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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thing(플레이싱 어느 대공 각하의 장난감
)~ ~

Juguete - Un juguete de cierto Gran Duque -

TR 작가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판타지 BL 신작!


실력으로 싸우고 싸운 만큼 돈을 버는 단순한 인생에 익숙해져 있는 용병 일
릭, 여자들과의 의미 없는 하룻밤을 즐기며 큰 불만 없이 살았다.
남자에게는 관심 없었던 그는 자신의 엉덩이 정조를 노리는 용병대장의 아
들을 사고로
살해하게 되고,
그 살인을 나름 성공적으로 은폐한다.
"대공이 사적으로 부릴 몇 명을 남겨두고 가라고 하더군."

미로스 공국의 대공이 원하는 그 인선에 일릭이 들어가게 될 줄은 아무도 예


상하지
못했지만 일릭은 직접 그와 면접까지 보게 된다.
일릭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대공을 보고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 그는 일릭과
동행한
용병대장 파빅에게 말을 꺼낸다.
"며칠 전 성 밖의 한 물레방앗간에서 시신이 한 구 발견되었네."

보석처럼 빛나는 찬란한 외모를 가진 대공은 우아한 협박을 시작한다.


“억울할 거야. 먼저 강간을 하려고 한 쪽은 그쪽일 텐데 말이지. 어느 사내
가, 특히
그대가 속한 용병이란 족속들이 보통 마초가 아닌데, 어떻게 제 몸을 강간하
게 두겠어.
몸을 지킬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또 자기방어는 본능이잖나? 정
당방위였겠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내가 은혜를 베풀기로 한 거다.”

“감사합.......”

“그러니 그대가 나에게 먼저 박아달라고 말을 하는 게 맞겠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감사 인사


를 툭 끊고 치고 들어온 말을, 나는 일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나는 그대와 그런 짓을 할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그대가 그토록 원한다면


야. 못 해줄
것도 없단 말이네.”
역시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대가 애원하면, 그대의 후장에 좆을 박아주겠다고.”

그러니까.......
대답하지 못하고 혀가 굳어버린 나를 보며, 대공이 구김 없는 얼굴로 생긋
웃었다. 몹시도
상큼한 미소였다.
그러니까.......
“자, 이제 대답해야지?”

@ 일러스트 : 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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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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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지금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좆됐다.”

좆됐네. 좆됐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방금 발생한 일은 명백하게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우발적이며 나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불의의 사고.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나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것은 바로 나였으므로.
“아…… 씨발새끼, 진짜…….”

눈앞에 널브러진 놈을 두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욕밖에는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못해 눈알이 다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뺀질뺀질한 얼굴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늘 사람을 희롱하던 그 징그러운 목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나 사내에게서는 작은 신음 하나 새지 않았다. 그러게
옛말에도 그러지 않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생명력을 의미하는
붉은 액체가 식어 가는 남자의 몸 주변으로 둥글게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저 정도 피를 흘릴 정도라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열다섯 살에 용병대에 들어와 서른이 넘도록 용병으로 살았으니, 사람을
처음 죽여 본 것은 아니었다. 사람 하나 죽였다고 충격 받을
신경줄이었다면 애당초 이 일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여자나 어린아이도 죽이며 살아온 나였기에, 사내놈 하나 죽인 건 사건도
못 될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용병대 대장의 하나뿐인 아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 씨발…….”

그런 새끼가, 내 엉덩이를 보면 꼴린다느니, 한번 박아 보고 싶다느니 하는


개떡 같은 소리를 지껄인 시점에서 이미 내 인생은 꼬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몰랐지만, 이미 그때 싹 망했던 것이다.
용병대 대장이 평생을 용병대에 바쳐 번 돈으로 기사를 만들려 한다는
놈이었다. 자신은 배운 게 없어도 자식은 공부를 시켜서 큰 인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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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온갖 기대를 걸고 있었고, 아카데미라는 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도 한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내 보기에는 애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버르장머리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시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어 자식농사는 아무래도 실패였는데, 대장은
제 아들의 단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싸고돌기 바빴다. 하나뿐인
자식이니만큼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싸가지 없는 놈이 나한테 개소리를 지껄였을 때에도 그냥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대장 아들과 마찰을 일으켰던 몇몇 녀석들이
결국에는 무엇도 바꾸지 못하고 용병대에서 나가는 걸 보며 더더욱 나는
놈을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마음먹기도 했었다. 대장 아들놈을 제외하면 이
용병대의 대우나 봉급에 제법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로 다 그냥 못 들은 것처럼 흘려 넘기고 참고 외면하고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 새끼가 사람을 속여서 이딴 물레방앗간으로 불러들여 덮치려 들지만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
몇 시간 전, 내 방 문틈에 끼여 있는 편지를 보고 나는 또 웬 처자가 나의
박력에 반해서 연애편지를 넣어 놓았나 했다.
내가 용병치고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 아닌지라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유부녀나 혼자된 과부가 쪽지로 혹은 말을
전달하여 나를 불러냈는데, 나는 그녀들과 어울리며 성욕을 해소하곤
했었다. 이번에 온 편지 역시 그런 편지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기다린다는 물레방앗간에 도착해 보니, 나를 반긴 것은 낯짝부터 꼴
보기 싫은 대장 아들놈이었다. 너희 용병 나부랭이와는 달리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몸을 단련했다며 잘난 척을 하곤 했던 녀석은, 제 힘만 믿고
다짜고짜 나에게 달려들었다.
심지어 놈은 혼자였다.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을 수 있는 나를 상대로
말이다.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부와 훈련만 하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 녀석은 실전에서는 형편없었다. 한눈에도 빈틈이 너무 많이 보여서,
가장 공격도 방어도 쉬운 곳에 칼을 쿡 찔러 넣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랬는데
그걸 못 막고 뒈져 버린 것이다.
감정이 실린 탓인지 검끝이 조금 날카로웠다는 것은 그래, 내가 인정한다.
하지만 제 입으로 떠든 게 있지 않은가. 중간에서 막히리라 생각했는데, 검
이 필요 이상으로 더 깊이 쑤욱 들어가는 바람에 찔러 놓고도 나는
당황할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뒈져 널브러진 놈의 고간은 여전히 부풀어 있었다.
나는 아들의 시신을 발견할 대장을 마음 속 깊이 애도했다. 그렇잖아도
예기치 않은 아들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텐데, 뒈진 몰골이 저
따위여서야 아비 된 자의 마음이 어떻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불행하게도, 대장은 어떻게든 아들의 원수를 갚을
위인이었다. 그 죽음이 누가 봐도 강간하려다 칼을 맞고 죽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대장은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 죽이려 할 게 분명했다.
역시나, 나만 좆된 상황이었다.
“여어, 일릭!”

아지트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머리카락의 용병 하나가 아는 체를 해 왔다.


동료인 체즈번이었다. 녀석은 내가 다가와 어깨동무를 척 걸더니 코를
킁킁댔다.
“여자냐?”

“뭐, 그렇지.”

“크으, 좋겠다! 그래도 임마, 작작 돌아다녀. 대장이 알면 난리 친다고.

아까도 왔다 갔는데.”
“계약 종료돼서 떠날 일만 남은 동네에서 뭐 중요한 일이 있다고 사람을

들들 볶아.”
“그러게 말이야. 자기 아들이나 똑바로 단속할 것이지.”

평소 대장의 아들, 마일을 극도로 혐오하던 체즈번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갑자기 마일의 이름이 툭 튀어나와서 나는 속으로 흠칫했지만 겉으로
동요를 드러내지는 않을 수 있었다. 원체 표정이 없는 탓에 감정을 숨기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가 마일
을 죽인 뒤, 3일이 흘렀다.
처음에는 꽤나 초조했지만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으로서 침착하게 나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 물레방앗간에는 일단 범인을 특정할 만한 그
어떠한 증거도 남겨놓지 않았다. 내 흔적은 물론, 목격자도 없음에
틀림없다. 절망에 빠져 있을지언정 내 감각은 그 여느 때보다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근처에서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빠르게 그 장소를 떠나 곧바로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었다. 운 좋게
이전에 한 번 만났던 여자를 멀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나를
보고 반색하는 여자의 허리를 붙들고 곧장 근처의 비어 있는 헛간에
들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성심성의껏 봉사를 하며 나와 마주친 장소나
시각에 대해 말을 맞춰 줄 것을 약속 받았다. 그녀는 나를 꽤나 좋아하고
있으니 기꺼이 나를 도울 기세였다. 물론 완전히 믿고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루 한 번 얼굴 도장을 찍으며 이 한 몸 바쳐 봉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짜 그 자식은 어디 처박혀 있기에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진짜

어디 가서 뒈졌나?”
“대장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간 코뼈 부러질걸.”

“왜 아니겠어. 대장도 이쯤 되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던데…….

내 생각에는 여자랑 붙어먹고 있을 것 같지만. 그 자식, 얼굴 하나는 대장 안


닮아서 반반하잖아?”
체즈번의 말에 내 인상이 한껏 구겨졌다. 귀가 썩을 것 같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변태새끼 얼굴이 반반하다고? 눈깔이 삐었냐?”

“아니, 좀 뺀질뺀질하긴 하지만 여자들이 환장할 얼굴이긴 하지. 네가 그

새끼 싫어하는 건 알겠지만, 객관적인 사실이 어디 가냐?”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켰다.
그 새끼가 잘생겼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느끼하게 생겨서 팔십 먹은
영감도 안 할 구닥다리 희롱을 시커먼 사내를 상대로 던지는 변태새끼일
뿐이었다. 내가 놈을 단순히 귀찮은 존재로 여길 때에도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 놈에 대한 혐오감이 내게서 객관성을 빼앗아 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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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은근히 눈이 높더라? 특히 남자 외모에 아주 박해. 거울 안 보냐?”

“…씨발놈.”

날카로운 인상의 내 외모를 지적한 체즈번은 기어코 내게서 욕설을


뽑아내고는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녀석의
옆구리에 가볍게 펀치를 먹였다. 금세 허리를 꺾고 컥컥대는 꼴이 조금은
고소했다.
“그래서 대장이 자기 아들 찾아오라고 난리야?”

“어어, 말단 애들이 고생하고 있지. 나조차 이 짬에도 눈치가 뵈더라니까. 그

와중에 너 어디 갔냐고 길길이 날뛰는데 존나 무섭더라. 노인네 성깔


하고는.”
“……나는 왜?”

긴장감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아직 그 누구도 마일이 죽었음을 모른다.
그를 찾으려 사람을 푼 것 같지만, 애당초 마일이 나를 꼬여 낸 곳 자체가
성벽 너머 숲으로 들어가서야 있는 물레방앗간이었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아,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이
도시에 머물게 된 우리 용병들이 알기 힘든 장소인 것이다. 도시를 다
뒤지고 거기까지 수색을 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번 달 말, 미로스 대공과의 계약 기간을 모두 채우고 난 뒤까지도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마 대장은 일부 사람들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우리의 고향이자 용병대 주둔지인 달칸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계약 뒤에는
또 다른 계약이 있어, 고향에 내려가 정비를 하는 대로 다시금 새로운
계약처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로 마일이 살해된 게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나는 모른 체 그냥
있으면 된다. 마일의 시체가 발견될 즈음에는 이미 나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계약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나에게 가장 유리한 가정이었고, 현실은 충분히 다를 수 있었다.
덕분에 머릿속이 복잡하긴 했다. 걸리기 전에 그냥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하고 떠날까. 근데 갑자기 떠난다고 하면, 마일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대장이 나를 의심할 계기를 주는 건 아닐까. 그럼 시체가 발견된 다음에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떻게 하
는 게 옳은가. 끝까지 잘 속일 수 있을까, 아니면 기회를 엿봐서
용병대에서 탈주해야 하나. 이런 수 없이 많은 고민들로 속이 시끄러웠다.
“대장이 널 왜 찾는지는 나야 모르지?”

체즈번놈은 나를 왜 찾느냐는 질문을 던진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지는 물론 알지 못한 채, 아주
성의 없고 가볍기 짝이 없는 대답을 던졌다. 덕분에 조금 긴장했던 나는
김이 팍 새 버렸다.
“도움 안 되는 새끼.”

“뭐? 야! 너 대장이 찾을 때 내가 얼마나 공들여 변명해 줬는데, 이 새끼가

고마운 걸 모르고!”
“뭐라고 했는데?”

“똥통에 빠져 뒈졌다고 했다. 됐냐?”

“아, 예. 눈물 나게 고맙네요.”

한껏 빈정대 주었더니 체즈번은 열이 잔뜩 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나는


그를 가볍게 무시했다. 밝고 경쾌한 녀석이라 의미 없는 소리들을 떠드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내 속이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대장이 마일의 죽음을 알고, 나를 의심해서 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왜 찾는단 말인가. 내가 용병대에서 경력이 오래되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에는 연차가 적었고, 그렇다고 잡무를
시키기에는 고참이었다. 용병대에서의 내 일은 전투로 딱 정해져 있는데, 베
르바니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미로스와 세리포브가 평화조약을
맺은 지금 굳이 나를 필요로 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나를 무슨 이유로.
“일릭!”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리며 터져 나온 사자후 같은 부름에, 곁에서 신나게


떠들던 체즈번이 혀를 씹었고 나도 흠칫 놀랐다. 체즈번은 울컥한 얼굴로
자신을 놀라게 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버럭 소리를 지를 심산이었으리라. 그러나 문가에 선 커다란 사내를
보고 그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회색으로 머리가 세어 가기 시작한 중년의 사내였으나, 거구의 몸은 터질
듯이 부푼 근육으로 가득 차 사뭇 야만적이기까지 했다. 험상궂게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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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름과 그 주름을 가로지르는 오랜 흉터들로 뒤덮여 있어 그의
인상을 더욱 폭력적이며 난폭해 보이게 했다. 나이를 잊은 활력과 패기
따위가 그의 건장한 육신에서 철철 흘러넘쳤다.
그가 바로 용병대의 대장, 마일의 아버지인 파빅이었다.
“대장.”

“너 이 새끼! 계약 기간 아직 남았으니 멋대로 쏘다니지 말고 붙어 있으란

소리는 똥구멍으로 처들었냐!”


“아니,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와 놓고선-”
화장실을 어느 과부 댁 침실로 가서 쓰셨어요?”

“…….”

“체즈번! 네놈은 대체 뭘 하고 자빠졌어! 일릭 새끼 오면 당장 나한테


보내라고 한 건 잊어버렸냐? 붕어 대가리 새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파빅의 기세에 체즈번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특히
체즈번은 혀를 심하게 깨물었는지 눈꼬리에는 눈물까지 달고 있었음에도
입 한 번 벙긋을 못 했다.
나는 그의 짜증이 더 큰 폭발로 이어지기 전에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볼 때 날 찾은 이유가
아들의 죽음에 관련된 건 아닌 것 같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럼 일도 없는데 너 같은 밥버러지를 찾았겠냐?”

아, 영감 예민하네. 순간 울컥 치밀어 올랐으나 무단으로 자리를 비웠던


탓에, 또 그의 아들을 죽였다는 부채감 탓에 나는 성질을 누르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가자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영감은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억센 손으로 나를 밖으로 끌어내기는 했지만,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미로스 대공이 계약을 좀 더 연장할 생각인가 보더구나.”
“계약을? 하지만 미로스 공국이 싸울 상대가 없을 텐데? 방비군은 따로

계약되어 있을 거고.”
“대공이 사적으로 부릴 몇 명을 남겨 두고 가라고 하더군. 그런 작은 계약은

안 한다고 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보수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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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자기 기사들은 어쩌고.”
“ ?

“기사들에게 시키기 힘든 뒤 구린 일을 시킨단 거겠지.”

“그런 게 어디 있어. 기사건 용병이건 돈에 몸 파는 건 마찬가지인데.”

“야, 그래도 기사랑 용병이 같으냐? 이 새낀 싸움질 좀 한다고 허파에

바람만 차서는.”
난 뭐가 그리 다른지 모르겠는데, 자식을 기사로 길러 신분상승까지 시킬
꿈을 가진 파빅은 자기도 용병이면서 용병을 한없이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기사라고 해 봐야 작위가 후대까지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영주와 직접
계약을 맺어 그에게 녹봉을 받게 된다 해도 갑옷과 무기, 말을 관리하다
보면 개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마일처럼 집에 돈이 좀 있으면 그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가며 귀족 여자와 결혼을 노려 볼 수도 있겠지만, 글쎄. 당장
지금의 미로스 대공도 기사가 아닌 용병을 곁에 두고 부린다고 하는데, 어차
피 대공과 계약을 맺는다면 기사나 용병이나 다른 게 뭐 있냔 말이다.
그리고 마일 그 녀석은 싹수가 이미 노랗다. 어디 영주가 받아 주기나
할까가 의문이고, 받아 준다 해도 귀족 여자와의 결혼은……. 으음……. 그
녀석, 여자들은 잘생겨서 좋아한다고 했던가? 그럼 뭐… 아주 희망이 없는
얘기는 뭐, 아닌 것 같긴 한데…….
음. 근데 내가 죽여 버려서 노란 싹수마저 싹둑 잘라 버렸구나. 취향이
의심되는 변태 강간미수범이었지만, 자식의 죽음을 모르는 아비와 같이
있노라니 또 마음이 불편해져 버렸다.
“하, 마일 그 녀석은 대체 어딜 갔는지 말이야.”

“음?”

“마일이야 그래도 가끔 이렇게 나랑 지내면서 용병들 일하는 걸 봤잖냐.

그러니까 기사지만 용병의 일도 알고 있어서, 이 기회에 대공님 밑으로


들어가면 좀 좋냐고. 그래서 마일을 데려가려 했는데, 이 새끼는 어디서
자빠져서 처놀고 있는지, 어?”
음……. 그 새끼는 아마 성 밖의 어느 물레방앗간에서 썩어 가고 있을
거예요. 그러게 자식 좀 잘 키우지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속으로 연신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물론 내 표정이나
목소리에는 동요가 묻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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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자리에 날 추천하게요? 나를?”


“……그런데 대공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파빅에게 느끼는 죄책감과는 별개로 나 살 궁리를 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


대공이 나를 고용해 준다면 그만한 게 없었다.
자연스럽게 용병대와 멀어질 수 있는 데다가 파빅의 말에 따르면 보수도
좋다고 하지 않은가. 또 내가 미로스에 계속 남게 된다면, 나중에 마일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가 수사를 한다면서 진실을 은폐할
수도 있다. 가짜 범인을 하나 만들어서 쏙 빠져나오는 건 일도 아닐
것이었다. 대공에게 선택받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파빅은 영 떨떠름하다는 얼굴이었다.
“왜요?”

“아니, 3일 전에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소규모 인원을 남겨 두고 가라는

소리를 하더라고. 용병들에게 직접 급료를 지급하면서 우리 쪽에는


중개료를 주는 식으로 일을 맡기고 싶다고……. 우리야 나쁠 것 없는
얘기잖냐.”
“그런데요.”
“그래서 일단 라도반을 데려갔지. 라도반이라면 뭐 소수정예로 움직이는
일도 많고, 이런 일에는 딱이잖아? 용병 주제에 예법도 꽤나 익힌 놈이니까
대공이 곁에 두고 써도 불쾌하지 않을 거고.”
내가 생각해도 이런 일에는 라도반이 제격이었다. 얼굴에 검상이 한 줄기
나 있어서 인상이 험상궂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용병 중에서는 깔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수염도 꽤 멋지게 났고 말이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용병대가 전쟁이 본업이라지만 종종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을 때는 추가금을 받고 호위 따위를 할 때도 있는데, 그는
대인 경호에까지 뛰어났다.
나? 나야 호위 대상이 죽거나 말거나 눈앞에 적들을 쳐 죽이는 게 우선이라,
호위 업무는 딱 한 번 해 보고 전부 열외였다.
“라도반 딱 데려다 놓고 이력 읊어 줬는데…… 아니, 영 시큰둥한 거야.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를 하자고. 나 참. 뭐가 문제인지 얘기를 해야 알 텐데


귀족들이 다 그렇듯 의뭉을 떨더군. 역시 용병이라 안 되나 싶어서 마일이
제격이겠다 싶었는데, 마일새끼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말이지. 그러던 차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보
좌관인지, 고문관인지 하는 자가 와서 은밀히 말을 전해
주는데……. 음. 네가 딱일 것 같더라고.”
“뭐라고 했는데요?”
“뭐, 그게 모호한 소리여서……. 아무튼, 가 보면 알아, 임마. 근데 이 새끼는

여자들 치마 속 쫓아다니느라 아침 댓바람부터 분 냄새나 풀풀 풍기고.”


그 뒤로 한참 잔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덧 그와 나는 대공의 거처에 다다라
있었다. 일개 용병 나부랭이다보니 대공이 기거하는 성 안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혼나느라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했다.
물론 파빅이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해도 성안을 구경할 정신머리는 없었을
것이다. 대공 같은 높으신 귀족을 알현한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성의 하인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나도 파빅도 입을 꾹 다물고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인이 파빅과 나를 안내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잠시 뒤 대공이 온다는
말을 전하고 하인은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긴장감에 조금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파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날 찾은 거 맞아요…?”

“몰라, 새끼야. 입 닥치고 기다리기나 해.”

처음 오는 게 아닐 텐데도 파빅 역시 꽤나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두 발은


바닥을 딛고 있었지만 무릎을 자발 맞게 떨어 대는 꼴이 그러했다.
하긴, 우리가 알현을 앞둔 것은 미로스 공국의 대공이었다. 저 티마예브
왕국 국왕의 형제이면서 국왕이 자식이 없기에 현재 티마예브의 왕위 계승
1순위이기도 했다. 현재 티마예브의 국왕이 골골대고 있어 왕위에 아주

가깝다는 얘기가 있었다. 또 각국의 지배자들 중에 그와 친척관계인 이들이


많아, 앞으로 그가 쓰고 있는 왕관 위에 몇 개의 왕관이 씌워질지 알 수가
없다고도 들었다. 어쩌면 수백 년 전 제국이 존재하던 때만큼 커다란
영토를 가질 수도 있노라고, 미로스 출신들이 자랑스레 떠들어 대곤
했었다.
광활한 영토를 지닌 왕국의 왕족으로 태어나 머지않아 왕이 될 남자.
미로스를 통치한 지 몇 해만에 공국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위대한 지배자이자, 세리포브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공국의 영토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확장하고
주변국들마저 위협하는 정복군주. 이것이 내가 알현을 앞둔
존재였다.
그도 물론 머리 하나, 몸통 하나, 팔 둘, 다리 둘,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에 눈 코 입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은 나나 파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혈맥을 흐르는 피는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하고도 높으신 분을 기다리고 있자니, 무덤덤한 성격의 나라 해도
긴장감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애당초 직접 이렇게 만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난다 해도
대전이나 알현실 같은 곳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뵐 줄 알았지……. 가운데에
테이블이 있고, 소파가 마주한 이런 곳은 예상치도 못했다. 옆에서 파빅이
긴장하며 연신 이곳저곳을 힐끔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응접실로
안내된 것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며 천천히 둘러본 응접실은 경외심이 들 정도로 화려한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천사의 강림을 그린 형형색색의 천장화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으며, 금빛으로 번쩍이는 실로 자수가 놓인 실크 벽지 역시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붉은 빛깔에 금사가 섞이자 몹시
따뜻하면서도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공간 자체로
묵직한 위압감을 갖고 있었다.
벽 귀퉁이와 천장 구석구석이 음각과 양각으로 조각이 되어 있었고 실크
벽지 위에는 황금색 액자에 둘러싸인 성화들이 걸려 있었다. 천장 한가운데
달린 샹들리에에서 크리스탈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방 안을 채우고 장식하는 가구도 무엇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파빅과 내가
딱딱한 태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소파 역시 실크로 감싸여 있어 손이
절로 미끄러졌다. 원목 테이블은 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랬는데, 어떻게 가공을 한 것인지 천장의 그림이 비쳐 보일
정도로 윤이 반질반질 흘렀다.
더럽고 꼬질꼬질하며 투박하기 짝이 없는 용병 나부랭이가 있어서는 안 될
듯한 공간이었다. 내 인생에 이보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불과 몇 분 뒤에 곧바로 내 짧은 소견을 통째로 수정해야 했다.
“이런. 내가 기다리게 했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문이 열리


고, 뒤에서 쏟아지는 빛과 함께 들어온 남자.
가벼운 어조로 한마디를 내뱉으며 들어온 사내는, 그보다 몇 배는, 아니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존재였다. 스스로 빛을 뿜는
듯하여, 그를 바라보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그 자체로 광채를 발하는 존재.
사내를 보고 나서 나는 금이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내 상식을
고쳐먹어야 했다.
그를 본 순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을
떠올렸다. 희고 투명하면서 사방으로 빛을 산란시키며 오색으로 빛난다는
그 보석으로 사람을 빚어낸다면 꼭 저 사내와 닮았을 것 같았다.
오직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2.

상석에 앉는 사내의 어깨 위로 반짝거리는 실버 블론드의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희고 투명한 피부는 꼭 먼 동방에서 들여온 백자
도자기 같았다. 감촉 역시 그 도자기처럼 미세한 요철 하나 없이
매끌매끌해 보였다. 실크보다 부드러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을 넘겨 드러낸
이마가 단정했으며 숱 많은 눈썹은 매일 다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양이
완벽했다. 눈썹 뼈 아래로 눈매가 그윽하니 깊으면서도 서늘한 예기가 담겨
있어, 눈매만으로도 기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한 치의 휨도 없이 곧게 뻗은 콧날은 우아하기까지 했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모양 좋은 입술은 자연계에 존재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되는 고운
분홍빛이었다. 사내의 입술인데 진주 가루를 바른 것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
눈은 꼭 보석 같았다. 사내를 보고 이런 감상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으나
차마 부인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빤히 주시하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가장 순도 높은 호박(琥珀)을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그 노랗고도 붉은
빛깔이 오묘하면서도 영롱했다. 마치 이 세상의 색이 아닌 것처럼
신비로웠다.
나는 내가 넋을 잃은 줄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에게 인사를 올린
뒤였다. 내가 시선 처리를 잘 했는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예의도 아닐뿐더러, 사내놈 얼굴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사내놈인데 빤히
쳐다본 게 꼴사납지 않은가.
그래서 정신 차린 뒤로는 테이블 위만 노려보았다. 대공은 다행히도 내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일릭은 아주 경험이 풍부한 용병입니다. 열다섯 살에 용병대에 들어와서,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곁에 두고 쓰시기에 아주 좋으실 겁니다. 이 친구의
경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보다는 대공의 얼굴에 면역이 있는 파빅이 주섬주섬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나는 앞뒤 안 가리고 사람 죽이는 것만 잘 하는, 전투 능력치만 좋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용병일 뿐
인데…….
파빅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열심히 나를 추켜올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이쯤 되면 중개료를 얼마나
받기로 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가 물론 안 해 본 일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잘 하는 건 또 아닌데
사람을 무슨 만능인 것처럼 포장하고 앉았다.
대공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파빅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간간이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으며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로 차를 홀짝거려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파빅의 긴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에도, 그는 유유자적 찻잔을
기울였다.
침묵이 내려앉은 응접실 안에 아름다운 도자기가 달칵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했다. 그즈음에는 긴장감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나는 숨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응접실은 웬만한 귀족 저택의 거실만큼이나 넓었다. 그 넓은 공간이
침묵으로, 또 그 침묵이 만들어 낸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팽팽히
부풀어오른 공기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마른침 한 번을 삼킬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 각하.”

한참 만에 침묵을 깬 것은, 이 무거운 침묵에 압사당하기 일보직전의


얼굴을 한 파빅이었다. 나는 저 험상궂은 얼굴이 그렇게 긴장한 꼴을 처음
보아서 놀라기까지 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그의 이마 위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 경력을 읊조릴 때보다 더 이상한
톤으로 흘러나왔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아니.”

사람이 아니라 돌멩이를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무시하던 남자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때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아.”

나른한 음성에 어쩐지 소름이 돋아날 것만 같았다. 속에서 오싹하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끓어오르
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감 없이 낮고 그윽한 목소리였다. 절로
이가 지그시 사리물어졌다.
“급여나 제반 비용, 우리 쪽에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인원에 대한 얘기는 내

보좌관과 하게.”
미남은 꼭 목소리조차 잘생겨야 하는 것인가.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저렇게 잘생겼는데 목소리도 좋고, 젊은 나이에
공국의 대공이며 이미 검증된 통치 능력을 지닌 데다가 앞으로 얼마나 더
큰 땅의 지배자가 될지 모르는 남자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파빅이라고 했지.”

“네, 네.”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

대공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원체 높으신 분을 대해 본 일이


없다보니, 그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도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았다. 어쩐지 무릎을 꿇고 고개라도 조아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파빅 역시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침착하려는 노력이
무상하게도 그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꿀꺽, 요란하게 울렸다. 나 역시
괜히 더 긴장을 하는 수밖엔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대공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성 밖의 한 물레방앗간에서 시신이 한 구 발견되었네.”

그리고 그 한마디는 내가 대공의 입에서 들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이야기였다.
성 밖의 물레방앗간.
시신 한 구.
“검에 찔려 죽은 남자의 시신이었어.”

쿵. 어디서 무언가가 곤두박질쳐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울렸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파빅은 알아듣지 못했다. 왜 발견된 한 구의 시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물레방앗간의 시신이란 말에
놀란 것은 나뿐이었다.
“…저희 용병대의 소행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아니지. 계약을 맺은 도시에 들어와서 사람을 해칠 정도로 그대들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파렴치한


종자들은 아니지.”
그러니 내가 숱한 용병대 중에 선택을 한 것이고? 가볍게 덧붙이며 대공은
싱긋 웃었다.
황금색으로도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는 나를 향한 채.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 나는 꼭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짧은 미소는 이내 자취를 감추고, 대공의 잘생긴 얼굴이 언제 웃었냐는
듯이 진중하게 굳어졌다. 조금 더 낮아진 음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자네의 아들이 실종되어 사람을 풀어 찾고 있다 들었네.”

“…….”

발견된 시신. 실종된 아들. 대공이 결국 두 가지를 모두 언급했음에도


파빅은 알아듣지 못한 듯이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생각을
하는 성 싶었다.
곧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긴장감이 사라졌다. 굳어 있던 얼굴이 멍하니
풀렸다. 무언가를 말하려 입이 벌어져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그 얼굴이 경악으로 다시 굳어진다.
나는 이를 악물며 아래로 내린 손을 꽈악 주먹을 쥐었다. 마일의 죽음이
결국 알려지고야 말았다. 대공이 알고 있었다. 이제는 파빅 역시 알게
되었다…….
마일의 죽음이 언젠가는 알려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이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내 예상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나로서도
충격이었다.
물론 파빅과는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말이다.
“…제 아들……. 제 아들이.”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야. 그대가 직접 확인을 하는 게 낫겠지.”

확실하지는 않으니 확인을 해 보라고 말은 하고 있었으나, 그 표정이며


어조는 시신이 파빅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레방앗간에서 발견된 시체. 그를 죽인 게 바로 나였으므로. 대공이
파빅에게 확인시키려 하는 시신은 틀림없이 마일일 것이다.
“시종에게 안내하라 일러두었으니 따라가서 확인을 하게나. 새 계약은 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좌관을


보내 따로 진행할 테니.”
파빅은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속에서 벌어지는 맹렬한 갈등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죽은 건 내 아들이 아닐 거야. 하지만 죽지 않았다면 3일이나 머리카락 한
올 발견 못 했을 리가 없지. 아니야, 그렇다고 설마 내 아들이 죽었을까.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자문자답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멍청히 소파에서
일어난 그의 몸이 휘청댔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파빅의 몸을 부축했다.
그를 부축하는 겸, 함께 가서 시체를 확인할 계획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그대는 남아서 계약에 관한 얘길 더 듣고 가지.”

대공의 낮고도 그윽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며 동요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정신이
없는 파빅은 다행히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시종을 따라 나가기
바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갈등했으나, 어차피
대공이 얘기를 더 들으라고 한 마당에 내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엉거주춤 일어나던 엉덩이를 소파에 다시 붙여 앉았다.
“차가 식었어.”

혼잣말처럼 대공이 중얼거린 순간, 구석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시종이


와서 그의 잔에 새로운 차를 따라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것을
보고나서야 나는 테이블 위에 준비된 찻잔이 단 하나임을 깨달았다. 파빅과
나를 응접실로 불러 놓고서는 차 한 잔을 대접하지 않고 저만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차가 귀족들만의 호사품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앉혀 두고 그다지 좋은 매너는 분명 아니었다.
이번에도 사내는 저 홀로 차를 마셨다. 흰 도자기에 장미와 줄기가 그려진
티세트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미로스 대공에게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저만 처마시고 있는 작태까지 훌륭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물레방앗간에서 발견된 시체는.”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 저 홀로 우아한 티타임을 충분히 즐긴 미로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마
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화제랍시고 꺼낸 단어들에, 나는
차라리 그가 입을 다물어 주기를 바랐다. 이 자리에 파빅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숨이 콱 조여들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좆을 발딱 세우고 있더군.”

“…….”

나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이 대공이 언급한 말의


내용인지, 그가 사용한 천박하고 더러운 단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둘
모두가 충격적이었는데 파장이 더욱 크게 다가왔던 것은 그의 단어
선택이었다. 단정한 얼굴에서, 예쁜 입술에서, 울림이 풍부한 낮은
목소리로 내뱉어서는 안 될 단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튼 그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를 후려쳐서, 벼락에 맞은 듯이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강간 미수가 있었다고 봐야 할까. 설마 좆질을 해 보기도 전에 복상사를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박는 걸 상상만 해도 골로 가게 만든다니, 대체


얼마나 명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이어지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마저 경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마저도 그의 음성은 감미로운 미성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참 좋을 목소리건만. 나는 감히 그 목소리를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장을 쿡 쿡 찔러 댔다.
그가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지껄이는지가 관건이었다. 그저 시신의
상태를 보고 상황을 유추한 것인지-
“뭐, 사내 중에 아랫구멍으로 여느 계집보다 게걸스럽게 사내 좆을

먹어치우는 사내가 있기는 하지. 하하, 그걸 사내라고 불러 주긴 해야


하나?”
혹은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대공은 분명 가해자를 ‘남자’로 특정하고 있었다. 또한 마일이 살해당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투였으며, 동시에 또 다른 것을 나에게 암시하고
있었다. 사내와 접붙는 것을 들어서 아는 게 아니라…… 해 봐서 안다는
듯이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파빅이 있을 때와는 180도 달라진 말투가 몹시도 내 신경에 거슬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길거리 시
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시궁창의 오물처럼 끈적하고 더러운
소리들이었다.
그 말이 나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있어,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용병 생활을 하며 남자들끼리 붙어먹는 걸 못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에는 직접 눈앞에서 보았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마일의 강간 미수 이후 내가 남자의 성적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이 뒤집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씨발, 대체 뭘 알고, 어디까지 알고 저런 식으로 지껄이는 거지? 긴장감에
뱃속이 뜨끔거렸다. 분명 그때, 그 물레방앗간 주변에 인기척은 따로
없었다. 의도치 않았던 살인을 한 직후라 내 감은 그 여느 때보다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으므로, 당시의 내 감을 확신한다. 목격자는 없었다. 그러니
마일의 살해와 나를 연관 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는, 무언가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뭐, 사람 하나 찔러 죽이고 곧장 계집을 끼고 좆질하는 걸 보면 사내는

사내인 것 같긴 해.”
모든 상황을 본 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일을 죽이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다른 여자를 안았던 것까지 모두 직접 목격했다는 듯이.
“무슨… 말씀이신지…….”

당혹감에 나도 모르게 말이 터져 나왔다. 말투가 느릿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동요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표정도 제대로 관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은 나를 무시한 채 제가 하고 싶은 말만을 이어 갔다.
“그런 반편이를 아들이랍시고, 그대의 대장이 꽤나 아끼는 모양이더군.
나라면 원수가 갚고 싶을 거야. 내 자식이 멍청한 짓을 시도하다가, 심지어
성공하지도 못하고 그런 수치스러운 꼴로 나자빠진 걸 알면… 아비 된
도리로 더더욱 복수도 하고 싶고, 내 자식의 수치도 덮어 주고 싶고
그렇겠지. 상대가 심지어 내 부하라면, 해코지하기가 어린애 손목
비틀기보다 쉽지 않겠나.”
“…….”

“용병들 중에는 또 고문의 달인이 있다지. 하도 사람을 밥 먹듯이 죽여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버릇하다
보니, 자백을 받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처참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게 만드는 기술을 연마하는 이들도 있다고. 아, 그
대가 속한 용병대에는 그런 기술자가 없나? 없다면 내 기술자를 하나
빌려줘도 좋겠지. 부끄럽지만, 고문실도 제법 꾸며 놨다네.”
나는…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대공이 나에게 말한 것의 반의
반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만 이것이 협박이라는 것은 알았다. 나는 대장의 아들을 죽인 게
너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걸 대장에게 흘리면, 네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아주 기대가 돼. 고문 얘기를 할 때는 사뭇 달콤해지기까지 했던 음성으로
한다는 소리가 오로지 협박이었다.
입이 말라, 입술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전부 마비가 된 듯이 움직이질 않았다. 불안과 긴장으로 흉곽 안쪽이 쿵쿵
울렸다.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들이 이어지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무슨 말씀이신…….”

“나는 말을 길게 하는 취미는 없어.”

한번 부인이라도 해 보려는 나의 시도는 해 보기도 전에 무참히 박살나


버렸다.
나는 이를 지그시 사리물며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머릿속에서 힘겹게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대공은 그런 나를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걸린 빛나는 미소였으나 나에게는 그것이 뱀처럼 요사스러워 보였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라. 가진 건 커다란 몸뚱이 하나뿐인 용병 나부랭이에게,


내가 원하는 게 뭐가 있을까.”
나는 귀족의 화법 따위는 알지 못했지만, 이 사내가 꼬이고 또 꼬인 인간
말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화려한 껍데기 속에는 뒷골목의 부랑자보다
더 더럽고 치사한 쓰레기가 들어 있었다. 사람을 협박하고 있는 주제에, 그
는 나에게서 착취를 하는 형태가 아닌, 내가 자발적으로 그에게 헌납하는
형태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 가려 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서 원하는 것은 재물이 결코 아닐 것이다. 내가 용병이라지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개처럼 부
릴 노동력이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었다. 돈 안 들이고 개를
만들고 싶어 이 따위 짓을 할 인간 같지는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탐내기엔 내가 가진 재력이나 힘이 지나치게
하찮았다.
그렇다면 가진 거라곤 그의 말마따나 몸뚱이뿐인 용병 나부랭이에게 무슨
원하는 게 있어서 대공인 그가 직접 나섰단 말인가.
문제는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란 존재는 버러지만도 못할 텐데, 그런 내게서 착취해 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아, 머리가 나쁠 건 예상 못 했는데.”

대공은 가볍게 혀를 차며 나를 힐난했다. 나는 접착제를 문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에 대공이 헛웃음을 지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난데 말이다.
뭐 그대에게 내가 지능을 요구하는 건 아니니 상관없긴 하지.”
“ ,

“…송구합니다. 답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가르칠 게 많아서 번거롭게 됐어.”

“…송구합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성심성의껏 따르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함구도 하고, 성에 남을 수 있게 해 주겠지. 그래야

그대의 대장에게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지 않겠나.”


“…….”

“억울할 거야. 먼저 강간을 하려고 한 쪽은 그쪽일 텐데 말이지. 어느


사내가, 특히 그대가 속한 용병이란 족속들이 보통 마초가 아닌데, 어떻게
제 몸을 강간하게 두겠어. 몸을 지킬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
자기방어는 본능이잖나? 정당방위였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내가 은혜를 베풀기로 한 거다.”

“감사합…….”

“그러니 그대가 나에게 먼저 박아 달라고 말을 하는 게 맞겠지.”

감사 인사를 툭 끊고 치고 들어온 말을, 나는 일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나는 그대와 그런 짓을 할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그대가 그토록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원한다면
야 못 해 줄 것도 없단 말이네
. .”

역시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대가 애원하면, 그대의 후장에 좆을 박아 주겠다고.”

그러니까…….
대답하지 못하고 혀가 굳어 버린 나를 보며, 대공이 구김 없는 얼굴로 생긋
웃었다. 몹시도 상큼한 미소였다.
그러니까…….
“자, 이제 대답해야지?”

이제 진짜로 좆 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3.

내가 다시 용병대로 돌아왔을 때, 용병대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바로 마일의 죽음 때문이었다.
대장은 결국 시신을 인도 받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아직 수사가 끝난 게
아니므로 정보 공개도 할 수 없고 시신을 돌려줄 수도 없다고 했다던가.
신원 확인만 마치고 곧바로 끌려 나왔다는 얘기를 체즈번이 전해 주었다.
대장은 용병대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그 통곡이 어찌나 침통했던지, 마일을 평소 싫어하던 녀석들조차
애도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우울한 얼굴을 해 보였다. 체즈번 역시 전에
없던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원수를 갚아야겠지.”

내가 온 것을 기점으로 모두를 모아 놓고 읊조리는 대장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했다. 그리고 분위기상 그에 토를 다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그래, 내 아들이지만 마일은 용병대 소속은 아니었어. 그래서 불만인 자

있나?”
평소 마일을 싫어해서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놈도 분명 있을 테지만, 역시나
입도 벙긋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놈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식구의 죽음에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우리 용병대의 체면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더 난감해져 버렸고 말이다.
“내 아들이지만, 어딜 가나 친구를 잘 만드는 것만큼 적도 잘 만들었다는 걸

모르지 않아. 용의자를 추리기도 쉽지는 않을 테지.”


친구를 잘 만든다는 확인할 수 없는 칭찬이 여기에까지 끼어들었다. 물론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래도 제 몸 하나는 간수할 줄 아는 놈이야. 아무리 실전 경험이 없다

해도, 저보다 체격이 작고 약한 상대한테 당했을 놈은 아니라고…!”


대장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발기한 좆이 사후경직을 일으켜서 그대로 남아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검시관에게서 관련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들이 애먼 사람을 강간하려다가 죽은 게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듯이 분노를 내보여서 나는 솔직히 어처구니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없었다.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 돌아가니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시신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확인하지 못했다. 겨우 얼굴만 봤을 뿐이지.”

오랫동안 사람을 죽여 온 대장이었다. 갖은 죽음을 다 보았고 제 손으로


죽여 본 적도 있는 만큼, 시신을 보면 대략적인 사인이나 죽었을 때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을 터. 그러나 그는 시신을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대공의 짓임을 직감했다. 치안대의 규칙을
운운하며 파빅을 막아서게 한 것은 역시나 거래-그는 거래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의 일환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도를 해야 할지, 더더욱 절망감을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보가 너무 없어요. 대장, 마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나 역시
그 죽음의 진상을 파헤쳐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일단 대장은 어떻게든 시신을 자세히 확인하고 오십쇼. 정확한 사인을

알아 와요. 대장이라면 시신만 봐도 살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우리는 마일이 살해당한 날의 행적을 쫓아 보겠습니다.”
평소라면 대장이 내렸을 법한 지시였지만 지금 대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선 것은 라도반이었다. 매끄러운 진행에 용병들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3일 전의 그날에 대해 소리를 낮춰 두런두런 떠드는 놈들도
있었다. 그 사이사이 자신은 무얼 했다며 알리바이를 대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가장 먼저 용병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도 너, 여자 만나고 점심 때쯤에나 돌아왔지?”

“그랬던 것 같은데.”

다행히 내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시체가 발견되었다지만 그가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검시관이 얼마나 정확한 사망 추정 시간을
내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정확한 시각을 맞혔다 하더라도 아마 대공이… 손을 써 줄
것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가 그에
게 원하는 것을 바치기만 한다면 말이다 .

“하아, 일릭.”

라도반이 마일 살해 사건의 수사에 대해 길을 제시한 뒤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은 대장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쓰며 그에게 다가갔다. 절대로 속을 들켜서는 안 되며, 불안이
겉으로 드러나서도 안 됐기 때문이었다. 대장은 전쟁터에서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라는 듯, 감이 무서울 정도로 좋은 인간이었다.
대장은 나를 안쪽 방으로 이끌었다. 슬픔은 슬픔이고, 일은 일이었다.
아들의 주검을 보고 체면도 잊고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는 사내는 지금은
단단한 용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이 네가 썩 마음에 든 모양이더구나.”

“……뭐어.”

“계약서를 보니 비밀 유지 조항이 있더군. 그러니 네가 뭘 할지는 내가 굳이

묻지 않으마.”
“당연한 소리를. 사람 난처하게 하지 마요.”

“그렇다고 원칙까지 잊지는 말고. 네가 우리를 저버리는 순간, 그 어떤


보호를 받는다 해도 우리가 널 죽일 거라는 걸 명심해라.”
“내가 뭐 하루 이틀 일합니까? 잔소리는…….”

우리 용병대는 내 고향인 달칸을 본거지로 한 용병대였다. 용병대 사람들이


이웃사촌이요 가족이었다. 용병대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곧 내 고향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어 달칸에 남은 게 비어 있는 내 집 하나뿐이라 해도, 달칸이
내 뿌리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도와 다오.”

그런데 그걸 이용해서 대장이 이런 식으로 정에 호소할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않았던 약한 모습에 나는 딱딱하게 굳어지고야 말았다.
“수사를 운운하면서 놈들은 제대로 된 사인조차 밝히지 않아…! 어떤

무기에 당했는지, 정확히 언제 죽은 것인지, 그 이외에 다른 발견된 증거나


목격자는 없었는지……. 아무것도 얘기를 해 주지 않더구나. 일릭, 일릭.
제발 부탁이다.”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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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이 개소리를 하며 널 모욕했었다는 거,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넌


상대도 하지 않았었지……. 사내놈들이라면 크게 주먹질을 할 일인데도


철없는 내 아들을 너그럽게 봐주었어.”
그 순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에서 울컥 어떤 답답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영감탱이였다. 제 아들이 나를 귀찮게 굴며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 알고 있었다면 말렸어야지. 그때는 다른 사람이
불쾌해하거나 말거나 멋대로 구는 것을 방치해 놓고, 혹은 도리어 제
아들의 역성을 들어 놓고 대체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부탁을 한단 말이야.
당신의 그 잘못된 교육이, 자식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대공이 곁에 두고 쓰겠노라 했으니, 대공과 마주칠 일이 많을 것이다.

마일이 어떻게 죽었는지 내가 알 수 있게… 수사 진행 상황이라도 파악할


수 있게 얘기를 넣어 다오.”
그러나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아비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죽였노라 고백조차 할 수 없는 범인은 같이 슬퍼할지언정 분노를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힘닿는 대로, 노력할게요.”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정작 대공에게는 마일의 사건을 빨리 덮고 사인을 숨기고 시신이 충분히
부패한 이후에 대장에게 인도하라고 부탁하겠지만 말이다.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막다른 길목에 몰려, 빠져나갈 수 있는
구석이라고는 범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엔 없었다.
“고맙다…….”

불과 몇 시간 전보다 훌쩍 노쇠한 얼굴로 대장이 중얼거렸다. 절대로


나에게만큼은 해선 안 되는 감사 인사를 하는 그 목소리가 기력을 잃고
떨렸다.
씨발, 강간당할 뻔한 건 나인데. 마일을 죽인 건 사고였을 뿐이었는데. 놈은
정말 죽여 마땅한 개새끼였는데……. 좀처럼 느낀 적 없던 죄책감과
죄의식이 가슴 속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불행은 죄책감과 죄의식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저지른 죄를 은폐하기 위한, 또 다른 치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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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공의 성에 도착했을 때, 시종은 나를 별관으로 안내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시종은 나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고 바닥만을 바라보며
길을 잡았다.
도착한 별관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성과 떨어져 자그맣게 자리
잡은 건물에는 불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시종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고, 나 역시 어둠에 금방 눈이 익숙해져서
꼴사납게 넘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시종은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이
욕실이었기에, 나는 눈치껏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로 씻는 호사를
누렸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사실은 이 성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니 대공과
아무도 모르는 계약을 한 이후부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성에 들어오기 직전, 용병대를 떠나는 나를 기다린 라도반과 나눈 대화
역시 나에게 상당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일릭. 넌 아니지?’

그는 아주 대범했다.
‘무슨 소리요, 그게.’

‘대장은 차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마일을 죽였다면

우리 용병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커.’


‘하아, 그래서 그게 나냐고?’

‘그놈이 유독 너한테 치근덕거리긴 했잖아. 대놓고 열받게 하는 소리들을

내뱉는 걸 네가 늘 무시했었지. 그래서 녀석이 더 발을 동동 굴렀고 말이야.’


‘솔직히 이렇게 뒈질 줄 알았다면 몇 대 패 주는 거였는데 말이죠.’

‘아무튼, 체즈번이 그날도 네가 여자와 놀아나느라 늦게 왔다고 얘기를 해


주긴 했다만… 필요하다면 증명해야 할 거야. 그 여자가 어디 사는
여자인지는 알고 있나?’
‘알고 있어요.’

‘그건 다행이로군. 어쨌거나 너로서도 빨리 범인이 잡히는 편이 좋을 거다.

우리야 이 달 말에 떠날 거고, 그때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미로스에


남는 놈들이 고생하게 될 테니까. 벌써부터 남지 않으려고 발을 빼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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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기적인 새끼들. 나는 무슨 죄요? 대공은 왜 굳이 나를 꼽아서는.


어디 밉보였었나?’
‘모르지. 네가 건드린 여자 중에 대공의 정부가 있었다거나?’

‘왁!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어쨌거나 잘 다녀와라. 대공에게는 늘 깍듯이 하고. 친해져서 달칸에 나쁠

건 없으니까……. 마일 녀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손도 좀 잘 비벼


봐. 하는 김에 상비군도 규모를 좀 더 늘리는 쪽으로 다시 계약하자고 하고.’
제길, 남의 일이라고 말은 쉽지.
적당히 대거리를 하며 넘기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도반이 직접
나에게 와서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갔다는 게 꺼림칙했다. 마일 그 골 빈
새끼는 정말 다른 용병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나를 모욕하곤 했었다.
아무리 내가 그를 끝까지 무시했어도, 성격 지랄맞은 제 3자 용병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내가 분노를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일을 죽인 용의자를 꼽는다면 가장 먼저 나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럴 수 있다며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신경이 너무 쓰여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정말로 내가 죽였으니까. 나한테 치근덕대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죽였으니 말이다…….
아아, 내가 그래도 나름 열심히 진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하늘은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린단 말인가……!
“일릭.”

잠시간의 회상에 잠겨 있던 탓에, 나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낮은 음성이 그윽하게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대공이 방 안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쪽 팔리게도 온 몸을 펄떡 떨며 동요를 내보인
뒤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지?”

잠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이쪽으로 건너온 듯이 보이는 대공은 얇은 침의


위에 어두운 빛깔의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꼴로 바깥을
가로질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나는 이 별관에 본성과 연결된
비밀통로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니 내가 기척을 눈치챌 새도 없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땅에서 솟
은 것처럼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해. 거짓말을 하는 건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

그대는 내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아서는 안 돼.”


나이트가운을 아무렇게나 벗어 바닥에 떨어뜨리며, 그가 생긋 웃었다.
“그 입에 담는 건 진실과 내 좆이면 족하지.”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는 분명 듣기 좋은 것이었으나 그 내용은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씨발, 입으로 하는 행위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나한
테 사내놈 좆을 빨게 하겠다는 예고를 해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이 곧 닥치겠거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행할 일은 차라리
모르고 당하고 싶었다.
“대답은?”

“……용병대를 나오면서, 동료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겨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나.”
“… 마일… 그러니까 단장의 살해된 아들에 대한 정보를 치안대 쪽에서
넘겨주지 않으니… 각하께 부탁을 드려 보라고…….”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잠시 고민했지만, 나를
빤히 주시하는 노란 눈동자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사실을 토하고야 말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요요히 빛나는 촛불과도 같았다. 빛이 반사되는
것뿐임에도, 그 눈동자가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하하, 그럼 알려 주도록 할까? 갈비뼈를 부수며 가슴에 박힌 검에 정확히

심장이 관통되어 죽었다고? 검이 아주 깔끔하게 꿰뚫고 빠져서 흔적이


예쁘게 남아 있는데 그게 딱 어느 용병대 용병들이 들고 다니는 보급형
롱소드 사이즈라고? 아, 좆을 세운 채로 죽었단 걸 그 자에게 얘기를 하라고
했던가, 하지 말라고 했던가.”
“가, 각하…….”

장난스레 떠드는 소리였지만 나에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강간을


저지르려다가 죽었는데, 우리 용병대의 롱소드로 죽었다고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범인은 자연스레 나로 귀결될 터였다. 강간 미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용병들 사이에서 조금은 정상참작이 되긴 하겠지만, 죽은 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단장의 아
들이라는 점에서 그냥 나는 유죄였다.
하늘하늘한 침의 한 장만을 입은 대공은 침대가 아닌 소파로 가서 앉은 뒤
나른하게 속삭였다.
“흠, 나한테 바치고 싶은 게 있다면 명확히 얘기를 해야 할 텐데 말이지.”

놈은 정말, 빌어먹을 방식의 협박을 일삼는 천하의 개새끼였다. 씨발, 차라


리 수청을 들어라, 그럼 도와주지 하고 직접적으로 말했다면 내가
정신적으로 털려도 이 지경까지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개만도 못한 새끼였다. 변태 중의 변태였다.
“바…….”

그러나 내게는 역시 선택지가 없었다.


“…박아 주…세요…….”

그가 제시한 길을 걷는 것 외에는.
내뱉은 뒤 차라리 그냥 자살할까 하는 충동이 불쑥 머리를 들었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그렇다고 수치심이 작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생존은 모든 것에
앞서는 본능이었다. 나는 빌어먹게도 안타깝게도 결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 어떤 치욕을 겪어도 살아남고 싶었다.
“진정성이 없잖아.”

그러나 대공은 단 한마디로 내 필사의 노력과 인내를 짓밟아 버렸다.


“바지 벗고 테이블에 등을 대고 누워.”
그리고 더한 치욕과, 더한 수치를 요구했다.
“치… 침대에.”

당혹감에 내 입에서 닥치는 대로 말이 쏟아졌다. 나라고 섹스를 침대에서만


하는 게 아니었음에도 테이블에 눕고 싶지 않아서 침대 소리가 나온
것이다.
대공은 그런 나를 차갑게 비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숨기지 않고
비아냥댔다.
“이거야, 원. 요조숙녀이신 걸 몰랐군, 그래. 그런데 어쩌지요, 레이디?

침대로 올라가기엔 매너가 한참 부족해서 배워야 할 게 태산 같은데


말이야.”
“각하…!”

“두 번 말시키지 말라는 소리까지 두 번 해 줘야 알아듣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의 목소


리에 작은 짜증이 밴 순간. 나는 더 이상 애원하는 것을 멈추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수없이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적은 없었는데, 눈앞의
아름다운 사내가 겁이 났다. 인정하기 자존심 상하지만 무서웠다. 동요를
감추지 못해 손끝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물리적인 힘 따위와는 무관한, 말
한 마디로 나를 죽일 수 있는 그의 권력이 나를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깨끗하게 씻은 몸 위에 걸쳤던, 시종이 준비해 두었던 편안한 바지
매듭을 풀어 헤쳤다. 손이 버벅대서 행동이 서툴고 느린데도 대공은 별말
없이 공연을 관람하듯이 나를 지켜보았다. 그 시선에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술이 간절히 고팠다.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할 수가 없는 치욕스러운 짓을
맨정신으로 하고 있다는 게 또 나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내가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고 테이블에 등을 대고 누울 때까지, 나
는 내내 내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그 이후까지도.
“다리를 끌어안아. 그래, 오금 아래로 손을 넣어 당겨 안아야지.”

나는 얌전히 남자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얼굴로 열이 올랐다. 얼굴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워지며 숨이 절로 차
어느새 나는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성감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내가 테이블에 등을 대고 누워서
다리를 팔로 잡고 끌어안아, 고간과 회음을 전부 사내에게 내어 보이고
있다는 것에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치욕스러워서 분노마저 피어올랐다.
그러나 치욕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박…….”

토할 것 같았다. 얼굴이 너무 뜨겁고, 심장이 온갖 감정으로 쿵쾅쿵쾅


뛰었다. 차라리 그냥 뒈져 버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런 짓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박아 주세요…….”

하지만 내 입에서는 결국, 내뱉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한마디가 속절없이 흘러나간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무언가를
삼키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래, 내가 그대를 강간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가 원해서 안아 주기로 한

건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않겠나?”


대공은 쓸데없이 잘생긴 그 얼굴로, 잘도 사람의 복장 뒤집는 소리를
지껄여 댔다. 내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 것을 빤히 알 텐데도 그는 마치
내가 진심으로 그를 원해 안달이 난 것처럼 이죽거렸다.
“헉……!”

그러나 분노도 잠시. 대공의 손이 내 몸에 닿은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겨우 비명은 참을 수 있었지만 숨을 삼키며 몸을 퍼뜩 떨었다. 땀이
밴 손으로 부여잡고 있던 허벅지를 놓칠 뻔했다.
대공은 혀를 차고는 나를 힐난했다.
“잘 붙잡고 있어야지.”

기다란 손가락으로 아래를 더듬으면서 말이다. 나는 그 순간 대공을 발로


차 버리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극도의 분노와
스트레스로 눈앞이 파직파직 점멸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구의 손도 닿은 적 없었던 항문의 주름 위를
사내가 손끝으로 덧그리며 문지른 것이다.
이미 악물어 피비린내가 나는 입안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이를 더
꽉 깨물었다.
“몇 명의 좆이 이 안을 드나들었지?”

대공의 입에서 쉬지 않고 모욕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아, 아무도…….”

“처녀인 척하다니, 실망인걸. 열다섯에 용병대에 들어갔는데 다들

신사적으로 그대 엉덩이를 지켜 줬다? 그걸 믿으란 건가.”


“달칸, 달칸 용병대에, 그런, 건, 없……!!”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가락이 다물린 사이를 벌리며 쑤욱 안으로


틀어박혔다. 단단한 막대기 같은 것이 내장을 역행해 올라가는 기분은
무엇에 비할 바 없이 끔찍했다. 그대로 대공을 발로 차 버리고 싶어서 몸이
다 뒤틀렸다.
“그럼 타고나길 음탕해빠진 건가. 내 손가락을 아주 맛있게 먹잖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허 허윽, 힉…!”
“ ,

“경험도 없으면서, 이렇게 게걸스럽게 삼킨다고?”

아니라는 둥, 그렇지 않다는 둥 부정할 여력도 없었다. 내 입에서는 쉼 없이


새된 신음이 터졌다. 손가락 개수가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안쪽을 잔뜩
넓히며 내벽을 문질러 대는데, 그 감각을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아픔은 덜했다. 그러나 장벽이 늘어나며 억지로 벌어지는 감각이
척추를 선득하게 후려쳤다. 물에서 건져 올린 생선처럼 몸을 펄떡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쪽에 틀어박힌 대공의 손가락이 내벽의 한 지점을
사정없이 짓누른 순간.
“하악!”

별안간 눈앞에서 번개가 내려쳤다. 아니, 정수리에 직격해 척추를 타고


전신을 짜릿하게 태웠다. 일시적으로 정신이 멀어지며 이명이 삐익 울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감각과 그 여진에 속을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몸
안이 간지러웠다.
“아, 아으! 힉!”

손가락이 그 지점을 멋대로 찍어 누를 때마다 연신 눈앞에 스파크가 터지고


새카맣게 어둠이 번뜩였다. 정신까지 깜빡이는 것 같았다. 내가 익히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의 홍수였다. 성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늘
아침에도 여자를 안고 절정을 맛보았는데 지금의 것은 절정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런 내 위로, 대공의 비웃음 가득한 음성이 떨어졌다.
“이렇게 환장하고 자지러지는데, 처녀란 걸 내가 어떻게 믿어.”

손가락이 일시에 빠져나가고, 벌어진 사타구니로 끈적한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침의를 마저 벗은 대공이 내 사타구니에 바짝 몸을 붙이고 섰다.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는데도 용케 나는 내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벌어져 드러난 엉덩이 골에 단단한 살덩이가 닿았다. 그것은 단단하게
발기한 대공의 성기였다. 나는 그것이 지랄맞게 크다는 것을 인지할
타이밍조차 갖지 못했다.
“크, 크악!!”

대공의 표현대로, 그가 내 안으로 제 좆을 박아 넣는 그 순간에도… 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에게 일
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인지하기를 거부했다
. , .

현실감 없는 은빛의 긴 머리카락이 내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내 무릎을 움켜쥔 손이 전해
오는 체온에도 나는 현실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쑥, 안으로 파고든 순간 정수리까지 쪼갤 기세로 통증이
솟구쳤다는 것만큼은 여실히 느꼈다. 또 안을 잔뜩 비벼 대며 멋대로
헤집는 성기에 몸속도 겉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는 것도. 그가 박아
들어올 때마다 어딘가가 몹시도 간지러워 진저리가 쳐지는 것까지도.
“밝히기는.”

대공은 꾸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지껄여 댔다. 나는 그에 그 어떠한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내 다리를 붙잡은 채 그의 아래에서
속절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음탕하다느니, 천박하게 엉덩이를
흔든다느니 하는 모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또한 나를 반으로 쪼갤
기세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고 다시금 처박아 들어오는 허릿짓 역시
쉬지 않고 지속되었다.
접합부에서 하얗게 포말이 일었다. 안을 채운 체액이 대공의 움직임에 따라
끌려나와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져 고였다. 대공은 제대로 조이지 못하고
질질 흘려 댄다며 나를 힐난했다. 그러면서도 멈춰 주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는 내 몸을 억누르며 온갖 저속한 말들을 쏟아 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그 밤은 시작에 불과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4.

새벽에 용병대 숙소로 돌아가 지친 몸을 누이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깊게
잠들었다 깨었기 때문에 몸이 상쾌하고 개운…… 해야 하건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덮쳐 온 뻐근하고도 얼얼한 감각에 눈을 뜬
이후로 내 기분은 시궁창에 처박힌 것처럼 더러웠다.
내 얼굴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다른 녀석들은 물론 체즈번까지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눈치라고는 개코도 없는 놈들이 눈치를 볼 정도였던
것이다. 짜증을 내 봐야 애먼 곳에서 화풀이 하는 셈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딘가에 엉덩이를 대고 앉을
때마다 내 몸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둔통에 도무지 짜증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놈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다만 대공이 시킨 일이 몹시
더럽고 치사하고 기분 나쁜 일이겠거니, 짐작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일’이라는 게 그 개같은 새끼의 좆같은… 아니 말
그대로 좆을 받는 일이라는 건 짐작도 못 할 것이었다.
이전에 마일이란 천하의 개쌍놈이 나에게 같잖은 소리를 할 때에도, 어떻게
나를 보고 성욕이 일 수 있냐며,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고 구역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던 놈들이었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몸이 가녀린 것도 아니다. 보기 흉할 정도로 근육이
부푼 것은 아니지만 가녀리다와 우락부락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에 속하는 몸이었다. 그렇다고 얼굴이 절세미인인 것도 아니다. 내
외모는 지극히 평범했다. 추남은 아니었지만 미남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왜, 어째서 그런 미친 변태새끼들이 둘씩이나 꼬여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냔 말이다……!
“눈빛이 불손한걸.”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태에 잠시


기억의 회상으로 도피를 했던 내 의식이 기어코 질질 끌려나왔다. 덕분에
나는 내 상황을 직시할 수밖엔 없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 그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선이 마
주친 순간 긴장감에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갔다 밤하늘에
, .

쏟아지는 달빛을 꼬아 만든 것만 같은 은빛의 머리카락과,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가 몹시도 신비한, 다시 봐도 놀라운 수려한 외모였다.
또한 다시 겪어도 놀라운 변태새끼였다. 대공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내 몸에서 말랑한 부분이 있다면 입술일
텐데도 도리어 그의 손가락이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부드러운 척, 다정한 척을 해도 이 새끼의 본질이 어떤지 나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처녀였다는 걸 믿어 주기로 했어.”

믿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믿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도 없는 얘기를 예쁜


입술이 지껄여 댔다. 남자를 두고 처녀니 뭐니 하는 소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단어들을 써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을 좋아했다. 열 받으라고 하는 소리인
걸 뻔히 아는 데도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개떡 같은 단어들을 써서 말이다.
“좆 무는 게 형편없어서 믿을 수밖엔 없더군.”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연극조로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솔직히 기가 찼다.


저 잘생긴 얼굴을 한 대만 후려치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빨아 봤나?”
“……아니요.”

“하지만 받아 보기는 했잖아?”

“…예.”

“남자한테도 받아 봤나?”

“……남자한테는 받아 본 적 없습니다.”

용병들에 대한 흔한 편견으로는 남색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편견일


뿐이었다. 적어도 우리 부대는 아니었다.
늘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다지만 주둔지까지 여자들이 따라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간혹 자기들끼리 욕구를 푸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강
제적인 관계는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차라리 적국에 가서 약탈을
하면 했지, 힘이나 권력을 사용해서 동료를 성폭행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마일이 대장 아들이니까 내가 죽여 놓고도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거지, 일반 용병이었다면 나를 강간하려다 죽은 시점에서 놈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체조차
거둬지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졌을 터였다.
어쨌거나 용병대 내에서 남자끼리 관계를 갖는 놈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성
취향 때문이었다. 그런 놈들은 또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아가는 용병들인데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 남자끼리
붙어먹거나 말거나 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가끔 사내놈들 사이에서
치정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자위를 할지언정, 아무리 궁하다 해도
남자와 몸을 맞대 본 적이 없었다. 빨아 달라고 하면 입으로 하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해 줄 놈도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는 고추 달린
사내놈을 상상만 해도 욕구가 푸시식 식어 버리는 타입이었다. 다른
용병놈들이 저들끼리 붙어먹든지 말든지 관심 없었지만, 나한테
추근덕거리는 건 모조리 무시하곤 했었다.
미로스의 대공과 얽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받아 본 경험은 있다고 하니까, 기대를 해 볼까.”

이 거지 같은 상황의 원흉이었으나, 그가 미인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수려한 얼굴이 미소를 짓자 일시적으로 방 안이 밝아지는 것 같은 환상마저
일었다.
저 얼굴이면 세상에 꼬여내지 못할 상대가 없을 텐데, 왜 굳이 나에게
이러는지, 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못내 억울한 마음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뉘여 앉은 대공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부터, 나는 그가 나에게 뭘 시킬지 알 수 있었다. 짐작한 순간부터
구역질이 치솟아 괴로웠다. 뭘 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입안이 텁텁하면서
속이 거북했다. 그러나 그것을 표정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게 정말
좆같은 점이었다.
“손.”

문득 대공이 내 코앞에 손을 내밀었다. 꼭 개한테나 할 법한 짓이었지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내가 개와 다른 게 뭐가 있겠는가.
나는 잠자코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굳은살이 잔뜩 밴 두껍고 모양
사나운 손을 대공의 매끈한 손 위에 올렸다. 막상 길이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매끈한 그의 손은 몹시 아름다웠다. 마디마디가
길게 빠진 손가락은 섬세하기까지 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가 그의
손이 내 손과 다른 것을 느꼈듯이, 대공 역시 자신과 다른 손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투박하니 곰 앞발 같은 내 손을 가볍게 받쳐 들고
엄지로 손등과 손가락을 가볍게 쓰는 꼴이 꼭 처음 보는 물건을 만지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그의 손길에 조금은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전날 밤에는 그렇게
거칠게 사람을 몰아붙였던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 손등을 간질이는
손길이 몹시도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살갗 아래까지 근지럽게 만드는
접촉에 어쩐지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가 만지작대는 손만
아니라 팔뚝까지도 감각이 예민하게 서는 기분이었다.
내 손에 박힌 굳은살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대공이 말했다.
“손이 흉하군.”

모든 귀족의 화법이 저렇지는 않으련만. 배려할 필요가 없으니 배려하지


않는 것이리라.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느낀 바를 여과 없이
내뱉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오래 쥐었으니까요.”

“그런다고 손등까지 이렇게 되지는 않지 않나?”

손등에 도드라진 관절 부위 위에도 두껍게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 나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모르기에 대답하지 못하고 난처하게 눈알만 굴리고 있으려니, 대공은
손가락으로 굳은살 위를 덧그리며 문질렀다. 둔감한 부위라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성질을 내던 그는 내 우둘투둘한 손등에
완전히 집중했는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게 한동안 그는 신기한 것을 보듯 내 손을 보며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렸고 나는 그가 양껏 만지도록 묵묵히 손을 대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밤새 내 손이나 만지고 다른 짓은 안 시켰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내 양손과 깍지를 껴 손가락 굵기를 가늠해 본 대공은
다시 내 손을 가볍게 부여잡은 채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손의 인도로 내 손이 도착한 곳은 그의 바지 앞섶이었다. 발기한 것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닌데 불
룩하게 굴곡이 티가 났다. 그 안에 어떤 게 들어 있는지는 알아도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괜한 긴장감이 뱃속을 꾸욱 조였다. 아니,
대공의 것만 아니라 다른 남자의 성기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볼 일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 결코 보고 싶지 않았건만……. 나는 빠르게
체념을 배운 지 오래였다.
“착하지?”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애완동물을 대하듯이 다정다감했다. 전날보다는


분명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하기로 한 거, 아픈 꼴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의
기분을 맞춰 주며 최대한 힘들지 않게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손끝에 닿은 벨트를 천천히 풀어 헤쳤다.
힐끔 올려다본 남자의 눈이 칭찬을 하듯이 가늘게 휘어졌다. 아무래도
대공의 앞이라 긴장을 했기에, 또 솔직히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기에
심장이 쿵쿵쿵 거세게 박동했다.
고급스러운 버클이 달린 벨트를 풀고 가운데를 따라 꿰어진 단추들을
차례로 풀어냈다. 단추를 풀자 느슨하게 벌어지는 부드러운 옷감을 좌우로
젖혔다. 마지막으로 속옷을 들추어 냈을 때, 드디어 대공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마도 대공은 바지를
입을 때 재단사가 성기를 좌측에 둘 것인지 우측에 둘 것인지를 물어 바지
좌우를 달리 만들 게 틀림없다. 속옷 밖으로 끌려나와 아래로 축 늘어진
것은, 옷 속에 넣어 두려면 마땅히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두어야 할
정도로 컸다. 컸다. 정말 너무 컸다.
어쩐지, 씨발, 어쩐지 아프더라. 나는 그 순간 몹시도 서러워지고야 말았다.
웬만해서는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 대공의 성기를 보는
순간 정말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서글퍼져 버렸다. 이따위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 저따위로 변태가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취향을 개발해 갈 때 그와 어울리며 희생되었을
사람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이 물씬 피어올랐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나고 말이다.
긴장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마른침이 넘어가서 꿀꺽 삼키며 황망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얼굴로 존
재감 넘치는 성기를 바라보았다. 대공이 그런 내 콧등을 가볍게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렇게 군침까지 삼키면, 내가 너무 기대하게 되는데.”

씨발, 넌 입도 안 떨어져서 마른침 삼킨 거랑, 먹고 싶어서 군침 흘리는 거랑


구분이 안 되냐? 그렇게 쏘아 줄 수 있다면 속이 정말 시원할 것 같지만, 역
시나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저 대공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기분이 그 여느 때보다 거지같은 나와는 달리 대공은 그 여느 때보다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도대체 낮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의 태도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정말 쉽지가 않았다. 어제는 제멋대로
사람을 몰아붙이면서 처녀입네 아닙네 별 거지 같은 소리들을 늘어놓더니,
오늘은 처음이라 만족스럽다는 투였다.
여자를 만날 때 순결에 집착한다는 놈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원숙미가 있고 잠자리에 능숙한 타입을 선호하여 과부나 유부녀만 만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여자의 성경험 유무를 따지는 놈들도 이해하지를
못하는데, 하물며 남자인 내 경험이 뭐가 중요한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걸
따지고 싶어 한다는 것부터가 충격적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오늘 대공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의 기분을 내가 더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대공 모르게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그의 샅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편히 자세를 잡도록 다리를 벌려 주며, 대공이 고운
손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무엇 하나 부드러운 게 없는 나인지라 머리카락조차 억셀 텐데, 대공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기며 두피를 문질렀다. 뒷목이 쭈뼛할
정도로 간지러운 손길이었다.
“흐읍…….”

늘어진 살덩이의 끄트머리를 입에 물었을 뿐인데 예상 외로 꽉 채워 오는


부피감에 내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렀다.
대공이 쿡쿡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입안에 힘을 주어 빨아 당겼다. 내 고개가 그에게 더 가깝게 붙었고 묵직한
살덩이가 입 속에 가득 차, 자극에 약한 입천장 안쪽을 건드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반사적으
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혀 아래 고여 드는 타액과 함께
그 구역감을 애써 삼켰다. 타액을 삼키느라 입 안에 빠는 힘이 일시적으로
강해졌던 탓에 대공의 허벅지가 움찔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입 안에 담긴
것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내 머리카락을 쥔 손이 이따금씩 움칫대며 머리카락을 쥐었다 놓는다거나,
예상 외로 단단한 허벅지가 조여들며 꿈틀한다거나, 나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나는 그가 제법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입 안에
고이는 역하고 기분 나쁜 맛을 무시하며 나는 턱이 아플 정도로 커진 것을
머금는 데 온 신경을 다 집중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입 안이 자극당하니 타액이 질척하게 고이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입에 문 것이 너무 커서 몇 번 물었다 뱉는 것만으로도 고인 타액이 잔뜩
휘저어져,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으로 질질 흘러내렸다. 턱과 입 주변이
죄 질척하게 젖어 드는 것이 몹시 불쾌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단단하게
부푼 것을 사정시킬 목적으로 열심히 빨았다. 내가 어떻게 했을 때 기분이
좋았는지를 떠올리며 혀를 쉬지 않고 놀리기도 했다.
“하아, 이건 또, 의외로…….”

대공의 목소리가 열기가 가득했다. 만족이 여실히 묻어나서 나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것은 곧 끝을 예고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들이 나에게
해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의 허벅지를 붙잡아 의지하며 고개를 깊게
기울였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

혓바닥을 누르고 있던 귀두가 쑥 안으로 미끄러져 목구멍에 닿을 기세로


안쪽까지 들어갔다. 삼킬 듯이 그것을 빨며 나는 구역감을 억눌러야 했다.
정말 토할 것 같았는데, 얼마나 힘겨운지 눈가가 찡해지면서 물기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기를 뱉어 낼 수도, 토사물
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 우으, 윽…….”

목구멍 가장 깊숙이까지 삼키자, 사내의 치골 언저리가 내 얼굴에 닿으며


젖은 체모가 살갗을 간질였다. 눈을 꾹 감고 잠시간 그렇게, 숨만 헐떡이며
목구멍으로 성기를 조였다. 입안에 타액이 가득 고이면 그것을 삼키는
것으로 대공의 성기를 강하게 빨아 주었다.
“……하아, 일릭.”

낮은 음성이 내 이름을 속삭였다. 귓가가 오싹했다. 이어 부드러운 손끝이


눈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관자놀이를 스쳐 눈썹 아래를
문질렀다. 그리고 감긴 눈꺼풀 위를 톡톡 건드리는 것이다. 그 손짓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여,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통 탓인지 시야가 부옇게 번져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있을 곳을
올려다봐도 형체가 명확히 들어오지 않았다.
“잘하고 있어.”

다정한 칭찬이었는데, 그 순간 도리어 수치심에 귀까지 뜨겁게 열이


올랐다.
하지만 계속 성기를 물고 있는 수밖엔 없었다. 내가 목구멍 깊숙이까지
성기를 머금고 있는 게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대공은 연신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내 눈 아래를 몇 번쯤 문지르고 나니, 고여
있던 액체가 흘러내려 시야가 맑아졌다. 시선이 맞닿자 대공의 눈매가
둥글게 휘며 그 사이에서 보석 같은 눈동자가 노랗게 빛났다.
대공은 내 목덜미를 쥐고 천천히 고개를 물리게 했다. 성기 끝이
목구멍에서부터 미끄러져 나오며 연한 살을 문지르자 또 구역질이
치솟았고 그것을 억지로 참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목구멍을 빠져나와 성기의 절반 정도가 입안에만 있을 때는 차라리 나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체액의 맛
이 입 안 가득 퍼졌지만, 구역질을 참는 것보다는 덜 괴로웠다.
대공이 고개를 더 뒤로 빼게 한 탓에 성기가 주르륵 입안에서 빠져나갔다.
한껏 벌어져 있었던 입가가 얼얼하고 입술은 부었는지 후끈거렸다.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대공이 젖은 성기 끝을 입술에 문지르며
싱긋 웃었다.
“다시.”

후두둑, 눈가에서 땀인지 무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리며 시야가 다시


맑아졌다. 어쩐지 코 안이 찡하게 차오르기도 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
행위를 다시 하라고 하니 싫어서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내게 무슨 다른
선택지가 있겠는가…….
“흡… 후읍…….”

나는 다시 입술을 벌려 내 입술을 문지르고 있던 귀두를 찾아 물었고, 대공


이 내 뒷덜미를 당기는 것으로 성기가 다시 깊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자리가 제자리라는 듯이 찾아 들어가는 성기의
움직임이 아까보다 빠르고 우악스러웠다. 아까는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
조절하며 스스로 삼켰다면, 이번에는 대공이 멋대로 처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욱, 우욱. 성기로 가득 채워진 내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렀다. 사실 그건 신음이 아니라, 구역질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성기를 뿌리까지 머금자, 대공은 그대로 내 머리를 제 쪽으로 더욱
짓눌렀다. 그리고 좌우로 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까지 넘어간 성기가 안에서 요동을 치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튀어나오는 구역질을 삼키며 내가 욱욱대자 대공은 도리어 그것을
즐기듯이 내 머리를 눌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내 머리를 뒤로 물렸다. 나는 당장 그 성기를 뱉어 내고
숨을 틔우고 싶었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연신 시야가
부옇게 젖었다가 액체를 흘리며 맑아졌다. 겨우 그의 성기가 전부 내
입에서 나갔을 때 나는 헐떡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급하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들이마셨을 때.
“다시.”

대공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숨도 고르기 전이라


입안에 들어온 성기에 절로 하늘이 노랗게 떴다. 거부하며 그를 밀어내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했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힘이 강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아직 내 이성은 살아 있었고 나는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다시 혓바닥을 누르고 입천장을 긁으며 귀두가 깊숙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내가 구역질을 하거나 말거나 대공은 성기를 밀어 넣었다.
눈앞이 핑 돌고 식도와 위장이 경련을 일으켰는지 속에서부터 통증이
일었다. 전부 파열되고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격통에 나도 모르게 몸부림을
쳤으나 대공은 끝까지 내 머리를 잡아 눌러 제 샅에 처박았다. 그의 젖은
체모가 내 얼굴을 문질렀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눈가가 욱신욱신 아파
왔다. 나는 그제야 내 눈에서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 눈물임을 깨달았다.
이어 대공이 성기를 빼 주었을 때는 숨을 헐떡거리는 사이로 흐느낌이
샜다. 그러나 차라리 숨을 골랐어야 했다. 제대로 숨을 쉬기도 전에 다시
성기가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혀로 밀어내려 했으나, 대공은
아랑곳 않고 다시 내 입안 깊숙이까지 성기를 처박았다. 머리가 이끌려
그의 다리 사이에 처박혔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몇 번인지 모를 ‘다시’가 이어졌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대놓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음에도 대공은 개의치 않고 성기를 물게 했다.
그는 열 오른 눈으로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곰 같은 험악한
남자가 갖은 액체로 지저분해진 얼굴로 헐떡거리는 게 뭐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라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내가 눈을 감으면 눈가를 문질러 눈을 뜨게 만들었다. 깊숙이 삼키기를
반복하면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안 뜨려고도 해 보았지만, 눈을
뜨지 않으면 숨이 막히도록 성기를 물고 있어도 빼 주지 않았다. 어차피
눈물로 흐려져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는데도, 그는 계속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다시 체모가 얼굴에 닿도록 깊게 성기를 머금은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웃었다. 숨통이 막혀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가늘게 숨을 쉬어 내고 있는
내 코끝을 톡톡 건드리기도 했다. 얼굴에 맺힌 땀과 눈물을 훔쳐 문질러
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지치지도 않고 차올랐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것이다.

제발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성기를 빨리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또 다시


그가 ‘다시’라고 말할까 봐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깊숙이 삼키고 있는
현재가 더 괴로운지, 입 안과 목구멍을 잔뜩 자극하며 미끄러져 들어오는
순간이 더 괴로운지 알 수가 없었다.
“힘든가?”

씨발, 이렇게 온 얼굴로 괴로워하고 있는 걸 보면 모르겠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그의 허벅지를 억세게 부여잡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냔 말이다. 나는 입안의 타액을 모아 삼키며-그
과정에 목구멍과 식도가 울렁거리며 성기를 조여 대공이 나직하게
신음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형편없어. 이래서 처녀가 번거롭지.”
제법 잘하는가 싶더니 말이야. 그는 지겹지도 않은지, 그 시답잖은 처녀
소리를 다시 끄집어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중간까지는 제법
잘한다는 식으로 한껏 느껴 댔던 주제에, 씨발.
그런 내 마음의 욕지거리가 닿기라도 했는지, 대공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그제야, 남의 목구멍을 정말 셀 수 없이 유린하고, 수없이 숨도
못 쉬게 괴롭히고 나서야 왜 이 미친 짓거리를 반복하게 했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빼 줄 때 더 잘 빨아야지?”

나는 순간 입에 문 것을 그냥 물어뜯어서 이 새끼를 고자로 만들어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충동의 불길이 조금만 더 거세었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씹어 버렸을 것이다.
씨발, 이 새끼가 일부러 사람 괴롭히며 이 지랄을 한다는 건 알았지만, 별
같잖은 이유를 듣고 나니 화가 치솟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진짜 십수 년
만에 눈물을 질질 짰는데, 사내새끼 좆 빨다가 울었다는 것 역시
수치스럽고 분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씨발, 내가 진짜 이러고도 살아야
해? 어차피 내가 마일을 죽인 게 들통 나면 대장 손에 뒈질 거, 그냥 대공
좆을 물어뜯고 자살하는 게 낫지 않겠어?
“해 볼까?”
내 생각의 고리를 끊은 것은, 목구멍까지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선득한 감
각이었다.
하도 시달려서 목구멍이 부은 듯이 이제는 아프기까지 했다. 하지만 입
안을 점유한 성기가 빠져나간 순간, 나는 말 그대로 허겁지겁, 그것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급히 빨아 당겼다. 입술을 힘주어 오므려서 빠져나가는
기둥을 조였다. 막대 사탕을 빨듯이 쭉쭉 빨았다.
그리고 마침내 귀두만 내 입술에 걸려 있을 정도로 성기가 빠져나갔을 때.
“잘했어.”

칭찬과 함께 다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목구멍까지 삼키고, 또 빠져나가는 것을 조이며 끝까지 힘주어
빨았다.
마침내 내 입안에서 성기를 뺀 대공은, 안도감에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말 잘 듣는 개새끼를 쓰다듬기라도
하는 투였다. 손을 떨구어 내 귓가를 문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뺨을 쓸어내려, 턱을 들어 올리게 했다. 내 눈앞에는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입 벌려야지?”
속삭임은 다정했으나, 그 순간 아마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사람이 진짜 죽을 것처럼 절망하는데, 그 얼굴을 보며 미친 변태
대공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더는 심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로 나를 달래려 드는 게 더 어이가 없었다.
“금방 쌀 거다. 응?”

이 자리에서 눈앞에 보이는 좆을 뜯어 버리고 나갈 수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바로 나였다. 사실은 그가 좋게 달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라면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나는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벌려 동그란
귀두를 다시 머금었다.
다행히도 대공은 다시 깊게 삼키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귀두를
꽉 조여 물고 핥고 빨라고 했다.
나는 왼손으로 그의 고환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기둥을 말아 쥐었다. 콱
쥐어 터뜨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의 고환을 부드럽게 굴리며
주물렀다. 입으로는 귀두 끝을 빨며 쉴 새 없이 성기를 말아 쥔 손을
흔들었다. 타액과 그가 흘린 체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성기가 손 안에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마찰됨에
따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움찔거렸다. 저는 뭐 하는 것도
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대공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 일릭…….”
대공의 모든 것이 다 소름 끼쳤지만, 내 이름을 부를 때면 특히나 등골이
오싹했다. 절정을 향해 가는 그는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속삭였다. 일릭.
일릭. 나는 그럴 때마다 입 안의 성기를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큿…!”

그리고 마침내, 그가 신음과 함께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이에 가둬 둔 허벅지가 조여들며 근육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아랫배가 잘게 경련하기도 했다. 손으로 말아 쥐고 있는
성기가 손 안에서 꿈틀댔다. 그럴 때마다 입안으로 뜨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쏘아졌다. 살 냄새 사이로 짙은 밤꽃 내음이 번졌다.
나는 대공이 사정하는 동안 계속해서 그의 성기를 빨았다. 귀두만을 문
채로 빨며 정액을 토해 내는 요도구를 혀를 세워 문질렀다. 그의 입에서
연신 만족에 겨운 신음이 흘렀다. 사정은 끝나는가 싶으면 한 번 더, 또
끝나는가 싶으면 한 번 더, 그렇게 간헐적으로 몇 번을 이어졌다. 덕분에 내
입 안에는 정액이 한가득했다.
이걸 대공이 알면 분명 삼키라고 할 위인인데. 거기에 생각이 미친 나는
진짜 토해 버릴 것만 같았다. 빨면서 조금씩 삼킨 거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다 치겠는데, 남의 정액을 크게 한 입 삼킬 생각을 하니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대공 모르게 어떻게 뱉어 버리는 방법은 없을까? 아, 씨발 진짜
삼키면 토할 것 같은데-
그러나 내 입에는 여전히 대공의 귀두가 물려 있었다. 정액이 입 안 한
가득이라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보일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공은 피식 웃으며 내 입에서 귀두를 빼냈다. 희고 끈적한 실이
힘을 잃은 살덩이와 내 입술 사이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정액은 여전히 내
입 안에 남아 있었다.
솔직히 당장 뱉어 버리고 싶었다. 입 안에 머금은 것의 맛이며 질감이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비위가 강해서 다행이었다. 전투를 하다 보면
흙먼지만 아니라 피나 심지어는 살점 같은 온갖 것이 다 튀어서 입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들어오다
보니 맛에 둔감해졌던 것이다. 살다 살다 내가 맛이 무뎌질
정도로 전투를 많이 했던 것에 감사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뱉을까
말까, 어떻게 하면 대공 모르게 뱉을까 고민하며 나는 대공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대공이 말했다.
“삼키지 말고.”
“…….”

의외로운 말에 놀란 것은 이쪽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대공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또 내 코앞에 손을 들이댔다.
“손.”

멍하니 정액을 문 채 아까처럼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오른손만을 잡은 그가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내 손을 뒤집었다. 그리고
뒤집힌 손을 턱 아래 대게 했다.
“뱉어.”

생각지도 않았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 오목하게 만들며
입안을 채운 것을 퉤 뱉어 냈다. 타액과 제대로 섞이지 않은 물컹한 액체가
후두둑 떨어져 손안에 고였다. 눈으로 보니 더 끔찍해서 한 번 더 입안에
남은 것들을 모아 손안에 뱉었다.
뱉어 낸 것들이 꼴도 보기 싫어서 손을 바닥에 털어 버리려 했을 때, 대공이
잽싸게 내 손목을 잡아챘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뱉어 낸
체액들을 모아 쥐고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공은 나무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버리면 안 되지.”

“ …?”

“다시 먹어야 하는데.”

“……예?”

아니… 물론 자기가 싼 걸 확인하고 도로 먹게 하는 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그렇게 구역질나는 짓을 하자는 거야? 그저 아연할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대공은 늘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변태이며 미친놈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대 아래 입으로.”
“…….”

아프기 싫다면, 공들여서 풀어야 할 거다.”


잘 못하면 아프게 될 거라며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나를 아프게 하는


주체가 누구일지를 생각하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마 그 순간 나는
숨기지 못하고 이를 갈았을 것이다. 나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감돌았다.
생긋,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사정의 여운이 남아 나른하게 풀린 얼굴에
걸린 미소는 몹시도 색정적이면서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동시에
불길했다. 순식간에 불안감이 심장을 터뜨릴 듯이 조여 왔다.
다리를 조금 더 벌려, 훤히 드러난 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공이
말했다.
“빨아서 세워.”

- 다음 화에 계속

6.

대공은 급이 다른 변태이니만큼 그 정력도 수준이 남달랐다. 몸을 단련한


나보다 힘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내 입안에 진짜 한가득, 넘치도록 싼
이후임에도 또 기운 좋게 발기를 한 것이다. 내 입안에서 점차 부피를 늘려
가는 성기에 나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차라리 입으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다. 목구멍이
터지도록 그의 성기를 머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그가 말한 대로 내 손으로 직접 내 뒤를 푸는 것은 난감하고, 난
처하고, 몇 배는 더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윤활유로 삼아야 하는 게 그의 정액과 내 타액이 뒤섞인 끈적한 액체라는
점에서, 무디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 신경줄마저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버렸다.
그는 삽입을 돕는 다른 윤활유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나를 절망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빠뜨렸다.
전날의 삽입은 끔찍할 정도로 아팠다 그런데 그가 오일까지 .

사용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그 고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직접 물고 빨아서, 대공의 성기가 얼마나 지랄맞게 큰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만 생각해도 섬뜩한데
아무런 준비도, 윤활유도 없이 들어온다면…….
“흐윽, 으……. 흡…….”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공이 나에게 아까처럼 깊게 삼키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채 몹시도 나태하게 소파
위에 널브러져, 바닥에서 끙끙거리며 애를 쓰는 나를 관망하기만 했다.
이따금씩 내 머리나 목덜미를 쓰다듬을 때가 있기는 했으나 뭘 어떻게
하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입에 달고 살던 모욕적인 말들도 더는 내뱉지
않았다. 더운 숨을 규칙적으로 쉬어 낼 뿐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적막 속에 울리는 것은 오직 거칠어진 내 숨소리와 입이
성기를 빨고 핥는 소리, 그리고 손으로 뒤를 쑤시는 질척한 소리가
전부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수치심에 귀가 다 화끈 달아올랐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리들을 듣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언제 대공이
박겠다고 나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그의 성기는 내 입 안에서
단단하게 발기한 지 오래였다.
내가 내 뒤를 내 손으로 푸는 일 따위, 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몸을
만지는 것임에도 손은 영 서툴렀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넣는 게 어색하고 불편해 시작할 엄두 내는 게 정말
힘들었다. 어떻게든 덜 아파 보려고 시도는 해 보고 있었지만, 하면서도
내가 제대로 하는 게 맞나 싶었다. 확실한 건 전날 대공이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밀어 넣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애써 두 개, 세 개로 늘렸지만
아프기만 했다. 물론 전날 대공이 했을 때도 아팠지만, 그때는 더 깊은
안쪽까지 닿아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거기까지는 손을 넣을 수가 없었다. 내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보다 훨씬
두꺼운데도 내벽을 벌리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윤활액의 양이 턱없이 적었다. 기능 자체가 윤활인 미끌미끌한
액체가 아닐뿐더러, 내 손으로 더듬으며 묻히다 보니 대부분 겉에만 살짝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묻고는 아
래로 맥없이 흘러내려 버렸다. 회음을 따라 흐르는 덩어리진
액체의 감각이 끔찍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감각에 몸서리를 칠 여유조차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릭.”
머리 위에서 낮고도 풍부한 음성이 울렸다. 역시나 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몹시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성기를 뱉어 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공은
무표정에 가까운 흐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행위를 시키곤 했다지만 그래도 감은 잡히는 편이었는데, 지금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불길한 미소인지, 안도해도
좋은 미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도리어 마음속에 불안을 부추겼다.
“침대 위로.”

분명 전날에는 침대에서 하자는 애원에도 테이블에서 그런 꼴로 사람을


몰아붙였던 게 바로 대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침대에서 하잔다. 얼마나
더한 짓을 하려는 걸까. 괜한 기대를 하면 실망도 크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의심하고 경계하는 길을 택했다.
내가 잠시 머뭇대는 사이, 대공은 나를 밀어내 떨어지게 하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늦게까지 일을 했는지 전날과는 달리 옷을 갖추어 입고 있던
사내는, 내가 풀어 헤쳐 바지 앞이 벌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들어왔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착장을 하고 있었다. 그와 마주하자마자 곧장 옷부터
벗게 된 나와는 정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나체가 주는 수치심에 귀가 또
달아올랐다.
대공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나를 바라보더니, 침대
를 향해 턱짓을 했다. 두 번 말시키지 말라던 경고가 떠올라 퍼뜩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누워야 할지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은 채 침대에 앉았다. 대공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뜨렸다.
전날에도 옷을 벗고는 있었지만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벗은 몸을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나만큼이나 키가
컸지만 무관보다는 문관 스타일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벗은 몸에 근육이
옹골차게 들어차 있었다. 부피가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살갗 아래 근육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쩍쩍 갈라
져 그 굴곡이 여실히 드러났다. 팔다리의 길이나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좋고, 균형이 잘 잡혀 있었으며, 장인이 깎은 조각상처럼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몸이었다. 지극히 사내다우면서도 흰 피부 결이 몹시
보드라워 보였다.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어 왔고, 갖은 전투로 몸을 단련해 왔던 나였기에
상대의 몸을 보고 위압감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우락부락하고
커다란 인간이라 해도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대공의 벗은 몸을 보는 순간 나는 어떤 위압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이
상황이 혹은 권력이 부여하는 카리스마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의 백옥같이 하얗고 조각상처럼 잘 짜인 몸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엎드려.”

모욕적인 말들을 지껄이지 않을 때의 대공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아까까지는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조금 날카로운 분위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깔아뭉개며 몰아붙이는 사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얼마나 사람을 괴롭힐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걱정되어 암담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그러했듯,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무릎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수그려 팔꿈치와 무릎으로 몸을 지탱했다. 네 발 달린 짐승의 꼴이었다.
이어 내 뒤쪽에서 침대가 잠시 꺼지며 반동을 전해 왔다. 대공이 침대 위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후끈한 온기가 뒤에서부터 닿아 왔다. 긴장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힘을
빼야 한다고 끝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대공이 성기를 내 엉덩이 골에
문질렀을 때는 긴장으로 몸이 더욱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몸이 어제의
통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윽…….”
매끈한 귀두가 입구에 닿아 그 끄트머리가 주름을 벌린 순간, 내 입에서
신음이 샜다. 정말 끄트머리만 들어온 거라 아픈 건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수준임에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입구가 메말라
있어서, 맨살이 주름을 벌리며 들어오는데 살과 살이 쓸리면서 쓰라린
통증이 확 일었기 때문이었다. 통증에 몸이 절로 앞으로 도망갔고 이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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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던 귀두가 맥없이 빠져나갔다.
대공이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통증이 괴로워서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픈 것에도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와의 섹스로 인한 통증은 내가 견딜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신체 단련을 늘 해 왔다고 해도
항문까지 단련했겠느냔 말이다. 통증을 느낄 일이 거의 없는 여린 살에
가해지는 통증은 너무 강렬했으며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쯧.”

뒤에서 대공이 혀를 찼다. 어깨가 흠칫 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나는


몸을 낮춘 채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솔직히 절대로 못 할 것 같았다.
그의 커다란 성기가 떠오르면서 그걸 제대로 된 윤활유도 없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일을…….”

일생일대의 용기를 쥐어짜 내서 입을 열었다. 튀어 나온 것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대공이 그런 것에 동정심이 생겨서 사정을 봐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동정심을 위해 일부러 낸 목소리가 애당초 아니었다. 펠라티오로
목을 그렇게 학대당했으니 성대가 멀쩡할 수가 없어서 나온 목소리였다.
“오일을… 써 주시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조차 모멸감이 들었지만 어쩌랴. 썩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리는 수밖에.
“머리가 이렇게 나빠서야.”

대공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책이었다. 마지막 자존심까지 다 버려 가며


애원까지 했는데 결국 안 들어주려는 것인가. 괴롭고, 억울하고, 분하고, 답
답한 마음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내가 씨발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사람
약점을 잡고 씨발……. 서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그냥 저 새끼를 죽이고
나도 죽어야겠다는 마음만 간절해졌다.
그의 몸이 멸치처럼 말라서 비리비리했다면 아마 더 보지도 않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깨부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잘 짜여진 몸을 본
뒤였다. 실전 경험이야 나보다 없을 테니 주먹을 휘두르면 나가떨어지기야
하겠지. 그러나 내 희망사항대로 단번에 황천길로 보내거나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탄탄한 육신으로 보아 절대 만만한 상대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었다.

“침이라도 뱉어서 쓰든지, 아니면 나한테서 한 발 더 빼서 쓰든지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아…….”

“내 좆물을 뺐다면 내가 세 번은 안 세웠을지도 모르고 말야.”

“…….”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까.”


그 말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한탄조여서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씨발, 근데
반박할 수도 없었다. 내게 허락된 윤활유는 내가 뱉어 낸 체액 덩어리였다.
그러니까 타액과 정액. 다른 윤활유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 두 개를 더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절망한 채로 뒤로 고개를 슬쩍 돌려 힐긋 그를 훔쳐봤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대공의 손에 자그마한 병이 하나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내
눈을 본 대공이 피식 웃으며 명령했다.
“엉덩이 잡아서 벌려.”
그는 병마개를 열어 다른 손바닥에 내용물을 조르륵 부었다. 흘러나온
액체로부터 어제도 맡았던 냄새가 내 비강으로 흘러 들어왔다. 삽입을 돕는
오일이었다.
나는 그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 새라, 얼굴을 침대에 처박아 이마로
상체를 지탱하며 양 손을 뒤로 해 엉덩이를 붙잡았다. 잡고 있기가 버거울
정도로 엉덩이가 근육으로 꽉 차 단단했지만 힘주어 부여잡고 양 옆으로
벌렸다. 그 자세가 주는 수치심은 일단 외면하기로 했다. 모욕감과
수치심은 마일을 죽인 것을 대공에게 들켜 이런 요구를 받은 시점에서 이미
묻어 없앴으므로.
“아……!”

내가 서툰 손길로 만진 탓인지, 귀두가 억지로 열고 들어오려고 했던


탓인지 아래가 이미 약간 부어 있었고 덕분에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자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일을 치덕치덕 바른 탓에 이내 통증은 희미해져
갔다. 그의 손가락 역시 보다 쉽게 안쪽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혼자서도 적실 줄을 알아야지, 응? 느끼는 점도 찾고 말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으 흐으, 큭…….”
“ ……

“언제까지 내가 해 줄 수는 없지 않겠나?”
대공은 짐짓 엄한 말투로, 그러나 다정한 듯이 속삭였다. 오일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마른 내벽이 충분히 젖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깊게 들어온
손가락들이 내벽을 문질러 넓혔다. 내장을 간질이는 탓에 속에서부터
열기가 홧홧하게 올랐다. 안쪽부터 가려운 기묘한 감각에 꼬리뼈부터
정수리까지 척추를 따라 찌릿찌릿한 성감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아!”

손가락이 내벽의 어느 한 지점을 쿡 찌른 순간에는 눈앞에서 섬광이 터지며


삐익, 이명이 울었다. 입이 벌어져 속절없이 신음이 터졌다는 것도 몰랐다.
전신으로 전기가 내달렸다. 스스로 엉덩이를 붙잡고 있는 게 힘들 정도로
몸이 파드득 뛰었다. 허벅지가 멋대로 조여들어 덜덜 떨렸다.
“크읏, 흐……. 흐으…….”

한참을 안을 들쑤시던 대공이 손을 뗐을 때, 내 몸은 온통 땀에 젖어 열에


절절 끓고 있었다. 벌어진 아래가 얼얼했다. 통증과 찌릿한 성감에 한참
시달린 탓에 몸이 노곤했다. 이미 아까의 펠라티오로 한계에 도달했던
몸이었기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공은 여전히 제 성기를 꼿꼿이 세운
채였으니까.
“윽, 크윽……!”
내 손을 치워 내고 엉덩이를 붙잡은 대공은 그대로 주름위에 성기 끝을
맞대고,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꾸욱 눌러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잔뜩
넓히고 벌려 댔음에도, 남다른 부피감에 둔통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안을
가득 채우며 역행하는 이물감 때문에 입을 벌리면 구역질이나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를 악다물어야 했다.
“으, 으흑, 큭…!”

“힘, 빼야지…….”

철썩! 엉덩이에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쌍욕을 할 뻔했다. 미친 대공 이 개쌍놈의 새끼가! 내
엉덩이를 때린 것이다! 어린 시절에도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얻어맞은 적은
없었다. 부모님조차 몽둥이로 패면 팼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지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않았단 말
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나이가 서른도 넘어서……. 잘못한
아이처럼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그것이 주는 정신적 충격이
엄청나서, 나는 잠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의식을 다시 강제로 현실로 끌어온 것은 역시…….
“윽?!”

철썩! 엉덩이를 내리친 손바닥이었다. 돌처럼 단단하던 내 엉덩이가 대공의


손바닥과 어울려 차진 소리를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비단 내 처지나 대공과의 신분차 때문이 아니었다.
“아……!”

엉덩이를 얻어맞은 내가 충격에 휩싸인 틈을 타 미끄러지듯이 쑥 처박혀


내벽 깊은 곳을 후려친 대공의 성기 때문이었다. 그 충격은 가히 몸에
말뚝을 박고 망치로 내려쳐 내장까지 꿰뚫은 것과 비슷했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가 번쩍거리며 점멸했다. 아픈데, 너무 아프고 괴로운데
뭐가 아프고 어디가 괴로운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꺽꺽
거리면서 왜 숨을 쉴 수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쉬이, 착하지?”

- 다음 화에 계속

7.

깜빡거리는 의식 사이로 낮고 달콤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은데, 목소리가 침잠하는 내 정신을 억지로 붙들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엉덩이에 땀에 젖은 맨살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몸을 위아래 양옆으로 비비는 것에 따라 내 내장이 울렁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압박감이 너무 심한데, 그가 움직일 때면 속 안에 가득 들어찬
것들이 꿈틀거리며 속을 헤집어 댔다. 그게 버겁고 힘들어서 복부가 파르르
떨렸다. 언제 엉덩이를 놓았는지, 뒤에 찰싹 달라붙은 대공은 어느새 내
복부에 손을 감고 있었다.
“흐…… 흐으…… 윽…….”

그가 몸으로 내 엉덩이를 짓누르며 성기를 밀어붙였다. 벌어지지 않았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곳까지 억
지로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마치 내 목구멍 깊숙이까지
들어왔을 때 그의 살가죽이 맞닿아 체모가 얼굴에 비벼졌던 것처럼, 지금은
엉덩이에서 그의 체모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대공은
꾸욱 꾸욱 아래를 눌러 댔다.
더 이상 들어올 수도 없는데 들어오고자 안을 밀어 대는 성기에 연신 내
몸이 떨렸다. 밀어 넣는 움직임은 몹시 느긋했지만 안에서 성기가 요동을
치며 내장을 죄 들쑤셔서 구역질마저 치솟았다. 가만히 있어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압박감인데 그가 자꾸만 더 파고들며 꿈틀거려서, 난폭한 침입을
밀어내려고 내벽이 절로 조여들었다.
“하아…….”

대공은 내 귓가에 대고 나른한 신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더운 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귓바퀴를 간질여 어깨가 흠칫
튀었다. 대공은 그런 내 배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겨 안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미 끝까지 박아 넣은 것을 더 밀어 넣으며 내 엉덩이에 제
몸을 비벼 댔다. 대공의 고환이 내 엉덩이에 물컹하게 뭉개졌다. 나는
무력하게 그에게 뒤를 내준 채 시트에 뺨을 대고 끙끙 앓았다.
“여기쯤 왔으려나?”

깊게 박아 넣은 채로 대공이 내 하복부를 문질렀다. 꾸욱 누르기도 했는데,


정말 그 부분에까지 성기가 들어가 있는지 안쪽이 짓눌려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대공은 아랫배를 살짝 힘주어 누른 손을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땀에 젖은 살갗 위를 그의 손이 문질러 내려가 음모가 난
곳에 기어코 손이 닿는다. 무성한 체모 사이에 내 성기가 볼썽사납게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안을 헤집을 때면 자극당해 발기를 했었는데, 어느샌가
삽입의 고통으로 축 늘어지고야 말았다. 대공의 손이 내 성기에 닿았을 때,
예기치 않은 접촉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는 개의치 않고 기어코 성기를
말아 쥐었다. 나는 그 여느 때보다 긴장하며 몸을 경직시켰다. 많은
여자들을 기쁘게 했던 자랑스러운 사이즈였기에 내 성기는 힘이 빠져 있을
때에도 움켜쥐면 손 하나 가득이었다. 근데 그게 지금도 자랑스러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읏…….”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그
것을 말아 쥔 채로 두어 차례 문지르자 몸 안에 간질간질한 ,

열기가 일기 시작했다. 통증으로 인해 굳었던 관절 마디까지 열기가 스미며


몸이 더워졌다. 온몸을 조이고 싶기도 했고 그냥 풀어 버리고 싶기도 한, 간
지러우면서도 야릇한 감각이 성기를 달려 아랫배를 후끈하게 데우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대공의 성기를 내 안 깊숙이 품고 있다는 게 몹시
거북했지만, 남자라는 동물은 성적인 접촉에 약할 수밖엔 없는 법이었다.
종족을 이어 가고자 하는 본능은 성기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자극의 주체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으, 으흐…….”

안에 들어박혔던 성기가, 아주 조금 물러섰다. 억지로 벌어져 있던 내벽이


다물리는 감각이 도리어 강렬한 감각을 선사한다.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자니, 뜨거운 손아귀가 성기를 강하게 옥죄어 왔다. 둥글게 말아 쥔
손이 내 성기를 오르내렸다.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하는 게 괴로운지
야릇한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공의 움직임은 어제처럼 과격하지
않아서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슬쩍슬쩍
튕기듯이 안을 찔러 들어왔다가 빠지는데 그 박고 빼는 박자감이 기가
막혔다.
“하아, 하… 아… 흐읏…….”
느릿한 움직임이 진득하게 이어졌다. 점점 열이 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굴이 뜨거운 것으로 보아 뺨이 잔뜩 붉어진 모양이었다. 대공의 손이
적당한 강도로 내 성기를 말아 쥐고 귀두를 문질렀을 때는 아찔한 자극에
괴롭기까지 하여 나도 모르게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몸을 떨었다. 그의 손
안에서 성기는 꼿꼿이 발기해 꺼덕였다. 뒤를 박힌 채 성기를 세운 내 꼴이
수치스러웠지만 전신을 적신 땀이 아까와는 다른 종류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

대공이 가볍게 내 하복부를 당겼고 그대로 그에게 끌려 들어가 성기가 다시


깊숙이 박혔다. 나도 모르게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 전신의 근육이
꿈틀댔다. 내벽의 조임이 뜻하지 않게 강해졌고 대공이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손아귀에 쥔 내 성기를 주무르며 다른
손으로는 복부를 쓰다듬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땀에 젖은
살갗을 문지르는 손길에 어쩐지 몸이 움칠거렸다. 간지러움에
뱃가죽이 파르르 떨렸다. 가죽만 아니라 속 안의 근육까지 함께. 잔뜩 힘을
주고, 참고, 용을 쓴 탓에 내 배에는 복근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대공은
움푹하게 들어가는 고랑 위로 선을 긋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게 여간
간지러운 게 아니라 절로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 반응마저 즐기듯이
손가락과 손이 내 살갗을 누르고 희롱하며 아랫배에서 윗배로, 옆구리
로……. 그리고 가슴으로 움직였다.
“몸이 좋군그래.”

대공은 양 손으로 내 아래쪽 갈비뼈 위에서부터 가슴을 쓸어 올렸다.


갈비뼈와 그 사이사이의 근육을 누르며 올라가서는 손가락을 쫙 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 검지는 진득하게 유두를 쓸고 지나갔다.
전투를 하고 그를 위한 훈련을 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다 보니, 내 몸은 꽤나
근육질이었다.
“가슴도 크고.”

……그의 말마따나, 가슴 근육도 크고 말이다. 그러나 대공은 대흉근이

발달했다는 의미로 지껄인 게 아니었다. 그는 내 가슴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면서… 그것이 꼭 여자의 가슴이라도 되는 것처럼 희롱하며
품평하고 있었다. 나를 향한 의도적인 조롱이라는 걸 알면서도, 귀까지
뜨거워지며 열이 확 올랐다.
“윽…….”

집요하게 가슴을 주물러 대던 대공의 손이 이내 유두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성감이 몸을 오싹하게 달궜다. 성기나 내벽의 어떤 지점에 가해지는
자극처럼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야릇하면서 간지러웠다. 작은 돌기를
손가락으로 쥐어 문지를 때마다 따끔하게 아픈 듯하면서도 오싹한
성감으로 유두가 딱딱하게 일어섰다. 게다가 성기를 만지는 것보다
미묘하게 더 민망했다. 여자를 애무하듯이 가슴을 주무르고 유두를
희롱한다는 게,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나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탄력이 아주 좋아.”

거기까지였다면, 그래도 제정신으로 견뎠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직후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쪽.

목덜미에 간지럽고도 따끔한 감각을 남기며 이상 미묘하고 야릇하기 짝이


없는 작은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을 때. 전신을 따라 소름이 내달렸다.
징그러워. 그의 좆을 빨면서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징그럽다고! 내 이성과 본능이 동시에 외친다. 격렬한 거부의 경종이
머릿속에 웽웽 울려 댔다.
“크악!”

아마도 그가 예고 없이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지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피어올랐던 혐오감에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가슴을 콱 움켜쥔 채, 대공이
요란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귀두만 가까스로 걸리도록
단번에 빠져나간 성기가, 나를 꿰뚫고 입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기세로
거칠게 안으로 처박혔다. 내 입에서는 신음이 아닌 비명이 쏟아졌다.
“크윽! 아! 아윽! 윽!!”

철퍽철퍽!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엉덩이 어디 할 것


없이 대공의 몸이 거세게 부딪혔다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내벽이
조여들었지만, 빠지는 성기를 잡기에도, 다시 쑤셔 박아 오는 성기를
막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대공의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그
는 도리어 보란 듯이 허리 움직임의 피치를 올렸다. 퍽! 퍽! 퍽! 근육으로
꽉 찼다 싶을 만큼 단련한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대공이 허리를 쳐올렸다.
속이 엉망으로 뭉개지는 것 같았다. 거대한 몽둥이를 넣어 잔뜩 휘저어
내장을 망가뜨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행위였다.
“아, 아프, 아! 아!”

그가 성기를 뺄 때면, 내벽이 들러붙어 함께 딸려 나갔다. 밑이 빠지는


느낌은 아프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빠져나가는 성기를 따라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으며 허공에 붕 떴다가 추락하는 낙하감이 등줄기를 후려쳤다.
분명히 무릎으로 침대를 짚고 엎드려 있는데 허공에 던져진 듯이 눈앞이
아찔했다.
“아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래를 콱 조였다. 아니, 전신에 힘이 들어가서 저절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여졌다
는 게 맞을 것이다. 온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부터 상체를 지탱하지 못해 침대에 널브러진 채 엉덩이만 치켜 든 꼴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시트를 그러쥐었다. 자세가 낮아지자 가슴 만지는 것이
불편해졌는지 대공이 내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나는 도무지 허리를 세울
수가 없었다.
“크아, 하, 아파, 하으!”

아프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아래는 하도 빠르고 강하게 마찰이 되다 보니


마비된 듯이 얼얼할 뿐 다른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너무 많은
감각들이 홍수처럼 몰려들어서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정신이 없었다. 더웠고, 숨이 찼고, 무엇인지 모르게 몹시도 괴로웠다.
내가 정신이 아니었다.
“하아…… 일릭, 일릭.”
대공은 내 가슴을 놓고 허리를 세웠다. 등에서 그의 무게가 떨어져
나갔으나 거친 움직임은 여전했다. 대공은 가슴 대신 내 치켜든 엉덩이를
양쪽으로 움켜쥐고 좌우로 벌리며 깊숙이 성기를 박아 넣었다. 퍽!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밀렸지만 엉덩이를 쥐고 당기는 탓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쑤욱, 성기가 빠져나가고 다시 퍽! 안을 짓이길 기세로 파고들어
왔다. 충격이 너무 커서 등이 덜덜덜 떨리며 진저리가 쳐졌다.
통증이었을까. 아니, 온전한 통증은 아니었다. 통증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 견디기 어려운 어떤 감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느끼는군.”

거칠어진 숨소리만큼이나 거칠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분을 못 이긴


목소리였다. 숨이 찰 정도로 빠르고 격렬한 몸짓이나 거친 목소리나 모두,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폭발하는 폭력적인 쾌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큭, 크윽! 아! 아! 아!”

그가 퍽퍽 찧어 올릴 때마다 내 입에서 하릴없이 신음이 터져 나갔다.


얼얼할 뿐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속이 뜨거웠다. 멋대로
휘저어 대는 성기에 곤죽으로 짓이겨진 듯 했던 몸속이 이제는 완전히 녹아
버린 것만 같았다. 용광로 속에서 녹은 금속이 흐르듯이, 뱃속이 절절
끓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아, 겨우, 두 번째인데, 큭, 역시… 소질이 있잖아? 크윽.”


성기가 짓누르는 지점이 특히 미칠 것만 같았다. 벼락을 맞은 듯이 짜릿한
감각이 송곳처럼 튀어 올라 뇌를 꿰뚫어 지졌다. 눈앞에서 끊임없이 섬광이
터지고, 암전이 반복되었다. 나는 내가 혼돈과도 같은 황홀경에 터질 듯이
발기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대공이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
“아! 아아! 아!”

나는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느끼는지 뭔지도 모르겠고, 그냥 미칠 것


같았다. 대꾸할 정신은커녕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눈가가 홧홧했고, 귀에서는 이명이 울었다. 뇌가 녹아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이, 나 자신이 쉴 새 없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의식이 제멋대로 깜빡거렸다. 감각의 한계였다.
“아아, 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폭발을 한 것도 같았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전신이 바짝 조여들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펄펄
끓어오르던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조여든 순간. 성기 끝에서 하얗게 정액이
터져 나갔다. 입이 멋대로 벌어져서 나는 타액조차 삼키지 못했다.

“ ……!”

대공이 그런 내 골반을 틀어쥐고 당겼다. 퍽! 살과 살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단단한 귀두가 내벽 너머 어느 지점을 짓이겼다. 눈앞에서
폭죽이 터졌고 내 성기 끝에서 정액이 쏘아졌다.
대공은 다시 성기를 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내가 느끼는 곳을, 느낄
수밖에 없는 강렬한 감각을 선사하는 곳을 더 세게 짓눌러 압박했다. 나는
더 미칠 것만 같아서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대공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경련하듯 떨리는 내 몸을 체중으로 억누르며, 그 역시 내 안에 정액을 토해
냈다. 질척하게 젖은 내벽에 감싸인 성기가 꿈틀대는 감각이 선연했고, 그
자극으로 나 역시 멀건 액체를 사출했다.
“아……. 아아…….”

대공의 사정은 두 번째라, 다행히 그리 길지 않았다. 부풀었던 성기가


시들어 가면서 압박감 역시 줄어들었다. 더 이상 내벽 안쪽의 그 미칠 것
같은 곳을 자극하지 않아서 드디어 내 몸에서도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의식을 놓
칠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탈력감에 내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후우…….”
대공 역시 호흡을 고르며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엉덩이조차
더는 세우지 못하고 침대로 무너지려 하는 내 안에서 성기를 쑥
끄집어냈다. 내벽의 점막이 쓸리고 안을 채운 꿀렁한 액체가 딸려 나가는
느낌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그러나 몸이 워낙 뜨겁게
끓고 있어서 소름은 언제 돋았냐는 듯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 대신 피로감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일어나서 대강 몸을 닦고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만 앞서고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운이 없었다. 펠라티오부터 시작해서 오늘 이 정사가 너무
길었다.
침대에 반동이 느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니, 대공이 땀에 젖은 몸 위로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다. 가운을 입고
매듭을 느슨하게 묶은 뒤, 그는 긴 머리카락을 가운 아래에서 끄집어냈다.
그리 어둡지 않게 불을 켜 둔 실내였기에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씻으러 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개만도 못한 새끼…….”

그대로 까무룩 의식이 꺼져 버렸다.


- 다음 화에 계속
8.

나는 아주 건강한 편이었다. 험한 곳에서 잠을 청하고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많았음에도 병은커녕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사람을 태울 듯이 내리쬐는 열사의 사막에서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도 동상을 피해 가지 못할 혹한의 설원에서도 나는 한 번 앓아눕지도
않고 빠르게 환경에 적응해 살아갔다. 동료들이 내 강점으로 이 적응력을
꼽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사람이니만큼 가끔 가벼운 몸살 기운을 느낄
때가 있기는 했지만, 독한 술 한 잔을 하고 땀을 흘리며 자고 일어나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멀쩡해지
곤 했다.
그랬던 나였는데. 건강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강인한 신체의
소유자였는데. 눈을 떴을 때 하반신을 두드린 격통에는 악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몸 안쪽에서부터 피어오르는 통증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통증이 그리 날카로운 건 아니었지만 생소한 곳이 아프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잔뜩 늘어나 있었던 항문도 욱신욱신 아프면서 동시에 쓰라렸다.
부었는지 엉덩이 사이의 느낌이 말도 못하게 생소했다. 그뿐 아니라 허리가
무지근하면서 시큰시큰 아프기도 했다. 몸을 어느 정도 단련한 이후로는
심한 근육통을 느낄 일이 그다지 없었는데, 내가 생전 취할 필요 없었던
자세를 무리하게 강요당했던 탓인지 신체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 덕분에 내가 이런 근육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통증을 참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묵직하고
불쾌한 종류라서 생소해서 그렇지, 칼에 베이고 창에 쑤셔지는 것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처음에야 이질감에 식겁했지만, 역시나 내 몸은 적응력이
좋아서 불쾌한 통증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덕분에 호흡을 충분히 고르며
잠기운을 떨쳐 내는 동안 고통도 어느 정도는 가라앉았다.
몸이 무겁고 아파도 마냥 누워 있을 수 있는 성미가 아니었다. 내장을 쏟아
내기 일보 직전의 검상을 입었을 때에도 일어나서 움직이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음.”

침대 위에 편하게 늘어져 있었던 몸이, 단숨에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숨까지 멈췄다. 가볍게 오르내리던 가슴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그
가슴 위에.
“음…….”

잠꼬대를 하는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대공의 머리통이 놓여 있었다.


어깨와 가슴이 만나는 언저리를 베고 있는 것은 분명 대공이었다. 두피에
가까운 쪽이 회색으로 물든 은빛의 머리카락이 이 세상에 둘일 리가
없었다.
나는 도대체 왜 대공이 내 가슴을 베고 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이 굳은
것만큼이나 머릿속이 단단하게 굳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가 않았다. 그냥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패닉이었
다.
내가 왜 대공과 함께 자고 있단 말인가. 아니, 대공이 씻으러 가는 것
같았지. 그 뒤로 잠들었나? 피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 버렸어?? 아니, 그럼
사람을 깨우든지 다른 방에 가서 자든지 할 것이지 대체 왜 찰싹
달라붙어서 자고 있느냔 말이다.
대공이 내 몸을 베고 끌어안고 자고 있는 탓에 그 모르게 일어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식은땀만 흘렸다. 대공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니 하복부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팔도, 내 다리에 닿는
다리도 느낄 수 있었다.
더더욱 나를 패닉으로 몰아간 것은 대공과 내가 모두 여전히 벗은 몸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내가 그와 이런 저런 짓을 했다고 하지만 남자 둘이 벗은
몸을 맞대고 있는 건 절대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대공의 취향이 의심스러웠다. 이 미친 변태새끼는 나처럼
커다란 몸이 취향이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취향이니까 그 따위 요구를 한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끔찍할 따름이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더 이상 웅얼웅얼하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공은 깊이 잠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머리통을 슬쩍 밀어 베개 위로
옮기고 팔을 떼어 내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잠든 그를 깨우지 않고 몰래
일어나서 이 방을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한참 그런 갈등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헉…!”

대공이 아직 자는지 확인하기 위해 힐끔 시선을 돌린 순간. 마주친 호박색


눈동자에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크게 놀라고야 말았다. 몸이 펄떡 뛰면서
대공의 머리 역시 가슴을 따라 덜컥덜컥 오르내렸다.
“잘 잤나.”

“아, 예…….”

짧은 대답을 내뱉고 나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또 한 번 놀랐다. 내 목소리가


듣기 싫을 정도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소리를 낼 때면
목구멍이 아프기까지 했다. 분비물이 딱히 나오지 않음에도 가래가 끓는
듯이 간지러웠고 이물감이 목구멍에 한가득했다.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맛이 갔나. 답은 금방 나왔다. 억지로 내 목구멍까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성기를 쑤
셔 넣기를 반복했던 저 미친 대공이 범인이었다 .

“고작 한두 시간 잔 것 같은데.”

대공은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자라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나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솔직히 내가 이런 식으로 대공의 거처에서 잠들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침대 위에 올라가도 아침까지 함께 맞을 생각은
없었단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 잠들어서는. 대공이 나를 너무 극한까지
몰아붙인 탓이었다. 나도 모르게 의식을 놓아 버렸다. 이건 흡사 기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이만 숙소로…….”

“흐응.”

대공이 갑자기 이상한 콧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 역시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는 아직 잠이 묻은 얼굴로 내 흉골 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시트가 흘러내려
드러난 몸은 역시나 알몸이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살갗과 짙게 그을린 내
피부의 색상 대비가 묘하게 외설적이었다.
대공은 나를 굽어보며 빙긋 웃었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 있어, 그의 미소는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젖이 크단 말이지.”
그러나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좀
더럽게 느껴졌다.
“헉……!”

이어진 대공의 행동에 나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킬 수밖엔 없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내 가슴을 덥석 입술로 물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은 유륜을
다 덮도록 물고 말캉한 혀로 유두를 굴렸다. 그리고 쭙, 젖먹이처럼 빨아
댔다.
“자, 잠시만.”

낯선 기분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가슴을 빠는 게 뭐 성감이


엄청나게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느낌이 야릇하고 미묘하기 짝이
없었다. 간지러웠다. 오싹해지면서 유두만 아니라 몸 곳곳의 피부 아래까지
가려웠다. 속이 조금 더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식의 애무가 참으로 낯설고 민망했다. 내가 여자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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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놈이 내 가슴에 매달려 가슴을 희롱하는데 그게 마냥 좋을 리가
없었다. 꼭 여자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이건 뒤를 뚫리는
것과는 또 달리 수치심을 가혹하게 자극하는 행위였다.

“ .”

내가 밀어내자 상체를 일으킨 대공이 읊조렸다. 나는 또 반사적으로 내


코앞에 내밀어진 대공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대공은 그대로 내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게 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팔을 움직이니 양손을 머리 위로
침대에 내리누른 자세가 되었다. 팔뚝이 근육으로 두꺼운 탓에 귀에 거의
달라붙었다.
“손 놓지 마.”

대공은 짧게 명령했다. 그는 손으로 방금까지 빨아 타액으로 젖어 부푼


한쪽 유두 주변으로 빙글빙글 반복해서 원을 그렸다. 이따금씩 손톱으로
유두를 튕길 때면 내 몸이 작게 흠칫했다. 자세 탓에 수치심이 한참 더
배가되었다. 그를 밀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
늦은 후회였다. 나는 손을 맞잡은 채 팔을 들어 올려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엔 없었다.
“크기는 큰데, 그리 예민하지는 않은 것 같아.”

젖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집요하게 문지르며 대공이 품평했다. 근육에 힘을


주지 않고 있어 탄력은 있지만 단단하지는 않은 가슴을 손 안 가득 잡아
주무르기도 했다. 정말 여자 가슴을 애무하듯이 내 양쪽 가슴을 움켜쥐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풀며 주물렀고 손바닥으로 가슴 전체를 슬슬
문지르기도 했다. 살이 볼록하게 올라오도록 쥐더니 혀를 길게 빼서 유두를
혀끝으로 비비기도 했다. 그가 가슴을 빨 때면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그럴 때면 다른 손은 또 반대편 유두를 잔뜩 비비고 문지르며
희롱해 댔다. 간지럽고 야릇한 기분이 뭉근히 차올라 몸을 뒤척거리고
싶었다. 물론 굳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대공이 빨리 내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빌었다.
그러다가 한참 지속된 자극에 익숙해지면 내 유두가 말랑해지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물고 빨고 만진다 해도 유두는 대단한 성감대는
아니었다. 약간 야릇한 정도로 오른 성감은 계속 고조된 채로 유지되지
않는다. 한껏 고조되면 다시 가라앉기 마련인데, 대공은 누가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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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몹시도 끈질겼다. 유두가 말랑해지면, 다시 딱딱해질 때까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벼 댔다. 여자의 유두와 비교하면 만질 것도 없을
자그마한 돌기인데도 집착이 보통 집착이 아니었다. 얼마나 만져 댔는지
종내에는 껍질이 벗겨진 것처럼 쓰라릴 지경이었다. 아, 미친 새끼.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짓씹는 것으로 고통을 참아 냈다.
“헉?!”

갑자기 대공이 내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무릎을 잡아 허벅지를 확 벌린 대공이 벌어진 다리 사이에 몸을 끼운
것이다. 씨발, 혹시? 설마? 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한 시간밖에 안
잤다면 대공이 내리 두 번을 싸고 고작 한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또 세운다고? 또 하자고??
“아윽!”

그러나 내 몸은 절대로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공의 손가락이


밀려들어 온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미 퉁퉁 부어 있어 손가락 하나를
넣는 것만으로도 쓰라리고 아팠다. 그런데 대공은 기어코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어 내벽을 벌렸다. 다물려 있던 안쪽에 체온보다 낮은 온도의
공기가 들어오는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대공은 잠시 내 유두에서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말했다.
“좆을 박지는 않을 테니 힘 빼.”

“으, 으윽…….”

“이거야 원, 질척질척하잖아.”

그의 말대로 대공의 손가락이 헤집고 있는 항문 안쪽에는 액체가 고여


있었다. 씻는 것도 잊고 잠들어 버려서 미처 빼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처음 그에게 대 주었던 날, 나는 그 새벽에 숙소에 돌아와 지친 몸을 이끌고
대공이 안에 싸질러 두었던 정액을 긁어 빼냈었다. 용병대에 남색을 즐기는
녀석들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뒤처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공의 체액이 내 안에 고여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더러워서 차라리
긁어서 빼는 쪽이 나았다. 이번에도 당장 숙소로 돌아가서 안을 비워
냈어야 했는데.
“큭, 크, 으윽…!”

손가락은 부드러우면서도 가차 없었다. 퉁퉁 부어 버린 안을 깊게 찌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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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없이 벌렸고, 손가락을 구부려 안을 채운 액체를 끌어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 다시 오므라든 입구를 벌리며 다시 쑥, 또 다시 푹.
음탕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아래에서는 연신 질컥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이를 악 물며 뒤통수를 베개에 뭉개며 비볐다. 대공의 성기가 잔뜩
치댔던 내벽은 손가락이 살짝만 건드려도 쓰라리고 욱신댔다. 그런데
대공은 거침없이 내벽을 누르고 벌린다.
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정액을 빼낼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안에서
요동치듯 움직이는 손가락에 통증이 피어올랐다.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정쩡히 벌어진 다리가 맥없이 파르르 떨릴 따름이었다.
“아…!”

멋대로 손가락으로 아래를 헤집는 것도 모자라, 대공은 내 가슴을


물어뜯었다. 근육으로 부푼 가슴에서 가장 볼록한 부분을 크게 베어
물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가고 욱신거리는 둔통이 광범위하게 번졌다.
대공은 물었던 자리를 핥고 빨았다. 그리고 다시 유두를 물어 젖먹이
아이처럼 빨기 시작했다.
“크윽… 큭, 윽…….”

나는 통증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숨을 가늘게 쉬어 내는 가슴이


낮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잔뜩 긴장한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 손가락 마디가 아프도록 손이 쥐어졌으나 이내 힘이 빠져
버렸다. 무력하게 늘어져 고통을 참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마며
콧잔등, 등줄기에 식은땀이 뱄다. 나는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이를 악물었다.
“하아…….”

더운 숨을 뿌리며 드디어 대공이 입을 뗐을 때, 내 유두는 어느 쪽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대공은 그 새빨간 돌기 위에 쪽, 입을
가볍게 맞추는 것으로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다.
다행히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래를 잔뜩 들쑤셨던 손가락도 스윽
빠져나갔다. 대공은 체액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을 벌어진 내 허벅지 안쪽에
대강 문질러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과적으로는 뒤처리를 해 준
셈이었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가 이런 뒤처리의 필요성을 알고 해 준
것 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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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마시겠나?”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진 대공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침대의 필러
옆쪽으로 늘어뜨려진 태슬을 잡아당겼다. 단순히 장식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하인을 부르는 벨이었다.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당혹감에 나는 급히
시트로 몸을 가렸다. 나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대공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차림새가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하인이 들어와서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스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다.
“얼음. 그리고 간단히 씻을 것을 가져와라.”

하인은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는 그가 말을 하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대공의 사적인 영역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이었다. 대공이 이런
비열한 짓거리를 오직 나에게만 제의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의 변태적인
섹스 취향도 하루 이틀 된 게 아닐 테니, 그가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이
별관에는 마땅히 입이 무거운 시종을 곁에 두어야 했을 것이다. 아이는
아마 말도 하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함이 틀림없었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입맛이 조금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다른 하인 두 명을 대동해 안으로 들어왔다. 두
명은 김이 풀풀 나는 대야를, 다른 한 명은 수건과 얼음이 든 병을 들고
있었다.
시종들은 바지런히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대공은 그들에게 달리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손을 들어 올렸다. 온몸으로 자신이
지배자임을 드러내듯이, 몹시도 거만한 태도였다. 시종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명령이었다.
맨 처음 들어왔었던 시종이 얼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수건 한 장을
뜨거운 물에 적시고 물기를 짜서 대공에게 다가왔다. 시종은 그 손이
대단히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받들고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감싸 꼼꼼히
닦아 내었다. 새로 물수건을 갈아서 한 번 더 공들여 닦고 난 뒤 대공이 손을
물렸고, 그의 턱짓에 시종은 유리잔에 얼음 몇 개를 넣고 물을 따랐다. 그
사이 다른 시종이 입혀 주는 나이트가운을 걸친 대공은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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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겨.”
씻겨라. 그 명령에…….
“잠, 잠깐.”

세 명의 하인이 나에게 다가와 내가 몸을 가리고 있는 시트를 잡아당겼다.


당혹감에 내가 시트를 꽉 그러쥐어 당기며 버럭 소리를 쳤음에도, 하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빨리. 나 졸린걸.”

대공이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시종들이 더욱 단호한


태도로 시트를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한 명은 일단
수건부터 더운 물에 담가 따뜻한 물수건 만들기에 들어갔다. 나는 세
하인을 노려보며 대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각하, 제가 알아서 씻겠습니다. 그리고 주무실 수 있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돌아가서 씻겠습니다.”


“이미 그대가 세상모르고 잘 때 그들이 그대를 씻겨주었는데.”

“……예?”

“그럼 정액 범벅인 채로 그대로 재울 수는 없지 않겠나.”

정신이 순간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다 결국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렸으니 널브러진 내
꼴이 어땠겠느냔 말이다. 의심을 사는 것과 현장을 들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대공의 하인들이 나를 그의 새로운 장난감이겠거니
추측하는 건 견딜 수 있어도, 내 몸에 남겨진 정사의 흔적을 그들이 보는 건
못 견딜 만큼 수치스럽단 말이다. 그런데 뭐……? 이미 다 봤다고……?
“흐응, 아니면 내가 씻겨 줘야 하는 걸까. 나한테 박아 달라는 게 내 손길만

타고 싶단 거였다면야, 내 특별히.”
“그건…….”

아니,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나 알아서 씻겠다는 의미였지, 대공에게 씻겨


달란 얘기는 단연코 아니었다.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부정하기도 전에 대공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대 몸을 구석구석 씻겨 줄 생각을 하니 좆이 터질 것 같군.”

“아, 아닙니다. 그냥, 그냥 제가 알아서.”

“다들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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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애타게 그를 불렀지만, 하인들은 소리 없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


대신 대공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향해 다가오며 그가 가운
끈을 잡아당겼다. 가볍게 매듭지어져 있던 것이 사르륵 풀렸고,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새하얀 나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손가락만으로도 아파 죽겠다고 난리를 쳐서 내가 몰랐네. 그렇게
부었는데도 박아 주길 원하고 있었다니.”
나는 이제 저 새끼의 저 ‘네가 원한다니’하는 식의 말투에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씨발, 내가 원하는 게 절대로 아닌데도 내가 원한단다. 저가
하고 싶은 짓들을 강제로 하면서 내가 원하니 해 준다는 수혜적인 태도로
나오니 내가 억울해서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금방 고장 나 버리니까. 오늘은 참자, 응?”

그리고 나를 위해 준다는 저 위선적인 태도에는 구역질이 났다.


“입 벌려.”

“각하…….”

“그렇게 뒷구멍으로 받아먹고 싶나? 그럼 엎드려.”

씨발. 미치고 팔짝 뛰고 구역질을 하면 뭘 하겠나. 진짜로 정신을 놔 버릴


것도 아니고, 대공 앞에서 토악질을 할 수도 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구역질과 함께 대공의 성기를 삼키는 것뿐이었다.
“우읍…….”

대공이 정말로 박으려 들기 전에, 나는 급히 그의 성기를 찾아 물었다. 말은


좆이 터질 것 같다면서, 내 입에 들어온 것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갈증을
느끼며 버석하게 말랐던 입안에 반사적으로 타액이 솟아올랐다.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역시 죽을 수는 없었으므로, 입 안에 가득 찬 것을 빠는
수밖엔 없었다.
“일릭.”

그의 부름에 나는 성기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 입안을 채우고 있는 말랑말랑한 성기는 금방 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부풀어 갔다. 이렇게 된 이상 완전히 세워서 사정시키지 않는
한에는 날이 새도록 빼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대공은 그런 인간이었다.
“흘리면 내가 닦아 줘야 할 게 많아지니까,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삼켜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해.”

씨발…….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놓고, 대공은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수줍다는 듯이 속삭였다.
“나에게 씻겨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안 해 봤거든. 하인들보다 서툴

수밖엔 없으니 그대가 이해를 해 줘.”


나는 그 순간 절실히 깨달았다. 대공이 두 번 같은 말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하나를 제안했을 때 그걸 거부하면, 그 뒤에는 더더욱 괴로운 꼴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대가 원하니 하고는 있지만, 피곤하긴 피곤하군.”

내 머리채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겨 성기를 입 안 깊숙이로 밀어 넣으며


대공이 읊조렸다. 힘을 받기 시작한 성기가 목구멍을 건드렸다. 이미 잔뜩
붓고 상처가 난 탓에 통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안을 치고 빠지며 드나드는
성기는 자비가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졸리니까, 빨리 끝내고 자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머리를


움직이게 했던 이전의 펠라티오와는 달랐다. 손은 똑같이 머리채를 쥐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성기가 빠르게
목구멍을 유린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괴로워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살이 내 얼굴을
때리며 성기가 깊이 처박혔다. 내 턱 언저리에 고환이 짓뭉개지기도 했다.
“세게 빨아.”

머리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폭력적으로 드나드는 성기에 정신이


남아나질 않던 중이었음에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귓가에 꽂혔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성기가 입안과 목구멍만 드나드는 게
아니라, 머릿속까지 휘저어 뇌를 곤죽으로 만든 것 같았다. 다만 그 명령을
이행해야만 편해진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래서 무작정 빨았다. 구역질이
치솟고 어지럽고 졸도할 것 같았지만 입안에 고이는 타액과 비릿한 체액을
죄 삼키며 입안에 들어온 것을 빨고 또 빨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언
제 사정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그가 내 .

머리를 콱 짓누르며 사정을 했고, 내 머릿속에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라는


명령이 각인되어 있어, 정신없이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액체를 삼켰다. 그가
요구하는 대로 힘을 잃고 난 성기를 조금 더 핥고 빨기도 했다. 잘했다는
칭찬이 떨어졌던 것도 같았다.
대공은 손수 수건을 물에 적셔 와서 내 몸을 닦아 주었다. 그가 한참 물고
빨았던 내 가슴을 문질러 닦고, 다리 사이에 말라붙은 체액들도 말끔히
닦아 냈다. 해 본 적이 없어서 서툴다는 것치고는 괜찮은 솜씨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제야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흘러내린
눈물이 말라붙었는지 얼굴이 따끔했다.
얼굴을 마지막으로 젖은 수건을 대충 던진 대공은 나에게 물을 먹였다.
얼음 조각이 씹혔다. 나 같은 용병 나부랭이는 아주 추운 지역에 가지 않는
한 구경도 하기 힘든 게 얼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즐길 새가 없었다. 너무
차가워서 도리어 목이 아팠다. 달리 선택지가 없어서 꿀꺽꿀꺽 바닥이 날
때까지 마셨지만 해갈이 그리 달지가 않았다.
내가 물을 다 마시고 난 뒤 대공은 나를 다시 눕게 하고 내 옆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아까 잠이 깼을 때와 같이, 내 팔을 베고 누워 한쪽 손을 내
가슴 위에 얹었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할 기운도 없었다. 몸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쳐서 그대로 혼이 몸에서 탈출할 기세였다.
“흠, 근데 아까 잠들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하나?”

대공이 물었다.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바로 씻으러 들어가는 그에게 말을 건 적도 없었다. 그러나 길게
얘기를 하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역시.”

의미 모를 말을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째서인지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낮게 웃기까지 했다. 웃으면서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아까처럼 성적인 접촉은 아니었다. 설령 성적인
접촉이었다 해도, 내게는 더 이상 그를 받아 주고 있을 여력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역시나 정신이 너무 지쳐 있어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마음이었
다. 자포자기의 심정 속에 의식이 희미하게 멀어졌다.
이내 암전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9.

“여어, 일릭.”
용병대 숙소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체즈번이 다가왔다. 트레이에 오트밀과
빵 따위를 받아 온 녀석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힐끔 녀석을 한번
쳐다본 뒤 다시 내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도시에서 먹는
식사였기에, 단체 배식임에도 질이 나쁘지 않았다.
“목소리 아직도 안 나와?”

“나오지만 목이 아파.”

대꾸하는 내 목소리는 거의 바람 새는 소리에 가까웠다. 들릴까 말까 한


작은 소리였는데, 고작 그 정도 소리를 내기만 해도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우스운 건 지금이 그나마 나아진 상태라는 것이었다. 지난
며칠간은 소리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아니, 정말 대공이 너한테 대체 무슨 짓을 시키기에 며칠 만에 이 꼴이 돼?

너 잘 안 아프잖아.”
굳이 비밀유지 조항이 아니라 해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녀석도 내게서
대답을 듣고자 했던 게 아니라 마주 한숨을 내쉬고는 식사에 몰두했다. 나
역시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체즈번 녀석이 대공을 언급한 순간 식욕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도무지 대공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추가 계약은 지금

협상중이라던데, 정작 너는 당장 들어와서 일을 하게 하고……. 마일 죽인


범인 찾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성에서 자꾸 귀찮게 한다며 파빅이
씩씩대더라.”
“…그래서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데?”

“글쎄다. 대장이 이것저것 주워듣고 온 것 같기는 하더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저절로 턱


에 힘이 들어가서 이가 악다물어졌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얼굴에서 최대한 힘을 뺐지만 긴장감에 몸이 조금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인은.”

“검상. 심장을 관통했다던데.”

“…마일이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아무튼 행방불명 된 날이나 그 다음 날쯤 죽은 걸로

추정하고 구역을 나눠서 탐문을 하고는 있는데……. 모르겠다. 솔직히


마일놈 죽은 거에 그렇게 정성들여 복수하고 싶은 놈이 몇 명이나 되겠냐.
우리 명예를 위해, 대장을 위해 마지못해 하는 거지. 어차피 이달 말이면
귀환하니까 그때까지만 대충 버티면 되지 않겠어? 다들 그런 마음이지, 사
실.”
나도 체즈번의 말에 크게 동의하는 바였다. 내가 죽인 게 아니었어도
체즈번과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대장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일새끼는
정말 죽어도 싼 자식이었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칼
맞고 객사했을 새끼란 거다. 그런데 운 없게도 하필 내가 죽였을
뿐이지…….
“그리고 만약에 마일새끼 죽인 게 우리 중 하나라면, 그 새끼 죽였다고

동료를 처벌해야 한단 거야?”


목이 아픈 것을 핑계로 대꾸를 하지 않은 나는 묵묵히 몇 숟가락 남지 않은
오트밀을 마저 떠먹었다.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체즈번은 혼자
뭐라고 더 투덜거리다가 식사를 마쳤다. 대다수의 용병들이 체즈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 혹시 꼬리가 잡힌다고 하더라도 도망칠 구석은 있을
것 같아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아, 참. 너 없는 동안 이런 누가 찾아왔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체즈번이 나를 붙잡았다.


“누구?”

“리리엘.”
리리엘. 그녀는 내가 마일을 죽인 뒤 만났던, 나의 알리바이가 되어 주는
여자였다. 대공과 계약을 한 뒤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 전까지는
말을 맞추기 위해 그녀에게 꽤나 공을 들였었다. 혹시라도 용병대에서 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행적을 캐
다가 그녀에게 닿았을 때, 괜히 쓸데없이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만난 곳이 마일이 죽은 물레방앗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이야기라든가. 그렇지 않아도 라도반이 내 동기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마일이 사라진 날 그가 죽은 장소에 내가 가까이 간 적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용의선상 1순위에 오를 게 분명했다.
그런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해 나는 적절히 그녀의 입을 막아 둘 필요가
있었다. 재가를 원하는 과부라는 점에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만큼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므로 나를 위해 조금의 거짓말은 해 줄
것이었다. 만나자마자 불이 붙어서 헛간에서 관계를 가졌다는 건 당신의
명예에 그리 좋은 얘기가 아닐 테니, 누가 나와의 일에 대해 묻거든 내가
집으로 찾아간 걸로 얘기하자. 그녀를 위한다는 듯이 속삭이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도리어 고마워하기도 했던 그녀였다.
“자기 집에 좀 들러달라고 하던데.”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쩌자는 거야.”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녀석에게 으르렁댔다.
숙소로 돌아오지 못하고 대공의 곁에서 기절하듯이 잠들 정도로 대공에게
혹사를 당했던 그 다음 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하던
대로 출근을 했던 나는 대공을 만나지도 못했다. 필요하면 부를 테니 그
전까지는 용병대에 머물러 있으라는 전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소리였다.
그래서 그 뒤로 지금 며칠째 숙소에 머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걸 이제 와
전달해 주다니. 며칠 동안 내게 소식이 없어서 그녀가 영문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게 아닌가.
“아니, 뭐……. 잊고 있었지.”

붕어 대가리 새끼. 파빅이 체즈번에게 했던 욕들을 속으로 쏘아 주며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리리엘이 괜한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적어도 용병대가 떠나는 이달 말까지는 그녀를 내 편으로 확실히 붙들어
두어야 했으니까.
숙소에서 뛰쳐나온 나는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간이지
만 그녀가 부디 집에 있기를 빌며.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급했다. 마음은 그보다 두 배는 더 조급했다.
뺨을 매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내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일릭.”

나를 부르는 음성은 높고도 부드러웠다. 여인의 교태 어린 목소리만큼 듣기


좋은 게 있을까. 막 잠에서 깨어 혼몽한 화중에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말려 올라간 입 꼬리에 쪽,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몹시도 귀여운 입맞춤이었다.
“많이 피곤한가 봐.”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몇


번 문지르고 나니 눈을 제대로 뜰 수 있었다.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를 굴리니 시야에 하얗고 고운 얼굴이 잡혔다. 부드러운 연한 금빛의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새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속상하게, 목소리도 완전히 상해 버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가 내 팔을 당겼다. 그녀를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더니 그녀가 내 손에 머그잔을 쥐여 주었다.
“목에 좋은 거야. 좀 챙겨 줄 테니까 물 마실 때마다 같이 타 먹어.”
그녀의 배려에 가슴 속이 조금 간지러워졌다. 역시 여자가 좋았다. 이런
다정함이나 배려심은 둔하고 섬세하지 못한 남자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타준 진한 차는 달착지근한 게 맛도 나쁘지
않았다.
“대공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며?”

“음.”

“일릭, 그럼 계속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앞으로도 쭉?”

“계약 기간 동안은, 아마도.”

계약서에 계약 기간이 얼마로 되어 있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제대로 읽지도 않았던 탓에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너무
자포자기의 상태였으므로, 내게 월급을 얼마나 주는지, 용병대가 떠나고 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뒤의 내
거주지는 어떻게 되는지, 계약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따위를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또 내게 의향을 한번 묻기는 했지만 계약서
자체는 파빅과 대공이 작성한 것으로, 어차피 내게는 크게 선택권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아아, 너무 좋아.”

내 대답에 리리엘이 나를 폭 끌어안았다. 차를 마시고 있던 중이었기에


뿜을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넘긴 나는 그녀의 가녀린 등을 안아
토닥여 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운 것 같았다. 천진하게 웃으며 몇
번이고 내 입에 쪽쪽 입을 맞췄다.
“나 솔직히 헤어지기 섭섭했거든. 이 나이 먹으니까 연애할 만한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고…….”
“으음.”

“아예 자기가 여기에 정착했으면 좋겠다. 응? 대공님께 잘 보여서 쭉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신이시여……. 무신론자인 나였지만, 지금은 신을 찾을 수밖엔 없었다.
설령 악마라도 좋으니 나를 이 상황에서 구해 주기만 한다면 십일조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용병 생활… 너무 위험하잖아. 또 어디 전쟁터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나 자기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솔직히 내가
그녀를 착각하게 했기 때문에, 또 앞으로도 계속 어느 정도는 나에게 빠져
있게 해야 했기에 여기서 그녀의 환상을 와장창 깰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장단 맞춰 나 역시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꾸준히 어필해야 했다.
사랑하지만, 용병이라는 내 일 때문에 떠날 수밖엔 없다. 이런 멘트를 치며
좋은 기억만 남기고 눈물의 이별을 해야 앞으로도 깔끔한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이용하는 내가 비열한 놈이긴 했지만, 나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책임질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당장 용병 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리리엘.”

대답을 하기 힘들 때 쓸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다. 내 부름에 그녀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고개를 들
었고 나는 조막만한 얼굴에 자리 잡은 예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눈가에 눈물마저 맺혔던 그녀였지만 이내 입맞춤에 깊게
빠져들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뒤섞였다.
여자를 유혹하는 달콤한 말은 못 해도 키스에는 자신이 있었다. 간지럽고
부드럽게 혀를 움직이다가 거칠게 탐하고, 잡아먹을 듯이 굴다가도 애를
태우며 희롱하는 입맞춤에 녹아나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리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맞춤을 거듭함에 따라 그녀는 콧소리를 울리며 내게
빠져들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뗐을 때, 리리엘은 발갛게 물든 얼굴에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코끝에 쪽, 입을 맞추고 나는 천천히 그녀를 떼어 냈다.
이대로 한 번 더 안아 주는 것도 좋겠지만, 대공에게 심하게 시달려 보니
대공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두고 싶었다. 또
아쉬움을 남겨 두어야 그녀가 더 나에게 안달할 것 같았다.
“저녁 해 줘.”

“응……. 자고 갈래?”

“대공께서 언제 부르실지 몰라서 들어가 봐야 해.”

“아아……. 알았어. 그럼 얼른 준비할게. 씻고 조금 더 쉬어.”

“그래.”

그녀는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내게 몇 번 더 입을 맞춘 뒤에야 방을


떠났다. 나 역시 침대에서 일어나 수건에 물을 적셔서 몸을 닦았다. 확실히
여자를 상대하는 것과 남자를 상대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둘 다
정사라고 부를 수 있다 해도 리리엘과 하는 쪽이 확실히 몸도 마음도
개운했다.
대공과 하는 건 골수까지 쪽쪽 빨리는 것 같았다. 비단 내가 남자라서
대공을 상대하는 게 더 힘든 게 아닐 것이다. 내가 남자라 체력이 좋아 잘
버티면 버텼지, 만약 대공을 상대한 게 리리엘이었다면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게 틀림없었다. 씨발, 그런 새끼가 하필 내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게 나에게는 불행이요 비극이었다.
내가 씻고 옷을 입은 뒤 리리엘이 식사 준비를 해 놓고 나를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내 생각보다 한참 빠르게 그녀가 문을 열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일릭? 용병대에서 당신을 찾으러 왔는데.”


“음?”

갑자기 용병대에서 나를 무슨 일로 찾으러 왔을까. 의아함에 방에서 나가


보니, 열린 현관문 한 걸음 밖에 체즈번이 비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를
이곳까지 찾으러 온 게 꽤나 배알이 꼴린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성에서 너 들어오라고 호출.”

“…아아. 리리엘, 나 외투 좀.”

리리엘은 내가 저녁을 먹고 가지 못하게 된 것에 순간 우울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이내 들어가서 외투를 챙겨서 나왔다. 손수 옷을 입혀 주려고
하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시중을 받았다. 체즈번은 대단히 부럽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나 나나 험상궂은 건 똑같은데 왜 나에게는
여자가 꼬이냐는 그런 불만스러운 눈이었다. 나는 가만히 혀를 찼다.
여자들은 원래 과묵한 남자를 좋아하는 법이라고 돌아가면 한마디 해 줄까
싶기도 했다.
“이만 가 볼게.”

“응…….”

나가려는데, 리리엘이 문득 내 팔을 잡았다. 굿바이 키스라도 원하는 걸까


싶어서 고개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입을 맞추는 대신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체즈번에게 보이지 않도록 내가 몸으로 그쪽을 막게
하며,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 사람, 며칠 전에도 나 찾아왔었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이 은밀한 목소리였다.


“얼마 전 자기 행적에 대해 묻더라? 같이 있었던 게 맞냐고. 어디서

있었냐고.”
그 순간 내 심장이 철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몸도 머릿속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리리엘이 나에게 쪽 입을 맞추었는데 반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는 그 순간 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부르지 않아도, 자기가 먼저 와 줄 거지?”

묻는 얼굴에는 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처음 파빅
과 함께 대공의 성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 내가 성에 온 것은 늘
늦은 밤이었다. 해야 하는 일이 그렇고 그런 종류였으니 대낮에 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대공성에서 온 하인은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되지 않은, 해가
버젓이 떠 있는 오후에 나를 성으로 데려갔다.
심지어 하인 역시 말 못 하는 별관의 하인이 아닌 다른 하인이었다. 별관의
하인들처럼 어리지도 않았다. 40대로 보이는 하인은 나를 곧장 성으로
데려갔다.
성에 도착했을 때, 여느 때와는 달리 나는 대공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늘
외진 곳의 통로를 통해 별관으로만 다니다가 으리으리한 복도를 걸으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부와 권력이 주는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대공이 정말 나와는 다른 계급의
사람이라는 것을. 원래대로라면 용병인 나로서는 얼굴 한번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런 고귀한 혈통의 높으신 분이 어쩌다 그런 변태가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세상 모든 것을 손쉽게 손에 넣다 보니 더 큰 쾌락, 더
자극적인 쾌감을 좇다가 그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귀족 중에 취향이
더러운 놈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대공 역시 그런 부류일 것이었다.
“들어가시지요.”

본성의 하인은 나에게도 제법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게 나를 조금 더


거북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여느 귀족가의 하인이 그러는 것처럼
오만방자한 태도로 사람을 천대해 주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열린 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벽 한 쪽을 거대한 창문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 정오의 빛이
새하얗게 쏟아지는 방이었다. 바닥의 카펫 색이 바랠 텐데. 그런 엉뚱한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천문학적인 부를 지녔을 대공은 신경도 쓰지
않을, 평민인 나니까 하는 그런 궁상맞은 걱정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10.

내 월급을 평생 모아도 사지 못할 화려한 카펫이 깔려 있고, 만드는 게


가능키나 한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크기의 유리창이 벽을 가득 채운
호화로운 방. 장식품이 그다지 없어 일견 단조로워 보이나 벽지나 가구
무엇 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게 없는 집무실에서 대공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유백색의 원목 테이블에 앉은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일릭.”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각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예법에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 격식을 차린답시고 주워들어 두었던


것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서 올린 인사였다. 그의 사적인 침실이 아닌
집무실에서 만났으니 예의를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목소리 하고는.”

원인 제공자인 주제에 대공은 조금 놀랐다는 투로 수려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였고 나는 조금 더 대공에게 다가갔다. 나는
하얀 책상에 몸이 닿을 정도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감기?”

“아닙니다.”

“그럼?”

씨발, 그냥 아프면 아픈가 보다 할 것이지 이유는 왜 묻는단 말인가.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맹렬히
갈등 중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더 심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덕분이었다. 솔직히 대답하고 싶지는 않은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말주변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흐음. 일릭.”

대공이 나를 재촉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느긋한 미소에 나는 그가 이미


답을 알고서 일부러 나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발.
튀어나오려는 욕을 억지로 삼키며 나는 애써 무덤덤한 목소리를 꾸며
대꾸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각하의… 성기를 빨고 나서 목을 좀 다친 것 같습니다.”


“하하.”

기어코 내 입에서 수치스러운 소리를 끄집어 낸 게 퍽 만족스러웠는지


대공은 홍소를 터뜨렸다. 이쯤 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 씨발, 놀려라 놀려. 그런 마음으로 또 자포자기를 해 버렸다.
“그대 손처럼 말이지.”

“제 손이요?”

“그래. 자꾸 빨다 보면 목구멍에도 굳은살이 밸 지도 모르지. 그럼 안 아플

거다.”
씨발놈…….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욕을 주워 삼켰다. 언젠가 진짜 대공을
한 대는 때릴 것 같았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 그냥 지금 패 죽이고 나도
자살해 버릴까. 자꾸만 그런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아, 하루 종일 지루한 탁상공론을 듣고, 서류 따위를 봤더니 말이지.

머리도 아프고, 짜증도 나고.”


대공은 반질반질한 백색의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종이들을 성의 없이 툭
건드리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의자를 주욱 뒤로 밀어 책상과 의자 사이의
공간을 넓혔다. 그다지 푹신해 보이지도 않는 의자에 나태한 태도로
비스듬히 몸을 기댄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툭툭, 제 허벅지를
치고는 말했다.
“앉아.”

“…….”

습관적으로 또 예? 하고 되물을 뻔 했다. 씨발, 제 머리가 아프면 제 머리만


아플 것이지 왜 내 머리까지 아프게 한단 말인가. 혈압이 오르는지 뒷골이
싸하게 당기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잘 움직이려 들지 않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되물어서도 안 된다. 싫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가 말이 아닌
몸으로 내게 새긴 규칙들이었다. 제정신으로 그 규칙들을 따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인내심이 금방이라도 바닥을 드러낼 것 같았다.
“…무거우실 텐데요…….”

“안 무겁게 앉아야지.”
그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나를 나무랐다. 씨발. 나는 다시금 튀어나오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는 욕설
을 삼키며 다리를 벌려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말이
걸터앉았다지, 몸만 맞닿았다 뿐 내 체중의 대부분을 내 다리 힘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대공이 내 엉덩이를 제 쪽으로 당겨 조금 더 앉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 다리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서른 넘은 시커먼 용병이 꽃같이 예쁜 대공의 다리 위에 앉다니……. 정말
누가 볼까 무서울 정도로 수치스러운 꼴이었다. 열이 올라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정작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는 나른한 얼굴로 내가
입고 있는 셔츠 앞을 풀어 헤쳤다. 그렇게 가슴을 드러내 놓고 그는
근육으로 두꺼운 가슴에 작게 도드라진 유두를 빤히 바라보았다.
“며칠 일 없이 쉬었을 텐데. 그대는 별일 없었나.”

사람 불러다 놓고 차 한잔 내줄 줄 모르는 인간이 다정하게 안부를 다


묻는다.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태도였지만 이제는 그가 제멋대로인
인간이라 다정함조차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찜찜하던 곳을 긁어 준 셈이긴 했다. 대공과 나의
체위가 이런 대화를 하기에 몹시 부적절하다 싶었지만, 나는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 의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심?”

“……예. 용병대 쪽에서 제 행적을 캐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대장의 아들이

실종된 날… 죽은 날의 행적을요.”
체즈번은 이전에도 리리엘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체즈번이 나에게 말을 늦게 전달한 건 잊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 행적을 쫓고 있던 도중 마침 리리엘이 나를 만나러 용병대에
찾아왔고, 그 덕에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어 만나러 갔던 것이다. 마일이
죽은 날 내가 리리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리리엘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리리엘이 내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었을 테니 용병대의 의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잠시 자문해 보았지만, 리리엘이 체즈번에게
무어라 대답했는지 듣지 못했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약속대로
집에서 만났다고 증언을 해 주었다면 용병대에서 내게 씌운 혐의가 조금
가벼워졌을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또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바로 리리엘이었다. 그녀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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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똑똑했다. 자신을 찾아와 나에 대해 묻는 체즈번을 보고, 내가 뭔가 숨
겨야 할 것이 있어 그녀에게 말을 맞춰 달라고 부탁했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찾아오라고 말을 하던 눈빛이
잊히질 않았다. 나는 네가 용병대로부터 숨기고 싶어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그자가 그대의 엉덩이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다들 알았나 보지?”

사람은 난처한 상황에 빠져서 심각해져 있는데……. 대공은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속에서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긴, 꽤 꼴리는 엉덩이기는 하지.”

대공은 킬킬거리며 내 엉덩이를 양껏 주물렀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했는데 어린애를 달래듯이 엉덩이를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렸을 때는
굴욕감이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어.”

…대공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굴욕감을 이기지 못해 정말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박아 달라 매달리는 그대를 내칠 정도로 내가

매정한 인간은 아니거든.”


그 말이 곧 용병대로부터 내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였지만 내 속은
아주 썩어 문드러져 갔다. 이 새끼는 이딴 식으로 말하는 법을 어디서 배워
오기라도 하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내가 발정이라도 났다는 듯이
말을 하고, 협박을 해 놓고 거래의 대가로 주는 것을 저렇게 수혜를
베푼다는 태도로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새카맣게 썩어 버린 속에 한 줄기 안도감이 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마일을
단칼에 죽였듯이 대공도 죽였을 것이다.
“난 지금 머리가 몹시 아파.”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슬며시 웃는 얼굴로 그가


내 엉덩이에서 손을 떼고 책상으로 손을 뻗어, 양피지 하나를 내게 쥐여
주었다.
“읽어 봐.”

평민의 대다수가 글을 모르는데, 그는 그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만약 글을
몰랐다면 모른다고 또 굴욕을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라도반처럼 어려운 책을 척척 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단어는 다 알았다. 그래서 양피지를 펼쳐 들고 쓰여
있는 단정한 글씨들을 읽기 시작했다.
“윽.”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내가 양피지를 읽는 동안 대공은 내 가슴을


빨았다. 유두에 이를 세워 잘근잘근 깨물며 손으로는 내 엉덩이를 제
마음대로 주물러 댔다. 그 손이 그래도 바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내 신세가 한심할 따름이다.
한숨을 짧게 내쉬고 나는 대공이 전해 오는 감각을 무시하려 최대한 애쓰며
양피지 내용에 집중했다. 유두가 그의 입술과 혀로 인해 단단하게
일어났다가 말랑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가슴을 핥고 빨고 이따금씩
무는 애무는 그리 큰 자극은 아니라서 무리 없이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건…….”

몇몇 어려운 단어가 있기는 했어도 문맥상 내용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나야 싸울 줄만 알지 전략 전술도 제대로 모르는 용병이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 달칸 용병대는 불과 얼마 전까지 미로스와 세리포브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르바니 지역에서 미로스를 위해 싸웠다. 이미 베르바니 땅의 절반
정도를 미로스에게 빼앗겼던 세리포브가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덤빈 것 치고는 세리포브는 한
전투에서도 제대로 이기지 못했다. 대공의 용병술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베르바니를 수복하기는커녕 도리어 남은 지역도 전부 빼앗길
판이었다.
미로스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세리포브 전체를 밀어 버리고 역사상 가장 큰
공국을 세울 수도 있는 기회였다. 실제로도 용병대에서는 세리포브를
멸망시킬 때까지 계약이 연장될 것 같다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바로 교황의 중재 때문이었다.
이전보다는 영향력이 약화되었다지만, 교황이 평화를 외치며 나서자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은근히 미로스에 압박을 넣었다. 교황의 권위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중시해서
가 아니라 미로스의 확장을 경계한 것이었다.
“짜증이 날 만하겠지?”

