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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1)

"그럼 남은 곳은⋯⋯."

모두의 시선이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화산과 남궁, 녹림, 그리고 새외오궁 중 두 곳이 참석자를 정했으니, 남은 곳은 당가뿐


이었기 때문이다.

"가주님?"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본 당군악이 크흠 헛기침을 흘려 냈다.

"당가는⋯⋯."

"가십니까?"

"다른 곳은 다 문주가 직접 가는데."

"⋯⋯."

당군악의 눈가가 실룩하고 경련을 일으킨다.

"지금⋯⋯ 크흠. 지금의 나는 당가의 가주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천우맹의 부맹주


로서 상황을 정리하는 중이니 당가와 관련된 일은 내가 아니라 소가주에게 묻도록 하
시게."

"그게 그거 아닙니까?"

"화산도 장문대리와 맹주님의 역할을 구분하고 있으니, 당가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뭔가 발을 빼는 느낌이 났지만, 따져 묻기엔 조금 애매하긴 했다. 그러니 자연히 모두


의 시선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당패에게로 향했다.

"어⋯⋯. 그⋯⋯."

당패가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물론 당가에는 당가를 대표할 만한 훌륭하신 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검들이 수군댔다.

"많아요?"
"많았었지. 그 많았던 사람들 가주님이 청명이랑 손잡고 싸그리 다 뒷방에 밀어 넣었
잖아."

"아, 원로원 폐쇄를 말하는 거구나. 그럼 없네."

당패가 애써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아무래도 문파 간의 형평성이라던가, 상징적인 의미도 있으니 당가


에서도 가주님께서 직접⋯⋯."

그 순간, 제 몸에 밀어닥치는 한기를 느낀 당패가 고개를 획 돌린다. 그를 바라보는 당


군악의 얼굴이 일순 아수라처럼 변했다가 재빨리 무표정을 되찾는다.

"⋯⋯."

"직접이요?"

"아, 아니⋯⋯."

당패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야 하는 게 맞긴 한데⋯⋯. 아시다시피 저희 가주님께서 가시면 문제가 좀⋯⋯."

"무슨 문제요?"

"⋯⋯뭔가 있겠죠?"

"예?"

"⋯⋯."

다시 한번 등을 찔러 오는 살기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낸 당패가 더듬더듬 대며 말을


이었다.

"그⋯⋯. 지금 가주님께서는 실질적인 천우맹의 부맹주로⋯⋯. 워낙 많은 역할을 하


고 계시다 보니, 자리를 비우시면 업무에 문제가 여럿 생기고⋯⋯."

조걸과 윤종이 또다시 수군대기 시작한다.

"사형. 지금 천우맹이 뭐 하는 게 있습니까?"

"⋯⋯나야 모르지. 그런데 지금은 딱히 뭐가 없을 텐데?"

"그런데 무슨 공백이 생긴다는 겁니까?"

"글쎄?"
당패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저 망할 승냥이 떼 같은 놈들. 저런 것들이 도사라고⋯⋯.

"그, 그러니 가주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맹주님이 힘들어지실 수 있습니다."

"아. 그럼 뭐."

"그건 인정이지."

"장문인도 요즘 생각이 많으실 텐데, 방해하면 안 되지."

당패가 뿌득 이를 갈았다. 저 썩을 화산 놈들⋯⋯.

백천이 말이 길어진다는 듯 핵심을 물어 왔다.

"그래서 당가에서는 누가 가는 겁니까?"

"장로님들 중 한 분이⋯⋯."

"장로님요?"

"⋯⋯."

당패가 슬쩍 당군악을 돌아본다. 그의 아버지는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미 결


론이 나 있는 문제를 뭘 그리 고민하냐는 듯.

그리고 당패는 그 결론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소가주님이요?"

"예. 다른 문파에서는 문주께서 직접 가시니, 저라도 직접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소가주님이 가신다면 뭐."

"크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군악이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음. 먼 길이기도 하고, 위험한 길이기도 할 터인데."

"⋯⋯."

"그래도 소가주가 직접 가 준다고 하니, 조금은 체면치레를 한 것 같군. 고맙네, 소가


주."
"별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가야 하는 일이지요."

빙그레 미소짓는 당군악을 보며 당패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에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언제 사람이 저렇게 능글맞아졌는가? 왜?

"여하튼 그럼 결론은 다 난 것이로군."

당군악이 상황을 정리했다.

"해남으로 향할 이들은 남궁세가의 소가주, 당가의 소가주, 빙궁의 궁주와 녹림왕, 그


리고⋯⋯."

당군악의 시선이 백천을 호위하듯 앉아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오검인가?"

백천이 슬쩍 제 뒤에 있는 이들을 돌아본다.

"⋯⋯원래대로라면 각 문의 문주들이 가는 자리에 낄 만한 이들은 아니지만."

"아니, 뭔 말을 그렇게⋯⋯."

"본인들의 의사가 있다면 데려갈 생각입니다. 제 한 몸 지킬 무위가 부족한 이들도 아


니니까요. 다른 문파의 문주님들께서 양해해 주신다면."

"좋겠지."

당군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활한 협상을 위해서도 필요한 동행이라 생각하네. 지금 대외적으로 천우맹을 상징


하는 이들이 화산의 오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

"⋯⋯상징이라니, 과하십니다."

"음? 모르는가?"

"예?"

백천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들의 명성이 높아질 때, 본인들은 되레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


실인 모양이로군. 자네들이 강남으로 파견되었던 일들이 알려지면서, 오검들의 명성
이 가히 드높아지고 있네."

"⋯⋯정말입니까?"
"물론 그 명성의 대부분은 화산검협의 것이지만, 자네를 비롯한 다른 오검들의 명성
도 이제는 후기지수의 수준에서 논할 바는 아닐세."

"⋯⋯."

뭔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검들을 보며 당군악이 빙긋 웃었다.

"어쩌면 다들 각자 별호가 생길지도 모르지. 강호인들은 사람에게 별호를 붙이지 않


고는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니까."

"오? 별호!"

조걸의 얼굴이 화색을 띤다.

"그럼 저희도 이제 별호가 생기는 겁니까?"

"⋯⋯좋으냐?"

"그럼요! 사숙이나 사고는 별호가 있는데, 저희는 없어서 억울한 면도 있었잖습니까.


저희도 열심히 싸웠는데."

"이상한 별호라도 붙으면 어떻게 하려고?"

"에이, 제 별호는 좋은 것 분을 거예요. 질풍매화무적검(疾風梅花無敵劍). 뭐 이런 걸


로!"

"그게 제일 이상해. 그게⋯⋯."

조걸의 반응을 보며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백천이 오검을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면, 당군악이 먼저 저들의 동행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사패련과의 전투, 그리고 마교와의 전투. 그 모든 곳에 오검은 항상 존재했으
니까.

저들은 이제 단순한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아니다. 저들은 사마와 싸우는 천우맹의 검


이자, 그 어느 곳이든 억울한 이들이 있으면 달려가는 협의의 상징과도 같았다.

해남 역시 귀를 막고 사는 이들은 아닐 테니 오검의 활약상은 충분히 들었을 것이고,


그런 이들이 직접 온다면 대접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거기에⋯⋯. 유이설, 윤종, 조걸⋯⋯."

당군악이 말을 끊고는 당소소를 바라본다.

"⋯⋯너까지는 굳이."
"갈 거예요."

"이미 수는 충분한 것 같은데."

"갈 거예요."

"⋯⋯방해만 될 것 같은데."

"간다고요."

당소소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철벽을 치자, 당군악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


다.

"꼭?"

"뻔한 말씀을 하시네요. 위험할 수도 있는 길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제가 따라가야


죠. 저희 사형들은 칼 맞고 살이 찢어져도 제 스스로 꿰맬 줄도 모르는 양반들인데."

"소가주가 직접 가는 일이니, 굳이 의원은 필요하지 않다."

"그건⋯⋯."

그때, 백천이 입을 열었다.

"소소는 의원으로 같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으음?"

당군악의 시선이 백천에게로 향한다. 그러자 백천이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소는 의원이 아니라 화산을 대표할 검수로서 함께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누가


되었든 소소를 대체할 만한 검수는 구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당군악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위험한 곳에 딸을 보내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심정으로서는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


었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뒤늦게 화산에 입문하여 검이 아닌 당가의 의술로 부족함을 채우던 아이가, 이제는 장


문대리에게 그 검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의미니까.
아니나 다를까. 백천의 말을 들은 당소소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다. 그 얼굴에 어린 벅
참을 느낀 당군악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장문대리께서 그리 말한다면, 내가 입을 뗄 일은 아니군. 허가하겠네."

"감사합니다."

백천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이런 당연한 일로 굳이 당소소


와 시선을 교환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확실히⋯⋯.'

당군악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종과 백천은 확실히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차


이점은 바로 저 의지견정함과 당당함일 것이다.

"그럼 인원은 확정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저기, 사숙."

"응?"

"⋯⋯뒤쪽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응?"

백천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에 한쪽 구석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


고 있는 혜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스님?"

"그⋯⋯. 잘 다녀⋯⋯. 예, 잘 다녀오십시오. 도장. 이곳에서나마 무사귀환을 부처님


께 기원드리고⋯⋯."

조걸이 윤종에게 속삭인다.

"왜 저러시는 건데요?"

"글쎄다. 아마도 방장이 깽판 친 일인데, 소림 출신이 같이 가기에는 민망해서 그러는


것 아닐까?"

"그런 걸 신경을 쓴다고?"


다들 의아한 눈으로 혜연을 바라본다. 그러자 혜연의 머리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
다.

"⋯⋯저 염치의 반만이라도 방장이 가졌어야 하는 건데."

"반이 뭡니까. 십 분지 일만 있었어도 그렇게 안 살지."

"생각해 보면 저 양반이 너무 많이 가져서, 방장이 가질 게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럼 저 양반이 원인이네."

"아, 아니 제가 뭘?"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혜연을 보며 백천이 피식 웃는다.

"신경 쓰지 말고 같이 가시지요. 스님."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천우맹 분들이야 제 입장을 이해하시지만, 해남의 입장에서


는 소림 출신이 함께한다는 것이 조롱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롱을 위해서 각 문의 문주가 모두 위험을 무


릅썼다고 생각할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아⋯⋯."

혜연이 이곳에 있는 이들을 돌아본다.

확실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해남으로 가는 이들의 면면이 그 오해


를 불식시켜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아미타불."

혜연마저 함께하는 것이 확정되자 조걸이 새삼스럽다는 듯 모두를 돌아본다.

"와. 그럼 야수궁을 뺀 각 문의 문주, 소가주, 장문대리에 혜연 스님까지 같이 가


는⋯⋯."

감탄한 듯 말을 하던 조걸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저기⋯⋯. 아니, 사형. 그런데요."

"왜?"

"애초에 해남으로 소수정예만 보내는 이유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적은 인원을 보내


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전을 확보하자는 의미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아까 다 설명하지 않았느냐? 그게 왜?"

"⋯⋯그런데 해남에 가는 사람들은 다들 제일 죽으면 안 되는 각 문의 문주님들인데


요?"

"⋯⋯."

조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재차 물었다.

"이게 천우맹이 다 몰려가는 거랑 대체 뭐가 다릅니까?"

"⋯⋯."

아무도.

그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1202 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2)

“뭐......”

당군악의 눈치를 슬쩍 살핀 남궁도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좋지 않습니까? 해남에서도 저희의 진정성을 확실하게 이해할 것이고."

남궁도위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문주들이 직접 해남을 방문하는 것보다 그들의 진


정성을 더 보여 줄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조걸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협박으로나 안 느끼면 다행이지 않을까요?”

“혀, 협박이요?”

나도위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돌아보자 조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천우맹의 구성 문파들이 하나같이 만만한 곳은 아니잖습니


까?"

“.......그렇지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말도 솔직히 너무 겸손한 발언이었다. 천우맹이 아직 구파일방


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다고는 하지만, 따져 보면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
이다.
“오대세가의 주축이었던 남궁세가와 당가에, 신주오패 중 하나였던 녹림, 그리고 새
외오궁 중 두 곳까지.”

“음.......”

“그중에 해남파가 만만하게 볼 만한 곳이 있습니까?"

“없......겠죠?”

해남이 아무리 구파일방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겨우 백 년도 안 된 과거에 구파일방


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문파에 불과하다. 냉정하게 보자면 서로를 대함에 있어서 부담
이 더 큰 곳은 분명 해남 쪽이다.

“그런데...... 그런 문파에 천우맹의 문주님들이 단체로 몰려가서 우리는 좋은 마음으


로 왔으니, 좋은 말로 할 때 합류하라고 해 보십쇼.”

그 순간 모두의 머리에 한 광경이 떠올랐다.

성질머리로 따지자면 구파일방 따위는 가져다 대지도 못할 천우맹의 문주들이 해남


의 장문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어....”

“이거 그림이 좀........”

“심지어 사파 수괴도 있잖아.”

뭔가 묘한 반응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남궁도위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혀, 협박을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저희는 그냥 해남의 미래를 위해 천우맹과 함께하


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합류 안 하면 그냥 간다. 근데 그럼 소림도 안 도와줄 테니,


니들은 결국 망할 거다. 망하기 싫으면 합류해라."

