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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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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천사님과의 만남

“……뭘 하고 있는 거야.”
후지미야 아마네가 시이나 마히루와 처음 이야기한 것은―― 비가
끝없이 내리는 가운데 공원에서 그네에 앉아 있던 그 아이를 우연히
봤을 때였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자취 생활을 시작한 아마네가 사는
맨션의 오른쪽 이웃에는 천사가 살고 있었다.
천사란 물론 비유지만, 시이나 마히루는 그 비유가 우습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어여쁜 소녀였다.
잘 손질된 황갈색 스트레이트 헤어는 늘 부드럽고 광택을 띠었으
며, 뽀얀 유백색 살결은 피부 트러블도 모르는 매끄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에 긴 속눈썹이 가장자리에 나 있는 커다란 눈,
윤기를 띤 예쁘장한 분홍색 입술 등등 모든 요소가 마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 그것도 같은 학년인 아마네는 마히루의 평판을 자
주 들었는데, 문무를 겸비한 미소녀라는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실제로 마히루는 정기고사에서도 늘 1등을 차지하고 있으며, 체육
수업에서도 에이스 급의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네는 반이 달
라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소문대로라면 완벽 초인이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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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결점은 보이지 않으며, 단정한 용모에 성적은 우수, 그런


데도 자만하지 않고 겸허하면서 얌전한 성격이라고 하니, 그 정도면
인기가 많은 것도 수긍이 되었다.
그런 미소녀가 옆집에 살고 있으니까, 이 환경은 일부 남자들에게
선 실로 바라 마지않을 정도로 부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마네는 마히루와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거나, 그
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아마네의 눈에도 시이나 마히루라는 소녀는 매력적으로 비쳤
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는 기껏해야 옆집 사람이다. 그리고 이야기할
기회도 없고, 아는 사이가 될 생각도 없다.
아는 사이가 되면 남자들의 질투를 살 것이며, 애초에 옆집에 사는
것만으로 사이가 좋아진다면 마히루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그렇게 고
생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성이 봤을 때 매력적인 것이 곧 연애 감정으로 이어
진다는 의미는 아니라서, 아마네는 마히루를 바라보는 게 제일 좋은
감상용 미소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고로 달콤쌉싸름한 관계이고 뭐고를 기대할 마음은 전혀 없고,
얽히는 일도 없을뿐더러, 단순히 옆집에 산다는 것 말고는 접촉한 적
도 없었다.
그러므로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혼자 멍하니 있는 모습을 발
견했을 때는, 솔직히 뭘 하는 거냐고 생각하며 수상한 자를 보는 듯
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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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딴 길로 안 새고 자기 집으로 서둘러 돌아갈 정도로 비


가 많이 내리고 있는데, 그 아이는 학교와 맨션 사이에 있는 공원에
서 혼자 그네에 앉아 있었다.
‘빗속에서 뭘 하는 거람.’
진한 회색 구름에 덮여서 빛이 비치지 않는 하늘 탓에 어둑어둑했
고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로 시야도 좋지 않았지만, 저 눈에 띄는 황
갈색 머리카락과 교복을 보고 바로 마히루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젖은 몸으로 그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
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몸이 젖는데도 아무 저항
없이 그저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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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살짝 위로 든 얼굴은 원래부터 색소가 흐린 탓인지 혈색이 좋


지 않아서 창백하게까지 보였다.
자칫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감기에 걸릴 것 같은 상태였는데, 그래
도 마히루는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다.
돌아가려는 낌새조차 없는 걸 보면, 본인이 원해서 그러고 있는 것
이겠지. 남이 참견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서 공원 옆을 지나쳐가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본
마히루의 얼굴이 어딘가 울음을 터트릴 듯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
기 때문에 아마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딱히 엮이고 싶다거나 하는 동기는 없었다.
그저 저런 표정을 지은 인간을 내버려 두는 데는 왠지 양심의 가책
이 느껴졌다. 그것뿐이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다른 뜻은 없다는 의미를 담아서 되도록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더
니, 물기로 엄청 무거워졌을 것 같은 긴 머리카락을 출렁이면서 아마
네를 봤다.
여전히 예쁘게 생겼다.
비에 젖었어도 그 광채는 흐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조차도 그
외모를 돋보이게 해 주는 소도구가 되어 있었다. 이걸 보고 촉촉하고
싱그러운 여자라고 하는 걸까.
쌍꺼풀이 진 또렷한 눈이 아마네를 봤다.
일단 마히루도 아마네를 옆집 사람으로 인식하고는 있을 것이다.
가끔 아침에 스쳐 지나가기는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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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관계가 없


었던 사람이 접촉하는 바람에, 캐러멜색의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경
계의 빛마저 감돌았다.
“후지미야 군.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아아, 성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묘한 감동을 느꼈지만, 동시
에 이래서는 경계를 푸는 일도 없겠구나 하고 분위기를 헤아렸다.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라도 타인이 갑자기 말을 걸면 가드가 단
단해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수긍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자와 별로 접촉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히루는 학
년을 가리지 않고 교내 남학생들로부터 고백이랑 대시를 받고 있다
고 하니까, 아마네가 흑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
른다.

“딱히, 볼일은 없어. 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데 혼자 이런 데 있으


면 걱정되잖아.”
“그런가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지만, 저는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니까요. 신경 쓰지 마세요.”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시 돋친 목소리가 아니라, 어디까지
나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접근하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이 담백한 목
소리였다.
‘뭐, 그렇겠지.’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은 명백하고, 관여하지 말라는 거절의 표현을
들으면서, 아마네는 깊게 파고들 마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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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자신도 어쩌다가 그냥 말을 건 셈이다. 사정을 물으려고 한


것도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 딱히 심하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
다.
본인이 여기 있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오히려 마히루는 왜 말을 걸었느냐는 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가녀리고 고운 얼굴로 자신을 수상쩍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마네는 “그렇군.”이라고만 말했다.
여기서 더 말을 건다면 확실히 싫다는 반응을 보일 테니 이제는 물
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할까, 딱히 마히루가 자신을 좋게 생각하든 말든 관계
가 없기에 바로 내버려 두고 돌아가자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도 뭐랄까, 여자애가 이런 곳에 흠뻑 젖어서 홀로 있다는 사실
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감기 들 수 있으니까 이걸 쓰고 돌아가.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참견을 투하하고 간다.
감기라도 걸린다면 왠지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다. 그런 마음에
지금까지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우산을 손에 쥐여 준, 정확하게 말하자면 억지로 떠넘긴 아마네는
마히루의 입술이 움직이기 전에 등을 돌렸다.
서둘러서 그 자리를 떠나려니, 등 뒤에서 마히루의 목소리가 들렸
다.
하지만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기
에, 아마네는 그대로 후다닥 곧장 공원 옆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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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감기라도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란 정도의 생각으로 떠넘긴 덕


분인지, 처음에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본인이 대화를 거절했으니까 더 이상 관여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인연도 아니었으니, 이걸로 끝이다.
다시 귀갓길로 들어선 아마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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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감기와 천사님의 간병

“아마네, 콧소리가 시끄러워.”


“너야말로 시끄러워.”
다음 날, 감기에 걸린 건 아마네였다.
급우라는 말보다 악우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아카자와 이츠키의 지
적을 받으면서, 아마네는 흥 하고 콧소리를 내려다 실패했다.
그 대신에 코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니, 코에서 소리가 난다는
의미로 보면 실패는 아닐지도 모른다.
몸 상태는 최악이고, 코가 막혀서 그런지 아니면 감기 증상인지 머
릿속이 지끈거리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시판 중인 약을 먹고 오긴 했지만, 증상이 완전히 억제될 리가 없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아아.” 하고 코막힘 증상에 인상을 쓰면서 티슈를 벗으로 삼은 아
마네를, 이츠키는 걱정이 된다기보다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어제까진 팔팔했잖아, 너.”
“비를 맞아서 그래.”
“기운 내. 아니 잠깐, 어제 너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었나?”
“……다른 사람한테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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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학교에서 마히루에게 줬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애


매모호하게 얼버무렸다.
참고로 마히루는 학교에서 슬쩍 본 바로 안색도 나쁘지 않고 건강
해 보였기 때문에, 우산을 준 자신만 감기에 걸려서 웃긴 상황이었
다.
탕에 몸을 담그고 몸을 잘 덥히지 않은 것이 원인이므로 자업자득
인 셈이지만.
“그렇게 비가 많이 내렸는데 우산을 빌려주다니, 사람이 너무 착한
거 아니냐?”
“어쩔 수 없잖아. 준 건 준 거니까.”
“굳이 감기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에게 준 건데?”
“……우연히 지나가던 길 잃은 어린아이?”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잘 성장한 몸이지만. 아니, 애초에 같은 나이
지만.
‘……아, 그렇구나. 길 잃은 아이 같은 표정이었어.’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서야 겨우 납득이 되었다.
그때 마히루의 표정은 미아가 부모를 찾고 있을 때와 똑같았던 것
이다.
“착하기도 하셔라.”
어제의 마히루를 떠올리고 있는 아마네의 심정을 모르는 이츠키는
놀리듯이 웃었다.
“하지만 뭐, 우산을 빌려줬든 뭘 했든, 넌 그 뒤에 대충 몸만 닦고
끝냈겠지. 그게 원인인 것 같지만.”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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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얼마나 건강을 챙기지 않고 사는지는 너희 집에 가 보면 바


로 알 수 있어.”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감기나 걸리는 거라고, 이 멍청아.”라고 까
이는 바람에 아마네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츠키의 말대로, 아마네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몸에 애착이 별로
없다.
더 말하자면 정리 정돈이 서툴러서 방은 엉망진창인 데다, 끼니도
편의점 도시락이나 영양 보조 식품, 아니면 외식으로 해결했다.
그러면서 용케도 자취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며 이츠키가 어
이없어할 정도였다.
그런 생활을 보고 있던 이츠키라면, 아마네가 적당히 대충 살다가
감기에 걸린 것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후다닥 집에 가서 빨리 쉬어. 주말도 있으니까 빨리 나아
서 오라고.”
“그렇게 할게…….”
“하다못해 간병해 줄 만한 여친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시끄러워. 여친이 있는 녀석은 닥치고 있어.”
약간 자랑스럽게 웃음을 띠는 이츠키를 보자, 아마네는 괜히 부아
가 나서 자기 앞에 있는 박스 티슈로 손등을 때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갔다.


처음에는 두통과 콧물뿐이던 감기 증상은 목의 통증과 권태감까지
동료로 삼아 몸을 지배하고 있다. 방과 후에 한눈팔지 않고 귀갓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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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렀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감기에 밀리는지 발걸음이 느렸


다.
그래도 겨우 맨션 입구에 도착했지만, 무거운 발을 움직여서 엘리
베이터에 탔을 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벽에 기댔다.
“하아.”
흘러나오는 숨결은 평소보다 거칠고 뜨거웠다.
학교에서는 잘 버틸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제 곧 집에 도착한다
는 것 때문에 방심했는지, 몸이 단번에 불편함을 호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엘리베이터의 독특한 부유감도 지금은 은
근히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 곧 집에 도착할 것이다.
자신이 사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엘리
베이터에서 내린 아마네는 자신의 집으로 발을 움직이려다가―― 한
번 멈췄다.
시선 끝에는 이제 제대로 이야기할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소
녀가 황갈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서 있었다.
슬쩍 봐도 어여쁜 용모에는 생기가 있었고, 피부도 혈색이 좋아 보
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아이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았는데도 팔팔했다.
평소에도 몸을 잘 챙기는지, 자신과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
다.
마히루의 손에는 어제 떠넘긴 우산이 깔끔하게 접힌 상태로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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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돌려주러 온 것 같았다.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빌린 걸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에……?”
도중에 말을 끊었다. 아니, 아마네의 얼굴을 보고서 말이 멈춘 것이
다.
“저기. 열이, 있는 것 같은데요……?”
“……너하곤 관계없잖아.”
최악의 타이밍에서 마주쳤다고, 아마네는 눈썹을 찌푸렸다.
단적으로 말해 우산은 돌려받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타이밍에 만나는 건 좋지 않았다. 똑똑한 이 아이라
면 바로 아마네가 감기에 걸린 이유를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저에게 우산을 빌려준 것 때문에…….”
“내가 멋대로 한 일이니까 관계없잖아.”
“관계가 있어요. 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감기에 걸린
셈이니까요.”
“딱히 상관없어. 네가 마음에 둘 일이 아니야.”
아마네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한 일인데 상대가 신경을 써 주는 것
이 싫었다.
그러나 마히루가 그대로 ‘네, 그렇군요.’라고 말하면서 내버려 둘
것 같은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단정한 미모에는 조바심이 드러나 있
었다.
“……이제 괜찮아. 잘 있어.”
아마네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더 힘들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마
히루의 추궁과 걱정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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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비틀 휘청이면서 우산을 대충 받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


내……는 것까지는 좋았다.
약간 주춤거리면서 자택의 문을 연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겨우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안심한 것이 잘못이었는지,
휘청하면서 뒤에 있는 펜스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것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펜스는 튼튼해서 부딪친 것 정도로
부서질 우려는 없고 높으니까 떨어질 일도 없었다. 어느 정도의 충돌
은 있겠지만 약간 아픈 것 정도로 넘어갈 테니까, 이건 어쩔 수 없
다……고 생각하면서 통증이 느껴질 것을 각오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팔을 꽉 잡아당기는 바람에 억지로 자세가 원래대
로 돌아왔다.
“……역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겠네요.”
약간 멍해진 의식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빚은, 갚겠어요.”
열이 오른 건지 멍해지기 시작한 머리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려
하다가 포기했다.
이해하기도 전에, 마히루가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아마네의 몸을
부축하면서 집 문을 열었으니까.
“들어갈게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용서하세요.”
조용한 목소리에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힘이 있었다.
아마네는 감기에 걸려 저항할 기력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끌려갔
고, 난생처음 또래 여자애를 동반하고 귀가했다.
간병해 줄 여친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간병해 줄 천사는 있었나 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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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한 건 열로 들뜬 머리로 늦게나


마 자신의 집의 현재 상태를 떠올린 뒤, 아니 그보다는 실태를 본 뒤
였다.
아마네가 사는 맨션은 방이 하나다.
하지만 넓은 거실에 침실, 창고 방까지 딸린 곳이라 혼자 살기에는
충분히 사치스러운 집이다. 제법 유복하신 부모님이 치안 문제와 교
통 편의를 생각하여 이곳으로 정했던 것이다.
혼자 살려면 여기서 살아라. 부모님이 그렇게 정했으니 뭐라 따질
생각은 없지만, 딱히 이렇게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 하
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혼자서 살기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넓었
다.
아무튼 아마네는 혼자 살면서, 정리 정돈을 죽도록 못하는 남자였
다.
당연히 거실은 물론이고 침실까지 난장판이었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군요.”
천사님, 아니 구세주님은 사랑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아주 솔직한
말을 아마네에게 바쳤다.
실제로도 심각해서 아마네도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집에 들
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얼마만큼은 치웠겠지만, 그것도 이미 때늦
은 후회였다.
아리따운 입술 사이로 한숨을 흘린 마히루는 그래도 돌아가지 않고
아마네를 침실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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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함께 넘어질 뻔했기 때문에, 슬슬 진지하게 치우지 않으면


위험하겠다고 어지럽힌 본인이 통감했다.
“일단 전 나갔다가 다시 올 테니까 제가 돌아올 때까지 옷을 갈아
입으세요. 알았죠?”
“……다시 오겠다고?”
“무시하고 끙끙 앓게 두었다간 제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으니까
요.”
예전에 흠뻑 젖은 마히루를 보고 생각했던 것을 이번에는 마히루가
아마네를 보면서 느낀 것일까. 무뚝뚝하게 대꾸하는데도 아마네는
그 이상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마히루가 방에서 나간 뒤에 얌전히 그 분부를 따라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라고 할까, 발 디딜 곳이……. 이런데 어떻
게 생활할 수 있는 거죠……?”
옷을 갈아입는 중에 난감해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와서, 정말 미
안한 마음이 들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고 누웠더니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무거운 눈꺼풀


을 겨우 뜨자 황갈색 머리카락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머리카락을 따라 이동하듯이 시선을 위로 올리자, 오늘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는지 마히루가 아마네를 들여다보듯이 조용히 서
있었다.
“……지금 몇 시지?”
“오후 일곱 시예요. 몇 시간 정도 자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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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대답한 마히루는 아마네가 몸을 일으키는 것에 맞춰서 컵


에 따른 스포츠 드링크를 건네주었다.
감사히 받아서 마신 뒤에야, 겨우 주변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잠을 잤기 때문인지 몸 상태가 조금은 멀쩡해졌다.
머리가 시원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이마를 만져 봤더니, 약간 딱딱
한 천 같은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이 집에 있을 리가 없는 냉각 시트가 붙어 있는 것을 깨닫고 마히루
를 쳐다보니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 집에는 냉각 시트는 물론이고, 웬만한 스포츠 드링크조차도 없
다. 스포츠 드링크도 마히루가 가져왔을 것이다.
“일부러 이렇게까지…… 고마워.”
“아뇨.”
무뚝뚝한 대답을 듣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 때문에 간병을 자청했을 뿐이지, 아마네와 이야기하고 싶다
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얼굴만 겨우 아는 수준인 남자의 집에
단둘이 있으면서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책상 위에 있던 약은 이리로 가져왔어요. 뭘 좀 먹은 뒤에 약
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식욕은 있나요?”
“응, 뭐, 그럭저럭.”
“그런가요. 그럼 죽을 끓였으니까 그걸 드세요.”
“……뭐, 시이나가 직접 만들었다고?”
“저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요. 싫다면 제가 먹겠지만요.”
“아니, 먹겠습니다. 먹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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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간병해 준 걸로도 모자라서 직접 죽까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마히루의 요리 실력은 미지수지만, 가정과 수업에서
무슨 실수를 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으니까 심각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곧바로 머리를 숙이고 먹겠다고 대답한 아마네를 마히루는 약간 어
이가 없다는 눈길로 봤지만, 고개를 끄덕인 뒤에 사이드 테이블에 놓
아둔 체온계를 건네주었다.
“가져올 테니까 열을 재고 있으세요.”
“응.”
시키는 대로 셔츠 앞섶을 열고 체온계를 넣으려고 했을 때, 마히루
가 얼굴을 홱 돌렸다.
“제가 방에서 나간 뒤에 하세요.”
목소리가 약간 거칠어진 마히루를 보니, 볼이 약간 빨갰다.
여자와는 달리 남자의 가슴은 딱히 숨길 필요도 없을 텐데. 아마네
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아해했지만, 마히루는 그다지 맨살에 면역이
없는 건지 앞섶을 연 것만으로도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당황하고 있
었다.
흰 뺨을 옅은 장밋빛으로 물들이고서는 고개를 돌린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귀까지 빨개진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마히
루가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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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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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아…… 왠지 주변 남자들이 귀엽다 귀엽다 하는 게 조금은 알 것


같아.’
아마네도 마히루를 정말로 미소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딱히 그
이상의 감상은 생기지 않았다. 아름답고 귀엽다. 그건 틀림없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를 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 예
술품에 가까운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약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당황하는
마히루는 왠지 인간다운 면을 보여 주는지라 묘하게 귀여웠다.
“……그럼 어서 죽을 가지러 가면 되지 않을까?”
“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하지만 솔직하게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말하면 틀
림없이 이상한 눈으로 볼 것 같아서 그런 감상은 속으로 삼켰다.
흥미 없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자, 마히루는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약간 주춤거린 것은 동요했기 때문일까, 방이 어지럽혀져 있어서
그런 걸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본 뒤에, 아마네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
인지를 새삼스레 생각하면서 한숨까지는 되지 않을 숨을 슬쩍 내뱉
었다.
‘……뭐,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이겠지.’
일반적인 여자라면, 잘 모르는 남자의 집에 들어와서 간병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남자가 덮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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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그런 위험 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간병해 주었으니까, 어지간히도
양심이 아팠던 모양이다. 추가로 아마네가 명백하게 흥미 없는 것처
럼 굴었다는 것이 마히루를 안심시키는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어서 마히루가 간병해 주고 있는
건 틀림없겠지.
“……가져왔는데요.”
약간 열에 들뜬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조
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옷을 다시 입었는지를 몰라서 바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듯한 마히루의 반응을 보고, 그러고 보니 옷의 앞섶을 푼 건 열을 재
기 위해서였음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직 열을 재지 못했어.”
“제가 없는 동안 재고 있으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미안해. 머리가 멍한 상태였거든.”
솔직하게 사과하고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약간 흐릿한 전자음이 흘러나왔다.
슬쩍 들어 올려 화면을 보니, 38.3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높은 온도였다.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뒤에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마히루에게 “이
제 됐어.”라고 말하자, 질냄비를 얹은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
왔다.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안도하고 있는 건, 옷을 다시 제대
로 입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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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몇 도였나요?”
“38.3도. 약을 먹고 자면 나을 거야.”
“……시판되는 약은 어디까지나 증상만 완화하는 것이지, 바이러스
자체를 퇴치해 주는 건 아니니까요. 푹 쉬어서 면역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세요.”
따끔하게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걱정이 되니까 그런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왠지 모르게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쉰 마히루는 사이드 테이블에 쟁반을 놓
고, 질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내용물은 절인 매실이 들어간 죽. 위장의 부담을 생각해서인지 된
죽이 아니라 물기가 많은 진죽으로 만든 것 같았다.
매실을 넣은 건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기에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려나.
김이 나진 않았지만 약간의 온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갓 만든 게
아니라 가져오기 전에 의도적으로 식힌 것으로 보였다.
죽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마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히루는 익
숙한 손길로 그릇에 죽을 담고 있었다. 매실 열매를 가볍게 으깨어서
풀고는 있었지만, 씨는 정성껏 발라내었는지 빨간 속살이 흰 죽에 아
주 쉽게 섞여들고 있었다.
“드세요. 아마 뜨겁진 않을 거예요.”
“응, 땡큐.”
받긴 했지만 스푼을 쥔 채 가만히 죽을 바라보는 아마네를 보면서,
마히루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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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뭔가요. 먹여 달라는 뜻인가요? 그런 서비스는 해드릴 수 없


는데요.”
“그런 말은 아무도 안 했거든. 그게…… 그냥 요리도 할 줄 아는구
나 싶어서…….”
“혼자 사니까 당연한 거예요.”
자취 생활도 똑바로 못 하는 아마네에겐 의외로 따끔한 발언이었
다.
“후지미야 군은 요리 이전에 일단 방부터 치우는 게 좋겠지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마히루가 곧바
로 아픈 곳을 찔렀다. 아마네는 가볍게 신음하면서 방금 그 대화를
얼버무리듯 죽을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혀에 퍼지는 찰기 어린 죽 맛은 역시 예상대로라고 할까, 쌀의 맛을
잘 살렸으며 짠맛은 적었다.
하지만 죽 속에 섞인 매실의 부드러운 신맛과 짠맛이 전체적인 죽
의 맛을 더 잘 살려 주어, 적절한 밸런스로 완성되어 있었다.
아마네는 맛이 짠 매실 절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희미하게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 순한 신맛은 좋아하기 때문에, 몸이 건강하다
면 이대로 흰쌀밥에 얹어 먹거나 찻물에 밥을 말아 같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어.”
“고맙네요. 죽이니까 누가 만들었어도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겠지
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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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마히루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끔 보곤 했던 사교적인 미소와는 다른, 안도감이 포함
된 미소를 자신도 모르게 응시하고 말았다.
“……후지미야 군?”
“아, 아무것도 아냐.”
아주 짧은 순간 지었던 그 부드러운 미소가 바로 사라져 버린 게 왠
지 아깝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고, 아마네는 또 상황을 얼버
무리려는 듯이 죽을 홀짝홀짝 입으로 옮겼다.

“……어쨌든 오늘은 안정을 취하세요. 수분 보급을 잊지 말고요.


그리고 땀을 닦으려면 이 수건을 쓰세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놓았
으니까 적셔서 짠 뒤에 닦으면 돼요.”
식후, 마히루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스포츠 드링크랑 물을 담은 세
숫대야와 수건, 예비용 냉각 시트를 준비해 와서 사이드 테이블에 열
심히 놓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을 아는 수준에 불과한 남자의 집에서 묵을 순
없을 것이고, 아마네도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
문에 그런 행동은 고맙게 느껴졌다.
아마네가 지그시 바라보는 가운데, 마히루는 빠진 게 없는지 확인
하고 있었다.
‘……의무감으로 해 주는 것치고는 너무 꼼꼼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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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는 차갑고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정작 하는 행동은 바지런한


마히루. 그걸 보는 아마네도 왠지 점점 익숙해져 쓴웃음이 나왔다.
‘나와 얽히는 건 이번으로 끝일 텐데, 정말 성심성의껏 대해 주네.’
아마도 더 이상 얽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짧은 인연으
로 간병을 받은 것뿐이니까.
그렇다. 더는 접촉할 일이 없을 테니까, 궁금했던 일 하나쯤은 물어
봐도 괜찮겠지.
약도 효과가 돌기 시작했는지, 권태감은 여전해도 열은 조금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자기 전보다는 맑은 상태였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가요.”
필요한 것을 세팅한 마히루가 아마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왜 빗속에서 그네에 앉아 있었어? 남친하고 싸웠어?”
궁금했던 것은, 애초에 간병하는 계기가 된 어제의 일이었다.
마히루는 왜 빗속에서 그네에 흔들거리며 앉아 있던 걸까.
왠지 길 잃은 아이 같은 눈빛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그
렇게 억지로 우산을 떠넘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를 모르겠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기에 사귀는 남자가 있고
그와 싸운 게 아닐까 하는 안이한 예상을 했지만, 마히루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마네 쪽을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사귀는 남자는 없고, 사귈 예정도 없어요.”
“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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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묻고 싶은데요. 왜 제가 누군가와 교제 중일 거라고 생각


한 건가요?”
“그 정도로 인기가 많으면 으레 한두 명쯤은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아마네에게는 의외로 인간미가 넘치면서 조
금은 기가 센 평범한 소녀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
을 것이다.
청순가련, 얌전하고 겸허한 미소녀. 천사로 불릴 정도로 고운 미모
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몸은 아담하면서도 체형은 굴곡이 뚜렷하
다. 신비하고 지키고 싶어지는 분위기가 스타일과 잘 어울려 마치 남
자의 이상을 구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수석을 유지하는 성적에, 스포츠도 만능, 오늘 알았지만 요
리도 무시무시하게 잘했다. 그 정도면 당연히 인기가 있겠지.
고백받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도 있었으며, 반 친구들 중에서
마히루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것도 알고 있
었다.
그렇게 누구라도 골라잡을 수 있는 상태에서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두 명쯤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지만, 그 말을 들
은 순간 마히루의 표정이 딱딱해졌고, 다음에는 일그러졌다.
“그런 사람은 없고, 여러 남자와 교제할 정도로 절도 없는 인간이
된 기억은 없어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오싹해질 만큼 차가워진 눈으로 담담하게 부정하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곧바로 뭔가 지뢰를 밟았다는 것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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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감기에 걸린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었다. 왠


지 모르게 방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사과할게.”
“……아뇨, 저야말로 너무 열을 냈네요. 죄송해요.”
하지만 머리를 숙이자 바로 차가운 분위기는 사라졌다.
열을 낸 것이 아니라 눈보라가 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굳이 지적
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때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머리를 식히
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걱정해 준 당신이 감기에 걸리게 만든 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요.”
“괜찮아. 내가 멋대로 나선 것뿐이니까. 실제로 내가 멋대로 끼어
들어서 이렇게 된 것이니 죄책감 같은 걸 느끼면 오히려 내가 난감
해. 시이나와 이런 식으로 얽힐 일도 이번뿐일 테고.”
역시 죄책감 때문에 간병해 주었을 마히루는, 아마네가 하는 말 후
반부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아마
네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얽힐 일도 이번뿐’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
다.
“딱히 접점이 없으니 당연하잖아. 아무리 네가 학년 최고의 미녀니
재녀니 천사니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이런 구실로 친해질 생각은
없어. ‘친절을 베풀다 보면 언젠가는…….’ 같은 생각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눈길을 돌리는 마히루를 보면서, ‘역시 그랬
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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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이건 본인이 오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미소녀에게 친절하게 굴면서 친해지려고 하는 것은 흔히 있을 법한
수법이다.
그런 일을 몇 번인가 경험했을 마히루가 그때 경계하는 모습을 보
였던 것도 이해가 된다. 자기 방어를 위해서 그런 것이니까 책망받을
일은 아니다.
“너도 귀찮을 거 아니야.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얽히는 건.”
“그건 그렇지만요.”
“역시 그렇군.”
본인이 긍정한 것이 조금 재미있었다.
얌전하고 우등생이며 사랑스러운 천사라고 사람들이 떠드는 이 아
이에게도 호불호는 있고, 성가시게 여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 조금
친근감이 생긴다.
마히루에게는 실언이었는지, 자신의 실언을 이끌어 낸 아마네를 약
간 원망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바로 그 모습이 마히루가 정말로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증명
하고 있었다.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안심했어. 천사도 다른 사람
들처럼 그런 게 성가신 거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세요.”
보아하니 천사라고 불리는 건 부끄러운지 불만스러운 눈빛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런 반응도 재미있어서 아마네는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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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니까 용건도 없는데 일부러 얽힐 일은 없어.”


그렇게 딱 잘라 말하자, 마히루는 아주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
레 뜨고, 이어서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에 돌아간 마히루를 떠올리면서, 아마


네는 침대에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약은 효과가 있었지만, 역시 몸은 아직 나른해서 방심했다간 바로
잠기운에 끌려갈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해 봤다.
천사(독설 타입)에게 간병을 받다니.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테
고,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마네와 마히루만의 비밀이다.
비밀이라고 하니 왠지 낯간지럽다. 그냥 귀찮으니까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을 뿐인데.
내일부터는 얼굴만 아는 타인이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면서, 아마네는 천천히 자신의 의식을 어둠
속에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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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천사님이 음식을 나눠주다

선언했던 대로, 아마네와 마히루는 여전히 얼굴을 아는 타인의 관


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병을 받은 다음 날에는 기운을 차렸으며, 편의점에 뭘 사러 갔을
때 가끔 마히루와 얼굴을 마주쳤지만 딱히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없
었다. 하지만 마히루가 건강해진 아마네의 모습을 보고 약간 안도하
던 것은 알 수 있었다.
한 주가 새로 시작되고 학교를 다니면서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
전히 남이다.
그저 아주 약간 변화가 있다고 하면, 통학할 때 마주치면 가볍게 고
개 숙여 인사하게 된 정도라고 할까.
“오, 아마네, 건강해졌네.”
“덕분에 말이지.”
지난주 하교 때 반쯤 죽은 상태였던 아마네를 이츠키도 걱정했었는
지, 학교 현관에서 만나자마자 몸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주말에는
‘살아 있냐?’는 문자를 보냈을 정도였다.
문제없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도 반신반의했는지, 이렇게 실제로
만나서 팔팔해진 모습을 본 뒤에야 이츠키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안
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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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아무리 나라도 걱


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뭐, 다 나았으면 다행이지만 말이야. 너도
이제 좀 건전하게 생활해. 우선은 청소부터 하라고.”
“누군가와 비슷한 말을 하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저번 주말에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가까운
시일 안에 청소할 거야.”
“아니, 지금 당장 청소하라니까.” 하고 곧바로 지적을 받았지만, 애
써 무시했다.
그 정도면 아마 반나절론 다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네가 고개를 휙 다른 곳으로 돌리자 이츠키도 더 이상은 잔소
리를 하지 않았지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너희 집이니까 네 좋을 대로 하면 되겠지만 말이지. 다음에 갈
때는 발 디딜 곳 정도는 좀 만들어 둬.”
“……노력할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실내화를 신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 교실로
향했지만, 유달리 시끄러운 교실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곁눈질로
보고 말았다.
창문을 통해 본 그 교실에는 변함없는 미모를 발휘하고 있는 마히
루가 있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말을 걸면 조용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응하는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며칠 전의 마히루와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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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린 이츠키도 마히루의 모습을 포착하고는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하, 시이나구나. 여전히 인기가 많네. 뭐, 미소녀니까.”
“뭐니 뭐니 해도 천사님이니까 말이지. ……이츠키도 시이나를 귀
엽다고 생각해?”
“그야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에겐 치이가 있으니까, 단순한 감
상용이라고 할까.”
“애인 자랑은 사양하겠습니다―.”
이츠키에겐 치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라카와 치토세라는 애인이
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아주 사이좋은 커플이라서,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속이 쓰릴 정도이다.
애인 자랑은 딴 데 가서 하라며 손을 휙휙 젓는 아마네를 보면서도,
이츠키는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늘 있는 일인지라 “매정
한 녀석.”이라면서 웃을 뿐이었다.
“아마네야말로 시이나를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아?”
“미인이지. 그것뿐이야.”
“담백하네.”
“우리에겐 손이 닿지 않는 절벽에 핀 꽃 같은 존재잖아. 얽힐 일도
없으니, 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해.”
“그건 맞는 말이야.”
무슨 인연인지 지난번에는 간병을 받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애초에
사는 세상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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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가 마히루와 친해지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우수한 인간은


우수한 인간과 서로 이끌리는 법이다.
스스로도 글러 먹은 남자라는 자각이 있는 아마네와 귀여우면서 무
엇이든 잘하는 마히루가 어떻게 될 일은 없다.
그렇다. 얽히게 될 일 자체가 이제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뭘 먹고 있는 건가요.”
그 생각이 뒤집힌 것은, 베란다에서 젤리 음료를 마시면서 밖을 바
라보고 있을 때였다.
편의점에 들르는 것도 귀찮았기에 집에 상비해 두고 있는 젤리 음
료를 마시면서 펜스에 몸을 기대어 바깥 공기를 맡고 있었더니, 우연
히 마히루가 베란다로 나왔다.
아마네의 모습을 발견한 마히루도 베란다의 펜스에서 약간 얼굴을
내밀었고, 그런 뒤에 아마네가 입에 물고 있는 젤리 음료를 보고 눈
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네 자신은 설마 상대가 말을 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한
동안 멍하니 굳어 있었다.
“보면 알잖아. 불과 몇십 초면 에너지를 보급할 수 있는 젤리.”
“……설마 그게 저녁밥이란 건가요?”
“당연히 그렇지.”
“한창 성장기인 남자 고등학생이 겨우 그것만 먹는다고요?”
“괜한 참견이야.”
평소엔 편의점 도시락이나 슈퍼에서 파는 반찬을 먹고 있으므로 이
렇게까지 간단히 먹지는 않는다. 오늘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게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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찮았던 데다 컵라면을 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젤리 음료


를 마시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걸로는 부족할 테니 나중에 스낵 같은 과자를 집어먹게
될 것 같지만.
“요리는…… 물어볼 것도 없겠군요. 못 할 것 같으니까. 요리도 청
소도 하지 못하는데, 용케도 혼자 살고 있네요…….”
“시끄러워. 너랑 관계없잖아.”
따끔하게 지적당한 내용이 사실이기에, 살짝 눈썹을 찌푸린 상태에
서 마시다 만 젤리를 마저 빨았다.
청소 쪽은 며칠 전에 실감했으니까 나중에 어떻게든 할 예정이다.
잔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의욕이 가시고 만다.
왜 이렇게까지 잔소리하는지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데, 마히루는 그
런 아마네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슬쩍 한숨을 쉬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마히루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베란다에서 방으로 돌아갔다.
아마네는 창문이 드르륵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대체 뭐야?”라
고 중얼거렸다.
기다리라곤 했지만 뭘 기다리란 말일까.
의아한 눈길로 마히루의 집 쪽을 봤지만, 당연히 아무런 반응이 없
었다.
‘슬슬 추워지니까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일단 대기하고는 있었지만, 가을밤은 생각했
던 것보다 추웠다. 스웨트 소재의 옷으로는 싸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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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왜 시킨 대로 착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건지를 자신도 알 수


가 없었다.
머지않아 숨결이 하얗게 변할 것 같은 기온 속에서 깊게 숨을 내뱉
고 있으려니, 현관 쪽에서 전자음이 들렸다.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려 주는 소리에 돌아섰다.
올 만한 손님은 한 명뿐이다.
정말로 왜 찾아온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흐트러진 옷이랑 잡지를 피
해 걸으면서 현관으로 나갔다.
문구멍으로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샌들을 발에 걸치고 체
인을 벗겨서 문을 열자―― 예상대로 아마네의 시선보다 낮은 위치에
서 황갈색의 머리카락이 출렁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너.”
“당신이 너무나도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걸 보다 못해
이러는 거예요. ……남은 음식이지만 드세요.”
마히루는 쏘아붙이듯이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손을 앞으로 내밀
었다.
아마네보다 한층 더 작고 가녀린 손 위에는 밀폐 용기가 있다. 반투
명한 뚜껑을 통해선 뭔가를 조린 듯한 요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직 온기가 약간 남았는지 뚜껑이 살짝 흐려져 있어서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아마도 조림 같았다.
눈을 깜빡거리고 있으려니, 왜 이러는지를 묻고 싶은 아마네의 눈
빛을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마히루의 입에서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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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당신이 잘 챙겨 먹지 않아서 그래요. 영양 보조 식품은 보조일 뿐


이지, 그걸 주식으로 삼아선 안 돼요.”
“네가 우리 엄마냐.”
“상식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방은 정리 정돈을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발 디딜 곳도 없었는데 말이죠.”
마히루는 아마네의 뒤를 힐끗 보면서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듯 눈
을 가늘게 떴다. 아마네는 끽 소리도 못했다.
“……어느 정도는 있어.”
“없어요. 애초에 옷은 바닥에 두는 게 아니에요.”
“원래 바닥에 떨어지는 법이야.”
“빨아서 널거나 개서 옷장에 넣어야 해요. 안 읽는 잡지는 한데 모
아서 묶으세요. 밟고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 큰일이니까요.”
말에 조금 가시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자신을 순
수하게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어서 무턱대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간병을 받을 때도 방이 너무 너저분해서 함께 넘어질 뻔하
기도 했으니 이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끙. 인상을 구기면서도 반론할 수 없는 아마네는 입술을 꼭 다물고
마히루의 손에서 밀폐 용기를 받아 들었다.
손바닥으로 잔잔하게 전해지는 온기는 쌀쌀해지는 이 시기에 정말
로 반가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필요 없다면 처리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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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아니, 감사히 받을게. 천사님이 직접 만들어 준 요리는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정말로.”
앙갚음하듯 담고 놀리는 투로 학교에서 통하는 호칭을 쓰자, 하얀
볼이 알아보기 쉽게 붉은 기운을 띠었다.
본인은 천사라고 불리는 게 부끄러워서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
마네도 그런 입장이 되면 틀림없이 싫어할 것이므로 당연하다면 당
연하겠지만,
볼을 붉히고 약간 눈물이 맺힌 눈으로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마히루
의 모습을 보고, 아마네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이제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
더 언급하면 기분이 상할 게 명백하니, 너무 많이 놀리는 것도 바람
직하지 않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친하지도 않으므로 지나치면 좋지
않겠지.
마히루도 그 이상은 듣고 싶지 않은지, 어흠 하는 헛기침으로 기분
이 풀렸음을 어필했다.
미묘하게 볼이 붉었기 때문에, 그다지 바뀐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
지만.
“뭐, 이건 고맙게 받겠지만 말이지. 그때 일은 딱히 마음에 두지 않
아도 돼.”
“그건 간병해 준 것으로 상쇄했어요. 이건 자기 만족이라고 할
까…… 당신이 너무나도 한심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신
경이 쓰였을 뿐이에요.”
“그러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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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렇게 판단하는 건 어떤 의


미에선 당연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아마네 뒤에는 온갖 것들이 뒹구는 복도가 보이고 있을 테
고, 간병하러 안에 들어왔을 때 모든 걸 다 봤으니까 더 이상 숨길
방법도 없었다.
“……식사도 잘 챙기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세요. 알았죠?”
“네가 우리 엄마냐?”
진지하게 타이르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따졌
다.
받은 음식을 손에 들고 돌아온 아마네는 슈퍼에서 받은 나무젓가락
을 가져와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마히루가 억지로 주는 거라 받긴 했지만, 과연 맛은 어떨까.
죽은 맛있었다고 생각한다. 감기로 혀가 약간 둔해지긴 했지만, 생
쌀로 정성껏 끓인 것 같은 죽은 위장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맛이었다.
그걸 먹어본 바로, 아마 마히루는 요리도 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
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약간의 기대와 망설임을 품은 채 밀폐 용기의 뚜껑을 열자 조림 요
리의 향기가 화악 하고 풍겼다.
몇 가지 채소와 닭고기로 만든 것이다. 국물 색은 약간 묽었고, 선
명한 당근의 색이랑 장식으로 추가된 강낭콩이 또렷하게 잘 보였다.
한입 사이즈에 맞춰서 자른 갖가지 색 조림이, 젤리밖에 먹지 않은
아마네의 식욕을 이래도 먹지 않겠냐는 듯이 자극했다.
곧장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쪼개고, 우선은 무를 입에 넣어 봤다.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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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맛의 답은 바로 나왔다.
건강을 지향하는 마히루답게, 양념은 약간 싱거웠지만 국물의 맛을
잘 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시판 중인 조미료로 만든 게 아니라 가다
랑어포랑 다시마로 직접 국물을 낸 것으로 보였다. 감칠맛이 전혀 달
랐다.
씹어 보자 국물과 조미료, 그리고 채소 본래의 맛이 부드럽게 입안
에 퍼졌다.
채소의 단맛을 살리면서도 맛을 잘 조절해 속까지 맛이 잘 배인 조
림 요리는 그다지 채소를 잘 섭취하지 않는 아마네라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채소를 메인으로 먹으라는 듯, 닭고기는 약간 곁들이듯이 들어갔지
만 퍽퍽함이라곤 전혀 없이 보들보들하게 익었다. 양이 적은 것 말고
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여고생이 만든 것치고는 선택이 약간 수수하고 낡았지만, 만든 사
람의 역량을 잘 알 수 있었다.
요리를 이제 막 배운 사람이 만든 것과는 상당히 차원이 다른 맛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밥과 된장국 내지는 맑은국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공교롭
게도 밥은 안 했다. ……아니, 쌀조차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희망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늦었지만, 즉석 밥이라도 사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
었다.
“대단한데, 천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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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운동도 집안일도 완벽하단 말인가. 아마도 본인이 들었으면


싫어할 호칭으로 마히루를 칭찬한 아마네는 계속 손을 움직이면서
이상적으로 양념된 채소 조림을 잘 먹었다.

“이거 돌려줄게. 맛있었어.”


다음 날 저녁, 아마네는 어제 받은 밀폐 용기를 들고 마히루의 집을
방문했다.
그야 아마네는 집안일을 잘하진 못하지만, 설거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정성껏 씻어서 말린 뒤에 돌려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라고 생
각해서 깔끔하게 씻어 가져왔다.
초인종이 울린 시점에서 아마네일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마히루는
누군지 묻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와인색 니트 원피스를 입은 마히루는 아마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살짝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밀폐 용기를 슬쩍 보면서 확인한 뒤에 “깨끗이 씻어서 돌려줬네요.
잘했어요.”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어조에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일부러 이렇게 돌려주러 와 줘서 고마워요. 자, 이거요.”
마히루가 밀폐 용기를 받아 들었다. 그때까지는 좋았지만, 이번에
는 다른 밀폐 용기가 아마네의 손에 슬쩍 놓였다.
이것도 약간 따뜻했다.
아마도 돼지고기와 가지를 같이 볶은 것이 들어 있는 듯했다. 뚜껑
에 김이 서리지는 않을 정도로 식힌 것 같았으며, 가지의 색과 잘 익
은 돼지고기, 그 위에 뿌려진 참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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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보면 아마도 된장으로 볶았으리라. 약간 노릇하게 그을린 가


지와 윤기가 나는 돼지고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긴 한데, 왜 또 자신에게 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기, 난 그릇을 돌려주었는데.”
“오늘 저녁 식사예요.”
“응, 그건 알겠는데 말이지.”
“일단 묻겠는데, 알레르기는 없나요? 편식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겠
지만요.”
“그런 건 없는데, 왜? 아니, 또 받는 건 역시…….”
이틀 연속으로 음식을 받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하는 처지로선 고마운 일이다. 무엇보다
마히루의 요리 실력은 또래 여자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으며 맛도 확
실할 것이다.
이 밀폐 용기 안에 든 것도 분명히 맛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모습을 같은 학교의 인간들이 본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 같다. 물론 아마네의 평온한 학창 생활이 말이다.
이 맨션은 독신자용이긴 해도 설비랑 입지적인 여건 때문에 집세가
비싼 편이다. 마히루 말고 같은 학교 학생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런 모습을 목격당할 걱정은 할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역시 망설여졌다.
“혼자서 먹을 때는 너무 많이 만드니까, 받아 주면 고맙겠어요.”
“……그런 거라면 고맙게 받겠지만 말이지. 보통 이런 행동을 하
면,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하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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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당신은 그런가요?”
“아―니, 난 아니야.”
‘바보 아닌가요?’ 하는 뜻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면,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마히루처럼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자가, 최근 들어 자신
이 한심하다는 것을 통감하기 시작한 아마네 같은 남자에게 호의를
보인다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야 이 상황은 귀여운 옆집 사람이 음식을 나눠준다는 러브코미디
만화 같은 전개일지도 모르지만, 서로에게 러브는 존재하지 않고 대
화에도 코미디 요소라곤 전혀 없었다.
있는 것은 천사님의 말 속에 담긴 가시와 동정에서 나온 온정 정도
가 전부였다.
“그럼 문제없겠네요. 어차피 당신은 편의점 도시락과 슈퍼에서 파
는 반찬으로 끼니를 때울 것 같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리 봐도 주방이 제대로 쓰였던 흔적이 없고, 편의점과 슈퍼에
서 주는 일회용 나무젓가락이 식탁 위에 잔뜩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상태를 보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요. 얼굴도 건강해 보
이지 않고요.”
집에 딱 한 번 들어왔을 때 본 것만으로 그만큼 꿰뚫어 본 마히루에
게 아마네도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정말로 정확하게 짚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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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만 하고 줄 것만 준 뒤에, 마히루는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다


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잘그락. 문 안쪽에서 체인을 거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마네는 자신
이 받은 밀폐 용기를 봤다.
손바닥 안에서 희미한 온기를 전하는 음식을 보면서, 슬쩍 한숨을
쉰 아마네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히루에게서 받은 가지와 돼지고기의 참깨 된장 볶음은 역시 맛있
었으며, 몹시도 쌀밥이 먹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결국 매일 밀폐 용기를 씻어서 돌려줄 때마다 안에 음식이 든 다른


밀폐 용기를 또 받게 되면서, 아마네의 식생활은 극적으로 개선되고
있었다.
마히루의 요리는 간이 진하지 않아도 모두 밥을 생각나게 만들었기
에, 저녁 식사는 즉석 밥을 준비하여 같이 먹게 되었다.
일식, 양식, 중식 전부 다 할 수 있는지 다양한 장르의 요리가 매일
다르게 담겨 있었지만, 그게 다 맛있었기 때문에 먹는 양이 너무 많
이 늘어나는 것이 괴로웠다.
매일 받는 것을 기대하는 게 미안하고 송구스러웠지만, 먹는 것으
로 길들여지는 것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먹지 못하게 되면 괜히 그리
워질 정도였다.
천사의 요리는 의존성이 높은 건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고 생각하
면서도 순순히 밀폐 용기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만다.
“……요새 안색이 좋아졌네. 식생활을 개선하기라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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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로 어느 정도는 영양을 보급한 덕분에 안색도 좋아졌는


지, 점심시간에 이츠키가 아마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학교 식당에서 주문한 우동을 먹고 있던 아마네는 여전히 예리한
이츠키의 말에 식은땀을 약간 흘렸다.
“이츠키, 난 네가 무서워.”
“왜? 아니, 정곡을 찔린 거야?”
“아니…… 뭐,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마히루가 맨션에서 마주칠 때마다 똑바로 살라고 가볍게 잔소리를
하는 데다, 저녁 반찬을 나눠주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생활 자체의 질
이 향상된 것이다.
‘천사님 만세’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지만, 괜한 참견이라는 생각
도 아주 조금은 들었다.
약간 말끝을 흐리면서 긍정한 아마네를 보고, 이츠키는 자못 유쾌
한 표정으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넌 얼굴만 봐도 건강하지 않아 보였고, 실제로 생
활 습관도 더럽게 엉망이었으니까 말이야.”
“시끄러워.”
“그건 그렇고 왜 개선하게 된 거야?”
“……강제적으로?”
“아하, 어머니한테 들킨 건가.”
“……맞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네.”
마히루의 말투는 어머니 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젊고 귀엽지만. 왠지 이것저것 챙기면서
돌봐 주는 마히루를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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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저기 이츠키. 내가 그렇게 건강하지 않게 보여?”


“응. 원래부터 얼굴이 하얀 게 큰 원인이겠지. 키만 멀대 같고, 표
정에는 의욕이 없어 보이고, 면상이 건강하지 않아.”
“얼굴은 원래 이런 거야.”
“나도 알아. 좀 더 생기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는 건 어때?”
“너무 요구하지 마. 그렇군. 시체 같은 얼굴인가…….”
자신의 얼굴은 거울로 자세히 안 보는 편이라서 잘 몰랐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다지 생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어쩌면 평소 표정이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여서 마히루도 걱정
이 된 것일지 모르겠다.
“넌 조금 더 주변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써야겠어. 늘 시선이 밑으로
향하니까 말을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애초에 사람의 접근
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들잖아. 언뜻 보기엔 암울함 그 자체라고.”
“은근슬쩍 사람을 까네.”
“뭘. 꾸미질 않아서 촌스럽고 다 죽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잖아.”
이츠키는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은 건강과 함께 몸단장에 신경을
쓰라고 잔소리를 했다. 아마네는 “괜한 참견이야.”라고 대꾸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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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우연한 만남

“아.”
맑고 고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최근에는 귀에 익숙해진 목소리이긴 했지만, 이곳은 맨션이 아니
다. 동네 슈퍼마켓에 있는 과자 코너였다.
남들 눈이 있는 장소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
았다. 아마네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보니 마히루가 약간 동
그랗게 눈을 뜨고 서 있었다.
손에 든 슈퍼의 장바구니 안에는 오늘 저녁에 쓸 재료인지 무 한 개
와 두부, 닭다리살과 우유가 있었다.
과자 코너에 슬쩍 들렀을 때 아마네와 우연히 마주친 것으로 보였
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이건 우연이야. 널 미행하고 있던 건 아니라
고.”
“알아요. 피차 가장 가까운 슈퍼가 여기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으
니까요.”
선수를 쳐서 말하자, 마히루는 오히려 어째서 그런 발상을 하느냐
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푸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메모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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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적어 놓은 모습이 성격이 꼼꼼한 마히루답


다.
귀여운 꽃무늬 메모지에 적은 내용을 차근차근 살피는 것 같던 마
히루는 과자 코너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맞은편에 있는 조미
료 코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목소리로 간장과 미림을 중얼거리며 실로 가정적인 물품을 찾
고 있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미림이라면 이쪽에 있어. 자.”
“아, 그게 아니라 미림처럼 쓸 수 있는 다른 걸 찾는 거예요. 미성
년자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이걸 술로 취급하는 거야?”
“단맛이 나는 술로 취급하니까요. 요리용 술은 소금을 첨가해서 마
실 수 없으니까 미성년자라도 살 수는 있지만요.”
미림을 건네주려고 했더니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고, 미림풍
의 조미료를 바구니에 넣고 있었다.
집안일이라곤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아마네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
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헤에.”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간장이 놓인 진열대를 살펴보던 뒤늦게 마히루는 가격표를 보고는
으음,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대특가 상품, 1인 1병 한정…….”
예비용으로 하나 더 사려던 모양인 마히루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
얼거리며 아마네 쪽을 보았다.
“내가 하나 사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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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를 빨리 알아듣는 사람이라 도움이 되네요.”


마히루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차렸기 때문에 쓴웃음을 지으면
서 간장병을 집었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술이 약간 동그란 호를 그렸
다.
“……의외로 절약 정신이 투철하네.”
“절약한다기보다 싸게 살 수 있다면 사는 것뿐이에요. 낭비가 있으
면 줄이는 법이잖아요.”
“일본인다운 기질이라고 해야 하나. 뭐, 부모님이 부치는 돈으로
생활한다면 그렇게 살아야겠지.”
아마네도 혼자 살곤 있지만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기에 그렇게 깨끗하고 안전한 맨션에 살 수
있는 것이며, 생활비도 애써 줄일 필요가 없을 만큼 여유가 있다. 사
실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학비도 있고 송금해 주는 돈도 상당한 액수이니, 가능하다면 쓸데
없는 낭비를 피하고자 했다.
“……그러네요. 부모님이 보살펴 주시는 거니까, 절약은 중요하
죠.”
마히루는 담담하게 대꾸하면서 바구니 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
었다. 열기를 빼앗긴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단번에 목소리에서 억양이 사라진 것을 보고 잠깐 주춤했지만, 고
개를 든 마히루는 이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주 잠깐 엿보였던 어두운 눈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사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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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를 바꾸려는 듯이, 마히루는 아마네가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진공팩 쌀밥과 감자 샐러드를 보면서 물었다.
마히루가 주는 요리는 물론 맛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기 때
문에 평소에는 이렇게 주식과 같이 먹을 샐러드를 준비해 두고 있었
다.
“저녁밥이니까.”
“건강에 안 좋아요.”
“시끄러워. 샐러드를 샀잖아.”
“감자 샐러드인데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생활하면서 몸이 안
망가진 건지…….”
“괜한 참견이야.”
마히루가 좀 더 채소를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눈을 흘기고 무언의
압력을 가해서, 아마네는 고개를 돌려서 회피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도 계산이 끝나 산 것을 슈퍼 봉투에 담았
다. 마히루는 가방 안에서 에코백을 꺼내더니 부지런히 담고 있었다.
실로 친환경적이고 서민적인 천사님이다.
그러나 담는 건 좋지만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조금 불안해졌
다.
우유에 간장, 미림풍 조미료만으로도 4리터. 물과 비중은 다르더라
도 4킬로그램은 거뜬히 될 것이다. 게다가 식재료들, 그것도 큰 무
하나를 통으로 샀으니 그 정도면 틀림없이 무거우리라.
깔끔하게 채워 넣긴 했지만, 이걸 들고 맨션까지 돌아가는 건 은근
히 중노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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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내가 있는 바람에 조미료와 식재료를 더 많이 소비한


셈이니까 말이지.’
아마도 평소보다 더 많이 만든 후 주는 것이겠지. 마히루가 나눠주
는 몫은 일반적인 한 끼 분량에 가까웠으므로, 너무 많이 만들어서
주는 거라는 본인의 말과 달리 일부러 많이 만드는 게 틀림없으리라.
결과적으로 많이 보살핌을 받고 있는 셈이니까, 역시 여기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건 남자답지 않을 것 같다.
다 채운 에코백의 손잡이를 잡고 들어 보니, 아마네에게는 그리 무
겁지 않지만 여자가 오래 들기엔 상당히 힘들 것 같은 중량이 느껴졌
다.
마히루도 운동을 잘하는 것 같지만, 그건 순수한 완력과는 다른 문
제다. 옷을 입어도 알 만큼 가는 팔에 그런 힘을 요구하는 건 무리
같았다.
아마네의 행동을 보고, 캐러멜색 눈이 한순간 깜박거렸다.
놀란 것 같기도, 감탄한 것 같기도 한 것 같았다.
“……딱히 빼앗으려는 건 아니야.”
“그런 걱정은 안 해요. ……그 정도는 들 수 있거든요?”
“이럴 때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더 귀엽게 보일 거야.”
“마치 제가 귀엽지 않다는 듯이 말하네요.”
“학교에서 보이는 태도와 날 대할 때의 태도를 비교해 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그건 본인도 아는지 마히루가 약간 주춤했다.
학교에서 보이는, 모두가 인정하는 자상하고 온화하며 겸허한 면은
아마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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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마네에게도 자상하긴 하다. 하지만 말투가 너


무 극단적이라고 해야 할까. 마히루는 아마네에게 하는 말을 부드럽
게 포장할 여유가 없는 모양이다. 언제든지 솔직한 의견을 늘어놓았
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아마네 자신은 별로 신경 쓰
지 않았지만.
마히루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본 아마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식료
품이 가득 담긴 에코백과 자신의 짐을 손에 들고 터벅터벅 출구로 향
했다.
뒤에서 허둥대는 듯한 낌새가 있었지만, 아마네는 상관하지 않았
다. 거리가 벌어졌지만 상관하지 않고 걸어갔다.
마히루의 걸음에 맞춰서 기다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슈퍼에서는 곁에 있었다. 나란히 귀가하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질 것이다.
서로에게 이 거리가 가장 적당한 것이다.
모르는 사이처럼 가장하며 큰 짐을 들고 서둘러 걷는 아마네의 등
뒤에서 작게 “……고마워요.”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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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제5화 천사님과 청소 대작전

아마네는 집안일 전체가 쥐약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성가신 것이


청소다.
부상을 각오하고 겉모습과 맛만 무시하면 요리도 못할 건 아니었
다.
가열해서 배를 채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말 엉망으로 생기고 맛
도 안쓰러운 수준이라면 어떻게든 만들 수야 있다.
빨래는 애초에 못 하면 생활이 불편하므로 문제가 아니다. 여차하
면 코인 빨래방이라는 수단도 있고, 세탁기에 넣고 세제와 물과 함께
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별문제 없이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청소만큼은 아마네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쩐다.”
마히루에게도 이츠키에게도 청소하라는 말을 자꾸 들어서 휴일을
맞아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켰지만, 뭐부터 손대야 할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 잘못인 건 알지만, 일단 물건이 너무 많은지라 어떤 순서로 치
워야 좋을지에 대한 통 모르겠다.
일단 시트는 빨고 이불은 밖에 널어놓았다.
다음엔 뭘 어떻게 청소하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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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옷이랑 잡지 등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의외로 발을 디딜 공간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놔두면 냄새가 나는 음식물 쓰레기는 바로 버렸
기 때문에, 악취가 나거나 기름때 같은 게 심각하게 남진 않았다. 그
저 엉망으로 너저분하게 널려 있을 뿐이다.
그 상태가 너무 난장판이라서 난감한 것이지만,
한숨을 슬쩍 흘렸을 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아.” 하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문자, 정확히는 줄 것만 주고 돌아가는 하늘의
은혜이자 배달부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 이때만큼은 구세주처럼 느
껴졌다.
서둘러 현관으로 가려고 하다가 발 디딜 곳이 없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 벽에 손을 대고 버티면서 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밀폐 용기를 미리 좀 돌려받으려고…… 뭐 하는 건가
요?”
“……청소를 하려고 했어.”
균형을 잃은 자세로 마히루에게 얼굴을 보이자, 미묘하게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아마네를 봤다.
“방금 엄청난 소리가 난 것 같은데요.”
“……넘어질 뻔했어.”
“그렇겠죠. 청소는 시작도 안 한 거죠?”
“멍 때리고 있었어.”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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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이만큼 심하면 그럴 법도 하다는, 여전히 기탄없는 그 의견에 아마


네도 얼굴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 삐쳐서 마히루를 돌려보냈다간, 청소를 어떻게 시작
할지 상담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게 물어보면 되는 걸까.
청소하는 요령을 물어볼 생각은 있었지만, 애초에 충고를 해 주긴
할 것인가……. 약간 망설이면서 마히루를 봤더니, 마히루는 아마네
뒤쪽의 어지럽혀진 복도를 보고 있었다.
뒤에 펼쳐진 참상에 ‘우와아.’라고 눈빛으로 대신 말하는 걸 보면,
마히루의 기준으로는 어지간히도 심각한 모양이다.
“나 참. ……저도 방 청소를 같이 하겠어요.”
“뭐?”
아마네 자신은 도와달라는 부탁이 너무 뻔뻔할 것 같아서 조언만
받을 생각이었는데.
설마 마히루가 직접 도와주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옆집이 쓰레기장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그 언동이 약간 신랄한 것은 이미 평소와 다를 게 없으니까 딱히 화
는 나지 않았고, 애초에 사실밖에 말하지 않았으므로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집안일도 못하면서 혼자 산다니, 자취 생활을 너무 얕본 거 아닌
가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고 낙관한 게 뻔히 보여요. 결과
적으로 지금도 못하니까 조금은 반성하는 게 어때요?”
찍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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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어머니한테 조금씩 자주 하면 편하다는 말을 듣고 방치한 결과가


이 모양이다. 완전히 자업자득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말이죠. 평소에 조금씩 자주 하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
데요. 평소에 태만했던 생활이 다 드러나네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건 기본적으로 마히루에겐
너무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어서 면목이 없고, 아마네의 심리와 과거
의 행동을 정확하게 짚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고 편히 생각하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니, 이
제 아마네는 마히루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선택
지가 없는 것이다.
“청소해도 될까요, 이 방?”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거니까 당연하죠. 그리고 저도 준비하고
올 테니까, 숨기고 싶은 거랑 귀중품은 그동안 창고 방에 넣고 문을
잠그세요.”
“그런 걱정은 안 해.”
대체 뭐가 아쉬워서 말은 험해도 친절하게 도와주려는 인간을 상대
로 도난을 걱정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나 상식적이면서 남을 돌보길 좋아하는 마히루가 남에게 해
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걱정하지 않는단 말인가요?”
“네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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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남자가 숨기고 싶은 걸 들


킬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공교롭게도 그런 건 가지고 있지 않거든.”
“어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럼 옷을 갈아입고 청소 도구를
가져올게요. ……철저하게 청소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마히루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기 집으로 일단 돌아갔다. 아마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다시 아마네의 집으로 돌아온 마히루는 아까 만났을 때와 다르게,


흰색 긴팔 티셔츠에 카키색 카고 팬츠를 입었다.
몸에 딱 맞게 입은 티셔츠는 가냘프면서도 굴곡이 있는 몸매를 뚜
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긴 머리는 재주껏 둥글게 모아서 묶었는데, 흰 목덜미가 보이는 것
이 묘하게 어색했다.
평소에 원피스나 스커트만 입은 모습을 본 아마네로선 뭔가 신선했
다.
이렇게 보이시한 복장은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만, 그건 착각이었다. 미인은 뭘 입어도 잘 소화하고 잘 어울린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다만 확실히 움직이기 편해 보이긴 해도, 평범하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을 차림이다. 그게 더러워져도 되는 복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옷은 더러워져도 돼?”
“어차피 머지않아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딱히 더러워져도 상관없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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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마히루는 한 번 더 아마네의 방의 참상을 바라보더니


슬쩍 탄식했다.
“미리 말하겠지만, 철저하게 할 거거든요?”
“……알았어.”
“알았다면 바로 시작해 볼까요. 저는 허술하지 않아요. 타협은 절
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알겠느냐고 물었기 때문
에, 아마네는 “네.”라고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천사의 청소 대작전이 막을 올렸다.
“일단 옷은 빨래 바구니에 넣어요. 원래 청소는 위에서 아래로 하
는 거지만, 이건 청소기를 돌리기 이전의 문제예요. 마루 바닥을 물
건들이 가리고 있으니까요. 옷을 빨려고 해도 좀 나누는 게 좋겠네
요. 너무 많으니까요. 그리고 이거, 평소에 입는 것과 입지 않는 것
을 구분할 수 있나요? 전부 빨아도 될까요?”
“그냥 네가 마음대로 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청소기를 돌리려고 해도 바닥이 물건으
로 꽉 찼기 때문에 먼저 그것들을 치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속옷 같은 게 떨어져 있진 않겠죠?”
“아무리 나라도 그건 옷장 안에 있어.”
“그럼 됐어요. 일단 옷은 나중에 처리해도 괜찮겠죠. 빨아서 널려
고 해도 청소 때문에 먼지를 뒤집어쓸 테고 널 공간도 없을 것 같으
니까요. 서두를 필요가 없다면 청소를 끝난 뒤에 하는 게 좋겠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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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잡지 말인데요, 기본적으로는 처분하겠어요. 수집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다루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으니까
요. 필요한 거라면 그 페이지를 스크랩하고 나머지는 처리할게요. 한
데 묶어서 재활용 쓰레기로 내놓죠.”
곧바로 청소를 시작한 마히루는 아마네에게 떨어져 있는 옷을 빨래
바구니에 넣도록 지시하고는 잡지를 모조리 모으기 시작했다.
필요한 잡지가 있다면 지금 말하라고 하는데, 딱히 필요한 건 없어
서 고개를 저었다. 그걸 확인한 마히루는 지참해 온 것으로 보이는
비닐 끈으로 능숙하게 묶었다.
“옷을 다 모았으면 다른 잡동사니도 버릴 것과 놔둘 것을 골라 주
세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나눠서 쓰레기로 버리세요. 알았죠?”
“……응.”
“제 지시에 불만이 있으면 바로 말하세요.”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척척 처리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
야.”
“안 그러면 시간이 없잖아요. 엉망진창이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휴일이라곤 하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
고 청소기를 돌리려면 낮에 할 수밖에 없다.
그 청소기를 돌리기 전 단계에서 상당한 고생을 할 것이라는 걸 알
기 때문에, 마히루는 최대한 서둘러 물건을 치우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청소를 돕게 만든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마
히루의 지시에 따라 점점 발 디딜 곳이 생기는 걸 보고 진심으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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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도 하고 있었다.
“시이나 교관님…….”
“스승으로 받들겠다면 일단은 보고 배우세요. 당신의 개인 물품 분
류는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꼭 필요한 물건만 따로 챙겨 놓으세
요.”
“옛서.”
“절 남자로 만들지 마시고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지적한 천사님은 재빠른 손놀
림으로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들을 분류하거나 버리
고 있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고 그냥 두는 습성이 있는 아마네는 마히루
의 단호함이 고맙고도 부러웠다.
다른 사람의 방이지만 거침없이 치워 나가는 마히루는 실로 가정적
이라서, 완전히 주부 못지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혼자서도 여유롭게 이 방을 치울 것만큼 요령이 좋았다.
하지만 서두르느라 발밑을 미처 주의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건 백프로 아마네 탓이지만, 바닥에 놓인 옷을 밟고 미끄러졌는
지 마히루가 그대로 밸런스를 잃었다.
“아.”
마히루가 목소리를 흘린 순간, 아마네는 반사적으로 마히루가 넘어
지려는 바닥에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확 하고 퍼지는 달콤한 향기. 그리고 희미하게 섞인 먼지 냄새는 빠
르게 움직이느라 먼지가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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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방아를 찧은 탓에 엉덩이가 은근히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마히루의 무게를 느끼면서
가볍게 신음하는 것으로 그쳤다.
잽싸게 받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리라.
“……후지미야 군.”
고개를 든 마히루가 미묘하게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아마네
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여러 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넘어진 제가 잘못한 건 인정하겠지만, 이런 일이 안 생기라고 청
소하는 거예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반성할게요……. 다친 덴 없지?”
“괜찮아요. 애써서 다치지 않게 받아 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죄
송해요.”
“아니, 이건 내 탓이니까…….”
그렇잖아도 먹을 것도 나눠주고 청소까지 도와주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 창피할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다.
원한다면 엎드려 비는 것까지도 감수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마
히루는 넘어진 것에 책망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안 생기게 청소하는 거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뇨,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어요. 제가 멋대로 나서서 돕는
거니까요.”
아주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아마네를 쳐다보는 마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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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기대게 된 자세, 그것도 바로 곁에서 살짝 불안한 듯


올려다보는 바람에 아마네는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렇잖아도 여자와 별로 인연이 없는 아마네에게 이 정도 거리는
심장에 좋지 않은데, 미소녀와 밀착 상태인 것이다.
아무리 양쪽 다 연애 감정이 없다곤 하나, 이건 도저히 바람직한 상
황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마히루는 이 자세를 의식하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에, 아마네는 슬
쩍 어깨를 붙잡아 몸을 떼어놓고 얼굴에 부끄러운 감정이 드러나기
전에 일어섰다.
“……청소나 마저 할까.”
“그러죠.”
다행히 그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한 마히루는 아마네가 내민
손을 순순히 붙잡고 일어섰다.
아마네와 밀착한 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마히루는 평소와 같
은 표정을 보였다.
마히루처럼 수많은 남자들이 호의를 보이는 소녀라면 이 정도 일로
동요할 리가 없을 거라고 나름대로 납득할 수는 있었지만.
아마네는 태연한 눈치인 마히루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전부 맡
길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합을 넣고 청소를 재개했다.
“……깜짝 놀랐어.”
아마네 자신은 익숙하지 않은 청소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
문일 것이다.
마히루가 작게 중얼거린 말,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귀가
아주 약간 붉어져 있었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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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 깔끔해졌네요.”
결국 아마네의 집을 청소하는데 하루를 통으로 날렸다.
바닥에 있는 개인 물건을 정리하는데 몇 시간. 그 뒤에 옷을 빨고,
찬장 위랑 조명의 먼지를 털고, 창틀을 닦고, 세탁기를 돌렸더니 이
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히루가 왔을 때 본 태양은 벌써 모습을 감추어 두 사람의 분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는지를 증명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마네의 집은 알아보지 못할 만큼 깨끗해졌다.
쓸모없는 것이 다 사라진 바닥에는 마루가 훤히 보였으며, 유리창
과 창틀에는 얼룩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조명도 먼지를 털어내면서
이전보다 더 밝아졌다.
아마네의 방도 청소했으며, 바닥에 물건이 놓여 있지 않아서 편안
하게 드러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치우는데 하루가 꼬박 걸릴 줄이야…….”
“그야 그렇게 난장판이면 말이지…….”
“당신이 어지른 건데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천사님 겸 구세주님에겐 머리를 들 수가 없는지라, 완전히 넙죽 고
개를 숙이고서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도와준 마히루를 힐끗 봤다.
일부러 귀중한 휴일을 소비해 준 마히루는 “정말이지…….”라고 말
하면서 쓰레기봉투를 묶고 있었다.
말과는 달리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간 지친 기색이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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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일하게 만들었으니 당연하다.


이러고 나서 저녁밥까지 만들게 하는 것은 역시 내키지 않았다.
자신에게 음식을 나눠주든 말든, 지친 상태에서 더 일을 시키는 것
이 미안했다.
“이제는 장을 보러 나갈 마음도 들지 않으니까, 저녁은 피자라도
시켜서 먹을까. 오늘은 내가 사게 해 줘. 그동안 얻어먹은 것도 많으
니까.”
“네? 하지만…….”
“나랑 먹는 게 싫다면, 따로 한 판 시킬 테니까 가져가서 먹어.”
같이 먹는 게 싫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마히루
가 가져갈 몫으로 따로 주문하면 된다.
같이 먹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오늘 한 고생에 보답하려는 것
이니 혼자 먹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 건 아니지만, 피자 같은 건 주문해 본 적이 없으니까 놀
랐을 뿐이에요.”
“어? 시켜 본 적 없어?”
“그야 혼자 사니까 피자를 주문할 일이 없잖아요……. 만들어 먹기
는 하지만.”
“만들어 먹는다는 발상이 더 대단한데.”
일반적으로 피자를 먹고 싶으면 시판 중인 것을 사거나 배달을 시
키거나, 혹은 외식한다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겠지. 일부
러 도우 반죽부터 시작해서 만드는 귀찮은 짓을 할 인간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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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배달을 시켜도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혼자서 주


문하니까. 아, 그런 타입인가. 패밀리 레스토랑도 혼자서 가는 건 무
리인 사람.”
“애초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좀 신기하네. 나는 평소에도 혼자서 가고, 우리 부모님은 식
사 준비가 귀찮을 때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종종 갔는데. 네 부모님은
외식은 하지 않는 주의였어?”
“……우리 집은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해 주셨으니까요.”
“가정부라니, 부잣집이구나.”
부잣집 사람이라면 납득이 된다.
유달리 행동거지가 바르고, 옷이나 소지품도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품격 있는 분위기와 교양이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당사자는 아마네의 말에 희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그러네요. 비교적 유복하다고 생각해요.”
괜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고 후회했다. 마히루의 미소가 기쁨이나
자긍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오히려 자조적인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
다.
예전에도 부모님 이야기를 했을 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로
반응했으니, 어쩌면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괜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인 것 같았고, 아마네도 그 이상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알려지거나 언급당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한둘쯤 있
는 법이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상대라면 터치하지 않는 게 예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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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뭐,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 자, 좋아하는 거로 주문해 봐.”
부모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피자 광고지를 마히
루에게 보여 줬다.
가끔 주문해서 먹는 가게로, 아마네가 아는 한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는 가게 중 가장 맛있는 곳이다.
가마로 피자를 굽는 본격적인 곳보다는 당연히 못하지만, 스탠다드
한 토핑부터 아이들도 좋아하는 토핑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으니 마
히루의 입맛에 맞을 만한 것도 있겠지.
화제 전환에 응한 마히루는 광고지를 받아 들고 재빨리 훑어보았
다.
투명하게 보이는 짙은 갈색의 눈은 갖가지 피자 사진에 못 박혀 있
었다.
늘 그다지 감정을 보이지 않던 눈도, 지금은 왠지 생생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진짜 기대하고 있는 걸까.’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던 마히루는 잠시 메뉴를 본 뒤에 “이게 좋
겠어요.”라며 네 가지 맛을 즐길 수 있는 파티용 피자를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눈치를 살피듯이 바라보는 마히루에게 알았다고 말하자 눈이 살짝
빛났다.
약간 기뻐하는 표정이었기에, 아마네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으면
서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고 광고지에 실려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약 한 시간 후에 도착한 피자를, 마히루는 곧바로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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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류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이므로 어떤 것을 먼저 먹을지 잠시


고민했지만, 시작은 베이컨이랑 소시지를 듬뿍 얹은 것으로 정한 것
같았다.
놀랄 건 없지만 꽤 부잣집 아가씨라는 게 발각된 마히루가 작은 입
으로 피자를 오물거린다.
손으로 들고 먹는 모습에도 어쩐지 품격이 있어 보이는 것은 아마
도 오랫동안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겠지.
그러는 모습은 작은 동물처럼 자그마한 것을 볼 때의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늘어나는 치즈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
금는 모습이 묘하게 귀여웠다.
평소에는 어른스럽게 보이고 실제로도 차분하지만, 지금의 마히루
는 나이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작은 입으로 냠냠 피자를 즐기고 있는 마히루를 보자니, 자신도 모
르게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맛있게 먹는다 싶어서.”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마세요.”
다만 싫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에는 귀여운 면이 전혀
없었지만.
“……뭐랄까, 넌 정말로 귀염성이 없구나.”
“없어도 괜찮아요. 오히려 이제 와서 평소에 학교에서 하던 것처럼
굴면 그게 더 기분 나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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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긴 하지. 학교에서의 너보다는 여기에서 보여주는 네가


더 익숙해졌으니까.”
학교에서는 마히루와 거의 접점이 없고 말해 본 적도 없다.
그저 모두에게 평등하게 자상하며, 완벽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모습을 가끔 볼 뿐이었다.
그 대신, 지금 눈앞에선 애교가 없는 부분을 보고 있다.
마히루의 진짜 모습은 아마도 이쪽일 것이며, 학교에서는 대외용
모드를 발동하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이쪽이 더 부담이 없어서 좋지만 말이지.”
“귀염성이 없는 쪽 말인가요.”
“은근히 속에 담아 두는구나, 너. ……뭐랄까, 학교에서 보는 넌 무
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거든.”
“주로 오늘의 식단과 수업 내용이네요.”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네.”
마음속으로 뭔가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을 것 같다는 의미로 말했
는데, 마히루는 말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본인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지 미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으
로 아마네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속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무슨 생
각을 하는 건지 모르는 것보다야 다소 무뚝뚝해도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대하기 편하다는 이야기지.”
“……학교에서 하던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인가요?”
“처세술일 테니까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지치지 않
을까 하는 걱정은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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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딱히 문제없어요. 어릴 적부터 이랬으니까요.”


“어릴 적부터 철저히 익힌 거였단 말인가.”
어릴 적부터의 버릇이라면 그런 태도가 몸에 익은 것도 수긍이 된
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상적이고 착한 아이’로 존재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물론 대충 짐작이 가는 가정 환경만으로는 이러쿵저러쿵 떠들 수
없다.
“뭐, 맘 편히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결과적으
로 내가 그런 상대가 되기도 했고 말이지.”
“……당신은 보고 있으면 여러모로 아슬아슬해서 맘 편히 있을 수
가 없어요.”
“거 미안하네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리자, 마히루는 우습다는 듯이 아주
약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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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제6화 친구의 방문

그날 청소 이후로 마히루와의 사이에 있던 벽이 아주 조금 얇아진


것 같지만, 딱히 거리가 가까워진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였으며, 저녁거리를 나눠줄 때
가끔 잡담을 하는 수준.
며칠 전에도 방의 청결을 유지하라는 내용의 잔소리를 따끔하게 들
었다. 이래저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역시 남을 돌보길 좋아하는 소
녀라는 것을 통감했다.
신신당부하는 와중에 정리 방법을 조언해 주기도 해서, 아마네의
집은 깨끗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오오, 깔끔해졌네.”
깔끔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츠키가 휴일에 찾아왔는데, 좋은 방향
으로 바뀐 방을 보고 감탄사를 내놓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깨끗이 치웠을 줄이야. 그렇게나 더러웠는데 말
이지. 이전에 내가 도와주면서 청소했는데도 바로 엉망이 되었잖
아.”
“시끄러워.”
“아니, 하지만 사실인걸. 물건을 바닥에 놔두지 않은 상태를 최대
며칠이나 유지했어?”
“안심해. 신기록이야. 2주는 이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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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신기록이 2주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시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닥에 물건을 방치해 두지 않는다는 상식론에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츠키는 친절한 마음에서 상식적인
소리를 하는 거니까 차마 거부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마히루에게 도움을 받기 전에는 이츠키에게도 신세를 졌기
때문에, 이런 때는 강하게 나갈 수가 없다.
끄응. 입을 다물고 신음하는 아마네를 보면서 이츠키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 이렇게 깨끗해졌으면 치이도 데려올 수 있겠네.”
“그러지 마, 너희 닭살 행각을 왜 우리 집에서도 봐야 하는데.”
“사양하지 마.”
“우리 집을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지 말라고.”
뭐가 아쉬워서 친구 커플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억지로 봐야
한단 말인가.
바보 커플로 잘 알려진 두 사람의 닭살 행각을 계속 봐야 하는 아마
네의 처지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이츠키도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건 알지만, 두 사람의 뜨거운
모습을 늘 억지로 보고 있는 입장으로선 그다지 웃을 수 없었다.
“뭐, 농담이야. 이렇게까지 깨끗해졌으니 또 어지르거나 하진 말라
고.”
“노력은 할게.”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뭐, 좋아. 꺼냈으면 다시 넣는 습관만
이라도 익혀 두는 게 좋겠어.”
“네가 우리 엄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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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아마네도 참, 방은 자주 청소해야 한다고 엄마가 그랬지?”


“징그럽고, 은근히 우리 어머니 말투랑 비슷해서 무서워.”
일부러 연기하듯 가성으로 주의를 주는 이츠키를 보고, 아마네는
온몸을 떨었다.
이츠키와 어머니는 면식도 없을 텐데 왠지 비슷했기 때문에 오싹했
다.
애초에 남자가 여자임을 강조하는 몸짓을 하는 게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즉시 중지했으면 좋겠다.
우웩, 하고 혀를 내미는 아마네를 보고 이츠키가 유쾌한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아마네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단 말이구나. 우리 어머니는 정말
로 무뚝뚝한데 말이지―.”
“차라리 너희 집이 부러워. 우리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참견을 하려고 드니까 말이야.”
“자식을 아끼는 좋은 어머니잖아.”
“그냥 자식을 품에서 떼어놓질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지. 네가 칠칠치 못하게 구니까 간섭할 수밖에 없는 거란 생
각이 드는데.”
“말이 많네. 그걸 빼놓고 생각해도 우리 어머니는 자식에게 너무
간섭한다고.”
외동아들이라서 그런지, 아마네의 어머니는 틈만 나면 아마네를 보
살피려고 든다.
응석을 다 들어주는 것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돌봐 주는
게 많고 괜히 마음을 써 주기도 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상대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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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좀 곤란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자취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별별 소리를 들었으며, 종종 기습적으로 체크하려고 하는지라 제법
고생하기도 했다.
“뭐, 그만큼 너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 아닐까?”
“사랑이 너무 무거워.”
“포기해. 언젠간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
“경험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넌 현재 진행형으로 반항 중이잖아.”
“핫핫하. 치이와 관련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어.”
아버지와 여친 문제로 다투고 있는 이츠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설
득력이 별로 없지만, 하는 말 자체는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얌전히 듣기로 했다.
이 자식도 나름대로 문제를 끌어안고 있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
면서 살며시 한숨을 쉬었지만, 정작 이츠키는 그런 고생을 엿볼 수
없는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나와 치이 사이를 방해하겠
다면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지만 말이지.”라고 약간 살벌하게 들리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괜찮아. 일단
네 생활을 똑바로 챙기라고, 알았지―?”
히죽거리며 웃는 이츠키에게 미묘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렇
게 할 거야.”라고 대꾸했다. 그리고는 누군가와 같은 말을 한다는 생
각이 들어서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이츠키가 아마네의 집을 들른 이유는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가 아니라, 단순히 놀러 온 것이기 때문에, 집 청소 이야기는 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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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접고 둘이서 게임을 했다.


당초의 목적은 분명 일주일 후로 잡힌 시험 공부였을 텐데, 어느새
노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너, 그렇게 회복 아이템을 낭비하다간 나중에 모자랄걸.”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든.”
“아니, 어떻게든 되긴. 레벨도 안 올랐는데 그래도 괜찮을 리가
없…….”
아마네는 스릴을 맛보는 걸 좋아하는 이츠키에게 뭘 어떻게 지적해
야 좋을지 고민했지만, 집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곧바로
다른 고민이 생겨나고 말았다.
“응? 손님이 왔나?”
이츠키도 게임 메뉴 화면을 띄운 뒤에 고개를 들었다.
딱히 다른 사람에게 이 집을 가르쳐 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
는 데다, 집을 찾아올 친구도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손님이라면 공
동 현관에서 먼저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먼저 호출을 해야 할 것이
다.
“뭔지 모르겠네. 옆집 사람 아닐까? 회람판을 가져온 걸지도 모르
지.”
“그렇겠네.”
“잠깐 좀 보고 올게.”
딱딱해지려는 표정을 어떻게든 숨긴 채로 이츠키에게 적당히 얼버
무린 뒤에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른 후에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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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마히루도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 빠르게 문을 열었고, 방문자의 모


습이 보이지 않도록 좁은 틈새로 몸을 빼낸 뒤에 그대로 문을 닫았
다.
예상대로 마히루가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아마네의 반응에 눈을
깜박거리자 “쉬잇.” 하면서 검지를 세워 보였다.
“……조용히 말해 줘. 이츠키가 와 있으니까.”
“이츠키?”
“친구야. 지금 집에 놀러 와 있어.”
“아, 그렇군요.”
은밀하게 행동하는 아마네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는지 마히루는 고
개를 끄덕거렸고, 더 이상 따져 묻는 일 없이 평소처럼 밀폐 용기를
건네줬다.
아침부터 준비했던 것 같다. 안에 든 음식은 날씨가 추워진 지금 계
절에 딱 어울리는 오뎅이었다.
고맙게 받아 든 아마네는 이제는 자연스럽게 요리를 건네주는 마히
루를 보면서 슬쩍 한숨을 쉬었다.
“저기, 정말로, 네가 이렇게 챙겨 주는 것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
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네. 미안해.”
“딱히 답례를 바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행이네요. 친구를
초대할 수 있을 정도로 집 안이 정리가 되었으니.”
“엎드려 절해서 고마워하면 될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어이가 없다는 듯 ‘제가 나쁜 여자 같잖아요.’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바람에 아마네도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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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하게 진심이 섞인 말을 해 버린 것은, 정말로 머리를 들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엎드려 절해도 충분할 수준으로 자신을 돌봐 주
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많은 양을 공짜로 계속 받는 것은 여러모로 미안하므
로,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식사에 들어가는 비용 이야기를 하
고 싶은 참이다.
“친구가 와 있다면 오래 이야기할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럼 이만 실
례할게요.”
“……늘 고마워. 이츠키에겐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을
게.”
“그렇게 해 주세요.”
“뭐, 설령 말해 봤자 믿지 않겠지만 말이지.”
“그렇겠죠.”
순순히 긍정하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복잡해지지만, 실제로 아마
네가 이츠키라면 시이나가 식사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영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망상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겠지.
그만큼 천사님은 절벽에 핀 꽃 같은 존재인 셈이다.
잘생기고 우수한 남자라면 또 모를까 자신처럼 변변치 못하고 한심
한 남자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천
지가 뒤집혀도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가요?”
“나에게 이렇게 계속 음식을 나눠줘서 무슨 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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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은 이렇게 노력과 돈을 쓰면서 공짜로 요리를 나눠주지


않을 것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네 자신에
게 호감이 있다고 만에 하나라도 없을 확률을 기대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이상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네의 질문을 받은 마히루는 잠시 생각하듯 시선을 위로 돌렸다
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저 자신의 자기만족이에요.”라고 대
답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저는 1인분을 만드는 것보다 2인분을 만드
는 게 더 즐겁고, 단순히 남에게 뭔가를 베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
니까요.”
“요리하는 걸 좋아한단 뜻이야?”
“뭐, 그 이유도 있겠네요. 당신은 귀찮은 착각을 하지 않고 그저 맛
있다고만 말해 주니까 편하기도 하고, 당신의 식생활은 보고 있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역시 자기만족이에요.”
“……그런 거야?”
“그런 거네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뜻밖에 마주친 행
운이라고 생각하세요.”
“네네.”
더 이상은 마히루도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는지, 예절 바른 동작
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에 “이만 실례할게요.”라고 말하면서 자
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이유가 되나.’
공짜로 주는 것치고는 뭔가 이유가 부족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그
렇게 중얼거리면서 아마네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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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였어?”
“옆집 사람. 음식을 좀 나눠줬어. 냉장고에 넣고 올 테니까 먼저 게
임 시작하고 있어.”
“아, 미안. 나 혼자 보스전을 끝내버렸어.”
“야, 무슨 짓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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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천사님의 부상과 답례

아마네와 마히루가 처음 대화를 나눴던 공원은 집으로 오는 길에


있다.
아마네가 사는 맨션은 가족보다 적은 인원이 살기에 용이하도록 만
들어진 곳이라서 어린아이가 적은데, 주변의 맨션도 대부분 비슷했
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들어진 공원은 아담하고,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노는 일도 없어서 한산한 그곳에서―― 학교에서 귀가
중으로 보이는 마히루를 발견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해요.”
벤치에 단정하게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던 마히루는 아마네의 모
습을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얼굴을 아는 사이이며 말도 꺼낼 수 있는 사
이가 되었기 때문에 보는 즉시 말을 걸었지만, 마히루의 목소리는 딱
딱했다. 경계하는 건 아니나, 뭔가를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렇게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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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딱히…….”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마히루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밖에선 상관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지만, 이번에는 마히루
가 왠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
았다.
마히루는 관심을 보이지 않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뭐, 말하고 싶지 않다면 상관없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은근히 표정
이 굳어진 마히루를 바라보다가 블레이저에 하얀 실, 아니, 털이 여
러 개나 묻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그렇고 교복에 털이 묻어 있는데, 개나 고양이랑 놀고 있었
던 거야?”
“논 게 아니에요. 그냥 나무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고양이를 내
려 줬을 뿐이에요.”
“무슨 그런 뻔한 전개가 다 있담. 아하, 그런 거였나.”
“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마히루가 한 말을 듣고, 왜 벤치에 계속 앉아 있었는지를 뒤늦게 이
해한 아마네는 한숨을 훅 쉰 뒤에 일단 그 자리를 떠났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당부한 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
다.
그보다는 움직일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이상한 구석에서 괜한 고집을 부리는 녀석이라니까. 그렇게 혼자
투덜거리면서 근처에 있는 드럭 스토어에서 파스와 테이프,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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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커피용으로 파는 얼음을 산 뒤에 마히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


다. 역시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이나, 타이츠를 벗어.”
“네?”
그렇게 짧게 말하자, 마히루가 극도의 한기를 담은 목소리로 되물
었다.
“아니,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 자, 돌아서 있을 테니까 타이츠
를 벗고 내 블레이저로 가려. 일단 다친 부분을 식히고 파스를 붙일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타이츠를 벗기면서 기뻐하는 취미는 없다. 변명의
의미를 겸해 구입한 물건이 담긴 봉투를 흔들어서 보여주자, 마히루
의 얼굴이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굳어졌다.
“……어떻게 안 건가요?”
“로퍼를 한 짝만 벗은 데다 발목의 굵기가 미묘하게 다르잖아. 그
리고 거기서 일어서려고 하지 않으니까. 고양이를 구해주려다가 발
목을 다치다니, 정말 뻔한 전개네.”
“시끄러워요.”
“네네. 자, 어서 타이츠를 벗고 발을 보여줘.”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마네에게 들킨 것이 예상
외였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순순히 블레이저를 받아 다리 위에 걸친 것을 보면 시키는
대로 따를 것 같았다.
아마네는 그대로 마히루에게 등을 돌리고는, 편의점에서 산 얼음을
비닐 봉투에 넣고 물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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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넘치지 않도록 주둥이를 묶고,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수건으


로 살짝 감싸서 즉석 얼음주머니를 만든 뒤에 천천히 돌아봤다.
마히루는 시킨 대로 타이츠를 벗고 맨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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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지방이 없는,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 매


끄러운 다리 라인과 발목의 부자연스러운 붓기가 다 드러나 있었다.
“뭐, 심하게 붓진 않은 것 같지만, 너무 움직이면 악화되겠네. 춥겠
지만 일단 조금은 식히는 게 좋겠어. 통증이 가시면 파스를 붙일 테
니까 안정을 취하도록 해.”
“……고마워요.”
“다음부턴 처음부터 솔직하게 도움을 청해. 딱히 이런 기회를 틈타
서 빚을 지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그동안 잔뜩 쌓인 빚을 조금씩이라도 갚고 싶
은 심정이므로, 곤란한 일 한두 가지쯤은 해결해 주고 싶었다.
다리를 벤치 위에 놓고 발목을 식히고 있는 마히루의 표정은 여전
했지만, 아마네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통증은 좀 가셨어?”
“……네, 어느 정도는요.”
“그럼 파스를 붙일 테니까…… 변태니 치한이니 소리치면서 화내지
마.”
“은인에게 그런 무례한 짓은 하지 않아요.”
“그건 다행이네.”
엉큼한 마음은 일절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마히루의 다리 옆에 웅
크려 앉아 벌겋게 부푼 발목에 파스를 붙였다.
일단 얼마나 아픈지를 물어보니, 설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지만 악
화될 것 같아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일단은 가벼운 부상이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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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를 붙이고 같이 사 온 테이프로 고정하다가, 지그시 내려다보


는 마히루의 시선을 느꼈다.
“의외로 손재주가 있네요.”
“뭐, 다쳤을 때의 처치 정도는 할 수 있어. 요리는 못하지만.”
약간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하자, 쿡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흘
러 나왔다.
아까부터 굳은 표정을 짓게 하고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
렸다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이지만 태도가 누그러진 마히루를 보고 내심 안도하면서, 가방
에서 체육복 바지를 꺼냈다.
“자.”
“네?”
“아니,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그대로 가면 다리가 보이
잖아. 파스를 붙인 채로 타이츠를 신을 수도 없고. 오늘은 그 옷을
안 입었으니까 안심해.”
테이핑으로 한층 커진 오른쪽 발목 위에 그대로 타이츠를 신기는
것도 좀 그렇고 위화감도 느껴지겠다. 추위와 속옷 노출을 막으려면
그거라도 입는 게 좋을 것이다.
별뜻은 없다는 건 알고 있는지 순순히 체육복을 입어 주었다.
다 입은 것을 확인하고서 빌려줬던 블레이저를 돌려받고, 그 대신
지금까지 셔츠 위에 입고 있었던 파카를 마히루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걸 입어.”
“아뇨, 그러니까 이건 왜…….”
“업혀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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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를 그냥 걸어가게 둘 수는 없으니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


다.
어차피 돌아갈 장소는 거의 같으니까, 아마네가 데려가는 게 효율
적으로도 좋고 부상에도 좋을 것이다.
“아, 미안하지만 내 가방만 좀 지고 있어 줄래? 아무리 그래도 가방
을 뒤에 맨 채 널 앞으로 안고 갈 수는 없으니까.”
“안 업는 선택지는 없나요?”
“있잖아, 발목을 다쳤으니까 얌전히 있어. 아무도 없다면 또 모를
까, 지금 딱 적당한 다리가 있으니까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라고.”
“다리란 말인가요.”
“뭐야, 팔이 더 좋은 거야? 두 손으로 안고 가는 걸 원해?”
“절 안고 집까지 돌아갈 근력은 있나요?”
“날 무시해? 뭐…… 자신은 없어.”
마히루를 두 팔로 안을 순 있겠지만, 맨션까지 데려가는 건 아무래
도 힘들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엄청나게 받을 것 같으니
까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않다.
마히루도 가벼운 농담으로 말한 것임을 아니까 놀렸다고 화낼 생각
은 없다. 그만큼 여유롭게 말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웃
었다.
“자, 다 입었으면 후드를 쓰고 가방을 메 줘. 그리고 내 가방도 내
가 업은 뒤에 챙겨 주고. 널 업어야 해서 들 수가 없거든.”
“……죄송해요.”
“괜찮아. 그래도 남자인데 부상자를 내버려 두고 돌아가거나 걷게
만들 정도로 썩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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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숙이고 등을 보이고 있으려니, 마히루가 조심스럽게 아마네의


등에 몸을 기댔다.
파카까지 입혔으니 그만큼 부피가 불어났어야 할 텐데, 그래도 아
마네가 느낀 마히루의 몸은 가냘프고 미덥지 못했다.
목에 두른 손이 심하게 조르지 않는 정도의 힘으로 자신을 붙잡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아마네는 천천히 마히루를 등에 업고 일어났다.
역시 생각대로 가벼웠다.
아마네에게 잔소리한 본인이야말로 식사를 잘 챙기고 있는지 걱정
될 정도로 가냘픈데, 어쩌면 원래 몸집이 작아서 이럴지도 모른다.
은은하게 달콤한 향기가 나는 데다, 마히루가 불안한 표정으로 꼭
매달려 있는 상황이라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귀갓길에 들어섰다.
사람을 업고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제법 쏠렸지만, 마히루가 얼
굴을 숨기듯이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큰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난 이만…….”
마히루의 집 현관 앞까지 옮긴 뒤, 아마네는 더 간섭할 필요가 없다
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벽에 기대야 하긴 했지만 제 발로 설 수 있었으니 그리 심하게 다친
건 아니겠지. 다행히 내일부턴 휴일이므로, 며칠 안정을 취하면 보행
에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나을 것이다.
“오늘은 내 밥을 챙기지 않아도 되니까 안정을 취하면서 쉬어. 정
필요하면 영양 보조 식품이라도 줄까.”
“괜찮아요. 만들어 둔 게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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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그건 다행이네. 그럼 나중에 봐.”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다행이다. 움직이지 않는 게 제일
좋으니까.
마히루가 현관문을 여는 걸 보고, 아마네도 자기 집의 열쇠를 꺼냈
다.
“저기…….”
“응?”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가방을 끌어안
은 마히루가 조심스럽게 아마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짝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겨우 마음을 굳혔는지
아마네를 똑바로 바라봤다.
“……오늘은 정말 고마워요.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됐어.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그럼 몸조리 잘해.”
너무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좀 그러니까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
고, 마히루가 머리를 꾸벅 숙이는 걸 본 뒤에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파카랑 체육복을 빌려준 채로 그냥 왔다는 걸 깨달았
지만, 나중에 다시 돌려받을 수 있겠지. 아마네는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너, 1년 내내 반바지만 입는 건강 캐릭터였어?”


월요일 체육 시간이 우울했던 것은 아마네가 운동을 잘 못하는 데
다가, 쌀쌀한 이 계절에 무릎길이의 체육복을 입어야 하게 되었기 때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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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이 계절이면 이미 긴바지 체육복이 주류라서 무릎 아래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아마네는 주위 사람들과 약간 동떨어져 있었다.
“아니야. 잊어버렸을 뿐이라고.”
“멍청하긴.”
“시끄러워.”
주말 동안 마히루를 만나지 않아 미처 돌려받지 못하는 바람에 이
렇게 되었지만, 이츠키에겐 딱히 변명할 거리도 없는지라 잊어버렸
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놀림을 받는 건 달게 받아들였지만, 낄낄 웃으면서 등을 탁탁 때리
는 건 참을 수 없어서 그대로 되갚았다.
이츠키가 조용히 신음하는 걸 보면서 슬쩍 한숨을 쉰 뒤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 운동장에선 높이뛰기를 하고 있는데, 여자들도 체육 시간에
운동장을 쓰는지 여자들도 보였다. 게다가 두 반이 합동 수업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인원이 제법 많이 모였다.
저쪽은 저쪽대로 육상경기를 하고 있는데, 대기 시간에는 아마네의
반 체육 수업을 구경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카도와키, 파이팅―!”
기본적으론 남녀가 다른 장소에서 수업을 하니까 여자가 있으면 남
자들이 술렁거리는 건 당연했지만…… 여자들이 보는 곳에는 아마네
와 같은 반이자 꽃미남으로 유명한 카도와키 유타가 있었다.
아마네가 말을 걸 일은 거의 없지만, 붙임성이 좋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가 1학년이면서 육상부의 에이스였기 때문에 여자들로부터 인
기가 높다는 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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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아마네는 하늘은 참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그 사실이 못마땅한지 미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들
도 많았다.
“오오, 여전히 인기 쩌네, 유타는.”
“그러게.”
“흥미가 없는 것 같네.”
“아니, 실제로 나랑 관계가 없잖아. 같은 반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도 없고.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야.”
딱히 상대가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며, 이렇다 할 관계가 없으므로
솔직히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런 사람이 소수라는 건 알아도, 역시 다른 남자들처럼 시샘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너무 완벽하니 질투조차 넌센스라는 생각을 하고 있
었다.
“질투하지 않는 게 너답긴 하네.”
“뭐야, 인기 폭발이라서 부럽기 그지없소이다, 같은 말이라도 해?”
“너하곤 안 어울려.”
낄낄 웃는 이츠키를 흘겨보다가, 여자들의 성원을 받으며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봐도 균형이 잘 잡힌 체격에 훈훈하게 생긴 얼굴은 그야말
로 왕자님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별명 중에 왕자님도 있고, 딱 봐
선 이렇다 할 결점이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여자들의 뜨거운 눈빛과 새된 목소리에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면
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붙임성이 좋은 남자라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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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들어서 감탄까지 나왔다.


“뭐랄까, 정말 인기가 대단하네.”
“그러게. 남자들의 질투는 확정 사항이군.”
“하하. 그건 그렇고, 여자들도 기운이 넘치는걸.”
이츠키에게는 끔찍하게 사랑하는 여친 치토세가 있어서 다른 여자
에게 관심이 없으므로, 마치 남 일처럼 군다.
치토세도 유타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으므로, 이츠키가 유타에게 뭔
가 감정이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왕자님이니 천사니, 우리 학교엔 부끄러운 별명이 붙는 사람들이
많네.’
그러고 보니 천사님, 즉 마히루는 결국 안정을 취하면서 잘 쉬었을
까.
휴일에 외출하는 낌새는 없었으니까 얌전히 지냈을 테지만, 다친
데는 얼마나 나았을까.
마침 마히루의 반과 합동 수업이었기 때문에 몰래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찾아보니, 사람이 잔뜩 있어도 바로 눈에 띄는 용모를 지닌 소
녀가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수업에도 참가하지 않은 걸 보면 견학
중인 것 같다.
조용히 앉아 있는 마히루에게 시선이 저절로 끌리는 남자들도 많이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눈이 딱 마주쳤다. 멋쩍어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
자 입가에 슬쩍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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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그 얼굴이 아마네, 그 이전에 남자들 집단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미소를 본 같은 반 아이들이 “지금 날 보고 웃은 건가?!” “아냐,
나일 거야.”라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건 찬스야. 멋진 모습을 보여서 시이나에게 어필해야지.”
“왕자만 멋진 모습을 보이도록 양보할 순 없지.”
자그마한 미소 하나로 이렇게까지 흥분시킬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
다고 해야 할까, 남자들이 너무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참 단순하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츠키가 그렇게 나지막이 말했고, 아마네도
그만 웃고 말았다.
“뭐, 내신 점수도 있으니까 우리도 어느 정도는 노력해야겠지.”
“뭐야, 아마네 너도 천사님이 보고 있다는 이유로 기운이 샘솟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
“뭐, 그건 그런가. 넌 정말로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여친이 있으면 좋거든?” 하고 커플 자랑이 시작될 것 같았
기에 아마네는 “그래, 알았어.”라고 말하면서 대충 흘려 넘기고, 다
시 마히루 쪽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후지미야 군이 빌려줬던 파카랑 체


육복이에요.”
그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나눠주러 온 마히루는 밀폐 용기
외에 종이 봉투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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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언뜻 보기에 아마네가 금요일에 빌려준 바로 그 파카와 체육복 같


았다. 단정하게 갠 상태로 들어 있었다.
“응. 다친 데는 어때?”
“이제 통증은 거의 없어요. 다 나을 때까지 운동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럼 됐어. 체육 시간에도 견학만 하는 것 같았으니까.”
“네.”
혹시 몰라서 마히루는 체육 시간에 견학만 했다는데, 그게 정답일
것이다. 아파 보이진 않지만, 약간 조심하면서 걷는 모양으로 보아
아직 완치되진 않았으리라.
현명한 판단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체육 시간 때 일을 떠올리
며 잠시 웃었다.
“그건 그렇고 천사님은 인기가 정말 대단하던걸. 미소 한 번에 남
자들의 의욕이 치솟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저도 곤혹스럽
긴 했지만, 그렇게 기쁜가요?”
“뭐, 미인이 웃어 주면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그 왜, 여자들도 오
늘 카도와키가 손을 흔들어 주니까 꺅꺅 소리를 지르고 좋아했잖
아.”
“카도와키……. 아, 그 엄청 인기가 많은 사람 말인가요.”
마히루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기색이다. 아니, 실제로 관심이 없는
지 이름만으론 감을 잡지 못하다가 아마네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누군지 짚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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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님 정도는 아니지만 유타도 같은 학년에선 나름대로 유명한 남


자인데, 이름만 듣고는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한다는 건 의외였다.
“넌 관심이 없어?”
“딱히요. 반도 다르고, 별로 접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흐응. 다른 여자들은 야단법석인데 말이지. 멋있다고.”
“뭐, 얼굴이 곱상하긴 하네요. 저는 이야기해 본 적도 없고 관계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런 점은 담백하게 반응하는구나, 넌.”
“외모의 미추만으로 호감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면, 당신이 저에게
아무런 감정을 품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오, 자신이 귀엽다는 건 아나 보네.”
마히루의 말은 지당했다.
아름답다는 요인이 호감을 가지는 이유는 될 수 있지만, 아름답다
고 해서 반드시 호감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 말에는 동의하며, 마
히루가 미소녀라는 것도 인정했다. 본인도 그걸 자각하고 수긍하고
있었다는 것이 의외이긴 했지만.
“주위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면 싫어도 알게 돼요. 그리고 저 자신
이 객관적으로 반반하게 생긴 건 알고, 노력을 게을리한 적도 없어
요.”
마히루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자신의 외모를 자랑스럽
게 여기는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마히루는 아마 그 미모를 유지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
을 것이다.
원래 곱게 생겼지만, 그것만 믿고 안주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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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광택 있는 머릿결은 천사의 고리를 떠올리


게 했고, 피부도 완벽해서 여드름이나 기미는 하나도 없다. 집안일을
하는데도 손이 튼 데가 없으며, 손톱도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
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균형 잡힌 몸매는 하루아
침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어련하시겠어. 담담하게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까 싫은 내색을 안
하지만, 칭찬받고 쑥스러워할 일도 아니라는 것 같네.”
“너무 끈질기게 들으면 질리기부터 할걸요.”
“미인은 힘들겠구나.”
“그만큼 득도 보니까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순 없지만요.”
“정말 남 일처럼 말하네…….”
“뭔가요. 수줍어하면서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하길 바라는 건가
요?”
“아니, 네 본성을 알고 있는 나로선 그런 반응을 보여도 위화감
이…….”
“그렇겠죠. 저도 당신에게 그런 행동을 해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
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마히루가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므로 태도
를 바꿔 봤자 난감할 뿐이다. 학교의 마히루처럼 자신을 대하면 이상
하게 닭살이 돋을 것 같으니까, 제발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좋겠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학교의 천사님이 천사님답게 행
동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위화감이 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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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에게 진짜 마히루는 지금 보는 모습이지 학교에서 보게 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그대로가 좋다는 것에 합의한 셈이라 생각하면서,
아마네는 자신이 받은 밀폐 용기를 봤다.
평소보다 많이 담긴 것 같은 그 용기 안에는 여러 반찬이 담겨 있었
으며, 품목도 다양했다. 이 정도면 음식을 나눠준 게 아니라 아예 도
시락을 만들어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메뉴가 호화롭네.”
“신세를 졌으니까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오오, 고로케도 있어.”
겨우 고로케냐고 얕보지 마라.
반찬 가게에서 흔히 팔지만, 직접 만들려면 정말 귀찮은 가정 요리
의 으뜸 격이다.
감자를 삶아서 으깬 뒤에 볶은 소고기랑 양파 등 재료를 섞어서 모
양을 잡고, 잘 식힌 뒤에 튀김옷을 입혀서 튀겨야 하는 등…… 은근
히 손이 많이 가는 요리인 것이다.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 아마네조차 어머니가 만드는 것을 보고는
귀찮으니까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뭐, 미리 만들어서 냉동한 걸 튀겼을 뿐이지만요.”
“그래서 닭 튀김도 덤으로 같이 있는 건가.”
“그런 셈이에요.”
혼자 살게 되면 튀김 요리도 반찬 가게를 통하지 않으면 먹을 일이
없으니, 손수 만든 요리라면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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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막 튀겨서 튀김옷이 바삭바삭할 때 밥과 함


께 먹고 싶지만.
“……가끔은 갓 만든 요리를 먹고 싶어진단 말이지.”
위생 문제 때문인지, 마히루는 어느 정도 식힌 뒤 밀폐 용기에 넣기
때문에 역시 다시 데워서 먹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튀김류도 오븐
토스터로 튀김옷의 바삭한 느낌을 다시 살릴 수 있지만, 갓 튀긴 것
에는 미치지 못한다.
물론 그래도 아주 맛있었지만, 역시 갓 만든 음식은 각별할 것이다.
별뜻 없이 단순한 바람이 입 밖으로 샜을 뿐인데, 꽤 뚜렷한 혼잣말
이 되는 바람에 마히루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집에 들여 달라는 뜻인가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얻어먹는 신세인데,
분수도 모르고 그럴 수는 없지.”
억울한 의심을 받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 단호하게 부정했지만,
마히루는 입가에 손을 댄 채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아마네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는다.
“……반반.”
“응?”
“식비를 반반씩 부담하고, 당신의 집에서 만든다면 생각해 보겠어
요.”
겨우 입을 연 마히루가 꺼낸 말은 아마네의 입이 떡 벌어지도록 만
들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농담이라고 할까, 무심코 떠오른 것을 말로 흘린 건데 .그걸 진지하
게 검토한 끝에 승낙할 줄은 몰라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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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의 집에 와서 음식을 하려고 생각할


까?
그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해도, 상대는 남자이고 속을 터놓는 관계
도 아니다. 보통은 불안하지 않을까.
“반반씩 부담하는 것은 내가 원하던 바고, 너무 많이 받아서 바라
마지않은 일이지만…… 넌 위기감이 없는 거야?”
“이상한 짓을 했다면 깨부수겠어요. 물리적으로. 재기 불능이 되도
록.”
“우와, 무서워. 오싹해졌어.”
“애초에 그러지 않아도, 당신은 리스크를 생각해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학교에서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
고 있겠죠?”
“만약 무슨 짓을 했다간 내가 파멸하겠지.”
아마네와 마히루 사이에는 압도적인 인망의 차이가 존재하는 데다
가, 마히루는 연약한 여자이기도 하다. 아마네에게 위험한 짓을 당할
뻔했다고 말하는 순간 아마네는 학교에 다닐 수 없어진다.
사회적으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고를 칠 만큼, 아마네는 멍청하
거나 생각이 없지는 않다.
그보다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쪽이 진심에 가깝지만.
“그리고.”
“그리고?”
“당신에게 저 같은 사람은 취향이 아닐 거 같으니까요.”
정색하고 단언하는 바람에 그만 쓴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만약 내 취향이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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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끈질기게 절 쫓아다녔겠죠. 그랬으면 전 당신한테 간섭


하지 않았을 테지만요.”
“마음에 드셨는지?”
“뭐, 안전한 사람이라고는 인식하고 있어요.”
“그거 정말 고맙네.”
그래도 되는 건가 생각했지만, 마히루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전
혀 없으므로 굳이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극상의 저녁밥을 완성된 상태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절호
의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아마네는 무해한 남자라는
칭호를 받아들이고, 마히루와 식사를 함께할 권리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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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시작되는 저녁 공유

마히루가 아마네의 집에서 요리하게 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


했다.

·비용은 재료비를 반반씩 부담하고, 인건비를 아마네가 추


가로 낸다.
·일이 생겨서 식사를 함께하지 않을 때는 그 전날까지 연락
한다.
·장 보기와 뒷정리는 분담한다.

맨 처음에 있는 인건비는 시간을 빼앗는 것을 미안하게 여긴 나머


지 아마네가 먼저 말해서 마히루가 받아들이게 한 것인데, 그 밖에는
딱히 다투는 일 없이 바로바로 정해졌다.
만들어 주는 걸 받아먹는 입장에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조건이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런고로 위 사항들을 정한 다음 날 마히루가 곧장 슈퍼 봉투를 한
손, 아니 두 손에 들고 찾아와서 요리 준비를 시작했는데.
“정말로 거의 쓴 흔적이 없는 새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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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
집에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있다는 남자의 로망이 구현된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아마네는 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으나, 거의 미사용 상태인 주방을 새삼스럽
게 지적받자 민망해진 것이 더 컸다.
“다 좋은 걸로 받았으면서, 돼지 목에 진주네요.”
“네가 쓸 거니까 진주도 가치를 찾겠지.”
“결과론이네요. 모처럼 마련해 놓은 조리 도구가 눈물을 흘리고 있
어요.”
“그럼 네 특기인 요리로 그 눈물을 그치게 만들어 줘.”
아마네가 나는 못하겠다고 깔끔하게 인정하자 마히루는 어이가 없
다는 표정을 보였지만, 그것도 이미 예상한 것이었는지 한숨만 쉬었
을 뿐 더는 뭐라고 하지 않는 눈치다.
“만들어 보겠는데, 조미료는 있나요?”
“있거든, 나를 무시하는 거야? 보존 방법과 유통 기한도 잘 지켰
어.”
“어머나, 의외네요.”
“뚜껑을 열지 않았으니까 말이지.”
“으스댈 일이 아니거든요. 뭐, 부족하면 일단은 우리 집에서 가져
와 사용하겠지만요.”
“고마워.”
“일단은 기본적인 조미료가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리고 오늘
메뉴는 독단으로 정했는데 괜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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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알지도 못하고 먹을 수만 있으면 되니까 뭐든 좋아. 가리


는 것도 없고.”
“그런가요. 그럼 바로 만들겠지만…… 조미료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세요.”
“이 바구니에 있어.”
“정말로 미개봉 상태로군요…….”
마히루는 조미료를 모아 놓은 바구니를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래도 미리 들은 게 있다 보니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서 수돗물로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럼 만들기 시작할 테니까, 당신은 거실에서 기다리든지 방에서
기다리든지 하세요.”
“그럴게. 도울 수 있는 일도 없으니까.”
“정말로 깔끔하게 인정하네요. 뭐, 요리도 할 줄 모르는데 괜히 어
슬렁거리면 곤란하지만요.”
“너도 너무 솔직해.”
“사실이니까요. 꾸밀 필요도 없잖아요.”
마히루의 말대로 명백하게 방해가 될 테니까, 아마네는 순순히 거
실로 돌아가서 마히루를 뒤에서 관찰하기로 했다.
손을 다 씻은 마히루가 재빨리 요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뭘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준비되어 있는 재료를 보면 일식일 것
이다.
그렇게 맛있는 요리를 자기 집에서 만들어 준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꿈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마히루가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
이면서 재료를 다듬고 있으므로 이건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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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아내가 생긴 기분인데.’


서로 그런 감정은 없지만, 이 상황이 가정을 꾸린 듯한 느낌이라서
무심코 상상하고 말았다.
딱히 마히루와 그렇고 그런 관계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지만, 미소녀가 자기 집 주방에 서 있는 상황 자체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역시 호의의 유무를 떠나, 귀여운 소녀가 직접 만든 요리를 차려 준
다는 시추에이션은 아마네의 가슴을 자극했다.
“……뭔가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이상한 억측은 하지 마.”
마히루가 돌아서지도 않고 날린 지적에 얼굴이 굳어질 뻔했지만,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들키진 않았다.
얜 묘하게 예리하다니까. 그렇게 감탄함과 동시에 마음을 졸이면
서, 아마네는 사념도 못 되는 남자의 감상을 지워 버리고 마히루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식탁에 요리가 놓이기 시작했다.


마히루가 메뉴를 정했으니 당연하지만, 건강을 지향하는 마히루다
운 일식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의외로 조리 도구랑 조미료가 있어서, 우리 집에서 가져올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내일부턴 좀 더 공을 들인 메뉴도 만들게요.”
“아니, 이젠 만들어 주기만 해도 고마워.”
조리 도구나 조미료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인지 조리
과정이 복잡한 것보다는 간단한 것이 많았지만, 색채나 접시에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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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은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마네라면 일단 만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생선 조림과 푸성귀
무침, 달걀말이에 된장국 등등 이것이야말로 일식이라는 생각이 드
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일식을 좋아하는 아마네로선, 살
짝 미안한 표정을 짓는 마히루에게 이런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엄청 맛있어 보여.”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마히루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앉았기 때문에, 아마네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혼자 사는 데다가 주방용 테이블이 작아서 어쩔 수 없이 거리가 가
까워질 수밖에 없다.
일단 손님용으로 의자가 두 개 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눈앞에 미
소녀가 있는 상황은 뭐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요리에 손을 대기 시작하자, 마히루의 미모를 운운할 마음
은 싹 가셨다.
잘 먹겠다고 말하자마자, 우선은 된장국에 입을 대 봤다.
그릇에 입을 댄 순간 풍겨오는 된장과 국물의 향기를 만끽하면서
천천히 마시자 향기와 똑같이 퍼지는 된장과 국물의 풍미.
인스턴트 된장국과는 완전히 다른 그 부드러운 맛은 완벽하게 계산
된 것이리라.
된장의 맛은 너무 진하지 않고, 국물의 풍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간이 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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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처음 먹었을 때 아주 약간 싱겁다고 느낀 건 다른 요리와 함께 먹을


것을 생각해서이고, 국물을 다 마셨을 때 적절하게 짭짤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간을 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싱겁다기보다는 기분이 편안해지고, 밥이랑 다른 반찬을 먹도록 유
도하는 맛이었다.
“맛있어.”
“고마워요.”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마히루의 눈이 희미한 안도감과 함께 살짝
가늘어졌다.
평소에도 맛있다고 말해 주긴 했지만, 눈앞에서 직접 그런 말을 듣
는 것은 또 다른 긴장감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자신의 반응을 살피던 마히루도 식사에 손을 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아마네도 반찬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차려진 것들을 하나씩 먹어 보고, 역시 마히루는 요리를 정말 잘한
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선 조림은 맛이 잘 배어 있으면서도 생선살의 수분이 잘 보존되
어 있었다.
맛이 배도록 오래 가열하면 당연히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푸석한 식
감이 되기 마련인데, 이 생선은 살이 탱탱하고 식감도 좋았다.
달걀말이는 아마네의 취향을 완전히 직격하는 맛이었다.
표면의 선명한 노란색에 이끌려 입에 넣어 봤는데, 역시 같이 들어
간 육수의 부드러운 풍미가 느껴졌다.
달걀말이에는 설탕을 넣는 파나 소금만 넣는 파 등 다양한 취향이
있지만, 이건 육수를 섞어서 만든 달걀말이였기 때문에 육수의 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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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약간의 단맛이 가미되어 있었다.


은은하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이 단맛은 벌꿀일까.
양은 많이 넣지 않았겠지만, 감칠맛이 느껴지는 단맛이 맛의 깊이
를 더해 주고 있었다.
단맛이 나는 달걀말이도 짠맛이 나는 달걀말이도 싫어하진 않지만,
가장 좋은 것은 우려낸 국물 속에서 단맛을 느끼게 하는 기품 있는
맛. 그렇게 생각하는 아마네는 이 이상적인 달걀말이에 감동까지 느
끼고 있었다.
맛있다. 누가 들으랄 것도 없이 중얼거리고 또 입으로 옮겼다.
익힌 상태도 완벽했다. 육수를 포함하고 있어서 탄력이 있게 느껴
지는 식감을 천천히 씹고 즐기면서 조용히 맛을 감상했다.
어머니보다 월등히 요리 실력이 좋다. 여기엔 없는 어머니에게 실
례가 되는 생각을 몰래 하면서 행복하게 맛보다가, 마히루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맛있게 먹네요.”
“실제로도 맛있으니까. 맛있는 것에는 경의를 표해야지.”
“네, 그건 그렇죠.”
“그리고 무표정하게 먹는 것보다 솔직하게 맛있다고 말하는 게 둘
다 기분이 좋지 않겠어?”
맛있다고 생각해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만드는 사람은 불안
하고 괜히 신경이 쓰일 것이다. 무표정하게 맛있다고 하면 정말로 맛
있는지 확신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솔직한 감상을 표정으로 드러내서 말하는 게 서로에게
더 좋겠지. 감사하는 사람도, 감사를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은 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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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바람직하니까.
“……그러네요.”
아마네의 말을 듣고 납득했는지 마히루가 아주 약간 미소를 지었
다.
긴장이 풀린 것 같은, 안도감이 포함된 부드러운 미소는 한순간 아
마네의 모든 생각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귀여웠다.
“후지미야 군?”
“아……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신이 팔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므로, 아마네는 슬며시 느껴지는
부끄러움을 억지로 숨기려는 듯이 저녁밥을 계속 입으로 옮겼다.

“……잘 먹었습니다.”
“차린 게 별로 없어서 죄송하네요.”
식탁에 놓인 요리를 깨끗이 비운 아마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
사하자, 마히루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온화했으며, 이렇게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준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맛있었어.”
“보면 알아요.”
“우리 어머니 밥보다 더 맛있었어.”
“여자가 차린 요리를 어머니의 것과 비교하는 건 금기라고 들었는
데요.”
“그건 나무랄 때만 그런 거 아니야? 근데, 마음에 걸려?”
“마음에 걸리진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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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그럼 상관없잖아. 맛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마히루의 요리 솜씨는 짧은 요리 경험으로는 절대로 배양될 수 없
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요리 경험만 따지자면 아마네의 어머니가 더 오래됐겠지만,
간의 취향이 다르거나 엉성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계산된
마히루의 맛에는 대적할 수 없었다.
애초에 어머니보다 오히려 아버지가 더 요리를 잘했기 때문에, 어
머니랑 비교해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었지만.
“……아, 지금의 난 너무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모르겠네. 매일 이
런 걸 먹을 수 있단 말이지.”
“양쪽 다 다른 일이 없는 한은 그렇게 되겠죠.”
“……이거, 정말로 매일 이렇게 같이 식사해도 되는 거야?”
“싫었다면 제안도 안 했어요.”
“뭐, 그건 그렇겠지만.”
솔직한 마히루의 성격을 볼 때, 싫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임을 잘 안다. 그래도 정말로 이렇게 만들어 주는 걸 먹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되었다.
재료비 절반에 인건비도 지불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히루의 부담이
너무 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요리를 만들어 주는 게 보
편적인 일이야?”
“당신이 너무 건강을 챙기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만드는 것
자체를 좋아하고, 당신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싫지 않아요.”
“그래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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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마음에 걸린다면, 저는 딱히 만들지 않아도 되는데


요?”
“아뇨, 만들어 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즉답하고 만 것은, 그만큼 마히루의 요리가 아마네
에겐 필요하며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아마네에게 마히루의 요리를 빼앗기는 것은 의외로 사활이
걸린 문제로 발전한다.
위장을 인질로 잡혔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지만, 마히루의 요리가
너무 맛있는 게 문제였다. 이러다가 반찬 가게에서 파는 반찬으로 때
우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아무 맛도 못 느끼는 시시한 매일이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알기 쉽게 대답하는 아마네에게 어이없어하던 마히루가 쓴웃음과
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얌전히 드세요.”
“……응.”
참으로 자비로운 천사님과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나날은 아직 더 이
어질 것 같아서, 아마네는 기쁨과 죄책감과 기대감 때문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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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제9화 천사님의 생일

“아마네~ 시험 어땠어?”
기말고사 일정이 겨우 끝나면서 지옥 같은 시험에서 해방된 학생들
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마네와 이츠키 역시 시험이 끝난 것에 안도하면서 이번 결과를
평가하고 있었다.
“응? 보통이야.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물어보니까 대답은 했지만, 특별히 할 말은 없다. 시험 범위에서 그
대로 나왔기 때문에 평소에 복습을 했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
었다.
이번에도 시험 결과는 지금까지와 같았기 때문에, 아마네로선 딱히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다.
아마네는 매사를 귀찮아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복습을
빼먹진 않았다. 수업에서 배운 건 대개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만점은
어려워도 80~90점은 확보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대체로 30등 안에는 든단 말이지……. 범생이
녀석.”
“평소의 행실이 좋은 거지.”
“평소의 네 행실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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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연애에 정신이 팔려서 공부를 소홀히 하는 녀석이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아마네와 이츠키의 차이는 머리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여자 친구인
치토세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이츠키도 이해력은 좋았기 때문에 성실하게 공부하면 나름대로 높
은 등수에 올라갈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치토세와의 시간을 우선시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네보다는 등수가 낮았다.
“……여친이 있으면 좋거든?”
“그러시겠죠.”
“아마네도 말이지, 여친 만들어 봐.”
“원한다고 해서 사귈 수 있으면 이 세상 남자들이 피눈물을 흘릴
일은 없을 거야.”
원해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은 산더미처럼 많으므로, 이츠키의 부주
의한 발언은 듣는 사람에 따라선 매우 짜증 날 것이다.
아마네는 딱히 눈총을 줄 생각도 없고, 애초에 현재로선 애인을 바
라지 않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기지만.
“애초에 사귀어서 뭘 어쩌자는 건데?”
“더블 데이트.”
“그래 봤자 나랑 가공의 여친만 닭살이 돋고 끝날 텐데.”
“우리한테도 해 보라고!”
“내 성격으로 그게 될 것 같아?”
“……못 하겠지.”
“그렇지?”
아마네는 자신이 담백한 성격임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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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것을 싫어해서 사람에 따라선 차갑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성격과 담백한 말투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않는다. 애초에 성격
부터가 애인이 생길 수 없다.
만일 여친이 생긴다고 해도, 정말 싱거운 관계가 될 것이다. 적어도
이츠키처럼 남들 눈도 의식하지 않고 러브러브하게 구는 관계가 될
리는 없다.
“아니,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찾아보라고. 너는 앞머리만
조금 치고 시원하게 세팅하면 여자들이 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아마네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한다고 생각한다. 유타 같은
꽃미남도, 이츠키처럼 약간 가볍게 보이면서도 단정한 용모도 아니
지만, 결코 못생긴 건 아니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몸단장을 제대로 하고 멋을 부린다면, 웬만한 남자 고등학생과도
손색없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자신을 꾸미고 상대를 서글서글하게 대할 만큼 융통성이
있진 않았다.
“외모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 중에 괜찮은 사람은 없어.”
“그렇긴 하지만, 우선 그 사람의 성격부터 알고 흥미를 가질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딱히 여친을 사귀고 싶진 않아.”
설령 여친이 생겨도 아마네의 본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실망할 것
이다.
아마네는 흐리터분한 성격에 생활 능력이 없는 인간이며, 게다가
무뚝뚝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끌리는 여자가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
며 스스로 쓴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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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는 남에게 일일이 간섭하기 귀찮다는 식으로 사교성과는 거


리가 먼 성격이다. 여친이 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마히루가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에, 만
일 여친이 생긴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귈 예정
은 눈곱만큼도 없으므로 불안하진 않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누
군가를 사귈 생각은 없었다.
아마네의 머릿속 우선도에 따르면 ‘마히루의 요리 > 아직 모르는
여친’이다. 이건 아마도 그리 쉽게는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담백한 녀석이라니까……. 치이의 친구를 소개해 줄 수도 있거
든?”
“괜한 참견이야, 멍청아. 애초에 치토세의 친구라면 틀림없이 하이
텐션인 사람일 텐데, 나는 누군가를 친구로 사귀는 것조차도 힘들다
고.”
“아마네 넌 음침하니까 말이지.”
“시끄러워.”
“뭐, 네가 그렇다면 나도 당장은 더 말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화려
한 고등학교 생활 중에 여친도 없이 혼자 지내는 건 괴롭지 않아?”
“됐어. 귀찮아.”
학교생활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따질 만큼 성실하게 생각한 것
은 아니지만,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니 사귀고 싶다는 생각도 없
다.
애초에 좋아하는 상대는 그리 쉽게 나타나지 않고, 쉽게 맺어질 수
도 없는 법이다.
“……아깝게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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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다고 쳐.”


“하지만 뭐,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바뀔걸?”
“왜 그렇게 단언하는 건데?”
“너 같은 인간일수록 여친을 무지 아끼는 법이거든.”
“멋대로들 말하세요.”
자신이 그렇게 애교가 넘치는 인간이 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다. 아
마네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이츠키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
었다.
이츠키는 그런 아마네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갑자기 시선을 돌리더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잇군, 같이 가자.”
“오, 치이구나.”
마침 치토세가 온 모양이었다. 귀가 약속을 잡았는지, 아마네는 그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이야기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붉은 기가 감도는 밝은 갈색 머리를 중간 길이로 자른 보
이시한 소녀가 활짝 웃으면서 이쪽, 정확히는 이츠키를 향해 손을 흔
들고 있었다.
발랄한 분위기랑 밝은 미소는 보고 있는 사람이 눈부실 정도였다.
성격도 외모 그대로 붙임성이 좋아서, 좋든 나쁘든 시끌벅적한 분위
기를 담당하는 소녀였다.
마히루와는 다른 타입의 미인인 치토세는 이쪽으로 뛰어오면서 생
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길 바랐던 것은, 치토세가 말을 하기 시작하
면 대부분은 아마네가 놀림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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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마네 같은 타입이 실은 여친을 무지


아낄 거라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니까.”
“응? 뭐야, 아마네한테 여친 있어?!”
“없어.”
“에이, 뭐야. 있으면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체엣.” 하고 아쉬워하는 치토세.
“네가 말하는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과격한 스킨십을 뜻하잖아. 가
공의 여친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야.”
“뭐, 이매지너리 걸프렌드가 있었어?”
“만약 생겼을 경우를 이야기하던 거였잖아?!”
“농담이야. 농담.”
“널 상대하면 피곤해…….”
“아마네가 체력이 부족한 것뿐이야.”
“기력까지 다 뺏기거든…….”
체력을 운운하기 전에 정신적으로 지친다. 안 그래도 평소 친한 사
람들이 아니면 잘 대화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무기력한 생활을
보내기에, 치토세처럼 한없이 텐션이 높은 인종과 대화하는 건 정
말 힘든 노릇이다.
다소 차갑게 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치토세는 진이 빠진 모습을
보이는 아마네에게 “변변치 못하네.”라고 말하면서 실로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츠키도 웃으며 “빨리 익숙해져.”라며 성의 없는 충고
만 하는지라, 아마네는 그저 지쳐서 한숨을 푹푹 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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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고 있는 거야?”
집에 돌아온 아마네는 마히루가 직접 만들어 준 요리를 깨끗이 비
웠다.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와 보니 마히루가 거실에서 시험지를 펼
쳐 놓고 있었다.
설거지는 교대제이지만 되도록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아
마네가 솔선해서 맡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마히루는 거실에 앉아 있
다. 듣자니 일을 시켜 놓고 바로 돌아가는 건 뭔가 미안하기 때문이
란다.
“채점이에요.”
“뭐, 그건 보면 알겠지만.”
재검토하는 건가. 교과서를 꺼내서 틀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과는 어때?”
“답안지에 잘못 적은 곳이 없다면 만점이네요.”
“역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너무나도 깔끔하게 만점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아마네도 딱히 거창
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놀라지 않은 것은 정기 고사 때 맨 위에서 이름이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히루라면 그렇겠거니 해서, 만점 소리를 들어도 역시 그렇구나
하는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공부는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애초에 다음 학년 분의 이수 내용
전체를 먼저 공부해 놓고 있으니까 복습으로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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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무서워. 용케도 그렇게 할 수 있구나…….”


“후지미야 군도 어지간히 공부를 잘하잖아요.”
“내 성적을 알고 있었어?”
“학교에 게시되는 등수표에 들어가는 사람은 대충 기억하고 있어
요.”
듣자니 말을 걸기 전에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교 10등 안에 들지 않으면 안중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
외로 잘 챙겨 보고 있었는지 아마네의 저번 등수를 바로 말했다.
아마네가 그럭저럭 공부하는 것은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라는
성실한 사상 때문이 아니라, 가족과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성적 유지가 자취 생활의 조건이었으니까.”
혼자 살려면 성적은 유지하라. 그렇게 정했다.
그 밖에도 반년에 한 번은 얼굴을 보이라는 등의 조건도 있지만, 그
건 방학 기간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된다. 그러니 기본적으론 성적만
잘 유지하면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다.
“곤란해지지 않을 정도로는 공부하고 있지만 너 정도는 아니야. 용
케도 그렇게 노력할 수 있구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히루가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에 가려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밝은 표정이 아닌 건 분명하
리라.
하지만 바로 고개를 들고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지적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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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으리라. 아픔을 애써 참는 분위기였


으니까.
마히루는 때때로 그런 표정을 보였다.
뭔가 힘들거나 싫은 일이 있어도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뭔
가에 붙잡혀 발버둥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원인이 가정 환경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언급하기도 쉽지 않았다.
타인인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임을 잘 알기에, 아마네는
그 부분을 애써 건드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옆집 사람의 적당한 거리
감을 유지하려 했다.
아마네도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는 부분은 있다. 무단
으로 침범하는 것이 실례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더
고맙게 느껴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조금 전의 분위기를 감춘 마히루는 “슬슬 갈게요.”라고 평소의 차
분한 목소리로 말한 뒤에, 가방에 교과서와 시험지를 다시 집어넣고
있었다.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그래.”라고만 대답하고, 돌아갈 준비
를 하는 마히루를 바라봤다.
마히루가 가방을 챙겨 일어난 후, 아마네는 빈 컵 뒤에 자신의 물건
이 아닌 것이 놓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손으로 집어 보니,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학생증이 든 케
이스였다.
필시 교과서를 꺼낼 때 같이 꺼냈다가 도로 챙기는 것을 잊은 것이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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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사진에 성명, 학생 번호, 생년월일, 혈액형 같은 간단한 정보


들이 적혀 있는 그걸 바라본 뒤에, 돌아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마히루에게 말을 걸었다.
“이걸 놓고 갔어.”
“아아,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그럼 잘 자요.”
“잘 자.”
정중하게 허리를 꾸벅 굽혀 인사한 뒤에 집을 나간 마히루를 배웅
하고, 아마네는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에 본 학생증에 적혀 있던 생년월일…… 특히 월일 부분을
떠올리면서 이마를 짚었다.
“……나흘 후잖아.”
학생증을 보지 않았으면 모른 채로 넘어갔을 마히루의 생일. 아마
네는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또다시 한숨
을 깊게 쉬었다.

“그러고 보니 너, 뭔가 갖고 싶은 건 없어?”
다음 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대로 저녁 식사 시간에 마히루에
게 바로 이야기를 꺼내 봤다.
생일에 선물을 주는 것은 딱히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평소에 신
세를 지는 사람에게 감사의 의미도 겸해서 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하
에 선물을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 질문은 틀림없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리라.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직접적으로 물었다고 후회하는 동안, 마히루
가 의아한 눈으로 아마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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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너는 그다지 물욕이 없는 것 같아서 호기심에 한번 물어본 거야.”
“참 갑작스럽네요…….”
좀 더 잘 둘러댈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이미
말을 꺼내 버렸으니 취소할 수는 없다.
다행이라고 할까, 생일 생각은 하지 않은 눈치다.
마히루의 입장에선 아마네가 생일을 알 리가 없으므로, 애초에 염
두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네요, 필요한 거라. 지금 가지고 싶은 건…….”
“가지고 싶은 건?”
“숫돌이네요.”
“……숫돌?”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만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고생에게 갖고 싶은 걸 물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을 것이
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여고생이라면 화장품이나 액세서리나 가방 같은 걸 원할 것
이다. 설마 금속을 연마하는 도구를 원할 줄이야. 아마네는 미처 예
상하지 못했다.
“그래요, 숫돌. 몇 개 있긴 하지만, 입자가 더 가는 연마석을 가지
고 싶어요.”
“이봐, 현역 여고생.”
“저에게 일반적인 여고생을 요구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네도 반론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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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빈말로도 마히루를 평범한 여고생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천사라는 별명이 붙은 시점에서도 터무니없지만, 문무를 겸비한 재
녀에다 요리를 잘하고 집안일도 완벽. 칠칠치 못한 아마네를 이래저
래 돌봐 주는 것만 봐도 어느 집안 며느리냐 싶을 정도로 바지런하고
가정적인 소녀였다.
‘아무리 그래도 숫돌을 예상할 수 있겠어?’
숫돌을 원하는 여고생은 마히루 말고 없을 것 같다.
“스스로 사진 않는 거야?”
“딱히 사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다지 쓸 기회가 없는 데
다, 비싸니까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뿐이죠. 기본적으로 칼을 갈 수
있는 건 가지고 있으니까, 딱히 더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
고요.”
아무렇지 않게 몇 개나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무섭
다.
“부엌칼을 가는 여고생이라니, 그건 좀…….”
“의외로 많이 있는데요.”
“있다곤 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엔 너밖에 없고, 숫돌을 원하는
사람도 너뿐이야.”
“레어하다는 뜻이니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인데…….”
너무 레어해서 취향이나 원하는 게 뭔지를 전혀 모르겠다.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아서 망연자실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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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있잖아, 이츠키.”
마히루가 원할 만한 걸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츠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치토세라는 여친이 있고, 여자 마음도 잘 안다. 일반적인 여자가 원
할 만한 것은 얼추 파악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과연 마히루를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기뻐하는 거라면 싫어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한다.
“왜?”
“이츠키 넌 치토세에게 선물로 뭘 주고 있어?”
여친에게 뭘 주는지를 물어보는 게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질문을 받은 이츠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마네를 바라봤다.
“뭐? 너, 마음에 둔 여자에게 선물이라도 하려는 거야?”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여?”
“아니지.”
“그렇지?”
“그럼 왜 묻는 건데?”
“아는 사람의 생일이 가까워서 참고삼아 묻는 거야.”
참고로 삼는 게 아니라 아예 그걸로 선택할 생각이었지만, 거기까
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
“흐응. 그야 원하는 걸 주는 게 제일 좋겠지. 하지만 이런 건 평소
부터 미리 조사해 두는 게 중요하면서도 원만하게 끝나는 비결이
야.”
“딱히 사귀는 사람이 아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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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마히루가 여친이면 여러모로 위험이 느껴질 것이고(주로 주위의 살


기 때문에), 애초에 너무나도 송구한 노릇이다.
확실히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담백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이
맞는다. 그래도 연애 감정은 전혀 없었다.
당연히 귀엽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이상의 수준까지는 발전되지 않
는 그런 감정이었다.
“원하는 거라…… 만약 그게 뭔지 모른다면?”
“얼마나 친하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친하다면 액세서리 같은 것도
좋지만, 친하지 않다면 부담스럽지 않은 작은 물건이나 시간이 지나
면 사라지는 것이 무난할 거야. 꽃 같은 건 기쁘지만 받아도 곤란한
경우가 제법 많아.”
“……자세히도 아네.”
“뭐, 나름대로 공부했으니까 말이지.”
이츠키와 치토세는 처음부터 서로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며, 중학
생 시절부터 천천히 거리를 좁혀 갔다고 한다. 다른 중학교를 다녔던
아마네는 몰랐지만, 많은 장벽을 돌파하면서 교제하는 사이로 발전
했다며 지금도 애인 자랑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치토세에게 선물할 때도 상당히 고민했다고 하니, 그 선택이 신중
히 생각한 끝에 나온 결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핸드크림은 대부분 싫어하지 않아.”
“핸드크림?”
의외의 선택지를 듣고 아마네가 되묻자, 이츠키가 씨익 웃으면서
득의양양하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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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어떤 연령대든 비교적 많이 사용하잖아? 학생이라면 수업에서 노


트랑 교과서를 만지다 보면 손이 쉽게 건조해지고, 사회인이라면 키
보드나 환기 문제 때문에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고, 주부라면 집안일
로 물을 많이 접하니까 피부가 거칠어지기 쉬워. 선물로서는 무난
해.”
“흐응. 너무 자세히 알고 있어서 오히려 식겁한데.”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이츠키가 등을 찰싹 때렸지만, 진심을 담은 게 아니므로 서로 웃으
면서 넘겼다.
‘핸드크림이라.’
확실히 그거라면 있어도 난감하진 않을 것 같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는 아마네가 주도적으로 하고 있지만, 마히루
도 자신의 집에서 할 때가 있을 테니까 손이 거칠어지지 않는다고 장
담할 순 없었다.
아니, 평소에도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손이 매끄러운 것일 테
지. 피부 트러블을 예방하는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이
다.
“뭐, 참고는 됐어.”
“나중에 치이한테도 물어봐. 같은 여자라면 우리와는 다른 아이디
어가 있겠지.”
“……으엑.”
“이제 그만 좀 익숙해져.”
물론 치토세를 싫어하진 않지만 대하기 껄끄러운 타입이다. 만나러
가는 건 미묘하게 내키지 않아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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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가 유쾌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이번에는 다정하게 등을 두들겨


주었다.

“뭐어? 아마네가 여자에게 생일 선물?”


별일이 다 있다면서 생글생글, 아니 히죽히죽 웃고 있는지라, 아마
네는 안면이 떨리지 않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방과 후에 치토세의 교실로 찾아가 물어봤는데, 예상대로 하이텐션
으로 반응을 보였다. 참고로 이츠키는 아마네라면 걱정할 필요가 전
혀 없다는 듯이 치토세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먼저 돌아가 버렸다.
정말 들뜬 듯이 웃는 치토세를 보면서, 아마네는 슬쩍 한숨을 쉬었
다.
‘이래서 싫었다고, 치토세에게 부탁하는 건.’
이런저런 질문을 받거나 놀림을 당할 것이 뻔한데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물론 본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대하기 껄끄러운 점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잇군이 ‘아마네가 치이에게 부탁할 게 있대’라고 문자를
보낸 거구나. 오호라. 내 힘을 빌리고 싶다는 말이지.”
“부탁할 수 있는 여자가 치토세 너밖에 없어.”
“그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것도 좀 그런데 말이지.”
이건 좀 질렸다, 아니 이건 좀 불쌍하다는 시선을 아마네는 그냥 넘
겨 버렸다.
실제로 아마네의 지인 중에서 여자라곤 치토세밖에 없다. 같은 반
여자들과는 어디까지나 얼굴을 아는 사이일 뿐이며, 뭔가를 부탁할
수 있을 만큼 친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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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같은 반 여자들도 평소에 눈에 잘 띄지 않고 얌전한 인간이


라고 여기던 아마네가 갑자기 말을 걸어 봤자 난감한 반응밖에 보이
지 않을 것이다.
“뭐, 아마네가 여자의 마음을 알 리는 없을 테니까 좋아. 이 치토세
가 상담을 받아 줄게.”
“……조금은 믿고 있어.”
“조금이 뭐야, 조금이. 이렇게 보여도 여자의 마음은 꽉 잡고 있거
든!”
“그야 너도 조금은 여자니까.”
“이럴 때 조금을 붙이면 안 되잖아! 내 어디가 남자로 보인다는 건
데.”
치토세는 “어흠.” 하고 가슴을 당당히 폈지만, 슬프게도 마히루를
매일 보는 아마네의 기준으로는 몹시 부족해 보였다. 시선이 바로 툭
떨어질 정도다.
하지만 남자들에겐 인기가 많다.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좋아서, 누구와도 가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치토세는 마히루와는 또 다른 인기가 있었다. 남녀 모두와 사이
가 좋은 무드 메이커 같은 존재였다.
중학생이었을 때는 육상부에 있었다고 하는데, 슬렌더한 체형과 탄
탄한 다리가 보여 주는 각선미가 상당히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츠키가 “내 여친 몸을 빤히 봤다간 혼날 줄 알아.”라고 남자들에게
충고할 정도로 다리가 예쁘다는 것은 인정한다.
“아아, 네네. 귀여운 여자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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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성격이 약간 지나치게 사근사근할 뿐이지, 귀여운 건 확실


하다. 인기가 있는 이유도 알 것 같다.
“너도 참…… 태도가 그러니까 남들에게 오해를 사는 거라고.”
“괜한 참견이거든.”
“그래, 그러세요. 그건 그렇고 여자애에게 주려는 거지? 어떤 애
야?”
그걸 듣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다는 듯이 질문하는 치
토세. 아마네는 섣불리 잘못 말했다간 끝장이며, 놀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는 여자, 비교적 젊어. 그 이상은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저기 말이야……. 성격이나 취향을 모르면 아무리 나라도 제안해
줄 수가 없어.”
“네 감성을 바탕으로 받으면 기쁠 것 같은 걸 말해 줄래? 그중에서
고를게.”
“말할 마음이 없다는 건 알았어. 어쩔 수 없네.”
치토세가 하는 말은 지당했지만, 이야기했다간 아마네가 젊은 여자
와 친하게 지낸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엇나가면서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진상을 확인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가급적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기
로 했다. 치토세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는지 얌전히
물러났다.
“음음, 그렇단 말이지…… 어떤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대
화는 하는 지인…… 뭐, 이런 경우 내가 아마네 정도로 친한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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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받고 기쁠 만한 것을 가정한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기본적으로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소모품이나 일용품이려나.”
“이츠키도 비슷한 말을 했어.”
“역시 잇군은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남자라니까. 그래서 말인데, 부
담 없이 줄 거라면 과자라든가 손수건이랑 파우치 같은 작은 것들이
적당하려나. 내가 아마네한테 액세서리 같은 걸 받으면 ‘왜 이러지?!
뇌물인가?!’라는 생각이 들 것 같으니까.”
“너에게 뇌물을 줘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
무슨 득이 있겠냐는 뜻이 담긴 시선을 주자 “뭐, 그건 맞는 말이
네.”라고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소품류가 무난하겠어.”
“……그렇군.”
“그런 걸론 불만이야?”
“불만스럽진 않지만…….”
물론 불만스럽진 않지만, 정말로 기뻐할지 걱정이다.
방금 언급한 소품류로 선물을 주려면 센스가 필요할 것이다. 마히
루는 아마도 상당히 취향이 고급일 것이며, 질과 기능성을 둘 다 만
족하는 것을 골라서 사용할 타입으로 보였다. 아마네가 고른 것이 마
히루의 마음에 들지를 알 수가 없었다.
치토세는 아마네가 미묘하게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감지한 듯
“음음.”하고 나지막이 읊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 그럼 귀여운 것은 어떨까.”
“……귀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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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귀여운 것…… 예를 들어서


동물 인형이나 마스코트 키홀더, 그런 것들을 주는 것도 좋은 선택일
거야.”
아마네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서 눈을 연신 깜박이고 있으려니,
치토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여자애는 대부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귀여운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지. 동물 인형은 어른이 된 뒤에도 모으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
는 여자애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
“……동물 인형이라.”
마히루가 그렇게 풋풋한 취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귀여운 프릴이 달린 옷이나 딱 봐도 여자애답게 하늘거리는 옷을 입
고 있었던 적도 있으니까, 귀여운 것을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아마네가 인형을 준다면 마히루는 기뻐할까.
“오, 흥미가 좀 동하신 것 같은데?”
치토세가 아마네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듯 웃었다. 아마네는
미묘하게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인형을 사면 징그러울 텐데.”
“선물을 주겠다면서 그런 걸로 망설이는 거야?”
“역시 이 나이의 남자가 동물 인형을 안고 계산대까지 걸어가는 건
부끄럽다고.”
“겁쟁이.”
“윽.”
그 말이 전적으로 옳았지만, 지적을 받으니 괜히 더 뜨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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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같은 건 버려야 하겠지만, 애초에 혼자서 인형을 취급하는


가게에 가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치토세가 있으니,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가 달라
고 부탁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가능하긴, 하겠지만.
“치토세, 나랑 같이…….”
“같이……?”
“……팬시 용품점에 좀 가 줘.”
“어떡할까~.”
이렇게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바로 치토세라는 여자다.
물론 정말로 거절할 생각은 없겠지만, 다분히 의도적으로 고민하는
척하는 것은 틀림없이 아마네를 놀리기 위해서, 그리고 결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부탁이야. 진심으로 부탁할게.”
“음음, 가 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아마네, 나 말
이지, 갑자기 단 게 먹고 싶어졌어~. 역 앞에 있는 크레이프 가게에
기간한정으로 파는 엄청 맛있어 보이는 메뉴가 있던데 말이지~.”
“……사드리겠습니다.”
“야―호!”
능글맞게 요구하는 치토세를 보고 얼굴을 떨면서, 그래도 그 정도
면 싼값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크레이프 1인분, 혼자서 팬시 용품점에 들어가는 것보다
는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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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웃으면서 한껏 기분이 좋다는 걸 드러내는 치토세를 보고


아마네는 한숨을 크게 쉬고, 좌우지간 지갑 안에 있는 예산을 머릿속
으로 떠올려 보았다.