미로스 대공이 나에게 읽어 보라 한 양피지는 밀정이 보내온 서신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골치 아픈 내용이 잔뜩 쓰여 있었다. 교황 측에서
세리포브의 편을 들어 미로스를 조금 더 압박하려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굳이 교황이 개입할 이유가 없음에도 베르바니가 오랫동안
세리포브의 영토였음을 이유로 그 영토의 대부분을 반환하도록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를 위해 주변국의 국왕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황의 뜻에 우호적으로 나선 통치자들의 명단이 아래에 이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 놀랍게도 티마예브의 국왕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미로스
대공은 현 티마예브 국왕의 남동생이었음에도, 형이 동생을 압박하는 데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카미드가 멍청한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내 유두 위에 붉은 혀를 굴리며 대공이 중얼거렸다. 혀로 야하게 핥는 걸


보는 것도, 가슴이 더 볼록해지도록 모아 쥐고서는 쭉쭉 빨아 당기는 걸
보는 것도 내 기분을 참 불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렇게 빠느라 대공의 입술이 조금 더 붉어져 타액으로 젖은 채
번들거리는 것도 보고 있기 민망했다. 그는 정말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남자 주제에 뭐 이리 선이 곱나 싶은 얼굴이었는데, 짓는
표정에 따라 정말 쓸데없이 야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 남자가 입술을
붉게 물들인 꼴이 어찌 보기 좋겠느냔 말이다.
“…형제시라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그러니 나에게 공국 떼어 주기가 얼마나 억울했겠나. 이제는

티마예브까지 주게 생겼으니 배가 좀 아프긴 할 거야.”


“사이가 안 좋으신 겁니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 정치적일 뿐이지. 이 대륙 왕실들 중 친인척 아닌

이들이 누가 있을까. 혈연이란 무의미한 거다. 저 멍청한 세리포브의


국왕도 내게는 먼 삼촌뻘이라고.”
그리고 먼 조카뻘이기도 하려나?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난다고 했던 것치고
대공의 목소리는 퍽 유쾌하기까지 했다. 내 가슴에 언제부터 두통과
정서장애 치료 효과가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공은 타액으로 번들번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젖은 내
유두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원을 그리듯이
움직이는 손가락이 야릇한 성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눈을 내리깔아
대공의 시선을 비스듬히 빗겨 냈다. 나지막이 대공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좀 부족한 기분이 드는군.”

“예…?”

“기분 전환이 잘 되지 않는다고.”

손바닥을 넓게 펴서 내 쇄골에서부터 쓰다듬어 내리며 대공이 읊조렸다.


그의 손이 탄탄한 가슴을 감싸고 문지르며 내려가서 울룩불룩 굴곡을
그리는 복부를 쓸어내렸다. 간지러움에 힘을 주자 근육의 고랑과 이랑이 더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대공은 그 위를 한 번 더 문지르고는 내 바지허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당혹감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몹시도
불길하여 심장이 쿵, 바닥을 쳤다. 그리고 설마는 역시나였다.
“바지 벗고 책상에 누워.”
씨발……. 욕이 절로 솟구쳤다. 뒤를 힐끔 돌아 책상을 바라보았으나, 책상
은 도무지 누울 곳이 못 되었다. 그 위에 갖은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몸을 대면 전부 구겨지고 조금 움직였다간 찢어질
게 뻔했다.
“서류가…….”

“어서.”

그러나 대공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가 상관없다고 한다면,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의 위에서 일어나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대공의 위에
앉아 있었다지만 그에게 체중을 싣지 않기 위해서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속으로 쌍욕을 퍼붓기도 지쳐서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혁대를 풀고 바지 버클을 끌렀다. 대공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 것에 무감해질 만도 하건만, 나를 속까지 발라 먹을 기세로 주시하는
호박색 눈동자에 생리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그가 보는 앞에서 나는 속옷까지 벗어 내린 뒤, 책상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쌓여 있는 양피지 위로 몸을 뉘여 등을 댔다. 그가
다리를 안으라기에 맨 처음 그에게 꿰뚫렸던 자세를 취하며 오금 아래를
붙잡아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고간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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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대공이 내게 다가온 순간,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서는 은빛의 날붙이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니, 편지 봉투를 열 때 사용하는 페이퍼 나이프였다.
다만 일반적인 페이퍼 나이프와는 달리, 언뜻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일
정도로 날이 잘 갈려 있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움직이지 말도록.”

대공은 심지어 의자를 끌어와서 내 고간을 마주하며 편히 앉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나이프가 들려 있었고 나는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다치게 하지 않는다면서 왜 저런 날카로운 칼을 들고 다가온단 말인가.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남자의 생명과도 같은 부분이었다. 칼이라고 한다면 내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것이었음에도, 성기라는 급소를 향해 칼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공포와 거부감이 물씬 피어올랐다.
“가만히 있어.”

재차 경고의 말이 떨어지고, 대공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에 닿았다. 그리고


이어 섬뜩한 금속의 감촉이 살갗 위를 긁었다.
사각. 사각. 면도를 할 때나 날 법한 소리가 내 아래에서 울렸다.
- 다음 화에 계속
11.

씨발……. 나는 그제야 대공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알아챈


순간 얼굴로 터질 듯한 열기가 몰려들었다. 이 미친 변태새끼의 변태
짓거리를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내 음모를 나이프로 싹 밀고 있었다.
“사냥을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는군.”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숨결이 맨살에 닿았다. 그렇지 않아도 칼날이


스치고 있어 잔뜩 긴장해 있는데, 그 위를 간질이니 몸이 자꾸만 흠칫대려
했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제어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었다.
조금만 움찔거려도 살을 베이리라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겨우 가늘게 호흡을 해야 했다. 사람을 그런
꼴로 만들었으면 최고 한도로 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대공은 저 혼자
추억 여행에 잠겨 떠들어 댔다.
“어릴 적부터 사냥을 좋아했거든. 잡은 짐승도 손수 처리를 다 했었지.”

회음부의 털을 사각사각 밀어내며 그가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끝이


혹시라도 고환을 찌를까 봐 나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어찌나 긴장하고 있는지 머리가 다 띵했다. 그럼에도 몸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그때는 한참 가죽 손질에도 맛 들려 있었는데.”

죽은 짐승 가죽 손질을 하고 싶은데 그걸 못 해서 산 사람 몸에서 털을 밀고


있단 말이냐…….
그의 ‘기분 전환’ 방법에 나는 기함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대체 내가 어쩌다 이런 변태새끼한테 걸려서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 와중에도 살가죽을 벗기겠다고 들지 않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려 드는 내 이성이 서글펐다.
내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가까스로 굴욕감을 참고 또 억누르고 있는
사이, 대공은 회음부를 깔끔히 밀어 놓고 이어 고환과 성기 주변을 제모해
나갔다. 날카롭게 벼린 페이퍼 나이프가 성기 근처에 닿을 때마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도망치고 싶었다. 내 꼴이 우스워질 게 싫어서만 아니라,
급소를 위협하는 칼날에서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대공이
성기와 고환을 이리저리 쥐고 주무르니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버릇없기는.”

대공이 나를 힐난했다. 나는 접착제를 문 것처럼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를 악물었다. 남자란… 남자란 정말 슬픈 생명체였다. 칼날의 위협
속에 잔뜩 긴장하고 쪼그라들었을 텐데도, 대공이 몇 번 쥐어 주무르는
것으로 야릇한 쾌감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몸이 차갑고도 뜨거웠다.
긴장감에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소름이 죄 돋았는데 속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기이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 흥분할 수 있는 내
하반신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칼날이 닿아 체모를 깎아 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제는 이 긴장감과 불안마저 내 흥분에 무게 추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더하는 모
양이었다.
나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늘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마침 천장에는 형형색색의 성화(聖畵)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성모와 성령, 성자와 성녀, 천사들이 후광을 두르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무신론자가 되었다지만 어렸을 때는 교회를 성실히 다니며
교리를 익히던 나였다. 그런데 성화 아래에서 이런 낯 뜨거운 꼴로 더 낯
뜨거운 짓을 당하고 있어야 한다니.
잊은 지 오래였던 신성에 대한 죄의식이 머리를 쳐들었다. 미친 대공새끼
때문에 내가 죄악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머릿속으로 끝없이 주기도문을
외웠다. 새카맣게 잊었다 생각했는데, 홍수가 터진 것처럼 머릿속으로
신성한 말씀들이 흘러들었다…… 는 개뿔, 자꾸만 설 것 같아서 심호흡을
해야 했다. 대공이 일부러 필요 이상으로 야하게 내 성기를 주물러 댔던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흥분을 참아 냈다.
성기 주변은 물론 치골 위쪽까지의 체모를 모두 깔끔하게 밀어 버린 대공이
마침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즈음에 내 성기는 완전히 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전히 시든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덜렁거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 맨들맨들해진 것을 확인한 내 마음이 절망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쪽팔려서 진짜 접시 물에 코를 박고 뒈져 버리고 싶었다. 씨발, 이
제 어디서 바지도 못 벗겠다. 옷 벗을 일이 그리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목욕 등의 이유로 다 같이 벗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공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낸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수도사들이 개발한 제모제야.”

뭐… 뭐라고……? 대공의 한마디가 나를 충격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뭐라 되묻고 싶기도 했고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입만 벌어지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르륵, 오일처럼 미끌미끌한 액체가
내 고간 위로 흘러내렸다. 한 병을 모두 내 위로 들이부은 대공은 털을 밀어
낸 자리에 그 액체를 고루 펴 발랐다. 미끌미끌한 액체를 바른 손이 고간을
문지르는 게 여간 야릇한 게 아니었다. 고환과 성기를 주물렀을 때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긴장이 풀
린 몸에서 커다란 쾌감이 피어올랐다. 성화고 심호흡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그의 손에서 흥분을 하고야 말았다.
“의외로 잘 어울리는군.”

개새끼……. 제가 해 놓은 꼴을 품평하는 대공에게는 정말 욕도 아까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제모제라고 하더니 액체를 바른 부분이
따끔따끔해지기 시작했다.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바르고
얼마간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인지 대공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집무실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물병을 집어 들어
냅킨을 적신 뒤 그것으로 손을 닦았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대공은 적셔 둔
냅킨으로 내 아래를 닦아 냈다. 치골 위쪽부터 성기 주변과 회음까지, 젖은
천이 제법 꼼꼼하게 액체들을 제거했다. 그 천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진
뒤, 대공은 손가락으로 내 성기 주변을 스윽 문질렀다. 보지 않아도 그의
손가락이 얼마나 매끄럽게 미끄러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제모제를 바르기 전까지는 그래도 피부에 박힌 모근 부위라도 남아 있어
그래도 살갗이 파르스름했었다. 시간이 걸리기야 하겠지만 털이 다시
자라난다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봐봐. 아주 깔끔해. 보송보송하기까지 한걸.”

그런데 지금 대공이 기어코 나에게 확인케 하는 곳은 아주 반들반들했다.


그의 말마따나 보송보송하기까지 했다. 체모로 덮여 있던 곳의 피부가
유난히 희어서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게 또 내 수치심을 자극했다. 내가
아무리 무신경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꼴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대공은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넣어 줄까?”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힉!”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손가락이 쑤욱 안을 파고들어 왔으므로.


“아, 아아!”

대공의 손가락은 능수능란하게 내가 느끼는 곳을 곧바로 찔러 들었다.


갑작스럽게 터진 쾌감에 내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대공은 집요하리만치
내벽을 눌러 그 너머를 집요하게 비벼 댔다. 눈앞에서 별이 빛났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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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너무 강렬하여 요의(尿意)마저 느껴졌다.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는 내 허벅지가 벌벌벌 떨렸다.
“쉬, 조용히. 밖에 다 들리겠어.”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공의


집무실이었다. 바깥에는 호위가 서 있을 것이며 시종들도 근처를 지키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곳의 시종들은 별관의 시종들과는 달리 입과
혀를 갖고 있을 터.
대공과 나의 관계를, 거래를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되고 소문이 돌게 된다면
나는 그냥 자살하러 갈 것이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자존심도 내버리고
대공 밑에서 이런 굴욕을 감내하는 것이라지만, 내가 대공의 밑에 깔려
이런 수모를 당한다는 게 알려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러니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했다.
“으…! ……!”

남은 신음을 참느라 죽을 맛인데, 대공은 어디 신음을 내지 않고 버티나


보자는 식으로 내 성기를 말아 쥐었다. 그가 손을 몇 번 흔드는 것으로
성기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헐떡거리는 숨마저도 소리를 죽이며
다리를 안은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쾌감을 참기 위해 이렇게나 애를 써야
한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대공은 정말 개새끼였다.
“들어오라고 할까? 들킬 것 같다고 하니 그대, 조임이 좋아졌어.”
“……!”

“남들 보는 앞에서 하는 게 좋은가? 난 그건 좀 부끄러운데… 그대가


원한다면야.”
개소리의 향연이었다. 신음을 참고 몸의 반응을 통제하느라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또 안을 들쑤시는 이물감에 내벽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결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 대
공은 끝도 없이 나를 조롱했다. 성기를 흔들어 대며 하복부 안쪽의
깊숙한 어딘가를 집요하게 찌르고 문질렀다. 쾌감에 헐떡거리면서도 나는
맹렬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 머리 아래에서 양피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런 걸 걱정할 주제가 아니었다.
“흐음, 그런가 하면 오늘은 반응이 좀 느린 것 같은데.”

“…! …으, 흐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성기를 꽉


조여 만 손이 보다 빠르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맨들맨들해진
치골 부근에 손이 닿아 탁탁탁 마찰음이 연신 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짜릿한
쾌감이 하복부에서 전신으로 질주하는데, 손가락이 거침없이 안을 헤집어
더욱 아찔한 성감을 강요했다. 안구 속의 액체가 끓어오르는 듯이 눈가가
홧홧 타올랐다.
“참을성이 좀 늘었나? 쑤셔 주면 자지러지면서 질질 흘려 댔으면서.”
추궁이 이어졌지만 나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발기가 조금 느린 것도, 안쪽
을 몇 번 자극하면 버티지 못하고 정액을 뿌리던 사정이 오늘만큼은
느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리리엘과 몸을 섞은 게 불과 한두 시간 전이었다. 대공과의 관계를
포함해도 섹스가 오랜만이었던지라, 또 리리엘의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잘
달래 두어야 했던지라 이미 연거푸 두 번을 했다. 자극이 주어진다고 세
번째로 선 게 신기했다. 뭔가가 나온다면 그건 더 신기할 것이다.
그렇다고 대공에게 이미 두 발 빼고 와서 더는 나올 게 없다는 소리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허억, 으……! 흐…….”

그런데 여기에 나도 모르는 인체의 신비가 있었다. 그의 손에 안팎으로


희롱을 당하자 성기가 꼿꼿이 서다 못해 그 끝에 방울방울 액체가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안을 자극당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흥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공과 얽히면서 알게 된 안에서부터 오는 자극은 솔직히
상상을 초월하는 영역이었다. 안쪽을 찌르면 발기하지 않고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에 빠지기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만 세 번째로 발기를 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시간
간격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덕분에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넘치게
차오르는 쾌감만도 죽을 것 같은데, 몸 안에서 뭐라도 사정하려고 체액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영혼까지 쥐어 짜이는 기분이었다.
“침실이 아니니까, 아무데나 싸면 안 돼.”

이미 양피지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데다가 그가 깎아 낸 내 체모들이


책상과 바닥을 잔뜩 더럽히고 있는 것부터가 문제인 것 같은데 대공은 굳이
내 사정을 문제 삼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막 이곳저곳에 정액을 뿌리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일단 이대로 쌌다가 내 몸만 아니라 옷에까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묻으면 돌
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돌아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이 날 뭘로
보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씨발, 이 상황에서 그럼 어떻게 어디다가 싸라고.
그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대공이 안을 헤집던 손을 늦추고
성기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다리를 놓고 여길 잡아.”

여기가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대공은 손수건을 꺼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하얀 실크 손수건을
꼿꼿이 발기한 내 성기 끝에 댔다. 그리고 나를 힐끔 보았다.
“잘 잡고 막도록.”
흘리면 혼나. 그가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뒷말까지 들렸다.
그래서 오금을 당겨 잡고 있던 팔을 풀어 양손으로 손수건을 잡아 성기
끝을 감싸 쥐었다. 굴욕적이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정사의
흔적을 묻힌 채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름 필사적이었다.
“흐으……!”

다시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개나 들어왔는지 모를 손가락에 잔뜩


벌어진 아래가 아팠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고통을 상회하는 쾌감이 나를
후려쳤다. 팔로 다리를 잡지 않고도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바짝
긴장시킨 탓에 모든 것이 더 괴롭게 다가왔다.
대공은 다른 손으로 내 성기 기둥을 말아 쥐었다. 끝을 내 손으로 잡고 있어
그의 손이 전처럼 크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강하게 조였다 푸는
것만으로도 저릿한 쾌감이 하복부로 파고들었다.
대공은 성기를 손잡이처럼 당기며 내 안을 들쑤셨다. 손길이 과격해질수록
비명을 내지르고 싶을 정도의 성감이 전신에 범람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머릿속까지 녹아 곤죽이 되는 기분이었다. 눈앞에서는 연신
섬광이 터졌다. 점멸하는 빛에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소리를 내면 안 돼.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우윽……!!”
절정의 순간, 나는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입 안 가득 비릿한 맛이 번졌다.
아찔한 통증이 뇌리를 지졌다. 아니, 통증인지 쾌감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것들이 투두둑 끊어지고 터지는 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우 으으……. 흐…….”
“ …

손으로 쥐고 있는 손수건에 축축하게 물기가 번졌다. 어마어마한 탈력감을


이기지 못해 의식이 흐릿하게 가라앉는다. 온몸이 너무 무거워서 그대로
깊은 곳으로 함께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대공이 그런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멍하니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시야 속에서도 그의 빛나는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는 썩 기분이
좋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른한 표정의 얼굴은 야릇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아, 확실히. 기분전환만큼은 제대로 된 모양이다. 대공은 역시나 천하에
다시없을 변태새끼였다.
- 다음 화에 계속

12.

기진맥진하여 숨을 겨우 고르며 늘어져 있는 사이, 대공이 내 성기를


어루만졌다. 손수건째 쥐고 있던 내 손을 치워 내고는 젖은 손수건 위로
귀두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 문질렀다. 사정을 막 마치고 한참 예민해져
있던 탓에 몸이 저절로 파드득 경련했다. 속이 콱 조여들며 조금 더 사정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봐야 물 같은 것만 비질비질 흘러나왔을 테지만.
덕분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더욱 진이 빠져 버렸다. 너무 기운이
빠지니까 머리가 울리면서 어지럽기까지 했다.
안에 담긴 것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쥐어짜 뱉어 낸 뒤 내 성기는 완전히
늘어져 버렸다. 대공이 그 끝에 뭉쳐져 있는 손수건을 집어 올렸다. 하얗던
손수건이 내가 사출한 액체로 인해 군데군데 어둡게 젖어 있었다. 대공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묽군. 소변을 지렸다고 해도 믿겠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였다. 나는 무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설령 여력이 있었다 해도 섣불리 입을 떼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에게 정조를 지킬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도 괜히 외도를 하다가 들킨 기분이었다. 이유 모를 긴장감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차올라 대
공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
대공의 어조며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인성을 보아
함부로 몸을 놀렸다는 식으로 나를 몰아붙일 만한데도 그러지 않았다.
의자에 느긋한 태도로 앉아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그 얼굴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내가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치를 보며 나는 서둘러 책상에서 내려왔다. 내 등과 뒷머리에 눌린
양피지들로 책상 위가 엉망이었다. 그걸 치워야 할 것 같아서 바지를 줍는
내 손이 급했다. 그때 대공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부 벗어.”

그 말에 나는 아연해졌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오후 시간, 게다가 대공의


집무실이었다. 침실이어도 문제가 될 판에 별관의 침실도 아니고
집무실에서 벗으라니. 정사의 흔적이 남으면 곤란하니 손수건으로 막고
사정을 하라고 했던 인간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당장 박으려 들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물론 내게는 늘 그렇듯이 선택권이 없었다. 굳은 얼굴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의 명령대로 고분고분 옷을 벗었다. 어차피 바지와 속옷은 이미 벗고
있어서 걸치고 있던 것은 재킷과 리넨 셔츠뿐이었다. 벗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내 벗은 몸을 훑어보던 대공이 느른하게 읊조렸다.
“빨아도 좋아.”

씨발, 차라리 빨라고 명령을 해라……. 어차피 입만 쓸 텐데 굳이 옷을 전부


벗으라고 하는 건 역시 굴욕감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대공의
의도를 안다고 해서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을
지닌 사람인 이상 나 혼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좆같은 건, 모멸감을 느낀다
해도 내가 작은 반항 하나 하지 못하는 처지라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대공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꼼꼼하게 채워진 버클과 단추를 풀고, 속옷에 감싸인 성기를 끄집어냈다.
발기하기 전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성기는 이미 약간은 흥분해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게 발기
하면 얼마나 커질지 알기 때문에 입에 담기도 전에 턱이 아팠다.
이전에 입으로 했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구멍이 혹사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더 괴로웠다.
그러나 역시 나는 그의 성기를 입으로 물 수밖엔 없었다. 대공은
치하하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15분 뒤에 회의가 또 있다. 해답도 내지 못하는 무능한 것들이 재주라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게 전부지. 다 잘라 버릴까.”
대공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안에서 무섭게 부푸는 성기를 열심히 빨아
삼켰다. 리리엘에게 봉사하느라 애썼던 내 입이 정말 오늘 여러모로
시달린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지워 버리고 정말 성심성의껏 혀를 놀리고 입술을
조이며 성기를 빨았다. 먼저 15분 안에 끝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 것에 아직 일언반구의 추궁도
없는 대공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불쾌한 감정을 느끼면 더더욱 잔혹하게
굴 타입이었다. 지금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내 외도(?) 때문
에 나를 갈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웬만하면 이렇게 눈치를
보지 않는데, 대공은 신경을 쓸 수밖엔 없었다. 그가 나를 괴롭히는 방식이
정말 괴로웠던 것이다.
“하아, 일릭…….”

대공은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신음하는 것으로 만족감을


나타냈다. 고양이가 가르릉 목을 울리는 것처럼 낮게 소리를 냈다. 그에
배알이 꼴리는 것과 동시에 안도감이 번져 나갔다. 힐끔 올려다 본 그의
얼굴은 다행히 평소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눈이 마주치자
살풋 웃어 보이는 게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눈치 볼 것 없어.”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다 안다는 말투였다. 그 음성이 몹시도 다정했다.


“시키는 일만 잘 하면, 뭘 하든 내가 왜 간섭을 하겠나.”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나 그의 표정, 목소리가 모두 부드러웠지만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입 안의 성기를
우물거리며 눈치를 보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자 대공은 더 환하게 미소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꼭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반짝반짝 화려한
미소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늘 그래도 내 기분을 풀어 준다고 노력을 많이 했으니, 상을 줘야겠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공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몹시도 간지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내가 그의 좆을 빨고 있는 좆같은 상황이기는 했지만,
저 잘생긴 얼굴로 사람 두엇 너끈히 녹일 수 있을 만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니 괜히 낯이 화끈거렸다. 뭐 사내놈이
이렇게 생겼어. 민망한 기분에 그의 외모 탓을 해 버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해 버렸다.
내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 이 변태새끼를 믿는 건데 말이다.
“내일부터는 매일 아침 성으로 와. 그대의 입안에 듬뿍 싸 줄 테니.”
씨발새끼…….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의 성기를 물고 있어 우물거리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대공이 하아 더운 숨을 내쉬며
신음했다.
“그대는 정말……. 입을 잘 쓰는군.”

아주 만족에 겨운 목소리였다. 내 머리를 눌러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삼키기를 강요하며 진심 어린 칭찬을 쏟아 냈다. 단언컨대 내가 살면서
들은 칭찬 중에 가장 좆같은 칭찬이었다. 이건 사람 잘 죽이는 인간
백정이란 말보다 더 최악이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 것에 화를 내지 않아서 안도를 할 겨를도 없이, 내
기분은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이 와중에도 그의 성기를 빨고 있어야 한다는
게 몹시도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잘 마모되지 않고 튼튼한 내 정신이
우지끈 금이 가며 흔들릴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무슨 다른 방도가 있으랴.
“시간이 참 잘 가는군.”

귓가에 감겨드는 나른한 음성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그를 사정하게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그의 성기를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한낮이면


볕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만개했던 봄꽃이 스러진 자리에
.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해 숲은 온통 푸른 빛깔로 물들었다. 젖은 흙과


나뭇잎 냄새가 제법 상쾌했다. 나무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사각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아름다운 계절. 미로스 공국의
수도의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미로 산맥과 그 산맥에서 이어지는
숲은 바야흐로 푸르게 피어나고 있었다. 분명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그러나 내 기분은 더러웠다. 아름다운 자연과 외유로 인한 해방감을 느낄
새도 없이, 아주 최악이었다.
“씨발…….”

그건 볼 때마다 욕부터 나오는 내 아랫도리의 꼴 때문이었다. 옷을 입을


때마다, 소변을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걸을 때에도 가랑이가 어쩐지 자꾸 의식이 되어서
걸음걸이가 절로 어정쩡해지곤 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도 그럴진대, 벗은
몸을 확인할 때면 어깨를 흠칫할 정도로 놀랄 수밖엔 없었다.
씨발, 털이 없다는 게 이렇게 수치스러울 줄은 몰랐다. 성기 주변에 체모가
없어, 아무리 내 거라지만 성기와 고환이 가릴 것 없이 훤히 보이니까 괜히
낯이 뜨거웠다. 어린애 고추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평생을 이런 백자지로 산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않나, 나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덕분에 신경이 잔뜩 곤두선 요즈음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정점이었다.
헐벗은 내 아랫도리를 떠올리면 혼자 있을 때에도 기분이 바닥을 치는데, 오
늘은 아침부터 다른 용병들과 함께 행군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대공을 호위하기 위해.
“하아, 진짜…….”

혼잣말을 하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방뇨의 순간 찾아온 해방감이 평소보다 훨씬 컸던 탓이며, 동시에 소변을
보면서 쾌감까지 느낄 정도로 요의(尿意)를 참고 있어야 했음에 울적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혼자 멀찍이까지 소변을 보러 갈 수
있는 타이밍을 잡지 못해 소변을 참고 있었던 내 자신이 몹시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조차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생각보다 더 거지 같은 일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원칙상 행
군 중에는 잠시 휴식을 가지는 동안 볼일을 해결해야 했는데, 어차피 다 사
내놈들이었기 때문에 삼삼오오로 모여서 일을 보러 가곤 했다.
피치 못한 경우에는 행렬에서 잠깐 이탈하여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르게
해결을 할 수도 있었다. 다만 무리에서 떨어질 때는 반드시 두 명씩
움직이는 게 원칙이라는 게 문제였다. 나는 씨발 제발 혼자서 일 좀 보고
싶은데, 혼자 있을 시간을 도무지 만들 수가 없었다.
그냥 여봐란 듯이 내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칸 용병대의 용병 놈들은 이런
놀림거리를 그냥 넘길 놈들이 아니었다. 그 새끼들은 파안대소를 하며 아마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놀려 댈 것이다. 아예 나를 일릭이 아니라
백자지라고 불러 댈 게 틀림없었다. 내가 뒈진 뒤에도 일릭이란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백자지였어라며 구전동화처럼 만들어 놓을 놈들이었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빤히 알면서 그들과 소변을 같이 보러 가는 위험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타이밍을 찾지 못해 볼일을 보러
다녀오지를 못하다가, 잠시간의 휴식이 끝나고 행군을 다시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자리를 정리하는 척 빠져나온 것이다.
“젠장…….”

나는 소변을 다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냈다. 또


언제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또 아랫배가
꼬이도록 소변을 참아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내가 대체 왜 이런 걸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답답했다.
대공을 만나고 나서 생긴 낯선 고민들로 정신이 나날이 너덜너덜해져 갔다.
대공 새끼, 그냥 습격이라도 당해서 칼 맞고 뒈졌으면 좋겠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는 옷을 잘 갈무리해서 입었다.
“일릭.”

옷을 막 다 정리했을 때 난데없이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라도반이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와서 숲 깊은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누가 따라오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그게 지금 우리 용병들을 이끄는 라도반이리라고는.
나를 책하듯이 굳어진 얼굴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임무 중에 나는
지휘관의 지시를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멋대로 말도 없이 무리에서
이탈을 했고, 그 현장을 라도반에게 딱 걸렸으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미
안함이나 죄책감 따위를 가볍게 상쇄할 정도로 지금 내가 느끼는
불쾌함이 몇 배는 더 컸다. 자칫 잘못하면 헐벗은 내 아랫도리를 들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언제부터 따라왔어요?”

허리춤에 매 두었던 물주머니를 꺼내 손을 적시며 퉁명스레 물었다. 근처에


물이 없으니 식수를 써야 했다. 어차피 난 마실 생각이 없었다. 요의를
참느니 갈증을 참는 게 나았으니 말이다. 라도반은 별 해괴한 짓을 다
한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손을 마저 닦았다.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지.”

“내가?”

라도반은 어디서 의뭉을 떠냐며 눈을 부라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아직 나를 용의선상에 올려 두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탈영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더욱 내가 마일을
죽인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혔을 것이고 말이다.
“돌아가려는 길이었수다.”

“누가 뭐라고 했냐?”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잖아, 지금.”

“누가 뭐라고 하던 신경도 안 쓰는 게 너 아니었냐? 마일 같은 녀석이

깐죽대도 관심 끄고 무시하지 않았냐고. 그런 녀석이 요새는 매일매일


곤두서 있으니 안 이상해?”
“…하아. 나 참. 내가 요즘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 잊으셨나 본데.”

“그래. 그래서 대공이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 멀리까지 혼자 나왔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더라?”
“미치겠네? 비밀 유지 조항이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뒤를 밟아? 설령 내가

발설한 게 아니라 해도 대공에 관한 얘기가 새어 나가면 나부터 좆 되는 거


몰라요?”
노기를 담아 쏘아붙이자 라도반이 잠시 주춤했다. 라도반이 아는 대로 나는
주변에 무관심하고 무신경한 편이었다. 누가 귀찮게 굴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 성격이 무던하다는 얘기도 종종 듣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다정하고
착한 부류는 결코 아니었다. 그냥 분노의 역치가 높고 타인에 무심한
것뿐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다른 일이 있어 보였다면 당연히 조용히 돌아갔을 거다.”


라도반이 대거리를 했지만 기세는 한 풀 꺾인 뒤였다. 그가 물러선 것으로
충분했다. 더 말을 길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는 것으로
차오르는 것들을 애써 억누르며 그를 지나쳐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면 그럴 만한가 보다 해 주쇼, 좀.”

차라리 아랫도리 상태를 확 까 버릴까.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머리털이


빠진다는데 나는 음모가 빠졌으며 그래서 다른 놈들이랑 용변 해결을 한
곳에서 못 하겠다고 반쯤 거짓말을 섞어서 밝힐까. 라도반은 적어도
놀림거리로 삼을 위인은 아닌데.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생각을 접었다. 라도반이 혹시라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저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 해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데다가
우리 중 누구보다 귀족을 많이 상대해 봐서 그들의 변태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그가 어떤 추측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이 시도 때도 없이 널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내 곁에서 함께 걸으며 라도반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내 입술에 꽂혀


있었다.
“피곤하긴 많이 피곤한가 보네.”

내 몰골이 걱정스럽다는 말투였다. 라도반이 나를 의심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걱정은 진심이었다. 대장 파빅만큼이나 오랫동안 달칸 용병대에서
생활을 한 저 중년의 사내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는 용병대
대원들을 가족처럼 여겼다. 나이 차이가 있어 크게 친분을 쌓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들은 가볍지 않았다. 물론, 성격이
무뚝뚝해 그다지 친해질 일이 없었던 나보다는, 친우 파빅의 아들인 마일이
더 소중하겠지만 말이다.
“피곤해요. 입술이 이 모양이라 말하기도 힘들어.”

입술 핑계에 라도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입술. 잔뜩


부르트고 입 꼬리는 잔뜩 갈라져서 입을 조금만 벌려도 찢어져 피를 보이는
내 입술 말이다. 살짝 혀로 훑은 자리가 욱신대면서 피 비린 맛이 느껴져서
나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라도반은 궁금할 것이다. 대공이 나에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무엇을 시
키는지. 뭘 어떻게 하면 입술이 이 모양으로 망가질 수 있는지
말이다.
내 입술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물론 대공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로 매일매일 아침마다 대공의 그 지랄맞게 큰 성기를 빨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는 매일 아침 성으로 와. 그대의 입안에 듬뿍 싸 줄 테니.’

- 다음 화에 계속

13.

그의 한마디로 내 아침 일과가 결정되어 버렸다. 숙소에서 자는 날이면 그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서 대공성의 별관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대공의 별관 하인 중 하나가 나를 데리러 왔기에 늦잠을 자서 못
가는 일은 없었다. 그즈음이면 대공은 아직 자고 있을 시각으로, 어둠에
잠긴 침대에 올라가 그의 침의를 들추고 성기를 찾아 물어야 했다. 뭘
먹는지 정력이 지나치게 좋은 대공은 아침마다 대체로 발기해 있었다. 그
큰 걸 물고 빨고 하면 입술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경우가 달랐다. 나는 오늘 늦잠을 자 버렸다. 그것도
대공의 침실에서.
아침에 펠라티오를 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2-3일에 한 번꼴로 그는 밤에도
나를 불러들였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로, 대공의 아래에서 한참을
시달리다가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던 것이다. 연거푸 두
번을 하고 나서는 완전히 진이 빠져서 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공은 정말 괴물이었다. 아침에 내가 입으로 한 발 빼게 했는데도 밤이
되었다고 두 번을 했으니, 결국 그날만 세 번을 한 셈이었다. 그렇게 해 놓고
또 아침에 발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난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물론 안 빨아도 된다는 판단에 늦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대공을 옆에 두고 잠들었으면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
정신없이 잤다. 어둠에 끌려 들어가 그대로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잤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떴는데 내 눈앞에 노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는 대공
과 마주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눈꼬리를 가늘게 접어 사르륵 짓는 미소는 솔직히 아름다웠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찬란하기까지 했다. 그 미소가 얼마나 달콤했냐하면…
이런 비유는 정말 싫지만, 신혼의 신랑이 늦잠을 잔 신부를 보고 지을 법한
그런 미소였다.
‘일릭.’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데, 그게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쭈뼛 돋아났을 정도였다. 그는
사람을 녹이는 음성으로 불러 놓고는 꿀처럼 달게 웃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내 입에 성기를 쑤셔 넣었다.
‘갈 길이 먼데 늦잠을 자서야 쓰나.’

잠에서 막 깨어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의 미소를 보고 굳어진 나에게,


그 여느 때보다 더 길고 집요하면서 폭력적인 펠라티오를 강요했다.
솔직히 대공이 정력이 진짜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평소처럼
빠르게 발기하지는 못했다. 내 입에 쑤셔 넣고도 완전히 단단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만큼 사정까지는 또 한참이었다. 그게 내 잘못이
아닌데도 대공은 나를 탓했다.
‘그렇게 좆을 빨고 싶었으면 일찍일찍 일어났어야지.’

그는 내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고 고환이 턱에 철썩철썩 부딪히도록


거칠게 성기를 내 입 안으로 쑤셔 넣으며 아주 손쉽게 나를 협박했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마차에서 마저 먹을까?’

만약 만족하지 못한다면 대공은 정말로 그렇게 할 미친놈이었다. 남들에게


이 관계가 알려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에 나는 눈을 뜨자마자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입으로 정말 열심히 대공의 성기를 애무했다. 덕분에
입술이 다 헤지고 터졌다. 대공은 그런 내 입술에 아주 만족스럽게 정액을
뿌렸다. 정말 개새끼 중의 개새끼였다.
그런 꼴을 당하고 그 대공을 호위하며 행군을 하고 있는 게 바로 나였다.
어제는 엉덩이를 바쳐, 아침에는 입을 바쳐, 게다가 아랫도리는 그의
취향대로 훤하게 털을 밀려 있어……. 내 한심한 꼴에 한숨이 나왔다. 아니,
씨발 대공이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적어도 오늘의 일행에서 나는 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혹은 어제 밤에 건드리지를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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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예민했나 보다.”

잠시 침묵하던 라도반이 사과 비슷한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도 마초들의


세계에서 저 정도 말은 대단한 사과나 다름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가 느끼고 있을 책임감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이 관대한 표정도 지어 보였다.
오늘의 이 행군은 대공이 소규모 인원에 대해 재계약을 한 이후 내린 첫
임무였다. 라도반을 필두로 하여 나까지 총 21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대공의
기사들과 함께 대공의 마차를 호위해야 했다. 목적지는 미로 산맥의 산세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미로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으므로 아침에도 새벽같이 길을 떠난 참이었다. 숲길과 산길을
가야 하다 보니 해가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많이 이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라도반은 우리 부대의 책임자였다. 부대를 이끌어 빠듯한 일정을 첫 임무로
소화해야 하니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예민해질 수밖엔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곤두선 상태가 아니었다면, 내가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고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을 테고.
나는 이래저래 착잡한 기분으로 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 일행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라도반 역시 처음부터 나와 함께 갔었던 것처럼, 내
이탈을 내색하지 않고 제자리로 녹아들었다.
우리가 합류하자마자 앞선 기사가 말을 움직였고 대공의 마차가 뒤를
이었다. 대공성의 사치스러움이나 대공 그 자체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새
카맣고 무난한 마차였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 어떠한 무늬도 없이 일견 투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공의 마차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낮게 감겨드는 음성이 울렸다.
‘마차에서 마저 먹을까?’

나를 바라보며 열기로 번들번들 빛나던 호박색의 노란 눈동자.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공이 정말로 그런
짓을 시킬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더욱 나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아, 진짜 누가 습격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혼란을 틈타서 내가
대공을 냉큼 죽여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부질없는 망상에 깊어 가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곁에서 다른 놈들이 땅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꺼져라 한
숨을 내쉬는 나를 힐끔댔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대공의 일만 아니라 라도반이 나에게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대공은 나를 도와주겠노라 말을 했지만 정작 나를 가장 의심하는 사람과 한
일행에 묶어서 이렇게 끌고 다니고 있으니, 대공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더욱 머릿속이 복잡했다. 변태새끼 머릿속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음에도. 한 발짝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점차 진창으로
처박히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역시나,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깊어져서 더 이상 숲길을 나아가지 못할 즈음이
되어서야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목적지는 거대한 나무에 가려지고
멋대로 자라난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한 산장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을 때는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그러나 폐가와 다름없다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기름칠을 한지 수년은 되었을 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끼이끼이 듣기 싫은
소리를 울렸다.
종종 이곳을 찾는 것인지 기사들과 대공은 다 쓰러져 가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용병대에게 홀에서 야영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산장에 들어오자마자 위치한 홀은 먼지와 벌레, 벌레의 사체로
뒤덮여 사람이 잘 곳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용병들이 뭐 언제부터 누울
자리를 가렸단 말인가. 바람 막아 줄 벽만 있고 천장만 있으면 쾌적한
숙소였다. 우리는 대강 모여 앉아 딱딱한 빵과 육포 따위를 나눠 먹고
불침번을 정한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전날 시달리고 새벽에 그 고생을 한 뒤 하루 종일 걸어야 했던 여파로 나는
금세 꿀 같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숙면을 취하다가 눈을 뜬 건, 강렬한 요의 때문이었다. 일부러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음에도, 자기 전에 소변을 보지 않았더니 자다가 깨 버린
것이다. 억지로 눈을 떠보니 불침번을 서기로 한 놈마저도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차피 남들 몰래 홀로 소변을 봐야 하므로 이
시점에 깬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대공 개새끼. 나는 속으로
욕을 주워 삼키며 소리 죽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다행히도
내가 건물을 빠져 나오는 동안 용병놈들은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 새삼 나는 나의 건강함에 감탄했다. 기껏 새벽부터 좀 걸었다고
기절한 놈도 있는데, 나는 어제부터 계속 과로를 하고도 몸이 좀 무겁고
아픈 걸 빼면 멀쩡했으니 말이다.
차라리 아팠다면 대공이 사정을 봐줬을지도 모르려나……. 어떻게 해도 그
변태에게로 귀결되어 버리는 씁쓸한 상념을 이어 가며 숲속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의 숲은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스산했지만 공포를
느끼기에는 내가 너무 무딘 사람이었다. 차라리 짐승이나 귀신이 낫지… 그
변태에 비하면.
혹은 동료 용병들에게 하반신의 사정을 들켜 버리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혹시라도 소피를 보러 나온 용병놈과 마주치게 될까 봐 나는 조금 더
깊숙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우연이라도 여기까지는 흘러들어 오지 않을 정도로 꽤 오랫동안 걸어
어두운 숲속에 도착했을 때에야 멈추고 볼일을 해결했다. 내가 진짜 오줌
한 번 싸자고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자괴감이 뒤를 따랐다. 심란해서 괜히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느 때보다 큰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빛이 땅에 닿아
숲의 어둠까지 몰아낼 정도로 밝았기에 별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별이 많건 달이 밝건 관심도 없었겠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전에 없이 감상적인 걸로 보아 아무래도 내가
심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적막 속에 잠겨 있자니,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찌륵대는 벌레 소리나 나뭇잎이 바스락대는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개울이 흐르는 모양이었다. 손이라도
씻고 싶다는 생각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밤중에 산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고민은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길을 잃으면 그대로 탈영을 해서 떠나 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걷다 보니 산줄기를 따라 흘러 내려왔을 개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깊은 곳에 폭포라도 있는 것인지 먼 곳에서 물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아예 가서 몸을 담글까? 잠시 고민을 하며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씻을 생각은 버렸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찬지 소름이 다 돋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

소름이 돋아난 건 손을 적신 냉기 때문이 아니다.


“……뭐 하는 새끼들이냐?”

바늘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전신을 난자할 기세로 쏟아진다. 달빛에 진 나무


그림자 속에 은빛의 칼날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긴 놈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대공이 보여
주었던 서신을 떠올렸다. 단순히 세리포브와의 분쟁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
국이 전부 미로스 대공을 경계한다. 교황이 그를 압박함에 대공의 형인
티마예브의 국왕까지 힘을 더할 정도로. 외교나 전쟁보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수단이 암살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미로스의 수도 인근이라고 해도
암살을 시도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서 검을 뽑아 들었다. 다수를 앞에
두고 적당히 긴장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도리어 마음은 편했다. 최근
일신에 벌어진 감당이 되지 않는 일들로 머리가 아픈 것에 비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은 유쾌하기까지 했다. 금세 차오른 흥분에
뒷덜미가 찌릿찌릿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달칸 용병대의 용병이.”

문득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검 다 빼서 꼬나쥐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대화를 시도한단 말인가. 심지어 놈이 내 소속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일단 적이 아닐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곳까지 왜 왔지? 산장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하아, 뭐야. 미로스의 기사냐?”

“대답하라, 용병.”

“오줌 싸러 왔다.”

“산장에서 여기까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지.”

“믿지도 않을 거 묻긴 왜 물어.”

“시답잖은 말장난은 집어치워라!”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는데도 믿음이 부족한 기사는 발끈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온 간자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고 아


주 거하게 헛다리를 짚었다. 하! 코웃음이 절로 쳐졌다. 대꾸할
가치도 없어서 그냥 피식 웃어 버렸다.
“대답은 천천히 듣도록 하지.”

어둠 속에서 놈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착한 척해도 건들건들한 내


태도에 꽤나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예로부터 기사란 것들은 잘난 것도
없으면서 콧대가 높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래봐야 말이랑
갑옷 유지비로 허리가 꼬부라지게 가난한 것들이 말이다. 그런 놈들 한둘
죽여 본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죽이면 안 되는 게 도리어 문제겠지. 힘 조절을 해 가며 죽이지
않는 선에서 제압하고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게 조금 괴로웠다.
“크윽!”

먼저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달빛에 몸을 드러낸 놈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러


들어갔다. 얕기는 했지만 검 끝에 살 찢기는 느낌이 제대로 났다. 덕분에
놈들이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판금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지금 그들이 맡고 있는 임무에, 방어보다는 민첩성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한 놈을 베어 넘긴 순간 내 옆구리 쪽에도 섬광이 날아들었다. 가까스로 두
번째 놈을 흘려보내며 나는 있던 자리를 벗어나 나무 그림자로 몸을
날렸다. 다수를 상대하는데 어둠에 자신을 숨긴 놈들에게 나만 모습을
노출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일대 다수라는 점에서 분명 나에게 불리했지만, 승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기사라는 타이틀이 놈들을 오만하게 만들었고 머릿수가 방심을
심었다. 게다가 놈들 중 하나가 먼저 나에게 당하자 머리꼭지가 돌아 버린
모양이었다. 내 형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할 텐데 나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테지만, 글쎄.
흥분도 흥분 나름이지, 앞뒤 재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제압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작은 빛에 상대의
검날이 번쩍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찍어 내리는 검을
피한 직후, 머리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멀찍이로 나가떨어졌다. 손이 욱신대는 것으로 보아 얼굴을 제대로
뭉갠 것 같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어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빠르게 쳐 냈다. 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듣기 좋은 건 아니었지만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소리였다. 신경이 짜릿하게 달아오르며 몸이 더워졌다. 어둠이 눈에 익어
거칠 게 없었다. 칼날의 반사광과 거대한 몸들이 만드는 새카만 형체면
충분했다. 놈들을 하나하나 잡아먹을 생각에 속에서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날카롭게 벼린 신경은 작은 풀잎소리 하나 놓치지 않는다. 어둠 속에
이동하여 달려드는 한 놈의 가슴을 가볍게 베어 냈다. 직후 또 다른 놈이
옆에서 찌르고 들어왔지만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검을 쳐 냈다. 챙강!
금속의 마찰음이 귓가를 찢었다. 반탄력에 놈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고, 나는
곧장 그 가슴팍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명치에 직격한 묵직한 펀치에
나무 등걸 같이 단단한 몸뚱이가 허물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허?”

다가온 놈을 향해 빠르게 휘두른 검 끝에 걸리는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반격해 들어오며 검날이 번뜩였다. 당황할 틈도 없이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검을 피해 냈다. 검 끝이 셔츠에 걸려 옆구리가 조금 찢겼다. 다른
방향에서 또 빛이 비쳐서 나는 냉큼 몸을 크게 한 걸음 뒤로 날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로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검이 지나갔다. 인정사정없는 검에
질려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그렇게 기사들과 거리를 벌린 채, 나는 나무를 등지고 혀를 찼다. 놈들의
실력을 내가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놈들도 나처럼 순간적으로 검날이
반사하는 빛을 보고 검의 궤도를 예측하는 정도의 재주는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식었는지 놈들은 내가 물러서는 것을 보고도 달려들지 않았다.
도리어 침착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나를 에워싸 포위했다. 제길. 흥분이
끓어올라 방심한 쪽은 어쩌면 내 쪽일지도 모르겠다.
“건방지게 굴더니, 고작 이거냐?”

놈들은 방어적으로 태세를 전환한 나를 제법 도발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대한 나무를 등지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게. 고작 셋밖에 못 밟았네.”
아, 넷인가? 툭 던진 한마디에 어둠 속 형체들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적잖이 열
이 받았을 텐데도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았다. 확실히 정신들을
차린 모양이었다. 놈들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내 주변으로 포위를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간격을 좁혀 오고
있었다.
명색이 미로스 대공의 기사단인데, 내가 그들을 너무 무시했다.
기사들이라고 해 봐야 거들먹거리기에만 능한 작자들이 대다수라서
말이지. 어쨌거나 예상외의 실력에 나는 조금 골치가 아파졌다.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로 포장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놈들을 신나게 죽일 수가 없는데, 놈들은 나 하나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는 짓을 보니 본심은 날 잡아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포위망이 더 촘촘해지기 전에 몸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놈!”

나무를 등진 채 움직이지 않고 덤벼드는 놈들만 상대하던 내가 먼저


움직이자 상대가 일순간 멈칫했다. 어둠 속이라서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나는 기사 한 놈의 가슴팍을 몸통으로
들이받아 날려 버린 뒤,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쫓아!”

새카만 숲속. 의지할 것은 달빛뿐인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잘 도망치고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으나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싸울 만한 공간에 도착하게 된다면
기다려서 추격해 오는 놈을 한 놈 한 놈 처리하는 게 일단의 계획이었다.
앞쪽에 나무 사이로 폭포가 보였다. 불행히도 앞쪽이 전부 높게 솟은
절벽으로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나무 사이를 벗어나 물가에 다다르면 더는
도망칠 곳도 없어 폭포를 등지고 싸워야 하리라. 달빛 아래에서 오랜만에
미친놈처럼 칼춤을 추게 생겼다.
그런데 덤불을 뛰어 물가에 막 발을 디딘 순간.
“어라.”

천사.
“헉……. 허억……?”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 요


정.
숲의 요정이 그곳에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14.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나는 눈을 부릅뜨고 결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달빛이 새하얗게 부서지는 머리카락은 꼭 달빛
그 자체를 꼬아 자아낸 듯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달이 유난히 크고
밝은 탓에 선명히 시야에 들어오는 얼굴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요정. 그래,
꼭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요정처럼. 하얀 얼굴과 늘씬한 몸, 은빛의
머리카락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달빛에 젖은 아름다운 얼굴에 보석처럼 박힌 금빛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어린 아주 짙고 농염한 금빛이었으나 탁하지
않고 투명했다. 그것이 또 신비해 나는 멍하니 넋을 잃어버렸다.
“웬 놈이냐!”

버럭 내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을 때에야 나는 사내를 보호하듯이


에워싸며 검을 빼든 남자들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쫓아오던 놈들이 도착해 내 뒤를 막아섰다는 것도. 포위를 피하기 위해
도망쳤는데 더 많은 인원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이곳이
전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완벽하게 갑주를 갖춰 입고 있었다.
좆됐다. 아무래도 좆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비단 기사들에게 포위를 당한
게 문제가 아닌 기분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릭?”

그 와중에 평온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온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확 번졌다.
내가 저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여전히 보석처럼 빛났으나 그 눈은
흡사 짐승의 그것이었다. 마주하고 있노라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좆됐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며 전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에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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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릭.”
사내가 내 이름을 읊조렸다. 몇 번이고 나를 부르던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그의 사람 같지 않은 외모에 잠시 환상에 잠겨 있던 내 의식이 현실로
단박에 내동댕이쳐진다.
대공. 그는 내 악몽과도 같은 존재인 미로스 대공이었다.
대공의 주변에 선 기사들이 모두 검을 들고 나를 적대시하고 있었지만, 나는
검을 내릴 수밖엔 없었다.
“…예, 각하.”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그게…….”
대공이 내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하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즉각적으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그의 눈치만 보았다.
단둘이 있었다면 대공은 나를 다른 방법으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대공의 사적인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밤중에 나선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지금 나를 희롱할 여유는 없는 모양이었다.
“베이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딱딱했다. 대공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사람을 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꽤나 낯선
모습이었다. 나를 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 절대로 뚫을 수 없는 얼음벽, 아니
철벽에 날카로운 칼날이 빼곡하게 차 있어 닿는 족족 절단 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혼자 산장을 빠져나와 숲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각하.”
베이즈라는 부름에 대답을 한 건 나를 쫓아오던 기사 중 하나였다. 그의
대답을 듣고 대공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첩자라…….”
“…… 아닙니다, 각하.”
“그럼 이 밤중에 왜 나와 있지?”

“……그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말문이 막


혀서 나는 입술만 깨물었다 대공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이미
. .

두 번 물어보게 한 걸로도 후환이 두려운데 세 번이나 묻게 한다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엄청나게 심한 일을 당하게 될 것 같다. 차라리
기사놈들에게 붙잡혀서 고문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오싹한 예감에 저절로 내 입이 열렸다.
“소변을… 보러…….”

“이렇게 멀리까지?”

합당한 의문이었다. 내가 기사 놈들에게 시비를 걸긴 했지만, 기사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나라도 안 믿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씨발, 대공만큼은 내가 왜 굳이 멀리까지 나와서 생리현상을
해결했는지 알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
“…제가, 그…….”

대공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해서 내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게 최악이었다.


굴욕감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를 지켜보는 대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노란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나를 훑었다.
그리고는 한 곳에서 고정되더니…….
“아.”

문득 깨달았다는 듯, 그가 탄성을 냈다. 내 입에서는 후욱, 긴장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감정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하하하.”

대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아까까지 그렇게


무겁고 싸늘하게 벽을 세우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풀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나에게만 의외가 아니었는지, 기사들도 어리둥절을 넘어
당황하고 경악한 것처럼 보였다. 놈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눈동자 역시 떨리고 있을 것이었다.
“이리 와.”

홍소는 멈추었지만 아직 눈가며 입가에 웃음기가 남은 대공이 나를 불렀다.


“예상에는 없던 일이지만, 뭐 상관은 없겠지.”

내가 대공에게 다가가자 대공은 나를 곁에 세워 두고는 베이즈라고 불렀던


기사를 바라보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원래 위치로.”
“…예, 각하.”

뭐 빠지게 나를 뒤쫓아 왔던 기사들은 대공의 짧은 명령에 숨 고를 새도


없이 묵묵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완전히 묻히고 난 뒤에야 대공은
남은 다섯 명의 기사들과 나를 이끌고 폭포 쪽으로 향했다.
가장자리의 바위들을 밟아 폭포 쪽으로 가다보면 떨어지는 폭포수를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폭포에 다가갈 수 있었다. 떨어지는 물방울과 물안개로
머리며 옷이 젖어드는데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내가 정말
따라가도 되는 게 맞나 싶었지만, 대공은 말을 걸 틈도 주지 않아 그를
따르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폭포수가 얼굴에 튈 정도로 폭포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대공이 씻으러 온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 야밤에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폭포 뒤에는 떨어지는 폭포수에 가려진 동굴이 있었다. 너비가 제법 넓어서
대공과 나는 물론 나머지 기사 다섯도 들어와서 설 수 있을 정도로 큰
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은 안쪽으로 더 깊게 길이 나 있었다.
“일릭, 이쪽으로.”
대공은 그 길로 나를 데리고 갔다. 폭포 쪽의 입구가 넓은 것에 비해
안쪽으로 들어가는 굴은 한 사람씩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대공이 달리 지시를 내린 것도 없는데 네 명의 기사가 대기했고 적갈색
머리카락의 기사 하나가 금세 횃불을 만들어 불을 붙이고는 앞장섰다.
대공과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좁은 동굴에 세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부끄러웠나?”

“……예?”

“남들이 볼까 봐 무서워?”

대공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노골적으로


유쾌해하는 그가 그토록 얄미울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주 힘들었겠어.”

“……예.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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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변기라도 준비해 줄 걸 그랬군. 돌아갈 때는 그렇게 할까?”


대공이 너무 스스럼없이 지껄여 대서 나는 속이 다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 동굴에 나와 대공만 있다면 그냥 듣고 넘기겠지만, 제삼자가 있었던
것이다. 귀머거리라 아무 소리도 못 듣는다는 듯 직진하는 대공의 기사가.
다행히 거기까지 하고 대공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내 눈앞에 보이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냥 죽일까……. 그냥 죽이고
나도 죽을까. 교황까지 이 인간을 죽이고 싶어하는 마당에,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앞에 두 남자가 멈춰 섰다. 내 생각보다
동굴이 깊어서 꽤나 오랫동안 걸어온 뒤였다. 맨 앞의 기사가 횃불을 이리
저리로 흔들었다. 저 너머에서도 불꽃이 빛나며 흔들리고 있었다. 신호를
주고받은 뒤 기사는 대공을 돌아보았고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걸어온 긴 통로 끝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다. 종유석조차 없는,
인공적인 공간이었다. 돔형의 천장만 아니라 평평하기 짝이 없는 밑바닥은
절대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대공이 세간의 눈을 피해 주요인사와
접선하는 비밀 공간이었다.
대공은 공터의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반대쪽에서부터 걸어오던
형체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횃불에 비친 실루엣에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엔
없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대공이 만나러 온 상대가 여자였던 것이다.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로브가 퍼진
형태는 틀림없이 드레스 모양이었다. 또한 키가 작고 몸이 가녀렸다.
“오랜만에 보는군.”
가벼운 어조의 인사 한마디 역시 여인의 목소리. 대공의 앞에 선 여자가
후드를 벗어 내렸다. 새카만 후드에 가려져 있던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좋아 보이네.”

달빛을 꼬아 만든 듯이 하얗게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사얀.”

꼭 대공의 것과 닮은.
“덕분에 말이지.”

여자 역시 호박(琥珀)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로브 아래
드러난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에 나는 정말로 넋을 잃고야
말았다.
닮았다.
아니 똑같았다. 대공의 여자 버전이었다. 여자라고 생각하고 보니 키가 큰
편이었고 로브를 뚫고 드러나는 실루엣은 늘씬하면서도 육감적이었다.
실버 블론드와 호박색이라는 색깔만 닮은 게 아니라 그 화려함마저도 똑
닮았다. 깊은 눈매와 오똑한 코, 예쁜 입술까지. 조막만한 얼굴에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서로가 풍겨내는 분위기조차 서늘하고 날카로운 게 비슷했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여자 쪽이 조금 더 은은한 느낌이랄까.
“이스. 카미드가 역시 미쳐 가고 있는 모양이야?”

“언제 제정신인 적이 있기는 했나?”

대공과 만나서 대공의 형이자 티마예브의 국왕인 카미드를 입에 올릴 수


있는, 대공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바보 천치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저렇게 닮았는데 혈육이 아니라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대공은 제 누이를 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느른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똑바로 해, 이스. 내가 손에 뭘 쥐고 있는지 잊었어?”

나긋하고 다정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소중하지 않은가.”

여자의 수려한 미간이 살짝 좁혀 들었다. 그녀는 제 뺨을 쓰다듬고 있는


대공의 손을 매섭게 쳐 내고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대공을 노려보았다.
“그따위로 얘기하지 마.”

“그럼 가서 카미드 엉덩이라도 때려 주라고. 다른 생각 하지 못하게

말이야.”
하 네 엉덩이라면 내가 아주 기분 좋게 때려 줄 텐데 말이지.”
“ .

“나도 그게 늘 안타까워.”

남매는 내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대화를 하며 서로에게 이죽거렸다.


그러나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대공도, 여자도
어느새 사뭇 유쾌하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일단 이쪽에서 파악할 수 있는 만큼 파악한 거야.”


여자가 턱짓을 하자 그녀의 옆에 시립해 있던 수행원이 들고 있던 상자를


대공의 기사에게 넘겼다. 대공은 그 상자를 열어 안에 담겨 있는 양피지를
끄집어냈다. 대공 역시 품에서 꺼낸 서신 하나를 여자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횃불에 의지해 각자 서신을 읽는 동안 동굴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몇 마디 더 이어 갔다.
북부라는 단어가 귀에 들렸으나 어차피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나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대공이 왜 굳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와서 누이와
비밀리에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여자 역시 그게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
가 대화를 끊고 다른 화제를 던졌다.
“어지간히 빠져 있나 보구나.”
“음?”

“이런 자리에까지 데려오다니……. 애첩이라고 불러야겠어.”

“뭐?”

대공의 시선이 제 누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 그러니까 나를 향했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진 채 움찔하지도 못했다. 여자가 내뱉은 단어가 내
멘탈을 처참하게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첩. 그 단어가 충격인지, 여자가 대공과 내 관계-그러나 분명 애첩은
아니다-를 눈치 챘다는 게 충격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이 일순간 뚝 끊길 뻔 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대공은 그런 나를 보고 홍소를 터뜨렸다. 내가 민둥산이 된 하반신이
쪽팔려서 이 멀리까지 소변을 보러 왔다가 대공의 기사들과 마주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아주 맑고 해맑은 웃음이었다.
“맞아, 이스. 내 애첩이지.”

“언제부터 이런 거구가 취향이었는지 몰라……. 그래, 뭐. 재료가 좋긴 하네.

쉽게 망가지지는 않겠어.”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여자가 나를 품평했다. 대공과 얼굴만 아니라
사람을 핥듯이 바라보는 시선도 닮았다.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똑같은
노란 눈동자가 두 쌍이나 나를 오르내리니 숨통이 콱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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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데려온 건 아니야. 이 앞에서 마주쳤다고.”


“…폭포 앞에서?”

“그래. 대단한 우연이지 않나?”

찡그린 여자의 얼굴에서 나는 많은 것을 읽었다. 첩자인 거 아니냐. 도리어


의심을 해야지 여기까지 데려온 건 무슨 생각이냐. 뭐 그런 표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누이에게 보여 주자 싶었지. 어울릴만한 좋은 물건들 좀

보내 줘.”
“벗겨 보고 만져 봐야 알지 이렇게 본다고 뭘 어떻게 알아.”

“나중에 성에 한번 와. 빌려줄 테니.”

“그것 참 기대가 되네. 카미드가 아주 좋아하겠어.”

“미쳐서 팔짝팔짝 뛰게 될 걸. 아주 유능하거든, 내 애첩.”

남매의 대화는… 절대로 평범한 대화가 아니었다. 내가 화제였음에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그 정점을 찍은 것은 대공의
입에서 기어코 흘러나온 ‘애첩’이라는 단어였고 말이다.
이 대화가 나한테만 엿 같고 나한테만 거지같이 느껴지는지, 대공과 여자는
웃고 있었다. 특히 여자는 나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살포시 접어 사람을
홀릴 법한 눈웃음을 보내왔다. 그녀는 내가 태어나서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꼭 마녀처럼 느껴졌다. 대공을 꼭 닮은
요사스러운 미소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괜찮은 걸 보내 줄게.”

“역시. 데려온 보람이 있어.”

“흥. 네 물건보다 그걸 더 좋아한다고 울지나 마시지.”

변태. 변태가 둘이다. 소름 끼치는 예감이 뒤통수를 두들긴다. 나에게서


시선을 떼며 다시 제 형제를 바라보는 여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주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전에 말한 건 저 상자 안에 같이 넣어 뒀어.”

“고마워. 역시 누이뿐이야.”

대공은 팔을 뻗어 제 누이를 살짝 안았다 놓았다. 아까 제법 살벌하게 굴며


뾰족한 말들을 쏟아 냈던 것과는 달리 무척 우애가 도타워 보였다. 그
우애의 밑바탕에 변태적인 대화가 깔려 있지만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레이사가 갑자기 데뷔를 하게 돼도, 너무 놀라지 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군.”


“다행이지. 걱정 마. 연막을 이중 삼중으로 쳐 놨으니까. 돈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고.”
“…….”

“뭐야, 그 표정은. 날 못 믿겠다는 건 아니겠지.”


“글쎄다.”

대공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어조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우리 아들 일인데, 실수 없이 진행해야지.”

우리 아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그 단어가 또 다시 내 멘탈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대공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공이 미친놈인줄은 알았는데 그 누이 역시 미친년인 모양이었다. 대공은
제 형도 미쳤다고 했지. 정신 나간 집안이었다. 저런 작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혹은 나만 미친놈인지도 모른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아무렇지 않게 듣고
서 있는 대공의 기사와 여자의 수행원을 보며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고야 말았다.
- 다음 화에 계속

15.

대공은 누이와 작별인사를 한 뒤 그 길로 동굴을 빠져나와 기사들과 합류해


산장으로 돌아갔다. 나는 돌아갈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으나 따라오라는
말에 목줄이 묶인 개의 꼴로 그와 동행해야 했다.
앞에서 볼 때는 다 쓰러져 가던 산장이었고 실제로 내부도 그러했는데, 산장
의 서관은 그래도 꽤나 멀쩡한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삼삼오오로 흩어졌고 대공은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복도는 유난히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본관과는 달리 거미줄

하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와서 주기적으로 관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공이 근처의 폭포를 밀회의 장소로 사용하니 그를 위해
준비된 게 틀림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복도 끝에
있는 침실은 아늑하기까지 했다. 대공 성의 별관에서 보았던
하인이 들어오는 대공에게 공손이 인사를 하고는 그의 시중을 들었다.
대공은 시중을 받으며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나 역시 다른 하인 하나가 내민
대야의 물로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나가 있어.”

그 명령은 내가 아닌 시종들을 향한 것이었다. 시종들이 나가고 나자


대공은 손수 잔에 황금색 술을 따라 들고는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쳤다. 나는 그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혼이 나간 얼굴이야.”
그러는 대공은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얼굴을 문지른 그가 술을 몇 모금
마셨다. 나도 목이 타서 한잔하고 싶었다. 아니, 술 따위 안 마셔도 좋으니
일단 대공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오늘 들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렸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뭐랄까…… 그래, 버거웠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휘말려 봐야 머리만 아플 일들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여기서 발을 빼고 싶었다.
“내 누이가 그렇게 예뻤어?”

“아니…… 예. 아니……. 그렇긴 한데, 그런 게 아니라.”

“그대 취향이 과부라면서? 내 누이가 아주 딱이긴 해. 아주 귀찮은 정부가

하나 붙어 있긴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은 게 아닙니다.”

“그럼?”

대공은 가벼운 어조로 물었지만 나는 달리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대공과 꼭 닮은 외모가, 그녀와 대공이 나누었던
대화가 내게는 몹시 불길하게 느껴졌다. 또 그 아들 얘기도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말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도 결코 대공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지라 우물쭈물할 수밖엔 없었다. 그러자 대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든지 물어봐도 좋다. 그대에게라면 전부 얘기해 주지.”

“……우리 아들이라고.”

대공은 미혼이었다. 이르면 십대 후반, 늦어도 이십대 중반에는 결혼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도 대공에게는 처자식이 없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혼기가 지난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대공은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염문설을 뿌리는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야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여자를 진득하게 사귀고 결혼할 겨를이 없었다지만, 귀족인
그가 여태 결혼을 하지 않은 건 분명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저와 똑 닮은 누이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으니 내가 어찌 놀라지 않겠냔 말이다. 아무리 대공에게 관심이 없다
해도, 남매간의 근친상간은 경악할 일이었다.
“왕족들 중에 친인척이 아닌 사람 찾기가 더 힘들다고 내가 얘기했었지?”

“예.”

“왕가에서는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 근친혼은 드문 게 아니야.”

“……네.”
특히나 티마예브는 근친으로 태어난 아이로 왕위를 이어왔지.”

“…….”

“놀랐나? 하하. 처음에야 고결한 피가 다른 피로 더럽혀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겠지. 그런데 그게 세대를 거듭하다 보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어. 형제자매를 사랑하도록 핏줄에 새겨져 버렸다고.”
대공의 말투는 여상했다. 말투만 들어서는 ‘오늘은 날씨가 맑네.’ 따위의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미드가 날 미워해. 이스를 사랑하는데 이스가 내 애를 낳았거든.”

그러나 그 내용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일개 평민 나부랭이인 내가 감히


알아도 되는 것인가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비밀이었다. 어디서 떠들고
다녔다간 당장 왕실 모독죄로 붙잡혀 가서 열흘 밤낮 고문을 당한 뒤 몸이
다섯 토막으로 나뉘고 머리는 시장 광장에 내걸릴 게 뻔했다. 그런 폭탄
발언을 연이어 들은 내 머릿속은 진정한 과부하를 일으켰다. 사고가 정지한
건 물론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다 얼얼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티마예브의 왕위 계승 2순위지. 카미드가 죽는다면 내가, 또 내가 죽는다면

그 아이가 왕이 된다. 이스는 카미드의 아이를 낳아 주지 않을 거고, 카미드


가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도록 허락하지도 않을 거거든.”
형제자매끼리 사랑을 느낀다고 했다. 대공의 누이는 대공의 아이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낳았다고
했어. 그러니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대공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아까의 남매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대공의 관계를 알고 ‘애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목소리에서 질투나
분노 따위의 감정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대공과 서로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부정을 저지르는 연인에게 화를 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나를 조금 신기하게 보았고, 대공도 그녀에게 나를 내보이면서
빌려주겠다느니, 좋은 물건을 보내 달라느니 하는 말을 지껄였었다.
“카미드가 교황 손을 들어 날 압박하는 건 다 그 때문이야. 자기가 죽는다면

좋은 건 다 나한테 넘어올 테니 어지간히 배가 아픈 모양이지. 그 얼간이는


어려서부터도 생각이 짧고 멍청했어. 지능이 낮은 건 고쳐지지 않는 문제인
것 같아.”
대공은 신랄하게 제 형제를 비웃었다. 누이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르게
형제를 언급하는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 전부 경멸이 깔려 있었다. 이전에
제 형과의 관계가 그저 정치적이라고 말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나는 잠시 아까 동굴에서 남매가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지금 대공의 누이는 티마예브의 국왕 카미드와 함께 지내는 듯이 얘기를
했었다. 누이에게 붙어 있다는 정부가 설마 국왕 카미드란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남매간이냐고. 남매간에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모럴이 없다보니 부정을 저지르는 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당당히 드러내는 걸까? 그렇지만 카미드란 형제에게는 제대로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득 대공이 금방 표정을 바꾸어 생긋 웃었다.
“그대가 신경 쓸 건 없어. 이스를 질투할 것도 없고.”

질……. 원래도 할 말이 없었지만 완전히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내가 왜


질투를 하겠는가. 질투를 한다면 오히려 그의 누이 쪽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엔 없는 문제였다. 유부녀를 건드리다가 그 남편과 맞닥뜨리는 것보다
질이 나쁘다.
아니, 내 도덕관을 떠나서 말이다. 남매간에 사랑을 하는 유전자가 있고, 아
이까지 낳을 정도로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제발 나는 좀 그 사이에서
빼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너희끼리 붙어먹든지 말든지 솔직히 내 알 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니까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라고…….
“그… 그분께서 신경을 쓰시지 않을까요.”
“이스가 그대를?”
되물음과 동시에 대공은 피식대며 나를 비웃었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너 좀 자의식 과잉 아니냐, 뭐 그런 느낌으로다가. 아니 뭐, 그
래. 뭐 그 대단히 아름다우신 분이 시커멓고 커다란 남자놈을 질투하실
리는 없을 것 같다마는. 그래도 본처 입장에서는 남편의 첩이 기분이 좋을
리가. 아니, 씨발 누가 첩이냐, 첩은.
“더 궁금한 건?”

단순하게 살아온 내가 당신과 얽힌 뒤로 대가리가 터져 버릴 것 같으니


그냥 날 좀 내버려 둬…….
궁금하다기보다는 대공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내가 감히 그런 말을
대공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 아이를 낳아 준 여자 앞에서
애첩이라는 말을 당당히 지껄인 인간이 내가 하지 말란다고 나를 놓아줄 것
같지도 않고. 역시나 차라리 이것저것 포기하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몇
배는 더 이로울 것이다.
더 생각해 봐야 답이 없는 화제에 지쳐 버려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좋은 걸 보내 달라는 건 무슨 얘기였습니까.”

“아아. 누이가 여러모로 나보다 기술자거든. 그런 핏줄이야. 특히 누이는


각종 도구를 잘 다루지.”
“……도구요?”

“응. 차차 알게 될 거다. 그대도 좋아할걸.”

뭐든 대답해 주겠다던 대공은 생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불안감이


더 커지며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불길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피곤하군. 얼른 하고 자야겠어.”

아니 물론 대공과 얽히고 나서 보통 아닌 일이 뭐 하나는 있기는 했던가.


또 하자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밤이 깊었는데 지금 시작하자고? 아니, 어제도 했는데 또 하자고? 오늘, 오
늘 아침에도 입으로 했는데. 그리고 아침이 되면 오늘처럼 또 하루 종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를 호위
하며 걸어야 하고, 그러다가 어디서 적이라도 나타난다면 싸워야
하는데.
그러나 내가 한마디를 벙긋하기도 전에 대공이 술을 털어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침대로 가는 수밖엔
없었다. 내가 다가서자 대공은 내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섹스 한 번 한다고 못 일어나는 체력은 아니잖아?”
대공은 어쩌면 내 머릿속을 읽는지도 모른다……. 나는 체념하고 셔츠
아래로 들어오는 그의 손을 받아들였다. 살갗을 한 차례 쓸어 올리며 셔츠
아랫단을 밀어 올린 그는 지체 없이 내 셔츠를 벗겨 냈다.
그가 직접 내 옷을 벗기는 건 오랜만… 아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앞에서 옷을 벗을 때 느꼈던 굴욕감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감정이 속을
들쑤셨다. 몹시도 거북하면서 불편한 감정이라 바지는 내가 벗었다. 옷을
벗겨 준다는 게, 어쩐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간지럽고 오글오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윽…!”

내가 침대에 눕자마자 대공이 위로 올라와서 내 다리를 벌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대공의 손가락이 푹 쑤셔 박히는 순간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특히나 이틀 연속으로 시달려 아래가 부어 있는
상태에서는 더욱. 아무리 오일을 발랐다지만 손가락이 닫힌 곳을 벌리고
들어올 때면 통증이 아릿하게 번지는 것이다. 내장을 역행하는 이물감은
언제나 괴로웠다. 게다가 대공은 그다지 부드럽게 손을 놀리는 편이
아니었다. 오늘처럼 빨리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넓히는 것에만 충실하여
더더욱 거칠었다.
“자위해 봐.”
늘어진 내 성기 위에도 오일을 부으며 대공이 명령했다. 손가락만으로도 내
안쪽을 자극해서 발기시키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지금은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혹은 피곤해서 귀찮든가. 그 지경이라면 섹스를 안 하면
되잖아……. 소리 없는 아우성이 내 속에서 들끓었다.
“흐으…….”

나는 입술을 깨물어 아래를 벌리는 거북한 감각과 통증을 견디며 손으로


늘어진 성기를 말아 쥐었다. 남자는 역시나 슬픈 생명체였다. 이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상황에서
도 성감을 느끼다니 말이다. 타인에 의해 아래가 열린다는 감각은
여전히 끔찍할 정도로 낯설었지만 차오르는 굴욕감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자포자기로 감정을 포기하고 나니 몸이 쾌감에 더 솔직해진다.
혹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는 데에 지쳐서 쾌감으로 도피를 하는
것인지도.
성기를 미끈하게 감싸는 오일 덕분에 손을 움직이기가 편했다. 몇 번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운 감각이 피어오르더니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래에 박힌 손가락이 개수를 늘리며 더 깊은 곳을 헤집어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졌지만, 그래도 성기에 느끼는 자극은
착실히 쌓여 갔다.
“후으…… 으…….”
대공은 일부러 내가 느끼는 곳을 피하고 있었다. 간혹 그쪽으로 손가락이
움직였을 때에도 근처만 누르고 내가 움찔하기만 하면 손가락이 다른 곳을
비껴 찔러 들었다. 안쪽에 가하는 쾌감을 알고 있는데 일부러 만져 주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애가 탔다. 성기를 흔드는 손이 빨라져 손 안에서 성기가
팽팽히 부풀었는데도 부족하고 아쉬웠다. 뒤를 헤집어 이렇게 불쾌하게 할
거면 차라리 좀 더 느끼게라도 해 주든가……. 평소에는 너무 심하게
쾌감을 강요하여 사람을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애를 태우는 새로운
괴롭힘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떨었다.
“일어나.”

한껏 벌려 대던 안에서 손을 빼내고 대공이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힐끔 보니 어느새 그도 바지춤에서 성기를 꺼내 흔들고
있었다. 그의 손 안에서 성기가 크게 흥분해 꺼덕였다. 내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키자, 대공은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나를 끌어당겼다.
“올라앉아.”

대공의 요구에… 나는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씨발, 굴욕감에


익숙해졌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위에 올라타라는 말을 들을 줄은, 이런
체위를 요구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여자들이 내 위에 올라타
엉덩이를 흔든 적은 있어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고. 씨발, 이게 이렇게
수치스럽고 쪽팔릴 줄은 몰랐다. 진짜 하기 싫었다. 내가 대공의 좆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내 쪽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물론 나는
그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집무실에서 나를 제 다리에 올라앉게
했던 그날처럼. 나는 다리를 벌린 채 그의 위로 올라갔다. 내 다리 사이에
누운 사내의 늘씬한 몸과 야살스러운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은은히
타오르는 촛불 아래 보이는 대공의 얼굴에는 미끈한 미소가 맺혀 있어 나를
더 울컥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잘 삼키는지 구경이나 좀 할까?”

대공은 내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등에 쿠션을 대고 침대에 편안하게


늘어진 채 머리 뒤로 깍지를 껴 베개를 삼고는 나를 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밤이 지나도록 끝이 나지
않을 게 뻔했다. 아니, 더 심한 일을 당하게 되겠지. 상하가 명확한 이
관계에서 나는 한 번도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건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으…….”

손을 아래로 내려 쥔 대공의 성기는 여전히 굵고 길고 단단했다. 내가


아무리 체격이 좋다지만 이런 몽둥이를 몇 번이나 아래에 넣고 괜찮은 게
신기할 정도로.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성기 끝에 아래를 맞댔다. 대공의
손가락이 잔뜩 벌리고 헤집었던 곳이었음에도 성기 끝이 닿는 감각이
몹시도 이상했다.
“으음…….”

내 아래에 몸을 누인 대공이 낮게 신음했다. 손에 쥔 성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주름진 아래에 성기 끝이 맞닿아 살짝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절대로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 복장을 뒤집어 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기다릴 뿐.
“큭…….”

서서히 몸을 낮추자 성기가 아래를 벌리며 밀려들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서 당장 빼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피하고 싶어서
움찔대는 몸에서 최대한 힘을 빼며 주저앉았다. 대공이 그래도 착실히 적셔
둔 덕분에, 귀두가 들어온 뒤에는 기둥이 즈윽 하고 미끄러지며 들어왔다.
긴장을 풀어야 수월하게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꾸만 몸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힘이 들어
가서 죽을 맛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하는 짓거리에 몸이 땀으로
.

흠뻑 젖어 들었다.
“으윽… 흐……!”

- 다음 화에 계속

16.

끝까지 삽입했을 때, 기어코 입에서 신음이 샜다. 손가락이 닿지 않았던


깊은 곳까지 열리는 느낌이 선연했던 것이다. 뱃속이 가득 차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위에 올라온 체위 탓에 삽입이 평소보다 깊게 느껴졌다.
정말로 배꼽 아래까지 대공의 성기가 들어찬 듯이 압박감이 심했다.
“잘도 먹는군.”

끝까지 삽입해 대공과 내 몸이 맞닿았을 때에야 대공이 손을 움직였다. 내


엉덩이를 움켜쥐어 주무르는 탓에 몸이 또 흠칫댔다. 그가 엉덩이를
양쪽으로 쥐어 벌렸다가 다시 모아 쥐며 비벼 댈 때마다 성기를 가득 물고
있는 항문이 아릿하게 자극되었다.
“그거 알아?”

대공이 웃었다. 침대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은빛의 머리카락과 발갛게


홍조가 오른 얼굴. 젖어 든 호박색의 눈동자가… 몹시도 야했다. 솔직히 이
정도 남자라면 나도 한번쯤 박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야한
얼굴이었다. 불행히도 박히는 건 이쪽이었지만 말이다…….
“이젠 넣을 때도 좆을 세운다고, 그대.”

그의 지적에,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에 내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더


뜨거워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목덜미와 귀까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말마따나 내 성기는 여전히 발기한 채로 허공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워 두었다 해도 넣을 때의 정신적 충격과 통증으로 수그러들곤
했었던 내 좆이. 그런데 지금은…….
“아주 절경이야.”

털 한 가닥 없는 탓에 고스란히 노출된 성기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대공이


웃었다. 허공을 찌르고 있는 귀두를 톡 건드린 순간 나는 쾌감을 참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못하고 허
리를 젖히며 몸을 떨었다. 뜨겁게 질주하는 성감이 전신을 지지는
것만 같았다.
“밤새 이러고 있을까? 그렇게 좋아?”

대공은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는 듯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물론 일부러


다정한 말투를 내어 나를 놀리고 괴롭히는 것이었다. 성기를 자극 받은
쾌감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허벅지에 힘을 주어 몸을
위로 띄웠다. 성기가 내벽을 압박하며 주르륵 빠져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저릿해졌다.
“윽… 크흑….”

들어 올렸던 엉덩이를 다시 내리자 성기가 수직으로 깊숙이까지 처박혔다.


대공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내가 움직여 넣고 빼는 그
감각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야릇했다.
다시 엉덩이를 위로 올렸다가 주저앉고, 다시 들어 올리고, 주저앉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는 동안 대공은 내 엉덩이를 쥐어 움직임을 조금씩
도와주었다. 요령이 생겨 성기를 반 정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접합부에서 오일이 질컥질컥 젖은 소리를 냈다.
“하으… 흑! 크읏!”

혼자서 움직이던 도중 유난히 신음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성기 끝이


내벽의 한 지점을 누르고 미끄러질 때마다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대공이
과격하게 찔러 들어올 때와는 달리 자극이 적당했다. 수치심이 희미해질
정도로 기분이 붕 떠오르게 만드는 쾌감이었다. 안쪽에 간지러운 열기가
번지며 성기로도 쾌감이 질주했다. 꼿꼿하게 서서 꺼덕이던 성기 끝에
끈적한 액체가 고여 대공의 몸에 똑똑 떨어졌다.
“일릭. 더 빨리.”
대공이 나른하게 더운 숨을 뿜어 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엉덩이를 쥔 손이
위로 올라가 허리를 당겨 나는 그의 위로 조금 더 몸을 구부렸다. 무너지지
않으려 대공의 몸을 손으로 짚었다. 탄탄한 육체가 뜨거웠다. 그의 살에
닿은 손바닥에 찌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크윽, 윽, 으, 하윽.”

나는 딱 좋을 정도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데, 대공은 부족한 모양이었다. 내


엉덩이를 잡아 주저앉히는 손이 빨라진다. 나만 사정감이 고조되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사정하는
것으로는 이 짓이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조금 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철썩철썩 살이 맞부딪힐 정도로 깊게 성기를 품었다가 빼내고 다시 깊게
품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내가 느끼는 지점에 성기를 비비는 것은
본능과도 같았다. 이보다 더 느껴 버리면 괴로워질 것을 알면서도,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조절되지가 않았다.
“아! 아, 아! 잠깐, 아!”

대공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성기의 움직임이 과격했다. 내벽 너머를 짓이길 기세로 박혀
들어와 그대로 점막을 비비며 깊숙이로 쑤셔 박혔다. 내가 도망치며 몸을
띄우면 곧장 다시 주저앉히며 쑤셔 박혔다. 눈앞에 번개가 쳤다. 폭발하는
열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질주하는 쾌감에 부유감마저 느껴졌다. 성기가
안을 헤집을 때면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급속도로 추락하는 것처럼
배꼽 안쪽이 당겼다. 숨이 턱턱 차올라서 산소가 부족해 눈앞이 핑글
돌았다.
“……!”

퍽 소리가 울리고 내 몸이 들썩일 정도로 대공이 거칠게 쳐올렸을 때.


눈앞에 별이 쏟아지며 엉덩이가 확 조여들었다. 아니, 전신의 근육이 아플
정도로 경직되었다. 더는, 더 이상은 쾌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아랫배에서 끓어오르던 것이 일제히 폭발했다. 척수를 따라 뇌까지 지지는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후려쳤다. 대공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비 없이
성기를 퍽퍽 박아 넣었다. 의식이 일순간 끊어지며 시야가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아아……!!”

대공의 몸을 짚은 채 나는 길게 사정했다. 고환이 텅 빌 정도로 사정을 한 게


24시간도 되지 않았기에 나오는 것은 상당히 묽었다.

내가 절정에 올라 부르르 떨며 사정하는 사이, 대공 역시 몇 번을 더


쳐올리다가 움직임을 멈추고 내 안에 정을 쏟아 냈다. 오르가슴을 느끼며
헐떡거리는 그의 얼굴이 요사스러울 정도로 야했다. 땀에 젖어든 뺨에 오른
발간 홍조가 몹시도 색정적이었다. 나른하게 풀어지며 나를 바라보는
눈매가 보통 관능적인 게 아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변태 개새
끼 미친놈이었지만 그가 굉장한 미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 몸에 대고 욕구를 푸는 놈을 두고 잘생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조차 나는 억울할 때가 있었다.
“…후우.”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대공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제 몸을 훑어보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사정한 정액이 그의 하얀 피부 위에
흩뿌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머리카락까지 새하얀 남자의 촉촉하게 젖은
피부 위에……. 내가 사출한 정액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모습이란. 그가 내
아래에 누워 있다는 게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게 만든다.
“버릇없긴.”

가볍게 나를 질책하며 대공이 손가락으로 제 배를 훑었다. 손끝에 묻어나는


묽은 점액질의 액체를 엄지와 검지로 비비적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비벼지다가 떨어질 때마다 사이에서 점액질이 실처럼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그걸 보고 있는데 얼굴이 보통 화끈거리는 게 아니었다. 씨발, 그
가 너무 미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런 미인이 내 아래 깔려서 정액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게 너무 야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당하기는 내가 당했는데 말이다.
“헉…….”

대공이 예고 없이 늘어진 내 성기를 만졌다. 뜨거운 손이 성기를 가볍게


훑고는 치골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주기적으로 제모제를 발라대는 대공
탓에 모근도 남기지 못하고 매끌매끌해진 살갗을 만지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앞으로 영원히 음모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나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싫은가?”

“…….”

백자지 귀엽잖아.”

씨발, 그렇게 귀여우면 너나 하든가.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아서 어금니를


지그시 사리물었다.
대공은 쿡쿡 웃으며 맨들맨들한 피부를 몇 번 더 쓰다듬고는 손을 위로
옮겼다. 여전히 그의 성기를 품은 채 그의 몸을 올라타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거북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이러다가 또 한 번 하자고 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것 같아서
솔직히 두려웠다 오늘의 섹스는 내가 상위로 올라갔다는 것을
.

제외하면 무난하게 끝난 편이었고,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보통 이럴


때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 놀아 주고 싶긴 한데.”

복근을 문질러 올라와 내 가슴을 주무르며 대공이 중얼거렸다.


“피곤하군.”

나에게는 무척이나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표정을 드러낼


수가 없어 무표정을 가장했다. 내 가슴을 만지는 손길이 느릿했다. 그리고
그 손길보다 더 느릿하게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로 피곤한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기절을 하면 했지, 대공이 지친 기색을 보이는 게 처음이었기에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여전히 그의 성기가 내 안에 박혀 있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기분이 더 달랐을지도.
“더 할까?”

“아닙니다.”

본심이 숨겨지지 않아 정색을 하고야 말았다. 대공은 피식 웃었지만


평소처럼 심술궂게 구는 대신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그게 일어나도
좋다는 허락인 것 같아서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사정을 한 후에도 부피가 상당한 대공의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솔직히
그리 좋지는 않았다. 빼낸 후에도 아래가 벌어져 잘 닫히지가 않았다. 안에
고인 것들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아서 나는 급히 엉덩이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막 일어나기 전.
“헉?!”

대공이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아 제 쪽으로 확 눌렀다. 빠르게 침대를 짚어


그의 위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그의 가슴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그렇게 우연으로라도 대공을 한 대 칠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들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대가 더럽힌 건 치우고 가야지.”

고개를 겨우 들어 본 대공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졸음이 담뿍 느껴졌다. 그 와중에 다시 한번 내 머리를 꾸욱 눌렀다. 땀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젖었다가
식기 시작한 그의 피부에 내 코끝이 닿았다. 땀을 꽤 흘렸음에도
그의 살갗에서는 어떤 정결한 체향이 은은히 풍겼다. 다만 그 체향에 밤꽃
냄새가…….
“핥아.”
씨발. 그 순간 차마 소리는 못 내도 입을 벙긋대며 욕을 해 버렸다. 대공이
핥으라고 명령한 것. 새하얀 피부 위에 맺힌 희뿌연 액체. 그건 바로 내가
그의 배와 가슴에 흩뿌려 놓은 내 정액이었다.
솔직히 혀를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대공의 좆을 빨고 그가 싼 정액을
먹는 것과는 또 달랐다. 그걸 먹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단 한 번도 입으로
들어가리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내 정액을 내가 먹는다는 것도
고문이었다. 벌써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짓을 하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 더 주저하고 머뭇거린다면 대공이 더 심한 짓을 할
테고, 피곤한 자신을 번거롭게 했다는 죄가 더해져서 아주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간지러워…….”

내가 혀를 내어 그의 살갗을 핥았을 때, 대공이 반은 잠든 목소리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차마 처음부터 내 정액을 핥을 수가 없어서 우선
일단 혀가 닿는 곳부터 대강 핥았다. 땀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의 살갗이
조금은 찝찔했다. 두 눈을 꽉 감고 나는 되는 대로 혀를 놀렸다. 간혹 기분
나쁜 촉감의 체액이 혀에 닿기도 했다. 씁쓸하면서도 비릿한 그것이
무엇인지 애써 외면하며 계속 혀를 놀렸다.
그 와중에도 혀끝으로 느끼는 대공의 피부는 몹시 부드러웠다. 밤꽃 냄새
사이로 묘하게 달착지근하다고 할 법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의 살갗이
워낙 부드러워서 향기가 잘 어울렸다. 꼭 크림을 핥고 있는 것 같았다.
실상은 땀에 젖은 피부와 내 정액을 핥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 내 머리에 얹혀 있던 대공의 손이 스르륵 흘러내려 침대로 툭
떨어졌다. 핥게 시켜 놓고 그걸로 자극 받아서 또 하자고 덤벼들까 봐
긴장을 하고 있던 나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었다. 숨을 죽인 채 속으로 수십
초를 셌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공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가슴이 규
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정말로 잠든 것 같았다.
“……각하…?”

나는 용기를 내어 그를 불러보았다. 용기를 쥐어짠다고 쥐어짜 보았음에도


사실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속삭임이었다.
대공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감긴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고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암만 봐도 자는 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그 얼굴은 정말 천사 같……. 아니, 속에 시커먼 구렁이가 들어
있는데 겉모습이 쓸데없이 예뻐서 사람을 현혹하는 점까지 악마 같았다.
나… 나도 이제 가도 되지 않을까. 늘어진 그의 몸 위에 내 몸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과 무릎으로 침대를 짚어 엎드린 채로 내 머릿속에서 치열한 갈등이
이어졌다. 내가 핥은 곳은 그의 가슴 가운데와 상복부 정도라, 아직 아랫배
쪽에는 내 정액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그냥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굳이 핥아서 치워야 할까. 다른 걸로 닦으면 안 될까? 깨어날까??
그때 침실 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렸다. 나처럼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기척이 없는 움직임의 주인공은 대공의
하인이었다. 별관에서도 보았던, 매일 아침 나를 데리러 오던 그
하인이었다.
대공의 별관에서 별짓을 다 당하면서 시종들에게 벗은 몸을 보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나는 결코 대공과의 정사의 흔적이 남은 내 몸을 보이는 것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대공을 깨우면 안 된다는 것도 잊은 채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온
뒤였다.
“……어어…….”

어린 하인은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더운 물이 가득 든 대야를


들고 온 그는 마른 수건을 적셔 잠든 대공의 몸을 닦아 냈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대공의 몸에 아직도 대강 걸쳐 있는 옷들을 벗기기까지
했다.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한 것인지 혹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피곤한
것인지 대공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내뱉는 숨이 잠시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이내 다시 새근새근 고른 소리를 냈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중요 부위를 가린 채
어정쩡히 서서 하인이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고개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돌린 하인
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흠칫 동요해 버렸다.
“…….”

저쪽으로 가세요. 하인은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문을 하나 가리켰다. 그가 들어온 곳과는 다른 자그마한
문이었다. 그쪽으로 나가라는 건가 싶어서 나는 주춤주춤 옷을 그러모아
쥐고는 뒷걸음질 쳐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금 놀라 버렸다.
이어진 곳은 대공의 침실에 딸린 작은 화장실이었다. 바닥에는 큼직한
대야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더운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아……. 하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 감정이 무딘
내가 감동을 느껴버렸다. 그래, 저 거지발싸개 같은 대공의 수발을 드느라
너도 고생이 많았겠지. 나 같이 당하고 사는 사람을 하나둘 본 게 아니었을
테니 동정심이 들었겠지. 하인이 내게 보인 호의가 동정심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는 그에게 고맙기만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건을 적셔 대충 몸을 닦았다. 그리고 난 뒤 더 한숨
나는 짓을 하기 위해 엉덩이를 조금 뒤로 내밀고 다리를 벌려 섰다. 참으로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는 짓이었으나 더 절망스러운 건 내가 이 짓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으윽…….”

손가락으로 억지로 벌린 안쪽에서 끈적한 액체가 주르륵 흐르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흘러내린 것이 벌어진 구멍을 통해 아래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속 안에 것이 모두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무 바닥 위에 지저분한 액체가 몹시도 심란한 모양새로
떨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오는 건 한숨밖엔 없었다.
하지만 안에 고인 정액을 완전히 빼내기 위해 내벽을 더듬는 손은… 분명히
그 행위에 능숙했다. 점차 능숙해지고 있었다. 입을 사용하는 것도, 대공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 뒤처리를 하는 것도 모두.
“하아……. 큭….”

나는 그렇게 그에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17.

어찌어찌 몸을 씻고 나왔을 때 대공의 하인은 배려의 끝을 보여주었다.


섹스를 하기 전에 옷을 벗어 두었기 때문에 내 옷이 그리 엉망이 된 것이
아님에도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주었던 것이다. 내 사이즈의 여벌옷까지 싸
들고 다니는가 싶어서 조금 신기하기도 했지만, 묻는다고 대답을 할 수
있을 처지도 아닐 것이기에 작게 고마움을 표하고 챙겨 준 옷으로 갈아입고
대공의 침실을 나섰다.
어둠에 잠긴 복도를 걸어 본관까지는 또 한참이었다. 서관을 벗어나자마자
건물은 급속도로 황폐화되었다. 복도 모서리를 돌았을 뿐인데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심지어 2층 복도가 중간에 뚝 끊겨 있어서 어둠 속을 더듬다가
1층까지 수직낙하 할 뻔 했다. 계단을 찾아 왔던 길을 거슬러 중간까지

돌아가서야 그나마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거기서 본관의


현관홀까지는 어둠을 헤치며 걸어야 했다.
그때 불침번을 서고 있던 놈은 체즈번이었다. 조느라 내가 나가는 줄도
몰랐던 이전 놈과는 달리 체즈번은 제법 흉흉하게 눈빛을 빛내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특히나 나를 보았을 때 놈의 눈이 퍽 매서웠다. 그렇지 않아도
리리엘을 찾아갔었던 놈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뒤로는 내 뒤를 캔
주제에 그걸 감추지도 않았다. 천박할 정도로 가볍게 굴지만 오랫동안
용병으로 일한 놈의 속은 보통 의뭉스러운 게 아니었다.
“또 대공?”

툭 던지는 질문 속에 가시가 있었다. 그러나 놈이 의뭉을 떠는 만큼 나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투로 대꾸했다.
“그래.”

“기사들도 데려왔으면서 왜 굳이 널 찾는대.”

대공과의 계약서에 비밀유지 조항이 있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나온 스물한


명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놈들 역시 같은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유난히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스무 명이 한 임무를 공유할 때
나는 그들이 모르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체즈번은 더는 캐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오기 전에 정보를 좀 캐 봤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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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공이 미혼이잖아?”

갑작스럽게 화제에 오른 대공에 약간 긴장감이 차올랐다.


“…성벽이 아주 괴팍하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더군다나 대공의 성생활에 관한 얘기라면 나로서는 무조건 피하고 싶은


화제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체즈번이 멋대로 지껄여 댔다.
“그 정도 권력자라면 취향대로 여자든 남자든 건드릴 텐데 말이지.

실제로도 뭐, 엄청나다고 하더라고. 대공의 침대로 한번 불려 들어가면


시체도 찾지 못한다나.”
“……죽인단 거야?”

체즈번은 음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대체 뭘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대공의 침대에 불려 가는 처지인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체즈번이 대공과 내 관계를 눈치챘을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대공의 침대로 불려 갔던 이들의 시체도 찾지 못한다는
얘기에 더 섬뜩해졌다.
“먹는다는 얘기도 있고.”

“……뭐?”

“피로 목욕한다는 얘기는 아주 공공연한 비밀이던데.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미모잖아?”
어느 영주의 미망인이 어린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여 늙지 않는 미모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대륙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널리 퍼진 괴담이었다.
물론 대공은 그런 괴담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번 임무에서 처음 대공을 본 동료 용병놈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었다. 나도 처음 봤을 때 숨을 멈출 정도로 놀랐고
지금까지도 놀라곤 하는 그런 미모의 소유자였으니, 피로 목욕을 한다는
괴담은 충분히 있을 법 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오늘 맡았던 그의 은은한 체취를 떠올렸다. 그 이전의 정사에서
맡았던 냄새들도 돌이켜보았다. 연한 살 냄새. 그러나 절대로 악취는
아니었다. 십 년을 넘게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살았기에 피 냄새라면
귀신같이 알았다. 대공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그런 비린내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냄새를 맡고 정결하다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또 그게
피 목욕의 결과였다면 그의 누이 역시 피로 목욕을 한다는
뜻인데……. 그 남매는 성격적인 면에서 보면 피로 목욕하는 게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미모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 대공이 가끔 이 숲으로 외유를 나온다더군.”

체즈번은 그동안 리리엘만 찾아낸 게 아니라 여기저기 들쑤시며 꽤 많은


정보를 모은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본인이 말이 많은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도 쉽게 대화를 이끌어 내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죽고 못 사는 여자를 만나러 말이지.”

그리고 그가 물어 오는 소식들은 의외로 신빙성이 높은 편이었다. 이번에도


영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괜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은 주억거렸다. 내
제스처를 놓치지 않은 체즈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체즈번은 원하던 답을 얻은 셈이었다. 내가 정말로 대공이
불러서 다녀왔으며, 그에게 갔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말이다.
물론 그가 만난다는 여자는 그의 누이고, 정작 그와 섹스를 한 건 나라는 게
진실이었지만.
“…흠.”

체즈번이 원하는 답을 얻어낸 뒤에는 잠시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녀석은


내가 어디까지를 얘기할 수 있을지 간을 보듯이 나를 힐끔댔다.
“크흠. 엄청 예쁘겠지?”

“…뭐, 대공이 몰래 만나러 나올 정도니까. 대공만큼은 아름답겠지.”

나는 사실만을 말했다. 대공과 그 누이는 성별만 바꿨다 싶을 정도로


닮았고 같은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체즈번은 멋대로 상상을
했는지 과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캬. 얼마나 대단한 여자면 대공이 숨겨 두고 만날까?”

“글쎄. 유부녀라거나.”

“……와. 진짜 그럴 수도. 아니, 아무리 유부녀라 해도 그렇지. 대공 정도


되는 권력자가 손에 넣지 못한다고?”
“금단의 관계라거나.”

“헉. 대박.”

“거기에 동성이라거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미친. 남자, 그것도 남의 집 남자를? 금단의 관계면 뭐, 뭐지?”


“심지어 한둘이 아닐지도 모르지.”

“나, 난교?!”

여태 소리를 죽여 대화를 나누던 체즈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잘


자던 놈들 중 몇 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난교?!”

“어디! 난교가 어디냐!”

참으로 추잡스러운 꼬라지였다. 난교라는 단어 하나에 눈을 번쩍 뜨며


무덤을 박차고 튀어나온 시체처럼 일어났던 놈들은 그 어디에도 난교의
니은도 없음을 금세 깨닫고는 쌍욕을 퍼부으며 도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진짜로?”

잠깐의 소동이 가라앉은 뒤 체즈번이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
“뭐… 사람만 있는 건 아닐지도.”

“헉……? 그럼… 그럼 수…….”

“드래곤이랑 떡치는 것도 수간이라고 하나?”

“…….”

체즈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을 치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드래곤이라고 하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생명체
아니겠나. 놀림 당했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놈을
차갑게 비웃어 주었다.
“의뢰인 얘길 할 것 같냐? 잠이나 자라.”

“개새끼…….”

일부의 진실에 일부의 거짓을 섞었다. 체즈번은 이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대공과의 일 때문에
나갔다 온 게 맞는지도 다시 의심하게 되겠지만, 대공이 여자를 만나러
왔다는 것을 제멋대로 사실인 양 믿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씩씩대는 체즈번을 무시하고 침낭 속에 들어갔다. 딱딱한 바닥에 담요
쪼가리 깔고 누운 것이나 다름없는 빈약한 잠자리에 몸이 배겼다. 대공에게
시달린 몸이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지
쳐 있던 몸은 이내 자리를 가릴 것 없이 무겁게 늘어졌다 눈앞이 .

가물가물 감겼다. 빠르게 수마가 몰려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나 자신의 괴물 같은 체력에 감탄을 하고야
말았다. 몇 시간 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던
것이다. 평소와 다른 체위로 섹스를 했던 탓에 전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허리가 무겁고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대공이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소프트한 섹스였던 건 분명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행군을
했음에도 전날보다는 확실히 몸이 가뿐했다. 하루 종일 움직이는 것보다
대공과의 거친 섹스가 나를 더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다는 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대공의 하인이 나를 부르러 오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니만큼 대공이 정신을 차렸든지, 혹은 연일 낮밤으로 빼 댔으니
놈도 체력이 다했든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누이를 만나고 와서는
빠르게 한 번 하자마자 잠들어 버릴 정도로 피곤해했으니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늘 일정에 대해 지시를 받은 게 없었으므로 용병들은 일단 다 쓰러져
가는 본관 홀에서 대기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각자 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라도반이 초조하게 건물의 안팎을 오갔지만 그 역시
대기하라는 전언밖에는 들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대공의 기사가 용병대를 찾아온 것은 정오가 다가왔을 무렵이었다. 대공은
어디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나타난 기사는 전날 대공이
누이를 만나러 동굴에 들어갔을 때 횃불을 들고 동행케 한 적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중년의 사내였다.
“여기서 자네들은 동쪽으로 이동을 하게.”

그는 라도반에게 지도를 펼쳐 보여 주며 산장에서 동쪽으로 숲의 경계쯤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켰다.
“로인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인데, 이곳에 자네들이 호위를 할 대상이

있거든.”
“호위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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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쪽에 가 있는 용병들이 있어 인원 충원인 셈이지. 저쪽의 제키가


마을까지 안내하고 그곳에서의 자세한 임무를 알려 줄 걸세.”


기사와 라도반의 시선이 향한 곳에 비교적 젊고 기사치고는 자유분방해
보이는 남자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잠시 표정을 굳혔던 라도반이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리고 자네.”

기사의 부름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자네는 이번 임무에서 제외다.”

“……일릭만 말입니까?”

“각하께서 따로 시키실 일이 있다고 하시더군.”

라도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그 주변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모든


용병놈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놈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보다가 나는 문득
대공이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어.’

나를 집무실로 불러들여 제 무릎에 앉혀 놓고, 용병대의 의심을 받고


있다고 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자신이 다 해결해 주겠다는 듯이 말을
하더니 그 방법이 이거였다.
나를 의심하는 놈들을 전부 엮어 임무랍시고 타지에 보내고, 나에게는 단독
임무를 맡겨 제 곁에 붙여 두는 것. 곧 있으면 본대는 돌아갈 테니 아무리
나를 의심한다 한들 더는 내 뒤를 캐 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만만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운 아름다운
얼굴이 그릴 듯이 눈에 선했다. 분홍빛의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고,
깊은 눈매가 관능미를 풍기며 가늘어질 테지.
사내를 떠올린 순간, 허리가 묵직하고, 엉덩이며 그 안쪽이 아릿하며
불쾌하게 아파 왔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는 어쩔 수 없이 안도감이 번졌다.
생존이라는 목표 앞에 그래, 무엇이 문제겠는가. 이대로만 풀린다면 목숨만
건지는 게 아니라, 가족같이 지내 오던 용병들과 척지지 않고 마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저 아래 묻어 버린 채 달칸 용병대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공과의 계약은 지켜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가벼워지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기분이었
다. 그에게 지불해야 하는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대가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그 순간만큼은 나는 대공과 계약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라도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각자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건강히 살아서 만나자라는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적갈색
머리카락의 기사가 가자며 나를 독촉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지난 밤 내가
헤매던 길을 거슬러 산장의 서관으로 이동해야 했다.
용병들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들과의 헤어짐을 기뻐했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는데, 서관으로 향하는 내내 내 마음에는 새카맣게 그늘이
드리워졌다. 안도감을 언제 느꼈냐는 듯이 속에 묵직한 덩어리가 뭉글뭉글
부피를 늘려갔다. 그건 물론 대공 때문이었다.
대공이 나를 굳이 불러들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잠시 나를 구해 준
은인이라고 미화했지만 그 본질은 미친 변태였다. 나는 그 변태새끼가
지치지도 않고 또 좆을 벌떡 세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을 깨고 다행히도 나는 대공을 만나지 못했다. 그의 방 앞에
도달했을 때, 하인이 나와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공의 방 앞에서 되돌아왔다.
기사가 나에게 따로 명령을 들은 게 없냐고 물었지만 나도 들은 게 없었다.
나를 제외한 용병 20명에게 다른 임무를 맡겨 내 곁에서 사라지게 해
준다는 얘기조차 들은 게 없었다. 굳이 이전에 따로 명령이 내려왔던
거라고 친다면… 그 아침마다 와서 구음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늘 나를
데리러 오던 하인이 오늘은 오지 않았으며 도리어 문 앞에 서서 들어갈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젓지 않았던가.
적갈색 머리카락의 기사, 자칸은 결국 나를 다른 기사들에게로 데려갔다.
물론 나를 대하는 기사들의 분위기가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특히 그 중에
베이즈라는 놈을 필두로 해서 전날 밤 나와 마주쳤던 놈들은 아주 심하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용병이라고 우습게 알았다가 나 하나에게 네 명이나
나가떨어진 게 꽤나 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적대적인 분위기가 차라리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놈들은 대공이 나에게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때문이었
다.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지만 ‘엉덩이나 대 주는
놈’이라고 보는 시선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내 체구나 외모를 보면 대공이
내 몸을 원한다는 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대공은 방에 처박혀 이동할 생각이 없는
성싶었고, 기사들은 대공의 행보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고 보초를 섰다.
나만 하는 일 없이 붕 떠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공은 그날 하루가
다 가도록 나를 부르지 않았고 밤이 되었을 때 나는 자칸이 배정해 준
방에서 잠을 청했다. 언제 대공이 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얕은 잠을 자야
했지만 밤에도 부름은 없었다.
대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다.
일찌감치 일어나서 기사들 틈에 끼어 배를 채우고 나니 대공이 나타났다.
성으로 돌아간다.
짧은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생겼다.
다른 기사들은 전부 말을 타고 있는데, 나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올 때에도
기사들은 말에 올라 마차를 앞뒤로 호위했고 그 뒤를 용병들이 걸어서
따르는 식이었다. 모양새는 좀 우습지만 다른 기사의 뒤에 타고 가야하나
잠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다 무너져 가는 산장에서 대공이 나왔다.
이른 아침의 햇살에 그의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달빛 아래 서
있을 때에도 그렇지만, 태양 아래에서도 그는 아름다웠다. 아무튼
겉껍데기만큼은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인간이었다.
도열해 있는 기사들을 지나 대공은 마차로 다가섰다. 마차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자칸이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나 대공은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18.

일릭.”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나를 불렀다. 그 부름에 나는 물론 주변의


기사들까지 흠칫했다.
대공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 움직여 보이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차로 다가갔다. 여전히 자칸이 문을
잡아 열고 있었다.
그 안에 대공이 앉아 있었다. 딱 보기에도 푹신해 보이는 자리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열린 문 너머의 나를 응시했다.
“들어와.”

“……예.”

그냥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겠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순순히 마차에 올랐고 내 뒤로 문이 닫혔다. 대공이 맞은편 자리를
턱짓하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대공은 나를 앞에 두고 침묵에 잠겼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머리가
아픈 것인지,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는 눈을 감고만 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나는 그가 눈을 감고 있는 틈을 타서 그를 관찰했다. 하얀 얼굴에
병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뭐랄까…… 푹 자고 일어난 듯이 혈색은
좋아 보였다.
검정색 옷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대공은 오늘따라 어딘지 금욕적인
느낌이었다. 깃을 조금 높이까지 세우고 꽉 조여 맨 검은 크라바트라거나,
검은 조끼와 재킷이 그를 다소 경건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사실은 어두운 은빛의 실이 화려한 문양으로 수 놓여 있는, 결코
수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옷이었다.
그 화려함을 은밀히 감춘 탓일까. 사제처럼 딱딱하고 엄숙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관능적이었다. 금욕적으로 보이는 착장인 건 확실한데, 도리어
야하게 느껴졌다.
“용병들은 잘 떠났나?”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며 그가 물었다. 관찰하던 시선을 급히 돌리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예 어제 모두 떠났습니다.”
“ .

“같이 가고 싶었던 건 아니지? 보내 줄 걸 그랬나.”

“…아닙니다.”

일단 드러내 놓고 나를 의심하던 게 라도반과 체즈번이었다. 두 놈이


떠나는데 굳이 거기에 껴서 가는 건 사양이었다. 의심을 거두게 만들기가
불가능하다면 멀리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았다. 괜히 그들의
앞에서 말실수라도 했다간 더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무슨 임무인지 궁금하지는 않나?”

“호위라고 들었습니다.”

대공의 질문은 그들을 걱정하지는 않냐는 뜻이었다. 호위는 어쩌면


전쟁만큼 위험할 수도 있었다. 호위 대상에 대한 살해 시도가 빈번히
있다는 건데, 그 말인즉 언제 기습이 닥칠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호위 인력을 충원한다고 했으니, 이번에 라도반이 이끄는 부대가 맡은
임무가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걱정하느냐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우리의 직업이 용병이었다. 용병에게 있어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는 동반자나 다름없었다. 잘못된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들이
걱정되었지만, 용병이기에 죽음은 당연하다는 점에서 걱정되지 않았다.
내가 걱정을 한다고 죽음이 그들에게서 빗겨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이스의 아들. 이름은 레이사라고 하지.”

“…수도에 계신 게 아닙니까?”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꽁꽁 숨겨 뒀다. 그 애를 노리는 사람이 많거든.

일단 카미드라거나. 그 애만 있다면 이스를 제 곁에 온전히 붙잡아 둘 수


있을 거고, 눈엣가시인 나를 얼마든지 죽여 없앨 수도 있을 테니까.”
으윽……. 나는 할 수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았다. 알아 봤자 머리 아픈 일만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정치 놀음 따위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안다고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성향에
도 맞지 않았다. 나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르는 걸 좋아했다. 머리 아픈 고민은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절대 내 일이 아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은 그
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지껄여 댔다 .

“지금은 레이사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나밖엔 없어서, 감히 나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지. 적어도 나 아닌 다른 후계자를 확보해야 나를


없애도 뒤탈이 없지 않겠나.”
아, 진짜 모르고 싶었다. 삼남매 중에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그래서
질투하고 다른 형제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 따윈 알고 싶지 않았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없을 근친상간의 향연에 머리가 아파 왔다. 제발
너희끼리 지지고 볶고 떡을 치든지 하고 나는 좀 내 갈 길 가게 해
주라고…….
“성에는 둘 수가 없었어. 내게 자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자체가 극히

소수다. 언젠가는 드러내야겠지만, 때가 중요하거든. 그 아이는


특별하니까.”
그래 물론 근친의 관계에서 본 자식이니 만인 앞에 드러내기가 쉽지는
않겠지……. 근데 왜 그걸 나한테는 알려 준단 말인가. 누이와 그렇고 그런
관계인 것만 아니라 자식의 존재까지. 대체 왜. 차라리 모르는 게 좋을
이야기였다. 이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더군다나 나는
이제 레이사라는 아이가 로인에 있다는 것도 들어서 알아 버렸다.
나는 전날 ‘우리 아들’이라는 남매의 대화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에게
우리 아들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던 것을 후회했다. 애당초 묻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까지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물었을까. 나답지
않았다.
사람을 이렇게 심란하게 만들어 놓고, 대공은 옅게 웃었다. 내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빤히 보인다는 듯한, 몹시 얄미운 미소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가 칼라에 손가락을 걸어 크라바트를 조금 느슨히 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셔츠를 벗어, 일릭.”

“……예?”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하고 있던 대화와 연관성이 1도


없었을 뿐더러,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와 나는 달리는
마차 안에 있었다.
“각… 각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내


눈도 의심했다. 대공이 벨트 버클을 풀어 버린 것이다. 속옷을
젖히는 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금욕적이고 경건하기 짝이 없는
새카만 옷차림 그대로, 그는 성기를 덜렁 끄집어냈다. 전혀 발기하지 않고
늘어진 것조차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살덩이에 나는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할 일은 해야지?”

어서 와서 자리를 잡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다리를 벌리며 제 성기를 손을


쓸어 올리는 작태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니까 사람이 그냥 굳어 버렸다. 대공은 그런 나를 보며 보란 듯이 제
성기를 주물렀다.
“그대가 그토록 마차에서 하고 싶어했다는 걸 내가 몰라줬어.”

“무… 무슨…….”

“괜히 어제부터 내내 기다렸잖아.”

부르지 않아서. 대공이 나를 부르지 않아서 안 갔다. 또 성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했다고. 나를 기다렸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어제 내가 자칸에게 이끌려
대공의 방까지 왔을 때 대공의 하인이 나를 방으로 들여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은 도리어 문을 가로막아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어디서 묵는지 뻔히 알면서도 다시 찾아온 적이 없었다.
공작이 안 불렀으니 안 온 게 아니냔 말이다!
사실은 그 모든 게 다 나에게 더 굴욕적인 짓을 시키기 위한 함정이었음을.
극도의 패닉에 빠져서 깨닫지 못했다. 대공의 손 안에서 발기해 가는
성기를 보며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마차 안. 아무리 창을 커튼으로 가렸다지만 실루엣이 비칠 수도 있고, 소리
가 새어 나갈 수도 있는데. 멀쩡한 대낮에, 바깥에 기사놈들이 즐비해
있는데 마차 안에서, 지금, 지금 하라고??
“일릭.”

반쯤 발기한 살덩이를 문지르며 대공이 나를 불렀다. 내가 요정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꽃잎을
머금은 듯이 붉은 입술이 달콤할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밀크 먹자.”

대공은 손을 뻗어 내 머리채를 붙잡았다. 손길이 억세지는 않았지만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갔다. 그는 내 머리를 제 사타구니에
처박았고, 내 얼굴이며 입가에 거대한 살덩이가 마구잡이로 비벼졌다. 이
짓도 하도 하다 보니 아주 자동으로 입이 벌어졌다. 매끈한 귀두가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
대공은 그대로 내 머리를 잡아들어 올렸다가 짓누르기를 반복했다. 위로, 아
래로, 다시 위로, 아래로. 그의 손이 머리를 누를 때면 목구멍 깊숙이로
성기가 밀려들었고, 두피가 당겨질 때면 목구멍과 입안을 온통 긁으며
성기가 빠져나갔다. 머리가 흔들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태까지 몸으로
학습한 바가 있어서 나는 정신없이 성기를 빨았다.
“욱… 우으…….”

입이 가득 막혀서 억눌린 소리가 흘렀다. 그러나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내 머리를 움직이게 해 내 입안에서 성기를 세웠다. 턱이 아플
정도로 커진 대공의 성기는 흉기라 불러야 마땅한 물건이었다. 그런 걸
남의 몸에 넣으려 든다는 시점에서 대공은 이미 훌륭한 살인미수범이었다.
그냥 이 모든 게 다 거지 같고 내가 불쌍했다. 내 입술이랑 목구멍이 특히
너무 불쌍했다.
“욱, 욱……!”

대공은 내 머리를 눌러 깊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혓바닥을 누르며


묵직하고 두꺼운 기둥이 미끄러져 들어와 식도로 넘어갈 듯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코며 턱이 그의 샅에 닿아 뭉개졌다. 숨이 턱 막혔다.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으나 대공은 아랑곳 않고 내 머리를 더 강하게 짓눌러 성기를
뿌리까지 삼키고 참게 만들었다.
“더 세게 빨아.”

씨발, 목구멍까지 꽉 막혔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빨라고…! 노력이라도 해


보려 했으나 입안에 잔뜩 고인 타액도 삼키지 못하고 질질 흘리는
수준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였다. 토악질이
올라와서 식도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기가 가득 차 있어서 그
움직임마저 막혔다. 덕분에 가슴 안쪽으로 위와 식도가 있는 곳이 꼬이듯이
아파왔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목구멍을 잘 조여야지. 아직도 이렇게 서툴러서야……. 입을 잘 쓴다고


칭찬 좀 해 줬다고 벌써 꾀를 부리는 건가?”


씨발놈. 개새끼. 벼락 맞아 뒈질 변태새끼…… 나는 대공을 욕하며 끙끙
앓았다. 타액이라도 좀 삼키려 했으나 혓바닥이 잔뜩 눌려 그럴 수가
없었다. 대공은 목구멍을 조이라고 했지만, 한 번이라도 목구멍 근육을
움직여 봤어야 조이든지 풀든지 할 것 아닌가. 아니, 애당초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긴 한 거야? 숨이 막혀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와중에 생각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질식사에도 클래스가 있다. 씨발, 내가 물에 빠지거나 목이 졸려서 질식사
하는 얘긴 들어봤어도 좆 빨다가 질식사하는 얘긴 처음 들었다고. 그런
꼴로 대공의 마차에서 발견되면 어떡하지. 이건 백자지라고 불리는 것과는
또 다른 수치다. 아니, 어차피 죽고 난 뒤라 상관없나……?
“크흡, 커헉…!!”

막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려고 할 때 대공이 성기를 빼주었다. 갑자기 탁


트인 호흡에 헐떡이며 공기를 들이켰다. 무엇인지 모를 체액에 사레가
들려서 기침도 쏟아졌다. 대공은 쿨럭거리는 나를 굽어보았다. 그의 성기가
내 앞에서 꺼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아, 진짜 씨발 새끼……. 겨우 속이며 기침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대공이


웃음기를 담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몹시도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색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소리였으며 그는 내 뺨에 제 성기를 문지르고
있었다. 목소리를 다정하게 내는 것마저 나를 향한 능욕이었다. 그를
쳐다보고 있으면 그냥 목을 졸라 버릴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속으로 분을 삭였다.
“아.”

귀두를 내 입술에 문지르며 그가 어린애 입을 열게 하려 달래듯이 아


소리를 냈다. 그대로 쑥 밀어 넣었으면 바로 내가 받았을 것을, 굳이 나에게
직접 움직여서 성기를 물게 시키는 것이다. 나는 입을 벌려 내 입술 바로
앞에 놓인 동그란 귀두를 입에 물었다. 혀를 놀려 입안에 들어온 동그란
것을 꼼꼼히 핥았다. 대공이 다시 목구멍에 처넣으려 하기 전에 그를
즐겁게 해 주는 편이 내 심신에 이로웠으므로, 그가 핥아주는 걸 좋아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부분을 열
심히 공략했다. 눈치를 보다가 손을 뻗어 흥분에 올라붙은 고환을
손에 쥐어 부드럽게 문지르기도 했다.
“후…….”

대공은 더운 숨을 내쉬며 목을 옥죄는 크라바트가 답답하다는 듯 손가락을


걸어 당겼다. 내가 열심히 혀와 입을 써서 그의 성기를 핥고 빠는 게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내 머리를 억누르던 이전과는 달리 부드럽게 내 귓바퀴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나는 아예 대공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았다. 손으로 성기를 말아 쥐고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기둥을 입술로 물어 혀로 핥고 빨았다. 귀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기둥에 입을 맞추자 대공이 연신 더운 숨을 흘렸다.
그의 허벅지가 이따금씩 흥분으로 꿈틀댔다.
“더워.”

그의 말마따나 마차 안의 공기가 어느새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대공의


성기를 물고 빠는 내 머리와 등에도 땀이 맺혔다. 대공의 절정이 임박해
있음을 직감한 나는 그의 귀두 끝에 입술을 대고 힘을 주어 빨아 당겼다.
대공은 혀끝을 세워 요도구를 후벼 파듯이 핥는 걸 좋아했다. 끈적한
액체가 혀끝을 미끈하게 감싸 보통 불쾌한 게 아니었지만, 최대한 빨리
끝을 내고 싶었다.
“후……. 일릭. 일릭.”

사정이 머지않은 듯 했다. 대공은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


내 머리카락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나는
애써 긴장을 풀며 그의 성기를 삼켰다. 입안을 벌리며 목구멍까지 파고드는
살덩이가 전보다 더 크게 느껴졌지만 필사적으로 빨아 삼켰다.
“우욱… 욱, 욱…….”

대공은 성기를 깊게 밀어 넣으며 앉은 채로 몇 번 허리를 튕겼다. 성기가


재차 밀려들어와 목 안쪽의 깊은 곳을 찔러 대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눈을 꽉 감고 최대한 몸에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깊게 숨을 내쉬며
목에서 힘을 빼서 끝까지 삼킬 수 있었다. 음모가 내 얼굴에 비벼지고 그의
고환이 턱 아래 뭉개질 정도로 깊게 성기를 삼켰다. 나는 그가 만족스럽게
사정할 수 있도록 잘 움직이지 않는 혀와 목을 이용하여 한가득 들어와
있는 살덩이를 빨아 주었다. 숨이 막혔지만 그가 요구한 대로 목구멍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였다.
하아…….”

대공은 그 상태로 허리를 움직여 내 입과 목구멍을 가득 채운 채로


추삽질을 몇 차례 한 후 그대로 사정했다.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성기를
넣은 탓에 정액이 그대로 식도로 쏟아져 내려갔다. 더러는 역류해 입안에
맛을 남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속으로 넘어갔다. 나는 그것들을 삼키며
대공의 성기를 끝까지 빨고 또 빨았다.
마침내 대공의 사정이 끝났다. 꿈틀거리던 허벅지나 굳어져서 잘게 떨리던
몸이 나른하게 늘어진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뗄 수 있었다. 부피가 조금
줄어든 성기를 끝까지 빨며 뱉어 냈다.
아직 뒷정리가 남아 있었다. 성기에 조금 묻어 있는 체액을 혀로 핥았다. 흰
점액질의 액체가 남지 않도록 핥아 낸 뒤 대공의 옷을 입혀 주었다. 단추를
잠그고 버클과 벨트를 채우는 손이 조금 떨렸다. 모멸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감정에 괴로웠던 건 이런 뒷정리를 처음 해 봤던 날의 이야기고…….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떨리는 것이었다. 목구멍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받아
내고 참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다가 갑자기 공기가 확
밀려들어 머리가 띵했고 너무 힘들어서 손이 떨렸다.
내가 대공의 맞은편에 앉자 대공은 내게 손수건을 주었다. 그걸로 나는
땀을 닦고 입가를 닦을 수 있었다. 입가를 닦고 있자니 쓰리고 아팠다.
아니나 다를까 손수건에 피가 찍혀 나온다. 아물어 가던 입술이 다시금
터진 모양이었다.
“헉!”

- 다음 화에 계속

19.

입술의 피를 지혈하는데 갑자기 고간을 훅 치고 들어온 것에 나는 놀라


몸을 펄떡거렸다. 내 다리 사이를, 성기 위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
“각… 각하……?”

그건 대공의 구둣발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조금 다리를 벌리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앉아 있던
내 다리 사이로 발을 뻗은 것이다. 정확히 성기 위를 구두의
딱딱한 밑창이 누르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프도록 걷어 차였거나
찌부러진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부드럽다 한들 성기를 구둣발로 밟히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 새끼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대공은 그대로
발을 비비적거리기까지 했다. 바지의 천을 사이에 두고 내 성기와 대공의
구두 밑창이 잔뜩 비벼졌다.
“다리 벌려.”
고간을 툭 치니까 다리가 오므라든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주인이 좀 만지겠다는데 감히 몸을 사리냐는 듯이 대공이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꾸며낸 다정함보다 더 질이 나빴다. 네가 감히 피해? 하며
진심으로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아서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삐익삐익 울렸다.
나는 굳어진 허벅지를 움직여 애써 다리를 벌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아주
활짝.
“일릭.”

벌어진 다리 사이를 구두 바닥으로 문지르며 대공이 나를 불렀다. 낮은


음성에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지금은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짓밟아 터뜨려 버릴 것만 같아서 생리적인 공포가 몰려들었다.
“맛있었어?”

“예……?”

“밀크.”

너 같으면 그게 맛있겠냐고……. 대답을 주저한다면 대공이 또 사람을


괴롭혀 댈 게 뻔했지만 나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그딴 걸 맛있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의 면전에 대고 최악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몸까지 대 주고 있는
마당에 거짓말은 못 하겠다고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해야지.”

대공은 그런 내 속을 뻔히 알면서 대답을 독촉했다.


“내 좆물 맛이 어땠냐고.”

아니 대체 누가… 대체 누가 저 티마예브 왕가의 왕자이자 미로스 공국의


대공인 이 남자에게 저 따위 비속어를 가르쳐 줬느냔 말이다. 물론 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집안이 애
당초 생겨먹기를 개차반으로 생겨먹기는 했다지만, 체면도
체통도 다 개나 줘 버린 건 아닐 텐데 대공은 좆이라는 단어를 너무
스스럼없이 입에 올렸다. 심지어 이번에는 무려 좆물이었다. 정말이지
사람을 기막히게 하는 단어 취향이었다.
“맛이 없었구나.”

내가 끝내 대답하지 않자, 대공이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대


성기 위를 문지르는 발길은 멈추지 않아 나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구두
밑창이 몹시 딱딱했음에도, 자극은 자극이었다. 천에 쓸리고 구둣발에
밟히는 걸로도 성감이 올라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그러니 이렇게 풀이 죽었겠지. 이건 아랫구멍 채워 줄 때에만 서는 건가.”

대공이 내 다리 사이를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수치심에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내놈한테 성기를 이런 식으로 밟히고 있다는 것도,
대공에게 박히며 세운다는 것도 모두 굴욕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대공의 밑에서 내 몸은
박히면서도 세우도록 변해 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입에 넣는 것만으로도
벌떡 서게 되는 건 아닐까. 대공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 탓이었다.
“엉덩이는 그렇게 음탕해 빠졌으면서, 다른 데는 너무 둔감하단 말이야.”

남자가 다른 곳이 예민해 봐야 뭣에다 쓴단 말인가. 그의 발에 밟히면서도


자극 받아 슬슬 일어나기 시작한 좆이면 됐지. 후장이 개발된 것도 쪽팔려
뒈지겠는데, 대공은 역시나 그 이상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머리도 나쁘고.”

벌을 줘야겠다는 듯, 구두가 더 깊게 내 다리 사이를 밟아 왔다.


“셔츠, 벗으랬잖아?”

“아…….”

“아니면 다 벗을래? 아래 입으로도 먹고 싶나?”

그 말에 내 손이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여 재킷을 벗어냈다. 셔츠 단추를


풀어 벗어 던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차에서 섹스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달리는 중이라지만 여기서
방아를 찧었다간 바깥으로 다 티가 날 것이다. 나는 들키면 그냥 뒈져 버릴
마음이었지만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겠지. 그럴 인간이었기에 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마차에서
하는 것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그런 걸 요구했다간 그냥
죽여 버리고 도망칠 거다.
“그대는…….”

대공이 마침내 내 다리 사이에서 발을 내렸다. 그리고는 옆의 작은 상자를


열어 뒤적거리다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 상자는 대공이 제 누이에게서
받은 상자였다. 대공의 손에는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의 병이 들려 있었다.
그 병뚜껑을 열어서 냄새를 살짝 맡으며 대공이 말했다.
“젖 모양이 참 예뻐.”

아. 진심으로 한 대 칠 뻔했다.
내가 들은 중에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칭찬이었다. 그건
칭찬이라기보다는 모욕이었다. 물론 훈련을 많이 한 덕분에 내 전신에
근육이 잘 발달했고 특히 흉근이 펌핑이 잘 되어 있다지만, 대공이 말하는
‘예쁘다’는 건 결코 평범한 의미는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독보적인

그의 단어 선택에 소름이 돋았다. 예쁘다니. 너무 간지러운 단어라서


생리적인 혐오감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감도는 별로인 것 같더군.”
난 남자였고 내 가슴은 남자의 가슴이었다. 아니, 솔직히 여자들도 가슴이
엄청난 성감대는 아니지 않나? 가슴 좀 만진다고 오르가슴까지 가는 얘기는
소문만 무성했지 직접 만나 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전의
경험에서 나를 애무하려 드는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있기야 했지만, 좀
간지럽고 야릇하기는 해도 그냥 그런 정도였다. 내가 더 특별히 무딘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였다.
“손 머리 뒤로.”

대공은 내게 명령하며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가 다가와서 불길함이


배가되었지만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양손을 깍지 껴서 뒤통수에 얹었다.
가슴이 활짝 드러났다. 말을 잘 듣는다며 내 뺨을 토닥이는 것으로 치하한
대공이 다시 한번 명령했다.
“손 내리지 마.”

그리고 그가 고개를 기울여 내 유두를 빨기 시작했다. 붉은 혀가 마치 뱀의


혀처럼 낼름낼름 모습을 드러냈다. 미묘한 간지러움이 가슴 끝에서부터
번져 나갔다. 야릇한 성감에 복부의 근육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뿐이었
다. 혀놀림이 암만 현란하고 빨고 깨물고 비비는 게 암만 격렬해도
유두는 성감에 딱딱하게 굳어졌다가 이내 자극에 무뎌져 가라앉았다.
그것도 불응기가 있어서 한번 가라앉고 나면 대공의 혀가 야릇하게 핥아
대도 간지러움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공은 차례로 내 가슴을 빨다가 손에 쥐고 있던 병에서 액체를 몇 방울
따라냈다. 그의 손가락에 묻어나는 매끄러운 질감으로 보아 무슨 기름인 것
같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각하?”

그가 먼저 말을 시키지 않으면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나, 등줄기를 오싹하게 하는 불길함에 내 입이 열렸다. 삽입 시에
쓰는 윤활유는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바지를 입고 있으니 윤활유가 등장할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생을 아끼는 누이의 선물이지.”

“선물… 이요…?”

“그래. 그러니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도록.”

나는 직감했다. 저 빌어먹을 물건은 결코 고맙다는 소리를 할 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도리어 그 여자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며 대체 뭘 보낸
거냐고 따져야 할 만한 물건이라는 것을.
그것을 손가락에 바르고 다가오는 대공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손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대공의 손가락이 그가
연신 핥고 빨았던 유두에 닿았다.
“……으…?”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냥


오일이었다. 미끌미끌해서 동그랗게 일어난 유두 위에서 대공의 손가락이
더 쉽게 미끄러지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성감이 더 예민해진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아까와 비슷한 정도로 야릇하고 간지러웠다.
대공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그게…….”

“누이가 설마 내 애첩에게 해가 되는 물건을 보냈겠나? 도리어 도와주면

도와줬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양손 엄지
와 검지에 그 정체불명의 기름을 바른 대공은 전과 다르지 않은
음성으로 말하며 내 유두를 비비적거렸다. 한참 유두를 비비다가
손가락으로 유륜을 덧그리듯이 문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그 액체를
가슴의 다른 곳에는 묻히지 않았다. 오직 유두와 유륜에만 문질러 발랐다.
덕분에 내 유두는 딱딱하게 일어났다가 말랑말랑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헉……?”

대공의 손가락이 한참 괴롭히고 있던 내 유두를 가볍게 튕긴 순간.


짜릿하게 전기가 올랐다.
“아, 잠깐.”

잠깐만, 잠깐. 안 돼. 이거 이상해. 아니야, 이거.


“각하, 잠시. 잠시만.”

“쉬이, 일릭. 착하지?”

대공이 반짝반짝 빛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거야.”

그리고 나한테 약을 팔았다.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엄지와 검지로 내


유두를 붙잡아 꼬집었다.
“아!”

그 순간 눈앞에 하얗게 섬광이 터질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 전신을


후려쳤다. 성기가 절로 벌떡 설 정도로 충격적이고 강렬한 성감이었다.
“이거, 이상, 잠시만. 각하, 잠시…!”

나는 당황했다. 그런 약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강도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뒤틀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쾌감이 멋대로 질주해서 몸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있는 것도 가까스로 유지한 채 숨이 헐떡헐떡 차올랐다.
말하자면… 가슴에 유두가 아니라 귀두가 달린 것만 같았다. 성감이 꼭, 귀
두를 만져지는 것처럼 강했다. 아니,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가슴에서
그런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도 함께였다.
“효과가 썩 괜찮은 것 같군.”

중얼거리면서도 대공은 내 유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꼬집어 잡아당기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정상 체위로 삽입을 할 때처럼 아예 자세를 잡았다.
나는 죽을 맛이었다. 단단해진 유두가 꼭 발기한 성기 같은 강렬한 쾌감을
전해 왔다. 그가 엄지와 검지로 비벼 댈 때면, 꼭 귀두를 꽉 조이고 비벼
문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가슴에 두 개나 달려 있는 것이다.
쾌감이 전신을 질주하며 척추가 다 지져지는 것만 같았고 꼬리뼈가
짜릿했다.
“하아, 아. 이거, 윽…! 으!”

이를 악 물어 신음을 삼키며 나는 몸부림쳤다. 그래봐야 앞은 대공에게, 뒤


는 마차의 의자에 막혀 있어서 크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대공의 몸에 내
몸이 바짝 닿아 있어 알 수 있었다. 섰다. 완전히 서 버렸다. 가슴을 자극한
것만으로도 내 다리 사이가 잔뜩 흥분해 터질 것 같았다.
“으윽!”

몸을 비틀던 도중 허리를 튕겼을 때, 대공의 몸에 다리 사이가 비벼졌다.


지나치게 성감을 느끼고 있는 탓일까.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성기가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가고 싶었다. 전부
토해 내고 편해지고 싶었다. 뜨겁게 열이 오르고 전신이 간지러워 미칠
것만 같다. 그에게 성기를 비벼 대는 것을 내 의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몸이 움찔대고, 허리가 튕겨졌다.
“좋은가 보군.”

대공이 집요하게 괴롭히던 유두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때마다 내 몸이


들썩들썩 요동을 친다. 성기에 가해지는 자극이야 사정을 하고 나면
가라앉는다 치자. 그런데 가슴은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 느껴서,
괴로울 정도로 느껴서 미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냥 너무 짜릿해서 머릿속까지 저렸다.
“좋은 거라고 했잖아?”

대공이 내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웃었다. 그의 손이 드디어 내 가슴을 떠나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엉덩이를 잡아 제 쪽으로 당기자 바지 앞이 더욱
밀착된다. 허리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가 당기는 것에 맞춰 몸이 연신
허리를 튕겨 그의 바지 앞섶에 발기해 툭 튀어나온 내 앞을 문질렀다.
그에게 구애를 하듯이 매달리고 유혹하는 몸짓으로 보였겠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직 사정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쾌락이 넘치는 듯하면서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부족했다.
짜릿한 자극이 척추를 태울 때마다 사정하고 싶은 욕구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으응, 으윽, 윽. 흐으.”

그런데 가슴이 문제였다. 그가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있는데도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열기가 송곳처럼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속을
자극한다. 따가울 정도로 찌릿했다. 대공이 아무리 물고 빨고 만져 대도
잠시 딱딱해졌다가 말랑해지곤 했던 유두가 지금은 터질 듯이 탱탱하게
부풀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수십 마리 개미가 달라붙어 깨물어 대는
것만 같았다.
만져 줬으면 좋겠다. 아니, 손도 대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나 만져
주면,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가고 싶어?”

대공의 속삭임은 나긋하고도 달콤했다. 소리가 마치 귓가와 귓속을


고막까지 핥는 것 같았다. 한계까지 쌓인 성감과 사정 욕구에 전신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으으…!”

그리고 대공이 내 가슴 전체를 움켜쥐어 손바닥으로 유두를 짓눌러


문질렀을 때.
“아아… 아……!”

가슴을 자극당한 것만으로, 바지와 바지를 사이에 두고 성기를 어설프게


문질러 댄 것만으로 나는 절정에 이르렀다. 유두가 타는 듯이 뜨겁고, 그
열기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전신의 근육이 아플 정도로 꽉
조여졌다가 극도의 해방감과 함께 경련을 일으켰다. 박힐 때와는 또
달랐다. 성기를 아플 정도로 자극당한 고통스러운 쾌감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자극당한 곳이 성기가 아니라 유두라는 것 정도…….
“히익…!”

대공의 손가락이 유두를 다시금 문질렀을 때, 몸이 파드득 떨렸다. 막


사정을 마쳐 예민해진 귀두를 자극할 때의 아찔한 쾌감이 가슴에서
느껴진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다. 정말로
가슴의 감도가 올라간 것이다. 아까처럼 뜨겁고 따가울 정도로 짜릿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가슴 끝이 저릿저릿했다. 옷자락만 살짝 스쳐도 견디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못할 것
같았다 .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지나 적시고 말이야.”

대공은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아 손수건을 꺼내 오일에 젖은 손가락을


닦았다. 저걸 바르니까 유두가 성기 급의 성감대가 되어 버렸는데 대공의
손가락이 멀쩡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그는 손가락을
비비는 것만으로도 가 버려야 하지 않나??
“정말이지 버릇이 없어.”

벌어진 다리 사이에 다시 그의 구둣발이 닿았다. 그는 장난치듯이 내


성기를 발로 툭 툭 가볍게 찼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급소라서
반사적으로 몸이 놀라 흠칫댔다. 그리고 몹시도 축축했다. 내가 사출한
정액으로 흠뻑 젖은 속옷 안이 아주아주 축축했다.
“이걸 어떻게 고쳐 줘야 할까, 응?”

씨발……. 일부러 그런 약을 써 놓고, 이제는 싸도 지랄이다. 나는 차마


대공을 노려볼 수가 없어서 눈을 내리깔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손은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손.”
대공이 그렇게 말을 했을 때에야 나는 손을 내릴 수 있었다. 그즈음에는
가슴이 더 이상 저릿하지는 않았다. 약효가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이면서도……. 불행이었다.
“……이건…….”

내가 내민 손에 그가 쥐여 준 자그마한 병 하나 때문에.
그건, 내 가슴을 엄청난 성감대로 만든, 대공의 누이가 주었다는, 그
저주스러운 병이었다.
“누이가 만드는 미약이지. 성감대에 바르면…… 효과는 아주 좋은 것 같아.

그렇지?”
“…….”

“좆에도 발라 줄까? 아니면 아랫구멍에?”


가슴에 발랐더니 유두가 귀두 급 성감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 걸 아래에
바르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른다. 차마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그런 나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며 나른
하게 웃었다.
“하루에 한 번. 손가락에 두 방울을 떨어뜨려서.”

톡톡. 대공이 손가락에 떨어뜨리는 시늉을 해 보이곤 말을 이었다.


“그대의 젖꼭지에 발라서 예뻐해 주라고.”
“……각…하…….”

“검사할 거야.”

이… 미친… 변태새끼가……. 너무 기가 막혀서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한 가지 더.”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이 빙긋이 호선을 그렸다.


“내 허락 없이 싸지는 말 것.”

야……. 씨발, 야, 이거 지금 가슴에 잠깐 바른 거 갖고 잔뜩 흥분해서 좆 몇


번 문지른 것만으로도 바로 싸 버렸는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대공에 나는 황망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공은 그런 내 다리 사이를 밟은
발에 꾸욱 힘을 주어 질척하게 젖은 곳을 짓눌렀다.
“진한 게 나오는지 묽은 게 나오는지, 확인할 것이다.”

그 첨언은 쓸데없이 근엄하고도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0.

용병 중에서는 임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놈들이 종종 있었다. 아무런 위험도 없는 가정 집 침대에 누워서도
적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거나, 상대와 눈만 마주쳐도 나를
죽이려 했다며 먼저 공격을 한다거나,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이 꿈에
나타나서 잠을 못 자는 등. 그 증상은 가지각색이었다. 더러는 사람을 더
죽이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해서 넘치는 살의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놈들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살인을 했을 때에도
찝찝함을 느꼈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나는 일과 일상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경계가 명
확한 타입이었다. 전쟁터가 그리운 적도 없었고 두려운 적도
없었으며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며칠째 방에 처박혀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숙소로
쓰는 여관 1층의 주점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우울했다. 그 무슨 짓을 해도 권태를 느끼면 느꼈지 우울함은 느껴
본 적 없던 내가, 지금은 몹시도 울적했다. 그게 다 대공 때문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그나마 요 며칠간은 대공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당분간은 아침에 만나 줄 수가 없어.’

성에 다다랐을 무렵, 대공이 말했었다. 그즈음의 나는 꽤나 심하게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할 짓 다 했으면 차라리 기사의 뒤에 붙어 말을
타고 가고 싶었건만 대공이 나를 마차에서 내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공과 장시간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나를 몹시도 피곤하게 만들었다.
펠라티오를 시키고 내 가슴을 갖고 장난을 친 이후 더 이상의 성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언제 그 미친 변태가 달려들지 모를 일이라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대공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른히 나를 훑을 때마다
소름이 끼쳐서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밀크를 못 먹게 돼서 아쉬워?’

대공은 사람을 놀릴 때 쓸데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버릇이 있었다.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나를 두고 그는 또 그렇게 웃었다.
‘아쉬워도 참아. 그대는 참을성을 기를 필요가 있어.’

내 인생에 가장 큰 인내심을 대공에게 발휘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두들겨 패거나 죽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 씨발…….”

그런데 나는 왜 또 대공새끼를 떠올리고 있단 말인가. 혼자 있을 때만큼은


제발 그 뺀질뺀질한-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얼굴을 1초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대공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우울감의
시작점에 그 변태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모든 것이 대공에게로 귀결되곤 했다. 또한 대공의 얼굴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문제였다.
너무 화려해서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그 빌어먹을 외모 말이다.
나는 침대를 뒹굴며 괴로움에 끙끙 앓았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른 걸 해서 잊자 싶어서 어제는
방에서 혼자 미친 듯이 운동을 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잠들기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해도 비집고 튀어 나오는 대공의 얼굴에 한숨만
나올 뿐.
“……제길…….”

나는 베개 옆에 놓인 검푸른 빛깔의 유리병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결국에는 마지못해 억지로 그 병을 붙잡았다. 어린애 주먹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병이었으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액체에 치가 떨렸다. 벌써
며칠째.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대공의
면상보다는 사실 이 작은 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들여서 만져 주라고.’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대공은 내 가슴을… 정확히는 유두를 꽉 집어


문지르며 속삭였다.
‘잘하면 상으로 빨아 줄 테니까.’

약기운이 전부 빠진 후였음에도 그가 비비는 곳이 평소보다 더 저릿했던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더 저릿했었다.
“윽…….”

그 빌어먹을 약은 절대로 일회성이 아니었다. 대공이 돌아가서 나 혼자서


할 것을 명령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오일은……. 쓰면
쓸수록…….
“씨발…….”

성감대 자체를 예민하게 만드는 몹쓸 물건이었다. 셔츠만 살짝 스쳐도


화들짝 놀라게 될 정도로.
몸을 움직이다가 가슴 끝에 시트가 쓸리는 순간 짜릿하게 퍼지는 감각에
얼굴이 대번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공이 검사를 한다 어쩐다 해서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속으로 코웃음을 쳤었는데, 과연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얼마나 예민해졌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흐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오일을 묻
힌 손가락을 이미 발딱 선 유두에 댄 순간 저릿한 쾌감이 척추를
따라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처음 오일을 발랐을 때는 성감이 달아오를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니, 이제는 묻히는 순간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찌릿찌릿했다. 순식간에 눈가가 홧홧해지며 열이 올라 머리가
멍해졌다. 내 손으로 유두를 만지는 거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솟구쳤다.
“으, 흐윽…… 으…….”

이를 악 물어도 더운 신음이 샜다. 가슴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에 수치심이


내 멘탈을 강하게 뒤흔들었으나 유두를 비벼 문지르는 손은 자꾸만 빨라져
간다. 누가 보면 그놈을 죽이거나 내가 자살해야 할 쪽팔린 꼴이었음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을 좀 문지른 것뿐인데 바지 속이 갑갑해질 정도로
성기가 발기했다.
“아, 씨발 진짜…….”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그러나 성욕이 고조되었을 때는 우울감도


절망도 수치심도 굴욕감도 멀어지는 법이었다. 나는 아예 바지 앞을
뜯어내듯이 풀어 헤쳤다. 거대하게 부푼 성기가 튕겨지듯이 튀어나와
꺼덕였다. 당장이라도 쥐어서 흔들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가슴을 계속
비벼서라도 가고 싶었다. 꼴사나운 몰골인 건 확실하다지만, 자위를 하다가
멈출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이……. 씨발…!!”

그러나 멈춰야 하는 그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차곡차곡 쌓인 분출의


욕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해서, 계속 비비고 문지르며 만지고 싶은데도
손을 떼야 하는 게 나란 말이다…….
“으…! 흐으…… 후욱……!”

눈을 질끈 감으며 나는 가슴에서 손을 떼고 이를 악물었다. 연신 비벼 대던


자그마한 유두가 그 여운을 떨치지 못하고 지근거렸다. 온몸이 땀으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역치를 넘지 못한 쾌감이 나를 더 엉망진창으로
몰아붙인다. 성기 끝에서 끈적끈적한 선액이 맺혔다가 배 위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대로 더 쾌감을 고조시키다가 싸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절정에 도달할 수 없었다. 아니, 도달하도록 나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 허락 없이 싸지 말 것.’

귓가에 감겨드는 낮은 음성과 헐떡거리는 내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호박색의 눈동자. 그 안에 담겨 있는 끈적끈적하고 어두운 욕망
따위가……. 이 빌어먹을 순간에도 잊히질 않았다. 내 모든 행동은 물론
본능에까지 제약을 걸고 있었다.
감질 나는 쾌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괴로워서
몸이 저절로 뒤틀렸다. 베개에 뒤통수를 문지르며 모자란 쾌감을 갈구하며
헉헉 헐떡여야 했다. 그 새 약기운이 최고조에 달했는지 유두가 뜨거웠다.
아주 작은 바늘로 쿡쿡 찔리는 듯이 따가웠다. 아플 정도의 쾌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랜다. 사정하고 싶고, 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진한 게 나오는지 묽은 게 나오는지, 확인할 것이다.’

평소와 나를 대할 때보다 유난히 권위를 내세운 그 말투가 연극조로


느껴지기도 하련만. 그 순간의 대공은 분명 위엄이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노란 눈동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비단 변태적인 욕구만이 아니었다.
대공은 미친놈이었다. 아닌 척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눈빛 안에 광기가
번들번들했단 말이다.
그 위험한 눈빛이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 섹스 후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라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며 쾌감에 가득 차서 내뿜는 더운
숨이라거나, 열기에 젖어서 절정을 느끼는 야해 빠진 얼굴…… 아니, 아니.
이것들이 여기서 왜 나와. 위험한 눈빛. 위협적인 눈빛을 떠올리자.
중간에 이상한 장면들이 지나가서 아찔한 위기가 찾아들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참아 냈다. 전신이 콱 조여들며 금방이라도
분출하려 드는 것을 참느라 온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그대로 싸 버릴 것 같아서 몸을 이완시킬 수가 없었다.
이렇게 힘을 주다가 근육이 파열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허리를 젖히고 절로 튕겨지려 하는 골반을 가까스로 고정시키며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크흑… 윽…. 후……. 으…….”

절정의 파도에 귀에서 웅웅 이명이 울었다. 살갗에서 김이 뿜어져 나가지는


않을까 할 정도로 몸이 뜨거웠다. 숨을 오랫동안 쉬지 못한 것처럼 숨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차고 머리
가 어찔어찔 어지러웠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아…….”

그럼에도 여전히 무지근하고 알싸한 열기가 하반신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벌어진 바지 앞 사이로 튀어나온 내 성기를 확인하고
나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애처로울 정도로 발기한 성기는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제 존재를
과시하며 꺼덕이고 있었다. 끝에 맺힌 액체가 약간 희뿌옇기는 했지만, 사정
이라고 할 수는 없을 정도로 선액에 조금 섞인 수준이었다.
“내가 씨발……. 진짜 어쩌다가.”

싸고 싶다. 아, 싸고 싶어. 씨발 싸고 싶다고. 사내로서 그 어떤 욕구보다


우선하는 게 성욕인데, 그걸 해결할 수가 없는 이 상황이 너무나 좆같고
짜증이 나다 못해 우울했다. 손바닥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덮었다. 아, 씨발
차라리 엉엉 울어 버리고 싶다. 내가 10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서른
넘어서 차라리 울면 속이 시원해질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더더욱 거지 같았다.
“으응……!”

무심코 가슴을 손으로 쓸다가 내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절로 몸이 비비


꼬였다. 절정이 한 꺼풀 가라앉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번에 쌌을
뻔했다. 내 유두는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어쩐지 욱신욱신한 것 같았는데, 손으로 슬쩍 만져보니 과연 쾌감이
짜릿하게 번졌던 것이다. 지금 상태라면 유두 조금 더 만지면 바로 쌀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몹시 짜증이 나고 굴욕적이며 괴로운
와중에도 만지고 싶었다. 잔뜩 꼬집고 비틀고 비벼 대며 절정에…….
“아아, 씨발……!!”
이 상태로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누워 있다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몸을 씻었다. 차디찬 물을 한참 끼얹고 나서야
욕구를 분출하지 못해 잔뜩 화가 나 있던 아래가 맥없이 가라앉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세우기는 했는데 사정하지 못하고 가라앉히는 건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셔츠 안에 감싸인 가슴이 전체가 저릿했다. 특히나 옷감에 가슴이 쓸릴
때면 그냥 미쳐 버릴 것 같다. 유두가 딱딱하게 선 탓일까, 전보다 조금 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커져 보이
는 건 내 착각이겠지……? 아, 마구 만져서 가 버리고 싶다. 싸고
싶다. 쾌감에 덜덜 떨면서 안에 쌓인 것을 전부 분출해 버리고 싶다. 하고
싶다. 누구랑 해도 좋으니 제발 섹스 좀 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혼자서 헐떡거리며 끝까지 가지도 못해 몸부림쳤던 침대를 노려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충 이불을 털어 침대를 정리하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요 근래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늘 애매한 시간에만 식사를 하곤 했다.
용병대 아지트 겸 식당으로 쓰고 있는 주점의 붉은 머리 종업원이 참
인기가 많았지……. 고양이처럼 앙칼진 눈매가 매력적이었는데, 오늘따라
더 끌리는 것 같다. 남자란 하반신의 지배를 받는 게 틀림없었다. 머리나
마음으로 끌려서 성욕을 느끼는 게 아니라 성욕에 사로잡혀 있으면 상대가
더 예쁘게 보이니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머릿속에는 한 발 빼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어서 괴로웠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해서 더욱.
“앗, 일릭!”

주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일까.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 길가에서 그 붉은 머리카락의
종업원이 물건을 가득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방의 심부름으로
장을 보고 오는 모양이었다. 들고 있는 것이 무거워 보여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들고 있는 짐을 나눠 들어 주었다.
“일릭은 용병치고는 매너가 좋네요.”

여자는 내 호의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방긋 웃었다. 기가


세다느니, 코끝으로 남자를 부리려 든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며 이 여자애를
고깝게 보는 놈들도 있었지만-대표적으로 마일이라든가- 나는 세상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가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여자가 또
침대에서는……. 아니, 씨발 진짜 미치겠네. 뭘 생각해도 전부 떡방아로
연결되다니.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별로.”
“숙소에만 처박혀 있다면서요? 다른 용병들이 걱정하던데.”

“걱정은 무슨. 하도 전쟁터에서 살았더니 드디어 돌아 버린 거 아니냐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낄낄댔겠


지.”
“와, 어떻게 알았지?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녀는 쾌활하게 웃어 젖혔다. 내가 내비치는 언짢은 기색은 1도 신경 쓰지


않는 웃음에 어이가 없어서 나도 헛웃음을 쳐 버렸다.
“용병들 상대하는 거, 힘들지는 않나?”

“힘들죠. 더럽고, 냄새나고, 껄떡거리고.”

“거 듣는 용병 찔리게 말씀을 하시네.”

“일릭은 그런 쪽에서 담백해서 좋아요. 오는 여자 안 막지만 안 오는 여자를

탐내는 타입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일단 잘 씻잖아. 그게 중요하지.”


“칭찬이지? 좋게 봐 주시니 눈물 나게 고맙군.”

“그런 일릭도 여자 문제는 더럽고. 세상에 괜찮은 남자는 없나 봐요.”

“고르다 보면 원래 다 그런 법 아니겠어? 대충 하나 골라서 결혼해서 살아.

다 그놈이 그놈일걸. 돈 잘 벌어서 식구들 고생 안 시키고 안 굶기면 되는


거지.”
“그러다가 웬 변태 같은 새끼 만나서 신세 망치면 어쩌려고? 유능한 사람들
중에서는 특히 변태들이 많대요.”
“너 그건 편견…….”

편견이다. 마누라랑 새끼들 배 안 곯리고 먹여 살리는 놈들 중에 머저리


같은 놈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제 가정에만 충실하고 상식적이며 다정한
놈들도 얼마든지 있다고. 또 남자가 좀 머저리 같아도 일단 궂은 일 안 해도
되면 사는 게 좀 편하지 않겠냐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유능한 사람. 아, 유능하기로는 공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공국의 귀족들을
한손에 휘어 쥐고 그 여느 때보다 미로스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그를
기반으로 세리포브와 전쟁을 일으켜 베르바니를 맛있게 잡아먹은 미로스
대공만 한 사람이 또 있겠는가. 그의 치세에 시행한 세법으로 공국의
백성들의 삶이 이전보다 나아졌으면서도 공국의 창고는 풍요로워져서
그가 아낌없이 용병을 고용하고 있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지금
대륙의 수장들 중에서 유능하다고 한다면 1번이 대공, 2번은 무너져 가던
교단을 재정립해 다시금 이전의 권위를 되살린 교황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번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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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야 모르겠지만 번 대공은 그래 유능하지 그리고
1 ……. , .

유능한 것 이상으로……. 변태……. 씨발……. 남자인 나도 이런 새끼를


만나면 신세를 망치는 것이다.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모르는 유두를 느끼며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일릭?”

내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나 보다. 여자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눈치를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어서 나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세상에 변태들 참 많지……. 상상 초월의 변태도 있긴 하더라.

혼자 사는 게 나을지도.”
그 뒤로 여자애는 일릭은 다른 꼰대들과는 생각이 다르다느니, 사람을
존중할 줄 안다느니 하는 칭찬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칭찬이
절대 기쁘지 않았다. 이게 다 경험에서 나온 얘기다 보니, 나 홀로 비참할
따름이었다. 변태를 만나서 당해 보니 변태 무서운 줄을 알겠더라…….
이런 깨달음 따위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으련만.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Volumen
2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21.

“배고프다. 빨리 밥이나 먹어야겠어.”


“좀 식사 때 맞춰서 와요. 주방장이 짜증내는 거 받아주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아니, 아랑곳 않는
여자가 종알종알 잔소리를 해 댔다. 그렇다고 여자를 상대로 짜증을 내기도
거북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자와 처음 대화 몇 마디를
나눴을 때는 기분 전환이 되어서 꽤나 유쾌하기도 했었는데 어쩌다가 또
대공 생각을 하면서 울적해졌나. 기분 전환. 하. 대공 그 새끼가 기분
전환이랍시고 내 가슴을 빨아 댔었지.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만약
지금처럼 예민하게 달아올라 만지기만 해도 짜릿할 때 가슴을 빨려
버리면…….
‘잘 하면 상으로 빨아 줄 테니까.’

웃음기를 담은 낮은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여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응? 더워요?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

여자가 물었지만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얼굴이며 귓가가


후끈후끈 뜨거웠다. 미친 변태새끼. 개새끼. 씨발놈의 새끼. 쌍욕을
퍼부어도 속이 시원하질 않았다. 끊임없이 몸에 지근지근 피어오르는
열기가 나를 몹시 괴롭게 만들었다. 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꾸만 놈의
번지르르한 면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더는 그녀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마침 도착한 주점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아무거나 되는 대로 빨리 달라고 해서 배만 채우고 어디로든 가
버릴 계획이었다. 혼자서 조용히 먹기 위해 주점이 비었을 만한 시간대를
선택해서 왔으므로, 식당에 아무도 없으리라 예상했었다.
“아, 그만 좀 하쇼!”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주점 안에는 용병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대장인


파빅의 모습도 보였다. 여러 용병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에게 한
놈이 대거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사내들의 분위기가 사뭇 흉흉했다. 내 곁에 있던 여자는
그 분위기에 겁을 먹었는지, 내가 들어 주었던 물건들을 뺏듯이 가져가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주방 쪽으
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 건방진 새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만 좀 하라고 했어요. 대장, 진짜 너무한 거 아니요?”



“ ?”

“이게 벌써 며칠째요? 아들 죽은 거 유감이고 안타깝긴 한데, 그러게 자식

교육을 똑바로 했어야지! 그 새끼가 우리한테 함부로 군 게 얼만데 씨발, 이


렇게 달달 볶여 가며 고생을 해야 해?”
“이… 이, 이 개새끼가!”

“아, 쳐. 쳐, 씨발, 쳐. 대장이 뭐 중재나 했소? 그 새끼가 우리한테 건방지게

구는 거 뻔히 알면서도 굳이 끼워 넣어서 데리고 다니고! 마일 그 개차반


같은 새끼 기사 수업 받고 있는 건 맞아? 그 새끼를 누가 받아 주기나
했냐고요, 그렇게 재수 없는 새끼를! 막말로 뒈져도 싼 새끼 아니오?”
“야, 이 씨발놈아! 자식 잃은 애비 앞에서 지금 그게 할 소리야?!”

“그러게 욕먹고 칼 맞아 뒈지기 전에 똑바로 가르쳤어야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드는 것은 성격이 성급하고 다혈질로


유명한 토비라는 놈이었다. 보통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다른 놈들이
토비를 말리련만, 지금은 절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들 터질 게
터졌다는 투로 불만스레 대장을 보고 있었다.
“떠날 날 며칠 안 남아서 조급한 거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들들

볶으면 여태 못 잡던 범인이 잡힌대? 우리가 뭐 대장 화풀이 인형이오?”


그 순간 파빅의 주먹이 토비의 면상에 직격했다. 뻐억!! 골통을 쪼개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토비놈은 그대로 멀찍이 나가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대장이 얼마나 세게
쳤는지, 단 한 방에 기절을 한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진 몸이 꿈틀대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그 뒤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배은망덕한 새끼…….”

나는 쓰러진 토비놈의 명복을 빌었다. 저 새끼 성질 조절 못 하고 한번씩


난리를 칠 때마다 임자 만나서 한번 된통 얻어터지리라 예상은 했었지. 그
임자가 대장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내가 이 용병대를 이끌면서 너희들한테 그렇게 서운하게 했냐?”

적막을 뚫고 묻는 대장의 목소리는 작고 맥이 없었지만, 어떤 절규가 담겨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었다.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놈들의 얼굴이 일제히 죄책감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꺼칠하니 추레해진
파빅의 몰골에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늘 활기 넘치고
호탕하던 노인네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대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 나는 흠칫했다. 설마
나를 쳐다볼 줄은 몰랐을 뿐더러,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검은 눈
안에 원망까지 어려 있었던 것이다.
“일릭, 너도 그러는 거 아니다.”
기어코 그가 나를 원망하는 말을 내뱉는다. 대공에게 부탁해서 청탁이라도
넣거나 정보라도 빼 오지 않고 무엇 했냐는 원망이었다.
나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파빅이 금방이라도 관에 들어갈 꼴을 하고
있는 게 내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채감은
희석된 지 오래기 때문이었다.
나는 피해자였다. 피해를 당한 건 이쪽임에도 불구하고 대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당방위였을 뿐인 일을 숨겨야 했고, 그로 인해 대공에게 잔뜩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만 문제가 아니라 몸도. 아니, 몸
이 아주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욕구 불만에 괴로워하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이냔 말이다. 그래서 나를 탓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왈칵
솟아났다.
“……됐다, 말을 말자.”

그러나 토비를 이어 내 성질머리가 폭발하기 전, 노인네의 어깨가 추욱


가라앉았다.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그를 외면해 버렸다.
파빅의 절망한 모습에 겉으로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참은
만큼 분개한 마음이 속에서 부글부글 들끓었다.
대장은 제 자식 욕 하지 말라며 토비새끼에게 한 방 먹이긴 했지만, 토비놈
말이 그른 거 하나 없다.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저 따위로 싸고도는
태도가 제 자식을 망쳤다는 걸 애비만 몰라. 아들 새끼 어디 가서 칼 안
맞도록 인성부터 잘 교육을 했어야지, 씨발. 뒈진 건 백프로 자업자득이고
난 절대로 피해자인데 왜 나까지 엿을 먹게 만드느냔 말이다.
“…하아, 일릭. 네가 좀 참아라.”

