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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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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천사님과의 만남
“……뭘 하고 있는 거야.”
후지미야 아마네가 시이나 마히루와 처음 이야기한 것은―― 비가
끝없이 내리는 가운데 공원에서 그네에 앉아 있던 그 아이를 우연히
봤을 때였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자취 생활을 시작한 아마네가 사는
맨션의 오른쪽 이웃에는 천사가 살고 있었다.
천사란 물론 비유지만, 시이나 마히루는 그 비유가 우습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어여쁜 소녀였다.
잘 손질된 황갈색 스트레이트 헤어는 늘 부드럽고 광택을 띠었으
며, 뽀얀 유백색 살결은 피부 트러블도 모르는 매끄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에 긴 속눈썹이 가장자리에 나 있는 커다란 눈,
윤기를 띤 예쁘장한 분홍색 입술 등등 모든 요소가 마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 그것도 같은 학년인 아마네는 마히루의 평판을 자
주 들었는데, 문무를 겸비한 미소녀라는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실제로 마히루는 정기고사에서도 늘 1등을 차지하고 있으며, 체육
수업에서도 에이스 급의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네는 반이 달
라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소문대로라면 완벽 초인이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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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그런 위험 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간병해 주었으니까, 어지간히도
양심이 아팠던 모양이다. 추가로 아마네가 명백하게 흥미 없는 것처
럼 굴었다는 것이 마히루를 안심시키는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어서 마히루가 간병해 주고 있는
건 틀림없겠지.
“……가져왔는데요.”
약간 열에 들뜬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조
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옷을 다시 입었는지를 몰라서 바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듯한 마히루의 반응을 보고, 그러고 보니 옷의 앞섶을 푼 건 열을 재
기 위해서였음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직 열을 재지 못했어.”
“제가 없는 동안 재고 있으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미안해. 머리가 멍한 상태였거든.”
솔직하게 사과하고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약간 흐릿한 전자음이 흘러나왔다.
슬쩍 들어 올려 화면을 보니, 38.3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높은 온도였다.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뒤에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마히루에게 “이
제 됐어.”라고 말하자, 질냄비를 얹은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
왔다.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안도하고 있는 건, 옷을 다시 제대
로 입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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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도였나요?”
“38.3도. 약을 먹고 자면 나을 거야.”
“……시판되는 약은 어디까지나 증상만 완화하는 것이지, 바이러스
자체를 퇴치해 주는 건 아니니까요. 푹 쉬어서 면역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세요.”
따끔하게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걱정이 되니까 그런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왠지 모르게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쉰 마히루는 사이드 테이블에 쟁반을 놓
고, 질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내용물은 절인 매실이 들어간 죽. 위장의 부담을 생각해서인지 된
죽이 아니라 물기가 많은 진죽으로 만든 것 같았다.
매실을 넣은 건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기에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려나.
김이 나진 않았지만 약간의 온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갓 만든 게
아니라 가져오기 전에 의도적으로 식힌 것으로 보였다.
죽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마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히루는 익
숙한 손길로 그릇에 죽을 담고 있었다. 매실 열매를 가볍게 으깨어서
풀고는 있었지만, 씨는 정성껏 발라내었는지 빨간 속살이 흰 죽에 아
주 쉽게 섞여들고 있었다.
“드세요. 아마 뜨겁진 않을 거예요.”
“응, 땡큐.”
받긴 했지만 스푼을 쥔 채 가만히 죽을 바라보는 아마네를 보면서,
마히루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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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먹고 있는 건가요.”
그 생각이 뒤집힌 것은, 베란다에서 젤리 음료를 마시면서 밖을 바
라보고 있을 때였다.
편의점에 들르는 것도 귀찮았기에 집에 상비해 두고 있는 젤리 음
료를 마시면서 펜스에 몸을 기대어 바깥 공기를 맡고 있었더니, 우연
히 마히루가 베란다로 나왔다.
아마네의 모습을 발견한 마히루도 베란다의 펜스에서 약간 얼굴을
내밀었고, 그런 뒤에 아마네가 입에 물고 있는 젤리 음료를 보고 눈
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네 자신은 설마 상대가 말을 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한
동안 멍하니 굳어 있었다.
“보면 알잖아. 불과 몇십 초면 에너지를 보급할 수 있는 젤리.”
“……설마 그게 저녁밥이란 건가요?”
“당연히 그렇지.”
“한창 성장기인 남자 고등학생이 겨우 그것만 먹는다고요?”
“괜한 참견이야.”
평소엔 편의점 도시락이나 슈퍼에서 파는 반찬을 먹고 있으므로 이
렇게까지 간단히 먹지는 않는다. 오늘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게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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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답은 바로 나왔다.
건강을 지향하는 마히루답게, 양념은 약간 싱거웠지만 국물의 맛을
잘 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시판 중인 조미료로 만든 게 아니라 가다
랑어포랑 다시마로 직접 국물을 낸 것으로 보였다. 감칠맛이 전혀 달
랐다.
씹어 보자 국물과 조미료, 그리고 채소 본래의 맛이 부드럽게 입안
에 퍼졌다.
채소의 단맛을 살리면서도 맛을 잘 조절해 속까지 맛이 잘 배인 조
림 요리는 그다지 채소를 잘 섭취하지 않는 아마네라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채소를 메인으로 먹으라는 듯, 닭고기는 약간 곁들이듯이 들어갔지
만 퍽퍽함이라곤 전혀 없이 보들보들하게 익었다. 양이 적은 것 말고
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여고생이 만든 것치고는 선택이 약간 수수하고 낡았지만, 만든 사
람의 역량을 잘 알 수 있었다.
요리를 이제 막 배운 사람이 만든 것과는 상당히 차원이 다른 맛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밥과 된장국 내지는 맑은국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공교롭
게도 밥은 안 했다. ……아니, 쌀조차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희망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늦었지만, 즉석 밥이라도 사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
었다.
“대단한데, 천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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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런가요?”
“아―니, 난 아니야.”
‘바보 아닌가요?’ 하는 뜻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면,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마히루처럼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자가, 최근 들어 자신
이 한심하다는 것을 통감하기 시작한 아마네 같은 남자에게 호의를
보인다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야 이 상황은 귀여운 옆집 사람이 음식을 나눠준다는 러브코미디
만화 같은 전개일지도 모르지만, 서로에게 러브는 존재하지 않고 대
화에도 코미디 요소라곤 전혀 없었다.
있는 것은 천사님의 말 속에 담긴 가시와 동정에서 나온 온정 정도
가 전부였다.
“그럼 문제없겠네요. 어차피 당신은 편의점 도시락과 슈퍼에서 파
는 반찬으로 끼니를 때울 것 같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리 봐도 주방이 제대로 쓰였던 흔적이 없고, 편의점과 슈퍼에
서 주는 일회용 나무젓가락이 식탁 위에 잔뜩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상태를 보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요. 얼굴도 건강해 보
이지 않고요.”
집에 딱 한 번 들어왔을 때 본 것만으로 그만큼 꿰뚫어 본 마히루에
게 아마네도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정말로 정확하게 짚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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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우연한 만남
“아.”
맑고 고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최근에는 귀에 익숙해진 목소리이긴 했지만, 이곳은 맨션이 아니
다. 동네 슈퍼마켓에 있는 과자 코너였다.
남들 눈이 있는 장소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
았다. 아마네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보니 마히루가 약간 동
그랗게 눈을 뜨고 서 있었다.
손에 든 슈퍼의 장바구니 안에는 오늘 저녁에 쓸 재료인지 무 한 개
와 두부, 닭다리살과 우유가 있었다.
과자 코너에 슬쩍 들렀을 때 아마네와 우연히 마주친 것으로 보였
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이건 우연이야. 널 미행하고 있던 건 아니라
고.”
“알아요. 피차 가장 가까운 슈퍼가 여기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으
니까요.”
선수를 쳐서 말하자, 마히루는 오히려 어째서 그런 발상을 하느냐
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푸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메모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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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도 하고 있었다.
“시이나 교관님…….”
“스승으로 받들겠다면 일단은 보고 배우세요. 당신의 개인 물품 분
류는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꼭 필요한 물건만 따로 챙겨 놓으세
요.”
“옛서.”
“절 남자로 만들지 마시고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지적한 천사님은 재빠른 손놀
림으로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들을 분류하거나 버리
고 있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고 그냥 두는 습성이 있는 아마네는 마히루
의 단호함이 고맙고도 부러웠다.
다른 사람의 방이지만 거침없이 치워 나가는 마히루는 실로 가정적
이라서, 완전히 주부 못지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혼자서도 여유롭게 이 방을 치울 것만큼 요령이 좋았다.
하지만 서두르느라 발밑을 미처 주의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건 백프로 아마네 탓이지만, 바닥에 놓인 옷을 밟고 미끄러졌는
지 마히루가 그대로 밸런스를 잃었다.
“아.”
마히루가 목소리를 흘린 순간, 아마네는 반사적으로 마히루가 넘어
지려는 바닥에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확 하고 퍼지는 달콤한 향기. 그리고 희미하게 섞인 먼지 냄새는 빠
르게 움직이느라 먼지가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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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 깔끔해졌네요.”
결국 아마네의 집을 청소하는데 하루를 통으로 날렸다.
바닥에 있는 개인 물건을 정리하는데 몇 시간. 그 뒤에 옷을 빨고,
찬장 위랑 조명의 먼지를 털고, 창틀을 닦고, 세탁기를 돌렸더니 이
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히루가 왔을 때 본 태양은 벌써 모습을 감추어 두 사람의 분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는지를 증명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마네의 집은 알아보지 못할 만큼 깨끗해졌다.
쓸모없는 것이 다 사라진 바닥에는 마루가 훤히 보였으며, 유리창
과 창틀에는 얼룩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조명도 먼지를 털어내면서
이전보다 더 밝아졌다.
아마네의 방도 청소했으며, 바닥에 물건이 놓여 있지 않아서 편안
하게 드러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치우는데 하루가 꼬박 걸릴 줄이야…….”
“그야 그렇게 난장판이면 말이지…….”
“당신이 어지른 건데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천사님 겸 구세주님에겐 머리를 들 수가 없는지라, 완전히 넙죽 고
개를 숙이고서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도와준 마히루를 힐끗 봤다.
일부러 귀중한 휴일을 소비해 준 마히루는 “정말이지…….”라고 말
하면서 쓰레기봉투를 묶고 있었다.
말과는 달리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간 지친 기색이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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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뭐,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 자, 좋아하는 거로 주문해 봐.”
부모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피자 광고지를 마히
루에게 보여 줬다.
가끔 주문해서 먹는 가게로, 아마네가 아는 한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는 가게 중 가장 맛있는 곳이다.
가마로 피자를 굽는 본격적인 곳보다는 당연히 못하지만, 스탠다드
한 토핑부터 아이들도 좋아하는 토핑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으니 마
히루의 입맛에 맞을 만한 것도 있겠지.
화제 전환에 응한 마히루는 광고지를 받아 들고 재빨리 훑어보았
다.
투명하게 보이는 짙은 갈색의 눈은 갖가지 피자 사진에 못 박혀 있
었다.
늘 그다지 감정을 보이지 않던 눈도, 지금은 왠지 생생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진짜 기대하고 있는 걸까.’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던 마히루는 잠시 메뉴를 본 뒤에 “이게 좋
겠어요.”라며 네 가지 맛을 즐길 수 있는 파티용 피자를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눈치를 살피듯이 바라보는 마히루에게 알았다고 말하자 눈이 살짝
빛났다.
약간 기뻐하는 표정이었기에, 아마네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으면
서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고 광고지에 실려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약 한 시간 후에 도착한 피자를, 마히루는 곧바로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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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친구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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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곤란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자취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별별 소리를 들었으며, 종종 기습적으로 체크하려고 하는지라 제법
고생하기도 했다.
“뭐, 그만큼 너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 아닐까?”
“사랑이 너무 무거워.”
“포기해. 언젠간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
“경험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넌 현재 진행형으로 반항 중이잖아.”
“핫핫하. 치이와 관련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어.”
아버지와 여친 문제로 다투고 있는 이츠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설
득력이 별로 없지만, 하는 말 자체는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얌전히 듣기로 했다.
이 자식도 나름대로 문제를 끌어안고 있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
면서 살며시 한숨을 쉬었지만, 정작 이츠키는 그런 고생을 엿볼 수
없는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나와 치이 사이를 방해하겠
다면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지만 말이지.”라고 약간 살벌하게 들리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괜찮아. 일단
네 생활을 똑바로 챙기라고, 알았지―?”
히죽거리며 웃는 이츠키에게 미묘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렇
게 할 거야.”라고 대꾸했다. 그리고는 누군가와 같은 말을 한다는 생
각이 들어서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이츠키가 아마네의 집을 들른 이유는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가 아니라, 단순히 놀러 온 것이기 때문에, 집 청소 이야기는 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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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였어?”
“옆집 사람. 음식을 좀 나눠줬어. 냉장고에 넣고 올 테니까 먼저 게
임 시작하고 있어.”
“아, 미안. 나 혼자 보스전을 끝내버렸어.”
“야, 무슨 짓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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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마히루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밖에선 상관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지만, 이번에는 마히루
가 왠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
았다.
마히루는 관심을 보이지 않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뭐, 말하고 싶지 않다면 상관없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은근히 표정
이 굳어진 마히루를 바라보다가 블레이저에 하얀 실, 아니, 털이 여
러 개나 묻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그렇고 교복에 털이 묻어 있는데, 개나 고양이랑 놀고 있었
던 거야?”
“논 게 아니에요. 그냥 나무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고양이를 내
려 줬을 뿐이에요.”
“무슨 그런 뻔한 전개가 다 있담. 아하, 그런 거였나.”
“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마히루가 한 말을 듣고, 왜 벤치에 계속 앉아 있었는지를 뒤늦게 이
해한 아마네는 한숨을 훅 쉰 뒤에 일단 그 자리를 떠났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당부한 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
다.
그보다는 움직일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이상한 구석에서 괜한 고집을 부리는 녀석이라니까. 그렇게 혼자
투덜거리면서 근처에 있는 드럭 스토어에서 파스와 테이프,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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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시작되는 저녁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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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
집에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있다는 남자의 로망이 구현된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아마네는 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으나, 거의 미사용 상태인 주방을 새삼스럽
게 지적받자 민망해진 것이 더 컸다.
“다 좋은 걸로 받았으면서, 돼지 목에 진주네요.”
“네가 쓸 거니까 진주도 가치를 찾겠지.”
“결과론이네요. 모처럼 마련해 놓은 조리 도구가 눈물을 흘리고 있
어요.”
“그럼 네 특기인 요리로 그 눈물을 그치게 만들어 줘.”
아마네가 나는 못하겠다고 깔끔하게 인정하자 마히루는 어이가 없
다는 표정을 보였지만, 그것도 이미 예상한 것이었는지 한숨만 쉬었
을 뿐 더는 뭐라고 하지 않는 눈치다.
“만들어 보겠는데, 조미료는 있나요?”
“있거든, 나를 무시하는 거야? 보존 방법과 유통 기한도 잘 지켰
어.”
“어머나, 의외네요.”
“뚜껑을 열지 않았으니까 말이지.”
“으스댈 일이 아니거든요. 뭐, 부족하면 일단은 우리 집에서 가져
와 사용하겠지만요.”
“고마워.”
“일단은 기본적인 조미료가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리고 오늘
메뉴는 독단으로 정했는데 괜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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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하니까.
“……그러네요.”
아마네의 말을 듣고 납득했는지 마히루가 아주 약간 미소를 지었
다.
긴장이 풀린 것 같은, 안도감이 포함된 부드러운 미소는 한순간 아
마네의 모든 생각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귀여웠다.
“후지미야 군?”
“아……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신이 팔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므로, 아마네는 슬며시 느껴지는
부끄러움을 억지로 숨기려는 듯이 저녁밥을 계속 입으로 옮겼다.
“……잘 먹었습니다.”
“차린 게 별로 없어서 죄송하네요.”
식탁에 놓인 요리를 깨끗이 비운 아마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
사하자, 마히루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온화했으며, 이렇게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준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맛있었어.”
“보면 알아요.”
“우리 어머니 밥보다 더 맛있었어.”
“여자가 차린 요리를 어머니의 것과 비교하는 건 금기라고 들었는
데요.”
“그건 나무랄 때만 그런 거 아니야? 근데, 마음에 걸려?”
“마음에 걸리진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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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천사님의 생일
“아마네~ 시험 어땠어?”
기말고사 일정이 겨우 끝나면서 지옥 같은 시험에서 해방된 학생들
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마네와 이츠키 역시 시험이 끝난 것에 안도하면서 이번 결과를
평가하고 있었다.
“응? 보통이야.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물어보니까 대답은 했지만, 특별히 할 말은 없다. 시험 범위에서 그
대로 나왔기 때문에 평소에 복습을 했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
었다.
이번에도 시험 결과는 지금까지와 같았기 때문에, 아마네로선 딱히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다.
아마네는 매사를 귀찮아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복습을
빼먹진 않았다. 수업에서 배운 건 대개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만점은
어려워도 80~90점은 확보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대체로 30등 안에는 든단 말이지……. 범생이
녀석.”
“평소의 행실이 좋은 거지.”
“평소의 네 행실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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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고 있는 거야?”
집에 돌아온 아마네는 마히루가 직접 만들어 준 요리를 깨끗이 비
웠다.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와 보니 마히루가 거실에서 시험지를 펼
쳐 놓고 있었다.
설거지는 교대제이지만 되도록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아
마네가 솔선해서 맡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마히루는 거실에 앉아 있
다. 듣자니 일을 시켜 놓고 바로 돌아가는 건 뭔가 미안하기 때문이
란다.
“채점이에요.”
“뭐, 그건 보면 알겠지만.”
재검토하는 건가. 교과서를 꺼내서 틀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과는 어때?”
“답안지에 잘못 적은 곳이 없다면 만점이네요.”
“역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너무나도 깔끔하게 만점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아마네도 딱히 거창
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놀라지 않은 것은 정기 고사 때 맨 위에서 이름이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히루라면 그렇겠거니 해서, 만점 소리를 들어도 역시 그렇구나
하는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공부는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애초에 다음 학년 분의 이수 내용
전체를 먼저 공부해 놓고 있으니까 복습으로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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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너, 뭔가 갖고 싶은 건 없어?”
다음 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대로 저녁 식사 시간에 마히루에
게 바로 이야기를 꺼내 봤다.
생일에 선물을 주는 것은 딱히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평소에 신
세를 지는 사람에게 감사의 의미도 겸해서 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하
에 선물을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 질문은 틀림없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리라.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직접적으로 물었다고 후회하는 동안, 마히루
가 의아한 눈으로 아마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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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너는 그다지 물욕이 없는 것 같아서 호기심에 한번 물어본 거야.”
“참 갑작스럽네요…….”
좀 더 잘 둘러댈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이미
말을 꺼내 버렸으니 취소할 수는 없다.
다행이라고 할까, 생일 생각은 하지 않은 눈치다.
마히루의 입장에선 아마네가 생일을 알 리가 없으므로, 애초에 염
두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네요, 필요한 거라. 지금 가지고 싶은 건…….”
“가지고 싶은 건?”
“숫돌이네요.”
“……숫돌?”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만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고생에게 갖고 싶은 걸 물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을 것이
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여고생이라면 화장품이나 액세서리나 가방 같은 걸 원할 것
이다. 설마 금속을 연마하는 도구를 원할 줄이야. 아마네는 미처 예
상하지 못했다.
“그래요, 숫돌. 몇 개 있긴 하지만, 입자가 더 가는 연마석을 가지
고 싶어요.”
“이봐, 현역 여고생.”
“저에게 일반적인 여고생을 요구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네도 반론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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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이츠키.”
마히루가 원할 만한 걸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츠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치토세라는 여친이 있고, 여자 마음도 잘 안다. 일반적인 여자가 원
할 만한 것은 얼추 파악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과연 마히루를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기뻐하는 거라면 싫어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한다.
“왜?”
“이츠키 넌 치토세에게 선물로 뭘 주고 있어?”
여친에게 뭘 주는지를 물어보는 게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질문을 받은 이츠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마네를 바라봤다.
“뭐? 너, 마음에 둔 여자에게 선물이라도 하려는 거야?”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여?”
“아니지.”
“그렇지?”
“그럼 왜 묻는 건데?”
“아는 사람의 생일이 가까워서 참고삼아 묻는 거야.”
참고로 삼는 게 아니라 아예 그걸로 선택할 생각이었지만, 거기까
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
“흐응. 그야 원하는 걸 주는 게 제일 좋겠지. 하지만 이런 건 평소
부터 미리 조사해 두는 게 중요하면서도 원만하게 끝나는 비결이
야.”
“딱히 사귀는 사람이 아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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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이야.”
시선을 돌리면서 그렇게만 대답했다. 마히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지만, 열어 보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는지 종이 봉투에서 그것을 꺼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종이 봉투 안쪽과 같은 색으로 포장해 달라
고 부탁했고, 바닥에 눕혀 두었지만 역시 크기가 눈에 띌 정도로 컸
다.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상자가 아니라 비닐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 크기는 딱 마히루의
품에 들어갈 정도였다.
진한 푸른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걸 마히루가 정성 어린 손길로 푸
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난 자리를 떠도 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때마침 마히루가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냈다.
마히루가 두 손으로 그 안에 든 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정말
의외라는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곰?”
마히루가 중얼거린 것은 선물의 바탕이 된 동물의 이름이다.
너무 크지도 않고, 초등학생 정도가 끌어안고 다니기 좋을 정도의
곰 인형.
마히루의 머리카락처럼 연한색 부드러운 털이 특징이며, 목에는 목
줄처럼 연푸른색 리본이 묶여 있었다.
어딘가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얼굴, 단추로 만들어 광택이 있는 검
고 동그란 눈이 마히루를 비추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나 되었는데 무슨 인형이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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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요!”
“으, 응, 시이나의 성격상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쩔쩔매면서 고개를 끄덕
이자, 마히루는 다시 한번 손에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바라봤다.
“……그런 심한 짓은 못해요.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가녀린 팔이 마치 감싸듯이 곰 인형을 끌어안았다.
어린아이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뺏기지 않으려는 몸짓처럼도, 아
이를 자상하게 감싸 주는 어머니의 몸짓처럼도 보였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없이 소중하게 그걸 끌어안았다는 사
실뿐.
마히루는 ‘꼬옥’이라는 효과음이 어울릴 것처럼 끌어안고, 살짝 시
선을 숙여 품에 있는 곰 인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이나 어이가 없을 때
보여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 어딘가 자애로
운 듯한.
그러면서도 풋풋함조차 느껴지는, 그 순진한 미소는 무심코 숨을
죽일 정도로 아름답고 귀여웠다.
‘――보는 게 아니었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어진다.
연애의 의미로 좋아하진 않더라도, 극상의 미소녀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저런 표정을 보고 말았다는 사실이 심장을
쿵쿵 뛰게 했다.
곰 인형을 소중히 끌어안고 희미하게 웃는 그 모습은, 누구라도 넋
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귀여웠다. 자신이 담백한 성격인 걸 자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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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아마네조차 홀려 버릴 것만 같았다.
얼굴에 얼마나 열기가 몰린 건지, 손바닥으로 가리듯이 만져보니
평소보다 확실하게 뜨거웠다.
참 알기 쉽게 쑥스러워하고 있는 자신. 마히루에게 들리지 않을 정
도의 목소리로 “젠장…….”이라고 자신에게 투덜대고 말았다.