이츠키와 치토세의 조언을 통해 선물할 것을 고른 아마네는 생일


당일에 은근히 긴장한 표정으로 마히루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역 앞에 있는 크레이프 가게의 특제 크레이프(계절 한정 베리베리
스페셜)를 대가로 바쳐 치토세에게 부탁한 게 있어서, 그것도 선물에
추가하긴 했지만…… 언제 주면 좋을지 몰라서 끙끙대고 있었다.
생일을 맞은 당사자인 마히루는 정작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만들
고 있었다.
메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상 일식인 것 같았고, 역시 특별
한 느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지내고 있었다.
본인에게선 생일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인식이 머
릿속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
이었다.
그건 식사 준비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으며, 대화를 나누며 평
소처럼 식사를 했다.
어느 타이밍에 건네줘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소파 뒤에 숨
겨둔 선물을 담은 종이 봉투 쪽을 보면서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하여튼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돌아와 보니, 마히루는 마침 2인용
소파에 앉아서 지참해 온 걸로 보이는 책을 읽는 중이었다.
독서하고 있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니 역시 천사답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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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옆에 앉기가 미묘하게 망설여졌지만…… 그 자리를 피


해 봤자 마땅히 앉을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놓아둔 종이 봉투의
손잡이를 잡고 옆에 앉았다.
마히루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마네의 기척과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감지한 것이리라. 캐
러멜색 눈이 아마네 쪽을 향하고, 그런 뒤에 아마네가 손에 들고 있
던 종이 봉투 쪽으로 이동했다.
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의 마히루.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아직
생일 선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거, 줄게.”
툭 던지듯이 마히루의 무릎 위에 놓자, 한층 더 눈이 동그래졌다.
“뭔가요, 이게?”
“생일이잖아.”
“그렇긴 한데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전 아무한테도 말한 기억이 없는데.”
재빨리 경계의 빛을 살짝 보였지만 “학생증을 우리 집에 놓고 그냥
갈 뻔한 적이 있었잖아.”라고 밝히자, 납득했는지 원래 표정으로 돌
아왔다.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전 생일을 챙기지 않으니까요.”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하게 내뱉는 듯한 목소리로 들렸다. 착각은
아니리라.
생일이라는 말 자체에 왠지 모를 기피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그
런 눈빛이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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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생일인데도 태도가 전혀 변함이 없는가.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


기 때문이 아니었다.
생일을 의식하면 마음이 불편하니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것이
리라.
안 그러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그렇군. 그럼 평소 느끼는 감사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돼. 내
가 멋대로 고마움을 느껴서 주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생일을 축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평소에 느낀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생일 선물이 아니라 감사의 표
현이라는 구실로, 마히루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매일 맛있는 요리를 차려 주고, 때로는 청소도 도와주며, 소소하게
자신을 돌봐 준다.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이렇게 갚고 싶었다.
바로 물러서면서도 선물만큼은 넘겨주는 아마네의 모습에 마히루
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선물만은 어떻게든 주겠다는 태도에
눈썹을 늘어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시선이 종이 봉투 안에 든 것, 한 번 더 꾸러미로 포장된 것에 집중
되어 있었다.
“……열어 봐도 될까요?”
“응.”
고개를 끄덕이자, 마히루는 조심스럽게 종이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상자를 꺼냈고, 정성 어린 손길로 포장지를 열고 리본을 풀었다.
뭐랄까, 자신이 준 선물이 자신의 눈앞에서 천천히 개봉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묘하게 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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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물은 이츠키가 추천해 준 핸드크림이다. 큼직한 상자에 과자가


소소하게 딸린 것은 세트로 샀기 때문이다.
참고로 향이 좋거나 하는 세련된 것은 아니었다. 집안일에 곤란하
지 않게 냄새가 없으면서도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고 촉촉함을 유지
해 준다는 선전 문구로 팔리고 있는 것이었다.
인터넷 평판도 확인했기 때문에 효과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
다.
“뭐, 대단한 게 아니라서 미안하지만 말이야.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피부도 건조해질 거 아냐. 향기가 나는 것도 있
었지만 그런 건 네가 가지고 있을 것 같았어. 피부에 자극이 없고 효
과도 좋은 거래.”
“실용적이네요.”
“굳이 말하자면, 너는 실용성을 더 중시할 것 같아서.”
“그러네요. 고마워요.”
잘 아시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웃는 마히루를 보니, 아마네도
입꼬리에 약간 미소가 맺혔다.
반응을 보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지만…… 눈앞에서 개봉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기 때문에, 가능하면 집에 돌아가서 열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종이 봉투 안에 하나가 더 있다는 걸 이미 알아차렸는지, 마
히루는 종이 봉투 속을 봤다.
“왜 두 개나……?”
“아……. 아니, 그게 말이지. 독단과 편견이 낳은 덤이야.”
“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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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이야.”
시선을 돌리면서 그렇게만 대답했다. 마히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지만, 열어 보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는지 종이 봉투에서 그것을 꺼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종이 봉투 안쪽과 같은 색으로 포장해 달라
고 부탁했고, 바닥에 눕혀 두었지만 역시 크기가 눈에 띌 정도로 컸
다.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상자가 아니라 비닐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 크기는 딱 마히루의
품에 들어갈 정도였다.
진한 푸른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걸 마히루가 정성 어린 손길로 푸
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난 자리를 떠도 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때마침 마히루가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냈다.
마히루가 두 손으로 그 안에 든 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정말
의외라는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곰?”
마히루가 중얼거린 것은 선물의 바탕이 된 동물의 이름이다.
너무 크지도 않고, 초등학생 정도가 끌어안고 다니기 좋을 정도의
곰 인형.
마히루의 머리카락처럼 연한색 부드러운 털이 특징이며, 목에는 목
줄처럼 연푸른색 리본이 묶여 있었다.
어딘가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얼굴, 단추로 만들어 광택이 있는 검
고 동그란 눈이 마히루를 비추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나 되었는데 무슨 인형이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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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애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는 치


토세의 조언을 근거로 이걸 선택했다.
역시 남자 혼자 가서 사는 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역 앞 크레
이프 가게에서 크레이프를 대가로 바친 뒤에 치토세와 함께 가서 사
온 것이었다.
결국 고르는 시간부터 점원에게 부탁하여 포장하는 시간까지 시종
일관 치토세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지켜봤기 때문에, 혼자 가는 게 차
라리 덜 부끄러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여자라면 좋아할 것 같아서…….”
누구에게 변명하는 건지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건 긴장된다.
애초에 여자에게 뭔가 선물한 것은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이후로 처음이라서, 설마 이렇게 선물하게 될 일이 생기리라곤 생각
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귀여운 인형을 남자에게 선물로 받는 것은 역시 징그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반응을 슬쩍 살폈더니, 마히루는 한
참 동안 곰 인형의 얼굴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표정을 봐선 기쁜 건지 기쁘지 않은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며,
그저 계속 곰 인형을 바라볼 뿐이다.
“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버려도 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면서 가벼운
농담조로 그리 말하자, 마히루는 고개를 아마네 쪽으로 휙 돌리면서
눈살을 한껏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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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그러지 않아요!”
“으, 응, 시이나의 성격상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쩔쩔매면서 고개를 끄덕
이자, 마히루는 다시 한번 손에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바라봤다.
“……그런 심한 짓은 못해요.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가녀린 팔이 마치 감싸듯이 곰 인형을 끌어안았다.
어린아이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뺏기지 않으려는 몸짓처럼도, 아
이를 자상하게 감싸 주는 어머니의 몸짓처럼도 보였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없이 소중하게 그걸 끌어안았다는 사
실뿐.
마히루는 ‘꼬옥’이라는 효과음이 어울릴 것처럼 끌어안고, 살짝 시
선을 숙여 품에 있는 곰 인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이나 어이가 없을 때
보여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 어딘가 자애로
운 듯한.
그러면서도 풋풋함조차 느껴지는, 그 순진한 미소는 무심코 숨을
죽일 정도로 아름답고 귀여웠다.
‘――보는 게 아니었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어진다.
연애의 의미로 좋아하진 않더라도, 극상의 미소녀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저런 표정을 보고 말았다는 사실이 심장을
쿵쿵 뛰게 했다.
곰 인형을 소중히 끌어안고 희미하게 웃는 그 모습은, 누구라도 넋
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귀여웠다. 자신이 담백한 성격인 걸 자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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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있는 아마네조차 홀려 버릴 것만 같았다.
얼굴에 얼마나 열기가 몰린 건지, 손바닥으로 가리듯이 만져보니
평소보다 확실하게 뜨거웠다.
참 알기 쉽게 쑥스러워하고 있는 자신. 마히루에게 들리지 않을 정
도의 목소리로 “젠장…….”이라고 자신에게 투덜대고 말았다.
다행히 마히루는 아마네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 듯, 소중하게 끌
어안은 곰 인형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너무나 귀여워서,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목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뻐해 주니 나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그 말만을 겨우 입 밖에 냈더니, 마히루가 힐끔 아마네 쪽으로 시선
을 돌렸다.
“이런 걸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에요.”
“뭐, 너 정도로 인기가 많으면 자주 받을 줄 알았는데…….”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약간 어이가 없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바뀌는 걸 보고 안도한
것은, 그 표정을 직시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
겠다.
“……다른 사람한테 생일을 가르쳐 준 적은 없어요. 전 생일을 싫
어해서 남들에게 말하지 않으니까요.”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한 마히루가 곰 인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곰 인형을 향한 눈빛은 방금 했던 말과는 달리 온화했기 때문에, 왠
지 아마네의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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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모르는 사람이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선물을 주려고 해


도, 무서우니까 받지 않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건 받았네.”
“……후지미야 군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작은 목소리로 슬며시 그렇게 말하면서 곰 인형에게 얼굴을 파묻은
채로 쳐다보는 마히루를 직시하고 만 것을 후회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쪽을 올려다보는 마히루는 약간 풀어진 듯
그 나이에 어울리는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이어서, 쉽게
말하자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질 정도로 귀
여웠다. 자칫 머리를 향해 움직일 뻔한 손을 허둥지둥 힘껏 되돌리는
지경에 처했다.
‘……위험했어.’
방심하고 있었다간 그대로 마히루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그
런 짓을 저질렀다간, 모처럼 기뻐해 준 이번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다.
“……왜 그러죠?”
“아냐, 딱히 아무것도…….”
한순간 팔이 움직인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마네의 감정이 폭발할 뻔한 것을 눈치챈 것인지, 마히루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런 작은 동작만으로도 눈길을 빼앗길 것만 같으니, 미소녀란 존
재는 정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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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서 넋을 넣고 보고 있었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 역시 부끄럽


고, 말해도 ‘네?’라는 소리밖에 듣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네가 여러 의미로 죽을 것 같으니 이 충동은 속에 감춰
두기로 결심했다.
“……정말 고마워요, 후지미야 군.”
고개를 홱 돌린 아마네에게, 마히루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있잖아, 아마네, 선물을 준 상대와는 그 뒤로 잘됐어?”


선물을 살 때 같이 갔으니 그야 당연하지만, 다음 날 치토세의 히죽
거리는 웃음과 질문이 맞이해 주었다.
다른 반인 치토세가 방과 후에 반에 찾아온 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그
들과 헤어지고 싶은 기분이다.
“절대로 네가 상상하고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 그런 전개도 없
었거든.”
적어도 연애 감정을 품었던 것은 아니며,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다
는 생각으로 선물을 준 것도 아니다.
기뻐해 준 건 틀림없지만, 치토세가 기대하는 듯한 전개는 결코 없
었다.
“아니, 그게 있지. 네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잖
아. 어지간히 친밀한 지인이라는 뜻이니까. 그리고 여자. 그 정도면
억측을 받을 만도 하다고.”
“그런 수상한 관계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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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도 치토세의 편을 들었지만, 아마네는 그런 시도를 단칼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마히루가 기뻐해 준 것은 좋지만, 이렇게 귀찮은 일이 뒤따르기 때
문에 가급적 다른 사람에겐 의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호기심을 채우는 건 사양하고 싶어서 무뚝뚝하게 대꾸하
자, 이츠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입가에 손을 댔다.
“……음음. 저기, 아마네.”
“왜?”
“혹시 선물을 준 상대가 옆집 사람이야?”
정말이지, 이츠키는 정말로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다. 이럴 때는
성가실 정도로.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너와 관계가 있는 범위 안에서 아는 사람, 신세를 지는 범위에서
따져 보면 이웃 사람이겠지. 넌 이곳 출신도 아닌 데다 여자를 사귄
적도 없고. 얼마 전에 음식을 나눠주었으니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글쎄.”
“흐응. ……아마네, 요새 안색이 좋아졌단 말이지.”
“아, 나도 그런 생각은 들었어.”
“음식을 나눠주는 일이 상당히 자주 있었던 것 아냐? 그러니까 감
사의 표시로 생일에 선물을 줬다거나?”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맞추는 바람에 아마네는 얼굴이
실룩거리지 않게 유지하느라 필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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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현장에서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중하는 바람


에, 때로는 이츠키가 두려워진다. 촐랑거리는 듯하면서도 가끔 사려
깊은 모습을 보이는지라 실은 의외로 인기가 많지만, 그런 부분은 치
토세에게만 발휘해 주면 좋겠다.
“용케도 억측으로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구나.”
“사실을 모르니까 상상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래서? 진실은 뭐
야?”
“글쎄.”
“쩨쩨한 녀석.”
“쪼잔해~.”
“시끄러워.”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입을 열 생각은 없다.
무심코 입 밖으로 나왔다간 그걸로 끝장이다. 자신이 전부 실토할
때까지 추궁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츠키라면 그나마 모르겠지만,
사랑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생물인 현역 여고생은.
사랑이 전혀 없어도 사랑으로 이으려는 불가사의한 생물이 있기 때
문에, 참으로 귀찮기 그지없다.
“거참.”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집에 갈 준비를 끝내고 가방을 멨
다.
전략적 후퇴이자, 커플의 닭살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난 간다. 너희는 남의 사정에 간섭하지 말고 너희끼리 러브러브하
게 놀고 있어.”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건데?”
“잇군, 미행해서 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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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은 타깃이 있는 앞에서 할 것도 아니고, 네가 생각하는 그


런 일은 일절 없는 데다, 미행해 봤자 우리 맨션 공동 현관에서 막힐
거야.”
“쳇.”
귀엽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의외로 진심이 담
겨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실행할 것 같은 치토세에게
전율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두 사람을 놔두고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위험했어.”
“뭐가 말인가요?”
집에 돌아와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마히루가 이상
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녁을 만들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에 장을 보고 귀가했기에 함께
조금 느긋하게 있었는데, 그러다 혼잣말을 들어 버린 모양이다.
참고로 오늘의 마히루는 평소와 똑같다.
어제의 그 미소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
로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이것이 평소 모습이고, 제발 그래 주
길 바랐다. 그때의 그 표정을 보여주면, 자신의 심장이 저릴 것만 같
다.
“뭐, 그게 있지. 선물에 관해서 이츠키랑 치토세가 이상한 억측을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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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와 치토세에게 상담했었다고 추가로 설명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마히루도 이츠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아아, 그렇
군요.”라고 말하면서 이해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 후지미야 군이 살 법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아마네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 그 사실 자체가 두 사람이
생각하는 아마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연애 관련으로 심하
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리라.
실제로는 딱히 양자 모두 사랑에 수반되는 달달함이나 쌉쌀함, 쓰
라림 같은 감각이나 감정이 들지 않은데도.
“그냥 내 사정이야. 거참.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말이야.”
확실히 마히루는 귀여우며, 그때는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도 느꼈
다. 그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충동은 청소년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라고 생각하고, 애초에 마히루가 터무니없는 미소녀라는 것을 새삼
실감해서 가슴이 두근거렸을 뿐이니까, 이게 연애 감정일 리가 없다.
인간적으로 호감이 간다고 생각하지만, 마히루와 그렇고 그런 사이
가 되고 싶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힐끗 보니, 여전히 곱게 생겼다.
그러나 어젯밤처럼 심장이 마구 뛰지는 않았다. 자신은 마히루를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고, 슬쩍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므로 스
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문득 채팅 앱의 아이콘에 읽지 않은 메
시지가 몇 개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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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츠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앱을 열어 보니, 새로운 메


시지에 뜬 이름은 아마네의 상상을 벗어났다.
‘시호코’라는 이름을 보고, 아마네는 눈살을 찡그렸다.
아마네의 스마트폰에 있는 여자 연락처는 세 개. 그중 한 명이다.
그 내역은 치토세, 마히루, 그리고―― 어머니.
뭘 보낸 걸까 생각하면서 전용 대화창 화면을 열자, 아마네가 부담
스럽게 여기는 하이텐션의 문자로 시험은 잘 봤냐느니 생활에 불편
함은 없냐느니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치토세를 대하기 어려운 것은 가족 중에도 치토세와 닮은…… 그
이전에 치토세가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
람이 있기 때문이다. 싫어하진 않고 미워할 수도 없지만, 친어머니라
도 그런 성격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할아버지가 과일을 보내 주셨으니까 너한테도 좀 줄게. 너희 집으
로 보낼 테니까 토요일 오후에는 집에 있으렴! 수취 거부나 부재중이
뜨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멋대로 내 스케줄을 정한단 말이지…….”
토요일은 딱히 예정이 없어서 상관없지만, 좀 더 빨리 연락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왜 그러죠?”
중얼거린 말이 들렸는지, 마히루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아마네를 봤다.
“어머니가 토요일 오후에 할아버지 집에서 수확한 과일을 보내겠
대. 아마 사과일 것 같은데.”
“깎아 먹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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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러로 깎일까?”
“그야 깎이긴 하지만…… 두껍게 깎이니까 영양분이 좀 아까울 것
같네요.”
우리 어머니도 그런 말을 할 것 같다는 감상은 속으로 삼켰다.
“여차하면 그냥 씹어 먹지, 뭐.”
“와일드하네요.”
“귀찮으니까.”
“게으르네요.”
여전히 의견이 솔직한 마히루에겐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
에, 그저 어깨를 으쓱하면서 넘겼다.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마히루도 “뭐, 위장에 들어가면
별차이가 없을 테니까요.”라고 말하면서 납득하는 자세를 보였다.
“아, 맞다.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시이나도 필요
하면 가져가겠어?”
“그럼 좀 받아 갈게요. 과일은 단가가 높으니까요.”
왠지 주부 같은 발언을 하고 있지만, 이것도 마히루답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토요일이란 말이죠. 그러면 답례의 의미도 겸해서 미리 점심이라
도 만들도록 할게요.”
“신세는 늘 내가 지는데 말이지.”
“후지미야 군에게 만들어 주는 건 딱히 싫어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요.”
쿡, 하고 정말로 자그맣게 미소를 지은 마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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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어제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지라 왠지 민망해서, 아마네


는 미묘하게 시선을 돌리면서 “……그럼 부탁할게.”라고 무뚝뚝하
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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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어머니, 습격

어머니가 보내준 걸 받는 즉시 나눠주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는지


도 모르겠다.
인터폰 소리와 함께 “아~마네.”라는 톤이 높고 장난기 어린 목소
리가 들렸을 때, 아마네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토요일 점심을 만들어 주겠다던 마히루의 제안은 너무나 고마웠다.
하늘의 은총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만들어 준 카르보나라는 맛있었다. 진한 소스와 후추의 자
극이 잘 맞아떨어져서 너무나도 맛있었다.
딱히 마히루가 잘못한 건 없다. 그렇다. 마히루가 잘못한 게 아니
다.
잘못은 사전에 끈질기게 집에 있으라는 분부를 받고도 눈치 채지
못했던 아마네 자신과―― 서프라이즈를 좋아하여 황당한 짓을 벌이
는, 피가 이어진 이 아줌마에게 있을 것이다.
“……저기, 후지미야 군? 택배가 온 게…….”
“아니야. 여벌 열쇠로 공동 현관을 통과해서 직통으로 왔어, 어머
니가…….”
잘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시찰하러 오려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의
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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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머니가 장난을 치지 않고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 어머님?”
“아마 우리 어머니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러 왔을 거야……. 사
전에 말하지 않은 건, 미리 말했다간 내가 어떻게든 눈속임을 하려고
들 테니까 그런 거겠지.”
“아아…….”
“그 부분에서 납득하는 건 좀 복잡한 기분이지만, 지금은 그게 문
제가 아니야.”
문제는 지금 여기 있는 마히루를 어떻게 하느냐다.
어머니가 아직 입구에 있다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되지만, 이
미 집의 문 앞에 있기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어머니를 안으로 들이면 마히루와 마주치면서 엉뚱한
착각을 할 것이다. 그건 마히루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할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인터폰 소리의 간격은 점점 좁아
지고만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미안해, 시이나, 내 방에 잠시 좀 들어가 있어 줘. 부탁이야.”
“네, 네?”
“이걸 줄 테니까, 내가 어떻게든 어머니를 밖으로 끌어내서 나간
뒤에 집으로 돌아가 줘. 정말 미안하지만 부탁할게.”
아마네는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은폐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히루가 점심을 만들어 주었지만 설거지는 끝낸 상태니까 문제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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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은 신발장에 숨기면 들키지 않을 것이고, 지금 가져온 담요 같


은 마히루의 개인적 물건은 본인과 함께 방 안에 넣어 놓으면 된다.
방에 있게 하고, 시찰이 끝났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 준 요리가 먹고
싶다고 애원하면 아마 그 요구에 응해 주리라. 방의 시찰은 최선을
다해 거부해서 어떻게든 그냥 넘길 생각이었다.
일부러 냉장고에 없는 식재료를 써야 하는 메뉴를 희망하여 같이
장을 보러 나간다. 그사이 마히루는 탈출한다――. 이게 계획의 내용
이었다.
이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여벌 열쇠를 주고 아주 진지
하게 부탁하자, 마히루는 난감해하면서도 “네, 네.” 하고 고개를 끄
덕여 주었다.
참고로 창고 방을 숨길 장소로 고르지 않은 것은, 아무리 그래도 지
금 이 계절에는 난방이 없으면 춥기 때문이다.
아마네의 방이라면 난방도 되고 부드러운 쿠션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앉느라 허리가 아파서 고생하거나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잘 부탁할게. 나는 지금부터 어머니를 상대하러 갈 테니
까…….”
얼굴을 마주치기 전부터 이미 핼쑥해진 아마네가 현관으로 향하자,
마히루도 조용히 아마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네는 그걸 지켜본 뒤 떨떠름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어머나 아마네, 늦었구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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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름 방학 이후로 처음 만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이면서도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집에 있을
때 자주 봤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데는
얼굴만이 아니라 언동도 한몫했지만.
“네네, 건강하게 잘 지내니까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어머나, 엄마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일부러 몇 시간을 들여
서 여기까지 왔단다? 고생했단 말 한마디도 없는 거야?”
“멀리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세요.”
“어머나, 그런 식으로 말한단 말이지? 그렇게 귀염성이 없는 부분
은 슈토 씨랑 정말 하나도 안 닮았다니까.”
“귀염성은 남자에겐 필요가 없잖아.”
툭 내뱉듯이 말했지만, 어머니―― 시호코는 기분이 상한 모습을 보
이기는커녕 깔깔 웃으면서 “반항기가 왔구나.”라고 납득하고 있었
다.
“그럼 들어갈게.”
“잠깐, 들어와도 된다고는…….”
“여긴 나와 슈토 씨가 번 돈으로 빌린 곳인데?”
그렇게 말하면 반론도 거절도 할 수가 없는지라, 아마네는 정말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고 시호코를 안으로 들였다.
물론, 침실로 가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침실 쪽에 붙으면서 거실
로 유도했지만.
“저기, 어머니, 올 거라면 온다고 미리 연락해. 어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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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우리 아들이 똑바로 생활하는지 아닌지는 기습적으로 방


문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잖니?”
“윽. ……하지만 문제없잖아. 청소도 잘했고.”
“그러네, 깜짝 놀랐어. 아마네는 집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의외로 제대로 치우면서 살 수 있었구나. 생각하지도 못했어.”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둘러본 시호코는 감탄했다는 듯이 고
개를 깊이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마히루와의 공동 작업 덕분이며, 그 상
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히루의 충고와 주의 덕분이다. 결국 대부
분 마히루의 공적이지만, 그 사실을 시호코가 알 리가 없었다.
“피부도 좋아 보이는 것이, 잘 챙겨 먹고 사는 것 같구나.”
“……응.”
약간 시선을 돌리고 만 것은, 이것도 마히루 덕분이기 때문이었다.
“요리도 제대로 해서 먹고 있네. ……어머나, 하지만 2인분인 것 같
은데?”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이 식기가 놓인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은 둘이서 먹었기 때문에 당연히 접시도 2인분이었다. 그걸 아
마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주의가 부족했기 때문이지만, 시호코
도 눈이 날카로웠다.
“친구가 왔었으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라고 전제를 붙여야 하지만 친구 관계와 비슷한 사이를 구
축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성별을 숨기고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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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동요를 참으면서 담담히 대답한 아마네를 보고 시호코는


“흐응.”하고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꾸했고,
다시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겨우 아슬아슬하게 얼버무려 넘기긴 했지만, 식은땀이 나올 것만
같았다.
“뭐, 합격점……이랄까, 남자 혼자 사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
도로 잘 사는구나.”
시호코는 한동안 관찰하며 질의응답을 반복한 뒤에 총평을 내렸다.
어떤 의미에선 당연할 것이다. 대부분 마히루의 손길이 닿았으니
까.
“어머니가 걱정할 일은 없어.”
“그러네, 정말 놀랐어. 집에선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성장
했구나.”
“……아무리 나라도 성장은 해.”
잘도 그런 소릴 한다. 속으로 그렇게 자조하면서 대꾸하자, 시호코
도 방긋 웃으면서 “그래, 노력했구나.”라고 칭찬해 주었다.
역시 자신이 해낸 게 아니기 때문에, 미묘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일단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으니까, 이대로 참으면서
어서 돌아가 주길 바랐다.
기본적인 생활 체크는 끝났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요리를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집을 나
가 주지 않을까――. 아마네는 그런 생각까지 했지만.
“이제 방 체크만 하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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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떨어진 폭탄에,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


다.
방 체크. 즉 아마네의 방…… 침실을 체크하겠다는 뜻이다.
방에는 당연히 마히루가 있다. 들켰다간 당초에 예상했던 접촉 상
황보다 더 나쁜 대참사가 일어날 게 뻔했다.
“잠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내 방
에는 들이고 싶지 않다고.”
“어머나, 뭔가 보이면 안 될 거라도 있는 거니?”
“보편적으로 생각해 봐도 남자 고등학생 방에 그런 게 한두 가지는
있을 거 아니야.”
“그건 인정하는구나.”
“그래, 인정하니까 들어가지 마.”
지금은 전력으로 저지해야만 한다. 약간의 창피는 감수하더라도,
마히루의 존재는 끝까지 숨겨야만 한다.
지금 아마네의 방에 있는 마히루를 보면, 시호코는 틀림없이 자신
이 좋을 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거운 방향으로 망상을 폭주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시호코의 시선을 차단하듯이 문 앞에 서서 절대로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안 된다고 거절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바로
간파한 시호코가 “부모에게 뭔가를 숨기다니 너도 많이 컸구나.”라
고 방긋 웃으면서 압박을 가해 왔다.
미안하지만 여차하면 완력으로라도 거부할 마음을 먹고 시호코와
대치했지만.
퉁, 하고 방에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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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네.”
“뭘 숨기고 있는 거니.”
“……어머니하곤 관계없어.”
“그렇게 말한단 말이지, 알았어.”
싱긋. 웃음이 더 뚜렷해졌다.
그것은 거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압력의 미소. 매번 이 미소를 지
으면 아마네는 정말 마음이 약해지고, 거역할 기력이 대부분 사라지
고 만다.
이미 몸에 뱄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크윽.” 하고 낮게 신음한 아마네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시호코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아뿔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무슨 소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마네의 옆을 통과해 문을 연 시
호코.
문 너머에 펼쳐진 것은―― 침대 가장자리에 등을 기대고 무릎 위의
쿠션을 끌어안은 미소녀의 모습.
그것도 눈을 감은 채 일정한 리듬으로 자그마한 호흡을 반복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졸고 있는 마히루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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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난방이 되는 따뜻한 방, 점심을 먹은 후의 식곤증, 이것만으로도 이
미 졸음이 오기에 충분한 환경이다.
솔직히 생각해서 남자 방에서 잠이 오냐 하는 의문은 있지만, 일단
아마네를 해가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잠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꾸짖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도록 잠자코 있
다 보면 지루할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아마네가 머리를 붙잡은 원인은 어머니인 시호코가 와 있는 타이밍
에서, 그것도 이 상태를 어머니가 목격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오해를 살 것이다.
아마네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기 자신도 착각했을 것이다. 방에
들일 정도로, 그리고 방심하고 졸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말이다.
얼굴을 실룩이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힐끗 봤더니, 마히루를 본 눈
이 빛나고 있었다. ‘어머나, 어쩜 좋아!’ 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기분 탓일까.
“어머나, 아마네도 참, 이렇게 귀여운 여자 친구를 사귀다니! 너도
여간내기가 아니었구나!”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시호코를 보면
서, 아마네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오해를 사고 말았다. 게다가 잔뜩 흥분한 상태.
아들이 여친을 데리고 왔다고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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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은 시호코가 귀여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틀림없다.
확실히 마히루는 누구라도 미소녀임을 인정할 미모를 지니고 있다.
무방비하게 자는 중이라 무표정한 가면도 쓰지 않고 있었으며, 무
엇보다 표정이나 몸짓으로 속일 수 없는 그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
였다.
한없이 고운 얼굴은 현재 편안하게 풀려 있다.
익숙한 모습이긴 했지만, 다시 봐도 마히루는 극상의 미모를 지닌
너무나도 매력적인 소녀였다. 자는 얼굴은 순진했으며, 자신도 모르
게 만지고 싶을 정도로 무방비하고 귀여웠다.
쿠션을 끌어안고 새근새근 자는 마히루는, 공공연하게는 말하고 싶
지 않은 부류의 욕구를 너무나도 자극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아마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미소녀가, 시
호코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들의 여친(가정).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혹시 엄마를 오지 못하게 한 건 여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니? 세
상에, 못 본 사이에 남자가 다 되었구나.”
“아니거든! 전체적으로 여러모로 착각했어! 여친도 뭐도 아니야!”
“어머나, 변명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 엄마는 네가 고른 사람이
라면 반대할 생각이 없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래도!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절
대로 아니라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방에 들인 시점에서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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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그런 거잖아! 그냥 거실에 있기만 했


어도 괜한 오해를 했을 거면서!”
“하지만 그 이전에 일단 네가 호감이 없었다면 여자애를 집에 들이
지 않았을 테고, 여자애도 호감이 없으면 상대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
단다?”
그런 말을 들으니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있는 요소를 찾기가 힘들
었다.
시호코의 말대로, 아마네에게 집은 자신의 영역이므로 타인을 들이
려고 하지 않는다.
마히루를 맨 처음 들인 것은 그 기세에 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요리라는 요인을 빼고서도 마히루의 성격에 호감을 느끼
고 있기에 이렇게 집에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좋아하긴 하지만.’
아마네에게 마히루라는 소녀는 외모를 제외해도 호감이 가는 사람
이었다.
학교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신랄함과 성실함도, 그런데도 솔직하지
는 않은 모순된 성격도, 무뚝뚝하게 보이지만 남을 돌보길 좋아하는
점도, 어딘가 달관한 듯한 태도도, 허를 찔리면 허둥대면서 그 나이
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는 면도,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순진한 미소
도, 전부 마히루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게 연애 감정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매력적인 소녀이긴 했다.
“친구로서 호감은 있지만, 이성에 대한 호감을 전부 연애 감정으로
만들지 마. 애초에 얘도 그런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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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시호코의 말을 긍정할 정도로 달달한 감정은 없다. 애초에


마히루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호감을 갖고 있다고 아마네가 착각
하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어머나, 그건 모르지. 아마네야말로 여자애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어떻게 말해야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아줄 거야……. 시이
나, 부탁이니까 그만 일어나 줘…….”
아무리 말해도 연애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려고 하는 시호코를 보
고. 아마네는 난처해하면서 이마를 짚었다.
빨리 일어나 주길 바랐다. 절실하게.
“응…….”
기도가 통했는지, 혹은 주위가 시끄러워서 잠에서 깬 것인지.
마히루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떴고, 달콤한 신음 소리를 내
면서 고개를 들었다.
사라락. 황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흘러 떨어졌다.
캐러멜 같은 빛깔을 띤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서 일렁이고 있는
모습은, 뭐랄까 똑바로 보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무방비했다.
미묘하게 아직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이리라. 잠기운이
아직 남은 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멍하게 아마네를 쳐다보아서, 아마
네는 시선을 미묘하게 돌리고 말았다.
“시이나, 잠든 건 나중에 설명해도 되지만, 오해를 샀으니까 일단
해명하는 걸 좀 도와줘.”
“오해……?”
“안녕, 아가씨, 이름은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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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덜 깬 상태로 힘없이 되묻는 마히루에게, 시호코가 사람 좋


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뜸 다가갔다.
그런 구김살 없는 미소랑 친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람
에, 막 일어나서 아직 머리가 멍할 마히루는 혼란에 빠졌는지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어, 저, 저기…….”
“역시 처음 만나면 서로 이름을 밝히는 게 중요하겠지?!”
“어, 시, 시이나 마히루예요…….”
“어머나, 마히루, 귀여운 이름이네! 나는 시호코라고 해. 사양하지
말고 이름으로 부르려무나.”
기세에 밀려서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밝힌 마히루가 ‘도와줘요, 후
지미야 군.’이라고 구원을 청하는 듯한 눈으로 아마네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아마네 자신은 오히려 도움을 바라고 싶은 상황이었고,
솔직히 아무런 방법이 없는지라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어머니라서 잘 알고 있지만, 한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멈추
질 않는다.
마히루를 보고 잔뜩 흥분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아마도 끝도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것이다.
정작 그 대상인 마히루가 곤혹스러워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저, 저기, 어머님.”
“어머나! 벌서 어머님이라고 날 인정해 주는구나!”
“후지미야 씨!”
“후지미야라고 부르면 날 부르는 건지 아마네를 부르는 건지 알 수
가 없잖니. 그렇지? 아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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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시이나가 곤란해하잖아.”


“아마네, 여자 친구라면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 줘야 하지 않을까?”
도저히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아마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지만, 시호코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다. 여전히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신경이 무디다고 해야 할지.
“저, 저기, 시호코 씨.”
“왜애?”
“저, 저랑 후지미야는…….”
“어떤 후지미야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에.”
“……아, 아마네 군과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시호코의 말을 듣고, 마히루가 알아보기
쉽게 당황하면서도 어떻게든 부정하고 있었다.
시호코의 재촉을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주저주저 아마네의 이름을
부르면서 반응을 살피는지라, 아들의 이름을 부르도록 만드는 것에
성공한 시호코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나, 그럼 지금부터 그런 관계가 될 거라는 말일까?”
“어, 저, 저기, 그게 아니고요…….”
“어머나, 내가 그만 오붓한 분위기를 방해한 것 아닌가 모르겠네.”
“저, 저기, 차분히 설명할 기회를 주시면 좋겠어요! 아마네, 군과
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밥을 같이 먹을 뿐이라고 할까요. 아마네
군이 요리를 할 줄 모르니까.”
“좋은 색시가 되겠구나, 마히루는. 우리 아마네는 집안일은 전혀
할 줄 모르는데 혼자 살게 되었거든. 그런 거라면 저 아이를 네가 잘
보살펴 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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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게…….”
마히루는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호코의 기세에 밀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한다는
건은 무리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집에 방문하고, 직접 만든 요리를 차려 주고 있으며, 한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말을 들은 시점에서 시호코의 눈빛이
바뀌더니 한층 더 기세가 더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아마네의 힘으론 도저히 시호코를 말릴 수 없다. 그나
마 가능한 사람은 아버지인 슈토 정도일 것이다.
“……시이나, 포기해. 어머니가 흥분 상태에 빠지면 누가 뭐라 해
도 듣질 않으니까.”
“그럴 수가아…….”
아예 달관의 상태에 이른 상태인 아마네는 빠르게 해명을 포기했
고, 그저 어머니의 폭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아마네가 용케도 이런 미인을 붙잡았네. 이 엄마는
깜짝 놀랐어.”
부정하는 것도 지친 아마네와 어쩔 줄 모르는 마히루는 함께 입을
다물었다.
그걸 긍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무슨 말을 해도 쑥스
러워서 아닌 척하는 것뿐이라고 받아들인 시호코는 호기심을 숨기려
들지 않는 눈으로 마히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떠니? 마히루가 보기엔 아마네는 제대로 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네? ……그건 그러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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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하라고.”


“하지만 처음 봤을 때 방이 엉망이었으니까요.”
“시끄러워. 지금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잖아.”
“제가 청소를 도와줬기 때문이잖아요.”
“그건 뭐,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식사나 청소나 그런 부분은 정
말로.”
그런 점에선 마히루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 덕택에 지금처럼 쾌적한 생활을 할 수가 있으므로, 엎드려서 감
사의 절을 올리는 것쯤은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다. 마히루가 싫어
할 것 같으니 실제로 하지는 않지만, 자신도 최대한 마히루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발언을 그다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받아들인 것은 시호
코였다.
“어머나 아마네도 참, 이번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마히루가 늘 돌봐
줬단 말이네. 정말 어쩔 수 없는 아이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혹시 동거 중이라거나……?”
“아니야! 왜 그렇게 보는데! 옆집에 산다고!”
“어머나, 그럼 운명적인 만남이란 이야기네! 잘됐구나, 아마네. 이
렇게 미인에다 바지런한 아가씨가 돌봐 주고 있으니까.”
“미인이면서 기량이 좋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운명적인 만남
운운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어.”
“로맨틱해서 좋잖니.”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거든! 전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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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어머나.”
틀림없이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하는 말로 인식하고 있는 시호코의
반응에, 아마네의 얼굴은 슬슬 떨리는 참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확히는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망상대로
해석하는 어머니 때문에 몇 번이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아마네는 최
근 몇 개월 중에서 가장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기세에 밀리고 있던 마히루는 어땠는가 하면, 아마네와 시
호코를 번갈아 보면서 딱 봐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마히루, 마히루, 이건 부모라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지도 모르지
만, 아마네 얘는 말도 무뚝뚝하게 하고 솔직하진 않아도, 의외로 성
실하고 신사적인 성격이니까 좋은 사람을 잡았다고 생각해도 돼. 뭐,
여자 경험은 전무하니까 그 점은 마히루가 잘 조종하는 게 좋겠구
나.”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건데, 어머니. 정말 입 좀 다물어.”
후반부가 진짜 괜한 참견이었다.
“하지만 내 말이 맞잖니. 오히려 왜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은 거람.
슈토 씨를 닮아서 생긴 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뭐, 촌스러워서 그런가?”
“괜한 참견이거든.”
“마히루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떨까?”
“보여주지도 않을 거고, 얘도 보고 싶지 않을걸.”
“자꾸 그런다. 아, 정 원한다면 마히루가 바라는 타입으로 가꿔도
된단다. 옷만 잘 입히면 그런대로 잘 소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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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긋방긋 웃으면서 밀어붙이는 시호코 때문에 마히루는 지극히 난


감한 표정으로 애매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냉정하고 침착한 천사님을 이렇게까지 당황시키는 시호코는 어
떤 의미에선 굉장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시이나가 정말로 곤란해하고 있다고. 아니, 제발 좀 돌아
가 줘.”
“어머니에게 돌아가라는 소리를 하다니 많이 컸구나.”
“제발 부탁할게. 딱 봐도 시이나가 곤란해하고 있잖아.”
“그러니? 마히루.”
“시이나한테 묻지 마. 무조건 배려할 테니까. 이번만큼은 정말로
좀 돌아가 줘. 나중에 다시 와도 되니까.”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았어. 여자 친구와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한 건 사실이니까.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게 그렇게 싫었
던 거구나.”
“이제는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니까 얼른 돌아가기만 해 줘.”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지치고, 마히루도 이 텐션에 억지로 어울리
느라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마히루를 보니 미묘하게 축 늘어져 있다.
나중에 잘 위로해 주자고 결심하면서 시호코에게 어서 사라지라는
듯이 훠이훠이 손을 흔들자 미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마네를
바라봤다. 그래도 남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일단 아마네와 마히루
를 배려해서일 것이다. 명백하게 잘못 착각한 방향의 배려지만.
“아, 마히루, 연락처를 교환할까. 우리 아마네의 생활 태도 같은 걸
나중에 샅샅이 좀 말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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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네……?”
마지막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억지로 만들려고 드는 시호코
를 보면서 아마네는 이마를 짚었다.
마히루는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단계까지 휩쓸린 상태였으며, 시
키는 대로 스마트폰으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제 틀림없이 마히루에게도 귀찮은 간섭을 하게 될 것이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마히루의 손을 잡고 “아마네를 잘 부탁
할게.”라고 거듭 당부하는 시호코를 보고, 아마네는 나중에 아버지
에게 ‘제발 부탁이니까 어머니 좀 말려 줘.’라는 문자를 보내기로 결
심했다.

“피곤하네요…….”
“미안해. 태풍이 지나갔네.”
머무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이미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
가 되어서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축 처진 모습으로 앉아 있던 아마네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히루는 왠지 어색하게 다소곳하게 앉아 있지만, 꼿
꼿하던 등을 평소보다 구부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탈 없이 대응하는 마히루를 이렇게까지 피폐하게 만든
시호코에게 전율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자식으로서 사과해야 하는
걸까.
“착각을 풀지 못한 채로 그냥 돌려보내서 정말 미안해.”
“아뇨, 뭐, 실제로 피해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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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의외로 실제 피해가 생길지도……. 그 반응을 보면 시이나


가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너에게 이런저런 연락을 해
올 거야…….”
그 점에서 마히루에게는 괜한 고생을 시킬 것 같아 정말로 미안했
다.
아들의 여친(오해)이라는 것에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시호코의 취
향도 더해지면서, 아마도 엄청 마음에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든 마히루에게 연락하면서 관심을 주려고 할 것이다. 민폐 수준으로.
“시호코 씨는 정말로 후지미야 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군요.”
“좋게 표현하면 그렇겠지만, 너무 귀찮아. 저 정도면…….”
팔불출이라는 것과는 또 다르지만, 아무튼 자신을 너무 귀여워한
다.
이는 아마네 자신이 칠칠치 못한 탓도 있어서 너무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관여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고맙고 소중한 어머니이긴 하지만, 성가신 타입이라서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었다.
“……부럽네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아마네는 마히루를 쳐다봤다.
“뭐가?”
“어머님이 좀 활기차시지만 자상하시니까요.”
“그 사람은 말이 많고 간섭이 심한 것뿐이야.”
“……그래도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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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러워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기어들어가듯


작고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마히루는 시선을 아래로 숙였
다.
어딘가 우울함과 그림자가 있는 표정이라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손을 대면 무너질 것만 같은, 누가 봐도 연약하다는 생각이 들 모습
이었다.
피곤함 때문만은 아니리라. 연약하고 덧없는 분위기를 띠던 마히루
는 아마네의 시선을 느끼자 바로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작게 미소 지
었다.
아무것도 아니란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마히루는, 보기 드물
게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히루, 라고 불렸네요.”
“……뭐야, 갑자기.”
“아뇨.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 제 이름을 불렀다는 생각이 들어
서 말이죠. 늘 성으로 불렸으니까.”
그 인기가 많은 천사님이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다는 건 의외였
다. 마히루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뭔가 황송한 느낌이 드는지라 대부
분 그렇게 부르기를 꺼려서겠지.
학교에서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천사님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편하게 부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었다. 본인은 아주 싫
어하고 있었지만.
“뭐, 사이좋은 친구가 없으면 그렇게 부를 사람은 부모님 정도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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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부모님은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절대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마히루의 얼굴을 보자, 그 표정은 아무런 빛도 띠고
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게 빠져나간 것 같았으며, 무기질하게까지 느껴지는 무
표정.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마치 인형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은 착
각조차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아마네의 시선을 알아차린 마히루는
무표정을 지우고, 뭔가 난감한 것처럼 눈썹을 살짝 늘어트렸다.
“……어쨌든 정말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슬쩍 한숨을 토해냈다.
마히루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부모님을 언급할 때 가끔 보이던 차가운 표정, 부모님과 외식한 적
이 없다거나 생일을 싫어한다는 등의 발언을 감안해 보면 가정 환경
에 문제가 있다는 걸 쉬이 상상할 수 있었지만―― 부모가 이름으로
불러준 적조차 없을 줄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부럽네요.’
조금 전에 중얼거린 말은, 어떤 심정으로 자아낸 것일까.
“마히루.”
부른 적이 없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고 있었다.
캐러멜색 눈이 몇 번 깜박였다.
불의의 기습을 당했기 때문인지 어딘가 멍한 듯한, 평소의 태도와
표정에는 감춰져 있던 어떤 종류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겉으로 드
러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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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이름 정도야 누구라도 불러 줄 수 있잖아.”


“……그것도 그러네요.”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더하자, 뒤늦게 슬쩍 웃음을 지었다.
아주 약간 안도한 듯이 웃는 걸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마네 군.”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가슴의 울렁거림이 한층 더
커졌다.
아까는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만 썼기 때문인지 그다지 마음에 와닿
지 않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보는 상태에서 부르니까 얼
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속에서 답답한 뭔가가 소용돌이쳤다.
“밖에선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런 건 알고 있어. 너야말로 밖에서 말실수하지 마.”
“알고 있어요. 비밀, 이니까요.”
희미하게 웃는 마히루를 직시할 수가 없어서.
아마네는 “그래.”라고만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자세를 바꾸는 척
그 미소로부터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토요일에 있었던 어머니의 습격 때문에, 아마네와 마히루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그걸 제외하면 딱히 바뀐 것은 없었다.
급격하게 사이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호칭이 약간 편하게
바뀌었고, 마히루의 태도가 어느 정도 부드러워진 게 다라고 할까.
“……저기, 아마네 군.”
일요일 저녁, 평소보다 빨리 찾아 온 마히루는 미묘하게 어색하다
고 할까 난감하게 보이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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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집 안으로 들인 건 좋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태도에 아마네는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에 저항감이 드나 싶었지만, 이름을 부를 때는 주
저 없이 불렀기 때문에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소파에 앉아서 마히루의 상태를 살피고 있으려니, 스커트 주
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갑자기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정성껏 끝을 맞춰서 접은 손수건을
펼쳐서 그 안에 싸여 있던 걸 꺼냈다. 열쇠가 둔탁한 빛을 반사했다.
낯이 익은 것은 불과 며칠 전에 마히루에게 건네주고 그대로 넘어
갔던 물건이라서겠지.
“열쇠 돌려줄게요. 결국 그때 나가질 못했으니까요. 그, 잊어버리
는 바람에 돌려주질 못해서…… 미안해요.”
“아하.”
보아하니 그대로 열쇠를 가지고 돌아간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마히루가 왜 묘한 반응을 보였는지를 이해한 아마네는 손수건 위에
놓여 있는 열쇠를 바라봤다.
잘 생각해 보면 마히루는 거의 매일 이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마네가 현관으로 나가서 맞이하고 있지만, 잠시
다른 곳을 들르느라 집에 없다거나 조금 기다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
었다.
지금 같은 계절에 현관 앞에서 서서 기다리면, 여자에게는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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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여자는 몸이 차가워지면 건강에 나쁘다고 들었고, 아마네도 한동안


멍하니 서서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달갑지 않다.
거의 매일 여기 오고 있으니까, 마히루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그냥 그대로 갖고 있어도 괜찮은데.”
“네?”
“나중에 이런 관계가 끝나고 필요 없어졌을 때 돌려주면 돼.”
뭐, 말하자면 열쇠를 주었으니 한동안은 신세를 지겠다는 뜻이 되
겠지만. 마히루는 열쇠를 받지 않는 아마네를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하, 하지만…….”
“뭐, 일일이 현관으로 마중 나가는 것도 귀찮거든.”
“진심이 다 드러나고 있거든요.”
“너라면 악용하진 않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한 달 넘게 먹을 걸 나눠주거나 여기서 식사를 만들어 주고 있다.
마히루의 인품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마히루는 상식적이고 양식적이며, 나쁜 짓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
다.
이 열쇠를 얻는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준다거나 아마네가 없을 때
무슨 짓을 하는 일은 거의 없으리라. 믿어도 되는 상대다.
“너도 매번 인터폰을 누르면서 기다리는 건 귀찮을 거 아냐.”
“그렇다고 해도, 당신에겐 경계심이란 것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널 믿고 맡기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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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뜬 마히루는 뭐라고도 말할 수 없는 표


정으로 눈썹 끝을 늘어트렸다.
당혹감과, 그 외에 잘 알 수 없는 뭔가가 표정에 드러나고 있었다.
뭐, 아마네는 귀찮음을 덜기 위해서 넘겨주는 거지만, 마히루가 싫
은 내색을 보인다면 순순히 거둬들일 생각이었다.
마히루는 한동안 아마네와 열쇠를 번갈아서 지그시 바라보다가――
슬쩍,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잠시 빌릴게요.”
“응.”
“아마네 군은 대범한 건지 무심한 건지 모르겠네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아주 약간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그렇
게 아픈 곳을 찌르는 마히루. 아마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
다.
“그게 나답잖아?”
“그런 소리는 자기 입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매섭게 주의를 받자, 아마네의 미소는 한층 더
진해졌다.
이런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아마네에게 익숙해진
것 같았다.
애초에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허용했으니 익숙해지지 않았으
면 이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요.’라는 듯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다분히
담긴 눈으로 보지만, 차갑지 않고 약간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네의 실없는 말이 농담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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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그럼 사양하지 않고 사용하겠지만, 집에 변화가 생겨도 전 모르니


까 그렇게 아세요.”
“무슨 변화?”
“……어느새 청소가 되어 있어서 놀랄 수도 있겠죠.”
“그건 고마운 일인데.”
“냉장고에 만들어 둔 반찬을 잔뜩 넣어서 냉장고를 압박할 수도 있
어요.”
“아침 식사가 행복해지고 저녁 식사 메뉴가 늘어나겠군.”
너무 평화로운, 아니 너무 고마운 장난이라서 아마네는 오히려 환
영하고 싶지만, 마히루는 너무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것이 미묘하게
불만인 것 같았다.
협박도 안 되는 말로만 윽박지를 수밖에 없는 마히루의 착한 성품
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지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절 바보 취급하는 것 같은데요?”
“아닌데.”
역시 웃다간 토라질 것 같아서, 그것도 좀 보고 싶지만 아마네는 미
소를 거두고 마히루를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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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제11화 천사님에게 주는 상

학생 이름을 나열한 종이가 복도 벽에 붙은 것을 보고, 아마네는


“뭐, 이 정도인가.”라고 중얼거렸다.
지난주에 있었던 시험 등수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동급생
들과 마찬가지로 보러 온 것이다.
결과를 언급하자면 뭐, 평소대로 21등. 의외로 좋은 성적이지만 그
다지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시험을 치고 나서 느낀 바로는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했던 등수에 있는 걸 보고 약
간은 안도했다.
참고로, 마히루도 평소와 다름없이 1등에 군림하고 있었다.
정말로 재능이 뛰어난 여자지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지라 역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 후에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원래 머리가 좋은 것도 있겠지만, 본인의 부단한 노력이 마히루를
1등 자리에 있게끔 하는 것이다.
“시이나는 또 1등이네…….”
“역시 천사님이야. 다른 사람들이랑 머리가 다르다니까.”
수군거리는 소리들 중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는지라, 아마네는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왜 그래, 아마네. 그런 표정을 다 짓고. 결과 안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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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같이 온 이츠키가 아마네를 살펴보면서 의아해했다.


참고로 50등까지만 실리기 때문에, 이츠키는 자신의 성적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마네를 따라온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21등이었어.”
“오오, 이번 성적은 저번보다 올라갔네.”
“약간은. 오차 범위 수준이야.”
“오오, 똑똑한 사람은 하는 말도 다르구나.”
웃으면서 일부러 비꼬듯 말하는 이츠키. “그래, 그래.”라고 가볍게
받아넘긴 후에 한 번 더 등수표를 봤다.
정말이지 용케도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별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지만, 숨은 곳에서 노력하는 마
히루. 당연하다는 듯 이런 결과를 냈지만 상당히 노력하고 있었을 것
이다.
주변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칭찬하긴 해도, 그 노력을 모르기 때문
에 노고를 치하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마히루도 정말 답답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만큼은…….”
“응? 뭐라고 했어?”
“딱히 아무 말도 안 했어. 자, 교실로 돌아가자고.”
“알았어.”

“어라, 아마네 군, 이건 뭔가요?”


마히루가 교복을 갈아입고서 슈퍼에서 구입한 식재료를 들고 왔다.
아무래도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으려다가 낯선 흰 상자의 존재를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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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아차린 것 같았다.
“응? 아아, 케이크야.”
흰 상자 안에 든 것은 케이크였다. 아마 마히루도 상자의 모양을 보
고 대충 감은 잡았겠지만 그래도 확인을 위해 물었으리라. 참고로,
치토세가 종종 SNS에 올리는 인기 제과점에 가서 사 온 것이다.
“……케이크를 좋아했었나요?”
“아니, 딱히. 너에게 주려고 사 온 거야.”
“왜 또……?”
“네가 학년 1등을 했으니까 소소한 축하 정도는 괜찮잖아. 1등 축
하해.”
자신에게 주려고 샀다는 말을 듣고 눈을 깜박이는 마히루.
정말로 예상외였던 모양이다.
“1, 1등은 매번 하니까, 그렇게 축하할 일은…….”
“그래도 늘 노력하고 있으니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상을 받는 것
도 좋지 않겠어? 쇼트 케이크인데, 혹시 싫어해?”
“네? 시, 싫어하진 않는데요…….”
“응, 그럼 잘됐네. 식후에 먹어 줘.”
어안이 벙벙한 분위기가 전해져 왔지만, 아마네는 그대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마히루는 너무 배려하면 오히려 난감해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끝내
는 게 낫다.
타인은 은근 극진하게 배려하지만, 자신의 일이라면 너무나 금욕적
이다. 웬만해선 자신에게 관대하게 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타입이
라고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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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상을 주거나 수고했다고 말해 주지 않으면, 마히루는 열


심히 노력만 하면서 숨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누군가에
게 기대거나 응석을 부리는 행위를 모르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같이
지낸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성격을 알게 되었기에 늘 신세만
지던 걸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방에서 아직도 굳어 있는 마히루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아
마네는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마히루가 재기동할 때까지 바라보기로
했다.
식후,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접시에 얹어서 가져온 마히
루의 모습을 보고,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왜 웃는 건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신경 쓰지 마.”
그저 마히루가 묘하게 긴장해서 굳은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웃으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고 해서 그노고
를 위로한다는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될 테니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기
로 했다.
커피를 같이 가져와서 케이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은 마히루가
소파에 앉았다.
이때도 미묘하게 움직임이 딱딱했기 때문에 웃을 뻔했지만, 옆에
있는지라 역시 참기로 했다.
마히루가 아직도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아마네를 힐끗 쳐다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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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축하해.”
“고마워요. 하지만…….”
“됐으니까 솔직히 받아들여. 노력한 건 사실이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자, 어서 먹어. 때로는 너도 너 자신에게 좀 관대하게 베풀고 살라
고.”
덧붙여서 “이미 사 온 것이고 너한테 준 거니까.”라고 말하자, 마히
루는 여전히 조금 미안해하면서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크가
놓인 접시와 포크를 집었다.
“감사히 먹을게요.”
“응.”
손을 가볍게 젓고 있으려니, 마히루는 왠지 신중한 손놀림으로 케
이크를 포크로 한입 크기만큼 덜어서 입으로 옮겼다.
여자는 단것이나 과자의 맛을 세심하게 따진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치토세도 자주 먹는 가게에서 파는 것이라면 문제없겠지.
그 증거로, 입에 넣은 마히루가 눈을 약간 동그랗게 떴고, 그 후에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표정이 바뀌는 일이 없는 마히루였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알아보기 쉽게 희로애락을 표현하게 되었다.
천천히 먹으면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모습은, 먹고 있는 것만으
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 왜 그러죠?”
“아냐,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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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모르게 응시하고 말았는데, 마히루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이


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어리게 느껴지는 표정에 아마네는 조금 전까지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마네를 빤히 바라보던 마히루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포크를 이용해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덜어 내더니, 아마네 쪽으로
내밀었다.
말하자면 ‘아앙~’을 하는 모습이다.
“어, 아, 아니, 먹고 싶어서 봤던 게 아니고, 그러니까…….”
“이게 아닌가요?”
“아니…… 뭐, 그…… 주겠다면 먹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연하게 당황한 모
습을 보인 끝에, 그만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나이가 되어서, 그것도 여자에게, 더군다나 엄청난 미소녀가 먹
여 주는 걸 받아먹다니. 어떤 의미에선 행운일지도 모르지만―― 솔
직하게 기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마네는 부끄러움을 버리지 못했다.
“원래 아마네 군이 사 온 거니까, 아마네 군도 먹을 권리가 있어
요.”
그렇게 제안한 마히루는 정작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평소의 표정
대로 아마네의 입 근처에 케이크를 내밀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론 이성에게 ‘아앙~’을 한다면 의식할 법도 할 텐
데, 마히루를 봐도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순수한 호의에 따른 ‘아앙~’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아마네는 마음
을 단단히 먹고 케이크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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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으로 퍼지는 것은 너무나 달달한 맛이었다.


“……달아.”
“그야 케이크니까요.”
딱 봐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마히루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
다.
우물우물. 씹어 봐도 아무튼 달았다. 정신 상태의 영향이 상당히 컸
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네.”
이쪽은 이렇게도 달달함과 부끄러움과 근질거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마히루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게 은근히 분해서, 아마네는 “잠깐 좀 줘 봐.”라고 말하며 마히루
의 손에서 포크를 뺏은 뒤에 마찬가지로 케이크를 내밀었다.
당했으면 갚아 줘야 할 것이다.
“응.”
“……저기.”
“먹어.”
조금 강한 투로 말했기 때문인지, 마히루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자신도 방금 한 행동이라 거절하진 못했고, 아마네와 마찬
가지로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조심스럽게 입에 물었다.
오물오물. 입이 음미하듯이 움직였다.
빤히 보고 있자 마히루의 반응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곤혹스러워하는 감정이 컸지만, 입을 움직일 때마다 미묘
하게 볼이 붉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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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다 먹었을 즈음엔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완전히


드러낸 마히루가 완성되어 있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탐낼 주름 하나 없는 유백색 볼은 사과처럼 붉어
졌고, 눈은 부끄러움으로 약간 물기를 띠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자, 감상은 어때?”
“마, 맛있어요…….”
“그런 뜻이 아니야. 그렇게 받아먹어 보니 기분이 어때?”
지금이라면 조금 전 자신의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여 물어보자, 눈을 숙이면서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너무 어색하고 민망해요.”
“그렇겠지. 이런 행동은 사람에 따라선 그 의도를 착각할 수도 있
어. 하려면 같은 여자한테 하라고.”
내 기분을 알았느냐는 투로 고개를 휙 돌린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꾸했다.
안전한 인간이라고 인식했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겠지.
의식하지 않고 그런 짓을 저지른 마히루의 행동에는 곤혹스러웠지
만, 뭐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므로 그다지 나무랄 것도 아니다.
그저 여전히 입안에 남아 있는 맛이 달았을 뿐이다.
‘방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난감하네.’
자신을 믿어 주는 건 기뻐도, 그런 식으로 자각 없이 무방비한 모습
을 보여 주는 건 참기가 힘들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아마네는, 옆에서 약간 부끄러운 표정으로 몸
을 움츠리고 있는 마히루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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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천사님이 지도하는 요리 교실

평일 점심 끼니는 학교 식당에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휴일


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서로 각자 볼일이 있을 때도 있으니 점
심까지 같이 먹는 것은 무리이며,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가 너무 주
제넘은 짓이다.
저녁 식사를 일부러 만들어 주고 있으니까, 최소한 휴일 점심쯤은
자신이 준비해야겠지.
하지만 편의점을 너무 자주 이용하면 마히루에게 “밸런스를 제대로
맞춰서 먹으세요.”라고 따끔하게 지적당할 테고, 외식은 비용이 커
지니까 매번 밖에서 먹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러므로 휴일 점심이 가장 곤란했다.
“……요리를 해야 하려나.”
어딘가에 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집에 있었지만, 정오를 한 시
간 정도 남긴 시점에서 오늘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히루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지만, 아마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마네가 딱히 요리를 끔찍하게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암흑 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하진 않는다. 겉
보기와 맛을 희생해도 된다면 먹을 수 있는 걸 만들 수 있었다.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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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가 아니라 요리 비슷한 무언가에 가깝지만, 그래도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마히루가 만들어 주는 극상의 요리에 익숙해져 있는 지금,
자신의 요리를 다 먹을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자진해서 맛있지
도 않은 요리를 먹고 싶어 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아, 정말 마히루 때문에 완전히 타락하고 말았네.’
완전히 마히루가 만들어 주는 요리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또 외식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편의점 도시락도 질리
기 시작했다.
마히루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으니 직접 요리할 의미를 찾지 못했
지만, 역시 슬슬 도전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마히루가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주진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 관계
가 정착되어 있지만, 앞으로 2년 남은 고등학교 생활에 무슨 일이 생
기면서 관계가 끝날 수도 있고, 애초에 대학에 가면 헤어지게 될 것
이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무리겠지.
‘이참에 조금은 노력해 봐야겠지.’
앞날을 생각해서 어느 정도는 노력해 보자는 마음을 먹은 아마네는
소파에서 일어나 지갑을 쥐었다.

“어라, 슈퍼에 다녀왔나요?”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슈퍼에서 돌아오던 중 맨션의 공동
현관에서 마히루와 딱 마주쳤다.
마히루도 외출했었는지, 동네 문구점의 봉지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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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숨길 필요도 없기에 “응.” 하고 대답하면서 슈퍼의 봉지를 기울여


서 보여주자, 마히루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어제 장 본 것만 해도 양은 충분하지 않았나요? 메모에 적어
준 대로 잘 사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점심 정도는 직접 만들어 볼까 하
는 생각이 들어서…….”
“……아마네 군이?”
일단 설명은 했지만, 마히루는 미심쩍은 눈으로 돌아봤다.
당연할 것이다. 마히루만 의존하고 있고, 이전에는 반찬 가게에서
파는 반찬과 편의점 도시락에 의존한 아마네가 직접 요리를 해 보겠
다고 말했으니 도저히 믿기지 않을 것이다.
“아마네 군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만두는 게 무난할 것 같은데
요. 화상을 입거나 손을 베지 않을까요?”
“……딱히 못 하는 건 아닌데?”
“부상의 유무는 그렇다 치고, 맛과 외견이 엉망인 걸 전제하면 만
들 수 있다는 뜻이겠죠?”
정확히 지적한 마히루에게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론할 수가 없었다.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어설프게 이상을 알고 있는 만큼 현실
과의 격차를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 이라는 것은 마히루의 요리를 말하는 것이겠지. 마히루는 자
신의 실력에 의외로 자신을 갖고 있으며, 매일 맛있다고 말하면서 먹
고 있는 아마네가 마히루의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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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하지만 말이지. 그 뭐냐. 네가 늘 영양을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 데


다, 만약 앞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정말로 혼자 생활하게 되면 너
에게 의지할 수 없잖아.”
마히루에게 너무 의존하다간, 마히루가 없어졌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질 것이다. 안 그래도 마히루 때문에 인간적으로 타락하고 있으니
까 최소한의 일 정도는 할 수 있게 되고 싶다.
아마네의 말을 듣고 마히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며, 그런 뒤에 약
간 감탄한 것처럼 숨을 내쉬었다.
“……장래를 내다보고 행동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저
에게 의지해야 하지 않나요?”
“뭐?”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감독하여 사
고를 방지하는 것이 훨씬 나아요. 아마네 군, 주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없습니다.”
요리를 못하는 인간은 애초에 주방을 깔끔히 이용하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며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마네도 자신이 주방을 쓰면
엉망진창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겠죠.”라는 담담한 목
소리가 돌아왔다. 마히루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제가 있는 게 나을 거예요.”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싫다면 제안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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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약간 새침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아마네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것이므로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자 “딱히 그렇게 송구스럽게 반응하지 않아도 괜찮아
요.”라고 허둥지둥 대답해서 희미하게 웃고, 마히루와 함께 엘리베
이터를 타고 자신의 집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하나 묻겠는데, 앞치마는 있나요?”
“그건 확실히 있어. 조리 실습 때 쓰려고 샀으니까.”
“사용했나요?”
“그다지 의미가 없었지. 계량이랑 설거지만 했으니까.”
“그렇겠죠.”
예상했던 바라는 듯 한숨을 쉰 마히루와 함께 아마네의 집에 들어
갔다. 마히루의 앞치마는 여기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집에도 있다고
하니, 늘 보고 있는 앞치마는 아마네 집 전용인 것 같았다.
앞치마를 걸치고 늘 그랬듯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마히루는, 아마
네가 옷장 안쪽에서 꺼내 온 짙은 갈색 앞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랄까, 아마네 군은 평소에 착용하질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앞
치마가 아마네 군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시끄러워. 그것참 미안하네.”
“뭐,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렇고, 메뉴는 정해 놓은 것 같네요.
사 온 재료를 보면.”
선반에 놓아 둔, 재료가 담긴 봉지를 본 마히루의 말에 아마네가 고
개를 끄덕였다.
“채소 볶음이랑 오믈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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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제가 주의를 줬기 때문에 채소를 섭취하려고 했고 달걀을 좋


아하니까 오믈렛으로 선택한 거군요.”
“용케 아셨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거예요. 채소 볶음은 어떤 맛으로
하려고요?”
“그게, 불고기 소스를 뿌리려고 하는데.”
“남자답게 호쾌한 양념을 할 생각이로군요……. 맛있다는 건 이해
가 되지만…….”
“조리하려는 마음을 먹은 것만 해도 그나마 어디야.”
불고기 소스가 없다면 소금과 후추, 간장으로 어떻게든 할 생각이
었기 때문에, 불고기 소스가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사용할 생각이었으므로 고기용 소스에
게 감사하면서, 마히루를 따라 손을 씻었다.
그러는 동안 마히루는 아마네가 조리하기 편하게 기구를 준비하거
나 재료를 쓰기 쉽게 배치하고 있었다. 그런 손놀림도 능숙하니 역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채소 볶음은 고르게 익을 수 있도록 채소를 자르고 볶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죠. ……채소 써는 방법은 아나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잘하지 못할 뿐이지, 부엌칼
정도는 다룰 줄 안다.
힘 있게 단언한 후 마히루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배추를 썰었지
만…… 그게 큰 허세였다는 걸 이해한 것은 부엌칼로 손가락을 벤 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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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마히루는 조언해 주거나 시범을 보여주긴 했지만, 본인의 자주성에


맡기는 형식으로 지도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하다 싶을 때는
손을 가볍게 얹듯이 쥐면서 수정해 주었는데,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 보조에서 벗어났을 때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아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을 보니,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부엌칼
에 베여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일단 물로 씻었지만, 역시 따끔거리면서 아프긴 했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긴 했어요. 자, 손을 이리 주세요.”
앞치마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어 익숙한 손길로 감아 주는 마히
루를 보고, 고마움과 감탄을 반반 느꼈다.
“준비가 철저하구나.”
“요리가 서툰 사람은 다치지 않는 게 더 드문 일이니까요.”
“신뢰받지 못하고 있네.”
뭐, 시작하자마자 손가락을 베였으니까 신뢰를 받을 리가 없으려
나.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뭐, 아마네 군이 노력하려고 했다는 건 인정하겠어요. 장
해요.”
“그거 고맙네.”
“뭐, 그 전에 절 불러 주길 바랐지만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휴일에까지 요리를 만들도록 시키는 건 미안하니
까.”
“만들려는 노력은 인정하겠지만, 무슨 사고를 내고 대처하기 난감
한 상태에서 결국 저를 부르느니 처음부터 부르는 게 더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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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네.”
이번에는 가볍게 다치는 수준으로 끝나서 다행이지만, 주방에서 대
참사가 일어나거나 전자제품을 이상하게 다루는 바람에 가동하지 않
게 될 경우 아마네로선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마히루가 하는 말이 지극히 타당했기 때문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가 없다.
“……튀김 같은 건 절대로 시도하지 말아요. 화재가 날 것 같으니
까요.”
“튀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레벨이 높진 않아.”
“튀김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 그러고도 용케 혼자서 살 수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대놓고 “어차피 저는 편의점이 없으면 살지 못하거든요.” 하고 토
라진 투로 대꾸했더니 마히루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아마네를 보
기 시작했다.
딱히 풀이 죽은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만, 그래도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마히루가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그, 아마네 군에게 튀김을 시키는 건 무서우니까, 만약 튀김
요리가 먹고 싶어지면 미리 말해 주세요.”
“그럼 내일은 돈가스를 먹고 싶어.”
바로 기분을 푼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해 주자, 마히루는 안도한
듯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같이 곁들일 양배추도 많이 먹어야 해요. 그리고 채소를 많이 넣
은 된장국도 같이 만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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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어. ……고마워.”


“뭐가 말인가요?”
“그냥 여러모로.”
평소에도 마히루에겐 늘 신세를 지고 있는 데다, 마히루 본인도 나
름대로 걱정이 되어서 이런저런 말을 해 주는 것이다. 아마네도 가끔
씩은 밉살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일단 고마워하고는 있었다. 마히루
가 없었다면 아마네의 건강한 학교생활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왠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어서 정말로 작게 “도움을 많이 받았
어.”라고 덧붙이면서, 아마네는 다시 채소 쪽으로 돌아섰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채소들과 씨름하길 약 한 시간, 식탁에는 꼴사납게 잘린 채소를 볶
은 것과 모양이 예쁜 오믈렛……과 스크램블 에그가 놓여 있었다.
당연히 모양이 예쁜 오믈렛은 마히루가 시범을 보여주려고 만든 것
이다. 오믈렛 비슷한 것, 아니 스크램블 에그는 아마네가 만들었다.
참고로 아마네의 오믈렛(가칭)은 맛을 본다는 명목으로 마히루 앞
에 놓였다. 아마네에겐 모범적인 견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쁜 모양
오믈렛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을 맞대서 식재료에 감사 인사를 한 뒤에 먹기 시작하자, 마히루
는 엉망이 된 달걀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옮겼다.
“……아무런 맛도 없는 스크램블 에그로군요. 소금과 후추를 빼먹
었죠?”
“잊어먹었어. 그리고 오믈렛을 만들려고 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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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너무 휘저었네요. 으깨질 정도로 젓가락으로 저어서 어쩌자는 거


냐고 주의를 주었는데 말이죠.”
“죄송합니다.”
간을 잊은 건 아마네가 달걀을 젓는 동안 마히루가 오믈렛을 만들
고 있느라 지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빠짐없이 지시를
내려 주었다. 맛도 모양도 엉망이 된 것은 명백하게 아마네의 실수였
다.
참고로 마히루가 직접 만든 오믈렛은 촉촉하고 부드러웠으며 아주
맛있었기 때문에, 실력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네 군치고는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만들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게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아직 제가 보지 않는 곳에서
요리를 하게 놔뒀다간 뒷정리가 힘들 것 같으니까 차근차근 연습해
나가면 좋겠네요.”
“……그러면 너에게 계속 의존하게 되잖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윽.”
“뭐, 농담……은 아니지만, 저는 제가 만든 요리를 먹어 주는 걸 좋
아하고, 요리를 가르치는 것도 싫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고마워, 늘.”
마히루의 호의 덕분에 지금에 이르게 되었으니, 정말로 머리를 들
수가 없다.
하지만 계속 숙이고만 있어 봤자 마히루가 좋게 생각하지 않으므로
잠시 후에 고개를 들고 마히루의 표정을 살펴봤다.
마히루는 무슨 이유인지 약간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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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마네 군이 멀쩡하게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면, 전 쓸모가 없


어지는 걸까요.”
아마네가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면, 마히루는 아마네에게 식사를 만
들어 줄 필요가 없어진다.
그걸 느끼면서, 아마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아직은 마히루의 요리를 먹고 싶다고 할
까……. 마히루의 요리가 가장 맛있으니까, 가능하면 계속 더 먹고
싶다고 할까. 이런 말을 하는 건 한심하고 미안하지만 말이지.”
받아먹는 처지면서 뻔뻔한 소리를 다 하는 건 자각하고 있지만, 역
시 자신의 요리보다 마히루의 요리를 계속 먹고 싶었다.
마히루의 요리에 완전히 중독되었다고 할 수 있는 아마네로선, 그
게 사라지면 의외로 정신적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된다.
애원하듯 조심스럽게 부탁하자, 마히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살
짝 웃었다.
희미하게 떠오른 쓸쓸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후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당분간은 그만둘 생각이 없으니
까 안심해도 돼요.”
“……땡큐.”
희미하게 보이던 불안의 빛이 사라진 것에 안도하면서 한 번 더 고
맙다는 인사를 하자, 마히루의 미소가 계속 이어졌다.
“가끔은 절 돕게 할까요. 필러로 껍질을 벗긴다거나 계량 같은 걸
로 말이죠.”
“어린아이가 도울 때 하는 일 같은데.”
“아마네 군은 그 수준에서 시작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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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실제로 어린아이 수준의 실력이기 때문에 부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


문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는 또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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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제13화 다 함께 크리스마스

“저기, 아마네, 너희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 안 돼?”


“안 돼.”
갑작스러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자, 치토세의 볼이 알기 쉽게
부풀어 올랐다.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브……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데다
혼자 사는 아마네에겐 딱히 인연이 없는 이벤트이긴 했다. 하지만 치
토세와 이츠키는 아마네와 함께 보내고 싶었는지 그런 말을 꺼냈다.
일부러 점심시간에 이렇게 아마네와 이츠키의 교실로 쳐들어와 그
런 제안을 한 치토세는 아마네의 빠른 대답을 듣고 볼을 부풀리고 있
었다.
“뭐, 어때. 아마네는 어차피 혼자…… 아, 혹시 여친이랑?”
“사귀지도 못했고 있지도 않아.”
“그럼 괜찮잖아. 그게 아니면 싫어서 그래?”
“뭐, 아마네가 싫다면 우리는 딱히 상관없지만 말이지.”
두 사람도 나름대로 친구를 배려한 것이리라.
그리고 느긋하고 편안하게 닭살 행각을 벌일 장소를 찾는다는 이유
도 있겠지만.
그렇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데다, 싫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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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는 건 사적인 장소에서 두 사람이 터무니없이 격렬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기가 낯부끄러운 것과 마히루에게 여러모로 설명해
야 하는 고생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먼저 마히루에게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자기 집으
로 오지 않도록 당부해 놓고, 마히루가 평소에 남긴 흔적을 지워놓으
면 되긴 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말이지…… 알았어, 알았어. 24일 말이지? 어차
피 밤이 되기 전에는 해산할 테고, 그런 뒤에 너희끼리 사이좋게 열
기를 식힌 뒤에 돌아가. 미리 말해 두겠는데, 절대로 우리 집에서 과
도하게 러브러브하게 굴진 말라고.”
뭐 그렇게까지 거절할 것도 없나 해서 승낙하자 치토세가 씨익 하
고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타협해 줄게.”
“네가 뭔데.”
살짝 건방진 말에 인정사정없이 볼을 꼬집었더니 “아흐하아. 이꾸
운, 아마네가 날 괴로혀.”라고 약간 꼬인 말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
다.
“야, 아마네, 치이를 괴롭히지 마. 볼을 꼬집어도 되는 사람은 나뿐
이라고.”
“그래, 그래, 날 대신해서 단단히 꼬집어 줘.”
“내게 맡겨.”
“잇군이 맡으면 안 되는데―!”
이것도 애정 행각을 벌이는 구실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이츠키에게
꼬집던 볼을 양보하자, 예상대로 두 사람은 볼을 이리저리 꼬집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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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난을 쳤다.
꼬집히고 있는 치토세가 실로 기뻐하는 표정인지라, 아마네는 그만
어깨를 으쓱했다.
“……나 그만 가도 될까?”
원래부터 아마네의 반이라서 가고 자시고 할 게 없었지만, 이쪽이
겸연쩍어지기 전에 그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싶었다.
“안 돼. 예정을 제대로 세워야 할 거 아냐. 케이크랑 파티 요리도
준비해야지!”
“나는 만들 줄 몰라.”
아마네의 실력으론 크리스마스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
마히루라면 아마 아무렇지도 않게 차릴 수 있겠지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아마네가 손을 가볍게 저으면서 무리라고 주장하자, 치토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깊게 응시했다.
“왜?”
“만들 줄도 모르는데, 그렇게 건강해 보이는 게 신기하다 싶어서
―.”
“딱히 상관없잖아, 그건.”
“자, 자, 치이. 아마네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뭐야, 잇군도 알고 싶어 했잖아.”
“나한텐 나중에 아마네가 가르쳐 줄 거야.”
“안 가르쳐 줘.”
멋대로 약속하지 말라고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그것도 의도적인
행동이었던 것처럼 이츠키가 소리 높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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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이 이츠키의 좋은 점이긴 하지만,


우연히 생각이 난 것처럼 대뜸 찌르는 건 좋게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기도 했다.
“나 참. ……뭐, 파티 음식은 배달을 시키면 되지 않겠어? 케이크는
예약 같은 걸 해야 하겠지만 말이지.”
아마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추궁하는 건 일단 미룬 듯해서, 아마네
도 현실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당연하지만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서 준비하는 것은 무리이며, 식사
도 마련할 수 없다. 그렇다면 팔고 있는 걸 준비하는 게 자연스럽겠
지.
“아, 그럼 피자가 좋겠어―! 케이크는 내가 늘 사는 가게에서 예약
해 놓을게. 아직 접수 중이었으니까!”
“치킨이 아니란 말인가―.”
“잇군도 피자를 더 좋아하잖아.”
“그렇긴 하지. 역시 치이야, 날 잘 아네.”
“에헤헤.”
멋대로 피자로 정해지고 말았지만, 아마네도 피자는 싫어하지 않고
파티다운 분위기가 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위기라면 식사 메뉴는 아마네랑 이츠키가 종종 주문하는 가게
의 배달 피자로 결정될 것 같았다.
피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문득 마히루를 떠올렸다.
작은 동물처럼 피자를 오물오물 먹던 마히루. 묘하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던 것은 평소 기품 있게 먹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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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케이크도 먹었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자연스


럽게 볼이 약간 열기를 띠는 것 같았다.
‘그런 짓은 다시 안 할 거야.’
서로에게 먹여 주는 부끄러운 짓은 이제 하지 못할 것이다. 이츠키
와 치토세처럼 사이좋은 커플도 아니니까, 그런 기회가 찾아올 리도
없겠지.
“……아마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럼 케이크는 너에게 맡길게.”
한순간 떠오른 생각에 잠시 멍해져 있는 걸 의아하게 여긴 치토세
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마네를 들여다보았다. 아마네는 황급히
머릿속으로부터 그 생각을 쫓아낸 다음 평소대로의 표정을 지었다.
“응―! 피자도 예약 잘 부탁해―!”
텐션이 올라간 치토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마네는 집에 돌아가
면 마히루에게 크리스마스 예정을 묻기로 결심했다.

“크리스마스 예정 말인가요? 딱히 없는데요.”


빨래를 마친 뒤에 소파에 앉아 있던 마히루에게 물어보니, 실로 깔
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보나마나 여자들끼리 모여서 파티 같은 걸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정은 없었다고 한다.
의외라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마히루는 아마네를 보고 아주
약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저와 친한 동급생 친구들은 대부분 사귀는 남자가 있
어요. 남자들의 초대도 거절하고 있으니까, 예정은 결국 빌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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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죠.”
“남자들은 아주 울상이겠군.”
밖에서는 마히루의 가드가 아주 단단했다. 어렴풋하게 기대하고 마
히루를 초대했던 남자들은 견고한 수비에 막혀 눈물을 삼켰으리라.
아마네는 용케도 그런 권유를 할 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
스로에게 웬만한 자신감이 없다면 그 천사님을 초대할 수 없을 텐데,
인싸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감탄조차 나왔다.
“……그렇게 저와 같이 보내고 싶을까요?”
“잘되면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
“뭘 위해서요?”
“그야 너와 사귀고 싶어서 아니겠어?”
“왜 저와 사귀고 싶은 걸까요?”
“……사귀게 되면 그렇고 그런 걸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건전하네요.”
단호하게 거절당했을 남자들에게 속으로 합장하면서 “뭐, 그래
도…….”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녀석들만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까 너무 의심하진 마.
너라면 남자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 정도는 알 거 아냐.”
“그러네요. 모두가 몹쓸 눈으로 볼 리는 없으니까요. 아마네 군도
그렇겠죠?”
“내가 널 언제 몹쓸 눈으로 봤던가?”
귀엽다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은 있지만,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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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마히루는 바로 알아차리고 떠났


을 것이다.
해를 끼치지 않는 남자이기 때문에 마히루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이며, 만약 그런 의도가 담긴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였다간 바로 사
라질 것이다. 딱히 어떻게든 마히루를 얻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식욕
이 더 중요하니 지금의 관계를 무너트릴 생각도 없었다.
“그렇겠죠. 아마네 군은 처음부터 저에게 흥미가 없는 것 같았으니
까요.”
“뭐,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신뢰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마워.”
남자로서 그래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신뢰 같기도 하지만, 일단
안전한 남자 포지션에 있다는 사실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래서 제 크리스마스 예정을 물은 아마네 군은 무슨 예정이
있는 건가요?”
“응? 아아, 24일은 낮에 이츠키와 치토세가 이리 오기로 했거든.
뭐, 늘 있는 일이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질지도 모른다고 미리
알려 주려고.”
이제 겨우 본론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한번 설명하자, 마히루
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면 불러 주세요. 그런 뒤에
식사를 만들 테니까 준비만큼은 미리 해 놓을게요.”
“응, 뭔가 미안해.”
“아뇨, 재미있게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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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쓸쓸하진 않겠어?”
“익숙하니까요, 혼자 지내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는 걸 듣고는 아주 조금 가슴이 아팠
다.
마히루의 머릿속에서도 부모님의 생각이 한순간 스치고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어딘가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아, 그 뭐냐. 아주 뻔뻔한 제안이라는 건 알지만, 이브는 무리
라도 크리스마스에 같이 지내는, 건…….”
뭐랄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딱히 흑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초
대하는 것은 대개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다른 뜻은 결코 없다.
그저 마히루가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제안을 들은 마히루가 눈을 깜빡였다.
“같이 지내면서 뭘 하자는 건가요?”
“응? 아, 딱히 할 게 없구나. 미안해.”
그 점을 지적받으면, 아마네로선 더 이상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
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경우 그 뒤처리가 얼마나 귀찮을지를 생각하
면, 일단 같이 외출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집에서 보내게 되겠지만, 이 집에는 마히루의 흥미를 끌 게
거의 없으리라.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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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게 다일 텐데, 아마도 엄청나게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까.
그 정도라면 각자 따로 지내는 게 더 좋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
이 들어서 철회하려고 했지만, 마히루는 아마네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저걸 해 보고 싶어요.”
예상외로 마히루가 의욕을 보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TV 쪽을 가리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TV 받침대 안에 수납되어 있는 게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에는 저녁에 마히루가 있어서 자주 켜지 못한 게임기에 흥미가
있는지 “저런 건,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라고 작게 희망 사항
을 말했다.
마히루가 하고 싶다면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크리스마스에
딱히 사귀는 것도 아닌 남녀가 게임을 하면서 보내는 것도 뭔가 해괴
하지 않을까.
딱히 남녀 간의 이벤트를 바라는 건 아니어도 약간 복잡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 뭐, 그것도 좋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게임을 하면서 보
내도.”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그게 좋겠어요.”
“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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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된단 말이지……. 마히루의 희망 사항이니 가능하면 들어주


자는 생각도 들었다.
조촐한 즐거움이라도 주고 싶다. 늘 신세를 지고, 뭔가 바라는 걸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 마히루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임이라
면 뭐든지 즐기게 해 주자.
딱히 크리스마스에 예정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마히루와 식
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뜻밖의 횡재인 셈이다.
“뭐, 크리스마스와 관계없이 그냥 편하게 보내면 되겠지.”
“그러네요.”
나지막이 웃는 마히루를 왠지 직시하기가 힘들어서, 아마네는 고개
를 끄덕거린 뒤에 슬며시 얼굴을 돌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찾아온 크리스마스 이브.
학교는 이미 겨울 방학에 들어갔으며,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각자
계획했던 대로 지내고 있을 오늘, 이츠키와 치토세는 각자의 짐을 들
고 아마네의 집에 집합해 있었다.
시간은 오후 한 시경.
테이블 위에는 이미 주문 배달로 도착한 피자랑 주스가 놓여 있었
다. 이런 시간이 된 것은 예약했다고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문에 혼잡
해진 길을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도착이 늦어지고 말았기 때문이
었다.
점심으로 먹기에는 문제가 없는 시간이고 둘 다 정오가 지난 뒤에
와서 그다지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라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진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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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래,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아마네, 반응이 약해! 한 번 더.”
“Merry Christmas.”
“발음 좋게 말하긴 했지만 역시 반응이 약하지 않아?”
애초부터 텐션이 높은 치토세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도 텐션을 올린 것이라는 걸 아는 이츠키는 치토세를 달래
면서, 평소처럼 약간 가벼우면서도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그 정도면 됐잖아. 일단 먹고 놀고 자자고.”
“우리 집에서 자지 마, 멍청아.”
“농담이야. 자려면 치이 집에서 잘 거니까.”
“부모님이 안 계실 때 해라.”
“뭐어? 아마네는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는 거야?”
히죽거리면서 웃는 치토세는 무시하고, 아마네는 식기와 컵을 가지
러 주방 쪽으로 향했다.
치토세는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도
와줄게.”라고 말하면서 아마네의 뒤를 따라왔다.
주방은 당연하게도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거
의 마히루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마히루가 쓰기 쉽도록 각종 도구
와 조미료가 놓여 있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네.”
“그것참 고마운 말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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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대응한 뒤에 식기장에서 각자 쓸 접시와 컵 등을 꺼내서 반


정도 넘기려고 했는데, 치토세는 식기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글쎄~?”
씨익 웃는 모습에서 뭔가 끈적끈적한 기운을 느끼고 등골이 오싹해
지긴 했지만, 끝까지 무시하는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치토세의 머릿속에서 뭔가 크나큰 오해가 생겨나는 듯한 기분이 아
주 강하게 들었지만, 말로 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약간 기분이 좋아진 치토세와 그 모습에 얼굴이 굳은 아마네
는 이츠키가 있는 거실로 돌아갔다.
“그건 그렇고 정말 집이 깨끗하네. 넓은 데다가 호사스러워.”
집안에 놓아둔 오디오에서 흐르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음악을 들
으면서 식사를 대충 마친 뒤에, 한숨을 돌린 치토세는 세 명뿐인 거
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넓은 건 이곳을 마련해 준 부모님 덕분이며, 깔끔한 것은 마히루가
청소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다지 코멘트할 거리가 없는지라 “고
마워.”라고만 대꾸하고 말았다.
“뭐, 한때는 정말 굉장했었지. 용케도 이렇게 깔끔해졌네.”
“시끄러워.”
“응응, 여자의 냄새가 나는걸.”
“왜 그러는데.”
방이 깔끔해졌다는 것이 왜 여자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인
지, 아마네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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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아마네의 성격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방법으로 청소가 되어 있는 것 같거든. 책을 꽂아
놓은 법이라든가 코드가 상하지 않도록 동그랗게 말아서 놔둔 거라
든가. 아마네의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식기들도 여러 개 있었고 말이
야.”
“……어머니 거야.”
“흐응?”
일단 안쪽에 넣어 두긴 했지만, 식기를 꺼낼 때 치토세가 보고 있었
던 모양이다.
아마네의 식기만으론 부족해서 마히루가 자기 집에서 몇 개를 가져
오긴 했는데, 설마 좋든 나쁘든 웬만한 일은 대충 넘기는 성격의 치
토세가 그런 세세한 점을 알아차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뭐, 딱히 상관없지만 말이지~. 그렇지, 잇구운?”
미묘하게 반응이 늦는 아마네를 의미심장하게 본 치토세는 방긋 웃
으면서 이츠키에게 기댔다.
평소에도 이렇게 굴었는지, 이츠키는 딱히 놀라는 모습도 없이 치
토세에게 손을 뻗어서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대로 몸을 안고
있는 자세가 되었기 때문에 뭐랄까, 똑바로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남의 집에서 너무 들러붙지 마.”
“부러워―?”
“별로.”
부럽다기보다 참고 봐 주기가 힘드니 그만했으면 좋겠지만, 이게
평소의 모습인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줘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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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세는 이츠키에게 착 달라붙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가슴


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과 이츠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쯤은 다들 이렇게 러브러브하고 있으려나아.”
“피눈물을 흘릴 녀석들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 줘.”
다들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진 않겠지. 가족과 보내는 사
람도 있을 것이고, 친구와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혼자인 사람
도 있으리라.
솔로를 굴욕으로 여기는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이기 때문에, 치토
세의 발언은 밖에 들렸다간 위험할 것 같았다.
“남자들은 원래 다들 그렇게 애인을 바라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나는 그렇지도 않지만.”
“그건 아마네가 괴짜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시끄러워.”
“뭐, 크리스마스 전엔 다들 들뜨기 마련이지. 특히 독신 남자는 더
그럴 거야. 얼마 전에 천사님에게 다들 몰려가서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초대했던 모양인데, 싹 거절하는 바람에 시체만 쌓였더라
고.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어려워요.’라고 했다나.”
“헤에.”
그 약속 상대가 자신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절하기 좋은 구실이 된 것도 같지만, 거절하면서 마히루가 느꼈
을 양심의 가책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자신을 이용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름은 밝히지 않았을 테니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남자들이 절망하는 얼굴은 정말 위험했어. 실례인 줄 알면서
도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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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마.”
“하지만 평소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이벤트를 핑계 삼
아서 같이 보내자는 말을 하다니 당연히 무리잖아? 그 전부터 친해
지지 못한 시점부터 이미 늦은 것이고, 친하진 않지만 앞으로 친해지
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너무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것 같거
든. 그리고 그런 녀석들일수록 꼭 파티를 하자고 말해 놓고는 단둘이
있으려고 한단 말이지. 여자의 입장에선 무서울 뿐인데.”
혀를 내밀고 “그런 인간들을 따라갈 정도로 가벼운 애도 아니고 말
이지.” 라고 말하는 치토세는 싫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이츠키에게
안겨들었다.
마히루와는 다른 타입이지만 치토세도 미인이기 때문에 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인기가 많은 여자는 인간관계로 골머리를 썩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가여워졌다.
“뭐, 시이나도 고생이 많겠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한다
면.”
“……아마네는 정말로 천사님에게 관심이 없구나.”
“뭐, 그런 셈이지.”
“옆집 사람이 아마네의 천사님이니까 말이지.”
“쫓아내는 수가 있어.”
“아잉.”
그만 하란 뜻을 담아서 약간 강하게 노려보자, 치토세는 익살스럽
게 “무서워.”라고 말하면서 이츠키에게 힘껏 안겼다.
“그래도 옆집 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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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턱 막힌 모습을 보이자, 치토세는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째려보지 마. 미안하대도.”
그다지 반성하는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치토세를 한 번
더 노려보자 “꺄악.” 하고 귀여운 목소리를 내면서 이츠키에게 안기
더니…… 문득 이츠키의 등 뒤에 있는 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왜 그쪽을 보면서 가만히 있나 싶어서 아마네도 덩달아 창문을 보
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물체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보였
다.
“……아, 잇군, 저것 봐! 눈이야!”
“오,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이제 12월 후반이니 눈이 내려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맑은 날씨였는데 눈이 내리다니 신기한 일이지만, 연인들의 입장에
선 기쁜 일이리라.
아직 밤은 아니지만 기온을 감안해 보면 아마도 밤까지 솔솔 내릴
것 같으니, 거룩한 밤을 눈으로 장식해 줄 것이 틀림없다.
‘커플들은 좋아 죽겠군.’ 싶어서 근처 커플이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는 것을 본 아마네가 ‘보나 마나 거기서 한동안 들러붙어 있을
테니까, 따뜻한 거라도 준비해 놓을까.’하고 일어섰을 때―― 베란다
에서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째서 여기에……?”
“어, 어?”
“아.”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최근에 귀에 익숙해진, 어딘가 달콤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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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베란다에서 두 사람이 멈칫한 기색을 느끼면서 황급히 달려가 보
니, 베란다에선 마침 눈을 보러 나온 것으로 보이는 마히루가 펜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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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다. 옆에서 바른 자세로 앉은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한


숨을 쉬었다.
베란다에서 마주치는 대참사를 맞이한 아마네는 어쩔 수 없이 마히
루를 일단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어차피 얼버무리려고 해도, 이 두 사람은 분명히 이상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그나마 쓸데없는 억측과 착
각을 막을 수 있겠지.
그리고 확실하게 입막음을 해놓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다.
“……저기, 정말로 죄송해요.”
“네가 잘못한 게 아냐.”
마히루가 너무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가냘픈 목소리로 사과했지
만, 이번 일에서 잘못한 건 없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것도 첫눈이었으니 무심코 눈을 구경하러 베
란다로 나간 것이겠지.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면 아마 아마네도 말렸겠지만, 방에 음
악을 틀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히루도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로 반성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눈을 반짝이는 치토세가 얼굴을
불쑥 가까이 들이댔다.
“그러니까 아마네의 옆집 사람이 천사님이었단 이야기야?!”
“저기, 천사라고 부르진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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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눈앞에서 천사님이라고 불리는 건 내키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보이고 있었지만, 치토세는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
그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이츠키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볼을 긁으면서 아마네와 마히루의 모
습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 그럼…… 지금까지의 전개를 이야기하자면, 시이나는 아마네
의 옆집에 살고 있고, 자주 아마네에게 식사를 만들어 준다. 이렇게
이해하면 맞는 거야?”
“……응.”
“뭐, 뭐어…… 그게, 도움을 받은 것도 있는 데다, 후지미야 군이
딱 봐도 너무 건강과는 인연이 먼 식생활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
렸기 때문에…….”
처음 인연이 생기게 된 계기도 솔직히 이야기했고 어떻게 교류가
이어져 왔는지도 설명했다. 이츠키는 “그랬구나.”라고 말했지만, 미
묘하게 납득이 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네가 이츠키라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네처럼 평범한 남자를, 마히루처럼 우수한 여자애가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으음, 사정은 파악했지만 말이지. 시이나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
서 아마네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데. 따로 살면서 남편
을 챙기러 오는 출장 와이프 수준이잖아.”
“풉.”
평소에는 전혀 들어볼 일이 없는 단어를 듣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
게 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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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와이프.
듣고 보니, 상황만 따진다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매
일 만들어 주고, 가끔은 휴일의 점심 식사도 차려 주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청소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그렇게 보일 수
도 있으리라.
다른 것은 서로에게 애정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이겠다.
마히루도 이츠키의 말을 듣고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대
외용 미소를 지으면서 “그럴 마음은 없어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요.”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츠키랑 치토세에겐 학교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하는구나. 그
렇게 생각하니, 왠지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상한 마음은 일절 가지고 있지 않고, 그러니까 시이나도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거겠지.”
“아마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관없지만 말이지. 정말로 신기한
조합이네……. 그렇게 유능한 시이나가 아마네에게 요리를 해 준단
말이지. ……인형을 선물해 준 사람도 시이나였어?”
“……뭐, 그래.”
“헤에.”
“시끄러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부터 이미 시끄러웠어.”
“너무해!”
치토세의 방긋거리는…… 아니 히죽거리는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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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실 확인만 하는 거니까 심하게 놀림을 당하지는 않지만,


놀림감이 되는 건 사양이다. 마히루에게도 영향이 미치므로, 가능하
면 치토세는 무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워워, 진정해. 두 사람 다.”
아마네의 상태가 달라진 걸 처음부터 눈치챘던 이츠키는 치토세처
럼 놀리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진심으로 싫어하기 전에 그만두는 걸 보면, 이래저래 놀리긴 해도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고 배려도 할 수 있는 남자였다. 가능하면 파
고들기 전부터 치토세를 말렸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이겠지.
미묘하게 노려보는 아마네와 수수께끼가 풀려 기뻐하는 치토세를
달랜 이츠키는, 무슨 이유인지 자세를 단정하게 바로잡은 뒤에 마히
루를 향해 완전히 돌아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아…… 시이나 양, 우리 아마네가 항상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
다.”
“내가 언제부터 너희 집 애가 되었냐.”
“저야말로 후지미야 군과 사이좋게 지내 줘서 고맙습니다.”
“거기, 편승하지 마. 내가 못난 녀석인 것처럼 들리잖아.”
“실제로 못난 녀석이니까.”
“이 자식.”
확실히 이츠키에게도 그런 소리를 실컷 들었고, 자각도 하고 있었
지만…… 정작 지적을 받으니, 엄청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런 농담에는 잘 응할 수 있는지 가볍게 받아넘긴 마히루는 아마
네와 이츠키의 대화를 듣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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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에게만 보여주는 원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조금 가면을 벗은 듯한 미소였으며, 이츠키도 그걸
보고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친이 있는 녀석이 다른 여자를 넋 놓고 보지 말라는 뜻으로 이츠
키를 쿡 찔렀다. 기분이 상한 듯한 치토세가 마찬가지로…… 아니,
조금 강하게 찔러대는 것이 왠지 재미있었다.
하지만 마히루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기 때문에,
아마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딱히 너희처럼 달달한 관계는 아니지
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틀림없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이해하겠지?”
“이해해. 남들에게 말하진 않을 거야.”
함부로 말했다간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그런 뜻을 은근히 담아
서 한 위협이었지만, 이츠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의외였다.
“치토세, 너도야.”
“나도 그렇게까지 입이 싼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애가 아마네에게 식사를 만들어 준다는 걸 사람들이 믿을 것 같지도
않고.”
“어울리지 않아서 미안하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한 건 아닌데~.”
치토세의 말이 옳다는 건 아마네 자신도 잘 안다.
평범한 남학생을 전교 아이돌이라고 해도 좋을 천사님이 돌봐주고
있다니 아무도 믿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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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믿는다 해도 어울리지 않는 사이라는 악담을 들을 것이 틀림


없다.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사실을 발설하고 싶지 않
았다.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다.
치토세는 “비굴해~.”라면서 아마네를 보고 웃었지만, 도중부턴 저
절로 이끌린 것처럼 마히루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열심히 빤히 본다 싶더니, “호오.” 하고 한숨을 쉬고는 또 바라봤
다.
마히루도 그런 반응이 부담스러운 듯,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눈치
였다.
“저기, 왜 그러죠?”
“……새삼스럽게 든 생각인데 말이지. 시이나는 정말로 엄청 귀엽
네.”
“네? 감사합니다……?”
치토세는 정면에서 칭찬하고는 마히루의 용모를 이리저리 훑듯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지만, 역시 천사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인이네. 이목구비도 반듯하지, 살결도 엄청 하얗고 깨끗하
지, 속눈썹도 길지, 머리카락도 매끄럽지, 가냘프면서 몸매의 굴곡도
뚜렷하지.”
“저, 저기……?”
치토세의 안 좋은 버릇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아마네는 크게 한숨
을 쉬었다.
아마네는 치토세가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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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성품은 의외로 좋아하는 쪽이지만…… 아무


리 좋게 봐도 껄끄러운 면은 있었다. 하이텐션이라든가, 간혹 가다가
쓸데없이 치고 들어오는 부분이라든가, 그런 구석이 상대하기 버거
웠다. 가족 중에 그런 인간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심리적 부담이 생
긴다.
쉽게 말해서, 그 어머니와 어딘가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껄
끄러운 것이다.
치토세는 아마네의 어머니와 성격은 물론이고 취향도 비슷했는
데…… 아름다운 것이나 귀여운 것을 아주 좋아했다.
“와~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엄청 미인이고 귀엽네. 저기, 머리카락
좀 만져 봐도 돼? 아니, 이렇게 부드러운데 무슨 비결이 있어? 샴푸
는 어떤 걸 써?”
“아니, 저, 저기……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봐도…….”
“살결도 부드럽고 탄력이 넘치는데, 뭘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가
유지되는 걸까.”
같은 여자로서 미용의 비결이 궁금한 데다 마히루가 미인이다 보니
만져 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이리라. 치토세가 기관총처럼 질문을
날리면서 마히루에게 손을 뻗었다.
말리지 않으면 역시 마히루가 불쌍할 것 같아서, 손을 뻗으려는 치
토세의 머리를 딱 하고 가볍게 때렸다.
제지와 지적이 목적인지라 정말로 살짝 때리긴 했지만, 충격을 받
은 치토세는 “아얏.” 하고 약간 목소리를 높이면서 마히루한테 뻗으
려던 손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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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어땠는가 하면, 아마네가 멈추게 한 것을 보고 안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천사님으로 굴고 있기 때문에 잊기 쉽지
만, 마히루는 익숙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경계심이 강하다. 물론 치토
세는 여자이기에 아마네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심하게 경계하진 않
았지만, 역시 낯을 가리는 성격은 그대로 발휘되고 있었다.
“때릴 것까진 없잖아.”
“이 녀석은 낯을 가리니까 친숙하지 않은 동안에는 스킨십을 자제
해.”
“친숙해지면 해도 돼?”
“그건 시이나에게 물어봐. 우선은 단계를 밟아, 단계를.”
마히루는 누가 봐도 도망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아니 상당히 난감해하는 마히루를 본 치토세도 자신을 말린
이유를 납득한 듯했다.
“미안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만질 뻔했어.”
“네, 네에…….”
갑자기 만지려 들었다는 폭로를 들어 봤자 난감할 뿐이리라. 어떻
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의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시선으로 도와달
라는 요청을 보냈다.
“아. 시이나, 치토세는 행동력이 엄청난 괴짜이지만 나쁜 애는 아
니야……. 아마도.”
“와, 그게 내 편을 들어 주는 거야? 내 편을 드는 게 아니지? 헐뜯
는 거지?”
“지금의 말과 행동을 보고 부정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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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당당하게 스스로를 부정한 치토세는 마히루를 빤히 보다가,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마히루에게 손바닥을 내미는 형태로.
“그러면 친구부터 되어 주길 부탁드립니다.”
“네? 네, 네, 잘 부탁드릴게요……?”
악수를 요청받으면서, 마히루는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잡았다.
한번 마음에 들면 어떻게든 친한 사이가 되려고 드는 치토세의 성
격상 마히루가 휘둘릴 것 같긴 하지만, 역시 평범한 친구로서 사귄다
면 자신이 굳이 끼어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올바른 교우 관계를 유지해 주면 좋겠다.
“사이좋게 지내려면 자기소개가 중요하겠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아마네한테서 이름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라카와 치토세
라고 해. 아마네의 절친……이라고 해도 되겠지? 절친인 잇군의 여
자 친구야.”
“아이참, 절친이라니 쑥스럽네.”
“쑥스러워하는 척해 봤자 징그럽기만 하거든.”
“또또 그렇게 말한다…… 아마네, 알고 있어? 세간에선 그런 걸 츤
데레라고 불러.”
“정말 쫓아낸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쫓아내겠다니 너무해애.”
“남자가 일부터 교태부리면서 말하지 마.”
우웩. 다분히 의도적으로 기분 나빠하는 반응을 보이자 이츠키가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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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 마히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츠키가 “아, 우


리는 늘 이런 식으로 놀아.”라고 말하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다시 내 소개를 할게. 내 이름은 아카자와 이츠키야. 여
기 있는 솔직하지 못한 녀석의 친구로 지내고 있지. 만약 아마네가
멍청한 짓이나 이상한 짓을 하면 언제든지 상담에 응해 줄게.”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후지미야 군은 저에게 흥미가 없는 것 같고, 생활 능력은 없
지만 상식적인 분이므로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
어요.”
“생활 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족이지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부정할 수 없어서 슬프긴 하지만, 아마네를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건 역시 기쁜 일이었다.
이츠키가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이인데 시이나에게 관심이 없다니,
네가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럽다.”라고 귓속말을 해서, 아마네는 가
볍게 이츠키의 등을 두들겼다.
진심으로 전혀 관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히루 역시 적당히 친하면서, 남녀 관계로서의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 상대로 있는 쪽을 더 바랄 것이다. 자신들은 단지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지내는 사이에 불과하니까.
마히루를 힐끗 보니, 이쪽 이야기가 끝났다고 판단한 것 같은 치토
세에게 질문 공세를 받으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싫어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조금 있으면 익숙
해지면서 마음을 터놓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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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스러워하면서도 작게 미소 지으며 대응하는 마히루의 모습에


아마네는 몰래 안도하면서 두 사람이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정말로 미안해.”
저녁이 되어 이츠키와 치토세가 돌아간 후, 아마네는 약간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마히루에게 사과했다.
갑자기 모르는 인간이 끼어들어서 비밀을 들키는 바람에, 마히루도
곤혹스럽고 많이 지쳤을 것이다.
이런 대화를 시호코가 찾아왔을 때도 나눴던 것 같다.
“아뇨, 제가 어리숙하게 굴었던 게 원인이니까요.”
“많이 소란스러웠지?”
“……활달한 사람이었어요.”
“솔직하게 시끄러웠다고 말해도 괜찮아.”
“밀어붙이는 경향이 조금 있었지만, 재미있는 사람이었어요.”
“조금 수준이 아니잖아……. 그야 뭐,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
았다면 다행이지만 말이지.”
그 정도면 틀림없이 시끄럽다는 영역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표현이 점잖은 마히루는 실로 부드러운 표현으로 치토세를 평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치토세와 친구가 된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마히루와는 상당히 다른 타입인데…… 신선함, 이라는 의미에선 좋
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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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히루가 너무 난감해할 때는 주의를 줄 생각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까 조금은 즐거웠어요.”
“뭐, 치토세 같은 녀석은 별로 흔하지 않겠지……. 너무 귀찮게 굴
면 한 대 때려도 돼.”
“포, 폭력은 좋지 않으니 말로 말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둘 다 치토세의 폭주를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
만, 실제로 치토세는 기세가 넘치다 못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뜨겁게
폭주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했다.
나중에 치토세에게 직접 주의를 주도록 하자.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 아마네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살랑살랑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이런 날씨가 아니었으면, 그 커플에게 들키지 않았겠지만…… 사랑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려고 내리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너무 불평할
수는 없었다.
마히루도 눈을 보는 것 자체는 좋아하는지, 아마네의 시선이 어딜
보는지 뭔지 알아차리고 덩달아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서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이미 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두웠으며, 눈도 색이 연했기 때
문에 집의 조명을 켜놓은 상태에선 아슬아슬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그러네. 뭐, 우리하곤 그다지 관계가 없지만.”
“예쁘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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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는 사이는 아니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직접 관계는 없지


만…… 마히루가 기뻐하고 있으니까, 눈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자잘하게 내리는 눈이 어두워진 세계를 흐릿한 흰색으로 예쁘게 덮
는다. 이대로 계속 내린다고 해도 그렇게 많이 쌓이지는 않으리라.
“뭐, 너무 많이 내리면 대중교통이 마비되니까, 적당히 내려 주면
좋겠지만요.”
“그런 점은 또 현실적이네.”
“사람은 낭만만으론 먹고살 수 없으니까요.”
“지당한 말씀이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눈이 내렸기 때문일지 모른다.
서로를 바라보며 슬쩍 웃은 뒤에, 마히루가 일어섰다.
“그럼 전 식사를 가져올게요.”
“응, 가져온다고?”
“미리 저희 집에서 비프스튜를 만들어 두었거든요. 역시 칠면조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웠다간 둘이선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말이죠…….”
“나라면 통구이를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않을 거야.”
“아마네 군이 요리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내일 점심은
오므라이스에 비프스튜를 끼얹어서 먹죠.”
“엄청 맛있을 것 같은 요리네…….”
그런 건 먹기 전부터 이미 맛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오늘 저녁을
건너뛰고 벌써 내일 점심이 기대가 되잖아.
“난 달걀을 잘 익힌 걸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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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네요, 저도 옛날 그대로의 방식을 좋아하거든요. 그럼 솥을


가져올게요.”
분주한 걸음으로 아마네의 집에서 자기 집으로 잠깐 돌아가는 마히
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아마네는 소란스러웠던 낮 동안
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들킬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부터 의심을 사고 있었으니 그 의심이 더 커질 건 예상하고 있
었지만…… 설마 그 타이밍에서 마히루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
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었고, 이해해 주
는 사람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아주 조금 복잡한 기
분이 들기도 했다.
조금만 더 둘만의 비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나도 참,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두 사람에게 일일이 숨기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까 생활이 훨씬
더 편해질 텐데 미묘하게 답답한 기분이 든다. 자신도 영문을 모른
채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쁜 것이 아닌데, 뭔가가 마음에 걸려서 개운하
지 않았다.
“왜 그러나요?”
“……아무것도 아냐.”
솥을 들고 돌아온 마히루가 아마네의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역시 이렇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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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에게 토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평소와 똑같은 표정을 짓는 아마네를 보
고, 마히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계속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있었
다.

“……하아, 맛있었어.”
여전히 마히루의 요리는 맛있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만든 요리가 나왔
다.
마히루가 푹 끓인 비프스튜는 포트 파이1)로 만들어졌고, 그걸 잘라
먹는 식으로 요리가 나왔다.
파이를 자르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바삭바삭한 식감
에 비프스튜의 깊은 맛이 느껴지는 소스를 발라 먹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한때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파이의 반죽을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마히루의 수준 높은 솜씨에
감탄하면서, 오늘 두 번째의 케이크를 깨끗이 비운 뒤에 한숨을 돌렸
다.
참고로 케이크도 마히루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포트 파이용의 반죽을 만든 김에 케이크에 쓸 반죽을 동시에 만들
고, 그걸 이용하여 밀푀유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정도면 장인 레벨
이었다.
“변변찮은 요리였어요. ……정말 많이 먹어 주었네요.”
“응. 맛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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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짓는 미소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맛있다고 말하면 안도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
니까, 그걸 보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평소의 훨씬 더 부드러운 표정을 보는 건 아마네의 특권 같아서, 왠
지 쑥스러우면서 뭔가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오므라이스란 말이지…… 진짜 기대되는데.”
“정말로 달걀을 좋아하는군요……. 전에 만들었던 달걀말이도 엄청
난 기세로 먹었었죠.”
“맛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좋아하는 달걀 요리라고 해도 맛이 없으면 먹지 않는다. 그
렇게 잘 먹을 수 있었던 건 마히루의 요리가 맛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점하는 것은 과분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넘
겨줄 생각은 없다. 마히루가 만드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 얻어먹
을 생각이다.
“……아마네 군은 밥 먹을 때 정말 행복한 것 같네요.”
“실제로도 행복하고, 마히루의 요리가 맛있기 때문이지.”
“그건 고마울 따름이지만, 행복의 가치가 너무 낮네요.”
“아니, 의외로 그렇지 않다니까……. 너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파
악해…….”
뭐니 뭐니 해도 그 천사님이 직접 만들어 주는 요리이다. 일부 남자
들은 그걸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죽도록 원하리라.
“저는 매일 만드는 것이니까요.”
“행복한 인간이네, 나란 놈은.”
“……그 정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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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맛있는 요리를 매일 먹을 수 있으니까.”


기본적으로는 물욕이 그다지 없는 아마네지만 식욕은 강했으며, 매
일 맛있는 요리를 완성된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지?”
“절 돌봐 주던 사람이 가르쳐 줬어요. ‘널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의
위장을 반드시 붙잡아야 해.’라고 말했었죠.”
“미안하네. 나 같은 놈의 위장을 붙잡게 만들었으니.”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할게요.”
쿡 하고 살짝 미소 지은 마히루를 보고 본의 아니게도 가슴이 두근
거렸다.
“……그건 그렇고 널 돌봐 줬다는 사람도 대단하네.”
“그러네요, 그 사람은 요리를 정말 잘했으니까요. 아직 저는 그 사
람에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에요. 그 사람의 요리에선 행복한 맛이
느껴졌거든요.”
여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약간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회상 중인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마히루는 돌봐 주었다는 그 사람에게 귀여
움을 받았을 것이다. 마히루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알 수 있
었다.
그런 사람이 마히루의 곁에 있어 주었다는 건 정말 요행이라 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도 맛있었나 보네. 뭐, 나는 네 요리에서 행복한 맛을 느
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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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일단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의 요리도 맛있지만 마히루의


요리가 아마네의 입맛에 더 맞았다.
마히루의 요리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맛이 느
껴졌다. 마음을 편하게 만들면서도 마음이 들뜨게 만드는 요리였으
며, 전혀 질리지 않고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뭐, 역시 마히루의 부담이 너무 커지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않겠지
만.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마히루가 멍하니 굳어 있었
다.
허를 찔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
어딘가 멍하게,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아마네를 보고 있었다.
“……마히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마네가 부르자 제정신을 차렸는지, 마히루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
고는 머리를 숙였다.
좋아하는 쿠션을 꼭 끌어안고 슬쩍 한숨을 쉬는 마히루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미묘한 색기를 느끼게 했다.
“왜 그래?”
“……그냥, 저 같은 사람이 행복한 맛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이 들었을 뿐이에요.”
“왜 자신을 비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요리는 매일 먹고 싶
을 정도로 맛있어.”
“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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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이쪽을 힐끔 쳐다보고 약간 쑥스러운 듯 눈썹을 늘어트리


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아마네가 고개를 숙이면서 표정을
감추고 싶어졌다.
정말로 극히 드물게 보여 주는 이런 표정은,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평소의 가면을 벗고 무방비하다고 표현해도 될 미소를 짓는 마히루
를 보고, 아마네는 지금 당장 얼굴을 식히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점점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열기를 들키는 건 싫다. 서로 쑥스러워
하고 있었으니까, 틀림없이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아, 저기…… 그렇지, 마히루.”
“네.”
“내일은 낮부터 같이 있으면 되겠지?”
이런 분위기를 참지 못해 억지로 화제를 바꾸고 말았지만, 마히루
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 아마네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
었다.
“네,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점심을 만들어 먹고, 그런 뒤에
약속한 대로 게임을, 하기……로 했죠.”
“응.”
“내키지 않……나요?”
“아니, 그냥 확인을 했을 뿐이야. ……이브는 이미 지나가긴 했지
만 정말 크리스마스를 그런 식으로 보내도 된단 말이지?”
“내키지 않는다면 저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기대하
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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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히루가 살짝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네는 이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응.”이라고 대충 대꾸한 다음, 마히루와는 반대쪽에
있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 부끄러움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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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둘이서 크리스마스

다음 날 집으로 찾아온 마히루는 약간 들떠 침착하지 못한 모습이


었다.
휴일에 남자 집에 놀러 갔을 때 느끼는 긴장…… 때문일 리는 없으
며, 자신의 희망대로 게임을 하게 된 흥분이 드러난 것이리라.
듣자니 TV 게임은 처음 해 본다고 한다. 그런 점을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먼저 만들게요.”
“응. 달걀은 충분히 익혀 줘.”
“알고 있어요.”
요구하는 것이 많은 손님 상대로도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고,
앞치마를 걸치고 바로 주방으로 가서 점심 식사 준비를 시작하는 마
히루는 기분이 꽤나 좋은 상태 같았다.
그렇게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묘하게
쑥스럽다고 할까, 온몸이 근질거렸다.
‘뭐, 게임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겠지만 말이지.’
결코 이렇게 단둘이서 노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묶은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아마네는 쓴웃음을
슬쩍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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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조작하는 건가요?”


점심을 먹은 후에, 둘이서 TV 앞 소파에 앉아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지만 종류조차도 잘 몰라서, 유명
한 국민적 2D 게임을 켜서 컨트롤러를 줘 봤지만…… 역시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일단 이동은 이 스틱으로, 점프는 이 버튼으로 하는
건데…….”
기본적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한 마히루가 엄청 당황한 모습으로 컨
트롤러와 TV를 번갈아 보면서 조작해서, 왠지 참 훈훈했다.
익숙하지 않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엉성한 플레이는 처음 보았
다.
적이 돌격해 와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걸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걸 보니, 천사님도 못하는 게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못 이기겠어요.”
“스테이지 클리어는 물론이고 처음 만나는 적조차도 쓰러트리질 못
하니까 말이지.”
“시끄러워요.”
“뭐, 익숙해지면 될 거야. 이런 건 몸으로 익히면 돼.”
무슨 일이든 도전하면 된다고 말해 주자, 마히루는 순순히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오락거리인 게임에 진지한 표정으로 임하고 있는 마히루를 보고 있
으려니 흐뭇한 기분까지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만 미소가 지어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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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너무 금방 죽어 버리는 통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행되지


못하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점차 웃음보다는 불안이 더 커지기 시작
했지만.
마히루가 아마네를 돌아봤다.
표정에 ‘뚜웅’ 하는 효과음이 동반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기분 탓
일까.
“아…… 잘 봐,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역시 이대로 가면 의욕 자체가 꺾일지도 모르기에, 아마네는 마히
루가 쥔 컨트롤러에 손을 얹고 잠시 시범을 보이는 식으로 플레이를
했다.
이 게임은 몇 번이나 클리어했기 때문에 마히루가 막혔던 장소도
무난하게 돌파할 수 있었다.
사실 마히루가 너무 서투를 뿐이며, 평범한 인간은 이렇게까지 오
래 걸리지는 않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잘 봐. 이 적은 일정한 속도로 불규칙하게 이동하지만, 우리를 인
식하면 캐릭터를 향해 속도를 높여서 다가와. 타이밍을 잘 보고 있다
가 점프해서…….”
작은 손 위에 겹치듯 얹어 놓은 손으로 컨트롤러를 쥐고 조작했으
며,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시범을 보여줬다.
화면에선 아마네가 설명했던 대로 캐릭터가 움직이고, 적을 피했
다.
특별할 것도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계속 실패만 해 온 마히루에겐
신선했는지 “와아.” 하는 감탄의 목소리가 나왔다.
긴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눈이 크게 떠졌고, 표정도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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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거리 덕분에 아래쪽의 속눈썹도 길다는 새로운 발견을 하


고, 기뻐하고 있는 마히루를 바라보고 살짝 웃었다.
단정한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마히루가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아
마네 쪽을 돌아봤다.
마히루가 든 컨트롤러를 잡을 만큼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생각했
던 것보다 거리가 가까웠다. 정확히는 팔뚝과 손이 이미 서로 맞닿
고, 그 숨결이 자신의 피부를 슬쩍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가까웠다.
덕분에 마히루의 온기와 달콤한 향기가 직접 전해져 왔다.
“미안.”
마히루의 손을 포개듯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떼자, 마히루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리고는 가까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뇨……. 딱히. 저야말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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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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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색조를 띤 볼을 보면서, 해선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는 후회가 엄습했다.
마히루는 남과 접촉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
이 익숙해진 사이라고 해도, 손을 잡히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
다.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혐오감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
이다.
“정말 미안해.”
“저기, 그렇게까지 마음에 두고 있진 않으니까요.”
“싫지 않았어?”
“……깜짝 놀라긴 했지만, 싫다뇨.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관대하신 천사님은 아무래도 자신의 무례를 용서해 주는 것 같았
다.
바로 잊고 넘어가 주는 마히루의 반응에 안도하면서,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마히루가 게임을 진행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화면을
보다가…… 역시 게임 오버 당하는 마히루의 모습을 보고, 아마네는
어떻게 하면 마히루가 게임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
했다.
결과적으로 온갖 고생을 한 끝에 첫 스테이지를 겨우 클리어했을
때, 일단 이 게임은 중단하기로 했다.
완전 초보자에게 이런 마음고생을 계속 시켰다간 의욕 자체가 사라
질 수도 있다. 다른 게임으로 눈을 돌리게 해서, 스트레스를 풀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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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의도였다.
“마히루, 몸이 기울고 있어.”
그런고로 다음에는 현실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익숙할 것 같은 레이
싱 게임을 플레이시켜 봤는데…… 마히루의 몸이 기울고 있었다.
이 게임은 자이로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컨트롤러에도 자이로
센서가 달려 있지 않았다.
몸을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건지
컨트롤러를 쥔 상태에서 몸을 좌우로 기울이고 있었다.
본인은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까 게임과는 달리, 차를 조종하는 게임이라서 차를 탈 기회가 있
는 현대인은 익숙해지기 쉬웠던 모양이다. 학습한 보람도 있었는지,
서투르게 운전하면서도 플레이 자체는 해내고 있었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몸을 기울이며 열심히 차를 움직인
다.
‘뭐야, 이거. 귀여워.’
진자처럼 좌우로 몸을 기울이는 마히루가 묘하게 귀여웠다. 아주
진지하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괜히 더 귀엽게 보이는 것이겠지.
커다란 커브를 돌자, 자연스럽게 마히루의 몸도 크게 기울어졌다.
툭 하고 아마네의 허벅지 위로 쓰러졌을 때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할 지경이었다.
“……딱히 몸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거든?”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응, 알아. 하지만 기울어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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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마히루를 일으켜 주었


다.
역시 예상대로 부드럽고 가벼웠다. 몸집이 작은 것도 있지만, 부러
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가벼워서 손을 대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
였다.
아마네가 일으켜 준 마히루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볼을 붉히면서 떨
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작은 동물처럼 귀여운지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 절 바보 취급하는 것 아닌가요.”
“아냐, 아냐, 보고 있으니 흐뭇해서 그래.”
“그게 바보 취급하는 거라고요.”
“내가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할 거라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요…….”
“그렇지? 그냥 귀여워서 그랬던 거야.”
“……그 귀엽다는 건 분명히 어린아이 같아서 흐뭇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네요.”
어딘가 토라진 듯이 들리는 말. 너무 지나치게 놀렸다간 기분이 상
해버릴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감상을 늘어놓는 건 그만하기로 했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
으니까, 마음속으로만 몰래 생각하기로 하자.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인 것을 보고 작게 웃자, 마히루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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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님이 도중에 토라지는 사태가 있었긴 했지만, 게임을 하는 도


중에 깨끗이 잊어버렸는지 천사님은 다시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게임 자체에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위태위태 하면서도 플레이는 할
수 있었으며, 그럭저럭 적응하는 듯했다.
처음에 했던 게임과 달리 차를 조종하는 콘셉트의 게임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코스에서 벗어나 비포장도로에 들어가 버리거나 벽에 격렬하
게 충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진은 하고 있었다.
게임이 서툰 마히루라서 역주행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
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순조롭게 나아가는지라 안도했다.
기왕 하는 김에 아마네도 화면 분할로 함께 플레이를 시작했지만,
마히루가 무의식중에 방해를 하는지라 좀 힘들었다.
역시 마히루는 자연스럽게 몸이 기울어지는 버릇이 있는지, 때때로
팔뚝 부근에 머리가 툭 닿았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좋은 냄새가 화악 하고 풍겨왔기 때문에 아마네로선
차분하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가장 쉬운 레벨로 설정한 CPU가 상대였기 때문에 독주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빠른 건가요.”
“세월과 경험.”
몇 번이나 플레이하다 보면 코스를 외우고, 코너링도 자연스럽게
잘하게 된다. 상대의 방해도 익숙해지면 카메라워크와 차단물 등을
구사하여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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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마히루를 보고 쓴웃음으로 대답한


후, 슬쩍 1인용 플레이로 되돌려 주었다.
마히루는 경험이 부족하니까 우선 큰 화면으로 연습해야겠지. 아마
네의 실력을 보고 자신의 실력에 실망하는 것보다 CPU에 익숙해지
는 것이 더 낫다.
다행히 마히루도 의욕이 있는지, 다시 1인용 플레이를 시작했어도
열심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익혀나가면, 뭐, CPU를 상대로는 그럭저럭 충분히 맞
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노력가인 면을 이런 데에서도 볼 수 있는지라, 역시 미소가 절로 지
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몰래 웃었는데 기척으로 그걸 알아차
렸는지 마히루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더 웃었더니, 마히루가 눈썹을 찌푸린 뒤
에 “아마네 군, 바보.”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겼어요.”
두 시간을 넘긴 고전이 끝난 후.
화면 끝에 찬란하게 빛나는 1등이라는 글자를 획득한 상태로 골인
에 성공한 마히루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마네를 봤다.
긴 시간 동안 TV를 보면서 격투를 치른 끝에 드디어 얻은 영광의 1
등.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꼴찌를 경험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 순위를 조금씩 올려서, 가까스로 1등을 차지했으니까 감격스럽
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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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냈다는 듯 성취감 가득한 마히루의 표정을 보고, 아마네는 솔직


하게 칭찬의 박수를 보냈다.
“잘됐네. 계속 노력하던 걸 보고 있었어.”
“네.”
칭찬을 받아서 기뻤는지, 평소보다 약간 쑥스러운 듯이 풀린 표정
이었다.
알아보기 쉽게 방긋방긋 웃는 게 아니라, 아주 약간 기쁜 표정으로
부드럽게 머금은 미소는 평소 마히루가 보여주는 쿨한 모습에선 생
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달했다.
최근 들어 평소의 쿨한 모습 사이로 간간이 또래 소녀다운 면을 보
여 주게 된 마히루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자신의 나이에 맞는
표정을 보여 주고 있는지라 너무 귀여웠다.
어딘가 천진난만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순진무구한 미소는 아마
네의 이성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욕
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와도 비슷한, 귀여워해 주고 싶다는
그 충동은 그만 자신의 팔에 명령을 내리고 말았고…… 자신도 모르
게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황급하게 다시 내렸다.
“왜 그러나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제는 잘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서.”
“숙달된 것 같나요?”
“응응. 처음에 비하면 아주 좋아졌어.”
“고마워요. 재미있어서 그만 열심히 하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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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하고 또 미소를 지은 마히루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서, 아마네는 그런 마음을 얼버무리듯이 집안의 찬장에 있는 바구니
에 넣어두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1등을 한 상으로 이걸 줄게.”
“네? 저기, 딱히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상을 받는 게 싫다면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덩치 큰 할아버
지가 맡긴 걸로 치자고.”
그렇다. 어제 그만 주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이
었다.
생일과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서 다시 선물을 고르는 것이 힘들긴 했
지만, 한 번 해 본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생일 선물을 살 때만큼 고
생하진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말에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새삼 떠올
렸는지 눈을 깜박이던 마히루가 선물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열어도 된다고 말하자, 또 정성 어린 손길로 포장을 풀고 있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말이지.’
상자를 열고 천천히 꺼낸 것은 가죽으로 만든 키 케이스였다.
너무 비싼 걸 줘도 받는 사람이 난감해할 것 같으니까 브랜드를 보
고 고르지 않고, 순수하게 디자인만 봐서 마히루에게 어울릴 만한 것
을 골랐다.
꽃과 덩굴의 모양이 각인된 심플한 것으로, 평소에 쓰기에도 무난
한 정도의 디자인. 꽃은 자세히 알지 못해서 뭐가 새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섬세한 모양이 틀림없이 마히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서 골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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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벌 열쇠를 줬으니까 말이지. 딱히 쓰지 않겠다면 그래도


돼.”
“아뇨, 고맙게 쓰도록 하겠어요. 아마네 군은 생각했던 것보다 센
스가 좋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좋다는 건 무슨 뜻이야?”
“아뇨, 평소에는 스웨트 소재 아니면 체육복만 입는 데다, 복장이
센스 이전에 문제가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기능성이 좋은 옷은 달리 없다고.”
마히루에겐 옷을 꾸며 입은 모습을 보일 기회도 없었고, 그런 건 귀
찮아서 되도록 피하고 싶었기에 교복이나 늘어진 실내복을 입은 모
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센스를 따지기 전에 깔끔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저절로 붙었
을 것이다. 뭐, 깔끔하지 못하다는 건 사실이므로, 그 인상을 불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잘 차려입으면 멋지게 보일지도 몰라요. 중학생 때의 아마네
군은 그랬잖아요.”
“그건 어머니가 억지로…… 잠깐,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시호코 씨가 ‘잘 차려입으면 이렇게 될 수 있는데 말이지.’라고 사
진을…….”
“그 사람이 진짜…….”
설마 어머니의 일에 억지로 어울리느라 딱 봐도 외부에 선보일 차
림으로 차려입게 된 사진이 유출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
마네는 이 자리에 없는 어머니에게 속으로 대량의 불평을 퍼부었다.
“……나한텐 그런 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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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아마네 군은 다른 사람과 그다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 하거나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지, 이목구비는 딱히 문제
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작은 손이 아마네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쓸어 올리려는 듯이 흰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
고, 시야가 평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목욕할 때를 제외하면 오랜만에 훤하게 트인 시야로 앞을 보자, 아
주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마히루가 있었다.
딱히 놀랄 거 없는,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일 텐
데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마히루가 너무 이상했다.
“……왜 그래?”
“아뇨, 예전보다 눈이 생기를 띠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히루가 “몇 개월 전에는 죽은 눈을 하고 있었거든요.”라고 너무
실례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아마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봐도 딱히 재미있지 않을 텐데,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
고 있었다.
여자가, 그것도 엄청난 미소녀가 자신을 응시하는 건 어쩐지 부끄
러웠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는 건 재미가 없다. 아마네도 반격하듯 마히루
의 볼에 걸려 있는 머리카락에 손을 대 아름다운 얼굴을 노출시켰다.
손을 대는 것은 약간 망설여졌지만, 마히루도 별생각 없이 아마네
의 머리카락을 먼저 만졌으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 주리라. 머리를 쓰
다듬은 것은 아니니까 세이프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건 그렇고, 정말 미인이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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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마히루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과거에 아마네의 방에 놓여 있던 잡지에 실린 미녀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애초에 사진이라는 것은 그다지 신용할 수 없다.
한순간을 도려내어 가공할 수 있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
는 것도, 아름다움을 더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도, 가장하는 것도 가
능하니까.
눈앞에 있는 마히루는 가공하지 않아도 귀엽고 아름다웠다.
질릴 것 같지 않은 그 반듯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
히루의 시선이 점점 갈 곳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히루가 아마네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뭔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잠깐 꼼지락거리던 마히루는 컨트롤
러를 완전히 놓고 옆에 있던 쿠션을 끌어안았다.
“저기. 그…… 그렇지. 저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어요.”
“으, 응, 고마워.”
대체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마히루는 이야기를 차단하듯
이 옆에 놓아둔 가방에서 포장이 된 꾸러미를 꺼내더니 아마네에게
떠넘기듯 내밀었다.
“그럼 전 저녁 준비를 해야겠어요.”
“응? 그, 그래……?”
그 말만 남기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너
무나도 빠른 전개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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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마친 아마네가 거실로 돌아오자, 마히


루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최근에는 옆자리에 앉는 것도 익숙해졌는데, 어째서인지 마히루가
도저히 진정하질 못했다. 저녁을 먹는 중에도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
고 있었다.
마히루가 자신을 의식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무슨 이유로
그러는 건지 궁금했지만, 혹시 선물을 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네도 마히루에게 곰 인형을 주었을 때는 쑥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
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으니, 자신의 반응이 어떤지
몰라서 불안한 걸까.
“그러고 보니 이거, 열어 봐도 될까?”
“그, 그러세요…….”
낮은 탁자 위에 놓아둔 마히루가 준 선물을 들어 올리자,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선물 때문에 긴장한 거구나. 속으로 그런 결론을 낸 아마네는
꾸러미에 묶여 있던 리본을 풀었다.
무게로만 따지면 그렇게 무겁지 않았으며 만져 보고 천으로 만든
제품이라는 걸 알았지만, 꺼냈을 때 모노톤의 물떼새 무늬의 천이 나
온 것은 예상외였다.
이게 뭐지, 라고 생각했지만, 펼쳐본 뒤에는 어떤 용도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머플러였구나.”
부드럽고 매끄러운 촉감의 머플러는 목에 둘러서 몸을 따뜻하게 만
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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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은 멋을 부리는 것에 둔한 것 같고, 등하교 시에는


늘 추워 보였으니까요.”
“실용성은 확실한 거네. 촉감도 아주 좋고.”
“평소에 사용하는 것은 질을 중시해야 하니까요.”
기본적으로 질이 좋은 것을 갖춰서 사용하고 있는 마히루가 하는
말이니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싼 물건을 사는 걸로 돈을 헛되이 쓰
지 않고 질이 좋은 것을 오래 사용하는 타입 같으니, 그런 마히루의
기준에 들었다면 틀림없이 좋은 물건일 것이다.
손을 대 보니 아주 촉감이 좋았고 민감한 피부에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웠기 때문에 착용감도 너무나 편할 것 같았
다.
마히루가 골랐다는 것이 수긍이 될 만한 품질에 감탄하면서, 자신
의 반응을 약간 경직된 분위기로 지켜보고 있는 마히루에게 머플러
를 흔들어서 보여 줬다.
“둘러봐도 될까.”
“아마네 군에게 준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럴게.”
미묘하게 무뚝뚝한 대답에 그만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히루의 말에
따라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목은 피부가 얇기 때문에 촉감이 얼마나 좋은지를 바로 알 수 있었
다. 부드럽고 피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공기를 통과시키지 않고
온기를 보존해 주는 머플러의 느낌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실내에 있으니까 효과를 느끼기 어려울 것 같지만, 아마 밖
에서 둘러도 충분히 따뜻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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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주 따뜻해.”
“그건 다행이네요.”
아마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마히루도 안도한 듯이 옅은 미소
를 지었다.
최근에는 이전과 다른 종류의 미소를 짓게 된 마히루의 단정하고
예쁜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다.
‘……이러고 있으면 진짜 천사님이란 말이지.’
학교에서 짓는 천사의 미소가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렇
게 솔직한 모습으로 보여 주는 미소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왜, 왜 그러죠?”
계속 바라보고 있던 것을 알아차렸는지, 약간 주위를 돌아본 후 아
마네를 쳐다보았다.
“아니, 마히루도 처음 봤을 때 비교하면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그런가요?”
자신은 몰랐다는 듯 볼에 손을 대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작게 웃었다.
“응. 아니, 전에는 툭툭 쏘아대기만 했고 귀여운 맛이 없었다고 할
까―.”
“귀여운 맛이 없어서 미안하네요.”
“화내지 마.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뭐랄까― 좋아졌다고 생
각해. 그런 식으로 웃는 게 더 귀여운데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마히루가 차원이 다른 미소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표정에
따라서 인상은 바뀌는 법이다. 학교에서 보여 주는 천사의 미소는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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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이라고 할까,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손을 대선 안 되는 물건 같


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처음에 아마네에게 보여 주던 차가운 눈매와 표정은 사람을 다가오
지 못하게 하는 가시 돋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지금의 마히루는 그 나이에 맞게 어딘가 천진난만하고 부드러운 분
위기를 띤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쓰다듬으면서 귀여워해 주고 싶은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게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마음을 터놓게 된 덕분에 생긴 변화라고
생각하자, 뭐라고 말하기 힘든 근질거리는 느낌이 가슴속에서 올라
오더니 볼까지 도달했다.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웃어 주면, 이제는 친숙해진 것 같아서 나도
기쁘니까…… 뭐하는 거야, 지금.”
하지만 그 말은 도중에 물리적으로 가로막혔다.
어째서인지 마히루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목에 두른 머플러를 아마
네의 눈 위치까지 올리더니, 거기서 멈춘 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기행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올리기만 했을 뿐 머플러가 얼굴을 조르는 건 아닌지라 갑
갑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숨결이 쌓이면서 약간 뜨겁게 느껴졌다.
“……잠깐만 조용히 있어 주세요.”
“대체 왜?”
“……그냥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시야가 가로막혀서, 일단 머플러를
쥔 채 올리고 있는 손목을 붙잡고 내리려고 했다. 겨우 트인 시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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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갈색이 보였다.
정면에서 본 마히루의 볼은 미묘하게 떨리고 안쪽부터 확연하게 물
이 들어 있었다.
새빨갛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달아오르듯 붉어진 마히루의 얼
굴은 아마네를 보자 한층 더 붉은 기운이 강해졌다.
왜 이런 표정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짐작이 가는 이유는 그
나마 하나 정도였다.
“……혹시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시끄러워요.”
아마네의 말을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마히루를 보고, ‘이럴
때는 역시 새침하게 구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그만 웃고
말았다.
마히루는 그런 아마네를 보면서 나지막이 신음하더니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올게요.”라고 중얼거린 뒤에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창밖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눈이 살랑살랑 내리고 있었지만, 마히
루는 상관하지 않고 베란다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아마네가 있는 곳까지 흘러들어 왔다.
바로 창문을 닫아서 바깥 공기를 차단했지만, 은근히 남아 있는 차
가운 공기는 무심결에 몸을 부르르 떨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런데도 베란다로 나간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슬쩍 한숨을 쉬
었다.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도망친 건 좋지만, 좀 더 따뜻한 차림으로 나
가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마히루가 입은 옷은 웃옷을 걸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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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실내에 있는 것을 전제로 멋을 우선한 차림이니까. 저런 차림으로


있다간 가냘픈 몸이 금세 차가워질 것이다.
“정말이지…….”
그렇게 투덜대면서, 소파에 걸쳐 두었던 담요를 집어 들었다.
눈도 조금씩 쌓이고 있는데 얇은 옷만 입은 채 밖에 오래 있으면 몸
에 좋지 않다.
자신도 웃옷을 걸친 뒤에 베란다로 나가서 마히루의 어깨에 담요를
걸쳐 주자, 마히루가 빠르게 돌아봤다.
“바깥 공기를 쐬는 건 좋지만, 감기 들 거야.”
“……그건 제가 할 말 아닌가요?”
보아하니 이제 평정을 되찾았는지, 마히루는 평소의 모습과 표정으
로 대꾸했지만 거기에는 약간 비꼬는 투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아마네가 마히루와 처음 대화를 나눴던 때의 일을 지적하는
것이겠지.
“윽. ……그건 목욕으로 몸을 제대로 덥히지 못했기 때문이야. 방
심했던 것뿐이라고.”
“다음에는 몸이 젖으면 확실하게 체온을 유지하도록 하세요. 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바로 욕실로 밀어 넣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네가 우리 엄마야?”
가끔 마히루는 어머니 같은 말을 꺼낸다. 웃으면서 첫 만남을 떠올
렸다.
그건 가을에 접어들면서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었다.
아마도 10월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살았던 곳보다 날씨가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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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리 추워지는 바람에 방심한 것도 있지만, 설마 약간 젖은 것 때문에


열이 나면서 드러누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마히루의 간호를 받은 것이 가장 예상 밖의 일이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말을 트고 나서 벌써 2개월이 지났
네.”
“그러네요. 아마네 군의 방이 더러웠던 것도 좋은…… 아니, 좋지
는 않았지만, 어쨌든 추억이에요.”
“시끄러워. 지금은 깔끔하게 치우고 살잖아.”
“누구 덕분일까요.”
“마히루 님 덕분이지. 엎드려서 감사의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
야.”
“필요 없거든요, 정말이지.”
이렇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다니 옛날의 자신이라면
믿지 못하리라. 옛날이라고 하기엔 꽤나 최근의 일이지만, 이 2개월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 빨랐다.
침묵이 한 번 흐르면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제부터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던 눈은, 지금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리면서 아마네의 집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주택가, 그것도 크리스마스 밤이었기 때문에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
랑 갖가지 소음은 왠지 멀게 느껴졌다. 어딘가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목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마히루가 하아, 하고 숨을 내쉬면서 하얀 입김을 만드는 소리가 또
렷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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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왠지 이상한 기분이에요.”


한동안의 침묵 후 먼저 입을 연 건 마히루 쪽이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 뭐지?’라고 생각했거든요.”
“뭐, 마히루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랬겠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내밀면 의심을 하게 될 거야. ……지금은 어때?”
“……글쎄, 어떨까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요.”
“그 말이 맞아.”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마히루를 보고 웃으면서,
베란다의 손잡이에 기댔다.
“……나도 이렇게 둘이서 밥 먹는 사이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솔직히 말해서 마히루는 감상하는 대상이라는 느낌이었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너무 솔직하네요. 알고는 있었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신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한마디를 더하는
걸 듣고, 아마네는 몸을 들썩이면서 웃었다.
흥미가 없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마히루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피차 마찬가지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뭐, 이렇게 알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생활 습
관을 개선했고, 매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데다, 너와
같이 어울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니까 말이지.”
“……그런가요.”
“정말로 이 두 달 동안 감사히 여겨야 할 일밖에 없었어. 고마워.”
이 고마운 마음에는 거짓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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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마히루 덕분에 생활 수준은 올라갔고 매일 맛있고 행복한 식사 시


간을 보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꾸밈없는 마히루와 이야기하는
것도 의외로 마음이 편했기에 일상의 즐거움이 되어 있었다.
때때로 놀렸을 때의 반응도 귀엽고,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았다.
‘최근에는 잘 웃게 되었고 말이지.’
조금 전에도 생각했지만, 감정표현이 풍부해지면서 어쩐지 귀여워
해 주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역시 실행은 할 수 없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아마네의 말에 눈이 동그래진 마히루가 아주 살짝 시선을 낮췄다.
약간 볼이 붉어진 것은 추위 때문일까, 부끄럽기 때문일까.
“저야말로 고마워요.”
“나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아마네는 신세를 지기만 했을 뿐 아무런 답례도 해 주지 않았는데,
마히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부정했다.
“……아마네 군은 모르겠지만,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 많았거든
요.”
“흐―응…… 왠지 서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왠지
연말 같은 느낌이 드네. 내일부터 연말 무드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이
상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무슨 이유인지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아직 그믐날
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엿새 후면 그믐날이 되니까 연말에 가
깝기는 하지만.
마히루는 연말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반짝 빛내더니 쿡 하고 미소
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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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후후, 그러네요. ……아직 이르지만, 내년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응, 내년에도 잘 부탁해.”
바라 마지않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찬가지로 웃어 주자,
마히루가 “몸이 차가워졌으니까 슬슬 들어갈까요.”라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거실로 연결된 창문을 열었다.
힐끗 보인 귀가 살짝 빨개질 정도로 몸이 차가워진 걸 보면, 아마네
도 감기에 들기 전에 철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도 이 생활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가슴속이 따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히루를 따라 방으로 돌아가면서, 아마네는 황갈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옆집 천사님과 함께 지내는 생활은 앞으로도 조금 더 계속될 것 같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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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후기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에키상이라고 합니다.

『옆집 천사님』은 재미있게 즐기셨는지요.


따뜻하고 안타까우면서 부드러운 러브코미디를 목표로 쓴 작품입
니다만, 그 목표대로 잘 써낸 것 같다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습니
다.
처음에는 서로 차갑고 무뚝뚝한 관계로 시작했지만, 서서히 신뢰를
쌓으면서 어느새 서로에게 이끌리는―― 그런 식으로 감정과 관계가
바뀌어 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상대를 알아 가면서 거리를 좁히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도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안달복달하면서 안타까운 사랑이야말로 최고라고요!’라는 뜻입니
다.
이 작품은 인터넷에 게재했던 것을 가필 및 수정하여 책으로 묶은
것이 되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1권 분량에선 아직 서로의 감정
을 완전하게는 확인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
작입니다.
앞으로도 주인공 두 사람은 속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서로에게 가
까이 다가가게 만들 예정입니다. 둘이 서로 좋아하면서 그걸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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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짝사랑은 정말 최고라니까요.

이 작품 안에서 히로인인 마히루는 천사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만, 일러스트 덕분에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완
성되었습니다. 카즈타케 하자노 작가님의 멋진 일러스트 덕분에 천
사님, 그러니까 마히루의 매력도 더욱 잘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실은 담당 편집자 분과 회의를 했을 때 일러스트는 카즈타케 작가
님이 좋겠다고(눈치) 주장했습니다만, 작가님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서 너무 놀랐습니다.
계속 좋아했던 작가님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감동하고 말았죠…….
일러스트를 맡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즈타케 작가님의 매력이 듬뿍 담긴 일러스트를 보면 아시겠지만,
모든 캐릭터가 다 귀엽습니다. 일러스트를 받아서 보게 될 때마다 너
무 좋아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천사님은 정말 천사였습니다.
멋지게 그려 주셔서 정말로 고마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이 되겠지만, 신세를 진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


를 드립니다.
이 작품을 출판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주신 담당 편집자님, GA문
고 편집부 분들, 영업부 분들, 교정 담당자님, 카즈타케 하자노 작가
님, 인쇄소 직원 분들, 그리고 이 책을 구입해 주신 독자 여러분, 너
무나 감사합니다.
다음 권에서 다시 뵐 수 있기를 빌면서,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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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끝까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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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사에키상

주석

1) 포트 파이 : 고기를 넣은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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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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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1

전자책 발행일 2021년 03월 10일


전자책 ISBN 979-11-6625-823-7 (05830)
전자책 정가 4,500원
지은이 사에키상
일러스트 카즈타케 하자노, 하네코토
옮김 도영명
펴낸이 임광순
펴낸곳 영상출판미디어(주)

OTONARI NO TENSHISAMA NI ITSUNOMANIKA DAMENINGEN NI SARETEITA KEN vol. 1


Copyright ⓒ 2019 Saekisan
Cover Illustrations ⓒ 2019 Hanekoto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2019 by SB Creative Corp.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SB Creative Corp., Tokyo


in care of Tuttle-Mori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영상출판미디어(주)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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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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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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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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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제1화 천사님과 보내는 연말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세상은 온통 연말 분위기가 된다.