대장이 숙소를 떠나고, 용병 몇 놈이 내게 다가와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장의 저
성미가 용병들과 마찰을 빚을 걸 뻔히 알기에 라도반이 나서서
용의자 색출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대공이 내린 임무를 맡아 떠난 탓에
대장이 직접 나서게 되어서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기야 하다만, 마일놈 죽은 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개고생 할

이유는 없지 않냐. 바로 새 임무 맡은 너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가


지금 아니면 언제 쉬겠어. 달칸으로 돌아가면 또 어느 전쟁터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내게 말을 걸었던 몇 놈이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식당을 떠났다. 다른 몇 놈이 기절한 토비를 챙겨서 나가고, 식당에
는 나만 남게 되었다. 적막이 찾아들자 종업원이 나와서 눈치를
보더니 내 몫의 식사를 챙겨 주었다. 내가 워낙 심각한 얼굴을 한
탓이었을까. 그녀는 내 얼굴을 몇 번 힐끔거렸지만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나는 깔깔하게 말라붙은 입 안으로 음식물들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입맛이 써서, 솜씨 좋은 주방장이 만들어준 음식이 더럽게
맛이 없게 느껴졌다. 더럽게 짜증이 났다.
며칠 뒤에는 파빅도 공국을 떠나 달칸으로 돌아간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까. 떠날 날이 머지않아 파빅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겠지만, 나는 제발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가능하다면 대공에게 부탁이라도
해서 그들을 하루 빨리 달칸으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파빅은 아마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마일을 죽인 범인을 잡아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러면 아무
범죄자나 하나 잡아서 죽인 뒤 파빅에게 거짓으로 보고를 해 줘야겠다.
노인네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도 않게 말이다.
평소라면 맛있게 해치웠을 음식을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고 씹어
한숨과 함께 삼켜 버렸다. 피곤했다. 그리고 몹시도 우울했다.
다음 날 나는 내키지 않는 외출에 나섰다. 내가 굳이 나설 이유는 없었지만,
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숙소에 처박혀만
있으려니 영 파빅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내가 마일의 사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티를 너무 노골적으로 내었음을 조금은 반성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아들
새끼 때문에 내 팔자가 된통 꼬여 파빅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대장의 아들 사건에 너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도리어 의심을 살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마일을 죽이지 않았다 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겠지만, 그간 대장에게 신세를 진 게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 어느 정도는 협조해 줬을 것 같다. 그래서 대공이 나를 다시
부르기 전까지 며칠 정도는 파빅을 위해 움직이는 척을 해 줄 요량이었다.
“뭐 좀 밝혀진 게 있냐?”

오늘 내가 함께 움직이기로 한 놈은 아닉이라는 놈이었다. 돼지털처럼


뻣뻣한 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놈이 늘어지게 하품을 토해 냈다.
“솔직히 개판이야.”

“라도반이 그래도 애 좀 쓰다 갔잖아?”

“그 라도반이 빠졌으니 말이지. 게다가 라도반 진두지휘 하에 조사를 하던

놈들 중에 그나마 적극적으로 나서던 놈들도 전부 이번 임무에 포함되어


빠졌어.”
“다들 마일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적극적인 놈들도 있었냐.”

“뭐… 연차가 오래된 꼰대들 있잖아. 아니면 파빅이나 라도반을 아버지처럼


모시던 놈들이라거나. 나도 씨발, 마일새끼 때문에 움직이냐? 파빅이 청승
떠는 꼴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 이러지.”
“그럼 어제 토비는 왜 그 지랄을 한 거야?”

“파빅이 먼저 심했어. 조사하던 놈들이 라도반이랑 같이 쑥 빠지니까 더

마음이 급했겠지……. 자기가 나서 보니 막상 건질 만한 건 없고. 요즘


그래서 우릴 엄청 심하게 갈궜다고. 어제도 모아 놓고 씨발, 욕을 얼마나 해
대는지.”
어쩐지 어제 식당에 모여 있다 했더니, 파빅이 먼저 용병들을 불러 모았던
모양이었다. 일 때문에는 종종 그럴 때가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임무
관련된 집합과 욕설은 참아도 개인적인 일로 부림을 당하는 것은 나라도 딱
질색이었다. 파빅은 우리의 대장이지 주인은 아니다. 그걸 알고 있을 테니
파빅도 더 애가 타지 않았을까. 본인이 아무리 아들 죽인 놈을 찾기
전까지는 떠나고 싶지 않다 해도 용병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달칸에서 허용할 리가 없을 거고.
“그런 새끼도 자식이라고 싸고도는 거 보면 진짜 짜증나기는 하는데, 나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고향의 우


리 애 생각하면 파빅 마음이 영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더라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소꿉친구와 일찌감치 사고를 치고 결혼을 한
아닉은 큰아들이 벌써 열 살이었다. 자식을 낳아 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나. 나는 자식은커녕 결혼도
하기 전인 데다가 마일을 죽인 범인이었으므로 그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알아듣는 척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쨌거나…….”

아닉이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나를 힐긋 보고는 물었다.


“너는 아니지?”

“하……. 이 새끼들이 진짜.”

“아니, 뭐. 물어볼 수는 있잖아. 너만 아니라 토비나 다른 놈들한테도

물어봤었다고.”
“범인인 새끼가 그래 내가 죽였소 하겠냐? 뭘 묻고 앉았어.”

“야, 씨발. 죽인 건 죽인 건데 왜 가만히 있는 우리한테까지 똥을 뿌리냐

이거야.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든가. 우리야 한 달을 미로스에 묶여 있어서


국경을 넘기는커녕 수도에만 있어야 하는데, 도망을 쳤어 봐. 어떻게 잡냐?”
“도망을 못 치는 사정이 있나 보지. 너처럼 처자식이 달칸에 있다든가.”

“뭐, 사실 내 생각에도 그래.”

아닉과 대화를 하고 있자니 슬슬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게 말이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 걸 그랬어. 도망쳐서 얼굴에 흉터 좀 만들고 머리색 바꿔서
다른 인생을 시작해 볼 걸.
그런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없어 다른 용병대에 들어가기가 일단 쉽지가
않을 테고, 신분을 꾸며 어찌어찌 들어간다 해도 정체를 들키면 달칸
용병대와의 관계를 의식해서 나를 내쫓을 놈들이 태반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신나게 죽여 대던 라이벌 용병대에 들어갈 수도 없을 거고. 용병 짓을
그만둬? 그러면 여태 사람 죽이는 걸로 벌어먹고 살아온 내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달칸이 아닌 어디에 정착을 해? 이대로 범인이 아닌 척
한 달만 참고 넘기면, 달칸 용병대에 그럭저럭 붙어 있을 수 있을 텐데.
“아무튼 거지 같아. 서로를 의심하는 것도 웃기고……. 다들 곤두서

있다고.”
“용병이 아닐 확률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 그것도 아주 높지. 단장이 자식 농사를 너무 못 지었어. 이건 라도반이


“ ,

은밀히 빼 온 정보인데…….”
“으음?”

“시체가 발견된 꼴을 보아, 누구를 강간하려다가 당한 것 같다더라고.”

역시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일까. 아닉이 들은 ‘은밀히


빼온 정보’라는 것은 아주 정확했다. 나는 평소에도 내가 뚱하고 무신경한
표정을 지녔음에 감사하며 멀뚱히 아닉을 바라보았다.
“너한테도 수작을 걸었지? 밖에 나가서도 자기를 거절하는 여자를 보면 못

참았나 보더라. 그거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몇 번 있어서 그걸 주먹으로


막고, 돈으로 막고…….”
“토비새끼가 괜히 폭발한 게 아니란 건가.”

“어어, 조사하면서 우리도 환멸만 더 커졌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놈이 좀

생겼잖아?”
이 용병 새끼들이 단체로 눈깔들이 다 삐었나. 파빅이야 제 새끼가
세상에서 가장 잘생겨 보인다 해도 그렇다 친다만, 전에 체즈번도 그렇고
지금 아닉도 그렇고 눈이 옹이구멍인 모양이었다.
“치정 사건도 더러 있더라고.”

“…하.”

“이 여자 저 여자 동시에 만나면서 장난질을 치다가 그 여자들의 아버지나

남자 형제와 다투는 건 예사고……. 아무튼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사고를


치면서 원한을 많이 사서, 추린다고 추려도 용의자가 좁혀지지를 않아.
게다가 시일이 점점 지나고 있으니, 기억에 의존하는 데 한계가 있고.”
도대체 그런 새끼를 좋아하는 건 또 뭔가 싶다가도, 놈이 제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들을 꾈 때면 또 그렇게 간지럽게 군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제 꼴리는 대로 안 되면 오기를 부려 대는 강간마 주제에 말이다. 내
표정이 경멸로 굳어지는 걸 본 아닉이 킬킬 웃었다.
“그렇잖아? 마일 뒈진 날 뭐 했는지 난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 넌 기억

나냐?”
어. 난 그날 마일새끼를 죽였어.
차마 대답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켰다. 자연스럽게 기억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당시를 회상한다. 물레방앗간으로 오라는 쪽지. 갔더니 기다리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다가 냅
다 달려드는 마일 새끼. 뒷구멍 어쩌고 하기에 검을 휘둘렀더니
너무 맥없이 찔려 뒈져 버려서 당황했었지. 도망치듯이 나와서 알리바이를
만들 생각을 하는데 마침 리리엘을 마주쳐서……
아.
“아…….”

리리엘.
리리엘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공에게 시달리느라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다.
대공의 누이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는 리리엘을 만나긴 해야 하는데 아래가
민둥산이라서 어쩌나 고민을 하며 그녀를 피했었고, 다녀온 뒤로는
우울함에 침잠되어 그녀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나는 네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다 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였는데.
“왜. 뭐 생각난 거 있냐?”

“별로.”

“뭔데 그래. 수상하게 이럴 거야?”

“여자 생각 했다, 여자.”

“아, 너 은근히 색골이지.”

평소라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나, 지금의 나는 색골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기분이 나빴다. 색골은 씨발, 진짜 색골을 못 만나 봤으니 나더러
색골이라지. 전에도 종종 내가 여자들을 거절하지 않는 걸 두고 색골이네
바람둥이네 하는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에게 받아 본 게
거절밖엔 없는 모자란 것들이 시기심에 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피식 비웃어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기분이 나빴다.
“……어, 야. 뭘 정색을 하고 그러냐.”

아닉이 뒤늦게 눈치를 보았지만 나는 괜찮다고 해 줄 수가 없었다. 잠시


이겨 냈던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돌아왔던 것이다. 대공은
차치하더라도…… 리리엘은 진짜 어쩐단 말이냐.
- 다음 화에 계속
22.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가서 만나


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조금
,

곤란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더욱 원하고 있겠지. 내게는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 성심성의껏 봉사를 해야 할
텐데……. 평소라면 별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털 한 가닥 남지 않은 내 아랫도리를 뭐라고 설명을 한단 말인가. 대공이
제모제를 바른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여전히 털 한 가닥 올라올 기미가
없는 내 아랫도리 말이다. 그녀의 반응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니, 일단
내가 이렇게 민둥산이 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요새 계속 방에만 처박혀 있지를 않나. 어떤 여자기에 그래?”

“됐다. 그만하고 가기나 해.”

“에이, 형님이 유부남 아니냐. 연애상담이라면-”

“오늘은 누굴 만날 거냐고.”

“뭐…… 내 느낌에 범인일 것 같은 놈들, 다시 한번 만나 보려고.”

내가 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끊어 버리자 아닉은 더는 깊게 캐지


않았다. 대화가 거기서 일단락이 되었음에도 나는 기분이 가라앉아서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방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우울감이 사람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드는구나. 평소에도 그리 의욕적인 건 아니었다지만, 진짜
더럽게 움직이기가 싫었다.
“일단, 조네 남동생한테 가 보자.”

조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하자. 파빅이 불쌍하긴 하지만, 우리야 뭐 날짜만 채우면 되는 거

아니겠냐.”
그나마 그것이 내 어깨를 가볍게 해 주는 한마디였다. 아닉은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 속에 용의자… 아니, 마일의 피해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갔다. 물론 별 소득은 없는, 지난한 하루였다.
각자 흩어져서 이런저런 조사를 한 다음, 저녁에 모여서 하루 동안 알아낸
것들을 공유했다.
이전에는 라도반에게 보고를 하는 형식이었으나 현재는 담당자가 없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주절주절
일과를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파빅은 어제의 일로 단단히
마음이 상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놈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마일은 개새끼고, 정말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이런
새끼를 죽였다고 내가 대공과 그런 거래를 하고, 그런 꼴을 당하고…….
울적한 마음만 커져 가고 있을 때였다.
“이봐, 일릭. 뭐 하나 묻자.”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 집중된다. 질문을 하고 싶다는 건 용병대 중에서도


그나마 머리를 쓴다는 놈이었다. 놈은 나만큼이나 의욕이 없고 귀찮은
기색이 가득했는데, 머리를 벅벅 긁다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용병대에서 조사를 주도하는 놈들이 누군지 대공이 물어본 적 있었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일까. 내가 눈썹을 찌푸리자 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상하잖아. 조사를 열심히 하던 놈들은 죄 그 20명 안에 포함되어서

차출된 게.”
어? 그러게?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놈의 지적이 꽤나 예리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진짜 이상하긴 한데……. 믿을지는 모르겠다만, 대공이 물은 적 없어.

나한테 물어봤어도 대답 못 했을 거고. 일단 누가 열심히 들쑤시고


다녔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 말이 사실이었다. 대공은 나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고,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의심을 받고 있다는 말을 했을 뿐.
그리고 용병대가 마일을 찾는 동안 나는 대공이 시키는 일을 핑계로
돕기는커녕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모른 척하고 있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이 용병 놈들이었다. 내 말에 납득을 했는지 놈들이 각자 의견을 떠들어
댔다.
“근데 라도반이나 그 주변 놈들이 눈에 띄게 나섰던 건 사실이잖아? 그걸로

추정을 했을 수도 있지.”
“잠깐. 애당초 20명이라는 명수만 제시한 게 아니라 보낼 명단을 그쪽에서

보내온 거 자체가 이상하긴 한데.”


“내 말이 그거다. 그러니까…… 우리 내부 일을 전달하는 정보원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다면?”

일순간 분위기가 험악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섣불리 그럴 리가 있냐고


입을 열었다가 말끝을 흐리며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내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혹시 대공이 이쪽에 정보원을 심어 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공에 대해 쓸데없이 많은 것을 알게 된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마일의 죽음을 캐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대공의 사냥터가 그 인근에 있어서 수도 사람들은 그 물레방앗간 근처에도


잘 가지 않는단 얘기, 여러 번 나오지 않았나?”
“그걸 모르는 건 외지인밖엔 없을 거라고 말이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마치… 대공을 의심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가. 다시 한 놈이 내게 물었다.
“대공이 뭐 이상한 기색을 보이거나 한 건 없었어? 그 측근이라거나. 솔직히

마일새끼 사고치고 다닌 거 보면, 미로스 쪽에서 손을 쓴 거란 생각도 든단


말이야.”
“……글쎄.”

대공이 이상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냐고? 그러나 나는 그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입장이 아니었다. 늘 그 변태에게 휘둘리고 휘둘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내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하느라 애를 쓰기도
바빴으니 말이다.
아니, 애당초 대공이 내게 이상한 기색 따위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마일을
죽인 건 바로 나였으니까.
“하지만 마일의 죽음을 대장에게 알려 준 게 대공이다.”

“대공이 직접?”

“직접. 내가 처음 성에 들어가서 대공을 알현했을 때. 대공이 대장에게 말을

해 줬다고.”
“…… 대공 쪽에서 손을 쓴 거라면,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살인 사건이 아니라
실종 사건으로 만들었겠지. 굳이 알려 줬다니…… 대공은 역시 아닌가.”
“하, 씨발 차라리.”

다시금 다들 얼굴을 흐렸다. 나는 이 분위기 속에서 미묘한 아쉬움을 읽어


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차라리.
차라리 범인이 대공이라면, 파빅도 손을 쓰지 못할 테니 더 이상
살인 사건 조사 따위로 귀찮을 일 없을 텐데 하는 아쉬움.
나조차도 아쉬웠다. 어떤 놈의 뇌내 망상인지는 몰라도 아주아주 솔깃한
소리였다.
만약 대공이 마일을 죽였다는 결론이 나기만 한다면.
“어쨌거나 일릭, 넌 뭐 들은 게 딱히 없단 거지?”

“대공이 나에게 직접 일을 시키는 건 맞지만, 용병대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어. 내게 말을 한 것도 없고.”
“얘기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보고 들은 게 없다고 생각해도 되겠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용병대


놈들이 한숨을 내쉰다.
다시금 미궁이었다. 파빅이 하도 난리를 치니까 누구라도 좋으니 범인이
제발 나와 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냐마는.
“…더 할 얘기들 있냐?”

이미 할 얘기들은 다 마친 분위기인데 회의를 주재하는 놈이 없으니


끝내자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고 앉았다. 자리를 파하자는
얘기를 꺼내는 놈이 없어서 내가 물었다.
아무 성과도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 아닉과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게 나를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쉬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침에 일찌감치
나서느라 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자려면 그 짓을 해야 했기에 얼른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괜히 머리가 아팠다. 마일을 죽인 건 나라서 대공을 딱히 의심할 이유도
없는데 괜히 찜찜하고 마음에 무언가가 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먼저 들어간다.”

“어어, 그래.”

내 얼굴이 꽤나 지쳐 보였는지 놈들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뒤에서


수군대며 저 새끼 요즘 왜 저래? 하는 소리들이 들리긴 했지만 나에게 직접
묻는 놈은 없었다. 묻는다 해도 대답할 말은 없을 것이었기에 차라리 내게
직접 묻지 않는 편이 다행이었다. 나는 놈들을 뒤로 한 채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둠이 깔
린 밤 하늘에 뜬 달을 멍하니 바라보며 걷자니 의문이 한두 개
.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과연 대공은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수사에 힘을 쏟던


용병들을 고를 수 있었을까. 라도반 일행이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수도를
들쑤시고 다녔던 걸까? 또 그는 대관절 어디서 뭘 어쩌다가 내가 마일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또 리리엘을 만나 알리바이를 만드는 광경을
보았을까. 살인 직후 예민하게 날이 섰던 내 감각으로는 그 어떠한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하, 씨발 차라리.’

차라리 대공이 마일을 죽인 것이라면.


어느 용병인가가 끝까지 내뱉지 못했던, 덧없는 바람이 내 마음속에 번져
간다. 그의 입에서 내가 죽였소 소리가 나오게 만들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주제에. 생각지도 않게 듣게 된 가장
손쉬운 돌파구에 마음이 무거웠다. 당장 숙소에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검푸른 색의 병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액체를 떠올리면 더더욱. 심장이
짓눌려 짜부라지는 것만 같았다.
***
내 첫 경험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남들보다 늘 머리 하나는 더 키가 컸고
체격이 좋았기 때문에 열두세 살 쯤 이미 성인으로 오해를 받곤 했었다.
그때부터 그래도 꽤나 인기가 좋았다. 섹스가 무엇인지를 배운 이후로
성욕을 해소하지 못해 허덕인 적이 없었던 수준이었다. 굳이 참아야 할
때가 있다면 전쟁터에서 일을 할 때 정도? 하지만 여자를 끊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할 때는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고 혹독한 전투가 연달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욕을 느낄 새가 없었다. 물론 나도 남자인 이상 가끔
자위를 할 때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심각한 욕구 불만 같은 건 내 사전에
없었다는 소리다.
몽정? 그것도 언제 했는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사춘기 시절에도 성욕
해소가 안 되던 적이 없었는데 왜 굳이 몽정을 했겠는가.
그런데 요새는 연일 욕구 불만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아랫도리를
적시며 눈을 뜨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젖은 속옷을 빠는
쪽팔린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은데, 내 의지로 조절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 오래
도 아니었다. 5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 이상
싸기 일보 직전까지 발기를 해서 쾌감에 헐떡이다가 해소를 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나 혼자 잔뜩 흥분해서는, 그 와중에
정신을 다잡고 있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기 일쑤였다.
방에 처박혀서 몸을 만지작대다가 몰아닥치는 욕구에 허덕이고, 섹스하고
싶어서 몸을 뒤틀고……. 아니, 섹스도 필요 없다. 자위라도 하고 싶다. 한
발만 시원하게 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지난밤에는 자기 직전 그 빌어먹을 미약으로 가슴을 예민하게
만드는 짓거리를 하고 잠들었다. 덕분에 특별히 꿈을 꾸지 않아도 자다가
그냥 싸 버릴 것만 같았던 거지 같은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하아…….”

나를 자근자근 짓밟듯이 괴롭히던 야한 꿈이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내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실재하듯이 생생했다.
몽마. 서큐버스라고 하던가? 이전에 글을 아는 용병들이 돌려 읽었던 야한
책에서 나오는 존재를 떠올리며 나는 몸을 떨었다.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럽다. 굵고 탄탄한 팔뚝을 쓰다듬고, 더 위로 올라갈 듯, 혹은
아래로 떨어질 듯 복부를 쓰다듬는 손길이 야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참고 있었던 욕구가 불같이 번지며 몸이 뜨거워졌다.
대공이 만지는 것보다 섬세하고 부드럽다. 어딘지 더 야릇하고 간지러웠다.
아니, 씨발. 꿈으로 대공이 날 이렇게 간지럽게 애무하는 걸 꾼다고?
미쳤냐? 아무리 욕구로 미쳐 버리기 일보직전이라고 해도 야한 꿈에 대공이
나온다고??? 아니, 그렇지만 대공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누가 나를 만지고
있단 말인가.
불현듯 정신이 들어, 잠기운에 빠져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일릭.”

잠시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방황했다. 연한 금빛의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미녀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몸에 바투 붙인 육체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에
완벽하게 밀착해 부드럽게 뭉개졌다. 붉은 혀가 낼름, 내 입술을 핥는다.
간지러운 감촉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고, 입술이 닿으며 혀가 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입안으로
깊게 파고들어 왔다.
머릿속이 그저 새하얬다. 쉬이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던 것 같은데, 분명 내 방에서 잠들었는데 왜 리리엘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잘 자는 사람을 덮치는 모습으로. 리리엘. 그래, 그녀는
리리엘이었다.
“놀랐어?”

애교스러운 말투에 눈을 찡긋거리는 그녀는 분명 리리엘이었다. 그리고 이


공간은 틀림없이 내 방이었다.
“…어떻게.”

“보고 싶어서 왔지. 말만 전해 달라 하고 가려 했는데, 요즘 일릭이

울적해한다고 동료분이 들어가 보라고 하던데?”


숙소에 여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그래서 번번이 나를 불러
달라고 전언을 남겨야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를 안에 들어오게 했다는
건, 용병 놈들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용병대의 규칙을
어기는 걸 눈감아 줄 테니,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기운을 차리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자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리리엘이 내 입술에 쪼듯이 입을 맞추며 물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이


좋아서 나 역시 그녀의 입맞춤에 응했다. 그녀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입맞춤이 질척해지며 뭉클한 혀가 입안을 넘나든다. 그녀의
뜨거운 입안으로 내 혀가 빨려들어 가기도 했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혀와 혀 아래를 핥고 비비며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리리엘은
코를 울리며 몸을 내게 노골적으로 비벼 댔다.
“으……!”

갑자기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가려 들어서 깜짝 놀라며 나는 내 혀를 콱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았다.
“아앙, 아파, 일릭.”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나는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도리어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내게 가슴을 비비다가 그녀의 몸에 내 유두가 비벼졌을
때, 순간적으로 너무나 찌릿해서 신음까지 터질 뻔했던 것이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게 쾌감 때문인지, 유두가 이렇게 예민해진 것으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인한 수치
심 때문인지, 그녀에게 몸 상태를 들킬까 두려워진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프다니까?”

“아, 어어…….”

그녀가 또 다시 내게 몸을 비빌까 봐서, 놓아주면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내가 놓아주자 다행히도 그녀는 상체를 띄웠다. 내 하복부를 깔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몹시도 요염했다.
“괜찮은 거야? 늦잠도 잘 안 자는 사람이, 여태 자고.”

“…좀, 피곤해서.”

“날 만나러 와 줄 줄 알았는데. 안 오더라? 너무 섭섭했어.”

“으음…….”
“하지만 다른 사람 생긴 것 같지도 않으니, 이번만 내가 용서해 줄게.”
그녀는 짐짓 자비를 베풀 듯이 오만한 얼굴로 읊조렸다.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기분이 되어버렸다. 원래라면 상대가 그 누구라 해도 내게 집착을 할
기미를 보이면 정리할 마음부터 먹었을 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만한 저 표정은 자신이 내 약점을 쥐고
있음을 정확하게 아는 얼굴이었다. 만약 다른 여자와 놀아났다면 나를
파멸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 않았다.
……다른 남자의 노리개가 되었을 뿐.

“자기 기운 나게 해 주려고 왔는데…….”

헉……. 리리엘의 손길에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손이 덥석 내 다리


사이를 쥐었던 것이다. 성기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접촉에 아래가 불끈대는
게 느껴졌다.
“아이 차암, 여긴 너무 기운이 팔팔한 거 아냐?”

리리엘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이미 바지를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기세로


흥분해 있었다.
나 혼자 방을 씀에도 불구하고 음모를 잃은 뒤로는 늘 바지를 입고 자는
습관을 들여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에 들어온 그녀가 털 한 올
남지 않은 내 아랫도리를 보고 곧장 다른 용병들에게 가서 내 비밀을
폭로해 버렸을 것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자기 정말, 아침부터 대단해.”


예쁘장한 얼굴이 야릇하게 젖어든다. 눈 안에 기대감이 한가득했다. 날
뼛속까지 발라 먹고 골수까지 쪽쪽 짜낼 기세였다.
그녀의 손이 슬금슬금 바지 위를 문지르다가 허리춤으로 슬금슬금
다가선다. 그 순간 내 이성의 끈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아, 씨발 하고 싶다. 근데 하면 안 된다. 대공이 허락 없이 싸지 말랬잖아, 씨
발. 그것만 아니라 털 한 가닥 남지 않은 아래를 보면 리리엘이 도망을
치거나 다른 상대가 생겼냐며 미친 듯이 화를 낼 거라고. 아니, 어떡하지?
하고 싶은데. 아니아니, 도망쳐야 하는데. 거절하면 이 여자가 또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이 덜 깬 머릿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 성욕과 이성이 불꽃을 튀겼다.
그 와중에 도망칠 방법도 없다.
“하아, 일릭…….”

발갛게 젖어든 여자의 눈가가 욕망으로 촉촉했다. 나를 핥듯이 훑어보는


시선이, 대공의 호박색 눈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거는 진짜 보통
일이 아니다.
익히 전쟁터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 다음 화에 계속

23.

“리리엘.”
나는 그녀의 손이 내 바지 속을 파고들기 전에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그리고 곧장 그녀의 옆구리를 내 허벅지로 밀어 침대로 쓰러뜨리고 그 위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내 아래에 깔리게 된 그녀는 잠시 놀란 듯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그 눈이 유혹적으로 휘어진다.
“자기도, 차암.”

나는 그녀의 손이 나를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 팔을 내 목에 감게


만들었다. 나 역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으나 몸을 맞대지는 않았다. 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가슴이 비
벼지면 정말 이성이 홀랑 날아갈지도 몰랐으니까.
“응…….”

입술이 맞닿고 혀가 얽히자 그녀가 고양이처럼 가르릉 소리를 냈다. 원래도


키스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성심성의껏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촉촉한 입술을 감물어 빨아 당기고, 자그마한 혀를
고루 핥아 주었다. 혀 아래 고인 타액을 질척하게 휘젓기도 하고 입천장을
긁으며 깊숙이 혀를 밀어 넣기도 했다. 타액이 끈적하게 뒤섞이며 혀와
혀의 움직임을 한층 미끄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숨이 점차 거칠어지며 다리를 비비 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키스가 꽤나 로맨틱하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더한 접촉은 잠시 미뤄둔 채
입맞춤을 즐기며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성욕이 폭죽처럼 펑펑
터지는데, 이성은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귀가 찢어질 듯한 경고음을
울려 댄다. 어떡하지. 여기서 끊어야 한다. 끊어야 하는데, 뭐라고 핑계를
대지? 어떻게 물 흐르듯이 도망치지? 아니, 근데 진짜 그만두는 게 맞나?
머릿속이 한참 복잡하게 돌아가던 때였다.
“일릭…….”

촉촉하게 젖어든 음성이 울린 순간. 열에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에 담긴


나를 본 순간.
뚝, 어디서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미친 듯이 하고 싶어 죽겠는데, 준비완료 의욕만만인 내 취향의 여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으니……. 씨발, 그 순간 그대로 쌀 뻔했다. 대공이고
나발이고 그냥 해야겠다. 해버려야겠다. 아랫도리 못 보게 후배위로 하면
되겠지. 아니면 눈 가려 놓고 하자. 그래, 눈. 눈을 가려 놓고 하면 되잖아?
결국 나는 머릿속에 섹스만 한가득한 성욕의 노예가 되었다. 그때부터 뭐든
그녀의 눈을 가릴 게 없나 혈안이 되어 찾기 시작했다. 아, 그냥 옷을 벗겨서
그걸로…….
그러나 맹렬한 기세로 이성을 반으로 뚝 꺾어 버린 나의 성욕은, 이번에도
분출로 이어지지 못했다.
똑똑똑, 짧고 단호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던 것이다.
“꺅!”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리리엘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 역시 화들짝 놀라서 열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지고야 말았다.
“…….”

문간에 서 있는 것은 얼굴이 익숙한, 소년. 지금 이 순간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가 시
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년은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위기의 순간 내 이성을 돌아오게 만들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까지 하는 원망스러운 구원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분명
익숙했다. 그가 이곳에 오는 것 또한 흔한 일이었다. 대공의 인장을 들고
있어 그 어느 때에도 용병대의 숙소에 프리패스로 들어오는,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에는 어린 소년.
그는 매일 아침, 대공에게로 나를 데려가곤 했던 대공의 별관 하인이었다.
더럽게 눈치가 보인다.
말 없는 대공의 하인의 뒤를 따르고 있자니 연신 마른침이 넘어갔다. 내가
대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유일한-엄밀히 말하면 여러 명이지만
별관의 하인이라는 집단 하나, 단수로 치고 싶다- 제3자였다. 그런 그에게
내가 대공이 아닌 다른 사람과 몸을 섞기 일보 직전의 모습을 들켰으니, 괜
히 마음이 조였다.
대공은 자신을 만족케 한다면 내가 뒤에서 다른 짓을 해도 좋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그렇다. 마치 외도를
저지른 기분이라 당당할 수가 없었다.
무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뭐라고 말이라도 붙여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대답도 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괜히 머리나 긁적이며 묵묵히 걸었다. 그
와중에 몸은 여전히 불끈불끈 달아오른 상태라 더 열이 났다.
하인이 나를 데려간 곳은 대공의 집무실이었다. 그 굴욕적인 제모를 당했던
장소로, 다시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 거세게 박동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집무실이 아니라 연회장이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방 안에 대공이 있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지는 새하얀
오전의 햇살을 받아 그의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책상 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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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을 하는 듯 고개를 수그리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이는 단정한 이마라든가, 우뚝 솟은 콧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헌데 그러면 뭘 한단 말인가……. 속에 들어 있는 게 미치광이 변태인데.
하인은 따라 들어오지 않아서, 집무실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내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어쩐지 사자 우리에 처넣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책상 앞에 빈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마치 나 앉으라고 준비를 해 둔 듯이.
“…부르셨습니까, 각하.”

내가 그의 앞에 서자, 대공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릭.”

수려한 낯에 일순간 숨이 막혀 온다.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내 이름이


어쩐지 꿀처럼 묵직하면서도 다디단 것 같다. 눈매를 사르륵 접자 속눈썹이
팔랑이는데, 그 눈웃음이 몹시도 다정했다.
괜히 얼굴로 열이 몰렸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찬란했으며 눈이
부셨다. 나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속으로 숫자를 셌다. 몸 안의 열기가
날뛰지 않도록, 아랫배에 꾸욱 힘을 주기도 했다. 정말로 내가 개가 되어
버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잘 훈련 되어 주인의 손짓 하나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침을 질질 흘리는 개.
“앉아.”

대공이 명령했다. 그의 무릎에 앉으라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는 대공의 시선을 비스듬히 비껴 냈다. 어쩐지 오싹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성감이 너무 예민해져 있는 탓일까? 대공의 시선이 나를 샅샅이 훑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다정한 척 포장되어
있으나 사실은 집요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 몸 안쪽 어딘가가
찌릿찌릿했다.
“낯빛이 어두워.”

“아… 예…….”

“역시 내가 그리웠던 게지.”

아, 저 새끼 입을 꿰매 버릴 수도 없고. 나는 이를 악 물고 네인지 예인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모를 앓는
소리를 짧게 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였다 대공은 앉은
. .

자리에서 쿡쿡 웃었다.
“시킨 건 매일매일 했나?”

“……예.”

“그거 참 볼만했겠군그래.”

대공의 말에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하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차오르는 수치심과 굴욕감은
내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새끼는 왜 성격이 저 모양일까.
진짜 딱 한 대만 때려 보고 싶다. 두 대도 말고. 한 대만.
이렇게 속으로 욕을 할 때만 해도 나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대공이
말로만 끝내는 종류의 변태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해 봐.”

달콤한 미소와 함께 짧게 떨어진 명령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는 반문도 머뭇거림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고, 멍하니 그
빛을 뿜어 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 봐? 뭘. 뭘 해 봐?
“가슴으로 가는 거 보여 달라고.”

가…? 가긴 어딜 가. 혀끝이 굳은 듯이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겨우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키며 말을 뱉어 냈다.
“그, 병……. 병을 안 갖고 왔습니다.”

“아쉽게 됐군. 그럼 가서 가져오기를 내가 기다려야 하나.”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 그러나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마치


빙하기를 맞은 듯이 온도가 뚝뚝 떨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병을 가져온다고 해 봐야, 그 뒤에 더
심한 꼴을 보게 되리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어쩌면 그의 말마따나
성기에다 액체를 바르거나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안쪽에…….
가슴만으로도 돌아 버릴 것 같았던 그 자극이 떠올랐다. 아마 안쪽에서부터
그렇게 자극당한다면 난 심장마비로 죽게 될 거야.
결국 나는 그의 협박 아닌 협박에 옷을 벗을 수밖엔 없었다. 그가 가서 그
미약을 가져오라고 하기 전에 재킷과 셔츠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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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 스친 것만으로도 저릿한 감각이 올라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열이 올랐다. 이건 다 내가 너무 욕구불만이기 때문이다. 성욕을
어떻게 해소하지는 못하고 계속 쌓고 또 쌓기만 하니까, 이제는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지경이라서, 그래서.
“후욱…….”

내쉬는 숨이 벌써 거칠었다. 흉곽을 뚫고 튀어 나올 기세로 심장이 거세게


박동한다. 몸에서 사납게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니 두툼한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수치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대공이 시켰다지만, 그래서 매일 한 번씩은 했다지만 이런 꼴을
타인이 지켜본다는 게 내 신경줄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벌써 뾰족하게
서 있는 유두를 대공이 핥듯이 보고 있다는 것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흐……!”

손가락을 댄 순간, 저릿함에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배에 힘이 콱


들어가면서 다리 사이까지 죄 욱신욱신 아파 온다. 허벅지도 당겨 왔다.
나는 애써 숨을 크게, 그러나 가늘고 천천히 들이쉬었다 내쉬며 긴장을
풀어 냈다.
입술이 말라 왔다. 나는 시선을 내리깐 채 내 가슴을 문질렀다. 작은 돌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혼자서도 이 짓을 몇
번이나 해 왔기 때문에 사뭇 익숙하기까지 했다. 곧 빠르게 쾌감이 오르기
시작했다. 대공의 시선이 몸에 열기를 더한다. 은밀해야 할 행위를 타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건 분명 굴욕적이었으나 동시에 그로 인해 흥분이 더욱
부추겨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아까도 리리엘로 인해 한차례 흥분했다가 맥없이 수그러들어야 했던
성기가 바지를 뚫고 튀어나올 듯이 발기했다. 허리가 멋대로 움찔움찔
튀었다. 허공을 향해 좆질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꼴이겠지만 내 몸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아플 정도로 아래가 부풀어 올랐다. 아니, 아팠다. 당장 바지 앞을 풀어 헤쳐
자유를 주고 손으로 주물러 마구 흔들고 싶었다. 빼고 싶었다. 제발 한 번만
사정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몸 안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데 분출이
안 되니 열을 식힐 수가 없었다. 텅 빌 정도로 사정하고 그 탈력감과
나른함에 빠지는 게 얼마나 황홀한 쾌감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분
명 천국이었을 테지. 대공에게 너무 시달려서 죽을 것 같았던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던 과거조차 미화되어, 괴로워도 좋으니 이제 제발
싸고 싶었다.
나는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빠르게 정상에 도달했다. 씨발, 내가 조루가 왜
생기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내가 그래도 침대에서 힘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욕구 불만에는 장사가 없었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지는 몸이 되어 버린다. 근데 가해지는 자극이 작지도 않았다.
최고조로 올라간 쾌감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크으… 흑……!”

그러나 분출하기 직전, 지난 며칠간 몇 번이나 그러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몸이 꽉 조여들었다. 안에서 폭발하는 충격과 함께 사정하며
풀어지기 마련이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안에 더 힘을 주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속이 조여들다 못해 꼬이는 듯이 아파 왔다. 그럼에도
나를 해방시킬 수가 없었다. 가면 안 돼.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참아.
참으라고…!
“아……!”

짐승의 소리처럼 탁하고 그렁그렁한 소리가 내 목구멍에서 터져 나갔지만


그뿐이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허벅지며 복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며 새카맣게 흐려지는 와중에 빛이 점멸한다.
아아아아. 미칠 것 같았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그 안에서 끓는 것이
해소가 되지 않아서. 후벼 파고 싶을 정도로 하복부 안쪽이 근지러운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이제 겨우 힘이 풀려 가는 다리가 제멋대로 달달
떨렸다. 몸이 절로 비비 꼬이려 들었다.
“……흐윽…….”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린 순간,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공의 노란 눈동자에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다.
뼛속까지 발라 먹을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내게
고통스러울 정도의 쾌감을 선사하며 위에서 움직이던 얼굴이 절로
연상된다. 그리고 그 아찔한 성감과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쾌감까지도.
머릿속이 뜨거웠다. 해소되지 못한 열기가 전신을 태우고 머릿속을
뭉근하게 녹여 낸다. 눈가가 욱신대며 부옇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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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나는 내 입이 열린 줄도 몰랐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멋대로 목소리가
성대를 울리며 비집고 튀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열이 너무 오르고
욕구가 차올라서 머리가 멍했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의 허락 없이는 사정하지 말라는 낮은 음성이 머릿속에 한가득했다. 저
호박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었다. 거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낮은 음성으로.
그러니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가고… 싶습니다…….”

헐떡거리는 내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는


애원조였다.
“싸고 싶어요…….”

욕구 앞에 나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달아오른


몸이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떨린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도, 끝이 뾰쪽하게 서다 못해 단단하게 뭉친 듯이 욱신거리는 가슴도
차라리 없애 버리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제 정신을 차리지를 못
하겠다.
“……이것 참.”

대공이 헛바람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헐떡이는 내 숨소리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
울린다.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점차 나에게
다가와서, 내 앞에 선 사내를 차마 올려다볼 수 없어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었다.
대공은 내 턱을 감싸 쥐어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손에 하릴없이 고개가 위로
들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웃는 듯, 혹은 굳은 듯한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이의 약이 효과가 이렇게나 좋을 줄은.”

내 턱을 감싸 쥐고 있는 손으로 간질이듯이 손가락만 움직여 땀에 젖은


피부를 쓰다듬는다. 그 감촉은 그저 간지러운 수준일 뿐이었음에도 등골이
다 쭈뼛 서도록 야릇했다. 내 입에서 애달픈 숨소리가 흘러 나간다. 대공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열에 발갛
게 익어 땀에 젖은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제 막 정오를 향해 가는 한낮이었다. 커튼을 걷어 둔 커다란 창가에서
쏟아지는 빛이 지나치게 밝았다. 그러나 나는 수치심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잘하면 빨아 주기로 했었지.”

대공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호박색 눈동자에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게


틀림없는 장난기가 담뿍 묻어 있었으나, 보다 깊은 곳에서는 어두운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몹시도 위험한 빛깔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 가슴 위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 다음 화에 계속

24.

헉 힉, 흐윽!”
“ …!

그가 내 턱을 놓고 고개를 기울여 유두를 덥석 입에 문 순간, 익히 가슴에서


느껴 본 적 없던 성감의 파도가 나를 후려쳤다.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거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밀어내고 싶은 것인지, 더 당기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가 저절로 뒤로 꺾이며 가슴이
내밀어진다. 대공은 일부러 젖은 소리를 내며 내 가슴을 핥고 빨았다.
유륜째 입술로 덮어 아이가 젖을 먹듯이 쭉쭉 빨아 당기다가 도드라진
돌기를 자근자근 이로 깨물었다.
“각하, 헉…!”

그것만으로도 당장에 싸 버릴 것 같았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대공은


불룩 튀어나온 내 바지 앞을 풀어 헤쳤다. 잔뜩 밀려 올라간 속옷이 이미
선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는데, 대공이 그것을 젖히자 성기가 튕겨지듯
튀어나왔다. 잔뜩 젖어 들어 번들번들한 것을 대공이 손으로 쥐어 가볍게
주무른 순간.
“아!”

뱀처럼 휘어 감기는 손가락에 눈앞에서 섬광이 터졌다. 대공의 어깨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부여잡은
손에 와락 힘이 들어갔다. 성기 끝에서 울컥, 희고 끈적한 액체가
쏟아졌다. 그 해방감이 어찌나 큰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면서 귀에서는 웅웅
이명이 울었다. 내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대공의 어깨를
붙잡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잘 참았나 본데.”
잠시 입술을 뗀 대공은, 손을 들어 그 손에 묻은 흰 액체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열이 오른 눈으로 뭉글뭉글하기까지 해 보이는 액체를
바라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내 정액이었다.
“아주 진해.”

대공의 말마따나 그건 액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진하고


끈적끈적했다. 대공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것들은 덩어리져 뭉쳐
있어 흐르기보다는 떨어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대공은 점도를 확인하듯이
엄지와 검지로 그것을 비볐다. 그의 곱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에서 내
정액이 뭉개지는 광경이란…….
“잘했어.”

마치 개를 칭찬할 때와 같은 관대한 어조. 자비로운 낯을 한 대공이 다시


손을 내려 성기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허억…!”

대공의 혀가 길게 가슴을 핥았을 때 다시 시야가 하얗게 탔다.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몸이 크게 떨렸다. 내 손으로 만지는 것과 대공이 혀로
핥고 빠는 것이 주는 자극은 차원이 달랐다. 펠라티오를 받을 때와 비슷한
혹은 더 강렬한 쾌감이 가슴에서 번지는데, 도무지 사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공의 손이 오르내리는 성기에서 연신 정액이 쏘아졌다. 내
입에서 몇 번이고 짓눌린 교성이 튀어나갔다.
대공은 내 가슴을 손 가득 쥐어 더 볼록하게 만들고선 젖은 소리를 내며
유두를 빨았다. 한 번씩 그가 세게 빨 때마다 쾌감이 벼락처럼 쏟아졌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았다. 씨발, 며칠 참았다가 맛보는 절정의 쾌감은
황홀함 그 이상이었다. 차라리 그냥 죽고 싶을 정도로 짜릿하고 뜨겁고
아찔했다. 그걸 가슴에서 느끼고 있다는 게 굴욕적이란 걸 잊을 정도로
너무 좋았다.
“…일어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입


술을 떼며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낮게 잠겨
있는 건 내 귀에 이명이 울기 때문일까.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책상을 짚고
섰다. 바지 앞이 풀려 있어서 바지가 그대로 흘러내려 발목에 걸렸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뒤로 뺀 채로 서도록 했고, 내가 자세를
취하자 엉덩이 사이로 오일을 묻힌 손가락이 성마르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윽, 크윽!”

아래를 푸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급했다. 여유 없이 내벽을 억지로 밀고


들어오며 입구의 주름을 벌린다. 힘을 빼려는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안을
난폭하게 찌르는 손가락에 자꾸만 몸이 경직됐다. 대공은 그런 내가
성가신지, 아예 뒷목을 잡아 책상에 내리눌렀다. 양피지가 잔뜩 펼쳐지고
쌓여 있는 그의 책상에 내 상체가 엎드려졌다. 몸을 기역자로 구부린 채
엉덩이만 뒤로 뺀 굴욕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아래를 벌리는 손길이 너무
과격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힉! 히익!”

그의 손가락이 안쪽의 한 지점을 마구잡이로 찔러 댈 때마다 입에서 새된


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갔다. 대공이 벌려 대는 아래가 얼얼하고
욱신욱신했다. 그러나 내벽을 역행하는 손가락의 감촉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다. 몹시도 괴로우면서도 야릇하다는 두 가지 의미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크윽!!”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언제 끄집어낸 것인지 모를 단단한 것이


아래에 닿는가 싶더니 단숨에 찔러 들어왔다. 비명을 삼키며 악문 잇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몸 안에 말뚝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아린 건 느낄 새도 없었다. 속이 온통 진탕이 되는 기분. 말뚝을 박고
그 위를 망치로 내리친 것만 같았다. 어느 영주가 적군을 창으로 항문부터
꿰뚫어 세워 두었다는 괴담이 떠올랐다. 성기가 처박힌 순간에는 정말
그것이 몸을 직선으로 꿰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구역질마저
솟아올랐다.
“아윽, 큭!”

대공의 손이 내 허리를 틀어쥐더니, 안에 박힌 것이 뽑혀 나갔다. 내벽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온통 휩쓸
며 빠져나가는 것에 내 몸이 마치 허공으로 떠오른 듯이 부유감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크학!!”

퍽! 가죽 터지는 소리를 내며 대공의 성기가 거세게 내 안을 꿰뚫었다. 내


엉덩이에 대공이 맞닿는 소리가 꼭 매질을 하는 것처럼 차지고 커다랗게
울렸다. 그대로 대공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 움직임을 반복했다.
움직임이 어찌나 큰지, 그가 박아 들어올 때면 책상에 막혀 더 앞으로 갈
곳도 없는 몸이 튕겨져 나갈 듯이 흔들렸다. 이렇게나 거칠고 빠르게
안으로 드나드는데 심하게 아프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아, 아! 아! 우윽!”

입에서 절로 비명 같은 신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그나마 중간에 이성이


잠깐 들어와 입을 틀어막았다. 바깥에 들릴까 봐 두려워진 것이다. 입술을
앙다물고 이를 악물었다. 덕분에 숨 쉬는 게 곤란해져서 가빠진 호흡에
폐부가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입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벌리는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대공의 성기가 그가 손가락으로 난폭하게 자극했던 내벽 안쪽을


짓이기듯이 제대로 콱 찔러 들어왔을 때. 나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온몸을
경직시킨 채 부들부들 떨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떠오르며 몸이
휘어졌다. 깜빡 깜빡. 어둠과 빛이 교차되며 세상이 온통 점멸한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사정을 한 것도 몰랐다. 그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히익!”

대공은 내 사정을 결코 봐주지 않았다. 내 양쪽 손목을 붙잡아 뒤로 당기며


멋대로 안으로 재차 파고들어 왔다. 퍽 퍽 퍽 규칙적으로 살과 살이 맞닿아
가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구잡이로 해 대는 것 같았지만, 그는
집요하리만치 내가 느끼지 않고는 못 버티는 곳만을 찔러 댔다.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어 불이라도 붙은 듯이 속이 뜨거운데 그 안에서
전기가 파직파직 통하며 신경을 따라 전신을 튀기는 것만 같았다. 그의
성기가 깊이 처박힐 때면 머릿속까지 온통 휘저어지고 뭉개져 뇌가 곤죽이
되어 온몸의 구멍으로 줄줄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비명을 내질렀는지,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했는지, 뭘 어떻게 했는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모르겠다.
이성도 감정도 죄 날아가 버렸다 그저 쾌감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난폭한 성감만이 내게 남은 전부였다. 하나의 성기가 되어 느끼고


싸고 절정에 몸부림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아…!!”

마침내 대공이 절정에 다다라 내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성기를 처박아


내벽을 짓누르며 사정을 할 때까지.
“후윽……!”

건드린 적 없는 곳까지 깊게 건드리며 거칠게 처박힌 성기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서, 내 안을 가득 채운 성기를 조였다. 그러자 대공이
낮게 신음하며 내 허리를 움켜쥔다. 허리에 반동을 주어 더욱 깊숙이 밀어
넣으며 그가 좁아지는 내벽에 연신 성기를 문질렀다. 잔뜩 힘을 주어
좁히고 있는 안쪽을 성기가 억지로 벌리며 헤집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반면 대공의 입에서는 재차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열기로 가득 찬 더운 숨결이 땀에 잔뜩 젖은 내 등 위로 쏟아졌다. 나 역시


내 아래 깔린 양피지가 엉망이 되거나 말거나 그대로 내리누른 채 책상에
상체를 대고 숨을 고르기 바빴다. 대공이 내 안에 사정하는 동안 쾌감의
여진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것마저도 황홀해서 머릿속이 몽롱하게
잠겨 들었다. 엉덩이가 제어를 잃고 자꾸만 움찔거렸다.
살 것 같다. 탈력감에 젖은 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뒤에 아직까지 박혀
있는 묵직한 것이 괴롭기는 했지만, 머릿속이 멍해져서 정신을 차리기 힘든
와중에도 살 것 같았다. 대공이 너무 급하게 휘몰아쳐 대니까 또 죽을 것
같기는 했는데, 그래도 오랫동안 참다가 몇 번이고 오르가슴을 느끼며
사정을 했다는 그 쾌감과 해방감은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천국에
한 발을 걸치고 내려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진짜 천국인지, 지
옥의 열탕인지는 모르겠지만.
“으윽…….”

대공이 몸을 떼는 순간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갔다. 대공의 좆은 솔직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어떻게 사정해서 부피가 좀
줄어든 상태인데도 빠져나가는 느낌이 이렇게 선명하게 날 수 있단 말인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성기에 척추를 따라 오싹한 감각이 번졌다. 나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모르게 몸
을 떨자 대공이 웃는 소리가 났다.
대공은 손수건으로 앞을 닦고 옷을 제대로 입었다. 그러는 사이 나만
엉덩이를 훌렁 까고 있기가 민망하여-그제야 내 자세에 대한 자각이
찾아들며 조금 수치스러워졌다- 나 역시도 허리를 세웠다.
오랫동안 대공의 아래 눌려 책상에 대고 있던 탓에 허리가 시큰시큰 아파
왔다. 게다가 다리에는 어떻게 이렇게 힘이 들어가지가 않는지. 후들후들한
다리에 겨우 힘을 주어 서서 아래를 대충 훔치고는 발목에 걸려 있는
속옷과 바지를 끌어올려 입었다. 그리고 셔츠를 주우려 하는데, 대공이
나를 불렀다.
“일릭.”

그는 어느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사를 막 끝낸 남자의


얼굴에는 아직 흥분과 열기가 남이 있었고 호흡도 아직은 거친 편이었다.
다만 눈동자만은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정사의 여운이 뚝뚝 묻어나는
발그레한 낯에 괜히 내 기분이 더 민망해진다. 내 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누군가 들어와서 대공과 나를 보는 일만 없기를 바랐다.
“이리 와.”

그런 느슨한 꼴로 대공이 제 허벅지를 툭툭 치는 게 아닌가. 의미하는 바가


명확했다. 대낮에 그런 꼴도 보이고 섹스까지 질펀하게 한 마당에 무릎에
앉는 게 뭐 그리 쪽팔리겠냐마는.
안타깝게도 수치스러운 기분은 새삼스럽게 머리를 든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나는 묵묵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마주 본 채로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대공이 안에 사정한 것을 완전히 긁어 낸 게 아니었기에, 다리
를 벌리고 앉으려니 흘러나올 것만 같아 괴롭다. 대공이 깊게 박혀
있던 구멍이 잘 다물리지도 않는 듯해서 더욱.
“윽!”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대공은 이


자세에서는 손이 갈 곳은 응당 엉덩이밖에 없다는 듯이 내 둔부를 움켜쥐고
마음껏 주물렀다. 양쪽을 쥐고 주무르는 손길에 엉덩이 사이까지 자극을
받는다. 약간 부어오른 항문이 비벼지도록 일부러 그러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열기가 식어 가던 뺨이 다시 달아오르려 했다. 이번 건 성감
때문이 아니라 굴욕감과 분노 때문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오랜만이라고 아주 게걸스럽게 먹던데.”


아, 씨발……. 나를 바라보며 웃는 낯이 진짜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밉상이었다. 씨발, 지가 사람을 그렇게 몰아가 놓고서는……. 내가 진짜 요
며칠 얼마나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씨발. 진짜 싸기 일보 직전까지
흥분했다가도 끝까지 하지도 못하고 참고, 찬물 부어 가며 식히고, 씨발.
“젖꼭지도 이렇게나 예민해지고.”

쪽. 그가 가볍게 내 유두를 입술로 물어 빨아 당겼다가 떼며 말했다.


오싹하게 피어오르는 감각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씨발 남자라면
사정 후에 불응기가 있기 마련인데, 그 불응기에마저 이렇게 짜릿할 정도면
얼마나 예민하게 개발된 거냐고. 순식간에 울적함이 고개를 들었다. 섹스의
쾌감이 컸던 만큼이나 그 후의 허무함 역시 평소보다 강하게 찾아든
것이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닌지도.
“그렇게 좋았나?”

“…….”

아.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다. 느물느물 웃는 낯이 몹시도 짜증이 났다.


대공은 쿡쿡 웃으며 나를 노골적으로 놀렸다. 어린애를 달래듯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으로 나를 희롱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얼굴이…….
“한 번 더 할까.”

나른하게 풀린 눈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도 끈적했다. 한 번


발산해 놓고서도 그의 호박색 눈동자 안쪽이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번엔 침대에서. 느긋하게.”

나른하게 풀린 얼굴이 다시금 순식간에 야하게 젖어드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 남자는 자기 얼굴이 어떤지 너무 잘 안다. 알고서 상황에 맞게
이용한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 속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내 속내를 누구보다 쉽게 읽어 내고는, 제가 가진 얼굴로 나를.
내게.
“더는 못 쌀 때까지 빨아 줄까 하는데.”

달콤하기 짝이 없는 음성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려 했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입술마저 선정적이었다. 어느새 엉덩이에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옆구리를
쓸어 올리며 가슴까지 올라온 손이 타액으로 젖은 유두 위를
간질인다. 몹시도 야릇한 손놀림. 그 입술과 혀가 닿았을 때의 감촉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빨아 주겠다는 건 펠라티오를 해 준다는 게 아니라, 가슴을 말하는
것이겠지. 질질 쌀 정도로 짜릿했던 그 애무가 그립지 않았냐는 듯 대공의
손가락이 유두를 부드럽게 희롱한다. 씨발, 누가 가슴으로 가는 것 따위
즐길 성 싶으냐 반발감이 들면서도.
“…….”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던 것도 같다.


“하하.”

무언의 끄덕임에 대공이 웃음을 터뜨렸고 내 얼굴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씨발……. 그래. 문제는 다른 게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내 몸이 그가 선사하는 쾌락에 기쁘게 떨었다는 것. 그리고
질펀하게 사정을 한 뒤에도 부족하다 느낀다는 것. 그래서 그가 조금
만지고 비비자 더 하고 싶어졌다는 그 모든 게 바로 문제였다.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그런다. 계속 감질 나는 쾌감에 고문당하다 보니까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다고. 속으로 변명을 하고 있자니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낯으로 대공이 읊조렸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곤란하게 하기는.”

아, 진짜 저런 개새끼가 있을까. 먼저 더 하자고 나를 유혹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놓고서는, 이제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대공의 한마디에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는다. 대공은 수치심을 느끼는 내 모습이 즐겁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그가 한참 주무르고 있던 내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제 무릎에 앉혀 둔
연인에게나 할 법한 다정한 터치에 쭈뼛 소름이 돋아난다. 차라리 변태같이
주무르라는 소리가 혀끝까지 튀어나온 내 마음을 알 리가 만무한 대공이
엷은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가슴으로만 가는 거야 보기 좋을 줄 알았지만…….”
만족감이 듬뿍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는 몹시 나른하고도 나긋했다. 낮은
음성이 귓가에 닿을 때마다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고 싶어서 들썩거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런 간지
러운 행동은 정말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제발 썩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애써 대공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비껴
떴다. 다시 대공의 음성이 귓가에 감겨들었다.
“오늘따라 어쩌면 이렇게 귀엽게 굴지?”

귀엽……. 어린 시절에도 그다지 들어 본 적 없으며, 나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그 빌어먹을 단어를 쓰면서 말이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쭉
돋고 털이 거꾸로 서는 것 같았다. 뭔지 모르지만 간지러웠다. 아주 불쾌할
정도로 가려워서 귓구멍이고 고막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전부 긁고
싶어진다.
씨발, 연인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사내새끼들끼리 징그럽게 무슨. 무슨 저
따위 표현을. 나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쓴 단어겠지만, 그 어느
단어들보다 내게 주는 타격이 강했다. 귀엽… 씨발, 그런 단어를 쓰다니.
다리 여럿 달린 벌레들이 기어 다녀도 그 단어를 대공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는 덜 징그러울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정색을 해 버린 것 같다. 그리고 대공의 다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대공은 웃는 낯으로 나를 놓아주었다. 그
얼굴마저 나를 놀리는 기색이 역력해서 밉살맞기 짝이 없었다. 아니, 얄밉다
기보다는 불편했다. 토라진 애첩을 보듯이 보는 눈빛이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다정했으니 말이다. 소름 끼치고 징그러웠다. 차라리 욕망에
젖은 눈이 더 담백하게 느껴진단 말이다.
나는 그를 외면하며 여전히 바닥을 뒹굴고 있는 셔츠를 집어 들어 걸쳤다.
대공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깔고 앉아 약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나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의 앞에 가서 섰다. 방에서 더 하자고 했으니 여기서 더
무슨 짓을 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는 알량한 믿음을 갖고.
대공은 물론 내게 더 굴욕적인 행위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먼저 들어가서 씻고 있어.”

즐겁다는 얼굴로 한마디를 속삭이며.


쪽.
“…….”

그러니까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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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떨어졌을 뿐.


뒤늦게 입술에 감각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말캉하면서 따뜻한 무언가가
가볍게 닿아 문질러졌다가 떨어진 그 간질간질한 감촉이 떠오르고 이미
떨어져 나간 것의 여운이 기이할 정도로 진하게 묻어났다. 나는 그제야
그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입맞춤. 대공과는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연인이나 할 법한 그런
다정하고 달달한 행위가… 방금…….
그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과 함께, 전신이 아플 정도로 소름이
돋아났다.
이건 엉덩이 토닥거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징그러움이었다. 수천 마리
벌레가 온몸을 휘어 감고 잠식하는 것처럼 징그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정수리를 반으로 쪼갤 기세로 찾아든 혐오감에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한다.
아니, 새카맣게 불이 꺼진 것도 같았다.
뻐억!!
어디선가 가죽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우당탕탕 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째서인지 내 주먹이 욱신욱신 아파 왔다.
“……어…….”

이성이 홀랑 날아가 암전되었던 시야에 어느새 빛이 돌아왔을 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갔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욱신거리는 주먹의 통증이 이것이 현실이라 말한다.
“……씹…….”

저 멀리 바닥에 늘어져 있는 길고 늘씬한 육신. 화려한 문양의 카페트 위에


흐트러진 은빛의 머리카락.
미로스의 대공이, 내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5.

나는 특별히 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인도 아니었다. 물론


살면서 올바른 일만을 하고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설령 그릇된 짓을 한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해도 상식
적인 수준이었다. 그 이전에 굳이 악행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내 덩치 덕분에 웬만한 갈등은 상대 쪽에서 먼저 피했으니까. 그럭저럭
무난하고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사람을 많이 죽이긴 했다. 그러나 직업 때문이었다. 전장에서는 옳고
그름, 선악의 구분 따위는 무의미한 것 아니겠나. 이 땅의 지배자들에게
전쟁은 체스 게임과도 같았고, 그 도구가 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나에게
살인은 단순히 일일 뿐이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나는 악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악당들이나 가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옥에 갇혔다는
게 내게는 사뭇 충격이었다. 누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설령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일도 흔히 일어나겠지. 그러나 내 외모나 직업
덕에 괜한 시비에 휘말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게 미친 듯이 억울했다. 내가 씨발, 요새
억울하지 않은 게 없다지만 이건 정말 너무 심하지 않나.
작은 창 하나 없어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는 어둡고 좁은 방이 나를 몹시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청소는 물론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게 틀림없는
좁다란 방. 벽에는 갖은 오물이 튀어 말라붙어 있었으며 벌레와 쥐새끼들이
인간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기어 다녔다. 그런 걸 무서워할 정도로 섬세한
신경은 아니었지만, 결코 즐겁지도 않았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특히
최악이었다. 결코 익숙해지기 힘든 온갖 지린내와 더러운 냄새들이 후각이
마비될 틈도 없이 내 코를 공격해 왔다.
그 악취 속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대공이 언젠가
제 성의 고문 기술자에 대해 얘기를 했던 적이 있더랬지. 만약 대공이 나를
벌하기로 했다면-물론 당연히 벌하겠지만-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게 뻔했다.
그러기 전에 그냥 자살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어디 목
맬 곳도 없고 스스로를 찌를 만한 날붙이도 없다는 것이었다. 방법이 하나
있다면 혀를 깨무는 것 정도인데 아직 삶에 미련을 끊지 못한 나는 혀를
깨무는 걸로는 죽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솔직히 그런 꼴로 뒈지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건 최후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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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미로스의 대공을 두들겨 팼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입에서는 한숨이


튀어나온다. 이성이 끊어졌던 그 순간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주먹에 진하게 남아 있던 타격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안면을 강타한 것
같았다. 그 곱디고운 얼굴을 솥뚜껑 같은 내 손으로 후려친 것이다.
이어 바닥에 쓰러진 대공이 떠올랐다. 힘을 잃고 늘어진 몸은 경련조차
하지 않았다. 기절을 한 거면 그래도 다행인데, 설마 한 대 때린 게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아서 죽은 건 아니겠지……?
혹시 대공이 죽었다면 이건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마일을 죽인
것을 파빅에게 들켜서 용병대에게 쫓겨 다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일이다.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겠지.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달칸 용병대
전체가 문제가 될지도.
씨발, 그깟 입맞춤이 뭐라고. 그게 뭐 그리 징그럽다고 그 순간 이성이 뚝
끊어지냔 말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부터도 그랬다. 대공이 간혹 간지러운 짓을 할 때.
목덜미에 입술을 댄다거나 하는 짓을 할 때면 정말 견딜 수 없이 징그럽고
소름이 돋았다. 살갗을 벅벅 긁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그런데 난데없이 입맞춤이라니. 그걸 어떻게 견디느냔 말이다.
“아, 씨발…….”

어쨌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는 내 처분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문제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알 수가 없어 시간을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내 상태를 봤을 때 이틀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나는 그대로
감옥에 방치되어 있었다.
대공이 죽었다면 나 역시 지금 이렇게 곱게 있을 수 없었을 테니 아마
대공이 살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 관한 처벌이 내려오지 않는 걸
보아 아마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을 것 같았다. 혹은 어떤 벌을 줄지
고민을 하고 있다거나…….
“꼴좋게 됐구나.”

심난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노골적인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내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웬 사내가
건들건들한 모양새로 창살 밖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삐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 꼴이 몹시 하찮은 기사 나부랭이처럼
보였다. 체구나 걸치고 있는 갑주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재수 없는 면상이
딱 기사의 그것이었다.
“뉘신지.”

“…이, 이놈!”

제법 공손하게 물었던 것 같은데 튀어나온 음성이 시건방졌던 것은 너무


피곤해서다. 혹은 죽을 자리 봐 둔 자의 자포자기라거나. 원래라면 굳이
성질을 긁는 말투를 쓰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잖아도 심란한 사람을 앞에
두고 꼴좋다며 비웃는 작태에 나도 적잖이 언짢았다.
“건방진 놈. 네가 죽으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대공의 얼굴을 때린 순간 사형은 확정된 거 아니었냐.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어차피 죽을 거 아니냐고. 나를 어떻게든 비웃으려 하는 놈에게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한숨만 푹 내쉬었다. 유치한 도발이라 대꾸할
말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또 놈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근본도 없는 천한 놈이…!”

그냥 나를 무시해 주면 좋으련만. 놈은 내게 어떤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공 각하께서 계속 네 뒤를 봐주실 거라 생각하느냐? 네놈이 저지른 죄는

반역죄다. 감히 대공 각하를 시해하려 해?”


놈에게서는 지독한 악의가 느껴졌다. 단순히 주군을 해한 상대에게 보이는
적의가 아니었다.
“나는 진작 네놈이 이런 짓을 벌일 줄을 알고 있었지. 각하의 눈을 무슨

재주로 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야.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는 차차 묻도록 하지.”
진작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놈과 이전에 마주친
기억이 당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나는 기사놈들을 피하며
살아왔다. 실력으로라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인데, 일상에서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대등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꼬워서라도
기사들을 피하던 나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상대는 미로스의 기사. 굳이 마주칠 일이
있었는지도 내 쪽에서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기억을 한참 더듬어 보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렴풋이
근래에 대공의 기사와 마주쳤던 것 같기는 한데. 얼굴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꼭 어둠 속에 스쳐 지나갔던 것처럼, 혹은 야밤에
칼춤이라도 췄던 것처럼…….
“아.”

종알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나는 기억


속에서 미로스의 기사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대공을 수행해 숲의 산장에
다녀왔을 때, 소변을 보러 멀리까지 나갔다가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다짜고짜 검을 빼들고 나를 잡아 심문을 하려 들기에 나는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로서 검을 들었었다. 그때 검을 맞댔던 그놈들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죽이지 않으려고 애 많이 썼었는데.”

“네놈이..!”

혼잣말처럼 흘러나간 내 한마디에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검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나를 찌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아,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냥 날 죽여라, 죽여. 고통 없이 한 방에 보내 준다면
내가 그냥 칼 한 방 맞아 줄 테니까.
그러나 놈은 필사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얼굴로 창살을 붙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겠다.”

아, 네에, 네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나는 놈을 무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놈에게 빌 일은 없었다. 빈다고 놈들이 나를 봐줄 리도 만무하고
말이다.
솔직히 각오하고 있는 바였다. 대공의 얼굴에 손을 대고도 내가 멀쩡히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공이 내 주먹에
나가떨어진 직후, 우당탕탕하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집무실을 지키던
하인과 기사가 들이닥쳤다. 현행범인 나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그대로 감옥에 끌려왔을 때 곧바로 고문을 당했어야 하련만, 지금까지 가둬
두기만 한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이봐, 베이즈.”

그때 뒤에서 관망하고 있던 기사 한 놈이 나섰다.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걸고 있던 놈은 나를 향해 씩씩거리던 기사 놈의 귀에 무어라 귓속말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속삭였다.
베이즈라 불린 기사놈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귓속말을 하던 기사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섰을 때, 나를 바라보는
베이즈란 놈의 얼굴에는 음흉한 웃음이 가득했다.
“감옥에서 소란을 일으킨 놈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뒈질 놈인데.”


올 것이 왔나.
철컹, 창살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놈이 하는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굳이
예의를 가르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나를 고문할 명분은 충분할 텐데?
감방의 철문이 열리자 기사 두 놈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놈이 나를
일으키는 사이, 다른 놈은 벽에 붙어 있는 도르래를 움직였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리더니, 갈퀴가 달려 있는 쇠사슬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과연, 대공부터가 고문에 자부심이 있는 양 얘기를 하더니, 대공성 감옥은
감방마다 바로 고문이 가능하게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놈들은 입술을 길게 찢어 히죽히죽 웃으며 내가 손에 차고 있는 족쇄들을
쇠사슬 끝의 갈퀴에 매달았다. 차르륵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위로 올라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목을 위로 당겨 올려,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까치발을 서서 발끝으로 겨우 바닥을 버티고 섰을 때에야
도르래가 멈추었다. 위태롭게 바닥을 딛고 선 탓에 대번에 종아리에 힘줄이
서며 통증이 몰려들었다.
“꼴좋구나.”

여느 고문 기술자들보다 더 능숙하게 손수 나를 매달아 놓은 놈이


이죽거렸다. 그나마 거꾸로 매달지 않아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미처
그 말을 할 틈도 없이, 입속으로 더러운 천 뭉치가 쑤셔 박혔다. 그제야 나는
멍청하게 혀를 깨물 타이밍조차 놓쳐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오래오래 버텨 달라고. 너희 용병 놈들은 그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이

그나마 장점이잖아?”
베이즈란 놈은 얼굴에 한껏 의기양양한 미소를 띤 채 고기 덩어리처럼
매달린 내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툭, 툭, 등이며 복부 등을 가볍게
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몸이 흔들려서 결박된 손목이 끊어질 것 같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금만 더
지나면 감각이 무뎌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심호흡으로
숨을 골랐다.
“어때. 어떤 걸 쓸지 네게 선택지를 줄까?”

놈은 관용을 베푸는 태도로 내 앞에 도구들을 펼쳐 보였다. 고문을 하기 전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고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심리전이었다.
끔찍한 도구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본격적인 고문을 가하기 전에 정보를
술술 토해 내는 놈들이 부지기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들과 거래를 할 게
아무것도 없다. 심문이 아니라 고문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 고문 도구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 내 정신까지 농락할 심산인 것이다.
날카로운 날붙이들, 피와 살점 따위가 말라 비틀어져 들러붙어 있는 톱날,
뾰족한 바늘 따위를 보고 있노라니 심박수가 빨라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속으로는 사실 진작 자살할 걸 하는 후회가 한가득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흥, 그 허세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한참 이런 저런 도구를 고르는 척하던 놈은 내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자


더욱 성이 난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데롱데롱 매달려 발끝으로 겨우
지탱하고 선 내 몸뚱이가 얼마나 치기 좋은 샌드백으로 보일지 뻔했기에
나는 이를 지그시 물며 복근에 바짝 힘을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다.
그런데 놈이 막 내 배에 주먹을 꽂아 넣기 직전이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모여 있는 남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철창


너머에 팔짱을 낀 채 적갈색 머리카락의 중년의 기사, 자칸이 서 있었다.
그를 본 기사들이 일제히 굳어졌다. 자칸은 기사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미간을 좁히며 딱딱한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말했다.
“대공 각하의 명이 있기 전에 저 자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단장님……. 그건 그렇지만 감히 각하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그런 자를, 각하의 명령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둔다는


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다들 참을 만큼 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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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 닥치지 못하겠나!”
“단장님! 어차피 각하께서 깨어나시면 사형시킬 놈 아닙니까! 게다가

이놈은 이전에 저희들과…!”


“지금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자칸이 험악하게 읊조리자 기사놈들이 일제히 주춤했다. 과연


기사단장이라는 남자의 몸에서 쏟아지는 기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결국 한 놈이 움직여 도르래를 작동시켰다. 촤르륵,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사슬이 느슨해진 덕분에 내 몸이 바닥에 추락했다.
발끝으로 지탱하고 있었다지만 종아리 근육이 이미 한계에 달해 있던 탓에
그대로 철푸덕 바닥으로 쓰러질 수밖엔 없었다. 재갈에 막힌 입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갔다.
“다들 돌아가라. 이 일은 차후에 다시 물을 테니.”

기사단장의 엄중한 명령에 기사들이 감방을 나섰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성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에 가득 들어차 있던 천 뭉치를 퉤
뱉어냈다. 잔뜩 건조해졌던 입에서 쿨럭쿨럭 기침이 터졌다.
자칸은 그런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지푸라기며 더러운 천이 깔려
있는 좁아터진 판자-차마 그것을 침대라고 할 수는 없었다-위에 눕혔다.
그는 잠시 내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각하께 함구하는 게 좋을 거다.”

기사들을 대할 때보다 한층 잦아든 음성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뭘 걱정하며 내 입막음을 하려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게 대공이었을까? 그가
깨어나기는 했나?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각하께서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다. 아무리 그대가 돈에 움직이는

용병이라고 해도, 주군을 걱정하는 기사들의 충성심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는 하지 않겠지.”
“충성심에 저지른 일이니, 고자질하지 말라 이거요? 대공이 아시게 되면 뭐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용병 나부랭이가 감히 그의 얼굴을 때려 며칠간 의식마저 없었다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깨어났을
때 분노가 어마어마할 텐데 말이다 도리어 내 털끝 하나 손대지
.

않고 멀쩡히 내버려 두었던 걸 더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아.”

자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를 한숨이었다. 한편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심한 것을 보는 것도 같았다. 일단 제 주군의 얼굴에
손을 댄 극악무도한 반역죄인을 보는 눈빛은 결코 아니었다. 안색이 어두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무표정했다. 제 명을 어기고 나를
고문하려 했던 부하들을 보는 시선에 비하면 그래도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도리어 뭐랄까. 답지 않게 측은하게 여기는 듯한…….
“…후.”

그는 끝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긴 한숨을 내쉰 뒤, 가타부타 한 마디


말없이 등을 돌려버렸다. 내가 그를 다시 돌려 세울 틈도 없이 가 버렸다.
다시 그 좁고 더러운 방에 나 혼자였다. 이후로는 간수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둑한 벽에 횃불이 뿜어 내는 주홍빛 빛만이 일렁였다.
좁디좁은 감옥 안에서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으니 시간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간혹 간수가 와서 물과 함께 멀건 죽이나 빵 따위를
식사랍시고 주어 목숨을 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안감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기분도 나아졌다. 전부 다 귀찮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다가, 너무 더러우니까 좀 씻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다가, 다 귀찮아서 그냥 잠든 채 죽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감방에서 벗어난 건 대공의 하인이 나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하인은 앳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철창을 열어 나를 나오게 했다. 며칠 씻지 못한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어쩔 수 없었는지 어린 얼굴이 찡그려졌다가 이내 다시
원래의 무표정함으로 되돌아왔다.
감옥에서 나오자 시원할 정도로 상쾌한 공기가 비강을 가득 채웠다. 아직
해가 채 떠오르지 않아 하늘 한구석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는
새벽이었다. 성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조용해 어떤 인기척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마차를 끄는 말의 발굽 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렸다.
나를 태운 마차는 잠시간 달려 별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인은 곧장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혼자 씻겠다고 하는 것을, 두세 놈이
달라붙어서 머리를 감기고 면도를 시키고 몸을 닦아 대는데 버틸 수가
없었다. 저항할 정신적, 육체적 체력이 모두 방전된 상태였다.
결국에는 욕조에 늘어져서 시중을 받으며, 생각했다. 나 죽지는 않겠구나.
설마 죽이기 전에 이렇게 더운 물로 씻기고 단장을 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언제 감옥살이를 했냐는 듯 깔끔해진 얼굴로 욕실에서 나오니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실내복의 개념이 딱히 없는 내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가벼운 복장이었다. 하인들이 걸쳐 주는 대로 옷을 입고 나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길바닥 용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었다.
설마 죽기 전 마지막 호사 같은 건가 싶어서 불길해질 정도였다.
내가 말끔한 모습을 갖추자 하인은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내가 대공과
종종… 아니 자주 밤을 보내던 바로 그 방이었다.
어느덧 해가 떠올랐는지 새하얀 빛이 하늘하늘한 흰 레이스 커튼을 뚫고
방을 비추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익숙하면서도, 오늘따라 낯설게만
느껴지는 커다란 침실.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널찍한 침대 위가 조금
볼록하게 올라와 있었다. 캐노피가 드리운 헤드 쪽으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누운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지만 말이다.
나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곧 어둠에 잠긴 대공의 실루엣이 보였다.
얇은 시트를 덮은 몸은 여전히 늘씬했다. 커튼이 만드는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침대가 한 걸음 앞이었다. 대공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 빛이
들어오지도 않는데 눈이 부시다는 듯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침대 위로 은빛의 머리카락이 방만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아침에 그가 잠에 잠겨 있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랜만이라서일
까.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대공은 정말 저
인간계를 벗어난 외모 덕을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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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화에 계속
26.

“이리 와.”
잠에 취한 듯이 낮게 잠긴 음성. 침대 위로. 짧게 떨어지는 명령은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탓일까. 혹은 그가 깨어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귓가가 오싹해졌다. 목덜미를
따라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일릭.”

나는 그 부름에 손과 무릎으로 침대를 짚어 올라갔다. 더. 더 가까이. 대공은


기어코 내가 그의 위로 완전히 올라오게 만들었다. 내 팔과 다리 사이로
대공을 두고 내려다보는 건 정말이지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일단
침대 위에 제멋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괜히 아름답다. 게다가 대공의
얼굴은…….
“……아… 어….”

대공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린 순간 내 목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맥없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랐다.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혹은 이상한 소리를
참지 못할 정도로 놀라고야 말았다.
새카만 멍. 그의 얼굴에 새카만 멍이 새겨져 있었다. 아름답다는 수식어
외에는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 그의 얼굴, 왼쪽 눈가가 얼룩덜룩했다.
“일릭.”

그 와중에 대공은 제 꼴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른한 얼굴이었다.


아프지는 않은 것인지, 잠에 아직 잠긴 얼굴이 몽롱해 보였다. 그런 사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제 얼굴을 슬며시 문질렀다.
대공의 입가에 매끈한 미소가 걸렸다.
“그대의 작품이 마음에 드나?”

나는 잠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금니만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카만 멍. 끄트머리는
푸르고 붉은 보랏빛으로 바래 가는 선명한 빛깔의 피멍. 과장을 조금 보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왼
쪽 눈가와 광대뼈 위쪽까지, 얼굴의 1/4 가량이 흉측한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전히 빛이 나듯이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얼굴의 일부가
색깔이 그 모양이다 보니 대공의 몰골이 전에 없이 참혹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심장이 다 덜컹거렸다.
숨 쉬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졌다.
신이 빚어낸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에 이런 흠집을 남긴 놈은 누구냐. 이건
천인공노할 죄악 아닌가.
그런데 그 짓을 저지른 게 바로 나였다. 내가 그 멍자국을 만든
주인공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듯 제정신이 돌아왔다.
순식간에 사람을 홀리다니, 과연 쓸데없이 잘난 껍데기였다.
“별 감흥이 없어?”

대공은 나를 놀리듯이 재차 물었다.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고 정신이


들어왔음에도 나는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대공은 그 꼴을
하고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릴 때 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내가 무어라 대꾸를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대공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유모가 아프다는 곳에 입을 대고 호- 바람을 불어 주더군.”

호. 입술을 동글게 모아 바람을 살짝 불어 내는 걸 굳이 재현한다. 이 정도로


멍이 들었다면 부기며 통증이 상당했을 텐데, 내가 갇혀 있는 동안 그래도
부기는 거의 다 빠졌는지 얼굴의 움직임이 크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그럼 나아지는 모양이지?”

저는 어릴 때 그래 본 일이 없어서 잘 모른다는 듯이 말을 하는 대공에 나는


순간 무어라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가 원하는 것은 퍽 명확했다.
이게 무슨 네다섯 살 난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씨발, 하는 생각과 함께
속이 좀 근지러워졌다. 하지만 의뭉을 떠는 대공의 앞에 무슨 선택권이
있으랴. 나는 넘어오는 것들을 애써 삼키고 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호오.
새카맣게 피멍으로 물든 광대 위에 민트 향기가 쏟아졌다. 설마 시종들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런 미래
를 알고 양치를 시켰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한 번, 두 번. 대공이 그만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서 나는 연거푸 그의 멍
위로 숨결을 쏟아 냈다.
그런데 갑자기.
“아…….”

뒷목에 대공의 손이 닿는가 싶더니,


“흐읍…!”

머리가 끌려 내려가고 입술이 포개어졌다.


말캉하고 따뜻하게 문질러지는 입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충격과 거부감은
이전처럼 강렬했지만 두 번째인 덕분에 이성이 홀랑 날아가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어쩌면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주먹을 꽉 말아 쥐는 것으로
대공을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그러는 사이 대공은 고개를 비틀어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이 물컹한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흐으…….”

맞닿아 비벼지는 혀에 야릇한 감각이 귓가까지 짜릿하게 뻗쳐올랐다.


입안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혀는 대공 아닌 누구의 것이었어도
자극적이었을 거다. 입맞춤이라는 행위가 주는 자극은 상대가 대공이라는
것과 상관없이 야릇했다. 여전히 소름이 끼치게 징그러웠으나 성감을
간지럽게 자극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대는 날 정말로 즐겁게 해.”

입술이 슬쩍 떨어지자, 대공이 웃는 낯으로 속삭였다. 그렇잖아도 잠겨


있던 목소리가 더 낮게 잠겨 바닥을 긁었다. 괜히 귓가가 뜨거웠다. 대공의
위에 몸을 드리운 이 자세도 그렇거니와 그와 입을 맞추며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하고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날 보고 웃는 대공의 얼굴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감옥에서
빠져나왔다는 안도감 탓일까? 아니면 멍든 얼굴을 한 대공이 언제 나를
벌하려 들지 몰라 두렵고 눈치가 보여서? 그것도 아니라면 저 멍든 얼굴
자체에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일까.
“내 좆은 그렇게 맛있게 빨면서, 키스는 그토록 싫었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씨발, 대공이 그렇게 말한 순간 죄책감이고 나발이고 지독한 불쾌감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이걸 말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
그냥 싫었다. 그냥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시키는 별의별 짓들이 굴욕적이기는 해도, 나를 능욕하는 것이 대공의
의도이며 목적임을 알기에 그럭저럭 무감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고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렇지만 키스는 느낌이 달랐다. 그가 다정한 포옹이나 달착지근한 애무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씨발, 대공과 내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아무리 잘생겼다지만 시커먼 남자 둘이서 그런 간지러운 짓을 하는 건
정말이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내가 여자를 안을 때 하던 짓을 사내를 상대로 당하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벌레를 보았을 때 징그럽고 불쾌하듯이, 생리적인 혐오감이
찾아들어 이성마저 뚝 끊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귀엽기는.”

아 씨발……. 귀…. 아 소름끼쳐, 씨발…….


내가 대꾸를 하지 못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대공은 연신 웃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쪼듯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날 괴롭게
만들었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침착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흠칫흠칫
몸이 굳어졌다. 대공이 내 반응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징
그럽고도 간지러워서 참고 있기가 여간 고역인 게 아니었다.
대공은 아예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입술만 아니라 입술 주변과
턱 끝을 제 입술로 감물어 빨아 당겼다. 아, 정말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간질간질한 자극에 등골이 다 쭈뼛 서고 소름이 돋아 몸이 부르르 떨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껍데기를 홀딱 벗겨서 속을 벅벅벅
긁고 싶었다. 감각이 무뎌질 법도 하건만. 내 몸은 대공의 야살스러운
애무에 연신 흠칫거렸다.
“바지 벗고 올라와.”

대공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어느새 덥혀진 그의 숨결이


살갗을 또 은근히 간질인다. 당황스럽고 괴롭고 황당해서 열이 벌겋게 오른
나는, 차라리 굴욕적으로 몸을 꿰뚫리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바지와 속옷을
벗어서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셔츠를 벗으라는 말은 없어서 우물쭈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고 있으
려니 대공이 내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윽…!”

등 뒤에 쿠션을 대고 상체를 비스듬히 기댄 대공은 나를 제 쪽으로 바투


끌어당겼다. 엉덩이를 더듬는 손이 질척했다. 내가 옷을 벗는 동안 오일을
꺼낸 모양이었다. 미끌미끌한 액체로 젖은 손가락이 지체 없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크윽, 윽…!”

오랜만에 느끼는 이물감이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감옥에 갇히기 직전까지


그와 섹스를 했으니 그리 오랜만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을
파고들어 오는 감각이 몹시 낯설었다. 내장을 역행하는 움직임에 허리가
절로 뒤틀렸으나 피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절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몸이 굳어졌다. 손가락이 내벽을 벌리며 깊숙한 곳을 문지를 때마다 애써
고정시키고 있는 몸 대신 허벅지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잡을 곳이 없어서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대공의 어깨에
닿았다. 침의가 흘러내린 탓에 잡힌 어깨는 맨살이었다. 닿은 순간 떼려고
했으나 아래를 헤집는 손에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그를 붙잡지 않고서는 몸을 지지할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겠지만, 며칠간의 옥살이에 체력이
바닥이었다.
“…일릭.”

대공이 낮게 내 이름을 속삭인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아래를 헤집는


손과는 별개로 다른 팔이 허리를 휘어 감았다. 손바닥이 셔츠 아래로
등줄기를 쓸어 올렸다. 그 손이 뒷목에 닿아 내 머리를 아래로 당겼다.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으…… 흐읍…….”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내 입술에 문질러졌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는 혀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뒤로 빠지려 했지만, 대공이 내 뒷목을
누르고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후에는 뒷목을 누르던 손이 사라졌을
때에는 고개를 떼거나 도망칠 여력이 없었다. 그냥 정신이 너무 없었다.
입안 깊숙이 들어와 멋대로 혀를 비비며 휘저어 대는 혀 때문에.
“흐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고 아


래를 벌리고 깊숙이 들어와 엉망으로 헤집어 대는 손가락 때문에.
대공은 내 엉덩이를 벌리고 주름을 한계까지 늘리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쑤셔 댔다. 억지로 벌어진 주름이 얼얼하고 화끈화끈했다. 그 와중에
손가락이 내벽을 짓누르고 찔러 들어올 때면 눈앞에 빛이 번쩍거렸다.
새하얀 섬광이 터지며 몸이 파드득 떨리고 직후 의식이 끊어지듯이
암전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입안에 혀가 들어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그냥 야릇하고 간지러워서 이성이 희미해져 갔다. 대공이 나지막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좋아 죽는군.”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등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윽…!”

손이 가슴으로 넘어와 손가락이 유두를 스쳤을 때, 나는 어깨를 움찔대며


몸을 떨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내 가슴은 여전히
예민했다. 그의 손가락이 유두 위를 가볍게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바르르 떨려 왔다. 열이 후끈후끈 몰려서 머리마저 띵했기에 대공이
속삭이는 모욕들에 타격을 받을 새도 없었다.
“이렇게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그래.”

대공은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유두를 문질렀다. 동시에 내벽 안쪽을


꾸욱꾸욱 눌러 댔다. 신음을 참기 위해 꾹 다문 잇새로 나도 모르게 히익
히익 신음이 샜다. 강렬한 감각들이 신경을 죄 지지는 것만 같았다. 열이
너무 올라서 머릿속이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이
빠져나갔을 때는 살 것 같다 싶으면서도 아쉬움에 뒤가 절로 움찔거렸다.
“물어.”

대공이 내 셔츠 자락을 말아 올려 입가에 댔다. 그가 시키는 대로 뭉쳐진


천을 입에 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맨가슴을 드러낸 수치스러운
꼴이었으나 그보다 더 쪽팔린 건 가슴과 아래 구멍을 좀 만졌다는 이유로
내 성기가 잔뜩 발기하다 못해 그 끄트머리에 미끈한 액체가 맺혔다는
것이었다. 셔츠에 가려져 있던 것이 이제는 고스란히 내 눈에 보여, 수치심
에 귀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대공은 한 손으로 발기한 내 성기 주변을 문지르며 제 침의를 좌우로
젖혔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모습을 드
러낸 대공의 성기 역시 발기해 있었다 오일에 젖은 손으로 두어
, .

차례 성기를 쓰다듬고 난 뒤, 대공은 내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문질렀다.


회음부와, 대공이 잔뜩 벌려 대서 얼얼해진 주름에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문질러지는 감각은 몹시도 야릇했다. 어떤 알싸한 간지러움이 몸을 자꾸
떨리게 만들었다. 닿아 오는 것이 점점 더 커지고 뜨거워지고 있는 건 내
착각일까.
“우윽…!”

옷자락을 문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손가락으로 풀어 놓았다지만, 주름을


벌리며 들어오려 하는 대공의 성기가 너무 컸던 것이다. 힘을 빼려는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귀두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 찢어지면 어쩌나 싶은 공포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공은 내 골반께를 붙잡아 그대로 아래로 내리눌렀다.
“흐윽, 욱! 으!”

억지로 벌어진 입구를 타고 내벽을 짓누르며 기둥이 쑤욱 미끄러져


들어왔다. 입이 벌어져 셔츠를 놓칠 뻔했다. 신음이 터지려 해도 말 그대로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눈앞이 파직파직 점멸했다. 순간적으로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영겁과도 같았던 찰나의 순간. 하얗게 바랬던 시야에 빛이 돌아오고 정신이
겨우 되돌아왔을 때는 대공의 성기가 뿌리까지 내 안에 박혀 들어 있었다.
등에 대고 있던 쿠션이 무너지도록 완전히 몸을 기댄 대공 위에서 내가
그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어느 새 가슴을 짚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움직여야지.”

대공은 내가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았다. 엉덩이를 가볍게 감싸 쥔


채로 내게 움직임을 종용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지만 갑작스러운
삽입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움직여, 일릭.”

어느덧 대공의 눈 안에 열기가 가득했다. 그의 성욕은 때로는 광기와


닮았다.
힘이 빠져서 허리가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그 눈빛에 위기감이 들었다.
얼른 그를 만족시키자는 마음가짐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았다간 대공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여유를 잃
고 달려들어 내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곧장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주어 몸을 띄웠다.
“흐윽…!”
성기가 빠져나가는 순간의 감각은 뭐라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워낙
부피감이 압도적이다 보니 내장이 순식간에 비는 것 같기도 했고 아래가 쑥
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거의 다 빠져나갔을 때는 솔직히 다시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엉덩이에 가볍게 얹혀 있는 대공의 뜨거운 손이
저절로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으, 으윽!”

단숨에 속을 꿰뚫는 것에 비명 같은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처음


삽입보다는 깊지 않았다. 내 골반을 쥔 대공의 손에 강제는 없었고, 나는
적당한 선에서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뽑혀 나가고, 또 다시 박혀 들어왔다. 내가 위에서 움직여 보니
깊이와 강도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적당한 강도의
자극이 가해지자 의식이 허공에 붕 뜨는 듯이 머릿속이 멍해져갔다.
“으응, 으, 읏, 흐으.”

두꺼운 성기가 내벽을 잔뜩 벌리며 안쪽을 짓누를 때마다 가볍게 가 버릴


것 같았다. 발기한 내 성기 끝에서 뚝뚝 선액이 흘렀다. 대공에게 체중을
싣지 않으면서 몸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허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열이 너무 올라서 내가 내 정신이 아니었다.
성기가 밀려들어 오면 압박감에 헉 소리가 절로 터졌고, 내벽 너머의
어딘가가 짓눌릴 때면 아찔한 쾌감이 번져 허리가 절로 떨렸다.
솔직히…… 솔직히 씨발, 좋았다. 대공이 괴로울 정도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내가 적당하게 정도를 조절하며 움직이고 있노라니, 섹스의 쾌감이
차곡차곡 쌓여 그저 좋았다. 대공의 지랄맞게 큰 성기가 주는 버거울
정도의 압박감마저도 어떤 쾌감이 되어 머릿속을 흐물흐물 녹여 갔다. 내가
딱 좋게 느낄 수 있는 지점과 강도를 파악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찧어
내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질컥질컥 야한 소리가 접합부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리 와.”

대공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내가 상체를 조금 숙이자 뒷목을 감싸 쥐어 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쪽으로 당
긴다. 자세가 무너진 탓에 나는 대공의 몸에서 손을 떼고 그의
머리 옆쪽을 짚으며, 여전히 찬란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만든 새카만 멍 자국이 고스란히 새겨진, 그 멍 자국
덕분에 처연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아름다운 얼굴을.
“으읍……!”

셔츠가 빠져나간 입술에 대공의 입술이 맞닿아 포개어져 뭉개졌다.


질척하게 고인 타액이 누구의 것이라 할 것 없이 뒤섞였다. 그게
소름끼치고 징그럽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저 야릇했다. 아찔할
정도로 야릇해서, 나도 모르게 뒤를 움찔거리며 내 혀를 얽어매는 그 혀에
응했다. 대공은 내 혀를 기어코 끌어내어 이로 잘근잘근 씹으며 말캉한
살덩이를 빨아 당겼다. 상황이 상황이라서일까. 그토록 끔찍하다 여겨졌던
게 대공과의 키스였음에도, 지금만큼은 맥없이 사정할 것만 같을 정도로
아찔했다.
“으응! 으!!”

몸과 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손이 유두를 꼬집듯이 잡아 당겼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쥐고 비틀어 댄 순간, 눈앞에 번개가 내리쳤다. 어디서부터
발생한지 모를 쾌감이 전신으로 질주하며 뇌수를 지졌다. 전신의 감각에서
스파이크가 터지며 쾌감이 사납게 점멸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온몸을
벌벌 떨며 사정하고야 말았다. 대공의 몸에 비벼지던 성기 끝에서 쏘아진
정액이 새하얀 몸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일릭.”

대공이 더운 숨결과 함께 내 이름을 신음처럼 내뱉었다. 절정에 올라 짧게


사정을 하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차였다. 대공이 다시 내 유두를
비볐다. 성기만큼이나 자극에 민감해진 지 오래라, 다시 몸이 펄떡 뛸
정도로 경련했다. 대공을 깊게 품고 있던 뒤가 바짝 조여졌다. 그러자
대공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아, 일릭…….”

나를 부르는 음성과 젖어든 눈빛이 쓸데없이 야했다. 열기에 감싸인 호박색


눈동자가 뿜어 내는 광채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으윽, 이상한 소리가 샐
정도로.
눈가에 밴 새카만 멍마저도 그의 얼굴에서 철철 쏟아지는 야릇한 색기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막지 못했
다. 도리어 더더욱 퇴폐적인 느낌이 더해져서 보고 있기가 힘들
지경. 그럼에도 동시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더 움직여야지. 달래는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 든다. 내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공이 더운 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당겼다.
다시 입술이 포개어졌다.
- 다음 화에 계속

27.

대공 성의 별관에 와서 내가 몸을 씻기 위해 사용한 곳은 대공의 침실에


딸린 욕실이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면 족할 크기의 욕조가 있었지만
이전까지는 사용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준비되어 있는 온수에 수건을
적셔서 몸을 닦은 뒤 제대로 씻는 건 집에 돌아가서였다. 대공의 성에 와서
욕조를 사용한 것은 감옥에서 나와 대공을 알현하기에 너무 더러운
상태였던 아까밖에는 없었다. 그건 또 다른 욕실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대공 성 별관에 이 정도로 큰 욕탕이 갖춰져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귀족들이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게 사교 활동의 일환이라는 건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성에까지 갖춰 놓았을 줄이야. 본성이 아니라 별관에
구비를 해 놓았다는 건 오롯이 대공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욕탕이란
의미였다.
사람 여럿이 들어갈 수 있을 풀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건 내게는 퍽
신기한 광경이었다. 탕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씻게 되어 있었는데, 타일
위에 흥건하게 떨어진 물들이 한 곳으로 졸졸졸 흘러 내려가는 것으로 보아
바닥에도 배수 시설이 되어 있는 듯 했다.
“윽… 크윽…!”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나치게


넓고 높은 공간에 습기가 가득 차 있어서일까. 내 입에서 토해진
소리들이 쓸데없이 크게 귓가에 울렸다. 열이 너무 몰린 머리가 멍한
와중에 수치심에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굴욕감 따위는 이제 희석될
만한데도, 지치지도 않고 괴로운 마음이 차올랐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보다 더 크게 헐떡거렸고, 성기가 안을 드나드는 소리가 질컥질컥
요란하게도 울렸는데 말이다.
욕실에 들어온 뒤, 몸을 씻는 게 아니라 한 번을 더 했다. 며칠 제모를 해
주지 못했다며 제모 크림을 바르더니, 그 화끈화끈한 자극에 흥분해 버린
나를 뒤돌려 세워 허리 높이의 세신대를 붙잡게 하고서 그대로 뒤에서부터
꿰뚫어 왔다. 대공은 뒤에서 끌어안은 채 내 가슴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렇지 않아도 제모 크림 때문에 따끔따끔한 자극이 아래에서 절로
피어오르는데, 거기에 민감해진 가슴을 만져 대니 몇 번이나 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공작이 사정을 할 즈음이 되어서는 바닥을 딛고 선 두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어지간히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다리에 힘이 풀릴 일이
없을 정도로 단련된 몸이 대공과의 정사는 견뎌 내지 못한 것이다.
이제 몸을 씻자고 하며 내 안에서 빠져나가기에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아… 아으……. 흐…….”

질컥한 액체가 고인 안쪽을 헤집는 손가락에 절로 앓는 소리가 터졌다.


잔뜩 치대고 짓눌려 부었을 게 틀림없는 내벽을 손가락으로 짓누르는 건
정말 몹시도 괴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계속 절정에 올라
있었는데, 내벽 너머의 지점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아아……!”

“참아. 탕에 들어가려면, 뒤처리는 해야 하잖아?”


“제가, 제, 가, 아!”
신음과 함께, 반밖에는 발기하지 않은 내 성기 끝에서 묽은 것이 쏘아졌다.
목이 쉬어서 흘러나오는 신음은 새된 소리였고, 맥없이 쏘아져 나오는 것은
정액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묽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더 나오는
게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정말 민망한 건 뒤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대공의 흔적들이었다.
“그만, 그… 만……. 히익…….”

대공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재차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안에 고여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던 것들
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공작의 손가락이 계속
구멍을 벌리고 있어, 다물릴 틈이 없이 흘러나왔다. 끝도 없이 안을 헤집는
손가락에 앞으로 사정을 하면서도, 뒤로는 공작의 정액을 흘려보냈다. 그
꼴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공은 몹시도 집요하게 내벽을 벌리며 정액을 긁어
냈다.
“평소에는 혼자 뒤처리를 했었나?”

헐떡이며 가까스로 버티는 내게 대공이 물었다. 질문이 목덜미에서 가깝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쪽, 목덜미에 입술이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닿는다.
소름이 쭉 끼쳐 왔다. 그러나 그에 반응할 틈 따위는 없었다.
“아아…! 아…….”
깊숙한 곳을 짓누르며 밀고 들어오는 그의 손가락에, 기어코 나는 다시
파정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오는 것은 물처럼 묽었다. 도리어 뒤에서
흘러나오는, 대공이 싸지른 정액이 더 진했을 것이다. 대공은 서서히
손가락을 빼고, 나지막이 웃었다.
“마개로 막아 주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너무 질질 흘리는걸.”

씨발……. 그럼 사람을 이 따위로 몰아붙이지나 말든가. 울컥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몸은 여전히 사정의 여운에 잠겨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있었지만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어째서 대공은 참고 참았다가 두 번을 쌀 뿐인데 나는 눌리는 족족
싸게 되는 것인가. 어째서 뒤로 하는 게 이렇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을
주는 건가. 나는 왜 이런 걸 알아 버려서 뒤로 가게 되어 버렸단 말인가.
내가 후들후들 떨고 있는 사이, 대공은 내 몸 위로 더운 물을 끼얹었다. 몸에
묻은 것들이 씻겨 내려간다. 바닥을 흐르는 말간 물에 뒤섞이는 희뿌연
흔적들을 보다가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체력의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탓에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피곤했다.
“들어와.”

한 발 앞서 탕으로 들어간 공작이 나를 불렀다. 용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온천욕 같은 걸 해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실내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걸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아무런 감흥조차 없었다. 너무 기진맥진해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처음 발을
들이밀었을 때는 생각보다 뜨거운 온도에 조금 놀랐다.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있었기에 나 혼자 뜨겁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쪽팔려서 피부가 따끔거리는 걸 무시하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욕탕
가장자리를 따라 턱이 있어,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가슴 위쪽까지 잠기는
깊이였다. 처음에는 물이 너무 뜨거운 게 아닌가 싶었는데, 몸은 빠르게
높은 수온에 익숙해졌다. 지친 몸이 풀리며 노곤함과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나쁘지는 않군.”

더운 물에 약간 홍조를 띤 얼굴을 젖은 손으로 쓸어내리며 대공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별관은 역대 미로스의 공작들이 휴식을 위해 사용하던 곳이거든.

은밀한 향락을 즐겼다고들 하던가. 그래서 이런 욕탕도 있는 거고.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아.”
대공은 더운지,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지 않도록 연신 은빛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전에 어느 밤, 호숫가에서 달빛 아래 서 있던
그를 보고 요정으로 착각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달빛에 젖은 모습이
참으로 요정 같았는데, 물에 젖은 지금도 분위기가 기묘했다. 확실히
미인은 물에 젖었을 때 풍기는 그런 야릇함 같은 게 있었다. 얼굴에 커다란
멍이 든 요정이라니, 더 좀 그래.
“더워.”

멍 든 곳이 아프지는 않은지 대공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물에서 나와 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만 물에 담갔다. 그의 흰 피부가
더운 물에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의외로 탄탄한 허벅지와 그 사이로 시선이
향한 건 눈높이가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정력은 허벅지에서
나온다고 하던데……. 모르겠다. 탄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늘씬하고
예쁜 다리였다. 무슨 남자 다리가 저렇게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지 괜히
한숨이 다 나오려했다.
“뭘 보는 거야.”

별생각 없이 멍하니 보고 있던 중, 대공의 말에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릴 뻔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무심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지 않았
다는 무구한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에 말리지 않고 나는 끝까지 무표정함을 유지했다.
“이리 와.”

왜 또 사람을 부르고 앉았어……. 속으로 온갖 쌍욕을 다 내뱉으면서도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너무 지치고 피곤했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을 헤치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다리를 벌렸다.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의 벌어진 허벅지와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자, 그가 내 머리를
잡아 제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입술에 물컹하게 늘어진 성기가 닿았다.
그럼에도 부피감이 상당한 것을 입에 무는 행위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아주 잠깐 자괴감이 들었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이 짓도 이제 내게는
익숙해진 것이다.
“살살, 부드럽게 빨아 봐. 끝에만 물고.”

나는 대공이 시키는 대로 늘어진 성기의 끝을 입에 물고 혀를 살살 굴려


가며 그의 것을 빨아 주었다. 평소에는 세게 빨고 목구멍 깊숙이까지
삼키게 하더니, 지금은 장난스럽고 가벼운 애무를 원한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변덕이었다.
간지러운 자극을 느낄 때마다 대공은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간질였다.
오늘만 두 번을 사정한 성기는 물론 곧바로 발기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성기를 물고 빨자 느낌이 좋은지 공작은 나른하게 신음했다. 물속에 오래
있어 뜨거워진 내 손으로 성기를 말아 쥐어 위로 살짝 들고는 음낭을
입술로 물어 입안에서 굴리자 치하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런 건 확실히 좋군.”

하아. 나른한 한숨과 함께 그가 중얼거렸다.


“대낮에 욕탕에서 애첩에게 희롱당하는 거 말야. 역대 공작들이 욕탕

유지에 재정 낭비가 심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


애첩……. 그 단어를 듣는 것도 두 번째였지만 정신적 타격은 여전히
상당했다. 반발심에 나도 모르게 입에 든 것을 콰득 깨물어 버릴 뻔하지
않았던가. 울컥하는 것을 참아 내느라 절로 한숨이 흘렀다. 그러나 그
한숨마저도 내색할 수가 없어서 속으로 꾸욱 삼키며 눈을 감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언
제 발기해서 쌀지, 아니 발기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입안에 들어온 귀두를 낼름낼름 핥으며 빨리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더더욱 납작 엎드릴 수밖엔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죄를 상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인데.”

문득 대공이 내 입에서 성기를 빼내며 물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하는


손에 나는 저항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시선은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대공은 그런 나에게 말을 해 보라고
격려하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저 눈치를 보고 있었을 뿐, 내가
그에게 욕 말고 달리 뭐 할 말이 있을까마는. 그다지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독촉하기에 억지로 화젯거리를 쥐어 짜냈다.
“…정무는 보러 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누구 덕분에 대외활동을 하지 못할 꼴이 돼서 말이지.”

“…….”

괜한 것을 물은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졌다.
엷은 미소를 띤 대공의 얼굴에서 그의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왕족이었다. 왕자로 태어나 그의 부모에게도 물론 맞아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큰 잘못을 했다 해도 매 맞는 아이를 따로 두고 맞을
일은 없었을 테지. 어쩌면 그를 때린 건, 특히 안면에 손을 댄 건 내가
최초일지도 모르겠다. 씨발,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예상하고 묻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물어본 내가 멍청이였다.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갈 것을.
“뭘 그리 눈치를 보지?”

대공이 쿡쿡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이 기묘하게 다정해서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뭐 내가 별 수
있으랴.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그의 말마따나 눈치를 볼 뿐.
“내가 그대의 목을 광장에 내걸기라도 할까 봐 무섭나?”

대공은 무서운 소리를 아주 예쁜 얼굴로 내뱉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그 전에 몸뚱이는 산 채로 껍질을 벗겨야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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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과 발톱은 미리 좀 뽑아 두고. 손가락을 매일 한 마디씩 천천히 자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열 개나 있으니까.”


“…….”

“팔다리를 자를까.”
“…….”

그보다는 인대를 끊는 편이 낫지. 팔다리가 늘어져서 이 커다란 몸이


바닥에서 기는 꼴도 귀엽기는 할 거야. 그러면 이 눈동자가…….”


“…….”

눈동자가… 뭐. 마치 본인이 고문을 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고문 코스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대공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나를 보는 그대의 눈동자가…….”

한참을 기다렸으나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대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기분이
전과 달리 언짢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침묵이 내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의 시선이 내 눈을 보는 것 같기도, 혹은 그
너머의 뭔가 다른 걸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어색하게 그 침묵을 견디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죽일 거였다면 진작 죽였겠지?”

한참의 공백 끝에 대공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꼭 개를 쓰다듬는 것 같아서 불쾌한 한편, 안도감이 가슴 속에
번졌다. 그가 줄줄이 읊은 고문 코스가 사실은 꽤나 섬뜩했으므로.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대공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하. 새벽같이 데려다가 예뻐해 주고 있는데 이런 눈치나 보고 있었다니.”

…예뻐…….
“웬만한 귀족도 누리지 못할 호사를 누리게 해 줬더니 남의 다리나
훔쳐보고 말이야.”
훔… 쳐…….
“변태같이.”

아…… 씨발. 진심으로 말문이 틀어막히고야 말았다. 예뻐해 주고 있다는


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다리를 훔쳐보고 있다는 말에도 기함했지만
변태 같다는 소리는……. 야, 씨발 지금 누가 누구더러. 변태한테 변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소리를 듣
는 게 이렇게 불쾌한 일일 줄 몰랐다. 정사의 여운과 몸을 감싸는
뜨거운 물이 주는 나른함이 싹 달아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사람 기분을 시궁창에 처박아 놓고 대공은 기분이 좋다는 듯 웃었다. 씨발,
얼굴이 저렇게 멍이 들어 있으면 좀 하찮아 보이거나 우스워 보이기라도
해야 하련만. 본판이 워낙 아름다워서인지 멍든 얼굴에 걸린 미소조차
찬란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더 나빠지는지, 내 불쾌함이
하찮아지는지 구분이 되지 않게 되어 버린다.
“물론 나도 누가 내 얼굴에 손을 댄 건 처음이라서.”

웃음기가 담긴 음성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대를 죽일까 생각도 하긴 했지.”
아니 그렇게 찬란하게 웃는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아프더군. 이렇게 아파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대공이 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잘 싸우긴 해도 나라고 안 맞아본


게 아니다. 저 정도 멍이 들었다면 부기가 벌써 빠진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지금도 건드리는 게 힘들 정도로 아플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제 얼굴을, 멍든 광대와 눈가를 문지르던 공작이 손을 내려 내 턱을
받쳐 들었다. 얼굴을 문지르는 손길이 더운 물 속에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다정했다.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 그때 그대 얼굴이…….”

과거를 회상하는지 대공의 호박색 눈동자가 몽롱하게 젖어 들었다. 입가의


미소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각종 고문을 읊조릴 때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인지…….
“나를 때릴 때 그대의 얼굴이……. 하아.”

나는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몽롱하게 흐려져 있던 대공의 노랗고도 붉은


기묘한 색깔의 눈동자에 어린 광기를.
대공이 내 머리채를 그러쥐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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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웁!”
언제 얼굴을 다정히 쓰다듬었냐는 듯이, 머리카락을 뽑을 기세로 당겨 제
사타구니에 처박았다. 입안으로 그의 성기가 난폭하게 밀려들었다. 입안에
들어온 것을 반사적으로 저항 없이 깊이 머금으며 나는 기함하고야 말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입에 물고 핥고 빨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것이, 어느
새 단단하게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

“욱, 우욱……!”

“귀여웠어.”

공작이 무어라 소리들을 지껄였지만 물에서 중심을 잃어 허우적거리는 내


귓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몸의 균형을 잡기도 어려운 와중에 입안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목구멍을 범하며 들어오는 성기에 숨이 턱 막혔다.
구역질이 왈칵 치밀어 억지로 참았더니 눈가가 뜨끈해졌다. 눈물이라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눈물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액체가 눈가에 잔뜩 고인
듯이 순식간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징그러울 정도로 다정하게 굴며 입에 넣고 혀를 굴리며 살짝 빨기만 하라고
했던 대공은 어디로 가고 다시 그 흉폭하고 난잡한 펠라티오를 강요하는
남자가 왔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왜 대공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라는 엄중한 경고마저도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아, 일릭…….”

나는 입안에서 무섭게 부푸는 성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난폭하게 처박혔다 뽑혀 나가기를 반복하는 성기를 삼키기 바빴다.
더운물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띵했는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절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튼튼한 사람이었다. 쉼 없이 몰아치는
대공을 받아 내는 수밖엔 없었다. 결국 그가 내 입에서 파정을 하며 흥분을
달랜 뒤에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운 물 속에서 한참을 고생한 탓에,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져 갔다. 대공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런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몹시도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
구름 위에 떠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 아닐까.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부드러워서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대고 있는 모든 곳이 푹신푹신해서 나 자신의 체중조차
느낄 수가 없다. 게다가 무언가 좋은 향기까지 났다. 햇볕에 냄새가 있다면
이런 향기가 아닐까 싶은, 포근하면서도 따사로운 그런 향기…….
“…릭.”

거기에 귓가에 듣기 좋은 노랫소리가 울렸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갔던


성당에서 들었던 찬송가처럼 가슴 속을 울리는 소리였다. 그날을 위해
성당에서 초청을 했던 가수의 노랫소리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듣기 좋은
음성이다.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듣기 좋을 일인가. 언젠가 그렇게
생각을 했던, 낯익은 목소리였다.
“일릭.”

…그러니까, 대공의 목소리 같은.

“……헉…….”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에 나는 진심으로 경악하며 숨을 토해


냈다. 비명을 토해 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아니 왜, 어째서 대공이.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이 당장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멍했다.
새카맣게 암전되어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깜빡깜빡거릴 뿐이었다.
여긴 어디지. 왜 대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아니, 방금까지 자다가 깬 것
같은데.
그런 혼란 속에 눈만 꿈뻑거리고 있기를 잠시간. 이내 정신이 돌아온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내가 얇은 셔츠만 한 장 입은 채 대공의 침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봐도 분명 대공의 침대였다.
“죽은 듯이 자더군.”

귓가에 울리는 현실감 없는 목소리 역시 대공의 것.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찬란히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도 모두 대공의 것이었다. 눈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깜빡거리
며 나는 잠들기 이전까지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감옥에서 나와서 대공의 침실에 왔었다. 그리고 잔뜩 시달려
지친 몸으로 욕실에 가서 또 시달리고, 더운 물 속에서 또 시달렸다.
그즈음이 분명 체력의 한계였다. 물에서 일어나는 대공을 따라 욕조에서
나와 몸을 말리고 나니 나른함까지 더해져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대공을 따라 다시 침실로 돌아온 것 같기는 한데… 언제
누워서 잠이 들었단 말인가. 술을 진탕 마시고 기억이 끊어진 것처럼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는 기억만이 간신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식사는 하고 자야지.”

기억이 어렴풋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아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제야 제대로 본 대공은 실내복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나가도 될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완벽한 차림새와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멍이 눈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만
빼면.
‘내 얼굴을 보고도 가겠단 소리가 나오나 보지.’

대공이 그렇게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욕실에서 나와 대공의 침실에 다시


돌아와서 내가 이만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대공이 했던 말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가겠단 소리를 더는 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대공이
침대로 올라오라고 했었다. 아아, 그래. 그래서 대공의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구나.
“어디 아픈가?”

“아…… 아닙니다.”

대공의 목소리 덕분에 기억의 회상에서 벗어난 나는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려오고 보니 셔츠 한 장 덜렁 걸친 차림이 조금 민망했다.
다행히 옷이 준비되어 있어 냉큼 챙겨 입었다. 하인이 건네는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고, 앞서 방을 나간 대공의 뒤를 쫓았다.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대공은 이미 상석에 앉아
있었다.
“앉아.”

“예? 아… 어… 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과 같


은 식탁에 앉으라는 말은 그의 무릎에 앉으라는 말 이상으로 다를
당혹케 했다. 음식 냄새가 실제로 폴폴 풍겨오고 있어서 더욱. 설마 고귀한
신분의 그가 나와 겸상을 하겠다는 건가 싶어서 절로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도 차 한 잔 내어 주는 법이 없던 남자가 대관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단 말인가.
까마득히 높은 신분의 귀족 앞에 평민인 내가 가질 수밖엔 없는 황송함과
어려움은, 그러나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 순간 형체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당황스러운 상황 탓에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지만 음식이 눈앞에 보인 순간
강렬한 공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따져 보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가 오래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딱딱한 빵 따위로 겨우 허기만 면한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대공의 성에
와서는 오늘 새벽부터 먹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대공에게 잔뜩 시달리지
않았던가.
아아… 정정하자면 먹은 게 있기는 했다. 대공이 삼키란 대로 그가 사정한
것들을……. 하루 종일 유일하게 먹은 게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기분이
저 밑바닥으로 처박혔다. 비위가 좋은 편이었음에도 약간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식욕 앞에 아주 빠르게 스러졌다.
식탁 한가득 차려진 음식은 정말 너무나 맛있었다. 커다란 고깃덩이의
냄새를 맡은 순간 접시에 고개를 처박고 정신없이 입에 욱여넣었다. 대공만
아니었다면 뼈다귀를 붙잡고 고기를 뜯었을 것이다. 정말… 정말 너무너무
맛있었다. 특히 고기 요리가 정말 많아서 좋았다. 고기는 고기 그
자체만으로도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갖은 방법으로 요리해서 소스를
끼얹어 놓으니 맛의 신세계였다. 씹지 않아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살점에서 농후한 육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혀가 간지러울 정도로 황홀한
맛이었다.
면 요리도 있었고, 채소 요리도 있었지만 손이 가는 것은 대체로 고기
요리였다. 하인이 곁을 오가면 내 주변이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들로
채워졌다. 겉을 바삭하게 태우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럽게 구운 스테이크도
몇 장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맛의 향연에 입이, 위장이
더 음식을 넣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원래도 잘 먹는 나였지만 어째
먹어도 공복감이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청나게 먹어 버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정신을 차
렸을 때는, 배가 불룩이 튀어나올 정도로 폭식을 한 뒤였다.
“다 먹었나?”

…대공이 그렇게 물었을 때는 조금 얹히는 기분이었다. 먹을 때는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대공과 같은 식탁에 있다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 정말


음식만 보였던 것이다.
“이제 디저트를 먹을까.”

대공은 나보다 앞서 식사를 끝내고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식탁만 보면 대공의 주변은 식사를 한 흔적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접시 위의 음식들도 깨끗하게 비워진 게
없었다. 테이블보에도 무엇 하나 떨어진 게 없었다.
내 주변의 접시 위 음식들이 초토화되고 깨끗했던 테이블보가 음식
찌꺼기나 소스 따위로 얼룩덜룩해진 것과는 달리 말이다. 하인들이
식기들을 치우고 나니 내 주변 테이블보의 처참한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 손이나 입가가 지저분한 것도 나뿐이었다. 그제야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왜 갑자기 눈치를 봐.”
예 아…. 그… 죄송합니다.”
“ ?

“됐다. 내가 예의범절을 기대하고 그대를 곁에 둔 게 아니니.”

“…송구합니다.”

“됐대도. 뭐… 그런 건 차차 가르치는 것도 좋겠지.”

평민 나부랭이와는 차도 함께 마시지 않던 대공이 보이기에는 예상 외로


털털한 모습이었다. 그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 걸로 보였다. 불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자그마한 스푼을 손에 쥐고 하인이 내어 온 디저트를
한 스푼 뜰 뿐이었다. 하얗고 물컹물컹해 보이는 것이 꼭 애기 궁둥이처럼
탄력 있게 흔들렸다.
“먹어 봐.”

“예…….”

나는 그를 힐끔대며 내 손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스푼을


들어 그가 한 것처럼 그 디저트라는 것의 모서리 부분을 조금 떠 올렸다.
그리고 입에 넣은 순간 조금 놀랐다. 부드럽게 입에서 흩어지는 식감이
생소했고, 달달한 맛에 혀가 마비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라 설명하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려운 식
감과 맛이었는데, 대공은 비위 좋게도 그것을 맛있게 먹고 있어서
또 놀랐다. 이걸 먹느니 냇가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게 입이 개운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것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대공이 웃으며 물었다.
“하하. 맛이 이상해? 푸딩은 처음 먹어 봤나?”

“…답니다.”

“그 맛에 먹는 건데. 먹어 둬.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던데, 잘 먹어야지.”

“……예….”

애당초 감옥에 가두지 않았으면 살도 안 빠졌을 거 아니냐. 그렇게


반박하고 싶은 것을 그 푸딩이라는 것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다행히
많이 씹지 않아도 넘어가는 음식이라 크게 크게 떠서 꿀떡꿀떡 삼켰다.
정말 이상한 식감에 너무 달아서 먹기 힘든 맛이었다. 하지만 대공께서
먹으라고 하셨으니, 나는 그것을 전부 먹어치우는 수밖엔 없었다.
마침내 내가 그 접시를 다 비워 냈을 때, 대공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한테는 다 먹으라고 했으면서 대공의 접시 위 푸딩은 반 이상 남아
있었다. 그는 우아한 태도로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나 역시 눈치를 보며 냅킨으로 지저분한 손과 입가를 닦았다.
여전히 새하얀 대공의 냅킨과는 달리, 내가 사용한 것은 얼룩덜룩
지저분했다.
“연무장을 빌려줄 테니, 소화도 시킬 겸 운동을 좀 하도록.”
갑자기 웬 운동 타령인가. 몸을 움직이는 거야 환영이긴 했지만, 갑자기
운동까지 지시를 내리는 게 의아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대공이 해사하게 웃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러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가슴이 작아졌어.”

“…….”

“풍만해야 만질 맛이 나지 않겠나? 잘 먹였으니 운동해서 다시 좀 키워 와.”


…미친 개 변태새끼야 그럼 가서 젖소 젖이나 처만져. 그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끌어 모아야 했다. 씨발, 이왕 감옥에


갈 거 한 대만 때릴 게 아니라 뒤지게 패 버렸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에 나는 배부르고 등 따신 와중에도 정말 몹시 억울해지고야 말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별관이 아
니라 본성에 위치한 연무장은 과연 이곳을 연무장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화려했다.
연무장이라는 특성 때문에 대공의 성에서 가 본 곳 중에서는 가장
수수했음에도 화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단 바닥에 깔린 반질반질 윤이 나는 새카만 바닥만 보더라도 그
사치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대리석이 깔린 것처럼 빛이 나는데,
대리석이 아니라 목재였다. 목재 특유의 밟히는 질감은 느껴지는데 소리는
거의 나지도 않았다. 특히 목재가 어긋나는 끼익대는 소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보통의 연무장과는 달리 벽과 천장을 타일이 빼곡하게 덮고 있었다.
청색과 흰색의 무늬가 어우러진 타일은 실크 벽지나 성화가 그려진
회벽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여기에 온갖 종류의 병기며 갖은 무게의 덤벨과 바벨이 진열되어 있었다.
평소에 체력 단련을 즐겨 하던 나로서는 눈이 돌아갈 만한 환경이었다.
이런 연무장을 혼자 사용한다는 것은 용병대에서 훈련할 때는 물론 그
어디서도 누릴 수 없던 호사였다. 몸을 만드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땀내
나는 우락부락한 사내놈들과 부대끼며 훈련하는 건 불쾌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혼자만 남겨진 휘황찬란한 연무장에서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렇지 않아도 임무를 마치고 쉬면서 근육이 조금은 빠져 가던
차에 며칠 갇혀 있었다고 몸이 말이 아니었다. 대공이 가슴을 키우라는
헛소리를 해서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과는 별개로 몸을
만들 의욕이 차오른 나는 피로감을 잊고 몸을 움직였다.
오롯이 육체에 집중하는 것이 정신을 해방한다. 대공의 헛소리들도, 그와
나의 관계도, 더럽게 꼬인 내 상황도 모두 잊어져 갔다.
그렇게 얼마나 몸을 움직였을까.
근육이 터져라 무거운 쇳덩이들을 들었다 놨더니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었고 땀에 푹 젖은 몸에는 열이 펄펄 끓었다. 가빠진 숨으로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무기들도 어쩜 그렇게 가벼우면서도 균형이 딱딱 맞는지,
롱소드만 아니라 할버드, 츠바이핸더까지 꺼내다가 아주 제대로 몸을 풀 수
있었다. 아주 건강한 방식으로 땀을 뺀 덕분에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약간의 피
로감마저도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다가왔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게 쑥 꺼져 슬슬 배가 고프기도 했다. 가서 땀을 닦아
내고 간단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잠자리에 들면 아주 행복할 것 같았다.
너무 과격하게 움직인 탓에 내일은 근육통이 조금 있겠지만 그마저도 기분
좋은 고통이리라.
그러니 부디 대공이 나를 좀 용병대 숙소로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어떻게 하면 대공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때였다.
“네놈……!”
등지고 있던 문 쪽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나를 부르러 온 대공의 하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웬 목소리란
말인가. 돌아본 자리에는, 예상치 못했던 얼굴이 나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감히 이곳에!!”

놈은 그 기사였다. 이름이 베이즈라고 했던가. 감옥에 갇혀 있는 나를


조롱하고 고문을 하려다가 기사단장에게 제지당해 꼬리 내린 개새끼 꼴로
사라졌던 놈 말이다. 대공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마주칠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는 그쪽은?”

나를 고문하려 들었던 놈이었다.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로 나를 방어했던


데에 앙심을 품고 말이다. 그러니 나 역시 놈에게 감정이 안 좋을 수밖엔
없었다. 감옥에서도 나왔겠다, 대공에게 그의 얼굴을 때린 일을 용서도
받았겠다, 내 쪽에서 꿇릴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건방진 놈……. 설령 단장님께서 말리신다 해도, 나는 네놈을 용서할 수가

없다! 검을 들어라!”
버럭 외치며 놈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몸을 잔뜩 움직인
탓에 아직 전신에 남아 있던 흥분이 호승심이 되어 화르륵 끓어올랐다.
지지부진 입씨름을 하는 것도 귀찮고, 마주칠 때마다 개새끼가 으르렁대는
걸 참아주는 것도 취향이 아니었다. 다시는 개기지 못하도록 흠씬 두들겨
패 주리라. 그렇지 않아도 대공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는데, 화풀이를
할 아주 좋은 기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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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네놈이 이 연무장을…….”


기사놈이 부들부들 떨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분노의 포인트가 조금
미묘하지 않나 고개를 갸웃했을 때.
“이놈!”

놈이 요란한 기합과 함께 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잽싸게


벽으로 몸을 날려, 벽에 걸려 있던 검을 하나 빼들어 놈을 맞이했다.
- 다음 화에 계속

29.

챙강! 제대로 제련된 검과 검이 만나자 날카로운 금속음이 크게 울렸다.


손을 통해 찌릿한 진동이 전해 온다. 그것이 혈관 안의 피를 조금 더 빠르게
돌게 만들었다. 심장이 크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운동 후에 잠시 찾아들었던 나른함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피로감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날붙이가 교차하자 긴장감이 정신을 날카롭게 벼린다.
놈은 그래도 제법 검을 다룰 줄 아는 기사였다. 놈이 한 발을 크게 내딛으며
기다란 검을 하늘을 향해 세워 올렸다. 나를 향해 검이 쇄도했다. 모든 것을
내려찍을 기세로 허공을 가르며 쏟아지는 검날을 나는 피하지 않고 검으로
쳐 냈다. 흘려 버리거나 피하는 쪽이 더 편했겠지만 힘으로 눌러 주고
싶었다. 들고 있는 검이 아주 잘 벼려진 순도 높은 강철검이라 놈의 검에
실린 힘을 버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윽!”

내리 휘두르는 힘이 강했던 만큼 내 검에 가로막혀 튕겨지는 힘 역시


강했다. 그 순간 검을 놓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하다. 반탄력에
놈이 두세 걸음을 물러섰고, 나는 앞으로 내딛으며 놈을 따라갔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놈은 다음 이어질 내 공격을 대비하지도 못했다. 놈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읏차.”

그러나 나는 놈을 베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쏠리던 몸에 억지로


브레이크를 걸어 몸을 멈춰 세웠다. 그러는 사이 완전히 균형을 잃고
쓰러진 놈은 추레한 몰골로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구르지 않은 척
후다닥 몸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미 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놈을 여유롭게 굽어보았다.
“내가 한 번 봐드린 겁니다?”

“…!”

“너무 쉽게 끝나면 재미없잖아.”


“…그래, 과연……. 건방을 떨 실력은 된다 이거로군.”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사놈이 읊조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놈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주변의 공기가 함께 가라앉는 것 같았다. 도발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침착함을 되찾은 놈을 보고 조금 곤란해졌다. 이기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기보다는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다짜고짜 검을 쥐고 덤볐던 것과는 달리, 놈은 거리를 재며 서서히
간격을 좁혀 왔다. 나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로 놈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검을 들고 경계를 하지도 않았다. 놈이 발끈해서 덤벼들기만을
기다렸다.
“하앗!”

마침내 놈이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작정하고 횡으로


휘두른 검이 내 생각보다 빨랐다.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며 상체를 살짝
뒤로 젖혔다. 서늘한 날붙이가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내 목 앞을
지나갔다.
빠르게 상체를 세운 나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사 역시 제가
휘둘렀던 검을 수습해 내 검날을 비껴 냈다. 흘려보내지는 검을 위로 걷어
올렸다. 검과 검이 교차해 카가각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대치가 이어졌다.
힘으로 밀어붙여 튕겨 내려 했으나 놈은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아 버틴 것이다.
그 상태에서 놈이 손목을 비틀어 검을 튕겼고, 이번에 물러선 것은 내
쪽이었다. 거센 파공음과 함께 다시금 검이 쇄도했다.
허공에서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금속의 마찰음이 귓가를 찢을 듯이 몇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번이고 이
어졌다.
“이놈이…!”

검이 몇 번이나 맞부딪힌 이후에도 서로를 베지 못한 상황에 먼저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낸 것은 기사놈 쪽이었다. 침착해 지려고 꽤나 애를 썼던 것
같은데, 놈은 결국 시뻘건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감히 천한 용병 나부랭이가!”

“그런 용병 하나를 처리 못 하시나, 대단하신 기사분께서?”

“…죽여 버리겠다!!”

오, 그냥 한마디했을 뿐인데. 그 순간 놈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흥분해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속도가 빨라졌고 검에 실리는 힘이
강해졌다. 막아 내고 있으려니 검을 통해 전해 오는 진동에 팔이 조금 저려
올 정도였다.
하지만 움직임이 커져서 허점이 보였다. 벌써 몇 번을 찔러 볼까 하는
지점이 있었다. 검을 비껴 내고 휘두르면 옆구리 정도는 쉽게 벨 것 같은데.
벨까? 뒷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베어 버려……?
“어….”

문득 시야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온 건, 내가 놈의 검을 요리조리


막아 내며 어떻게 공격을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헉……?”

존재 자체로 나를 순간 당황하게 만드는 것. 그건 바로 은빛의


머리카락이었다. 이 성에서는 오직 대공만이 갖고 있는 그 머리카락
말이다.
“죽어라, 이놈!!”

베이즈란 놈은 한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져 드러난 내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정도 재주는 있는 기사였다.
“크윽…!”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보며 몸을 크게 뒤로 물렸지만, 가슴에 서늘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자세가 무너져서 그대로 한 바퀴를 뒤로 굴렀다. 놈이
따라와 검으로 내려치기에 가까스로 검을 들어 올려 막았다. 위에서부터
내려찍는 힘에 무게가 더해져, 손아귀는 물론 팔과 어깨까지 충격이 진하게
전해져 왔다. 하지만 다행히 검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만.”
대공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헉… 헉…! 가, 각하…!”

그제야 대공을 발견한 베이즈는 황급히 검을 거두며 물러섰다. 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어 예를 갖추는 놈은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검을 땅에 대강 던지고는 몸을 일으켰다.
“베이즈.”

다가선 공작이 기사의 앞에 서서 그를 굽어보았다. 베이즈는 더욱 더 깊이


고개를 수그렸다. 완벽한 복종을 보이는 자세였다. 이름이 불리자 놈은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크게 동요하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래, 귀신이라도
본 기분일 것이다. 아까 나도 공작의 은발을 보고 적잖이
놀랐으니 말이다.
“내가 언제 그대에게 내 개인 연무장을 허락했던가.”
“…….”

“게다가 이 안에서 검을 휘둘러?”


“송구… 송구합니다, 각하. 각하께서 알현실에 계신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연무장에서 소리가 나서, 순찰을 위해 들어왔다가…….”
벌벌 떨면서도 베이즈는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끔 보았다. 그 눈은 여전히
분노와 적개심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저 무뢰배가 감히 각하의 연무장을 더럽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즉결처분을 할 생각으로….”


“내 연무장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이건가.”

“그, 그건…….”

“심지어 죽이지도 못했잖아. 즉결처분이라더니, 내 눈에는 아주 잘 살아 숨

쉬는 것으로 보이는군.”
“…….”

베이즈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제 기사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시선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지켜보고 있던 내가 괜히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돌아가서 자숙하라.”

“……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태
도에는 일말의 여지조차 없었다 냉막한 표정에 베이즈란 놈은
.

자기 변호 한 번을 해 보지 못하고 고개를 더 깊게 처박았다. 그런 충성을


보이는 기사를 앞에 두고도 하잘 것 없는 버러지 대하듯이 하는 대공의
냉정함에 조금은 질리는 기분이었다. 나를 대할 때의 모습과는 또
달라서…….
그때 갑자기 대공이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낯설다면 낯선 대공의 모습에
괜히 얼떨떨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차였기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대는.”

“…….”

“어디 다친 곳 없나?”
“…….”

아니 씨발……. 왜 나한테는 그런 걸 묻고 그래요.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나를 향한 목소리는 적어도 베이즈를 대할 때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무신경한 듯하면서도 다정했다. 그것이 나를 당황케 한 것은 물론,
베이즈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제가 들은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황망
함에 커진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다 흐르는 기분이었다.
“괜찮…습니다.”
“몸을 키우라고 했지 다치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내려다본 내 가슴은 앞섶이 잘려 나가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살갗은 멀쩡했다. 베이즈놈의 검이 얕았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나는 지금
내가 검에 베였다면 상황이 더 좋지 않게 흘러갔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다치지 않았음에 깊게 안도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지. 그대, 좀 씻어야겠어.”

물론 씻어야 하는 건 맞지만… 나를 대하는 대공의 어투가 지나치게


친밀했다. 그 누구에게도 이 관계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는 더더욱
곤란해질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대공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잔뜩 젖었잖아.”

“…….”

나직하게 내리깔리는 음성은, 그가 침대에서나 낼 법한 목소리였다. 아까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냉막한 표
정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
장난기 담긴 얼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잔뜩 젖었다는 한마디는
희롱이며 능욕이었다. 하도 많이 들었던 것이라 굳이 새삼스럽게 욱할 건
없었다.
그러나 씨발, 지금은 단둘만 있는 게 아니잖아. 물론 베이즈란 기사놈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베이즈 놈은 분노와 증오로 절절
끓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이 뭐 얼마나 대단한 공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이 이 곳을 나에게 허락했다는 것도 분한데, 그가 나를
다정히 대하는 게 참을 수 없이 분한 모양이었다.
“별관으로 갈 테니 그대가 수행하도록.”

대공이 나에게 그렇게 말을 했을 때 베이즈놈의 표정이 특히 볼만했다.


아니, 명령을 내린 건 대공인데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게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기는 하다. 마음 같아서는 네가 좀 모셔라하고 떠넘기고
싶은데 말이다.
“각하!”

상황을 보던 기사놈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높였다. 저를 부르는 단호하기 짝이 없는 음성에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기사놈은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리는 충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하. 부디 한 번만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대공의 언짢은 내색에도 베이즈는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매달렸다.


“어찌 저런 무도한 자에게 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무도한 자라.”
“각하의 존안에 감히 손을 댄 것만으로도 죽을죄가 아닙니까. 놈이 속한

용병대 전체에 책임을 물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풀어 주심도


모자라 각하의 개인 연무장까지 사용하도록 하시다니요. 이미 각하께 해를
끼친 자를 계속 믿고 호위를 맡기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사용하던 연무장이
규모가 작으면서도 쓸데없이 화려하다 싶었더니, 무려 대공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는 말에 놀라기도 했다. 도대체 대공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연무장을 내어 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의 속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대공 외에 있기나 한가도 의문이었지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과연, 그대의 말에는 그다지 틀린 구석이 없어.”


대공의 입에서 너무나도 쉽게 수긍의 말이 나온 것까지도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대공을 이해하기를 옛날에 포기한 나였지만 놀라고야 말았다.
“각하…!”

베이즈란 놈은 대공의 똑 부러진 반응에 몹시 감동한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기라도 할 얼굴이 된 게 몹시 꼴 보기 싫었다.
역시 우리 주군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니구나 하는 그런 감격에 겨운
얼굴이었다. 놈의 의기양양한 얼굴에 내 속이 뒤틀리려는 순간, 대공이
나에게 한차례 짧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별관에서는 용서하겠다고
했던 그가 새삼스레 변덕을 부려 나를 벌하려 들지는 않겠지 하는 불안감이
가슴 속에 번지려는 찰나.
“설령 그렇다 해도.”

엷은 미소를 띠운 채, 흔들림 없는 시선을 기사 놈에게 고정한 채로 대공이


입을 열었다.
“사랑싸움을 좀 했기로서니, 연인을 죽이기라도 하란 말인가?”

난 사람 얼굴에서 핏기가 그렇게 빨리 가시는 걸 처음 봤다. 선 채로 심장이


멈춰 그 자리에서 즉사한 시체인 줄 알았다. 기사놈이 제법 준수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라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놈은 꼭 영혼이 탈출한 것처럼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물론 놀란 건 그놈만이 아니었다. 나도 놀랐다. 아니, 씨발 내가 더 놀랐다.
얼마나 놀랐냐 하면 그 자리에서 대공을 죽일 뻔했을 정도로 놀랐다.
“응?”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갸웃 기울이는 얼굴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시커먼


멍 자국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대공에게 주먹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두 번은 안 돼.’

습기 가득한 공간에 울렸던 그 말도 뒤늦게 떠올라 내 이성의 끈을 붙잡아


주었다. 가까스로 폭력적인 충동을 억누른 나는 베이즈와 마찬가지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다
른 종류의 현실을 부정하며 대공의 뒤를 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별관이었다.
“표정이 이상한걸.”

톡톡. 대공이 내 뺨을 건드렸다.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온 나는 무어라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지그시 어금니만 악물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튀어나갔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무슨 말을?”

대공은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그 가식적인 표정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살의가 피어올랐다. 죽일까. 그
기사놈까지 알게 된 마당에 그냥 확 죽여 버려? 씨발, 여기서 더 악화될 게
있기나 해??
걱정할 것 없다. 내 기사인데 입단속 하나를 못 할까.”

“…….”

“원한다면 혀라도 뽑아다 줄까?”


한없이 가벼운 말투에 코웃음이 나왔다. 진심일 리가 없었다. 아니, 혀를
뽑겠다는 그 잔혹함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침실 노리개로 쓰고
있는 용병 하나를 위해 제 기사를 희생시킬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다. 또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고 말이다.
“저는 싫습니다.”

“베이즈의 혀를 뽑는 게?”

대공의 그 가벼움이 나를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만들었다. 베이즈란


기사놈 하나 혀가 뽑히든 말든, 혹은 죽든 말든, 아니 그의 기사단 전체가
죽든 말든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문제가 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이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게, 싫습니다.”

싫은 건, 정말 싫은 거였다. 내게는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명예? 남성성?


뭐든 상관없었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각하께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가벼우시겠지만.”

“…….”

그렇다하여 가볍게 이 관계를 입에 담으신다면, 계약을 지속하는 것은



제게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 단호함
앞에 대공은 입을 다물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씨발,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


앞에 나는 굴하지 않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대공에게 뒤를 대 주고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건 진심이었으니까.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저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잠시 그렇게 적막이 흘렀다.


- 다음 화에 계속

30.

“…… 흐음.”
예상보다 한참이나 길었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대공이었다.
“싫단 말이지. 약조를 해 달라?”

내 말을 되풀이하는 그 어투도, 태도도 모두 여상했다. 노여워할 수도 있고,


건방지다며 당장 내 목을 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어려울 것 없는 얘기지.”

누구는 죽음도 불사하고 있는데, 그렇게 굳은 의지를 다진 나를 상대하는


대공의 가벼운 어투는 베이즈의 혀를 뽑겠다는 말을 할 때와 한 점 다르지
않았다. 너무나 가벼운 대꾸에 나는 허탈함마저 느껴야 했다.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지만, 그대가 그래야 안심을 하겠다면야.”

대공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가 천천히 내 얼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낮은 음성이 속삭여지고, 이내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개어졌다. 마치 인장을


찍듯이. 그것이 계약서에 하는 서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맞닿은 입술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꾸욱 눌려
한데 뭉개졌다.
“……흐읍….”

문질러지는 입술도,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오는 혀도. 나는 거부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가 계약에 대해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주어, 날이 섰던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누군가 알게 된다 해도 말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대공의 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베이즈가 소문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미묘한 안도감이 번지기도 했다.
다정한 입맞춤이 그렇게 이어졌다. 내 한쪽 뺨을 감싸 쥐고 있던 공작의
손이 목이며 어깨를 쓰다듬기도 했다. 몹시도 간지럽고 야살스러운
손짓이었다.
심히 부담스럽게도 말이다.
“누워.”

대공이 가볍게 내 가슴팍을 밀어 내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침대에 파묻힌


나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대공의
움직임이 빨랐다. 내 벌어진 다리 사이에 몸을 끼우며 올라와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슴을 내리눌렀다.
섹스를 하자는 의도는 명확했다. 그러나 분명 평소와 달랐다. 그게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옷을 벗어, 다리 벌려 따위의 말이 없는 것도
그렇거니와 공작의 태도가 무슨.
“흐읍……!”

연인 대하듯이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내리누르며


입을 맞춰 오는 대공에 내 몸이 절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내가
질색하는 걸 알면서 일부러 이런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씨발, 이런 간지러운 입맞춤은 정말 최악이었다. 익숙해지기엔 너무
징그러운 짓이었다. 소름이 쭉쭉 돋아나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빨고
혀가 얽힐 때마다 어찌 할 바를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밀어내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제… 제가. 제가 벗을.”

심지어 대공은 손수 내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이런 적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없었다.
아니, 언젠가 한 번은 그가 내 셔츠를 벗긴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징그
러운 분위기는 결단코 아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쉬- 착하지.”

대공이 그렇게 속삭인 순간 나는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이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지, 경악한
동시에 불안함에 심장이 펄떡거렸다. 무섭기까지 해서 그를 밀어내 버리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 일릭.”

그러나 그 간지러운 짓거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대공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분홍빛의 입술 역시 슬며시 곡선을
그렸다. 미소 짓는 그 얼굴에 어쩐지 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르르 녹아나는 듯한 미소였다.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그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세상 달콤하게 웃으며 대공이 속삭였다.
“오늘은 그대를 묶어야겠으니까.”
묶…….
나는 그저 당황할 뿐, 이 갑작스러운 전개를 따라가지 못했다. 왜 갑자기
나를 묶겠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그런 내 당혹감과는 별개로… 도대체 어느새 꺼낸 것인지. 대공의 손에는
가느다랗게 꼬인 밧줄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결박당했다.
“우윽… 윽…….”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비단 묶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수밖엔 없는 지금의 자세
때문이었다.
대공의 ‘묶다’는 일반적인 묶기 따위가 아니었다.
손목이 침대 모서리를 향해 묶인 걸 시작으로 발목 역시 묶였다. 문제가
있다면 발목과 손목이 오른쪽끼리 왼쪽끼리 사이좋게 짝을 이뤄서 같이
묶였다는 것. 허벅지가 벌어진 채 허리가 접힌, 뒤집어 놓은 개구리 꼴이
되어 회음부며 고간을 위를 향해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세였다. 덕분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체가 상
체를 짓누르며 가슴을 압박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얼굴로 열이
몰리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아마도 조금만 더 이대로 방치되었다간
얼굴이 새빨갛게 울혈 될 게 틀림없었다.
참으로 좆같이 힘든 자세였다. 옷을 입고 있어도 수치스러웠을 것을, 사람을
홀랑 벗겨 두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거지 같았다. 괴로운 와중에
수치심과 굴욕감이 배가되니 더 죽을 맛이었다.
“흠.”

대공은 평소와 한 점 다르지 않은 무던한 표정으로 침대 발치에 서서, 묶인


내 몰골을 감상했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해
놓고 있는지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변태 짓을 하도 하다 보니
사람을 묶는 취미까지 들린 걸까.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였다.
혹은 또 어떤 짓을 더 하려 들까, 불안하기도 했다.
특히나 그가 어디에선가 꺼내 온 상자가 내 불안감을 들쑤셔 댔다. 사람
머리통 하나 정도가 들어갈 사이즈의 상자는 몹시도, 아주 몹시도 불길해
보였다.
“힘든가?”

대공은 몹시 가벼운 어조로 질문을 툭 던졌다. 네가 한번 해 보든가.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대답도 하기 힘든 자세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고개를 흔들었는지, 끄덕였는지. 대강 얼버무린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억지로 숨을 골랐다. 허공을 노려볼 수밖엔 없었다. 둔부가 위로
떠오른 채 몸이 반으로 접힌 자세 탓에, 덜렁거리는 내 성기가 내게 너무
정면에서 보였으니까.
대공의 손이 내 둔부를 느른하게 쓰다듬었다.
“일릭.”

어느새 침대에 올라온 대공이 나를 굽어보았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들린 내


둔부며 회음부, 허벅지 아래쪽을 쓰다듬는 손길이 몹시 느긋했다. 정말….
징그럽기 짝이 없는 손길이 아닌가.
쿵. 쿵. 쿵. 불안함과 긴장감으로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아까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입을
맞추기 시작해서는 침대에 나를 눕히고 내리누르며 연인이나 할 모양새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애무를 이
어 가려 들었던 그 징그러운 기억이.
그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묶여 있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강제로 험한 꼴을
당하는 게, 그런 소름 돋는 분위기 속에 키스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속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음을. 나는 그토록 대공을
경험하고도 깨닫지 못했다.
“……!”

그의 손이 내 성기에 닿았을 때 나는 내적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몸을 흠칫


떨었다. 묶는 것만 아니라 더 변태 같은 짓을 충분히 할 인간이라는 것을
예상했음에도, 그가 고스란히 노출된 성기를 건드린 순간 어깨가 다
움츠러들었다. 평소라면 내보이지 않았을 반응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침착함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후욱, 숨이 가쁘게 몰아쉬어졌다.
흥분 때문은 아니었다. 분류하자면 긴장감… 아니, 불안감 탓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다는 게 내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묶어도 어떻게 이렇게 묶었는지, 반으로 접힌 체위 탓에
작은 저항 하나 할 수가 없었다.
저항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묶여서 어떤 상황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거기서 기인하는 두려움은 내가
참는다고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공포는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헉… 후윽…….”

길쭉하게 뻗은 대공의 흰 손가락이 기어코 내 성기를 거머쥐었다.


말랑말랑하게 늘어져 있는 것을 쥐어 문지르자 오싹한 간지러움이
꼬리뼈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숨도 편히 쉬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자극
이 가해진다고 열기가 돌 건 무어란 말인가. 피가 혈관 속을 빠르게
돌면서 숨이 더욱 가빠 오기 시작했다. 오늘 몇 번이나 시달린 뒤였음에도,
성기는 그의 손 안에서 서서히 힘을 받기 시작했다.
“으… 흐으…….”

대공은 아예 오일을 뿌리며 성기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흥건하게 부어진


오일이 살을 타고 흘러내릴 겨를도 없이 그의 손으로 잔뜩 살갗에
발라졌다. 그 미끄러움에 힘입어 하얀 손이 빠르게 성기를 오르내리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작했다.

후욱, 후욱. 나는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이를 악물었다. 대공에게


잔뜩 시달리며 섹스를 연거푸 한 이후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닌지라, 흥분을 해도 쾌감보다는 괴로움이 앞섰다. 성기가 벌떡 서고
피가 혈관 속을 빠르게 돌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것은 발산하고 싶은
활력이 결코 아니었다. 머리가 어찔할 정도의 탈력감이 몸을 휩쓸었다.
반으로 접혀 상체가 짓눌린 자세 탓도 있었다. 이래저래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차라리 빨리 싸고 끝내고 싶다. 아니, 길게 괴롭혀도 상관없으니
묶인 걸 좀 풀어 주어 자세라도 좀 편하게 해 주었으면. 그런 부질없는
바람들만 지친 머릿속을 요란하게 오갔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대공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단단해진 성기를
쥐어 흔드는 손이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른 손으로는 음낭이나
회음, 항문 주변을 문지르기도 했다.
“윽…! 으윽…!”

특히 그의 손가락이 부어오른 항문 주변을 건드릴 때면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학습된 성감 탓이었다. 그 손가락이 들어와서 안을 찔러 댈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 속을 휘저어 댔다. 아직 부어 있는 주름을 문지를 때면
분명 따갑고 쓰라린데도 속에서 무언가가 사납게 들끓었다. 심장이 더
빠르게 박동했다. 피가 혈관 속을 질주하며 전신을 뜨겁게 달구었다. 두근.
두근. 괴로우면서도 더한 성감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떨렸다.
“으응…!”

대공이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가하는 자극이 착실히 쌓여 가자, 정신이 다


아득해지며 절정이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의식이 끊어질 듯이 탈력감이
어마어마했으나 사정하고 싶다는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짜릿한 쾌감을 빨리 맛보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열기로 어지러운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 갔다. 허공에 뜬 허리가 나도
모르게 튀었다. 나와 봐야 묽은 액체만 나올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싸고
싶었다. 안에 얼마 안 남은 것을 죄 쥐어 짜내서라도 사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진짜 견디기 힘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일릭.”

잠시 성기를 흔들던 손을 멈춘 대공이, 내 이름을 불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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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가면 안 되지.”
“……!”

귓가에 낮은 음성이 한마디를 속삭인 그 즉시, 거짓말처럼 온몸에 가해지던


자극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절정의 벼랑 끝에서 딱 한 걸음이 부족했다. 딱 한 걸음을 앞두고 나는
편해질 수가 없었다.
“각… 각하…….”

정말 딱 그 직전에 멈춰 버린 절정에 애가 타서, 나도 모르게 애원하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내 손으로 쥐어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지금 나는 만족되지 않은 분출의 욕구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대공은 내 부름을 듣고도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가 잠깐 잊고 있었던 상자를 열어 젖혔다.
“오늘은 이걸로 해 볼까?”

상자 안에서 대공이 꺼낸 것. 그건 얇고 기다란 막대였다.


유리처럼 투명하면서도 유리와는 달리 반짝이는 기다란 막대.
“각하, 각, 각하!”

나는 다급하게 대공을 불렀다. 잠깐만이라도 멈춰 주길 바라며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내 비명 같은 부름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대공은 그 막대를, 내 성기 끝에 대고 찔러 넣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내 눈앞에서, 내 몸에


자행되고 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 끔찍함에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여과 없이 터져나갔다.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일을 당하고
있자니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듯이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보다 더욱 충격적인 감각이 찾아들었다.
“히익!!”

일단 아팠다. 너무나 아팠다. 실제로 고통이 죽을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통증이었기에, 또 경험할 거라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부위에서 기인한 통증이기에 죽을 듯이 아픈 것 같았다.
“이런, 아픈가?”

막대기를 밀어 넣으며 대공이 물었다. 이 새끼는 세상 다시없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개새끼였
다 그는 묶여서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살포시
.

웃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희열이었다.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호박색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이지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한
악마새끼였다.
“쉬이, 괜찮아. 상처를 내지는 않을 테니까.”

대공의 개소리에 나는 아픈 와중에도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씨발,


괜찮긴 뭐가 괜찮은데!! 그러나 묶인 데다가 대공의 손에 가장 중요한
급소인 성기를 내맡기고 있는 나로서는 감히 몸부림조차 칠 수가 없었다.
“힘을 빼야 덜 아플 텐데, 힘이나 조금 빼지 그러나.”

“…!!”

막대기가 성기 안쪽을 꾸욱 압박한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충격에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늘상 무언가를-그것이 소변이든 정액이든-배출하기
만 하던 곳으로 다른 물질이 역행해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히
끔찍한 감각을 선사했다. 더군다나 박혀 들어오는 막대기가 지나치게
단단해서 더 소름이 끼쳐 왔다. 이런 단단함을 요도로 느끼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기 바깥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점점 짧아질수록 내 안에서 공포가 커져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끝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더 들어가지가
않았음에도, 대공은 막대를 더 꾸욱 눌렀다. 안쪽이 눌리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러다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터지고 고장날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아프고 두려웠다. 익히 전장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공포가
나를 패닉으로 몰고 간다. 이런 끔찍한 짓을 당하는데 발기가 이어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흥분이고 성감이고 나발이고,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흐으, 으, 흐으으……!”

원래의 나라면. 대번에 고추가 쪼그라들었을 상황이란 거다. 원래 같았으면


말이다.
“아, 아으, 으, 으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지


금의 나는 나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힐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쾌감에 바르르 몸을 떨 따름이었다. 대공과 어울리면서 나 역시도 미쳐
버린 것일까? 혹은 가운데에 막대기가 심지처럼 박혀 버린 탓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이런 미친 상황 속에서도 거시기를 벌떡 세우고
있는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발기가 풀리지 않아 요도를 파고 들어온 관이 지나치게 확연히 느껴지는데.
더는 들어와서는 안 되는데도, 더 들어가지도 않는데도 막대가 계속 꾸욱
밀려들어 오는데. 눈앞에서 불똥이 튈 정도로 아프고, 그 감각이 너무나
소름이 끼치는데도.
전신을 태울 듯한 열기는 분명 성욕이며 성감이었다. 결박된 사지가 팽팽히
당겨져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나를 몰아붙이는 아찔한 쾌감이었다.
“흐으윽!”

꼭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더는 들어가지 않고 그저 안쪽을 짓누르기만 하던


막대기가, 갑자기 안쪽에서 문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쑤욱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순간 어디라고 특정하지도 못할 안쪽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생경한
감각이 정수리까지 치솟아 눈가가 죄 욱신거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그것을 통증이라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열기에
휩싸여 쾌감에 헐떡거린다는 점이었다. 묶인 몸이 파르르 경련하며 눈앞이
아득해져 왔다. 고통보다는 성기 안쪽을 자극해 대는 쾌감 탓이었다.
“아아아… 아……!”

막대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으므로, 사정은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분출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아찔한 오르가슴이 전신을 후려쳤다. 아플
정도로 강렬한 절정이었다.
내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신음하며 절정에 몸부림치는 동안, 막대기
는 더욱 깊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것이 내 절정을 부추겨
오르가슴이 끝나질 않고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그 막대기가 성기 안으로
전부 모습을 감추어 대공이 내게서 손을 떼고 나서야 나는 길고 긴 쾌감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열이 올랐을 게
분명했다. 또한 눈물로 범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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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
“ ,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시야에도 대공의 움직임만큼은 그린 듯이 선명히


들어왔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서 어디로든 도망칠 수가 없었다.
“만지면… 안… 각, 각하…!”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다급하게 쏟아졌다. 그러나 멈출 대공이 아니었다.


입술을 핥는 그의 얼굴에서 도리어 흥분이 짙어졌다. 그걸 보고서야 나는
내가 다시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아…!!”
대공은 엄지손가락으로 막대기가 빠져나오지 않도록 귀두 끝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손가락으로 성기를 휘어 감아 제멋대로 주물러 댔다. 요도를
따라 깊숙이 박힌 막대기가 얼마나 단단한지, 요도의 점막을 통해 감각들이
비명을 지르듯이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그가 막대기가 꽂힌 성기를 주무를 때마다 고통과 고통보다 강렬한 쾌감이
내 안을 강타했다.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결박된 사지가 팽팽히 당겨져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켰다. 온몸이 펄펄 끓어오르고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빠지지 않게, 잘 물고 있어.”

귀두를 막은 손가락을 살짝 떼며 두어 차례 내 성기를 쓸어 올린 대공이


명령했다.
그러나 나는 그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몸이었지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포와 열기, 두려움과 쾌감. 모든
것이 뒤섞여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성기에서 손을 뗀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허공에 뜬 내 둔부에 제 몸을 맞댔다.
그제야 나는 대공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역시 말릴 틈
따윈 없었다. 아니, 말렸다 한들 들었을 위인이 아니었다.
크 악……!”
“ …

언제 발기했는지도 모를 대공의 지랄맞게 큰 성기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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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화에 계속
31.

아래가 억지로 벌어지는 그악한 고통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아니, 새


카맣게 꺼진 것도 같았다.
“힘… 빼, 일릭.”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해했다 해도


행동으로 따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내 몸을 자의로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아팠다. 어딘지 모르게 너무나 아프고 미칠 것만 같았다. 몸 안의 어딘가를
뜯어내 버리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몸부림을 아무리 쳐도, 팔이나 다리
모두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게 하나 없어 더욱 패닉이었다.
“하아, 일릭.”

회음이 위를 향한 자세 탓에, 대공은 찍어 누르며 성기를 삽입했다. 그가


삽입해 들어올 때마다 몸이 침대로 푹 푹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철썩 철썩
마찰음이 귓전을 시끄럽게 때렸다. 가슴이 억눌려 쪼그라든 폐부에서
기이한 숨소리와 함께 비명도 신음도 아닌 무언가가 흘러나와 마찰음과
뒤섞였다.
흐릿한 시야 속에 은빛의 머리카락이 내 위로 쏟아졌다. 하늘하늘한
베일처럼 흘러내리는 그것은 그 순간에도 마치 달빛인 양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크헉, 끄, 으…! …!”

몸이 짓눌려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죽는다. 이러다 정말 죽을


거야. 생존에의 공포조차 나를 몰아붙였다.
대공은 내 허벅지를 붙잡고 제멋대로 허릿짓을 이어갔다. 좁아드는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성기가 흉포하게 내리꽂혔다. 내벽에 불길이 이는 것만
같았다. 뻐근한 하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아니, 내 몸 전체가 내 것이
아니었다. 대공의 성기가 꿰뚫는 대로, 또 뽑혀 나가는 대로 범람하는
감각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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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대공의 손이 다시 내 성기를 거머쥐었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 끝에 막대가 어느새 주르르 밀려 나와 있었다.
“잘 물고 있으래도.”
절반은 빠져나간 것을, 대공이 다시금 밀어 넣었다. 고통인지, 아플 정도의
쾌감인지 모를 것에 나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숨이 그대로 멈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공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손으로 성기와 막대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다시 빠져나가지 않도록 손에 쥔 그것이 손잡이라도 되는 양
당기며 무식하게 성기를 내 안으로 처박아 댔다. 퍽! 퍽! 퍽! 가죽 터지는
소리가 한도 끝도 없이 빨라져 갔다.
“하으! 아! 아! 아!”

짓눌린 폐부에서 끓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터졌다. 대공의 성기가


짓쳐들어올 때마다 내벽 안쪽의 어딘가가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폭발적인
쾌감이 머릿속을 송곳처럼 찔러 들어왔다.
싸고 싶다. 사정의 욕구가 이미 넘치게 차올랐다. 대공이 안으로 들어오며
내벽을 찌르고 문지르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몸속에 용광로를 품은
것처럼 뜨겁게 끓어올랐다. 분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혀 있었다.
“일릭, 하아, 일릭.”

지옥 같은 시간 속에 대공 역시 점차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끝을
느꼈는지, 그가 내 성기를 놓아주며 대신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았다.
삽입이 깊어졌다. 질컥질컥 온갖 음란한 소리를 울리며 대공의 허릿짓이
빠르게 이어졌다. 기절을 할 듯이 의식마저 깜빡였다. 강요된 쾌감이
아팠다. 아니, 그 미칠 듯한 쾌감 속에서도 성기가 너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싸지 못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하복부 안쪽이, 대공이 성기를
처박아 짓누르는 그곳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터져도 몇 번은 터져야 했을
감각이었다. 막혀 있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그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아아아!!”

끝을 모르고 빨라지던 대공의 허릿짓이 그 여느 때보다 더 강하고 깊게


안을 파고 들어와 틀어박힌 순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요도를 가
득 채우고 있는 막대조차 막을 수 없는 강렬한 쾌감이 내 존재를
찢어발기며 폭발했다.
“아! 아아……!!”

“큭……!”

멀건 물 같은 액체가 분수처럼 성기 끝에서 튀어 올랐다. 안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액체는 깊숙이 박혀 있던 막대기까지 들썩이게 만들 정도로
강하게 뿜어졌다.
쥐어 짜이며 사출되는 그 힘에, 정액과 함께 막대가 뽑혀 올라왔다. 튕겨
나온 것이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렸다.
단단한 막대기가 잔뜩 자극 받아 예민해진 요도를 긁으며 튀어 나온 순간.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강렬한 절정이 나를 후려쳤다. 더는 사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성기 끝에서 왈칵 말간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욱신욱신한 통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요도를 통해 말간 액체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해방감이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이런 짓을 당하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고장이라도 난 듯이 완전히 멈춰 버린 채, 나
는 온몸을 후려치는 오르가슴의 파도에 몸부림치며 몸을 떨어야 했다.
“일릭, 일릭.”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결박이 풀려 몸이 옆으로 눕혀져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는지 아직도 숨이 가쁘고 몸이
뜨거웠다. 얼굴은 덜 마른 땀과 눈물로 범벅이었다.
“쉬이, 괜찮아.”

낮은 음성이 어찔어찔한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대공이 숫제 내 머리통을 끌어안을 듯이 몸을 바짝 붙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대공의 체취가 훅 끼쳐올 정도로 그의 몸이 가까웠다.
“이걸 봐, 일릭.”
대공이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스윽 쓸어 올렸다.
그의 손에 끈적하면서도 묽은 액체가 묻어났다. 그제야 나는 의식을 잃기
전 그가 내벽을 자극하는 대로 내 성기 끝에서 분수처럼 묽은 것이
토해지던 것을 기억해 냈다. 막대가 박혀 있어 늘어나기라도 했는지 액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뿜어져 나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말간 액체가 가슴과 목으로
흩뿌려졌었다.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가혹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대공은 그것이 몹시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이건 너무 야한데.”

사정을 마친, 열기의 잔재가 남은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방금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상냥하고도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맺혀 있었다.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데다가, 그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현실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야해 빠진 몸이잖아, 일릭.”

흰 손이 내 얼굴을 문질렀다. 땀과 눈에서 흘러내린 액체만 아니라, 정액이


라고 부를 수 없을 말간 것이 잔뜩 묻었을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대공이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대공. 나는 눈앞의 사내가 내보이는
껍데기에 홀리지 않으려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무어라 반응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정신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에 걸쳐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고 나는 내 몸이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이 가라앉고 있었으며
온몸을 두들기던 갖은 감각들 역시 잦아들기 시작했음에도 그 잔재가
여진처럼 남아 있던 탓이었다. 막대기가 박혔던 요도를 비롯해 항문과 그
안쪽까지 죄 욱신대면서도 마비가 된 것처럼 뻐근했다.
차라리 그대로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너무나 빨리
정신이 들어 버린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씻기도 귀찮았다. 시종들이
멋대로 내 몸을 씻겨도 상관없으니 그냥 자 버리고 싶었다.
“일릭.”

그러나 대공은… 대공은… 악마도 형님이라 부를 새끼였다.


“잘 물고 있으라고 했잖아?”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그의 손에는 투명한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그가 내 요도 깊숙한 곳으로 박아 넣었던 바로 그 막대기가.
“각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힘
없이 늘어진 내 성기를 다시 거머쥔 순간 나는 그가 무슨 짓을 ,

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언제 그렇게 뜨거웠냐는 듯, 몸에서 삽시간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각하, 제발…… 제발, 각하…!”

내 입에서 절로 애원하는 소리가 튀어나갔다. 나도 모르게 막대기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정신이 다 번쩍 들었다.
요도를 역행해 단단한 막대가 들이박히는 그 기분. 나는 그걸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폭력적인 성감을 다시 느낀다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짓눌린 와중에도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손 놓아라.”