다행히 마히루는 아마네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 듯, 소중하게 끌
어안은 곰 인형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너무나 귀여워서,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목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뻐해 주니 나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그 말만을 겨우 입 밖에 냈더니, 마히루가 힐끔 아마네 쪽으로 시선
을 돌렸다.
“이런 걸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에요.”
“뭐, 너 정도로 인기가 많으면 자주 받을 줄 알았는데…….”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약간 어이가 없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바뀌는 걸 보고 안도한
것은, 그 표정을 직시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
겠다.
“……다른 사람한테 생일을 가르쳐 준 적은 없어요. 전 생일을 싫
어해서 남들에게 말하지 않으니까요.”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한 마히루가 곰 인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곰 인형을 향한 눈빛은 방금 했던 말과는 달리 온화했기 때문에, 왠
지 아마네의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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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했어.”
“뭐가 말인가요?”
집에 돌아와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마히루가 이상
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녁을 만들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에 장을 보고 귀가했기에 함께
조금 느긋하게 있었는데, 그러다 혼잣말을 들어 버린 모양이다.
참고로 오늘의 마히루는 평소와 똑같다.
어제의 그 미소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
로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이것이 평소 모습이고, 제발 그래 주
길 바랐다. 그때의 그 표정을 보여주면, 자신의 심장이 저릴 것만 같
다.
“뭐, 그게 있지. 선물에 관해서 이츠키랑 치토세가 이상한 억측을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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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러로 깎일까?”
“그야 깎이긴 하지만…… 두껍게 깎이니까 영양분이 좀 아까울 것
같네요.”
우리 어머니도 그런 말을 할 것 같다는 감상은 속으로 삼켰다.
“여차하면 그냥 씹어 먹지, 뭐.”
“와일드하네요.”
“귀찮으니까.”
“게으르네요.”
여전히 의견이 솔직한 마히루에겐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
에, 그저 어깨를 으쓱하면서 넘겼다.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마히루도 “뭐, 위장에 들어가면
별차이가 없을 테니까요.”라고 말하면서 납득하는 자세를 보였다.
“아, 맞다.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시이나도 필요
하면 가져가겠어?”
“그럼 좀 받아 갈게요. 과일은 단가가 높으니까요.”
왠지 주부 같은 발언을 하고 있지만, 이것도 마히루답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토요일이란 말이죠. 그러면 답례의 의미도 겸해서 미리 점심이라
도 만들도록 할게요.”
“신세는 늘 내가 지는데 말이지.”
“후지미야 군에게 만들어 주는 건 딱히 싫어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요.”
쿡, 하고 정말로 자그맣게 미소를 지은 마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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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어머니,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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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네.”
“뭘 숨기고 있는 거니.”
“……어머니하곤 관계없어.”
“그렇게 말한단 말이지, 알았어.”
싱긋. 웃음이 더 뚜렷해졌다.
그것은 거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압력의 미소. 매번 이 미소를 지
으면 아마네는 정말 마음이 약해지고, 거역할 기력이 대부분 사라지
고 만다.
이미 몸에 뱄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크윽.” 하고 낮게 신음한 아마네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시호코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아뿔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무슨 소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마네의 옆을 통과해 문을 연 시
호코.
문 너머에 펼쳐진 것은―― 침대 가장자리에 등을 기대고 무릎 위의
쿠션을 끌어안은 미소녀의 모습.
그것도 눈을 감은 채 일정한 리듬으로 자그마한 호흡을 반복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졸고 있는 마히루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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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난방이 되는 따뜻한 방, 점심을 먹은 후의 식곤증, 이것만으로도 이
미 졸음이 오기에 충분한 환경이다.
솔직히 생각해서 남자 방에서 잠이 오냐 하는 의문은 있지만, 일단
아마네를 해가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잠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꾸짖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도록 잠자코 있
다 보면 지루할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아마네가 머리를 붙잡은 원인은 어머니인 시호코가 와 있는 타이밍
에서, 그것도 이 상태를 어머니가 목격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오해를 살 것이다.
아마네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기 자신도 착각했을 것이다. 방에
들일 정도로, 그리고 방심하고 졸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말이다.
얼굴을 실룩이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힐끗 봤더니, 마히루를 본 눈
이 빛나고 있었다. ‘어머나, 어쩜 좋아!’ 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기분 탓일까.
“어머나, 아마네도 참, 이렇게 귀여운 여자 친구를 사귀다니! 너도
여간내기가 아니었구나!”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시호코를 보면
서, 아마네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오해를 사고 말았다. 게다가 잔뜩 흥분한 상태.
아들이 여친을 데리고 왔다고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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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게…….”
마히루는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호코의 기세에 밀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한다는
건은 무리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집에 방문하고, 직접 만든 요리를 차려 주고 있으며, 한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말을 들은 시점에서 시호코의 눈빛이
바뀌더니 한층 더 기세가 더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아마네의 힘으론 도저히 시호코를 말릴 수 없다. 그나
마 가능한 사람은 아버지인 슈토 정도일 것이다.
“……시이나, 포기해. 어머니가 흥분 상태에 빠지면 누가 뭐라 해
도 듣질 않으니까.”
“그럴 수가아…….”
아예 달관의 상태에 이른 상태인 아마네는 빠르게 해명을 포기했
고, 그저 어머니의 폭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아마네가 용케도 이런 미인을 붙잡았네. 이 엄마는
깜짝 놀랐어.”
부정하는 것도 지친 아마네와 어쩔 줄 모르는 마히루는 함께 입을
다물었다.
그걸 긍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무슨 말을 해도 쑥스
러워서 아닌 척하는 것뿐이라고 받아들인 시호코는 호기심을 숨기려
들지 않는 눈으로 마히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떠니? 마히루가 보기엔 아마네는 제대로 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네? ……그건 그러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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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어머나.”
틀림없이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하는 말로 인식하고 있는 시호코의
반응에, 아마네의 얼굴은 슬슬 떨리는 참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확히는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망상대로
해석하는 어머니 때문에 몇 번이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아마네는 최
근 몇 개월 중에서 가장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기세에 밀리고 있던 마히루는 어땠는가 하면, 아마네와 시
호코를 번갈아 보면서 딱 봐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마히루, 마히루, 이건 부모라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지도 모르지
만, 아마네 얘는 말도 무뚝뚝하게 하고 솔직하진 않아도, 의외로 성
실하고 신사적인 성격이니까 좋은 사람을 잡았다고 생각해도 돼. 뭐,
여자 경험은 전무하니까 그 점은 마히루가 잘 조종하는 게 좋겠구
나.”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건데, 어머니. 정말 입 좀 다물어.”
후반부가 진짜 괜한 참견이었다.
“하지만 내 말이 맞잖니. 오히려 왜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은 거람.
슈토 씨를 닮아서 생긴 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뭐, 촌스러워서 그런가?”
“괜한 참견이거든.”
“마히루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떨까?”
“보여주지도 않을 거고, 얘도 보고 싶지 않을걸.”
“자꾸 그런다. 아, 정 원한다면 마히루가 바라는 타입으로 가꿔도
된단다. 옷만 잘 입히면 그런대로 잘 소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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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네……?”
마지막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억지로 만들려고 드는 시호코
를 보면서 아마네는 이마를 짚었다.
마히루는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단계까지 휩쓸린 상태였으며, 시
키는 대로 스마트폰으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제 틀림없이 마히루에게도 귀찮은 간섭을 하게 될 것이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마히루의 손을 잡고 “아마네를 잘 부탁
할게.”라고 거듭 당부하는 시호코를 보고, 아마네는 나중에 아버지
에게 ‘제발 부탁이니까 어머니 좀 말려 줘.’라는 문자를 보내기로 결
심했다.
“피곤하네요…….”
“미안해. 태풍이 지나갔네.”
머무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이미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
가 되어서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축 처진 모습으로 앉아 있던 아마네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히루는 왠지 어색하게 다소곳하게 앉아 있지만, 꼿
꼿하던 등을 평소보다 구부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탈 없이 대응하는 마히루를 이렇게까지 피폐하게 만든
시호코에게 전율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자식으로서 사과해야 하는
걸까.
“착각을 풀지 못한 채로 그냥 돌려보내서 정말 미안해.”
“아뇨, 뭐, 실제로 피해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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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천사님에게 주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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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린 것 같았다.
“응? 아아, 케이크야.”
흰 상자 안에 든 것은 케이크였다. 아마 마히루도 상자의 모양을 보
고 대충 감은 잡았겠지만 그래도 확인을 위해 물었으리라. 참고로,
치토세가 종종 SNS에 올리는 인기 제과점에 가서 사 온 것이다.
“……케이크를 좋아했었나요?”
“아니, 딱히. 너에게 주려고 사 온 거야.”
“왜 또……?”
“네가 학년 1등을 했으니까 소소한 축하 정도는 괜찮잖아. 1등 축
하해.”
자신에게 주려고 샀다는 말을 듣고 눈을 깜박이는 마히루.
정말로 예상외였던 모양이다.
“1, 1등은 매번 하니까, 그렇게 축하할 일은…….”
“그래도 늘 노력하고 있으니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상을 받는 것
도 좋지 않겠어? 쇼트 케이크인데, 혹시 싫어해?”
“네? 시, 싫어하진 않는데요…….”
“응, 그럼 잘됐네. 식후에 먹어 줘.”
어안이 벙벙한 분위기가 전해져 왔지만, 아마네는 그대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마히루는 너무 배려하면 오히려 난감해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끝내
는 게 낫다.
타인은 은근 극진하게 배려하지만, 자신의 일이라면 너무나 금욕적
이다. 웬만해선 자신에게 관대하게 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타입이
라고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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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축하해.”
“고마워요. 하지만…….”
“됐으니까 솔직히 받아들여. 노력한 건 사실이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자, 어서 먹어. 때로는 너도 너 자신에게 좀 관대하게 베풀고 살라
고.”
덧붙여서 “이미 사 온 것이고 너한테 준 거니까.”라고 말하자, 마히
루는 여전히 조금 미안해하면서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크가
놓인 접시와 포크를 집었다.
“감사히 먹을게요.”
“응.”
손을 가볍게 젓고 있으려니, 마히루는 왠지 신중한 손놀림으로 케
이크를 포크로 한입 크기만큼 덜어서 입으로 옮겼다.
여자는 단것이나 과자의 맛을 세심하게 따진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치토세도 자주 먹는 가게에서 파는 것이라면 문제없겠지.
그 증거로, 입에 넣은 마히루가 눈을 약간 동그랗게 떴고, 그 후에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표정이 바뀌는 일이 없는 마히루였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알아보기 쉽게 희로애락을 표현하게 되었다.
천천히 먹으면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모습은, 먹고 있는 것만으
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 왜 그러죠?”
“아냐,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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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번에는 가볍게 다치는 수준으로 끝나서 다행이지만, 주방에서 대
참사가 일어나거나 전자제품을 이상하게 다루는 바람에 가동하지 않
게 될 경우 아마네로선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마히루가 하는 말이 지극히 타당했기 때문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가 없다.
“……튀김 같은 건 절대로 시도하지 말아요. 화재가 날 것 같으니
까요.”
“튀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레벨이 높진 않아.”
“튀김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 그러고도 용케 혼자서 살 수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대놓고 “어차피 저는 편의점이 없으면 살지 못하거든요.” 하고 토
라진 투로 대꾸했더니 마히루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아마네를 보
기 시작했다.
딱히 풀이 죽은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만, 그래도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마히루가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그, 아마네 군에게 튀김을 시키는 건 무서우니까, 만약 튀김
요리가 먹고 싶어지면 미리 말해 주세요.”
“그럼 내일은 돈가스를 먹고 싶어.”
바로 기분을 푼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해 주자, 마히루는 안도한
듯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같이 곁들일 양배추도 많이 먹어야 해요. 그리고 채소를 많이 넣
은 된장국도 같이 만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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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그래.”
채소들과 씨름하길 약 한 시간, 식탁에는 꼴사납게 잘린 채소를 볶
은 것과 모양이 예쁜 오믈렛……과 스크램블 에그가 놓여 있었다.
당연히 모양이 예쁜 오믈렛은 마히루가 시범을 보여주려고 만든 것
이다. 오믈렛 비슷한 것, 아니 스크램블 에그는 아마네가 만들었다.
참고로 아마네의 오믈렛(가칭)은 맛을 본다는 명목으로 마히루 앞
에 놓였다. 아마네에겐 모범적인 견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쁜 모양
오믈렛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을 맞대서 식재료에 감사 인사를 한 뒤에 먹기 시작하자, 마히루
는 엉망이 된 달걀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옮겼다.
“……아무런 맛도 없는 스크램블 에그로군요. 소금과 후추를 빼먹
었죠?”
“잊어먹었어. 그리고 오믈렛을 만들려고 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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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다 함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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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난을 쳤다.
꼬집히고 있는 치토세가 실로 기뻐하는 표정인지라, 아마네는 그만
어깨를 으쓱했다.
“……나 그만 가도 될까?”
원래부터 아마네의 반이라서 가고 자시고 할 게 없었지만, 이쪽이
겸연쩍어지기 전에 그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싶었다.
“안 돼. 예정을 제대로 세워야 할 거 아냐. 케이크랑 파티 요리도
준비해야지!”
“나는 만들 줄 몰라.”
아마네의 실력으론 크리스마스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
마히루라면 아마 아무렇지도 않게 차릴 수 있겠지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아마네가 손을 가볍게 저으면서 무리라고 주장하자, 치토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깊게 응시했다.
“왜?”
“만들 줄도 모르는데, 그렇게 건강해 보이는 게 신기하다 싶어서
―.”
“딱히 상관없잖아, 그건.”
“자, 자, 치이. 아마네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뭐야, 잇군도 알고 싶어 했잖아.”
“나한텐 나중에 아마네가 가르쳐 줄 거야.”
“안 가르쳐 줘.”
멋대로 약속하지 말라고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그것도 의도적인
행동이었던 것처럼 이츠키가 소리 높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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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죠.”
“남자들은 아주 울상이겠군.”
밖에서는 마히루의 가드가 아주 단단했다. 어렴풋하게 기대하고 마
히루를 초대했던 남자들은 견고한 수비에 막혀 눈물을 삼켰으리라.
아마네는 용케도 그런 권유를 할 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
스로에게 웬만한 자신감이 없다면 그 천사님을 초대할 수 없을 텐데,
인싸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감탄조차 나왔다.
“……그렇게 저와 같이 보내고 싶을까요?”
“잘되면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
“뭘 위해서요?”
“그야 너와 사귀고 싶어서 아니겠어?”
“왜 저와 사귀고 싶은 걸까요?”
“……사귀게 되면 그렇고 그런 걸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건전하네요.”
단호하게 거절당했을 남자들에게 속으로 합장하면서 “뭐, 그래
도…….”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녀석들만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까 너무 의심하진 마.
너라면 남자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 정도는 알 거 아냐.”
“그러네요. 모두가 몹쓸 눈으로 볼 리는 없으니까요. 아마네 군도
그렇겠죠?”
“내가 널 언제 몹쓸 눈으로 봤던가?”
귀엽다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은 있지만,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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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진 않겠어?”
“익숙하니까요, 혼자 지내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는 걸 듣고는 아주 조금 가슴이 아팠
다.
마히루의 머릿속에서도 부모님의 생각이 한순간 스치고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어딘가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아, 그 뭐냐. 아주 뻔뻔한 제안이라는 건 알지만, 이브는 무리
라도 크리스마스에 같이 지내는, 건…….”
뭐랄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딱히 흑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초
대하는 것은 대개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다른 뜻은 결코 없다.
그저 마히루가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제안을 들은 마히루가 눈을 깜빡였다.
“같이 지내면서 뭘 하자는 건가요?”
“응? 아, 딱히 할 게 없구나. 미안해.”
그 점을 지적받으면, 아마네로선 더 이상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
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경우 그 뒤처리가 얼마나 귀찮을지를 생각하
면, 일단 같이 외출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집에서 보내게 되겠지만, 이 집에는 마히루의 흥미를 끌 게
거의 없으리라.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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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찾아온 크리스마스 이브.
학교는 이미 겨울 방학에 들어갔으며,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각자
계획했던 대로 지내고 있을 오늘, 이츠키와 치토세는 각자의 짐을 들
고 아마네의 집에 집합해 있었다.
시간은 오후 한 시경.
테이블 위에는 이미 주문 배달로 도착한 피자랑 주스가 놓여 있었
다. 이런 시간이 된 것은 예약했다고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문에 혼잡
해진 길을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도착이 늦어지고 말았기 때문이
었다.
점심으로 먹기에는 문제가 없는 시간이고 둘 다 정오가 지난 뒤에
와서 그다지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라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진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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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래,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아마네, 반응이 약해! 한 번 더.”
“Merry Christmas.”
“발음 좋게 말하긴 했지만 역시 반응이 약하지 않아?”
애초부터 텐션이 높은 치토세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도 텐션을 올린 것이라는 걸 아는 이츠키는 치토세를 달래
면서, 평소처럼 약간 가벼우면서도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그 정도면 됐잖아. 일단 먹고 놀고 자자고.”
“우리 집에서 자지 마, 멍청아.”
“농담이야. 자려면 치이 집에서 잘 거니까.”
“부모님이 안 계실 때 해라.”
“뭐어? 아마네는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는 거야?”
히죽거리면서 웃는 치토세는 무시하고, 아마네는 식기와 컵을 가지
러 주방 쪽으로 향했다.
치토세는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도
와줄게.”라고 말하면서 아마네의 뒤를 따라왔다.
주방은 당연하게도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거
의 마히루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마히루가 쓰기 쉽도록 각종 도구
와 조미료가 놓여 있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네.”
“그것참 고마운 말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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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마.”
“하지만 평소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이벤트를 핑계 삼
아서 같이 보내자는 말을 하다니 당연히 무리잖아? 그 전부터 친해
지지 못한 시점부터 이미 늦은 것이고, 친하진 않지만 앞으로 친해지
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너무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것 같거
든. 그리고 그런 녀석들일수록 꼭 파티를 하자고 말해 놓고는 단둘이
있으려고 한단 말이지. 여자의 입장에선 무서울 뿐인데.”
혀를 내밀고 “그런 인간들을 따라갈 정도로 가벼운 애도 아니고 말
이지.” 라고 말하는 치토세는 싫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이츠키에게
안겨들었다.
마히루와는 다른 타입이지만 치토세도 미인이기 때문에 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인기가 많은 여자는 인간관계로 골머리를 썩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가여워졌다.
“뭐, 시이나도 고생이 많겠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한다
면.”
“……아마네는 정말로 천사님에게 관심이 없구나.”
“뭐, 그런 셈이지.”
“옆집 사람이 아마네의 천사님이니까 말이지.”
“쫓아내는 수가 있어.”
“아잉.”
그만 하란 뜻을 담아서 약간 강하게 노려보자, 치토세는 익살스럽
게 “무서워.”라고 말하면서 이츠키에게 힘껏 안겼다.
“그래도 옆집 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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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와이프.
듣고 보니, 상황만 따진다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매
일 만들어 주고, 가끔은 휴일의 점심 식사도 차려 주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청소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그렇게 보일 수
도 있으리라.
다른 것은 서로에게 애정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이겠다.
마히루도 이츠키의 말을 듣고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대
외용 미소를 지으면서 “그럴 마음은 없어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요.”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츠키랑 치토세에겐 학교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하는구나. 그
렇게 생각하니, 왠지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상한 마음은 일절 가지고 있지 않고, 그러니까 시이나도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거겠지.”
“아마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관없지만 말이지. 정말로 신기한
조합이네……. 그렇게 유능한 시이나가 아마네에게 요리를 해 준단
말이지. ……인형을 선물해 준 사람도 시이나였어?”
“……뭐, 그래.”
“헤에.”
“시끄러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부터 이미 시끄러웠어.”
“너무해!”
치토세의 방긋거리는…… 아니 히죽거리는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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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당당하게 스스로를 부정한 치토세는 마히루를 빤히 보다가,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마히루에게 손바닥을 내미는 형태로.
“그러면 친구부터 되어 주길 부탁드립니다.”
“네? 네, 네, 잘 부탁드릴게요……?”
악수를 요청받으면서, 마히루는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잡았다.
한번 마음에 들면 어떻게든 친한 사이가 되려고 드는 치토세의 성
격상 마히루가 휘둘릴 것 같긴 하지만, 역시 평범한 친구로서 사귄다
면 자신이 굳이 끼어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올바른 교우 관계를 유지해 주면 좋겠다.
“사이좋게 지내려면 자기소개가 중요하겠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아마네한테서 이름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라카와 치토세
라고 해. 아마네의 절친……이라고 해도 되겠지? 절친인 잇군의 여
자 친구야.”
“아이참, 절친이라니 쑥스럽네.”
“쑥스러워하는 척해 봤자 징그럽기만 하거든.”
“또또 그렇게 말한다…… 아마네, 알고 있어? 세간에선 그런 걸 츤
데레라고 불러.”
“정말 쫓아낸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쫓아내겠다니 너무해애.”
“남자가 일부터 교태부리면서 말하지 마.”
우웩. 다분히 의도적으로 기분 나빠하는 반응을 보이자 이츠키가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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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미안해.”
저녁이 되어 이츠키와 치토세가 돌아간 후, 아마네는 약간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마히루에게 사과했다.
갑자기 모르는 인간이 끼어들어서 비밀을 들키는 바람에, 마히루도
곤혹스럽고 많이 지쳤을 것이다.
이런 대화를 시호코가 찾아왔을 때도 나눴던 것 같다.
“아뇨, 제가 어리숙하게 굴었던 게 원인이니까요.”
“많이 소란스러웠지?”
“……활달한 사람이었어요.”
“솔직하게 시끄러웠다고 말해도 괜찮아.”
“밀어붙이는 경향이 조금 있었지만, 재미있는 사람이었어요.”
“조금 수준이 아니잖아……. 그야 뭐,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
았다면 다행이지만 말이지.”
그 정도면 틀림없이 시끄럽다는 영역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표현이 점잖은 마히루는 실로 부드러운 표현으로 치토세를 평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치토세와 친구가 된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마히루와는 상당히 다른 타입인데…… 신선함, 이라는 의미에선 좋
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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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맛있었어.”
여전히 마히루의 요리는 맛있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만든 요리가 나왔
다.
마히루가 푹 끓인 비프스튜는 포트 파이1)로 만들어졌고, 그걸 잘라
먹는 식으로 요리가 나왔다.
파이를 자르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바삭바삭한 식감
에 비프스튜의 깊은 맛이 느껴지는 소스를 발라 먹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한때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파이의 반죽을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마히루의 수준 높은 솜씨에
감탄하면서, 오늘 두 번째의 케이크를 깨끗이 비운 뒤에 한숨을 돌렸
다.
참고로 케이크도 마히루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포트 파이용의 반죽을 만든 김에 케이크에 쓸 반죽을 동시에 만들
고, 그걸 이용하여 밀푀유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정도면 장인 레벨
이었다.
“변변찮은 요리였어요. ……정말 많이 먹어 주었네요.”
“응. 맛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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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였다.
“마히루, 몸이 기울고 있어.”
그런고로 다음에는 현실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익숙할 것 같은 레이
싱 게임을 플레이시켜 봤는데…… 마히루의 몸이 기울고 있었다.
이 게임은 자이로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컨트롤러에도 자이로
센서가 달려 있지 않았다.
몸을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건지
컨트롤러를 쥔 상태에서 몸을 좌우로 기울이고 있었다.
본인은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까 게임과는 달리, 차를 조종하는 게임이라서 차를 탈 기회가 있
는 현대인은 익숙해지기 쉬웠던 모양이다. 학습한 보람도 있었는지,
서투르게 운전하면서도 플레이 자체는 해내고 있었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몸을 기울이며 열심히 차를 움직인
다.