“...... ”

“그게 협박이지.”

그 말에 오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그런데?”

“무섭다.”

“진짜 개무섭네.”
“나 같으면 지렸다.”

이쯤 되니 당군악이 합류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양반들이


에워싼 와중에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당군악이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없는 신물이
라도 들고 나와 바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 이쯤 되면 협행이라고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형?”

“쯧쯧. 어리석은 놈. 아직 모르겠느냐?"

“예?”

윤종이 한심하다는 듯 조걸을 보며 말했다.

“협행이란 원래 힘으로 하는 거다.”

조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아라. 힘이 필요하지 않은 협행은 협행이라 하지 않는다.”

“그, 그럼요?”

“그건 그냥 선행이지.”

“어?”

조걸이 눈을 크게 치떴다. 뭔 헛소리지 싶었는데, 듣고 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 때


문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닥치고 두들겨 패서 해결하니까 선행이 아니라 협행이라 불리는 거다. 그리고 우리


는 협행을 하러 가는 길이 아니더냐.”

“그러네요?”

“그렇지. 그러니 당연히 힘을 써야지."

“크으. 사제가 그건 몰랐습니다. 과연, 이게 화산식 협행이군요.”

“아니야, 이 미친놈들아!”

참다못한 백천이 벌컥 고함을 쳤다. 조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형. 장문대리께서 아니라고 하시는데요.”


“쯧쯧. 걸아, 너는 여전히 모르는구나. 장문대리 같은 지고한 자리에 있다 보면 옳은
것을 아니라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아, 본심은 다르다는 거군요.”

“그렇지. 애초에 이 계획을 세우신 분이 장문대리 아니냐. 그리고 따지고 보면 장문대


리야말로 '화산식 협행'의 창시자나 마찬가지 아니냐.”

“과연!”

“아, 아니라고!”

가만 듣고 있던 당군악은 뭔가를 놓아 버린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방장과 손을 잡을 걸 그랬나?'

그럼 적어도 이 고통을 그가 아닌 방장이 겪었을 터. 생각해 보면 그게 방장을 괴롭히


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단 말인가.

한숨을 푹 내쉰 당군악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농으로 할 만한 이야기만은 아니오.”

달라진 당군악의 말투에 모두가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직접 해남으로 향하겠다는 그 협심을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처음에 생각한 것 이


상으로 해남으로 향하는 이들의 면면에 무게가 실린 것도 사실이오. 객관적으로 본다
면 유례없는 일이라 해야 하지 않겠소?"

“만일 해남으로 간 문주들이 뜻하지 않은 변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


로 할 수 없을 것이오. 상황에 따라서는 천우맹의 존속조차 불가능해질 테고 말이오.”

거기까지 말한 당군악이 다른 문주들의 면면을 보았다. 이 말을 하면서도 그는 이들의


제 의지를 꺾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애초에 천우맹은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던가. 이런 사람들이


기에 이 천우맹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한 복귀요. 자신들이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잊


지 마시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당군악의 시선이 백천에게로 향했다. 그저 짧은 눈짓에 불과했지만, 백천


은 그 의미를 확연하게 이해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백천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 역시 백천의 책임이 될 거
란 의미였다. 설사 그가 강요한 게 아니라, 문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이라 할지
라도 말이다.

그건 질책이라기보다는 우려나 걱정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백천은 당군악의 눈빛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로 가득 찬 그 눈빛을 보며 당군악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당군악의 입에서 당가의 가주다운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 일만큼 천우맹의 뜻과 의지를 천하에 확실히 보여 줄 수 있는 방


법도 없는 게 사실이오."

“우리는 구파와 다른 길을 가기로 선언했소. 그게 말만으로 끝난다면 결국 훗날 우리


의 선택은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지 못한 이기적인 결정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겠지.”

다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니 알게 되더군. 때로는 옳은 선택과 그른 선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을. 선택은 선택일 뿐,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오."

이건 당군악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간 천우맹은, 화산은, 당가는 세상이 틀렸다고 말하는 선택을 수도 없이 해 왔다. 그


럼에도 그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이었음을 검
과 의지를 통해 스스로 증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마음의 외침을 무시하고 현실과 위험에 대해 논하는 순간, 그들도


결국은 방장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금의 천우맹이 택한 건 그들이 소림과 다름을 증명하는 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에게 말이다.

당군악은 마음에 이는 우려와 걱정을 억누르며 단호한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당당히 다녀오시오. 천우맹의 이름을 걸고."

대답은 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예!"
더없이 뜨겁게.

***

소림과 천우맹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소림의 방장인 법정 대사가 그간 두 세력 간에 쌓인 악감정을 풀고, 천하에 닥칠 환란


에 대비하여 정파의 이름 아래 다시 하나로 뭉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천우맹은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법정 대사는 천하의 위기보다 자신의 세를 우선시하는 천우맹의 행위에 분노했


고, 천우맹과 공조하지 않을 것임을 단호히 선언했다.

- 간악한 사패련 세력이 준동하고, 백 년 전 사라졌던 마교가 다시 움직임을 보이는 상


황에서 제 입장만을 내세우는 건 정도를 걷는 이들이 할 행위가 아니다. 소림을 위시
한 구파일방은 천우맹의 무도한 행위를 단호히 규탄 한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천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괴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천우맹이 좀 과한 것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이의 얼굴에 노기가 차올랐다.

“뭐? 이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천우맹을 욕할 수 있는가? 지금껏 힘없


는 이들이 고통받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어디인가? 저 마교가 사람들을 떼로 죽
여 댄 항주로 달려간 유일한 이들이 누구였냐 이 말 이야!”

“아니,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닌가? 지금껏 천우맹은 항상 양민들을 도와 오지 않았는


가? 구파와 힘을 합친다면 당연히 더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왜 굳이 그걸 거부한단 말인
가?"

“믿을 수가 없는 거겠지, 그 구파 놈들을! 그 육시랄 놈들을 뭘 어떻게 믿겠다! 목숨이


아까워서 제 동료들이 죽어 나가던 걸 구경만 하던 것들인데!”

격앙된 목소리를 듣던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구파일방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는 해도, 그래도 수백 년간 정파로서 사람들


을 지켜 온 곳일세. 설마 그들이 사패련과 마교가 강북으로 쳐들어올 때도 구경만 하
고 있겠는가? 제 목숨까지 걸린 일인데?"

"......그건 아니겠지.”
“그럼 당연히 힘을 합쳐 싸워야 할 것 아닌가? 내가 듣기로는 저 법정 대사께서 천우
맹에 굉장히 많은 걸 양보했다고 하더군. 그런데도 그 제안을 받지 않은 걸 보면 천우
맹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단 뜻 아니겠는 가?"

“다른 것이라니?”

“잿밥이지. 이제는 제 권력이 아쉬운 것 아니겠는가? 이제는 천우맹도 작은 곳이라 할


수 없으니.”

“이 사람이 뚫린 입이라고! 야, 이 사람아. 그러다 벌 받네. 천우맹이 지금껏 얼마나 많


은 일을 해 줬는데.”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시게. 구파일방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저랬겠는가? 지금의 천우


맹이 하던 일을 예전에 구파일방이 해 주었네. 과거 마교가 발호했을 때 목숨 걸고 싸
워서 천하를 지켜 낸 이들이 누구였냐 이 말이네.”

“그야......”

할 말이 궁색해진 이가 말끝을 흐렸다.

분명 저 구파일방이 협의의 상징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변치 않는 단 한


가지의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천우맹이 벌써 변할 리는 없네.”

“속단하지 말게. 저들이 정말 양민들을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여겼다면 구파에서 거


부한다고 해도 힘을 합치려 했어야 맞는 걸세.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구파에서 한
제안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지 않았는가?”

“...... "

“사패련이나 마교가 쳐들어왔을 때 둘로 나뉘어 있는 것과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 어


느 쪽이 희생이 적을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일세. 나는 이번에 천우맹에 크게 실망했
네.”

“그건 자네 조카가 저 공동의 속가제자니 하는 소리겠지. 자네 팔이나 똑바로 보게. 얼


마나 심하게 안으로 굽었는지 젓가락질도 못 할 판이구만."

“뭐? 자네 말 다 했는가?"

“뭘! 내가 뭐 틀린 말 했는가?"

“이 사람이!”
둘의 언성이 격하게 높아지며 주루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주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
리면서도 딱히 말리려 들진 않았다. 그들 역시 나름대로 생각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주루 한쪽 구석에 앉은 거지 하나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둡게 가라


앉은 눈빛은 점소이 하나가 짜증 섞인 얼굴로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렸다.

거지는 점소이가 신경질적으로 내민 쉰밥을 헤헤 웃으며 받아 챙기고는 슬그머니 주


루를 빠져나갔다.

1203 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3)

손에 든 쉰밥이 다 흩뿌려지도록 부리나케 달린 거지는 구석진 움막을 찾아가 문에 걸


린 거적때기를 걷으며 박차고 들어갔다.

“분타주!”

“어떠냐?”

움막 한구석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홍대광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떻긴 뭘 어떻습니까? 텄습니다.”

“응?”

“반으로 나뉘어 싸우고 난리도 아닙디다. 제가 몇 군데나 돌아봤는데 다들 비슷비슷


합니다."

홍대광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사람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그동안 천우맹이 해 준 게 얼만데.”

“어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합니까? 앞으로 뭘 더 줄지를 따지지. 평생 거지 생활한


사람이 세상인심 각박한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몰라서 이러겠느냐? 속이 터져서 그러지!”

홍대광의 만면에 짜증이 서렸다.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는 건 듣기에 따라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 같다. 어쨌거나


천우맹의 입장을 이해하는 이들도 절반은 된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그건 이전까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이 일이 퍼지기 전까지


양민들은 구파가 아닌 천우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근 몇 년간 구파일방이 양민들을 위해 한 것이 없는 반면, 천우맹은 장강 유역의 양민
지원은 물론이고, 제 목숨까지 걸며 항주로 달려가 마교를 몰아내지 않았던가?

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이라면 천우맹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론이 반으로 갈렸다는 건, 법정이 내건 명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의미였다. 연이어 몰리던 구파일방이 이번에야말로 천우맹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인 것
이다.

‘썩을 땡중 놈이.......’

홍대광이 이를 벅벅 갈아붙였다.

교활한 법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전하는 척하면서, 말


과 말 사이에 천우맹이 제 이득을 위해서 구파의 양보마저 거절했다는 해석을 슬그머
니 끼워 넣었다.

굳이 나서서 지적하고 해명하기엔 좀스러울 정도로, 과하지 않게 말이다.

“소림 방장 자리를 투전판에서 딴 건 아니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겠지만......”

그럼에도 욕이 나오는 이유는, 소림의 방장이라는 자리가 본디 교묘한 정치가 아닌 대


의를 표방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천우맹에서는 별말 없습니까?"

“뭔 말을 하겠느냐?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닌 것을."

따지고 보면 힘을 합치자는 법정의 제안을 화산이 거절한 것은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세세한 부분에서야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세세한 사정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할 말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천우맹이 뭐가 아쉬워서 지금 구파에 고개를 숙이고 들


어갑니까?"

“그거야 우리가 볼 때 그런 거고, 평범한 양민들의 눈에는 여전히 구파가 훨씬 크고 역


사가 깊은 곳이다.”

"음....... 그건 그렇겠네요.”

“그러니 둘이 힘을 합친다면 당연히 천우맹이 사라지고 구파가 남는 것이 순리라고 생


각하겠지.”

“그거 기분 묘하네.”
동곽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쨌거나 개방도 구파일방에 속한 곳이니, 양민들이 구파일방을 조금 더 우대해 준다


는 것에 기분이 좋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화산과 찰떡같이 붙어 생활했던 화음 분타
의 일원으로서는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기 분이 묘한 것이다.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느냐?"

“.......그럼 뭘 어쩝니까?"

“야, 이 새끼야! 멋모르는 사람들이 나오는 대로 떠드는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고?


옆에서 지적을 했어야지! 그런 게 아니라고!”

“아이고, 분타주. 정신 좀 차리십시오!"

동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홍대광을 흘겼다.

“우리가 아무리 화산이랑 친하다지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어떻게 거부합니까? 지


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천우맹을 변호하는 게 아니라 방장의 입장을 천하에 나르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화산 놈들을 음해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퍼뜨리라고?"

“누가 그렇게까지 하자고 했습니까? 명에 따르지 못할 순 있어도 아예 반대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상부에 찍히면 분타주도 모가지 날아가는 겁니다. 몰라
서 그럽니까?”

“에이, 씨발.”

결국 욕지거리를 한 홍대광이 콧김을 확 뿜었다.

“거지보고 더럽다고 하는 놈들이 제일 웃긴 새끼들이야. 진짜 더러운 놈들이 저리 많


은데. 썩은 내가 진동한다! 썩은 내가!"

“말조심하십시오. 그러다 진짜 파문당합니다.”

“파문당하면 내가 뭐 갈 데가 없어? 화산에 입문하면 되지!"

"......안 받아 줄걸요?"

“뭐? 화산검협이 내 친구야, 이 새끼야!”

