자 했던


건, 지금처럼 셋이 모여 있을 때가 적기라는 소립니다!”

“그런가? 리사를 데려가겠다는 말은 좀 기다렸다 하라는 뜻이군. 알아들었다.”

알체스테는 잊지 않겠다는 듯 아제프의 말을 차곡차곡 기억했다.

아제프는 아이젠에게 사랑받는 요령을 티끌만큼만 더 전수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한두 번 정도는 더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알체스테가 평소와 같은 낯빛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아제프는 느릿느릿 엘리사의 곁으로 돌아가는 알체스테가 못 미더웠지만, 티는 내지 않고 엘제이 곁으로 돌아왔다.

“아제프, 일이 많이 바쁜 거예요?”

엘제이는 아제프와 알체스테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일 때문이라고 오해한 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일이 바쁜 게 아니,”

“공작. 아기가 태어난다면 그대를 닮을 것 같다.”


아제프는 제 말을 끊고 다짜고짜 아이젠에게 말을 거는 알체스테를 아연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 남자는
타이밍이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아이젠도 얼떨떨했는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알체스테를 바라봤다.

“아……. 음, 그렇겠습니까? 첫 아이는 부친 쪽을 닮는다는 소리가 있던데요.”

아이젠은 좀 황당한 듯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살짝 웃으며 받아넘겼다.

‘다행이군. ……가만, 내가 왜 저놈을 걱정하지?’

저도 모르게 안도하던 아제프는 제가 알체스테를 걱정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는 잘 풀려가는 상황을 흘긋


보고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 딸기 하나를 집었다.

“그런가? 이상하군. 그대와 전혀 안 닮았는데.”

꼭 집어 누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알체스테의 시선은 첫째인 엘제이를 향해 있었다. 알체스테는 곧 엘제이와
닮은 엘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닮지 않았다. 알체스테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아이젠의 눈썹이 파들, 경련했다.

“안 닮았습니까? 자세히 보면 둘 다 저와 닮았습니다. 특히, 머리카락 색과, 손톱 모양이 저를 쏘옥-


빼닮았습니다.”

“그런가?”

알체스테는 엘리사의 손톱 모양을 살펴보며 전혀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제이가 먹기 좋도록 딸기 꼭지를 따고 있던 아제프는 아이젠의 혈압을 올리는 알체스테의 행동에 반쯤


포기해버렸다.

저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장인의 사랑을 받기는 틀려먹은 듯했다.

‘내게 나쁠 건 없지.’

알체스테가 미움 받는다면 그만큼 아제프의 상대평가는 올라갈 터였다. 아제프는 파르르 떨리는 아이젠의
손가락에 딸기 하나를 끼워줬다.

“제이가 아버님이 딸기 좋아하신다고, 직접 챙겨온 거예요. 드셔보세요.”

아이젠은 새콤달콤한 딸기 하나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불긋하게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평소라면 엘리사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해줬겠지만, 그녀는 지금 하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암-.”

어느새 내려앉은 적막을 가르고 엘리사의 하품 소리가 울렸다.

엘제이는 또다시 재미난 볼거리를 구경하듯 관람하는 태도로 세 사람을 지켜봤다. 꼭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도 하나 먹을래요?”
아제프가 친절하게도 엘제이의 입안에 딸기를 넣어줬다. 입안으로 쏙 들어간 딸기 과즙이 혀끝을 뭉근하게 스쳤다.

아제프는 묘한 눈으로 딸기를 오물오물 씹어 먹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딸기를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네요.”

“헙!”

딸기 먹다가 체할 뻔했다. 아제프는 아마도 딸기날벼락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엘제이는 작게 콜록거리며
아제프를 바라봤다.

엘제이의 시선을 느낀 아제프는 빨간 혀를 내밀어 딸기의 끝을 천천히 핥아 내렸다. 샐샐 눈웃음치는 꼴을 보니


고의인 게 분명했다.

“그때 딸기, 맛있었는데. 그렇죠? 제이도 좋아하잖아요. 딸기.”

‘고작 딸기가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지?’

딸기라고 발음하는 혀가 오늘따라 유독 붉은 듯도 했다. 엘제이가 울상을 지으며 딸기를 쪼물거렸다. 아제프는
그때와 같은 엘제이의 행동을 보며 이곳에 둘만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왜 대답이 없어요? 제이도 분명 좋아했잖아요. 어찌나 좋아했는지, 제가 딸기 물고 있는 벌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참지 못해서, 읍!”

귀 전체가 빨갛게 들뜬 엘제이가 참지 못하고 딸기 하나를 아제프 입에 쑤셔 넣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미처


떼어내지 못한 초록색 딸기 꼭지가 아제프의 입술에 살짝 걸터앉았다.

아제프는 씩, 웃으며 이빨로 딸기꼭지를 떼어냈다. 초록색 꼭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발긋한 시선을 교환했고, 알체스테는 영문도 모르고 아이젠과 눈싸움
중이었으며, 엘리사는 하품을 해댔다.

이건 뭐, 평화로운 봄 소풍이 아니라, 조용한 난장판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4 화 에필로그(6)
134

삐죽삐죽 튀어나왔어도 뱅글뱅글 잘만 돌아가던 톱니바퀴를 깬 건 엘리사였다. 꾸뻑꾸뻑 졸던 그녀의 고개가


알체스테의 어깨 위로 떨어져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이유도 모르는 주제에 아이젠과 끝도 없는 눈싸움을 하던 알체스테는 바닥에 떨어지려는 엘리사의 머리를 황급히
손으로 붙잡았다

“리사? 괜찮나? 왜 이러지?”

“우음……. 졸려요.”
엘리사는 반쯤 졸음에 잠긴 듯 그녀의 목소리는 혼곤하기만 했다. 알체스테는 제 손바닥을 베고 편히 눈감는
엘리사를 말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추어 있다가 조심조심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 위에 올렸다.

“단순히 잠이 와서 이러는 건가?”

“하암-.”

엘리사는 알체스테의 목소리에 답하는 대신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긍정했다.

엘리사는 뜨거운 태양 아래의 꽃잎처럼 흐물흐물 흔들렸다. 엘제이는 엘리사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겨주며 작게 속삭였다.

“피곤한가 보네.”

아제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눈을 반짝 뜨며 안타깝다는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임신하면 잠이 많아진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어요. 잠을 잘 자야 태아가 쑥쑥 큰다나? 많이


졸리신 모양인데, 여기서 재우는 것보다는 편한 방으로 옮기는 게 좋겠어요.”

“임신하면 잠이 늘어나나? 생각해보니 확실히 리사의 수면시간이 늘긴 했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 사람인데


오늘은 소풍 간다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기까지 했으니, 힘든 모양이군.”

알체스테가 안쓰럽다는 듯 엘리사의 뺨을 매만졌다. 그의 손이 볼을 톡톡 건드렸지만, 엘리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알체스테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아제프가 말한 대로 여기보다는 편한 방 안에서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건 제 집이군요.”

아이젠이 따라 일어서며 온화한 얼굴로 덧붙였다. 오랜 시간 티아세를 품었던 저택은 아제프가 쓸 수도 없게


붕괴해 놓았고, 잔해를 치우기는 했지만 그곳은 아직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아이젠은 황궁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야 했는데, 베아른이 수도 외곽에 있다 보니 아이젠의 집이 확실히
가까웠다.

아제프라면 매끈한 혀를 놀려, 평소 지내던 방이 편할 테고 거리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겠지만, 알체스테에게 그런 재주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알체스테는 환하게 미소 짓는 아이젠을 보며 몸을 움찔, 떨었다. 무척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체스테는


내키지 않는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공작의 집으로 곧장 가는 게 좋겠다.”

엘리사의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녀는 편안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다. 이 상태라면 마차의 흔들림에도 깨어나지 않을 게 뻔했다.

알체스테는 햇살을 머금고 움찔거리는 엘리사의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아제프는 이대로 소풍이 끝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슬쩍 아이젠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가 뒷정리하고 가겠습니다. 편하게, 먼저 가세요.”


뒷정리야 아제프가 아니라 그들을 따라온 시중인들이 할 몫이었지만, 아제프는 뻔뻔하게 말하며 웃었다.

엘리사가 잠이 들어 빨리 그녀를 눕혀야겠다는 생각이 강한 두 남자는 아제프의 말에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고마운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먼저 들어가 보겠네.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일찍 가서 미안하네. 자네는 제이와 천천히 즐기다
돌아오게나. 오늘은 얼굴을 보았으니, 굳이 집에 들르지 않아도 괜찮다네.”

“미안하지만, 먼저 가겠다.”

아제프는 사르르 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충분히 쉬실 수 있게 하는 게 더 중요하죠. 편히 들어가세요.”

“제이야, 오늘은 먼저 가야 할 것 같구나.”

“네. 아버지, 폐하,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들은 몇 마디 남기지 않고 황급히 사라졌다.

아제프는 점이 되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제야 입꼬리를 완전히 말아 올렸다. 아제프는 이제야
소풍다워졌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개가 만족스럽게 끄덕여졌다.

엘제이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직 배가 홀쭉하기는 했지만, 엘리사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줄곧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제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각한 얼굴을 하는 엘제이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

“모처럼 나온 소풍이니,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어디 가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근처에 얕은 계곡이 있는 것 같아요. 여기는 많이 봤으니까요.”

아제프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쫓으려는 수행원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눈짓을 해 보인 뒤 엘제이만 데리고 작은
동산을 넘었다.

정원이라고 해도, 원래는 산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평지는 아니었다. 아제프는 정원이라기보다는 사냥터에 가까운
베아른을 살피며 씩, 웃었다. 둘만 있기에 참 좋은 장소였다.

아제프의 말대로 조금 더 걸어가자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늘진 나무 아래를 지나 좀 더 걸어가자 환한


빛이 쏟아졌다.

엘제이는 빛을 가둬둔 것 같은 절벽과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세상에……. 무릉도원 같네요.”

울창하게 자란 꽃나무가 꽃잎을 살랑살랑 날려 보냈고, 너울거리는 물 위에는 꽃잎이 둥둥 떠 노닐었다. 봄볕을
머금은 물살은 거울처럼 반짝거렸고, 꽃잎배가 물장구를 치며 수면 아래 갇힌 햇살을 톡톡 건드렸다.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탓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꽤 험난했지만, 아제프가 손을 잡아주어 엘제이는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갈 수 있었다.

가까이 내려가서 보니 자연의 흥취가 더욱 깊어졌다. 감수성이 풍부한 엘제이는 어느새 촉촉해진 눈으로 계곡을
둘러봤다.

아직 봄이라 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이 맑아 바닥이 다 비쳤다. 아제프는 눈대중으로 그걸 확인하며 엘제이


곁에 다가가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가끔은 아이처럼 물장구치는 것도 좋겠죠.”

“제가 해도 되는데…….”

엘제이는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속삭였다. 아제프가 손을 물리자 햇살 아래 드러난 하얀 발끝이 수면 위를 톡,


건드렸다. 그녀의 몸짓이 둥글게 번졌다.

천천히 흘러가던 꽃잎은 갑자기 일어난 파도에 뒤집혔다.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꽃잎의 노래가 들렸다. 꽃잎은
뒤집히든 말든 수면 위에서 노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엘제이는 드레스가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히 옷자락을 붙잡으며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발로 물을 톡 찼다.


공중으로 올라간 작은 물방울들이 투명하게 빛나며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만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서 뭉쳐진 몇 개의 눈뭉치가 빠르게 회전하며 터졌다. 엘제이의 옆으로
작은 무지개가 여럿 피어났다.

엘제이의 손이 알록달록한 무지개를 톡, 건드렸다. 몽글몽글 부드러운 느낌이 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꼭, 꿈꾸는 것 같아요.”

“안심해도 좋아요. 이게 만약 꿈이었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제가 이처럼 편안한 걸 보니,


아무래도 꿈은 아닌 듯하네요.”

아제프가 피식 웃으며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아제프도 어느새 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엘제이는 고개 숙여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봤다. 아제프의 발등 위로 고동색의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물고기! 아제프, 느꼈어요? 물고기가 있어요!”

“계곡이니까요. 좀 더 깊은 곳에 들어가면 큰 물고기도 있을 거예요.”

아제프는 발등을 간질이고 지나가는 괘씸한 것을 느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계곡이니 물고기가 사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잔뜩 흥분해 발긋하게 달아오른 엘제이의 볼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물 안에 손을 집어넣고 잠시 기다리니, 퍼덕거리는 물살이 느껴졌다. 아제프는 가까이 다가오는 작은 몸체를


날렵하게 휘어잡았다.

“송사리 정도 되는 것 같네요.”
“귀엽다…….”

아제프는 삐쩍 마른 물고기가 뭐가 그리 귀여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송사리는 하얀 손바닥 위에서 몸을 작게 퍼덕였고, 아제프는 상기된 얼굴을 바라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지,
빠르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제프는 그저, 이런 게 휴식이라는 걸 알았다. 강도 높은 업무에 지쳤던 정신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오늘은 엘제이의 보조개가 유독 자주 고개를 내밀었다. 아제프는 미소 짓는 하얀 얼굴을 보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생산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즐거웠다. 아제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엘제이를 품에 안았다.

엘제이는 여전히 작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땡글땡글한 물고기의 눈동자에 헤실헤실
풀어졌던 뺨이 걱정으로 굳어졌다.

“밖에 나와 있으면, 얘가 숨을 못 쉴까요? 고통스러울까요?”

물속에서 사는 것이 저 미물의 습성이니, 좋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아제프는 한낱 물고기 따위를 위해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말을 고를 때, 엘제이는 허리를 숙여 물고기를 놓아줬다.

“앗! 차가워!”

한 손으로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모두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는지, 물고기를 놓아주다가 드레스 밑단이
젖어버렸다.

하필 고개를 숙였을 때 놓친 탓에 드레스가 깊게 잠겨 엘제이의 종아리에는 차가운 천자락이 찰싹 달라붙었다.

엘제이는 찝찝한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끙끙거렸고, 아제프는 허리를 숙여 드레스 자락을 다시 잘 붙잡았다.

“손으로 짜는 걸로는 어림도 없겠는데요?”

“괜찮아요. 조금 젖으면 어때요.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요.”

엘제이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아제프는 축축하게 젖은 밑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녀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살짝 후회되었다. 물놀이는 애초의 계획이 아니었으니 여벌 옷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저리 두면 차가울 텐데, 벌써 떠나기에는 아쉬웠다.

아제프는 좀 고민하다가 엘제이를 안아 들어 마른 바위 위에 앉혔다.

“수건이라도 가져올게요. 금방 다녀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아제프가 엘제이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서둘러 뒤돌아섰다.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엘제이는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는 아제프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괜히 바보같이 놓쳐서 귀찮게 해버렸네.”

엘제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창천 아래, 무릉도원 같은 이곳에, 엘제이만 덩그러니 남아 앉아 있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5 화 에필로그(7)
135

아제프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 남으니 뭔가 어색했다. 엘제이는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절경을 눈으로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아제프가 만들어둔 무지개는 공기 아래로 투명하게 스며들어 사라졌다. 엘제이는 그 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레이스 소재로 만든 드레스는 물을 많이 먹었다. 아제프가 손으로 짜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질척하게 젖은 터라
드레스가 엉겨 붙은 다리가 불편했다. 엘제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퐁.

발밑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엘제이는 무슨 소린가 싶어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숨을 쉬기 위해서인지
물고기 한 마리가 뻐금뻐금 입술을 벌리며 퐁퐁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귀여워라. 얘는 좀 크네.”

손을 뻗으면 계곡의 작은 친구가 달아날 걸 알았기에 엘제이는 눈으로만 그걸 구경했다. 뻐금뻐금 움직이는
물고기의 입속으로 꽃잎 한 장이 삼켜졌다. 제가 삼켜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물고기는 퉤, 하고 꽃잎을
바로 뱉어냈다.

“응? 푸흡,”

엘제이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트리다가, 물고기가 혹시 달아날까 봐 걱정되어 황급히 입을 가렸다. 곱게
휘어진 눈매가 즐거운 듯 휘어졌다.

엘제이는 조심스럽게 발을 담그고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작은 물결이 톡톡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쳤다. 동글동글한
물고기의 눈이 저를 향하는 것 같아서 엘제이는 숨을 죽이고 긴장했다.

퐁퐁.

물고기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을 뻐금거리며 마저 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제프가 돌아온 건 그때쯤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는지 엘제이는 혼자 얌전히 앉아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제프는 수면 위만 빤히


바라보는 엘제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으며 천천히 내려왔다.
거친 돌길을 내려오면서도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던 남자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아제프는 안심한 듯 길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며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봤다.

아제프에게 사랑이라는 건 퍽, 신기한 감정이었다. 그는 항상 높이 올라가기 위해 쉬지 않고 달리는 삶을


살았는데, 그저 바라만 보는 생산성 없는 일이 그에게도 기껍게 다가오는 것이 놀라웠다.

아제프는 엘제이와 함께 지내며 다양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걸 무어라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굳이 칭해보자면 이
마음이 행복인 것 같았다.

아제프는 지금, 적당히 덥혀진 따스한 물이 가슴 위로 잔잔하게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뜨거워 데지 않고, 차가움에 놀라지 않으며, 세찬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아제프는 그냥 안온하게 흘러가는 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길게 내려앉은 백금색 속눈썹 위에서 반짝반짝 고갯짓하던 햇살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가슴을 달구던 온기는 배
속 깊숙이 떨어져 손끝으로, 발끝으로 번져갔다.

천천히 물들이는 그 감정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아제프는 평온한 공기를 깨고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제이,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요?”

“앗!”

갑자기 들려온 아제프의 목소리에 놀란 엘제이가 저도 모르게 풍덩, 발을 휘저었다. 덩달아 물고기도 놀랐는지
물고기는 지느러미로 엘제이의 발을 찰싹, 때리고 황급히 도망갔다.

엘제이는 사라지는 물고기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아제프, 왔어요?”

“수건이랑 이것저것 챙겨 왔어요. 바위에 앉아 있느라 불편하진 않았어요?”

“네. 아제프는 힘들지 않았어요?”

“그리 멀지도 않은데, 힘들 게 있나요. 얌전히 잘 있고, 착하네요.”

아제프가 물살을 가르며 들어왔다. 맨발이 물을 철벅철벅 차는 소리가 즐거웠다. 엘제이는 가만히 손을 벌려
아제프를 끌어안았다.

“햇살이 아제프 몸을 데우고 지나갔나 봐요. 따뜻해요.”

“제가, 따뜻해요?”

아제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크게 확장된 동공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바로 마주 안지 못하고 손끝을 떨었다.

“네. 햇살 냄새가 나요.”

엘제이가 칭얼거리듯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웃었다. 친애가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아제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엘제이를 마주 안았다. 꽉 끌어안는 그의 팔에 힘이 꽤 들어갔다.

엘제이는 아프다고 신음하는 대신 그의 너른 가슴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역시 따뜻했다. 엘제이의 입술에서


나른한 숨결이 새근새근 번졌다.

아제프는 어두운 색감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햇살을 품고 따뜻한 체온을 유지했다. 반면 엘제이는 젖은 옷자락
때문에 살며시 추위를 느끼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반대였겠지만, 오늘은 엘제이가 그의 품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멍하니 끌어안고 있다가 그녀의 낮은 체온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엘제이를 안아 올렸다.

“아직 봄의 초입이라 꽤 쌀쌀한데,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는 감기에 걸리겠어요. 옷만 바로 말리고 가요.”

“아쉬운데……. 드문 기회잖아요.”

“다음에 또 올 수 있어요. 페하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협박해서라도 기회를 얻어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최측근으로 살다 보면 약점 한둘 정도야 금방이에요.”

아제프는 이미 알체스테의 약점 정도야 한 손에 넘칠 정도로 들고 있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말이 웃겼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또 기회가 있다면 이만 물러나 드리도록 할게요.”

새침하게 고개를 들고 속삭이는 말에 아제프가 피식 웃었다. 늘 차갑게 웃었던 입꼬리는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
웃는 입과는 다르게 냉소적이었던 파란 눈은 기쁨을 머금을 줄 알게 되었다.

눈치 빠른 아제프가 자신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제 뺨을 눌러보았다. 보들보들 풀린 근육이


아제프의 손끝에 꾹꾹 눌렸다.

의심이 많은 남자는 제 변화를 알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몇 번 더 뺨을 눌러보다가 손을


떼어냈다.

천천히 천을 깔고 엘제이를 앉힌 아제프가 엘제이의 발을 꼼꼼히 닦았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아제프도 젖었잖아요.”

“젖은 채로 오래 기다린 제이가 먼저죠. 가만히 있어요. 계속 닦아도 물이 졸졸 쏟아지네.”

아제프는 이미 수건 하나를 축축하게 적신 드레스를 바라보다가 손을 더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엘제이의 다리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 물기를 묵묵히 머금은 드레스가 축 늘어지며 물을 주르륵 흘려보냈다.

하얀 종아리를 타고 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얌전히 엘제이를 살피던 단정한 눈매가 노골적으로 깊어졌다. 그는
홀린 듯 엘제이의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읏!”

축축한 물기가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차가운 종아리에 손가락을 얽자 따스한 기운이 엘제이의 다리를 타고
흘렀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다리를 좀 더 치켜들자 엘제이의 드레스가 주르륵 미끄러져 그녀의 배에 떨어졌다.

엘제이는 배를 축축하게 적시는 드레스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지만, 아제프는 엘제이의 발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에 홀린 상태였다.
이처럼 환한 대낮에 그녀의 허벅지를 보는 건 처음이라 묘한 감정이 치밀었다. 아제프는 오늘 아침 스스로
다짐했던 걸 잊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과실 베어 먹듯 엘제이의 허벅지를 입술로 빨았다.