‘뭐야, 이거. 귀여워.’
진자처럼 좌우로 몸을 기울이는 마히루가 묘하게 귀여웠다. 아주
진지하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괜히 더 귀엽게 보이는 것이겠지.
커다란 커브를 돌자, 자연스럽게 마히루의 몸도 크게 기울어졌다.
툭 하고 아마네의 허벅지 위로 쓰러졌을 때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할 지경이었다.
“……딱히 몸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거든?”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응, 알아. 하지만 기울어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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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어요.”
두 시간을 넘긴 고전이 끝난 후.
화면 끝에 찬란하게 빛나는 1등이라는 글자를 획득한 상태로 골인
에 성공한 마히루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마네를 봤다.
긴 시간 동안 TV를 보면서 격투를 치른 끝에 드디어 얻은 영광의 1
등.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꼴찌를 경험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 순위를 조금씩 올려서, 가까스로 1등을 차지했으니까 감격스럽
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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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주 따뜻해.”
“그건 다행이네요.”
아마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마히루도 안도한 듯이 옅은 미소
를 지었다.
최근에는 이전과 다른 종류의 미소를 짓게 된 마히루의 단정하고
예쁜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다.
‘……이러고 있으면 진짜 천사님이란 말이지.’
학교에서 짓는 천사의 미소가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렇
게 솔직한 모습으로 보여 주는 미소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왜, 왜 그러죠?”
계속 바라보고 있던 것을 알아차렸는지, 약간 주위를 돌아본 후 아
마네를 쳐다보았다.
“아니, 마히루도 처음 봤을 때 비교하면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그런가요?”
자신은 몰랐다는 듯 볼에 손을 대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작게 웃었다.
“응. 아니, 전에는 툭툭 쏘아대기만 했고 귀여운 맛이 없었다고 할
까―.”
“귀여운 맛이 없어서 미안하네요.”
“화내지 마.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뭐랄까― 좋아졌다고 생
각해. 그런 식으로 웃는 게 더 귀여운데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마히루가 차원이 다른 미소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표정에
따라서 인상은 바뀌는 법이다. 학교에서 보여 주는 천사의 미소는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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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갈색이 보였다.
정면에서 본 마히루의 볼은 미묘하게 떨리고 안쪽부터 확연하게 물
이 들어 있었다.
새빨갛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달아오르듯 붉어진 마히루의 얼
굴은 아마네를 보자 한층 더 붉은 기운이 강해졌다.
왜 이런 표정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짐작이 가는 이유는 그
나마 하나 정도였다.
“……혹시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시끄러워요.”
아마네의 말을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마히루를 보고, ‘이럴
때는 역시 새침하게 구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그만 웃고
말았다.
마히루는 그런 아마네를 보면서 나지막이 신음하더니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올게요.”라고 중얼거린 뒤에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창밖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눈이 살랑살랑 내리고 있었지만, 마히
루는 상관하지 않고 베란다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아마네가 있는 곳까지 흘러들어 왔다.
바로 창문을 닫아서 바깥 공기를 차단했지만, 은근히 남아 있는 차
가운 공기는 무심결에 몸을 부르르 떨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런데도 베란다로 나간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슬쩍 한숨을 쉬
었다.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도망친 건 좋지만, 좀 더 따뜻한 차림으로 나
가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마히루가 입은 옷은 웃옷을 걸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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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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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정말 최고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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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포트 파이 : 고기를 넣은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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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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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마히루의 감상으로는 ‘아마네 군은 말랐으니까 살을 더 찌워야 하
지 않을까요?’라고 하니까, 되도록 지방이 아니라 근육을 키우고 싶
었다.
“뭐, 아마네 군이 먹어 준다면 괜찮겠지만요. 그거, 이리 주세요.
냉장고에 넣을 테니까. 아마네 군은 손을 씻고 가글하고 와요.”
“알았어, 자.”
마히루에게 짐이 든 비닐봉지를 주고, 아마네는 순순히 세면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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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슬슬 해가 넘어가겠네요.”
“그러네.”
메밀국수를 다 먹고 소파에 앉아서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더
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날짜가 바뀌기 직전이
되어 있었다.
TV를 잘 보지 않는지 요즘 노래는 잘 모르는 눈치인 마히루가 조용
히, 그러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모습을 구경하
고 있었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제야의 종을 치는 풍경으로 방송 화면이 바뀌고야 비로소 올해가
다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옆에 앉은 마히루는 눈을 내리뜨고 조용히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107번째 종소리가 들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날짜가 바뀐 순간, 자신을 보면서 자세를 반듯하게 세운 뒤에 고개
를 숙이는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도 덩달아 자세를 바로잡고 새해
인사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왠지 기분이 이상하네, 둘이서 새해를 맞
이하니까.”
“후후, 그러네요. ……올해도 잘 부탁해요.”
“나야말로…… 오히려 내가 잘 부탁해야 하는데.”
“그건 부정할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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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너희 집에 가도 되겠니?』
그런 메시지를 아버지가 보낸 것은 1월 3일 오후 10시. 저녁 식사
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마히루가 돌아간 후였다.
『 네가 집에 오지 않는 것은 좋지만, 역시 나도 얼굴을 한 번쯤은
봐야겠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웃 사
람에게도 인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아마네가 마히루에게 얼마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지 아는 아버지
―― 슈토가 부모로서 인사하고 싶다는 뜻이다.
이게 만약 시호코가 마히루를 모르는 상태였다면 온 힘을 다해 거
부했겠지만,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마히루 본인이 이미 시호코와 연락
을 주고받고 있으므로 거절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일단 숨길 게 없어진 지금, 부모님이 귀성하지 않은 자식을 시찰하
러 오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다.
슈토가 시호코와 함께 온다면 툭하면 폭주하는 시호코를 잘 붙잡아
줄 것이다.
아니, 말리지 않으면 똑같은 전철을 밟아 아마네와 마히루의 진이
빠질 테니까, 슈토가 열심히 움직여 줘야 한다.
어차피 거절해도 시호코가 억지로 마히루를 보러 올 것 같아서, 아
마네는 먼저 연락해 준 아버지에게 알았다고 답장한 뒤 마히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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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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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불안한 듯 슈토를 보고 있어서, 그 시선을 알아차린
슈토도 온화한 웃음을 지으면서 시호코 옆에 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마네의 아버지인 슈토라고 합니다. 시이나
양의 이야기는 시호코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신세를 많
이 지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시이나 마히루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아
마네 군에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인사한 슈토에 맞춰, 마히루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마히루는 슈토가 시호코 같은 타입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 같
지만, 슈토는 온후한 인품과 상식을 갖춘 사람이므로 그 점에선 부디
안심했으면 좋겠다.
시호코에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슈토뿐이며, 시호코도 슈토
에겐 약했다. 홀딱 반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어머나, 그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된단다. 누가 봐도 우리 아마네
는 칠칠치 못하니까 말이지.”
“칠칠치 못해서 미안하네.”
“시호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아마네, 평소 신세를 지니까
잘 챙겨 주고 있겠지?”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럼 됐다.”
여자를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치는 슈토는 아들인 아마네가 마히루
를 잘 챙기고 있는지 걱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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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세요.”
부모님이라곤 해도 손님이므로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히루
가 차를 내오겠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냥 맡기고 말았다.
마히루가 마시려고 가져온 티세트와 홍차가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
이 될 줄은 몰랐으리라.
평소 아마네와 마히루 둘이서 앉는 소파에 앉은 부모님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나. 고맙구나, 마히루. 완전히 익숙해졌구나.”
“네…….”
“원래는 아마네가 할 일 아니니?”
아마도 아마네가 끓였다간 홍차에서 쓴맛만 남을 것 같아서 마히루
가 한 것이지만, 시호코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서…….”
“뭐, 아마네가 하면 물 온도도 대충 맞추니까 어쩔 수 없어.”
지당한 평가지만, 지적을 받으니 살짝 부아가 났다.
그러나 차마 반론할 수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시호
코는 아마네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마네, 이제는 마히루를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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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 됐어.”
시호코에게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라며 온갖 잔소리를 들
으면서 머리카락과 얼굴을 농락당하고 패션 코디도 세팅당한 끝에
간신히 해방됐을 때는 은근히 피곤했다.
패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마네에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거울로 확인해 보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평소 아마네와는 비교
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남자가 보였다.
시호코가 고른 것은 다크 그레이 체스터코트에 흰 터틀넥, 검은 슬
랙스 조합. 심플하면서도 캐주얼한 분위기를 억제한 코디네이션이
다.
새해 경축 행사에 가는 거니까 가벼운 차림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지, 정장 같은 분위기도 살짝 풍기고 있었다.
아마네도 컬러풀한 옷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모노톤에 차
분한 차림은 취향과 일치했다.
머리 모양도 확인해봤는데, 약간 긴 앞머리는 머리에 쓰는 인두와
왁스, 시호코의 솜씨로 잘 넘어가 평소 앞머리에 가렸던 눈이 드러나
있었다.
눈을 확실하게 노출함으로써 인상이 제법 밝아졌는데, 그뿐만이 아
니라 볼륨감을 잘 살려서 세팅한 앞머리가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
고 있었다.
어머니나 이츠키에게 음침하다는 야유를 들었던 아마네는 어느새
사라지고, 이게 누구냐 싶을 정도로 산뜻하고 인상이 훤한 남자가 거
울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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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주 잘 어울리는군.”
자연스럽게 웃으며 칭찬하는 슈토의 말을 듣고 마히루도 약간 쑥스
러운 듯이 시선을 내렸다. 그런 동작까지도 매혹적으로 보이니까, 미
인이란 진짜 무시무시하다.
“자, 아마네, 너도 감상을 말해야지.”
“어울리는 것 같아.”
아무래도 부모님 앞에서 절찬할 수는 없어서 무난하게 칭찬하고 넘
어갔지만, 시호코는 매우 못마땅한 눈치다.
“……그런 점이 문제라는 거 아니?”
“됐네요.”
시호코한테서 박한 평가를 받았지만, 아마네는 부모님 앞에서 더
칭찬할 마음이 없으므로 고개를 돌렸다.
시호코는 그런 아마네가 어처구니없는 눈치였지만, 그 성격을 잘
아는지 한숨만 쉬고 넘어가 주는 것 같았다.
“얘도 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히루는 어때? 아마네, 이러
니까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
“네, 네. 평소와는 완전히…….”
“평소에도 이렇게 입고 다니면 인기가 있을 텐데, 그렇게 안 한단
말이지. 정말 손해만 보면서 산다니까.”
아마네에겐 괜한 참견이지만, 시호코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한
숨을 쉬고 있었다.
“기왕 슈토 씨를 닮았는데, 그걸 살리지 않는 얘는 정말 실망이야.
아까워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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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보아하니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부모님 모두 외출 준비
로 넘어간다.
어느 신사에 갈지는 부모님에게 맡기고, 먼저 주차장에 가려고 집
을 나서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나는 가방에 필요한 걸 넣어둬서 더 준비할 건 없는데, 마히
루는 어때?”
“아, 이 가방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
갑자기 둘만 남는 바람에 조금 어색함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창문
을 닫거나 쓸 일이 없는 가전제품의 콘센트를 뽑았다.
거실 불을 끄고 나서, 다시 마히루를 봤다.
역시 자세히 보질 않아도 미인이다. 이만큼 기모노가 잘 어울리는
소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 앞인지라 너무 노골적으로 칭찬할 수 없었지만, 누가 봐도
전통복 미인인 마히루는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마네 군?”
“응? 아니, 잘 어울린다 싶어서. 청초한 전통복 미인 느낌이 딱 들
어.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해.”
슈토에게 여자가 꾸몄을 때 칭찬하라고 배웠으니 원래는 처음에 그
래야 했지만, 부모님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은 부끄러웠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마히루는 몇 차례 눈을 크게 깜박였고, 그런
뒤에 살짝 볼을 붉히면서 입술을 꼭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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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여기야―.”
시호코의 목소리는 밝고 시원시원해서 알기 쉽다.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둘이서 부모님에게 가 보니 시호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뒤에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아
마네와 마히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머머.”
“왜?”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있구나 싶어서.”
그 말을 듣고, 시호코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은 실수였다고 뒤늦게 깨
달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이
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상하게 착각한 시호코가 실실 쪼개는 모습을
봐야 한다니, 웃기지도 않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잡은 거잖아. 그리고 기모노를 입고 있으
면 넘어지기도 쉽고.”
“그래. 기모노를 입으면 걷기 힘드니까 에스코트해 줘야지. 나도
시호코한테는 그렇게 하니까.”
슈토는 이해가 되는지 마히루의 손을 잡은 것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시호코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저렇게 눈치껏 손을 내밀어서 잡을 수 있다면 고생하지
않겠지만, 성격상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마히루가 순순히 손을 잡아
줘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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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 아뇨, 됐어요. 여기요. 저도 감주를 주세요.”
“으, 응.”
무슨 이유인지 약간 발끈한 마히루에게 감주 컵을 강탈당해서, 아
마네도 마히루에게 컵을 받았다.
내용물은 색만 봐도 팥을 연상케 하는 걸죽한 액체.
은은하게 풍기는 팥 특유의 향기를 맡으면서 입에 대고 마시자 역
시나 달고 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단맛이 조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네가 단것을 좋아하는 체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맛있지만, 역시 단팥은 차와 궁합이 좋다고 통감했다.
여담으로 마히루는 단것도 그럭저럭 좋아한다고 하니, 이 정도가
딱 알맞을지도 모른다.
마히루를 힐끗 보니 감주를 한 모금 마셨는지 볼이 살짝 상기된 채
어질어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입에 안 맞았어?”
“아니에요. ……아마네 군, 케이크 때는 바로 알아차렸으면서, 왜
이건 모르는 건가요?”
“……아.”
그제야 마히루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닫고, 아마네도 딱딱
하게 굳었다.
(앙~은 아니지만. 이건 간접 키스네.)
단팥죽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간접 키스를
제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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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댔다.
“……저와 아마네 군도 친구니까 딱히 문제없어요.”
“으, 응……. 네가 다 마셨네.”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알코올 성분이 없는데도 볼을 붉히고 있는 마히루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아마네는 마히루가 3분의 1쯤 남긴 단팥죽을 마셨다.
아까보다는 식었을 텐데도, 그 단팥죽은 뜨겁고 왠지 모르게 엄청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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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부엌에서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가 날아들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시치미를 떼면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옆에서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슈토가 “시호코를 너무 괴롭히지 말
렴.”이라고 타일렀지만,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니 놀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마네이므로 이 정도 앙갚음은 허용되리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아마네에게 부엌에서 “정말 못된 아이라니
까.”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시호코는 바로 마히루
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었다.
마히루도 당황하지 않고 시호코가 거는 말에 차분히 대꾸하고 있었
다. 시호코의 성격에 많이 익숙해졌는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멀리서 두 사람이 사이좋게 조리 중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마네는
슬쩍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호코는 시이나 양이 정말 마음에 든 것 같구나.”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뒤에서 구경하던 슈토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 예쁘고, 귀엽고, 성격도 좋으니까 어머니가 좋아할 줄은 알
았어.”
“아마네 너는 어떤데?”
“……별로. 그냥 착하고, 귀여운 애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은근슬쩍 체크하나 싶었는데, 슈토는 딱히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니
까 그저 순수한 흥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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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맛있네.”
“감사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평소 두 사람이 쓰면 딱 맞는 식탁에서 네 사람이 먹
을 수는 없어서, 다른 방에 보관하던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 저녁을
먹었다.
슈토의 솔직한 감상에 안도한 마히루는 몸에서 긴장을 살짝 풀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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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손대지 않는다.
일단 아마네와 마히루는 친한 부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으니까 마
히루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서 접촉했지만, 다른 사람에
게 이럴 생각은 없다.
애초에 접촉하려는 시도도 안 할 것이다. 기껏해야 못된 장난을 치
는 치토세에게 벌을 줄 때가 다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지거나 쓰다듬을 리가 없잖아.”라고 덧붙이자 마히
루는 머리에 얹힌 손을 치우지도 않고 얌전해졌다.
“……보면서 알았지만 아마네 군은 슈토 씨와 아주 많이 닮았어요.
안 지 얼마 얼마 안 되는 제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어디가? 성격도 얼굴도 별로 닮지 않았는데.”
“……판박이예요, 정말로.”
이번에는 크게 한숨을 쉬는 마히루에게 조금 울컥한 나머지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마히루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닮았나?)
확실히 나란히 서면 남들이 나이 차이가 나는 형제로 종종 착각하
지만, 아마네와 슈토는 분위기가 정반대다.
성격도, 정반대는 아니지만 닮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똑같다고 말하다니, 무슨 영문일까.
의문이 속속 떠오르지만, 마히루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마네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마음껏 쓰다듬은 뒤에 손을 떼자 마히루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아마네를 쳐다보고 이상하게 허둥댔다.
“왜, 더 쓰다듬어 줬으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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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뭔가 너무 듣기 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
게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다행히 마히루는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아마네를 보고 조금 만족스러운 기색이다.
“알면 됐어요. 자, 점심 준비를 할까요.”
보아하니 정초 사흘에 이어서 오늘도 오늘도 점심을 차려 줄 생각
인 듯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아마네의 집 문고리를 잡은 마히루
를 보고, 아마네는 쑥스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히루의 머
리를 내려다봤다.
(……신뢰한단 말인가.)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은 자신이 할 말이다.
아마네가 마히루를 천사로 보지 않았던 것처럼 마히루도 아마네를
단순한 옆집 사람으로 봐 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신뢰해
줬다. 그게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었다.
“이리로 오길 잘했네.”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목소리만 들렸는지 마히루가 “뭐라고 했나
요?”라고 물어보며 돌아봤고, 아마네는 얼버무리듯이 웃으면서 “아
니,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하고는 마히루와 함께 자신의 집으
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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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신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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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키고 말았다.
분명 차갑게 식은 몸을 훈훈하게 데워줄 것이다.
“……팥찐빵을 먹고 다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반반씩 나눠 먹을까? 그러면 다 먹을 수 있겠지?”
“……네.”
제안하니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기에, 아마네도 슬쩍 웃고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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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른해요.”
“그래? 그럼 나는 편의점에 가서 아침밥과 마히루가 먹을 만한 걸
좀 사 올게.”
일단 죽도 사놓은 게 있지만 환자에겐 젤리나 복숭아 통조림 같은
걸 먹인다는 이미지가 있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가서 사
올 생각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안도하면서, 갈아입을 옷
을 옷장에서 꺼내 다시 침대에 놓았다.
“갈아입을 옷을 두고 갈게. 열도 재 봐. 땀을 닦고 싶으면 거기 있
는 대야에 담은 물과 수건을 써.”
밤중에 얼굴의 땀을 살짝 닦아 줄 때 담았던 물을 가리킨 뒤에 아마
네는 방에서 나왔다.
지갑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은 열 때문에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을 마
히루가 옷을 갈아입거나 땀을 닦을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서였다. 편의점은 맨션에서 꽤 가까우니까 불과 몇 분 사이에 다녀올
수 있지만, 시간을 조금 들여서 물건을 샀다.
20분 정도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구매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마
네가 냉장 보관이 필요한 것을 냉장고에 넣고 난 뒤에야 다시 마히루
를 보러 가니, 마히루는 옷을 갈아입고 아마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도 완전히 차린 것 같아서, 어제보다 기운이 있어 보이는 마히
루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열은 재 봤어?”
“37.5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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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저를 바보로 아는 건가요? 만약 직접 먹지 못한다면 대신 먹여 줄
건가요?”
“응? 그야 뭐…….”
아마네가 “정 원한다면 먹여 줄 수도 있지만…….”라고 덧붙이자,
마히루는 또 열이 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제,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으, 응.”
마히루는 아마네한테서 그릇을 받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지만, 결국
다 먹을 때까지 붉은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죽을 다 먹은 뒤에도 아직 식욕이 있는지 젤리를 꺼내서 다 먹는 걸
본 뒤에야 한숨을 놓았다.
일단 몸 상태는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까, 이제는 쉬면서 체력을 회
복하면 되겠지. 마히루도 비교적 기운을 차린 얼굴이어서 아마네도
안심했다.
“그리고 달리 해 줬으면 하는 건 있어?”
“……지금은, 없어요.”
“그래? 알았어.”
그러면 한숨 더 자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는 방에서 나오려고 일어
났을 때 마히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렁이던 눈이 똑바로,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아마네를 바라봤다.
그 캐러멜색의 눈에 또 불안과도 같은 감정이 한껏 담긴 듯해서, 아
마네는 그만 그 자리에 다시 앉고 말았다.
“……아마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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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쓸쓸해 보여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마히루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아마네를 쫓아낼 것이다.
그래서 아마네는 말없이 침대 옆에 앉아서 상반신을 일으킨 채 침
대에 앉아 있는 마히루를 쳐다봤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다시 잠들 때까지 이야기나 할까?”
“……네.”
침대에 기대면서 웃어 보이자, 마히루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흐
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 누군가에게 간병을 받아본 게 처음이에요. ……코유키 씨
도 퇴근 시간이 되면 그냥 돌아갔으니까요.”
“코유키 씨?”
“친가에서 살았을 때 같이 지냈던 가사 도우미분이에요.”
“아, 요리를 가르쳐 줬다는 사람 말이구나.”
“아침과 밤에는 늘 혼자였거든요…….”
“오늘은 내가 곁에 있을게. 빨리 기운을 못 차리면 내가 곤란해지
니까.”
“죄송해요. 침대를 점령해버렸네요. 식사도…….”
“그런 뜻이 아니야. ……마음이 편하질 않잖아. 늘 함께 있는 사람
이 아픈 걸 보면.”
친해진 뒤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고는 해도, 앞으로도
한동안 같은 시간을 보낼 사람이 건강을 해치면 걱정이 되는 것도 당
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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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밸런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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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시험.”
“저기, 화사한 남자 고등학생이 왜 그런 빈티 나는 발상을 하는 거
야?”
방과 후 아마네의 집을 방문한, 아니 다짜고짜 쳐들어온 치토세는
아마네의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뭔가 의논할 게 있다면서 찾아왔지만, 기분 탓인지 마히루와 놀기
위해서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마히루는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거실에는 아
마네와 치토세밖에 없었다.
“남자 고등학생에게 무슨 화사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이라
면 당연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청춘을 만끽하는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밸런타인데이라고 대답해
야 하는 것 아닐까?”
“청춘을 만끽하지 않아서 모르겠어.”
“또 그런다―.”
소문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히죽대고 보니까, 아마네는 일단
째려봤다.
그랬는데도 치토세는 웃음을 그치질 않으니,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상의하고 싶다는 게 뭐야?”
치토세가 일부러 아마네 집에 온 것은 이츠키가 없는 자리에서 아
마네와 마히루에게 상의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음. 잇군에게 줄 초콜릿을 어쩔까 싶어서. 중학생 때는 평범하게
파는 초콜릿을 녹인 뒤에 모양만 바꿔서 줬는데 말이지, 역시 고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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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쇠!”
볼을 부풀리고 “쩨쩨해―!”라고 하는 치토세를 무시했더니, 쓴웃음
을 지은 마히루가 부엌에서 돌아왔다.
쟁반에는 치토세의 요청으로 밀크티가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 세 사람 분의 밀크티를 놓았을 때 아마네는 소파
에서 일어나 가까이 있던 쿠션과 함께 바닥에 앉았다.
마히루에게 ‘소파에 앉아’라고 눈짓으로 권유하자 약간 미안한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금 전까지 아마네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다소
곳이 앉았다.