그러나 대공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내 애원에도 돌아온 것은 차디찬


시선뿐이었다. 언제 욕망과 열기가 어렸었냐는 듯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이었다.
그런 눈빛을 내가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몸이 굳어졌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내가 그대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던 탓이지.”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처럼 몸을 붙이고 있었으나 나를 바라보는 대공의


시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미소 짓고 있지 않았다.
막대 끝이 힘없이 늘어진 성기 끝을 쿡 찔렀다. 들어갈 곳을 찾듯이 헤매는
듯 했지만 그걸 쥔 손에는 성의가 없었다. 말랑한 귀두를 아무렇게나
찌르고 문질러 대고 있었다.
“제대로 참지도 못했잖아.”

“제발… 제발, 각하. 각하…….”

“그대와의 관계를 함구해 달라는 부탁도 내가 들어주기로 했는데. 이

정도는 어울려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제야… 대공이 왜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안 빠지게 잘 물고 있으라 했는데, 그것도 못하다니.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평소에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였지만, 이번처럼 도구까지 사용하며
나를 고문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타고난 성벽도 성벽이지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대를 쉬이 용서한 게 잘못이었을까. 내가 그대에게 너그럽기로서니, 그
대에게 친히 하사한 것을 이렇게 뱉어 내는 건 지나친 불경 아닌가.”
대공의 말은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이건 명백한 ‘벌’이다. 이 관계를 타인에게 알리는 게 싫다, 이 관계가
알려진다면 계약을 지속할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약조를 해 달라……. 감히
대공의 앞에서 주제 넘는 말들을 지껄인 대가였다. 그 만용으로 인해 내가
지금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것이다.
“내 관대함이 지나쳤던 바. 이제라도 제대로 참을 때까지 가르치는 게 내

의무겠지.”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에 나는 더더욱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저항을 했다간 더한 짓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는 이 짓을
당할 여력이 없었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씨발, 내가 왜 이런 꼴까지 당해야 해. 두렵고 막막한 와중에 속에서
억울함이 울컥 솟아올랐다. 동시에 눈가가 욱신욱신거리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눈가에 가득 고였다가 뺨을 적시며 주르륵 흘러내리는 건 눈물이었다.
살면서 내가 웬만한 육체적, 심리적 고통에 눈물 한 번 흘려 본 적이
없었는데. 대공을 만나서는 이게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성행위 도중에 운 것도 아니고, 진짜 진절머리 나는 상황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나는 눈물이었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눈물이 나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내가 혀 깨물고 죽어 버릴 수도 없고…….
“……이건…….”

대공이 문득 내 뺨을 문질렀다. 잔뜩 고인 눈물을 닦아 내듯이 눈 아래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어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날카로움이 빠진 듯이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건 반칙인데.”

대공의 미소가 전보다 짙어진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기울여 내게 키스를 해 왔으므로.
“흐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울음 때문


에 차오르는 숨을 제대로 쉴 겨를이 없었다. 대공의 입술이 내
입을 막고 끈적한 타액으로 젖은 입안으로 말캉한 혀가 곧장 밀려들어
왔다.
“흐읍, 흐으, 흐…….”

헐떡이는 와중에 대공의 입맞춤은 끝날 줄을 몰랐다. 손에 쥐고 있던


막대기는 어쨌는지, 내 뺨을 부여잡은 채로 몇 번이고 내 입술을 감물며
빨고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고루 핥았다. 굳어져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내 혀에 멋대로 제 혀를 얽어매고 비벼 댔다. 나는 헐떡거리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울음과 함께 타액을 삼켜 넘겼다.
평소라면 질색을 했을 입맞춤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징그러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정도로 지쳐 있었으며 정신적으로 한계였다. 나도 모르게
대공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울먹거리며 그 입맞춤에 응할 따름이었다.
“귀엽기는.”

대공은 무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눈을 감자 눈꺼풀 위에도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눈물에
흠뻑 젖은 속눈썹을 혀가 부드럽게 핥고 지나갔다.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나.”

쪽. 쪽. 얼굴 위에 몇 번이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감히 눈을 뜨지


못한 채 그 입맞춤에 몸을 맡겼다. 내 흐느낌이 점차 가라앉는 것과 함께
대공으로 인해 한껏 굳었던 몸에서도 긴장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몸이
침대에 파묻히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맥없이 늘어진 몸에는 다시는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 귓가에 대공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이제 자도 좋아, 일릭.”

그 허락이 어떤 버튼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삽시간에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깊은 어둠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앞에 하얀 벽이 보였다. 어딜 가고 있었는지 행선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아니, 간다기보다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게 옳다. 어디든 좋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자리한 거대한 흰 벽은 무어란 말인가. 끝없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펼쳐진 벽
에 헛것이라도 본 기분이라 눈만 몇 번을 비벼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벽은 벽이었다.
뚫어져라 벽을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벽은 매끈하지 않았다. 우둘투둘
굴곡이 보였다. 그러나 그 굴곡이 벽돌처럼 네모진 형태가 아니었다.
가만히 쳐다보니 꼭 비늘 같았다. 딱딱하면서도 매끌매끌한 윤이 나는 게,
마치 파충류를 연상케 했다.
그제야 흰 벽이 사실은 벽이 아님을 알게 된다.
뱀.
그것은 거대한 뱀이었다. 그것도 살아서 움직이는 새하얀 뱀 말이다.
스스스스. 어디선가 뱀 특유의 히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마주쳤다.
노란 눈. 아니 붉은 눈. 붉고도 노란, 호박(琥珀)과도 같은 빛깔의 눈.
살면서 뱀 따위 한 번도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그 순간 손끝
발끝도 까닥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심장이 떨렸다. 어찌나
요란하게 박동을 하는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아니, 숨을 못 쉬는 까닭은 뱀이 그 커다란 몸을 내 몸에 칭칭 휘어 감고
나를 옥죄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그 커다란 뱀이
내 몸을 옥죄기 시작한 게. 이러다간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져 죽게 될 거야.
죽는다. 죽는다고.
죽는다니까?
“헉……!”

뜰채로 막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몸이 펄떡 경련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폐부로 밀려들어온 공기로 가슴이 뻐근한 흉통을 호소한다.
와아아악!!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삼키며 나는 대신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허억허억. 거친 숨이 연신 토해졌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니, 처음 사람을 죽이고도 꿈자리가 사나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런 악몽이라니. 그것도 생전 무서워해 본 적 없던 뱀 따위에 겁을
집어먹고서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뱀이 몸을 옥죈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처럼 온몸이 아파서 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순간 현실
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더욱 공포심을 느껴야 했다 헐떡이는 .

숨을 가라앉히며 애써 왜 몸이 이렇게 아픈지를 생각하고 나서야 대공에게


고문당했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꿈속에서 왜
뱀을 보았는지, 또 그 뱀이 어째서 그토록 무서웠는지 말이다.
“씨발…….”

나도 모르게 욕설이 쏟아졌다. 손으로 눈가를 내리누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꿈도 현실도 모두 좆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몸의
통증은 내가 지난 밤 겪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강력하게 인지시켰다.
묶여 있었던 몸은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묶인 손목과 발목에
흔적이 남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다리 사이가……. 다리 사이가
불쾌하게 아팠다. 대공과의 섹스로 항문의 얼얼한 통증에는 비참하게도
익숙했는데, 지금 느껴지는 건 그 익숙한 통증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끔찍했다. 거시기까지 얼얼할 줄은. 그것도 겉이 아니라 속이 얼얼할 날이
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때였다.
“꽃노래도 아니고 욕설로 내 잠을 깨우는 건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그대로 기절할 듯이 놀라 버렸다. 아니, 씨발


차라리 기절을 했어야 했다.
악몽에 너무 시달려서, 잠이 덜 깨서, 내 비참함에 깊게 함몰되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내가 아직까지 대공의 침실에 있다는 걸 잠깐
망각하였고, 뿐만 아니라 옆에서 대공이 자고 있었다는 것을 새카맣게
잊었던 것이다.
화들짝 놀라 바라본 옆자리에서는 대공이 얼굴을 찌푸린 채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황급하게 사죄했다.


눈을 비비던 대공은 별 다른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대신 내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악몽에서 깨면서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던 나는
하릴없이 그에게로 끌려갈 수밖엔 없었다. 나를 도로 침대에 눕힌 대공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더 자지 않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자기 잠을


깨웠다고 괜한 트집을 잡아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대공의 손은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전날 사람을 그렇게 다룬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손길이었다.
그런데 다만…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분명 대공의 손은 그 무엇도
묻어 있지 않았고 평소와 다름없는 백옥같이 하얀 손이었음에도.
“…피비린내가.”

“…….”

“…나서요.”
채 씻겨지지 않은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늘 정결한 체취를
풍기던 대공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피비린내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말이었는데, 대공은 그것을 반복하며 내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목소리나 눈빛에 잠이 담뿍 묻어 있었는데, 지금 나를
바라보는 호박색의 눈동자는 잠기운 하나 없이 명징했다.
씨발, 나 또 말실수를 한 걸까. 피비린내 때문이 아니라 악몽 때문에 깬
것이었는데, 갑자기 대공이 왜 일어났냐고 물어보니까, 또 대공의 손에서
안 나던 냄새가 나니까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았다.
대공이 피식,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베이즈가 찾아왔었지.”

“……혀를… 뽑으셨습니까?”
“설마. 다짜고짜 혀부터 뽑는 건 옳지 않아.”
…아니, 혀를 뽑아 준다는 소리는 대공이 이전에 먼저 꺼냈으면서 왜 나를

비난하는 거냐고. 나는 그가 베이즈의 혀라도 뽑아 주길 원하느냐는 소리를


했던 걸 기억해 내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의 손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맡지 못했을 미세한 냄새였지만, 분명 피
냄새였다. 대공도 부인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의 몸에 가까이 코를 대고
맡아 보면 더 확실해질 것 같은데…….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대공은 내게서 몸을 조금 떼며 내
쪽으로 비스듬히 누였던 몸을 바로 했다. 잠기운이 다 가셨던 것 같은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잠을 청하
려는 사람처럼 눈을 감기도 했다.
“이만 가 봐.”

나는 잠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대공이 정말로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준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분명 내가 바라 마지않던 축객령이었다.
깨달은 순간 나는 빠르게, 그러나 대공이 잠을 청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조심스러운 몸놀림으로 침대를 벗어났다. 몸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해
왔지만 싸그리 무시했다.
대공의 침실에서 빠져나와, 성을 벗어난 순간에야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드디어 탈출이다. 폐부를 가득 채우고 들어오는 상쾌한 새벽 공기에
머릿속마저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듯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용병대 숙소로 돌아가서 자고 싶은 마음뿐. 대공에게서 어렴풋이
풍기던 피 비린내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32.

내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용병대 숙소에 도착하자


동료 용병들이 귀신 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대체 무슨 일로 감옥에
갇혔고 어떻게 풀려났는지를 물었지만 나는 상대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서 그들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로 직행했다.
용병대 숙소의 침대는 대공의 침대와는 비할 바 없이 열악했지만, 감옥의
그 지푸라기 쌓인 나무판자와도 비교할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하기로는 숙소의 내 침대만 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심신이 전부
한계에 몰려서 회복이 필요했다.
한참을 굴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자다가 일어났을 때는 정오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너무 오래 자서인지 머릿속이 다 멍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으나 쿠션감이
좋지 못한 침대에서 더 누워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이 삭신이 온통 쑤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대공의 침대
정도가 아니면 제대로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다고 대공의
침대에서 자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침대를 털고 일어난 나는 수건에 물을 적셔서 몸을 닦았다.
지난 밤 그 난리를 쳐 놓고 내가 기절하듯이 잠든 사이 하인들이 몸을
씻겼는지 몸은 깨끗했다. 하긴, 그랬으니 대공이 한 침대에서 재웠을
것이다.
우습게도 이제는 하인들이 내 몸을 씻긴 데에 굴욕감은 들지 않았다.
남들한테 못 보일 꼴을 그들에게는 한두 번 보인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또
별관의 하인들이 본 대공의 장난감이 나만 있었겠는가……. 그들에게도
익숙한 일이리라는 합리화에 나는 무감각해질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원래 그렇게 무던한 사람이었다. 타고 나기를 무덤덤하게
태어나 감정의 동요 따위 크게 느껴 본 적 없이 살았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태평했다. 씨발, 대공과 얽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성격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이제는 굴욕감마저도 무덤덤하게
넘겨 버릴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막 몸을 씻고 났을 때,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파빅이었다.
“이 새끼, 내가 직접 여기까지 와야겠냐? 돌아왔으면 마땅히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문을 열자마자 대뜸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내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랐었던 모양이었다. 화가 난, 그러나 동시에 안도하는
복잡해 보이는 얼굴에 나 역시 복잡 미묘한 감정이 찾아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가족 같은 사이에, 식구라고 나를 아껴 주는 그
마음씨에 고마움이 잠깐. 그 아들을 죽인 게 나라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
하지만 이내 그러게 아들을 잘 키웠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할 일이 없지
않았겠나 하는 분노와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고할 게 없으니까 안 갔지. 아니었으면 어련히 먼저 찾아갔을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 몰라요?”
“뭣이 어째? 이 새끼가 정말! 너 감옥에 갇혔다는 얘기 듣고 용병대

분위기가 어땠을 것 같냐? 인마, 네가 대공한테 죽을죄를 저질렀다고


하던데 내가 걱정을 안 해?”
“하. 대장이 내 걱정을?”

“내가 미쳤냐? 당연히 용병대 걱정이지!”

와. 우리 대장 의리 보소.
“너 하나 때문에 용병대에 불똥이 튈까 봐 잠을 못 잤다! 그런데 이놈은

팔자 좋게 자빠져 자다 이제야 일어나?”


아이고,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대장이 말은 그렇게 해도 나를 걱정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얼굴 맞대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것이다.
다만 피차 그걸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남자들만의 그런 유치한 심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었냐.”

“뭐가요.”

“무슨 죽을죄를 지었기에 감옥에 갇혀?”


“죽을죄는 무슨.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온 거 보면 모르겠수?”
“고문 안 당했냐?”

“고문?”

“미로스가 원래 고문기술로 유명하잖냐.”

“…하아.”

그렇구나. 미로스가 고문기술로 유명했구나. 그래서 대공이 그 모양이냐고


설마.
뒤늦게 알게 된 미로스의 특산물에 다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대공의
신분으로 직접 사람에게 고문을 할 일은 없겠지만, 어쩐지 잘 할 것 같았다.
고문하는 걸 아주 타고 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처럼 곰같이 커다란
사내에게 성고문을 할 생각이나 했겠는가.
씨발, 요도에 막대기 밀어 넣었던 건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도 남자면 그게 얼마나 아픈 건지 알 텐데 그런 무자비한 짓을 하다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고 그
때 분명히 신이 나 있었다. 아주 재밌어 죽더라. 딱 그런
얼굴이었다. 생각하니까 또 분통이 터지려 하네.
“그래, 무슨 짓을 했냐니까.”

대장은 정말로 영문이 궁금하다며 재차 물었다.


내가 대공의 얼굴을 가격한 게 사람이 없었던 별관도 아니고, 본성의
집무실이었다. 말 못하는 하인들이 아닌 본성의 하인과 기사들이 다수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내가 왜 잡혀 들어갔는지를
모른다는 것인가.
심지어 대공은 멍이 든 그 얼굴로 집무를 보러 다녔다. 대공 얼굴에 멍이
들었다는 것만 알려져도 내 죄가 무엇인지는 쉽게 유추 가능하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사실은 온 미로스가 떠들썩해질 법한 일이다. 그런데 성 밖의 그 누구도
모른다.
대공은 제 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바깥으로 새어 나갈 리 없다고
자신했었다. 사람의 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대체 대공은 어떤 방법을
쓰는 거지?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비밀유지 조항에 걸려서, 말할 수 없수다.”

“……항명 같은 거라도 했냐?”

“말 못 한다니까.”

“아니면 성 안에서 여자 건드렸냐?”

“아, 몰라, 몰라. 아무튼 이렇게 풀려났고, 용서도 확실히 받았으니 대장은
걱정할 거 없어요.”
“이 새끼… 확실한 거야?”

“그럼 내가 탈옥이라도 했을까 봐? 그럼 퍽이나 여기 와서 여태까지 자고

있었겠다.”
“이 새끼는 걱정을 해 줘도.”

그 말에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뭐? 여자를 건드렸냐고? 의심하는 수준하고는 말이다. 내가 자기 아들처럼
호색한, 난봉꾼도 아니고 말이다. 도리어 대공한테 건드려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기분이 다시 수직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 나가기나 해요. 나 좀 더 자게.”


“ ,

“밥은 먹고 자, 이 새끼야. 얼굴이 이게 뭐냐. 옥살이 한 거 자랑하냐?”

“나 알아서 해요. 아니, 근데 무슨 죄를 지은 줄도 모르는데 내가 감옥 갇힌

건 어떻게 알았대?”
“대공이 용병 하나를 곁에 두고 쓰니 기사들이 배가 아팠나 보지? 너

갇혔다는 날 기사 두 놈이 아주 신이 나서는 여기까지 쳐들어왔더라. 한껏


비아냥대며 네가 감옥에 갇혀서 오늘 내일 한다는 소리를 했다고. 그놈들이
네가 사형당하는 건 기정사실이고 용병대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만만하던데……. 네 소식은 통 알 수 없으니 내가 안 답답해?”
아마도 마주쳤다는 기사들은 베이즈의 무리이거나, 혹은 기사 전체가 나를
못마땅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나도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기사 놈들도 쉽게 입을 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예상이 틀어져서 어쩌나. 조금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나를
눈엣가시 취급 하던 베이즈 그놈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문득 미로스가 고문으로 유명하다고 했던
파빅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새벽녘 대공의 손에서 풍기던 미약한
피비린내도.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대공은 위험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내
미래가 더더욱 암울해질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 사람 앞에서 계약을 그만두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 댔다니… 어쩌면
요도에 막대기 한 번 꽂힌 걸로 끝난 게 다행인지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어쩔 수 없나. 이제 자도 좋아,
일릭.’
내가 결국 울어 버렸을 때 내게 입을 맞추며 읊조렸던 말들은 분명
용서였다. 그의 얼굴을 때린 걸 쉬이 용서해 주었던 것처럼. 대공은 그때도
내게 아량을 보였던 것이다. 아침에도 보내준 걸 보면 분명 용서를 받은
것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나에게는 너그럽게 굴고 있는 걸까. 너그럽게 구는 게

그 정도라고……?
차라리 대공의 속내를 까뒤집어 볼 수 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공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기에 생각을 할수록 머리가 아프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막막하기
만 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인간에게 걸려서 이 고생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기만 했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입을 다물어? 거기서 기사놈들이랑 붙었냐? 그래서

감옥에 갇혔던 거야?”


“…뭐가 되었든 다 해결했대도. 걱정하지 말고 나가요.”

파빅이야 용병대가 계속 걱정되겠지만, 실상 용병대에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그냥 나만 좆된 거지.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쭉 말이다.
그러니 부디 남의 속도 모른 채 용병대 걱정만 늘어진 대장은 걱정일랑
접고 썩 나가 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내 바람과는 달리 대장은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짜증이 왈칵 솟아났지만 나는 억지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보았다기보다는 당장 나가라는 뜻으로 노려본 것에
가까웠다. 그 시선에 잠시 움찔한 파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마일 일은 좀…… 물어봤냐.”
아, 씨발……. 내가 진짜 누구 때문에 이 개떡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대장이 그 이름을 올리며 나를 채근한단 말인가. 이쯤 되니 짜증이 나다
못해 맥이 탁 풀리기까지 했다. 분노조차 흩어져 버려서 허탈한 헛웃음이
지어졌다.
“…혹시 너 감옥에 갇힌 게, 마일 관련된…….”

“대장.”

나는 대장의 말을 뚝 자르며 그를 불렀다. 나를 바라보는 파빅의 눈동자에


떨림이 일었다.
“…나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보는 중이요.”

“…….”

하지만 아직은 말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건


소문이 저 대공성 성문을 넘지 못하는데, 저 안에서라고 소식 캐는 게


쉽겠어?”
그저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말이었을 뿐인데, 파빅의
얼굴이 점차 우울함으로 흐려져 간다.
그 얼굴에 나는 또 가슴에 물에 젖은 솜뭉치가 하나 올라간 것처럼
갑갑해졌다.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소리에 절망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그제
야 내 방에까지 찾아와서 나를 살피고 용병대 걱정을 늘어놓던
그가 사실은 무리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우울하고 울적하고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괜찮은 척, 평소와 다름없는 척
하며 용병대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

마침내 파빅이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서 다짜고짜 나를 깨워서 말을 시킬


때의 모습과 지금의 얼굴이 너무도 달랐다. 꼭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우울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에 또 내 속만 답답해진다.
“……고맙다.”

“…그 따위 안 어울리는 인사, 하지도 마쇼.”

이건 한 편의 웃기지도 않은 촌극이다. 아들의 살인범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싶어하는 아버지와, 그 아들을 죽이고도 살인범이 아닌 척 그를
돕는 척 위하는 척하고 있는 살인범이라니.
……씨발, 마일 한 새끼 때문에 지금 이게 뭐란 말인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오가는 감정의 기복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파빅을 내보내고 자고 싶었다. 오랜만에 진탕 취하도록 술을 들이붓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파빅이 방에서 나가고, 나는 다시 침대에 늘어져 눈을 감았다.
대공의 성에서 훌륭한 식사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내내 먹은 게
없음에도 배고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는 무의미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잠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

하루를 자고 일어난 뒤에는 복잡하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리가 되었다기보다는 묻어 두고 회피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해 봐야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으니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꼬박 하루를 굶은 탓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배가 고팠다. 용병대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용하는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있노라니 다른 용병 녀석들이 내 쪽을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갔는지, 어떻게
풀려났는지가 적잖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도 마일을 죽인 범인을 찾는 일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대공이 알아서 해 준다고는 했지만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나 정도는 알아 둬야 하지 않을까.
대공은 본인의 말마따나 나에게 너그럽게 굴고 있었고,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처럼 굴지만 대공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대공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게 이쪽의
진심이기도 했고 말이다.
깔깔한 입안에 오트밀을 밀어 넣다 말고 나는 문득 대공을 떠올렸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게 꼳 쏟아지는 달빛처럼 영롱한 은빛의 머리카락.
황금보다는 붉고 루비보다는 노란 빛깔의 눈동자. 마치 천사의 것인 양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에 걸린 매끄러운 미소 따위를 보면 참 세상에
다시없을 미인이었다. 그 정도 얼굴이라면 좋다고 몸을 던지는 상대도 많을
텐데 도대체 왜 나 같은 평범하고도 우락부락한 용병 나부랭이를 괴롭히고
있단 말인가…….
‘귀엽기는.’

그런 개떡 같은 소리를 지껄이지 않나.


당시에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징그러운 소리였다. 나 같은 다 큰 남자를 보고, 그것도 질질
짜고 있는 얼굴을 보고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올 수가 있지? 역시 대공은
단단히 돌아 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런 미친놈과 계속 상종해야 하는 것이
나의 불행이었다.
“여어, 일릭.”

다가온 것은 아닉이었다.
“얼굴 한번 엄청나네.”

“뭐가.”

“야한 생각 했냐? 혼자 왜 귀까지 빨개졌어?”

“…너도 참 은근히 개소리 잘 해.”

툭 던지듯이 대꾸했지만 나는 그제야 내 얼굴이 조금 따끈하다는 것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깨달았다.
씨발, 대공이 헛소리 하던 걸 떠올리니까 괜히 내가 민망해서
얼굴이 다 붉어진 거 아닌가.
“이따 같이 나가자.”

“아, 용의자 탐문?”

“그것도 있고. 할 말도 있고.”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지.”

“너 어제 하루 종일 숙소에만 처박혀 있었는데 안 지겹냐? 나가서 좀


걷기라도 하자고. 요새 싸울 일도 없어서 몸도 찌뿌둥한데.”
아닉의 말은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나도 오늘 별일이 없으면 나가 볼까
하는 생각도 했고 말이다.
아무리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혼자 있었다간 우울감이나
번뇌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럴 바에야 몸을 움직이는 쪽이 괜한
고민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나았다.
- 다음 화에 계속

33.

식사를 마치고 아닉과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막상 나오니


공기가 맑고 쾌청했다. 이런 햇살 아래 느긋하게 활보하는 것도 괜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미로스가 확실히 잘 살기는 잘 사나 봐. 길 잘 닦인 거 보소.”

아닉의 말마따나 미로스의 길은 도시 외곽의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석재


타일로 빼곡히 포장되어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중앙대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시의 동과 서를 잇는 대로는 그 어느 왕국 수도의 중앙 대로보다
잘 닦여 있어, 말이나 마차 따위가 지나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미로스가 잘 사는 나라라는 증거는 비단 잘 닦인 도로만이 아니었다.
“구걸하는 애들도 잘 안 보이고 말이지.”
도시의 빈민층이라 할 수 있는 거지나 소매치기, 꽃이나 잡화 따위를 파는
어린애들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소매치기야 우리의 체구를 보고
주머니를 딸 간 큰 애들은 없으니 그렇다 쳐도, 어느 도시든 시장이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광장마다
존재하던 들꽃을 따다가 파는 애들이 안 보인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대공이 참 대단하긴 대단해.”

아닉의 말마따나 모든 것은 대공이 이뤄낸 결과였다. 티마예브의 둘째


왕자가 미로스의 지배자가 된 이후, 미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졌다. 베르바니 지역을 두고 세리포브와 전쟁을 했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임에도 미로스의 수도에서는 전쟁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전쟁에는 돈이 들어가는 법이었다. 징병을 하기보다는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벌인다고는 하지만 용병을 살 돈은 다 세금에서 충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세율을 크게 높이지도 않고 이 전쟁을 치러 내며 베르바니
지역을 빼앗았다고 들었다. 국고를 불리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도 상당한 능력자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능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타고난 혈통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공국의
군주로서 영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게 가능한 남자였다. 또 미로스만 그의
것이겠는가. 자식이 없다는 티마예브의 국왕이 서거한다면 티마예브까지
그의 것이 된다. 미로스의 대공으로 일군 것이 이 정도인데, 그가
티마예브의 왕이 된다면 이 대륙의 정세는 티마예브 쪽으로 확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교황일 필두로 하여 주변국의 군주들이 그를
견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가, 어떻게 그런 미치광이 변태일 수가

있는 걸까. 내 사고의 흐름은 다시금 대공의 침대 위 사정으로 돌아갔다.


아아,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떠오를 수밖엔 없는 충격적인
짓이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한번 보면 각인되어 절대 잊어지지 않을 엄청난
미모였고 말이다. 그에 대한 내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시시때때로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은빛 머리카락이나 영롱한 호박색의 눈동자 따위에
고통 받아야 했다.
어쩌다가 내가 그런 놈한테 걸린 거지.
그런 절망감에 깊게 빠져 있을 때였다. 우리의 발걸음이 중앙광장에
다다랐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통 광장
이라면 사람들의 갖은 소리로 왁자지껄하기 마련이련만 아닉과 .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은 재잘거리는 새소리처럼 귓가를 간질이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광장에 닿은 순간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건 침묵만이 아니었다. 기온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
자체가 우리가 쭉 걸어오던 길거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원래라면 도시의 그 어느 곳보다 더 활기가 넘쳐야 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우리가 광장에서 발견한 것은 사색이 되어 모여 있는, 얼어붙은 사람들.
그리고 효수되어 있는 네 개의 머리통이었다.
각각의 머리통에는 입에서부터 끄집어져 나와, 잘린 목보다 더 길게 내려온
검푸르게 썩어 가는 혓바닥이 늘어져 있었다. 살아 있을 때 혀를
뽑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몸뚱이를 잃은 머리통들은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있어?”

아닉은 이 머리통들을 처음 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걸 보여 주고 싶어서


나를 광장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나는 세 놈의 얼굴이 익숙해.”

아닉이 꼬챙이에 꿰인 머리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두 놈은 며칠 전 용병대에 와서, 네가 감옥에 갇혀 있고 대공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당할 거라는 소리를 했던 기사놈들이다.”


“…….”

“한 놈은…… 마일의 시체가 어떤 꼴로 죽어 있었는지를 말해 줬던


치안대의 말단이야. 하나는 모르겠는데. 본 적이 있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베이즈였는데 네 머리통이
다 내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그 머리통만 바라보았다.
“공국 사람들, 미로스 대공 얘기만 나오면 입을 딱 다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였어. 종종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더군. 대공의 신변에 관련된 얘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면 이렇게 혀를 끄집어 빼내고 목을 자른다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기사인데. 제 가신을, 귀족을 그렇게 죽여 버린다고?”

“돈줄은 전부 다 대공이 틀어쥐고 있는데 귀족이 뭐가 무섭겠냐. 대공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미로스에


온 이후로 공국 귀족들은 사병도 못 거느리게 되었지. 대공이
공국으로 오고 첫 해 동안에는 미로스의 토호 세력인 원로 귀족들을 회의
도중에 끌어내서 죽이기도 하고 그랬다더라.”
“대공성에서 말 한마디 흘러나오지 않는다면서 그런 소문은 어디서 나온
거냐?”
“그런 소리들을 한 머리들도 광장에 내걸렸었다고 하더군.”

믿기 어려운 소리에 내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대공의 성에서 그 어떤 말도 새어 나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대공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대공이
알았고, 그 결과가 눈앞에 있는 혀를 빼물고 죽은 머리통들이었다.
“…그러니 네가 입을 다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릭.”

“……그래.”

“이 정도로 입을 틀어막는다면, 마일을 죽인 범인이 누군지는 뻔하지

않겠어?”
“…대공을 의심하고 있다고?”

“그래서 용병대 안에서는 얘기할 수 없었어.”

“무슨 의미냐.”

“용병대 안에 첩자가 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라도반을 포함해서 마일을 죽인 범인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던 인원이 모조리 차출되어 임무에 나간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아닉은 크게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우리들의 철칙은 알고 있겠지.”

나를 향한 시선에 나는 순간 기가 찰 뿐이었다.
용병대에 존재하는 몇 가지 철칙. 그 중에 한 가지는 바로 용병대 내부
사정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진행된 계약이라면 패널티를
막론하고 파기해야 했다. 그 어떤 계약도 용병대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만큼 간혹 의뢰인에게 큰돈을 받고 용병대 내부 사정을 파는
변절자가 나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잔혹하게 보복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지금 아닉이 나를 변절자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일은 죽어도 싼 놈이었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닉이 낮


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넌 아니야, 일릭. 우리는 널 잃고 싶지 않다.”

우리라. 그 말인 즉, 아닉만 아니라 용병대의 일부 혹은 다수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아까보다 한층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아닉 역시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녀석은 그래도 나에게 꽤나 우호적인 녀석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언질을 주는 이유도, 만약 내가 배신행위를 하고
있다면 계약을 파기하고 돌아오라는 의미이리라.
“난 아니야.”

하지만 영 헛다리짚는 소리였다. 변절? 배신? 대공과 내 계약은 그런 게


아니었다. 뭘 하는지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단 말이다.
“……그럼 말이다, 일릭.”

짧은 한숨을 내쉬며 아닉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내 속을 꿰뚫을


듯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일릭…!”

나를 부르는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목소리. 그 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 놀라서 아닉이 나에게 말을 하다가
말았다는 것도 잊었다.
“당신, 정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의 여자.


바로 리리엘이었다.
“리리엘!”

내가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한 그녀를 붙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을 붙잡아 몸을 돌려 세우자, 여자는
울먹이고 있었다.
이미 아닉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몇 놈들이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게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그보다는 내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리리엘을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녀는 울


음 가득한 목소리로 비명처럼 외치며 나를 밀어내려 했다. 길거리
한복판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서 나는 조금 난처해졌다. 그러나
이성을 잃고 울먹이는 그녀를 진정하게 해야 했다. 저항하는 여자의 팔을
재차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진정. 진정해.”

“놔! 놓으란 말야! 이 나쁜 자식!”

“쉬이. 진정해. 리리엘, 진정하라고.”

기어코 그녀를 품에 가두자, 그녀는 품에서 벗어나려고 몇 번이고 내


어깨와 가슴을 밀고 때렸다. 나는 그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을 고스란히
맞아 주며 그녀를 끌어안기만 했다.
리리엘의 저항은 잠시뿐이었다. 이내 저항을 멈춘 그녀는 도리어 내 목에
팔을 감아 끌어안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우는 그녀의 눈물이 내
셔츠에 스며들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우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나쁜 놈…….”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그녀는 욕을 하는 입과는 달리 매달리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나는 자기가 잘못된 줄 알고…….”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날 분명히…!”

리리엘은 발끈해서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매달린 눈이 불안감을 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에 향해 있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내 팔을
잡아당겼다.
“집에 가서 얘기해.”

솔직한 심경으로는 지금 리리엘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밖에서 그녀를 달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그녀의 태도는 아주 강경했다.
내 상황이 너무 좆같아서 절망하느라 그녀를 잊고 있었던 게 실책이었다.
시간이 될 때마다 그녀를 찾아가서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녀에게 순순히 끌려갈 수밖엔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리리- 흡.”
그녀의 집에 도착해서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그녀가 다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뺨을 부여잡고 입을 맞추는 그녀의 몸짓이 절박했다. 그러나
그 몸짓은 유혹이라기보다는 어떤 확인과 안도에 가까웠다.
그녀를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별 수 없이 그녀를 도닥이며
입맞춤에 응했다. 혀를 섞지 않고 입술과 입술만을 감물었다 놓고 턱과
뺨을 모두 빨리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일릭. 일릭…….”

리리엘은 어느새 다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내 뺨을 매만지고 입술을


눌러 내 존재가 실재하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재차 입을 맞췄다. 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 이성을 잃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긴 했지만, 단순한 반가움을 넘어선 반응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는 자기 목이 잘린 줄 알고.”

“…뭐…?”

“광장에 기사들 머리가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어. 자기가 기사는 아니지만


대공 각하의 최측근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고, 또, 내가 자기를 찾아간
날에 그 기사들이 자기가 감옥에 갇혔다고 하는 걸 들어서.”
“무슨 소리야. 천천히 다시 말해 봐.”

리리엘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대공의 부름을 받고 성에 들어간


뒤로 그녀를 찾아오지 않아서, 나에게 화가 나서 용병대 숙소로 찾아
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때 미로스의 기사 둘이 용병대에 방문해서
내가 대공에게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혔다는 얘기를 떠들고 있었다고 한다.
대공이 나를 용서할 리가 없으며, 용병대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소리를 들어서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며칠 동안 불안에 시달리며 나를 걱정하고 있던 중에 오늘 중앙광장에
사형수들의 머리가 효수되었다는 얘기가 돌아서, 내가 사형을 당한 줄 알고
놀라서 뛰어갔다는 것이었다.
“목이 내걸린 게 자기가 아니라서 너무 안도했지만, 자기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니까 계속 불안했어. 그런데 거기서 딱 자기랑 마주치니까


너무 놀라서…….”
그제야 나는 리리엘이 보인 감정적인 반응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사지 멀쩡
하게 돌아온 걸 확인하려고 이곳저곳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던
것도.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내 약점을 쥐고 나를 잡아
두려고 하는 여자였다. 그만큼 나를 향한 마음을 진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약점이 잡힌 입장에서는 나를 향한 애정조차 달가울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몸이… 도저히 그녀를 안을 수가 없는 상태기에 더욱.
“…저렇게 목을 걸어 놓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건가?”

“…응. 특히 대공 각하께서 처음 미로스에 오셨을 때는 광장마다, 시장마다

머리들이 내걸렸었어.”
“반발이 심했을 텐데.”

“하지만 각하는 대단하신 분인걸. 다들 그분을 존경해.”

그가 미로스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피칠갑을 한 역사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특히나 기사들까지 그런 꼴로 효수를 해 놓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사들 중에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도 있기 마련이었고, 아니라 해도 기사
그 자체로 평민과 구분되는 작위가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죄를
저질러서는 주군이 기사에게 사형을 내리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고,
사형을 내린다 해도 반역자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머리를 광장에 내거는
불명예를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공은 말 한마디 잘못 내뱉는 것으로 목을 잘라 버린다. 발설한
것이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고, 대공에 관한 얘기는 쏙 빠져 있지
않았음에도.
단순히 말 몇 마디를 외부에 흘린 것만으로도 사형을 내리고 목을 광장에
내거는데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인다고? 심지어 이전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반발이 없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도리어 미로스의 기사들이 충성심으로
이름 높다는 게 더 믿기가 어려워진다. 공포에 의해 강요된 충성심이라고
하는 쪽이 설명 가능한 소리였지만,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베이즈를 비롯한
기사들이 대공에게 보이던 충성과 애정을 본 처지였다. 그들은 대공이 나를
곁에 둔다는 이유로 나를 시기 질투하지 않았던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충성심.
그것을 넘어선 완벽한 복종. 그리고 제 기사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리라 확신하던 대공의 가벼운 말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도대체 그 미친 변태의 어떤 면모에 반해서
목숨까지 바쳐 가며 따르는지 나는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자기는 무사한 거지?”
“…보다시피.”
“왜 그랬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니. 아니야. 말하지 마. 자기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그냥 말하지 마.”


진정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치는 않았는지, 리리엘은 산만하게 내
입을 막으며 횡설수설했다. 어차피 말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면받은 거지? 용서는 받은 거지?”

“그래. 그러니까 나왔지.”

“아아……. 그럼 됐어. 다행이야. 그럼 됐어…….”

“내 문제는 잘 해결됐으니 걱정할 것 없어.”

“정말 다행이야. 감옥에 갇히고 멀쩡히 나왔다는 사람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자기를 사면하셨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야…….”


도대체 대공은 얼마나 엄청난 공포로 미로스를 다스리고 있단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다른 날 도시의 분위기가 밝고 쾌활한 것도 미스터리다.
리리엘도 말하지 않았던가. 미로스의 백성들은 대공을 존경한다고…….
“용병대에도 조심하라고 해. 특히 요새는 대공 각하에 대해 묻고 다니는

용병들도 있다던데……. 사람들이 앞으로 더 입단속을 해서 정보를 얻기는


더 힘들어질 거야. 아니, 어쩌면 대공 각하에 대해 묻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을지도 몰라.”
“…그래. 전해 두지.”

대답은 했지만 사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 다음 화에 계속

34.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용병대는


대공이 마일을 죽인 거라고 의심한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

대공에게 복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텐데, 계속해서 도시를


들쑤시고 있었다. 제 얘기를 외부에 누설했다는 이유로 기사의 목을 치는
권력자를 상대로 말이다.
대공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더 힘들어진 용병들이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이 잘 되지 않았다. 물론 대공이 범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사건이 그냥 미궁에 빠지는 것이었다. 계약
기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만 버틸 수 있으면 좋으련만…….
파빅이 그걸 받아들일까? 또 내가 받고 있는 변절자 혐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홀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리리엘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용병대에서는 대장 아들이란 사람의 죽음에 대공 각하가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전에 참석했던 회의에서도 그렇거니와, 아까 아닉의 태도를 보면 범인을
대공으로 추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최근 며칠간 감옥에 갇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공에게 시달렸던 나는 용병대의 수사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직 용의선상에
있는지, 제외되었는지도 몰랐다.
나를 변절자로 오인하고 있는 마당에, 아닉이 진짜 정보를 주었을지도
의문이었다.
“…모르지, 나도. 나는 대공성에서 일을 하느라 수사에서는 빠져 있으니까.”

아니, 씨발 아닉이라도 붙들고 얘기를 더 했어야 했는데. 리리엘을 보고


갑자기 너무 당황한 데다가 이 여자가 냅다 뒤돌아 달리니까 따라오기
바빠서 아닉을 내다버려 버렸다. 분명 아까 아닉이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고 했는데…….
“……흐응.”

리리엘은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 얼굴에 나는 갑자기 등줄기가 다 서늘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도
언제 걱정이 어렸었냐는 듯 불만과 투정이 잔뜩 담겼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얼굴과
눈빛이 몹시도 의미심장하여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

넘어갔다. 순식간에 반전된 분위기에 나는 속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일릭.”

“어어.”

아니, 그렇게 갑자기 분위기 잡으며 내 이름을 은근하게 부르지 좀 말아


줄래…?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언제 용병대로 돌아왔어?”

“…어제…….”

“근데 나한테 바로 올 생각은 안 들었어?”

“…했지……. 근데 어제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온 건데.”


“그럼 나 보러 오려던 거였어? 광장에서 잠깐 멈춰선 거야?”

그녀의 집 방향을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리리엘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렇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표정 관리를 잘 하기는 해도 거짓말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여자를 상대로는 더욱 더. 그러나 지금, 위기를
모면해 보겠다며 내 입은 어설픈 거짓말을 토해 내 버리고 말았다.
아, 나 진짜 최악이다. 여자들한테 거짓말하고 살고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가 진짜 어쩌다가 이런 꼴이.
“……거짓말.”

심지어 얄팍한 거짓말이었다는 걸 단번에 간파당해 버리는 건 최악 그


이상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 나는 꼴불견이었다. 차라리 솔직했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를 보러 오던 길이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진심이라고 잡아뗐어야 했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내 태도에 리리엘의 눈빛이 변했다. 입술을
꾹 깨물었던 그녀가 파르르 떨며 외쳤다.
“내 생각이 나기나 했니?”

아니……. 솔직히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다.


“나는 계속 당신만 생각했는데. 당신이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기다렸는


데! 당신은 내 생각 한 번이라도 했어?”
“……리리엘.”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를 걱정하느라 불안해서 죽는 줄 알았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던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그녀 대신 분노에 파르르 떨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나를 걱정했고 또 그간 서운한 게 있었다는 건 알겠지만, 나는 오늘따라
요동을 치는 그녀의 감정 기복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저 위기감에
마음만 다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눈앞의 여자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는 나를 왜 만나는 건데?”

큰일 났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었다. 이대로 그녀의 화를 풀어주지


못한다면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크게 저지를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화를 풀어 주어야만 했다.
“날 좋아하기는 해?”

격앙된 얼굴,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한 사람을 진득하게 만나지 않고 잠자리 상대만을 두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타인과의 감정 다툼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답해! 일릭, 이 나쁜 자식- 흡…!”
아니, 나는 다른 방법으로 회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아 품으로 당겨 안고는, 내 입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저항이 느껴졌으나 더욱 강하게 몸을 옥죄어 안으며,
나는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지 않고 내
침입을 허락했다. 싫다는 듯이 도리질쳤다. 그러나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종내에는 도리어 적극적으로 내 목에 팔을 감아 안으며 내 혀를 빨아
당겼다.
흥분이고 나발이고……. 성심성의껏 입을 맞추며 혀를 얽어맸지만 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금의 야
릇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느끼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으며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입맞춤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만 흘렀다.
“일릭, 일릭…….”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내게 매달렸다.


내게 폭 안겨서 몸을 비비며 울음기 섞인 소리를 냈다.
“이런 걸로……. 이런 걸로 넘어가려 하지 마. 오늘은 정말…….”
“…내가 요즘 만나는 여자는 단언컨대 당신뿐이야.”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까의 어설픈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사실이었다.
다만…… 섹스를 하는-당한다고 표현하고 싶은- 남자가 한 명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이 사실을 알 필요는 없었다.
“아아, 일릭…….”

누구는 나한테 늘 무덤덤하게 보여서 표정을 읽기 어렵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리리엘은 내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간파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만나는 여자가 없다는 말을
그녀는 믿었다. 그게 감격스럽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나도 당신이 좋아…….”

열렬한 고백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졌다.


“달칸으로 가야 한다면 함께 갈게. 함께 있고 싶어, 일릭.”

와, 이거는 진짜……. 진짜 큰일 나 버렸다.


나는 미칠 것 같은 심경이 되어,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릿속은
그냥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본능이 나를 움직여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고양이처럼 가르릉 울며 품에 안겨 오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이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만남과 이별이 쉬운 상대와 서로의 욕구에 충실할 뿐인
관계를 맺는 걸 선호했다. 그래서 솔직히 나를 향한 리리엘의 걱정이나
불안도 고맙고 미안하기보다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만약 알리바이 건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가 나에 대해 진지한 감정을
드러내려고 한 순간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알리바이
를 위해, 용병대가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만 그녀와 관계를 이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달칸까지 따라오겠다는 얘기를 해 버리면……. 내가 자신을 만나는
이유가 알리바이 때문이라는 걸 알고 약점을 잡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내가 그녀와 결혼을 할 마음이 들었다 해도
말이다……. 대공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대공을
생각했더니 양심의 가책 또한 찾아들었다. 대공과 고문에 가까울 정도의
성관계를 맺고 있는 내가, 이 몸으로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게 가당키나
한지도 생각해 볼 문제였다. 물론 그녀도 내 취향의 미인이긴 하지만, 대공
의 찬란한 얼굴도 왠지 모르게 자꾸 떠오르고…….
그런데 그런 걸 생각하면 괜히 나만 괴롭고 답도 안 나오는 거 머리만
아프니까, 그냥 리리엘과 결혼 같은 게 하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알리바이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진퇴양난의 형국이었다. 씨발,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머릿속은
온갖 고민들로 어지럽고도 시끄러워 그냥 이 자리에서 도망쳐 버리고만
싶었다.
“하아, 안아 줘, 일릭…….”

와……. 이거 돌겠네.
적극적으로 내 애정을 갈구하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뒤로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면서도 나는 착실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목줄기를 따라 입을
맞추었다. 그녀 역시 나를 끌어안고 내 등을 긁고 문질렀다. 허리를
쓸어내려 엉덩이를 쥐는 그 의욕 충만한 손길에 나는 난감해 죽을 것
같았다.
이전이라면 내가 무척 즐겼을 적극적인 타입의 애무지만…….
대공이 만지는 것과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걸 이제는 알아 버려서.
아니아니, 씨발. 갑자기 그걸 지금 여기서 왜 떠올려. 대공의 얼굴은 그
해악이 보통 해악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얼굴이 빛이 나도록 잘생겨
버리니까 뇌리에 각인이 되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타이밍에까지
제멋대로 머릿속을 점유해 버리지 않는가.
나는 애써 뇌중에 떠오른 대공의 잘난 얼굴을 털어 버리며 그녀에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집중했다.
지금은 이 한 몸 바쳐 리리엘의 몸과 마음을 녹여야 했다.
오늘처럼 그녀가 감정적으로 나올 때 굳이 결혼 얘기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일단 정신 없게 만드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녀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어서 빨리 흥분을 해야 했다. 이전의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말캉한 가슴이라거나, 가느다란 허리, 보드라운
엉덩이를 만지고 있노라면 아래가 아주 자연스럽게 벌떡…….
자연스럽게…….
자연… 스럽게…….
……좆됐다.

“하아……. 일릭…?”

내가 조금 주무르자 한층 더 흥분해서 발갛게 붉어진 얼굴로 헐떡이는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내 품에 안긴 여자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그런데 나는 온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끌어올리려
했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 도리어 손끝이 얼음장처럼 찼다.
좆됐다.
아니, 좆이 안 선다.
“헉…!”

내가 그 찰나의 순간 머뭇거린 것을 눈치를 챈 것일까. 갑자기 그녀가 내


고간을 덥석 쥐어 왔고 나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놀랐다. 어깨가 다 펄떡
떨릴 정도로 놀라고야 말았다.
“…….”

바지 천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손에 잡힌 내 성기는 힘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원래의 나라면 여태까지의 입맞춤과 서로의 몸을 비비던 애무만으로도
벌떡 서기 충분했으리라는 걸 나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언제
흥분으로 젖어들었냐는 듯 싸늘하게 식는 것을 바라보며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너…… 너무 힘들어서.”

“……옥살이 때문에 힘들었어?”

목소리는 일견 다정했으나 그 안에 잔뜩 돋아난 가시에 속이 다 난자당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기분이었
다 절대로 믿는 투가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인 것이다
. . .

그녀가 몇 번 만지지 않아도 위풍당당하게 벌떡 서던 것이, 지금은 연신


주무르고 있어도 벌떡은커녕 움찔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어, 힘들었거든…….”

씨발, 설 리가 있느냔 말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 대공이 정말 물밖에 안


나올 정도로 쥐어 짜냈는데. 심지어 요도에 막대기를 처박고 괴롭힌 바람에
아직도 거시기가 안에서부터 욱신거린다. 혈뇨를 보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였다고, 내가. 지금 그녀가 만지는 것만으로도 평소와는 달리
욱신거리는데, 내가 세울 수가 있겠냐고…….
그러나 리리엘은 그런 내 속을 알 턱이 없었다. 물론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야릇하게 생긋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기운을 북돋아 줘야겠네.”

도톰한 입술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핥아 내며…… 내 바지를 잡아 내렸다.


“리리…!”

나는 미처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고, 바지가 쑤욱 허벅지까지 내려가고야


말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에 꽂혔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주아주 무겁고, 싸늘한 정적이 훤하게 드러난 내 아랫도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가… 왜…….”

“…….”

“털이…….”
씨바…알…….
들키지 않도록 얼마나 애를 써 왔는데. 그 누구도 내 거시기 주변이
민둥민둥해졌다는 걸 알 수 없게 내가 진짜 씨발, 소변 보고 싶은 것까지
참아 가며 개고생을 했는데, 내가 씨발.
“당신…….”

익히 전쟁터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당혹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솔직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떻게 수
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멘탈도 수습이 안 되는데
리리엘을 어떻게 달래고 이 민둥산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털이 없으니까 1도 흥분하지 않은 게 더 잘 보여 버리니까 더
당황스러웠다. 뭐라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밖에… 없다면서…….”

아, 아니다. 오해다. 이건 다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가 하필 그 부위에……


그따위 변명을 한때 이유랍시고 생각해 놨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니 당혹감에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리… 리리엘.”

그녀 이름 석 자를 겨우 말했는데 그마저도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게다가


애써 불러 놓고선 백치처럼 뒷말을 잇지도 못했다. 이을 말이 없었으니까!
“……너.”

늘 나를 ‘자기’라고 부르던 여자가, 털 한 오라기 남지 않은 내 중심에서


시선을 떼고 낯선 호칭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나는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시뻘겋게 불을 뿜는 것을 보았다. 내가
경험해 본 중 가장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살기가 전신을 난자해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나가, 이 개새끼야!”

철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뺨이 휙 돌아갔다. 자칫 잘못하면 모가지가 꺾일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서슬 퍼런 외침과 날아오는 물건 세례에, 나는 무어라 변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지춤을 붙잡고 줄행랑을 쳐야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35.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인


생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 .

발이 향하는 대로 터덜터덜 걸으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리엘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뒤 정처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무엇에 절망하고 무엇에 우울감을 가져야 할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지경이다.
리리엘의 분노한 얼굴이 망막에 붙은 듯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화가 난 건 처음 보았다. 나에 대한 경멸이 하나 가득 담겨 있던 눈은 내가
그녀를 방치한 채 다른 사람과 놀아났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내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방법도 거지 같았다.
다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봐 버렸다. 털 한 올 없이
민둥민둥해진 내 거시기를 말이다…….
용병대 놈들에게 들킨 게 아니라 여자에게 들켜서인지 수치심이나
굴욕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게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 지금 이 좆같은 상황에 뭐가 위안거리가 될 수가 있겠어. 털만
없는 게 아니라 한 번 세우지도 못했다는 것 또한 충격적이었다. 어제
하루를 온전하게 쉬었는데도 회복이 되지 않았던 것도 어쩐지 나에겐
상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고개 숙인 남자라는 걸 타인이 알아챘다는 것
또한 나를 몹시도 울적하게 만들었다. 털이 없으니 맥없이 축 처진 게
얼마나 잘 보이던지, 씨발…….
마음이 이토록 아픈 와중에 얼굴도 아팠다.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아주
이빨을 털어 버릴 기세로 후려치더라. 고개가 다 휙 돌아가지 않았던가.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맞았나 싶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나를 힐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몰골이 형편없음에 틀림없었다.
“이런, 씨…….”

길거리의 상점 중 거울 가게 바깥에 진열된 거울을 무심코 보았을 때, 내


얼굴에는 정말로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광대뼈 언저리에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제법 깊은 상처가 움푹 패어 있었다. 그 주변은 얻어맞았다고
광고라도 하듯이 손바닥 자국대로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어쩐지 만져
보니 피가 묻어나면서 따끔따끔 쓰라리더라니.
어딜 봐도 여자한테 맞은 몰골이었다. 내가 여태 숱한 여자를 만났어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런 몰골
로 돌아다니게 된 것은 처음인지라 더 낯이 뜨거웠다. 너무
쪽팔리니까 지나가며 나를 힐끔대는 사람들한테 뭘 보냐고 시비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국 그 몰골이라는 걸 깨닫고 더는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용병대 숙소로
돌아왔다. 식사를 걸렀지만 식당에는 들르지도 않았다. 내 꼴을 보면 꼭
한마디씩 보탤 놈들이 많아서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나는 1층에서 용병대 놈들에게 붙잡히고야
말았다. 어쩐 일인지 용병 놈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던 것이다.
“너 얼굴 왜 그러냐?”

몇몇 놈들이 나를 보고 다가왔다. 이전에 아닉이 나한테 한 얘기가 있어서


나 때문에 모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던 것도 잠시, 다가온
녀석들의 스스럼없는 태도를 보고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연기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놈들은 변절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가온 놈들 중에는 이전에 대장에게 대들었다가 한 대 크게 맞았던
토비라는 놈도 섞여 있었다. 제 성질 못 이겨서 대들다가 파빅한테 당했던
주제에, 지금 말하는 말본새를 보아 그다지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와, 네가 여자 뒤꽁무니 쫓아 아닉을 버리고 가 버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자한테 맞았냐?”
“전에 그 여자지, 왜 그, 숙소까지 찾아왔던 여자. 아주 예쁘던데.”

“금발? 그 여자야?”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내가 만나는 여자에 관심이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들 여자가 좋으면 나가서 만나든지 말이다.
“뭐 그리 관심들이 많아.”

“왜 맞았어? 너 요령 좋아서 맞고 다니지는 않잖아.”

“맞아. 여자들은 그렇게 많이 만나는 주제에.”

“뒤로 호박씨나 까는 새끼.”

“…아니, 이 새끼들은 대체 날 뭘로 보고 있었던 거야?”

내 평판이 이 정도 호색한일 줄은 나도 몰랐다. 여자들을 시끄럽게 만난


것도 아니고 잠자리만 하는 만남을 조용히 가졌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런
이미지가 되어 있단 말인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특히 토비
의 무리는 나랑 그다지 어울리는 놈들도 아니었다. 나는 주변을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고, 도리어 신경 쓰게 만드는 놈들을
싫어했다. 그러니까 성질머리를 제어하지 못하고 분란거리를 만드는 토비
놈과는 친하게 지낼 리가 없었다.
뭐, 체즈번녀석은 토비와 가끔 노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놈을 길게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아는 척
떠드는 건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하긴 뭐, 여자한테만 먹히는 건 아니잖아? 마일 새끼도 뭐-”

놈이 마일을 운운하며 개소리를 지껄이지만 않았더라도, 하던 대로 대강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을.
놈의 입에서 마일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또 마일 새끼가 과거 나에게 해
버릇하던 종류의 농지거리가 튀어 나왔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컥, 커억, 헉…!”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목을 조르고 있었다. 요 며칠


고생을 좀 해서 몸이 허하다 싶었는데 어디서 그렇게 힘이 샘솟았는지 놈을
아주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었던 것은 아닌지라, 나는 정신을 차린 즉시 녀석을
놓아주었다. 주변에서 나를 말리려던 놈들이 내가 쉽게 손을 떼 버리자
도리어 다가오지 못하고 멈칫하는 게 보였다.
“너, 이 새끼!”

“전에 대장한테 얻어터진 걸로는 부족했냐?”

“이익…!”

“아니면 뭐, 너도 박아 줘?”

“……이 새끼가 지금 날 뭘로 보고!”

“근데 어떡하냐? 넌 어딜 봐도 내 취향이 아닌데. 나도 꼴려야 박을 거

아냐.”
이런 저급한 말싸움에는 소질이 없었고 말다툼을 하느니 무시하고 피해
버리는 나였지만, 사실 지금은 속에서 피어오르는 짜증을 누를 길이
없었다. 아까 리리엘에게 뺨을 맞고 여기서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나는 상당히 짜증을 표출하고 싶고 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새끼를 주
먹으로 못 때리면 말로라도 때려야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이다.
“너, 너, 이 씨발, 이 백정새끼가…!”

“우리 중에 백정 아닌 새끼가 있나?”

용병한테 백정이 뭐 그리 대단한 욕이 된다고,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가 먼저 개소리로 사람을 자극해 놓고,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씩씩거리는 놈을 보며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놈이 덤벼
오면 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딱 한 대만 패 줄 요량이었다. 배도 한번 걷어찰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다.
그러나 씩씩거리던 녀석은 끝내 내게 달려들지 않아서 나를 아쉽게
만들었다.
“씨발놈이 대공 밑에서 일 한다고 이제 옛 동료들은 아주 우스운가 보지?”

대신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으로 도리어 사람 맥을 탁 풀리게 만들었다.


“……하…….”

놈을 밟아 줄 생각에 부풀었던 마음이 단번에 푸시식 쪼그라들어 입에서


한숨이 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도 멍청한 소리를 하니까 놈과 맞설 의지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저런 멍청한 걸 계속 상대하고 있는 게 웃길 뿐이었다. 그냥 피곤했다.
“야, 야. 토비, 그만해라. 일릭 너도.”

내 안에 가득했던 짜증과 분노를 대신해 피로감이 자리를 잡았을 때에야, 지


켜보던 놈들이 우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미 전투 의지를 상실한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토비놈 역시 시끄러운 개처럼 짖기나 했지, 나한
테 덤빌 마음은 없었는지 입을 다물고 쭈그러졌다.
토비녀석이 내게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기에, 나는 몸을 돌려 한 남자를
찾았다. 이 소란에 끼어들지 않고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로 이쪽을 묵묵히
관조하고 있던 남자, 아닉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아닉은 내 뺨을 힐끔 쳐다보았다. 부어오른 뺨이나 상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졌다.
“다른 놈들도 다 토비처럼 생각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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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너도 아까 그런 소리 했잖냐.”

“토비 녀석이야 너 부러워서 그러는 거 아니겠냐. 너 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그런 놈을 길게 상대하고 그래.”
아닉의 모호한 화법에 나는 순간 말려들 뻔했다. 하지만 아닉의 말은 내
질문에 정확한 대답 없이 화제를 돌려 버린 것에 불과했다. 아까는 한껏
분위기를 잡아 놓고선, 이제 와 없었던 일인 양 구는 게 나를 몹시도
찝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진지하게 말했다.
“난 아니다.”
“…….”

“내가 대공한테 용병대 내부 사정 중 뭘 얘기를 하겠냐. 마일 살인범 찾는


거? 내가 그거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서 전달을 했겠냐고.”
“그래…. 넌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지. 아까는 네가 그렇게 가 버릴 줄 모르고

일단 던져 본 소리다.”
한번 찔러 본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미심쩍게 놈을 보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 해 보이더니 물었다.
“근데 아까 그 여자가 마일 죽은 날 네가 만났다는 여자야?”

“그래. 체즈번이 찾아가서 확인했다고 하던데, 전달 못 받았냐?”

“아아, 그랬지. 그럼 됐고.”

나는 아닉이 나를 대강 상대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에게서 진실을 감추면서 피상적인 얘기만 해대는 것이다. 나는 그가
아직도 나에게 변절자 의혹을 씌우고 있음을 확신했다.
“아까 하려던 말은 뭐였어?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끊겼던 말 말야.”

“그거야 뭐……. 그날 여자를 만난 건 사실이냐고 확인하려 했지. 그런데

체즈번이 확인까지 했다면야.”


……아니, 나에게 씌워진 건 변절자 의혹이 아니라 마일 살해범 의혹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리리엘에 관심을 갖는 그에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리리엘과의 사이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는 말이다.
만약 지금 용병대 사람들이 찾아간다면 리리엘이 무어라 대답할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은 차라리 나았다. 만약 내가 그날 만난 시각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장소에 대
해 거짓말을 해 달라 했던 얘기를 하기라도 한다면……. 의심의
화살은 단번에 나에게로 향하게 될 게 틀림없었다.
아니, 씨발 그렇다고 리리엘을 죽여서 입을 막을 수도 없지 않나.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녀를 죽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가 죽는다면 역시나
내가 의심 받을 테니 말이다.
어떡하지. 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대공이 그래도 나와 약속을 하고
계약을 맺었으니 나를 도와주겠지? 믿어도 되겠지? 지금 믿을 건
대공뿐인데……. 아니, 씨발 그럼 그 변태 짓거리를 언제까지 당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내 머릿속이 온갖 고민과 상념들로 미친 듯이 돌아가던 때였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굳은 얼굴로 파빅이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용병들이
모여 있던 이유를 몰랐던 나였다. 갑자기 내려진 소집 명령에, 그 누구도
이유는 모르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파빅의 등장에 용병들의 술렁거림이
잦아들었다. 누가 보아도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빅은 하나하나 우리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번뜩거렸다.
“교황이 성명서를 냈다.”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의


성명서라는 단어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뒷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야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미로스는 당장 이전 전쟁에서 강탈한 베르바니 지역을 세리포브에

반환하고 영토 침탈에 대한 사과와 보상금을 지불하라고 말이다. 대륙의


여섯 국가가 교황과 함께 뜻을 모은다고 하더군.”
미리 대공의 집무실에서 알게 되었던 이야기였다. 대공은 이보다 며칠 앞서
교황이 다른 국가들의 뜻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듯이 보였는데, 결국에는 교황이 성명서를 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대륙의 여섯 국가와 함께 세리포브의 손을 들어준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 용병들이 무지렁이라지만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놈들은 적어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중에는
없었다 .

장내가 순식간에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살기등등하게 부풀어


오른 긴장감을 터뜨리며, 파빅이 입을 열었다.
“전쟁이다.”

***

연합군이 베르바니로 오고 있다. 미로스라는 작은 공국이 대륙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달칸 용병대는 미로스의 편에 서기로 했다. 파빅에 따르면
달칸에 요청한 용병의 수가 이전 전쟁보다 훨씬 큰 규모인 듯 했다. 달칸만
아니라 다른 용병대에서도 용병들을 끌어모으고 있을 터. 대공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재력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코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진 부와는 무관하게
미로스는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나라다. 베르바니의 반환을 위해 결성된
만큼 연합군은 우선적으로는 베르바니 주변에 집결하겠지만, 그 군대가
미로스 본국으로 방향을 돌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사방에서
미로스를 에워싸고 공격을 해 온다면, 아무리 미로스가 많은 용병들을
고용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6:1이라는 점, 그리고 저쪽은
교황을 등에 업고 있어 명분까지 갖춘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쪽이
시작부터 열세인 싸움이었다.
그래서 내 기분이 더 울적해졌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도리어 혈관 속에 피가 빠르게 도는 듯이 손끝까지 짜릿해지며 기분 좋은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쟁. 전투. 그건 내가 늘 하던 것이었다. 내게는 익숙하면서도 가장 쉬운
일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답 없는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느니 무념무상으로
검이나 휘두르면서 사는 게 백 배 천 배는 나았다.
또 전쟁 이후에는 그 이전의 것들이 모두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다들
죽다 살아나는데 파빅이라고 제 아들 죽은 것에 계속 연연하며 사람들을
갈굴 수는 없을 것이다. 뭐, 그 전쟁에서 파빅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물론 파빅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지만, 전쟁
이후의 일이야 지금 생각해서 뭘 하겠는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리리엘 때
문에 머리가 아프던 차였는데, 차라리 전쟁이 터져서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며칠 뒤면
미로스를 떠날 테니까.
미로스를 떠난다. 다른 임무를 위해 갔던 라도반 일행도 돌아와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 말인 즉 나 역시 전쟁에 합류한다는 의미리라.
그러니까 미로스를, 대공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전쟁~ 전쟁~ 주변에서 다른 놈들이 나를 미친놈 보듯이 했지만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무기를 점검했다. 용병대에는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감도는데 어제부터 나만 신이 나 있으니 나를 미친놈 취급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 근데 신이 나는 걸 어떡해.
그렇게 혼자 즐거운 마음으로 내 검을 손질하고 있을 때였다.
“야, 일릭! 나와 봐!”

용병 중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뭔데.”

“성에서 사람이 왔어! 너 찾는다고!”

- 다음 화에 계속

36.

아마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내 인상은 뭐 씹은 얼굴로 팍 구겨졌을 것이다.


와. 사람 기분이 이렇게 한순간에 개차반이 될 수도 있구나.
전쟁 소식에 한껏 들떴던 마음이 구멍 난 풍선처럼 푸쉬식 쪼그라들었다.
손에 쥐고 애지중지 다루던 검을 내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맥이 픽 빠져
버렸다.
대강 검을 검집에 처넣고는 허리춤에 매달고 몸을 일으켰다. 어제 전쟁
얘기를 듣고 푹 잔 덕분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그렇게 몸이 가벼울 수가
없었는데, 성에서의 소환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서두르라는 채근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다지 서두르고 싶지가 않았다.
터덜터덜 발을 끌며 홀을 나섰다. 대공이 이 시점에 나를 왜 부르는지가
의문이었다. 용병 소집은 물론 미로스 자국의 군대도 소집해야 했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베르바니
로의 보급을 확보하고 연합군에 맞설 전략도 짜야 할 중요한
시점인데 말이다.
대공은 교황이 어떻게 나올지 미리 예측했음에도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전쟁에 이기기 위해 불철주야로 준비를 할
것이지 그 와중에도 날 괴롭힐 생각이 난단 말이야? 대공이 설마 다른
임무를 내리기 위해 나를 부른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미로스의
사람들이 대공을 얼마나 믿고 신임하건 간에 내게 대공은 그저 색에 미친
정신 나간 취향의 변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 아름다운
얼굴이 아까운 미친놈이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최대한 늦게 걸었으나 문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나는 왜 나를 부르러 온 놈이 그렇게나
서두르라며 나를 독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얼굴이 익숙한 하인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던 것이다.
이런 미친……. 나는 혹시라도 다른 놈들이 볼까 봐 등 뒤로 문을 황급히
닫았다.
아니, 씨발 지금 나 타고 오라고 마차를 보낸 건 아니겠지??
“각하께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하인은 이전에도 한 번 왔었던 40대의 말을 할 줄 아는 쪽이었다. 그가


나더러 타라는 듯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나는 목에 커다란 가시가 턱
걸린 것처럼 컥 하는 얼빠진 소리까지 내 버렸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대공의 기사들이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용병 놈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데 마차는 대체 왜 보낸단 말인가.
혹시 주변에 다른 놈들이 이 민망한 장면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여, 고개
가 휙휙 돌아갔다.
그런데 내 시야에 뜬금없는 것이 들어왔다.
우선은 아닉이었다. 그가 아지트 건물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금빛의 머리카락이 그를 뒤따른다…….
“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잠깐이나마 힐끔 본 체구가 내 눈에 익숙했다. 스치듯 지나간 옆모습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 눈동자는 분명
푸른빛이었으리라.
그녀는 리리엘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서두르지요.”

내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는 것을 알아챈 하인이 말했다. 그제야 내


앞에 대공의 하인이 마차 문을 열고 서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지만
여전히 내 정신은 리리엘이 사라진 골목 쪽을 향해 있었다.
“잠시만.”

평소라면 용병 따위가 대공의 하인을 무시하는 짓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이 온통 팔려 버려서 리리엘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화를 내며 나를 집에서 내쫓았던 그녀였다. 만약 나를
찾으러 왔다면 곧장 용병대 문을 두드렸을 텐데, 옆 골목에서 무얼 한단
말인가.
내가 본 게 맞다면, 그녀를 앞서 골목으로 들어간 남자는 바로 아닉이다.
드러내 놓고 나를 의심하던 아닉.
그러나 나는 차마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일릭.”

리리엘보다도 더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내 뒤를 따라붙었기 때문에.


“아…!”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붙잡아 나를 돌리는 손길에는 어떤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나는 그에 자그마한 저항 하나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 몸이 이미 내 통제력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이끌려가며 다리가 움직였다. 그대로 마차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차 안이었다. 이전에 탔던 대공의 마차보다
실내가 좁고 어둑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알아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억…!”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릭.”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입가에 몹


시도 불길해 보이는 매끄러운 미소를 담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면, 내가 너무 섭섭한데.”

가벼운 어투였으나 그 말을 나는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것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꼭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호박색 눈동자 역시 어둠 속 촛불처럼 요요하게 빛을
낸다.
마차 안에는 대공이 타고 있었다.
“일릭?”

그가 재차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나는 흠칫 놀라며 이 마차 안에 대공이


앉아 있는 것이 현실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얼마나
넋을 빼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어느새 마차가 출발했다는 것도
몰랐다. 바깥에서 다그닥다그닥 말편자 소리가 나며 마차에 흔들림이
전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직 그 얼굴에서 멍이 완전히 가신 것도 아닌데 아름다움은 가시질
않았다. 아무튼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었다.
“각… 각하께서 어쩐 일로 용병대 앞까지.”

“데리러 왔지.”

컥……. 설마 했던 대답을 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농담을 한 거겠지…? 일이 있어 성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앞을 지나가게 되어 나온 김에 나를 태워 가는 것일 거다. 다만 그가 늘
그렇듯 사람 기분이 좆같아지도록 말을 하는 것 뿐.
“그런데 날 보고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전혀 기뻐하는 내색이 아니던데.”

아니 씨발 내가 왜 너를 보고 기뻐해야 하는데요.
그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으나 필사의 인내심으로 나는 말을 삼킬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럴 인내심이 남아 있다는 게 나 스스로도 내심
신기하기까지 했다.
“…오실 거라고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탓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을 귀신 보듯 보나.”

아니 환장하겠네.
대공은 짐짓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해 보이는 것으로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 진짜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원래 그렇게 말주변이 좋은 놈이 아니었다. 대공이 아니라 상대가
여자였다면, 말 몇 마디로 풀어주는 대신 대뜸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걸로 통하지 않는다면 관계를 정리해 버리는 방법으로 살아왔던
인생이었다.
하지만 대공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상대로 절대 내 쪽에서
먼저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짓을 허락 없이 저지르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에게 내가 먼저 격정적인
입맞춤을 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아주 내 꼴도 보기가 싫은 사람처럼 말야.”

…아니 본인 입으로 정답을 말해 버리니까 내가 표정 관리가 잘…….

“대공인 내가 부르는데도 여자 뒤꽁무니 쫓아가기 바쁜 것도 괘씸한걸.”

그걸 봤단 말인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아니, 씨발 내가 왜 본처를 두고 부정을 저지른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가장 먼저 앞선 것은 리리엘에 대한
걱정이었다. 괜히 나와 얽혔다는 이유로 리리엘이 해코지를 당하는 게
아닐는지 덜컥 겁이 났다. 광장에 내걸려 있던 참혹한 머리들도 떠올랐다.
다시 생각을 해 보니 리리엘이 나에 대한 말을 용병대에 발설하기 전에
대공이 제거해 주는 게 내게는 이득인 것 같긴 했지만……. 나 살자고 그
여자를 희생시킬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차라리
내 치부를 들킨 순간 내 손으로 죽여 없앴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면 어쩌면 그렇게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리리엘이 아니었다.


가당치도 않게 토라진 체를 하고 있는 저 대공이 커다란 문제였다. 대공이
기분이 언짢아질 때면 어디로 튈지 나는 이제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요도에 막대기가 꽂히는 것보다 더한 꼴을 당할까 봐 두렵다. 이번에도
그러고 싶어서 괜한 트집을 잡으며 심술을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가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위기감만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뿐.
머리가 굳어 버린 와중에 입이 어쭙잖은 헛소리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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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를 보고 놀란 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뭐.”

“그러니까 그게.”

“그게?”

에라이, 씨발 나도 모르겠다.
위기의 순간 내 입은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불쑥 내뱉어 버렸다.
“너무 잘, 생기셔서.”

“…….”

그 말을 내뱉고 난 뒤 곧장 후회막심이었다. 정말 멍청한 소리였다. 남자가


남자한테 잘생겼다는 소리를 대체 왜 한단 말인가. 그리고 대공이 그런
소리 뭐 한두 사람한테 들었겠어? 칭찬이라고 들었을지도 의문이었다. 괜히
또 트집을 잡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

대공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려다가


웃음을 참는 듯한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내 낯이 다 벌겋게 달아올랐다.
씨발, 꼭 이런 반응을 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해야겠냐고.
“잘생겼다라.”

대공은 진정 악취미였다. 사람이 민망해 죽겠는데 꼭 그렇게 말을 반복하고


그러는 것이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라, 심지어는 더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어디가?”

“……얼굴이요….”

“얼굴만?”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 어떻게 잘생길 수가 있지.”

씨발… 그 머리카락을 하고 얼마나 많은 칭송을 받으며 살아왔을 텐데


모르는 척 의뭉을 떨고 앉았어.
가증스러운 작태에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으나 나는 애써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고르고 골랐다. 최대한 무난한 단어들을 찾느라 그 와중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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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다 벌게지고 난리인데, 대공은 나를 비웃듯이 다시


한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씨발, 그래. 너도 내가 하는 소리들이 어처구니가 없겠지. 씨발 잘생겼다는
소리 뭐 한두 번 들었겠어? 그런데 나처럼 이렇게 커다랗고 시커먼
사내놈이 그런 소리 하는 건 처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이없고 징그럽고
그렇겠지, 씨발…….
애써 쥐어짜 내어 겨우 내뱉었건만. 내가 한 소리가 어지간히 황당했는지,
연신 꼬투리를 잡던 대공이 내게서 시선을 휙 돌려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빛이 투과되는 얇은 커튼이 쳐져 있어서 바깥이 보일 리 만무하건만 무엇을
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를 꼬고 얼굴을 손으로 짚은 채, 그 마차가
멈춰 설 때까지 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뭔가 미묘하게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마차는 대공의 성 안까지 들어가 본관 앞에서 멈췄다. 하인이 문을 막
열었을 때였다.
“잠깐.”

내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려 했는데, 내가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이 대공이


읊조렸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열리던 문이 움찔하며 멈추었다.
대공이 별다른 지시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문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마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이리 와.”

마차에서 내리는 대신, 대공이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손가락을 까닥여


나 역시 그 쪽으로 상체를 가까이 해야 했고,
“흐읍…….”

문이 닫힘과 동시에, 어쩌면 닫히기도 전에 대공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피할 수가 없었다. 아, 물론 알았어도 감히
피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내 턱을 가볍게 그러쥔 그는 몇 번쯤 쪼듯이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으나 시작은 그리 질척하지 않고 가벼웠다. 쪽, 쪽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여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고막이 가려운 기분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입
맞춤은 섹스를 할 때 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입술을 감물어
… .

살짝 빨아 당기다가 혀를 살짝 밀어 넣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내 혀를


건드리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맞닿아 있는 그의 입가가 웃고 있는 것
같아서 솔직히 더 미칠 것 같았다. 자꾸만 소름이 끼치면서 귓가가
오싹거렸다.
반쯤 감은 내 눈앞에 대공의 눈이 너무 가까이 보여서 더 죽을 맛이었다.
입맞춤을 하는 그가 눈을 감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속눈썹이었다.
코앞에서 팔랑거리는 속눈썹은 내 얼굴에 닿을 듯이 길었으며 숱이 많아
풍성했다. 그가 미남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속눈썹까지
이렇게 예쁠 줄이야……. 세상 아름다운 속눈썹이 또 너무 나와 거리가
가까워서 다시 속이 오싹거렸다.
턱을 쥐고 있던 대공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을 때는 아주 소름
돋음의 절정이었다. 나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을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흠칫흠칫 떨고야 말았다.
아니, 씨발 이 새끼는 아까까진 자기가 어디가 잘생겼냐며 꼬치꼬치 캐묻고
꼬투리를 잡아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사람 간지럽게
입을 맞추고 지랄…….
“……이 상처는.”
대공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는 내 코앞에 있었고
입술은 금방이라도 스칠 듯이 가까웠다. 나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을 신경 써야 하는지,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젖은 입술을 신경 써야
하는지 혹은 내 상처를 쓸어 보는 손가락을 신경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뜨인 눈. 그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이었다.
“그냥… 그냥 좀…… 긁혔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손톱에 긁힌 상처였으니까.


다만 대공이 그저 내 부주의로 나뭇가지 따위에 긁힌 거라 오해해 주기를
바랐다.
“손톱에 긁히는 게 그냥 일어날 일인가.”

…물론 다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내 뺨의 상처를 언제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제가 지금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는 상처가 손톱에 긁힌


자국이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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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까.”

낮은 음성이 대공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순간…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소름이 전신을 휩쓸었다. 나는 순간 내 몸속에서부터 한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맞춤으로 약간 더워졌던 실내 공기가 거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 다음 화에 계속

37.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다.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던가. 죽여서 입을 막는 것. 그것도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대공이 손을 써 준다고 하니 어쩌면 내게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내가 마일을 죽인 게 들통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것이 그가 나에게 약속한
조건이었으니, 리리엘을 죽이는 것 역시 약속을 지키는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쩌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서 몸을 던져 온 여자를 그런 식으로
죽게 한다는 게 영 내키지가 않는다.
문득 대공이 피식 짧은 웃음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내가 굳어진 사이 그의 입술이 쪽, 다시 한번 내
입술에 닿았다. 마치 도장을 찍듯이 입술이 맞닿아 뭉개지도록 꾸욱 내
입술을 누르고 떨어져 나갔다.
“농담이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아난다. 그게 귓가에 감기는 대공의 낮은 음성 탓인지,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입맞춤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징그러울 정도로 간지러운 감각이라 손끝이 절로 움찔댔다.
“이런 일로 내 백성을 죽일 수는 없지.”

중얼거리듯이 읊조린 뒤 대공은 내 뺨을 놓아주었다. 그 대신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를 미는 손에 나는 상체를 뒤로 할 수밖엔 없었다.
대공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말했다.
“별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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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 있는 분들은 차후 다시 오도록 할까요.”


“기다리라고 해.”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손수 마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를 덮쳤다. 내 몸을


마차 벽으로 몰아붙이며 다시 입술을 붙여 왔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타액에 질척질척하게 젖은 혀가 잇새를 가르고 깊이 들어왔다. 예기치 않은
접촉에 화들짝 놀란 사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소환했을 때 당연히 섹스를 할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대공과 나의 관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공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마치, 꼭, 마차 안에서 일을
치르기라도 할 것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대공을 밀어 버리고 싶어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미약한 저항을 느낀 것인지 대공은 내 몸을 짓누르듯이 벽으로
밀어붙이며 격렬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내가 예상한 게 맞다는 듯이 그의 손이 거칠게 내 하의 앞섶을 쥐어뜯었다.
“각, 각하, 여기, 여기서…….”

“밖에 있는 것들이 아는 게 싫다면 입 다물어.”

무엇이 대공을 갑자기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내 상처 이야기를


하기 전만 해도 세상 달착지근하게 입을 맞추던 인간이 왜 이렇게 여유
없이 나를 밀어붙인단 말인가.
그는 그만둘 기세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 관계를 들키게 된다면 계약을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했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를 떠올리면 감히 그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저항은 정말 무의미했다는 거다. 괜히 아픈 꼴이나 당하고 씨발…….
권력이라는 게 그런 거였는데, 씨발.
내가 차마 그를 만류하지 못하는 사이 내 바지와 속옷이 벗겨져 나갔다. 내
다리를 벌려 놓고 그 사이에 몸을 끼운 채 나를 밀어붙이며 대공은 반쯤
곧추선 제 성기 위에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오일을 뿌리고는 내 손을 제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그 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씨발… 이 와중에 입으로 세우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위안 삼아야 하나.
그가 다시 내게 입을 맞추는 동안 나는 그의 키스 세례를 받으며 손 안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들어온 대
공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반쯤 발기했을 때에도 묵직하던 것이
내 손에서 점차 크기를 키워 가기 시작했다.
내 하의를 벗긴 이상 그가 어디까지 할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나는 부디 그가 내 손 안에서 끝까지 가기를 기도했다. 그 염원을 담아 진짜
열심히 흔들었다. 오일이 묻어 미끌미끌한 기둥을 단단히 쥐고 손을
바지런히 오르내렸다.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고환을 주무를
때면 내게 입을 맞추는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만.”

대공이 속삭였다. 그는 내 손을 떼어 내고는, 떼어 낸 내 손을 발기는커녕 축


늘어져 있는 내 성기 위에 올렸다.
“이제 그대 좆을 세워 봐.”

아니 대체 언제부터 내가 세우고 싸는 거에 관심 그렇게 가졌다고, 빨리


하고 끝낼 것이지 나까지 세우라 마라 하는 걸까. 지금 몸 상태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다.
전날 리리엘을 애무하면서도 움찔도 하지 않았던 몸이었다. 대공의 키스
따위로 섰을 리가 만무했다. 그 전에 대공에게 워낙 시달렸던 탓에 솔직히
지금만 아니라 이번 주 내내 발기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혈뇨는 안 나오던가?”

와, 대공 인성은 진짜 대체 어디까지냐. 내 요도에 막대기를 쑤셔 넣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 소변 볼 때 피가 났는지를 묻고 있나. 심지어 묻는 낯에는
나를 놀리는 게 분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다.
그러나 물론 내가 그 분노를 대공에게 표출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권력과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

질문에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내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그가 그 지랄맞게 큰 성기를 내 아래에 무식하게 쑤셔 박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성기가 충분히 미끄럽게 젖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찢어졌을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풀어 준 것도 아니고, 씨발…!
“후윽, 윽…!”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와서 나는 급히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마차가 계속 움직이고 있어 안의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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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

내 신음소리가 흘러나간다면 그건 정말 수치스러워서 자살할 일이었다.


“!!”

반 정도 들어왔던 대공의 성기가 단숨에 뿌리까지 퍽 들어온 순간에도,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입을 막은 손을 꾸욱 눌렀다.
그런데 대공의 인성은 늘 내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내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자위해 보라니까.”

야, 이…… 개새끼야……!
“…!”

내가 머뭇대는 사이, 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퍽 소리를 내며 다시 내 안을


꿰뚫었다. 대공은 내 골반을 틀어쥔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뒤로 몸을
물렀다가 허리를 튕길 때마다 내 눈앞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내 허리가 같이 튕겨졌다.
몸에 열기가 돌았다. 마차 안이 더워서. 자꾸만 밀어붙이는 대공에게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와서. 그 흥분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몸에 피가
빨리 돌고 살갗 아래가 간질간질해져 왔다. 배꼽 안쪽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흐으, 읍……!”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왼손으로 입을 다시 막았다. 오른손으로는 성기를
말아 쥐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손 안에 쥔 내 성기가 어느새 발기해 있었던 것이다. 전혀 설 것 같지가 않은
내 성기가. 리리엘이 손으로 쥐어 문질렀을 때에도 묵묵부답이던 내
거시기가…!
“아…! 읍…, 흡……!”

대공이 안쪽을 자극할 때마다 입에서 신음이 터지려 했다. 눈앞에 번쩍번쩍
안화가 피면서 열기가 정수리까지 치솟는다. 삽입은 과격했지만 이어지는
대공의 추삽질이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 도리어 정신이 아득해 올 정도로
쾌감이 차고 넘쳤다.
별관이 이렇게 멀었던 것일까.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덕분에 말발굽 소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마차가 흔들렸다. 그 안에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에게
짓눌린 내 몸 역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발기한 내 성기 역시 내
손안에서 잔뜩 흔들렸다.
“절경이로군.”

내 골반을 쥔 채로 허릿짓을 이어가며 대공이 속삭였다. 마차 안에서


다리를 벌린 채 사내를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성기를 흔드는 내 모습을 그가
고스란히 보고 있음에 수치심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공의 성기가 안을 꿰뚫을 때마다 가파르게 몰아치는 쾌감에
허리가 덜덜 떨렸다. 금방이라도 사정하고 싶어서 성기를 오르내리는 손이
자꾸만 빨라져갔다.
대공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허릿짓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마침내는 내 입을 가로막고 있던 손까지 떼어 내 붙잡고는 그 대신 제
입술을 붙인 순간. 입 안 가득 밀려들어 오는 그의 혀를 나도 모르게 빨아
삼키며 나는 절정에 오르고야 말았다.
마차가 어느 결에 멈춰 섰는지도 모르겠다.
대공이 사정을 하고 내게서 떨어져 나간 뒤에야 나는 마차가 멈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내 몸이 계속 흔들렸으니 마차가 흔들리는지
멈췄는지 알 턱이 있겠는가. 대공이 강요하는 쾌락에 그런 걸 알아차릴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열기로 흐릿해지려 하는 의식을 애써 붙들며 벌어졌던 다리를
오므렸다. 정사의 후유증처럼 찾아오는 탈력감으로 무거운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속옷과 바지를 주워 걸치고 잔뜩 구겨진 상의를 끌어내렸다.
맞은편에 앉은 대공은 손수건을 꺼내 대강 제 아래를 닦고는 옷을 입었다.
나보다는 흐트러짐이 덜한 상태였기에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의를 정리하고는 느슨하게 벌렸던 크라바트를 조금
조이는 것으로 그는 섹스를 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차 안이 더운 공기와 음란한 냄새로 가득 했기에 대공은 마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들어 올렸다. 선선한 공기가 들어와서 숨 쉬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창문 밖으로 마차의 위치를 확인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나 다
를까 이미 별관 앞이었다.
“내리지.”

그 말에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차 문을 열었다.


…씨발, 하인이나 마부는 이미 눈치를 깠겠지. 낭패감이 내 속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마차에서 내리면 그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마차에서 내렸을 때, 마부나 하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저 별관의 말 못하는 어린 하인들뿐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이로군.”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대공이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별관으로 갈 때 수행하는 하인들은 정해져 있으니 괜한 걱정 할 것 없다.”

“아… 네…….”

아니 씨발…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가 지금 대공의 입에서 나온 건가.


이거 설마 지금 대공이 나 배려하고 그런 건가. 나는 그답지 않은 짓에
도리어 당황을 해 버렸다. 내게 걱정거리를 얹어 주면 얹어 줬지 덜어 주는
건 처음인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실 최선은 내가 걱정할 원인 자체를 안
만드는 거겠지만…….
“그럼 들어가 봐.”

“……예?”

꼭 자기는 안 들어갈 것처럼 말하는지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는… 안 들어가십니까.”

“군사회의가 있다.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 봐야지.”

그제야 나는 아까 본성 앞에서 대공과 하인이 나누었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하면 되겠느냐는 하인의 질문에 대공이
기다리라고 했던 게 군사회의를 말하는 거였다.
당장 전쟁을 앞두고 있는 주제에, 군사회의까지 미뤄 가며 제 욕구를
풀다니. 대공은 정말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군사회의라고
하면 그의 가신들이 죄 와 있다는 건데, 대공 이 미친 변태새끼는 섹스가 더
중요하냔 말이다. 그나마도 평소처럼 사람을 길게 안 괴롭히고 빨리 끝낸
게 최후의 양심 뭐 이런 거였을까. 실로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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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씻고 쉬어.”
아니 근데 아까부터 대공이 하는 짓이 좀 불쾌한데. 들어가 보라느니, 씻고
쉬라느니……. 이거 꼭 무슨 일터로 나가는 남편이 살림하는 부인한테 할
법한…….
“이따 밤에 천천히 예뻐해 줄 테니.”

……아니 씨발…….

대공은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참으로 신묘한 재주가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주 징그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지금 내가 감히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미로스 따위 전쟁에서 지고 멸망을
하든가 말든가, 씨발……. 내 코가 석자인데.
나는 진심으로 정말 간절히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말에 따라
그를 기다리고 있기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욕실이나 침실이 아무리
호화스러워도 밤까지 그를 기다렸다 예… 예쁨을 받을 걸 생각하니 너무
싫어서 우왁 비명이라도 질러 버리고 싶었다.
물론 모든 것은 내 망상일 뿐. 실행에 옮길 수는 없다. 대공이 보는 앞에서
내 곁에 붙어 들어가기를 종용하는 말 없는 하인들을 따를 뿐……. 내
신세라고 한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새끼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내 인생…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대공의 방.
대공의 침대 위에 털썩 쓰러지며 나는 절망했다. 여자를 상대로는 흥분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했던 주제에 대공에게 박혀서는 바로 세워서
싸버리기나 하고……. 그것마저도 자괴감이 드는데 이 행위에 끝이
예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울적했다.
전쟁이 터졌다고 신이 났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던 것 같은데……. 하나
변하지 않은 내 신세가 처량할 따름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38.

사람이 참 간사하지. 그 무엇도 나를 우울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는


과거의 생각을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나는 스스로를 조소했다. 호사스러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생활이 사
람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이란 내 생각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이전에 대공과 함께 썼던 욕실에서 몸을 씻고 탕에 몸까지 담그고 나왔을
때는 전신이 노곤노곤해서 잠이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울함에 가득
젖어들었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몸의 피로를 풀어 줄 수 있는
온욕이란… 너무 좋아서 하다 보면 중독이 될 것 같다.
나란 새끼 단순한 새끼. 속으로 나를 비웃기도 했으나,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진 건 사실이었다. 그대로 잠들면 더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곧장 잠들지는 못했는데, 별관에 손님이 한 명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궁정 의사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상처가 난 얼굴로 욕탕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면
어떻게 하냐며 역정을 냈다. 이깟 상처가 뭐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인지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에 흉이 지면 세상 큰일이라는
투로 꼼꼼히 약을 바르고 다시는 상처를 물에 닿게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해 댔다.
그가 나가고 난 다음에야 나는 대공의 침실로 들어와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대공의 침대에는 어쩌면 마력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동화 속에나
나오는 마법사가 마법을 부려서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도
포근했으며 푹신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노곤한
상태가 아니었다 해도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었을 것이다. 몸을 뉘이고
있으면 잠들 수밖엔 없는 그런 침대였다. 뭉게구름 위에 몸을 누이는 게
이렇게 푹신할까 싶었다.
다만 그런 구름 같은 침대조차 내가 악몽을 꾸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얀 뱀.
지난 번 악몽 때와 같은 미끈한 미늘을 지닌 새하얀 뱀이 내 눈앞에
있었기다. 다만 이번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뱀이 귀엽다 싶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라는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옷을 전부 벗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내 허벅지 위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사이즈가 작으니
그것이 조금은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을 한 찰나.
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피부 위를 기는 감촉에 소름이 끼쳤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런데 더
소름 끼치는 건 그 다음이었다.
으윽, 윽. 내 입에서 하릴없이 신음소리가 샜다.
그것이 내 성기를 휘어 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기를 칭칭 감아 올라간
그 뱀은 내 성기를 제멋대로 조여 대며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뱀 주제에
단단하면서도 그 조이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뱀이 내 거시기를 휘어
감고 있다는 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뱀새끼가 더더욱 끔찍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절대로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사이즈였는데, 씨발, 그것
이 요도를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아아악!!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소리가 나오지가 않았다.
요도를 역류해 올라가는 그 느낌이 몹시도 생생해서 덕 죽을 것 같았다.
아팠다. 아프면서도 아랫배 안쪽이 저릿저릿했다. 어쩐지 고환까지 열이
펄펄 끓는 것 같았다. 뻐근하게 아픈 와중에 간지러웠다.
피하고 싶은 마음에 몸이 뒤틀렸다. 뱀새끼를 떼어 내기 위해 팔이
움찔댔다.
그러나 정작 움직여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아무리 뒤틀어도, 팔을
아무리 들어 올리려 해도 손가락도 제대로 까닥여지지가 않았다. 밧줄로
칭칭 동여매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 기다란 뱀이 내 전신을 칭칭 휘어 감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내 몸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묶어 버린 대공의 밧줄을 연상케
했다. 몸에 칭칭 새하얗고 길쭉한 뱀의 몸체가 얽혀 있었다. 내 몸을 휘어
감고 있는 뱀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대가리를 찾아 고개를 휙 옆쪽으로
돌린 순간.
뱀의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놀라서
꼿꼿하게 굳어지고야 말았다. 생리적인 공포로 온몸에 소름이 주욱
끼치는데도 전신이 얼어붙어 손가락 마디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새하얀 뱀이 피처럼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그걸 본
순간 정말 살갗을 벗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소름이 바짝 돋아났다. 그
순간만큼은 요도를 파고드는 통증을 잊었을 정도였다. 소름 돋은 살갗 위에
또 다시 소름이 돋는 그 감각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벗어나고 싶은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몸이 움직
이지 않아 더 미칠 것 같았다.
다시 뱀의 붉은 혀가 낼름거렸다. 스으윽 하는 뱀 특유의 히싱이 귓가를
간질여 몸이 다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뭔지 모를 감각에 움찔거리는 내게……
……쪽.

뱀이 입을 맞추었다.
입을…….
뱀새끼가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씨발…….”

개꿈이네.
자각한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뱀이 나를 휘어감아 옥죄고 있었던
것도, 내 거시기를 파고들어온 것도 모두 꿈. 현실의 나는 푹신푹신하고
깃털처럼 부드러운 대공의 침대에 방만하게 널브러져 있…….
“허억…!!”

눈앞에 보이는 얼굴에 나는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그나마 익숙한 얼굴이라


가까스로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만약 그 얼굴이 아니었다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내 본능에 각인된 바가 있어, 다행히 그런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자각했다.
대공. 대공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도 나도 모두 벗은 몸으로. 나는 대공의 아래 깔려서는 다리를 벌리고
있었고 대공이 벌어진 내 다리 사이에 몸을 끼운 채였다. 뱀이 내 요도를
파고 든 것은 분명 꿈이었지만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말랑말랑하게
늘어진 내 성기를 쥐고 있는 건 현실이었다. 더불어 그의 다른 손은 항문
언저리를 문지르며 오일을 묻히고 있었다.
“잘 안 서네.”

잠에서 막 깨어 현실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버버 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대공이 한다는 소리가 저거였다. 제가 연신 쥐고 문지르고
있는데 내 좆이 똑바로 서지 않는다며 투덜대고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처구니가 정말 너무 없다보니까 벌어진 내 입에서는
무어라 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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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익!”
그 와중에 대공의 손가락이 푹, 안을 꿰뚫고 들어왔다. 내벽의 점막을
자극하는 손가락에 새된 소리가 샌 순간에는,
“흐읍!”

대공의 입술이 내 입을 막아 왔다. 입술과 혀가 잔뜩 빨리고 그의 혀가 내


입안을 점유해 들어왔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코로 숨을 쉬는 것도
잊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버둥거려야 했다.
그럴수록 대공은 체중을 실어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혀가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미끌미끌한 타액이 뒤섞이고 입안의 점막이 온통 핥아졌다. 그
야릇하고도 간지러운 감각에 나는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작
입맞춤 따위에 몸이 자꾸 움찔댔다.
아니, 내 몸을 떨리게 만든 것은 아마 아래를 마음대로 헤집으며 넓히는
손가락이었으리라. 그러나 온몸에 사정없이 몰아치는 감각을 제대로
구분하기에 내 머리는 아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그에게 휩쓸릴 따름이었다.
“허억, 헉, 허윽…!”

대공의 입술이 떨어진 뒤에야 나는 쉬어내지 못했던 숨을 다급하게 쉬어


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릴 정도로 호흡이 달렸다.
대공은 그런 나를 아랑곳 않고 헐떡거리는 내 턱을 제멋대로 깨물어 댔다.
그게 간지러운 짓거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내벽을 멋대로 헤집던 손가락이 어느새 빠져나간 뒤였다. 그것을 새삼
알아챌 새도 없이 대공의 성기가 항문을 벌리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 각하, 각하…!”

이게 씨발 지금 무슨 일이냐…!! 나 씨발 지금 뭐 꿈에서 깨어서 또 꿈을


꾸고 그런 건가? 이게 지금 꿈에서 깬 게 맞기나 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는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했다. 몽롱하고 멍한
와중에 제멋대로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서 몸만 뒤틀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박하게 대공을 불렀으나 대공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지랄맞게 큰
성기를 내 안 깊숙이까지 밀어 넣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체중으로
나를 내리누르며 삽입을 강행하는 그를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

비단 짓눌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본능이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크헉…!”

“하아…….”

내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비명이 섞인 이상한 소리를 낸 것과는 달리


대공의 입에서는 깊은 만족감에 가득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두고, 대공은 끝까지 삽입하자마자
곧장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어쩔 바를 모르고 버둥거리는 내
손을 붙잡아서는 침대로 내리눌렀다. 손이 그의 손에 깍지가 끼워진 채로
내리눌렸다.
침대에 뒤통수를 비비며 바르작거리는 내 목줄기에 그가 얼굴을 묻었다.
목줄기를 핥는 혀와, 쪽 빨아 당기는 입술에 소름이 보통 끼치는 게
아니었다. 간지러워서 온몸이 다 들썩거렸다. 그런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대공이 짓눌렀다. 깍지를 낀 손을 아프도록 옥죄어 잡아도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더 세게 내리누르며 내 안을 파고들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기운조차 채 빠져나가지 못한 머릿속이, 열기와
바짝 끓어오르는 성감으로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차오른 숨을 헐떡이기
바빴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들이 무엇인지조차 정의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또 휩쓸렸다.
새카만 암전 속에 붉고 푸른 안화가 피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새하얀
섬광이 요란하게 점멸했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의 폭주 속에 나는 몸을 떨며 신음했다.
사정없이 짓눌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하아, 일릭…….”

거칠어진 숨소리와 열락에 찬 신음에 잠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꼭 뱀의 히싱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은빛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내
위로 떨어진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가 땀에 젖어 빛났다.
나를 눈에 담는 호박색 눈동자가 꼭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뱀의 그것과
같아 보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꿈이 아니
었다. 현실이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매끈하고 새하얀 뱀.
나는 그 뱀에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잡아먹히고 있었다.
침대에 널브러진 나는 잠시 현실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껌뻑거렸다.
꿈. 빌어먹을 개꿈. 아니 뱀꿈.
좋은 침대에서 잔 게 무색하게도 그 따위 개같은 꿈을 꾸더니 깨고 보니
현실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아닌 밤중에 내가 갑자기 뱀 꿈을 꾼 이유가
있었다.
대공이 씨발, 자는 사람 옷을 다 벗겨서는, 씨발. 제 멋대로 내 안에 좆을
처박고는 사람을 몰아붙여서 잠도 제대로 깨지 않은 나를 상대로, 씨발.
정사가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가 없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했다. 몸 안에 남아서 잔잔히 나를 때리는 쾌감의 잔재가 도리어
꿈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몸에 탈력감이 또 장난이 아니었다. 내 배 위에는 액체가 떨어져
있었다. 물이나 땀보다는 끈적한. 그러나 정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옅은
그런 액체. 며칠에 걸쳐서, 또 오전에도 한참을 시달린 탓에 더는 나올 게
없었던 내 성기가 겨우 뿜어낸 내 사출물이었다.
정액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건만 이거라도 사정한 게 솔직히 나로서는
용하다 싶었다. 더는 쥐어짜도 나올 게 없을 것 같았는데, 대공이 기어코
나를 안에서부터 자극해서 사정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아니 씨발…… 이것도 절망적이었다. 손으로 만질 때는 잘 안 섰던 내 좆이
말이다……. 박혔다고 막 서고 싸고 씨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씻었다고 하더니 좋은 냄새가 나는군.”
어우, 씨발…….
갑자기 대공의 숨결이 목덜미에서 느껴져서 몸이 다 부르르 떨렸다. 깜짝
놀라서 확 일어나 버릴 뻔했다. 그랬다간 다리 사이며 허리가 아파서 좀
힘들 뻔했지……. 아니, 그 전에 대공이 내가 그렇게 놀라니 기분이
나쁘다며 또 괜한 트집을 잡아서 사람을 어떻게 괴롭혔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쁘지 않아.”

내 목덜미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대공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 징그러
운 인간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다행히
그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침대로 돌아와서는 내게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서
배 위와 다리 사이를 닦아 내고 있으려니 대공이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
속을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그의 팔이 나를 잡아당겨 나 역시 그의 옆에 누워야 했다. 젖은 천은
아무렇게나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대공은 내 어깨 언저리에 제 머리를
대는 짓으로 또 나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팔베개가 필요한 것도 아닌
인간이 대체 왜 이렇게 들러붙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이 들러붙어
있으니, 이 편한 침대가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전에 나한테 피비린내가 난다고 했지.”

“…예? 아…… 네…….”

요도를 고문당한 그 잊을 수 없는 새벽에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베이즈가 찾아왔었다는 대답만 했을 뿐, 몸에 왜 피비린내가 뱄는지 그는
설명해 주지 않았었다.
“지금은.”

“…그날만 그랬습니다.”

“그럼 평소엔 무슨 냄새가 나지?”

…이게 어디 오밤중에 가서 쥐약을 처먹고 왔나.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에는 점점 잠기운이 묻어난다.


에이, 씨발. 내가 지금 대공을 욕해 봐야 무얼 하겠는가. 그의 앞에서 철저히
약자인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킬 수밖엔 없다. 피비린내가 난다는 말
따위를 했던 과거의 내 잘못이다, 내 잘못.
“……그냥 각하의 체취가 납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걸로 또 트집을 잡아 사람을 괴롭힐 인간이라, 나는


무어라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고했다.
“그게 어떤 냄새인데?”
아 내가 진짜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집요한 새끼한테 걸렸단
… .

말인가. 그러나 대답하지 않기에는 또 언제 돌변해서 대답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사람을 갈굴까 두려워, 나는 되는대로 말을 뱉어 냈다.
“겨울로 접어들 무렵의 숲 공기처럼 청량하기도 하고, 햇볕에 말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리넨처럼


건조하기도 한… 그런 냄새입니다.”
“하아?”

내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대공이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인지 영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라
괜히 내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내 무식함이나 표현력 없음에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새삼 그게
부끄러웠을까. 아니면 가까이서 보는 대공의 얼굴이 역시나 지나치게
잘생겨서일까…….
씨발, 아무튼 진짜 적응 안 되는 얼굴이었다. 아직 그의 얼굴에 짙게 남아
있는, 내가 만들어 놓은 멍이 유일한 오점이었다. 그런 멍을 달고 있음에도
부인할 수 없는 미남이라는 것조차 어쩐지 불공평했다.
“…좋은 냄새입니다.”

“……흐음.”
좋다… 좋다란 말이지.
대공은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풀썩 떨어뜨렸다.
다행히도 좋은 냄새라는 말로 답이 되었는지, 그는 더 이상 제 체취에
집착하며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표현이 될 거였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좋은 냄새라고 할 걸, 나는 왜 표현력도 없는 주제에 어쭙잖게
숲이니 리넨이니 떠들었단 말인가. 잠시 자괴감이 내 명치를 훅 치고
지나갔다.
대공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힐끔 본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내 어깨에 머리를 댄 채
새근새근 잠에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잠든 얼굴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 같았다. 늘 내가 먼저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내가 본 대공의 잠든 얼굴이라고는 아침에 잠깐
뿐이었다. 혹은 멍든 얼굴로 누워 있을 때라거나……. 그때 대공은 깊이
잠들었다기보다는 일어나 있는데 나를 놀리느라 자는 척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지금 본 대공은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또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떨림이 이는 긴 속눈썹이며 오똑한 콧날 따위를 물끄러미
보았다. 혹시라도 갑자기 눈을 뜰까봐 무서운 마음이 조금 들면서도 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얼굴에서
시선을 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쳐다보고 싶지 않은데 .

자꾸 눈이 간다. 참…… 아름답다. 아름다운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멋대로 덮친 파렴치한에 미치광이 변태라는 것을
알면서도.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으니 내가 당한
짓거리에 화도 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이제껏 당해온 것에
비하면 큰일도 아닌지라 그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읏…….”

남의 속도 모르는 대공이 내가 베개라도 되는 양 허리를 당겨 안으며 베고


있는 가슴에 머리를 문질러, 나는 잇새를 깨물어야 했다. 그가 깨어난
것일까봐 고개를 휙 돌려 잠든 그 얼굴을 외면했다.
그러나 대공은 깨어나지 않았고,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힐끔 시선이 다시 그를 향한다.
…솔직히 단언컨대 여태껏 내 어깨와 팔 언저리를 베고 잠들었던 잠자리

상대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성별을 떠나 이렇게 예쁜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았다.
미치광이 변태새끼 주제에…… 어째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걸까.
그 잠든 얼굴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그가 베고 있어서인지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무게감을 전해오는 제법 묵직한 머리통. 이 예쁜
머리통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 것인지.
하얀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나오는
것은 오직 소리죽인 탄식 뿐이었다.
***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더 자고 싶었다. 물에 젖은 솜뭉치 하나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머리가 멍했다.
숙면을 취했는지 개운한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진한 피로감에
일어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기이한 상태였다. 동시에 적당한 빛과 적당한
어둠의 공존에 안락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긴 어딜까. 작은 의문이 피어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떠올리면 내 기분만 나빠질 게 틀림없다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본능의 발
로였다.
사위가 고요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시트에
살이 스치는 바스락 소리만이 울렸다. 참으로 포근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평화롭다. 따뜻하고 보드랍고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러한 수면과 현실의 경계에 놓인 무념무상의 평화는 결코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잘 잤나?”

차르륵, 휘장이 걷히며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들어올린 나는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침대의
휘장이 젖혀진 곳에 서 있는 것은 물론 대공이었다.
“어…….”

당장 외출을 해도 좋을 것 같은 완벽하게 꾸며진 차림새의 대공을 보고


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니 저렇게 옷을 다 갖춰 입었다면 내가 깼을 만도 한데 말이다. 내가
잠귀가 아주 밝은 편이고 사람의 기척에도 예민한데 그가 일어나서 나가는
것조차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대공은 정말이지 불쾌할 정도로 기척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기척을
빠르게 눈치챈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번번이 흠칫흠칫 놀랄 수밖엔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늦잠을.”

“그러게. 빨아 줄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 사람 기분 개차반으로 만드는 데는 진짜 대공만 한 인간이 없을
것이다.
아침부터, 씨발……. 아니 대공 이 새끼는 진짜 성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지속 발기증 이런 거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요새 그렇게 해 대고 또
아침에 펠라 받을 생각이 난단 말인가. 심지어 잠들기 직전, 그러니까 불과
몇 시간 전에도 하지 않았냔 말이다.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식사 하지.”

“아… 저는 괜찮습니다. 용병대로 돌아가서…….”

“돌아가다니.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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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돌아가냐니요…? 그가 어째서냐고 묻는 순간 나는 얼빠진 반응을


보였다. 그런 나를 향해 대공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조로 물었다.
“내가 가도 좋다고 했던가.”

아니……. 그럼 뭐 어쩌자고. 여기 남아서 나더러 뭘 하라고. 말문이 막힌


나는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며 그를 보았다. 물론
그가 가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늘 정사가 끝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나는 용병대로 돌아가곤 했었다.
“나는 그대의 몸에서 피 한 번 본 적 없는데 말이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쳐서 올 수가 있나.”

아, 뺨의 손톱자국…….
그걸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반사적으로 뺨을 매만졌다. 손끝에
거실거실한 딱지가 만져졌다. 그리 길지도 깊지도 않아서 금방 나을
상처였다. 얼굴에 생겨서 눈에 잘 띈다 뿐이지 내 몸에 이런 흉터는 한두
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대공이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이렇게 다쳐서 오다니. 밖은 그대에게 너무 위험해.”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내 눈앞에 있는 대공 바로 너일

텐데요. 씨발놈아. 피만 안 봤다 뿐이지 더 끔직한 짓을 하면서. 기가 막혀서


그저 입만 떠억 벌어졌다.
“내 생각보다 그대가 연약한 것 같아.”

한 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나. 나한테 맞은 멍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얼굴로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대공은 꿋꿋하게 개소리를 이어 갔다.
“연무장에서 체력 단련이나 하고 있어.”

개소리는 입술에 쪽 입을 맞추는 개같은 짓거리와 함께였다.


“이만 일어나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대공이 못을 박았다. 수없이 많은
거절과 거부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를 무시한 채 냅다
내달려 내빼는 상상도 이어졌다. 물론 그중에 가장 구미가 당기는 것은 저
멍든 얼굴을 아주 흠씬 두들겨 패서 기절시키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상
상은 거기까지.
현실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엔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39.

대공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은 채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으려


애를 썼다. 대공과 이렇게 계속 붙어 있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건 아니었다. 며칠 뒤면 전쟁을 하러 떠나야 하지
않는가. 대공은 이 성에 앉아서 전쟁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그는 성을 떠나야 했으며, 나 역시 전쟁터로 가게 된다면 그의
곁이 아닌 최전방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생활이 길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용병대의 용병들이 나를 의심하고, 리리엘이 아닉을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을지 알 수 없는 이 상황 속에 오히려 전쟁 전까지 용병대를 떠나
있는 게 속편한 일일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내릴 수 없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없어,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휩쓸릴 수밖엔 없는 입장이었으니, 이렇게
한 발 물러선 채 멀찍이서 관조하는 게 낫다는 거다. 게다가 내가 이 성 안에
있으면 설령 내가 마일을 죽인 게 탄로난다고 해도 용병대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처음에는 대공에게 내가 변절자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나 리리엘이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용병대에 얘기하면 내 입지가 곤란해진다는 걸
상담이나 해 볼까 했지만, 계약이 이어지고 있는 이상 그가 어떻게든 내게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일을 해결해 주리란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대공은 약속을 안 지킬 인간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권력의 차이가 이렇게 큰 마당에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답도 없는 이 상황을 그냥 잊어버리고 묻어 버리는 쪽을
택했다. 골치 아프게 계속 고민을 하는 건 성미에 도통 맞지를 않았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게 가능했던 것은 어쩌면, 대공성에서의 생활이 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생각보다
훨씬 더 호사스러웠으며, 그 안락함이 내게 상당히 긍정적인
여파를 미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폭신폭신하면서도 포근한 침대는 물론이거니와, 아
침부터 한 상 차려진 식사가 훌륭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공과 함께
해서 조금 껄끄럽고 불편하기야 했지만 그 불편함을 잊고 집중할 정도로
식사는 맛있었다. 그러니 내 고민 역시 부질없다며 단칼에 날려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생 먹어온 딱딱하고 푸석한 빵이 아닌 솜털처럼 보드라운
빵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동이었다. 그런데 함께 나온 다른 음식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 반숙 달걀을 나이프로 잘랐을 때 노른자가
맛깔스럽게 흘러나와 아래의 채소와 고기를 다져서 구운 것 위를 주르륵
적시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맛있었다. 훈제 연어를 크림치즈와 함께 빵에
얹어 놓은 것 역시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런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차나 홀짝이는 대공이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음식들도 매일 먹다 보면 별 감흥이 없어지는
걸까. 그는 아침이라 별로 입맛이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늘어놓았다.
“말은 탈 줄 아나?”

내가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일찌감치 식기를 물리고 차를 마시던


대공이 물었다.
“예, 탈 줄은 압니다.”

“올라타는 솜씨가 별로던데, 말을 탈 줄은 안다고?”

아. 잘 먹은 밥이 체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순간 쉴 새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던 내 손이 움찔 굳어졌다.
웃지도 않는 얼굴로 대공이 툭 내뱉은 한마디에 순식간에 속이 부대끼면서
얼굴로 열이 올라 버린다. 씨발, 평생 여자만 만나 온 남자인 내가 남자 몸
올라타는 솜씨를 가지는 게 정상이겠냐, 그럼?
물론 속으로만 구시렁거릴 뿐, 대공에게는 할 수 없는 소리라 그저 작게 예,
탈 줄 압니다, 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아니야. 그대에게는 연습이 필요해.”

“……연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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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연습.”

……그 순간 불길함이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든 건, 내가 대공과 그래도

얽힌 일이 많아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약간은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설마 지금 내가 막 더는 쌀 것도 없이 섹스를 해 댔고, 항문이 붓고 아프고
쓰라리고 온 엉덩이가 다 얼얼하게 아프도록 연신 해 댔으면서 내가 그를
타고 올라앉는 기승위로 또 하자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씨발 이 말을 한 게 대공이었으니 설마가 아니라 역시나겠지.
아침부터 배불리 먹인 건 설마 점심도 안 먹이고 방에 틀어박혀서 그 짓을
시킬 계획이기 때문이었나?
좋은 침대에서 잘 자고 좋은 음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워 나도 모르게 조금
올라갔던 기분이 다시 시궁창으로 추락했다.
그런 나를 보며 대공은 뭐라 말하기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손이 움직였다.
“역시 테이블 매너도 조금은 배워야겠고.”

냅킨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내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를 하얀 냅킨에 무언가가 묻어났다. 내 입가에
식사의 흔적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걸 왜 직접 손을 뻗어서 닦아 준단 말인가……. 당혹감에 내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대공이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다 먹었으면 가 볼까?”

말의 형태는 권유에 가까웠으나 내게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나를 앞서 걷는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엔 없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바로 승마장이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을 탈 수 있도록 길이 닦여 있고,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는 구간도 있고, 결정적으로 말이 준비되어 있는, 말 그대로의 승마장.
위풍당당하게 대지를 박차고 서 있는 새카만 갈기를 가진 새카만 말을 보고
나는 뭔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 옆에는 승마를 가르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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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젊은 청년이 또 다른 말의 고삐를 쥔 채 서 있었다.
“그대의 까만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리는군.”

까만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딱 봐도 비싼 말이었다. 용병으로 평생


번 돈으로도 살까 말까 한. 그러니까 나와는 몸값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대공은 그런 말을 쓰다듬으며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말치고는 성격도 아주 순해. 타 보면 그대도 마음에 들 거다.”

말 타는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내 말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말을 자주 탈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나로서는 딱히 비교할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대공이 퍽 자부심까지 담아서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좋은 말인 모양이었다.
나 같은 용병 나부랭이가 타기에는 과분한 말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런
말을 지금……
“타 봐.”

나더러 타라고요……? 아니 왜 이런 부담스러운 짓을 하시는지…?


나는 잠시 눈치를 보았으나, 역시 선택지가 없었다. 그의 말에 토를 달아
같은 말을 두 번 시켰을 때 내 몸이 당해 온 짓이 있거니와, 말을 못 타지
않냐는 대공의 오해를 그대로 뒤집어쓸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등자에 한쪽에 발을 끼우고 안장을 잡고 말에
올라탔다. 내 행동이 그리 부드럽지 않았을 텐데도 말은 놀라는 기색 없이
푸릉거리며 얌전히 내가 올라타는 것을 받아 주었다.
고삐를 잡고 있노라니, 대공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출발하라는 신호에 내가 살짝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차자 말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타는지라 사실 조금은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사람을 태운 경험이
많은 말인지 말은 안정적으로 나를 태운 채 트랙을 달렸다. 황토 바닥에
말발굽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다만 다리 사이가… 엉덩이가 좀 아프고 괴로웠다. 대공이 한참 괴롭힌
덕분에 부어 있어서 더욱 말을 타기가 곤란했다. 이내 좀 덜 아픈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가 몸을 쓰는 센스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말을 타는 게 아주 힘들었을 뻔했다.
내가 트랙 한 바퀴를 달리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대공은 웃으며
나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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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했어.”
“…예. 감사합니다.”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을 하도록 해.”

“제가 앞으로 말을 오래 탈 일이 있는 겁니까?”

“그럼 날더러 전쟁터에 마차를 끌고 가자는 건가.”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지요. 여태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용병들이랑


걸어서 이동하면 되는 거 아닌지요.
대공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질문을 하면 그가 답을 주기는
했지만, 그게 내게는 결코 대답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뭐 겸사겸사 올라타서 움직이는 걸 익혀 놓는 게 좋기도 할 거고.”

“…….”

배운 게 아깝다면 앞으로 자주자주 써먹을 수 있게 해 주면 되겠지. 그럼,



열심히 연습하도록.”
… 아 진심 말로 그냥 확 치어 버리고 싶다. 말이 저 해사하게 웃는 낯을
뒷발로 차서 날려 준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내가 그런 망상을 하는 사이 대공이 몸을 돌렸다. 나는 시야에서 점차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등 가운데에서 흩날리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햇살에 하얗게 반짝였다.
“그럼 가실까요?”

대공이 있을 때는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하는 것 외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남자가 갈색의 말에 올라타서는 내게 말했다.
“…같이 타는 겁니까?”

“그럼요. 혹시라도 말에서 떨어질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또 제가 자세나

틀린 점을 봐 드릴 겁니다.”
멀끔한 차림새의 청년은 신분을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기사라고
하기에는 태도가 정중하면서도 사근사근했고 종자라고 보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였으며 하인이라고 보기에는 태도에 기품이 있었다.
“허리를 조금 더 세우세요. 이번엔 조금 더 빠르게 가 볼까요?”

그를 탐색할 시간은 그러나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제 본분을 다하겠다는


태도에 나는 입을 닥치고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은 갑
자기 왜 나한테 이런 승마 연습을 시킨단 말인가 .

물론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몸을 흔드는 것 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은


상황이었지만. 머리가 조금 나쁜 나로서는 내가 처한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승마를 끝내고 났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엉덩이와 허벅지의 통증이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중간에 몇 번 위기가 있었는데, 완벽한 자세가 나올 때까지 달리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청년의 열정에 휩쓸려-사실 그에게서 나오는 어떤
귀족적인 아우라 때문에 그의 말에 반기를 들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승마가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즐거웠다- 너무 오래 타고야 말았다.
덕분에 말에서 내려서는 걸음을 나도 모르게 어기적어기적 걸어야 했다.
청년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이 너무 과하게 나를 몰아붙인 게 아니었느냐며
호들갑을 떨어서 나를 조금 부담스럽게 했다. 아무리 봐도 입은 옷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평민은 아닐 것 같은 남자가 내게 지나치게 저자세라는
점이 나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얘기를 한 뒤에야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고, 점심
식사를 할 곳으로 안내를 하겠다며 나를 데리러 온 하인을 따라 나섰을
때에야 마음이 좀 편해질 수 있었다.
하인은 그저 말없이 제 할일만 묵묵히 했기에 도리어 편했다.
그의 안내에 승마를 하느라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도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재질이 좋은지, 실크 셔츠가 아닌데도 면이
살갗에서 미끄러지듯 했다. 다리를 감싸는 바지 역시 아주 맞춤으로
편안했다.
그 뒤에 이어진 점심 식사 역시 훌륭했다. 귀족들은 다 이렇게 먹는지는
몰라도, 정찬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화려했다. 수프와 샐러드를 먹고
나니 고기 요리와 생선 요리를 차례로 주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부드러운 빵도 물론 함께였다.
물론 무엇보다 나를 가장 즐겁게 한 것은 이 맛있는 식사를 대공 없이
오롯이 나 혼자 한다는 점이었다.
뒤이어 나오는 디저트까지 아주 깔끔하게 해치우고 부른 배를 문지르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자니 전
날 보았던 궁정 의사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손톱에 긁힌 상처일 뿐인데, 그는 내 상처를 꼼꼼히 살피고는 약을 바르고
또 상처가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고 절대 손으로 만지지 말라는 등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의사가 가고 난 뒤에는 잠시 낮잠을 잤다.
호사스러움의 끝이었다. 귀족이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놈들이 주변에
많았는데, 놈들은 귀족의 삶을 경험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렇게 좋은지를
미리 알았나 모르겠다. 정말 천국이었다.
용병 일을 하는 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놀고먹는 게
천직이었나 보다.
계속 이렇게 사는 건 언젠가는 지루해지고 지겨워질 것 같기도 하지만, 한번
쯤 경험해 보기에는 좋은 것 같았다. 일을 하고 쉬는 기간 동안 이런
호사스러운 휴식을 즐길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헉…….”

물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대공의 존재는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말이다.


“…각하.”

잠이 덜 깬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대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잠기운이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침대를 향해 돌려진 의자에 대공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가 방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잤다는 게 여전히 나에게는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의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기척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게 아닐 텐데도, 나를 바라보는 대공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침대에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킨 채 멈춰 있을 수밖엔
없었다. 나를 향한 노랗고도 붉은 빛깔의 시선에 사로잡힌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공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수려한 얼굴에는 감히 입도 열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대공이라는 사내가 갖는 권력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무게감을
피부로 느꼈다. 공국을 다스리는 대공의 권위란 일부러
꾸며내거나 만들어 내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굽어보는 시선, 권태가 깃든 표정, 그 모든 것은 그저 자연스러웠다.
천적이라고는 모르는 생명체처럼 나른하게 늘어뜨린 몸에서 자연히
쏟아져 나오는 기세가 있었다. 한없이 무방비해 보이지만 도리어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철벽처럼 느껴졌다.
“이리 와.”

그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서자 그는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이끌었고, 결국 나는 무릎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야
했다. 내가 바짝 붙어 섰음에도 대공은 내 손을 놓지 않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느긋하게 주물렀다.
“말을 타는 건 즐거웠나?”

나는 서 있었고 그는 앉아 있었기에 나는 감히 불경스럽게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또
표정이… 막 내가 깨어났을 때 나를 보고 있던 그 굳은 얼굴과는 달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누구도 뚫지 못할 위압감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를
올려다보는 대공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층 말랑말랑해 보였다.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분위기가 꽤나 다르게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예. 말씀하신 대로 좋은 말이더군요.”

“그래. 그대가 말을 제법 탄다고 하더군.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여전히 내 손을 조물락거리며 대공이 말을 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머리가 아팠는데 말이지.”

“…….”

기분전환이 필요해.”

대공이 내 손을 놓았다. 그 대신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내 허리춤이었다.
실내복 하의의 허리 끈을 잡아당기는 그의 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리고 그가 손수 내 옷을 벗기는 행위에 소름이 쭉 끼쳐왔다.
“제가 하겠….”

차마 만류할 틈도 없었다. 허리끈이 풀리고 그가 허리선에 손을 걸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끌어내리
는 것으로 바지는 발치에 툭 떨어졌다.
대공은 어렵지 않게 내 속옷까지 발치로 떨어뜨린 뒤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허벅지 안쪽을 쓸며 회음부를 향해 올라오는 손길에
나는 긴장할 수밖엔 없었다. 간지럽고도 야릇한 감촉이었다. 낯이
화끈화끈해졌다.
“오늘 연습한 걸 해 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읏…….”

그의 손이 고환 아래쪽과 회음부를 간질였다. 항문을 건드릴 듯이 구는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댔다.
오늘 연습한 건 승마… 그가 나에게 시키고 싶었던 것은 내가 그의 몸을
타고 오르는 짓이었을 것이다. 말을 많이 타서 걸음까지 어기적거리며
걸었던 내 몸에는 확실히 무리가 되었을 짓이고 말이다. 물론 그가 나에게
하는 짓 중에 무리가 아닌 게 없기는 했지만. 또 그가 내 사정을 봐주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내가 그동안 그대의 가슴을 충분히 예뻐해 주지 않은 것 같더군.”

그가 나를 끌어 당겼고, 나는 다리를 벌려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야


했다. 언젠가 그의 집무실에서 했던 짓이었다.
그는 내 셔츠를 말아 올려 입에 물게 했다. 그렇게 가슴이 드러나자, 대공의
입술이 내 유두를 덮었다.
“흐읏…!”

뜨뜻한 입술이 유두를 쪼옥 빨아 당기고 혀끝이 유두 위를 비빈 순간


찌릿한 성감에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공은 여자 가슴을 주무르듯이 양손으로 내 가슴을 모아 쥐고는 주무르며
번갈아 유두를 빨았다. 모아진 탓에 볼록해진 살덩이 위로 그 고운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 꼭 어미 젖을 찾는 어린애처럼 말이다.
천사처럼 예쁜 얼굴이 꼭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서 소름이 꼬리뼈에서
뒷목까지 쭈뼛쭈뼛 타고 올랐다.
“으읍…. 흡…….”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도 내쉬는 숨결에 자꾸 콧소리가 뒤섞였다.


생각해 보면 대공이 준 약을 쓰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가슴 끝에서
전해지는 쾌감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한참 연마를 할 때 보다는 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지만,
귀두를 빨리는 것처럼 아찔한 쾌감에 허리가 흠칫흠칫 떨렸다.
자꾸만 다리에 풀리려 해서 대공에게 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있는 게 힘들었다.
“가슴이 전보다….”

제 마음대로 내 가슴을 쥐고 물고 빨다가 코끝을 그 위로 비비던 대공이


나를 힐끔 올려다 보며 말했다.
“말랑말랑해.”

…어우, 씨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라 나는 그 순간 정말 도망치고 싶어져


버렸다. 대공의 이런 행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그의 얼굴은 진짜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멍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한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는데……. 내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듯이 해서 올려다 보는 그
얼굴이 정말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다
벌겋게 열이 올랐다.
가슴이 말랑말랑해진 건 감옥에 다녀오면서 빠진 근육들을 다시 채우기엔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늘 전쟁터에서 살던 때와는 달리
움직임이 적었고, 또 최근 이것저것 잘 먹을 일이 많아서…….
“감도도 좋고 말이지.”

“흣…….”

대공이 붉은 혀를 내어 내 가슴을 핥았다. 내 살갗에 대비되어 그의


입술만도 붉은데, 혀는 더더욱 붉어 보였다. 그것이 볼록하게 모아 쥔 내
가슴을 핥는 광경은 지나치게 야했다.
“흐으…….”

입에 물고 있던 셔츠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물고 있던


턱에 힘이 들어갔는지 아구가 아팠다. 그러나 놓을 수는 없었다. 또한
대공에게서 시선을 뗄 수도 없었다.
“하아, 일릭…….”

몇 번이고 내 가슴을 핥고 유두를 입술로 감물어 빨아 당기며 희롱하던


대공이 잠긴 목소리로 한숨처럼, 혹은 신음하듯 내 이름을 읊조렸다. 그의
긴 숨결이 살갗을 간질이고 흩어졌다.
마침내 내 가슴에서 그가 떨어져 나갔을 때 나는 안도감에 길게 숨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쉬었다.
가슴을 자극당한 덕분에 아랫도리가 다 욱신거렸다. 그만큼
적나라하고 강렬한 쾌감이었던 것이다. 가슴을 좀 빨린 것만으로 며칠 동안
혹사당한 몸이 다시 흥분을 해 버렸다…….
내 몸이 그런 꼴이 된 것이 비참하게 느껴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대공은
내가 비참함 따위의 감정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입술을 떼었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유두의 성감을 높인답시고 사용했던 조그마한 약병이 들려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VOLUMEN 3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40.

“으읏, 흣…….”
잠깐 기다려 달라거나, 그건 좀 힘들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려고 했으나, 내
입에서는 억눌린 소리만이 흘러나갔다. 입에 가득 셔츠를 물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만류한다고 대공이 들어먹을
인간도 아니고, 도리어 내가 저항을 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그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대공이 내 가슴에 미약을 바르는 걸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애당초 피할 방법은 없었겠지만.
“기분 좋은가?”

대공은 내 유두를 비비며 그렇게 물었다. 손가락으로 꼬집듯이 내 유두를


괴롭히고 비비기도 하면서 연신 가슴팍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이런 씨발… 기분 좋으면 너나 바르든가요.
그 말들은 내 입에서 으읍 으읍 따위의 뭉개진 소리로 튀어나갔다. 아, 이거
셔츠 자락 물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냥 이나 악 물고 하고 싶은 말 다 해
버려야겠다.
수백 마리 개미가 물어뜯는 듯이 유두며 유륜이 뜨겁고 따갑고 간지럽고
미칠 것 같았다. 몸이 다 움찔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애써 힘을 주고 있던
허벅지며 장딴지에 쥐가 나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부터는
대공의 허벅지에 체중을 실어 주저앉은 뒤였다.
성기는 욱신거릴 정도로 발기한 지 오래였다. 더 쌀 것도 없을 텐데도
발기한다는 게 신기했다. 이런 성감에 발기가 안 된다면 그것도 신기했을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곧 절정이 올 것처럼 숨이 가빴다. 짜릿짜릿한
쾌감에 허리가 절로 튕겨졌다. 머리가 뒤로 넘어가고 허리가 젖혀지는데, 그
런 내 허리를 한 팔로 당겨 안으며 대공이 내 가슴 가운데, 흉골 위에 재차
입을 맞추었다.
“흐……. 으으…….”

그 거대한 쾌감의 파도에 내가 정신 못 차리고 떨고 있을 때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내
입에 물린 옷자락을 빼냈다. 그가 셔츠를 위로 더 끌어올려 벗겨
버렸다. 셔츠는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유를 찾아 숨을 헐떡거리고 있으려니, 대공이 내 뒷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졌다. 혀가 난잡하게
얽히고 입안이 엉망으로 휘저어진다. 대공은 멋대로 내 혀와 입술을
빨았다. 아랫입술을 잔뜩 깨물기도 했다.
그 와중에 손가락은 연신 내 유두를 비비고 문질러 그의 입술에 막힌 내
입에서는 신음이 샜다. 열이 하도 올라서 머리가 어지러운데 입이 막혀
숨도 제대로 쉬질 못하니까 더 죽을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차고 넘치는 쾌감 탓이리라. 이걸 어떻게 해야 될 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나친 성감에 괴로웠다. 머릿속까지 얼얼했다.
대공이 내 가슴을 쥐어 주무르고 유두를 튕기며 괴롭힐 때마다 내 몸은
어쩔 도리를 모르고 움찔대고 들썩거렸다. 이내 가슴 전체가 불을 지른
듯이 뜨거웠다. 아니, 온몸이 뜨겁고 어째서인지 자꾸 허리 아래가
욱신거린다.
대공은 한참을 내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즐기듯이 입을 맞추며 나를
희롱했다. 나같이 시커먼 사내놈이랑 입을 맞추는 게 뭐 그리 좋다고
질척하게 젖은 타액이 입술과 입술 사이를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몇
번이나 입술이 겹쳐지고 또 겹쳐졌는지 셀 수가 없었다.
내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가 뜨거운 숨결을 내쉬며 속삭였다.
“바닥으로 내려와.”
대공이 나를 밀어내어, 그의 다리 위에서 일어났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구부려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일어나자 다리를 벌리며 바지 앞을 풀어
헤치는 그가 요구하는 바가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와 몸을 바투 붙여
다리를 깔고 앉아 있을 때부터 그의 하반신이 흥분하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대공은 속옷을 옆으로 젖히며 성기를 끄집어냈다. 튕겨지듯이 튀어나온
것은 다시 봐도 지랄맞게 컸다. 고작 성기일 뿐인데도 불거진 핏줄이
폭력적이라 느껴지는 건 내가 이것에 당한 바가 많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것을 입에 담는 것은 전처럼 구역질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것도 물론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일까. 내 흥분이 지나치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커져 있는
탓일까. 어쩐지 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두꺼운 귀두를 입안에 넣고 혀로 살짝 핥아 낸 나는 이내 대공의 성기를
깊게 빨아 삼켰다. 대공은 그런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어쩐지 낮에 대공이 말을 쓰다듬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목구멍을 막아 오는 존재감 넘치는 성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졌다.
“욱……. 흐욱….”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도 가슴 끝이 짜릿짜릿하고 성감이
달아올라 몸이 뜨거웠다. 허리가 나도 모르게 움칠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대공의 성기를 빠는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입안에 들어온 것을 핥고 빨 뿐이었다. 대공이
머리채를 쥐어 당기는 대로, 혹은 밀어내는 대로 입안을 가득 채운 것을
빨아 삼켰다. 그의 체모가 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깊게 머금었을 때는 배운
대로 목구멍을 조여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머리 위에서 만족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한번 펠라티오를 시킬 때마다 늘 집요하게 굴던 대공이었다. 제 기분
전환을 위해 늘 나를 괴롭히던 개새끼였다. 그러나 오늘은 전과 조금
달랐다. 내 입안에 사정을 하기도 전에 멈추게 한 것이다.
“일어나.”

짧게 명령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조급했다. 내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대신, 팔을 붙잡아 잡아당겼다.
내가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가 테이블에 내 몸을
엎드리게 만들었다. 자그마한 둥근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화병 따위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어져 나갔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뒤에서 다가오는 대공의 온기에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니, 씨발
설마. 설마 바로 박을 태세인 건가 싶어서.
연일 시달린 덕분에 이미 잔뜩 붓고 아픈데, 말까지 타서 더 상태가 좋지가
않은데 오일도 없이 풀어 놓지도 않고 박았다간 유혈사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잠깐. 잠깐만. 정신이 들어서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그를 막으려 고개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뒤로 돌렸
을 때였다.
“다리 꽉 붙여.”

대공이 도리어 내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며 명령했다.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허벅지 사이를 좁혔다.
“허억…!”

그리고 회음부를 스치며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단단하고 묵직한 부피감에


파드득 몸을 떨었다. 허벅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단단하게 발기한
대공의 성기였다.
“하아, 일릭…….”

내 다리 사이가 무슨 구멍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기를 밀어 넣은 대공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씨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나는 잠시 그의 행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읏…!”

그런 내 살갗 위로 대공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는 멋대로 내 등에 입을


맞추며 살을 물고 빨았다.
“아…!”

단단한 치아가 살갗을 물기도 했다. 그것이 따끔하고 아팠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번져 갔다. 그러나 그게 아픈지, 어느새 가슴을 부여잡은 그의 손이
주는 자극이 아픈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찌릿찌릿하게 질주하기
시작한 쾌감이 아팠다. 하복부에까지 열기가 퍼지며 안쪽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일릭… 일릭, 하아…….”

뒤에서 대공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등줄기에 낙인이라도 찍히는 듯이


따갑고도 짜릿한 감각이 퍼진다. 대공의 혀가 살갗을 핥을 때는 간지러움이
피부 아래까지 번졌다. 그가 쥐고 문지르는 유두에서 전해 오는 쾌감처럼
크게 느껴졌다. 역시나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이 되지 않고 그냥 다 뜨겁고
미칠 것 같았다.
대공에게 박히고 있을 때와 비슷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과 몸이
부딪친다. 엉덩이에 퍽 퍽 마찰하는 감각이 그에게 꿰뚫려 정신없이 흔들릴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아래가 채워진 게 아니라, 낯설고도 이상했다. 조금은…… 부족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런 상
태. 회음부에 그의 성기가 스칠 때마다, 조이고 있는 허벅지
사이에서 성기가 비벼지는 게 느껴질 때마다 묘하게 애가 탔다. 분명 붓고
쓰라린데도 항문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또한 쾌감이 모자랐다. 대공이 등을 잔뜩 희롱하고, 또 성기만큼이나 강한
성감대가 되어 버린 유두를 잔뜩 희롱하고 있음에도. 몸 안쪽에서 전해
오는 쾌감이 부족했다.
그것은 대공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넣고 싶어…….”

연신 내 다리 사이에 성기를 문질러 추삽질을 이어가던 대공이 헐떡거리며


속삭였다. 귓가를 긁는 낮은 음성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고
아래가 발씬거렸다.
“그대 안에 넣고 싶다.”

속삭이고 또 속삭이며 대공은 내 다리 사이에서 성기를 빼냈다. 그 대신


그는 내 엉덩이 골에 성기를 끼워 문질렀다. 기둥이 잔뜩 문질러지다가, 이
내 귀두가 닿았다. 꼬리뼈에서부터 아래로 그어 내리듯이 귀두가 항문
주변을 문질러 댔다.
“으, 흐으…….”

“넣어서 박고 싶어.”

귀두 끝이 쿡 쿡 항문을 찔러 댔다. 주름 위를 자꾸만 비벼 댔다. 입구를


자극당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묘한 성감에 몸서리쳤다. 씨발, 차라리
박히는 게 낫지…!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 말 듯 입구에만 가해지는 자극은
질이 더 나빴다.
간지럽다. 간지러운데 부족해. 안쪽은 더 큰 쾌락을 알고 있었다. 주름을
잔뜩 벌리고 들어와 안을 가득 채운 충만감이라거나, 점막을 잔뜩 치대고
문지를 때의 쾌감 같은 거. 또 내벽 안쪽의 어떤 극점을 찔러 댈 때의 미칠
것 같은 쾌락 같은 거…….
“하아, 일릭. 일릭…….”

대공의 애타는 목소리에 속이 더 뜨거워지는 기분은 착각일까.


귓가에 그의 목소리나 숨소리가 파고 들 때마다 고막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머릿속까지 간지러움이 번졌다. 저릿할 정도의 간지러움에 얼굴로도 열이
오르고 눈가까지 욱신거렸다. 이미 더 달아오를 곳 없다 생각했던 얼굴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터질 듯이
뜨거워진다.
대공은 내 항문 주변에 제 성기를 비비며 격렬하게 차오른 숨소리와 함께
속삭였다.
“말 태워 줄까, 응? 그대가 그렇게 말을 잘 탔다던데.”

안 돼…… 그건 안 된다. 그건 곤란해……. 나는 속절없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도리질쳤다.
물론 부족했지만. 뭔지 모를 게 부족해서 괴로웠지만, 지금 상태에서 삽입
섹스를 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오일도 없이, 아니 설령 오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까지 타고 난 오늘 대공이 박는다면 그 고통에 한참
고생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고통을 상회하는 쾌감이 있기야
하겠지만…….
괴로울 정도로 강요당하던 쾌감을 떠올린 순간 아래가 욱신거렸다. 가슴에
가해지는 자극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내 성기도 괴로웠지만, 항문이 자꾸만
발씬댔다.
아니 씨발……. 하면 안 된다는 걸 이성은 아는데, 동시에 대공이 제 좆을
박아 넣고 안을 자극할 때의 쾌감도 알아 버려서…….
“헉…!”

그때 갑자기 대공이 내 몸을 뒤집게 했다. 등을 테이블에 대자 대공이 내


다리를 벌렸다. 나는 그 순간 대공이 삽입해 들어올 것을 각오했다.
“흐읍…!”
그러나 생각했던 삽입은 없었다. 대신 대공은 내게 입을 맞췄다. 거친
숨결이 뒤섞이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혀가 잔뜩 얽혔다. 호흡까지 빼앗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동시에 두 개의 성기가 한 데 맞닿아 비벼졌다. 제 성기로 내 성기를
짓누르며 대공은 마치 삽입 섹스를 하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몇 번이고
성기끼리 서로 비벼지도록 허리를 움직이다가 조임이 부족했는지 이내
뜨거운 그의 손아귀가 두 개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아아…!”

성기를 한 데 모아 쥔 대공이 고개를 기울여 내 가슴을 물었다. 유륜째


머금어 쭉 강하게 빨아 당긴 순간 나는 신음을 내질렀다.
“각하, 각…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도 모르


게 그를 부르며 그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옷을 모두 벗은 나와는
달리 하의만 조금 끌어내렸을 뿐인 그의 상의가 내 손 안에서 구겨졌다.
그 어떤 애무가 이렇게 자극적일 수 있을까. 내가 경험했던 그 어떤 애무도
이보다 미칠 것 같은 쾌감을 주는 건 없었다. 고작 유두를 빨린 것뿐인데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다. 뭉치고 뭉친 쾌감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새하얀 섬광 속에서 붉고 푸른 폭죽이 터졌다.
“……!!”

대공이 이를 세워 유두를 깨물었을 때, 대공의 것과 한껏 비벼지던 내 성기


끝에서 묽은 액체가 튀어올랐다.
그 순간 여느 때보다 조금 빠르게 대공 역시 절정에 이르렀다. 내 위로 그가
쏟아낸 정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아아아…….”

사정을 하면서도 내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끝날


줄 모르고 전신을 질주하는 쾌락에 온몸이 저려 죽을 것 같았다. 더는 나올
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사출하려 안쪽이 죄 쥐어짜지는 듯해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하아…….”

절정에 몸부림치는 내 위로 정액을 쏟아 낸 대공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고운 미간에 옅게 주름이 팼다. 그 얼굴은 평소에 보았던 사정 후의
얼굴과는 조금 달랐다. 사정을 하기는 했지만 부족했다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어렴풋이 이해하고야 말았다.
분명 사정할 수 있을 정도의 쾌락이었다. 유두만으로도 가 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부족했다.
분명 차고 넘치는데도… 부족하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정의 여운이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가슴 끝만이 저릿저릿한
지금의 상태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아니… 뭐, 대공과의 섹스는 늘 괴로운 데다가 지금은 더욱이 섹스를 또 할
상황은 아니었고 또 내가 대공과의 섹스를 바란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하다가 만 듯한 뭔가 미진한 지금의 상태가 몹시도 낯선 게 사실이었다.
넣고 싶다고 그렇게 칭얼거리더니 답지 않게 왜 이런 애매한 섹스를 하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만둔단
말인가. 아니 물론 끝까지 하지 않은 것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하다가 만 이 찝찝함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공 역시
마찬가지인지 사정을 마친 뒤에도 나한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마치 더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그는 내 가슴께에 이마를 댄 채
잠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이윽고 한숨과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대신 상체만을 일으켜 그에게 짓눌려 있는 나를 굽어보았다. 조금 사이를
벌렸다지만 여전히 몸과 몸이 지나치게 가까운 낯 뜨거운 체위였다.
“미로스 각지로 퍼져 있던 군사와 용병들이 얼추 집결했다.”

……그건 정말이지 이런 상황 속에 이런 자세로 할 얘기가 절대로 아니지

않나…. 그러나 하늘 같은 대공께서 이 상태로 말을 하고 싶으시다는데, 내


가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말씀이십니까?”

교황의 성명서가 도착한 게 불과 3일 전. 미로스 전역에 퍼져 있던 군대가


모두 모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연합군이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는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준비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 예……. 그럼 로인에 갔던 저희 용병대 용병들도 도착했겠군요.”

“시간을 따져 보면 점심쯤에는 도착을 했겠지.”

“그럼 언제쯤 베르바니로 출격하는 겁니까.”

“내일 동이 트는 대로.”

나는 잠시 그의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성에


들어온 사이 군대가 속속들이 집결해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단 소리였다.
아니 그럼 나는? 내가 지금 대공의 별관에서 대공이랑 이렇게 쿵덕쿵덕
방아나 찧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잖아.
“그럼… 저도 오늘은 용병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내일 출발 준비를 하려면.”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공이 말을 툭 끊으며 말했다.
“그럴 예정이었다면 굳이 그대에게 승마를 가르칠 이유가 없잖아?”

이번에도 잠시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뒤늦게 이
해했을 때는 욕이 나왔다. 아니 씨발, 내가 무슨 기사도 아닌데
지금 전쟁터에 가면서 나를 말을 태워서 곁에 데리고 가겠다는 건가? 왜
굳이 나를 자기 곁에 데리고 가려고 말까지 태운 거지?
이제야 내가 오늘 오전 내내 승마를 한 이유를 깨달은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전쟁터에 그럼 마차 끌고 가야겠냐는 소리를 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말을 탈 줄 몰랐으면 어쩌려고.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승마라는 게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정말로 마차를 끌고 가려고 했다는 건가? 아니 대체 왜.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사정의 여운에 잠겨서
머리가 안 돌아가나 자문해 보았지만 그것도 절대 아니었다. 몸이 나른한
건 사실이었지만 정신만큼은 명철했다. 그럼에도 용병 나부랭이인 나를
대공이 굳이 곁에 데려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대공이 드디어 내게서 몸을 떼었다.
나와는 달리 바지 앞을 열었던 것을 빼면 옷을 벗지 않았던 대공은
손수건으로 앞을 닦고 바지 앞섶의 단추를 채운 뒤 벨트 버클을 잠그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것으로 완벽한 착장으로 돌아왔다. 땀에 조금 젖은
얼굴이 발그레한 것을 제외하면 막 정사를 마친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대화를 하는 사이, 가빴던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 역시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대공은 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 상체를 손바닥으로 내리눌러
테이블에 눕도록 만들었다. 그러더니 손수건으로 내 가슴이며 복부에
묻어난 액체를 닦는 게 아닌가.
“제가, 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

아니, 씨발 내가 닦고 싶다고요. 그러나 이번에도 마음의 소리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차마 그가 내 몸을 닦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사이 대공은 내 가슴과 복부, 성기까지 닦아 내었다. 그
간지러움에 나는 몸을 떨어야 했다. 얼굴로 다시 열이 벌겋게 오를 것만
같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원래는 그대를 집무실로 부르려 했는데.”


체모는커녕 그것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사라진 내 치골 위쪽을 문지르며
대공이 중얼거렸다.
“오수를 즐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 낮에 말을 탄 게 많이 힘들었나 봐.”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운동하고 씻고 배불리 식사하고 나니까


나른하고 졸리고 또 할 일이 딱히 없으니까 잔 것뿐이었는데. 나는 굳이
대공의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보다 그대가 몸이 약한 것 같아 걱정이야.”

“…….”

아니라고 해야 할지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부인했다가 더 험하게 다뤄질까 봐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내
입으로 내가 요즘 체력이 달리고 힘들다는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히 체력이 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안 해 본 쪽으로 착취를
당하다 보니까 정신적으로 더 힘들어서 그렇지…….
“그대에게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조금 아쉽게 되었어.”

“..주고 싶은 것이라 하심은.”

“선물.”
… 아니 선물이라니. 낮에 했던 승마 같은 건 충분히 선물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가 말하는 선물은 그런 종류가 결코 아닐 것 같았다.
선물이라는 그 단어가 이렇게 불길하고 불안한 단어일 줄 예전에는 내가
미처 몰랐었다.
대공의 입가에 걸린 미묘한 미소가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전에도 말 탄다는 소리에 괜히 지레 겁을 먹었다가 정말 말을 타게
되어서 어리둥절한 적도 있기야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선물’이라는 것이 나에게 이로울 것이 결코 없을 것이란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거절하고 싶다. 그런데 그 불안감이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대공이 문득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전쟁터로 떠나는 그대에게 필요한 물건이지.”

“…전쟁터에서 필요한 거라면, 검이나 갑옷 같은 것입니까?”

“그런 거지. 이 예쁜 가슴이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은 생


글생글 웃으며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음탕한 손짓은 아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야했다. 대공의 얼굴은 큰 문제였다. 그 호박색
눈동자가 야하게 젖어드니 내 얼굴로 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갑자기 무슨… 상식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을 하니까 도리어
헷갈린다. 아니 물론 상식 있는 사람이 남의 가슴을 대뜸 움켜쥐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뭔가 미묘하게 굴어서 이상했다. 말 타는 얘기를 하기에 기승위를 시키며
사람을 괴롭히겠구나 했는데 정말로 승마를 시키지를 않나…….
이대로라면 정말로 흉갑 같은 걸 선물하는 게 아닐까? 물론 대공이 주는
흉갑은 엄청 좋은 물건일 테니까 요긴하긴 할 텐데……. 미친놈이 정상인인
척을 하니 영 꺼림칙했다.
“아침에 출병을 해야 하니 나는 오늘 본성에 있어야 한다. 그대는 오늘 밤엔

혼자 이 침실을 쓰도록 해.”


대공은 마치 내가 대공의 부재가 무척이나 아쉽기라도 한 사람인 것처럼
말해서 나를 참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또 의외였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오늘은 일찌감치 자는 게 좋겠지.”

아니… 진짜 왜 갑자기 정상적인 인간인 것처럼 얘기를 하고 그러세요.


일찍 쉬라느니, 내 컨디션을 배려해 주는 것처럼 말을 하시고 그러시는지
놀랍고도 황송할 지경이다. 대공이 내보이는 다정함에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다 닦아 내고도 내 몸 위에서 떠나지 않고 살갗을 지분거리는
손가락이나 나를 향한 호박색의 눈동자를 차마 견뎌 내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돌리며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그래도… 제가 평소에 쓰던 무기와 갑옷이 전부 용병대에

있습니다. 적어도 가서 가져오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대공의 목소리가 아주 단호했다. 두 번 말 시키지 말라는 소리를 했을 때와


비슷한 말투에 나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다 준비를 시켜 두었으니, 그대는 걱정할 것 없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갖은 체액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도 나도 손수건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공이 내 뺨을 부여잡아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리게 했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내 위로 흩어지고, 호박색의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듯이
가까워진다.
이어 사내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졌다.
- 다음 화에 계속
41.

베르바니 지역에 집결한 대공의 군대는 이만에 달했다. 또한 이번에 교황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은 무라드 왕국에서 공국의 편을 들어 군사 오천 명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 모든 군사를 합친다면 이만 오천 명. 그래도
교황이 소집한 연합군의 규모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대공은 그다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군을 이끄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전신을 감싸는 판금 갑옷을 입고 말을 탄 모습은 꼭 군신이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위압감이 넘쳤다. 원래도 늘씬하면서도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에
흉갑과 견갑, 건틀렛을 착용하자 강인한 기운이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그의 벗은 몸이 잘 짜여진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전신 갑주를 입고 별 다른 피로감을 내보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평소에도 늘 몸을 단련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남성적인 강인함이 흘러넘치는 동시에 기품이 가득했으며 사뭇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갑주를 입은 사내에게서 거대한 힘을
느끼면서도 우아하다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 육체에 요정의 것인 듯이 아름다운 얼굴 역시 역설적으로 잘
어울렸다. 투구 아래 드러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성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하여 시선을 빼앗길 수밖엔 없었다.
투구 아래로 흘러내린 은빛의 머리카락 역시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깨에서
아래로 이어지며 말 등을 덮는 푸른 빛깔의 망토와 대비되며 그
위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찬연하게 빛났다.
그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괜히 얼굴을 긁적거렸다. 손끝에 리리엘이 냈던
상처가 만져졌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거실거리는 가피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아져 붉은 자국만 조금 남아, 이마저도 내일이나
모레면 깨끗이 사라질 것 같았다. 궁정 의사가 준 연고 덕분이었다.
내 볼에 상처가 옅어진 것처럼, 대공의 얼굴에도 내가 남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얼굴 한쪽이 새카맸는데 이제는 푸른
기운은커녕 노란 빛도 거의 보이질 않는다. 덕분에 투구 아래 그의 얼굴은
신이 정성스레 빚어낸 흠결 없는 조각상처럼 보였다.
어쩐지 전장에 서 있는 걸 보기만 해도 사기가 오르고 충성심이 오를 법한
얼굴이었다. 그의 기사들이 그를 흠모하는 시선으로 보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경외심이 드는 외양을 지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 겉껍데기만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 속 안에 들어 있는 변태 미치광이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그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기기는 해도 존경하는 마음 따위가 생겨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또 사람인지라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사내가 나를 계속 옆에 두고 끌고 다니는 것은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웬만한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나였지만 지금은 부담스러워서 속이 다
부대낄 지경이다. 대공이 타라고 내어 준 흑마는 분명 내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말이겠지만 나는 말 따위 타고 싶지 않았다. 다리가
터져라 고생해도 좋으니 내려서 보병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었다. 물론
대공은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가짐, 불편한 상황 속에 병력은 며칠에 걸친 행군 끝에
베르바니의 시르반 성에 도착했다. 이전에는 세리포브의 땅이었으나
현재는 미로스 국경선을 이루게 된 요새였다.
성을 지키고 있던 것은 라베인 백작. 그는 미로스가 베르바니 지역을
점령한 뒤 베르바니 지역을 다스리게 된 대공의 가신이었다. 그는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과 녹색의 눈동자를 지닌 젊은 사내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루시스.”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대공은 백작과 사이가 제법 각별해 보였다.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행동에서 나는 친밀함을 읽을 수 있었다.
“상황은 좀 어떤가.”

“오시안의 병력이 먼저 세리포브의 국경을 넘어서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수는 오천. 세리포브의 병사들까지 하면 일만은 충분히 넘을


것입니다. 연합군 본대가 세리포브 국경에 왔다는 첩보는 아직
없었습니다.”
“성명서씩이나 낸 것 치고는 진군이 너무 느린데.”

“우리 쪽 움직임이 그들 예상보다 한참은 빨랐을 겁니다.”

“그럼 오시안은 다른 곳에서 맞이해 볼까.”

“바로 회의 준비하겠습니다.”

남자는 빠릿하게 대답했다.


미로스는 원래 이 시르반 요새에서 연합군을 맞이할 계획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므로 이 요새에서 수성을 하며 전쟁이 끌어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연합군의 이동이 늦어 대공은 수성을 하기보다는 세리포브의
다른 성을 빼앗을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각하, 뒤에 계신 분은 소개를 아니 해 주십니까.”
갑작스럽게 시선들이 대공의 뒤에 서 있는 분, 그러니까 나를 향했다.
대공이 먼저 나서서 나를 소개한 게 아님에도 소개를 먼저 청한 걸 보면
대공과는 어지간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에게 쏠린 관심에
나는 몹시도 거북해지고야 말았다. 용병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용병 나부랭이일 뿐인 나를 대공은 대체 무어라
소개할 것인가. 괜한 긴장감이 속에서 올라왔다.
그가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수 나를
백작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일릭.”

작위도 성도 없는 내 이름만이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에 분명


백작은 놀라는 눈치였다. 이어진 부연설명 역시 그에게 충분한 답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일릭은 내…….”

내……?
잠시 대공은 말을 마무리하지 않고 말꼬리를 늘렸다. 문득 대공의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의 눈가가 마치 웃는 듯이 찡긋댔다.
“친위대다. 계속 내 곁을 지킬 사람이지.”
내가 원체 얼굴이 무덤덤한 편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아니, 친위대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급조해 낸 자리라 해도, 나
같은 용병 나부랭이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직위였다.
…하지만 꽤나 머리 좋은 단어 선택이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붙어 있는 것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명칭이었으니까.


라베인 백작은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대공에게 친위대가 있었느냐 묻는다면 친위 기사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지금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자칸이 친위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친위 기사단이 멀쩡히 있는데 친위대라는 어정쩡한 단어를 쓰는 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날 딱 보면 아무리 좋은
갑주로 몸을 휘어감고 있다 해도 절대로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소개한 이름에 성이나 작위가 붙어 있지도 않았고.
“그렇군요.”

그러나 이내 라베인 백작은 납득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절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을 설명이었는데도 그는 제 주군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각하께서 눈에 들이신 인재인 모양입니다. 친위대라니, 앞으로 자주

보겠군요.”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버리는 것이다.

그래, 대공만 한 권력자를 의심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곧 법이거늘.
차라리 라베인 백작처럼, 그의 말을 표면 그대로 믿어 나에 대해 오해를 해
버리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 오해에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난 그냥
연차 좀 있는 용병 나부랭이일 뿐인데……. 전략과 전술 같은 건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고, 호위 같은 건 전혀 할 줄 모르는 무지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내가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할 오해가 쌓이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고작 용병인 주제에 대공의 뭐 대단한 기사라도 되는 양, 친위대라는
영광마저 강제로 가지게 되었다.
용병대가 아닌 대공과 함께 다니면서 좋은 점은 사실 여러 가지가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야 말을 타는 것도 사실 걸어다니는
것 보다는 훨씬 편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 좋은 게 있다면 식사와 숙소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공은 늘 나를 곁에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나는 그와 같이 식사를 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먹는 음식이란 본디 맛과 질을 따질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먹는 건 염장한 고기나 딱딱하게 말린 건빵 따위였는데, 그건 정말 배를
채우고 필요한 열량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것들이었다. 돌에
내려치면 빵이 아니라 돌이 깨져 나갈 정도로 딱딱해서 물에 불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빵이 맛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에는
솥에 염장 고기와 같이 넣어서 푸욱 끓여 먹을 수가 있었다. 물론 맛은
없었다.
그러나 군대의 총사령관인 대공의 식사는 그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식량
수급이 원활하지 않으므로 갓 구운 빵을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건량조차
높으신 분들이 먹는 것은 맛이 달랐다. 행군 중에 먹는 것이 그러할진대, 도
시를 지나가며 성에 머무를 때는 또 제대로 차린 식사가 나왔다.
또 훌륭한 것을 꼽자면 잠자리였다. 물론 대공처럼 거대한 막사에 침대까지
놓고 자는 건 아니었지만, 내게 주어진 막사는 용병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새우잠을 자는 막사와는 또 차원이 달랐다.
가장 놀라운 건 물을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손 씻을
물은커녕 마실 물도 부족할 때가 많은데, 대공과 함께 이동을 하니 매일
몸을 씻을 물이 준비되었다. 과연 전쟁터에까지 시종들을 여럿 데리고
다니는 권력자의 삶은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었다.
훌륭한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상상도 하지 못했던 청결함. 그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호사스러
운 생활이 사람의 마음을 참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전쟁하러 가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긴장이 풀리려 들었다. 그 마음이
참 간사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시르반 성에 들어온 지금, 오늘 밤은 더 편히 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은근슬쩍 가슴 속에 자리했다. 대공의 처소 앞을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는 지금 순간에도 꽤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친위대 운운을 했지만 대공은 나를 회의실에까지 데리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내게 주어진 역할은 그 회의실을 지키는 것이었다. 먼저
도착할 오시안의 기병대를 상대할 계획을 세울 기세라 궁금하던 차였는데
조금 아쉽기도 했다. 물론 나야 추후 하달되는 명령에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시각 용병대는 뭘 하고 있을까. 아마 진을 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쉬고
있을 것이다. 요새에 도착했으니 행군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오늘 밤은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지 않을까. 성안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는 걸 보면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대공의 방에서 회의에 들어갔던 그의
가신들이 나왔다. 용병대를 이끄는 지휘관 부켈릭도 있었다. 부켈릭 휘하의
여러 부대 중 하나인 파빅이 이끄는 부대에서 싸우는 나를 다행히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
모두가 나온 뒤 하인이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테이블 위,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작은 장기 말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작전을 짰던 흔적이리라. 나는 그것들이 바스코브라는
도시와 그 앞의 평야 지역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바스코브. 반나절이면 당도할 거리에 있는 도시였다. 주변의 지역을 본다
해도 평야에 자리한 그 도시는 군사 거점이 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쪽이
수적으로 엄청난 우세 상황이면 모를까, 굳이 시르반 요새를 버리고 나가서
세리포브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서 빼앗을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교황이 본디 세리포브의 영토였던 베르바니를 반환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진격해 오고 있는 지금, 세리포브를 선공하는 것은 절대로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일릭.”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잠시
그 지도에 시선을 빼앗겨 나는 대공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

부르는 목소리에 바라보니 상석에 앉은 대공이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앉지.”

“아, 예.”

나는 하인이 의자를 빼 주는 대로 자리에 착석했다. 대공의 오른편


자리였다. 그러는 사이 다른 하인들이 테이블 위를 정리했고 순식간에
지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깨끗해진 테이블 위에 하인들이 음식을 옮겨 오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테이블 위를 점령해 가는 음식들을 보고 있다가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아 버렸다. 지금이 전쟁중이 맞나 싶을 정도의 만찬이 차려진 것이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요리들은 내게 꽤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었으며 먹기도 전에 어딘가 기가 막히는 기분이라 잠시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연회가 있는 겁니까?”

아까 나갔던 그의 가신들이 다시 돌아와서 같이들 식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나온 질문이었다. 준비된 음식이 절대 그와 둘이 먹을 양과 가짓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회? 루시스가 준비를 해 놨다고는 하더군. 그건 왜 묻지?”

“혹시 이곳에서 하는 것인가 싶어서요.”

“연회를 위한 홀이 따로 있겠지. 그리로 가고 싶나?”

“아뇨, 제가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럼 이 음식들은…….”

“아아……. 하하, 일릭. 그대가 다 먹어도 돼. 그대 먹으라고 준비한

것들이다.”
…아니……. 분명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뜻은 끝에 가서야 통했다.

서로 하는 말이 계속 어긋나는데 결국 뜻이 통한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또한 어쩐지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게 지금 둘이 먹을 양은 설마
아니겠지 싶어서 물어본 거긴 하지만, 당연하다는 대공의 반응이 나를 꽤나
민망하게 만들었다.
내가 민망해하는 걸 대공이 알면 또 꼬투리를 잡아 놀릴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각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셔도 되는 자리인지요.”


“입맛을 돋우는 얼굴들도 아닌데, 내가 굳이 그들과 식사를 해야 할 이유가

있나.”
…… 그럼 누구는 입맛을 돋우는 얼굴을 가졌나.
아까의 민망함에 더한 민망함이 더해져 괜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식사 예절도 몰라서 늘 주변을 지저분하게 더럽히며 와구와구
시끄럽게 먹는 용병 나부랭이인 나랑 먹는 게 오히려 더 비위가 상할 것
같은데, 대공의 취향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들지.”

대공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어느새 소리없이


다가온 하인들이 음식을 내 앞의 접시에 덜어 주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참으로 황송하게도 귀족도 아닌 놈이 귀족, 그것도 대공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런 대접에도 이전보다 조금은 덜
송구스럽기도 했다.
음식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미로스 성에서 먹어본 것과 비교했을 때
나쁘지 않다는 거지, 지금이 전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용병으로 일을 할 때 먹었던 걸 생각하면 더없는 호사였다.
놀랍게도 대공 역시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먹고 있었다. 그래 봐야 성인 한
사람 정도의 양이었지만. 성에서는 그 훌륭한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그였으나 전시에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게 두 사람이 먹어도 턱없이 많은 양이었다. 음식은 태반이
남았다. 대공과 내가 한두 번 먹고 손을 더는 대지 않는 음식들은 하인들이
다시 내어 갔다. 요리 종류가 많아서 테이블에서 모든 요리가
치워지기까지는 한참이었다.
테이블 위에서 마지막 요리까지 사라졌을 때는 포만감이 턱 끝까지 차오른
뒤였다. 디저트가 나왔으나 거의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달착지근한 것을
넣을 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술을 한 잔 마셨다. 만찬의 끝에 귀족들이 마신다는 디저트
와인이라는 것이었는데, 기포가 뽀그르르 일면서 달착지근해서 내
입맛에는 영 별로였지만 그래도 단맛을 뚫고 느껴지는 쌉쌀한 술맛에
아쉬운 대로 한 잔을 쭉 마셔 버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평소 식사
후에는 혼자서 차를 꼭 한 잔 마시던 대공은 나처럼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식사량도 그렇고 차를 마시지 않는 것도 그렇고, 전시라서 그 역시
평소와 달리 조절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내일 출병하시는 겁니까?”