“아제프, 뭐 하는, 으응-.”

볼이 홀쭉해지도록 하얀 살결을 빨아들이자 생크림 같은 피부에 붉음이 번졌다. 아제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살결을 보다가 뜨겁게 달궈진 손을 엘제이의 허벅지 위로 밀어 올렸다.

보드라운 살결이 뭉근하게 잡혔다. 아제프는 진로를 방해하는 천자락을 들치고 엘제이를 내려다봤다. 열기에 집어
삼켜진 눈매가 발갛게 들떠 있어서 엘제이의 얼굴에도 붉음이 번졌다.

아제프는 발갛게 익은 얼굴을 보며 우악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하아- 진짜 참기 힘들어. 알아?”

“나는, 아무 짓도,”

“알아. 당신은 아무 짓도 안 했고, 나 혼자 짐승처럼 헉헉거리는 거지. 미친 것 같아.”

아제프는 목이 졸린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르렁거리는 음색이 못마땅해하는 짐승 같았다. 엘제이는


손끝을 파르르 떨다가 드레스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정염 어린 눈은 밤에 보는 걸로도 충분했는데, 아제프는 종종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변하고는 했다.

아제프는 허벅지에 달라붙어 주르륵 미끄러지는 드레스를 보다가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눈을 감고 치미는 욕정을
달랜 아제프가 엘제이의 귀를 잘근잘근 깨물며 낮게 속삭였다.

“그냥, 미쳐버릴 것처럼 좋아서 그래. 당신이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엘제이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눈을 굴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핥아 내리니 몸의 털이
쭈뼛 섰다. 엘제이는 히끅!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밖에서 하면 안 돼요.”

“왜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요. 부끄럽고, 민망하고.”

“여긴 사유지야. 황궁 소속이고,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못해. 게다가 내가, 다른 사람이 보게 둘 것
같아?”

“…….”

“하지만, 당신의 허락이 없다면 하지 않아.”

아제프가 안심하라는 듯 엘제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는 그저 온기를 나눠주기 위해 엘제이를


안았다는 듯 그냥 품을 가만히 내주고만 있었다.

아제프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가 엘제이를 홍시처럼 익혀준 탓에 추위는
이미 물러가 있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품에서 편안한 자세를 잡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무섭지 않으니, 미안해하지 마요.”

“……그래도 미안해. 당신이 놀란 거 알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초조할 때가 있어. 미안해.”

아제프가 얼굴을 조금 일그러트리고 엘제이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는 저의 악랄한 면모를 보여주기 싫어했다. 그는 늘 엘제이에게 다정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듯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그런 행동이 일종의 강박이라는 걸 알았다. 혹시,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엘제이가 저를
떠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두려움에서 오는 강박.

엘제이는 못된 아제프도, 다정한 아제프도 모두 좋아했다. 엘제이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아제프를
살살 달래며 속삭였다.

“저는 다정한 아제프도 좋지만, 음……. 지금처럼, 유혹하는 아제프도, 좋아요. 당신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이 한마디로, 아제프의 강박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아제프는 행복해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 끝이 날까 봐 두려운 듯했다. 이제 와 엘제이를 잃는다면, 그는 분명 미쳐버릴 터였다.

아제프는 다 먹지 못할 커다란 케이크를 선물 받은 소년 같았다. 그걸 다 삼켜버리고 싶은데, 케이크는 넘칠


정도로 많아 평생을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누구에게 빼앗기는 건 아닌지 초조해졌다.

아제프가 갑자기 맞이하게 된 크나큰 행운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아제프도 그 사실을 아는지, 조금 자조적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겁쟁이처럼 굴어서 미, 읍!”

엘제이가 아제프의 입을 손으로 척, 막았다. 그녀는 둥글게 뜬 아제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엘제이의 입술이 아제프의 가슴께에 닿았다.

엘제이는 정확히, 아제프의 문장이 있는 가슴에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아제프가 다소 더디게 굴어도 괜찮았다. 아제프에게는 두려워하는 그를 달래주고 사랑해줄, 엘제이가 있었다.

“사랑해.”

아제프는 비로소, 미안함을 털어내고 웃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6 화 에필로그(8)
136
베아른으로 소풍을 다녀온 지 또 몇십 일이 흘렀다. 아제프는 내일부터 휴가였고, 둘은 함께 신혼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잡았다.

엘제이는 바쁜 아제프 대신 짐을 꾸리고 집안 정리를 한 뒤 입궐했다.

엘리사는 아제프의 도움으로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갔고, 엘제이는 엘리사를 만나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아제프가 퇴궐할 때까지는 그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기도실 비었나요?”

엘제이는 늘 그렇듯 같은 질문을 했고, 그녀를 맞아주는 신관도 늘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론입니다.”

엘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실 문을 열었다. 기도실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엘제이의 것이었다. 시녀들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기도실로 바로 들어가려던 엘제이는 잊은 걸 떠올리곤 고개를 돌렸다.

“후작님께, 함께 퇴궐하자는 청을 넣어주렴.”

“아ㅡ.”

시녀가 깜짝 놀란 듯 작은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엘제이는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살짝 웃었다.

“왜 그러니?”

“퇴궐하시고 바로 신전으로 오시겠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그리 큰 비밀은 아니었기에, 시녀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사실을 털어놨다. 귀가 밝은 남자는 엘제이가 입궐했다는


걸 그새 들은 모양이었다.

엘제이는 불안한 듯 저를 올려다보는 시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모르는 척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면 되니까.”

엘제이는 아제프가 오면 놀라는 척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남자는 엘제이의 속내를 금방
알아차릴 테지만, 엘제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들춰내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기도실 문이 닫혔다.

프리멧사의 석상 아래 단정하게 무릎을 꿇은 엘제이가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앞으로 보름 정도는 이곳에 들르지 못할 것 같아요.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거든요.”

엘제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혼여행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운지 볼을 살짝 붉혔다. 결혼해서
엘제이 란델이 되었고 후작 부인이라는 칭호로 불렸지만, 아직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엘제이는 몰랐지만, 프리멧사는 엘제이의 기도가 시작되면 늘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얼굴을 붉힌 엘제이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자, 프리멧사의 고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예쁜 것.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

켈레덴은 찹쌀떡처럼 몽글몽글 풀어진 프리멧사의 뽀얀 볼을 바라보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프리멧사의 곁을


지키며 엘제이의 얼굴을 수백 번 봤지만, 아무리 봐도 뭐가 그렇게 예쁜지는 알 수 없었다.

켈레덴의 눈에는 인간보다는 여신인 프리멧사가 훨씬 아름다웠다.

저 영혼이 다른 것들과 달리 유독 환한 빛을 머금은 건 알겠지만, 그게 신을 홀리게 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프리멧사가 저 작은 인간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아는 켈레덴으로서는 엘제이가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형벌의 신은 차가운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늘 그 패턴의 반복이군. 질리지는 않나?]

[켈레덴 님이 제 마음을 어떻게 아시겠어요. 제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프리멧사는 켈레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엘제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만졌다. 시선 한 줌,


관심 한 줌, 켈레덴을 향하는 게 없었다.

켈레덴의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그는 저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 어린 신의 방종을 또 너그럽게 넘겼다. 옅은


색감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흔들리는 모습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기에 켈레덴은 더 끼어들기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신들도 결혼하시던데……. 여신님은 결혼 안 하시나요?”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제로 이 세계에는 많은 신이 존재했고 신들 사이에도


사랑은 있었다.

프리멧사는 엘제이에게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유순하게 답해줬다.

[나는 아직 앞길이 창창한 어린 신이라서 말이야. 나이가 좀 더 들면 모를까, 아직은 생각 없단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켈레덴의 검은 날개가 움찔, 떨렸다. 그는 왜 자신이 프리멧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지 몰랐다. 딱딱한 얼굴에 서늘함이 번졌다. 이건 다 요망한 말을 꺼낸 인간 때문이었다.

형벌의 신의 차가운 눈동자가 엘제이를 쏘아봤다. 프리멧사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인간에게 화풀이는 할 수


없었다. 원래 그런 비열한 성격도 아니지만.

켈레덴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못마땅한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닿지 않을 테지만.

[응? 켈레덴 님, 뭐 하세요?]

[아무것도.]

엘제이를 힘껏 노려보던 눈이 살짝 흔들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처음부터 엘제이는 보지 않았다는 듯 딴짓을


했다.
프리멧사는 조금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켈레덴은 원체 다른 이에게는 관심이 없는 신이었다. 그러니 저
나이 먹도록 장가를 못 간 게 아니겠는가. 프리멧사가 혀를 끌끌 차며 조언했다.

[그렇게 차갑게 구시니 아직 결혼을 못 하신 거예요. 가뜩이나, 켈레덴 님이 형벌의 신이라는 것 때문에 다들
오해하는 모양인데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프리멧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형벌의 신 켈레덴은 신들의 형벌도 담당했다. 프리멧사도 벌을 받으며 켈레덴을 알기 전에는 그가 아주 무서운
신인 줄 알았다. 서늘한 얼굴로 죄목을 조목조목 읊는 태도에 겁을 먹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무서운 신이
아니었다.

프리멧사가 엘제이를 도와줄 수 있게 된 것도 켈레덴의 도움 덕분이었다.

켈레덴이 답하지 않자, 프리멧사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말간 분홍빛 눈망울은 대답을 종용하는 듯해서 켈레덴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앗! 켈레덴 님이 말 걸으셔서 제 아이가 하는 얘기 못 들었잖아요!]

프리멧사가 황급히 켈레덴의 말을 끊으며 엘제이에게로 집중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 탓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때가 종종 있었다.

프리멧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도실을 내려다봤다.

엘제이에게 프리멧사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지만, 켈레덴에게는 고작 천 년밖에 안 산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방종하게 굴지 마라.’

다른 어린 신이 저렇게 굴었다면 켈레덴은 서늘한 얼굴로 차갑게 읊조렸을 터였다. 지금도 그의 입술이 뭐라
말하려는 듯 움찔거렸지만, 켈레덴은 끝내 말을 내뱉지 못했다.

켈레덴은 프리멧사를 나무라는 대신 한숨을 쉬며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팔랑거리는 8 장의 날개가 아래로


살짝 처진 듯도 했다.

켈레덴이 그러거나 말거나 프리멧사는 엘제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다들 안 된다고 했지만, 아제프를 말릴 사람이 없는 터라 결국 여행은 둘만 가기로 했어요. 마차를 끌고 가기로
했는데, 수행원이 없는 터라 저희가 직접 마차를 몰아야 해요. 마부가 된 아제프는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즐거울 것 같아요. 여신님을 뵙지 못하는 건 많이 아쉽지만요.”

엘제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부쩍 아제프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 엘제이는 주로 두서없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옮겨가며 말했다. 이곳에서 한참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면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엘제이는 프리멧사 석상의 눈을 바라보며 조언을 구하듯 속삭였다.

“리사가 임신한 후, 아무래도 그곳이 마음에 걸려서요. 아버지께 결국 그곳의 위치를 물어봤어요.”
[그래? 잘했네. 내가 그럴 때는 물어보는 것이 좋다고 했잖아. 말도 잘 듣고, 예쁜 것.]

켈레덴은 기가 차다는 듯 얼굴을 씰룩거렸다. 프리멧사가 지금처럼 답해준 건 사실이었지만, 엘제이는 들을 수


없었는데 말을 잘 듣긴 뭘 잘 들었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여행 가기 전에 인사 한번 드리고 가려고 하는데, 황궁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어요. 아제프에게 말하지


않고 그를 데려갈 생각인데, 그가 화를 내진 않을지 걱정이에요.”

[그가 네게 그럴 리가 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혹시라도 그러면 내가 확!]

프리멧사가 벌떡 일어나자, 켈레덴이 아연한 얼굴로 프리멧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신들 사이에도 율법은 존재했고,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건 큰 죄에 속했다. 프리멧사는 이미 몇 번이나 그어놓은 선을 넘어간 전적이
있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켈레덴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했다.

[현신은 안 된다.]

[누가 그걸 몰라요? 그냥, 같이 화내주겠다는 뜻이었어요. 현신하겠다는 게 아니라.]

켈레덴의 시선에 찔끔한 프리멧사가 새침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엎드렸다.

프리멧사는 다시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며 엘제이의 목소리에 답해주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아제프의 퇴궐
시간이 되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아제프가 들어왔다.

[또 왔네. 또 왔어! 얄미운 놈. 신을 모시는 기도실에 와서는 내게 인사도 안 하고 내 아이만 홀라당


빼간다니까!]

프리멧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툴툴거렸다.

반면, 켈레덴은 조금 호의 어린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저 인간이 오면 프리멧사가 사랑하는 인간이 기도실을
나갔고, 그러면 프리멧사도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걸 그만두었다.

프리멧사의 시선이 다시 함께 있는 켈레덴을 향하는 것이다.

켈레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제이.”

“아제프. 왔어요? 음- 깜짝 놀랐어요.”

아제프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시녀가 그의 깜짝 방문을 털어놨음을 깨달았다. 그의 눈썹이 잠시 하늘 높이


솟았지만, 이내 되었다는 듯 내려왔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생각대로 모른 척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살피며 안도했다. 그녀가 친근한 태도로 아제프 팔에 팔짱을 끼자 그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여신님께 인사만 드리고 가요. 오늘 저녁에,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때요?”


“가고 싶은 곳? 어디를요? 제이 아직 저녁도 안 먹었잖아요. 식사 거르면 못써요.”

“비밀이에요. 그리 멀지는 않으니까, 같이 가줬으면 해요.”

엘제이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가자고 하는 곳이 짐작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지만, 그녀의 부탁을 내치지는 않았다.

“좋아요. 대신, 다녀와서 식사는 꼭 하기로 약속하면요.”

엘제이는 밥보다는 잠이 우선인 성격으로, 피곤하거나 졸리면 식사를 거르고는 했다. 아제프가 그걸 지적하자
엘제이는 조금 뚱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님,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 재미있게 놀다 오렴.]

엘제이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아제프의 팔짱을 끼고 기도실을 나갔다. 엘제이가 완전히 빠져나가고,


기도실에는 다시 조용한 온기만 감돌 뿐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7 화 에필로그(9)
137

엘제이와 아제프는 신전을 나와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황궁의 문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서는 마차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좀 걸어야 했다.

아제프는 어깨가 좀 뻐근한지 고갯짓을 하며 목을 돌렸다.

“일이 많아서 피곤하죠? 보름 동안 여행하면 더 피곤할지도 모르는데, 하루 쉬고 출발할까요?”

아제프는 제 걱정이 가득 담긴 엘제이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엘제이의 자질은 지켈리온과의 전투 후 다친 그를 치료한 뒤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저를


순수하게 걱정하는 것만은 좋았다.

아제프는 온화한 표정으로 엘제이의 머리를 살살 만졌다.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어깨가 좀 뻐근한 것 같아요. 피곤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보름 동안에는 신경 쓸 일 없이, 편하게 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간 아제프가 여러 사람 몫을 하느라


힘들었잖아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제가 없어도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뽑아 놓은 지가 언젠데, 슬슬 제 몫을 해낼 때도


되었죠.”

아제프는 알체스테가 새로 등용한 이들을 떠올리며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꽤 우수한 인력들이었지만,
아제프 눈에는 그리 차지 않았다. 다만, 그간 닦달하고 가르쳤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제 몫을 할 거라고
믿기는 했다.

“그나저나, 폐하가 아제프를 용케 놔주었네요. 이번 달에는 절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리사와 폐하도 여행은
못 갔잖아요.”

황권이 교체된 지 1 년도 되지 않았다. 많이 안정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자리를 비우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감이


있었다. 엘리사 역시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기에 엘제이는 좀 미안한 얼굴을 했다.

“황제가 견뎌야 할 무게와 일개 귀족인 제가 져야 할 무게는 다른 법이죠. 원래 신혼여행이란 말 그대로 신혼 때


가는 건데, 지금까지 참아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알아야 해요.”

아제프는 까맣게 죽은 얼굴로 그를 배웅하던 알체스테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야 권력이 좋고 돈이
좋았지만, 지금은 뭐든 적당한 게 좋았다.

권력이란 무시 받지 않고 제 의견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있으면 충분했고, 돈이란 삶을 즐길 수 있을 만큼만


되면 충분히 풍족했다.

보이지 않는 지하 끝까지 아득바득 긁어모으던 전과는 달리, 아제프는 꽤 너그럽게 굴었다.

아제프에게 중요한 건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시간이었고, 여유였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팔에 얼굴을 기대며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어디로 갈지는 계속 비밀인 거예요?”

“딱히 비밀은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계획이 안 잡힌 거죠.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마차 여행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아요.”

“마차로만 계속 다녀요? 저 그런 여행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럼 숲속에서 노숙도 하나요?”

엘제이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둘만의 마차 여행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었다. 숲에서 별을
보며 함께 잠들거나,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평화로운 광경이 떠오르자 엘제이의 볼이
발긋해졌다.

아제프는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엘제이의 반응을 살피며 피식 웃었다. 중간중간 마을이 있으니 길에서 노숙하는
일은 최대한 막아보려 했는데, 저렇게 좋아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밖에서 자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자주 그럴 수는 없지만, 원한다면 한두 번 정도는


숲에서 자볼까요?”

“네! 숲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함께 별을 바라봐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힘들지 않다면요.”

숲에 불을 피우고 자면 그들의 위치가 다 공개된다. 좋지 않은 의도를 품은 이들로부터 공격받을지도 모르지만,


아제프의 자질은 예민하니까 보초로서 활용하기에는 최적이었다.

그리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아 아제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막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들꽃 하나가 아제프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것에 시선을
줬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제프만을 바라보며 종알종알 말을 걸던 엘제이는 아제프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 아제프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작은 꽃이었다. 누가 밟았는지, 꽃대가 꺾인 모습이 가여웠다.
왠지 꽃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엘제이는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멍하니 그 꽃을 바라봤다.

“제이? 왜 그래요?”

“아제프, 잠깐만 기다려줘요.”

아제프가 의아한 듯 엘제이를 불렀지만, 그녀는 갈 길을 재촉하는 대신 그 꽃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오밀조밀 모여 소담하게 피어난 것들이 더 자세히 보였다.

엘제이는 멀쩡한 것은 그대로 두고 꽃대가 꺾여 쓰러진 것들만을 조금씩 꺾어 손에 모았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많이 다친 것들만 꺾었는데 어느새 한 손 가득 꽃들로 차올랐다.

아제프는 들판에 아무렇게나 번져 사람들에게 짓밟힌 들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 짓눌렸다고 금세


휘청거리며 기운을 잃은 것도 별로였다. 그는 역시, 들꽃이 싫었다.

아제프는 그런 것들을 조심조심 주워 담는 엘제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길가의 들꽃인데……. 꽃, 가지고 싶었어요? 그런 것들은 그냥 둬요. 제가 다른 거 사줄게요. 응?”

“꽃은 망가지지 않았는데, 이대로 두면 또 누군가에게 밟힐지도 모르니까요. 보세요. 이렇게 모아두니, 예쁘지
않아요?”

엘제이는 한 줌 정도로 모인 들꽃을 꽃대로 가지런히 엮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하얗고 노란 들꽃다발을 흔들며
웃는 엘제이가 밝아서 아제프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 손에 묻은 흙을 조금 털어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쁘네요.”

[아제프,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랜 시간 기다렸기 때문이란다. 비바람이 꽃줄기를 흔들고, 해충이 잎을


갉아먹어도, 인내하고 참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거란다. 보렴. 아름답지? 네게도 꽃이 될 순간이
있을 거란다. 가여운, 내 아기.]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처럼 산들산들 속삭였다.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전에는 우습다고 비웃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아제프는 뿌옇게
떠오르는 얼굴을 눈을 감는 것으로 없애버렸다.

“이만 가요.”

엘제이는 한 손에 꽃다발을 쥐고, 한 손에는 아제프의 손을 쥐고 걸었다. 그야말로, 양손의 꽃이 아닐 수 없었다.

킥킥거리며 작게 웃은 엘제이가 도착한 마차를 보며,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어딘가, 한적한 외곽으로 달려갔다.

***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소리가 들리자 아제프가 먼저 내려, 뒤따라오는 엘제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이곳이 어딘지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낯선 곳을 둘러보는 대신 엘제이가 손을 잡기만을 기다렸다.

마차 안에서 긴장했더니 몸이 조금 뻐근한 것 같았다. 엘제이는 삐걱거리는 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정감 가는 집 한 채였다. 그리 큰 집은 아니었지만, 단정한 색감의 아담한 집은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멋이 있었다.

아제프는 장난감 집을 옮겨 놓은 것처럼 아기자기한 집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 집에 볼일이 있는 거예요?”

“아니요. 좀 더 가야 해요.”

엘제이는 마부에게 기다리라는 눈짓을 해보이고는 아제프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들꽃다발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제이는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꽃을 건넬 생각이었던 듯, 마차 안에는 백합을 엮어 만든 화려한 꽃다발이 있었다.

엉성하게 엮은 엘제이의 꽃다발과는 달리 전문가의 손을 거친 듯 확실히 더 화려했다. 꽃 자체가 품은 아름다움도


청초한 백합이 저 우세했는데, 엘제이가 왜 그걸 놔두고 저 꽃다발을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아제프에게 두 꽃다발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물론 엘제이가 만든 것을 골랐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안 나오네요?”

“아! 저 집에 사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관리인들이 머무르는 공간이라고 들었어요.”

엘제이가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쯤 되자 아제프도 엘제이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아제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엘제이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의 처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화가 나지는 않을 테지만, 엘제이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제프는 이쯤에서 대체 뭣 때문에 여기 왔는지 물어봐야 할까, 고민하며 엘제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왜,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제이, 이곳에는 처음 오는 거죠? 아까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본 걸 보면 처음인데…… 길을 잘 아네요?”