“그런 소문이 돌 정도라면 학교에서 하고 다녀도 인기가 있을 텐
데.”
“싫어. 귀찮아질 게 뻔하고 애초에 인기를 얻고 싶지도 않아.”
“에이, 모처럼 큰 이벤트인 밸런타인데이가 있는데? 아마네는 밸런
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고 싶지 않은 거야? 예를 들어서 인기가 많
은 유짱은 엄청나게 많이 받을걸? 부럽지 않아?”
“뭐? 싫어. 당뇨병에 걸릴 것 같아.”
유짱은 아마 유타를 말하는 거겠지. 다행히 아마네는 희생양이 되
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이름을 붙여 부르는 건 치토세의
특이한 버릇이다.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유타는 아마도 초콜릿을 대량으로 받겠지만,
그걸 전부 다 먹었다간 분명 몸에 군살이 붙을 것이다.
“무엇보다 답례를 생각하면 우울해질 것 같아. 카도와키라면 예의
상 주는 거와 진심을 담아서 주는 걸 합치면 대충 두 자릿수에 가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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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는 뭘 만든 거야.”
“아마네 너를 놀라게 하겠다던데.”
어떤 의미로는 경악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몸서리를 칠 정도로
놀라게 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 같다.
“……먹는 게 두려워지네.”
“포기해. 맛을 본 나도 거쳐 간 길이니까.”
“너는 반쯤 재미로 먹은 거잖아.”
“그렇긴 하지. 치이가 만든 거라면 뭐든 먹을 거야.”
“멍청한 닭살 커플.”
이츠키는 치토세가 주는 거라면 뭐든지 먹겠지.
애초에 치토세는 딱히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도전 정신이
지나치다는 것이 문제다. 평범하게 만들 때는 잘 만드는 것 같은데,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상하게 손을 댄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희생자는 이츠키지만, 아마네한테도 폭탄이 돌아올 줄
은 몰랐다.
뭐, 이츠키의 반응을 보면 못 먹을 수준은 아닌 듯하니까 너무 두려
워할 필요는 없겠지만, 울적할 수밖에 없다.
질겁하는 아마네를, 이츠키는 포기하라는 뜻을 담아서 이미 경험한
자 특유의 훈훈한 눈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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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괜찮다니까. 입가심할 것도 있을 테니.”
“입가심할 것?”
“그럼 우리는 갈게―. 바이바―이.”
아마네의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이츠키의 손을 잡고 교실에
서 나가려 했다. 오늘은 밸런타인데이 데이트란다.
“건투를 빌게.”
이츠키의 위로와 격려를 들으면서, 아마네는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본 뒤에 아마네도 슬슬 집에 가
고자 코트를 걸치고, 책상 옆에 걸어 둔 가방을 들었다.
혼자 남은 것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지만, 여기 있어 봤자 충실한 삶
을 사는 남녀들의 훈훈한 분위기에 방해만 될 것 같기에 빨리 퇴장해
줄 생각이었다.
그만 가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방을 메다가 문득 같은 학년에
서 가장 충실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봤다.
겨우 선물 공세가 진정된 것으로 보이는 유타가 책상 위에 쌓인, 남
자라면 침을 흘릴 만한 물건들을 약간 초점이 나간 듯한 눈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책상 옆에 걸어둔 손가방에는 보물이 잔뜩 채워져 있었
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동정
하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카도와키.”
“응? 아, 후지미야구나.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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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에요.”
“응, 땡큐. 덕분에 살았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아마네는 안도하고 슬쩍 한숨을 쉬었다.
부정당했다면 혼자 괜히 의식한 것 같아서 부끄럽겠지만, 다행히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마히루는 ‘모처럼 밸런타인데이니까’라는 마음으로 만들었겠지. 가
볍게 이벤트에 참가한다는 기분으로 만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고마
웠다.
한 번 더 “고마워.”라고 말하자, 마히루는 왠지 불편한 듯한 기색으
로 몸을 꼬물거렸다.
“왜 그래?”
“저기, 그게…….”
“응?”
옆에 앉아서 보채면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 최대한 자상한 말투를
의식하면서 되물었다.
어디까지나 천천히 물어보니, 마히루는 안고 있던 쿠션에 얼굴을
반쯤 묻으면서 아마네를 쳐다봤다.
몸을 약간 웅크리고, 언뜻 불안하게도 보일 만큼 시선만 슬쩍 위로
돌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졌다.
작은 동물 같은 몸짓을 보이는 마히루가 묘하게 귀엽고 미소를 자
아내게 하는지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마히루는 몸을 떨기만
할 뿐 다음 말을 도저히 하지 않았다.
“……이, 이만 가 볼게요.”
그러기는커녕 갑자기 일어나서 자신의 짐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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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동안 같이 지내면서 안 사실인데, 이건 살짝 화가 났을 때
에 보여주는 표정이다.
“……아마네 군.”
“응?”
“그때는 우리가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시기죠?”
“그런데?”
“왜 말해 주지 않았나요?”
“묻지 않았으니까. 너도 말하지 않았잖아. 학생증을 보고 알았으니
까.”
“으.”
“애초에 그때는 지금처럼 친하지도 않았는걸. 생일이 언제라고 알
려줘 봤자 ‘이 인간이 무슨 소리래.’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을 거
고.”
자신의 생일을 마히루에게 알려줘도 그때의 마히루는 “그런가
요.”라는 반응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네도 선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런 짓은 질
색이었고, 그 정도로 뻔뻔한 사람도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말할 만큼 신뢰가 두터운 관계도 아니었으니
까 말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 올해 생일은 빼먹지 않고 축하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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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화이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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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비할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겉치레보다 실리를 더 중시하는 치토세라면 기뻐하면
서 받아줄 것이다. 그 선물을 고른 이유만 말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마히루다.
마히루는 아마도 무엇이든 기뻐하며 받아줄 것 같았다.
아마네가 주는 것은 대부분 받아 주는 데다가, 마음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딱히 물건 자체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 같다. 원하는 것
이 뭔지 물으면 부엌칼 연마용 숫돌을 맨 먼저 언급하는 소녀이므로,
솔직히 뭘 주면 좋을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 타입이었다.
취향을 기준으로 선택하려고 해도 여자라면 의외로 공통적이라 할
수 있는 좋아한다는 단것과 귀여운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뭘 골
라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에 말했던 숫돌은 전혀 분위기에 맞지 않고 예산
을 생각해도 버거워서 제외한다고 쳐도, 뭘 선물해야 좋을지 고를 수
가 없어서 골치가 아팠다.
가능하다면 이번에는 실용품보다 기호품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일단 잡화점에서 화이트데이 특집 코너를 둘러보
고 있었지만, 마히루가 정말로 기뻐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
았다.
기왕이면 곰 인형을 줬을 때처럼, 그런 반응을 보일 선물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또 곰 인형을 선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귀여운 곰 인형이라면 진열장에 잔뜩 있지만, 같은 선물을 하는 건
신선한 맛이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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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게 무엇보다 이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으, 응.”하고 어색하게 대꾸했고, 그런
뒤에 분위기를 얼버무리려는 듯이 옆에 둔 종이가방을 대충 들이미
는 것처럼 내밀었다.
“자, 받은 초콜릿의 답례야. 너무 기대하진 마.”
“……고마워요. 봐도 될까요?”
“응.”
눈앞에서 자신이 준 선물을 개봉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막을 수
는 없었다.
일단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벨벳 천이 안에 든 작은 상자를 사서 넣
어놨지만, 내용물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괜히 샀다는 생각도 들
긴 했다.
뽀얀 손가락이 짙은 남색 상자를 살며시 열자, 그 안에는 며칠 전에
산 핑크골드색 팔찌와 접어서 같이 넣은 종이가 있었다.
마히루는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심
플함과 품격을 중시하면서 꽃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팔찌를 골랐다.
곳곳에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크리스털 글래스가 드러나 있어서,
귀여움과 우아함도 갖춘 디자인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상자에 담긴 팔찌가 드러나자, 캐러멜색 눈은 핑크골드의 광채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취향에 안 맞아?”
“아뇨, 귀여워요.”
“그럼 다행이네.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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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어울릴 것 같아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운 표정으로 눈을 내
리뜨고 있었다.
그 귀엽고 순진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숨이 탁 막히고 말았
다.
“그리고 이건……?”
눈을 돌리고 싶은데도 시선이 고정되는 바람에 아마네는 마히루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같이 넣어둔 것을 마히루가 찾아내자 쑥스
러워하면서 볼을 긁었다.
“아, 그거? 저기, 그게,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항상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소원 정도는 들어주고 싶었거든.”
같이 넣은 것은 직접 만든 ‘뭐든지 들어주는 티켓’. 아이들 장난 같
은 물건이었다.
세 번 쓸 수 있는 회수권이며, 아마네가 그린 곰 일러스트가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잘 만들어졌다고 아마네는 평가하고 있었다.
항상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마히루가 뭔가 소소하게 원하는 게 있
다면 최대한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에 같이 넣었는데, 마히루는 곰 그
림에 주목했는지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후, 후훗, 아마네 군이 직접 그린 건가요? 이 일러스트.”
“시끄러워. 미안하네, 못 그려서.”
“아뇨, 개성이 있어서 좋아요.”
은근슬쩍 못 그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눈썹을 팔자로 모으고
끙끙댔지만, 마히루가 청순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하
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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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바로 써도 될까요?”
“뭔데?”
지금 당장 쓸 줄은 몰랐지만,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 줄 수 있는 범위에서 들어줄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팔찌가 든 상자
를 살며시 내밀었다.
“……아마네 군이, 채워 주세요.”
“그 정도는 회수권을 쓰지 않아도 들어줄 거야. ……분부대로 하
죠.”
마히루가 말한 소원은 정말 소소했기 때문에 아마네는 그런 건 티
켓을 쓰지 않아도 부탁만 하면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쓴웃음
을 지었다.
더 큰 소원에 쓰면 될 텐데, 굳이 귀여운 소원을 말한 마히루의 소
박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마네는 마히루가 내민 손에서 상자를 받아 허벅지 위에 놓은 다
음 팔찌를 꺼냈다.
작은 고리들이 서로 부딪치는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부서지
지 않게 조심스럽게 연결 고리를 풀어서 손목에 살며시 감았다.
정중하게 채우는 것을 의식하고 연결 고리를 잠그자, 마히루의 가
녀린 손목을 물들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색조의 팔찌가 금속성 빛을
발했다.
역시 마히루의 뽀얀 살결에는 이 색이 잘 어울렸다.
청초한 미모라서 화려한 것보다는 간소하고 기품이 있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당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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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응, 잘 어울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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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 화이트데이는.”
다음 날, 이츠키가 감상을 물었을 때 아마네는 최선을 다해서 태연
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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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네요.”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귀가하자 앞치마를 입은 마히루가 맞
이해 줬다.
자신도 모르게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츠키와 주고받은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마히루에게 그런 감정이 없는
데도 이상한 망상을 해 버린 것은 본인의 잘못이므로 황급히 그런 생
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응, 이츠키와 감자튀김을 좀 먹고 왔어.”
“……저녁 식사를 앞둔 시간인데 말인가요?”
“괜찮아. 남기지 않고 다 먹을게.”
마히루의 요리가 들어갈 배는 따로 있다. 그리고 애초에 감자튀김
도 자중하는 의미로 S사이즈를 골랐으니 그렇게 배가 부른 것도 아
니다.
평소에 나오는 만큼 다 먹을 자신이 있었다.
“살이 찌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마네 군은 말랐
으니까 살이 좀 붙은 게 더 보기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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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봄 방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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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러붙지 마, 징그러워.”
“마음에 상처를 받았어! 위자료로 시이나의 요리를 달라!”
“상처를 안 받았어도 먹을 거잖아.”
“에헤헤.”
“귀여운 척하지 마. 쏠리니까.”
“너무하네. 더 직접적인 표현을 쓰다니…… 으흐흑.”
의도적으로 우는 시늉을 하는데 얼굴은 웃고 있어서, 아마네는 어
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츠키를 보면서도 아주 조금 안도했다.
이츠키가 아버지와 싸우는 일은 종종 있지만, 오늘 아침에는 조금
심각했던 모양이다. 학교에선 왠지 억지로 활기차게 구는 것 같았는
데, 조금은 기운을 차린 것 같다.
뭐, 본인에겐 도저히 말하지 못하니까. 아마네는 이츠키에게 쌀쌀
맞게 대하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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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달걀 요리를 참 좋아하네요.”
“달걀은 좋아. 그리고 네가 만든 달걀 요리가 가장 맛있으니까 엄
청 기대돼.”
마히루의 요리는 꽝이 없으니까 좋아하는 달걀 요리라면 더욱 기대
가 된다. 전에 먹었던 비프스튜 오므라이스는 최고로 맛있었다. 그건
매주 먹어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치토세가 참 바람직한 요리를 요청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엄지
를 척 세우고 기쁜 마음으로 4인분 쌀을 계량해서 씻고 있었는데, 정
작 마히루는 냉장고 앞에 선 채로 굳어 있었다.
“왜 그래?”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기습하면 안 돼요.”
“무슨 뜻이야?”
“몰라도 돼요.”
고개를 홱 돌리고는 수프 재료를 썰기 시작한 마히루를 보면서, 아
마네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러면서 사귀지 않고 있으니까, 잘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정―말 맛있었어―!”
점심을 다 먹은 치토세는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배를 쓰다듬었
다.
표정을 봐도 매우 만족했음을 알 수 있어서, 마히루는 기쁜 듯 미소
를 짓고 있었다. 남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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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바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진을 보낸 거야?
왜 자기 전의 아마네에게 보여 준 것일까. 이런 걸 보여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들 수가 없잖아.
“왜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어? 무슨 이상한 사진이라
도 보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뭘 보는 건데.”
얼굴을 쓱 들이밀면서, 미처 숨길 틈도 없이 이츠키의 눈이 스마트
폰에 표시된 메시지를 봤고, 그런 뒤에 씨익 하고 웃었다.
“과연 그랬군. 아마네 군은 정말 순수하네요.”
“영원히 잠들어라.”
“죽으라고 돌려서 말하는 거야?”
“직접적으로 말해 줄까?”
“쌀쌀맞긴. 아니, 그래도 뭐 그 천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남자라
면 뭔가 확 끌리는 게 있겠지. 아니, 나한테는 치이가 가장 아름답지
만.”
“마음껏 자랑해 봐, 멍청아.”
정말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
면서 한숨을 쉬었을 때 찰칵 하고 셔터 소리가 났다.
“……이츠키.”
“아니, 치이가 아마네 사진도 기념으로 찍어두라는 메시지가 왔거
든. 넌 남자니까 사진을 찍어도 딱히 문제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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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이츠키와 치토세가 묵고 돌아간 뒤에 아마네와 마히루는 둘이 나란
히 소파에 기대 앉았다.
일단 예정했던 3일이 된 오늘 아마네의 집에서 자는 건 끝내기로
했으며, 앞으로 하루나 이틀은 치토세의 집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했
다. 며칠 정도는 치토세의 부모님도 환영하겠지(매일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역시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는지라 사양했다고 한다.).
마히루가 만든 점심을 먹고 “그동안 실례했어. 남은 시간은 둘이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웃으면서 남긴 뒤에 떠났다. 제멋대로 망
상하는 것 같았지만, 따지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마히루는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다기보다는 큰일을 치렀다는 느낌이네요. 그래도 즐거
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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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적어도 아마네가 마히루와 안면을 튼 이후로 마히루가 친구를 집에
부른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아니까, 치토세가 그런 계기가 되어 준 것
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네가 모르는 곳에서 치토세와도 만나거나 때때로 같이 노는 것
같았으니 친한 친구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게, 갑자기 사진을 찍어서 놀라긴 했지만요…….”
“아, 응, 그거 말이구나.”
사진이라는 말을 듣자 어제 그 청초하면서도 요염한 모습이 떠올랐
고, 저절로 볼이 빨개졌다.
딱히 큰 노출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역시 네글리제는 얇은 옷이라
서 부드럽게 부푼 부분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이 보이기도 했기 때문
에 실로 눈에 해로웠다. 오히려 노출이 없는 것이 요염함을 더 강조
했다.
남자의 본능에 따라 그만 얼떨결에 저장해서 폴더에 넣고 말았지
만, 엄청나게 죄책감이 들었다.
“어제는 ‘귀여워―!’라고 말하면서 사진을 자꾸 찍어서 뭘 보냈는지
모르겠는데, 뭘 보냈나요? 기세에 눌려서 허락은 했지만, 너무 부끄
러운 사진이면 곤란한데요…….”
치토세는 보낸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도 베스트 샷을 아마네에게 보냈겠지만, 본인은 그런 표정을
지은 사실을, 그걸 찍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본인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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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손질해 주고 쓰다듬어 준다는 부분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것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귀여운 행위였다.
끌어안고 함께 잔다.
그 마히루가 곰 인형을 안고 잔다니.
아마네는 잠든 마히루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천사 같
았다.
그런 얼굴로 곰 인형을 사랑스럽게 안고 잔다니. 미소녀가 곰 인형
과 함께 잔다니.
상상해 보니 너무 귀여워서 계속 바라보고 싶을 것 같은 광경이 머
릿속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얼굴이 빨개졌다.
마히루는 마히루대로 자신이 한 말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으며, 눈
물이 맺힌 눈으로 아마네의 팔에 애원하듯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 잊으세요.”
“아, 아니, 그건 어려운데.”
“제가 곤란해진단 말이에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귀까지 새빨갛
게 빨개진 마히루는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아마네를 쳐다보고 있
었다.
그 표정이 더 파괴력이 강했지만, 마히루 본인은 그런 사실을 알 턱
이 없을 것이다.
“그, 그렇게 부끄러워? 딱히 곤란할 일은 아니잖아.”
“어, 어린아이 같잖아요. 곰 인형과 함께 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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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잖아요.”
마히루는 오래 울지 않았다.
시간을 재진 않았지만, 10분이 될까 말까.
16년 치 괴로움을 다 토해도 괜찮았지만, 너무 울어도 지치니까 몸
이 강제적으로 멈춘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피로에 육체적 피로까
지 생기면 뇌가 강제적으로 휴면 모드로 이행할 테니까.
고개를 든 마히루의 눈은 젖어 있었지만, 아주 조금 기운을 되찾았
는지 아마네를 보는 눈은 초점이 잘 잡혀 있었다.
“내 품에 기대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울 때까지는 보지 않
으려고 애썼어.”
어느새 흘러내린 담요를 잡아당겨 보여 주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
다.
“……아마네 군.”
“왜?”
“……고마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니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렇
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마히루는 다시 아마네의 품에 얼굴을 묻
었다.
“조금만 더, 빌려주세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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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주겠다고 조건을 붙이자, 마히루는
살며시 웃으면서 “아마네 군만 할 수 있어요.”라고 속삭였다.
“더 많이, 봐 주세요.”
“네가 노력하는 모습은 잘 보고 있고, 눈을 떼면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으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야.”
“……붙잡아 주세요.”
“손이라도 잡고 있을게.”
그걸로 끝인가? 싶어서 마히루의 얼굴을 살피자, 마히루는 잠시 아
마네를 보더니, 그런 뒤에 수줍게 웃어 보였다.
“오늘만큼은 온몸으로 붙잡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마히루는 아마네의 등에 팔을 감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히루의 행동에 아마네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불순한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며 꾹 참고 그 가녀린 몸을 한
번 더 감싸듯이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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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천사님의 변화
다음 날도 마히루는 이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제처럼 풀이 죽은 모습도 아니고 괴로워 보이
는 표정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경계하는 것처럼 표정이 딱딱한 느
낌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옆에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 한껏 긴장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마네를 꺼리는 분위기는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아마네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다.
시험 삼아서 시선을 돌려보자 곧바로 움찔하면서 쿠션을 힘껏 끌어
안았고, 반대로 눈길을 돌리면 아마네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에 반사돼서 보였다.
왜 이렇게 자신을 의식하는 것인지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어제
일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이 바로 나왔다.
(……어색해서 그러는 걸까.)
어제는 늘 다부지게 굴던 마히루가 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잘 생
각해 보니까 위로해 주기 위해서 그랬다곤 해도 여자를 끌어안은 것
은 문제가 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마히루가 먼저 안긴
것은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저지른 행동이며, 나중에 정신을 차린
뒤에 후회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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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이건 마히루 나름대로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마히루가 스스로 먼저 다가와서 기대
줬다는 것이 기뻤고, 그리고 혼자 둘 생각이 없다는 뜻을 담아서 마
히루의 말에 답례하듯 배에 두르고 있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자,
알아보기 쉽게 마히루의 몸이 움찔했다.
분위기를 타느라 그만 눈치 없는 짓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어서 급하게 손을 떼자, 마히루가 “아, 아니에요. 그냥 깜짝 놀
란 것뿐이라…….”라고 등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인지 약간 흐릿한
목소리로 변명하더니 아마네의 손을 찾듯이 이리저리 손을 더듬거리
며 움직였다.
싫어하진 않는다는 말에 안도하면서 마히루의 손을 한 번 더 쥐자
이번에는 마히루도 손을 맞잡아 줬다.
이 반응에 놀란 아마네가 몸을 들썩거리자, 마히루의 머리가 미묘
하게 아마네의 등을 부비면서 압박했다.
“……저를 붙잡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내가 그래도 괜찮다면 말이지…….”
“왜 다른 사람에게도 허용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마
네 군이 아니면 허용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아요.”
너무 귀엽고 가슴 뭉클한 말을 하는 바람에 아마네가 다시 굳어지
자, 마히루도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고는 부끄러웠는지 등에
자신의 머리를 받았다.
그래도 놓지는 않는 걸 보면 마히루가 얼마나 아마네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낯간지러운 기분과 가슴을 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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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한 꽃잎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그리 멀지 않은 하천부지에 벚나무들이 나란히 심어져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봄 방학 동안에는 계속 빈둥거리며 지냈으니 말이지.)
적당히 근육 트레이닝과 가벼운 조깅을 몇 번 했지만, 그걸 제외하
면 밖에 자주 나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실내 활동파이기도 한 까닭에 기본적으로는 집 안에서 마히루와 지
내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집 밖에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뉴스를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나간다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런 건 마음먹었을 때 신경 쓰지 않고 실행하는 것
이 좋다. 애초에 봄 방학 마지막 날인 오늘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간
다음 주에나 갈 수 있을 테니까 오늘 나갈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소파에서 일어나서 외출복으로 적당히 갈아입었다. 소문의 남자 모
드로 차려입지 않은 것은 혼자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남자 혼자 나가는 거라 준비할 것도 별로 없어서 바로 옷을 갈아입
고 지갑과 스마트폰을 넣은 가방을 손에 쥐고 현관을 나섰을 때……
마침 황갈색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아마네 군, 어디 가는 건가요?”
마히루가 평상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아마네의 집에 가려 했던 모
양이다. 지금부터 밖에 나간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
“아, 마히루. 그게, 그냥 산책이나 할까 해서. 봄 방학도 이제 끝나
니까, 오늘 하루쯤은 어떨까 싶었거든.”
“그렇군요. 아마네 군은 봄 방학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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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삭였다.
마히루도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이 잡은 손에 힘을 주는지라 아마네
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손으로 마히
루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래도 부족하다면 치토세와 이츠키를 부르자. 그야 우리 어머니
와 아버지는 멀리 있어서 어렵겠지만, 부르면 틀림없이 올 거
야…….”
“괘, 괜찮아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요.”
“그래? 그럼 나로 참아 줘.”
“……참고 있는 건 아니에요.”