내게는 그 모습이 내일 있을 전투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여서 물었다.


“오시안 따위에? 자칸으로 충분하지.”

“…그렇다면 일단은 이 요새에 계속 머무르실 예정이십니까.”


“이런. 그대가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 알았다면 회의에 데리고 들어갈 걸
그랬군.”
대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지적처럼 평소와 달리 내 쪽에서 질문이
많기는 했다. 그거야 전시니까. 용병인 나로서는 앞으로의 계획에 관심이
많을 수밖엔 없는 것이다.
“내일은 부켈릭이 그 휘하 용병들을 움직일 것이다. 바스코브에서 보급을

하기로 했지.”
…보급. 말은 보급이지만 약탈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시르반 요새에는 어느 정도 군량이 쌓여 있을 것이며, 베르바니 지역으로의


보급선도 확보가 되어 있었다. 수성을 한다 해도 한동안 걱정이 없을 터.
그럼에도 대공은 세리포브의 도시 하나를 약탈하기로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하였다.
“팔천이면 도시 하나는 충분히 빼앗겠지. 놈들이 시간을 맞춘다면 그 앞의

평야에서 오시안의 기병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 사이 자칸이 추가 병력을


이끌고 놈들의 측면을 칠 거고.”
대공은 오시안 기병대가 무슨 가을 날 길가에 굴러다니다 뭉친 낙엽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내일 있을 전투는 그저 그것들을 빗자루질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처럼 읊조렸다.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이름 높은 오시안 기병대를 상대로 어떻게 저런
자신감을 보일 수 있는지가 나로서는 의문이었다. 전신을 감싸는 판금
갑옷을 입고 군마를 입은 채 돌진하는 걸 상상하면 15살 때부터 전쟁터에서
살아온 나조차도 약간의 공포심이 드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 수가 무려
오천이었다. 오천. 거기에 세리포브 측의 보병들까지 합세할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시르반 요새로 돌아와 수성을 해야겠지. 아무리 연합군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엉덩이가


무거워도 근시일 내로 도착하긴 할 테니까.”
수만의 군사를 상대해야 하니 시르반 요새를 지키고 있는 건 당연했다.
설마 대공이 미치지 않았다면 쫓아오는 연합군을 두고 세리포브 내에서
땅따먹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땅따먹기를 한다면, 그 역시 나름대로 스릴이 넘치긴 하겠지만.
“……각하.”

나는 나도 모르게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전투. 검을 쥐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생각만 해도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몸 안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며 팔뚝에 핏줄이 솟으며
벌떡거렸다.
민간인을 상대로 약탈을 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약탈 과정
속에 상당한 수입을 얻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끔 용병으로 일을 하다가
고용주가 급여를 지급하지 않을 때면 고용주의 도시를 약탈하는 것도
용병의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게다가 그 뒤에 이어질 오시안 기병대와의 전투. 그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내일 저도 달칸 용병대와 함께 하겠습니다.”

내 딴에는 순식간에 열이 올라서 한 소리였다. 전쟁터에 가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대번에 미간을 픽 찌푸렸다.
“그대는 전쟁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야.”

대공의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에 잠시 나는 굳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안에서 들끓던 혈기들이 일시에 식어 버렸다.
전쟁을 참 좋아한다기보다는… 몸을 마구 움직이면 스트레스도 풀리니까
움직이고 싶었다. 다른 때라면 전투에서 빠지는 것에 별 생각이 안 들 텐데,
요즈음은 계속 하루 종일 대공과 붙어 있으니 신경이 날이 서고 절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이러다가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서…….
몸이 편한 것과는 별개로 좀 움직이고 싶달까……. 어쩐지 그렇게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변명을 하는 말주변 같은 건 없었고, 내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버린 사이
대공이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세상 사람들은 내가 전쟁광이라고 떠들어 대는데 말야. 전쟁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따로 있잖아.”


“…전쟁 싫어하십니까?”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안다면 그대도 전쟁이 싫어질걸.”

“하지만 영토를 점령하고 난 후에는 더 부유해지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식민지라면 모를까 세리포브는 가치가 없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언제든 박살내고 싶지만, 중요한 건 상황이지. 지금은 세리포브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거든. 베르바니는 비옥한 평야니 쓸모가 있지만, 그
외의 지역은 굳이 탐낼 정도는 아니다. 좋은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공은 굳이 세리포브와 다시 전쟁을 하게 된 데에 상당히 불만이 많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전쟁을 하면 일당을 받는 나와는 달리 대공은 일당을
지급하는 쪽이었으니,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손익을 잘 계산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어쩐지 돈 얘기를 하는 대공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바스코브 정도는 지금 치는 게 딱 적당해. 적어도 병사들 며칠 치 임금은
확보할 수 있을 테지. 괜히 시기를 놓쳐서 지난번처럼 미련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
요컨대 지난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바스코브를 약탈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웠다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동시에 수적으로 열세인 전쟁을 앞둔 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기도 했다. 약탈을 명령해 놓고 어디 마실이나 가는 듯이
태평스럽기까지 했다.
“오시안의 기병대를 이끌고 오는 게 엔리온이면 좋을 텐데, 그러기는 쉽지

않겠지.”
“…엔리온이면 현 교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놈이야말로 전쟁광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뭔가 지금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 휙 지나간 것 같은데.


문제성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어 놓은 주제에, 대공은 여전히 유유자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번 연합군 소집을 교황이 주도했다는 얘기는 알고 있습니다만, 직접


전장으로 오기도 하는 겁니까?”
“스스로가 훌륭한 전략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겠지.”

대공의 말투가 젊은 교황을 한껏 비아냥대고 있었다.


“칼 들고 직접 찔러야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걸까. 군사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제가 주창하는 교리에 어긋나는 일인데 대륙의 평화를


운운하는 꼴이 아이러니지.”
“각하를 적으로 돌리는 게 교황의 입장에서도 좋지는 않을 텐데요.”

내 말에 대공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나를 민망하게 했던


미소와는 조금 달랐다.
“놈은 이미 나를 적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 말을 하는 입술이 그려 내는 것은 완벽한 비웃음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2.

작금의 교황은 지난 세월동안 땅바닥에 떨어진 교권을 다시 회복하여,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상당한 권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과거 신을 저버렸던 수많은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교단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이끄는 존재였다. 교황이 베푸는 수많은 구휼 정책과
복지 사업들이 백성들의 가난과 곤란을 구제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교황이 교단 내부의 부패 척결을 1순위로 삼으며 엄격한
도덕성을 내세워 교단을 안팎으로 강화하고 있었다. 덕분에 백성들이 믿고
의지하니 귀족들이 그들에게 결탁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왕가에 행사하는
영향력 역시 커지는 것이다. 결국 교단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한 국가의 행보에 명분과 당위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고작 십수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무섭도록 세력을 키우고 있는 교황 엔리온 1세와 대공이 이미 척을
진 사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는 단순히 대륙 국가들 간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균형을 위
해 미로스 공국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교황이 직접 전장에 온다? 자신의 전략이 있어야 이길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반드시 이기고 싶다는
소리인데.
이건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엔리온은 어릴 적부터 교단을 이끌어 올 인재로 점찍어져서 갖은 지원을

받았다. 공부를 한다는 명목 하에 여러 왕실에 신세를 졌었지. 티마예브에


머무르던 적도 있었는데, 당시 병정놀이를 하자며 나를 귀찮게 했어.”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일단 교황은 지금의 모습도 알지

못하니 어릴 때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게 있다면 바로 어린 대공이었다. 심지어 뭐…? 병정놀이를 했다고?
말로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리는 기분이었다. 절대로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웃기는 일이지. 그때도 한 번도 못 이긴 주제에 진짜 전쟁은 이길 거라

생각했나.”
“……설마 병정놀이에서 못 이긴 것 때문에 이번 전쟁을 일으킨 건

아니겠지요.”
“하하, 일릭. 그대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군.”

…농담은 아니었는데, 멍하니 튀어나온 내 말에 대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에게서 그다지 본 기억이 없는 밝은 웃음이라 조금 놀라기도 했다.


티 없이 맑게 웃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모든 면에서 나를 이긴 적이 없으니 이기고 싶은 마음이야 한량없겠지.”

대공이 웃음기 어린 말투로 덧붙였다. 그러나 그 얼굴은 분명 아까의 웃는


낯과는 조금 달랐다. 이번에도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소에
가까웠다.
“경쟁심 같은 겁니까?”
“그보다는 질투에 가까울걸.”

“질투요?”

“그래. 다 내 누이 이스테샤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탓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스테샤.
그의 누이 나는 어느 달밤 그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어두운
. ,

동굴 속에서 횃불에 의지하여 보았던 여자를 떠올렸다. 대공의 것과 똑같은


은빛의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대공을 닮은 여자였다. 엄청난
미남인 대공과 외모가 닮은 만큼 그녀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다. 대공보다
선이 가는 그녀야말로 따지자면 진짜 요정과도 같아 보였다. 남자라면 능히
마음에 둘 법한 그런 천상의 외모였다. 물론 대공과 닮았다는 점에서
내게는 별로 끌리는 얼굴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어느 사내가 그녀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교단의 미래를 짊어진 채 여러 나라의 왕실에서 공부를 하던 한 젊은
사내가 티마예브의 왕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 왕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다른 남자… 그러니까 쌍둥이인 대공의 아이를.
엔리온의 입장에서 충분히 대공을 미워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왕녀 이스테샤가 낳은 아이가 대공의 자식이라는 걸 안다면 말이다.
“교황은 그… 아이가 각하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까?”

“누이가 그의 면전에 대고 직접 얘기를 해 줬지. 내 아이를 가졌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티마예브를 당장 떠나라고 말이야.”


아니… 차인 방식이 너무 잔인하잖아?
나는 생전 얼굴도 본 적이 없었던 교황이 가여워졌다. 그런 경험을 했다면,
연적이 증오스러울 만도 했다.
“카미드나 엔리온이 생각하기엔 그래도 나보다는 이스테샤가 낳은 아이가

낫다는 모양이야. 뭐, 그렇다 해도…… 이스한테 차인 놈들이 의기투합을


해 봤자지.”
…특히 상대가 이 재수 없는 미치광이 대공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티마예브의 국왕도 이스테샤 왕녀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교황과 손을 잡았단 말씀이십니까?”


“카미드는 엔리온이 이스를 좋아한다는 걸 몰라. 그걸 알았으면 엔리온은

티마예브에 있을 때 암살당했을 것이다. 이스테샤의 남편처럼 말야.”


“…남편이요?”

“프리스카 백작과 혼인시킨 뒤 백작을 죽여 버렸다. 그녀가 다른 이와

결혼해 함께 하는 꼴을 볼 수가 없다면서 이스를 과부로 만들어 버렸지.


덕분에 프리스카 백작 부인이라고 불리는 처지지만, 정작 이스는 백작의 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한 번 잡
아 본 적이 없어. 얼굴이나 제대로 보았을까도 의문이로군.”
내가 따라가기에는 솔직히 너무 정신 나간 이야기였다. 나는 형제자매가
없지만, 그것이 성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도 그 누구도 제 형제자매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아니, 애당초 사람으로서 나고 자란 과정을
함께 해온 동기(同氣)에게 어떻게 성욕을 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 피를 지키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나는 이 왕족들의
근친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들만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감정적인 영역으로 확대된다는 게
소름이 끼쳤다. 일부러 결혼을 시키고 상대를 죽여 과부로 만들어 제 곁에
묶어 둘 생각을 했다는 것도 끔찍할 따름이었다. 사촌도 아니고 동기간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만약 이스테샤 왕녀, 프리스카 백작 부인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형제의
성애의 대상이 된 것이라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그녀에게 차인 교황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가 가장 불쌍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제 형제가 자신을 사랑하여 낳은 아이를 숨겨야
하고, 또 원치 않으면서 그 형제의 곁에 머물러야 한다면 말이다.
“교황은 국왕이 왕녀를 붙잡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손을 잡은

것입니까.”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군. 나를 증오하고 있을 뿐이지. 프리스카 백작을

암살한 건 나라고 알고 있을 거다.”


“…각하께서는 왕녀를 곁으로 데려오실 생각이 없으셨는지요.”

아무리 카미드가 티마예브의 국왕이라고는 하지만, 이스테샤가 낳은 것은


대공의 아이였다. 그럼에도 대공이 이스테샤를 카미드의 곁에 남겨
두었다는 게 의아했다.
“글쎄……. 뭐, 나도 그녀도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지.”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대공은 미소를


짓는 것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나는 더는 질문할 것이 없었다. 뒤늦게
나답지 않게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다는 후회가 찾아 들었지만 그마저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언젠가는 제 누이이자 아이를 낳아 준 여인을 제 곁으로 데려오려는 노력…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고 있구
나. 멍하니 그런 생각이 이어졌을 뿐.
“용병대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건, 그대도 바스코브에서 한몫 챙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가?”
잠깐의 적막을 깨고 대공이 물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물론 용병대가 약탈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굳이 약탈을 즐기는


쪽은 아니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용병대 생활이라 해도 돈이 전부인 건
아닌지라, 급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굳이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하며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대공에게 전쟁터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한 건 순수하게 전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의 곁을
떠나고 싶었고 말이다.
“동료들이 걱정이 되기라도 하는 건가, 그럼. 그대에게는 그대의 용병대가

죽는 쪽이 이득일 텐데.”
“……예?”

대공이 중얼거리듯이 한 말에 내가 반문했으나 그는 제 중얼거림을


되풀이해 주지 않았다. 파빅의 용병대가 죽는 게 나한테는 이득이라니, 섬뜩
한 소리지 않은가.
그러나 대공은 내 궁금증을 풀어 주는 대신 다시 한번 단호하게 퇴짜를
놓았다.
“전투 따위 할 필요 없어. 나는 그대를 그런 용도로 곁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위압감이 담긴 한마디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호박색의 눈동자가… 꽤나
의미심장했으므로. 나를 핥듯이 바라보는 시선에는 정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만 쉬도록 할까.”

대공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고, 은밀하게 들린다.


며칠 간 숱하게 보았던 얼굴인데도 그 얼굴에는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순식간에 바뀐 눈빛에는 더욱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불안을 닮은 어떤
감정으로 심장이 덜컥덜컥 떨리기 시작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속에는
미치광이가 들어 있다. 나는 분명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 요정처럼 아름다운 게
문제 중의 문제였다.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와 갑옷을 벗고 씻고 나왔을 때에도 요새 곳곳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멀리서는 사내놈들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전투를 앞두고 술이 조금씩 지급이 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 역시 원래라면 다른 용병놈들과 어울려 술로 몸을 데우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과장된 웃음과 흥으로 억누르며 밤을 보냈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침 일찍 행군을 떠나야 하니 자리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을 계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창문 하나를 닫으면 바깥의 소란이 완전히
차단되어 들리지 않았다. 대신 고요함만이 흐르는 자그마한 방이 나의
것이었다. 전시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푹신한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사에서 다른 용병 놈들과 부대끼며 자는 게 아니라 이런 방을 쓰고
있다니. 게다가 그 방 한쪽에 걸린 번쩍거리는 갑옷이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며칠째 입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벗어 놓고 보니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감이었다.
용병으로서 내가 입던 것은 판금 흉갑에 어깨 등의 다른 부분에는 가죽을
덧댄 형태의 갑옷이었다. 잘 제련된 강철로 만든 건틀렛이나 팔꿈치, 어깨를
보호하는 파츠 따위를 여윳돈이 되면 사서 쓰기도 했지만 이렇게
전부 다 갖춰서 갖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말하자면 용병 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완벽한 무장 상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이 나를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으니 내가 욕구
불만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전투를 시킬 게 아니었다면, 이
런 갑옷을 하사한 대공의 심리를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고가의 물건을 말이다.
곁에 데리고 다닐 때 내 차림새가 비루하면 제 면이 서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굳이 나를 차려 입혀서 데리고 다니는 대신 그냥 용병대로
돌려보내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련만. 돈이 많이 들어서 전쟁이 싫다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왜
그러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물론 내가 어떻게 미친놈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겠는가마는.
나는 침대에 벌렁 누워서 잠을 청했다. 해가 질 무렵 요새에 들어와 바로
작전 회의가 있었고, 그 이후에 늦은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난 뒤 방에 돌아와
씻고 누운 참이었으니 밤이 깊어 가는 시각이었다. 창문 밖의 소란 역시
잦아들고 있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내 머릿속에는 대공과의 대화가 둥둥 떠다녔다.
좀처럼 대화를 할 일이 없는 사이에 모처럼 길게 나눴던 대화였다.
티마예브의 국왕과 교황, 미로스의 대공 사이에 어떤 앙금이 있는가 하는
것은 비밀이라면 엄청난 비밀일 텐데 대공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저어하지 않았다. 제 누이의 이야기조차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이스테샤. 대공을 무척이나 닮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 같은 여인.
티마예브의 왕녀. 프리스카 백작 부인. 교황이 연정을 바쳤던 상대.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 아이를 낳은…….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니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할 것이다. 나 역시 대공을
미리 알아 그에게 학을 뗀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를 본 순간 반해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안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얼굴이 빼어난 여인을 보고 나라를 기울게 할 미인이라고 한다든가. 그
표현이 딱 맞는 여자였다. 지금의 전쟁이 사실상 그녀를 두고 일어나는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대공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낳아 준 여자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다면 그때가 되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되는 걸까. 어둠 속에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공은 행군 도중에 나를 곁에 두기는 했지만 내 몸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물론 그가 손 대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상하다는 거다. 갖은
변태짓을 하기 위해 나를 곁에 두고 있었던 그가 손도 대지 않는다는 점이.
식사를 마치고 나를 핥듯이 바라보던 시선이 떠오른다. 솔직히… 뭐라도
하라고 시킬 줄 알았다. 늘 그가 나에게 요구하던 그렇고 그런 것들.
그러나 대공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내보냈다. 배정된 방에서 쉬라는
소리를 했었지.
설마 그가 말을 오래 타야 하니까 내 컨디션을 배려해 준 걸까 하는 생각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들었지
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무섭다. 내 상태를 배려하는
대공이라니, 씨발 그가 왜. 다음에 또 어떤 더 엄청난 짓을 시키려고. 아니면
뭐, 무슨 뭐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아니 애당초 대공이 나를 ‘배려한다’는 걸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배려라는 건 대공에게는 없는 개념일 것 같았다. 내게는 그런 편견 같은
확신이 있었다.
괜히 잠이 오지 않으면서 마음이 심란했다.
대공과 대공의 누이. 지나치게 닮아 연인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닮
았기에 더욱 아름다운 한 쌍 같기도 했다.
그 둘이 낳은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두 사람이 꼭 빼어 닮았으니 아이
역시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은 호박색 눈동자와
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겠지. 세 명이 모여 있으면 꽤나 멋진
그림이리라. 그 모습이 조금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단의 관계를
떠올려서인지 괜히 기분이 미묘했다.
내 방 문에 노크 소리가 울린 것은 내가 그렇게 멍청한 생각들에서
벗어나지 못해 잠들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였기에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문을 연 것을 잠시 후회했다.
문 밖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대공의 하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물론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다- 알 수 있었다. 대공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나는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그럼

그렇지. 나한테 손을 안 대고 있었던 게 더 이상했다니까?


내 방은 대공의 방에서 멀지 않았기에 하인을 따라 대공의 방에 도달하기는
금방이었다. 길게 갈 것도 없이 내 방이 그의 침실 쪽 문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왔나?”

대공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피곤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살짝 찌푸린 얼굴은 꼭 두통이라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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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로 올라와.”
나는 분부에 따라 침대 위로 올라왔다. 손바닥과 무릎을 짚어 네 발 동물의
모습으로 그를 향해 움직였다.
더. 더. 가까이. 그가 말하는 대로 사지를 움직여 조금씩 나아갔다.
어느새 나는 대공의 머리 양옆에 손을 짚고, 그의 골반 옆쪽으로 무릎을
짚어 내 아래에 그를 가두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빛깔의 벨벳 침구 위에 흐트러진 은빛의 머리카락이 내 손과 손목에
휘어 감겼다. 그 감촉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가늘게 자아낸
비단실이 이처럼 부드러울까 싶었다.
“일릭.”

붉은 혀가 제 입술을 핥아 낸다. 호박색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한 채 붉은


혀를 내보이는 것이, 내 악몽 속의 뱀과 같으면서도 그토록 요사스러울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내 아래 그를 가두어 두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어쩐지 목덜미를 물린 채 위협당하는 위기감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입술을 더듬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문지르더니 손가락
하나가 입술 사이로 들어와 치아를 두드린다. 이를 살짝 벌리자 더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혀를 건드렸다. 혀 아래로 타액이 잔뜩 고인 혀뿌리
주변을 문질렀다. 그답지 않게… 느릿느릿 감질 나는 손길이었다. 손가락
아래 타액이 질척질척 소리를 내며 넘칠 듯이 고여 들었다.
“머리가 아파.”

중얼거림과 함께 입속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의 손가락은 내


타액으로 번들번들 젖어 있었다.
대공은 그 손가락을 내 셔츠 아래로 집어넣었다.
“흐읏…!”

아니 씨발 진짜 언제부터 내 가슴이 두통 치료에 효험이 있었기에 자꾸 내


가슴을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아프다는 대공은 다짜고짜 내
유두를 비틀어 쥐었다. 얼마 전 미약으로 잔뜩 괴롭혀졌던 유두는 여전히
그 감도가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허리가 절로 튀며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내 아래 깔린 대공이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반응을 즐기듯이 그는 제 마음대로 내 유두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문지르고
비틀며 잔뜩 희롱해 댔다. 그 어떤 반응도 주지 않아야겠지만, 생리적인 현
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 꽤나 오랫동안 자극이 없었던 아래에도 확실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야해 빠져서는.”
대공은 그런 내게 수치스러운 단어를 속삭였다.
“가슴으로 느끼는 얼굴이 얼마나 새초롬한지, 더 만져 달라고 유혹이라도

하는 것 같아. 그대가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 씨발… 내가 왜 너한테 내 가슴을 만져 달라고 하냐. 그리고
새초롬이란 단어가 나한테 어울리기나 해?? 그의 손길을 견디지 못해 몸을
비트는 와중에도 열 오른 머리에 쌍욕이 난무했다.
“나 아닌 다른 사내의 손길에도 이렇게 앙앙거릴 테지. 이런 가슴을 가만히

둘 수가 있나. 젖 모양이 이렇게나 예쁜데.”


와. 나는 대공의 트집 잡기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가슴을 비틀며 희롱하는
손길에 헐떡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건 없는 거였다. 내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 놈은 세상에 하나밖엔 없는데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다행히 대공의 개소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 대신 뒷목에 손이 닿았고
그가 내 머리를 끌어내려 나는 고개를 수그려야 했다. 대공은 내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춰 왔다. 내가 위에서 덮어 누르고 있는 자세 때문에
마치 내가 입을 맞추는 모양새였으나 실상은 그가 멋대로 내 입술을 물고
빨며 혀를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나에게 키스를 조르는 것만 같아서, 등줄기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입안에 들어오는 혀에 나는 여전히 굳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처음처럼 심한 혐오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들끼
리의 입맞춤은 정말이지 지나치게 간지럽고 소름 끼치는
행위였다.
“하아, 일릭…….”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만큼 내 호흡 역시 뜨거워져


있었다. 대공이 간질이듯이 유두 위를 문지를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공은 낮게 웃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생각을 해 보니 그대가 입으로 말을 타는 건 아니더군. 그러니 선물, 지금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선물. 미로스를 떠나기 전날 밤, 답지 않게 허벅지 사이에 문지르는

성행위를 했던 그가 다음을 기약했던 것이었다. 검이나 갑옷 같은 것이냐


물었고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하인들이 나에게
판금 갑옷을 입혀서, 나는 이게 설마 선물이었나, 대공이 말에 이어서 또
이런 정상적인 선물을 하다니 전쟁이 났다고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렸나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선물’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불길할 수가 없었다. 가슴 끝이 저릿저릿하면서 온몸을 뜨겁게 열기가
달구고 있는데도, 불안감에 가슴 한구석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자.”

대공은 머리맡에서 상자를 집어 내게로 건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그런 상자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천쪼가리.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나풀나풀한 천조가리를 손에 쥔 채
나는 황망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흐드러져 퍼진 은빛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아 입가에 댄 채
대공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몹시도 외설적이며 관능적인
미소였다.
“입어 봐.”

여자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드레스나 모자 따위에 장식으로 들어갈 법한


레이스로 구성된 천 조각.
그것은 여자들이 가슴을 가리기 위해 입는 속옷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3.

나는 대공이 그 징그럽고 괴상한 것들을 입으라 하는 것에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검정색의
어깨 끈 아래 이어지는 화려한 망사 레이스로 이뤄진 삼각형
모양의 천이 양쪽 가슴을 가렸고, 어깨 끈과 같은 가느다란 끈이 몸통에
감겨 등 뒤에서 매듭 지어졌다.
귀족 여자들과 관계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볼 기회가 없는
화려함으로 가득 찬 속옷이었다. 도대체 이런 건 누가 만드는 것인지, 가득
짜인 섬세하고도 화려한 레이스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아주
맞춤인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았다. 보는 눈 없는 내가 느끼기에도 이것은
장인의 솜씨였다.
“역시 내 누이가 솜씨가 좋아. 그렇지 않나?”

분노를 닮은 허탈함이 순간 나를 덮쳤다. 이런 변태 같은 물건을 만든


장인은 누군가 했더니, 그게 바로 대공의 누이 이스테샤였다니…! 그
여자가 어두운 동굴 안에서 내 몸을 핥듯이 바라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대단한 눈썰미라고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추호도 없었다.
남매가 쌍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나처럼 시커먼 사내놈한테 이런
걸 입힐 생각을 한단 말인가! 여자들이 하는 가슴 속옷을, 굳이 남자
사이즈로 맞춤 제작을 하는 건 또 무엇이냐고…!! 그 황당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공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도, 다리를 벌리는 것도, 가슴을 애무 당해
발기하는 것도 모두 익숙해져서 수치심이 덜 하다 생각했거늘, 그 다음의
것이 있었다. 여자 속옷을 이렇게 입혀 놓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굴욕감에 전부 다 때려 부수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가슴 속옷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하의는 더 난장판이었다. 내가 만나 온
그 어느 유부녀도 이렇게까지 야사시한 걸 입은 꼴을 못 봤다. 엉덩이를
가리는 천이 없이 그냥 끈만 달려 있어, 양쪽 둔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끈이 자꾸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어 거북해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앞을 가리는 부분까지 있으나 마나한 꼴이었다. 망사
레이스로 된 역삼각형의 천쪼가리가 얼마나 작은지, 고환조차 억지로
욱여넣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자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툭 불거진 것은
물론, 발기한 성기는 채 들어가지도 못하고 튀어나와 볼썽사납게
덜렁거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꼴을
본 순간 내 얼굴로 어쩔 수 없는 열기가 뜨겁게 질주했다.
“누이의 눈썰미에 자꾸만 감탄이 나오는군.”
나를 그 꼴을 만들어 놓은 대공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고 도리어 흥분이 된다는 듯이 그의
눈동자가 정욕으로 빛나서 나를 더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데, 여성용 속옷을 입은 내 꼴이 보일까 봐
고개를 또 제대로 숙일 수도 없었다. 얼굴로 열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민망한 기분을 또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의 상황이 최악인지, 리
리엘에게 민둥민둥해진 성기를 들킨 게 최악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정말. 못 참겠군.”

대공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머리채를 쥐었다. 나는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그는 내 머리를 그대로 제 다리 사이로
내리눌렀다.
“빨리.”

아직 벗지 않은 대공의 바지의 천 너머로 단단한 것이 내 뺨이며 입가에


잔뜩 비벼졌다.
“잠, 잠시만.”

“빨리.”

나를 재촉하는 대공은 짐짓 앓는 듯한 소리까지 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야살스러운지 내 귓가에 홧홧하게 열이 다 올랐다. 내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도 잊은 채, 나는 애써 내 얼굴과 대공의 바지 앞섭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어 그의 바지 앞에 채워져 있는 버클과 단추를 풀어 헤쳤다.
후끈한 열기를 전해오는 것이 속옷을 통해 느껴졌다. 나는 그 속옷을
옆으로 젖히고 벌떡 튕겨져 나오는 것의 끝을 찾아 입술로 물었다.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모든 행위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흡… 으읍…….”

턱을 뻐근하게 만들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것의 부피감이 버거워서 신음이


흘렀다. 거부감 같은 게 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입에 다
담기도 힘들 정도로 커다란 크기라는 건 늘 문제였다. 행군 도중 어떠한
접촉도 없었기에 꽤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물론 반갑다거나 좋다거나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입안에 들어온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것은 지랄
맞게 컸고, 이상한 맛이고, 이상한 감촉이고, 목구멍을 찔러 올
때면 여전히 구역질이 치밀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러 번 반복되었던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입안이 자꾸 저절로
질척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성기를 빨아 삼키고 동그란 귀두를 핥을 때마다
자꾸만 타액이 고였고 그 타액이 질척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읍, 흐, 흐으…….”
대공이 조급하게 허리를 움직여 내 입안으로 조금 더 깊이 찔러 넣을
때마다 입에서는 자꾸 신음이 샜다. 온갖 음탕한 소리 사이에 대공의
뜨거운 숨소리 역시 뒤섞였다.
“하아, 일릭…….”

……솔직히 그게 참 야하게 들렸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내가 미쳐 버렸나. 대공을 따라 나도 완전히 변태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 이것은 대공이 필요 이상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져서, 필요
이상으로 듣기 좋은 나직한 음성을 가져서 그렇다. 어떤 상황이라 해도
그가 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야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입안에 고이는 타액에 뒤섞인 선액을 삼키며 나는 대공의 성기를 여느
때보다 강하게 빨았다.
“으윽…!”

그 순간 대공은 견딜 수 없다는 듯 허리를 떨며 신음했다. 사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사정에 이르기에는 한참 일렀지만 말이다.
그러나 힐끔 올려다 본 대공의 얼굴이 절정을 맞이한 것처럼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제 아랫입술을 깨문 얼굴이 보통 야한 게 아니었다. 새하얀 얼굴에
뺨만 발갛게 물들어 잔뜩 느끼는 얼굴이……. 아니, 씨발 이게 뭔데 이렇게
야한지 모를 일이었다.
그 얼굴이 너무 야해서…….
“으읍?!”

나는 대공이 어깨 끈을 잡아당길 때까지, 그가 나에게 세상 수치스러운


속옷을 입혀 놓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가슴을 가리는 천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루는 레
이스의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면이 유두를 문질렀을 때에야 내가
어떤 부끄러운 것을 걸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더는 뜨거워질 곳 없다 생각했던 얼굴로 더욱 열이 몰리며 얼굴이 그 순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속옷에 옥죄인 고환이며 성기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레이스에 가슴이
비벼지는 감촉에 등줄기를 따라 오싹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조금 시들려
하던 아래가 단번에 벌떡 일어나 허공에서 벌떡거렸다.
“크읍, 큽…!”

그 순간 대공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닫힌 목구멍 안쪽을 억지로 열며


성기가 틀어박혔다. 숨이 턱 막히며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 여느 때보다 더 내 목구멍 깊숙한 곳을 범하는 성기에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아프기도 했다.
“아아, 일릭…….”

대공은 내 이름을 마치 신음이라도 되는 양 부르며 허리를 떨었다. 그


부르는 소리가 퍽 애달프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애처로운 건 내 신세였다. 괴로움에 내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였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커흑, 허억!”

입안에서 잔뜩 발기한 성기가 뽑혀 나갔을 때에는 요란하게 기침이 터졌다.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워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새카맣게 흐려져 가던
눈앞이 번쩍거리며 머리가 다 어찔어찔했다.
대공의 성기가 고통에 헐떡거리는 내 뺨에 잔뜩 문질러졌다. 설마 또 입에
물리려는 것인가 싶어서 나는 물기를 흠뻑 머금은 눈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부옇게 젖은 시야에 대공의 호박색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걸 보고 있는데 왜 내 눈가가 욱신욱신 달아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참기가…….”

그런 내 얼굴을 이번에는 성기가 아닌 손으로 문지르며 대공이 중얼거렸다.


“좆같이 힘들군.”
어쩐지 잔뜩 날이 선 것 같기도 하고, 끊어질 듯이 위태로운 것 같기도 한 그
음성이 나직하게 울린 뒤, 대공이 다시 내 입안으로, 목구멍 안으로 성기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밀어 넣었
다. 마치 본능에 학습이 된 일인 양, 나는 입안에 들어온 것을
빨았다. 입술을 오므려 기둥을 훑으며 혓바닥을 누르며 목구멍을 찔러
들어오는 귀두를 삼킬 듯이 빨아 넘겼다.
숨이 막혔다. 그리고 다시 눈앞이 까무룩해질 무렵 숨통이 트였다. 입안이
온통 질척하게 젖은 와중에 몇 번이고 그것이 반복되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갑자기
몸이 일으켜져 침대로 밀쳐질 때 머리가 잔뜩 흔들렸기 때문인지, 혹은
계속 목구멍 깊숙한 곳을 범해진 탓에 산소가 희박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지러움에 정신이 제대로 차려지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의식이 뚜렷해지기도 전, 대공이 내 다리를 벌리며 나를 덮쳐 왔다.
“아, 아아!!”

그 입술이 그 민망한 레이스 속옷 위로 내 가슴을 덮은 게 먼저인지,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그 민망한 속옷 끈을 밀치고 아래를 파고 들어온 게
먼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닿은 순간 나는 비명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으윽, 흐, 아으…!”

대공이 내 가슴을 빨았다. 볼록이 일어선 유두를 레이스 위로 혀로 마구


비벼 대더니 이내 단단한 치아가 그것을 깨물었다.
“…!!”

순간 나는 사정할 때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쾌감에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절정에 올랐다. 안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하듯 정액이 터져 나오려
했으나 사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쾌감의 극치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가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발기와 사정이 가능해져 버린 이
몸뚱이에 눈앞이 하얗게 샐 만한 쾌감이 덮쳐오자 몸이 절로 파드득
경련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절정이 가파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바로 그 코앞에서 한 걸음이 부족해
애가 탔다. 성기를 붙잡아 미친 듯이 흔들어 사정하고 싶었다.
대공은 물론 내가 성기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잡하게 엉덩이를 주무르고 그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집착적으
로 내 가슴을 빨았다 레이스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혀끝으로 잔뜩
.

희롱하다가 또 음탕하게 빨아 대는 게 꼭, 가슴만으로 느껴서 사정하라고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심지어 그게 머지않았다. 그가 안쪽을 조금 더 자극한다면, 가슴과
내벽을 자극당한 것만으로도 쌀 수 있을 것이었다. 사정이 바로 한 발짝
앞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똑똑똑!
대공의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흥분과 열기로 가득 찬 머릿속에 송곳처럼
파고들어 왔다.
“각… 각하.”

꿈에서 깨어나듯이 화들짝 놀란 나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들어와서 볼까


덜컥 두려워져서 무의식중에 대공을 밀어내려 했다. 여전히 대공의
머리통이 내 가슴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의 손가락이 내 다리 사이를
쑤시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안에 파묻혀 내벽을 벌리는 그 자세로
굳어진 채였다.
아니 그것도 문제지만 지금 내 꼴이……. 대공 밑에 깔려서 벌겋게 열 오른
얼굴로 신음하는 내 꼴이…….
검정색의 레이스 가득한 여자 속옷을 입고 있는 내 꼴이…….
“…무시하도록 하지.”

미간을 찡그렸던 대공이 다시 내 가슴 끝을 머금어 쪽, 빨아 당겼다.


“각, 각하, 각하…!”

당황한 나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감히 대공의 머리를 쥐어뜯을 수가


없었다. 체중으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사내를 밀어낼 수 없는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히익…!”

그 와중에 내 항문을 벌리고 들어와 있던 두 개의 손가락이 단번에 세 개가


되었다. 그 세 손가락이 마구잡이로 입구와 내벽을 벌리며 내벽 안쪽을
착실히 자극해 와서 허리가 튀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쌀 뻔했다. 눈앞이
하얗게 탈 정도의 위기가 한차례 폭풍처럼 몰아쳤다.
대공은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바깥에서 누가 부르든 말든, 그대로 기어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와 일을
치르겠다는 열의와 욕망으로 가득했다. 나는 이미 바깥의 소리로
인해 이 행위에 몰입할 수가 없어졌는데 말이다…!
똑똑! 똑똑똑똑!
“각하! 루시스입니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만이 아닌 목소리가 울려 왔을 때에야 대공의 몸이 다시
움찔 굳어졌다.
“루시스입니다, 각하. 송구합니다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루시스. 라베인 백작.


문 너머의 상대가 자신을 밝혔을 때에야 대공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가
드디어 내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역시 내
안에서 거두어졌다.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언제 그 얼굴에 욕망과 정염을 담았냐는 듯이 차갑게 굳은 얼굴이. 광기를
닮은 무언가를 애써 참아 내는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몹시도 위험해
보였기에. 그 순간 대공은 검이 있었다면 문 밖의 상대를 찔러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조각조각 난도질을 하고 그 시체를
날것으로 뜯어 먹는 괴물처럼 보였다.
“하.”

노크 소리가 다시 이어지자, 대공은 짧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흉흉하게 발기한 것을 속옷 안으로 밀어 넣고 바지 단추를 잠근 뒤
벨트와 버클까지 단정하게 잠갔다.
“기다려.”
내 안을 멋대로 헤집던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으며 대공이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 짜증과 화가 넘실대고 있어서 나는 얼떨떨하게 예… 라고
대답했다. 뒤늦게 이 빌어먹을 속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공은 그대로 침실을 나가 버렸다.
……아니 씨발. 아직도 내 몸은 계속 뜨겁고… 사정도 아직 못 했고

그런데…….
나는 열에 들뜬 멍한 상태로 몸에 시트를 두른 채 대공을 기다렸다. 아, 솔직
히… 솔직히 가슴이든 좆이든 마구 만져서 사정을 해 버리고 싶었다.
정점을 찍을 듯이 가파르게 상승하다가 절정을 찍지 못하고 멈춰, 그대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미지근하
게 식어 가는 몸이 괴로웠다. 아니, 식는 것도 아니다. 대공이
가슴과 안쪽을 막 이상하게 자극해 놓은 바람에 열기가 간질간질 지속되어
더 괴로웠다.
이러다가 대공이 밤새 안 들어오면…… 아니 씨발 나는 옷도 못 갈아입고
싸지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대공이랑 섹스가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이 욕구를 풀고 싶은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런데 그걸 계속 참으며 맥없이 있어야 한다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어 잠깐 엿보았던 대공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떠올랐다. 감히 흥을
깬 자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그 얼굴은… 나로서는 조금 놀라웠다. 내
기억에 없는, 처음 보는 냉막한 얼굴이다. 심지어 그의 얼굴을 때렸을
때에도…… 그러고 보면 대공이 나를 향해 화를 낸 적은 없었던 것일까.
아, 근데 몸이… 몸이 자꾸 뜨거웠다. 마치 미약을 먹은 것처럼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린다. 레이스에 가슴이 비벼지는 감촉이 되게
괴롭고도… 짜릿했었다. 레이스 천과 함께 대공의 입술로 희롱 당했을 때는
막… 아, 씨발 그냥 그때 싸 버릴 걸. 그랬으면 이렇게 답답하고 괴롭지는
않을 텐데.
사정은 대공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게 조금 웃기기도 했다. 대공 역시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이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새삼 그게 바지 안에
갈무리가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겉에서 볼 때 한쪽으로 두드러지지
않을까. 발갛게 물든 볼이 금방 가라앉지도 않을 텐데 그 얼굴을 본
신하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애당초 그가 이렇게 섹스 도중에 방해를 받은 적이 있기나 했을까. 그
커다란 게 발기한 상태가 심히 괴로울 텐데 어쩌고 있으려나. 대공이 남들
앞에서 성욕을 애써 참고 있는 걸 생각하면 깨소금이다 싶기도 했다.
아니 근데, 이러다 진짜 밤새 안 들어오는 거 아냐?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해??
문이 거칠게 열리며 대공이 돌아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하인들을 부를 테니 옷을 입어, 일릭.”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명령했다.
방을 나설 때처럼 싸늘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감정을 짐작하기 힘든
그런 표정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인들이
곧 들이닥칠 테니 옷을 입으란 말에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황급히
바닥에 널브러진 셔츠와 바지를 주워 입었다. 먼저 속옷을 벗었어야 했는데
그럴 겨를이 없어서 그냥 위에다 걸쳐 입었다.
바지를 겨우 다 걸쳤을 즈음 귀신 같이 하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대공의 갑주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하인은 내 것을 들고 있었다.
“오시안이 쳐들어온 것입니까?”

몸에 남은 열기를 잊을 정도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하인들이 자연스럽게 붙어서 갑옷을 입혀 주었다. 흉갑과 배갑을 입고
몸통에 맞게 벨트를 조인 뒤 건틀렛을 끼고 어깨와 팔꿈치를 보호하는
파츠를 입었다. 나는 하지를 보호하는 갑옷은 입지 않아서 비교적 준비가
빨리 끝났다.
대신 대공은 허벅지와 무릎, 정강이와 발을 감싸는 파츠들까지 모두
착용했다. 그래도 곁에서 하인들이 입혀 주니 입는 시간이 길게 걸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갑옷을 입는 모습을 보니 더욱 긴장감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야밤에 라베인 백작이 들이닥치더니, 이어 갑옷을 챙겨 입고 있으니
전투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야습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직
연합군의 본대는 물론 오시안 기병대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고
했는데.
“그대는 정말 싸움을 좋아하는군. 나는 방해를 받아서 기분이 아주

언짢은데 말이야.”
언짢다는 말과는 달리 대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스듬히 입술을
끌어올려 웃는 그 얼굴은 분명 아까의 분노하던 얼굴과는 달랐다. 이쪽이
내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시르반 요새에서 말을 타고 세 시간 정도 달리면 알즈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호수가 퍽 아름다워서 과거의 어느 귀족이 그곳에 별장을 하나 지어


놨는데 관리도 아주 잘 되고 있어. 베르바니를 점령하면서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나는 갑자기 그가 왜 알즈라는 마을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라베인 백작이 밤에 찾아온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 있어서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공의 휴식을 방해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호수가 예쁜 마을에 별장 타령을 한단 말인가.
“그곳이라면 아무런 방해도 없이 아주 조용히 즐길 수 있을 테지.”

“……예?”

…즐긴다니. 뭘요.

마음속에서 차마 튀어나가지 못한 내 질문에 대해, 대공은 나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즈에 도착하는 대로 박아 줄 테니, 조금만 참아.”

“…….”

나는 아마도 그 순간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내 얼굴이 그저 평소와 같았기만을
바랐다.
전투를 코앞에 두고도 방해 없이 떡칠 생각으로 이 시각에 거기까지 가잔
소리냐…. 아니 씨발 내일 새벽에 용병대를 포함한 팔천 명이 바스코브로
떠나고, 또 거기서 오시안 기병대와의 일전을 예상하고 있는 이 시국에?
지금?? 오입질을 하러 거기까지 가겠다고? 이 새끼 진짜 미친 새끼 아냐?
“시간이 없으니 어서 가도록 할까.”

대공이 몸을 돌리자, 전시와 다름없이 차려입은 그의 어깨에 매달린 푸른


망토가 은빛의 머리카락과 함께 펄럭였다. 전쟁터에 나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멋진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전쟁터에
나가는 거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대공은 미치광이였다. 색에 미친 변태 색마 미치광이.
도대체 이 나라의 미래가 어찌 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못내 걱정이었다.
대체 용병 나부랭이인 내가 왜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밖에 나오니 라베인 백작만 아니라 그의 기사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을 좇는 그들의 시선에는 대공을 향한 한 점의 의심조차 없었다. 그게
또 나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오입질을 하러 간다면서 제 기사단
정예부대를 이끌고 가는 게 어처구니가 없는 와중에, 그래도 전시에
위험하다는 자각이 있어 갑옷이라도 챙겨 입고 기사단이라도 데리고 가는
게 다행인가 하는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피어올랐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출발한다.”
오랜만에 술과 고기를 지급 받아 흥겨운 저녁 시간을 보낸 병사들이 내일의
전투를 위해 모두 잠에 든 시각.
달빛만이 오롯이 비추던 어둑한 숲길에 횃불이 피어올랐다. 기사들에
둘러싸인 채 대공이 말을 몰았다. 그의 곁을 어느새 부턴가 내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따르고 있었다.
설마 다른 용무가 있으니 이 밤중에 갑자기 알즈라는 곳으로 가는 것이리라
짐작을 하면서도. 나는 저 미치광이의 머릿속을 또 내가 멋대로 속단하는
게 아닌가, 정말 그 목적이 오입질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4.

밤중에 말을 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달빛이 밝다지만 모든


길을 훤히 비추는 게 아니었고 특히 숲길의 상황은 좋지가 않았다. 가끔은
길이 맞기나 한가 싶은 곳을 무작정 말을 타고 내달릴 때도 있었다. 흙길을
달리다가 간혹 물가를 건너듯이 물이 채이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여럿이서 함께 달리지 않았더라면 절대 혼자서 말 타는 것은 절대로 엄두도
못 냈을 숲길이었다. 특히나 이런 속도로는. 지금 타고 있는 말이 엄청난
준마가 아니었다면 말이 달리기를 포기했거나 내가 말에서 떨어져도 진작
떨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훈련이 잘 된 말은 어두운 숲속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소리들에도 겁먹지 않고 다른 말들을 따르고 또 이끌며 안정적으로
달렸다.
말발굽 소리와 바람 소리가 대부분이었으나, 가끔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나를 꽤나 긴장하게 만들었다. 30명 정도 되는 무장한 기사들과
함께 있으며 또 빠른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으니 산짐승의 공격은 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는 늑대들이 따라붙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어둠에 잠긴 숲을 보고 있노라면 나조차 오싹할
때가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벌레들
이 우는 소리로 가득 차 있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빈 느낌이 낮의
숲과는 달랐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를 보는 듯 했다. 가끔
숲을 달리는 발소리나 늑대의 하울링이라도 들리면 등골이 쭈뼛 서기도
했다.
내가 겁이 많은 타입은 결코 아니지만, 공포란 생리적인 감정이었다.
게다가 밤길을 빠르게 내달리는 말을 붙잡고 있느라 긴장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대체 대공은 왜 이 밤중에 미쳐서 알즈인지 뭔지를 간다고 설치는 것인가.
횃불에 주황 빛깔로 물든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굳이
이 야밤에 길을 나선 그 변덕스러운 결정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기사들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30명 정도 되는 기사들이 이
밤중에 세리포브와 미로스의 국경지대를 달리고 있음에도 대공의 행보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횃불에 비치는 경직된 얼굴을 보면 긴장을 하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구 하나 대공의 야행에 토를 달지 않았다.
다수의 인원이 빠르게 달리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야 적겠지만, 늑대나
곰의 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짐승들이 달려든다면 일단 말들은 크게
놀랄 것이고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낙마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판금 갑옷은 웬만한
화살까지 막아줄 정도로 단단했지만, 단단한 만큼 무거웠다. 낙마를 했을
때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무장을 한 기사는 말 위에
있을 때에나 그 위력이 큰 법. 그러니 말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짐승을 상대로는 도리어 싸움이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짐승만이 아니었다. 하늘의 별을 보고 방위를 잡아 보건대,
일행은 절대로 미로스 쪽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미로스가 빼앗은 베르바니
지역과 세리포브의 접경지대를 아슬아슬하게 달리고 있었다. 충분히
세리포브 측의 매복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누구도 대공이 정신이 나가서 밤중에 소수의 기사들만 데리고
요새를 빠져나와 이 길을 질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겠지만-
“?!”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순간


나는 상당한 파괴력을 가진 것이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을 들었다 .

파공음을 들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또한 한 번도 아니었다.


“각하!”

누군가의 외침이 숲의 소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그러나 찰나에 불과했다.


퍽! 무언가가 두껍고 단단한 육질을 꿰뚫고 박히는 소리가 났고.
이히히히히힝! 말이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대공이 타고 있던 말이 낸 소리였다. 어슴푸레하게 그것의 엉덩이에 두꺼운
화살… 아니, 석궁용 볼트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고통에 찬 말이 거칠게
움직이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 탄 사내의 몸이 위태롭게 그것을
버텨낸다.
버티지 못한 것은 도리어 말 쪽이었다. 엉덩이에 화살이 박힌 말은 뒷발로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그 위에 탄 사내가 말에서
떨어져 땅을 구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는 그 와중에도 상당한 균형
감각을 자랑하며 쓰러지는 말에 깔리지 않고 빠져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었다.
물론 지체 높으신 분께서 바닥을 구르는 꼴은 꽤나 볼썽사나웠지만 말이다.
“각하!”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외치며 말에서 떨어진 대공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화살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나는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바닥에 내리니 대공의 상황이 조금 더 명확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다.”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순발력을 발휘한 와중에
운까지 좋았나 보다.
다시 퍽!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내 쪽이었다. 볼트가 어깨를 감싼 갑옷에
맞은 것이다.
그러나 꿰뚫리지는 않았다. 화살을 막는 거야 그렇다 쳐도 석궁까지 막아
내다니, 아무리 판금 갑옷이라지만 퀄리티가 너무하지 않은가! 역시 대공이
준비해 준 갑옷은 용병 나부랭이가 구입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금 감탄
을 해 버렸다 다만 그 물리력을 전부 막을 수는 없어서 갑옷이
.

움푹 들어가 찌그러졌고 내 어깨에도 힘이 전해져 욱신거리는 통증 정도는


있었다.
“횃불 버려!”

나는 기사 한 놈이 쥐고 있던 횃불을 붙잡아 화살이 날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던지며 버럭 소리쳤다. 자칫 잘못하다간 크게 산불이 날
수도 있겠지만 알 게 무어란 말인가. 횃불 때문에 어둠 속의 적에게 이쪽만
표적이 되는 것보다야 불놀이를 하는 편이 나았다. 횃불을 쥐고 있던
기사들 모두가 내가 던진 것과 같은 방향으로 횃불을 집어 던졌다.
삽시간에 어둠이 깔리고, 사물을 구분하는 일은 오직 달빛에 의존해야
했다.
화살을 쏘는 쪽에서도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눈먼
화살들이 쏟아졌다. 눈 먼 화살이라고 해서 명중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기사들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말들이 사납게 날뛰며
쓰러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도 했다. 기사들은 쓰러진 말을 엄폐물
삼아 몸을 숨겼다. 말에 매어 두었던 방패를 빠르게 꺼낸 자도 있었다.
숨어서 화살을 쏘아 대던 놈들은 곧 우리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엄폐물이 없다 해도 그들이 가진
석궁으로는 기사들이 입은 갑옷을 뚫지는 못한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으리라.
화살비가 주춤한다 싶더니, 어둠에 잠긴 숲속에서 검을 든 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기사들 역시 검을 꼬나쥐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장감 넘치는 순간. 내 안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지며 호흡이 가빠진다.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내 몸이
활력을 끌어올린 것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죽인다. 오직 생존에의 본능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용감하게 내게 달려오며 검을 휘두르는 놈의 검을 쳐 냈다. 그리고
곧장 투구와 흉갑 사이 좁은 틈으로 드러난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즉사한 놈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었다. 그 즉시
또 다른 상대가 쇄도해 왔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다시 말하
지만 나는 전쟁광은 아니다. 살인에 쾌감을 느끼는 변태 살인마도
아니었다. 그저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뿐, 싸우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다만
전쟁터까지 와서 대공의 옆에 서 있느라고 앞으로 벌어질 전투들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며 지켜만 봐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전장에 선 몸이 펄펄 날았다.
몸에 활력과 함께 흥분이 끓어 넘쳤지만 이성은 여느 때보다 명철했다.
어둠 속에서 습격을 당한 상황이니, 좋다고 신나서 칼부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적들의 수를 파악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포위를 당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달려드는 적들을 베어
넘기며 나는 시야를 넓혀 주변을 살폈다.
놈들의 복식은 나와 비슷했다. 도리어 나보다 무장의 정도가 약했는데, 흉갑
을 입었을 뿐, 하지에는 방어구가 없었으며 어깨와 팔 역시 가죽
방어구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흉갑을 감싼 표식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어서 소속을 당장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용병이었다.
대공이 이곳을 지나가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목표는 분명 대공이었다. 이 일행이 미로스의 대공과 그
기사들이라는 것을 알고 습격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다수의 용병들이
대공의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 망토를 쫓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디 소속이려나. 표식을 보지 못하더라도 억양을 들어 본다면 어디
애들인지 대충은 알 수 있을 텐데. 움직임이 달칸 용병대의 것은 아니었다.
달빛에 번뜩이는 검의 모양 역시 이곳에서 쓰이는 일반적인 검의 형태와는
조금씩 달랐다.
어디 놈들이지. 정체를 파악하려 애쓰며 나는 달려드는 놈을 다시 베어
넘겼다. 갑옷을 두르고 있는 복부나 가슴 따위를 베어서는 소용이 없다.
어깨와 팔의 이음매 역시 가죽 갑옷을 덧대고 있다 보니 베어도 효과가
미진하다. 내가 노리는 곳은 죄 허벅지였다.
목을 찌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허벅지를 베어 내는 게 좋았다. 상대의
기동력을 단번에 빼앗을 뿐더러, 허벅지 안쪽에는 굵직한 혈관들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나가고
있어서 깊이 베면 한 칼에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격에 죽지 않는다 해도 허벅지를 깊게 베이면 움직이지도 못하고
과다출혈로 알아서 뒈지는 경우들도 있어, 달칸에서는 일부러 허벅지를
잘라 버리라고 검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여러모로 내 쪽이 유리한 전투였다. 일단 놈들은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을
뚫지 못한다. 그 정도로 깊이 찔려 줄 생각도 없고, 베는 정도에는 갑옷이
조금 우그러질 뿐이다. 갑옷에 보호를 받지 않는 다리만 조심하면, 쇄도하는
검을 갑옷을 입은 어깨나 팔뚝으로 막고 상대의 목이나 허벅지
따위를 찌르고 베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놈들이 숫자가 많았다. 30명 기사들 중 몇 명이 쓰러졌는지 우리 쪽
인원은 전보다 적은 것 같은데, 적을 베고 또 베어도 자꾸만 숲속에서 한
놈씩 두 놈씩 튀어나와 덤벼들었다.
상대가 인해전술로 나온다면 이건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리 일격에
죽인다 해도 체력이 일단 문제다.
일단 상대의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지금, 그나마 방법이 있다면
포위망을 뚫고 숲속으로 도망쳐 시르반 요새로 도망치는 것이다. 아마
그쪽으로도 매복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길이 아니라 숲을 돌아서
간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보다 일찍 구조대를 만날 수도 있고 말이다. 설마 대공이 밤늦게
나갔다가 안 돌아오면 누구라도 구조대를 보내지 않겠는가. 자칸. 대공의
호위 기사인 자칸이 내일 있을 전투를 위해 오늘은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어떤 위기감을 빠르게 느끼고 뒤쫓아 왔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과 조우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인데.
내게 덤벼든 놈 하나의 허벅지를 반쯤 베어 내고, 쓰러지는 놈의 머리채를
붙잡아 방패처럼 내 앞에 세워 놓은 채 나는 주변을 살폈다. 적들은 동료를
다치게 할까 봐 감히 내게 덤벼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멍청한 놈들이었다. 어차피 이놈은 과다 출혈로 오래 살지 못할 텐데, 도리
어 이걸 기회로 놈과 함께 나까지 찔렀어야지.
물론 그런 시도를 한다 해도 내가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크억…!”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나는, 지체 없이 내가 방패로 삼고 있던 놈의 목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검으로 그
어 버렸다. 어둠 속에 피 분수가 뿌려진다. 코앞에서 보는 동료의
죽음에 당황하는 놈들 쪽으로 그놈을 밀어 차 버렸다. 받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피하는 놈들에게, 이번에는 내 쪽에서 쇄도하여 그대로 검으로
목을 꿰뚫어 버렸다. 다른 한 놈은 옆에서 목을 향해 검을 박아 넣었다.
호흡이 가빴다. 몸이 얼마나 뜨거운지, 외기(外氣)가 그리 추운 것도 아닌데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흘렀다. 피가 핑핑 돌아서 손끝까지 짜릿했다. 거센
심장의 고동이 귓가에서 북처럼 둥둥둥 울렸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나는 분명 악귀의 몰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주변의
적들이 새삼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꼴이 그러했다. 이제와 목숨이
소중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용병이라면 제놈들도
죽음에 무감각해지련만, 겁을 집어먹은 꼴들이 우스웠다.
아니, 우스울 것은 없다. 나 역시도 죽기 싫어서, 살아남고 싶어서 상대를
죽이는 것이었으니까.
본능. 오직 생존만을 향한 본능. 전장에 선 내게 남겨진 것은 단 하나
그것뿐이었다. 검을 들고 있는 적을 죽인다. 위기에 몰린 내 편을 노리고
있는 적을 죽인다. 앞에서 목을 찌르고, 옆에서 목을 관통하고, 뒤에서 목을
꿰뚫는다. 가장 효율적으로 적을 척살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내 편은
구명한다.
인간 백정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우리 용병이라면, 사람 죽이는 것쯤은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한 걸음을 더 앞으로 옮기며 세 명의 적에 둘러싸인 사내에게
다가갔다. 눈앞의 상대에 눈이 멀어 뒤를 놓친 한 놈의 목을 그대로 갈랐다.
피가 튀자 다른 놈들이 이쪽을 눈치 챘다. 한 놈이 달려들기에 검을 휘둘러
나를 향해 쇄도하는 검을 쳐 냈다. 그리고 한 걸음을 다시 내딛으며 머리로
놈의 면상을 들이받아 버렸다.
“아악!!”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코뼈가 제대로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


버린 남자에게 코뼈가 뭐 중요하겠는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놈의 면상에 박아 준 것은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검 끝이었다.
세 놈에게 몰리고 있던 사내의 곁에 남은 것은 이제 하나였다. 주변에 더
많이들 있기는 했지만 기사들이 그들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막아서서
검을 부딪치며 싸우고 있었다.
하나만 딱 정리를 하고, 각개 돌파를 하며 도망치자고 전달하자. 그렇게
생각한 찰나. 포위에서 벗어나도록 내가 도와준 사내의 옆으로 용병 한
놈이 검을 들고 접근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제 앞의 적을
상대하느라 그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검이 그를 노리고 날아든 순간, 그 검을 쳐 내기에는 내 위치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등지고 싸우고 있는 사내의 목덜미를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사내의 몸이 뒤로 무너지는 사이, 나는 놈이 내찌른 검을 쳐냈다. 그리고


분명 그 순간 다음 공격이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온몸을 잠식했던 흥분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든 것도
같았다.
“…일릭?”
그 부름을 들으며 나는 반사적으로 아주 가까스로 다시금 나를 찌르려던
놈의 검을 쳐 내고 허벅지를 그은 뒤 발로 냅다 차버렸다. 사내, 그러니까
대공과 대치하고 있던 다른 사내 역시 단칼에 쳐 죽여 버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일릭, 그대…….”

내가 지금, 대공을 구해 낸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을!


아니, 씨발…! 수세에 몰린 채 다수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게 바로
대공이었는데, 내가 왜, 미쳤다고 정신이 나가서 대공을 구해 냈단 말인가.
그냥 냅다 나 혼자 살겠다고 다 내다버리고 숲속으로 도망쳤어야지!
“……각하.”

세 명의 용병에게 포위되었던 사내는 대공이었다. 그 중 두 놈을 내가


죽이고 나니 다른 한 놈이 또 들러붙어서, 그 검에 죽을까 봐 내가 뒷덜미를
잡아당겨 바닥으로 쓰러뜨린 게 바로 대공이었다는 거다.
전투에 너무 집중을 한 모양이었다. 정신이 맑다고 생각했는데, 은빛의
머리카락과 푸른 망토를 보면서도 그것이 대공인 줄을 몰랐다. 씨발, 내가
왜 대공을 구했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달빛에 드
러난 새하얀 얼굴 이른 새벽 아침을 밝히는 태양과도 같은
,

붉고도 노란 눈동자. 다시 봐도 대공이었다. 내게 뒷덜미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던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45.

나는 아마 악귀, 야차의 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거친


피부는 피칠갑이 되어 입에서는 흥분 가득한 뜨거운 숨결을 뿜어내고
있으리라. 사람 죽일 때 얼굴이 무섭다는 얘기는 숱하게 들어 온 말이었다.
물론 용병 중에 선한 얼굴인 자는 없었다. 전장에서 사는 사내라면 이런
얼굴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 진흙 속에 피어난 새하얀 장미가

있었다. 가시 따위도 가지지 못한 듯이 청초하여, 흙과 먼지, 피 따위의


오물이 묻은 얼굴조차 요정과도 같은.
“각하!”

누군가가 대공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퍼드득 몸을


떨었다.
그는 라베인 백작이었다. 적들을 찌르며 한달음에 이쪽으로 다가온 그는
바닥에 쓰러져 상체만 일으키고 있던 대공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가
대공을 데리고 내게로 다가왔다.
“여긴 우리가 막겠네. 자네는 각하를 모시고 시르반으로 돌아가게.”

“……어…….”

아니 물론 나도 시르반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여기에 있는 기사들이 뒤를


좀 막아 주면 좋고, 아니면 다 같이 한번에 흩어져서 도망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급한 불을 좀 끄면 도망치자고 말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아니, 대체 내가 왜 대공을 구했단 말인가! 또 내가 도망 길에 왜 대공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데리고 다
녀야 해?!
“송구합니다, 각하. 저 때문에 이런 함정에…! 어서, 어서 가십시오!”

“…….”

나는 냉막한 대공의 얼굴에서 그 무엇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화를 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아니란 거다.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신경을 쓸 바가
아니었다.
대공을 살린 건 미친 짓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는 길에 대공을 데려가는 건
더더욱 미친 짓이다.
길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또, 시간도 없었다.
“갑시다.”

나는 덥썩 대공의 팔을 붙잡았다.
물론 내가 건틀렛을 끼고 있어서, 또 대공 역시 건틀렛을 끼고 있어서
철컥철컥 쇠와 쇠가 닿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그 끝에서 미약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늘 사용했던 경어를 잊고 갑시다 따위의 말을 했던
것처럼, 그의 권력을 잠시 잊어버렸다. 그의 의지에 반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도 생명의 위기 앞에서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손에 붙든 것을 힘주어 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 새 달리고 있었다.
미쳤다고 지금 대공을 데려가고 있나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송곳처럼 찔러
댔지만, 그를 붙잡은 손에서 힘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괴물의 아가리처럼 새카맣게 입을 벌린 숲속으로 대공을
이끌었다.
걸음을 멈춘 것은 호흡이 턱끝까지 닿아 더는 달릴 수가 없었을
즈음이었다.
대공에게도 한계였는지 내가 멈추자 그 역시 내 곁에 서서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격하게 움직인 뒤에 달리기까지 했더니 숨이 보통 가쁜 게 아니라
나는 허리까지 수그리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대공은 서 있는 것도 힘든 모양이었다. 그는 나무에 몸을 기대어 몸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탱했다.

“…큭큭.”

…이 상황에서 들려서는 안 될 게 있다면 추격해오는 적들의 발걸음 소리,


그 다음이 웃음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들은 것은 분명 웃음소리였다.
“큭큭큭큭….”

나무 그림자에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새카맣게 물든 어둠 속에서 대공이


웃고 있었다.
이 새끼가 드디어 돌아 버렸나……. 때에 맞지 않는 웃음소리에, 그것도
평소의 대공과는 조금 다른 소리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만큼
기괴한 웃음이었다.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군.”

웃음기는 가득한데 말 속에는 비아냥이 한가득이었다. 자조적인 소리를 참


유쾌하게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아주 잘 싸우던걸, 일릭. 전쟁터로 보내 달라 노래를 부르던 사람다웠어.”
나한테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인지도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말투가
자조적이었다. 그의 상태가 적잖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일단 대꾸를
해 주었다.
“……용병이니까요.”

“상대도 용병이었잖나. 그들 중에서도 그대만큼 잘 죽이는 자는 없던데.”

이건 지금 칭찬이긴 한 건가. 어둠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15살 때부터 바로 실전 경험을 했고 그 이후로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다는

얘기를 할까 하다가 괜한 변명같이 들릴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대공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으면 험한 꼴을 당한다지만 지금은 알 게 뭐란 말인가.
당장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가 어쩌자고 대공과 함께 움직이겠다고 한 거지.
다시 한번 나는 아까의 내 비이성적인 결정을 후회했다. 내가 그 순간 미쳐
버렸던 게 틀림없다. 차라리 라베인 백작한테 네가 모시고 가라고, 내가
뒤를 맡겠다고 하고 싸우다가 도망쳤어야 했다.
아니, 대공 따위 미끼로 던져 놓고 나 혼자 그냥 튀었어야 했는데 내가 대체
왜 일단 우리 편을 얼추 살려 놓고 도망치자는 생각을 했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물론 그
편이 생존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러기는 했지만 대공을 내가 ,

데리고 온 시점에서 나는 놈들의 표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악수 중의 악수를 둔 셈이었다.
하……. 아무리 싸우다가 정신이 없었다지만 대공은 왜 도와줬단 말인가.
주변의 다른 기사놈들은 자기 상대랑 싸우느라 대공을 도울 겨를이 없었고,
대공은 3:1의 상황, 주변에서 합세한다면 그보다 더 수적으로 열세였을
텐데 말이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터였다.
언제나 바라지 않았던가? 어디 습격이라도 있어서 대공이 칼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아까가 진짜 절호의 찬스였는데, 씨발 대체 내가 왜
그랬냐고…!!
나는 어둠 속, 나무에 기대 선 대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차라리 지금 죽일까.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그런 생각 하나가.


죽일까.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적들이 죽여 준다면 그게 최상이지만……. 죽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생포 당한다면 고문 따위를 당할 수도 있겠지만, 고문으로 죽이기보다는
상대쪽에서 미로스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받고 대공을 돌려보낼 확률이
높다. 귀족들이 포로를 잡는 건 다 몸값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교황과 티마예브의 왕이 그를 싫어한다고 해도 아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붙잡히게 두어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는……. 지금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다.
적들에게 붙잡혀 저항하다가 죽은 거라고 하면 되잖아.
죽일까. 어차피 아까 대공을 구해 줘서, 설령 대공이 죽는다 해도 나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될 것 같은데…….
문득 주마등처럼 그간 대공에게 당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굴욕적인 말들을
들은 것도, 항문에 삽입을 당했던 것도, 입에 대공의 성기를 물게 된 것도, 요
도에 그런 막대기가 꽂혔던 것도 모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것들이
떠오른 순간, 이미 더웠던 몸에 얼굴까지 벌겋게 열이 올랐다.
역시 대공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빛의 찬란한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보다 더 빛나는 얼굴. 특히나
흥분으로 발갛게 열이 올라 음란하게 젖어든 얼굴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쿵. 무언가 묵직한 것이 가슴 안쪽을 두드리고 머릿속을 강타했다.
죽이자.
오늘 밤. 대공을 죽이자.
그 욕망에 안정을 되찾아 가던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실력이라면 그대의 원대로 바스코브에 갔어도 한몫을 단단히

챙겼겠어.”
약탈은 좋아하지 않는대도.
대공을 죽일까 말까를 고민하는 와중에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머릿속에는 그를 그냥 죽여 버리자는 욕망이 가득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적 갈등이 아주 최고조였다가 이제 그 저울이 죽이자는 쪽으로 완전히
기운 뒤였다.
그러나.
“달칸 용병대에서 그대를 제거하려면 힘이 많이 들어가겠군 그래.”

나는 내 욕망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아깝기도 아까울 거고.”

정말로 죽이려는 마음을 먹기 직전에, 대공이 내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용병대에서 나를 제거하다니. 어째서.
그간 내가 걱정하고 있던 일들을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순간, 살의로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빠르게 제 속도를 찾으며 잦아들었다. 대신 조금
다른 종류의 불안감이 내 심장을 꾸욱 압박해 왔다.
“그대가 대장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고 의심받고 있더군.”

“…….”

“변절자라는 소리가 돈다는 건 눈가림일 뿐이지……. 알리바이가 뒤집어진


지금, 거짓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가장 의심받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리리엘.

아닉의 뒤를 좇아 골목으로 들어가던 그 금발의 잔상이 떠올랐다. 대공이


나를 직접 데리러 온 바람에 차마 뒤를 쫓지 못했던 그날. 설마 그날……. 그
여자, 진짜로 내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용병대에 알렸단 말인가?
“그래도 변절자 의심을 받고 있다고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 계약을 맺었으니 당연히 이행할 거라 나를 믿었기
때문이겠지?”
그의 어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오직 미로스의 대공인 그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계약을 했으니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고. 그러니 잠자코 자신을 믿고 있던 게…….
“잘했어.”

아주 잘한 짓이라고.
대공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와주실 거잖습니까.”

“물론이지. 용병대 따위가 그대를 건드리게 둘 리가 없지.”

나는 그제야 내가 왜 무의식중에 대공을 도와서 살렸는지 깨달았다. 아, 그


래. 명분이 있고 이유가 있었다. 아주 잘했다고 내 본능을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어졌다.
내 본능이 대공이 나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대의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대공마저 없으면 나는 끈 떨어진 두레박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아아, 그래. 결국 그러니까 내가 대공을 도와준 것은 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는 거다.
내 설명되지 않는 행동에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 붙은 순간,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해졌다. 하하, 그래. 내가 그렇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대공 따위를 살린 게 아니지, 하하. 꼭 살려야 했네, 뭐.
잘했네…….
아주…… 잘했네…….
죽이면……. 안 되겠네…….
“하, 사얀, 그 멍청한 놈이 모든 상황을 낙관했지. 약점을 쥐고 있는 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쪽이니


쉽게 해결이 될 거라고? 큭큭. 그래서 지금 이 꼴이지 않나.”
대공의 입에서 다시 웃음과 함께 자조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에게 계책을
말해 준 어떤 책사를 탓하는 듯 했다. 오입질 때문에 갑자기 밤에 나온 게
아니긴 했던 모양이다. 무언가 알즈에서 해야 할 게 있었던 것이다. 물론
습격으로 인해 알즈에는 가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대공의 상태는 분명 좋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더욱, 웃음기 어린 그의 중얼거림이 기괴하게 들렸다. 어떤
얼굴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루시스, 그놈 말만 믿다니. 내 방심이요 오만이겠지.”

“……그가 배신을 했으리라 보시는 겁니까?”

“그는 나한테 모든 걸 걸고 티마예브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 나한테

사활을 걸었는데, 배신을 할 가능성은 적지.”


나는 라베인 백작이 티마예브 사람이며 대공을 따라 미로스에 왔다는 것을
몰랐지만, 그가 배신한 게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기에는 정말
모든 것을 걸고 싸웠고, 어떻게든 대공을 도피시키려 했으니까.
“그럼 배신자는 그 사얀이라는 자인가요.”

“……누구?”

“…사얀?”

“…….”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그 순간 어둠 속 대공은 침묵에 잠겼다.
아까 분명히 사얀이 모든 상황을 낙관했다고 하지 않았나.
사얀. 그 이름은 어쩐지 내 기억 속에도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스쳐 지나가듯이 들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대공의 가신 중 하나가
아닐까. 책사나 참모일 것이라고 나는 막연히 추측했다.
“……내가 누구라고 말했다고?”

“사얀……. 아닙니까?”

“…아니, 맞아. 내가 실언을 했군.”

그 뒤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실언을 했다는 건 사얀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는 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더 자세한 것을 물을 수가 없다. 어떤 멍청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전시에 상
황 판단을 이 따위로 해서 대공에게 야행을 시키고 이런 위험에
빠뜨렸는지는 궁금하지만, 안다고 해서 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또 대공이 저 정도로 말을 아낀다면 내가 더 아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공 역시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침묵이 조금 길어졌다. 오직 숨소리만 들렸다. 그마저도 격앙되었던 처음에
비해 차츰 잦아들어, 이내 숲에서 벌레 찌륵거리는 소리 외에는 들리는 게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만 이동할까. 기척이 가까워지는 것 같군.”

내 귀에는 들리는 게 없었는데, 그는 풀 소리와 벌레 소리 외에 또 무언가가


들린다는 듯이 말한다. 기척이 가까워진다는 건 그의 노파심인 것 같지만
이동을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날이 밝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만 한다. 날이 밝으면 우리가 이동하는 것도 편해지지만 상대 역시
추격하기가 편하므로, 차라리 야음을 틈타 이동하는 게 안전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시르반 요새는 이쪽입니다.”
대공이 우리가 가야 하는 정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에 대공이 간다고
했던 알즈 방면이었다.
“달을 따라 가야 알즈에 도착한다.”

…아니, 그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니라 정말로 알즈에 가려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르반 요새로 돌아가서 원병을 이끌고 와야지요.”

설령 대공의 뒤를 막아 준 기사들이 전부 죽는다 해도, 그 시체라도 수습을


해 줘야 했다. 이미 용병들이 다 털어 간 뒤겠지만 시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공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알즈로 가야 해.”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46.

“…거리상 알즈가 더 오래 걸릴 겁니다. 설령 간다 해도 그곳에 병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가 봤자 헛짓입니다. 시르반 요새로 가야 합니다.”
“알즈로 간대도.”

이 급박한 상황 속에 대공이 고집을 부린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알즈에 무슨 일이 있기에 자꾸 알즈로 간다고 하십니까.”
답답한 마음에 나는 약간 버럭 하듯이 그에게 물었다. 소리를 죽여야 하는
상황 속에 자꾸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니까 왈칵 짜증이 나버렸다.
그 순간 대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제대로 내 눈에
들어왔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조금은 궁금했는데.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에 웃는 듯 마는 듯한 그 미묘한 표정은 그의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채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대.”

대공이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건틀렛을 낀 손 검지가 쿡, 내 흉갑


위를 찔렀다. 맨살이었다면 유두가 있었을… 위치였다.
“그곳에서 그대를 안기로 했잖아?”

……대공은…….

“다리를 활짝 벌려 놓고 단번에 좆을 박아 넣을 거다. 아프다고 울며

애원하고 너무 느껴서 눈을 까뒤집으며 경련하도록 계속 박을 거야. 그대의


허리가 녹아나서 더는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내 좆이 입술에 닿기만 해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발정이 나
서 좆을 세우고 물을 질질 흘려 댈 때까지 그대의 모든 구멍을 다
범할 거다.”
대공은, 미치광이였다.
나는 살면서 이 지경에도 섹스 타령을 하는 미친놈을 본 적이 없다. 제
부하가 지금 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대공 그 자신도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 알즈에 가서 뭘 해??
이 미치광이의 미친 소리에 나는 도리어 말문이 막혀 버렸다. 기가 막혀서
헛바람조차 나오질 않았다. 질려 버렸다. 이 광기에 완전히 질려 버린
기분이었다.
“알즈로 간다.”

대공이 다시 뒤로 돌았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 아래 잔뜩


더러워진 망토가 보였다. 본인의 말마따나, 꼴이 참 우스웠다.
“혼자 가시지요.”

내 음성은 여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 단호함은 대공의 발목을 잡아채기에


충분했다.
“……지금 무어라 했나.”

돌아서며 그가 물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숱한 목숨을 빼앗고 내 생명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킨 그 흥분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그것은 만용일지도 모르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지금 알즈로 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전 죽기 싫습니다. 어떻게든 시르반

요새로 갈 겁니다.”
“…….”

그 순간 대공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한창 섹스를 하려던 중에 라베인이 그를 불렀을 때. 그때처럼 말이다. 그의
눈동자가 마치 칼날이 되어 나를 난자하는 것 같았다. 차디찬 눈빛. 그 안에
담긴 분노 역시 북해의 빙하처럼 차가웠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베여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대의 처지를 잘 모르는군.”

어조는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러나 물러서기엔 내 생명이 걸려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 맞설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손으로 죽일까 하는 살의를 품었던 상대였기에 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거리낌이
없기도 했다.
“그대가 나와 함께 숲으로 들어온 것을 본 내 기사가 몇 명일 것 같나.

그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 확신하나 보지.”


“…… 그게 지금 제가 요새로 돌아가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
“내가 혼자 시체로 발견되면, 내 기사들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베인 백작이 그를 나에게 맡겼다. 그런데 나 혼자 살아 돌아오고…
대공은 돌아오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가 포로로 붙잡히거나 혹은 시체로
발견된다면.
“이건 탈영보다 질이 나쁘지. 그대가 나를 적에게 넘긴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나.”
…그렇다. 최악의 경우, 아니 무조건적으로 반역죄가 씌워질 것이다.

대공이 그 서늘한 얼굴에 입꼬리만을 조금 끌어올려 웃었다. 이런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하냐는 듯, 그에게서는 피로감마저 느껴졌다.
“나와 그대는 둘 다 살든지, 둘 다 죽든지 하나밖엔 없어.”

나 혼자 살아남은 게 발견된다면. 차라리 그와 함께 죽는 게 나은 선택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씨발, 그 여파는 달칸 용병대에까지 미치리라. 운이 좋아 용병대가 화를
피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달칸 용병대에 몸담을 수 없을 것이며 달칸
아니라 그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든 먹고
살기야 하겠지만……. 용병 짓을 하지 않는 내 삶은 솔직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현역에서 물러나 다른 일을 하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도 안 되었고
나이도 너무 어정쩡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입 닥치고 따라와.”

대공은 싸늘하게 일갈하고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잃고 굳어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알즈로 가는 길은 살 방법이 요원하다. 이건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알즈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고, 대공이 말하는 그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 군대가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무사히 도착해서
씨발, 거기서 섹스나 하고 있자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아 다시 그의 몸을 돌려 세웠다. 납득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수가 없는
데 알즈로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라베인 백작 역시
시르반으로 가라고 했다. 그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데에는 대공도 나도 모두
동의하는 바였고 말이다.
“지금은 시르반 요새로 돌아가는 게 최선입니다.”

“입 닥치라 했는데도.”

“말을 타고도 한참 걸리는 곳 아닙니까. 지금 절반도 못 온 것으로 아는데요.

이러다 날이 새면, 정말로 위험해집니다.”


“감수하고서라도 갈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아까의 대답은 농을 하신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방해 없이 저를 희롱하기 위해 거기까지 가야 한다는 게 대답이라면, 알즈에


는 못 갑니다.”
대공이 내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버텼다. 쇠끼리 닿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렸지만 그를 놓아주지 않고 도리어 옥죄어 잡았다.
씨발, 내가 여태까지 힘이 없어서 너한테 다 당해 준 줄 아냐? 네가 권력을
가져서. 내 목숨 지키기 위해 너한테 당하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너 때문에
내 목숨이 풍전등화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만이 내 구명줄이라는데
내가 왜 널 데리고 사지로 걸어 들어가냐고!
“가야 한대도…!”

“그것이 목숨보다 소중합니까?”

“하, 목숨만큼 하찮은 게 있을까?”

궤변. 대공은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십의 기사가 그를 위해 오늘


목숨을 내던졌다. 수백, 수천, 아니 만 단위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 전쟁터에
섰다. 내일부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다. 나 역시 전쟁터에 서는 한
명이었다. 그 전쟁터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다.
생명이 전부 소중하다 해도 추풍낙엽처럼 사람을 쓸어버리는 내가 그러나
대공은 죽이지 못하는데, 그 무게에 어찌 경중이 없다 할까. 그런데 뭐?
하찮아?
“차라리 이 목숨은 오늘 끊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갈수록 가관이었다.
“이렇게 우스운 꼴은 처음이다. 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뭐야, 지


금. 자기가 함정에 한 번 빠졌다고 크게 절망이라도 한 건가? 그래서
다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어 버려서 목숨도 상관없다 이런 거야?
미친놈.
나는 그 단어밖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다른 느낌으로 미쳤다. 대공은 평온했고, 서늘했으며
날카로웠지만…….
나는 지금 이 모습이 그가 이성을 잃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앞의 대공은 여느 때의 대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얼음처럼
차가운데 불처럼 타는 분노를 내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평소와 다른
것이었다. 판단력을 잃고 헛소리를 하는 지금이 바로 그가 이성을
상실했다는 증거였다.
“알즈로 갈 것이다. 그대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우스운 소리였다. 그를 혼자 보낸다면 나에게 남은 건 처참한 최후라는
협박을 해 댔으면서 혼자라도 간다니.
대공은 고집을 부렸다. 팔을 붙잡은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제정신이 박힌 상태였다면 어떤 명령을 하든, 아니면 칼을 뽑아 들든, 그것
도 아니면 내 얼굴을 치든 해서 제 몸에 감히 손도 대지 못하게 했을
위인이 말이다.
그래, 하는 짓을 보니 감이 딱 왔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
나에게 감정을 토로하며 이성을 잃고 내 가슴을 두드리며 매달렸던 여느
여자들처럼, 그 역시 지금 감정의 절벽에 내몰려 벼랑 끝에 한 걸음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
“각하.”

“입 다물어라. 이것 놓으래도.”

하, 놓으라는 말뿐이지 제대로 된 저항도 않는다. 이건 뭐, 나 싫다고


말하면서도 몸은 매달려 오던 여자들과 다를 게 뭐냐고.
어째서인지 나는 촌각을 다투는 위기의 순간,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어쩌면 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공의 행태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 대공을 말리며 몇 마디를 했다지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떠오르는
것들 중 반도 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울며 떼를
쓰는 여자들을 달랠 때 내가 아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설득을 포기를 해 버릴 정도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끈기도
없고 말주변은 더더욱 없었다.
“이것 놓아. 내가 그대에게 더 이상 자비를 베풀 거란 생각-”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감쌌다.
그대로 끌어당겼다.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물론 대공의 피도, 내 피도
아니었다. 서로의 얼굴에 묻어 있던 적의 혈흔일 뿐.
나는 손가락에 감기는 그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장갑과
건틀렛을 꼈기에 그 감촉을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언젠가 한번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욕망을 충족시킬 기회였기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품으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몸을 돌려 그를 근처의 나무로
밀어붙였다.
이성을 잃은 여자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나한테 떼를 조금 쓴다고 그녀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하나밖엔 없는 것이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을 알고
둘은 몰랐다.
“흐읍……!”

대공이 놀라 발버둥을 쳤지만 그마저도 순간일 뿐이라 예상해 본다.


나는 그렇게 대공의 입을 내 입으로 막아 버렸다.
첫 느낌은 차갑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밤공기 속에 달렸다고는 하지만 내 몸은 뜨거운데, 대공의 입술은
차디찼다. 늘 부드럽던 것과 달리 조금 메마른 것도 같았다. 그 입술 사이를
가르고 혀를 밀어 넣자 내 혀 끝에 와 닿는 그의 혀도, 입안도 모두
서늘했다. 코끝에 느껴지는 그의 살갗 역시 방금 싸움을 벌이고 한참을
달리다가 겨우 호흡을 진정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체온이 낮았다.
나는 그런 사내의 허리를 꿰어 안고 나무로 밀쳐 그의 몸을 짓누르며 더욱
깊이 입술을 문질렀다. 혀 아래에 내 혀를 굴려 타액이 고인 곳을 핥아
내고는 그의 입안 점막 곳곳을 혀로 간질였다. 그리고 그의 혀를 찾아 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혀를 맞대
어 문질렀다. 타액에 힘입어 음탕하게 얽히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그렇게 그의 입안을 잔뜩 희롱하다가 느릿하게 혀를 거두어 그의 입술을
핥는다. 타액에 젖어 다시 부드러워진 것을 내 입술로 감물어 빨아 당겼다.
반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에서 말캉한 혀가 모습을 드러내, 그 혀 역시
입술로 조여 물어 쪽, 빨아 당겼다. 그의 혀가 내 입안에 들어왔을 때 열렬히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캉한 살덩이를 적당한 강도로 빨고 타액을
삼키며 섹스를 하는 두 몸뚱이처럼 혀와 혀를 얽었다.
점차 내 체온이 옮아가며 대공의 몸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몇
번이나 각도를 바꾸며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누구의 혀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두 개의 혀가 서로의 입안을 넘나들었다.
간지러운 자극에 꼬리뼈가 오싹오싹했다. 뿜어져 나오는 숨결이 더웠다.
그 키스는 비릿한 맛이었다. 평소 그의 체취가 아닌, 몸에 묻은 타인의
혈향이 비릿하게 감돌았다. 얼굴에도 피가 튀어 있었으니 입맞춤 사이에
조금은 섞여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입맞춤은 격렬하면서도
감미로웠고, 달착지근하면서도 비릿했다.
잠시 떨어진 입술과 입술 사이 타액이 길게 이어진다. 나는 다시금 그의
뒤통수를 내 쪽으로 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몇 번씩이나 끝날 듯이
끝나지 않고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가 내 입술을 물었고, 따끔한 자극에 필요 이상으로 조금 더 흥분을 해
버려서 나 역시 사내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말캉한 살갗이 잇새에서
짓이겨지자 사내의 입에서 으읏,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가 내 귓가를
참 오싹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내를 달래려 물었던 자리를 부드럽게 핥고 빨다가, 다시금 그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달가이 내 혀를 맞이하는 혀와 점막이 이제는
뜨거웠다.
“……하.”

긴 입맞춤이 드디어 끝을 보였을 때. 대공이 참고 있었다는 듯 숨을 토해


냈다.
나를 바라보는 호박색의 눈동자가 조금은 몽롱해 보였다. 달빛 아래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뺨이 아마도 발갛게 달아올랐으리라. 적어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볼에서 느
껴지는 열기는 그러했다.
“……시르반 요새로 가는 겁니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다시 입술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서 내가 속삭였다.
그러나 대공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갈등으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그러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어, 천천히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건틀렛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으면 좋을 뻔했지. 그런 멍청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머리카락을 그렇게 한차례 느릿하게 빗어 내린 뒤, 나는 가만히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대공의 호박색 눈동자가 내 코앞에서 파르르 경련했다.
나는 다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만 닿는 가벼운 입맞춤에 애가
타는지 대공이 혀를 내어 내 입술을 핥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침범을
받아주지 않고 슬며시 고개를 떼어내 버렸다.
이상한 비유였지만, 내 품에 안긴 대공은 마치 순진한 처녀처럼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사내의 허리를 조금 더 당겨 안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시르반 요새로 가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키스를 해 주지 않겠다는 듯이 협박하는


불한당이 된 기분은 어째서인가. 절대로 협박이 아닌데. 그냥 좀
진정하라는 뜻이었을 뿐인데…….
“……그래.”

마침내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포개어졌다. 내 목에 한쪽 팔을 감아 끌어당기며
매달리듯이 입술을 붙여 오는 대공을, 나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그의 혀를 탐하고 그의 입 안 곳곳에
탐닉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47.

대공과 나는 어둠 속에서 나무 그림자를 이용해 이동했다. 발아래


나뭇가지나 나뭇잎 따위가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다가 우리를 찾는 용병들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이제 횃불을 들고
있어 눈에 띄는 것은 그쪽이었다. 횃불이 보일 때면 나는 그들의 수를
파악했다. 무리의 수가 많지 않을 때에는 내 쪽에서 습격을 하기도 했다.
보통은 그들의 뒤로 돌아가 횃불을 든 놈부터 목을 따 버렸다. 서너 명
정도는 기습으로 수월하게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체를 만들어 놓으면 횃불을 끄고 다시 대공과 길을 잡아 걸었다.
대공은 더 이상 저항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적들을 죽이는 동안 나를
돕지도 않았다. 다만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적들을 죽이는 데 집중을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어둠에 숨어 있는 그의 기척이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적들을 전부 죽이고 보면 늘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빈도가 점점 잦아지는군.”

용병 셋을 도륙하고 검에 묻은 것들을 털어 내고 있을 때, 그가 중얼거렸다.


내내 한마디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순한 양처럼 내 뒤를 따르던 남자의 첫
마디였다. 얼떨결에 나를 따라오기는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알즈가 아닌
시르반 요새로 돌아가는 결정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알즈 쪽이든 시르반 요새 쪽이든 적들이 수색하고 있는 건 똑같을 겁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중얼거리는 대공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정말……. 나는 그 얼굴에 상당히 처참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게 무슨
느낌이냐하면, 순진한 시골 처녀를 온갖 음탕한 짓거리로
꾀어내어 야반도주를 하는 불한당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로 대공은 전에 없이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사스러움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그 얼굴이 도리어 부담스러워서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가시죠.”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다시 길을 잡으며 그를 앞서
걸었다. 내 뒤를 따르던 대공이 문득 제 어깨에서 망토를 떼어 냈다. 원래의
푸른 빛깔보다 흙과 피 따위의 오물이 묻은 부분이 더 많은 데다가
찢어지기까지 하여 엉망진창이 된 망토였다. 그는 그것을 뭉쳐 다른 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교란을 위한 행동이었다. 또 별 가치도 없는 망토를 매달고
다니는 게 거추장스러웠기에 망토를 버리는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대공은 크게 지치는 기색
없이 나를 따라왔다. 그의 체력이 비단 침대 위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침대 위에서는 그토록 집요하게 구는 인간이, 달리는 체력은
형편없었다면 환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귀한 몸이라 고생도
많이 하지 않았을 텐데 제대로 따라오고 있어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만
했다.
그렇게 큰 방해 없이 얼마간 이동을 하던 중이었다.
“잠깐.”

대공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입을


막아 왔다. 거칠게 내쉬고 있던 숨이 턱 막혔다. 조금 괴로웠지만 나는
가까스로 코로 길게 숨을 쉬어 내며 대공이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을 쳐서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소리도 그다지 들려오지 않는데……?
마치 무엇인가를 들은 것처럼 구는 대공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정지에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멈춰 있었을까.
멀리에서 자박자박,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먼 곳에 횃불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다수의 사람의
발아래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고,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바스러지
는 소리가 났다. 고요한 숲에서 점차 그 소리가 커져갔다. 횃불
역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양동작전이다.”

대공이 아주 작은 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가 나무 그림자를 빠져나갔다. 그 다음 그림자로 이동하는 그의
모습이 어둠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횃불을 든 놈들이
이동하는 루트를 예상해 놈들의 뒤를 치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 자리에서 놈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공은
아마 내가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에서 놈들의 후방을 칠 테고, 내가 나가야 할
시점은 그때였다.
그런 작전으로 갈 거라면 내가 이동하는 게 나은데 왜 대공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은 조금 소름이 돋아났다.
아무리 어둠 속에서 이동을 하고 있다지만, 그가 이동하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
정상적인 남자의 체중에 판금 갑옷이 더해져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닐 텐데,
대공이 밟는 자리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된 뒤에는 내가 여태까지 대공과
있었던 게 아니라 귀신과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무슨 인간이… 저렇게 기척이 없을 수가. 이렇게 소리 없이 이동을 할 수
있다면 기습을 해도 대공이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니 뿐만 아니라…….
혼자서 숨어 있는 쪽이 더 발견이 안 될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대공만큼
기척을 숨기지 못하는 나와 같이 다니는 게 그에게 더 불리한 거
아닌가……?
그즈음 횃불을 들고 있던 적들이 내 지척에 다가왔다. 일곱 명으로
여태까지 마주쳤던 놈들 중에 그 인원이 가장 많았다. 기습을 한다고 해도
한번에 다 죽이기는 어렵다. 멀리서 보일 때 그냥 피했어야 했는데…….
대공이 싸움에 참여하려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까 3:1의 상황에서도 고전을
했던 그였다. 물론 이번에는 습격하는 쪽이 우리라지만 속전속결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고민하는
새에 그들은 조금 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횃불을 좌우로
돌리며 그림자 사이사이를 보고 있었기에, 그들이 조금만 더 다가온다면 나
역시 은신해 있는 곳을 들킬 수 있었다.
아니, 내 예상보다 그것이 더 빠르게 일어났다. 횃불이 이쪽을 향하는 순간,
한 놈이 나무 뒤에 몸을 숨겼으나 채 숨겨지지 않은 내 어깨 부분을 보아
버린 것이다.
“이ㅉ…!”

이쪽이라고 소리쳐 동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


많은 병사들이 와야 우리를 잡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그러나 채
끝맺지도 못한 말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들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대공이 검으로 소리를 지르려던 놈의 목을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그 순간 나 역시 나무 뒤에서 달려 나와 놈들에게 쇄도했다. 뒤에서 대공이
소리 없이 기습을 한 찰나에 앞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가 뛰어들자, 놈
들은 순간 당황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게 우리에게는 기회였다. 대공은 옆에 선 놈이 방비할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목에 검을 찔러 넣었고, 나 역시 소리를 지르려 하는 맨 앞의 놈의 입에
가장 먼저 검을 박아 넣었다.
투구를 쓰지 않은 놈은 그렇게 절명했다. 이어 그 기세를 몰아 다른 놈의
목을 날려 버렸다. 나에게 달려드는 다른 한 놈의 검을 가까스로 피하고
이를 악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검 끝에 걸리는 느낌과 함께, 허공
으로 적의 피가 뿌려졌다.
대공 역시 제 역할을 무사히 완수해 냈다. 그 빠른 시간 동안 둘이서 일곱을
죽여, 이제 자리에 선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혼전 속에 바닥에 떨어진
횃불이 피 웅덩이에 닿아 치이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후…….”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며 대공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에 넷을 죽인 그의


호흡이 가빠져 어깨가 조금 들썩이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시죠.”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시체에서 멀지 않은 나무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두 남자의 숨소리가 가라앉는 데는 그리 오랜
.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대공이 이번에는 잘 싸워서 다행이었다. 기척을 없애는 능력도
탁월하고, 기습에 상대를 일격필살로 죽이는 것도 잘 해서 조금 놀랐다.
덕분에 적이 일곱 명이나 되었음에도 그들이 소리를 쳐서 우리 위치를
퍼뜨리기 전에 죽일 수 있었다.
“생각을 해 보니까.”

문득 대공이 말을 걸었다. 힐끔 바라본 그는 아까의 그런 요상하게 순진한


표정에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꼭 내 옷 안쪽까지 훑는 듯이…….
“그 속옷, 아직도 입고 있는 거잖아.”

…….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아니, 씨발. 그러니까 씨발. 갑자기 이게 무슨, 씨발.


“움직이기 불편하지는 않은가 봐. 누이가 바느질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말에는 어떤 마력이 있을 때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여태까지는 내가 그런 것을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지적을 한 순간 평소와 달리 살갗을 조이는 끈의 감각이 여실히 느껴지고야
말았다. 가슴을 두르고 있는 끈도, 어깨 끈도, 가슴을 감싸는 레이스의
감촉까지 어쩐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느껴져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아래 속옷의 뒷부분이, 엉덩이 골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마치 내 갑옷 안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잔뜩 세워 놓고 제대로 싸지도 못했지.”

피식 웃으며 말하는데, 그 사정은 대공이나 나나 마찬가지라 누구의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 그 망사 천에 고환만 겨우 들어가서
허공을 향해 벌떡 선 게 고스란히 노출되던 아까의 내 꼴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게 지워지지가 않아서 와악 소리를 질러 버리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박는 건데 그랬어. 순간의 판단 실수로 내가 그대를

욕구 불만에 시달리게 했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각하……. 지금은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알즈에 가서 그대를 안으리라 생각했는데. 꼭 알즈에 가야 했는데…….

이제는,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숲속에서 그대를 안는 것도,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아.”


…대공의 눈빛이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하고 싶다는

욕망이 보이는 것 같아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그가 나를 덮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 와중에도 섹스 타령을 하는
그의 광기에 질려 버리는 기분이었다. 이 새끼는 중간이 없나? 아까는
새색시처럼 굴더니 지금은 또 저런 능구렁이가 없는 것이다.
“하아, 꼭 살아서 요새로 돌아가야겠다.”

……뭘 상상하면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싶었다.

나를 바라보며 제 입술을 핥는 얼굴이 보통 요사스러운 게 아니었다.


불길함에 가슴 안쪽이 쿵 내려앉는 기분까지 들어 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짓는 웃음에 속이 다 덜컹덜컹 떨렸다.
“키스를 그렇게 잘하는 줄, 내가 미처 몰랐지 말야.”

아니… 나는 분명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진 유일한 방법을 썼던


것뿐인데……. 무언가 실수를 해도 단단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수렁으로 한 걸음 더 깊게 들였다는 불안감이 발목을 잡아챘다.
“이만 갈까?”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태도로 이번에는 대공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마지못해 그의 앞에 서서 길을 잡았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시선에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 봐, 일릭. 대공을 죽이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어? 차라리 지금 대공을 죽여 버리는 게 앞으로의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그리고 나 역시 죽은 것처럼 꾸며 놓고 도망을 치는 거다. 사람
죽으란 법은 없다고, 그렇게 도망을 쳐도 어떻게든 살아남기는 하지
않을까? 나 생존 능력은 좋은 편이잖아??
마음과 머리가 모두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우리의 정면, 저 멀리에서 수없이 많은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방향은 시르반 요새 쪽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렇다면
대공을 구조하러 온 우리 편인가? 아니면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는
적? 설마 적이라면 저렇게 대규모 인원이 시르반 요새 인근에서 머물며
소란을 부리고 있다는 걸까?
어둠으로 인해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긴장감에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대공이 만들어 놓았던 불안감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며, 아랫배까지
긴장감이 퍼져 갔다. 검을 쥔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저들을 피해 우회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우회를 할 수는 있을까? 마주쳤다가 적이라면 확실하게 죽을 텐데.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대공을 정말 죽여서는 안 되는가 라는
미련도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생각을 깊이 하는 것 따위 딱
질색인데, 너무 많은 생각이 쏟아지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는 사이 횃불들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는 대공을 돌아보았다. 대공 역시 그 횃불들을
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 역시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죽을 것이라는 절망감을.
“…이거야 원. 가 볼 수밖엔 없겠군.”

그것이 대공의 결정이었다.


이번에 앞장을 선 것은 대공이었다. 그가 걷기 시작했기에, 나 역시 그의
뒤를 좇았다. 어쩌면 사지일지도 모르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가 볼 수밖엔 없었다.
그 긴장된 시간의 끝에, 횃불이 점차 가까워져 그 빛에 서로의 얼굴이
비치게 되었을 때.
“……각하!!”
맨 앞에 서서 달려오는 사내를 보며 나는 안도감에 긴 숨을 흘렸다. 그제야
피 맺힐 듯이 억세게 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뺄 수가 있었다.
“자칸.”

대공의 기사 자칸 경. 그리고 미로스의 군사들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미로스의
군사들과 합류한 뒤 대공은 바로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수색을 나온 병사들을 지휘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고, 우리를
습격한 적을 추격했다.
미로스 측의 군대가 대규모로 숲에 투입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이
제 도망을 치며 사냥을 당하는 쪽은 그쪽이었다. 투항을 하여 생포를 한
인원도 상당했다.
그 와중에 대공의 기사들도 몇몇 구조되었다. 개중에는 적의 손에 목숨을
잃어 갑옷과 무기를 모두 빼앗긴 알몸으로 땅바닥을 구르는 시체의 꼴이 된
자들도 있었지만, 시체만큼은 회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 생각보다는
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부지했다. 살아남은 수가 절반 이상이었다.
라베인 백작 역시 살아남은 쪽이었다.
“각하…!”

만신창이의 몰골로 구조된 그는 10년은 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초췌해 보이기도 했으며 얼굴에 상처를 입었는지
검붉게 피가 말라 붙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구조된 순간에도
대공의 생사를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각하,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라베인 백작은 말에 오른 채 군사를 지휘하고 있던 대공을 만난 순간


눈물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안도하고 그의 생존에 감동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베인 백작이 전한 말을 듣고 그 길로 알즈에 간다며 길을
나섰다가 이 변을 당한 것이었다. 결국 백작이 잘못된 정보를 물어와 그의
영토 안에서 적의 간계에 당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대공의 생환이
기쁘지 않을까. 백작으로서는 아마 자신이 살아난 것보다 대공이 살아 있는
게 더 기쁠 것이었다.
“우리가 성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첩보가 도착했다는군. 목표물의

모습이 연합군 진영에서 확인되었다고 말이다.”


“제가… 제가, 거짓 정보를 믿고…….”

라베인 백작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대공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대공이
그에게 죄를 물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대공에게서는 분노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라베인 백작을 책하지도 않는 듯이 보였다
. .

그러나 받아들이는 백작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내일 전투에 제가 선봉장이 되겠습니다, 각하…!”

울음 가득한 얼굴에 독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니, 다음 있을 전투에서도…! 이 모든 전쟁에서, 제가 선봉에 서서 적을

척살하겠습니다! 오시안의 기병대도, 감히 이 땅을 넘보는 모든 적들을


제가 척살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불꽃같은 분노를 내어 보이는 백작을 앞에 두고 대공은 엷게 웃었다.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얼굴로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환한다.”

그의 입에서 짧게 명령이 떨어졌다. 드디어 귀환이었다.


시르반 요새에 도착했을 때 성 안은 상당히 부산스러웠다. 내일 출병을
위해 배불리 먹고 마신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가 강제로 기상했던
병사들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흉흉했다. 그러던 중 대공이 귀환하자 그
긴장감 위로 안도감이 덧그려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성에 돌아온 뒤 나는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방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제야 알았는데, 검을 몇 번이나
받아 냈던 어깨 갑옷은 너무 심하게 우그러져서 어깨가 완전히 짓눌리고
있었다. 잔뜩 부어오른 채로 갑옷까지 우그러지니 완전히 끼어 버려서 잘
벗겨지지도 않았다. 결국 파츠를 고정하는 벨트를 잘라 버리고 억지로 잡아
뜯은 뒤에야 벗어 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움푹 패고 찌그러진 것은
흉갑이나 배갑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갑옷을 두르지 않은 하체에 상처가
없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검에 찔리고 베인 상처는 다행히 없었으나, 갑옷이 우그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은 자리에 멍이 들고 있었다. 특히 어깨 쪽은 새카맣게 피멍이 들었다.
만져보니 생각보다 통증이 심했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픈 줄도
몰랐는데, 다쳤다는 걸 알고 나니 통증이 마구 몰려들었다.
파츠를 낑낑거리며 다 벗고 옷까지 벗어 놓고 있을 때 대공의 하인이 더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가져왔다. 기사도 아닌 나를 위해 그가 종자 노릇을 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종자가 무
엇인가. 용병의 신분으로는 더운 물에 깨끗한 수건만 해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치였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찬물로 씻어 내거나 겨울에는
그마저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주제인데 지금은 무려 대공의 하인이 내
시중을 들어 주고 있었다.
대공의 목숨값을 생각하면 충분히 누릴 만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인은 이전에 그가 대공에게 했듯이 수건에 물을 묻혀 직접 내 몸을 닦아
주려 해서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아니 내가 사지 못 움직일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미리 그 빌어먹을 속옷을 벗어 놔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하인에게 더운 물이나 더 가져다 달라고 말하고 내 손으로
몸을 닦았다. 참고로 대공이 하사한 것이라 차마 내버리지 못했던 그
징그러운 천 조각들은 대강 구겨서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몸을 씻고 난 뒤에는 대공의 하인이 가져다 놓은 새 옷을 입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아니, 곧 죽을 것 같기도 해서 누워서 잠이나
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돌바닥 위에서도 달게 잘 상태였는데 오늘
밤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호사였다. 역시 이쯤 되니 대공의
목숨 살리기를 잘 했다 싶었다. 물론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기도 했지만.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야밤에 나갔다가 개고생을 하고 돌아왔기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눈앞에는 제법 푹신해 보이는 침대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장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자 대공의
하인이 나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대공의 방이었다. 평소와 달리 방 안에서는 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대공이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자잘한 타박상 정도는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대공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나를 한차례 힐끔 보고는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명령했다.
“치료해.”

나는 대공의 옆쪽 소파에 앉아서 셔츠를 벗어야 했다. 전쟁터까지 따라온


궁정 의사가 내 상처를 살폈다. 어깨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새카만 멍과
확연히 눈으로 보이는 부기에 의사의 미간이 슬쩍 일그러졌다.
“…움직일 수는 있습니까? 이거 뼈까지 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움직이는 건 문제없는데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움직일 때


마다 욱신거리고 아프기는 하지만,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다.
타박상이 조금 세게 들었을 뿐. 이 정도 부상이야 용병에게는 그리 심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확인이라도 해 보이듯이 팔을 움직여 보였다.
“그래도 되도록 팔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부기가 빠지고 통증이

가라앉는 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어요.”


의사는 약을 꺼내어 내 어깨에 멍 든 부분에 넓게 펴 바르고 그 위로 붕대를
둘렀다. 찢어지고 베인 것도 아니라 그냥 두면 나을 상처에 지나치게
유난스러웠다. 이까짓 멍이야 시간 지나면 낫는데 말이다.
대공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의사가 내
어깨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두르는 모습을 구경했다.
치료를 마친 의사가 대공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간 뒤에도 기묘한 침묵
속 기묘한 시선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 침묵을 깰 자신도 용기도 없어서
그저 허공만 바라보았다.
대공은 차를 한 잔 다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나치게 온건했던 것 같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무어라 반문하기도 전에, 대공이 축객령을 내렸다.
“쉬어야겠으니 이만 나가봐.”

무표정한 그에게서 나는 무엇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멍청이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어정쩡하게 일어나서 자리를 떴을 뿐.
그리고 다음 날, 예정했던 대로 부켈릭이 병사를 이끌고 바스코브로
향했다. 전날 전의를 불태웠던 라베인 백작이 자칸을 대신해 병사를 이끌고
그들과 함께했다.
병력이 바스코브에 도착해 전투가 시작된 날.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바스코브는 함락되었다.
그저 물자에 대한 약탈만을 계획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한 도시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48.

미로스의 이만 군사 중, 부켈릭이 팔천을, 라베인 백작이 오천을 이끌고


바스코브로 갔기에 요새에 남은 것은 고작해야 칠천이었다. 그 칠천은
요새를 지키며 바스코브로 갔던 군이 오시안을 격파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은 대공의 계획대로 되지 않아 그들이 밀리기 시작했을
때 구원병으로 갈 수도 있어 대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병사들이 바스코브로 떠나고 이틀 뒤 저녁. 오시안의
군대가 시르반 요새에 도달했다. 대공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군사들과 상의하고 있던 대공이 소식을 들었을 때 도리어
그는 피식 웃어 버렸다.
“멍청한 놈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사실 상황은 그보다 심각했다.


오시안의 기병대가 약 오천. 그리고 세리포브가 보병을 보내 몸체를 불려
진격해 온 그들의 수는 무려 만오천이었다. 요새를 지키고 있는 미로스의
군사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셈이었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 사이에 놓여
있다고는 하나, 오시안 기병대의 소문을 아는 놈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그들이 바스코브를 버렸군요.”

“뒤늦게 가 봤자 건질 게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니까 도시 전체를 불사르지는 말았어야 했다. 대공이 도시를 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부터 뒷골이 싸하던 참이었다. 바스코브를 치는
목적은 약탈에도 있었지만, 오시안을 바스코브 평야로 유인해 그곳에서
격파를 하기 위함이 더 큰 게 아니었나. 세리포브의 도시를 공격하면, 오시
안과 함께하는 세리포브 쪽에서 자신들의 도시를 구명해 주기를 바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군대가 일
단 바스코브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시를 온전히 남겨 두었다면, 적어도 계획대로 되었을 텐데.
“병력의 반 이상이 없으니 요새를 함락시키는 게 쉬울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요새를 빼앗을 때에도 제법 고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인 건지 모르겠군.”


“오시안 기병대의 명성만을 믿고 있는 것이겠지요.”

“공성전에 기병대가 무슨 소용이라고.”

“대포도 50문 정도 보였습니다.”


고작 50문인가. 철도 얼마 안 나오겠군.”

…대공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아무리 시르반 요새가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시안의 중장기병의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기사가 철갑으로 무장한 말을 타고 다니는데
그 수가 오천이었다.
중장기병은 전쟁에서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중장갑으로 무장한
장창병이 전방에서 그들의 접근을 막는다 해도, 틈을 파고들어 방진 안으로
돌진해 병사들을 압사시킬 때면 당해 낼 방도가 없었다. 인간과 말을 합친
크기의 포탄이 밀고 들어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중장기병 다수가
돌진해 들어온다면 보병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바스라질 수밖엔 없었다.
들어가는 유지 비용만큼이나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
용병들조차 전쟁터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중 하나였다. 물론 우리
쪽에도 중장기병이 있기는 했지만, 오시안처럼 작정하고 떼로 몰려다니는
기병대를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대공은 공성전에 기병대의 역할이 작다는 것을 지적했지만, 그들만 온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대포도 있고 보병도 있었다. 성벽이나 문이 뚫려서
그 중장기병이 몇 명이라도 성 안으로 들어오면 그 이후에는 그저 학살일
뿐이었다.
그러나 대공의 자신감에는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저녁에 도착한 오시안의 병력은 그 즉시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빠른 시간 내에 요새를 함락시켜야 했다. 바스코브에 갔던 미로스의 만삼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군사가 돌
아올 것이라는 걸 그들 역시 예상하고 있을 터. 그렇지 않으면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들은 오늘과
내일 중 성을 뺏을 각오로 공격을 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마땅히 수성을 하며 원군을 기다려야 했다. 대공이
말했던 것처럼 시르반 요새는 본디 세리포브에 속해 있을 때 미로스가 꽤나
힘겹게 빼앗았던 만큼 수성에 큰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공은 성문을 닫아걸고 수성을 하는 대신, 군사들을 적극적으로
교전하게 했다. 병력의 수가 미로스 군보다 훨씬 많았지만,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넓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
있던 우리 군이 각개격파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 버틸 만한
밤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로스의 기병 이천이 새벽의 야음을 틈타 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이전에 대공이 알즈로 가던 중 습격을 당했던 숲을 우회하여
오시안의 포병대를 후방에서 급습했다. 야습에 대비하지 않았던 포병대는
그대로 무력화되었다.
“이겼군.”

이 시점에서 대공은 승리를 확신했다.


“포병대를 무너뜨렸을 뿐이지 않습니까.”

“덕분에 놈들은 이제 우리에게 대처하지 못할 거다. 자칸. 총병들을

내보내.”
잠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물러섰던 오시안의 군대가 날이 밝아 오는 것과
함께 다시금 몰려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번 전투에 그들은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이 여기서 꺼낸 카드는 고작 화승총 부대였다. 명중률이
형편없는 데다가 관통력도 약해 기사의 중갑을 결코 뚫지 못하는.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폭죽인 양 하늘을 향해 쏘는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되던
화승총 말이다.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이 되어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공의 얼굴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긴장감은커녕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화승총 부대가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나는 그들이 총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쏜 직후
무력하게 기사들에게 치일 것을 예상했다 .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내가 생각한 사정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달려오는 기병들을 향해
화승총병의 총이 불을 뿜은 순간.
오시안의 기병대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총알은 갑옷을 꿰뚫어 그
안의 육체에 처박혔다. 말이고 사람이고, 총알에 맞은 순간 그대로
고꾸라졌다. 달려오던 기병대의 첫 줄이 그렇게 무너졌다.
임무를 완수한 총병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2열에 있던 총병이 다시
기병대에게 총을 갈겼다. 그들이 물러서자 장전을 마친 뒷줄이 다시 나서서
총을 쐈다. 내 생각보다 명중률이 높았고, 파괴력조차 이전과 달라 그들의
총알은 갑옷을 부수고 살을 파고들어 기사들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가
버렸다. 그런데 교대로 쏘아 대고 있으니, 그 속도마저 이전의 전쟁터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빨랐다.
그래도 기마대 전부를 쏴 죽일 수는 없었다. 그들이 우리 군대의 지척에
도달했을 때였다.
이번에는 장창병이 앞으로 나섰다. 250명 정도 되는 한 부대의 사방을
장창병이 감싼 채 장창을 들어 기병대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는 와중에
장창병의 뒤에서 다시 장전을 마친 화승총병이 총을 들었다.
오시안의 이름 높은 기병이 그렇게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나는 그제야 대공이 포병대를 무력화시키자마자 이겼다고 확신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화승총 부대에 대응할 수 있는 건 원거리에서 대포로 쏴
버리는 것뿐이었다. 인간 대포인 기병대는 통하지 않더라도 거대한 탄환은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시안 군에는 포병대가 남아 있질 않았다. 진작
포병대를 잃었기에 그들은 화승총 부대에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밤새 전투가 치열하게 이뤄졌던 것에 비해, 승세가 기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전투에는 전혀 나가지 못하고 성 위에서 자리를 지키던 나는 대공의 군대가
오시안의 병사들을 각개격파할 때도 놀랐지만, 화승총 부대가 출격하여
기병들을 녹이기 시작했을 때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합군을 상대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대공의 자신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저 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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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하느라 골치깨나 아팠지.”


“저 정도 위력이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난 저것도 부족하다고 본다. 사정거리가 만족스럽지가 않아. 그나마


다행히 루시스가 훈련을 잘 시켜 놓은 것 같군.”
아니… 도대체 대공은 어느 정도 성능의 화력을 요구하는 것인가. 대공이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부를 화기에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상대하기가 영 곤란해 공포감마저 주었던 기병들이
화승총에 이렇게 맥없이 무너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최강을 견주던 오시안의 기병대를 녹여 버린 것은 고작 천 명의
화승총병이었다.
그런데 이것조차 대공에게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또한 놀랍고도
충격적이었다. 이보다 사격거리가 더 증가하고 명중률이 높아진다면 비단
기병만 표적이 되는 게 아닐 것이었다.
화승총 따위 무시하며 살아온 내 앞길이 막막해지는 소리였다.
기존에도 화승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는 화승총이라면 그
총알에 맞는 놈이 등신이었다. 또한 한번 총을 쏘고 나면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니까, 기병대가 얼른 가서 쳐 죽이면 별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들이었고, 선봉대를 맡아 장창병을 무력화하고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나 같은 검을 쓰는 병사나 기병대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기병대나 돌격대 따위가 달려 나가다간 총 맞고 뒈지기 딱
좋을 것 같다. 화승총 부대가 사격을 해 기병의 수를 줄이고, 기병이
접근하면 장창 부대가 화승총 부대를 보호한다. 화승총 부대를 두세 줄로
배치해 교대로 총을 쏘게 해 장전의 시간을 번다……. 그 위력이 판금
갑옷을 꿰뚫을 정도였으니, 이 정도 위력의 총이 많아진다면 앞으로는 막을
도리가 없을 터였다. 이제 전쟁터에서 나 같이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지 않을까.
“각하! 적병의 지휘관인 오시안의 루젠이 화승총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한 군사가 그렇게 전달을 해 왔을 때, 나는 더더욱 미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루젠이라고 한다면 오시안의 기병대를 이끌며 한때 무적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던 양반이었다. 그 사람까지 화승총에 가 버렸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쩐지 썼
다. 이제 전장은 더 이상 사내들이 힘과 힘을 겨루는 장소가
아니게 된 것이다. 용병으로서 마초적인 구석이 있어 총병을 은근히 무시해
오던 나였기에 더욱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휘관이 사망을 했고 그것이 적진에 알려질 정도였으니, 전투는 더 길게
이어질 것이 없었다.
내가 충격적인 전투를 보고 앞날 걱정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와중에, 대공이
유유자적 중얼거렸다.
“퇴각하는군.”
결국 맥없이 기병대를 잃고 지휘관마저 잃은 적에게 남은 것은
퇴각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타이밍이 나빴다.
“아…….”

밤을 새워 달려온 미로스의 기병대가 마침 그들의 뒤로 도착한 것이다.


무엇에 이입하고 있었는지, 내 입에서는 작게 탄식마저 튀어나와 버렸다.
도망치던 보병들이 기병들의 칼에 맞아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칼
에 베일 것도 없었다. 패닉에 빠져 정신없이 도망치는 보병들에게
기병들이 돌격하자 보병들은 그대로 짓이겨졌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푸른 대지 위를 그들의 피가 적셨다.
이대로라면 오시안과 세리포브의 군대는 궤멸이었다. 다른 쪽에는 강이
있어, 그 강에 빠져 죽는 병사들도 많을 것이었다. 살기 위해 검을 놓고
목숨을 구걸하는 패잔병도 벌써 생겼다.
그러나 대공은 여상하게 명령을 내렸다.
“포로 따윈 필요 없다.”

바스코브 도시 전체를 불태워 버리는 명령을 내릴 때처럼, 대공은 일말의


자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로를 전부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나답지 않게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엄청난 화승총 부대의 위력에 적의
기병대가 도리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 버려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나
역시 이제 전쟁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존재가 되리라는 뼈아픈 예감
때문이었다.
“지휘관도 죽은 마당에, 달리 몸값 대단한 놈이 누가 있다고.”

그러나 대공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가치가 없다는 양 얘기하는 그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며 나는
괜히 속이 다 부대끼고 부글거리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이
엄청난 승리 앞에 기쁨보다는 막막함이 더 컸다.
“이런 병력이라면 대륙을 통일하시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 아닙니까.”

“말했다시피 나는 전쟁광이 아니야.”

……도시 하나를 불태우고, 포로조차 남겨 두지 말고 만오천 명의 군사를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방금 내린 주제에. 대공은 내 비아냥과도 같은


질문에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더는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일축한 와중에, 그의 입가가 피식 미소를 그려냈다.
“물론 걸어 온 싸움을 피하지는 않지.”

또한 자신은 늘 이기는 싸움만 한다는 듯, 자신감이 엿보이는 미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군이었으므로 무척이나 든든하게 여겨져야 하련만…….
그의 화승총 부대에 맥없이 무너진 적에게 이입을 하고 있어서인지 나는
도리어 그 미소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어쩐지 화승총 외에 또 다른 게
있을 것만 같았다.
같은 날 점심이 되기도 전에, 전투는 끝이 났다.
오시안과 세리포브의 군대는 결국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쪽의
피해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미로스의 완벽한 승리 속에, 아주 운 좋게 도망을 친 소수의 패잔병을
제외하고는 신분고하를 막론한 적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오시안을 완벽하게 격파한 뒤, 대공은 연합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코
성에 가만히 앉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알즈에 간다고 나섰다가 적에게 습격을 당해 죽을 뻔한 게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세리포브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형태로 다가왔다.
시르반 요새를 거점으로 삼아, 대공이 인근의 도시들로 군사를 보냈던
것이다. 바스코브를 약탈하고 불태웠던 것처럼. 대공의 묵인 아래 병사들이
세리포브의 도시를 습격했다. 오시안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주변의 세 개 도시가 바스코브처럼
초토화되었다.
대공은 연합군의 군대를 이끈 교황이 시르반 요새의 코앞에 도착했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때에야 인
근 도시를 공략하던 것을 멈추었다. 하루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연합군의
앞에 대공이 전군을 집결시켰다.
***

연합군 측에서는 다시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황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에서


뜻을 모아 베르바니를 세리포브에 반환하라 권고하였음에도, 베르바니를
반환하기는커녕 오시안의 병대를 척살하고 포로조차 남기지 않은 채 전부
죽여 버렸으며 세리포브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킨 미로스의 대공을 악마라
비난하며 몰아붙였다. 신을 믿는 선량한 백성들은 그 악마의 현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은근슬쩍 병사들과 용병들을 충동질하려 들었다.
솔직히 나도 대공이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교단의 위세가 강해지고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신앙심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특히나 우리 피도 눈물도 없는
용병들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용병 놈들은 오히려 지난 전투에서의
대승과 도시 네 개에 대한 약탈로 주머니가 빵빵해져 몹시 만족하고 있을
게 뻔했다.
연합군의 수와 연일 이어지는 비방에도 미로스 군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교황의 말씀에 교화되어 전장에서 이탈하는 병사는 물론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여태까지 지나온 전장에서의 승리가 너무나도 달콤했던
탓이다. 오시안과 세리포브의 만오천 군사를 궤멸시키고 네 개 도시를
불태우면서도 이쪽의 전력 손실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나 역시도, 새카맣게 몰려온 연합군을 보면서도 크게 걱정이 되지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미래가 조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일부 병사들이 약탈을 나간 동안 나머지 병사들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시르반 요새 주변에 갖가지 준비들을 해 두었다. 총병들을 위한 참호가 그
첫 번째였으며 80문의 대포가 두 번째였다. 빼곡하게 늘어선 대포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연합군이 싸움을 걸어 온 날.
내 불길함은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선봉대를
맡은 적의 기병대가 돌진해 오자, 대공이 주저 없이 대포를
발사시킨 것이다.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공기를 찢으며 울렸고, 거대한
포탄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사슬로 연결된 두 개의 커다란 쇳덩어리가
회전하며 빠르게 날아가 달려오는 기사들을 뭉쳐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그 사정거리였다.
상대의 대포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렇기에 상대 역시 우리의
사정거리를 가늠하고 여유롭게 달려오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대공의
대포가 선보인 사정거리는 그들의 예상을 한참 상회했다. 뿐만 아니라
포탄이 날아가는 속도가 남달랐으며, 사슬로 연결된 두 개의 포탄이 동시에
날아가며 보인 파괴력은 상상초월이었다.
기사들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것은 기병대의 뒤를 따라오던
보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와 열을 맞추어 방진을 그리며 다가오던
보병들이었기에 사슬로 엮인 포탄에 의한 피해는 몇 배나 컸다.
살아남은 기병들이 다가왔을 때에는, 화승총이 불을 뿜었다. 화살이나
기존의 화승총은 결코 뚫지 못하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강풍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덕분에 살아서 장창병의 앞까지 온 중장기병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미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그들은 무력하게 장창병에게 꿰뚫려 낙마했고, 병사
들은 신이 나서 바닥에 떨어진 기사를 찔러 죽였다.
이것은 비단 중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부켈릭이 맡은 우익도, 라
베인 백작이 맡은 좌익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미로스의 군대는 대포와
화승총을 앞세워 너무나 쉽게 돌격해 오는 적의 선봉대를 녹여 버렸다.
이쪽의 화력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연합군은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연합군 전체가 총공세를 펼친다면 조금 더 상황이
위태로워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에 대한 대비도 해 놓은
것인지, 대공은 직접 중앙을 진두지휘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미로스의 군대는 후방에 든든한 요새를 등진 채, 이전의
전투에서와는 달리 길게 늘어선 선형진을 유지하며 연합군을 상대했다.
미로스의 군대가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하자 집중포화를 견뎌내지 못한
연합군은 조금씩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얼마 지나
지 않아 그들은 결국 수백 미터를 달아났다.
참으로 맥없는 승리였다.
- 다음 화에 계속

49.

승리의 단물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연합군이 진영을 뒤로 물린 그날 밤.


대공은 밤에 나를 불러냈다. 이전의 전쟁과는 달리 대포 몇 방 쏘고 화승총
부대가 활약을 좀 한 뒤 기병들이 나머지를 처치하는 것으로 전투가 끝나
버려서, 좀처럼 검을 휘두를 기회가 없었던 나로서는 좀이 쑤시던 차였다.
기존의 전쟁에서의 활약을 생각하면 역시나 우울함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용병 중에서도 늘 선봉을 맡던 특수한 용병으로, 장창병들을
상대해 그들을 무력화하여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롱소드로 적을 도살하는
임무를 맡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 없어서야. 물론 대공의 곁이 아닌 보병들과
함께 하는 상황이었다면 손맛을 볼 일 정도는 있었겠지만, 화기의 위력을
본 지금 시점에서는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더불어 앞으로는 용병을 해먹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대가 그렇게 빨리 바뀌어 금방 전부 총병으로 대체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기병들도 말을 탄 채로 총을 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니 그러면 나 용병짓을 몇 년 해먹지도 못할 판인데, 용병짓 더
해먹겠다고 달칸에 붙어 있으려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게 웃기는 거 아닌가?
대공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당하면서 이렇게 비위를 맞추며 사는 게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니야……? 솔직히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건 이것
같았다.
물론 내 성격이 본디 깊게 우울해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군의 승리는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을 바꾸려 노력했다.
또한 그나마 그래도 전시라고 대공이 나를 불러서 그런 저런 짓을 시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한번의 시도가 있었다지만 미수에 그쳤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중간에 하
다가 방해를 받아서 기분이 나빴던 것인지, 오입질 하겠다고
알즈에 가다가 습격을 당해 생사가 오갔기 때문인지 아무튼 그 뒤로 한동안
대공은 나를 밤에 따로 부르지도 않았다.
오늘 나를 불렀을 때도 그는 아침과 다름없이 갑주를 갖춰 입은 행색으로
나를 맞이했다.
다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예상 외였다.
“알즈로 간다.”

또?
순간 반문할 뻔했다. 그만큼 황당했던 것이다. 알즈에 대체 뭐가 있기에
거길 가겠다고 또 난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가 단순히 방해
없는 환락을 위해 알즈의 별장에 가려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목숨 걸고 몰래 거기까지 가야 할 용건이라는 게 대체 뭔지 몰라서
그렇지.
아, 물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대공과의 이 계약에 대해 마음이 더 복잡해진
지금, 대공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깊게 아는 것은 결단코 사양이었다.
“이번에는 위험하지 않을 거다.”

대공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뭐라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가 오만함에


가까운 자신감을 내비칠 때에는 단단히 준비를 해둔 후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수적으로 크게 불리한 작금의 상황 속에서도 아군의
사상자는 거의 내지 않으면서 적군의 피해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는
대공을 보며 솔직히 의심하는 마음을 갖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의
부하들이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요즘의
매일매일이 그의 대단함을 확인하는 하루였던 것이다.
오늘 아침의 전투에서 그는 대포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었다. 사정거리가
엄청나게 늘어난 화승총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대포에도 개선점이
필요하다고 했다.
“포탄이 지면에 닿는 즉시 폭발을 한다면 파괴력이 더욱 증가하겠지. 펑

터져 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면 성가시게 탄환을 사슬로 연결하는 짓 따위


할 필요가 없을 거다. 게다가 탄환 하나라면 두 개를 발사했을 때보다
사정거리가 더 늘어날 거고.”
작금의 포탄은 대포에서 쏘아져 나가면 커다랗고 무거운 구체가 날아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부딪쳐 나
아가는 방향에 있는 것들을 파괴하는 형태였다 나는 대포라면 .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포탄 자체가 터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아니 그걸 사슬로 연결해서 살상력을 더 늘린다는 생각조차 못 해
봤다.
그러나 대공은 더 빠르게, 더 멀리만이 아니라 포탄이 터지는 것까지
상상해서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총알 역시 그렇게 터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탄환만 아니라 그 파편에 맞는 사람들까지 크게 타격을 입게 될 테고
말이다.
전쟁터에서 대포와 총알이 날아오고, 그것을 피하더라도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걸 상상한 순간에는 몸이 부르르 떨리며 겁이 조금 나기도
했다. 대공이 아군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적으로 만난다면 궤멸당하는 건
이쪽이 될 테니까.
달칸이 줄서기를 잘 해서 다행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계속 줄서기를 잘
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 미래가 걱정될 수밖엔
없었다. 조만간 용병짓도 은퇴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뭘 해먹고 사나.
그런 걱정이 뒤를 잇기도 했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대답을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나는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나는 대공과 함께 알즈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의 기사인 자칸이 곁을
지켰다. 숲길을 빠르게 달려가며 나는 혹시 다시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조금 긴장했으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달이 스러져 가는 어느 밤. 우리는 그렇게 알즈에 도착했다. 처음 이곳에
오려 했을 때 고생을 했던 것에 비해 너무 쉽게 도착해서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은 듯했다.
숲속에 위치한 그 마을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대공이 향한 곳은
민가에서 조금 떨어져 호숫가에 위치한 상당한 규모의 별장이었다. 아마도
어느 귀족이 지어 두었다며 전에 대공이 언급했던 그 별장이리라. 한밤중에
온 것이기에 마을의 전경은 물론, 그 저택의 외관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대공이 아름다운 곳이라 언급했었는데 말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모두가 잠
이 들었는지 별장에서는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자칸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대공을 모셨다. 실내의 공기는 훈훈하면서도
아늑했다.
중년의 부부가 잠에서 막 깬 몰골로 황급히 나와 대공을 맞이했다. 대공은
제법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다.
“멜. 로간. 잘 지냈나.”

“황공합니다, 각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이전에 알즈로 오시다가 큰일이 날 뻔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다치신 곳은…….”
“나는 괜찮네.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롭지.”

“……그렇다면, 오늘인가요?”

“오늘이지.”

“하아, 드디어 그 날이 왔군요.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다정한 것 같은데, 대하


는 얼굴이 냉랭한 것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부인 쪽이 복도 끝으로 들어가고, 남자가 대공을 2층으로 안내했다. 다른
기사들은 저택을 호위하도록 둔 채, 자칸과 나만 2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나도 스윽 빠지려 했는데 대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2층의 한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는 자칸에게 문 앞을 지키라고
하고는 나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그가 나를 옆에 앉혔다.
아니 그리고 환장하게도…….
“일릭.”

그가 내 허벅지를 쓸며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다리 안쪽을 훅


쓸어 오는 예기치 못한 손길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가, 각하…?”

“내가 준 속옷은 잘 입고 있나.”

아니 씨발……. 말문이 막혀서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내 흉갑의 가슴 쪽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그게 딱 그 안쪽으로 내 유두가 있을 위치였다.
비비적비비적, 원을 그리는 손가락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났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금도?”
그렇게 갑옷 위를 희롱(?)하는 대공이 지나치게 나와 거리가 가까웠다.
갑옷이 아니었다면 몸이 닿아 천 너머로 체온이 느껴질 거리였다.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서 한 손은 내 허벅지를 매만지고 다른 손으로는 갑옷 위를
비비적대며 말하는 탓에 그의 숨결이 후욱 귓가까지 불어 왔다.
너무 깜짝 놀라서 어깨가 움츠러들며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지, 지금은……. 안 입었…습…….”
“하아? 어째서. 늘 입으라고 준 것인데.”
“그게……. 전시라서, 제가 움직이기에,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당황해서 말을 다 더듬고 얼굴은 빨개지고 난리가 났단


말인가.
대공이 너무 부적절한 질문을 해서 그렇다. 설마 갑자기 이런 걸 물을 줄은
몰라서.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대공이 지금 너무 가깝게 몸을 막 들이대고
있어서 그렇다. 게다가 그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유두를 덧그리듯이 흉갑
위를 비비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유두를 문지를 때면 짜릿하게 번져 오던
성감이 떠올라 아랫배가 다 묵직해졌다. 만져지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온통
찌릿찌릿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오싹하고 야릇한 성감이 목줄기를 따라
번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쌓였기 때문일까? 지난번의 미수 이후 또
접촉이 오랜만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반응이 예민하고 격렬해서
당황스러운 것은 내 쪽이었다.
“그대가 검 한 번 빼 든 적이 있던가, 오늘. 내가 준 것을 입지 않은 데 대한

대답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아니, 그게…….”

그 와중에 대공은 대체 왜 내 입술만 뚫어져라 보고 있단 말인가. 호박색


시선이 잡아먹을 듯이 내 입술을 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입술이 말라 와서 혀로 한번 핥았다가 그의 눈 안쪽이
일렁거려서 내가 한 짓을 후회했다. 얼른 혀를 삼키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대공이 히죽 웃은 것도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건가. 이런, 누이에게 전해 줘야겠는걸…….”

“아니……. 아닙……. 그러니까 그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분위기상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것 같은데… 곧 죽어도 내 입에서는
아니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씨발, 그 흉물스러운 게 마음에 들 리가
있겠냐! 입어서 편하지도 않고! 아래 속옷은 자꾸 뒤를 파고들고, 가슴
속옷은 천에 유두가 쓸려서 야릇하고 환장하겠던데!
내 안에서 내적 분노와 비명이 쏟아지고 있을 때.
갑자기 대공이 내 귓불을 깨물었다. 비명이 입에서 쏟아질 뻔했다. 후욱
전해 오는 숨결에 귓속까지 간지러워 고막을 긁어 버리고 싶었다. 와악, 소
리를 지르며 그를 밀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공이 속삭였다.
“이따가 벌을 줘야겠어.”

버… 벌이요? 씨발, 무슨 벌이요…?


그의 입에서 벌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내 얼굴은 분명 창백하게 질렸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벌이냐고 차마 묻지를 못했다. 내가 그것을 묻기 전에 대공의
입술이 내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 입술이 내게 닿기 전에, 노크 소리가 한 발 빨랐다.
나는 그 순간 용수철처럼 튕겨지며 벌떡 일어났다. 허벅지를 매만지고 있던
손도, 흉갑을 쓰다듬고 있던 손도 모두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각하. 손님들이 도착했습니다.”

와, 씨발. 심장이 놀라서 춤을 추었다. 벌이라니, 씨발. 내가 전에 당했던


요도에 막대기가 꽂히는 것보다 끔찍한 꼴을 당할까 봐 겁이 다 났다.
중간에 방해를 받아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설마, 씨발 대공새끼 지금 그 짓이 하고 싶어서 알즈에 온 건 아니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손님이 있어서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 온 거라 너무 다행이었다. 근데 내 몸은 왜 이렇게 근지럽고
얼굴에서 열이 안 내려가나 모르겠다.
대공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잠깐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들어오시라 해.”
그 말에 자칸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도착한 인원은 셋이었다. 기사가 두 명. 그리고 하얀 은빛의 흉갑에 흰 색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긴 망토를
입은 사내가 한 명이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대공이 만나고자 한
남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디찼다. 동시에
타오르는 분노가 그 안에 숨겨져 있었다. 대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멸 그
자체였다.
그 시선을 무덤덤하게 넘기며, 대공은 도리어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부드럽고도 나직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성하.”

성하.
대공의 입에서 성하라는 호칭이 나올 만한 인물.
그는 바로 교황 엔리온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교황은 더 젊어 보였다. 나이를 많이 본다 해도
마흔은 결코 안 되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대공에게서 그 누이를 좋아하다가 차이고 대공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잇살 많은 아저씨가 어린 여자애를 쫓아다니다가
차이고 괜한 화풀이를 하고 있나 하는 편견을 갖기도 했던지라 그를 직접
보고서는 조금 놀라고야 말았다. 아무리 일찌감치 교단을 이끌 기대주로
점찍어졌다지만 교황이 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지위가 보통 지위가 아니라서인지 그의 전신에서는 어떤
기품이 느껴졌다. 오늘의 전투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쪽에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한 채 충격적인 패배를 한 남자로는 보이질
않았다.
특히나 대공을 향한 그의 투지가 강렬해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대공의 인사에도 대꾸 한마디 없이 안으로 들어와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앉은 남자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대공 역시 무어라 더 말을
건네지 않아서 살얼음판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잔재주를 부리셨더군요.”

마침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엔리온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음산하다 싶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대공과 한마디 섞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투였다.
“고작 그 정도를 잔재주라 하시다니, 과찬이십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목


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분명 존대를 하고 있는데 반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교황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제 품을 뒤져
손수건 하나를 툭 내던졌다. 떨어지며 벌어진 손수건에서 검푸른
머리카락이 한 움큼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교황의
머리카락이었다.
“언제든 내 목을 취할 수 있다며 나를 도발하는 걸 잔재주가 아닌 무어라

할까요.”
“처음 청하였을 때 응하셨더라면 그 잔재주를 굳이 볼 일도 없었을 것을요.”

“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사내가 모두 정중한 척 잡아떼면서도 서로를 향한 적의를 감추지를


않는다. 교황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에 대공 역시 평온한, 그러나 싸늘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세리포브에 정보를 흘려 세리포브의 멍청이로 하여금 당신인 척 나에게

만나러 가겠노라 거짓 회신을 전달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성하를 뵐


부푼 마음으로 오다가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지 뭡니까.”
“제가 아버지의 자식들을 함정에 빠뜨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세리포브의

국왕께서 잠시 유혹에 넘어가 설령 그런 일을 하셨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세리포브의 도시 네 개를 파괴하고 백성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그 어떤
명분도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는 것이 미덕이자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바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도 교황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장황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전후 상황을 파악한 나는 교황의 아닌 체하는 대꾸에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아버지의 자식들이라 운운하며 용서를 입에 올리는 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대공이 알즈로 가야 한다고 했던 것도 교황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는
거다. 라베인 백작이 가져온 소식은 교황이 회담에 응한다는 서신이었을
터. 그러나 그것은 세리포브가 보낸 가짜 서신이었고, 깜빡 속은 대공이
준비 없이 길을 나섰다가 습격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 밤, 대공과 함께 내가
죽을 뻔한 것은 다 저 능구렁이 같은 교황 탓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은 무고하다는 듯이, 도리어 세리포브를 용서하라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말한다.
누구도 함정에 빠뜨린 적 없다고 주장하는 것치고 그 눈빛이
금방이라도 대공의 목을 조를 듯이 흉흉했지만 말이다.
“성하께선 큰 실수를 한 겁니다.”

“하. 할 말이 있다고 하도 성화라 시간을 내었더니……. 대공과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 간과하였군요. 시간 낭비를 했습니다.”


교황은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의 힘이 어디까지 통할 거라 생각합니까. 베르바니를 포기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신의 뜻을 이어받은 팔만의 군대가-”
“그 팔만 명을 전부 신의 곁으로 보내고 싶은 게 아니면 입 닥치고 자리에

앉아.”
존대를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 그러나 상대를 찍어 누르는 내용에
교황은 잠시 말을 잃었다. 순간 이 방의 모두를 아연하게 만들 정도의
폭언이었다.
그리고 이내 방 안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더욱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완전히 미쳤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무리 대공이 공국의 군주라지만, 교황을 상대로


말을 끊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게다가 그 내용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지
않은가. 그 협박성이 농후한 반말에 교황의 뒤에 서 있던 덩치 좋은 기사가
검을 쥐었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씨발, 이런 상황이면 내가 아니라 자칸이 이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왜 대공을 호위하는 입장이 되었는지 나는 너무도
의문이었다. 호위기사는 왜 바깥에 두고 내가 그를 지켜야 하느냔 말이다.
물론 내가 저 기사를 맡는다면 대공이 교황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내가 아무리 신을 저버렸다고는 하지만 신을 업은 교황에 직접 대적하는
것은 뒤가 구린 일이었다. 천국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사후세계가
있다면 적어도 지옥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대공을 위해서는 더더욱
특히나 말이다.
“정녕 파문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교황은 결국 종교적 파문을 입에 올렸다. 과거 교황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 파문이란 대륙의 공적으로 선포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상
황이 다르지 않던가. 이제와 파문? 성명문을 발표한 지금이
미로스를 대륙의 공적으로 선포한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파문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다면,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이 몸을

파문부터 했어야지. 협박은 먹힐 상대한테나 하는 겁니다.”


대공은 그런 협박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상대고 말이다.
“…….”

교황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대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에도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대공이 위축될 이유는 물론 전혀
없었다.
아무리 교황이 위풍당당한 체하고 있다고는 하나 오늘 있었던 첫 교전의
전황이 한 쪽에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군사의 수에서 네 배, 연합군
이 더 모인다면 그 이상의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오늘의
전투에서 대공은 미로스가 녹록치 않은 상대임을 증명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파문이라는 카드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단이 가진
권세를 어찌 과거의 영광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파문이라고 해 봐야
연합군과 함께 한 성명서만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총력전이 아니고서야 교황이
대공에게 쓸 수 있는 카드가 있을지가 의문이다.
교황에게는 안타깝게도, 이마저도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공의 접선을 기회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교황이 오늘은 실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대공은 오시안의 기병대를 격파하고 세리포브의 도시 네 개를 불태우고도
모자라 교황이 이끌고 온 연합군의 선봉을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게다가
교황의 머리카락을 잘라 도로 그에게 보내 언제든지 자신이 그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증명도 했다.
다만 나로서는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교황의 뒤에는 팔만
혹은 그 이상의 대군이 있었다. 이 숫자가 미로스를 상대로 창끝을
세운다면.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 시르반 요새를 포위해 대공의 발을 묶고
미로스의 본토로 들어간다면, 버틸 수 없는 것은 미로스가 될 것이었다.
대공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려고
교황과 자리를 만든 것이리라. 그럼에도 계속해서 교황을 자극하는 대공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조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자칸의 목소리가 울렸다.
“각하. 레이사 님이 왔습니다.”

“들여보내.”

누군가가 또 온다는 소리에 교황의 눈썹이 지그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누군가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뒤에서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사람들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와…….
“레이사.”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은빛의 단발머리를 가진.


“……각하.”

대공과 똑 닮은, 그러나 동글동글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레이사. 나는 그것이 대공이 제 아들의 이름이라 얘기해 주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하!”

그리고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교황 역시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니, 그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보면 모르는 게 바보
머저리 등신이었다.
교황 엔리온의 눈에서는 이제 분노가 숨겨지지도 않았다. 그는 잡아먹을
듯이 대공을 노려보았다. 분노로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금 그 아이가 왜 나오지? 대체 어디까지 나를 모욕하고 기만할

셈인가…!”
교황이 내보이는 여과 없는 분노에 아이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이는
어디 숨고 싶다는 듯이 흠칫댔으나 대공은 그 아이를 도리어 제 앞에
세웠다.
아이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겁을 먹은 듯한 혹은 충격을 받은 듯한
호박색 눈동자가… 나는 왜 이렇게 보고 있기가 힘이 들고 기분이 이상한지
모를 일이다. 뭔가 대공의 어릴 적 모습을 연상케 하는 그의 아이를 두
눈으로 보는 건 이 와중에 나에게 기묘한 충격을 선사했다. 아니 솔직히
어떤 상황보다 더 당혹스럽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저 미치광
이 대공도 저렇게 보송보송하고 귀엽고 사랑스럽던 시절이
있었을 것 아닌가!
그 괴리감에 어째서인지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이를 똑바로
보기가 어려우면서도 자꾸 힐끔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 대공의 어린 시절 어쩌구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자꾸
만 주의가 그쪽으로 흘러가서 도무지 이 상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뭔가 패닉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이 살기를 띄우고 있는 나나 다른
기사가 아닌, 제 아버지인 대공과 교황을 불안한 눈길로 번갈아 본다.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가 겁을 먹은 모습이 몹시도 어여쁘고
애처로워 보이면서도 그 외양 때문에 대공이 자꾸 떠올라서 나는 막 기분이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그렇게 남모를 패닉에 빠져 있는 사이, 대공은 노골적으로 교황을
도발했다.
“질투하는 사내란, 추한 겁니다. 성하.”

“그대가 감히!”

“날 많이 닮았지요? 당연하겠지요. 이스와 내가 쌍둥이니까.”


이제는 악에 받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황을 둔 채 대공은
제멋대로 지껄였다. 나는 혹시라도 교황이 미쳐서 칼부림이라도 할까 봐
긴장을 곤두세웠다.
레이사. 그저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지만 교황이 사랑한 여자의 아이이자
티마예브의 왕족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진 아이였다.
그 아이가 대공의 아이라는 이유로 내가 개인적인 패닉을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교황 엔리온 역시 엄청난 심적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부들부들 떨 정도로 그 분노와 고통을 숨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래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교황을 상대로 대공이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카미드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성하는

모를 겁니다.”
“……무슨.”

“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이만큼 자랄 때까지 이스와 내가 얼마나 애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썼는지도,


물론 모르겠지요.”
대공은 싸늘한 얼굴로 웃었다. 그 미소는 비웃음 그 자체였다. 교황을
눈앞에 두고 그는 한껏 비아냥대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
꾸며 대던 처음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 태도에 교황 역시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공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인 태도로 교황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교황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는 굳은 얼굴로 대공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 대공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은빛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때 아이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울듯이 울먹울먹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대공이 한 말이 아이에게는 제법 충격적일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교황을 보고 놀란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 조금쯤은 나에게 감사를 하는 게 어떨까, 엔리온.”

대공은 제 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채를 뽑아 버리기라도 할 듯이, 잡아당겨 버렸다.
아이가 충분히 아파할 수준이었다.
아니, 그는 정말로 아이의 머리채를 통째로 뽑아 던져 버렸다. 뿌리째 뽑힌
은빛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내 바닥에 툭, 떨어져 버렸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0.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그건 아이를 지켜보고 있던 교황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적의와 분노만이
가득 차 있던 그의 회색의 눈동자에서 일순간 분노가 증발하며 동공이
찢어질 듯이 확장되었다.
대공이 그러쥐고 당긴 아이의 머리채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그 은빛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그러나 고통에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채가
통째로 뜯겨져 나갔음에도 아이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피가
흐른다거나, 붉은 두피가 드러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공의 것과 꼭 닮은 머리카락이 떨어져 나간 자리 아래에는 그 대신
짓눌려 있던 짧은 검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검푸른 빛깔의 머리카락.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것은, 아이의 눈앞에 선, 이
쪽과 대적하고 선 젊은 교황의 것과 똑같은 색깔의 머리카락이었다.
삽시간에 내려앉은 충격으로,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적막이
내리깔렸다. 찰나의 침묵이 영겁처럼 이어졌다.
침묵을 깬 것은 대공이었다.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그저 무덤덤했다.
“이스테샤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배신한 적이 없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보는 교황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아이의 푸른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를 모르지 않으리라.
교황이 내보이던 적의와 대공이 내뱉은 배신이라는 단어. 그리고 아이의
푸른 머리카락.
“오히려 지키려고 했지.”

나조차도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대공과 그 쌍둥이 누이의 아이라고 여겨졌던, 베일에 싸인 레이사는 교황과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마 엔리온의 아이를 갖고도 그것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대공의 아이를 가졌다며 그를 떠나갔던 모양이다. 사실을
모르는 엔리온은 대공을 증오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이
스테샤가 사랑한 것은 엔리온이었다.
“그러기 위해 당신을 속여야 했지만, 덕분에 당신과 아이를 지켜 내지

않았나.”
“……누구로부터.”

교황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 역시도……. 어쩌면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그래서 그렇게 모진
말을 하고……. 나를 떠나야 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를… 대공, 당신
으로부터 지키려고……. 그런데 네가 아니라면…….”
교황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말을 더듬더듬 이어나갔다. 그
시선은 끊임없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이 역시 떨리는 눈으로 교황 엔리온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이가
울먹였던 이유는 낯선 사람들을 보고 겁에 질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황의
머리카락을 본 순간, 아이는 그가 자신의 친부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이스를 아끼고 사랑한다.”

누구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냐는 엔리온의 질문에 대공은 뜬금없는


소리를 내놓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성애의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어. 형제자매간에 그런 건

이상하잖아.”
대공의 입에서 나온 상식적인 대답에 교황의 눈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갖고 있던 오해가 지나치게 깊고도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아 버려서 또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물론 오해를 하고 있다가 밝혀진 사실에 놀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대공이 틀림없이 근친 관계로 누이를 사랑하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너희… 티마예브는…….”

“고결한 피를 유지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 대고 있지. 다들 미쳐

버렸어.”
제 집안의 얘기를 하는 대공은 몹시도 냉소적이었다.
“엔리온, 당신 눈에 카미드는 제정신으로 보이던가.”

그 질문에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을 향
했던 증오는 본디 티마예브의 국왕 카미드에게 향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모든 게 카미드의 짓이었음을 모르고 그와 손을
잡고 여기까지 와 버렸다.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던 사람이 사실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지키려 했던 사람임을 알게 된 교황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이제 대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과는 사뭇 달랐다. 다를 수밖엔 없는
상황이었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여태까지
숨겼다는 것에 대한 원망마저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엔 없는 감정이었다. 대공을 미칠 듯이 증오하면서
교황 엔리온 역시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을 테니까.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으로 교황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사실 엔리온 당신이 더 이상 이스테샤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다.”
제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고 고통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교황을 보다가
대공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교황은 제 감정을 의심했다는 말조차 고통스럽다는 듯이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이 자리조차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다. 내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정말 가슴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교단의 미래랍시고 모든 후원을 받으며
자라온 존재가 제가 짊어진 모든 것을 내버리고 선택할 정도로 사랑한다고.
그것이 대단한 사랑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

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바람 소리를 낸


우리의 대공이 그렇게 참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놓고 혀를 츳츳 찼다.
“그러니까. 그때 이스가 가진 아이가 자기 자식인 걸 알았다면, 교황 자리

따위 안중에도 없이 티마예브에 한 교구를 얻어 주교 정도로 만족하며


눌러앉으려 했겠지. 잘 풀려 봐야 추기경까지 올라갔을까? 고작 그 정도로
카미드에게서 이스를 지킬 수 있었을 것 같나. 프리스카 백작 꼴이 났을
거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촌
철살인에 교황은 찡그린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러나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타박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렇게 물러터진 성격임을 알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미드를 이길 힘도 없었으면서, 어떻게든 잘될 거라며 마냥 해맑기나 했던


얼간이였기 때문에.”
아니… 나는 그 순간 아이의 귀를 막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를 키워
준 아버지… 아니 사실은 삼촌인 자가 제 친부를 세 치 혀로 가차 없이
난도질하는 게 아이의 정서함양에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가 듣는 앞에서 애 아빠한테 얼간이라는 소리를 하는 건 좀 안 좋지 않나.
그러나 교황은 느끼는 바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과거 엔리온의 성격을
모르지만, 대공이 병정놀이를 운운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티마예브에
머물 때 이미 나잇살깨나 먹었을 때였나 본데, 병정놀이를 하자고 대공을
졸랐을 정도면 보통 해맑고 철없는 청년이 아니었을 것 같기는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교황은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처참하다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아이를 바라볼 때면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그 눈빛이
흔들렸다. 저러다가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아이 역시 그 시선에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 보내다가 대공을 돌아보았다.
대공을 닮은 얼굴에 호박색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각하……. 그럼 이분이… 제… 아버…….”

“네 아버지는 나란다.”

아이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대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교황과


그의 수행 기사-그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가 동시에 파드득 어깨를
떨며 동요를 내비쳤다.
물론 대공은 하등 신경 쓰지 않고 아이에게 말했다.
“교황은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자식을 가질 수도 없다. 추기경이나

주교 정도라면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겠지만. 아, 그것도 지금은 조금


힘들어졌지. 교황 성하께서 교리를 엄격히 지킬 것을 명하면서 문란한
생활을 해 사생아를 낳은 성직자를 가차 없이 파문하고 있거든.”
크게 찔리는 바가 있었는지 다시 교황이 크게 움찔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물론 이번
에도 대공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이전 교황들의 시대에 교황의 사생아가 없었던 건 아니니 그 예를

찾아본다면… 그래, 한 교구의 주교 정도는 될 수도 있겠지. 그건 정말 잘


풀렸을 경우란다.”
한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가 대공의 말을 다 이해를 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제법 똘망똘망해 보이기는 했다. 대공의 말을
경청하는 아이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대공은 대강 쓰다듬었다. 솔직히 그리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내 자식이라 해도 사생아라

해야 할 거다. 하지만 티마예브는 근친 간에 생긴 사생아를 정식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으니, 너는 티마예브의 왕자도 될 수가 있다.”
“…왕자가 되면 좋은가요?”

“교황의 사생아가 되는 것보다는 백 배쯤 좋지.”

그 말에 교황 본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벙긋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자신을 변호하지는 못했다. 대공의
말에 하나 틀린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공은 거기에 쐐기까지 박아
버렸다.
“너는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내 유일한 자식일 테니, 네가 내 다음의 왕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대공의 확신에 교황조차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위에 오른다는
말의 무게를 알기는 할까 싶은 나이의 레이사는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결혼을 하시면 아이가 생길 테니, 어찌 제가…….”

“내 연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란다.”

아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공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조금… 뭐랄까 내가 듣기에는 어딘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연인이라니. 대공에게 어디 연인이 있어.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연인이라니.
레이사와 교황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이야기일까. 아이 역시 대공의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대공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길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밤이 깊었으니 이제 그만 자러 가거라.”


“아…….”

“그래야 착한 아이지, 레이사?”


네 각하.”
“… ,

아이는 전혀 떼를 쓰지도 않고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잠깐만!”

그에 다급해진 것은 교황이었다.
“잠깐만.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까지도 한마디 못 걸었으면서 무슨 조금만 타령이신지. 대화는 이

다음에 이스와 셋이 만났을 때 해.”


대공은 피도 눈물도 없고 가차도 없었다. 교황이 애절하게 부탁했음에도
그는 차갑게 퇴짜를 놓으며 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는 제 아버지, 그
러니까 친부를 한 번 더 힐끔 본 뒤 그와 대공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교황은 그 아이가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

아이가 나가고 난 뒤 교황이 조금은 진정된 음성으로 대공에게 물었다.


“어째서 카미드를 진작 죽이지 않았지? 그렇게 할 수 있었잖아.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었으면서.”
“카미드는 멍청하기는 하지만 제 살 궁리는 하는 놈이다. 놈을 죽인다면

나와 이스가 의심받는 건 당연할 터. 의심을 받더라도 나를 향한 노골적인


적의가 되지는 않을 정도로 상황을 꾸며 놓기는 해야 하지 않겠나.”
“전부 쓸어 버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왕이 되러 가는 길에 내가 다스릴 백성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우기라도 하라는 건가.”


“……그건.”

“왕이 갑작스럽게 의문의 사고를 당한다면, 왕비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왕비의 친정이 나서면 티마예브 북부가 들고 일어날 테고, 티마


예브에 내란이 일어난다면 세리포브나 오시안 같은 것들만 신이
나겠지. 굳이 상황을 그렇게 난장판으로 만들 필요는 없어.”
…그렇게 된다 해도 대공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정리했을 거란 생각이 드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건, 이번


전쟁에서의 몇 번의 전투로 그에 대한 어떤 믿음이 생겨 버린
탓이리라. 대공이 효율성을 따지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와 누이가 기다린 세월이 10년이었다. 그 시간을
참으며 기다리고 뒷공작만 하느니, 차라리 전부 격파하는 걸 선택했을 것
같은데…?
교황 역시 그것이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내가 뒤늦게 붙인 이유고, 이스가 형제를 죽이는 건 패륜이라는, 저질
러서는 안 되는 죄라고 하더군.”
“…… 이스테샤가?”
“그래. 꽤나 예전에 한 소리였지만……. 이해가 안 되면 직접 물어보도록 해.

나도 그녀와 자주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지금.”

“카미드의 곁에 있다. 동생을 죽이러 친정(親征)을 오고 싶어하는 걸 말리고

티마예브에 묶어 놓기 위해 고생을 좀 했지. 게다가 드디어 카미드에게


손을 쓰기로 했으니……. 그녀답지 않은 결정에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다.”
모든 상황의 원흉인 카미드의 곁에 이스테샤가 남아 있다는 얘기에 교황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 같아도 당장에 데려오고 싶을 것이다.
대공은 그 얼굴을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끝이 난다.”

“…….”

내가 티마예브의 국왕이 되고 나면 레이사의 신분과 안전이 모두 보장이


될 테니… 성도(聖都)에 가서 배움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린애가


혼자 갈 수는 없으니 보호자로서 티마예브 왕실의 가장 높은 여인이 가는
게 마땅할 테고.”
그것은 교황에게는 엄청나게 희망찬 이야기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밝아졌다. 동시에 어떤 굳은 결의가 그의 얼굴에 가득 찼다.
“전쟁은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물론. 물론이다. 성명서는 당장에 철회할 것이고, 연합군은 철수하겠어.”

“세리포브 쪽에서 난리를 칠 텐데.”

“상관없다. 명분은 이쪽에서 만들기 나름이니까.”

교황의 태도는 마치 세리포브를 멸망시켜서라도 이 전쟁을 끝내겠다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듯이 결연
했다. 어떻게든 미로스를 멸망시키고 대공을 척살하고 싶다는
의지로 불타며 들어왔던 것과는 180도 다른 태도였다. 물론 다를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었음에도 대공은 웃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지친 얼굴로 한숨을 삼킬 뿐이었다.
“좋아. 병환 핑계라도 대서 전투를 일단 좀 미뤄 놓으라고.”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다. 내가 책임지고 해산시킬 테니 걱정은

하지도 마.”
교황은 호언장담을 했다. 대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공의 태도가 꽤나
건성이라는 것은 아마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헌데 오늘 이 회담에 내가 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우리

쪽에서 군사를 나누어 미로스 본토로 진격을 했다면 곤란해졌을 텐데.”


“궁금하면 그렇게 해 보시든지.”
그 대꾸에조차 성의라고는 1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교황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서로의 관계는 늘 이러했던 것처럼 더 따지거나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문득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1.

“그럼 성하.”
“……성하? 갑자기 무슨.”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머무시는 곳이 적진이라 그곳까지 모시지 못하고

이곳에서 인사드림을 양해해 주십시오.”


“…….”

공손하고 우아하게 포장되어 있었으나, 이제 그만 꺼지라는 소리였다.


대놓고 나가라 하는 축객령은 기분이 나쁘긴 한 모양이다. 교황은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순식간에 아차 하며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래, 간다, 가. 대공. 오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결국 교황 엔리온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 쪽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배웅하려 대공 역시 움직였기에 나도 그를 따랐다.
그런데 교황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대공을 돌아보았다.
“…연인이 정말 있기는 한 거야? 미로스의 대공에 나아가 티마예브의 국왕

되실 분인데, 결혼은 하긴 해야 할 거 아니야.”


“레이사가 있는데 굳이 결혼의 의무를 이행할 이유가 없지. 연인은 있다.

결혼은 모르겠는데……. 하지만 가능하다면 교황 성하의 축복을 받는 건


의미가 있겠군.”
“허어? 그런 거라면 그냥 결혼을 하지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서? 아니면 신분이 낮아?”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교황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는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신분이 낮은 건 맞지만.”

굳어버린 것은 엔리온만이 아니었다. 그의 기사 역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하관이 툭 떨어지도록 입을 쩍 벌린 채 망부석이 되었다.
“누가 봐도 여자는 아니라서.”

…나 역시도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대공의 길쭉하게 빠진 모양 좋은 손가락이 어째서 내 한쪽 엉덩이를 남들


다 보란 듯이 꽈악 움켜쥐고 있는지.
그의 몸이 어째서 필요 이상의 친밀감을 드러내며 내게 찰싹 달라붙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는지.

“그렇지, 내 사랑?”

어째서 그 목소리가 남들한테도 다 들릴 크기인데도 내 귓가에 바짝 붙어서


들려오는지.
또 왜 쪽, 하고 간지러운 감촉이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지도.
석상처럼 굳어 버린 나는 머릿속까지 돌덩이가 된 것처럼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교황과 그 기사가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대공이 나를 뭐라고
불렀는지, 나를 어떻게 했는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숨 쉬는 것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패닉에 빠진 내 엉덩이를 보란 듯이 조물조물 만지며 대공이
말했다.
“레이사의 가발, 다음에는 이스 걸로 만들라고 해.”

이 세상에 은빛의 머리카락이라면 대공 남매의 것밖에는 없을 테니 둘 중


하나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줘야 했다. 레이사의 가발을 만들어
주기 위해 대공이 머리카락을 잘라 지금 견갑골 언저리까지만 오는 길이인
듯 했다. 아니 뭐… 그거야 그렇다 치겠는데.
갑자기 이 시점에 왜 가발 이야기를……. 교황도 그의 기사도 나도 모두 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일릭이 내 머리카락을 좋아하거든. 그러니 난 앞으로 계속

길러야겠습니다, 성하.”
“…….”

“…….”

“…….”

이 자리의 그 누구 하나 대공에게 대꾸를 하는 이가 없었다. 교황조차


대꾸를 하지 못하는데, 다른 이라고 입이 있어야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나 충격과 공포에 빠진 나는. 나는 그냥 입이 벌어지지가 않았다. 턱에
못이라도 박힌 듯이 말이다. 아니 내가 네 머리카락 좋다는 얘기를 언제
했는데, 그 와중에 그것까지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참 만에 교황 엔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감춰지지를


않았다. 이곳에 들어와서 대공의 아들인 줄 알았던 레이사가 자기
아들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보다 더 큰 동요를 내보이고 있었다. 아무렇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않은 척
꾸며내고 있었지만 눈빛과 목소리는 물론 말을 만들어 내는 입가와
뺨까지 푸들푸들 떨림을 멈추지를 못했다.
“나는 대공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아니, 뭐, 이 새끼야?

“이러니 이스테샤가 눈에 안 찼구나. 이해했습니다, 대공. 이해했어요. 내가

큰 오해를 해서 미안했습니다.”
아니, 야. 그 발언은 지금 뭔데. 저기요. 아까도 사과 안 했으면서 왜 지금은
사과하냐??
“예쁜 사랑 응원하겠습니다.”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성하.”

뭘, 뭘 응원해? 뭘? 어??
나는 이토록 기가 막힌데 대공은 방긋 웃었다. 전쟁을 끝낸다는 얘기를 할
때도 피로감만을 드러내던 사내가, 새파랗게 질린 교황이 되는대로
주워삼킨 말 한마디에 아주 방긋 웃어버렸다. 빛이 쏟아질 듯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교황은 눈이 부시다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고맙… 미안합……. 잘 지내세요.”

그 미소를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멀어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교황은


누가 봐도 도망치는 자의 모양새로 손수 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나섰다.
걷고 있었지만 뛰는 듯이 빨랐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을 믿는 자들이 마귀를 봐도 저렇게 도망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우린 이만 쉴까?”

“……아니, 각하…!”