"화산검협도 그렇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홍대광이 옆에 놓은 몽둥이를 움켜잡자 동곽이 움찔하더니 얼른 목을 움츠렸다.

“에이, 씨!”

홍대광의 입에서 다시 쌍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장강의 유역. 섬서, 사천과 함께 천하에서 천우맹에게 가장 여론


이 좋은 세 곳 중 하나였다. 여기서도 여론이 반으로 갈린다면 다른 곳에선 어떨지 뻔
하지 않은가.

“아무리 사람 마음이 갈대 같고, 여론이야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거라지만...... 참 사


람들 매정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게 어디 천우맹을 싫어해서 그러는 거겠습니까? 불안해서 그렇지요. 불안해서.”

"뭐가 불안한데? 뭐가?"

“사실...... 천우맹이 유일하게 항주의 참화에 반응해 달려간 건 맞습니다만....... 그렇


다고 항주 사람들을 구해 낸 건 아니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홍대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뭐? 그게 뭐 잘못됐다는 거야?"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뭔 생각을 했겠습니까? 마교가 작정


하고 달려들면 자기들도 항주 사람들 꼴이 나겠단 생각을 하지 않았겠냐고요.”

이 말에 홍대광도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다들 쉬쉬하기는 하지만, 항주의 참화는 천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박멸된 줄 알았던


마교가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가장 충격이었던 건 그들
의 잔인한 손속이었다.

저 마교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천하가 어떤 꼴이 될지를 세상 모두가 똑똑히 알아 버


린 것이다.

“불안하고 겁이 나니까, 정파가 더 강해지길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사패련이나


마교가 쳐들어오더라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둘로 갈라져 있다고 그놈들 하나 못 이길까 봐!”

“아이고, 분타주, 평소에는 안 그러는 양반이 왜 화산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


게 정신을 못 차리십니까. 막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막말로 내가 뒈지고 나서
마교를 막아 내면 그게 뭔 의미가 있습니까.”
"......"

“사패련과 항주마화 덕분에 사람들도 알아 버린 겁니다. 정파가 힘이 없으면 내가 희


생될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정확히는 이제야 제대로 실감했다고 해야겠지요.”

그 말을 들은 홍대광이 대놓고 역정을 냈다.

“야, 이 새끼야! 그럼 더더욱 천우맹을 지지해 줘야지! 구파 새끼들이 언제 제 목숨 걸


고 양민들을 도우러 간 적 있어? 뒤에서 점잔만 빼면서 구경이나 했잖아! 지금 강남에
서 사람들이 사파 새끼들 때문에 고통받는 상황이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건데!"

“아니,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동곽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사실, 뭐....... 명분이야 저쪽에 있지 않습니까. 서로 대립하는 것보다는 화합하는 게


나으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게 원칙상으로는 옳으니까.”

“뭐, 인마?”

홍대광이 두 눈에서 불을 뿜었다.

“이 새끼야! 그런 게 다 조지는 거야. 원론적으로는! 크게 보면! 그딴 소리 지껄이다 다


말아먹는 거라고! 원론적으로 보면 어차피 사람은 다 뒈지는 건데, 뭐 하러 아득바득
살겠다고 입에 쉰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

"......"

“크게 볼 걸 크게 봐야지. 뭐든 크게 보면 다 해결이 돼? 그런 아는 척하는 놈들이 다


말아먹는 거라고!"

“......저한테 열 내지 마시고 사람들한테 가서 말씀하십쇼.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에이, 씨발.”

다시 한번 쌍소리를 내뱉은 홍대광이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어쩌지 못한 노기로 얼굴


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방주도 너무 늙었어. 지금 개방이 소림 말 듣고 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닐 상황이냐고!


진즉에 구파에서 나가 천우맹에 들러붙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어디 쉽습니까? 오대세가야 남궁과 당가가 모두 빠져 버렸으니 그렇다지만, 구


파에서는 아직 제대로 이탈한 곳이 없잖습니까.”

"......"
“처음으로 구파일방에서 이탈해 천우맹에 붙는 문파가 나오면 소림이 어떻게든 조지
려고 들 텐데, 그걸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특히나 우리 개방은 그거 감당 못 합니다.
다른 문파들이야 제 구역이 확실하지만, 우리 거지들은 천하 곳곳에서 빌어먹고 사는
놈들 아닙니까? 당장 하남에서만 쫓겨나도 몇천 명은 굶어 죽을 텐데.”

“그걸 누가 몰라!”

홍대광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새끼야. 굶어 뒈지는 게 무서워서 주둥아리를 닥치고 살면 그게 개방이냐? 진


짜 거지새끼지? 그게 먹고살려고 노략질한다는 사파 새끼들 논리랑 다른 게 뭐냐!"

“아니......”

“누구는 세상 남부러울 것 없이 돈 벌고 명성을 얻어도 양민 구하겠다고 사파 새끼들


이 득시글거리는 강남으로 뛰어가는데, 누구는 빌어 처먹을 밥 굶기가 무섭다고 늙은
너구리 새끼들 주구가 돼서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홍대광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개방에 들어온 게 아니었는데........”

“뭐 대단한 뜻이 있어 들어온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냥 거지라 들어오신 거면서.”

“에라!”

홍대광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다짜고짜 집어 던졌다.

“아악!”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동곽이 뒤로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일부러 염장 지르나! 너 오늘 진짜 뒤져 볼래?”

“어이쿠!”

동곽이 입구 쪽으로 얼른 내빼며 소리를 질렀다.

“여하튼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장로님이 탈방해서 분위기


흉흉한데, 여기서 헛짓했다가는 본보기로 조져집니다! 지금 개방이 마음에 안 들면
악착같이 버텨서 방주가 되고 바꾸면 될 일 아닙니까!”

“안 꺼져?”

“절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꼭입니다!"


그 말을 남긴 동곽이 밖으로 도망치듯 박차고 나갔다. 그가 나간 입구를 죽일 듯 노려
보던 홍대광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주가 돼서 바꾸긴 얼어 죽을.”

위에서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이미 진즉에 바뀌었겠지.

화산을 보고 알았다. 바꾸려고 한다면 기다려선 안 된다는 것을, '언젠가는'을 마음을


품은 채 참고 기다리다 보면 결국은 자신 역시 과거의 규칙에 순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냐, 화산검협."

새삼 청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가 무모하고 멍청하다고 할 때, 끝끝내 자신이 틀


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낸 그가 말이다.

“기분 더럽네.”

홍대광은 손때가 탄 궤짝을 열고 싸구려 화주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셔야 잠이 올 모양이었다.

1204 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4)

사내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굵은 땀방울이 연신 옆구리며 등허리를 훑고


지났다

하지만 사내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그는 칼날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해도 그 감각과 고통에 집중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유야 지극히 간단하다.

고통 따위야 순간적으로 스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물린 이


가 손등에 난 상처 따위에 고통을 느끼겠는가?

더구나 지금 사내가 마주한 이는 범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이였다.

"흐음."

나직한 비음이 새어 나오자 사내의 몸이 절로 흠칫 움츠러들었다.

"차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예? 아・・・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련주님"

"누구 있느냐?"
사내의 앞에 선 이가 부르기 무섭게 즉각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안으로 들
어왔다.

"차를 새로 내어 오거라. 따뜻하게 데워서."

"그리하겠습니다."

시비들은 사내의 앞에 놓인 찻잔을 회수하더니 공손한 움직임으로 방을 나섰다. 그 모


습을 보여 사내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혹여나 차를 마시지 않은 자신의 행동이 눈앞에 있는 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까 봐 겁이 난 것이다.

'흠."

그 순간 사내를 바라보는 눈이 초승달 같은 묘한 호선을 그려 냈다. 어떻게 보더라도


악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한 이가 편안할 리는 없었다.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단주님."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아니, 아니.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실로 부드럽고 정감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주님께서도 이 사람을 너무 겁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예! 물론......"

"제가 단주님께 해를 끼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구차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지 않


겠습니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 호의다. 그리고 그 표현도 그리 그릇되지 않았다. 문제가 있


다면 그 말을 하는 이, 패군 장일소 그 자체였다. 별 뜻 없는 말도 장일소의 입에서 나
오면 섬뜩한 말로 변하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단주라 불린 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장일소가 다시 작게 미


소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압니다만, 저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패악무도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나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온화한 사람에
가깝지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여 우물쭈물하던 사내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


았다. 장소의 눈매가 한껏 휘어졌다.

“믿기 어려우십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련주님! 미, 믿습니다!"

"하하하핫"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힌 장소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짝 턱을 괴더니 사내를 빤


히 응시했다.

"제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앞으로 단주님께 도움받을 일이 있어서입니다."

"...... 한낱 상인에 불과한 제가 련주님 같은 높으신 분께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


까."

말을 한 사내는 슬쩍 장소의 눈치를 살폈다. 장일소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


고만 있었다. 대답을 잘못 택했다는 것을 알아챈 사내가 즉시 말을 바꿨다.

"하, 하지만 제 미력한 힘이나마 련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소인분골쇄신을 마다


하지 않겠습니다! 모,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이 이상을 바랄 수 없이 과격한 충성의 맹세였다. 하지만 장소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


화가 없었다.

한참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던 장일소가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충성이라......"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

"상인의 말은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장일소의 눈빛은 여전히 온화했으나 그 시선은 흡사 살아 있는 독사처럼 사내의 전신


을 훑었다.

"또 그만큼 위험하고 허무한 것이지요."


순간 시내는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내의
뇌리에는 전동처럼 울려 퍼졌다.이 변덕스러운 마귀의 기분에 따라 수백, 수천의 목
이 순식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저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마, 망령된 입을 놀린 저 벌......"

"상인이 또는 것은 결국 이문."

"......"

"그렇지요?"

시내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팀이 배어났다.

장일소가 천천히 운을 뗐다.

"그간 장강의 상황 때문에 강남의 상인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


다. 사패련의 련주로서 사과드리지요."

장일소의 입에서 사과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그게 어찌 주님께서 사과하실 일이시겠습니까?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한 요. 용


단이었다는 걸 모를 이가 있겠습니까?"

"용단......이라. 쿡쿡쿡쿡."

용단이라는 말에 장소가 순간 못 참겠단 듯 조소했다.

"그리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어쨌든 저는 이문을 포기하고 사패련을 위해 희생


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하자는 말
이지요."

"......돕는다고 하시면?"

"간단하지요."

장일소가 손에 들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음


미했다. 건너편에 있는 이의 속이 타들어 가든 말든 딱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은 몸
짓이었다.

"단주님."

"예, 예! 련주님.."

"상인에게 필요한 것이 이문이라면, 저희 사패련에 필요한 것은 안정입니다."


"......안정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엇이든 기반은 단단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정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말을 꺼낸 이가 장일소이기 때문이리라. 그가


지금껏 걸어온 행보를 생각해 보면 '파격'이나 '급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안정이라
는 말은 조금도 어울리질 않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지금 강남 민초들의 삶은 그리 안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장일소가 살짝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사내는 놀라 그를 다시 보았다.

'이 사람이 정말 패군 장일소인가?'

물론 맞는다는 건 사내도 알았다. 천하에 이런 화려한 복색을 한 이가 또 있겠는가?


실사 이가 둘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곳 사패련에서 저 무시무시한 사파의 거두들을 숟
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장소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사내가 놀란 기색을 숨기질 못하니 장소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십니까?"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하하. 이상할 것 없습니다. 단주님 제가 사파의 수괴이며 수없이 사람을 죽여 살인마


인 건 분명히 사실이지요."

"......"

"하지만...... 그렇다 해서 굳이 쓸데없이 민초들을 핍박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강남에 바라는 것은 그저 안정과 질서입니다."

사내가 몇 번이고 입을 떼려다 다시 닫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종잡을 수 없는 장


일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서였다.

"그러니 요청 드리는 것입니다. 상인은 이문을 쫓는 존재. 그렇기에 때때로 잊고는 하


지요. 결국 이문이라는 것은 물건을 사 줄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사내가 생각할 때 즈음, 장소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


다.
"사패련이 강남을 장악한 이후 강남 상계가 곡식과 물품들을 몰래 숨겨 비축하고 있
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려, 련주......"

"아아."

장일소기 말을 끊지 말라는 듯 장신구 가득한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걸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시절이 하 수상할 때는 웅크리는


것도 방법이지요."

"......이해해 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순간 혼백이 달아났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사내는 이제 차라리 단칼에 목


을 쳐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장일소의 기름한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문을 쫓는 것도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곡식


을 풀지 않는 건 도를 넘어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단주님은 강남 상계에 영향력이 큰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경상단(南京商團)의 심


이경(沈二更)이라 하면 강남에서는 누구나 첫손에 꼽는 상인이라 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러니 가서 전하십시오. 창고에 모아 둔 곡식을 모조리 풀라고. 그리고 모아 놓은 다


른 물품들은 사패련으로 가져오십시오. 항주의 재건에 사용할 것입니다."

사내 심미경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마침내 장일


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눈앞이 아득하였다. 차라리 목을 베어 가라고 외치고 싶은
와중, 그의 귓가에 전혀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대금은 청구하십시오. 한 달 내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예?"

너무 황망한 나머지 심이경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값을 쳐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이 사람이 강탈이라도 해 갈 줄 아셨던


모양이지요?"
"그, 그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련주님!"