마히루와 함께 보내서 외톨이 크리스마스를 회피한 다음 날, 아마
네는 장을 보러 혼자 밖에 나와 있었다. 그야 살 것은 이미 다 사고
주위 풍경이 변하는 양상을 구경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지만.
야경을 위해서인지 장식용 조명은 아직 남았지만, 그토록 잔뜩 치
장했던 크리스마스 트리는 이미 치워지고, 눈에 선한 장식들은 대부
분 전통 일본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 것도 전면적으로 새해맞이 장식이나 식재료로 바뀌
면서 이미 크리스마스 이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기껏해
야 크리스마스에 못 팔고 남은 상품의 가격을 낮춰 재고 정리 세일이
라는 명목으로 진열한 것이 전부이리라.
태세 전환이 참 빠르구나. 연말연시 준비에 들어간 주위를 둘러보
면서, 아마네는 머플러에 얼굴을 묻고 추위를 이기려 했다.
모노톤의 물떼새 무늬 머플러는 마히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
은 것이다.
듣기론 ‘목 주변도 잘 꾸미는 게 중요해요.’라는데. 촉감이 정말 좋
고 바람을 단단히 막아서 온기를 품어 주는, 실용성과 패션을 겸비한
좋은 물건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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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평소 머플러를 하지 않는 까닭에 감사히 잘 쓰면서, 아마네는 자신


의 팔에 걸린 비닐봉지 속을 확인했다.
기본적으로 장보기는 분담하기로 했지만, 요리하는 마히루의 부담
을 줄이고자 보통은 아마네가 메모를 챙겨서 사러 간다.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나베1) 요리를 한다는 듯, 야채니 버섯이니
고기 등등이 봉지 안에 가득 있었다. 야채가 많은 것은 영양을 골고
루 섭취하라는 마히루의 말없는 주장이리라.
이런 데서 마히루의 어머니 기질이 드러난다고. 본인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웃었다.
부족한 건 없을까 싶어서 다시 확인하고, 점점 더 매서워지는 추위
에 몸을 떨면서 종종걸음으로 귀가했다.
“잘 다녀왔어요?”
집에 가니, 늦은 오후 시간대라 마히루가 맞이해 주었다.
생판 남이 집주인을 맞이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상황이지만, 요새
는 익숙해졌다.
“응, 잘 다녀왔어. 얇게 썬 떡을 사 왔는데 괜찮을까?”
“샤부샤부로 먹고 싶은 거죠?”
“응. 그리고 마무리로 먹을 재료로 라멘을 사 왔어.”
“전 그렇게 많이 먹지 못하는데요?”
“내가 거의 다 먹을 거니까 상관없을걸.”
예전에는 별로 많이 먹지 않았지만, 마히루의 요리 덕분에 저녁밥
은 은근 많이 먹게 됐다.
마히루도 칼로리를 의식하는지 살이 찌지 않을 수준의 요리를 내놓
지만, 그보다 많이 먹는 아마네는 미묘하게 걱정이 되는지라 요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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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근육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마히루의 감상으로는 ‘아마네 군은 말랐으니까 살을 더 찌워야 하
지 않을까요?’라고 하니까, 되도록 지방이 아니라 근육을 키우고 싶
었다.
“뭐, 아마네 군이 먹어 준다면 괜찮겠지만요. 그거, 이리 주세요.
냉장고에 넣을 테니까. 아마네 군은 손을 씻고 가글하고 와요.”
“알았어, 자.”
마히루에게 짐이 든 비닐봉지를 주고, 아마네는 순순히 세면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마히루는 새해 초에 뭘 할 거야?”


오늘도 변함없이 진짜로 맛있는 저녁밥을 깨끗이 비우고 뒷정리를
마친 뒤, 문득 궁금한 것을 마히루에게 물어봤다.
“새해는…… 귀성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여기 있을 거예요.”
너무 담담한 투로 대꾸해서 아마네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지
만, 마히루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부모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으니까 가족과 관계된 화제에는 아무래
도 무뚝뚝한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마히루는 혼자 새해를 보내는 것 아닌가.
아마네는 기본적으로 반년에 한 번은 가서 얼굴을 비친다고 약속했
기에, 마히루와 만나기 전에는 방학이나 연휴 때는 친가에 가려고 작
정했지만.
“아마네 군은 귀성하죠?”
“응, 일단은 얼굴 좀 보자는 말을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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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마히루를 슬쩍 보니, 기분 탓인지 평소 표정보다 눈빛이 더 차가웠


다.
혼자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 아마네가 귀성할 것임
을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집에 가면 너에 관해서 끈질기게 물을 것 같아.”
“큰일이겠네요.”
“아버지는 가볍게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끝나겠지만, 어머니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을 테니까 말이지.”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데도 왜 그러실까요.”
“거참. 어느새 우리 어머니랑 친해진 거람…….”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와 친해지고, 나아가 어느새 사진이나
비밀 정보가 유출되고 있는지…… 싶어서 조금 허탈하지만, 마히루
도 이러는 걸 봐서는 의외로 달갑게 상대하는 듯하고, 그렇다면 상관
없지 않겠냐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 시호코에겐 다시는 괜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두기로 하고, 이제 어쩔까 싶어서 마히루를 봤다.
때때로 보이는 허망한 표정과 쓸쓸한 눈빛을 떠올리니, 도저히……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뭐, 어머니는 얼마 전에 봤으니까, 아버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이번
에는 귀성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봄 방학 때는 갈 테니
까.”
그러니까 마히루만 불편하지 않다면, 늘 그랬듯이 함께 저녁 식사
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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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네가 만들어 주는 메밀국수2)를 먹고 싶기도 하고.”


“먹을 생각만 하네요.”
“마히루가 해 주는 요리니까.”
“……재료는 시중에서 파는 건데요?”
“그래도 먹고 싶어.”
설령 시중에서 파는 면을 삶기만 하더라도 좋다.
둘이서 느긋하게 먹고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니까.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시끄러워.”
심한 감상을 내놓는 마히루에게 일부러 쏘아붙이듯이 대꾸했더니,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보았다.
“……고마워요.”
“뭐가?”
“뭐든, 말이에요.”
마히루는 더 말하지 않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밝은 표정을 지으면
서 애용하는 쿠션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드디어 12월 31일, 올해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1년의 마지막 하루,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기본적으로는 내년을 대비해 준비하거나 대청소를 하면서 분주히
보내는 날이지만――.
“저기, 마히루 씨.”
“왜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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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거실 소파에 편하게 앉은 아마네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부터 부엌


에 서 있는 마히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히루가 아침부터 온 이유는 새해맞이 명절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다.
둘이서 새해를 맞기로 해서, 당연히 요리도 2인분이 필요하다.
당연히 시중에서 파는 명절 요리를 살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손수
만든다고 했다. 주부에게도 힘든 작업을 꽃다운 나이의 여고생이 혼
자 하는 거니까 놀랍기만 하다.
대단하다고 감탄만 했지만, 마히루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그런 요리는 사전 예약을 받으니까, 못 구해요.”
이렇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러겠다고 이해했지만, 그런데도 번거롭게 명
절 요리를 만들려고 하는 마히루에게 탄복했다.
물론 간편하게 넘어갈 부분은 그러고 있어서, 검은콩은 삶을 때 시
간이 오래 걸리고 가스레인지의 화구 하나를 차지한다는 이유로 시
중에서 파는 것을 사 왔다.
“아마네 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지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도울 일이 있긴 하나요?”
“없습니다.”
“그렇겠죠. 방해하는 것보다는 얌전히 있는 게 더 나아요.”
실로 냉혹한 관점에서 설득당해 얌전히 소파에 앉지만,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아마네도 전혀 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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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대청소는 어제 끝냈고, 한동안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게 명절 요리


에 쓸 것을 포함한 대량의 식재료를 사 뒀다.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마히루와 비교
하면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으리라.
“어제는 가구나 가전제품을 옮기고 구석구석까지 청소하느라 많이
피곤할 테니까 편하게 쉬고 있어요.”
힘쓰는 일을 담당했던 아마네를 배려하듯 말한 마히루는 아마네를
돌아보지 않고 요리만 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마히루는 대청소를 이미 마쳤다고 한다. 애초에 정기적으
로 잘 청소하고 있어서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나.
이게 평소 성실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인가…… 하고,
새삼스럽게 그 격차를 통감했다.
“그래도 뭐랄까…… 미안해서…….”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까 딱히 힘들지는 않아요.”
“그래도 말이지…….”
“괜찮아요. 즐거우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마히루를 어
쩌지도 못하고, 아마네는 머리를 붙잡고 끙끙댔다.
“마히루, 점심에 먹을 걸 사 왔어.”
아무리 그래도 명절 요리를 준비하느라 바쁜 마히루에게 점심까지
차리게 하는 것은 너무하다 싶어서 편의점에 가서 적당히 먹을 것을
사 왔다. 마히루는 원래 많이 먹지 않으니까 샌드위치 한 개면 문제
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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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슬슬 좀 쉬려고 했는지 마히루도 앞치마를 잠시 벗은 상태라서 타


이밍도 딱 좋았던 듯하다.
“고마워요. 점심은 챙기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아니야. 명절 요리를 만들어 주는 시점에서 이미 압도적으로 내가
더 미안한 상황이지……. 이리 와, 같이 먹자.”
휴식을 겸한 점심이고 해서 마히루는 순순히 거실로 돌아왔다.
“샌드위치와 카페오레인데, 괜찮겠어?”
“네, 고마워요.”
마히루는 살짝 고개를 숙여서 점심거리를 받고, 아마네 옆에 앉았
다.
“그나저나 얼마나 됐어?”
“어느 정도는 시중에 파는 걸로 때웠고, 종류도 줄였으니까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는 식혀서 담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아마네 군은 다테마키3)를 좋아할 것 같아서 그건 직접 만들었어요.”
“어떻게 알았어?”
“달걀을 쓴 요리를 좋아하잖아요. 다테마키도 예외는 아닐 것 같았
거든요.”
굳이 오븐으로 구웠다고 한다. 오븐을 켜는 소리가 들려서 뭘 만드
는지 궁금했는데, 그게 그거였던 모양이다.
“살짝 단맛이 나는 걸 좋아하죠?”
“잘 아시네.”
“몇 달이나 됐으면 입맛을 기억하는 법이에요.”
마히루는 참으로 기쁜 말을 해 주면서 양상추 햄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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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아마네도 사 온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부엌 쪽을 보니 눈에 띄는 곳


에 마히루가 가져온 작은 찬합이 놓여 있었다.
저 찬합에 담을 생각인 것 같았다.
설마 혼자 살면서 저런 찬합을 가져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칠기에
금박까지 새겨진 고급스러운 찬합이 등장했을 때는 약간 놀랐다.
“정말 고맙다고 할까…… 그 뭐냐,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상상도
못할 만큼 올해 하반기는 식생활이 충실했는걸.”
“저는 당신이 지금껏 용케도 살았다고 생각해요.”
“너무하네. 의외로 편의점 도시락과 시중에 파는 것만 먹고 살아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거든?”
“건강에 좋진 않아요. 정말이지.”
어이없다는 투로 마히루는 한숨을 쉬는데, 그 표정에는 어쩔 수 없
다고 말하는 듯한 쓴웃음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
렸다.
“제가 있는 한은 몸에 나쁜 식생활을 허용하지 않을 텐데요?”
“우리 어머니냐.”
“아마네 군이 건강을 너무 소홀히 하니까 그래요. 내년에는 식생활
을 더 멀쩡하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미묘하게 의욕이 넘치는 마히루의 모습을 보고 완전히 내년에도 함
께할 작정이구나 하고 생각하자, 이상하게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 태도를 나태하게 살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마히루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봐서, 아마네는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는
데 시간을 약간 소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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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에는 이미 모든 요리를 완성해 찬합에 담은 마히루는


다음으로 메밀국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면은 삶기만 하면 되는 것을 샀으니까, 면을 삶
고 고명을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어묵은 명절 요리로 만든 게 많이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될 것이다.
시금치는 데치기만 하면 되고 파는 잘게 썰기만 하면 된다.
가장 만들기 어려운 것은 새우 튀김이지만, 마히루는 그 번거로운
것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튀기고 있다.
“그리고 호박이 남아서 호박도 같이 튀길게요.”
“오…… 엄청 호화로운 메밀국수네.”
“가끔은 이래도 좋겠죠.”
그렇게 말한 마히루의 손에 완성된 국수는 친가에서 먹는 것보다도
호화로웠다.
커다란 새우 튀김은 한 사람당 두 개가 있고, 같이 만든 호박 튀김
도 바삭바삭하게 잘 튀겼다. 시금치와 파는 듬뿍 얹었고, 어묵은 부
채꼴 모양으로 잘려서 장식되어 있었다.
참고로 마히루는 튀김은 나중에 얹어서 바삭하게 먹는 성격인 듯
아마네의 몫도 직접 면 위에 얹지 않고 접시에 따로 담았는데, 그런
세세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오오.”
“자, 드세요.”
아마네한테는 그것만으로 부족할 것 같다는 이유로, 남은 명절 요
리도 작은 접시에 담아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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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 손을 맞대고 “잘 먹겠습니


다.”라고 음식에 대고 감사를 표한 뒤, 국수를 먹어 보았다.
시중에서 파는 거라고 했지만, 비싼 면을 사 왔는지 면에서 메밀 향
기가 확 퍼졌다.
국물도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았으며,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올 만큼 적당하게 간이 되어 있었다. 속이 훈훈해지는 것이 추운
날에 딱 맞는 맛이다.
“하아…… 이걸 먹으니 연말 느낌이 나네…….”
국물을 마시고 숨을 내쉬면서 절절하게 중얼거렸다.
TV를 보면서 느긋이 메밀국수를 먹고 새해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은 역시 기분이 좋았다.
친가에서도 매년 메밀국수를 먹고 연말 특집 방송이나 1년에 한 번
방송하는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해를 맞았기 때문에, 올해도 똑
같이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옆에는 가족이 아니라 바지런한 타인이지만.
“연말에 메밀국수를 먹으면 한 해가 끝난다는 실감이 드네요.”
“정말 그러네. ……올해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이런저런 일이라고 했지만, 대부분 마히루와의 교류가 차지하고 있
다.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이런 미소녀가 밥을 차려 줄 것이라고, 눈곱
만큼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마네 군이 혼자 살기 시작한 해니까 말이죠. 많이 힘들었을 거
예요.”
“너는 무지 익숙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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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지간한 것은 다 할 줄 아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혼


자 살려고 하는 아마네 군이 틀려먹은 건데요?”
“끅……. 그렇긴 한데 말이지.”
“정말이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질린 기색이 아니라 실소하듯 나무라는 마히루의 표정은 부드럽다.
아마네를 돌보는 것이 힘들지 않은지, 참 푸근한 표정이었다.
“……올해는 참 신세를 많이 졌어.”
크리스마스에도 했던 감사의 마음을 다시 전하자, 마히루는 “그러
게 말이에요.”라며 살짝 웃었다.
완전히 긍정하면 가슴이 뜨끔하지만, 마히루가 싫은 내색이 아니니
까 그나마 다행이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알아요. 제가 없으면 아마네 군은 금방 불균형 불규칙 생활을 시
작할 테니까요”
“부정할 수 없어.”
“……알면 조심해야죠?”
“새해 목표로 삼을게.”
아마 마음먹더라도 마히루에게 계속 신세를 지다 보면 결심이 날아
갈 것 같지만, 본인에게는 말하지 말고 속에만 담아두자.
물론 주변 정리정돈 정도는 하겠지만―― 마히루가 만들어 주는 식
사에 의존하는 것은 거의 확정이겠지.
완전히 사로잡혔음을 알면서도,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개선하겠다고 선언했는데도 마히루가 웃어서 아마네는 얼굴을 굳
히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히루는 즐겁게 슬쩍 웃음만 띠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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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슬슬 해가 넘어가겠네요.”
“그러네.”
메밀국수를 다 먹고 소파에 앉아서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더
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날짜가 바뀌기 직전이
되어 있었다.
TV를 잘 보지 않는지 요즘 노래는 잘 모르는 눈치인 마히루가 조용
히, 그러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모습을 구경하
고 있었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제야의 종을 치는 풍경으로 방송 화면이 바뀌고야 비로소 올해가
다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옆에 앉은 마히루는 눈을 내리뜨고 조용히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107번째 종소리가 들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날짜가 바뀐 순간, 자신을 보면서 자세를 반듯하게 세운 뒤에 고개
를 숙이는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도 덩달아 자세를 바로잡고 새해
인사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왠지 기분이 이상하네, 둘이서 새해를 맞
이하니까.”
“후후, 그러네요. ……올해도 잘 부탁해요.”
“나야말로…… 오히려 내가 잘 부탁해야 하는데.”
“그건 부정할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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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며시 웃는 마히루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을 때 아마네는 무릎


위 스마트폰이 진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츠키와 치토세가 새해 인사를 보낸 모양이다. 앱 아이
콘에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마히루도 마찬가지라서, 그 스마트폰도 진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 막 아는 사이가 된 치토세에겐 아직 ID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하니까 아마네가 모르는 친구겠지.
요새는 메시지를 보내기만 해도 새해 인사를 할 수 있으니까, 세상
이 정말 편해졌다.
“잠시 답장을 보낼게요.”
“나도 보내야겠네.”
아마도 마히루에겐 인사 메시지가 많이 왔겠지. 남자에겐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능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십자 입력 방식으로 답문을 쓰는 마히루를
보고 ‘이런 모습은 여고생답네.’라고 감탄하면서 자신도 이츠키와
치토세에게 답장을 보냈다.
메시지에는 평범하게 ‘새해 복 많이 받아’ 말고도 ‘시이나와는 사이
좋게 새해를 맞았어?’라는 쓸데없는 질문이 있어서, 정곡을 찔렸지
만 일단 부정하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바로 이츠키가 ‘자꾸 숨기긴’ 하고 놀리듯 답장했기 때문에 한동안
은 얼버무리거나 부정하는 등의 내용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슥 하고 아마네의 팔뚝에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달콤한 향기가 화악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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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접촉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설마 하는 심정으


로 조심스럽게 옆을 보니…… 눈을 감은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기대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깐, 잠깐, 잠깐.)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아마네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설마 옆에서, 그것도 자신
에게 기대서 자는 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왜 마히루가 잠들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현재 시각은 자정을 30분 정도 넘겼다.
규칙적으로 생활한다고 하는 마히루가 밤늦게 깨어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오늘은 명절 요리를 만드느라 바빴으니 겉으
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많이 피곤할 것이다.
잠기운에 저항할 체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유는 안다.
알지만,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잠들 줄이야.
아마네에게 기대어 잠든 마히루는 아마네의 혼란과 당혹도 알 바
아니라는 듯 실로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반듯한 콧등, 분홍색 입술도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잠든 얼굴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나 가까이서 본 적은 없
기 때문에 몸이 긴장됐다.
“마히루, 일어나.”
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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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피곤했는지 잠기운에 취해 깊게 잠든 것 같았다. 불러 봐


도, 어깨를 흔들어서 살짝 흔들어 봐도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
다.
가볍게 어깨를 두들겨도, 아마네의 몸에 닿은 몸을 흔들어 봐도 일
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니 자신에게 기댄 부분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앞으로 기
울어지는 바람에 아마네는 허둥지둥 마히루를 붙잡고 끌어당기
고…… 그건 좋았지만, 의도하지 않게 끌어안은 자세가 되는 바람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엄청 좋은 냄새가 나.)
마히루는 식사 후에 잠시 집에 돌아가서 목욕 등의 볼일을 마치고
왔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샴푸의 꽃향기는 물론이고 본인의
냄새인 것 같은 약간 달콤한 냄새까지 같이 나는지라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뭔가 부드러운 것이 닿는 느낌도 들어서 제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깨우려고 해도 푹 잠들어서 그러기 미안하고, 애초에 요란하게 깨
우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좋지?)
새해 초부터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는 바람에 아마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터무니없는 사태에 직면한 아마네는 완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
의 품에 있는 마히루를 봤다.
정말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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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는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걸까. 조금도 경계하


지 않고 잠에 빠진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애가 타는 심정과 부끄
러운 감정과 약해져 가는 이성 때문에 자신의 머리를 벽에 박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의식하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마히루의 감촉에 의식을 집
중하고 만다.
가녀린 몸은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남아 있어서, 어디를 보더라
도 여성스러운 유연함이 있다.
더군다나 자신의 몸에 닿은 마히루의 몸에서 겉보기보다 질량감이
있는 특정 부분을 느끼는 바람에 아마네의 이성은 팍팍 무너지고 있
었다.
(――이걸 어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인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
는 부드러운 감촉에 눌리면서 아마네는 심각하게 혼란에 빠졌다.
여자애는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처음 안
사실에 묘한 감회를 느끼다가, 곧바로 불순한 상상은 해선 안 된다며
이성을 꽉 붙잡았다.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의식하는 바람에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래도 겨우 어떻게든 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이 사태를 무난
하게 수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대응할 방법으로는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1. 마히루를 억지로 깨운다.
2. 마히루를 집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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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마네의 침대에 재우고 자신은 소파에서 잔다.


첫 번째는 이렇게 지쳐서 깊이 잠든 마히루를 억지로 깨운다는 것
이 꺼림칙하다. 피로의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니까, 가능하면 그냥 재
우고 싶다.
두 번째는 얼핏 보면 제일 무난한 방법인 것 같지만, 마히루의 옷을
뒤져서 열쇠를 찾아내고 여자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난관
이 있었다. 아무리 마히루라도 나중에 알면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세 번째, 아마네의 침대에 재우는 선택지가 무난하고 실
행하기도 쉽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정신적으로 사망할 자신이 있
었다.
아무리 평소 곁에 있다고 해도, 누구든 반할 것처럼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자고 있는 마히루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
다간 이성이고 뭐고 무너질 것 같았다.
여자애가 자기 침대에서 잔다는 상황.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버티기
힘든데, 더구나 상대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미소녀.
온갖 상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아마네에게 가장 무난한, 최선의 타협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아마네의 등과 무릎 뒤에
살며시 손을 대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고 있기도 해서 솜털처럼 가볍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역시
마히루는 가벼웠다.
쉽게 깰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은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면
서 아마네의 방으로 신중하게 옮겼다. 옆으로 안고 있어서 문을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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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 문제만 돌파하고 나면 침대에 눕히기만 하면


된다.
가녀린 몸을 침대에 눕혔다.
그 몸에 모포와 이불을 덮어서 수면 태세를 완성했다.
깰 낌새는 없고,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린다.
앳된 티가 남은 단정한 미모는 여전히 아름다우면서도, 천진난만하
게 잠든 얼굴로 아마네의 심장을 뛰게 한다.
조심스럽게 마히루를 눕히고,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힘들어.)
뭐가 힘드냐면, 마히루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시추에이션
도, 부드러운 감촉도, 무방비하고 귀엽게 잠든 얼굴도, 신뢰를 바탕
으로 남자 집에서 잠드는 무방비함도, 뭐든지 전부.
물론 자신을 신뢰하는 것은 기쁘지만, 남자로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히루의 머릿속에서 아마네는 ‘너무 부족해서 보살펴 줘야만 하는
안전, 안심, 무해표 남자’로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마히루를 힐끗 보니, 아마네의 갈등도 전혀 모르고, 실로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 마음도 모르고.)
너무 무방비해서 ‘이대로 같이 침대에 누워버릴까…….’ 하고 한순
간 생각했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같이 자는 건 역시 안 될 일이
라는 생각에 그 생각을 물리쳤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마히루는 일어난 그 순간부터 말도 하려고
들지 않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했죠?’라고 차가운 눈으로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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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니까,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 대신 조금쯤은 만져도 천벌을 받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히루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살랑살랑, 매끌매끌, 반들반들, 그런 말이 잘 어울릴 것처럼 큐티클
이 완벽한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에서 엉키는 일 없이 부드럽게 빠
져나갔다.
이것도 열심히 관리하기 때문이겠지. 여자의 노력에 감탄하고 전율
하면서, 천천히 손끝을 마히루의 볼로 옮겼다.
생기 있고 부드러운 백자색 피부는 체온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인지
아마네의 손과 비교하면 약간 차가웠다.
손끝으로 살짝 매만지자, 그때까지 한없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마히루가 약간 찡그린 미소를 지었다.
“잘 자.”
내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 깜짝 놀라겠구
나 싶었지만, 자신을 이렇게나 안절부절못하게 했으니까 그 정도는
허용되겠지.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슬쩍 쓴웃음을 짓고, 아마네는 다시 마
히루의 부드러운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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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무방비한 천사님과 새해 첫날

아침, 아마네가 일어나도 사람들의 생활 소리는 안 들렸다.


창문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게 고작이고, 아마네의 방
에서 잠들었던 마히루도 일어날 기미가 없다.
시간으로 봐서 일출 때는 이미 지났지만, 어제 어지간히 피곤했는
지 푹 잠들어 있는 듯하다.
참고로 아마네도 잠은 잤지만, 자신의 침대에 마히루가 누워 있다
는 생각에 좀처럼 잠들지 못해서, 결국 선잠을 자다가 지금 시간에
일어나고 말았다.
딱히 컨디션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의미에서 힘
들다.
여자애를 집에서 재우고 자신의 침대에 눕히는 경험은 처음이라서,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 무방비해서 힘들어.)
안전, 안심, 무해한 남자라고 믿으니까 잠든 거겠지만, 일단 아마네
도 남자니까 조금은 경계했으면 좋겠다.
깨워서 집에 돌려보낼 걸 그랬다고 몹시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한
들 소용없는 짓이다.
한숨을 푹 쉬면서 소파에서 자느라 굳어진 몸을 풀듯이 기지개를
켠 뒤에 천천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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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마히루가 어떤지 살펴보자.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가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가는 김에 마히루도 어떤지 볼 생각이었다.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실내는 조용하고, 침대에서 잠든 마히루도 그대로 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하면, 자면서 몇 번인가 몸을 뒤척였는지 옆으로
돌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들 수 있겠지.
새근새근. 정말이지 귀엽게 숨소리를 내면서 자는 마히루를 웅크리
고 앉아서 바라봤다.
정말이지 잘 때는 청순한 느낌이 강하다.
평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건지 쿨한 표정일 때가 많지
만…… 잠든 얼굴에서는 긴장이 다 풀려서 표정이 귀엽다.
굳이 말하자면 손으로 만져 보고 싶어지는 귀여움이었다.
(……자고 있을 때는 정말 귀엽단 말이지.)
물론 깨어나 있을 때도 미소녀니까 귀엽지만, 이건 애완동물을 볼
때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이 살랑살랑한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 말랑말랑한 볼을 콕콕 찌
르고 싶다.
평소 착실하고 빈틈이 없는 만큼,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일 때는 건
드려 보고 싶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워 보이는 볼에 손을 뻗어서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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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볼에서 어제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계속 만지고 싶어지는 토실토실한 촉감에 아마네는 그만 손가락의
안쪽 면으로 볼을 눌러보고 말았다.
살짝 건드리려고 했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이 좋아서
장난치듯 만졌더니, 조용히 자고 있던 마히루한테서 “으응….”하는
나지막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손을 뗄 틈도 없이, 닫혔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촉촉한 캐러멜색 눈이 아마네…… 정확하게는
아마네가 있는 쪽을 봤다.
늘어진 듯한 표정에는 어리게 보이던 잠든 얼굴의 흔적이 있어서
청순한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의식이 있는데도 정신이 멍한 듯 눈에
초점이 풀린 지금이 더 어리게 보였다.
완전히 풀어진,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표정을 드러낸 마히루는 잠
시 후 눈썹을 늘어트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얼굴에 닿은 손가락을 거두려 하자 그 손가락에 볼을 문지르면서
애교를 부리듯이 목에서 가냘픈 소리를 낸다.
가지 말라고 말하는 듯이 볼을 문지르는 행위.
“……으.”
잠이 덜 깼다는 것은 잘 알았다.
마히루가 이렇게까지 아마네에게 응석을 부릴 리가 없고, 평소라면
이렇게 긴장이 풀린 표정과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애교를 부리는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이면
서 아마네의 심장과 이성을 시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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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손을 떼야 할까. 마음 내키는 대로 볼을 쓰다듬으면서 귀여워해 주


는 게 좋을까.
솔직히 마음은 후자로 기울고 있었다.
이토록 부드러워진 마히루를 볼 기회는 거의 없고, 얼마나 응석을
부릴지 흥미가 생긴다.
그러나 실행으로 옮겼다간 마히루가 제정신을 차리면, 다시는 상대
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수치심에 몸부림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어
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귀여우니까 잠에서 덜 깬 마히루를 관찰하기만 했다.
의식은 거의 돌아온 것 같은데 아직 뇌가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것
인지, 아니면 아마네의 손이란 걸 깨닫지 못한 것인지, 계속 손가락
에 볼을 대고 멍하니 있다.
상황을 보고 갈아입을 옷만 챙길 작정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접촉하는 바람에 아마네는 표현하기 힘든 쑥스러움 탓에 볼이 뜨거
워지는 것을 느꼈다.
“응, 으응…….”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잠에서 깼는지 다시 마히루가 눈꺼풀의 커
튼을 걷고…….
“……어?”
눈이 딱 마주쳤다.
이어서 시선이 가까이에 있는 아마네와 볼에 닿은 손가락으로 이동
하고, 경직했다.
다음 순간, 마히루는 벌떡 일어났다.
“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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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자, 잘 잤어, 요……?”


“네가 우리 집에서 잠들어서 여기서 재웠어. 다른 뜻은 없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내게 고마워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야.”
선수를 쳐서 아마네의 침대에 누워 있던 이유를 설명했더니, 마히
루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얌전히 굴었다.
하지만 남자 침대에서 잤다는 사실에 볼이 점점 빨개져서, 이불을
확 잡아당겨 입가를 감추고 있었다.
그 동작이 묘하게 귀여워서 그만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일단 잘 곳을 마련해 준 셈인데,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
그야 허락 없이 볼을 만진 것은 잘못이겠지만, 아주 잠깐 그랬을 뿐
이고, 딱히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마히루의 귀여움에 가슴이 벌렁거리고, 죄책감에 따끔거리고, 아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마히루를 보니, 볼이 빨개진 채로 약간 불쾌
한…… 수준은 아니지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네 군은 볼을 만지는 걸 좋아하나요?”
“뭐?”
“크리스마스 때도, 어제 자기 전에도 볼을 만졌잖아요.”
“……잠든 게 아니었어?”
어제 만졌을 때는 마히루가 푹 잠들었을 터라서, 본인의 의식은 없
었을 텐데.
그런데도 만진 사실을 안다면, 마히루는 그때 잠들지 않았던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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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 그건…… 침대에 눕힐 때 잠깐 깼다고 할까…… 그런 상황에


선 자는 척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뭔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어?”
“아마네 군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걸 확인하려고
자는 척한, 거기도, 하거든요.”
듣자니 정말로 믿어도 될지 가늠해 보려고 한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신뢰해 준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앞으로는 남자 앞에
서 잠드는 무방비한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마네도 다음에 또 보면 볼을 찌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 같
다. 조금 더 경계해 주지 않으면 아마네가 곤란하다.
“……믿어서 그랬다면 상관없지만, 다음에는 그러지 마. 나도 남자
니까.”
“으으. 그, 그건 저도 알아요. 알지만…….”
“아니면 뭔가 해 주길 원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새빨개져서 강하게 부정한 마히루가 이불 속으로 다시 숨어서, 거
긴 내 침대라고 지적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수치심이 진정될 때까지,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떠는 마히루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수치심에서 회복한 마히루는 잠시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돌


아왔다.
하지만 아직 부끄러운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
기 때문에 아마네도 기분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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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소파 옆에 앉기는 했지만, 영 거북하다.


“……용서해 줘.”
왠지 너무 거북해서 무심코 사과하자, 마히루가 아마네를 힐끗 보
고 한숨을 쉬었다.
민망함이 많이 가셨는지 일단은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화난 게 아니에요. 아마네 군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그래도 말이지…….”
“전 그저 자신의 멍청함을 후회하는 거예요. 그토록 한심하고 추한
얼굴을 보이고 말았으니까요.”
“추한 얼굴이라니…… 그냥 귀여웠는데.”
천사님 별명이 부끄럽지 않게 그야말로 천사 같은 얼굴로 잤고, 일
어난 뒤에 아직 잠이 덜 깬 눈도, 완전히 풀린 청순한 얼굴도 너무
귀여웠다.
잠이 덜 깼을 때는 평소 냉정하고 차분한 표정에서 어린 티가 강하
게 나는 표정으로 확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오히려 더 보고 싶을 만큼 좋았지만, 마히루 자신은 그렇게 방심한
표정은 보여주고 싶지 않겠지.
한심하거나 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 부분만은 단호히 부정
하자, 마히루는 입술을 꼭 물고 어째서인지 안고 있던 쿠션으로 아마
네를 탁탁 때리기 시작했다.
아프지는 않고 마히루도 진심으로 때린 게 아니겠지만, 갑자기 때
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래?”
“……아마네 군의 그런 점이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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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뭐가 말이야……? 어떻게 고치라는 건데?”


“그런 말은 가볍게 하는 게 아니라고요.”
“딱히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도 아닌데…….”
아마네의 주위에 여자란 마히루나 치토세밖에 없다.
치토세는 확실히 귀여운 부류에 속하지만, 아마네에겐 귀찮다는 생
각이 먼저 들고 면전에서 칭찬할 필요도 없는지라 마히루 말고는 칭
찬할 상대가 없었다.
마히루가 멈춘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그런 말은 자주 들어서 익숙하지? 이제 와서 뭘.”
애초에 귀엽다고 인식한 것을 몇 번이고 마히루에게 전한 바가 있
으니까, 이제 와서 따지고 들 줄은 몰랐다.
마히루 자신도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테니
칭찬을 받는 일에도 익숙할 것이다.
아마네 한 사람이 뭐라 한다고 쑥스러울 일은 아닐 텐데.
그런데 마히루는 무슨 이유인지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아까부터 정말 왜 그러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탁 하고 쿠션으로 물리공격을 가한 마히루는 고개를 휙
돌리면서 “떡국을 차릴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앞치마를 두르고 부
엌으로 가버렸다.
자신에게 떠넘긴 쿠션을 잡고, 아마네는 갑자기 살짝 기분이 상한
마히루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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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떡국을 다 먹었을 때는 마히루가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먹기 시작한 시점에선 왠지 이상하게 긴장한 기색이 있었지만, 떡
국과 다른 명절 요리도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마히루
의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식탁에서 이동하여 둘이 함께 소파에 다시 앉았을 때는 완전히 평
소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히루는 새해 참배를 하러 갈 거야?”
“새해 참배요? 딱히 갈 생각은 없는데요……. 사람이 많은 곳은 내
키질 않는단 말이죠. 괜히 쳐다보는 사람만 많고.”
“그건 네가…….”
엄청난 미인이라서 그렇다고 말하려 했지만, 아까 마히루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말을 아끼면서 “어쩔 수 없지.”라고만 대꾸했
다.
“아마네 군은 참배하러 갈 건가요?”
“친가에 있을 때는 부모님과 함께 가곤 했지만, 오늘은 어떻게 할
지 고민 중이야. 사실 일부러 새해 첫날부터 힘들게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들어.”
“동감이에요.”
“치토세와 이츠키는 치토세 집에서 사이좋게 새해를 보내는 것 같
고, 요즘 아이들은 새해 참배를 가지 않는단 말이지. 나중에 가도 문
제없을 거야.”
듣기로는 옛날에 비하면…… 특히 10대, 20대 젊은이들은 새해 참
배를 하러 가는 사람의 비율이 줄어들었다고 하니, 아마네와 마히루
가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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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딱히 가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너무 많으면 제대로 움직이


지도 못하고 피곤하기만 하다는 걸 알기에, 사람이 줄어들었을 때 가
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이지, 새해의 첫 사흘 동안은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거
든. 나는 럭키박스 같은 것을 사는 데도 딱히 관심이 없으니까.”
“저는 약간 관심이 있긴 하지만요.”
“쇼핑몰에라도 다녀오겠어?”
“……그 엄청난 인파 속으로 돌격할 용기가 없네요.”
“동감이야.”
아까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했던 대답을 아마네도 똑같이 돌려주면
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딱히 정월 초하루라고 해서 어딘가에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은 아마네는 이렇게 느긋하게 지
내기만 해도 만족한다. 마히루도 식사 때문에 정초에는 아마네의 집
에서 지내겠다고 하니까, 대화할 상대도 충분하고 식사도 문제가 없
다.
분수에 넘치는 새해 첫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마네는 옆에 있는
마히루를 몰래 바라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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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부모님의 방문과 새해 참배

『내일 너희 집에 가도 되겠니?』
그런 메시지를 아버지가 보낸 것은 1월 3일 오후 10시. 저녁 식사
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마히루가 돌아간 후였다.
『 네가 집에 오지 않는 것은 좋지만, 역시 나도 얼굴을 한 번쯤은
봐야겠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웃 사
람에게도 인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아마네가 마히루에게 얼마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지 아는 아버지
―― 슈토가 부모로서 인사하고 싶다는 뜻이다.
이게 만약 시호코가 마히루를 모르는 상태였다면 온 힘을 다해 거
부했겠지만,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마히루 본인이 이미 시호코와 연락
을 주고받고 있으므로 거절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일단 숨길 게 없어진 지금, 부모님이 귀성하지 않은 자식을 시찰하
러 오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다.
슈토가 시호코와 함께 온다면 툭하면 폭주하는 시호코를 잘 붙잡아
줄 것이다.
아니, 말리지 않으면 똑같은 전철을 밟아 아마네와 마히루의 진이
빠질 테니까, 슈토가 열심히 움직여 줘야 한다.
어차피 거절해도 시호코가 억지로 마히루를 보러 올 것 같아서, 아
마네는 먼저 연락해 준 아버지에게 알았다고 답장한 뒤 마히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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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메시지를 보냈다.

“어, 저기, 제가 가족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자리에 있어도 될까요?


방해되지 않을까요?”
다음 날, 아침부터 아마네의 집에 찾아온 마히루는 약간 긴장한 기
색이었다.
그야 당연한 걱정이다. 갑자기 돌보는 남자……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지만, 함께 생활하는 남자의 부모가 마히루를 보고 싶다고 말한 거
니까.
시호코와는 아마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서…… 아니, 정확하
게 말하자면 시호코가 자주 연락하는 듯해서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았
다.
따라서 시호코만 오면 괜찮겠지만, 이번에는 아버지도 같이 오는지
라 아마네가 긴장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아버지는 너한테 인사하러 오는 거고, 어머니도 마음에 든
눈치니까 있어 주면 고맙겠어. 오히려 네가 없으면 안 돼.”
“그, 그렇게 말해도…….”
“뭐, 내키진 않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면 좋겠어.”
부모님에게 인사를 시킨다는 괴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상대방이
이미 만날 작정이니 어쩔 수가 없다.
마히루의 시간을 빼앗는 건 미안하지만, 아버지의 성격상 마히루에
게 인사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참고 동석해
주면 좋겠다.
“……시호코 씨는 저를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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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아버지한테는 어디까지나 은인이라고 말했으니까. 어머니


의 신바람 망상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라고 전했어.”
시호코는 이미 며느리, 귀여운 딸로 인식하고 있다고 해서, 온 힘을
다해서 부정했다.
슈토도 쓴웃음을 지은 뒤에 ‘시호코의 이상한 버릇이 또 발동했구
나.’라고 납득했으니까 오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마히루에게 “미안해.”라
고 말한 뒤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딱 좋은 타이밍에
인터폰이 울렸다.
건물 공동 현관은 여벌 열쇠로 돌파할 테니까 여기까지 직통으로
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마히루가 몸을 흠칫거리는 것을 살짝 웃고 달래면서, 현관으로 가
서 체인을 빼고 잠금을 풀었다.
문을 열자 아마네에겐 익숙한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반년 만에 보는구나, 아마네.”
“오랜만이야, 아버지.”
온화한 웃음을 띤 슈토를 보고, 아마네도 약간 안도하면서 비슷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푸근한 느낌이 나는 슈토는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라서, 아마네도 얼굴을 볼 때 저절로 긴장이 풀린다.
“엄마한테는 안 그러면서…….”
“어머니는 갑자기 쳐들어오니까 그렇지. 미리 알려주기만 하면 평
범하게 대응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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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마히루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고, 아마네 혼자였


다면 조금은 더 친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들어와. ……그 짐은 뭐야?”
“좀 챙겨왔단다. 뭐, 이건 나중에 보고, 마히루는 어디 있니?”
“안에.”
짧게 대답한 뒤, 신발을 벗고 들어온 부모님과 함께 거실로 돌아오
니, 조금 불안한 듯이 있던 마히루가 이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히루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슈토는 30대 후반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젊고 활기차다. 아들인
아마네가 후하게 본다고 쳐도, 객관적으로 봐서 30세 전후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안이라고 해도 될 만한 젊고 단정한 용모라서, 아버지의 피를 조
금 더 짙게 물려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
는지 모르겠다.
아마네와는 다르게 얼굴이 부드럽고 착해 보이는 청년(실제나이는
중년에 가깝지만)이라서, 정말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맞는지 의심
을 종종 받았다. 그래도 나란히 걸어가면 나이 차이가 나는 형제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마히루,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라니, 한 달도 안 됐잖아.”
“나한테는 오랜만이야.”
마히루에게 달려가서 활짝 웃는 시호코에게, 마히루도 자세를 바로
잡은 뒤 “오랜만에 뵙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약간은 대외용에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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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불안한 듯 슈토를 보고 있어서, 그 시선을 알아차린
슈토도 온화한 웃음을 지으면서 시호코 옆에 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마네의 아버지인 슈토라고 합니다. 시이나
양의 이야기는 시호코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신세를 많
이 지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시이나 마히루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아
마네 군에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인사한 슈토에 맞춰, 마히루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마히루는 슈토가 시호코 같은 타입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 같
지만, 슈토는 온후한 인품과 상식을 갖춘 사람이므로 그 점에선 부디
안심했으면 좋겠다.
시호코에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슈토뿐이며, 시호코도 슈토
에겐 약했다. 홀딱 반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어머나, 그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된단다. 누가 봐도 우리 아마네
는 칠칠치 못하니까 말이지.”
“칠칠치 못해서 미안하네.”
“시호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아마네, 평소 신세를 지니까
잘 챙겨 주고 있겠지?”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럼 됐다.”
여자를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치는 슈토는 아들인 아마네가 마히루
를 잘 챙기고 있는지 걱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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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일방적으로 대접만 받으면서 자신만 편하게 사는 것


은 아마네도 심정적으로 참을 수 없으니까, 당연히 마히루를 최대한
배려하려고 했다.
아마네의 대답을 듣고 안심한 표정을 지은 슈토는 다시 마히루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평소 요리를 만
들어 주면서, 명절 요리까지 만들어 줬다고 하니…….”
“늘 감사히 여기고 있고, 마히루를 최대한 챙기고 있어.”
“네. ……아마네 군은 의외로 배려해 주거든요.”
“의외는 또 뭐야?”
“그야…….”
이어서 “대충대충 사는 것 같으면서도 섬세하게 볼 줄 아니까
요.”라는 말을 들었고, 대충대충 산다는 말에 반론할 수 없어서 할
말을 잃었더니, 슈토가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아마네, 너도 시이나 양
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치지 않게 하렴.”
“……알고 있어.”
“시이나 양도, 아마네가 잘못한 게 있으면 단호하게 말해 주렴. 이
아이는 안 그런 것처럼 굴지만 의외로 말을 잘 들으니까. 나쁜 점은
금방 고칠 거야.”
“아마네 군은 자상하니까 나쁜 점은…… 조금…….”
“있단 말이구나.”
“나쁘다고 할까…… 한심한 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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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조금 말하기 어려운 눈치인 마히루에게, 그렇게 말할 만


큼 한심한 점이 대체 뭐냐……고 따지고 싶어졌다.
시호코는 왠지 모르겠지만 “아~항.” 하고 짚이는 데가 있다는 듯
씩 웃고 봐서, 아마네는 대체 뭐냐는 눈빛으로 노려볼 수밖에 없었
다.

“드세요.”
부모님이라곤 해도 손님이므로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히루
가 차를 내오겠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냥 맡기고 말았다.
마히루가 마시려고 가져온 티세트와 홍차가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
이 될 줄은 몰랐으리라.
평소 아마네와 마히루 둘이서 앉는 소파에 앉은 부모님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나. 고맙구나, 마히루. 완전히 익숙해졌구나.”
“네…….”
“원래는 아마네가 할 일 아니니?”
아마도 아마네가 끓였다간 홍차에서 쓴맛만 남을 것 같아서 마히루
가 한 것이지만, 시호코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서…….”
“뭐, 아마네가 하면 물 온도도 대충 맞추니까 어쩔 수 없어.”
지당한 평가지만, 지적을 받으니 살짝 부아가 났다.
그러나 차마 반론할 수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시호
코는 아마네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마네, 이제는 마히루를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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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지적을 받고 아마네와 마히루는 몸을 굳혔다.


자연스럽게 부르기 시작해서 몰랐지만, 예전에 어머니와 만났을 때
아마네는 마히루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마히루는 아마네의 이름
을 어색하게 불렀다.
그랬는데 지금은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서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
으니까 시호코라면 당연히 눈치챌 만했다.
“……딱히 상관없잖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사이좋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니까.”
굳이 괜한 추궁은 하지 않고, 그저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
는 시호코를 보니, 아마네는 볼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놀림을 받는 게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호코는 자신
들의 사이를 머릿속으로 날조하면서 즐기고 있을 것이다.
“시호코, 아마네를 너무 놀리진 마.”
그때 슈토가 시호코를 말렸다.
“그건 시호코의 나쁜 버릇이야. 자꾸 들볶지 마.”
“알았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시호코는 슈토의 말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휘둘리는 자
식으로선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역시 좋아. 아들이 귀여운 여자애랑 친하게 지내는 걸 보
면.”
“시호코의 안 좋은 버릇이 폭주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가슴을 졸
이고 있지만 말이지.”
“어머, 슈토 씨가 말려 줄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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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알면 고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나는 시호코의 그런 면도


좋아하니까 어쩔 수가 없군.”
“어머…… 슈토 씨도 참…….”
말려 주는 건 좋지만, 이번에는 부모끼리 미묘하게 자신들만의 세
계를 만드니까 아마네는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슈토는 상식적인 사람이지만, 아내를 무의식적으로 귀
여워하기 때문에 때때로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
들곤 한다.
다행히 그건 가족 앞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이고 밖에선 그런 노골적
인 분위기는 풍기지 않는데, 이곳이 아마네의 집이라서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부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이좋은 것은 자식에게 좋은 일이지
만, 그걸 봐야 하는 자식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아마네는 끼어들고 싶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고 식탁
에서 가져온 의자에 앉아 재차 한숨을 쉬었다.
마히루도 그 옆에 마련한 의자에 앉아서 아마네의 눈치를 슬쩍 살
폈다.
“……부모님께서 사이가 좋으시네요.”
“응. 뭐, 밖에서 저러지는 않지만 집에선 늘 저런 느낌이야.”
“그렇군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했더니, 마히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호코
와 슈토를 봤다.
불쾌한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눈부신 것을 보는 듯했다.
동경과 선망의 감정이 담긴, 귀중한 것을 보는 듯한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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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허망하다고 단언해도 될 만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지켜보는 마


히루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가――.
“어머, 아마네, 왜 그러니?”
현실세계로 되돌아온 것 같은 시호코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손을
거뒀다.
“왜 그러긴. 둘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바람에 우리가 거북하다고.”
“어머, 부럽니?”
“전혀, 조금도 부럽지 않거든. 그런 건 자기 집에서만 해달라는 생
각이 들었을 뿐이야.”
보아하니 마히루의 손을 잡으려 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마히루도 마찬가지로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마네의 말을 듣고 쓴웃
음을 짓고 있었다.
왜 손을 뻗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마히루를 혼자 두기 싫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평소의 마히루로 돌아왔으니까, 아마네는 살짝 안도하면서 들
키지 않게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말인데. 다들 아들 얼굴을 보고 만족했어?”
“아마네보다 마히루를 보고 만족했는데…….”
“이봐요.”
“반은 농담이야. 아직 목적도 이루지 못했고 말이지.”
“목적?”
새해 인사와 함께 마히루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하는 게 목적일 줄
알았는데, 시호코에겐 아직 다른 목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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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너희, 아직 새해 참배는 가지 않았지?”


“사람이 빠지면 갈 생각이었어.”
“그랬구나. 마히루도 안 갔지? 메시지로 그랬으니까.”
“네.”
“그럴 줄 알고 기모노를 가지고 왔어―.”
보아하니 시호코는 마히루와 함께 새해 참배를 하러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활짝 웃는 것을 보고, 뒤늦게 큰 짐을 가져온 온 이유를 이해한 아
마네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시호코는 귀여운 걸 좋아하고, 사람을 치장하는 행위 자체를 좋아
해서 이런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네가 기억하기로도 집에 기모노가 몇 벌 있었으니까, 그중 하
나를 가져왔나 보다.
“나는 딸아이한테 기모노를 입혀서 새해 참배에 가는 게 꿈이었거
든……. 마히루라면 틀림없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어머니는 그냥 인형놀이를 하고 싶은 것뿐이잖아.”
“아니거든? 하지만 마히루에게 꼭 입혀 보고 싶은걸.”
자신만만하게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라고 말하는 시호코의 의견
은 타당했다.
애초에 마히루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아마네가 기억하기로도 보이시한 복장이나 귀한 집안 아가씨가 입
을 법한 기품 있는 차림, 프릴이나 레이스를 주렁주렁 단 귀여운 소
녀 의상도 몇 번 입은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이 잘 어울렸다. 미소녀
란 옷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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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복도 필시 아주 잘 어울릴 것이다.


아마네의 집에는 아들 하나밖에 없으므로, 딸을 예쁘게 단장하고
싶었던 시호코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마히루만 괜찮다면 입혀서 다녀와.”
“왜 아마네 넌 가지 않을 것처럼 말하니?”
“아니, 마히루와 밖에 나갔다가 같은 학교 애들에게 들키면 곤란하
니까.”
부모님과 마히루만 간다면 새해 참배에 가더라도 한가족으로 볼 테
니까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아마네가 낄 때가 문제다.
딱 봐도 평범한 아마네가 마히루와 나란히 참배 중인 모습을 같은
학년 학생이 본다면, 개학 때 펼쳐질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예상할 수
있다.
역시 그런 위험부담을 지면서 새해 참배에 가고 싶진 않다.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니?”
“그야 그렇지만 들킬 게 뻔…… 잠깐, 어머니, 설마…….”
“후후, 이런 때를 대비해서 다양하게 가져왔단다.”
“이런 때가 어떤 때인데?!”
기모노에 전통 속저고리, 각종 소품, 기모노와 관련된 것을 가져온
것치고는 이상하게 짐이 많다 싶었는데, 아마네를 골탕 먹이려고 다
른 짐을 더 가져왔다고 한다.
“슈토 씨도 찬성했단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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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모처럼 생긴 기회니까 괜찮지 않겠니? 연례행사니까, 나로선 되도


록 같이 가고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 거절하기 힘들다.
가족의 친목을 소중히 여기는 슈토의 의향도 반영하여 시호코가 그
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걸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왠지 미안하다.
“그래도…….”
“괜찮아, 엄마만 믿으렴. 반드시 원판 아마네와는 전혀 닮지 않은
멋진 남자로 만들어 줄게!”
“그건 원판이 별로라는 뜻이잖아.”
“물론 슈토 씨를 닮아서 이목구비는 단정하지만 머리 모양이랑 분
위기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지. 음침하다는 말이 맞으려
나.”
“시끄러워.”
스스로도 촌스러운 것은 알지만, 좋아서 이런 차림인 거니까 일일
이 지적받고 싶지 않다.
“다듬으면 훌륭할 텐데. 아마네도 참, 그런 걸 귀찮아하니까 말이
지…….”
“괜한 참견이야.”
“아까워라. ……어때, 마히루? 마히루도 아마네가 깔끔하게 잘 다
듬은 모습을 보고 싶지?”
“네?”
갑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바람에 마히루는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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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마히루에게 억지로 떠넘기듯이 묻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시호코는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아마네가 잘 꾸미면 마히루도 다시 볼걸? 이렇게 보여도 아마네가
의외로 얼굴은 반반하단다. 성격도 솔직하진 않지만 슈토 씨를 닮아
서 신사니까, 잘하면 정말 유망해질 거야.”
“어, 저기…… 그, 그렇겠죠……?”
“같이 새해 참배하러 가고 싶지 않니?”
“그, 그건 저기, 가고 싶긴 한데, 요.”
“이봐, 배신하지 마.”
혹시 모르니까 기왕이면 기각해 주길 바랐지만, 마히루는 따지고
든 아마네를 힐끗 봤다.
“……아마네 군이 싫다면, 됐어요.”
약간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눈썹이 처지는 마히루를 보자
아마네는 숨이 턱 막혔다.
본인은 감추려는 것 같지만, 딱 봐도 아쉬워하고 있다. 일부러 보라
고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난 듯하다.
긴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면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엄청난
죄책감이 솟구쳤다.
시호코한테선 ‘마히루를 슬프게 했구나’라고 책망하는 듯한 시선
을, 슈토한테선 ‘포기하는 게 좋아’라는 시선을 받으면서 아마네는
나지막이 끙끙댔다.
이러면 자신이 마히루를 괴롭히는 것 같잖아.
“……알았어.”
그런 얼굴을 보면, 아마네가 굽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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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자, 다 됐어.”
시호코에게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라며 온갖 잔소리를 들
으면서 머리카락과 얼굴을 농락당하고 패션 코디도 세팅당한 끝에
간신히 해방됐을 때는 은근히 피곤했다.
패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마네에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거울로 확인해 보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평소 아마네와는 비교
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남자가 보였다.
시호코가 고른 것은 다크 그레이 체스터코트에 흰 터틀넥, 검은 슬
랙스 조합. 심플하면서도 캐주얼한 분위기를 억제한 코디네이션이
다.
새해 경축 행사에 가는 거니까 가벼운 차림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지, 정장 같은 분위기도 살짝 풍기고 있었다.
아마네도 컬러풀한 옷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모노톤에 차
분한 차림은 취향과 일치했다.
머리 모양도 확인해봤는데, 약간 긴 앞머리는 머리에 쓰는 인두와
왁스, 시호코의 솜씨로 잘 넘어가 평소 앞머리에 가렸던 눈이 드러나
있었다.
눈을 확실하게 노출함으로써 인상이 제법 밝아졌는데, 그뿐만이 아
니라 볼륨감을 잘 살려서 세팅한 앞머리가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
고 있었다.
어머니나 이츠키에게 음침하다는 야유를 들었던 아마네는 어느새
사라지고, 이게 누구냐 싶을 정도로 산뜻하고 인상이 훤한 남자가 거
울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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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조금만 만져도 이렇게 산뜻하고 인상이 좋은 사람이 되는데, 왜


그러질 않는 거람.”
“취향이 아니야.”
“너는 그런 구석이 있구나. 뭐, 표정이 딱딱하니까 웃지 않으면 호
감을 줄 수 없지만.”
얼굴이 딱딱하다는 말은 사족이지만, 사실이라서 부정할 수는 없
다.
“그럼 나는 마히루를 다듬고 올 테니까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
렴.”
아마네는 이것저것 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마히루의 상황은 모른다.
혼자서 기모노를 입을 줄 안다고 해서 마히루는 자신의 집으로 일
단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는데, 기모노 입는 방법을 안다
는 점에서 마히루의 스펙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방에서 먼저 나간 시호코를 보내고,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봤다.
오랫동안 이런 차림은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자기 자
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쁘지는 않네.”
마히루의 옆에 서기에는 좀 초라한 것 같지만, 평소의 아마네보다
는 몇 배나 더 나아 보였다.
시야를 가리지 않는 앞머리를 살짝 만지면서, 가끔은 이러고 다니
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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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거실에서 슈토와 함께 수십 분을 기다린 끝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


리가 났다.
여자는 외출 준비를 하는 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
기를 들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 자체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마히루
가 시호코에게 성희롱 같은 짓을 당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걱정했다.
이제 끝났나 싶어서 앉아 있던 소파에서 슬쩍 일어나 현관을 본 타
이밍에 마히루가 조용히 거실에 도착했다.
마히루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멍해지고 말았다.
평소에 마히루는 전통복을 안 입고, 볼 기회도 없다.
그래서 그냥 잘 어울리겠지 하는 수준으로만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시호코의 말에 따르면 후리소데4)를 입으면 사람이 많은 곳에선 움
직이기 불편할 테니까 코몬5)으로 입혔다고 하는데, 연분홍색 바탕에
매화무늬가 들어간 기모노를, 원래부터 있던 옷이 아닐까 싶을 만큼
잘 소화하고 있었다.
마히루는 평소 분홍색 옷을 잘 입지 않지만, 지금은 우아한 기품을
유지하면서도 여성스러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색소가 옅은 긴 머리카락은 옆머리만 남기고 뒤로 모아서 비녀로
고정했다. 새하얀 목덜미와 찰랑이는 장식이 여성스러운 매력을 강
조하는 바람에 참 고혹적이다.
원래의 아름다움을 끌어내도록 살짝 곁들인 화장의 효과까지 합쳐
서 더없이 청초한 미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어떠니? 꽤 귀엽게 완성했다고 보는데. 마히루는 원판이 좋아서
정말이지 꾸미는 보람이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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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주 잘 어울리는군.”
자연스럽게 웃으며 칭찬하는 슈토의 말을 듣고 마히루도 약간 쑥스
러운 듯이 시선을 내렸다. 그런 동작까지도 매혹적으로 보이니까, 미
인이란 진짜 무시무시하다.
“자, 아마네, 너도 감상을 말해야지.”
“어울리는 것 같아.”
아무래도 부모님 앞에서 절찬할 수는 없어서 무난하게 칭찬하고 넘
어갔지만, 시호코는 매우 못마땅한 눈치다.
“……그런 점이 문제라는 거 아니?”
“됐네요.”
시호코한테서 박한 평가를 받았지만, 아마네는 부모님 앞에서 더
칭찬할 마음이 없으므로 고개를 돌렸다.
시호코는 그런 아마네가 어처구니없는 눈치였지만, 그 성격을 잘
아는지 한숨만 쉬고 넘어가 주는 것 같았다.
“얘도 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히루는 어때? 아마네, 이러
니까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
“네, 네. 평소와는 완전히…….”
“평소에도 이렇게 입고 다니면 인기가 있을 텐데, 그렇게 안 한단
말이지. 정말 손해만 보면서 산다니까.”
아마네에겐 괜한 참견이지만, 시호코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한
숨을 쉬고 있었다.
“기왕 슈토 씨를 닮았는데, 그걸 살리지 않는 얘는 정말 실망이야.
아까워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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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이제 그만해, 시호코. 아마네도 여러모로 복잡한 시기인 거


겠지.”
“그 또래면 여자들 관심을 받고 싶지 않나?”
“아마네는 굳이 말하자면 한 명으로 만족하는 성격 같은데. 더 있
어도 복잡해서 싫어하지 않을까?”
“어머머.”
아마네를 두둔하는 말이 오히려 시호코의 망상에 불을 지폈다.
그야 아마네는 불특정 다수에게 호감을 사는 것보다 한 명만 있으
면 된다고 생각을…… 아니, 슈토에게 그렇게 배웠고 실제로도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상대가 마치 마히루라고 말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게 아닌가.
환하게 웃는 시호코를 보고 얼굴을 실룩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왜 자꾸 이상한 추측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제삼자의 눈에
는 그렇게 보이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특별하다고 단언할 만큼은.
그건 사실이지만――.
마히루 몰래 힐끗 보고, 슬쩍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냐고 묻는다면야, 좋아하지만…….)
호감이 간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연애 감정이라고 단정하려면, 뭔가 아니다.
“어머니가 이상하게 상상하는 그런 일은 하나도 없거든. 시시한 소
리는 그만 하고 운전할 준비나 하지그래?”
“매정한 아이라니까…… 진짜. 아무렴 어때. 슈토 씨, 우리는 차를
가지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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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보아하니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부모님 모두 외출 준비
로 넘어간다.
어느 신사에 갈지는 부모님에게 맡기고, 먼저 주차장에 가려고 집
을 나서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나는 가방에 필요한 걸 넣어둬서 더 준비할 건 없는데, 마히
루는 어때?”
“아, 이 가방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
갑자기 둘만 남는 바람에 조금 어색함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창문
을 닫거나 쓸 일이 없는 가전제품의 콘센트를 뽑았다.
거실 불을 끄고 나서, 다시 마히루를 봤다.
역시 자세히 보질 않아도 미인이다. 이만큼 기모노가 잘 어울리는
소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 앞인지라 너무 노골적으로 칭찬할 수 없었지만, 누가 봐도
전통복 미인인 마히루는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마네 군?”
“응? 아니, 잘 어울린다 싶어서. 청초한 전통복 미인 느낌이 딱 들
어.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해.”
슈토에게 여자가 꾸몄을 때 칭찬하라고 배웠으니 원래는 처음에 그
래야 했지만, 부모님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은 부끄러웠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마히루는 몇 차례 눈을 크게 깜박였고, 그런
뒤에 살짝 볼을 붉히면서 입술을 꼭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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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런 반응을 보인 때를 떠올리고, 아마네는 슬쩍 쓴웃음을 지


었다.
“아아, 칭찬하면 싫던가? 미안해.”
“그,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아마네 군은, 의외로…….”
“의외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홱 돌리는 마히루를 보면서 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물어
볼 분위기가 아닌지라 얌전히 포기하고 마히루와 함께 현관으로 이
동했다.
신발은 걷는 것을 감안하여 정통 나막신이 아니라 부츠를 신는 절
충 스타일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
다.
비녀 장식을 찰랑찰랑 흔들면서 겨우 부츠를 신은 마히루는 먼저
밖에 나와서 문을 잡고 있던 아마네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리가 가까웠다. 웬일로 마히루가 먼저 다가와서
슬쩍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귀를 좀 빌려달라는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현관문을 잠근 뒤
에 허리를 숙이자, 마히루가 입가를 손으로 동그랗게 살짝 가리면서
귓가에 갖다 댔다.
“아마네 군.”
“응?”
“저기…… 아마네 군도, 오늘, 멋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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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목소리로 그렇게만 속삭인 뒤에 옆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 홀


로 빠르게 걸어가는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그대로 문에다 이마
를 쿵 박았다.
“치사하게 그런 말을 하다니…….”
앙갚음처럼 속삭인 말을 듣고, 아마네의 심장 고동은 경종이 울리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마히루 때문에 확 달아오른 볼을 식히는 데 시간이 걸려서, 먼저 주
차장에 가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은 그런 아마네를 수상한 눈으로
봤다.

아마네가 사는 지역에서 차로 약 한 시간 걸리는 지역에 있는 유명


신사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TV에서 봤을 때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한산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많이 있네요.”
“그렇군.”
“마히루, 흩어지지 않게 조심하렴. 우리도 조심할 테고 스마트폰도
있으니까 다시 모이는 건 쉽겠지만, 그래도 역시 참배는 함께하고 싶
으니까.”
“네.”
기모노를 입은 마히루가 가장 움직이기 불편할 것이고 걸음도 느리
다. 신발은 부츠를 신었다고 해도 기모노는 보폭이 제한되니까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느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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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를 헤치고 가야 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어깨가 자주 부


딪칠 만큼은 사람들이 많아서 아마네 일행도 조심해서 걸어가야 했
다.
“그럼 가 볼까.”
앞장선 시호코를 따라서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우선은 손을 씻는
곳에 가서 손과 입을 정갈히 씻으려고 했는데, 역시 마히루에게 시선
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모노 차림인 사람도 적잖이 있으니 기모노를 입은 마히루가 그렇
게 눈에 띌 리가……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수수한 교복만 입어도 사람들 눈길을 끌었던 마히루다. 청
초한 분위기의 정통파 미소녀가 전통복을 입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입을 씻는 몸짓조차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왜 그러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달갑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서,
아마네도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손과 입을 씻은 뒤에 앞서가는 부모
님의 뒤를 따라갔다.
일단 마히루의 속도에 맞춰서 걷고는 있었지만, 평상복이라면 또
모를까 역시 전통복은 옷자락이 흐트러지지 않게 걷기가 어려운 듯,
사람들이 붐비는 탓도 있어서 평소보다 이동하는 속도가 느렸다.
“마히루, 괜찮아?”
“네, 이 정도는…… 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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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참배객과 어깨가 부딪치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기 때문


에 아마네가 팔을 잡아 줬다.
“괜찮아 보이질 않는데.”
“……죄송해요.”
“자, 손을 이리 줘.”
역시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히고 걷게 하는 거니까, 신경을 쓰지 않
을 수가 없다.
소매 밖으로 살짝 드러난 작은 손바닥에 손을 뻗자, 마히루가 아마
네를 쳐다봤다.
싫은 건가 싶어서 손을 다시 거두려고 했더니 황급히 손바닥을 포
개면서 다시 아마네를 빤히 쳐다보는지라, 아마네는 영문도 모른 채
마히루를 바라보고 말았다.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마히루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아마네의 손
을 꼭 쥐었다.
대체 뭘까? 머리를 갸웃거릴 틈도 없이 인파에 밀려서 이제 곧 새
전함 앞까지 도착할 것 같았기 때문에 아마네는 맞잡은 손의 감촉을
확실하게 느끼면서 작은 의문을 가슴에 도로 넣었다.

“꽤 오래 기도하는 것 같던데, 무슨 소원을 빌었어?”


참배를 마치고 줄에서 조금 벗어났을 때가 되어서야 조용히 기도했
던 마히루에게 물어봤다.
이게 바로 견본이라는 듯이 우아하게 참배를 마친 마히루는 아마네
의 곱절은 될 정도로 오랫동안 눈을 감고 합장한 채 서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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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고개를 숙이는 우아한 모습에 정신이 팔릴 뻔했지만, 뭔가 소원


을 빌었음을 깨닫고 물어본 것이었다.
“무병장수라고 할까요.”
“엄청 무난한 소원이네.”
마히루답긴 했다.
본인은 욕심이 별로 없어서 뭘 빌었는지 궁금했는데, 예상했던 범
위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약간 맥이 빠졌다고 할까.
“그리고.”
“그리고?”
“……이대로 평화롭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그것도 참 마히루다운 소원이었다.
자극이나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히루가 바랄 일이며, 평화
와 평온을 선호하는 마히루다운 소원이리라.
“우리 어머니가 있으면 평화롭지 않겠지만 말이지.”
“그건 그것대로 즐거울 수 있어요.”
그런가…… 싶었지만, 본인이 즐겁다고 하니 참견하지만 않고, 표
정을 부드럽게 풀고 마히루의 손을 잡았다.
아직 복잡한 인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먼저 참
배를 마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 곁에 가기 전
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런 의미로 손을 잡았는데, 마히루는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조금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면서 아마네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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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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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얘들아, 여기야―.”
시호코의 목소리는 밝고 시원시원해서 알기 쉽다.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둘이서 부모님에게 가 보니 시호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뒤에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아
마네와 마히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머머.”
“왜?”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있구나 싶어서.”
그 말을 듣고, 시호코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은 실수였다고 뒤늦게 깨
달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이
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상하게 착각한 시호코가 실실 쪼개는 모습을
봐야 한다니, 웃기지도 않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잡은 거잖아. 그리고 기모노를 입고 있으
면 넘어지기도 쉽고.”
“그래. 기모노를 입으면 걷기 힘드니까 에스코트해 줘야지. 나도
시호코한테는 그렇게 하니까.”
슈토는 이해가 되는지 마히루의 손을 잡은 것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시호코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저렇게 눈치껏 손을 내밀어서 잡을 수 있다면 고생하지
않겠지만, 성격상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마히루가 순순히 손을 잡아
줘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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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코의 관심이 슈토에게 넘어간 것에 안도하면서 살며시 손을 놓


으려 했는데, 마히루는 여전히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세지 않게 꼬옥 잡고 있지만,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
다. 왜 그러냐고 목소리를 낮춰 물어봐도 마히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녀린 손가락이 아마네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마히루, 마히루, 따뜻한 음료수를 사 올까 하는데 묽은 단팥죽과
감주 중에서 뭐가 좋니?”
“그럼 단팥죽으로 부탁드릴게요.”
시호코가 끼어들어서 물어보거나 손을 놓을 타이밍도 놓치는 바람
에 그대로 계속 가녀린 손을 잡고 있었다.
“너는?”
“……나는 감주.”
“그래, 알았어.”
마히루만 싫지 않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가슴속에서 일어난
작은 동요를 억지로 가라앉히고, 시호코에게 희망사항을 전하면서
마히루의 손을 다시 잡았다.

잠시 후 노점에서 돌아온 시호코가 각각 부탁받은 것을 줬는데, 이


때는 아무래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으니까 일단 손을 떼고 한숨을 돌
렸다.
부모님은 함께 감주를 마시면서 사이좋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만의 세계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라서,
말을 걸 생각도 없는 아마네도 받은 감주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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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주는 마시는 링거라고 불릴 정도로 영양도 풍부하지만, 그 전에


쌀의 단맛과 걸쭉한 식감이 온몸에 따끈하게 퍼지는지라 자신도 모
르게 감탄과 안도가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마네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단팥은 의외로 좋아하기 때
문에 단팥죽이라는 선택지도 포기하기 아까웠다. 그저 새해라는 이
유만으로 분위기상 이쪽을 고른 건데, 개인적으로는 정답인 것 같다.
마히루를 슬쩍 보니 온화한 표정으로 종이컵에 담긴 단팥죽을 조금
씩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단팥죽에 미련이 커
지니까 참 난감하다.
(한입 얻어먹을 수 없을까.)
부탁하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보고 있었더니, 그 시선을 알아차린
마히루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그때 덩달아 찰랑거리면서 흔들
린 비녀가 뭐라 말할 수 없는 청초함을 풍겼다.
“맛있어?”
“맛있어요.”
“한입 먹어도 돼?”
단팥죽을 맛보고 싶어서 물어봤더니, 마히루는 우스꽝스러울 정도
로 깔끔하게 딱 정지하고 말았다.
“어, 되, 되는데요…….”
허락한다는 듯이 대답하면서도 당혹을 감추지 못한다. 주저하는 느
낌으로 아마네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싫으면 됐어.”
“시, 싫다뇨. 그건 아니지만……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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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 아뇨, 됐어요. 여기요. 저도 감주를 주세요.”
“으, 응.”
무슨 이유인지 약간 발끈한 마히루에게 감주 컵을 강탈당해서, 아
마네도 마히루에게 컵을 받았다.
내용물은 색만 봐도 팥을 연상케 하는 걸죽한 액체.
은은하게 풍기는 팥 특유의 향기를 맡으면서 입에 대고 마시자 역
시나 달고 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단맛이 조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네가 단것을 좋아하는 체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맛있지만, 역시 단팥은 차와 궁합이 좋다고 통감했다.
여담으로 마히루는 단것도 그럭저럭 좋아한다고 하니, 이 정도가
딱 알맞을지도 모른다.
마히루를 힐끗 보니 감주를 한 모금 마셨는지 볼이 살짝 상기된 채
어질어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입에 안 맞았어?”
“아니에요. ……아마네 군, 케이크 때는 바로 알아차렸으면서, 왜
이건 모르는 건가요?”
“……아.”
그제야 마히루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닫고, 아마네도 딱딱
하게 굳었다.
(앙~은 아니지만. 이건 간접 키스네.)
단팥죽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간접 키스를
제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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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마히루는 난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


까 그런 태도를 보인 거겠지.
“미,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불쾌했지?”
“왜,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불쾌하진 않았고, 그러니까…… 부끄
럽기만 해서.”
“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미안해.”
감정이 어떻든 간에 곤혹스럽게 한 것은 사실이므로 가볍게 머리를
숙이자, 이번에는 마히루가 허둥지둥 팔을 휘저었다.
“따, 딱히 마음에 두진 않았어요.”
“그, 그래? 그래도 미안해. 그 녀석들 같은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
는 거였는데.”
이츠키랑 치토세는 그런 걸 마음에 두지 않는 타입인지라 ‘친구라
면 괜찮다’고 주장하면서 아마네가 먹던 음료수나 음식을 종종 먹곤
했다.
이츠키는 같은 남자고 치토세는 여자로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딱히 그런 짓을 당해도 간접 키스로 느낀 적이 없다. 빼앗겼다고 분
통해 하는 게 다였다.
그렇지만 역시 마히루에게 그러는 건 문제였다.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이 잘못한 거지만.
“아카자와 군과 치토세 양과는 평소에도 그러나요?”
“응. 뭐, 친구니까.”
“그렇군요.”
이해한 것 같기도 하고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인 마히루는 감주 쪽으로 시선을 떨구다가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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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입을 댔다.
“……저와 아마네 군도 친구니까 딱히 문제없어요.”
“으, 응……. 네가 다 마셨네.”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알코올 성분이 없는데도 볼을 붉히고 있는 마히루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아마네는 마히루가 3분의 1쯤 남긴 단팥죽을 마셨다.
아까보다는 식었을 텐데도, 그 단팥죽은 뜨겁고 왠지 모르게 엄청
달았다.

“마히루는 요리를 참 잘하는구나.”


새해 참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잠시 쉬었더니 벌써 저녁때라서, 마
히루는 옷을 갈아입은 뒤 평소처럼 저녁 준비를 시작했는데…… 아
마네 집에 하룻밤 묵기로 한 시호코가 마히루의 솜씨를 관찰하려는
목적으로 부엌에 있었다.
친가는 차로 몇 시간은 걸리는 곳이라서, 피곤하니까 처음부터 여
기서 자고 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았으면 좋겠지
만, 원래 집주인은 슈토이므로 불평할 수 없다.
다행히 이불은 혹시라도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서 한 세트가 더 있
으니까 둘이서 쓰면 되리라. 친가에서도 같이 자니까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고등학생인데도 솜씨가 좋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이
만큼 못 했는데.”
“어머니는 지금도 마히루보다는 잘하지 못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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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부엌에서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가 날아들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시치미를 떼면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옆에서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슈토가 “시호코를 너무 괴롭히지 말
렴.”이라고 타일렀지만,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니 놀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마네이므로 이 정도 앙갚음은 허용되리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아마네에게 부엌에서 “정말 못된 아이라니
까.”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시호코는 바로 마히루
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었다.
마히루도 당황하지 않고 시호코가 거는 말에 차분히 대꾸하고 있었
다. 시호코의 성격에 많이 익숙해졌는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멀리서 두 사람이 사이좋게 조리 중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마네는
슬쩍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호코는 시이나 양이 정말 마음에 든 것 같구나.”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뒤에서 구경하던 슈토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 예쁘고, 귀엽고, 성격도 좋으니까 어머니가 좋아할 줄은 알
았어.”
“아마네 너는 어떤데?”
“……별로. 그냥 착하고, 귀여운 애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은근슬쩍 체크하나 싶었는데, 슈토는 딱히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니
까 그저 순수한 흥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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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의 대답을 듣고 더 추궁하지 않았다.


“아마네가 매일 먹고 싶어진다는 요리가 기대되는걸.”
“맛은 보증할게. 어머니가 이상한 짓만 안 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시호코는 시이나 양의 요리를 먹고 싶어 하니까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선에서 그치겠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딱히 시호코가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섬세하게 맛을 내는 마
히루와는 달리 간을 대충 보는 일이 많았다.
섬세한 맛은 슈토의 담당이며, 시호코는 양과 편리함을 우선시했
다.
물론 한창 먹을 자식을 둔 주부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기 쉽겠지만,
아마네는 마히루가 만드는 것처럼 철저하게 계산된 맛을 선호하는지
라 마히루가 만든 요리의 매력이 손상되는 것이 싫었다.
다행히 시호코도 마히루를 도와주는 선에서 그치는 것 같아서, 안
도의 한숨을 쉬고 두 사람의 요리 풍경을 바라봤다.

“응, 맛있네.”
“감사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평소 두 사람이 쓰면 딱 맞는 식탁에서 네 사람이 먹
을 수는 없어서, 다른 방에 보관하던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 저녁을
먹었다.
슈토의 솔직한 감상에 안도한 마히루는 몸에서 긴장을 살짝 풀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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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실습 시간을 제외하면 직접 만든 요리를 아마네 말고 다른 사


람에겐 대접해 본 일이 없었는지 약간 긴장했던 것 같지만…… 슈토
의 부드러운 미소에 그제야 힘이 빠진 듯하다.
“정말 맛있는걸. 이 정도면 혼자 살든 결혼하든 문제가 없을 것 같
아.”
자신들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는 시호코의 말을 듣고 얼
굴이 실룩거릴 뻔했지만, 무표정을 유지하고 된장국을 홀짝였다.
육수로 끌어낸 그윽한 맛은 이미 익숙해졌다.
마히루의 맛에 완전히 친숙해지는 바람에 마히루의 요리 말고는 그
다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매일 직접 만든 요리를 먹
을 때의 난점이었다.
“아마네, 감상을 안 말하니?”
“물론 맛있지. 늘 고마워.”
시호코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보채니까 말한 것처럼
들렸을 것 같다.
단둘이 있을 때는 매일 맛있다는 말을 빼먹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
모님이 계셔서 자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도 평소 하듯이 칭찬했지만, 마히루는 왠지 불안한 듯, 아니
뭔가 불편한 듯이 몸을 꼬면서 “……네.”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
다.
볼이 살짝 발개진 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이겠지.
세 사람에게 연달아 칭찬을 받으면, 아무리 아마네의 감상을 듣는
데 익숙해진 마히루라도 낯부끄러울 것이다.
“정말 귀엽구나, 마히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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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코, 너무 놀리지는 마.”


“놀리려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순진하고 착
한 아이라고 생각했을 뿐인걸?”
“그, 그렇지는 않은데요…….”
“아니, 그건 그래. 순진하다고 할까, 순수하다고 할까.”
“아마네 군?!”
순진하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딱히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가
셔츠를 풀어 헤친 것만으로 얼굴을 붉힐 정도였으니, 순진무구하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머,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딱히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마히루한테서도 부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순진하니 순수하니 하는 말은 딱히 흠을 잡는 게 아니지만, 계속해
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싫은지 마히루가 강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아마
네도 더는 말하지 않는다.
“뭐, 나는 아마네가 시이나 양에게 상처만 주지 않는다면 알아서들
해도 된다고 보지만 말이지. 놀리는 건 정도껏 하렴, 아마네.”
“나도 알아.”
“……보세요, 놀리는 거 맞잖아요.”
“순진하다는 말은 진심으로 한 거야.”
옆에 있으면서 테이블 밑에서 몰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볼을 붉히고 자신을 살짝 노려봐서 아마네가 “미안, 미안해.”라고
사과하자 고운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런 모습이 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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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아마네는 마히루가 화내지 않게 꾹 참


았다.
“……참 뭐랄까. 우리가 할 법한 짓을 눈앞에서 보여주면 좀.”
“괜찮지 않을까. 아마네도 전에 없이 표정이 부드러우니까.”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안 했어―.”
기분 탓인지 이상한 추측을 하는 것 같아서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
어보자 시치미를 뚝 뗐다.

“음, 미안해. 부모님 몫까지 음식을 만들게 해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두 시간 정도 웃고 떠들고 뒤에 자리를 파했다.
그렇다 해도 부모님은 거실에서 잘 예정이니 집에 돌아갈 사람은
마히루 혼자지만.
부모님이 먼저 목욕탕을 쓰게 양보했기 때문에 아마네만 혼자 마히
루를 바래다주러 밖으로 나왔다.
배웅할 필요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과 함께 오늘 시호코가
억지를 부린 것을 사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즐거웠으니까요.”
“그래?”
기분이 상하지 않은 눈치여서 다행이다.
오히려 즐거운 눈치였다.
“그리고…….”
“그리고……?”
“……조금은, 행복한 기분이 뭔지 알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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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목소리로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말한 마히루는, 왠지 모르게


쓸쓸함을 동반한 것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바람이 불면 꺼질 듯 연약한 미소. 눈에 희미한 동경이 섞여 있음을
안 것은 아마네가 마히루의 가정환경을 짐작하기 때문이리라.
왠지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아마네는 무심코 마히루의 머리
에 손을 얹어 일부러 조금 거칠게 쓰다듬었다.
마히루는 싫은 표정을 짓지 않고 그저 놀란 듯 아마네를 쳐다봤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의미는 없어.”
“의미가 없다뇨…….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고요.”
“어차피 목욕할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안 되는 거였어?”
“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미리 말은 해 줘요.”
“쓰다듬었어.”
“그건 사후 보고예요.”
“미안해.”
미리 말하면 얌전히 만지게 해 주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도 꾹
참고 솔직하게 사과하자 마히루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아마네 군도 참…… 저니까 괜찮지만, 사실은 여자애의 머리를 가
볍게 쓰다듬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에요.”
“아니, 너 말고는 안 하는걸…….”
이성의 몸 일부를 만져도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친한 사람뿐임을
잘 알고 있다. 아마네는 성격이 털털한 사람처럼 마음 편하게 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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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손대지 않는다.
일단 아마네와 마히루는 친한 부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으니까 마
히루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서 접촉했지만, 다른 사람에
게 이럴 생각은 없다.
애초에 접촉하려는 시도도 안 할 것이다. 기껏해야 못된 장난을 치
는 치토세에게 벌을 줄 때가 다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지거나 쓰다듬을 리가 없잖아.”라고 덧붙이자 마히
루는 머리에 얹힌 손을 치우지도 않고 얌전해졌다.
“……보면서 알았지만 아마네 군은 슈토 씨와 아주 많이 닮았어요.
안 지 얼마 얼마 안 되는 제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어디가? 성격도 얼굴도 별로 닮지 않았는데.”
“……판박이예요, 정말로.”
이번에는 크게 한숨을 쉬는 마히루에게 조금 울컥한 나머지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마히루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닮았나?)
확실히 나란히 서면 남들이 나이 차이가 나는 형제로 종종 착각하
지만, 아마네와 슈토는 분위기가 정반대다.
성격도, 정반대는 아니지만 닮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똑같다고 말하다니, 무슨 영문일까.
의문이 속속 떠오르지만, 마히루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마네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마음껏 쓰다듬은 뒤에 손을 떼자 마히루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아마네를 쳐다보고 이상하게 허둥댔다.
“왜, 더 쓰다듬어 줬으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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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는 투로 물어보자, 마히루가 희미하게 빨개진 얼굴로 “놀리지


말아요.”라고 반론해서 그쯤에서 그만뒀다.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마히루는 뚱한 얼굴을 숨기지 않
고서 자기 집 문을 열고는 그대로 쏙 들어가 버렸다.
좀 지나쳤나 싶어서 후회했는데, 곧바로 마히루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어 아마네를 봤다.
“아마네 군.”
“왜?”
“……아마네 군, 바보.”
마히루는 볼을 연홍색으로 물들이고 토라진 듯이, 그러면서도 약간
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 말한 뒤 문을 닫았다.
(……누구더러 바보래.)
너 때문에 심장이 갑자기 터질 뻔했잖아.
슬쩍 한숨을 쉰 뒤에 아마네는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서 한동
안 복도 벽에 몸을 기댔고, 평소보다 하얗게 느껴지는 숨결을 내뱉었
다.

마히루를 보내고 나서 집에 들어오고, 잠시 후 부모님이 목욕을 마


치고 나왔다.
TV에서 눈을 떼고 슬리퍼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잠옷으로 갈아입
은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부부 사이가 좋은 증거겠지.
애초에 같이 목욕할 정도이니 이제 와서 사이좋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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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 썼단다. 아마네도 목욕하렴.”


“응. ……그나저나 용케도 둘이 들어갔네. 우리 집 욕조는 혼자라
면 모를까 두 사람이 쓰려면 좁을 텐데.”
혼자 살기에는 꽤 넓고 쾌적한 집이지만, 욕실은 별로 넓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 남녀가 다리를 쭉 뻗고 들어갈 만큼 욕조가 크지
는 않았다.
“어머, 괜찮은걸? 꼭 붙어서 들어가면 되니까.”
몸을 기대고 “그렇죠? 슈토 씨?” 라고 말하면서 웃는 시호코를 보
면서 슈토도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결혼하고 20년이 다 되는데도 여전히 신혼처럼 사는 두 사람
을 보니 아마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뜨겁네.”
“부럽니?”
“딱히. 혼자가 더 편하고, 애초에 그럴 상대도 없으니까.”
“마히루는…….”
“저기 말이야. 걔랑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왜 시호코가 아마네와 마히루를 자꾸 이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지. 시호코는 마히루를 좋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헛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
니지만. 마히루가 자신에게 느끼는 신뢰를 연애 감정으로 착각해서
는 안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자, 시호코. 아마네도 민감할 때니까 너무 괴롭히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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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는 게 아니라, 진심인데…….”


“그래. 알았어.”
시호코의 말을 적당히 흘리고 목욕 준비를 하려고 일어서자 “아마
네.”라고 슈토가 불렀다.
시호코를 타이를 때나 쓴웃음이 섞일 때와 다르게 진지한 목소리였
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슈토를 보니 온화한 눈길로 자신을 보
고 있었다.
“너는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니?”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부모님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많이 편해졌어.”
분명 부모님은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툭하면 아마네를 살피러 온 것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얼굴을 보
려고 찾아온 것도.
전부 아마네가 마음 편안히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로 믿을 사람은 있으니까.”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다는 말은 애써 참으면서 대꾸하자, 시호코가
“아아, 이츠키 군 말이구나.”라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기왕이면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건 안 돼. 이상한 이야기를 할 거잖아.”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어릴 적 아마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를…….”
“그게 이상한 이야기라고. 제발 그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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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이츠키에게 흘리면 치토세에게도 무조건 전해진다. 그것만큼은 어


떻게든 피하고 싶다. 틀림없이 자신을 놀릴 것이고, 사진을 보여달라
면서 조를 것 같아서 싫다.
어릴 적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예쁘장한 여자애처럼 생겼기 때문
에 틀림없이 웃을 것이다. 어머니가 여장 사진을 제공하면 몸부림칠
것이다.
“하지만 인사하고 싶은걸. 아마네와 친하게 지내 주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주 착한 아이겠지. 아마네가 인정할 정도니까.”
“……좋은 녀석이야. 나에겐 아까울 만큼.”
본인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이츠키에겐 감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엮이려 들지 않고 조용히 교실 구석에서 음악만 듣던
음침남에게 싹싹하게 말을 걸어 줬으니까.
“씻고 올게.”
본인이 없다고는 하나 이츠키를 칭찬하는 것도 쑥스러워서 대충 둘
러대듯 그렇게 말한 뒤에 아마네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재빨리 자
기 방으로 갔다.
뒤에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리는지라 아마네는 입술을 실룩여
서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방으로 도망쳤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가니 이미 부모님은


일어나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잘 잤니? 아침 식사가 다 됐으니까 앉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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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의자에 걸쳐 두었던 아마네의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그렇게 말


하는 슈토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이 집에 막 와서 아직 낯설어야 할 부엌에 벌써 익숙해진 것은 슈토
가 평소에도 요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친가에선 시호코와 슈토가 교대로 요리하므로 앞치마를 입은 모습
도 눈에 익었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았다.
시호코는 먼저 테이블에 앉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아마 돕고
싶었는데 슈토가 ‘내가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편히 있어.’라고 말한
모양이다.
역시 자신도 도와야겠다고 생각해서 슬쩍 일어났지만, 바로 슈토가
따끈따끈한 밥과 된장국을 쟁반에 얹어서 가져오는 바람에 자신의
시도는 허사로 끝났다.
“고마워, 아버지.”
“천만에. 나는 별로 한 게 없단다. 시이나 양이 어제 먹고 남은 걸
밀폐용기에 담아 준 게 있어서 그걸 데우고, 밥과 된장국과 달걀말이
를 만들었을 뿐이야.”
아마네의 가족들은 아침을 챙기는 주의라서 아침 식사도 대충 넘어
가지 않는다.
이번에는 마침 마히루가 만든 조림이 남아서 그걸 메뉴에 추가했겠
지만, 그게 없었다면 슈토는 뭐든 찬거리를 하나 더 만들었을 것이
다.
슈토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각자의 자리에 밥과 된장국을 놓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슈토의 달걀말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자니,
어느새 상을 다 차린 슈토도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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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럼 슬슬 식사를 시작할까.”


“그러죠.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함께 식사에 감사를 표하고, 맨 먼저 육수로 간을 한 달걀말이를 젓
가락으로 집었다.
슈토의 요리는 여름 방학 때 귀성해서 먹어 본 이후로 오랜만에 보
는지라 반가운 기분을 느끼면서 한입 크기로 잘라 천천히 입에 넣었
다.
입안에서 퍼지는 국물 맛도, 적절하게 단맛도, 잘 익힌 달걀도 반갑
고―― 동시에 약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니?”
심각하게 먹는 아마네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슈토가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물었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간을 잘못 맞췄나?”
“아, 아니. 그건 아니야. 맛있긴 한데…… 역시 늘 먹던 마히루의
요리와는 맛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그렇구나.”
반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곤 하나 오래 먹어서 익숙한 아버지의 요
리보다 늘 먹고 있는 마히루의 요리가 기준이 된 사실에 아마네 자신
도 놀라고 있었다.
물론 슈토의 요리가 맛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히루가 만든 것이 아
마네의 입맛에 더 잘 맞는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만난 지 몇 개월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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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에 안 된 마히루의 요리가 이렇게까지 아마네의 입맛을 길들였다는


사실이 왠지 낯간지럽다.
“완전히 시이나 양의 포로가 되고 말았구나.”
“마히루가 아니라 요리겠지.”
“어머나, 마히루 본인에겐 매력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소리는 한 적도 없고요. 유도신문에 넘어갈 생각도 없거든.”
시호코는 분명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 할 테니까 화제에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예상이 맞았는지 시호코가 아쉬운 듯 눈꼬리를 내리는 것을, 아마
네는 콧방귀를 뀌고 무시했다.

부모님은 점심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것도 두 분 다 내일은 일해야 하니까 일찍 집에 가서 쉬는 게 좋
겠다고 아마네가 제안했기 때문이지만. 오랜 시간 운전해서 귀가하
면 당연히 피곤할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야 할 것이다.
“마히루 얼굴도 더 보고 싶고, 이츠키 군도 보고 싶었는데.”
현관에서 맨션 복도로 나왔을 때 시호코가 불쑥 말했다.
“그건 다음 기회에……. 무엇보다 이츠키는 선약을 잡아야 해. 그
녀석도 시간이 남아돌지는 않으니까.”
“그럼 아마네가 약속을 잡아 주렴.”
“마음이 내키면 그럴게.”
사실상 그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시호코가 알아
보기 쉽게 발끈했지만, 슈토가 “자, 이제 그만들 하렴.”이라고 말하
면서 달래 주자 약간 기분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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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옆집 문이 소리를 내면서 열렸


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면서 문틈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민 마
히루의 모습이 보였다.
시호코의 목소리를 듣고 나온 모양이다.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
미에서도 시호코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잘 들리니까.
“다행이다. 마침 인사하러 갈까 하던 중이었어―.”
두 사람도 마히루가 나온 걸 알아차리고 마히루의 집 앞으로 이동
했고, 시호코가 환하게 웃으면서 마히루에게 다가갔다.
신발을 신고 나온 마히루를 힘차게 와락 안으려 드는 바람에 마히
루는 약간 당황했지만, 거절하는 낌새가 없는 걸 보면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어쩔 수가 없지 뭐니. 사실은 앞으로 이틀 정도는 더 있고 싶었지
만 일이 있거든.”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스케줄이 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만
큼은 어쩔 수가 없더구나.”
아쉬워하는 부모님을 보고 마히루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뭐, 다음 기회에 또 보면 되지. 아, 다음에는 마히루가 우리를 찾
아올 차례지만.”
“알았어. 여름 방학에는 갈게.”
시호코한테서 강한 시선이 느껴진 것은 다음에 반드시 귀성하라는
압력과 마히루를 데려오라는 무언의 압박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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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아무리 그래도 데려가는 건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서도,


마히루는 방학 때도 혼자 지낼 것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본인이 싫
어하지만 않는다면.
“정말 귀여운 구석이 없다니까. 그렇지? 마히루?”
“네? 저, 저한테 물어보셔도…….”
“여보, 시호코. 난처한 질문은 하지 말래도. ……뭐, 어릴 적에 비
하면 솔직하게 굴지 않게 됐지만.”
보아하니 아마네 편은 없는 것 같아서 말없이 무시하기로 마음먹
자, 슈토가 아마네를 보면서 시호코와는 다른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보다시피 우리 아마네는 겉으로는 솔직하게 굴지 않지만, 잘 살펴
보면 알아보기 쉬우면서 다정한 아이란다.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
주면 좋겠구나.”
“그런 소리는 본인 앞에서 하지 말라고. 엄청 민망하거든.”
칭찬을 듣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편들어 준 게 아니라 적에게 도
발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다정하다고 칭찬하다니,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생
각하니 창피해 죽겠다.
자신은 딱히 다정한 게 아니다. 가까운 사람을 마땅한 경의와 친애
로 대하는 거니까, 그걸 다정하다고 평가받으면 괜히 부끄럽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멋쩍어서 마히루를 슬쩍 보니, 눈을 몇 번
깜박인 뒤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네 군이 성실하고 다정한 건 항상 느끼고 있어요. 사이좋
게 지내는 건 오히려 제가 바라는 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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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럼 다행이야. 여러모로 안심되네.”


여러모로 안심된다는 말에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그보다 마히루의
말에 동요하는 바람에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마히루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아니까 괜히 화끈거려서, 본인의 얼굴
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아마네를 보고 시호코가 웃었지만, 그것조차도 제대로 반응하
지 못한 채 아마네는 마치 입술을 깨물듯 꾹 다물고 말았다.

“듣기 좋으라고 빈말하지 않아도 돼.”


부모님이 아마네의 집을 떠난 뒤에 복도에 서 있는 마히루에게 나
지막이 말했다.
아마네는 미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그런 소리를 했지만,
마히루는 무슨 이유인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면서 아마네를 쳐다봤
다.
그 표정은 조용하면서도 약간 위압감이 느껴지는지라 아마네는 기
가 죽고 말았다.
“제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요?”
“나에겐 말하지 않겠지만, 부모님한테는 또 모르잖아.”
아무래도 빈말이라고 평가한 것이 못마땅한 듯하다.
무심코 변명하자, 마히루는 발끈한 표정을 지은 뒤에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있잖아요, 저는 아마네 군의 인품을 좋게 생각하니까 신뢰하
는 거고,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는 거라고요. 빈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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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으, 응…….”
뭔가 너무 듣기 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
게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다행히 마히루는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아마네를 보고 조금 만족스러운 기색이다.
“알면 됐어요. 자, 점심 준비를 할까요.”
보아하니 정초 사흘에 이어서 오늘도 오늘도 점심을 차려 줄 생각
인 듯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아마네의 집 문고리를 잡은 마히루
를 보고, 아마네는 쑥스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히루의 머
리를 내려다봤다.
(……신뢰한단 말인가.)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은 자신이 할 말이다.
아마네가 마히루를 천사로 보지 않았던 것처럼 마히루도 아마네를
단순한 옆집 사람으로 봐 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신뢰해
줬다. 그게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었다.
“이리로 오길 잘했네.”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목소리만 들렸는지 마히루가 “뭐라고 했나
요?”라고 물어보며 돌아봤고, 아마네는 얼버무리듯이 웃으면서 “아
니,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하고는 마히루와 함께 자신의 집으
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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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제4화 신학기

신학기가 시작됐지만, 딱히 이렇다 싶을 정도로 달라진 것은 없었


다.
각자 나름대로 겨울 방학을 보람차게 보낸 것 같지만, 여름 방학이
끝난 뒤 같은 변화는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큰맘 먹고 이미지
를 바꾸는 일도 없이, 다들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평소 반 분위기보다 훨씬 더 소란스럽게 떠드는 반 아이들을 바라
보면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아마네의 얼굴에 누군가의 그림자
가 졌다.
“안녕, 아마네. 잘 지냈나 보네.”
“응, 덕분에.”
아마네보다 늦게 교실에 들어온 이츠키도 바뀐 것은 없어 보인다.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는데, 여전히 실없어 보이는 웃음
을 짓고 있었다.
“어때, 연말은 잘 보냈어?”
“뭐, 그럭저럭…….”
“왜 말끝을 흐리는데? 뭔가 진전이라도 있었어?”
“너도 참. 진전은 무슨…….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무 일도 없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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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사실 아무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서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마히루가 자신의 집에서 잤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말했다간 치토세에게 바로 전해지고, 둘이서 놀리려 들 것임을 어
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이외에는 부모님이 찾아와서 새해 참배에 같이 간 것이 다니까
딱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범주에는 충분히 들 만했다.
“……흐응?”
“딱히 아무 일도 없었어.”
“뭐, 그렇다면 그렇게 치고 넘어갈게.”
유달리 히죽거리는 것을 보니 살짝 부아가 치밀었지만, 따져 봤자
귀찮기만 하니까 그냥 넘어갔다.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서라도 뭔가 다른 화제를……. 그렇게 생각하
면서 반 전체를 둘러봤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여학생들이 같은 반 왕자, 그러니까 카도와키 유타 곁에 모여 있는
것도 여전했다. 둘러싸여 있는 본인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주위 남자들이 은근히 질투하는 눈으로 보는 것도 바뀌지 않았
다.
“저긴 여전하네.”
“뭐, 유타답다고 할까, 늘 보던 광경이긴 하지.”
어차피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아마네와 여친
이 있어서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이츠키는 인기가 폭발하는 유
타를 보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뭔가 다른 일은 없는지 확인해 보려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시이나에게 남친이 있는 게 아니냐고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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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때 마침 여자애들이 몇몇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들려와서,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아, 리사가 그랬지. 새해 참배하러 간 곳에서 남자와 손을 잡고 있
는 걸 봤대.”
“어어. 시이나는 아무한테도 마음을 쉽게 주지 않는 것 같았는데,
남친이 있어서 그랬던 걸까.”
“꽤 잘생긴 사람이었는데, 학교에선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대. 다
른 학교 아니겠냐고 하더라.”
왠지 모르게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이야기 중인 여자애들에게 집중되
는 것 같았다. 그 유타마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대화에 귀를 기울
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츠키의 시선만은 아마네를 향하고 있었지만.
“이봐, 아마네.”
“나는 모르는 일이야.”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하고는 관계없어.”
“그렇군.”
조용히 뿌리치듯 말하는 아마네를 보면서 이츠키는 쓴웃음을 지었
고, 그런 뒤에 아마네의 앞머리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뭐, 너는 눈에는 안 띄지만 얼굴이 괜찮단 말이지.”
“네가 그러면 놀리는 소리로만 들려.”
이츠키는 잘 까불지만, 분위기가 가벼워도 외모는 잘생긴 축에 속
했다.
그런 미남이 얼굴이 괜찮다고 말해도, 놀리는 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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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외모가 평범한 수준임을 잘 아는 아마네는 굳이 외모 평가


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앞머리를 쓸어 올린 이츠키의 손을 찰싹 쳐내면서 눈살을 찌푸리
자, 쓴웃음을 짓는 이츠키가 눈에 들어왔다.
“넌 그런 녀석이었지.”
“시끄러워.”
“뭐, 너답다면 너답다.”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하는 아마네를 보면서, 이츠키는 화를 내기는
커녕 그냥 웃었다.

“학교에서 소문이 돌더라고.”


저녁을 먹은 후 식탁에 마주 보고 앉은 상태에서 그렇게 투덜대자,
마히루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는지 표정이 딱딱해졌다.
가장 곤란한 사람은 마히루일 것이다.
소문으로는 일단 상대가 아마네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것 같지
만, 그래도 난데없이 주위 사람들이 남친이 있냐고 물어보면 피곤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마네의 집에 왔을 때부터 미묘하게 분위기가 어색
하고, 걸음걸이도 무거웠던 거겠지.
“……아마네 군이라는 걸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엄청 오해를
사는 바람에 그 오해를 푸는 게 힘들어요.”
“손을 잡은 것 정도로 남친이 될 수 있나?”
“모르겠어요. 아무튼 아는 사람이라고 단호히 부정해 두긴 했어요.
이제는 소문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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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자신이 남친으로 오해받는 건 역시 불쌍하니까, 가능하면 빨리 소
문으로 끝나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일일이 그 사람이 남친이
냐는 질문을 계속 받다간 스트레스가 쌓일 것 같다.
아마네도 소문을 들을 때마다 미안함과 창피함 때문에 마음이 불안
한지라, 소문이 후다닥 사라졌으면 한다.
아마네는 한숨을 훅 쉬었지만, 마히루는 시선만 조금 숙이고 있었
다.
“……그렇게, 연인처럼 보였던 걸까요?”
“글쎄. 나로선 나 같은 인간이 마히루의 남친이면 말도 안 된다고
보지만. 더 유능하고 잘생긴 남자를 고를 테니까, 같이 있어도 지인
으로 볼 텐데.”
“그렇지 않아요.”
“어?”
예상외로 강하게 대꾸하는 바람에 무심코 마히루를 다시 보니, 마
히루는 아까처럼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약간…… 화
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강한 의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아마네 군은 자신을 너무 낮게 평가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마
네 군은 참한 사람이라고 봐요. 다정하고, 배려를 잘하고, 신사적이
고, 그러니까, 인품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옷을 잘 입었
을 때는 아주, 멋있다고 생각, 했고요.”
자신한테 하는 말인지 의심될 정도로 칭찬이 계속되어서, 아마네도
저절로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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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마히루가 이토록 좋게 평가할 줄은 몰랐고, 너무 진지하게 말


하는지라 칭찬받는 입장에선 쑥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마히루도 서서히 자신이 한 말이 부끄러워졌는지, 중간에 점점 더
듬거리면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진심임을 확실히 전하려는 듯이 아마네의 눈을 보면서 말하
니까, 더욱 부끄럽다.
“그, 그래……? 저기, 고마워.”
“그, 그러니까, 저기, 너…… 너무 비하하진 말아요.”
“그, 그래…….”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면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겸손조차
허용되지 않을 듯한 분위기.
살짝 얼굴을 붉힌 마히루가 고개를 숙여서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떨기 시작하자, 아마네도 속에서 솟구치는 애틋함과 부끄러움을 어
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기, 설거지하고 올게.”
“그, 그래요.”
좌우지간 아마네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얼버무리면서 도망칠 수밖
에 없다.
전술적 후퇴라고 할 수도 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떠는
마히루를 계속 시야에 담는 건 심장에 너무 해로웠다.
흐읍, 하아. 심호흡한 뒤에 일어나서 식기를 모아 싱크대로 옮기는
동안 마히루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마
히루 역시 익숙하지 않은 칭찬을 한 것이 부끄러워서 끙끙대는 눈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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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면서 아마네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끄럽다면 말


을 하지 말지.”라고 투덜댔지만, 마히루가 그렇게 말해 준 덕분에 아
주 조금은 가슴속이 후련해진 것 같았다.
자신을 긍정해 줬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한 거겠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역시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법이라서, 아
마네는 겨울인데도 찬물로 묵묵히 설거지를 했다.

『아마네, 아마네, 천사님 좀 빌려가도 돼?』


치토세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신학기가 시작되고 3일이 지났을 무
렵, 저녁 식사를 끝낸 뒤였다.
평소에는 앱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왜 굳이 전화로 아마네에게
마히루에 관해서 양해를 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빌려가도 되고 자시고, 아마네의 소유물도 아닌데. 시간이 되는지
를 물으려면 본인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한테 묻지 마. 시이나한테 물어봐.”
『지금 아마네 옆에 있지 않아?』
“……있긴 한데.”
『그럼 내일 방과 후에 같이 놀지 않겠느냐고 물어봐 줘.』
“네가 직접 물어봐.”
얘한테는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았나 싶었는데, 크리스마스 때
치토세는 마히루에게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질문을 퍼부었으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래서 연락처를 알고 자주 곁에 있는 아마네에게 연락해 본 것 같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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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치토세의 생각은 이해됐지만, 자신은 전서구가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일단 본인과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옆에서 마히루에게
스마트폰을 건네고 “치토세가 할 이야기가 있대.”라고 알려준 뒤에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마히루는 곤혹스러운 눈치였지만, 순순히 받아서 스마트폰에 귀를
댔다.
“전화 바꿨습니다. ……네, 내일이요? 네, 딱히 이렇다 할 예정은
없는데요…….”
아마도 치토세의 머신건 토크에 밀리고 있는 것 같다. 마히루가 난
처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단지 갑작스럽게 제안을 받고 놀란 나머
지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네를 힐끔 보기에 “나는 네 판단에 맡길게. 내가 아니라 너와
놀고 싶은 거니까.”라고만 말해 뒀다.
일단 마히루도 가끔 친구들과 놀러 가는 것 같지만,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돌아와 식사 준비를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므로 잠시 숨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치토세의 제안
이 숨을 돌릴 계기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네. ……저기, 그렇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하는데요…….”
아마네의 말을 듣고 결심했는지, 전화 상대인 치토세에게 그렇게
말하자 “야호―!”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컸기
때문에 마히루는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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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너무 신났잖아.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마히루와도 시선이 마주쳤


다.
난처하면서도 약간은 안도와 기쁨의 감정이 보이는 미소를 살며시
짓고 있었다.
마히루는 목소리가 줄어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대화를 재개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아마네는 슬쩍 웃으면서 지켜봤다.
“고마워요. 이거 돌려줄게요.”
통화가 끝나고 스마트폰을 공손히 돌려받았다.
듣자니 이야기는 잘 마무리가 된 듯, 내일 치토세를 따라 어딘가로
간다고 한다.
“너무 갑작스러웠지? 치토세는 늘 그래.”
“뭐, 뭐어, 놀라긴 했지만요.”
“나쁜 애는 아니야. 그냥 조금 막무가내인 거지.”
조금 수준이 아닌 것 같지만, 최대한 좋게 평가했다.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닌데 추진력이 좀 지나치게 강하다.
마히루도 그건 아는지 쓴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
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절친이라고 해도 무방한 남자의
여친과 마음이 안 맞는 일은 흔할 테지만, 그래도 약간은 슬플 것 같
았다.
“내일은 내 걱정 말고 즐겁게 지내다 와.”
“네.”
“……아, 그렇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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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즐거웠으면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장난을 심하게 치면 눈치 보지 말고 때려도 돼. 걔는 우리 어머니
랑 비슷해서 귀엽거나 예쁜 걸 좋아하니까, 너 같은 미인은 엄청 만
지려고 들 거야.”
예전에는 말렸지만, 치토세는 정말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마히루의 생일에는 그 지혜의 도움을 받았지만, 마히루와 단둘이
있게 두는 것은 약간 불안했다.
마히루는 완전 미소녀처럼 생겼다. 거리를 걷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은 귀엽고 예쁘다.
남자들의 헌팅 시도에도 주의했으면 좋겠지만, 치토세의 마수도 조
심할 필요가 있다.
“뭐,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러지 않을 테지만, 어중간하게 거
절했다간 오히려 신나서 더 만지려 들 테니까 조심하는 게 좋……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입술을 꼭 다문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히루
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마히루가 치토세와 놀러 가기로 한 날에는 아마네도 얼른 집으로


돌아와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요새는 마히루가 자주 곁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지내는 시
간은 휴일 정도가 다였다.
그럴 때도 마히루가 점심을 차려 준다고 하면 순순히 받아들이니
까, 혼자서 지내는 날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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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물론 그게 싫지는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만, 가끔은 이렇


게 혼자만의 공간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옆자리가 허전한 기분이 들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히루는 이제 우리 집에 완전히 익숙한 존재
가 되었구나.)
이제는 있는 게 당연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관계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지났다.
그런데도 몇 년이나 함께 산 듯한 거리감을 느끼니까, 어지간히 상
성이 좋은 것이리라.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같은 분위기를 느끼는 수준의 거리감
이 아마네를 편하게 했다.
난감하게도, 놓치기 싫을 정도로.
(나도 참 단순하다니까.)
명확하게 호감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열기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단
순한 옆집 사람 겸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독점욕이 지나치게 강했다.
친구 이상의 호감은 있으나, 연애 대상으로는 감정의 불이 호롱불
수준이다. 그 사실을 잘 아니까, 뭐라 표현하기 어렵게 답답했다.
이 이상 마히루 쪽으로 호감의 저울이 기울어지면 되돌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마네는 살짝 불이 붙은 열기를 가슴속에 가두고 덮었다.
호감을 드러내도 마히루만 곤란할 뿐이다.
마히루도 나름대로 호감을 보이고 있지만, 연애 감정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애초에 이렇게 보살펴야 하는 지뢰남을 좋아할 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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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마히루는 아마네를 긍정해 줬지만, 그래도 좋아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니까, 방향성이 서로 다른 감정을 드러내 봤자 관계가 삐걱거
리기만 할 뿐이다.
가슴속에서 답답해 꿈틀거리는 감정을 꾹 누르고, 아마네는 창밖을
슬쩍 봤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져서, 하늘에는 완전히 어둠이 깔렸다.
아직 오후 6시를 약간 넘긴 시각이지만, 느낌상으로는 밤이라고 해
도 좋으리라.
치토세라면 밤늦게까지 데리고 돌아다니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
게 어두운 시간에 예쁘장한 여고생 두 명이 돌아다니게 놔두는 건 은
근히 불안했다.
『언제 끝나?』
스마트폰을 몸에서 떼놓지 않고 다니는 치토세에게 메시지를 보내
자 곧바로 『이제 곧 헤어질 거야』라는 답장이 왔다.
치토세도 방과 후에 오래 놀 생각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안도하고,
추가로 언제 역에 도착할 예정인지 물어본 뒤에 아마네는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얼마 전에 썼던 그 왁스가 아직 남아 있었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히루와 밖에서 만날 생각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꾸미고 싶진 않지만,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는
방법은 부모님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단단히 배웠다. 그때의 머리 모
양 정도는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을 보니 음침해 보이는 자기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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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바꾸고자, 아마네는 왁


스를 집어 들었다.

한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이 계절, 그것도 해가 사라진 밤은


기온이 낮다.
방한과 디자인을 생각해서 밝은 회색 스웨터에 네이비 컬러 피코
트, 안에 털이 달린 검은 스키니를 갖춰서 입었는데도 은근히 추운
날씨이니 교복을 입은 마히루는 얼마나 추울까.
마히루는 겨울에 두꺼운 타이츠를 입고 다니기는 하지만, 여고생답
게 교칙 위반으로 걸리거나 품위 없게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길이를
갖춘 스커트는 보고 있으면 엄청 추울 것 같았다. 안에 학교 체육복
을 입히고 싶어진다.
가끔 지나치는 여고생도 쓸데없이 짧은 스커트를 살랑거리니까, 아
름다움에 집착하는 여고생의 노력은 무시무시하다고 통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히루가 준 머플러로 입을 가리고 가장 가까
운 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듣자니 대형 상업시설로 놀러 간 듯, 전철을 탄 것 같았다. 가까운
역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갈 거리이며, 치토세의 정보에 따르면 이제
곧 전철이 도착할 테니 딱 좋은 타이밍이리라.
걷다 보니 바람 때문에 세팅한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지만 망가질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머리 모양이 망가지면 다시 손봐야 하니까 귀찮다. 늘 멋을 부리고
다니는 사람이 존경스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묵묵히 걸었더니 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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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맨션으로 가는 방향을 생각하면 이 출입구로 나올 테니까, 근처에


서 기다리고 있으면 거의 확실하게 마히루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출입구 벽에 기댄 채 시간을 확인하면서 마히루를 기다리고 있으
니, 머지않아 낯익은 황갈색 스트레이트 헤어의 소녀가 역에서 나왔
다.
“마히루.”
이름을 부르자, 귀에 익숙한 목소리여서 그런지 경계하는 기색 없
이 돌아봤고―― 그리고 아마네가 시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그
순간 굳고 말았다.
“어…… 어라? 왜, 왜?”
왜 이런 차림이냐 물은 거겠지.
마중하러 나온다는 이야기는 치토세에게 들었겠지만, 새해 참배 때
모습으로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아마네라도 평소처럼 대충 입고 똑같은 머리 모양으로 올
생각은 없었다.
혹시라도 주위 사람들이 보고 정체불명의 남자=아마네라고 생각해
도 곤란하고, 마히루의 옆에서 걸을 때 어느 정도 갖춰 입지 않으면
마히루까지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다.
변장하려는 목적도 있긴 했지만, 역시 마히루 옆에 나란히 설 수 있
을 정도로는 꾸며야 할 것이다.
“혼자서는 못할 줄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평상복 차림으로 마중하
러 올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네요.”
“어울리지 않아? 일단 거울로 확인하긴 했는데 이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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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평범하고 무난한 코디에 맞춰서 머리 모양은 얼마 전 새해 참배를


하러 갔을 때와 썩 다르지 않으니까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미적 센스
가 좋은 사람이 보면 영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끔 힐끔힐끔 보는 시선을 느낀 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습이 이상
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나름대로 차려입었는데도 촌스러웠나 싶어서 약간 충격을 받을 뻔
했지만, 마히루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면서 “잘 어울려요.”라고 긍정
해 준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됐어. 왜, 벌써 날이 어둡잖아. 혼자 다니면 위험하고.”
“그, 그건 알지만…….”
“그게 아니면 내가 마중하러 오는 게 싫었어? 나란히 걸어가는 게
싫으면 뒤따라오면 돼. 나는 조금 앞서 걸어갈게.”
“시, 싫다고, 하진 않았어요. 저기…… 고마, 워요.”
“응.”
싫은 눈치는 아니어서 안심하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내밀자, 마
히루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추위 탓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웠다.
“손이 차네. 장갑은 어떡했어?”
“오늘 빨았거든요. 아마네 군이야말로 어쨌나요……?”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왔거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착한 아이는 따라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방법으
로 왔으니까 으스댈 처지는 아니다.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차갑고 가냘픈 손을 감싸듯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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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마히루의 손은 정말로 가늘고 섬세해서 불안했다.


너무 쉽게 아마네의 손안에 쏙 들어오고 말았다.
“……따뜻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마히루가 싱긋 웃듯이 눈을 희미하
게 떴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에 심장이 벌렁 뛰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
고 그저 쥐고 있는 손을 의식하는 것만으로 꾹 참았다.
손을 잡은 김에 마히루가 치토세와 돌아다니면서 산 물건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쇼핑백과 가방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으로 슬쩍 옮
기고는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마히루가 힐끔 쳐다보는지라 “왜?”라고 되물었다.
아마네를 빤히 보던 마히루는 이윽고 시선을 홱 돌렸다.
귀와 볼이 약간 빨간 것은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시선을 너무 오래
맞췄기 때문일까.
“자, 이제 가자. 도중에 편의점에 들를까? 지금 같은 계절에는 고기
를 넣은 찐빵이 맛있어.”
“……팥을 넣은 찐빵이 좋아요.”
“넌 단걸 정말 좋아하는구나, ……저녁은 뭘 할 거야?”
“장조림 달걀과 차슈와 멘마를 준비했으니까 라멘을 만들 거예요.”
“추운 날에는 라멘이 제격이지.”
“그러네요.”
냉장고를 보지 않아서 몰랐지만,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다.
역시 국물과 면은 시중에 파는 걸 쓰겠지만, 손수 만든 고명, 두툼
한 차슈와 맛이 잘 밴 반숙란을 상상했더니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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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삼키고 말았다.
분명 차갑게 식은 몸을 훈훈하게 데워줄 것이다.
“……팥찐빵을 먹고 다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반반씩 나눠 먹을까? 그러면 다 먹을 수 있겠지?”
“……네.”
제안하니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기에, 아마네도 슬쩍 웃고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

“시이나가 또 그 남자와 걷는 걸 목격했대.”


다음 날, 이츠키가 ‘소문이 꺼지기 전에 기름을 부어서 어쩌자는 거
야’라는 눈으로 보는 바람에, 아마네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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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제5화 천사님의 컨디션 불량

곧 있으면 2월에 접어드는 금요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응?”
식사 후 뒷정리를 끝내고 거실로 돌아온 아마네는 문득 마히루의
얼굴을 보다가 볼이 붉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방 온도를 너무 높게 설정했나 싶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았고,
마히루가 옷을 너무 많이 껴입은 것도 아니었다. 잘 보니 표정에 기
운이 없었고 눈빛도 어딘가 멍하게 보였다. 평소보다 호흡도 거칠었
다.
평소와 똑같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딱 봐도 이건 몸이 편찮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날이 꽤 추웠고, 마히루는 우등생이라는 이유
로 교사들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받아서 바빠 보였다. 그랬는데도 집
안일을 하고 두 사람이 먹을 저녁을 계속 준비했다. 몸 상태가 나빠
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자신이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고, 빨리 알아챘어야 했다고 후회하
면서 마히루의 안색을 살폈다.
“마히루, 얼굴이 붉어. 열이 있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걱정해서 물어봤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부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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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아마네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마히루는 정색


하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빨개진 볼까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이러면 본인의 말을 믿을 수 없으므로, 아마네는 미안하지만 마히
루의 앞머리에 가린 이마에 손을 댔다.
예상대로 아마네의 손바닥보다 꽤 뜨거운 상태였다. 마히루는 아마
네와 비교하면 체온이 딱히 높지 않으므로, 열이 났다는 것은 거의
확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몸이 뜨겁잖아.”
“……뜨겁지 않아요.”
“그럼 열을 재서 확인해 볼까.”
“열은 딱히 없어요. 괜한 참견이에요.”
평소의 새침한 목소리에도 기운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딱 봐도 열이 있어 보이는데.”
“잠깐 몸이 달아올랐을 뿐이에요.”
“그럼 체온을 재서 증명해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찬장에 둔 구급상자에서 체온계를 꺼내서 돌
아왔지만, 마히루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자신이 열이 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허세
를 부리는 걸까.
아마 양쪽 다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열을 재 보지 않으면 아마네도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마히루의 정면에 서서 마히루의 손바닥에 체온
계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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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마히루, 내가 옷을 잡고 늘려서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끼우는 것과


스스로 재는 것…… 둘 중 뭐가 좋겠어?”
아주 진지하게 무게를 잡고 말하자 마히루는 “으…….”하고 신음하
고, 그런 뒤에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체념했는지 체온계를 가동하는 소리가 들렸고 아마네도 만일의 경
우를 대비해서 뒤돌아서 기다렸다. 그러자 다시 전자음이 들렸다.
바로 돌아보지 않고 마히루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걸 기다린 뒤에
돌아보니, 이미 케이스에 넣은 것으로 보이는 체온계를 든 마히루가
무표정한 얼굴로 마히루를 보고 있었다.
“……37.2도예요. 심한 열은 아니네요.”
“흐―응.”
“열이 높지도 않고 오늘은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아마네는 마히루의 손에서 체온계를 빼앗은 뒤에 한 번 더 케이스
에서 꺼냈다.
아마네가 들고 있는 체온계는 바로 앞에 측정한 온도를 기록해두는
모델이다. 다시 가동해 보니―― 마히루가 스스로 밝힌 것보다 1도 넘
게 높은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호오, 내 눈에는 38.4도로 보이는데 말이지.”
눈길을 돌려 버렸다.
“저기 말이야……. 나는 쉬게 해 놓고서 너 혼자 고생하면 어쩌자
는 거야? 내일이랑 모레는 쉬는 날이니까 얌전히 있어.”
아마네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아마네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갈아입
히거나 죽을 끓여 주기도 했는데, 정작 자신이 걸렸을 때 아무런 조
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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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는 의외로 튼튼하기 때문에 자다 보니 바로 나았지만, 마히


루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면 나을 병도 낫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히루는 여전히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쉬라는 말에 전혀
고개를 끄덕이려 하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는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아마네는 마히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열 때문에 평소보다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
는 것으로 보이는 마히루는 반응이 느렸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마네는 마히루의
등과 무릎 뒤를 손으로 받치고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끌어안듯이 옆으로 안은 아마네는 마히루의 주머니에서 열쇠가 짤
랑거리는 소리를 확인한 뒤에 현관으로 향했다.
“어, 아, 아마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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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자신을 안아 들었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마히루가 아마네의


품에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아마네가 잠시 멈추고 마히루를 내려다보자, 마히루는 열 때문에
볼이 빨개진 상태에서 혼란에 빠진 눈으로 아마네를 쳐다보고 있었
다.
“무리할 게 뻔하니까 잠들 때까지 지켜보고 있겠어.”
“여, 여자애 방에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그게 싫으면 내 방에 눕혀야 하는데.”
“……그냥 내버려 둔다는 선택지는요?”
“처음에 순순히 쉬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랬을 거야.”
아마네도 어느 정도 친해진 상태라고 해도 여자애의 집, 그것도 당
사자의 방에 들어가서 잘 때까지 지켜보는 짓은 실례라고 생각하고,
되도록 그런 짓은 안 하는 게 좋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군다면 마히루는 분명 집에 돌아간 뒤에도 쉬지 않
고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지금의 반응을 본다면 확실하다.
마히루도 예전에 아마네의 집에 억지로 들어온 적이 있으므로 이번
만큼은 아마네도 마찬가지로 강행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
다.
“자, 뭐가 좋아? 우리 집이야? 마히루 집이야?”
“……둘 다 싫다면요?”
“그때는 강제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침대에 내던질 거야.”
“아마네 군의 방으로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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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자신의 방에는 들이고 싶지 않았는지, 포기하고 아마네의


방에서 쉬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다.
여자가 남자를 자기 방에 들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니
까 그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꺼릴 정도라면
처음부터 순순히 자기 집에서 자면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인지 아닌지 모를 숨을 내쉬고, 마히루를 침실로 데려갔다.
마히루가 이곳에 들어온 건 새해 첫날 이후로 처음이다.
일단 마히루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옷장을 뒤졌다. 아무리 그래
도 지금 입은 옷 그대로 재울 수는 없으니까, 기왕이면 땀을 흘려도
되는 옷으로 갈아입는 게 좋을 것이다.
최대한 사이즈가 작은 셔츠와 스웨트팬츠를 골라서 마히루 옆에 놓
았다.
“자, 이걸로 갈아입어.”
“하지만…….”
“내가 벗길 수도 있어.”
“갈아입을게요…….”
당연히 남이 벗기는 것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싶은 마히루는 내키지
않는 손길로 갈아입을 옷을 집었다.
아마네도 자신이 갈아입히는 것은 죽을 만큼 부끄러운 데다가 마히
루도 싫어할 테니까 실행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 줘서
안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지라 아
마네는 얼른 방에서 나와 상비하고 있는 스포츠드링크를 찬장에서
꺼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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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자신이 감기에 걸린 뒤로 즉석 죽과 스포츠드링크는 항상 구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서 보관해 둔 해열 시트와 스포츠드링크, 수건과 약을 들고 방문
을 노크하자 작은 목소리로 “다 갈아입었어요.”라는 대답이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옷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는 마히루가 아마네를 보고 있었다. 역시 사이즈가 작은 옷이라도
마히루에겐 컸는지 헐렁헐렁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습
이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지금 모습은 귀여웠지만, 그런 생각
은 애써 머릿속에서 몰아낸 뒤에 사이드테이블에 스포츠드링크와 수
건을 놓았다.
“약도 먹을래? 밖에서 흔히 파는 거지만.”
“……네. 저희 집에도 그 약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응.”
부엌으로 일단 돌아가서 컵에 물을 따르고, 나온 김에 냉동고에서
얼음베개를 꺼냈다. 유비무환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고는, 그 말
이 정말 옳다고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마히루에게 물잔을 건네준 뒤에 약을 꺼내서
빈손에 놓아 줬다.
“그걸 먹고 나서 수분을 충분히 보충하고 자.”
마히루가 약을 먹는 동안 얼음베개를 수건으로 싸서 머리맡에 세팅
하고 있으려니, 마히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아서 잘하네
요.”라고 중얼거렸다.
“네가 해 줬던 걸 따라 했을 뿐인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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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기본적으로는 마히루가 간병해 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흉내


만 내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건강하니까 이 정도는 해 주는 게 당연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자꾸 무리하려는 거야?”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자기관리를 잘해도 감기에 걸리는 사람은 걸려. 넌 늘 뭐든 열심
히 하고 있으니까 몸에 피로도 많이 쌓였겠지. 뭐, 그게 나 때문인
것은 정말 미안하지만.”
마히루가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마히루에
게 부담이 갈 것이다. 마히루는 자신이 할 일도 있는데 아마네까지
돌보고 있으니까, 역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몸에 피로가 쌓인 것도 열이 난 원인인 것 같아서 아픈 동안에는 되
도록 배려하면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아마네 군을 부담스럽게 여긴 적은 없어요.”
“그래? ……그래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푹 쉬어.”
아마네와 함께 지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고 말해 준 것은 기쁘
기도 했고, 괜한 마음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미안하기도 했
다.
그러므로 지금 아마네가 할 일은 마히루가 휴식을 취하도록 간병하
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마히루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더 좋
을지도 모르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마히루는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침대에 누웠다.
목까지 이불로 덮고 나서 마히루는 아마네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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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하게 부끄러운 표정인 이유는 이제 자야 하는데 자신의 잠든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 여자애가 잠든 얼굴은 함부
로 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마히루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뭔가
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뭔지 몰라서 소매로 시선을 내리니 마히루의 작은 손이 아마네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히루를 보니, 본인도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
었는지 자신의 손을 보고는 얼른 놓더니 황급하게 이불 속으로 숨겼
다.
캐러멜색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걸 숨기려는 듯이
이불을 얼굴까지 올려서 가렸다.
“……잘 자요.”
가냘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이불을 덮은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
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면서 볼을 긁었다.
(……몸이 아플 때는 마음도 불안해지겠지.)
과연 마히루가 허락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불을 살짝 들춘 뒤
에 마히루의 손을 찾아내서 잡아 줬다.
부드럽게 쥐자 마히루가 이불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싫은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아니거든요.”
“알아. 도망치지 않게 붙잡고 감시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와서 도망치진 않아요.”
“글쎄, 그야 모르지. 잠들면 놓을 테니까 안심해. 자, 놓아 주길 바
라면 얼른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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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하는 아마네의 말을 듣고, 마히루는 순순히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잡고 있는 마히루의 손이 아마네를 놓지 않으려는 듯이 희미하게나
마 힘을 주는 것을 느끼자 왠지 쑥스러웠다.
기쁘면서도 부끄럽고, 왠지 애가 탔다.
가슴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는 것처럼 근질거리는 감각을 느끼면
서, 아마네는 마히루가 평화로운 표정으로 새근거리면서 잠들 때까
지 가녀린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파에서 눈을 뜬 아마네는 미묘하게 굳은 몸을 풀면


서 시계를 봤다.
오전 8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휴일이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시간도
아니지만 마히루가 회복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에 슬슬 움직이는
게 좋을 것이다. 일단 밤중에 잠깐 보러 갔다가 편안한 표정으로 잠
든 얼굴을 보인 것은 확인하고 나왔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가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노크를 하지 않은 것은 아직 마히루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
지만, 문을 여니 마히루가 상반신을 일으킨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직 약간 볼이 붉긴 했지만 어제만큼 심하진 않은 것 같았다.
마히루는 왠지 모르게 멍하니 풀린 듯한 표정을 지은 상태에서도
아마네의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거짓말은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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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른해요.”
“그래? 그럼 나는 편의점에 가서 아침밥과 마히루가 먹을 만한 걸
좀 사 올게.”
일단 죽도 사놓은 게 있지만 환자에겐 젤리나 복숭아 통조림 같은
걸 먹인다는 이미지가 있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가서 사
올 생각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안도하면서, 갈아입을 옷
을 옷장에서 꺼내 다시 침대에 놓았다.
“갈아입을 옷을 두고 갈게. 열도 재 봐. 땀을 닦고 싶으면 거기 있
는 대야에 담은 물과 수건을 써.”
밤중에 얼굴의 땀을 살짝 닦아 줄 때 담았던 물을 가리킨 뒤에 아마
네는 방에서 나왔다.
지갑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은 열 때문에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을 마
히루가 옷을 갈아입거나 땀을 닦을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서였다. 편의점은 맨션에서 꽤 가까우니까 불과 몇 분 사이에 다녀올
수 있지만, 시간을 조금 들여서 물건을 샀다.
20분 정도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구매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마
네가 냉장 보관이 필요한 것을 냉장고에 넣고 난 뒤에야 다시 마히루
를 보러 가니, 마히루는 옷을 갈아입고 아마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도 완전히 차린 것 같아서, 어제보다 기운이 있어 보이는 마히
루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열은 재 봤어?”
“37.5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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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직 열이 좀 있네. ……너무 움직이진 마.”


“저, 저도 알고 있어요.”
“식욕은 있어? 죽은 집에 있고, 푸딩과 젤리를 사 왔는데.”
속에 부담을 주는 것을 먹일 순 없는지라 양이 적고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것을 사 왔지만, 마히루가 식욕이 있어야 먹을 수 있을 것이
다.
“아, 괜한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
“사과하지 말라니까. 나도 간병을 받은 적이 있잖아. 자, 푸딩과 젤
리 중에서 뭘 먹고 싶어?”
“……젤리요.”
“알았어. 죽은 먹을 수 있겠어?”
“……네.”
“데워올 테니까 기다려.”
아직도 미안해하는 마히루의 반응에 한숨을 쉬면서, 아마네는 방에
서 나와 즉석 죽 봉지를 뜨거운 물로 데운 뒤에 그릇에 담아서 가지
고 왔다.
마히루가 간병해 준 은혜에 보답하려면 직접 만든 걸 먹여야 하겠
지만, 아마네는 무사히 죽을 끓일 자신이 없었기에 무난한 즉석 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든 요리보다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는 음
식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자. 혼자서 먹을 수 있겠어?”
숟가락을 주고 나서 마히루가 죽 그릇을 받기를 기다리던 아마네가
반쯤 장난삼아 그렇게 물었더니, 마히루는 뾰로통하게 눈살을 찌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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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저를 바보로 아는 건가요? 만약 직접 먹지 못한다면 대신 먹여 줄
건가요?”
“응? 그야 뭐…….”
아마네가 “정 원한다면 먹여 줄 수도 있지만…….”라고 덧붙이자,
마히루는 또 열이 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제,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으, 응.”
마히루는 아마네한테서 그릇을 받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지만, 결국
다 먹을 때까지 붉은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죽을 다 먹은 뒤에도 아직 식욕이 있는지 젤리를 꺼내서 다 먹는 걸
본 뒤에야 한숨을 놓았다.
일단 몸 상태는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까, 이제는 쉬면서 체력을 회
복하면 되겠지. 마히루도 비교적 기운을 차린 얼굴이어서 아마네도
안심했다.
“그리고 달리 해 줬으면 하는 건 있어?”
“……지금은, 없어요.”
“그래? 알았어.”
그러면 한숨 더 자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는 방에서 나오려고 일어
났을 때 마히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렁이던 눈이 똑바로,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아마네를 바라봤다.
그 캐러멜색의 눈에 또 불안과도 같은 감정이 한껏 담긴 듯해서, 아
마네는 그만 그 자리에 다시 앉고 말았다.
“……아마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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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쓸쓸해 보여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마히루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아마네를 쫓아낼 것이다.
그래서 아마네는 말없이 침대 옆에 앉아서 상반신을 일으킨 채 침
대에 앉아 있는 마히루를 쳐다봤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다시 잠들 때까지 이야기나 할까?”
“……네.”
침대에 기대면서 웃어 보이자, 마히루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흐
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 누군가에게 간병을 받아본 게 처음이에요. ……코유키 씨
도 퇴근 시간이 되면 그냥 돌아갔으니까요.”
“코유키 씨?”
“친가에서 살았을 때 같이 지냈던 가사 도우미분이에요.”
“아, 요리를 가르쳐 줬다는 사람 말이구나.”
“아침과 밤에는 늘 혼자였거든요…….”
“오늘은 내가 곁에 있을게. 빨리 기운을 못 차리면 내가 곤란해지
니까.”
“죄송해요. 침대를 점령해버렸네요. 식사도…….”
“그런 뜻이 아니야. ……마음이 편하질 않잖아. 늘 함께 있는 사람
이 아픈 걸 보면.”
친해진 뒤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고는 해도, 앞으로도
한동안 같은 시간을 보낼 사람이 건강을 해치면 걱정이 되는 것도 당
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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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를 지는 사람이든 아니든 친구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이다.
“애초에 나는 다른 사람이 아픈 걸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야.”
“……아마네 군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잘 알아요.”
“그러시겠죠.”
다정하다는 평가를 면전에서 들으면 괜히 낯간지럽고, 쑥스럽다.
“이제 슬슬 눈을 붙여. ……질릴 만큼 푹 자고 얼른 기운을 차리라
고.”
“……네.”
“이번에도 잘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까?”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반쯤 장난삼아 말했더니 마히루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뭐?”
“아마네 군이 먼저 말한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설마 승낙할 줄은 몰랐다. 마히루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거
부할 줄로만 알아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자, 이번엔 마히
루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남자가 두말하겠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알았어.”
내가 한 방 먹었군. 작게 신음하며 마히루의 손을 잡아 주자, 마히
루는 몸을 눕히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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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뒤에 아마네가 잡아 준 손을 보던 마히루의 눈길이 부드러워


졌다.
“……따뜻해.”
“열이 많이 내려간 모양이네. 따뜻해졌어. ……어서 자.”
“네.”
아마네의 손을 한 번 쥐고서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마히루한테서 일
정한 리듬에 맞춰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보.)
또 하나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낮게 신음했다.
몸이 아프기 때문인지 자꾸 응석을 부리듯이 스킨십을 요구하는 바
람에 아마네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심장은 시끄러
울 정도로 소리를 내고, 얼굴은 마히루의 열이 옮은 것처럼 뜨거웠
다.
지금 대체 누가 열을 내면서 앓아누운 건지 모를 정도로 아마네는
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 심장을 위협하는 아이야.)
마히루의 얼굴을 살짝 들여다보니 아마네의 마음속 갈등 따위는 전
혀 모르는 것처럼 마음을 푹 놓은 표정으로 자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참……. 작은 목소리로 신음하듯 투덜대면서 아마네는 한 번 침
대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침대인데도, 아마네와는 아주 조금 다른 달콤한 냄새가 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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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들어 보니 곁에 있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잡고 있었던 손도 안 보이고, 아마네 혼자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었다.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지만, 침대에 있어야 할 마히루의 모습이 보
이지 않았다.
사이드테이블의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걸 보
고 그 후에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중에 마히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난 탓도 있겠지만, 설마 이렇게 깊이 잠들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아마네는 당황하면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후다닥 이동해 보니 거실 소파에 단정하게 앉은 마히루가 보였다.
잠들 때까지 봤던 아마네의 셔츠와 체육복 바지 차림이 아니라 마히
루 자신의 사복 차임으로 앉아 있다는 것은 아마도 집에 한 번 돌아
갔다는 뜻일 것이다.
“아마네 군. 잘 잤어요?”
“잘 잤어? 일어났더니 침대에 없어서 깜짝 놀랐어.”
“미안해요. 샤워를 좀 하고 왔어요.”
그래서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다. 몸을 씻어도 될 만큼 회복한 것 같
아서 안심하면서도 일단은 마히루의 이마에 손을 대 봤는데, 이제는
평소 체온으로 돌아와 있었다.
“응, 열도 없는 것 같네. 다행이야.”
“……걱정을 끼치고 말았네요.”
“그러게 말이지. 다음에도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또 같은 짓을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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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 옆에 앉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마히루는 난감한 듯한 표정


을 지으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조심은 하겠지만…… 아마네 군, 또 폐를 끼쳐도 화내지 않을 건
가요?”
“폐라니?”
“간병 같은 거나…….”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이 바보야. 내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
으로 보여?”
“……그렇진 않아요. 단지 의지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의지할 수 있을 거 같으면 일단 부탁해. 너는 뭐든 다 혼자 끌어안
고 사는 성격으로 보이니까.”
함께 몇 개월 지냈을 뿐이지만, 그래도 마히루의 기질을 잘 알았다.
마히루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속에 담아둔 채 밖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남이 들어오지 않도록 벽을 쌓고 타인과 자신
을 격리하려 하기 때문이겠지.
“뭐, 내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지하지 못하는 것도 이
해는 가지만.”
“그, 그렇진 않아요! 전 아마네 군을 믿고 있어요.”
“응. 그럼 무리하지 말고 부탁해.”
자신도 모르게 마히루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말았고, 굳어버린
마히루를 보면서 뒤늦게 도가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 불쾌했지?”
“……그런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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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아니라 부정의 의사를 표현하


기 위해서 천천히 고개를 저은 마히루는 그대로 아마네의 팔뚝에 이
마를 갖다 댔다.
살짝 체중이 실리면서 기대는 감각이 느껴지자 아마네는 심장이 두
근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정말로 조그맣게 “……고마워요.”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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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밸런타인데이

2월에 들어서야 겨우 마히루의 ‘수상한 남자, 남친 의혹’도 가라앉


기 시작했다.
마히루를 마중하러 나갔을 때 목격되면서 그만 기름을 붓고 말았지
만, 일단 진화가 되긴 했다.
그래도 ‘연인은 아니지만 마히루와 친한 남자’라는 인식이 뿌리박
히고 말았다고 하며, 마히루가 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무
근의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본인이 밝게, 그리고 추궁을 허용하
지 않는 웃음을 지으면서 부정했다고. 그 덕분인지 그 소문도 겨우
잦아들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복도에서 목격했다는 치토세가 “모든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위압감이 느껴졌어.”라고 했으니까, 소문이 도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뭐, 그런 반응도 당연하긴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열심히 부정한다
면 감정적으로는 약간 슬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히루는 연애 감정 없이 그저 친한 느낌인데 주위에서 억측하면
당연히 화가 날 법도 할 것이다.
아마네 입장에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2월이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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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시험.”
“저기, 화사한 남자 고등학생이 왜 그런 빈티 나는 발상을 하는 거
야?”
방과 후 아마네의 집을 방문한, 아니 다짜고짜 쳐들어온 치토세는
아마네의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뭔가 의논할 게 있다면서 찾아왔지만, 기분 탓인지 마히루와 놀기
위해서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마히루는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거실에는 아
마네와 치토세밖에 없었다.
“남자 고등학생에게 무슨 화사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이라
면 당연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청춘을 만끽하는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밸런타인데이라고 대답해
야 하는 것 아닐까?”
“청춘을 만끽하지 않아서 모르겠어.”
“또 그런다―.”
소문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히죽대고 보니까, 아마네는 일단
째려봤다.
그랬는데도 치토세는 웃음을 그치질 않으니,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상의하고 싶다는 게 뭐야?”
치토세가 일부러 아마네 집에 온 것은 이츠키가 없는 자리에서 아
마네와 마히루에게 상의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음. 잇군에게 줄 초콜릿을 어쩔까 싶어서. 중학생 때는 평범하게
파는 초콜릿을 녹인 뒤에 모양만 바꿔서 줬는데 말이지, 역시 고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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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되었으니까 좀 더 정성을 담아서 만들고 싶거든.”


“그거라면 시이나의 의견만 들어도 충분하잖아.”
요리를 못 하는 아마네에게 초콜릿 이야기를 해도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이츠키의 취향을 알려
주는 거겠지만, 그런 쪽은 더 오래 알고 지낸 치토세가 더 자세히 알
것이다.
“마히룽한테도 물어봤는데 말이지, 아마네도 명색이 남자니까. 남
자 의견을 한번 듣고 싶었어.”
“명색이 아니라 엄연한 남자야.”
“남자라면 여자랑 단둘이 있을 때 손댈 거야.”
“이봐. 그런 건 교제 중에 합의하고 하는 거고, 애초에 우리는 그런
관계도 아니라니까.”
“아마네는 그런 쪽으로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할까, 참 상식적이네.”
상식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게 평범한 견해라고 아마네는 생
각했다.
확실히 남자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지만,
할 수 있다는 것과 진짜로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히루를 상대로 그런 욕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외모도 내면
도 매력적인 여자가 곁에 있으면 당연히 남자 특유의 욕구가 어느 정
도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도 해 보자는 멍청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히루를 울리고 싶지 않다. 마히루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마히
루를 소중히 대하고 싶다. ――그런 감정이 맨 먼저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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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리고 무슨 짓을 했다간 사회적 위신에도 급소에도 큰 타격을 주


겠다는 선언을 받았는데도 한순간의 충동만으로 손댈 만큼 어리석진
않다. 마히루라면 인정사정없이 대응하겠지.
“뭐, 그게 아마네의 좋은 점이자 마히룽의 신뢰를 받는 점이라고
하겠지.”
마히루를 마히룽이라는 귀여운 별명으로 부르는 치토세.
부엌에서 듣고 있을 마히루가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의 호불
호와 상관없이 그 별명으로 부르는 것 자체는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
이다.
뭐, 마히루 본인에게도 면전에서 천사님이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나
은 모양이다.
“가끔 진짜 남자인지 의심이 가.”
“남자라고 했잖아. 이렇게 뼈만 앙상하고 아무런 굴곡도 없는 여자
가 어디 있어?”
“초식남인가……. 아마네는 좀 더 들이대도 될걸?”
“내 얼굴로 그러면 징그럽잖아.”
“소문난 스타일로 꾸미면 되잖아. 사실은 나도 보고 싶어.”
이츠키와 치토세에겐 소문의 상대가 아마네임을 진즉에 간파당했
고, 게다가 얼마 전에 인정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는 숨기지도 않았
다.
하지만 일부러 그 모습을 보일 생각은 들지도 않고, 귀찮다.
“그렇게 말하지 마. 아니, 무엇보다 내가 싫어.”
“닳는 것도 아닌데.”
“내 멘탈과 왁스가 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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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쇠!”
볼을 부풀리고 “쩨쩨해―!”라고 하는 치토세를 무시했더니, 쓴웃음
을 지은 마히루가 부엌에서 돌아왔다.
쟁반에는 치토세의 요청으로 밀크티가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 세 사람 분의 밀크티를 놓았을 때 아마네는 소파
에서 일어나 가까이 있던 쿠션과 함께 바닥에 앉았다.
마히루에게 ‘소파에 앉아’라고 눈짓으로 권유하자 약간 미안한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금 전까지 아마네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다소
곳이 앉았다.
“그런 소문이 돌 정도라면 학교에서 하고 다녀도 인기가 있을 텐
데.”
“싫어. 귀찮아질 게 뻔하고 애초에 인기를 얻고 싶지도 않아.”
“에이, 모처럼 큰 이벤트인 밸런타인데이가 있는데? 아마네는 밸런
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고 싶지 않은 거야? 예를 들어서 인기가 많
은 유짱은 엄청나게 많이 받을걸? 부럽지 않아?”
“뭐? 싫어. 당뇨병에 걸릴 것 같아.”
유짱은 아마 유타를 말하는 거겠지. 다행히 아마네는 희생양이 되
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이름을 붙여 부르는 건 치토세의
특이한 버릇이다.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유타는 아마도 초콜릿을 대량으로 받겠지만,
그걸 전부 다 먹었다간 분명 몸에 군살이 붙을 것이다.
“무엇보다 답례를 생각하면 우울해질 것 같아. 카도와키라면 예의
상 주는 거와 진심을 담아서 주는 걸 합치면 대충 두 자릿수에 가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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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게 받을 것 같으니, 세 배로 돌려주다간 고등학생의 지갑으론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착실하게 세 배로 돌려주는 걸 전제로 계산하다니 기특하네. 답례
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나도 줄게. 어떤 게 좋아?”
“단것은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니까…… 너무 달지 않은
게 좋겠어.”
“알았어. 안에 다양하게 넣을게.”
“이물질을 넣진 마.”
“괜찮아. 먹을 수 있는 걸로 넣을게.”
“야.”
뭘 넣을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무난하게 맛있는 것을 줄 생각은 없
는 것 같았다.
“마히룽은 누구한테 줄 거야?”
“같은 반 여자애들에게요.”
“남자애들한텐 안 줄 거야?”
“예의상 주는 거라도 큰일이 나니까…….”
“아―.”
흥분하는 남자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랬다간 괜한 다툼이
생길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평범한 남자라면 천사님에게 받는 초콜릿은 신의 은총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줬다간 엄청난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마히루의 인기일까, 남자들의 망상력일
까.
뭐, 주지 않는 게 무난하겠지. 쓴웃음을 지으면서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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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치토세 양에게도 드릴게요.”


“와아, 마히룽, 사랑해. 나도 줄게. 아마네에게 주는 거랑은 다르게
제대로 만든 걸로.”
“야, 너.”
환하게 웃으면서 마히루를 꼭 끌어안는 치토세.
성희롱으로 볼 스킨십은 아니라서 안심하면서도,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말을 하는지라 도끼눈을 뜨고 강하게 노려보자, 치토세가 헤
실헤실 싱겁게 웃었다.
“농담이야. 아마네에게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걸 줄게.”
“먹으면 맛있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딱 봐도 뭔가 이상한 것을 넣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 치토세를
보자 두통이 생겨서 이마를 짚고 있으려니, 치토세는 유쾌한 표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채 “기대하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아마네를
향해 웃어 보였다.