돌아본 얼굴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워서, 그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다. 정말 너무 기가 막혀서!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은 탓에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려서 뭐 부터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생각나는 대로 울컥한 마음을 드러냈다.
“제가 언제, 각하의 머리카락을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처음 나온 말은 내가 내뱉어 놓고도 조금 뜬금없었다. 버럭 내질러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놓고는 내


가 다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대공은 너무나도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대가 눈을 못 떼고 쳐다보던데, 늘.”

“제가 언제…….”

…아니, 씨발, 신기하니까 내가 좀 쳐다보기는 했다, 그래. 그럼 신기하니까

쳐다볼 수도 있지 그게 좋아하는 거냐?! 아니 내가 좀 쳐다본 거는 또 언제


눈치를 채고 있었대??
“그리고 내 머리카락이 잘생겼다며.”

내가 예전에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소리가 아니지 않았나!
분통이 터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해
버릇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애당초 말로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감정을
격렬하고 풍부하게 느껴본 적도 과거에는 크게 없었다- 제대로 말이
나가지도 않았다.
“누가 내 머리에 손을 댈 수 있겠나마는.”

그런데 그 순간 대공이 내 손을 잡았다. 덥썩 잡아서 흠칫 놀랐다. 그리고는


더 놀라서 꼿꼿하게 굳어져 버렸다.
“만져 봐도 좋다. 허락해 주지.”

대공이 내 손에 제 머리카락을 쥐여 준 것이다……. 나는 어정쩡하게


대공의 목 언저리에 손을 댄 채였다. 양쪽 손이 머리카락으로 덮인 목에
놓였고, 그 손을 대공의 손이 덮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대공의 목
주변으로 손을 감싸게 된 모양새였다.
……씨발, 그냥 이대로 콱 모가지를 졸라 버리고 싶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에 잠시 또 넋을 잃을 뻔한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아 어차피 건틀렛 때문에 안 느껴지나.”
“ ,

대공은 그제야 내가 장갑과 건틀렛을 끼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내 손을 붙잡은 채로 제 목에서 떼어 냈다. 아, 그냥 아주
뒈질 때까지 목을 졸라 버렸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뒤늦게 헤일처럼
몰려들었다.
“밤새 만지게 해 줄 테니 조금만 참아.”

…와, 진짜 오랜만에 나온, 하지만 사람 속을 아주 쟁기질하듯이 뒤집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엎어 버리


는 그의 말버릇이었다. 아주 나를 대공 머리 만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니, 근데 지금 뭐? 밤새 뭐? 그러고 보니 아깐 뭐라고 했던가. 이제 쉬자고
하지 않았나.
“귀환, 안 합니까?”

당혹감에 내 질문이 툭 튀어나갔다. 그러나 대공은 내 무례한 어투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주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즈에서 할 게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알즈에서 뭘 해.

교황 만나러 온 거잖아. 전에도 교황이 만나 준다는 줄 알고 여기에 오다가


습격당했던 거고. 오늘은 당연히 교황 만나서 그 아들내미가 누구 아들인지
밝혀서 전쟁을 끝내려고…….
“그대가 엉망이 되어 걷지도 못할 때까지 안아 주겠노라 했던 걸 잊었나?”

나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걸까.”

대공의 입술 사이에서 뱀 같은 혀가 스르륵 미끄러져 나와 제 붉은 입술을


훑었다. 그 입꼬리에는 몹시도… 몹시도 야릇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나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는 호박색의 눈동자에 광기를 닮은 정염이
넘실거렸다.
“오늘, 그대의 모든 구멍을 다 범해 줄 거다.”

…아니, 그 붉고도 노란 것은 광기 그 자체였다. 교황 엔리온을 상대할 때의

날카로운 이성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는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미치광이일 뿐이었다.
대공이 나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려 하는 그였다. 평소라면
그것이 징그럽다 해도 참아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나는 대공의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아직
갑옷을 벗지 않았기에 건틀렛 아래 그의 판금 갑옷이 금속음을 내며
붙잡혔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고개를 돌려 그를 피해 버렸다.
“…… 할 말이 있나.”
대공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순간, 내 용기는 맥없이 푸시식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너무 많았
다. 물론 언제는 하고 싶었겠냐마는.
정말로 따지고 싶었던 건 내가 언제 네 머리카락을 좋다고 했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을 뿐, 아까부터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건 따로 있었다.
“굳이 교황에게 알릴 필요는 없던 것 아닙니까?”

전황이야 사실 어떻게 돌아가든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한테 밝히지 않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분명 그랬지.”

그때도 연인 운운하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었다. 그런데 뭐? 이번에는


뭐? 내… 내 뭐? 아니 그 징그러운 호칭은 차치하고, 교황의 앞에서 내
엉덩이를 움켜쥐어 우리의 관계를 내보였다. 교황뿐만 아니라 그 기사 역시
다 보았다.
그러나 대공은 태평하기만 했다.
“엔리온은 레이사의 장래 때문에 아무 얘기도 못 할 텐데 뭐가 걱정이지.”
“그래도 제게… 제게 약조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도 엔리온이 나와 이스의 사이를 의심하며 가시를

세우는 거, 그대도 보지 않았나. 레이사가 내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라는


얘기도 전혀 안 믿고 있었다고.”
아니, 씨발, 교황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다 보는 와중에 남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희롱했단 말인가.
나와 대공을 바라보던 교황의 황망한 얼굴이 잊어지질 않았다. 그의 기사
역시 두 눈을 뜨고 있지만 헛것을 본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씨발
내가 대체 왜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데!
불현듯 어떤 벼락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설마…….”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그간의 세월이 지나갔다.


“설마… 그걸 위해서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입니까.”

교황에게 자신과 이스테샤가 아무 관계가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 또


자신에게 남자 연인이 있어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라, 후계자로서의
레이사의 입지가 단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오늘 이
날을 위해 처음부터 나를 그런 용도로 골랐고 성적인 관계로 ,

끌어갔으며, 연인 운운하며 전쟁터에서도 곁에 데리고 다니다가 용병


나부랭이인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왕가의 추악한 비밀을 알려 주고, 결국에
는 이곳까지 데려온 거란 말인가. 대공은 나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대관절 나를 언제 처음
보았는데??
“하하, 일릭.”

대공이 웃었다. 몹시도 의미심장한 그 미소에 나는 내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대공은 처음부터 이럴 용도로 나를 곁에 둔 것이다. 나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제 광기 어린 성욕도 채우…….
“그럴 리가 있나.”

“…….”

“그대를 이곳까지 데려온 건, 아무런 방해 없이 그대를 안고 싶어서일


뿐이야.”
대공은 가벼운 웃음으로 내 추측을 부인했다.
“날 의심하다니. 섭섭한 걸, 내 사랑.”
…… 이런 씨발…….
대공의 입에서 또 다시 그 단어가 나온 순간, 온몸을 타고 소름이 쭉 끼쳤다.
아니, 이 징그러운 기분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끔찍하다. 진짜 존나 끔찍하다. 내 응응이라는 표현은 연인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어찌나 끔찍한지 피부가 다 벗겨지도록 벅벅 긁어
버리고 싶었다. 소름이 끼쳐 죽을 것 같았다.
“그, 단어, 좀…….”

너무 싫어서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원래도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아마도 사납게 굳어졌을 것이다.
“엔리온 따위가 목적이었을 리가. 내 목적은 오직 그대라는데도.”

다가오는 대공에 나는 정말 뭐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숫제 당황을


해 버렸다. 그 단어, 사 뭐라고 하는 그 단어가 너무 끔찍하게 싫은데
다가오는 대공의 야한 얼굴과 눈빛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친놈. 미친놈이었다. 이것도 나를 괴롭히기 위한 한 방법인가? 씨발, 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괴롭히는
게 뭐 그리 재미있다고.
그의 얼굴이 가까이 오자 얼굴로 벌겋게 열이 올랐다. 분이 안 풀려서
그렇다. 또 그가 내뱉은 사 뭐라는 단어가 너무 끔찍스럽고 당황스러워서.
그래서.
“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다시금 대공의 어깨를 붙잡아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조금


밀어 버리기까지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정색했다. 아니, 정색했지만
당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시… 그래도 전시가 아닙니까. 일단 성으로 돌아가셔야-”

“엔리온이 하는 얘기를 못 들었나. 전쟁을 멈춘다고 하잖아.”

“만에 하나라도 교황의 발언이 통하지 않는다면요. 혹은 그가 각하의

뒤통수를 치려 한다든가.”
“엔리온이 막지 못해도 상관없지. 며칠 동안은 어떠한 전투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전쟁은 이대로 끝이 날 거야.”


대공은 확신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물론 전쟁의
대부분이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지만, 세리포브의 함정에 빠져 교황을
만난답시고 나왔다가 죽을 뻔했던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불신이 내 시선에 묻어났을까. 나를 보던 대공이 문득 코웃음을
쳤다.
“따라와.”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2.

대공이 내게 밀착시키려고 했던 몸을 드디어 떼어 냈다. 그리고 그는


출입구가 아닌 다른 벽면의 문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열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흠칫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응접실에 연결된 그 방은 침실이었다. 문 하나 열면 바로 붙어 있는… 침실.
알즈에 온 목적은 오직 나를 안는 데 있었다는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지척에 침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무슨 신방마냥 초가 은은히 빛을 뿜고
있었다. 씨발……. 온통 붉은 빛깔에 금빛으로 꾸며진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 침실을 코앞에 두고 나는 석상처럼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피할 수 없다. 정말로 대공 저 미친 자는… 정말로 이 짓을 하려고 알즈까지
나를 끌고 온 거다.
깨달음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러나 손수 갑옷을 하나하나 벗으며 나를
바라보는 대공의 시선에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갑옷을 벗으며, 대공이 말했다.
“카미드를 대신해서 티마예브의 삼만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은 티마예브 북부

이나힐의 길리어드다. 그는 왕비의 아버지인 에도스 공작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지. 그러니 카미드 역시 길리어드가 에도스의 뜻에 따라
나를 죽이고 싶어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공의 입가에 비딱한 비웃음이 걸렸다. 세상에 다시없을 오만함이 철철
넘치는 얼굴로 그가 읊조렸다.
“나는 길리어드에게 그 막내딸과 레이사의 성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대공은 오만할 자격이 있는 사내였다.


“카미드와 왕비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카미드가 그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보지 못할 것임은 퍽 공공연한 비밀이지. 티마예브의 후계자는


레이사뿐이다. 그렇다면 그 장인 될 길리어드가 에도스 공작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대공은… 교황을 믿고 있는 게 아니었다. 교황에게 전쟁을 막을 능력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는가 없
는가는 그에게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교황이 이 회담에 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겠냐 하는 질문에 궁금하면 해 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던진 소리가 아니었다. 설령 교황이 이 회담에 응하지 않고, 또는 회담
이후에도 계속 대공에게 적의를 불태워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다 해도
전쟁은 계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연합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티마예브의 군대가 교황의 뜻에 따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길리어드 그 자가 배신을 할 수도.”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대공은 이번에도 단정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알겠다. 길리어드가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는 이유조차 이미 만들어 둔 것이다, 대공은.
“에도스 공작이야 왕비의 아비이니 카미드를 버릴 수 없겠지. 하지만

길리어드 백작은 경우가 달라. 에도스가 레이사의 머리카락이라도


찾았다면 또 모르지만, 그 무능한 것들은 미로스만 들쑤실 줄 알지 이
베르바니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더군.”
그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누구라도 레이사처럼 중요한 존재를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겼을 거라 생각하지, 이런 분쟁 지역에 숨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생각했다 해도 상관없다. 호박색 눈동자에 검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는 운이 좋다면 찾을 수 있었겠지만, 티마예브 왕가의 쌍둥이 남매를
닮아 은빛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를 모두 가진 아이는 애당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해서도 아이를 찾기는 어려웠으련만, 대공은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아이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장소에 숨겨 두었다. 대공의
용의주도함은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연합군이 처음부터 총력전을 펼친 게 아니라 애매한 숫자의 선봉대를 보낸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 오시안 기병대가 전멸했다는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말이지. 길리어드가 내부에서 수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나를 지지한다는 것을 증명했던
거야.”
대공은 내 생각보다 한참이나 치밀한 남자였다. 모든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교
황을 끌어들여 전쟁을 멈춘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대공이 빠른 길을 찾았다면, 전부 다 밀어 버리고 차지한다는 쉽고 편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공에게는 이미 대륙을 집어삼킬 능력이 있었다.
내가 직접 목도했던, 수적인 열세를 단숨에 뒤집어엎는 어마어마한 화력이
그중 하나였다. 아마도 더한 힘을 갖고 있는 사내이리라.
그럼에도 그가 굳이 연합군의 장단을 맞춰 주고 위험을 감수하며 교황과의
비밀 회담을 제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누이인 이스테샤가 교황을
사랑하고 있어서. 형제인 카미드를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
자신이 전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그저 기가 막혔다.
그리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사내가 고작
섹스를 위해 나를 곁에 두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나이기 때문에 그에게
걸려든 게 아니었다. 대공은 그저 교황을 안심케 하기 위해 제 누이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이를 하나 골라 연인 노릇을 시키려 했던 것이었을
뿐인데, 운 나쁘게도 내가 걸려들었을 뿐이었던 거다.
“궁금증은 다 해결되었나?”

버석하게 말라붙었던 입안에 쓴맛마저 감돌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대공에게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몹시도 심란한데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머리가 복잡할
따름이었다.
“말이 길어지니 흥이 식었다.”

자신이 이 전쟁에 얼마나 많은 대비를 해두었는가 하는 것은 충분히


자랑스럽게 떠들 이야기인 것 같은데, 대공은 무척이나 무료하고 지겨운
얘기를 했다는 얼굴이었다. 교황과 대화를 했을 때처럼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다 벗고 이리 와.”

……씨발,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심란한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복잡한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지럽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괜한 일에 말려들어 신세를 조진 기분. 딱 그거였다. 대공에게 장기말이
하나 필요하던 와중에 걸려들어 이 꼴이 된 내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 그
게 아니라 해도. 설령 그가 정말 나를 원하는 거라 해도…….
“이리로…….”

대공이 갑옷 안에 입었던 셔츠 앞의 매듭을 당겨 느슨히 만들고는, 제 바지


앞을 풀어 헤쳤다. 그리고 수치도 모르는 양 보란 듯이 속옷을 젖혀 제
성기를 말아 쥐는 것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만 봐도 상당한 부피감이
느껴지는 성기를 세우려는 듯 느긋하게 문지르며,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기어 와.”

……아오, 저 씨발 새끼 진짜. 속으로 개 쌍욕을 삼키며 나는 모멸감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나를 주시하는 호박색의 눈동자 앞에 역시,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무릎과 손바닥으로 카펫 위를 짚어 그에게로 기어갔다.
내 머릿결보다도 부드러운 카펫이었기에 손바닥과 무릎이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네 발 짐승의 꼴로 타인의 앞에 벗은 몸을 보이는 것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몹시도 굴욕적이었다. 평정심을 위해 애를 쓰고 있음에도
얼굴로 벌겋게 열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씨발, 이 또한 지나가야 끝이 나리라. 눈을 질끈 감은 셈 치고 사지를 겨우
억지로 움직여 그의 앞으로 기어갔다. 대공이 다리를 벌려 나는 그가
원하는 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공의 성기가 내
코앞에 있었다.
나는 그의 다리 사이에서 그를 한번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여전히
피곤하다는 얼굴이었다. 당장 물지 않고 무엇 하냐는 듯, 그가 내 입가에
반쯤 발기한 성기 끝을 갖다 대었다.
나는 귀두를 입술로 조여 물고 사탕을 먹듯이 혀로 핥으며 입 안에 가득
들어오는 둥그런 것을 빨았다. 그것만으로도 대공의 호흡이 조금 흔들렸다.
머릿속에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은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약속을 했으면서 교황에게 그와 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렸다.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내 의사는 전혀
존중받지 못했다.
그것에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면서도, 대공의 좆이나 빨고 있는 이 상황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압도적인 권력의 차이 앞에 내가 무엇을 할 수
.

있겠는가.
그 차이만으로도 굴복할 수밖엔 없을진대, 대공은 자그마한 공국 하나를
가지고서 대륙의 수많은 나라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는 능력을 보였다.
그러니 더욱 그의 앞에 나는 꼬리 내린 개의 꼴일 수밖엔 없었다.
아니, 씨발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아프고 괴로운 것은
싫지만. 사… 어쩌구라든가, 연인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을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철저히 육체를 능욕당하는 편이 백 배는 낫다는 거다.
내가 그렇게 겨우 내 감정을 추슬렀을 때였다.
“내가 그대에게 영 믿음을 사지 못한 모양이야.”

내 입에 제 성기를 물려 둔 채 대공이 읊조렸다. 그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언제 돌변하여 목구멍으로 깊게 성기를 처넣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몸이 긴장되었다. 그가 거친 펠라티오를
강요하는 것은 솔직히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할 때마다 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한없이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했음에도, 대공의 샅에 고개를
처박고 그 살 냄새를 맡고 있노라니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쾅쿵쾅
거세게 박동했다. 육체에 가해질 고통 앞에서 정신적 피폐는 무력하게
스러질 뿐이었다.
“전쟁 따위, 걱정할 것 없다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지.”

우물거리며 제 성기를 빨고 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만큼이나 그의 목소리 역시 부드러웠다.
“어쩌다 내가 그대에게 이렇게 신용이 없는 사내가 된 걸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앉았냐. 씨발, 다른 놈들한테 이 관계를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안 지키고 있는 새끼가…!
나는 울컥하였지만, 뭔지 모를 미묘한 기시감에 괜히 등골이 싸늘했다.
게다가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것도 같았다.
잠깐, 이거… 이전에도 이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나. 나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호박색 눈동자에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뱉은 바를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대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겠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어버린다.
“언제까지 내가 풀어 줄 수는 없으니, 스스로 적실 줄 알아야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아니…….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그간 대공에게 당해 온 게 하도 많아서 그런 옛날 일은 잊어버렸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건만, 그와 내가 몸을 섞은 지 몇 번 안
되었던 그 시절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가 그때의 일을 입에 담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혼자서도 적실 줄을 알아야지, 응? 느끼는 점도 찾고 말야. 언제까지 내가

해 줄 수는 없지 않겠나?’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무는 것도 처음이었던 그날, 폭력적인 펠라티오를
강요해 놓고는 다시 뒤에서 내 아래에 성기를 박아 들어오며 그가 했던
얘기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오일을 써 주기는 했었다. 그러나 오일을 쓰기 이전에는 마른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삽입하려 했다. 채 풀어지지도 않은 입구로 성기가
들어올 때의 그 쓰라린 통증에 나는 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아팠다. 진짜 찢어질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오늘 해 보도록 할까.”

피곤한 낯에 나른한 웃음기를 띄우며 대공은 자그마한 유리병을 하나 들어


보였다. 안에 들어 있는 연한 노란 빛의 투명한 액체는 아마도… 윤활유
역할을 할 오일.
그 순간 분명 내 낯은 핼쑥해졌을 것이다. 얼굴에서 핏기가 다 가시는 것
같았다. 자위를 하는 것도, 내 손으로 유두를 만지는 짓을 해 보이는 것도
익숙해졌다면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씨발, 내 손으로 지금 내 뒤를
쑤시라고 하는데 내 멘탈이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손.”

대공의 성기를 뱉어 낸 나는 그의 명령대로 손을 내밀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패닉이었다. 들어 올린 손이
나도 모르게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대공은 그런 내 손 위로 조르륵 병의 내용물을 부었다. 오목하게 모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손바닥에
조금 끈적거리면서도 미끌미끌한 기름이 고였다.
“피 보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해 봐.”

그 말은 하나의 선고와도 같았다. 그날처럼 내 사정을 봐줄 마음은 전혀


없으니,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선고.
“적실 필요가 없다면, 당장 박아 줄까?”

내 머뭇거림을 읽은 그가 가볍게 질문한 순간 내 손이 움직였다. 온도가


조금 내려간 목소리에 본능이 먼저 나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당장 그가 풀어지지 않은 입구를 억지로 찢으며 성기를
처박을 것만 같았다. 대공은 지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은 상태였다.
오일이 번들번들하게 묻은 손이 다리 사이로 향했다. 엉덩이 골을 따라
내려가 손끝에 주름이 닿자 나는 그 안으로 중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큭…!”

씨발, 내 손을 항문 안으로 넣을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물론 대공과의


잠자리 후에 그가 안에 싸질러 놓은 정액을 빼내기 위해 손가락을 넣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와 스스로 뒤를 넓히는 건 절대 동일선상에
놓을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깊게 손가락을 넣어 입구를 넓히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니 두
번째였다. 대공이 강요했던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도 잘 못했던
것을 지금이라고 잘할 리가 없다.
어설프게 손가락이 드나들었지만 안쪽을 넓히는 짓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고이도록 흥건했던 오일은 항문 주변에 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미끌미끌하게 손이 온통 젖어 있다지만 그
손가락으로 입구를 벌리고 내벽을 넓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때처럼 그를 사정하게 해서 그 정액으로 뒤를 적셔야 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 생각하면 처음보다는 나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스스로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행위였다. 검이나 잡을 줄 알았지 섬세한
것은 할 줄 모르는 내 둔한 손으로는 특히나-
“흐윽…?!”

그때, 대공이 내 머리채를 잡았다.


“커읍, 큽!!”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머리채를


붙잡힌 채, 머리통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단숨에 목구멍 깊은 곳까지 처박혔다.
“입이 놀고 있으면 안 되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내 입안으로 가득 성기를 밀어 넣어, 성기를


뿌리까지 삼킨 내 머리통을 제 쪽으로 당겨 누르며 대공이 속삭였다. 낮은
음성이 귓가를 긁었다.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그간 대공에 의해
학습된 바대로 목구멍을 조이며 그의 성기를 빨아 삼키면서도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공이 왜… 이 새끼가 대체 왜……. 언제부터 빡이 친 거지??
“하아, 빨리 박고 싶은데.”

대공은 거칠게 내 머리를 흔들어 댔다. 아무렇게나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또 밀어내는 탓에 머리가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성기가
목구멍까지 처박혀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호흡이
달렸다. 마구잡이로 머리를 쥐고 입안으로 박아 대는 탓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 와중에도 본능만은 남아서, 나는 어떻게든 손을 놀렸다. 빨리 박고
싶다는 말에 더더욱 화들짝 놀라 억지로 내 항문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입구를 벌리며 쑤시고 또 쑤셨다.
얼얼하고 아팠다. 내가 느끼는 내벽 안쪽의 한 지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기 위해 입구를 넓히기에만 급급했다.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가 않았지만 말이다.
“입안에 쌀까?”

내 뒷목을 눌렀다가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마구잡이로 내 입안을


범하던 대공이 더운 숨결을 내뿜었다. 오랜만인 정사에 그 역시도 사정이
급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신없이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그의 성기를 삼키는 와중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차라리 입에 싸라. 한번 싸고 나면 그래도 내가 뒤를 풀 시간 여유를
확보할 수는 있을 테니까. 이대로 박히느니 차라리 정액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건 몇 번 해 봐서 그럭저럭 넘길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커흑! 쿨럭! 쿨럭, 쿨럭!”


목구멍 가장 깊은 곳을 억지로 벌리며 들어왔던 성기가 거칠게 뽑혀 나간
순간, 나는 기침을 토해 냈다. 대공은 그런 내 머리채를 쥐어 몸을 일으키게
했다. 아니, 그대로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과 산소 부족으로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공이 내 머리를 움켜쥐고 제 멋대로 흔들며 펠라티오를 강제했기 때문에
잔뜩 흔들렸던 머리가 핑핑 돌았다.
하지만 나에게 정신을 차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공이 그대로 내
다리를 벌리고 들어와, 벌어진 허벅지를 내리누르며 제 몸을 붙여 왔던
것이다.
“각… 각하, 잠시. 잠시만…!”

“오늘밤은 기사들이 번을 정해 복도를 지킬 것이다. 게다가 레이사의

침실이 지척이라.”
“……!”

“큰 소리를 내면, 곤란하겠지?”


대공은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녹아날 듯이 부드럽고 찬란한
미소였다.
그러나 나는 그 미소에, 심장이 덜컥 바닥으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분명 눈앞에서 아름다운 낯이 달콤하게 웃고
있는데, 짐승처럼 예민하게 곤두선 내 본능은 비명을 내질러 댔다.
어째서. 왜. 갑자기. 아니 언제부터.
“아…!”

대공은 화가 난 것일까.
“아윽, 읍…! 으, 으흡!!”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기 위해 나도 모르게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한 손으로 막는 것도 부족해서 양 손을 겹쳐 입을 막았다. 그러고도 부족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 비명을 참을 수가 있었다.
“…!!!”

입구만이 조금 젖어든, 그러나 거의 풀리지 않은 아래를 대공의 성기가


박혀 들어오기 시작한 순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몸이 반으
로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나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 버리고
싶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3.

고통 속에서 나는 내가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뒤, 그의 기사 베이즈를 연무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때 기사의 앞에서 연인 운운하던 대공에게 말조심을 하지 않는다면 더는
계약을 이행할 의미가 없다는 소리를 했을 때.
대공은 알겠노라 너무도 쉽게 약조를 했지만 그 직후 나는 고문에 가까운
관계를 맺어야 했다. 감히 내가 먼저 계약을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한 것에
벌이라도 주듯이, 그는 화를 내지 않는 척 화를 냈었다. 요도를 역행하던
막대기의 감각이 떠올라, 등골을 따라 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대공의 성기가
준비되지 않은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들어오자 소름이 돋았던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들며 끔찍한 고통이 정수리를 쪼갤 듯이 치솟아 올라,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전에 귀두만 겨우 들어왔을 때에도
도망치게 될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 그보다 더 깊은 곳까지 메마른
내벽을 무작정 벌리며 들어오니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읍, 흐, 흐으…!”

나는 양손으로 입을 아플 정도로 누르며 비명을 참아 냈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단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안에서부터 장관(腸管)이 찢어질
듯이 강제로 벌어지는 통증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요도를 파고들었던 막대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것 역시 아팠다. 그러나
미끄러운 윤활유에 힘입어 들어온 것은 어느 순간에는 감당하지 못할
쾌감이 되기도 했었다. 아픈 것인지, 지나친 자극에 고통스러운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흐윽……. 후윽…….”

대공의 치골 언저리가 내 샅에 닿을 정도로 성기가 깊숙이 들어와 박혀


잠시 멈추었을 때 나는 파르르 떨리는 숨을 가까스로 토해 냈다. 고통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와 비교적 관계를 자주 맺었을 때는, 마차에서 그다지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했을 때에도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또한 대공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성기가 미
끌미끌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삽입은 꽤나 오랜만인 데다가, 윤활을 할 오일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내 몸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박혀 들어온 침입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찢어졌을 거다… 피가 줄줄 나고 있을 거야. 성기가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저 박혀 있을 뿐임에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압박감에 토할 것만 같았다.
“빡빡하군.”

깊숙이 삽입을 해 놓고 대공은 나를 굽어보며 웃었다. 시야가 부옇게


차올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홍빛의 입술은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세상에 그대만큼 내 말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또 있을까.”

대공이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의 말에 반응할 새도 없이, 접합부를


쓰다듬는 대공의 손에 나는 움찔 굳어져 버렸다. 그의 손이 닿는 자리가
쓰라렸다.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나 대공의 성기를 빠듯하게 물고 있는
입구를 매만지는 손에 나는 으, 으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울었다.
“그러게 내 말을 새겨듣고 연습이라도 했어야지.”

물기로 흠뻑 젖은 눈가를 대공의 입술이 훑고 지나갔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몸을 가까이 하자, 그렇지 않아도 이미 깊었던 삽입이 더욱
깊어져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그러나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눈가에
입을 맞추고 눈물을 핥았다.
씨발……. 이 꼴을 당하며 눈물까지 난다는 것도 굴욕적이었다. 내가
그렇게 잘 우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대공과의 관계에서는 눈물을 쏟기
일쑤였다. 그게 습관이 된 것처럼, 대공이 내 몸에 고통을 줄 때는 쉽게도
눈가가 젖어들었다. 마치 억눌려 터져 나가지 못하는 비명을 대신하듯, 눈물
이 흘러 넘쳐 버리는 것이다.
“우는 건, 반칙인데.”

“아윽!!”

그가 다시 상체를 세운 순간, 안에 깊이 박혀 있던 성기가 움직여 나는 결국


비명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그러나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가 그대 눈물에 약한 걸 알고 이러는 게지.”


저따위 개소리나 왈왈 지껄이면서 말이다……. 씨발, 그래 개새끼야
죽여라, 죽여. 씨발 아프면 까무러치기밖에 더 하겠냐?! 씨발, 네가 이
따위로 군다고 내가, 씨발 너한테 어? 막 굴복할 것 같으냐, 이 천하의 개
쌍놈의 새끼야…!!
“오일…….”

개새끼야…….
“써 주십시오…….”
윤활유 좀 제발 써 줘라…… 제발.
잔뜩 품었던 독기는 그가 가볍게 허리를 튕긴 순간 어디로 갔는지,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육두문자가 아닌 애처로운
애원이었다.
“그냥 움직이고 싶은데.”

그가 나를 놀리듯이 말했다. 그 소리에 또 왈칵 눈물이 솟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의 육체적 고통에 두려움이 앞섰다. 이미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했을 테니, 무력함에 그저 눈물만
나왔다.
“움직이면, 안…….”

“그럼 밤새 이러고 있자는 건가. 그대가 내 좆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공이 다시 개같은 소리로 내 복장을 뒤집어 놓았지만, 나는 자존심을
세울 수가 없었다.
대공이 얼마나 자비가 없는 사람인지는 전쟁을 겪으면서 내가 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멋대로 욕심을 채우며 움직여 나를 걸레짝처럼 찢어 놓고도
아무 감흥이 없을 위인이었다. 그러니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굽히고 비는 게
맞지 않는가. 애당초 압도적인 권력 앞에 내 자존심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너무…… 아픕니다…….”

내가 다시 애원하자, 대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접합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윤활유를 할 만한 건, 하나밖엔 안 남았는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이 슬


쩍 허리를 물린 순간 몸이 절로 흠칫 떨렸다. 잠시 잠잠해지려던
격통이 다시금 몰려들어서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대공이 더 깊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도리어 조금 물러섰음에도 말이다.
“이거라도 써 줄까.”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윤활유를 대신할 만한 것’을 써준다는 소리


외에는 들리는 게 없었다. 헐떡거리며 시트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 으윽…!”

그리고 내벽을 잔뜩 벌리며 가득 들어차 있던 대공의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것이 꽤나 완만한 속도로 뽑혀 나갔음에도, 내벽이 쓸리고
항문이 자극되는 아리고 쓰리고 화끈화끈한 통증에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후회하지 않기다?”
몹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렇게 울렸던 것도 같다.
이어, 얼얼하고 화끈거리기 짝이 없는 아래에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이 닿아
왔다.
“흐윽…!”

대공은 내 한쪽 종아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그대로 제 몸을 내


쪽으로 붙여, 내 다리가 좌우가 아닌 앞뒤로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이 밀려들어 왔다. 주름진 입구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아린
통증이 몰려들었지만 주름을 찢을 듯이 억지로 벌리며 들어온 성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으응…! 윽…!”

도리어 그 손가락이 윤활유에 힘입어 미끄러지든 내벽을 문지르자, 입에서


는 아까의 비명과는 조금 다른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등을
물고 신음을 참았다.
“으, 흐읏…! 흐으…!”

그러나 대공의 손가락이 입구에 고루 미끌미끌한 액체를 묻히고 안쪽까지


적시며 들어와 내벽의 한 지점을 쿡 찔렀을 때는, 터져 나오는 비음을 전부
다 삼키는 게 불가능했다.
대공의 지랄맞게 큰 성기가 쓸고 지나간 바람에 얼얼하던 내벽은 그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손가락이
닿을 때면 통증을 전해 왔지만, 미끌미끌한 액체로 적셔지며 자극
받을 때는 견딜 수 없는 감각이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대공의 손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마구잡이로 안을 찔러 대며 넓히는 게 아니라, 최대한
내가 느끼는 쪽을 자극해 대고 있었다.
“크읏……!”

거친 삽입의 통증으로 쪼그라들었던 내 성기가 벌떡 서서 허공에서 꺼덕일


정도로. 대공은 부드럽게, 그러나 충분히 자극적으로 손을 놀렸다.
그렇게 그의 손가락이 하나, 둘 들어와 내 안을 문지르며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을까. 몇 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으리라.
“헉……!”

어떤 강렬한 감각이 대공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입구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으…… 으윽……?!”

그리고 이어 점차 더 안쪽으로, 깊은 곳으로. 간지럽고도 찌릿한 감각이


번져갔다. 그 감각에 어째서인지, 더 붉어질 곳도 없다 싶을 정도로 벌겋게
익었던 얼굴이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아니, 뜨거운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대공의 손가락이 들어와 문지르고
있는 내벽이,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그 안쪽의 곳곳이 전부 뜨거웠다.
따끔거릴 정도로 뜨겁고도 간지러웠다. 몸이 절로 베베 꼬였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은데- 한쪽 다리가 대공의 어깨에 걸쳐져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허리가 자꾸 떠올랐다.
“히… 히익…….”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그 당혹감의 표현조차 나오지 못했다.


끊어질 듯한 신음만 겨우 흘러나왔을 뿐.
“흐윽…! 흐으, 아!”

뜨겁고 간지러웠다.
손가락이라도 넣어서 긁고 찌르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나를 휘어잡았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대공의 손가락이 더 세게, 더 난잡하게 아래를 쑤셔
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이성을 지배한다.
싸고 싶었다. 아니, 사정은 극상의 절정이 아닐 것 같다. 이미 내 성기
끝에서는 질질 정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안에 들끓
는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도리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것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쿵쾅쿵쾅 뛰었다.
“크윽, 으, 으윽!”
대공이 손가락을 거두었을 때 나는 허리를 비틀며 몸부림쳤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자꾸만 튕겨지고 엉덩이를 어떻게든 자극하고 싶어서 시트에 비벼
댔다. 그러나 안쪽은 전혀 자극이 되지가 않았다. 이토록 간지럽고 뜨겁고
화끈화끈한데 그 무엇 하나 만족되는 게 없었다.
몸에 너무 열이 올라서 그대로 심장부터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뭔지 모를 이 욕망의 해일에 죽을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뒤를 향했다.
“흐으, 으, 크, 으, 흑!”

더 이상 내가 내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공이 보고 있다는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입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신음을 누군가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이 간지러움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다는 욕구뿐.
나는 내 손가락을 발씬거리는 항문으로 밀어 넣었다. 아까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 안쪽까지 흥건하게 발린 오일에 힘입어 쑤욱 들어간다.
아아아, 나는 크게 신음하며 마구잡이로 안을 쑤셨다. 어떻게든 안쪽을
자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손목이 아프도록 안을 헤집어 댔다.
이성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내가 지독하게 수치스러운 꼴로 내 뒤를
쑤시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대공이 그것을 보며 제 좆을
문지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하아, 일릭.”

대공이 내 발목을 잡아 붙잡아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는 내가 연신


어떻게든 쑤셔 대고 있는 내 항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대 다리를 잡아.”

아아……. 귓가에 울리는 말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했지만, 회음부에


대공의 성기가 비벼지는 것을 느낀 순간, 내 입에서는 맥없이 신음이 흘러
나갔다.
배운 대로, 그가 시켰던 대로 나는 오금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다리를 벌린
채 내 쪽으로 허벅지를 당겨 안았다. 아랫도리가 훤하게 드러나 보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자세였다.
그러나 수치심은 이미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 버린 뒤였다.
굴욕감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만족되지 않은 욕구에 허덕이는 짐승 새끼에
불과했다.
내가 손으로 잔뜩 헤집었음에도 전혀 만족되지 않았던 입구에, 단단하고도
둥근 귀두가 닿은 순간. 심장이 흉곽을 깨부수고 뛰쳐나올 듯이 거세게
박동했다. 아플 정도로 부풀어 오른 가슴 속을 가득 채운 것은……
기대감이었다.
언제나 나를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쾌락의 세계로 인도하던, 대공에 대한
기대감.
나는 그가 당장 내 안에 박아 주기를 원했다.
뜨겁고 간지러운 이 안쪽을 엉망으로 쑤시고 헤집어 주기를 원했다.
“아, 아아…!!”

그리고 대공은 내 바람을 충실히 들어주었다.


입구에 맞닿은 귀두가 단번에 가장 깊은 곳까지 내 안을 파고들었다.
삽입이 어찌나 깊었는지 그의 치골 언저리가 내 샅을 매질하듯이 때렸다.
퍽! 가죽 터지는 소리가 울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짐승처럼 울부짖는
내 신음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멀어지면서 머릿속에서는
웅웅 이명만이 울 뿐이었다.
첫 삽입은 그저 아프기만 할 뿐이었는데. 너무 아파서 몸이 안쪽부터
찢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그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좋았다. 내벽을 가득 압박하는 버거운
부피감마저 쾌감이었다. 따가울 지경으로 간지럽던 내벽의 점막들이 죄
자극되어 벅찰 정도의 만족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온몸의 신경이
요란하게 점멸했다. 그저 넣은 것만으로도 절정이 휘몰아쳤다.
“으읍…!”

대공은 깊게, 더 깊게. 마치 제 고환까지 내 안으로 쑤셔 박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붙이며 내게 입을 맞추었다. 타액으로 이미 질척하게 젖어든
내 입 안에 제 혀를 물리고 입안을 잔뜩 휘저었다가 입술을 깨물어댔다.
나는 그 입맞춤에 응할 정신 같은 게 남아 있질 않았다. 물론 제정신이었다
해도 그의 키스에 적극적인 반응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정신이 없
었다. 다만 내벽을 조금 더 자극해 주었으면 싶어서 허리만
들썩거릴 뿐이었다.
“…최음 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더니…….”

이지를 잃은 광인처럼 그저 헐떡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대공이 속삭였다.


어느새 상체를 띄운 대공은 내 가슴을 볼록하게 모아 쥔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유두에 닿은 순간, 전신에 불이 붙듯이
찾아드는 감각의 축제에 나는 허리를 비틀며 나도 모르게 내벽을 바짝
조였다.
“윽…….”

대공의 수려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역시 효과가 좋아.”
최음 성분. 효과가 좋다. 대공이 그런 소리들을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머릿속까지 점령한 흥분과 열기가 물러가질 않았다.
욕망이 가라앉질 않았다. 더 큰 쾌감이 필요해서 이제는 대공이 어서
움직여 주었으면 싶었다. 땀에 미끄러지는 것을 애써 붙잡고 있는 허벅지가
덜덜덜 떨렸다. 그만큼 애가 탔다.
“……덕분에 나도 복상사를 각오해야겠어.”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긁었다. 그리고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가 크게 뒤로 빠졌다가, 단숨에 뿌리까지 내 안을 찔러
들어왔다. 잠시의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아아!”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 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비명을


내지르듯 신음했다.
그 밤, 끝도 없이 지속될 열락의 시작이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공이 나를 제 위에 앉혀 놓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때, 미친 듯이
엉덩이를 찧어 내렸다. 이미 그가 내 안에 사정을 한 액체가 오일에 뒤섞여
질컥거리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리는 와중에, 정말 쉴 새 없이 허리를
놀렸다. 그의 성기가 꽂히며 내벽을 압박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느끼는 지점을 강하게 찔러 들어올 때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눈앞에 벼
락이 쳤다. 전신을 내달리는 쾌락에 덜덜 떨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대공과 같은 방향을 향한 채로 그를 올라타고 있었기에, 그는 뒤에서
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내 골반께를 단단히 붙잡고 쳐올리기도
했다. 그의 위에서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다가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그저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다.
그러다가 깊은 곳을 찔려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한 이후부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론 몸을 휩쓰는 열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힘이 들어서 더는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내 상태를 대공이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공은 자세를 바꿔 나를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겨우 네 발 동물의 꼴로
엎드리자, 뒤에서부터 대공이 나를 꿰뚫고 들어왔다. 제멋대로 찔러
들어오는 그를 가까스로 받아 내며 나는 쾌감에 몸서리쳤고, 그만큼
울부짖었다.
팔에 힘이 먼저 풀려 상체를 지탱하지 못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엉덩이는 하늘을 향해 치켜든 채로. 대공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퍽, 퍽, 거칠게 박아 들어오는 탓에 그와 맞닿는 엉덩이까지 아플
지경이었다. 그즈음 다시 성기 끝에서 물 같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사정하고 얼마나 오래인지 모를 시간 동안 대공에게
뒤를 대 주고 있었음에도 열락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건 대공 역시
마찬가지인 성싶었다.
‘최음 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더니……. 역시 효과가 좋아.’

오일로 내 안을 풀어 주었을 때, 안에서부터 시작된 욕구에 이성을 잃고


허덕이는 나를 보며 대공이 했던 말이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오일을 써 달라고 했을 때 그가 후회하지 말라는 소리를 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러니 내가 이런 꼴이 되리라는 것도 이미 예상을 했을 터. 최음
성분, 그게 오일에 들어 있었던 것이리라.
덕분에 나는 안에서부터 흥분하며 그가 넣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망가져도
좋으니 잔뜩 박아 주어 이 열기를 가라앉혀 주기만을 바랐다.
기진맥진하여 엉덩이를 든 자세조차 더 유지하지 못하고 완전히 늘어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버린 지금
도…….
흐 흐윽… 으, 응!”
“ ,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다시금 항문으로 삽입해 오는 성기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입에서는 잔뜩 쉰 목소리에 비음이 섞여 터져 나왔다.
“힘들어하는 것치곤…….”

내 귓바퀴를 물고 핥으며 대공이 속삭였다.


“내 좆을 물고 놓아주지를 않는걸.”

더운 숨결이 귓속으로 들어와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대공은 그런 내


귓가에 웃음기 어린 음탕한 소리들을 속삭이며 다시 허릿짓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일정한 박자로 이어지는 추삽질에 나는 하릴없이 신음을 토해
냈다.
힘들었다. 힘든데도 기절조차 하지 않아서 더 죽을 맛이었다. 아니, 내가
의식이 끊어진다 해도 대공이 멈출 것 같지도 않다.
대공은 내 안에 최음제를 잔뜩 발랐고, 그 안으로 제 좆을 처넣었다. 최음제
효과가 나에게만 적용될 리가 없었다. 그 역시 평소보다 더 그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사정을 하고 나면 잠깐 동안은 불응기가 있던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역시 사정을 몇 번쯤 한 것 같은데 발기가 풀리질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도 내게 입을 맞추거나 가슴을 희롱하다 보면 다시금 흥분해서 내
안에 제 좆을 처박고 허릿짓을 이어 가곤 했다.
……그래서 지금이 몇 번째지.

열이 잔뜩 오른 머리로 나는 애써 헤아려 보려 했다. 그러나 역시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이 빌어먹을 최음제는 물론 대공의 누이, 이스테샤의 손에서 탄생했겠지.
반쯤 돌아온 정신은 거기까지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두 연놈이, 쌍으
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남매였다.
빌어먹을 쌍둥이 연놈들 때문에 내 인생은 나락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노를 불태우기엔 내 상황이 좋지 못했다. 분노보다 내
몸 그 자체가 불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릭. 하아, 일릭.”

역시 쉬어 버린 목소리로 대공이 내 이름을 신음처럼 내 귓가에 읊조리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피치를 올
리기 시작했다. 가장 깊은 곳에 박힌 것이 빠르게 빠져나가고
박히기를 반복했다. 엉덩이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갖은 체액이 그 사이에서 끈적이며 질컥거렸다.
“큭…!”

“…!!”
대공이 절정에 이른 순간, 그는 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냥 문 게 아니라
치아 자국이 날 정도로 아득, 제가 무슨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깨물었다.
아팠다. 아니, 아파야 했다. 그러나 대공이 울컥울컥 내 안에 제 정액을 토해
내는 동안, 나 역시 눈앞이 새하얗게 바라는 오르가슴에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을 떨었다. 사정조차 없었다. 그가 내벽을 강하게 짓누르며 사정한
순간, 그냥 절정에 휩쓸려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공이 나를 바로 눕힌 뒤였다.
“일릭.”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던 대공이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소름 끼치는 행위였으나 나는 흠칫하는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 그럴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대공이 빠져나간 구멍이 다물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비질비질
점액질의 액체가 새어 나오는 기분이 역력했지만 하반신 전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든 줄 알았다.”

“…….”

아니… 이제는 정말 잠들고 싶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잠든 게 아니라


기절을 해야 할 상태였는데 여태껏 버티고 있는 게 용했다.
다행인 것은 이제는 최음제 기운이 빠졌는지, 발씬거리던 항문이 더는
근지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불을 지른 듯이 화끈거리며 자극을 원했던 내벽
역시도 가라앉았다.
탈력감과 만족감이 공존하는, 그러나 기운이라곤 하나도 남질 않아
피곤하고 힘든 그런 상태였다. 목욕을 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힘이
없으니 그냥 이대로 잠든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르기 전에 그냥 의식이 끊어지기를 바랐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내 뺨이며 턱에 내려앉는 대공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입맞춤이
거슬렸지만 고개를 돌릴 여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공이 내 팔을 침대 기둥에 묶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정신이 가물가물해서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다시 내 성기를
거머쥐는 손에 흠칫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 했을 때에야, 침대 기둥에서
이어진 끈에 내 손목이 묶여 팔을 굽히지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 각하……?”

다 끝이 난 줄 알았는데. 박을 만큼 박고 쌀 만큼 싸서,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흥분이 드디어 만족된 만큼 그의 흥분 역시 달래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분명 나를 바라보는 그의 발그레한 얼굴 역시 분명 만족감으로
나른해져 있었는데.
“벌을 받기로 했잖아?”

그는 나를 묶어 놓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개소리를 하고 있었다.


“…벌이라니…… 무슨.”

“하아, 그대가 이토록 내 말을 허투루 듣고 있었다니.”

“…….”

“내가 하사한 것을 입지 않아, 벌을 받기로 하지 않았나.”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그 길로 기절을 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기절을 했어야 했는데……!!
알즈에 도착해서 아직 오지 않은 교황을 기다리던 중 그가 갑자기 나를
희롱하며 했던 소리가 뒤늦게 떠올랐다. 제가 준 속옷을 입고 있냐고
물으며, 왜 입지 않았느냐 따지고 벌을 줘야겠다는 소리를 한 게 말이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씨발 그럼 지금까지 한 건 벌이 아니었단 말인가.
사람의 안에 최음제를 쓰고, 미치게 만들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범했으면서…!!
“지난번에 앞을 쑤셔 주는 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했던 게지.”

나는 대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열이 벌겋게 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으리라. 입안이 급속도로 바짝 말라왔다. 숨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대공의 손에는 두 가지 물건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울퉁불퉁 굴곡진
기다란 얇은 금속 막대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열 개쯤 되는 꿰어 놓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구슬들이
었다. 하나하나의 구슬이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만든 동그라미
정도의 크기였다. 본 순간 그 용도를 짐작하는 내가 싫었다. 앞으로 내게
닥칠 일이 절로 상상되어 뜨겁게 데워졌던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각하……. 각하, 그건-”

“쉬이. 이번엔 울어도 봐줄 수 없다.”

대공은 나를 달래듯이, 그러나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리고


내게는 암흑이 찾아왔다.
기절? 그런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내 의식은 몹시도 멀쩡했다. 다만 대공이 내 눈에 안대를 씌워
버린 것 뿐. 너무나 갑작스럽게 암전된 시야에 패닉에 빠질 수밖엔 없었다.
무서웠다. 입에서 애원이 저절로 터져 나갔다.
그러나 대공은 그마저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흐읍!!”
한마디를 채 벙긋하기도 전에 입에 재갈이 채워졌다.
엄청난 위기감에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몸부림을 쳐봤으나, 이미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뒤였다.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 역시, 대공이
허벅지를 내리눌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아, 일릭. 착하지.”

야아, 이 씨발새끼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입이


막혀 있어서 억눌린 비명 외에는 나가는 게 없었다.
새카맣게 암전된 시야 속에 대공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둥그렇고 단단한 구슬이, 아래에 닿아 왔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4.

***

어깨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이 깊게 침잠되어 있던 내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간지러운 감촉과 함께 이어졌다. 벌레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 어깨를 손으로 털어 내고 싶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거워서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전신의 근육이 모두 욱신욱신했다. 몸이
아팠다.
“……이만 일어나야 하는데.”
귓가에 속삭여지는 낮은 음성이 어쩌면 이렇게 간지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보다 잠긴 목소리라 그런 것도 같았다. 목 안쪽을 긁으며 흘러나오는
탁성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파서, 입에서
절로 끄으응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깨에서 맴돌고 있던 간지러운 감촉이 입술에 내려앉은 것은 그
즈음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는 것도 같았다. 뻣뻣한 머리털을 몹시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는, 다시 이마에 간지러운 감촉이 꽃잎에 앉는 나비처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연신 간질이던 어깨를 붙잡아 온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 손이라는 자각이
찾아들 무렵. 얼굴 곳곳에 내려앉는 간지럽고도 귀찮은 감촉에 나는 결국
눈을 떴다.
눈꺼풀이 잔뜩 부은 것처럼 눈을 뜨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눈을
떴을 때, 시야가 하도 부옇게 흐려져 있어서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질 못한 것일까. 혼몽한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멍이 많이 남았어.”

어깨를 잡은 손이 살살 가볍게 살갗을 쓰다듬었다. 또 간지러운 감촉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려앉기
도 했다. 멍하니 그 감촉이 느껴지는 어깨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달빛인가
싶은 흰 실타래가 보였다. 하얗고 둥그런 머리통이 내 어깨
언저리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대공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어났나.”

아침에 눈을 떠서 처음 본 게 대공이라는 것에, 이전과는 달리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씨발, 이제는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혹은 놀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무겁고 멍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인은 잠이 많다고 하던데, 그대가 나보다 잠이 많으면 어떡해.”

……아니, 놀라 버릴 정신은 있나 보다.

아침 댓바람에 대공이 개소리를, 그것도 전에 없던 개소리를 하니까 너무


깜짝 놀라서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눈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아픈 데다가
머리가 무거웠지만 적어도 잠은 확실히 깨 버렸다.
혀끝이 굳어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입에 대공이 쪽,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서 씻도록 해. 요새로 돌아가야 하니.”

나는 대공을 눈으로 좇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몸이 일으켜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일어나야 했다. 대공이 일어나라고 하니까.
지난밤의 일로 나는 완전히 저항 의사를 상실한 상태였다. 통렬한 후회
속에 대공의 뜻에 거슬릴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난밤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팔에 힘을 주어 지탱하니 팔이 덜덜 떨렸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니 허리가 지끈거리면서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나는 애써
꿋꿋한 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대공에게 시달렸던 몸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다리 사이는……. 아직도 벌어져 있는 느낌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새하얀 욕조 가득 채워져 있는 더운 물을 보며, 나 혼자가 된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 씨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씨발 , .

자꾸만 머릿속에 차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을 애써 떨쳐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움직일 때마다 항문은 물론 그 안쪽까지 길이 난 듯이 욱신거리고
얼얼하여 숨이 턱 턱 막혀 왔다. 더운 물에 몸을 씻는데도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이 손이 덜덜 떨렸다.
얼마나 많은 울음과 얼마나 많은 애원이 안대와 재갈에 억눌렸는지는 나만
알 것이다. 통증과, 그 통증을 능가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요된 쾌감에
몸이 만신창이인 것도 오롯이 나만의 문제였다.
몸을 씻고 내 안 깊은 곳에 남겨진 대공의 흔적을 지워 내는 내게는 그러나
굴욕감이나 수치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너무
지쳐 버렸다.
그냥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그토록 집요하던 내 삶에 대한
집착마저 흐려질 정도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피로감뿐이었다.
씻고 나와서 옷을 입었을 때는 가벼운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입안이 헐어 있었고 입술도 부르텄으며 결정적으로 무엇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입맛이 없어서 나는 수프만 몇 숟가락을 뜨다가 말았다.
상당히 훌륭하게 맛을 낸 식사였음에도 빵이나 햄 따위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대공과 함께 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 얼굴이 눈앞에서 이것저것
먹으라고 했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일찌감치 식사를 물리고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공이 알즈를 아름다운
곳이라고 얘기를 했던가.
과연 산을 향해 이어진 거대한 호수가 아름다웠다. 내 생각보다 호수의
크기가 상당해서 저 먼 쪽으로 수평선이 보였다. 저택에서는 그 호수가
고스란히 내려다 보였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나는 유사시에는 배를 타고 호수를 통해 탈출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멍하니 했다. 아름답다는 소리를 지껄였지만 분명
또 다른 탈출구가 있다는 점에서 대공은 제 후계자의 은신처로 이 알즈를
선택했을 것이다. 대공은 그런 인간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똑똑.

노크 소리에 돌아보니 대공의 하인이었다. 가야 한다는 그의 손짓에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아래가 얼얼하면서 척추를 따고
진동이 울려 와서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바닥에 앉으면
제대로 앉지도 못하겠지.
이런 몸으로 말을 타야 하는 것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티기는 하겠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하는 내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 일릭.”

저택의 1층 현관홀에서 막 나가려 하던 대공과 마주쳤다. 멜과 로간이라는


중년 부부가 그의 뒤에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로브를 푹 눌러 써서 얼굴과
머리를 가린 소년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배웅을 하려고 나온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간 바깥에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대공과 소년, 그
리고 멜이라는 여자가 탔다. 로간은 작은 트렁크 가방을 마차 뒤쪽의
짐칸에 실었다.
아니,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이 난 것도 아닌데 벌써?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대공의 행보에 조금 기가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건 다음이었다.
“타지 않고 뭐 하나, 일릭.”

대공이 내게도 마차에 오를 것을 명한 것이다.


아니……. 내가 솔직히 말을 탈 상태가 아닌 건 맞는데…… 그렇다고
대공과 후계자가 탄 마차를 같이 타고 가는 게 말이 되나.
“일릭?”

“아, 예.”

그러나 대공이 움직이지 않고 무얼 하냐는 듯 다시 한번 나를 불렀을 때, 생


각과 머뭇거림은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렸고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머뭇거리거나 그의 뜻에 반하는 대답을 했다가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므로,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내 자리는 놀랍게도 대공의 옆자리였다. 대공과 그 후계자가 순방향으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앉고 사용
인인 여자와 내가 역방향으로 앉는 게 마땅할 텐데도 대공은 제
옆자리를 비워 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행히 흔들림과 진동에 대비한 마차의 쿠션은 상당히 푹신해서 앉을 때의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 앉은 것만으로도, 내가 말을 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이 상태로 딱딱한 말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서너 시간을 달렸다면……. 중간에 기절해서 낙마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엉덩이가 욱신거리는 것만 아니라 그 안쪽으로는 아예 내 것 같지가
않았다. 하반신에 살짝 힘을 줘 보는 것만으로도 뻐근하고 욱신거리고 아린
온갖 통증이 몰려들었다.
이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에는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게 점차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대공과 공자의 앞이니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앉아 있는 게 버겁고 힘들다. 마차 바퀴에 돌 따위가 밟혀 마차가
덜컹거릴 때는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자리가 더더욱 바늘방석이었다. 나를 겁내는 것처럼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면서도 힐끔대는 여자는 둘째 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레이사의 호박색 눈동자에는 괜스레 입안이 더 바짝바짝 말라 왔다. 마차
안이라 후드를 벗어 내린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이나 호박색 눈동자가 너무
대공의 그것이라 더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레이사.”

그때 대공이 제 아들을 불렀다.


“공부는 잘 하고 있느냐.”

“네, 각하.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제 곧 네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된단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바빠지겠지. 그래도 네가 잘하리라 믿는다.”


열심히 할게요.”

아이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후계자를


상대로 쓸데없이 위엄이 넘치면서 차가운 대공에게서 믿는다는 말을 들은
게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각하, 그러면 저는 이제 어머니와 살게 되나요?”


“물론이지. 네 어머니가 그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모를 거다.”

아마도 제 엄마와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아이는 기대감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도, 일견 다정하게 들리는 대공의 말에 더더욱 얼굴을
붉혔다.
“또 네 약혼녀도 조만간 만나게 될 거란다.”

“약혼녀요?”

“그래. 친절히 대해 주려무나.”

“……그 애가 저를 좋아할까요?”

“나는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만.”

“예? 하지만… 결혼을 할 사이인데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의아함을 한가득 담은 호박색 눈동자를 보고 있기가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대공과 똑 닮은 얼굴을 해서 앳된 얼굴이 너무나
순진무구하니까 괴리감에 소름이 다 끼쳤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엷은 베일로 가려져 빛만 들어올 뿐, 바깥
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몸을 조금
비스듬히 틀어 한쪽 엉덩이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가운데가 압박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래. 그러니 친절히 대해 주렴.”

“네. 제가 다정하게 대할게요.”

“착하구나.”

대공의 칭찬에 아마도 아이는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눈을 돌려 버려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기분이…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어질 것 같았으므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는 두 부자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냈다. 이제 대공은 대포와 화승총에 대해 아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솔직히 아이가 알아들을 얘기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이의
진지한 대답과 질문이 중간 중간 섞였다.
어쩐지 멍한 머릿속에 딴생각이 피어올랐다. 말로 빠르게 달려서 숲을
관통해 세 시간을 온 거리이니, 마차를 타고 가는 건 그보다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 길도 더 돌아서 가야 할 텐데 그럼 저녁에나 도착하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되려나.
그런 생각이었다 .

어느덧 나는 마차의 한쪽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였다. 그것이 대공과


공자의 앞에서 하기에는 몹시도 방만해 보이는 자세일 것이었지만 도저히
바르게 앉을 수가 없었다. 자세가 더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최선이었다.
그런 와중에 마차 멀미를 하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프만 몇
숟가락 먹다 말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을
것 같았다.
제발 빨리 도착해라……. 바라고 또 바라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릴 때가 있어, 덜컹거리는 진동이
심해지기도 했다. 덕분에 어지러움을 넘어 두통이 몰려들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부디 가라앉기를 바라며 호흡을 골랐다. 애써
무시하고 있는 온몸의 통증이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대공은 개새끼였다. 개호로놈의 새끼. 오늘 이렇게 시르반 요새로 돌아갈
거였으면서 씨발, 사람을 그런 꼴로 괴롭히고 씨발…….
당사자, 그것도 대단히 높으신 분의 앞이라 차마 대놓고 한숨을 쉴 수는
없었기에 한숨과 쌍욕을 속으로 삼켜야 하는 것조차 내게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엔 없었다. 지금 제 아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와 지난 밤 내가 겪었던 사내는 외양은 똑같았지만 그 내용물이
천차만별로 달랐으므로.
눈을 감아 생긴 어둠 속에서 나는 자꾸만 머릿속에 차오르는 지난밤의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나 자신을 추슬렀다.
그러나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을 떴을 때, 마차는 멈춰 있었다.
“헉…….”

그리고 나는 누워 있었다. 완전히 누운 건 아니었지만 상체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머리 아래에는 높이를 맞춰 주는 베개까지 괴어져 있었다.
…그것이 베개가 아닌 대공의 허벅지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 순간 눈에 보이는 건, 분명 대공이었다. 그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 도착했습니까?”

겨우 말을 했을 때 내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어 있었다.
나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 목이 쉬어 있어서는 아니었다. 목이
맛이 갔다는 건 이미 아침에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놀란 이유는 마차 안에, 아직도 네 사람이 있는 와중에 내가 여태까지
쿨쿨 잤기 때문이었다. 맞은편에서 멜이라고 불린 부인이 심란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자인 레이사가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아이는
부인의 허벅지를 벤 채로 자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대공의 다리를
베고 잔 것처럼 말이다.
“피곤했나 봐.”

대공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나는 완전히 패닉인데 말이다. 아니… 아니 내가 분명 창가 쪽에
머리를 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잠들었단 말인가. 또 잠든 나를
반대쪽으로 머리를 하게 해서 누이는 것도 모르고 잤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용병이었고, 그렇기에 잠자리에서도 늘 예민하던 사람이었다. 잠귀도
보통 밝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지만 흔들리는 마차에서 이렇게
숙면을 취해 버렸다니. 내가 아예 곯아떨어졌던 것도 어이가 없고, 대공이
나를 제 무릎을 베고 눕게 했는데 몰랐다는 것도 경악스럽다. 대공의
기척을 몇 번이고 놓친 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놀랍지는 않았다.
“도착한 지는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두 사람이 워낙 잘 자니 깨울 수가

있어야 말이지.”
“송구… 송구합니다…….”

“레이사야 멜이 안고 내릴 수 있다지만, 내가 그대를 안고 내릴 수는 없지

않겠나.”
“…….”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 아름다운 대공이 커다란 짐승


같은 나를 안… 안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가 패닉
에 빠져 있는 사이, 대공의 지시에 멜은 레이사를 깨웠다. 잠들어
있으니 안고 내릴 법도 하건만 잠기운에 칭얼대는 아이를 기어코 깨웠다.
그러더니 옷매무새를 단정히 해주는 것이다. 머리와 얼굴을 가리던 후드
따위는 없었다. 도리어 그녀는 아이의 가발이 제대로 견고하게 씌워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들이 준비가 되자 대공이 바깥에 신호를 보냈고, 마차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내가 먼저 내렸다. 여전히 황망하고 얼떨떨한 와중에 더더욱
놀랄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정에 함께 했던 기사들은 물론 성을 지키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전부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에서부터 건물까지 길게 붉은 카펫이 이어져 있었다. 그 카펫의 좌우로
기사들이 도열한 모습이 장관이었다.
용병으로서 기사들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대공의 정예 기사들이 갑옷을 장착하고 제 주인을 맞이하는
모습에서는 엄숙함이 느껴졌다. 거대한 하나처럼 움직이는 무리에게서
웅장한 기운이 발산되었다. 나조차도 조금은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대공은 너무도 당당히 그를 위해 펼쳐진 카펫 위를 걸었다.
그 뒤를 대공의 축소판 같은 사내아이가 뒤따른다.
나는 그제야 이 성대한 환영이, 대공이 세상에서 숨겨 두어야 했던 제
후계자에게 선사하는 첫 번째 영광임을 깨달았다. 이 모든 기사들 앞에
대공이 제 후계자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도열한 기사들의
끝에 대공의 가신들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대공과 그 후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 이런 자리에서 대공의 왼쪽에 서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친위 기사인 자칸이 곁을 지키는 건 너무 잘


알겠는데…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용병 나부랭이인
내가 설 자리는 정말 너무너무 아닌 것 같은데.
이 자리가 처음부터 내 자리인 것처럼 나는 대공과 그 후계자의 뒤를
자칸과 함께 따라가고 있었다. 용병대 소속일 뿐 결코 미로스의 소속은
아닌데 모두가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갑자기 심
장이 아플 정도의 불길함이 찾아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발밑에
새카만 수렁이 있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기분은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잠시 잊었던 두통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온몸을 괴롭히는 근육통도 함께였다.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최대한으로 힘을 낸 짧고도
강렬한 환영식을 지난 뒤에야 성 안으로 들어온 그 즈음이 분명 나에게는
한계였다. 물론 단련해 온 시간이 있어 당장 쓰러지거나 기절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려면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서 빠질 타이밍을 노려야 하는데…….
“일릭 경.”

……경……?
내 이름 뒤에 절대로 붙어서는 안 될 호칭으로 나를 부른 것은 언제
나왔는지 모를 궁정 의사였다. 내가 기사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대체 왜 경이라는 호칭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를 부른 게
맞나 싶어서 대꾸도 하지 않고 쳐다보니 그가 말했다.
“열이 있는 것 같군요.”

머리가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뜬금없는 열 타령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열이라니. 원체 건강해서 열 같은 게 나 본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한데 말이다.
“안색도 안 좋아 보이고… 치료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궁정의사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이 자리에서 빠져나올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이 있는 곳을 힐끔 보니 그는 제 가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자리를
비운다는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가시죠.”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조용히 몸을 돌렸다.


나를 붙잡는 사람은 물론 없었고 나는 드디어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상태를 진찰을 한 뒤 궁정의사는 내게 약을 먹이고 내 방을 나섰다. 열이
난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어쩐지 머리가 뜨거운 것도 같았다. 그보다 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를 괴롭
게 만드는 것은 두통이었다.
마차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나 몸이 좋지
않기 때문일까. 잠이 쏟아졌다. 의사가 먹인 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몸이
맥없이 늘어졌다.
그 와중에 머릿속이 뭔지 모를 생각들로 복잡했다. 가슴도 기묘한
불안함으로 덜컹거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려 해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니라는 생각만 들면서 그저 불편했다.
속이 시끄러웠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혼란이 이어졌다. 그러나 역시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럴 체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내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5.

그 뒤로 나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열이 올라서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몸살이 쉬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다.
기운이 좀 없고 머리가 아프면서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빼면 당장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쉬고 싶어서 계속 많이 아픈 척을 했다.
궁정 의사가 처방한 약이 좋기는 한 모양인지 근육통은 차차 가라앉았다.
얼얼하고 욱신거리던 다리 사이의 통증도 꽤나 빠르게 좋아졌다. 3일째
되던 날에는 열도 다 떨어졌다.
그러나 괜찮아졌다고 했다가 또 대공의 곁으로 불려 갈까 봐 나는 방에만
머물렀다.
다행히도 대공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부디 제가 나한테 했던 짓이
과했다는 자각이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대공은 타인의 사정 따위를
봐주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쉬는 동안 드문드문 그 밤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오싹하게 소름이
돋아나면서 구역질이 나려 했다.
미약을 윤활유로 사용해서 날 이성을 잃게 만들어서는 몇 번이고 했던 것.
그래, 거기까지는 용납할 수 있었다. 괴로울 정도로 느끼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때까지는 쾌감의 범주였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져서는 쥐어
짜이고 박히고……. 그걸 생각하면 안쪽이 어쩐지 얼얼하면서도 근지러운
그런 느낌이 들어 불쾌해졌지만, 그래,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잘도 삼키는군. 내 좆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응?’

안대에 가려져 새카맣게 암전되어 보이는 게 없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귓가에 속삭여지는 대공의 낮게 잠긴
목소리조차 내게는 공포였다. 몸은 뜨거운데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애원을 해도 대공은 꾸역꾸역 내 안으로 그 구슬들을
밀어 넣었다. 몇 번씩 당겨서 두세 개를 빠져나가게 만들고,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끝까지 다 삼키게 되었을 때는, 끄트머리를 붙잡아 단번에 뽑아냈다.
단단한 구슬이 내벽과 입구를 엉망으로 쓸어 내며 빠져나가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울었던 것 같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와중에
다시 발기한 성기에는 막대기가 꽂혀 있었다.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귀두에 고리를 거는 형태라, 대공이 빼 줄 때까지
어떻게 해도 빠지지가 않았다. 괴로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벌을 주는데 이렇게 좋아하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발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약기운이 가셨다지만 다시


내벽을 자극하니 짜릿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해소되지
않는 욕구에 허덕이며 발기한 성기를 주무르며 대공은 다시 내 안으로
구슬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거칠게 잡아당겨 뽑아냈다. 내벽이 죄
쓸리고 자극되어 죽을 것 같았다. 비명을 질렀으나 재갈에 막혀 나오질
않았다. 몸부림을 치려 했으나 묶여 있는 몸은 그저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다른 기사들을 부를까. 그들에게 전부 그대를 범하게 할까?’

구슬이 하도 드나들어 벌어져 다물리지 않는 내벽에 다시 발기한 성기 끝을


대고 들어올 듯 말듯 입구를 자극하며 대공이 속삭였다.
‘그들에게 전부 돌려지고 나면, 이 헤픈 구멍도 만족을 하지 않겠나. 응?’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가 정말로 고민을 하는 것 같아서, 이미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나는 엉엉 울어 버렸다.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소리가
제대로 나가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 뒤에도 대공은 멈추지 않고, 다시 제 성기를 내 안으로 박아 넣어 제가
만족할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나 그가 내 입에서 재갈을 뺄 즈음 기절을 해 버렸다. 그때까지
정신이 버틴 게 용했다. 아니, 왜 버텼냐며 나 자신에게 욕을 해 주고
싶었다. 그냥 확 기절을 빨리 해 버렸어야 했는데……. 기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공이 나를 괴롭혔다는 게 맞으리라.
씨발… 그러고 아침에는 어깨에 멍이 아직 남아 있다며 아무렇지 않게
쪽쪽대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니. 소름이 끼쳐 죽을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런 짓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맨 처음 그가 요도에 막대기를 꽂는 짓을 했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더한 꼴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 그래서 한동안은
그의 눈치를 더 살피고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사내였고, 그런 사내가 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약점마저
쥐고 있으니 괜히 거역해서 더 험한 꼴을 보지 말자고 분명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가 않은 게 문제겠지…….
내가 대공의 명령에 불복종한 역사가 몇 번 있었다. 우선 습격을 당하고도
알즈로 가자고 하는 걸 시르반 요새로 끌고 갔었던 것. 이건 결과가
좋았으니 넘어간다 치고.
그 빌어먹을 놈의 속옷……. 그걸 안 입었다고 벌을 주겠다는 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잔뜩 해 버릴 분위기를 잡기에 그 분위기를 깨면서 정색을
하고 교황한테는 왜 알렸냐고 따지기도 했었고. 자꾸 하려 드는 그를
막으면서 전시니까 일단 참고 시르반 요새로 가자고 설득하려 하기도
했었다.
……그중에 정말로 대공을 기분 나쁘게 한 게 무엇이었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모두 아닐 수도 있었고, 전부 다일지도 모르겠다.


숱한 밤을 보내고 진하게 살을 섞어 온 사이였지만 여전히 나는 대공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종잡고 싶지도 않다.

나를 그런 꼴로 괴롭히기 이전에 내 사… 응응 운운했던 걸 떠올리면 기가


차지도 않았다. 솔직히 밤새 괴롭힘을 당한 것보다 그게 더 구역질이 났다.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은 짓에,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그런데 대공의 곁에 있으면 언제고 그런 일들은 반복될 것 같다. 철저한
약자인 내 입장에서는 대공이 나한테 질려서 나를 놓아주기만을 바라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씨발 대체 나한테 무슨 마성의 매력이 있어서 대공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사람을 괴롭혀 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속이 터졌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그렇게 아픈 척을 하며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방문자가 하나 나를 찾아왔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혹시 대공의 하인인가 싶어서 불길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용병대의 체즈번이었다.
“와, 아팠다더니 낯짝이 엄청나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전쟁을 시
작하기 전 대공이 따로 내린 임무로 로인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에
꽤나 오랜만에 보는 놈의 첫 인사가 위와 같았다.
“안 아픈 너는 낯짝이 왜 그 모양이냐.”

그래서 나도 유치하게 대꾸해 버렸고 말이다.


툭 내뱉은 말에 놈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 울적했던
기분이 아주 조금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아, 이 맛에 대공이 나를 괴롭히나.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시궁창으로 단번에 처박혔다.
“성에는 어떻게 들어왔냐.”

“심심하던 차에, 너 아프다는 얘기를 들어서. 문병 왔다고 하니 들여보내

주던데?”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대공이 아들 데리고 온 날 네가 곁에서 수행했다며. 그날부터 얼굴이 안

좋았던 걸 누가 봤다고 하더라고.”


…그 자리에 대공의 기사들만 나온 게 아니라 용병을 포함한 병사들까지 다

나와 있었던 것인가.
그날 내가 아프긴 아팠는지 주변 상황이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도열한 기사들의 위용에 조금 놀랐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씨발, 내가 진짜 그 전날 오죽 고생을 했어야 말이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얼얼한 느낌이 간헐적으로 찾아들 정도인데.


“와, 너 팔자 진짜 좋네. 독실 쓰냐?”

내가 쓰는 방을 둘러보며 체즈번이 감탄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대공에게 뒤를 대 주는 대신 이런 방에서 잘 바에야, 냄새나는
용병놈들이랑 뒤엉켜서 뒹굴고 개고생하는 편이 백 배는 나을 거다.
“시답잖게 문병 온 건 아니겠고. 진짜 왜 왔냐.”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조금 반가운 것도 같았는데 벌써 지겹고 귀찮아져서


내가 뚱하게 물었다.
“심심했다니까! 너도 심심할까 봐 놀러와 준 건데!”

“용병 주제에 전시에 심심하단 소리가 주둥이에서 나와?”

“야, 전투가 있어야 안 심심할 거 아냐. 다들 지금 좀이 쑤셔서 죽겠다고

난리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 전투가 아예 없다고?”


“너 진짜 아팠냐? 아무 것도 못 들었어?”

방에서 나가질 않으니까 솔직히 바깥 상황은 아무것도 몰랐다. 성 안에


머무는 사람들 중 나한테 상황 설명 해 줄 사람은 대공뿐인데 요 며칠간
대공조차 만나질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뭔가 남자 자존심에 아팠다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아서 뚱하게
체즈번놈을 바라보자, 말하기 좋아하는 놈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연합군이 선봉대 내세워서 쳐들어왔을 때 우리가 대포로 다 쏴 죽였잖냐.

그때 이후로 연합군 놈들 아주 몸을 사리면서 진채에서 나오질 않더라고.


이럴 거면 왜 베르바니까지 기어들 왔나 몰라.”
투덜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체즈번은 승리하는 쪽에 선 이 상황이 실은
즐겁다는 듯 히죽거렸다.
“솔직히 미로스가 보인 화력이 어마어마하긴 했잖아. 그래서 그쪽에서도

분란이 좀 일었나 보더라고. 세리포브 때문에 왜 굳이 개죽음을 당해야


하냐, 뭐 이런 식?”
아마 그 분란은 교황이 적극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교황
엔리온이 나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음, 이거는 어제 부켈릭이 부대장들 모아 놓고 회의하는 거 훔쳐 들어서 안

건데, 티마예브는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나 보더라고. 거기 국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도착했대.”
듣고 있는 사람은 나밖엔 없는데 체즈번은 목소리를 낮춰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현 국왕이 후사도 없는데 쓰러지면 왕위는 누구 거겠냐. 미로스 대공 거지.

그러니 지금 티마예브 군사들이 대공한테 맞설 이유가 있겠어? 대들었던 적


없다고 얼른 꼬리 내리고 도망가는 게 상책이지. 그래서 티마예브가 철수를
하는 모양인데, 티마예브 군이 연합군의 절반 가까이 되잖아. 거기가
빠져나가면 연합군은 뭐, 답이 없지. 연합국이 내건 성명서, 오늘이나
내일이면 철회될 거란 얘기가 나돌더라고.”
아, 물론 낙관할 수만은 없겠지만. 체즈번이 뭐라고 덧붙이며 말을
이었지만 나는 뭔가 가슴 한구석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대공이 이런 판을 다 예상했을까? 자기 형이 지금 쓰러질 줄은 몰랐겠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운도 더럽


게 좋아.”
……글쎄. 그게 운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내막을 모두 아는 나로서는 체즈번처럼 순수하게 감탄하며 이 상황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대공을 모르던 시절의 일반 용병 나부랭이였던 나라면
어쩌면 체즈번처럼 좋은 의미로 심심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연합군과의 첫 전투에서도 이쪽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대포로 대열을
무너뜨리고 기병에 크게 피해를 입힌 후 일방적으로 도륙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전투를 마지막으로 며칠을 보초나 서면서 쉬고 있는
상황이니, 용병의 입장에서는 다소 심심하다 해도 이번 전쟁으로는 쉽게
돈을 벌어서 좋다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대공이 짜 놓은 판이었으며, 대공이 원하는 대로 정확히
흘러가고 있음을 아는 지금은 그저 속이 답답해 올 뿐이었다. 거대한 벽에
몸이 짜부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있어 그 거대한 벽이 대공의 존재 그 자체였다.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런 전쟁이라면 평생 하고 싶더라. 우리 도시 몇 개 털었잖아? 그때 이미

급료 이상 챙긴 놈들도 있던데. 뭐, 넌 전리품은 크게 관심 없다고


하겠지만.”
“…뭐 좀 좋은 거 얻었냐.”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자


체즈번놈은 신이 나서 제 목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목걸이를 하나 꺼내
보였다. 푸른 보석이 커다랗게 달린 목걸이는 분명 여자용 장신구였다.
"예쁘지?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냐?"

"그걸 줄 여자나 있고?"

"당연하지! 이런 거 주면서 네 눈동자가 생각나서 샀다 이 한마디 하면 어느


여자가 싫다고 하겠어?"
약탈을 한 물건을 산 거라고 속이고 여자에게 선물을 할 거라는 놈의 입이
아주 귀에 가서 걸려 있었다. 아마 좋아하는 여자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진짜 대공은 대단한 것 같아. 갑자기 난데없이 아들을 어디서

데려오질 않나……. 대공이랑 똑같이 생겼다며? 어땠냐? 너도 보긴 했을 거


아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똑같이 생긴 거 알면서 뭘 물어.”


“대공처럼 그렇게 위엄이 넘치면서 냉기가 풀풀 풍겨? 어린애가? 나는

상상이 잘 안 돼서 그래.”
…아니. 그 애는 그냥 어린애였다.

기사들이 정렬한 길을 제 아비를 따라 당당히 걸으면서도 사실은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던, 새하얀 뺨을 빨갛게 물들이곤 하던 그런 순진한 어린애.
다만 대공을 너무너무 닮아서 내게는 이질감이 지나치게 클 뿐.
“애가 애지, 뭐.”

“이 새끼 감흥 없는 건 알아 줘야 해. 씨발. 근데 그 애 하나 때문에 그 고생을

했나 싶긴 하더라.”
“무슨 소리냐.”
“대공 명령으로 우리가 중요 인사를 호위한다고 로인에 갔었잖아. 거기서
습격이 몇 번 있었거든.”
“습격?”

“지금 생각하면 대공이 거기에 아들을 숨겨 둔 거라 착각해서 습격을 해

왔던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히 미끼였던 거지. 씨발, 한두 번은 죽을


뻔했는데.”
그러고 보니 대공은 체즈번을 비롯하여 라도반 등의 일행을 로인으로
보내던 날, 나에게 그곳에 자기와 누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다고
말을 했었다.
그때 나는 이런 얘기를 나한테 대체 왜 하나 싶어서 당황했고, 쌍둥이
남매가 근친상간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충격에 빠져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러려니 했는데,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니, 거짓이 아닌 게 없었다.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이도 아니었던 거잖아.
물론 나를 뭘 믿고 진실을 전부 말을 했겠냐마는…….
어쩐지 확 질리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판을 짜고 있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 역시도 그 판 위의 장기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대공은 나를 이용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모르겠다.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무언가 이용한 게 아니라 해도 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기분이 좋
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야, 일릭. 너 말이다.”

신나서 한참을 떠들던 체즈번 녀석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았다. 늘 촉새처럼


떠들던 녀석이 전에 없이 진지해진 모습에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흠. 대공 밑에서 대우도 잘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용병대로 돌아올 거냐?”

“……무슨 소리냐. 계약 끝나면 돌아가야지.”

“…아니, 뭐.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그 순간 조금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니까…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용병대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용병들과 떨어져 대공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다.
…변절자로 오인 받고 있다. 혹은 마일을 죽인 범인으로 몰리고 있거나.

만약 리리엘이 용병대에 가서 내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밝혔다면, 굳이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 낸 나를 수상하게 여길 터. 그녀와 내가 조우했던 곳도
사건이 발생한 현장과 무척이나 가까웠다. 일이 귀찮아질까 봐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었을 뿐 나는 결백하다는 변명은 통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아니, 아버지의 마음으로는 설령 결백하다 해도 범인을 하나 만들어
분풀이를 하고 싶지 않을까.
“일릭. 나는 널 내 친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래도 오래 봤잖냐.”

…친구라고 할 정도로 끈끈한 사이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용병대

안에서는 제법 붙어 다녔기 때문에 동료애가 남들보다는 조금 더 있는


편이기는 했다. 그래도 갑자기 친구 어쩌구 하는 소리가 좀 소름 끼치긴
했다.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하는 사이가 절대로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놈이 그런 간지러운 소리를 할 정도로 어쩌면 상황이
나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나는……. 뭐, 내부 상황을 너한테 정확하게 다 얘기는 못 하지만,
네가 대공 아래 남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이것은 경고였다.

체즈번이 용병대를 배신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고.
“또 대공이 자기 사람은 잘 챙기지 않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용병대가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돌아오지 말고,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대공의 곁에 붙어 있으라고.
“……고맙다.”

내 입에서 짧은 인사가 튀어나갔다.


체즈번 녀석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신나게 떠들어 댔던 아까
전과는 달리, 멋쩍은 얼굴에 곤란하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는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파빅한테는 그냥, 네가 아무래도 대공 곁에 남을 것 같다고 말하련다.”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으로 조금 웃었다. 체즈번 이 새끼, 용건 없이 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문병을 왔다고 하더니 사실은 용건이 있었다.
놈은 그냥 온 게 아니었다. 파빅이 가서 나를 떠보라고 보내서 온 것이다.
다만 파빅보다 내 편에서 나를 더 생각해 주는 고마운 놈이었다. 그래서
내게 용병대로 돌아오지 말 것을 경고하고, 파빅이 이번 방문을 사주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쯤 되니 내가 지금 감시를 받고 있단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알즈에서 귀환하는 날부터 지금까지 아팠다는 걸 용병대가 어떻게
알았겠느냔 말이다.
“…야, 난 이만 가 본다. 몸조리 잘 해라.”
체즈번은 내게 퉁명스러운 인사를 건네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솔직히
놈이 고마웠다. 놈의 방문과 경고로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던 것이다.
용병대에서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감히 위험을
감수하고 대공이 머무는 성 안에 있는 나를 감시할 리가 없을 테니.
……어떻게 할까.

체즈번을 보낸 뒤 다시 침대에 늘어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네가 대공 아래 남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용병으로 사는 것보다 대공의 수하로 사는 편이 더 좋을


것이었다. 봉급이나 위험도도 그렇거니와, 나아가 왕이 될지도 모르는
고귀하신 분의 수하가 되는 게 더 명예롭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전에 내게 시비를 걸었던 토비처럼 내 신세를 부러워하는 놈들도 분명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마 내가
그런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나도 용병대로 돌아갈지 말지를
조금은 고민을 했을 것도 같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대공과
맺은 계약이… 정말 남자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하기 힘든 행위를 해야
하는 그런 계약이라는 점이 정말 커다란 문제다.
그래서 나는 마일의 죽음이 이대로 묻히고 나서, 대공과의 계약이 어느
시점에서 종료가 된다면 용병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평생 해 온 게
용병질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또 내
고향 달칸을 꽤나 좋아했으니까.
…다른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던 인생이었다.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조차 귀찮아서, 내가 가장 잘 하고 익숙하게 하는


짓을 하며 적당히 돈을 벌고 살다가 생활력이 좋은 여자를 만나 모은
돈으로 가정을 꾸려서 살면 되겠다고 적당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대공의 하인이었다.
그를 본 순간 마치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사실 몸살 기운이 거의 다 가셔서 살 만했음에도 갑자기 온몸이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에게 있는 선택지는 그를 따라가는 것밖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대공의 방에 들어갔을 때, 대공이 나를 반겼다. 같은 성에 있었지만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어깨를 덮으며 내려오는 은빛의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가 여전히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나를 바라보며 웃는 낯이 참 쉽게도 사람을 홀릴 법한
그런 얼굴…….
“동료가 문병을 왔다 갔다지.”
“……예.”

“그대가 몸이 약해서 큰일이야.”

…씨발놈아,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쟁터에서 굴렀어도 열 한 번 난

적 없고 기침 한 번 해 본 적이 없어요.
갑자기 또 속에서 울컥 치솟아 오르는 바가 있었으나 나는 다시 한번 꾹
눌러 참았다. 그러면서 최대한 순종적인 표정을 지으려 애를 썼다.
대공을 자극해서 또 며칠 전 밤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대공이 나한테 그런 짓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내가 아무리 눈치를 보고 조심한다 해도 피해 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그리고 또 씨발… 대체 언제까지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내적 갈등에 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모르겠다. 내 앞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막막하고 암담했다. 혼자 있어도 머릿속이 복잡할 상황인데
대공의 면상을 보니 심란함이 두 배였다. 대공이 입을 열어 헛소리를 해
대니 진짜 솔직히 존나 패 버리고 싶었다.
“이리와, 일릭.”
문득 대공이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시 흠칫했으나 나는 저항 없이 그에게로 끌려 들어갔다. 순종적인 몸과는
달리 머리와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대공이 내 엉덩이를 쥐었을 때에는…….
엉덩이 사이, 다리 안쪽까지 저릿해 오는 느낌이 절로 들어 나는 입 안쪽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대공은 그런 내 입에 제멋대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참기 싫다. 아아, 참기 싫은데…….”

…씨발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아주 안달이 나 죽겠다는 투로 나를

끌어안고 징그럽게 입을 맞춰 댔다. 나는 목석같이 선 채로 그에게


입맞춤을 받으며 굳어졌다.
“…역시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참아야겠지.”

애틋한 속삭임… 만으로도 환장할 지경인데, 쪽, 간지러운 입술이 재차 내


입술에 붙었다 떨어졌다.
“그간 그대가 아파서 고생을 했으니.”

“…….”

내 머리카락, 만져도 좋아.”


…하……. 뭐 대단한 상이라도 내리는 듯한 이 말투. 다시 들어도 사람 참


어이없게 만드는 이 말투.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 은빛의
머리카락은 보는 것만큼이나 만지는 감촉도 신비로웠다. 뻣뻣하기 짝이
없는 내 머리카락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워서 과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만지는 맛
이 있기는 했다. 그게 어떤 포상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최대한 부드럽게 쓰다듬고 빗어 내리며 나는 한
가지를 결심했다.
더 깊은 생각을 하기도 지쳐서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고 나니 그것이 몹시 그럴싸해 보였다. 기가 막히게 합리적이었다.
“하아, 일릭…….”

내 거구를 품에 안고 제 머리를 맡긴 채로 입을 맞춰 오는 남자를 보며, 나는


확실히 결정을 굳혀 버렸다.
도망가자.
황공하옵게도 대공 각하께서 내게 머리카락을 만지는 영광을 내려주신 날.
나는 드디어 도망을 결심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6.

이른 새벽. 나는 성의 아침이 막 시작될 무렵 방을 빠져나왔다. 돈이 될 만한


걸 최대한 가져오고 싶었지만 내가 소지하고 있는 것은 대공이 준 갑옷과
검, 하인이 챙겨 놓고 간 옷이 전부였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그것들이라도
챙겼다.
나오는 길에 마구간에서 말이라도 한 마리 훔쳐서 나오고 싶었지만 들키기
십상이라 포기했다. 대공이 준 갑옷은 아주 좋은 철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 팔면 말 한 마리 살 돈이 되기를 기대했다.
내가 한밤중이 아닌 이른 아침을 택한 이유는 그나마 요새를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적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은 아니었고 전쟁이 곧 끝날 무렵이라지만, 미로
스의 군대는 여전히 수성 중이었다. 성문을 굳게 걸어 닫고 안을
지키고 있는 만큼, 적이 들어오기도 어렵지만 안에 있는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기도 힘든 상황인 것이다.
당연히 야밤에 성문을 몰래 열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간 너무 눈에 띄어서 붙잡힐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성벽에 줄을
걸어 내려가자니 성벽이 너무 높아 시도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 내가 노릴 수 있는 것은 이른 새벽, 백성들의 통행을 위해
성문이 개방될 때뿐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개방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시라 해도 요새에서 나가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늘 있었고, 그
사람들에게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수성도 공성도 해본 나였기에 이 시르반
요새에도 당연히 그런 불법적인 개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새에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당한 뒷돈을 받고 남몰래
그들을 내보내 주는 중개인 놈들은 이 시르반 요새에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활동을 할 만한 성문으로 향했다.
물론 중개인에게 줄 돈은 없었다.
“허억?!”

그러나 놈에게 먹여 줄 주먹은 있었다.


뻐억, 소리와 함께 내 주먹에 명치를 꿰뚫린 놈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바닥으로
쓰러졌다. 단숨에 기절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맷집이 있는
놈이었다. 명치를 맞은 덕분에 당장 비명을 지르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다시 손을 들어야 했다. 놈을 기절시켜야 했으니 말이다.
“자, 자, 자, 잠깐. 잠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놈은 가까스로 팔을 들어 제 머리를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왜, 왜. 갑자기, 무슨.”

“감히 전시에 성문을 멋대로 개방하려 들다니. 이들 중에 첩자라도 있으면

어쩔 생각인가.”
“크흑, 허억, 그건.”

“너를 잡아 대공께 바치겠다.”

내가 하는 말은 물론 전부 개소리였다. 하지만 중개인에게 지불할 돈이


없는 이상, 놈을 기절시키고 돌파를 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나. 혹시라도
놈이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를 대비해서 적당히 거짓말을 쳐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주먹에 다시 한 대 맞기 전, 놈이 숨 가쁘게 외쳤다.
“내, 내가 없으면 성문을 지나갈 수 없어…!”

“……누가 성문을 나간다고 하던가.”

“당신, 도, 나가려고 하는 거잖아. 아니면 씨발, 치든가!”

그 말은 내 행동을 멈추게 했다. 수도로 뒷목이라도 내려쳐서 기절시킬까


고민하고 있었던 나는 차마 놈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배를 감싸고 바닥에 엎어져 있던 놈은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자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놈이 다시
어깨를 흠칫했다. 그러나 내가 저를 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 입을
쭉 내밀며 꿈틀꿈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 지도 나가려고 했던 주제에.”

“아직 덜 맞았나 보군.”

“아, 아닙니다요, 나으리. 어? 기사야? 기사신가 보네.”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상반신만 판금 갑옷을 입고 있는 내가 기사로 보인 모양이었다.
기사라는 소리에 아직 도망을 가지 못하고 있던, 중개인을 통해 성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가려 했
던 다른 백성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정말로 기사에게
걸린 줄 알고 다들 절망한 얼굴이었다. 어떤 이는 훌쩍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아니, 기사님이 왜 성을 나가요, 지금?”

“성문의 문지기가 중개인에게 매수되었다는 소리를 내가 지금 들은 것

같은데.”
“……아니, 그게 말입니다요, 나리.”

“안내해라.”

“……아니, 그게…….”
“저들과 함께 나도 성에서 나갈 거니까.”
“……예?”

“네가 있어야 성문을 나갈 수 있다면서. 혹시라도 중간에 배신하면 내가

너만큼은 꼭 죽인다는 걸 명심하고.”


중개인 놈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그러나 놈은 똑똑했다. 똑똑한 머리를 갖고 있으니 성문을 지키는 보초를
매수해 사람들을 성에서 내보내 주는 이 짓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예에,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요, 기사 나리.”

밀짚색 머리카락에 옅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서비스 정신이 물씬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자, 자. 그럼 다들 이동하십시다.”

놈이 앞장을 서자, 내 눈치를 보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놈의 뒤에 바짝 서서 놈을 뒤따랐다.
성문 인근이 모임장소였기에 성문까지는 금방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보초병이 다가오는 중개인놈을 보고 눈을 반짝 떴다.
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다만 중개인의 손에서 보초병의 손으로 주머니
하나가 건네졌을 뿐.
그 뒤에 거대한 성문의 구석에 난 조그마한 문이 열렸다. 내가 통과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나올 때까지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 통과였다.
미로스 대공이 아무리 철혈과 같이 냉혹하고 엄격한 규율로 통치를 한다
해도 이런 비리까지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사람들은 저 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길을 찾을
것이었고 별 수 없이 불법이 횡행하기 마련이다.
여차하면 중개인놈은 물론 보초병까지 두들겨 패서 기절시키고 성문을
나설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문을 나선 뒤에도 내가 별 다른 말이 없자, 같이 나온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혹시라도 내가 잡아서 해코지를 할까 무서워하는
모양새로 꽁무니를 뺐다.
성문 앞에 남은 것은 나와 중개인 단둘뿐이었다.
“어, 이대로 그냥 보내시는 겁니까?”

도망치는 사람들을 그냥 보고 있는 게 의아했던 것일까. 중개인이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왜 남아 있나.”

중개인은 성 안에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내일 아침에도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내보내 주며 돈을 챙기지 않겠는가.
“기사님 덕분 아닙니까.”
놈은 입을 비죽이 내밀며 투덜거렸다.
“기사가 떴다는 거 소문 파다하게 날 텐데 내가 이 짓 계속 할 수 있겠어요?

괜히 요새 안에 남았다가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기사도 몰래 내보내 줬다는 걸로 더 유명해질 것 같은데?”

“참 나. 이 업계 일을 너무 모르시네. 됐고요. 기사님 어디까지 가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와, 매정한 거 봐. 사람 인생 하나 오갈 곳 없게 만들어 놓고선!”

헛소리를 하며 떼를 쓰는 놈을 오래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새벽의 어스름으로 검푸르던 하늘이 노랗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제 밤에도 몸이 좋지 않다고 해 두었으니 아침부터 대공이 나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침에 하인이 식사를 가지고 온다 해도 이불 안에 베개를
잔뜩 말아 두었으니 금방 알아채지는 못할 테고. 대공이 나 하나 잡겠다고
추적해 올 리는 없겠지만, 그 미치광이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최대한 멀리 가야 했다.
또 혹시라도 달칸 용병대가 내 뒤를 쫓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무어라 시끄럽게 떠드는 놈을 무시하고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세리포브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아니, 기사님. 기사 양반. 세리포브 쪽으로 가는 거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만 따라와.”
“이 양반 이거, 나한테 첩자 내보낸단 소리하더니 본인이 첩자인 거 아니야?

지금 이 시국에 세리포브로 왜 가? 이 시국에??”


쉴 새 없이 조조거리는 게 체즈번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체즈번과는 결이
다른 수다스러움으로 나를 귀찮게 만드는 놈이었다. 말 많은 놈을 상대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이 새끼 그냥 검으로 쿡 찔러서 기절시킬까 하는 욕망이 점점 커져만 갔다.
“당신 기사 아니지.”

놈이 그렇게 말한 순간에는 더욱.


나는 결국 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 손잡이를 꽈악 손에 쥐었다.
뺀질거리는 면상을 보니 그냥 확 죽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 어, 어? 잠깐. 잠깐만요, 기사 나으리. 이놈이 실언을 했습니다요.”

“그만 따라오라고 했다.”

“아, 중간까지라도 같이 가요! 기사님 노자는 좀 있어요?”

꽤나 아픈 곳을 쿡 찌르는 중개인 놈의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녀석이 씨익 웃었다.
“나가야 하는데 돈 없어서 기사인 척 나 협박한 거 아냐. 안 그래?”
“……하.”

갈 길도 바쁜데 웬 파리새끼 같은 게 귀찮게.


그런데 문득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저 중개인놈은 요새에서 나가려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은 게 있을 것이다. 그 중 일부를 문지기에게
건넸지만 분명 남은 게 있을 터.
“…아니, 이분 갑자기 눈빛이 무섭네. 저기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거든요? 날 죽이고 돈 뜯어갈 생각일랑 접어 둬요.”


아오. 이 새끼는 뭔데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
진심으로 놈을 죽일까 하는 충동을 잠시 느꼈던 나는 아까 명치를 제법
세게 때렸음에도 놈이 버텨 냈던 것을 떠올렸다. 의외로 체격이 좋았고
옆구리에는 검을 차고 있는 게 싸움 좀 해 본 놈 같았다. 상대를 못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대꾸도 없이 몸을 다시 휙 돌려 걸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갈 길이
멀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근처 마을이라도
들러서 돈을 좀 구해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걸어서 저녁에 도착이나
할지도 미지수였다.
“이렇게 합시다. 도르만까지는 같이 가요. 당신 그 갑옷 팔아서 노자 할
생각이잖아?”
내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는 놈에 솔직히 놀랐다.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더 속도를 냈다.
“일단 가면서 쓸 돈은 내가 낸다. 거기서 물건 파는 것만 나한테 맡겨요.

내가 값은 잘 쳐 줄 테니까, 엉?”
아. 사기꾼 새끼. 하는 말 들어보니 견적이 딱 나왔다. 나는 놈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나 놈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기사인 척하는 기사 아닌 양반, 거 말수 되게 없으시네. 같이 좀 가요오!”

아니… 씨발 시작부터 뭔가 마가 제대로 낀 것 같다. 대공을 피해서 도망


나오는 길에 어째 요새를 손쉽게 빠져나왔다 했더니 금붕어 똥 같은 게
들러붙었다.
길을 따라 빠르게 걷는 내 뒤를 놈은 지치지도 않고 따라왔다. 지치지도
않는 것은 놈의 주둥아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계속 무시한다면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겠지. 더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나는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놈을 무시했다.
일단은 세리포브로 더 깊숙이 들어갈 생각이었다. 전쟁이 이대로 끝이 날
분위기이니 대공이 설마 세리포브로 쳐들어오지는 않을 터. 세리포브의
마을이나 도시-가장 가까운 곳이 놈이 말한 도르만이라는 도시였다-에
도착하면 입고 있는 갑옷을 노획한 물건이라 속여 팔아 노자를 마련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오시안 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해가 높이 떠오르기 전에 나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출발에 대한 어떤 설렘일까. 혹은 뒤에 남겨 두고 온 것에 대한
불안감일까.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

그리하여 내가 어디에 도착했냐 하면, 애당초 예정했던 세리포브의 도시인


도르만은 아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도리어 내
가 도달한 곳은 미로스 공국의 영토인 라싼이라는 도시였다.
베르바니 지역을 벗어나서 위치한 도시는 미로스와 대륙을 연결하는
커다란 상업도시로 유명했다.
대공을 피해 세리포브로 가려던 내가 왜 라싼으로 오게 되었는가 하면, 모두
다 저 베슬란이라는 놈의 생각이었다. 황토 빛깔의 누런 머리카락에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뺀질뺀질한 녀석은 기어코 여기까지 나를
따라붙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다.
우선 놈은 내 생각보다 시르반 요새 주변의 지리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무렵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마을에서 잠자리를 구해 온
것도 녀석이고 식사를 해결하게 해 준 것도 녀석이었다. 나는 놈을
경계했지만 놈의 뻔뻔스러움에는 어쩐지 말려들고야 말았다.
그곳에서 놈은 수완 좋게도 침낭 따위를 구해 왔다. 그즈음에는 더는 놈을
무시하기도 힘들고 그만 따라오라고 윽박지르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같이
다녔다. 되도록 작은 길로 가자는 내 말에 놈은 숲속에 난 길로 나를
안내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짐승을 잡아 함께 끼니를 해결하는 사이
정도는 되었다.
조금 큰 규모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내가 입고 있던 갑옷을
대장간에 팔아넘기고 말을 두 마리 사왔다. 값을 잘 받으리라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말을 두 마리나 끌고 와서 나를 꽤나 놀라게 만들었다. 대공이
나에게 하사한 갑옷이 그렇게까지 좋은 물건인가 싶어서 놀라는 마음도
조금…….
어쨌든 드디어 말까지 생겨서 본격 도망을 칠 준비가 되었을 때, 놈은
지도를 꺼내 보이며 나에게 제안 한 가지를 했다.
내게 특정한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미로스 남쪽의 무라드 왕국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무라드 왕국이라면 이번 전쟁에서도 연합군과 뜻을 함께 하지 않고 미로스
편을 들어 군사를 지원하겠다고 했던 나라였다. 비록 전쟁이 터무니없이
빨리 끝나서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마무리 되었지만, 공국과 무라드가
서로 끈끈한 동맹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미로스를 떠날 생각이라면 적국이 아닌 동맹국으로 가라는 것이, 베슬란의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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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역시 대도시가 좋아. 그렇지 않아요, 형님?”


말을 끌고 성문을 통과하며 베슬란이 뺀질뺀질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을 불법으로 성 밖으로 내보내 주던 중개인 노릇을 했던 만큼 놈은
내 생각 이상으로 능력이 출중했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어떻게든 구해
오는 것뿐만 아니라, 통행증까지 여분으로 가지고 있었다. 물론 위조품, 혹
은 타인의 것이었다.
나 역시 내 이름으로 된 통행패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미로스에서 그것을
쓸 엄두는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대공이 나를 찾는다면-내가 뭐라고
대공이 굳이 나를 찾아다니겠냐마는- 꼬리를 잡히기가 쉽기 때문이다.
애당초 통행증 때문에 미로스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내 말을
듣고 놈이 품속에서 여러 개의 통행증을 꺼내 하나 쓰라고 건네기 전까지는
말이다.
“밥부터 먹을까? 라싼에 싸고 맛있는 집이 많이 있거든. 내가 맛집 공유 안
하는 사람인데 형님한테는 특별히 하나 알려 줄게.”
“일단 상단부터 가고. 상단이 이미 떠났으면 라싼으로 온 게 말짱 도루묵

되는 거잖아.”
“아, 이 형님 진짜 사람 안 믿네. 출발일을 아슬아슬하게 맞췄대도요.”

“이제 와서 나를 받아 줄지도 미지수지.”

“내가 또 그 정도 능력은 있지.”

분명 호의를 보이고 있는데 놈의 웃는 얼굴이 괜히 밉상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만만한 놈의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냥 괜히 때리고
싶은 상이었다.
“네가 티무르 상단에 그런 끈이 있다는 걸 아직도 못 믿겠는데.”

“하아, 여기까지 와 놓고선, 섭섭하게시리. 알겠어요, 갑시다, 가. 가서 내 말

틀린 게 있나 봅시다, 참 나.”
놈은 투덜거리며 나를 앞서 걸었다. 나는 그런 놈의 뒤통수를 빤히
주시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7.

티무르 상단은 대륙 전역에서 무역을 하는 거대한 상단이었다. 대륙 곳곳에


중개소를 두고 특산품을 교역하는 상단은 꽤나 긴 거리를 이동해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용병 중에서는 상단의 호위로 먹고 사는 놈들도 있어서
나도 알고 있었다.
베슬란은 이 무렵이면 티무르의 상단 중 미로스와 무라드를 오가며 교역을
하는 상단이 라싼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라싼에서 출발하여 미로스
공국의 남쪽 도시들을 거쳐 무라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돈도 없는
처지에 상단 호위로 들어가면 숙식을 해결하면서 무라드까지 갈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은 솔직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루트 중에
가장 괜찮아 보였다.
남쪽의 무라드는 달칸 용병대가 한 번도 활동해 본 적이 없는 국가였다.
그래서 더욱 구미가 당겼다. 더운 기온과 그 남단의 사막으로 유명한
왕국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서 마음에 들면 정착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미로스의 영토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상당하다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전쟁으로 빼앗은 베르바니 지역에 제
후계자를 숨겨 두었던 대공을 떠올렸다. 도리어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미로스의 대공을 피해 도망친 내가 미로스 남부를 관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미로스를 통과해 그 동맹국으로
가는 게 어쩌면 적국으로 피신하는 것보다 나을 것도 같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힌 통행증을 들고 있었으므로, 미로
스 내에서 내 이름을 숨긴 채 활동할 수 있었다. 상단에서 나를 호위로
받아 주기만 한다면 일이 썩 괜찮게 풀릴 것이었다.
“형님, 여기서 기다려요.”

언제부턴가 기사님이나 나리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호칭 대신 더 기분


나쁜(?)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베슬란놈은 커다란 상단 건물로
혼자 쏙 들어가 버렸다. 부유한 상단답게 라싼 지사의 건물은 중앙 광장의
가장 목 좋은 자리에 떡하니 위치해 있었다. 건물의 외양부터가
휘황찬란했고, 티무르라는 간판 역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사실 상단
에 호위로 넣어 주겠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어디 뒷골목에
나를 팔아넘기려고 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티무르 상단의 간판 앞에 섰을 때에야 나는 의심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안에 들어간 베슬란을 기다리며 그 광장 가운데에 위치한 화려한
분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볕도 좋고, 기온도 적당한 날이었다. 아무리 전쟁이 끝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은 전시였음에도 라싼의 분위기는 쾌활했다. 심지어는 악사들이
광장에 나와서 악기를 연주했고 사람들이 흥겹게 박수를 치며 그들을
구경한다. 비눗방울이 햇살 아래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와중에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 소리가 살갗에 닿는 햇살만큼이나 내 가슴
속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전시인데. 라싼은 미로스의 영토 중에서도 베르바니와 가장 인접한
도시인데. 신기할 정도의 평화로움이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상업 도시라 도시 자체가 부유하다는 것도 이
평화에 한 몫을 할 것이었다.
사실 이 모든 평화는 지배자인 대공의 안정적인 통치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그러나 세상에 대공만 한 지배자가 또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는
이런 부유하고 평화로운 도시가 또 있을 테고, 그런 도시라면 정착을 하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거기선 뭘 해먹고 살지. 밥벌이 할 것을 생각하면 앞날이

깜깜하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간 내가 벌어 둔 돈 역시 버린 셈 쳐야 할


테니 어느 도시든 정착을 하기에는 꽤나 힘이 들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떠돌이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고민이었다.
물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 정착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문제겠지만.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상단 호위 따위의 일을 하면서 떠돌 생각이었다. 사실
상단을 따라다니며 도망 생활을 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베슬란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하나 찾은 것 같기는 했다.
일단 그가 호언장담을 한 대로 상단에 무사히 취직이 될 것인가가 당장의
문제였다.
“여어, 형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때 뒤에


서 베슬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녀석은 뺀질뺀질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얼굴이었다.
“얘기가 잘 됐나 보군.”

“아, 나만 믿으라니까. 타이밍 아주 좋아요. 내일 당장 출발이라고 하네.”

“당장 내일?”

“그렇대도. 내 말 안 듣고 하루 더 지체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여기

고용인 숙소에서 하루 묵고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한다니까, 들어가서 같이


자세한 얘기 들읍시다.”
베슬란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화려한 복도가 우리를 맞이했다. 상단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방긋
웃으며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경계심을 품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려한 응접실에 안내를 받아
어느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티무르 상단의 라싼 지부
책임자라고 소개했다. 냉철한 인상에 숫자 계산을 잘 할 것 같은 깐깐함이
돋보이는 여자였는데, 별 다른 말없이 고용계약서를 내밀고 계약 내용을
설명하는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일당은 상당히 짠 편이었지만 무라드 수도까지의 이동에 필요한 장비를
지급하고 숙식을 해결해 준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나로서는 그 정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조건이었다.
나는 계약서를 한차례 꼼꼼히 읽고는 서명을 해 넣었다.
“와, 이 형님, 글씨 읽을 줄도 아는구나?”

라고 베슬란이 용병을 개무시하는 소리를 내뱉어서 나를 조금 짜증나게


하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나를 한번 놀린 놈은 내가 서명을 마치자 그 펜을 뺏어 제 계약서에도
휘리릭 서명을 해 버렸다. 처음에 도르만까지만 같이 가자고 하다가 그
뒤에는 라싼까지 같이 가자고 했던 놈이, 기어코 무라드까지 함께 가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언짢은 시선으로 놈을 보자 놈은 또 뺀질뺀질하게
웃었다. 보고 있자면 사람 속이 뒤집히는 미소라 나는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고용 계약은 끝이었고 하루를 지낼 숙소의 ,

위치를 그녀가 알려 주었다.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계약서까지 썼으니 사기를 당한 건 아니고 말이다.
상단에서 나오자마자 베슬란은 나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말.”

“……누가 떼어먹냐?”

나는 투덜거리며 녀석의 손에 말고삐를 건넸다.


놈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서 나를 더 기분 나쁘게 했다.
“좋았어. 형님은 그럼 숙소 가서 쉬고 있어요. 나는 말 팔아서 돈으로 바꿔

올 테니까.”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같이 간다.”

“허어? 형님 맨날 나한테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 형님이 나를

따라오는 거야?”
히죽거리는 놈의 면상을 한 대 패 줄까 잠시 고민했다. 계약이야 무사히
진행되었고 출발이 내일이라지만, 정말로 출발을 해서 무라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놈을 믿지 못했다. 놈의 말대로 라싼에 도착해서 일이 너무 술술
풀리니 더욱, 상황에 순응하면서도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럼 이름 가르쳐 줘요.”

“반트.”

“와, 이 인간 더럽게 치사하네.”

반트는 내가 빌린 통행증에 적힌 이름이었다. 동행을 하는 내내 나는


베슬란에게 내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냥 저 뺀질뺀질한 인간에게
알려 줄 마음이 당최 생기지를 않았다.
“진짜 따라올 거예요?”

“널 못 믿는대도.”

“어휴, 내가 뭐 길 잃나? 라싼이야 손바닥 안인데.”

“이곳이 고향인가? 아주 잘 아나 본데.”

“뭐, 나야 세상 모든 곳을 다 잘 알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녀석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래요, 뭐, 같이 갑시다. 그래도 말 판 돈은 못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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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 소리 아무도 안 했다.”


그치, 이거는 정당한 대가지. 댁한테 양심 있어서 다행이네.”

여기까지 오는 길에 그래도 필요한 물건에는 척척 돈을 내놓던 놈이 이제와


수전노 같은 소리를 하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을 팔아 벌 돈이
그토록 소중한가. 그리 좋은 말도 아니라 값도 얼마 못 받을 것 같은데.
성 한 채 값은 될 비싼 말도 타 봤던 적이 있어서인지, 이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가당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말은 기본적으로
용병으로서의 내 급여로도 사기 어려울 정도의 고가라는 걸 잠시 잊었나
보다.
……그래, 내가 그렇게 비싼 말을 탔던 적도 있었다. 대공이 선물을

준비했다며 그 말로 승마 연습을 시키고 전쟁터까지 타고 가게 했었다.


알즈로 가던 길에 습격을 당했을 때 잃어버렸지만…….
그 말, 제법 품종이 좋은 비싼 말이었으니 아마 죽지 않고 붙잡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 비싼 말을 용병 나부랭이가 타다가 잃게 되었는데, 대공은 탓하는
소리 한 번 꺼낸 적이 없었다. 전혀 아까워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물론
대공의 말은 그 습격에서 죽었으니 내 말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니, 아니. 내가 왜 갑자기 대공을 떠올리며 그가 말을 하사한 순간을
떠올리고 있담. 내가 왜 알즈로 가다가 습격당한 그 순간을 떠올리고, 내가
왜…….
그 뒤에 머릿속에 제멋대로 떠오른 어떤 이미지에, 나는 순간 당황을 해
버렸다. 어둠에 잠긴 나무 그늘 아래.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얼굴. 예상보다
체온이 낮았던 말캉한 살덩이의 감촉 따위가.
내가 미쳐 버렸나 잠시 고민도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 떠오른 적이
없었는데, 굳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다니. 긴장감이 너무 커진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이미지를 애써 지워 버렸다. 괜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입을 다물어 막고 꿀꺽 삼켜 버렸다.
다시금 가슴을 두들기는, 시시때때로 고개를 들곤 했던 불안감 역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자꾸만 떠
오르려 드는 기억들과 함께 모른 척 지워 버렸다. 그 모든 게 이제
더 이상 내가 신경조차 쓸 이유가 없는 일이 될 것이었으므로.
나는 베슬란이 나를 돕는 이유를 모르기에 그의 호의를 믿을 수 없었지만,
일은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숙소에 도착해서 상단의 호위를 위해 모인 다른
용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어, 아침에 일어나서는 지체 없이
출발이었다.
상단과 함께 이동을 하니 도시를 지날 때에도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대우도 나쁘지 않아서 하루 세 끼 식사를 다 챙길 수 있었다. 호위를 함께
하게 된 용병 중에서는 사냥을 잘 하는 놈도 있어서, 이동 중에 토끼 한두
마리를 잡았다가 식사 시간에 같이 구워 먹을 때도 있었다. 야숙을 하는
날은 좁은 텐트에서 구겨져서 자야 했지만 도시나 마을에서 묵을 때는 2인
1실로 숙소가 주어졌다. 전쟁터에서 구르던 내 입장에서는 꽤나 괜찮게

숙식을 해결하는 셈이었다.


물론 마지막 전쟁은 예외로 쳐야 했다. 그때는 감히 전시라 하기 힘들
정도로 편하기는 했었다. 사람의 승마술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안정적으로 태우는 명마를 타고 이동을 했었고, 갑옷이나 내갑의(內甲⾐)도
몹시 질 좋은 것으로 착용했으며 식사 역시 미로스의 대공과 같은 수준으로
먹었으니까. 또한 야영을 할 때도 이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사에서
자곤 했었다.
또 시르반 요새에 있을 때는 독실까지 썼었지. 그때 먹었던 식사가 또 아주
괜찮았다. 성을 빠져나오기 전날 저녁에도 대공과 식사를 했을 때 먹었던
것은 만찬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육즙이 가득하던 고기,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던 고기, 목 넘김까지 훌륭한 고기……. 소와 돼지와 닭이 모두
식탁에 올라왔었던 호화스러운 식탁이었다.
대공에게 그런 수모를 겪고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였고, 다음 날 시르반
요새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꽤나 긴장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많이
먹지 못했던 게 이제 와 후회되었다. 대공의 면상을 보며 밥을 먹는 게 힘든
와중에도 맛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주 훌륭했는데. 그 음식들을 제대로
먹지 못할 몸 상태를 만든 대공놈이 다시금 원망스럽고, 어쩌면 내 인생에
가장 호화로운 마지막 만찬이었을 것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던 게 요즘 끼니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때마다 늘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먹고 있는 것은…….
“형님은 꼭 생긴 것 같지 않게 음식 투정 하더라.”

휴식을 취할 겸 잠시 길을 멈춰서는 건량과 염장한 고기를 넣고 끓인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을 무렵 베슬란 놈이 툭 내뱉었다. 그 말에 나는
괜히 얼굴이 다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동하면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한 적은 물론
없었지만, 속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먹는 데는 불만이 없던 나였다.
전시에는 움직일 수 있는 열량을 채울 수만 있으면 뭐든 만족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걸쭉하게 쑤어진 밀가루 죽이 입으로 잘 넘어가지를 않았다.
먹기는 먹는데 표정이 자꾸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뭐 얼마나 맛있는 걸 먹고 살았는데?”
“그냥 입맛이 좀 없을 뿐이야.”

“아닌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는데, 형님은.”

그거야 시르반 요새를 떠난 이후 먹은 식사라는 것들이 죄 지금 먹는 죽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너희가 어? 그런 거 먹어 봤냐. 쫀득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빵 위에
크림치즈를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신선한 풀과 두툼한 생선살을 얹은 깊은
풍미의 샌드위치 같은 거 말이다.
대공 성 요리사가 고기 요리만 아니라 생선 요리도 참 잘 했었다. 생선
요리는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닌 나조차도 아주 맛있게 먹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에 비하면 저 모닥불에 아무런 간도 없이 구운 정체 모를 민물 생선은
손조차 가지 않았다. 내장 손질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통째로 구운 것을
뜯어 먹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입에서도 비릿한 흙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전에는 나도 그냥 있으면 먹었던 것들인데도.
내가 정말 대공의 그 호화로운 생활에 길들여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곁에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음에도, 그때 먹었던 음식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괴로웠다. 지금 내가 먹어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기분까지
울적해지는 듯 했다.
“하긴, 뭐. 끔찍한 맛이긴 하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베슬란은


저 역시도 맛이 없다는 얼굴로 생선을 물어뜯었다 늘 뺀질뺀질한 .

얼굴이 일그러진 지금은 꽤나 볼만한 꼴이었다.


“…난 소피나 보고 오련다.”

“그냥 저 나무 뒤에서 해결하지?”

“형씨 뭐 안 달린 거 달렸어? 전부터 아주 멀리 가더라?”

안 달린 게 아니라, 있어야 할 털이 없…….


아오, 씨발. 차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라 나는 뒤에서 떠드는 놈들을 무시한
채 수풀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공을 떠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대공이 나에게 썼던 수도승들의
제모제라는 게 얼마나 효과가 강한 것인지 여전히 내 아랫도리는 밋밋하기
짝이 없어서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체모가 자라나려는 기미만 있어도
이렇게 우울하지는 않을 텐데, 쳐다보아도 만져 보아도 맨들맨들했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거시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멀리 와서 소변을 보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저런 의심의 시선들이 들러붙는
것도 지친다.
제모를 당해서 이런 꼴이 된 것을 생각하면, 대공을 떠나온 건 백 번 잘한
짓이었다. 그래, 그깟 따뜻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마음이 편한 게 최고인 것을. 내가 그동안 감당해야 했던 굴욕감이나
수치심 따위를 떠올리면, 맛대가리 없는 죽 따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소변을 보고 근처 냇물에 손을 닦은 뒤 나는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베슬란과 다른 호위들은 식사를 하던 자리를 거의 정리한
뒤였다. 다시 출발이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뱃속이 헛헛했다. 향신료로 양념을 한 육즙
가득한 고기 좀 한 입 크게 먹었으면 좋겠다. 그 맛을 아니까 더더욱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 도피 생활을 끝내고 어느 정도 생활력을 찾을 때까지는 맛없는

음식들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차라리 그 환상적인 맛을 몰랐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입안을 채우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음식 탓에 조금 울적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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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화에 계속
58.
상단의 짐마차들을 호위하며 걷는 것이 하루 종일의 일과였다. 두세 시간
꼴로 한 번씩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식사를 챙겨 먹는 걸 제외하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면 행진을 멈추고 야숙 준비를 했다. 작업을 분담하여
일부는 식사를 준비해 저녁 식사도 그제야 먹었다. 오는 도중에 나는 토끼
두 마리를 잡았다. 베슬란이 상단에서 운 좋게 소금을 구해 와서 토끼에
소금을 솔솔 뿌려 맛깔나게 구웠다. 낮에 먹었던 비릿한 생선 구이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기름진 고기를 먹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날이 그리 춥지 않았기 때문에 모닥불을 하나 피워 두고 그 주변으로
동그랗게 누워 잠을 청했다.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서 누운 놈들도
있었다. 나는 바깥을 택했다.
순번을 정해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불침번은 보통 맨 처음이나 맨
마지막에 서는 게 좋았는데, 운 나쁘게도 내 순서는 네 명 중 세 번째였다.
베슬란 녀석은 첫 번째를 뽑았다며 싱글벙글이었다.
그놈 웃는 낯을 보고 있으면 왜 괜히 짜증이 나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분명
나를 도와주는 고마운 놈인데 말이다.
찌륵찌륵.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나뭇잎이
사사삭 저들끼리 몸을 부빈다.
평화로운 밤. 나는 누운 채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달빛이
밝았다. 새하얀 빛에 주변에는 별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달무리가 없으니 내일도 날이 맑을 모양이다. 쏟아지는 달빛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새카만 밤하늘에 하얗게 떠 있는 달.
그 빛으로 실을 자아낸 것인가 싶은 새하얀 은빛의 머리카락.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그 감촉. 손가락으로 끝을 만지면 그
끄트머리조차 매끄러웠다. 내가 안아 온 그 어떤 여자의 머리카락보다
부드러웠다. 혹시라도 그 머리카락을 살갗 위를 스칠 때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달빛처
럼 드리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 또한 달빛을 받은
조각상처럼 빛이 났더랬지. 눈동자만큼은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처럼
노랗고도 붉었다. 보석 호박(琥珀)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눈동자는
어쩌면 동틀 녘이나 해질녘의 붉게 빛나는 노란 태양을 닮았던 것도 같다.
감히 마주 보기도 부담스러운 눈동자였다. 바라보고 있자면 때로는
지나치게 요사스러워, 파충류의 그것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었는데.
열기로 일렁이는 눈동자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델 것 같은 빛깔이었다.
일릭.
낮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닿은 고막부터 간지러움이 번지는 건
어째서일까. 귓속을 통해 머릿속이 어쩐지 저릿했다. 그리고 배꼽
안쪽으로도. 가슴 끝도 근지러웠다. 그 간지러움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뜨거운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간지러움이 번졌던 곳곳에 전부 열이 오른다.
아…….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는 손이 가슴을 가볍게 쥔 순간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갔다. 그 손이 부드럽게 가슴을 주물러 손가락이 유두를 스친
순간에는 몸이 흠칫 튀었다.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른 부드럽고 간지러운 손길이었다. 그렇잖아도
예민하게 변해 버린 유두 위를 간질이며 손가락이 원을 그렸다. 아주아주
야살스럽고 부드럽게 문지른 위를 몇 번이나 덧그렸다.
으으응……. 나는 한숨처럼 신음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오싹오싹해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손이 살갗을 잔뜩 문질렀다.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복부에 도드라진 굴곡을
쓰다듬었다. 골반을 붙잡은 채 그가 몸을 맞댔다. 엉덩이며 회음부에
열기를 담은 살덩이가 와 닿았다.
나는 그것이 주는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안쪽을 꿰뚫어 잔뜩
치댈 때의 아찔한 쾌감. 이성만 아니라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 쾌감 말이다. 뻐근할 정도로 아래를 벌리고 들어와 내벽을
녹진하게 만들며 진퇴를 반복하는 그 움직임이 주는 쾌감을 알아서, 가슴
속이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쩐지 숨
을 쉬기가 버거웠다. 열기 때문에. 또 기대감 때문에.
안쪽이 근지러웠다. 항문이 자꾸만 발씬거렸다. 내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저 길고 아름다운, 섬세한 손가락이 그 안쪽으로 들어올 때의 감각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진다. 물론 생긴 것과는 달리 과격하게 움직여 사람을
괴롭게 만들기 일쑤였지만……. 그 고통은 통증만 아니라 격렬한 쾌락이
뒤섞인 것이었다. 종내에는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더
괴로울 정도로.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이 헐떡이는 내 입술에 포개어진다. 소름끼치고
징그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내 입술을 빨고 입안을 유영하는 혀에 전신의
성감대가 불을 지른 듯이 오싹오싹한 쾌감을 전해 온다. 그의 가슴에 닿아
비벼지는 가슴 끝이 찌릿했다. 뒤가 근질근질했다. 그 안쪽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허덕이며 안을 꽉 채우며 들어와 박힐 살덩이를 원한다.
아랫도리에 피가 몰려 하복부까지 뻐근함이 일었다. 허벅지 근육까지
당기는 듯했다.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안쪽을 절절 끓게 만들고 결국에는
폭발시킬 그런 쾌락이.
그러나 성기를 만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쪽을…
그보다 더 깊은 안쪽을 만져, 몸부림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쾌락을
느끼고 싶었다. 단단하면서도 두꺼운 것이 안을 가득 채워 안쪽을 잔뜩
찔릴 때의 그 쾌감 속에 사정하고 싶다…….
일릭.
내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은빛의 머리카락. 나를 굽어보는 호박색의
눈동자. 달빛을 등지고 있음에도 빛이 나는 듯한 얼굴을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본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그 이상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는 그 때문에
애가 닳아서…….
일릭. 일릭.
일릭…….
일릭….
“형님!”

“허억…!!”
눈을 번쩍 떴을 때 보이는 얼굴에 나는 막혀 있던 숨을 탁 토해 내며 눈앞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놈을 있는
힘껏 떠밀어 버렸다.
놈이 으악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주먹을 내지른
게 아니라 그냥 밀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절제한 편이었다. 아니, 지금
이라도 한 대 치고 싶었다.
잠에서 깬 순간. 내가 꿈을 꾸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정신이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면서 혼란스러웠다.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로 헐떡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노상이었다. 나는 침낭 속에 있었다. 주변에 다른 용병들의 코 고는 소리가
찌륵거리는 벌레 소리에 뒤섞여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모닥불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려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침낭 속의 몸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헐떡이며
토해지는 숨결도, 몸도 모두 뜨거웠다.
“아이, 씨……. 왜 갑자기 사람을 떠밀고 그래…!”

내게 다가와서 투덜거리는 놈의 얼굴은 밉상에 뺀질뺀질했다. 황토색


머리카락에 엷은 갈색의 눈동자. 누구지 잠시 생각하다가 놈이
베슬란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이어 내가 왜 노상에서 자고 있나 하는 이유도 떠올랐다. 상단 호위
중이었다. 오늘은 야숙을 하는 날이었고 말이다. 하늘의 달을 보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개꿈을 꿨다.

“자면서 왜 그렇게 끙끙대요?”

개꿈. 씨발, 개꿈이었다.


그래, 그게 꿈이지. 꿈이 아니고서야 나한테 그 고통을 준 존재를 보고 그
얼굴에 멍하니 홀려서 헐떡거릴 리가 없지 않은가! 나를 보는 눈빛에
가슴이 속에서부터 간지럽고, 더 만져 주기를 원하고 그럴 리가, 내가 씨발
그럴 리가.......
현실 감각을 찾지 못해서, 또 시간이 지나 현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니
내가 꿔 버린 개꿈에 자괴감이 느껴져서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런 꿈을
꾼 것만으로도 쪽이 팔리고 수치스러운데 내가 입으로 정말
끙끙대는 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씨발……. 막 그렇고 그런 신음소리를 낸
것은 아니겠지. 서늘한 밤공기가 닿은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꿈 꿨수? 무슨 꿈을 꿨는데?”

“…개꿈, 개새끼야, 개꿈.”

나는 괜히 놈에게 성질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침낭에서 완전히


나올 수가 없었다.
내 하반신이 아직도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가 몰려서 다리 사이가
뻐근했다. 그리고 회음부가 막… 막 근지럽고 그랬다. 저 혼자 예민해져서
막 움칠거렸다.
“날더러 개새끼라면서 개꿈을 꿨어? 내 꿈을 꿨다는 거야?”

아 저 뺀질이 새끼 진짜.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언짢은데 놈이 깐죽거리자 아까 그냥 떠밀지 말고
턱주가리를 날려 버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내가 이성을 잃고
대공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기도 했던 인간인데 저 뺀질이가 대체
뭐라고…….
아니, 씨발 나는 왜 또 멍 자국으로 얼룩져 그 여느 때보다 퇴폐적으로
보였던 그때의 하얀 얼굴을 떠올리고 있나.
흠칫 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털었다. 얼굴에 벌겋게 오른 열이
가시지를 않았다. 내 몸의 반응을 내가 통제할 수가 없었다.
“잘 거니까 닥치고 꺼져.”
심사가 더러워서 내뱉는 말도 거칠 수밖엔 없었다. 나는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 어깨까지 침낭을 올리고는 놈을 등지고 눈을 감았다. 옆으로 누우니
적어도 그 달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 좀 나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달이 밝기는 왜 이렇게 밝은지, 또 코 고는 소리들은 왜
이렇게나 거슬리는지 잠이 오질 않았다. 몸에 오른 열은 쉬이 식지를
않아서 더 죽을 맛이었다.
…씨발, 내가 안 뺀 지 며칠 되기는 했다지만, 그런 개꿈을 꿀 줄이야.

황당하고 민망해서 내가 나를 패 버리고 싶었다. 그다지 욕구불만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더욱 황당했다. 이 나이를 먹고 여자를 안는 꿈을 꿔도
황당할 판에… 씨발, 뒤가 막 어, 막 그렇게, 어? 씨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게 다
대공 그 개새끼 때문이었다. 그가 오일 대신에 썼던 최음제의
여파가 아직 안쪽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예민하게 개발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박히고 싶다는 꿈을 꿀 리가 없었다. 아무리
대공과의 섹스가 여자와 하는 섹스보다 더한 쾌락을 준다 해도, 씨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아팠는데. 그렇게 고통스럽고
무서웠는데...!
게다가 꿈 내용이 그게 무어란 말인가.
대공의 꿈은 늘 뱀 꿈이었다. 하얀 비늘에 노란 눈을 가진 징그러운
파충류가 나와서 몸을 휘어 감고 희롱하는 그런 기분 나쁜 종류였다.
그런데 이번에 꾼 꿈은 대체. 열에 가득 차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이
번지기라도 한 듯이 몸이 뜨거워지고 그가 나를 세상 다정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꿈이라니.
뱀꿈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는 꿈이었다.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다.
대공과의 섹스가 너무 폭력적이고 과격한 데다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성감을 강요하니까 거기에 길들여져서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꿈을 꾼 걸 설명할 수가 없었다. 최악이었다. 그냥 다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진작 도망쳤어야 했는데.

깊은 회한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면서 잠에서 깨서인지 다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있었다.
이전에는 맨바닥에서도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었던 내가,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며칠째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마을이나 도시에서
투숙을 하는 날이면 싸구려 여관의 침대에서 자니까 사정이 조금 낫다.
그러나 오늘처럼 노숙을 할 때는 침낭 하나에 의지해서 자야 하는 탓에
등이 배겼다. 어떻게 누워도 편하지가 않으니 잘 수 있을 리가 있나.
설령 텐트에서 잔다고 해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바닥이 딱딱한 것은 다를
바 없는 데다가, 텐트에서 여러 놈들과 구겨져 자야 하니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했다. 움직일 때마다 옆에서 자던 놈의 몸에 손이 닿아 흠칫대며 깨기
일쑤였다.
내가 기척에 예민하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다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놈들과 부
대끼는 걸 견디지 못했다면 용병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옆에
놈이 코를 골거나 말거나 잠을 자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의 나는 대공 성 별관의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
구름 같은 푹신함과 몸을 감싸는 시트의 부드러움을 말이다. 몸을 대고
있으면 자고 싶지 않아도 스르륵 잠들게 되는 그 안락함을 아는데 이런
땅바닥에서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공과 함께 전쟁터로 갈 때 썼던 막사의 매트가 그립다. 그 매트가 하급
여관의 침대보다 편하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역시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이…….
에이, 씨발. 내가 또 뭘 생각하고 있담.
“형님, 안 자요?”
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베슬란놈이 물었다. 물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몸에 올랐던 열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식어갔다. 아랫도리도
가라앉고, 나를 괴롭게 하던 안쪽의 근질거리는 욕구도 차츰 잦아져 갔다.
그러나 그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여기저기 배기는 몸으로 끙끙거리며, 결
국 내 불침번 순서가 될 때까지 잠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이동해서 우리는 비스카스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미로스
남부로 가는 관문과 같은 곳으로 여행자나 상단이 많이 드나들어 숙박업이
발달한 동네였다. 숲 속에 위치해 있었지만 남부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기에 이 마을을 경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은 도시에 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상단은 늘 사용하는 숙소가 있는
듯이 여관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드디어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잔다는 생각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찌뿌둥하고 여기저기가 결렸던 것이다. 하급 여관의 침대가 그리
좋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바닥보다는 나았다. 얼른 들어가서 몸을 뉘이고
싶었다.
“형님.”

여관 앞에서 방 배정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 베슬란이 말을 걸었다.


“들어가면 수염 좀 깎아요.”
…아주 정색을 하고 한 소리치고는 개소리라 나는 잠시 놈의 말을 이해하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못했다.

“10년은 더 늙어 보인다고.”

“맞아. 형씨 깔끔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다른 놈들까지 동조를 할 정도로 내 상태가 좋지 못한 것 같았다. 일단 잠을


너무 못 자서 얼굴이 초췌해졌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런데 깔끔한 거랑
수염이 무슨 상관이지. 정작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한 놈은 턱수염이
덥수룩한데 말이다.
“계속 기를 건데.”

나는 며칠을 면도하지 않아서 까슬하게 수염이 올라온 턱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면도를 하면서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르기
시작했다. 노숙이 많아졌을 때는 일일이 면도를 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내버려 뒀고, 수염이 자라다 보니 아예 덥수룩하게 길러서 하관을 가리면
약간의 변장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거 도망자 티 되게 내네.”

그 속내를 읽은 듯이 베슬란 놈이 작게 중얼거렸을 때, 내 이마에 빠직


핏줄이 올라왔다. 깐족거리는 놈의 정강이를 발로 찬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으악!!”

그리 세게 찬 것도 아닌데 놈은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끙끙거렸다.


덕분에 이쪽에 이목이 집중되어 나는 놈의 뒤통수를 한 대 더 쳤다.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놈이 원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늘
뺀질거리는 얼굴만 보다가 아파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상판을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이상하게 밉상인 놈이었다.
“뭔 말을 못 하게 해!”

놈이 버럭 외쳤지만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자 놈은 바짝 열이


오르는지 발끈한 얼굴을 해 보였다.
베슬란이 뭐라 또 내 속 뒤집을 얘기를 꺼내려 했을 때였다.
“다른 여관으로 갑시다.”

여관에 방을 잡으러 갔던 책임자가 나와서는 일행에게 말했다. 그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다른 용병대랑 예약이 겹쳐서 방이 없다고 하네요. 여관에서 대체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숙소를 소


개해 줬으니, 그쪽으로 가야겠어요.”
“티무르 상단이랑 계속 일하던 여관 아닌가요? 무슨 예약이 겹쳐?”
음 상대가 대공 각하의 명령을 수행중인 거라……. 여관 쪽에서도 어쩔 수
“ ,

없는 상황이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대공 각하.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용병대 이름이 뭡니까.”

책임자에게 여태까지 한 마디도 건 적이 없었던 내가 그렇게 물은 것은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대공 각하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내 심장은 불안감에 요동을 쳐 댔다.
심장은 격렬하게 박동하는데 흉곽은 바짝 조여들었다. 불길함에 등골이
서늘했다.
내가 질문을 한 것이 의외라는 듯, 책임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봉숭아 씨앗 벌어지듯이 톡 벌어졌다.
“달칸 용병대라고 하네요.”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59.

상단의 일행들은 짐과 함께 이전의 여관에서 소개를 한 다른 여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넉넉히 객실 여유가 있었고 상단이 원하는 정도의 보안이
보장된 창고도 있어서 책임자는 만족스러워했다.
상단과 함께하는 모두가 방을 배정받았다. 2인 1실로 나는 베슬란과 한
방이었다. 오랜만에 지붕 아래 침대 속에서 잘 수 있는 날이었다. 급히
옮기게 된 여관은 여태까지 지나오며 묵었던 그 어느 여관보다 방이 넓고
쾌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팔자가 아니었다.
방에 발을 들이기는 했지만 짐을 풀지도 않았다. 베슬란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뭐 살 게 있으니 먼저 씻으라는 말로 녀석을 욕실로 밀어
넣고는 홀로 여관을 뛰쳐나왔다.
달칸 용병대가 이 마을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마당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급히 나왔지만 거리에서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혹시라도 급히
행동하다가 눈에 뛸 것이 두려워 나는 여행 도중 구매했던 로브로 몸을
감싸고 후드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숨긴 채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
객관적으로 나의 상황을 보자면, 나는 사실상 탈영병이었다.
시르반을 떠났을 때는 전시 상황이었다. 아무리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평화적인 해결을 앞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휴전 협정이 오간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 와중에 내 임무는 대공의 곁에서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대공의 곁에서 도망쳤다. 이것을 탈영 아닌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용병대가 나를 마일 살해범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붙잡힌다면
즉결처분을 당해도 억울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씨발, 이래서 내가 미로스 안을 돌아다니기 거북해 세리포브로 가려던
거였는데.
길거리에서 덩치가 큰 사내들을 보면 혹시라도 아는 얼굴일까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며 나는 후드를 더욱 눌러썼다. 하지만 후드로 내 얼굴을
가리면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결국 고개
를 푹 수그린 채로 나는 빠르게 걸어 마을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라싼으로 돌아가 베르바니 지역을 통과해
세리포브로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좋든 싫든 이제는 무라드를
향해 가는 수밖엔 없다.
마을을 벗어나 길이 숲길로 접어들었을 무렵,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구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쯤 확인하며 가슴이 터지도록
달렸다.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패잔병을 찾아내어
도륙내던 내가 다 이긴 전쟁에서 패잔병 꼴이 되어 용병대로부터 도망칠 줄
누가 알았어. 그것도 내 친정이나 다름없는 달칸 용병대를 상대로 말이다.
씨발, 이 날을 피하기 위해 대공에게 몸을 바쳤던 것이었는데 결국 내가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째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
버렸는지,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싹둑 잘라 모든 것을 풀어 버리고만 싶다.
그러나 내 손에는 실타래를 풀어내기는커녕 잘라 낼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무라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비스카스를 통해 미로스 남부의 비스 숲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숲을 우회해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간이 배는
걸리기에 많은 사람들은 비스 숲을 통과해 다녔고, 오랜 세월에 걸쳐
숲에는 길이 닦였다.
비교적 고른 땅을 골라 닦은 길을 따라 이동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추격자와 마주칠까 두려워 나는 그 길을 포기했다. 길을
따라 걸은 것은 초입 뿐이었고 중간에 경로를 이탈해 숲으로 들어왔다.
향하는 방향은 비슷하지만 길이 없는 곳으로 들어와 수풀을 헤치며 길을
개척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혼자 다니니 속도는 전보다 빨라서 좋았다. 다만 뒤늦게 차라리 말을 타고
숲을 관통하는 길을 달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비스카스에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올 때
상단 책임자가 타고 다니던 말이라도 훔쳐서 나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숲은 벌써 통과하여 미로스 남부에 확실히 도착해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무라드까지의 길이 이렇게
잘 닦여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으니, 뭘 준비할 수가 없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배낭에 며칠 치의 건량과 육포를 챙겨 온 게 용했다.
나는 부지런히 걸었고, 걸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조리를 해 먹을 솥도
없었거니와 시간은 더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도 들어가지 않는 돌처럼
딱딱한 빵을 입안에 넣고 그것이 말랑해질 때까지 불려서 씹어 삼키고 중간
중간 맛대가리 없는 육포를 씹어 먹었다.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게 걱정이었다. 그나마
이곳까지는 베슬란과 상단이 있어 굶지 않고 왔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상단과 호위 계약을 맺었다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중간에
말없이 도망을 쳤으니, 반트라는 이름의 신용은 바닥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당분간은 상단 호위 같은 걸로 먹고 살 생각을 했었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된 셈이었다.
티무르 상단과 끝까지 함께했다면 무라드에 도착했을 때는 적게나마
급여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태까지 일한 돈까지 받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결국 돈 한 푼 없는 도망자의 꼴이었다.
돈이 될 갑옷도, 고급스러운 옷도 없다. 이미 다 팔아버렸다. 돈이 될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인데 지금처럼 도망 생활을 하다간 금방 몸이
만신창이가 될 것 같다. 매일 강행군인데다가 먹는 게 영 부실하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축나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쉴 수가 없었다.
달칸 용병대는 어떻게 비스카스까지 올 수 있었을까. 대공의 명령을 듣고
왔다는데, 나를 잡으러 온 것일까? 내가 여기로 온 것을 어떻게 알고.
나는 세리포브로 이동을 하던 도중 선회하여 비스카스까지 왔다. 그런
나보다 하루 일찍 비스카스에 도착하려면 내가 시르반 요새를 탈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비스카스를 목표로 출발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야 시간 때가 맞았다.
다시 의문은 내가 이곳으로 올 줄을 어떻게 알고 그들이 비스카스로 왔는가
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면 다
른 명령을 수행하러 온 것인데 괜히 내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어떤 경우라 해도 내가 탈영병 신세라는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
어쨌거나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낮 동안에는 숲을 걷고 밤에는 나무 따위에 올라가 쪽잠을 잤다. 혼자
다니고 있었기에 짐승의 습격도 큰 걱정거리였던 것이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하루를 보내야 했기에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었다.
4일째 정오 무렵. 숲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내 꼴은 그다지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여유 있게 왔다면 숲에 있는 개울에서 몸도 좀 씻고


제대로 먹을 것을 챙기면서 왔으련만. 나무 열매들을 보면서도 챙겨 먹지
못하고 일단 걷기 바빴다. 덕분에 내가 지나간 흔적을 최소화하며 왔지만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다리도 아팠다.
“!”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 발 앞에 화살이 푹 꽂힌 것은


그즈음이었다.
“여어, 일릭.”
“…… 아닉.”
익숙한 얼굴은 나를 보며 애써 웃어 보이고 있었지만 그의 입가며 눈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냐?”

“은퇴 후 생활은 좀 따뜻한 곳에서 해 볼까 하고 말이다.”

화살을 내 쪽으로 향해 있는 놈을 보며 나는 검 손잡이를 꽈악 쥐었다.


거리가 가까웠다. 놈이 화살을 쏘면, 궤도를 예측해 피할 수 있을까. 첫 번째
화살만 피하거나 쳐 낸다면, 다시 놈이 장전을 하기 전에 베어 낼 수 있다.
거리를 재며 나는 놈을 살폈다. 일단 놈은 혼자였다.
“다른 놈들은.”

“네가 무라드 쪽으로 갈 거라는 건 예상했다. 진작 숲을 빠져나와서 네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다들 이쪽으로 올 거다.”


“정신 나갔나? 나 하나 잡으러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거야?”

아닉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때 그의 뒤쪽에서 하나둘 익숙한


얼굴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뒤쪽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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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릭.”

파빅까지 와 있었다. 어느새 달칸의 용병대가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 사이사이를 그들이 빼곡하게 메워, 도망을 칠 작은 틈조차
보이질 않았다.
“……이런, 씨발.”

어처구니가 없어서 욕과 함께 헛웃음이 튀어나갔다.


지척에 동료들이 있으니 그 누구도 활을 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활 맞을 일은 이제 없다 쳐도, 칼 맞아 뒈지게 생겼다. 내가 아무리 사람을
잘 죽인다 해도 완전히 포위된 상황 속에 나를 잘 아는 용병들을 상대로는
무리였다. 또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을 죽이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그럼에도 싸우게 된다면 죽일 수밖엔 없었다. 나로서는 죽이지
않는 게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까.
“나는 너를 믿었다, 일릭.”

파빅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슬픔과 분노가 범벅이


되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대장. 나는 변절자가 아니야.”

“네가 변절자일 리는 없지.”

확신에 찬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변절자로 의심한다는 건 눈가림이었을 뿐이었다.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일 뿐…!”
그 말에 나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정답이라고
대답했을 때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을 한다면 과연 내 말발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아니, 내가 마일을 죽이고 안 죽이고와 상관없이 나는 어차피 탈영병이다.
“네가 그날 함께 있었다던 여자가, 너를 만난 건 다른 곳이었다고 얘기를

하더군.”
역시나 리리엘은 내 알리바이가 거짓이라는 걸 용병대에 전달을 한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전쟁이 터지고, 대공이 나를 곁에 데리고 다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전쟁이 없었고 대공이 나를 제 곁에 붙여 두지 않아 내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용병대에
돌아가야 했다면, 이 사태는 진작에 일어났을 터였다.
씨발 결국 대공의 곁에 남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악수를 둔 셈이었다.
“내 아들이 죽은 그 오두막, 그 근처였다고 말이다!”

“…….”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내 아들이 죽은 일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알아



오지 않았던 거겠지. 대공의 곁에서 일을 하면서, 며칠이고 대공 성에
머무르면서……!”
“……하.”

내 입에서 짧은 한숨과 같은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환장하겠네. 그 말은


삼켰는지 못 삼켰는지 모르겠다.
“대장. 대장 아들 죽인 범인 알아 오라고 용병들을 닦달하고 그 난리를 치는

게 미안하지도 않았소?”
어차피 뒈질 거. 마음이 잔뜩 비뚤어져서 나는 더 이상 나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아니, 통제하기도 싫었다.
나도 씨발 억울하던 차였다. 되도 않는 희롱과 추행을 일삼던 게
마일이라는 새끼였다. 좆도 아닌 놈이 나보다 강한 척하는 것도 같잖아
죽겠는데, 상대를 안 하면 닥치고 꺼질 것이지 놈은 정도를 몰랐다. 나를
상대로 강간 미수 따위를 저질렀으니 죽는 게 당연하지 않나. 피하라고
내지른 검 하나 피하지 못해서 심장을 꿰뚫린 것도 우습다. 기사가
된답시고 떠들던 놈이, 결국 약해 빠져서 뒈진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죽인 가해자새끼가 용병대 대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대공에게 온갖
수치스러운 꼴을 다 당했다.
씨발, 억울한 건 나란 말이다!
“동료를 죽여도 이 난리는 안 나지. 그런데 마일이 우리 동료였던가?”

“이 새끼가…!”

“어떤 꼴로 죽었는지 알려 줘?”

“……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장은 나를 원수로 보겠지.”

속에서는 울화가 끓어오르는데, 동시에 말을 더 해서 뭘 하나 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허무함도
함께 찾아들었다.
다른 용병대 놈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죽이는 걸로 밥 빌어먹고 사는
인생인데 재수 없는 새끼 하나 죽였다고 이런 꼴이 된 나를 불쌍히 보는
놈도 있을 거고, 대공의 곁에서 일을 하게 되었던 나를 시샘하다가
고소하다 생각하는 놈도 있을 것이었다.
뭐 어쨌거나 누구 하나 대장을 말릴 놈은 없다는 건 확실했다.
용병 놈들이 나를 에워싼 와중에 파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나와
대치했다. 검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 죽은 건 내 아들일 뿐이니, 용병대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회한에 잠긴 비통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맛이 썼다. 그나마 용병들이
범인을 찾는 시늉을 하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건 그간 대장이 우리에게 잘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장은 서운할지 모르지만 나는 다들 할 만큼
했다고 본다. 결국 내가 잡히기도 했고 말이다.
고개를 잠시 수그렸던 파빅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매서운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내 개인의 문제…! 달칸 용병대와는 관계없다. 일릭, 내

손으로 너를 단죄하겠다!”
“……하.”

“네가 이기면 보내 주마. 하지만 널 죽이기 위해, 난 전력을 다 할 것이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파빅이 내게로 쇄도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파빅의 검을 막았다. 엄청난 충격에 손목이 다
찌릿하고 어깨가 울렸다. 그러나 나도 한가닥 하는 용병이었다. 무의식중에
앞쪽으로 무게중심을 잡고 버텨 몸이 밀리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대장을 이기면 보내 준다는
소리가 가당치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이긴다면 마일을 죽인 죄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해도, 아직 탈영이라는 죄가 남아 있다. 이건 파빅
개인이 아닌 용병대 전체가 나설 일이었다. 결국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는 거다.
그런데 씨발 무슨 희망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고문을 해?
피로한 탓인지 검을 나누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지극히 차가우면서도 여러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생각들이
느슨하게 부유했다. 지치고 피곤했다. 검을 들고 싸우면 어떻게든
흥분이 끓어오르기도 하련만, 파빅의 검은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전혀 피가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쉽게 죽어 줄 수는 없었다.
그냥 죽기에는 여태까지의 세월이 억울하지 않은가. 또 아무리 내가 며칠
못 먹고 못 자서 상태가 안 좋다지만, 중년을 넘어 노년을 향해 가는
늙다리를 하나 못 이겨서야 자존심이 상한다고.
나는 다시 한번 파빅의 검을 막았다. 그러자 그가 검을 옆으로 밀어, 대치한
와중에 검이 원을 그리고는 아래에서 맞닿았다.
노련한 용병답게 파빅은 검을 다시 위로 쳐올렸다. 보통의 경우 대치한
상태에서 검을 쳐올렸을 때 그 힘을 이기지 못하면 검이 위로 튕겨
올라가며 가슴이 무방비하게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파빅의 움직임을 예상했기에 부드럽게 검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한 발 뒤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내 가슴을 노렸던 파빅의 검은
덕분에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큰 공격 다음에는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 나는 벌렸던 거리만큼 한 발을
앞으로 내딛어 거리를 좁히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크윽!”

휘두른 검 끝이 얕았다. 그러나 끝에 걸리는 느낌은 분명 있었다.


내가 노린 것은 이번에도 허벅지였다. 흉갑을 입고 있을 테니 드러난
가슴이나 옆구리를 노리는 건 의미가 없었으므로.
다만 공격이 얕게 들어간 것은, 파빅이 내 수법을 뻔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벅지를 반 정도 갈라 버릴 작정이었으나 한쪽만 얕게 스친 정도에서
그쳤다. 나는 아쉬움에 쯧, 혀를 찼다.
“아직이다!”

아무리 얕았다 해도 베인 허벅지가 아플 텐데, 파빅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인 양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날카로운 금속음 사이 검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이어졌다. 나는 마치 이성을 잃은 듯이 마구잡이로 휘둘러 오는
검을 가까스로 쳐내고 피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목을 노리
고 날아드는 검에 몸을 낮추며 옆으로 한 바퀴를 굴렀다 몸을
, .

일으키는 즉시 다시 검이 날아들었다. 노인네가 뭘 좋은 걸 혼자 처먹고


늙지도 않았는지,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제대로 먹고 쉬었다면 피하는 게 크게 문제는 아니련만, 내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물론 전장에서 몸 상태가 늘 최고일 수는 없었으니, 익
숙하다면 익숙한 일이었지만.
여기서 대장을 이긴다 해도 빠져나갈 구석이 막막하다는 생각에 나는
최선을 다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그 아들을 단칼에
죽였다지만 오래 알고 지낸 대장까지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자꾸만
머뭇대게 되니 그를 제대로 공격하기가 힘들었다.
또 공격을 어설프게 하는 만큼 방어도 어설퍼서, 자꾸만 살갗이 검 끝에
베여 나갔다. 얕은 자상들이 팔이며 다리에 새겨졌다.
물론 나 역시 대장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했다. 주로 팔이나 다리였다.
맨몸인 나와는 달리 그는 흉갑과 배갑을 입고 있어, 사실상 유효 공격을
넣기가 어려웠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저 모가지를 똑 따 버리는 것인데…….
씨발, 역시 죽이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건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씨발, 그만 좀 해요, 대장!”

다른 용병놈이 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한 소리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버럭 내지른 고함은 내 입에서 튀어나간 것이었다.
나는 내 가슴을 찔러 들어오는 파빅의 검을 정말 있는 힘껏 튕겨 내 버렸다.
아무리 내가 요즘 못 먹고 곯았다 해도 며칠간의 강행군을 한 것은 파빅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더 젊었다. 안타깝지만 파빅은 순수한 근력에서 나를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씨발 이 용병대에서 나보다 사람 잘 죽이는 용병이 누가 있어.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빅은 순간적으로 몸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냅다 검을 휘둘러 경동맥을 그어 버렸겠지만-그 대
신 나는 그의 갑옷 목 부분을 쥐어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거침없이 머리로 그의 면상을 들이받아 버렸다.
“크아악!!”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씨발, 비


명은 내가 지르고 싶다! 노친네 머리가 단단해도 얼마나 단단한지, 머리가
얼얼하게 아파 왔던 것이다. 골이 울려서 눈물이 다 찔끔 났다. 물론
코뼈가 무너져 얼굴이 순식간에 피범벅이 된 파빅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내 머리에 받친 파빅은 쓰러졌고, 나는 그가 쥐고 있는 검을 가뿐하게 발로
차서 날려 버렸다. 이어 순식간에 그의 가슴을 짓밟아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갑옷을 입고 있어 타격은 크게 없겠지만 갑옷 무게에 내 무게가
더해져서 절대 일어나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의 목에 검 끝을 겨누었다.
“…씨발, 내가 이긴 거 맞습니까?”

머릿속이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싸우면서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상 억울하기로는 내가 가장 억울한 인간이었다. 울분이
쌓인 건 이쪽이 더하단 말이다.
그러나 파빅은 전혀 승복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나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이 활활 타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에 나를
노려보는 안광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더욱
괴기스러운 꼴이었다.
“죽일 것이다. 내가, 내가 너를 죽일 거야…!”

아, 씨발 돌겠네…! 그렇다고 내가 대장을 콱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나는 절박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서 있는 용병 놈들이 나설
때였다. 나를 탈영병으로 처리하는 건 둘째 치고, 적어도 파빅을 멈추게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나는 귀신을 본 듯이 딱딱하게 굳어지고야 말았다.
…주변의 용병들 역시 나와 표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용병놈들이 왜 나와 파빅의 싸움이 점점 개싸움이 되어 가는데도 말리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어느 시점부터는 정적이었는데 내와
파빅이 싸우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몰랐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와 파빅을 빙 둘러 에워싼 용병들과, 그런 용병들을 에워싼 기사들. 그
와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하얀 말에 오른. 은빛의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일릭.”
미로스의 대공이 이 자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0.

그를 보고 바닥에 툭 떨어져 버린 심장을 대신해 가득 들어온 첫 번째


감정에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안도감이었다.
용병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겠노라 약속 하였던 그가 왔으니까 나는 이제
살았다. 그런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또한 적어도 이젠 불안에 시달리며
도망칠 필요가 없어졌다. 붙잡혔으니까.
안에서 무언가 긴장감이나 불안 따위가 탁 풀리는 느낌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흠칫 굳어진 것을 본 파빅 역시 눈알을 굴려 대공을 바라보고는 몸을
퍼뜩 떨었다. 나는 그 진동을 느끼고 그제야 그의 가슴에서 발을 떼며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파빅도 멍청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미친개처럼 굴던
그였지만 갑작스러운 대공의 등장에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서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대공뿐이었다.
그는 옅게 웃는 얼굴로 말에서 내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대공이 도망친 나를 추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가 몸소 오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대공과의 조우는 내게
사뭇 충격적이었다.
“일릭을 찾아 오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다치게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이 무렵 비스카스를 지나가리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고 여기로 달칸


용병대를 보낸 것인가. 아니면 여기저기로 사람을 보냈는데 우연히 달칸
용병대가 이곳에 온 것일까. 아니, 그렇다면 대공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나 그 의문은 길게 가지 않았다. 궁금증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공의 얼굴에, 더는 의문 따위의 잡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상처 입은 사냥감을 보는 포식자의 눈도 저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다.
대공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초췌해진 내 얼굴과 팔과
다리, 가슴에 새겨진 옅은 자상을 보며 그의 입가가 옅게 호선을 그려 냈다.
그러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웃는 얼굴이… 진짜 웃는 게 아니었으므로.
“각… 각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뭐라도 말을 하려고 나는 입을 달싹거렸으나 할


말이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흔들리는 나의 시선에 그가 시선을 맞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채,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내 그의 입가가 엷은 미소를 그려 냈다.
그가 미소를 지은 순간, 어쩐지 심장이 덜컹거렸다.
“돌아가지.”

…낮게 읊조리는 그 목소리가 난데없이 다정하게 들리는 것은 내 귀의

착각일까. 주변의 용병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롯이 나만을


향하고 있는 눈동자에 나는 문득 마른침을 삼켰다.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 갑자기 파빅이 외쳤다. 피투성이의 얼굴에서 입가의 피를 훔쳐 내며


그가 비장하게 말했다.
닥치고 그냥 가만히 있어, 이 노망난 노친네야! 속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그것은 파빅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고, 파빅은 기어코 대공의 앞에 나섰다.
“일릭은 달칸 용병대의 변절자입니다. 변절자에 대한 처분은 모든 계약을

우선한 용병대의 권한이니, 일릭을 데려가실 수는 없습니다.”


“일릭이 변절자라는 걸 믿는 머저리가 있기나 한가?”

파빅은 순간적으로 놀라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조금은 그의 심경을 알


것도 같았다. 대공의 입에서 비속어가 나오는 걸 처음 들은 순간 나도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었으니 말이다.
물론 대공은 상대의 그런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루 종일 나와 있었던 그가 용병대의 내부 사정 무엇을 알아서 나에게

말을 했겠나. 특히 그대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용병대에서 누굴


조사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걸. 그대들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건.”

“일릭은 그대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대공의 발언에 파빅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로스의 영토에서, 미로스의 지배자가 하는 말은 절대적이었다. 내가
마일을 죽이지 않았다는 말을 미로스의 대공이 내뱉은 순간, 그것은
사실이자 진실이 되는 것이다. 납득이 갈 만한 이유나 변명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 말에 거역하려면 파빅은 제 목숨만 아니라 달칸 용병대 전체를 걸어야
할 것이다.
아니, 갑자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갑자기 대
공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아니, 원래도 빛이 쏟아지는 듯이 아름다운 사내지만 신이 내려 보낸다는
구원자처럼 그의 전신이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권력에는 멋있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누구도 한마디 토를 달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보라. 대공께서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못을 박으시는데 감히 누가 나를
범인으로 몰 수 있을까.
경악한 파빅을 서늘하게 바라보는 여유로운 얼굴이 아름다운 것조차
멋있었다. 하얀 낯에 나른해 보이는 미소가 걸린 입술이 어딘지 짜릿했다.
그 와중에 눈빛이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워서 가슴이 속에서부터 떨렸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아마도 ‘감동’이라는 감정인 것 같았다.
거기까지만 했다면, 그 감동이 적어도 하루 정도는 갔으련만.
“전혀 납득한 얼굴이 아니로군.”

대공이 읊조린 한마디에 내 정신이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분명 여유 넘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파빅을 앞둔 그는 웃고 있으되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잠시 감동에 젖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그의 저 불길하게 웃는 미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대의 아들이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지 내가 알려 줄까.”

아니……. 설마.
나는 문득 대공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설마 그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앞에서 그때 했던 말과 같은 소리를-
“강간을 저지르려던 그 좆이 어떤 꼴로 발딱 서 있었는지 말을 해 주길

바라나.”
……해 버렸다. 대공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천박한 단어를 쓰며.


그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감동의 여운마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내가 그
지경인데 파빅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피투성이인 파빅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걸 아비에게 직접 확인시키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자비였다고
생각하네만, 나는.”
대공의 사람 속을 터뜨리는 화법은 나한테만 쓰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다 파빅 너를 위한 것이었다는 듯, 책임을 전가하는 말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그가 기사 행세를 하며 내 도시를 어떻게 더럽히고

다녔는지 일일이 말을 해 줘야 할까. 감히 기사를 사칭한 것만으로도 이미


죽을죄가 아니던가. 무전취식과 금품 갈취, 폭행, 부녀자 강간……. 내
도시를 상대로 약탈이라도 저지르려 했던 건가.”
대공은 세 치 혀로 파빅을 난자했다.
“그대의 아들은 쓰레기야.”

그 혀는 어떤 검보다도 날카롭고 잔인했다.


“단칼에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비. 그 아비에게 시신을 거두게 해 준

것은 넘치는 자비였다.”
…아니, 약간 속이 시원하기도 했는데……. 대공은 선이 없었다. 물론 그는

선이라는 게 필요치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니면 만인의 앞에서 거행되는 재판이라도 열어 주었어야 했을까. 그래서

내 도시에서 소란을 피운 죄를 그대의 용병대 전체에 물었어야 했나?


그런데 자네의 아들은 용병대 소속도 아니라며.”
공개 재판을 했다 해도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혹여 운 좋게 사형을
면했다 해도, 마일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져 절대로 기사는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용병대 소속이 아니었으니 용병대에 책임이 돌아가지는 않았겠지만
어쩌면 파빅은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책임여부와 상관없이 달칸
용병대의 평판 역시 떨어질 수밖에는 없었을 테고.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제법 공명정대하면서도 자비롭게 일을 처리했다고

보네만.”
그 모든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자신은 자비를 내린 것이라고, 대공은
말하고 있었다.
그건 물론…….
“그대의 아들은 내가 죽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완벽한 기


만이었다.
제가 죽이지도 않았으면서. 너희의 명예를 지켜 주고 자비도 내려 주었다며
도리어 은혜를 억지로 떠안겨 놓고서는,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폭로해
명예까지 추락시키는, 완벽한 기만.
그런 걸로 해 둬.”

굳이 붙일 필요도 없는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대공은 설령 거짓을 말한다


해도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다.
파빅은 허망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이라는 권력자 앞에 무력한
제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내에게서 절망감이 짙게 묻어났다.
이 미로스에서는 대공의 말이 곧 법이었다.
마일이 설령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대공이 그렇게 말을 한 이상 그는 기사
사칭, 무전취식, 금품 갈취, 폭행, 부녀자 강간을 저지른 쓰레기 범죄자였다.
그를 조용히 죽여 없애 그 자신과 가족, 용병대의 명예를 지켜준 것과 그의
시신을 파빅에게 인도한 것은 모두 대공의 자비였다.
마일의 죽음은 그렇게 결론지어졌다.
이제 그 누구도 나에게 마일 살해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없었다. 대공의 말
한마디에…….
뒤끝이 찝찝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제 나는 안전해진 셈이었다. 누구도
아닌 대공 덕분에.
나는 물끄러미 대공을 바라보았다. 파빅을 향해 매서운 말들을 우아하게
쏟아 내던 그는 파빅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파빅이 마침내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수그릴 때까지.
대공의 시선을 버티지 못한 파빅이 결국 고개를 숙인 뒤, 대공은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깨를 넘어 내려오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호박색의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었다.
…그 어느 밤. 꿈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노랗고도 붉은 눈동자에 나는 잠시 영혼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대공이 결국 나를 구해 준 것이다. 제 입으로 약조했던
것처럼, 용병 따위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걸로 되었지, 일릭?”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

아니 씨발…….
아니, 굳이 그 한마디는 왜 붙이는 건데?
대공은 쓸데없는 말을 또 한마디 덧붙여서 이 자리에 선 모두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밥을 다 지어 놓고 거기에 코를 빠뜨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가장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이걸로 되었지’라니! 파빅이 나를 다시 노려보잖아! 죽일 듯이
노려보잖아!!
기껏 제가 죽였다고 해 놓고, 이걸로 되었냐는 소리는 왜 하냐고! 결국 그건
마일을 죽인 건 나인데 대공 자신이 뒤집어써 준 거다 하고 사실을 죄다
얘기한 거랑 뭐가 달라…!
“그러니 이제 돌아갈까.”

나를 바라보며 대공이 웃었다. 그의 눈가가 사르르 이지러졌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 웃는 미소였다.
그 얼굴을 보는 내 복장만 터져 나가는 것이다. 씨발, 잠깐도 감동이라는 걸
못 해요, 씨발. 안도감을 느꼈던 내가 머저리다, 내가.
그러나 그 어떤 감정도 나는 내보일 수가 없었다.
버럭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럴 권력도 없었거니와-
“잠ㄲ…!”