"하하하하하하하핫!"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장일소가 몸을 들썩이며 깔깔 웃었다.

"좋아요, 좋아. 다만...... 값을 너무 과히 치지는 마십시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을 좋


아하지만, 과욕을 부리는 이는 경멸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만민을 위하는 일에 어찌 과욕을 부리겠습니까!"

"흐음."

강일소에게서 얻은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이경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럼 그리 전하기만 하면......"

"그리고."

"예, 예! 련주님!"

"장강을 열어 드릴 테니, 강북과의 무역을 재개하십시오."

그 말에 심미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조건은 한 가지."

"......그게 무엇인지?"

"창고에서 꺼낸 곡식과 물품들이 큰 도시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사는 촌락에도


닿을 수 있게 하시면 됩니다."

"......"

"사람의 진실에 피가 통하듯 강남 전체에 물류라는 피가 다시 흐르게 하세요. 강북과


교역한 물품도 마찬가지로."

"그, 그리될 수 있다면 저희 역시 반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인이란 결국 물류를 통해


먹고사는 이들 아니겠습니까?"

심이경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남에서는 물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조금이라도 귀한 물건


이 도로로 나서면......"

"약탈을 한다?"
"그게......"

"감수하세요."

"예?"

심이경이 놀라 묻지 장일소가 나직이 웃었다.

"처음 한두 번이면 됩니다. 그 뒤로는 누구도 약탈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처음


물건에 손을 댄 놈들이 한 달에 걸쳐 살점 하나하나 뜯겨 가며 죽는 걸 보고 나면 말입
니다."

순간 심경의 등을 타고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그러니 단주님께서는 속히 상계를 움직여 천하 곳곳에 곡식과 물품들을 풀고, 그동


안 쌓아 놓은 것들을 강북으로 보내 이문을 취하십시오. 그 대신 그 이문의 대가가 강
남 전체에 닿도록 하십시오. 그게 사패련이 상계에 거는 조건입니다. 그 대가로 상계
는 강남에 한하여 제한 없는 상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련주님!"

"별말씀을."

장일소가 조용히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심이경의 마음속에 순간 작은 의혹이


떠올랐다.

"......그런데......"

"흐음?"

어쩌면 이건 심이경의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용기라기


보다는 위화감 때문이었다.

패군 장일소는 천하에서 가장 지탄받는 사파의 거두다. 그런 그가 사패련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제 돈을 풀어 강남의 굶주린 이들을 구하는 것이라니.
위화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심이경은 결국 묻고 말았다.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살짝 밀어 둔 채 말이다.

"어찌하여 이런 선정(善政)을......"

"이상합니까?"

"......"
"아니면 그러면 안 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만."

"어떻습니까?"

장일소가 짙게 웃으며 말했다.

"이 장일소가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지요?"

"나, 나쁜 사람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합니다! 가, 감히 그런 생각은 머리에 한시도


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유쾌하게 웃어 젖힌 장소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더니 미소 지었다.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이야. 천하가 저를 오해하는 와중에 단주님이라도 알아주시


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단주님은 이문을 쫒고, 저는 안정을 쫒으니, 서로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


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련주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도록 창백하던 심이경의 얼굴에 살짝 들뜬 기색이 떠올랐다.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쌓아 둔 물건을 팔 수 있게 되었


고, 막혀 있던 유통로를 다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에야 큰 이문이 남지는 않겠지만, 물류를 재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득이 아


닌가?

그리고 생각보다 장일소가 대화가 통하는 이인 걸 보면,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이문


을 취하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아. 참. 한 가지만 더."

"예?"

심이경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보았다.

곱게 호선을 빚은 장일소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더없이 섬뜩한 빛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상계에 잘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장일소가 본보


기 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

"사람이 돼지와 다른 이유는 은혜를 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은혜를 아는 이라면 호


의를 호의로 받을 터. 만약 내 호의를 그저 호의로 받지 못하는 이가 나온다면."

장소가 제 붉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단주님께서는 세상이 말하는 저와 진짜 제가 조금 다른 이라는 걸 다시 한번, 조금 다


른 의미로 알게 되실 겁니다."

심이경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온 차는 드시고 가십시오. 제 배려이니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핫!"

크게 웃으며 일어난 장일소의 뒤쪽에서 시비가 차를 내왔다. 그리고 심이경의 앞에 놓


아 두었다.

그날, 심이경은 그 차 한 잔을 한 시진이 넘도록 다 넘기지 못했다.

1205 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5)

넘치도록 따라진 술이 출렁였다.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장일소는 심드렁한 낮


으로 고개를 젖혔다.

"갔니?"

"예, 련주님. 지금 막 련을 빠져나갔습니다."

"쯧."

작게 혀를 찬 장일소는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저리 심약해서야. 상계에서는 알아주는 이라고 해서 조금 기대했건만."

"......웬만하면 맞장구를 쳐 드리고 싶습니다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 시진 만에 정신


을 차린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해 주고 싶습니다."

"음?"

"지금의 련주님을 독대한 것을 고려하면 말입니다."

"쯧쯧. 너도 요즘 슬슬 혀에 꿀을 바르는구나. 이러니 권력자가 타락하는 게지."

장일소의 힐난 아닌 힐난을 들은 호가명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치시겠습니까?"
"끄응."

슬쩍 앓는 소리를 흘린 장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상계의 거두라는 놈도 저런 머저리인데, 너를 대신할 이를 대체


어디서 구하겠느냐?"

그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심약한 건 그렇다 치고, 그래도 상인이니 머리는 조금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웠겠지요."

호가영은 가볍게 웃으며 심경을 거들었다.

저들이 보기에 련주님은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련주님이


재물을 털어 양민들을 구휼하겠다고 나서셨으니, 저들의 입장에선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러니 멍청한 거란다."

작게 혀를 찬 정일소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이득만을 추구한다는 상인이라는 놈이, 이득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뜻


이잖니."

"......"

"위정자들이 선과 질서를 내세우는 것은 위정자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멍청


한 양민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지. 그걸 이해했다면 저따위로 반응하
지는 않았을 터. 다른 이라면 몰라도 상인이라면 선과 질서가 이득이 된다는 걸 알아
야 하지 않겠니?"

호가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련주님께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저희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


다."

"엄살이 심하구나. 너라면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호가명은 쓰게 웃었다.
지배자가 폭군이 되는 이유는 욕심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멍청하기 때문이
다. 진정으로 욕심이 많은 왕은 법과 질서의 완벽한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게 왕에게 가장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 욕심에 따라 행동하고 질서와 법을 무시한다면 원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 혼란을 안정시키는데 막대한 힘과 자금이 소모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선을 지키고, 질서를 숭상하게 된다면 왕은 어떤 수고도 들이지 않고


그런 이들로부터 이득을 뽑아낼 수 있다. 가혹할 정도로 말이다.

"저 정파놈들에게도 배워야 할 건 배워야지. 선이나도 그리고 질서와 협의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진 이들은 당장 배곯아 죽어가면서도 함부로 타인에게 칼
을 들이대지 않거든."

"......"

"늑대를 먹이로 길들여 개로 만들듯이, 사람은 선으로 길들여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저 잘난 정파놈들도 수틀리면 사람 죽이는 칼을 선의 수단이라고 지어 대는데, 내가


저들의 선을 무기로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더냐?"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사패련이 창고에 쌓인 제물을 모조리 물어 양민을 구했다는 소문이 터진다면, 강남의


양민들은 앞으로 뿐만해서는 패션이 하는 일에 쉽사리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장일소가 강호인들에게는 잔인하지만,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없


이 자비롭다 여기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훗날 그들이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정파와
도 적대하게 될지 모른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장일소나 사패련에게는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그런 막대한 이


득을 돈과 타인을 부려 얻어 낼 수 있다면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만......"

호가영이 피식 웃었다.

"조금 우습기는 합니다. 이대로라면 련주님께서 천하제일의 협의 지사로 불리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광소를 터뜨렸다.

"협의지사? 하하하하핫.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으하하하하하하하핫! 그럼 나는 광동


패협(廣東覇俠)이 되는 건가?"

장일소는 아예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기 힘들단 걸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위선과 선은 단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평생 위선을 행하다가 자신


의 선이 위선이었음을 밝히지 않고 죽어 버린다면, 그는 결국 평생 선을 행한 선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장일소가 어떤 뜻으로 선을 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선에 도움받은 이들이 장일


소를 칭송하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그는 훗날 정말 협의지사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하하핫. 좋구나. 협사라...... 협사, 근사한걸?"

"그렇게 웃으실 일만은 아닙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농담이 아닙니다."

"음?"

강일소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가명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협의지사의 의미가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여 타인을 돕는 이라면, 지금도 딱히 틀


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패련의 재정이 충분하다고 하나, 이 일에는 천문학적인 비
용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쯧. 쫌생이처럼 구는구나."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금대부, 그 돈귀신 놈이 모아 놓은 재물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고 남을 정도잖니."

그 말도 분명 사실이었다. 흑귀보가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단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


었다. 소금 밀매로 그들이 축재한 돈은 만인방이라는 거대 집단의 재정을 관리하던 호
가영조차 아연실색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련주님. 시련은 거대한 단체입니다. 지금 당장에 버틴다지만 모아 놓은 돈을 쓰면서


버티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
호가명의 우려에도 장일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곡식과 물품들을 사들이는 데 쓰거라."

"련주님, 그러다......"

"쯧쯧. 가명아. 답답하게 굴지 말고 생각해 보자꾸나."

장일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호가명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돈이 무엇이더냐?"

"......예?”

“황금은 또 무엇이고?"

“그건......”

무언가 대답하려던 호가명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장일소의 입가에 의미심장


한 미소가 서렸다.

“그래. 알겠니?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 가치를 만드는 것은 그저 사


람이지. 사람 간의 약속이 없다면 돈이란 쓸모없는 종이 뭉치이고, 황금은 칼 한 자루
만들 수 없는 무른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

“굶어 죽어 가는 이에게 황금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제아무리 집채만 한 황금이


라고 해도 굶주린 이에게는 쌀 한 톨만 한 가치도 없는 법이지 않니.”

“......그러합니다.”

“곧...... 그래. 곧 올 거란다.”

장일소의 얼굴에 일순 귀기가 어렸다.

"산처럼 쌓아 올린 전표보다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한 홉의 쌀이 더 중요한 시대


가, 강처럼 흐르는 황금보다 날 세운 칼을 만들 수 있는 녹슨 철이 더 귀한 시대가!”

그런 장일소를 바라보며 호가명은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장일소는 피처럼 붉은 입술을 검지로 천천히 가로 그었다.

“그때가 오면, 세상이 옳다 믿던 것은 바닥에 처박히고, 세상이 천하다 여기던 것은 하


늘로 오를 것이다.”
마귀 같은 미소를 지어낸 그는 음산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시대...... 세상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불태우는 시대가 곧.......”

장일소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 내 손에서 시작될 거란다.”

호가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다수에게 '안정'이라는 두 글자는 평화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안정


은 그런 게 아니다. 이 남자가 안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등 뒤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 그래야만 적을 부수고 죽이는 데 전념할 수 있으므


로.

장일소가 행하는 것은 더없는 선이다. 하지만 그 선의 결과는 결국 더없는 악으로 이


어진다. 지극히 온당한 선을 행하여 지극히 무도한 악의 체제를 구축하는 행위를 대체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

아니, 칭할 필요가 없다.

'무의미하니까.'

장일소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


루기 위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그저 행한다.

세상을 얻기 위해 협을 행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할 것이고, 더없는 죄를 저질러야


한다 해도 추호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저 욕망뿐이다. 순수할 정도로 검게 불타는 욕망.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말끔히 살기를 지운 장일소가 가볍게 호가명의 어깨에 손


을 얹었다.

그때 필요한 건 재물 따위로는 얻을 수 없단다. 그러니...... 그 재물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가 되어 버리기 전에 다 써 버려야 하지 않겠니?"

“......이해했습니다.”

“좋구나.”

탁. 탁!
호가명의 어깨를 두 번 가볍게 두드린 장일소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탁자로 다가가
탁자에 놓인 잔을 들었다. 단숨에 술을 털어 넣은 그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지."

"......예?”

장일소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슬슬 거슬리는구나. 나는 내 등 뒤에 놓인 칼을 계속 놔둘 만큼 인내심이 깊지 못해서


말이다.”

“해남 말씀이시로군요.”

곧장 이해한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구파일방과 천우맹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


어졌다는 소식을 막 입수한 참입니다.”

“흠?”

“이리된다면 저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쉬이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해남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처지일 뿐이지요.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네가?”

“해남 따위에 련주님이 직접 나서시게 해서야 제 면이 살지 않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흐음......”

장일소가 살짝 비음을 흘리며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좋겠지. 네 뜻대로 하려무나."

“감사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였던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장일소는 어느새 그에게서 관


심을 거두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깊게 잠긴 모양으로 움직임이 없었다.

호가명은 장일소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소리를 죽여 방을 나섰다. 방에


서 충분할 만큼 멀어진 뒤에야 그는 조금 속도를 높여 걷기 시작했다.

'해남이라.......’