밸런타인데이 당일은 상상했던 대로 학교 전체가 소란스럽고, 다들


들뜬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남자들은 초조하게 뭔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애써 관심이
없는 척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 초콜릿을 받을지 말지에 따라 남자의 랭크가 정해진다고 생각
하는 남자가 많아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은 거겠지.
“다들 한껏 들떴네.”
랭크는 아무래도 좋은 아마네는 참 고생이 많다고 남 일처럼 생각
하면서, 다른 의미로 관심이 없는 이츠키에게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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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이츠키는 학급의 소란 상태를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아마네의 말에


“그러네.”라고 태평하게 대꾸했다.
“여친이 있어서 여유로운 이츠키 선생,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관한
견해를 부탁드립니다.”
“역시 남자라면 초콜릿을 받을지 어떨지가미래를 좌우하다 보니 필
사적이군요. 그리고 시이나 양의 초콜릿을 받을 수 있을지 눈치를 보
는 남자가 60퍼센트는 됩니다.”
“남자에겐 예의상으로도 초콜릿을 돌리지 않겠다고 하던데. 수습이
안 되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아마네, 그 사람에게 받을 예정은?”
“몰라. 적어도 나는 그런 낌새를 못 느꼈어.”
마히루는 여자는 줘도 남자에게는 안 준다고 했으니까, 아마네에게
준다는 건 기대할 수 없다. 못 받아도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
물론 주면 고맙겠지만, 주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솔직히 아마네에게 밸런타인데이는 제과회사의 판촉 같은 거라서,
그다지 중요한 이벤트는 아니다.
딱 봐도 별로 관심이 없는 아마네에게 “무덤덤하긴.”이라고 쓴웃음
을 흘린 이츠키는 시선을 돌려 반에서 유달리 시끄러운 쪽을 봤다.
“……그나저나 저건 진짜 굉장하네.”
이츠키가 가리킨 그거란, 같은 반 여자들을 거의 흡수하고 있는 인
기인을 뜻하는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친숙한 미소를 지은 왕자가 집단 중앙에 있고, 여자
들이 끝없이 찾아와서 초콜릿이 든 꾸러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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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본인이 준비한 듯한 봉지에는 이미


선물이 꽉꽉 차 있어서, 엄청난 인기를 짐작할 만했다.
“역시 굉장하군.”
“주변에서 엄청나게 이를 갈고 있네.”
아직 아무한테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남자들은 애써 외면하거
나 질투하는 눈길로 유타를 보고 있었다.
랭크가 정해지기 전에 레벨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네는 저렇게 초콜릿을 많이 받아서 가져가려면 힘들겠다는 감
상과 함께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지만.
“인기남은 힘들겠어. 저걸 가져가서 먹으려면 힘들 텐데.”
“그러네. 그런데도 살이 찌지 않는다니 정말 대단해. 중학생 때부
터 저렇게 받고 있는데 체형이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까.”
“역시 육상부는 다르네. 뭐, 초콜릿 때문에 살찌는 건 우리와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치이는 단단히 준비했어. 각오해.”
“무슨 뜻이야? 각오라니.”
“러시안 룰렛이야.”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해. 뭘 넣은 건데?”
얼마 전 대화를 통해 평범한 과자를 만들 생각이 없음을 짐작했지
만, 쓸데없는 것을 섞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하바네로, 와사비, 산초가 삼위일체로 들어간 초콜릿 한
알, 매실초 농축 엑기스 젤리가 들어간 초콜릿 한 알, 나머지는 평범
한 초콜릿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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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걔는 뭘 만든 거야.”
“아마네 너를 놀라게 하겠다던데.”
어떤 의미로는 경악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몸서리를 칠 정도로
놀라게 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 같다.
“……먹는 게 두려워지네.”
“포기해. 맛을 본 나도 거쳐 간 길이니까.”
“너는 반쯤 재미로 먹은 거잖아.”
“그렇긴 하지. 치이가 만든 거라면 뭐든 먹을 거야.”
“멍청한 닭살 커플.”
이츠키는 치토세가 주는 거라면 뭐든지 먹겠지.
애초에 치토세는 딱히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도전 정신이
지나치다는 것이 문제다. 평범하게 만들 때는 잘 만드는 것 같은데,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상하게 손을 댄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희생자는 이츠키지만, 아마네한테도 폭탄이 돌아올 줄
은 몰랐다.
뭐, 이츠키의 반응을 보면 못 먹을 수준은 아닌 듯하니까 너무 두려
워할 필요는 없겠지만, 울적할 수밖에 없다.
질겁하는 아마네를, 이츠키는 포기하라는 뜻을 담아서 이미 경험한
자 특유의 훈훈한 눈으로 봤다.

“자, 아마네, 이거 받아―!”


“고마워.”
방과 후에 이츠키를 찾으러 온 김에 아마네에게 초콜릿을 주는 치
토세에게, 아마네는 미묘하게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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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초콜릿을 받으면 당연히 고맙다.


고맙지만, 솔직히 안에 독극물이 있다는 걸 뻔히 아는지라 순수하
게 기뻐할 수 없다.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생각이고 반드시 언젠가는 엄청 매운 초콜릿
이나 엄청 신 초콜릿이 걸릴 테니까, 앞으로 며칠 동안은 전전긍긍하
면서 먹어야 하리라.
“잇군한테 들어서 알 테지만, 맛을 기대해 줘!”
“난 매운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해서 만들었거든? 나도 맛을 보고 확
인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맛있었어!”
“그건 네가 매운 걸 좋아하기 때문이잖아……. 정말이지.”
아마네는 매운 것을 즐겨 먹지 않는지라 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았
다. 신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마네가 부담스러워하는 맛을
일부러 노리고 넣은 것이다.
그것만 빼면 맛있게 만들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아, 아주 단 것과 아주 쓴 것도 있어.”
“미리 알려 줘서 고맙다.”
대수롭지 않게 폭탄을 더 늘렸다는 치토세의 말을 들으니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주 단 것은 연유, 아주 쓴 것은 아마 카카오 99퍼센트 초콜릿을
사용했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아직 먹을 만하다. 쓴맛은 싫어하지 않는다.
이츠키도 그 말은 처음 들었는지 “치이…… 너도 참…….”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미묘하게 표정이 딱딱했지만, 치토세는 여전히 웃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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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있었다.
“괜찮다니까. 입가심할 것도 있을 테니.”
“입가심할 것?”
“그럼 우리는 갈게―. 바이바―이.”
아마네의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이츠키의 손을 잡고 교실에
서 나가려 했다. 오늘은 밸런타인데이 데이트란다.
“건투를 빌게.”
이츠키의 위로와 격려를 들으면서, 아마네는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본 뒤에 아마네도 슬슬 집에 가
고자 코트를 걸치고, 책상 옆에 걸어 둔 가방을 들었다.
혼자 남은 것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지만, 여기 있어 봤자 충실한 삶
을 사는 남녀들의 훈훈한 분위기에 방해만 될 것 같기에 빨리 퇴장해
줄 생각이었다.
그만 가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방을 메다가 문득 같은 학년에
서 가장 충실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봤다.
겨우 선물 공세가 진정된 것으로 보이는 유타가 책상 위에 쌓인, 남
자라면 침을 흘릴 만한 물건들을 약간 초점이 나간 듯한 눈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책상 옆에 걸어둔 손가방에는 보물이 잔뜩 채워져 있었
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동정
하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카도와키.”
“응? 아, 후지미야구나.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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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가까이 같은 반에서 지내다 보니 존재감이 별로 없는 아마네라


도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선생님의 말을 전할 때 정도 말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외의 상대를 보면서 유타도 의아해하고 있었
다.
그런 반응을 보면서 아마네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고, 가방 앞에 있
는 작은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딱히 용건이 있어 부른 건 아니고, 자.”
주머니 안에서 슈퍼에서 쓸 비닐봉지를 삼각형으로 작게 접은 걸
몇 개 꺼내 카도와키에게 던져 줬다.
마히루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몇 개 넣어두면 나중에 편리해
요.”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넣어둔 것이었다. 나중에 에티켓 봉투
나 쓰레기 봉지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청춘의
한 페이지를 도와주게 될 줄이야. 가방 안에 넣었을 때는 생각도 하
지 못했다.
뭔지 몰라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유타가 삼각형으로 접은 걸
펼치자 의외로 커다란 봉지가 나왔다.
아무래도 슈퍼의 비닐봉지는 두껍지 않으니까 역시 찢어질지도 모
르지만, 그 문제는 어떻게 해 줄 수 없으니까, 그 정도는 본인이 알
아서 하길 바란다.
“필요 없는데 괜히 줬어?”
“아, 아냐…… 고마워.”
“그래? 뭐, 힘들겠지만 잘 들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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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빵빵하게 부푼 비닐봉지를 안고 가는 유타가 금방 교내에서


목격되겠지.
인기남은 힘들겠구나. 속으로 그런 감상을 하면서 손을 흔들어 인
사한 뒤에 교실에서 나갔다.

밸런타인데이라고 해도 집에서 그런 이벤트를 챙기는 분위기가 있


을 리가 없으니, 실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집에 돌아와서 휴식을 취
했다.
저녁을 만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옆에는 마히루가 앉아 있었
지만, 들뜬 분위기는 전혀 없었으며 아마네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은 낌새도 없었다.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딱히 상관없지만, 남자의 긍지라는
측면에선 미묘하게 슬픈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학교 전체에서 단내가 풍기더라.”
“밸런타인데이였으니까요.”
친구인 여자에게는 줬지만 남자에겐 예의상 주는 초콜릿조차도 주
지 않았다고 하니 천사님에게 마음이 있던 남자들은 엄청 낙담하는
반응을 보였다.
딱히 특별한 관계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받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
는 걸까……. 아마네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역시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뭐, 밸런타인데이 같은 건 일부 꽃미남하고만 인연이 있는 이벤트
라서 우리처럼 변변치 못한 남자와는 관계가 없지만 말이지.”
“해탈한 것처럼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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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은 아니지만 진심을 담아서 주는 초콜릿은 받아본 적이 없거


든. 치토세한테서 러시안 룰렛 같은 초콜릿을 받았을 뿐이니까.”
“예의상 주는 러시안 룰렛 초콜릿이라고요?”
“일반적인 초콜릿 안에 자극적인 것이 들어간 초콜릿 몇 개가 섞여
있는 거래.”
아무 매운 것, 아주 신 것, 아주 단 것, 아주 쓴 것. 그렇게 제각각
미각을 파괴할 듯한 내용물이 든 초콜릿이 섞여 있다고 했기 때문에
먹기가 너무 두려웠다.
“또 그런 엄청난 것을…….”
“나중에 먹긴 하겠지만, 내가 몸부림쳐도 이해해 줘.”
“다 먹겠단 말이군요.”
“그래야지. 문제가 많아도 나를 주려고 준비해 준 것이니까. 먹을
거야. 독이 든 것도 아니고.”
자극적이긴 해도 몸에 해로운 건 아니니까 애써 만들어 준 것을 감
사히 여기며 먹을 생각이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 줬으니까 받은 사람으로서 먹어 줘야
할 것이다. 자극적인 것이 있어서 진짜 내키지는 않지만.
“……그런가요?”
“뭐, 그것 말고는 받은 것도 없고, 나처럼 사교성이 없는 사람은 밸
런타인데이와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말이지.”
예의상 주는 초콜릿을 하나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답례를 어떻게 할까. 한 달 후에 자신이 갚아야 할 날을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트린 아마네를, 마히루는 조용히 보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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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치토세의 초콜릿을 먹다가 식탁에 엎어졌다.


치토세한테 받은 상자는 일정 간격으로 칸이 있고, 그 안에는 송로
버섯처럼 생긴 초콜릿이 열두 개 정도 들어 있었다.
꽝은 네 개. 즉 3분의 1 확률로 꽝을 뽑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꽝은 아주 매운 것인 하나뿐이니까 그것만 아니
라면 대수롭지 않게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집었는데――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당첨됐군요.”
“며칠 동안 나눠서 먹으려 했는데 이 지경이…….”
부엌에서 마실 것을 만들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마히루가 아마네의
반응을 보면서 약간의 동정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다 먹긴 했지만 입안은 매운맛을 넘어서 고통이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매운맛이 미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죽도록 맵거나 정말로 못 먹을 정도가 아니라, 참을 수는 있지만 버
거울 만큼만 들어 있었다.
코를 찌르는 와사비 특유의 알싸한 자극을 느끼면서, 이런 휘발 성
분을 초콜릿 안에 용케 담았다는 감탄과 함께 이렇게까지 공들일 필
요는 없지 않냐고 생리적으로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투덜댔다.
코와 눈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와사비, 혀를 불타게 하는 것은 하바
네로 가루와 산초. 강렬한 맛…… 아니, 고통 때문에 겨우 한 개의
초콜릿만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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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됐네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미리 지옥을 보고 왔으니 이제는 천


국만 남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빨리 이 아픔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속으로 비는 아마네에게 살며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고, 달그락 하고 단단한 뭔가가 놓이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자요, 입가심으로 이거라도 마셔요.”
고개를 드니 옆에 김과 함께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머그컵이 있었
다.
그 안에는 짙은 갈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코코아?”
“비슷한 거예요. 쇼콜라쇼…… 쉽게 말해서 핫초코예요. 단맛은 줄
였지만 입가심하기엔 충분할 거예요.”
“고마워…….”
지금은 일단 이 고통을 씻어내고 싶었다.
머그컵을 쥐고 핫초코를 입에 흘려 넣으니 진한 감칠맛이 입안에
퍼졌다.
초콜릿의 단내는 났지만, 단맛이 심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달콤쌉
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맛인데, 아주 마시기 편하면서 훈훈한 기분
과 함께 마음이 차분해지는 맛이었다.
“맛있어.”
“다행이네요.”
담담하게 대꾸하는 말을 들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입안의 고
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핫초코를 천천히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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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성분이 대량으로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가나슈에 섞어서


굳힌 것을 초콜릿으로 빈틈없이 코팅한 뒤에 슈거파우더를 뿌린 것
이라 맨 처음에는 임팩트가 강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가시기 시
작했다.
핫초코를 다 마셨을 때는 겨우 평소와 같은 혀로 돌아왔지만 아직
얼얼했다.
“하―…… 정말로 전부 다 섞어 놨네, 그 녀석…….”
“그렇게 매웠나요?”
“그야 고추, 와사비, 하바네로가 들어갔으니까. 정말이지…… 입가
심할 게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이걸 밖에서 먹었다간 죽었을 거야.”
“불행 중 다행이네요.”
“그러게.”
망할 치토세 녀석. 나지막이 투덜대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서프라
이즈의 의미를 담아서 만든 것인지라 너무 심하게 책망할 순 없었다.
꽝인 초콜릿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마도 멀쩡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남에게 먹이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본인도 맛을 봤다고 하니 아마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별일이네. 핫초코라니. 평소엔 핫밀크를 마셨잖아?”
“네…… 뭐 어쩌다 보니…….”
“이거, 혹시 밸런타인데이라서 만들어 준 거야?”
기본적으로 마히루는 코코아보다는 핫밀크나 밀크티를 마시는데,
오늘은 웬일로 이런 음료를 만든 걸 보니 역시 약간의 기대를 품으면
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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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에요.”
“응, 땡큐. 덕분에 살았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아마네는 안도하고 슬쩍 한숨을 쉬었다.
부정당했다면 혼자 괜히 의식한 것 같아서 부끄럽겠지만, 다행히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마히루는 ‘모처럼 밸런타인데이니까’라는 마음으로 만들었겠지. 가
볍게 이벤트에 참가한다는 기분으로 만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고마
웠다.
한 번 더 “고마워.”라고 말하자, 마히루는 왠지 불편한 듯한 기색으
로 몸을 꼬물거렸다.
“왜 그래?”
“저기, 그게…….”
“응?”
옆에 앉아서 보채면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 최대한 자상한 말투를
의식하면서 되물었다.
어디까지나 천천히 물어보니, 마히루는 안고 있던 쿠션에 얼굴을
반쯤 묻으면서 아마네를 쳐다봤다.
몸을 약간 웅크리고, 언뜻 불안하게도 보일 만큼 시선만 슬쩍 위로
돌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졌다.
작은 동물 같은 몸짓을 보이는 마히루가 묘하게 귀엽고 미소를 자
아내게 하는지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마히루는 몸을 떨기만
할 뿐 다음 말을 도저히 하지 않았다.
“……이, 이만 가 볼게요.”
그러기는커녕 갑자기 일어나서 자신의 짐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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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어?” 소리가 나왔을 때는 이미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면서


거실을 나가고 있었다.
아마네가 굳어 있는 사이에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문이 잠
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마히루가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빠르게 사라지는 바람에 “어어……?”하는 목소리만 흘러나오
고 말았다.
(내가 뭘 했나……?)
설마 도망칠 줄은 몰라서 곤혹스러움과 혹시 자신이 불쾌한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반반씩 가슴속을 점령했다.
내일 만날 때도 기분이 언짢은 상태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하면
서 일어나 마히루가 사라진 현관을 보러 나가려다가 문득 자기 방 문
고리에 종이가방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떠날 때 마히루가 들고 있던 연분홍색 종이가방. 겉에는 메시지 카
드가 스티커로 붙어 있었다.
『언제나 신세를 져서, 평소의 감사를 담았습니다.』
마히루의 이미지에 어울리게 약간 동글동글하면서도 단정한 느낌
을 주는 글씨로 정성껏 적혀 있었고, 안을 보니 초콜릿색 리본으로
포장된 파스텔핑크색 상자가 들어 있었다.
왜 여기에? 그게 의문이었지만 곧바로 아까 걸어 두고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직접 주는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남자에겐 주지 않
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상당히 망설였던 것 같다.
(그냥 줘도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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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이럴 때만 참 소극적인 마히루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소파에


앉아서 안에 든 것을 꺼냈다.
귀엽게 포장된 상자는 마히루와 어울리게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
기고 있었다.
일단 받아도 되는 거겠지? 미묘하게 불안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포
장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설탕에 절인 뒤에 초콜릿에 담근 오렌지 조각, 그러니까 오
랑제뜨가 비닐로 개별 포장된 상태로 들어 있었다.
선명한 오렌지색과 광택이 있는 짙은 초콜릿 컬러의 대비가 눈부시
고, 정말 맛있게 보였다.
코팅에 화이트초콜릿을 쓴 것과 오렌지 대신 레몬을 쓴 것도 함께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먹다가 질릴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랑제뜨와 함께 또 하나의 메시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먹기 쉬운 걸로 만들어봤
어요. 입맛에 맞으면 좋겠지만요.』
그렇게 적혀 있는 걸 보고 열흘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떤 게 좋아?’
“단것은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니까…… 너무 달지 않은
게 좋겠어.”
치토세와 한 대화를 빠짐없이 기억해 뒀다가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만들어 준 모양이다.
마히루다운 섬세한 배려와 자신의 취향을 기억해 줬다는 사실, 무
엇보다 마히루한테서 받았다는 사실이 그만 쑥스러움을 자아내서 볼
이 약간 뜨거워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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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먹기 쉽게 하나씩 포장된 노멀 버전 오랑제뜨를 가만히 보다가 하


나 집었다.
윤기 있는 광택을 띠는 초콜릿과 선명한 오렌지의 대비가 아름다운
오랑제뜨를 천천히 한입 물었다.
입속에 퍼지는 것은 설탕에 절인 오렌지의 새콤한 맛과 비터초콜릿
의 너무 달지 않고 알맞게 씁쓸한 맛.
양쪽이 각각의 맛을 적절하게 강조해 주면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맛있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마히루가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입 더 깨물어 봤다.
마히루의 오랑제뜨는 새콤하면서 쌉쌀한 것이―― 무슨 이유인지 무
척 달았다.

“후지미야, 어제는 네 덕분에 살았어.”


다음 날 등교한 아마네에게 유타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기에
아마네는 경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 작은 접점이 있었다곤 해도 일부러 이렇게까지 고맙다고 인사
하러 올 줄은 몰랐다.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와는 또 다르게 친근하고 밝은 표정으로
웃는 유타를 보면서, 그가 말을 건 당사자인 아마네도 힐끔힐끔 훔쳐
보는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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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기본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을 버겁게 여기는 성격인지라 이렇게 가


벼운 흥미본위의 시선이라도 왠지 기가 죽는다.
“아니야. 그 정도를 가지고 뭘. 너야말로 많이 힘들었겠다.”
“뭐, 그렇긴 했지…….”
유타의 눈빛이 흐릿해지자, 아마네도 ‘역시 인기남은 힘들겠지’라
고 생각하면서 동정했다.
유타 본인은 자신이 인기가 있음을 잘 알면서도 자랑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일 테고, 질투하는 남자들
도 진심으로 싫어하지는 않는 거겠지.
그 정도 일로 일부러 고맙다고 말하러 올 만큼 예의가 바른 것도 호
감을 사는 이유일지 모른다.
“어쨌든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거든.”
“괜찮아. 힘들 때는 서로 도와야지.”
딱히 빚을 만들고 싶어서 친절하게 대한 것도 아니니까, 딱히 고맙
다는 인사를 받을 일도 아니다.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하면서 가볍게 웃어 보이자 유타도 약간 안
도한 듯한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솔직한 그 미소에 주위 여자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그런 표
정은 여자들에게 보여주라는 생각과 함께 아마네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유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유타가 돌아간 뒤에 방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
는 이츠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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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이 너무 많아서 쩔쩔매던 카도와키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를 줬을 뿐인데.”
“아. 예상보다 많았나 보네. 야무지지 못한 녀석이라니까.”
그 많은 초콜릿과 여자들의 호의를 옆에서 보고 있던 이츠키도 아
마네의 설명을 듣고 이해했는지, 동정하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많으면 챙겨서 집에 가는 것도 힘들겠지.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네가 도와준 것도 딱히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네로선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 준 게 다였으므로, 딱히 고맙다
는 말을 들을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뭐, 단지 그것뿐이야. 딱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너답다고 해야 하나. ……그건 그렇고 슈퍼에서 주는 비닐봉지를
휴대하고 다니다니…… 너, 요즘 살림에 너무 찌든 것 아냐? 스마트
폰으로 슈퍼 광고를 보고 있을 때는 무슨 살림하는 아줌마인 줄 알았
어.”
“난 남자야. 뭐, 누군가의 영향을 받긴 했겠지…….”
이게 다 마히루 탓이라고 할까. 아니면 덕분이라고 할까.
식비는 둘이서 반씩 부담하고 있으므로 되도록 싼 물건을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 광고를 체크하거나, 그 광고에 실린
값싼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츠키에겐 그
게 한층 더 살림에 찌든 모습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일반 가정의 남편보다는 훨씬 더 주부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
다. 요리는 마히루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지만.
“가정적인 파트너가 있어서 좋겠네요.”
“ 파트너 아니야. ……치토세는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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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 음, 기발한 발상을 실행하지만 않는다면 뭐…… 웬만큼은


할 수 있는 수준?”
“그 녀석이 황당한 짓을 하지 않을 때가 있긴 해?”
“……그런 점도 귀엽잖아?”
“이봐, 눈을 피하지 마.”
치토세는 굳이 말하자면 자극을 즐기는 기분파다.
사고만 안 치면 보통 여고생 수준만큼은 문제없이 집안일을 할 수
있다지만, 장난기가 발동하거나 기분이 바뀌면 이것저것 사고를 치
는 것이다.
“뭐, 결혼하면 성실하게 살겠다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너희 사이를 인정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요즘 시대에 맞지 않게 남녀 교제에 엄격한 이츠키의 아버지는 치
토세를 좋게 보지 않아서,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 지금 상태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한다.
반대로 치토세의 부모님은 이츠키를 언제든 환영한다는데, 보통은
반응이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약간 어이가 없기도 했
다.
“뭐, 성인이 되면 차분히 설득할 거야. 손주 얼굴을 보고 싶지 않냐
고.”
이것만큼은 아버지의 말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어깨
를 으쓱하면서도 눈빛은 진지했고,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만큼 치토세를 사랑한다는 건 평소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고 고등
학생 나이에 벌써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는지라
응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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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너라면 분명 아버지가 포기할 때까지 마음이 꺾이지 않을


테니까, 잘해 봐.”
“응. 너도 힘내.”
“뭘?”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알잖아?”
“난 딱히 그 아이랑 그런 사이가 아냐.”
멋대로 착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이츠키가 유쾌하게
한바탕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탁받은 식재료를 슈퍼에서 사서 돌아가니, 이미 마히루는 아마네


의 집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꽤 자주 보는 광경이며 평소와 마찬가지인데, 다른 게 있다면 마히
루가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파 위에서 무릎을 모은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토라졌을 때 취하는 자세로 보였지만, 그것보다는 부끄
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아마네도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몰라서 난감했다.
긴 스커트를 입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마네는 눈길을 슬쩍
돌린 뒤에 일단 냉장고에 식재료를 넣으러 갔는데, 거실로 돌아오니
아마네의 눈치를 살피는 마히루가 있었다.
옆에 앉으면서 고개를 돌렸더니 마히루가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마히루, 어제는 고마웠어. 맛있었어.”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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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어제 일을 의식하고 있을 마히루의 심정은 이해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랬더니 마히루도 아마네를 보면서 쿠션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답례로 뭘 받고 싶어?”
“딱히 답례를 바라고 준 건 아니에요.”
“그건 알지만, 역시 성의는 성의로 갚아야 하지 않겠어? 받기만 하
는 건 남자의 체면이 걸린 문제라고 할까.”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신조인 아마네는 그렇게 맛있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 줬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뜻을 굽힐 생각도 없었다.
일단 다른 남자에게는 주지 않고 아마네의 취향에만 맞춰서 만든
것으로 보이니까 적잖게 힘들었을 것이다.
“……저는 아마네 군에게 받은 게 많으니까요.”
“오히려 내가 일방적으로 받는 것 같은데. 늘 요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그렇고, 계속 나를 돌봐 주고 있잖아.”
“그건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아마네 군은 자신이 베풀
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것 같네요. 그래도 저는 고맙게 받고 있으니
까 괜찮아요.”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해 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받기만 하
고 있으니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마히루가 느끼기에
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뭐,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을 생각
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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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아마네가 무의식중에 뭔가 주고 있더라도, 그것과 화이트데이


때의 답례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았으면 화이트데이에는 자신이 답례로
뭔가를 주는 것이 일종의 예의이니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히루를 보자
“네…….”라고 대답하면서 미묘하게 시선이 흔들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일단 뭘 줄지 정하는 데 앞으로 한 달쯤 여유가 있으니까. 네가 좋
아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여유가 있나요? 다음 주부터 기말 시험 기간이고, 그게 끝나
면 머지않아 종업식이 있는데요.”
마히루는 약간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지적했지만, 그 말대로 다음
주부터 기말 시험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은 학교 전체에 밸런타인데이의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조만간
시험을 앞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찰 것이다.
아마네 입장에선 딱히 초조해할 필요도 없었지만.
“시험은 평소처럼 보면 문제없이 진급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와서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어. 마히루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네요. 여유 있게 대처하는 건 중요하죠.”
아마네는 예습과 복습을 빠짐없이 하면서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시험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일은 거의 없었다.
벼락치기로 공부하지 않아도 평소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
고 있으며, 실제로 지금껏 그랬다. 시험 기간에는 기껏해야 평소보다
조금 더 책상에 오래 앉는 정도가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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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아예 개인적으로 수업 진도보다 미리 공부한다고 하며,


아마네와 마찬가지로 예습과 복습을 빼먹지 않는 타입이므로 초조해
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히루의 기준에선 수업이
일찍 끝나는 시험 날이 더 편하지 않을까.
“뭐, 너무 기대하지 말고 기다려 줘.”
“네. 아마네 군이 준 것은 전부 소중히 여기고 간직할게요.”
“굳이 그럴 필요는…….”
“곰 아저씨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요.”
듣자니 생일에 선물했던 곰 인형도 아껴 주는 모양이다.
키 케이스는 마히루가 쓰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깨끗하게 이용
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곰 인형은 어떻게 되었을지 약간 불안하기
도 했지만…… 마히루의 말을 들어 보니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곰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귀엽게 부른 마히루를 보다가 그만 입꼬
리가 저절로 올라갈 뻔했지만, 그랬다간 눈을 흘길 것 같아서 꾹 참
았다.
올해도 이렇게 함께 지낸다면 다음 생일에는 뭘 선물하는 게 좋을
까……. 벌써 기대된다.
“그거 다행이네.”라고 웃으면서 말해 주자, 문득 마히루가 아마네
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전 아마네 군의 생일을 모르네요.”
“아아, 내 생일 말이야? 내 생일은 11월 8일이야.”
그러고 보니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생일을 알려주자
마히루의 눈이 슥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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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동안 같이 지내면서 안 사실인데, 이건 살짝 화가 났을 때
에 보여주는 표정이다.
“……아마네 군.”
“응?”
“그때는 우리가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시기죠?”
“그런데?”
“왜 말해 주지 않았나요?”
“묻지 않았으니까. 너도 말하지 않았잖아. 학생증을 보고 알았으니
까.”
“으.”
“애초에 그때는 지금처럼 친하지도 않았는걸. 생일이 언제라고 알
려줘 봤자 ‘이 인간이 무슨 소리래.’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을 거
고.”
자신의 생일을 마히루에게 알려줘도 그때의 마히루는 “그런가
요.”라는 반응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네도 선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런 짓은 질
색이었고, 그 정도로 뻔뻔한 사람도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말할 만큼 신뢰가 두터운 관계도 아니었으니
까 말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 올해 생일은 빼먹지 않고 축하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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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면서 아마네의 옷소매


를 꼭 붙잡고 선언했다.
받기만 하는 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자신의 생일보다 더 진지하
게 축하하려는 의욕이 가득 찬 눈빛을 보면서 아마네는 완벽히 쓴웃
음이 되지 못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기뻐서…… 그만,
평범하게 기뻐하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결국, 마히루도 아마네처럼……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생각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때까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준 거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마히루가 맑고 고운 캐러멜색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런 뒤에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면서 손에 든
쿠션으로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소매 근처를 툭 때렸다.
직접 얼굴을 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의도가 명백한 화풀이성 쿠션 공격을 맞으면
서, 아마네는 또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딱히, 아마네 군이, 싫은 것도 아니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
해지니까, 저도 좋아요.”
“그렇구나, 고마워.”
“딱히, 다른 뜻은 없어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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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당부하듯 말하는 걸 듣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무슨 이유인지


미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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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화이트데이

원래부터 근면하게 공부하고 수업 태도는 성실함 그 자체인 아마네


는 별 탈 없이 기말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
마히루와 함께 답안지를 채점해 봐도 늘 나오는 수준의 점수일 것
같았고, 학교에서의 생활 태도도 흠이 잡힐 만큼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유급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츠키도 적당한 점수를 얻었으며 치토세도 낙제는 면할 성적이라
고 하니까, 아마네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선 유급될 위기에 처
한 사람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딱히 친하지도 않은 3학년을 보내는 졸업식이며,
그 후에는 종업식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사이에 있는 하나의 이
벤트가 문제였다.
“……답례로 뭘 주지.”
그렇다. 밸런타인데이에서 승리한 자에게 찾아오는 답례의 날이 가
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네가 승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히루와 치토세에게 받은 게
있으니까 당연히 답례는 할 생각이다.
하지만 난처하게도 뭘 주면 좋을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다.
치토세에게 줄 선물로는 무난하게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산 가게
에서 파는 화이트데이 선물 세트와 본인이 모으고 있는 캐릭터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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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비할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겉치레보다 실리를 더 중시하는 치토세라면 기뻐하면
서 받아줄 것이다. 그 선물을 고른 이유만 말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마히루다.
마히루는 아마도 무엇이든 기뻐하며 받아줄 것 같았다.
아마네가 주는 것은 대부분 받아 주는 데다가, 마음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딱히 물건 자체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 같다. 원하는 것
이 뭔지 물으면 부엌칼 연마용 숫돌을 맨 먼저 언급하는 소녀이므로,
솔직히 뭘 주면 좋을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 타입이었다.
취향을 기준으로 선택하려고 해도 여자라면 의외로 공통적이라 할
수 있는 좋아한다는 단것과 귀여운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뭘 골
라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에 말했던 숫돌은 전혀 분위기에 맞지 않고 예산
을 생각해도 버거워서 제외한다고 쳐도, 뭘 선물해야 좋을지 고를 수
가 없어서 골치가 아팠다.
가능하다면 이번에는 실용품보다 기호품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일단 잡화점에서 화이트데이 특집 코너를 둘러보
고 있었지만, 마히루가 정말로 기뻐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
았다.
기왕이면 곰 인형을 줬을 때처럼, 그런 반응을 보일 선물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또 곰 인형을 선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귀여운 곰 인형이라면 진열장에 잔뜩 있지만, 같은 선물을 하는 건
신선한 맛이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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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아마네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여자가 기뻐할 선물이 화


장품이나 액세서리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네는 화장품에 문외한이고, 디자인으로 고르는 액세서
리도 그런 걸 선물할 사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
다.
아마 그냥 받아주긴 하겠지만, 받는 사람이 기뻐해 줄까.
일단 남녀로서는 사이가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과연 액세서리
를 주면 기뻐할 것인가.
이츠키가 치토세에게 선물하는 경우라면 가장 확실한 선택이 되겠
지만, 아마네가 마히루에게 선물해도 되는 걸까.
좀처럼 정하지 못한 채 고민하면서 특집 코너를 서성거리고 있으니
까, 아마도 수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일단 외출용 차림이지만, 남자가 귀여운 물건들 앞에서 헤매고 있
으면 당연히 수상하게 보이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끙끙대고 있자니, 뒤에서 “뭘 찾으
시나요?”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점원용 앞치마를 한 묘령의 여성이 방긋 웃으며 서 있었
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아마네를 보다 못해 물어본 모양이다. 안
그러면 수상한 모습으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고 있는 아마네에게 일
부러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아, 그게 말이죠……. 화이트데이에 답례할 선물을 고르지 못해서
고민 중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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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코너에 마음에 드시는 것은 없었단 말이군요? 다른 코너에도


화이트데이 선물로 자주 찾으시는 게 있으니까 안내해드릴게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닌데 선물로 줘도 싫어하지 않을 만한 것으론 어떤 게 있는지 몰라
서 말이죠.”
“그게 무슨 말씀인지?”
“여친은 아니지만 친하다고 할까…… 예를 들자면 말이죠, 액세서
리 같은 걸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한테 받아도 기뻐할까요?”
상의하는 게 부끄러워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더니, 여자 점원은 쿡
하고 웃었다. 아마도 보기 참 좋다는 의미겠지.
“남자분이 그런 이유로 고민하는 모습은 자주 본답니다.”
“참고로, 그 손님들은 어떤 결단을 내렸나요?”
“고민하면서도 구입을 결정하신 분이 많았죠. 친한 사이라면 선물
을 받아도 아마 싫어하진 않을 거예요.”
싫어하진 않는다는 말을 듣고 약간 안도했지만, 그래도 그 마히루
에게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것은 역시 좀 망설여졌다.
마히루는 항상 단정하게 꾸미는데, 가끔 쓰는 액세서리도 질이 좋
은 것뿐이었다.
센스가 좋은 마히루의 심미안에 인정받을 물건을 고를 자신이 없었
다.
“괜찮으시다면 저쪽 코너에서 여자분들에게 인기 있는 품목을 몇
가지 소개해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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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제안을 듣고,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아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덜컥 샀다는 거구나.”


일이 어떻게 됐는지 이츠키에게 이야기하자, 그 점원과 같은 눈길
로 보면서 웃었다.
식당 구석 자리에서 오늘의 정식 메뉴를 둘이서 먹고 있다가 화이
트데이가 화제가 되는 바람에 덜컥 말하고 만 것이다.
“말이 많네. 하지만 역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액세서리를 선물로
주면 이상하게 볼 것 같단 말이지.”
“왜 이렇게 겁이 많아? 남자라면 배짱으로 밀어붙여. 내 생각으로
그 사람이라면 아마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다 기뻐할 것 같은데?”
“……그래도 말이지.”
마히루의 성격을 보면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뭐든 기뻐하며 받아줄
것이다.
아마네는 정말로 기뻐하며 착용해 줄 것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걸 줘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뭘 산 거야?”
“……꽃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핑크골드색 팔찌.”
마히루는 쿨한 분위기의 실버나 화려한 인상을 주는 골드보다 화사
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귀여운 느낌을 주는 핑크골드가 어울릴 것이
라고 생각했다.
학생 신분으로는 비싼 귀금속은 살 수가 없어서 어디까지나 색과
디자인만 보고 고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색깔의 액세서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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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처럼 섬세하게 디자인된 것을 골랐다.


“뭐야. 듣기만 해도 충분히 기뻐할 선물이잖아.”
“……질색하지 않을까?”
“아니, 지나치게 걱정하는 거야. 왜 이럴 때는 비관적으로 구는 거
람…….”
“내가 멀쩡하게 여자에게 선물하는 건, 그 아이가 처음이란 말이
야.”
어머니는 일단 그런 대상이 아니며, 치토세는 해당이 안 된다. 애초
에 치토세에게 줄 것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서 과자류로 정했으며, 선
물이라는 인식도 별로 없었다.
“넌 그런 데서만 자신감이 없더라…….”
“아니, 오히려 어떻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어……? 그 아이에게
주는 건데.”
“곰 인형은 기뻐했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아마네, 마음이 중요한 거야, 마음이. 이미 어느 정도는 돈을 써서
골랐으니까, 남은 건 네 마음을 담는 것뿐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이츠키에게 “그렇게 딱딱 생각할 수 있으면 이런 고
생은 안 해.”라고 푸념하면서, 아마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화이트데이 때까지, 한동안 지금 이 결단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는
지 계속 고민할 것 같다.

화이트데이 당일, 아마네는 묘하게 긴장한 표정으로 마히루의 방문


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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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분위기는 밸런타인데이보다 술렁이진 않았지만, 역시 승리


자들은 답례하기 좋은 때를 살피고 있었으며 여자들은 답례를 기대
하고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참고로 유타는 착실하게 똑같은 과자를 답례품으로 선물했는데, 그
것만으로도 몇만 엔은 깨졌을 것 같은지라 보고 있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아마네는 학교에서 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마히루가 찾아오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먼저 집에 와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이런 선물을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역시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일단 늘 입는 스웨트 소재의 옷이나 체육복 바지가 아니라 흰 셔츠
위에 회색 브이넥 니트를 걸친 레이어드 스타일에 치노팬츠를 갖춰
입고 있었다.
평소의 칠칠치 못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 받
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히루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현관에
서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반듯하게 바로잡은 것은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
다.
늘 그러듯이 여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마히루는 거실에 모습
을 보였고, 그런 후에 아마네를 보고 경직했다.
“어, 왜, 왜 그런 머리 모양을…….”
“일단 화이트데이니까 정장까지는 아니라도 신경을 쓴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상하면 다시 원래대로 고치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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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마히루를 놀라게 하는 것은 성공한 듯하지만, 반응은 별


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일어났더니, 마히루가 부정하
듯이 손을 힘차게 저었다.
“그, 그건 아니에요. 그냥 놀랐다고 할까…….”
“그래?”
마히루는 마히루대로 진정되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이니까, 이런
차림보다 평소 입는 옷을 입고 기다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옆에 앉으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역시 부담스러우면 평소처럼 입고 올까?”
“아, 아뇨, 그 모습이 좋아요. 단지…… 그, 쓸데없이 너무 멋져
서…….”
“쓸데없이 멋지다는 건 무슨 뜻이야?”
“펴, 평소에는 차분한 분위기라서 안심할 수 있었는데…… 지금 모
습은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네요.”
“그럼 갈아입고…….”
“……그 모습이 좋아요.”
소매를 꼭 쥐면서 쳐다봤다.
부끄러워서 그런지 약간 빨개진 볼과 촉촉해진 눈으로 쳐다보는 바
람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소매를 잡고 시선만 올리는 건 상당히
위험한 자세다. 가깝기 때문에 달콤한 냄새까지 느껴지는지라 여러
모로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의식하고 말았지만, 마히루도 아마네의 옷차림을 의
식하고 있는지 주저주저하면서 붙잡고 있어서, 두 사람은 동시에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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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게 무엇보다 이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으, 응.”하고 어색하게 대꾸했고, 그런
뒤에 분위기를 얼버무리려는 듯이 옆에 둔 종이가방을 대충 들이미
는 것처럼 내밀었다.
“자, 받은 초콜릿의 답례야. 너무 기대하진 마.”
“……고마워요. 봐도 될까요?”
“응.”
눈앞에서 자신이 준 선물을 개봉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막을 수
는 없었다.
일단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벨벳 천이 안에 든 작은 상자를 사서 넣
어놨지만, 내용물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괜히 샀다는 생각도 들
긴 했다.
뽀얀 손가락이 짙은 남색 상자를 살며시 열자, 그 안에는 며칠 전에
산 핑크골드색 팔찌와 접어서 같이 넣은 종이가 있었다.
마히루는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심
플함과 품격을 중시하면서 꽃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팔찌를 골랐다.
곳곳에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크리스털 글래스가 드러나 있어서,
귀여움과 우아함도 갖춘 디자인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상자에 담긴 팔찌가 드러나자, 캐러멜색 눈은 핑크골드의 광채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취향에 안 맞아?”
“아뇨, 귀여워요.”
“그럼 다행이네.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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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어울릴 것 같아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운 표정으로 눈을 내
리뜨고 있었다.
그 귀엽고 순진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숨이 탁 막히고 말았
다.
“그리고 이건……?”
눈을 돌리고 싶은데도 시선이 고정되는 바람에 아마네는 마히루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같이 넣어둔 것을 마히루가 찾아내자 쑥스
러워하면서 볼을 긁었다.
“아, 그거? 저기, 그게,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항상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소원 정도는 들어주고 싶었거든.”
같이 넣은 것은 직접 만든 ‘뭐든지 들어주는 티켓’. 아이들 장난 같
은 물건이었다.
세 번 쓸 수 있는 회수권이며, 아마네가 그린 곰 일러스트가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잘 만들어졌다고 아마네는 평가하고 있었다.
항상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마히루가 뭔가 소소하게 원하는 게 있
다면 최대한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에 같이 넣었는데, 마히루는 곰 그
림에 주목했는지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후, 후훗, 아마네 군이 직접 그린 건가요? 이 일러스트.”
“시끄러워. 미안하네, 못 그려서.”
“아뇨, 개성이 있어서 좋아요.”
은근슬쩍 못 그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눈썹을 팔자로 모으고
끙끙댔지만, 마히루가 청순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하
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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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바로 써도 될까요?”
“뭔데?”
지금 당장 쓸 줄은 몰랐지만,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 줄 수 있는 범위에서 들어줄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팔찌가 든 상자
를 살며시 내밀었다.
“……아마네 군이, 채워 주세요.”
“그 정도는 회수권을 쓰지 않아도 들어줄 거야. ……분부대로 하
죠.”
마히루가 말한 소원은 정말 소소했기 때문에 아마네는 그런 건 티
켓을 쓰지 않아도 부탁만 하면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쓴웃음
을 지었다.
더 큰 소원에 쓰면 될 텐데, 굳이 귀여운 소원을 말한 마히루의 소
박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마네는 마히루가 내민 손에서 상자를 받아 허벅지 위에 놓은 다
음 팔찌를 꺼냈다.
작은 고리들이 서로 부딪치는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부서지
지 않게 조심스럽게 연결 고리를 풀어서 손목에 살며시 감았다.
정중하게 채우는 것을 의식하고 연결 고리를 잠그자, 마히루의 가
녀린 손목을 물들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색조의 팔찌가 금속성 빛을
발했다.
역시 마히루의 뽀얀 살결에는 이 색이 잘 어울렸다.
청초한 미모라서 화려한 것보다는 간소하고 기품이 있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당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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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응, 잘 어울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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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잡고 있으면 미안해서 살며시 손을 놓자, 마히루는 팔찌가 채


워진 손목을 다정하게 감싸 안듯이 가슴에 대고는 부드러운 표정으
로 웃었다.
살짝 볼을 붉힌 채 입가가 올라간 입을 그대로 드러낸 미소 앞에서
아마네는 눈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너무 매력적이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만면의 웃음과는 다른 정숙하고 천진난만한 미소가 머릿속에 단단
히 각인됐다.
평소 어이없어할 때 보이는 미소나 순수하게 기쁜 표정과는 또 다
른, 어딘가 앳된 분위기가 남아 있으면서도 여성스러운 향기를 풍기
는 아름다운 미소는 단아하면서도 고혹적이어서, 아마네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고는 놓아 주지 않았다.
(……위험해.)
그런 미소를 보여준 것도, 그런 미소를 보여주는 사람이 자신뿐이
라는 것도 괴로웠다.
주체할 수 없이 거세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시선
을 돌리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그러지 못하고, 마히루가 자신을 바라
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쿠션으로 얼굴을
가릴 때까지 계속 바라봤다.

“어땠어? 화이트데이는.”
다음 날, 이츠키가 감상을 물었을 때 아마네는 최선을 다해서 태연
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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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학교에선 아마네를 배려해서 물어보진 않았지만, 하굣길에 패


스트푸드점에 들러서 자리에 앉자마자 웃으면서 그렇게 물었던 것이
다.
가끔은 짭짤한 것도 먹고 싶어서 감자튀김을 먹으러 왔을 뿐인데,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았으면 들리지 않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
다.
“어땠냐니…… 그냥 평범하게 선물했을 뿐이야.”
“받고 기뻐했어?”
“……뭐, 응.”
굳이 말하자면, 기뻐했다.
천진난만하게 신바람난 웃음은 아니었지만, 수줍은 미소와도 비슷
하게 달콤하면서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색기가 느껴지게 웃어
줬으니까, 정말 기뻐했다고 본다.
그 아름다운 미소는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안에서 열기가 볼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억누르면서 최대한 아무렇
지 않은 투로 대꾸하자, 이츠키는 팔짱을 끼면서 “응, 응.”하고 이해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정말 괜찮았나 본데. 정말이지
기쁘게 받으면서 귀엽게 웃어 준 모양이네.”
“윽…….”
“이것 보라지. 착실하게 친해지고 있구나.”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잘됐다는 투로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마
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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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는 깊이 관여하길 바라지 않는 부분에는 참견하지 않지만,


그 밖의 부분에선 친구로서 매서운 지적을 하기 때문에 정말 상대하
기 버겁다. 되갚아 주려고 해도 치토세와는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아
서 자신이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으니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채 끙끙대는 아마네를 보면서 이츠키는 온화한 표정으
로 웃고 있었다. 미묘하게 따스한 눈길로 보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반박할 말이 없는지라 주문한 감자튀김을 씹으면서 고개를 돌리는
아마네에게 이츠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기쁘거든? 아마네 너한테도 드디어 봄이 찾아온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야.”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잖아?”
“아니야, 그런 감정은.”
마히루가 아마네를 깊이 신뢰하는 것은 확실히 잘 알고 있다. 본인
이 원한다면 아마네는 마히루가 가장 신뢰하는 남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친하게 지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적어도 현재 알고 있는 인간
관계의 범위 안에선 아마네에게 가장 마음을 터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연애 감정이냐고 묻는다면, 아닐 것이다.
때때로 이성으로서 대하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은 있지만,
그건 남녀 사이에서 종종 생기는 일이다. 호감은 보이지만, 이성에게
보이는 연애 감정이라는 의미의 호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에야 아마네는 몸단장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지만,
한심한 남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네 같은 타입을 좋아하
게 될 일은 일단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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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비굴해지더라. 정말로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다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반대로 생각해 봐.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받은…… 아니, 그보다
는 노력의 산물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귀엽
고 엄청난 애가 아무런 장점이 없는 나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미소녀가 모두 유능한 미남과 맺어지는 게 세상의 법칙이라면 평
범한 사람들은 테러를 일으킬걸.”
그건 미남 부류에 속하는 이츠키가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지금은 넘어가겠지만 말이지. ……그럼
친구로서 예언을 하나 할게.”
“뭔데?”
“너는 때가 되면 바뀔 거야. 아니, 이미 변화의 조짐이 보여. 남은
건 네가 용기를 내서 한 발짝을 내디디는 거라고.”
“네가 뭘 안다고…….”
“하하하, 네 친구로 몇 년을 지냈다고 생각하냐?”
“1년도 안 됐어.”
냉정하게 지적하자 “그것도 그러네.”라고 말하면서 낄낄 웃었다.
이렇듯 대수롭지 않게 대화하고 있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사귄 친
구인 이츠키는 근처에 살면서 초중학교를 같이 다닌 다른 남자 친구
들보다 훨씬 더 아마네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남자였다.
“그건 그렇고 말이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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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툭하면 네가 안 어울린다고 말하지만, 그런 태도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콧구멍에 감자튀김을 처박아 줄까?”
“죄송합니다.”
조금은 감동했는데 마지막에 괜한 소리를 해 줘서 감자튀김을 손에
쥐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이츠키답다는 생각이 들었
다.

“늦었네요.”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귀가하자 앞치마를 입은 마히루가 맞
이해 줬다.
자신도 모르게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츠키와 주고받은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마히루에게 그런 감정이 없는
데도 이상한 망상을 해 버린 것은 본인의 잘못이므로 황급히 그런 생
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응, 이츠키와 감자튀김을 좀 먹고 왔어.”
“……저녁 식사를 앞둔 시간인데 말인가요?”
“괜찮아. 남기지 않고 다 먹을게.”
마히루의 요리가 들어갈 배는 따로 있다. 그리고 애초에 감자튀김
도 자중하는 의미로 S사이즈를 골랐으니 그렇게 배가 부른 것도 아
니다.
평소에 나오는 만큼 다 먹을 자신이 있었다.
“살이 찌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마네 군은 말랐
으니까 살이 좀 붙은 게 더 보기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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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야말로 살을 좀 찌우는 게 좋지 않겠어? 보고 있으면 부러질 것


같아서 무서워.”
“부러질 정도로 약하진 않아요.”
“그런가? 하지만 이렇게 가느다란 걸.”
마히루의 몸은 누가 봐도 가냘픈 소녀 같다. 운동은 잘하니까 몸이
가늘어도 그냥 마른 게 아니라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쪽에 가깝지
만.
얼핏 보면 부러질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 분명했고, 시험 삼아서
손목을 잡아 보면 손가락이 딱 맞닿을 만큼 가늘었다. 힘을 주면 부
러질 것 같아서 ‘여자애는 자상하게,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아
버지의 가르침도 절로 이해했다.
손을 잡았을 때도 든 생각이지만, 마히루는 너무 가냘파서 자칫하
면 모르는 사이에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느껴지곤 했다.
섬세한 손가락도 약간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지라 이렇게 가
늘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손가락을 더듬듯이 만지면서 촉감과 튼튼함을 확인하고 있으려니,
마히루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얼굴을 살짝 숙였지만, 시선은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아마네의 손
을 향해 있었다.
약간 상기된 볼을 보고는 뒤늦게 허락 없이 마구 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면서 손을 놓았다.
“……저기, 미안해. 멋대로 만지는 바람에 불쾌했지?”
“아, 아뇨…… 아마네 군이 만지는 건 불쾌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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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의심하고 싶어지는 발언을 한 마히루를 순간적으로 응시하자,


마히루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확 돌렸다.
아까보다 더 상기된 볼은 물론이고 부끄러움 때문인지 약간 촉촉해
진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네는 이 자리에 더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그렇다고 만져 달라는 뜻은 아니거든요. 그저 다른 남자는 만
지는 건 허용하고 싶지도 않다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으, 응.”
그런 말을 들어도 심장 고동 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마히루가 아마네를 친근한 사람으로 특별하게 여긴다는 건 잘 알지
만, 아무래도 잘못 해석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
면 좋겠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걸, 차지 않았네. 아, 아니,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시끄러운 심장 소리를 애써 잊기 위해서 물어보자, 마히루는 손목
을 보다가 아마네가 잡고 있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집안일을 할 때 차고 있으면 방해가 되고 빨리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서 쉬는 날에만 차기로 했어
요.”
“……그랬구나.”
너무 기특한 이유를 말하는 걸 듣고, 아마네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렇게 귀여운 말을 듣고 의식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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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뜻도, 잘 쓰겠다는 뜻도 전해져서, 아마


네는 속에서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감정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여러모로 힘들었다.
두근, 두근. 시끄러울 정도로 뛰는 심장을 어질어질한 머리로 인식
하면서, 아마네는 잠시 진정하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했다.
“……마음에 들었다니 나도 기뻐.”
“마음에 들었으니 소중하게 간직할 거예요. 곰 아저씨도, 키 케이
스도, 팔찌도.”
핸드크림은 아끼지 않고 쓰고 있지만 말이죠. 약간 쑥스러운 듯이
입꼬리를 올린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더는 참지 못한 나머지, 신발
도 벗지 않은 채 서 있던 상태에서 급하게 신발을 벗고 복도로 들어
섰다.
“……옷 갈아입고 올게.”
“네, 네. 다녀와요, 아마네 군.”
집에 돌아왔는데도 마치 신혼인 아내의 배웅을 받는 것 같은 기분
이 드는 바람에 또다시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한 아마네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들어간 다음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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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봄 방학의 시작

의외로 특별한 건 없구나. 단상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인사말을 하


는 교장의 모습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마네는 그런 생각
과 함께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았다.
종업식 날이 되었지만, 딱히 아무런 감흥도 없이 오늘을 맞이하고
단상에 선 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주위 학생들도 거의 같은 생각인지 진지하게 듣고 있는 학
생은 극히 일부였으며, 대부분이 적당히 흘려듣거나 졸린 표정으로
단상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서 진지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빨리 끝내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대충 듣고
넘겼다.
이게 자신들의 졸업식이라면 그나마 감흥이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종업식이므로 이렇다 할 감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은 좀 그렇지만 사실 아무래도 좋을 일이라, 아마네는 우등생인
척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아, 어깨가 뻐근해.”
“교장 선생님은 말이 너무 많다니까.”
종업식이 끝난 뒤에 교실로 돌아오니 다들 각각 그런 말을 늘어놓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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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목소리가 약간 들뜬 것처럼 들리는 것은 다음에 예정된 종


례만 끝내면 2주 정도의 자유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겨우 지루한 수업에서 해방된다는 생각에 입가에 웃음까지 짓
는 반 아이들을 자리에 앉아 바라보면서, 아마네도 한숨을 살며시 쉬
었다.
내일부터 봄 방학이 시작되는데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일단 부모님은 얼마 전에 봤고, 교통비도 부담이 되니까 귀성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그러면 의외로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2학년 과정을 조금 예습해도 시간이 남을 것이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 보려고 해도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미리 찾
지 못했기 때문에 날짜가 모자라는 데다가, 쉬는 날에 같이 놀 친구
는 이츠키와 치토세 정도가 다였다.
“여보세요, 아마네 군.”
지금 막 머릿속에서 떠올렸던 이츠키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실로 상큼한 미소…… 아마네의 눈에는 수상쩍은 미소로
보여서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츠키가 이런 미소를 짓는 것은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나 귀찮은 일을 떠넘길 때다.
“왜?”
“너, 내일부터 할 일이 없지?”
“뭐, 그렇긴 하지.”
“응응,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잘됐네, 잘됐어.”
“……뭔데?”
만면의 웃음을 지은 이츠키가 자기 책상 옆에 걸어 둔 가방을 두들
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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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어제 짐을 대량으로 집에 챙겨가서 사물함과 책상도 비웠을 텐데,


뭔가 빵빵했다. 오늘은 수업이 없으니까 기껏해야 필통이나 파일첩,
지갑 정도가 고작일 텐데, 부자연스럽게 뭔가가 채워져 있었던 것이
다.
“……그건 뭐야?”
“갈아입을 옷.”
“그건 왜?”
“재워 줘.”
말끝에 하트 마크가 붙어 있기라도 할 것처럼 발랄하면서도 교태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부탁하는지라 그 말을 들은 아마네가 얼굴이
한껏 찌푸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 말이다, ‘Ho-Ren-So6)’라는 말을 알기나 하냐?”
“응, 알아. 방문, 연야, 소음 말이지.”
“그건 단순히 밤중에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 멍청이지. 소란을 피울
생각이야?”
“농담이야. 재워달라는 건 진담이지만.”
이츠키가 사전에 허락을 구하지 않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다른 사람 집에 묵어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는 뜻
인데, 그럴 사정이 생각나질 않았다.
“아침에 아버지랑 싸웠어.”
그런 아마네의 의문에 답하듯이, 이츠키는 곧바로 사정을 밝혔다.
“……치토세 일로?”
“응. 우리 아버지는 한번 화내면 며칠 동안은 이야기를 들으려 하
지 않거든. 그동안 치이의 집에만 계속 묵을 순 없잖아. 치이의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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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님이 받아주신다고 해도, 역시 좀 그렇지.”


“우리 집은 괜찮다는 거야?”
“너라면 묵게 해 줄 거라 생각했어.”
방을 잘 정리하지 않고 살았을 때도 몇 번인가 묵었던 적이 있으니
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마네도 딱히 이츠키가 묵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식사를 만들어 주러 오는 마히루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
제였다.
마히루가 쉬는 곳에서 천사님 모드를 억지로 유지하면 정말 힘들지
않을까?.
아마네에게만 민낯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이츠키 앞에선 감추려고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최근에 마히루가 묘하게 귀여운 행동을 하거나
부끄러워할 때가 있어서 자꾸 여자로 의식하고 마는데, 이츠키가 그
걸 보고 착각할 것 같아서 무섭다.
“……그 애한테 연락을 좀 해 볼게.”
마히루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는지라 메시지를 보내 봤다. 대개는
귀가하기 전에 아마네에게 장을 볼 품목을 메시지로 보내니까 그때
쯤에는 확인할 것이다.
익숙한 동작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아마네를 보면서, 이츠키는 무슨
이유인지 감탄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같이 살기라도 하는 거야?”
“너는 난방과 이불 없이 그냥 바닥에 재울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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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묵게 해 주는 친절을 칭찬해야 할까, 얼어 죽으라는 냉대를 한탄


해야 할까.”
“나는 너의 그 이상한 망상을 한탄하고 싶어.”
‘이 인간이 무슨 소리래.’라는 눈빛으로 보자 이츠키는 어깨를 으쓱
했다.
어깨를 으쓱하고 싶은 건 아마네다. 묘한 착각으로 마히루의 마음
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이츠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아니까 마히루를
놀리지는 않겠지만, 마히루가 없는 데서 미묘하게 놀릴 것 같은지라
약간 우울해졌다.
이츠키가 웃는 걸 보고 한숨을 쉬었더니, 아마도 우연히 스마트폰
을 본 것으로 보이는 마히루가 『식재료를 3인분 사오면 별 문제없
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허락하는 취지의 답장을 줬다.
“괜찮대.”
“얏호,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겠네.”
“그게 목적인 건 아니겠지?”
“약간은 노리고 있었어. 아마네가 절찬하는 요리를 한번 맛보고 싶
긴 했거든.”
“……그 애를 너무 귀찮게 하진 마.”
“널 귀찮게는 해도 그 사람에겐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나한테도 귀찮게 굴지 마.”
히죽거리면서 웃는 이츠키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자 “아얏!”하고 비
명을 지르면서도 유쾌한 표정으로 웃는지라 아마네는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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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런데 언제까지 있을 거야?”


하굣길에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한숨을 돌리는 중에 자기 집처럼
편하게 앉아 있는 이츠키를 봤다.
요새는 마히루가 있어서 자주 올 순 없지만, 이 집에 몇 번이나 온
적이 있어서 익숙한 장소로 여기는 것 같았다.
외모가 잘생겨서 다리를 꼰 자세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멋있게
보이는 이츠키는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는지 허공을 보면서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음, 일단 3일 정도는 여기서 지내면 좋겠어. 진짜 귀찮아 죽겠단
말이지.”
“네 아버지는 나쁜 분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주장을 잘 받아들
이는 분이 아니니까 말이지.”
“똥고집에 꽉 막힌 시대착오 아저씨라고 말해도 돼.”
“그건 좀….”
“부모가 자식이 사귀는 사람을 일일이 따지는 걸 어떻게 참아.”
이츠키는 “어차피 성인이 되면 집을 나갈 텐데.”라고 말하면서 혀
를 내밀었지만, 진심으로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이츠키의 아버지는 일관적인 남자라서 한 번 마음에 들면 친절하게
대해 주는 타입이다. 치토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
네가 봤을 때는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치토세와의 교제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 집안이 나름대로 명
문가라서 아들이 격에 맞는 여자를 택하길 바라는 점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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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덧붙여서 단순히 이츠키의 아버지가 치토세를 부담스럽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조건 부정하는 것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이츠
키는 “자꾸 그러니까 집을 나가려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아마네 너는 좋겠다. 내버려 두시니까.”
“우리 부모님은 진짜 사이가 좋으니까. 자식도 자기가 좋아하는 상
대를 고르길 바란다나 봐.”
“정말 너희 부모님이 부럽다.”
엄격하게 자란 결과, 폭발하는 바람에 지금의 이츠키가 되었다고
하니 그 말을 너무 부정할 수도 없었다.
머리를 밝은색으로 물들여서 경박해 보이게 꾸민 것도 본인의 말에
따르면 반항이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모님은 존경하고 있잖아.”
“인간으로선 존경하지만 부모로서는 빵점이야. 찍어 누른다고 다
되는 게 아닌데 말이지……. 적절히 당근을 줘도 되는데 채찍질로만
키우려고 드니까 오히려 걷어차이는 거라고.”
“당근을 받는 사람이 그렇게 인식해도 되는 거야?”
“방목하면 알아먹었을 텐데, 우리에 가두고 목줄까지 채우려고 하
니까 이빨을 드러낸 건데 말이지.”
이츠키는 “몇십 년이나 살았으면서 그런 것도 모르나 봐.”라고 말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고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뭐, 며칠 동안은 여기서 편히 지내. 다행히 방학 기간이라서 시간
도 있으니까.”
“역시 친구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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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들러붙지 마, 징그러워.”
“마음에 상처를 받았어! 위자료로 시이나의 요리를 달라!”
“상처를 안 받았어도 먹을 거잖아.”
“에헤헤.”
“귀여운 척하지 마. 쏠리니까.”
“너무하네. 더 직접적인 표현을 쓰다니…… 으흐흑.”
의도적으로 우는 시늉을 하는데 얼굴은 웃고 있어서, 아마네는 어
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츠키를 보면서도 아주 조금 안도했다.
이츠키가 아버지와 싸우는 일은 종종 있지만, 오늘 아침에는 조금
심각했던 모양이다. 학교에선 왠지 억지로 활기차게 구는 것 같았는
데, 조금은 기운을 차린 것 같다.
뭐, 본인에겐 도저히 말하지 못하니까. 아마네는 이츠키에게 쌀쌀
맞게 대하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해가 진 뒤에 마히루가 아마네의 집을 찾아왔다.


빈손인 것은 이미 아마네가 부탁받은 대로 식재료를 준비했기 때문
이리라.
이츠키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사전에 했으니까 편하게 늘어져 있
는 이츠키를 보고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츠키가 미묘
하게 당황했을 정도다.
“오랜만이네요, 아카자와 군.”
“나야말로 오랜만이야. 갑자기 사랑의 보금자리에…… 아야, 아야
야, 알았어, 농담이야. 갑자기 쳐들어와서 미안해. 익숙하지 않은 사
람이 와서 불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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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가 말없이 발을 밟았기 때문에 슬쩍 신음했지만, 그래도 이


츠키는 인상 좋게 싱글싱글 웃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사람이 많으면 즐거우니까요.”
“이 녀석이 있어 봤자 시끄러울 뿐이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타이르는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자 이츠키가 히죽거려서, 아마네
는 마히루의 눈을 피해서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래 봤자 이츠키의 몸은 남자의 이상적인 체형이라서 꼬집을 살이
거의 없었지만.
“그럼 저는 저녁을 만들어 올 테니까 편히 쉬고 계세요.”
둘이서 자잘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더니, 마히루는 천사 같은 미
소를 생긋 지은 뒤에 앞치마를 하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역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상대는 아마네에게
맡기겠다는 뜻 같았다.
마히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츠키는 히죽거리던 웃음을 거뒀다.
“……열쇠를 줄 정도로 사이좋구나.”
“시끄러워.”
이제는 완전히 일상적인 절차가 되었으니 별생각 없이 그냥 열쇠로
열고 들어왔겠지. 인터폰을 누르지 않고 들어오는 바람에 이츠키가
눈치채고 말았다.
“편히 쉬고 있으란 말도 시이나에겐 이곳을 자신이 있을 곳으로 인
식했으니까 나왔겠지? 저 태도는 완전 부인처럼 보이는데.”
“쫓아내도 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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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농담……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인식해 주면 좋겠어.”
붙잡으려고 하자 이츠키가 도망쳐서 카펫 위에 앉아 게임기를 켰
다. 그래서 아마네는 소파에서 내려와 등을 무릎으로 쿡쿡 찍으면서
옆에 앉아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잠시 후 접시를 내놓는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 아무리 그대로 마히
루에게 일을 전부 떠넘길 수는 없는지라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도와줄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가면 될까?”
“고마워요.”
늘 그랬듯이 접시에 담긴 음식을 테이블에 늘어놓기 시작하자, 이
츠키가 미묘하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참 뭐랄까…….”
“왜?”
“아니, 말하지 않을게.”
끝까지 말하지 않고 게임기를 정리하는 이츠키를 보면서, 아마네는
“뭔데?”라고 아주 조금 곤혹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 세 사람은 마히루가 만든 요리를 두고 같이 식


사했는데, 이츠키가 실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맛있어…….”
“고마워요.”
단정한 자세로 먹고 있던 마히루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
사님의 미소이긴 했지만, 비밀을 아는 상대라서 그런지 아주 조금 솔
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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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는 정신없이 요리를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츠키는 아마네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을 미리 말했기 때문에 평소
보다 많이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순식간에 다 먹어치울 기세였다.
“캬, 이런 요리를 매일 먹는 아마네는 정말 복에 겨운 녀석이라고
할까…….”
“그건 나도 알아. 오늘도 맛있는걸.”
“……고마워요.”
된장국을 호로록 마시면서 감상을 말했다.
자연스럽게 표정이 풀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육수와 된장의 풍미
가 정말 끝내준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지만, 만든 장본인은 그 자각이 없는 것 같은지라 칭찬하는 것이 어
느새 일과가 되어 있었다.
본인의 인품이 그대로 밴 것처럼 푸근한 그 맛은 혀뿐만 아니라 가
슴까지 편안하게 해 주니까, 이츠키가 푹 빠지는 것도 이해한다.
“하아, 맛있어.”
오늘은 아마네가 좋아하는 달걀말이를 만들어 줘서 평소보다 밥이
잘 넘어간다. 물론 매번 맛있으니까 밥을 한 공기 추가할 기세로 먹
지만. 역시 달걀 요리가 있으면 식욕이 달라진다.
정말 맛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양이 넘치는 요리에 입맛을 다시고 있
었더니, 이츠키가 아마네와 마히루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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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보란 듯이 고개를 저은 뒤에 열심히 밥을 먹는 이츠키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아마네는 온화하게 자신들을 보고 있는 마히루
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녁을 먹은 후, 마히루는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에는 아마네가 목욕하기 전 오후 9시까지는 이 집에 머무르지
만, 오늘은 이츠키가 있어서 자리를 피해 주려고 더 빨리 자기 집에
간 것 같았다. 아마네가 빨래하고 있는 사이 이츠키와 무슨 대화를
나누다가 약간 머쓱해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그것도 하나의 이유인
것 같았다.
이츠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자 ‘단순한 잡담과 치이 이야
기’라고 대답해서 더는 추궁할 수 없었지만, 분명 다른 일을 화제로
언급했을 것 같다.
“저기, 아마네.”
자기 전 아마네의 방에 이부자리를 깔던 이츠키가 침대에 앉은 아
마네를 쳐다봤다.
“왜?”
“너 말이다, 시이나에게 그렇게 자상한 얼굴을 보이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
“딱 봐도 좋아한다는 걸 뻔히 알 수 있거든?”
“쫓아낸다.”
“아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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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이 또 뭐래.’라는 눈으로 노려봤지만, 이츠키는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평소 히죽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왠지 감탄한 것처럼 기뻐하
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네가 솔직하게 굴지 못하는 건 늘 있었던 일이지. 나는 기쁠
뿐이야. 아마네의 좋은 점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서.”
“뭐?”
“왜 자꾸 싸우려고 드는데……. 같은 반 아이들은 아마 널 어둡고
무뚝뚝하고 존재감이 없는 수수한 남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거
야.”
“그건 나도 알아.”
반에서 아마네의 위치는 수수하고 무뚝뚝하며 이렇다 할 특기도 없
는 눈에 띄지 않는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시험 후에 게시되는 등수표
를 챙겨 보는 인간이라면 그럭저럭 머리가 좋다는 사실이 추가되는
정도일 것이다.
이츠키처럼 세련되고 활기찬 미남이나 유타처럼 상큼한 왕자님 계
열인 미남의 기준에서 본다면 아마네는 무개성에 가까웠다.
의식적으로 눈에 띄지 않으려고도 하지만, 아마네의 평가치는 결코
높지 않다.
“하지만 그건 외모만 봤을 때의 평가이지 네 내면의 평가는 아니
야. 내면을 보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면 네 좋
은 점을 보기가 힘들지.”
이츠키가 아마네를 가만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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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츠키의 눈빛이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고


아주 진지했기 때문이리라.
“너는 엄청 좋은 자식인데, 사람들이 모르는 건 아깝단 말이지. 그
래서 시이나가 너의 내면을 보면서 친해진 것은 나로선 정말 기쁜 일
이야.”
“이츠키…….”
“그러니까 어서 사귀라고. 그리고 더블 데이트를 하는 거야.”
“네 결론은 결국 그거냐.”
감동해서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츠키는 농담으로 얼버무리지 않으면 배길 수 없는지 시선
을 돌리고 있어서, 그걸 보면 쑥스러움을 숨기려고 그랬다는 추측도
할 수 있었다.
“치이도 좋아할 거야.”
“혼자…… 아니 둘이서 다녀와. 우리를 끌어들이지 말고. 아니, 설
령 그런 관계가 된다고 쳐도, 내 외모로 괜찮겠어?”
“아니, 그때는 소문의 남자 모습이 되어야지. 그 남자 버전을 보고
싶어.”
“싫어.”
“그거냐? 시이나한테만 보여주고 싶다는 남자의 마음이냐?”
“이츠키, 추운 날씨에 밖에서 영면할 것인지, 입 다물고 따뜻한 실
내를 향유할 것인지 하나만 골라.”
“죄송합니다―.”
이부자리 위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이츠키를 보면서 “너란 녀
석은 정말이지…….”라고 어이가 없는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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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는 아마네에게 여친이 생기면 아마네도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마히루와 사귀는 사이가 될 리가 없잖아.)
지금도 자신을 돌봐 주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폐를 잔뜩 끼치고 있
는데, 사귀게 되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의지할 것 같아서 두려웠
다. 지금도 이미 변변치 못한 상태인데 사귀기라도 했다간 훨씬 더
타락한 상태로 급강하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히루는 남자를 기피하고 있다.
아마네와 슈토, 아마네가 신뢰하는 이츠키에겐 그렇게 거부감을 보
이진 않지만, 가끔 학교에서 보는 마히루는 다른 여자보다 남자를 막
는 벽이 두꺼웠다. 천사님이라는 가면을 쓰고 책잡힐 일과 위화감 없
는 모습을 유지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백을 받는데도 교제 경험이 없는 걸 보면 남자를 완
전히 피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아마네는 애초에 어중간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
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까지 하므로, 현재 상태의 마히루와 어떤 의미
가 있는 관계가 되고 싶진 않았다.
마히루도 그런 마음은 없을 테니까 사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망상
인 것이다.
“……그래도 뭐, 시이나가 그만큼 널 신뢰하니까. 그걸 전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하기 전에, 똑바로 봐 주라고.”
아마네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하는 이츠키를 보면서 아마네
는 “……그러냐.”라고만 중얼거린 뒤에 이불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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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하게 잇군만……! 나도 마히룽의 요리를 먹고 싶어―!』


다음 날, 아침부터 치토세가 아마네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런 푸념
을 늘어놓았다.
듣자니 이츠키가 어제 치토세에게 그렇게 연락한 모양이다. 어제
테이블 준비한 식사를 마치 여자처럼 사진을 찍는다 싶었는데, 치토
세에게 보내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나에게 따져도 소용없어. 시이나한테 물어봐.”
『그럼 마히룽이 좋다고 하면 나도 먹으러 가도 돼?』
“그야 뭐…….”
『알았어! 그럼 마히룽에게 물어보고 다시 연락할게!』
치토세가 기운차게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가 시끄러워서 스마트폰을 살짝 귀에서 떼고 있었던 아마네
는 치토세의 행동력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지, 황당해하는 표
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보고 있던 이츠키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이는 참 활기차다니까.”
“네 여친의 폭주 습성은 어떻게 좀 안 되냐?”
“안 돼. 치이는 좋아하는 건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드러내는 타입이
거든. 애정이 깊어서 그래.”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는 이츠키를 보면서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
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치토세의 기력과 누구하고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밝은 성격은 좋
은 점이고 아마네에겐 없는 부분이라 부럽게 생각하지만, 그 치토세
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는 마히루가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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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마히루에게 사과하면서, 아무튼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것


을 데워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래서 왔습니다!”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치토세가 나타났다. 짐으로 보이는 가방을
메고 왔는데, 손에는 식재료가 가득 든 장바구니를 들고 있고, 그 옆
에서는 마히루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모양이다. 치토세와 함께 장을
보고 나서 함께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안 그러면 둘이 나란히 장바
구니를 들고 있을 리가 없고, 치토세는 맨션 현관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엄청난 행동력이네…….”
“마히룽의 집에서 잔다고 하니까 한시도 참을 수가 없었어!”
“……자고 가게?”
“마침 봄 방학 기간이니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마히룽도
허락해 줬어!”
치토세가 “그렇지?”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으며 마히루를 보자, 마
히루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허락했군.)
치토세의 기세에 밀린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일에 살짝 곤
혹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납득하고 받아들인 거니까요.”
냉장고에 재료를 넣으러 가던 마히루가 지나칠 때 아마네에게만 들
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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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안을 꿰뚫어 본 것 같아서 아마네는 쓴웃음을 짓고 저녁때


쓸 식재료를 냉장고 안에 넣는 마히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치토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히룽의 요리, 엄청 기대된다.”고 말
하고 이츠키 옆에 찰싹 붙어 닭살 행각을 벌여서, 아마네는 앉을 자
리를 잃고 그냥 부엌으로 이동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아마네 군은 요리를 못 하잖아요.”
거실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줄여 이름을 부르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어렴풋이 쓴웃음을 지었다.
“야채를 뜯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거든? 아니, 지시만 내리면 간단한
일 정도는 할 수 있고, 실제로 요리도 만들어서 보여준 적도 있잖
아.”
“……그럼 도와주세요. 저쪽에서 같이 있기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죠?”
“잘 알고 있네. 저 녀석들, 지금 알콩달콩 놀고 있어.”
어깨를 으쓱한 뒤에 수돗물로 손을 씻었다.
마히루를 도와준다고 해도 딱히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만, 그렇다고 요리를 전혀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량이나 재료 손
질을 도와줄 수는 있으므로 한동안은 연인들의 애정행각에서 고개를
돌린 채 마히루의 서포트에 전념하겠지.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오므라이스와 야채 포타주, 샐러드에요. 치토세 양이 밥 위에 얹
은 오믈렛을 나이프로 가르면 펼쳐지는 반숙 타입의 오므라이스를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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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야호.”
“달걀 요리를 참 좋아하네요.”
“달걀은 좋아. 그리고 네가 만든 달걀 요리가 가장 맛있으니까 엄
청 기대돼.”
마히루의 요리는 꽝이 없으니까 좋아하는 달걀 요리라면 더욱 기대
가 된다. 전에 먹었던 비프스튜 오므라이스는 최고로 맛있었다. 그건
매주 먹어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치토세가 참 바람직한 요리를 요청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엄지
를 척 세우고 기쁜 마음으로 4인분 쌀을 계량해서 씻고 있었는데, 정
작 마히루는 냉장고 앞에 선 채로 굳어 있었다.
“왜 그래?”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기습하면 안 돼요.”
“무슨 뜻이야?”
“몰라도 돼요.”
고개를 홱 돌리고는 수프 재료를 썰기 시작한 마히루를 보면서, 아
마네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러면서 사귀지 않고 있으니까, 잘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정―말 맛있었어―!”
점심을 다 먹은 치토세는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배를 쓰다듬었
다.
표정을 봐도 매우 만족했음을 알 수 있어서, 마히루는 기쁜 듯 미소
를 짓고 있었다. 남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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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오늘의 갑작스러운 습격도 본인이 느끼기에 불쾌한 일은 아닐 것 같


다.
“와~ 시이나는 뭐든지 잘 만드는구나. 반숙 오믈렛을, 용케도 그렇
게 속이 촉촉한 상태로 오믈렛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니.”
“요리를 가르쳐 준 선생님 덕분이죠.”
“요리 교습을 받았어?”
“네, 그런 셈이죠. 혼자 생활해도 곤란하지 않도록, 누군가에게 요
리를 대접해도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들었어요.”
“헤에―! 이렇게 요리를 잘 만들 수 있게 가르친 걸 보면 정말 실력
이 좋은 선생님이었나 보네!”
마히루가 말하는 사람은 아마 예전에 말한 적이 있던 그 가사도우
미일 것이다.
마히루의 친가에서 유일하게 마히루에게 자상하게 대해 줬다던 그
사람이 틀림없겠지.
“나도 그 사람한테 배우면 요리를 잘할 수 있을까.”
“너는 호기심을 참고 모험만 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잘 만들
수 있잖아.”
“뭐? 하지만 모험이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걸.”
“그런 점만 없으면 너는 뭐든 대부분 잘할 텐데 말이지……. 그 호
기심과 장난기가 모든 걸 다 망친단 말이지……. 얌전히 조리법대로
만들면 되는 것을…….”
치토세는 이상한 장난만 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분야에서 평균 이
상으로 해낼 수 있지만, 그 차분하지 못한 성격과 나쁜 버릇 때문에
전체적인 평가가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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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고양이처럼 자유분방 마이웨이 성격인 치토세가 고양이처럼 새침


하게 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리라. 얌전히 굴려면 굴 수는 있지만
피곤하다고 한다.
일부러 의식하고 본성을 숨길 수 있으면 차분한 여자가 되겠지만,
본인의 천성이 그걸 허용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리도 그렇지만, 네 말과 행동에도 조금은 차분한 모습을 보여
봐. 여기에 좋은 예가 있잖아.”
“에이, 마히룽처럼은 되고 싶어도 못 돼. 답답할 것 같아.”
“그런 말은 시이나에게 실례잖아.”
“응, 하지만 마히룽은 답답해 보인다고 할까,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때때로 치토세는 놀랄 만큼 본질을 잘 꿰뚫어 볼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마히룽이 지루해 보이니까.”
“……그렇게 보였나요?”
“음~. 반이 다르니까 정확하게 파악한 건 아니지만, 지루해 보인다
고 할까, 몇 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누구나 친절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한테도 마음
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보인다고 말한 것치고, 치토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
다.
누구에게도 친절하고 친하게 지내는 착한 아이처럼 굴고 있지만,
그 가면 안쪽으로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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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마히루는 착한 아이로 있으려고 하기 때문에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더더욱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걸 본인이 가장 잘 자각하고 있으므로 약간 표정이 어두워졌지
만, 치토세는 생긋 웃으면서 옆에 있는 마히루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선 마히룽은 엄청 귀여운 표정을 지으니까
이쪽이 진짜 모습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거든? 나는 이쪽이 더
좋아―.”
‘에헤헤.’ 하고 웃으면서 마히루에게 한껏 들러붙는 치토세의 행동
에 마히루는 한순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한자리에 고
정시키지 못했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치토세와 몸을 붙
이고 있었다.
“마히룽은 있지~, 좀 더 솔직해져도 좋을 것 같아~. 아마네라면 마
히룽의 애교나 응석도 잘 받아줄걸? 쟤는 이래저래 말은 많아도 마
음을 터놓은 사람에겐 엄청 자상하니까, 마히룽이라면 애교 한 방으
로 함락할 수 있을 거야”
“안 해요!”
“어?”
“……치토세 양이 기대하는 그런 일은 없어요.”
고개를 홱 돌리는 마히루를 보고 치토세는 웃는 얼굴로 “그런가
~?”라고 되물어보면서 무슨 이유인지 아마네를 봤다.
자신을 본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마히루가 자발적으로 의
지하지 않는 한, 완전히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먼저 나서서
마히루를 도와줄 수 없다. 마히루 본인은 자신의 두 다리로 서 있기
를 바라고 있으니까, 그 뜻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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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래도 만일…… 기대게 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면……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지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혼자서 끌어안고 있는 것을 아마네에게도
보여주면서 쓰러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면, 당연히 그 작은
등을 받쳐 줄 자신이 있다.
그만큼 자신이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부끄러워
졌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치토세와 마히루가 친하게 지내
는 모습을 바라봤다.
“캬, 미소녀끼리 사이좋게 지내니까 눈이 호강하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츠키의 변태 발언은 무시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마히루에게도 솔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동성 친구가
나타나 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안도했다.
치토세는 당연히 마히루의 집에서 묵었다.
이츠키와 함께 있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잇군은 자주 자고 가니
까 마히룽이 좋아.”라면서 저녁을 먹은 뒤에는 신나게 마히루의 집
에 갔다.
두 사람이 너무 사이가 좋아서 치토세의 집에 자주 묵는다는 건 알
고 있으니까 그 발언이 딱히 이상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자
주 자고 간다는 사실이 미묘하게 낯뜨거운 기분을 들게 했다.
그런 아마네에게 이츠키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은근히 밝히는
녀석일세.”라고 속삭이는지라 일단 발을 밟아 줬다. 그나마 새끼발
가락을 밟지 않은 건 최소한의 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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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너 말이야. 부끄러운 걸 감추려고 발을 밟는 짓은 이제 그만 좀 하


지그래?”
“이상하게 추측한 네가 잘못한 거야.”
잠자리에 들 때 이츠키가 그런 불만을 제기했지만, 아마네는 고개
를 돌려 외면했다.
진심으로 밟은 건 아니고 고통도 금방 가실 수준으로 힘을 조절했
으니까 이츠키도 심각하게 나무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남자끼리의 가벼운 장난 같은 것을 두고 상대를 헐뜯으려하는 짓을
아마네나 이츠키나 할 리가 없었다. 이츠키도 가끔 때리곤 하는지라
이런 실랑이는 자주 있는 편이다.
“사귀는 사람 집에서 자는 것도 요즘엔 흔한 일이잖아. 딱히 이상
한 일도 아니라고.”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아니, 이런 이야기도 이제는 할 필요가 없잖
아.”
“남자라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정석인 것 같아서.”
“정석이 아니니까 난 사양할게.”
친구 커플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았기에 이 이야기는 이
제 끝내자는 뜻을 담아서 이츠키를 노려보자 유쾌한 표정으로 깔깔
웃었다.
“넌 진짜 초식남이라고 할까, 순진남이구나.”
“확 때려 버린다.”
“뭐, 그래서 시이나도 마음을 허락했겠지. 네가 엄청 적극적인 자
세를 보였다면 절대로 다가가지 않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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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이츠키가 “잘됐네!”라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고 엄지를 척 세우는


것을 보고는, 아마네는 마히루에겐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떫은 얼굴
로 이츠키를 봤다.
하지만 이츠키에겐 전혀 효과가 없었는지 웃는 소리가 더 커졌다.
혀를 차면서 이츠키를 노려보려 했을 때 옆에 둔 스마트폰에서 경
쾌한 전자음이 울려 퍼졌다.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신호로 설정한 소리이므로 이츠키를 노려
보는 건 일단 중지하고 스마트폰 화면을 보니, 치토세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일 예정이라도 물어본 건가 싶어서 앱을 열어보니, 메시지 한 건
과 사진을 보낸 것 같았다.
『이것 봐, 마히룽이 엄청 귀여워! ※허가는 받았어.』
그런 문장 한 줄과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찍은 것은 마히루가 침대 위에서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뒤에는 침실의 정경도 찍혀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딱히 대단한 사진도 아니겠지만, 문제는 복장과 표정
이었다.
마히루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잠옷으로 입고 있는 것이 소
매가 길고 넉넉하게 생긴 원피스 타입의 파자마, 소위 네글리제라고
하는 것인데, 마히루의 기품과 청초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연분홍색
이라는 점이 한층 더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잘 드러내서 정말 귀여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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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목욕을 막 마치고 나왔는지 소매랑 목깃 사이로 비치는 살결은 전


체적으로 상기된 것처럼 약간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 까닭에 노출이 없는데도 묘하게 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청초하다
는 상반된 인상을 동시에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마히루의 표정일 것이다.
아마네가 준 곰 인형을 무릎 위에 얹은 마히루는 카메라를 보지 않
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무 깊이 숙이진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다 숨기지 못한 상
태인지라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볼에 드러난 장미 같은 빛깔은 목욕한 직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
이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흐트러진 것처럼도 보이는
그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섹시하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무릎 위에 놓고 손을 얹고 있는 곰 인형 때문에 귀여운
분위기도 더 강해졌기 때문에 사진만 보고 있는데도 볼이 안쪽부터
뜨거워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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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저 바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진을 보낸 거야?
왜 자기 전의 아마네에게 보여 준 것일까. 이런 걸 보여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들 수가 없잖아.
“왜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어? 무슨 이상한 사진이라
도 보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뭘 보는 건데.”
얼굴을 쓱 들이밀면서, 미처 숨길 틈도 없이 이츠키의 눈이 스마트
폰에 표시된 메시지를 봤고, 그런 뒤에 씨익 하고 웃었다.
“과연 그랬군. 아마네 군은 정말 순수하네요.”
“영원히 잠들어라.”
“죽으라고 돌려서 말하는 거야?”
“직접적으로 말해 줄까?”
“쌀쌀맞긴. 아니, 그래도 뭐 그 천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남자라
면 뭔가 확 끌리는 게 있겠지. 아니, 나한테는 치이가 가장 아름답지
만.”
“마음껏 자랑해 봐, 멍청아.”
정말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
면서 한숨을 쉬었을 때 찰칵 하고 셔터 소리가 났다.
“……이츠키.”
“아니, 치이가 아마네 사진도 기념으로 찍어두라는 메시지가 왔거
든. 넌 남자니까 사진을 찍어도 딱히 문제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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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건 그렇지만 나를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딱히 다른 사람에게 유출하진 않을 테니까 안심해. 그리고 의미는
있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아마네가 황당하다는 표
정으로 이츠키를 봤지만, 이츠키는 그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을
뿐이었다.
자신을 찍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작게 투덜대면서 큰 한숨
을 쉬는 아마네를 보면서 이츠키는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자기 자신
에게 무심한 건지 모르겠다니까.”라고 아마네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곤해…….”
이츠키와 치토세가 묵고 돌아간 뒤에 아마네와 마히루는 둘이 나란
히 소파에 기대 앉았다.
일단 예정했던 3일이 된 오늘 아마네의 집에서 자는 건 끝내기로
했으며, 앞으로 하루나 이틀은 치토세의 집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했
다. 며칠 정도는 치토세의 부모님도 환영하겠지(매일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역시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는지라 사양했다고 한다.).
마히루가 만든 점심을 먹고 “그동안 실례했어. 남은 시간은 둘이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웃으면서 남긴 뒤에 떠났다. 제멋대로 망
상하는 것 같았지만, 따지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마히루는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다기보다는 큰일을 치렀다는 느낌이네요. 그래도 즐거
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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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그렇군.”
적어도 아마네가 마히루와 안면을 튼 이후로 마히루가 친구를 집에
부른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아니까, 치토세가 그런 계기가 되어 준 것
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네가 모르는 곳에서 치토세와도 만나거나 때때로 같이 노는 것
같았으니 친한 친구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게, 갑자기 사진을 찍어서 놀라긴 했지만요…….”
“아, 응, 그거 말이구나.”
사진이라는 말을 듣자 어제 그 청초하면서도 요염한 모습이 떠올랐
고, 저절로 볼이 빨개졌다.
딱히 큰 노출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역시 네글리제는 얇은 옷이라
서 부드럽게 부푼 부분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이 보이기도 했기 때문
에 실로 눈에 해로웠다. 오히려 노출이 없는 것이 요염함을 더 강조
했다.
남자의 본능에 따라 그만 얼떨결에 저장해서 폴더에 넣고 말았지
만, 엄청나게 죄책감이 들었다.
“어제는 ‘귀여워―!’라고 말하면서 사진을 자꾸 찍어서 뭘 보냈는지
모르겠는데, 뭘 보냈나요? 기세에 눌려서 허락은 했지만, 너무 부끄
러운 사진이면 곤란한데요…….”
치토세는 보낸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도 베스트 샷을 아마네에게 보냈겠지만, 본인은 그런 표정을
지은 사실을, 그걸 찍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본인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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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부끄러운 차림을 한 것도, 옷이 흐트러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사진은 파괴력이 너무 강하다.
“어, 그게, 그러니까, 곰 인형을 무릎 위에 놓은 사진이었어.”
“고, 곰 아저씨를, 말인가요……?”
“소중히 여긴다는 건 사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거짓말은 안 했다.
하지만 죄책감이 심해서 폴더 깊숙이 봉인해 두자고 생각했다. 지
우지 않는 것은 미묘한 남자의 마음 때문이다.
곰 인형이라는 말을 들은 마히루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살며시 미소
를 지었다.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소중한 물건이니까요.”
뭔가를 소중히 여기는 듯한,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그런 부드러
우면서 따뜻한 눈빛과 미소를 보자 숨이 막혔다.
평소에 보이는 천사의 미소와는 다르게, 천진난만함과 모든 것을
감싸 주는 듯한 자애로움이 섞인 미소는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섬세
하고 아름다웠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끌어안고 싶어질 만
큼 애처로운 귀여움을 머금고 있었다.
“……아아, 응, 그랬, 구나. 꽤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야 물론 아마네 군이 골라 준 것이니까요.”
약간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잇자, 미소를 지으면서 갸륵한 말로 맞
장구를 쳐 줬다.
“걱정하지 않아도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매일 손질해 주고 쓰다듬
어 주고, 끌어안고 함께 자기도…… 아니, 지금 한 말은 취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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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손질해 주고 쓰다듬어 준다는 부분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것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귀여운 행위였다.
끌어안고 함께 잔다.
그 마히루가 곰 인형을 안고 잔다니.
아마네는 잠든 마히루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천사 같
았다.
그런 얼굴로 곰 인형을 사랑스럽게 안고 잔다니. 미소녀가 곰 인형
과 함께 잔다니.
상상해 보니 너무 귀여워서 계속 바라보고 싶을 것 같은 광경이 머
릿속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얼굴이 빨개졌다.
마히루는 마히루대로 자신이 한 말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으며, 눈
물이 맺힌 눈으로 아마네의 팔에 애원하듯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 잊으세요.”
“아, 아니, 그건 어려운데.”
“제가 곤란해진단 말이에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귀까지 새빨갛
게 빨개진 마히루는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아마네를 쳐다보고 있
었다.
그 표정이 더 파괴력이 강했지만, 마히루 본인은 그런 사실을 알 턱
이 없을 것이다.
“그, 그렇게 부끄러워? 딱히 곤란할 일은 아니잖아.”
“어, 어린아이 같잖아요. 곰 인형과 함께 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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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상상해 보니 엄청 귀여우니까, 난 완전 괜찮다고 생각하


는데.”
“……상상하지 마세요.”
마히루는 부끄러워서 더 이상은 아마네를 직시하지 못하겠는지 자
신이 좋아하는 쿠션에 얼굴을 묻으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조차 귀엽다고 생각해 버린 자신이 여러모로 글러 먹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심코 귀여워해 주고 싶어졌다.
손을 내밀어서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지금 그
랬다간 역효과가 날 것이고 본인도 허락하지 않겠지.
근질거리는 손을 억지로 참으면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잠시 후 마
히루가 쿠션에 묻은 얼굴에서 눈만 슬쩍 돌렸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심하게 울상인 데다가 얼굴도 새빨갰지만,
기운은 있는지 약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네 군도 부끄러운 비밀을 밝혀야 해요. 저만 이러는 건
불공평하다고요.”
“뭐……?”
단순히 자폭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말대로 아마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비밀을 밝히라고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
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카자와 군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물어볼 거
예요.”
“언제 이츠키와 연락처를 교환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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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치토세 양이 가르쳐 줘서 연락할 수 있어요. 어제도 사


진…… 아뇨, 그냥 넘어가요……. 이제 됐어요…….”
마히루는 도중에 말을 끊고 다시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시 자폭한 것으로 보이는 마히루를 보면서, 아
마네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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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제9화 천사님의 이변과 진실

봄 방학은 딱히 이렇다 할 취미가 없는 인간에겐 꽤나 심심한 기간


이었다.
아마네도 딱히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독서와 산책이었
기 때문에 반 친구들은 아저씨 같은 취미라고 평가하면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취미가 그래서 야외 활동을 하러 나가거나 레저 시설을 찾아가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다. 누군가 같이 놀러 가자고 권하거나 초
청을 받지 않는 한, 외출도 러닝이나 산책, 식재료를 사러 나가는 정
도가 다였다.
이츠키는 고등학생인데 청춘을 즐기지 않아도 되겠냐며 어처구니
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어느 정도는 건강에 신경을 쓰면서 운동
하고 있으니까 딱히 상관없지 않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히루도 기본적으로는 자주 외출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운동하는 모습은 가끔 봤고 필요한 걸 사러 나가는 것도 봤지
만, 어딘가로 놀러 가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어디 놀러 가고 싶어지진 않아?”
자신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꽃다운 여고생이 그래도 되는
걸까…… 싶어서 저녁 식사 후에 마히루에게 물어보니, 잠시 고민한
끝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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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지금은 딱히…… 놀러 가고 싶은 생각이 없네요. 저는 실내 활동


을 더 좋아해서요.”
“뭐, 나도 그런 편이긴 하지. 나가 봤자 딱히 뭘 하겠냐는 생각만
들어.”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건요?”
“새해 시즌에 봤으니까 괜찮을 거야. 어차피 여름 방학에는 귀성할
테고. 그리고 마히루의 요리를 먹지 못하는 건 달갑지 않으니까.”
“……그, 그렇군요.”
이제는 마히루의 요리를 먹지 못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고, 매일 먹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이래저래 마히루가
같이 있는 것에도 익숙해졌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게 되기도 했
다.
역시 마히루의 귀여움이나 기특함, 갸륵함을 의식할 때가 많지만,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마히루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아마네의
성격에 잘 맞는다는 뜻이리라.
“뭐, 돌아가 봤자 어딘가로 계속 끌려다니는 바람에 지칠 것 같고
말이지.”
“……끌려다닌다고요?”
“행락지나 쇼핑몰 같은 곳. 나한테 별다른 예정이 없으면 어딘가로
끌려가. 중학생 때는 겨울 방학에 온천 여행을 간 적도 있어.”
시호코는 실내 활동파이면서, 야외 활동파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면서 무엇이든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선약이 없거나 아마네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꼭 어딘가로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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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려가려고 했다. 선택지를 주는 것은 양심적이지만, 한번 승낙했다간


계속 끌려다닌다.
유원지나 쇼핑몰 정도는 그나마 얌전한 수준이지만, 래프팅이나 서
바이벌 게임 등에 뭐든지 도전해 보자는 정신으로 같이 참가시키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그 가녀린 몸의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덕분에 다양한 것을 배우면서 몸도 나름대로 단련할 수 있었지만,
그 반동으로 스스로 즐기는 취미가 얌전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즐거울 것 같은데요.”
“그것도 매일 하다 보면 지쳐. 그 기운에 끌려갔다가 완전히 피폐
해진 상태로 신학기를 맞이한다고.”
“후후, 상상이 되네요.”
“네가 우리 집에 가 보면 알 거야. 오히려 네가 있으면 관심이 너에
게 쏠리겠지.”
“그, 그건 뭐…….”
만약 마히루가 부모님 집에 가면, 시호코는 기꺼이 데리고 나갈 것
이다.
그렇다고 해도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겠지만, 틀림없이 쇼핑이나
레저시설에는 데리고 갈 것이다. 딸을 가지길 원했던 어머니는 한창
때의 여자애, 그것도 마히루가 머무른다면 분명 희희낙락하면서 가
만두지 않을 것이다.
“여름에라도 가 보면 알 거야. 아마 엄청 다양한 곳에 끌고다니거
나, 옷 입히는 인형이 되겠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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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보나 마나 마히루 너를 데려오라고 할 것 같아.”


데려오라고 할 것 같다고 할까, 실제로 눈빛으로 그런 압박을 가했
다. 마히루를 데려오라고.
그때 그 반응을 보면, 여름 방학에는 아마도 시호코가 직접 마히루
에게 연락하지 않을까.
“아,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시, 싫다뇨! 오히려 기쁜걸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머리카락이 찰랑거리고 샴푸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응. 뭐, 일단 어머니에게 물어는 볼게, 아마 기꺼이 맞아들이겠지
만.”
“……고마워요.”
“피해가 분산되니까,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아이참.”
찰싹. 마히루가 손바닥으로 팔뚝을 살짝 때렸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건드린 느낌인데, 심장에 약
간 해로웠다.
자그마한 스킨십을 마히루가 먼저 하는 바람에 그만 가슴이 두근거
리고 말았다.
“……아마네 군?”
“아, 아니야, 딱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치고는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 스마트폰에 뭔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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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동요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화제를 돌리고 싶었기 때문에


진동하면서 알림 램프가 깜빡거리고 있는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관심이 그쪽으로 넘어갔는지 마히루는 “뭘까요?”라고 말하면서 궁
금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앱을 열었다.
내용을 읽는 건 역시 실례이기도 하고 지금은 그다지 눈을 마주치
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눈길을 돌리고 있었는데…… 툭 소리가 나는
바람에 마히루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마히루의 얼굴을 보고, 바로 경직하고 말았다.
마히루는 스마트폰을 무릎 위에 놓은 쿠션에 떨어트리고, 울 것 같
은, 마치 부모와 떨어진 미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거나, 입가가 일그러졌다거나, 그런 것도 아
닌데…… 만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느끼게 했다.
이 표정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렇다. 처음 대화했을 때의 표정과 아주 비슷해서――.
“……마히루?”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마네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 전에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전 슬슬 가 볼게요. 내일은 볼일이 생겨서 저녁 식사는 어려
울 것 같아요. 죄송해요.”
마히루는 뭐라 한마디 할 틈도 없이 아마네에게 통보하고,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났다.
손을 뻗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무시한 걸
까. 내민 손바닥은 공기만을 움켜쥐었다.
(왜,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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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딱 봐도, 메시지를 받은 것이 원인일 것이다.


마히루의 표정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아마네가 아는 한에서 하나
밖에 없다.
“……마히루의, 부모님.”
마히루는 남에게 연락처를 잘 알려주지 않아서, 매우 적은 사람만
이 메시지 앱의 ID를 알고 있다.
아마네와 시호코, 치토세에 이츠키, 입이 무거운 같은 반 여학생 몇
명까지는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밖에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부모님 정도가 다이지 않을까.
부모님한테서 연락이 온 거라면.
어제까지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피한 것은, 어쩌면 부모님과 만나니까 그런 게 아닐까.
마히루가 부모님과 불화가 있음을 알기에, 그런 표정을 지은 건 부
모님이 원인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할 수 있다.
추측해 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마히루.”
떠날 때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뭘 어쩌지도 못하고 지금은 여기 없는 소녀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
면서, 방금까지 마히루의 무릎에 놓여 있던 쿠션을 주먹으로 쳤다.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칙칙한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햇
빛은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뭔가 쏟아진다면 그것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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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이 아니라 빗줄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3월도 후반에 접어들었는데도 쌀쌀했다.
난방을 켜고 소파에 앉았지만 왠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시선
이 자꾸만 마히루의 집 쪽으로 향했다.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오늘이 아마 마히루가 부모님과 만나는 날
이지 않을까.
오늘은 저녁을 차리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부모님과 만난
후의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렇게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은 마히루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에 응어리가 맺힌 것처럼 불쾌했다.
참지 못하고 『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줘 』 라는 메시지를
보낼 만큼 걱정이 되었다.
그렇듯 차분하지 못한 상태로 방을 둘러봐도 소용이 없어서, 일단
저녁밥을 확보하러 슈퍼로 갔다.
장을 볼 때도 마히루의 얼굴만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표정
을 짓게 하는 부모와 만나는 건 몹시 괴롭지 않을까.
왠지 겁먹은 것처럼도 보이는 그 표정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입술
에 힘이 들어갔다.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바로 표정을 풀었지만, 기분은 도
저히 밝아지지 않았다.
바구니에 슈퍼에서 만들어 파는 반찬을 담는 손길이 살짝 난폭해지
는 바람에 내용물이 넘쳐서 조금 후회했다.
한숨을 푹 쉬면서 상품을 계산한 뒤에 흐린 하늘을 보면서 느릿느
릿 걸어서 집에 갔고――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자신의 집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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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는 층에 왔을 때 이변이 일어난 것을 느꼈다.


자신의 집으로 통하는 복도로 발을 내밀었다가 멈추고는 잠시 몸을
숨겼다.
마히루의 집 현관 앞에 사람이 두 명 서 있었다.
한 명은 낯익은 황갈색 머리 소녀, 마히루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아마네가 모르는 여자였다.
멀리서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꽤 미인으로 보이는 여자다.
몸집이 작은 마히루와 대치하고 있어서 알겠는데, 그 사람은 키가
컸다. 마히루와의 차이를 생각해도 남자의 평균 신장만큼은 될 것 같
았다.
그런데도 덩치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몸매가 균형
이 잘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딱 맞는 정장 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굴곡이 큰 몸매는 여성의 이상적인 체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밝은 갈색 세미롱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트린 모습에선 관록이 느껴
졌다.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린 눈은 화장을 지운 모습을 감안해 봐도 기
가 센 성격임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마히루와 대치하고 있는데도 그
날카로운 눈매는 누그러질 낌새가 없었다.
상당한 미인이긴 했지만 얼굴도 분위기도 강렬했기 때문에 왠지 다
가가기 어렵다는 인상을 줬다. 딱 봐도 유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마히루를 청초한 백합에 비유한다면, 그 사람은 강렬하고 화려한
장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분위기나 외모의 질이 다른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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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정말 귀여운 구석이 없는 아이구나. 그 사람과 많이 닮았어. 진짜


거추장스러워.”
그런 목소리가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걸 듣고 아마네
는 눈을 크게 떴다.
마히루와 이야기하는 걸 보면 어머니라는 건 알 수 있었는데, 그 어
머니의 입이 모멸에 가깝게 들리는 말을 친딸에게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그건 친부모가 딸에게 할 말도 아니고 딸에게 보여 줄 표정도 아니
었다.
친부모가 그런 태도를 보여 준다면 누구라도 당연히 상처받을 것이
다. 이런 걸 마히루는 그동안 참아왔단 말인가.
“그나마 나를 닮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 사람을 닮아 버렸단
말이지. 아무렴 어때. 대학만 졸업하면 볼 일도 없을 테니 더는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필요한 서류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우편으로 보내
면 돼.”
“……네.”
“그럼 난 간다. 앞으로는 쓸데없는 일로 성가시게 굴지 마.”
그 사람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한 마히루를 향해 콧방귀를 낀
뒤에 발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홀로 오는지라 아마네도 미묘하게 머쓱한 기분을 느끼
면서도 복도로 나왔다.
스쳐 지나갈 때 아마네를 힐끗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
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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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멈춰 서 있던 마히루는 아마네가 있는 것을 알아보고는 얼굴을 한


껏 찌푸렸다.
“……듣고 있었나요?”
“미안해.”
거짓말할 수가 없어서 솔직하게 사과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타이밍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마히루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저기, 아까 그 사람은…….”
“……시이나 사요. 제 친어머니예요.”
요새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많았지만, 지금의 마히루는 처
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딱딱한 분위기였고 말할 때마다 삐걱거리
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먼저 말해두겠는데, 옛날부터 저런 사람이었으니까 이제는 익숙해
졌어요.”
아마네가 마히루의 어머니를 언급하기 전에 마히루가 조용한 목소
리로 말했다.
“원래부터 어머니는 저를 싫어했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목소리는 담담하고 억양이 없었다.
그게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아마네는 마히루
를 오래 보고, 곁에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괴롭다, 아프다, 힘들다. ――그런 감정을 억지로 감추고 있다는 것
은 바로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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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 마히루의 손을 붙잡아버린 것


은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올바르다.
이대로 두면 마히루는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할 것 같았으니까.
휘둥그레 눈을 뜬 뒤에 살며시 힘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마네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려고 하는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 손을 꽉 잡았다.
너무 세게 잡지 않게 주의하면서 강하게 움켜쥔 손목은 놀랄 만큼
약하게 느껴졌다.
“같이 있어.”
아마네가 평소 마히루에겐 하지 않는 강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마히루는 얼굴을 한껏 찌푸리면서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전 딱히 아무렇지 않은데요? 아마네 군이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건방지게 들리는 발언 같았지만, 그 발언을
거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히루를 똑바로 바라보자 마히루는 모든 힘이 사라진 듯한 미소를
짓고, 그런 뒤에 저항할 생각을 포기한 듯이 손에서 힘을 뺐다.
그걸 승낙한 것으로 억지로 받아들인 아마네는 마히루의 손을 잡아
끌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마히루를 집으로 들인 뒤에 소파에 앉혔다.
힘없는 웃는 마히루가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아서 손을 잡은 상
태로 앉은 아마네는 그 손목에서 손바닥을 감싸듯이 자신의 손을 옮
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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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쥐어 주자 눈썹이 힘없이 처졌다.


“……시시한 이야기지만, 들어 주겠어요?”
마히루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마네의 집에 들어오고 나서
10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제 부모님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자세한 사정은
밝힐 수 없지만 집안 사정과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결혼했을 뿐이
죠.”
마히루는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현대 일본에선 그다지 접할
수 없는 결혼 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는 사랑해서 결혼하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이유로 결혼하
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해도 지금보단 더 옛날에나 있
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히루는 아마도 상류 계급의 인간일 테니까, 그 부모도 당연히 상
류 계급의 인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하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마네로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룻밤
의 실수로 생기고 만 아이. 낳아 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이 금전적으
로 부양해 주고 있을 뿐이죠. 저를 키울 생각은 아예 없었을 거예
요.”
“키울 생각이 없었다니…….”
“……그 사람들은 집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와도 자는 곳으
로만 이용할 뿐이었으니까요.”
어릴 적부터 부모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나지막이 중
얼거린 마히루는 초췌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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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처럼 저를 대해 준 기억이 없어요. 저를 실질적으로 키워 준


사람은 하우스키퍼였죠. 어머니는 집 밖에 애인을 만들고는 그쪽으
로만 드나들었고, 아버지는 저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일에만 몰
두했어요. 어쩌면 아버지도 애인이 따로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에겐 돈만 주고 방치했죠. 저는 필요가 없다면서요. 아무리 노
력해도, 아무리 착한 아이로 지내도 저에게 관심을 주지는 않았어
요.”
마히루가 왜 천사님 같은 착한 아이로 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
었다.
마히루는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봐 주기를 바란 것이다.
착한 아이로 지내면 자신에게 눈길을 줄지도 모른다, 칭찬해 줄지
도 모른다―― 그렇게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계속 착한 아이처럼 굴
면서 살다가 그만둘 때를 놓치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얼마 안 되는 가능성을 기대
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면에 있는 자신을 건드리지 않
았으면 해서 계속 가면을 쓰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원해서 쓰고 있는 것
은 아닐 것이다.
“결국 저를 봐 주지는 않았어요. 예쁘게 자라도, 공부를 잘해도, 운
동을 잘해도, 집안일을 잘해도 그 사람들은 한 번도 저를 봐 준 적이
없어요. ……애써 봤자 헛수고인데도 계속 노력한 제가 바보였던 거
겠죠.”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는데.
체념으로 가득 찬 탄식에,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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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어서 그 사람들은 이혼할 수 없어요. 어느 한쪽도 저를 거


두려고 하지 않아요. 애인의 가족에게 부담을 주니까. 일에 방해가
되니까. 그리고 조부모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자립만 하면 이제 관계없으
니까요.”
“그건…….”
“어머니한테 필요 없는 아이라는 말을 직접 들었을 때는…… 역시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모르게 비를 맞으면서 그네를 타고 있을 만큼
자포자기하고 있었죠.”
그 말을 듣고, 몇 달 전 그때 왜 마히루가 비 내리는 공원에 있었는
지 이해했다.
부모에게 매정한 말을 노골적으로 듣고 상처를 받아 헤매다가 도달
했던 장소였던 것이다.
있을 곳이 없다.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그런―― 부모와 떨어진 미
아처럼 어리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겠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못하고, 자신이 들은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저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그 장소에 이르러 혼자 우두커
니 있었다.
그것을 상상했을 때 입안에 희미하게 쇠 맛이 퍼졌다.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물었는지 약간의 아픔과 독특한 맛
이 입안에 남아 있었다. 너무 부조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
르게 분노가 쌓인 것이리라.
“……그렇게 싫으면, 낳지 않았으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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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작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가슴에 못이 박히는


듯한 아픔을 주면서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마히루가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든 마히루의 친부모에게 머릿속이 새
하얘질 만큼 강한 분노를 느끼고 말았다.
부모에게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토록 섬세하면서도 남
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여자애로 자란 것이다. 겉으로는 강하
게 굴지만 속으로는 울면서 산 결과, 마히루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바
라지 못하게 됐다.
착한 아이의 가면을 벗겨내면 산들바람에도 무너져 사라질 만큼 허
망한 모습이 드러났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언성을 높여 따지고 싶었지만, 마히루를 버린 장본인들은
여기에 없다.
게다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독한 가정환경에 분노하지만, 아마네와 마히루는 타인이다.
마히루의 집안 사정에 타인이 참견해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괜히 상황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무턱대고 끼어들었다간 마
히루가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마네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공기 속으로 녹아들며 사라질 것 같아
서―― 아마네는 옆에 있던 담요를 마히루의 머리부터 덮어 줬다.
얼굴까지 그림자가 지도록 가려 준 뒤에 당황하는 마히루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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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지로 처음 껴안은 몸은 너무 가냘프고 불안하다. 조금이


라도 무리하게 힘을 주면 쉽게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참아 온몸을 힘껏 끌어안으면서 아마네는
마히루를 보듬어 줬다.
“어, 아, 아마네 군……?”
“……왜 있잖아. 네가 왜 이런 성격으로 자랐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귀염성이 없는 성격 말인가요?”
“아니. ……참을성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약한 면을 보여주려고 들
지 않는 성격 말이야.”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약한 소리를 한 번이라도 토해냈다
간 정말로 부러져 버릴 테니까.
가사 도우미라는 사람은 마히루를 소중히 대해 주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고용된 타인이며 마히루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었
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마히루는 계속 혼자 버
텼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자신을 속이는 것이 능숙해지고 말았을 것
이다.
“……나는 말이지. 딱히 너희 집안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남의
집안 사정에 멋대로 간섭할 수도 없으니까.”
아마네는 타인이다. 가족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마히루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 줄 수 없다는 것을 의
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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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본 척해 줄게. 울고 싶으면 울어. 그렇게 힘든 얼굴로 억지


로 참다간 숨만 막히잖아.”
사실은 울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참고 있다간, 마히루는 언젠가 망가져 버릴 것
이다.
그러니까 울기를 바랐다. 참고 살았던 것을 전부 토해내길 바랐다.
괴롭다면 괴롭다고 말하길 바랐다. 외롭다면 외롭다고 말하길 바랐
다. 그러면 아마네가 마히루의 곁에 있으면서 그 말을 들어 줄 수 있
으니까.
마히루가 처한 상황은 어떻게 해 줄 수 없어도, 아마네는 마히루의
괴로움을 받아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마
히루가 아마네의 품에서 살짝 움직이면서 아마네의 가슴에 스스로
얼굴을 묻자 그런 생각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
“……비밀로 해 줄 수 있나요.”
“나는 안 봤으니까 몰라.”
“그럼 아주 잠시만…… 빌려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인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아무 대답
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머리에 덮어 준 담요를 한 번 더 깊이 덮어 주
면서 약하게만 느껴지는 그 등을 꼭 끌어안았다.
이윽고 작게 오열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마히루가 흘
리는 것이었다.
‘기대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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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언제나 울음을 참으면서 혼자 버티고 있었던 마히루가 처음으로 아


마네에게 말한 소원을 듣고, 아마네도 약간은 울고 싶어지면서도 마
히루의 작은 등을 꼭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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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봤잖아요.”
마히루는 오래 울지 않았다.
시간을 재진 않았지만, 10분이 될까 말까.
16년 치 괴로움을 다 토해도 괜찮았지만, 너무 울어도 지치니까 몸
이 강제적으로 멈춘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피로에 육체적 피로까
지 생기면 뇌가 강제적으로 휴면 모드로 이행할 테니까.
고개를 든 마히루의 눈은 젖어 있었지만, 아주 조금 기운을 되찾았
는지 아마네를 보는 눈은 초점이 잘 잡혀 있었다.
“내 품에 기대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울 때까지는 보지 않
으려고 애썼어.”
어느새 흘러내린 담요를 잡아당겨 보여 주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
다.
“……아마네 군.”
“왜?”
“……고마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니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렇
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마히루는 다시 아마네의 품에 얼굴을 묻
었다.
“조금만 더, 빌려주세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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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이런 상태인 마히루를 밀쳐낼 수도 없다. 그리고 마히루가 바라는


대로 기댈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태연한 척하며 작은 몸을 한 번 더 껴안아 주고 천천히 머리를 쓰다
듬었다.
아무도 마히루를 칭찬해 주지 않는다면, 아마네가 칭찬해 주면 된
다.
잘 참았다고, 이제는 내 앞에선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그런
마음을 담아서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자, 마히루도 진정됐는지 필요
없는 힘을 뺀 표정으로 아마네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불안한 마음이나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런
지 표정이 밝아진 건 아니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앞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린 마히루는 아마네의 눈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으
로 미소 지었다.
“노력해도 봐 주지 않는데 말이죠.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다들 천
사님이니 뭐니 저를 추켜세워 주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니까
요. 천사처럼 구는 시이나 마히루를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지…… 원래의 저는 필요로 하지 않아요.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들
어 놓고 힘들어하는 것은 바보 같지만요.”
마히루는 “자기 목을 조르는 꼴이네요.” 라고 말하며 쓴웃음을 짓
다가 아마네의 가슴팍을 꼭 쥐었다.
“진짜 저는 귀여운 구석도 없고, 겁쟁이에 제멋대로이고, 성격도
안 좋고, 말도 막 하고…… 저를 좋아할 요소는 전혀 없는데 말이
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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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나는 의외로 좋아해.”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눈을 깜박이는 마히루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뭐, 귀엽지 않을 때는 물론 있지만 말이지. 그 이상으로 귀엽거나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다 너의 단호한 말투에서는 호감을 느
껴. 그리고 정말로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걸로 고민하지
않아.”
마히루의 이마를 톡 건드리고 “너무 부정적이야.”라고 말해 주자,
왠지 넋이 나간 것처럼 마히루의 표정에서 어두운 빛이 사라졌다.
아마네는 왜 마히루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보든 간에 마히루는 노력가이며 마음씨 착한 소녀라고
생각한다. 언동이 다소 솔직한 면이 있지만, 지적은 정확하며 발언도
남을 배려해서 한다.
겁쟁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딱히 흠이 되지도 않는다. 너무 많은 상
처를 받아서, 더는 상처를 입는 게 싫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귀여운 구석이 없다면, 아마네는 마히루 때문에 매번 고뇌
하는 지경에 처하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할 때가 더 귀엽다는 사실을 본인이 좀 깨달아 줬으면
싶을 정도다.
“자꾸 비하하지 마. 너의 솔직한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다는 인간이
여기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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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으니까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


지 못하는 거겠지만, 마히루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은 아마네 혼자
만이 아니라 주위에도 더 있으니까, 그건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
다.
치토세는 아예 솔직한 마히루가 더 귀엽다면서 들러붙는 지경이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겉모습만 보고 하는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히루의 캐러멜색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는데, 마히루
는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약간 빨개진 눈가에 뒤지지 않을 만큼 볼까지 붉어
지고 있었다.
곧바로 장미색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물들었는데, 이게 부끄
러움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마히루가 몸
을 움츠리고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있었다.
마히루의 반응을 보고 자신도 상당히 노골적인 발언을 했다는 걸
깨달으면서 아마네까지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니, 치토세와 이츠키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결코 이상한 뜻
으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부모님도,
치토세와 이츠키도, 천사님이 아닌 너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교류하
고 있는 거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 좋은 사람이
라고 생각해.”
허둥지둥 자신이 한 말을 설명하고 있으려니, 그제야 마히루의 시
선도 아마네를 포착했다.
하지만 한순간이나마 착각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는지 새빨
개진 얼굴로 떨고 있는 걸 보면 상당히 부끄럽게 만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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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사에키상

아마네도 몹시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훨씬 더


부끄러울지도 모른다.
“저기, 노력하기 힘들거나 너희 부모님 문제로 힘들어지면 우리 집
으로 피난해도 돼. 우리 부모님은 사정을 알면 널 숨기고 보호하는
것쯤은 해 주실 테니까. 왜 있잖아. 요양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
까.”
“……응.”
“우리 부모님은 마히루를 좋아하니까 계속 있어도 된다고 말해 줄
거고…… 오히려 네가 행복해질 때까지 놓아 주지 않을 거야. 나와
우리 부모님은 네가 너희 부모님과 어떻게 할지 정할 순 없지만, 네
가 스스로 결론을 내릴 때까지는 얼마든지 기대게 해 준다고 할까,
도와줄 거야.”
“응…….”
열심히 오해를 풀려고 설명했더니 마히루가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왜, 왜 또 우는 거야?”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행복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으니까 조금은 네 욕심을 있는
그대로 말해도 돼.”
금전적으로는 좋은 환경일지도 모르지만, 마히루는 그것 말고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었다. 받아야 마땅할 사랑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데
용케도 지금까지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마히루는 누군가에게 기대도 된다. 자기 욕심도 말하면
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만큼 조금이라도 되찾아 줬으면 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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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주겠다고 조건을 붙이자, 마히루는
살며시 웃으면서 “아마네 군만 할 수 있어요.”라고 속삭였다.
“더 많이, 봐 주세요.”
“네가 노력하는 모습은 잘 보고 있고, 눈을 떼면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으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야.”
“……붙잡아 주세요.”
“손이라도 잡고 있을게.”
그걸로 끝인가? 싶어서 마히루의 얼굴을 살피자, 마히루는 잠시 아
마네를 보더니, 그런 뒤에 수줍게 웃어 보였다.
“오늘만큼은 온몸으로 붙잡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마히루는 아마네의 등에 팔을 감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히루의 행동에 아마네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불순한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며 꾹 참고 그 가녀린 몸을 한
번 더 감싸듯이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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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천사님의 변화

다음 날도 마히루는 이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제처럼 풀이 죽은 모습도 아니고 괴로워 보이
는 표정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경계하는 것처럼 표정이 딱딱한 느
낌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옆에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 한껏 긴장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마네를 꺼리는 분위기는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아마네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다.
시험 삼아서 시선을 돌려보자 곧바로 움찔하면서 쿠션을 힘껏 끌어
안았고, 반대로 눈길을 돌리면 아마네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에 반사돼서 보였다.
왜 이렇게 자신을 의식하는 것인지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어제
일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이 바로 나왔다.
(……어색해서 그러는 걸까.)
어제는 늘 다부지게 굴던 마히루가 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잘 생
각해 보니까 위로해 주기 위해서 그랬다곤 해도 여자를 끌어안은 것
은 문제가 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마히루가 먼저 안긴
것은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저지른 행동이며, 나중에 정신을 차린
뒤에 후회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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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 소소한 스킨십은 자연스럽게 하게 됐지만, 그렇게 대


담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것은 처음이었다. 마히루가 뒤늦게 당황한
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지만…….)
불쾌하게 여겼다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고 옆에 앉지도 않을 것
이다.
시험 삼아 마히루에게 손을 뻗어보니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몸
을 움직여서 피하는지라 아마네를 의식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아, 아니에요. 그렇지는…….”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는 한동안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마히루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이건 그러니까…… 한심한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
는 것뿐이에요. 엄청 울기도 했고…….”
“아아…… 그렇구나.”
운 것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후에 얼음으로 눈을 식혔기 때문에 눈가에 붓기는 남아 있지 않
았지만, 울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므로 그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포인트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딱히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
“제가 마음에 두고 있어서 그래요. 우는 얼굴을 보이다니 일생의
실수라고요.”
“그렇게까지 말한단 말이야……? 나 참. 그런 생각을 하니까 계속
마음에 담아두다가 폭발하는 거라고,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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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랬듯이 또 강한 척하는 모습을 보이는지라 아마네는 한숨을


쉬면서 마히루의 볼로 손을 뻗었다.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 전에 볼을 잡고 살짝 당겼더니 너무 촉촉하
고 매끄러운 촉감과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졌다.
마히루는 아마네의 이 행동에 당황했고,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눈을 한껏 뜨면서 아마네를 약간 강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머, 머하는 허예요?”
“발산하지 않으면 언젠가 폭발하니까 말이지. 이제 어느 정도는 기
대도 되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필요하다면 의지하면 되고, 울고 싶으
면 언제든지 숨겨 주고 못 본 척해 줄게. 조금은 남에게 의지하는 버
릇을 길러.”
어제 쌓여 있던 것을 폭발시켰는데 또 속으로 쌓아두려고 하는 마
히루를 꾸짖으려는 목적으로 볼을 이리저리 꼬집으면서 일단 벌을
줬다.
아마네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니까 의지할 수 없다면 그런 평가는 달
게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 의지하고 기댔으면 좋
겠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었던 마히루가 기댈 곳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제는 솔직하게 받아들였으면서 왜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거야. 나에게 의지해도 된다고. 넌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가 아니다…….”
왠지 멍한 표정으로 그 말을 곱씹는 마히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
인 뒤에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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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있잖아. 그리고 부르기만 하면 치토세와 이츠키는 달려


와 줄 거고, 부모님도 와 주실 거야. 그만큼 마히루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
마히루는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한탄하며 울었지만,
그건 옛날 일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히루를 좋아하며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사
람들이 마히루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아마네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에 빠진 마히루는 조심스럽게 고개
를 들어 확인하는 듯한 눈길로 아마네를 쳐다봤다.
“아마네 군도…….”
“응?”
“아마네 군도, 저를 소중히 여기나요……?”
그 질문을 듣고 한순간 숨이 막혀서, 이윽고 볼을 긁었다.
“그야…… 이렇게 함께 있으면 당연히 소중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
다고 할까…….”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겠지.
아마네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상당히 담백한 기질을 지닌
인간이라서, 친한 사람 외에는 딱히 애쓰지 않고 성의껏 대하지도 않
는다. 그 대신 정말로 소중한 사람에겐 반드시 힘이 되어 줄 생각이
며 최대한 도움을 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히루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소중한 사람의 범위에 있었다.
이 가녀린 몸이 끌어안고 있었던 버겁고 힘든 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괴로움을 대신 짊어 주고 싶었다. 늘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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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게 웃고 있길 바랐다. 행복해지길 바라며――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가요.”
마히루는 아마네의 말을 듣고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쿠션을 끌어안
고 얼굴을 묻었다. 아마도 마주 보는 자리에서 인정하는 답을 듣는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아마네가 더 심했다. 많은 것을 억지로 자각하
게 되는 것도 모자라서 마히루와 마주 보며 소중하다고 선언하다시
피 했으니 부끄러운 감정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마히루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말이지.)
오히려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왠지 약해진 틈을 파고드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면 앞으
로의 생활이 분명 너무 버티기 힘들어질 것이다.
아마네의 고뇌까지는 다행히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마히
루는 천천히 쿠션에서 고개를 들더니 아마네를 힐끔 쳐다보기 시작
했다.
“……아마네 군.”
“왜?”
“저, 저기, 뒤, 돌아봐 주겠어요?”
“응? 왜?”
“부, 부탁할게요…….”
갑자기 뒤로 돌아달라는 말을 듣고 혼란스러웠지만, 순순히 마히루
를 향해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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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위에서 책상다리를 한 자세로 대기하고 있으니 등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직하고도 남을 사건이었지만, 가느다란 팔
이 아마네의 배를 감싸는 바람에 완전히 굳고 말았다.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마히루가 자신의 몸을 아
마네의 등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끌어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걸 정면에서 당했다면 아마네는 완전히 허용량을 넘어
서는 바람에 머리와 몸이 다 얼어붙었을지도 모르겠다.
“마, 마히루……?”
심장 고동이 평소보다 빨라지고 있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겨우 정신
을 차려 물어보니, 마히루는 아마네의 등에 밀착한 상태에서 살짝 몸
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한 번 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보아하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절대로 돌아보지
못하도록 억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 두고 있는 걸까.
“으, 응…….”
“……많은 걸, 너무 많은 걸, 아마네 군한테서 받았어요.”
“나, 나는 딱히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어.”
“아마네 군에겐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저에게는 크게 느껴지는
일이에요. ……정말로, 고마워요.”
“응.”
“……아마네 군이 곁에 있어 줘서, 다행이에요. 혼자였으면, 버티
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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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이건 마히루 나름대로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마히루가 스스로 먼저 다가와서 기대
줬다는 것이 기뻤고, 그리고 혼자 둘 생각이 없다는 뜻을 담아서 마
히루의 말에 답례하듯 배에 두르고 있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자,
알아보기 쉽게 마히루의 몸이 움찔했다.
분위기를 타느라 그만 눈치 없는 짓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어서 급하게 손을 떼자, 마히루가 “아, 아니에요. 그냥 깜짝 놀
란 것뿐이라…….”라고 등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인지 약간 흐릿한
목소리로 변명하더니 아마네의 손을 찾듯이 이리저리 손을 더듬거리
며 움직였다.
싫어하진 않는다는 말에 안도하면서 마히루의 손을 한 번 더 쥐자
이번에는 마히루도 손을 맞잡아 줬다.
이 반응에 놀란 아마네가 몸을 들썩거리자, 마히루의 머리가 미묘
하게 아마네의 등을 부비면서 압박했다.
“……저를 붙잡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내가 그래도 괜찮다면 말이지…….”
“왜 다른 사람에게도 허용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마
네 군이 아니면 허용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아요.”
너무 귀엽고 가슴 뭉클한 말을 하는 바람에 아마네가 다시 굳어지
자, 마히루도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고는 부끄러웠는지 등에
자신의 머리를 받았다.
그래도 놓지는 않는 걸 보면 마히루가 얼마나 아마네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낯간지러운 기분과 가슴을 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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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충동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금 머리를 받고 있는 마히루보다


아마네가 단연코 더 부끄러웠다.
마히루는 한동안 이마로 등을 받는 연습을 한 뒤에야 겨우 진정했
는지 아마네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어, 어쨌든 약속대로…… 저를 잘 지켜봐 주세요. 하, 한눈팔면 안
돼요.”
“으, 응. 하지만 지금은 볼 수가 없는데.”
“지금 보면 화낼 거예요.”
“무슨 논리야, 그건. ……보이지 않으니까 안심해.”
아마도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얌전히 따라 주기로
했다. 보려고 했다간 아까처럼 또 머리로 받을 것 같으니까 차라리
이러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얼굴을 보이면 곤혹스러운 건 아마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마히루의 손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덮듯이 가리면서 슬
쩍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신학기가 시작되네요.”


마히루가 운 뒤로 며칠이 지났다.
이제는 평소 모습을 되찾은 마히루가 아마네의 옆에서 참고서를 보
다가 문득 떠오른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울었던 다음 날처럼 이상하게 의식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자연스
럽게 대하고 있었다. 묘하게 아마네를 힐끔힐끔 보는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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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히루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그날보다는 거리가 더 가까


울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마네가 함께 참고서를 보고 있기 때문일 수
도 있겠지만, 두세 뼘 정도는 두고 있던 거리가 지금은 서로의 체온
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솔직히 말해서 달콤한 냄새가 부드럽게 풍기고, 가까이 붙어 있어
서 따뜻하고, 더구나 가끔씩 부드러운 것이 닿기 때문에 상당히 아슬
아슬한 자세였다.
“그렇구나. 이번 주말이 끝나면 신학기가 시작되네. 반 편성이 바
뀔 테니까 기분은 우울하지만.”
“우울……한가요?”
“나는 붙임성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츠키를 제외하면 남자 친구가
하나도 없거든.”
“그건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나요……?”
“착각하지 마. 일반적인 대화는 할 수 있어. 얼굴을 아는 사람 수준
에서 인간관계가 끝나는 것뿐이야.”
미묘하게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바라봤지만, 딱히 극단적인 커뮤니
케이션 장애가 있는 건 아니다. 상대가 말을 걸면 대응하며 상대의
이야기에 적절히 맞장구를 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친해질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며, 아마네도 자신의 성
격이 어둡다는 것은 물론이고 눈매와 말투가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
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으므로 친구는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혼자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격인지라 이츠
키와는 반이 갈려도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1년
을 보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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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은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니까 말이죠.”


“윽.”
“아마네 군은 좋은 사람인데 아카자와 군과 치토세 양 말고는 그걸
모른다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네 군의 진짜 매력은 친해
지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까 우선은 남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
를 풍기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게 아깝다고 중얼거리면서 아마네의 앞머리
를 들어 올리는 마히루의 행동에 아마네는 미묘한 쑥스러움을 느끼
면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딱히 불특정 다수와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친한 사람은
일부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왜긴…….”
그야 당연했다.
(――옛날처럼 또 배신당하는 게 무서우니까.)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 가까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아마네는 지금 같은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다.
“……딱히 상관없잖아. 나는 네가 있어 주면 괜찮으니까.”
“네? 어, 저기…….”
“아, 아니, 너만이 아니라 이츠키와 치토세도 포함해서 사이좋은
사람들이 있어 주면 그걸로 만족한다는 뜻이야. 사람이 많아서 번잡
해지는 건 딱히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마터면 엄청난 오해를 초래할 발언이 될 뻔했다. 오해는 아니지
만, 마히루는 아직 그게 오해라고 인식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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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가 황급히 덧붙인 말을 듣고 마히루는 안도감과 곤혹스러움


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마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볼이 빨개진 것
은 이상한 착각을 할 뻔했다는 증거겠지.
“……저도 아마네 군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
“그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중심이자 기둥이 됐어. 여러 가
지 의미로.”
“생활 면의 비중이 그렇다는 뜻이로군요.”
타박하듯이 “너무하네요.”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보는 바람에 복잡한
심정을 느끼면서도 그 눈길을 받아들이면서 볼을 긁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반 편성이 바뀌는 걸 어떻게 생각해? 기대하는
쪽이야?”
이참에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려고 아까 화제를 다시 언급하자, 마
히루는 크게 눈을 몇 번 깜박인 뒤에 살며시 웃었다.
“저는 새로운 반 편성이 기대돼요.”
“뭐, 너는 어딜 가더라도 잘 지낼 수 있겠지.”
“그게 기대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 같지 않은가요?”
“그건 그러네.”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해서 그게 기대하는 이유가 되
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마히루의 성격을 감안해 보면 문제없이 대처
하면서도 속으로는 곤란해할 것이다. 교우 관계가 돈독한 사람과 함
께 있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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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꾸미지 않은 마히루를 알고 있는 치토세


와 같은 반이 될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걸 기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
른다.
“아마네 군은 왜 제가 반 편성을 기대하는지 알겠나요?”
살짝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마히루의 모습에 두근거리면서 입가
를 손으로 가리며 생각했다.
“……치토세와 같은 반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정답은 아니에요. ……아마네 군, 바보.”
갑자기 귀여운 비난을 받았지만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토라진 듯한 말투로 들리는지라 일단은 기분을 풀
어 주려고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런 점이 문제라는 거예요.”라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흘리
듯이 말했다.
“……아마네 군은 치사해요.”
“뭐, 뭐가?”
“몰라도 돼요. ……신학기가 되면 단단히 각오하세요.”
뭔가 심상치 않게 들리는 말을 하며 아마네에게 몸을 맡기듯이 기
댄 마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 고동을 마
히루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애써 숨겼다.
(……뭘 하려는 거지, 마히루는?)
그렇게 말한 마히루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은지라, 다음 주의 시
업식에 약간의 파란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신
학기도 부디 평온하게 보낼 수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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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혼자가 아니야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날, 아마네는 소파에 늘어지게 엎드려 TV 뉴


스를 보면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신학기가 눈앞에 닥쳤는데도 이렇게 늘어져 있는 것은 날씨가 풀리
면서 졸음을 유발하는 따뜻한 기온 때문이기도 했고 어떤 반에 배정
을 받아도 자신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
문이었다.
하품으로 흐려진 시야로 TV를 보고 있으니, TV 안에서 딱딱한 표정
을 짓고 있는 아나운서가 벚꽃 구경을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가 제철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지와 현재 꽃
이 만개한 지역을 중계로 보여 주고 있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몰
려드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도 만개할 때가 가깝다고 한다. 올해는 평소보
다 꽃이 일찍 피었다고 하는데, 신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피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 봤자 자신이 원래 살던 곳에선 한창 꽃이
필 때인지라 그렇게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벚꽃이라…….)
아마네는 사계절이 바뀔 때의 경치를 그다지 즐기진 않지만, 운치
까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벚꽃을 즐기는 기분은 잘 알고 있으며,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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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한 꽃잎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그리 멀지 않은 하천부지에 벚나무들이 나란히 심어져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봄 방학 동안에는 계속 빈둥거리며 지냈으니 말이지.)
적당히 근육 트레이닝과 가벼운 조깅을 몇 번 했지만, 그걸 제외하
면 밖에 자주 나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실내 활동파이기도 한 까닭에 기본적으로는 집 안에서 마히루와 지
내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집 밖에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뉴스를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나간다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런 건 마음먹었을 때 신경 쓰지 않고 실행하는 것
이 좋다. 애초에 봄 방학 마지막 날인 오늘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간
다음 주에나 갈 수 있을 테니까 오늘 나갈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소파에서 일어나서 외출복으로 적당히 갈아입었다. 소문의 남자 모
드로 차려입지 않은 것은 혼자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남자 혼자 나가는 거라 준비할 것도 별로 없어서 바로 옷을 갈아입
고 지갑과 스마트폰을 넣은 가방을 손에 쥐고 현관을 나섰을 때……
마침 황갈색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아마네 군, 어디 가는 건가요?”
마히루가 평상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아마네의 집에 가려 했던 모
양이다. 지금부터 밖에 나간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
“아, 마히루. 그게, 그냥 산책이나 할까 해서. 봄 방학도 이제 끝나
니까, 오늘 하루쯤은 어떨까 싶었거든.”
“그렇군요. 아마네 군은 봄 방학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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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는 그만해. 아…… 몇 시간 뒤면 돌아올 테니까 우리 집에


있으려면 그래도 되는데 어떡할래?”
아마네 집이 마히루 집보다는 오락거리가 많은지라 그걸로 놀아도
되지만, 자기 집이 더 편할 수도 있으니까 본인에게 판단을 맡길 생
각이었다.
마히루는 가만히 아마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마네에게 뭔가
할 말이 있지 않느냐는 듯이 말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어떻
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볼을 긁었다.
마히루의 눈에는 은근히 기대하는 빛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뭐야, 혹시 따라오고 싶은 거야?”
“……네.”
“뭐?”
농담이라고 말하면서 웃어넘길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였고, 설마 그
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시, 싫으면 혼자 가도 돼요.”
“시, 싫은 게 아니라…… 그, 뭐랄까, 누가 보면 또 소문이 돌 텐데
괜찮겠어?”
“소문은 소문이니까요. 상관없는 사람들은 알아서 떠들게 놔두면
돼요.”
“아, 알았어. 너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한 시간 후에 같이
나갈까.”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마히루를 보고 약간 당황했지만, 마히루도
할 일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납득하고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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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다소 간소한 평상복 차림이지만, 옷 자체가 좋으니까 보


기 흉하진 않다. 하지만 여자 기준에선 그대로 나가는 것을 꺼릴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마네는 아마네대로 마히루와 나란히 걸으려면 그에 맞는 차림을
갖춰야 했다. 안 그랬다간 이중의 의미로 피해를 줄 것이다.
머리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앞머리를 만지는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도 약속 시간을 그렇게 잡은 가장 큰 이유를 알아차렸는지 살
짝 눈썹을 늘어트렸다.
“미, 미안해요, 저 때문에…….”
“아냐, 괜찮아. 기분 전환에는 산책도 좋겠지. 마히루와 함께한다
면 평소와는 다른 경치를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준비하는 게 딱히 힘든 일도 아니니까 함께 지내 주는 상대에게 화
낼 일도 아니다.
그리고 벚꽃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마히루가 옆에 있어 준다면 벚꽃
도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타산도 은근 있었기 때
문에 탓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네, 그래요.”
약간 위축된 듯한 눈치를 보인 마히루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고
쓰다듬어 준 뒤에 아마네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세팅하기 위해 집
으로 돌아갔다.

약 한 시간 후에 서로 준비가 끝났으므로, 아마네는 옷을 갈아입고


온 마히루와 함께 느긋하게 산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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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소녀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변함없는 미


모가 눈에 들어왔다.
마히루는 봄에 어울리게 레이스 장식이 달린 흰색 원피스에 연분홍
색 카디건을 입었다. 원피스는 무릎이 살짝 드러나는 것이라서 마히
루치고는 조금 짧은 옷을 입었지만, 스타킹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맨
다리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산책하러 가는 건데도 일부러 머리를 땋아서 하프업 스타일로
하고 나온 모습에선 별것 아닌 외출에도 꾸미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마히루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왜 그러나요?”
“아니, 오늘도 세련되게 잘 입은 것 같아서…….”
“……고마워요.”
쑥스러웠는지 볼을 살며시 붉히면서 눈을 내리뜨는 모습은 그야말
로 청초한 미소녀다.
덕분에 길을 걷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 그러고 보니 어디 가려는 목적지가 있나요?”
사람들의 시선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던 마히루는 왠
지 약간 당황한 말투로 아마네를 쳐다봤다.
“음, 사실은 하천부지에 가서 벚꽃이나 구경할까 했었어. 듣자니
작년보다 꽃이 일찍 피어서 구경하려면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라고
하더라고.”
“……그렇군요.”
“그래서 잠깐 가볍게 구경하러 가 볼까 하는데. 안 될까?”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따라온 처지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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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어색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다 날아가 버렸다.
귀여운 몸짓과 눈짓에 심장이 벌컥 뛰어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
었다.
(……하나하나가 다 귀여워서 진짜 못 살겠어.)
미소녀임을 잘 알지만, 호감이 있는 여자애라서 그 귀여운 면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마히루도 아마네를 신뢰하고 자신이 먼저 스킨십
을 하게 되어서 더더욱 그랬다.
마음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억누르면서, 아마네는 마히
루의 가느다란 손을 옷자락에서 뗀 뒤에 손을 잡았다.
“자, 어서 가자.”
“아…… 네.”
휴일이라서 사람도 많으니까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았더니 마히
루는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낮췄고, 아마네는 입 밖으로 흘러나올
것 같은 신음을 애써 참으면서 그 손을 꼭 쥐었다.

아마네와 마히루가 사는 맨션에서 조금 떨어진 하천부지에 도착하


니 역시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에겐 마지막 휴일이었고, 사회인도 꽃놀이를 하기에 딱 좋은
때였다. 푸른색 시트를 깔아놓고 꽃을 구경하는 사람도 많아서 시끌
벅적했다.
벚나무도 대부분 꽃잎을 활짝 벌려서 연하고 부드러운 색을 시야
전체에 슬쩍 내보이고 있었다. 정말로 이만큼 피었으면 꽃놀이를 하
기에 딱 좋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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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걸. 생각했던 것보다 장관이야.”


바람에 흩날리며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마네는 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아름다운 것은 좋아했다. 이
렇게 시야를 알록달록 장식하는 연분홍색 꽃잎은 솔직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한숨을 내쉬면서 마히루를 힐끗 보니, 마히루는 말없이 벚
꽃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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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는 감탄하는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아무런 감


정도 없이 멍한 눈으로 벚꽃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벚꽃을 향하고
있는지조차도 의심스러웠다. 단지 그 경치가 눈에 비치고 있는 것뿐
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히루?”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져서 말을 걸어보니, 그제야 마히루는 눈을
깜박였고 놀란 표정으로 아마네를 보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멍하게 있어?”
“아, 아뇨, 뭐라고 할까…… 벚꽃이구나 싶어서…….”
“그야 벚꽃이니까 말이지.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어? 어
딘가 이상하게 보여서 왠지 걱정이 됐어.”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라서 당황했다는 걸 전하자 마히루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트렸다.
“아뇨, 무슨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전 벚꽃을…… 아니, 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뭐? 미안, 몰랐어. 같이 가자고 하지 말 걸 그랬구나.”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데리고 나온 것을 후회했지
만, 마히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꽃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단지 추억이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말아서요.”
“추억이 없다고?”
“네, 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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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쓸쓸한 분위기를 동반한 웃음을 보면서, 마히루가 무슨 생각


을 했는지 왠지 모르게 이해가 되자 입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마히루는 괴롭다기보다 곤혹스러운 것 같은, 쓸쓸한 것 같은, 그런
기색을 드러내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고통을 넘어서 체념의 감
정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학식…… 졸업식도 그랬지만, 저는 혼자였거든요. 코유키 씨는
계약상 오후부터 일했고, 부모님은 일을 우선시했으니까요.”
작게 “어쨌든 두 분에게 축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살며시 쓴웃음을 지은 마히루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쳐
다봤다.
“혼자서 집에 왔어요. 입학식도, 졸업식도. 벚나무 길을 다들 부모
님과 손을 잡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저만 혼자였죠. 손을 잡아
주는 사람도 없이, 손을 잡아서 끌어 주는 사람도 없이, 같이 걸어
주는 사람도 없이, 집에 가는 길을 혼자 걸어야 했어요. ……그래서
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혼자임
을 통감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저도 참 한심하네요.”라는 말을 하고 고개를 숙인 마
히루를 보면서, 아마네는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을 마히루가 알
아차리지 못할 만큼만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았다.
마히루의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마히루가 느끼고 있는 고독을 치워 주고 싶었다.
“지금은 손도 잡았고, 내가 옆에 있잖아.”
캐러멜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자, 마히루는 크게 눈을 깜박
인 뒤에 얼굴을 찌푸리듯이 웃으면서 “……그러네요.”라고 나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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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삭였다.
마히루도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이 잡은 손에 힘을 주는지라 아마네
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손으로 마히
루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래도 부족하다면 치토세와 이츠키를 부르자. 그야 우리 어머니
와 아버지는 멀리 있어서 어렵겠지만, 부르면 틀림없이 올 거
야…….”
“괘, 괜찮아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요.”
“그래? 그럼 나로 참아 줘.”
“……참고 있는 건 아니에요.”
“미안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그, 그렇구나.”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더 부끄러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볼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다른 뜻은 없다고 해도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고,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고, 손을 잡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마음이 흔들리기
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손을 계
속 잡고 있으니, 마히루가 표정을 풀고 살포시 웃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벚꽃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말하며 수줍은 듯이 웃고 벚꽃을 바라보는 마히루를 본 아
마네는 “그렇구나.”라고 마음속 동요를 꼭꼭 숨겨서 대꾸하고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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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손을 다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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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이 책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권이므로 대부분 1권부터 계속 읽어 주신 분들이겠지만, 새롭게
인사하겠습니다. 작가인 사에키상이라고 합니다.
‘옆집 천사님’ 2권은 재미있게 보셨는지요.

자, 이번 권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아마네에게 조금씩 마음을 터놓


기 시작한 마히루의 말 못할 사정이나 감정의 변화를 메인으로 삼아
서, 따뜻하고 애틋하고 때때로 심각하지만 역시 따뜻한 분위기의 이
야기로 그려냈습니다.
명확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마음이 가는 단계에서 점점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깊어지는 것을 자각하고 부끄러워하는 히로
인은 정말 귀엽지 않습니까. 귀엽잖아(팔불출).
조금씩 마음의 거리를 좁혀 가는 두 사람을 묘사한 이야기이므로
앞으로도 애틋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서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부디 기대해 주십시오.
아마도 다음 권부터는 대천사 마히룽이 소악마 마히룽으로 잡체인
지를 하지 않을까요(대충 던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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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이번 권부터 일러스트


를 하네코토 선생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
주신 카즈타케 선생님께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에 하네코토 선생님의 일러스트를 볼 때마다 끄어어…… 하는
신음만 내고 표현 능력을 상실하곤 했습니다. 특전 이야기를 해도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네의 셔츠를 입은 일러스트는 정말 최고더군
요. 체격 차이가 있는 커플은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물론 모든 일러
스트가 최고이긴 합니다만.
삽화에 나온 공주님 안기 포즈 일러스트는 체격 차이가 있는 커플
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사에키에게는 대환영이었습니다. 손 크기가
차이가 나는 건 특히 더 참을 수가 없단 말이죠.
좋아하는 부분을 전부 다 이야기하다간 페이지가 모자랄 것 같으
니, 아쉽지만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일러스트로 이 작품을 꾸며 주실 거라 생각하니 너
무 행복해서 괴로울 지경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네코토 선생님
(머리를 조아림).

자, 마지막으로 신세를 진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이 작품을 출판하는데 최선을 다해 주신 담당 편집자님, GA문고 편
집부 여러분, 영업부 여러분, 교정 담당자님, 하네코토 선생님, 인쇄
소 직원 여러분, 이 책을 구입해 주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
니다.
다음 권에서 또 볼게요. ……나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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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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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나베 : 우리나라의 전골 또는 찌개와 비슷한 일본 요리. ‘나베’란


냄비의 일종. 하나의 냄비에 고기나 생선, 식용채소 등을 넣고 끓이
며, 이를 여럿이서 나눠 먹는다.

2) 메밀국수 : 일본에서는 한 해 마지막 날에 메밀국수(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다.

3) 다테마키 : 일본의 새해맞이 명절 요리의 하나. 흰살 생선 등의


연육에 계란을 풀어서 오븐에 구워 롤케이크처럼 만드는 계란말이의
일종.

4) 후리소데 : 일본의 전통복 양식. 어깨에서 팔 부분 공간을 좁게,


또한 손이 나오는 부분을 좁게 만들어 팔 밑에 늘어지는 부분이 생기
게 한 의상. 젊은 여성들이 성인식, 결혼식, 참배 때 예복으로 입는
다.

5) 코몬 : 일본의 전통복 양식. 전체적으로 작은 무늬가 들어간 옷


을 가리키는 말. 후리소데에 비해 소매 부분이 짧고 늘어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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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 있다.