“미안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그, 그렇구나.”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더 부끄러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볼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다른 뜻은 없다고 해도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고,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고, 손을 잡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마음이 흔들리기
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손을 계
속 잡고 있으니, 마히루가 표정을 풀고 살포시 웃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벚꽃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말하며 수줍은 듯이 웃고 벚꽃을 바라보는 마히루를 본 아
마네는 “그렇구나.”라고 마음속 동요를 꼭꼭 숨겨서 대꾸하고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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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손을 다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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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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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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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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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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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뇨. 아마네 군의 머리카락은 만지면 참 좋을 것 같아서요.”
“뭐?”
무슨 소리를 할까 긴장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무심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딱 봐도 관계가 없는 머리카락 이야기가
나와서 아마네가 당혹스러워하는데, 마히루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아마네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만져도 되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야 마음대로 만져도 되지만.”
“그런가요. 그러면 이리 오세요.”
그렇게 말하고 소파 구석으로 이동해서 본인의 다리를 탁탁 두드리
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다시 “뭐?”라고 대꾸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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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왕자님과의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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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서?”
자신이 머리 모양을 조금 바꿨다고 갑자기 인기를 끌 것 같지는 않
지만, 이츠키는 왠지 확신하는 눈치다.
“네 성격은 여자들이 남친으로 삼고 싶은 성격이라고 봐. 입은 조
금 험해도 의외로 솔직하고, 여자를 소중히 여기는 부류야.”
“그게 보통 아니야……?”
“그것도 못 하는 남자가 많다고 할까, 소중하게 여겨 줬으면 하는
여자 마음을 생각해서 소중하게 여기는 부류겠지. 너라면 자기만족
이 아니라, 잘 보고 행동에 옮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데.”
“안 그랬으면 겉으로는 친근하면서 경계심이 무지 강할 것 같은 그
사람하고 친해질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 부정할 수 없다.
끙. 입술을 깨물자 거보란 듯이 이츠키가 웃는다.
“그리고 한마디 해도 될까?”
“뭔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소중하게 대할 리는 없겠구나 싶은
데.”
“말이 많아. 그러면 안 되냐?”
이미 태도로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숨길 수도 없어서, 툴툴대듯 대꾸
하고 주문한 라멘을 후르륵 먹는다.
이츠키는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구나 싶은 눈치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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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아는데?”
“아니, 그게 말이지. 후지미야는 센스도 있고 신사적이잖아. 은근
슬쩍 남을 돕기도 하고.”
“어쩌다 그런 거겠지.”
“어쩌다 그런 거라도, 나는 도움을 받았으니까. 왜, 그때 그 비닐봉
지라든지.”
그때는 정말 고마웠다고 상쾌하게 웃으며 다시금 말하는 소리를 듣
고, 왠지 낯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딱히 대단한 일을 하진 않았지만, 유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 듯하
다.
슈퍼의 비닐봉지는 자주 구하니까, 은혜를 베풀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도와키는 밸런타인 때 그걸 다 먹었어?”
대놓고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서 낯부끄러워진 기분을 감추듯이 의
문이 들었던 사실을 물어보자, 유타가 미묘하게 표정을 흐렸다.
“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지? 시중에서 파는 건 먹었어.”
“수제 초콜릿은 안 먹은 거구나.”
“수제는 좀, 뭐라고 할까……. 그야 진짜로 멀쩡하게 만드는 아이
도 있는데 말이지.”
“맛없다는 거야?”
“아니, 가끔 머리카락이나 딱 봐도 넣어서는 안 될 것이 나올 때가
있어.”
“무슨 주술도 아니고…….”
우연히 섞인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유타의 낌새로 봐서는 자주
있는 일이고, 의도적으로 넣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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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요?”
“마히루, 좋아하잖아?”
“조, 좋아하지만요.”
“마히루가 좋아할 게 은근 있어서 뽑았어. 받아.”
오늘 제일가는 수확은 전에 선물한 곰돌이 인형과 크기가 비슷한
토끼 인형일 것이다.
덩치는 컸지만 한 방에 뽑은 것이 아마네로선 수수하게 자랑거리
다.
털이 희고 눈이 동글동글한 토끼를 꺼내서 마히루의 무릎 위에 올
린다.
무슨 캐릭터 상품인지는 잘 모르지만, 좌우지간 마히루가 좋아할
법한 것을 뽑았다. 그런데 마히루는 무릎에 둔 토끼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토끼는 별로야?”
“귀여워요…….”
“다행이네.”
평소 쿠션을 끌어안듯이 두 팔로 꼭 안고 얼굴을 문대는 마히루를
보고 잠깐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하다가 그만뒀다.
해맑게 웃는 얼굴을 머릿속 카메라에 저장하고 아직 불룩한 봉지에
서 다른 인형을 꺼낸다.
“더 있어. 고양이도 있고, 강아지도 있고.”
그 게임센터는 다른 곳에 비해 집게의 힘이 좋아서 아마네의 적은
예산으로도 어지간한 것은 다 뽑을 수 있다. 그래서 마히루가 좋아할
것을 쏙쏙 뽑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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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들켰다는 식으로 장난치듯 웃자 이번에는 마히루가 다리를 찰싹 때
렸다. 좌우지간 달래려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걸로 얌전해진 마히루를 보고 이번에는 들키지 않게 웃었다.
“얼버무리려는 것 같아요.”
“기분 탓이야.”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겠지만요.”
마히루는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리고 머리를 쓰다듬게 두는데, 표정
과 말이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마히루의 무릎 위에 올린 고양이와 품에 안긴 토끼를 보고 토끼와
고양이를 반반씩 섞은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동안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마히루가 고개를 들었다.
상기한 뺨은 여전했지만, 눈에는 아까와 다르게 못마땅한 기색이
보였다.
“저는 아마네 군한테 받기만 해요.”
아무래도 받은 선물이 많아서 걱정하기 시작한 듯하다.
“내 맘대로 준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저는 아마네 군한테 항상 받기만 해요. 선물도, 배려도, 포
근한 분위기도, 전부.”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딱히 네가 신경을 쓸 일은 아니
야.”
딱히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게 아니고, 그저 마히루가 기뻐하니까 주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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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 맛있어.”
“칭찬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점심 식후 디저트로 나왔는데,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말았다. 하나
로는 부족하니까 두 개.
남고생치고 아마네는 식욕이 왕성하지 않은 편인데, 역시 마히루가
손수 만든 디저트는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었다.
먹은 양보다 더 큰 만족을 느끼고, 아마네는 기분 좋게 배를 만졌
다.
“너는 뭐든 다 만들 줄 아네.”
“어지간한 것은 만들 수 있게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마히루는 자랑할 것도 없다는 투로 말하지만, 실제로 요리의 종류
가 풍부해서 가끔 아마네가 모르는 요리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물론 맛있고 물리지 않는다. 마히루 같은 존재가 곁에서 자신을 위
해 요리해 준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겠지.
“역시나 대단하다고 할까. 덕분에 나는 행복하지만.”
“행복하나요……?”
“그야 당연하지. 맛있는 걸 매일 먹는데 불행할 리가 없잖아. 하루
하루가 기대되는걸.”
마히루의 요리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거의 차지해서, 하루를 마치
고 마히루의 요리를 먹으면 싫은 기억도 대부분 잊는다.
매일 요리해 준다는 것 자체가 행복해서 매번 행복을 곱씹으면서
먹는데, 마히루는 자신의 요리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것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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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사귀자.”
방과 후, 도서실에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갔을 때 생긴 일이다.
도서실은 교실이 있는 제1동이 아니라 제2동에 있어서 연결 통로로
이동해야 한다.
제2동은 기본적으로 수업과 관계가 있는 교실이 모인 곳으로, 방과
후에는 인기척이 뜸해서 고작해야 문화 동아리 학생이 동아리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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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 지나는 정도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이 적은데, 조용해서 그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
다.
2층 연결 통로를 걷다가 1층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서, 아마네는 발
소리를 죽이면서 걸음을 빨리한다.
다른 사람의 연애 사정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
사적인 일이고, 애초에 남이 반하든 사랑에 빠지든 별로 관심이 없
다.
“미안하지만 교제 요청은 거절하겠어요.”
몰래 엿보는 것도 미안하니까 얼른 자리를 떠야 하리라. 그렇게 생
각하고 소리 없이 걷는데, 몹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무의식중
에 몸이 급정지했다.
부드럽게 스며들듯 듣기 편한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딱딱한
느낌이 났다.
안 된다고 알면서도 무심코 창가에 몸을 바짝 대고 만다.
1층에는 마히루와 동급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아마네를 알아차리진 못한 듯하다.
남학생은 이쪽에서 뒷모습만 보여서 표정이 안 보이지만, 마히루는
고요한 얼굴로 상대를 보고 있다.
항상 천사님으로 불리는 고운 얼굴을 조금 미안한 기색으로 흐린
것은 교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리라.
“왜…….”
“저는 당신을 잘 몰라요. 매우 미안하지만, 교제를 원해도 응하기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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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마웠어요.”
귀가 후, 옷을 갈아입고 찾아온 마히루가 난처한 듯이 미소를 지으
며 처음 한 말이다.
마히루도 뭔가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소파에 앉아 있는 아마네에게
조금 지친 기색으로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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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저로서 있는데 피해를 주려고 하다니, 웃기지도 않아요. 다
른 누군가에게 소비되려고 제가 자신을 갈고닦는 건 아니에요.”
질색하듯이 중얼거리는 마히루는 정말로 피곤한 눈치여서, 인기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고생도 많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아마네에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는 마히루가 너무 힘들어 보여
서, 아마네는 자연스럽게 마히루의 머리에 손을 뻗고 있었다.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배려하듯 만지자 마히루가 순
순히 받아들이듯 아마네의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둔다.
오늘 본 남학생과 다른 점은, 신뢰 관계의 유무이리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만지면 기분 좋게 눈
을 희미하게 뜬다. 그게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은 마히루가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애교를 보이는 기질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학교의 나’는 제가 택한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게 손을 내
밀어도 곤란해요. 저는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할 거예요. 마음
대로 만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마히루가 조금, 아니 매우 못마땅한 투로 말해서 무심코 손이 멈추
고 말았다.
마히루는 지금 아마네의 손을 방치하고 있지만, 마음이 지쳐서 그
런 거고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아닐까. 한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왜 갑자기 멈추나요?”
“아니, 그게 있지……. 요새 주제도 모르고 멋대로 만진 잘못을 뉘
우치고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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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에요. 진심인걸요.”
그것도 나름 심하니까,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불만을 전하려고 손을
꼭꼭 눌렀다. 하지만 마히루는 간지럽다는 듯이 웃기만 해서, 아마네
는 고개를 홱 돌리고 수치심을 감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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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천사님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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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 일도 없어.”
이츠키는 얼버무리려는 듯이 웃고 셋이서 식당으로 가고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마네와 유타도 뒤쫓듯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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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후지미야가…….”
교실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참고서와 교과서를 보고 있을 때, 우연
히 바로 옆자리에 있었던 남자들이 원망하듯 조용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마히루와 수업 내용과 숙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래
도 그걸 목격한 듯하다.
왜 아마네인가. 그 의문에 답하자면 마히루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
었고, 대화 내용에 따라갈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리라.
마히루와 가장 친한 치토세는 수업 진도를 예습하지 않고, 지금 배
우는 곳을 완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 남자친구인 이츠키도 마찬
가지다.
그러므로 공부 면에서는 아마네가 이야기하기 편하다.
아마네도 원래 공부를 그럭저럭 잘하고, 집에서 마히루의 지도를
받다 보니 예전보다도 성적이 좋아졌다. 이 점은 마히루 님 만세를
외치고 싶다.
“왜냐고 해도 말이지. 어쩌다 보니 내가 시이나의 화제에 맞출 수
있어서 그런가 보지.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학교에서 마히루와 이야기할 때는 약간의 일상 이야기를 빼면 대부
분 공부 관련이다.
주위에서 수상하게 보지 않도록 천천히 거리를 좁힌다고 해서 학생
끼리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말만 주고받는다. 오히려 모범생 같은 대화
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실한 대화를 했다.
“그야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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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천사님과 조리 실습
“잘 부탁할게요.”
평소 아마네를 향할 일이 없는 천사의 미소를 대놓고 봐서, 아마네
는 신음을 꾹 참고 “잘 부탁해…….”라고 조용히 대꾸했다.
기본적으로 마히루와는 적극적으로 얽히려 하지 않지만, 마히루가
다가왔을 때는 아마네가 차마 어쩔 수 없다. 다만 이건 마히루의 잘
못이 아니라, 단순히 가까운 사람끼리 모이려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
이리라.
가정 교과의 조리 실습은 일정한 자유도가 인정된다. 며칠 후에 실
기 평가로 조리 실습 예정이 잡혔는데, 이번에는 자유롭게 조를 짜고
자유롭게 조리 내용을 정한다.
다만 영양학에 따른 식단을 요구하고, 식단도 채점 대상이므로 잘
생각해서 정해야 한다.
조를 자유롭게 짜도 된다는 이유로 마히루는 사방에서 러브콜을 받
다가 사이좋은 치토세와 짝이 됐고, 그 치토세는 남자친구인 이츠키
를 끼우려 했으며, 그 이츠키와 짝이 되려고 했던 아마네가 딸려왔
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겠지.
그 결과로 아까부터 시선이 엄청 따가워서, 아마네는 속이 쓰리다.
일부 원인을 제공한 치토세는 근처 책상을 인원수에 맞춰 맞대면서
헤실헤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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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실력이다.
“엄마가 밖에서 일해서 집에 없으니까. 예전에는 아마네의 집에 밥
을 차려 주려고 간 적도 있었고. 뭐, 지금은 안 하지만?”
눈치를 주듯 아마네를 힐끗 봐서 미간을 찡그리지만, 이츠키는 웃
을 자격이 있다.
“그랬군요.”
“이대로 가다간 내 한심함이 부각돼…….”
“지금 할 소리야?”
“지금 할 소리는 아닌걸.”
“너희 말이야. 호흡 맞추지 마.”
“후후. 지금 곤란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나요?”
“아, 아니야. 노력해 볼게. 혼자 있을 때는 가끔 내가 만드니
까…….”
전부 마히루에게 맡기면 좋지 않으니까, 휴일에 마히루가 없을 때
는 요리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간단히 구워서 만
드는 요리나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완성하는 조리법이 전부지만.
말을 조금 아끼는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왠지 자애롭게 웃으면서
“잘했어요.”라고 칭찬했다. 그 말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아마네는 얼
굴을 실룩거렸다.
아마네의 요리 실력이 얼마나 꽝인지 마히루도 잘 알고 있을 것이
다. 마히루의 요리와 비교하면 아마네의 요리는 아이들이 만든 수준
이다. 너무 어설퍼서 흐뭇하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발전하고 있으니까, 아마네는 아무것도 못 하는 수준에서
탈피했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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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팬 준비를 시작했다.
된장국은 이미 야채를 거의 익혀서 이제는 된장을 풀면 된다. 행인
두부는 치토세와 이츠키가 냉장고에 넣고 식혀서 굳히는 중이라 덮
밥 준비만 남았다.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지 않게 냉장고에 당면 샐러드를 넣고 다진
고기를 가져온다.
자신들의 조리대로 돌아오는 중에 다른 조를 슬쩍 봤는데, 순조로
운 곳이 있는가 하면 다툼이 생긴 조도 있다. 남자만 있는 조 중에는
재료를 낭비하거나 노는 데도 있어서 학생들의 자주성을 존중하면서
감시 중인 교사가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마히루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마네의 조가 다른 조보다 원활하게 진행하고 있는 이유는 마히루
가 압도적으로 능숙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식단을 짰기 때문이
다.
‘겉멋을 의식해서 손이 많이 가는 메뉴로 하는 것보다, 영양이 좋고
시간과 수고가 별로 들지 않는 메뉴가 훨씬 편해요. 식사는 매일 차
려야 하니까, 피곤한 메뉴로 할 리가 없잖아요.’
식단의 이유를 집에서 물어봤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매일 두 사람
의 식사를 차리는 마히루답게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네는 이 메뉴만으로도 만드는데 몹시 고생하니까, 마히루의 고
마움을 다시 인식하는 조리 실습이다.
세상에서 가정의 주방을 책임지는 사람은 매끼 고생이 참 많겠다고
실감하면서 돌아가자 마히루가 치토세에게 막 작업 지시를 내리는
참이었다. 이츠키는 보이지 않는데, 시선으로 눈치챈 것인지 마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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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을 리가 없는데, 마히루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
는 관계로 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고기를 볶던 화구에서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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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다치면 큰일이다.
여자는 흉터를 신경 쓰는 사람이 많고, 남자가 봐도 깔끔한 사람을
더 선호하는 풍조가 있다. 만약 이렇게 시시한 일로 다쳤다가 흉이
지면, 상처가 생긴 사람은 상대를 원망할 것이다.
마히루든, 다른 여자든 상관없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화내
고, 질타한다.
기본적으로 무기력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아마네가 눈을 가늘게 뜨
고 다소 강한 어조로 경고하자, 이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남학생
은 “미, 미안해…….”라고 의기소침한 눈치로 사죄했다.
“나한테는 사과할 것 없어. 부딪힌 야마자키랑 튈 뻔했던 시이나에
게 사과하는 게 좋아. 아무튼 다음부턴 조심해 줘. 위험하니까.”
너무 세게 말해도 알력이 생길 것 같아서 말투를 부드럽게 풀고, 다
시 마히루를 봤다.
지금껏 한 손으로 품에 끌어안고 있었는지 마히루는 얼굴을 희미하
게 붉히고 있었다. 실수했다고 뒤늦게 뉘우쳐도 지금 동요했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살 테니까 슬쩍 떨어지고, 표정이 바뀌지 않게 조심하
면서 냉장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시이나, 허락 없이 만져서 미안해. 그리고 샐러드를 먼저 챙겨서
조 애들한테 돌아가 줘. 나는 이걸 닦고 갈 테니까.”
“괘, 괜찮아. 부딪쳤어도 내가 흘린 거니까.”
“어차피 관계자고, 우리 조는 이제 먹기만 하면 돼. 금방 끝날 테니
까 걱정하지 마.”
흘린 양은 얼마 안 되니까 닦는 데도 수고가 많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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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어.”
바닥을 다 닦고 샐러드와 행인두부를 예정보다 5분 늦게 가져온 아
마네와 마히루를, 치토세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맞이해 주었다.
이미 테이블에는 샐러드와 행인두부 말고는 아마네와 마히루가 먹
을 것까지 다 차려진 상태라서, 아마네는 샐러드용 접시에 모두가 먹
을 샐러드를 옮겨 닮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왠지 피곤해.”
“멋졌는걸. 그리고 의외로 대담하네.”
“내가 좋으려고 만진 게 아니야. 그냥 두면 시이나에게 튈 것 같았
으니까 하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천사님을 품에 끌어안는 행동을 보일 줄은 몰랐다. 급한 판단이어
서 주위에서도 원망하듯 보지는 않지만, 역시 남자들은 부러운 눈치
라서 왠지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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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는 도시락이구나.”
아마네와 이츠키는 언제나 학교 식당에서 먹어서, 평소 교실에서
먹는 마히루와 치토세가 이쪽에 맞춰 주기로 했다.
남자들이 제각기 주문한 점심을 챙겨서 자리에 앉자 유타가 마히루
가 꺼낸 도시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참고로 마히루는 아마네의 정면에 앉았다. 치토세가 거기 앉히는
바람에 도망칠 틈이 없었다.
“네. 저녁때 남은 찬거리로 채울 때가 많지만요.”
마히루는 평일에 도시락에 쓸 요리를 만드는 일이 많은데, 저녁때
남은 찬거리를 아마네의 아침 식사용과 도시락용으로 따로 두니까
오늘은 그걸 가져온 거겠지. 어제저녁에 상에 오른 데리야키 미트볼
이 도시락에 있었다.
“아하, 직접 만드는 거야?”
“네. 별로 대단한 건 못 만들지만요.”
“마히룽, 거짓말은 나쁜 버릇이야. 요리 엄청 잘하면서.”
“치이는 시이나의 제자가 되는 게 어때?”
“잇군 너무해.”
“치이는 요리에서 맛을 내는 법만 배우면 돼. 요리 자체는 할 줄 아
는데 말이지…… 맛을 너무 특이하게 만드니까.”
지난번 조리 실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치토세는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니다. 장난기가 발동하면 새로운 맛을 찾아서 정상에서 일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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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랐나요?”
집에서 마히루가 짓궂게 웃는 것을 보고, 아마네는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놀랐다고 할지. 이번에는 확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는걸.”
“천천히 하겠다고 했지만요. 슬슬 건너뛰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마네 군은 조금 억지를 써야 통한다고, 요새 이해했거든요.”
“그러십니까.”
아마네가 도망치려는 것을 아니까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겠지.
뭐, 그때는 포위망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지만.
아마네는 마히루가 그토록 밀어붙일 줄은 몰라서 식겁했지만, 이야
기만 하고 스킨십은 없어서 그나마 안심했다.
집에서 그러는 것처럼 순수하고 순진하게 접촉했다간 질투의 칼날
이 날아들 것이다. 본인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대는 거겠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그게, 되도록 아마네 군의 생활에 영향을 안 주는 선에서 조금씩
애쓰고 있는데요. 혹시 뭔가 일이 생기면 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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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천사님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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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득도 있으니까.
뭐, 또 그 남자의 소문이 안 났으면 좋겠지만, 그게 무서워서 아무
데도 못 가면 참 시시하겠지.
“그래서? 어딜 가려고?”
“네? 그, 그건 안 정했는데요.”
“안 정했구나…….”
“그야 아마네 군이 어떤 델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
“어? 나?”
“기왕에 같이 외출할 거라면 둘이서 즐겁게 지낼 곳이 좋아요.”
소매를 붙잡고 간절히 보면서 “그러면 안 되나요?”라고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숨이 턱 막혀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린 다음, 머리를 벅벅 긁고 탄식
했다.
“나는…… 마히루를 따라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저기, 그렇다면 말
인데. 가고 싶은 곳이 있어.”
혼자서는 가기 어렵지만,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어디죠?”
“웃지 마.”
“안 웃어요.”
“고양이 카페…….”
그렇다. 귀여운 고양이가 잔뜩 있는 고양이 카페다.
아마네는 제법 동물을 좋아하지만, 차마 집에서 키울 수는 없어서
잡지나 다른 사람이 키우는 동물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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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울 거 같아요.”
그리고 행복이 물씬 배어난 것처럼 순수하게 활짝 웃어서 숨이 막
힐 뻔했다.
“얼른 휴일이 오면 좋겠네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진심으로 그날 외출을 기대하는 눈치를 보인 마
히루가 해맑게 웃고서 들뜬 기색으로 쿠션을 꼭 끌어안았다.
한동안 넋이 나간 것처럼 그 얼굴을 바라본 아마네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면서 “그래…….”라고 목이 멘 것처럼 대꾸했다.
천사님의 기습 공격은 심장을 너무 세게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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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죄송해요.”
치토세가 떠난 뒤, 마히루가 갑자기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에 앉은 마히루를 보
니, 몸을 옴찔옴찔 움츠리고 미안한 기색으로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장난을 쳐서요…….”
“장난?”
“치토세 양은 아마네 군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제가.”
“어? 마히루가?”
그야 치토세 본인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말했고, 마히루도 치토세
가 안 했다고 말했다.
마히루 본인이 뭘 했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다.
아마네는 마히루가 자신에게 뭔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서 무의식중에 제외했는데, 아무래도 그 마히루가 뭔가 저지른 듯하
다.
죄책감에 자백했는지, 미묘하게 미안한 눈치다.
“뭘 했는데?”