“사실, 아버지가 여길 만든 터라 아버지께 들었어요.”

“아버님이요?”

“네. 아버지가 만든 공간이에요. 물론, 집을 지은 건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지만요.”


아제프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아는 아이젠은 이런 집을 지을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제
딸들과 연관된 일이 아니라면 생산성 없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온화한 얼굴로 웃지만, 손해 보는 일은 안 하는
성격이었다.

아제프의 시선이 아래로 흘러가 엘제이의 꽃다발을 응시했다. 생각해보니 참 이상했다. 이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엘제이와 아제프,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수행원 몇몇밖에 없었다.

가만 살펴보니,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엘제이가 말하는 안쪽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꽃다발은 누구에게 준다는 거지?’

하얀 꽃다발. 엘제이는 노란 꽃들도 주섬주섬 엮기는 했지만, 대체로 하얀 꽃의 비중이 컸다. 백합만 봐도
그랬다.

베아르시 제국에서 하얀 꽃다발은 신부의 부케, 또는 죽은 자를 기리는 데 쓰이고는 했다.

아제프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그의 시야에 둥근 무덤 하나가 들어왔다.

<소피아 엘린델, 휴버트 엘린델, 우리엘 엘린델.>

커다란 무덤을 지키는 묘비에는 그저 이름 세 개가 유려한 서체로 단정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제프는 그
서체가 아이젠의 것임을 알았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8 화 에필로그(10)
138

엘린델은 아제프 란델의 첫 성이었다.

아제프는 저 합장묘의 정체를 금세 알아챘다. 죽어버린 그의 가족을 아이젠이 묻어준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다만, 아제프의 다리는 그 자리에 박힌 못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엘제이는 우뚝 선 아제프를 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편안하게, 잠들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아무렇지 않은데,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 엘제이의 속삭임이 단단히 뭉쳐 있던 무언가를 톡, 건드렸다.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여전히 굳건히 선 다리는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제프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오랜 시간 묵혀왔던 해묵은 감정이 그 한


방울에 녹아 뚝 떨어졌다. 가슴에 박힌 작은 돌조각이 팽그르르 회전했다. 아제프는 그제야 제가 슬퍼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제프의 하얀 볼을 다정한 손길이 훑었다. 그는 자신이 제 볼을 만져보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엘제이가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보며 그의 볼을 살살 어루만졌다. 아제프는 신록처럼 푸르고 따스한
눈을 바라보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눈에, 뭐가 들어간 모양이에요.”

“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이제 빠져나왔을 거예요.”

엘제이는 여전히 다정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물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아제프의 속삭임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그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아제프는 한숨을 푹, 내뱉으며 고해하듯 속삭였다.

“어쩌면, 조금 미안했는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좀 더 빨리 갔다면, 내가 그를 말렸다면,


혼자 나가는 게 아니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

아제프는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는 소피아를 어머니라고 칭하지 않았고, 휴버트를 아버지라고도 칭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제이는 그가 하려는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휴버트의 폭력에 차여 핏기를 잃고 쓰러지던 어머니를 두고 약초상으로 달려갔던 일.

그날, 아제프의 다리가 빨랐다면 가족들과 함께 죽었을 터였다. 그날, 아제프는 휴버트를 말렸지만 화가 난
휴버트는 아제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5 살의 어린 몸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쓸모없는 가정. 달라지지 않을 미래.

아제프는 생각해보고, 고민해봐도 달라지지 않을 결과를 ‘만약에’라는 말로 포장해서 고민하는 게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현명했으면, 좀 더 힘이 셌으면 뭔가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허무한 가정이 계속 머릿속을 흐리게 채웠다.

“정말 멍청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는데. 왜, 생산성도 없는 이런 생각을


할까?”

“아제프에게는 죄가 없어요. 당신은 그날,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엘제이가 손끝이 떨리는 아제프의 손을 붙잡아주며 속삭였다. 아제프의 눈이 파도처럼 크게 일렁거렸다. 그도


알았다. 그때의 그는 정말 잘못이 없었다.

5 살의 어린 소년이었던 아제프는 어머니를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날, 아제프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눈을 감으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정말 무엇도,”

“그날의 당신에게는 죄가, 없어요.”

엘제이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속삭였다.

아제프가 좀 어렸을 때, 순진하고 말랑말랑했을 때, 그는 무거운 바위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 묵직한


무게에 가슴이 짓눌려 숨이 헐떡헐떡 넘어갔다.

불타는 집을 두고 혼자만 돌아섰다는 죄책감. 그들이 죽어갈 걸 알면서도 불길에 뛰어들 용기가 없었다는
자기혐오.

오랜 시간 무뎌진 돌덩이는 작은 돌조각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그의 살갗에 머물렀다. 뾰족한 돌 끝이 쿡쿡


찌르는 게 아팠지만, 적응되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제프는, 아팠던 거다. 슬펐던 거였다.

아제프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살갗을 파고들던 작은 돌조각이 짠 기운이 어린 눈물에


녹아 사그라들었다.

기껏 두 방울의 눈물.

아제프는 그 두 방울을 제외하고는, 울지 않았다. 그게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애통함의 전부였다. 그는 그걸로


되었다는 듯 더는 동요를 보여주지 않았다.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던 다리가 가벼워졌다. 아제프는 이끌리듯 걸어가 묘비 앞에 섰다. 묘는 하나뿐이었다.


시신이 다 불타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을 테니, 합장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우리엘 엘린델]

죽어버린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보다는 낯선 그 이름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제프는 딱딱한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묘비를 살짝 훑었다. 깨끗하게 관리된 묘비는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티 묻지 않은 그 아이의 이름처럼.

그때, 그 아이는, 태어나지도 못한 핏덩이였다. 소피아와 휴버트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놓을 정신도 없었고,
아제프 또한 동생의 이름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제프는 끝이 유려하게 휘어지는 익숙한 서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엘. 천사의 이름을 붙였군요. 아버님이 이렇게 감성적인 분인 줄은 몰랐는데.”

“저는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아이젠은 옛 친구의 무덤 옆에 소박하지만 따스한 집을 지어주고,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친우의


아이에게는 천사의 이름을 붙여줬다.

멍으로 가득했던 그의 친우가 부디, 편안하게 잠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우리엘이라는 이름을 속으로 불러봤다. 자신을 닮은 어린 여아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감는 것으로 여아의 얼굴을 떨쳐냈다.

“저는 그 아이가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면서 그냥 여동생이 태어날 거라 믿었어요.”

“그럼 애칭은 ‘엘’이라고 해요. 여자아이 이름 같죠?”

아제프는 아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엘제이에게 하지 않을 터였다. 해묵은 감정은
해소됐고 그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다.

에이든에게 굳이 복수하려 들지 않은 것도 아제프에게 엘린델이라는 이름이 많이 흐릿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제프는 단정하게 적힌 천사의 이름을 흘긋 바라봤다. 그는 이번에도 엘제이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걸 선택했다.

엘제이는 둥글게 솟은 무덤 위에 들꽃다발을 올려놨다.

아제프는 그제야 왜 엘제이가 이 꽃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것도 꿈에서 본 건가요?”

“음ㅡ, 네. 처음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익숙한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별로 화가 나지는 않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아는 꽃을 좋아했지만, 화려한 것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작은 들꽃에도 기뻐했고, 시선을 줬다. 어린


아제프는 비싼 꽃을 사줄 능력이 없었기에, 그녀에게 아무렇게나 피어 있던 들꽃을 엮어 선물하고는 했다.

소피아의 그늘진 얼굴이, 그때만은 환하게 빛났던 것도 같다.

엘제이가 선물한 들꽃은 그런 의미인 듯했다.

소피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엘제이의 마음이 예뻐서, 아제프는 조금 웃었다.

아제프는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엘제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만하면 됐어요. 이제 가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내민 손을 붙잡고 서둘러 무덤가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제프는 정말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듯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내딛는 아제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앗! 천천히 가요.”

엘제이는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제프를 따라 분주히 발을 놀렸다. 아제프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다가 엘제이를 안아
올렸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 당신의 발걸음으로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네요.”

“제 다리가 당신보다 짧다고 무시하는 거죠! 저도 뛰면 빨라요. 리사만큼이나 잘 달릴 수 있단 말이에요.”

아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는 말에 엘제이가 주먹을 꽉 쥐고 곧장 반박했다. 엘제이는 여자니, 신체


특성상 남자인 아제프보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은 건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제프는 그 당연한 사실에 분개하는 엘제이가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엘제이의 눈꼬리가 사나워졌다. 아차 한
아제프는 휘파람을 불며 말을 돌렸다.

“배는 안 고파요? 뭐 먹을까요?”


“말 돌리지 말아요. 피식 웃은 거 봤어요! 봤다고!”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담았다.

엘제이는 얼굴을 붉히며 당장 사실대로 말하라고 아제프를 채근했고, 아제프는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아제프는 밝은 얼굴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아제프는,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지 않을 터였다.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노을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어루만지듯 하얀 뺨을 쓸어본 노을은 그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

아제프가 여행 갈 준비를 끝내고 나왔을 때는, 엘제이가 방을 분주하게 오가며 무언가를 덥석덥석 챙기고 있었다.

아제프는 이미 마차 안에 산더미처럼 실어뒀던 짐을 떠올리며 의아한 듯 갸웃거렸다.

“제이, 짐 미리 챙겨놓지 않았어요?”

“미리 챙겨두긴 했는데, 혹시 빠진 게 있을까 봐 걱정돼요.”

아제프는 엘제이 손에 들린 물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여행 짐에 물감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차는 꽤


크니 아제프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엘제이는 한참을 더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아제프 앞에 섰다.

“이제 다 챙겼어요? 갈까요?”

“아! 잠깐만요! 이거랑, 이것도 필요하겠죠?”

처음에는 물감만 챙기더니, 색연필과 파스텔도 챙겨 들었다. 아제프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엘제이는 꼭


필요하다는 듯 그것들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손에서 차고 넘치는 것을 대신 들어주며 그녀의 보닛을 반듯하게 씌워줬다.

“자, 이번에는 빠진 게 없나요?”

“음- 아마, 없는 것 같아요.”

엘제이는 조금 불안한 듯 다시 방을 살폈다. 하얀 침구를 열심히 더듬는다고 한들 까먹은 무언가가 떠오를 리는


없었다.

아제프는 미리 확인해본 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확인해봤어요. 잘 쌌던데요? 혹시 부족한 게 있더라도 오지로 여행가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드디어 준비를 끝낸 듯한 엘제이의 손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가문의 문장이 없는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아제프는 엘제이를 안쪽에 태웠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엘제이와 나란히 앉지 않고 마부석으로 갔다.
엘제이는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서둘러 열었다.

“아제프가, 거기 앉으니 이상해요. 제 옆에 앉을 것 같은데요. 저도 거기 앉을까요?”

“안이 더 편할 텐데?”

아제프는 말리고 싶었지만, 엘제이는 이미 낑낑거리며 창문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아제프는 말썽꾸러기 아이
보듯 엘제이를 힐긋 바라보다가 할 수 없이 엘제이를 도와줬다.

“역시 옆이 좋아요.”

엘제이가 아제프의 손을 살짝 잡았다.

결국, 아제프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엘제이가 옆에 있는 게 더 좋았다. 그는 엘제이의 무릎 위에


작은 모포를 얹어주며 고삐를 당겼다.

“그럼, 출발해볼까요?”

신혼여행의 시작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39 화 에필로그(11)
139

마차는 꽤 오랜 시간 달렸다. 수도를 벗어나 끝이 보이지 않는 숲길로 들어섰고, 엘제이는 길이 잘 닦인 숲길을


보며 감탄했다.

여행은 즐거웠다. 엘제이는 나무 위에서 포르르 움직이는 다람쥐에 즐거워했고, 강인한 야생화를 감상하며 웃었다.

아제프는 풍경 대신 엘제이를 감상했다.

아제프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마차를 모는 것이 꽤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여행길에 겪을 수 있는 여러


위험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맑게 갰다.

아제프의 생각보다 여행은 그리 위험하지 않은 듯했다. 복잡한 계산은 전혀 필요 없는 숲길은 그저 안온한 품을


내주었다.

휘잉- 바람이 크게 불었다. 숲이 잘잘 흔들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뭇잎이 부딪히는 싱그러운 소리에 엘제이는
활짝 웃었다.

“비가 오려는 걸까요?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부네요?”

“아까까지는 맑았지만, 날씨는 변덕이 심하니까요.”

아제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풍성한 녹음이 길게 드리워 있어, 하늘은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마차와 천막은
기름을 먹인 것이었으니 비를 좀 맞더라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계산을 끝낸 아제프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는 숲에서의 외박, 나쁘지 않을 거예요. 별은 잘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맑은 날 한 번 더 하면
되니까요.”

“우리 정말 계획 없이 왔는데, 그게 더 즐거운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에 내리는 비네요.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어요.”

엘제이는 봄비의 운치를 기대하는 듯 눈을 빛냈다. 정말 비가 쏟아지려는 건지,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사아아아-

바람도 크게 흔들렸다. 좀 전에는 숲의 노래라고 생각했던 싱그러운 소리가 조금 음울하게 번졌다. 엘제이는
아까와는 묘하게 다른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인위적인 바람 소리가 섞인 것 같았다.

엘제이가 막 고개를 들자, 까만 무언가가 하늘에서 퍼덕거렸다.

“윽, 저게 뭐예요? 꺄아!”

하늘에서 버둥거리던 까만 것이 빠르게 추락했다. 엘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모포 자락을 꽉 잡았다. 시선을 떼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자 떨어지는 까만 물체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새?”

엘제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아제프는 인상을 썼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엘제이의 머리에 모포를
뒤집어씌웠다.

철퍼덕.

살이 짓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아아아- 부는 바람에 뒤섞인 이질적인 소리가 소름 끼쳐서 엘제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제프는 기분 나쁘다는 듯 까만 것을 바라봤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세크르다의 시체라니 좋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저것이 가급적이면 엘제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뭐예요? 뭐가 떨어진 거예요? 새?”

아제프는 궁금한 듯 고개를 돌리려는 엘제이를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새의 사체도 꺼려지는데,
세크르다는 더했다.

“세크르다네요. 근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친 상태로 하늘을 비행하다가 떨어진 것 같아요. 이미 죽었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세크르다는 굳이 따지자면 새의 일종이긴 했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날개를 가졌고, 조류다운 날카로운 부리도
있었다. 하지만, 새라고 칭하기에는 덩치가 무척 크기도 했고 선천적으로 외눈박이로 태어나 외모도 흉물스러웠다.

성격이 포악하고 턱 힘이 세서 육류를 주로 섭취하는데, 인간 또한 세크르다의 먹잇감이었다. 다 자란 성인은


세크르다가 먹기에는 좀 크기 때문에, 세크르다는 주로 어린아이들을 노렸다. 그건 세크르다에 대한 인간의
혐오를 크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세크르다에게 위협받는 사람은 드물었다. 세크르다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 아닌 깊은 숲속에서 주로


살았고, 인간들이 세크르다를 사냥한 탓에 개체 수가 많이 줄어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책 속에서 봤던 세크르다를 떠올리며 아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아제프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엘제이는 말을 걸며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세크르다요? 거의 멸종되어 간다고 들었는데, 이런 숲에 있다니…….”

“여긴 수도 근처인데, 좀 이상하기는 하네요. 지능이 높아, 수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그렇죠? 그래도 뭐, 새니까…… 잠시 지나가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에게 사냥당한 걸까요?”

아제프가 세크르다의 시신을 살펴봤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시신이 꽤 훼손되기는 했으나 육안으로 봤을 때
화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면 하늘의 포식자를 사냥할 것이 없기도 했다.

세크르다가 동족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아제프는 고개를 슬쩍 내밀려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황급히 생각을 멈췄다. 그는 다시 엘제이의 머리에 모포를
씌워주며 말을 재촉했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으니, 머리는 내밀지 말아요. 딱히 무기에 찔린 곳은 안 보이지만, 아무래도 사냥당했을
확률이 높겠죠.”

“비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오싹하네요. 공포 체험하는 것 같아요.”

“날도 어두워졌으니, 야영할 장소를 찾아봐야겠어요. 추우면 안에 들어가 있을래요?”

아제프가 뒤쪽의 창문을 열어 보이며 물었다. 창문이라고 칭하기는 했으나 거의 문에 가까운 크기라 드나들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안락해 보이는 마차 내부가 보였다. 엘제이는 마음이 좀 흔들린 듯 포근해 보이는 내부를
살펴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아니에요. 아제프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아요.”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엘제이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찔끔했다. 올해 성년이 된 자존심은 그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턱을 당기고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 그럼, 제이가 잠깐 여기 혼자 있을래요? 제가 마차 안에서 좀 쉴게요.”

“…….”

엘제이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불안함을 한껏 담아 벙긋거렸다. 엘제이의 눈이 저도 모르게


간절함을 담아 아제프를 바라봤다. 제발, 저를 두고 혼자는 가지 말라는 애원이었다.

아제프는,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풉! 아하하하하!”

“또 저 놀린 거죠! 못됐어, 정말!”

엘제이가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가만 보면 맨날 당하는 것 같았다. 억울해진 엘제이가


분풀이를 하듯 그의 어깨를 때리며 웃지 말라고 갸르릉거렸다.

작은 강아지가 털을 바짝 세우고 왕왕 짖는 것 같아서 더 웃겼다. 아제프는 이제 배를 쥐고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는 한참을 더 웃고 나서야 삐지려는 얼굴을 발견하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아하하, 알았어. 알았어.”

“또 웃기만 해봐요!”

아제프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협박하는 엘제이 때문에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숨을 참으며 웃음을
간신히 밀어 넣었다. 뛰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웃기만 했는데 호흡이 거칠어졌다.

아제프는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부푼 웃음주머니를 토닥토닥 달래며 눈웃음쳤다.

“좋아서 그래요. 제이는 제게 기쁨을 주는 존재니까.”

“…….”

엘제이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제프가 계속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속삭이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엘제이는 선하게 휘어진 아제프의 눈을 보고 또 홀라당 넘어갔다. 꽉 쥐어진 주먹이 은근슬쩍 풀리고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제프는 색조화장을 하지 않고도 복숭아처럼 발긋한 볼을 보며 또 웃었다.

“푸흡, 크흡, 아하하하!”

“웃지 말라니까요!”

아제프는 참지 못하고 신명나게 웃은 죄로, 엘제이의 토라진 얼굴을 봐야 했다. 물론, 그마저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그리 나쁘지 않은 벌이었다.

아제프의 웃음을 실은 마차는 그 와중에도 빠르게 달려 세크르다의 사체로부터 제법 멀어졌다.

똑똑, 작은 빗방울이 마차를 두드렸다.

빗방울이 퐁퐁 노크하는 소리에 엘제이의 귀가 쫑긋 섰다.

엘제이는 여전히 킥킥거리는 아제프를 찌릿, 노려본 후에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엘제이의 손바닥에
톡톡, 내려앉았다.

“어? 비가 와요.”

눈물을 찔끔 매달면서까지 웃던 아제프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봤다. 여전히 우거진 숲길이었지만,
비가 온 이상 말들의 체온이 떨어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아제프는 마차를 세웠다.

“잠깐만 있어요. 더 큰 비가 오기 전에 빨리 해야 하니까.”

엘제이는 이럴 때 제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 높은 마부석에서


가뿐히 뛰어내린 아제프가 분주히 움직였다.

순하게 서 있는 말들이 보였다.

엘제이는 제가 할 일을 찾은 것 같아서 폴짝 뛰어내렸다. 작은 빗방울이 엘제이의 옷 위를 톡톡 두들겼지만,


빗줄기가 그리 굵지는 않았고 나무 아래에 있어 많이 맞지 않았다.

“너희들도 수고 많았어.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엘제이는 마차 안에서 말들의 먹이와 물을 꺼내와 그들 앞에 놓아줬다. 교육을 잘 받은 말들이 순한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보다가 먹이를 받아먹었다.

아제프가 기다란 나무 기둥 같은 걸 가져와 얼음으로 그것들을 고정했다. 엘제이가 말들의 먹이를 주는 잠깐 사이


커다란 천이 크게 펄럭이며 엘제이의 머리 위를 덮었다.

마차는 어느 정도의 방수는 가능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챙겨온 커다란 천막은 말들의 위를
모두 다 덮을 정도로 널찍했다.

더 이상 빗방울이 엘제이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엘제이는 굳이 못질할 필요가 없는 아제프의 능력에 손뼉을 짝짝 쳤다.

“자질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지만, 아제프는 정말 잘 다루는 것 같아요.”

기피하는 능력이라 세밀하게 제어했던 게 좋게 작용했다. 아제프는 가늘고 긴 얼음을 무한대로 쭉쭉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제어력을 보였다.

아제프는 굳이 그걸 뽐내지는 않으며 피식 웃어넘겼다.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그런데 제이, 안 추워요?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포 잘 두르고 있으니 괜찮아요.”

엘제이는 고개를 저으며 보란 듯이 모포를 들어 보였다. 아제프가 여행 짐에 가장 신경을 쓴 게 있다면 추위에


대한 대비였다. 두꺼운 모포를 넉넉히 챙겨왔기에 엘제이는 조금 전부터 그것을 두르고 있던 참이었다.

아제프는 그걸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한 번 더 채근했다.

“그래도 얼굴에는 찬바람이 닿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엘제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아제프는 엘제이를 안으로 들여보내는 걸 포기했다. 대신 그는 보금자리를
빨리 만들려는지, 바닥을 눈으로 쭉 살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제프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0 화 에필로그(12)
140

“음…….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모닥불 피우고 천막 아래에서 자는 것보다는 마차 안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괜찮지만, 아제프는 불편하지 않겠어요?”