6) Ho-Ren-So : 일본의 기업 등 비즈니스 활동에서 쓰는 용어인 보


고(호코쿠), 연락(렌락쿠) 상담(소단)의 약어. ‘뭔가 일이 생기면 보고
하고, 연락하고, 상담하라’는 뜻. 이츠키가 말한 것은 방문(호몬), 연
야(렌야), 소음(소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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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2

전자책 발행일 2021년 06월 23일


전자책 ISBN 979-11-380-0225-7 (05830)
전자책 정가 4,500원
지은이 사에키상
일러스트 하네코토
옮김 도영명
펴낸이 임광순
펴낸곳 영상출판미디어(주)

OTONARI NO TENSHISAMA NI ITSUNOMANIKA DAMENINGEN NI SARETEITA KEN vol. 2


Copyright ⓒ 2020 Saekisan
Illustrations copyright ⓒ 2020 Hanekoto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2020 by SB Creative Corp.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SB Creative Corp., Tokyo
in care of Tuttle-Mori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영상출판미디어(주)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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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2학년 신학기

“있잖아.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야.”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등교하는 개학식 날 아침, 아마네
는 어머니 시호코와 전화하면서 어처구니없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일부러 아마네가 일어나 대충 준비를 마치고 여유가 생겼을 시간대
를 노려서 전화를 거는 어머니에게 황당함과 감탄을 반반씩 느끼면
서, 걱정도 참 태산이라고 소파에서 슬쩍 한숨을 흘린다.
어머니는 아마네가 혼자 따로 살아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옛 상
처가 또 곪지 않을까 신경을 쓰는 것이리라. 2학년이 되어서 부담도
커질 테니까, 뭔가 영향을 받아서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듯하다.
아마네는 가끔 쑤시는 정도이지, 심하게 아픈 수준이 아니다. 바쁜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고는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혼자서도 괜찮으니까.”
『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렴. 아, 그보다는 마히루짱에게 보듬어 달
라고 하는 게 좋겠네!』
“말을 막 던지시네.”
어째서 마히루가 달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걸까.
어머니가 마히루를 아끼고, 여차하면 좋은 관계가 됐으면 싶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들로서는 참 성가신 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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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감정을 자각하고 있는 만큼, 부모님의 간섭은 좋든 나쁘든 성


가시다.
애초에 마히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므로, 이런
대화는 적당히 흘려넘기는 것이 제일이다.
『마히루짱이라면 기꺼이 받아줄 텐데.』
“아, 그러신가요.”
『아무튼, 힘들면 누구든 좋으니 의지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꼭
마히루짱이──.』
“나는 슬슬 나가야 하니까 끊을게. 아침부터 걱정해 줘서 고마워.”
더 말하다간 마히루를 자꾸 권할 게 뻔해서 고맙다는 말만 넌지시
하고 통화를 끝냈다. 필시 지금쯤 어머니는 볼을 부풀리고 있을 것이
다.
걱정의 원인은 아마네 자신이지만, 이건 너무 마음을 써 주는 것이
다.
옛날 상처가 쑤실 때는 있지만, 몸부림칠 만큼의 고통은 주지 않는
다.
애초에 괜히 떠올리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일도 없다.
(괜히 건드리지 않으면 돼…….)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 곁에 있으면 된다.
그렇기에 반이 바뀌는 것은 조금 무서웠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서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일 참이다.
화면을 꺼서 어두운 스마트폰 화면에 자신의 우울한 얼굴이 비쳐서
조금 쓴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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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얼굴을 치토세나 이츠키가 보면 등짝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


각하면서, 아마네는 학교에 가고자 소파에서 일어섰다.

대략 2주 만에 보는 통학로에 조금 감상에 잠기면서 학교에 이르


고, 아마네는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학급 배치표가 붙어 있어서, 아마네도 확인해야 한다.
일단 다소 일찍 왔다고는 해도 새 학년 신학기라는 점도 있어서 일
찍 등교한 학생이 많다. 그중에서도 참 희한하게도 친구인 이츠키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아마네. 지금 왔나 보네.”
“안녕. 네가 먼저 오다니 비가 오겠는걸.”
“아버지가 신학기 정도는 빨리 가라고 집에서 내쫓았거든.”
슬쩍 웃으면서도 지겹다는 듯 고백하는 이츠키가 어깨를 으쓱한다.
이츠키는 여전히 아버지와 대립하고 있는 듯하다. 치토세와의 관계
가 있어서 부모님의 뜻에 따를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리라.
이츠키로서는 치토세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부모님과는 서로 이
해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치토세와의 교제를 따지고 드는 점만 빼면
엄격하기는 해도 성실하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니까, 친구가 봤을 때
는 좋은 부모님이지만.
그 점을 보면, 자신은 부모님과 사이좋은 편이리라.
오히려 너무 소중하게 아끼는 바람에 조금 난처하지만, 부모님이
아마네를 존중하므로 대립할 일은 없다.
아마네를 위해서 부모님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떨어진 학교로 보내
줬으니까. 더군다나 아마네의 교제를 막을 생각이 없다고 할까, 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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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추천하고 있다. 아마네가 마히루에게 느끼는 감정을 전하지는 않


았지만, 부모가 마히루를 매우 아끼고 딸로 삼고 싶다고 말할 정도니
까, 만에 하나 마히루와 사귀는 사이가 되더라도 환영해 줄 것이다.
자신이 가정환경 면에서 매우 축복받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마히루의 사정을 생각하면, 나는 아마도 엄청 행복한 거겠지…….)
마히루의 어머니가 지었던 차가운 표정을 떠올리고 기분이 착잡해
졌을 때, 마음을 가라앉힌 건지 이츠키가 히죽 웃는다.
“뭐, 우리 아버지는 아무래도 좋지만. 자, 학급 배치표나 보라고.”
“네가 웃는 걸 보니 대충 짐작은 간다.”
히죽거리다가 실실 쪼개며 웃는 이츠키를 한심하다는 듯 슬쩍 보
고, 학급 배치표를 확인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
는다.
잠시 후 자신의 이름을 찾고, 다음으로 같은 반에 배정된 이름을 확
인한 뒤 이츠키가 왜 웃는지 그 의미를 다시 이해했다.
명단에는 잘 아는 이름이 몇 개 있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같은 반이 된 사람의 이름도 더러 있는데, 그
중에는 이츠키와 작년에도 같은 반이었던 통칭 왕자님, 카도와키 유
타가 있다.
나아가 치토세의 이름도 보이는데, 이츠키의 기분이 좋은 것은 반
쯤 이것 때문이리라.
그리고 또 하나,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시이나 마히루. 아마네가 평소 신세를 지고, 나아가 남몰래 호감이
생긴 옆집 사람의 이름이다.
(이러면 노린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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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교에서 학급 배치를 정하는 거니까 아마네나 주변 사람들


은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설마 익숙한 사람이 여럿 있을 줄은 몰
랐다.
“잘됐네, 아마네.”
“뭐가 잘됐는지 모르겠는데. 뭐, 네가 있어서 안심했어.”
“뭐야, 갑자기 반한 거야?”
“넌 좀 닥쳐. 너야말로 잘됐잖아. 치토세가 같은 반이라서.”
“그러게 말이야. 사랑하는 여자와 찢어지는 줄로만…….”
“오히려 찢어지는 게 주위 사람들에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신바람 커플이 있으면 너무 시끌벅적하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찰싹 달라붙는 커플이라서 솔로가 피눈물
을 흘리거나 애정 행각을 보고 속이 쓰리거나 할 것 같다.
친숙한 이츠키와 치토세가 있어서 반가운 한편, 앞으로 1년 동안
시끄러울 테니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
“말이 심하네. 그거냐? 여친 없어서 질투하는 거야?”
“그 소리를 다른 남자한테 해 봐라. 눈빛으로 죽일걸.”
“농담이래도. 속도 참 좁네. 뭐, 아무렴 어때. 네가 관심이 있는 사
람도 이번에는 같은 반이니까.”
“입 다물어.”
야유하듯 말하고 고개를 홱 돌리니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게 왠지 속을 긁어서 미간을 찡그리지만, 앞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
려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후지미야가 싫어하는 눈치인데? 너무 놀
리다간 미운털이 박힐 거야, 이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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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도 이츠키의 목소리가 아니라서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


니, 이츠키의 어깨를 두드리는 왕자님, 유타가 있었다.
주위에서 슬쩍슬쩍 보는 것도 다 알고 있을 테지만, 익숙한 건지 딱
히 의식하는 기색도 없이 아마네를 보고 살갑게 웃음을 지었다.
“안녕. 올해도 후지미야와 같은 반이야. 잘 부탁해.”
딱히 대단한 접점도 없을 텐데 아마네가 이츠키와 게시판 근처에서
대화하고 있을 때 인사하러 온 듯하다. 유타는 이츠키와도 사이가 좋
은 것 같으니까 말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아마네도 친근하게 보
는 것은 신기했다.
이런 인기남이 말을 걸면 거북하다. 유타의 잘못은 아니지만, 너무
이목을 끄는 것은 달갑지 않다.
게다가 이렇게 신학기에 새로운 교우 관계를 만들려고 하면 옛날
일이 떠오른다.
가슴속에서 확 퍼지는 아픔이 낯설지 않다.
속에서 정리하고, 속에 꾹 삼키고, 속에 깊숙이 밀어넣었을 터였다.
“후지미야.”
“아, 미안해. 잠시 멍하니 있었어. 올해도 잘 부탁해.”
조금 불안한 눈치로 눈썹을 늘어뜨리는 유타에게 슬쩍 웃어서 대꾸
하자, 안심했는지 부드럽게 웃는다.
그건 여자들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아주 조금 그렇게 생각하
면서도 순수하게 기뻐하는 눈치라서 아마네도 안심했다.
유타는 그대로 다른 남학생이 말을 걸어서 그쪽으로 갔지만, 그때
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츠키가 뭔가를 확인하듯 아마네를 바라본다.
“너 혹시, 유타를 경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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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나랑 친해지려고 하는 게 왠지 신기


해서.”
“와, 또 비굴하게 군다. 유타는 뭔가 목적이 있어서 너랑 친해지려
는 게 아닐걸? 세상 모두가 이익을 계산하고 다른 사람과 친해지려
는 건 아닐 테니까.”
의심도 참 많다고 어처구니없어하는 이츠키에게, 아마네는 “그야
그렇겠지만.”이라고 대꾸한다. 그 뒤에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있
어.’라고 덧붙이려는 것을 꾹 참고서.
딱히 유타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1년 동안 같은 반에서 지낸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사람 됨
됨이는 잘 안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성격이
라서 인기가 많은 것도 이해가 되고, 친구가 많은 것도 이해할 수 있
다.
그래도 아마네의 가슴속에 자그맣게 남은 응어리가, 과거를 떠올리
게 하는 이 시기가, 의심을 강하게 부채질한 것이리라.
아마네 자신도 잘 알지만, 조금 몸을 움츠리고 경계하고 마는 것이
다.
“카도와키가 어쨌다는 게 아니라, 나는 낯을 가려서 갑자기 말을
걸면 겁이 덜컥 난다고.”
“뭐, 너는 굳이 따지자면 낯을 가리는 성격이 맞지만. 나와 처음 이
야기했을 때도 경계심을 확 드러내는 고양이 같았으니까.”
“야, 누가 고양이라는 거야.”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한데, 건드리면 털을 곤두세우고 학학거리는
고양이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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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동물처럼 말하는 이츠키를 보고 미간을 찡그리고 “어딜 봐


서 고양이라는 거야.”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도도하고 귀여운 생물을 속이
삐뚤어진 아마네와 동급으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뭐, 유타도 익숙해지면 친해지기 쉬울걸? 중학교까지 해서 3년 동
안 같은 반이었던 내가 보장하겠는데, 쟤는 속까지 좋은 놈인데?”
“그건 봐도 아는데, 내 마음의 문제야. 게다가 딱히 말을 걸 일도
없고…….”
“쟤가 먼저 말을 건단 말이지.”
“왜?”
“음? 그야 네가 유타가 봐도 좋은 놈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이츠키가 히죽 웃고 말하지만, 아마네는 그 기준을 몰라서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안녕! 올해는 같은 반이구나!”


새로운 교실에 들어가 지정된 자리에서 제출 서류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을 때, 미묘하게 늦잠을 잔 듯한 치토세가 찾아왔다.
올해는 치토세와 이츠키가 모두 같은 반이니까, 참으로 닭살 돋는
일상이 시작되리라.
“안녕. 오늘은 이츠키랑 같이 안 왔네.”
“응. 늦잠 잤어. 와~ 신학기인 줄도 깜빡하고 마마가 깨워줬어. 잇
군은?”
“아까 자판기 있는 곳에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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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밀크티 부탁해야지. 아, 마히룽, 마히룽! 올해는 같은 반


이니까 잘 부탁해-!”
누구를 봐도 주저하지 않는 치토세는 먼저 교실에 와 있는 마히루
에게 손을 붕붕 흔들면서 돌격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마히루가 눈을 딱 깜
빡인다.
주위 사람들이 ‘마히룽’이라는 별명에 경직했다. 하지만 이어서 마
히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천사님의 미소를 보이자, 그것
이 허용되는 사이임을 이해했는지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히루에게 서둘러 다가가는 치토세를 보고 아
침부터 기운이 넘친다며 황당함과 감탄을 반반씩 느끼면서 마히루에
게 눈길을 돌렸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미소의 질이 한순간 변한 느낌이 들었는데, 곧이어 치토
세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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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차피 일찍 끝날 테니까 크레프 먹으러 가자! 옆 앞에서


파는 크레프가 맛있어-.”
“그래요. 저라도 괜찮다면.”
기분 탓인지 또 이쪽을 본 것 같지만, 아마네는 딱히 자신의 허가를
안 받고 가도 상관없고, 애초에 행동을 제한할 권리도 없으니까 마음
대로 했으면 좋겠다.
점심은 패스트푸드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면 되겠지. 참으로 건
전한 친구 사이라서 흐뭇하기도 하다.
치토세는 이런 구석이 참 좋다고 보니까, 다른 사람과 잘 놀려고 하
지 않는 마히루를 피곤하지 않은 선에서 데리고 같이 놀았으면 좋겠
다.
치토세가 같은 반이라서 가장 잘된 사람은 마히루일지도 모른다.
치토세의 기백에 밀리면서도 즐겁게 웃는 마히루를 멀리서 지켜보
면서, 아마네도 조금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신학년도 첫 등교는 개학식을 마치고 반에서 자기소개 및 연락사항


전달을 거친 다음에 해산하는 것으로 끝났다.
오전 중에 하교하면서 마히루와 함께 식사를 공유한 이후로 의지할
일이 줄어든 편의점 도시락을 사서 귀가한 아마네는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늘어지게 드러눕는다.
새로운 반에는 아는 얼굴도 많고, 그냥 봐서는 차분한 학생도 많은
듯하니 어떻게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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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아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다. 만약 하나도 없었더라면


앞으로 1년 동안 학교생활이 우울해질 뻔했다.
아마네 자신도 음침한 성격이라고 잘 아니까, 역시 새롭게 친구를
사귀고 친목을 다지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신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 어렵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데도 용케 이츠키와 친해졌다고 옛날의 자신에게 감탄하면서,
아마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익숙하지 않은 반에 조금 피로를 느꼈다. 식후의 졸음도 맞물려서,
아마네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네가 봉인한 옛날 기억은 상처에 손대는 것처럼, 작고도 강한


통증을 유발한다.
평소에는 잊은 상태이고, 충실한 학교생활로 기억 깊숙한 곳에 몰
아넣고 있는 것이다.
마히루를 만나고 난 뒤로는 떠올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있을 때도
수면에 떠오르는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는 정도라서 아픔도 적었
다.
그것이 지금 와서 명확하게 표면에 부상한 것은 신학년도가 시작된
탓일까, 아니면 마히루의 과거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
면 가슴에 쐐기를 박은 원인을 제공한 남자와 유타가 조금 겹쳐서 보
였기 때문일까.
『올해부터 잘 부탁해!』
과거에, 그렇게 말하고 아마네에게 손을 내민 남자가 있었다.
당시의 아마네는 더 솔직하고, 남을 의심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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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도 전부 선량해서 악의를 좀처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그들도, 모두가 그렇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너 따위는, 처음부터.』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아마네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머릿속에 울
리지 않았다.

조금 흐릿한 시야에 평소와 똑같은 실내가 보인다.


봄 햇살이 창밖에서 들어와 불을 켜지 않은 실내를 따스하게 비추
고 있다.
실내에는 아마네 말고 아무도 없고, 유달리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
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호흡을 고르고 시계를 보니 깜빡
졸기 시작한 시점에서 한 시간 정도 지났다. 선잠을 잤다고는 해도
그럭저럭 오래 잔 셈인데도 피로가 조금도 풀리지 않은 것은 악몽을
꾼 탓이리라.
몸과 마음의 피로로 봐서는 다시 잠들 수 있겠지만, 잠을 잘 기분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세수하고 정신을 차리자.)
흐르는 물이 마음속 응어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기를 빌면서, 아마
네는 세면장으로 갔다.

“아마네 군, 얼굴색이 안 좋아요.”


결국 얼굴은 시원해졌지만, 마음속에 낀 안개가 걷히는 일은 없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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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금은 멀쩡해졌고, 또한 마음속 깊숙이 밀어넣은 것이 잊


힐 때까지 기다리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고로 마히루에게 변화를 들키지 않도록 어떻게든 얼굴에 드러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통찰력이 좋은 마히루에게 들키고 말았다.
치토세와 하교 후에 딴 길로 샜다가 집에 찾아온 마히루는 저녁 후
마음이 정리된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아마네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몸이 안 좋나요?”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아, 뭐라고 할까. 낮잠을 잤는데 꿈자
리가 사나웠어.”
“뭔가 불쾌한 꿈이라도 꿨나요?”
“뭐, 그런 셈이야. 다만 딱히 심각한 꿈은 아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속내를 떠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슬쩍 가로젓고, 얇은 가면을 얼
굴에 쓴다.
마히루는 총명하다. 건드리는 것을 꺼리는 일에는 파고들지 않는
다. 마히루가 지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물러날 사람이다.
아마네도 벽을 만들 만큼 마히루와 거리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
음속에 연약한 부분을 갑자기 건드리면 밀쳐내서 마음이 상할 것 같
으니까 얇은 막을 하나 두고 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히
루가 억지로 건드리려고 들지 않는다고 아니까.
아마네가 말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한 마히루는 화내거나 슬퍼하거
나 곤란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아마네를 쳐다봤다.
맑고 고운 캐러멜색 눈동자로 바라보면 왠지 불편하지만, 마히루는
아마네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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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왜?”
“아뇨. 아마네 군의 머리카락은 만지면 참 좋을 것 같아서요.”
“뭐?”
무슨 소리를 할까 긴장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무심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딱 봐도 관계가 없는 머리카락 이야기가
나와서 아마네가 당혹스러워하는데, 마히루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아마네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만져도 되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야 마음대로 만져도 되지만.”
“그런가요. 그러면 이리 오세요.”
그렇게 말하고 소파 구석으로 이동해서 본인의 다리를 탁탁 두드리
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다시 “뭐?”라고 대꾸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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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기 쉬운 자세를 잡아야 하니까 머리를 올려 주세요.”


“아니, 그건 좀.”
노골적으로 이상한 제안을 듣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아마네를,
마히루가 조용히 보고 있다.
아마네는 왜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제
안한 마히루가 너무 차분해서 아마네는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제 다리에 불만이 있나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못마땅하게 말하는 소리에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좋아하는 여자애의 다리에 머리를 올릴 기회는 좀처럼 없다. 하늘
에서 떨어진 행운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필시 죽도록 부끄러울 것이다. 아무리 다소의 신체 접촉이 있었다
고 해도, 무릎베개는 차원이 다르다.
지난번 포옹은 긴급한 사안이었고, 마히루를 달래는 목적이 있었으
니까 수치심을 심하게 느끼지는 않았지만, 이건 아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오세요.”
“아, 아니지. 그건…….”
“아마네 군.”
“……네.”
아무리 그래도 부끄러우니까 거절하려고 했으나 마히루가 미소를
지으면서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저항할 기력이 사라진 것은 필시 눈
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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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그 이전에 아마네의 저항을 완


전히 꺾은 마히루는 아마네를 부르듯이 또다시 스커트 위로 다리를
탁탁 두드린다.
롱스커트라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마히루
의 다리에 머리를 올리듯 소파에 눕고 마히루의 몸에서 등을 돌리듯
몸을 틀자 부드러우면서 반발력이 있는 감촉이 들었다.
불필요한 지방이 없으면서도 여자애답게 부드럽고 가녀린 다리는
아마네의 체중에는 꺾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듯 머리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딱 좋은 높이도 그렇고, 마히루가 희미하게 풍기는 달달한 향기도
그렇고, 마음이 편해지는 체온도 그렇고, 모두가 아마네의 저항심을
다른 의미로 깎아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위에서 내려온 손이 아마네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니
까 더더욱 힘이 풀린다.
“내가 이대로 나쁜 짓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톡 쏘아붙이자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밟아 줄까요?”
“죄송합니다.”
요새는 줄어든 독설을 오래간만에 들어서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면
서도 그 무시무시한 내용에 곧바로 사죄했는데, 마히루는 아마네의
반응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웃고 있다.
“그야 아마네 군은 그러지 않을 테지만요. 그럴 배짱도 없고, 기운
도 없어 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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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게 배짱이 없다는 말을 들어서 속이 복잡하지만, 실


제로 마히루가 싫어할 것을 생각하면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으므로
그 지적은 올바르다.
“기운이 없으면 없는 대로 제가 편하게 내버려 두세요. 저도 얌전
히 있어 줘야 만지기 편해요.”
부드럽게 속삭이고 아마네의 검은 머리칼을 하얀 손가락으로 어루
만지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다
물었다.
(아마도 신경을 써 준 거겠지…….)
마히루가 나름대로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리라.
아마네의 스트레스를 알아채고 기분을 풀어 주려는 것이다.
어째서 무릎베개로 기분을 풀어 주려는 것인지 그 발상은 아리송하
지만, 실제로 마히루의 무릎베개로 마음이 편해지고 푸근한 것은 사
실이니까 불평할 수 없다.
지금의 아마네는 마음이 조금 지친 탓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심장이
쿵쿵 뛰지 않는다.
그저 잠에 취한 듯한 편안함이 계속해서 몸에 스며든다. 머리카락
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것이 이토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는 미
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남에게 몸을 맡긴 것도 오랜만이어서, 어쩌면 좋을지
도 모르는 채 행복과 만족의 바다에 쑥쑥 빨려든다.
이대로 가다간 잠들겠다고 생각할 만큼, 마음이 온통 평화로웠다.
“그나저나 여자가 무릎베개를 제공해 주는데 감상도 하나 말하지
않는 남자는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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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 희미하게 온몸을 감싼 차에 그런 소리가 들려서, 단숨에 정


신이 번쩍 들면서 무심코 기침할 뻔했다.
“저, 저기 말이야.”
“치토세 양한테 남자가 지쳤을 때는 무릎베개를 해 주면 행복해서
피로도 회복된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치토세가 이상하게 조언한 탓이라고 깨달았지
만, 따지고 보면 완전히 이상한 것도 아닌 데다가 오히려 보상을 받
은 셈이라는 점에서 차마 치토세를 원망할 수도 없다.
손가락으로 아마네의 볼을 콕콕 찌르는 마히루에게 뭐라고 대답해
야 좋을지, 자연스럽게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솔직히 진짜 행복해서 매일 해 줬으면 싶다. 그 말을 입 밖에 꺼냈
다간 황당해하거나 질색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말하지 않겠지
만.
속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찬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마음을 달래 주었기도 하고, 여자애의 다리를 독점한 것도 있으니
까 농담으로도 불편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섣불리 솔직하게 말했다간 마히루가 질색할 게 뻔하니 아마
네는 고심한 끝에 표현을 순화한 칭찬을 말하기로 했다.
“정말 좋았어. 하지만 아무한테나 하지 마.”
“남한테 처음 하는 건데 아무한테나 하지 말라고 해도 곤란한데
요.”
처음이라는 말에 무의식중에 심장이 뛸 뻔했지만, 잘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마히루는 남자를 근처에 잘 두려고 하지 않는 데다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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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성격이라서 당연히 아마네한테 처음


하는 거겠지.
그런데도 해 주는 정도로는 신뢰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가슴과 얼
굴이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마히루는 아마네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기색도 없이 만족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어루만진다.
“그야 제가 멋대로 하는 일이니까 아마네 군은 얌전히 만끽하면 돼
요. 저는 그냥 머리카락을 감상하는 거니까요.”
“그런 거냐.”
요컨대 자기가 멋대로 하는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겠지.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일이라고 말해서 거북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 속이 근질거리면서도, 아마네는 마히루의 말을
곱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네 군은 올해 학급 배치를 어떻게 생각해요?”
잠시 말없이 아마네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마히루가 문득 그런
질문을 했다.
“음. 설마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어.”
사이좋은 누군가와 같은 반이 되면 안심하고 지낼 수 있겠다. 그렇
게 생각한 적은 있지만, 다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다.
“후후. 아마네 군이 깜짝 놀란 얼굴이 재밌었어요.”
“저기 말이야……. 그야 깜짝 놀라지. 경계도 해야 하고.”
“경계해요?”
“너한테 편하게 말을 걸거나 친한 척하지 않게 거리를 둬야 하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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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편해진 한편, 마히루가 있으니까 접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말을 걸 생각은 없지만, 실수로 친
하게 대했다간 대형 참사에 말려들 것이다.
아마네는 학교에서 섣불리 마히루와 가까운 사이가 되려고 생각하
지 않는다.
아마네 자신은 그저 집에서 함께 지내는 걸로 족하다고 본다. 굳이
남자의 태반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남들에게 이 관계를 알리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을 걸 생각은 없다.
남처럼 지낼 작정이다.
그 점은 마히루도 이해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 볼을 꼭 꼬집혔다.
“왜 그러는데?”
“아뇨. 딱히 이유는 없어요. 이유는 알아도 감정이 가만히 있는 것
을 용납하지 않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람…….”
아무래도 조금 토라진 것 같은데, 아마네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아마도 마히루는 학교에서도 아마네에게 말을 걸고 싶은 것이리라.
마히루의 약한 부분을 아는 아마네가 있으면 안심할 수 있겠지만, 그
랬다간 아마네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아마네가 이츠키만큼 친근감이 있고 얼굴도 반반하면 당
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네는 이츠키처럼 성격이 밝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남
자가 아니다. 뭔가 뛰어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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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와 마히루 사이에 우정이 있더라도, 주위에서 그것을 인정할


지 어떨지는 또 다른 문제다.
천사님은 이래야 한다고, 이런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정해서
아마네를 배척하는 사람이 생길 것은 상상하기 쉽다.
혼자 지내는 것은 익숙하지만, 주위에서 적대하는 것은 싫다.
“지금은 그렇게 알고 넘어갈게요.”
“지금은 그러겠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게 해.”
“집에서는 평소처럼 지내 주세요.”
“그래야지. 그나저나 평소처럼 지낸다면 무릎베개는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이건 예외예요.”
이해할 수 없는 예외 발언을 한 마히루가 계속해서 아마네의 머리
카락을 만진다. 그보다도 동물 털을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내는 장
난이라서, 아마네는 더 말했다간 마히루가 또 토라질 것 같다는 생각
에 입을 다물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최고로 기분 좋은 느낌을 주니까, 이번에는 얌
전히 만끽해야겠지.
말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마네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마히
루가 아까보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기 시작한다.
그 손길은 부드럽고 자애로워서, 왠지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이를
웃돌 만큼 편한 마음과 스며드는 행복이 몸을 지배하는 바람에 아마
네는 완전히 마히루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이건 사람을 타락시키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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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대로 계속 가다간 금방 잠에 빠져들 만큼은 기분이 좋다.


사람을 타락시키는 마히루의 진가를 체험하고, 아마네는 나른함과
함께 마히루의 온기에 빠져들려고 눈을 감는다.
그것만으로 갑자기 잠기운이 쏟아지니까, 천사님표 무릎베개는 정
말이지 무시무시하다.
이제 마히루의 배 쪽으로 돌아누우면 온기와 달달한 향기로 더욱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했다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마히루를 등진 채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마히루가 아마네를 부드럽게 만질 때마다 늘어질 듯한 감각에 빠져
서 조금 겁이 나지만, 저항할 수 없는 행복에 몸을 맡기고 만다.
“졸리나 보네요.”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제는 눈을 뜰 기력이 없었다.
“괜찮아요. 꼭 깨워 줄게요. 편하게 잠들어 주세요.”
자애롭고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마네는 더는 졸음을 쫓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감싸는 잠기운에 몸을 맡겼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떠 보니, 블라우스가 감싼 산봉우리와 그 너머


에서 자애롭게 보는 마히루의 얼굴을 쳐다보는 자세로 있었다. 아마
네는 벌떡 일어났다.
어느샌가 몸을 뒤척여서 천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나 보다. 그 덕택
에 잠에서 깰 때 자극적인 광경을 목격해서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
다.
“내가 얼마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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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일어난 아마네에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마히루는 아마


네의 질문을 듣고 살포시 웃었다.
“한 시간 정도 잤어요. 잠든 얼굴이 귀여웠어요.”
“빤히 보지 마.”
“아마네 군이 할 말인가요.”
불필요한 감상을 말하는 마히루를 타박하려고 했지만, 마히루에게
곧바로 논파당하고 말았다.
그 말대로 아마네는 마히루가 잠든 사이 몇 번인가 얼굴을 보거나
만진 적이 있으니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리라.
“저만 방심한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아마네 군도 풀어질 필요가 있
어요.”
“마히루 넌 멋대로 풀어진 거니까…… 아효, 아힙히하.”
“이 입이 방정맞게 떠드는 거군요?”
양쪽 볼을 부드럽게 붙잡히는 바람에 “헤효함히하.”라고 솔직하게
사과한다.
“잘했어요. 정말이지 참.”
아마네의 사죄에 마히루가 만족했는지, 볼을 쪽쪽 잡아당기는 것을
멈추고 부드럽게 만지작거린다. 결국 볼을 만지는 것에는 변함이 없
지만, 아마네도 마히루의 볼을 잡은 적이 있으니까 말릴 수가 없다.
마히루보다 딱딱하고 잘 늘어나지도 않으니까 만져도 즐겁지 않을
텐데. 마히루는 즐겁게 웃으면서 아마네의 볼을 가지고 놀고, 다음에
는 천천히 뺨을 어루만졌다.
“얼굴색이 좋아졌네요.”
“그렇게 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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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래도 매일 보니까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아마네 군도


제가 뭘 참고 있으면 알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 마히루가 다시 아마네의 뺨을 어루만지
고 짓궂게 웃는다.
“뭐든 힘든 일이 있으면 의지해 주셔야 하거든요? 당신이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노력해 볼게.”
마히루가 슬며시 엄지와 중지, 약지로 볼을 붙잡았다.
더는 붙잡혀서 이상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아, 알았대
도.”라고 허겁지겁 대답하자 만족스럽게 “잘했어요.”라고 고개를 끄
덕인다.
“억지가 심하네.”
“여자는 조금 억지를 쓸 때가 있는 법이에요. 애초에 저는 밖에서
얌전하니까, 이런 것도 아마네 군 말고는 보일 일이 없어서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많잖아.”
오히려 그게 훨씬 위험하다. 즉, 아마네한테만 특별히 이러는 거라
고 선언한 셈이니까.
마히루는 딱히 자신의 발언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 듯,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뚱한 표정을 지은 아마네를 보고 웃었다. 아마네는 더욱 부
끄러움을 감추고자 고개를 홱 돌리고 “이 바보가.”라고 조용히 중얼
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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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왕자님과의 접촉

마히루와 같은 반이 된다고 해서 아마네의 생활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생답게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이츠키와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
고, 방과 후에는 동아리 활동도 없으니까 집에 간다. 애초에 마히루
와 엮일 일이 없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1학년 때보다 유타와 대화할 기회가 많
아진 정도이리라.
그래도 아마네가 먼저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유타가 스스럼없이 말
을 거는 것이라서, 아마네는 망설이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개학식 날에는 옛날 일이 잠깐 떠올라서 경계했지만, 유타와 아마
네의 옛 지인은 다른 사람이다.
조금 긴장하지만, 그렇다고 유타를 멀리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접
해 본 바로는 밝고 솔직하고 마음씨 착한 소년 같았다. 애초에 이츠
키가 보장한 바 있어서, 아마네가 우려할 성격은 아닌 게 확실하다.
2학년이 되어 학교에 다니고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가슴속의 아픔
도 잠잠해졌다.

“너는 그래도 되겠어?”


아마네의 앞자리에 앉은 이츠키가 뭔가 떠올린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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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식당에서 1학년 때처럼 밥을 먹고 있다.


참고로 치토세도 이 자리에 낄 때가 있지만, 오늘은 마히루와 같이
먹겠다고 했다. 공개적으로 마히루와 완전히 친해져서 조금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그 사람과 지금처럼 지내는 거.”
“굳이 학교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잖아.”
그 이전에 말을 걸었다간 십중팔구 주위에서 ‘얜 누구야?’라고 볼
것이다.
수수하고 얌전한 부류에 속하는 아마네가 마히루와 대놓고 엮이는
것은 자살 행위다.
“아니, 상대는 이야기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눈치던데.”
“뭐, 그건 인정하겠어.”
마히루 본인도 알아서 아마네를 시야에 두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지
만, 가끔 이쪽을 보고 왠지 시무룩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보는 눈이 없을 때는 그나마 낫지만, 치토세가 대신 이쪽을 보고
‘이 겁쟁이’라고 말하듯 볼 때는 왠지 속이 거북해진다.
“이제는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는걸.”
“싫어. 귀찮아. 그렇게 잘난 모습도 아니야.”
게다가 애초에 지금은 소문이 잠잠해졌지만, 머리를 정돈한 상태로
마히루와 함께 있는 것을 여러 번 목격당했다. 아마네=소문이 난 그
남자라는 공식이 성립했다간 장차 아마네의 학교생활에 지장이 생길
만큼 난리가 나겠지.
“너는 왜 꼭…… 적어도 인기가 생길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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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서?”
자신이 머리 모양을 조금 바꿨다고 갑자기 인기를 끌 것 같지는 않
지만, 이츠키는 왠지 확신하는 눈치다.
“네 성격은 여자들이 남친으로 삼고 싶은 성격이라고 봐. 입은 조
금 험해도 의외로 솔직하고, 여자를 소중히 여기는 부류야.”
“그게 보통 아니야……?”
“그것도 못 하는 남자가 많다고 할까, 소중하게 여겨 줬으면 하는
여자 마음을 생각해서 소중하게 여기는 부류겠지. 너라면 자기만족
이 아니라, 잘 보고 행동에 옮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데.”
“안 그랬으면 겉으로는 친근하면서 경계심이 무지 강할 것 같은 그
사람하고 친해질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 부정할 수 없다.
끙. 입술을 깨물자 거보란 듯이 이츠키가 웃는다.
“그리고 한마디 해도 될까?”
“뭔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소중하게 대할 리는 없겠구나 싶은
데.”
“말이 많아. 그러면 안 되냐?”
이미 태도로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숨길 수도 없어서, 툴툴대듯 대꾸
하고 주문한 라멘을 후르륵 먹는다.
이츠키는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구나 싶은 눈치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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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기쁘다고 할까. 소중히 여기고 싶은 사람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야.”
“그러냐.”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딱히…… 잘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 아이가 행복해질 상대
라면 내가 아니더라도 좋고.”
물론 그 상대가 자신이었으면 하지만, 마히루가 모르는 다른 남자
를 택해서 행복해진다면 축복해야겠지.
자신이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한편, 마히루가 행복해진다면 자신
의 마음을 꾹 참는 것도 불사한다.
마히루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환경에 축복받지 못한 만큼, 많이
행복해져야 지금껏 한 노력에 보답받을 수 있으리라.
“겁쟁이 자식.”
“시끄러워. 그야 나도. 아니, 내가 그렇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러
고 싶지만.”
“그렇다면 본인에게 마음을 전하면 되잖아.”
“그걸 어떻게 말하냐, 이 바보야.”
아직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는 마음을 고
백할 수 없다.
애초에 마히루는 교제를 신중하게 보는 성격이니까, 일단 시험 삼
아 혹은 노는 목적으로 어중간하게 교제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
다.
마히루의 부모님 이야기로 봐서는, 마히루가 간단히 승낙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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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장래를 약속할 각오와 감정이 없으면 교제로 발전하지 않을


거라고 보니까, 마음을 섣불리 전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신중하다고 할까.”
“말이 많아. 뭐가 어때서. 나는 나대로 그 아이가 좋아하게 행동할
거야.”
“이걸 제삼자가 다 말하면 참 좋을 텐데…….”
“뭘?”
“됐다……. 뭐, 잘해 봐. 나는 응원할게.”
왠지 어이없다는 투로 응원해서, 아마네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고
맙게 받아들였다.

“어, 후지미야잖아? 별일도 다 있네.”


방과 후에 게임센터에 들른 아마네가 동전 교환기에 지폐를 투입했
을 때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전을 지갑에 넣고 돌아보자 유타가 있었다. 아무래도 게임센터에
놀러 온 듯, 지갑을 한 손에 들고 아마네의 뒤에 서 있었다.
“카도와키? 너야말로. 동아리 활동은 어쩌고?”
“오늘은 쉬는 날이야. 매일 몸에 부담을 많이 주면 안 되니까.”
“그래?”
육상부의 에이스라도 연습에만 전념하는 것은 아니겠지. 휴식도 잘
취하고 있다는 뜻인가 보다.
동전 교환을 마치고 물러났더니 유타가 마찬가지로 동전 교환기에
지폐를 넣고 동전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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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2000엔만 딱 교환하고 지갑에 넣은 유타가 무심코 구경하던 아마네


를 보고 웃었다.
“난 후지미야를 이런 데서 볼 줄 몰랐거든. 시끄러운 곳은 별로 좋
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보고 깜짝 놀랐어.”
“게임센터 정도는 가. 돈을 낭비하고 싶진 않으니까 자주 오진 않
지만.”
“흐응. 그렇다면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데?”
“크레인 뽑기 게임을 하려고. 인형을 부탁받았다고 할까.”
부탁받았다고 할까, 치토세가 ‘이거랑 이걸 마히룽이 좋아할 것 같
은걸~?’ 하고 게임센터 홈페이지에 있는 입고표를 보여줘서, 요새
묘하게 시무룩한 마히루에게 선물하려고 뽑으러 왔다.
게다가 예전에 치토세가 보낸 사진을 봐서는 집에 장식품이 별로
없어 보였다. 기왕이면 이렇게 귀여운 인형을 주고 싶고, 곰돌이 인
형에게도 친구를 만들어 줘야겠지.
“인형을 뽑을 줄 알아?”
“의외로 잘해.”
이 게임센터는 집게팔이 잡는 힘이 좋아서, 경품의 무게 중심이나
배치, 집게의 힘이 걸리는 위치만 잘 이해하면 의외로 쑥쑥 뽑힌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 시호코에게 ‘이건 말이지. 여기를 집게로 잡
으면 뽑혀. 이건 상표에 집게를 걸면 되겠네.’라고 여러모로 교육을
받은 덕택이리라.
어머니가 쓸데없이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서, 아마네도 이상한 기
술과 지식을 습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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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유타가 의외라는 눈으로 보고 있어서 한번 보라는 느낌으로 함께


크레인 뽑기 게임 코너로 이동하고, 신상품 코너에 있는 토끼 인형이
수북하게 쌓인 기계에 대충 동전을 투입했다.
집게팔의 힘과 배치를 봐서는 동전 하나로 될 것 같다. 돈을 여러
번 써야 뽑히는 것도 있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이 뽑을 수 있다.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의 캐릭터 상품 같은 토끼 인형의 머리와 몸
통이 만나는 곳을 노려서 집게의 위치를 맞추고, 머리를 잘 붙잡아서
몸통은 늘어져도 머리로 붙들어서 고정한 상태로 올린다.
그리고 레버에서 손을 떼면 자동으로 상품을 꺼내는 곳에 떨어진
다.
툭 떨어진 토끼 인형을 꺼내서 슬쩍 흔들어 보이자, 유타는 감탄한
듯이 “오.” 소리를 냈다.
“이 게임센터의 집게팔은 힘이 좋아. 점원도 친절해서 잘되지 않을
때 뽑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니까 초심자에게 추천하는 곳이야.”
“그래서 이츠키가 여기가 좋다고 한 건가.”
유타는 “그랬군.” 하고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혹시 남한테 선물할 거야?”
“그래.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평소의 고마움을 전하려고.”
거짓말한 적은 없다.
줄 사람이 마히루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세를 진 건 사실이
고, 평소에 고맙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단순히 인형들 사이에 있는 마히루도 참 귀엽겠다고, 조금
개인적인 욕심도 있다.
“후지미야는 꼼꼼한 남자니까.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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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뭘 아는데?”
“아니, 그게 말이지. 후지미야는 센스도 있고 신사적이잖아. 은근
슬쩍 남을 돕기도 하고.”
“어쩌다 그런 거겠지.”
“어쩌다 그런 거라도, 나는 도움을 받았으니까. 왜, 그때 그 비닐봉
지라든지.”
그때는 정말 고마웠다고 상쾌하게 웃으며 다시금 말하는 소리를 듣
고, 왠지 낯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딱히 대단한 일을 하진 않았지만, 유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 듯하
다.
슈퍼의 비닐봉지는 자주 구하니까, 은혜를 베풀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도와키는 밸런타인 때 그걸 다 먹었어?”
대놓고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서 낯부끄러워진 기분을 감추듯이 의
문이 들었던 사실을 물어보자, 유타가 미묘하게 표정을 흐렸다.
“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지? 시중에서 파는 건 먹었어.”
“수제 초콜릿은 안 먹은 거구나.”
“수제는 좀, 뭐라고 할까……. 그야 진짜로 멀쩡하게 만드는 아이
도 있는데 말이지.”
“맛없다는 거야?”
“아니, 가끔 머리카락이나 딱 봐도 넣어서는 안 될 것이 나올 때가
있어.”
“무슨 주술도 아니고…….”
우연히 섞인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유타의 낌새로 봐서는 자주
있는 일이고, 의도적으로 넣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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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일부를 넣으면 사이가 좋아진다는 미신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즉 그런 것이겠지. 그러나 먹는 사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간식 같은 것도 받기는 하는데 말이지……. 그런 일이 예전부터
종종 있어서 무섭거든. 그래서 손수 만든 것은 받지 않는다고 사전에
말하고 있어. 그래도 주는 사람은 마음만 받고 돌려줘. 시중에서 파
는 것처럼 위장해서 넣는 것은, 미안하지만…… 좀.”
아무래도 자꾸 이물질이 들어가서 받지 않기로 했다는…… 애수를
자아내는 표정으로 맥없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차마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기남도 참 고생이 많네.”
“이런데도 질투를 받으니까 참 힘들다고 할까……. 나는 인기를 끌
고 싶은 게 아니야. 이런 일을 당할 바에는 인기가 없어도 좋아.”
“절박하구나.”
“무섭잖아? 웃으면서 이상한 걸 넣은 과자나 먹을 것을 주는 여자
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서, 아마네도 고개를 끄덕인다.
보통은 여자가 손수 만들었다는 것에 가치가 생기지만, 유타에게는
공포의 대상밖에 안 된다. 보기 드문 체험을 자주 한다는 점이 너무
불쌍하다.
“여자들한테 관심을 받지 않으려면 사귀는 상대를 구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 아이가 괴롭힘을 당할까 무섭거든.”
“질투는 참 무섭구나…….”
“그러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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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난처하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유타는 심하게 피곤해


보였다.
너무나도 동정심을 자극하는 그 모습에, 아마네는 근처 크레인 뽑
기 게임 기계의 대형 포테이토 스틱 과자 봉지를 뽑아서 떠넘겼다.
“그 뭐냐……. 나나 이츠키라도 괜찮다면 상담 정도는 들어줄 테니
까. 먹고 기운 차려.”
“고마워……. 힘들어…….”
정말로 고민하는 유타를 보고, 인기가 많은 것도 편하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라고 실감했다.

아마네가 귀가하자 마히루가 소리를 듣고 맞이하러 나왔다.


오늘의 마히루는 앞치마를 걸치고 머리를 경단 모양으로 모아서 묶
었다.
평소 요리할 때는 머리를 묶는데, 역시 여자는 다르다고 할까. 땋아
서 모으거나 경단 모양으로 만들거나 해서 실용적이면서도 귀여움을
추구하고 있다.
먼저 와서 밥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한 마히루는 아마네가 집에 와
서 조금 안도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일단 늦어진다고 연락했지만, 마히루가 신경을 쓰게 한 것 같다. 그
뒤로 유타와 카페에서 가볍게 커피를 마시면서 푸념을 듣다가 늦어
진 탓이리라.
“어서 와요, 아마네 군. 그 봉지는 뭐예요……?”
“게임센터에 들렀어. 뭐, 전리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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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말고도 더 뽑아서 큰 봉지에 가득 넣었으니까 마히루가 봐도


안에 많이 들었다는 걸 알겠지.
“참 많네요……?”
“학식 일일 정식의 두 끼 돈밖에 안 썼어.”
“하아. 그래서 뭘 뽑아 왔나요?”
“나중에 말할게. 배고파.”
지금 줘도 되지만, 기왕이면 천천히 반응을 살피고 싶어서 뒤로 미
룬다.
게다가 배고픈 것도 사실이니까, 빨리 마히루가 차려 주는 밥을 먹
고 싶었다.
“그러면 먼저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가글도 하고요. 그
사이 밥을 내올게요.”
“예입.”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걱정해서 마음을 써
주는 게 기뻤다.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고, 시키는 대로 세면장에
갔다.

“그래서…… 뭘 그렇게 많이 뽑았나요?”


저녁 식사 후, 마히루는 궁금한지 소파 옆에 세워 둔 전리품 봉지를
슬쩍 보고 물어봤다.
“응? 인형인데?”
숨길 생각도 없으므로 봉지를 들어서 무릎 위에 올리고, 붙여 둔 테
이프를 떼면서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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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요?”
“마히루, 좋아하잖아?”
“조, 좋아하지만요.”
“마히루가 좋아할 게 은근 있어서 뽑았어. 받아.”
오늘 제일가는 수확은 전에 선물한 곰돌이 인형과 크기가 비슷한
토끼 인형일 것이다.
덩치는 컸지만 한 방에 뽑은 것이 아마네로선 수수하게 자랑거리
다.
털이 희고 눈이 동글동글한 토끼를 꺼내서 마히루의 무릎 위에 올
린다.
무슨 캐릭터 상품인지는 잘 모르지만, 좌우지간 마히루가 좋아할
법한 것을 뽑았다. 그런데 마히루는 무릎에 둔 토끼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토끼는 별로야?”
“귀여워요…….”
“다행이네.”
평소 쿠션을 끌어안듯이 두 팔로 꼭 안고 얼굴을 문대는 마히루를
보고 잠깐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하다가 그만뒀다.
해맑게 웃는 얼굴을 머릿속 카메라에 저장하고 아직 불룩한 봉지에
서 다른 인형을 꺼낸다.
“더 있어. 고양이도 있고, 강아지도 있고.”
그 게임센터는 다른 곳에 비해 집게의 힘이 좋아서 아마네의 적은
예산으로도 어지간한 것은 다 뽑을 수 있다. 그래서 마히루가 좋아할
것을 쏙쏙 뽑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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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마히루 같은 느낌이 나는 베이지색&흰색 털 고양이 인형과 시


바견처럼 생긴 동네 마스코트 캐릭터의 인형을 추가로 올려놓자 당
혹스러워하는 기색이 훤히 보였다.
“저, 저기, 이렇게 많이……?”
“거추장스러워?”
“아뇨. 그렇지 않아요! 방을 꾸미는 물건도 없고, 귀여워서 기뻐
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인형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은 상상했던 것처럼 귀엽다.
지금은 토끼를 끌어안고 있는데, 다음에는 뭘 안을까 고양이와 강
아지를 번갈아 보고 들뜬 상태다.
그런 마히루가 참 보기 좋아서 웃음을 띠고 구경했더니 시선을 눈
치챈 듯 얼굴을 붉히고 토끼로 얼굴을 반쯤 감췄다.
토끼가 하얘서 빨개진 마히루의 얼굴이 한눈에 잘 보인다.
토끼 귀 사이로 보이는 눈이 촉촉해서 묘하게 색기와 귀여움을 자
아내니까, 아마네는 역시 지긋이 바라보고 만다.
마침내 더 참을 수 없는지, 옆에 있는 아마네의 팔뚝에 이마를 대고
얼굴을 감췄다. 아니, 화풀이하듯 머리를 박는다.
박치기 느낌이 아니라 그냥 툭 대는 정도라서 전혀 아프지 않지만.
“이상하게 웃지 마세요.”
“안 웃었어.”
“아니에요. 웃었어요. 애 같다고 웃는 거예요.”
“그렇게 웃은 거 아니야. 귀여워 보여서 그랬어.”
“웃은 거 맞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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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들켰다는 식으로 장난치듯 웃자 이번에는 마히루가 다리를 찰싹 때
렸다. 좌우지간 달래려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걸로 얌전해진 마히루를 보고 이번에는 들키지 않게 웃었다.
“얼버무리려는 것 같아요.”
“기분 탓이야.”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겠지만요.”
마히루는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리고 머리를 쓰다듬게 두는데, 표정
과 말이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마히루의 무릎 위에 올린 고양이와 품에 안긴 토끼를 보고 토끼와
고양이를 반반씩 섞은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동안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마히루가 고개를 들었다.
상기한 뺨은 여전했지만, 눈에는 아까와 다르게 못마땅한 기색이
보였다.
“저는 아마네 군한테 받기만 해요.”
아무래도 받은 선물이 많아서 걱정하기 시작한 듯하다.
“내 맘대로 준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저는 아마네 군한테 항상 받기만 해요. 선물도, 배려도, 포
근한 분위기도, 전부.”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딱히 네가 신경을 쓸 일은 아니
야.”
딱히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게 아니고, 그저 마히루가 기뻐하니까 주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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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마치 마히루의 기쁨이 대가 같지만, 결국 자기만족에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본인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래도 마히루는 받기만 해서 마음이 아픈 듯하다.
오히려 아마네는 마히루가 이것저것 다 챙겨 주니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것으로도 모자란다고 보지만.
“저도 뭔가 보답하고 싶어요.”
“완고하네……. 그래도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하나 정도는 받을
까.”
“제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어요.”
정말로 말하면 뭐든 줄 것 같아서 조금 위태롭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담을 주는 일을 부탁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부탁하지 않으면 마히루가 시무룩할 것이다.
“푸딩을 만들어 줘.”
그래서 아마네는 기쁘고 마히루에게는 부담이 안 가는 일을 부탁했
다.
“푸딩을…… 만들어 달라고요?”
“달걀을 듬뿍 쓴 푸딩. 마히루가 만들어 준 걸 먹고 싶은데.”
“싸게 넘어가려는 거 아니나요……?”
“그럴 리가. 마히루가 만들어 주는 거니까 의미가 있어.”
단것을 찾아서 먹지는 않지만, 커스터드는 별개다.
푸딩이나 커스터드 크림만 넣은 슈크림은 좋아하니까, 마히루가 손
수 만든다면 맛있게 완성되겠지.
좋아하는 여자애가 만든, 그것도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만들면 당
연히 먹고 싶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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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부탁했더니 마히루가 가만히 아마네를 쳐다본 다음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번 휴일에 만들게요. 달걀을 듬뿍, 단단히 말이죠?”
“응.”
“맛있게, 만들어 볼게요.”
“그렇게 힘을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렇군.”
왠지 쓸데없이 의욕이 넘치는 마히루가 결의를 표명해서, ‘너무 애
쓰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맛있는 푸딩을 먹을 수 있
으니 더 따지지 않는다.
잘해 보라는 응원을 담아서 머리를 다시 쓰다듬자, 마히루가 살포
시 웃고 토끼 뒤통수에 입가를 댔다.

세간에서 잘 팔리는 생크림이 많고 말랑말랑한 푸딩도 맛있지만,


역시 아마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달걀을 많이 쓰고 단단해서 스푼
을 써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 푸딩이다.
달걀 본연의 맛을 잘 남기면서도 생크림의 진한 느낌을 감춘 푸딩
은, 조금 달면서도 씁쓸한 캐러멜 덕분에 너무 느끼하지 않은 선에서
달달함을 잘 정리한다.
오히려 뒷맛이 깔끔해서 계속해서 입에 퍼 나르고 말 정도의 매력
이 있다.
단것을 잘 먹지 않는 아마네도 마히루가 손수 만든 푸딩은 정신없
이 먹을 정도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접시에서 푸딩이 자취를 감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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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 맛있어.”
“칭찬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점심 식후 디저트로 나왔는데,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말았다. 하나
로는 부족하니까 두 개.
남고생치고 아마네는 식욕이 왕성하지 않은 편인데, 역시 마히루가
손수 만든 디저트는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었다.
먹은 양보다 더 큰 만족을 느끼고, 아마네는 기분 좋게 배를 만졌
다.
“너는 뭐든 다 만들 줄 아네.”
“어지간한 것은 만들 수 있게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마히루는 자랑할 것도 없다는 투로 말하지만, 실제로 요리의 종류
가 풍부해서 가끔 아마네가 모르는 요리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물론 맛있고 물리지 않는다. 마히루 같은 존재가 곁에서 자신을 위
해 요리해 준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겠지.
“역시나 대단하다고 할까. 덕분에 나는 행복하지만.”
“행복하나요……?”
“그야 당연하지. 맛있는 걸 매일 먹는데 불행할 리가 없잖아. 하루
하루가 기대되는걸.”
마히루의 요리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거의 차지해서, 하루를 마치
고 마히루의 요리를 먹으면 싫은 기억도 대부분 잊는다.
매일 요리해 준다는 것 자체가 행복해서 매번 행복을 곱씹으면서
먹는데, 마히루는 자신의 요리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것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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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마히루의 요리를 가리켜 행복한 맛이 난다고 말한 적이 있


는데도 마히루 본인은 잘 모르는 눈치여서, 아마네가 절찬하지 않으
면 가치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맛있을 때는 맛있다고 말하는 것이 만들어 준 사람에게 바
치는 예의이므로 솔직하게 전달해야 하리라.
“그, 그래요……?”
대놓고 칭찬하니 마히루가 볼을 살짝 붉히고 몸을 움츠렸다.
“아마네 군이 칭찬해 줘서 기뻐요…….”
“나라도 좋으면 얼마든지 칭찬할 테지만 말이야. 매일 맛있다고만
하면 부족해? 더 자세하게 감상을 말해 주길 바란다면 반드시 그럴
텐데.”
세상의 부부들은 서로에게 고마움을 잊는 순간부터 사이가 멀어진
다고 한다.
딱히 마히루와 부부인 것도 아니지만, 매일 요리를 받아먹는 처지
로서 감사의 마음을 잊어선 안 되고, 감상을 말하면 의욕으로 이어질
테니까 바란다면 자세하게 말할 작정이다.
다만, 마히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다.
“돼, 됐어요……. 그러다 죽어요.”
“허풍이 심하네.”
“허풍이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해요.”
“그래? 하지만 앞으로도 매일 만들어 줄 거라면 감사의 말은 빼먹
고 싶지 않은데. 매번 고마워.”
정말로 마히루가 아마네의 식생활을 떠받치고 있으니까, 반항할 수
도 없고 감히 발을 뻗고 잘 수도 없다. 마히루 님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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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없으면 아마네는 타락한 인간으로 직행할 테니까 앞으로


도 부디, 굳이 욕심을 말하자면 계속 곁에 있기를 바란다.
참 고마운 일이라고 말하며 웃자, 마히루가 매너 모드인 스마트폰
에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일어섰다.
“아마네 군은 바보예요…….”
영문도 모르게 바보라고 귀엽게 매도하고 식기를 챙겨 설거지하러
가서, 아마네도 뒤따르듯 자신이 쓴 식기를 싱크대로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뒷정리는 아마네가 할 일
이니까 안 해도 된다는 의미로 팔을 살짝 붙잡자, 마히루가 홱 돌아
봤다.
아까보다 훨씬 빨개진 얼굴로 아마네를 돌아본 마히루가 얼굴을 더
붉혀서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았다.
“내, 내가 할게. 너는 소파에서 기다려. 알았지?”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주방에서 몰아내자, 마히루는 작게 신음하
면서 소파에 돌격해서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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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는 평소 차분한 마히루답지 않은 행동을 보고 눈을 한차례


껌벅였다.
그러고 나서 아까 부끄러운 듯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고,
아마네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라도 찬물로 설거지하기로 마음먹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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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천사님과 바라지 않는 강요

천사님이라고 거창한 별명이 붙은 마히루. 하지만 그 온화함과 겸


허함, 마음씨 착한 성격과 문무를 겸비한 우수함, 나아가 빼어난 미
모는 그야말로 천사로 부르기에 합당해서 당연히 인기가 많다.
1학년 때는 학년을 가리지 않고 여러 남자가 고백한 것을 모두 찼
다고 본인이 자랑하는 기색도 없이 난처한 투로 말했었다.
마히루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호의를 보이고 교제를 신청하는
것이 무섭기만 하다고 한다.
그런 마히루도, 완고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도 있어서 반년
쯤 지나서는 고백 열풍도 진정됐다고 한다. 아마네와 교류할 적에는
호의를 보이는 일이 있어도 고백하는 일은 줄었다고 들었다.
다만 줄어들었을 뿐, 있기는 있다는 사실을 아마네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랑 사귀자.”
방과 후, 도서실에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갔을 때 생긴 일이다.
도서실은 교실이 있는 제1동이 아니라 제2동에 있어서 연결 통로로
이동해야 한다.
제2동은 기본적으로 수업과 관계가 있는 교실이 모인 곳으로, 방과
후에는 인기척이 뜸해서 고작해야 문화 동아리 학생이 동아리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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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 지나는 정도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이 적은데, 조용해서 그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
다.
2층 연결 통로를 걷다가 1층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서, 아마네는 발
소리를 죽이면서 걸음을 빨리한다.
다른 사람의 연애 사정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
사적인 일이고, 애초에 남이 반하든 사랑에 빠지든 별로 관심이 없
다.
“미안하지만 교제 요청은 거절하겠어요.”
몰래 엿보는 것도 미안하니까 얼른 자리를 떠야 하리라. 그렇게 생
각하고 소리 없이 걷는데, 몹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무의식중
에 몸이 급정지했다.
부드럽게 스며들듯 듣기 편한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딱딱한
느낌이 났다.
안 된다고 알면서도 무심코 창가에 몸을 바짝 대고 만다.
1층에는 마히루와 동급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아마네를 알아차리진 못한 듯하다.
남학생은 이쪽에서 뒷모습만 보여서 표정이 안 보이지만, 마히루는
고요한 얼굴로 상대를 보고 있다.
항상 천사님으로 불리는 고운 얼굴을 조금 미안한 기색으로 흐린
것은 교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리라.
“왜…….”
“저는 당신을 잘 몰라요. 매우 미안하지만, 교제를 원해도 응하기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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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고 나서 친해지면 되잖아.”


“저에게 남녀 교제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예요. 신뢰 관계
를 만든 다음에 서로 동의해서 사귀는 거겠죠. 시험 삼아 사귀는 것
은 피차 실례가 되는 일이고, 제 주관에 어긋나요.”
그 가정환경을 생각해 보면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자는 것은 마히
루의 지뢰를 밟는 행위겠지.
애초에 마히루는 남자가 호의를 보이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니
까 교제를 요청해도 고개를 끄덕일 리가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
인이라면 더욱 거절한다.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한 마히루가 더 말할 것은 없다
는 듯 머리를 숙인 다음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남학생이 마
히루의 손을 잡았다.
그 탓에 작게 “꺄악.”하고 귀여운 소리를 낸 마히루는 뒤돌아서 난
처한 듯 눈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손을 잡혀서 아파 보이기도 했다.
“저기, 이러면 곤란한데요.”
“미안해.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그래도 저는 당신과 사귈 생각이 없어요. 놔주시겠어요?”
이번에는 다소 강하게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천사님 수준이다.
난폭해서 손을 뿌리치는 행동에는 이르지 않았어도 다소 불편한 기
색을 보이는 마히루에게, 남학생이 손을 잡아당기면서 계속해서 말
하려고 했다.
마히루는 상대가 뭘 할지 경계하면서 조금 겁먹고 움츠러든 것처럼
눈꼬리를 내려서,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아마네는 미간
을 찡그리고 반쯤 열린 창문에 손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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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억지로 마음을 고백해서 자기 뜻대로 만들려고 하는데, 호의적으


로 봐줄 리가 없잖아.”
일부러 두 사람에게 들릴 목소리로 말하고 창가에 팔을 슬쩍 걸친
다.
두 사람에게는 갑작스러운 난입자라서, 남학생이 홱 돌아봤다.
마히루는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아는지 딱 봐도 안도하는 기색
이어서, 상대의 힘이 풀린 틈을 타 남학생의 손에서 벗어나 거리를
벌렸다.
표정으로 봐서 정말로 난처한 것은 확실하고, 아마네가 아슬아슬하
게 알아챌 정도로는 상대의 자기중심적 행동에 혐오감과 공포가 엿
보인다.
(그야 무섭고, 싫겠지.)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행위가 역효과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학생
에게 한심함과 짜증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자신도 별로 좋지 않다고
잘 아는 눈초리로 상대를 매섭게 째려본다.
남학생이 알기 쉽게 얼굴을 굳혔다.
아마네는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마히루의 손을 잡았던
남학생을 가만히 볼 뿐이다.
본인이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선이 단순한 시선으로
만 느껴질 것이다. 켕기는 짓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미안해.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지나가다가 왠지 싫어하
는 것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말이야. 그리고 시이나가 아픈 눈치
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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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손을 슬쩍 흔들고 마히루의 반응을 말하자 남학생의 안색이 나빠진


다.
“시이나, 정말 그래?”
“거칠게 잡아서 조금 아프고, 여자 몸을 허락도 없이 만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는데? 조심하는 게 좋아.”
마히루도 너무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싫은 반응을 보이며 어디까지
나 담담하게 달래듯 말하자, 남학생은 입술을 꾹 다문 다음에 “미안
해.”라고 말한 뒤 뛰어갔다.
순순히 물러나 준 것에 다소 안심하면서 마히루에게 시선을 돌린
다.
잡혔던 손을 가슴에 끌어안고 난처한 듯이 힘없이 희미하게 웃는
마히루를 보니 조금 가슴이 아프지만, 학교 안에서 섣불리 말을 걸어
서는 안 된다.
그건 마히루도 잘 아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한 다음에 뒤돌
아섰다.
그 작은 등이 평소보다 더 작게 보여서, 아마네는 걱정하듯이 멀어
지는 뒷모습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귀가 후, 옷을 갈아입고 찾아온 마히루가 난처한 듯이 미소를 지으
며 처음 한 말이다.
마히루도 뭔가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소파에 앉아 있는 아마네에게
조금 지친 기색으로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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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평소에는 단정한 자세로 앉는 일이 많으니까, 마히루도 많이 힘들


었던 것이리라.
“솔직히 괜히 참견했나 싶었어.”
“아뇨. 잘한 일이었어요. 말해도 놔주지 않았으니까요. 평소 제가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잘 알려져서, 거절하면 이해한다는 듯
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분이 많았지만요.”
몇십 명이나 사랑을 고백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많이 고백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마히루가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 만약 사귀는 사람
이 있다면 이렇게 아마네와 단둘이 있는 일도 없겠지.
“마히루는 역시 인기가 많구나.”
“그건 그러네요. 저는 기쁘지 않지만요.”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고 단호하게 의사를 표명하는 마히루.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호의를 보이는 것은 고맙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불러내는 일이 많
으면…….”
조금 미안한 듯이 “예정이 있는데도 멋대로 시간을 내라고 해서 곤
란해요.”라고 말하는 마히루의 말에 역시 정기적으로 고백을 받는다
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마네는 학교에서 마히루에게 너무 접근하려고 하지 않고, 마히루
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이 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마히루를 너무 보
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마히루를 불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마히루의 성격으로 봐선 예의 바르게 직접 보고 거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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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상대가 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전한다면 이 뜻에 따라서


거절하는 게 도리겠죠. 호출을 무시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무시하면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그야 모두가 진지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
“네. 뭔가 벌칙 게임으로 제가 거절할 것을 알면서 고백하는 사람
도 있고, 제가 예쁘니까 곁에 두고 싶다는 감정이나 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쉬운 여자가 된 적은 없는데 말이죠.”
“그 자식들은 잘도 그런 감정으로 고백할 수 있네.”
고백하려면 진지하게 마음을 전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있는 아마
네로선 이해할 수 없다. 전자도 조금 이상한 것 같고, 후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에게 교제를 요구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 애초에
아마네는 그렇게 얄팍한 감정을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저도 그런 사람들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빨리 자리를 떠요. 근본적
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차갑게 말하는 마히루. 아마네는 처음으로
마히루가 집에 왔을 때 지뢰를 밟은 사실을 떠올리고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역시 마히루는 진지한 교제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아마네도 그러니까, 그때는 말이 그렇다고는 해도 무례한 소리를
했다고 반성하면서 마히루의 눈치를 살핀다.
예전처럼 차갑게 식은 눈은 아니어도 질린 기색과 경멸이 드러난
눈빛을 보고, 아마네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알면서도
몸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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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애초에 소박한 의문인데요……. 저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고 승낙할 만큼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나요?”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그렇다면 왜 가망도 없는 고백을 하는 걸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
서 승낙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신기한데요.”
여러 번 고백을 받은 마히루가 “잘 모르는 사람이 쫓아와도 무섭기
만 한데요.”라고 난처한 듯이 중얼거린다.
“자신을 인식해 줬으면 좋겠다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
다거나?”
“참을 수 없으니까 제 몸에 난폭하게 손대도 된다는 거예요?”
못마땅한 듯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마히루의 오해를 풀려고 단호
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그건 다른 거고. 감정을 키우는 것은 나쁘다고 보지 않지
만, 그걸 상대에게 강요하고 이기적으로 사랑을 요구해서는 안 되겠
지. 그 자식의 행동을 감쌀 생각은 없고, 오히려 나도 화났어.”
마히루가 매력이 있어서 고백하는 거니까, 그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못마땅한 것은 아마네가 마히루를 좋아하기 때문이니까, 지
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다만 그 남학생이 마히루에게 억지를 부리려고 한 것은 긍정할 수
없다. 좋아한다는 면죄부를 써서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려고 한 시
점에서 단순한 강요다.
이번에는 어쩌다가 아마네가 근처에 있어서 슬쩍 방해했지만, 아마
네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붙잡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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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했다. 마히루는 적으로 인식하면 자비가 없으므로 물리적으로 거부


했을 테지만, 그래도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요…….”
“당연하지. 남자가 힘으로 강요하는 건 말도 안 돼. 무섭지 않았
어?”
“조금 무서웠지만, 만약 해를 입히려고 했으면 온 힘을 다해 국부
를 차려고 했어요.”
역시 물리적으로 벌을 줄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마히루는 정말로 망설이지 않고 그럴 것이다. 추행을 당할 뻔했다
면 주위 사람들도 마히루를 동정할 테니까, 뭐라고 불평할 수 없겠
지.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 듣는 내가 간담이 서늘해지지만.”
“아마네 군에게는 그러지 않는걸요?”
“애초에 그렇게 당할 짓은 안 해.”
그랬다간 확실하게 부모님이 집에서 쫓아낼 것이다. 아마네의 가치
관으로 봐도 그럴 리가 없다. 여자에게 힘을 휘두르는 것은 남자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할 생각이었는데, 마히루는 이상하게
어이없는 눈치였다.
“그렇겠죠. 아마네 군은 신사니까요.”
“왜 나를 한심하게 보는데?”
“칭찬한 건데요?”
“눈빛이 영 그렇지 않은데.”
“기분 탓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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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눈빛 모두 칭찬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불만이 느껴지


고, 말과 태도가 너무 달라서 영문을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마히루의 시선이 거북해서 눈을 이리저리 돌리자 못
말리겠다는 듯 마히루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야 아마네 군은 그래서 멋진 거니까요. 복잡한 부분이네요.”
“뭐가 복잡한데…….”
“저한테, 말이에요.”
놀리듯이, 짓궂은 느낌으로 미소를 짓는 바람에 가슴이 뛰어서 무
심코 눈을 돌렸는데, 마히루는 아마네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
대로 조금 몸을 기댔다.
아마네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는 것도, 마히루는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 같은데요. 인기가 많은
것도 탈이죠?”
그렇게 힘없이 중얼거리는 마히루는 정말로 난처한 것처럼 보인다.
“객관적으로 봐서 다른 사람보다 용모가 좋다는 걸 저도 알지만요.
이런 일이 많아서 참 곤란해요.”
“고생이 많아 보이니까 말이지…….”
“고생이 많아요. 같은 여자가 보면 복에 겨운 고민일 것 같지만요.
잘 모르는 사람이 고백해서 거절했더니 매달리고, 더군다나 몸을 붙
잡거나 역정을 내는 일은 정말 사양하고 싶어요. 안 그래도 고백을
거절하는 것도 마음이 지치는데 말이에요. 거절할 때마다 저도 미안
한걸요.”
적으로 인식한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마히
루는 선량하고 양식이 있는 인간이고, 본질을 보면 마음씨 고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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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저로서 있는데 피해를 주려고 하다니, 웃기지도 않아요. 다
른 누군가에게 소비되려고 제가 자신을 갈고닦는 건 아니에요.”
질색하듯이 중얼거리는 마히루는 정말로 피곤한 눈치여서, 인기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고생도 많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아마네에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는 마히루가 너무 힘들어 보여
서, 아마네는 자연스럽게 마히루의 머리에 손을 뻗고 있었다.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배려하듯 만지자 마히루가 순
순히 받아들이듯 아마네의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둔다.
오늘 본 남학생과 다른 점은, 신뢰 관계의 유무이리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만지면 기분 좋게 눈
을 희미하게 뜬다. 그게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은 마히루가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애교를 보이는 기질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학교의 나’는 제가 택한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게 손을 내
밀어도 곤란해요. 저는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할 거예요. 마음
대로 만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마히루가 조금, 아니 매우 못마땅한 투로 말해서 무심코 손이 멈추
고 말았다.
마히루는 지금 아마네의 손을 방치하고 있지만, 마음이 지쳐서 그
런 거고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아닐까. 한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왜 갑자기 멈추나요?”
“아니, 그게 있지……. 요새 주제도 모르고 멋대로 만진 잘못을 뉘
우치고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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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싫으면 처음부터 거부하니까 안심해 주세요.”


“그, 그래?”
“더 만져도 되는데요?”
아마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부드럽게 입술을 오므리는 마히루는
눈에서 신뢰와 아주 작은 기대가 어른거려서, 아마네는 숨을 훅 삼켰
다.
“그, 그 말은 즉…….”
“농담한 거예요.”
뭐라 대꾸하지 못하는 아마네를 놀리듯이 웃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
아간 마히루가 눈을 내리뜬다.
“하지만 손은 잡아 주세요……. 오늘 붙잡혀서 기분이 조금 나쁘니
까요.”
정말 지친 듯, 난처한 투로 작게 중얼거려서, 아마네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마히루의 손을 잡았다.
작고, 가녀리고, 섬세한 손가락. 손가락을 만지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희미하게 펜을 잡다가 생긴 굳은살이 있다. 그저 약하기만
한 손이 아니다.
그래도 남자에게 저항하려면 힘이 부족할 것이다.
뿌리치지 않은 건지, 뿌리치지 못한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마
히루가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다.
속에 움츠러든 두려움을 풀듯이 슬며시 어루만져서 주물러 주자 마
히루가 조금 안심한 듯이 웃는다.
“신기하네요. 아마네 군이 만지면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건 좀 처음에 보였던 경계심을 되찾아 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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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져도 될까? 그런 의미로 마히루의 눈을 보니 아름다운 미


소를 보여준다.
“어머, 지금 제가 불만인가요?”
“부,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되겠어?”
“애초에 싫었다면 이 집에 있지도 않고, 만지게 두지도 않아요. 무
릎도 허락하지 않고요.”
“무릎은 허락하지 말라고…….”
“잘 만끽했으면서요?”
그렇게 말하면 아마네는 반박할 수 없다.
얼떨결에 마히루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고 푹 자고 말았으니까,
그만두라고 해도 설득력이 없다. 마히루가 먼저 말한 거지만, 결국
받아들인 건 아마네 자신이다.
그러므로 아마네는 미묘하게 눈을 돌리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라고 대꾸하자 마히루가 이상하다는 듯이 웃었다.
“후후. 그 말은 편리해 보이니까 기억해 둘게요. 안심해 주세요. 피
곤할 때는 언제든지 빌려줄게요.”
“으엑, 사양할게…….”
그랬다간 마히루와 떨어질 수 없다. 그토록 행복한 시간을 매번 받
았다간 아마네는 확실하게 타락으로 직행할 것이다. 원래부터 건전
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이성이 몽땅 타락해 버릴 것만
같다.
자신의 이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슬쩍 거절하자, 별로 아쉬
운 기색도 없이 조금 유쾌한 듯이 웃으며 “어머, 아쉽네요.”라고 했
으니까, 그냥 놀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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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에요. 진심인걸요.”
그것도 나름 심하니까,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불만을 전하려고 손을
꼭꼭 눌렀다. 하지만 마히루는 간지럽다는 듯이 웃기만 해서, 아마네
는 고개를 홱 돌리고 수치심을 감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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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천사님의 결심

“이츠키, 후지미야, 같이 밥 먹자.”


학교 점심시간. 아마네가 평소처럼 이츠키와 점심을 먹으려던 차에
요새 귀에 익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보니까 여전히 상쾌하면서 인상이 훤하게 웃는 카도와키 유타가 한
손을 들고 있었다. 평소에는 다른 친구와 밥을 먹는데, 오늘은 사정
이 다른지 지갑을 한 손에 들고 다가왔다.
유타는 2학년이 되고 나서부터 종종 말을 거는데, 그렇다고 엄청나
게 친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번에 잠시 푸념을 들어준 덕분인지 서로 친근감이 생긴
데다가 유타의 사람 됨됨이를 다시금 이해해서, 아마네도 유타를 대
하는 태도가 조금씩 이츠키와 비슷하게 바뀌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
다.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이츠키도 괜찮지?”
“왜 내가 거절하지 않는다고 보는데. 그야 거절하지 않지만?”
“그럼 됐잖아.”
“그야 그렇지만. 왜 있잖아. 이 형님은 너희를 여러모로 신경 써 줬
는데 어느새 친해지고 말이야. 유타가 아마네에게 길들어서 징그럽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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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유타는 의외로 강아지와 비슷한데? 한번 신뢰하고 길들면 꼬리를
마구 흔드는 성격이니까. 뭐랄까. 골든 레트리버 같아.”
“너희 말이야. 본인 앞에서 개 같다는 소리는 하지 마.”
이츠키에게 딴지를 걸지만, 분위기가 정말로 골든 레트리버 같다는
생각에 무심코 웃음이 나온다.
아마네가 어깨를 떠는 것을 알아챈 유타가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지
만,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라 놀리니까 겉으로 삐친 척하는 느낌이
다.
“후지미야, 너도 웃지 마.”
“아, 그게. 미안해.”
“아마네 너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 거잖아.”
“왠지 그럴싸해서…….”
“큭. 후지미야, 너까지. 저기 말이야. 나는 단순히 후지미야가 좋은
사람이라서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뭐, 아마네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잘된 일이지.
자, 이리 오너라.”
“넌 왜 잘난 척하는 건데.”
찰싹. 손등으로 딴지를 걸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가온 유타는 아마
네와 시선을 맞추고 눈부시게 씩 웃었다.
여자한테 그랬다간 쉽게 함락할 것 같은 웃음을 보고, 아마네가 쓴
웃음을 짓는다.
“하나 물어봐도 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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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친구가 되어도 괜찮겠어? 나와 친구가 되어도 별로 이득은


없을걸?”
유타는 아마네에게 흥미와 함께 우정에 따른 호의로 친해지려는 거
겠지만, 옛날 기억이 조금 장난을 쳤다.
이런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심코 말하는 것이다.
아마네의 말을 듣고 유타가 놀란 듯 신기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후지미야는 손해나 이득을 따지고 친구를 사귀지 않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럼 괜찮잖아. 나는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건 거니까.”
맑게 갠 하늘처럼 웃는 얼굴을 보고, 아마네는 유타가 눈이 부셔서
눈을 희미하게 떴다.
“그래…….”
“암, 그렇고말고. 사이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이츠키가 히죽히죽 웃고 감상을 말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슥 돌
린다.
이츠키가 보는 곳에는 “마히룽은 기특하고 참 귀여워.”라고 웃으면
서 마히루를 끌어안은 치토세와 그냥 당하기만 하는 마히루가 있었
다.
치토세의 스킨십은 원래부터 그런 거고, 반 아이들도 요새는 익숙
해졌는지 미소녀들의 스킨십으로 보고 훈훈한 눈으로, 혹은 부러운
눈치로 구경하고 있었다.
아마네도 일상적인 일로 보고 있는데, 이츠키는 두 사람이 노는 것
을 보면서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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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 일도 없어.”
이츠키는 얼버무리려는 듯이 웃고 셋이서 식당으로 가고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마네와 유타도 뒤쫓듯이 걷기 시작했다.

“혹시 불쾌한 일이 있었어?”


귀가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상하게 뚱해 보이는 마히루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마히루가 눈을 연달아 깜빡였다.
“혹시 얼굴에 드러났나요……?”
“어? 응. 그냥 언짢아 보였는데. 내가 잘못한 게 없는지 짚이는 구
석을 생각해 봤어.”
마히루가 언짢을 때는 기본적으로 아마네가 뭔가 실수했을 때다.
다만 오늘은 마히루를 상대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정말로 짚이
는 구석이 없었다.
마히루는 역시 얼굴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는지, 자신의 뺨을 꾹꾹
만지며 확인하고 있었다.
“내가 실수했다면 사과할게.”
“아, 아뇨. 아마네 군이 잘못한 건 없어요. 다만 제 속이 좁다고 할
까요.”
“마히루가 속이 좁으면 어지간한 사람은 전부 마음의 넓이가 밀리
미터 단위가 될걸. 어차피 내가 뭔가 잘못한 거겠지.”
기본적으로 화내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를 인정하는 방향
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마히루가 속이 좁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아
마네는 정말 속이 좁은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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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잘 모르겠지만, 마히루가 언짢다면 그만


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히루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감정을
잘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관대한 마히루가 기분이 나쁘다는 건, 십중팔
구 곁에 있고 마음을 허락한 아마네가 뭔가 잘못했다는 뜻이리라.
“정말로 아마네 군 탓이 아닌데요……. 저기, 아마네 군과 관계가
있는 일이긴 하지만요.”
“잘 모르겠지만, 원인이 나라면…….”
“잘 모르면서 사과하면 못써요. 애초에 오히려 제가 사과해야 해
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속이 좁으니까요!”
“알았어. 다 이해해. 가령 마히루가 속이 좁다고 치고, 뭐 때문에
화난 거야?”
조금도 속이 좁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으니
까 가정하고 이야기하니 마히루가 미묘하게 거북한 눈치로 눈을 돌
렸다.
“저기…… 치사한 거 같아서요.”
“치사해?”
“카도와키 씨가.”
“카도와키가?”
“남자라고 편하게 말하는 건 치사해요. 저는 참고 있는데.”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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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아마네 군의 생활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남들이 이상하게 보


는 것을 피하려고,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저는 학교에서 모르는 사
람처럼 구는데…… 이러면 저만 쓸쓸해요.”
소외감을 느낀다는 뜻일까.
마히루는 여전히 학교에서 천사님처럼 행동하고, 남자에게는 결코
지나치게 접근하지 않는 데다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웃어 준다. 그
철저함에 감탄할 정도로.
마히루는 역시 아마네와 평소처럼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
면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주니까 자제하는 듯하지만, 비슷하게 여자
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인기남 유타가 아마네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쓸쓸하다는 말에 왠지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시선을 내리자
마히루도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뜬다.
“아카자와 씨도, 치토세 양도, 카도와키 씨도, 아마네 군과 사이좋
게 지내는데 저만 아닌 것 같아요.”
“으.”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아마네는 예전부터 치토세와 그냥 이야기하니까, 아마네와 마히루
의 사정을 아는 두 사람과는 학교에서도 평소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마히루를 끼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치토세가
이츠키에게 말을 걸 때는 마히루가 빠지고 만다.
반에 다른 친구도 있어 보이지만, 치토세만큼 마음을 터놓은 사이
는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 물론 천사님의 미소
로 감추고 있지만, 익숙해진 아마네의 눈에는 역시 쓸쓸하게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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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아는 일이고,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받아들


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천사님이 갑자기 나처럼 눈에 안 띄는 인간하고 친하게 지
내면 이상하잖아?”
“왜 갑자기 자신을 낮추나요. 화낼 거예요.”
뚱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히는 마히루가 조금 화내듯 아마네의 코를
검지로 쿡 찌른다.
“오늘 셋이서 하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아마네 군은 자신을 비하하
지 말아야 해요. 애초에 이해득실을 따지자면 처음부터 저는 아마네
군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아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마네 군은 제
눈에 매우 한심한 사람으로 보였으니까요. 친해져서 무슨 이득이 있
겠나요.”
“설득력이 너무 커.”
아마네와 마히루의 교류는 아마네의 식생활에 느끼는 연민과 아주
작은 죄책감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것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교류
도 없었겠지. 이해득실만으로 따지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이가 좋아진 것은 그때 이해득실을 제외한 사람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친절함이나 죄책감, 동정심 같은 것이 포함되지
만, 그 감정을 계기로 서로 알고 가까워졌으니까, 이익은 관계없다.
“물론, 지금은 아마네 군이 성품도 좋고 자상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알아요. 그 점에서 친하게 지내는 데 이득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
지만, 저하고는 관계가 없으니까요. 저는 아마네 군의 성품이 좋아서
가까워진 거고, 카도와키 씨도 본인이 말한 이유로 그런 거겠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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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까 자신을 낮춰서 보면 안 돼요. 당신을 인정하는 우리를 모욕하


는 일이 될 수 있어요.”
“미안해…….”
“심각하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그저 당신에게 자신감이 생
겼으면 하는 거니까.”
볼을 쿡쿡 찌르는 바람에 조금 아프지만, 싫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마네 군은 자기평가가 박한 것이 결점이니까 꼭 고쳐야
해요. 더 자신만만하게 있어도 돼요.”
“자신만만은 무슨…….”
“차라리 제가 아마네 군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선전할까요?”
“그랬다간 내가 부끄러워 죽고, 저 자식은 대체 뭐냐고 주변에서
수군댈걸.”
주위에선 딱히 접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마히루가 칭찬하
고 나서면 여러모로 의심하겠지.
“그건 이상하지 않게 잘 말할 건데요?”
“그건 학교에서 엮이자는 말이잖아.”
“그야 저만 빠지는 건 섭섭하니까요. 괜찮다면 모두와 똑같이 접하
고 싶어요.”
시무룩한 얼굴이 아마네의 약점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히루가
쓸쓸한 눈치로 시선을 내리면서 중얼거리는 바람에 아마네는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갑자기 거리가 가까워지면 이상하게 볼
걸.”
“천천히 하면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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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한 기색에서 눈빛이 밝아진 마히루를 보고 더는 거절할 수도


없어서, 아마네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칭찬하려고 들지 마.”
“그러면 지금은 개인적으로 좋게 말하기만 할게요.”
그것도 아마네의 심장에 부담을 주겠지만. 아무 말도 없이 앞으로
학교생활이 조금씩 어수선해지겠다고, 아마네는 조금 먼 곳을 쳐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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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천사님의 접촉과 주위의 반응

천천히 거리를 좁히겠다고 선언한 날부터, 마히루는 조심스럽게 아


마네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말은 그래도 처음에는 친구의 친구 포지션을 무너뜨리지 않고, 주
위에서 의심하지 않게 인사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 같은 수준에 머
물렀다. 어디까지나 아마네의 생활을 크게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점
에서 신중한 것이리라.
학생답게 공부 이야기를 할 때는 질투하는 시선보다 감탄하는 시선
을 느껴서, 이럴 때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마히루는 수업 내용을 1년 단위로 앞서고 있어서 아마네가
완전히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만, 마히루도 아마네의 진도에 맞춰 화
제를 내놓아서 탈 없이 학생의 본분에 전념하는 듯한 대화가 성립했
다.
대체로 치토세나 이츠키, 가끔 유타가 함께 있었던 덕분인지, 인간
이 조금씩 변화에 적응하듯 아마네가 마히루에게 가벼운 잡담이나
공통된 친구 이야기, 수업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는 정도라면 주변에
서 별로 질투하는 눈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마히루를 진심으로 좋아
하는 남자들이 째려보는 느낌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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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후지미야가…….”
교실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참고서와 교과서를 보고 있을 때, 우연
히 바로 옆자리에 있었던 남자들이 원망하듯 조용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마히루와 수업 내용과 숙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래
도 그걸 목격한 듯하다.
왜 아마네인가. 그 의문에 답하자면 마히루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
었고, 대화 내용에 따라갈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리라.
마히루와 가장 친한 치토세는 수업 진도를 예습하지 않고, 지금 배
우는 곳을 완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 남자친구인 이츠키도 마찬
가지다.
그러므로 공부 면에서는 아마네가 이야기하기 편하다.
아마네도 원래 공부를 그럭저럭 잘하고, 집에서 마히루의 지도를
받다 보니 예전보다도 성적이 좋아졌다. 이 점은 마히루 님 만세를
외치고 싶다.
“왜냐고 해도 말이지. 어쩌다 보니 내가 시이나의 화제에 맞출 수
있어서 그런가 보지.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학교에서 마히루와 이야기할 때는 약간의 일상 이야기를 빼면 대부
분 공부 관련이다.
주위에서 수상하게 보지 않도록 천천히 거리를 좁힌다고 해서 학생
끼리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말만 주고받는다. 오히려 모범생 같은 대화
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실한 대화를 했다.
“그야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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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있으면 너희도 공부해서 이야기에 끼어들어. 질투해도 곤


란해. 공부는 학생의 본분이라고.”
“어? 무리……. 못 따라가……. 뭘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는걸.”
“그냥 교과서를 봐. 우리는 지금 배우는 진도를 예습하고 있을 뿐
이야. 그것도 안 된다면 포기하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신랄하네…….”
“나는 너희의 학습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딱히 시이나와 친한 건 아니야.”
담담하게 대꾸했더니 이를 갈고 끙끙거린다.
딱히 얘들과 사이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마히루와의 관계를 의심
하고 일방적으로 적대시하니까 거들어줄 의리도 없겠지.
애초에 마히루는 아마네와 학교에서도 친구처럼 접촉할 수 있게끔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 선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공부였을
뿐이지, 가령 누군가가 공부를 잘해도 친해질지 어떨지는 모른다.
어디까지나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아마네를, 처음에 말을
꺼냈던 두 사람이 의심스럽게 본다.
“너…… 시이나 양하고 그토록 이야기해 놓고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혹시 천사님한테 관심 없어?”
“천사님한텐 없지.”
아마네는 ‘천사님’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러니 거짓말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천사님’이 아니라, 아마네의 앞에서 보여주는 마히
루의 본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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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을 조금 하고, 자아가 강하다. 그런데도 마음씨가 착하고, 수줍


음을 잘 차고, 응석을 잘 받아주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외로움을
잘 타고, 꺾일 것처럼 약한 마히루.
마히루에게 ‘천사님’은 밖에서 싸울 때의 차림, 까놓고 말하자면 연
약한 몸을 지키는 갑옷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갑옷을 좋아할 리가
없다.
물론 그것도 포함해서 마히루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표면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아마네의 담담한 태도가 두 사람에게는 의심스러운 눈치였지만, 정
말로 ‘천사님’에 관심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말도 안 된다
는 눈으로 봤다.
“얼마나 귀여운지 이해하지 못하는 후지미야는, 혹시…….”
“상상하는 중에 유감이지만, 나는 같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고 미적
감각도 일반적인 사람이야. 귀여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봐도 귀엽고 인품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연애로 발
전하는 것과는 다르잖아.”
“후지미야의 취향을 모르겠어!”
두 사람이 불평을 떠드는 바람에 같은 반 학생들이 힐끗힐끗 보니
까 속이 거북하다.
아마네는 지금 자신이 마히루에게 반한 사실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귀엽고 마음씨 착한 완벽 미소녀가 있으면 남자가 무조건 호감을 보
여야 한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학교 남자 모두가 반했겠지. 실제로는 마히루를 감상용으
로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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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마히루를 이성으로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님은 주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마히루가 호감을 얻기 쉽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지만.
“반대로 내가 묻겠는데, 너희는 천사님의 뭐가 그렇게 좋은데.”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리자, 두 사람은 제 세상이 왔다는 것처럼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무지 귀엽지, 누구한테나 상냥하고 청초하고 정숙하고 뭐든지 잘
하고, 여친으로 삼으면 아주 최고잖아?”
“하아…… 그러십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그게 연애의 의미에서 좋아지는 이유일
까? 문득 그렇게 회의적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겠지.
“진짜 미인이고 몸매도 좋으면 완벽하잖아. 남자의 이상형을 완성
한 천사 같은 존재야. 아니, 천사님 맞지만.”
“귀엽고 성격도 좋은 걸로도 모자라 뭐든지 잘하고 몸매도 끝내주
니까 좋잖아. 평소에는 조끼가 감추지만…… 체육복 때는 굉장한걸.
존재감 끝내줘.”
“그게, 참 쩔지.”
“시라카와처럼 평탄한 느낌도 좋지만, 역시 이렇게 봉긋 솟은 느낌
이 좋은 거지. 남자의 꿈이잖아.”
“너희는 여러 방면에서 여자들에게 무례하니까, 여러 의미에서 입
을 다무는 게 좋아.”
얼떨결에, 아니 명확하게 살기를 느꼈다.
자신에게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도, 근처에 있기만 해도 따끔
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아마네의 몸을 저절로 움츠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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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그러는지 보지는 않아도 누군지는 알 것 같아서, 나중에 덤


터기를 안 뒤집어쓰게 해야겠지.
더 엮였다간 이쪽에도 불똥이 튈 것 같아서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수중에 있던 참고서를 펼친다.
마히루와 학교에서 이야기했던 학습 내용을 눈으로 좇으면서, 남자
들만의 독특한 망상을 떠들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슬쩍 한숨을 쉬었
다.
“그런 욕구를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시점에서 시이나가 너희에게 관
심을 보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전제를 말하자면, 어지간한 여자는 대놓고 음담패설을 떠드는 남자
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의 체형을 화제로 신나게 떠들고
있다면 더더욱.
게다가 마히루는 용모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호의를 느끼기 어
렵다. 신체적 특징에 주안을 둔다면 호감도는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
겠지.
마히루가 있는 곳을 슬쩍 보니 곁에 있는 살기의 주인을 달래듯이
쓰다듬고 있다. 치토세는 이츠키가 웃으면서 놀리기만 해도 뒤에서
일대일 면담을 받아야 하는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예를 들면 당연히
화가 나겠지.
마히루도 치토세를 달래는 천사님으로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어처구니없게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속으로 마히루에게 변명하면서, 아마네는 참고서를 보고 같은 반의
두 남학생이 하는 이야기를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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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도 못 알아채고 신나게 떠들고 있는데, 아마네는 말릴 의무가


없다. 애초에 눈치를 줬는데도 계속하는 거니까 무의미할 듯하다.
‘천사님’이 얼마나 좋은지 떠드는 남자들에게, 아마네는 남몰래 묵
직하게 한숨을 흘린다.
(아마도 너희가 자꾸 그러니까 천사님이 천사님으로 있는 거겠지.)
그 말은 소리로 나오는 일 없이 입속에서 머물다가 사라졌다.

“저기, 마히루 씨…….”


그날 저녁, 평소처럼 아마네의 집을 방문한 마히루의 표정이 불만
스러워 보였다. 무심코 호칭을 바꿀 만큼 마히루의 분위기가 딴판이
다.
“왜요?”
대답이 왠지 퉁명하다. 확실하게 화난 상태다.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관대한 마히루의 기분이 언짢아서, 아마네는
속이 좀 쓰리다.
“왜 그렇게 심기가 불편하신 걸까요.”
“그런 건 아니지만요.”
“아니…… 딱 봐도 기분 나쁜 분위기인데.”
“안 나빠요.”
소파 옆자리에 앉은 마히루의 표정은 여전하다. 알기 쉽게 화내는
것이 아니라,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더 가깝다.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해도 좋겠지.
다만 뭐가 심기를 자극하고 있는지 몰라서 고민했는데── 오늘 반
에서 남자들하고 엮인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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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내가 걔들하고 같이 체형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 거


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히루가 불쾌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용모를 화제로 신나게 떠들었다면 기분이 나빠지겠
지.
마히루가 아마네의 말에 흠칫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예상이 맞
는 것 같다.
“들렸지?”
“아, 아뇨. 그게…… 그 이야기도 들리긴 했지만요…….”
“미안해. 여자들은 그런 이야기 싫어하지?”
“저는 그게 아니라. 용모 이야기는 자주 들어서 익숙하고, 이번엔
저한테 직접 몸매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니까요. ‘아, 그런가 보구나.’
같은 느낌이에요.”
오랫동안 천사님처럼 행동하고, 미모를 유지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 마히루다운 발언이다.
다만 마히루의 말로 미루어 봐서는 과거에 직접 성희롱 발언을 들
은 적이 있다는 거니까, 그렇게 무례한 소리나 하는 남자가 있다는
점에 같은 남자로서 미안해졌다.
“다만 잘도 여자가 있는 곳에서 말할 수 있구나 싶어서 놀라긴 했
지만요……. 생각하는 것은 자유니까 막진 않아요. 다만 심도 있게
이야기할 때는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지 않나요? 주위 사람들
의 눈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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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는 교실에


서 이야기한 것이 실수다. 아니, 아마네는 갑자기 그런 이야기로 발
전해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지만.
“아마네 군이 한심하게 보는 것도 알았고, 언급하지 않는 것도 다
들렸어요. 다른 여자애들도 감탄했어요.”
“그,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죽기는 싫거든.”
“물론…… 다른 의미로 조금 걱정되지만요. 아마네 군이 너무 신사
라서 남자로서 정말 괜찮은지 말이죠.”
“말이 너무 심하잖아.”
같은 반 남학생에 이어 마히루까지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만, 마히루는 “사실인걸요.”라고 말하고 고개를 홱 돌
렸다.
마히루는 아직 조금 불만이 남은 눈치를 보이다가 아마네가 미간을
찡그린 것을 알아채고, 쿠션을 무릎 위에 두고 끌어안는다.
“아마네 군은 저한테 매력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자신감이 사라져요.”
“뭘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데.”
“관심이 없다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천사님에게 관심이 없다고 한 말을 들었나 보다.
“뭐, 천사님에게는 관심이 없어. 천사님은 네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거잖아? 나는 마히루한테 관심이 있어도 천사님으로 지내
는 마히루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야 고생이 많겠구나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다른 감정은 없고.”
“저한테 매력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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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 말할 만큼 내 눈이 썩어 보이나. 매력이 넘치잖아. 가장 가


까이 있는 내가 보증할게.”
오히려 마히루에게 매력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곁에서 오래 같
이 지내면서 점점 마히루의 새로운 일면을 알고, 더욱 사랑스럽게 여
겨지는 것이다.
늘어나기만 하고,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만큼 마히루가 매력적이
라는 뜻이다.
아마네가 단언하자 마히루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쿠션
을 꼬집기 시작한다. 천에 주름이 잡히는 것도 무시하고 마구 만지면
서 고개를 푹 숙인다.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어물어물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마히루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
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새빨개서, 부끄러워하는 것을 한눈
에 알아볼 수 있다.
이 분위기로 봐서는 한동안 쿠션에서 얼굴을 떼지 않을 것 같다. 아
마네는 그런 마히루를 등지고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로 고개
를 홱 돌렸다.
아마네의 몸에서 여분의 열기가 빨리 안 빠져나가면 부활한 마히루
에게 보이고 말리라.
(부끄러운 줄 알면 말하지 않으면 되잖아…….)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을 생각하면서,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안 들리게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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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천사님과 조리 실습

“잘 부탁할게요.”
평소 아마네를 향할 일이 없는 천사의 미소를 대놓고 봐서, 아마네
는 신음을 꾹 참고 “잘 부탁해…….”라고 조용히 대꾸했다.
기본적으로 마히루와는 적극적으로 얽히려 하지 않지만, 마히루가
다가왔을 때는 아마네가 차마 어쩔 수 없다. 다만 이건 마히루의 잘
못이 아니라, 단순히 가까운 사람끼리 모이려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
이리라.
가정 교과의 조리 실습은 일정한 자유도가 인정된다. 며칠 후에 실
기 평가로 조리 실습 예정이 잡혔는데, 이번에는 자유롭게 조를 짜고
자유롭게 조리 내용을 정한다.
다만 영양학에 따른 식단을 요구하고, 식단도 채점 대상이므로 잘
생각해서 정해야 한다.
조를 자유롭게 짜도 된다는 이유로 마히루는 사방에서 러브콜을 받
다가 사이좋은 치토세와 짝이 됐고, 그 치토세는 남자친구인 이츠키
를 끼우려 했으며, 그 이츠키와 짝이 되려고 했던 아마네가 딸려왔
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겠지.
그 결과로 아까부터 시선이 엄청 따가워서, 아마네는 속이 쓰리다.
일부 원인을 제공한 치토세는 근처 책상을 인원수에 맞춰 맞대면서
헤실헤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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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아마네 얼굴이 벌레 씹은 것 같아.”


“이게 누구 탓인데.”
네 사람의 책상을 맞춰서 자리를 만들어 앉자 마히루는 천사의 미
소를 조금 흐리면서 미안하듯 미소를 웃는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 시이나 잘못이 아니야. 다만 내가 시선에 찔려 죽지 않을까
불안할 뿐이야.”
“행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 아마네답네.”
“이건 나 말고 다른 곳에 행운을 나눠줘야겠지.”
그 말이 옳다는 듯 목소리는 작아도 불만을 드러내는 말이 들린 것
도 기분 탓은 아니리라.
천사님이 직접 만든 요리를 만들 먹을 기회가 생기면 남자들도 흥
분할 테니까. 그 기회를 별로 원하지도 않는 남자가 잡았으니 속이
끓을 만도 하다. 실제로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서 따가운 시선이 푹푹
꽂히고 있다.
“하지만 너도 나랑 찢어지면 곤란하잖아? 다른 데는 다 친한 애들
끼리 뭉쳤고.”
“윽.”
그렇게 말하면 힘들다.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친한 사람들 그룹에 끼어
들어 소통할 만큼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이미 다 뭉친 상태에서
아마네 혼자 나가기도 어렵다.
“뭐, 이것도 운명이라고 보고 포기해. 나랑 치이하고 친해진 것을
후회하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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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랑 친구가 되고 후회한 적은 없어…….”


“어머나. 내 가슴이 쿵해쪄.”
“남자가 그래도 소름만 돋는데. 역시 후회하련다.”
“사람 두 번 죽이네.”
노골적으로 부끄러운 척 두 손으로 볼을 누르는 이츠키에게 쌀쌀맞
게 대꾸하자,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연기에 넘어가는 일은 없지만,
반응을 즐기는 태도는 전혀 달갑지 않다.
저 볼을 꼬집어 줄까 생각했을 차에 작게 한숨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니까, 마히루가 웃긴 듯 살며시 웃고 있다.
“지금 봐도 사이가 좋네요. 참 부러워요.”
“그야 뭐…….”
사실은 사이좋은 것도 다 아는데, 어디까지나 처음 안 것처럼 말하
는 마히루의 태도를 보고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가슴이 착잡
했다.
철저하게 남처럼 대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렇게 모르는 척하면
왠지 낯간지러우면서도 답답한 느낌이 든다.
마히루와의 대화를 들은 치토세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마히루의 어
깨를 톡톡 친다.
“마히룽도 올래?”
“야, 그러지 마. 시이나한테 너희 분위기를 강요하지 마. 피해를 주
잖아.”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거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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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치토세 넌 좀 까불지 마.”


치토세는 마히루와 아마네가 엮이는 것을 긍정한다. 오히려 그걸
지지하는 구석이 있어서, 치토세가 이야기를 주도할 때는 마히루와
아마네를 가까이 붙이려고 든다.
아마네의 집이라면 또 모를까 여기는 학교이므로, 눈에 띄는 일은
피하고 싶다.
“자, 이제 됐으니까 식단을 정하자.”
주위에는 마히루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고 선전하면서 식단을 정
해서 제출하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으므로 빨리 정하고 싶다는 주장.
치토세가 미묘하게 질린 얼굴을 보인다.
“아마네는 요리도 못하면서 지휘할 거야?”
“말이 심하네. 오믈렛은 만들 줄 알아.”
“이름만 오믈렛이고, 거의 스크램블드 에그에 가깝지만요.”
근처에 있는 세 사람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이는 바람에 치토세와
이츠키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마네는 주위 사람들에게 안 들키게 마
히루를 조금 원망스럽게 보지만,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평소와 똑같은 천사의 미소 앞에서, 아마네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랬더니 또 치토세와 이츠키가 웃으니까, 아마네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
“아카자와 씨는 요리를 잘하나요?”
“나……? 그야 뭐, 먹고살 정도로는 하지.”
“잇군은 이래 보여도 집안일을 뭐든 할 줄 알아.”
기본적으로 필요할 때는 뭐든지 할 줄 아는 이츠키는 요리도 무난
하게 잘한다. 그야 마히루 수준은 아니지만, 혼자 자취하며 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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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충분한 실력이다.
“엄마가 밖에서 일해서 집에 없으니까. 예전에는 아마네의 집에 밥
을 차려 주려고 간 적도 있었고. 뭐, 지금은 안 하지만?”
눈치를 주듯 아마네를 힐끗 봐서 미간을 찡그리지만, 이츠키는 웃
을 자격이 있다.
“그랬군요.”
“이대로 가다간 내 한심함이 부각돼…….”
“지금 할 소리야?”
“지금 할 소리는 아닌걸.”
“너희 말이야. 호흡 맞추지 마.”
“후후. 지금 곤란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나요?”
“아, 아니야. 노력해 볼게. 혼자 있을 때는 가끔 내가 만드니
까…….”
전부 마히루에게 맡기면 좋지 않으니까, 휴일에 마히루가 없을 때
는 요리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간단히 구워서 만
드는 요리나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완성하는 조리법이 전부지만.
말을 조금 아끼는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왠지 자애롭게 웃으면서
“잘했어요.”라고 칭찬했다. 그 말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아마네는 얼
굴을 실룩거렸다.
아마네의 요리 실력이 얼마나 꽝인지 마히루도 잘 알고 있을 것이
다. 마히루의 요리와 비교하면 아마네의 요리는 아이들이 만든 수준
이다. 너무 어설퍼서 흐뭇하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발전하고 있으니까, 아마네는 아무것도 못 하는 수준에서
탈피했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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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아무튼 식단을 정해요. 성적하고도 관계가 있으니까요.”


마히루는 아마네의 반응을 언급하는 일 없이, 온화하게 웃으면서
학교에서 받은 제출용 식단표를 만진다.
마히루가 요리를 가장 잘하니까 마히루가 지휘하는 것이 가장 무난
하다. 조금은 발전했다고는 해도 영양을 생각한 식단을 짜는 것은 문
외한이니까 매일 저녁 식단을 정하는 마히루에게 따르는 것이 바람
직하다.
그렇게 상의한 결과 고기와 닭고기와 야채를 쓴 삼색 덮밥과 된장
국, 당면 샐러드, 행인두부1)로 정했는데, 식단을 본 치토세가 실실
웃었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달걀을 쓴 요리를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치토세와 이츠키가 아주 흐뭇하게 보는
바람에 아마네는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듯 다 작성한 식단표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조리 실습 당일. 아마네는 지친 듯 한숨을 쉬었다.


앞치마 차림이 잘 어울리는 마히루를 옆에서 돕는다. 그 명목으로
아마네가 감시당하고 있다.
“후지미야 씨는 저를 도와주세요.”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통보하고 아마네를 마히루 옆에 두었다.
이건 치토세의 작전도 아니고, 단순히 아마네가 치토세와 이츠키와
비교해서 조리가 서툴기 때문이다. 마히루의 눈앞에서 손을 벤 전과
가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조리 작업을 막는 방침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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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사태를 피하고 싶은 것도, 다 끝낸 조부터 점심을 먹으니까 후


다닥 조리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까 이 조치도 다 이해한다. 다만 아
무리 자신이 어설퍼도 아무것도 못 하지는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하
고 싶다.
“삐쳤어요……?”
야채를 다 다듬은 마히루가 슬쩍 물어봐서, 아마네는 조미료의 양
을 재면서 시선을 맞추지 않고 “그런 건 아니지만.” 하고 대꾸했다.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야…… 우리끼리 하는 게 더 효율이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요.”
“그건 나도 부정할 수 없어.”
마히루는 처음부터 말할 나위도 없다. 이츠키는 애초에 아마네도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있으니까 문제없이 요리하는 수준이고, 치토세
는 간을 볼 때 이상한 짓만 안 하면 그럭저럭 잘하는 수준이다. 아마
네도 못 하는 수준이 아니라고 하지만, 다른 세 사람보다는 떨어지니
까 그 점을 지적하면 아무 말도 못 한다.
“그래서 잘하는 분야에서 애써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치
토세 양은 맛을 극단적으로 만들기 일쑤니까 후지미야 씨에게 맡기
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중요한 역할이에요.”
“책임이 막중하군……. 그런데 그냥 책에 나온 대로만 하는 거 아
니야?”
“치토세 양의 돌발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데
요?”
마히루가 살짝 소리 내어 웃어서, 아마네는 치토세를 힐끗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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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세는 이츠키와 같이 행인두부를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은 뒤,


솥에 밥을 안치면서 뒷정리를 하고 있다. 이츠키가 감시하니까 행인
두부에서 사고가 나지는 않겠지.
미각이 꽝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극단적인 맛을 선호하고 깜짝
이벤트를 좋아하는 성격을 경계해서 이츠키에게 감시를 맡겼다. 게
다가 남자친구와 요리하는 게 즐거울 거라고 마히루가 배려한 듯하
다.
마히루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다 데친 숙주와 당근을 소쿠리에 담는
다. 아마네는 조리대 위에 둔 키친 페이퍼 타월을 두세 장 뜯었다.
“후지미야 씨.”
“응, 알았어.”
마히루가 데친 야채를 소쿠리에 담아서 주자 아마네는 가볍게 식히
면서 페이퍼 타월로 물기를 적당히 훔치고 물로 불린 당면, 얇게 썬
오이와 햄을 함께 미리 조미료를 넣고 준비한 보울에 투입했다.
요리는 계량과 순서만 지키면 결과물을 망치지 않는다고 한 마히루
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조리법에 따라 진행해 나간다.
아마네는 간단한 작업만 맡아서 당당하게 굴기는 어렵지만.
“깨를 섞은 다음에 냉장고에 넣으면 되는 거지?”
“그래요. 그리고…….”
“이걸 넣고 나서 고기도 가져올게.”
먼저 안친 쌀밥이 다 되기 직전이라서 슬슬 덮밥 작업을 시작할 참
이리라.
당면 샐러드가 든 보울에 비닐랩을 씌우고 조 번호를 붙이면서 마
히루를 본다. 틀리지 않은 듯, 아마네의 행동을 수정하지 않고 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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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이팬 준비를 시작했다.
된장국은 이미 야채를 거의 익혀서 이제는 된장을 풀면 된다. 행인
두부는 치토세와 이츠키가 냉장고에 넣고 식혀서 굳히는 중이라 덮
밥 준비만 남았다.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지 않게 냉장고에 당면 샐러드를 넣고 다진
고기를 가져온다.
자신들의 조리대로 돌아오는 중에 다른 조를 슬쩍 봤는데, 순조로
운 곳이 있는가 하면 다툼이 생긴 조도 있다. 남자만 있는 조 중에는
재료를 낭비하거나 노는 데도 있어서 학생들의 자주성을 존중하면서
감시 중인 교사가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마히루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마네의 조가 다른 조보다 원활하게 진행하고 있는 이유는 마히루
가 압도적으로 능숙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식단을 짰기 때문이
다.
‘겉멋을 의식해서 손이 많이 가는 메뉴로 하는 것보다, 영양이 좋고
시간과 수고가 별로 들지 않는 메뉴가 훨씬 편해요. 식사는 매일 차
려야 하니까, 피곤한 메뉴로 할 리가 없잖아요.’
식단의 이유를 집에서 물어봤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매일 두 사람
의 식사를 차리는 마히루답게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네는 이 메뉴만으로도 만드는데 몹시 고생하니까, 마히루의 고
마움을 다시 인식하는 조리 실습이다.
세상에서 가정의 주방을 책임지는 사람은 매끼 고생이 참 많겠다고
실감하면서 돌아가자 마히루가 치토세에게 막 작업 지시를 내리는
참이었다. 이츠키는 보이지 않는데, 시선으로 눈치챈 것인지 마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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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카자와 씨는 다른 교실에서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고기를 부탁할게요.”
“알았어.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이지?”
“그래요. 잘 부탁해요.”
마히루는 삼색 덮밥에서 노란색과 녹색 부분을 만드는 듯, 시금치
를 데칠 물을 준비하면서 달걀을 풀고 있다.
프라이팬 준비는 마히루가 이미 마쳐서, 고기와 조미료를 가열하기
만 하면 끝나는 쉬운 일을 맡는다.
치토세는 다 쓰고 씻은 솥을 행주로 닦으면서, 아마네가 프라이팬
으로 고기를 볶자 신기한 눈치로 쳐다봤다.
“요리 못 하는 거 맞지……?”
“못 하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비교 대상이 이상할 뿐이야.”
지금 하는 작업은 단순히 고기를 조미료와 섞어서 물이 나오지 않
을 때까지 주걱으로 섞으면서 졸이는 일이니까, 오히려 이것도 못 한
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 만화처럼 암흑물질을 생성하는
인간은 현실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겠지.
현실에서 요리를 망치는 이유는, 화력을 잘못 조절하거나, 요리의
순서가 잘못되거나, 괜히 원본에서 바꾸려고 들기 때문이다. 마히루
의 조언을 들으면서 조리하는 현재 상황에서는 실수할 일이 없다.
“애초에 피해를 안 주게 요리 순서 정도는 머릿속에 넣고 왔다고.”
“성실하구나.”
“이런 상황에서 걸림돌로 있다간 내가 주위 남자들에게 죽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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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서 천사님의 요리를 맛보려고 하다니……. 그런 눈빛에 찔려


죽을 것 같으니까, 최소한은 일할 작정이다.
기본적으로 요리를 못 하는 자신을 아니까 교과서를 볼 때보다 더
열심히 요리 과정을 봤는데, 마히루가 집에서 웃었다. 그렇게 심각하
게 안 봐도 된다는 말인데, 일단 시비가 안 걸리게는 해야겠지.
고기가 익고 칼칼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타지
않게 고기를 주걱으로 알맞게 휘젓는다.
옆에서는 마히루가 나머지 화구를 써서 달걀 소보로를 만들고 있
다. 달걀을 사랑하는 아마네를 위해서 보통 분량보다 많이 만드는 것
이 왠지 쑥스럽지만, 아마네의 취향을 잘 아는 마히루의 배려가 고마
웠다.
“시이나, 이건 더 볶아야 할까?”
“그래요. 조금만 더 졸이는 게 좋겠어요. 너무 졸이면 퍽퍽해지니
까, 1분만 더 있다가 불을 꺼 주세요.”
“응, 알았어.”
수분도 거의 날아간 까닭에 타지 않게 주걱으로 휘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니 마히루도 더 말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런 아마네와 마히루를 옆에서 보던 치토세가 미묘하게 질린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도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신혼…….”
“치토세 양, 된장국 준비하세요.”
“꺄악~. 네~.”
왠지 모르게 한심한 비명을 지른 치토세가 냉장고에 된장을 가지러
가서,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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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을 리가 없는데, 마히루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
는 관계로 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고기를 볶던 화구에서 불을 껐다.

마히루도 달걀을 다 볶고 데친 시금치를 썰어서 조미료로 무쳤을


때, 이츠키가 그릇을 챙겨서 돌아왔다.
“오래 걸렸네.”
“아, 미안해. 잠시 다른 조 애가 말을 걸어서.”
헤실거리는 이츠키는 얼굴과 달리 장난기가 없다. 이런 일로 농땡
이를 부리진 않으니까, 정말로 누가 말을 걸어서 시간을 잡아먹은 거
겠지.
누구와 이야기했는지, 뭘 이야기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왠지 마
히루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들어도 상관없을 이야기라면 슬쩍 할
텐데, 아마네 대신 이츠키가 불만을 들었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뭐, 그래도 맡은 임무는 잘 처리했어.”
그렇게 말하고 접시와 밥그릇을 올린 쟁반을 가리키는 이츠키에게
마히루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준비가 다 됐네요. 그러면 밥을 푸고 제출용 보고서에 쓸 사진을
찍은 다음에 먹어요.”
“야호. 난 벌써 배가 꼬륵꼬륵해.”
“그건 잇군이 아침밥을 못 먹어서 그러잖아.”
“어쩔 수 없잖아. 늦잠을 잤으니까. 나는 왕곱빼기로 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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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저는 샐러드를 가지러 갈 테니까, 그동안 밥을 퍼 주세


요.”
“그럼 나도 갈게. 사진용으로 완성한 행인두부도 같이 둬야 하니
까.”
디저트를 포함하면 마히루 혼자서 다 챙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도와
주겠다고 제안하니 온화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준다.
뒤늦게 치토세를 보내야 괜한 억측을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라서 아마네는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조리실 안쪽에
있는 냉장고로 갔다.
마히루가 일을 잘 처리해 준 덕분에 아마네의 조 말고 다 끝난 데는
아직 없어 보인다. 여전히 대충 조리하는 조도 있어서, 점수가 심각
할 것 같다고 남 일처럼 생각하면서 나란히 걷는다.
어느 조에서 남학생이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조리하고 있었는지,
웃으면서 프라이팬을 든 손을 요란하게 움직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 자리에 수프가 담긴 솥을 든 여자애가 있었다.
위험하다고 한순간 판단한 아마네는 잽싸게 마히루를 잡아서 그 자
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촤악. 액체가 힘차게 쏟아지는 소리와 확 퍼지는 우유 냄새. 아래에
서 희미하게 따스한 공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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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수프를 만든 것이리라. 다소 걸쭉하고 하얀 수프가 반 컵 정도


바닥에 흐른 것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마히루에게 안 튀었는지 눈으
로 확인했다.
“시이나, 화상은 안 입었어?”
“아……아뇨. 저한테는 튀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히루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놀라서 몸이 굳었다.
부딪쳐서 수프를 흘린 여자애는 미안한 눈치고, 부딪힌 남학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쪽에는 안 튀었어?”
“어, 으, 응. 괜찮아. 미안해……!”
“아, 사과는 됐어. 나랑 시이나도 안 튀었으니까.”
다행히 일찍 알아차려서 마히루와 아마네 모두 피해가 없다.
일단 솥을 화구에 올리고 사과하는 같은 반 여자애에게는 손을 슬
쩍 흔들어서 안심하게 하고, 부딪힌 남자를 슬쩍 봤다.
같이 장난치던 남자들도 위험했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
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마히루에게 피해를
줄 뻔했기 때문이리라.
“야…… 교실에선 조금 장난쳐도 되겠지만, 불이나 칼을 쓰는 장소
에서 장난치면 안 되지. 누가 다쳐서 흉터라도 남아 봐, 후회해도 소
용없을걸. 이번에는 아무 탈도 없었지만, 만약 여자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쩔 뻔했어. 너희가 책임질 수 있겠어?”
화상이든 자상이든 흉터가 남으면 장난으로 넘어갈 수 없다. 아마
네는 조금 상처가 남아도 신경 쓰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특히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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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다치면 큰일이다.
여자는 흉터를 신경 쓰는 사람이 많고, 남자가 봐도 깔끔한 사람을
더 선호하는 풍조가 있다. 만약 이렇게 시시한 일로 다쳤다가 흉이
지면, 상처가 생긴 사람은 상대를 원망할 것이다.
마히루든, 다른 여자든 상관없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화내
고, 질타한다.
기본적으로 무기력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아마네가 눈을 가늘게 뜨
고 다소 강한 어조로 경고하자, 이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남학생
은 “미, 미안해…….”라고 의기소침한 눈치로 사죄했다.
“나한테는 사과할 것 없어. 부딪힌 야마자키랑 튈 뻔했던 시이나에
게 사과하는 게 좋아. 아무튼 다음부턴 조심해 줘. 위험하니까.”
너무 세게 말해도 알력이 생길 것 같아서 말투를 부드럽게 풀고, 다
시 마히루를 봤다.
지금껏 한 손으로 품에 끌어안고 있었는지 마히루는 얼굴을 희미하
게 붉히고 있었다. 실수했다고 뒤늦게 뉘우쳐도 지금 동요했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살 테니까 슬쩍 떨어지고, 표정이 바뀌지 않게 조심하
면서 냉장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시이나, 허락 없이 만져서 미안해. 그리고 샐러드를 먼저 챙겨서
조 애들한테 돌아가 줘. 나는 이걸 닦고 갈 테니까.”
“괘, 괜찮아. 부딪쳤어도 내가 흘린 거니까.”
“어차피 관계자고, 우리 조는 이제 먹기만 하면 돼. 금방 끝날 테니
까 걱정하지 마.”
흘린 양은 얼마 안 되니까 닦는 데도 수고가 많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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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눈치로 허둥대는 같은 반 아이에게 잠시 말하고, 교사에게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있는 키친 페이퍼 타월을 몇 장
뜯어서 수프를 빨아들인다.
몇 장만 있으면 양이 별로 되지 않는 수프는 금방 다 흡수한다. 나
중에 물걸레로 닦으면 문제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히루가
어디선가 물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둘이서 하는 게 더 빠르니까요.”
그렇게 속삭인 마히루는 정말로 천사님 같이 미소를 지어서, 그걸
가까이서 본 아마네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고생했어.”
바닥을 다 닦고 샐러드와 행인두부를 예정보다 5분 늦게 가져온 아
마네와 마히루를, 치토세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맞이해 주었다.
이미 테이블에는 샐러드와 행인두부 말고는 아마네와 마히루가 먹
을 것까지 다 차려진 상태라서, 아마네는 샐러드용 접시에 모두가 먹
을 샐러드를 옮겨 닮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왠지 피곤해.”
“멋졌는걸. 그리고 의외로 대담하네.”
“내가 좋으려고 만진 게 아니야. 그냥 두면 시이나에게 튈 것 같았
으니까 하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천사님을 품에 끌어안는 행동을 보일 줄은 몰랐다. 급한 판단이어
서 주위에서도 원망하듯 보지는 않지만, 역시 남자들은 부러운 눈치
라서 왠지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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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아마네의 말을 듣고 친한 사람들만 알 정도로 아주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저는 큰 도움을 받았어요. 안아 줘서 다행이에요.”
“그야 앞치마와 교복을 망치고, 심하면 화상이 입을 참이었으니까.
상대도 반성하는 눈치여서 다행이야.”
부딪힌 남학생은 주위에서 비난을 들어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부상자가 발생할 차였기에 교직원한테도 꾸중을 듣고 있는 듯하다.
아마네는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으로 여긴다. 아마네가 직접 피
해를 본 것도 아니다. 주변에서 보는 사람이 있는 가운데 마히루와
신체적으로 접촉했다는, 다른 의미로 화상보다 더 뜨겁게 데일 짓을
저질렀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용서받은 듯하다.
“아마네도 이럴 때는 대담한데 왜 평소에는 그렇게.”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뭐, 아무튼 우리 점심은 무사히 완성했으니까
기념촬영 하자.”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것 같아서 시선과 목소리로 틀어막자 이츠
키가 눈을 피하면서 실실 웃고 스마트폰을 든다.
조리법 확인과 보고서 제출이 있어서 스마트폰 사용이 되지만, 놀
라고 허가한 게 아니다. 딱 봐도 사람에게 카메라를 돌려서 아마네는
황당하다는 듯이 이츠키를 봤지만, 치토세는 신나서 카메라에 찍히
는 범위에 들어왔다.
“자, 어서. 마히룽도. 찍자.”
“이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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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세가 보채자 마히루는 눈을 잠시 깜빡인 다음 희미하게 웃더


니, 아마네의 옆에 의자를 딱 붙인다.
마히루, 너마저……. 그러자 아주 잠깐 짓궂은 웃음을 보여서 깜짝
놀랐는데, 곧바로 학교용 천사의 미소로 돌아와 있었다.
“자, 잇군도.”
“저기 말이야, 사진을 찍을 사람이…… 오오, 마침 잘 왔어. 유타,
사진 찍어 줘.”
“어? 갑자기 뭔데?”
냉장고에 들렀다가 온 건지 얇게 썬 돼지고기를 올린 쟁반을 가지
고 우연히 지나가던 유타에게 스마트폰을 떠넘긴 이츠키가 아마네의
뒤로 돌아가서 앞쪽으로 손을 내밀어 V사인을 한다.
갑작스러운 일에 눈을 껌뻑이던 유타도 아마네의 앞에 완성된 요리
가 있는 것을 보고 눈치챈 듯하다.
웃고 “하는 수 없지.”라며 스마트폰을 든다.
“너희는 빨라서 참 좋네. 자, 찍는다.”
“그야 우리는 우등생이니까.”
“잇군은 오늘 작업한 게 별로 없지만.”
“에이 그러지 말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츠키에게 낚여서 무심코 웃었을 때 셔터 소리가
들린다.
표정을 지을 새도 없이 사진을 찍혀서 굳은 아마네에게 유타가 “잘
찍혔어.”라고 웃으며 이츠키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고 떠난다.
“오오, 아마네가 웃는 사진은 보기 힘든데.”
“아마네는 항상 무뚝뚝하니까. 잇군, 나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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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오케이. 시이나 양은 치토세한테 받아.”


마히루는 이츠키와도 연락처를 교환했다고 하는데, 주위에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는 말하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
그보다도 아마네가 사진을 확인하기도 전에 마히루에게도 송신한
사실이 신경 쓰인다.
마히루에게 시선을 돌려도 싱긋싱긋 아주 귀엽게 웃기만 하니까,
아마네는 끙끙대면서 사진을 보내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얼굴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먹자.”
도망치듯 중얼거리니 이츠키가 히죽 웃어서, 아마네는 이츠키가 제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손가락으로 쿡 찌르고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이츠키와 치토세의 배려로 달걀 소보로를 곱빼기로 얹은
덮밥을 만족스럽게 웃으며 먹는 사진을 찍히는 치욕을 당했지만, 마
히루는 즐겁게 웃기만 하고 두 사람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다.

“아마네~ 오늘부터 우리도 같이 밥 먹을게!”


조리 실습이 있고 며칠 지난 날, 아마네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히
루를 데려온 치토세를 보고 얼굴을 실룩거렸다.
일단은 순서에 맞춰서 얼굴을 아는 사람에서 친구의 친구, 이어서
그럭저럭 말을 주고받는 친구 정도의 단계까지 왔지만, 같이 식사하
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뛰어오르는 게 아닐까.
그야 치토세가 이츠키와 같이 밥을 먹겠다는 명목이라면 마히루를
데려와도 단순히 친구를 데려온 걸로 무마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 주
위에서 조금 질투해도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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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치토세에게 손을 잡혀서 온 마히루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평소의


천사님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왠지 한 방 먹였다는 표정으로도 보여서, 아마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나는 자리를 피해야 할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합석을 요청하는 거니까요.”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진다.
이번 제안은 치토세의 작전일 게 확실하다. 싱글벙글, 헤실헤실 웃
는 치토세를 매섭게 노려봐도 본인은 모르는 척하고 있다.
이츠키도 사전 공작에 넘어갔는지, 아니면 치토세와 같이 식사해서
기쁜 건지, 평소처럼 웃으며 “같이 먹으면 좋잖아.”라고 말하는 판
국.
아마네는 역시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시선에 압도당해 쩔쩔매고 만
다.
“어라? 시라카와랑 시이나도 같이 밥 먹어?”
오늘도 같이 밥 먹을 작정으로 보이는 유타까지 고개를 쑥 내미는
바람에 아마네의 위장이 이상하게 쓰라리기 시작했다.
“네. 자리를 같이 쓰려고요.”
“그래? 활기차겠는걸.”
유타는 태평하게 웃는데, 활기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다.
반대하는 기색은 없다. 고작해야 마히루가 온다는 사실에 놀랄 뿐
이다.
이미 끝났다.
“포기해, 아마네……. 포위망이 완성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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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유타에게 안 들리도록 이츠키가 조용히 말하자 아마네는 지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시이나는 도시락이구나.”
아마네와 이츠키는 언제나 학교 식당에서 먹어서, 평소 교실에서
먹는 마히루와 치토세가 이쪽에 맞춰 주기로 했다.
남자들이 제각기 주문한 점심을 챙겨서 자리에 앉자 유타가 마히루
가 꺼낸 도시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참고로 마히루는 아마네의 정면에 앉았다. 치토세가 거기 앉히는
바람에 도망칠 틈이 없었다.
“네. 저녁때 남은 찬거리로 채울 때가 많지만요.”
마히루는 평일에 도시락에 쓸 요리를 만드는 일이 많은데, 저녁때
남은 찬거리를 아마네의 아침 식사용과 도시락용으로 따로 두니까
오늘은 그걸 가져온 거겠지. 어제저녁에 상에 오른 데리야키 미트볼
이 도시락에 있었다.
“아하, 직접 만드는 거야?”
“네. 별로 대단한 건 못 만들지만요.”
“마히룽, 거짓말은 나쁜 버릇이야. 요리 엄청 잘하면서.”
“치이는 시이나의 제자가 되는 게 어때?”
“잇군 너무해.”
“치이는 요리에서 맛을 내는 법만 배우면 돼. 요리 자체는 할 줄 아
는데 말이지…… 맛을 너무 특이하게 만드니까.”
지난번 조리 실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치토세는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니다. 장난기가 발동하면 새로운 맛을 찾아서 정상에서 일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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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 버릇만 없으면 좋겠다고 이츠키가 자주 투덜댄다.


“그럼 나중에 마히룽한테 맨투맨으로 요리를 배워야지. 아마네를
실험 대상으로 불러서.”
“실험 대상이라고 말하지 마. 그리고 시이나가 불편하니까 갑자기
그런 소리를 꺼내지 마.”
“아뇨. 저는 불편하지 않아요. 치토세 양하고 같이 또 요리하는 게
기대돼요.”
“와~ 마히룽 사랑해! 나도 기대할게! 아마네도 예정 비워!”
치토세는 마히루의 옆에 앉아서 활짝 웃고 마히루에게 찰싹 달라붙
었다.
마히루도 미소를 지으면서 받아들이고 있어서, ‘완전히 친해졌구
나.’라고 감동했을 때── 깨달았다.
(지금 다들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노는 약속을 잡았잖
아.)
치토세를 봐도 본인은 마히루와 사이좋게 웃고 있다. 일부러 그런
건지, 우연히 그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주위에서 미묘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급생들과 눈이 마주
쳤을 때 ‘부러워 죽겠네’ 같은 소리 없는 질투를 받아서 얼굴이 딱딱
하게 굳었다.
“저기, 이츠키…….”
“응?”
“이러다 나 죽지 않겠어? 괜찮을까?”
“괜찮아.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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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의 팬…… 마히루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쏟아져


서 영 불안하다.
이번에도 치토세가 주도해서 살기를 느끼지는 않지만, 더 알기 쉽
게 친해지고 나서 마히루가 뭔가 말할 때가 무섭다.
“잘됐잖아, 후지미야.”
“내가 너였으면 별로 질투받지 않고 넘어갔을 텐데 말이야.”
유타처럼 잘생기고 재능이 많은 인간이라면, 마히루와도 잘 어울리
고 질투해도 소용없다며 포기하겠지.
“나는 후지미야가 부러운데 말이지.”
“뭐가?”
“여러 가지로.”
유타가 의미심장하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뭐, 나는 유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진짜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잘 모르는 법이야. 가진 자는 없는 자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까. 그러고도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애타게 찾는
거지. 치이도 자주 그래.”
“그렇다면?”
“시이나에게 있고 치이에게 없는 건…….”
“잇군. 지금 이상한 생각 했지?”
이야기를 들었는지 치토세가 싱긋, 활짝 웃었다. 그런데 눈이 살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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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아, 이건 지뢰를 건드렸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두 사람이 사이좋


게 이야기하는 것을 구경하고 마히루를 슬쩍 본다.
마히루는 치토세가 이츠키와 티격태격하기 시작해서 당황했지만,
아마네와 눈이 마주치자 도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이 천사님의 미소가 아니라 평소 집에서도 보는 웃음에 가까워
서, 아마네는 낯부끄러운 나머지 시선을 돌려야 했다.

“놀랐나요?”
집에서 마히루가 짓궂게 웃는 것을 보고, 아마네는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놀랐다고 할지. 이번에는 확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는걸.”
“천천히 하겠다고 했지만요. 슬슬 건너뛰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마네 군은 조금 억지를 써야 통한다고, 요새 이해했거든요.”
“그러십니까.”
아마네가 도망치려는 것을 아니까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겠지.
뭐, 그때는 포위망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지만.
아마네는 마히루가 그토록 밀어붙일 줄은 몰라서 식겁했지만, 이야
기만 하고 스킨십은 없어서 그나마 안심했다.
집에서 그러는 것처럼 순수하고 순진하게 접촉했다간 질투의 칼날
이 날아들 것이다. 본인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대는 거겠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그게, 되도록 아마네 군의 생활에 영향을 안 주는 선에서 조금씩
애쓰고 있는데요. 혹시 뭔가 일이 생기면 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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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도 자신의 영향력을 잘 알아서 되도록 급하게 접근하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 아마네도 그 점은 이해하고 있다.
천사님답게 남이 악의를 드러내지 않게 잘 접근해 주니까 다행이지
만, 이번에는 치토세가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이미 늦었으니까 따
지진 않지만.
“뭐, 아직은 괜찮아. 부러워하는 시선은 받지만.”
“그런가요. 저기…… 시, 싫지 않나요……?”
처음에 아마네가 거리낀 것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나 보다.
“마히루가 외로움을 잘 타는 걸 아니까. 친구를 따돌리는 건 미안
하고, 너도 피곤하겠지.”
“친구…….”
“응?”
“아뇨. 별거 아니에요.”
불안한 표정이 이번에는 불만으로 바뀌어서 당혹스럽지만, 말할 생
각은 없나 보다.
왠지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마히루를 보고 이건 뭔가 기분을 상하
게 했다고 깨달은 아마네는 좌우지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아. 기쁘지 않을까 싶어서.”
“기쁘지만요! ……아무한테나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려고 들지 마세
요.”
“마히루 말고는 안 하는데…….”
애초에 달리 친한 여자는 치토세밖에 없다. 치토세를 쓰다듬을 일
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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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치토세가 기뻐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마히루밖에 없고, 마히루 말고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마히
루의 응석만 받아주고 싶으니까,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할 이유가
없었다.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마히루가 고개를 푹 숙이고
쿠션을 잡아 탁탁 때리는 것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다.
말리는 게 좋을까 싶어서 손을 잡으니까 이번에는 팔뚝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아프지는 않지만, 요새 마히루가 조금 공격적인 것 같아서 당혹스
럽다.
“아마네 군은 바보예요…….”
“왜?”
“제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데요…….”
“뭐,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너무 애쓰면 지치
기만 하니까 적당히…….”
“이건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아마네의 팔뚝 아래에서 눈을 드러낸 마히루가 조금 원망스러운 눈
치로, 그러면서도 수치심과 아주 작은 기대가 담긴 눈으로 빤히 쳐다
봤다.
조금 촉촉해진 눈이 바로 앞에 있어서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겨, 결국 말이야. 마히루는 나한테 뭘 원하는 건데?”
“일단은 계속 쓰다듬어 주세요…….”
그렇다면 아직 아마네에게 요구할 게 있다는 뜻이겠지만. 지금의
마히루가 더 요구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네는 다시 마히루의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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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쓰다듬어서 기분을 풀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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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천사님의 제안

“슬슬 골든위크2) 시즌이 오겠네.”


선반에 둔 달력을 보고, 아마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4월에는 진급 관련으로 바쁘고 마히루가 학교에서도 친해지는 작전
을 펼치는 통에 어수선하다 보니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월말이 되어
서 학생과 사회인 모두가 고대하는 골든위크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
다.
아마네는 딱히 공부가 싫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다소 귀찮기는 하지만 괴롭지는 않아서, 골든위
크를 너무 반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느긋하게 지내는 시간이 늘어서 편하다고 생각한다.
올해 골든위크는 작년과 달리 마히루가 있으니까 지루할 일도 없겠
지.
이미 휴일 중 하루는 ‘마히룽 요리 교실의 실험 대상’이라는 이유로
치토세가 강제로 약속을 잡았으니까, 지루하기는커녕 시끄러워서 보
통 난리가 아닐 것 같다.
“또 긴 연휴가 오네요…….”
“어? 싫어?”
“싫지는 않지만,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돼요.”
마히루 역시 비슷한 유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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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두 사람 모두 실내에서 주로 활동하니까, 뭔가 예정이 있지


는 않다.
“그야 휴일은 반갑지만, 할 일이 없으면 말이지.”
공부는 하루하루의 예습과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적당히 잘되
니까, 굳이 휴일 내내 공부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
취미인 산책과 독서는 꼭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
어질 때 기분에 맞춰서 하는 거라서 예정을 잡지 않는다. 게임도 그
러니까 정말로 예정이 없었다.
“아마네 군은, 한가한가요?”
“한가해.”
현재 요리 교실의 실험 대상과 이츠키, 유타와 같이 노래방에 가는
약속을 잡은 게 전부다. 일주일 연휴니까 비는 날이 더 많다.
아마네가 “그냥 집에서 느긋하게 있어야지.”라고 중얼거렸을 때 마
히루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라서 시선을 맞추자, 마히루가 테이블 위에
있는 스마트폰에 손을 뻗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마트폰 케이스에.
마히루의 스마트폰 케이스는 다이어리 타입이라서 카드 등의 물건
을 넣는 공간이 있는데, 그 카드첩에서 지퍼가 달린 작은 비닐백을
꺼냈다.
안에는 접힌 종이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꺼낸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보이듯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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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고 느끼기엔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지만, 그건 한 달하고


도 조금 전에 마히루에게 준 ‘뭐든지 들어주는 티켓’이다.
개인적으로 잘 그렸다고 생각하는 곰돌이 그림이 있는 그것을 내민
마히루가 다시 아마네를 가만히 바라본다.
“써도, 되나요?”
“뭐든지 분부만 하시죠.”
“골든위크 때, 아마네 군의 하루를 쓸게요. 쇼핑도 하고, 놀기도 하
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그래도 될까요?”라고 물어보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슬며시 쓴웃음을 흘린다.
“저기, 그걸 안 써도 부탁하면 쇼핑 정도는 따라갈 거야.”
아마도 소문이 난 그 남자 스타일로 함께해야 하겠지만, 부탁하면
그 정도는 같이 갈 테니까 굳이 티켓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다.
오히려 이렇게 사소한 일에 부탁할 권리를 쓸 필요는 없다고 웃었
지만, 마히루는 진지한 눈빛을 보이고 고개를 저었다.
“쓸 거예요……. 그날은, 뭐든지 부탁을 들어줘야 해요.”
“정 그렇게 말한다면 상관없는데, 뭘 시킬 작정이야……?”
“지……짐을 들게 할 거예요.”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할 생각이냐고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마
히루가 그렇게 말한다면 고개를 끄덕여 준다.
기본적으로 실내에서 주로 생활하는 마히루도 가끔은 외출을 즐기
고 싶을 테니까, 아마네라도 괜찮다면 그 정도는 함께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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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득도 있으니까.
뭐, 또 그 남자의 소문이 안 났으면 좋겠지만, 그게 무서워서 아무
데도 못 가면 참 시시하겠지.
“그래서? 어딜 가려고?”
“네? 그, 그건 안 정했는데요.”
“안 정했구나…….”
“그야 아마네 군이 어떤 델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
“어? 나?”
“기왕에 같이 외출할 거라면 둘이서 즐겁게 지낼 곳이 좋아요.”
소매를 붙잡고 간절히 보면서 “그러면 안 되나요?”라고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숨이 턱 막혀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린 다음, 머리를 벅벅 긁고 탄식
했다.
“나는…… 마히루를 따라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저기, 그렇다면 말
인데. 가고 싶은 곳이 있어.”
혼자서는 가기 어렵지만,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어디죠?”
“웃지 마.”
“안 웃어요.”
“고양이 카페…….”
그렇다. 귀여운 고양이가 잔뜩 있는 고양이 카페다.
아마네는 제법 동물을 좋아하지만, 차마 집에서 키울 수는 없어서
잡지나 다른 사람이 키우는 동물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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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그런 카페에 가고 싶어도, 남자 혼자 돌격하는 것은 주위 시선


이 부끄러워서 지금껏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마히루가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갈 수 있다. 다른
의미에서 시선을 끌겠지만,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마히루가 고양이와 노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울 것이다. 그
렇게 작은 흑심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저기…… 둘이서 가면,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안 될까?”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저기…… 같이, 갈까요?”
“그래…….”
받아들여 줘서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아마네는 미묘하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를 억지
로 감추고, 허둥대는 마히루에게 슬쩍 웃는다.
“그러고 나서는 뭘 할까?”
“그다음에는, 함께 쇼핑하고…… 아, 게임센터에 가 보고 싶어요.
저는 그런 델 간 적이 없어서요.”
역시나 귀한 집 아가씨 같은 마히루는 게임센터에 간 적이 없는 듯
관심을 보여서, 그렇다면 사회 공부도 겸해서 데려가 보면 된다.
아마도 마히루가 좋아하는 인형도 또 들어왔을 테니까, 같이 뽑는
것도 즐겁겠지.
“그렇다면 거기도 가자. 고양이 카페에 갔다가 밥을 먹고 쇼핑도
하고 게임센터에 가고, 그러면 되겠지.”
“네.”
당일 스케줄을 얼추 정하고 안심해서 한숨을 쉬자, 마히루가 아마
네에게 얼굴을 보이듯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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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울 거 같아요.”
그리고 행복이 물씬 배어난 것처럼 순수하게 활짝 웃어서 숨이 막
힐 뻔했다.
“얼른 휴일이 오면 좋겠네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진심으로 그날 외출을 기대하는 눈치를 보인 마
히루가 해맑게 웃고서 들뜬 기색으로 쿠션을 꼭 끌어안았다.
한동안 넋이 나간 것처럼 그 얼굴을 바라본 아마네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면서 “그래…….”라고 목이 멘 것처럼 대꾸했다.
천사님의 기습 공격은 심장을 너무 세게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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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천사님의 요리 교실과 장난

“제1회 마히룽의 요리 교실~!”


몇 분이면 완성되는 요리 방송 같은 배경음을 띄우면서 힘차게 선
언하는 치토세를, 아마네는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지켜봤다.
무사히 골든위크에 돌입한 첫날에 마히루의 요리 교실이 개최된 것
이다. 장소는 아마네가 사는 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마히루와 치토세가 모이기 쉽고, 아마네가 갈 수
있는 장소라서.
치토세의 집은 가족이 있어서 떠들 수 없다. 마히루의 집은 본인이
괜찮다고 했지만, 아마네가 여자애 집에 들어가길 거북해하는 바람
에 아마네의 집으로 정해졌다.
앞치마를 걸친 치토세가 “예이~!” 하고 외치며 혼자 흥을 내고 있
다. 마히루도 앞치마를 장착하고 치토세의 옆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
었다.
“강사로는 시이나 마히루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네가 모신 게 아니라, 네가 우리 집에 초대받은 거야.”
“그리고 모르모트…… 게스트로는 유달리 요리에 잔소리가 많은 후
지미야 아마네 씨를 모셨습니다.”
“군소리가 많네. 그리고 여긴 내 집이야.”
“아이참, 분위기 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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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치토세의 기운에 따라갈 수가 없을 뿐이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정각을 지났다.
점심 식사에 맞춘 요리 교실이라고 해서 이 시간대에 집합한 것이
다.
별로 상관없지만, 은근 일찍 일어나서 치토세의 기운을 감당하기
힘들다.
“죄송해요……. 아침부터…….”
“아니, 괜찮아. 점심을 차려 주는 거니까. 뭐, 그건 그렇고. 치토세
가 이상한 걸 넣지 않나 잘 감시해 줘.”
“사람을 믿지 않네.”
“밸런타인데이 때의 네 전과를 잊지 말아야지……?”
치토세가 장난을 친 초콜릿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아무것도 안 들어간 것은 당연히 맛있었지만, 함정 초콜릿의 엄청
난 맛은 지금도 떠올릴 정도로 충격이 컸다.
그걸 그냥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치토세의 미각은 신용할 수 없다.
“아하하, 그건 장난친 거니까. 그냥 잘 만들면 괜찮아. 아마도.”
“아마도 그렇다니까 걱정하는 거야, 이 바보야. ……제발 부탁하니
까 내가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알았대도.”
치토세가 “나만 믿어.”라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신만만하게 말
하니까 불안하지만, 아마네는 마히루가 어떻게든 해 주리라 믿고 가
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마히루는 남에게 먹이는 음식에 타협하지 않고, 요리 교실이라는
점에서 완벽한 요리를 만들 의욕이 넘치니까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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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치토세를 본받아서 익숙한 우리 집 주방에 가서 오늘 메뉴로 추정


되는 요리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
참고로 오늘 점심은 키슈와 샐러드, 새우를 쓴 비스크3), 남은 새우
로 소테를 만든다고 한다. 새우를 먹고 싶다고 한 아마네의 희망에
응해 준 듯하다.
이거라면 망칠 일이 거의 없겠지. 그럴 테지만, 치토세가 키슈에 이
상한 재료를 넣지 않을까 걱정된다.
“왠지 이상하게 의심하는 것 같아…….”
의심하는 눈으로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치토
세에게서 눈을 돌리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솔직히 맛을 보라는 이유로 호출된…… 집에 있는 아마네로선 할
일이 없다.
마히루를 도우라면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치토세가 할 일이다. 애초
에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앉아 있으라고 지시했으니까 움직일 수 없
다.
그래서 참 심심했다.
주방을 보니 앞치마를 걸친 여자 둘이 사이좋게 이야기하면서 조리
를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방향성은 다르지만 미소녀다. 그런 미소녀들이 앞치
마 차림으로 자신의 집에서 요리하는 상황은 남자라면 누구나 탐낼
것이라고, 왠지 남 일처럼 생각하면서 멍하니 바라본다.
저 장난꾸러기 여자애가 뭔가 저지르지 않을까 다시 불안해지면서
도, 아마네는 한가함을 못 참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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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어차피 몇 시간은 걸릴 테니까 잠시 눈을 붙여도 상관없겠지. 어차


피 자기 집이니까 혼낼 사람은…… 마히루밖에 없다.
흐암. 작게 하품하고, 아마네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정신이 들고 보니, 달달한 냄새가 근처에서 났다.


친숙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냄새. 우유처럼,
꽃처럼 달고 편안한 향기를 무심코 훅 들이마신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그 냄새가 나는 곳에 얼굴을 가까이 대 보니
온기가 느껴지고 조금 부드러운 감촉이 들었다.
닿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의 맨살 같은 그것을 탐닉하려고
뺨으로 더욱 문대자 들썩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저, 저기…… 간지러운데요…….”
곤혹스러움이 섞인 가냘픈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고, 무언가가
다리를 찰싹찰싹 때린다.
몽롱한 의식이 그물에 걸린 것처럼 빠르게 부상해서 무거운 눈꺼풀
을 올려 보니…… 시야에 매끄러운 유백색이 펼쳐져 있다.
조심조심 고개를 들자 난처한 듯, 수줍은 듯, 그런 표정을 지은 마
히루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마히루……?”
“네.”
“안녕…….”
“잘 주무셨나요……. 벌써 낮이지만요. 보세요.”
선반에 있는 디지털 시계를 보니 정오가 이미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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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아무래도 오래 잠들었나 보다. 그걸 깨달은 것은 그렇다 쳐도, 왜


마히루가 옆에 있을까?
“옆에 앉았더니 몸을 기댔어요.”
아마네의 의문에 대답하듯이 말하는 마히루의 뺨은 조금 불그스름
했다.
보아하니 마히루의 어깨 근처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나 보다. 오늘
입은 옷에는 목둘레가 넉넉해서 맨살이 많이 노출됐는데, 그곳에 얼
굴을 댄 듯하다.
자칫하면 성희롱 범죄가 될 수 있으니까 화가 났으면 화냈으면 좋
겠는데, 마히루는 화내는 것보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눈을 내리
뜨기만 했다.
차라리 화내면 좋겠는데, 그렇게 반응하면 참으로 곤란하다. 허락
하는 것 같아서 멋쩍다.
“저기, 미안해. 불쾌했지?”
“아,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마히룽은 ‘아마네 군이 잠에 취해서 응석을 부린다’고 받
아들였는데.”
“치토세 양!”
아무래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경한 듯, 치토세가 싱긋싱긋……
아니,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을 덧붙이는 바람에 마히루의 뺨이 더욱
빨개졌다.
“둘이서 어느새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가 됐을까?”
“치토세…….”
“째려보지 마. 너도 실수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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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렇게 말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잠결에 긴장이 풀려서, 치토세가 있는데도 마히루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아마네의 실수다.
“뭐, 마히룽한테 들어서 이름으로 부르는 걸 알았지만.”
“너 진짜.”
“죄, 죄송해요.”
“아니야. 마히루한테 뭐라고 한 게 아니야.”
실수로 비밀을 누설한 것에 화냈다고 착각한 마히루에게 허겁지겁
고개를 젓자 치토세가 키득키득 즐겁게 웃기 시작한다.
“나는 별로. 마히룽과 아마네가 사이좋아서 참 보기 좋다는 생각만
했는걸?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너는 착각이 심하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흐~응?”
“왜 그러는데.”
“아니야. 딱~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면서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말로 표현할
생각은 없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면 다그쳐도 소용없으니까 치토세에게 물어보는 것은 포기한
다.
옆에 있는 마히루는 미묘하게 눈꼬리가 축 처졌다.
“마히루……?”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걸었더니 정신을 차린 것처럼 황급히 웃고 고개를 저어서 더
는 추궁하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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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래서 말인데…… 점심도 다 됐으니까, 먹을 거지?”