“그게, 볼을 찔러 봤어요…….”
“그게 장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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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을 많이 찔렀어요.”
“남자의 볼을 찔러서 뭐가 좋은데.”
“즐거운데요?”
아마네 자신은 볼이 여자보다 딱딱해서 찔러도 재미없다고 생각한
다.
마히루가 어떤 재미를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볼을 찌르는 행위가
즐겁다면 불평할 수 없다.
“뭐, 마음은 이해해. 네 볼도 찌르면 감촉이 좋으니까.”
마히루가 했다는 장난을, 본인에게도 해 본다.
그래도 너무 막 만져도 문제니까 손끝으로 부드러운 볼을 살살 찔
렀다.
마히루의 볼은 역시 여자애답게 부드럽고, 떡처럼 말랑말랑한 감촉
이 있다. 군살은 없지만, 질감이 부드럽다고 표현해야 할까.
피부는 잘 관리해서 매끄럽고 생기가 있다. 만지기만 해도 즐거울
만큼 감촉이 좋았다.
마히루가 만졌으면 자신도 만져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변명하면서 마히루의 볼을 가볍게 잡았다.
쭉. 부드럽게 늘어나는 볼.
마히루가 조금 불만스럽게 쳐다봐서, 역시 너무 막 만지면 안 되니
까 달래려고 슬쩍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그렇다. 새끼 고양이를 만질 때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응…….”
불만스러운 표정은 금방 사라지고, 뭔가를 입에 머금은 것처럼 푸
근하게 풀어진 웃음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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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렸다.
“그렇게 칭찬해도 내줄 건 없어요. 고작해야 식후 푸딩 정도예요.”
“어? 더 칭찬할까?”
“욕심에 눈이 멀었네요.”
피식 웃는 마히루를 슬쩍 곁눈질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정말
로 푸딩이 있다. 시중에서 파는 물건이지만, 이건 치토세가 좋아하는
제과점의 푸딩으로, 아마네도 좋아하는 상품이다.
마히루가 직접 만든 것이 제일이지만, 이것도 맛있으니까 기운이
확 솟아났다.
마히루가 단번에 표정이 밝아진 아마네를 보고 키득키득 웃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달걀을 좋아하네요.”
“그래, 좋아해.”
이미 먹는 취향을 다 간파한 마히루에게 얼버무릴 필요는 없어서
솔직하게 긍정했더니, 왠지 마히루가 경직했다.
다 씻은 감자를 손에 들고서 경직한 마히루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
어서 얼굴을 살피려고 했더니 갑자기 홱 뒤돌아서 등을 보인다.
“마히루?”
“별일 아니에요……. 그나저나 도울 생각이 없으면 주방에서 나가
기를 권하겠어요.”
“갑자기 신랄하네. 도와주려고 오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마히루에게만 집안일을 시킬 수는 없고, 몸을 움직
이는 편이 몸이 풀리는 데도 딱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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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천사님과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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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 지금 찍었죠?!”
“미안해. 꼭 지워야 해?”
“그, 그렇게 웃긴 얼굴을 남기려고요?”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말하자 마히루가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희미하게 붉히더
니, 나지막하게 “한 장만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때도 하얀 수염이 있어서, 아마네는 가슴이 훈훈해지
는 것을 느끼면서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라테 아트를 그린 카페라테를 다 마셨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아마
네의 무릎 위에 뛰어올랐다.
아까 옆자리에 있던 아메리칸 쇼트헤어다.
프로필 표를 보니 ‘카카오(암컷)’이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친숙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무릎 위
에 오는 바람에 아마네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고양이의 자유분방함은 잘 알지만, 갑자기 다가와도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무릎 위에 있는 온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한데, 마치 여기
가 자기 자리라는 듯이 당당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얘는 사람을 겁내지 않나 보네.”
손 냄새를 맡게 하면서 마히루를 보니 부러운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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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하는 것도 괜찮겠지.
마히루가 카카오에게 푹 빠진 사이에 책장에서 적당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아래에 마히루가 처음 인사한 실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쪼그려 앉아서 검지를 코에 가까이 대니까 역시 인사로 냄새를 킁
킁 맡는다.
이런 동작도 귀여워서 저절로 표정을 풀고 구경했더니, 다 맡은 다
음에 앞발을 들어서 아마네의 팔에 뛰어들듯이 매달렸다.
카카오와는 다르게 소리를 높여 ‘미야옹’ 하고 울면서 접촉하려고
들어서, 아마네는 바닥에 앉았다.
고귀한 분위기이긴 해도 역시 사람에 익숙한 듯, 앉는 자리를 내줘
서 만져 봤더니 아주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목에서 골골 소리를 내고 몸을 비비는 걸 보면, 이건 더 만지라는
신호겠지. 실크 님께서 바라는 대로 부드럽게 공들여서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이츠키의 집에 고양이가 있어서 만지는 방법은 잘 안다.
어떻게 만지면 고양이가 좋아하는지, 애교를 부리는지, 다 알고서
반응을 살피며 손놀림을 바꾼다.
(귀여운걸.)
목에서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것을 느끼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
진다.
처음에는 왠지 쌀쌀맞은 태도였으니까 허용하고 나서 이렇게 애교
를 부릴 줄은 차마 몰랐다.
(왠지 누구랑 닮은 것 같았는데, 마히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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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이 있다.
게다가 마히루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뭐부터 구경할까? 잡화나 옷이나 인테리어 등등, 여러 가지가 있
는데.”
이 대형 쇼핑몰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류점과 음식점, 오락
시설 등을 같이 갖춰서 하루에 다 돌아다닐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점
포가 들어와 있다.
아무래도 전부 돌아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까, 가고 싶은 곳을
어느 정도 좁혀야 한다.
“그러면…… 옷부터 보러 가도 될까요?”
“좋아. 새 옷을 사게?”
“좋은 게 있으면 사고 싶어요. 올해 여름옷도 나왔을 테니까 새 옷
을 사고 싶거든요.”
“여름이라…… 빠르네.”
조금 땀이 나오는 계절로 넘어가려는 참이지만, 그래도 아직 포근
한 햇빛이 쏟아지는 정도의 계절이라서 여름옷은 조금 성급한 것 같
다.
신상은 시즌보다 앞서는 것이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봄 기분
이 빠지지 않는다.
“올해 여름은…… 아, 마히루는 우리 고향 집에 같이 갈…… 거
야?”
“아, 네. 아마네 군과 부모님만 괜찮다면 말이죠.”
예전에 귀성할 때 마히루도 같이 고향 집에 가 보자고 말한 것을 기
억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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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당혹스럽다.
점원만이 아니라 주변 손님들까지 따스한 눈으로 보니까, 아마네는
영 거북하다.
빨리 나와 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마히루를 기다리고 있는
데, 마침내 탈의실 커튼이 걷히고 마히루가 밖에 나왔다.
하지만 옷은 갈아입지 않았다.
“어서 와. 안 입었어……?”
“아뇨. 옷의 치수를 확인했어요. 다만…… 그게, 지금은 속옷 문제
로 보여줄 수 없다고 할까요…….”
“미, 미안해.”
지금 입은 시폰 블라우스도 목과 어깨 라인이 그럭저럭 보이지만,
오프숄더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저렇게 어깨를 드러낸 옷을 입을 때는 평소와 다른 속옷을 입어야
하는 듯하니까, 지금은 보여줄 수가 없는 거겠지.
“다만 아마네 군이 어울릴 거라고 말해 주었으니까요. 입어 보고
마음에 들었으니까 살래요.”
아마네가 맡은 백을 받아서 품에 안은 원피스를 계산대로 가지고
가서, 황급히 뒤쫓는다.
자신이 마히루에게 어울린다고 말했으니까 돈을 내야 할 것 같아서
지갑을 꺼내려고 했는데, 마히루가 가방을 뒤지는 아마네의 손을 제
지했다.
“안 돼요. 이건 제가 사서 아마네 군에게 자랑해야 해요.”
“그,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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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몇 초 후에는 가볍게 내린 옆머리를 찰랑이고, 사뿐한 동작으로 구
세주(천사님)께서 나타나셨다.
아마도 아마네가 난처한 상황인 것을 보고 급하게 온 거겠지. 걸어
왔다고 보기에는 호흡이 조금 빨랐다.
표정을 굳히고 여자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아마네에게,
마히루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품에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어도 성대하게 가슴을 졸인 아마네
를, 마히루는 등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각도를 조정하
면서 올려다보고 있다. 시선에서는 ‘지금 뭘 하고 있나요?’처럼 어이
없다는 눈치와 아주 작은 불만이 느껴져서, 이것이 아마네를 빼내기
위한 연기임을 이해했다.
(심장이 쪼그라드니까 이러진 마…….)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거절하려고 한 결과 이도 저도 아닌 태
도로 상대를 가까이 불러들인 아마네가 잘못한 거지만, 그래도 이건
심장에 나쁘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은 사실이라서 불만을 말할 수
는 없고, 아마네는 마히루의 연기에 편승하듯이 부드럽게 마히루의
등에 손을 돌린다. 정말이지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처럼 보이도록.
“걱정하지 마. 착한 누나들이 상대해 준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으니
까.”
“그랬나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몸을 반쯤 돌려서 생긋 웃는 마히루를 보고, 여자들은 넋을 놓고 있
었다. 같이 놀려고 했던 남자에게 애인으로 보이는 소녀가 안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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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어쩔 건데요……?”
“그냥 스마트폰으로 연락해서 장소를 지정하고 다시 합류해야지.”
“현실적이네요.”
“그야 당연하지. 뭐, 놓치지 않을게.”
떨어져서 혼자 돌아다니면 마히루가 남자들에게 붙잡힐 확률이 높
다고 할까, 거의 무조건 그럴 테니까 혼자 둘 생각은 없다.
모처럼 마히루가 원해서 외출했으니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골머
리를 앓는 것보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싶겠지. 게다가 아마네도 마
히루에게 남자가 꼬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임을 알아도 조금 못마땅
하다.
아마네의 말을 들은 마히루가 아마네의 눈을 빤히 보고, 다음으로
시선을 서로 잡은 손으로 내린다.
그리고 꽃이 천천히 피는 것처럼 입가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네…… 놓치지 마세요.”
나지막이 속삭이고 손가락을 거는 마히루의 말에 응하듯, 아마네는
동요를 안 들키게 애쓰면서 똑같이 손가락을 걸었다.
“여기가 게임센터…….”
옷가게와 잡화점을 구경하고 눈에 들어온 것을 산 뒤, 아마네는 마
히루를 데리고 평소 가는 게임센터에 들렀다.
게임센터는 마히루가 요청해서 온 것이다. 크레인 뽑기 게임에서
경품을 뽑아도 짐이 늘어나지 않게 마지막으로 잡았는데, 이제는 집
에 가기만 하면 끝이니까 시간도 여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잡기를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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슷하다.
마히루에게 처음 인사한 실크를 닮아서 눈에 띈 듯하다.
“정말로 닮았네. 뽑고 싶어?”
“뽑고 싶어요. 도전해 봐도 될까요?”
“응. 이 게임센터는 뽑기 쉬운 편이지만, 못 뽑으면 내가 할게.”
“수고를 끼치지 않게 노력할게요.”
의욕이 넘쳐서 크레인 뽑기 게임에 임하는 마히루를, 아마네는 일
단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네가 잡으면 간단히 뽑겠지만, 이건 마히루가 뽑고 싶은 거니
까 본인의 자주성과 도전 정신을 우선해 주는 게 맞겠지.
동전을 넣고 제일 처음 옆으로 이동하는 버튼을 조심스럽게 잠깐
만지고 낌새를 관찰하고 있다. 신중한 마히루답게 얼마나 누르면 이
동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크레인 뽑기 게임은 버튼을 눌렀다가 떼면 이동 방향
이 바뀐다.
“어? 어라? 움직이지 않아요.”
“미안해. 말하는 걸 잊었는데 버튼에서 한 번 손을 떼면 좌우 이동
에서 상하 이동으로 바뀌니까 기회는 한 번밖에 없어.”
“어? 그러면 이건…….”
“뭘 해도 인형에는 못 가지.”
현재 인형의 위치는 남은 공간의 중앙.
그런데 집게의 위치는 경품을 떨어뜨리는 곳에서 아주 조금 이동한
상태로 상하 이동만 남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형에는 스치지도 못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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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아쉽네. 이건 그대로 잡아서 올리는 것보다 집게의 측면으로 움직
이거나 중심을 이용해서 굴리는 게 더 잡기 편할 거야.”
다행히 경품을 떨어뜨리는 공간의 칸막이는 별로 높지 않으니까,
굴려서 가면 나오겠지.
마히루가 눈을 반짝 빛내고, 이어서 말한 대로 순순히 실행에 옮겼
다.
쉽게 짜증을 내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마히루의 좋은 점이리라.
집게의 위치와 인형의 무게 중심을 생각해서 “이건 이렇게 해
서…… 머리로 굴려서…….” 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유리에 비친 표정이 아주 진지해서, 마히루에게 안 들키게끔 작게
웃는다.
동전을 몇 번 넣고 시간이 얼마간 흐른 다음, 마히루가 집게로 잡은
인형을 경품을 떨어뜨리는 곳에 밀어 넣었다.
“아.”하고 작게 중얼거린 순간에 경품 배출구에 인형이 톡 떨어졌
다.
잠시 침묵이 있은 다음, 마히루가 조금 멍한 기색으로 아마네를 쳐
다봤다.
“……들어갔어요.”
“응, 고생했어. ……자, 네가 노력한 증거야.”
악전고투 끝에 구한 인형을 꺼내서 마히루에게 내밀자 그제야 뽑았
다는 사실을 실감한 듯 순식간에 고운 미모가 환희로 물든다.
“뽀, 뽑았어요. 뽑았어요, 아마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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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게…….”
마히루가 말을 흐리는 것을 봐서 확인한 듯, 유타가 아마네와 마히
루를 번갈아 보고 다소 허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이라면 접점이 없으니까 부정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한숨을 푹 쉬고 이마를 짚은 아마네는 신기한 눈치라고 할까, 당혹
스러움이 강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유타를 봤다.
“나라고 용케 알아봤구나…….”
“역시나. 아니, 왠지 후지미야 같았거든.”
“그렇게 알아보기 쉬워?”
“아니. 아마도 같은 반 아이들한테도 쉽게 들키진 않을걸. 후지미
야는 이런 얼굴을 잘 보이지 않으니까.”
애초에 이런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문으로
떠도는 그 남자와 아마네가 얼굴을 이유로 바로 연결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보다 시이나와 후지미야가 둘이서 있는 게 더 의외인걸.”
“숨겨도 소용없으니까 말하겠지만…… 카도와키의 말대로 우리는
2학년이 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뭐, 사이좋은 것도 인정할게.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야.”
“그래……?”
“그래.”
마히루도 단호하게 부정했으니까,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도 슬프지
만 확실하게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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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미안한걸.”
카도와키와 헤어져 귀갓길에 오른 아마네는 집과 가장 가까운 역에
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히루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그 밖에도 게임센터에서 작은 장난감을 뽑아서 만족스러운 눈치였
던 마히루는 갑자기 사과하는 것을 듣고 캐러멜 빛깔의 눈을 크게 깜
빡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죠?”
“그게…… 카도와키에게 들킨 거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게다가 결과는 잘 풀렸다고 생각해
요. 일단 이해해 주었으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가 아닌지 의심받아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유타는 납득했는지 그냥 물러나 주었지만, 역시 마히루가
강하게 부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무조건 안 들킨다고 생각해서 외출한 건 아니에요. 이런
사태도 고려했고, 카도와키 씨가 상대라서 다행으로 생각했어요.”
“그래. 카도와키는 어찌어찌 잘 이해하고 배려해 주었으니까. 정말
좋은 녀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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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여차하면 아마네 군이 제발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칭찬할 거예
요.”
“와, 무서운데. 그나저나 그건 정말로 하지 마.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걸.”
“그러면 더욱 자신감을 가져 주세요.”
마히루가 희미하게 웃고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가슴이 희미하게 뜨
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이 편안함을 망가뜨리기 싫어서, 손을
놓기 싫어서, 조용히 “고마워.”라고만 말하고 귀갓길을 걷는다.
손을 놓기 싫어도 집에 도착하면 뗄 수밖에 없으니까 일부러 천천
히 걷는 아마네를, 마히루는 아무 말 없이 똑같은 속도로 따라서 걸
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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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사정 청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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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밝혔다.
거절하는 수단도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게 말과 태도가
모두 부드러워서, 딱히 옥신각신하는 일 없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
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아마네 혼자서는 대
처하기 어려우니까 익숙하다는 것이 그만큼 위대함을 알 수 있었다.
“또 아마네 군한테 말을 걸었나요……?”
“그렇긴 해도, 나는 덤이겠지.”
굳이 말하자면 아마네보다 다른 두 사람이 목적이고, 아마네는 어
디까지나 덤으로 봤다. 애초에 자신도 아는 사실이지만 인상이 나빠
서 잘 모르는 사람은 말을 걸기 어렵다.
마히루와 외출했을 때는 어쩌다가 말을 거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특출한 미남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두 사람을 제치고 아마
네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쓴웃음을 지었는데, 왠지 마히루가 뚱하게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자기평가가 낮다고 말하고 싶어?”
“그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에요.”
“그럼 어떤 건데.”
“몰라도 돼요…….”
고개를 홱 돌리고 먼저 “잘 먹겠습니다.”라고 손을 맞대는 마히루
의 태도에 당황하면서, 아마네도 뒤따르듯 손을 맞대고 마히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셋이서 노래방에 간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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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다.
조금만 얼굴이 가까워지면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마히루만의 독
특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서,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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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으으.”
이렇게 말하면 마히루가 반론하지 못한다고 아니까, 아마네는 슬쩍
웃고 마히루의 위에서 물러났다.
몸이 뒤로 넘어간 마히루의 등과 소파 사이에 손을 넣어서 일으키
자, 마히루는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면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내가 내 사진을 검사하면 안 될까?”
“멋대로 보세요…….”
체념했는지 미묘하게 토라진 투로 시호코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채
팅 페이지의 사진 일람을 보여주는 마히루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다.
그걸 지적했다간 다음에는 집에서 뛰쳐나갈 것 같아서 꾹 참고, 아
마네는 마히루에게 보이지는 않는 각도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
(깜짝 놀랐네…….)
마히루에게 들키지 않고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은 지금도 폭음을
낼 기세로 쿵쿵 뛰고 있다.
그래도 장난을 치지 않았더라면, 거부할 기색이 없었던 마히루에게
자신은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아마네 자신도 그걸 잘 아니까, 수치심과 죄책감이 복잡하게 뒤엉
켰다.
(하마터면 최악의 남자가 될 뻔했어.)
사고는 사고고, 그 사고에 이르는 과정에서 피차 반성할 점이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마히루에게 연인끼리만 하는 신체 접촉을 해
도 되는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된다.
멋대로 키스라도 했다간 마히루가 울 것이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
니까 그럴 권리는 없고, 그랬다간 마히루가 자신과 멀어질 거라는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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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다.
상대의 뜻을 무시하고 감정과 욕구를 강요하면 그냥 자기밖에 모르
는 인간이다. 아마네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아마네 군은…… 확인하고 싶다면서 정작 볼 생각은 없나 보네
요?”
딱 봐도 아까보다 언짢은 투로 부르는 바람에 허둥지둥 마히루를
봤더니, 마히루는 그제야 다소 색깔이 차분해진 볼을 부풀리고 있었
다.
“미안해.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바보.”
평소보다 직설적으로, 또한 귀엽게 들리는 말로 매도하는 마히루.
이건 어설프게 대답했다간 오래갈 것 같다고 깨닫고, 아마네는 서둘
러 스마트폰에 시선을 줬다.
사진 일람에는 아마네의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사진이 있었다. 얼
핏 봐서는 창피한 사진이 없어서 안심했지만, 지금의 아마네를 봐서
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순진함을 사방에 드러내며 웃는 사진이 있어
서 몹시 부끄럽다.
다른 의미로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서 끓어오르는 수치심에서 눈
을 돌리려고 마히루를 힐끗 봤더니, 더는 언짢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 대신 뭔가 넋이 나간 듯,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여기가 아닌 다
른 어딘가를 보는 눈빛으로 입가를 만지고 있어서, 아마네는 왠지 보
면 안 되는 것을 본 기분으로 황급히 스마트폰을 다시 봤다.
아까처럼 심장이 쿵쿵 뛰는 사실을, 마음과 눈 모두 외면하려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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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당신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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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마히루…….”
“왜……요?”
뒤돌아보기 전에 그 가냘픈 등을 감추듯이 아마네를 감싸자 마히루
가 깜짝 놀란 소리를 냈다.
팔과 몸으로 감싼 채 마히루와 밀착하듯이 꼭 끌어안자 가녀린 몸
이 떨린다.
그러나 거부감이나 혐오감은 없고, 그저 놀라움과 당혹감이 몸을
흔드는 것을 알았다.
작지만 의지할 수 있는, 의지하고 마는, 매달리고 마는 몸을 감싼
아마네는 마히루가 뒤돌아보지 않게 머리 위에 턱을 올렸다.
“정면에서는 괜찮으면서, 뒤에서는 놀라는 거구나…….”
“누구든 갑자기 그러면 놀라요!”
“네가 응석을 부려도 된다고 했잖아. 뭐, 이렇게 될 줄 알아서 사양
한 거지만. ……나도 심장이 위험하고.”
원래는 이런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조금 토라진 마히루를
뒤에서 배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애정이 끓어올라서, 하지만 부끄러워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멋대로, 몸이 마히루를 원하고 말았
다.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은 몸을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다.
마히루는 어떻게든 뒤돌아보려고 했지만, 아마네가 조용히 “돌아보
지 마.”라고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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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휴일 후 파란의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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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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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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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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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천사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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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포시 웃었다.
“제 교우관계는 범위가 좁으니까요. 사람들과 알맞게 잘 교류하고
는 있지만, 명확하게 친한 사이로 부를 사람은 아마네 군과 치토세
양, 아카자와 씨밖에 없어요. 물론 모두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
장 친하고 함께 있어서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은 당신이겠죠.”
“그, 그래…….”
아마네도 마히루와 친하다고 할 사람이 본인이 언급한 만큼밖에 없
음을 잘 알지만, 이렇게 직접 가장 친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라
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같이 지낸 시간은 반년 정도지만, 반년 동안 저는 무척 농밀한 시
간을 보냈다고 봐요. 남과 깊게 엮이지 않고 산 저로서도, 아마네 군
이 가장 친근하고 마음에 들어요.”
스스럼없이 담담하게 하는 말에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마히루
의 눈을 보니, 온화한 빛을 띤 눈이 아마네를 주시하고 있다.
“제 세상은 작아요.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손바닥 크기의 작
은 모형 정원에 사는 셈이죠. 아마네 군은…… 그중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 제가, 있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 준 사람.”
“마히루…….”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선 아마네 군이 조금 자신감을 가져 주세
요.”
본심을 여실히 전하는 부드러운 표정을 봐서 무의식중에 볼이 열기
를 띠었지만, 마히루는 알아챈 기색이 없다.
노린 게 아니니까 이토록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조
금씩 번지는 기쁨이 아마네를 떨리게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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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인기가 많아서 참 곤란하네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감시하
고 참견하니까요.”
딱 봐도 질린 듯한 투로 중얼거린 마히루는 그 자리에서 빙 돌아섰
다.
“하지만 여기선 둘이서 있으니까 아무도 참견하지 않아요. 지금은
그걸로 만족할게요.”