마차에는 긴 소파 두 개가 마주보고 있었다.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엘제이는 그곳에 누우면 편하게 잠들 수


있었지만 아제프는 아니었다. 일단 길이부터가 남다른 아제프는 어쩔 수 없이 몸의 어딘가는 구부려야 누울 수
있었다.

엘제이는 휴지 조각처럼 구겨질 아제프의 몸을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루쯤이야 괜찮아요. 따로 자는 것보다는 그게 낫기도 하고.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좀 푹신한 침구류를


사야겠어요. 딱딱한 바닥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요.”

아제프가 작은 통 하나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엘제이는 익숙한 통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앗! 수프 만드는 건 제가 할게요!”

“그럴래요? 그럼, 여기에 불 피워줄게요.”

물에 젖은 나무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아제프는 마른 장작을 챙겨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장작 몇 개를 꺼내


불을 붙였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엘제이는 그저 미리 준비해둔 가루를 넣고, 깨끗하게 씻어 썰어둔 채소를 퐁당퐁당 넣었다.
화력이 좋아서인지 수프는 빠르게 끓었다.

엘제이는 보글보글 끓는 수프를 적당히 휘휘 저었다. 넣고 젓는 것만 했는데 수프는 금세 완성되었다.

“미리 준비해 오기 잘했어요. 이렇게 하니까, 손이 많이 가지는 않네요. 맛보실래요?”

엘제이가 직접 요리할 기회가 없다 보니, 아제프는 샌드위치 외에는 그녀의 음식을 먹어볼 일이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직접 만들어준 수프를 오묘한 눈으로 보며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꿀꺽, 수프를 삼키는 소리가 났다. 별로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나름 제가 만든 요리라 신경이 쓰였는지 엘제이는
아제프의 반응을 신경 썼다.

“어때요?”

주방장의 손맛이 물씬 풍기는 맛이었다. 아제프는 늘 먹던 수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맛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참아냈다.

“맛있어요. 추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맛이에요.”


그냥 따뜻하기만 하다는 평이었지만, 유려한 혀와 달달한 목소리 덕에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식사시간이 찾아왔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빵과 수프로 간단히 식사를 끝냈다.

주변에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지만, 아제프가 있었다. 아제프는 빗물이 떨어져 고이는 걸 기다리려는


엘제이를 말리고 커다란 냄비에 얼음을 채웠다.

얼음은 곧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었다. 아제프는 부글부글 끓는 물에 얼음 몇 개를 뭉텅뭉텅 던져 넣어 적당히


따뜻한 물을 마련했다. 엘제이는 그 물에 몸을 씻었다.

“씻는 건 조금 불편하네요. 제이, 찝찝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요. 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긴 하죠.”

아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씻고 잘 준비를 끝낸 엘제이가 하품했다. 졸린 눈을 보니 잘 때가 된


모양이었다.

오늘은 소파에 따로 누워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등을 살짝 밀며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제이, 이만 들어가요.”

그때,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휘이잉- 끼익-

“이게 무슨 소리죠?”

“놔! 놓으라고!”

답은 하늘에서 울렸다. 엘제이는 뜬금없이 들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의


암흑에 잠긴 날개가 크게 퍼덕거렸다. 세크르다였다.

엘제이는 세크르다에게 잡혀서 버둥거리는 아이를 발견하고 경악스러운 듯 입을 벌렸다.

“아제프!”

아제프 혼자였다면, 어린애가 새에 잡혀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아이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옆에는


엘제이가 있었다. 아제프는 군소리 없이 검을 들었다.

쐐애액-

검을 타고 날아간 얼음이 세크르다의 날개를 공격했다. 쩌저적- 얼어붙은 날개가 휘청거리며 움직임이 둔해졌다.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며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크르다는 날개를 버둥거리며 움직임을 방해하는 먹잇감을
버렸다.

이대로 낙하 속도를 유지하다가 아이를 떨어트리려고 했던 아제프가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좋은데?”
아제프는 작게 감탄하다가 엘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아제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아아악!”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두른 모포자락을 뺏어 귀퉁이를 잡았다.

“제이, 모포 잘 잡아요.”

아제프의 빠른 속삭임에 엘제이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줬다. 엘제이가 미처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아이는


떨어졌다. 다행히 아제프가 위치를 잘 잡았는지 무사히 모포 위로 떨어졌지만, 엘제이는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다.

아제프는 모포째로 아이를 잘 말아 안아 들었다. 바닥에 슬쩍 내려놓기에는 엘제이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뻐근한 손목을 손으로 주무르며 아제프를 향해 다가갔다.

“어때요? 괜찮아요?”

“낙하 충격에 기절한 것 같아요. 심장이 멎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보기보다 강심장인가 봐요.”

엘제이는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크게 다친 곳 없는 아이를 살펴보며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세크르다의


날카로운 발톱에 긁혀 어깨에서 피가 좀 나긴 했지만, 겉옷을 입은 덕에 큰 상처는 아닌 듯했다.

“끼이이이-.”

세크르다가 기묘한 소리로 울며 천막을 찢어발길 듯 발톱을 세웠다. 얼음이 달라붙어 더는 날 수 없었는지 거대한
몸체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아제프는 천막 위로 떨어지려는 세크르다를 옆으로 쳐냈다.

“끽! 끼윽!”

쇠가 긁히는 것 같은 소음에 엘제이가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사람의 고막을 내리찍는 소음에 아제프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움찔거렸다. 아이는 오래지 않아 눈을 떴다. 말간 갈색 눈에 비명을 지르는 세크르다가 담겼다.

‘시끄럽군.’

아제프는 괴로워하는 엘제이를 보다가 검을 무심히 휘둘렀다. 땅에 떨어진 세크르다가 산 채로 얼어붙었다.


기묘한 새의 울음이 뚝, 멎었다.

손으로 귀를 막고 새 울음소리를 견뎌내던 엘제이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듯했다.

엘제이는 꽁꽁 얼어붙은 세크르다를 보다가 몸서리를 쳤다.

“으으-. 새 울음소리가 엄청 특이하네요.”

엘제이의 말에 아제프는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세크르다의 울음소리는 평범한 새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 개체는 마치 사람의 정신을 파괴할 것 같은 기묘한 소음을 냈다. 빨리 제압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오래
들었으면 고막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상하네요. 제가 전에 본 세크르다는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책 속에도 세크르다의 울음이 이렇게 강력하다는


말은 없었는데, 이 개체가 특이한 걸까요?”

“아니에요! 아저씨가 돌보는 세크르다는 다 저렇게 울어요!”

아제프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아제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평화로운 신혼여행을 꿈꿨는데, 이 아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건 날아간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크게 뜬 엘제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흔들며 관심을 보였다.

“사람이 세크르다를 돌본다고?”

“히익!”

아이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뭔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아제프는 엘제이 몰래 한숨을 삼켰다. 누가 세크르다를 돌보든, 잡아먹든 아제프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엘제이는 관심을 가져버린 듯했다. 일이 귀찮아졌다. 어찌 되었건 미아를 맡아버렸으니, 엘제이는 집을 찾아주려
할 터였다.

아이의 집에 찾아가려면 필연적으로 저 세크르다를 다시 만나게 될 게 분명했다. 아제프는 자신과 엘제이가 무슨


사건에 휘말려들었음을 알았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그냥 가자고 하면 분명 신경 쓸 테니까.’

빠르게 해결하고, 여행을 계속한다.

아제프는 그렇게 다짐하며 멀쩡해진 것 같은 아이를 내려줬다. 땅에 부드럽게 내려온 아이의 시선에 맞춰
아제프가 몸을 숙였다.

“돌본다고? 세크르다를?”

아이는 아제프의 선한 얼굴에 안심한 듯했다. 아제프는 아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이들은 겁이 많은 생명체였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려면 윽박지르는 것보다는 온화하게 달래는 게


효과적이었기에 아제프는 귀찮음을 감수했다.

시간이 째깍째깍 흘렀다. 아이는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른들이 소문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불길한 마을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제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르다는 여러 이유로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그들을 본 날은 운이
없다는 말도 돌 정도니 세크르다가 마을에 자주 보인다면 입을 다물고 쉬쉬할 법도 했다.

엘제이는 아제프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걸까요? 세크르다가 사람을 따르기도 하나요?”


“글쎄요. 영민한 생물이니 주인을 인식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만은 아닌 듯하네요.”

세크르다의 목소리는 저주나 주술과 흡사했다. 아제프는 지긋지긋한 주술사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엘제이가 아이를 살짝 들어 올려 마부석에 앉혔다. 엘제이는 겁을 내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괜찮으니, 편하게 있으렴. 난 엘제이야. 저 사람은 내 남편인 아제프고,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던 중 너를


만났어.”

“아……. 제 이름은 아론이에요.”

아이는 엘제이의 말에 크게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론. 우선 네 상처부터 치료해야겠네. 아프지는 않아?”

엘제이는 아이를 채근하는 대신 그의 상처를 살피며 약을 먼저 발라줬다. 상비약을 이것저것 챙겨왔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엘제이가 아이의 다친 몸에 소독약을 붓고 연고를 발라주자 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세크르다에게 잡혀 와 낯선 곳에 떨어진 것이 두렵고 무서울 법도 한데,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걸 보니 이 아이는


제법 강단이 있는 것 같았다. 엘제이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의 어깨에 모포를 둘러주었다.

“세크르다는 몹시 위험한 생물이야. 그 아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돌보려고 하다가는 위험해질지도
몰라. 너도 무척 위험했잖니.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세크르다를 돌보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니?”

아론은 엘제이의 다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1 화 에필로그(13)
141

아론의 말에 따르면, 그의 마을에 세크르다를 기르는 남자가 살기 시작한 지는 1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바르킨이라고 불렀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론이 사는 마을은 규모가 큰 곳은 아니었다. 보통 그런 작은 마을은 외지인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는데,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바르킨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세크르다라는 위험한 생물을 기르고
있음에도 말이다.

아론의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밤이었다.

밤에는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세 사람은 마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론의 마을을 찾기로
했다.

이제 겨우 5 살이라는 아론이 스스로 마을을 찾을 수는 없었기에 아제프가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척을


수색해 마을로 보이는 곳을 찾아냈다.
세 사람은 지금, 세크르다가 날아온 방향에 있는 작은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제프는 여행길이 고단한지 엘제이 품에서 잠든 짐덩이를 바라보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못마땅함이 물씬
묻어났지만, 엘제이가 고개를 들면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아제프, 이 아이를 보니 어렸을 때의 당신이 생각나요. 아제프도 5 살 때 딱 이만 했던 것 같은데.”

엘제이는 꿈에서 본 5 살의 아제프를 떠올리며 속삭였다. 일이 해결된 후에는 꼬마 아제프를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가끔 생각나고는 했다.

엘제이는 아론이 5 살이라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그 아이에게 잘 대해주려 애썼다. 아제프는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5 살짜리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엘제이에게 날카롭게 답하지는 않았다.

“그 나이 때 애들은 다 고만고만한 법이니까요. 제이는 아이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기 가지고 싶어요?”

엘제이는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아론을 내려다봤고, 아제프는 그게 못마땅했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관심을
끌어오기 위해 눈웃음을 살살 쳤다.

보란 듯이 흐드러지게 웃는 얼굴에 엘제이의 시선이 고였다. 엘제이는 손끝을 우물쭈물 매만지며, 아제프를 따라
웃었다.

“아기, 조금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리사가 임신한 걸 보니 그렇게 먼 것 같지도 않아요. 첫째는 아제프를
닮은 아들, 둘째는 저를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제프 생각은 어때요?”

“음, 저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는 쪽이 좋아요.”

“어머, 외동은 외로워요. 적어도 둘은 되어야죠.”

“폐하의 아이를 사사로이 생각하면 저희의 조카가 되는 것이니, 외동처럼 자라지는 않을 거예요.”

아제프는 나긋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귀족의 아이는 유모가 맡아 기르는 게 보통인데, 몇 번을
넌지시 떠봐도 엘제이에게는 그런 의사가 없었다.

엘제이는 무척 확고하게 아이는 제가 기르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아제프는 엘제이를 닮은 아이가


기대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시간을 많이 뺏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주장에 긴가민가한 얼굴을 했다.

“사촌이 있으니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집에서 함께 자랄 형제가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

“음- 첫 아이를 낳으면 고민해봐요. 그때가 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니까요.”

아제프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이면서도 쉽게 마음을 굳히지 않는 엘제이를 보다가 할 수 없이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오래 들여야 할 것 같았다.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밤사이 비가 줄줄 쏟아지던 게 거짓이라는 듯 낮이 되자 화창하게 갰다. 엘제이는 환한


햇빛에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엘제이는 나뭇잎에 고인 빗방울이 햇살을 받아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을 감상했다. 주변엔 온통 나무뿐이라,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도 싱그러운 빗물이 똑똑 떨어졌다. 엘제이는 젖은 숲의 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앞을 바라보다가, 앞쪽에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엇! 마을이 보이네요? 아론을 깨울까요?”

“잠시. 제이, 저 마을 평범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주술사가 있는 모양이에요.”

아제프는 아론을 깨우려는 엘제이를 말리고 그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어젯밤, 얼음을 녹이고 세크르다의 사체를 살펴보던 아제프는 이 일이 평범한 인간의 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크르다의 목에는 분명히 새까만 술식이 남아 있었다. 이런 일은 주술사만이 할 수 있었다.

“주술사요?”

“네. 저 아이의 말에 따르면 어른들이 그에게 호의적인 성향을 보였다는데 무척 이상하지 않아요? 세크르다를
기르는 걸 비밀에 부친다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에요. 지금처럼 아이들이 잡아먹힐 수도 있는 상황인데요.”

아제프가 조곤조곤 설명하자 엘제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이도 처음부터 그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론은 마을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까 봐 어른들이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설명했지만,
석연찮았다.

세크르다는 훈련받지 않은 인간이 쉽게 사냥할 수 있는 짐승은 아니었다. 땅에 내려오는 시간보다 하늘 높이 나는


시간이 길기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공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런 작은 마을에 세크르다를 제압할 사람도 많지 않을 텐데, 아이가 세크르다에 잡아먹힐 수 있는 상황에서


외부에 연락을 취하지 않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술사에게 사람들이 동조하는 걸까요? 아니면, 세뇌당한 걸까요?”

“글쎄요. 자세한 건 부딪쳐봐야 알겠지만, 저는 세뇌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세뇌당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동조했다면 이야기가 쉬워질 거예요. 아이가 공격당한 순간부터 믿음이 흔들렸을 테니까요.”

“주술사……. 아직 남아 있었네요.”

“선황의 경우, 악마와 계약한 것은 아니기에 악마의 흔적이 없어졌지만, 악마 소멸 전에 계약을 끝낸 자들은
아직 완전히 힘을 잃지 않은 모양이에요. 최대한 잡아내려 했지만, 이런 한적한 마을에 숨었다면 힘들겠죠. 이번
기회에 싹 정리되면 좋을 텐데요.”

“그렇군요.”

엘제이는 다소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제프는 주술사가 사회악이라 생각했고, 무조건 그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엘제이는 아니었다.

엘제이는 주술사에게 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해를 입혔으니 미움이
가장 컸지만, 한편으로는 아제프가 악마와 계약했던 모습이 떠올라 연민도 드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악독한 상황에 몰렸으면, 악마에게 혼을 파는 짓까지 했을까 하는 연민. 뭉근하게 고인 그늘진
감정이 가슴께에 차올랐다. 엘제이는 가슴에 떠오르는 회색빛 감정을 고개 저어 떨쳐냈다.

불쌍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엘제이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었고, 엘제이도 이기적인 사람인지라 사랑하는


사람이 더 소중했다.

주술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악마에게 끌려가던 아제프의 영혼이 떠올랐다. 엘제이는 그늘진 얼굴로 꿈을
회상하다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응? 그런데, 주술사들은 죽으면 어찌 되는 거죠? 악마가 소멸했으니, 그냥 단순한 죽음에서 끝나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신만이 알겠죠.”

아제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주술사의 끝이 어떤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제프는 이
일이 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라며 마차를 몰았다.

마차가 마을에 가까워졌다. 마을 청년 여럿이 외지인을 경계하며 마을 앞으로 나왔다. 아제프와 엘제이는 잠든
아론을 깨워 아이를 안아 들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아이의 얼굴을 본 남자들이 술렁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 곧


아론과 닮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뒤로 여자 한 명도 허둥지둥 달려왔다. 아이의 부모인
것 같았다.

엘제이가 아론을 품에서 내려주자, 아이의 아버지가 빠르게 달려와 아론을 끌어안았다.

“아론!”

“아버지! 어머니!”

“세상에! 아가야, 다친 곳은 없니?”

아론의 어머니는 아론의 얼굴을 수차례 매만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울자, 그동안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아론도 참지 못하고 어머니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제프는 제법 정상처럼 행동하는 그들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세뇌된 자 특유의 흐리멍덩한 동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건가? 왜지?’

아제프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아제프는 이곳에 오기 전에 황궁에 연락을 취했다. 신혼여행 중에는 가급적
연락을 취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예 연락을 끊을 수는 없었다.

아제프가 무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자이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은 언제나 벌어질 수 있었다.
알체스테는 여행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하루에 한 번씩 전서구를 주고받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정무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고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계속 파악하고 있어야 했기에 아제프도 알체스테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주술사가 있다면 정화의식이 필요할 것 같아 신관을 부르고, 세뇌로 폭동을 일으킬 주민들을 제압하려 기사단을
불렀는데, 일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듯했다.

‘밤에 전서구를 보냈으니, 오늘 점심때쯤에는 나를 찾아올 텐데. 그전에 무슨 일인지 파악해둬야겠군.’

세뇌가 아니라 동조한 거면 숨기려고 들 테니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나 상관없었다. 대략적인 줄기만 파악하고
기사들에게 사건을 넘기면 될 일이었다.

아제프는 기사들이 올 때까지 이 일을 해결하겠다고 다짐하며 마을로 발을 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제프와 엘제이를 여전히 경계했지만, 아론을 데려다줘서인지 대놓고 박대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늘진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며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아이가 세크르다에게 붙잡혀 있더군요. 하마터면 세크르다의 먹이가 될
뻔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제프는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었지만, 묻는 말은 날카로웠다.

아제프는 편한 여행을 위해 귀족의 옷을 벗었지만, 특유의 기감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눈이 속내를


꿰뚫을 듯 아론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긴장하고 있군. 숨기는 게 있긴 한가 보지?’

아론의 아버지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론을 내려주고 아론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보냈다.

“마을 가까이에 세크르다의 둥지가 있는 건지 종종 세크르다가 출몰하고는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습만 보일 뿐


위험하지는 않아 넘어갔는데 어제,”

“바르킨! 가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론의 아버지는 꽤 침착하게 거짓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마을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며 말이 끊겼다.

아제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을 쪽으로 향했다.

“바르킨! 안 된다니까! 아무래도 저 사람, 심상치가 않아. 기사 같다고!”

새까만 로브를 쓴 남자와 그를 말리는 마을 사람 여럿이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소리를 낮추고 남자를 말렸지만,
남자는 큰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해결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가 몸부림을 치자 로브가 살짝 젖혀졌다. 긴 로브 자락 끝으로 손가락이 살짝 보였다.

엘제이는 굵은 손가락을 칭칭 휘감은 새까만 문양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주술사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2 화 에필로그(14)
142
아제프는 싸늘한 얼굴로 바르킨과 주민들을 바라봤다. 주술사는 발견하는 즉시, 즉결 처형 대상이다. 물론,
주술사의 도주를 돕거나 주술사를 보호한 사람 역시 즉결 심판의 대상이었다.

“바르킨!”

바르킨은 저를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굴려는 듯 턱을 바투 당기고 등을
쭉 폈다. 바르킨은 천천히 로브를 벗으며 차분한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세크르다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저에게 있습니다. 제가 멋대로 돌본 동물이고, 제 관리 부주의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 정체도 짐작하신 것 같으니,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다만, 마을
사람들은 보호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제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제프는 애초에 주술사라는 존재가 역겨웠다. 주술사들이 신들을 배반했다는
건 그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아제프가 주술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아제프는, 자신이 주술사가 되는 모습을 봤다. 지켈리온이 보여준 환각에는 엘제이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제프는 환각을 통해 그녀가 왜 죽었는지, 만약 그녀가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끝났을지
알았다.

아제프는 다만, 엘제이가 그 모든 걸 숨기고 싶어 했기에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아제프는 허울뿐인 것에 홀려 스스로를 버리고, 엘제이를 아프게 한 그 존재가 역겨웠다. 그 역겨움은 아제프
본인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주술사들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아제프는 나약한 것을 싫어했다. 나약한 것들이 살려고 버둥거리는 꼴은 더 싫었다. 아득바득 절벽을 기며
진창에서 살아가면서도 죽지 못해 꿈틀거리는 것들이 싫었다. 혼을 팔면서까지 무언가를 가지려는 그 버러지 같은
주술사들의 습성에, 토악질이 치밀었다.

그건 일종의, 자기혐오였다.

아제프가 섬뜩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바르킨을 노려봤다.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버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살살 달래는 게 빠르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아제프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어조로 담담한 척 서 있는 바르킨을 후려쳤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율법대로라면 너는 내 앞에 서는 순간 죽었어야 옳았고 너를 도운 마을 주민들도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게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이곳 사람들도 마찬가지. 발
하나쯤 얼려놔도 죽지는 않으니, 도망간다면 내 권한으로 즉결 심판하겠다.”

아제프가 서늘한 얼굴로 주민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반감이 번졌다. 그들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 아제프를 노려봤다.

“당신이 뭔데,”

“그만하세요! 우리가 다 함께 덤벼들어도 이 남자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남자는, 황제의 번견입니다.”