“먹을 거지만, 정말로 어느새 점심이 다 됐네…….”
“쿨쿨 잤으니까. 도중에 자는 얼굴을 구경하면서 장난칠 시간도 있
었는걸?”
“장난친 건 아니겠지?”
“안 쳤어~.”
장난치지 않았다고 해도 별로 신용할 수 없는 것은 치토세의 평소
행실 탓이리라.
“왜 그러니, 아이야.”
“장난치는 것 말고는 한 거지?”
“딱히~? 난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진짜로? 마히루, 얘가 아무 짓도 안 했어?”
확인차 마히루를 보지만, 마히루는 갑자기 화제가 넘어와서 난처한
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치토세 양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그래? 했으면 주먹으로 머리를 꽉 조여 주려고 했는데.”
“폭력 반대!”
그렇게 말하면서도 깔깔 웃는 치토세가 어이없어서 한숨을 쉬었다.

오래 기다렸다고 말할 것도 없이 아마네는 잠드는 바람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았지만, 점심을 먹을 때가 됐다.
치토세도 이번만큼은 성실하게 만든 듯, 테이블에는 예쁘게 구워진
키슈와 새우 냄새가 진하게 나는 비스크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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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이번에는 원 플레이트 메뉴라서 샐러드와 키슈, 비스크에 새우 소


테로 알록달록하게 꾸민 것이 카페에서 나오는 점심 메뉴처럼 보였
다.
“오, 맛있어 보이는걸. 마히루, 맛은 어때?”
“괜찮아요. 이상한 것도 안 넣고 맛도 미리 봤어요.”
“다행이군.”
“아이참, 얼마나 의심하는 거야. 오늘은 멀쩡하게 만들었다고요.”
말이 심하다고 툴툴대지만, 그렇게 말하고 뒤통수를 칠 때도 많으
니까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겠지.
이번에는 마히루가 감수해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아, 키슈는 마히룽이 만든 거야. 나는 잇군한테 줄 걸 만들었으니
까.”
“키슈를 통으로 주는 거냐…….”
“손바닥 사이즈로 작게 만들어서 괜찮아. 에헤헤, 잇군이 기뻐해
줄까?”
마히루가 활짝 웃는 치토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치토세는 장난만 안 치면 기본적으로 남자친구를 아끼는 소녀라서,
이츠키도 참 착한 아이를 사귀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 푸근해진
다.
다만 도가 지나칠 때가 있으니까 완전히 신뢰했다간 조금 위험하지
만.
싱글벙글 웃는 치토세에게 아마네도 슬쩍 웃고, 눈앞에 차려진 접
시를 보고 손을 맞댔다.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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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맛있게 잘 먹어.”


환하게 웃는 치토세는 얘도 역시 여자애라고 생각할 만큼 매력이
있었다.

“저기…… 죄송해요.”
치토세가 떠난 뒤, 마히루가 갑자기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에 앉은 마히루를 보
니, 몸을 옴찔옴찔 움츠리고 미안한 기색으로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장난을 쳐서요…….”
“장난?”
“치토세 양은 아마네 군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제가.”
“어? 마히루가?”
그야 치토세 본인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말했고, 마히루도 치토세
가 안 했다고 말했다.
마히루 본인이 뭘 했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다.
아마네는 마히루가 자신에게 뭔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서 무의식중에 제외했는데, 아무래도 그 마히루가 뭔가 저지른 듯하
다.
죄책감에 자백했는지, 미묘하게 미안한 눈치다.
“뭘 했는데?”
“그게, 볼을 찔러 봤어요…….”
“그게 장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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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리고, 아마네 군이 잠든 얼굴을 구경하거나 머리카락도 만


지거나 했어요.”
“마히루는 그걸 참 좋아하는구나.”
“네, 그래요…….”
“그게 다야?”
“네…….”
시무룩.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건 장난이 아니라고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마히루가 한 것은 장난이 아니라 스킨십이다.
그게 장난이면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못된 장난을 친 셈이니까, 그
걸 장난으로 판정하면 곤란하다.
“딱히 화내는 게 아니야. 뭐, 네가 즐거우면 상관없지 않을까? 남들
앞에서 방심하고 잔 내가 잘못한 거니까.”
“고, 고마워요…….”
“뭐, 나 같은 자식이 자는 걸 봐도 즐겁지 않겠지만…….”
“귀여웠는걸요……?”
“사내자식이 자는 걸 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니에요. 치토세 양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건 확실하게 놀리는 의미인걸…….”
치토세는 무조건 재미로 귀엽다고 말했을 것이다.
마히루가 생각하는 귀여움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너무 믿지 말았으
면 좋겠다.
“귀여워서, 무심코…….”
“무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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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을 많이 찔렀어요.”
“남자의 볼을 찔러서 뭐가 좋은데.”
“즐거운데요?”
아마네 자신은 볼이 여자보다 딱딱해서 찔러도 재미없다고 생각한
다.
마히루가 어떤 재미를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볼을 찌르는 행위가
즐겁다면 불평할 수 없다.
“뭐, 마음은 이해해. 네 볼도 찌르면 감촉이 좋으니까.”
마히루가 했다는 장난을, 본인에게도 해 본다.
그래도 너무 막 만져도 문제니까 손끝으로 부드러운 볼을 살살 찔
렀다.
마히루의 볼은 역시 여자애답게 부드럽고, 떡처럼 말랑말랑한 감촉
이 있다. 군살은 없지만, 질감이 부드럽다고 표현해야 할까.
피부는 잘 관리해서 매끄럽고 생기가 있다. 만지기만 해도 즐거울
만큼 감촉이 좋았다.
마히루가 만졌으면 자신도 만져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변명하면서 마히루의 볼을 가볍게 잡았다.
쭉. 부드럽게 늘어나는 볼.
마히루가 조금 불만스럽게 쳐다봐서, 역시 너무 막 만지면 안 되니
까 달래려고 슬쩍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그렇다. 새끼 고양이를 만질 때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응…….”
불만스러운 표정은 금방 사라지고, 뭔가를 입에 머금은 것처럼 푸
근하게 풀어진 웃음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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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을 가득 머금은 것처럼, 달콤한 느낌이 나는 얼굴이다.


(정말이지 온순하다고 할까…….)
남자가 만지는데 이렇게 웃는 마히루의 온순함이 걱정되지만, 애초
에 마히루는 남자가 몸에 손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
금 부끄러워진다.
어느 정도는 특별하게 대해 준다고 실감해서, 소파 등받이에 머리
를 박고 싶어졌다.
이런저런 먹먹함과 충동을 감추려고 마히루의 턱 아래에 손을 뻗
고, 이번에는 정말로 고양이를 만지듯이 손가락을 벅벅 움직였더니
“햐앙!” 하고 작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뭐 하는 건가요……?”
“고양이 카페에 갔을 때의 연습.”
“사람한테 해서 어쩌려고요…….”
“마히루는 고양이 같으니까. 강아지 같기도 하고, 토끼 같기도 해.”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그냥 그렇다는 뜻이야.”
요새 안 사실이지만, 마히루는 고양이와 강아지와 아주 약간의 토
끼 요소를 더해서 3으로 나눈 분위기가 있다.
처음 알고 지냈을 때는 완전히 경계심이 강한 고양이였는데, 친해
지면서 강아지처럼 사람을 잘 따르고……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친
해진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을 보이며 쫓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
었다.
토끼는, 아마네가 생각하는 토끼가 외로움을 잘 타니까 추가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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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해 주고 싶어진단 말이지. 본인이 거부하지 않는 걸 빌미로


턱 아래를 쓰다듬었더니, 마히루가 “머리가 더 좋은데요.”라고 작게
말을 흘려서 순순히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이런 구석이 강아지 같다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제가 고양이랑 강아지랑 토끼라면…… 아마네 군은 늑대 같아요.”
“내가 그렇게 여자를 덮치게 생겼어……?”
“그, 그런 뜻이 아니고요. 늑대는 동료를 아낀다고 해요. 같은 무리
의 동료를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나 봐요. 그야 무리는 기본적으로 가
족으로 형성된다니까 그런 의미에선 조금 다르지만요. 아마네 군은
일단 가까워진 사람은 무척 소중하게 대하니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네의 교우 범위는 좁다. 친하다고 할 사람은 두 손에 꼽힌다.
다만 사이좋은 사람은 되도록 잘 대하고 싶고,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런 면을 늑대라고 한다면 딱히 부정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게, 게다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시해 주세요. 저기, 털도 복슬복
슬해서 늑대 같아요.”
“그건 늑대 요소가 아닌데.”
뭔가 다른 말을 하려다가 그만둔 마히루가 아마네의 머리카락을 만
져서, 아마네는 추궁하지 않고 마히루가 편하게 머리를 만지게 내버
려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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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세의 요리 교실이 있었던 다음 날인 오늘도 마히루는 치토세와


같이 논다는 듯, 아마네가 먹을 점심을 차린 다음에 외출했다.
굳이 아마네의 점심밥을 차리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 먹을 수 있는
데, 마히루가 성실하게 차려서 같이 먹으니까 얻어먹는 아마네는 아
무 소리도 못 하고 마히루의 호의를 달게 받아들였다.
왠지 모르게 들뜬 기색으로 아마네의 집을 나선 마히루를 뒤에서
배웅하고, 아마네는 남는 시간을 어떻게 지낼지 한숨을 쉬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30분을 지났다. 마히루가 외출했듯이 바깥에
나가기에는 문제가 없는 시간인데, 딱히 예정도 없는 아마네는 외출
할 의욕이 안 생긴다. 누군가와 같이 논다면 그나마 기력을 쥐어짜서
나갈 테지만, 놀 사람도 없는데 굳이 집에서 나갈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뭘 할지가 문제인데, 집에서 심심함을 달래는 방법은 제
법 한정되는 법이다.
가장 흔한 방법은 게임이나 만화책인데, RPG 장르는 시나리오를
깨고 반복 요소도 끝장을 봤다. 파티 게임은 혼자서 해도 전혀 재미
가 없다.
그렇다면 만화책이나 소설책인데, 기본적으로 안 보고 쌓아 둔 책
은 없는 데다가 여러 번 봐서 전개를 외우고 있다. 애초에 아마네는
독서 속도가 빨라서 한 시간만 지나면 만화책 시리즈 하나는 독파할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할 일이 있냐면 그렇지도 않아서 곤란하니까, 아마
네는 이를 어쩌지 싶어 고민하고 좌우지간 방에 가서 책상 책꽂이에
있는 참고서를 빼서 펼쳤다.
(치토세가 보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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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도 없고, 골든위크 중이라도 숙제는 있다. 그리고 골든위크 다


음에는 중간고사가 기다리고 있다.
원래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편인 아마네는 할 일이 없다면 공부해서
시간이나 때우면 된다고, 모범생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어차피 숙제는 처리해야 하고, 내일 외출을 걱정 없이 즐기기 위해
서라도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게 좋겠지.
기본적으로 성실한 아마네는 그대로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하려고
샤프를 쥐었다.

어느새 오후 6시가 지났다.


진지하게 집중해서 빠져들면 다른 데 눈이 안 가는 아마네는 창문
으로 들어오는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것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뻣뻣해진 몸을 풀려고 가볍게 어깨를 돌리면서 방을 나섰다.
복도에 나오자 금방 주방이 보이는데, 주방에는 공부하는 중에 화
장실을 갔을 때는 없었던 마히루가 앞치마 차림으로 있었다.
아무래도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듯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모를 정도로 집중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맞이하지 않은 것은 별로 좋지 않으리라.
“잘 다녀왔어? 맞이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뇨. 그건 괜찮은데요……. 저도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방에
서 뭔가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방에서 숙제했어.”
조용해서 진도가 잘 나갔는데, 너무 집중한 탓인지 몸이 약간 뻐근
하다. 자세를 좀 바꾸고 공부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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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아마네에게, 마히루가 작게 웃음


소리를 냈다.
“부지런하네요.”
“나는 숙제를 먼저 끝내고 놀고 싶은 타입이니까.”
“저도 그래요. 공부는 꾸준히 하지만요.”
“네가 훨씬 부지런한데 말이지.”
아마네도 꾸준히 공부해서 머리에 반복적으로 각인하는 타입이지
만, 마히루처럼 치밀하게 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이츠키는 먼저 끝내고 놀기만 하는 타입, 치토세는 먼저 놀
고 나서 매달리는 유형임을 작년 여름 방학 때 이해했으니까, 올해
여름 방학 후반에는 엄청날 것 같다.
“습관이 되면 별로 불편하지도 않아요. 그게 당연한 일이 되면 아
무 생각도 안 드니까요.”
“대견한걸. 나도 당연히 여길 정도로 노력해야겠어.”
그 노력을 모르는 사람은 마히루를 천재, 하늘에서 재능을 받은 소
녀 등으로 평가한다. 아마네는 마히루가 천재임을 부정하지 않아도,
그보다 노력파임을 안다.
겉으로는 그다지 드러내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을 아
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적과 용모와 운동 능력이 모두 뛰어나다.
마히루의 노력을 아니까 인정하고 칭찬하지만, 그렇다고 시샘하진
않는다. 마히루의 능력은 노력 끝에 얻은 것이므로, 똑같은 것을 원
한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리라.
마히루 같은 영역에 도달할 것 같지는 않지만. 성적은 좀 올려야 하
겠다고 생각한 아마네가 감탄하자 마히루가 수줍은 듯이 눈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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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렸다.
“그렇게 칭찬해도 내줄 건 없어요. 고작해야 식후 푸딩 정도예요.”
“어? 더 칭찬할까?”
“욕심에 눈이 멀었네요.”
피식 웃는 마히루를 슬쩍 곁눈질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정말
로 푸딩이 있다. 시중에서 파는 물건이지만, 이건 치토세가 좋아하는
제과점의 푸딩으로, 아마네도 좋아하는 상품이다.
마히루가 직접 만든 것이 제일이지만, 이것도 맛있으니까 기운이
확 솟아났다.
마히루가 단번에 표정이 밝아진 아마네를 보고 키득키득 웃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달걀을 좋아하네요.”
“그래, 좋아해.”
이미 먹는 취향을 다 간파한 마히루에게 얼버무릴 필요는 없어서
솔직하게 긍정했더니, 왠지 마히루가 경직했다.
다 씻은 감자를 손에 들고서 경직한 마히루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
어서 얼굴을 살피려고 했더니 갑자기 홱 뒤돌아서 등을 보인다.
“마히루?”
“별일 아니에요……. 그나저나 도울 생각이 없으면 주방에서 나가
기를 권하겠어요.”
“갑자기 신랄하네. 도와주려고 오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마히루에게만 집안일을 시킬 수는 없고, 몸을 움직
이는 편이 몸이 풀리는 데도 딱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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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선반에 둔 아마네의 앞치마를 걸치자 마히루가 말없이 씻던


감자를 몇 개 보울에 담아서 필러와 세트로 줬다. 그동안에도 눈을
마주치려고 들지 않았다.
“참고로 묻겠는데, 이 감자는 뭐가 되는 거야?”
“포테이토 샐러드를 만들 예정이었는데, 프리타타4)의 재료로 쓸
거예요.”
“그건 노선 변경이 심한데?”
“괜찮아요. 주방의 왕은 저예요. 제 말에 따르세요.”
“자, 잘 모르겠지만. 그렇긴 하지.”
아마네의 집 주방이지만, 요리는 주로 마히루가 하니까 실질적으로
이 주방의 관리자는 마히루다. 애초에 아마네는 마히루보다 주방 사
정을 모르므로,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해야 하겠지.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마도 후자 같지만. 조금 퉁명한 마
히루에 말투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손을 씻고 감자를 깎기 시작한
다.
필러로 다치거나 실수할 일은 거의 없어서 마음 편하게 깎는 동안
마히루가 자기 작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식단을 바꾼 듯한데, 애초에 냉장고 내용물
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마히루니까 문제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밖에서 뭘 했어?”
두 사람이 나란히 있어도 요리하는 데 여유가 있는 주방이라서 같
이 작업하고 있는데, 말없이 작업만 해도 나쁘지는 않지만 심심하니
까 화제를 하나 꺼냈더니 마히루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아…… 그게 말이죠……. 사, 상담을 받았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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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고민거리가 있었나. 해결했어?”


사실은 고민거리가 있다면 아마네에게 상담하면 좋겠다고 생각하
지만, 같은 여자가 아니면 모르는 고민도 많을 테니까 억지로 참견할
수도 없다.
“네, 그래요. 해결됐는지는 나중에 알 수 있지만요.”
“흐응. 그렇다면 잘됐지만.”
해결했다면 아마네가 더 말할 것도 없고, 물어보기도 뭐하니까 입
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히루가 머뭇거리듯 앞치마를 잡아당겼다.
“아마네 군…….”
“응?”
“저, 저기, 아마네 군은…… 청초한 것과 어른스러운 것, 뭐가 더
좋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껌뻑였지만, 마히루는 난처한 기색으로 아
마네를 쳐다보기만 하고 질문의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예상하는 거지만, 내일 외출 때 어떤 차림이 좋을지를 물어
보는 것이리라.
“본인에게 어울리면 되지 않겠어?”
“아마네 군의 취향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보는 게 즐겁고,
본인이 입고 싶은 옷을 입어서 즐거운 게 제일이라고 보는데.”
“……아마네 군의 취향을 말하는 거예요.”
“으엑……”
마히루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 게 제일이라고 보는데, 그 말로는 이
해하고 넘어가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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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어느 쪽이든 좋을 것 같은데. 청초한 것은 마히루의 분위기와 어


울려서 귀여울 테고, 어른스러운 것은 마히루의 미모를 부각할 테니
까. 어느 쪽이든 잘 어울릴 것 같아. 각각 장점이 있을 테니까 실물
을 안 보면 뭐가 취향인지 잘 모르겠는데.”
“참…… 아, 아마네 군은 은근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요…….”
“아니, 마히루가 물어봤잖아. 아…… 그러면 청초한 걸로.”
뭐가 좋은지 답을 내주길 바라는 눈치여서 굳이 말하자면 그게 보
고 싶다고 전하자,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등을 돌리고 “그럼 그걸로
할게요.”라고 대답했다.
“여유로운 아마네 군의 간담이 서늘해지게 노력할게요…….”
“그건 청초함과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마네 군의 넋이 나가게 할게요.”
“너무 나가면 곤란한데.”
“얌전히 곤란해 보세요.”
오늘은 마히루의 말투가 왠지 강압적인데, 아마네는 그것도 귀여워
서 슬쩍 웃고 감자를 깎는 작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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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제9화 천사님과 외출

“좋은 아침이에요, 아마네 군.”


보통은 다른 사람과 외출할 때는 약속 장소에서 대기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마히루와는 마히루가 아마네의 집에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옆집에 사니까 일일이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잡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는 합리적 판단에 따라 마히루가 집에 찾아왔다.
역시나 오늘의 마히루는 평소와 달랐다.
“좋은 아침이야. ……오늘은 머리를 올렸네?”
“고양이와 놀 때는 방해가 되니까요. 이상하나요?”
평소에는 뒤로 길게 늘어뜨리는 머리를 땋아서 경단처럼 모았다.
봐서는 요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를 만큼 손이 많이 간 것을 알 수 있
다.
“잘 어울려.”
“그렇다면 됐지만요…… 저, 저기…… 우스꽝스러우면 웃어 주세
요.”
“갑자기 왜?”
“신났다고 생각했죠……?”
가슴을 꼭 누르고 있는 마히루는 평소보다 맨살이 더 잘 보이는 차
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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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이렇게 말하면 노출이 심한 것 같지만, 목둘레가 넓은 시폰 블라우


스 차림에서 새하얀 목 언저리가 드러난 거니까 노출이 늘어난 것처
럼 보일 뿐이다.
소매 부분은 긴 랜턴 슬리브 타입이고, 측면에 트인 곳이 있다. 레
이스로 감추면서도 팔뚝이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것이 묘하게 야릇
하다.
물론 안에도 옷을 받쳐 입어서 자칫하면 밖에서 여러모로 보이는
일은 없지만, 여성미 속에서도 청초한 매력을 느낀다.
아래는 고양이와 놀 것을 생각했는지 스키니 바지를 입었는데, 체
형에 딱 맞아서 날씬한 다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손목에는 아마네가 선물한 꽃 모양 팔찌를 찼다.
소중히 잘 쓰겠다고 한 말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졌
다.
“아니야. 평소보다 귀엽다곤 생각했지만.”
“그런 소리가 태연하게 나오는 것도 부모님이 교육한 성과겠
죠…….”
“뭐, 아버지는 여자가 잘 꾸미면 칭찬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물론
아부가 아니니까 안심해.”
“믿어 볼게요.”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고 손가방을 끌어안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
는 쓴웃음을 짓고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생해서 꾸민 머리를 시작부터 망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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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는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춘 것에 놀라서 눈을 깜박였지


만, 머리를 신경 써서 그랬다고 이해했는지 마찬가지로 쓴웃음을 지
었다.
아주 조금, 아마네의 오른손을 아쉽게 봤지만.
“아마네 군, 요즘 제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에 빠지지 않았나
요……?”
“싫으면 그만둘게. 너무 막 만져도 좋을 게 없으니까.”
“시, 싫은 건 아니에요……. 저기, 저, 저도 좋을 때 만지고 싶어
요.”
“그야 상관없지만, 지금은 안 돼. 왁스를 발랐으니까.”
마히루와 외출하는 것이니까, 예전의 그 스타일로 했다.
그래도 마히루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아니라서, 머리를 잘 정리
하기만 하면 끝이지만.
복장도 데님 재킷에 하얀 V넥 셔츠, 검정 슬림 팬츠 같이 캐주얼한
복장이라서 심하게 꾸민 것은 아니다.
마히루의 옆에 있을 때는 부족해 보이겠지만, 이것만큼은 얼굴 문
제도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되나요……?”
“딱히 싫은 일도 아니니까. 오늘은 고양이를 만지고 참아.”
“지, 지금 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렇구나…… 해도 되
는구나…….”
“나도 하니까 나한테 해도 당연한 거겠지.”
마히루가 머리를 만져도 별로 싫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
져서 거부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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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런 거로 마히루가 만족한다면 꼭 해 줬으면 싶기도 하다.


쉽게 긍정한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는 처음에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
였지만, 마침내 기쁜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다음에 만질 테니까요……. 오늘은 고양이를 많이 만져 봐
요.”
“그러자.”
“가 보죠.”
“응.”
둘이서 같은 곳에서 외출하니까 왠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 마
히루를 데리고 집을 나선다.
마히루에 맞춰서 천천히 걷고, 마침 떠오른 생각에 손을 내민다.
“손을 잡아 주세요.”
장난치듯이 말하자 마히루가 볼을 슬며시 붉히고 미소를 지으며 아
마네의 손을 잡았다.

일단은 어느 정도 사전 조사를 했지만, 실제로 고양이 카페에 들어


가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널찍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접수와 손 씻기, 알코올 소독을 마친 두 사람이 카페에 발을 들이고
보니 고양이들이 사방에서 돌아다니고 있거나 몸을 웅크리고 있거나
손님과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오…… 의외로 넓네. 깔끔하고.”
음식물을 제공하는 곳이니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
다 청결했다.
동물의 독특한 냄새도 거의 안 나서, 거의 무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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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평가로는 위생적이고 고양이도 배려하는 고양이 카페라고


한다.
인기가 있어도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게 좌석도 다소 적은
편이다.
고양이가 숨을 집도 마련해서, 고양이를 만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
까지나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컨셉인 듯하다.
이 카페는 시간제로 요금도 비싼 편이지만, 그 돈을 내고도 전혀 아
깝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차분한 공간이었다.
“흐아아…… 고양이…… 보세요, 아마네 군. 다 귀여워요!”
다른 손님과 고양이가 있어서 목소리를 낮추고, 그래도 흥분한 투
로 마히루가 아마네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다양한 종류의 고양이 스태프가 있어서, 마히루는 두리번거리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동물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어도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는
듯한 마히루가 흥분하는 모습에, 아마네도 무심코 입가에 미소가 지
어졌다.
“그러게. 귀엽네.”
“네! 아, 저 아이는 실크라고 하나 봐요.”
뭘 보고 귀엽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마히루가 점원에게 받은
고양이 사진과 함께 이름과 품종을 기록한 프로필 표를 보면서 근처
에 있는 샴 고양이를 가리킨다.
꼬리와 얼굴 주변의 털만 까맣고 날씬한 다리와 몸에 하얀 털이 난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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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고,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고귀한 분위기


를 풍긴다.
마히루는 만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갑자기 만지는 것은 금지
라서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면서 슬며시 손가락을 코에 대고 냄새
를 맡게 했다.
고양이가 코를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다.
그것만으로 마히루는 ‘귀여워.’라고 말없이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
니까,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크는 마히루의 냄새를 한동안 맡은 다음 몸을 홱 돌려서
우아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가고 말았다.
마히루가 시무룩하게 딱 봐도 실망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딱히 싫어한 게 아니라 인사를 마친 거라고 보는데.”
“그, 그럴까요……?”
“뭐, 천천히 익숙해지면 되겠지. 아무튼 자리에 앉자.”
일어선 마히루의 손을 잡고 빈 소파에 앉았다.
거기서 비로소 실내 전체를 천천히 봤는데, 역시 여러 종류의 고양
이 스태프가 있었다.
아까 본 고양이는 샴 고양이인데, 아메리칸 쇼트헤어나 엑조틱, 러
시안블루, 먼치킨이나 벵갈 등, 개성이 풍부한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에 있다.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는 아메리칸 쇼트헤어 고양이가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 자리에 앉은 여자가 부드럽게 쓰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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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 눈빛으로 다른 손님을 봐서, 아마


네는 쓴웃음을 짓고 메뉴판을 봤다.
이 카페에서 제공하는 음식물은 맛있기로 정평이 났다.
추천 메뉴는 밀크폼으로 고양이를 만들어서 올리는 라테 아트 음료
인 듯하다. 듣기로는 라테 아트를 잘 만드는 점원이 있는 듯, SNS에
사진이 자주 올라온다고 한다.
근처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보는 마히루는 잠시 내버려 두고, 점
원을 불러서 라테 아트를 부탁했다.
“그냥 똑같은 걸 시켰는데, 괜찮아?”
“네? 아, 괜찮아요.”
역시 고양이에 시선이 꽂혀서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다.
마히루는 커피든 홍차든 다 괜찮은 타입이라서, 모처럼 소소한 깜
짝 이벤트로 주문한 것은 비밀로 했다.
얼마 후 점원이 웃는 얼굴로 주문한 것을 가져왔다.
라테 아트가 망가지지 않게끔 천천히 움직여서 테이블에 두고 인사
한 다음 자리를 뜨는데, 마히루의 시선이 컵에 올라간 라테 아트에
고정됐다.
“이런 건 싫어?”
“아, 아뇨. 무척 귀여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마히루의 앞에 놓인 컵에는 고양이가 몸을 웅크리고 잠든 것처럼
밀크폼이 올라갔고, 코코아가 고양이 무늬와 표정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네의 컵에도 가장자리에 매달린 듯한 고양이를 만들었다.
세밀한 모양과 귀여움은 인기를 끄는 것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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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남기려는 건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마히루.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귀여워서 마실 수 없어요…….”
심각하게 중얼거려서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 웃지 마세요.”
“귀여운 고민을 다 하는구나 싶어서.”
“그, 그야……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가 있는데 망가뜨리면 아까운
걸요…….”
“안 마시는 게 더 아까운데.”
“으으.”
뭐, 마히루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지만. 가만히 둬도 언젠가는 망가
질 테고, 망가지거나 식기 전에 마시는 것이 만든 사람도 기쁘지 않
을까 싶다.
아마네도 잘 감상한 뒤 망설이지 않고 컵을 입에 댔다.
옆에서 “아아…….” 하고 슬프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웃을
뻔했지만 겨우 참고, 천천히 카페라테를 마신다.
마히루가 시무룩하게 반응해서 최대한 안 망가지게 마셨는데, 역시
맛도 좋다. 커피의 진한 맛과 밀크의 향이 딱 좋았다.
단맛은 별로 안 나지만, 블랙커피도 마시는 아마네는 별로 이상하
지 않았다.
“음, 맛있어.”
숨을 고르고 나서 말하자 마히루가 작게 신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컵을 입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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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망가지지 않게 신중하게 마시는 그 모습은 웃기다고 할


까, 귀엽다고 할까, 무의식중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우, 웃는 거 같은데요.”
“기분 탓이겠지. 맛있어?”
“네. 그야 물론.”
컵에서 입을 떼고 대꾸한 마히루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어깨를 떨
었다.
“왜, 왜 웃어요?”
“그게 있지. 하얀 수염이 생겨서.”
고양이가 망가지지 않게 주의하다가 다른 밀크폼을 의식하지 못했
는지, 마히루의 입가에 산타 같은 하얀 수염이 달렸다.
무심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정말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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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 지금 찍었죠?!”
“미안해. 꼭 지워야 해?”
“그, 그렇게 웃긴 얼굴을 남기려고요?”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말하자 마히루가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희미하게 붉히더
니, 나지막하게 “한 장만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때도 하얀 수염이 있어서, 아마네는 가슴이 훈훈해지
는 것을 느끼면서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라테 아트를 그린 카페라테를 다 마셨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아마
네의 무릎 위에 뛰어올랐다.
아까 옆자리에 있던 아메리칸 쇼트헤어다.
프로필 표를 보니 ‘카카오(암컷)’이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친숙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무릎 위
에 오는 바람에 아마네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고양이의 자유분방함은 잘 알지만, 갑자기 다가와도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무릎 위에 있는 온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한데, 마치 여기
가 자기 자리라는 듯이 당당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얘는 사람을 겁내지 않나 보네.”
손 냄새를 맡게 하면서 마히루를 보니 부러운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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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맡은 카카오가 아마네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빈다. 이건 만져 달


라는 뜻인가 싶어서 마히루로 연습한 것처럼 턱 아래를 긁듯이 쓰다
듬어 줬다.
고롱고롱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진동과 소리로 알 수
있다.
귀여움에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슥슥 쓰다듬는데, 옆에 있는 마히루
가 부러운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무심코 웃고 말았다.
“마히루, 손.”
“네? 아, 네.”
마히루가 순순히 손을 내민다. 아마네는 잠시 카카오에게서 손을
떼고 대신에 마히루의 손바닥을 카카오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
아마도 이 고양이는 성격이 순하고 사람에 익숙할 테니까, 인사만
잘하면 만지게 해 주겠지.
킁킁거리며 마히루의 손에서 냄새를 맡던 카카오가 “냐~앙.” 하고
늘어진 소리를 내고 마히루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벼서, 마히루가 감
동한 듯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아마네 군, 만지게 해 줬어요.”
기분이 좋아진 마히루를 보고 웃으면서 아마네도 털을 고르듯이 어
루만져 준다.
손질을 잘했는지 털이 복스럽고 매끈매끈하다. 불쾌한 냄새도 나지
않고, 고양이만의 독특한 냄새가 은근하게 날 정도라서 정말이지 점
원들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는구나 싶었다.
고양이는 모두가 털의 윤기와 얼굴색이 좋고, 극단적으로 뚱뚱하거
나 마른 아이도 없다. 건강과 체형이 잘 관리된 고양이들이 하나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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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귀여운걸…….”
“정말 그래요, 아마네 군이 부러워요…….”
“카카오한테 부탁해 보는 게 어때? 무릎 위로 와 달라고.”
사람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몸짓은 의외로 통한다고 한다.
마히루가 시험 삼아 무릎을 툭툭 치면서 “이리 온.” 하고 불러 봤더
니 카카오가 한 번 울고 마히루의 무릎으로 슥 이동했다.
그때 마히루가 보인 감동의 표정은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만큼
기쁨이 가득했다.
“보세요. 올라와 줬어요.”
“잘됐네. 봐봐, 쓰다듬어 달라는 것 같은데.”
아마네의 딱딱한 다리보다 마히루의 부드러운 다리가 더 좋은 걸
까. 아까부터 소리를 크게 내고 마히루의 손바닥에 자기 얼굴을 문대
고 있다.
활짝 웃고 마음껏 쓰다듬기 시작한 마히루를 보고 쓴웃음을 지으면
서, 아마네는 스마트폰에 그 모습을 담았다.
“이건 괜찮아?”
“괜찮다고 칠게요…….”
그렇게 말하고 카카오를 쓰다듬는 마히루에게 웃어 보인 다음, 아
마네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는 책장이 있어서 잡지와 만화책이 비치되어 있다. 거기서 몇
가지를 자리로 가져오려는 생각이다.
고양이 카페라고 해도 항상 고양이와 노는 것은 아닐 테고, 고양이
가 있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니까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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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하는 것도 괜찮겠지.
마히루가 카카오에게 푹 빠진 사이에 책장에서 적당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아래에 마히루가 처음 인사한 실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쪼그려 앉아서 검지를 코에 가까이 대니까 역시 인사로 냄새를 킁
킁 맡는다.
이런 동작도 귀여워서 저절로 표정을 풀고 구경했더니, 다 맡은 다
음에 앞발을 들어서 아마네의 팔에 뛰어들듯이 매달렸다.
카카오와는 다르게 소리를 높여 ‘미야옹’ 하고 울면서 접촉하려고
들어서, 아마네는 바닥에 앉았다.
고귀한 분위기이긴 해도 역시 사람에 익숙한 듯, 앉는 자리를 내줘
서 만져 봤더니 아주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목에서 골골 소리를 내고 몸을 비비는 걸 보면, 이건 더 만지라는
신호겠지. 실크 님께서 바라는 대로 부드럽게 공들여서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이츠키의 집에 고양이가 있어서 만지는 방법은 잘 안다.
어떻게 만지면 고양이가 좋아하는지, 애교를 부리는지, 다 알고서
반응을 살피며 손놀림을 바꾼다.
(귀여운걸.)
목에서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것을 느끼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
진다.
처음에는 왠지 쌀쌀맞은 태도였으니까 허용하고 나서 이렇게 애교
를 부릴 줄은 차마 몰랐다.
(왠지 누구랑 닮은 것 같았는데, 마히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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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도 처음에는 쌀쌀맞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한번 마음을 허락하고 나니 신뢰하는 눈으로 보거나, 응석을 부리거
나, 빈틈을 보이거나 한다.
그런 부분이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비교해 봐
도 고양이 같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실크에게 천사님 2호라는 별명을 붙이고 기분 좋게 정
성껏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문득 찰칵하고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마히루가 다가와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
다.
“오는 게 늦어서 보니까…… 실크와 언제 친해진 건가요?”
“잘 모르겠지만 쓰다듬으라고 왔어.”
“치사해요……. 저도 만지고 싶어요…….”
“카카오는?”
“고양이는 정말 자유로운 동물이네요…….”
아무래도 어딘가 가버린 듯하다.
카페를 둘러보니 카카오는 캣타워 2층에 웅크리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마히루가 만지게 했는데, 기분이 바뀐 거겠지.
“아마네 군은 실크가 가장 마음에 드나요?”
“아니, 아직 다 만진 것도 아니니까 뭐라고 할 수 없는데. 그래도
뭐…… 왠지 마히루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 만져 주고 싶어져.”
“닮았다고요?”
“왜 있잖아. 마히루는 처음에 쌀쌀맞다고 할까, 도도하고 무덤덤했
는데. 한 번 친해지고 나서는 의외로 응석을 부리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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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마음을 허락하고 빈틈을 보이는 부분은 고양이 같아도 전폭적


으로 신뢰하고 애교 공격에 나서는 부분은 강아지 같으니까, 역시 고
양이와 강아지를 섞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본인은 무의식중에 기대려고 하고 응석을 부리니까, 아마네는 기쁘
면서도 부끄럽지만.
“저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한테나 정을 주진 않아
요.”
“뭐, 마히루는 경계심이 강하니까.”
“고양이 취급하는 거죠……?”
“그런 적 없어.”
평소 마히루를 쓰다듬듯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대답하고, “그렇
지?”라고 실크에게 동의를 구한다.
분위기를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실크도 “냐앙.” 하고 울
어서, 마히루도 더는 추궁하지 못하는 듯하다.
다만 마히루가 조금 못마땅한 기색으로 봐서, 고양이를 만지지 않
는 왼손으로 마히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역시 고양이 취급해요…….”
“워워. 자, 마히루도 실크랑 놀자. 접수처에 말하면 장난감을 빌려
준다고 하니까.”
“그, 그냥 넘어가게 두지 않아요.”
“같이 놀기 싫어?”
실크와 놀면서 물어보자 마히루가 입술을 작게 삐죽이고 “아마네
군은 치사해요.”라고 투덜댄 다음 장난감을 빌리려고 접수처로 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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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하고 장난감을 가지러 가려고 했던 아마네는 눈을 휘둥그레 뜨


고, 다음에는 왠지 미묘하게 토라진 마히루의 표정을 떠올리면서 고
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치사하다는 걸까?”
실크를 핑계로 대서 그런 걸까? 마히루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생각해 보고 중얼거렸지만, 실크는 ‘내가 알 바 아니야.’라고 말하려
는 듯이 울고 아마네의 손바닥에 이마를 문질렀다.
결국 마히루가 토라진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고양이들과 노는 동
안에 기분이 풀린 듯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도중부터 아마네를 뒷전으로 두고 고양이에 푹 빠진 마히루를 쓴웃


음을 지으면서 지켜봤는데, 어째서인지 고양이들이 아마네의 다리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또 토라지긴 했지만, 실크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마
히루의 다리에 올라가 탈 없이 넘어갔다.
의외로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건지, 귀여워해 주다 보니 간식도 안
줬는데 다른 고양이들도 몰려드는 사태가 발생하는 귀중한 체험을
하다가 고양이를 만끽하는 시간의 끝이 찾아왔다.
서로 돌돌이로 고양이 털을 떼고, 손을 씻으면서, 마히루가 손을 씻
는 동안에 계산을 마치고 보니 마히루가 못마땅한 얼굴로 봤다.
“왜 얼굴이 그래?”
“그렇게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배려가 아니라 자기만족이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멋대로 계산한 거니까 신경 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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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오히려 나는 혼자서 들어가기 어려운 고양이 카페에 따라와 줘서


고마우니까. 알았지?”
“하지만…….”
“이럴 때는 호의를 받는 게 좋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렇
군. 다음에 또 같이 오는 거로 퉁치는 게 어때?”
“그러면 저만 이득인데요……?”
“나도 이득이니까 윈윈이지.”
문제없다고 웃으며 대꾸하자, 마히루는 입술을 꼭 다물고 팔뚝에
머리를 박더니 다시금 아마네의 손을 잡았다.

미리 평판이 좋은 레스토랑을 점찍어서 점심을 해결하고, 아마네와


마히루는 쇼핑몰에 왔다.
참고로 평판이 좋은 레스토랑은 그 평판에 걸맞게 맛이 좋았다. 다
만 취향 문제로 따지면 마히루의 요리에 손을 들어주고 싶으니까, 역
시 마히루의 요리가 제일이라고 재인식했다.
골든위크라서 그런지 평일보다 손님이 무척 많아서, 마히루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잠시 벽 쪽으로 다가가 앞으로의 예정을 정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쇼핑몰에선 뭘 하지? 쇼핑한다고 했지만, 뭔가 사고
싶은 게 있어?”
“따, 딱히 정한 건 없지만요. 저기, 함께 구경하고 다니면 즐거울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괜찮아. 나는 의외로 윈도쇼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고향 집에서는 어머니에게 끌려다니는 일이 많았고, 가족들과 느긋
하게 구경하러 다니는 일도 많았으니까 남자들이 힘들어하는 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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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내성이 있다.
게다가 마히루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뭐부터 구경할까? 잡화나 옷이나 인테리어 등등, 여러 가지가 있
는데.”
이 대형 쇼핑몰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류점과 음식점, 오락
시설 등을 같이 갖춰서 하루에 다 돌아다닐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점
포가 들어와 있다.
아무래도 전부 돌아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까, 가고 싶은 곳을
어느 정도 좁혀야 한다.
“그러면…… 옷부터 보러 가도 될까요?”
“좋아. 새 옷을 사게?”
“좋은 게 있으면 사고 싶어요. 올해 여름옷도 나왔을 테니까 새 옷
을 사고 싶거든요.”
“여름이라…… 빠르네.”
조금 땀이 나오는 계절로 넘어가려는 참이지만, 그래도 아직 포근
한 햇빛이 쏟아지는 정도의 계절이라서 여름옷은 조금 성급한 것 같
다.
신상은 시즌보다 앞서는 것이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봄 기분
이 빠지지 않는다.
“올해 여름은…… 아, 마히루는 우리 고향 집에 같이 갈…… 거
야?”
“아, 네. 아마네 군과 부모님만 괜찮다면 말이죠.”
예전에 귀성할 때 마히루도 같이 고향 집에 가 보자고 말한 것을 기
억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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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 뒤로 어머니한테 잠깐 물어봤는데 꼭 오라고 하더라. 오히려


데려오라고 힘줘서 말했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승낙할 것 같았지만, 방을 준비해야 하니까 일
단 확인을 구해 봤더니 ‘환영할게!’라고 해서, 올해 여름은 마히루와
함께 고향 집에 갈 것 같다.
데려가지 않으면 어머니가 항의할 게 뻔하니까 마히루에게 그럴 마
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뭐, 우리 고향은 별로 대단한 곳도 아니지만. 레저 시절이 의외로
많을지도.”
“그래요?”
“어머니가 데리고 다니기 부족하지 않을 만큼 여러 군데가 있어.
이런 쇼핑몰이라든지, 무식하게 넓은 자연공원이라든지, 쓸데없이
규모가 큰 워터랜드라든지.”
너무 도시도, 너무 시골도 아닐 정도로 딱 좋은 입지라서 여름이든
겨울이든 심심하지 않은 동네다. 따분하기 이전에 끌려다니는 통에
시간이 비지 않을 때도 있어서, 시간을 때울 수단은 제법 많은 편이
다.
여름이라면 워터랜드가 개장하니까 슬라이더를 타거나 천천히 수
영하는 것이 참 기분 좋기도 하다.
지금 사는 지역에도 규모가 큰 워터랜드가 있으니까,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헤엄치러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마네는 특별히 잘하는 운동이 없지만, 운동 자체를 싫어하는 것
은 아니다. 헤엄치는 것은 좋아하니까 혼자 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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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와 풀장에 가고 싶다는 말은 너무 속내가 뻔히 보이는 수작이


니까 차마 입 밖에 꺼낼 수도 없겠지.
“우리 학교는 수영이 선택 과목이라서 신청하지 않으면 헤엄칠 기
회가 없으니까, 수영하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만약 괜찮다면 어
머니랑 둘이서 가는 게…… 마히루?”
“아, 아뇨. 별일 아니에요…….”
“아하, 안심해. 수영복을 보고 싶다거나, 그런 발칙한 생각은 안 하
거든?”
“그, 그런 오해는 안 했어요. 푸, 풀장을 생각해서요.”
“무슨 문제가 있어?”
여름철에 풀장은 정석이라고 보니까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마히루가 묘하게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기…… 말이죠.”
“응?”
“헤, 헤엄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가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
고 할까요…….”
“혹시…… 헤엄 못 쳐?”
노골적으로 눈을 피했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듯하다.
“나는 네가 뭐든 잘할 줄 알았는데…….”
“그, 그렇지 않아요! 수영은 필수가 아니라서 남한테 말하지 않아
도 될 줄 알았는데…….”
점점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리라.
“참 의외라고 할까…….”
“수, 수영 이야기는 이제 됐잖아요. 자,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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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엄치지 못하는 것은 언급하기를 바라지 않는 듯, 완전히 빨개진


얼굴로 마히루가 손을 당긴다. 당긴다고 할까, 팔에 몸을 밀착해서
꼭 끌어안듯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본인은 화제를 돌리고 싶으니까 억지로 윈도쇼핑을 시작하고 싶겠
지만, 애석하게도 이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조금씩 더워지는 계절에 맞추다 보면 옷도 얇아진다.
이번에 마히루가 입은 시폰 블라우스는 겉보기에 가벼워 보이는 만
큼, 당연히 옷감도 얇다. 덤으로 이번에는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라인이 깔끔하게 보일 만큼 목 주변이 느슨하다. 안에 받쳐 입은 옷
이 대부분 가린다고는 해도 아마네의 각도에선 모인 부분이 보이고,
닿는다. 그러나 지금 그걸 지적했다간 확 달아올라서 도망칠 것 같으
니까 굳이 말하지 않고 은근슬쩍 마히루의 몸에서 팔을 떼면서 손을
단단히 잡는다.
조금은 부드러운 것을 순순히 감상할 수 있다면 이 고생도 안 하겠
지만, 죄책감이 앞서는 점에서 보면 자신은 패기도 없는 겁쟁이 자식
이겠지. 그렇게 속으로 자조한다.
“알았어. 알았대도. 뛰지 마. 넘어지니까.”
“아이가 아니에요…….”
아마네의 동요를 모르는 마히루가 고개를 홱 돌리는 틈을 타서, 아
마네도 잠시 마히루의 시선을 피하듯이 바깥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직 팔에 희미하게 남은 부드러운 감촉의 잔재를 필사적으로 머릿
속에서 몰아내고,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들리지 않게 슬며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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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에게 손을 잡히고 끌려가는 형태로 길가에 따라 늘어선 가게


를 구경하는데, 마히루가 역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을 새
삼스럽게 깨달았다.
평소 천사님으로 불릴 만큼 청초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지금의 마
히루는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귀여움과 순진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천사님 모드인 마히루는 그림처럼 예쁘고 환상적이어서 건드려선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다만 그건 너무 섬세하게 만든 미모인지라,
아마네의 눈에는 조금 생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 이렇게 손을 잡은 마히루는 순수하게 웃고 생기가 넘친다. 굳
이 말하지 않아도 ‘기쁘다!’는 감정이 아마네를 잡은 손과 걸음걸이
에서 알 수 있다.
다소곳하게 웃는 것도 예쁘지만, 이렇게 감정을 겉에 드러내고 기
뻐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겉으로 꾸민 모습보다 훨씬 귀엽게 보인다.
“왜 그래요……?”
“아니, 너랑 걸으면 시선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 같아서.”
남녀 모두의 시선이 이쪽에 쏠려서, 마히루가 얼마나 미소녀인지
깨달았다.
“저만 보는 게 아닐걸요……?”
“뭐, 따라다니는 나도 어느 정도는 감정하듯 쳐다보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참.”
못마땅하게 쳐다보지만, 더 말할 생각은 없는지 손을 꼭 잡았다.
나지막하게 “아마네 군은 자기 일을 잘 모르니까 곤란해요.”라고
중얼거리는데, 마히루와 같이 있으면 당연히 자신도 시선을 받을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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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비교해 보면 부족할 게 뻔하니까 자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


지.
“됐어요. 이건 차차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제가 찬찬히 말할 거니
까요.”
“어? 무슨 소리야. 무섭게.”
“무섭다니 말이 심하네요……. 당신 탓이거든요?”
쿡. 마히루가 검지로 코를 눌러서 아마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다만 불만보다는 놀리듯이 웃는 얼굴로 코를 쿡 찔러서 만족했는
지, 손을 떼고 아마네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마네의 팔에 몸을 기댔다.
“자신감이 생기면 이야기가 빨라질 텐데요…….”
아마네는 더 참지 못하고 팔뚝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리는 마히루에
게서 눈을 돌렸다.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니까 더 위험하단 말이지…….)
슬쩍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팔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은근슬
쩍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마히루가 가지 말라는 듯이 팔을 꽉 붙
들었다.
이게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엄청난 악녀 기질에 소름이 돋겠지만,
본인은 어디까지나 자각하지 않고 하는 것이니까 다른 의미로 오싹
하다.
이대로 가다간 얼굴이 익을 것 같아서 아마네는 어떻게든 의식을
다른 데 돌리려고 슬쩍 주변을 살피다가, 마침 마히루의 취향에 맞게
얌전한 옷을 진열한 옷가게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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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저기 봐. 저 마네킹에 걸린 옷이 마히루한테 어울릴 거 같은데. 구


경하고 갈래?”
뺨의 열기를 얼버무리듯이 잡히지 않은 손으로 가리키니 마히루가
“아마네 군의 취향인가요?”라고 흥미를 보여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
의 발걸음이 그 가게로 향했다.
“이거 말인가요?”
“응. 뭐, 마히루는 뭐든 어울리겠지만. 이런 것도 잘 어울릴 것 같
아서.”
마네킹은 하얀 바탕에 작은 줄무늬가 있는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었
다.
여름옷이니까 옷감이 다소 얇고, 어깨도 드러나서 시원한 느낌이
든다.
이런 옷은 날씬해서 목과 어깨 라인이 예쁜 여자에게 잘 어울리니
까, 마히루한테도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네킹 옆에 선 마히루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입혀 봐도 시원하고
상쾌한 마히루의 모습이 금방 떠오른다. 밀짚모자가 잘 어울릴 듯한
복장이다.
“잠시 입어 보고 올게요.”
마히루의 결단은 빨랐다. 아니, 예정했던 것처럼 마네킹에 걸린 것
과 똑같은 옷을 집었다.
왠지 모르게 의욕이 넘치는 마히루에게 조금 압도당하면서 가방을
맡고 보니, 마히루는 곧장 탈의실로 사라졌다.
왜 저렇게 의욕이 넘칠까 싶어서 어쩔 바를 모르고 마히루가 옷을
갈아입기만을 기다리는데, 왠지 주변에서 흐뭇하게 보는 바람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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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당혹스럽다.
점원만이 아니라 주변 손님들까지 따스한 눈으로 보니까, 아마네는
영 거북하다.
빨리 나와 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마히루를 기다리고 있는
데, 마침내 탈의실 커튼이 걷히고 마히루가 밖에 나왔다.
하지만 옷은 갈아입지 않았다.
“어서 와. 안 입었어……?”
“아뇨. 옷의 치수를 확인했어요. 다만…… 그게, 지금은 속옷 문제
로 보여줄 수 없다고 할까요…….”
“미, 미안해.”
지금 입은 시폰 블라우스도 목과 어깨 라인이 그럭저럭 보이지만,
오프숄더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저렇게 어깨를 드러낸 옷을 입을 때는 평소와 다른 속옷을 입어야
하는 듯하니까, 지금은 보여줄 수가 없는 거겠지.
“다만 아마네 군이 어울릴 거라고 말해 주었으니까요. 입어 보고
마음에 들었으니까 살래요.”
아마네가 맡은 백을 받아서 품에 안은 원피스를 계산대로 가지고
가서, 황급히 뒤쫓는다.
자신이 마히루에게 어울린다고 말했으니까 돈을 내야 할 것 같아서
지갑을 꺼내려고 했는데, 마히루가 가방을 뒤지는 아마네의 손을 제
지했다.
“안 돼요. 이건 제가 사서 아마네 군에게 자랑해야 해요.”
“그,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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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건 더 더워져야 입을 수 있겠지만요. 여름까지 기다려야


하겠네요.”
웃으면서 “기대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계산을 마친 마히루를 보
고, 아마네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것을 필사
적으로 참았다.
(엄청나게 귀여운 소리를 하잖아. 젠장.)
마치 아마네를 위해서 입어 준다고 말한 것 같아서 심장이 너무 아
프다.
계산하는 점원과 눈이 마주치자 정말이지 친절하게 싱긋싱긋 웃어
서, 아마네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윈도쇼핑,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제로 물건을 샀으니까 보통 쇼핑을


즐긴 아마네와 마히루. 하지만 아마네는 잠시 마히루와 떨어져서 혼
자 있었다.
마히루가 혼자 사고 싶은 것을 사러 가는 바람에 혼자 남을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부터 마히루가 요청해서 외출한 것이고, 여자는 남이 몰랐으면
하는 물건도 몇 가지 사야 할 테니까 순순히 보낸 다음 기다리는 장
소로 지정한 쇼핑몰 내부 분수 근처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
다.
아마네는 어머니를 통해서 여자와 같이 물건을 사러 나가는 일에
익숙했고, 끌려다니거나 기다리는 것도 몸에 익었다. 애초에 혼자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 않아서 짜증도 전혀 안 내고 멍
하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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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와 헤어진 뒤로 시선이 줄어들어서 마음도 조금 편해졌고,


부담이 컸던 심장을 쉬는 데에도 딱 좋은 휴식 시간이다.
(일일이 귀여운 스킨십이 많아서 힘들어…….)
오늘은 마히루가 평소 별로 보이지 않는 들뜬 모습을 봤는데, 천진
난만함과 순수함이 강하고, 평소 억눌렸던 일면이 겉으로 드러나 무
척 귀여웠다.
마히루는 자신의 용모가 얼마나 빼어난지 알 텐데도, 아마네가 평
소 친하게 대하는 데다가 외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라서 그
런지 자신의 미모에 무관심했다. 정확하게는 아마네 앞에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 덕분에 순수한 귀여움을 한껏 보고,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몸
을 느끼는 바람에 정신이 한계에 달했다.
이걸 이득으로 받아들이면 이 고생을 안 할 텐데, 아마네는 기쁨을
느낄 만큼 수치심 내성이 강하지 않다. 죄책감이 앞서고 만다.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
소에서 몸부림칠 수는 없으니까 입술을 꾹 다물고 조용히 눈을 감았
다.
머릿속을 헤집는 잡념을 털어내려고 천천히 고개를 저은 순간, 근
처에서 “저기.”라고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르는 목소리에 반응해 눈을 번쩍 뜨고 정면을 보니 여자 두 명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대학생쯤 되는 나이일 것이다. 최소한 연상으로는 보인다.
골든위크의 행락 시즌에 걸맞게 잘 꾸민 두 사람은 의아해서 눈을
가늘게 뜨는 아마네를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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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지금 혼자야? 한가해?”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기가 막혔다.
이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딱 봐도 말을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내는
데도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멘탈은 정말 괄목할 만하다.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보여서 조금 아쉽지만.
왜 얼굴도 별로 좋지 않은 자신에게 굳이 말을 걸었을까 하는 의구
심이 고개를 들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좀 그러니
까 일단은 부드럽게 시선을 주었다.
“아뇨,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서 마히루가 맡기고 간, 오늘 전리품인 여성 브랜드의 종이봉
투를 눈치채 주면 좋았을 테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디자
인이 단순해서 몰랐을 수도 있지만.
“말씀은 고맙지만,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친구랑 같이 차라도 마실래?”
아무래도 기다리는 친구가 같은 남자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럴 때 마히루와 사귀는 사이라면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
하나로 일갈할 수 있지만, 마히루와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본인이 여기 없으니까 여자친구라고 주장했다가 실제로 합류했을 때
마히루가 말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사정이 있어서 취객과 멀어지려는 방편으로 썼을 때 마히루
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방편으로 쓰는 데도 거리낌이 있다.
이대로 가다간 마히루와 합류할 때까지 말을 걸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미간을 찡그리고 여자들을 봤더니── 시야 한쪽
에서 눈에 익은 황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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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몇 초 후에는 가볍게 내린 옆머리를 찰랑이고, 사뿐한 동작으로 구
세주(천사님)께서 나타나셨다.
아마도 아마네가 난처한 상황인 것을 보고 급하게 온 거겠지. 걸어
왔다고 보기에는 호흡이 조금 빨랐다.
표정을 굳히고 여자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아마네에게,
마히루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품에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어도 성대하게 가슴을 졸인 아마네
를, 마히루는 등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각도를 조정하
면서 올려다보고 있다. 시선에서는 ‘지금 뭘 하고 있나요?’처럼 어이
없다는 눈치와 아주 작은 불만이 느껴져서, 이것이 아마네를 빼내기
위한 연기임을 이해했다.
(심장이 쪼그라드니까 이러진 마…….)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거절하려고 한 결과 이도 저도 아닌 태
도로 상대를 가까이 불러들인 아마네가 잘못한 거지만, 그래도 이건
심장에 나쁘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은 사실이라서 불만을 말할 수
는 없고, 아마네는 마히루의 연기에 편승하듯이 부드럽게 마히루의
등에 손을 돌린다. 정말이지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처럼 보이도록.
“걱정하지 마. 착한 누나들이 상대해 준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으니
까.”
“그랬나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몸을 반쯤 돌려서 생긋 웃는 마히루를 보고, 여자들은 넋을 놓고 있
었다. 같이 놀려고 했던 남자에게 애인으로 보이는 소녀가 안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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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귀여운 소녀가.


마히루는 여자들이 왜 굳었는지 알 텐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선
량한 눈빛과 미소를 짓고 있다. 어디까지나 ‘남자친구의 잡담에 어
울려 줘서 고맙습니다’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순수한 웃음
을 보고 아마네는 혀를 내둘렀다.
악의가 하나도 없이 순진하게 웃는 얼굴 앞에서 여자들이 가만히
이쪽을 봐서, 아마네는 되도록 온화한 표정과 눈빛을 보이게 주의하
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아까 말했듯이 약속이 있어서요.”
처음 거절할 때 말하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마히루의 등을
토닥이자, 순진한 웃음을 드러내던 마히루가 기분 좋게 아마네의 팔
에 팔짱을 낀다.
밀착하는 바람에 당연히 풍만한 과실의 감촉도 잘 전해지지만, 여
기서 당황해서는 일부러 연기해 주는 마히루에게 미안하니까 태연한
척하고 여자들에게 인사했다.
마히루도 덩달아 인사하고, 아마네는 마히루의 움직임에 따라 여자
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코너를 돌아서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마히루
를 보니, 딱 봐도 사교용으로 지었던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지고 없었
다.
“뭘 하고 있었나요?”
갑자기 말투가 담담해지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히루의 태도가 너
무 달라져서 무심코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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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아직 밀착한 상태지만, 표정에는 한심함과 미묘한 불쾌함이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은 연기였는지, 눈빛에선 오히려 언짢
은 기색이 보였다.
“덕분에 살았어.”
“참, 눈을 떼자마자……. 아니죠. 제가 잠시 자리를 뜬 거지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다니지 않았을 거라고 푸념하는 마히루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 밀착한 부분에 슬쩍 시선을 주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않는 것이 조금 얄밉다. 아마네만 밀착한 몸에 동
요하고 있었다.
“아마네 군은 의외로 잘 모르는 사람을 거부하지 못하네요.”
마히루는 흔들리는 아마네의 마음도 모르고, 어이없어 보이는 눈치
다.
“거부하지 못한다고 할까, 저런 사람들이 껄끄럽다고 할까. 여자라
서 거칠게 대할 수도 없고, 말을 심하게 해서 울리기라도 하면 곤란
하니까.”
“그런 점은 정말이지 아마네 군이 신사인 건지, 겁쟁이인 건지 모
르겠어요.”
“말이 많네. 그런 일은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설마 나한테 말
을 걸 줄은 몰랐다고.”
한가해 보이는 사람이 그럭저럭 있는데 자신에게 접근할 줄 누가
알까.
“적극적인 여자들은 참 대단하네. 나처럼 음침한 사람에게도 말을
다 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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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지금 모습은 음침하지가…… 굳이 말하자면 시원한 남자 스타일이


에요.”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칭찬이네.”
“속은 이 모양이니까요.”
“잘도 말했겠다.”
설령 외모가 다소 밝더라도 속이 음침한 것은 틀림없으니까, 마히
루가 한 말도 틀리지 않아서 그냥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마음을 숨기지 않는 말투도 마히루의 좋은 점이자 끌리는
부분이라서 달갑게 여겼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
욕하는 게 아님을 잘 아니까 편하게 받아들이는데, 마히루는 왠지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 말이죠. 본인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요, 당신은
밝고 활기찬 것보다는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이 강해요. 음침하다는
말로 표현해서는 안 돼요. 같이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할까,
안심할 수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정말 굉장한 거라고 봐요.”
“그런가…….”
칭찬을 들으니 절로 부끄럽다.
그래서 대충 대꾸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마히루가 팔을 꼭꼭 조여
서 불만을 드러낸다. 이런데도 자신의 무기를 모르니까 정말이지 장
래가 두렵다.
“당신은 저와 있어서 어떤가요?”
“집에서는 마음이 편해.”
“지금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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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차분하지 못해. 어디의 누가 가슴을 대니까.”


“흐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 의식한 적도 없었던 듯이 마히루가 딱딱하
게 굳어서 자신의 가슴팍에 시선을 내린다.
그리고 김이 확 오른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어.”
실컷 안절부절못하게 했으니까 이 정도는 놀려도 되겠지. 그런 느
낌으로 짓궂게 말해 봤더니, 조금 눈물이 맺힌 눈으로 째려봤다.
조금도 박력이 없는 것은, 이것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태도임
을 알기 때문이리라.
“무슨, 바, 바보! 그런 건!”
“알아. 농담한 거야. 미안해.”
너무 놀리면 토라지는 것을 아니까 산뜻하게 사과했다. 그러자 폭
발 직전에 불이 꺼진 마히루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작게 움
직였다.
그러나 뭔가 말하는 일은 없이 화풀이하듯 옆구리를 한 대 때리는
것으로 타협해 주었다.
그런 마히루를 보고 웃으면서 이번에는 몸이 밀착하지 않게 다시
손을 잡았다.
“너무 들러붙지 마.”
“손을 잡는 건 괜찮나요……?”
“놓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골든위크 시즌의 인파 속에서 손을 안 잡고 다니다가 일행을 놓치
면 외출한 의미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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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놓치면 어쩔 건데요……?”
“그냥 스마트폰으로 연락해서 장소를 지정하고 다시 합류해야지.”
“현실적이네요.”
“그야 당연하지. 뭐, 놓치지 않을게.”
떨어져서 혼자 돌아다니면 마히루가 남자들에게 붙잡힐 확률이 높
다고 할까, 거의 무조건 그럴 테니까 혼자 둘 생각은 없다.
모처럼 마히루가 원해서 외출했으니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골머
리를 앓는 것보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싶겠지. 게다가 아마네도 마
히루에게 남자가 꼬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임을 알아도 조금 못마땅
하다.
아마네의 말을 들은 마히루가 아마네의 눈을 빤히 보고, 다음으로
시선을 서로 잡은 손으로 내린다.
그리고 꽃이 천천히 피는 것처럼 입가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네…… 놓치지 마세요.”
나지막이 속삭이고 손가락을 거는 마히루의 말에 응하듯, 아마네는
동요를 안 들키게 애쓰면서 똑같이 손가락을 걸었다.

“여기가 게임센터…….”
옷가게와 잡화점을 구경하고 눈에 들어온 것을 산 뒤, 아마네는 마
히루를 데리고 평소 가는 게임센터에 들렀다.
게임센터는 마히루가 요청해서 온 것이다. 크레인 뽑기 게임에서
경품을 뽑아도 짐이 늘어나지 않게 마지막으로 잡았는데, 이제는 집
에 가기만 하면 끝이니까 시간도 여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잡기를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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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치토세도 데려온 적이 없는 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는 모습


이 참 귀엽다.
“뭔가 여러 가지 장치가 많이 있네요.”
“그래. 크레인 뽑기 게임만이 아니라 아케이드 게임이나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게임도 있어. 여기는 제법 종류가 많거든.”
“그렇군요. 그리고 소리가 무척 커요.”
“아, 게임센터는 보통 이래.”
마히루가 미간을 조금 찡그리고 있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게임센터의 잡음이 귀에 거슬리기 때문이겠지. 아마네는 이미 익숙
해서 아무렇지도 않지만.
슬롯 게임이나 아케이드 게임 코너는 특히나 더 시끄러워서, 그 일
대를 피하면서 마히루를 데리고 천천히 걷는다.
“그래서? 뭘 할까?”
“저도 크레인 뽑기 게임을 해 보고 싶어요. 인형을 뽑아 볼래요.”
목표는 크레인 뽑기 게임이었던 듯, 아마네가 데려간 크레인 뽑기
게임 코너를 보고 흥분한 기색으로 얌전히 있지 못하고 잡은 손에 힘
에 주거나 풀거나 했다.
골든위크라서 경품이 많이 입고했고, 가족 손님에 맞게 귀여운 인
형도 많이 들여서 마히루가 좋아할 인형이 잔뜩 있었다.
“아마네 군, 저걸 뽑고 싶어요.”
“응? 어떤 거?”
“저거요. 저 고양이…… 실크를 닮지 않았나요?”
마히루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몸의 털이 하얗고 얼굴 주변만 진한
갈색인 고양이다. 눈이 파래서 확실히 고양이 카페에서 본 실크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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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슷하다.
마히루에게 처음 인사한 실크를 닮아서 눈에 띈 듯하다.
“정말로 닮았네. 뽑고 싶어?”
“뽑고 싶어요. 도전해 봐도 될까요?”
“응. 이 게임센터는 뽑기 쉬운 편이지만, 못 뽑으면 내가 할게.”
“수고를 끼치지 않게 노력할게요.”
의욕이 넘쳐서 크레인 뽑기 게임에 임하는 마히루를, 아마네는 일
단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네가 잡으면 간단히 뽑겠지만, 이건 마히루가 뽑고 싶은 거니
까 본인의 자주성과 도전 정신을 우선해 주는 게 맞겠지.
동전을 넣고 제일 처음 옆으로 이동하는 버튼을 조심스럽게 잠깐
만지고 낌새를 관찰하고 있다. 신중한 마히루답게 얼마나 누르면 이
동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크레인 뽑기 게임은 버튼을 눌렀다가 떼면 이동 방향
이 바뀐다.
“어? 어라? 움직이지 않아요.”
“미안해. 말하는 걸 잊었는데 버튼에서 한 번 손을 떼면 좌우 이동
에서 상하 이동으로 바뀌니까 기회는 한 번밖에 없어.”
“어? 그러면 이건…….”
“뭘 해도 인형에는 못 가지.”
현재 인형의 위치는 남은 공간의 중앙.
그런데 집게의 위치는 경품을 떨어뜨리는 곳에서 아주 조금 이동한
상태로 상하 이동만 남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형에는 스치지도 못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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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시간을 두고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는 레버를 쓰는 기계도 있는


데, 이런 버튼 방식은 돌이킬 수 없다. 크레인 뽑기 게임을 하는 처
음 사람이 자주 거치는 길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0엔을 그냥 쓰고 말았지만, 아직 상하 이동이 남았으니까 그걸
로 이동 속도와 버튼에서 손을 뗐을 때의 딜레이를 느끼고 다음 기회
를 살리자.”
“으으…… 그럴게요. 부주의한 제가 잘못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아주 진지하게 집게팔을 움직여서 스피드를 확인하
고 있다.
이번에는 아마네의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라서 슬쩍 동전을 넣었더
니 마히루가 못마땅하게 봤다. 그래도 아마네가 “자자, 그러지 말
고.”라면서 등을 톡톡 두드리고 권하자 마지못한 기색으로 크레인
뽑기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그나마 이동 속도는 파악했는지, 이번에는 좌우 이동에서 인형이
있는 위치에 라인을 맞출 수 있었다.
중심에서 조금 어긋났지만, 상하 이동의 장소에 따라서는 못 뽑을
것도 없다. 전부 중앙으로 잡지 않아도 무게 중심이나 집게에 걸리는
힘, 집게가 풀리는 타이밍을 고려하면 공략할 수 있다.
초심자치고는 의외로 위치를 잘 잡았다고 감탄하면서 마히루를 지
켜본다.
상하로 신중하게 이동시키고 어찌어찌 인형 위에 집게팔을 옮겨서
잡아 올리려고 했다.
노림수는 좋았지만, 미묘하게 위아래로 긴 경품이라서 집게가 조이
자 금방 중심이 이동해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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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으으.”
“아쉽네. 이건 그대로 잡아서 올리는 것보다 집게의 측면으로 움직
이거나 중심을 이용해서 굴리는 게 더 잡기 편할 거야.”
다행히 경품을 떨어뜨리는 공간의 칸막이는 별로 높지 않으니까,
굴려서 가면 나오겠지.
마히루가 눈을 반짝 빛내고, 이어서 말한 대로 순순히 실행에 옮겼
다.
쉽게 짜증을 내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마히루의 좋은 점이리라.
집게의 위치와 인형의 무게 중심을 생각해서 “이건 이렇게 해
서…… 머리로 굴려서…….” 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유리에 비친 표정이 아주 진지해서, 마히루에게 안 들키게끔 작게
웃는다.
동전을 몇 번 넣고 시간이 얼마간 흐른 다음, 마히루가 집게로 잡은
인형을 경품을 떨어뜨리는 곳에 밀어 넣었다.
“아.”하고 작게 중얼거린 순간에 경품 배출구에 인형이 톡 떨어졌
다.
잠시 침묵이 있은 다음, 마히루가 조금 멍한 기색으로 아마네를 쳐
다봤다.
“……들어갔어요.”
“응, 고생했어. ……자, 네가 노력한 증거야.”
악전고투 끝에 구한 인형을 꺼내서 마히루에게 내밀자 그제야 뽑았
다는 사실을 실감한 듯 순식간에 고운 미모가 환희로 물든다.
“뽀, 뽑았어요. 뽑았어요, 아마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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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냈네. 처음이지만 잘했어.”


참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자 간지러운 듯 눈을 희미하게 뜨고 아
마네가 건넨 실크를 닮은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는다.
자기 손으로 뽑아서 기쁨이 더 큰 듯, 인형에 뺨을 대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마히루에게 꼭 안긴 인형을 조금 부럽게 여길
만큼, 요새는 마음이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것 같다.
마히루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안고 있다가 문득 아마
네를 보고 머뭇거리며 인형을 내밀었다.
“저기…… 이걸, 받아줄래요?”
“어? 내가?”
“전에도 받았고. 그게, 왠지 실크를 좋아했으니까요…….”
그거야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고, 특히 마히루를 닮아서 귀여웠으니
까.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남자는 역시 인형을 좋아하지 않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히루가 애써서 뽑았는데 내가 받아도 좋
나 싶어서.”
“아마네 군을 위해서 노력한 건데요. 아, 그런 식으로 강요하려는
게 아니고요! 실크처럼 생겼으니까 아마네 군이 좋아할 것 같아
서…….”
마히루가 조금 시무룩한 기색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필요 없
으면 제 방에 둘게요.”라면서 불안한 듯이 쳐다보니까 거절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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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받아서 방에 장식해 둘게. 아무리 그래도 마히루처럼 머리


맡에 둘 수는 없지만.”
“그, 그건 잊어 줬으면 하는데요…….”
“소중히 간직할게.”
마히루에게 인형을 조심스럽게 받고, 근처에 있는 경품 포장용 비
닐봉지를 하나 빼서 안에 넣는다.
곧바로 기뻐하며 웃는 마히루에게, 아마네가 다시 손을 뻗으려고
했을 때──.
“어, 시이나?”
옆에서 말을 거는 소리를 듣고 굳었다.
마히루도 똑같이 굳어서 둘이서 나란히 뻣뻣하게 목소리가 들린 곳
을 돌아보자, 요새 익숙해지고 있는 얼굴, 천진함과 씩씩함을 겸비한
듯 인상이 반듯한 소년…… 유타가 서 있었다.
“카도와키 씨.”
유타가 나타나자 마히루가 곧장 학교에서 보이는 천사의 미소를 짓
는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어색해 보이는 것은 속으로 몹시 동요했기 때
문이리라.
골든위크라서 동급생과 마주칠 가능성도 크다고 인식하기는 했지
만, 설마 요새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 상대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시이나가 게임센터에 있으니까 의외인데……. 아, 혹시 방해했
어?”
아마네를 보고 난처한 듯이 눈꼬리가 처진다. 아직 아마네라고 인
식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하면 확실하게 들킨다. 게다가 유타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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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을 제법 잘 보니까, 몰라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아뇨, 그렇진…….”
“시이나가 사귀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어.”
“사귀는 사이는 아니에요.”
단호하게 부정하는 마히루를 보고 왠지 가슴이 아프지만, 사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니까 당연히 부정하겠지. 오히려 이럴 때는 긍정하
는 것이 더 이상하니까 기대해도 소용없다.
“아, 아니지. 암만 봐도…… 음?”
마히루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하면서 다시 추궁하려던 유타가 문득
아마네를 봤다.
시선이 마주치고, 아마네는 얼굴을 굳혔다.
의심스러운 눈치로 아마네를 가만히 보는 유타. 아마네는 매우 난
처한 상황이었다.
“후지미야……?”
아니나 다를까, 누구인지 알아챘다.
아직 오래 접하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타는 통찰력이
좋은 것을 안다. 아무리 아마네가 머리를 다듬고 평소와 다른 차림새
를 했더라도 친해지기 시작한 지금은 속일 수 없는 상태인 듯하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에 아마네의 얼굴을 주시하려고 하지
않고 분위기도 다르니까 이 얼굴과 매치하지 않을 텐데, 유타는 그렇
지 않은 듯하다.
“어? 후지미야…… 맞지? 덩치나 얼굴이, 자세히 보니까……. 혹시
시이나랑 후지미야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다가 학교에서 가까워진 거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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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게…….”
마히루가 말을 흐리는 것을 봐서 확인한 듯, 유타가 아마네와 마히
루를 번갈아 보고 다소 허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이라면 접점이 없으니까 부정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한숨을 푹 쉬고 이마를 짚은 아마네는 신기한 눈치라고 할까, 당혹
스러움이 강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유타를 봤다.
“나라고 용케 알아봤구나…….”
“역시나. 아니, 왠지 후지미야 같았거든.”
“그렇게 알아보기 쉬워?”
“아니. 아마도 같은 반 아이들한테도 쉽게 들키진 않을걸. 후지미
야는 이런 얼굴을 잘 보이지 않으니까.”
애초에 이런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문으로
떠도는 그 남자와 아마네가 얼굴을 이유로 바로 연결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보다 시이나와 후지미야가 둘이서 있는 게 더 의외인걸.”
“숨겨도 소용없으니까 말하겠지만…… 카도와키의 말대로 우리는
2학년이 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뭐, 사이좋은 것도 인정할게.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야.”
“그래……?”
“그래.”
마히루도 단호하게 부정했으니까,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도 슬프지
만 확실하게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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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해가 계속되면 마히루가 난처할 테고, 유타니까 그럴 걱


정은 없어도 괜히 오해해서 외부에 발설하면 곤란하다. 소문을 못 내
게 막아야겠지.
당당한 태도를 보였더니 마히루가 아마네의 옷을 잡고 쳐다봤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인데, 입을 열려고 하지 않으니까 일단은 가만
내버려 둔다.
유타는 아마네와 마히루의 분위기를 보고 이해했는지 어떤지, 어깨
를 슬쩍 으쓱했다.
“흐음……. 뭐, 상관없어. 이츠키가 말한 그대로 같으니까.”
“뭐가?”
이츠키가 뭔가 말했나 싶어서 저절로 눈에 힘을 줬지만, 유타가
“네가 걱정하는 그런 게 아니야.”라고 웃었다.
“아니, 잘 꾸미면 멋지다고 했잖아. 아주 근사한걸.”
“네가 말하면 놀리는 걸로 들려.”
학년에서 제일가는, 어쩌면 학교에서 제일가는 훈남에게 칭찬을 들
어도 쓴웃음만 나온다.
유타는 가만히 있어도 멋지고 바탕이 미남이라서, 아마네처럼 꾸며
야 겨우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나아지는 남자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질투하진 않지만, 이렇게 태어날 수만 있으면 인생이 조금 더 밝아질
것이다.
“놀리는 게 아니야. 다만 평소에도 이러면 좋을 텐데.”
“싫어. 매일 아침 세팅하는 게 귀찮아. 그리고 갑자기 이런 차림으
로 학교에 가면 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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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렇겠지만…… 시이나는 후지미야가 이렇게 변하는 걸 알았


던 거구나.”
“그건, 저기, 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히루를 유타가 가만히 바라본다.
의심하거나 평가하려는 시선이 아니다.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이
마히루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울까.
“그래. 왠지 알겠어.”
“뭘?”
“시이나도 참 고생이 많겠다고 말이야.”
그 말에 마히루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유타는 “시이나는 의외로 알
기 쉽구나.”라고 슬쩍 웃었다.
떠오르는 것은 희미한 웃음. 아주 조금 따스하고, 왠지 쓸쓸하게도
보이는, 선망이 드러난 표정이기도 했다.
“저기, 카도와키 씨.”
“응?”
“그게……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사, 사이
좋다거나…… 여러모로.”
그런 소리를 들으면 곤란하다고 비밀을 요청한 마히루에게, 유타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감추는 이유도 왠지 이해하고, 나
도 그 마음은 아니까. 게다가 퍼지지 말았으면 하는 일을 떠들고 다
니면서 즐기는 취미는 없고.”
이보다도 유타의 인품이 고마울 일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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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유타는 조금 공감하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남자들에게 질투를 살 때도 있을 테고, 반대로 사이좋
은 여자가 생겨서 그 아이가 피해를 보면 어쩔지 고민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까, 어쩌면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한 푸념일 수도 있
다.
설령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아마네처럼 수수한 사람이 겉으로
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상냥한 천사님과 친구라고 하면 반감이 생
기는 사람도 있겠지.
그러한 일을 생각해서 입을 다물어 주는 유타가 고마울 따름이다.
“미안해, 카도와키.”
“뭘. 뭐, 그게 보통이라고 생각하지만. 괜한 짓을 해서 후지미야와
관계가 끊기면 싫으니까. 모처럼 친해졌는데 말이야.”
상쾌하게 씩 웃는 유타를 보고 ‘이러니까 인기가 있겠지.’ 하고 절
실히 이해했다.
남자가 봐도 거만하지 않고 착한 사람이니까, 여자가 봐도 당연히
매력이 있겠지. 얼굴만이 아니라 속도 좋으니까, 남자로서는 조금 참
을 수가 없지만.
“아, 맞다. 후지미야.”
“응?”
“모레 또 보자.”
왠지 의미심장한 투로 언급한 날에는 이츠키와 유타와 셋이서 노래
방에 가기로 했다.
즉, 그때 사정을 더 말해 보라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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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마주치니 놀리듯 씩 웃었다. 이건 유타 나름의 신뢰에 기초


한 것일 테니까, 아마네는 왠지 속이 복잡하면서도 “그래.”라고 대
꾸했다.
그런 아마네와 유타를, 마히루는 조금 부러운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미안한걸.”
카도와키와 헤어져 귀갓길에 오른 아마네는 집과 가장 가까운 역에
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히루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그 밖에도 게임센터에서 작은 장난감을 뽑아서 만족스러운 눈치였
던 마히루는 갑자기 사과하는 것을 듣고 캐러멜 빛깔의 눈을 크게 깜
빡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죠?”
“그게…… 카도와키에게 들킨 거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게다가 결과는 잘 풀렸다고 생각해
요. 일단 이해해 주었으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가 아닌지 의심받아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유타는 납득했는지 그냥 물러나 주었지만, 역시 마히루가
강하게 부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무조건 안 들킨다고 생각해서 외출한 건 아니에요. 이런
사태도 고려했고, 카도와키 씨가 상대라서 다행으로 생각했어요.”
“그래. 카도와키는 어찌어찌 잘 이해하고 배려해 주었으니까. 정말
좋은 녀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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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에게 들켜서 다행이다.


나중에 추궁을 각오해야 하지만, 학교에서 유타에게 감추는 죄책감
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들켜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유타에게는 마히루에게 느끼는 아마네의 감정도 들킨 것 같지만,
마히루 본인에게 전해지지만 않으면 문제없겠지.
노래방에 가서 다소 놀릴지도 모르지만, 유타와 이츠키는 선을 지
킬 줄 알아서 너무 심하게 놀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네 군은…… 카도와키 씨를 매우 좋게 평가하네요.”
“응? 뭐 그렇지. 이야기할 기회가 늘어서 역시 좋은 녀석이라서 인
기가 있는 것도 이해가 돼. 얼굴도 마음도 훈남이니까 굉장한걸.”
“신뢰하는 거군요.”
“신뢰라고 할까…… 좋은 녀석이라고 봐.”
아마네 자신도 잘 알지만, 의외로 사귀는 상대를 가리는 성격이다.
사람이 별로면 다가가려고 하지 않고, 접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
는다.
유타가 좋은 인간임을 본능으로 어렴풋하게 느꼈으니까 들켰을 때
도 초조하지 않았고, 그게 정답이었다.
“그렇다면 유유상종이네요.”
“내가 어딜 봐서 같은 부류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네 군은 또 자기를 비하해요……. 카도와키 씨는 아마네 군의
인품이 좋아서 친해지려고 한 거잖아요? 아마네 군이 카도와키 씨를
보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아마네 군이 신뢰해도 좋다고 생각
한 카도와키 씨가 아마네 군을 인정한 거니까, 아마네 군도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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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딱 잘라 말하고 아마네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마히루는 당해낼 수가 없다고 할까, 자기 자신을 부정하자마
자 단호하게 긍정해 주는 마히루의 존재가 고마웠다.
자신감을 가지라고 잔소리 모드에 돌입한 마히루에게 어깨를 으쓱
하고 웃어 보인 다음,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히루는 언제나 나를 칭찬해 주는구나.”
“정당한 칭찬이에요. 아마네 군이 자신을 부정하기만 하는 게 나쁜
거예요.”
“버릇이라서.”
“참, 왜 그런 버릇이 생기는데요?”
마히루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왜냐고 물어봐도 대답하기 곤란하다. 아니다. 왜 그런지는 알고 있
다.
단순한 이야기다. 자빠지는 게 무서우니까.
인간은 학습한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자빠지기 싫으니까, 기대하기 싫으니까, 뒤통수를 맞기 싫으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이렇게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걸 마히루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자, 마히루는 맑고 고운 눈으로 아마네를 쳐다봤다. 속까지 전부
보는 듯한 눈에 속이 답답해졌을 때 마히루가 시선을 돌리고 아마네
의 팔에 기대듯 몸을 붙였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되지만요. 제가 당신을 긍정한다는 것
만은 기억해 주세요. 비굴해지면 못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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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응…….”
“여차하면 아마네 군이 제발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칭찬할 거예
요.”
“와, 무서운데. 그나저나 그건 정말로 하지 마.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걸.”
“그러면 더욱 자신감을 가져 주세요.”
마히루가 희미하게 웃고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가슴이 희미하게 뜨
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이 편안함을 망가뜨리기 싫어서, 손을
놓기 싫어서, 조용히 “고마워.”라고만 말하고 귀갓길을 걷는다.
손을 놓기 싫어도 집에 도착하면 뗄 수밖에 없으니까 일부러 천천
히 걷는 아마네를, 마히루는 아무 말 없이 똑같은 속도로 따라서 걸
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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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제10화 사정 청취

“자, 엊그제 있었던 일을 좀 말해 주실까.”


마히루와 외출하고 이틀.
이츠키와 유타와 셋이서 노래방에 가기로 약속한 날, 모여서 예약
한 방에 들어가자마자 유타가 웃으며 말했다.
유타의 추궁은 각오했지만, 역시 직접 들으니까 속이 거북하다.
참고로 이츠키는 유타에게 들은 듯 ‘아아, 들켰네.’ 같은 표정을 짓
고 있었다. 그러나 유쾌한 표정도 숨기지 않는다.
셀프 서비스로 챙긴 멜론 소다를 잠시 마시고 목을 축인 뒤, 하는
수 없이 입을 연다.
“딱히 대단한 관계는 아니야……. 이츠키와 치토세는 예상하지 못
한 일이 생겨서 알았지만, 나와 마히루는 서로 옆집에 살아. 이건 진
짜로 우연이야. 그리고 작은 일을 계기로 친해졌는데.”
치토세 때문에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숨겨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평소처럼 이름으로 말하면서 설명했다.
“친해져서 단둘이 외출했다고?”
“그래.”
객관적으로 보면 단순히 아는 사이로 넘어갈 수 없겠지. 좋게 보면
친구, 자칫하면 연인처럼 보일 수 있다.
아마네는 마히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부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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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카도와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후지미야가 말하는 사이와도 다른 것 같지만.”
“이봐.”
“친하다는 수준으론 넘어갈 수 없는데, 너희 상황은. 시이나가 매
일 밥을 차리러 오잖아.”
“어?”
폭탄을 떨어뜨린 이츠키를, 얼굴을 굳히면서 째려본다.
“이츠키.”
“언젠가 들킬 테니까 일찍 말하는 게 좋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갑자기 마히루가 직접 만든 요리를 매일 먹
고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간 무조건 착각할 것이다.
“출장 와이프……?”
“아니야. 혼자 자취하면서 사니까 식비를 반반씩 내고 2인분을 만
드는 게 편할 뿐이야.”
“그렇다는데?”
“설득력이 없어…….”
“카도와키 너마저…….”
마히루와는 절대로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유타가 황당하게 보니
까 왠지 자신감이 없어진다. 아니, 애초에 그런 자신감이 없지만.
“여자는 보통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고, 안
심할 수 없는 상대라면 남자의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아. 여자가 덮칠
생각이라면 또 모를까.”
왠지 미묘하게 경험을 섞어서 덧붙이는 바람에 유타가 여자에게 느
끼는 피해 의식이 얼마나 심한지 궁금해졌지만, 말 자체는 틀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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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으니까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여자, 특히 마히루는 경계심이 강해서 본인이 먼저 남자를 다가오
게 두지 않는다. 결과론에 가깝지만, 아마네가 다가간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의미로 특별하게 취급해 준다는 것은 아마네 자신도 잘
안다.
다만 남녀 관계의 의미로 좋아한다고 생각할 만큼 아마네는 자신에
게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히루가 너무 가까이서 순수하
게 신뢰해 주는 것도 다 남자로 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다.
“후지미야는 이상하게 자신감이 없고 고집이 심할 때가 있어…….”
“바로 그거야.”
이츠키와 유타가 나란히 어이없다는 눈으로 봐서 정말이지 속이 쓰
리다.
“그래서? 결국, 후지미야는 시이나를 좋아해?”
얼버무리듯 멜론 소다를 마시려는 타이밍에 유타가 불쑥 터무니없
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아마네는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왜 그렇잖아. 경계심이 강해 보이는 후지미야가 같이 있는 거니
까, 조금은 호감이 있나 싶어서. 그나저나 시선과 분위기가 좋아한다
고 말하는 것 같은데.”
“좋아하면 안 돼……?”
유타는 정말로 사람을 잘 본다고 씁쓸하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긍
정했더니, 왠지 모르게 유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흐음. 여러모로 고생이 심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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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딱히 마히루와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 전혀 모르는 눈치라서 더더욱 말이지. 이츠키도 지켜본 거
구나.”
“그렇지. 등짝을 걷어차고 싶어져.”
“이해해.”
“그런 걸로 서로 이해하지 마…….”
등짝을 걷어차고 싶어진다는 점에 동의하는 유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그렇잖아. 답답해. 좀 더 밀어붙였으면 싶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아니지. 시이나가 너한테 마음을 허락한 거잖아. 밀어붙이면 함락
할걸.”
“그야 마히루는 나를 어느 정도는 좋게 볼 테지만. ……그런 게 아
닐지도 모르잖아.”
이츠키는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겠지.
애초에 마히루가 친근하게 대한다는 것 자체는 아마네도 알고 있
다. 다른 남자들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까지는 인정하마.
하지만 그것을 남자로서 좋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자로서 좋아한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아는 상대로서 신뢰한다
는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넌 그 눈빛을 보고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내 몸에 무슨 매력이 있는데.”
그렇게 반론하자 이츠키가 등을 힘껏 때렸다.
“……아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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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린 건 미안하지만, 너는 진짜아아아 자신감이 없구나. 정작 중


요할 때 겁을 낸다고 할까, 도망치려고 드는데.”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버릇이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버릇을 고쳐야지. 자기 자신을 너무 부정하잖아.”
“그건 마히루한테 자주 듣는 말이야.”
“시이나도 참 고생이 많구나…….”
“보는 우리도 고생이 많을걸. 이 자식은 그런 점에서 꽉 막혔으니
까.”
“말이 많아.”
다 같이 모여서 말하면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
이것만큼은 성격이니까 어쩔 수 없고, 고치려고 해도 쉽게 고쳐지
는 게 아니다. 지긋지긋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잊으려고
해도 아직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로 겁이 많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뭐, 나는 아마네가 그래도 좋다면 강요할 수 없지만. 시이나가 좋
아서 사귀고 싶으면 더 밀어붙여.”
“내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겁쟁이 자식.”
“시끄러워.”
“워워. 하지만 후지미야는 자신감을 더 키워야 할 것 같아. 정말이
지, 학교에서도 엊그제처럼 꾸미면 인기가 있을 텐데. 연습해 볼
래?”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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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앞에서도 할 수 있고, 내 앞에서도 괜찮다면 친한 사람 앞


에서도 조금씩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모처럼 휴일에 놀러 왔으니
까, 어때?”
“즉……?”
“자, 여기에 왁스가 있습니다.”
슥. 가방 안에서 남자의 화장 세트가 나온다.
유타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시원하게 웃는다. 역시나 왕자님답게
멋진 미소지만, 오한이 들었다.
“어때?”
“아니, 사양할래.”
“자, 사양하지 말고.”
“잠깐만. 그러지 말고 노래나 부르자. 여긴 노래방이니까, 안 그
래?”
“그러지. 그러면 내가 노래할 테니까 이츠키, 맡기마.”
“나한테 맡겨.”
“지금 농담하는 거지……?”
조심스럽게 물어봐도 상쾌하게 웃기만 한다.
“뭐,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아마네는 슬슬 남들 눈에 익숙해
지는 게 좋을 테니까 과격하게 개선해 보자.”
“자, 인마…… 으악!”
이츠키가 빗과 왁스를 들고 씩 웃어서 아마네는 뒷걸음질 치려고
했지만, 노래방에서 도망칠 공간이 있을 리가 없다.
유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노래할 준비를 하는 동안에, 아마네는
이츠키에게 머리를 농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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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어서 오세, 요……?”


집에 오자 마히루가 의문형으로 맞이해 주었다.
오늘은 햄버그라서 소스부터 부지런히 만들어야 한다는 듯 아마네
의 집에 먼저 온 듯하다.
이제 밥이 거의 다 됐다고 메시지가 와서 집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
지만, 마히루의 얼굴을 직접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다녀왔어…….”
“왜 그렇게 지쳤죠……?”
“이츠키가 나를 가지고 놀아서…….”
이츠키는 소문이 난 그 남자의 스타일을 본 적이 없어서 본인이 멋
지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세팅했는데, 역시 눈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 당혹스러웠다.
더군다나 노래방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겸사겸사 아마네에게 없을
유형의 옷을 파는 가게로 연행당하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하면서 어울리는 옷을 찾는 일로 발전한 것이다.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남자판 옷 갈아입히는 인형이 되
는 바람에 제법 피곤하다.
“하, 하아. 큰일이었겠네요.”
“그 자식들…… 나를 장난감처럼 다루고 말이야…….”
“고생이 많아요.”
말처럼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꿰뚫어 봤는지, 마히루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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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내를 간파당해서 왠지 낯부끄러운 느낌이 들면서, 새로 산 옷이


있는 봉지를 방에 던지고 세면장에 가서 손을 씻었다.
마히루는 저녁 식사를 담으러 주방에 돌아가서 아마네도 손을 잘
씻고 가글을 마친 뒤 거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마히루가 햄버그를 담
은 접시를 식탁에 두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왠지 미안하니까 평소처럼 주방에 가서 밥을 푸
자.
햄버그에 밥을 조합하는 주의인 아마네는 갓 지은 밥에서 뭐라 형
용할 수 없이 달달한 냄새가 나서 표정이 풀어졌다.
“그나저나 피곤하네……. 그나저나 걔들도 참 대단하다고 새삼 느
꼈어.”
“뭐가요?”
미리 만든 샐러드와 포타주도 내서 자리에 앉아 투덜댔더니 정면에
앉은 마히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있지. 셋이서 걷는데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걸더라고. 역시 평
소에 인기가 많은 남자들은 다르구나 싶어서. 거절하는 것도 잘하고,
경험이 달라.”
노래방을 나와서 쇼핑 투어를 할 때도 여대생쯤으로 보이는 여자들
이 말을 거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야 타입은 달라도 이츠키와 유타는 모두 얼굴이 잘생겼으니까 여
자들 눈에 띄기 쉽겠지. 이른바 역헌팅이라는 것도 당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당연히 전부 거절했지만.
이츠키에게는 사랑하는 치토세가 있고, 왕자님은 강하게 들이대는
여자가 질색인 듯 웃으면서 몹시 경계했기 때문에 곧바로 거부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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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를 밝혔다.
거절하는 수단도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게 말과 태도가
모두 부드러워서, 딱히 옥신각신하는 일 없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
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아마네 혼자서는 대
처하기 어려우니까 익숙하다는 것이 그만큼 위대함을 알 수 있었다.
“또 아마네 군한테 말을 걸었나요……?”
“그렇긴 해도, 나는 덤이겠지.”
굳이 말하자면 아마네보다 다른 두 사람이 목적이고, 아마네는 어
디까지나 덤으로 봤다. 애초에 자신도 아는 사실이지만 인상이 나빠
서 잘 모르는 사람은 말을 걸기 어렵다.
마히루와 외출했을 때는 어쩌다가 말을 거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특출한 미남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두 사람을 제치고 아마
네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쓴웃음을 지었는데, 왠지 마히루가 뚱하게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자기평가가 낮다고 말하고 싶어?”
“그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에요.”
“그럼 어떤 건데.”
“몰라도 돼요…….”
고개를 홱 돌리고 먼저 “잘 먹겠습니다.”라고 손을 맞대는 마히루
의 태도에 당황하면서, 아마네도 뒤따르듯 손을 맞대고 마히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셋이서 노래방에 간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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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는 평소처럼 아마네의 집을 방문했다.


요새는 휴일에 아마네의 집에 있을 때가 많다. 골든위크가 시작되
고 거의 매일 집에 있었다. 하루 내내 있지는 않더라도 저녁 무렵에
는 식사를 차리러 오고, 아마네는 좋아하는 여자애가 곁에 있으면 당
연히 기쁘니까 마히루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뒀다.
마히루는 옆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스마트폰을 만지
는 것은 당연하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왠지 열심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것은 사생활 침해 행위
이고 예의에 어긋난 짓이니까 하지 않지만, 스마트폰을 연락용이나
조사용으로만 쓰는 마히루가 열심히 화면을 본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뭘 보고 있어?”
물어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물어보니, 어째서인
지 마히루가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아마네를 보고 왠지 거북한 눈치로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잘 몰라서 아마네는 의문이 들지만, 마
히루는 그런 아마네의 시선을 피했다.
이건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 보이는 태도겠지.
“뭘 숨기고 있어……?”
“수, 숨기는 건…… 저기, 화내지 않을 건가요?”
“내가 화날 짓을 한 거야?”
아마네는 원래 표정이 묘하게 언짢아 보인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
데, 화내는 일은 별로 없다. 애초에 마히루를 상대로 정말로 화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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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일은 없다. 성격으로 봐서 아마네가 마히루의 성질을 건드릴 리가 없


고,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황당함을 섞어서 조금 짜증을
내는 걸로 그치겠지.
“어쩌면 화낼지도 몰라요…….”
“흐응. 아무튼 말해 봐.”
“저기…… 시호코 씨가…… 아마네 군의 옛날 사진을.”
“우리 어머니는 바보야?”
어머니에게는 왜 마히루에게 사진을 보냈는지 따지고 싶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야 사진을 보낼 결심을 하는 걸까.
“이, 이건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시호코 씨와 이야기하다가 우연
히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와서…… 작은 아마네 군은 참 귀여웠겠다
고 말했더니…… 그게, 이런저런 사진을…….”
“잠깐만. 그거 확인해 볼게. 위험한 건 보내지 않았겠지?”
옛날 사진이라면 아마네의 기억에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기억에
있어도 개중에는 남에게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실수를 찍은 사진
도 있으니까, 본래라면 마히루에게 보내기 전에 본인이 검열해야 하
겠지.
뭘 보냈냐고 시선으로 물어보니 마히루가 또 눈을 피했다. 그 반응
으로 봐서 아마네에게 부끄러운 사진임을 눈치채고, 아마네는 마히
루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래도 마히루의 스마트폰을 강탈하는 것은 신사답지 않아서, 마히
루가 항복하고 자백할 때까지 추궁하기로 했다.
“마히루 씨, 순순히 내게 보여주는 것과 계속 내가 추궁하는 것, 뭐
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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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한쪽 무릎을 대고 심각한 얼굴로 마히루의 뒤에 있는 소파


등받이를 짚고서 얼굴을 조금 들이댄다. 이렇게 하면 도망칠 데가 없
으니까 찬찬히 추궁할 수 있겠지.
마히루는 도망칠 데가 없어져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줄 알
았는데,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더욱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여전히
말할 생각이 없는지 무릎 위에 올린 쿠션을 꼭 끌어안고 작게 신음하
고 있다.
그토록 위험한 사진인가……. 그런 위기감이 들어서 마히루의 눈을
똑바로 보는데, 마히루는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쿠션
을 아마네의 얼굴에 대고 밀어내려고 하니까, 어째서 이토록 저항하
는지 몰라서 쿠션을 잡고 던졌다.
별로 세게 붙잡고 있지는 않았는지 손쉽게 아마네의 손에 넘어간
쿠션이 곧바로 바닥을 힘없이 구른다.
몸을 굳힌 마히루에게 “순순히 실토해.”라고 속삭이면서 볼을 꼬집
으려는 순간, 무슨 생각인지 마히루가 소파에서 몸을 확 자빠뜨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마네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
고 마히루가 소파 등받이를 짚은 손에 부딪히듯이 움직이는 바람에
몸에서 균형을 잃고 그대로 소파 위에 넘어졌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한 손이 마히루의 얼굴 옆에 있는 공간에 닿
아서 깔아뭉개는 일은 회피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마히루와 밀착
했다.
서로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바람에 몸을 굳혔다.
몸은 밀착하지 않았어도 얼굴은 입김에 닿을 만큼 가깝다. 동그랗
게 뜬 캐러멜 빛깔의 눈에서 긴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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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다.
조금만 얼굴이 가까워지면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마히루만의 독
특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서,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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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는데, 먼저 마히루가 움직였다.


불그스름한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충격에 대비하는 듯, 불안한 듯, 그리고 무언가가 찾아오기를 기다
리는 듯한 표정에 무의식중에 시선이 빨려든다.
희미하게 물든 뺨과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가녀린 숨결, 달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은 순수함과 동시에 색기를 자아낸다. 모순적
인 인상이 양립하는 마히루는 그저 조용히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보호 욕구와 지배 욕구를 자극하는 그 모습에 무심코 손을 뻗어서
── 볼을 잡았다.
“흐헤.”
“얼굴이 웃겨.”
조금 웃음을 섞어서 중얼거리자 눈을 번쩍 뜬 마히루가 단숨에 얼
굴을 확 붉힌다. 아까 같은 수치심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분노가 반
반씩 섞였다.
“자빠뜨린 것도 모자라 여자의 얼굴을 만지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요?”
조금 울상을 짓고 째려보는 바람에 아마네는 슬쩍 쓴웃음을 지었
다.
“그걸 솔직히 미안해. 네가 날뛸 줄은 몰랐어.”
“나, 날뛰다뇨. 말이 심하네요. 그건 저기, 아마네 군이 압박해서
그래요!”
“마히루가 나 몰래 어머니에게 사진을 받아서 은폐하려고 드니까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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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으으.”
이렇게 말하면 마히루가 반론하지 못한다고 아니까, 아마네는 슬쩍
웃고 마히루의 위에서 물러났다.
몸이 뒤로 넘어간 마히루의 등과 소파 사이에 손을 넣어서 일으키
자, 마히루는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면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내가 내 사진을 검사하면 안 될까?”
“멋대로 보세요…….”
체념했는지 미묘하게 토라진 투로 시호코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채
팅 페이지의 사진 일람을 보여주는 마히루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다.
그걸 지적했다간 다음에는 집에서 뛰쳐나갈 것 같아서 꾹 참고, 아
마네는 마히루에게 보이지는 않는 각도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
(깜짝 놀랐네…….)
마히루에게 들키지 않고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은 지금도 폭음을
낼 기세로 쿵쿵 뛰고 있다.
그래도 장난을 치지 않았더라면, 거부할 기색이 없었던 마히루에게
자신은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아마네 자신도 그걸 잘 아니까, 수치심과 죄책감이 복잡하게 뒤엉
켰다.
(하마터면 최악의 남자가 될 뻔했어.)
사고는 사고고, 그 사고에 이르는 과정에서 피차 반성할 점이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마히루에게 연인끼리만 하는 신체 접촉을 해
도 되는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된다.
멋대로 키스라도 했다간 마히루가 울 것이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
니까 그럴 권리는 없고, 그랬다간 마히루가 자신과 멀어질 거라는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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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신이 있다.
상대의 뜻을 무시하고 감정과 욕구를 강요하면 그냥 자기밖에 모르
는 인간이다. 아마네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아마네 군은…… 확인하고 싶다면서 정작 볼 생각은 없나 보네
요?”
딱 봐도 아까보다 언짢은 투로 부르는 바람에 허둥지둥 마히루를
봤더니, 마히루는 그제야 다소 색깔이 차분해진 볼을 부풀리고 있었
다.
“미안해.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바보.”
평소보다 직설적으로, 또한 귀엽게 들리는 말로 매도하는 마히루.
이건 어설프게 대답했다간 오래갈 것 같다고 깨닫고, 아마네는 서둘
러 스마트폰에 시선을 줬다.
사진 일람에는 아마네의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사진이 있었다. 얼
핏 봐서는 창피한 사진이 없어서 안심했지만, 지금의 아마네를 봐서
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순진함을 사방에 드러내며 웃는 사진이 있어
서 몹시 부끄럽다.
다른 의미로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서 끓어오르는 수치심에서 눈
을 돌리려고 마히루를 힐끗 봤더니, 더는 언짢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 대신 뭔가 넋이 나간 듯,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여기가 아닌 다
른 어딘가를 보는 눈빛으로 입가를 만지고 있어서, 아마네는 왠지 보
면 안 되는 것을 본 기분으로 황급히 스마트폰을 다시 봤다.
아까처럼 심장이 쿵쿵 뛰는 사실을, 마음과 눈 모두 외면하려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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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제11화 당신 말고는

“그러고 보니…… 아마네 군은 어머니의 날5)에 뭔가 선물할 건가


요?”
함께 TV를 시청하다가 어머니의 날 특집 제목이 달린 방송을 본 마
히루가 문득 떠올린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기본적으로 부모님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봐서 슬쩍
채널을 돌리려고 했던 아마네는 마히루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
어서 조금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그래도 고향 집에 작은 선물과 꽃을 부치는 정도
지만.”
다소 귀찮아도 소중한 어머니이고, 물론 가족으로서도 좋아하니까
평소의 고마움을 전할 필요가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고향 집을 떠나
서 직접 말하러 갈 수도 없다.
“뭐, 떨어져 지내니까 이런 거지. 가까이 살았으면 조금 더 다른 방
법이 있었겠지만.”
“집안일을 도운다든지요?”
“내가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거리가 늘어나지만.”
마히루의 덕분에 다소 실력이 늘었고 혼자 자취하는 데는 크게 지
장이 없을 만큼 성장했으니까 도울 수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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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다만 부모님처럼 잘하는 건 아니므로, 결국 다시 하는 꼴이 될 것


같지만.
“하긴 그렇겠네요.”
“그걸 긍정하면 마음이 복잡해지는데…….”
“하지만…… 아마네 군도 불편하지 않게 살 정도로는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됐잖아요? 그야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지만요.”
“평가가 신랄하네. 그 말이 맞지만.”
“후후. 아마네 군은 아직 멀었어요.”
“암, 그렇죠. 마히루 선생님은 못 이깁니다.”
“아이참.”
집안일은 지금의 마히루를 평생 못 이길 것 같다.
마히루는 아마네의 말투를 듣고 한심하다는 듯이 웃으며 팔뚝을 찰
싹 때리는데,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불만을 더 말하지 않았다.
“시호코 씨와 슈토 씨는 집안일도 못 하는 아마네 군을 잘도 자취
하게 했네요.”
아마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생각한 바를 말한 거겠지.
딱히 뭐라고 말한 적도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예전의 아마네는
이츠키가 질려서 걱정할 만큼 생활력이 없었고, 그 실태를 가장 잘
아는 마히루가 의문을 말하는 것도 당연한 흐름이다.
아마네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은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던데? 나는 정말로 생활력도 없고
한심한 인간이었으니까.”
“아마네 군도 용케 혼자 자취하려고 결심했네요.”
“응. 사정이 있어서 고향에 있기 싫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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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너무 심각하게 말하면 마히루가 의식할 것 같으니까 아무렇지도 않


게, 어디까지나 부담이 안 생기게 고백하자 마히루가 움직임을 멈췄
다.
캐러멜 빛깔을 띤 눈에 금방 후회가 슬쩍 드러나기 시작하니까, 민
감한 것도 참 곤란하다. 그런 얼굴을 보려고 한 게 아닌데, 남들보다
상처에 훨씬 민감한 마히루는 아마네가 속에 안고 있는 사정을 조금
눈치챈 것이리라.
괜히 드러냈다고 후회하면서, 곧바로 눈꼬리가 처지는 마히루의 머
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 걱정하지 마. 그렇게 부담을 느끼면 내가 미안해. 딱히 심각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니거든. 단순하게 고향에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타지로 나선 거니까.”
실제로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저 믿었던 것이 근본부터 무너졌
을 뿐이다.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피해가 없고 그들과의 관계도 끊긴 지금은 과
거에 생긴 상처가 욱신거리는 정도로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다. 마히
루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마히루는 우울한 표정을 지어서, 아마네는 이걸 어쩌나
싶어서 아주 난처했다.
“정말로 괜찮거든? 지금도 힘들면 고향에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아.
나에게는 과거의 일이야.”
“거짓말쟁이…….”
“저기, 거짓말쟁이라니.”
“전부 받아들였으면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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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렇게 말하고 아마네의 뺨에 손을 내민 마히루는 조금 떨고 있었


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눈을 내리뜬 마히루의 눈동자에는
비치지 않는다. 그저 마히루가 하는 말로 봐서는 밝은 얼굴이 아니겠
지.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돼요……. 그래도 아마네 군이 힘들어
하면, 보고 있기가 힘들어요.”
“그런 게 아니야. 대단한 이야기도, 재밌는 이야기도 아닌걸?”
그래도 걱정하냐고 조용히 묻자, 마히루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히루의 반응을 보고 아마네는 뺨을 긁으면서 이걸 어쩌나 싶어
한숨을 슬쩍 흘렸다.
“음……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뭐, 왜 고향을 떠났는지, 그것부
터 말해야 할까.”
“네…….”
“친구와…… 올바르게 말하자면, 내가 일방적으로 친구라고 생각했
던 상대와 거리를 두고 싶어서야.”
딱히 대단한 계기는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사소한 일을 신경 쓴
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의 기억은 아마네에게 깊이 새겨져 있다.
“뭐라고 할까. 나는 환경이 좋았어.”
갑작스럽게 화제가 바뀌어서 마히루가 조금 의아한 기색이지만, 이
것도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이해했는지 조용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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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껴 주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이 있었고, 금


전적으로도 유복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게 해 주었어.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 준다는 것을 나도 알았어.”
특히 부모님은 외동아들인 아마네를 끔찍하게 아껴 주었고, 아마네
의 개성과 의견을 존중하면서 키워 주었다.
“그래도 당시의 나는 무척 행복한 환경인 것도 잘 몰랐고, 사람도
잘 의심하지 않았지. 주위에 온통 좋은 사람들만 있고, 귀여움을 받
으면서 자랐으니까. 더 순진하고, 쉽게 말하자면 단순한 아이였어.”
지금이야 이렇게 삐뚤어졌지만, 그 사건이 있기 전의 아마네는 현
재로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순진하고 발랄한, 아이다운 아이였다.
“그 단순함은…… 속이기도 쉽고, 이용해 먹기도 쉬웠겠지.”
그렇기에 이용당할 빈틈도 아주 많았다.
“중학교 중반에 새롭게 사귄 친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
만, 새롭게 친해진 인간들이 쉽게 말하자면 봉이라고 할까, 돈줄로
봤다고 할까. 집안이 좋으면 편의를 봐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이니
까.”
말하고 보면 한심하지만, 당시의 아마네는 정말 순진하고 단순했
다. 속기 쉽다고 해도 좋다. 인간의 선한 부분을 믿으며 살았고, 그
때까지 아마네를 이용하려고 든 인간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 사고방
식에 박차를 가했다.
단번에 표정을 굳힌 마히루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그야 나도 그만
큼 멍청하진 않았으니까 돈을 준 적은 없지만.” 하고 웃었는데, 마히
루의 표정은 더욱 딱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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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뭐랄까, 뒤에서 이래저래 떠드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거


든. 얼굴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아주 심하게 말하더라고. 이용하기
만 하는 거지 처음부터 얄미웠고 역겨웠다고 말하는 것도 들어서 충
격을 받고 한동안 끙끙 앓았던 거야.”
용모나 성격의 취향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텐데, 아마네에게 이용 가치가 있어서 친한 척하고, 뒤에서는 험
담하고 있었다. 그걸 견딜 수 없었다.
지금은 마히루에게 순화해서 말하고 있지만, 정말이지 입 밖에 꺼
낼 수 없을 만큼 심한 모욕을 받아서 더더욱 괴로웠다. 현재는 그렇
게 헐뜯든 말든 한 귀로 흘리겠지만, 당시 순진하고 섬세했던 아마네
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인간들만 있는 건 아니라고 알아. 그리고 내 인품이 좋
아서 친구로 있었던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 그래도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까 무서웠어. 믿을 수가 없었어.”
한동안 방에 틀어박히고, 울기도 했다.
부모님에게 위로를 받아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지만, 역시 그들과
접하는 게 무서워서, 피하고, 피하고, 피하다가──.
“그래서 나는 고향을 떠났어. 나를 모르는 땅에서 새롭게 시작하려
고. 더는 그 사람들 때문에 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혼자 살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그보다도 마음의 평화를 선택했다.
그 덕분에 옛날처럼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인
지 시간을 들여 확인한 뒤에야 겨우 친구가 두 명 생긴, 사교성이 없
고 의심이 많은 남자로 자랐다. 좋은 나쁘든 방어적인 된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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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본인도 쓴웃음밖에 안 나오지만, 이것만큼은 이미 몸에 밴 습


성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
이야기를 마친 아마네 앞에서, 마히루는 몸을 바르르 떨고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것은 틀림없는 분노라서, 온화
한 마히루가 이토록 화내는 모습이 혼란스럽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서 화낸다는 사실 자체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당혹감과 아주 작은 기
쁨을 느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천박한 사람의 뺨을 때렸을 거예요.”
“마히루가 손을 다치니까 안 돼. 나를 위해서 상상 속에서라도 실
수하면 안 돼.”
마히루가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그들에게 그런 가치는 없고, 아마네도 그들을 이미 아무래도 좋은
존재라고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다. 애초에 마히루가 그들을 보게 하
는 것 자체가 아깝다.
하얗게 질릴 만큼 꼭 쥔 손을 슬쩍 풀어 주자, 마히루의 분노가 조
금 가시고 그 대신에 비통한 기색이 드러났다.
아마네의 일로 상심할 만큼 마히루는 마음씨가 곱지만, 이미 지나
간 일이니까 너무 슬퍼해도 곤란하다.
“마히루처럼 정말로 괴로운 것도 아니니까,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돼.”
“아마네 군, 그것과 비교할 게 아니에요. 비교하게 하고 싶지도 않
아요.”
딱 잘라 말하는 것을 듣고, 이건 마히루에게 못 할 소리를 했다고
눈꼬리를 내리니 마히루가 아마네를 보고 고요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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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두겠지만, 비교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당신의 슬


픔은 당신만의 슬픔이니까 저에겐 없는 것이고, 제 슬픔과 비교해서
좋을 게 아니에요. 그런 데 우열은 없어요. 진정한 의미로 아마네 군
의 슬픔을 이해할 수는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
“저는 당신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받쳐 주는 일밖에 할 수
없어요. 아마네 군이 그렇게 해 준 것처럼…… 저도 아마네 군을 받
치고 싶고, 아마네 군이 저를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아마네의 두 뺨에 손을 댄 마히루에게, 자연스
럽게 가슴속과 눈시울이 확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의지하는데 말이지…….”
“정신적인 의미에서, 말이에요.”
“언제든지 의지하고 있어.”
“그렇다면…… 더.”
“내 투정을 받아주지 마.”
“받아줄 거예요. 얼마든지.”
“인간적으로 타락할 거 같잖아.”
“지금 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요. 아마네 군이 한심한 사람인 건 예
전부터 알았는데요.”
은근슬쩍 신랄하게,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는 바람에
무심코 입가에 힘이 들어갔지만, 마히루는 한심하다고 말하는 것과
는 정반대로 사랑을 베풀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마네를 봤다.
“하지만…… 무척, 무척 좋은 사람인 것도, 잘 참는 것도, 알아요.
저한테는 응석을 부려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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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상냥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은은하게 속삭여서, 아마네가


유지하고 있는 초라한 제방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터지면 마히루에게 한없이 매달릴 것 같아서 무섭다.
진심으로 반한 여자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응석을 부렸다간 그
감미로움 탓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다.
그대로 참지 못하고 조금씩 마히루를 요구할 위험이 있다.
자제심을 위해서 고개를 천천히 젓고 “괜찮아.”라고 대답하자, 마
히루는 눈을 깜빡인 다음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마히루 군은 너무 멋을 부려요. 바보예요…….”
이번에는 어이없다는 투로 귀엽게 매도한 마히루는 아마네의 뺨을
만지던 두 손을 뒤로 돌려서 머리를 감싼다.
그리고 쭉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일에 반응하지 못한 아마네가 마히루에게 이끌리듯 가
슴에 얼굴을 파묻자 몸이 알기 쉽게 경직했다.
완전히 얼굴이 파묻힐 곳에 끌어당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히
루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곳에 아마네의 얼굴이 있다. 당연히 부드럽
고, 우유와 잘 모를 꽃향기에 풋사과처럼 청초한 향기를 조금 가미한
듯한 마히루만의 독특하고도 그윽한 향기를 더더욱 가슴 가득히 마
시는 바람에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자꾸 따지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여 주세요.”
“너무 강제적이네…….”
복잡하게 뒤엉킨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쥐어짠 말은 애교고 뭐고 없
었지만, 마히루는 그 대답이 재밌다는 듯이 웃고 몸을 들썩였다.
“이제야 알았나요? 여자는 때때로 억지를 쓰는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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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게 속삭인 마히루는 아마네가 혼란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부드


럽게,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아마네의 등을 감쌌다.
물론 여자의 힘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뿌리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달콤한 향기와 마히루의 온기, 기분이 좋아지는 푸근함과 아마네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고동이 저항할 힘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저는 빚을 지면 꼭 갚는 성격이에요.”
안 된다고 알면서도 이 온기와 푸근함에 몸을 맡기고 싶어지는 아
마네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는 예전에 아마네 군을 의지했어요. 당신에게 응석을 부렸어요.
이번엔 제가 해 줄 차례거든요? 응석을 부려 주세요. 소소한 보답이
에요.”
“거스름돈이 생길 텐데…….”
“그럼 남은 건 빚으로 남겨요. 언젠가 제가 또 기운이 없을 때 손을
내밀어 주면 되거든요?”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렇게 장난기가 듬뿍 담긴 목소리에 아마네
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마히루에게 몸을 맡겼다.
정말로 아주 작은 저항으로, 그리고 아마네의 심장을 보호하기 위
해서, 팔로 마히루의 등을 감싸고 얼굴을 가슴이 아닌 쇄골과 목 언
저리로 피신해서 매달린다.
마히루는 그런 아마네를 보고 즐겁게 웃은 뒤, 아마네의 몸을 꼭 끌
어안았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


시간으로 보면 몇십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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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시간으로는 더 오랫동안 마히루에게 매달렸던 아마네는 고개


를 들고 몸을 뗀 다음 마히루에게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화내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과 마히루의 무방비함을 경계해서 목소
리에 가시가 돋쳤는데, 마히루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미소를 지었
다.
“저도 아마네 군이 우울해하면 싫으니까 다음부턴 더 빨리 응석을
부려 주세요.”
“그건 좀…….”
존재감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기복을 슬쩍 보고 시선을 돌렸다.
이런 식으로 응석을 받아준다면 되도록 사양하고 싶다. 이성으로
제동을 걸고 있지만, 또 그랬다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마히루 본인은 아마네를 신뢰하고, 이렇게 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는 이유로 그랬을 테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하기에는 조금 충격
적이다.
그 덕분에 가슴속의 아픔은 가라앉았지만, 아픔이 진정되면서 새로
이 심장이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눈을 돌려요?”
“그런 식으로 받아주면, 곤란해. 저기, 나도 남자니까.”
“그건 아는데요.”
“모르니까 말하는 거야. 거참.”
이걸 기회로 보고 멋대로 얼굴을 파묻고 문지르면 어쩔 거냐고 마
히루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마히루는 더 경계해야 하고, 아마네
에게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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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좋아하는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유혹을 당했다간 참


을 자신이 없었다.
한 번 신뢰하면 뭐든지 용서할지 모른다고 한숨을 쉬자 마히루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네 군은 아무것도 몰라요.”
“뭘?”
“뭐든지, 말이에요. 바보.”
또 귀엽게 매도한 마히루는 화가 나서 툴툴거리는 기색으로 소파에
서 일어섰다.
마히루가 화내는 기준을 몰라서 곤혹스러운 아마네를 방치하고, 마
히루는 주방으로 가려고 뒤돌아섰다.
가냘프고 약해 보이지만, 아마네를 받쳐 준 마히루의 뒷모습을 멍
하니 바라본다.
본인이 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작게 “아마네 군은 바보예
요.”라고 툴툴거리며 매도하는 말이 계속되어서, 아마네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으면서 그 뒷모습을 배웅하려고 하는데──.

“제가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귀가 듣고 말았다.


숨이 막힌다.
무슨 소리를 했는지 한순간 이해하기를 거부할 만큼, 아마네에게는
충격이 컸다.
“헉.”하고 숨을 짧게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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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강한 충동이, 끓어오르는 감정이,


아마네를 일으켜 작은 등에 손을 뻗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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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마히루…….”
“왜……요?”
뒤돌아보기 전에 그 가냘픈 등을 감추듯이 아마네를 감싸자 마히루
가 깜짝 놀란 소리를 냈다.
팔과 몸으로 감싼 채 마히루와 밀착하듯이 꼭 끌어안자 가녀린 몸
이 떨린다.
그러나 거부감이나 혐오감은 없고, 그저 놀라움과 당혹감이 몸을
흔드는 것을 알았다.
작지만 의지할 수 있는, 의지하고 마는, 매달리고 마는 몸을 감싼
아마네는 마히루가 뒤돌아보지 않게 머리 위에 턱을 올렸다.
“정면에서는 괜찮으면서, 뒤에서는 놀라는 거구나…….”
“누구든 갑자기 그러면 놀라요!”
“네가 응석을 부려도 된다고 했잖아. 뭐, 이렇게 될 줄 알아서 사양
한 거지만. ……나도 심장이 위험하고.”
원래는 이런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조금 토라진 마히루를
뒤에서 배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애정이 끓어올라서, 하지만 부끄러워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멋대로, 몸이 마히루를 원하고 말았
다.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은 몸을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다.
마히루는 어떻게든 뒤돌아보려고 했지만, 아마네가 조용히 “돌아보
지 마.”라고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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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바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그 말을 부


정할 만큼 아마네는 똑똑하지 않으니까 달게 받아들인다.
(바보가 맞아……. 정말이지.)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을 때 매달리고, 나아가 빈틈을 노렸으니까,
엄청난 바보일 것이다.
마히루가 거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기를 독차지하려고 한다. 오
늘 마히루가 아마네를 받아들이려고 끌어안은 것처럼, 예전에 아마
네가 마히루의 등에 얼굴을 묻었을 때처럼, 아마네도 마히루의 머리
위에 턱을 대고 마히루의 온기를 느낀다.
“예전의 내 심정을 알겠어?”
“아, 알겠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동요한 탓이리라.
귀가 빨간 것을 보면, 여기서는 안 보여도 얼굴도 똑같이 빨갈 것이
다. 그때 마히루의 상황과 다른 것은 아마네는 이렇게 하면 마히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렴풋이 알고서, 받아들여 줄 거라고 알면서 응
석을 부린다는 점이다.
“있잖아……. 딱히 상처에서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제법 뻔
뻔하니까, 정말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이렇게 매달리는 것도, 단
순히 마음씨 착한 너의 빈틈을 노리는 거야.”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알면서 하는 거니까, 아마네 자신도 참 질이
나쁘다고 이해하고 있다.
마히루는 조용히 아마네의 말을 듣고, 이어서 슬며시 한숨을 쉬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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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렇게 해서 아마네 군이 만족한다면, 마음이 치유된다면, 저는


거부하지 않아요.”
움츠러들고 얌전히 있던 손을 지금 마히루를 붙잡은 팔에 뻗고, 슬
며시 부드럽게 만진다.
뿌리치거나 때리지도 않고, 그저 맞대듯이 손을 대고 다정하게 만
져 주니까, 아마네는 너무 까불지 말라는 듯이 자신에게 경고하면서
마히루의 머리에 다시 턱을 툭 댔다.
“나는 치사한 자식이야. 받아들여 준다고 알면서 너한테 기대고 있
어.”
“무슨 소리를 하나요. 아마네 군이 치사한 건 항상 그런데.”
“그건 왠지 다른 일도 섞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명확하게 자신이 비겁함을 잘 알지만, 마히루가 말하는
치사함이란 아마네가 잘 모르는 무언가 같다.
“그래요. 알면 고쳐 주세요. 심장이 위험해요!”
“나는 짚이는 구석이 없는걸.”
모르는 건 모르는 거라고 대꾸하자 마히루가 “끙끙.” 귀여운 소리
를 내고, 이어서 아마네의 항의하듯이 아마네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
다.
아프지도 않게 장난치듯 건드리니까 귀여워서 조용히 웃었다.
“미안해, 치사해서.”
“기왕 치사할 거면, 더 치사해지면 좋을 텐데요…….”
“아까 한 말과 모순되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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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마히루를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본인이 뭔가 생각한 바가 있다면 아


마네는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마히루가 본 아마네가 치사하다면, 치사한 거겠지. 더 치사해지라
고 해도 잘 모르겠으니까 부응해 줄 수는 없지만.
“저도 치사하니까, 불평할 자격은 없지만요.”
“마히루의 어디가 치사한데?”
“어딜까요?”
마히루가 몸을 살짝 떨었다. 아마도 웃은 거겠지.
“제가 왜 치사한지 모르는 동안에는, 아마네 군도 아직 멀었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오늘 가장 즐거운 듯이 웃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진난만하게 소리 내어 웃은 마히루는 품에서 미끄러지듯이 슬며
시 빠져나와서 아마네를 돌아봤다.
그때 지은 표정은 생기가 넘치고, 짓궂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보
는 사람을 매료할 만큼 귀엽고 아름다운 미소라서, 아마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아마네를 보고 만족한 듯 마히루는 평소처럼 웃고 기분 좋게
주방으로 가서, 아마네는 마히루가 주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그대
로 소파에 쓰러지듯이 털썩 앉았다.
(마히루 너도 엄청나게 바보야……. 이 바보.)
저렇게 웃어서 아마네의 심장을 어쩌려는 건지 따지고 싶지만, 지
금 마히루의 얼굴을 보면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자
리에서 조용히 끙끙댈 수밖에 없다.
가슴속은 이제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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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제12화 부모님의 걱정과 과거의 아픔

“어머니…… 멋대로 마히루에게 사진을 보내지 마.”


골든위크 마지막 날, 아마네는 어머니 시호코에게 연락했다.
일단 어머니의 날을 앞두고 집에 있는지를 물어볼 작정이었는데,
그보다도 마히루에게 사진을 유출한 일에 항의하려는 의미가 더 크
다. 아직 끔찍한 사진이 유출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마히루가 조
르면 그냥 보내겠지.
인사도 없이 바로 언짢은 목소리를 들은 시호코는 “어머, 들켰
니?”라고 태평하게 대꾸했다.
절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마히루가 수상한 모습을 보여서 추궁했더니 사진을 받았다고 했
어.”
『마히루짱도 참 미숙하구나. 포커페이스를 지켜야지.』
“보낸 걸 반성하라고.”
그 덕분에 마히루의 사진 폴더가 이상한 방향으로 풍성해서, 언제
더 늘어날지 조마조마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히루가 좋아하는
눈치라 억지로 막지도 못해서, 만악의 근원인 어머니를 말리는 게 빠
르다고 학습했다.
다만, 시호코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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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 귀여운 아들의 사진을 귀여운 딸에게 보내는 게 뭐가 잘못이


니?』
“무엇부터 정정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아무튼, 마음대로 보내지
마.”
『그렇다면 허가를 받으면 되니? 마히루짱은 기뻐했는데.』
“하다못해 내가 고를 권리를 줘. 창피한 사진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죽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말렴. 목욕 사진은 안 보냈어.』
“보내면 어머니의 날에 파업할 거야.”
대체 무슨 선택지를 넣는 거냐고, 이 자리에 없는 어머니 대신 스마
트폰을 노려봤다.
아마네의 심경을 모르는 시호코는 『 우후후. 』 하고 즐겁게 소리
내어 웃고 있으니까 눈썹이 곤두설 것 같지만, 이어서 『이러니저러
니 해도 매년 챙겨 주는구나.』라는 말이 들려서 불평을 도로 집어넣
었다.
“그야 뭐…… 어머니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귀찮거나 지겹거나 질색할 때도 있다. 하지만 힘
들게 자신을 낳아 주고, 건강하게 사랑을 듬뿍 주고 키운 어머니에게
는 당연히 고마움을 느낀다.
부모님 덕분에 삐뚤어지지 않고 자랐다. 상처를 받았을 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조금은 속이 꼬였지만.
하지만 대놓고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것은 사춘기 청소년에게 부끄
러운 일이라서 미묘하게 입을 어물거리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그런
아마네를 다 안다는 것처럼 경쾌하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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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착한 아이로 자라서 엄마는 기뻐. 올해 꽃도 기대할게.』


“그래…….”
『 그리고 마히루짱을 여름에 초대해야 한다? 나도 즐겁게 기다릴
테니까.』
귀성을 기대하는 어머니에게 “알았어.”라고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또 웃었다.
“뭐, 마히루도 가고 싶어 하더라고. 기대하는 것 같아.”
『너도 즐거워 보이는데?』
“시끄러워.”
여름에도 마히루와 같이 지내는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지만, 어머
니에게 그걸 놀리는 것은 달갑지 않다.
단숨에 목소리가 뚱해졌지만, 어머니에게는 안 통해서 전화기 너머
로 유쾌하게 웃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다.
『후후. 다행이야. 고향에 오는 게 싫지 않은 것 같아서.』
“싫지는 않아…….”
1학년 여름에는 자발적으로 귀성하려고 들지 않은 것을 신경 쓴 것
이리라.
지금의 아마네는 예전보다 귀성에 긍정적이다.
과거를 잊은 건 아니지만, 쓴맛을 본 일도 지금 보면 결과적으로 잘
된 일 같다. 그대로 속으면서 순진하게 꽉꽉 쥐어짜이는 것보다는 훨
씬 낫다.
게다가 그들의 그림자에서 도망치려고 들지 않았더라면 마히루와
만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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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 일로 계속 꿀꿀하게 있었더니 마히루가 여러모로 해 줬으니까.


이젠 뭐랄까,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마히루짱한테 말했니?』
“응.”
『잘됐구나. 너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 늘어난 거니까.』
밝은 목소리로 축하해 주는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조금 뜨거워졌
다.
“그래…….”
『그러면 보류해 두었던 중학교 시절 사진도 괜찮겠구나. 키가 커
서 나보다 커졌을 때 의기양양하게 구는 사진도 있는데.』
“이보쇼. 웃기지 마. 그만둬. 왜 그딴 걸 남겼어.”
부모의 사랑에 감동한 것도 잠시,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어서 단숨
에 감동이 날아갔다.
『귀여운 아들이니까~.』
“젠장. 이번에 가면 앨범부터 처분해 주겠어.”
『그 앨범은 숨길 테니까 괜찮아.』
“반드시 찾아낼 테다.”
마히루의 눈에 들어가기 전에 처분하지 않았다간 어머니가 유출한
사진을 보고 마히루가 싱긋싱긋 웃으면서 감상을 말할 것 같다.
굳게 다짐하고 선언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마도 배꼽을 잡고 웃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 여유로운 웃음소리에 속이 끓어서 “끊을게.” 하고 무뚝뚝한 말
로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을 때 “뭐 해요……?”라고 조용히 물어
보는 말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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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돌아보니 거실 입구에서 이쪽을 보는 마히루가 있다. 아무래도 이


야기 소리가 들려서 조용히 집에 들어온 듯하다.
아마네는 의아해하는 마히루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랑 전화하고 고향 집에 있는 앨범을 파기하기로 마음먹었
어.”
“무, 무슨 소리를 하나요! 아까워요!”
왠지 모르게 민감하게 반응해서 반대하는 마히루를 보고 얼굴을 실
룩거렸더니, 마히루는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옆에 앉아 아마네의 팔
뚝을 딱 때렸다.
“마히루 넌 뭘 기대하는데…….”
“그야 물론 옛날 아마네 군의 사진을 보는 건데요…….”
“싫어.”
“역시 시호코 씨와 몰래 거래할 수밖에…….”
“야.”
“반은 농담이에요.”
“나머지 반이 궁금하지만, 지금은 따지지 않겠어. 거참.”
가만 내버려 뒀다간 어머니와 결탁해서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지만,
마히루는 기본적으로 양심이 있으니까 끔찍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
그렇게 믿고 있다.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는데도 마히루는 신경 쓰는 기색이 없이, 오
히려 즐겁게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다.
“아마네 군한테는 미안하지만, 여름 방학이 기대돼요.”
“아직 골든위크도 안 끝났는데, 마음이 성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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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당연하잖아요. 아마네 군의 부모님을 뵙는 것도 기대되고, 아마네


군의 앨범을 보는 것도 기대되고, 아마네 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제 눈으로 보는 것이 기대돼요.”
“앨범 말고는 고마워. 앨범은 안 돼.”
갑자기 귀여운 소리를 듣는 바람에 가슴이 펄떡 뛰었지만, 쓸데없
는 목적이 끼어 있어서 퇴짜를 놓았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보였다.
아마네에게만 보이는 유치한 얼굴에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면서, 앨
범의 존재에서 의식을 돌리려고 마히루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섬
세한 머리를 헝클어뜨리지 않게 부드럽게 표면을 쓰다듬는데, 아직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지만 얌전해진다.
“귀성은…… 나도 기대하고 있어.”
“정말요?”
“왜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야…… 그건.”
말을 흐린 것은, 어제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그 인간들 일은 이제 별로 상관없어. 마히루가 화내 주었다는 사
실만이 중요하니까. 뭐라고 할까, 나도 참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
해.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화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마네가 생각해도 자기 자신이 참 단순하지만, 마히루는 아마네가
끌어안고 있었던 상처를 받아들이고 보듬어 주었다. 그것만으로 상
처가 많이 나았다.
게다가 질질 끌다간 마히루가 아마네를 보듬어 주려고 애쓸 테니
까, 계속 우울하게 있을 수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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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아무리 그래도 이성을 잃고 싶지는 않고 인간적으로 타락하기도 싫


으니까, 더는 신경을 쓸 수가 없어졌다.
“아마네 군이 상처를 받으면 당연히 화낼 거예요. 아마네 군도 다
른 사람이 제게 상처를 주면 화낼 거잖아요?”
“당연하지.”
“즉, 그런 거예요.”
조금 흥겨운 투로 속삭인 마히루는 그대로 눈을 감고 아마네가 쓰
다듬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확실한 신뢰를 느끼고 부끄러워진 아마네는 마히루가 바라는 대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마히루는 곱게 미소를 지으며 아
마네의 몸에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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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제13화 휴일 후 파란의 예감

길고도 짧았던 골든위크가 끝나고, 학교가 시작된다.


(이제야 마히루와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어…….)
골든위크 때는 마히루가 거의 매일 아마네의 집에 있었다. 허가도
했고, 밥을 차려 주면 고맙고, 좋아하는 여자애와 같이 시간을 보내
는 것도 기쁜 일이다.
하지만 마히루가 아마네의 상처를 받아들여 준 날부터 마히루를 향
한 감정의 열량이 늘어나서 마음속을 정리하기가 복잡했다.
아마네를 전폭적으로 신뢰해 주는 마히루는 아마네의 응석을 받아
주고, 반대로 응석도 부린다. 그러니까 그때마다 아마네의 심장과 이
성이 단련을 시험받는다.
신체 접촉을 허락하는 사람은 아마네밖에 없다고, 그런 태도를 보
여서 아마네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질 것만 같다. 오히려 이토록 참
은 것을 칭찬해 줬으면 하는 정도다.
지금이라면 참지 않아도 아마네가 바란다면 응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마히루는 아마네의 일이라면 뭐든지 받아들
여 줄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을 고백할 용기는 생기지 않는
다.
만약 거절한다면, 기운을 잃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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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한편으로 만약의 일이 무서워


서 실행에 옮기지 않는 자기 자신의 한심함이 부끄럽지만, 받아들여
준다고 해도 마히루의 옆에 서도 될 만큼 아마네는 잘나지 않았다.
(노력해야지…….)
얼굴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체격이나 두뇌 면에서 연마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연마하려고 한다. 하다못해 옆에 있을 때 뒤에서 손가락
질을 당하지 않게끔, 마히루가 망신을 당하지 않게끔.
실제로 마히루가 아마네를 남자로 보고 좋아하는지는 둘째 치고,
노력해서 손해를 볼 일은 없겠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반하게 노력
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해 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중에 현역 육상부 에이스도 부러워할 만큼 몸의 균형이 잘 잡힌
유타에게 추천 트레이닝을 물어보자고 결심하면서 교문을 지나 신발
장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얼굴이 왜 그래?”
천천히 실내화로 갈아신던 이츠키는 아마네의 얼굴을 보고 미심쩍
게 미간을 모은다.
“내가 할 소리인데. 이상해?”
“아니, 음…… 뭐라고 할까. 뭔가 결심한 얼굴이라서. 혹시 드디어
고백한 거야?”
“풉. 그럴 리가 있겠냐!”
완전히 빗나가지도 않은 말을 듣고 무심코 뿜을 뻔해서 눈꼬리를
곤두세우자 이츠키가 참 이상하다는 눈으로 봤다.
“어? 그러면 뭔데? 뭔가 진전이 있었나 싶었는데.”
“지, 진전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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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드디어 쫄보에서 벗어나서 남자답게 돌격한 줄로만 알았지.”


“쫄보라고 하지 마, 이 바보야. 단순히…… 걔한테 호감을 사려고,
옆에 있어도 되게 노력하자고 생각했을 뿐이야.”
“흐응. 다시 말해 연휴 동안에, 그것도 요전번 노래방 이후로 뭔가
있었다는 거군.”
제법이라며 웃는 이츠키에게 더는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이츠키는 웃으면서 아마네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캐물으면 네가 싫어할 테니까 더 말하진 않겠지만, 뭔가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건데?”
“이츠키…….”
“그리고 더블 데이트를 하자.”
“너 말이야. 그게 목적은 아니겠지?”
긴장을 풀려는 농담임을 알아서 받아주자, 이츠키는 슬쩍 웃으면서
“와~ 꿈이란 말이지.”라고 아마네의 등을 다시 찰싹찰싹 때렸다.
이게 이츠키가 나름대로 기운을 내라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아니까,
아마네는 희미하게 웃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마음대로 떠들
어.”라고 대꾸했다.

둘이서 교실에 들어가 보니 왠지 소란스러웠다.


교실에 들어온 두 사람에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와 다르
게 시끌시끌한 까닭에 영문을 모르는 아마네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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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연휴가 끝난 교실이 여행 이야기 등으로 시끄러운 것은 매번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그것과는 다르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굳이 말하자면 연휴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문
을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다.
자리에 짐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여 보니── 마히루의 이야기를 하
는 듯했다.
“시이나 양이 잘생긴 남자랑 데이트하는 걸 봤대.”
들린 말에 아마네는 얼굴을 확 굳혔다.
목격 자체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걸었으니까 있을 법하다고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설마 그 이야기로 교실 전체가 시끌시끌할 줄
은 몰랐다.
잘생긴 남자라는 평가를 들어서 기뻐하는 한편으로, 본인으로선 속
이 거북하다.
참고로 옆에서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이던 이츠키가 히죽히죽 웃어
서,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팔짱을 끼고 학교에서는 못 보던 표정으로 웃었다는데…… 혹시
올해 초에 소문이 돌았던 그 사람일까?”
“사귀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역시…….”
소곤소곤 속닥이는 여학생들이 마히루를 보고 있다.
당연하지만 학교에 일찍 온 마히루는 소문의 중심이 자신임을 모른
다. 아니, 알지만 모르는 척 1교시 준비를 하고 있다.
반듯하면서 청초한 자태가 주목받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지만, 오
늘만큼은 호기심이 섞인 시선이 많이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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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여자들의 호기심 말고도 남자들은 다 죽은 눈으로 보고 있지만, 조


금도 의식하는 기색이 없다.
어디까지나 평소처럼 차분한 태도다.
마히루가 너무나도 천사님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더는 참지
못한 같은 반 여자애가 마히루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시이나 양.”
조심조심 말을 걸자 마히루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네, 무슨 일
이죠?”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투로 대답했다.
“저기, 요전번에 시이나 양이 남자랑 같이 쇼핑몰을 걷는 걸 봤는
데.”
“네, 그런데요.”
순순히 긍정하는 마히루를 보고 교실이 술렁거린다.
역시 소문의 진위를 모두가 궁금해하는 거겠지. 소문의 당사자인
아마네로서는 위장 언저리가 쿡쿡 쑤셨다.
“그게 있잖아. 그 사람하고는 어떤 관계인지…….”
“어떤 관계냐고 하면, 친구가 가장 맞는 말이라고 보는데요.”
그때 솔직하게 대답하는 마히루를 보고 안심하면서도, 아직 술렁거
리는 교실이 역시 여러모로 속이 쓰린다. 이상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마히루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남자들이 아마네와 다른 의미로 안심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데이트는 아니었나 보구나.”
“데이트, 인가요……. 아뇨, 데이트의 정의를 생각하면 데이트가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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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그때 무슨 생각인지 마히루가 긍정했다.


데이트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남녀가 시간을 정해서 만나는 것이니
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를 따지진 않으리
라.
꺄악, 하고 간드러진 소리가 터져 나온다.
어느 시대든 세상의 여자들은 연애 이야기에 흥분하는 법이다. 아
마네도 평소라면 잘도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멀찍이서 구경하고 그냥
흘렸겠지만, 당사자로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건 즉, 무슨 뜻이야……?”
물어본 여학생이 흥미와 기대가 뒤섞인 투로 물어보자 마히루가 한
순간 아마네를 봤다.
부드러우면서 조금 열기를 띤 시선에 숨이 막혔을 때, 마히루가 시
선을 돌리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듯, 자애로운 듯, 부드럽고 섬세한 미소를 짓
고서, 마히루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
요.”
그렇게 투하된 폭탄은 교실을 들썩이게 하고, 아마네의 심장을 크
게 뒤흔들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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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후기

이 책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인 사에키상입니다. <옆집 천사님> 3권은 즐겁게 봐 주셨나
요?

이번에는 지난 2권의 후기에서 쓴 것처럼 소악마 마히룽으로 변하


는 권입니다. 가라, 가라, 밀어라, 밀어라 마히루 양의 노력을 3권에
한가득 묘사해 봤습니다.
밀어붙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 듯, 마히루 양은
팍팍 밀어붙여서 아마네 군을 휘두르고 있는데, 아마네 군도 뒤지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변하면서도 역시 겁이 많습니다. 결국 지는 게
맞잖아요, 이걸 어째.
그래도 아마네 나름대로 전진할 것을 선택하고 애쓰고 있으니까,
두 사람의 가슴 졸이는 접근 양상을 재밌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권에서는 아마네 군도 더욱 적극적으로 애쓰게 할 작정이니까
요! 남자답게 굴어 봐, 아마네 군.

그리고 하네코토 선생님의 일러스트가 너무 귀여운 문제가 발생했


는데 이걸 어쩌면 좋을까요. 너무 귀엽지 않나요? 천사님이 천사님
이죠? 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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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일러스트가 전부 진짜 귀여운데, 개인적으로는 수줍어하는 마히루


양이 귀여워요……. 어라? 대부분 수줍어하던가…… 아마네 군이 그
렇게 만들고 있네요……?
즉, 전부 귀엽습니다. 여러분, 더 많이 봐 주세요.
정말이지 다음 권 일러스트가 기대됩니다. ……나, 나올 거라고 믿
어요!

이제 마지막입니다. 신세를 진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이 작품을 출판할 때 애써 주신 담당 편집자님, GA문고 편집부 여
러분, 영업부 여러분, 교정자님, 하네코토 선생님, 인쇄소 여러분,
그리고 이 책을 집어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권에서 또 만나기를 빌면서 펜을 놓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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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사에키상

주석

1) 행인두부(杏仁豆腐. 일본어 : 안닌토후) : 살구씨나 아몬드에 우


유 등을 혼합한 뒤 한천 등의 식용 응고제를 첨가해 만드는 중국식
젤리.

2) 골든위크 : 일본에서 4월 말부터 5월 초에 있는 각종 휴일에 맞


춘 연휴를 가리키는 말.

3) 키슈, 비스크 : 키슈는 프랑스 알자스, 로렌 지방의 향토요리. 파


이 요리의 일종. 비스크는 프랑스 요리. 새우나 게 등의 갑각류를 삶
아서 만든 크림수프의 일종.

4) 프리타타 : 이탈리아 요리. 달걀을 풀고 재료를 섞어서 굽는 오


믈렛의 일종.