호가명의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그동안은 장강에 진을 친 이들에게 움직일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냥 두었을 뿐이
다. 사실 사패련의 힘이라면 해남 정도는 언제든 쓸어 버릴 수 있었다.

'매화도에서 받은 굴욕을 갚아 줄 때도 되었지.'

이건 단순히 구파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그 성과다 사정하는 모든 놈들에게 사패련에 대항하는 이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똑똑


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사파의 방식으로 말이지.”

찬 미소를 흘린 호가명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발끝에 묘한 흥분이 묻어나기 시작했


다.

1206 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1)

권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고, 수많은 이들을 파멸로 밀어 넣었다. 권력이란 무릇


양날의 검과 같아서, 잘못 휘두르는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그에 매달리는 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질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곳, 화산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젊은 검수는 지금 자신이 가진 권력이 과


연 길가에 널브러진 돌멩이만큼의 가치라도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거 챙기고, 이거도 챙기십쇼.”

“……고맙다.”

“가기 전에 잊지 말고 저한테 들러서 노자도 받아 가시고요.”

“그래. 잊지 않으마.”

“물 바뀌면 애들 배앓이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소소한테 말해서 약 챙기라고 하


십시오.”

“뭔 무인이 물이 바뀌었다고 배앓이를…….”

“그러다 애들 탈이라도 나면 사형이 책임지실 겁니까?”

“……말해 둘게.”

“쯧.”

……불편하다.
물론 백상이 항상 편하기만 한 사제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백상은 백자 배 중 둘째로,
백천이 당연히 존중해 줘야 할 위치였다. 게다가 예전에는 그의 수족으로서 수많은 일
을 해 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백천도 어느 정도는 백상의 눈치를 살피던 편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


느끼는 이 불편함은 조금 궤가 달랐다.

“그…… 상아.”

“왜요?”

“……아니다.”

백천을 노려보던 백상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물품들을 뒤적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뭔 선불 맞은 황소 새끼도 아니고…….”

“…….”

“눈만 돌리면 일 저지르고, 눈 돌리면 또 일 저지르고!”

“…….”

“그거 수습은 다 누가 하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나이에 재경각주 되게 생겼네.”

“그…… 그냥 내가 장문대리를 맡는 것뿐이지. 너희가 딱히 뭔가 달라지지는…….”

백천이 말문을 닫았다. 백상이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백천의


면전에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굵은 철사에 꿰인 열쇠 꾸러미를 본 백천의 얼굴이 살짝 묘해졌다.

“이게 뭔 줄 아십니까?”

“……열쇠 같은데?”

“광이랑 창고! 식량이랑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 열쇠들입니다! 열쇠요!”

멍하니 열쇠 꾸러미를 바라보던 백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중간에 있는 작은 열쇠는 뭐냐? 왜 열쇠에 금칠을…….”

“예. 잘 보셨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백상이 눈을 희번덕대며 언성을 높였다. 그 기세에 백천이 움찔 한 걸음 뒤로 물러났


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내, 내가 물었잖아…….”

“금고 열쇠입니다, 금고! 현영 장로님이 어딜 가든 신줏단지 모시듯이 업고 다니는! 현


영 장로님 방 안에만 있는 문파 금고! 그 금고 열쇠요! 장로님이 저 섬서에서 여기까지
가져온 화산 금고 열쇠!”

“…….”

“평생 한시도! 심지어는 목욕을 할 때도 입에 물고 하시던 그 금고 열쇠를 저한테 넘기


신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알지. 왜 모르겠니…….

“장로님들은 벌써 업무 넘길 생각에 희희낙락하고 계신데, 막상 일 저지른 사람만 머


리에 꽃밭이 펼쳐져서는!”

“미, 미안하다.”

“에이, 진짜!”

백상이 콧김을 킁 내뿜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쫄아 버린 백천이 양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았다.

“이십 년은 지난 후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내가 장로라니. 아이고, 위장이야…….”

백천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이들이야 그냥 장로랍시고 거들먹거리면 되고 적당히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되


지만, 백상은 경우가 많이 달랐다. 그는 현영에 이어 재경각의 각주가 되어야 하는 사
람이니까.

화산에서 업무적 부담으로 따진다면 비빌 곳이 없는 재경각이다. 당연히 재경각의 각


주 자리에 강제로 올라야 하는 백상의 위장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응?”

현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한다.

“무각주 자리는 정하셨습니까?”


“무, 무각주?”

“예! 무각주!”

“그거야, 어……. 현상 장로님이 내려오신다면 아무래도 운검 사숙이…….”

“운검 사수우우우우우욱?”

백상이 다시 눈을 까뒤집자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장문인이 백천이고, 재경각주가 백상인데! 무각주가 운검 사숙이요? 아무리 문파가


거꾸로 돌아간다지만, 무도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 사숙에게 보고를 받겠다는 겁
니까? 예?”

“그, 그럼 안 되지! 그렇지!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럼 누굴 올릴 겁니까?”

“그건…….”

백천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백상은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께를 쥐어


뜯었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말을…….”

“…….”

“사형.”

“으…… 응?”

백상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제 말 똑바로 들으십시오.”

사뭇 진지한 목소리에, 백천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어질 말이 장난


으로 흘려들을 만한 게 아닐 것 같아서였다.

“사형의 머릿속은 지금 강호의 정세와 천우맹의 앞날, 그리고 각 문파 간의 관계로 복


잡할 겁니다.”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 지금 그는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머


리는 백상이 말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지요. 큰 일을 두고 작은 일에 신경을 쓸 수는 없
는 법이니까요.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백상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가화만사성이라 했습니다.”

“…….”

“선인들께서 제 손에 닿는 곳부터 신경을 쓰라 하신 이유는 발밑이 안정되지 않으면


뛰어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형이 정말 화산을 잘 이끌고자 하신다면, 당장 손에
닿지 않는 먼 일보다 가까이 있는 일부터 제대로 살피셔야 합니다.”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백상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게 되면 내가 이런 말을 안 하겠지. 에이!”

“…….”

“해남 가는 길에 이거 읽으십시오.”

백상이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냐?”

“장부입니다. 화산의 재정출납부!”

백천의 얼굴이 살짝 떨떠름해졌다.

“이걸 굳이 내가 볼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하는 일인데, 나는 그냥 너를 믿고…….”

“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백상이 버럭 호통치자 백천이 움찔하며 찔끔 목을 움츠렸다.

“사람을 믿는 건 믿는 거고, 일은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자금은 문파의


핏줄과도 같은 겁니다! 혈관이 막히면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이!”

“그, 그렇지.”

“그럼 적어도 문파의 수입이 어떻게 되고, 지출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중간에 새는
돈은 없는지, 장부 정도는 볼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딴마음 먹고 돈을 빼돌리
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백천이 아무 말을 못 하자 백상이 작게 혀를 차더니 품에서 책자 하나를 더 꺼내 백천


의 손에 얹었다.
“그리고 이것도 보십시오.”

“……이건 또 뭔데?”

“백자 배와 청자 배 애들 인적사항이랑, 성향, 무공 수위 같은 걸 분류해서 정리해 둔


겁니다. 문파는 문도가 근간 아닙니까. 장문인은 문도 하나하나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 아니, 백상아. 네 말에 틀린 건 없다. 다만 지금 내가…….”

“아, 당장 할 일이 아니라고요? 장문대리니까?”

“…….”

“속 편한 소리 그만하십시오. 누군 제가 이러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창고 열쇠 들고


다니기까지 십 년은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넘어오는 데 일 년도 안 걸립디
다!”

“빠, 빠르네.”

“화산의 일이 상식적인 속도로 진행된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사형이 장문대리 호칭


을 떼고, 진짜 장문이 되기까지 일 년도 안 걸립니다. 아시겠습니까? 거꾸로 말하면
사형은 지금부터 일 년 내에 장문인 업무에 완전하게 통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맞는데…….”

“지금 장문인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딱 그 말을 하려 했던 백천이 다시 입을 합죽 닫고는 공손하게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건 권리는 누리고, 책임을 피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애들이 사형을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그건 저부터 용납 못 합니다!”

“그, 그래. 내 노력해 보마…….”

“그러니까 지금 준 장부와 인명록 완벽하게 달달 외우시고!”

백상의 품 안에서 다시 책자가 쑥 뽑혀 나왔다.

“또, 또 있……. 잠깐만.”

“이건 장문인께서 대외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화산의 사업장 정보와, 지금 화산이 벌


이고 있는 사업들에 대한 대략적인 얼개를 정리해 둔 것.”

“아니, 뭔 품에서 책이 계속 나와?”


저걸 다 넣고 있었다고?

“이건 은하상단과 유령문을 비롯한 화산과 연대하는 곳들의 대략적인 정보와 내부 조


직도!”

“…….”

“그리고 이건…….”

턱! 턱! 턱! 턱!

순식간에 양손에 탑처럼 책자가 쌓였다. 백천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충 이 정도만 보시면 화산이 어찌 돌아가는지 감은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최소


한의 정보만 추린 것들이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머리에 쑤셔 넣으십시오!”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산의 장문인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하는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고…….

‘이건 원래 내가 당연히 알았어야 하는 것들이구나.’

그걸 지금까지 백상이 대신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단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


고 묵묵히.

그 사실을 깨달은 백천의 얼굴이 굳어지자 백상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다른 소리를 늘


어놓았다.

“뭐…… 물론 좀 많기는 한데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사형은 알아 두시는 거고,


실제로 그걸 관리하고 운영하는 건 제가 할 일이니까요.

”백천은 새삼 백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건만, 백상은 백천이 수많은 업무에


질려 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시라니까. 대외적인 업무 때문에 바쁜 건 알고 있습니다. 안


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지만, 그래도 알고는 계시라는 겁니다. 그 정도는 하셔야 훌
륭한 장문인이…….”

“상아.”

“예?”

“……고맙다.”

순간 멍하니 있던 백상이 입술을 실룩였다.


“뭔 이상한 말을……. 여하튼 그거 다 숙지하십쇼. 저는 이제 식재 관리하러 가야 됩니
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백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나가 버렸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백천은 책자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것


을 펴 들었다.

그 순간,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새로 쓴 책이다.

원래 있던 것을 보라며 찾아다 준 것이 아니라, 한 자 한 자 새로 쓴 것이다. 살펴보니


책자들이 다 그랬다.

천우맹의 맹도들을 먹이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 백상이 아니던가? 보나 마나 이 책


자들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아직 채 다 마르지도 않아 먹 냄새가 진동했다. 백천은 눈을 떼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


라보다 책장을 덮었다.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망할 놈 같으니…….”

책임은 백천만 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아가는 만큼, 다른 이들도 그만큼의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간다. 모두가 그 무


게에 익숙해졌을 때,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화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실망시키지 않으마.’

백천은 굳은 다짐을 다시 한번 새기며 책자를 모두 챙겨 들었다. 그리고 창고 문을 열


려던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니이이이이, 목검은 무슨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그걸 왜 그렇게 막 써 대고 있어!


그리고 내가 대련할 때 의복 안 찢어지게 조심하라고 했지? 이 새끼들이 진짜 옷이 때
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나!”

“아, 아니, 사숙……. 대련을 하는데 어떻게…….”

“뭐? 너 이 새끼 지금 반항하는 거야? 돈 한 푼 못 벌어 오는 식충이 같은 것들이 어디


서 사숙들이랑 사형들이 몸뚱이 하나로 벌어 온 피 같은 돈을 귀한 줄 모르고 막 써
대!”
“자, 잘못…….”

“화산에 돈이 영원히 펑펑 쏟아질 것 같아? 청자 배 놈들은 고생을 덜 해 봐서 그래?


왜 돈 귀한 줄을 몰라! 나 때는 옷 한 벌도 수십 번을 꿰매서 입고! 목검 한 자루도 직접
산에 올라가 나무 베어다 깎아 썼는데! 하여튼 요즘 것들은 정신이 글렀어!”

“잘못했습니다, 사숙!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내가 지금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잖느냐! 엉? 애초에 그 돈이 다 네 장문대리


와 청명이 놈이 칼 맞고! 장력에 얻어맞아 가며 벌어 온 돈인데! 그걸 너희가…….”

“히이이이이익!”

연이어 귀를 찔러 오는 송곳 같은 잔소리를 묵묵히 듣던 백천은 잡았던 문고리를 조심


스레 다시 놓았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읽어야겠지?”

그리고 좀 조용해지면 나가자…….

조용해지면…….

1207 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2)

현종이 안쓰러운 눈으로 눈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수심 가득한 그와는 달리,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의 표정은 더없이 담담했고, 그래서


속이 더 쓰렸다.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이구나.’

돌이켜 보면 백천의 지적은 정확했다. 현종은 분명 백자 배와 청자 배에 대한 과한 책


임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했던 것들을 누리게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정말 아끼고 보호해야 했던 이들은 백자 배나 청자 배가 아


니라, 바로 운자 배 아니던가?

물론 백자 배와 청자 배는 몰락한 화산에 입문했기에 안쓰럽고 안타까운 존재였지만,


운자 배는 그 몰락의 여파를 전신으로 맞은 이들이다. 그래도 아직은 여력이 있던 세
가 일시에 기울고, 풍비박산이 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끝끝내 화산을 지켜 내지 못
했다는 절망까지 떠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현종은 운자 배를 백자 배나 청자 배처럼 아껴 주지 못했다.