바르킨은 앞으로 나서는 청년을 말리며 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켈리온과의 전투 후 아제프는 더는 제 자질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하루 만에 얼음성이 된 티아세 家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알체스테의 황권을 위해 검을 몇 번 휘둘렀더니 어느새 그에게는,
황제의 번견이라는 돼먹지 못한 별칭이 붙어 있었다.

아제프는 그 별칭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

아제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굳어 있는 얼굴 하나하나를 눈으로 노려봤다.

“나는 모처럼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일은 빠르고 간단한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 생각엔 너는 즉결
처형, 이 마을은 즉시,”

“아제프.”

엘제이는 날카로운 어조로 공격하듯 퍼붓는 아제프의 말을 부드럽게 끊어냈다. 아제프는 아차 한 얼굴이 되어
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엘제이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부드럽게 걸어와 아제프의 손을 붙잡았다.

“…….”

“아제프. 당신,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휴가 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니 신경이 예민해졌나 봐요. 괜찮아요?”

엘제이가 조곤조곤 속삭이며 아제프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러주자 그의 얼굴이 좀 풀렸다.

아제프는 무척 냉정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일로 화를 내다니 뭔가 이상했다. 아제프도 그걸 알아챘는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평소라면 혼자 생각하는 걸로 그쳤을 텐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제프는 바르킨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내게 무슨 짓을 했지?”

“제가 한 건 아닙니다. 혹시, 이곳으로 오면서 세크르다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후작님처럼 기감이
예민하신 분은 잠깐 들은 소리로도 영향을 받으셨을 수 있습니다.”

아제프는 어젯밤 들었던 이상한 귀곡성을 떠올렸다. 그가 가만히 눈을 감자 푸른 자질이 일렁거리며 주변 공기를
서늘하게 바꿨다. 혈관을 타고 자질이 졸졸 흐르자 몰래 숨어 있던 까만 기운이 먹구름처럼 피어났다.

아제프는 그걸 손으로 움켜잡았다. 새까만 기운이 얼음에 갇혀 톡, 떨어졌다.

“이건가? 대체 세크르다에게 무슨 짓을 해둔 거지?”

“제가 한 짓은 아닙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저를 조금만 더


살려주시겠습니까?”

“아제프, 이야기를 먼저 들어봐요.”

엘제이가 아제프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하아-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아제프는 엘제이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킨은 조금의 시간과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

바르킨이 안내한 곳은 마을 뒤쪽의 숲이었다.

바르킨이 가리킨 숲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제이는 그저 울창하기만 한 숲길을 바라보면서 뭐가 문제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바르킨이 작은 오두막에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잘게 잘린 새빨간 덩어리였는데, 피가 고인 걸 보니 동물의


사체인 듯했다.

바르킨은 커다란 통에 담겨진 사체를 숲 곳곳에 뿌렸다.

“곧 올 겁니다. 먹이가 있으나 흉포하게 굴지도 모르니, 미리 대비하시는 게 좋습니다.”

바르킨이 엘제이를 살짝 바라보며 충고했고, 아제프는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어냈다. 조금 기다리자, 바람이 크게
불었다.

사아아아-

저번과 같았다. 숲이 기묘한 소리로 울며, 신음했다.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더운 기운을
흠뻑 묻힌 햇살을 가로막고 까만 형체들이 날아들었다. 세크르다였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세크르다들은 생각보다 유순했다. 그들은 사람에게 달려드는 대신 얌전히 고기를 받아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튼튼한 턱이 으적으적 뼈를 씹는 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다.

세크르다는 총 8 마리였다.

엘제이는 저보다 큰 세크르다를 바라보다가, 바르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성인 남자만 하네요. 왜 먹이를 주고 있는 거죠?”

“먹이를 주지 않으면 인간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세크르다는 기본적으로 무척 영리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이를
직접 사냥하는 것보다 제가 주는 걸 먹는 게 더 편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배가 부르면, 사냥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1 년이라고 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어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먹이가 충분하지 못했고 약한
개체는 낙오된 거겠지. 그래서 한 마리는 동족의 공격을 받아 죽은 채로 발견됐고, 다른 한 마리는 인간을
잡아먹으려다 우리에게 들킨 건가?”

“정확한 추측입니다. 어제 저는, 먹이를 충분히 구하지 못했습니다. 배를 채우지 못한 세크르다는 사냥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악마는 정말, 소멸했습니까?”


알체스테가 성군으로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악마의 존재를 사멸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제프의
공이 더 컸지만, 아제프는 굳이 제 공을 챙기려고 들지는 않았다. 칭송받고 화답하는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악마는 소멸했다.”

아제프는 뚝 떨어지던 지켈리온의 머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악마와 생사를 함께하는 존재였고,
그는 분명히 죽었다.

“그렇군요. 제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했습니다. 저는 원래 이 마을 출신입니다. 다만, 성인이 된 직후 떠났죠.


어떤 이유로 악마와 계약하는 걸 선택했고, 주술사가 됐습니다. 제가 들어간 주술사의 무리에서는 세크르다를
길들이고, 세크르다의 살상력을 높이는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술식이 그것인가 보군. 무리였다고 했나? 왜 지금은 너뿐이지?”

“모두 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죽이셨죠. 당신이.”

대부분의 주술사는 지켈리온을 따랐다. 그들이 악마를 따른다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르킨과 함께
있던 자들은 지켈리온이 그들을 불러들였을 때 모두 황실로 향했고, 엘제이와 엘리사를 향한 저주를 준비했다.
가지 않은 건 바르킨뿐이었다.

물론, 시행하기도 전에 알체스테와 아제프에게 발각되었으니 당연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곳에 가담하지
않은 바르킨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나를 원망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쭉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1 년 전 저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여전히 주술사였지만…… 제 고향은 보시다시피 외진 곳이었고 조용히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선 안 됐는데, 욕심을 부린 거지요.”

바르킨은 제 이야기를 고해하듯 털어놨다.

바르킨이 주술사가 된 이유는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5 년 전, 그의 마을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그의 연인도, 가족도, 그 전염병으로 죽어버렸다. 바르킨은 누군가 고의로 그 전염병을 퍼트렸다는 걸 알아냈다.

바르킨은 그자에게 복수하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자 악마에게 혼을 팔았다.

바르킨은 손에 넣은 힘으로 손쉽게 복수했다. 손가락 하나부터 야금야금 신체 부위를 잘랐고, 새까만 어둠을
몸속에 집어넣으며 그 자가 고통 받는 걸 즐겼다. 하지만, 악마가 대가로 준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은 아니었다.

악마는 결코, 원하는 것을 온전히 들어주지는 않았다. 결국 얻지 못할 소망을 위해 혼을 파는 인간을 보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바르킨 역시, 허울뿐인 악마의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심한 고문을 반복하자, 그자는 죽어버렸다. 복수를 끝내자 허망함이 남았다. 바르킨은 그자를
고문해 알아낸 전염병 치료약을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고, 그 뒤로 고향을 떠났다.

바르킨은 15 년 전에 고향을 떠났으니까, 고작 5 살밖에 안된 아론은 당연히 바르킨이 이곳 출신이라는 걸 몰랐다.

바르킨은 처음부터 외지인이 아니었고, 마을 사람들이 바르킨을 보호해주려고 했던 건 그때의 고마움이


남아서였다.
아제프는 몇 가지 의문이 풀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제는 뻔히 보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3 화 에필로그(15)
143

아제프는 정황을 모두 파악했다. 그는 먹이를 씹어 먹는 세크르다를 흘긋, 바라보고는 말했다.

“세크르다가 따라온 거군. 먹이를 받아먹으러.”

“……정말,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세크르다는 무척 영악합니다. 인간에게 먹이를 받아먹었던 기억이 있는
개체들은 저를 따라왔어요. 사냥하기가 귀찮았던 거겠죠.”

“왜 죽이지 않았지?”

“보시다시피,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먹이만 받아먹죠. 제 힘으로는 죽일 수
없습니다. 지난 1 년간 주술사로서의 힘이 점점 미약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아마, 악마가 소멸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죠.”

“힘을 주는 매개가 사라졌으니, 타격이 가는 건가?”

아제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는 주술사를 만난 게 거의 1 년만이었다.


그날 이후, 주술사의 본거지는 대부분 발각됐고 주술사들은 즉결 처형됐다. 아마, 살아남은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제프는 먹이를 먹는 세크르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직콰직- 얼어붙는 대지에 놀란 세크르다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려 했지만, 이미 다리가 얼어붙은 터라 소용없었다.

“끼아아악-.”

발끝부터 빠르게 어는 감각에 세크르다들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리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숲에는 세크르다의 얼어붙은 사체만이 남았다.

아제프는 제게 눌어붙은 독기를 털어내고, 바르킨을 쳐다봤다.

“간단하군요. 너무 간단한 것이라, 허무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벌은 그리 무겁지 않겠지. 당분간 세금을 조금 올리는 정도일 거다.”

아제프는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바르킨은 보며 드물게 자비를 베풀었다. 텅 빈 동공에 얼핏 안도가 차올랐다.

바르킨은 주먹을 꽉 쥐고, 고해하듯 속삭였다.

“아론이 잡혀간 걸 보고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제 힘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얼마 버티지 못할 걸 알았습니다.


세크르다들의 먹이를 공급하는 게 버겁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황궁에 알렸어야 옳았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아제프는 검을 뽑아 바르킨의 목덜미에 겨눴다. 지금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되도록 엘제이 옆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게 아제프만의 규칙이었다. 아제프는 가늠하듯 바르킨을 보다가 그가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자 검을 위로 휙 들었다.

마을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줄 생각이었다.

“후회한다고 해도, 뉘우친다고 해도, 네게 다른 길은 없다.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은 건 칭찬해주지.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제프는 공중에서 검을 한번 털었다. 뽀얗게 쌓여 있던 눈이 포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제프는 검을 집어넣으려고


한 것이었지만, 엘제이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 아제프를 말렸다.

“아제프! 잠깐만요.”

“제이?”

“꼭 죽여야만 할까요? 기회가,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엘제이는 아제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했다. 아제프는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 사람인데, 제가 이 말을


꺼냄으로써 그를 심란하게 할 거라는 걸 생각하자 미안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바르킨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주술사는 엘제이에게 아픈


손가락과 같았다. 아제프의 끝이 그러했으니, 그러지 말아야지 되뇌어 봐도 자꾸만 연민이 솟아올랐다.

엘제이는 당황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아제프에게 횡설수설 설명하기 시작했다.

“뭔가,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힘이 줄어든다고 했어요. 게다가 자세히 보면 문양이 번진 곳도 한쪽


팔뿐이에요. 15 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전신으로 퍼지지 않은 건 그만큼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잖아요.”

악마의 문양은 사용할수록 몸을 빼곡하게 메운다. 힘을 받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문양의 크기가 저것밖에 안


된다는 건 정말, 그 힘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기껏해야 제 복수를 하고, 세크르다에게 술식을 걸고, 그들에게 먹이를 잡아주는 정도가 바르킨이 악마의 힘을
빌린 일 전부였다.

엘제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제프를 간절히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제프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하나 정도 예외를 두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이 일을 못 본


척해줄 수 있었고, 주술사 하나쯤 그의 힘으로 숨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반복되는 건 위험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타일렀다.

“제이, 안타까운 건 알지만, 위험을 남겨두는 일일지도 몰라요. 지금은 저리 얌전히 있지만, 또 복수할 대상이
생길지도 모르죠. 예외를 둔다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제이가 정말 원한다면 나는 들어주고 싶지만, 반복은
위험해요.”

엘제이는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보다가 바르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르킨은 아제프가 아니었다. 하지만, 엘제이가 돕지 못했던 아제프의 최후를 떠올리게 했다. 시체로 만든 산
위에 앉아 있던 아제프가 알체스테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던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때의 아제프도, 문양이 넓지 않았다. 책 속의 아제프는, 문장을 가지는 것 외에는 그 힘을 쓰지 않았던 거다.

바르킨은 복수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고 했지만, 엘제이는 그가 소중한 이들을 살리는 걸 더 원했다는 걸
알았다. 그자를 잔인하게 고문한 것도 살리지 못했다는 절망이 커 그랬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문장을 가지고 싶었던 아제프와, 그저 소중한 이들을 살리고 싶었던 바르킨. 두 사람이 자꾸만 겹쳐들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지금은 달라졌고, 아제프는 살아 그녀의 옆에 있었다. 엘제이는 망막을 스치는
아제프의 최후를 힘겹게 삼켜냈다.

“……미안해요. 아제프의 말이 맞아요. 제가, 성급했어요.”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엘제이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자, 그냥 바르킨을 제 감시하에
두고 살려준다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솟구쳤다.

‘어떻게 할까?’

아제프가 엘제이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고민할 때, 바르킨이 슬쩍 끼어들었다.

“팔을, 잘라보면 어떻습니까?”

“네?”

엘제이가 눈을 둥글게 뜨고 바르킨을 바라봤다. 바르킨은 무덤덤한 얼굴로 문양이 있는 쪽 팔을 들어 보이며


차분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상대적으로 문양이 있는 쪽이 힘을 쓰기가 더 쉬웠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문양이 없는 쪽으로는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고요. 혹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죽을 각오를 한 게 아니었나?”

“살 방도가 있다면, 역시 살고 싶습니다.”

바르킨이 덤덤하게 속삭이며 엘제이를 흘긋 바라봤다. 아제프만 있었다면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엘제이가
있는 이상 변수는 있었다. 바르킨은 가만히 상황을 살피며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했다.

아제프와 엘제이의 사랑 이야기는 꽤 유명한 것이었다. 바르킨은 소문대로 아제프가 엘제이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빠르게 알아챘다. 죽고자 했지만, 살 수 있다면 마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간절히 바라보는 바르킨을 마땅찮게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바르킨은 엘제이를 향해
살려달라고 눈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똑똑하군. 그렇게까지 해서 아득바득 살고 싶나?”

“살아남고자 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바르킨의 말에 아제프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올라갔다. 어린 날, 살고 싶다고 애원하던 나약한 기억이 떠올랐다.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아제프의 얼굴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살고자 바르작거리는 건 불쾌했다.

엘제이는 어두워 보이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확, 퍼지자 머리
한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던 망령이 물러갔다.

그가 사랑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나긋나긋 울렸다.

“아제프, 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조금 전에는 제가 성급했어요.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뭐, 실험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니까요. 확실히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다면, 더는 주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테니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렇다고, 주술을 사용했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아제프가 냉정하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부딪혔다.

새하얀 얼음이 솟아나 바르킨의 팔을 콰직- 깨물었다.

“윽!”

한쪽 어깨 끝까지 타고 오른 얼음이 입을 쩌억, 벌리며 냉기를 발산했다. 바르킨은 귀 끝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냉기에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평온한 안색을 유지했다.

“감각이 없는 걸 보니, 아프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왕 자르실 거 깨끗하게 잘라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제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르킨을 바라봤다. 아제프는 바르킨이 아프지 않도록 배려해준 게 아니라, 고통
어린 신음을 듣지 않도록 엘제이를 배려한 것뿐이었다.

아제프는 미친놈 보듯 바르킨을 흘긋 쳐다봤다가 곧 신경을 꺼버렸다. 휙 돌아가는 고개가 무심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끌어안아, 그녀의 얼굴을 품에 가뒀다.

“당신은 호기심이 많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까지 보려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엘제이는 살이 떨어지고, 피가 튀는 잔인한 광경에 면역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때 마침, 프리멧사는 엘제이를 지켜보던 중이었다.

엎드린 채 세계를 내려다보던 여신은 조금 안타까운 얼굴로 바르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으음- 저렇게 안 해도 되는데. 본인이 원한 거긴 하지만, 아까운 팔 하나 떨어지겠네.]

악마가 사멸한 후, 주술사들의 영혼이 어디로 갈지가 애매해졌다. 신들은 회의 끝에 한 가지 율법을 추가했다.

<율법 하나, 악마 소멸 후 남은 주술사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따라 몇 가지 시험을 거치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윤회의 궤도를 걷게 할지, 소멸시킬지 결정한다.>

그 결정을 담당하는 건, 형벌의 신인 켈레덴의 책임이었다.


켈레덴은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까만 눈으로 세계를 내려다봤다. 프리멧사는 모처럼 관심을 보이는 켈레덴이
신기한지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웬일이에요? 인간의 삶에 관심을 보이시고.]

[관심이 아니라, 책임이다. 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될지 결정하는 건 온전히 내 권위니까.]

[흐음- 어쩌실 거예요? 윤회의 궤도로 돌려놓으실 건가요? 저들을 위해 굳이 회의까지 열었으니,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겠지만요.]

켈레덴은 고민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4 화 에필로그(16)
144

신들이 굳이 회의를 연 이유는, 주술사가 더는 주술사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바르킨이 아직도 주술을 사용하는 건 꽤 특수한 경우였다. 그는 힘을 아껴 썼기에, 악마가 제 몸에 심어놓은


독기의 잔재를 아직 온전히 다 배출하지 못했다.

아제프가 오랜 시간 동안 주술사를 발견하지 못한 건 그들의 힘이 실제로 사라지고 있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주술사가 힘을 사용할수록 독기는 빠졌다. 원래대로라면 악마가 독기를 다시 채워 넣을 테지만, 그가 소멸했으니


공급원이 사라졌다.

독기가 다 사라지면 온전히 없어질 문양인데, 그걸 알 리 없는 바르킨은 최대한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세크르다에게 계속 먹이를 공급하기 위해 최소한의 힘만 사용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프리멧사는 동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냥 다 써버렸으면 벌써 문양도 소멸하고, 세크르다의 술식도 깨졌을 텐데.]

세크르다의 술식이 아직 존재하는 이유는 술식을 건 여러 명의 주술사 중 바르킨의 힘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술식을 건 주술사가 모두 사망하거나, 힘을 온전히 잃으면 술식도 자연히 사라졌다.

프리멧사의 눈에는 옅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켈레덴은 프리멧사가 인간을 왜 저렇게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랬다면, 마을의 인간들이 저 짐승에게 잡아먹혔겠지. 더는 저만한 양의 먹이를 사냥할 능력이 없을 테니.
가장 현명한 방법은 마을을 떠나는 거였다. 정말 그들을 위했다면, 왜 외딴 숲으로 가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

[켈레덴 님도 참! 아직,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거죠. 그도 살고 싶었을 테니까요.]

프리멧사는 바르킨을 어리석다는 듯 바라보는 켈레덴을 밉지 않은 눈으로 흘겼다. 형벌의 신은 유독 성정이 차고


무심했다.

사랑의 신인 프리멧사에게 자애가 넘치는 것처럼, 켈레덴 또한 본인의 직책에 맞는 성격을 가진 것뿐이었다.
프리멧사도 그걸 알았기에 켈레덴의 생각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런가?]

켈레덴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인간 때문에 프리멧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제프는 바르킨의 팔이 완전히 얼어붙기를 기다렸다. 감각이 사라진 뒤에 베어야 그가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프리멧사는 시간을 재고 있는 아제프와, 그의 품에 안긴 엘제이를 보다가 투덜거렸다.

[저렇게 안고 있으니 제 딸의 얼굴이 하나도 안 보여요! 하여튼 얄미운 놈. 내가 내려갈 수 있었다면 머리카락을
뽑아, 응?]

[왜 그러지? 현신은 안 된다.]

켈레덴은 눈을 반짝 빛내는 프리멧사를 의심 어린 눈으로 보며 버릇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프리멧사는 뚱한


얼굴로 켈레덴을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바꿨다.

새하얀 얼굴이 애교를 담아 해사하게 휘어졌다.

[저야 당연히 벌을 받는 중이니, 안 되죠. 하지만, 켈레덴 님께는 있으시잖아요. 현신의 자유가.]

프리멧사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옅은 분홍빛 속눈썹이 꽃잎처럼 떨어졌다가 피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켈레덴은 반짝반짝한 눈빛 공격에 마른 침을 삼켰다.

[……내 현신은 주술사의 영혼을 시험하기 위해 허락된 거다.]

[있잖아요, 주술사. 저기에.]

프리멧사가 바르킨을 손가락으로 콕 집어보이며 속삭였다. 눈은 여전히 켈레덴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드물게도 프리멧사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켈레덴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났다.

[권위에는 책무가 따른다. 사사로이 사용할 수는,]

[에이- 켈레덴 님은 시험하러 가시는 거죠. 저는 켈레덴 님이 볼일을 보시면서 제 아이에게 제 전언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랍니다?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용무는 덤이죠, 덤.]

[프리멧사.]

형벌의 신이 하듯 프리멧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프리멧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켈레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내 아이에게, 내가 잘 듣고 있다고…… 전해줘요.]

[…….]

켈레덴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나왔다. 차갑고 무심한 형벌의 신에게 한숨을 쉬게 할 존재는 거의 없었다.
켈레덴은 간절하게 바라보는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날개를 폈다.
[아! 사랑한다고도 전해줘요!]

켈레덴의 날개가 뻐걱, 소리를 내며 퍼덕거렸다. 프리멧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환하게 웃으며 현신하는
켈레덴을 배웅했다.

***

아제프는 시간이 꽤 지나자 검을 들었다. 이제는 베어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얼어붙었을 듯했다.

아제프가 검을 높이 들었다. 그가 눈짓하자 바르킨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팔을 길게 내밀었다. 정확하게


베어내려고 자세를 잡은 아제프가 막 검을 휘두르려는데, 밤빛이 몰아쳤다.

[그럴 필요는 없다. 주술사에게 주어진 힘을 다 쓰면, 문양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니.]