5) 어머니의 날 : 5월 둘째 일요일로 지정된 일본의 기념일. 일본에


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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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3

전자책 발행일 2021년 11월 03일


전자책 ISBN 979-11-380-0740-5 (05830)
전자책 정가 4,500원
지은이 사에키상
일러스트 하네코토
옮김 도영명
펴낸이 임광순
펴낸곳 영상출판미디어(주)

OTONARI NO TENSHISAMA NI ITSUNOMANIKA DAMENINGEN NI SARETEITA KEN vol. 3


Copyright ⓒ 2020 Saekisan
Illustrations copyright ⓒ 2020 Hanekoto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2020 by SB Creative Corp.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SB Creative Corp., Tokyo
in care of Tuttle-Mori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영상출판미디어(주)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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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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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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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제1화 천사님의 생각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


요.’
같은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마히루가 고백한 말을 듣고, 아마네
는 그 발언의 뜻을 헤아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수업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소중하다는 말에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을지, 아마네는 알 수 없다.
우정인지, 친근함인지, 아니면 남녀의 감정인지.
자꾸 생각할수록 뇌에서 불안과 초조함, 희미한 기대감이 빙빙 맴
돌았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고서 하루를 보내는 아마네를 본
이츠키는 웃음을 지었지만, 놀리지는 않았다.
이츠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아마네 혼자 생각해서는 마히루
가 뭘 생각했는지 결론을 끌어낼 수 없었다.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본인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학교에서는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답답함을 끌어안고 하루를 보낸 뒤, 집에 와서 조심
조심 물어봤더니 마히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한 적은 없는걸요.”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앞치마를 두르면서 왠지 무덤덤한 투로 술술
말하는 마히루는 아마네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을 알아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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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살포시 웃었다.
“제 교우관계는 범위가 좁으니까요. 사람들과 알맞게 잘 교류하고
는 있지만, 명확하게 친한 사이로 부를 사람은 아마네 군과 치토세
양, 아카자와 씨밖에 없어요. 물론 모두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
장 친하고 함께 있어서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은 당신이겠죠.”
“그, 그래…….”
아마네도 마히루와 친하다고 할 사람이 본인이 언급한 만큼밖에 없
음을 잘 알지만, 이렇게 직접 가장 친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라
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같이 지낸 시간은 반년 정도지만, 반년 동안 저는 무척 농밀한 시
간을 보냈다고 봐요. 남과 깊게 엮이지 않고 산 저로서도, 아마네 군
이 가장 친근하고 마음에 들어요.”
스스럼없이 담담하게 하는 말에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마히루
의 눈을 보니, 온화한 빛을 띤 눈이 아마네를 주시하고 있다.
“제 세상은 작아요.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손바닥 크기의 작
은 모형 정원에 사는 셈이죠. 아마네 군은…… 그중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 제가, 있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 준 사람.”
“마히루…….”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선 아마네 군이 조금 자신감을 가져 주세
요.”
본심을 여실히 전하는 부드러운 표정을 봐서 무의식중에 볼이 열기
를 띠었지만, 마히루는 알아챈 기색이 없다.
노린 게 아니니까 이토록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조
금씩 번지는 기쁨이 아마네를 떨리게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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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애초에 제가 당신을 가장 신뢰한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요. 따로


소중한 사람이 있을 줄 알았나요?”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착각할
게 뻔하잖아.”
“저는 의도해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변함없이 웃는 얼굴인 마히루를 빤히 바라보는 아마네에게, 마히루
는 여유가 엿보이는 태도로 더욱 싱그럽게 웃었다.
“애초에 그대로 얼버무렸다간 끈질기게 캐물을 테고, 이상하게 지
레짐작할 게 뻔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면 알맞게 정보를 흘려야 소문도 관리하기 편해지는 법이에
요. 이상한 오해를 부를 바에야 스스로 어느 정도 방향성을 만드는
게 좋으니까요.”
“그러하십니까…….”
마히루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선언한 것임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언급당한 아마네는 심장이 철렁하는 순간이
었다.
결국 그 발언이 있은 뒤로 소란이 더 커졌지만, 본인이 온화한 천사
의 미소만 지어서 지금쯤 마히루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그 상대가 누
구일지 끙끙 앓고 있으리라.
“아무튼 그런 건 미리 말해 줘야지. 나도 착각할 수 있으니까 조심
해 줘.”
“착각,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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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그렇게 말하면 당사자인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할 거


라고.”
호의 자체는 그럭저럭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마히루가
이토록 마음을 터놓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신뢰하는 눈으로 볼 일도
없다.
그러나 그게 어떤 감정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마네가 마히루를 보는 감정과 같은 것인지, 같은 열기를 띤 것인
지.
자신의 마음속 감정은 그토록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법이
다.
뜨겁게 타오르는 감정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격한 감정도 아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열기가 있으면서 포근한 등불 같은 감정.
마히루는 아마네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슴속에서 생긴 자애와 애정
으로 소중히 여기고 싶은 상대다.
이런 감정을, 평소 그저 사이좋은 이성 친구로 접하는 상대에게 아
무런 각오도 없이 털어놓을 수는 없다.
아마네의 호의와 똑같은 감정이 마히루에게도 있는지, 알 리가 없
다. 그렇기에 착각하지 않도록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다.
“마히루 너도, 예를 들어서 내가 그런 타이밍에 마히루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뭔가 마음에 걸릴 거잖아?”
“아마네 군은 애초에 남 앞에서 공언하지 않을 것 같은걸요.”
“그건 그렇지만.”
“아니면, 공언해 줄래요?”
“나중에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 될 게 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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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바늘 같은 시선에 찔려 속이 쓰릴 게 뻔하다. 오히려 시선


에 찔려 죽을 수준일 것이다.
잘 알면서도 각오도 없이 사지에 뛰어들 생각은 없다며 손을 흔들
자, 마히루가 키득 소리를 내고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건 웃긴다거나 재미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허탈함과 체념이 슬쩍 섞여 있었다.
“그렇겠죠. 아마네 군은 모험하지 않는 성격이니까요.”
“왠지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이라고 보기에는 체념이 드러난 것 같지만, 마히루는 아마
네에게 설명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쉰 마히루는 그대로 주방으로 이동했다.
“저기 말이야…….”
“왜요?”
“만약 내가 공언하면 마히루 너한테도 영향이 갈 텐데, 그건 허용
하는 거야?”
“뻔한 소리인데요. 그야 당연하죠. 각오하지도 않고 아마네 군에게
쉽게 물어보진 않아요.”
정말로 스스럼없이 말하는 바람에 아마네가 할 말을 잃었지만, 마
히루는 돌아보지도 않고 앞치마를 살랑거리면서 조리 도구를 준비하
고 있다.
“저와 아마네 군은 처지가 다르니까 받는 시선과 감정이 다른 것도
잘 알아요. 아마네 군이 말하지 않는 것도 이해하고요. 아마네 군이
상처받지를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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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인기가 많아서 참 곤란하네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감시하
고 참견하니까요.”
딱 봐도 질린 듯한 투로 중얼거린 마히루는 그 자리에서 빙 돌아섰
다.
“하지만 여기선 둘이서 있으니까 아무도 참견하지 않아요. 지금은
그걸로 만족할게요.”
요염하게 웃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저 아름다운 미소를 가만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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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천사님의 위험 발언

마히루의 폭탄 발언이 있고 하루가 지났지만, 반에서는 여전히 천


사님의 소중한 사람 소식의 흥분이 식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껏 성별을 불문하고 평등하게 대하면서 남자의 그림자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천사님이 입에 담은 소중한 사람 발언은 정말로 관심
을 끄는 듯하다.
다만 마히루는 자신이 말한 것 말고는 어떻게 물어봐도 철저하게
대답하지 않았고, 가장 친한 치토세도 모른다고 대꾸하는 바람에 그
정체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소문의 그 남자인 아마네에게는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들킬
까 싶어서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뭐, 얼굴을 자세히 보면 알아볼 테지만. 차림새를 포함해서 멀리
서 보면 잘 모를걸?”
옆에서 진열 상품을 물색하던 이츠키가 아마네의 걱정을 웃어넘기
듯 말했다.
그 발언의 충격으로 잠시 깜빡했지만, 마히루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려고, 마히루가 좋아해도 되게 하려고, 자신을 더욱 연마하자는 의
미에서 운동할 때 쓸 물품을 사려고 이츠키, 유타와 함께 스포츠용품
을 파는 가게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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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전 동아리 활동 중지 기간이라는 이유로 여유가 생겼다고 하


는 현역 육상부 에이스에게 러닝슈즈를 고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
탁한 참이다.
“그야 평소 머리도 수수하지, 태도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느낌이지,
표정도 별로 안 변하잖아. 너는 그 사람이 있을 때 노골적으로 표정
이 많아지고 눈빛도 부드럽게 확 풀리니까, 학교에선 너하고 연결해
서 생각하지 않을걸.”
“후지미야는 의외로 감정이 잘 드러나서 깜짝 놀랐어.”
“거참 말이 많네.”
아마네 자신도 마히루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보다 부드럽다고
잘 아는 만큼 남들이 그 사실을 지적하니까 수치심이 끓는다.
교류를 막 시작한 유타에게도 들킨 것이 괜히 더 부끄러웠다.
수치심을 흘리듯이 자연스럽게 미간을 좁히는 아마네를, 처음에 말
을 꺼낸 이츠키가 실실 웃으면서 본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기면 변할 거라는 예상이 적중했군.”
“그만 말해…….”
“네네, 안 부끄러운 척하긴. 참 순수한 자식이로고.”
“징그럽게 말하지 마.”
“조금 질리는걸.”
“유타는 왜 아마네 편을 드는데. 이럴 때는 내 편을 들라고.”
“아니, 그건 좀…… 안 그래?”
“눈물이 날 것 같다.”
말처럼 느끼는 기색이 조금도 없는 이츠키는 한동안 실실 웃으면서
쿡쿡 찌른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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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뭐, 그 사람도 정말로 여러 가지 의미로 고생이 많지만. 어제 퍼포


먼스도 포함해서 말이지.”
“퍼포먼스는 무슨…… 그건 어차피 착각할 거라면 거짓말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 어느 정도 방향성을 정하려는 거라고.”
“아하, 그 사람은 그렇게 설명했나.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남
자를 털어내는 겸 다른 여자애들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는 의미
도 있을걸? 인기가 많으면 많든 적든 질투를 받는 법이니까. 소중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 말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흘리면 가
령 유타가 근처에 있어도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
“그렇군.”
“그리고 뭐, 견제가 아닐까.”
“견제?”
“아…… 신경 쓰지 마. 잊어 줘. 그나저나 그 사람이 특별하다는 건
척 봐도 알겠고, 그 사람도 그건 잘 알고 있을 거야. 밀어붙이면 이
길 수 있다니까. 오히려 자빠뜨릴 기세로 밀어붙여. 남자도 가끔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중요하다고.”
자빠뜨리라는 말에 연휴 때 있었던 해프닝이 떠오른 아마네는 눈을
돌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건 예측하지 못한 사고였고, 몸의 균형을 잃고 위에 올라탔을 뿐
이니까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은 아니다. 애초에 그렇게 발칙한 짓을
했다간 마히루가 싫어할 게 뻔하니까 아마네가 고의로 그럴 수는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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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마히루의 그 표정을 또 봤다간


──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호…… 내가 모르는 곳에서 해프닝이 있었나? 땡잡은 이벤트?”
기억을 떠올리고 뺨에 희미하게 열이 오른 아마네를 보더니 이츠키
가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손을 꼬물거렸다.
“넌 좀 닥치고 있어.”
“이츠키, 저질이야.”
“아까부터 넌 누구 편이야? 유타 너도 진전을 원하잖아!”
“그렇게 히죽히죽 웃는 사람 편을 들긴 싫은데. 뭐, 후지미야는 너
무 숙맥인 것 같지만.”
“내가 봤을 때는 둘 다 적인데.”
유타도 그렇게 평가하는 바람에 마음이 복잡하지만, 아마네 자신도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반론하긴 어려울 듯하다.
“워워. 그냥 응원만 하는 거라니까. 나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억측
만 하는 거지만, 그 사람은 후지미야 말고는 친근감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고,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도 후지미야밖에 없다고 봐. 그 사
람은 엄청나게 경계심이 강해 보이잖아? 그런 사람이 후지미야를 볼
때만큼은 눈빛이 다르단 말이지.”
“신뢰하는 것도, 인간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것도, 다 알지만. 그래
도 말이지…….”
“왜 자꾸 어렵게 생각하는 걸까. 너 자신을 믿어 보라고. 후지미야
넌 성격도 좋고, 목표가 생기면 꾸준히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봐. 자, 정 자신이 없다면 근육을 키워서 멋진 남자가 되라고. 근육
이 자신감을 키울 거야. 근육이 붙으면 자세가 좋아지고, 자세가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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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면 주위도 긍정적으로 보이고, 물리적으로 강해지면 자신감도


생기겠지.”
“너무 자신만만한걸.”
“책에서 그러더라고.”
자신의 체험담인가 싶었는데 책에서 한 말이라고 짓궂게 고백한 유
타가 장난스럽게 웃고 아마네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후지미야는 키가 작은 것도 아니니까 조금만 더 튼튼해지는
것이 균형이 잘 잡혀서 인상이 좋아지긴 할 거야. 기왕에 타고난 몸
이 있으니까, 잘 다듬지 않으면 손해라고.”
“노력해 볼게…….”
“피지컬은 유타가, 멘탈은 내가. 완벽한 포진이네.”
“네가 조금 불안한데.”
“말이 심하네.”
“농담한 거야. 적당히 의지해 볼게…….”
“이 녀석도 참, 솔직하지 못하네.”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서 아마네는 일부러 그 존재를 싹 무
시하고 옆에서 미소를 짓는 유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네는 이미 신발을 신어 보고 살 것을 골랐다. 더 필요한 물건도
다 찾았다. 가게에서 오래 죽치고 있으면 방해만 될 테니까 얼른 계
산을 마치려고 챙긴 상품을 슬쩍 들었다.
“카도와키, 계산하러 가자.”
“그러지. 나도 새로운 러닝웨어를 사야겠어.”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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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이츠키가 계산대로 가는 아마네와 유


타의 뒤에서 미묘하게 풀이 죽은 소리를 내뱉자, 아마네와 유타는 서
로 얼굴을 보고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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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운동량을 조금 늘리려고 해서, 집에 없는 시간


이 늘어날지도 몰라.”
집에 와서 마히루가 차린 저녁밥을 싹싹 해치운 뒤, 아마네는 마히
루에게 집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날 거라고 전했다.
운동하는 사람은 아마네 자신이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고 저
녁 식사를 담당해 주는 마히루에게 말도 없이 시작했다간 불편을 끼
치리라.
평소처럼 식사 후 소파에서 느긋하게 있던 마히루는 아마네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란 듯 캐러멜 빛깔의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작스럽네요. 운동에 따라 식단을 조정하겠지만요…… 뭐랄까,
깜짝 놀랐어요. 운동하는 건 좋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단순히 남자로서 더 단련하고 싶어서.”
마히루에게 인정받고 싶다거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마히루가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놓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얼버무리지만, 마히루는 곱고 맑은 목소리
로 웃었다.
“어머, 칠칠하지 못하게 살던 반년 전의 아마네 군을 생각하면 있
을 수 없는 말이네요.”
“야, 너무 놀리지 마. 공부도, 운동도, 외모를 다듬는 것도, 해서 손
해 볼 일은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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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다는 눈으로 봐서 안절부절못하고 시선을 돌


리지만, 아무래도 마히루는 깊게 추궁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어이없다는 듯이, 왠지 흐뭇해하는 느낌도 드는 웃음을 띠고 아마
네의 손끝을 간질이듯이 콕콕 찔렀다.
“무리하면 안 돼요. 아마네 군은 노력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자고
결심한 일은 철저하게 할 테니까, 제어가 안 되기 전에 꼭 의지해 주
세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 트레이너가 있으니까.”
“카도와키 씨 말이군요.”
“체력 단련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초보적인 것부터 여러모로 배울
거야.”
“그렇다면 저는 아마네 군 전용 요리사겠네요. 영양 균형을 잘 생
각해서 만들게요.”
몸을 만들려고 운동량을 늘리면 당연히 식사 내용도 바꿔야 할 테
고, 그만한 양도 필요해진다.
정말로 몸을 만들려면 마른 체형인 아마네는 체중을 늘리고 다듬어
나가야 할 테지만, 그만큼 세밀하게 조절하려면 마히루의 부담이 커
질 테니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단련하는 것으로 결론을 봤
다.
지금만 해도 식사 면에서 뭐든지 다 의지하는 상황이니까 이보다
더 요구하는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마히루는 싫은 내색을 전혀 보이
지 않고 받아들였다.
“여러모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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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마네 군이 정한 일이라면 기꺼이 도울 테고, 응원도 할 테


지만요……. 그 전에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거든요?”
“잊은 적 없어. 매일 복습하고 있고.”
“착한 아이로군요.”
참 잘했다는 듯이 아이를 칭찬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머리
를 쓰다듬으면 아마네도 차마 손을 뿌리칠 수가 없어진다.
다만 이렇게 당하기만 하면 마음이 복잡해지니까 조금 원망하는 눈
으로 쳐다봤다.
“너무 무시하지 마……. 공부든 단련이든 양립할 수 있어.”
아마네는 원래부터 성실한 성격이고 수업도 잘 들어서 수업 내용만
으로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다. 집에서 예습과 복습을 거르지 않는
만큼 기본적으로 학생의 본분에서 곤란할 일은 없다.
그 노력의 비율을 운동에 다소 기울인다고 해도 기존에 공부하던
것을 소홀히 할 리는 없고, 애초에 공부도 더 성실하게 할 작정이었
다. 둘 다 어중간한 결과를 내는 것은 피할 생각이었고, 그런 각오로
마히루의 곁에 머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피곤할 것 같네요. 안겨 볼래요?”
“저기 말이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받아줄게요.”
가슴에 손을 탁 대고 미소를 짓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지난번
에 풍만한 그곳에 얼굴을 파묻은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는 단순히 아마네가 기운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마히루가 달래
듯이 끌어안은 거지만, 사춘기 남자에게는 여러모로 견디기 힘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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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여유가 별로 없어서 기대는 것을 우선하며 품에
안긴 것이라서 감각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마히루가 그때와 똑같이 끌어안았다간 이번에는 그
몸의 감촉을 확실히 느낄 것이다. 그런 자신이 비겁함을 잘 아니까,
아마네는 사양하고 싶었다.
“마히루 넌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할 것 같아서 무서워…….”
“그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지간한 일은 다 할 거예요. 물
론, 보상은 받을 거지만요.”
“오히려 보상으로 뭘 요구할지가 더 무서운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라거나 봉사 같은 것은 실제로 정신적
인 만족처럼 마땅한 대가가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참고로 묻는 건데, 네가 바라는 보상은 뭐야?”
“저도…… 제가 바라는 것을, 요구할 거예요.”
마히루라면 금전이나 물건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귀엽고 범위가 넓은 요구를 말해서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그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이지. 등가교환이라는 거네.”
“제가 더 욕심이 많아요.”
“글쎄다.”
“정말이지…… 아마네 군은 제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시험 삼아 뭐라도 요구해 봐.”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뭔가 엄청난 것을 요구하겠지. 마히루의 욕
심이 궁금해진 아마네가 물어보자 마히루는 미묘하게 볼을 부풀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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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 싶어서 맑은 캐러멜 빛깔 눈을 가만히 보니
까, 마히루가 눈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이건 말은 거창하게 했어도 딱히 요구할 게 없는 패턴이거나, 아니
면 정말로 엄청난 요구라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
든 판단하기 어렵다.
가만히 바라보니 마히루의 뺨이 서서히 발개진다.
“제가 바, 바라는 건.”
“응.”
“가, 같이…….”
“같이?”
“아, 아마네 군도 같이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결국 허둥지둥 얼버무리듯 말을 막 던지는 느
낌으로 조르는 마히루를 보니 무심코 쓴웃음이 나왔다.
“그거면 돼?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
“그거면 돼요!”
이어지려던 말이 궁금했지만, 자꾸 건드렸다간 토라질 것 같아서
그만두고 바라는 대로 손을 뻗었다.
가끔 아마네가 머리를 쓰다듬곤 하는데, 마히루 본인이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걸 요구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 줄 테고 오
히려 마히루가 싫지만 않다면 아마네가 먼저 해 주고 싶어질 정도인
데, 소소한 소원으로 말한 거니까 역시 귀엽다는 생각만 든다.
아마네가 머리를 스스럼없이 쓰다듬자 마히루는 알기 쉽게 표정을
확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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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서 욕심쟁이인지 잘 모르겠는데.”


“욕심쟁이 맞아요. 더 만져 줬으면 하니까요.”
“만지라니.”
아마네가 무심코 몸을 굳힌 것도 모르고, 마히루는 부드러운 표정
을 지은 채 왠지 몽롱해진 눈으로 마히루를 쳐다봤다.
“저는 아마네 군이 만지는 게 좋아요. 딱히 사람의 온기를 좋아하
는 건 아니지만요. 아마네 군의 손은 마음이 참 편해져요.”
“그, 그래?”
듣기에 따라선 엄청난 소리를 했는데, 마히루 본인은 그 점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지 여전히 풀어진 얼굴로 조르듯이 몸과 머리를 바싹
들이댔다.
거리가 가까워진 탓인지 달콤한 향기가 아까보다 물씬 풍겨서 심장
고동에 박차를 가한다.
(나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좋아하는 여자애가 ‘더 만져 줬으면 한다’고 말하면, 어지간한 남자
는 기회다 싶어서 엉큼한 마음을 한가득 채우고 만지려고 들 것이다.
마히루가 아마네를 믿어서 응석을 부리거나 스킨십을 요구하는 것
은 잘 알지만, 그것과 별개로 건전한 청소년에게는 강렬한 유혹이다.
“아마네 군은 함부로 접촉하려고 들지 않지만, 이렇다 할 때는 자
상하게 마음을 달래듯이 만지잖아요? 그게 무척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고, 마음도 편해져요. 아마네 군의 몸에서 치유의 파장 같은 것이
나오는 걸지도 몰라요.”
마히루는 아마네가 나쁜 짓을 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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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 편하지 않은데. 마히루는 여자니까, 내 마음대로 만지는


게 아니야.”
“저는 그래도 상관없는데요.”
“나는 상관있어. 남자한테 몸을 만지라고 해 봐라, 덮치려고 들 거
라고.”
마음속으로는 남자로 인식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면
서도 조금 강하게 경고했더니, “만져 주려고요……?”라고 여유롭게
웃으며 바라봤다.
노골적으로 경계하지 않는 발언에 남자의 자존심이 자극받아서 무
심코 마히루의 볼을 꼭꼭 잡았다.
일단 원하는 대로 만지긴 했는데, 마히루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
다.
“밖에선 이렇게 안 말하고, 아마네 군 말고 다른 사람한테 요구하
지도 않아요.”
“그러면 더 안 되지, 이 바보야.”
그렇게 의식하지 않고 도발하는 소리를 들어서, 아마네의 입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마네한테만 허락하는 행위. 그 사실이 이성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성의 족쇄를 풀려고 하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제지하던 아마네는
간신히 발칙한 생각을 몰아내고 마히루의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아마네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접촉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마히루는 아마네의 행동에 긴 속눈썹을 떨면서 눈을 딱 감았다 뜨
더니, 아주 조금 쑥스러운 기색으로 희미하면서 따스한 웃음을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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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표정에서 안도와 행복감이 확실히 보이는 바람에 아마네도 저


절로 낯이 간지러웠다.
“따스해요……. 시기를 생각하면 덥겠네요.”
“놓을게.”
“싫어요. 역시…… 아마네 군의 손은 따뜻하고, 크고, 딱딱하
고…… 저와는 다르네요.”
“마히루는 작고, 여리고, 가냘프니까, 만지면 불안해.”
“간단히 부러지진 않아요. 그리고 아마네 군은 제 몸을 만질 때 항
상 조심하니까요. 절대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어요.”
“여자를 거칠게 만지진 않아…….”
하물며 평생 소중히 여기고 싶은 여자라면, 거칠게 대할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이 전부 섬세한 마히루를 지키고 떠받치고 싶기는 해도, 망
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일은 없다고 알면서도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아 유리
장식을 만지듯 신중하게 손등을 어루만지자, 마히루가 간지러운 듯
이 캐러멜색 두 눈을 희미하게 떴다.
“그러니까 신뢰하는 거고, 만지길 바라는 거예요…….”
그렇게 미소를 짓는 마히루가 참으로 사랑스러워서 그대로 꼭 끌어
안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속으로 꾹 참고, 아마네도
마히루처럼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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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꿈속 천사님과 수치심

“사랑해요…….”
명확하게 열기를 띤 목소리가 한마디 말을 자아낸다.
작지만 귀에 잘 들어오는 목소리를 낸 연홍색 입술이 요염하게 다
가온다.
어느새 침대에 누워 상반신만 일으킨 아마네의 다리를 깔고 앉듯이
올라타서 몸이 못 움직이게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감촉과 그윽한 향기만이 직접 전해졌다.
앞으로 쓰러지듯 몸을 기댄 마히루는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면서
아마네의 등 뒤로 팔을 둘러서 몸과 몸 사이의 빈틈을 없앴다. 아래
로 눈을 돌리니 몸에 걸린 하얀 원피스의 목 언저리에서 평소 햇빛을
안 받아 뽀얀 살결이 보였다.
깊게 파인 계곡에서 시선을 돌리려고 했더니, 마히루가 놓치지 않
겠다는 듯 아마네의 목에 팔을 휘감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숨결이 입술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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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만져, 줄래요?”


그렇게 속삭인 마히루의 가냘픈 등 뒤로 팔을 돌려 끌어안고, 아마
네는 천천히 입술을 가까이──.

“──!!”
벌떡 일어나 보니, 당연하지만 그곳은 아마네의 방이었다. 침대에
는 아마네 혼자. 쳐둔 커튼 사이에서 방으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
었다.
사이드테이블에 있는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5시 언저리.
여름을 앞둔 시기라서 그런지 해가 일찍 떠서 생활을 시작해도 될
시간대이지만, 일어날 예정은 아니었던 시각이다.
몸을 일으키고 꿈이었음을 깨달은 아마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누
르고 자신의 추잡함에 잠에서 깨자마자 우울해졌다.
(최악이네…….)
그런 꿈을 꿀 줄은 전혀 몰랐다.
지금껏 마히루를 꿈에서 봤을 때도 평소와 똑같은 태도였고, 결코
아마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반영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제 더 만져 달라는 발언이 있어서 이런 꿈을 꿨을 테지만, 그래도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꿈이라고는 해도, 아마네의 뇌는 마히루가 하
지 않을 짓을 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령 꿈이라도 그런 감정과 충동은 마히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고 말았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부채질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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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여기고 싶다면서도 상처를 주는 행위를 무의식중에 원했다


는 현실에 머리를 벽에 박고 싶어졌다.
아마네는 잠재된 자신의 욕망에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벽 치기
단련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움직이려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몸을 굳혔다.
“죽고 싶다…….”
좌우지간 머리를 박기 전에 나른함과 충동의 잔재를 전부 씻어내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네,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쉬는 시간. 그 뒤로 자신의 한심함을 씻어내려고 새벽 조깅을 나서
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아마네에게, 수업 중에 상태를 목격한
듯한 치토세가 말을 걸었다.
그렇게 얼굴이 초췌했을까 싶어서 옆에 있는 이츠키를 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게 말이지…… 아침부터 좀 뛰었거든.”
“그러니까 피곤하지. 평소 운동하지 않는 사람이 몸을 움직이면 늘
어질 거야.”
슬쩍 웃고 등을 찰싹 때리는 치토세의 반응을 보고, 아마네는 깊이
추궁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치토세가 안다=마히루도 안다고 봐도 좋으므로, 되도록 치토세에게
전해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애초에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몸 상태가 나쁘면 학교가 끝나고 바로 집에 가서 쉬는 게 좋아요.
몸을 혹사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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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치토세를 따라서 온 모양새로, 곁에 있던 마히루가 걱


정하듯이 말을 걸었다.
학교라서 천사님 모드이긴 하지만, 걱정하는 것은 진짜 같다. 집에
가면 부드럽게 보듬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지금의 아마네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
죄책감과 꿈의 잔재가 마히루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다. 그리고 아마네 역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눈이 안 마주치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픈 건 아니니까 괜찮
아.”라고 감정을 꾹 억누르고 담담하게 말하자 시야 한쪽에서 마히
루가 아주 조금 얼굴을 굳혔다.
아마네는 마히루를 정면에서 보면 어색함과 미안함이 표정에 드러
나는지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한 건데, 마히루가 보면 갑자기 쌀쌀
맞게 대하는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고 그냥 넘어
가려고 했다.
주위에는 아마네가 어둡고 내향적인 성격이고 태도가 무뚝뚝하다
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이상하게 보이진 않으리라.
“아마네…… 혹시 언짢은 일 있어?”
“언짢은 건 아니야. 피곤하고, 졸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시
험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졸 수도 없잖아.”
“와~! 성실하네.”
“넌 더 성실하게 살아. 우리 학교는 시험이 빡빡하니까, 놀지 말고
조금은 대비해.”
“그런 건 다 같이 하는 게 즐겁고 효율도 좋을 것 같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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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시이나한테 배우든지.”


“그것도 좋지만…….”
치토세가 가만히 바라보지만, 아마네는 눈이 마주치지 않게 다음
시간 교과서를 꺼냈다.
더 말했다간 필연적으로 마히루와 대화할 일이 생기므로, 슬쩍 한
숨을 흘리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로 교과서를 펼쳤다.

방과 후에는 바로 하교해서 저녁거리를 사고 귀가했다.


마히루는 평소처럼 아마네의 집에 와서 요리하고 있는데, 딱 봐도
기운이 없다.
아마네의 분위기에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는지 슬쩍슬쩍 눈치를
보다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평소에는 집에서 조금 더 서글서글
하게 지내는데 오늘은 학교에서의 거리감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걸 보
면 신경을 쓴 것이리라.
아마네가 개인적으로 찜찜하니까 되도록 마히루를 의식하지 않으
려고 한 건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할 것은 없
다.
“화났어요……?”
눈도 안 마주치고 식사를 마친 다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마히루.
아마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마히루의 눈이 불안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화난 거 아니야.”
“그렇게 대답할 때는 화났을 때예요. 오늘 하루는 분위기도 이상했
고, 태도고 차갑고…… 제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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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딱 봐도 아마네가 멋대로 피하는 건데도 마히루가 미안한 기색이어
서,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더 생각할 수가 없다.
허둥지둥 마히루의 손을 잡고 얼굴을 살폈다.
평소보다 촉촉해진 눈이 아마네를 바라봤다.
“아, 아니야. 네가 뭘 잘못한 게 아니야. 나야말로 상처를 줘서 미
안해.”
“그러면 왜…… 서먹서먹하게 대하나요?”
“아, 그건 말이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이유를 물어보면 어물거릴 수밖에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자인 마히루가 질색할 게 뻔하다. 만약 아마네
가 마히루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곤란한 데다가 앞으로 어떻게 대하
면 좋을지 고민할 것이다.
“혹시 제가 미워졌다거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개,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할까…… 내
가 멋대로, 여러모로 생각할 일이 생겨서.”
“말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딱 봐도 시무룩해서 눈썹이 축 처진 마히루의 표정을 보고, 아마네
는 끙끙댈 수밖에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거짓말하긴 싫어서 잘 에둘러서 전하고 싶지만, 어떻게 잘 뭉뚱그
려서 말하면 좋을까.
자칫하면 뜻이 잘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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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거든?”


“저를 무시할 정도로요……?”
“아니, 그건 말이지. 뭐라고 할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서?”
“제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거군요.”
“그런 뜻이 아니고. 고, 곤란하다는 의미로.”
“곤란할 정도로 피해를 준다는 거군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게 있지, 이걸 뭐라고 말하면 좋
지…….”
남자라면 이해할 테지만, 여자한테 말해서 이해해 줄 것 같지는 않
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간 마히루가 이해하고 넘어갈 것 같지 않다.
마히루 탓이 아닌데도 마히루를 피했다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
질 테지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를 아마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잘
포장해서 전하고 싶다.
“그게 말이지……. 마히루 네가, 만져 달라고 해서. 그게, 뭐라고
할까, 건전하지 못한 꿈을 꿨는데.”
“뭐가 건전하지 않아요?”
“네가…… 이런저런 의미로 귀엽게 떼를 쓰는 꿈을 말이지.”
잘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뭉뚱그린 결과가 이런 대답이었다.
이런 방면으로 순진한 마히루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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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로, 그러면 안 됐다고 생각해. 평소에는 절대로 그런 눈으


로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고, 억지로 만지려고 하지도 않아. 이번
에는, 그 뭐냐, 어제 마히루가…… 너무, 귀여운 소리를 하니까. 그
래서,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워서 피했다고 할까. 싫어서 그런 게 아
니라, 내가 한심해서…….”
“어떤 식으로 떼를 썼나요……?”
“새로운 수치 플레이?!”
마히루의 표정을 봐서는 질색한 게 아닌 듯해서 안심했지만, 그보
다 더 위험한 말이 나와서 얼굴이 실룩거렸다.
꿈에서 본 것은 거의 아마네의 욕망이나 다름없다. 그 사실을 전했
다간 마히루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무의식중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킬 것이다.
“수치 플레이……? 아뇨. 아마네 군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적극적이
었나 싶어서요. 여러모로 참고로 삼고 싶거든요.”
“안 그래도 돼. 애초에 무슨 일에 참고로 삼을 건데.”
“아마네 군의 가슴을 뛰게 할 때요……?”
“심장에 부담을 주는 시도는 하지 마.”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마네의 심장을 폭행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마히루는 평소 의표를 찌르듯 사람을 놀라게 하니까 이상
한 아이디어는 제공하고 싶지 않다.
마히루는 우려와 불안이 전부 사라진 듯 개운해진 표정이었다. 얼
굴이 조금 발그레한 것은 실수로 귀엽다고 말한 탓일지도 모른다.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됐고, 그것만 알았으면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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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빙그레 웃는 마히루가 스스로 한심해진 나머


지 입술을 굳게 다문 아마네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아마네 군은 의외로, 아니 제가 아는 남자 중에서도 가장 순진하
네요.”
“거참 말이 많네. 너한테도 고대로 돌려주겠어.”
“오히려 익숙하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남자와 교제한 적도 없
고, 제가 먼저 교류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남자는 아마네 군밖에 없어요.”
“나……나도, 여자랑 엮인 적은 별로 없으니까…….”
한심한 소리임을 자신도 잘 알지만, 거짓말할 수는 없다. 애초에 아
마네가 여자를 잘 안다고 말했다간 코웃음을 칠 것 같다.
“그러면서도 여자를 잘 다루네요.”
“내가 여자를 잘 다룬다고 하면 너무 건방지게 들릴걸. 어디까지나
얼마나 존중해서 대하느냐는 거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주 말했
지만, 상대가 싫어할 일은 안 하고, 하면 기뻐할 일만 하는 거야. 상
대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보통은 그런 거잖아?”
“그런 부분이 말이에요. 치사해요.”
“뭐가?”
“존재가 치사해요.”
“나를 부정하려는 거야……?”
“오히려 긍정하는 거예요. 더 당당하게 굴라고 힘껏 등을 밀어줄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치사하네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지금 몰라도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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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주고받은 것 같은데, 이번에도 뭐가 치사한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답을 내놓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네의 태도를 보고 걱정해서 풀이 죽었던 마히루가 이처럼 불안
한 기색 없이 즐겁게 웃고 있다. 치사하다고 말한다면 치사한 게 맞
겠지.
“아무튼 오늘은 좋은 정보를 들었어요.”
“뭐가 좋은 정보인데?”
“아마네 군이 처음 경험하는 여자가 저라는 걸요.”
터무니없는 발언을 듣고 콜록대는 아마네를 마히루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본인은 다른 의도가 없이 생각한 걸 그대로 말한 거겠지. 그만큼 충
격도 크지만.
“너 말이야, 말이 이상……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들려! 그리고 그
런 소릴 들을 이유는 없거든?!”
“왜 그렇게 허둥대죠? 뭐가 어때서요. 저도 처음 경험하는 것밖에
없어요. 지금까지 서로가 경험도 없이 친해졌다는 뜻이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지, 만.”
지금까지 느낀 걸로도 당연한 거지만, 본인이 무의식중에 그만큼
순진하다고 말하는 것이라서 정말 부끄럽다. 그런 걸 의식하면 안 된
다고 생각할수록 괜히 생각나고 만다.
“아마네 군……?”
“아무 일도 아니니까, 나를 보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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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다시 드러난 자신의 추한 욕망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소파에 앉아


등을 돌렸다.
보이기 싫고, 마히루를 보고 싶지도 않다.
“왜 존댓말을 쓰죠?”
“따지지 말고.”
“그렇다면…… 안 볼게요.”
그 대신에 기대듯이 등을 맞대고 앉은 마히루를 돌아보려고 했더니
옆구리를 찔렸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분명 짓궂게 웃고 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보는’ 거 맞죠?”
“맞습니다…….”
“오늘은 아마네 군이 피해서 그런 거니까, 참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도망칠 수가 없지만. 애초에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등에 확 퍼지는 온기와 가슴의 고동, 왠지 모르게 편해지는 마음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자신의 다리를 받치고 팔을 괴었다.
“다음부터는 남들 앞에서 처음이니 뭐니 하지 마……. 반응하기 난
처하니까.”
그 말을 듣고서 깨달았는지 마히루는 몸을 떨고 뒤돌아서 아마네의
뒤에서 옷을 꽉 잡았다.
“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거든요?! 아니, 사실은 그렇지만. 저
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에요!”
“아, 알았으니까 더 말하지 마.”
마히루가 타인을 가까이 들인 것이 처음임을 알기에 다시 본인의
입에서 들으니까 왠지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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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서로 처음 경험하는 일이 참 많았음을 이해


했다.
적어도 아마네는 여자 손을 잡은 것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잡은 것
말고는 처음이었고, 포옹한 것도 마히루밖에 없다. 마히루도 비슷하
겠지.
좋아하는 사람의 새로운 경험, 그 첫걸음을 뗀 상대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참으로 영예로운 일이다.
바라건대 사랑도 처음이자 마지막 상대가 되었으면, 그렇게 생각하
고 말았다.
수치심 탓에 이마로 추정되는 곳을 등에 대고 문지르는 마히루를
느끼면서, 아마네는 미래에도 마히루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며 슬
쩍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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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제4화 천사님과 시험공부

다음 날에는 원래 거리감으로 돌아와서, 걱정하던 치토세와 이츠키


는 안도한 듯했다. 아무래도 태도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던 듯하다.
어제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늘은 마히루와 서먹서먹하지 않
았다. 다소 의식하는 것은 있지만, 학교라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
을 뿐이다.
마히루는 여전히 천사의 미소를 짓고서, 지금은 공부를 가르쳐 달
라고 애원하는 같은 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다음 주에는 중간고사가 있어서 학년 제일의 재녀인 마히루가 교관
으로 점찍힌 것이리라. 다만 마히루는 온화하게 미소를 짓는 와중에
도 아주 조금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 집에서 하는 건 어렵겠네
요…….”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대화를 엿들어 보니 아무래도 같이 공
부하자고 하는 여자애들이 장소로 마히루의 집을 희망하는 듯하다.
필시 마히루가 사는 집을 구경하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으리라.
(그러면 곤란하겠지. 마히루는 경계심이 강하니까.)
물론 같은 반 아이들이니까 교류는 하지만, 이 여자애들은 치토세
처럼 정말 친한 사이인 것도 아니다. 집에 들이기는 좀처럼 쉽지 않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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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아마네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사고 때문에 집 근처에 오게 놔


두고 싶지 않다. 자칫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자애들에게 질문 공
세를 받고, 남자들에게 원한을 살게 불 보듯 뻔했다.
“아, 치사해. 나도 같이 공부할래.”
“나도~.”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다른 여자애들도 손을 들자 마히루는
딱 봐도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마히
루의 집에 다 들어갈 리가 없다.
덤으로 남자들도 부러워하는 눈치로 보고 있다.
“저기…… 오늘 방과 후에 교실에서, 한두 시간 정도라면 괜찮아
요.”
타협안으로 넓은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는데, 그래도 참가
희망은 그치지 않을 듯하다. 동아리 활동을 쉬는 시간이라서 더더욱
사람이 모이기 쉬울 것이다.
치솟는 환성을 듣고 마히루도 참 고생이 많겠다며 멀찍이서 구경했
더니, 이상하게 활짝 웃는 이츠키가 아마네를 툭툭 건드렸다.
“너는 참가하지 않을 거야?”
“내가 참가해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시험 범위에서 모르는 게 있
는 것도 아니고, 설령 모른다 해도 저렇게 사람이 많으면 한 사람마
다 대응하는 시간이 줄어들겠지. 그걸 기다리느니 나 혼자 후다닥 자
습하는 게 더 나아.”
“그렇게 신랄한 구석을 좋아하지만, 이럴 때는 참가해야 한다고 보
는데. 의욕을 위해서라도.”
“공부는 평소 하는 거니까 의욕이 어쩌고 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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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너 말고. 저기 말이야.”
반에서 절반이 넘게 참가할 듯한 공부 모임으로 발전하고 있는 마
히루 쪽을 보니 역시 인원이 많아서 고생길이 훤해 보인다. 아는 사
람이 있으면 편할 거라는 의미에서 보면, 아마네 자신이 참가할지 말
지는 제쳐두더라도 같은 교실에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딱히 배울 일이 없는데도 말이야……?”
“그렇다면 나를 가르쳐 주면 되잖아. 어차피 참가할 치이를 집까지
바래다줄 겸 기다리려고 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은
없겠지.”
“남을 가르치는 건 그다지 자신이 없는데…….”
“그야 말은 겁나게 차갑고, 하나하나 정성껏 가르쳐 주는 타입은
아니지. 그래도 외면해 버리거나 내팽개치지는 않잖아?”
확신하는 눈빛과 말투에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는 아마네에게 실
실 웃으면서 “너만 믿는다, 친구.”라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이츠키.
아마네는 거절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수업이 끝나고도 교실에 오래 남는 학생이 적을 테지만,


오늘은 정말로 드물게도 북적북적한 양상을 보였다.
청소하면서 잘 정렬했던 책상을 군데군데 그룹을 만들듯이 맞대고,
어느 정도 사이가 좋은 사람들끼리 뭉쳤다.
남자들도 참가한 듯, 처음에 마히루에게 부탁한 인원의 대략 여섯
배 규모가 되었다.
아마네는 마히루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츠키와 마주 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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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이거 왠지 내가 일대일로 봐주는 느낌인데……?”


“선생님! 잘 부탁합니다!”
“집에서 해도 상관없지 않아……?”
“치이를 기다리는 김에 공부도 하는 거야. 그리고 귀가 시간이 늦
어지면 혼자 두기 싫어지잖아?”
의미심장하게 보는 이츠키에게 눈을 흘기지만, 이츠키는 그저 히죽
웃기만 했다.
치토세는 평소 되도록 날이 밝은 시간대에 귀가하려고 한다는데,
오늘은 공부 모임이 있어서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진다. 본인도 안전
의식이 있고 방범 물품도 챙겨서 다닌다고 하지만, 역시 해가 저문
시간대에 혼자 집에 보내는 것은 좋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같은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같이 귀가할 수는 없
으니까, 거리를 슬쩍 두고 지키면서도 걷는 정도다.
“아마네 넌 남자가 늑대란 말을 모르지?”
“왜 그렇게 불건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애초에 필요성을 모르
고, 빈틈을 노리고 여자를 덮치려는 인간은 틀렸다고 봐.”
“그런 성격으로 신뢰를 딴 거겠지. 뭐, 목적지가 같으니까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애초에 덮칠 타이밍이 얼마든지 있을 것 같고.”
“그럴 리가 있겠냐. 싫다고 울기라도 하면 자살하고 싶어질걸.”
한 번 마음을 허락하면 무방비해지는 마히루에게는 얼마든지 빈틈
이 있지만, 그걸 노려서 뭘 어떻게 해 보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
히려 너무 풀어졌다고 혼낼 정도다.
신뢰를 바탕으로 마음을 터놓고 있는 마히루에게 뭔가 저질렀다간
지금처럼 평화로운 관계가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로 무너진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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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네는 마히루의 신뢰를 잃기 싫고, 인간의 양심을 버리기도 싫다.


소중히 여기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억지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그 성격을 잘 아는 이츠키는 미묘하게 질린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
하지만, 아마네는 일부러 무시하고 교과서의 시험 범위를 펼쳤다.
“자, 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처음 목적을 달성하라고. 나는 몰라서
곤란한 곳이 없으니까, 네가 모르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교과서를 손으로 탁탁 치고 보채는 아마네에게, 이츠키는 “잘 피하
네?”라고 웃으면서 자신의 노트를 펼쳤다.
이츠키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다. 요령만 보면 머리가 좋은 편이다.
자신의 역량을 잘 알아서, 적은 노력으로 결과를 낼 줄 아는 인간이
다. 다만 귀찮아하는 성격과 부모에게 반발하는 심리 때문에 조금 불
성실할 뿐이라서,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성실한 기질이 있다.
중학교 때는 우등생이었다고 하는데, 치토세와 교제할 때 소동이
있고 나서부터 반항기에 접어들었다는 듯하다.
“영어 문장은 진짜 의미를 모르겠어.”
“단어를 외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튼 시험
에 무조건 나올 문법과 단어만큼은 외우는 게 좋아. 여기는 반드시
나오니까. 네가 잔 수업 중에 나온다고 했어.”
수업을 땡땡이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잠기운에 굴하는 일이 많은
이츠키의 이마를 콕 찔렀다.
“아무튼 이번에도 노트를 복사해 줄게. 장문 독해는 지금부터 쑤셔
넣으려고 해도 한계가 있어. 그러니까 금방 어떻게 할 수는 없고. 그
건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까 단어 문제와 객관식 문제만 틀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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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 문제라면 뭐든지 대체로 최소 2개로 선택지를 좁힐 수 있으


니까 그중에서 확실하게 정답을 찾을 수 있으면 돼. 점수를 확실하게
따는 것에 중점을 두자. 너는 영어가 낙제점 근처지?”
“휴휴, 믿음직한걸. 다음에 보답으로 뒤에서 푸시해 줄게.”
“그건 확실하게 필요 없는 일이고, 괜한 참견이야.”
아마네는 마히루와의 관계를 천천히 발전시켜 나갈 작정이므로, 뒤
에서 너무 밀면 오히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고 싶어진다.
이츠키는 제안에 No 사인을 보내는 아마네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
지만, 아마네 자신은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근본적인 문제로, 지금은 마히루의 곁에서 당당하게 있으려고 한창
노력하는 중이다. 마히루가 자신을 좋아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걸음
을 떼는 것보다 자기 연마를 우선하고 싶다.
이츠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아마네가 무시하고 복사
할 노트의 페이지를 헤아리는 것을 보고 포기한 듯 “너도 참.”하고
말하고 샤프펜슬을 잡아 들었다.
그대로 공부 태세에 들어가려는 이츠키를 보고 다소 안심하면서,
아마네는 마히루가 있는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히루는 평소와 똑같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정성껏 가르쳐 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웃어 주고
여기저기 가르쳐 주러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정
말이지 학교의 천사님 포지션은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왜 답이 안 나와?”
“공식을 써.”
“썼는데도 안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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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세가 있는 그룹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면서 공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면서 활기가 넘치는데, 다른 그룹에 있는 남자들
은 끙끙 앓는 모양이었다.
마히루도 모두를 챙겨 줄 수는 없고, 배우는 인간의 이해력에 따라
서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게다가 목소리가 큰 곳에 마히루가 불려가
다 보니까,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아이들은 가르쳐 주려고
해도 다른 데 끌려가는 통에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걸 어쩔까 싶어서 잠시 고민한 뒤, 아마네는 이츠키에게 잠시 양
해를 구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미간에 주름을 잡고 끙끙대는 반 아이에게 다가가서 어디서
막혔는지 참고서와 계산식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슬며시 노트에 손
을 댔다.
갑자기 아마네가 끼어들어서 놀란 듯 쳐다보는 같은 반 아이에게,
아마네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 문제를 푸는 법을 전했다.
이때는 단순히 답을 찾는 데 쓴 공식이 잘못됐다는 이유라서, 막힌
부분의 의문만 해소하면 쉽게 풀리는 문제였다.
갑자기 끼어들었는데도 순순히 문제를 풀어 준 것에 안심했더니,
연신 눈을 깜빡이는 맞은편 자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시이나가 아니라서 미안하지만, 저쪽은 바쁘고 여유가 없어 보여
서 말이야. 괜히 참견했다면 미안해.”
“아니야. 고마운데…… 후지미야가 올 줄은 몰랐어.”
“뭘. 곤란해 보였으니까.”
자신이 얼마나 무뚝뚝하고 음침한 인간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고
자조하고 싶어졌지만, 실제로 무뚝뚝하고 음침한 건 사실이니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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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할 수 없다.
쓴웃음을 짓고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반 아이
가 “여기는 어떻게 풀어?”라고 풀리지 않는 문제를 짚어서, 온 김에
푸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러자 그 그룹 안에서 서로 눈치를 보더니, 어째서인지 이츠키를
봤다.
“저기, 이츠키. 후지미야 빌려도 돼?”
“어~? 내 거지만 하는 수 없지.”
“언제부터 네 거였다고.”
징그러운 소리를 듣고 슬쩍 토하는 흉내를 낸 아마네는 이츠키가
후다닥 책상 두 개를 이 그룹에 붙이는 것을 보고 행동이 참 빠르다
며 혀를 찼다.
딱히 상관없지만, 본인의 허가는 받았으면 좋겠다.
한숨을 쉬고 그룹에 합병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김에 이츠키의
책상 아래를 살짝 걷어찼다.
“미리 말하겠지만, 나도 잘 가르치는 건 아니야.”
“뭘. 그래도 고마워. 천사님은 저쪽에서 바빠 보이니까.”
“우리도 갑자기 참가했으니까. 시이나 혼자선 다 처리할 수 없겠
지.”
마히루가 가르치는 그룹을 부러워하듯 보지만, 질투하는 시선은 없
다. 단순히 아쉬워하는 것이다.
“우리도 재밌을 것 같아서 끼어든 거고, 시이나가 가르쳐 주면 땡
잡았다고 생각한 거니까 후지미야가 도와준다면 그걸로 됐어.”
“굳이 욕심을 말하자면 천사님이 더 귀여워서 기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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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한테 귀여움을 바라지 마. 자, 어디를 모르겠어?”


귀여운 구석이 하나도 없음을 자부하는 아마네로서는 마히루 대신
귀여움을 요구받아도 쓴웃음만 나오지만, 남자로서 이들이 하고 싶
은 말은 이해한다.
무뚝뚝한 남자보다 싹싹하고 귀엽고 똑똑한 여자애인 마히루에게
배우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 같다.
마히루가 더 좋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서 어깨를 으쓱한 다음,
각자 막힌 부분이 어딘지 물어보고 설명해 나갔다.
다행히 아마네가 설명할 수 없는 의문점은 없었고, 이 그룹 남자들
도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는 덕분에 이해하는 속도가 그럭저럭 빨랐
다.
이츠키까지 합쳐서 네 사람의 질문에 답하거나 시범으로 문제를 풀
어 주거나 하는데, 넷으로도 이만큼 힘든 걸 생각하면 마히루는 더
고생이 많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마히루가 있는 곳을 찾아보니 옆 그룹의 질문에
응답하고 있었다.
공부와 관계된 질문이 하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남자의 타입…… 말인가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되새기는 마히루에게, 여자애들이 흥미진
진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소문의 그 남자에 관해 완고하게 대답하지 않는 마히루에게 질문
수단을 바꾼 듯, 간접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캐내려는 것이리라. 마히
루도 그 남자가 연인이라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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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말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하


다.
큰 소리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주위에는 다 들렸는지, 이 교실에 있
는 모든 학생이 문제를 풀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조건으로는, 자상하고 성실한 사람일까요.
불성실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얼굴 취향은?”
“내면을 중시하니까 외모는 심하게 안 따지지만, 청결한 느낌이 나
는 사람이 좋아요.”
부드러운 미소와 눈빛으로 말하는 것은 남자 취향보다는 인간적인
취향 같아서, 말을 얼버무리는 것처럼 들리고 만다.
사실상 결론이 뻔한 이야기라고 질문한 여자애도 느낀 듯 아쉬운
눈치로 마히루를 봐서, 마히루는 평소의 미소에 조금 씁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 말고 중요한 거라면, 가치관이 맞는 사람……일까요.”
“가치관? 취미가 아니라?”
“네, 가치관이에요. 완벽하게 일치하는 걸 바라지는 않으니까 딱
맞지 않아도 되지만요. 맞지 않더라도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할 줄 아
는 사람을 선호해요. 자기 뜻을 억지로 밀어붙이려고 들지 않고, 상
대의 뜻을 억지로 굽히려고 하지 않고, 상대의 생각을 소중하게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이 좋아요. 같은 시야를 가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대가 보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옆에서 받아들여 주
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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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무리하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은 마히루는 아주 잠깐 아마


네를 슬쩍 봤다.
무심코 시선을 피하고 말았지만, 마히루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질
문한 여자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네도 자꾸 쳐다본다고 주변에서 인식하면 곤란하니까 자신의
노트에 눈길을 줬는데,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는지 옆자리에서 이
츠키가 피식 웃었다.
“다들, 잘 들었어?”
이츠키는 모두가 문제를 풀다가 멈춘 것을 지켜본 듯하다. 같이 공
부하던 반 아이들도 흠칫 놀라서 이를 얼버무리듯 시선을 내렸다.
아마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노트를 넘기고 포스트잇을 붙이
면서, ‘가치관이 맞는 사람’이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마히루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다.
오래 사귀고, 결혼을 전제로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곁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을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리라.
“천사님은 사고방식도 어른스럽네.”
“뭐, 시이나가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고 보지만.”
반 아이들의 감상에 무심코 중얼거리자 시선이 모여서, 아마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치관이 안 맞는 사람과 사는 건 힘들 테니까, 함께 있으면서 마
음이 편한 사람 곁에 있고 싶겠지. 가령 가치관이 다른 상대에게 맞
추려고 해도, 얼마 못 가서 삐걱거리다가 관계가 틀어질 테고. 나라
면 처음부터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거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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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것도 허용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


렇다. 사이가 가까워져도 둘 중 하나가 참다가 끝내는 파탄이 날 게
뻔하니까, 처음부터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너도 참 신랄하구나. 그러는 후지미야의 여자 취향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데…….”
“그냥 착한 사람이 좋아.”
“진짜 대충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더 바라는 건 없어?”
“더 바라는 거라고 해도 말이지. 마음이 잘 맞고, 자상하고 양식이
있는 여자가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누구나 좋아할 사람이잖아.”
“말이 많네. 불만 있어?”
“불만은 없는데, 너무 일반론 같아서.”
“그렇다면…… 반한 사람이 취향인 걸로 하자. 좋아하는 사람이 그
때의 취향인 거지.”
너무 구체적으로 대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떠드는 꼴이니까 되
도록 범위를 넓혀서 얼버무리자, 뒤에서 키득 웃는 듯한 숨소리가 들
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귀여운 말을 하네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이 살짝 굳는다.
왜 여기 있냐고, 혹시 내가 한 말을 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
지만 마히루가 여기 오는 것은 딱히 이상할 게 아니고, 가까이 있으
면 당연히 들릴 테니까 말을 도로 삼켰다.
의식한 것을 들키지 않게 표정을 죽이고 마히루를 보지 않은 채로
“거참 미안하게 됐군.”이라고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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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천사님을 차갑게 대하면 인상이 나빠질 것 같지만, 애초에


아마네는 평소 무뚝뚝하니까 이쪽을 보는 같은 반 아이들도 딱히 놀
라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시이나 양.”
“늦어져서 미안해요. 이쪽 자리에는 별로 안 와서 부끄럽지만……
모르는 부분은 없나요?”
저쪽 일이 얼추 끝나서 이쪽 상황을 보러 온 듯, 미안한 투로 눈치
를 보고 있다. 의도해서 아마네의 옆에 선 건지는 모르겠지만, 심장
에 해롭다.
같은 그룹에 있던 남자들은 서로 얼굴을 살핀 뒤, 마찬가지로 표정
에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 괜찮아. 후지미야가 가르쳐 줬거든. 우리도 갑자기 참가해서
미안해.”
“아뇨. 애초에 제가 감당할 인원을 파악하지 못하고 참가자를 늘린
게 원인이니까요. 저도 미흡했어요. 하지만 후지미야 씨가 가르쳐 줘
서 안심했어요.”
악의는 하나도 없이 “후지미야 씨는 공부를 잘하니까요.”라고 웃으
면서 말하는 바람에 영 찜찜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칭찬해 줘서 고
마운걸.”하고 대꾸했다.
그 뒤로 곧바로 야유로 들리지 않았을까 싶어서 시무룩한 기색으로
마히루를 봤는데, 마히루는 다 안다는 듯이 자애로운 눈으로 아마네
의 시선을 맞이했다.
“후지미야 씨는 다른 사람을 잘 챙기고, 공부도 잘 가르치는군요.”
“내가 남을 잘 챙겨? 대체 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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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고, 치토세 양과 아카자와 씨를 챙기는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잘 지켜보고 있잖아요? 상대
가 곤란해할 때는 금방 도와주려고 하고요.”
온화하게 웃으면서 “잘 보면 금방 알아요.”라고 말하자 자연스럽게
입술에 입이 들어갔다.
마히루는 종종 아마네를 칭찬하려고 하는데, 이런 데서 잘 본다는
소리를 듣거나 칭찬받거나 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해서 시선이 이리
저리 헤매고 만다.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네.”
“이츠키, 넌 입 다물고 있어. 대단한 일은 아니야. 평범한 거라고.”
“그게 평범하다는 점이 대단한 건데요.”
마히루가 싱긋 웃는 바람에 아마네는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아마네를 이츠키가 책상 아래에서 뭔가 보채는 듯이 발끝으로
툭 쳤다.

공부 모임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서, 아마네는 비로소 무거웠던 어


깨의 짐을 내린 것처럼 가볍게 몸을 풀었다.
마히루는 여전히 평소처럼 미소를 짓고 친한 사람만 아는 눈으로
다정하게 이쪽을 보질 않나, 그걸 보는 이츠키는 몰래 책상 아래에서
쿡쿡 찔러대질 않나, 같은 그룹에 있는 남자들도 아마네가 점차 익숙
해졌는지 털털하게 대하질 않나. 좋든 나쁘든 피곤했다.
평범하게 대화할 사람을 새로이 구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역시 마
히루가 있어서 미묘하게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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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같은 그룹 남자들도 공부 모임이 끝나면서 커피와 과자를 대가로


아마네에게 노트 복사를 부탁하고 하교했다.
볼일이 있거나 생각보다 진지했던 공부 모임에서 바라던 것을 찾지
못하고 도중에 나간 아이들도 있으니까, 이들은 제법 성실했던 거라
고 속으로 감탄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마히루는 끝까지 남아서 교실 청소와 정리, 교무실에 열쇠를 반납
하는 일을 맡았다. 다른 아이들이 같이 가자고 했지만, 주최자로서
뒷정리와 볼일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혼자 남으려는 것을 아마
네가 만류했다.
같이 교실을 쓴 처지이고 마히루를 너무 늦게 내보냈다간 위험할
것 같아서 둘이서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츠키와 치토세도 붙잡
아 둘 걸 그랬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영문도 모를 이유로 신경을 써 주고 둘이서 먼저 귀가한 것에 살짝
원망하면서,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마히루와 둘이서 나란히 걷는다.
동아리 활동을 쉬는 기간이고 이미 해가 저무는 마당이라 교직원과
일부 학생만이 학교에 남아 있으리라. 학교에서 단둘이 있는 것은 별
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한걸. 방해한 걸지도 모르고.”
“아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저 혼자서는 다 처리할 수가 없었으
니까요. 설마 그토록 늘어날 줄은…… 중간에 끼어든 분도 있어서,
예상을 넘어서 인원이 많아졌네요.”
“천사님은 역시 굉장한걸.”
“아이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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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시선을 받아서 모르는 척


그냥 흘렸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칭찬한 복수로 쳤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다들 성실하게 임해 주어서.”
“중간중간에 잡담도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다들 진지했어. 나
도 방심할 수는 없겠는걸.”
“후지미야 씨는 항상 성실하게 공부하니까 말이죠. 이번 시험은 예
전보다 힘을 쏟는 것 같은데요.”
“뭐…… 여러모로, 노력해 보고 싶어서.”
공부든 운동이든 최대한 노력해 보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인기
척이 뜸하고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이 있어서 곁에 있지만, 아무런 이
유가 없이 함께 있어도 손가락질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마네가 왜 노력하는지 그 진짜 이유를 모르는 마히루는 미소를
짓고 “참 기특하네요.”라고 말하더니 마침 도착한 신발장 앞 현관에
서 아마네를 돌아봤다.
“벌써 해가 저물었네요.”
“그러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아마네는 마히루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
음을 깨달았다.
항상 남들에게 보여주는 미소가 아니다. 평소 둘이서 있을 때 보이
는, 친근하게 아주 조금 기대가 섞인 웃음이다.
뭘 원하는 걸까 싶어서 몸을 굳혔는데, 예전에 한 이야기에서 왠지
모르게 마히루의 요구를 짐작하고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바래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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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아무래도 정답인 듯, 마히루가 백자 같은 볼을 아주 조금 장밋빛으


로 물들이고 호를 그리듯 입가를 희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참 친절하군요.”
“놀리는 거야……? 지금 내가 말하게 시킨 거잖아.”
“후후.”
정말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도 마히루에겐 다 들렸는지 살갑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마히루를 보고 “이게 진짜.”라고 투덜댄 다음, 신발을 갈아신
고 현관을 나선다. 그 뒤를 마히루가 다소곳하게 따라와서, 아마네는
마히루의 걸음걸이에 맞춰 걷는 속도를 줄이고 들리라는 듯이 한숨
을 쉬었다.
(아마도 다 알면서 그런 거겠지…….)
어찌 보면, 사실은 아마네가 원해서 말을 꺼냈다는 것을.
이런 시간까지 같이 남아서 기다린 것은 마히루를 혼자 두지 않고
바래다주려는 이유가 있었음을.
다만 단둘이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 뒤나 앞에서 걸을 작정이어서
함께 나란히 귀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도 내다보고 바래다주기
를 재촉한 셈이니 아마네로선 마히루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
다.
“시이나는 여자니까, 너무 늦게 다니지 마.”
“친절하네요. 평소엔 조심해서 귀가하고 있고, 오늘은 후지미야 씨
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요.”
“그러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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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서 왠지 불안한 가로등의 불빛에 비친 마히루의 미소가 조명


보다도 환해서, 아마네는 도망치듯이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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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다 같이 시험공부

“후지미야, 안녕.”
“안녕.”
어제 공부 모임 덕분인지 함께했던 그룹의 남자들이 가볍게 인사해
주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어제 귀가한 뒤에도 마히루는 시종일관 기
분이 좋은 눈치였다.
손을 슬쩍 흔들어서 대답하면서 자신의 자리에 짐을 내려놓자 먼저
학교에 온 이츠키와 유타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이츠키한테
서 왠지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예상대로 이츠키의 웃음이 싱글벙글에서 히죽히죽으로 변했기에,
무심코 혀를 찰 뻔했다.
“어제는 어땠어?”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네 얼굴이 징그러워.”
“아, 후지미야는 공부 모임에 참가했지? 나는 볼일이 있어서 못 갔
지만, 무슨 일 있었어?”
유타는 참가하지 않아서 이츠키가 히죽히죽 웃는 이유를 모르는 듯
하다.
굳이 설명할 마음은 없는지라 질색과 짜증을 섞은 표정으로 이츠키
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없었어. 그냥 유익한 공부 모임을 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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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너 말이야…… 내 배려를 뭐라고.”


“쓸데없는 오지랖이었거든? 확실하게.”
이츠키가 먼저 사라지지 않았어도 바래다줄(실제로는 귀가하는 장
소가 거의 일치하므로 같이 귀가한다는 표현이 맞지만) 작정이었지
만, 이츠키와 치토세가 같이 있었으면 확실하게 마음도 더 편하고 다
른 사람들 눈을 신경 쓸 일도 없었으리라.
“나는 보채지 않아도 천천히 갈 테니까 별로 상관없어.”
“너무 답답하니까 밀어주는 건데…….”
“시끄러워. 복사한 노트 안 줄 거다.”
“윽. 이번에는 물러나 주마. 목숨을 건졌군.”
“네가 말이지.”
누가 봐도 시간이 촉박하고 여유가 없는 것은 시험이니까, 이츠키
만 곤란할 뿐이다. 공부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성적이 나오는 남자이
긴 하지만, 취약 분야는 공부하지 않고선 무리라고 본인 입으로 말한
바 있다.
파일에서 복사한 노트를 건네자 “이걸로 이긴다.”라고 기뻐했는데,
집에 가서 멀쩡하게 공부할지 의심스럽다.
덤으로 어제 부탁받은 것을 아까 인사한 남자들에게 주러 갔더니
머리를 조아리고 과자를 바쳐서, 어쩌다 보니 아마네의 짐이 더 늘었
다.
“다른 사람을 잘 챙기네요.”
과자를 안고 돌아온 모습을 본 이츠키가 어제 들은 마히루의 평가
를 그대로 주절대는 바람에, 아마네는 뺨을 실룩이면서 “공짜도 아
니고, 너한테 줄 걸 복사하는 김에 같이 한 거야.”라고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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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유타는 여전히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조금 아쉬운 듯이


눈썹이 처졌다.
“나도 어제 참가할 걸 그랬어. 왠지 즐거워 보이니까. 다 같이 공부
하고 싶었는데.”
“즐거운 건 나를 놀린 이츠키였지, 놀림당한 나는 즐겁지 않았지
만.”
“자꾸 그런 소릴 하네.”
“워워. 이츠키도 사랑이 있어서 놀리는 거야. 분명. 아마도.”
“왜 나를 의심하는 건데?”
“너무 놀려서 가끔 기분을 상하게 하니까, 그게 정말 사랑인지 고
민되는걸. 적당히 해. 후지미야는 시간이 지나면 용서하겠지만, 넘어
서는 안 될 선을 잘 봐야지.”
“괜찮아. 그 정도는 잘 보고 하니까.”
“이 자식, 짜증 나네.”
이츠키도 정말로 화가 날 정도로, 아마네가 불쾌하게 느낄 만큼 놀
리는 일은 없다. 다소 짜증이 나기는 해도 불쾌할 수준은 아니다. 기
껏해야 울컥한 아마네가 가볍게 찰싹 때리는 선에서 그치고 있고, 이
츠키도 좀 맞았다고 불만을 토하진 않으니까 정말로 알기는 하는 거
겠지.
그런 눈치가 장점이면서, 반대로 짜증을 유발하는 점이기도 하지
만.
“참아. 이츠키가 조금 지긋지긋한 것은 원래 그런 거니까.”
“은근슬쩍 말이 심한데, 유타. 너, 쓴소리 캐릭터였어?”
“요새는 이츠키한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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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너무해! 강력하게 항의하겠어!”


“아하하.”
웃어서 넘어가는 유타에게 이츠키는 노골적으로 분개한 태도를 보
이지만, 척 봐도 정말로 화내는 것은 아니다. 이츠키도 놀림받을 때
가 있으니까 아마네도 속이 풀린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행동으로 보
여주고 있다.
이런 구석까지 합쳐서 미워할 수가 없으니까, 아마네도 슬며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말이야. 이츠키는 일단 무시하고.”
“무시하지 마.”
“이츠키가 입을 열면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으니까 잠시 조용히 있
어. 나도 너희랑 공부하고 싶거든. 토일 중에서 하루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순순히 유명 토끼 캐릭터처럼 입을 꼭 다문 이츠키를 무시하면서
“안 될까?”라고 물어보는 유타에게, 아마네는 딱히 볼일도 없고 유
타라면 그냥 공부 모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아마네 자신은 딱히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어디서?’라는 의문이
떠올렸다.
“참고로 묻겠는데, 어디서 하게……?”
“아, 나는 안 돼. 부모님이 다 있으니까 정신이 사납다고 할까, 분
위기가 거북할걸.”
이츠키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현재 부모 자식의 사이가 나쁘
다는 사실에 아마네는 속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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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우리 집에서 해도 딱히 상관없긴 한데, 누나들이 자꾸 방해해서


공부하기는 좋지 않을걸.”
“누나가 있어?”
“응. 둘 있어. 조금 귀찮게 군다고 할까, 기가 센 사람들이라서 아
마도 후지미야는 버거울 거야.”
유타가 그렇게 말한다면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누나들인 거겠
지. 굳이 말하자면 아마네가 꺼리는 타입의 여자들 분위기가 느껴져
서, 가능하다면 사양하고 싶다.
그렇다면 형편이 좋은 곳은 아마네의 집이다.
이츠키는 평소 들이는 일이 많고 유타도 부르는 것 자체는 상관없
지만, 그 집은 아마네 혼자 지내는 곳이 아니다.
마히루가 항상 아마네의 집에서 머무는 것은 아니지만, 친절하게
밥을 차리러 오거나 같이 공부하거나 하므로 집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그래도 허가를 받지 않고 손님을 들이는 것은 아닌 듯해서
모호하게 웃었다.
“잠깐 다른 사람에게도 물어봐도 될까?”
“아, 그랬지. 막 쳐들어갈 순 없으니까.”
“사랑의 보금자리니까 말이지.”
“넌 진짜 입 좀 다물어.”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째려봤지만, 이츠키도 신경
을 써서 목소리를 낮췄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는 반 아이들은 없는 듯
했다.
거참 못 말리겠다고 한숨을 쉬면서, 지금은 교실에 없는 마히루를
떠올리고 눈을 내리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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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저기, 마히루. 내일 이츠키랑 카도와키가 우리 집에서 같이 공부


하고 싶다는데, 그래도 될까?”
저녁 식사 후, 같이 싱크대로 그릇을 챙겨 가면서 마찬가지로 식기
를 옮기는 마히루에게 물어봤다.
이츠키의 사정에 맞춰 기왕이면 내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아슬아슬하게 직전에 물어보게 되는 바람에 왠지 미안했지만, 마히
루는 한 번 눈을 크게 깜빡이기만 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였다.
“딱히 상관없어요. 여러분 식사도 챙기면 될까요?”
“아니, 그러면 미안한데…… 그래도 그렇게 해 주면 고마워. 괜찮
겠어……?”
“양만 늘어나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수고가 늘어나리란 것은 쉬
이 상상할 수 있다. 자기 일도 처리해야 할 텐데도, 아마네의 예정에
맞춰 주는 마히루가 정말로 고마울 따름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저도 동석해도 되나요?”
“너만 괜찮다면 걔들도 괜찮대. 치토세도 부를까? 뭐, 시간이 날지
어떨지는 모르고, 걔가 주말에도 성실하게 공부할지는 의문이지만.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조금 불안하려나.”
치토세는 별로 성실하지 않다. 공부를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어제는 공부 모임에 참가했지만, 진척은 별로 없었는지 맥없이 ‘시
험 망한 것 같아.’라고 말했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애초에 이미 불렀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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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말이죠. 이번 시험에서 점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혼날 거라고 해서, 마침 오늘 치토세 양과 토요일에 같이 공부하기로
약속했어요.”
“그쯤 되면 치토세도 노린 거 아니야?”
이츠키가 공부 모임 이야기를 치토세한테 한 것 같지만, 확증은 없
다. 다만 이츠키를 통해 정보가 흘러나간 확신은 있으니까 ‘그 자식
도 참.’하고 쓴웃음이 나왔다.
그걸 처음부터 말하라고 생각하면서 기름때가 묻은 그릇을 뜨거운
물로 싹 헹구고 설거지를 시작하니 마히루도 살포시 웃고 남아서 식
힌 반찬을 밀폐용기에 담시 시작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시끌벅적한 공부 모임이 될 것 같네요.”
“마히루 넌 조용하지 않아도 되겠어?”
“저는 괜찮아요. 게다가 평소에도 공부하니까 별로 조급하지도 않
고요.”
마히루가 평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 이토록 여유롭게 말하
는 것임을 잘 알기에, 딱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그토록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는 궁금하지만.
“저기, 마히루. 나중에 네가 필기한 노트를 봐도 될까?”
“괜찮아요. 그런데 아마네 군의 노트도 참 깔끔했는걸요. 인기도
많았고요.”
“노트가 말이지. 뭐, 그럭저럭 내용을 잘 정리하니까. 그래도 학년
1등의 노트는 어떨지 궁금해.”
“기대할 정도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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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키득 웃고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넣었다.


냉장고에 들어간 저녁밥은 내일 아마네의 아침밥이 되므로, 설거지
를 하면서 속으로 마히루에게 절을 올렸다. 저녁밥만이 아니라 아침
밥도 마히루가 손수 만든 것을 먹을 수 있어서 매일 알차고 건강한
식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아마네 군, 이번 시험에는 정말로 힘을 쏟으려는 의욕이 넘치네
요.”
“뭐 그렇지. 여러모로 자신감을 키우고 싶고, 기왕이면 최선을 다
해 보려고 해. 한 자릿수 등수가 나오면 좋을 것 같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조금만 더 의욕이 나게 해 줄까요?”
“의욕을?”
“아마네 군이 10등 안에 들면, 뭐든 원하는 걸 해 줄게요.”
“뭐……?”
한순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경직하는 바람에 하마
터면 손에 있는 그릇을 싱크대에 떨어뜨릴 뻔했다.
마히루가 아끼는 그릇을 깨뜨릴 뻔했다는 사실에 정신을 번쩍 차리
고 심호흡했다.
다음으로 옆을 힐끗 보니 여전히 여유롭게 웃는 마히루가 밀폐용기
뚜껑을 닫고 있었다.
“예전에 부탁하면 기본적으로 뭐든 하겠다고 말했지만요. 이번에는
꼭 상을 챙겨 주려고요. 아마네 군이 평소 잘 부탁하지 않는 소원이
라도 들어줄 건데요?”
“여자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못써…….”
“어머, 아마네 군은 위험한 소원을 말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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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놀리듯이 물어보며 고개를 갸우뚱


하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의 미간에 주름이 지는 건 당연하리라.
아마네의 소원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예상한 듯하다.
슬그머니 마히루에게 시선을 주자 재밌다는 듯이 웃고 아마네의 옆
에 딱 섰다. 왠지 기대하는 기색이 은근슬쩍 보이는 것은 진짜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만약 위험한 소원을 말하면…… 마히루 넌 어쩔 건데?”
“내용을 들어야 알겠지만, 아마네 군도 남자구나 하고 감탄하고서
들어줄게요.”
마히루는 정말로 아마네의 소원을 들어줄 작정이리라. 물론 아마네
가 억지로 몹쓸 짓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겠지만, 듣는
사람으로선 갈등하고 만다.
억지로 밀어붙이고 싶진 않지만, 좋아하는 여자애가 뭐든지 해 주
겠다고 하면 여러모로 생각하고 만다. 실제로 입 밖에 낼 일은 없겠
지만, 남자의 망상이 아주 조금 머릿속을 스친다.
마히루를 힐끗 보니, 본인은 얼마든지 말하라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해서, 자신의 추악함을 콕 집어내는 것만 같았
다.
“그러면…… 예전에 해 준 무릎베개를.”
가까스로 꾹 참은 아마네는 고민한 끝에 미묘하게 욕망이 섞인, 마
히루가 자진해서 할 것 같으면서 아마네 자신은 평소 부탁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소원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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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안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졌다. 이 정도는 괘씸한 소원이


아닐 거라고 이성의 통제가 느슨하게 풀린 탓도 있었다.
말한 직후에야 나도 참 뭘 부탁하는 거냐고 부끄러워져서 신음하려
는 아마네 앞에서, 마히루는 여러 번 눈을 깜빡인 다음 아마네의 얼
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귀엽게 활짝 웃더니 “좋아요. 귀 청소도 덤으로 해 줄
테니까 마음껏 응석을 부려 주세요.”라고, 아마네가 10등 안에 들어
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로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안녕하세요. 들어갈게요.”
시험 전 토요일. 약속한 대로 이츠키, 치토세, 유타 이렇게 세 사람
은 10시경에 찾아와 한목소리로 인사하고 현관에서 복도로 들어왔
다.
이들은 중학교 때 같은 통학구역인 것도 있어서 먼저 합류해서 온
듯하다. 애초에 유타가 아마네 집 위치를 모르니까 그렇지만, 단순히
사이좋다는 이유도 있으리라.
“응, 어서 와.”
“마히룽은?”
“주방에서 점심에 쓸 걸 준비하고 있어.”
마히루는 먼저 아마네의 집에 와서 점심 재료를 손질하고 있다. 아
침 일찍 문을 연 슈퍼에 서둘러 재료를 사러 뛰어갔었으니까 점심 식
사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덧붙이자면, 오늘은 로스트비프를 만든다고 들었다. 만들어서 숙성
시키면 점심에는 적당히 부드러운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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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완전히 자기 집이네…….”
“조용히 해.”
“이제는 직장 동료를 맞이하는 새색시 느낌도 나.”
“자꾸 말하면 점심밥 안 준다.”
“싫어-! 마히룽이 해 준 밥 먹을래-!”
이상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투덜대면서 유타를 보니, 유타는 조금
넋이 나간 듯이 아마네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시이나 양이 아주 자연스럽게 후지미야의 집에 있는 것 같
아서.”
“어쩔 수 없잖아. 매번 식사를 챙겨 주니까.”
고개를 홱 돌리자 이츠키가 자기 입을 막고 웃는 게 보였는데, 그게
마치 어머니의 따스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성질이 뻗쳐 다
리를 살짝 걷어차 주었다.
“다들 어서 오세요…… 어? 아카자와 씨는 왜 그래요?”
“신경 쓰지 마.”
마히루가 봤을 때는 이유도 없이 잘 모를 웃음을 띤 이츠키를 걱정
한 거겠지만, 이건 걱정해 줄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신경을 껐으면
좋겠다.
아리송한 눈치를 보이면서도 신경을 쓸 일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한
마히루가 언제나 보여주는 미소를 짓고 “저는 조금 더 준비할 게 있
으니까, 먼저 거실로 가세요.”라며 앞치마를 펄럭이고 주방으로 돌
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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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본 이츠키가 “역시 새댁 느낌이 철철 넘치


네.”라고 중얼거린다. 좌우지간 이번에는 등짝을 때려 주었다.
“자, 공부해요.”
재료 준비를 마친 마히루가 아마네 옆에 앉았다. 왜 아마네 옆이냐
하면, 나머지 세 사람이 그렇게 획책했기 때문이다.
“네~.”
“저기, 치토세 양은 어느 범위를 잘 모르겠나요?”
“전부.”
“저, 전부…….”
“치이는 수학을 하나도 못 하니까. 아슬아슬하게 낙제점만 피하고
있어.”
치토세는 공부가 전혀 꽝인 게 아니지만, 수학은 몹시 쥐약인 듯 매
번 낙제점만 신기하게 잘 피하는 성적을 내고 있다.
전부라는 말을 듣고 마히루는 얼굴을 희미하게 굳혔지만, 실제로
못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기초는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리라.
“기본적으로 얘는 응용문제가 꽝이니까, 응용문제에 어떤 공식을
써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게 좋을 거야.”
“공식은 문제가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아마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마히루는 그 부분부터 애써 줬으면 좋
겠다. 치토세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공식 활용을 몰라서 풀지 못
하는 게 맞기 때문에 그 부분만 잘 이해하면 그럭저럭 좋은 점수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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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이츠키는 공부 의욕을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하하하.”
“웃어 넘기려고 들지 마. 공부해.”
대체 뭘 위해서 공부 모임을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유타, 아마네가 너무 빡세게 굴어.”
“이츠키 넌 이제 좀 성실하게 굴어.”
상큼하게 미소를 짓는 유타에게 도움을 거부당한 이츠키가 어깨를
힘없이 축 늘어뜨렸다.
유타는 성실하게 노트를 펼치고 공부를 시작하고 있으니까, 이츠키
와 치토세도 좀 본받으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유타는 이거다 할 정도로 힘든 과목이 없는 듯, 뭐든지
평균보다 잘하는 우수한 남자다.
아마네도 딱히 힘든 과목은 없으니까 이제는 암기와 응용력만 연마
하면 된다.
치토세의 가정교사는 마히루에게 맡기고, 아마네는 자신이 공부할
용도로 준비한 세계사 교과서에 시선을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마네와 친구들은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 결국


집중력이 떨어진 치토세가 간식 시간대에 “힘들어~.”라며 드러누웠
다.
“아마네~ 게임해도 돼?”
“노는 건 자유지만, 네 성적이 어떻게 되어도 난 몰라.”
“아잉~ 잔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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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기분 전환으로 노는 건 좋지만, 넌 기본적으로 왕창 노니까 말이


지. 너 혼자서 조절할 수 있다면 놀아.”
아마네가 참고서에 실린 문제를 풀면서 “난 계속 공부할 거야.”라
고 대꾸하니 미묘하게 볼을 부풀린 치토세가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치토세라면 슬슬 질릴 거라고 예
상했으므로, TV 선반에 둔 게임기에는 게임 소프트와 컨트롤러를 4
인분 갖춰 두었다.
애초에 인간의 집중력은 계속 유지되지 않는 법이라, 숨을 돌릴 정
도로 끝낼 수만 있다면 놀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마네는 한 시간마다 잠깐씩 쉬고 있어서 오래 휴식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고, 공부 자체를 싫어하지 않으므로 의외로 오랫동안 계속
할 수 있다.
“아마네가 차가워~.”
“공부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온 거잖아. 뭐, 놀아도 상관없어. 컨트
롤러도 네 개 있으니까, 휴식하는 김에 해 보는 게 어때?”
“그렇게 말한다면 할래. 너무 숨 막히게 공부하면 안 되거든?”
“나는 중간에 쉬고 있어.”
“공부벌레야? 그야 뭐, 아마네는 원래 성실했지만. 그러면 난 놀래
~. 잇군도 같이 놀래?”
“그러면 좀 놀아 볼까. 너무 몰입할 정도론 하지 않겠지만.”
이츠키도 두세 시간 연속으로 공부해서 지친 듯, 게임을 할 의사를
내비쳤다.
“유타도 할래?”
“나도 할까. 후지미야,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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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응.”
이츠키와 치토세보다 성실한 유타도 잠깐 휴식할 겸 게임에 흥미를
보여서, 아마네는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를 보이고 다시 참고서로 눈
길을 돌렸다.
덧붙이자면, 마히루는 옆에서 조용히 문제집을 풀고 있다. 집중력
이 풀린 낌새도 없다.
“마히루는 같이 안 놀아?”
“저는 조금 더 공부할게요.”
“그래.”
아마네는 이번에 성실하게 공부하기로 맹세했으니까 중간에 그만
두지 않는 건데, 마히루는 원래부터 이토록 근면하니까 감탄할 수밖
에 없다.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 항상 1등을 지키는 거겠지만, 그만큼
노력하는 부분이 마히루의 장점이자 대단한 점이리라.
아마네는 이츠키, 치토세, 유타가 책상을 떠나 TV 앞에 진을 치는
것을 본 다음, 세 사람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샤프펜슬을 움
직였다.
샤프심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와 지우개를 문지르는 소리, 옆에서
마히루의 숨소리가 괜히 크게 들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나게 노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어슴푸레 들
리는 가운데, 교사들의 출제 성향을 떠올리면서 시험 문제로 나올 법
한 것을 중점적으로 풀었다.
1학년 때부터 계속해서 같은 과목을 맡은 교사도 있는데, 그런 교
사가 내는 시험은 의외로 마음이 편하다. 성격이나 수업에서 뭘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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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하게 보는지에 따라 어느 부분을 문제로 낼지 작년 한 해 동안 잘 파


악했다.
올해부터 가르치는 교사들이 내는 문제는 이 시험과 쪽지 시험으로
출제 성향을 파악해 나갈 심산이다.
치토세한테도 일단 어느 선에서 나올 거라고 예상되는 것을 포함해
서 가르쳐 주고 있다. 특정 범위만 파서 대박을 노리는 것에 가깝지
만, 많이 벗어날 일은 없을 테니 중점적으로 학습하면 낙제점은 피할
수 있겠지.
“아마네 군, 드세요.”
묵묵히 문제를 풀기만 했더니 어느새 옆에 있던 마히루가 일어서서
아마네 앞에 커피컵을 놓았다.
작은 각설탕 하나와 포션 밀크를 넣은 것으로 보이는 커피를 보니
표정이 풀어진다.
“평소처럼 마실 거죠?”
“응. 땡큐.”
반년이나 곁에 있어서 그런지 서로 입맛의 기호를 잘 안다.
마침 마시고 싶어지던 차에 가져다준 마히루에게 감사하면서 컵 손
잡이를 잡았을 때, 아마네는 커피 말고도 작은 접시가 있는 것을 깨
달았다.
“이건 뭐야?”
“피낭시에라고 해요. 어제 구웠어요. 공부할 때는 당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작은 접시에 연한 갈색을 띤 한입 크기의 피낭시에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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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친절하게도 손이 더러워지지 않게 작은 픽을 꽂은 걸 보면, 공부하


면서 간식으로 먹을 전제로 크기와 모양을 미리 잡은 것이리라.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는 세 사람의 몫도 다 준비한 듯, 이쪽에는 3
인분으로 조금 많게 넓은 접시에 담아 디저트용 픽을 같이 뒀다.
커피도 세 사람의 컵을 따로 준비했는지, 이쪽은 설탕과 우유를 자
유롭게 챙기는 스타일로 설탕 스틱과 포션밀크가 쟁반에 같이 있었
다.
“여러분도 드세요.”
미소를 지으면서 세 사람에게 슬며시 다가가 TV 앞에 있는 작은 테
이블에 쟁반을 올렸다.
“와~! 고마워, 마히룽!”
“우와, 간식이다. 딱 좋은 시간대네. 고마워, 시이나 양.”
“뭘요.”
간식이 나와서 기뻐하는 세 사람을 기쁜 눈치로 보면서 자리로 돌
아오는 마히루를 본 아마네도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왠지…… 너무 준비를 많이 시켰는걸.”
“아뇨.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요. 공부하면서 틈틈이 한 거니
까 숨을 돌리기 딱 좋아요.”
“너도 참 지극정성이구나, 정말로.”
“정성을 바치고 싶은 사람한테 하는 거니까요.”
조용히 말하는 것을 듣자 목에서 뜨거운 게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밖에 나오기 전에 꾹 집어삼키려고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
가 달게 느껴져서 참을 수 없다. 설탕의 양은 평소와 똑같을 텐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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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몹시 달게 느껴진다.
싫지는 않은 단맛과 마히루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서, 아마네는 자기 자신에게 얼버무리듯 참고서로 눈길을 돌릴 수밖
에 없었다.

결국 게임 대회는 오후 늦은 시간대까지 이어졌다.


공부만 계속하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중간부터는 공부를 잠시 접
고 아마네도 참가했다. 물론 집중력이 떨어진 게 계속해서 자습만 한
탓은 아니지만.
(정성을 바치고 싶은 사람에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
마히루가 나지막하게 한 말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원래부터 마히루가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임은 잘
알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마치 아마네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들리
지 않을까.
그야 아마네는 마히루가 자신을 좋게 본다고 생각하지만, 남녀 관
계의 의미는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으면 좋아하는 남자라서 정성을 바치는 게 아
닐까…… 하는 망상도 끓어오른다.
(아니지. 인간적으로 봐서 내가 틀려먹었으니까 정성을 다한다고
할까, 돌보고 싶어지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마네는 집안일을
못 한다. 아니지, 노력하면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할 줄 알
지만, 너무 마히루에게만 의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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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 주고 싶다는 의미로 말한 건지, 아니면 좋아해서 돌보고 싶어


진다는 건지,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마히루를 좋아하는 아마네로선 후자를 기대하고 싶고,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도 생각하지만, 자신이 마히루가 좋아할 만한 남자인
지 하는 자문자답이 시작되고 만다.
“아마네, 장외로 떨어졌어.”
“어?”
게임 도중에 생각에 잠긴 탓에 조작을 실수해서 자신의 캐릭터를
추락시켰다. 남은 목숨이 없어서 부활하지 못하는 바람에 탈락하고
말았다.
이츠키, 치토세, 유타는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원래라면 유타의 실력이 어떤지 몰라도 시작하자마자 지는 일은 없
을 것이다. 그만큼 마히루가 한 말에 신경을 집중한 것이리라.
“역시 공부하느라 집중력이 떨어진 거 아니야? 멍 때리고 있잖아.”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마히루, 다음에 할래?”
“아뇨. 저는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시계를 힐끗 보는 마히루를 따라 눈을 돌리니 벌써 오후 7시가 다
됐다. 저녁 준비를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대이리라.
“아, 진짜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난 집에 가야겠는걸.
아무리 그래도 자고 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게. 치이는 시이나 양 집에서 자고 싶겠지만, 갈아입을 옷은
없겠지. 시이나 양한테 미리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치이는 시이
나 양과 옷 사이즈가 안 맞을 테니까.”
“잇군, 어딜 보고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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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신장을 보고 말한 겁니다.”


커플이 평소처럼 사이좋게 티격대는 것을 마히루가 웃으면서 지켜
보고 있다.
“다음에 와서 자고 가세요.”
“그래도 돼?”
“네. 미리 말해 준다면요.”
“그렇다면 나도 덩달아 아마네 집에서…….”
“밥이 목적인 것 같은데.”
“들켰나.”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시이나 양이 해 준 밥은 맛있으니까 말이
지.”라고 말하는 이츠키를 보고, 아마네는 한숨을 쉬고 “마히루가
허락하면 그래도 돼.”라고 말했다.
평소보다 밥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은 마히루니까, 아마네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다.
만약 허락을 못 받는다면 외식이나 편의점을 이용해야 하겠지만,
그것도 남자들끼리 먹고 자는 느낌이 나니까 나쁘진 않겠지.
마히루는 생긋 웃고 승낙했으니까, 조만간 자러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는 카도와키도 올래?”
“어? 그래도 돼?”
“당연히 되지.”
“그러면 아마네의 등짝을 걷어차는 모임을 열자.”
“야, 왜 멋대로 이상한 모임을 만드는 거야.”
“글쎄?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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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가 히죽 웃는 이츠키를 보고 얼굴을 실룩이자, 유타는 잠시


멍하게 본 뒤 안심한 듯 웃음을 지었다.

“저기, 마히루…… 아까, 정성을 바치고 싶은 사람에게 하는 거라


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다른 사람들이 떠난 뒤, 아마네는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것을 현관
에 서서 물어봤다.
사실은 물어볼지 말지 고민했지만, 이츠키가 집을 나설 때 어쩌면
좋을까 말을 흘렸더니 ‘군소리 말고 물어봐.’라며 걷어차였다.
물리적으로 걷어차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아마네도 복수해 줬지만,
이츠키는 전혀 질린 기색이 없었으니 의미가 없을 듯하다.
마히루는 아마네의 질문에 눈을 여러 번 깜빡인 다음, 천천히 입가
에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일 것 같아요?”
“생활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한심한 남자라서 눈을 뗄
수가 없다는 의미……?”
아무리 그래도 아마네를 좋아해서 그런다는 허황된 망언은 하지 않
았다.
“후후, 그래요. 아마네 군한테서 눈을 떼는 게 무섭네요. 아마네 군
은 제가 없으면 금방 타락할 거 같으니까요.”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실제로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정말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마히루
가 없으면 아마네는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괜찮은데요? 저는 아마네 군을 보살피는 게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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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할 거야……. 마히루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될 거라고…….”


“후후.”
마히루의 무서운 점을 들자면, 이미 마히루가 없으면 아마네의 생
활과 정신 모두가 성립하지 못할 만큼 타락시켰다는 점이리라.
이런저런 의미로 마히루의 노예가 되어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 이
전에 벗어날 수가 없고, 벗어나기도 싫다. 물론 마히루를 좋아한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이런 상태로 고백해서 차이기라도 했다간 진짜로 정신과 생활이 전
부 망가질 것 같다.
그러니까 진전이 없는 거라고 말로는 표현하지 않고 자조하는 아마
네에게, 마히루는 무슨 생각인지 몸을 기댔다.
밀착하는 정도는 아니고, 아주 조금 닿는 수준. 아마네의 정면에서
다가와 고개를 들고── 검지로 아마네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얼마든지 타락시켜 줄 테니까, 안심하고 타락해 주세요.”
눈을 희미하게 뜨고 짓궂게 웃는 마히루를, 아마네는 숨을 쉬는 것
도 잊고 뚫어지게 봤다.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왠
지 모르게 요염한 느낌이 드는 웃음. 귀여운 악마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본인의 말대로 인간을 타락시킬 듯한 그 미소는 아마네의 심장
을 강타하고도 남았다.
몸속에서 심장이 날뛰고 혈액이 세차게 순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천사 같은 미소와 당장 사라질 것처럼 가녀린 미소, 순수
하게 웃는 얼굴과 함께 여러 표정으로 웃는 모습을 지금껏 보고 살았
지만, 지금의 마히루만큼 요염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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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게 굳은 아마네를 만족스럽게 지켜본 마히루가 “이제 밥을


차릴게요.”라며 평소처럼 웃고 주방으로 가는 것을, 아마네는 타오
를 것만 같은 얼굴로 그냥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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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시험 전의 한때

시험 전 일요일. 아마네는 자신의 방에서 묵묵히 공부하고 있었다.


좋은 시험 결과를 남기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히루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는 이유가 더 크다.
『얼마든지 타락시켜 줄 테니까, 안심하고 타락해 주세요.』
귀여운 악마처럼 웃으면서 그런 말을 속삭이는 바람에 마히루의 생
각으로 머릿속이 꽉 찰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의식해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마히루는 요새 아마네에게
파괴력이 강한 말을 한다. 당하는 아마네로선 기쁘기도, 버겁기도 하
다.
마히루의 의도를 모르는 만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골치를 썩이는 것을 몰아내려고 아침부터 공부에
열중했는데, 그 덕택인지 너무 집중해서 어느새 오후 2시가 지나 있
었다.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계속해서 공부했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집중이 낳은 성과겠지만,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갑자기
위장이 배고픔을 호소했다.
“점심이나 먹자…….”
오래 앉아 있어서 뻣뻣해진 몸을 풀듯이 기지개를 쭉 켜고 의자에
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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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히루도 집에서 시험을 대비해 자습한다는 듯, 낮에는 아


마네의 집에 올 일이 없다. 그러므로 점심은 아마네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마히루가 집에 온 뒤로는 식생활이 너무 풍족해졌다고 생각하면서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냉동실을 열었다.
급할 때 먹을 수 있게 양을 적게 나눈 쌀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해
동하면서, 이번에는 마히루가 만들어 둔 밑반찬 몇 개를 작은 그릇에
나누어 담아 식사의 모양새와 영양을 확보한다.
(마히루 님 만만세네.)
혼자 살 때의 아마네라면 밑반찬을 만들어 두지도 않고, 점심은 편
의점 또는 외식으로 때웠을 것이다.
지금은 집에 그럭저럭 먹을 게 있고, 아마네도 스스로 요리하는 것
을 익혔다. 물론 마히루처럼 맛있고 보기에도 좋은 데다가 영양도 있
는 식사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마히루 선생님 덕택에 조금은 그럴싸해진 솜씨로, 아마네는 간단한
점심으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달걀과 베이컨만 넣어서 수수하지만,
마히루가 만들어 둔 반찬 덕택에 식탁 전체의 모양새는 풍성하게 보
였다.
인스턴트 중화 수프를 곁들이면 간단하게 먹을 점심으로는 훌륭한
차림이 되었다.
쟁반에 올려서 다이닝 테이블로 가져가 혼자 점심을 먹는다.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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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휴일 점심을 보고 슬쩍 쓴웃음을 짓


고, 아마네는 손을 맞대고 나서 숟가락을 집었다.
입에 들어간 볶음밥은 마히루가 만든 것과 다르게 간을 진하게 했
지만, 나쁘지는 않다. 남자 고등학생이 먹기에는 딱 좋게 짭짤하다.
(정말이지, 많이 변했는걸.)
식생활이 통째로 바뀌고, 아마네 자신도 여러모로 변했다. 이런저
런 의미로 타락했다.
평범하게 보면 오히려 예전보다 멀쩡한 인간이 된 것 같기도 하지
만…… 사람은 더 좋은 환경을 알면 좀처럼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법
이다.
마히루가 있는 생활에서 옛날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마히루
가 없으면 만족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정말로 인간적으로 타락
한 거겠지.
그리고 타락한 것은 생활만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정신도 그렇
다.
아버지 슈토에게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후지미야 집안의 사람
은 하나같이 일편단심이라고 한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소
중히 여긴다고 말이다.
아마네한테도 그 피가 진하게 흐르는지, 마히루를 좋아한다고 깨달
은 때부터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던 다른 여자들이 더더욱 눈에 들어
오지도 않게 되었고, 마히루를 소중히 여기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는 마음이 강하게 생겼다.
(마히루가 아니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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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행복하다면, 마히루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아마네 자


신이 아니어도 된다. 마히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그 사람을 선택
한다면 아마네는 고민하지 않고 곁을 떠날 것이다.
마히루가 행복하게 웃어 준다면 그것이 아마네의 행복이라고 단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마네 자신이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도, 양보하기
싫다는 마음도 강하다. 마히루와 멀어지고 싶지 않고, 자신만이 진짜
마히루를 알면 된다고 하는, 모순과도 같은 감정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마히루가 없
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감정을 가슴
속에 품었기 때문이리라.
마냥 깨끗하지는 않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순수한 마음. 솔직히 말
해서 깊고 강한 사랑의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고생도 안 할 텐데.”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자연스럽게 자조하는 느낌을 줘서, 아마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16년 동안 살면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자신의 손으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상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 첫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다른 사람이 알았다간 웃
음만 살 것이다.
자신이 겁이 많고 신중한 성격임을 잘 안다. 여자와 어떻게 가까워
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성향이 마히루의 신뢰를 얻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기도 하고, 애초에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조
금만 더 적극적인 성격이 되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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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거나 운동에 열중함으로써 자신감


을 키우려고 하는 건데.
슬쩍 쓴웃음을 흘리면서, 아마네는 남은 볶음밥을 한꺼번에 털어넣
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린 뒤 스트레칭으로 뭉친 근육을 풀면


서, 아마네는 바람도 쐴 겸해서 가볍게 운동이나 하러 나가자고 결심
하고 방에서 러닝웨어로 갈아입었다.
일단은 한동안 책상 앞에만 있었으니까 기분 전환 삼아서 몸을 움
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다만 굳이 따지자면 체력이 별로 없어서, 나중에 공부할 여력을 남
기지 않았다간 밤에 곯아떨어질 것 같다.
주의하자고 명심하면서 아마네가 현관을 나섰을 때, 마침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듯한 마히루와 딱 마주쳤다.
“아, 아마네 군. 운동하러 가게요?”
옷차림으로 봐서 운동하러 외출하는 것을 알아차린 듯 아주 조금
흐뭇한 눈으로 보는 마히루에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본 마
히루 본인도 밖에서 입을 차림새 같아서, 마침 외출하려던 참이었겠
지.
한순간 어제 일을 떠올리고 신음할 뻔했지만, 조금은 차분해진 덕
분에 눈에 띄게 허둥대지는 않았다.
“바람이나 쐬려고. 그러는 마히루 넌 장 보러 가는 거야?”
“네. 그러고 보니 달걀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생각나서요. 저녁에
는 달걀말이를 만들까 해요. 내일은 시험이 있으니까, 아침밥으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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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두면 아마네 군이 애쓸 기력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요…….”


“진짜? 갑자기 기운이 나는걸.”
“너무 타산적이네요.”
입가에 손을 대고 조용히 웃는 소리를 내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어쩔 수 없잖아. 마히루가 만든 게 가장 맛있으니까.”라고 대꾸하
고 미묘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러는 거고 사실은 불쾌한 게 아니라는 사실
을 마히루도 이해하는지라,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마히루의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아, 맞다. 아까 마지막 달걀을 쓰고 베이컨도 썼어. 그리고 냉동밥
도 소비했는데.”
“어머, 스스로 점심밥을 차린 건가요? 참 잘했어요.”
“왠지 무시당한 거 같아……. 나도 네가 없을 때 가끔은 혼자 차리
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마히루가 해 주는 요리에만 의지하면 양심에 찔려서
평소 간단한 조리 과정을 도와주고 있고, 마히루가 몸이 불편해 보일
때나 피곤할 때는 자진해서 아마네가 주방에 선다.
할 줄 아는 요리에는 한계가 있어서 예정했던 식단과는 거리가 멀
어지지만, 모양새를 무시하면 마히루의 맛보다 떨어지기는 해도 그
럭저럭 먹을 만한 것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요리를 좀 했다고 이토록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
다.
“그건 알지만, 아마네 군은 혼자 있을 때 잘 챙기지 않잖아요? 혼자
있을 때는 귀찮으니까 간단히 완성되는 게 좋다면서 인스턴트 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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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을 고를 사람인걸요, 아마네 군은.”


“윽.”
“재료와 아마네 군의 레퍼토리로 봤을 때 아마도 볶음밥 정도를 만
들었을 거 같지만요. 그래도 잘 챙겨서 만들었으니까 잘한 거예요.”
성격과 행동을 모두 간파당해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아마
네를 보고 더는 참지 못했는지 “후후후.”하고 소리를 내어 웃고 아
마네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바람을 솔솔 넣듯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는 마히
루를 보고, 아마네는 입술을 꼭 앙다물었다.
싫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느끼는 만큼 정말이지 인간적으로 타락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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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슬슬 그만둬……. 이제 됐잖아.”


“어머, 아쉽네요. 더 하고 싶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손을 떼고 온화하게 웃는 마히루
앞에서, 아마네는 입술이 미묘하게 웃는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면
서 고개를 홱 돌렸다.
“달걀만 사러 가게……?”
마히루가 자꾸 귀엽게 대하지 않게 화제를 돌린다.
“글쎄요. 다른 저녁 재료는 다 있으니까 보충하는 걸 잊은 달걀
과…… 그리고 우유 정도일까요? 금방 다녀올 예정이어서 근처 슈퍼
에 가서 살까 했는데요.”
“알았어. 그러면 내가 들어올 때 살게.”
장을 보는 것 말고 아마네가 대신 살 수 없는 물건이나 마히루의 볼
일이 따로 있다면 굳이 붙잡아 둘 필요가 없겠지만, 특별히 더 없다
면 마히루가 굳이 외출해서 수고할 일도 없다.
어차피 아마네는 외출할 테니까 마히루는 집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
을 하는 게 좋다. 평소 저녁을 차려 주는 데다가 시간도 빼앗고 있으
니 이 정도는 아마네가 하는 게 낫겠지.
“아, 하지만 아마네 군의 짐이 늘어나는데요.”
“집에 올 때 들러서 살 테니까 괜찮아. 슈퍼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니
고.”
“도, 돈은.”
“전자 결제로 할게. 잔고도 확인했어. 슈퍼에선 영수증도 주니까
식비 분담에는 문제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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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더 문제가 있을까? 아마네가 고개를 기울이자 이번에는 마히


루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네 군한테 미안한걸요…….”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어차피 밖에 나가는 김에 사는 거고.”
복수하듯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간지러운 듯 눈을 희미하게 뜬 마
히루가 아마네를 쳐다봤다. 왠지 기뻐하는 눈치여서, 아마네는 자신
이 잘못 건드린 게 아닌 듯하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러면 부탁할게요. 집에서 기다릴게요.”
“누구 집에서?”
“누구 집일까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한 마히루는 그대로 처음부터 챙긴 듯한
아마네의 집 여벌 열쇠를 써서 문을 열고 문틈으로 몸을 슥 집어넣었
다.
그것이 명확한 대답임을 알린 마히루는 문틈으로 머리를 쏙 내밀고
고개를 들어 아마네에게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세요, 아마네 군.”
“다녀올게…….”
이제는 어디가 자기 집인지 모를 마히루 때문에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면서 대꾸하자, 마히루는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마네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서 근육을 푼 다음 한 시간 조금 뛰어서 조


깅을 하고, 천천히 몸을 식히는 김에 슈퍼에 들러 장을 보고 귀가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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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 중에는 잡념도 없이 차분하게 운동할 수 있어서 그런지 조금


은 마음이 정리됐다.
일단은 마히루의 발언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만큼은 차분해져서
안심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히루가 작게 슬리퍼 소리를 내면서 맞
이해 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일단 목욕물을 받아 뒀는데, 어쩌시겠어요?”
아마네의 장바구니를 손에서 슬쩍 빼내면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
주니까, 아마네는 무심코 마히루를 빤히 보고 말았다.
이츠키와 유타가 자꾸 새댁 같다고 말하니까 정말로 그렇게 보인
다. 마히루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겠지만, 너무나도 지극정성으로 챙
겨 주니까 남이 보면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에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네 군……?”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욕하고 올게.”
어리둥절한 눈치로 보는 마히루에게 모호하게 웃고, 아마네는 세면
대에 들렀다가 입욕 준비를 하려고 자신의 방에 갔다.
평소처럼 실내복을 꺼내서 욕실로 가 보니 마히루가 선언한 대로
욕조에는 물이 가득해서 욕실 온도가 딱 좋았다.
준비성이 좋은 마히루가 있는 곳으로 잠시 머리를 조아린 뒤, 샤워
로 땀을 씻어낸다.
평소 생활력이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은 아마네도 딱히 지저분한 것
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목욕도 좋아하는 편이다.
몸과 머리에서 지저분한 것을 빠짐없이 씻어낸 뒤 욕조에 몸을 담
그자 뇌와 몸의 피로가 모두 물에 녹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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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럭저럭 피곤했는지 목욕물에 몸을 담


그니 긴장이 풀리는 김에 피로도 녹아서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
이리라.
너무 뜨겁지도 않고 딱 알맞게 따스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채, 아마
네는 욕조에 몸을 기대고 슬며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욕제도 넣지 않은 목욕물을 통해서 자신의 몸을 보고 도
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 갈 길이 머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당연한 거지
만, 칼로리 소모가 적은 데다가 애초에 어지간해서는 살이 안 붙는
체질인 아마네는 전체적으로 몸이 호리호리하다.
다부지고 듬직한 남자와는 거리가 멀고, 체형만 보면 비실비실하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조금만 더 듬직해지고, 나아가 외모도 좀 다듬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는 학교 아이들의 목격 정보가 있어서 밖에서는 섣불리 소문이
난 그 남자의 차림을 할 수 없지만, 얼굴색과 피부 상태 정도는 개선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평소 자신을 잘 관리하는 마히루는 이런 점에서도 아마네가 가소로
울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존경스러울 따름이
다.
푸근한 온기와 피로 탓에 정신이 잠기운에 살짝 잠긴 상태로 생각
하다가, 한숨을 쉬고 물속으로 몸을 푹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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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위험하게도 욕조에서 몸을 숙이고 꾸벅꾸벅 졸던 차에, 목


욕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미심쩍게 여긴 마히루가 황급히 욕실
밖에서 깨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저기요…… 위험하거든요?”
“정신줄을 놔서 죄송합니다.”
조금 발그레진 얼굴로 혼내는 바람에, 아마네는 그저 넙죽넙죽 사
과할 수밖에 없었다.
볼이 발그스름한 것은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잠시 상태를 확
인하러 왔을 때 욕실 문을 살짝 열었다가 아마네의 상반신을 목격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마네를 걱정한
탓임은 확실하다.
사람이 물에 빠질 때는 30센티미터 수심에서도 쉽게 허우적댈 수
있으니까, 마히루가 화내는 것은 지당하다. 마히루는 헤엄칠 수 없는
만큼 더더욱 불안했던 듯하다.
일단 변명하자면, 의식은 희미하게 있었다.
완전히 잠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의식이 꿈나라에 발끝만 담근 수
준이어서, 자세가 무너져서 욕조에 몸을 부딪쳤으면 틀림없이 정신
이 번쩍 들었을 거라고 자신한다.
“왜 그토록 애쓰는 거예요……?”
실수했다고 후회하는 아마네에게, 마히루가 미심쩍게 물어보는 목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불안이 섞여 있어서, 걱정하게 했다는 사실을 새삼
스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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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리가 안 된다면 조금은 노력을 줄여


야 하지 않을까요?”
“옳은 말이야.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아마네 군은, 왜 그토록.”
“당당하게 있을…… 남자가 되고 싶으니까.”
조금 화내면서도 눈썹을 축 내리고 슬퍼하는 마히루에게 쓴웃음을
지으면서, 아마네는 불안한 눈빛을 지우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
다.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조금만 더 자신감을 키우고 싶으니까. 공부나, 운동이나, 그런 것
부터 시작하고 싶어. 무리할 생각은 없었고, 이번에는 정말로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는 내 역량을 잘 생각하고 노력할 거고, 마히루한테
걱정을 끼치지도 않게 할게.”
“그렇게 서둘러야 하는 일인가요……?”
“서두를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노력하고 싶으니까. 나 자
신이……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아마네.
마히루는 그런 아마네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이어서 한숨을 쉬
었다.
“단단히 결심했다는 건 잘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정말로 조심하
세요. 안 그러면 저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든요?”
“미안하대도.”
“하지만 아마네 군은 그렇게 노력하는 구석에서 빛이 나니까, 그걸
제가 가리려고 해선 안 되겠죠. 지켜보긴 하겠지만, 방해하진 않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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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할게요.”
“오히려 마히루한테 도움을 받는 건데 말이지. 식사는 정말 고마
워. 나는 너만큼 관리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노력은 아마네 군이 하는 거니까, 저는 그런 도
움밖에 줄 수 없는 거지만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노력해 주세요.”
“다음에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할게.”
다시는 목욕 중에 잠들지 않을 거고, 애당초 실수로 죽을 뻔하는 위
기에 처하고 싶지는 않다.
걱정하는 마히루를 울리기도 싫으니까, 스스로 몸을 관리하고 무리
한 노력은 하지 않게 명심할 작정이다.
그 점은 마히루가 조금 의심하는지 ‘꼭 명심해 주세요.’라는 눈빛으
로 보는지라, 아마네는 마히루가 안심할 수 있게 손을 부드럽게 움직
여서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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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시험 후의 한때

이틀에 걸쳐 진행된 시험이 끝나고, 아마네는 해방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평소 수업 때보다 책상에 앉는 시간이 줄어서 편하
게 느끼지만, 이번에는 딱 알맞은 긴장감이 있었던 덕분에 조금은 압
박감이 들었다.
이전에는 적당히 공부해서 그럭저럭 등수가 높았지만, 이번에는 평
소보다 공부하는 시간을 더 많이 잡고 집중해서 시험에 임했다. 자신
의 노력을 시험받는다는 생각에 긴장도 했지만, 다 끝난 지금은 만족
스러운 결과를 예상하고 있다.
어제 첫날 본 시험은 마히루와 함께 시험 답안을 맞춰 봤지만, 만점
은 아니어도 상당히 좋은 점수를 딴 것으로 보인다. 오늘 시험도 귀
가한 뒤에 답안을 맞춰 보겠지만, 이번에도 지난번 시험보다는 문제
를 잘 푼 자신이 있다.
“아마네, 어땠어……?”
너무 늘어진 것 같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대서 긴장을 푼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미묘하게 기운이
없는 치토세가 비틀비틀 걸어서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얼굴색이 나쁜 것은 애초에 치토세 자신이 공부를 잘
하는 게 아닌 탓이겠지. 머리는 나쁘지 않으니까, 평소 노력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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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정말 막히는 문제는 거의 없었으니까, 이번엔 괜찮을 것 같아.”
“흐에~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내 이야기도 들어볼
래?”
“위험했지만 낙제는 간신히 면할 것 같다 이거지?”
“잘 아네.”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낙제점을 받으면 내가 더 곤란한데.”
마히루와 아마네는 이츠키와 치토세, 유타에 비해 여유가 있는 축
이어서 치토세의 시험공부를 도와줄 수 있었고, 어떻게든 낙제점을
피하는 데 전념하도록 시켰다.
치토세는 평소 수업 태도가 불량한 것이 걸림돌일 뿐, 기본적으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이해력도 나쁘지 않으니까 잘 가르치기만 하면
제대로 이해해 준다.
그것이 시험 뒤에도 자신의 실력으로 남을지 어떨지는, 본인의 복
습과 노력에 달렸지만.
“괜찮아~ 괜찮아~. 이제까지 본 시험 중에서 최고로 잘 봤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는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
지만, 괜찮았다면 됐어. 기말 시험 때도 열심히 해 봐.”
“으에엑. 시험 끝난 날에 다음 시험 이야기를 하지 마…… 기분 다
운되잖아……. 지금은 이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어! 그치? 잇군.”
“맞아! 지나간 과거도, 먼 훗날의 미래도, 지금은 머릿속에 떠올릴
때가 아니야.”
아마네의 뒤에서 흐느적 늘어진 이츠키는 치토세의 말을 긍정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여담으로 이츠키는 치토세보다 성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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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똑똑하지만, 영어 시험에서 죽을 쒔는지 기운이 없었다.


“나는 시험 답안을 맞춰 보고 싶은데.”
“싫어! 우리에게 시험 기억을 되살리지 마!”
무척 지쳤는지 이츠키와 치토세가 찰싹 달라붙어 서로의 고생을 위
로하는 모습을 보면서 “팔팔해 보이는데?”라고 조용히 중얼거리고,
시선을 교실 안에 생긴 인파 쪽으로 돌렸다.
시험이 끝나고 마히루의 자리에 계속해서 사람이 몰리는 것은 시험
답안을 맞춰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험 때마다 거의 정답인 마히루의 답안을 보고 싶어서 모이는데,
마히루는 조용히 웃으면서 각 과목의 문제지를 내놓고 시험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인파에 낄 생각은 없으므로, 집에 가서 답안을 맞춰 봐
야 한다.
“굉장한걸…….”
마히루라고 딱 집어서 말하진 않았지만,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알
아들은 듯하다.
이츠키와 치토세도 눈길을 돌려서 싱긋 웃었다.
“뭐, 천사님은 귀엽고 똑똑하고 인기도 많으니까. 여기저기서 못
데려가서 안달이겠지.”
“아마네 너도 저기 가서 끼지 그래?”
“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걸.”
“뭐, 그렇겠지.”
‘집에 가면 있으니까.’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이 이어질
것은 아마네라도 알 수 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은 점은 고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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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다 안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것이 아마네의 속을 긁기에는 충분


했다.
미간을 찡그린 아마네를 보고 더 웃는 이츠키 때문에 미간에 주름
이 잡히지만,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소리가 들려서 조금 얼굴에서 힘
을 뺐다.
“이츠키, 너무 놀리다간 후지미야가 삐질걸.”
“괜찮아, 괜찮대도. 아마네는 이 정도로 화내지 않으니까.”
“지금 네 머리를 꽉 조여주려는 참인데 말이야.”
“어이쿠.”
중재하러 온 유타를 보고 조금 화가 가셔서, 아마네는 어깨를 으쓱
하고 이츠키에게 벌을 주는 것을 그만뒀다.
“후지미야의 시험 결과는…… 좋아 보이네. 얼굴을 봐선.”
“뭐, 그럭저럭 좋게 봤다고 생각해. 카도와키 넌?”
“덕분에 나도 평소보다 점수가 좋을 것 같아. 나중에 답안을 확인
해 봐야 알겠지만.”
“그래? 잘됐네.”
토요일 공부 모임은 중간부터 게임 대회가 되어서 불안했는데, 유
타의 분위기로 봐서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은 그렇게 다른 사람과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
고 조금 표정을 푼 아마네에게, 이츠키는 알기 쉽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있잖아. 아마네 넌 유타한테만 살갑게 대하지 않아?”
“너 자신의 평소 행실을 돌이켜 보시지?”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랑한다고, 나는 믿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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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나는…….”
“어련하시겠습니까. 아마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
까.”
목소리는 작아도 쓸데없는 소리를 했으므로, 아마네는 손가락 관절
을 이츠키의 관자놀이에 대고 가볍게 공격해 주었다.
이번만큼은 이츠키가 잘못했다고 아는 듯, 유타는 웃기만 하고 아
마네를 말리려고 들지 않았다. 치토세는 “잇군도 참 멍청하긴.”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관자놀이 언저리를 강제로 꽉꽉 눌린 이츠키는 아프지 않은 듯이
실실 웃었다.
실제로 힘을 세게 준 것은 아니니까 별로 아프진 않을 테지만, 여유
를 부리면 아주 조금 짜증이 치미는 것도 사실이다.
“뭐, 후지미야는 일편단심이니까. 보면 알겠어.”
“카도와키, 너마저…….”
“나는 딱히 뭐에 일편단심인지, 어떻게 일편단심인지도 말하지 않
았는데?”
상큼함을 확 뿌리는 웃음을 보고, 아마네는 뭐라고 더 말할 수도 없
어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네의 태도가 어지간히 재밌는지, 이츠키와 치토세와 유타는 모
두 왠지 훈훈한 느낌으로 웃었다. 아마네는 부끄럽기도 해서 입술을
꼭 깨물고 시선을 돌렸는데, 그때 딱 손이 빈 마히루와 눈이 마주쳐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마히루가 봤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신음하자, 마히루가 미소를 지
은 채 조용히 아마네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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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 보이는데요.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응~? 아마네가 귀엽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치토세, 너 말이야.”
“그런 이야기 맞잖아.”
“그게 아니지. 애초에 내가 놀림당하는 이야기잖아.”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
“역시 놀리는 거 맞잖아.”
작작 좀 하라고 째려봐도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감독 책임
을 따지고자 이츠키를 째려봤다.
“왜 나를 째려보는 거야.”
“애초에 네가 처음에 그런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어? 아마네는 일편단심 퓨어 보이라는 이야기를 했어.”
치토세는 제발 입을 다물어 줬으면 좋겠다.
“퓨어 운운한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리고 누구더러 퓨어하다는
거야.”
“어? 설마 모르는 거야……?”
입술을 떨면서 일부러 놀란 척하는 표정을 짓는 이츠키의 다리를
책상 아래에서 걷어차고 마히루의 눈치를 슬쩍 보니, 마히루는 평소
처럼 미소를 짓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허공에 돌리고 있었
다.
“뭐, 후지미야는 겸허하다고 할까, 성격이 올곧다는 이야기를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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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군요. 후지미야 씨는 한 가지 결심한 일에는 노력하는 분이니


까요. 그런 점에선 정말 올곧은 셈이네요. 참 좋다고 봐요.”
“진짜로. 후지미야는 그런 부분에서 자신감을 챙겼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그렇네요.”
둘이서 칭찬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것이 정말 거북했다.
마히루와 시선이 마주치니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게 쑥스러워서 시선을 확 돌리자 같은 반 아이들이 부러운 눈치
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주목하는 것이 아마네가 아니라 어째서인지 의기투합해서 아마네
를 칭찬하는 마히루와 유타여서 안심하면서도, 왠지 조금 마음이 복
잡했다.
인기가 많은 남녀가 둘이서 사이좋게 있으면 당연히 주목을 받는
법이지만, 아주 조금 부럽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이렇게 주목을 받아
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마네, 왜 그래? 부끄러워?”
“아니거든?”
“아, 그러십니까. 부끄러운 걸 감추려는 거지? 아, 마히룽. 이따가
이렇게 다섯이서 모여서 놀러 가자. 모처럼 모였으니까 시험 뒤풀이
나 해야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마네의 마음을 깔끔하게 무시한 치토
세는 그대로 마히루에게 같이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부담 없이 가볍
게 제안한 건데, 마히루는 평소처럼 천사의 미소를 띤 채로 “여러분
만 괜찮다면 갈게요.”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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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이라고 하면 자신도 포함되는 거겠지. 아마도 거부권은 없


을 테고, 거부하지 않을 것도 치토세가 잘 알고 있으리라.
이번에야말로 한 방 먹였다는 듯이 웃는 치토세한테서 고개를 돌리
고,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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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천사님이 주는 상

“저기, 아마네. 너 너무 힘쓴 거 아니야?”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 복도 게시판에 붙은 정기고사 순위표를 보
고 이츠키가 다소 황당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마네는 공부 모임 뒤에도 곧장 공부에 전념하고 시험에 임했다.
단순히 처음 목적인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서.
그리고 요염하게 속삭인 말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최대한 그 말과 표정에 생각을 할애하지 않게 공부에 집중한 결과
── 이번 6등 성적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아니, 나도 이렇게 오를 줄은 몰랐는데.”
“참 애썼네. 자신감은 생겼어?”
“별로……. 이 성적을 계속 받는 게 당연할 정도는 되어야지.”
“겸손하기도 하셔라…….”
한 번 좋은 등수를 땄다고 방심했다가 떨어지는 모습은 마히루에게
보이기 싫다. 이렇게 상위권에 있는 것이 정착해야만 의미가 있다.
장차 대학 입시를 생각하면, 이걸로 만족해서 끝내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학 입시는 다른 학교 학생들도 순위 경쟁에 낄 테니까 단기적인
공부로 어떻게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장래를 대비하는 의미에서도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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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덧붙이자면, 마히루는 이번에도 1등을 독주하고 있다. 역시 대단하


지만, 언제나 노력한 성과이므로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후지미야 씨는 이번에 6등이네요.”
뒤늦게 보러 온 마히루가 아마네의 이름을 본 듯 예쁘게 미소를 지
었다.
천사님 모드인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동요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슬쩍 웃었다.
주위 시선이 따갑지만, 이제는 남들 앞에서 말을 거는 것도 익숙해
졌는지 심하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시선에 담긴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가 본데. 다행이야.”
“후후. 노력했으니까 말이죠. 쉬는 시간에도 공부했었고.”
“그래…….”
“이만큼 노력했으면 상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 네.”
상 이야기를 떠올리고 뭐라 말하지 못할 기분이 들었다.
무릎베개와 귀 청소 약속을 했었다.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다 몰아
내는 바람에 그냥 까먹고 있었는데, 10등 안에 들어가면 해 준다고
한 것 같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여자애가 상을 준다는데,
그 행복을 제 발로 걷어찰 수 있을까?
“시이나 너도…… 1등 축하해. 너야말로 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
야?”
“그러네요. 하지만 저 자신을 너무 풀어주면 안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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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시이나는 자신에게 엄격하니까 조금은 풀어도 될 것 같은데 말이


지. 뭐,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자신은 상을 받기로 했지만, 마히루는 아무것도 받는
게 없으니까 상을 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뭘 해 주면 좋을지 잘 모르니까, 집에 가서 마히루에
게 물어봐야 한다.
천사님의 미소를 띤 마히루 앞에서, 이츠키가 조용히 “아마네, 네
가 뭐라도 해 주는 게 어때?”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니까, 오늘 귀가해서 물어보자고 속으로 결
심했다.

“네? 저한테 주는 상, 말인가요?”


귀가해서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준비를 하는 마히루의 뒤에서 물어
보니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뒤돌아봤다.
아마네는 저녁을 먹은 뒤에 기다리고 있을 상과 지난번 악마의 미
소를 떠올리는 바람에 침착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마히루는 그
걸 눈치챈 기색도 없이 그저 예상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표정에 드러
내고 있다.
“딱히 원하는 물건이 있는 건 아닌데요.”
“해 줬으면 하는 건……?”
“아마네 군한테 말인가요? 음…… 그래요. 거기 있는 오이를 슬라
이서로 썰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일까요.”
“그런 거 말고. 아니, 없다면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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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욕심이 없다고 할까.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지만, 너무 억


지로 요구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순순히 물러났다.
마히루가 됐다고 하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뭔가 바라는 게 있다면
아마네가 가능한 선에서 들어줄 작정이었다.
좌우지간 오이를 슬라이서의 제물로 바쳐 달라고 하니 손을 씻고
준비가 다 된 슬라이서로 오이를 써는데, 이건 누가 봐도 그냥 일을
조금 거들기만 하는 것이다.
“그걸 소금으로 버무려 주세요.”
“알았어. 정말로 없어……?”
“별로요. 저는 지금 상황으로 충분하니까요. 애초에 제 진짜 소원
은 제가 알아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진짜 소원?”
“뭐일 거 같아요?”
슬라이서에서 눈을 떼고 보니 마히루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이 한순간 지난번에 본 악마의 미소로 보여서 도저히 직시
하지 못하고 시선을 도로 오이로 돌렸다.
“모……모르겠는데.”
“그렇죠? 그러니까 됐어요.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요.”
아마네의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는 느낌이 들었다.
더는 추궁하지 못할 분위기를 내면서 요리하러 돌아가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채로 그저 오이를 썰 수밖
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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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자, 오세요. 아마네 군.”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상을 받는 시간이 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소파 구석에 앉아서 다리를 탁탁 치고 미소를 짓
는 바람에, 아마네는 “윽.”하고 말문이 막혔다.
여담으로 오늘 마히루의 복장은 숏팬츠에 검정 타이츠 조합이므로
맨살 무릎베개인 것은 아니지만, 접촉면이 너무 얇아서 감촉을 더 알
기 쉽다.
덤으로 오늘은 귀가하자마자 목욕한 듯 전체적으로 좋은 향기가 났
다.
이 상황에서 무릎베개 상태로 귀를 청소한다니, 아마네로선 자살이
나 다름없는 행위다.
“저기…… 그게 말이지.”
“싫으면 안 해도 상관없지만요. 아마네 군이 바란 거잖아요?”
“그야 바라긴 했지만? 실제로 눈앞에 있으면 움츠러든다고 할까,
그게…… 부끄럽잖아?”
“그러면 왜 말한 거죠?”
“그, 그건 남자의 마음이 그렇다고 할까.”
“그 마음에 그냥 따르면 될 거 같은데요……. 노력해서 받은 상이
니까요. 굳이 사양하지 않아도 되는걸요? 응석을 부려도 얼마든지
받아줄게요.”
다시 다리를 탁탁 두드리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침을 꼴깍 삼
켰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그런지 타이츠는 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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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착 달라붙은 타이츠의 표면에서 희미하게 살색이 비쳐 보여서 참으


로 선정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타이츠를 신었는데도 허벅지는 아마네를 유혹하듯이 무방비하고
매끄러운 각선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본인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겠지만, 오늘의 마히루는 아마네를 살
려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원래라면 어떻게든 거절하고 정신의 안정을 꾀할 테지만, 상이라는
명목과 남자의 욕망이 죽음으로 떠밀고 말았다.
조심조심 마히루의 옆에 앉고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렸다.
예전에도 체험했지만, 역시 부드럽다. 예전보다 중간에 있는 천이
얇은 탓에 감촉과 온기가 더 잘 전해져서 아마네의 심장을 폭행했다.
어딜 보면 좋을지 몰라서 일단 위쪽을 봤더니 마히루가 웃는 게 보
였다.
다만 그 얼굴이 조금 가려서 보이는 것은…… 중간에 산이 있기 때
문이리라.
5월이 되어서 기온도 약간 올라가서 그런지 마히루가 입은 셔츠는
얇다. 더군다나 좋은 몸매를 부각하듯이 몸의 굴곡이 잘 보이는 종류
다.
천 너머로도 알 수 있는, 중력을 따르면서도 예쁜 모양새를 유지하
는 산 때문에 아마네는 위를 보는 것을 그만뒀다. 이대로 가다간 아
마네의 수치심이 폭발할 것 같다.
“자, 이제 귀를 청소해도 되겠죠?”
아마네의 마음속 외침을 조금도 모르고, 마히루는 왠지 신난 분위
기로 웃으면서 그렇게 선언하고 테이블 위에 둔 귀이개와 티슈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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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뻗었다.
뒤통수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내려왔다.
(?!)
소리도 내지 못하는 비명을 속으로 지르는 아마네를, 마히루가 알
아차린 낌새는 없었다. 곧장 귀이개를 집어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마히루는 모를 것이다. 아마네가 부드러운 감촉과 질량을
피부로 느꼈다는 사실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미 마음속 상태는 귀 청소가 어쩌고 따질 수준이 아니었지만, 마
히루는 “가만히 있어 주세요.”라고 타이르듯 속삭이고 아마네의 머
리를 한 손으로 슬쩍 고정했다.
귓속을 청소할 테니까 움직이지 말라는 소리겠지만, 이런저런 이유
로 마구 뒹굴고 싶은 아마네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들은 강아지
가 된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도 발버둥 칠 수는 없으므로 얌전히 테이블 옆면을 가만히 보
니 천천히 귓구멍 속에 딱딱한 게 들어왔다.
한순간 오싹한 것은 역시 피부가 얇은 곳이 민감한 탓이리라.
자기 손으로 할 때는 안 그런데도 마히루가 하면 기분이 이상해지
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다는 점과…… 좋아하는 여자
애가 해 준다는 흥분 때문이리라.
마히루는 성격으로 봐서 조심스럽게 잘 청소해 줄 것을 알지만, 부
드럽게 귀를 청소해 주면 왠지 모르게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음이 편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욕망을 자극
하는 희미한 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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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이대로 귀를 청소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만큼은, 말로 표


현하지 못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프진 않나요?”
“응…… 아프지 않아. 좋아.”
“그래요? 다행이에요. 남자는 이런 걸로 낭만을 느낀다고 들었는
데…… 낭만이 잘 느껴지나요?”
“아마도…….”
“아마네 군도 남자가 맞네요.”
“당연히 남자지.”
남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속으로 난리를 치지 않을 테고, 부드러운
감촉에 흥분하지도 않는다. 좋아하는 상대가 이토록 뭐든 다 받아주
고, 밀착을 허락해 주면 허둥댈 수밖에 없다.
“후후, 아마네 군은 신사니까요. 관심이 별로 없나 해서요.”
“내가 신사라고 가정하더라도, 언동과 속마음은 별개잖아. 너도 조
심해. 남자는 얌전한 척하면서도 여자가 혼자 있을 때 덮치려고 하는
법이니까.”
“그 이론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네 군은 남자가 아니네요.”
숫기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입술을 꼭 깨물지만, 마히루
는 그런 의도가 없는지 느긋하게 귀를 청소하고 있다.
“자, 아마네 군. 반대쪽으로 돌아주세요. 다른 귀도 청소하고 싶어
요.”
입술을 꾹 다물면서도 반대쪽 귀를 내밀었는데, 생각해 보니 마히
루의 배 쪽으로 얼굴을 둔다는 새로운 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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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를 봤다간 숏팬츠 차림이라고는 해도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


얌전히 배를 볼 수밖에 없다.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겠다.
욕망을 순순히 인정하면 필시 천국일 테지만, 갈등 속에서 허우적
대는 아마네로서는 지옥에 한 발을 담근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네 군…… 아까부터 왠지 몸이 들썩이는데요…….”
“신경 쓰지 마.”
속마음을 말할 수도 없다. 애초에 그런 소리를 했다간 마히루가 질
색할 것이다.
그러므로 순순히 귀 청소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욕망을 그저 숨길
수밖에 없다. 사심 없이 순수하게 잘 대해 주는 천사님은 정말 무시
무시했다.
마히루는 아마네의 태도를 의문시하는 눈치였지만, 아마네가 눈을
맞추려고 들지 않고 마히루의 몸을 보고 있어서 추궁을 단념하고 귀
청소를 재개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간지럼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눈을
감고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눈을 뜨고 있으면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어서 눈을 감았는데, 이것
도 다른 감각이 차단되는 바람에 마히루 본연의 달콤한 향기와 샴푸
나 보디샴푸의 향기가 코로 들어오거나 허벅지의 부드러운 감촉을
의식하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 부드러움을 고민하지 않고 탐닉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네 군, 끝나고 머리를 만져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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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도망쳤으면 더 갈등할 리도 없는데, 슬프게도 아마네도 남


자여서 무릎베개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두길 바라는 마음과 계속했으면 하는 마음의 갈등에 고뇌하면
서 결국 욕망에 굴복했으니까, 자신은 여러모로 의지가 약하다는 사
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승낙해서 기쁜 내색을 보였다.
“금방 끝날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정성껏 귀를 파 주는 마히루에게 ‘아, 벌써 끝나는구
나.’하고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고 말아서 다시 혼자 끙끙대는 처
지가 되었다.
물론 표정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조금 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은 마히루가 귀이개를 빼면서
끝났다.
그 대신 마히루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슥 헤치고 들어와서 다른
방면으로 기분이 좋아졌지만.
“자, 다 끝났어요.”
아이를 어르듯 자상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부
끄러운 감정과 몸을 맡기고 싶다는 충동을 같이 느꼈다.
굳이 말하자면 후자가 더 강한 자신을 알아차리고, 차마 인간의 말
로는 자아낼 수 없는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 뻔했다.
마히루는 상을 준다는 의미로 이렇게 부드럽게 받아주는 것이겠지
만, 이러다간 아마네가 확실하게 타락하고 말 것이다.
선언한 바 있듯이 아마네를 타락시킬 의욕이 넘치는 마히루에게 저
항하고 싶어도, 편안함이 그럴 기력을 송두리째 앗아가니까 어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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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없었다.
(이러다간 완전히 타락하겠어…….)
여자의 싱그러운 향기와 온기를 담뿍 느끼면서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면 별일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참
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런 걸 매일 당했다간 확실하게 인간적으로 타락하는 길로 직행할
만큼, 지금 상황과 자세는 여러모로 매력이 넘쳤다.
숨을 훅 내쉬고 몸에서 긴장을 풀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네 군은 의외로 어리광쟁이네요.”
“다 누구 탓인데……”
“제 탓이네요.”
마히루는 키득키득 부드럽게 소리를 내어 웃고 손가락 마디를 더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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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은 이렇게 부드럽게 쓸어 주고 싶어진다고 할까, 만지고


싶어져요. 아마네 군의 머리카락은 만지면 기분이 참 좋아요.”
“그래……?”
“네. 부드럽게 윤기가 넘쳐요. 어째서 이렇게 큐티클이 풍성한 걸
까요……?”
“어머니가 추천하는 샴푸를 써서 그럴까?”
어머니 시호코가 ‘기왕에 머릿결이 좋으니까 상하게 하면 못써!’라
고 강조하는 바람에, 아마네는 현재 미용실에서 쓰는 것처럼 머릿결
을 잘 보호하는 샴푸와 린스를 쓰고 있다.
냄새가 싫은 것도 아니고, 머리를 말린 뒤에도 손에 엉키지 않아서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마히루야말로 머릿결이 부드러운걸.”
황갈색 커튼을 한 줌 손에 쥐어 보니 자신의 머리카락보다 감촉이
더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부드럽게 윤기가 넘친다면 마히루가 한 수 위라서, 아마네와는 비
교도 안 된다. 마히루의 머리카락은 언제까지고 만지고 싶을 정도로
감촉이 좋고, 향도 너무 강하지 않게 은은한 비누 냄새가 나서 남자
로서 참을 수가 없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손질할 때 엄청 신경을
쓸 거 같은데.”
“뭐…… 관리를 게을리한 적은 없어요.”
“그렇겠지. 그런데 평소에도 내가 막 만지는데, 그래도 돼? 머리카
락은 여자의 생명이라고도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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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이 만지는 건…… 좋아해요.”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마히루의 말을 듣고
표정이 요상해졌기 때문이리라.
수치, 환희, 혼란, 당혹…… 아마네 자신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
갖 감정이 뒤섞여 완성된 그 표정은, 마히루의 눈에 띄었다간 수상쩍
게 여길 것이다.
(자꾸 그런 소리를 하니까 착각하는 거야.)
아마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려고 눈을 감
고 한숨을 쉬었다.

눈을 떠 보니 마히루의 셔츠가 눈앞에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행복한 감각에
의식이 날아간 듯한데, 얼마나 오래 잠들었는지 모르니까 솔직히 속
으로는 조마조마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없었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보니, 마히루는 소파에 몸을 기대서 새근새
근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부드럽게 새근거리며 호흡하는 마히루를 보고 “너무 무방비하잖
아.”라고 중얼거리며 시계를 보자 얼굴이 실룩거렸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날짜가 바뀔 참이었다. 무릎베개를 한 것이 갖
가지 뒷정리를 마치고 오후 9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으니까, 대략 두
시간이나 마히루의 다리를 베고 있었던 셈이다.
마히루가 잠든 것도 시간적인 문제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탓이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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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를 깨우기 미안해서 그대로 두다가 깜빡 잠들었을 게 뻔하


다.
남자가 사는 집이니까 조금은 조심했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다리를
베고 잔 아마네한테도 책임이 있다.
이걸 어쩌나 싶어서 잠든 마히루의 얼굴을 잠시 보고, 좌우지간 먼
저 목욕하기로 했다.
마히루는 먼저 목욕하고 온 듯하지만, 아마네는 아직 하지 않았다.
마히루를 깨우더라도, 지금은 그냥 자게 내버려 두고 목욕부터 하
면 된다. 어쩌면 그사이 마히루가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먹고, 아마네는 후다닥 방으로 돌아가 갈아입을 옷을
챙기기로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마네는 거실을 확인하고 슬며시 한숨을 쉬었


다.
마히루는 여전히 꿈나라에 푹 빠져 있어서, 드라이어 소리에도 일
어나지 않은 듯하다.
“마히루, 일어나.”
말을 걸고 살며시 몸을 흔들어 봤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 정말로 의식이 없는지 몸이 휘청휘청 흔들려서 일단은 마히루의
몸을 잡아서 받쳤다.
오랫동안 무릎베개를 시켜서 피곤한 걸지도 모르고, 그저 졸려서
잠든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히루가 잠에서 깨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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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었을 것이다. 깜빡 잠든 마히루를 자신의 침대에서 재운 기


억이 있다.
이번에도 그 코스가 될 것 같다.
다시 더 세게 흔들고 말을 걸지만, 마히루는 깨어나지 않는다.
작게 “우응.”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났지만, 그건 잠든 사람의 호흡
이 섞인 콧소리에 가깝다.
잠든 마히루가 아마네를 신뢰해서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정말로 그래도 되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
다.
“거참.”
투덜대면서 마히루의 볼을 콕콕 찔렀지만 역시 일어날 기미가 없
다. 반응은 없이 매끄러운 피부와 말랑말랑한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
다.
뺨에 손을 대면서 같은 여자도 부러워하는 부드럽게 탱탱한 피부를
엄지로 슥 만지고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뜨린다.
희미하게 힘이 빠진 입술에 손을 대니 뺨보다도 부드럽고 싱그러운
감촉이 전해진다. 입을 대면 달콤함이 바로 전해지는 과일을 연상케
했다.
무방비한 지금이라면 그 달콤함을 맛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최고급 과일을 입에 대고, 그대로 더욱 진하게 맛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이성이 제지하는 데다 마히루에게
거부당하면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만지는 것만큼은 그만두지 않는 점에서 자신도
참 겁이 많다고 자조하고, 아마네는 아름답게 잠든 얼굴을 드러낸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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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람 마음도 모르고.)
너무 방심하는 바람에 아마네의 속이 탄다는 것을, 마히루는 모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쉰 아마네는 여전히 무방비한 얼굴로 잠
든 마히루의 볼을 슬며시 쓰다듬고 피식 웃었다.
아마네 자신은 참 겁이 많고 한심하다고 잘 알면서도, 이러한 부분
이 마히루의 신뢰를 딴 요인일 거라고도 잘 알고 있었다.
이토록 신뢰해 주면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고백했다가 혹시 모를 일이 생길까 봐서 무서워하는 겁쟁이
라서, 그런 두려움이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좋아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면 고생할 일도 없겠지…….”
조용히 중얼거리고, 아마네는 생기가 넘치는 입술에 엄지를 살짝
문지르고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이렇게 아마네를 신뢰해서 무방비한 상태로 있
는 것은 기쁘고 사랑스럽지만, 일종의 고행이기도 하다. 애초에 마히
루는 아마네의 갈등을 좀 이해해 줬으면 한다.
일어나면 조금 핀잔을 주자고 속으로 결심하고, 아마네는 마히루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마히루, 일어나. 집에 갈 시간이야.”
조금 세게 흔들어서 마히루가 잠에서 깨길 유도했다.
귀엽게 잠든 얼굴은 언제까지고 볼 수 있지만, 너무 봤다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데다 이대로 두면 아마네도 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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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몇 번은 부득이하게 자고 가게 했다고 할까, 침대를 빌려줬다


고 하는 게 정확하지만. 이 집에서 재운 적은 있으니까 최종 수단으
로 아마네의 방에서 재울 수도 있다.
다만 되도록 집에 돌려보내고 싶다. 마히루가 아마네의 침대에서
잔 다음에는 참 좋은 향기가 침대에서 나서 여러모로 곤란하다.
자신의 침대에서 재울 때마다 마히루의 향기가 빠질 때까지 끙끙댈
것 같으므로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다.
그 일념으로 마히루를 흔들고 부드러운 볼을 톡톡 두드리자, 몹시
느릿느릿하게 긴 속눈썹을 떨면서 눈꺼풀이 올라갔다.
다만 안에서 보이는 선명한 캐러멜 색깔의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텅 빈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눈에서 초점이 맞지 않았다. 어딜 보는
지도 모를 만큼 흐리멍덩한 눈은 또다시 나른하게 눈꺼풀 커튼 속으
로 숨으려고 했다.
“마히루, 제발 일어나. 우리 집에서 자지 마.”
“우응…….”
“그러지 말고, 알았다고 말해 줘.”
“응…….”
정말로 모르는 듯이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하는지라, 아마네는 얼굴
을 실룩거리면서 뇌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몸을 흔들어서 필사적
으로 의식을 차리게 하려고 했다.
그 성과인지 다시 눈을 떴지만── 이번에는 앞에 있는 아마네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꼼질꼼질 얼굴을 파묻었다.
작게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좋은 냄새.”라고 중얼거리고 얼굴을 문
대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신음을 못 참고 몸을 떨면서 목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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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소리를 쥐어짰다.


(정말이지, 이 아이는.)
이제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방비하게 늘어진
몸을 차마 떼어낼 수도 없다. 오히려 이대로 품에 안고서 귀여워하고
싶은 욕심도 드니까, 빨리 떨쳐내고 벽에 머리를 박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몸에서 떼어놓자, 마히
루는 멍하고 생기가 없는 눈으로 아마네를 봤다.
“마히루, 늦은 시간이니까 집에 가자. 내일은 정상 수업이니까 늦
잠 자면 큰일이야.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말은 그래도 옆집이지만, 마히루가 너무 졸린 눈치로 힘이 빠진 상
태라서 거실에서 보내기가 불안했다.
마히루는 아는지 모르는지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맥없는 소
리를 내고 흐느적흐느적 일어섰다. 그건 좋았지만, 그대로 바닥에 쓰
러질 것 같아서 아마네가 허겁지겁 몸을 받치는 지경에 처했다.
시험으로 지친 상태에서 오랫동안 무릎베개를 해 주는 바람에 체력
에 부담을 준 거겠지. 잠기운에 휩쓸려서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었
다.
(하는 수 없지…….)
부축해서 집 앞까지 바래다줘도, 마히루의 집 안에서 고꾸라질 거
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숨을 슬쩍 쉬고, 아마네는 자신에게 몸을 기댄 마히루의 얼굴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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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 이미 한계인 것 같으니까 너희 집에 데려갈까 하는데, 열


쇠 빌려도 될까? 방에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사실은 여자 집에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고, 마히루가 이렇게 정상
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물어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몇 번 경험한 적이 있다고는 해도 남자 집에서 재우는 것과
자기 집에서 자는 것 중에서 뭐가 더 나을지 하면, 필시 후자일 것이
다. 마히루도 자기 집이 더 안심하고 잘 수 있을 테고, 익숙하지 않
은 아마네의 침대와 베개를 쓰는 것보다는 자기 침대가 훨씬 나을 것
이다.
정신이 있는 상태니까 허락을 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아마네는 아
슬아슬한 선에서 자신이 여자 집에 발을 들인다는 죄책감을 받아들
일 수 있었다.
물어보는 말에 마히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을 확인한 아마네는 최대한 몸에 손이 닿지 않도록 마히루의
숏팬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 몸을 눕혀서 안았다.
잠기운이 한계에 달한 듯한 마히루는 아마네에게 몸을 맡기고 반쯤
잠들었다. 얼른 집에 보내지 않았다간 품에서 푹 잠들어 버릴 것 같
다.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게 현관을 나서서 마히루의 집 앞에 서고, 마
히루를 안은 채로 문을 잘 열어서 천천히 안에 들어간다.
“실례합니다…….”
당연하지만 내부 구조는 똑같았다. 방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다.
다만 아메네의 집과 구조가 같은데도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집과는 다른, 달콤함과 상큼함이 섞인 듯한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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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몸을 감싼 탓일까.
꼼꼼하고 깔끔함을 좋아하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지 마룻바닥
은 윤이 나도록 잘 닦였고, 보이는 범위에서는 딱히 지저분한 곳도
없다. 벽을 따라서 배치한 선반에는 거울과 꽃 같은 게 있어서 차분
하면서도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쪽에서 이어지는 거실도 슬쩍 본 바로는 내추럴 컬러 바닥에 맞
춰 푸근한 흰색과 연청색을 바탕으로 청결하고 밝은 가구로 정리해
서 주인의 센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왠지 생활감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별로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다고 할까.
실제로 요새는 학교와 입욕, 수면 시간 말고는 아마네의 집에 있다
시피 하니까 어떤 의미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가까운 상태가 됐
을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천천히 침실로 추정되는 방의 문
을 열고 안에 발을 들였다.
여자 방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가 보는데, 이걸 기준으로 삼았다간
세상 여자들이 화를 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깔끔한 방이었다.
여기도 거실처럼 흰색과 연청색이 기본인데, 거실보다는 화사함이
있다. 청초하면서도 우아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방이다.
다만 얼핏 봤던 거실보다는 생활감이나 본인의 개성이 드러났다고
도 생각했다.
눈에 띄는 곳에 불필요한 물건을 두지 않으려는 건지 물건이 많다
는 인상은 들지 않지만, 책상 위에는 참고서와 요리책과 함께 아마네
가 게임 센터에서 뽑아서 선물한 인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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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전에 생일 선물로 준 인형은 그때처럼 깨끗하게 침대 머


리맡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달라진 부분을 들자면 원래 있었던 리본 뒤에 감춰진 것처럼 빨간
리본이 다소곳하게 달려 있다는 점일까.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침대 머리맡
에 두고 있음을 실감하니 자연스럽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매일 밤 함께 자는 모습을 상상하니 몸부림치고 싶어진다.
입안에서 볼살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아마네는 슬며시 마
히루를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줬다. 오늘 마히루가 숏팬츠에 타
이츠 차림이었던 것을 뒤늦게 감사했다.
침대가 가라앉는 감각을 알아차린 건지 반쯤 잠들었던 마히루가 희
미하게 눈을 떴다.
눈이 흐리멍덩한 것은 잘 알았기에 무심코 웃으면서, 아마네는 바
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누운 마히루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부드럽
게 쓸어 주었다.
“집에 왔어. 열쇠는 나중에 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은 마히루도 실컷 만졌으니까 조금은 괜찮겠지. 그런 마음에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서 걷어주면서 부드러운 볼을 찌르
자 간지럽다는 듯이 평소보다 몇 배는 풀어진 미소가 살포시 드러났
다.
그대로 확 풀어진 눈으로, 마히루가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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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도…….”
다음에 이어질 말이 뭘지 생각하고, 이어서 경직했다.
여기서 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아마도 안는 베개가 되라는 뜻
일 것이다.
(의미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특별한 뜻은 없어.)
그렇게 타이르고 한순간 유혹에 빠질 뻔한 자신의 욕망을 속에서
패대기쳤다.
이대로 느긋하게 있다간 마히루가 엄청난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조
마조마하면서, 아이를 재우듯 부드럽게, 찬찬히 머리를 쓸어서 잠으
로 유도했다.
“나는 집에 갈 거야. 알았지?”
“싫어…….”
“여자 방에 오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어나면 너도 무조건 후회
할걸. 나를 베개로 때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거든.”
만약 아마네가 이 침대에서 같이 잔다고 쳐도 확실하게 한숨도 못
잘 테고, 일어난 마히루가 혼란에 빠져 얼굴이 새빨개진 다음 창피한
나머지 베개로 때릴 게 뻔했다.
그 뒤로는 말도 안 할 거라는 미래를 예상할 수 있어서, 아마네와
이성과 내일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물러나야만
한다.
꾸벅꾸벅 조는 마히루는 아마네가 필사적으로 타이르는 말과 잠기
운에 저항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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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근처에 있는 곰돌이를 잡아서 마히루의 얼굴에 들


이댔다.
“나 대신에 얘가 같이 자 준다고 하니까 안심하고 푹 자.”
끌어안고 같이 잔다고 들었으니까, 곰 인형에게 재워 달라고 부탁
하기로 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주면서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
이자 마히루는 귀여운 소리로 신음하고 눈앞에 있는 곰 인형을 끌어
안았다.
그 모습은 평소 똑 부러진 마히루의 모습에선 생각하지도 못할 만
큼 천진난만해서, 마구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손에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무의식중에 사진을 찍고 싶어질 만큼 사
랑스러워서 집 열쇠 말고 챙기지 않은 사실에 안도했다. 멋대로 여자
가 자는 모습을 찍는다는 것은 무례하고 변태적인 발상이리라.
그제야 겨우 긴 속눈썹이 난 눈꺼풀이 눈을 전부 가리고 편안한 숨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아마네는 마히루를 깨우지 않게 슬며시 한
숨을 쉬었다.
(너무 무방비해서 무서워…….)
아마네가 상대라서 이토록 무방비하고 신뢰로 가득한 모습으로 애
교를 부리는 거겠지만, 좋아하는 여자애가 이토록 몸을 맡기고 방심
하는 것은 참 힘들다.
잘 참았다고 자기 자신을 칭찬하면서, 아마네는 소리를 내지 않게
방을 빠져나와 그대로 마히루의 집을 나섰다.
오늘은 잠들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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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서로 어색하게 얼굴을 마주친 것은 필연이
었다.
평소 학교에 가는 날에 아침부터 찾아오는 일은 지금껏 거의 없었
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라 뭔가 말하려고 온
듯하다.
아마네는 어제 받은 상과 마히루가 깜빡 잠든 사건으로 잠을 설쳤
기 때문에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오면 심장에 해롭다.
편안한 무릎베개의 감촉, 중간에 머리에 찾아온 탐스러운 과실의
향기와 부드러움을 떠올리고, 허락을 받았다고는 하나 거의 제멋대
로 침입한 마히루의 방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살아나면서, 다음으로
는 천진난만하게 잠든 얼굴과 귀여운 애교가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게다가 곰돌이를 끌어안은 귀여운 모습이 떠오르는 바람에 침대에
서 몸부림치기를 수십 번.
몸부림을 치고 끙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나 싶었더니 곧바로 아침
을 알리는 알림 소리에 정신이 들어 잠이 부족한 상태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반대로 마히루는 잘 잤는지 개운한 얼굴에 혈색도 좋다. 그저 부끄
러움을 감추려는 듯이 꼼질거려서 침착하지 않게 보일 뿐이다.
아침밥을 먹으려던 차에 마히루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경직
한 아마네는 시선을 어디 둬야 좋을지 고민했다.
마히루가 준 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 감촉을 안 이상 똑바로 보기
어렵다. 더불어 마히루 자신은 모르니까 수치심과 함께 죄책감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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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 열쇠를 찾으러 왔구나. 가져가
서 미안해.”
“아, 아뇨. 그게…… 그건, 맞지만요. 그런 게 아니고요.”
아무리 매우 친한 사이라고는 해도 여자가 사는 집 열쇠를 가져간
것은 잘못했다. 애초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집에 발을 들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반성하고 있다.
(역시…… 방을 보여주는 건 싫겠지.)
아마네가 봤을 때는 무척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조화가 잘된 방이라
는 감상을 떠올렸지만, 본인의 의식이 거의 없을 때 멋대로 방을 봤
다면 뭔가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가령 속옷을 실내에서 건조하는 것을 보기라도 했다간 아마도 마히
루는 한동안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행히 그런 건 보지 못했지만, 만약 있었다면 아마네도 마음이 너
무 불편해져서 한동안 피해 다닐 자신이 있다.
“저, 저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응.”
“채, 책상 위에, 사진이 있는 액자가 있었을 텐데요…….”
“사진 액자?”
방을 너무 두리번거리는 것도 미안해서 슬쩍 둘러본 정도인데, 사
진이 있는 액자는 딱히 기억에 없다. 마히루가 하는 말로는 아마도
잡화처럼 둔 거겠지.
기억을 뒤져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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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못 봤는데…… 무슨 일 있어? 혹시 떨어져서 부서졌다거


나?”
“아, 아니에요! 모, 못 봤다면 됐어요……. 못 봤다면.”
마히루는 뭔가 남에게 보이기 싫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둔 듯하
다. 오히려 그토록 안심할 정도라면 한번 보고 싶었지만, 사생활 침
해 문제가 생기니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노골적으로 안심한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방은 너무 보지 않으려고 했거든? 본 거라곤 내가 준 인형들이 다
모인 것하고, 마히루가 안고 잔다고 한 머리맡 곰돌이 인형밖에 없는
데…….”
“쓸데없는 기억은 잊어 주세요!”
아마네의 팔을 토닥토닥 때리는 마히루에게 “네가 예전에 한 말인
데…….”라고 무심코 대꾸했더니 눈을 흘기는 것을 봐야 했다.
“혹시, 인형을 안고 있었던 것도.”
“네가 잠결에 같이 자 달라고 요구하니까, 그건 무리라서 대신에
같이 자게 했는데.”
“같이 자요?!”
자기 발언을 의심하는지 충격을 받은 얼굴이 서서히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그야 잠결에 그런 소리를 했다고는 믿기 어렵겠지만.)
“제, 제가 그런 소리를 했나요?!”
“해, 했다고 할까 나를 불러서 옆자리를 탁탁 쳤으니까…… 거기서
자라는 요구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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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뺨을 감싸고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 마히루는 빨개진 얼굴로


울 것처럼 눈을 그렁그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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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에요.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 아니에요! 다


만, 그게, 저기…… 아마네 군의, 곁에, 있으면, 편하니까…… 딱히
그런 욕구가 있는 건 아니고…… 사,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그거
가 그래서 그런 거예요.”
“무슨 말이야?”
“너무 파고들지 마세요!”
진짜 드물게도 언성을 높인 마히루가 고개를 홱 돌려서 거칠게 숨
을 쉬는 바람에 오히려 아마네가 훨씬 마음이 침착해졌다.
“뭐, 잘 모르는 일이니까 캐묻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조심해. 잠
에 취했다고는 해도 일단은 네 허락을 받아서 집에 데려간 거지만,
안 일어나면 내 방에서 재워야 하니까.”
“그건 그거대로…….”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지막하게 뭐라고 말한 것 같지만, 마히루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는 알아듣지 못해서 무슨 소리를 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마히루도 아마네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
“아무튼, 나도 아무리 마히루와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고는 해
도 그리 쉽게 우리 집에서 재울 수는 없다는 걸 알아줘.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로 끌어안고 잘 거야.”
자겠다고 했어도 그날 밤에는 절대로 잠들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이
렇게 경고하지 않았다간 마히루가 방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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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사람이 적은 만큼, 그렇게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니까 조심하길 빌었다.
아마네가 다소 꾸짖는 투로 말하자, 마히루는 눈을 크게 껌뻑인 다
음에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아마네 군은 제 무릎베개를 하고 너무 새근새근 잘 자는
거 아닌가요? 두 번이나 잠들었는데요?”
“그, 그건 말이야. 지금 하는 이야기와 다르잖아. 여자 앞에서 남자
가 자는 거는 경우가 다르고, 위험하지도 않잖아.”
“제가 아무것도 안 한다는 보장도 없는데요……?”
“뭘 하려고?”
“그러게요. 장난쳐서 사진을 찍을까요.”
이러면 어쩔 거냐는 듯이 말하는 마히루를 보고 맥이 쭉 빠지지만,
마히루 자신은 모르는 눈치다.
“별로 상관없지만, 검열할 거야.”
“알아차리기 전에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단말에서 지울 거예요.”
“정말로 할 거 같아서 무서우니까 그러지 마. 그리고 내가 뭘 하는
것과 네가 뭘 하는 것은 다르니까, 정말로 조심해 줘.”
진짜 뭘 모른다고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지만, 마히루는 놀
라기는 했어도 도망치지 않았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잘 아니까, 괜찮아요.”
“전혀 모르는 건데.”
“잘 안다니까요. 너무하네요. 저를 너무 얕보는 것 같은데요.”
“알면 보통 그러지 않는다고.”
“아마네 군은 한참 멀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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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눈썹을 모으는데, 마히루는 슬쩍


한숨을 흘리고 아마네의 손에서 빠져나와 복도로 갔다.
그 손에는 어느새 회수했는지 마히루의 집 열쇠가 있었다. 현관 선
반 위에 둔 트레이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리라.
“아마네 군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아요.”
고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을 입에 담고서 아마네의 집에서 모습을
감추는 마히루를 향해, 아마네는 이마를 짚으면서 “모르는 게 대체
누군데.”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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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천사님의 새 옷

시험도 끝나고 5월 중순이 찾아왔다.