‘참으로 못났구나.’

가세가 기운 집에서 가장 힘든 이가 장남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눈은 막내


에게서 떼지 못하는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장
남에게 해 줄 것이 없게 된 못난 가장 말이다.

“정말…….”

말문이 막히는지, 목이 메는지, 살짝 머뭇거린 현종이 물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어찌할 수 없는 잔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에, 운암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새삼스럽습니다, 장문인.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너에게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이 녀석아. 이런 일을 장문인인 나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이렇게 덜컥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무지 상의를 드릴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래도 했어야지, 그래도.”

운암이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현종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운암이 답답해서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운암에게 하고 있는 말이 나이가 들어 고집만


남아 버린 노인의 투정과 다를 바 없게 느껴져서다.

“이놈아……. 장문인 자리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었더냐?”

“아니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운암이 담담히 미소를 짓는다.

“화산의 장문이라는 자리는 막대한 책임감과 능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문


파에서 가장 훌륭한 이만이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습니다.”

“…….”

“그렇기에 제 자리는 아닙니다, 장문인.”

“아니라니!”
결국 참지 못한 현종이 버럭 역정을 냈다.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무엇이 부족하기에 네 자리가 아니라고 하더냐? 당연히 네가


올랐어야 할 자리거늘!”

“장문인.”

운암이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작게 한숨 쉬었다.

본디 그는 무른 사람이 아니나, 현종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인지 자꾸만 몸 둘 바


를 모르게 되었다.

“저를 그리 대단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건 무슨 말이냐?”

“지금이 평범한 시대였다면, 태평성대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적당하게 흘러가는 시


대였다면, 저도 당연히 장문 자리에 욕심을 내었을 겁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현종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조금의 미련이라도 보일 법


한데, 운암에게서는 미련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탈속한 도인? 아니, 그런 건 아니다. 탈속한 도인이라면 장문인의 자리 역시 무가치하


다 느껴야 할 터.

지금 운암은 화산 장문이라는 자리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연연


하지 않는 것이다.

현종은 그 사실이 더없이 대견하면서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다.

“다가올 시대에 화산을 이끌어야 할 이는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워야 하고, 누구보다


판단이 빨라야 합니다.”

운암이 미소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장문인.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충분히 참고, 기다리고, 고심 끝에 좋은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면 저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역할은 어렵습니다.”

“야, 이놈아……. 왜 그렇게만 생각하느냐? 저 아이들이, 네 사형제들이 너를 도우면 될


일 아니더냐? 나는 뭐 대단한 이라서 화산의 장문을 하고 있다더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장문인.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운암이 작게 웃었다.

“착한 아이들입니다.”

“…….”

“저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장문인이 되지 못했단 사실이 아닙니다. 생각하던 길과 제


가 걷게 될 길이 달라져 앞으로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저를 곤란
하게 하는 건, 저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문파 아이들의 눈입니다.”

“…….”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참 착해 빠져서는…….”

현종이 눈을 딱 감았다. 애초에 그도 알고 있다. 설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운암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화산 제일의 고집쟁이다. 그런 면이 없었다면, 아직 애착


이 강하지 않았던 화산에 남아 그 맥을 이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러니 한번 정한 마음은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운암아.”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실 필요 없습니다, 장문인.”

“…….”

“자꾸 못 해 준 것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는 눈이나, 부


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은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저의 입장은 또 다르지 않겠습니
까?”

운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문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제가 불행한 건 아닙니다. 저는 화산의 문도일 수 있어


서 더없이 행복합니다.”

“…….”

“그리고 장문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화산에서 해야 할 일이 사라진 것도 아닙


니다. 어쩌면 저는 장문인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지요. 백상이 녀석
혼자서 문파를 운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아시다시피 백천이 놈이 강단은
있지만 그런 부분에는 영 소질이 없지 않습니까.”

“운암아…….”
“장문인.”

운암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의 저는 매화가 되고 싶었습니다.”

“…….”

“장문인께서 버티신 인고의 세월을 이어받아, 화려하게 피어나는 매화가 되고 싶었습


니다. 장문인의 겨울을 끝내는 이가 되고 싶었지요.”

운암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결국은 알게 되더군요. 그 역할은 제 것이 아니고,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현종이 나직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반면 운암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래서 저는 뿌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꽃이 화려하게 피기 위해서는 그뿌리가 튼튼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 뒤를 이을 아이들이 더없이 고운 꽃을 피워
준다면, 흙 속에 파묻혀 있다 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했습니다.”

“장문인이란 그 뿌리 같은 자리다, 운암아.”

“예, 그렇지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뿌리조차 제 역


할은 아니었다는 걸 말입니다.”

현종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 꽃도 되지 못하고 뿌리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운암은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장문인의 눈빛에 서린 감정을 눈치챈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장문인.”

“그래.”

“그래서 이제 제가 무엇이 되려는지 아십니까?”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

운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젊은 시절에는 몰랐습니다. 가슴을 호승심으로 채우고, 패기를 잃지 않으려 애쓸 때


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커다란매화나무뿐이었지요.”

“…….”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화산은 매화. 하지만 그 어떤 매화도 뿌리 내릴 터전이 없이는
피어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현종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저는 흙이 되려 합니다. 저 아이들이 뿌리 내리고, 더없이 고운 꽃을 피워


낼 수 있는 터전이 되려 합니다. 흙이 매화는 아니지만, 흙 없이 어찌 매화가 필 수 있
겠습니까? 그 역시 중요한 역할이지요.”

현종이 눈을 감았다.

도기(道器).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현종 역시 문파의 흥망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진짜 화산


의 도를 일궈 낼 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만약 지금이 평온한 시대였다면…… 운암은 분명 화산의 도를 천하에 떨칠 장문이 되


었으리라. 선대와 후대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장문인이 되었을 것이다.척박한
대지에 피어난 꽃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화산의 척박했던 세월은 어느새 운암으로
하여금 도(道)라는 꽃을 피워 내게 한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백천이가 장문이 되어 화산의 명성을 널리 떨친


다면 그 역시 저의 공이고, 윤종이가 장문이 되어 화산의 도를 널리 떨친다면, 그 역시
저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청명이는?”

“말 같은 소리를…….”

“…….”
“…….”

“크흠, 그래.”

나직이 헛기침한 현종이 안색을 정비하고는 다시 운암을 똑바로 보았다.

“너는 그것으로 괜찮겠느냐?”

“일은 갑작스러웠지만, 아시다시피 오래도록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청명이 녀석이 화산에 들게 된 데도 저희가 알지 못하는 이
치의 흐름이 있었겠지요.”

“…….”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게 두면 될 일입니다, 장문인. 자연스러운 것을자연스럽지 못
하다고 여기는 건 그저 사람의 욕심 아니겠습니까?”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

“네가 도인이구나. 네가 도사고.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란다.”

운암이 작게 웃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부끄러워 마시고 자랑스레 여기십시오. 장문인께서 지금의 저를


만드셨고, 지금의 화산을 만드셨습니다. 선대도 분명 그리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 내 그러마.”

현종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운암의 입장을 이해했고,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이조차 순리라는 것도 모


두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못내 가슴에 미련이 남는 것은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과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게 이다지도 힘든 일이구나. 그렇기에 등선이 지난한 것이


겠지.’

현종은 운암을 부드럽게 불렀다.

“운암아.”

“예, 장문인.”

그리고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화들짝 놀란 운암이 현종의 어깨를 잡아 세웠


다.

“왜, 왜 이러십니까, 장문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고맙구나.”

“…….”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그 이전에 한 사람의 도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


말하마. 그저 고맙구나.”
운암은 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그저 담담하기만 했던 그도 이 순간만큼은 가
슴속에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와서.

“화산의 모두가, 그리고 훗날의 화산도 지금의 너를 기억할 것이다. 진정으로 도를 좇


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네가 후대에 알려 줄 것이다.”

운암이 잠깐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현종은 말없이 그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삶의 대부분을 함께해 온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침묵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조금 긴


시간이 지나도록…….

1208 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3)

“으라차아아아아!”

카가가가강!

당패의 눈이 확 일그러졌다. 당잔의 비도를 막아 낸 손목이 시큰거려 왔기 때문이다.


아직 부르르 떨리고 있는 제 비도의 끝을 슬쩍 본 당패가 말했다.

"...... 어째 힘이 넘치는구나?"

“후후후후, 당연한 일 아닙니까, 형님.”

“당연하다고?”

“보십시오. 백천 도장이 마침내 화산의 장문대리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천우맹에 있겠냐마는, 그 일과 너의 활력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렇게 늦으셔서야......”

“응?”

당잔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천우맹에 남궁 소가주님이나 설 궁주님처럼 젊은 문주는 있어 왔지만, 백


천 도장의 경우는 또 명백하게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바로 선대께서 아직 정정하심에도 그 자리를 물려준 최초의 사례라는 거지요.”

그 말을 들은 당패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네 활력이랑 왜 상관이 있느냐?"

“아이고 형님 가주 되실 분이 그렇게 파악이 늘으셔서 어떻게 합니까? 이번 사건은 단


순히 화산의 장문인이 교체된 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천우맹 전반에 걸쳐 세대
교체가 시작되는 겁니다."

“으으응?”

당패는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당잔이 흐흐 소리 내어 웃었


다.

“다른 문파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으면 그냥 그 문파의 일로 끝났겠지만, 화산에서


벌어진 일은 그냥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아마 다른 문주님들도 이제는
다음 세대에 대한 생각을 안 하실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럴 때 눈에 띄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때 잘하면 가주님의 눈에 들어


서 단숨에 요직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겁니다!”

멍하니 듣던 당패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잔아.”

“예?”

“.......개소리하지 말고 하던 거나 잘해라.”

“형님.”

“왜?”

“주변이나 한번 보십시오. 지금 누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지."

"응?"

당잔의 고갯짓에 따라 당패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압!”

“받아라아아아아아!”

내력을 다소 과하게....... 아니, 많이 과하게 실은 암기들이 맹렬한 속도로 허공을 가르


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대련에 열과 성을 다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눈이 맛이 갔네, 눈이.'

저 희번덕대는 눈빛들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이들이 품은 흑심을 짐작할 수 있을 것


이었다. 할 말을 잃어버린 당패의 귓가에 이죽대는 당잔의 목소리가 닿았다.

“뭐...... 소가주님의 생각처럼 가주님께서 별 뜻 없으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


놈들이 하나같이 저러고 있는데 정말 그냥 무시하실 수 있을까요?"

당패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미친놈들이......'

아무래도 단체로 정신줄을 놓아 버린 모양이다.

“아아아아악! 이 새끼가 진짜 비도를 쑤셔?”

“못 피한 쪽이 잘못이죠!"

“오냐! 어디 해보자!"

당패는 아연실색하여 눈앞의 광경을 보다 몸을 획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여기 있다가는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포기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형님.”

“개소리하지 마라!”

질린 얼굴로 후다닥 연무장을 나선 당패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


다. 상대의 표정을 본 그는 순간 동병상련과 떨떠름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쪽도?"

“.......당가도 장난 아닌 모양이군요."

남궁도위와 당패가 서로 마주 본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가주라는 위치도 같겠


다. 사석에선 형 동생처럼 지내며 제법 가까운 두 사람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맹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남궁도 그러한가?”
“아시다시피 제가 매화도 이후 가문을 수습하는 데만 전력을 다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러다 보니........ 예전에 돌아가신 장로님들이 맡고 있던 직위들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는데........”

당패가 눈을 딱 감았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짐작이 갔다.

“갑자기 이놈들이 제 앞에서 검을 휘둘러 대질 않나, 식당에서 밥 먹다 말고 검을 뽑아


대련해 대질 않나, 오밤중에 고함을 질러 가며 수련해 대질 않나.......”

"...... 거긴 우리보다 더 심하군.”

“당가는 좀 나은 모양입니다.”

“우린 공석은 없으니 말일세....... 모르지. 가주님이 겪는 건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이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쁜 일은 아닌데.”

“그러게. 좋은 일인데.”

사실 문도들이 열정을 가지고 수련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건 문파를 이끄는 이의 입장


에서는 반길 일이었다.

“......좀만 덜 과격하면 좋을 텐데."

“그러게나 말일세."

문제는 이놈들이 도무지 정도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사실 당가도, 남궁도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당가는 암기와 독을 다루는 특성상 문파의 성향 자체도 신중하고 침착한 쪽에 가까웠


다. 그리고 남궁세가 역시 정도의 대표 가문답게 진중함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는
데.

“이게 다......”

"화산 때문이지요.”

둘은 벌써 세 번째로 마주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둘만큼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할 이


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네도 도망 나오는 길인가?"

“예? 도망이라니요. 저는 지금 연무장으로 가는 길인데.”

“...... 도망 나오셨습니까?"

“크흠. 그런 게 아닐세. 남궁이 수련을 하고 있으면 나도 한번 견식 해 봐도 되겠는


가?"

“...... 그러시죠.”

살짝 미묘하게 바라봐 오는 남궁도위의 시선을 외면하며 당패는 빠르게 걸었다.