“윽!”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아제프는 짧은 신음을 내며 엘제이를 끌어안고 물러났다. 새까만 기운이
치지직- 타올랐다. 얼핏 보면 악마의 독기와 비슷했지만, 악마의 것은 저렇게 반짝거리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한 자락 베어내면 저런 색감일 것 같았다.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치지직- 소리를 내던 기운이 뭉쳐져 형상을 토해냈다.

펄럭, 크게 흔들리며 빠져나오는 8 장의 거대한 날개에 엘제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천사님?”

“제이, 뭔지 알고 말을 걸어요.”

아제프가 작게 타이르며 엘제이의 앞을 막아섰다. 켈레덴의 눈이 어이없다는 듯 엘제이와 아제프를 차례차례


바라봤다. 감히, 신을 삿된 것 취급하다니 무례한 것들이었다.

형벌의 신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켈레덴 님?”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베아르시 제국은 사랑의 여신 프리멧사를 숭상하는
나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의 정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아제프도 현신하는 신을 보고 멀쩡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켈레덴을
바라봤다.

켈레덴은 딱딱하게 굳은 아제프를 힐긋, 바라보았다가 엘제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프리멧사는 항상 기도하는 너를 지켜보고 있다.]

엘제이는 갑자기 제게 말을 거는 신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또로록 굴렸다. 그녀는 프리멧사 때를 생각하며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아ㅡ. 음……. 여신님은 잘 지내고 계세요?”


[……그녀는 잘 있다.]

켈레덴은 눈썹을 파들, 떨었으나 프리멧사가 원할 대답을 들려주었다. 딱딱한 어조에 가슴을 치던 프리멧사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주세요!]

현신하지 못한 신의 말이었으니, 프리멧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켈레덴뿐이었다. 켈레덴은 할 수 없이 몇


마디 더 덧붙였다.

[너를 많이, 아낀다고 전해달라는군.]

곧 죽어도 사랑한다고 전해주지는 않았다. 프리멧사가 뭐라고 속닥이며 제대로 전해달라고 소리쳤지만, 켈레덴은
들리지 않는 척 그녀를 무시했다.

엘제이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ㅡ. 저도 여신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네가 사랑하는 건 저 인간이 아닌가?]

켈레덴이 아제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차갑게 물었다.

다정한 프리멧사와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꽤 무서운 인상의 형벌의 신을 대하려니 어려웠다. 어색하게 웃는
엘제이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네? 물론 아제프도 사랑하지만, 여신님도 사랑해요. 의미는 다르지만요. 여신님을 향한 사랑은 아이가 부모를
보는 것과 비슷해요.”

켈레덴은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멧사가 부탁한 건 다 전했으니 이만 물러나려는데, 건방진 인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제프는 순간적으로 엘제이를 향했던 켈레덴의 차가운 눈을 잊지 않았다. 그가 경계하듯 신을 바라보자 켈레덴의
눈에 옅은 흥미가 스쳤다.

‘죽어서도 내 옆에 있어줘.’

꽤 되바라진 생각을 하던 인간이었다. 켈레덴은 프리멧사의 석상 앞에서 무엄한 생각을 일삼던 아제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가 매번 엘제이를 기도실에서 빼간 덕에 켈레덴은 아제프에게 호감이 있었다. 비록 종잇장보다도 얇고


먼지보다도 가벼운 호감이었지만.

[문장보유자는 윤회의 궤도가 같다.]

“…….”

아제프는 저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켈레덴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신이라는 자가 뜬금없이 나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원래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생물이었다. 켈레덴은 아제프가 의아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너는 과거에서도, 현생의 끝에서도, 미래의 예정된 삶에서도 네 짝과 함께한다는 소리다. 죽은 후에도 당연히
네 옆에 있겠지. 그게 너와 네 짝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아제프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켈레덴은 아제프가 뭐라 반응하기 전에 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켈레덴이 사사로운 이유로 율법을
어긴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

켈레덴이 떠난 후, 세 사람은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엘제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켈레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고, 바르킨은 제가 공포에 질려 헛것을 본 거라
믿었다.

셋 중 정신력이 가장 강한 아제프만이 켈레덴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바르킨의 팔을 녹여줬다. 잠시 뒤, 팔이


녹고 남은 힘을 쥐어짜내게 하자 그의 팔에서 문양은 사라졌다.

아제프는 보고할 거리가 생겼음에 혀를 차며 보고서를 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부른 신관들과 기사단이


도착했다.

기사단은 할 일 없이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고, 신관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바르킨이 짜낸 주술사의 힘과


얼음에 갇힌 세크르다의 술식을 정화했다.

아제프는 마을 주민들과 바르킨을 감시할 사람을 매해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건 그리 큰 벌은 아니었다. 바르킨은


살아남았고, 그가 주술사였다는 건 비밀에 부쳐졌다.

일이 잘 끝난 후, 엘제이는 찝찝한 몸을 씻으러 갔고 먼저 씻고 나온 아제프는 엘제이가 들어간 집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엘제이의 안전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선 것뿐이었지만,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꼭 그녀를
훔쳐보는 사람 같았다.

아제프가 그렇게 멀뚱히 서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를 황당하게 할 인물이 뛰어왔다.

“형!”

“……형?”

맹세코 말하건대, 아제프가 형이라는 단어로 불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5 화 에필로그(17)
145

아제프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주위에는 형이라고 불릴 사람은커녕, 사람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를 형이라 부른 이 아이를 제외하고는.

한적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외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제프는 마을에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고,
신분이 높다 보니 다들 그를 어려워해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이 아이를 빼고는.

아제프는 드물게도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론은 대담하게도 아제프의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기행을
보였다.

“저기, 형.”

“…….”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조막만 한


것을 내려다봤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조막만 한 데다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5 살의 소년은 아제프의 바짓단을 친근하게 잡아당기며 말갛게 웃었다.
더러운 때 하나 물들지 않은 순진한 아이의 얼굴에 아제프는 손끝을 움찔, 떨었다.

아이라는 건, 그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였다.

“형! 이제 가는 거예요?”

아론은 마땅찮아하는 아제프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모른 척하는 건지, 아제프를 계속 형이라고 불렀다.

아제프는 바지를 잡고 흔드는 어린 것을 발로 차지도 못하고 떼어놓지도 못했다.

아이를 죽인 적이야 여러 번 있었지만, 아이들과 대화할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목적이 있는 대화야 아제프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얻어낼 게 있으니 귀찮은 아이를 살살 달래 원하는 걸
취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아이의 칭얼거림을 들어줘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아제프는 드물게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바짓단을 잡은 아이의 손을 쳐내고 무시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 아이는 엘제이가 특히나 마음에 들어 하던
아이였다. 나중에 엘제이가 말을 걸지도 모르니, 그런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제프는 할 수 없이 이 같잖은 것을 상대해줘야 함을 알고, 호칭부터 정정해주기로 했다.

“왜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나는 네 형이 아니다.”

“어머니가 후작님이라 부르라고 하셨는데, 형은 후작님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멋지잖아요!”

아론이 해맑게 웃으며 아제프의 무릎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
같았다.

아제프는 아이의 밑도 끝도 없는 어법에 조금 당황했다. 그의 지적 수준으로 생각할 때, 아이는 무척 멍청한


생명체였다.

‘저 나이를 먹어서, 말도 잘 못 알아듣는군.’


아제프는 개미 코딱지만 한 측은지심을 담아 아론을 내려다봤다. 선천적으로 모자란 아이가 있는데, 저 아이가
그런 경우인 듯싶었다.

“나는 너보다 17 살이 많다. 네게 형이라고 불릴 만한 나이는 아니지.”

“우와- 형,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요. 그래도 멋지니까, 형이라고 부를래요.”

아이는 생각보다 더 멍청했다. 아제프는 드물게 자비를 베풀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건만, 이 아둔한
생명체는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아제프는 두 번의 시도 끝에 칭호를 정정하는 걸 포기해버렸다.

“그래. 무슨 일이지?”

얼른 볼일만 보고 썩 꺼지라는 듯 아제프의 얼굴은 귀찮음이 가득했다. 마차에서 엘제이와 지낼 때는 그래도 낯을


가렸던 건지 저리 굴지는 않았는데, 제 보호자를 만나니 기가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제 한 몸 지킬 힘도 없으면서, 부모 밑에서 떵떵거리는 꼴이었다. 아제프는 역시 아이들은 싫다고 생각했다.

“아, 맞다! 형. 이거, 선물이에요.”

아론은 까먹었던 걸 떠올린 듯 이마를 탁- 쳤다. 그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내밀었다.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게 제법 예쁘기는 했지만, 값진 보석류는 아니었다.

무심한 눈으로 감정을 끝낸 아제프는 아론이 팔 빠지도록 내미는 것을 받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왜 나에게 주지? 제이가 아니라?”

“누나에게는 꽃을 줄 거예요. 어머니가 여자는 꽃을 좋아한다고 하셨거든요.”

되바라진 놈이었다. 아제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거의 노려보다시피 아론을 응시했다. 아론은 아제프의 살벌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헤헤 웃었다. 찌든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말간 미소에 아제프의 눈썹이 살짝
내려왔다.

아제프는 할 수 없이 아이가 내미는 걸 받아들었다. 나중에 버리더라도 받는 척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고맙다.”

아제프는 고맙다고 소리 내어 읊조리면서도 이 상황을 왜 고마워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굳이


고맙다는 화답을 들려줬는지도 몰랐다.

살짝 찡그려진 이마가 귀찮음과 조금의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아론은 주위를 사사삭- 민첩하게 둘러보더니 아제프를 향해 살짝 손짓했다.

“형, 고개 좀 숙여주세요.”

“…….”

아제프는 왜인지는 몰랐지만, 또 귀찮음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는 제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아이를 위해 쭈그려
앉아야 했다.

아이의 손은 보송보송했다.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이 둥글게 모아져 아제프의 귓가에 닿았다. 아제프는 아이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우유 냄새 같은 걸 맡았다. 아이들 특유의 보드라운 향이었다.

‘젖비린내군.’

아제프는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굽힌 몸을 펴지 않았다. 그는 아론이 주위를 살피고 그의 귀에 속삭임을 전달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형이, 비밀로 해준 거죠? 부모님께, 혼날 줄 알았는데. 헤헤. 고마워요, 형.”

아이는 아제프가 저를 위해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비밀로 해줬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론은 제가 세크르다에 대한 걸 말했다고 부모님에게 혼날까 봐 걱정했다. 아제프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입을 다문 것뿐이었지만, 정정할 필요는 느끼지 못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이는 할 말을 끝냈는지, 그의 손에
꽃 한 송이를 쥐여 주고 돌아섰다.

“형! 난 이만 가봐야겠어요. 어머니가 찾으실 테니, 누나에게는 형이 대신 전해줘요!”

괘씸한 것은 아제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아제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쭈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허ㅡ.”

아이가 꼭 쥐고 있어서 흐물흐물 죽어버린 노란 들꽃 한 송이와, 아제프의 엄지만 한 작은 돌멩이 하나. 보고


있자니 더 어이가 없었다.

아제프는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땅에 버리려고 했다.

[형!]

해맑게 웃던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비비적거리던 동그란 갈색 머리가 엘제이와 조금 닮은 듯도 했다. 아제프의


이성은 그런 거친 것과 엘제이의 보드라운 머릿결은 절대 같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 겹쳐졌다.

아제프의 손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그것들을 버리지 않았다.

아제프는 손바닥을 다시 펼쳐 쓸모없는 것 두 개를 바라봤다. 아제프의 입매가 기이하게 찌그러졌다.

다 씻고 나온 엘제이는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는 아제프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

“아제프, 왜 그래요?”

엘제이는 아제프가 어디 아픈 건 아닐지 걱정했다. 아제프는 제 이마를 더듬는 엘제이의 손길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천천히 다리를 펴 일어났다.

“아-. 제이, 다 씻었어요?”

“왜 그러고 있어요? 어디 아파요?”

“음ㅡ. 아뇨, 그 아이가 제이에게 이것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다 죽어 나자빠진 들꽃을 엘제이에게 건넸다. 분명 엘제이 몰래 뒤로 휙 던져버리려고


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건네고 있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 입안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지금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꽃? 어머, 귀여워라. 책 사이에 꽂아두고 말리면 예쁘겠어요.”

엘제이는 꽃을 소중하게 감싸며 방긋, 웃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웃는 얼굴을 보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의 본능은 엘제이가 저걸 받으면 기뻐할 걸 알고 있었다. 아제프는 그래서 꽃을 버리지 않았던 거라
생각했다.

이유를 파악하자 아제프의 얼굴은 평온하게 펴졌다. 그는 엘제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한바탕 소란이 끝났으니, 다시 둘만의 여행을 떠나볼까 봐요.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건 사양이에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죠?”

엘제이는 그렇게 물으며 아제프의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아제프의 얼굴이 행복하게 휘어졌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손을 깍지 껴 붙잡은 채 마차를 향해 걸었다. 둘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기쁨을 위해 아론의 선물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그의 손에는 엘제이의 기쁨과 관련
없는 하얀 돌이 꽉 쥐어져 있었다.

아제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그만 돌을, 버리지 않았다.

***

그 뒤의 여행은 순조롭고 편안했다. 아제프는 그가 원했던 것처럼 둘만의 시간을 오붓하게 즐겼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그 감정이 큰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버려 아제프와 엘제이는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아제프는 지난번 길거리 노숙으로 깨달은 게 있었는지, 이것저것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원하던 대로 작은 모닥불을 만들어주었고, 그 옆에 천과 모포를 깔아 누워서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팔베개를 베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을음 하나 없는 맑은 하늘에는 별이 수억 개였다.


엘제이는 너무 많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아름다워, 취할 것만 같았다.

풀벌레 소리가 윙윙 들렸다. 엘제이가 그걸 자장가 삼아 눈을 감으려는데, 별똥별이 떨어졌다.

피이잉-

엘제이가 눈을 번쩍 뜨며 아제프의 손등을 톡톡 쳤다.

“엇! 아제프, 별똥별이 떨어질 때는 소원을 빌어야 해요. 빨리 소원 빌어요.”

졸음기가 묻은 목소리는 무척 다급했다.

엘제이를 재우려고 그녀의 가슴을 도닥도닥 두드리던 아제프는 뜬금없는 엘제이의 말에 눈을 조금 키웠다. 그는
정말 소원을 비는지 눈을 감고 집중하는 엘제이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역시 하나뿐이었다.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너는 과거에서도, 현생의 끝에서도, 미래의 예정된 삶에서도 네 짝과 함께한다는 소리다. 죽은 후에도 당연히
네 옆에 있겠지. 그게 너와 네 짝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신이 거짓말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의심 많은 아제프는 쉽게 켈레덴의 말을 믿진 않았지만, 만약 후에 아니라고


한다면 신이 인간을 속였다는 걸 빌미로 얼마든지 저것을 진실로 만들 생각이었다.

엘제이의 말대로 소원을 빈 아제프는 엘제이가 무엇을 빌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아이를
바랄지도 모른다. 엘제이는 아이를 좋아하니까.

아제프는 엘제이를 닮은 아이를 생각해보았다. 빽빽 우는 것밖에 못 하는 어린 것은 딱 질색이었지만, 우는 눈이


녹색이라면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밀색이라도 어여쁠 것 같았다.

아제프가 가만히 그들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 대해 상상할 때, 엘제이는 소원을 빌다가 잠이 든 듯했다.

아제프는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엘제이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며 작게 그녀를 불렀다.

“제이?”

“으음- 아제프.”

답하기는 했는데, 그냥 잠꼬대였다.

엘제이는 추운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아제프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제프는 기꺼이 제 품을 내주며 그녀의
어깨에 모포를 덮어줬다.

엘제이는 따뜻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코를 비볐다. 목 끝까지 모포를 잘 여며주던 아제프의
손이 멈칫했다.

아제프는 비로소, 자신이 엘제이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남자임을 깨달았다.

“제이, 당신은 내 마지막 구원이었어요.”

엘제이는 듣지 못할 테지만, 아제프는 사랑을 담아 그렇게 속삭였다.

아제프는 제게 내밀던 보드라운 손을 내치지 않았던 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없을 마지막 기회를
붙잡은 행운아였다.

별밤 아래 살짝 드러난 두 얼굴은 미소를 덧그리고 있었다. 부부는 행복했다.

그들의 추억을 담은, 깊은 별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날로부터 또 1 년이 지나, 베아르시 제국력 818 년 아 9 일.

아제프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의 첫 아이는 엘제이를 닮은 녹안과, 아제프를 닮은 백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갓 눈을 뜬 아이의 신록빛 눈을 바라본 아제프는, 자신이 봄을 태어나게 했음을 알았다. 아제프는 아이의 이름을
플린테아스라고 지었다.

플린테아스는 ‘봄의 축복’이라는 뜻의 고대어였다.

또다시, 새로운 봄은 피어난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영원한 봄의 속삭임이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6 화 side story 1
146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긋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해보는 IF 스토리입니다.

side story 에서는 아제프가 엘제이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기 전에, 아이젠이 자신의 원수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본편과는 다른 쪽으로 전개됩니다.

***

하얀 방문 앞으로 걸어간 남자는 열쇠를 꽂고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열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하얀 침대가 보였다.

커다란 창문이 한가득 머금은 햇살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엘제이의 등을 비추고, 부드럽게 흐트러진 밀색 머리를
비췄다. 천사의 깃털처럼 나부끼는 빛무리가 무척 아름다웠지만, 생기가 빠져나간 듯 애처로운 엘제이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그녀는 덫에 걸려 날개가 꺾인 천사였다. 하얀 발목에는 죄수들이 걸 법한 쇠사슬이 길게 늘어져 있어, 혼자서는


몸의 운신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아제프는 방 안에 엘제이를 가둬놓았다.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단 셋뿐이었다. 엘제이 본인과 그녀의


시중을 들 혀가 잘린 하녀, 그리고 아제프. 세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방에 함부로 침입할 수 없었다.

엘제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아제프뿐이었다.

아제프는 얌전히 누워 있는 엘제이를 응시하며 방 안을 눈으로 한번 훑었다.

고급스러운 가구, 시중을 들어줄 하녀, 호사로운 식사. 생활하기에 불편한 건 없지만, 딱 그 정도였다.

가끔 찾아오는 그를 제외하고는 대화를 나눌 이 하나 없는 적막한 공간 속에서 엘제이는 사무치는 고독감을 배웠다.

엘제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제프가 이러는 게 더 안타까웠다. 꼭 자기가 이만큼 힘들었음을


알아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가 저럴수록 그가 무섭다는 생각보다 안쓰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베개 위로 엘제이의 눈물 한 방울이 덧그려졌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향해 걸어갔지만, 엘제이는 발소리를 듣고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돌아봐도 그가 아닌 하녀가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내는 건 좀 어떻지? 얌전히 잘 있는 걸 보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 모양이군.”


아제프의 목소리가 들리자 엘제이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녀는 울음기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앞에 보이는 아제프의 모습에 한결 나아진 안색을 했다. 뜨거운 뙤약볕에 시들시들 말라가던 풀잎색 눈이
생기를 틔웠다. 그녀는 마치 그가 반갑다는 옅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엘제이의 눈에 담긴 건 두려움이나 원망이 아닌, 반가움이었다.

아제프는 납치당해 감금된 주제에 자신을 반가워하는 엘제이를 보며 혀를 깨물었다. 그는 엘제이가 지독한 착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두려워서 뛰는 심장을 호감이라 착각하는 바보 같은 여자.’

아제프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자신에게 걸어오는 엘제이를 노려봤다.

엘제이가 달리듯 그에게로 걸어가자 길게 늘어진 사슬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제프의 눈앞에 도착한 엘제이는 냉랭한 그의 표정에 흠칫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벌써 3 일이
흘렀다. 아직은 무사하다고 해도 여기서 더 지내다가는 언젠가 그녀의 아버지가 이곳을 알아챌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아제프에게 납치되고 나서도 그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의심이 많은 남자의


성격상 화를 내거나 그녀를 내칠 게 뻔했다. 엘제이는 조금 고민하는 얼굴로 머뭇머뭇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제프……. 저는,”

“티아세 양. 누가 제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좋다고 했죠?”

힘겹게 떨어진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뚝, 떨어졌다.

“아ㅡ.”

엘제이는 아제프의 차가운 눈에 슬픈 얼굴을 했다.

서리가 낀 듯 냉혹하기만 한 푸른 눈동자가 엘제이를 노려봤다. 아제프는 무척 불쾌하다는 듯 찡그린 미간을 펴지


않았다.

엘제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3 일간 볕을 못 봐서인지,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 건지,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제프의 시선이 물끄러미 창백한 손을 응시했다. 몸 어딘가가 따끔따끔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아제프는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하얀 손을 외면하며 3 일간 부쩍 수척해진 얼굴을 노려봤다.

죽여 버리고 싶은 여자였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살려두는 건 아직 효용가치가 있어서이지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아제프는 잘그락잘그락 움직이는 엘제이의 족쇄를 바라보며 삐뚤게 웃었다.

“저는 되묻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티아세 양, 누가 제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좋다고
했습니까.”
아제프의 날카로운 어조와 냉정한 얼굴에 엘제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이 속눈썹을
적시고 팔랑팔랑 흔들렸다.

울음을 참는 얼굴로 풀이 죽은 엘제이가 청하듯 손을 뻗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그의 손을 스치듯 부여잡았다.
아제프는 함부로 잡아 오는 따스한 손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원수의 딸에게 약해지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제프는 온기 서린 손을 차갑게 패대기쳤다.

“누군가 당신에게 제 이름도 불러도 되고, 제 몸에 함부로 손을 대도 괜찮다고 했나 보죠?”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아제프의 목소리는 차고 따가웠다. 엘제이는 벼린 칼날에 베여 피가 나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손끝이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

“아……. 죄송해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란델 경도 위험해질 거예요. 저를 이만 풀어주시고,”

“그럼 당신 동생을 데려올까? 그쪽이 편하겠어요?”