이번에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대공의 손이 다가온다 싶더니 몸이 끌려갔고.
“흐읍…….”

……입술이 포개어졌다.

그의 손이 내 목에, 허리에 감겼다. 먹잇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뱀과 같이.


옥죄어 끌어안고는 놓아 주질 않았다. 놀라 헉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끈한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대공의 혀는 유유히 내 입안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제멋대로 빨아 댔다. 끌어안긴 몸을 나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니,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그저 새하얗기만 했다.
“허…억…….”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경악에 어


린 탄성이 들려왔다. 내 마음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었으나 내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파빅의 눈에서 분노와 증오가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쪽을 보는 용병들의 눈에서 영혼이 탈출하는 것을 보았다.
기사들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굳어지는 것도 보았다.
“…….”

쪽, 소리와 함께 대공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정적이 숲속을 휩쓸었다. 벌레조차 울지 않고 바람과 나뭇잎조차 침묵했다.
“사랑싸움을 좀 했다고 집을 나가면 어떡해.”

말을 하는 것도, 웃음을 짓는 것도 모두, 대공 한 사람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좁은 방에 불편한 자세로 반쯤 누워 있었다. 반쯤
누웠다는 말은 상체는 옆으로 쓰러져 있고 하체는 앉은 그런 자세라는
것이다.
좁은 방. 어둑한 실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마주 보고 있는 빈 좌석. 나는 곧
내가 있는 이 좁은 방이 마차 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가 그
언젠가처럼 대공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헉!”

나는 용수철처럼 튕겨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자뷔가 느껴졌다.


좁은 마차 안에서 천장을 뚫고 뛰쳐나갈 수는 없는지라 나도 모르게 반대쪽
자리로 달라붙었다.
대공의 손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멈춰 있었다. 그 높이가 마치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내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오싹하니 소름이 돋아났다. 대공이, 저 미친 자가 왜 내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단 말인가.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면 안 된다. 상처가 벌어져.”

손을 거두며 대공이 말했다. 그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머리가 조금 찢어졌더군, 그대. 이럴 줄 알았다면 궁정의사를 데려올

것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현실 분간
을 하지 못하고 굳어져 있는 나를 보며 대공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나는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대공이 눈앞에 있다는 것에 나 홀로 패닉이었다.
잠에서 막 깬 탓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씨발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어. 생각하려 했으나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정리가 되질 않았다.
아, 싸웠다. 머리가 찢어졌다고 대공이 그랬나? 그래, 머리로 누굴
들이받았다. 파빅. 그래, 파빅이 싸움을 걸어서. 아, 그래.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로감이 이미 최대치였다.
싸우느라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었기에 망정이지, 사실은 이미 충분히
한계였다.
그것이 어떤 강력한 충격에 의해 한순간에 전부 끊어지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던 것 같은데.
“이만 내릴까.”

대공이 마차의 문을 두드려 신호를 주자, 바깥에서부터 하인이 문을


열었다.
내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대공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본래라면
신분이 낮은 내가 먼저 내려야 했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대공이 먼저 내려 버리니까 얼떨떨하게 그를 뒤따라 내렸다.
아니, 내리려 했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꼿꼿하게
굳어지고야 말았다.
“피를 많이 흘렸다, 일릭.”

대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떡해.”

그 너머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도열한 채로.


“내 손을 잡아.”

…대공은 무슨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것처럼, 마차의 계단을 밟고

내려오려던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 후계자가 마차에서 내릴 때에도 신경 하나 쓰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제 갈
길만 가던 인간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를 향
해.
손을.
“…….”
나는 홀린 듯이 그 손을 붙잡았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래야 할 분위기였다.
그저 멍하니 그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 그를 따라 걸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어째서 대공의 기사들이 모두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이 어색하면서도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절망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대체 뭐지.
그 와중에 왜 대공만 혼자 꽃밭이지. 내 손은 왜 아직도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거지.
정신이 퍼뜩 든 것은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나는 마치 누가 내 정수리에 얼음물을 쏟아 부은 것처럼 퍼드득 몸을 떨며
그의 손을 던지듯 놓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과격한 움직임에 놀란 눈을 뜨며 대공이 멈춰 섰다.
“일릭?”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순진무구해 보였다.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으며 휘몰아쳤다.
그래, 씨발 그런 일들이 있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그 낯짝에 속이 더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이쪽을 힐끔대는 기사들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더욱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아주 진절머리가 쳐졌다.
“대체!!”

결국 내 성질머리가 폭발했다.
씨발, 솔직히 이제는 모든 게 한계였다. 기절했다가 깬 덕분에 체력은
되돌아오긴 했는데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억울함도 분노도
이미 최대치였다.
나를 보던 용병 놈들의 표정이 폭발적으로 떠올랐다. 기사들의 경악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들에 나는 진짜
미쳐 버리겠단 말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지만 용병들에게서 그대를 구해 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잖아?”

대공은 너무나도 여상하게 대꾸해서 내 복장을 또 뒤집었다.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에 복장이 뒤집히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각하께서 마일을 죽였다고만 했어도 충분했을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굳이…!”
“그걸로 끝냈으면 용병대가 끝내 그대를 변절자로 몰아 데려갔을 텐데?”
“그건 절 데려갈 구실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실이라는 걸 없애려면 그대가 나와 뭘 했는지를 얘기해

줘야 그들도 납득을 할 게 아닌가.”


와…….
대공의 뻔뻔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말발로 이 미친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씨발, 구실이 필요했다면 적당히 다른 얘기를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씨발, 갑자기, 씨발! 사람 입에 어?? 용병대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만인이 목도하는 앞에서, 어?!
“그리고 내가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잖아. 틀린 소리도 아니고.”

내가 화를 내서 도리어 제가 억울하다는 얼굴에 나는 꼭지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기가 막혀서 분통이 터져 죽을 것 같다.
속이 답답해서 가슴을 쾅쾅 내리치고 싶었다. 정확히는 대공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대공이 투덜거리며 이어 붙인 말
때문이었다.
“그대를 다시 보면 사지의 힘줄을 잘라 버리려 했는데.”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게 말이지.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활화산처럼 부글거리던 분노
역시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간 냉정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말로 내 사지를 자르려 했다는 것을.
“그런데 상처가 난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더군.”

대공은 파빅과의 전투에서 내 몸에 생긴 자잘한 자상들을 힐끔 보았다.


그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 것도 같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이
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나는
소름이 돋아난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입가에 담긴 미소가… 지나치게 다정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몹시 아끼는 것을 바라본다는 눈빛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나한테…….”

분노로도 떨리지 않았던 몸이 으스스 떨려 오기 시작했다.


묻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물을 수밖엔 없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내 질문은 분노보다는 숫제 절망에 가까웠다.


대공이 그러고자 한다면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 내가
만약 당신이 이 관계를 만천하에 밝혔으니 계약은 무효이며 떠나겠다고
소리를 친다면, 그가 정말로 내 팔과 다리의 힘줄을 끊어 나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라는 예측에 대한 절망 말이다.
대공은 그런 나를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빛이 나는 듯이
아름다운 얼굴로,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니까.”

내가. 미로스의 대공이.


그대를. 용병 일릭을.
사라…….
“…….”

이런, 씨발. 그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건 내가 들은 중 가장 다정하고 가장 달콤한 개소리였다.
나는 더 이상 내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이 성에 온 뒤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더욱 내가 느끼는 이
끔찍한 경악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대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나는 그대가 너무 좋아. 그대가 질색하는 얼굴이 좋아 죽을 것 같다.

세상에 그대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또 있을까.”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그 고운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냥 미친
소리였다. 미친놈이다. 이 새끼는 진짜 미치광이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소름
이 돋아 죽을 것 같았다. 이제 분노고 나발이고 그냥, 그냥 무서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파빅과 한참 싸우던 중에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안도감이 들면서
반갑기까지 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엄청난 착각! 이런 사태를
조금이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파빅의 칼에
죽었어야 했다. 씨발, 대공의 소굴로 도로 들어오다니, 내가 미친놈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미친다 한들 나는 저 미치광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

그 무서운 미치광이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너무 놀라 굳어 버려서 나는


그 손에서 차마 내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이 미친놈이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정신 나간 대공은 눈을 사르르 접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미드는 이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다. 티마예브로 돌아가면 대관식이

있을 거고, 나는 티마예브의 왕이 된다.”


알고 있던 사실을 대공은 다시금 제 입으로 고했다. 그것이 마치 암컷의
앞에 제 깃털을 자랑하는 수컷 공작새 같았다. 꼭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아지는 게 무슨 대단한 매력거리라도 되어 내가 그 얘기를 들으면
끌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이 내가 지켜 줄 건데 그대가 걱정할 게

무엇 있겠나, 내 사랑.”
입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사……. 그 단어 때문에. 그런 소리를 설마 정말로
진심으로 내뱉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너무 징그러워서 무섭기까지 했다.
“용병대 대장의 아들을 죽인 게 그대든 나든 무슨 상관인가. 그대가

죽였지만 내가 죽인 셈이지.”
경악과 패닉으로 굳어져 버린 나를 두고 대공은 미친 소리를 이어 갔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지 않아?”

부…….
그것은 정말이지 내가 감당할 수가 없는 단어였다. 전신에 바퀴벌레가 수천
마리 붙어 있어도 이보다는 덜 징그러울 단어였다. 참고 견딜 수준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었다,
이건.
처음 그가 내게 입을 맞췄을 때보다, 사랑 소리를 했을 때보다 더. 씨발, 나는
정말이지 더는 이 미친 자를 참을 수가 없어서-
“나의 왕비가 되어 줘, 일릭.”

은빛의 머리카락 아래 빛나는 찬란한 얼굴에 발긋한 홍조를 띈 사내가


오롯이 나만을 눈에 담으며 속삭였을 때.
마침내. 뚝.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미친 자에겐 매가 약이다. 오직 그것만 내 머릿속에 어떤 유일한 명령처럼
맴돌았다.
빠악!!
귓가에 우는 이명 사이로, 가죽이 터지는, 아니 박살이 나 버리는 마찰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주먹 마디를 찌릿하게 달구는 통각은 그 다음이었다.
“헉……!!”

“각, 각하!!”

“각하!”

누군가가 외친다. 웅웅거리는 이명 속에 소란이 이어졌다. 기사들이 숨


가쁘게 움직이는 게 아주 느릿한 그림으로 눈앞에서 흘러갔다. 그 모든
소란이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졌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내가 내
모습을 저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완벽히 이방인이 된
기분으로 나는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저 멀찍이 바닥에 늘어진 사내를 향해 호들갑을 떨며 달려가는 기사놈들을
보며. 아니, 카펫 위에 널브러진 대공을 보며……. 나는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헛웃음밖엔 없었다. 미로스의 대공이 내 주먹에 얻어


터져 바닥에 쓰러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 짓을 내가 저질러 놓고도
웃음만 나왔다.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생각
했다.
“좆됐네.”

마일을 죽인 날, 또 처음 대공을 만나던 날 느꼈던 것처럼.


“좆됐어.”

단언컨대 지금 내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 본편 마침
Fin de la historia principal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EXTRAS: VOLUMEN 4(FINAL)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1.

외전 사얀 1.
티마예브의 왕족들은 순혈을 유지하기 위해 왕국의 긴 역사 내내 근친혼을
자행하였다. 특히나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 국왕 혹은
왕세자가 혈연이 이어진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대 국왕의 첫 번째 왕비는 따로 있었으나 그에게 첫 번째 아들을 낳아 준
것은 동복의 누이였다. 사촌간도, 이복 남매간도 아닌 동복 남매간의
성혼은 교단의 법령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며 대륙 전반에서 금기시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왕비가 되지는 못했지만 왕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이름뿐인 왕비가 화병으로 사망한 이후에는 대놓고 왕비 행세를
하기도 했었다.
남매간에 정을 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손가락질 받을 일이었으나, 때는
교단이 거의 힘을 잃었으며 왕권이 극히 강화된 시기였다. 그 강력한
권력을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다는 왕족들의 배타주의는 친남매 간의
결합을 도리어 지극히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동복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카미드는 태어날 때부터 제 핏줄로
인해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국왕이 그를 지극히 아끼는
것은 물론, 모든 왕족과 대다수의 귀족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근친혼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어찌 건강할 수 있을까. 그 전대의
근친혼으로 인해 태어난 국왕의 누이이자 카미드의 친모는 카미드를 낳고
몇 년 뒤 병을 얻어 앓다가 사망했다.
그녀가 죽고 얼마 뒤 국왕은 제 사촌 누이를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였다.
사촌지간이었기에 결혼이 성립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왕비는 당시 미로스
공국을 다스리는 공작의 딸로, 은빛의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를 지닌
신비로운 외모의 여인이었다.
국왕에게 사촌 간인 여자는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상대였으나, 혈족 중 그
누구도 그녀만큼 국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미로스의 공녀가
국왕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쌍둥이 남매를 출산했다. 두 번째 왕비가 낳은 아이들은 신기할
정도로 왕비만을 닮아, 은빛의 머리카락과 호박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었다.
국왕은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남매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왕비가 낳은 딸아이는 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딸아이는 제 아들
카미드의 반려가 되어 이 왕국을 이어 갈 또 다른 후계자를 낳아 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아들은? 국왕에게는 혈통부터가 완전무결한 후계자인 카미드가
있었다. 또 다른 아들은 필요치 않았다. 더욱이 그 아들이 자신은 전혀 닮지
않아, 사실은 제 자식이 아닌 건 아닐까 의심이 드는 아들이었다.
국왕은 쌍둥이를 낳은 뒤 왕비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핑계로 왕비를
왕성에서 쫓아내었다. 왕비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 미로스로 돌아와
아이들을 길렀다. 그녀는 제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두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불운한 사고로 그녀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사얀은 자신의
불안정함을 알았지만 그 증상을 적당히 조절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은 길지 않았고, 모친의 사후 쌍둥이는 다시
티마예브의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얀은 카미드를 싫어했다.
그래서 어느 날 카미드가 키우는 앵무새를 죽여 버렸다. 언젠가 맛있게
먹었던 닭고기 요리처럼 털을 뽑고 배를 갈라 내장을 빼냈다. 머리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카미드가 그 새가 어떤 새인지 알아야 할 테니 말이다.
사얀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기분이 좋았다.
카미드는 그 새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다섯 살이나
더 많은 카미드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꼴이
우스워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카미드는 울면서도 여기가 이렇게 불룩하게 되어 있었어.”

소년이 제 다리 사이를 가리키자 이스테샤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남매지간이라지만 해서는 안 될 얘기가 있음을 그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책에서 읽었는데 그런 걸 피학성애자라고 한대.”

“피학성애자?”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는 거래. 그러니까 카미드는 자기 새가 죽은 게

슬퍼서 울면서도, 쾌락을 느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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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스한테도 자기한테 매질을 해 달라고 한 건가.”


얼마 전 이스테샤가 울면서 달려와 카미드가 자신에게 회초리를 쥐여 주며
자신을 때려 달라고 빌었다는 소리를 했던 것을 떠올린 그가 중얼거리자, 이
스테샤의 표정이 굳어졌다. 구역질이 난다는 얼굴에 사얀이 그에게
실수를 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번에도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했다고
빈정거렸다.
“그 반대로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느끼는 가학성애자라는 것도 있대.”
원치 않는 화제에 이스테샤는 말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 얘기에 그는 혼자서 조금 움찔하고야 말았다. 그게 너라는
얘기는 하지 말자, 사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충고에 그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둘 다 이상한 거네.”

“응, 이상해. 특히 카미드는……. 우리는 남매잖아. 그런데도 나한테 그러는

건.”
카미드는 종종 이스테샤를 부르곤 했다. 사얀과 함께 있을 때면 둘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도망치곤 했지만, 왕세자의 초대를 번번이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로는 이스테샤 혼자 카미드를 만나러 가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스테샤는 돌아오자마자 사얀에게 달려가 울음을 쏟았다.
이스테샤가 싫다고 거절하면 카미드는 비 맞은 개처럼 끙끙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 주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이스테샤에게는 상처였다.
사얀은 그래서 카미드를 죽이고 싶어했다. 카미드를 죽이자고 자꾸
속삭였다. 앵무새의 배를 가른 것처럼, 카미드의 배를 가르자! 아픈 걸
좋아하니까 울면서 좋아하겠지. 음, 그런데 카미드가 좋아하는 걸 떠올리면
사실 사얀은 기분이 아주 나빴다.
“하지만 나도 이스를 좋아하는걸. 어머니는 남매끼리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도 사얀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사얀이 카미드처럼…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 그걸 만져 달라고 할까 봐.”


그가 말을 꺼냈을 때는 쏘아보았으면서, 이스는 제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것인지 눈
치를 살피며 그 다리 사이를 힐끔 보았다. 그 말에 그는 남매
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리 사이가 불룩해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얀은 코웃음을 쳤다. 이스를 상대로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고.
이스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그럴 리가 없노라고.
사얀과 그는 우는 얼굴을 좋아했지만, 이스테샤가 우는 것은 참을 수가
없이 화가 나는 일이었다. 카미드 때문에 우는 이스테샤를 생각하니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럼 카미드를 죽이자.”

아, 사얀과 상의를 한다는 것을. 순간 헷갈려서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그러자 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모가 똑 닮은 소년을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해서는 안 될 얘기를 또 했어. 사얀이
그에게 속삭인다.
“우리는 피를 나눈 사이야. 형제지간에, 남매지간에 그래서는 안 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럼 사얀은 나를 죽일 수 있어?”

아니. 사얀은 이스테샤를 죽일 수 없지. 머릿속에서 강렬한 부정이


들려왔다. 그 역시 그 누구도 이스테샤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얀은 카미드를 죽일 수 있고, 카미드도 그를 죽일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이스테샤를 죽여서는 안 된다.
“가족들은 서로를 해해서는 안 돼. 특히 가까운 혈연일수록 더욱.”

이스테샤가 사얀을 죽인다 해도 괜찮을 것 같지만.


이스테샤가 안 된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리라. 사얀은 단순명료하게
정리를 해 버렸다.
“그래, 알겠어.”

그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테샤는 그런 소년을 칭찬하듯이


웃었다. 해사한 미소에 사얀은 이번은 정답을 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얀이 헷갈리는 문제에 있어 모든 답을 이스테샤에게 의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스테샤는 자신과는 다르다.
같이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이스는 이스일 뿐이다. 소년은 이스만 아니라
사얀과 같이 태어났는데-머릿속에 사얀은 너야! 라는 시끄러운 외침이
들렸지만 늘 들려오는 소리라 무시했다- 이스는 이스 혼자. 소년과는 달리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스테샤
는 사사건건 제 말에 토를 다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그러나 이스테샤에게는 있었다. 이스테샤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스테샤의 시비(是⾮)가 그에게는 법칙이 된다.
카미드는 죽이고 싶지만 죽이면 안 된다. 형제니까.
“쉬이-”

문득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얀은 이스테샤를 끌어당겨 그녀의 입을


막으며 숨을 죽였다. 정원수 속에 몸을 숨긴 채, 두 남매는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애완 새를 잃은 슬픔에 울먹이며 이스테샤를 찾는 카미드와, 그를 따르는
시종들이었다. 이스테샤를 찾기 위해 쌍둥이 남매가 자주 오는 이 정원을
뒤지던 그들은 결국 쌍둥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주 발견되어
카미드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자꾸 기척을 죽이려 애를 쓰다
보니 이제는 걸리지 않았다. 이스테샤는 기척을 지우는 게 잘 안 된다고
했지만, 사얀은 없는 척 자신을 숨기는 걸 잘 했다.
왜냐하면 이스테샤가 없을 때 카미드에게 걸려서 단둘이 있게 된다면, 카미
드가 사얀을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얀이 카미드를 싫어하는
것처럼 카미드 역시 사얀을 싫어한다.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사얀이 그렇게 속삭여서 소년은 카미드를 피해 이 성에서 없는 듯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기척을 죽이곤 했다.
“…카미드, 이제 갔어?”

정상인 이스테샤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사얀은 곧잘 듣고 그에게 말을 해


준다. 카미드와 그 번견들은 갔어.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이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 된 이스테샤가 말했다.
“그럼 공관에 가서 공부하자.”

“난 걔 싫은데.”

“왜 싫어? 엔리온이 약초학 서적을 구해 놨다고 했단 말야.”

“걔 글자는 읽을 줄 안대?”

사얀이 병법을 공부하면서 전쟁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으면, 엔리온은 그게


놀이라도 되는 것처럼 와서 같이 놀자는 소리를 해 댔고 사얀은 그가
귀찮았다. 언제나 이기는 것은 그였으므로 재미가 없다. 엔리온은
사얀한테도 지고 소년한테도 졌다. 사얀은 엔리온이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놈의 방에
는 책이 한가득했지만 늘 놈이 글을 읽을 줄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너무 미워하지 마. 그래도 귀엽잖아?”

“…이스, 너 진짜 정상인 거 맞아?”

사얀! 감히 이스를 의심하다니!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외침이 들려와서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끔 사얀이 이렇게 머릿속에서 소리를 지르면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되어 버린다. 소년은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괜찮아?”

“…어, 괜찮아.”

“……사얀…….”

이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년을, 사얀을 바라보았다. 아주


가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던 것과 같은 시선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우는 것도, 이스가 우는 것도 싫었다. 그러니까 하나는
확실하다. 이 머릿속의 목소리는 잘못되었다는 것. 들려와서는 안 되는
것을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안 들을 수는 없다. 이것은
핏줄에 새겨진 병.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소리를 듣는 것은
사얀만이 아니었으니까.
사얀은 기척을 죽인 채 성안을 돌아다니다가 들은 적이 있었다. 카미드가
저 홀로 소리를 들으며 미쳐 가는 것을 말이다. 심지어는 오늘 새벽에도
들었다.
‘왕비가 내 아내를 훔쳐 갔어. 사얀과 결혼시키기 위해.’

‘둘이서 정분이 나서 이스테샤가 나를 배신하면 어떡하지? 내 곁에

있는데도 이스테샤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스테샤는 언제 자라는 거야? 사얀을 죽이면 자랄까?’

‘아아아……. 왕비도 겨우 죽였는데.’

카미드는 주변을 모두 물린 채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제 몸을 꼬집고


때리며 울던 그는 헐떡거리며 이스테샤를 찾았다.
사얀은 그를 보며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카미드보다
자신의 몸이 작아서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칼로 찌르면 죽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하인들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인들이
돌아오는 기척에 카미드는 울음기를 지우고 옷을 제대로 입었다.
사얀은 아쉽게도 그 자리에서 물러서야 했다. 그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어
대신 카미드의 애완 새를 죽였다.
사얀. 그래도 이스한테 카미드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이스가 상처 받을 테니까.
머릿속에 다시 속삭임이 들린다. 그래, 그렇게 할 테니 소리는 지르지 마.
소리를 지르면 어지러워서 표정 관리가 안 되니까, 이스가 놀란단 말이다.
소년은 그렇게 머릿속의 목소리, 사얀을 설득했다. 그런데 자꾸 사얀은
자신을 사얀이라고 불러서, 소년은 사실 조금 헷갈린다. 이스테샤가 소년을
사얀이라고 부르는데, 머릿속의 목소리 역시 사얀이었으므로.
사얀과 카미드만이 아니었다. 사얀은 국왕조차 제 머릿속에 들려오는
소리들로 광증을 앓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티마예브
아이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 역시 조금은
그러했다는 것을 안다.
오직 이스테샤만이 달랐다. 그녀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것과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스테샤가 카미드의 아이를 낳아서… 혹은 사얀의 아이를
낳아서 아이가 또 소리를 듣고 광증에 시달린다면.
이스테샤는 어머니처럼 울게 될 거야. 그건 있어선 안 될 일이지.
그건 그도 사얀도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니 이스테샤는 이 핏줄의
저주를 받지 않은 완벽한 타인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녀가 누군가와
맺어지게 된다면. 이 티마예브의 굴레를 벗은 사람이어야 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이스테샤는 정상이니까.
혈육을 사랑하여 그 아이를 낳는 짓은 하지 않을 정상인이니까. 그래야
한다면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을 내 누이니까.
사얀은 그날까지 이스를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2.

외전 사얀 2.
……그 상대가 멍청이 엔리온이 될 거라고는 사실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눈물을 흠뻑 머금은 이스가 자신을 보며 도움을 청했을 때 티마예브의 둘째
왕자 사얀은 깨질 듯한 두통에 미간을 찡그렸다.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공부를 하고 문화를 익히러 가게 되었다며, 다음을
기약하고 티마예브의 왕실을 떠났던 엔리온이 돌아온 지 1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다. 둘이 약초와 의학 공부를 하느라 자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사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부에 진전도 있었다.
이스테샤가 어느 날부터 사얀에게 가져온 약들이 분명 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를 없애 주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차처럼 생긴 주제에 맛이 끔찍할
정도로 없는데다가 먹고 나면 몸에 열이 올라 누구든 다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싶다는 가학성이 끓어오르는 게 괴롭긴 했지만, 쉴 새 없이
머릿속에서 떠들어 대는 목소리를 닥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약을 과하게
먹고 나면 머리가 더 아파질 때가 있다 해도 소리가 들리는 것보다는 참을
만했다.
아, 물론 이제 사얀은 그 목소리가 아닌 본인이 사얀이라는 것도 안다.
정확히는 그 목소리도 자신도 모두 사얀이다. 목소리의 형태로 머릿속에
왕왕 울려 대는 것은 사실은 본인의 또 다른 생각이었다. 약을 끊으면 그
경계가 다시 명확해지면서 목소리가 분리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모든 게 자신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소리 여부와
상관없이 사얀은 미쳐 있었다. 광증은 근친으로 얼룩진 티마예브 왕족의
유전병이었다.
다만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티마예브의 왕자라는 자신의 위치가 굳이
미치지 않을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했을 뿐이다. 그가 좀 미쳐
있다 해도 무엇이 문제겠는가. 미친 짓을 능히 실행하고도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을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카미드가 나를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입지를 다져 놓기는 했는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래도 네
가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 줄 수 있는 정도는 못 되는걸 .”

“……알아.”

지난 몇 년간 사얀은 카미드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다수인 귀족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데 성공해, 전보다 더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덕분에 이스테샤 역시 안전할 수 있었다. 카미드가 사얀을
견제하느라 이스테샤를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둔 것이다.
그 덕분에 얻은 자유 속에 이스테샤는… 조금 때가 이른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고 또 바라고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데.
사얀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엔리온의 멍청함을 경멸했다. 감히 티마예브의 공주를 혼전 임신시키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물론 제 누이는 잘못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제 누이 이스테샤니까. 모든 것은 다 그 타락한 성직자 나부랭이의
잘못이었다.
“너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나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

거겠지.”
이스테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적으로
몹시 동요한 지금에도 그녀는 다행히도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일단 엔리온을 성도로 떠나보내.”

“……같이… 있고 싶어…….”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 멍청이는 그나마 교황이 되어야 널

지킬 작은 힘이라도 갖게 된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널


따라가겠다고 하겠지.”
가엾은 이스테샤. 그녀는 알면서도 타인의, 사얀의 입을 통해 확인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성도로 간다면 성도를, 미로스로 간다면 미로스를. 카미드는 그곳이

어디든 간에 쳐부숴서라도 엔리온을 죽이려 할 거다. 더불어 나도. 나는


무슨 죄야.”
가장 아프게 그녀의 상황을 지적해 줄 사람. 그래서 그녀를 모질게 만들고,
그 모진 행동에 탓할 상대가 되어 줄 사람. 이스테샤가 사얀에게 그 역할을
해 주길 바라니 그녀를 소중히 아끼는 사얀은 따라 줄 수밖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만간 국왕 전하가 서거하시면 카미드가 왕이 된다. 난 미로스로 가게 될


거야. 때가 혼란할 테니, 네가 몸을 숨겨도 카미드가 미쳐 날뛰지는


못하겠지. 아이를 낳을 1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거다.”

“…… …….”

“그러니 가서 엔리온에게, 내 아이를 가져 이 유치한 소꿉장난은 이제

끝내고 싶으니 티마예브에서 썩 꺼지라고 말 해.”


“…….”

“그러면 그 모자란 놈도 독기라는 걸 조금은 품겠지. 너를 위해서라도, 아이


를 위해서라도 제 위치를 높여 권력을 쥐어야 한다. 그러니 아주
차갑고 아프게 해 줘.”
그 말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픈 걸까.
이스테샤의 호박색 눈동자 주변에 고인 눈물이 후두둑 그녀의 하얀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는 사얀의 기분은 꽤나 이상해진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갓난 아이 때를 제외하면 그는 어릴 때도 울지
않았다. 같은 얼굴을 하고도 우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제가 울지 않기에
사얀은 같은 색을 띈 누이의 눈동자가 물기에 흠뻑 젖는 것을 볼 때마다
아주 미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슴 한구석이 조금 욱신거리는 그런 기분을 들게 한다고 할까.
“…그 아이는 나아가 티마예브의 왕이 될 거다.”

그러니 사얀이 제 누이에게는 약해질 수밖에. 다른 존재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우는 게 그를 즐겁게 만드는 것과 달리, 누이의 눈물은 그를
아프게 하니 말이다. 달래 주고 싶었다. 세상 모든 인간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서라도 그녀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그치게 하고 싶다.
이것 역시 남매간에는 지나친 정도의 애정일까. 이마저도 핏줄에 새겨진
저주의 또 다른 방향인 것일까……. 하지만 사얀에게는 이 세상에 소중한
것이 제 누이뿐이었다. 그러니 누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것에서 그 아이를 보호하고, 내 유일한 후계자로 삼을 거라

약속하지.”
사얀의 약속에 이스테샤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 약속의 무게를 알기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러나 그
녀는 분명 조금은 웃고 있었다.
“바보. 아이가 여자애면 어떡하려고.”

그게 뭐가 문제야. 네가 낳은 아이가 너처럼 정상이라면, 여왕으로 만들면


될 일이지. 그러나 사얀은 제 생각을 내뱉지 않았다. 다만 이스테샤의 뺨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가 아주 싫어할 소리를 한마디했다.
“사얀이 남자애라 말해 주더라고.”

그리고 바랐던 대로, 대번에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우는


얼굴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은가. 아직도 환청을 듣는다는 거짓말에 놀라
굳어진 제 누이를 보며 사얀은 속으로 조금 웃어 버렸다.
그 이후의 상황은 대체로 사얀이 안배한 대로 흘러갔다.
우선 사얀은 병환으로 오늘내일 하는 국왕에게 몇 가지 약을 썼다. 혈육을
죽이는 것은 금기시 되는 일이었으므로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미 사망
확정을 받은 사람의 날짜를 조금 당기는 것은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사얀은 광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국왕에게 이스테샤의 약을 써서
고통에서 잠시 해방시켜 주는 방법으로 유언장을 고치게 한 뒤, 서둘러
유언장을 발표해 미로스의 대공 자리를 얻었다. 어차피 공국은 공녀의 피를
이은 사얀의 것이었다. 그가 한 것은 다만 그 위치를 대공으로 격상시킨
것뿐이었다.
그리고 국왕이 다시 광증이 도져 카미드를 싸고돌며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려 하기 전에 그를 안식의 세계로 보내 버렸다.
그래도 사얀이 왕의 아들인데 얼마나 대단한 위해를 끼치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사얀은 왕의 묵인, 심지어는 주도 아래 여러 차례
중독되거나 암살 시도를 당해 생사를 오가기도 했었다. 이스테샤가 아니면
몇 번쯤 죽었을 것이다. 부자 간에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제가 아버지에게
한두 번 독을 먹인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카미드는 조금 일찍 왕위에 올랐고, 유언장에 적힌 내용대로 국혼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티마예브가 미쳐 있다고는 해도 국왕을 그 누이동생과
공식적으로 결혼시킬 수는 없으니, 왕비는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
티마예브의 북부를 지배하는 에도스 공작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 만약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카미드가
근친 관계로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는 왕비의 자식으로
길러질 것이었다. 지금의 왕비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할 뒷배가 있었다.
국상과 새로운 왕의 즉위, 국혼이라는 혼란 속에 이스테샤는 자신이 사얀의
아이를 가졌음을 티마예브의 왕실에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던
티마예브의 왕실에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다.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
폭탄을 아무렇지 않게 투하한 뒤, 그녀는 혼란을 틈 타 유유히 티마예브를
빠져나왔다.
이스테샤는 사얀의 보호 하에 은신하여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영원히 숨을 수는 없었으며, 앞으로의 미래에 그녀의 역할은 분명했으므로
아이를 오래 키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몸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마예브로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카미드가 맨발로 뛰어나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는 것은 왕실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녀는 끝끝내 아이의
소재를 말하지 않았으나 카미드는 감히 그녀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간혹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그러나 분명 동침은 아니었다-에
그저 목말라하며 뒤로만 은밀히 미로스를 뒤지며 그녀의 아들을 찾았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10년이었다.
10년. 그동안 이스테샤는 국왕 카미드를 불임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카미드
는 비상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그에게 약을 먹이는 것은 왕비를 중독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스테샤는 카미드의 왕비에게 약을 사용해 제 아들의 자리를
위협할 후계자를 낳지 못하게 만들었고, 카미드를 정신적으로 지배하여
다른 정부를 두지도 못하게 했다.
덕분에 그 어떤 아이도 태어나지 않아 국왕과 왕비 사이에서는 불화가 쌓일
수밖엔 없었다. 왕비는 이스테샤를 극도로 미워했다. 자신이 이스테샤의
약에 중독되어 불임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나, 불화의 씨앗이
이스테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미드가
이스테샤를 지극히 사랑하여 왕비는 차마 그녀에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미로스의 대공 사얀은 힘을 기르는 데 치중했다. 자신이
티마예브로 돌아가 왕이 될 수 있도록 귀족들의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상당한 시
간과 금품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사얀은 부를 축적하는 데 훌륭한 능력이 있었다. 상단을 운영하여
국가와 대륙을 초월한 무역을 주도하였으며 식민지 개발에도 열심이었다.
그 와중에 개인적인 자금과 상단을 운용하여 광산을 사 모으고 그것을
토대로 더 큰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티마예브 귀족들을 회유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력을 길렀다.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또 자신이
티마예브의 왕이 된 그 이후를 생각해도 많은 준비들이 필요했다.
저 자신의 목숨만 걸려 있다면 이 정도로 치밀하지는 않겠지만 누이와 그
아들의 목숨까지 달린 일에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얀은 숨 가쁜 10년을 보냈다. 덕분에 얼추 준비가 되기는 했는데,
문제가 있다면 카미드가 제법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타고난 광증과는 별개로 그는 어릴 적부터 왕의 재목으로서 수학해 온
몸이었다. 사얀은 그를 얼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국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제 누이를 사랑하기에 왕비와 갈등하면서도 왕비를
계속 곁에 두어 북부와의 화합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그가 퍽
이성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이스테샤가 카미드를 암살이라도 해 버리면 좋으련만.
그러나 이것도 쉽지는 않았는데, 카미드의 의심병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게 일단 첫 번째 문제였고, 두 번째 문제가 있다면 너무
갑작스럽게 카미드를 중독시켜 버린다면 이스테샤가 의심을 살 게
뻔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얀이 의심을 받을 테고, 사얀이
암살 배후로 지목된다면 티마예브의 국왕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일단 왕비의 친정인 북부가 사얀과 이스테샤, 그리고 그 아들인 레이사를
반대할 게 틀림없었다.
물론 결국에는 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제가 다스릴
백성들의 피로 닦아야 하리라.
사얀의 이성은 최대한 그 방법은 피하고 싶어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방법을 써야 한다면 최소한의 학살로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게 압도적인
무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점차 다가오고 있기는 하지만……. 10년이라는 기다림은 길고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루했다.
쉼 없이 달려왔지만 사얀은 이 모든 게 사실 이제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광증을 다스리는 약이 그에게는 도리어 폭력성을 불러일으켜 전부 다
부수고 죽이고 싶었다. 그게 해소되지 않을 때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대공은 아픈 게 싫었다. 그래서 나름의 해소 방법을 찾기는 했다.
대공이 처음으로 미로스에 왔을 때, 대공 성의 하인들에게 한 말이 있었다.
‘티마예브에서 내가 머물던 궁 지하에는 내 취미방이 있다. 그걸 똑같이

본떠 만들어 두도록. 또한 감옥 역시 증축해라.’


대공의 취미방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신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유를
물었을 때, 대공은 감히 제 말에 질문을 던지는 가신들을 괘씸하게 보며
웃었다.
‘이 미로스의 돼지들을 거기서 기를 예정이니까.’

그리고 그 돼지새끼들 중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놈들이 몇이나 되더라.


일단 지금 적어도 그의 가신 중에 돼지는 한 마리도 없었다. 또 사라진
돼지의 얼굴은 당연히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기억할 가치가 없으니까.
문득 떠오른 10년 전을 무료하게 회상하던 대공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조금 즐거웠던 것도 같은데. 미로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돼지들을 잡아와 사육하고 감히 제 명령에 토를 다는 놈들의 혀를 빼고
눈을 파내고 귀를 자르는 등의 처벌을 내렸을 때도 꽤나 유쾌했던 것 같다.
미로스 전체가 제 색깔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두통이 조금은
가벼워지기도 했었다.
또 취미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대공에게 남은 것은 오직 무료함뿐이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전부 끝난다면 조금 나아질까. 아니, 티마예브가 그의
것이 되어도 지루하고 귀찮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저 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
베르바니 지역을 두고 전부터 눈에 거슬렸던 세리포브와 전쟁을 하면서도
대공은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이 지역을 놓고 몇 번이나 전술을 짜
보았고 그것들이 지나치게 맞아 떨어지니 도통 재미가 없다. 어차피 들려올
것은 승전 보고인지라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지겨울 지경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또한 조만
간 그가 선보일 화기는 전쟁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곧 있어 구식이 될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리 기쁜 일이 아니었다.
알즈에 있는 별장이 마음에 드는 데다가 호수를 끼고 있어 유사시에
탈출하기도 좋을 것 같으니 그곳을 레이사에게 선물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전쟁인데, 슬슬 강화를 맺는 게 좋으려나.
전쟁까지도 무료하면 이젠 뭘 하며 시기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설령
시기가 온다 한들 그 이후에는 이 지루함이 가시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대공은 건조한 시선으로 전장을 굽어보았다. 전투가
한창이었다. 미로스의 기마병이 적진에 뛰어들었으나 장창병들의 위협에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이 쉽지가 않아 보였다. 기사들이 말을 몰며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보병들이 돌격해 왔다. 결국 진과 진이 완전히
부딪쳐, 기병과 보병, 장창병이 어지러이 얽혀 가는 것이다.
그 와중에 꽤나 눈에 띄는 활약이 있었다. 길이가 길고 폭도 넓어 들고
휘두르는 것이 쉽지 않은 양손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는 한
사내의 모습이 특히나.
“저쪽은 어디 용병대지?”

곁을 지키던 자칸에게 물어본 것은 그저 작은 호기심이었을 뿐이었다.


“달칸 용병대입니다. 부켈릭의 휘하에 속해 있습니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용맹함이라.”

과연 싸우는 모습이 제법 눈에 띈다 하였다. 장창병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기사의 앞을 가로막아 대검을 휘둘러 말에서 떨어뜨리지를 않나, 기사를
노리는 장창병들의 창을 꺾으며 전열을 흐트러뜨리지를 않나.
대검으로 전열을 흐트러뜨리고는 롱소드를 꺼내 보병들을 학살하는데 그
움직임이 또 눈에 띄었다. 용병대의 소속을 나타내는 보급형 투구를 쓰고
있었음에도 그 사내만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용병들 몇몇이 그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중에도 참 이상한 일이지. 사얀의 눈에는 유난히 한
명만 자꾸 눈에 들어왔다.
달칸 용병대. 그 중 비공식적으로 백정 부대라고 불리는 부대가 있다. 그
악명 높은 부대에서 제일가는 인간 백정으로 손꼽히는 그 사내의 이름이
일릭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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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화에 계속
63.

외전 사얀 3.
물론 미로스의 대공이 일개 용병 나부랭이를 오래 기억 속에 남겨둘 이유는
없었다. 사얀은 그게 아니더라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지나치게
많았으므로, 시르반 요새를 빼앗고 세리포브와 강화 조약을 맺었을 때 이미
그의 머릿속에 그 용병의 존재는 사라져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사얀은 더더욱 무료해졌다. 요즘에는 그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이 좀처럼 없는 탓에 감옥을 채울 일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취미방에 장난감을 가져다 두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나마 나은 게
있다면 사냥이었다.
도대체 카미드는 언제쯤 건강이 좀 악화가 될까. 혹은 심각한 정치적인
실수도 괜찮은데.
사얀은 그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사실 이대로 평화가 지속되다가 카미드가 후계자 없이 자연사하는
것이었다. 결국에 그의 공석은 사얀의 것이 되고, 또 레이사의 것이 될 테니
말이다.
카미드가 자꾸만 레이사를 찾기 위해 공국을 들쑤시는 것이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레이사를 잘 숨겨 두기만 한다면 버텨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또
카미드가 쓸데없이 사얀을 견제하지 않도록 이스테샤가 설득만 잘 한다면
말이다.
이 평화에 문제가 있다면 사얀 자신이 지루하다는 것뿐이겠지.
당장 티마예브의 왕실을 뒤집어엎을 게 아니라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사얀은 이 기약 없는 기다림에 염증을 느끼며 간혹 사냥을
하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아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가 그 남자를 발견한 것은, 제 사냥터 가장자리에 위치한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을 때였다.
미로스의 백성들은 대공의 사냥터 위치를 알고 있었다. 또 사냥이 있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며칠 전부
터 깃발을 올려 두기에 사용되는 사냥터 주변에는 가까이 오지를
,

않았다.
그러니 대공의 사냥터 주변에서 모습을 보였다면 이방인이거나
암살자라는 뜻인데.
난데없이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에 대공은 조금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부하들을 물린 채 저 홀로 사내의 뒤를 밟았다. 암살자는 아닌 느낌.
아마도 용병일 것 같았다. 전사의 육체로서 꽤나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째서인지 야한 느낌도 조금쯤.
그런데 남자의 육신에 그런 감상을 느낀 게 대공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물레방앗간 안에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 다른 남자와
무어라 실랑이를 하는 것 같더니, 그 이후의 일은 순식간이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저에게 달려드는 사내의 가슴을 검으로 쿡 찔러 버린
것이다.
무심한 얼굴에 군더더기 하나 없는 솜씨였다. 가슴을 꿰뚫린 남자는
즉사했다. 하도 깔끔하게 사람을 죽여서 대공은 휘파람이라도 불 뻔했다.
더 볼만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 뭐랄까…….
길게 옆으로 찢어져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눈매라든가, 단단해 보이는 굳은
턱 따위가 조금……. 조금 그랬다.
그러나 남자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곧장 그
자리를 뜬 것이다.
나가서 얼마 가지 않아 남자는 저를 아는 체하는 여자의 허리를 꿰어
안았다. 인적 드문 외곽의 길이라지만 대낮에 하기에는 과감한 행태가
아닌가. 얼굴을 붉히는 여자를 남자는 짐승처럼 안고 헛간으로 데려갔다.
남들이 하는 것을 보는 취미는 그다지 없었으나, 대공은 어쩐지 거기까지
뒤를 밟아 헛간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에게 벽을 짚고 허리를 숙이게 한 뒤 남자는 뒤에서부터 여자를 안고
있었다. 교성이 귓가를 간지럽게 울렸다. 남자의 허릿짓이 격렬해지자
여자의 신음소리가 더더욱 커져 갔다. 남자는 덥다는 듯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졌다.
단단한 목과 승모근. 넓게 벌어진 어깨와 흉포한 굴곡을 드러내며 쩍
갈라지는 근육들. 그것만으로도 예술적이라 하련만, 백미는 그 널찍한 등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역삼각형
으로 좁아지며 허리가 제법 날렵하게 빠진다는 점이었다. 척추 골
양옆으로 발달해 그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거리는 기립근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게다가 그 아래의 엉덩이는 또 어떠한가. 여자의 안쪽으로 진퇴를
반복하느라 조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그 엉덩이 근육을 사얀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남자들의 몸보다 야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피부색 때문인
것도 같았다. 얼굴과 팔, 상반신이 짙은 색인 것과는 달리, 옷에 가려져
있었던 둔부는 은근히 희었다. 전신적으로 체모가 그다지 많지 않아 살갗이
맨들맨들해 보이기도 했다.
유연하게 튕겨지는 허릿짓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 허릿짓이 이어질
때마다 엉덩이 위쪽이 보조개처럼 움푹 패이는 게 또 야해 보였다.
움직이는 뒤태에서 사얀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벗은 몸이라면 여러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성교중인 사내의 뒷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이 상당히 볼만하다. 특히나 엉덩이. 음,
저 엉덩이.
저런 엉덩이라면…….
저 탄력적인 엉덩이에는… 음.
제 좆을 박아 넣고 잔뜩 조이게 하고 싶다.
티마예브의 둘째 왕자, 미로스의 대공 사얀은 본디 섹스보다는 조금 다른
것을 좋아하는 자였으나, 눈앞의 용병을 보고 든 생각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사람을 죽이면서도 무덤덤했던 얼굴. 조금 난처해하다가 금방
무표정해지는 얼굴. 여자를 낚아챌 때도, 그녀를 안을 때에도 크게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
우는 얼굴은 어떨까.
뒤로 가득 사내를 품고 엉엉 우는 얼굴, 보고 싶은데.
미로스의 대공이 입맛을 다신 순간. 불쌍한 용병의 미래는 그렇게 결정되어
버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달칸 용병대에서 제일 뛰어난 인간 백정으로 데려와라.”


용병 하나를 찾으라며 대공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에 달칸 용병대에서 파빅이 데려온 것이 바로 일릭이었다. 그를 보고
대공은 바로 알아차렸다. 전장에서 눈에 띄던 용병도, 헛간에서 본 그
치명적인 뒤태의 주인도 모두 이 사내라는 것을.
그러니 이 사내가 자신의 장난감이 되는 것은 어떤 운명인 게 아닐까.
권력자를 알현하는 자리라 긴장을 한 것 같긴 한데, 그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사내를 대공은 퍽 마음에 들어했다.
‘그대가 애원하면, 그대의 후장에 좆을 박아 주겠다고.’
저속한 표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릭에게 내뱉는 것은 즐거웠다.
속이 잘 읽히지 않는 무덤덤한 얼굴이 미세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보면 볼수록 대공의 마음에 차는 사내였다. 일단 용병으로서의 제 주제를
아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그러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게 신기하기도 했다.
자존심이 없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숨기는 게 재미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사얀을 즐겁게 한 것은 결국에는 숨기지 못하고 굴욕감을
드러내던 표정과, 그러면서도 느낄 때면 잔뜩 흐트러져서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었다.
첫 삽입도 좋았다. 상대의 순결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그
탄력적이고 예쁜 엉덩이를 범하는 게 자신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흥분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겉만 탄탄한 게 아니라, 성기를 받아 감싸는
내벽의 감촉도 훌륭했다. 힘이 좋아 어찌나 잘 조이는지 대공은 그 여느
때보다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취미 생활을 조금 미뤄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에 제 성기를 물게 했을 때는 어땠더라. 일단 생각보다
혀와 입을 잘 써서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말주변은 없는 사내가 입을 이런
데 쓸 줄은 아는가 싶어 조금 웃음이 나왔다. 버거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대공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버거워했기에 더 심하게 몰아붙였다. 잔뜩
고인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던 얼굴. 와, 그 우는 얼굴이 정말이지
최고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구역질을
삼키면서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결국에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내는 그 얼굴에 대공은 제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제 좆을 보면 빨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만들어야겠다. 넣어 주길 바라며 그
내벽이 절로 젖어들게 만들 것이다. 며칠 박아 주지 않으면 몸이 달아서
발정이 나도록. 가슴만으로도 절정에 다다라서 옷에만 스쳐도 화들짝
놀라게 만들어 버리자.
뭐 그런 것들이었다. 게다가 일릭은 소질이 있었다. 고작 두 번째일 뿐인데
삽입 섹스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엉망으로 박아 대는데도
불구하고 느끼더니, 대공이 사정하는 것과 함께 묽은 정액을 뿜어 냈다.
대공이 그 정사에서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개만도 못한 새끼…….’

일릭이 대공을 보며 중얼거리고는 기절해 버린 것은.



‘…… ?’

순간 대공은 제 귀를 의심했다. 물론 그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은 이들은


많이 있었지만 모두 지하 감옥이나 그의 취미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침실에 들여 주었는데 욕을 듣기는 또 처음이라.
잠결에 제가 내뱉는지도 모르고 내뱉은 소리겠지만……. 역시 성깔이
있잖아. 아니면 설마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일까. 무덤덤하게 참고
버텨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대공의 생각보다 일릭은 더 재미있는 부류였다.
한 침대에서 자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 어떤 상대와도 침대를 함께 사용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 없던
대공이었기에, 옆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눈만 감고 있다 뿐 잘 수는
없었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어깨와 가슴 언저리를 베고 주인의
성정을 닮아 단단하면서도 묵직한 심장 박동을 듣고 있노라면 머릿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릭이 더욱 마음에 든 점은 그가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광증을 가라앉히는 약의 부작용으로 사얀이 갖게 된 식지 않는
폭력적인 욕정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이었다. 기절했다가도 금방 깨어나고, 고
통스러워하면서도 좀처럼 망가지지 않는다.
한동안 질릴 것 같지가 않았다. 몇십 번, 몇백 번 정도 안고 나면 그래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느 순간
에는 질리겠지 .

그때는 그럼 취미방에 데려가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일릭은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대공에게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여러모로 즐길 거리가
많은 장난감이 아닌가.
생각지도 않게 제 손에 잡힌 장난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대공은 잠시
무료함을 잊을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한참 즐거움을 찾으려고 할 때에 귀찮게도 카미드를
쳐야 하는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복병은 이스테샤의 옛 연인인 엔리온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적개심마저도 사얀이
유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엔리온이 이 모든 것을 끝낼 시발점을
제공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의외의 타이밍에 의외의
인물에 의한 의외의 사건이었다.
세리포브의 일을 빌미로 엔리온이 카미드를 충동질했고 카미드는
얼씨구나 그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연합군이 결성되어 미로스는 이제 온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할 판이었다.
물론 대공은 10년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두었기에, 지금 당장 전쟁이
터져도 상관없었다. 도리어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조차 지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는데 내가 지금 전쟁 따위를 하게 생겼나. 내가 뭐
그렇게 왕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내 자식… 아니 조카한테
왕위 좀 주겠다고, 귀찮게. 그런 생각이 조금 들어서 이스테샤한테
미안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0년을 준비해 온 일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일릭은 대공의 취향에
꼭 맞아떨어졌다. 근육으로 가득 찬 풍만한 가슴도, 의외로 분홍빛인
유두도 모두. 아주 예민하게 개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한
가슴이라 좋았다.
게다가 반응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재미있다보니, 계획과는 달리 그에게
이스테샤와 레이사에 대한 얘기까지 해 버렸다. 물론 진실만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쯤은 거짓을 섞은 제 치부와도 같은 얘기를 할 때의 일릭의
반응이 또 웃겼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궁금하지
도 않으니 굳이 알려 주지 마라, 알고 싶지 않다, 너와 얽히고 싶지
않다……, 뭐 그런. 귀여운 반응이었다.
가슴이 그렇게 귀여우니 사람도 귀여운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대공은
누이에게 받은 약을 ‘애첩’에게 사용했다. 이스테샤가 카미드에게 방치
플레이를 할 때 쓰기 위해 개발한 미약이었다.
그 약을 쓰면 카미드는 해결되지 않는 욕구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고통에 기뻐하지만, 일릭에게는 오직 괴로움만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것-예
컨대 젖꼭지를 애무하는 것으로 절정을 느껴야 한다 같은-을 시키면
굴욕감에 이를 지그시 물면서도 미약의 효과에 무너져 수치스러운 쾌감에
허덕이는 표정이 기가 막혔다. 가슴만을 애무당해 사정에 이르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속이 찌릿할 정도로 즐거워졌다.
그래서 대공은 그의 사정까지 금지했다. 그래야 다음 만남이 더욱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독점욕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일릭이 다른 여자와 놀러 다니는 것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장난감이 자신과의 시간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그 외에는 뭘 하든 굳이 터치할 생각이 없었다. 그 여자가 일릭에게
알리바이를 위한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고, 또 나름의 숨 쉴 구멍은 있어야
오래 버틸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은 자신의 즐거움만을 중시했다. 일릭을 고통스럽게 해서 대공이 더
즐거울 수 있다면 사정을 막는 건 하나의 플레이일 뿐이었다. 혹은 이미
다른 상대와 즐기고 와서 더는 사정할 수 없는 상태인 일릭을 쥐어 짜내어
억지로 사정하게 만드는 것도 좋다.
사얀에게 일릭은 딱 그 정도였다. 즐거움을 위한 도구. 좀처럼 망가지지
않는 튼튼한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느 순간 사랑을 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갖은 굴욕적인 짓을 마지못해 감내하던 사내를 결국 며칠 욕구불만에
시달리게 했더니, 더 하자는 속삭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때 얼굴이 참 귀여웠었지.
아니면 온갖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행위에는 다 무덤덤하게 응했던
주제에 키스를 한 순간에는 정말로 싫다는 듯 혐오감을 드러내었을 때?
아, 그때 그 얼굴은 정말로 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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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사얀은 회상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티마예브의 왕녀. 프리스카 백작 부인, 이스테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티마예브의 왕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는 것 역시 10년 만이었으나
사얀에게는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카미드는 깨어났나?”
“…전하께서는 이제 막 깨어나셨지.”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데 현 국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사얀에게 경고를
하듯 이스테샤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힘주어 ‘전하’라는 소리를 하는
그녀를 보며 사얀은 비위도 참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다음 왕위에 오를 후계자로서 사얀은 서거하기 전의 국왕을
만나야 했다. 그래도 카미드가 병석에 누워 있다고 하니 전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도 제대로 쉬어 내지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카미드를 보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이었다.
사얀은 이스테샤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을 버티고 버텼던
그녀가 결국에는 저 의심 많은 카미드를 중독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약을 제조하는 솜씨가 더 좋아졌는지 의심 받을 정도로 급작스럽지도
않았다. 물론 북부가 의심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이제는 크게
상관없었다. 길리어드가 사얀의 편에 섰으므로, 에도스 공작은 더 이상
골치 아픈 상대가 아닐 것이었다.
확 죽여 버렸어도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 이스테샤는 카미드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그러나 숨은 붙어 있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죽인 게 아니니 골육상잔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형제간에 과한
행동이었다 해도 이것은 이스테샤가 동의를 한 일이니까 틀린 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10년 동안 이스테샤를 곁에 두고 괴롭힌 카미드의
죄였다. 또 형제인 사얀을 먼저 죽이려 한 것도 카미드니까 이스테샤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사얀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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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화에 계속
64.
외전 사얀 4.
너도 이렇게 될 줄을 알고 나를 그토록 죽이고 싶어했던 거겠지.”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알아보고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카미드를 보며 사얀은 중얼거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암살 시도 따위를 하지 않았다 해도 사얀은 카미드를 싫어했을 것이다.
이미 아주아주 싫어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누구는 이성을 잃고 사얀의 얼굴을 때렸는데도 싫지가 않았다는
게,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숱한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았던 사얀이 장담컨대 그가 얼굴을 맞은 것은
그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얼마나 제대로 맞았는지 사얀은
순간 기절을 다 했었다. 깨어나 보니 얼굴이 붓고 아팠고 궁정의사가
성심성의껏 약을 써서 부기를 가라앉힌 이후에도 새카만 멍이 한참을
갔었다. 미로스의 대공이 당할 꼴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데도 왜 용서를 할 마음이 들었을까. 아직은 조금 더 즐길 게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상한 일이지. 사얀 그 자신은 아픈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데.
무엇이었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을 하는 것으로는 결론이
나지를 않아서, 사얀은 일릭을 지하 감옥도, 취미방도 아닌 제 침실로
다시금 불러들였다. 얼굴의 욱신거리는 통증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깨어난 어느 새벽, 그냥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엉망으로 멍이 든 제 얼굴을 보는 일릭의 표정이…….
욕실에서 조금은 겁먹은 얼굴로 제 눈치를 보며 성기를 무는 얼굴이…….
아니, 그 이전에 키스를 했더니 정말 싫어서 죽겠다는 듯이 일그러졌던 그
얼굴이…….
대공의 얼굴에 주먹질을 할 때의 얼굴이…….
정말이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너무 좋아
서 생각한 것만으로도 쌀 것만 같았다. 그가 진저리를 칠수록
좋았다. 싫어서 질색하는 얼굴이 소름 끼치게 즐거웠다. 그 무심하면서도
무덤덤한 얼굴이 싫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정말 귀여웠다.
그래… 귀여웠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카미드의 싫어 죽겠다는 얼굴은 꼴 보기 싫어
죽겠는데 말이다.
“왕비는?”

“왕비 전하는 왕비궁에 모셔두었지. 네가 왕위에 오를 즈음에는 성도로


요양을 가실 거다. 에도스 공작이 축출되어도 화를 피할 수 있도록.”
“누이는 너무 물러.”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고 싶어.”

그 동정심을 사얀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스테샤가 그렇게 하고


싶어했으므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옳다고 그녀가 믿으니, 그게
옳은 것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이만 가야겠군.”

“방에 돌아가기 전에 네가 전에 쓰던 궁에 좀 가 봐.”

“거긴 왜.”

“…지하 좀 치워. 레이사가 오면 거길 써야 하지 않겠어?”

“왕세자인데 카미드가 썼던 궁을 쓰는 게 낫지 않나.”

“거기가 더 기분 나빠.”

“아하. 그렇다면야.”

사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나가면서도 그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제 형제에게는 인사 한마디 하질 않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도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작은 관심조차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얀은 카미드를 싫어했으므로.
하루 빨리 뒈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왕의 침실을 나온 순간
사얀은 카미드의 존재 자체를 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의 발걸음이
성인이 될 때까지 티마예브에서 머물 때 썼던 왕자궁으로 향했다.
다시 일릭의 얘기를 해보자면, 그는 신기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대공의
마음에 들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물론 사람
인 이상 한 두 가지는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있기는 했다.
가장 어이가 없었던 건 이 계약을 일릭 자신이 파기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대공과 같은 권력자에게 일릭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버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존재에게 살을 맞댈 기회를 내리고 그를 만족케 할 영광을 내렸으며
위험에서 구해주는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데, 뭐? 계약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
대공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 어쭙잖은 너그러움이 일릭이 주제를 모르게
만들었다며 반성하기도 했다. 계약 따위 언제든 대공이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을 수 있는 건데 그게 뭐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줄 알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대공의 마음이지, 그깟 계약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모를 줄이야.
그래서 조금 버릇을 고쳐 줄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쩌면 그때부터 사랑이었을까.
고작 요도에 막대기를 꽂은 것만으로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더는 못 한다고
우는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 것을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펠라티오를 배우며 고통에 우는 얼굴이 가여워서
즐거웠던 것이 분명 시작이었는데.
“전하. 똑같은 것으로 본성에 준비를 할까요?”

왕자 궁을 관리하던 시종장이 굽실거리며 물었을 때 대공은 다시금


회상에서 깨어났다. 어릴 적부터 이 궁을 관리하던 시종장의 얼굴에서
대공은 그간의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에 피둥피둥 살이 오른 걸 보니
그간 살 만했던 모양이다.
“아직 즉위식도 하지 않았고 국왕 전하도 살아 계신데, 나를 반역자로 만들

셈인가.”
“죄… 죄송합니다, 각하…….”

“예나 지금이나 경솔한 건 매한가지군, 그래.”

입을 열어도 된다고 한 적이 없는데 멋대로 떠드는 꼴이 말이다.


조용한 게 좋아서 사얀은 곁에 말 못하는 하인들을 두곤 했다. 왕자 궁의
시종장 역시 모르지 않을 텐데도 잠시 잊었던 모양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피비린내가 나는군.”
“…송구합니다.”

시종장이 허리를 굽실거렸지만 그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관리가 잘못되어


피비린내가 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랫동안 피를 머금어 방 전체에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가시질 않을 뿐이었다.
이런 방에 잠깐이라도 들어왔다가 나가면 몸에 피비린내가 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냄새였다. 다만 피 냄새에 예민한 일릭이라면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게 어떤 냄새인데?’

‘겨울로 접어들 무렵의 숲 공기처럼 청량하기도 하고, 햇볕에 말린

리넨처럼 건조하기도 한… 그런 냄새입니다.’


언젠가 일릭에게 제 체취를 물었을 때 들었던 대답이 떠올라 사얀은 피식
웃었다.
‘……좋은 냄새입니다.’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이 공간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몸에 다시 피비린내가 밴다면
일릭이 미간을 찡그릴 테니까.
“여기 있는 것들 전부 버리고 싹 치워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사얀은 한동안 그의 즐거움이 되었던 취미방을 이제는 없애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방을 없애 버리면 나중에 일릭을 데려오고 싶어졌을 때는 어떻게 할
건데. 구하기 어려운 도구들, 직접 기술자에게 만들게 시킨 좋은 도구들도
많은데 정말 버릴 거야? 다시 만들기 힘들 거라고.
입 닥쳐, 사얀.
아니, 사얀은 너라니까.
알아. 그러니까 닥쳐.
머리를 묵직하게 누르던 두통이 조금 가벼워지자 그 두통에 억눌려 있다가
탈출하듯이 튀어나오는 목소리에 사얀은 미간을 찡그렸다. 약 기운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떨어진 모
양이었다. 두통이 없는 건 좋지만 목소리가 시끄러워서 다른
종류의 두통이 찾아들었다.
미로스에 있는 방은 그럼 남겨 두자. 머릿속에서 사얀이 속삭인다.
그 취미방에 일릭을 데려간다고? 그러나 사얀은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공의 얼굴을 때려 감옥에 갇혔던 일릭을 불러들였을 때, 멍든 제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던 그를 달랬을 때 이미 생각했던 바였다. 눈치를
보지 말라고 달래다니, 이래서야 애첩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사얀은 일릭을 고문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흔해빠진 검은 눈동자에 공포가 어리는 걸 떠올리자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진절머리 난다는 눈빛이 주는 느낌과는 몹시 다를 것
같아서… 일릭이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고문실에 데려가지는 말자고
생각했었다. 그날로서 대공의 취미방은 역할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로스에 만들어 두었던 취미방.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미로스에 연락을 넣어서, 그곳에 있는 지하를 치우라고 해.”

“예, 그리 하겠습니다.”

“거기 시신이 한 구 있을 텐데…….”

기사 베이즈였나.
그가 제 연무장을 쓰고 있던 일릭에게 시비를 걸었던 밤. 베이즈는 대공이
연인이라 한 일릭의 처지를 질투하여 별관으로 대공을 찾아왔었다. 일릭을
대신해서 대공에게 기쁨이 되고 싶다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그의
애정을 바랐다.
그러나 베이즈는 그다지 침실로 데려가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대공은 그를 자신의 취미방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의자에 앉혀 놓고 사지를 결박한 이후에는……. 글쎄. 그 어떠한
짓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하고 울며 살려 달라 비는
남자에게서는 그 어떤 즐거움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손톱을 뽑는 것부터가 시작인데, 사얀은 도구를 들었다가 그냥 자리에
내려놓았다.
베이즈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우는 꼴을 보기보다는 일릭이 우는
얼굴을 보는 게 더 짜릿했으므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굴욕감에
젖어 몸부림치는 모습이, 싫어서 질색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즐거웠으므로.
대공은 그 지하실에 베이즈를 내버려 둔 채로 올라와 버렸다. 그 뒤로 다시
내려간 적은 없었다.
대공의 명령이 없으면 그 지하실의 문은 열리지 않으니, 아마 베이즈는
그곳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럴 의도는 결코 아니었는데… 깜빡했다.
본성의 연무장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말라는 제 명령을 베이즈가 깜빡했던
것처럼 말이다.
뭐, 어차피 살려 둘 생각은 없긴 했다.
“그냥 태워 버리라고 해.”

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해 줄까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사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제 명령을 허투루 여기고 일릭을 공격하기까지 한 괘씸한
놈에게 그런 자비를 내려 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라면 이 방 하나는 남겨 둔다. 혹시 우리 아들 레이사가 이런 취미를
가질지도 모르는걸.
닥치래도. 레이사는 이스테샤와 엔리온의 아들이야. 나처럼 피를 좋아할
리가 없어.
레이사도 티마예브야. 일릭을 보고 반해서 이런 방으로 데려와서 예뻐해
주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
평소에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으로 조절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약효가 빨리 떨어지는 모양이다. 안 들리다 들리기 시작하니 그
소리가 평소의 몇 배는 시끄러운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릿속의 사얀이
자꾸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 댄다.
미친 소리라는 걸 알고 있어도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 모든 게
자신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분리하기가 어려웠다.
“이만 돌아가겠다.”
대공은 빠르게 지하실에서 나왔다.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
자꾸 신경 쓰이게 하니까 귀찮다. 그냥 일릭을 저 방으로 데려갈래, 사얀?
아니, 전혀 맑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시끄러워졌다.
닥치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듣지를 않고 떠들어 대는 머릿속 소리에 대공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한숨을 내
쉬며 본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서 빨리 약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그거 먹지 말고 나랑 대화하자니까. 우리가 함께 생각하면 더 좋은
발상이 나오는 걸 알잖아?
하, 네 헛소리를 듣고 앞뒤 따지지 않고 알즈로 갔다가 죽을 뻔한 걸 아직 난
안 잊었는데.
아니지, 사얀. 다 이긴 전쟁이라며 빨리 끝낼 생각에 방심했던 건 너야.
덕분에 일릭도 죽일 뻔했잖아.
“닥치래도.”

내뱉은 순간 대공은 흠칫 굳어졌다. 툭 내뱉어 버린 제 소리에 도리어 제가


더 놀란 것이다. 누구누구처럼 혼잣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니. 어서 가서
약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일이 조금 안정이 되면 이스테샤와 상의를 조금 하자. 이미 미쳐
있지만, 그래도 조금 덜 미치고 싶었으므로. 앞으로 더욱 미쳐 가겠지만 그
속도를 조금이라도 조절하고 싶었으므로.
일릭이 울까 봐 그래? 하지만 우는 얼굴, 좋아하잖아. 울리고 싶잖아.
바들바들 떨며 겁에 질린 거 보면 아랫도리가 짜릿해지잖아?
물론 그도 그렇지만……. 여전히 질색하며 싫어하는 얼굴이 좋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릭의 눈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눈에 진심으로 공포와
경멸이 어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안쪽이 조금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 옛날 어린 마음에 이스테샤의 눈물을 보고 아팠던 그 느낌과
조금 비슷했다.
그래서 안 울릴 거야? 이제는 예뻐하기만 할 셈인가.
…그런 건 아니지. 우는 얼굴이 예쁜걸.

그래, 그러니까 지하 고문실. 남겨 두자니까.


끝없이 속삭이는 소리를 무시한 채 사얀은 빠른 걸음으로 본성의 제 거처로
이동했다.
자신의 침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침실
근처에는 가까이도 가지 않았다. 응접실 겸 거실로 쓰이는 공간에서 급히
약을 타게 해 한 잔을 마셨다. 혀가 쓰라릴 정도로 떫고 맛없는 약이었다.
차처럼 맑고 고운 빛깔을 지녔는데 이렇게나 맛이 없을 일인가, 먹으면서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늘 고역이
었다. 그걸 마실 때는 입맛을 잃어 식사를 하기가 싫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차를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기 싫다고 괴성을 지르던
머릿속의 소리들이 점차 가라앉는다.
“……하…….”

그리고 관자놀이 부근을 두통이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신이 하늘에서 제


정수리를 짓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목과 어깨가 뻣뻣해져
갔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더 이상 사얀이 떠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두통은 물론
괴롭지만, 일릭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조금은 나아질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에 몸에 밴 이 피비린내를 씻어 내야 할 것이다. 일릭이 제

체취를 좋은 냄새라고 했으니 말이다.


“목욕을 준비해라.”

시종에게 명령하며 대공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약효가 오르면서 기묘한 열기가 다시금 사얀의 안을 들쑤신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면서 폭력적이며 흉포한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목소리가 사라진 지금, 사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일릭을 품에
안고 싶다는 욕망뿐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5.


외전 사얀 5.
그러니까 이 장난감이 언제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사랑이 되었는지는
미로스의 대공 사얀도 정확히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얼굴에 생채기를 만들어 왔을 때는 어땠더라. 그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었다. 자신도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 감히 다른 이가 상처를
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있었다.
평소라면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는 존재라면 전부 죽여 없앴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상대 여자가 죽이기에는 여러 관계가 얽혀 있어
조금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사생아가 좋아하는 여자가 일릭의 뺨에 상처를 만들었다더군.”

대공의 말에 그의 호위기사 자칸은 어깨를 움찔하며 눈에 띄게 동요를


보였다.
자칸은 대대로 미로스의 녹을 먹었던 가문의 일원이었는데, 사얀의
어머니인 공녀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그녀의 사후에는 사얀과
이스테샤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그는 출신 가문도 괜찮았고 좋은 기사였으며 출중한 능력을 가진 전장의
지휘관이었으나 가벼운 아랫도리를 가지고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호위 기사로서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가 사생아는 여럿 두었으니 말이다.
그중 하나가 달칸 용병대의 체즈번이라는 남자였다. 우연찮게도 일릭과는
용병대 내에서 친한 사이였기에 대공은 기꺼이 그를 정보원으로 사용했다.
체즈번 역시 용병의 내부 사정을 넘기는 행위에 성심껏 응했다.
이유인 즉, 체즈번은 리리엘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리엘이
일릭을 좋아하니 그간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지만, 대공이 리리엘에게서
일릭을 떨어뜨려 주기만 한다면 체즈번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대공은 체즈번에게 리리엘과 그의 안위를 약속해 주었다. 또한 두 사람이
살림을 꾸리게 된다면 체즈번이 무사히 미로스에 정착하도록 도와줄
것이었다.
덕분에 용병대의 내부 사정이 대공에게 훤히 들어왔다. 일릭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의심하면
서도 마일을 살해한 범인을 열심히 잡으려 하는 용병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그들에게 다른 임무를 내려 로인으로 보내 버렸다. 체즈번 역시
함께 보내 버림으로써 혹시라도 그에게 쏠릴 수 있는 의심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리리엘과 직접 거래를 했다. 리리엘은 똑똑한 여자였다. 그는
대공의 명령에 제가 일릭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수긍했다.
리리엘은 그래서 대공에게 사주를 받은 대로 연기를 했다.
남자를 사랑하는 척하는 연기는 그녀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일릭을 꽤나 사랑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덕분에 일릭의 맨들맨들한
아랫도리를 보았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예쁨받고 있는 것인가 싶은
질투심이 끓어오르기도 해서 진심이 나와 버렸다. 상처를 입힐 계획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상처를 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대공은 그것을 용서했고, 리리엘은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그것은
바로 용병대에 찾아가 일릭의 알리바이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여자의 연기 역시 썩 훌륭했다고 리리엘은
자부했다.
덕분에 리리엘은 평생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부를 얻었고,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새 신랑을 얻었다. 말이 많은 게 조금은 흠인 남자였지만, 말
한마디 없다가 권력자에게 걸려 그렇고 그런 몸이 된 일릭보다 나은 것도
같았다.
리리엘은 체즈번이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얻어 온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선물하며 청혼을 했을 때 리리엘은 몰랐던 것처럼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행복해졌으며, 제 사생아가 찾은 행복에
자칸 역시 기뻐했다. 대공은 일릭을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음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자그마한 간계였던 것이다.
음, 모두라고 하기에 일릭은……. 그에게도 안락한 잠자리와 풍족한
먹거리, 그 어느 귀족도 누리기 힘든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않았을까.
대공은 합리화를 마쳤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용병대가
일릭을 의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으로도 일릭을
불안하게 만들어 제 곁에 잡아 둘 수 있다고 대공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안일한 자신감이었는지.
일릭은 어서 이 계약이 종료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공과의
잠자리를 질색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점점 즐기고 있으면서. 박아 주지
않으면 아쉬워하며 허리를 뒤채며 사람을 보채는 주제에 말이다.
몸은 그렇게 착실하게 길들여지고 있으면서 마음은 계속 떠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을 대공이 확신한 것은 알즈로 가던 길에 습격을 당했을 때였다.
전쟁을 앞두고 사얀은 약을 끊었었다. 광증이 도지는 게 불안하기는
했지만, 머릿속에서 떠들어 대는 사얀이 상담하기 좋은 상대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특히나 둘(?)은 어릴 적부터 함께 병법을 공부하던 사이였다.
전쟁을 할 때는 늘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어 서로를 이기기 위해 여러
획기적인 전술들을 짜냈었다.
그래서 약을 끊었던 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라베인 백작이 교황이 드디어 비밀 회담에 응해 알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순간, 사얀은 확신을 해 버린 것이다. 이 전쟁은 이제 끝이 났다고.
엔리온에게 어서 레이사의 존재를 밝히고 끝을 내버리자고. 약점을 쥐고
있는 건 이쪽이니 빨리 알즈로 가서 결판을 짓자고…….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알즈로 가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적어도
다른 첩보를 두 번 세 번 확인한 뒤에 움직였어야 했는데.
덕분에 죽을 뻔했다. 그 와중에 설마 알즈가 점령당해서 레이사가 노출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뒤따랐다.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사얀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대공의 눈에 일릭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검을 들고
적을 베어 넘기는 그 모습을 무의식중에 쫓고 있었다. 커다란 몸이 어떻게
저리 날렵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효율적으로 급소만을 노려 사람의
생명을 앗을 수 있나. 피를 뒤집어 쓴 그는 흡사 한 마리 짐승과도 같았다.
그 흥분이 길게 이어지는지, 대공과 단둘이 도망을 친 이후에도 일릭의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번뜩거렸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공은 명확한
살기를 느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농밀한 살기가 마치 이 자리에서
당장 대공을 죽이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싸움을 하
니 도리어 물 만난 고기처럼 구는 인간이, 제 곁에서 고생이 많다.
피부를 찌르는 살기 속에 그런 느긋한 생각이 들어 대공은 피식 웃어
버렸다.
‘이런 실력이라면 그대의 원대로 바스코브에 갔어도 한몫을 단단히

챙겼겠어.’
제 곁을 떠나려 하는 게 괘씸해서 보내지 않았지만. 그냥 보내 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적어도 오늘 밤의 외출에 동행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적어도
일릭은 살았을 테니 말이다.
아니, 대공이 죽으면 전쟁은 미로스의 패배로 돌아갈 테니 용병인 그의
목숨은 어차피 위태로웠으려나. 여러 생각이 느슨하게 머릿속을 부유했다.
‘달칸 용병대에서 그대를 제거하려면 힘이 많이 들어가겠군, 그래.

아깝기도 아까울 거고.’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대가 대장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고 의심받고 있더군. 변절자라는


소리가 돈다는 건 눈가림일 뿐이지……. 알리바이가 뒤집어진 지금, 거짓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가장 의심받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사얀은 스스로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으나 좀처럼 멈춰지지가 않았다.
어이, 저 정도까지 말을 해 버리면 용병대에 정보원을 심어 둔 걸 일릭이
알아 버릴 거라고. 속삭임이 들려왔다.
‘……도와주실 거잖습니까.’

‘물론이지. 용병대 따위가 그대를 건드리게 둘 리가 없지.’

그것은 사얀의 진심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손에 넣은, 마음에 꼭 드는


장난감을 다른 놈이 부서뜨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마도 대공이 조금 더 제정신이었다면 그 순간 일릭이 뿌려 대던 노골적인
살기가 순식간에 흩어졌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일릭에게는
다행히도 대공은 그 살기가 자신을 향한 살의였음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소리들이 울려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으므로.
시끄러워, 닥쳐, 사얀.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뇐 말이었다. 물론 소리들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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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배신자는 그 사얀이라는 자인가요.’
일릭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순간, 미로스의 대공 사얀은 당황할 수밖엔
없었다.
저도 모르게 제 머릿속의 생각을 ‘사얀, 그 멍청한 놈이 상황을
낙관했지.’라고 입 밖으로 내었던 게 떠올랐다. 일릭이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왕족의 이름은 귀하디귀한 것이라. 일개 평민에 불과한 일릭이 사얀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모르고 있기에 망정이지
대공의 이름이 사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자기 이름을 3인칭으로
말하는 우스운 놈이 될 뻔했다.
‘……누구?’

‘…사얀?’

…그렇다. 머릿속의 소리는 사얀이 내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럴 때면

머릿속에서 늘 사얀은 너야, 라고 윽박지르던 그 목소리가 이번에는


침묵한다. 사얀은 나라고. 이번에는 대공이 저 자신에게 주장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내가 누구라고 말했다고?’

‘사얀……. 아닙니까?’
그래, 사얀은 나다.
일릭이 그 이름을 부른 순간, 대공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제 존재를
확신했다.
사얀은 나야. 그러니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
‘알즈로 간다.’

그것이 사얀의 결정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확신에 머릿속이 조용해진 것도 같았다. 무어라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을 담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역시나 시끄럽다.
사얀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시르반 요새로 돌아가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만을 듣고 알즈로 향했다가 습격을 당하지 않았던가. 다시
사얀의 말을 듣고 시르반 요새로 갈 수는 없었다. 알즈에 가서 확인을 해야
한다고 그의 이성이 소리쳤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런데 그
가 사얀이었고, 소리친 것 역시 사얀이었으므로 대공은 이제 제
생각과 사얀의 생각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니, 두 가지는 처음부터 구분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얀은 알즈에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레이사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지루한 삶이 아니던가. 그의 삶은 오직
레이사에게 무사히 왕위를 넘겨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레이사가 없다면 사얀 역시 이 지루한 인생을 길게 이어 갈 필요가
없었다. 살면 살겠지만, 굳이 죽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그 결정에 일릭은 반대를 했다. 감히 대공의 뜻에 거역하며 혼자
가라는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사얀은 사실은 많이 지치고 피곤했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소리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올바르고 합리적인 가야 할 길을 찾는데 지쳤다. 약의 기운을
받아 소리들을 없앤다 해도 두통이 따라붙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
두통도 지겹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이곳에서 죽는다면 이 근친상간의 고리를
끊겠다는 결심을 신이 반대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다
지치고 싫었다. 짜증이 났다. 이런 함정에 어이없이 빠진 게 제 정신병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저 자신과 싸우며 앞으로 나아갈 의지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게 내 이성인가 미친 소리인가 구분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는 것도 이제는 싫다.
그냥 알즈로 갈 거다. 설령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짓과 다르지
않다 해도,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한 번 제정신인 적이 있기는 했던가.
그냥 이대로 완전히 미쳐 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일릭이 사얀
을 덮쳐 버렸다. 사얀이 어떻게 반응할 수도 없을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흐읍……!’

달빛을 등진 그 사내는 흡사 한 마리 짐승과도 같았다.


전투의 흥분으로 열기를 뿜어 내는 흉포한 육체나, 그 몸에서 발산하는
광폭한 기세 따위가. 사람 수십을 도륙내어 짙은 피비린내가 뒤섞인
체취조차.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륙에서
흔하디흔한 색인 흑갈색의 머리카락이 짐승의 갈기처럼 보인
것은 아마 달빛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내가 말로 설득하는 것에는 취미가 없다는 듯, 대공에게 폭풍과도
같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 순간에는 미로스의 대공도, 머릿속의 사얀도 모두 조용해졌다.
짐승에게 잡아먹힌다고 생각했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의 품에
끌어안긴 몸이 옥죄이는 기분이었다. 사납게 입안을 범하는 혀와 입술을
물어뜯는 입술에 혼이 쏙 빠지는 듯했다.
그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황홀한 입맞춤이었다.

펠라티오를 할 때도 입과 혀를 잘 쓴다고 생각했었는데, 입맞춤은 또 격이


달랐다. 사납고 격렬한 입맞춤이 너무 뜨거워서 대공은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대립하던 소리들은 이미 한데 녹아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 전신이 오싹오싹했다. 격렬하게 오가다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입술만을 감물고, 장난치다가 다시 난잡하게 얽히는
입맞춤에 사얀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르반 요새로 가는 겁니다.’

짐승처럼 입을 맞추던 남자가 드디어 떨어져 나갔을 때, 대공은 정신이 다


혼미했다. 몽롱해서 눈에 초점도 잘 맞춰지지가 않았다.
뺨을 쓰다듬는 건틀렛을 낀 손에 그대로 절정해 버릴 것 같았다.
‘시르반 요새로 가요.’

아아……. 그대가 입을 맞춰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사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목에 매달리며 키스를 졸랐다.


이어진 입맞춤도 역시나 녹아 버릴 정도로 황홀했다.
그러나 그 입맞춤의 끝에서 사얀은 생각했다.
이렇게 키스를 잘 하면서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입 맞춰 준 적
없잖아. 내가 입을 맞췄을 때에도, 이렇게 열렬히 응해 준 적 없었잖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또한 이
심장의 아픔이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깨달은 것도.
분명 그즈음이었다.
약을 먹지 않았기에 사얀은 그 누구보다 타인의 기척을 잘 파악하고 제
기척은 없는 듯이 숨길 수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다. 다시 알즈로 가야 한다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사얀은
무시했다. 아까는 시르반 요새로 돌아가자고 하더니 참으로 변덕스럽지
않은가.
결국 일릭의 말을 따랐더니 그들은 구출을 위해 나온 자칸을 만나서 살 수
있었다.
사얀은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약을 마셨다. 앞으로 다시는 약을 끊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약기운에 넘실거리기 시작한 폭력적인 욕구를
전쟁으로 발산하기로 했다.
원래는 어떻게든 주변을 침탈하지 않고 진행하려 했던 전쟁이었다. 교황과
교섭만 잘 된다면 싸우지도 않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엔리온은 끝내 비밀리에 만나자는 사얀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고, 사얀은 본때를 보이는 수밖엔 없었다. 게다가 약의 부작용으로
그의 가학성이 배가된 탓에 대공은 잔인하게 손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가 세리포브 도시들에 대한 약탈과 방화였으며 오시안 기병대의
전멸로 이어졌다. 포로로 잡을 수도 있었지만 대공은 그들을 전부 죽이는
쪽을 택했다. 그러고도 사실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일릭의 어깨에 생긴 커다란 멍이 자꾸 생각나서 기분이 좋질 않았다. 그가
움직이다가 간혹 통증을 느끼는지 미간을 찡그릴 때면, 대공은 참을 수
없는 폭력적인 욕구를 느꼈다. 그게 좀처럼 해소가 되지가 않았다.
이럴 때 일릭을 울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남은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전쟁 도중에는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일릭에게 손을
대지 못했지만, 교황과의 비밀 회담이 성사된 후에는 상관없었다.
거듭된 승리에도 불구하고 슬슬 이 전쟁도 지겹고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엔리온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연합군 내의 티마예브 군사를
움직여 내분을 만들고, 그 군사를 돌려 도리어 티마예브를 점령해 카미드를
죽이고 왕이 될 생각도 있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렇게 되
기 전에 엔리온이 결국 사얀을 만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도 .

그럴 것이 사얀은 미리 잘라서 가지고 있던 레이사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엔리온에게 보냈다. 그 머리카락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오해를 한 엔리온은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쌓였던 오해를 풀고, 레이사를 등장시켰다. 엔리온이 놀라고, 제
친부의 존재를 알아챈 레이사 역시 놀라고 모두가 경악하면서도 감동한
그런 상황이었지만 사얀은 그 모든 게 지겹기만 했다.
설계했던 그대로의 장면이었다. 그는 다만 이 지겨운 것들을 모두 끝내고
어서 일릭을 침대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간 지나치게 오래 참았기에 더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티마예브의 왕이 되기 위해 10년을 기다렸는데 일릭을
참는 게 몇 배는 더 괴로우니 말이다.
‘…연인이 정말 있기는 한 거야? 미로스의 대공에 나아가 티마예브의 국왕

되실 분인데, 결혼은 하긴 해야 할 거 아니야.’


당장 썩 꺼지라고 했는데 엔리온은 예전부터 그러했듯이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엔리온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가
사얀을 조금 자극했다.
결혼. 아마 대공이 티마예브의 왕이 된다면 혼인에 대한 압박이 들어올
것이다. 가깝게는 티마예브의 귀족들부터 멀게는 다른 왕실의 왕족들까지.
그래서 대공은 이 기회를 조금 이용할까 하는 마음을 품었다.
‘레이사가 있는데 굳이 결혼의 의무를 이행할 이유가 없지. 연인은 있다.

결혼은 모르겠는데……. 하지만 가능하다면 교황 성하의 축복을 받는 건


의미가 있겠군.’
교황에게 축복을 받는다면 굳이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교황에게 인정받은
연인이 있다는 말로 결혼에 대한 압박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어? 그런 거라면 그냥 결혼을 하지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서? 아니면 신분이 낮아?’


‘신분이 낮은 건 맞지만.’

사얀은, 일릭의 엉덩이를 덥석 손에 쥐었다.


‘누가 봐도 여자는 아니라서.’

손 안에 들어오는 엉덩이가 얼마나 탄력적인지, 어서 박고 싶은 마음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심장이 두
근댔다.
‘그렇지, 내 사랑?’

여기에 일릭의 표정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미친놈을 보듯이 보는 그 얼굴이 대공을 얼마나 짜릿하게 만드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무덤덤한 무표정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의 그 간극에 아래가
온통 뻐근해져 버린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일이야? 그런 생각에 웃음이
터지려 들기도 했다.
‘……나는……. 나는 대공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무려 교황께서 인정을 하셨을 때, 그때 일릭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내가 큰 오해를 해서 미안했습니다. 예쁜 사랑 응원하겠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교황의 축복에 대공은 성혼 선언을 받은 신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진심이 담뿍 묻은 미소였다. 질색하는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 일릭이 귀여워서 당장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 예뻐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다.
결혼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교황의 축복과 인정은 성혼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 이제 일릭은 제 곁을 떠나지 못한다는 생각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릭은 성질을 냈다. 교황의 앞에 자신과의 관계를 밝힌 것에 대해.
감출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 대공이 충분히 설명을 해 주었음에도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과의 잠자리를 피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다른 사람들한테 밝히지 않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그놈의 약속.


분명 모든 일이 제가 뜻하던 대로 풀려서 기분이 좋았는데. 일릭을 안을
생각으로 흥분이 가득했는데 문득 몸 안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약을
충분히 먹었는데도 사얀이 머릿속에서 소리를 내려 하는 그런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관계를 주변에 알리지 않겠노라 약조하지 않으면 계약은 의미가 없다고
했던가. 문득 그날의 일까지 떠올라 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때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감히 대공의 앞에서 계약을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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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투로 입에 담는 것이 얼마나 불경한 일인지를 말이다.
알아들을 수 있게 그 몸에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릭이
머리가 나쁜 것 같았다.
어쩌면 이건 다 대공 자신의 잘못이다. 처음부터 했던 모든 교육이
지나치게 유했던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 두 번 시키지 말라는 것도
가르쳤던 것 같은데 이마저도 다 잊었나……. 이건 벌을 받을 일이지.
사얀의 입장에서 일릭은 그간 사얀 자신이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아, 물론 많이 참을 생각은 애당초 없었기에 요도를 막을 막대기나 구슬
따위의 기구를 준비해 온 것이긴 하지만.
어차피 뭘 해도 싫어할 것이라면, 봐줄 이유도 없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일릭의 눈물 어린 얼굴은 대공을 흥분시키면서도 동시에 그의
마음을 이상할 정도로 약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정말로 고통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윤활유 하나 쓰지
않고 빡빡한 내벽을 벌리고 깊게 성기를 박아 넣자 눈물을 흘리는 일릭을
보고 또 마음이 조금 무거워져 버렸다.
‘오일……. 써 주십시오…….’

눈물에 흠뻑 젖은 애원이 이렇게나 애처롭게 들릴 일인가.


그간 수 없이 많은 육체에 고통을 안기며 대공은 저주와 욕설과 온갖
종류의 애원을 다 들어 왔지만 그중에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오직
일릭뿐이었다. 우는 건 좋지만 너무 아파하니까 자제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게 이렇게 될 걸 뻔히 알면서 괜히 제 앞에서 뻗대어서는.
‘너무…… 아픕니다…….’

사얀은 일릭이 제 자존심을 내던지는 순간 심장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그가 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통증이 아닌 다른 감각을
주는 것으로 그를 괴롭혀야 할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공은 최음 성분이 섞인 오일을 꺼내 들었다. 이것을 일릭의
안쪽에 쓴다면 그 안에 성기를 박아 넣을 저 자신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아
조절이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쓰고 싶어졌다.
‘후회하지 않기다?’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얀이 오일을 꺼내자 안도감이 번지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눈동자에
사얀의 가슴 속에는 어떤 희열이 번졌다. 안도하는 저 얼굴을
다시 절망으로 흐리게 하고 싶다는 흉포한 욕구 역시 차올랐던 것도 같다.
아니, 정말 좋았던 순간은 제가 박아 주기를 바라며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사얀 그 자신에게도 작용했던 미약 때문일까. 혹은 미약에 이성을 놓고
섹스만을 바라게 된 일릭의 몸이 그 여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얽혀 왔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연결되어 있고 싶다. 안아 달라
애타게 허리를 뒤채는 그를 엉망진창으로 안고 싶다. 몸부림치며 울고
그러면서도 사얀을 원해 발정하게 만들고 싶다.
그래서 그를 부수어 깨뜨려 버리고 싶다.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약을 먹었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더 울리자. 저 단단한 사내가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리게 만들자. 이 순간을 끝내지 말고, 그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리자.
사실은 그걸 원하잖아.
그래……. 일릭은 벌을 받기로 했지.
이번에는 운다고 봐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공은 일릭의 눈을 가려
버렸다. 애원하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좋으면서도 가엾어서 제
마음이 약해질까 봐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억눌린 신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움찔대는 입구가 가까스로 구슬들을 삼킨다. 아직 최음제 효과가 남았는지
구슬을 밀어 넣을 때마다 일릭은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늘어져 있던 그의
성기는 제대로 발기했다. 모든 구멍을 범해 주겠노라 하였기에, 제법
단단해진 성기에도 막대기를 밀어 넣었다. 억눌린 사지로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대공을 얼마나 즐겁게 만들었는지 일릭은 알지 못하리라.
또한 그 정도가 사실 사얀의 입장에서는 억누르고 또 억눌러 제 욕구를
최대치로 조절을 한 것이라는 것도.
망가뜨리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일릭이 제
곁에 없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눈을 가려 두어 다행이었다. 울며 애원하는 걸 봐 버렸다간, 금방
그만두었을 테니 말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은 울
부짖는 사내를 찍어 누르며 마음껏 제 즐거움을 만끽했다 튼튼한 .

몸이 그것을 견뎌 주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를 일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 몹시도 사랑스럽다.
질색하는 얼굴이 보기 좋아 사랑 따위를 속삭이다가 정말로 사랑하게 된
모양이지.
머릿속에서 속삭임이 들려왔을 때, 대공은 그제야 일릭을 향한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일릭을 향한 제 애정이 신기하면서도 또 기특하여,
사얀은 다시 한번 일릭을 안았다.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제 품에서 눈을 뜬 일릭을

마주했을 때였다.
‘일어났나.’

짙은 멍이 남겨진 어깨가 안쓰러워 입을 맞추고 또 얼굴에 입맞춤을 퍼붓던


중,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다갈색의 눈동자를 보며 대공은 일릭의 표정을
살폈다.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가 일어나며
자신을 보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던 그가 그저 눈만 꿈뻑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인은 잠이 많다고 하던데, 그대가 나보다 잠이 많으면 어떡해.’

그가 기가 막혀할 소리를 일부러 내뱉었으나, 역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저 잠에서 조금 더 깬 듯이 눈동자만 명징해졌다.
입을 맞출 때면 번번이 움찔대던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간지러운 입맞춤에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이 순종적인 반응. 그에 흡족한 마음이 들만도
하련만,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 오는 것은 어째서인지.
내가 지난밤 조금 과했던 모양이라고 대공은 새삼 반성했다. 참는다고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와 제대로 절제를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일릭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으니, 그가 회복할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일릭이 마차 안에서 기절하듯이 잠들어, 무릎을 베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눕게 하는
것조차 모르는 것을 보고는 더욱. 요새로 돌아가면 일릭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겠노라고 대공은 결심했다. 이마저도 사실은 그답지 않은
너그러운 처사였다.
그러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공은 그러나 일릭에게 자꾸만
자비를 베풀고야 말았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는 게 좋아서 울리는 주제에 더는 못 하겠다는 얼굴로 울면 안쓰러워서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는 기묘한 감정이 찾아드는 것이다. 싫어하며
진저리를 치는 게 좋은 것은 또 어쩔 수가 없기도 했다.
역시 사랑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애첩이니 연인이니, 기어코는 사랑이니 하는 말을 한
것도 그런 단어들에 일릭의 반응이 몹시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이 썩는 걸 보면 더더욱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싫어도
제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게 사랑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일릭에게 체즈번을 보냈다. 용병대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말을 흘려
자신의 곁을 떠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보이지 않는 목줄을
매어 영원히 제 품에 안겨 있게 할 생각이었다.
대공은 일릭을 위해 제가 짜 둔 덫이 제법 견고하다고 생각했다. 단
하나만의 선택지만을 남겨 두어 할 수 없이 그 길을 걸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하인이 아침 식사를 챙기러 갔을 때에도 자고 있던 그가 점심까지도 미동도
없이 자고 있다는 얘기에 몸소 일릭의 방으로 갔을 때.
대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어 있는 방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6.


외전 사얀 6.
일릭이 없어졌다.
처음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기분이 어떠하였더라. 이성이 뚝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며 이명이 찾아들었던 것도 같았다. 가슴
안쪽에 평소의 뻐근하고 묵직한 종류가 아닌 어떤 지끈거리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성에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나갔다 해도 성문을 열고 요새를
빠져나갔을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요새 안의 수색을 명령했지만
일릭의 머리카락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새벽녘에 대공의 인장이 찍힌
갑옷을 입은 자가 성을 나가 막지 않았으며, 그가 성문을 빠져나갔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얀, 이 멍청아. 그 갑옷에 대공의 인장을 주어 누구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 게 너잖아. 일릭이 도망을 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해 감시
따위도 붙여 놓지 않았지. 정말 미쳐 버린 거야?
비웃음이 머릿속에 왕왕 울렸다. 비웃고 있지만 사실은 화를 내고 있기도
했다. 사얀은 화가 났다. 손 안에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너무도 손쉽게 일릭이 제게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에서 보호해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연인이라고,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하고 어여삐 여길 것인데 어째서 도망을 갔지? 제 곁에
있으면 주어지는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으면서. 대공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벗어나면 용병들에게 사냥당할 걸 알면서도 어째서.
그 정도로 사얀 네가 싫다는 거겠지.
피식 웃음이 흘렀다. 분명 화가 나는데 사냥감을 앞둔 사냥꾼의 마음이
그러하듯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일릭이 도망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저
자신이 우습고, 이렇게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이는 일릭이
기특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사얀이 싫어서 질색하는 얼굴로 도망을 친 것을
상상하면 할수록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를 도로 제 곁으로 데려오겠노라고.
대공은 그대로 세리포브로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갈 마음을 먹었다. 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꺼져 가는
전쟁의 불씨를 다시금 지펴 세리포브를 불사르고, 그것으로도
일릭을 찾지 못한다면 대륙을 정벌할 생각도 있었다. 가장 빠르게 대륙을
손에 넣을 방법을 찾느라 사얀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 보다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것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간에. 대공은 한시라도 빨리 일릭을 되찾고
싶었다.
그날 저녁 작은 쪽지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대공은 바로 다음
날에라도 당장 군사를 움직였을 것이다.
-갑옷의 주인, 세리포브 도르만으로 가는 중. 무라드로 유도할 계획.-

잘 훈련된 새의 발목에 매달린 작은 쪽지 하나에 사얀의 머릿속은 그제야


조금 잠잠해졌다.
대공은 거대한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시르반 요새, 세리
포브의 도시인 도르만. 그 반대편의 미로스 공국과 남쪽에 위치한
무라드를 비스듬히 보던 중, 그의 시선이 한 지역에 고정되었다.
사냥감 몰이를 할 시간이었다.
알즈로 가다가 죽을 뻔한 일 한 가지를 제외하면, 티마예브의 왕위 계승을
향한 사얀의 계획들은 무엇 하나 순조롭지 않은 게 없었다.
우선, 자신도 모르는 새에 중독이 되어 가고 있던 카미드가 이번 전쟁에
맞추어 쓰러져 버렸다. 결국엔 이스테샤가 손을 썼던 것이다. 그래도 그냥
죽여 버리면 일이 더 편했을 것 같은데, 이스테샤는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는지 그를 폐인으로 만드는 데 그쳤다.
그것은 어쩌면 카미드로 하여금 극도로 증오하는 사얀이 결국 모든 것을
갖는 장면을 살아서 보게 하려는 복수인지도 모른다.
카미드가 쓰러진 것을 이유로 티마예브의 군대가 연합군에서 빠져나가자
연합군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곧장 교황의 이름으로 성명서가 철회되었고
미로스와 다른 국가들을 이간질 했다는 죄명이 세리포브에 씌워졌다.
대륙이 이제는 미로스가 아닌 세리포브를 공적으로 몰아가는 상황이었다.
세리포브의 앞날이 위태로워진 그 순간에 대공은 미로스가
세리포브로부터 받아야 할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의 몫으로 돌렸다. 제게서
등을 돌린 연합군과 미로스의 사이에 끼어 출구를 찾지 못하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세리포브
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연합군은 약간의 보상을 받은 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고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싶었다. 앞서 세리포브의 도시 네 개를 약탈한
미로스로서도 병사들과 용병들에게 지급할 수익 정도는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미로스로 돌아온 대공은 티마예브 왕실의 부름을 받아 티마예브로
들어왔다.
그를 맞이한 것은 프리스카 백작 부인인 이스테샤였다. 카미드의 왕비는 이
모든 것을 승인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녀와 에도스 공작이 카미드의 병에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이미 대세가 사얀에게 기울어 있었다. 특히나 그가
레이사를 노출시킨 순간에는 더욱.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도스 공작은 아마 잠시 제 몸을 낮추고 북부의 공작 자리라도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얀은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북부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그이니만큼, 카미드의 편이었던 자를 가만히 두고 싶지가
않았다. 사얀은 그 자신만 아니라 레이사의 앞길을 위해서라도 에도스
공작을 제거해야 마땅했다.
길리어드는 그 자리를 제법 훌륭하게 메워 줄 것이다. 그 딸아이가 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을 지닌 것도 몹시 마음에 들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왕자 시절 사용하던 궁의 취미방에 들어갔다가 몸에 밴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씻고 들어간 침실이 비어 있다는 것만이 그의 예상과 달랐다.
“……일릭은?”

다시 잡아 온 후로 그의 행동반경을 계속해서 보고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방에 없을 줄이야. 사얀은 미간을 찌푸리며 왕궁의 시종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고했다.
“티무르 상단에서 온 사람이 방금 방문하셔서 지금 응접실에…….”

티무르 상단에서 온 사람이라니. 대공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을 때였다.


복도 너머의 응접실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소리에
복도를 지키던 기사들이 반응하며 문을 열었다. 대공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시종의 말마따나 일릭은 그곳에 있었다. 감히 대공의 허락도 없이 일릭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찾아온 손
님도 함께.
자신을 통하지 않고 곧장 일릭을 찾아왔다는 점에서 평소라면 대공이
용납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사얀은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으악! 악! 아악! 형님, 형님!”

“제가 왜 그쪽 형님입니까.”

그 사내가 일릭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악! 아니, 형님! 잠깐만!”

“나가 뒈지세요, 베슬란 님아.”

일릭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감정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정말 사내, 즉 베슬란을 패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베슬란 역시 육체 단련을 허투루 한 게 아닌지라 제법 막아 내고 있긴
하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상대는 달칸 용병대에서 최고로 꼽히는 인간 백정.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는다는 소문이 있는 사내였다.
어떻게든 방어를 하고 있는 베슬란을 노려 기어코 목에 팔을 감아 초크를
걸어 숨통을 조이는 일릭을 보며 사얀은 곰을 때려잡았다는 게 어쩌면
사실일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베슬란은 그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크에 걸린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새빨갛게
울혈되며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숨을 쉬지 못해 사지를 버둥거렸지만
일릭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뒤에서 옥죄는 모습이 정말로 죽이기라도 할
모양새였다.
티무르 상단의 막내아들을 그렇게 죽이는 건 조금 곤란한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대공은 그저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뭐, 일릭이 죽이고 싶어하는데 부하 한둘쯤 희생시켜도 되지 않을까,
그런 나이브한 마음이 한가득했다.
응접실에서의 소란을 듣고 들어온 기사들은 그런 사얀의 눈치를 살폈다.
왕궁에서 일어난 난투극을 말리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성의 주인이 될
사얀이 가만히 있으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크헥! 쿨럭, 쿨럭, 컥!”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티무르 상
단의 막내아들 베슬란의 숨이 막 꼴딱꼴딱 넘어가 눈이
,

까뒤집어지기 딱 일보 직전에 일릭은 그를 놓아주었다.


베슬란은 바닥에 쓰러지며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한계까지 목을
졸렸다가 풀려난 그는 한참을 쿨럭거리며 힘들어하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일릭에게 버럭 외쳤다.
“아, 진짜! 거 너무한 거 아니요?! 쿨럭, 쿨럭!”

“콱 죽일까 하다 참은 줄 알아.”

“왜? 아주 그냥 확 죽여 버리지?”

“살아는 있어야 패고 싶을 때마다 패지.”

“와, 씨. 형님 진짜 내가 형님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잘해?”

일릭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베슬란이 흠칫 놀라며 몸을 사린다. 대공은


분노하는 일릭을 보며 낮게 웃었다. 베슬란이 딱히 그를 속인 게
아니었음에도 일릭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티무르 상단은 대륙의 이곳저곳을 오가며 국가를 초월하여 활동을 했는데,
실질적인 상단의 주인은 바로 사얀이었다. 현재의 상단주는 사얀을 위해
그의 지시를 받아 상단을 운영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사얀이 상단을 맡겼을
만큼 장사 수완이 좋고 안목도 훌륭한 남자였다. 베슬란은 그의 자식들 중
하나였다. 귀하게 자란 막내아들이라서인지 온갖 자질구레한 사고를 치는
사고뭉치로도 악명 높았다.
대공이 시르반 요새를 거점 삼아 수성에 돌입했을 때, 베슬란은 시르반
요새까지 그를 따라왔다. 원래는 라싼에서 책임자인 누이를 도와
무라드까지 동행했어야 했지만 그것보다는 전쟁이 더 재미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얀을 따라갔는데, 막상 베슬란이 맡게 된 일은 솔직히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공은 성에서 사람들이 몰래 빠져나가는 쥐구멍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떤 목적을 가졌듯, 누군가는 전시의 성을
빠져나가려 한다면 차라리 그 통로를 자신의 관리하에 두는 게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빠져나간 사람의 정체라든가 목적지 따위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수 있어
첩자의 움직임마저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관리자 역할을 맡은 게 베슬란이었다. 대공은 베슬란에게 불법적인 일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 주었다.
그러니까 시르반 요새에서 누가 몰래 빠져나가서 어디로 갔는지를
대공에게 보고하는 게 베슬란이 맡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베슬란이 제 자리까지 버리며 일릭을 따라간 이유는 퍽 명확했다. 일릭이
입고 있는 고가의 판금 갑옷 역시 대공의 명령으로 티무르 상단에서 특별히
구해 온 단 한 개의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대공이 이런 고가의 갑옷을 누구에게 하사하려고 구해 오라고 했는지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그 갑옷의 주인이 요새에서 몰래 빠져나가려
하니 베슬란은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란 강렬한 예감이 있었다.
그리고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기 위해, 베슬란은 일릭을 따라가면서도
어떻게든 틈을 보아 대공에게 기별을 넣었다.
그러니까 결국 일릭이 비스카스에서 대공에게 붙잡힌 건 전부 베슬란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릭이 라싼에서 티무르 상단에 합류하여 무라드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대공은 그래서 달칸 용병대를 비스카스로 보냈다. 그쯤에서 마주치리라
확신했고, 마주친다면 달칸 용병대에서는 일릭을 산 채로 데려오라는 제
명령을 무시하고 그를 독단적으로 처벌하려 할 것까지 모두 계산했었다.
모든 일은 대공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고 말이다.
헉 각하!”
“ !

살기등등한 일릭을 피하기 위해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중 사얀과 눈이


마주치자, 베슬란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외쳤다.
기척에 예민한 일릭은 사얀만 아니라 기사들까지 들어온 시점에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모른 척하고 있더니, 이제야
대공을 봐 준다.
저를 향하는 까만 눈동자에 사얀이 미소를 지은 것은 무의식중의 일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릭은 조금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새초롬하기도 하지. 사얀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대공 각하께 인사 올립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사얀이 일


릭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도중, 베슬란이 격식을 차려 인사를
해왔다. 사얀은 그제야 새초롬한(?) 일릭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베슬란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이 시각에 내 침소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형님이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에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각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례함을 보아 넘기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다. 그에게 용건이 있거든
정식으로 초대를 받도록 하라.”
“……예에.”

베슬란으로서는 섭섭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으나, 그 역시 감히 대공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다만 어릴 적부터 몇 번쯤 얼굴을 보아, 저 홀로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서운하다는 얼굴을 해 보일 뿐.
그러나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냉막한 얼굴을 보고 베슬란은 얼른
눈을 내리뜨고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군주라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조기 교육의 효과였다.
“나가 봐라.”

대공은 짧은 말 한마디로 베슬란과 다른 기사들을 모두 내보냈다. 베슬란이


떠나고 기사들이 제자리를 찾을 즈음 사얀은 일릭을 제 침실로 데려왔다.
사얀은 딱딱하게 굳은 일릭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눈치였다. 상대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면 좋으련만. 일릭은 제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법이 좀처럼 없는 사내였다. 평소에는 그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다. 게다가 말수도 많지가 않아서 사얀을 답답하게
할 때가 있었다.
“베슬란을 만나서 기분이 상했나?”

“…그놈은 대체 왜 성 안에 들어온 겁니까?”


“왕실에 물건을 납품하는 계약을 맺을 게 있었다. 겸사겸사 좋은 말도 한
마리 구해 오라고 했고.”
“……말이요?”

“그대에게 주었던 말을 지난 전쟁에서 잃었잖아. 한 마리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사얀의 말에 일릭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게 꼭 도망칠 생각을 하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있다가 뜻
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실제로도 일릭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인가. 또 말을 선물한다는 건 무슨 확고한 자신감인가. 이런
종류의 놀라움이었다.
사얀은 물론 그가 이 왕성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확히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곳은 티마예브의 왕성. 전시의 시르반 요새보다 더 철통같은 경계 속에
지켜지는 곳이었다. 국왕이 쓰러지고 사얀이 뒤를 잇기 위해 들어온 지금이
가장 성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일릭 스스로가 돌아다니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성에서는 도망칠 만한 그 어떤 작은 구멍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설령 일릭이 사얀의 생각보다 멍청하여 도망을 시도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성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붙잡힐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에게 말을 한 마리 사 주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될 게 없었다.
미로스에서 티마예브로 올 때에도 일릭에게 좋은 말을 주어 타게 했지만
대공은 조금 더 특별한 말을 하사하고 싶었다. 승마에는 조금 서툰 그가
안정적으로 말을 탈 수 있도록 말이다.
아, 물론 말보다는 내 위에 올라타면 더 좋겠지만.
혀끝까지 말이 튀어 올랐으나, 어째서인지 내뱉어지질 않는다. 대공은 제
본심이면서 일릭이 싫어하는 말을 기어코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 이번에도
일릭이 질색하도록 말을 해 줄 요량이었는데- 이상하기도 하지. 어째서인지
혀끝에만 맴돌았을 뿐이었다.
“그래. 그것 때문에 들어왔을 뿐, 앞으로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거다. 상단

일로 사람이 필요하면 앞으로는 다른 이를 들어오라 이르지.”


그 대신에 튀어나오는 말이 어째 이렇게 일릭을 달래기 위한 말들인지
모르겠다. 한 번도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얼러 가며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

어라. 그런데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대공은 분명 일릭이 베슬란과의 만남으로 기분이 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이라 말을 했고, 또 좋은 말을 선물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주겠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일릭은 아무것도 풀리지 않았다는 듯이
한숨을 짓는단 말인가.
“그냥 베슬란을 죽여 줄까?”

사얀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앞에서 치우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베슬란이 싫은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베슬란은 티무르
상단에서 꽤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였고 사업 수완도 상당히 좋아서, 앞으
로 상단을 이끌 주요한 인재이므로 죽인다면 대공 쪽에서도 문제가 될
소지가 크지만. 그럼에도 일릭이 원한다면 죽여 줄 수도 있기에 물은
것이었는데.
일릭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늘 결론이 죽인다로 갑니까?”

“그럼 뭐가 문제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모르잖아? 대공은 일릭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제 쪽으로


당기며 물었다. 연무장에서 운동을 하고 씻고 나온 몸이었는데, 베슬란과
난투를 벌이는 바람에 그의 피부에 땀이 촉촉했다. 그 살갗에 입을 맞추자
일릭이 부르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 반응에 사얀은 그의 살갗에
입술을 묻은 채 웃었다.
그런 간지러운 스킨십을 질색하는 일릭은 결국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는, 앞으로는 각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못 만나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대답조차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답할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설마. 그대가 원하면 성에 들일 수 있지.”

어째서 입은 헛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베슬란을 불러서 때리고 싶다면, 언제든지 불러도 좋아.”

뒤의 말은 반쯤은 진심이긴 했지만.


일릭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대공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 마땅했다.
일릭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어떤 작은 관계조차 갖게 할 생각은 너무
당연하게도 없다.
그러나 입은 멋대로 일릭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나 늘어놓고 있었다. 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일릭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자 사얀의 마음도 뭔가
간질간질해지면서 안도감이 들고 말이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7.


외전 사얀 7.
사얀은 일릭의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의 뺨에 옅은
홍조가 오르며 일릭이 고개를 슬며시 돌린다. 입맞춤을 피하는 게 명백한
움직임이었지만 사얀은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됐습니다.”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그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으므로.


사얀은 다시금 일릭을 제 품으로 당겨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럼 오늘은 안아도 되겠지?”

“……어제도 했잖습니까.”

“오늘은 안 했잖아?”

일릭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사얀은 웃으며 그를 침대로


떠밀었다. 그리고 사얀이 제 옷을 벗기 시작하자, 일릭 역시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대공은 일릭의 저 포기가 빠른 면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었다. 제 주제와
처지를 받아들이고 대공이라는 권력자에 거스르지 않는 것 말이다.
벗으라면 벗고 다리를 벌리라면 벌리는 순종적인 행동에 그를 길들이는
재미를 톡톡히 봤었다.
물론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질색을 하며 싫어했지. 몸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속으로는 몹시도 괴로워하는 것까지도 대공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그대의 몸도 안에 박아 주는 걸 좋아하잖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척하면서도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공은 웃으며 제 아래 일릭을 가두고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정성껏 그에게 입을 맞추었으나 물론 만족할 만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딱 한 번 대공에게 먼저 입을 맞춘 이후 일릭은 결코 대공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그저 굳어 있거나 혀를 피하려는 듯이 어색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절정에 올라 제정신을 놓았을 때는 그나마 조금 반응을
해 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말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키스를 하기는 싫다는 것이겠지. 순종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척하면서
도 사실은 반항적이기 짝이 없는 일릭의 행동에 사얀은 낮게 웃어
버렸다.
하긴, 자신이 싫어 도망친 사내를 붙잡아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협박하여
붙들어 둔 것인데 그 마음까지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이만큼 자신과 대화를 하고 사이가 조금 편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사얀이 싫어 죽겠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내맡기고 있는 사내의
붉어진 뺨을 보며 사얀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사얀의 청혼을, 무려 티마예브의 왕비가 되어 달라는 예비 국왕의 청혼을
주먹질 한 방으로 무참히 날려 버린 뒤 일릭은 다시 구금되었다. 다만
이번에 그가 갇힌 곳은 감옥이 아닌, 잘 꾸며진 호화로운 방이었다.
매 끼니 고기와 생선 요리가 모두 포함된 식사가 그를 위해 준비되었고
대공의 하인이 직접 그의 시중을 들었다. 감금되어 있다뿐이지 대공의
얼굴을 때린 죄인의 대우는 절대로 아니었다.
기절을 했다가 깨어난 사얀은 일릭에게 며칠의 시간을 준 뒤 그를 다시 제
침소로 불렀다. 그때는 일릭의 오른쪽 손목 힘줄은 아무래도 끊어 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실행할 생각으로 날카롭게 갈아둔 나이프도
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 형편없이 멍이 든 제 얼굴을 보고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일릭을 본 순간. 그 나이프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대신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이 사내는 사얀의 얼굴에 약하다.
그의 곁에서 그의 환심을 사려 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들이 제
얼굴을 찬양할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일릭이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두 번은 없다고 했을 텐데.”

“…….”

아, 이전이라면 송구하다라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 한마디 정도는 했을


텐데. 이번에는 단단히 핀트가 나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강하게
나가는 수밖엔 없다. 대공은 손을 뻗어 일릭의 손을 붙잡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대공의 손
이 닿자 일릭은 몸을 움찔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사얀은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만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를까.”

“……차라리 죽이십쇼.”

오, 대놓고 반항적인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려 애를


쓰던 그간의 노력이 무색해지지 않은가. 대공은 유쾌한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같이 살든지 같이 죽든지 둘 중 하나라고.”

비단 그게 적에게 단둘이 쫓기던 때의 일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알즈로 가던 길에 습격을 당해 둘이서 도망을 치던 때의 일을 아직 잊지
않았는지, 사얀이 그날 했던 얘기를 꺼내자 일릭이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에 생긴 작은 균열이 사얀의 눈에는 보였다.
“사랑하는 그대를 어찌 죽일 수가 있겠어.”

“그 사랑한다는 그 단어 좀…….”

“하지만 사랑하기에 그대에게 팔다리가 없는 것쯤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아.”
“…….”

“그럼 꼼짝없이 내 곁에 붙어 있겠지.”


일릭의 검은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는 걸 보며 사얀은 그의 손을 끌어와
손목에 쪽, 입을 맞추었다. 작은 스킨십에 일릭이 겁먹은 토끼처럼
움찔거리는 건 몹시 귀여웠다. 몸집을 보면 절대로 토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커다란 몸을 움찔움찔 떠는 모습이란.
“…저 말고도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건 그대 하나뿐인걸.”

아, 이런 달콤하기 짝이 없는 고백에도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라니.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로 짜릿하지 않은가.
“저를 놓아줄 생각은… 없다는 겁니까.”

“부귀영화를 약속해 줄 수는 있다.”


미로스의 대공, 나아가 티마예브의 왕이 될 그가 약속한 것이었으니 일릭이
싫다 해도 안락한 생활과 온갖 진귀한 것을 안겨다 줄 생각이었다.
이 약속은 이전의 그 마음에도 없는 ‘그와의 관계를 알리지 않겠다’는 억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약속 따위
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사얀은 약속을 어겼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사얀은 그들의 ‘계약’이라는 관계를 밝힌 적이 없다. 사랑하는
사이라는 건 보였어도 말이다. 게다가 그날 본 기사들이나 용병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구를 하고 있으니 그리 소문이 멀리까지 퍼진 것도
아니고 말이다.
“선택지가 누구의 손에 달린 건지, 모르지 않잖아?”

사얀이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일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대공의


앞에서 한숨 따위를 쉰 것이었지만 사얀은 만족했다. 그 한숨에 밴 깊은
체념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므로.
일릭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이었으며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일에 머리를 싸매고 달려드는 사람이 아니다.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굳이 그 벽을 넘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이리 와.”

대공이 붙잡고 있던 손을 당겼을 때, 일릭은 마지못해 그의 품으로


끌려왔다. 싫어 죽겠다는 얼굴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아 대공은 웃어
버렸다. 대신 그 웃는 낯을 일릭의 눈앞에 들이댔다.
“아파.”

그 말에 일릭이 눈썹을 찡그린다. 새카맣게 멍이 든 얼굴을 보며 일릭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그 눈동자가 그려 내는 진동이 어쩐지 대공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속 안에서부터 간지러운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공은 손을 뻗어 그에게 입을 맞출 수밖엔 없었다. 제 손이
닿자마자 딱딱하게 굳어지며 미세한 저항을 보이는 사내의 뒷목을
잡아끌어 당기며 마음대로 입을 맞추었다.
“안아도 되겠나?”

일릭은 어차피 이제 사얀의 품 안에 떨어졌다. 사얀이 손을 대면 몸을 열


수밖엔 없는 처지였다. 아니,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사얀은 제 품에서 도망쳤다가 이제야 다시 돌아온 남자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자신도 왜 새삼스럽게 그의 의사를 묻는지
모르겠지만, 입이 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물론 일릭은 좋다고 대답할 리가 없다. 대공의 말에 재깍재깍 대답하라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가르쳤었
는데 그마저 잊은 것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시 가르칠 게 .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얀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그를


괴롭힐 마음은 접어 두었다. 지금은 더 급한 것이 있었으므로.
“안고 싶다.”

사얀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일릭을 사랑한다.
사얀도 사람이니만큼, 자신이 일릭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일릭
역시 자신을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마음을 바라는
것은 아무리 정신이 나간 사얀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그러나 사얀의 명철한 이성은, 일릭이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한 행동들을 일릭이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까지 쳤던 일릭이 아닌가. 그런 짓을 했으니 일릭이
사얀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잘해 주는가와 상관없이 말이다.
사얀은 일릭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가
싫어하는 짓을 앞으로도 계속 많이 하고 싶었다.
일릭은 사얀이 만지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사얀은 일릭을 보면 만지고 싶단
말이다. 일릭은 제 몸이 사얀에게 개발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사얀은 제 손가락 하나만 닿아도 일릭이 자지러지게 만들고 싶었다. 또
이런저런 기구를 사용해서 그가 절정의 절정까지 몰려 몸부림치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런 걸 왜 참아야 하지. 설령 참는다 한들, 이미 해 놓은 짓들 때문에
일릭은 사얀을 사랑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어떻게 해도 사얀은 일릭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욱신욱신 아파 온다. 사얀은 어떤 형태로든 통증을 싫어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얼굴 때린 것을 두 번은 봐주지 않겠노라 말했던 것과는 달리, 또
얻어맞고도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너그러이 넘어갔으니 말이다.
제 곁에서 도망치려 하면 사지를 자르겠노라 하였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것이었다.
팔다리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릭을 사랑하지만, 일릭을
사랑하기에 그의 팔과 다리 역시 사랑하므로.
“으윽…!”

또한 아래 구멍으로 제 손가락을 삼킨 채 헐떡이는 사내의 몸부림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으므로.
“너무 잘 느끼는 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릭이 인상을 썼다. 꼭 귀를 막아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너무 야해.”

“흐윽……!”

아래로 세 개째의 손가락을 밀어 넣어 입구를 넓히며, 사얀은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향해 벌떡 서서 꺼덕이는 일릭의 성기를 말아 쥐어
흔들었다. 사얀의 하얗고 기다란 손에 감긴 남성기는 꽤나 훌륭한 모양과
색깔을 갖추고 있었다. 그 끝에 선액이 매달려 금방이라도 흐를 듯이
반짝거리는 게 몹시도 색정적이었다.
아아, 젖 모양도 예쁘더니 아래도 만만치 않다. 털 한 올 없이 제모를 해
버린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일릭이 더욱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사얀은 제가 연신 입을 맞추어 부풀어 오른 입술을 반쯤 벌리고 신음하는
일릭을 굽어보며 일릭의 안쪽을 더듬었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기에 일릭이
느끼는 곳이 어디인지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그를 몇 번이고 가게 할 생각이 없었기에 일부러 넓히는 데
집중하며 느끼는 곳은 피해 가고 있었다.
덕분에 일릭은 딱 죽을 맛이다. 금방이라도 절정이 휘몰아칠 것 같은데
부족했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아플 지경으로 꺼덕이고, 그걸 대공이
제멋대로 만지고 있는데도 사정할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안쪽을 찌르는
자극, 그게 딱 한 번만 있으면 가 버릴 것 같은데도…….
사얀은 일부러 그것을 만족시켜 주지 않고 있었다.
“으응……!”

사얀의 손가락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일릭이 애타는 신음을 내뱉었다.


붉어진 얼굴이 제 신음소리에 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귀엽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짝이 없어
사얀은 일릭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입술에 입을 맞추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윽…….”

간지러움에 일릭이 몸을 움츠렸다. 사얀은 벌어진 일릭의 샅에 제 성기를


문질렀다. 아래에 문질러질 때마다 삽입을 기대하듯 주름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사얀 역시 성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박을 수가 없다.
“으윽……. 각하…….”
당장이라도 박아 주기를 원하는 일릭의 얼굴이 너무 야해서. 만족되지 않는
쾌감에 허덕이며 허리를 떨고, 차마 박아 달라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면서도 괴로워하는 그 얼굴이 너무 좋아서 더 괴롭혀 주고 싶은
것이다.
이대로 밤새 사정하지 못하게 그 직전까지만 괴롭히면 얼마나 즐거울까.
지금까지는 텅 비어서 더 나올 게 없을 정도로 쥐어짜 내는 섹스를 해
왔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로 한다면.
그러면 박아 달라고 엉덩이를 흔들며 매달려 오지는 않을까? 아아- 그런
욕망에 허덕이며 사얀은 일릭의 가슴을 핥고 올록볼록 멋진 굴곡을
자랑하는 그의 복부를 두루 물고 빨았다. 짙은 피부에 붉은 입술 자국이
피어오르는 것조차 사얀의 욕망을 몹시도 뒤흔들었다.
그렇게 입 맞추어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그의 성기가 사얀의 턱
언저리에서 꺼덕이고 있었다. 배꼽에 혀를 넣어 핥는 순간 일릭이 파드득
몸을 떤다. 사얀은 일릭의 성기 기둥을 말아 쥔 채로 부드럽게 흔들며
일릭의 배꼽에 혀를 세워 잔뜩 핥고는 옴폭한 곳을 잔뜩 빨았다.
간지러움이 일릭이 몸부림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릭이 참지
못하고 조금 사정을 해 버렸을 때는 그의 아랫배를 애교스럽게 깨물어
버렸다. 그러자 일릭이 다시 짧게 정액을 쏘아 올렸다.
“흐윽… 읏…….”
그럼에도 일릭은 전혀 만족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사정의 쾌감에 몸을
떨기는 하지만 대공을 바라보는 얼굴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욕망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서 박아 달라 조르는 음탕하기 짝이 없는 얼굴 아닌가. 그
얼굴은 어쩌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단 말인가. 차오른 욕망에 어쩔 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모르는 얼
굴을 보고 있자면 너무 좋아서 가슴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야하고도 귀여운 얼굴만큼이나-
“허, 허윽! 잠, 잠깐!”

손 안에 잡힌 좆은 또 왜 갑자기 이렇게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대공은 경악해서 헐떡거리는 외마디 비명을 외면한 채 일릭의 성기 끝을 쪽
빨아 당겼다. 생각해보면 사내의 좆을 입에 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미 정액을 흘려 지저분해진 것을.
입에 넣기 좋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도 아니었건만, 그럼에도 의외로 입에
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일릭이 물에서 건져 올린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몸을 떠는 게 사얀을
몹시도 즐겁게 만들었다. 사얀은 다른 손으로 일릭의 고환을 부드럽게
만지며 벌떡이는 성기를 조금 더 깊게 입 안에 담고, 입 안 가득 들어온 것을
진하게 빨아 주었다.
“흐으, 읏…!”

일릭이 사얀의 머리채를 쥐었다. 그러나 밀어내야 할지 당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붙잡은 채로 몸 둘 바를 모른다. 사얀은 그런 일릭의 성기를
마음껏 빨았다. 일부러 질척질척하고 음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움직여
적극적으로 그를 희롱했다. 입안에 타액과 함께 섞여 고이는 것들도 모두
삼켜 버렸다.
“아아아…….”

이래도 싫어하고 저래도 싫어하면서, 결국 육체의 쾌락에는 무너져 버리는


귀여운 남자.
그러니 사얀도 제 마음대로 하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나. 어차피 미움 받을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입을 맞추고, 내 마음대로 살갗을 핥고, 내 마음대로 온몸을
만지고. 내 마음대로 아프게 하고, 또 내 마음대로 울리고.
내 마음대로 사랑할 것이다.
사얀은 오랜만에 삽입 없이 절정을 느끼고 사정을 해 그 여운에 잘게 몸을
떠는 일릭을 보며 웃었다.
“…삼… 삼켰습니까?”
남의 입안에 잔뜩 싸질러 놓고서는 새삼 뭘 묻는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삼켰지.”
“아니, 그걸… 그걸 왜 먹습니까…….”

황당해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저렇게까지 얼굴이 새빨개질 일인가. 일릭은


사얀이 싫어 죽겠으면서도 정액을 몇 번이고 먹었으면서 말이다.
사얀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여전히 그가 귀여워
낮게 웃었다.
“사랑하니까?”

“그… 그 사랑 타령은 좀……!”

도대체 그 단어는 왜 저렇게 부끄럽게 생각하는 걸까. 사얀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뿐인데, 일릭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매번 질색하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지금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몸을 떠는 것이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아니 그런데 그 얼굴이 말이다.

“흠…….”

사얀은 자신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돌리고 바들바들 몸을 떠는 사내를


굽어보았다. 그의 다리를 벌리고 아직 죽지 않은 제 성기를 그의 회음부에
느긋하게 문지르면서도 귀까지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윽…….”

그러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릭이 다시 온몸을 움찔 떨며 시선을 피한다.


아니, 좆 좀 빨아 준 게 그렇게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가
싶다가도…….
요즘 자꾸 별것도 아닌 일에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라든가 하는 게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요즘 스스로가 일릭에게 너무 물러 터진 데다가 생전 본 적 없던 눈치라는
걸 봐서 내가 왜 이러나 하고 있던 참이긴 했는데……. 그랬다고 해서
일릭이 갑자기 음, 이렇게 막 얼굴을 붉히고 이러면……. 물론 일릭이
자신의 얼굴에 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넣어도 될까?”

“그, 그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응 일릭. 넣고 싶은데.”
“ ?

전혀 죽지 않은 성기로 입구를 꾹꾹 누르며 조르듯이 말을 하자 일릭은


더는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버럭해 버렸다. 사얀에게 다시 붙잡혀 온 뒤
무슨 질문을 해도 뚱하니 고개를 돌리고 짧게 대답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그런, 왜 자꾸, 물으시는 겁니까, 그런 거…! 그냥, 맘대로…… 허윽!!”

일릭이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버럭버럭 외친 순간, 사얀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퍽, 성기를 끝까지 처박아 버렸다.
그 충격에 일릭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떤다. 갑자기 뜨거운
내벽에 성기를 처박아 그 압박감에 별을 보고 있는 것은 사얀 역시
마찬가지였다. 뜨겁게 저를 감싸 조여 무는 탄력적인 점막에 그대로 싸
버릴 것만 같았다. 싫다고, 싫다고 하면서도 일릭이 그 삽입에 잔뜩 느껴
몸을 떠는 것조차 사얀에게는 극상의 쾌락이었다. 눈앞이 번쩍번쩍
점멸하고 귀에 이명이 울 정도로 좋았다. 너무 좋아서 허리를 움직일
수밖엔 없었다.
“흐, 흐으, 으! 아, 아으!”

겨우 이성의 끝을 잡아채며 사얀은 일릭의 다리를 벌린 채 허릿짓을 이어


갔다. 깊게 밀어 넣었다가 또 빼고 다시 처박기를 반복했다. 일릭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는 게 좋아서 규칙적인 리듬으로 몇 번이고 반복했다. 빠듯하게
저를 조여 무는 내벽이 주는 쾌감에 사얀 역시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사얀은 저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일릭에게 입을 맞추며
몸과 몸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성기를 쥐었다. 사얀의 입 안에 한차례
사정을 했으면서 다시 일릭의 성기는 힘을 받아 발기해 있었다.
또 섰다며, 안에 박아 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는 몸이라고 희롱하고
놀릴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런 기회를 놓칠 사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사얀의 입에서는 다른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갔다.
“다음에는 장난감을 쓰고 싶은데.”

“무, 무슨…! 으윽…!”

아앗, 장난감 얘기는 꺼내지 않고 있다가 일릭이 방심하면 마음대로 써


버려서 질색하게 만들려 했는데. 말이 제멋대로 나와 버렸다.
“내 좆을 닮은 막대 같은 거. 그걸로 잔뜩 박으면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금 후회


했지만 이왕 말을 꺼낸 거, 대공은 끝까지 말을 할 수밖엔 없었다.
“빨아 줄까?”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싫어서 진저리를 칠 확률이 높았다. 요도를


막대기로 쑤시고 뒤에 구슬을 좀 넣었다 뺐다고 해서 며칠 앓고는 도망을
칠 정도로 싫어했으니까. 장난감 얘기를 꺼내자마자 눈빛이 조금
달라졌었다.
그러니 어떻게 잘 구슬린다 해도 기구를 쓰자는 거에 동의를 할 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우읏…….”

…아니, 왜 갑자기 그렇게 얼굴을 더 붉히면서 막 그런 어쩔 바를 모르는

그런 이상하고도 야릇한 표정을 지어 버리는 건데……?


“읏, 흐으… 아윽! 윽!”

저기, 일릭?
“흣, 각하, 거긴, 아!”

제 허릿짓에 제 아래에서 잔뜩 흔들리고 신음하는 그 얼굴은 절대로


‘싫다’는 아니다. 사얀은 제 감에 티마예브라도 걸 수 있었다. 이왕 거는 거

누이와 레이사도 걸 수 있다. 이거는 확실히 뭔가 전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여기? 여기가 좋은가.”

일릭에게서 애정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순간 사얀의 마음속에 기대감이라는 자그마한 씨앗이 발아해 버렸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면서도 뻐근하게 당겨 왔다.
터질 듯한 심장을 가슴에 품고, 사얀은 제 사랑을 품에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열기로 달아오른 머릿속에서 그의 감이 외쳤다.
어떤 새로운 것의 시작, 혹은 자신이 놓친 어떤 것의 시작이었다.
- 외전 사얀 마침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8.

에필로그
역병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갈 곳 없게 된 내가 몸을 의탁한 곳은
용병대였다. 어렸을 때부터 발육 상태가 좋았던 나였기에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입단할 수 있었다. 동네에서는 이미 주먹질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용병대에 들어와서 슬슬 용병대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었을 때, 나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동료의 죽음이었다. 그건 정확히는
처형이었다.
남자의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한쪽 눈을 잃은 것인지 얼굴 반에
붕대를 둘렀는데, 한참을 갈지 않은 듯이 그 붕대가 원래의 색을 잃고
검붉은 피와 새카만 흙먼지로 얼룩덜룩 더러웠다. 남자의 전신이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막 용병대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 교육을 맡고 있던 선임 용병은 어린
나이에 용병대에 들어온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러니 이런 처형
장면을 억지로 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봐. 이번 임무 전까지만 해도, 용병대에서는 최고 잘나가는

인간이었다고.”
“…그런 사람을 왜 처형하죠?”

“전쟁에서 졌거든. 놈의 실수 때문에 동료들이 많이 죽었다.”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병으로 싸우면서 승패는 늘 있는


일이었다. 용병은 지시를 받고 싸우는 도구에 불과했고 패배의 책임을
도구에 묻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특히 그 도구들끼리 서로 싸우는 일은
더더욱.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얼마나 재수가 없는 놈이면, 용병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놈이

처형되는 걸 다들 기뻐하는 걸 봐라.”


“……이해가 안 되는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었거든. 전쟁터에서도 순 제 멋대로. 힘이 있을

때에야 물론 아무도 못 건드렸지. 달칸 용병대의 간판 같은 놈이니 대장도


오냐오냐 할 수밖엔 없었고. 하지만 세월에는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법이다.”

“늙어서 힘을 잃었다는 건가요?”

“그래. 그러나 그걸 또 인정하지 못하고 제 부대를 이끌고 이번 전쟁에


나섰다가 작전을 따르지 않고 설쳤지. 결국 제 부대도 잃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지, 멍청한 놈이.”
그래도 여태까지 그의 능력을 이용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전쟁터에서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한 용병들도 이곳에 많이 있을 텐데. 그의 처형을 반기는
분위기에 나는 속이 다 메스꺼워지며 기분이 가라앉았다.
“무엇도 영원한 건 없는 거야. 제 힘만 믿고 설치다간 저 꼴 나는 거라고.

대장이 그를 비호하는 것도, 놈이 힘을 잃으면 끝이야. 그간 쌓여 온


고마움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감정이란 얄팍한 거다. 쉽게 변하는 법이지.”
높이 떠올랐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태양광에 섬광이 번뜩이고, 이어
함성이 쏟아졌다.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용병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살인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너는 저런 꼴이 되지 마라.”

나는 당시 내가 열다섯 살에 용병대 입단을 허락 받을 정도의 기대주라는


것을 몰랐다. 몇 번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면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사람 좀 잘 죽이고 전쟁에서 좀 살아남는다 해서
용병대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조금씩 눈치 채게 되었을 때, 조금은
우쭐해지려던 마음속에 그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너는 저런 꼴이 되지 마라.
그것은 내 인생을 관통하는 충고였다.
***

대공의 얼굴을 때리고 감금된 후 나는 나의 단순함에 스스로 감탄을 할


수밖엔 없었다.
미로스의 대공, 조만간 티마예브의 국왕이 될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
심지어 두 번째였다. 또 때린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완전히 대공에게
코가 꿰어 버렸다. 내 의사는 완전히 무시당한 채, 대공의 기사들과
용병대에 대공과의 관계를 폭로 당했다. 이대로는 달칸 용병대가 나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찌하지
못한다 해도 용병으로는 평생 살아갈 수 없을 터였다.
아니, 용병대가 무엇인가. 대공이 만인의 앞에서 내게 입을 맞춤으로써
나는 명실상부한 대공의 정부가 되어 버렸다. 소문이 안 퍼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일릭이라는 이름으로, 이 얼굴을 갖고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인생은 완전히 망해 버렸다. 그렇게 절망하면서도…….
감금된 호화로운 방에서 너무 잘 잤다. 잠이 오지 않을 기분이었는데
침대가 너무 푹신하고 포근했다.
또 너무 잘 먹었다. 입맛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인이 들고 들어오는 세 끼
식사가 지나치게 훌륭했다. 그간 맛없는 것을 먹느라 고생한 내 입은 아주
기뻐하며 음식들을 흡입해 그릇을 싹 싹 비워냈다.
대공이 나를 다시 부르기까지의 며칠 동안 나는 너무 잘 먹고 너무 잘 쉬어
버렸다. 머리 아프게 고민을 한 사람의 몰골은 도저히 아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치밀어 올랐던 감정들이 가라앉으며 현실을
직시할 수는 있었다.
결국 대공이 원한다면, 내가 이 상황을 피할 방법은 죽음밖엔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아직 죽을 각오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때때로 충동이 머리를 들 때는 있었다.
한 대 더 때릴까. 아니, 흠씬 두들겨 패 버릴까. 어차피 이 남자는 나를
죽이지 못할 텐데.
그러나 힘줄을 잘라 더는 자신을 때리지 못하게 나를 불구자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럼 섹스는 싫다고 거부할까. 그가 만지는 게 싫다고 거부할까. 나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토로하는 남자를 상대로 내가 저자세로 나갈 이유가 뭐가
있어.
그러나 그랬다간 강간… 혹은 더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는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나를 보는 다정하면서도 기묘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이외의 짓은 할 수 있다고 말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비위를 맞춰 가며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그가 손에 쥐여 주는 단 하나의 길을
마치 내가 선택한 것인 양 따를 뿐.
그래도 내 감정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분명 파빅의 분노에서 나를
구해 준 은인이었고, 그 순간에는 멋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씨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제 곁에 붙들어 매고 섹스를 강요하는 건
몹시도 불쾌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아도 되겠나?’

마치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청년의 얼굴로 속삭이는 한마디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안아도 되겠냐니. 아니, 단 한 번도 그런 걸 물어본 적 없었으면서 갑자기
정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대공의 입에서 내 의사를 묻는 질문이
나오니, 도리어 너무 당황을 해 버렸다.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안고 싶다.’

이어진 후속타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였다.


심지어 새카맣게 멍이 든 얼굴로.
솔직히 그 얼굴도 충격적이긴 했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분노라는 감정과는
별개로, 그 아름다운 얼굴이 이전보다 더 심한 멍 자국에 얼룩진 그 광경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다 철렁했으니 말이다.
대공은 얼굴 덕을 정말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일릭.’

그때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그라지지 않던


분노였던가. 아니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경악이었을까…….
그저 나에게도 오랜만인 섹스라, 하다 보니 감정 따윈 잊고 쾌락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날을 기점으로 대공은 미묘하게 이상해져 버렸다.
물론 그 변태적인 섹스가 어딜 가는 건 아니지만… 자꾸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할까? 오늘은 해도 되나? 안고 싶은데. 일릭, 오늘 할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씨발… 거
의 매일같이 해 대면서 번번이 묻고 졸라 댔다 어차피 내가 다른 .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물어 대니 죽을 맛이었다. 하자고 대답을


하기도 그렇고, 싫다고 하기도 그렇고…….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좀 홀렸다 뿐이지 좋아하는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언제라도 그가 놓아준다면 홀가분히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맞춰 주는 이유는 그저 떠날 때 곱게 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이용해 멋대로 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막 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감정은 유한한 것이었다. 힘을 잃은 용병이 그간의 업보로 인해
동료들의 손에 처형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의 감정이 끝나는 날 내 신세가
어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어린 날의 기억이, 선임 용병의 한마디가 내 이성의 끈을 끈질기게 이어
붙여 주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대공의 얼굴을 두 번이나 후려갈기는 짓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대공은 자꾸만 나에게 이상한 짓을 해 댔다.
예를 들면 자꾸 내가 원치도 않은 비싼 물건을 안겨 준다거나, 보석 따위를
가져와서는 선물하곤 했다. 아니, 여자 속옷 같은 걸 가져와서 선물이라고
하면 변태새끼 저 같은 짓만 하는군 하고 생각했을 텐데, 누가 봐도
‘선물’이라고 할 법한 물건을 가져와서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미묘하게 내 눈치를 보는 듯이 굴었다. 저 미로스의 대공이.


티마예브의 국왕 될 자가!
그에게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말수가 줄어든 내가 어쩌다 한두 마디를
하면 그 말에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처럼 반응했다. 게다가 대답하는 말도…
미묘하게……. 이전과는 달랐다. 마치 너 원하는 건 다 해도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전부 해 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치…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대공은 저 혼자만의 유희가 진심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달콤하고
다정하게 굴었다. 나는 늘 그렇듯이 그게 참 소름이 끼쳤다. 소름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끼치면서
도…….
요사스러운 미소를 띄운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안고 싶다고 속삭일 때면
몸이 달아올랐다. 그와의 섹스에 길들여지며 몸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의 섹스가 뭐랄까…… 미묘하게, 아니 확실하게 또 전과는
달라서…….
매번 혼을 빼 놓을 정도로 짙은 애무를 하는 대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으윽……. 각하…….’

섹스 도중 그를 부르고 싶을 리가 없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해오는 호박색 눈동자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엉덩이 골에 비벼지는 성기 탓에 회음부가 욱신대는 것 같았다.
온몸에 입을 맞추며 내벽을 잔뜩 애무한 그였지만 오늘따라 느긋했다. 내
반응을 일부러 하나하나 살피는 듯이 굴어서 더 열이 올랐다. 섹스가
이렇게 민망한 거였나 싶었고, 그냥 이대로 얼른 박고 흔들다가 쌌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잔뜩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기대감과 욕망 역시 불끈불끈 차올랐다. 안쪽을 헤집어 넓히면서도
느끼는 곳을 도리어 집요하다 할 정도로 피해 가던 그였다. 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애를 태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박지는 않고 내 복부에
입술을 묻고 입술자국만 잔뜩 남기고 있으니-
‘허, 허윽! 잠, 잠깐!’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고루 핥고 빨고 난리를
친다지만, 대공이 제 성기에 입을 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막 짧은 사정을 마쳐 예민하기 짝이 없는 귀두를 입술로 머금어 빨아
당기는 입술에 혼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 감각 이상으로 현실감이 없는 것은 내 성기를 머금고 있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흐으, 읏…!’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가 좆을 빨아 준다면,


가슴 속이 짜릿해 오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 누구보다 강력한 권력을 쥔 미로스의 대공, 티마예브의 국왕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사내라고
한다면 말이다.
‘아아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절정이었다.
내 성기를 핥고, 빨아 당기다가 내가 사출해 버린 체액을 꿀꺽, 삼키는 걸
보고 있자면.
‘아니, 그걸… 그걸 왜 먹습니까…….’

‘사랑하니까?’
같잖은 사랑 타령에도,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짜릿해 올 수밖엔 없는 것이다.
넣고 싶다며 애처롭게 졸라 대는 것에도,
그 징그럽기 짝이 없고 사람 미치게 만드는 도구들을 쓰고 싶다는
소리에도,
‘내 좆을 닮은 막대 같은 거. 그걸로 잔뜩 박으면서…… 빨아 줄까?’

가슴에 전기가 튀듯이 짜릿하여,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버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비단 그에게 꿰뚫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너무 아프게만… 하지 마십쇼…….’

라고 속삭여 버렸다.
나는 그냥 원래 그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무덤덤하고 무신경해서 크게
좋은 것도 없고, 싫을 것도 없는. 내가 잘 하는 일을 적당히 하면서 먹고
살고, 크게 변화 없는 삶을 살며 귀찮은 일은 벌이지 않는, 그런 성격
말이다.
그냥 살았어도 잘 살았을 것이었다. 인생에 별다른 큰 재미는 없어도 그냥
적당히 능력을 인정받아서 돈도 좀 벌고, 나를 좋다고 하는 여자를 만나서
작은 즐거움도 찾고. 어쩌면 조금 더 나이가 먹어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을 벗어나더라도 결국 또 어찌어찌 흘러 살아가게 된다.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큰 저항 없이. 내가 견딜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풍파 정도는 적당히 흘러 넘기고, 또 그렇게 풍파를 겪다 보면
견딜 수 있는 범위가 더 커지기도 하고 말이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인생에는
그렇게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멀찍이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린 산맥을 바라보며 나는 나란 인간에 대해
잠시 고찰을 해 보았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몸 편하고 등 따뜻하고 배부른 게
최고라며 사는 나라 해도 그런 상념에 빠질 때가 있었다. 어쩌면 봄을 타는
것인지도 모른다.
봄. 볕이 제법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북부의 산맥에서부터 불어오던 바람에도 제법 훈훈한 기운이 섞였다.
세상이 푸르게 뒤덮이고 붉고 흰 꽃들이 피어올라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해,
살갗에 닿는 공기가 어쩐지 간지러웠다. 말을 조금 달렸을 뿐인데 제법
땀이 날 것도 같았다.
꽃가루가 코를 간질이기라도 했는지, 타고 있던 말이 푸르릉 소리를 내며
머리를 털었다. 쉴 새 없이 쫑긋거리는 귀가 괜히 귀엽기도 하여, 나는
녀석의 갈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짐승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좀처럼 해
본 적 없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가까이 지내고 보니 말이라는 짐승은
꽤나 귀여운 면이 있었다. 제법 사람을 잘 따르기도 하여 대견할 때도 있고
말이다.
다만 장갑을 끼지 않은 손아래 걸리는 검은색의 갈기가 그리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그 감촉에 괜히 내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 보게 된다.
음. 솔직히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생각 없이 방치했던 머리가 꽤 길어져
어깨에 닿을 듯이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은 거칠거칠하니 좋은 감촉은
아니었다. 곱슬기가 있어서 북슬북슬해지기까지 한 머리는 절대로
매끄럽게 빗겨지지 않고 엉키며 손가락에 걸렸다. 결국 빗어 내기를
포기하고 괜히 헝클어뜨리다가 돌아가면 이발을 하자고 다짐했다.
이만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해의 높이로
추정해 보건대, 시간이 꽤나 지난 것 같았다. 오랜만에 안장에 앉았던
엉덩이가 슬슬 아파 오는 것을 보아도 한두 시간은 너끈히 지난 것 같았다.
봄이 오기 시작한 산과 들이 아름다워서 생각 없이 달리다 보니 꽤
멀리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슬쩍 말의 옆구리를 차는 것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던 말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점차 속도
를 올리자 바람이 빠르게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열기에 조금 .

더워진 몸을 식혀 주어 기분이 좋아졌다.


가슴이 뻥 뚫어지는 듯이 상쾌하고 시원하다. 이른 새벽부터 말을 끌고
승마를 나온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일릭 경!”

한 청년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깨를 조금 넘을 정도의


머리카락이 꼭 대공, 아니 현 티마예브의 국왕의 것과 똑같은 청년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역시 어디서 많이 본 호박색. 그가 바로 왕국의
유일한 왕자인 레이사였다.
“머리카락 자르셨네요?”

“예, 나간 김에.”

도시의 활기찬 분위기에 마음이 동해서 말을 묶어 놓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도 하고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좀 놀다 왔다.
그러자 레이사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 표정이 시사하는 바는
뻔했다. 대공… 아니 국왕이 꽤나 신경질을 부린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프리스카 백작 부인께서 돌아오셔서 같이 식사했는데, 일릭 경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것을요. 두 분이 많이 섭섭해하셨답니다.”
그러니까 새벽같이 나간 거다……. 내가 왜 티마예브 왕족들과 한 테이블에
앉는단 말인가. 게다가 하나같이 은빛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하고. 레이사는 둘째치고 국왕이나 백작 부인과 식사를 하다간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휴, 그래도 어머니가 오셔서 한시름 덜었습니다.”

레이사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프리스카 백작 부인이 그의 어머니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임에도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즉위식 준비까지 도와주신다 하시던가요.”

“일릭 경…!”

농담으로 던진 말에 레이사는 소스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수하고


앳된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웃었다.
레이사는 그 즉위식이라는 소리가 국왕에 대한 불경이요 반역이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기함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왕실에는 양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분위기를 만든 것은 국왕이었다. 더는 나랏일을 하기 싫다며
레이사에게 국정을 넘기기 시작한 게 벌써 재작년의 일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업무를 레이사가 처리하고 왕은 그 결과에 대한 보고만 받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그가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양위를 받으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완전히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니 왕위를 가져가란다. 그러는 김에
아예 칭제까지 하라고 명령했다. 결혼식 날 다 해 버리란다.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어린애한테 결혼식과 즉위식과 칭제를 하루아침에
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저도 그렇게 못 했으면서? 나는 국왕의 양심
없음에 정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전 미로스의 대공, 현 티마예브의 국왕 사얀은 제 능력치와는 상관없이
일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사안들에 보고를
받는 것을 징징거림을 들어준다고 표현했고, 귀족들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토론을 하는 걸 멍청한 소리들이라고 일축했으며,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진 마당에 더 이룰 것이 없다는 허무함에 취했다며 정사를
돌볼 의지가 1도 남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가
더 아프다며 내 가슴을 괴롭혀 댔다.
…국왕의 기분 전환 방식을 생각하면 나로서도 그가 차라리 왕위를

레이사에게 넘겨 버리고 좀 편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국왕이라는 작자가 놀고 싶은
이유가… 너무 뻔뻔해서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가 레이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며칠간 두문불출하며 놀 때 하는 짓을 보면 국왕은 차라리
바쁘고 시간이 없어야 했다.
프리스카 백작 부인, 이스테샤 왕녀가 왔으니 그녀가 국왕을 잘 설득해
줄지도 모르겠다. 레이사 먼저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그 남매끼리
얘기가 길어지고 있다는 것…….
“일릭.”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백작 부인에게 붙잡혀 있을 거라


생각한 순간 들려온 목소리는 왕의 것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전하.”

레이사가 얼른 예를 갖추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국왕은 레이사를 손짓


하나로 패스했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국왕은 늘 그렇듯 나를 향해 다가왔다.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기른
은빛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것이 꼭 정오의 호숫가에 피어난 윤슬처럼
반짝였다.
남자가 허리까지 머리를 기르는 게 이렇게 잘 어울릴 일인가. 나는 홀린
듯이 멍하니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의 머리카락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사람을 홀리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었다.
물론 아름다움에 있어 그의 얼굴 역시 논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말이다.
10년. 국왕과 만난 지도 10년이었다.

“나가지 말라고 붙잡았는데.”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가 말했다. 투정을 부리는 듯한 그 말투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그 이유는 첫째로 마흔 넘은 남자의 말투라
생각하기에는 어리광이 과했기 때문이었다. 저런 말투는 10년 전에 했어도
징그러웠을 것이다.
어이가 없는 이유는 또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도 나도 마흔이
넘었음에도…….
씨발, 이 남자는 대체 왜 늙지를 않지??
“못 들은 것 같습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그에 왕의 잘생긴


미간이 꿈틀한다.
아아, 그의 감정에 기대어 함부로 구는 짓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 버렸다. 레이사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는데 절대로
부자로는 보이지가 않으니 괜히 더 심사가 뒤틀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레이사. 네 어미가 네 약혼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너도 가 보거라.”

“예, 전하.”

레이사는 냉큼 고개를 조아리고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덕분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왕과 단둘이 되어 버렸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종과 호
위를 물리고 왔는지, 긴 회랑에 그와 나뿐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흡-”

왕이 다짜고짜 나를 끌어다가 입을 맞춰 왔다.


잔뜩 핥아지고 빨리는 탓에 입에서 야릇한 소리가 샜다. 혼을 쏙 빼놓을
기세로 퍼부어지는 입맞춤에 금방 숨이 거칠어진다.
사얀이라는 남자의 곁에서 함께 한 지가 벌써 10년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다면 그의 머리카락과 이놈의 입맞춤이었다.
간지럽고도 징그러운 행위에 자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읏…….”

나는 결국 그의 격정적인 입맞춤을 견디다 못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내 뺨이며 턱, 귓가에 멋대로
쪽쪽거리며 입을 맞춰 댔다. 제멋대로 귓바퀴를 깨물거나 목에 입술을
묻기도 했다. 쪽, 빨아 당기는 자리가 벌에 쏘인 듯이 따가웠다.
언제부터인지 내 살갗에 붉게 자국을 만드는 취미가 생긴 그였다.
제 성에 찰 때까지 목에 입을 맞추던 그가 내 고개를 돌리게 하더니 턱을 쥔
채로 입을 맞춰온다. 입술을 감물어 쪽, 빨아 당기고 그 주변까지 두루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나는 그가 나를 이렇게 예… 예뻐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일릭.”

나를 부르는 그윽한 음성에 귓가에서부터 안쪽까지 죄 간지러움이 번진다.


소름이 오싹오싹 돋아났다.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은빛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나를
바라보는 사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전에도 나이를 알기 어려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항간에는 그가 늙지 않는
뱀파이어라는 소문까지 돈다는 얘기가 있었다. 나 역시 그 소문을 믿고
싶을 지경이었다.
“수염도 기르다 포기하더니, 머리도 기르지 않을 건가?”

왕이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기 어린 얼굴에 나는 기분이 확 나빠져 버린다.


궁금한 척 묻고 있지만 기실 나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 나에게는 한때 그런 꿈이 있었다. 40대가 되면 수염을 길러 중후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분위기를
한껏 살리겠다는 그런 꿈. 심지어 나는 수염에 제법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자부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면 아주 남성적이면서 강해
보일 게 틀림없었다.
……다만 더 늙어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니까 한 열 살쯤……. 그렇지

않아도 나 홀로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수염을 기르면 국왕이 안 먹은


나이까지 내가 다 처먹은 그런 얼굴이 되어 버렸다. 몇 년 전 한번 길러 볼까
하다가 포기했고, 지금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를 않았다. 머리카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길러도 젊어 보이기는커녕 지저분할 뿐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발끈할 수밖엔 없는 불공평함이었다.
“도대체 전하는 어째서 나이를 먹지 않는 겁니까……!”

“나도 늙는다. 눈가에 주름 보이지 않아?”

하, 눈꼬리 끝에 희미하게 매달려서 평소에는 절대 안 보이고 웃을 때만


조금 보이는 그거? 그런 것도 주름이라고 하나? 그냥 눈웃음이 더
요사스러워진 거 아니고?
불만스레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웃었다.
그러나 단순히 웃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다시 내 허리를 붙잡고는 멋대로
입을 맞춰 대는 것이다. 밀어내도 제 마음대로 할 인간이라 그가 양껏 입을
맞추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을 그렇게 쪽쪽거리다가 그가 속삭였다.
“그대는 전혀 늙지 않았어. 늙어도 사랑스러울 테고.”

…아니, 10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이 인간은 나날이 증상이 심해진단

말인가. 간지럽고 징그럽고 끈적끈적하면서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소리가


너무 늘었다. 피부에 소름이 쭉 끼쳤다. 동시에 민망함에 얼굴이 불에 타는
듯이 홧홧해지기도 했다.
하긴 10년 전, 내가 도망을 쳤다가 붙잡혔을 때. 며칠 고생하여 추레하고
지저분한 몰골이던 나를 보고도 사랑한다는 소리가 뻔뻔스럽게 나왔던 게
바로 저 인간이었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그 감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게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산책을 할까?”

“대신들이 알현을 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레이사한테 맡겼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왕의 뻔뻔


스러움에 그냥 기가 막혔다.
지난 10년간 왕국을 그 여느 때보다 더 풍요롭고 평화롭게 만들었으면서
이제는 직무유기를 못해서 안달이라니 말이다.
“저하는 아직 좀, 어리시지 않습니까.”

“내가 미로스의 대공이 된 게 그 즈음이다. 어린 나이는 아니지.”

“그래도…….”

“혼자 해 나가기 힘들다면 초반 몇 년은 이스테샤가 섭정을 하라고 하면

돼.”
아니 어느 왕실에서 왕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상왕으로 물러나고 어린
후계자를 왕으로 세워 다른 이에게 섭정을 맡긴단 말인가. 권력을 빼앗겨서
뒷방 늙은이가 되거나, 왕이 자신의 권력을 나눠 주기 싫어서 후계자를
죽이는 사례는 있어도 가져가라며 왕위를 떠넘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국왕이 이런 소리를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했다.
“광인보다야 뭐든 낫겠지.”

…티마예브의 국왕은 스스로 자신이 미쳐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보기에도 그는 미치광이 변태이기는 했다.


다만 미쳤다고 생각되는 건 그의 성벽(性癖)뿐이었다.
그 이외에 그의 통치는 완벽하다 할 정도로 훌륭했다.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까지 그가 그릇된 결정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판을 치밀하게 짜고 모든 것을 제 손바닥 위에 둔 사내였다. 남
몰래 물밑에서 미리 정보를 장악하고 상황을 유리하게 조정하느라 꽤나
골머리를 썩고 그로 인한 두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보는 그는 그 누구보다 비상한 사람이었다. 만인에게 칭송받는 위대한
군주였다. 그럼에도 정작 사얀은 스스로를 광인이라 여겼다.
혹시 정신이 나가서 나같이 시커먼 사내놈을 좋다고 하나 싶기는 했다.
“그리고 그대와 노는 게 더 재미있는걸.”

…그런 걸 이유랍시고 댄다면, 확실히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씨발. 무슨 나랑 놀고 싶다고 왕위까지 내버리려 한단 말이냐. 그가


놀고 싶어하는 이유가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이 인간과 상종하고 싶지가
않았다.
“재미도 없는 왕 노릇 하느라 많이 늙어 버렸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 예. 그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로 그 따위 소리를 하면 퍽이나
믿겠습니다. 아, 눈가에 주름이 좀 깊어지셨다고 하셨나? 참나, 아주
아니꼬워서 내가 진짜.
“하, 그 표정."

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때에야 나는 내가 표정 관리에 지나치게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정색을 해 보았지만 말 그대로 늦었다. 아니,
아무래도 좀 편해지다 보니까. 내가 가끔 나도 모르게 선을 넘을 때가
있었다.
감정은 유한한 것이라 믿기에 언젠가 올지 모를 후환이 두려워 나 살
궁리를 하며 10년째 몸을 사리는 중이었음에도, 간이 배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가끔은 막기가 참 힘들었다.
“산책 가지?”

…청유형의 문장이 어딘지 비딱하게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그러나 내게 무슨 선택지가 있겠는가.


국왕의 유일한 친위대는 따를 수밖에. 부대원 하나 없어 ‘대’라고
붙이기에도 민망하고 대장이라 붙이기엔 더더욱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기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친위기사단은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단장인
자칸 경도 아직 현역이었고, 기사단에 그 뒤를 이을 쟁쟁한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가진 자리는 뭐라 설명이 되지 않는 직위라는
것이었다. 세월이 꽤나 지난 지금, 10년 전의 일을 모르는 이들은 나를
기사로 알고 있었다. 그 오해를 굳이 나서서 정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 왕비 따위로 알려지는 건 나의 수치이기도 하지만 티마예브의
망신이기도 하니 말이다.
10년 전의 일을 아는 티마예브 기사단의 모두가 망신스러워서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일제히 내 존재에 대해 함구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국왕의 기사인 것처럼 그의 곁에서 함께하는 나를 그냥 호위 기사로
여겼다. 내가 국왕과 한 방을 쓰는 것도 그냥 없는 일인 척 여겼다. 솔직히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쪽이 팔렸다. 그런 짓을 벌여 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오직 국왕 사얀뿐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런 걸
보면 미친놈이 맞나 보다. 수치심을 전혀 못 느끼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안 될 테니까.
국왕은 나를 왕의 정원으로 데려갔다.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여 정원이
새로이 관리에 들어갔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꽤나 시간이 걸린
단장을 마치고 드디어 개장을 한 모양이었다.
“수행할 것 없다.”

회랑에서 정원까지 오는 동안 어느새 뒤에 따라붙었던 시종과 호위를 향해


국왕이 서늘하게 명령했다. 평소보다 날이 선 명령에 토를 다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대신 내 눈치를 힐끔 보는 게 다였다.
아아, 그래, 뭐. 왕의 침실까지 지키는 유일한 호위인 내가 뒤따르는 게
당연하겠지, 뭐.
나는 왕의 곁을 보필하는 기사의 모양새로 그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갔다.
과연 새로이 정비된 정원은 아름다웠다. 잘 가꿔진 잔디가 푸르게 펼쳐졌고
그 사이 사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따라 꽃이 피워져 있었다. 정원 주변에
세워진 정원수는 반듯한 사각형의 형태로 잘려 조형미를 더했다. 어떻게
보아도 인공적이었으나 아침나절 본 자연스러운 풍경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자, 진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온기가 담긴
바람이 제법 기분이 좋았다. 반 보 앞선 국왕의 긴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결코 엉키는 법이 없었다.
늘 부드럽게 나부꼈다.
“제법 보기가 좋지?”

“예.”

그 머리카락도 그렇고, 정원도 그렇고. 아니꼬웠던 마음을 금세 풀어 버릴


정도로 예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독특한 것을 만들라고도

했다.”
국왕이 손끝으로 정원의 끝을 가리켰다.
왕의 정원은 상당한 규모였는데, 보통 네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분위기로 꾸며지곤 했다. 각 구역을 나누는 것은 무릎 높이로 오는 관목
울타리와 자갈이 깔린 길이었다. 그런데 왕의 손가락 너머에는 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울타리보
다 한참 높은 정원수가 벽처럼 서 있었다. 한 구역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 벽의 가로 길이가 상당히 길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높이는 내 키와 비슷했다. 까치발을 들어야 네모지게 깎인 나무의 윗부분이
보일 높이였다.
“이게 뭡니까?”

“미로.”

미로?
내가 되물을 틈도 없이, 국왕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물론 아무도 없는
곳이었지만 밝은 대낮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러나 손을 빼기도 전에 그가 나를 이끌었다. 벽 사이에는 입구가 있었고
그 안에는 왕의 말마따나 미로가 있었다. 온통 초록빛이라 나는 순간
방향을 잃어버렸다. 여기저기 갈래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왕은 거침없이
선택해 나아갔다.
“전하,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말을 맺는 것보다, 그가 멈추는 게 빨랐다. 눈앞에는 더 이상
길이 없었다. 우리가 들어온 길을 제외하고 3면이 전부 나무로 막혀 있어
온통 초록빛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일릭.”

몸을 돌린 왕이 갑자기 내 허리를 안아 왔다. 흠칫 굳어지는 사이 그가 몸을


돌렸다. 덕분에 이제는 내가 막다른 길을 등지게 되었다. 왕이 나를 그대로
밀어붙여 벽에 등이 닿았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아슬아슬하게 내 몸을
받아 냈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넘어지면 나뭇가지 사이로 꼴사납게
처박힐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왕은 그런 내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오늘은 여기서 하자.”