"...... 이쪽입니다.”

“아네! 안다니까?”

장원 반대쪽의 공터로 향하는 와중 그들의 시야에는 많은 것이 들어왔다. 냉기를 풀풀


뿌리며 검을 날려 대는 빙궁도들, 또 대낮부터 웃통을 까고 울룩불룩한 근육으로 힘자
랑을 해 대는 야수궁도들......

'똑같네.'

'같은 것들이네.'

이쯤 되면 그냥 다들 한 문파로 합쳐도 되지 않을까?'

배우는 무학만 다르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것들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두 사람의 눈에 문득 이상한 광경이 걸렸다.

“응?”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쯤 한창 수련 중이어야 할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서 연무장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 지금 다들 뭘 하고 있느냐?"

“아? 소, 소가주님!”

서 있던 검수들이 화들짝 놀라 남궁도위를 돌아보았다.

“수련하러 간다더니?”
남궁도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먼저 수련하러 갔던 이들이 시간 낭비 하는 모습을 보
았음에도 화를 내지 않은 까닭은, 연무장으로 출발하던 이들의 기세가 대단했었기 때
문이다. 분명 용이 나타나도 단숨에 때려잡아 탕을 끓여 먹을 기세였는데......

“저, 저기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응? 그건 무슨 소리냐?"

“설명하기가 좀 힘듭니다. 직접 보셔야......”

남궁도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인파를 파고들었다.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슬쩍 들이민


그 순간.

“꾸웨에에에에에에에엑!”

쿠웅! 쿠웅! 쿠웅! 쿵!

앞쪽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바닥에 연이어 처박히더니 이내 처참하게 널브러졌다. 널


브러진 것, 아니. 널브러진 이의 정체를 확인한 남궁도위는 기겁하여 외쳤다.

“조, 조걸 도장!”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조걸은 새하얀 게거품을 부글부글 물고 있었다.

“주, 죽었나?”

“그런 것 같은데?”

“아, 아니, 이게 뭔 ......”

당황한 남궁도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천우맹에서 가장 강대하며 이제는 천하가 인정하는 강자인 화산의 검수들이 처참하


게 널브러진 모습을.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 사이에 서 있는, 거대한 악의 존
재를.

'처, 천마......?'

아니, 그럴 리가.

지금 저자를 포위한 화산의 검수들은 차라리 천마를 상대하고 싶을 것이다. 눈이 돌아


간 저 인간보단 말이다.

“......뭐?”
눈이 돌아간 그의 입이 열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새하얀 증기가 새어 나오는 것
만 같았다.

"......무우각주우우?”

"......"

“누가 무각주가 된다고?”

화산의 제자들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느 새끼냐?’

'누가 저 새끼 앞에서 무각주 소리를 했어?'

'죽인다! 내가 꼭 죽일 거다!'

태풍이 부는 것을 탓해 봐야 소용이 없고, 폭우가 내리는 걸 원망해 봐야 의미가 없듯


이 저 인간이 발악하는 걸 탓하는 건 무의미한 짓일 뿐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저 인간이 발악하게 된 원인을 찾는 게 낫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사람 모습의 재해가 눈을 까뒤집게 만든 원흉은 이미 턱주가리


를 얻어맞고 기절한 뒤였다.

“무각주? 장로오오오오?”

"......"

“장문대리가 저 꼴이면 너희들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도사라는 것들이 잿밥에


만 눈이 홀딱 멀어 가지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게 청명이란 사실이 모두를 서글프게 했


다.

“너희들이 화산을 아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뭐? 누가 무각주가 된다고? 누


가? 너희들이?"

하고 싶은 말이야 당연히 많다. 하지만 눈을 까뒤집고 발작하는 청명이 놈에게 제 할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체념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그...... 청명아......?"


윤종이 적의가 없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만면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조심
스레 청명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흡사 성난 고양이에게 손길을 뻗는 사람처럼 신중했
다.

“사, 사숙들도 나쁜 생각은 없었을 거다. 그냥 문파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 그....... 어, 그래. 그런 거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좋
은 일이잖아? 응?”

“그러니까, 자....... 그 검 내려놓고 우리 대화로, 응?"

'잘한다! 훌륭하다, 윤종! 빛이 난다!’

‘역시 차기 장문인!’

모두가 희망으로 눈을 빛내며 윤종을 응원하는 그때였다.

“.......좋은 일?”

“응, 그렇지. 좋은.......”

쿠우우우우웅!

털썩.

“아이고, 윤종아아아아아!"

“어떻게 일격에 가냐?"

옥에 갇힌 범죄자도 도사의 길로 이끌 수 있는 훌륭한 도인도 지옥에서 되살아난 마귀


를 교화하는 건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윤종이 쓰러진 채 움찔움찔 경련했다. 그의 머리에서 허연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


다.

“지금 동룡이가 장문대리가 됐는데 좋은 이이이일?"

청명이 아예 흰자가 보이도록 눈을 까뒤집으며 일갈했다.

“오냐! 내가 오늘 너희한테 좋은 일이 뭔지 확실하게 알려 주마!”

“히이이이익!”

“튀어! 빨리!"

“어딜 가, 이 새끼들아!"
청명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야 이놈의 자식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호통이 들린다 싶더니, 홀연히 나타난 현종이 수염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장문이이이이이인!”

“아이고오, 장문인! 왜 이제 오셨습니까!”

“저 새끼가 그랬습니다! 저 새끼가!"

무어라 입을 모아 하소연하는 제자들을 지나쳐 단숨에 청명에게로 달려간 현종은 현


란한 금나수로 귀를 낚아챘다.

"아야! 아야야! 장문인! 귀! 귀!”

이놈의 자식! 이리 따라오거라!"

“아아아야! 장문인! 나 귀 떨어져요! 귀! 아야야야야야!”

“그러니까 따라오래도!"

귀를 단단히 움켜잡은 현종이 청명을 질질 끌며 멀어져 갔다.

한 편의 극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멍하니 보던 당패가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가주.”

“예?”

“......우리 출발이 언제였지?”

“오늘...... 오늘 밤이요.”

“그래. 그렇군.”

두 사람은 말없이 저 먼 하늘을 바라보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힘내세.”

"......예."

해남으로 가는 길,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사패련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새삼스


레 깨닫는 두 사람이었다.
1209 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4)

“........ 손 똑바로 들어라.”

“손!”

슬슬 내려오던 청명의 팔이 다시 위로 획 올라간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청명을 보며


현종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내가 어쩌다 저런 걸.'

말이야 바른말로, 마교의 주교도 때려잡는 놈이 그깟 팔 좀 들고 있었다고 힘이 들 리


야 있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석 달하고도 보름은 팔을 들고 살 수 있는 놈이 저리 엄살
을 부려 대니 속이 더 터졌다.

“청명아.”

"......"

“청명아!”

“.......눼.”

삐쭉거리는 입술을 보며 현종은 천불이 터지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하고 쾅쾅 두드렸


다.

“뭐가 그리 불만이더냐?”

"......"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라서 애꿎은 사숙들을 때려잡고 있느냐! 사형도 아니고 사숙


들을!”

“아니, 뭐.......”

“이제 곧 문파의 장로가 될 이들 아니냐! 네가 경우를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다른 이


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 사숙들을 쥐 잡듯이 패 대면......!”

“제 말이 그겁니다! 제 말이!"

그 순간 청명이 눈을 희번덕댔다. 하지만 현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팔 내리지 말고 다시 들어라.”

".......눼."

청명이 슬그머니 내렸던 팔을 다시 올렸다. 그러면서도 입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 장문인! 솔직히 저것들이 화산의 장로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어디 머
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을!”

“......네가 젤 어려, 네가......”

쟤들 머리에 피가 안 말랐으면, 너는 피를 철철 흘리고 다닌다. 청명아, 제발 네 나이


가 몇인지 좀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문파에는 지엄한 법도가 있고, 지켜야 할 규범이 있는데!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
만, 어디 저런 새파란 것들이! 에잉! 나 때는 안 그랬는데!"

현종은 말없이 윗배를 움켜잡았다.

‘위장약이 어디에 있더라?'

이놈과 대화를 하다 보면 한 번씩 돌아가신 사부님이 무덤을 박차고 뛰쳐나온 기분마


저 들었다.

“상황이 상황이지 않으냐, 응?"

하지만 현종은 오랜 기간 수양하며 쌓아 올린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 청명을 어르고


달랬다. 실로 어른의, 어른다운 행동이었지만 청명은 눈에 불을 켜고 반박했다.

“장문인! 상황이 그렇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자꾸 원칙을 어기게 되


면 결국 문파의 법도가 한낱 종잇장처럼 가벼워지는 겁니다! 그럼 규범이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환란에 빠지고!"

"......그게 나라의 환란까지 갈 문제냐?"

“당연히 갈 문제죠! 왜 아닙니까!"

"......"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장문인!”

“왜.......”

“제가 사숙이 싫고 못 미더워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정말이냐?”

“어...... 음...... 솔직히 좀......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한데......”


"......솔직해서 좋구나. 그래, 도사는 우선 솔직해야지. 우리 청명이 참 도사답기도 하
지. 그러고 보면 내가 널 보며 화산을 빛낼 도기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
는데......

“여하튼, 화산이 어떤 문파입니까!”

“......어떤 문판데?”

“대 도문 화산파 아닙니까! 화산파! 섬서의 명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문이라 이


말입니다!"

윗배를 움켜잡은 현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그가 이 나이를 먹고 꼰대질을 당


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예? 그 화산! 예? 그 도적이 어떻게 만든 도적인데! 이게 무슨 개족보도 아니고! 어디


이제 겨우 이립인 것들이 장문인이 됩니까? 그것도 배분을 건너뛰고!”

“장문대리잖느냐...... 장문대리. 장문인이 아니라........”

“그게 그거지요! 세상에, 내 살다 살다 별......! 화산의 선조들이 선계에서 이 소식을 들


으면, 화산이 천마가 아니라 저것들 손에 망하는구나 하며 당장에 관뚜껑 박차고 나와
여기로 달려올 겁니다!”

“......네가 입문했을 때도 괜찮았는데 뭐 그렇게까지야.”

“예?”

“아, 아니다. 크흠.”

현종은 어색하게 헛기침하고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이더냐?”

“당장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멈춰야 합니다! 이게 어디......”

현종이 허탈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내가 부탁한다고 해도 끝끝내 반대하고 드러누울 셈이더냐?"

"그......!”

잠깐 주춤한 청명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곤란한 상황이라 눈을 피하는 게 아니


라,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무언가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아니, 그래도 그...... 아니, 장문인께서 말씀하시...... 아니, 그래도? 어?”
"......"

“그...러시면, 어...... 따르긴 할 텐데. 어...... 예. 따라야죠. 따르는데......”

이성과 본능이 강하게 충돌하자 청명의 양쪽 귀에서 허연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현종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터지겠다. 청명아.”

“끄응...... 시키시면 따라야지요.”

“......고맙구나.”

현종은 허허 웃어 버렸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녀석의 사고방식에 기묘한 면이 있다. 법정이고 장일


소고 할 것 없이 틈만 나면 물어뜯으려 드는 광견 같은 놈이 어떻게 화산 장문의 명만
은 이리도 철석같이 따를 수가 있을까? 오죽하면 이건 일종의 강박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다.

그 순간 청명이 불만스럽게 삐쭉거렸다.

“따르긴 할 텐데, 좋아서 따르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 두십쇼!"

“......오죽하겠느냐.”

그러고도 영 마음이 안 풀린 그는 작은 소리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장문인이시면 그래도 문파의 법도를 지켜 주셔야지. 손수 나서서 족보를 뒤엎으시면


이게 말이 되는......”

"다 들린다.”

“크흠”

청명이 시선을 피했다. 현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그도 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청명이 놈이 누구보다 백천을 잘 보좌할 것이라는


걸. 그가 젊은 백천을 장문대리에 임명하고, 빠른 시일 내에 장문인의 자리를 넘겨주
겠단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청명이 놈을 믿었기에 가능했다.

청명이가 있다면 백천 역시 쉽사리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고, 만일 실수를 한다 해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녀석의 불만이 이렇게나 확연히 눈에 보이는 건 문제였다. 노파심일지
는 모르겠지만, 이제 곧 해남으로 떠나야 할 이들이니, 그 전에 최대한 이 문제를 마무
리해 두고 싶었다.

“청명아.”

청명은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현종이 다시 한번 넌지시 그를 불렀다.

“청명아.”

"......예."

그 모습을 보고 현종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 아이는 아마 백 년이 지나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 사실이 은근히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 아이가 변하지 않는다면 화산 역시 변하지 않을 테니까.

“네 마음은 이해한다.”

"......"

“그리고 네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청명아. 나는 상황이 상황이


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구나.”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둘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도를 따르는 이들이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것을 따라야......”

“아니, 아는데요.”

그 순간 청명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도통 이해를 못 하겠어요."

“응? 그건 무슨 말이냐?"

“도사는 자연 그대로를 따라야 한다고, 인위(人爲)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하잖아


요.”

“그렇지. 그게 자연이잖느냐.”

“그런데 사람은 자연이 아닌가요?"

"......응?"