아제프가 날카롭게 벼린 어조로 빠르게 소리치며 불쌍한 척 허공에서 떠는 하얀 손을 내리쳤다.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찰싹- 나고 엘제이의 손끝이 붉게 물들었다. 엘제이는 그제야 제 손이 계속 허공에 떠


있음을 깨닫고 어색한 얼굴로 손끝을 문질렀다.

“미안해요.”

“빌어먹을!”

아제프가 욕을 지껄이며 소파를 발로 찼다. 끔찍하게도 청승맞은 여자였다. 차라리 원망하고 울부짖기를 바랐다.
그를 욕하고 할퀴려 들기를 바랐다. 아제프는 따끔따끔 요동치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날뛰었다.

소파 옆의 책상에 예쁘게 장식되어 있던 화병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지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화병조각이
바닥으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엘제이는 화를 내는 아제프를 말리지도 못하고 덜덜 떨리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고여 흐려진 시야에 예리한 날붙이가 보였다.

아제프의 발 앞에서 위험하게 빛나는 화병 조각을 본 엘제이가 머뭇거렸다. 그녀는 아제프의 앞에 놓인 위협을
참지 못했다. 엘제이는 그의 발아래에 떨어진 조각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아제프의 발 앞에 쭈그려 앉은 엘제이가 울음을 참으며 화병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모았다. 쨍강쨍강, 소리를
내는 유리조각이 그녀의 손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런, 씹, 제기랄!”

아제프는 울먹이는 얼굴로 화병조각을 줍는 엘제이를 보며 욕을 지껄였다.

저 여자만 보고 있으면 울화병이 도진 것처럼 기분이 불쾌하고 참을 수 없었다. 아제프는 화병을 줍는 엘제이의
손을 펴 조각들을 다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엘제이를 끌고 가 침대로 던져버렸다.

“아악!”
침대가 푹신해 다치지는 않았지만, 아제프의 난폭한 행동에 겁을 먹었는지 엘제이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아제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엘제이를 이런 식으로 거칠게 다루지 않았다. 충격이 컸는지 배 속이 뻐근하게
아팠다. 엘제이는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지만, 줄줄 새는 눈물샘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웅덩이에 돌을 던진 것처럼 일렁거리는 초록색 물결이 심장을 콱, 움켜잡았다. 낯선 감각에 아제프의 얼굴이 와락
찡그려졌다.

“빌어먹을! 내 앞에서 울지 마!”

아제프가 험한 말을 빠르게 지껄였다. 엘제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는 이불자락을 꽉 쥐며 미친


사람처럼 욕을 줄줄이 뱉다가 힘없이 울고 있는 엘제이를 노려봤다.

“당신 때문에 매일 기분이 더러워. 알아?”

“…….”

아제프는 모든 걸 엘제이의 탓으로 돌렸다.

다 그녀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아제프의 태도에 엘제이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힘없이 툭툭 떨어졌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

엘제이는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과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가족을 죽인 범인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몸에 빙의된 것뿐일지라도 아제프에게 미안했다.

아제프에게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역겨울 거라는 걸 알았다.

엘제이는 그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프고 비참해서, 눈물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눈을 감은 엘제이는 보지 못했지만, 아제프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엘제이의 눈물을 닦아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올리고 파르르 떨었다.

아제프가 입안을 꽉 깨물었다. 그의 입안에서 핏줄기가 번지고, 그는 파란 눈을 독하게 떴다.

“착각하지 마. 당신이 지금 손님으로 있는 줄 알아? 데려와서 아무 짓도 안 하니까 내가 우스워? 그렇게 울면


내가 불쌍하게 여겨줄 거라고 생각해?”

“……저는 그게 아니라,”

“나는, 당신의 눈물이 역겨워. 내 몸에 닿는 당신의 체온이 더럽고, 불쌍한 척 우는 것밖에 못 하는 그 정신


상태에 토악질이 치밀어.”

“…….”

엘제이가 황급히 입을 가리며 끅끅거리는 소리를 감춰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흐끕, 우는 애달픈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아제프는 알았다. 엘제이 티아세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망칠 여자였다. 아제프는 저를 휘두르려는 여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스스로 다짐하듯 쏘아붙였다.
“당신은 평생 여기서, 지금처럼 불행하게, 평생 이렇게 사는 거야. 내가 지난 21 년간 불행했던 만큼 당신도
불행해져. 당신을 살려두는 이유는 그뿐이니까.”

“제가 21 년간, 당신만큼 불행하면…… 당신은 행복해지나요?”

엘제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행복해지나요? 행복해질 수 있나요?

아제프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곧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당신이 나만큼 불행할 수 있다고? 당신은 21 년이 아니라, 평생을 가도 못 느낄 테니 21 년만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행여나 하지 마.”

아제프는 엘제이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제프는 엘제이를 제 전리품이라 여겼다. 그의 인생이


망가진 것에 대한 보상이니 제 것으로 생각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가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아팠던 만큼 그녀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착각이라는 걸 모르고.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7 화 side story 2
147

엘제이의 눈이 깊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제가 갇혀 지내는 방을 살펴봤다. 아제프는 으슥한


지하 감옥이나 먼 변방도 아닌 수도 한가운데에 있는 평범한 저택 안에 자신을 숨겨뒀다.

사람들의 눈이 많은 이곳은 은닉 장소로 좋지 못했다. 사람들의 입을 봉쇄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공녀 신분의 엘제이를 멋대로 데려와 감금했으니 그 죄질이 무거운 것이 당연했다. 들키면, 아제프는 꽤
곤란해질 터였다.

엘제이는 초조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다가 설득하듯 말을 꺼냈다.

“저를 놓아주셔야 해요. 이러면 당신만 더 위험해져요. 저를 놓아주세요.”

“입 다물어. 누가 네 의견 물어봤어? 내가 너에게 아무 짓도 안 한다고 내가 만만해 보여?”

아제프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엘제이의 몸 위를 올라탔다. 한쪽 손목을 꽉 짓누르고 이를 가는 그의 표정에


문장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엘제이가 쓰라린 문장을 그러쥐고 눈물만 뚝뚝 흘리자 아제프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얼굴도 모른다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보고 싶어?”

아제프가 엘제이의 옷을 젖혀 반짝반짝 싱그럽게 빛나는 문장에 손끝을 세웠다. 저 끔찍한 것을 보고 있으니 이가
벅벅 갈렸다.

이 여자는, 어떤 짓을 해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을 터였다.


아제프의 얼굴을 스치는 건, 허무함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여 그 감정을 털어냈다.

아제프는 방금 제가 느낀 감정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다른 감정을 거짓으로 덧씌웠다. 아제프의 눈이


노여움으로 물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절망스러운데, 엘제이는 누군지 모를 짝이란 것을 그리워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팠던 만큼 상처주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살고, 너 혼자만 사랑받겠다고?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아제프가 씹어뱉는 것처럼 사납게 소리칠수록 문장이 너무 아팠다. 누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문장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문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거센 고통에 엘제이가 몸부림치며 헐떡거렸다.

“아아악!”

아제프는 숨을 할딱거리며 몸을 뒤트는 엘제이를 보면서 속이 뒤집혔다. 저 여자가 느끼는 건 문장통이었다.


반려가 보고 싶어 발악하는 문장의 힘. 아제프는 환한 빛을 뿜으며 존재를 알리는 문장을 노려봤다.

저딴 거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저 여자가 반려 따위를 만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제프는


터질 것 같은 질투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제프는 고통에 겨워 헐떡거리는 얼굴을 붙잡고 잘게 떨리는 녹안을 마주 봤다.

“아으ㅡ. 흐윽!”

“아파?”

아제프는 희게 질린 뺨에 손을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고통을 달래듯 뭉근하게 토닥이는 손길에 엘제이의


비명이 멈췄다.

아제프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다정하게 문질러 닦으며 고개 숙여 속삭였다.

“당신 문장, 이제 필요 없잖아? 여기서 나갈 일도 없을 텐데……. 파내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주르륵 미끄러진 손이 얇은 옷을 젖히고 희게 드러난 가슴을 문질렀다. 날카로운 손톱 끝이 문장을 파낼 듯


비틀었다.

고통을 주진 않았지만, 엘제이는 겁을 먹었는지 바들바들 떨었다.

바르르 떨리는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제프의 팔뚝에 고였다. 아제프는 제 팔을 축축하게 적시는
엘제이의 눈물을 보다가 침대를 내리쳤다.

쾅!

큰 소리를 내며 내리꽂히는 주먹에 엘제이가 질겁하며 눈을 감았다. 아제프는 창백한 얼굴을 조금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휙 돌렸다.

뒤를 돌아나가는 남자의 청남색 눈이 어둡게 흐려져 광기에 타올랐다.

***
아제프는 그 뒤로, 매일 엘제이를 찾아갔다. 그는 엘제이를 피 말려 죽이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 자신에게
변명했으나, 실제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독한 말로 그녀를 상처주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그저,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서 엘제이가 무얼 하는지를 관찰했다. 엘제이는 주로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말을 걸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전의 일이 위협으로 다가갔는지
쉽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아제프는 그 방 안에서 엘제이가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엘제이가 읽을 만한 책을 하나둘씩


두고 갔다.

처음에는 아제프가 화를 낼까 봐, 책에 손을 대지 못하고 망설이던 엘제이는 시간이 지나자 심심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몰래몰래 그의 책을 읽었다.

어느 날, 엘제이가 책에 빠져 그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책에만 열중했던 날이 있었다. 엘제이는 뒤늦게 아제프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지만, 아제프는 엘제이를 힐난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엘제이는 책을 읽고 아제프는 그런 그녀를 관찰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날도, 아제프는 퇴궐을 하고 곧장 엘제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는 뛰지는 않았지만, 발걸음 소리를
저벅저벅, 빠르게 울렸다.

좀 일찍 왔더니, 평소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침 그녀의 식사가 끝났는지 그녀의 방에서 하녀가
트레이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아제프는 나날이 마르기만 하는 엘제이를 떠올리며 트레이의 뚜껑을 열었다. 음식은 조금도 손대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아제프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언제부터 이 모양이었지? 매일 이렇게 식사를 남기나?”

“…….”

혀가 잘린 하녀가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녀는 간단한 고갯짓으로만 의사를 표현했고, 아제프는 곧장


주방으로 내려가 사태를 파악했다.

쾅!

평소와는 다르게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속이 울렁거려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던 엘제이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쇠사슬이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엘제이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제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제프는 답하지 않고 그저 보란 듯이 눈을 가린


주방장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목을 베어내는 날카로운 감촉을 느꼈는지 주방장이 덜덜 떨며 애원했다.

“후, 후작님! 살려주세요!”

“영애, 그거 아십니까?”

아제프는 제 발에 매달려 우는 주방장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엘제이만을 바라봤다. 그는 오랜만에 존댓말을


사용했다.

나긋나긋 울리는 목소리가 왠지 오싹했다. 엘제이는 두 손을 꽉 붙잡으며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뭐를요? 왜 그러는 거예요?”

“용도를 다하지 못하는 물건은 그저 쓰레기입니다. 주방장이라는 자가 쓰레기 같은 음식을 가져다 바쳤으니,
영애가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게 아닙니까. 저는 주인으로서 주방장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는데, 영애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제프가 속삭이듯 말하며 검을 주방장의 목에 밀어붙였다. 주방장의 목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흘렀다. 그 모습이
꼭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로 엘제이를 벌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엘제이는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무척 당황했다. 가만히 방 안에만 갇혀 있는데 식욕이 돌 리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 식사를 거르는 일이 잦았지만, 아제프가 저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아제프의 화가 풀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데, 상태가 안 좋아지니 화가 난 것일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붙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화가 났으면 나한테 풀어요. 왜 애먼 사람을 잡으시는 거예요.”

“애먼 사람? 이자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겁니다. 주방장으로서 책무를 다했다면, 영애의 살이 그렇게
내려앉지도 않았겠죠. 영애의 몸이 상한 건 이자의 탓이니. 직접 고르십시오. 팔? 다리? 그것도 아니면, 목?”

아제프가 차례대로 주방장의 신체에 검을 겨누며 속삭였다. 주방장의 팔과 다리에 새빨간 핏물이 물감처럼 뚝뚝,
번졌다.

시야를 뒤흔드는 새빨간 피에 엘제이는 속이 울렁거렸다.

엘제이는 며칠간 계속 방 안에만 갇혀 살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으니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겨우 달싹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안 먹은 거예요. 속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그러니, 그만해요.”

“하! 속이 안 좋아서? 핑계도 좋지. 이 기회에 그냥 굶어 죽으려 했던 건 아닌가? 아니면 나에게 시위하고
싶었나? 둘 중 어느 쪽이지?”

아제프가 빈정거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엘제이는 그게 아니라고 잘 설명해보려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상태가 안
좋은지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엘제이는 비틀거리며 협탁을 손으로 짚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에게서 대답이 없자 보란 듯이 검을 치켜들었다.


“됐습니다. 영애께서는 말하기도 귀찮은 듯하니 제가 결정하지요. 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혀가 좋겠습니다.”

“아악! 후작님! 후작님! 웁! 우우우!”

아제프가 주방장의 턱을 손으로 움켜쥐자 주방장이 꽥꽥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엘제이는
주방장의 입속에 검을 집어넣으려는 아제프를 보다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린 아기의 첫 발걸음처럼 연약한 걸음이 겨우 떨어졌다. 짤랑거리며 흔들리는 쇠고랑 소리에 아제프의 얼굴이
슬쩍 엘제이를 향했다.

“그만, 그만해요. 그만…….”

엘제이의 핏기 없는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엘제이는 투명하게 녹아 사그라질 물거품 같았다. 아제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달싹거렸다.

“왜 그런 얼굴,”

“제발, 그만해요.”

엘제이는 힘없이 속삭인 뒤 쓰러졌다. 아제프가 검을 내팽개치고 달려가 쓰러지는 몸을 황급히 받았다. 축 늘어진
몸이 아제프의 몸에 힘없이 감겼다. 평소보다 체온이 낮았다.

‘왜? 무엇 때문에 아픈 거지? 왜?’

아제프가 멍한 얼굴로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그저, 엘제이가 이 공간에 존재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짝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곳에 머물러주기를 바란 거였다.

아제프는 이 공간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엘제이의 바람을 들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바랐다면 책이 주어졌을 거고, 음식이 달라졌을 거다.

하지만, 엘제이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란다는 듯 하릴없이


지낼 뿐이었다. 아제프는 그게, 두려웠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내정된 운명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아제프는 광기 어린 눈으로 엘제이의 가슴께를 노려봤다.

“……의원을 불러와.”

“네?”

“당장 나가서 의원 불러오라고!”

아제프가 소리를 지르자 쓰러져 있던 주방장이 헐레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눈이 가려져서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쾅, 소리가 났다.
아제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차가운 뺨을 손으로 만져봤다.

아제프는 초조해졌다.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그의 신경을 조금씩 파먹었다.

아제프는 미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상태라면 얼마나 더 버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8 화 side story 3
148

그 뒤, 아제프는 엘제이의 방 옆에 의원을 기거하게 했다. 엘제이는 매일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고, 시간이 좀
흐르자 엘제이의 몸은 회복됐다.

그녀는 한제이로 살다가 엘제이 티아세에 빙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제프에게 잡혀 왔다. 이 세계에 적응할
틈도 없이 감금생활이 시작되었고, 혹시 아제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조마조마하게 생각하니 시름시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의원은 엘제이의 심리 상태가 불안하니 그녀를 자극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고, 아제프는 꽤 착실히 그것을
지켰다.

바뀐 일상에서, 엘제이는 아제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외로움이 더 강했던 건지, 엘제이 티아세는 아제프와 함께 식사하는 걸 더 선호했다. 함께하는 식사가 잦아지자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돌고, 식사도 꽤 잘 하게 되었다.

아제프는 놀란 속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묽은 수프와 소화가 잘되는 음식 위주로 식단을 구성하게 했는데,
엘제이는 잘 먹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많이 먹지는 못해서 아제프는 늘 지켜보고 있다가 엘제이의 숟가락이
느려지면 그녀를 말려야 했다.

“배부르면 그만 먹어도 된다고 했잖아.”

“음ㅡ. 아제프는 식사 다 했어요?”

아제프에게 숟가락을 빼앗긴 엘제이가 그의 접시를 흘긋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제프 기준으로, 엘제이 티아세는 참 이상한 여자였다. 그녀는 종종 납치범을 걱정하고, 궁금해했다. 아제프는
그럴 때마다 배 한구석이 뻐근하게 뭉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 정도만으로 됐어. 배부르면 그만 먹고, 이따 다시 먹어. 옆의 종을 흔들기만 하면, 하녀가 들어와
다른 걸 내어줄 테니까.”

“저 하루에 식사만 6 번은 하는 것 같은데ㅡ.”

“당신이 새 모이만큼만 먹고 속이 안 좋다고 하니 어쩔 수 없잖아. 이제야 사람 같아졌으니 거르지 말고 먹어.”

엘제이는 그렇게 자주 먹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려 했으나, 아제프는 듣지 않을 터였다. 고민하던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가족과 헤어졌지만, 엘제이 티아세의 기억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감정도
그랬다. 엘제이는 아이젠과 엘리사를 떠올리며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걱정하고 있을 텐데.’

엘제이는 아제프를 자극하기 싫어서인지, 그 뒤로 나가고 싶다고 말하거나 보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크게 상관없긴 했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곳으로 떨어졌고, 조금 이상한 방식이긴
해도 같이 있었다.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엘제이는 납치 생활에 꽤 잘 적응하고 있었다. 다만, 하지 못하게 된


것들이,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금 그리울 뿐이었다.

아제프는 무얼 생각하는지 조금 우울해 보이는 엘제이를 바라보며 입안을 씹었다. 그는 결국, 밀려드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엘제이는 오늘도 아무 인사 없이 사라지는 아제프를 보며 우울한 낯빛을 했다.

‘사랑해요.’

닫힌 문을 향해 입으로만 힘없이 중얼거렸다. 닿지 못할, 어긋난 고백이었다.

잠시 뒤, 아제프는 금방 돌아왔다. 하녀가 접시를 치우러 들어온 줄 알았던 엘제이가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아제, 음ㅡ.”

아제프는 제 이름을 부르고 흠칫하는 엘제이를 느꼈지만, 전처럼 그녀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걸어와,
엘제이의 발목에 달린 쇠사슬을 풀었다.

짤랑, 소리가 나고 무겁게 발목을 짓누르던 족쇄가 풀렸다. 감금된 이후, 최초의 해방이었다.

풀린 발목에는 다행히 흠집 하나 없었다. 아제프가 발목에 난 상처를 발견한 뒤 부드러운 천을 여러 겹 덧대었기


때문이다.

아제프는 앉아 있는 엘제이에게 손짓했다.

“나와.”

“네? 어디, 가는 거예요.”

엘제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아제프를 졸졸 따라갔다. 아제프가 방문을 열고, 나가라는 듯 엘제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엉겁결에 저를 가뒀던 곳에서 해방된 엘제이가 얼떨떨한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갑작스럽게 바뀐 상황에 대한 불안감과 혹시나 하는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아제프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이는 눈 속에서 기대감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아제프는 평생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엘제이가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제프는
기대하는 엘제이를 보고 그동안 억누르던 성정을 폭발시켰다.
아름다운 입매가 삐뚜름하게 휘었다.

“왜? 설마, 내가 당신을 놔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내가 당신을 곱게 당신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한
거야? 당신이 어디까지 멍청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군. 고문실이면 모를까.”

뒤에 덧붙인 말에 엘제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엘제이는 아제프가 고문받는 모습도, 고문하는 모습도
꿈속에서 종종 봤다. 아제프는 저택 지하에 감옥과 고문실을 마련해뒀다.

지금까지는 납치된 것치고는 대우가 좋았지만, 몸이 좀 나아지자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평범하게 자라온 엘제이가 목적도 없이 가해지는 고문을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엘제이는 날카로운 피붙이가
살갗을 긁어내리는 걸 상상해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

앞으로 먼저 걸어가던 아제프는 뒤따라오지 않는 엘제이를 흘깃 돌아보다가 표정을 굳혔다. 아제프는 아차 한


심정이 되어 입안을 꽉 깨물었다. 더 참았어야 하는데 못된 성질이 튀어나와 또 그녀를 상처 주고 말았다.

아제프는 엘제이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냥 산책하러 가는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

“……!”

손이 아니라 손목이었지만, 꽤 부드럽게 쥐는 감각에 엘제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말을


의심하면서도 반항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아제프는 옅은 의심이 깔린 엘제이의 눈을 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문실은 안 가. 앞으로도, 당신이 그곳에 갈 일은 없으니 그것만은 안심해도 좋아.”

“…….”

엘제이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1 층으로 내려왔을 때, 엘제이는 그가 지하실로 끌고 갈까 봐 겁을 먹었지만 그는 엘제이를 어두운 곳이 아닌


환한 곳으로 데려갔다.

“아ㅡ.”

“햇빛을 오랜 시간 안 봐서 그래.”

아제프는 눈을 가리고 신음하는 엘제이 곁에 다가가 손바닥으로 엘제이의 눈을 살짝 가렸다. 그는 그 상태로 꽤


오래 머물렀다.

엘제이의 눈이 적응을 끝내자, 그는 미련 없는 태도로 손을 물렸다.

엘제이는 제 얼굴에 닿았던 손길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아제프는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어갔고, 엘제이는 그를
졸졸 쫓아갔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걸음이 느긋한 걸 보고 그가 저를 배려해주고 있음을 알았다.


엘제이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아제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저를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걸 왜 당신이 걱정, ……다 물려놨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제프는 날카롭게 반박하려다가 황급히 혓바닥을 비틀었다.