요염하게 웃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저 아름다운 미소를 가만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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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천사님의 위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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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여유가 별로 없어서 기대는 것을 우선하며 품에
안긴 것이라서 감각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마히루가 그때와 똑같이 끌어안았다간 이번에는 그
몸의 감촉을 확실히 느낄 것이다. 그런 자신이 비겁함을 잘 아니까,
아마네는 사양하고 싶었다.
“마히루 넌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할 것 같아서 무서워…….”
“그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지간한 일은 다 할 거예요. 물
론, 보상은 받을 거지만요.”
“오히려 보상으로 뭘 요구할지가 더 무서운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라거나 봉사 같은 것은 실제로 정신적
인 만족처럼 마땅한 대가가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참고로 묻는 건데, 네가 바라는 보상은 뭐야?”
“저도…… 제가 바라는 것을, 요구할 거예요.”
마히루라면 금전이나 물건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귀엽고 범위가 넓은 요구를 말해서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그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이지. 등가교환이라는 거네.”
“제가 더 욕심이 많아요.”
“글쎄다.”
“정말이지…… 아마네 군은 제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시험 삼아 뭐라도 요구해 봐.”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뭔가 엄청난 것을 요구하겠지. 마히루의 욕
심이 궁금해진 아마네가 물어보자 마히루는 미묘하게 볼을 부풀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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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 싶어서 맑은 캐러멜 빛깔 눈을 가만히 보니
까, 마히루가 눈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이건 말은 거창하게 했어도 딱히 요구할 게 없는 패턴이거나, 아니
면 정말로 엄청난 요구라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
든 판단하기 어렵다.
가만히 바라보니 마히루의 뺨이 서서히 발개진다.
“제가 바, 바라는 건.”
“응.”
“가, 같이…….”
“같이?”
“아, 아마네 군도 같이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결국 허둥지둥 얼버무리듯 말을 막 던지는 느
낌으로 조르는 마히루를 보니 무심코 쓴웃음이 나왔다.
“그거면 돼?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
“그거면 돼요!”
이어지려던 말이 궁금했지만, 자꾸 건드렸다간 토라질 것 같아서
그만두고 바라는 대로 손을 뻗었다.
가끔 아마네가 머리를 쓰다듬곤 하는데, 마히루 본인이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걸 요구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 줄 테고 오
히려 마히루가 싫지만 않다면 아마네가 먼저 해 주고 싶어질 정도인
데, 소소한 소원으로 말한 거니까 역시 귀엽다는 생각만 든다.
아마네가 머리를 스스럼없이 쓰다듬자 마히루는 알기 쉽게 표정을
확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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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명확하게 열기를 띤 목소리가 한마디 말을 자아낸다.
작지만 귀에 잘 들어오는 목소리를 낸 연홍색 입술이 요염하게 다
가온다.
어느새 침대에 누워 상반신만 일으킨 아마네의 다리를 깔고 앉듯이
올라타서 몸이 못 움직이게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감촉과 그윽한 향기만이 직접 전해졌다.
앞으로 쓰러지듯 몸을 기댄 마히루는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면서
아마네의 등 뒤로 팔을 둘러서 몸과 몸 사이의 빈틈을 없앴다. 아래
로 눈을 돌리니 몸에 걸린 하얀 원피스의 목 언저리에서 평소 햇빛을
안 받아 뽀얀 살결이 보였다.
깊게 파인 계곡에서 시선을 돌리려고 했더니, 마히루가 놓치지 않
겠다는 듯 아마네의 목에 팔을 휘감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숨결이 입술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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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떡 일어나 보니, 당연하지만 그곳은 아마네의 방이었다. 침대에
는 아마네 혼자. 쳐둔 커튼 사이에서 방으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
었다.
사이드테이블에 있는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5시 언저리.
여름을 앞둔 시기라서 그런지 해가 일찍 떠서 생활을 시작해도 될
시간대이지만, 일어날 예정은 아니었던 시각이다.
몸을 일으키고 꿈이었음을 깨달은 아마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누
르고 자신의 추잡함에 잠에서 깨자마자 우울해졌다.
(최악이네…….)
그런 꿈을 꿀 줄은 전혀 몰랐다.
지금껏 마히루를 꿈에서 봤을 때도 평소와 똑같은 태도였고, 결코
아마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반영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제 더 만져 달라는 발언이 있어서 이런 꿈을 꿨을 테지만, 그래도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꿈이라고는 해도, 아마네의 뇌는 마히루가 하
지 않을 짓을 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령 꿈이라도 그런 감정과 충동은 마히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고 말았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부채질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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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딱 봐도 아마네가 멋대로 피하는 건데도 마히루가 미안한 기색이어
서,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더 생각할 수가 없다.
허둥지둥 마히루의 손을 잡고 얼굴을 살폈다.
평소보다 촉촉해진 눈이 아마네를 바라봤다.
“아, 아니야. 네가 뭘 잘못한 게 아니야. 나야말로 상처를 줘서 미
안해.”
“그러면 왜…… 서먹서먹하게 대하나요?”
“아, 그건 말이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이유를 물어보면 어물거릴 수밖에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자인 마히루가 질색할 게 뻔하다. 만약 아마네
가 마히루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곤란한 데다가 앞으로 어떻게 대하
면 좋을지 고민할 것이다.
“혹시 제가 미워졌다거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개,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할까…… 내
가 멋대로, 여러모로 생각할 일이 생겨서.”
“말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딱 봐도 시무룩해서 눈썹이 축 처진 마히루의 표정을 보고, 아마네
는 끙끙댈 수밖에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거짓말하긴 싫어서 잘 에둘러서 전하고 싶지만, 어떻게 잘 뭉뚱그
려서 말하면 좋을까.
자칫하면 뜻이 잘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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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고. 저기 말이야.”
반에서 절반이 넘게 참가할 듯한 공부 모임으로 발전하고 있는 마
히루 쪽을 보니 역시 인원이 많아서 고생길이 훤해 보인다. 아는 사
람이 있으면 편할 거라는 의미에서 보면, 아마네 자신이 참가할지 말
지는 제쳐두더라도 같은 교실에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딱히 배울 일이 없는데도 말이야……?”
“그렇다면 나를 가르쳐 주면 되잖아. 어차피 참가할 치이를 집까지
바래다줄 겸 기다리려고 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은
없겠지.”
“남을 가르치는 건 그다지 자신이 없는데…….”
“그야 말은 겁나게 차갑고, 하나하나 정성껏 가르쳐 주는 타입은
아니지. 그래도 외면해 버리거나 내팽개치지는 않잖아?”
확신하는 눈빛과 말투에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는 아마네에게 실
실 웃으면서 “너만 믿는다, 친구.”라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이츠키.
아마네는 거절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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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할 수 없다.
쓴웃음을 짓고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반 아이
가 “여기는 어떻게 풀어?”라고 풀리지 않는 문제를 짚어서, 온 김에
푸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러자 그 그룹 안에서 서로 눈치를 보더니, 어째서인지 이츠키를
봤다.
“저기, 이츠키. 후지미야 빌려도 돼?”
“어~? 내 거지만 하는 수 없지.”
“언제부터 네 거였다고.”
징그러운 소리를 듣고 슬쩍 토하는 흉내를 낸 아마네는 이츠키가
후다닥 책상 두 개를 이 그룹에 붙이는 것을 보고 행동이 참 빠르다
며 혀를 찼다.
딱히 상관없지만, 본인의 허가는 받았으면 좋겠다.
한숨을 쉬고 그룹에 합병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김에 이츠키의
책상 아래를 살짝 걷어찼다.
“미리 말하겠지만, 나도 잘 가르치는 건 아니야.”
“뭘. 그래도 고마워. 천사님은 저쪽에서 바빠 보이니까.”
“우리도 갑자기 참가했으니까. 시이나 혼자선 다 처리할 수 없겠
지.”
마히루가 가르치는 그룹을 부러워하듯 보지만, 질투하는 시선은 없
다. 단순히 아쉬워하는 것이다.
“우리도 재밌을 것 같아서 끼어든 거고, 시이나가 가르쳐 주면 땡
잡았다고 생각한 거니까 후지미야가 도와준다면 그걸로 됐어.”
“굳이 욕심을 말하자면 천사님이 더 귀여워서 기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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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다 같이 시험공부
“후지미야, 안녕.”
“안녕.”
어제 공부 모임 덕분인지 함께했던 그룹의 남자들이 가볍게 인사해
주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어제 귀가한 뒤에도 마히루는 시종일관 기
분이 좋은 눈치였다.
손을 슬쩍 흔들어서 대답하면서 자신의 자리에 짐을 내려놓자 먼저
학교에 온 이츠키와 유타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이츠키한테
서 왠지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예상대로 이츠키의 웃음이 싱글벙글에서 히죽히죽으로 변했기에,
무심코 혀를 찰 뻔했다.
“어제는 어땠어?”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네 얼굴이 징그러워.”
“아, 후지미야는 공부 모임에 참가했지? 나는 볼일이 있어서 못 갔
지만, 무슨 일 있었어?”
유타는 참가하지 않아서 이츠키가 히죽히죽 웃는 이유를 모르는 듯
하다.
굳이 설명할 마음은 없는지라 질색과 짜증을 섞은 표정으로 이츠키
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없었어. 그냥 유익한 공부 모임을 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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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말이죠. 이번 시험에서 점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혼날 거라고 해서, 마침 오늘 치토세 양과 토요일에 같이 공부하기로
약속했어요.”
“그쯤 되면 치토세도 노린 거 아니야?”
이츠키가 공부 모임 이야기를 치토세한테 한 것 같지만, 확증은 없
다. 다만 이츠키를 통해 정보가 흘러나간 확신은 있으니까 ‘그 자식
도 참.’하고 쓴웃음이 나왔다.
그걸 처음부터 말하라고 생각하면서 기름때가 묻은 그릇을 뜨거운
물로 싹 헹구고 설거지를 시작하니 마히루도 살포시 웃고 남아서 식
힌 반찬을 밀폐용기에 담시 시작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시끌벅적한 공부 모임이 될 것 같네요.”
“마히루 넌 조용하지 않아도 되겠어?”
“저는 괜찮아요. 게다가 평소에도 공부하니까 별로 조급하지도 않
고요.”
마히루가 평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 이토록 여유롭게 말하
는 것임을 잘 알기에, 딱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그토록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는 궁금하지만.
“저기, 마히루. 나중에 네가 필기한 노트를 봐도 될까?”
“괜찮아요. 그런데 아마네 군의 노트도 참 깔끔했는걸요. 인기도
많았고요.”
“노트가 말이지. 뭐, 그럭저럭 내용을 잘 정리하니까. 그래도 학년
1등의 노트는 어떨지 궁금해.”
“기대할 정도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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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들어갈게요.”
시험 전 토요일. 약속한 대로 이츠키, 치토세, 유타 이렇게 세 사람
은 10시경에 찾아와 한목소리로 인사하고 현관에서 복도로 들어왔
다.
이들은 중학교 때 같은 통학구역인 것도 있어서 먼저 합류해서 온
듯하다. 애초에 유타가 아마네 집 위치를 모르니까 그렇지만, 단순히
사이좋다는 이유도 있으리라.
“응, 어서 와.”
“마히룽은?”
“주방에서 점심에 쓸 걸 준비하고 있어.”
마히루는 먼저 아마네의 집에 와서 점심 재료를 손질하고 있다. 아
침 일찍 문을 연 슈퍼에 서둘러 재료를 사러 뛰어갔었으니까 점심 식
사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덧붙이자면, 오늘은 로스트비프를 만든다고 들었다. 만들어서 숙성
시키면 점심에는 적당히 부드러운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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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자기 집이네…….”
“조용히 해.”
“이제는 직장 동료를 맞이하는 새색시 느낌도 나.”
“자꾸 말하면 점심밥 안 준다.”
“싫어-! 마히룽이 해 준 밥 먹을래-!”
이상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투덜대면서 유타를 보니, 유타는 조금
넋이 나간 듯이 아마네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시이나 양이 아주 자연스럽게 후지미야의 집에 있는 것 같
아서.”
“어쩔 수 없잖아. 매번 식사를 챙겨 주니까.”
고개를 홱 돌리자 이츠키가 자기 입을 막고 웃는 게 보였는데, 그게
마치 어머니의 따스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성질이 뻗쳐 다
리를 살짝 걷어차 주었다.
“다들 어서 오세요…… 어? 아카자와 씨는 왜 그래요?”
“신경 쓰지 마.”
마히루가 봤을 때는 이유도 없이 잘 모를 웃음을 띤 이츠키를 걱정
한 거겠지만, 이건 걱정해 줄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신경을 껐으면
좋겠다.
아리송한 눈치를 보이면서도 신경을 쓸 일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한
마히루가 언제나 보여주는 미소를 짓고 “저는 조금 더 준비할 게 있
으니까, 먼저 거실로 가세요.”라며 앞치마를 펄럭이고 주방으로 돌
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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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츠키와 치토세보다 성실한 유타도 잠깐 휴식할 겸 게임에 흥미를
보여서, 아마네는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를 보이고 다시 참고서로 눈
길을 돌렸다.
덧붙이자면, 마히루는 옆에서 조용히 문제집을 풀고 있다. 집중력
이 풀린 낌새도 없다.
“마히루는 같이 안 놀아?”
“저는 조금 더 공부할게요.”
“그래.”
아마네는 이번에 성실하게 공부하기로 맹세했으니까 중간에 그만
두지 않는 건데, 마히루는 원래부터 이토록 근면하니까 감탄할 수밖
에 없다.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 항상 1등을 지키는 거겠지만, 그만큼
노력하는 부분이 마히루의 장점이자 대단한 점이리라.
아마네는 이츠키, 치토세, 유타가 책상을 떠나 TV 앞에 진을 치는
것을 본 다음, 세 사람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샤프펜슬을 움
직였다.
샤프심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와 지우개를 문지르는 소리, 옆에서
마히루의 숨소리가 괜히 크게 들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나게 노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어슴푸레 들
리는 가운데, 교사들의 출제 성향을 떠올리면서 시험 문제로 나올 법
한 것을 중점적으로 풀었다.
1학년 때부터 계속해서 같은 과목을 맡은 교사도 있는데, 그런 교
사가 내는 시험은 의외로 마음이 편하다. 성격이나 수업에서 뭘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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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달게 느껴진다.
싫지는 않은 단맛과 마히루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서, 아마네는 자기 자신에게 얼버무리듯 참고서로 눈길을 돌릴 수밖
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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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시험 전의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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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할게요.”
“오히려 마히루한테 도움을 받는 건데 말이지. 식사는 정말 고마
워. 나는 너만큼 관리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노력은 아마네 군이 하는 거니까, 저는 그런 도
움밖에 줄 수 없는 거지만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노력해 주세요.”
“다음에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할게.”
다시는 목욕 중에 잠들지 않을 거고, 애당초 실수로 죽을 뻔하는 위
기에 처하고 싶지는 않다.
걱정하는 마히루를 울리기도 싫으니까, 스스로 몸을 관리하고 무리
한 노력은 하지 않게 명심할 작정이다.
그 점은 마히루가 조금 의심하는지 ‘꼭 명심해 주세요.’라는 눈빛으
로 보는지라, 아마네는 마히루가 안심할 수 있게 손을 부드럽게 움직
여서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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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시험 후의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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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정말 막히는 문제는 거의 없었으니까, 이번엔 괜찮을 것 같아.”
“흐에~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내 이야기도 들어볼
래?”
“위험했지만 낙제는 간신히 면할 것 같다 이거지?”
“잘 아네.”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낙제점을 받으면 내가 더 곤란한데.”
마히루와 아마네는 이츠키와 치토세, 유타에 비해 여유가 있는 축
이어서 치토세의 시험공부를 도와줄 수 있었고, 어떻게든 낙제점을
피하는 데 전념하도록 시켰다.
치토세는 평소 수업 태도가 불량한 것이 걸림돌일 뿐, 기본적으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이해력도 나쁘지 않으니까 잘 가르치기만 하면
제대로 이해해 준다.
그것이 시험 뒤에도 자신의 실력으로 남을지 어떨지는, 본인의 복
습과 노력에 달렸지만.
“괜찮아~ 괜찮아~. 이제까지 본 시험 중에서 최고로 잘 봤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는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
지만, 괜찮았다면 됐어. 기말 시험 때도 열심히 해 봐.”
“으에엑. 시험 끝난 날에 다음 시험 이야기를 하지 마…… 기분 다
운되잖아……. 지금은 이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어! 그치? 잇군.”
“맞아! 지나간 과거도, 먼 훗날의 미래도, 지금은 머릿속에 떠올릴
때가 아니야.”
아마네의 뒤에서 흐느적 늘어진 이츠키는 치토세의 말을 긍정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여담으로 이츠키는 치토세보다 성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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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나는…….”
“어련하시겠습니까. 아마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
까.”
목소리는 작아도 쓸데없는 소리를 했으므로, 아마네는 손가락 관절
을 이츠키의 관자놀이에 대고 가볍게 공격해 주었다.
이번만큼은 이츠키가 잘못했다고 아는 듯, 유타는 웃기만 하고 아
마네를 말리려고 들지 않았다. 치토세는 “잇군도 참 멍청하긴.”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관자놀이 언저리를 강제로 꽉꽉 눌린 이츠키는 아프지 않은 듯이
실실 웃었다.
실제로 힘을 세게 준 것은 아니니까 별로 아프진 않을 테지만, 여유
를 부리면 아주 조금 짜증이 치미는 것도 사실이다.
“뭐, 후지미야는 일편단심이니까. 보면 알겠어.”
“카도와키, 너마저…….”
“나는 딱히 뭐에 일편단심인지, 어떻게 일편단심인지도 말하지 않
았는데?”
상큼함을 확 뿌리는 웃음을 보고, 아마네는 뭐라고 더 말할 수도 없
어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네의 태도가 어지간히 재밌는지, 이츠키와 치토세와 유타는 모
두 왠지 훈훈한 느낌으로 웃었다. 아마네는 부끄럽기도 해서 입술을
꼭 깨물고 시선을 돌렸는데, 그때 딱 손이 빈 마히루와 눈이 마주쳐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마히루가 봤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신음하자, 마히루가 미소를 지
은 채 조용히 아마네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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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천사님이 주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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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뻗었다.
뒤통수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내려왔다.
(?!)
소리도 내지 못하는 비명을 속으로 지르는 아마네를, 마히루가 알
아차린 낌새는 없었다. 곧장 귀이개를 집어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마히루는 모를 것이다. 아마네가 부드러운 감촉과 질량을
피부로 느꼈다는 사실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미 마음속 상태는 귀 청소가 어쩌고 따질 수준이 아니었지만, 마
히루는 “가만히 있어 주세요.”라고 타이르듯 속삭이고 아마네의 머
리를 한 손으로 슬쩍 고정했다.
귓속을 청소할 테니까 움직이지 말라는 소리겠지만, 이런저런 이유
로 마구 뒹굴고 싶은 아마네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들은 강아지
가 된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도 발버둥 칠 수는 없으므로 얌전히 테이블 옆면을 가만히 보
니 천천히 귓구멍 속에 딱딱한 게 들어왔다.
한순간 오싹한 것은 역시 피부가 얇은 곳이 민감한 탓이리라.
자기 손으로 할 때는 안 그런데도 마히루가 하면 기분이 이상해지
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다는 점과…… 좋아하는 여자
애가 해 준다는 흥분 때문이리라.
마히루는 성격으로 봐서 조심스럽게 잘 청소해 줄 것을 알지만, 부
드럽게 귀를 청소해 주면 왠지 모르게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음이 편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욕망을 자극
하는 희미한 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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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없었다.
(이러다간 완전히 타락하겠어…….)
여자의 싱그러운 향기와 온기를 담뿍 느끼면서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면 별일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참
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런 걸 매일 당했다간 확실하게 인간적으로 타락하는 길로 직행할
만큼, 지금 상황과 자세는 여러모로 매력이 넘쳤다.
숨을 훅 내쉬고 몸에서 긴장을 풀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네 군은 의외로 어리광쟁이네요.”
“다 누구 탓인데……”
“제 탓이네요.”
마히루는 키득키득 부드럽게 소리를 내어 웃고 손가락 마디를 더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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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몸을 감싼 탓일까.
꼼꼼하고 깔끔함을 좋아하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지 마룻바닥
은 윤이 나도록 잘 닦였고, 보이는 범위에서는 딱히 지저분한 곳도
없다. 벽을 따라서 배치한 선반에는 거울과 꽃 같은 게 있어서 차분
하면서도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쪽에서 이어지는 거실도 슬쩍 본 바로는 내추럴 컬러 바닥에 맞
춰 푸근한 흰색과 연청색을 바탕으로 청결하고 밝은 가구로 정리해
서 주인의 센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왠지 생활감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별로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다고 할까.
실제로 요새는 학교와 입욕, 수면 시간 말고는 아마네의 집에 있다
시피 하니까 어떤 의미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가까운 상태가 됐
을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천천히 침실로 추정되는 방의 문
을 열고 안에 발을 들였다.
여자 방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가 보는데, 이걸 기준으로 삼았다간
세상 여자들이 화를 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깔끔한 방이었다.
여기도 거실처럼 흰색과 연청색이 기본인데, 거실보다는 화사함이
있다. 청초하면서도 우아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방이다.
다만 얼핏 봤던 거실보다는 생활감이나 본인의 개성이 드러났다고
도 생각했다.
눈에 띄는 곳에 불필요한 물건을 두지 않으려는 건지 물건이 많다
는 인상은 들지 않지만, 책상 위에는 참고서와 요리책과 함께 아마네
가 게임 센터에서 뽑아서 선물한 인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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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도…….”
다음에 이어질 말이 뭘지 생각하고, 이어서 경직했다.
여기서 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아마도 안는 베개가 되라는 뜻
일 것이다.
(의미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특별한 뜻은 없어.)
그렇게 타이르고 한순간 유혹에 빠질 뻔한 자신의 욕망을 속에서
패대기쳤다.
이대로 느긋하게 있다간 마히루가 엄청난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조
마조마하면서, 아이를 재우듯 부드럽게, 찬찬히 머리를 쓸어서 잠으
로 유도했다.
“나는 집에 갈 거야. 알았지?”
“싫어…….”
“여자 방에 오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어나면 너도 무조건 후회
할걸. 나를 베개로 때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거든.”
만약 아마네가 이 침대에서 같이 잔다고 쳐도 확실하게 한숨도 못
잘 테고, 일어난 마히루가 혼란에 빠져 얼굴이 새빨개진 다음 창피한
나머지 베개로 때릴 게 뻔했다.
그 뒤로는 말도 안 할 거라는 미래를 예상할 수 있어서, 아마네와
이성과 내일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물러나야만
한다.
꾸벅꾸벅 조는 마히루는 아마네가 필사적으로 타이르는 말과 잠기
운에 저항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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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서로 어색하게 얼굴을 마주친 것은 필연이
었다.
평소 학교에 가는 날에 아침부터 찾아오는 일은 지금껏 거의 없었
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라 뭔가 말하려고 온
듯하다.
아마네는 어제 받은 상과 마히루가 깜빡 잠든 사건으로 잠을 설쳤
기 때문에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오면 심장에 해롭다.
편안한 무릎베개의 감촉, 중간에 머리에 찾아온 탐스러운 과실의
향기와 부드러움을 떠올리고, 허락을 받았다고는 하나 거의 제멋대
로 침입한 마히루의 방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살아나면서, 다음으로
는 천진난만하게 잠든 얼굴과 귀여운 애교가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게다가 곰돌이를 끌어안은 귀여운 모습이 떠오르는 바람에 침대에
서 몸부림치기를 수십 번.