“사람은 자연이 아니냐고요.”


그 말에 현종이 눈을 끔뻑였다. 허를 찔린 듯 한참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도 자연의...... 그래. 사람도 자연의 일부겠지."

“그럼 이상하잖아요.”

“무엇이 말이냐?”

“도를 쫓는다는 건 자연 그대로를 따르는 것이라 하는데, 그럼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


니까 사람의 마음을 따르는 것 역시 도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위를 배제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건 사람을 쏙 뺀 자연을 따


르겠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사람인데, 사람이 없는 자연을 닮아 가는 데 대체 무슨 의
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현종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사람은 자연의 일부다.”

“예.”

“자연을 따르는 것이 도다.”

“예!”

“그러니...... 사람의 마음이 이는 대로 따르는 것 역시 도다.”

“예, 장문인!”

“그러니까......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 이거냐?"

"......"

“이런 궤변이 어디에 있느냐, 이놈아! 그럼 세상 사람들이 뭘 하든 도가 아니더냐!"

“......에이, 들켰네.”

“야, 이......!”

“아이고오! 내가 수련을 까암빡하고오오오!"

현종이 역정을 내자 청명이 쏜살같이 문으로 튀어 나갔다.

“거기 안 서느냐!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이놈아!”

“제가 아직 출발 준비를 덜 했거든요! 이 제자! 맡겨 주신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세세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놈아!”

활짝 열린 문으로 빠져나가 사라졌던 청명이 몸을 반만 빼꼼 내밀더니 헤헤 소리 내어


웃었다.

“에이, 걱정 마세요. 그래도 장문대리인데, 대접은 할 테니까요!"

"......"

“그럼!”

청명이 퍽 꺼지듯 사라졌다. 현종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걱정이다. 걱정이야.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잠시 후 홀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람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도라니....... 사람이란.......

현종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천장만 바라보았
다.

떠 있던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려 오고, 사위가 깜깜하게 물들어서 마침내 해남으로


갈 인원이 출발할 시간 즈음까지.

"준비는 다 했느냐?”

“준비랄 게 뭐 있습니까? 늘 하던 건데.”

백천의 물음에 윤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워낙 멀리 가는 일이 잦다 보니 이젠 눈 감고도 짐 싼다고요.”

“맞아.”

"......사고, 사고 짐은 제가 쌌잖아요.”

"......"

“사고? 어딜 보세요? 사고?"

백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기야 그렇구나. 괜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걸이 놈은 어디 갔느냐?”

“준비는 끝났는데.”
“끝났는데?”

“낮에 청명이한테 맞은 게 덜 나아서 일단 눕혀 뒀습니다.

“침상에?”

“아뇨. 바닥에요.”

......윤종아...... 그건 눕혀 뒀다고 하는 게 아니라 방치했다고 하는 거란다. 나는 한 번


씩 너를 잘 모르겠다. 잘 안다고 생각하다가도 잘 모르겠어.......

그때 윤종이 태연하게 되물어 왔다.

“저희를 걱정하실 게 아니라, 사숙은 준비되셨습니까?"

“응?”

“장문인께서 출발 전에 간소하게나마 정식으로 장문대리를 임명하는 자리를 가지겠


다고 하셨잖습니까?"

“음, 그러셨지.”

잠깐 잊고 있던 긴장이 백천의 얼굴에 스쳤다.

눈앞에 대적하기 어려운 강적이 있다 해도 기 안 죽을 백천이지만, 그런 그도 모두의


앞에서 공식적으로 장문대리 자리에 오르는 건 긴장되었다.

“준비랄 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오직 각오뿐이겠지."

“그러니 묻는 겁니다. 각오는 하셨습니까?”

그 말에 백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다.”

단호한 대답에, 윤종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천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뗐다. 문을 열고 나가자 연무장을 가득 채운


화산 제자들이 보였다. 모두가 백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

그 시선을 전신으로 받으며, 백천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쯤 설레고, 또 한없이 무겁다. 그 모든 걸 느끼며 발을 내디뎠다. 앞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종과 장로들을 향해서.

1210 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5)

장원의 공터를 연무장으로 쓰고 있는 상황이라 그리 넓진 않았다. 덕분에 화산의 제자


들이 한꺼번에 도열한 것만으로도 비어 보이지 않고 그득했다.

천우맹의 다른 문파들은 화산의 장문대리 임명을 위해 연무장을 비워 준 모양으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배려에 새삼 감사하며 백천이 무거운 한 걸음을 뗐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다. 종남을 떠나 화산에 처음 입문하던 때부터 그의 꿈은 장문인이


되어 언젠가는 화산을 종남보다 더 훌륭한 문파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어린 치기로 세운 목표지만, 이제 더는 치기가 남지 않았을 만큼 나이 먹고도 그의 꿈


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고, 더 단단해졌다.

이제 그의 꿈은 화산을 종남보다 훌륭한 문파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천하에서 제일가는 문파, 그것조차 넘어 강호의 흐름을 주도하는 문파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백천은 그토록 바랐던 꿈의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것이다.

'긴장하지 말자.'

겨우 첫걸음일 뿐이다. 벌써 긴장한다면 앞으로의 험난한 길을 어찌 헤쳐 갈 수 있겠


는가.

백천은 짧게 심호흡했다.

언제나 장난기 가득하던 화산의 문도들이 더없이 진지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 시


선 속에서 백천은 앞으로 나아갔다. 정복을 갖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훤칠했다. 연무
장 중앙을 따라 걸었고, 마침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문인과 장로들 앞에 섰다.

딱히 누군가가 말해 준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화산 이대제자 백천이 장문인을 배알합니다.”

그 말을 신호로,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예를 갖추었다.

“장문인을 배알합니다!”

현종은 말없이 백천을 바라보다 뒤에 도열한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격식 있게 도복을 차려입은 현종에게선 평소보다 더 묵직한 진중함이 흘러나왔다. 그
런 그의 눈빛을 받은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자세를 바로 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이 자
리에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문파의 장문인을 새로 임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어떤 문파에서건 수장이 바뀌는 일은 간단치 않다. 그런데 특히나 화산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할 수 있다.

화산은 그 어떤 문파보다 장문인의 권한이 강하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 멸문을


목전에 두었을 만큼 위기를 겪던 문파다.

그런 문파가 새로운 장문인을 임명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화산과의 결별을 의미함


과 동시에 새로운 화산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임명하는 것이 그저 '장문대리 일지라도, 새로운 장문인을 임명


하는 것과 다름없는 무거움을 가지는 것이다.

현종은 모든 제자들을 눈에 담았다. 평소와는 달리 칼날 같은 눈빛을 내뿜는 제자들을


보니 조금 낯설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직하다.

그 순간, 그는 밀려드는 묘한 기시감에 눈을 감았다.

'그랬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에 기시감이 느껴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이 기시감은 착각


이 아니다. 현종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가 과거에 꿈에서도 바라 왔던 화산의 모습


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그의 제자들은 그가 항상 그리곤 했던 화산파의
미래보다 더욱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 주었다.

꿈이 실현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회가 가슴에 차올랐


다. 그리고 동시에 새삼 이제는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게 실감되었
다.

'어쩌면 조금 늦었던 걸지도 모르지.'

미련? 그런 건 없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 법. 제 역할이 끝났다는 걸 알아 버린 현종에게 미련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하나 남은 것은, 미련이라기보다는......

현종이 작게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제자들은 듣거라.”

“예, 장문인!”

화산 문도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고개를 끄덕여 준 현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나 현종은 화산 장문인의 자격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후대의 화


산을 이끌어 갈 새로운 장문인을 임명하려 한다.”

모두의 눈빛에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현종이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이제 달라질 화산에 대한 조금의 껄끄러움과 두려움.

하지만 가장 큰 것은, 달라질 화산에 대한 기대와 화산을 이끌어 갈 백천에 대한 굳은


신뢰일 테다.

현종은 생각했다.

좋겠지.

제자들에게서 저런 눈빛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라면 충분히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고, 현종보다 더 훌륭하게 장문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현종은 새삼 자신이 장문인이 되던 때를 떠올렸다.

사형들이 모두 화산을 떠나 버렸기에 떠맡듯이 맡게 된 장문인의 직. 축하도 축복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화산을 지켜야 한다는 오기와 무거운 책임감만 존재했을 뿐.

그때 그를 바라보던 현상과 현영의 눈빛은 현종이 평생을 두고 떠올리는 무거움이 되


었다.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그렇기에 참으로 기꺼운 일이다. 새로 장문인이 될 이가 그와는 다른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이제 화산은 과거 그가 물려받았던, 섬서의 망해 가는 문파가 아니다. 모든 것을 주먹
구구식으로 선택하고, 몇 되지도 않는 이의 의견만으로 적당히 때우는 그런 곳이 아니
다.

새 시대의 화산은 과거의 화산이 그랬듯, 당당한 섬서의 명문이자 천하를 울릴 대문파
로서 그 체계를 갖추어 갈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대에 어울리는 이가 장문인 자리에
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현종이 가져갈 것은 그저 화산의 새 시대까지 버텨 내었다


는 자부심. 그것 하나면 족하지 않은가?

“화산의 장문인이란, 무릇 화산이라는 도문의 수장으로서 도인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하며, 검문인 화산의 수장으로서 검의 길을 올바로 걸어야 한다.”

백천의 얼굴이 실로 굳건하였다. 현종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백천이라면 잘해 낼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검의 길을 걸어 왔으며, 화


산의 검수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협의를 그 가슴에 단단히 새겼으니까.

“나 현종은 이제 화산의 후대 역시 그 자격을 갖추었다는 판단하에, 화산의 장문인직


을 다음 대의 장문에게 선위함을 조사와 선조께 고하려 한다."

현종의 몸에서 부드러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의 있는 자, 이곳에 있느냐?"

“없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자, 이곳에 있느냐?"

“없습니다!”

현종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 선조들께서도 미소로 그


의 선택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현종은 언젠가 마주하게 될 선조들께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잘해 냈다고는 할 수 없


지만, 최선만은 다했노라고, 한시도 화산 장문인 역할에 소홀한 적 없었노라고 말이
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백천을 주시했다. 반듯한 얼굴에 무거운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저런 표정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스승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그렇다면 나 현종은 선대로부터 그 권한을 인정받은 화산의 장문으로서, 제자들로부


터 그 권위를 위임받은 화산의 수장으로서 다음 대의 장문이 될 이를 선정하겠다.”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현종의 시선은 다른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모든 제자들, 심지어는 장로들마


저 백천을 바라보는 와중, 홀로 올곧게 현종만을 바라보고 있는 청명에게로.

그 흔들림 없는 눈을 본 현종은 미소 지었다. 어쩌면 청명의 것과 닮아 있는 듯한 미소


였다.

'선대들이시여.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뒤를 이어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은!”

현종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떠나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온당히 그 자리에 올라야 할


이에게로,

“운암!”

“예?”

"......어?"

순간 제자들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백이 넘는 제자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하니 현종을 보았다. 하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게 당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운암이었다. 그의 두 눈이 뒤흔들렸
다.

반면 현종의 입가엔 익살맞은 미소가 맺혔다.

'그러니...... 마지막 선택 하나만은 제 뜻대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도란 결국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는 것.

그의 마음이 말한다.

백천이 더 훌륭한 장문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운암이 지금껏 화산에 헌신해 온 것을 무


시해선 안 된다고.
더 나은 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걸 당연히 여기게 된다면, 화산 역시 오직 능력만
을 보는 문파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현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린 욕심이


자, 도인으로서의 자신을 직면한 결과였다.

“어.......”

운암이 너무 당황하여 입도 다물질 못하자, 현종은 그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


을 느꼈다.

다음 생은 청명이 녀석처럼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이 광경은 현종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기


분을 선사했다.

“제자 운암은 앞으로 나오너라!”

“자, 장문인......?”

운암은 어쩔 줄을 모르고 현종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 하는 것이냐?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더냐!"

짐짓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현종이 일갈하자 운암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앞으


로 나섰다. 멀찌감치서 보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다른 문파 사람들도 지켜보는 와
중에 그가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운암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백천의 옆에 무릎을 끊자 현종이 단호한 목


소리로 소리쳤다.

“나 현종은 화산 장문인의 권한으로 일대제자 운암을 화산의 장문으로 선택한다!”

운암의 얼굴에 망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현종은 다시 고함치듯 말했다.

“또한! 화산이 과거와 같지 않아 장문인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제대로 화산을 이끌어


나가기 어려운 바, 상시 장문대리직을 신설하고 대외적인 장문인의 업무를 분담하게
한다. 이에 화산장문대리의 자리에 이대제자 백천을 임명한다!”

“아!”

“어......?"

그래선 안 될 자리란 걸 알고 있음에도, 순간적으로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


져 나왔다.
“이에 반대하는 자, 이곳에 있느냐?"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눈빛을 교환한다. 잠시 후 그들의 시선은 앞에 있는 두 사람에


게로 향했다.

화산의 미래를 이끌 이와, 과거와 미래의 화산을 이어 줄 이에게로.

이윽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없습니다. 장문인!”

그 터질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사람, 청명이 히죽 웃었다.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현종을 보는 그의 시선에 다시없을 만족감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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