엘제이는 딱히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아제프는 속으로 안도하는 저를
느낄 수 있었다.

엘제이는 걱정하기를 그만두고, 오랜만에 보는 햇살을 마음껏 취하기로 했다. 엘제이는 꽃을 구경하기도 하고,
향을 맡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얌전하지만, 묘하게 분주한 엘제이의 태도에 아제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올라가는 입꼬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아제프가 어색한 듯 볼을 매만졌다. 괴롭히려고 데려왔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아제프는 다시 변명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이 쓸데없이 약하니 오래 살려두려고 봐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믿어야만 하는 사람처럼 강박적으로 되뇌었다.

아제프가 한참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는데 엘제이의 걸음이 뒤처졌다.

돌아본 엘제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옅게 배어 있었다. 아제프는 후들후들 떨리는 그녀의 무릎을 보며 그저
진실을 얘기하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벌써 힘든 건가?”

“너무 오랜만에 걸어서ㅡ. 미안해요.”

“화내는 거 아니니까 사과하지 마. 대체 당신이 왜 사과하는, 빌어먹을!”

아제프는 주먹을 꽉 쥐고 치솟는 욕을 참아냈다.

정말 짜증 나는 여자였다. 저 여자는 언제나 그를 화나게 했다. 아제프는 언젠가 저 여자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만들 거라는 걸 알았다. 아제프는 미치고 싶지 않았지만, 견고한 이성은 이미 조금씩 모래알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엘제이는 모처럼 나온 밖인데 바로 방으로 끌려갈까 봐 걱정했다. 아직 좀 더 이곳에 있고 싶었다. 엘제이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제 의견을 조그맣게 피력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면 안 돼요? 아직, 괜찮아요.”

아제프는 초조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엘제이를 흘긋, 봤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헙!”

아제프는 엘제이의 비명이 생각보다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긴 것만 보면 좀 더 높은 톤의 비명이 어울릴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놀라서 그런지 꿀꺽 침을 넘기는 모습이 묘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제프의 시선이 핥듯 그녀의 입술을
훑었지만, 둘 다 눈치채지 못했다.

“정원 안에 앉을 곳이 있으니 조금만 가만히 있어. 데려다줄 테니까.”

아제프는 엘제이를 관찰하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흔들릴 때마다 엘제이의 얼굴은 그의 가슴팍에 콩콩, 부딪혔다. 엘제이는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침대에 내던져진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래 안긴 건 처음이었다. 엘제이는 상황도 모르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마음을 졸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다행히 아제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제프가 이 마음을 안다면 틀림없이 불쾌해할 터였다. 엘제이는 제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정원에는 그네가 하나 있었다. 바람을 쐬게 해주려고 그네를 태워줄 생각이었는데, 당사자는 이미 잠든 상태였다.
아제프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엘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 여자는 위기의식도 없나? 어떻게 머리만 대면 자는 거지?”

“으음-.”

아제프는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렸지만, 엘제이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탈한 듯 헛숨을 내뱉던
아제프는 엘제이를 그네 위에 사뿐히 내려놨다.

엘제이는 깨지 않고 잘 잤다. 아제프는 기다란 그네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제 무릎에 올려놨다. 자세가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아제프는 제가 한 행동에 놀라기도 지쳐버렸다. 그는 아무려면 어떠냐 싶어서 그냥 앞만 바라봤다.

“아제프.”

엘제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49 화 side story 4
149

“……!”

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아제프는 저를 부르는 조그만 목소리에 흠칫했지만, 다행히 잠꼬대인 듯 엘제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엘제이는 납치된 직후에도 잠은 잘 잤다. 마냥 태평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잠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제프는 항상 엘제이가 잠들기 전에 그 방을 나왔다. 아파서 쓰러진 날 이후, 엘제이가 이렇게 잠든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제프는 가만히 엘제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의 손이 저절로 움직여 엘제이의 둥근 뺨을 매만지고 기다란
속눈썹을 살살 쓸었다. 눈가가 포르르 떨리기는 했으나, 엘제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미쳤나?”

아제프는 자신을 힐난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살결을 만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쉽게 믿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은 이
상황을 만족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머리카락도 만져봤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아제프는 눈매를 나른하게 내리깔고, 모르는 척 계속 그 행동을 반복했다.

“아제프ㅡ.”

엘제이는 아제프의 속도 모르고, 그의 이름을 길게 발음했다. 아제프는 왜 엘제이가 꿈속에서 그만을 애타게
찾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내뱉는 분홍빛 입술이 망막에 콱, 박혀들었다.

아제프가 미처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도 전에 그의 고개가 먼저 숙여졌다. 아제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입술이 엘제이의 입술을 길게 누른 뒤였다.

제일 먼저 느낀 건 말캉거리는 감촉이었다. 화들짝 놀란 아제프가 몸을 흠칫 굳히자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피부를 화끈거리게 했다. 아제프는 거기서 멈추려 했지만, 그의 몸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벌리고
있었다.

매끈한 치열을 훑고 그 안의 뜨거운 점막을 느꼈을 때, 그는 더는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었다.

깃 콧날이 하얀 볼을 뭉개며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아제프는 엘제이가 깨어날 것이 두렵지도 않은지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것에만 집착했다.

아랫입술을 욕심껏 빨아들이자, 엘제이가 아픈지 약한 신음을 흘렸다.

“으음-.”

“젠장.”

아제프는 엘제이가 곧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혀를 휘감아 욕심껏 혀뿌리를 빨았다. 마약에 전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아제프는 질척한
소리를 내며 엘제이의 입안을 욕심껏 훑었다.

게걸스러운 몸은 그녀의 숨결 하나, 체취 하나, 놓치지 않고 빨아들였다.

빌어먹게도, 기분 좋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입술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제프를 말린 건 희미하게 빛나는 초록빛이었다. 눈을 스치는 따스한 감각에 눈을 뜬 아제프는 엘제이의


가슴께에서 빛나는 문장의 빛을 발견했다.
“하…….”

아제프의 얼굴에 짙은 허무가 스쳤다.

몸이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추락감이 그를 덮쳤다.

아제프의 몸에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그는 지독스럽게도, 공허했다.

***

엘제이는 산책나간 다음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 신세를 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제프가 방에 들어섰을 때, 엘제이는 그에게 말을 걸려고 머뭇거렸다.

“아제프,”

식사하던 아제프가 식기를 탁, 내려놓았다. 아제프는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이름 부르지 마. 마지막 야.”

“아ㅡ. 미안,”

“미안하다고도 하지 마.”

“아음, 음…….”

엘제이는 의미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제프는 입술만 달싹거리는 엘제이를 휙, 노려보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엘제이는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흡, 흐으-.”

엘제이의 입에서 서러움에 젖은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나갔다. 방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아제프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엘제이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울었고, 아제프는 엘제이의 울음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

두 사람의 관계가 어그러진 채, 시간은 흘렀다.

아제프는 여전히 엘제이와 식사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엘제이는 정해진 시간에 밖으로 산책하러 나갈 수 있었지만, 아제프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혀가 잘린
하녀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날이 왔다.

베아르시 제국력 816 년 아 10 일. 그날은 아제프 란델이 첫 살인을 한 지 4 년째 되는 날이자, 그의 양모인


그라시아 란델이 사망한 지 4 년째 되는 날이었다.

엘제이는 그날, 아제프의 영혼이 악마에게 끌려가는 악몽을 꿨다. 새벽에 벌떡 일어난 엘제이는 종을 요란스럽게
흔들어 하녀를 불렀다.

엘제이는 곧바로 아제프를 불러달라고 애원했다.

아제프는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엘제이의 말을 들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고민하던


하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엘제이는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째깍째깍 흐르는 뻐근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제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이지? 미리 하는데, 나는 오늘 기분이 안 좋아.”

아제프가 가까이 다가오자 알싸한 향이 났다. 마약의 일종인, 아텐의 향이었다. 엘제이는 코끝을 뒤덮는 매운
향을 느끼며 황급히 아제프의 옷을 붙들었다.

엘제이의 머릿속에는 오늘 그를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만 가득했다. 아제프는 오늘 누군가를 죽일 거고,
그 살인은 크게 불어나 결국에 그를 뒤덮을 터였다.

엘제이는 인상 쓴 아제프의 얼굴도 안 보이는지 다짜고짜 애원했다.

“오늘 계속 저랑 있어 주시면 안 돼요?”

“뭐?”

아제프의 미간이 콱, 좁아졌다. 마약을 피운 탓에 몽롱해진 머리가 헛것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아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엘제이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저랑 이 방에 있어주세요. 그럼, 뭐든 할게요.”

“뭐든?”

그 한 단어가 아제프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엘제이는 그가 바라는 걸 들어줄 수 없었다. 아제프가 바라는 건
언제나 하나였는데, 엘제이는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거였다. 적어도 아제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 뭐든 할게요. 당신이 바라는 거면, 뭐든 해줄 테니까 계속 저랑 이 방에 있어 주세요.”

엘제이는 아제프의 속도 모르고 빠르게 종알거렸다. 엘제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제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가슴께를 노려봤다. 그를 불러놓고 옷도 안 갈아입은 채였다. 아제프는 얇은 슈미즈 끈 사이로
보이는 초록색 문장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제프는 우는 아이 같기도 했고, 성난 맹수 같기도 했다.

아제프는 제 옷을 붙잡은 엘제이의 손을 더럽다는 듯 찰싹, 털어냈다.

“당신은 그 얘기가 참 쉬워.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고? 그래. 뭘 해줄 거지? 나를 위해 죽어줄 건가?
아니면 그 문장을 찢어발겨 내 앞에 바칠 건가? 이 중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해?”

“…….”

위협적으로 뇌까리는 음색에 엘제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엘제이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오금에
침대가 걸리고, 엘제이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제이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했지만, 아제프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는 게 먼저였다.

아제프의 입술이 미끄러질 듯 내려와 엘제이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엘제이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줄 수 있어?”

“……!”

엘제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증오와 혐오를 담은 아제프의 얼굴이 우악스럽게 일그러졌다.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제이가 미처 뭐라 할 수도 없게 아제프는 엘제이의 가슴을 손으로 쿡 찔렀다. 엘제이가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


뛰었다.

아제프는 쿵쾅거리는 엘제이의 심장 위를 손으로 콱, 짓눌렀다.

“당신은 할 수 없어. 이 빌어먹을 게 내 것이 아니잖아. 나는 없는데, 당신만 있어. 왜 나는 없는데, 당신만


있는 거야?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해? 너는, 결국…… 사랑받고 잘 산다는 거잖아. 왜!”

아제프는 환멸감에 몸을 떨어댔다. 그는 결국, 가질 수 없을 거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아득바득 달려들어도 저


여자는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할 테니까.

엘제이는 아제프의 눈에서 짙은 원망과 증오를 읽었다. 그는 미워죽겠다는 눈으로 엘제이를 바라봤다. 엘제이는
그의 시선에 찔려 피가 나고, 그의 감정에 베여 상처투성이가 됐다.

엘제이는 흐릿해진 눈으로 아제프를 바라봤다.

“제가, 불행하면…… 당신이 행복해질까요?”

“아니.”

“제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면…… 당신이 행복해질까요?”

“아니.”

엘제이의 눈이 절망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아제프의 목소리를 듣고 이곳에 왔다. 그를 사랑했기에, 이곳에 오고
싶었다. 엘제이는 그저, 그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내 존재가, 내 문장이, 당신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나요? 당신을 괴롭게 하나요?’

엘제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제프는 여전히 미움을 담아 엘제이를 바라봤다. 그는 엘제이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엘제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혐오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모든 게 어긋나버렸다. 망가졌다.

엘제이는 이 모든 걸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하나쯤은 그가 원하는 걸 내어주고 싶어서 엘제이는
간절하게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까요?”

아제프의 눈에 둥근 파문이 일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마약을 피우고 있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괴롭고, 뻐근해서 몸 어느 곳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제프는 조소하듯 흐리게 웃으며 속삭였다.

“……당신의 목숨을 내게 주면, 조금쯤은 행복할지도 모르지.”

그러니, 가지 말고 평생 옆에 있어 달라는 소리였다. 곁에 남아 있어 달라는 숨겨진 애원이었다.

아제프는 입을 꾹 다문 엘제이를 보다가 소리 없이 일어나 밖을 나갔다. 아텐이 간절했다. 그는 몽롱함에 취하고


싶어서, 엘제이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달칵,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당신이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면. 기꺼이, 내어드릴게요.”

엘제이는 꺼질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가로지르고, 억눌린 비통이 아래로 쏟아졌지만, 향에
취한 남자는 꺼져가는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수상작]악역의 구원자
악역의 구원자 150 화 side story 5
150

엘제이는 책상에 앉아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사각사각- 까만 붓이 소리를 내며 종이에 잉크를 묻혔다.
엘제이는 눈물진 얼굴로 종이를 바라보며 염원을 완성했다.

“제발.”

엘제이는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글을 다 쓴 엘제이는 아제프가 완전히 이 방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종을
흔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하녀가 들어왔다.

엘제이는 등을 돌린 채로 중얼거렸다.

“물 한 잔만, 갖다 줄래?”

하녀는 저를 바라보지도 않고 부탁하는 엘제이가 의아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곧장 문을 닫고 나갔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엘제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흐리게 번진 눈물이 뚝뚝 떨어져, 엘제이의 손등에 떨어졌다.

두려움을 담고 있었고, 고독함을 품고 있었다. 엘제이는 하나둘 떨어지는 비애의 감정을 손등에 모아 이불로
닦아냈다.

시간이 흐르자, 문이 다시 열렸다.

“협탁 위에 두고 나가줄래? 혼자 있고 싶어.”

하녀는 힘없는 목소리에 조금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엘제이의 의지에 반하지는 않았다. 협탁에
트레이를 내려놓는 소리가 달칵, 방 안을 울렸다.

엘제이는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엘제이는 단 한 번도 저항하거나 벗어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날카로운 것을 얻어내려
하지도 않았다. 아제프는 그런 쪽으로 엘제이를 의심하지 않았고, 물은 유리컵에 담겨 있었다.

엘제이는 유리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물 잔을 약하게 쥐고 바닥에 물을 쏟았다. 주르륵 쏟아지는 물이


엘제이의 옷자락을 적셨다. 그녀는 얇은 침대보로 유리를 감싸고 협탁 모서리에 유리잔을 찍었다.

툭툭, 몇 번 두드리자 유리잔은 깨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다른 사람이 놀라 뛰어올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이불보를 살짝 벌리자, 깨진
조각들이 보였다.

두려움에 손끝이 떨렸지만, 엘제이는 가장 날카롭고 큰 유리조각을 침대보로 감싸 잡았다. 손이 아프면, 힘이 덜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제이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녀는 힘없는 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리조각은 길고
날카로웠다.

엘제이는 조명을 날카롭게 토해내는 유리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여기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제프는 자신을 미워했고, 오히려 자신 때문에 힘든 것 같았다. 엘제이는 그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망 받는 일은 생각보다 더 가슴 아팠다. 차가운 증오가 바글바글 끓는 눈, 엘제이는 그


눈이 서글펐다. 그를 그렇게 물든 게 저라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제프가 저 때문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걸, 견디기 힘들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줄 수 있어?]

엘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영원히 당신만 사랑하겠다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엘제이의 시선이 미끄러져 문장을 더듬었다.

[……당신의 목숨을 내게 주면, 조금쯤은 행복할지도 모르지.]

아제프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건, 그의 애원이었다. 제발 옆에 있어 달라는 간절한 애원이


비틀어져, 뻐걱거리던 관계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엘제이는 아마, 죽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할 터였다.

엘제이는 작은 종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오래 있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가장 보고 싶은 건 역시, 아제프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내 존재 자체가 당신에게 해악이라면. 내 죽음이 당신에게 기쁨이라면. 나는, 이것만이라도…….”

엘제이가 유리조각을 높이 치켜들었다. 가슴은 딱딱했다. 한 번에 가슴을 찌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꼭


이곳이어야만 했다.

문장을 바라보는 엘제이의 눈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제프.”

두려움에 떨리던 손끝이 망설임 없이 가슴을 찔렀다. 피가 튀고,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엘제이는
멈추지 않고 유리조각을 쑤셔 넣었다.

조금 서툴렀는지, 즉사하지는 못했다.

엘제이는 고통에 허덕이면서 흐릿한 눈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들어와 나를 본다면, 한 번쯤…… 웃어주기를.’

피가 웅덩이를 만들었다. 엘제이의 눈이 뿌옇게 번졌고, 그녀는 꽤 오랫동안 고통을 느낀 뒤에야 숨을 거둘 수


있었다.

***

아침 해가 밝았을 때, 죽은 엘제이를 먼저 발견한 건 혀가 잘린 하녀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급하게 휘갈겨 쓴 종이를 아제프에게 보여줬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죽음을 품은 종이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보다가,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아제프는 떨리는 손으로 엘제이를 만졌다. 너무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

“아으ㅡ. 으…….”

아제프의 입에서, 뜻을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엘제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부서질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제프가 엘제이의 몸을 조금 흔들자, 무언가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창백하게 질린 엘제이의 손에는 단정한 글씨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가 남아 있었다. 아제프는 죽어가면서도
미련처럼 남긴 엘제이의 마지막 흔적을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아제프……. 부디, 모든 걸 그만두세요.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제 목숨을 드렸으니, 부디 이것만 가지시고
이제 행복해지세요. 복수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아요. 곁을 돌아보면 당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많은데,
그걸 모르는 당신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고독에 지친 삶이 아니라 행복에 물든 삶을 사시고, 복수에 눈먼 삶이
아니라 사랑받는 삶을 사세요. 부디, 행복해지세요. 아제프.]

엘제이의 죽음이 비로소,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죽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변하지 않을 진실이 심장을 터트릴 듯 짓뭉갰다.

아제프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정하듯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ㅡ. 아아!”

아제프가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엘제이를 끌어안았다. 차갑게 얼은 몸은 축 늘어져 그의 손에 딸려왔다.


하얀 잠옷을 축축하게 적신 피가 떨어져 아제프의 손을 적셨다.

아제프가 더듬거리며 엘제이의 숨결을 확인하고, 죽은 심장을 문질렀지만, 이미 꺼져버린 생명이었다.

[……당신의 목숨을 내게 주면, 조금쯤은 행복할지도 모르지.]

귓가를 스치는 자신의 목소리에 아제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제프는 그제야 엘제이가 남긴 쪽지를 이해했다.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내가, 내가 당신을, 아악! 아아아악!”

아제프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비명을 질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에 질척질척하게 젖은 핏물이 들어왔다.

아제프는 정확히 문장 위에 내리꽂힌 유리 조각을 보며 손을 덜덜 떨었다. 하얀 침대 아래를 붉게 적신 피


웅덩이가 부르르 떨렸다.

엘제이가 죽었다. 독하지 못했던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가 목숨을 끊도록 독하게 몰아붙인 건,
그였다.

그가, 그녀를 죽였다.

아제프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아무리 흔들어도, 꾹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싱그럽다고 생각했던 녹색


눈은 더는 그를 향하지 않을 터였다.

푸르게 질린 입술은 더는 상냥한 목소리를 내뱉지 못할 테고, 따스하다고 생각했던 여린 숨결도 더는 새어나오지
않을 터였다.

아제프는 엘제이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애원하듯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문질렀다.

따뜻했던 입술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그를 찔러댔다. 아제프는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화들짝
떼어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잖아요. 제발, 제발.”

아제프는 이 순간에도 엘제이를 무어라 칭하지 못했다. 늘 부르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는데, 목구멍이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제프.]

[엘제이.]

엘제이의 입술이 상냥하게 그를 부를 때마다, 아제프는 늘 화답하고 싶었다. 그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럼 가슴 위로 따스한 것이 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깨닫지 못했었다.

아제프는 그의 구원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그의 사랑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다.

끝내 제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남자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하고 나서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이었음을 알았다.

“아아아악!”

아제프는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엎드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이 고여 터진 핏방울처럼 쏟아지는데도, 그의


구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제프는 피투성이가 된 엘제이를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제가 잘못, 잘못했어요. 다 사과할 테니까……. 다시는 당신 앞에서 험한 말도 안 하고, 당신을 괴롭히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요? 한 번만 일어나주면 안 돼요?”

아제프가 뒤늦게 용서를 빌며 날붙이가 꽂힌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새빨간 선홍빛 피가 아제프의 손을 적셨다.
그는 붉게 물든 손을 보다가 오열했다.

더는 박동하지 않는 심장이 그녀의 죽음을 알렸다. 아제프는 다시는 그녀가 일어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제발
일어나 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했다.

아제프의 애탄 목소리는 엘제이에게 닿지 못하고 부스러져 허공에서 흩어졌다.

“사랑이었는데, 당신을…… 사랑하는데.”

“…….”

부서진 마음을 고백해본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아제프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바라보며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사랑이었는데. 난생처음 느끼는 따스한 감정을 스스로 내쳤다.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을 독하게 몰아붙이고 상처 줬다.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가두고 외롭게 만들어도 불만 한 번


말하지 못하던 착한 사람을 그가 망쳤다.

상냥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폭언을 쏟아 부었고, 자신을 걱정해 힘겹게 뱉은 말을 차갑게 뿌리쳤다. 우는
여자를 다그치고, 불행하게 살라고 몰아붙였다.

[아제프.]
“엘제이ㅡ.”

아제프는 한 번도 불러주지 못했던 엘제이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붙잡았다. 늘 이렇게 불러주고 싶었는데,
그녀의 이름을 몰래 발음하며 이렇게 답할 날을 상상했는데, 모든 걸 그가 망쳐버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 불렀지만, 그의 부름을 들어줄 존재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는 그날, 모든 걸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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