아니……. 며칠 잠잠하다 했더니, 이 미친 변태새끼가……!


그러나 항의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몸을 사리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흐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왕의 입술
이 내 입술에 맞닿은 것이다 순식간에 물컹한 혀가 깊숙이 내
.

입안을 파고들었다.
만약 섹스를 위해 이 따위 미로 정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그냥 내
생각을 정정하는 게 맞겠다. 이 새끼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전하, 잠, 잠깐. 잠깐-”

제멋대로 입을 맞추던 왕이 내 옷에 손을 댔을 때 나는 당황하여 그를


말리려 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었다. 야외에서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밝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아니, 설령 어두울 때에도 밖에서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일릭, 일릭…….”

그는 만류하려 드는 나를 밀어붙이며 재차 입을 맞췄다.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해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 대서 나를 미치게 했다.
유혹이 가득 담긴 그의 저음에 귓가가 오싹오싹했다. 목소리는 왜 저렇게
잘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정신없이 입맞춤을 당하는 동안 하의가 발치로 툭 떨어졌다. 겉에
입은 외투도 벗겨졌다. 대낮에 이런 태양 아래 이런 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국왕은 더운 숨결을 섞어 계속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얼굴과 목, 쇄골에 입을
맞춰 댔다. 동시에 그의 손은 셔츠 아래로 내 몸을 쓸어내렸다.
“으읏…!”

손가락 끝에 유두가 쓸리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대며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국왕의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히익…!”

그가 고개를 기울여 셔츠 위로 내 가슴을 물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돌기를 잇새로 짓이기며 셔츠 채로 가슴을 빨았다.
그러는 사이 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맨들맨들하기 짝이 없는 아랫도리에
닿았다.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한 성기를 그대로 스쳐 지나가 회음부를
문질렀다. 손가락 하나가 주름에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크윽!”

가슴은 여전히 예민했다. 왕이 멋대로 물고 빠니 금방 아래가 다 뻐근해질


정도로 흥분이 차올랐다. 주름을 벌리며 들어오는 손가락에 내벽 안쪽이 다
저릿저릿했다. 10년 동안 수 없이 이 짓을 했음에도 대체 왜 익숙해지지
않는가. 왜 매번 할 때마다…….
“어제 해서 아직 조금, 부드러운데.”

안에 밀어 넣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왕이 말했다. 그가 내 안에 손가락을


넣은 채 시선을 맞춰 오는 건, 매번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가
느끼는 지점을 찔러 표정 관리가 안 될 때는 더욱.
“일단 넣어 볼까.”

씨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열이 발갛게 오른 얼굴을 해서는, 저


늙지도 않는 얼굴은 번번이 잊지도 않고 할까, 넣을까, 박을까 따위를 물어
댔다. 어차피 제 마음대로 해 댈 거면서 가증스럽게도 내 의사를 들어줄
것처럼 굴었다.
너무 가증스러워서 나는 막 심장까지 옥죄이는 느낌에 막 간질간질해진다.
“뒤돌아.”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결국 몸을 돌렸다.


허리를 반쯤 숙이며 앞의 나무 벽을 손으로 짚었다. 왕의 손이 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어깨 너비로 벌린 다리가 곧 있을 삽입을 예감하고 부들부들
떨려 왔다.
“윽…! 아윽…!”
아마도 국왕이 오일을 썼겠지만-너무나 명백한 이유로 그는 늘 안주머니에
오일 한 병을 가지고 다녔다- 내벽을 제대로 풀어 놓은 게 아니라 아래가
억지로 벌어지는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씨발, 어제 했다고 그냥 하자니…!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저항하지 않은 내가 미친놈이었다. 아프다.
뻐근하게 아파 온다.
“아!!”

그러나 분명 그의 말마따나 조금은 풀려 있었는지 찢어지는 고통은 없었다.


두꺼운 기둥이 쑥 밀려들어 온 순간, 온통 나뭇잎 색깔로 푸르게 칠해져
있던 시야에 새하얗게 빛이 점멸했다.
퍽! 살과 살이 완전히 맞닿아 차진 마찰음이 울리도록, 국왕은 단번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깊숙이 내
안으로 제 성기를 처박았다.
“아프, 아픕, 니다- 천천히-”

“응? 밖이라 빨리 끝내 줘야 하지 않아?”

아, 저 개새끼가 정말……. 나는 이를 갈며 눈앞의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쥐어뜯었다. 왕이 안에서 슬금슬금 허리를 움직이자 등줄기를 따라 쾌감이
번지며 몸서리가 다 쳐졌다. 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 둔부를 움켜쥔
그가 마치 나를 달래듯이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그게 그렇게 굴욕적일 수가
없었다.
“평소보다 더 조이는데.”

“윽……!”

“밖이라서 더 흥분했나?”

통증을 동반한 삽입에도 불구하고 허공을 향해 벌떡 서 있는 내 성기를


잡아 문지르며 왕이 속삭였다. 밖이라서 더 흥분했냐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수치심에 눈가가 다 뜨거웠다.
“많이 아픈가?”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도 빠듯하게 벌어진 내벽이 욱신거리기는


하는데, 그게 못 참을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평소랑…
그냥 비슷한 것도 같았다.
그 다음 국왕의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누이한테 마개라는 걸 받았는데.”

“…무, 무슨…….”

“그걸 그대에게 늘 채워 두었다가 박을 때만 빼면, 그대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
중얼거리며 국왕은 내가 입고 있던 단 한 장의 셔츠마저 휙 벗겨 버렸다.
덕분에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벗은 몸이 되어버렸다. 내 등 위로
떨어지는 봄볕이 따가웠다.
야외라는 실감이 새삼스럽게 찾아들었다. 밖이었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옷 하나 입지 않고, 뒤에는 사내의 성기를 가득 문 채로…….
“하루 종일 뒤가 막혀 있으면 말 탈 생각도 못할 테니, 내 곁에 붙어 있을

테고.”
와. 이 새끼 이거 뒤끝.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지금 아침
에 내가 그를 버리고 말을 타러 가 버렸던 걸 갖고 이 트집을 잡는
거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버티고 선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특히나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고 풀 냄새가 비강을 가득 채울 때면, 머리
위에 하얗게 떠오른 태양 빛을 느낄 때면 수치심을 닮은 어떤 기묘한
감정에 가슴이 요동을 쳤다. 속 안에서부터 짜릿해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빌어먹게도 왕의 지적처럼, 평소보다 성감이 날카롭게 전신을
질주했다.
“다음엔 저기 잔디밭에서 할까.”

사방이 탁 트인 잔디밭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지 앞만 조금 풀어 헤친 국왕의 아래 깔려서.
상상한 순간 상상 이상의 배덕감이 휘몰아쳤다. 그 상황이, 지나가던
누군가가 볼 수도 있는 그 상황이 너무 과했다. 사방이 트여 있어
신음소리나 숨소리가 잔뜩 퍼져나갈 것이다. 그건 너무… 너무 과하게
야릇하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하반신이 조여졌다. 왕의 성기를 가득 품고 있는
내벽이 절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왕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가 내 등에 몸을 바투 붙였다.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유두를 비틀어
쥐었다.
“크흑! 흐읍!”

“제대로 버텨.”

아니, 씨발 그럼 그렇게 희롱하지를 말든가…! 왕은 그러나 내 가슴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 마음대로 주물러 댔다. 그러면서도 허릿짓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으, 으윽! 흐으! 으! 아!”

반쯤 빠졌던 성기가 빠르게 다시 처박혔다. 또 빠르게 뽑혀 나가더니 더


깊숙한 곳을 자극하며 처박혔다. 성기의 움직임에 내벽의 점막이 죄 쓸려서
딸려나갔다가 다시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성기가 압박하는 내벽이
불이라도 지른 듯이 뜨거웠다. 아니, 짜릿한 것도 같았다.
“여기? 으응, 여길 더 박아 줄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왕의 움직


임이 점점 빨라져 갔다 깊이는 얕아져 갔지만 빨랐다 내가
. .

느끼는 곳을 무자비하게 찔러 댔다. 내 안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제 성기를


사정없이 박아 댔다. 너무 열이 올라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차오른 열로
눈가가 욱신거렸다. 한참을 쳐올리는 사내의 몸짓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다.
“아, 아…!”

결국 참아 내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간다.
안쪽을 잔뜩 자극 당해 성기 끝에서는 정액이 뿜어졌다. 나무 잎사귀가
하얗게 물들었다. 흰 점액질의 체액이 이슬처럼 나뭇잎 끝에 맺혔다.
사정이 평소보다 빨랐다. 안쪽만을 자극당하고 있음에도 너무 빨랐다.
야외에서 왕에게 박히고 있다는 이 상황 덕분에 가슴 속에 번진 수치심과
배덕감. 그게 왜 그렇게 짜릿한지 모를 일이었다. 너무 야릇해서
평소만큼도 참을 수가 없었다.
씨발……. 저 변태와 어울리다 보니 나도 변태가 되어 가나 보다. 지난 10년
동안 사실은 뼈저리게 느껴 온 바이기도 했다.
“으윽… 일릭, 일릭…….”
열락을 숨기지 못하는 짙은 신음소리에 귓가가 오싹해진다. 누군가가 이걸
듣기라도 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 그게 또
짜릿해 온다. 미치겠다. 아니, 이미 미쳐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국왕의 말이 맞았다. 그는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그게 옮아 나 역시 미친놈이 되었나보다.
“크으, 흐으, 아아…!!”

그 미친놈이 절정을 향해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퍽, 퍽.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모르겠다. 그냥 다… 모르겠다. 나는 결국 이성의 끈을 놓은 채, 국왕이
강요하는 쾌감이 몸을 맡겼다. 그를 만난 이후로 늘 그래 왔듯이. 아찔한
쾌감 속에 빠져들었다.
내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세상 다정하게 살갗에 입을 맞추는 입술에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박동한다.
하늘은 새파랗고 볕이 너무나 따사로운 어느 봄날의 오후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 마침>
69.
외전 피서 1.
금년 여름은 기이할 정도로 더웠다. 아직 봄이 채 끝나기도 전인데 때 이른
더위가 찾아들었다. 매 여름마다 무더울 때면 곳곳에 얼음을 두어 기온을
낮추기도 했고 하인들이 커다란 부채로 바람을 만들어 그래도 시원하게 난
편이었는데, 그런 게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에 성 안도 덥기는
매한가지였다.
밖에 나가서 말이라도 타면 조금 시원하련만. 그러나 쨍쨍 내리쬐고 있는
햇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눈 녹듯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너무 덥군.”

국왕 역시 더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몇 년 함께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추위보다는 더위를 더 많이 타는 사내였다. 지리적으로 티마예브가
미로스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미로스보다는 덜 더운 편임에도 그는 이
티마예브의 여름을 견디지 못했다.
“더울 텐데, 갑옷 벗지?”

그래도 명색이 호위대라는 이름으로 그의 곁에 붙어 있는지라 나는 셔츠


위에 경갑을 입고 다녔다. 그것이 더운 건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벗지 않는 이유는……. 더위만큼이나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국왕의 시선에 어쩐지 위기의식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 셔츠 한
장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경험상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더워.”

나는 불경하게도 국왕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말을 돌렸다.


“국무 회의에 가실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더워서 가기 싫다.”

왕은 덥다면서 기어코 나를 끌어당겨 소파에 앉히고는 내 허벅지를 베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누웠다.
덥다는 소리를 연발하는 것치고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하얀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알고 보니 국왕은 엄청난
게으름뱅이였다. 국정 돌보는 것을 대놓고 귀찮아하며 대체 레이사는 언제
자라서 자신을 대신하냐고 불평을 해 댔다. 이제 열다섯 살이 된 레이사가
가여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카이야로 피서를 갈까?”

아직 본격적인 여름도 아닌데 피서 타령이나 하고 있는 게 한 나라의


국왕이라니. 자신은 먼 곳으로 휴양을 가고 레이사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싶은 게 국왕의 진심 중의 진심이었다. 직무유기가 꿈인 국왕을 둔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카이야요?”

“그래. 그곳에 고대 신전이 보전되어 있거든. 행궁으로 개조를 해서 여름을

보내기엔 나쁘지 않아. 작년까지는 피서를 갈 여유가 되지 않았지만, 레이사


에게 임시로 국정 운영을 해 보라고 하고 떠날까.”
아이고. 불쌍한 우리 왕자님. 나는 남을 그리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성격은
결코 아니었지만, 티마예브의 유일한 왕자인 레이사는 응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착한 청년이었다. 위대한 통치자인 제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그는 또 제 부모에게 효도하고 주변
사람에게 다정한 성격이었다.
어린애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어찌 들지
않을까마는. 대공은 얼마 전부터 호시탐탐 정무를 하나라도 레이사에게
맡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전부 다 떠넘기고 놀러 다닐
궁리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응? 카이야로 피서를 가자. 더우니까 내가 머리가 아픈 것 같아.”

아프면 아픈 거지 아픈 것 같은 건 또 뭐야.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못


들은 체했다. 허벅지에 올라와 있는 머리통이 하도 덥다는 소리를 해 대니
나도 더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더우면 좀 떨어지면 좋을 텐데, 국왕
은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덥다고 지랄이었다.
“곧 축제 기간이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왕궁에서 연회도 크게 벌어질

예정이고요.”
“내가 이렇게 덥고 아프다는데, 그대는 너무 매정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디서 되


도 않는 약한 척을 하고 있어. 나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왕도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 손을 잡아 제 머리통 위에 올렸다.
쓰다듬으라는 의미인지라, 나는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은빛의
머리카락은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사실이었다.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왕의 얼굴도 뭐… 늘 그렇듯 아름답고
말이다.
날이 덥긴 더웠다. 머리카락 조금 만지고 있다고 몸에 열이 올라 뺨까지
따끈해지는 걸 보면.
“…후.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한참 동안 내 다리를 베고 있던 대공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 …….”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이 포개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데 열기가


훅 끼쳤다. 하얀 손이 내 뺨을 감싸 쥐고는 몇 번이나 쪼듯이 입을 맞추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인지라 나는 가만히 그의 입술 세례를 견뎌 냈다. 그
와중에도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왕은 내게 입을 맞추며 은근슬쩍 손을 내렸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으니 내
가슴이 만지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의 손이 딱딱한 갑옷에 막혔다.
나는 생각했다. 역시 경갑을 벗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노라고. 슬쩍
눈을 떠서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왕은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미묘한 승리감에 나는 겉으로 무표정을 가장한 채 속으로 낄낄
웃었다.
“이따 밤에 보지.”

표정 관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왕이 이를 갈며 속삭였다.
“더운데 따라올 것 없다. 그대는 쉬어. 얼음을 들여놓으라고 할 테니.”

아니 뭐… 사실 나는 더위에 강한 편이라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왕이 없으면 갑옷을 벗어 버릴 수 있어 더욱.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러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차례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국왕은 드디어 방을 나섰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멀어지는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길게 길러 등 아래에서 살랑이는 머리카락. 저것만 아니었어도 조금은 덜
더울 것을……. 몇 년째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 어쩐지
그 머리카락 끝이 가슴을 스친 것처럼 속이 조금은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

티마예브에서는 늘 여름의 초입이면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티마예브 전국


각지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상단이 방문했다. 여느 때보다 큰 규모로
시장이 열려 밤까지 문을 닫지 않았고 도시 곳곳에서 공연이 벌어졌다.
특히나 여름 축제의 별미는 여러 극단에서 선보이는 연극 공연들이었다.
수도의 여러 극장은 시간별 연극으로 가득 채워졌고 광장에도 무대가
세워져 노상에서도 공연을 즐길 수가 있었다.
많은 연극들 중 인기가 많은 극단은 극장과 정기 공연을 계약하거나
귀족들의 후원을 얻기도 했는데, 이 축제의 끝에는 연극들의 순위를 매겨
상을 수여하는 이벤트도 있었다. 특히 작품성과 흥행에서 1위를 한 극단의
연극은 축제의 마지막 날 저녁 왕성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날만큼은
귀족들이 연극 무대의 배우가 된 것처럼 특별한 복장을 입고 왕성에
들어와서 연극을 관람하고 무도회를 즐겼다. 이른바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것이었다.
일주일간 지속되는 축제였으며 왕성의 연회도 며칠씩 치러졌다. 고로
국왕이 결재해야 할 사항이 많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현 국왕은 왕비가
없었으므로, 연회에서 왕비가 신경을 써야 할 부분까지 국왕 본인이
책임져야 했다. 국왕은 레이사에게 일을 나눠 주고 싶어했지만 아직
레이사는 너무 어렸다.
그 말인즉 축제를 앞에 둔 이 시점에 국왕이 행궁으로 피서를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거다.
그러므로 카이야 타령을 하던 국왕의 이른 피서 계획은 말로만 그쳤다.
놀고 싶다는 바람과는 달리 왕은 점점 바빠졌다. 시간이 흘러 날은 더
더워졌고, 무사히 축제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그 첫날이었다. 온 도시가
떠들썩했고 왕성에서도 축제를 기념하는 첫 번째 연회가 시작된 날이었다.
왕의 친위대인 나는 왕의 곁을 지키는 것이 마땅했다. 여태까지는 늘 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연회에 참
석한다 해도 늘 왕의 뒤에 조각처럼 서 있곤 했다. 왕의 뒤를
지키고 있을 때면 그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는 법이 없었다.
태어나길 평민으로 태어난 나는 귀족들의 연회나 사냥대회 등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연회장 등지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뭇 귀족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눈빛들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왕의 곁에서 함께 한 지가
몇 년이 지났음에도 귀족 사회에 녹아드는 건 녹록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뭐 왕비라도 되는 것처럼 왕의 옆자리에 앉을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 기사도 아닌데 기사 비슷한 대접을 받는 것도 속이
시끄러운데, 왕비 대우 같은 걸 받는다고 생각하면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잠시 왕비 자리에 앉는 소름 끼치는 생각을 했음에도, 더위는 가시질
않았다.
오늘따라 날이 정말 더웠다. 그래도 밤이 되어 기온이 조금 떨어진 것
같은데 연회장에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서 너무 더웠다. 봄부터 덥기
시작하더니 올 여름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 와중에 오늘따라 연회장에서 왕을 둘러싼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더 열이 들끓었다. 나보다 더 더위를 타는 왕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짜증이 폭발하는 것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국왕의 뒤를 떠나 사람이 없어 비교적 선선한 연회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런 공식 석상에는 자칸 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그의 곁을
빈틈없이 호위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내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회장 구석에서 더위를 식히며 왕이 들어갈 때까지 시간을
죽이고 있을 계획이었다.
오늘따라 왕이 연회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모두가 다 국왕의 업보였다. 알현을 신청해도 받아 주질 않고
레이사를 만나라는 말이나 하고 있으니, 그에게 용건이 있는 귀족들이 그를
연회장에서 붙잡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쌤통이다. 나는 조금 고소하다는 심정으로 먼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국왕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짜증을 겨우 숨기며 그들을
상대하는 건, 술을 한 잔 마시며 지켜보기엔 퍽 즐거운 광경이었다. 국왕이
더위로 고생하고 있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즐겁게 웃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안녕하세요?”

새가 지저귀는 듯이 듣기 좋은 음성이 울린 것은 국왕이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오려 시도를 하다가, 다가온 외국의 사신에게 다시 붙잡혔을
즈음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 인사가 나를 향한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눈앞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스무 살은 넘겼을까
싶은 앳된 얼굴에 키가 크고 늘씬한 귀족 영애였다. 짙은 노란 빛깔의
탐스러운 금발을 에메랄드로 장식한 여자는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친위대인 일릭 경이시지요? 저는 이제브나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이제브나 양. 무슨 일이신지요.”

대충 귀족들의 말투가 이랬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내 외모는 귀족들처럼 고운 편이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험악하게 생긴
편이었다. 게다가 이제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족
영애가 말을 걸 타입은 아닌데, 이 나이 어린 여자는 취향이 다소 독특한
모양이었다.
“유명하신 친위대께서 고독하게 계신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저도 모르게

인사를 드렸답니다. 무례였다면 용서해 주세요.”


몇 년째 국왕의 곁에서 지내고 있다지만, 평민인 내가 어딜 봐도 귀족인
여자에게 무례니 용서니 하는 소리를 듣는 건 속이 부대끼는 일이었다.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그냥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자
내 눈앞의 여자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삼촌을 따라 세리포브에서 왔답니다. 티마예브는 처음이에요. 부디

저에게 티마예브를 알려 주시겠어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대화 상대로 좋지는 않을 겁니다. 아는 것도

없고요.”
“하지만 이 티마예브에서 국왕 전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일릭 경이라고
들었는 걸요? 아주 소소한 얘기도 괜찮아요. 저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일릭 경.”

또 다른 여자가 등장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었다. 이국적인 복장을 보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티마예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중 맨 앞에 서서 나에게 말을 건 것은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인이었다. 의상과 피부로 추측해 보건대 무라드의
사막에서 온 여자인 것 같았다.
“저는 무라드의 아렐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일릭이라고 합니다.”

아렐은… 오며가며 주워듣기로는 무라드의 공주라고 했던 것 같다. 나도


남자인지라 이국적인 사막의 복장과 그녀의 몸매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와, 가슴이 나만큼 크…가 아니고, 씨발. 이게 무슨 생각이지 대체.
“안녕하세요, 아렐 공주님. 그런데 지금 일릭 경은 저와 대화

중이셨답니다.”
나선 것은 이제브나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며 나에게만 인사를 건넨 공주가 불쾌하기에 충분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그녀는 무시당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면에서 공주는 몇 수쯤 위인 것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제 뒤에 붙어 서
있는 여자에게 무어라 무라드의 언어로 속삭였던 것이다. 그러자 뒤에 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공주님을 안다면 마땅히 먼저 예를 갖췄어야 하는 것 아닌지요. 또한

티마예브의 예절로는, 신분이 낮은 자는 마땅히 보다 신분이 높은 분이


말을 걸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상대를 알아보는 눈도 없는 자가 신분을 떠드는 건가? 게다가 무라드인이

티마예브의 예절을 운운하다니, 우습구나.”


이제브나는 분명 발끈했으나 상대를 비웃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보다
본인의 신분이 낮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 이제브나도
세리포브에서는 꽤나 높으신 분인가 보다. 그쪽은 왕이 슬하에 둔 왕자와
공주가 너무 많아서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마도 그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은데…….
“무라드에서는 대화의 순서를 지키는 법조차 없는가?”

“무라드는 누구와는 달리 티마예브의 국왕 전하께서 미로스 대공이던

시절부터 그의 우방으로서 신의를 다했다. 공주는 역사도 제 분수도 모르는


것인가.”
싸늘하게 웃으며 나선 것은 아렐 공주 쪽이었다. 짙은 피부에 건강미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넘치는 미
녀의 전신에서 쏟아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물론 티마예브의
국왕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긴 했지만. 나는 이제 슬슬 여자들의
말다툼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란 존재는 그냥 말다툼을 위해 이용당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 무렵.
“무라드에서는 강한 여자가 강한 사내를 갖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

춤을 춘다면 이 몸이 일릭 경의 손을 잡는 게 마땅하지 않겠어?”


아니요, 저기. 저는 일단 춤을 출 줄을 모르고요…….
생각만으로도 황당한 일이지만, 아마 이 아가씨들은 곧 시작될 댄스 타임에
파트너로 나를 고른 모양이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아가씨들이 왜 갑자기
나와 춤을 추겠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간 연회는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을 해도 국왕의 곁에서 떨어진 적 없이 잠깐 있다가 돌아갔던
터라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나는 사실 꽤나
당혹스러웠다.
아, 혹시 나를 통해 국왕의 정보를 얻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국왕은 즉위 이후 여자를 곁에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전대에는 국왕의 근친 상대이던 여인이 왕비 노릇까지 했다고는 하나, 현
국왕의 여동생인 프리스카 백작 부인은 결코 왕비 행세를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제로는 그런 사이가 결코 아니었고, 두 사람은 사실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를 받는 것조차 싫어했다.
국왕에게는 왕비도, 사랑하는 혈육도, 알려진 정부도 없다. 그러니 미혼의
아름다운 국왕에게 여자들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러나
국왕은 전혀 곁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대신 나에게 접근하려는
모양이었다.
“두 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춤을 추지 않습니다. 서로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여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군, 일릭.”

기척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물론 나를 놀라게 할 정도로


기척이 없는 인물은 내가 아는 한 이 땅에 한 명뿐이었다. 바로 전 미로스의
대공, 티마예브의 국왕인 사내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고 그
의 등장에 여태까지 말다툼을 하던 여자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 역시 놀란 눈치였다. 그 놀람은 또 다른 놀람으로
이어지며 그녀들의 얼굴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발갛게 물들었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차지하겠다며 내 곁으로 왔을
때는 홍조 하나 띠지 않던 그녀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 저 국왕의 얼굴이 쓸데없이 찬란하기 때문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남자인 나도 가끔 넋을 잃게 되는데, 여자들이 볼 때는
오죽하랴. 역시 그녀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국왕이었고 나는 경유지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저 미치광이 국왕은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미친놈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조아리는 여자들에게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
“…!”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름이 돋아나며 등골이 다 오싹했다. 차디찬 얼음물을 잔뜩
끼얹은 듯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를 주시하는 영롱한 빛깔의 호박색 눈동자 한 쌍.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더워서 더 있기가 힘들군. 이만 들어가지.”
“아, 네, 네.”

아니… 왜 저 미친놈의 눈이 저렇게 휙 돌아 버렸단 말인가. 노랗고도 붉은


눈동자에 어린 차디찬 냉기에 베인 듯이 가슴이 서늘했다.
공주들은 차마 그를 붙잡지 못했다. 국왕은 그 목소리에 짜증을 숨길
마음이 없는 듯 했다. 냉막한 미소를 보란 듯이 짓고는 몸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내 심장을 덜컥덜컥 뒤흔들었다.
아니, 씨발……. 내가 뭘 어쨌다고요. 억울한 마음이 되어 나는 황망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밤이라 공기가 낮보다 식어서일까. 여름의 밤바람이
열기를 품고 있었음에도, 연회장을 나서자 오싹하니 소름이 돋아났다.
“아, 그냥 다 죽여 버릴까.”

……그런 혼잣말이 귓가에 들려온 것도 같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몇 년째


사랑 타령을 하더니 이제는 아주 강렬한 질투를 하는 체하고
앉았다. 그걸 빌미로 또 나를 어떻게 괴롭히려고.
내가 뭐 그 여자들 손이라도 잡아 봤다면 몰라, 씨발 다가와서 말을 거는 걸
어떡하라고. 그리고 어차피 춤도 안 출 생각이었는데. 게다가 그 여자들, 사
실은 국왕 네놈한테 마음이 있어서 나한테 접근한 것뿐인데. 난 완전
이용당한 건데.
그러나 나는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하고 국왕의 뒤를 따랐다. 설마 저게 정말
질투를 하는 거라면… 어쩌면 여러 사람의 목숨이 아주 간당간당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일국의 공주라 해도, 국왕은 거침없을
인간이다.
몇 년을 함께 했지만 나는 저 정신 나간 국왕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국왕을 예측하는 것은 나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란 말인가. 내 코가 석 자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긴 은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따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뿐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0.

외전 피서 2.
그리고 나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아…! 아, 아아……!”

국왕의 아래 깔린 채, 나는 무력하게 신음했다. 내 다리를 활짝 벌려 놓고 그


사이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추삽질을 하는 국왕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전에 이곳저곳 잔뜩 물리고 빨렸다. 삽입 전에 이미 진이 빠질
정도로 집요하게 애무를 당해야 했다. 국왕이 꺼내 든 미약 탓에 유두를
위주로 온 가슴이 다 화끈화끈했다. 간지럽기 짝이 없어서 그의 맨살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그 와중에 내 불쌍한 이성은 고민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비교적 정상적인
섹스를 당하는 셈 아닌가 하는 세상 쓸모없는 고민을. 가슴을 예민하게
만들고 집요하게 애무하여 괴롭히는 건 평소에도 국왕이 심심치 않게 하던
짓이었다.
“으…! 으윽, 아!”

점점 격렬해지던 왕복운동의 끝에, 왕은 드디어 내 안에 정액을 사출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사정을 하는 동안 나 역시 쾌락의 끝 지점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나도 모르게 내벽을 잔뜩 조일 수밖엔 없었다. 벌어져
그에게 붙잡힌 허벅지가 덜덜덜 떨리고 발끝이 곱아들었다.
그 길고 길었던 절정이 멈추었을 때,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내 배
위는 내가 쏟아낸 정액으로 온통 지저분했다. 끝에 나온 것은 거의 물처럼
맑았다.
“더워…….”

내 한쪽 허벅지를 팔에 안고 있던 왕은 덥다고 중얼거린 주제에 내 다리를


놓기는커녕 그 다리에 몸을 비비며 발목 안쪽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몸을 떨던 나는 아직까지 내 안에 박혀 있는 그의 성기가
주는 버거운 부피감에 흠칫 굳었다.
사정을 했는데도 왜 이렇게 큰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시들지 않은 정력이
신기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반은 적응하고 또 반은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내 엉덩이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정사가 끝난 지금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나는 몸속
에 말뚝이 박힌 것과 다름없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취향이던가?”

씨발, 덥다면서 떨어지기나 할 것이지. 뜬금없이 왕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아직 정사의 여운에 잠겨 헤롱헤롱대고 있던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국왕은 그런 내 허벅지를 슬슬 쓰다듬으며
대답을 종용했다.
“말을 해 봐. 그대가 여자를 안고 싶다면, 내 주선을 해 주지.”

정말 그럴 용의가 있다는 듯이 말을 하는 국왕을 보며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얼마나 기가 막힌지 몽롱하던 정신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지금 나를 이렇게 깔아뭉개 놓고 한참을 박아 댔으면서, 이제는 여자를
주선해 주겠다니 이게 말이야 뭐야. 내가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눈이 벌개져서 죽이네 마네 한 주제에.
게다가 그녀들이 실제로 원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원하지 않는
상대를 권력으로 취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럴 권력도 없고 말이다.
“세리포브 여자가 마음에 드나?”

물론 국왕에게는 나를 원치 않는 여자로 하여금 내 침대 위로 올라오게


만들 권력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원치 않았다. 이런 대화조차 왜 이런
자세로 나누고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금발과 벽안, 그대 취향이잖아.”

딱히. 금발과 파란 눈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키가 크고 날씬하지만


볼륨감이 부족했던 그녀는 결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그보다는 몸매를
더 보는 편… 크흠.
“아니면 무라드의 공주? 그대만큼 풍만하던데.”

…아, 기분이 팍 나빠져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국왕에게 세뇌를 당해도

지나치게 당한 모양이었다. 그 아름다운 굴곡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아주아주 기분이 나빠졌다.
“됐습니다. 그런 거… 원치 않습니다.”

“왜? 다 마음에 안 들어?”

“예. 다 제 취향이 아닙니다.”

“그럼 그대 취향은 뭔데?”


지금 내 엉덩이에 좆을 박고 내 여자 취향을 묻고 있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참기가 어
려워진 나는 그가 안고 있는 내 허벅지를 그에게서 떼어 놓으려
힘을 주며 은근슬쩍 그를 밀어냈다.
“없습니다, 그런 거. 그러니 이제 좀…….”

취향이 없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냥 적당히 예쁘면 그걸로 족했고 그나마


보는 게 몸매와 잠자리에서의 적극성 정도였는데, 가슴을 떠올리면 내
가슴과 비교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지금은 큰 가슴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세상 어떤 여자의 가슴도 내 가슴처럼 민감하지도
않겠지. 씨발, 괜한 것을 생각했더니 기분이 더더욱 나빠져 버렸다.
“금발 좋아하잖아?”

국왕은 집요했다. 그가 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젠 숫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적어도 박고 있는 물건은 좀 빼고 대화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별롭니다. 더 밝은 색깔이 낫죠.”

나는 되는대로 말을 주워섬겼다.
“그럼 피부는? 짙은 게 건강해 보이잖아.”

“새하얀 쪽이 좋습니다.”

그 대답도 별생각 없이 대충 내뱉은 소리였다.


“가슴은?”
“아, 그건 됐대도요. 싫어합니다, 큰 가슴.”

원래는 풍만하고 굴곡진 몸매를 좋아하지만 이제는 바뀌었다. 내 가슴을


떠올리게 하는 큰 가슴은 진짜 생각도 하기 싫어졌다.
“…흐음. 그럼 눈동자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노랗거나 붉거나…….”

거기까지 대답했을 때, 나는 국왕의 표정이 기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 내가 무언가 크게 말실수를 했다는 것도.
밝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풍만한 가슴이 아닌. 노랗거나 붉은
눈동자…….
“…후, 더워.”

아니……. 나는 진짜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한 말인데, 국왕의 뺨이


왜 저렇게 새빨갛게 물들었는지, 왜 섹스를 할 때보다 더 열이 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가슴이 다 철렁했다. 이보시오, 국왕, 이것은
오해다. 진짜 큰 오해야. 저기요,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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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덥잖아.”

밤이 되어 기온도 많이 떨어졌다. 방 안을 식히는 얼음조각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어 오히려 서늘하기까지 한데 덥긴 뭐가 더워. 그러나 물론
내게 그를 반박할 틈 따윈 없었다.
“으윽…….”

국왕이 갑자기 내 안에서 제 성기를 뽑아낸 것이다. 사정을 한 후에


시들기나 했을까가 의문인 그의 커다란 성기가 빠져나가는 순간마저도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국왕이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릭. 내가 지금 너무 더워서.”

여전히 홍조가 오른 얼굴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수줍게 젖어 든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말문이 턱
막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시에…….
대체 어느 신이 빚어낸 인간이기에 저토록 아름다운가,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왕이 나를 놓아준 순간, 그따위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차라리 도망을 쳤어야 했다.
“그대가 알 낳는 걸 보고 싶어졌다.”

“……예……?”

“더우니까, 어쩔 수 없지.”
아니 대체 더위와 알 낳기의 상관관계가 대관절 무엇이라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알을 낳아…??
그러나 국왕의 손에는 이미 협탁 위에 늘 놓여 있던 검정색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몇 날 며칠째 놓여 있던 상자. 그 속에 들어 있는 동그란 구슬들을
본 순간, 내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나갔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대의 손버릇, 너무 나쁘니까.
그게 내 죄명이었다. 이것도 수 년 전 딱 두 번 저지른 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화려한 전적 때문에 내 두 손은 침대의 기둥에 묶여야
했다. 나는 무릎으로 침대를 짚고 엎드린 채로 결박당했다.
“으으윽, 으, 흐으, 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 입에서


는 연신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고
있었음에도 새어나오는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더 힘을 줘야지. 빠져나오려 하잖아.”

“아!”

찰싹! 손바닥이 얼얼하게 엉덩이 한쪽을 때리고 지나갔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곤 이를 악물었다. 이미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던 굴욕감이
그게 꼭대기가 아니었다는 듯 더 높은 곳까지 치고 올라갔다.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얻어맞았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부끄러우면서도 분한 마음에 눈가가 홧홧해졌다.
꾸우욱. 국왕이 손가락으로 반쯤 밀려 나온 구슬을 밀어 넣는 것이
느껴졌다. 완벽한 원형은 아니고 달걀 모양으로 생긴 구슬의 가장 볼록한
부분이 쑤욱 밀려 들어갔다. 그것이 다시 바깥으로 나갈까 봐 나는 힘을
주어 아래를 조였다. 대공은 그 조이는 힘을 무시하며 구슬을 미는
손가락까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에서 구슬끼리 부딪쳐 덜걱덜걱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마찰이 내벽을
통해 내 몸을 죄 흔드는 것 같았다. 장관이 요동을 치며 통증과 함께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 치솟아 올랐다. 장관을 늘리는 압박감과 함께 전부
다 내보내고 싶다는 생리적인 욕구가 머리꼭지를 뚫고 나갈 것만 같았다.
“흐으, 으, 으극, 흑.”

내 신음 소리는 숫제 흐느낌과도 같았다. 얼굴에 범벅이 되어 흐르는 것은


어쩌면 땀이 아니라 정말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금방
이라도 전부 내보내게 될 것 같아서 몸서리가 쳐졌다. 부르르 떨면서도
나는 혹시라도 구슬들이 빠져나갈까 봐 힘을 주어 아래를 닫았다. 그럴수록
복부에 힘이 들어가서 뱃속이 더 터질 것만 같았다.
“고작 네 개 들어갔는데.”
손가락을 빼며 국왕이 속삭였다.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순간 뱃속이 꾸르륵
요동을 치며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아래에
힘을 주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씨발, 고작 네 개라니. 고작이라니! 구슬의 크기가 계란만 했다. 계란보다
작다 해도 메추리알보다는 훨씬 컸다. 그런 게 네 개나 뱃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나는 꽤나 오랜만에 비참함까지 맛보는 중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나 더 넣어 줄까?”
안 돼. 안 돼……. 나는 기어코 울먹이며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시트에
고개를 처박고 애써 배설욕구를 참고 또 참았다. 배가 아팠다. 속이
불룩하게 부푼 기분이었다. 딱딱하고 둥근 이물감이 뱃속에 가득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왕은 그런 내 뒤에 바짝 제 앞을 붙였다. 뒤를 막아 주기라도 할 듯, 혹은
구슬로 가득 찬 안으로 제 좆을 박아 넣기라도 할 듯이 내 엉덩이에 제 몸을
꾸욱꾸욱 눌러 댔다.
“제발, 제, 발, 흐윽…!”

한계에 달한 나는 그에게 애원을 하고야 말았다.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처지에 애원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괴로웠다. 고통스러워서 그대로
앞뒤 가리지 않고 전부 배출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하나가 빠지면 두 개를 넣을 거다.’라고 국왕이
엄포를 놓고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족하기 전에 내가 먼저
무너진다면 그는 몇 번이고 이 짓을 반복케 할 위인이었다. 그런
변태새끼였다.
“히, 히익…!”

내 등에 달라붙은 왕이 손을 뻗어 가슴과 성기를 움켜쥐었을 때 나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미약으로 한참 괴롭혀졌던 가슴은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하반신은 괴로움으로 가득한데 가슴에는 아찔하고도 강렬한 쾌감이
흘렀다. 한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부조화가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왕에게 붙잡힌 성기 끝에서 묽은 정액이 쏘아졌다.
왕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내 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대가 내 아이를 낳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겠지.”

왕은 세상 다시없을 끔찍한 소리를 세상 애틋하게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너무 애달파서 누가 들으면 절절한 사랑 고백인 줄 알겠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남자인 나한테 자기 아이를 낳으라는 개소리였다. 국왕은 그냥
미친놈이었다. 소름이 쭉 끼쳤다.
“우리 아이, 정말 예뻤을 텐데.”
물론… 물론 국왕을 닮은 아이는 무척 예쁘기는 할 것이었다. 레이사의
어린 시절만 떠올려도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던가. 여자아이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마찬가지
다. 자라면 또 엄청난 미인이 될 게 틀림없었다. 프리스카 백작
부인 이스테샤가 그러하듯 말이다.
물론 국왕과 나를 반반 닮은 아이는 도통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지만…….
아니, 씨발! 내가 왜 이딴 걸 상상하고 있단 말인가!
“역시 왕비로 공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왜 다들 반대를 하는 거지? 짐이 이

나라의 왕인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군그래.”


미친놈아…! 나는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내
앞에서는 결코 짐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던 인간이, 이 상황에 굳이 왕
행세를 하는 게 가증스럽게 짝이 없었다. 몹시 얄미워서 콱 쥐어박고
싶었다.
“그대조차 싫다고 하니, 별수 없지.”

그나마 내 의사는 반영을 해 주어 다행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나의 착각일 뿐이었다. 저 미친 변태새끼한테 다행일 게
뭐가 있을까!
“대신 알이라도 낳아 줘.”
미친 소리를 서슴지 않으며 국왕은 내 등줄기를 따라 입을 맞추어
꼬리뼈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섯 개쯤?”

내 안에 들어온 구슬이 네 개. 그러나 낳아 달라는 것은 다섯 개…….


“으, 으아, 아!!”

힘주어 가까스로 다물고 있던 주름에 단단한 것이 닿은 순간. 나는


절망하며 오열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찰싹! 엉덩이
위로 손바닥이 떨어졌다.
“힘 빼.”

찰싹! 찰싹! 연거푸 몇 번이나 얻어맞았다. 비명과 함께 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굴욕감 따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힘이 꽉 들어간 입구를
뚫고 기어코 구슬이 또 하나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 싫어, 안 돼, 안 돼…. 히, 히익, 그만, 그만…!”

비명을 내질렀지만 구슬은 점점 더 입구를 벌리며 안쪽으로 들어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안쪽에 가득 들어 있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몰렸던 구슬들이
맞닿아 달그락달그락 난리도 아니었다. 다시 역행해 올라가는 구슬들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장관을 멋
대로 헤집고 늘이는 감각에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터질
것 같아서 괴롭기도 했다. 눈앞이 아득하게 검어졌다가 빛이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귀여워.”

다섯 번째 구슬은 완전히 들어와 버렸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다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벌어진 항문에 구슬의 둥근 아랫부분이 가까스로 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나오겠군.”

구슬을 잔뜩 품은 내 아래를 감상하는 왕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다분히 담겨


있었다. 최대한 조여 주름을 다물려 했으나 완전히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 조여도 마지막 구슬이 자꾸만 빠져나가려 들었다.
“힉, 히익…!!”

아래에 전해 오는 감각에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주름에 닿은 것은 뜨거운 살덩이였다. 말하자면 ‘혀’와 같은.
그것은 정말로 왕의 혀였다. 국왕이, 저 미친놈이 주름 위를 핥고 있는
것이다! 구슬을 다 머금지 못해 빠끔히 벌어진 곳을 핥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참을 수가 없는데, 주름 위를 간질이는 혀의 감촉에 척추를 따라 말
못 할 감각들이 내달렸다. 몸서리를 치고, 진저리를 쳐도 참아 낼 수 없는
강렬한 쾌감이었다.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내 성기를 멋대로 흔들며 국왕은 구슬을 품은 내
항문을 핥고 몇 번이고 회음부에 입을 맞추었다. 엉덩이를 애교스럽게
깨물기도 하고 붉게 자국이 남도록 쪽 빨아 당기기도 했다. 가까스로 힘을
주고 있는 항문만 아니라 회음부에 가까운 엉덩이 안쪽의 살들이 그의
입술과 혀, 치아에 쉴 새 없이 희롱당했다.
그 고문에 가까운 애무의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었다. 구슬을 도로 뱉어 내지 않기 위해 참고 또 견뎠다. 울며, 몸부림을
치며 혹은 꼼짝도 하지를 못하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거려야 했다.
“이제 낳는 거 보여 줘.”

마침내 국왕이 내게서 입술과 손을 떼고, 구슬을 빼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속을 비워
내고 싶다는 내 욕구는 이미 한계치에 임박한 지 오래였다.
타인의 앞에서 배설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수치심이 잠시 머리를 들었지만,
허락이 떨어진 지금 견딜 수가 없었다.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 아래에 나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아, 아흐…….”
맨 아래쪽에 겨우 품고 있던 구슬이 밀어내는 힘에 의해 항문을 벌리며
빠져나갔다. 구슬의 가장 큰 부분이 빠져나가는 순간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그 하나를 빼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나를 후려쳤다.
이어 두 번째 구슬 역시 밀려 나왔다. 툭, 툭. 그렇게 세 번째 구슬까지
빠져나와 시트 위로 떨어졌다.
“으윽, 으, 으응…….”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아직도 뱃속이 무거웠지만, 터질 것 같은


배설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쾌감이 동반되어
내 정신은 황홀경에 들기 일보직전이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도
아까의 것과는 달리 조금 더 질척질척했다.
“이제 두 개 남았다.”

그러나 맨 처음 들어갔던 두 개는 꽤 깊은 곳에 들어간 것인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장의 운동이 한차례 끝이 났는지 배설하고 싶은 욕구도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묵직한 압박감이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빨리, 응?”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1.

외전 피서 3.
빌어먹을 국왕 새끼는 그런 나를 독촉하며 내 엉덩이를 좌우로 잡아
벌렸다. 제 마음대로 양껏 주무르며 꼬리뼈 끝에 입을 맞추어 쪽 빨아
당겼다. 몸서리 처지는 감각에 나는 흐느끼며 몸을 떨어야 했다.
“아니면 구슬을 넣은 채로 그냥 박아 줘야 할까.”

아… 안 돼. 그러면 정말로 망가져 버릴 것이다. 안에 단단하고 커다란 구슬


두 개를 내장 깊숙한 곳에 박은 채 국왕의 격렬한 삽입을 받아 내다간
내장이 전부 파열될 것 같았다. 두려움이 차올라 나는 울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아!”

찰싹! 다시 엉덩이에 화끈한 손찌검이 이어졌다.


오른손으로 내 성기를 말아 쥔 채, 국왕은 왼손으로 재차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다시 뱃속이 꾸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에 힘입어 나는 배에 잔뜩 힘을 주었다. 내장의 연동운동을
독촉하며 안의 구슬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 아흐, 으, 흐으으-”

울음 섞인 신음을 내뱉는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 뱉어 낼 것도


없음에도 어째서인지 발기한 성기에 가해지는 강렬한 성감과 엉덩이를
때리는 손길, 그리고 몸 안쪽에서 밀려 나오는 단단한 구슬의 움직임에 내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배설하는 광경을 내보이는 상황에 본능적인
수치심이 뒤섞여 더욱. 이대로 그냥 미쳐 버리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으흑…! 으, 우흐…!”

마침내 구슬들이 항문 언저리까지 밀려나왔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더웠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그대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커진 배설
욕구에 흐느끼며 나는 열심히 아랫배에 힘을 주며 동시에 항문을 조이는
힘을 풀어 냈다. 다시 내 양쪽 엉덩이를 쥔 국왕이 그 광경을 제대로
보겠다는 듯,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딱딱하고 불룩한 구슬이 항문을 벌리며 빠져나가는 감각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깊은 곳에 들어간 구슬들은 국왕이 싸질러 놓은 정액으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미끌미끌
하고 지저분하게 젖어 있었다. 툭 떨어지는 구슬과 항문 사이에
하얗고 끈적끈적한 실이 길게 이어졌다.
“아……!”

그리고 이어 마지막 다섯 번째 구슬까지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왔다. 속이


완전히 비워지는 쾌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배설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쾌감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게 새삼 충격적이었다. 국왕의 성기가 몇 번이고
안을 가득 채우고 헤집었다가 빠져나가곤 했지만, 그것과는 종류가 다른
열락의 세계가 있었다.
“하아, 일릭. 일릭.”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구슬을 전부 집어넣고, 또 전부


빼내는 걸 보여 줬음에도.
“아, 안 돼. 그만, 그만…….”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 끝이 내 회음부를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나는


몸부림을 쳤지만 묶인 몸으로 반항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국왕은 도리어
내 등을 체중으로 누르고는 내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다소
덥수룩하게 자란 내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한 움큼 잡혔고, 고개가 억지로
돌아갔다.
아까부터 연신 흘리고 있던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는 국왕의
얼굴에 번진 것은 분명 희열이었다. 잔뜩 열이 오르고, 괴로워 식은땀을
흘리고, 쾌감과 고통의 이중주에 울음이 터진 나를 황홀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은 멋대로 내게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게 한 채로, 엉망으로
내 입술을 물어뜯었다. 내 입안으로 그의 거친 호흡과 함께 혀가
밀어닥치고, 입술이 치아 사이에서 짓이겨지다가 또 잔뜩 곳곳을 빨렸다.
국왕은 내 입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흐느낌까지 먹어치우며 내게 거친
입맞춤을 퍼부었다.
“흐으!!”

그리고 불시에 국왕의 성기가 퍽, 소리가 나도록 한 번에 깊은 곳까지


짓쳐들어왔다. 나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굳어졌고,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갖은 감각의 홍수에 울부짖었다. 구슬이 잔뜩 들어가 넓히고
짓눌렀던 내벽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던 탓이었다. 부어오른 점막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조금만 자
극해도 견디지 못할 상태였으나, 연신 내 안을 파고드는 왕의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었다.
“아! 아아! 아!!”

목이 쉰 지 오래였으나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처럼 신음했다. 내 입술을


놓아준 왕은 머리채를 붙잡아 당기며 마구잡이로 추삽질을 이어 갔다. 그의
몸이 내 엉덩이와 허벅지 뒤쪽에 아프도록 마찰했다. 그럴 때면 단단한
귀두와 굵게 부푼 기둥이 내 안을 깊은 곳까지 엉망으로 헤집어 댔다.
그 와중에 몇 번이고 국왕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가차 없이 매질했다.
찰싹찰싹, 엉덩이에 아프고 따가운 손찌검이 가해질 때마다 나는 울며 뒤를
조였다. 그 조임을 억지로 꿰뚫으며 성기가 흉포하게 박혀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내가 느끼는 지점을 폭력적이라 할 정도로 과격하게 찌르고
문질러 대면서.
손목이 묶이고 무릎으로 침대를 짚어 마치 네 발 짐승과 같은 꼴로, 나는
정말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주 그냥 죽여라, 죽여, 이 새끼야……. 끝의 끝에 가서 드디어 국왕이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그의 아래에 깔린 나는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만 기절을 해 버리고야 말았다.
***

늦은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왕성을 탈출했다. 몇 년 전 상황의 데자뷔가


느껴졌지만 상황은… 조금 다르긴 했다. 일단 탈출을 하긴 했지만 아예
수도를 떠나 도망칠 생각까지는 아니었으므로. 다만 며칠 집에 들어가기
싫은 그런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가출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탈출이라고 하기에는 그 과정도
탈출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 시종장에게
축제를 보러 가겠다고 했더니 즐겁게 놀다가 조심히 돌아오라며 용돈까지
받아서 나왔으니 말이다.
국왕의 곁에서 산 지도 벌써 수년째. 처음의 우려와 달리 외출은 막상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나가서 말을 타고 오기도 하고, 수도 구경을
나간 일도 있었다. 국왕은 굳이 나에게 감시자 같은 걸 붙이지도 않았다.
그게 뭐랄까… 어차피 내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보내는 것만 같아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도리어 그
신뢰가 내 목줄이 된 느낌이었다.
내가 왜 그 왕성에 돌아가야 하는지는 매번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해질녘이
되면 발걸음은 성으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다르다. 벌써 3일째 평소와 다르다. 엉덩이의
욱신욱신한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서, 3일
째 바깥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축제 시기에 수도의 여관을 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형님, 오늘도 안 들어갈 거요?”

축제 기간을 맞이하여 수도에 돌아와 있던 베슬란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와서 머물 방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자 놈은 상단이 소유한 최고급
여관의 가장 좋은 방을 내줄 수밖엔 없었다. 아마 하루 정도 자고 갈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거리의 축제를 즐기며 여전히 가출
중이었다.
“볼 게 이렇게 많은데 굳이?”

“와, 이러다 수도가 아주 뒤집어지는 거 아닌지 몰라. 물론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나 좀 무섭다고.”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가 티무르 상단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왕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순간 이미 보고가 다 들어갔을
것이다. 축제 때문에 바쁘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베슬란이 나를 살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미주알고주알 알리고
있으리라.
“형님. 그리고 형님도 긴장을 해야 해.”

“내가? 왜.”

이미 험한 꼴 당할 만큼 당해서 더 험한 꼴이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굳이
긴장을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베슬란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전하를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이 성에 들어와 있는지 알면, 형님
이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아하, 역시. 며칠 전의 연회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공주들이 모두 국왕을
마음에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사는 일찍이 길리어드 공작의 막내딸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약혼을 했
고 사이가 아주 좋다고 소문이 났으니, 왕비 자리를 비워 둔
국왕이 더 가능성이 있다 판단했을 터.
참 나. 그런 주제에 나를 마음에 둔 것처럼 다가왔다는 게 가증스럽고
불쾌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불쾌했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처자들이, 열 살도 더 많은 티마예브의 국왕을 노리고 온
것도 뭔가 기분이 미묘하게 안 좋고 말이다. 국왕이 얼마나 변태 같은 줄도
모르고, 멍청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래, 뭐. 시집을 와 보라지. 와서 고생을 좀 해 봐야 저 국왕이 껍데기만
예쁜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기회에 여자들이 국왕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 중 하나와 잘 된다면 뭐, 날 놓아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니겠나.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긍정적인 전망이었다.
…그런데 내 기분이 점점 가라앉는 것은 어째서인지.

아마도 끼니때를 넘겼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바깥 음식이 며칠 먹기에는


자극적이고 색다르기는 해도 왕성의 음식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므로, 오늘
은 딱히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아서 식사 때를 미적미적 늦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간다.”

“아, 형니임…! 그럼 같이 나가요. 어휴, 바빠 뒈지겠는데 진짜.”

바쁘면 제 일이나 보러 갈 것이지, 베슬란은 투덜투덜하면서도 나를


따라왔다. 놈은 여전히 시끄럽고 귀찮았지만, 모두가 삼삼오오로
몰려다니는 축제의 날에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금붕어 똥이라도 매달고
다니는 편이 기분이 조금 나은 것도 같았다.
정오가 지났지만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면서도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분장을 하고 공연을 홍보하며 행진하는 공연단의
배우들을 보며 환호하고 꽃을 던지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분명
즐겁고 떠들썩한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수도에 온지 몇 해가 지났음에도 축제를 전부 즐기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찜찜한 마음을 잊고 떠들썩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베슬란을 데리고 온 건 잘한 짓이었다. 녀석은 꽤나 훌륭한 안내자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역시나 말
이 많은 게 흠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수도 구석구석을 구경하며
축제의 명물이라는 것들을 빼놓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어느덧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날 주점에서 떠들썩한 밤을 보냈기
때문에 숙취가 있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늦잠을 잤다. 더 자고
싶었음에도 깨어난 이유는 바깥 기온이 올라가 실내가 몹시 더워졌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러운 숙소였지만 방마다 넘치게 얼음을 둘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곳곳에 얼음을 두고 하인에게 부채질을 시켜 실내 공기를
시원하게 만드는 것은 왕성에서나 가능한 사치였다.
땀을 질질 흘리며 일어나서는 차가운 물로 씻고 난 뒤에야 더위도 조금
가시고 정신도 차릴 수가 있었다. 전날 너무 과음을 해 버렸다. 그 이유인즉
내가 갔던 주점에 우연히 공연을 마친 공연단이 뒤풀이를 하고 있어서
자리가 과하게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공연단원들은 주점에서도 우스꽝스러운 희극 공연을 벌였다. 술에 취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와 몸짓들을 해 보이며 주점의 손님들까지 끌어들여서는
다 같이 웃고 떠들었다. 나중에는 취한 사람들이 춤판을 벌이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아함과 고상함을 포기하지 않는 귀족들의 연회는 시간이
흘러도 영 낯설기만 했는데, 역시 오랜만에 즐기는 평민들의 파티는 흥겹기
짝이 없었다.
그 덕분에 지금 속이 많이 쓰리기는 하지만. 나는 숙취로 아픈 속을 달래기
위해 여관의 1층 식당으로 향했다. 티무르 상단의 본부와 접해 있어 티무르
상단의 직원들도 와서 점심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의외의 인물과 조우했다.
“헉! 일릭!”

붉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익숙했으나 중늙은이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다. 10년은 늙은 얼굴을 자세히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체즈번?”

달칸 용병대에서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촉새 같은 놈. 바로 체즈번이었다.


그와 수도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달칸 용병대가 설마 티마예브 수도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절로 긴장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기도 했
었다. 물론 미로스의 대공이 티마예브의 국왕이 된 시점에서
용병대가 나를 건드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지만.
“와, 이게 몇 년 만이야! 신수가 훤한데?”

“어, 오랜만이다. 못 알아볼 뻔했어. 수도엔 어쩐 일이냐.”

“나? 재작년부터 여기서 살고 있는데?”

“뭐?”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도와줘서 정착하게 됐지.

리리엘이 미로스에서 떠나고 싶다고 성화를 부려서 말이야.”


리리엘. 그 이름은 왜 익숙하지. 잠시 생각하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가 어렴풋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그 여자는.”
아 나 결혼했어. 벌써 애가 둘이다.”
“ .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축하한다? 아니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벌써 애가 둘이라고 하고……. 과거 미로스에 머물던 시절 리리엘의 집에
있을 때 몇 번 체즈번이 나를 찾으러 온 적이 있었다. 나와 리리엘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지금은 체즈번이 그녀의 남편이라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대장의 아들을 죽인 범인으로 나를 의심하여
리리엘을 찾아와 알리바이를 물었다는 것도 체즈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눈이 맞은 건가??
“뭐, 다 지난 일이야. 난 신경 안 쓴다고. 오히려 내가 왜 그랬나 싶다고.”

체즈번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마누라 등쌀에 이사까지 와, 나와서 돈 버는 것도 힘든데 집에 가면 마누라

힘들다고 대신 애 보느라 정신없어, 아주 죽겠다, 죽겠어. 결혼을 하질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때 미쳤었지.”
“…그러냐. 그래도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얼굴이 팍 가 버린 것으로 보였지만, 굳이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체즈번이 씩 웃으며 갑자기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보이는 게 아닌가. 끝에는 둥그런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뚜껑을 옆으로
밀면 속안에는 초상화가 들어 있는 펜던트였다.
“우리 애들. 귀엽지?”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여 넣은 정도의 작은 크기의 펜던트 속에 어떻게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려 넣은
초상화는 두 아이들의 것이었다. 두 아이 모두 체즈번의 붉은
머리카락을 이어받아 머리통이 불긋불긋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리리엘의
파란 눈동자였다. 새삼 신기한 기분이었다.
“귀엽네.”

“아주 천사야, 천사. 요새는 애들 보는 맛에 산다. 마누라가 고생이지만 난

솔직히 셋째도 낳고 싶더라고.”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는다고 체즈번은 투덜거렸지만 그마저도 사실은
자랑이었다. 아주 좋아 죽겠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식사가 다 끝나고 나가던 참이었지만, 내가 앉아서 식사를 하는
내내 함께 있었다. 떠들기를 좋아하던 녀석은 여전히 말이 많았고, 그의
말대로 리리엘과 나의 과거는 크게 상관이 없는 듯했다.
“파빅은 은퇴를 했어.”

“…아, 그래?”

“뭐, 나도 결혼 때문에 용병대를 나온 지가 오래라 그냥 건너 건너 들은

거지만. 파빅이 사별하고 아들을 혼자 키웠던 건 알지? 근데 몇 년 전에


재혼을 했대.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더라고.”
“그럼 용병대는?”

“라도반이 뒤를 이어받았지. 지금은 총기 부대를 훈련시킨다나 봐.”

용병대를 떠난 뒤 나는 그들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미로스의 대공이 나에게 공개적으로 입을 맞춰 버린 것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그냥 잊어버렸다. 나에게는
흑역사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체즈번에게서 그들의
소식을 들은 지금은 마음이 괜히 푸근했다. 마일의 죽음으로 파빅에서
미안한 마음이 조금쯤 남아 있었는지, 그가 재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에 어떤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과거 좋은
인연이었던 사람들이 나름의 행복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너는 계속, 음… 왕성에 있는 거지?”

“…어어, 뭐. 그렇지.”

녀석이 내 안부를 물었을 때는 잠시 어색하고 서먹한 기류가 흘렀다.


체즈번이 먼 산을 보며 웃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기회 되면 종종 보자. 베슬란 님과 셋이 다음에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 ,
“어어, 그래.”
베슬란에게 존칭을 쓰는 게 나를 몹시 당황케 했으나 나는 적당히 대꾸를
하고 말았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축제의 마지막 밤을 즐겨야 해서 일찍
퇴근을 해야 한다며, 체즈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내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나 있기에 내가 베슬란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걸 체즈번이 알고 있는 것일까. 둘 다 달칸 용병대 출신이라
베슬란이 아는 체를 했던 적이 있던 걸까. 약간의 의문이 남게 된
만남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62.

외전 피서 4.
잠시 더 쉬다가 나는 홀로 숙소를 빠져나왔다. 아직도 날이 더웠고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축제 기간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닫히지 않았던 시장의
점포들 중에서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지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해가 지고 온도가 조금 떨어지면 다시 온 도시가 떠들썩하게 깨어날
것이다. 특히나 오늘 밤에는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있을 예정이었다.
불꽃놀이까지 보고 나면 밤이 깊을 텐데, 오늘도 들어가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멍하니 생각하며 나는 노점상에서 산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길을
걸었다. 이제는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나는 더운 와중에 그늘을 찾아서
무료하게 걷고 있었다.
나다니는 사람이 줄었다 해도 아직 열심히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노상에 꾸며진 무대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는 못했던 공연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연극을 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그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애절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연인들을 다룬 공연이었다. 보통
인기를 끌기 마련인 외설스럽고 익살스러운 공연은 아닌 정통 로맨스인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남녀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중년 부부도 있었고 젊은 커플도 있었다. 차양이 드리워진
객석에는 고급스러운 차림의 커플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나는 평소 드라마나 로맨스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공연의
수준이 높다고 유명하다 해도 사랑 얘기는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라는
거다. 게다가 공연은 거의 막바지인 듯 보였다.
그러나 내 걸음은 그 공연 앞에서 멈출 수밖엔 없었다.
“일릭 경?”
부르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는 열다섯, 열여섯 살의 남녀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소년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너무나 연상케 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호박색의
영롱한 눈동자를 가진 소년. 바로 레이사였다. 평소와 달리 그는
짧게 자른 푸른 머리카락을 내보이고 있어서 나는 더 놀랄 수밖엔 없었다.
“전하.”

“레이사라고 부르세요, 일릭 삼촌.”

커헉. 나는 순간 피를 토할 뻔 했다. 레이사라고 부르는 거야 그렇다 쳐도, 삼


촌이라니. 너무 엄청난 호칭에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한편 아버지 따위의 호칭이 아닌 게 어디냐 싶기도
했고……. 에이, 씨발 내가 지금 또 무슨 생각을.
“아니… 왜 나와 계시는 겁니까.”

“어? 아, 그게. 음. 그러니까.”

레이사는 얼굴을 붉히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옆에 선


아가씨에게 눈길을 주었다. 레이사와 비슷한 색깔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 이제 막 성장기에 접어든 레이사와 비슷한 키의 아가씨였는데,
내게도 얼굴이 익숙했다.
티마예브의 북부를 다스리는 길리어드의 막내딸, 필리아. 그녀는 레이사의
약혼녀였다.
“안녕하세요. 필리아에요, 일릭 삼촌.”

나는 또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공녀님이라 부르지 말라는


의미로 제 이름을 다시 말을 한 것이겠지만 굳이 나를 삼촌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었느냔 말이다……. 너무 당황해서 나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음, 필리아가 축제 때문에 수도에 내려왔거든요. 그런데 왕성에만 있으면

제대로 즐길 수가 없으니까, 축제를 보러 잠깐 나왔어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렇지. 수도의 치안이 아무리 잘 지켜진다 해도
왕세자가 예비 세자비와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그냥 둬도 되나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 누구도 레이사의 정체를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었다. 프리스카 백작
부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은빛의 가발을 벗은 것만으로도 잠행을
하기에 완벽한 변장이었으니까.
또한 혹시 누군가 길리어드의 막내 공녀의 얼굴을 알아본다 해도 오해를 살
것 같지도 않았다. 푸른 머리카락 덕분에 두 사람은 남매지간으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보이기까
지 했으므로.
“비밀로 해 주세요, 삼촌.”
필리아가 말한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엔 없었다. 이 더위 속에서도
손을 꽉 붙잡고 데이트를 하고 있는 두 남녀를 방해할 마음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왕과 공작이 자녀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진행한 혼담이건만,
두 사람 사이가 좋다는 게 도리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슬슬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저녁 때가 더 볼 게 많을 텐데요.”

“어제까진 그랬어요.”

간도 큰 왕세자 커플의 행태에 그저 기가 막혔다. 하긴 아직 무도회에 나갈


나이가 아닌 두 사람이었으니 왕성에 처박혀 있는 게 심심할 법도 할
것이다. 레이사야 왕세자라는 지위 때문에 연회에 얼굴을 비칠 때가
있었지만, 필리아는 아직 데뷔 이전이었다.
그렇다고 단둘이 데이트나 즐기고 있었다니. 내 눈이 가늘어진 탓에
레이사는 부끄럽다는 듯이 슬며시 웃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해서 일찍 나온 거예요. 저녁에 열리는

가장무도회는 나이가 어려도 몰래 참석할 수 있거든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가발 쓸 거예요. 뭐… 위험하다면 아버지가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는 직감적으로 그 아버지가 티마예브의 국왕을 일컫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지금… 성도의 교황 엔리온이 여기에 오겠단 소리인가?
제정신이야??
“매년 오셨었는데 별일 없으셨대요.”

세상 참 잘 돌아가는구만. 교황이 무도회에서 춤 좀 추고 싶다고 성도를


탈출하다니.
기가 차서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간 무도회는 왕이 얼굴을 내비칠
때만 갔었고, 그마저도 왕이 참석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프리스카 백작 부인을 향한 사랑이 변함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물론 그녀가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비견될 여인은 없다고 할 정도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새하얀 은
빛의 머리카락과 주름도 잡티도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 오묘한
빛깔의 호박색 눈동자……. 그 조합이 물론 참 아름다운 것이긴 했다.
“저희는 이제 대공원에 가려고요.”

대공원은 수도 외곽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공원으로, 평민들보다는


귀족들이 이용하는 장소였다. 인공 호수와 함께 조경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젊은 남녀의 데이트 장소로 선호된다는 설명을 베슬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굳이 가 보지 않았다. 베슬란과 둘이 데이트 명소를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호위를 데려오신 게 아니면, 함께 가겠습니다.”

“아, 호위는 데려왔어요.”

그래도 레이사는 왕세자라는 본인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눈짓을 하는 곳에는 과연 골목에 반쯤 몸을 숨긴 건장한 사내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복장에 조금 놀라 버렸는데, 티마예브
의 기사가 아닌 교단의 성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여태까지 별일 없었는데.”

…성기사가 이미 와 있단 얘기는 교황도 수도에 있다는 의미였다. 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교황이 온다면 축제 중에도 성대한


환영식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으니.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배알이 조금 뒤틀렸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원거리
연애를 하던 남녀가 쪼르르 모여드는 모습이 말이다. 이때다 싶어 교황이
몰래 티마예브의 수도에 잠입하고, 그 아들내미는 제 머리카락 색깔이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걸 이용해 약혼녀와 길거리 데이트를 만끽하고 있다.
게다가 체즈번은 리리엘과 결혼해서 애도 둘이라고 하고, 투덜거리는
주제에 마누라가 뭘 해 줬고 애들이 어떻게 귀엽다며 입이 아주 찢어졌다.
또 어젯밤 술에 개떡이 된 베슬란은 공연단의 여배우와 눈이 맞은 걸 내가
다 봤다. 아, 심지어는 파빅까지 새장가를 가서 인생 2막을 꽃피우고
있다지?
“그렇다면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갈 곳이 있어서요.”

행선지는 딱히 없지만 나는 굳이 이 커플의 들러리를 서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인데 왜 갑자기 마음이
이렇게 불편한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혼자 있고 싶어졌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네. 삼촌도요. 그리고… 조만간 집에서 봬요.”

그건 이제 슬슬 돌아오라는 간곡한 청이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나와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둘만의 세계에 빠진 어린 한 쌍은 손을 꼭 잡은
채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잠시 사이좋게 달라붙은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늘에 서 있어도 땀이 나는 더위는 연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날이 이렇게나 더운데. 하인들이 부채질을 해 주는 왕성을
떠나 이런 거리에 나올 정도로 나와서 데이트를 하는 게 즐거운 듯했다.
레이사가 은발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머리카락은 오직
티마예브의 왕과 그 여동생, 그리고 왕자만이 지닌 것이라 눈에 너무
띄었으니까. 가발만 벗으면 그냥 거리를 돌아다녀도 무방한 변장이 된다는
게 저 커플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국왕은… 그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긴 은발 때문에 잠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내였다. 날이 춥다면 후드를 써서 머리카락을 가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더운 계절에는 무리다. 그러니 그는 어느 누구와도 길거리를 걸으며
데이트를 하고 연극을 보러 다니며 축제를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교황처럼 은밀히 제 연인을 찾아 가장무도회에 나타나는 일도 하지
못하리라. 나는 국왕이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는 춤을 출 상대가 없었다. 뭇 귀족들의 시선 속에 춤을
추기에 그의 연인은…….
“……음…….”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채 잠시 신음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파란 하늘에 쨍하게 떠 있던 태양이 서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밝아서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조금
있으면 석양이 질 법도 한데, 어째서 이렇게 새하얗게 내리쬐는지. 살갗이
닿는 빛이 따가워서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 덥네.”
태양은 뜨겁고 날은 너무 더웠다. 이제는 더 보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너무 더워서 더 돌아다닐 의지조차 사그라졌다.
엉덩이도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더웠다.
온통 새하얀 남자가 견디지 못하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나는 뙤약볕을 피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시작되는 불꽃놀이는
꽤나 볼만할 것이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작년에도 꽤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바깥의 더위가 차단된 시원한 성 안에서 새카만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들을 봤던 게 기억이 났다. 덥다는 소리를 해
대면서도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허리를 안고 있던 무게가 괜히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뭔가 이상하게 뱃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이라 그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런데 자꾸만 왕성이 가까워지는 것은 어째서인지. 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릭…!”

돌아갈까, 돌아가지 말까를 고민하다가 더운 바깥에서 한참을 헤매던 끝에


결국 내가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있었다는 국왕은
한달음에 침전으로 뛰어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한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온 탓에 씻으려고 옷을 막 벗고 있던 중이었다.
국왕은 그런 내 뺨을 감싸 쥐어 다짜고짜 입술을 맞대었다. 어쩌면 예상을
한 일인데도 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경직시켰다.
“식사는 잘 했나? 조금 여윈 것 같은데.”

아니, 나가서 너무 잘 먹고 잘 지내긴 했는데……. 숙취도 싹 가셔서


수척함이라곤 전혀 없는데 국왕은 여위었다는 표현을 써서 나를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아, 물론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국왕의 얼굴이었다. 여전히 새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 보석을 박아 넣은 듯이 빛나는 눈동자
따위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남자임에도 프리스카 백작 부인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지. 나는 잠시 당황하여 헛기침을 내뱉었다.
“화는 다 풀렸어?”

내 뺨에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괜히 귓가가 뜨거워졌다. 말투가


지나치게 애처로운 탓이었다. 바라본 얼굴은 더 기가 막혔다.
씨발. 이 순진무구한 얼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제 외모의 장점을 십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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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얼굴에 내 속에 확 열이 올랐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게 꼭 애교를 떠는 것 같았다.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부리는 애교가 징그럽고 소름이 끼치는 게
당연하련만.
“……화가 난 건 아니었…….”

그의 미친 미모가 가진 힘은 어마어마했다. 내 입에서 저 따위 소리가


흘러나오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많이 아팠나? 성에 있었다면 내가 약을 발라 줬을 텐데.”

그래도 다치지 않게 하려 노력했던 건데.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국왕을 보며


나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다치지 않게 하려 했다는 얘기처럼 실제로 그렇게 과격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도 피도 없었다. 그냥 좀 붓고 얼얼하고 화끈화끈했을 뿐.
찢어지거나 상처가 난 게 아니라 약을 바를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세상
흉악한 섹스를 하면서도 국왕은 내 하반신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지난 세월 동안 해마다 몇 번쯤 연례행사처럼 내 요도를 쑤셨을
때에도…….
“…안 다쳤…습니다.”
“다행이야. 나는 그대가 없는 동안 조금 바빴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바빴다는 얘기를 하며 국왕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만을 감물고 빨아 당기는 입맞춤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 간지러운
입맞춤에 얼굴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랐다. 예전만큼 소름이 끼치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오싹오싹하니 뭔가 이상했다. 도망가고 피하고 싶은
감촉이었다.
“당장 그대를 잡아 오고 싶었는데……. 이스가 말리더군. 참길 잘했지.”

…그 말이 오싹하게 들린 것은 내 착각일까. 몸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과 달리 음성의 온도가 갑자기 낮아진 기분이었다.


내 발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조금 큰일이 났을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일주일
가출은 너무 길었는지도. 국왕은 지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힘을 가진 사내였다. 그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면 내 손발의 힘줄을 정말로 끊어 놓는 것은 일도 아닐 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였지만 나는 잠시 내 행동을 반성했다. 어차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벗어날 수
도 없는데,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질 말아야 했다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스스로 돌아왔다는 데에 국왕이 퍽 만족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축제는 즐거웠나?”
“예, 뭐…….”

“공연도 많이 봤겠지? 나도 그대를 위해 연극을 준비했는데.”

“…오늘 가장 무도회에도 연극이 올라오겠군요.”

나를 위해 준비한 연극이라는 단어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어차피 가장 인기 있었던 연극을 선정하는데 굳이 ‘나를 위해
연극을 준비했다’고 말을 하는 게 조금 거북한 것 같기도 했다.
“아, 하나 고르긴 했지. 그런 건 레이사가 정해도 좋을 텐데, 레이사도 어딜

갔나 보이질 않더군.”
음, 레이사는 약혼녀랑 데이트를 나갔거든요. 게다가 몰래 가장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느라 바쁜 거고요. 그러나 나는 사실을 고하는 대신
모르는 척했다. 호시탐탐 제 아들에게 일거리를 떠넘기려는 국왕에게서
레이사를 지켜 주려는 작은 의리였다.
“고대 신들의 이야기라고 하던데. 본 적 있나?”

국왕이 말하는 연극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왕성에 초청이 되기


충분할 정도로 입소문이 톡톡히 난 연극이었다. 첫날에 거리 공연으로
시작했다가 다음 날 바로 극장에 초대가 되어 황금 시간대에 극장 공연으로
진행이 되었다고 했다. 인기가 많아서 표가 바로바로 매진이 되고, 암표도
비싸게 팔렸다고 들었다. 서서라도 보게 해 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극장에서
입석표까지 팔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나는 그 정도 노력을 기울여서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본 적은 없었다.
“아뇨. 본 적은 없습니다.”

신들의 사랑 얘기. 그런 드라마는 굳이 보고 싶지 않았으며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전처럼 어느 물정
모르는 여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내면 험한 꼴을 보는 것도 나일 거란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그걸 봤다면 그대도 카이야에 관심이 생겼을 텐데. 신전의 분위기가 썩

좋거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니, 아
직도 카이야 타령을 멈추지 않았어? 국왕의 집요함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니 카이야에 뭐가 있나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며 꽤 많은 것을 보았지만 잘
보전된 신전은 본 적이 없긴 했다. 폐허가 된 신전의 부서지고 풍화된
기둥들을 볼 때면 그저 허무하다는 감상밖엔 들지 않던데 말이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국왕의 미간에 짧게 핏줄이 섰다 사라졌다. 방해를 받은 게 여간 불쾌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방해받길 싫어하는 그를 방해해야 할
정도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 이따 밤에 올 테니 그대는 쉬어.”

“네.”

“오늘 밤엔 안아도 되겠나?”

일주일 만에 성으로 돌아왔으니 당연히 국왕이 치근덕거릴 것은 예상을


했다지만. 번번이 물어 오는 그는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식어 가던
뺨에 다시 열이 올랐다. 민망한 기분 탓이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지만.”

“…….”

“하아, 어서 왕위를 내려놓든지 해야겠다.”


아니, 제발 오래 오래 그 자리에 머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레이사가 많이
어린데요. 한 여든쯤 되어 더 이상 서지 않을 즈음 양위하는 건 어떨까요.
아님 그대로 그냥 관짝에 들어가시는 게.
그 말이 혀끝까지 튀어 올랐으나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런 내 입술에
국왕이 깊게 제 입술을 눌렀다 떼었다.
“밤에 봐.”
중얼거린 그는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테이
블 위에는 금빛의 화려한 가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쥔 국왕은 그
가면을 얼굴에 쓰고 몸을 돌렸다.
…아니 방금 조금, 멋있는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얼굴의 윗부분을

가면으로 가린 채,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뒤를 도는 거. 평소랑 조금


다른 듯한 느낌이…….
해가 지고 있는데도 날이 더운지, 얼굴이 뜨거웠다. 아무래도 차가운 물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씻어야 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면 하인들에게 차가운 주스와 얼린 과일
따위를 내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러나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데 얼굴에 오른 열이 번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 전체가 괜히 뜨거웠다.
‘오늘 밤엔 안아도 되겠나?’

묻던 얼굴이, 음성이 자꾸만 떠올라서인지도 모른다. 씨발, 그 난리를 친


이후라지만 나도 섹스를 안 한 지가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되는 거라서…….
가면을 쓰고 있던 평소와 다른 이미지. 귓가에 울린 낮은 음성 따위가 자꾸
상념 속에 난입하여.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저녁에 더위가 가시질 않았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3.

외전 피서 5.
하인들도 조금 이상하게 행동하는 밤이었다.
꽤 오랜 시간 거대한 욕탕을 가득 채운 시원한 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며
씻고 난 이후에 나에게 마사지를 권했던 것이다. 굳이 그런 걸 받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성 밖에 나가 있다 돌아왔으니
피로가 쌓였을 것이라며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했다.
완고하게 거부할 정도로 싫지는 않아서, 욕탕에 딸린 마사지 베드에 누워
지압을 받았다. 근육을 문지르고 누르는 손길이 나쁘지는 않았다. 머리와
목, 등을 지압하는 손길이 제법 시원했다.
그리고 난 뒤에는 다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고, 방으로 돌아와 차갑게
얼린 과일과 과실주를 먹고 마셨다. 오늘따라 하인들의 시중이 세심했다.
어쩐지 그들의 기분이 꽤나 좋아 보였다. 마치 내가 돌아온 것이 대단히
기쁘다는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머쓱했지만 나는 모르는 체 시중을 받았다. 그래도 국왕의 곁에
머물며 시중을 받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는 있었다. 완벽하게 귀족
행세를 할 수는 없었지만, 식사 예절과 함께 익숙해진 게 있다면 바로
하인들의 시중이었다. 인간은 자신을 편리하게 하는 것에는 빠르게
적응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시원한 방에 반나체의 꼴로 널브러져 있었더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전날 과음을 하고 늦게 일어났던 탓에 깨어 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스르륵 잠에 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잤을까. 어딘가에서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향기가 풍겼다.
여름날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상쾌한 향기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속을
채웠다. 부드럽지만 건조하고 시원하면서도 차갑지는 않은 은은한 향기. 그
향기를 담은 공기가 흐를 때마다 새의 속 깃털처럼 부드러운 것이 살갗을
스치는 것만 같았다.
“으음…….”

나는 나도 모르게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잠이


살포시 깨었다. 허벅지가 간지러웠다. 느릿하게 눈을 떠올린 나는 부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야 속에
몇 번쯤 눈꺼풀을 깜빡였다.
“아……?”

분명히 잠에서 깬 것 같은데, 꿈을 꾸는가 싶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사내의 모습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탓이었다. 나는
멍하니 사내의 얼굴 위쪽을 가린 금빛의 가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를 따라 흘러내린 은빛의 머리카락도. 가면 아래 드러난 하얀
턱과 붉은 입술도. 익숙했으나 몹시 낯설었다.
“일릭.”

붉은 입술이 속삭인 순간.


그리고 그 입술이 내 입술에 제멋대로 입을 맞춘 순간, 그 감촉이 나를
현실로 이끌어냈다. 잠이 확 깨면서 나는 도리어 더 놀라 버렸다. 가면을 쓴
은발의 남자는 내가 아는 그 남자, 티마예브의 국왕이었다.
“신이 강림하였거늘, 제물로 바쳐진 자가 꿈을 헤매고 있을 줄이야.”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평소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은 국왕이었다.


미친놈이 정말 미쳐 버렸나. 화장을 한 듯이 새빨간 입술을 보며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눈을 비벼 이게
현실인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파격적인 복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고대의 인간들이 입었을 법한 튜닉이었다. 나는 몇 번쯤 폐허가 된 신전의
잔해에 조각되어 있던 그 복식을 본 적이 있었다.
소매가 없이 어깨의 매듭만으로 앞판과 뒤판을 연결하는 형태의 옷이었다.
아래까지 길게 흘러내리는 것을 허리만 조여 묶는 그 의상은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치마의 형태로 입는 것으로 그려졌다.
다만 지금 그가 입고 있는 것은 그 소재가… 그 소재가 너무 얇았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게 직조된 실크는 그의 살갗을 반은 드러내고 있었다. 새하얀
그의 몸이 하얀 실크 아래로 비쳐 보였다.
“전… 전하……?”

게다가 기장은 왜 이렇게 짧단 말인가! 짧아도 너무 짧아서 국왕의


탄탄하고도 하얀 허벅지가 절반이나 보였다. 속이 다 비쳐 보이는 천
때문에 그 사이가 보일 것만 같았다. 어쩐지 그 짧은 치마 아래 속옷을 입지
않은 것 같아 내 심장이 다 덜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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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라니. 나는 인간의 왕이 아닌 신이다.”


헛소리를 내뱉는 남자의 은빛 머리 위에는 고대의 신들이 썼다는 황금의


월계관이 씌워져 있었다. 신의 행색을 했으나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얇은
실크 튜닉은 너무 짧고 속이 다 비쳤다. 지나치게 외설적이면서 색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개소리를 내뱉는 것과는 달리, 일견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던 은빛의 머리카락이, 금빛의 화려한
가면으로 가려 온전히 내보이지 않은 얼굴이, 하늘하늘한 튜닉을 걸친
몸이. 그 모든 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은빛과
금빛이 사방으로 빛을 산란시켜, 신성한 광휘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잠이 덜 깨서 환상을 보는 건가 싶기까지 했다.
“그대에게 하사할 것이 있어 강림하였지.”

신, 아니 미친 국왕이 내 허벅지를 스윽 만졌다. 분명 잠옷으로 입는 얇은


바지를 입고 잤던 것 같은데 그제야 나는 내가 벗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벗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경악했다. 내 하반신에 국왕이 입은 것과 같은 재질의 얇은 실크 천이
감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왕이 입은 것과 같은 튜닉의 형태가 아니라,
노예가 입어야 할 법한 하반신만 가리는 형태였다.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릴
듯이 골반에 걸쳐진 천 위로 장골의 능선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헉…!”

그 안에는 물론 속옷이 없었다. 기장은 국왕이 입고 있는 것만큼이나


짧아서 그의 손이 허벅지를 매만지며 안으로 들어오자 허벅지 안쪽의
예민한 살까지 거칠 게 없었다. 천을 둘렀다 하나 벗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그대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신 놀음을 멈추지 않는 국왕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전의 장난감


따위가 아닌 휘황찬란한 보석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보석들이
알알이 박힌 넓은 벨트였다. 얇은 금을 체인으로 엮고 보석으로 장식한
벨트가 내 허리에 채워졌다. 그 뿐만 아니라 목과 쇄골 주변을 감싸는
형태의 목걸이도 함께였다. 국왕은 그것들을 내게 채웠고 나는 아직도 현실
구분을 하지 못해 그저 얼떨떨해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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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군.”
목걸이를 채운 국왕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장신구가 채워진 쇄골
언저리를 문질렀다. 그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허리로 내려갔다. 그의 손길에 나는 몸을 긴장시키며 숨을 잘게 내쉬었다.
국왕이 그런 내 허리 아래에 팔을 넣어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신의 성은에 제물인 노예는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색을 칠한 듯이 새빨간 입술이 야한 곡선을 그려 내며 웃는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하반신이 비벼졌다. 너무나 야릇한 감각이 척추를 찌르르
울렸다.
“이게… 무슨…….”

“가장무도회의 날이잖아?”

국왕이 제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그 입술이 너무나 붉어서. 앵두를


머금은 듯이 탐스럽고도 붉어서 너무 이상했다. 국왕의 입술은 이렇게 붉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꼭 꽃물을 들인 것만 같았다. 사내의 입술임에도
지나치게 야해서 보고 있기가 민망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나는 고대의 신, 그대는 신전에 바쳐진 산제물 노예. 어때, 마음에 드나?”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안겨 있는 내 몸을 느른하게 쓰다듬으며 그가


속삭였다. 신과 노예라니. 문득 그가 나를 위한 연극을 준비해 뒀다는
얘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가장무도회에 올릴 연극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국왕은, 이 짓을 하려고 미리 이런 의상이며 장신구 따위를
준비를 해 뒀다는 거다.
“카이야에 가는 게 싫다고 하니, 분위기라도 내 봤지.”

카이야 타령은 지치지도 않았다. 고대의 신전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어


시원하다고 했던가. 그곳을 언급한 순간부터 어쩌면 국왕의 대가리 속에는
이런 짓이 가득했나 보다.
“…흠.”

문득 국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이끌어 나 역시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국왕이…… 내 다리 사이에 앉았다. 난생 처음 겪는 구도라 나는 흠칫
놀랐다. 자신은 신이고 나는 제물로 바쳐진 노예라는 역할을 부여했으면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정작 그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쪽. 내 무릎에 입을 맞추며 국왕이 물었다. 무릎에서부터 전해 오는


간지러운 감촉에 나는 몸을 곧추세웠다. 이러다가 그를 발로 차 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국왕은 다시
내 무릎에 쪽, 쪽 입을 맞추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황금빛의 가면에 난 공동(
空洞) 사이로 호박색의 눈동자가 엿보였다.
“…화 난 거…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말이 없어.”

국왕은 내 발목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손길이 과하게 부드러웠다. 마치


새털로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간지럽게 구는
사내 탓일까. 내 목소리는 꼭 열에 끓는 것처럼 잠겨서 갈라졌다.
“…낯설어서요. 이런 건.”

“신을 눈앞에 두면 그럴 법도 하지.”

오만한 대꾸에 나는 그만 웃어 버렸다. 그다운 대답이면서도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그리고 이거 신성모독 아닌가? 고대의 신으로 분장했다지만
일국의 왕이 신 행세를 하며 노는 걸 교단에서 알게 된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 같은데. 게다가 사내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신이라니.
“무슨 신인가요. 색마들의 신입니까.”

나도 모르게 농담이 나와 버렸다. 농담이라기엔 너무 진심이라 내뱉어 놓고


나는 속으로 깜짝 놀라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국왕은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그의 요사스러울 정도로 붉은
입술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노예들의 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중요치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색을 입혀 지나치게 붉은 입술. 그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 그런데 입술이 너무 야했다. 저렇게 붉은
입술을 한 국왕의 얼굴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니 신전에 바쳐진 노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겠나.”

개소리. 그렇다면 노예 역할인 나는 노예의 신 역할인 너를 사랑하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척이라도
하란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역할 설정에 그저 기가 차기만 했던
순간.
“사얀이라는 이름의 신이지.”
으 으윽…?!”
“ ,

국왕, 아니 신. 무엇인지 모를 사내의 얼굴이 내 하반신을 가린 천을 밀어


올리며 다가와서는, 새빨간 입술이 늘어진 내 성기를 덥석 입에 물었다.
나는 당황하여 그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손으로 성기를 감싸 쥐고는 그 끝을 힘주어 빨아 당겼다. 황금색
가면 아래 붉은 입술, 그 안은 따뜻하고 축축했다.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내 다리 사이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사내의 혀는
몹시도 집요하고도 야했다. 말랑말랑하던 성기가 단단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신을 사칭한 남자는 거침없이 내 성기를 빨았다. 손으로 쥔
채, 핏줄이 불거진 기둥에 입을 맞추는 것을 저어하지 않았다. 붉은 물을
들인 입술 사이로 내 성기가 먹혀 들어갔다.
“으, 흐으, 읏.”

척추를 따라 내달리는 아찔한 감각에 나는 더운 숨을 내뱉으며 신음했다.


허벅지를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마저 자극적이었다. 그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문질러 올라와 고환을 문질렀을 때는 나도 모르게 허리가
흠칫 튀었다.
“후으, 전하…….”

은빛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쥐자, 그의 머리에서 월계관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게 머리채를 잡히고도 국왕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깊게, 늘 입으로 애무를 시킬 때면 그가 나에게 강요를 했던 것처럼
성기를 깊숙하게 빨아 삼켰다. 귀두가 그의 입술 사이에 먹히고, 기둥이
빨렸다. 마침내는 뿌리 끝까지 그의 입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치골에 그의
얼굴이 닿았다.
뜨거운 입안. 뜨거운 목구멍. 강렬하게 내 성기를 조이는 점막에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성기를 조여 빨며 국왕이 머리를 움직였다. 그의 입술과 치아가 기둥을
긁었다. 그마저도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순식간에 열이 오른 몸이
뜨거웠다. 귀두만을 입안에 남긴 국왕은 혀끝으로 난잡하게 귀두를 핥아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댔다. 또
강하게 빨아 삼켰다.
“아…!”

어째서 이렇게 잘하는 걸까. 강렬한 쾌감 속에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머리가 위아래로 오르내릴 때마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들썩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 머리카락의 감촉이 황홀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서서히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뜨겁고 축축한 입안에서 내 성기는
난잡하게 핥아지고 빨렸다. 힘 있게 나를 조이는 사내의 입술에 벌어진
허벅지가 이따금씩 떨렸다. 그의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성기가
조여지면 척추를 타고 쾌감이 치솟아 올랐다.
“아, 이제, 읏, 으, 흐으…….”

눈앞이 하얗게 타들어 간다. 나로서도 꽤나 오랜만인 성적인 자극이었다.


몸이 예민했고 사정하고 싶은 욕구가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몸 안에
쌓이고 쌓여 부글부글 끓던 것이 일시에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몸 안쪽이 근지럽기도 했다. 넘치도록 충분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부족한 기이한 상태였다. 나는 흠칫흠칫 몸을 떨며 사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잔뜩 쥐어 당겼다.
“큭……!”

그러나 막 사정을 하려 했을 때, 귀신같이 사내가 내 성기를 뱉어 냈다.


가파르게 상승했던 쾌감이 아슬아슬하게 역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부족하고 아쉬워서, 나는 내 다리 사이에 자리한 남자의 얼굴을 원망을
담아 바라보았다. 끝까지 하고 싶었다. 그의 입안에 다시 성기를 처박고
사정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놀리듯이, 국왕은 내 성기를 손으로 말아 쥔 채 느릿하게
흔들었다. 기둥을 따라 혀를 내어 간지럽게 핥고, 귀두 끝에는 쪽,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사정할 뻔했지만 또 그러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나는
애가 타서 나도 모르게 사내의 머리카락을 꽈악 그러쥐었다.
그러자 사내가. 내 다리 사이에 앉아 내 성기를 쥐고 그 끝에 입을 맞추던
국왕의 새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면 아래
그의 눈꼬리가 이지러지는 것이 눈에 선했다.
“쌀 때까지 빨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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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면… 박아 줄까?”

한계까지 발기해서 벌떡거리는 성기를 하얀 뺨에 문지르는 얼굴에 나는


넋을 잃었다. 성기에 단단한 가면이 닿기도 했다. 이질적인 감촉에 내가
몸을 떨자, 국왕은 부러 가면에 성기 끝을 문질러 댔다.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가면이 흔들렸다.
달칵, 툭. 가면이 떨어져 내렸다.
“아…….”

그 순간 왜 내 입에서는 탄식이 흘렀을까. 아니, 저 경외감마저 드는 얼굴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흐트러진 긴 은빛의 머리카락과 노랗고 붉은 눈동자. 높은 콧날과 날렵한
턱 선이 아름다운 줄은 알고 있었다. 나이를 잊은 얼굴은 제 누이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해 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평소에도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아슬아슬한 옷을 걸치고 내 다리 사이에 앉은 그는.
반짝이는 진주 가루를 바른 눈매는. 또 새빨갛게 물들인 입술은.
평소처럼 아름다웠음에도 또 달리 아름다웠다.
어째서인지 그가 내 취향을 묻던 순간이 떠올랐다. 금발보다 밝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노랗거나 붉은 눈동자. 아무 생각 없이 주워섬긴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이 사실은…….
“…사얀.”

어째서 그의 이름을 불렀는지 알 수가 없다.


사얀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의 신. 그에게 공물로 바쳐진 노예는… 얼마나
그를 사랑했겠는가. 아마도 나는 그 역할에 취해 버린 모양이었다. 신의
현신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인간을 앞에 두고 내가 원래 가졌던 취향은
의미를 잃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새빨간 입술. 그 색의 이름은 매혹이었다.
“사얀…….”

무의식에 각인된 아름다움 앞에 나는 헛된 저항을 멈추었다. 역할극에


코웃음을 치던 이성 역시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뜨거웠다. 머릿속이 절절 끓다 못해 가슴 속까지 죄 녹아 버리는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기분이었
다. 그래서 속에서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이름 붙일 수는 없었으나-
“사얀.”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 그의 팔이 잡혔다. 나는 힘주어 그


팔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 아름다운 얼굴이 드디어 사람 잡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신을 경배하는 종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내 위로 올라온 사내에게 입을 맞추었다. 비리고 야릇한 맛이 나는 그의
붉디붉은 입술에 내 멋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방 안에 은은히 풍기던
향기가 훅 비강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은 사얀의 체취였다. 햇살에 잘 말린 리넨처럼
건조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운 향기였다. 여름의 밤바람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시원한 향취였다. 꼭 먼 곳의 숲속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기도 했다.
나를 뒤로 넘어뜨리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으며, 나는 그 붉은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말캉한 살덩이를 잔뜩 물고 빨아 당겼다. 뜨거운 점막을
고루 핥고 그의 혀 아래 내 혀를 굴렸다. 넘어오는 타액을 삼키며 그의 혀를
내 입안으로 끌어내어 내 혀에 얽었다. 뜨겁고 격렬한 호흡이 그 난잡한
움직임에 뒤섞였다.
그의 얼굴을 감싸 쥔 채, 나는 쉴 새 없이 그에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비틀어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짙게
혀를 섞고 입술을 범했다.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조여 안았다.
“일릭…….”

내 이름을 속삭이며 국왕, 사얀이 내 벌어진 다리 사이에 제 몸을 비볐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몸이 비벼졌다. 벌어진 내 사타구니에 한껏 발기한
그의 성기가 닿았다. 금방이라도 들어오고 싶다는 듯 회음부를 찔러 대는
살덩이에 아래가 온통 움찔움찔거렸다. 그 순간 나는 분명 그가 나를 안아
미칠 듯한 열락을 선사하기를 바랐다.
“일릭… 일릭, 일릭.”

내 이름을 애타게 속삭이는 사얀에게 재차 입을 맞추며 나도 몇 번쯤, 그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이름을 불
렀다. 열기로 흐려지는 호박색 눈동자에 가슴 안쪽이 뜨겁게
차올랐다.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자조적인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 밤이 지나 꿈에서 깨어나면 내 행동을 후회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모든 것은 한여름 밤이 그려낸 환상. 더위를 잊기 위한 인간들이 벌이는
축제 속 연극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름다운 제 외모 탓에 성 안에만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남자와 여름을 이겨 내기 위한 짧은 피서라고 해도
좋았다.
그 밤, 나는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잊었다. 언젠가 먼
곳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관심조차 줄 수가 없었다. 그럴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뜨거운 어느 여름 밤. 축제의 마지막 밤의 일이었다.
- 외전 피서 마침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4.

후일담 1.
필리아. 그녀가 자신의 약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녀의 나이 열네 살의
일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소년의 약혼녀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이미 3년 전에 진행되었던
약혼이라니. 저를 몹시도 예뻐하는 아버지가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의했다는 것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아버지, 길리어드 공작은 그저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로 그녀와 오라비를 수도로 데려왔던 것이다. 수도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공작은 그녀에게 약혼에 관한 것을 알려 주었다.
3년 전에 구두로 진행되었던 약혼이 있었고, 그 약혼으로 인해 길리어드는

당시 미로스의 대공이었던 현 국왕의 편에 서서 북부의 공작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인즉, 제 약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필리아가 감히 약혼을 깰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티마예브의 유일한 왕자, 레이사의 약혼녀. 저도 모르던 제
신분을 듣자 필리아는 마치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갑작스러운 약혼 이야기에 필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결혼이나 연애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부분이었다. 왕자님과 맺어지는
아가씨의 이야기를 다룬 연애소설이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을 때도, 아무런 흥미를 갖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뭐? 그냥 결혼도 아니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왕자와의 결혼?
약혼은 이미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어 있었다고?
그렇다면 북부는?
잠시 수도에 유학을 온다고 생각했지 북부를 영원히 떠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다시는 북부의 초원에서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달리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왕자와의 결혼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제 어깨에 북부의 미래가, 적어도 가문의 안위가 걸려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수도에 온
지 며칠 뒤.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길리어드 공작과
함께 티마예브의 왕성에 들어가 국왕을 알현할 수밖엔 없었다.
북부의 유서 깊은 성들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였건만, 그 어느
성도 비교조차 되지 않을 거대한 왕성, 그곳에서도 가장 웅장하면서 화려한
알현실에서 필리아는 티마예브의 국왕을 처음 보았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요정처럼 아름다운 남자. 신비로운 은빛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는 대단한 미남이라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린
그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북부에도 미남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수도에는 엄청난 미남이 있었다. 심지어 그 미남이 티마예브의
국왕이었다.
이 나라는 얼굴로 왕을 뽑나? 그것이 국왕에 대한 필리아의 첫 감상이었다.
‘흔치 않은 머리색이로군.’
‘제 처가 에일레스 사람입니다, 전하.’
‘에일레스인은 검푸른 머리카락이 많다고 했지.’

‘예. 대표적으로 교황 성하 역시 에일레스 출생이십니다. 물론 제 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아름다운 국왕의 얼굴이 배부른 포식자처럼 만족스러워


보인 것은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국왕의 명령으로 그녀는 알현실을 떠나
왕자와 만나야 했던 것이다.
국왕을 꼭 빼닮아 은빛의 머리카락과 호박색의 눈동자를 지닌 왕자는
필리아보다 한 살 연하였다. 성장이 더딘 것인지 아직 키가 저보다 작았고
뺨은 어린아이처럼 붉었다. 꽤나 마음에 드는 외모에, 그녀를 향한 태도는
수줍으면서도 다정했고 또한 정중했다.
귀엽고 착한 남자. 왕자를 보며 필리아는 생각보다 제 결혼이 나쁜 일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꾸만 마음속에 드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었다.
국왕은 그녀의 무엇을 보고 제 아들의 짝으로 간택한 것인가. 제 자매들
중에는 더 아름다운 이도, 더 똑똑한 이도 많은데 왜 하필 막내인 자신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왕자의 약
혼녀가 되어야 했을까 .

필리아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수도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젊은 국왕의
즉위식과 함께 거행된 결혼식은 그녀의 생각보다 조금 더 정신없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단장과 수없이 많은 하객들의 인사, 갖은
행사들이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만인의 축하와 환호 속에 필리아는 피곤한 와중에도 행복감을 느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진행된 약혼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 하나 호화롭지 않은 게
없던 결혼식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였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사절단을 보내왔다. 사절단
중에는 성도에서 온 일행도 있었다. 그 일행을 이끄는 것은 교황
본인이었다.
10년 전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성도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던 교황이 직접

티마예브까지 방문해 레이사와 필리아의 성혼에 축복을 내렸다. 이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 교황의 축복은 결혼의 당사자만 아니라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커다란 감흥을 남겼다. 이 결혼을 축제처럼 즐기고 있던 백성들
역시 감동하여 필리아를 축복했다.
정신없이 바쁘고, 놀라우면서도 힘든 그런 날이었다. 그런 만큼 대륙을
통틀어 가장 화려하면서도 성스러운 결혼식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물론 그 결혼식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드디어 레이사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국왕인 레이사와 필리아는 열세 살, 열네 살에 처음 만나서 7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래도 부부가 되는 것은 어색한 일이리라 생각했는데, 밤을
함께 보내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레이사는 다정했다.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 밤새 펑펑 울어 부은 눈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이후로 늘. 레이사는 필리아에게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날은 레이사와 필리아의 결혼식이자 레이사가 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티마예브의 새로운 국왕이 된 날이었다. 왕자의 약혼녀였던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녀는 하
루아침에 왕자비가 아닌 왕비가 되었다.
일주일 내내 진행되었던 즉위식과 결혼식의 모든 행사가 끝이 난 뒤, 수도에
방문했던 길리어드 공작은 북부로 돌아가기 전, 그녀를 방문했다.
성인이 되어 결혼식을 올린 막내딸을 보며 길리어드 공작은 주책맞게도
눈시울을 붉혔다. 시녀들도 모두 훌쩍거렸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것은 필리아가 유일했다.
공작은 제 딸에게 마지막 충고를 하나 건넸다.
‘왕비 전하. 전하의 남편은 일국의 국왕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국왕

전하의 것인즉, 언젠가는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고 곁에 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부디 전하께서 현명히 대처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것이 이제 막 결혼한 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라면 참 너무하다고
필리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필리아는 길리어드가 그렇게 말할 수밖엔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티마예브의 역사를 보면, 혈연이 아닌 왕비가 이름뿐인 비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으니 말이다.
티마예브의 왕족이 혈족을 정부로 두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왕가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왕비가 왕의 정부를 질투한다
해도 왕은 늘 피가 이어진 정부의 편을 들었음을 티마예브 왕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레이사가 피가 연결된 여자를 곁에
두어도 질투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인내하시면… 전하께서는 이 티마예브의 왕비로 남으실 겁니다.’

심지어 그 근친의 관계에서 태어난 근친아로 명맥을 이어 온 왕가였으니.


그러므로 인내하여 이름뿐인 왕비 자리라도 지키라는 말은, 딸을 막
시집보낸 아버지의 피를 토할 것 같은 충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애당초 약혼을 승낙하지
말았어야지. 이게 결국 가문의 발전을 위해 어린 여자애 하나를 희생시킨
것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며 필리아는 옛 기억 속의
아버지를 조소했다.
“왜 웃습니까.”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 상념


에서 빠져나오며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을 마주쳐
오는 호박색의 눈동자에 빙긋이 웃어 보였다.
“아버지의 충고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길리어드 공작의 충고? 하지만 그다지 유쾌해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는데요.”
아니, 그 충고를 생각하면 필리아는 유쾌해지곤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틀렸으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이곳에
보낸 그를 필리아는 기꺼이 비웃을 수 있었다.
“어떤 충고였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황후?”
필리아는 왕비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몇 년 전 교황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칭제한 티마예브 제국의 초대 황후였다.
어디 그것만이던가.
“폐하께서 정부를 두어도 질투하지 말라는 충고였어요.”

“……궁정의사를 보냅시다. 공작이 노망이 난 모양이에요.”

정색을 하며 읊조리는 소리에 필리아는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공작이


노망이 난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 티마예브 제국의 황제 레이사는 단 한 번도 정부
같은 건-
“어제 오시안의 공주와 있었던 건, 그러니까, 외교적인 문제가 조금

있어서였을 뿐이었습니다. 절대로 나는. 아시지 않습니까, 황후.”


“호오, 어제 오시안의 마리안느 공주와 함께 계셨나요?”

“잠깐. 차 한 잔 식을 시간보다 짧게, 아주 잠깐. 접견실에서 만났습니다.

보좌관도 동석했습니다.”
“……흠.”

“아니, 황후. 필리아.”

티마예브의 현 국왕, 아니 황제는 필리아보다는 한 살이 연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나치게 귀엽다. 필리아는 전혀 오해 같은 거 하지
않았는데, 눈치를 보며 아니라고 열심히 자기변호를 하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귀엽고 다정할 수 있을까. 열네 살에 처음으로
만난 열세 살의 레이사 역시 그러했다. 순수하고 다정한 청년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리고 그
다정함과 헌신적인 애정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두 아이가 태어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과거 왕비의 자식들과는 달리, 레이사의 후계자는 그녀의 아이가 될
것이었다. 레이사가 그 어떤 압박에도 저와 피가 섞인 이를 정부로 둘 리는
절대로 없었다. 사랑과 애정이 아니더라도 레이사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티마예브의 피에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이가 아무도 없는데, 레이사와
관계를 가진 티마예브의 여자가 푸른 머리카락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레이사는 은빛의 가발 아래 제 푸른 머리카락을 숨기고
있었기에, 그 후계자를 낳을 때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필리아가 간택된 이유였다. 길리어드 공작은 과거 미로스의
대공이 길리어드를 회유하기 위해 결혼을 약속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길리어드 공작의 아내가 에일레스인이고 그 막내딸인
필리아가 어머니를 닮아 푸른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기에, 대공, 현재의
국왕에게 선택 받은 것이다. 길리어드가 에도스를 대신하여 북부의
지배자가 된 것도 모두 우연히 딸아이 머리카락이 푸른색이기 때문이었다.
필리아는 결혼식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이사가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여 주며 제 비밀을 알려 준 순간부터. 그녀는 어렵지 않게 제
시아버지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을 들은 순간 필리아는 아마도 기도를 했던 것 같다. 가득
피어오르는 안도감과 기쁨으로 부푼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신께
감사드렸다. 남녀의 사랑과 애정에 대해 관심이라곤 전혀 없던 그녀가 제
머리카락 색깔 덕분에 레이사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화나지 않았어요.”

“정말이지요?”

“네. 제가 어떻게 폐하께 화를 내겠어요.”

“……화나지 않았다면 다행인데…… 내 말을 믿어 주면 좋겠습니다.”

레이사는 필리아에게 속삭이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대낮에 응접실에서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지니, 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여 허리를 곧추세웠다. 레이사는 그런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내게는 황후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오시안의 마리안느 공주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탓에 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제 한창때인 공주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필리아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데, 레이사는 혹시라도
그녀가 신경을 쓸까 봐 걱정했다. 그 쓸데없는 배려심에 필리아는 그만
웃어 버렸다.
“저는 아이도 둘을 낳았고, 나이도 공주보다 다섯 살이나 더 많아요. 그 나이

때 아가씨들이 예쁜 건 당연한 걸요.”


“그래도 황후가 예쁘다니까.”

억지를 부리며 자꾸 뺨에 입을 맞춘다. 그것만 아니라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는 것이다. 오늘따라 머리장식을 수수하게 하고
왔기에 망정이지, 연회 때 하고 가는 것처럼 화려하게 장신구를 달았다간
머리가 엉망이 되었을 터였다.
그와 함께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필리아는 이런 스킨십에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북부의 귀족 가문에서 나고 자란 그녀였기에, 처음에
는 그저 문화가 조금 다른 건 줄 알았다.
북부에서는 아무리 부부간이라 해도 대낮에 사용인들도 드나드는 곳에서
이런 스스럼없는 스킨십을 하지는 않았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거면
몰라도 뺨에 입을 맞춘다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아주 사이좋은 부부가
침실에서나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맨 처음 레이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는 어찌나
부끄럽던지. 어쨌든 이것이 수도의 문화라면 받아들여야지 했는데, 얼마
뒤에 알게 되었다. 수도의 귀족들도 절대 공개적으로는 스킨십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필리아는 레이사가 열 살 무렵까지 귀족 사회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뭔가 잘못 배운 게 아닐까. 그것을 지적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그가 공공연히 자신을 만질 때의 기분이 싫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던 게 지금에 이르렀다.
필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오늘은 확실하게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폐하. 이렇게 대낮에 제 머리를 만지시는 것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 오늘은 보니까 머리 장식이 헝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조심히


“ .

만졌습니다. 머리 모양은 괜찮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지금.
레이사는 분명 총명한 사내였다. 다정함은 필리아 한정일 뿐, 그에게는
냉철하고 잔혹한 면도 분명 있었다. 덕분에 그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평가를 듣는 티마예브의 전 국왕의 뒤를 완벽하게 이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누구보다 정세를 빠르게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잔인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가끔 조금… 약간…… 이상한 쪽에서 눈치가 없고 맹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대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이성의 몸을
만지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는 이야기를 아주 조금 돌려서 말했을 뿐인데,
머리 망가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헛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얘기를 꺼냈다가 막힌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상대로 네가 예의 없고 부끄러운 짓을 한 거라고 직접적으로
말을 하기도 그렇고……. 그렇게 말을 했다가 레이사가 더 이상 머리를
쓰다듬지 않게 된다면 아쉬울 것 같기도 하고.
결국 필리아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그를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애매한
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 미소에 쪽, 레이사가 다시 한번 필리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어릴 때 본 게 너무 인상 깊어서, 자꾸 머리를 만지게 되나 봅니다.”

“폐하께서 어릴 때요?”
예 세리포브와 미로스의 전쟁이 끝날 무렵, 상황제 폐하를 따라 시르반
“ .

요새에 갔을 때 말입니다.”
필리아는 어느 시기를 이야기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이 티마예브가
미로스의 적이었던 시기였다. 길리어드로서는 이때 줄을 잘 서서 지금의
지위를 확보한 만큼, 북부에서도 꽤나 중요한 역사로 다뤄지는 부분이었다.
“그때… 상황제께서 연인에게 다리를 베도록 하시고,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이렇게…….”
“어머, 상황제께서요?”

“예. 저는 그 분이 어렵고 무섭기만 해서 그렇게 다정하게 누군가를 만질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덤덤하게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필리아는 레이사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말인즉 상황제가 단 한 번도 레이사에게 다정한 적이
없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소중히 아끼고 어루만져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필리아의 얼굴이 문득 발갛게 달아올랐다.
종종 침실에서 레이사가 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던 것을 기억해내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소중히. 아끼고
어루만져야.
레이사의 고백에 필리아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예쁘다, 아름답다라
는 말보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전해 오는 고백이 주는 감동이 더
컸다.
역시, 아버지가 틀렸다. 설령 레이사가 가진 비밀이 아니었다 해도
레이사는 황후가 아닌 정부를 만들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 사내가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 사람만을, 필리아 그녀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남자였다.
어쩌면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티마예브 왕가의 핏줄에 새겨져
있는지도 몰라. 필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폐하. 상황제께서 들라 하십니다.”

시종장의 알림에 레이사의 얼굴에서도, 필리아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들어가십시다.”

상황제. 티마예브가 아직 왕국이었을 시절, 젊은 나이였음에도 레이사에게


왕위를 양위하여 사실상 황제였던 적은 없는 자. 레이사가 즉위를 하고
칭제를 함으로써, 상왕이 아닌 상황제가 된.
사얀이 별궁의 가장 깊은 방에서 황제와 황후의 문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5.

후일담 2.
거대한 침대 위에 은빛의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허리 언저리에 오게 된 시점부터 더 기르지는 않았지만, 사내의
머리카락치고는 너무도 긴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나 그 긴 머리카락조차
어울릴 정도로 상황제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 외모는 쉬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어서 그 아름다움에 신비감마저 더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활기는
사그라졌지만 전보다 한층 깊어진 관능미가 그의 권태에 덧칠해져, 사내는
그저 고혹적일 따름이었다.
필리아는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바뀌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는 여전히 상황제 사얀이리라고 말이다. 애석하지만
그녀의 남편 레이사도 상황제의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언을 받아 적으라.”
그것이 무려 침실에서 누운 채 황제와 황후의 문후를 받는 상황제의
첫마디였다.
“…예, 전하.”

레이사가 답하자, 상황제의 하인이 조용히 양피지와 깃펜을 그의 앞에


대령했다. 준비를 마치자, 상황제가 입을 열었다.
“하나. 티무르 상단은 일릭에게 상속한다.”

티무르 상단. 대공이 젊은 시절부터 키워 온 그 상단이 보유한 막대한


재화를 생각하면, 그것을 레이사가 아닌 다른 자에게 상속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단이 연결한 교역로를 통해 모아 오는 정보만
생각해도, 상단은 황실의 것이어야 했다.
“단, 운영은 베슬란과 상의하여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둘. 티마예브 황실 보석 중 다음 열다섯 개를 상속한다.”

셋. 미로스의 식민지 중 카다티아 섬을 일릭의 관할로 지정한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넷. 티마
예브 황실 보물 중 다음 열 가지를 상속한다.
다섯. 티마예브 황실의 보검을 일릭에게 상속한다.
이 외에도 수 없이 긴 목록이 ‘일릭에게 상속한다’로 끝맺어졌다. 일릭의
사후 황실에 반환한다는 조항조차 없는 영구적인 상속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하사할 것들을 정리해 온 모양인지 목록을 읊조리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릭이 살 곳은… 그래, 헤레스 성이 좋겠지. 티마예브 남부의 헤레스 성을

일릭의 사유지로 상속한다.”


헤레스 성까지……. 듣고 있던 레이사와 필리아는 이 대목에서는 놀라서
잠시 굳어졌다. 티마예브 제국을 지키는 관문 중의 하나이자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겸사겸사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여 황족의 휴가지로
사용하는 남쪽의 행궁을 사유지로 하사하겠다니.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은가.
“물론 그가 다른 곳을 원한다면, 그곳을 대신 상속한다.”

대신 상속한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지금의 기세로는 ‘추가적으로’라는 말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으므로.
“마지막으로 황실 기사단 중 미로스 정예 기사단으로 하여금 일릭을 지키게

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되며, 짐으로부터 상속 받은


모든 것은 오롯이 일릭 개인에게 귀속된다.”
미로스 정예 기사단까지. 레이사는 그 대목에서 다시 한번 놀랐지만 받아
적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유언장을 받아 적는 것이 비록 황제의 일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상황제의 방에서 그 유언을 받아 적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했다. 이 위험한 내용을 바깥으로 퍼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짐의 인장으로 봉하라. 그것이 짐의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유언이다.”

드디어 끝이 난 건가. 레이사는 오랫동안 펜을 쥐고 있어 뻐근해진 손을


움직여 유언장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제 상황제가 미로스의 대공
시절부터 사용하던 인장을 사용해 밀랍으로 봉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이번 유언은 꽤나 길어 보이는군요.”

그러나 황동 수저에 담긴 밀랍이 촛불 위에서 채 녹기도 전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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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내가 죽으면 일릭을 순장해 다오 아니었습니까.”


흑갈색 머리카락에, 어두운 빛깔의 눈동자를 지닌 남자.
그가 바로 방금 전 상황제의 유언장에 의해 막대한 부를 상속 받은
일릭이었다.
“…순장?”
예 저를 같이 묻어 달라는 말 아닙니까.”
“ .

“……그대를 보니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겠군.”

무표정해 그저 권태만이 담겨 있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상황제는 제 자식과 며느리 앞에서도 방만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로 다가온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내, 일릭이 허리를 숙여
준다.
거기까지 보았을 때, 레이사는 필리아를 데리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뭔가 쪽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고개도 절대로 돌리지 않았다.
레이사는 필리아의 손을 덥석 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거의 달리다시피 해야 했다. 그래도 덕분에 빠르게 상황제의
침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이전의 그 상황제를 기다리며 머무르고 있었던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레이사는 필리아를 돌아보았다. 시아버지의 애정행각을 본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상 다시 없을 아름다운 남자가 곰처럼 커다란 중년의 시커먼 남자에게
애정을 쏟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면역이 없던
필리아로서는 더더욱. 시아버지인 상황제가 제 연인에게 죽고 못 산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몹시도 차갑고 무게감이 있었기에 저런
모습은 감히 직시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정말……. 엄청나네요.”

결국 그녀는 위와 같은 감상을 내놓을 수밖엔 없었다. 얼굴이 따끈해진


데다가, 부부로 산 지 오래라 웬만한 일에는 민망할 것 없는 사이에 모처럼
어색한 기류가 흘러 아무 말이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런데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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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릭 경이 헤레스 성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하면, 그곳을 상속한다지


않으십니까.”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럼 일릭 경이 황성에서 살겠다고 하면 우리가 비워 줘야 하는 걸까요?”

너무나도 진지한 질문.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 너무나 황당해서 필리아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하게 물어 놓고선 저도 황당해서 레이사 역시 웃어 버렸다.
“그러니까 굳이 황후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임종도

아닌데.”
“하지만 상황제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후 매일 아침마다 폐하를 침궁으로
오라 하시니, 무슨 일인지 저도 궁금했는걸요.”
레이사는 궁금증 많은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는 필리아를 보다가 그녀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필리아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며 몇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있자니 상황제가 왜 자신에게 양위를 하고 별궁에 처박혔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하아, 어전회의, 오늘따라 가기가 싫네요.”

평소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했던 탓에 벌써 기운이 좀 빠진 모양이다.


어리광을 부리기로 작정한 레이사의 입에서 힘들다는 투정이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참 일하기가 싫었다. 그냥 황후랑 산책도 하고 오수도 즐기고
간식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황후를 황후궁까지 배웅하고, 회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저야 좋지만. 먼저 그 유언장을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레이사는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챙겨서 나왔던 유언장을 상황제의


시종에게 건넸다. 미로스의 별궁에서부터 그를 따라와 지금도 상황제의
침궁을 지키는 시종은 공손히 그 유언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벽난로 속으로 휙 던져 버렸다.
상황제의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유언장이 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광경을 처음 보는 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언장의 내용이
허무맹랑하기는 해도, 그것을 잘 간직해 두었다가 상황제에게 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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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이 받아쓰기를 한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그러나 레이사는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얼굴에서
걱정을 지우지 못하는 필리아의 뺨에 입을 맞추곤 작게 웃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유언장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아…….”

상황제는 이미 유언장을 써 두었고 레이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이행하기로 맹세했다.
그러니 이제와 상황제가 자신을 불러다 놓고 쓰라 하는 유언장은 굳이
효력이 없었다. 처음에는 물론 당황했지만 새로운 유언장을 처분할 방도를
알려 준 것은 일릭이었다. ‘그냥 태워 버리세요.’ 그 한마디조차 참으로
무덤덤하게 내뱉는 사내였다.
“이만 갑시다, 황후.”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사가 내민 팔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러자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마주 웃는 레이사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을
애정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비록 상황제 사얀이 일방적으로 정해 준
짝이었지만 운명 같은 반려였다. 이렇게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것을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때때로 황제를 침궁까지 불러 유언장을 받아쓰게 만드는 짓궂은 행동을
하곤 했지만, 여전히 황제 레이사보다 강렬한 존재감으로 제국에 군림하는
남자. 필리아를 레이사의 짝으로 정하고 레이사와 필리아가 사랑에 빠진
것은 모두 저 상황제 사얀의 통찰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이 공교로울 정도로 딱 맞아떨어져,
필리아는 제 생각을 감히 허황되다고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조금은
궁금해진다.
과연 상황제가 미리 작성해 두었다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유언장의
내용이 대체 무엇인지.
그러나 필리아는 굳이 그것을 남편에게 묻지 않았다. 어쩐지 남편인 황제가
대답하지 못하고 곤란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릭. 상황제가 유일하게
곁에 두는 친위대인 그 사내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해 줄 수 없을 것이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래서 그
녀는 궁금증을 의식의 저 먼 곳으로 치워 버렸다 그 대신 .

레이사의 팔을 끌어안았다. 레이사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도록.


그녀의 세 아이가 가진 것과 같은 호박색 눈동자에 자신이 오롯이 담기는
것을 마주보며, 필리아는 애정을 담아 미소 지었다.
***

아, 실수를 해 버렸다.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은 순간 일릭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방금까지 이곳에는 황제와 황후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대 위의
남자가 손을 뻗는 순간, 그들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상황제에게
다가가 버렸던 것이다. 다가오라 손을 뻗은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몸이 저절로 움직여 버려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함께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이 지경으로 길들여진 건
당연하다고밖엔 할 수 없을지도.
마음대로 제 입술을 핥고 빨아 당기는 혀와 입술을 느끼며 일릭은 멍하니
생각했다. 말캉한 입술이 입술을 감물고 혀가 제 혀에 비벼질 때마다
등줄기를 따라 오싹하게 소름이 돋아나서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입맞춤이 한두 번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번번이 소름끼칠 수가
있는지. 일릭은 딱딱하게 반응하면서도 흠칫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딱딱한 반응이 상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입을 맞춰 주는 일이 없다, 이 남자는. 지난 세월 동안 일릭이 황홀한
입맞춤을 선사해 줬던 게 몇 번이나 있었나를 헤아려 보던 사얀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일릭을 놓아주었다. 그의 뒷목을 붙잡아 당기고 있던 손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아픈 사람에게 너무한걸.”

저게 지금 사람이 허리를 펴지 못하도록 뒷목을 잡아당기며 입을 맞추던


남자가 할 소리인가. 일릭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도 상황제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게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내 둘이 연인처럼 쪽쪽 입을 맞추다니, 너무 징그럽지
않은가. 그런 걸 바라는 상황제가 너무 양심이 없다고 생각하며 일릭은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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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자꾸 황제 폐하를 불러서 귀찮게 하는 겁니까. 폐하께서 일찍이


양위를 한 바람에 고생중이라는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자꾸라니. 사람을 상습범 취급하는군.”

“요즘 들어서는 거의 매일같이 그러지 않으십니까. 상황제라고 맞춰 주는


황제 폐하가 너무 착해서 큰일입니다.”
일릭은 늘 제 태도를 조심하고자 했다. 그러나 10년이 넘는 세월에는
장사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인물이 기가 막힌 짓을 하도 많이 하여, 말이
툭툭 튀어나가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까지 하지 못하고 살았다면 아마 화병으로 죽어도 벌써 한참 전에 죽었을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은
아름다운 사내를 보고 있노라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직 죽을 나이도
아닌데 상황제가 된 자가 아침마다 황제를 불러들여서 유언장을 쓰라는 둥
유언을 남기겠다는 둥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질 않나. 그런데 지금은
또 그런 적이 없다는 뻔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며칠 정도는 그가 정말로 아팠다는 것을 일릭은 알고 있었다.

어쩐지 옛날부터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더라니, 상황제가 몸은 탄탄해도


꽤나 연약한지도 모른다.
일릭은 분명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상황제를 조금은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살을 비비며 살아온 세월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까 그가 손을
뻗었을 때, 레이사 부부의 존재를 잊고 저도 모르게 몸을 숙여 주고야
말았다.
다만 그렇다고 계속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치기에는 뭐랄까, 조금 간지럽고
징그러워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다 나았으면 얼른 일어나세요.”

“…다 나았다니. 얼마 전에 사경을 헤매는 거 보지 않았나.’

사경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일릭은 표정관리에 실패해 비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제 저녁에 프리스카 백작 부인이 처방한 약이 효과를 보였잖습니까.

이제 머리도 안 아프잖아요.”
“…….”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딱 봐도


멀쩡해 보이는데 어디서 사람을 속이려 들어 일릭은 입을 꾹 다문 .

남자를 기민하게 살폈다. 며칠 침대에만 누워 있었으니 조금은 수척해


보이기도 했지만, 백작 부인의 약이 효험이 있었는지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상황제가 손을 뻗어 일릭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딜 갔었지?”

일릭은 상황제를 위해 그가 편히 만질 수 있도록 침대에 걸터앉아 허리를


조금 숙여 주었다. 아픈 척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래도 좀 안됐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제는 일릭의 뺨과 턱을 쓰다듬고 입술을 매만지며 대답을 종용했다.
“얼굴만 보면 순장해 달라고 하시니까, 피해 있었습니다.”

“…내가?”

얼씨구. 또 기억도 안 난다는 표정. 하지만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는


반문이기도 했다. 일릭은 오늘 새벽 프리스카 백작 부인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아침에 백작 부인이 찾아와서 그러더군요. 폐하께서 열이 올라서 그러신

거라고. 이제는 다 나았다고 말입니다.”


“아아…….”

기억도 안 난다는 투로 말을 한 게 불과 몇 초 전인데 이제는 뭘 또 납득이


간다는 듯이 끄덕이고 앉았나. 일릭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갑자기
상황제가 일릭의 뒷목에 손을 올렸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숫제
끌어안는 게 아닌가.
그의 체중에 일릭의 상체가 휘청이며 상황제에게 끌려갔다. 상황제의 몸에
몸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지척에서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에 일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황제는 일릭의 목에 매달리다시피 그를 끌어안은 채, 붉은 혀로 입술을
훑었다. 요염하기 짝이 없는 혀놀림에 일릭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설마. 얼마 전에 사경을 헤맸다느니, 아프다느니 지껄였던 주제에
설마 지금?
일릭의 추측이 맞다는 듯, 상황제가 웃었다.
“다 나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마치 흐드


러지게 피어난 꽃과 같은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니 안아도 되겠지?”

세월이 무색하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그가 일릭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일릭이 어떻게 되었냐 하면.
“크윽, 으, 윽!!”

시트를 찢어져라 그러쥔 채로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물론 벗은 몸으로, 다


리를 활짝 벌린 채.
사얀은 그 사이에서 일릭의 안으로 박아 넣고 있었다. 무엇을? 성기를.
정확히는 성기의 모양을 본떠 만든 나무 성기였다. 오일을 잔뜩 발라 나무
성기의 표면이 미끄럽게 젖었다지만, 내벽을 제대로 풀어 놓은 게 아니라
딱딱한 것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씨발, 그래서 싫다고 했는데…!
사얀이 그것을 꺼낸 순간 일릭은 싫다며 거부를 했지만, 사얀의 앞에서
일릭의 거부가 통한 적은 없었으니 헛된 저항이었다. 오늘은 묶인 것도
아니었지만 일릭은 차마 상황제를 발로 차버릴 수가 없었다. 권력과 신분의
격차가 여전히 일릭의 무의식을 붙잡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황제가 며칠
아프기도 했고…….
물론 사얀은 그런 일릭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병석에 누워 있어 며칠
섹스를 하지 못했던 탓에 사얀은 어느 때보다 조급했다. 손으로 공들여
풀어 주는 것조차 할 여력이 없어, 모조 성기를 꺼냈을 정도로.
물론 그걸 일릭의 안에 억지로 박아 넣을 때 일릭이 질색하는 모습이
몹시도 보기 좋았고 말이다.
“커헉……. 크, 으윽, 크흑…….”

2/3 정도 박아 넣었을 때, 그래서 일릭이 몸을 뒤틀었을 때, 사얀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제정신을 차리게 만든 약 때문인지, 혹은 꽤나 오랜 시간


일릭을 안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욕이 금방이라도 폭발해 미칠 것
같았다.
땀에 젖어 헐떡이는 일릭을 볼 때면 늘 심장이 위태롭게 박동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각했다.
게다가 일릭이 제대로 입맞춤을 해 주지 않은 게 오늘따라 괘씸하기도 하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말이다.

“ ……?!”

사얀이 일릭의 몸을 타고 오르자 일릭이 눈을 부릅떴다. 사얀은 그대로


일릭의 가슴 위쪽을 깔고 앉았다. 입고 있던 침의를 벗어 던진 뒤, 사얀은
발기하기 시작한 제 성기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누운 채로 제 코앞에 우뚝 선 성기를 바라보는 일릭의 갈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진동하는 게 사얀을 퍽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얀은 손을 뻗어 일릭의 뒤통수를 그러쥐었다. 허리를 살짝 띄우며
몸을 앞으로 밀어, 성기 끝을 일릭의 입술에 문질렀다. 경악한 와중에도
그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진다. 사얀은 그 말캉한 입술 사이로 단번에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6.

후일담 3.
“우웁…!”

뜨거운 입안은 질척하고 미끌미끌하게 젖어 있었다. 그 안에서 사얀의


성기는 더욱 단단하게 일어났다. 그럴수록 더 짙은 쾌감이 선득하게 사얀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하아…….”
더워진 숨을 내뱉으며 사얀은 일릭의 머리를 받친 채 허리를 움직였다.
마치 그의 엉덩이를 벌려 구멍 안으로 성기를 박아 넣듯이, 제 성기를
반사적으로 조이는 입술 안으로 재차 성기를 찔러 넣었다. 목구멍을 건드릴
때마다 일릭이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를
처박았다.
일릭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기가 막혔다. 이런 폭력적인 펠라치오에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목구멍이라는 곳은 결코
단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물론 단련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고 말이다.
설마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사내의 좆을 빨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을 애써
삼키며 일릭은 어떻게든 숨을 쉬어 내려 컥컥거렸다.
“하아, 일릭. 일릭.”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입안을 가득 채우고 목구멍까지 침범한 성기에


새빨갛게 울혈된 일릭의 얼굴을 사얀은 황홀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일릭의 눈가에 고인 액체가 사얀을 몹시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릭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얀은 일부러 일릭의
머리를 더욱 제 쪽으로 당기며 성기를 목구멍 깊숙이까지 처넣었다. 숨이
막혀 제 허벅지를 와락 부여잡는 그의 손아귀가 주는 아픔까지 사얀에게
쾌감으로 다가왔다.
사얀은 그대로 허리를 재차 움직여 마구잡이로 일릭의 입안 곳곳을 찔러
댔다. 때로는 일릭의 볼 한쪽이 불룩하게 부풀고, 때로는 성기가 곧바로
목구멍을 찔러 들어가기도 했다. 거칠게 제멋대로 성기를 처박았다 빼는
탓에 간간이 치아에 성기의 표피가 긁히는 것 또한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아, 이
대로 사정하고 싶다. 하복부를 뜨겁게 달구고 성기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절정에 전신을 꽈악 조이며 사얀은 그대로 일릭의
혓바닥 위에 제 성기를 몇 번 더 문질렀다. 깊게 박아 넣고 몇 번을 치대자
일릭의 몸부림이 더 심해져 간다.
“커헉!! 크흑, 흐아…!”

사얀이 성기를 빼내자,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일릭이 기침을 토해 내며


헐떡거렸다.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든 사얀의 성기만큼이나 일릭의
얼굴도 흠뻑 젖어 있었다. 눈물과 타액으로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런 얼굴이 코앞에 있는데 사얀이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잠깐, 큭, 크흑!”

일릭이 무어라 말을 했지만 사얀은 다시 일릭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아래에 여전히 박혀 있는 모조 성기를 단숨에
뽑아냈다. 일릭이 사얀의 성기를 빨며 몸부림치는 동안에도 용케 절반쯤
박혀 있던 모조 성기 덕분에, 그 흉흉한 것을 뽑아낸 뒤에도 입구는 빠끔히
벌어져 있었다. 오랜만의 정사였으니 더 안쪽까지 공들여 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아윽!!”

사얀은 일릭의 안으로 단숨에 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일릭의 몸이


들썩이며 허리가 휘어졌다. 갑작스러운 삽입의 충격에 일릭이 꺽꺽거리며
경련하고 있음에도 사얀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진정될 시간조차 줄
수가 없어, 허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퍽! 퍽! 퍽! 일릭의 샅에 사얀의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가죽 터지는
소리처럼 이어졌다. 덕분에 일릭은 매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는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안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들쑤시는 성기의 움직임이 일릭을 미칠 듯한
열락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역시나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으며, 항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쾌감이 그곳에 있었다.
“아아, 아!”

일릭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신음했다. 나무 성기가 박혀 있었음에도


여전히 제대로 풀려 있지 않았었건만. 사얀의 성기가 몇 번을 짓쳐 들어와
치대자, 내벽이 제멋대로 사얀의 성기를 조여 물며 질척하게 들러붙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시작했다.
성기가 내벽의 점막을 문지를 때마다 몸속이 경련하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찌릿한 쾌감이 피어올라 벌어진 허벅지가 파드득 떨릴
정도였다.
일릭은 스스로 이 쾌감에 익숙해지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이런
거친 섹스에서도 쾌감을 느낄 정도로 섹스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사얀이
성기를 박아 넣어 안을 짓누르며 짓쳐 들어올 때마다 눈앞에서 형형색색의
쾌감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히익!”

그리고 사얀이 고개를 기울여 일릭의 유두를 입술로 물었을 때, 삽입만으로


충분히 흥분해 있던 일릭의 성기 끝에서 흰 정액이 쏘아졌다.
일릭으로서도 오래간만의 사정이었다. 사얀이 자리보전을 하는 동안
바깥으로 나돌기도 하고, 성의 다른 곳에 은신(?)을 해 있었다지만 섹스를
할 일은 물론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시야가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내 새카맣게 꺼지고, 붉고 푸른
안화가 피어오르며 그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머릿속까지 뜨겁게 녹아내려
곤죽이 되어 간다. 마치 백치가 될 것만 같은 두려움마저 들 정도였다.
그대로 몸이 아래로 꺼지는 것만 같은 낙하감에 일릭은 절박할 정도로
거세게 시트를 그러쥐었다.
“큭, 아으, 흐아!”

여전히 일릭의 가슴은 민감하기 짝이 없었다. 사얀이 가슴을 움켜쥐자


그렇지 않아도 근육으로 커다랗게 부푼 가슴이 그의 손 안에 볼록하게
모인다. 그런 수치스러운 꼴을 만들어 놓고 사얀은 솟아오른 유두를
난잡하게 핥고 빨았다. 이따금씩 치아로 깨물 때면, 일릭은 전신을
후려치는 절정에 몸을 떨며 사정해야 했다.
“크윽, 으, 으윽!”

이를 악물어 절정감을 견디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였다. 일릭은 손을 뻗어


제 가슴을 희롱하고 있는 사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머리카락. 결이 몹시 고왔지만 일릭으로서는 그 감촉을
즐길 새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잡아당겼더니, 사얀이 드디어 가슴에서 입술을 떼었다.
가슴을 놓아준 사얀은 대신 제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일릭의 손에 깍지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끼어 잡았
다. 그리고 그의 머리 옆으로 양손을 내리누르며, 조금 더 빠르게
허릿짓을 이어 갔다.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아까처럼 격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릭의 내벽을
깊게 파고들며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었다. 또한 미끄러지듯이 들어오는
성기가 부드럽게 내벽을 짓누르고, 또 일릭이 느끼는 지점을 적당한 강도로
치대기도 했다.
“으응, 으, 아! 흐으.”

덕분에 일릭은 가슴을 괴롭혀질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가 버릴 것 같았다.


안을 자극하는 정도가 너무 적절해서 기가 막혔다. 당장에라도 사람을 발라
먹을 듯이 급하게 굴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사얀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일릭에게 쾌감을 주는 것만이 목적인
기계인 것처럼.
벌써 10년도 넘게 몸을 섞어 온 사이에, 사얀에게 일릭이 느끼는 지점을
좋아하는 강도로 자극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릭이 질색하는
모습만큼이나 쾌락에 휩쓸려 흐트러지는 얼굴을 좋아하는 사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곳을 잔뜩 문질러 주면 일릭의 안이 기쁘게 제 성기를
조여 물고 경련하니 사얀 역시 쾌감에 신음했다. 조금 더 이 행위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에 사얀은 사정감을 억누르며 일릭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한데 뭉개지고,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혀가 일릭의
입안을 범했다. 사얀은 미끄럽게 젖은 일릭의 혀 아래를 제 혀로 훑고
입술을 빨다가 이내 일릭의 혀를 찾아내어 잔뜩 얽어매었다.
그 동안에도 아래를 헤집는 움직임은 계속되어, 입이 막히자 일릭은 숨을
쉬는 것이 더 버거워졌다. 그러나 일릭은 지금 쾌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안에 들어온 혀를 반사적으로 빨아 당기는 입맞춤은 아까의 딱딱한
입맞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으읍, 흡-”

귀에 감기는 듣기 좋은 신음 소리. 그러나 사얀은 어쩐지 심장 한구석이


시큰시큰했다.
확실히 아까의 입맞춤보다는 낫다. 하지만 일릭이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년이
넘었음에도 키스에 있어서는 참으로 인색하게 구는 사내였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하기야,
일릭이 제 곁에 남기로 결심한-결심이라기보단 자포자기였지만-이후, 그가
제대로 입을 맞춰 준 게 5년 뒤의 여름이었다. 여름 축제에
사얀이 신을 빙자하여 역할극을 했을 때에야 사얀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한여름 밤의 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황홀한
입맞춤을 선사하며 제 이름을 불러 주었던 남자는, 다음 날 바로 평소의
일릭으로 돌아왔다. 사얀이 엄청난 노력으로 어떤 분위기를 형성해야
입맞춤을 해 주었고, 처음에는 그걸 몰랐기에 다시 입맞춤을 받기까지는 또
오래 걸렸다.
물론 사얀은 그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곁에 남았고 섹스를 허락했지만 일릭은 사얀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다. 또 바라지도 않았다. 질색하는 모습이 좋아 질색하는 짓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또 여전히 종종 싫어하는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일릭이 어찌 자신을 사랑하겠는가.
그러니 그에게서 애정을 바라는 게 멍청한 짓임을 그 누구보다 사얀이 잘
알고 있었다.
사랑 받기는 포기했다. 그의 감정까지 갖는 것은 과욕이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릭은 사얀을 사랑하는 척조차 해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애가 타는 이 괴로움을 사얀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것일까.
‘전에는 내가 죽으면 일릭을 순장해 다오 아니었습니까.’

‘얼굴만 보면 순장해 달라고 하시니까, 피해 있었습니다.’

문득 일릭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사얀은 자신이 그런 말을 했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은
레이사를 들라 하여 유언을 받아 적으라 시켰다는 것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릭에게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얀이 아픈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광증과 두통. 그로 인해 약을 과량 복용했다가 쓰러진 이후
드문드문 기억이 비어 있다는 것 역시, 일릭이 굳이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함께한 지 세월이 10년하고도 몇 년이 더 흘렀음에도, 여전히 일릭은
사얀이 광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스스로 광증에 걸렸다고 착각하는
병이라면 또 모를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머리가 아픈 거라고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치부해 버
리고 있는 일릭이 또 사얀에게는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릭은 사얀의 광증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다. 광증이 제대로
조절이 되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언젠가는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건만.
몇 주 혹은 몇 달 전부터 조절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약을 먹어도 의식이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져서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복용하던 약의 용량을 점점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쓰러져 버렸고, 지난 며칠간 사얀은 정말로 사경을 헤맸다.
‘일릭을 순장해 다오.’
그런 소리를 왜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티마예브 왕실에서 태어난 근친아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가 않았으니 죽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파서
죽음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고통 속에 일릭이 보였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여전히 사랑하는
그가.
자신이 죽으면 일릭은 혼자 남겨진다. 그러자 죽음이 덜컥 두려웠다. 한
번도 죽음이 두려웠던 적이 없었거늘, 무서웠다.
혼자 남겨진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이와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까 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사얀이라는 존재는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 버릴까
봐.
그래서 혀와 입이 저절로 움직이고, 성대가 진동해 소리를 만들었다.
‘내가 죽는다면, 일릭을 순장해 다오.’

빼앗길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일릭은 사얀 자신만의 것이었다.


머릿속에 그런 외침이 너무도 강렬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순장해 다오.’

레이사를 불러오라 하여 유언장을 쓰라고 한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 제가


그런 유언을 남겼던 것을 기억하지 못해, 매일 새로이 유언을 하겠다며
레이사를 불러들였던 것까지도.
몸과 정신이 멀쩡해진 오늘 아침에까지 그것이 관성처럼 이어져, 오늘도
레이사를 불렀다. 그리고 들어온 레이사를 앉혀 놓고 받아 적으라며,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일릭에게
제국을 넘겨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유언들을 주절주절
내뱉었던 것도 생각이 났다.
정말 미치기라도 했던 게로군. 사얀은 맥없이 웃으며 제 아래 발갛게 물든
일릭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죽어서도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애타게 원하게 될 상대가 생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아…! 아윽…!”

사얀은 조금 더 강하게 허리를 움직여 일릭의 안으로 제 성기를 박아


넣으며, 깍지 낀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대신 그의 뺨을 부여잡았다.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든 다갈색의 눈동자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나이 든
모습까지도 사랑한다. 더 나이가 들어서 일릭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도
사랑스러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얀 자신에게 그때까지의 시간이 과연 허락될 것인가.
그러니 그냥 지금 이 순간 그의 숨을 거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전…하……?”

흔들리는 갈색의 눈동자를 보며, 사얀은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뺨을 감싸 쥐고 있던 두 손이 모두 일릭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아, 그래. 제 좆을 무느라 숨이 막혀 괴로워하던 얼굴. 벌겋게 울혈되어
헐떡거리던 그 얼굴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눈물로 범벅이 되고 타액조차
삼키지 못해 흠뻑 젖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 얼굴이 정말 몹시도.
사얀은 거칠게 허리를 올려쳐,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일릭의 안을
파고들었다.
“크학…!”

그리고 일릭의 목을 쥔 아름다운 긴 손가락에 힘이…….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

사얀이 퍼뜩 몸을 떨었다. 일릭의 한 손이 제 팔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랗게 뜨인 갈색의 눈동자를 본 순간 사얀의 호박색 눈동자에 파르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파문이 일
었다 .

물론 여태 보고 있었던 일릭의 눈동자가 사얀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제


팔을 붙잡은 손아귀도 아니었다. 목을 감싸 쥐어 조른 채 체중으로
내리누른다면 아무리 일릭이라 해도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전하……. 지금, 뭘 하시는.”

헐떡이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는 일릭의 오른손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막 목을 조르려던 찰나 사얀의 시야에 들어온 일릭의 주먹. 그것을 본 순간
본능이 속삭였다.
한 대 맞으면 되게 아프다는 것을. 지난 며칠 사경을 헤매며 앓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아주 아프리라는 것을.
이미 사얀에게는 두 번의 경험이 있었다. 1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뇌리에 깊게 각인된 그 통증에 대한 기억은 사얀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묶어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묶어 두지 않기를 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얀은 싱긋 웃었다. 목을 조르려던 마음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야살스럽게 일릭의 목을 매만지며 살갗을 쓸어내려와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잠깐-”

손바닥이 유두를 짓뭉개듯이 누르며 가슴을 주무른 순간 일릭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일릭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한참 기분 좋은 성감에 넋이
빠져나가고 있던 차였다. 너무 좋아서 사정하지 않고도 황홀경이 몰려들기
일보직전이었다. 절정의 파도가 철썩철썩 전신을 휩쓸던 찰나.
일릭은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사얀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변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 전 사얀이 목을 쥐었을 때 일릭이 느꼈던 것은 살기였다. 분명
그 손아귀에는 자그마한 힘조차 담기지 않았음에도 일릭은 상황제가
금방이라도 제 숨통을 조일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생존을 향한 본능으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을 정도였다. 여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무슨 짓을
당해도 감히 상황제를 또 때리는 일은 없었는데,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팰 뻔했다.
아마 사얀의 손아귀에 조금이라도 힘이 담겼다면, 그래서 일릭이 목을
졸리는 느낌을 받았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주먹을 내질러 버렸을 것이다.
분명 그렇게 서로 살기를 주고받은 그런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남의 가슴을 왜 움켜쥔단 말인가! 한껏 예민해진 데다가 입맞춤을
당하기 전까지 잔뜩 희롱당해 더더욱 달아오른 유두를 제멋대로 비벼
가면서…!
“으응! 아!”

다시 시작된 허릿짓에 일릭은 그러나 무너져 내릴 수밖엔 없었다. 일릭의


살기 역시 맥없이 녹아버렸다. 더욱이 사얀의 움직임이 아까보다 더더욱
격렬해져서 숫제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가 없었다.
“아아! 아!”

사얀의 허릿짓이 과격해지자 일릭의 입에서도 거친 신음이 쏟아졌다.


사얀이 박아 넣을 때마다 일릭은 비명처럼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발기한
성기 끝에서 정액이 흘렀다. 사얀은 그 성기를 움켜쥐어 흔들며 재차 그의
내벽을 짓이기듯이 성기를 거세게 찔러 넣었다.
일릭의 안이 꿈틀거리며 사얀의 성기를 잔뜩 조여 댔다. 일릭의 쾌감이
커질수록, 내벽이 경련하며 사얀의 성기를 옥죄었다.
“크, 흑, 일릭……!”

사얀은 제 성기를 단숨에 뿌리까지 일릭의 안으로 처박았다.


“아아…!”
깊은 곳을 짓누르자 일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가 잦아들어, 숨조차 쉬지 못해 호흡이 멈췄다.
사얀의 손아귀에 붙잡혀 조여진 일릭의 성기 끝에서 정액이 토해지는 것과
동시에, 쥐어 짜이는 쾌감 속에 사얀 역시 일릭의 안에 파정했다.
아찔한 절정의 순간, 사얀은 커다란 황홀경 속에 신음하며 일릭을
굽어보았다. 저로 인해 흥분하고, 저로 인해 절정에 올라 너무도 야하게
정액을 토해 내는 사내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았다.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절정의 끝에 사얀은 생각했다.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아직은.
미치지 않았다.
“……일릭.”

여전히 일릭의 안에서 성기를 빼지 않은 채, 사얀은 몸을 아래로 숙였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일릭의 두툼한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쿵. 쿵. 쿵. 격렬한 정사와 절정으로 인해 힘차게 박동하는 일릭의 심장
소리에 사얀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 육신이 이렇게나 뜨겁다는 것에
사얀의 심장 역시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하…….”

그리고 어째서인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토해 내는 일릭의 한숨 소리가


들렸을 때.
사얀은 움찔 몸을 떨었다.
제 등줄기를 토닥이는 손. 고작 토닥임에 불과했지만, 사얀이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제 몸에 먼저 닿아온 일릭의 손 때문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77.

후일담 4.
정사를 마친 후 일릭은 곧장 씻으러 가고 싶었지만, 상황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 제 몸을 와락 끌어안기에, 이 인간이 몸이 아파서 좀
힘들긴 했나 싶어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한
세월이 길었고, 상황제는 갖은 변태짓을 제외하면 일릭에게 퍽 너그럽고도
다정하였기에 일릭 역시 미운정이 들 수밖엔 없었다.
특히나 정신을 멀쩡히 차린 오늘 아침의 유언은……. 일릭의 마음을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얀이라는 이 남자는 침대에서도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도 늘 너무 과했다.
그러니까 너무… 과했다. 일릭조차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이 사내는. 어쩌면 정말로 이 사얀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일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년을 훌쩍 넘게 살을 맞대며
살아왔기에 일릭은 인정할 수밖엔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에게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것도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얀의 등을 토닥인 것은 그래서였다. 사실은 그를 걱정도 조금
했고, 측은하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손이 갔다. 뿐만
아니라 사얀 같은 미남자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그다지
보기가 좋지 않은 광경일 것이라고 일릭은 생각했다.
그래서 등을 조금 토닥였더니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릭은
손을 거두어 사얀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좀… 씻고 싶은데요. 몸도 좀 불편하고요.”

“아아.”

그제야 사얀은 일릭의 위에서 일어나 그의 안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아래에


구멍이 뻥 뚫리고 안에 고여 있던 액체가 사얀의 성기를 따라 딸려 나가는
느낌에 일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떨었다.
씻으려면 대충이라도 아래를 닦아야 욕실까지 가는 와중에 바닥을 액체로
더럽히는 불상사가 없을 것이므로, 일릭은 시트를 뭉쳐 다리 사이를
닦았다.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그 모습을
보던 사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 위의 수건에 물을 적셔
침대로 돌아왔다.
“제가…….”

“그냥 있어.”

상황제가 손수 뒷정리를 하겠다고 나선 탓에 일릭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얀은 그런 일릭의 다리 사이를 젖은 천으로 닦았다. 그런데 아직 채
닫히지도 않은 구멍을 보고 있노라니…….
음. 한 번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은 역시 인지상정이 아닐까.
사얀 역시 마흔이 넘었음에도, 광증을 다스리는 약 때문인지, 타고난 정력
때문인지 연거푸 두 번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며칠이나 일릭을 안지 못한 날에는 세 번도 가능할 것 같았다.
또 하자고 하면 싫어하려나? 사얀은 일릭의 복부를 더럽히고 있는 일릭의
정액을 보며 골똘히 고민했다. 일릭의 배 위에 흩어진 흰 액체의 농도만
봐도, 일릭 역시 꽤나 참았다는 것은 자명했다.
역시 한 번 더 하고 싶다. 아까는 잠깐 정신이 나가서 일릭을 죽일까, 목을
조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바람에 고작 한 가지 체위밖에 못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뒤로도 하고, 옆으로도 하고, 제 위에 앉히기도
하고…….
“…다시 머리가 아프십니까?”

그 고민이 깊어지고 또 깊어져 미간이 찌푸려지고 얼굴이 심각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음탕한 고민을 알 길이 없는 일릭은
혹시라도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두통이 재발한 것인가 착각하여 물었다.
물론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음성에 사얀은 가슴 속이 아릿해진다. 일릭이 저를 사랑할 리는 없지만
걱정은 해 주는 것인가 싶어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렇게 걱정이 되었으면 간병이라도 좀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자신이 순장 소리를 했다고 해도 그렇지.
사얀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를 피해 상황제의 침궁을 떠나 있었던
일릭에게 조금 섭섭한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섭섭한 마음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역시, 사얀이 알 길이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없었다.
사실은 일릭이 지난 며칠 동안 꽤나 여러 차례 사얀을 병문안
왔건만.
광증과 두통으로 인해 사얀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사얀은 일릭이 혼자 또는 레이사와 함께 몇 번이나 자신을 보러 왔다는
것도, 그래서 자신이 순장 타령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 임종을 지킬 생각은 없었어?”

그러자 순간 일릭의 표정이 잠깐 바뀌었다. 금방 무표정이 되긴 했지만 그


얼굴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가 버렸나, 웬 어리광이람.’
기가 차다는 본심이 숨겨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두통 때문에 죽은 사람은 못 본 것 같은데요.”

“열도 났잖아.”

“원래 감기몸살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열나고 몸이 아프고 두통도 있고.”

“너무한걸.”

사얀은 웃어 버렸다. 그래, 일릭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얀이


광증을 앓고 있어 이스테샤가 지어 주는 약이 아니면 미쳐 버린다는 것을.
설령 약을 복용한다 해도 언제 광증이 도져 그를 죽이겠다고 설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차를 마신다고 생각하지, 약을 먹는 것은 모른다. 눈치조차 채지를 못하고
있는 그다. 나이를 한참 먹고도 아직 어리숙한 일릭이 귀여워 사얀은
웃음이 나왔다. 섭섭했던 마음이 싹 녹아내릴 정도로 그저 일릭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이만 일어나세요.”

“아픈데.”

“프리스카 백작 부인이 괜찮아졌다고 했습니다.”

“아픈 건 나인데 이스가 어떻게 알고.”

억지를 부리자 일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릭은 사얀이 지금 꾀병을 부리는


걸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 이유인즉 지난번 찾아왔을 때와 오늘의
사얀의 상태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었다.
사얀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릭은 갑자기 쓰러진 그를 걱정했고,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해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가 깨어나서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레이사를
불렀다는 얘기에 몇 번이나 얼굴을 비쳤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순장 타령을 해서 기함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러다가 프리스카 백작부인이 그가 나아졌다고 한 오늘은 순장 얘기를
하지 않으니, 멀쩡해졌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까 사얀 제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다 나았으니 안아도 되겠냐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병마가 거세어 완전히 낫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재발한 것 같아.”

사얀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을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으며 일릭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키스해 주면 나을 것 같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일릭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키스해 주면 빨아 줄게.”

……이런 개수작에 내가 넘어가는 줄 어떻게 알고. 유혹에 흔들리는 시선도

물론 숨겨지지 않았다.
40대임에도 청년 못지않게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는 일릭 역시 오래간만에

두 번 정도 할 체력은 차고 넘쳤다. 게다가 오늘의 섹스는 다소 평범한


편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아. 이 사내는 대체 입맞춤을 왜 이렇게나 좋아하는 것일까. 물론
상황제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건 늘 소름 끼칠 정도로 오싹오싹한 맛이
있긴 했지만……. 남자끼리 이러는 건 역시나 좀 징그러운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어리광을 부리는 이 늙지도 않는 아름다운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일
릭은 어쩔 수가 없었다. 뭐 언제는 수가 있었던가. 늘 그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휘말리고, 휘말리다 보니 그럭저럭 흘러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 지경까지 온 것을.
일릭은 사얀에게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 쥐자 동그랗게 커진 호박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늙지를 않으니, 중년의 늙은이가 청년을 희롱하는
배덕감이 들어 어째서인지 가슴 속이 찌릿했다.
얼굴도 여전히 예쁘고, 눈동자는 너무 신비롭고, 머리카락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게다가 결은 또 왜 어째서 늘 이렇게나 부드러운 것인지.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상황제 사
얀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일릭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제 목을 조르려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따지지도 못했다. 물론
따져서 무엇 하나 싶으면서도……. 한 대 팰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은데 조금 아쉬운 마음도 조금.
“……일릭.”

아니 또 왜 이렇게 처음 성애를 접하는 순진무구한 소년 같은 얼굴로


끌려온단 말인가. 중년에 이른 남자가, 그것도 변태 그 자체인 남자가 이런
표정이 어울린다는 게 가당키나 해? 역시 저 얼굴. 저 요사스러운 얼굴이
문제인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으로, 일릭은 사얀에게 입을 맞추었다.
***

몇 년 전.
때는 바야흐로 티마예브 왕국의 왕자인 레이사의 즉위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즉위식이 곧 결혼식의 날이었기에 레이사는 요즘
일정에 쫓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즉위식을 기점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일국의 군주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떨림, 그리고 불안과 책임감으로 그는 연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밤, 국왕이 은밀하게 자신을 내성의 가장 높은 탑으로 불렀을
때는 또 다른 의미로 긴장을 할 수밖엔 없었다.
내성의 탑은 과거 왕족을 유폐시키는 장소로 쓰였기에 더욱. 한때
티마예브의 국왕들은 정적과도 같은 제 혈육을 그곳에 가두어 두곤
했으므로, 왕성의 가장 높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몇 대 전의 선왕이 탑에 혈육을 가두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쓰인 적이 없어 레이사는 탑 꼭대기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내성에서 이어지는 긴 통로를 걷고, 그 통로 끝에서 다시 좁다란 층계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방.
층계의 끝에서 레이사가 문을 열자, 실내를 은은히 밝힌 작은 방이 그를
맞이했다. 사람의 머리 크기로 자그맣게 난 창을 제외하면 사방이 막혀, 레
이사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 화려한 티마예브의 왕성 그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디와도
비할 바 없이 허름한 장소였으며, 아무리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고는 해도 왕족이 생활하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 삭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기가 없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침대와 탁자, 의자 몇 개의
가구가 전부였다. 사용하지 않게 된 지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허름한 공간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껍데기를 가진 사내가 레이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티마예브의 국왕이자 레이사의 아버지, 아니 삼촌인 사얀이었다. 그를
마주한 순간 레이사는 어쩌면 이 숨 막히는 답답한 공기는 좁은 방 때문이
아니라, 사얀이 뿜어내는 위압감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까보다
더욱 고조된 긴장감에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흉곽 안을 둥둥 울려
댔다.
자그마한 탁자 위에서 요요히 빛나는 촛불이 무거운 침묵을 비춘다. 이런
사내를 두고, 자신이 며칠 뒤부터 왕이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속으로 자문하면서도 레이사는 국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 자리가 국왕 사얀이 일국의 군주로서 후계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내릴 자리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탑 맨 위에 자리한 좁은 방. 그곳에 선 채로 사얀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레이사를 굽어보았다. 아직 그를 불러낸 이유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챈 레이사다. 똑똑한 아이이니, 사실 별 다른 가르침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얀은 레이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사.”

아들로 길렀으나 사얀은 레이사에게 그리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를 부르는 사얀의 목소리에 전보다 애정이 담긴 듯이 울린다.
어찌 보면 가장 위엄이 넘쳐야 할 순간이었으나 사얀은 그러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자라나 왕위를 잇게 되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레이사는 여전히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해 나갈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나이 어린 자신에게 왕위란 책임감이 너무도 막중한
자리가 아닌가. 이 티마예브에, 아니 대륙에 드리운 사얀의 그림자가
너무도 크다는 것 역시도 레이사에게는 부담과 함께 미련을 남겼다. 레이사
스스로도 사얀이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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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더 이상 양위를 물러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음을 레이사는 알고


있었다.
“이제 이 나라의 백성들이 광인의 지배를 벗어나니, 만인의 복이라 할

것이다. 이스테샤와 엔리온의 피를 물려받은 너는 그 누구보다 칭송받는


위대한 군주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러니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뜻을 펼치며
군림하거라.”
평소 레이사를 칭찬하는 법이 없던 사얀의 말에 레이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핏줄에 새겨진 유전병으로 인한 광증. 티마예브의 역사상 그
누구보다 위대한 군주일 사얀은 그 광증으로 인해 스스로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사내였다. 하여 이것이 사얀이 양위를 하고자 하는
이유였다.
“다만 이렇게 너를 부른 것은 당부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 전하.”

“나와 네 어미의 지난날의 모든 노력이 다 너를 이 자리에 있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 자신은 물론이요,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 티마예브의 왕실이 다시금 혈육을 탐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이 나라를 젊은 후계자에게 물려주며 사얀이 당부할 딱 한 가지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당부를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기도 했다. 레이사
스스로도 자신이 근친의 고리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이유로 왕자가 되었고
또 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솔직히 말하자면 사얀은 잔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걱정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다만 형식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다음. 조만간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이런 인적 없는
탑으로 야심한 시각에 은밀히 부른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지금부터 네가 들을 이야기는, 짐의 마지막 명령이니라.”

말투가 바뀌었다. 그에 힘입어 고압적으로 바뀐 분위기에 레이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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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언젠가 일릭을 해하려 한다면.”


읊조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름없이 낮고 건조했다.
“그때는 짐의 광증이 불치의 수준에 이른 것이라.”
그 어떤 감정조차 실리지 않아, 평온하기만 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짐이 일릭을 해치기 전, 짐을 제거해야 한다.”

“……!”

“짐을 죽여라. 죽일 수 없다면 이 탑에 유폐해도 좋다.”


“전… 전하.”

“그러나 그 무엇도, 이 사얀조차도 일릭을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 광증을 경계하여 일국의 군주 자리까지 내놓은 남자가


내리는 마지막 명령.
사얀은 사실은 바라던 바를 모두 이루었다. 원래대로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어야 했다. 소망하는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사얀은 자신의 광증이 언젠가 일릭을 향할까 두렵다.
그리하여 그를 해치게 될까 봐 무섭다.
하지만 지금의 사얀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비뿐이다. 언제 완전히 미쳐
버릴지 알 수가 없으므로, 최대한 제정신일 때 양위를 마쳐야 한다. 그래야
누구 한 명이라도 사얀 자신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전하, 저는.......”

“불복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사얀은 레이사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차마 아비를 죽일 수도, 탑에 가둘


수도 없다는 말은 꺼내게 둘 생각조차 없었다. 애당초 진짜 아버지도
아니고, 삼촌이지 않은가.
“이것은 짐이 이 자리에 앉아 내리는 마지막 칙령이다.”

도리어 못을 박았으니 레이사는 감히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 짐의 칙령을 받아 적으라.”

결국 레이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적인 명령을


들은 탓에, 오래 꿇어앉아 있던 다리가 저린 줄도 몰랐다.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와 펜을 쥔 채로 레이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어라 정리를 해서 적어야 하건만, 차마 적을 수가 없었다. 국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선위를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양위를 해 준 그를 죽이겠노라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어찌 적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 자신이 적어야 한다는 것을 레이사는 알고 있었다.
광증으로 인해 왕위도 내던질 수 있는 사내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존재를 곁에 두기 위해 후계자에게 강요하는 명령이기에. 그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을 남자는 약속을 할 수밖엔 없었다.
결국 레이사는 국왕의 마지막 명령을 종이에 적었다.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자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을.
모든 위협에서 일릭을 보호하여 안위를 보장하고, 그의 적을 제거한다.
차마 시해를 언급할 수가 없어 절충하여 나온 문장이 레이사에게는
최선이었다.
사얀은 다시 한번 그 문장을 확인한 뒤, 펜을 들어 아랫줄에 한마디를 더
적어 넣었다. 일말의 미련도 거리낌도 없이 한 문장을 적어 넣은 뒤, 그것을
다시 레이사에게 건넸다.
마지막 문장을 확인한 레이사는 종이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밀랍으로 봉투를 봉하는 과정이었다. 사얀은 촛불 위에 황동
숟가락을 올려 밀랍을 녹이며 입을 열었다.
“일반적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왕이 서거한 이후일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밀랍이 녹기 시작하자 매캐한 냄새가 좁은 방 안에 퍼져 나갔다. 사얀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녹은 밀랍을 봉투에 부었다. 그리고
미로스의 대공 시절부터 늘 끼고 다니던 반지를 뺐다.
“그러니 왕으로서 짐이 네게 내린 이 마지막 명령은, 짐의 유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얀은 반지에 조각된 인장을 밀랍 위에 찍어 누르는 것으로써 레이사가
역시나 입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지를 거두고 밀랍이 완전하게 굳고 난 뒤에야, 명령, 아니 유훈이 들어
있는 봉투를 레이사에게 건넸다.
“이것이 짐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유언이다.”

레이사가 어찌 감히 그것에 불복할 수 있을까. 그저 나약했던 제 마음을


채찍질하여 각오를 다질 뿐.
Obra original: https://www.bomtoon.com/comic/ep_list/plaything 다시금 사
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언장을 받아 들며, 레이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유언대로 수행할 것을 맹세했다.
***

이것은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에 오르고 또 얼마 뒤 제위에


올라 티마예브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레이사가, 사랑해 마지않는 황후
필리아에게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긴 시간이 흘러 언젠가 선황제 사얀의 유언장이 공개된 날. 필리아는
그제야 그 유언장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후인 그녀는
선황제의 유언장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유언장의 마지막에는, 윗줄의 레이사의 것과는 다른 필체로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국왕 사얀의 사후, 일릭은 자유의 몸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사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 Plaything ~ 어느 대공 각하의 장난감 ~ 후일담 마침
Fin de los extras
Estado: COMPLE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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