몸부림을 치고 끙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나 싶었더니 곧바로 아침
을 알리는 알림 소리에 정신이 들어 잠이 부족한 상태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반대로 마히루는 잘 잤는지 개운한 얼굴에 혈색도 좋다. 그저 부끄
러움을 감추려는 듯이 꼼질거려서 침착하지 않게 보일 뿐이다.
아침밥을 먹으려던 차에 마히루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경직
한 아마네는 시선을 어디 둬야 좋을지 고민했다.
마히루가 준 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 감촉을 안 이상 똑바로 보기
어렵다. 더불어 마히루 자신은 모르니까 수치심과 함께 죄책감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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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 열쇠를 찾으러 왔구나. 가져가
서 미안해.”
“아, 아뇨. 그게…… 그건, 맞지만요. 그런 게 아니고요.”
아무리 매우 친한 사이라고는 해도 여자가 사는 집 열쇠를 가져간
것은 잘못했다. 애초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집에 발을 들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반성하고 있다.
(역시…… 방을 보여주는 건 싫겠지.)
아마네가 봤을 때는 무척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조화가 잘된 방이라
는 감상을 떠올렸지만, 본인의 의식이 거의 없을 때 멋대로 방을 봤
다면 뭔가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가령 속옷을 실내에서 건조하는 것을 보기라도 했다간 아마도 마히
루는 한동안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행히 그런 건 보지 못했지만, 만약 있었다면 아마네도 마음이 너
무 불편해져서 한동안 피해 다닐 자신이 있다.
“저, 저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응.”
“채, 책상 위에, 사진이 있는 액자가 있었을 텐데요…….”
“사진 액자?”
방을 너무 두리번거리는 것도 미안해서 슬쩍 둘러본 정도인데, 사
진이 있는 액자는 딱히 기억에 없다. 마히루가 하는 말로는 아마도
잡화처럼 둔 거겠지.
기억을 뒤져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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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튿날 아침. 아마네가 일어나서 방에서 나오자 마히루가 있었다.
잠시 뒤돌아서 침실 시계를 봤지만, 아침 준비 시간이라서 아직 집
을 나설 시간대가 아니다.
평소 마히루는 아침 시간대에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네는 잠이 덜 깬 머릿속으로 혼란
에 빠졌다.
“안녕……?”
여벌 열쇠도 줬고 편할 때 와도 좋다고 했지만, 아침부터 마주칠 줄
은 몰랐다.
당혹스러워서 의문형으로 아침 인사를 건네자 마히루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기, 아침부터 실례인 줄은 잘 알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확
인을 받고 싶어서요.”
“확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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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요.』
소리는 안 나도 확실히 그렇게 들린 것 같아서, 아마네는 도저히 얼
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진 나머지 고개를 홱 돌렸다.
돌아본 곳에 이츠키의 얼굴이 있었던 것은 아마네의 실책일 것이
다.
“애쓸 마음이 생겼어?”
“시끄러워.”
뭐든지 다 들여다본 것 같아서 화풀이하듯 대꾸했더니,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이츠키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죽겠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농구 경기에 임해서 기력을 다 방출하는 바람
에, 아마네는 숨을 헐떡이면서 쪼그려 앉아 신음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다.
요새 운동량을 늘렸다고는 해도 이렇게 전력을 다할 기회는 없었
고, 지금껏 격한 운동은 해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겨루는 시
합이라는 점도 맞물려서, 아마네는 정말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천천히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마구 날뛰는
심장이 도무지 얌전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시합 중에 사고가 나서 세게 넘어지는 바람에, 부딪힌 몸도 아프고
호흡도 고를 수 없어서 꽤 혹독한 경험을 했다.
자꾸 필사적으로 뛰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딱 봐도 너무 노력한 거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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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심한 꼴을 보인 것 같은데.)
마히루가 볼 때 넘어져서, 나중에 교실에서 얼굴을 보기가 우울했
다. 이래서는 멋진 모습은 고사하고 한심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네, 괜찮아?”
시합 후 인사를 마치고 쪼그려 앉은 아마네에게, 아무래도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한 이츠키가 몸을 숙이고 상태를 물어봤다.
“괜찮지만…… 내일은 확실하게 근육통이 오겠어.”
“하하, 그건 운동을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이지.”
놀리듯이 말하면서도 등을 쓸어 주는 이츠키에게 조용히 고마워하
면서 심호흡하다 보니 심장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뜨겁고 부딪힌 데가 아프지만, 진심으로 농구 시합을 뛴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래도 좋겠지 싶기도 해서, 자신답지 않다
고는 생각하지만.
나중에 얼굴을 식히러 가자고 다짐하고, 아마네는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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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뭐 해……?”
“아, 후지미야 씨와 카도와키 씨. 웬일로 이런 시간에 다 남아 계시
네요, 특히 후지미야 씨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그건 뭐야?”
두 손으로 힘들게 안고 있는 프린트를 눈짓하자, 마히루가 입술에
쓴웃음을 지었다.
“선생님께서 시간이 있으면 스테이플러로 다음 달에 있을 체육대회
관련 프린트를 묶어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차마 거절하지 못해
서…… 지금 받은 참이에요.”
“시이나를 너무 편리한 도구로 쓰는 거 아니야……?”
학생들만이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두텁게 신뢰를 받는 마히루는 좋
든 나쁘든 기대를 받고 있다. 부탁도 많이 받는 것을 자주 목격하는
데, 이번 것도 그런 부탁인 것 같다.
문무겸비의 재녀이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더더욱 시간
이 남을 거라고 생각한 교사가 부탁하는 일을 받는 빈도가 높다. 착
한 아이로 있으려는 까닭에 마히루가 기본적으로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사들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리라.
“저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요. 이 정도 일은 금방 끝나고요. 빈
교실로 옮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고, 다 나르기만 하면 스테이플러
만 찍으면 끝나요.”
“직원은 뭐에 쓰라고 있는 건데.”
“괘,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한 시간 정도면 끝나니까요.”
“강제로 한 시간이나 잡아둔다는 뜻이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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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말할 수 없다.
아마네는 미묘하게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는데, 마히루는 그걸 빤히
보고 있다.
그게 영 거북해서 마히루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야 구석
에서 한숨을 쉬는 마히루가 보였다.
“아무튼 카도와키 씨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인 것은 알지만, 뭐라고 할까…… 왠지 의식해
서 드러내는 태도가 겹치니까, 지인이나 친구, 이해자로선 좋을지도
몰라도 연애 감정에는 도달할 일이 없다고 느끼는데요.”
“뭐…… 겉으로 봐서는 마히루와 카도와키는 왠지 닮은 구석이 있
긴 하지. 카도와키는 마히루처럼 겉과 속이 심하게 차이가 나지 않지
만.”
유타와 친해진 최근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유타도 주위에서 기대
하는 태도를 보이는 구석이 있다. 다만 마히루만큼 현저하지 않고,
본인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마히루는 가정환경의 문제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유와 정도가 다른 거니까, 일률적으로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사
실이다.
“마치 제가 이중인격인 것처럼 말하네요……. 그, 그렇게 겉과 속
이 다른가요?”
“다르다고 할까, 마히루는…… 천사님보다 원래 모습이 훨씬 귀여
운걸. 처음에는 쿨하고 엄격한 느낌이었는데, 익숙해지고 보니 생각
했던 것보다 부끄럼쟁이 같아. 말과 행동에 드러나는 감정도 전혀 다
르니까, 격차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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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요? 말해 보세요.”
“어? 그건 좀.”
“딱히 화내려는 건 아니거든요? 아마네 군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것 같지도 않고요.”
가만히 바라보는 그 눈에는 거부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압박감
이 있다.
그야 당연히 아마네도 조금 오해를 살 말을 했으니까, 잘 설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말했다간 놀림당할 정도로 유치한 감정임을 자기 자신에게 드러내
야 하리라.
“저기, 웃지 마.”
말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신신당부하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줘
서, 아마네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미묘하게 시선을 돌
리고 입을 열었다.
“의식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
“즉, 우연히 마히루가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거잖
아?”
그 말까지 하고 마저 말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할 일
은 아니다. 아마네는 한 차례 심호흡하고 입술을 떨었다.
“언젠가 진짜 마히루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까, 왠지 마음이 복잡해져서 말이야.”
나머지 말을 꺼내는 것을 잠깐 망설인 것은, 아마네 자신이 참 아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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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었다.
눈썹을 모으고 눈으로 항의해도, 마히루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 듯
키득키득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다.
“전부 귀여워요.”
“여자가 귀엽다고 하는 말은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어.”
“말이 심하네요. 그야 여자가 쓰는 귀엽다는 말의 정의가 시각적인
뜻이 아니고, 더 넓은 의미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귀엽다
는 말로 표현한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요. 아마네 군은 귀여운데
요?”
“남자는 귀엽다고 칭찬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아.”
좋아하는 여자애가 칭찬하려고 귀엽다는 말을 골라도 기쁠 리가 없
다. 아니, 칭찬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아마네는 자신과 같은 남자에
게 귀엽다는 평가는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네로선 자신이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서 기뻐할 줄 아냐고 따지
고 싶지만, 칭찬보다는 단순한 평가 같으니까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
다.
입술에 힘을 주고 뚱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마히루를 봐도, 본인은
재밌다는 듯이 웃고만 있다. 그 눈에 사랑스러운 기색이 안 보였다면
아마네는 마히루의 볼을 꼬집었을지도 모른다.
“멋지지는…… 않은 건가.”
무심코 작게 중얼거리자 마히루가 딱 굳어서 아마네를 보는 바람
에, 자신의 발언을 곧바로 후회했다.
자신이 멋지게 봐 주지는 않느냐고 하다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남들에게 자주 겁쟁이, 소심하다, 한심하다 같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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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못 본 척, 모르는 척
뺨에 닿은 것은 대체 뭐였을까.
그 뒤로 결국 마히루가 아마네의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그대로 다
음 날을 맞이했다. 잠든 동안을 빼고는…… 정확하게는 너무 고민하
다가 그대로 기절한 건데, 잘 때 말고는 마히루의 그 행동이 머릿속
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정말 한순간에, 환상으로 의심할 정도로 아주 짧았지만, 부드러운
것이 뺨에 닿았다.
좁아진 거리와 그 감촉으로 보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했지
만, 이해력이 그 사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누구든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 마히루가, 뺨이라고는 해도 입술을
대다니.
(왜……?)
보통 키스란 행위는 상대에게 호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시점에서, 미수라고는 하나 아마네도 마히루에게 호감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니까 돌이켜 보면 부끄럽다.
다만 아마네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마히루는 아니다. 뺨이라고는 해도 실제로 키스했으니까.
어느 정도는 잘 따르고, 특별히 대우해 준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
다. 하지만 뺨에 입술을 댈 정도의 호감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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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난 홍팀이야.”
다음 달로 다가온 체육대회 팀 편성 발표를 보고 치토세가 아쉬워
하는 소리를 냈다.
먼저 결과가 나온 이츠키가 백팀이 되었으니까, 일단은 적이 된 것
이다.
“기왕이면 성에 맞춘 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어쨌든 너희는 적이 될 텐데.”
이츠키의 성은 아카자와(빨간 못), 치토세의 성은 시라카와(하얀
강). 두 사람이 홍백 커플로 불리는 이유다.
“그렇구나…… 이런 비극이…… 적인데도 이끌리고 만 금단의 사
랑…….”
적이 된 커플이 한탄하면서 닭살 행각을 벌이는 것을 어처구니없다
는 눈으로 구경한 아마네는 팀 편성을 적은 용지를 봤다.
아마네는 유타와 함께 홍팀이었다. 게다가 치토세도 있다.
반대로 이츠키와 마히루는 백팀에 들어가서, 육상부 에이스인 유타
가 있다고는 해도 같은 반에서 편성을 보면 운동부가 다소 백팀에 몰
려 있다.
그야 아마네는 이기든 말든 아무래도 좋지만, 마히루에게 너무 한
심한 꼴을 보이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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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이다.
시중에 파는 것치고는 비싼 축에 속해서, 한 입 한 입을 소중히 먹
으려고 한다.
“체육대회가 그렇게 싫은가요?”
“그야 슬슬 더워지는데 체육복 입고 밖에서 한나절 있으면 싫잖아.
천막을 친다고 해도 말이야.”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하지만 애써야 할 걸요?”
“그럭저럭 애써 볼게.”
“참.”
마히루가 입술을 비죽이지만, 시선이 스푼에, 정확히는 아이스크림
에 쏠려서 무심코 웃고 말았다.
단 것을 좋아하는 마히루가 먹을 것도 살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아마네가 시험 삼아 마히루의 앞에 스푼을 가져가니 눈이 확 빛났다.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로 참 알아보기 쉬워졌다고 몰래 웃고 마히루
의 입술에 가까이 들이대자, 마히루는 주인의 손에서 먹이를 받아먹
는 새끼 고양이처럼 거리낌없이 스푼을 입에 넣었다.
눈이 슥 가늘어진다.
아마도 맛있는 거겠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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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해했어.”
지금은 같은 학년에서 다 인정하는 커플이지만, 중학교 시절 아직
사귀기 전에는 이츠키가 치토세에 열심히 대시했다고 본인에게 들었
다.
지금보다 조금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하는 치토세를 함락하는 데 막
대한 시간을 들인 끝에 사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이츠키에게 반한 같은 육상부 선배가 봤다면, 실랑이가
벌어지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질척질척한 인간관계에 질려서, 동아리에는 안 들어가기로 했다나
봐. 그래도 달리는 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휴일에 뛰는 걸 자주
봐.”
유타는 “같은 동네에 사니까.”라고 말을 덧붙이고 웃더니, 크라우
칭 스타트 자세를 잡은 치토세를 바라봤다.
초심자에 가까운 아마네가 봐도 치토세의 자세는 숙달되어 보이고,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본 그 표정은 평소 장난치듯 웃는 명랑한 느낌이 아니라, 진
지하고 예리했다.
신호총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 주자는 치토세였다.
누가 봐도 입을 모아 깔끔하다고 할 폼으로 달리기 시작한 치토세
는 현역 여자 육상부원도 멀리 떨어뜨리고 그야말로 바람처럼 뛰었
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뒤에 남겨진 것처럼 날리고, 몸은 오로지 앞
으로만 나간다. 힘차게 바닥을 박차는 다리는 다른 선수보다도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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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지점으로 가고 있었다.
무심코 정신이 팔릴 만큼 아름답게 뛰는 모습을 보인 치토세는 어
느새 골 테이프를 통과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코스를 완주한 치토세는 1등 깃발을 들고 홍팀…… 이쪽
을 보고 씩 웃었다.
만족스럽게 깃발을 붕붕 흔드는 그 모습은 참으로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100미터 달리기가 끝나고 천막으로 돌아온 치토세는 당당하게 가
슴을 폈다.
“다녀왔어. 봤어?”
“봤어. 봤어. 진짜 빨랐는걸.”
“와~ 고마워~!”
“그래. 역시 시라카와가 뛰는 걸 보면 기분이 상쾌해져.”
현역 육상부원 둘이 칭찬해서 기분이 좋아진 치토세에게, 아마네도
“수고했어. 빠르던걸.”하고 칭찬을 말했다.
실제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라서 질겁했지만, 치토세는 아무렇지
도 않은 듯 “아, 즐거웠어.”라고 느긋하게 웃고 있다.
달리는 동안과는 완전히 다르게 풀어진 느낌이 치토세다워서, 아마
네도 안심하고 얼굴 표정을 풀었다.
“그나저나 시라카와는 여전히 빠른걸.”
“헤헤, 일과로 단련하고 있으니까. 그야 현역 시절만큼은 빠르지
않지만.”
듣자니 중학교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
다. 어쩌다 보니 아마네의 주위에는 신체 능력과 두뇌 면에서 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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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꺼번에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한 사람씩 말해
줘.”
어차피 멋대로 소문이 퍼질 거라면 자신의 입으로 사실을 전하는
게 좋다고 각오하고서 앞을 봤더니 남자들이 주춤거렸다.
아마네가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당당하게 나설 줄은 몰랐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지만.
“대체 언제부터 시이나 양과 가까워진 건데?”
“작년부터.”
어차피 숨겨도 애초에 아마네가 마히루의 곁에 있으려고 외부용으
로 몸단장하면 드러날 일이라서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어, 그러면 너, 새해 신사나 연휴 때 시이나 양과 소문이 났던
그 남자도.”
“내가 맞을 거야…….”
그러므로 반 아이들 사이에서 마히루가 연휴 때 말한‘소중한 사
람’이 방금 말한 ‘소중한 사람’과 직결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
다.
마침 연휴 때 외출했다가 목격했다고 하는 같은 반 여자애가 이쪽
을 봐서 의심을 사지 않는 정도로만 시선을 피했다.
모두의 관심을 끈 수수께끼의 남자가 사실은 자신이라는 것에 조금
은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마히루가 아마네를 멋지다고 생각해 준다
고 하니까 현재로서는 그래도 되겠지.
감정하는 듯한 시선이 강해진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아마네는 몰
려든 반 아이들에게 최대한 잔잔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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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시이나 양! 후지미야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마네 군은 제 소중한 사람이에요.”
딱 잘라서 말한 마히루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도 빈틈이 없는 천사님의 미소를 지은 마히루에게 잠시 주춤한
남자는 주위 시선에 떠밀렸는지 다소 힘이 빠진 투로 말했다.
“그, 그건…… 좋아하는 사람이냐는 의미로 물어본 건데.”
“만약 그렇다고 치고, 당신은 제게 뭘 말하고 싶은 거죠?”
“아니, 그건 말이지. 그게, 만약…… 좋아한다면…… 왜 후지미야
따위를.”
“후지미야 따위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시원찮은 후지미야랑 시이나 양이
사귀면 이상해서. 더 좋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가요.”
이건 마히루의 지뢰를 밟았다고, 아마네는 눈빛을 흐렸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스스로 비하하는 것을 싫어한다. 듣기로는 부당
한 평가를 하는 게 싫다는 듯하다.
즉,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보이는 자신은 그렇다 쳐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학교에서는 대다수가 시원찮은 남자로 보는 것을 부정하지 않
고,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다만 마히루가 그 평가를 허용할지 어떨지는 경우가 다르다.
마히루의 미소는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천사님의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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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꼴을 봤어…….”
욕실에서 흙과 먼지를 씻어내고 깨끗해진 아마네는 운동한 뒤 특유
의 기분 좋은 나른함에 몸을 맡기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기마전은 걱정했던 대로 적 팀의 공격이 강렬했다.
그야 예상은 했지만, 적극적으로 부딪히려고 뜨는 바람에 다른 세
사람에게 부담을 많이 주고 말았다.
다만 카즈야는 신나서 ‘이것도 다 청춘이지’라고 호전적으로 웃은
걸 보면, 아마도 카즈야는 이런 경기를 전체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리
라.
결국 적 팀의 지나친 공세에 끝까지 남지는 못했지만, 기수인 마코
토가 건투한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적 팀의 머리띠를 많이 빼앗았
다.
활약한 사람은 마코토지만, 적 팀에서 구경하던 마히루가 아마네에
게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오후 일정도 겨우 끝나서 폐회식을 마치고, 행사 때마다 항
상 그렇듯 뒷정리를 한 다음에 지금 이렇게 집에 있다.
오늘은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서 육체와 정신이 모두 피곤했지
만, 오늘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해야지…….)
마히루가 그만한 용기를 내서 아마네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아마네
와 함께하기를 선택해 주었다.
그 마음에 응하지 않고 미뤘다간 어딜 가서 남자라고 명함도 내밀
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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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진 않아.”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오히려 아마네는 마히루가 다 각오하고 그랬기에 결심할 수 있었
고, 본인의 진심을 알았으니까 전혀 싫지 않다.
게다가 아마네도 마히루에게 손을 내밀 각오가 생겼다.
한차례 심호흡하고, 마히루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 눈은 평소보다도 맑고 고요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분위기가 차
분했다.
“나도, 사과해도 될까?”
“뭘요?”
“겁이 많아서, 미안해.”
마음을 전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알면서도, 나서는 게 무서워서, 눈을 돌리고, 마히루의 마음을 모
르는 척, 못 본 척해서, 미안해.”
어렴풋하게 느꼈다. 하지만 외면했다. 마히루의 호의를.
한심하니까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이러니까 좋아할 리가 없다고,
그렇게 자꾸 변명하다가, 아마네는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이제는 도망칠 생각이 없다.
마히루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고,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
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눈을 돌리지 않게 똑바로 보자── 마히루가 작게 웃었
다.
“그건 서로 똑같지 않나요? 저도 그랬어요. 저도…… 아마네 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신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용기를 내지 못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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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까요.”
아마네에게 슬며시 손을 뻗은 마히루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아마네
의 손을 만졌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저는 치사하다고.”
“글쎄. 내가 더 치사해.”
마히루의 치사함은 귀여운 수준이라고 쓴웃음을 지은 아마네는 감
싸는 마히루의 손을 피하고, 그 대신에 마히루의 몸을 감싸듯이 천천
히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품에서 가녀린 몸이 긴장하지만, 이어서 아마네에
게 안긴 것을 이해했는지 마히루가 몸에서 힘을 살며시 풀었다.
예고도 없이 끌어당겨서 그런지 아마네의 다리 위에 올라간 마히루
는 가슴을 손으로 짚고 아마네를 올려다본다.
캐러멜색 눈에서는 놀라움과 곤혹스러움, 나아가 기대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내가…… 말하게 해 줄래?”
작게 속삭이자 아주 조금 얼굴을 붉힌 마히루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응석을 부리듯 아마네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있잖아.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 게 처음이야. 애초에 그
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어.”
“옛날 일 때문인가요?”
“그래. 그럴 거야.”
마히루를 떼어놓지 않듯이 꼭 안으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마네가 이토록 좋아한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상대가 자신을 좋
아한다고 인식하기를 마음속으로 거부한 것은 중학교 시절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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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아직 질질 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안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것이 무서웠
다. 혹시라도 거부당할 때를 생각하면, 뭐든지 집착하지 않는 게 좋
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도 변한 건, 마히루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쉽게 뒤집힐 줄은 몰랐지만.”
다시 품에 안긴 마히루를 봤다.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가슴이 은은하게 따뜻해지고, 얼굴이 뜨거워
지는 마음과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가득 차는 경험은 필시 마히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만큼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끌렸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면, 사람은 변하는 것 같아.”
마히루와 만나고, 아마네는 변했다.
마히루 덕분에 마음속 수렁에서 벗어나듯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
었고, 자기 자신을 조금씩이나마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는 욕망도
생겼다. 자신의 손으로 감싸서 소중하게 아끼고 싶다는 마음도 알았
다.
“처음에는 있지. 너를 귀엽지 않다고 생각했어.”
“알아요. 대놓고 말했으니까요.”
“그때는 미안해, 정말로.”
그때는 아마네나 마히루나 서로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시기라
서, 귀엽지 않다는 막말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마히루도 아마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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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직 안 끝났거든요?!
그런고로 이 책을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인 사에키입니다.
4권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두 번 강조).
4권에서는 마히루 양이 밀고 또 밀어서 아마네 군도 결심을 굳히
고, 마침내 서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이번에도 맺어
지지 않을 뻔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소심한지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질질 끌다 맺어졌는데, 앞으로도 계속 답답하
게 애를 태우면서 거리를 좁혀 나갈 예정입니다. 아마네 군의 소심함
이 금방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사악한 얼굴).
5권부터는 사귀기 시작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예정한 이야기
의 반도 진행하지 않았으니까,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기왕
이면 웨딩드레스 입은 마히루 양의 일러스트를 보고 싶으니까, 그때
까지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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