포근한 햇살로 봄철을 느끼게 했던 태양은 다소 햇빛이 강해져 긴
팔로 지내기 조금 불편한 계절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단은 5월로 접어들어서 하복으로 바뀔 시기이긴 했지만, 아마네
는 반소매 셔츠와 하복 바지를 꺼내는 일이 귀찮아서 뒤로 미루고 있
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마네가 다니는 학교의 에어컨 설비가 완벽해도 등
하교 때나 교실에서 한 발짝 나갈 때는 덥다고 느끼는 시기다. 아마
네의 마음속에서도 슬슬 하복을 꺼낼 때라는 결론이 나왔다.
“슬슬 반팔을 입고 싶은 시기니까요.”
내일에는 입어 보려고 옷장 깊숙한 데 넣어 두었던 의류 케이스에
서 하복을 꺼내 세탁기에 돌리고 있을 때, 그걸 지켜본 듯한 마히루
가 잘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이자면, 마히루도 아직 긴소매 옷에 타이츠까지 다 착용해서
불필요한 노출을 피한 차림새다.
블레이저를 벗고 안에 입었던 스웨터를 조끼로 바꾸기는 했지만,
맨살을 거의 감춘 차림새를 보니 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요새는 조금 땀이 나는 계절이니까요. 슬슬 저도 긴팔을 졸업할
때일까요. 날씨가 참 더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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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 넌 옷을 느슨하게 풀거나 하지 않으니까. 단추도 꼭 채우


고, 팔을 걷지도 않고, 항상 타이츠를 신으니까…….”
“노출하면 시선이 신경 쓰이니까 입을 수밖에 없다고 할까요…….
스스로 몸을 지키는 거니까요.”
몸매도 정말 좋고 얼굴도 어지간한 사람은 미인이라고 단언할 만큼
외모가 빼어난 마히루는 사람들의 시선을 항상 고민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을 끌고, 부적절한 시선도 받기 쉽다. 남자가 매
력적인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성적
인 의미로 보는 것은 마히루도 참을 수 없겠지.
“여름철에는 어떻게 차려입을지 고민이에요. 작년에는 얇은 스타킹
을 신었는데, 더울 때는 더우니까요.”
“하긴 그렇겠지. 여자는 남자보다 입는 게 많으니까 더워 보인단
말이지…….”
“그야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소 더운 것쯤은 참을 수 있지
만…… 땀이 차는 문제만큼은 절실하네요.”
이래서 여름은 싫다고 한숨을 쉰 마히루에게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는데, 마히루는 신경을 쓰는 기색도 없
이 시선을 세탁기로 슥 돌렸다.
“아마네 군은 내일부터 하복인가요?”
“뭐, 슬슬 바꾸려고 해. 더우니까…….”
“그렇군요. 저도 슬슬 바꾸려던 참인데요. 학교에 가기 전에 한번
입어 보고 체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체형은 항상 일정하
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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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는 몸매 유지에 매우 신경을 쓰는 듯,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


각하는 몸매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 할까, 벗어나지 못하게
관리하는 듯하다.
그 강한 의지와 관리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아마네 자신도 마히루
만큼은 아니어도 이상적인 몸을 만들어서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우선 이상적인 몸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나도 한번 입어 보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몰라. 입학 때보다 키도
컸고, 안 맞으면 매점에서 사야 하니까.”
하복은 고등학교 입학 전에 산 것이라서 2학년이 된 지금은 조금
길이가 안 맞을지도 모른다. 1학년 여름에 입었을 때는 괜찮았고 동
복도 탈 없이 입었지만, 길이를 길게 잡았는데도 조금 짧게 느껴졌
다.
입학 때보다 5센티미터나 키가 컸으니까 혹시 모른다는 생각도 있
다.
빨아서 마르면 입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고 돌
아가는 세탁기를 보니까 옆에 있는 마히루가 아마네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었다.
“아마네 군은 의외로 키가 크네요.”
“뭐, 평균보다는 클 거야.”
올려다보는 마히루와는 머리 하나 정도는 차이가 난다. 성인 남자
의 평균 신장보다 주먹 하나만큼은 크니까 키가 크다는 소리를 들어
도 이해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마히루는 체격이 작은 편이지만 극단적으로 작은 것은
아니라 평균적이다. 마히루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시선의 높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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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올라갔으니까 자신이 성장했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평소에는 마히루의 목에 부담을 안 주려고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하
는데, 요새는 손이 닿을 거리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은 마히루의
목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작 마히루는 현재 그런 걱정이 필요 없는지 아마네의 체격을 보
고 조금 눈썹을 모았다.
“그런데도 가벼우니까 걱정하는 건데요…….”
“그래서 운동해서 근육을 늘리려고 단련 중인데. 애초에 어째서 마
히루 네가 내 체중을 아는 거야?”
“쉬는 날에 늦게 일어난 아마네 군이 세면대 앞에서 재는 걸 봐서
그런데요. 잠에 취한 아마네 군을 세면대로 밀어넣은 게 저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더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만, 마히
루는 정말 한심하다는 느낌이 섞인 눈빛을 보였다.
“노력하는 거 같으니까 저도 지켜보고 있지만요. 아마네 군은 운동
한 뒤에 좀 더 먹어야 해요. 말라서 걱정도 되고, 식사가 몸을 만드
는 거거든요? 운동할 거라면 사전에 말해 주세요. 그러면 식단을 바
꿀 테니까요.”
“정말이지 수고를 많이 끼친다고 할까…… 고마워. 그건 그렇고,
너야말로 가냘파서 똑 부러질 것 같아 걱정되니까 더 많이 챙겨 먹
어.”
물론 마히루 덕택에 식사 때 곤란하지 않으니까 감사하고 있다. 근
육 단련에 좋은 추가 식사도 준비해 주니까, 마히루 님 만만세다.
다만 아마네는 그러는 마히루야말로 더 많이 챙겨 먹어야 하지 않
을까 생각한다. 옷을 입어도 가냘프게 보이니까, 가끔은 만지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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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부러지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할 정도다.


봐서는 원래부터 많이 먹지 않으니까 몸매를 관리하기 쉬운 걸지도
모르지만, 이토록 가냘프면 불안해진다.
“진짜 엄청나게 말랐잖아.”라고 쏙 들어간 배를 손으로 잡아 보니
정말로 군더더기가 없는 몸임을 알 수 있지만…… 마히루의 입에서
“하윽.”하고 콧소리 섞인 소리가 들려서 그 생각이 중단되었다.
“아…… 미, 미안해.”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지만, 여자의 배를 너무 만지면…… 콤플
렉스를 느끼는 아이도 있거든요?”
“진짜 미안해. 자연스럽게 만져서 미안해. 여자 몸을 멋대로 만지
면 성희롱이지, 미안해…….”
“저기, 그렇게 말하진 않아도…….”
사이가 좋아도 남자와 여자니까. 평소에는 적극적으로 접촉하지 않
으려고 신경을 쓰는데도 마히루의 옆구리를 그냥 잡고 말았다.
머리나 손이나 어깨가 아닌, 남이 만질 일이 없는 배를.
너무 가냘파서 내장이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걱정됐지만, 그보다도
멋대로 만진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심하게 신경 쓰는 것도 아니에요. 아마네 군은 저 말고는
이러지 않잖아요?”
“애초에 이런 이야기는 마히루가 아니면 안 하고, 다른 여자랑 접
할 기회도 없어. 친하지도 않은 여자를 멋대로 만질 리가 없잖아.”
있다고 치면 치토세 정도인데, 치토세도 마르긴 했어도 굳이 말하
자면 건장한 운동선수 체형으로 딱 조여진 몸이라서 아름다움을 추
구하는 마히루와는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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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당연한 일이지만, 치토세의 몸을 만지는 일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머리를 살짝 쥐어박는 정도는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섣불리 몸을 만지는 일은 없고 할 생각도 없다.
“그러면 됐어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끄덕인 마히루는 복수라는 듯 아마네의 배에
“에잇.” 하고 손바닥을 올리고 옷 위에서 만지고 있다.
마히루의 배를 만진 직후니까 뭐라고 따질 생각은 없지만, 너무 만
지면 간지럽고 자신의 몸이 부끄러워진다.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마히루와 만나기 전보다는 건강한 몸이 됐지
만, 아마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근육이 몸에 붙으려면 아직 멀었
다.
마히루에게 말라서 걱정된다는 말을 들은 것이 은근 충격이 크니
까, 몸에 더 근육이 생기게 잘 먹고 운동해야 하리라.
“마히루 넌…… 조금 더 듬직한 게 좋을 것 같아?”
“듬직한 게 좋다고 할까요. 기본적으로 체형은 남자든 여자든 건강
한 느낌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그리고 강요할 생각은 없고, 여자 시
점의 아주 개인적인 의견인데요. 여자는 너무 날씬한 남자와 나란히
있으면 기죽을 수 있으니까요. 빼빼 마른 것보다는 적당히 살이 있고
적당히 키가 큰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아, 아마네 군은 별로…… 너무 마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조금만 더 챙겨 먹는 게 건강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남자 고등학
생치고는 잘 먹는 타입이 아니니까요. 그러는 아마네 군은, 저기, 여
자는…… 날씬한 게 좋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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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매 이야기를 했다간 좋은 꼴을 못 봐.”


무심코 곧바로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는데, 아마네는 이게 남자들이
공통으로 가져야 할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 모두 ‘입 밖으로 꺼냈다간 자칫하면 피를 본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기에, 아마네도 다른 사람에게 몸매가 어떠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딱 잘라서 말하는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도 “그렇군요…….”라며 잘
이해한 듯이 시선을 어딘가 먼 곳으로 돌리는 걸 보니, 여자라도 뭔
가 짚이는 바가 있는 거겠지.
“뭐, 적당한 게 좋지 않겠어? 너무 마르면 성장 불량이나 영양 부족
을 걱정할 테니까. 근육과 지방이 알맞게 있는 게 봐도 안심할 수 있
어.”
“그건 남자의 시점이 아니라 보호자의 시점 아닌가요……?”
“네가 할 소리야?”
“그건 그렇지만요.”
마히루도 굳이 말하자면 어머니 시점에서 말하니까, 아마네에게 보
호자 시점이니 뭐니 해도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다.
“걱정하지 않아도, 마히루는 체중 조절에 힘쓸 필요가 없을 거야.”
“정말로요?”
“어디서 더 살을 빼게?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몸이 되어서 유지
하는 거잖아? 남이 뭐라고 따질 일도 아니니까, 마히루 네가 가장 자
신감이 생기는 모습이 좋다고 봐. 나로선 너무 마르면 불안해지니까
지금 이대로 있어 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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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냘픈 마히루가 더 마르면 걱정할 테니까, 마히루가 지금


몸이 좋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더 마르고 싶다고 하면 말리겠
지만.
“물론 몸매를 유지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까, 건강만 해치지 않으
면 괜찮다고 봐.”
“네…….”
고개를 딱 끄덕인 마히루와 장단을 맞춘 듯, 계속해서 돌아가던 세
탁기가 크게 덜컹거렸다.

“안녕하세요.”
이튿날 아침. 아마네가 일어나서 방에서 나오자 마히루가 있었다.
잠시 뒤돌아서 침실 시계를 봤지만, 아침 준비 시간이라서 아직 집
을 나설 시간대가 아니다.
평소 마히루는 아침 시간대에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네는 잠이 덜 깬 머릿속으로 혼란
에 빠졌다.
“안녕……?”
여벌 열쇠도 줬고 편할 때 와도 좋다고 했지만, 아침부터 마주칠 줄
은 몰랐다.
당혹스러워서 의문형으로 아침 인사를 건네자 마히루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기, 아침부터 실례인 줄은 잘 알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확
인을 받고 싶어서요.”
“확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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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히루를 다시 보고, 평소보다 피부 노출이 많아진 것을 깨달


았다.
“하복으로 바꿨는데요. 이상한 데는 없나요?”
“아아, 하복…… 아, 저기, 그게.”
“네.”
“맨다리는 좋지 않다고 봅니다.”
하복은 당연히 반소매니까 노출도 늘어나지만, 이번에는 그런 차원
의 문제가 아니다.
시선을 내리고 보니 새하얀 허벅지가 치마 밖으로 보였다.
교복은 물론이고 사복일 때도 긴 치마와 타이츠를 입으니까 평소에
는 정말로 구경할 일이 없는 맨다리가 보인다.
교칙은 지켜서 극단적으로 짧지 않고 속옷이 보이는 길이도 아니지
만, 그래도 바로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맨다리가 바깥으로 드러
나서, 아마네는 알기 쉽게 당황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말았다.
“학교에선 타이츠를 신는 여자가 더 적은데요.”
“그야 그렇겠지만. 마, 마히루는 안 돼. 좋지 않아.”
“그건 다리가 보기 흉하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함부로 막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할까. 나, 남자들이
시끄러울 테고, 뚫어지게 볼 테고, 그러면 좋지 않아, 않을 것 같아.”
애초에 어제는 검정 스타킹을 신을까 말까 하는 이야기를 했으니
까, 설마 방어구를 장비하지 않고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너무 하얗고 눈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다.
“아마네 군은 뚫어지게 안 볼 거예요?”
“그렇게 보면 실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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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삐었을 때는 봤죠?”


“흑심은 없었고, 비상사태였고, 다리에 블레이저를 걸쳐 줬잖아!”
그야 쪼그려서 맨다리를 봤지만, 안 보이게 블레이저로 가렸고 이
상한 데를 안 보려고 발목 응급처치에만 전념했으니까 마히루의 다
리를 구경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인간적으로 그래선 안 된다고 아마
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흑심이 있나요?”
“없어…….”
“말을 흐리는 게, 이상하네요.”
“없어!”
“너무 소리치지 마세요. 놀려서 미안해요. 아마네 군이 불건전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어요. 그저 어딜 봐야
좋을지 몰라서 쩔쩔맨다는 것도.”
“알면 이렇게 따질 필요도 없었잖아…….”
“아뇨. 저한테는 필요했어요. 가슴이 두근두근 뛴 것 같아서 다행
이네요.”
“그건 심장에 해롭다는 의미잖아.”
아무래도 마히루는 아침부터 깜짝 장난을 감행하고 싶었던 듯하다.
마히루의 의도가 그대로 놀아난 것을 통감하면서 원망스럽게 보지
만, 장난의 실행범인 마히루는 우아함을 남기면서 재미있는 듯이 미
소를 짓고 아마네를 보고 있다.
“안심하세요. 스타킹은 잘 챙겼으니까요. 처음부터 신을 생각이었
어요.”
“너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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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조건 놀리려고 온 거라고 깨달은 아마네는 작게 신음하고,


이어서 조금 앙갚음하고자 즐거운 기색을 드러낸 마히루의 캐러멜색
눈을 바라봤다.
“나한테는 보여줘도 좋은 거야……?”
“네?”
의표를 찔렀을까. 아마네는 놀라는 마히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일부러 이렇게 맨다리를 나한테 보여주는 건, 나한테는 맨다리를
보여줘도 좋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그건…… 아마네 군이라면, 딱히 보여도.”
“아무렇지도 않으시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지만요.”
약간 말을 더듬거리는 마히루를 보고, 아마네는 한숨을 슬쩍 흘렸
다.
“그렇다면 보이지 마. 그런 건 보이고 싶은 사람한테만 보여줘야
하잖아.”
좋아하는 여자애가 평소 보이지 않는 모습을 봐야 하는 자신의 처
지도 생각해 주길 바란다고, 본인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생각으
로 아침부터 지친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가 머뭇머뭇 아마네의 잠옷
자락을 잡았다.
“보, 보여주고 싶어서…… 보여주러 왔다고, 한다면요?”
수치심이 섞여서 떨리는 듯 가녀린 목소리.
아주 조금 촉촉해진 눈으로 쳐다보자, 이번에야말로 아마네는 딱딱
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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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 군의 반응을 보고 싶었어요. 안 된다……는 말밖에 듣지


않았는데요.”
조금 풀이 죽은 듯이 중얼거린 마히루의 말에, 아마네도 황급히 고
개를 저었다.
“그, 그야, 안 되지. 그야, 뭐라고 할까, 위험하다고 할까…… 내 시
선의 문제가…….”
“안 어울리나요?”
그 말을 듣고 아마네는 조금 주저하듯 시선을 마히루의 옷으로 돌
렸다.
반듯하게 다림질한 반소매 블라우스와 치마로 몸을 감싼 마히루는
우아함과 청초함을 남기면서도 평소보다 조금 활발한 분위기가 났
다.
목 아래까지 딱 여민 단추와 리본은 본인의 성실함을 여실히 드러
냈다.
좋아하는 여자애의 굴곡이 드러난 몸을 조금만 더 감췄으면 좋겠지
만, 하복이니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매끈한 다리에 눈이 가지 않게 하면서 한
차례 전체를 본 아마네는 조금 고민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귀엽고 잘 어울리니까, 한시라도 빨리 스타킹을 신어 주세
요.”
“네.”
칭찬할 때도 주의를 기울여 짧게 쥐어짠 찬사에 만족했는지, 마히
루는 살포시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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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을 보고 한순간 말문이 막힌 아마네는 마히루가 알아차리기


전에 고개를 홱 돌려서 시선을 세면대로 옮겼다.
“다음에는 나를 놀리지 마.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그때
까지 집을 나가든지 옷차림을 고치든지 해 줘.”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빨리 말하고 세면대로 후다닥 이동하는 아마
네의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네가 아침 몸단장을 마치고 거실로 가자 검정 스타킹과 조끼를


장비해서 방금 봤던 것은 대체 뭐였냐고 따지고 싶을 만큼 완전무장
한 마히루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코 기운이 쏙 빠진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처음부터 그런 차림을 보여줬으면 내 심장도 평화롭고 순순히 칭
찬했을 텐데.”
“잘됐네요. 특별하니까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미소를 짓는 마히루 때문에 조금 부아가 나서
다가가 볼을 잡았는데, 마히루는 그래도 기쁜 듯이 웃음을 감추지 않
았다.

“저는 먼저 학교에 갈게요.”


방문한 김에 아마네의 아침밥도 차린 마히루는 아마네가 밥을 다
먹은 타이밍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위를 맞추려는 건지 달걀 프라이도 만들어 줘서, 나도 참 속물 같
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평소 기분으로 돌아온 아마네는 마히루를 배
웅하려고 현관으로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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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같은 통학로를 지나서 같은 장소에 가는데 따로따로 움직이


는 것은 참 바보 같지만, 함께 등교할 수도 없으니까 이렇게 시간 간
격을 두고 갈 수밖에 없다.
“이따 학교에서 봐.”
평소처럼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띄워서 등교하려는 아마네
는 마히루가 미묘하게 못마땅한 표정인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
우뚱했다.
“왜 그래?”
“언젠가…… 함께 갈 날이 올까 싶어서요.”
“시선 때문에 내가 죽을걸.”
요새 마히루와 접할 일이 많아져서 같은 반 아이들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대로 부러운 눈으로 보는 데다 다른 반 학생
은 평범하게 노려보는 일도 있다.
너무 공격적인 시선을 자꾸 받으면 질리는데, 등하교를 함께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시선이 쏠릴 것이다.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어요. 제가 뿌린 씨앗이라곤 하지만, 이러
면 참 곤란하네요. 숨 돌릴 여유도 없어요.”
“그야 친구랑 같이 걷기만 해도 같은 학교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건 마히루 네가 봐도 견디기 어려울 테지.”
“소란을 피우든 말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지만, 아마네 군이
곤란하니까요. 신경이 안 쓰인다면 함께 갈 테지만요.”
“확정인 거야……?”
“시간이 맞는다면 말이지만요. 일부러 시간을 늦추는 것도 귀찮고,
오늘 같은 날에 간격을 두는 건 효율이 낮아요. 게다가 곁에 친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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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있으면 등하교도 더 즐거울 거잖아요? 혼자서 묵묵히 걷는 것


보다, 친한 사람과 사이좋게 걷는 게 더 좋으니까요.”
“그건 그렇겠지만.”
“그렇죠? 하지만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네요.”
지친 듯 한숨을 크게 쉰 마히루는 한차례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
쳐냈는지 평소처럼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가장 먼저 아마네 군한테 하복 차림을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을 크게 뒤흔드는 말을 꺼낸 마히루는 아마네
가 굳은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지만, 그대로 현관문
을 열었다.
“갈게요. 아마네 군도 지각하지 않게 오세요.”
마히루가 생긋 웃고 문밖으로 빠져나가자, 아마네는 잠시 복도 벽
에 머리를 대고 나서 다시 세수나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히루보다 늦게 집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당연하다고 할


까 새로운 옷차림으로 온 마히루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기온도 올라가고 있으니까 하복으로 넘어가는 중간 시즌인데도 반
소매 차림의 학생들이 늘었다. 다만 마히루는 화사한 외모와 가벼워
졌다고는 하나 엄중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하복 조합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더군다나 치토세가 자리에서 “더워 보이네.”라면서 마히루의 머리
를 모아서 포니테일 모양으로 만들었기에 평소 보지 못하는 마히루
의 머리 모양이 주목도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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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로선 저런 머리 모양은 목 뒤가 보여서 별로 시키고 싶지 않


다.
마히루가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하든 본인의 자유이긴 하지만, 좋아
하는 여자애의 무방비한 모습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 여자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말이야…….)
애인도 아니면서 그러한 독점욕 비슷한 것이 슬쩍 보여서 자기 자
신이 싫어질 것 같다.
“이상하게 언짢아 보이는데……?”
“기분 탓이야.”
이상하게 감이 좋은 이츠키가 아마네의 얼굴을 봐서 모르는 척 흘
려넘기자, 이츠키는 왠지 마히루를 본 다음에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참 흐뭇한 기색이라고 할까, 그보다는 히죽히죽 웃는 느
낌이라서 아마네가 짜증이 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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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천사님의 시선과 아마네의 분투

“아마네, 패스! 패스!”


“넌 진짜 컨트롤이 꽝이잖아.”
체육대회가 약 한 달 뒤로 다가온 지금, 체육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
고 있었다.
작년 경험으로 봐서 일주일쯤 지나면 팀 편성을 발표하고 학교 전
체가 준비에 들어갈 테지만, 지금은 아직 정상 수업이다.
농구부가 가져온 농구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 아마
네는 장난으로 대충 던져서 공을 벽으로 날린 이츠키를 째려보고 굴
러간 공을 쫓아갔다.
오늘은 농구를 하는 날이라서 슛 연습을 하던 참이다. 경기는 후반
에 한다고 하는데, 농구를 잘하지 못하는 아마네도 골대에 공을 던지
는 작업은 싫지 않았다.
벽에 부딪혀 속도가 줄면서도 데굴데굴 도망치는 낡은 갈색 공을
쫓아가면서 네트로 나뉜 저 너머의 공간을 슬쩍 봤다.
체육관을 반으로 분단하듯 친 네트 저편에는 여자들이 배드민턴을
하고 있다. 오늘은 여자들이 야외 수업이었을 텐데, 갑자기 비가 오
는 바람에 체육관을 반씩 나눠서 체육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자들도 별로 진지하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아마네는 어쩌
다가 근처에 있던 여학생이 라켓으로 셔틀콕을 가볍게 받아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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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힐끗 보고 공을 잡아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일일이 마히루가 있는 곳을 볼 수도 없고, 그게 들켜서 ‘역시 후지
미야도 천사님을 좋아하는 거잖아.’라고 주위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상황도 피하고 싶다.
실제로 좋아하긴 하지만, 본인이 들으면 곤란할 테고 친하지도 않
은 반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아니므로, 속에 감추고 싶다.
“너도 참 이상한 데로 던지지 마. 여자들 쪽에 들어가면 가지러 갈
때 거북하잖아.”
“워워. 너무 따지지 마.”
실실 웃는 이츠키의 배를 노리고 조금 세게 던졌는데, 운동을 못 하
는 것도 아닌 이츠키는 웃으면서 그대로 공을 받았다. 아마네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바구니에서 새 공을 꺼냈다.
이런 체육 수업에서는 운동부가 의욕을 드러낼 때가 많다. 이번에
는 특히나 전공자인 농구부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기운이 넘쳤다.
아마네는 굳이 따지자면 경기 형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슛 연
습은 의외로 좋아하는지라 체육 교사에게 성실하게 임하고 있음을
알리는 겸 골대에 공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이 백보드에 맞았다가 골 바스켓 안으
로 들어가서, 아주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떨어진 공을 회수했다.
“너는 이런 걸 잘한단 말이지. 경기 때는 의욕이 없어서 망하지만.
좀 애써 보라고.”
“말이 많네. 애초에 순수한 실내파 귀가부 인간에게 경기 활약을
기대하지 마. 어떻게 봐도 운동부가 활약할 게 뻔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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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지 말고. 자, 가끔은 말이야. 그 사람에게 멋진 모습을 보


여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 사람이 누굴 가리키는 말인지는 알지만, 순순히 긍정할 수가 없
다.
“그렇게 쓸데없는 참견은 됐고, 애초에 걔는 내가 운동이 별로인
것과 그다지 멋지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고.”
“너는 왜 그런 걸로 역정을 내는 건데.”
“이 상황에서 활약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너도 알잖아.”
남 일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바람에 인상을 구기고 쳐다보자, 이츠
키가 낄낄 웃었다.
“뭐, 그러지 말고. 찬스라면 있어.”
“없어. 시험 삼아서 네가 해 봐.”
“어? 무리, 못 해. 난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걸.”
“그러면서 나한테 하라고 말할 처지야?”
자신이 못 하는 일을 남에게 쉽게 요구하지 말라고 턱을 아래에서
꽉 잡고 볼을 조여주자, 이츠키는 “미안해, 미안하다고.”라고 웃으
면서 시선을 네트 너머로 돌렸다.
“하지만 여길 보는데 말이지.”
“뭐?”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리니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마히루가 여기
를 보고 있다. 구경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심심풀이 삼아 주변을 둘러본 거겠지만, 쳐다보면 갑자기 거북해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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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굳게 다문 아마네에게, 이츠키는 “애써야겠지?”라고 남 일


처럼 속삭이더니, 체육 교사의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아마네를 잡아
당겼다.

후반부터는 경기 형식으로 반을 두 팀으로 나누고, 다른 반과 시합


하는 형태로 진행한다.
아마네와 이츠키는 두 번째 시합에 나가게 되어서, 남은 인원으로
방해가 되지 않게 단상에 올라가 걸터앉았다.
먼저 시합을 시작하는 팀에 들어간 유타의 멋진 모습을 둘이서 구
경하는 셈인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멋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카도와키는 왜 농구부 애들하고 맞먹는 건데…….”
상대 팀에는 현역 농구부가 있는데, 대등하다고 봐도 좋을 만큼 잘
움직이고 있다.
보통은 운동부라도 농구부의 움직임은 따라잡을 수 없다.
달리는 속도만 보면 육상부가 유리할지도 모르지만, 드리블과 이동
의 완급 조절, 슛과 자세 등, 농구부는 농구라는 종목에 특화된 움직
임을 익히는 것이다.
당연히 농구부가 유리해서 짓밟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유타
는 그 예상을 간단히 뒤집고 계속해서 슛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뭐, 유타는 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까. 뛰는 걸 좋아하
니까 육상부인 거지 대체로 뭐든지 높은 수준에서 잘하니까.”
“그게 뭐래. 무서워라.”
“어머니가 스포츠 트레이너인가 그렇다나 봐. 누나들도 스포츠 분
야로 진출한 사람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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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 교육의 산물이잖아.”


유타는 누나들을 조금 거북해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이야기를 들
으면 스파르타 교육을 받은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유타는 코트를 누비며 상대를 희롱하
고 있다. 자신이 슛을 던질 때도 있고, 미끼가 되어서 같은 팀이 골
을 노리게 유도하는 등,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
다.
“우오오오오! 카도와키를 마크해!”
“밀어! 밀어!”
“쟤가 활약하게 두지 마!”
“저것들 원념이 엄청나게 서리지 않았어?”
“이럴 때 폼을 못 잡으면 진짜 농구부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상대 팀의 우렁찬 함성을 들으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보자, 네트 너
머에서 여자들이 유타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도 시합을 시작한 듯, 남은 여자들이 견학하러 네트 쪽으로 와
있었다.
더욱 알기 쉽게 힘을 내는 남자들을 보고 “잘하네.”라고 감탄한 듯
이 중얼거리자, 왠지 모르게 이츠키에게 등짝을 맞았다.
결국 첫 번째 시합은 아마네의 반이 승리했고, 아마네는 유타의 무
시무시함을 통감하면서 단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받은 팀 구별용 상의를 걸치면서 귀찮다는 표정도 숨기지
않은 채 코트에 들어섰는데, 문득 네트 근처에 있는 마히루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 천사님의 미소와는 다른, 은은한 웃음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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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집에서 아마네에게 보여주는, 마히루 본연의 부드러운 웃음


이다.
눈가에 친근함을 담은 마히루는 그대로 손을 작게 흔들어서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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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요.』
소리는 안 나도 확실히 그렇게 들린 것 같아서, 아마네는 도저히 얼
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진 나머지 고개를 홱 돌렸다.
돌아본 곳에 이츠키의 얼굴이 있었던 것은 아마네의 실책일 것이
다.
“애쓸 마음이 생겼어?”
“시끄러워.”
뭐든지 다 들여다본 것 같아서 화풀이하듯 대꾸했더니,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이츠키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죽겠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농구 경기에 임해서 기력을 다 방출하는 바람
에, 아마네는 숨을 헐떡이면서 쪼그려 앉아 신음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다.
요새 운동량을 늘렸다고는 해도 이렇게 전력을 다할 기회는 없었
고, 지금껏 격한 운동은 해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겨루는 시
합이라는 점도 맞물려서, 아마네는 정말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천천히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마구 날뛰는
심장이 도무지 얌전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시합 중에 사고가 나서 세게 넘어지는 바람에, 부딪힌 몸도 아프고
호흡도 고를 수 없어서 꽤 혹독한 경험을 했다.
자꾸 필사적으로 뛰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딱 봐도 너무 노력한 거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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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심한 꼴을 보인 것 같은데.)
마히루가 볼 때 넘어져서, 나중에 교실에서 얼굴을 보기가 우울했
다. 이래서는 멋진 모습은 고사하고 한심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네, 괜찮아?”
시합 후 인사를 마치고 쪼그려 앉은 아마네에게, 아무래도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한 이츠키가 몸을 숙이고 상태를 물어봤다.
“괜찮지만…… 내일은 확실하게 근육통이 오겠어.”
“하하, 그건 운동을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이지.”
놀리듯이 말하면서도 등을 쓸어 주는 이츠키에게 조용히 고마워하
면서 심호흡하다 보니 심장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뜨겁고 부딪힌 데가 아프지만, 진심으로 농구 시합을 뛴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래도 좋겠지 싶기도 해서, 자신답지 않다
고는 생각하지만.
나중에 얼굴을 식히러 가자고 다짐하고, 아마네는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마네는 체육관 쪽에 있는 수돗


가에서 얼굴을 씻었다.
체육 수업 다음은 점심시간으로, 모두가 ‘배고파’라고 말하며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장 나가서 아마네가 있는 곳은 조용했다.
이츠키와 유타와는 식당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마히루와 얼굴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서 물을 오래 얼굴에 적셔 억지로 식히려고 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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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다 보니 머리까지 젖었지만, 땀이 축축해서 씻어내기에는 딱 좋


으리라.
(보는 앞에서 넘어졌으니까 말이지.)
하필이면 마히루가 있는 근처에서 성대하게 넘어졌다.
그때 마히루의 표정을 떠올리고 떫은 표정을 지었는데, 뒤에서 작
은 발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귀에 익숙해도 지금은 거부하고 싶은 목소리가 들려서, 아마네는
씻는 것을 천천히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한심한 얼굴을 보이기는 싫어서 입술을 꾹 깨물고 심호흡한 다음,
어떻게든 수치심 때문에 도망치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 참으면서 젖
은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듯 쓸어 올리면서 뒤돌아봤
다.
“옷도 다 갈아입고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점심은 안 먹어?”
태연한 척하면서 뒤돌아봤더니 왠지 모르게 마히루가 동요하고 있
었다.
“아, 저기, 그게 말이죠. 넘어졌으니까, 괜찮은지 걱정이 되어
서…… 아카자와 씨가, 여기 있다고 말해 줬거든요.”
“이츠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금 부딪혔을 뿐이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말을 꺼내는 마히루는 천사의 가면이 조
금 벗겨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몰라서 아마네도 당혹스러웠다.
보는 앞에서 넘어졌을 때도 동요했는데, 이번에는 그것과 다른 느
낌으로 동요하는지라 고개가 절로 기울어진다.
“시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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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후지미야 씨는 그


포즈가 반칙이니까 그만둬 주세요.”
“무슨 뜻이야?”
“아무튼 안 돼요.”
마히루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할 때가 있다.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자, 마히루는 대답하려고 들지 않고 헛기침을 해서 마음을
바로잡은 듯 아마네를 바라봤다.
“아까…… 우리를 감싸려고 했죠?”
“어쩌다가 네가 거기 있었던 거야. 없어도 잡았을 거라고, 그건.”
아까 체육 수업 때는 여자들도 응원차 얼굴을 내비쳤는데, 네트가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여자들 얼굴로 꽤 빠른 공
이 날아갈 뻔했다.
체육 시간에 넘어진 것은 네트 사이로 공이 빨리 날아간 것을 아마
네가 아슬아슬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마워하길 바란 것은 전혀 아니니까, 넘어진 아마
네로선 그냥 무시해 주는 것이 더 고맙다.
“내가 그냥 혼자 넘어진 거니까, 웃고 넘어가면 되는데.”
“그럴 수 없어요. 정말로 감사해요. 그건 그렇고, 그렇게 무리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어쩔 수 없잖아.”
고개를 돌리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자 정말 못 말리겠
다는 눈으로 마히루가 아마네를 쳐다봤다.
“멋지긴 했지만요……. 집에 가면 부딪힌 데를 꼭 보여주세요, 아
마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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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에 있는 아마네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놓치지 않겠


다는 듯이 말하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눈을
돌린 채 “싫은걸.”하고 도망치듯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게 허락될 리가 없어서, 집에 가니 마히루가 가타부타 따


지는 것도 용서하지 않을 기세로 셔츠를 벗기고 응급처치를 했다.
그런 다음 마히루는 반라를 강요한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더
니, 한동안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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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천사님이 터뜨린 충격

시험지 반환과 결과 발표가 끝나고 동아리 활동도 재개하면서 가까


운 이벤트가 약 3주 뒤에 있을 체육대회만 남은 2학년들은 일단 침
착한 분위기였다.
시험 성적에 따라선 보충수업이, 과목에 따라서는 추가 시험이 있
거나 하지만, 아마네는 전부 통과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이 아
주 짧게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편한 시간이 별로 없지만. 동아리 활동이 있고, 전국대회를
대비해서 연습도 해야 하니까.”
방과 후에 유타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꾸했
다.
1학년 때부터 이미 육상부의 에이스로 불리던 유타는 감독과 코치
들에게 기대를 받는 듯,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을 빼먹지 않는
다.
유타는 아마네를 겸허하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아마네가 봤을 때
는 유타가 훨씬 더 겸허하다. 그 끝없는 노력이 있기에 인망이 있고
인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구나.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해도 성과를 내보여야 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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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지금부터 타임을 꾸준히 단축해 나가야 할 거야. 달리는 건 좋


아하니까, 시간에 여유가 조금 부족해도 상관없지만.”
“괜찮아? 육상부는 힘들 거 같은데.”
“그럴까? 우리 육상부는 스파르타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우리 코
치도 ‘무조건 뛰면 된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식으로 생각
하진 않으니까. 쉴 때는 쉬고, 연습할 때는 연습한다는 식으로 딱딱
구분하기도 하고.”
“아하…… 나는 무작정 열혈 동아리인 줄 알았어.”
“근성과 기합도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에너지를 쓸 때를 가리지
않는 활동이라면 아마도 그만뒀을 거야. 달리는 건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시라카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둔 거니까.”
“그러고 보니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고 했지……?”
“맞아. 아마 후지미야가 깜짝 놀랄 만큼, 이츠키와 시라카와도 완
전 다를 거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치토세는 중학교 시절과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는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를 모르는 아마네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지금처럼 밝고 분위기를 잘 띄우는 두 사람밖에 모른다.
본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화제도 아닌 것 같아서 자세히 물어보지
는 않았지만, 유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많이 변한 거겠지.
다만 궁금한 한편으로 두 사람이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얼
굴에 드러난 듯, 유타가 “나는 말하지 않겠지만, 두 사람은 언젠가
말해 주지 않을까.”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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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마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


다. 이츠키가 아마네의 사정에 파고들지 않는 만큼, 아마네도 괜찮다
고 여길 때까지 두 사람의 과거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뭐,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말이야. 생각도 없이 달리기만 한다면
그저 근육을 혹사한 끝에 일사병에 걸릴 뿐이야. 게다가 나한테는 육
상이 청춘이지만, 육상만이 청춘인 건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의 육상
부는 있기가 편해서 참 좋다고 봐.”
놀라울 정도로 상큼한 미소를 짓는 유타가 눈부시게 보여서 아마네
가 눈을 가늘게 떴더니, 유타는 미묘하게 부끄러워졌는지 조금 쑥스
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뭐, 이제 내 이야기는 됐지? 오늘은 동아리 활동을 잊자고, 쉬는
날이니까.”
“카도와키 네가 먼저 꺼낸 말인데.”
“그야 그렇지만, 됐어. 자, 가자.”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 유타를 보고 슬쩍 웃고, 아마네
는 같이 교실을 나섰다.
덧붙이자면, 이츠키는 치토세와 오늘 ‘보충수업 없다 아싸! 데이
트’를 하러 간다는 듯, 먼저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마침 동아리 활
동을 쉬는 날이라고 하는 유타와 기왕이면 어디라도 들렀다가 가자
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렇게 방과 후 가볍게 수다를 떤 다음에 하굣
길에 놀러 가기로 했다.
그대로 복도를 걷다 보니 익숙한 황갈색이 복도 끝에 보였다. 이런
시간에 남아 있어서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자세히 보니, 뭔가 두
손으로 대량의 프린트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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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뭐 해……?”
“아, 후지미야 씨와 카도와키 씨. 웬일로 이런 시간에 다 남아 계시
네요, 특히 후지미야 씨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그건 뭐야?”
두 손으로 힘들게 안고 있는 프린트를 눈짓하자, 마히루가 입술에
쓴웃음을 지었다.
“선생님께서 시간이 있으면 스테이플러로 다음 달에 있을 체육대회
관련 프린트를 묶어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차마 거절하지 못해
서…… 지금 받은 참이에요.”
“시이나를 너무 편리한 도구로 쓰는 거 아니야……?”
학생들만이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두텁게 신뢰를 받는 마히루는 좋
든 나쁘든 기대를 받고 있다. 부탁도 많이 받는 것을 자주 목격하는
데, 이번 것도 그런 부탁인 것 같다.
문무겸비의 재녀이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더더욱 시간
이 남을 거라고 생각한 교사가 부탁하는 일을 받는 빈도가 높다. 착
한 아이로 있으려는 까닭에 마히루가 기본적으로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사들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리라.
“저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요. 이 정도 일은 금방 끝나고요. 빈
교실로 옮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고, 다 나르기만 하면 스테이플러
만 찍으면 끝나요.”
“직원은 뭐에 쓰라고 있는 건데.”
“괘,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한 시간 정도면 끝나니까요.”
“강제로 한 시간이나 잡아둔다는 뜻이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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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면 이럴 때 편리하게 이용해 먹는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


이 복잡해지는데, 마히루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지 아니면 익숙한
건지, 눈꼬리를 내리고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저는 오늘 귀가가 조금 늦어지는 정도니까요. 해가 지는 시간도
점점 뒤로 밀리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는 마히루에게, 아마네는 슬며시 한숨
을 쉬었다.
“미안해, 카도와키……. 오늘 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될까?”
“신기한걸. 나도 그걸 생각했어.”
아무래도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둘이서 얼굴을 보고 작게 웃은 다음, 마히루의 손에서 프린트를 슬
쩍 빼앗았다.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연신 깜빡이던 마히루는 뒤늦게 무슨 일인
지 이해한 듯 허둥지둥 아마네의 옷자락을 잡았다.
“후, 후지미야 씨. 돌려주세요.”
“이걸 어디로 가져가게?”
“네? 2층 끝에 있는 빈 교실로……. 그게 아니고요! 제가 부탁받은
일이니까요.”
“학생한테 맡길 정도면 딱히 기밀사항도 아닐 테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 그렇지만…… 카도와키 씨도 뭐라고 말해 주세요.”
“하하하. 후지미야, 그러면 못써. 나한테도 반은 줘야지.”
“자,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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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불만인 척하는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반쯤 떼 카도와키에게


건네자, 마히루는 이제는 무슨 소리를 해도 틀렸다고 깨달은 듯하다.
질타하는 눈으로 째려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지정 교실
로 이동한다.
“여러분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없었는데요…….”
“나는 빼앗긴 게 아니라 내 멋대로 소비한 거야.”
어디까지나 아마네가 멋대로 하는 일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바라지
도 않은 호의를 강요한 셈인데, 마히루만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건 유타도 동의하는 듯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니까 마히루는 더는
뭐라고 말할 수 없어진 것처럼 조금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보는데, 그
냥 모르는 척했다.
다만 마히루도 싫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속으로는 양을 보고 난
처했을 테지만.
“바보…….”
학교에서는 결코 들을 일이 없는 귀여운 본성으로 매도하는 소리가
들려서, 아마네와 유타는 덩달아 웃고 말았다.
천사님의 가면이 아주 조금 벗겨지고 있는 마히루는 아마네와 유타
의 곁을 걸으면서 눈을 가늘게 뜨는데──.
“선생님한테 아양을 떠는 걸로 모자라서 남자한테도 꼬리를 치네.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했으면서.”
“진짜. 팔방미인이 따로 없어.”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서, 아마네는 무심코 걸으면서 몸을 굳
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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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만 돌려서 주위를 봐도 목소리를 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아마도 뒤쪽의 안 보이는 데 있는 거겠지.
옆에 있는 유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 않다. 예
전에 원래부터 뒤에서 험담하는 인간이 껄끄럽다고 몰래 말해 준 유
타도, 지금 목소리는 허용할 수가 없나 보다.
아마네도 ‘뭐?’라고 소리칠 뻔했지만, 그랬다간 또 일이 커질 원인
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꾹 참고 마히루를 힐끗 봤다.
마히루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 평소와 표정이 똑같았다.
다 익숙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 변화도 없다.
그 표정이 불안해서 무심코 쳐다보고 말았지만, 시선을 알아차린
마히루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너무 늦지 않게 끝내 버려요.”
불안을 느낄 정도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아마네와
유타도 더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 중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작


업을 마친 마히루와 시간을 벌려서 귀가한 아마네는 먼저 귀가한 마
히루의 얼굴을 무심코 쳐다봤다.
마히루는 평소와 표정이 같아서, 상처를 받았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예쁜 얼굴을 흐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마네
가 그 말을 떠올리고 짜증이 날 정도였다.
아마네의 표정이 흐려진 것을 본 마히루가 곧장 쓴웃음을 짓는다.
“혹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신경 쓰이나요?”
“당연히 신경이 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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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보지 않고 뒤에서 몰래 다 들리라는 듯이 험담하는 인간들


에게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옆에 앉아 마히루를 보니, 여전히 아마네의 태도에 쓴웃음을 짓고
있다.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그 정도는 예상했고,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하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허용한 마히루를 보고, 오히
려 아마네가 동요하고 말았다.
마히루가 천사님처럼 행동하는 이유를 아니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는 것이 의외라서 표정이 어색해진다.
“그, 그런 거야?”
“당연하죠. 누구나 저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무서울 거예요.”
손이 심심한지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서 머리끝을 손가락에 돌돌
말면서, 마히루는 담담하게,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기 쉽다고는 생각하지만, 학교의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호감이 크게 드러나는 만큼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에요. 아마네 군도, 처음에는 저를 전혀 좋아
하지 않았다고 보는데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엄청나게 찔리는데…….”
그 말대로, 자신도 알고 지내기 전에 평가만 알던 상태에서는 마히
루를 능력과 용모가 좋은 사람으로 인식했고, 그 점에 한해서는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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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하지만 천사님 개인은 굳이 말하자면 껄끄러운 사람으로 분류했으


리라. 눈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 너무 뛰어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다가가기 어렵다는 감각이다.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는 겉으로는 우호적이어도 저를 달갑게 여기
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드러내지 않는 것은 제가 여러 사람에게 좋
은 평가를 받으니까, 악의를 입 밖에 꺼내면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이
겠죠. 다수에 묻혀서 사는 게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니까요.”
아마네는 담담하게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자신을 싫어하는 사
람의 존재를 화제로 꺼내는 마히루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
민했다.
여자들 사이에는 아마네와 다른 가치관과 인간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히루가 말하는 걸로 봐서는 정말로 마히루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을 테고, 실제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말로 잘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아마네의 분
위기를 감지했는지, 마히루는 눈썹을 내리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옛날부터 일정 비율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
었으니까 익숙해요. 뭐, 되도록 비율이 줄어들게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지만요. 그래도 아예 없어지진 않아요. 다수가 좋아하니까 싫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힘들진 않고……?”
“직접 들으면 싫은 생각이 들지만,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은 현재
없으니까요. 게다가 오늘 있었던 것처럼 제가 싫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제 알맹이가 아니라 외모나 태도에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일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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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요.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뭔가 하려는 생각도 없어요.”
“냉정하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평소처럼 행동할 수 없어요.”
이런 점에서 누구보다도 냉정한 마히루는 이지적인 빛을 드러낸 눈
을 슬쩍 내리뜨고 입술에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저는 객관적으로 봐서 남들보다 외모가 좋다고 저 자신도 잘 알아
요. 그야 타고난 것이기는 하지만, 노력을 게을리한 적은 없고, 시간
과 수고를 들여서 완성한 거예요. 다만 이것만으로도 못마땅하게 생
각하는 사람은 생기는 법이에요.”
과장도, 오만도 아닌,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는 말.
하긴, 태어날 적부터 미인이라는 사실은 한 번밖에 보지 못한 마히
루의 어머니를 떠올리기만 해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다만 마히루의 미모는 타고난 게 전부가 아니다.
자세와 행동거지, 배어나는 분위기, 시선과 표정, 뭘 놓고 봐도 우
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타고난 것만으로 완성될
리가 없다.
아마네로선 그저 외모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지성과 교양,
품성이 내면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예쁘지…….)
눈부실 정도로 철저해서, 그 빛에 타버릴 것만 같다. 그 빛이 마히
루도 태울 것 같아서 조금 두렵지만.
“제 관리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성과만
보고 그게 치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야 그 질투는 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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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자의 감정이니까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부정하고 싶


은 게 있다면, 저는 카도와키 씨를 친구로서 우호적으로 대해도 이성
에게 보이는 호의는 전혀 없다는 점일까요. 그걸 오해하고 질투해도
곤란해요.”
“그, 그래…?”
“애초에 제가 카도와키 씨를 좋아하는 척이라도 했나요? 착하고 좋
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연애 감정은 하나도 없어요. 이야기만 했
다고 의심하면 곤란한데요.”
조금 거슬린다는 투로 말한 것은 의심받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
일종의 우상이 된 마히루와 유타는 그 성별과 우수함 때문에 이야
기 속에서 한 세트로 묶이는 일이 많다.
실제로 본인들은 접점이 별로 없고, 마히루는 아마네를 알게 된 시
점에서 유타를 인기가 많은 사람으로만 인식할 뿐 딱히 아는 게 없었
다. 아마네가 유타와 친해지면서 아는 사이가 됐을 정도다.
아마네 역시 학교에서 왕자님으로 불리는 남자도 평등하게 대하는
마히루가 유타에게 연애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카도와키를 좋아하는 사람이 보면 빼앗긴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마히루가 만약 호의를 보이면 어지간한 남자는 한 방에 넘어갈 테니
까.”
“아마네 군은 그 어지간한 남자가 아닌 것 같네요.”
“그야 …….”
호의를 받기 전에 아마네 자신이 푹 빠졌으니까,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커지고 많아지고 깊어질 뿐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만큼은 본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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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게 말할 수 없다.
아마네는 미묘하게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는데, 마히루는 그걸 빤히
보고 있다.
그게 영 거북해서 마히루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야 구석
에서 한숨을 쉬는 마히루가 보였다.
“아무튼 카도와키 씨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인 것은 알지만, 뭐라고 할까…… 왠지 의식해
서 드러내는 태도가 겹치니까, 지인이나 친구, 이해자로선 좋을지도
몰라도 연애 감정에는 도달할 일이 없다고 느끼는데요.”
“뭐…… 겉으로 봐서는 마히루와 카도와키는 왠지 닮은 구석이 있
긴 하지. 카도와키는 마히루처럼 겉과 속이 심하게 차이가 나지 않지
만.”
유타와 친해진 최근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유타도 주위에서 기대
하는 태도를 보이는 구석이 있다. 다만 마히루만큼 현저하지 않고,
본인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마히루는 가정환경의 문제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유와 정도가 다른 거니까, 일률적으로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사
실이다.
“마치 제가 이중인격인 것처럼 말하네요……. 그, 그렇게 겉과 속
이 다른가요?”
“다르다고 할까, 마히루는…… 천사님보다 원래 모습이 훨씬 귀여
운걸. 처음에는 쿨하고 엄격한 느낌이었는데, 익숙해지고 보니 생각
했던 것보다 부끄럼쟁이 같아. 말과 행동에 드러나는 감정도 전혀 다
르니까, 격차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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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가 부끄럽게 하는지 알기나 해요?”


“그건 뭐…… 그래.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의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마히루는 대놓고 진심으로 칭찬할 때
부끄럼을 잘 탈 뿐이다.
아마네도 평소 마히루가 노력가이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
을 잘 아니까 되도록 진심으로 순수하게 칭찬하려고 했다. 그게 부끄
러움을 끌어낸다면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부러 그러지 않는 게 더 나쁜 것 같은데요.”
“그 말은 그대로 돌려줄 거고, 오히려 네가 더 심해.”
“무슨 뜻이죠?”
“마히루 넌…… 의식하지 않은 스킨십이 추가되니까 곤란하다고 할
까.”
마히루야말로 아마네를 탓할 처지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부끄럽
게 한다는 점에서는 마히루가 더 파괴력이 크고 횟수도 많다. 덤으로
기습도 자주 하니까, 아마네의 심장과 이성은 항상 강하게 단련해야
했다.
마히루는 스킨십이라는 말에 원래부터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깜
빡인 다음, 이어서 숨을 마시고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다.
서서히 뺨으로 퍼지는 홍색이 아마네가 시선을 주는 시간에 비례해
서 더욱 진해졌다.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얼굴이 새빨개졌을 때, 마히루가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
다.
“일부러 그럴 때도 있지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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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런 게 뭔지 여러모로 물어보고 싶지만, 기본적으로 고의


가 아닌 건 알아. 여자가 자꾸 그러면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
라고.”
“아마네 군한테만 그러는 거예요…….”
“그것도 알아.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마히루가 아마네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특
별하게 보고 좋게 생각해 준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그렇더라도, 남자가 봤을 때 마히루가 무의식중에 하는 스킨
십은 파괴력이 너무 강해서 곤란하다.
가능하다면 개선해 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이성이 버티기 힘들다
고 생각하면서 마히루에게 시선을 돌리자, 마히루는 얼굴을 붉히고
아마네의 팔을 탁탁 때렸다.
“거봐. 그런 거 말이야.”
“이번엔 의도해서 한 거예요.”
“어어……?”
때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당황한 아마네를 마히루가 조금 매섭게
노려보지만, 본인의 얼굴과 수치심 때문에 젖은 눈으로 노려봐도 귀
엽게 쳐다보는 것으로만 보인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순도 100% 귀여운 표정을 보니 아마도 말했다
간 더욱 못마땅해할 감상이 떠올랐다.
다만 말하진 않아서, 마히루는 헛기침한 다음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저는 일부 여자가 미워해도 별로 상
관없어요. 모두가 친하게 지내자는 것은 아이들이나 꿈꾸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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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억지로 묶으려고 했다간 어디선가 균열이 생길 게 뻔하니까, 일


부가 미워해도 받아들일 거예요.”
“응…….”
“방금 한 말과 모순되지만, 저는 착한 아이로서 모두가 좋아하는
천사님으로 행동하고 있어요. 하지만 요새는 이젠 그만둬도 되지 않
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젠 그만둔다고?”
그토록 철저하게 천사님처럼 행동하던 마히루에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라서 되물었는데, 마히루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
다.
“착한 아이가 아니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아서요. 저는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알면서도 모두가 좋아하는 말과 행동을 실천
했지만, 진짜 저를 찾아주고, 저를 잘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있
는 그대로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쓸쓸하게 눈빛을 흐린 마히루는 곧
바로 캐러멜색 눈에 맑은 빛을 드리웠다.
“아마네 군은, 저한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잖아요?”
그 빛이 긍정적이고, 희망과 기쁨을 내포한 것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눈부시게 찬란한 빛은 아니지만, 포근하고 다정한, 확실한 온
기와 자상함이 담겼다.
그런 광채와 감정을 담은 눈으로 봐서, 아마네는 목에서 꿀꺽 소리
를 냈다.
“약속했으니까.”
“네. 약속해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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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가 긍정하자 달뜬 웃음을 얼굴에 드러낸 마히루가, 아마네에


게는 포근한 눈빛과는 반대로 매우 눈부시고 산뜻하게 보였다.
그러나 눈을 돌리기에는 너무 아쉬울 정도로 맑고 고운 웃음이라서
시선이 저절로 끌려간다.
왠지 멀리서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면서, 아마네는 자신을 향
한 미소를 눈에 새겼다.
“그러니까 너무 애써서 의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일부러 학
교에서 바꿀 생각은 지금도 없지만, 너무 신경을 쓰진 않으려고요.
남들이 실망해도 괜찮아요. 제게는 저를 봐 주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
이 있으니까요.”
“그래…….”
아마네가 보고 있으니까.
아마네가 진짜 마히루를 알고, 움츠러든 마히루를 찾았으니까, 마
히루는 이토록 마음이 편해졌다고.
그렇게 표정에 드러나서, 기쁨과 애정이 한없이 끓어올라 가슴을
간질였다.
다만 아주 조금, 그 느낌을 방해하는 작은 응어리가 가슴속에 있었
다.
“왠지 못마땅한 거 같은데요?”
아마네가 개인적으로 조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듯한 마히루가 불만은 아니지만 난처한 듯, 불안해하는 눈으로 봤
다.
“아, 아니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기쁘고, 잘된 일이라고
봐. 그건 그렇다 쳐도, 조금 생각한 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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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요? 말해 보세요.”
“어? 그건 좀.”
“딱히 화내려는 건 아니거든요? 아마네 군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것 같지도 않고요.”
가만히 바라보는 그 눈에는 거부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압박감
이 있다.
그야 당연히 아마네도 조금 오해를 살 말을 했으니까, 잘 설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말했다간 놀림당할 정도로 유치한 감정임을 자기 자신에게 드러내
야 하리라.
“저기, 웃지 마.”
말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신신당부하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줘
서, 아마네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미묘하게 시선을 돌
리고 입을 열었다.
“의식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
“즉, 우연히 마히루가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거잖
아?”
그 말까지 하고 마저 말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할 일
은 아니다. 아마네는 한 차례 심호흡하고 입술을 떨었다.
“언젠가 진짜 마히루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까, 왠지 마음이 복잡해져서 말이야.”
나머지 말을 꺼내는 것을 잠깐 망설인 것은, 아마네 자신이 참 아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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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가짐을 바꾸려는 것


은 기쁘고, 오랫동안 유지했던 허물을 하나 벗어서 아마네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도 기쁘다.
아마네를 전폭적으로 믿어 주는 것도 기쁘다.
꾸미지 않은 자신으로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 준 것이 기쁘다.
불만은 없다. 그런데도── 마히루가, 노력가이고, 강한 척하는 주
제에 외로움을 잘 타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서툰, 지극히 평
범하고 섬세한 여자애가 다른 아이들 앞에 드러나는 것이 싫었다.
(이게 독점욕과 질투심인 건 나도 알아.)
마히루는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이런 감정을 가질 권리가 없는데
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거, 건방지다고,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을 테지만.”
창피함과 한심함, 자조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꾹 닫은 아마네를, 마
히루는 넋이 나간 것처럼 크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면서 보다가 점차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마네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입가가 풀리고, 눈빛은 포근하고 즐
거운 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 웃지 말라고 했잖아.”
“후후, 미안해요.”
무방비할 정도로 순진하고 악의가 느껴지지 않게 빙그레 웃으면서
사과하는 바람에, 아마네는 숨을 삼키고 더는 뭐라고 따질 수 없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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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본 미소와는 다른, 순수한 기쁨과 친근함을 한가득 쏟아부은


표정과 눈빛에 말문이 막힌 아마네를, 마히루는 곁에서 미소를 조금
차분하게 바꾸고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아마네 군에게 보이는 얼굴은 다른 사람에게 보
이지 않아요. 친하지도 않은데 보일 리가 없잖아요.”
“그, 그래?”
노골적으로 안심하고 말아서, 아마네는 현재 감정이 겉으로 너무
드러나고 있음을 통감했다.
평소라면 표정을, 감정을 더 잘 감출 수 있을 텐데도. 마히루와 관
계된 일에는 안쪽에 감추고 싶은 것이 자꾸 겉으로 튀어나오고 만다.
“아마네 군은 역시 귀여워요.”
입안에서 볼을 깨물어서 표정근이 쓸데없이 일하지 않게 주의했을
때, 무슨 생각인지 마히루가 왠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놀리는 거지?”
“진심인데요.”
“더더욱 안 돼.”
“아마네 군도, 그렇게 귀여운 구석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안
돼요.”
“귀엽다는 말부터 부정하고 싶은데. 대체 어딜 봐서 귀엽다는 거
야. 이런 남자를 붙잡아 두고서.”
귀엽다는 말은 어린 시절에 두고 왔다고 자부하는 몸으로선 잘 이
해할 수 없는 평가이며, 남자로서도 수긍할 수 없다.
귀엽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린아이나 여자 정도로,
귀여움을 추구하지 않는 아마네는 그저 놀리는 뜻으로만 받아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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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었다.
눈썹을 모으고 눈으로 항의해도, 마히루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 듯
키득키득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다.
“전부 귀여워요.”
“여자가 귀엽다고 하는 말은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어.”
“말이 심하네요. 그야 여자가 쓰는 귀엽다는 말의 정의가 시각적인
뜻이 아니고, 더 넓은 의미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귀엽다
는 말로 표현한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요. 아마네 군은 귀여운데
요?”
“남자는 귀엽다고 칭찬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아.”
좋아하는 여자애가 칭찬하려고 귀엽다는 말을 골라도 기쁠 리가 없
다. 아니, 칭찬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아마네는 자신과 같은 남자에
게 귀엽다는 평가는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네로선 자신이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서 기뻐할 줄 아냐고 따지
고 싶지만, 칭찬보다는 단순한 평가 같으니까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
다.
입술에 힘을 주고 뚱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마히루를 봐도, 본인은
재밌다는 듯이 웃고만 있다. 그 눈에 사랑스러운 기색이 안 보였다면
아마네는 마히루의 볼을 꼬집었을지도 모른다.
“멋지지는…… 않은 건가.”
무심코 작게 중얼거리자 마히루가 딱 굳어서 아마네를 보는 바람
에, 자신의 발언을 곧바로 후회했다.
자신이 멋지게 봐 주지는 않느냐고 하다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남들에게 자주 겁쟁이, 소심하다, 한심하다 같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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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듣는 자신을 마히루가 멋지게 볼 거라고 착각하는 게 이상하다.


그런 말을 기대한 시점에서 잘못한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시선을
돌리려고 했는데, 마히루는 아마네한테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멋져요.”
똑똑히 들리게 발음해서 고백한 말에, 귀를 의심했다.
“그야 아마네 군은 귀엽지만, 멋져요. 저한테는, 누구보다도.”
“어설프게 칭찬하지 않아도 돼…….”
“말이 심하네요. 거짓말해서 어쩔 건데요. 생각한 것만 말하는 거
예요.”
“말이 과하고,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멋진 남자가 되자고 생각하기는 해도 자신의 지금 모습을 전혀 멋
지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마히루가 아마네를 멋지다고 칭찬하니까
의심하고 만다. 자꾸 귀엽다는 소리를 들은 뒤라서 더더욱.
“아마네 군이 생각하는 멋진 사람의 정의는 뭔가요?”
눈썹을 모으는 아마네를, 마히루가 온화하게 바라본다.
“제가 생각하기로 멋진 사람이란 분위기와 태도, 말과 행동과 성격
같은 사람의 됨됨이를 전부 포괄한다고 봐요. 겉만 멋져도, 저한테는
속이 빈 것처럼 보여요.”
“그, 그건 그렇지만.”
“물론 아마네 군이 객관적으로 봐서 누구나 반할 만큼 미남인가 하
면 그렇지도 않겠지만, 얼굴은 단정하고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외모
만 보고 멋지다고 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마네 군은 조금 입이 험할
지도 몰라도 예의가 바르고, 온화하고 신사적이고 자상하고, 무뚝뚝
한 척하면서도 어쨌든 다른 사람을 잘 챙기는 데다 곤경에 처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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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으면 도와주는, 신중하지만 여차할 때는 의지가 되는 사람이에


요. 종합적으로 봤을 때, 아마네 군은 멋진 사람이에요. 제 주관과
취향이 들어간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아마네 군은 무척 멋진 사람이
니까 자신을 믿어 주세요.”
“이, 이젠 됐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모르잖아요. 아마네 군은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이니까, 제가 잘
전해야 해요.”
“이젠 됐대도!”
마히루가 힘껏 해설하는 바람에 아마네는 중간부터 부끄러워 죽을
지경으로 신음하면서 들었는데, 더 들었다간 창피한 나머지 울 것 같
으니까 말릴 수밖에 없다.
아주 진지하게 역설한 마히루를 강제로 제지하면서, 무한정으로 열
기를 보내는 심장을 어떻게든 달래려고 심호흡했다. 지금의 아마네
는 필시 아까 본 마히루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잘 익은 사과가 되었으
리라.
마히루가 아마네를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은 절실히 알았으니까, 이
제는 자세하게 칭찬해 주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칭찬을 들었다간 심
장이 아픈 데다가 그만큼 평가해 주는 것이 기쁘고 부끄러워서 도저
히 못 버티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서 필사적으로 몸을 지배하는 열기와 수치심
을 배출하려고 드는 아마네를 보고, 마히루는 눈을 휘둥그레 뜬 다음
에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그런 게 귀여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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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마히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고, 빨개진


얼굴로 마히루를 흘겨봤다.
“다음에 또 말하면 입을 막을 거야.”
“어떻게요……?”
“어떻게 하긴, 당연히 손으로 막지.”
“그렇다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전혀 움츠러든 기색이 없는 마히루는 웃으면서 아마네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마히루의 손가락 감촉이 열기를 띤 뺨을 식히듯 감싸고, 시
선을 자신에게 고정하려는 것처럼 천천히 아마네의 얼굴을 마히루의
정면으로 돌렸다.
“설령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저한테는, 아마네 군은
멋진 사람이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아마네 군의 좋은 부분은 제가
잘 보고 있어요.”
정면에서, 봄날의 햇살 같은, 그러면서도 시원한 목소리가 천천히
아마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조용히 아마네를 평가해
주었다.
숨을 헉 집어삼킨 것은 캐러멜색 눈이 확실한 온기를…… 아니, 열
기와 자상함을 띠고서 아마네를, 아마네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리라.
(안 돼…….)
이런 식으로 느낀 적이 없는 열기를 강하게 맛보는 바람에, 아마네
는 신음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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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릴 수도 없는 상태로 마히루가 품은 열기를 그대로 느끼고


있을 때, 문득 마히루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사람.”
달콤한 느낌마저 드는 속삭임을 들은 순간, 등을 따라 확 올라오는
듯 감미로운 짜릿함이 확 퍼져서 마히루의 눈빛으로 뜨거워진 열기
가 몸을 채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마네는 뺨에 닿았던 가녀린 손가락을 떼고
그대로 마히루를 소파 등받이에 밀어붙이듯이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는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정도.
아까 선언한 대로 입을 막은 아마네는 자신의 손등에 입술을 댄 채
로 움직임을 멈추고 마히루를 응시했다.
시야가 가릴 정도로 긴 속눈썹 틈새로 보이는 캐러멜색 눈이 놀란
탓에 휘둥그레졌다.
위험했다고, 아마네는 생각했다.
저런 눈으로 보고, 도발하는 바람에, 한순간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
았다. 희미한 이성이 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사이에 손을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둘이서 처음 경험하는 것을 하나 잃었을 것이다.
그대로 단숨에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서도, 뒤늦게 머릿
속에서 울려 퍼진 이성의 경보에 정신을 차려서 후회하지 않을 선택
을 한 것을 감사했다.
아까만 해도 여유만만했던 마히루는 손가락 사이로 입술이 닿은 것
에 놀라서 어느새 분홍색 화장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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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결국 아마네는 여전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약한 마히루를 보고


피식 웃고 입술을 뗐다.
“다음에 또 그런 소리를 하면, 이 손을 치우고 입을 막을 거야.”
손을 조금 치우면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조금 멀어지는 대신에
귓가에 슬며시 가까이 대고 속삭이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아마네도
알 수 있을 만큼 몸을 크게 들썩였다.
그러나 밀치거나 거부하는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안도
하면서, 아마네는 이번에야말로 마히루의 몸에서 손을 뗐다.
마히루가 지금 어떤 표정일지 보고 싶어도, 아마네 역시 부끄러워
서 멋대로 눈을 돌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너무 대담한 행동에 나선 것이 무지막지하게 부끄러워서,
소파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섰다.
지금 냉정하지 않은 것은 아마네 자신도 잘 알아서, 일단 물리적으
로 거리를 두려고 그대로 일어서려다가 저항을 느꼈다.
잡아당기는 감각에 시선을 내리고 보니, 다음 순간에는 달콤한 향
기가 코끝을 스쳤다.
눈을 잠깐 깜빡였을 때는 눈앞에서 황갈색 비단실이 살랑거리고,
열기를 띤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살짝 스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타박타박 슬리퍼가 바닥을 때리는, 경쾌한 것보다는 거칠고
다급한 발소리가 울리고, 방금 느낀 전부가 환영인 것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타앙. 어딘가 멀리서 울리는 듯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인식하
면서, 아마네는 천천히 무언가가 닿은 뺨에 손을 댔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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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중얼거려도, 당연히 대답이 들릴 리가 없다.


열기와 패기와 냉정함을 전부 잃은 아마네는 쓰러지듯이 소파에 주
저앉아 황갈색 바람이 사라진 복도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날, 마히루가 다시 아마네의 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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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제12화 못 본 척, 모르는 척

뺨에 닿은 것은 대체 뭐였을까.
그 뒤로 결국 마히루가 아마네의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그대로 다
음 날을 맞이했다. 잠든 동안을 빼고는…… 정확하게는 너무 고민하
다가 그대로 기절한 건데, 잘 때 말고는 마히루의 그 행동이 머릿속
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정말 한순간에, 환상으로 의심할 정도로 아주 짧았지만, 부드러운
것이 뺨에 닿았다.
좁아진 거리와 그 감촉으로 보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했지
만, 이해력이 그 사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누구든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 마히루가, 뺨이라고는 해도 입술을
대다니.
(왜……?)
보통 키스란 행위는 상대에게 호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시점에서, 미수라고는 하나 아마네도 마히루에게 호감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니까 돌이켜 보면 부끄럽다.
다만 아마네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마히루는 아니다. 뺨이라고는 해도 실제로 키스했으니까.
어느 정도는 잘 따르고, 특별히 대우해 준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
다. 하지만 뺨에 입술을 댈 정도의 호감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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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서, 기쁨보다 당혹스러움이 더 강하다.


(나를 좋아해 준 걸까.)
별로 멋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한심한 모습만 보인 것 같
은데. 자신을 좋아할 요소가 있을지 자신감이 안 생긴다.
애초에 아마네를 좋아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건방진 게 아
닐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빙빙 맴돌아서 올바른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끙끙 앓았다.


학교에서 마히루는 아마네와 눈이 마주치면 미묘하게 시선을 돌려
서, 아마네도 덩달아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 사람하고 다퉜어?”
그런 주제에 자꾸 마히루를 시선으로 좇아서, 감이 좋은 이츠키는
아마네와 마히루의 미묘한 거리감을 눈치챘는지 점심때 그런 걸 물
어봤다.
덧붙이자면, 오늘은 치토세와 마히루가 불참해서 남자 셋이서 밥을
먹는다.
“어? 다퉜어? 후지미야?”
“아니, 다툰 건 아니지만…… 뭐, 그게 있지. 이런저런 일이 있어
서…….”
키스 미수가 있은 다음에 뺨에 키스를 당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리
가 없어서 대충 얼버무리는 말로 넘어가려는 아마네를 보고, 이츠키
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감추려고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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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됐으니까 감추지 말고 자백하라는 뜻이 시선으로 전해져서, 아마네


는 눈을 피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서로 의식하고 있다고 말해야
좋을까…….”
“너 말이야. 언제까지 소심하게 굴 거야?”
“시끄러워.”
“뭐, 후지미야는 신중하니까. 확증이 생길 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지 않을까?”
“그게 소심하다는 건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아마네가 소심한 거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두 사람이 가차 없이 하는 말이 날아와서 은근슬쩍
찔린다.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믿을 수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는데 말이
지……. 내가 더 남자다우면 좋아한다는 자신감이 생길 거고 말이
야.”
“후지미야 넌 굳이 말하자면 스펙이 좋은데 참 비굴하네.”
“거의 최고 스펙인 카도와키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도 말이지.”
아마네가 유타만큼 문무겸비에 얼굴도 잘생겼다면 고생하지 않았
을 것이다.
마히루가 보이는 호의가 연애 감정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였을 테고,
아마네 자신도 좋아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부담
도 없이 마히루의 옆에 섰을 것이다.
마히루가 진심으로 아마네를 멋지다고 말한 것은 이해하지만, 객관
적인 평가와 주관적인 평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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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의 주관을 가장 우선하지만, 주위의 시선과 아마네의 자신감


을 생각해 보면 객관적으로 멋진 남자가 되게 갈고닦아야 하리라.
“너를 질투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되면 자신감이 생겼
을 것 같아.”
이렇게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해답을 가지고 끙
끙 고민하는 것은, 자신감도 없고 해답에 손을 뻗는 것이 두렵다는
한심함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자신감을 챙겨서 그 사람한테 돌격해.”
“그래서 지금 애쓰는 거잖아. 금방 생기는 게 아니야.”
일단 자신감을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공부는 열심히 노력 중이
고, 좌우지간 앞으로도 10등 이내의 성적을 유지할 생각이다.
아마네는 남들과 비교해 기억력과 요령이 좋은 편이라서 너무 고생
하지 않고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는 유
지하는 성적을 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운동이다.
유타처럼 운동 신경이 뛰어나면 좋겠지만, 아마네는 일반적인 능력
밖에 없고 굳이 말하자면 공부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눈에 띄는 활약
은 기대하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몸이 좋게 보이려고 건강과 자신감을 위해서 신체를 단
련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몸을 다지는 목적에 중점을 둔 것이지 스
포츠를 위해 단련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도 조금 더 잘했으면 다음 달로 다가온 체육대회 때 활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서 스스로 서글퍼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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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도, 나도 나만의 속도로 노력할 테니까 너


무 보채지 마.”
“후지미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괜찮겠지만…… 보는 우리가 속이
타는데.”
“그렇지? 등짝을 걷어차는 모임은 다음에 언제 할까?”
“넌 진짜 뭘 만든 거야.”
설마 진짜로 만들 줄은 몰라서 얼굴을 실룩거리는 아마네에게, 유
타가 난처한 눈치로 “뭐, 응원하자는 의미니까…….”하고 미소를 지
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마히루의 키스가 무슨 뜻인지 고민하면서 학교에서 시간을 보


내고 귀가했는데, 집에 마히루가 오는 걸 기다리는 사이에 거북함이
점점 커졌다.
일단 문자를 보내서 물어봤을 때는 온다고 답장이 와서 오기는 하
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긴장된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아
마네는 심장과 위에서 통증을 느꼈다.
소파에서 몸부림칠 뻔하면서 이상하게 크게 들리는 시계 소리를 느
끼고 대기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몸을 흠칫거리고 말았는데, 지금 동요한 모습을 보였다간
마히루도 동요해서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참는다.
심호흡하면서 인기척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자 아마네에
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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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망설임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들자 사복으로 갈아입은 마히루


가 평소와 똑같이…… 아니, 볼을 희미하게 물들이고 시선을 이리저
리 돌리면서 서 있었다.
“저기…… 어제는 미안해요. 식사 전에 나가서.”
“아, 아니야. 나는 괜찮으니까.”
어색하게 대답하면서 보자 마히루는 기름칠을 안 한 기계처럼 뻣뻣
하게 움직여 아마네의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는데 이번에는 아마네와 거리
를 두듯 구석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면 꽤 심하게 의
식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정착했던 온기가 멀리 떨어진
것을 쓸쓸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안심한 것은 어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저기, 어제, 일, 말인데.”
한동안 말이 없다가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내자, 긴 황갈색 머리카
락이 파도를 치듯 흔들렸다.
“아…… 마, 마히루. 왜 그랬어?”
애매하게 물어본다는 건 아마네도 잘 알지만, 정말로 궁금한 것은
물어보길 망설이는 바람에 간접적으로 묻게 되었다.
아마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마히루는 입술을 꾹 닫고 아주 조금
못마땅하다고도 보이는 눈으로 돌아보더니, 천천히 닫힌 입술을 열
었다.
“부,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할까……앙갚음, 이라고 할까요.”
“앙갚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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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아마네 군도, 하려고 했잖아요.”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아마네는 미수로 그쳤고 마히루는 결과적으로 완수했다는 큰 차이
가 있지만, 지금 그걸 따졌다간 마히루가 토끼처럼 내뺄 테니까 꾹
참았다.
“그렇다면 저도 할 권리가 있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저기…….”
(뺨이라고는 하지만, 나랑 키스해도 괜찮았어?)
그렇게 직접 물어볼 수만 있으면 이 고생을 안 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마히루는 아마네가 하려던 일에 거부감이 없었
고 스스로 입술을 대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감정으로 그랬는지가 쏙 빠졌을 뿐이다.
그 해답을 아마네가 추측으로 내놓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
만 부정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답을 내놓지 않을 뿐이다.
(한심하긴.)
자신의 소심함과 한심함을 스스로 한탄하고 싶어지면서 마히루를
보니, 아주 조금 볼을 붉힌 마히루가 흘겨봤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만 대꾸하고, 아마네는 마히루의 시선에서 벗어나듯 등을 돌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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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제13화 체육대회 준비와 새로운 친구

“아아…… 난 홍팀이야.”
다음 달로 다가온 체육대회 팀 편성 발표를 보고 치토세가 아쉬워
하는 소리를 냈다.
먼저 결과가 나온 이츠키가 백팀이 되었으니까, 일단은 적이 된 것
이다.
“기왕이면 성에 맞춘 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어쨌든 너희는 적이 될 텐데.”
이츠키의 성은 아카자와(빨간 못), 치토세의 성은 시라카와(하얀
강). 두 사람이 홍백 커플로 불리는 이유다.
“그렇구나…… 이런 비극이…… 적인데도 이끌리고 만 금단의 사
랑…….”
적이 된 커플이 한탄하면서 닭살 행각을 벌이는 것을 어처구니없다
는 눈으로 구경한 아마네는 팀 편성을 적은 용지를 봤다.
아마네는 유타와 함께 홍팀이었다. 게다가 치토세도 있다.
반대로 이츠키와 마히루는 백팀에 들어가서, 육상부 에이스인 유타
가 있다고는 해도 같은 반에서 편성을 보면 운동부가 다소 백팀에 몰
려 있다.
그야 아마네는 이기든 말든 아무래도 좋지만, 마히루에게 너무 한
심한 꼴을 보이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다.

201
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아마네는 어떤 종목에 나갈 거야?”


치토세와 닭살 행각을 마치고 온 이츠키가 아마네에게 말을 걸었
다.
이츠키는 치토세와 함께 반에서 체육대회 실행위원을 맡았다. 반에
서 분위기를 띄워 주는 이츠키다운 일이지만, 귀찮은 일을 별로 좋아
하지도 않으면서 잘도 입후보했다는 것이 순수한 감상이다.
“종목이 뭐가 있더라?”
“고를 수 있는 종목은 단거리 달리기와 각종 릴레이 경기, 장애물
경주와 빌리기 경주, 이인삼각, 공 던지기와 줄다리기가 있어. 동아
리 대항 릴레이는 귀가부인 너랑은 관계없을 테고.”
“공 던지기가 좋겠는데.”
“수수한 걸 고르네……. 최소 2종목이야.”
“그렇다면 공 던지기와 빌리기 경주를 신청해야지.”
마히루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지만, 릴레이나 단거
리 달리기는 애초에 운동부의 독무대 같으니까 아마네가 나설 차례
는 없다.
이인삼각도 같이 할 만한 이츠키가 적 팀이고, 유타가 있기는 하지
만 운동부의 각력과 속도에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무난한 것을 고르겠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이츠키가
쓴웃음을 짓는다.
“정말이지 넌 눈에 안 띄는 걸 고르네……. 아니지, 빌리기 경주도
상황에 따라선 주목을 받긴 하지만.”
“별로 뛸 일이 없으니까.”
“너도 참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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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운동부와의 정면충돌은 피하고 싶으니 문화부를 생각해서 만든 경


기에 참가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문제는 남자 단체 기마전인데 말이지……. 넌 적이고.”
반에서 유달리 사이좋은 사람이 이츠키와 유타일 뿐, 다른 남자들
과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친분을 이용해서 유타의 팀에 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미묘
하게 소외감이 들 것 같다.
대체로 친한 사람들끼리 뭉치니까, 음침하다고 자부하는 아마네는
체육대회에 별로 의욕이 없었다.
“아, 그건 아마 괜찮을 거야.”
“응?”
“유타와 카즈, 마코토가 너랑 같이 뛰고 싶대. 어이쿠, 말하기가 무
섭네.”
이츠키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남자 세 명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카도와키인데, 나머지 두 사람은 잘
대화하지 않는 상대다.
아마네도 저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유타와 친한 사이고, 유타가 ‘기왕이면 내 친구들하고도 친해졌으
면 좋겠어.’라며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이츠키가 카즈라고 부른, 히이라기 카즈야. 카도와키와
같은 육상부이고, 장거리 달리기가 특기다. 분위기는 성실해 보인다.
나머지 한 사람은 남자 중에서도 비교적 체격이 작고, 여자들 말로
는 병약 소년으로 불리는 코코노에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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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두 사람 모두 아마네나 이츠키와 엮이지 않을 때 유타가 같이 지내


는 친구들이다.
“어이, 후지미야. 여기 와 봐. 기마전 팀을 짜자.”
그 중심에서 여전히 상큼하게 웃으며 부르는 유타에게 아마네가 당
혹스러워하자, 이츠키가 “가 보라고.”라며 물리적으로 등을 떠밀었
다.
조금 머뭇거리면서 가까이 가 보니, 유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맞
이했다.
“후지미야는 아무 데도 안 들어갔지? 괜찮다면 우리랑 같이 짰으면
좋겠는데.”
“나는 상관없지만, 너희는 괜찮아?”
“상관없어.”
얌전해 보이는 마코토가 먼저 대답했다.
“유타와 카즈야는 키가 크니까, 신장으로 봐서는 네가 제일 좋을
거야.”
“아하…….”
아마도 마코토는 기수일 테고, 기마를 맡는 세 사람의 체격이 다르
면 타기 불편하고 움직임도 굼뜰 것을 우려한 것이리라.
아마네는 키가 큰 편이라서 유타와 카즈야와 나란히 서도 별로 차
이가 나지 않는다.
체격만 보고 말하자면 아마네는 마른 편이라서 두 사람처럼 튼튼함
과 날렵함은 별로 없지만.
“히이라기,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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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고 자시고, 그러자고 부른 건데 말이야. 유타가 친하게 지내


는 이유도 궁금하고.”
“안심해. 후지미야는 좋은 녀석이야.”
“뭐, 유타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니까 의심하진 않아. 그렇다고
나랑 잘 맞을까 하면, 이건 직접 봐야 아는 거니까.”
지당한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짓는 아마네를, 카즈야가 가만히 응시
한다.
아마네를 찬찬히 뜯어보는 듯한 시선이 미묘하게 불편하지만, 사이
좋은 친구들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었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뭐, 잘 부탁해.”
적어도 교류를 거부할 상대는 아니라고 판단한 듯 조금 부드럽게
웃어 보여서 아마네도 마찬가지로 작게 웃고 “나야말로 잘 부탁
해.”라고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후지미야는 시이나 양과 친해?”


유타가 주도해서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작은 친목회를 했을 때, 조
용히 치킨 너겟을 먹던 마코토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의문을 표했
다.
아마네는 되도록 표정이 안 바뀌게 감자튀김을 입에 넣었다.
기마전을 대비해서…… 그보다는 친목을 다지려는 의도가 있는 유
타의 제안에 따라 넷이서 패스트푸드 가게에 왔는데, 설마 별로 접점
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유타에게 힐끗 시선을 돌리자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라는 듯한
표정으로 부정하는 것을 보면 마코토의 순수한 관찰력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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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아마네는 최대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조심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유타를 포함해서 다섯이서 자주 이야기하는데, 시이나 양
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이츠키나 유타를 대하는 것과 다르거든.”
“그래? 나는 전혀 몰랐는데.”
의외라는 듯이 아마네를 보는 카즈야는 순수하게 놀란 눈치로, 눈
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사람들도 모를 거야. 그 밖에는 단순히 질투하는 눈으로 보
기만 하니까.”
“그게 무서운 건데…….”
“그래서? 봐서는 내 생각이 맞는 걸까?”
감정을 잘 알아볼 수 없는 얼굴로 물어보는 마코토에게, 아마네는
어떻게 대답할까 싶어서 유타에게 눈길을 돌렸다.
유타는 두 사람을 믿으니까 문제가 없을 거라는 뜻이 담긴 눈으로
반응했다. 아마네는 볼을 긁적였다.
마코토는 확신한 눈치지만, 너무 퍼뜨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유타가 사람 보는 눈은 정말로 좋을 테고, 마코토의 의문은 캐
묻는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한 것이라서 악의가 있는 것도 아
니었다.
“뭐…… 친하다면 친한 편인데.”
“시이나 양이 먼저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정말이겠지.”
“그렇게 보여……?”
“어렴풋하게.”
마코토의 관찰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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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어설프게 얼버무리는 것보다 어느 정도는 진실을 말하


는 것이 의심도 안 사고 교우 관계가 있다는 현실감이 커질 것이다.
“단순히 집이 가까워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 보니 친해졌을 뿐이
야.”
“혹시, 2학년이 되기 전부터?”
“그렇지. 학교에서 교류하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부터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웃사촌이고 매일 마히루가 집을 오가면서 밥을 차
려 준다는 말은 할 수 없는 데다가 현실감이 별로 없으니까, 조금만
진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다.
아마네의 설명을 듣고 “유타는 알았어?”라고 유타에게 시선을 돌
리는 마코토.
본인이 말했으니까 감출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유타도 고개를 끄덕
이자, 마코토가 슬며시 한숨을 쉬었다.
“거참, 사람이 너무 착해.”
“착해?”
“아, 우리만 아는 이야기야. 유타, 우리한테 비밀로 했잖아.”
“후지미야가 말할 때까지 내가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카즈야랑 마
코토가 퍼뜨리고 다닐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연하지. 내가 굳이 남한테 원한을 살 일을 하겠어?”
“카즈야는 그런 솔직함이 미덕이야.”
싱글벙글 웃는 유타를 보고 칭찬을 들은 카즈야가 고개를 갸웃했
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식의 그 표정은, 사람의 선의를 의심하
지 못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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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미로 위태로운 것 같지만, 선량한 사람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유타와는 다른 방향으로 성실하고 품행이 방정하기로 유명한 카즈
야에게 황당해하면서, 역시 유타의 친구라고 잘 이해했다.
유타는 사람 보는 눈이 좋다. 친구로서 함께할 상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을 것이다.
“즉,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뭐, 카즈야는 거짓말을 못 할 테니까 모르는 척하는 게 제일일 거
야. 애초에 설령 두 사람이 가깝다는 의혹이 생겨도, 굳이 카즈야한
테 묻지 않고 이츠키나 유타에게 물어볼 테니까.”
“그렇겠지.”
피식 웃는 유타를 보고 아마네도 안심했다.
“뭐, 그래 주면 고맙겠어. 나는 걔한테 피해를 주고 싶은 게 아니니
까.”
오히려 숨기고 싶은 처지라서, 소문을 내지 않아 주는 것은 고맙다.
“본인도 자기 교우관계로 이런저런 소리를 들으면 싫을 테니까. 가
만히 내버려 두면 좋겠어.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들키면 아마네한테도 비난과 질투가 날아들 것임을 잘 알고, 각오
도 했다. 하지만 마히루도 악의가 없이 ‘왜 후지미야랑?’ 같은 소리
를 들어야 하겠지.
그만큼 마히루는 학교에서 천상의 존재…… 정도는 아니더라도, 특
별한 존재다.
고귀한 인간이 일반 서민과 교류하는 것을 주위에서 비난하는 것처
럼, 마히루에게도 의문시하는 소리가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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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그건 당연한 의문이겠지만, 마히루는 불쾌할 것이다. 인간관계 정


도는 자기가 선택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건 추측이지만, 마히루는 아마네가 무시당하는 것에
화를 내 줄 거라고,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일부러 마히루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기는 싫으니까, 되도록 비밀로
하고 싶다.
(뭐, 공개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요즘 접촉에서는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
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자.
“아……아…….”
“코코노에, 왜 그래?”
“뭐랄까…… 왠지 이해했어. 고생이 참 많네.”
곤혹스러운 눈치다. 아니, 그보다는 황당함이 더욱 강한 표정으로
보는 마코토에게, 아마네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유타, 이건 혹시.”
“맞아.”
“어? 지금 무슨 이야기야?”
“아마도 카즈야는 모를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딱 잘라 말하는 마코토에게도 기분이 상한 기색이 없이, 카즈야는
“그렇다면 몰라도 되겠네.”라고 웃고 있다. 이건 그들의 신뢰와 우
정의 산물이리라.
왠지 모르게 유타와 마코토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아마네는 둘이서 대체 뭘 이해했는지 모르는 채로…… 감자
튀김을 먹으면서 당혹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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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마히루는 체육대회 종목을 뭘 신청했어?”


저녁 식사 후,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면서 남은 반찬을 밀
폐용기에 담는 마히루에게 물어봤다.
일단 며칠 전 키스 소동에서 시간이 지나서 아마네와 마히루 모두
분위기가 차분해졌지만,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서로 자꾸 의식하는 바람에 이전과 같은 거리감이 아니다. 옆에 앉
아도 몸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늘 저녁때도 훈훈한 분위기가 있으면서 아주 조금 딱딱한 감이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의식하는 것은 명확했다.
오늘 저녁 반찬인 닭고기 야채 조림을 밀폐용기에 넣은 마히루는
스푼을 아마네에게 주면서 “그러게요.”라고 기억을 떠올리듯이 시
선을 위로 돌렸다.
“저는 릴레이와 빌리기 경주예요.”
“와, 겹치네. 나는 공 던지기와 빌리기 경주를 신청했어.”
신청한 대로 될지는 잘 모르지만, 공 던지기는 솔직히 인기가 없어
서 통과될 것 같다.
빌리기 경주는 통과될지 조금 미묘하지만, 세 번째 희망 종목인 장
애물 경주가 되어도 문제는 없다.
그건 순수한 달리기 속도보다 균형 감각과 유연성을 따지는 종목이
므로, 아마네의 평균적인 달리기 속도라도 팀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
겠지.
“운동할 생각이 철저하게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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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나는 운동 신경도 별로 좋지 않으니


까.”
“그러고 보니 아마네 군은 체육 성적이 보통이었죠.”
“아쉽게도 말이지.”
운동 신경도 좋았으면 체육 수업도 적극적으로 나설 텐데, 안타깝
게도 아마네는 운동을 별로 잘하지 못한다.
싫다고 할 정도로 치명적으로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평가에서 그치고 있다.
물론 유타나 마히루처럼 노력과 재능이 잘 맞물린 두 사람과 달리,
문무겸비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꿈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마네 군은 체육대회가 싫죠?”
“뭐,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어도 강제하는 운동은 싫어. 개인이
자유롭게 운동하는 건 좋아하는 편이야.”
같이 거실 소파로 돌아가면서 쓰디쓴 추억으로 남은 겨울 마라톤을
떠올린다.
체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수업에서 뛰는 거리라면 완주할 수 있는
데, 시간 제한을 두고 거리도 지정하는 것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
는다.
그냥 자기 속도에 맞춰 자신이 목표로 삼은 만큼 뛰면 기분이 좋은
데, 역시 강제로 뛰는 것은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고 통감했다.
떫은 얼굴을 한 아마네가 아이스크림 뚜껑을 여는 것을 보면서, 마
히루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남이 강제하는 건 별로 좋아
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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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러니 평범하게 해서 팀에 공헌하는 게 고작이야.”


너무 성의 없이 했다간 비난을 받을 테고, 아마네 자신도 죄책감이
든다.
그러므로 죽을 각오로 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실력을 발휘할 수 있
게 노력할 작정이다. 뭐, 신청한 종목대로 된다면 애쓸 필요가 별로
없겠지만.
“후후, 활약하는 아마네 군을 못 봐서 아쉬워요.”
“나만 믿어. 공 던지기로 활약……할지도 몰라.”
“할지도 모르는 거군요.”
“그야 수수한 종목이라서 주목을 안 받으니까”
왜 고등학생이나 되어서 공 던지기처럼 귀여운 종목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에는 없어진 학교도 있을 텐데, 아마네의 학교에서는
아직 하고 있다.
운동이 젬병인 사람을 구제하는 조치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공
던지기는 긴장이 부족해 보일 것 같다.
“아마네 군은 의외로 던지는 걸 잘하죠. 요전번 체육 시간에 농구
할 때도 슛을 잘 넣었고, 쓰레기통에 티슈를 던질 때도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요.”
더불어 “게으름쟁이 같지만요.”라고 말을 추가한 마히루에게 아마
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게으른 건 용서해 줘. 쓰레기통에서 안 벗어나니까.”
“그야 집이니까 괜찮지만요. 그런데 아마네 군은 정말 정확하게 보
고 던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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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는 건 제법 잘해. 다트는 의외로 잘하는 편이고. 어머니를 따


라가서 자주 했어.”
어머니의 아들 동반 투어는 다방면에 걸친다.
서바이벌 게임이나 래프팅 같은 야외 활동부터 다트나 볼링, 게임
센터 등 이런저런 곳에 끌려가는 통에 쓸모없는 특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그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전부 쓸모없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네 군은 일종의 영재 교육을 받은 거 아니에요?”
“놀이 쪽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네.”
“다른 의미로 굉장하네요, 시호코 아주머니도.”
마히루는 질린 게 아니라 감탄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는데, 끌려다녀
야 했던 아마네는 전면적으로 긍정하기 어렵다.
다만,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해 준 것도 그렇지만, 중학교 시절에 우울했
을 때도 변함없이 대해 준 덕분에 치명적으로 삐뚤어지지 않을 수 있
었다.
그건 그렇고, 역시 끌고 다니면서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제발 그
만뒀으면 좋겠지만.
“뭐…… 그런 종목이니까 눈에 띌 일은 별로 없을 거야. 그럭저럭
애써 볼게. 약간 우울하지만.”
그렇게 마무리하고, 적당히 잘 녹은 아이스크림에 스푼을 꽂아서
한 입 떠 보았다.
여담으로 지금 먹는 아이스크림은 편의점 한정인데, 유명 고급 초
콜릿 회사에서 만든 단맛이 덜하고 진한 카카오 맛을 내는 아이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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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이다.
시중에 파는 것치고는 비싼 축에 속해서, 한 입 한 입을 소중히 먹
으려고 한다.
“체육대회가 그렇게 싫은가요?”
“그야 슬슬 더워지는데 체육복 입고 밖에서 한나절 있으면 싫잖아.
천막을 친다고 해도 말이야.”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하지만 애써야 할 걸요?”
“그럭저럭 애써 볼게.”
“참.”
마히루가 입술을 비죽이지만, 시선이 스푼에, 정확히는 아이스크림
에 쏠려서 무심코 웃고 말았다.
단 것을 좋아하는 마히루가 먹을 것도 살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아마네가 시험 삼아 마히루의 앞에 스푼을 가져가니 눈이 확 빛났다.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로 참 알아보기 쉬워졌다고 몰래 웃고 마히루
의 입술에 가까이 들이대자, 마히루는 주인의 손에서 먹이를 받아먹
는 새끼 고양이처럼 거리낌없이 스푼을 입에 넣었다.
눈이 슥 가늘어진다.
아마도 맛있는 거겠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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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도 그렇지만, 마히루의 미각은 다른 사람보다 민감하고 맛이


좋고 나쁘고를 확실하게 판단할 줄 아는 타입이다. 마히루가 맛있게
느끼는 것 같으니까 잘 고른 거겠지.
“이건 비싼 거잖아요?”
“알겠어?”
“애초에 포장을 보면 알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어요.”
“그래? 자.”
한입을 더 떠서 내밀자, 순순히 입에 쏙 물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
었다.
실온에서 조금 방치한 아이스크림보다도 더욱 살살 녹는 표정을 짓
는 것을 보니 속에서 뜨거운 게 얼굴로 슬금슬금 올라왔다.
(아차…… 무심코 그냥 먹였네.)
아마네는 마히루와 되도록 정상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금방 이러고 만다.
마히루 본인도 아마네를 의식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방심한 표정을
보이니까 피차 똑같은 거지만, 남자가 앙~ 하고 먹여 주는데 기뻐하
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마히루, 전부 줄게.”
“네?”
“나는 커피를 마실 테니까 괜찮아. 줄게.”
곤혹스러워하는 마히루에게 아이스크림 컵과 스푼을 떠넘기고, 아
마네는 도망치듯이 주방으로 가서 커피 메이커에 화풀이하듯 필터와
원두를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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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겁 많은 자신과 작별을

6월 초순. 서서히 땀이 맺히는 계절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아마네


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체육대회가 열린다.
고등학교 체육대회는 초중학교 운동회처럼 화기애애한 행사가 아
니다. 굳이 말하자면 수업의 연장선 같은 분위기가 있어서, 학부모들
이 보러 오는 일도 없다.
그래도 얼마 되지 않는 행사이기는 해서,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열의가 끓어오른다. 특히 운동부 1학년은 동아리 고문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하는지 의욕이 넘쳤다.
반대로 문화부 소속 학생들은 별로 의욕이 없는 사람이 많다.
귀가부인 아마네는 의욕이 없는 사람에 속한다.
“지루해.”
같은 천막에 있는 학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아마네는 슬
쩍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네도 의욕이 없지만, 노골적으로 표정에 드러낼 정도는 아니라
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있다.
다행히 신청한 것에서 첫 번째로 희망한 종목에 들어가 힘들게 뛰
어다니는 종목에는 나가지 않는다. 힘들게 뛴다면 기껏해야 남자가
전부 참가하는 기마전 정도겠지.
“후지미야는 별로 싫은 눈치가 아니네. 싫어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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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홍팀에 배정된 천막에 있는 유타가 뜻밖이라는 듯이 아마네의


얼굴을 본다.
“뭐, 신청한 대로 됐고 한가한 시간이 있는 만큼 이번에는 딱히 싫
지는 않아. 그냥 공부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특이하다고 생각하는데…….”
“후지미야는 공부를 잘하는 대신 운동은 별로인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즈야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아
마네는 씁쓸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러니까 부정할 여지가 없지만, 역시 남이 지적하면 마음
이 복잡하다.
물론 공부를 잘한다는 평가는 고맙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
는 사실에 감동하지만, 역시 문무겸비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
라.
“카도와키가 가르쳐 준 대로 단련 중인데, 조금만 더 확실한 메뉴
를 짜는 게 나을까?”
“음. 우리가 하는 건 운동선수에 맞춘 훈련 메뉴니까 후지미야처럼
단련할 때는 지금처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집이 조금만 더 가까
웠으면 같이 조깅해도 좋을 테지만.”
“카도와키의 스피드와 체력에 따라갈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내가 그거 했다가 숨넘어갈 뻔한 거 잊었어? 유타, 너는
조깅이 아니라 러닝이라고.”
보아하니 마코토는 유타의 조깅에 따라간 적이 있는 듯 아주 질색
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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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마코토는 운동부가 아니라 문화부이며, 천문부 소속이라


고 한다. 가냘프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마르고 작은 몸과 하얀 피부
도 그렇고, 도저히 운동을 잘할 풍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가냘프고 몸도 작은 마히루가 운동을 척척 잘하는
것을 보면 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니, 후지미야는 될 거 같은데. 마라톤 때도 별로 지친 기색이 없
었고.”
“요새는 단련도 하고, 나이를 먹었을 때를 생각해서 쇠약해지지 않
게 애쓰고 있지만, 운동부는 따라갈 수 없는데?”
“지금부터 노후를 생각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후지미야는 참 특이해. 아니, 재밌다는 게 맞을까?”
“그건 칭찬으로 하는 말이야?”
카즈야는 성격도 우직하고 성실한 남자지만, 말도 직설적이라
서…… 쉽게 말해서 가차 없다는 것을 같이 지내면서 이해했다.
“카즈야는 칭찬한 거야, 아마도.”
“그렇다면 고마워.”
“별말씀을.”
“대화가 뭐 이래…….”
황당함을 감추지 않는 마코토도 비웃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냥 어
이없는 눈치다.
게다가 조금은 흐뭇하게 보는 느낌이 있어서, 겉으로 드러내는 뜻
이 전부는 아니겠지.
“자자, 카즈야가 어벙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나는 어벙한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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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만 모른다는 거지. 됐어, 카즈야는 신경 안 써도. 너는 지금처


럼 순수하게 있어 달라고.”
“음. 그래?”
순순히 넘어가서 더는 추궁하지 않는 카즈야를 보고, 아마네는 “정
말 그래도 돼……?”라고 중얼거리면서 운동장을 봤다.
운동장에는 선수들이 단거리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트랙의 길이로 봐서는 100미터 달리기일 것이다. 첫 번째 주자들이
끝나고 두 번째 주자들이 서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여자 주자들 차례인지, 홍팀에서도 다리가 빠른 여자들
이 모여 있었다.
눈에 익은 적갈색 머리 소녀도 있다.
“치토세는 현역 육상부 대신 나왔는데, 그렇게 빨라?”
“그래. 시라카와는 빨라. 중학교 때는 육상부의 에이스였어.”
“어? 그랬어?”
“응. 고등학교에 와서는 육상부에 안 들어간 것 같지만. 선배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게 귀찮다고.”
“실랑이를 벌인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딴지를 걸면 돼?”
“아, 그게. 다 사정이 있다고 할까…… 뭐, 넌더리가 났다고 할까.
지친 거겠지.”
“지쳤다고……?”
“시라카와가 이츠키와 사귈 때 우여곡절이 있었어. 뭐라고 할까,
이츠키를 좋아하는 선배가 육상부에 있었는데. 시라카와는 그 선배
보다 성적이 좋아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할까, 이런저런 일이 있
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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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해했어.”
지금은 같은 학년에서 다 인정하는 커플이지만, 중학교 시절 아직
사귀기 전에는 이츠키가 치토세에 열심히 대시했다고 본인에게 들었
다.
지금보다 조금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하는 치토세를 함락하는 데 막
대한 시간을 들인 끝에 사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이츠키에게 반한 같은 육상부 선배가 봤다면, 실랑이가
벌어지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질척질척한 인간관계에 질려서, 동아리에는 안 들어가기로 했다나
봐. 그래도 달리는 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휴일에 뛰는 걸 자주
봐.”
유타는 “같은 동네에 사니까.”라고 말을 덧붙이고 웃더니, 크라우
칭 스타트 자세를 잡은 치토세를 바라봤다.
초심자에 가까운 아마네가 봐도 치토세의 자세는 숙달되어 보이고,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본 그 표정은 평소 장난치듯 웃는 명랑한 느낌이 아니라, 진
지하고 예리했다.
신호총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 주자는 치토세였다.
누가 봐도 입을 모아 깔끔하다고 할 폼으로 달리기 시작한 치토세
는 현역 여자 육상부원도 멀리 떨어뜨리고 그야말로 바람처럼 뛰었
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뒤에 남겨진 것처럼 날리고, 몸은 오로지 앞
으로만 나간다. 힘차게 바닥을 박차는 다리는 다른 선수보다도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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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지점으로 가고 있었다.
무심코 정신이 팔릴 만큼 아름답게 뛰는 모습을 보인 치토세는 어
느새 골 테이프를 통과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코스를 완주한 치토세는 1등 깃발을 들고 홍팀…… 이쪽
을 보고 씩 웃었다.
만족스럽게 깃발을 붕붕 흔드는 그 모습은 참으로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100미터 달리기가 끝나고 천막으로 돌아온 치토세는 당당하게 가
슴을 폈다.
“다녀왔어. 봤어?”
“봤어. 봤어. 진짜 빨랐는걸.”
“와~ 고마워~!”
“그래. 역시 시라카와가 뛰는 걸 보면 기분이 상쾌해져.”
현역 육상부원 둘이 칭찬해서 기분이 좋아진 치토세에게, 아마네도
“수고했어. 빠르던걸.”하고 칭찬을 말했다.
실제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라서 질겁했지만, 치토세는 아무렇지
도 않은 듯 “아, 즐거웠어.”라고 느긋하게 웃고 있다.
달리는 동안과는 완전히 다르게 풀어진 느낌이 치토세다워서, 아마
네도 안심하고 얼굴 표정을 풀었다.
“그나저나 시라카와는 여전히 빠른걸.”
“헤헤, 일과로 단련하고 있으니까. 그야 현역 시절만큼은 빠르지
않지만.”
듣자니 중학교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
다. 어쩌다 보니 아마네의 주위에는 신체 능력과 두뇌 면에서 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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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아서, 평범한 아마네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카즈야도 유타와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고 하는데, 육상부 소속이
아닌데도 이만한 속도를 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왜 그렇게 빠른 거야? 역시 표면적이 작아서
공기 저항이 줄어드는 거야?”
“저기, 카즈짱. 표면적은 어딜 두고 말하는 거야?”
“응? 신장 말인데.”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는 듯이 순수한 눈으로 보는 카즈야 앞에서
치토세가 눈썹을 모았다.
이건 분노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수치심이겠지. 가슴 이
야기를 한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여담으로 치토세는 마히루처럼 몸집이 작은 게 아니지만, 키가 크
다고 말하긴 어렵다.
여자의 평균치보다는 조금 크지만, 육상 선수로 봤을 때는 별로 크
지 않은 정도다.
게다가 굳이 말하자면 마른 체형이니까, 카즈야는 그 속도에 놀란
거겠지.
말하는 낌새로 봐서는 다른 뜻을 느낄 수 없으니까, 이건 완전히 치
토세가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자폭했구나, 시라카와.”
“마코칭, 입 다물어.”
바로 얼굴을 붉히고 마코토의 등을 찰싹 때리면서 근처에 앉는 치
토세를 보고, 아마네는 본인에게 안 들키게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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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의 차례는 기본적으로 신청 종목인 공 던지기와 빌리기 경


주, 남자 모두가 참가하는 단체 기마전 정도라서 생각보다 한가하다.
열기가 넘치는 다른 학생들은 더 많이 신청하기도 했지만, 아마네
는 그런 열정은 없어서 두 종목과 단체 경기로만 좁혔다.
덧붙이자면, 공 던지기는 이미 끝났다.
정말로 분위기가 안 사는 경기라고 할까, 공을 높이 단 바구니에 던
져서 넣는 단순 작업이다.
안에 들어간 공으로 경쟁하는 거지만, 원래 양이 많은 데다가 너무
열을 올릴 일도 아니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롭게 겨뤘다.
활약해 보라고 마히루에게 응원을 받고 경기에 임했지만, 공 던지
기에 활약이고 뭐고 있을 리가 없다.
그냥 공을 몇 개 주워다가 방향을 잡아서 쌓고, 몰아서 던지는 수수
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므로 눈에 띌 일은 없었다.
그저 정확하게 노리고, 몰아서 던진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백팀보
다 들어간 공이 많았을 뿐이다.
“진짜 수수한 종목에 나갔네, 아마네.”
“말이 많아. 너희는 슬슬 교대 시간이지? 다녀와.”
“아, 그랬지.”
치토세는 일정표를 보면서 “실행위원은 제법 바쁘네.”라고 투덜대
고 운영 천막으로 간다.
그런데 왜 입후보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와서 할 말은 아니겠지.
잰걸음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치토세를 뒤에서 보면서, 아마네는 천
막 기둥에 붙은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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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정은 이제 몇 종목만 더 하면 끝난다. 아마네가 마지막 개인


종목으로 나가는 빌리기 경주도 여기에 포함된다.
남은 종목이 끝나면 점심시간을 끼고 오후 일정으로 넘어간다.
아무튼 아마네는 빌리기 경주가 끝나면 오후 기마전 말고 나갈 종
목이 없다.
“그런데 빌려야 할 때 운영이 그 녀석이잖아…….”
치토세가 이 타이밍에 교대하러 갔다면 남은 종목은 치토세가 담당
한다는 뜻이다. 빌려온 것을 판정하는 심판도 치토세가 할 텐데…….
딱 봐도 노린 것 같다.
누가 빌리는 것을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멀쩡한 문제가 없을 것 같
아서 조금 무섭다.
미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다다음으로 다가온 빌리기 경주
집합 장소로 가자, 마찬가지로 신청이 통과됐는지 마히루가 조용히
서 있었다.
말을 걸 이유가 없어서 아마네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
주친 마히루가 희미하게 웃으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밖에서는 타인처럼 대하지만, 조금 평소 웃음이 드러난 표정을 보
고 심장이 살짝 뛰었다.
아마네도 무표정으로 똑같이 인사했는데, 왠지 거북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아마네와 마히루를, 체육대회 운영으로서 집합을 전파하는 치
토세가 유쾌하게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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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빌리기 경주 차례가 되고, 진행요원…… 지금은 치토세의 지시를


따라 운동장에 입장한다.
이미 운동장에는 접은 종이가 깔려 있고, 출발 신호가 나오면 그 종
이를 주워서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을 가져오면 끝이다.
빌리기 경주는 다른 달리기 종목과는 다르게 여흥에 가까운 종목이
고, 빌리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 목적이므로, 별로 진지한 분위기는
없다.
다만 문제에 따라서는 창피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으리라.
“출장 선수 여러분은 출발선에 서 주세요.”
마이크를 써서 척척 지시하는 치토세는 장난만 안 치면 정말로 사
회자에 딱 좋은 소녀다. 명랑한 성격도 그렇지만, 분위기와 상황을
파악할 줄도 안다. 귀에 잘 들어오고 너무 크지도 않게 맑은 목소리
는 사람들이 경청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전교생과 교직원들이 지켜보니까 지금은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치
토세가 “위치로.”라고 신호했다.
신호총 자체는 다른 남자 진행요원이 가지고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말로 박자를 세는 거겠지.
치토세가 “준비.”라고 말하고 잠시 뒤, 신호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심장에 안 좋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뛰
어서 바닥에 깔린 종이로 갔다.
이미 먼저 온 선수가 펼쳐서 문제를 확인하고 있는데, 아마네도 뒤
따르듯 접힌 종이를 하나 주워 내용을 확인했다.
안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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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패턴도 예상했지만,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빌리는 문제였다.
정말이지 누가 이런 문제를 생각했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이 문제
는 아마네도 아슬아슬하게 돌파할 수 있다.
가장 곤란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봐서 미인인
사람을 데려오면 된다.
즉, 모두가 인정하는 미인…… 마히루를 부르면 된다. 마히루가 빌
릴 물건을 찾고 골인할 때 같이 가면 될 뿐이다.
마히루를 데려가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지만, 문제가 이러니까 내용
을 알면 타당하다고 판단해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문제를 줍고 있을 마히루를 찾으려는데…… 옆에
서 누가 티셔츠를 움켜잡았다.
움켜잡은 게 아니라 살짝 손으로 집은 게 맞겠지만,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기니까 아마네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뒤돌아봤다.
그러자 지금 찾는 사람이 머뭇거리며 아마네를 보고 있었다.
“후지미야 씨, 빌려야 하는 게 후지미야 씨라서. 후지미야 씨가 빌
릴 물건을 찾고 나서 같이 가 주셨으면 하는데요.”
“어? 내가?”
“네.”
설마 서로 상대를 빌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어떤 의미로는 잘된 일이지만, 너무 눈에 띌 것 같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마히루가 말을 건 시점에서 눈에 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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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인 지점 너머에서는 심판인 치토세가 히죽거리는 느낌으로 이쪽


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애초에 문제의 글씨가 치토세의 글씨체라서 어느 정도는 노리고 낸
문제도 있을 것이다. 마히루가 뭘 주웠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아마네
를 지정한 것을 보면 마히루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임이 틀림없다.
“아…… 뭘 빌려야 하는데?”
“비밀이에요.”
골인 지점에서 문제를 읽을 텐데, 마히루는 말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골인 지점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나도 너를 빌려야 해서 이대로 골인하자.”
“후지미야 씨야말로 뭘 빌려야 하는데요?”
“비밀.”
마히루와 똑같이 대꾸하자 작게 웃었다.
“그러네요. 골인한 다음이 기대되는걸요.”
그렇게 속삭이고, 마히루는 아마네의 손을 잡았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히루는 아마네를 잡
고 골인 지점으로 간다.
아마네는 미묘하게 속이 쑤셨지만, 신난 듯한 마히루를 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니까, 먼저 반한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
임을 잘 알았다.
아마네로선 왠지 적진에 있는 느낌이 드는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골
인 지점까지 가자,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치토세가 맞이했다.
무심코 혀를 찼지만, 치토세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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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둘이서 골인? 둘 다 빌리기 경주 주자로 아는데.”


“치토세, 이게 진짜. 히죽히죽 웃기는. 서로가 빌려야 하는 당사자
였다고.”
“하항~. 그러면 문제를 확인할 텐데, 누구부터 할래?”
“후지미야 씨부터 해 주세요.”
마히루가 딱 지정해서 놀랐지만, 치토세가 잘 알겠다는 듯이 아마
네의 손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보여달라는 뜻이겠지.
딱히 감출 것도 아니어서 순순히 치토세에게 문제를 보여줬다.
문제의 내용을 본 치토세는 미묘하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던 게 아니었던 거겠지.
그래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마이크를 입에 가까
이 댔다.
“현재 문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홍팀 1등의 문제는…… 『미인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네요.”
군중은 문제 내용을 듣고 왠지 안심한 분위기를 보였다.
참으로 무난한 선택이겠지, 아마네가 아는 선에서 교내에서 마히루
보다 미인인 사람은 없고, 아마네 자신도 역시 마히루가 가장 예쁘
다.
아마네 개인의 의견을 빼더라도, 마히루를 데려온 것은 전혀 이상
하지 않다.
마히루와 둘이서 골인하는 바람에 아마네에게 적개심이 쏠렸지만,
문제 내용으로 조금은 풀어졌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마히루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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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인지 아마네는 모르지만, 일부러 아마네를 지정한 만큼


아마네의 평화로운 학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하
다.
치토세는 마히루에게 문제가 적힌 종이를 받고 눈을 크게 깜빡이더
니, 이어서 마히루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네가 있는 곳에선 뭐가 적혔는지 안 보이는데, 치토세의 표정
에서 ‘말해도 돼?’라는 분위기가 엿보였다.
(대체 무슨 문제인데 나를 데려온 거야.)
치토세의 반응을 보니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마히루는 여전히 온화하게 미소를 띠고 있다. 즉, 그대로 읽어도 문
제가 없다는 의사를 표명한 셈이다.
치토세를 그것을 확인하고 이전처럼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아~ 이어서 공동 1등인 백팀의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백팀 1등
의 문제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치토세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퍼진 순간, 학생들의 대기 장소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아마네가 반사적으로 마히루를 보니── 마히루는 아마네의 눈을
보고 연홍색 입술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웃었다.
그게 장난에 성공한 아이의 웃음처럼, 수줍음을 포함한 미소처럼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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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아마네가 이 문제를 알았을 때의 반응을 보려고 바라


보고 있었다는 점이리라.
(이런 악마가 다 있나…….)
생각이 깊은 마히루라면 문제를 공개한 시점에서 주위 사람들이 어
떻게 반응할지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도 마히루는 아마네를 데려가기로 했다. 관계에 변화를 부르기
위해서.
앞으로는 어정쩡한 타인으로 있을 수 없다.
언제나 학교에서 보여주는 우아한 미소가 아니라 아마네에게 보여
주는 진짜 미소를 보고, 아마네는 “나중에 꼭 따질 줄 알아.”라고 투
덜거리고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떻게 된 거야, 후지미야.”


아니나 다를까, 오전 일정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자 반 남자들이
따지고 덤비는 사태에 직면했다.
절벽 위에 핀 꽃처럼 동경하는 존재인 마히루가 사람들이 보는 앞
에서 아마네를 소중한 사람으로서 빌린 것이다. 남자로서 속이 편안
할 리가 없는 것도 이해하지만,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물어봐도 아마
네는 곤란할 뿐이다.
“왜 네가 시이나 양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대체 언제부터!”
“접점도 전혀 없었지?! 같이 밥 먹은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어디가! 시이나 양은 네 어디가 좋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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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이해할 수 없어!”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는 통에, 아마네는 눈이 흐릿해졌다.
솔직히 따지고 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남자들의 질문 공세가 생각
했던 것보다 심해서 점심을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다.
당연히 남자들만 반응한 게 아니다. 여자들은 질문에 참전하지 않
았지만, 뭔가 감정하는 듯한 시선, 즐거워하는 시선, 왠지 모르게 안
도하는 시선으로 봤다.
아마도 마히루처럼 여자들 최대의 라이벌 같은 존재가 아마네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뭔가 평가하는 듯한 시선은, 그런 마히루가 좋아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려는 것이다.
반에서 온통 시선을 모으고 있는 아마네는 정말 버티기 힘들다.
덧붙이자면, 마히루 본인은 스포츠드링크를 사러 자판기로 가서 자
리에 없다. 이츠키와 유타는 남자들의 기세에 밀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아아…….”하고 쓴웃음만 지었고, 치토세는 미묘하게 들뜬 표정
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인정머리도 없는 자식들이라고 욕하고 싶어지는 것을 꾹 참으면서,
아마네는 주위에 있는 반 아이들에게 되도록 평소와 같은 표정을 보
이려고 고개를 들었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면, 각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마히루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다. 마히루가 내디딘 걸음을,
내민 손을, 아마네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완전하게 자신감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히루가
공개적으로 말해 준 용기를 헛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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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꺼번에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한 사람씩 말해
줘.”
어차피 멋대로 소문이 퍼질 거라면 자신의 입으로 사실을 전하는
게 좋다고 각오하고서 앞을 봤더니 남자들이 주춤거렸다.
아마네가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당당하게 나설 줄은 몰랐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지만.
“대체 언제부터 시이나 양과 가까워진 건데?”
“작년부터.”
어차피 숨겨도 애초에 아마네가 마히루의 곁에 있으려고 외부용으
로 몸단장하면 드러날 일이라서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어, 그러면 너, 새해 신사나 연휴 때 시이나 양과 소문이 났던
그 남자도.”
“내가 맞을 거야…….”
그러므로 반 아이들 사이에서 마히루가 연휴 때 말한‘소중한 사
람’이 방금 말한 ‘소중한 사람’과 직결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
다.
마침 연휴 때 외출했다가 목격했다고 하는 같은 반 여자애가 이쪽
을 봐서 의심을 사지 않는 정도로만 시선을 피했다.
모두의 관심을 끈 수수께끼의 남자가 사실은 자신이라는 것에 조금
은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마히루가 아마네를 멋지다고 생각해 준다
고 하니까 현재로서는 그래도 되겠지.
감정하는 듯한 시선이 강해진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아마네는 몰
려든 반 아이들에게 최대한 잔잔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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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친해졌는데?”


“딱히 접점은 없었잖아! 그런데 왜 처음에는 모르는 척을.”
“집이 가까워서 인연이 있었어. 그리고 모르는 척한 것도 이렇게
소란이 날 줄 알아서 그런 거고, 지금처럼 무조건 이것저것 캐물을
게 뻔하잖아.”
그야말로 지금 같은 일이 생기니까 말하지 않았다는 뜻을 전하자,
몰려든 아이들도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살짝 신음했다. 다만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 불만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라고 중얼거리
는데, 아마네도 딱히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서 그냥 흘렸다.
“후지미야는, 저기, 시이나 양과 사귀는 거야?”
그리고 한 사람이 아마도 가장 궁금했을 것을 물어봤다.
아마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사이좋고, 서로 소중하게 여긴다는 자신은 있지만. 사귀는 건 아
니야. 내가 호의를 보이는 거니까.”
좋아한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말은 본인에게 해야 한다. 정말로 좋아한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을 내포한 호의지만, 간단하
게 전하자면 그 말이 제일 좋을 것이다.
반쯤 공개 처형 같지만, 왠지 마음이 편한 것은 숨길 필요가 없어져
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천사님한테 관심이 없어?”
“거짓말은 안 했어. 천사님한테는 관심이 없어. 내가 보는 사람은
시이나 마히루라고 하는 평범한 여자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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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겸비&외모도 좋은 재녀이고 다소곳하고 차분해서 주위에서 인


망이 두터운 천사님이 아니라, 노력가이고 타인을 멀리하는 주제에
외로움을 잘 타고, 경계심이 강하면서도 방심하면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그렇게 평범하고 귀여운 여자애를 다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
게 여긴다.
천사님이 아니라, 천사님이라는 일부를 포함해서 전부 좋아한다.
아마네는 마히루가 걸친 외부로 내비치는 천사님의 외투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딱 잘라서 말하는 아마네를 보고, 주위 아이들보다 더 거세게 반발
했던 남자가 말문이 막혔다가 눈꼬리를 내리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사람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아마네에게 뭔가 말을 꺼내기 전에 누군가가 제지했다.
도움을 준 사람은 또다른 화제의 인물인 마히루였다.
스포츠드링크를 사러 가서 교실에 늦게 온 마히루의 손에는 조금
올라간 기온 탓에 땀이 맺힌 스포츠드링크 페트병이 있다.
아마네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못해서 아마네 군이 곤란해하잖아요?”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쓰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마히루
도 감출 생각이 없다는 뜻이리라.
남녀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데도 신경 쓰는 기색이 없는 마히루를
보고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남자…… 아까부터 아마네에게 거칠게
따지고 들던 남자가 앞에 나와 마히루에게 다가간다.
모두가 물어보고 싶은 것을 대변하려고 한다는 것을 짐작한 주위
사람들이 길을 터 줬다. 아마네를 향한 질문 공세도 지금은 멈춰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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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시이나 양! 후지미야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마네 군은 제 소중한 사람이에요.”
딱 잘라서 말한 마히루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도 빈틈이 없는 천사님의 미소를 지은 마히루에게 잠시 주춤한
남자는 주위 시선에 떠밀렸는지 다소 힘이 빠진 투로 말했다.
“그, 그건…… 좋아하는 사람이냐는 의미로 물어본 건데.”
“만약 그렇다고 치고, 당신은 제게 뭘 말하고 싶은 거죠?”
“아니, 그건 말이지. 그게, 만약…… 좋아한다면…… 왜 후지미야
따위를.”
“후지미야 따위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시원찮은 후지미야랑 시이나 양이
사귀면 이상해서. 더 좋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가요.”
이건 마히루의 지뢰를 밟았다고, 아마네는 눈빛을 흐렸다.
마히루는 아마네가 스스로 비하하는 것을 싫어한다. 듣기로는 부당
한 평가를 하는 게 싫다는 듯하다.
즉,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보이는 자신은 그렇다 쳐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학교에서는 대다수가 시원찮은 남자로 보는 것을 부정하지 않
고,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다만 마히루가 그 평가를 허용할지 어떨지는 경우가 다르다.
마히루의 미소는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천사님의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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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흘리는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졌다. 친한 사람이 보면 겨우 알


아챌 정도인데, 캐러멜색 눈에는 조금 살벌한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
다.
“저기.”
“어디가 시원찮나요?”
“어? 그게.”
“구체적으로 어디가 시원찮은지 말해 주시겠어요?”
“부, 분위기라든지. 얼굴이라든지.”
“당신은 좋아하는 사람을 얼굴로 고를 건가요?”
“아, 아니. 그게.”
“얼굴만 보고 좋아지는 건가요?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지도 모르
는 상대를, 당신은 얼굴로 고를 건가요?”
이때까지도 마히루는 천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압박감이 드는 것은 마히루가 미묘하게 화났기 때문이겠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마네가 그 압력을 느낄 정도니까, 대치한
당사자는 더 많이 느낄 것이다.
이제는 마히루가 웃으면서 화낸다는 것을 짐작했으리라.
등밖에 안 보이지만, 몸이 조금 움츠러든 것을 알 수 있다.
“그, 그건…….”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제가 어떤 이유로 누구를 좋아하든, 남이
간섭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온화한 목소리와 말
투와 정반대로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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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네가 아니어도 마히루가 분노했음을 알 만큼, 마히루는 웃으면


서 화내고 있다.
“조금 심하게 몰아붙였네요. 미안해요.”
앞에 있는 남자가 말문이 막힌 것을 보고, 마히루는 그제야 겨우 힘
이 풀린 듯이 난처한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기본적으로 온화하게 항상 생긋생긋 웃는 마히루를 화나게 했다는
사실에, 대치했던 남자는 조금 휘청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한 말을 정정할게요. 아마네 군은 멋지고 자상한 사람이에
요. 과묵하고 따스한 분위기도 근사하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매우
신사적이고, 저를 존중해 주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제가 힘들 때는
곁에서 지탱해 주는,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에요. 적어도 남을 헐뜯거
나 다른 사람의 연애를 방해하려는 사람은 아니에요.”
덧붙인 말은 마지막 선고일 것이다.
즉, 자신의 앞에서 아마네를 헐뜯은 당신은 절대로 좋아할 수 없다
고 선언한 것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귀엽게 웃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어보는 마히루에게, 이미 한
계인 듯한 남자는 “어, 없습니다.”라고 기어드는 목소리와 함께 고
개를 젓고 마히루의 앞에서 흐느적흐느적 물러났다.
마히루의 시선이 곧장 아마네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백 같은 소리를 듣는 바람에 앞으로 어떻
게 마음을 전하면 좋을지 얼굴을 굳힌 아마네에게, 마히루는 오늘 가
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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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님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집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기쁨으로


가득해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같이 식사해요, 아마네 군.”
“그래…….”
이제는 아마네에게 따지고 드는 남자가 없었다.

“기어코 먼저 말하게 했구나.”


“그 점은 미안하다고 생각해.”
오후 일정이 시작되고 몇 경기 뒤에 있을 기마전을 대비해서 모였
을 때, 아마네는 유타가 흘린 말을 듣고 눈이 처졌다.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데 있는 이유는 에워싼 주위의 시선이 성가
시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선이 있지만, 지척에서 쏠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니까
그나마 낫겠지.
카도와키의 말은 원래라면 ‘아마네가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아니
야?’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에 반론할 수가 없다.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시이나 양이랑 후지미야는 그렇게 사
이가 좋았어?”
아마네와 마히루의 관계 변화를 은근슬쩍 눈치챈 듯했던 마코토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음…… 내가 봤을 때는 왜 아직 안 사귀나 싶을 수준이었는데? 오
히려 시이나 양이 지금까지 잘 참았다고 봐.”
“그런데 감추고 살았구나. 뭐, 오늘 점심때 소동을 보면 감춘 이유
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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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위험했다고 동정하는 눈으로 본다.


마코토와 카즈야도 같은 교실에 있었는데, 그렇게 에워싸여 질문
공세를 당하니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직 친목을 다지지 않은 두 사람은 올바르게 판단한 셈이지만, 이
츠키와 유타는 조금 도와줘도 좋았을 텐데.
“그건 진짜 굉장했어. 그냥 봐도 한심한 놈들이었는데, 시이나가
딱 잘라서 속이 다 시원했다니까.”
“한심하다고 해도, 걔들도 그만큼 충격이 커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
하지만…….”
“음? 그래? 하지만 남자라면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당당하게 고
백하면 되잖아. 그러지도 않고서 매달린 끝에 후지미야를 욕하는 건
한심한 거 맞지.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고, 자기
가 못 가질 것 같으니까 떼를 쓰는 건 한심한 걸 떠나서 애들이나 할
짓인데 말이야.”
“으극.”
“카즈야. 내용의 일부가 후지미야에게 비수로 꽂혔어.”
남자라면 앞에서 당당하게 고백해라. 그것은 지금의 아마네에게 아
주 푹 박히는 말이었다.
“뭐, 내가 봐도 후지미야는 답답하니까.”
“그건 시이나 양의 의사 표명이겠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일까지 당하면 자신과 상대 모두 얼버무릴 수 없다. 틀림없이
호감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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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천사님 때문에 어느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사연 4 사에키상

이런 일까지 시켜 놓고서 아무것도 안 하면 남자도 아니라는 사실


은 잘 안다.
마히루가 똑바로 호의를 밝혔다면, 성의껏 대답해 줘야 한다는 사
실도. 옛날에 진즉 답이 나왔으니까, 이제는 전하는 방법이 문제다.
“집에 가면, 잘 말할 생각이야. 학교에선 안 말해.”
마음은 전하겠지만, 학교에서 말할 생각은 없다. 둘만 있을 때 전해
야 할 테고, 마히루의 표정은 자신만이 간직하고 싶다.
이미 공개 고백에 가깝게 일이 흘러갔지만, 그래도 마음을 주고받
을 때만큼은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있고 싶었다.
각오를 다진 아마네에게, 카즈야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래. 그래야지. 아무튼 기마전에서 상대를 해치우는 게 먼저야.”
왠지 모르게 기쁜 눈치로 “틀림없이 우리를 노릴 거야.”라며 웃는
카즈야에게 쓴웃음을 흘린다.
위에 타는 마코토는 질겁한 기색으로 “내 부담이 너무 크지 않
아?”라고 투덜대지만, 정말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못 말리겠다
는 투여서 조금 안심했다.
“후지미야도 카즈야를 본받는 게 어때? 여러모로 잘 해치워 봐야
지?”
“노력해 볼게.”
마히루를 노리는 손길을 전부 물리치고 자신만의 것으로 삼을 정도
로는 패기를 가져야 한다.
(집에서 꼭 말하자.)
그러기 위해서라도 오후 일정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고 다짐하
는 아마네를 보고, 세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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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꼴을 봤어…….”
욕실에서 흙과 먼지를 씻어내고 깨끗해진 아마네는 운동한 뒤 특유
의 기분 좋은 나른함에 몸을 맡기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기마전은 걱정했던 대로 적 팀의 공격이 강렬했다.
그야 예상은 했지만, 적극적으로 부딪히려고 뜨는 바람에 다른 세
사람에게 부담을 많이 주고 말았다.
다만 카즈야는 신나서 ‘이것도 다 청춘이지’라고 호전적으로 웃은
걸 보면, 아마도 카즈야는 이런 경기를 전체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리
라.
결국 적 팀의 지나친 공세에 끝까지 남지는 못했지만, 기수인 마코
토가 건투한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적 팀의 머리띠를 많이 빼앗았
다.
활약한 사람은 마코토지만, 적 팀에서 구경하던 마히루가 아마네에
게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오후 일정도 겨우 끝나서 폐회식을 마치고, 행사 때마다 항
상 그렇듯 뒷정리를 한 다음에 지금 이렇게 집에 있다.
오늘은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서 육체와 정신이 모두 피곤했지
만, 오늘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해야지…….)
마히루가 그만한 용기를 내서 아마네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아마네
와 함께하기를 선택해 주었다.
그 마음에 응하지 않고 미뤘다간 어딜 가서 남자라고 명함도 내밀
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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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결심하기는 했지만, 막상 고백하려니 갈피를 못 잡고 망설이니까
아마네가 소심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겠지.
아마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로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 고백하
는 셈이니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다.
‘여자라면 역시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해야 기쁠까?’, ‘어떤 식으로
마음을 전해야 좋아할까?’처럼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서 생
각이 빙빙 맴돌 뿐이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이마를 붙잡고 생각하고 있을 때
──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몸을 흠칫한 것은 그 소리가 여벌 열쇠의 주인이자 아마네
를 고민하게 하는 소녀의 방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토록 현관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운 적은 없었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났다.
타박타박. 공기가 섞인 듯 슬리퍼로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나고……
눈에 익은 황갈색 머리 소녀가 현관과 이어진 복도에서 나타났다.
“아마네 군.”
연홍색 입술이 살짝 움직여서 부드러운 표정을 만든다.
학교에서 있었던 소동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만큼 평소와 똑같이,
아니 평소보다도 더 싱그럽게 웃는 마히루를 보니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한다.
아마네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히루는 평소처럼 아마네의 옆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주먹 하나도 안 들어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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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하자 부드러운 머리칼이 파도치듯


일렁이고 샴푸 향기가 한없이 전해진다.
아무래도 아마네처럼 집에서 땀을 씻으려고 먼저 목욕하고 온 듯하
다. 자세히 보니 매끄러운 우윳빛 피부도 평소보다 혈색이 좋았다.
목욕을 마친 마히루를 의식하고 괜스레 더 긴장해 몸을 굳힌 아마
네에게, 마히루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네 군. 물론 아마네도 군도 저한테 말하고 싶고 물어보고 싶
은 게 많을 테지만요……. 먼저 하나 말해도 될까요?”
“그, 그래?”
갑자기 뭔지 싶어서 경계하는 아마네에게, 마히루가 머리를 숙였
다.
“빠져나갈 길을 막고 아마네 군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쏠리게 한
건 미안해요. 정말 죄송해요.”
“어?”
“그게…… 그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요.”
고개를 든 마히루가 거북하게 고백한 것을 듣고, 뭘 미안해하는지
이해했다.
마히루는 자신의 영향력을 알고, 그렇기에 지금까지 누구나 좋아할
수 있게 연기하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런 마히루가 사람들 앞에서 아마네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밝힌 것
이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것은 뻔했고, 마히루도 그걸 알면서 그
랬다는 사실을 아마네도 잘 알고 있다.
“뭐, 그건 너도 알면서 했을 거라고 나도 이해했으니까.”
“화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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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진 않아.”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오히려 아마네는 마히루가 다 각오하고 그랬기에 결심할 수 있었
고, 본인의 진심을 알았으니까 전혀 싫지 않다.
게다가 아마네도 마히루에게 손을 내밀 각오가 생겼다.
한차례 심호흡하고, 마히루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 눈은 평소보다도 맑고 고요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분위기가 차
분했다.
“나도, 사과해도 될까?”
“뭘요?”
“겁이 많아서, 미안해.”
마음을 전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알면서도, 나서는 게 무서워서, 눈을 돌리고, 마히루의 마음을 모
르는 척, 못 본 척해서, 미안해.”
어렴풋하게 느꼈다. 하지만 외면했다. 마히루의 호의를.
한심하니까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이러니까 좋아할 리가 없다고,
그렇게 자꾸 변명하다가, 아마네는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이제는 도망칠 생각이 없다.
마히루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고,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
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눈을 돌리지 않게 똑바로 보자── 마히루가 작게 웃었
다.
“그건 서로 똑같지 않나요? 저도 그랬어요. 저도…… 아마네 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신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용기를 내지 못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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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까요.”
아마네에게 슬며시 손을 뻗은 마히루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아마네
의 손을 만졌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저는 치사하다고.”
“글쎄. 내가 더 치사해.”
마히루의 치사함은 귀여운 수준이라고 쓴웃음을 지은 아마네는 감
싸는 마히루의 손을 피하고, 그 대신에 마히루의 몸을 감싸듯이 천천
히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품에서 가녀린 몸이 긴장하지만, 이어서 아마네에
게 안긴 것을 이해했는지 마히루가 몸에서 힘을 살며시 풀었다.
예고도 없이 끌어당겨서 그런지 아마네의 다리 위에 올라간 마히루
는 가슴을 손으로 짚고 아마네를 올려다본다.
캐러멜색 눈에서는 놀라움과 곤혹스러움, 나아가 기대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내가…… 말하게 해 줄래?”
작게 속삭이자 아주 조금 얼굴을 붉힌 마히루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응석을 부리듯 아마네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있잖아.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 게 처음이야. 애초에 그
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어.”
“옛날 일 때문인가요?”
“그래. 그럴 거야.”
마히루를 떼어놓지 않듯이 꼭 안으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마네가 이토록 좋아한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상대가 자신을 좋
아한다고 인식하기를 마음속으로 거부한 것은 중학교 시절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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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아직 질질 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안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것이 무서웠
다. 혹시라도 거부당할 때를 생각하면, 뭐든지 집착하지 않는 게 좋
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도 변한 건, 마히루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쉽게 뒤집힐 줄은 몰랐지만.”
다시 품에 안긴 마히루를 봤다.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가슴이 은은하게 따뜻해지고, 얼굴이 뜨거워
지는 마음과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가득 차는 경험은 필시 마히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만큼 아마네는 마히루에게 끌렸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면, 사람은 변하는 것 같아.”
마히루와 만나고, 아마네는 변했다.
마히루 덕분에 마음속 수렁에서 벗어나듯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
었고, 자기 자신을 조금씩이나마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는 욕망도
생겼다. 자신의 손으로 감싸서 소중하게 아끼고 싶다는 마음도 알았
다.
“처음에는 있지. 너를 귀엽지 않다고 생각했어.”
“알아요. 대놓고 말했으니까요.”
“그때는 미안해, 정말로.”
그때는 아마네나 마히루나 서로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시기라
서, 귀엽지 않다는 막말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마히루도 아마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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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하고 게으르게 사는 한심한 남자라고 생각했겠지.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하지 않고, 쌀쌀맞고, 귀여운 구석도 없어
서, 서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계면 된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어느
새 부족하게 느끼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언제부터 변했을까.
“더 많이 알고 싶어졌어. 맞닿고 싶어졌어.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어. 원한다고, 생각했어. 이런 건 처음이야.”
“네…….”
“쭉, 참았어. 내 주제에 뭘 바라냐고. 하지만…… 네가 괜찮다고 말
해 주어서,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너와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어. 뭐, 내가 뭘 어쩌기도 전에 마히루 네가 먼저 움직
였지만.”
“후후. 저도 참았어요. 아마네 군은 멋진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한
테 빼앗기면 어쩌나 싶었고요. 저를 좋아해 줄지 어떨지 가슴을 졸였
어요.”
“그렇게 취향이 이상한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으. 또 그런 말을…….”
마히루는 아마네가 또 자기 자신을 비하했다고 못마땅한 기색인데,
아마네가 지은 표정을 보고 눈을 연신 깜빡였다.
지금의 아마네는 마히루가 항상 핀잔을 주는 한심한 얼굴이 아니
라, 각오를 마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 취향이 이상하지 않게 노력할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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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가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노력해서 좋


은 남자가 될게. 마히루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못 되
더라도,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있을 정도로는.”
아마네는 누가 뭐라고 하지 못할 정도로, 마히루의 곁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훌륭한 남자가 되려고 한다.
마히루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 첫걸음은 이 말로 시작해야 하리라.
“마히루, 너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나랑…… 사귀어 줄래?”
속이 비칠 것처럼 맑은 캐러멜색 눈을 똑바로 보면서 천천히 속삭
이자, 맑고 고운 그 눈에 막이 생기듯이 촉촉해진다. 그러나 방울져
흘러내리는 일은 없이 그저 아마네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을 감추듯이 닫고, 마히루는 아마네에게 미소를 지었
다.
“응…….”
다른 누가 있어도 아마네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고 짤막하게, 그러
면서도 떨리는 음색으로 승낙한다는 뜻을 전한 마히루는 아마네의
품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등을 꼭 감싼 팔은 아마네를 힘껏 잡고 놓지 않는다.
이젠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는 것 같아서 왠지 쑥스러우면서도, 아
마네도 마히루의 작은 등을 단단히 팔로 감쌌다.
(──절대로, 놓치지 않아.)
소중히 여기고 싶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마히루와 마음이 통하고 처음 느낀 것은, 그런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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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루,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약속해 주진 않을 건가요?”
천천히 고개를 든 마히루가 짓궂게 물어보는 바람에, 아마네는 웃
고 나서 마히루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이건 내 소원이야. 내가 내 손으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소원
이니까. 내 결심을 말하자면…… 소중하게 여기고, 행복하게 해 줄
게. 반드시.”
“응…….”
열기를 가득 넣은 맹세의 말을 듣고, 마히루는 열기에 녹은 것처럼
풀어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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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직 안 끝났거든요?!
그런고로 이 책을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인 사에키입니다.
4권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두 번 강조).
4권에서는 마히루 양이 밀고 또 밀어서 아마네 군도 결심을 굳히
고, 마침내 서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이번에도 맺어
지지 않을 뻔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소심한지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질질 끌다 맺어졌는데, 앞으로도 계속 답답하
게 애를 태우면서 거리를 좁혀 나갈 예정입니다. 아마네 군의 소심함
이 금방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사악한 얼굴).
5권부터는 사귀기 시작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예정한 이야기
의 반도 진행하지 않았으니까,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기왕
이면 웨딩드레스 입은 마히루 양의 일러스트를 보고 싶으니까, 그때
까지 가고 싶네요!

이번에도 하네코토 선생님의 멋진 일러스트가 폭발했습니다. 커버,


컬러 페이지, 전부 귀여워요……. 머리를 묶은 마히루 양의 가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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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과 물씬 풍기는 요염함은 차마 뭐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매일


이런 마히루 양이 집에 있는데, 아마네 군은 얼마나 배가 부른 걸까
요.
이번에는 컬러 페이지에서 아마네 군이 많아서 솔직히 기쁩니다.
체격 차이는 좋은 거예요. 하네코토 선생님이 그리신 아마네 군이 너
무 멋져서 너는 대체 왜 자신감이 없니…… 하고 작가가 머리를 싸맸
습니다. 아마네 군, 멋지지 않나요?
다음 권부터는 건전하게 애정 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도움을 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하겠습니다.


이 작품을 출판하는 데 애써 주신 담당 편집자님, GA문고 편집부
여러분, 영업부 여러분, 교정자님, 하네코토 선생님, 인쇄소 여러분,
이 책을 사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권에도 또 만나기를 빌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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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2022년 01월 05일


전자책 ISBN 979-11-380-0959-1 (05830)
전자책 정가 4,500원
지은이 사에키상
일러스트 하네코토
옮김 JYH
펴낸이 임광순
펴낸곳 영상출판미디어(주)

OTONARI NO TENSHISAMA NI ITSUNOMANIKA DAMENINGEN NI SARETEITA KEN vol. 4


Copyright ⓒ 2021 Saekisan
Illustrations copyright ⓒ 2021 Hanekoto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2021 by SB Creative Corp.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SB Creative Corp., Tokyo
in care of Tuttle-Mori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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