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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 하이스쿨.

gba 1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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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 하이스쿨.gba 의 1 부 텍스트본입니다.

포하를 사랑해주시는 여러분의 열렬한 성화에 힘입어 만들어진 텍본으로 작가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배포하는
것입니다.

텍본은 작가의 블로그(https://dodostorybox.tistory.com/)에서만 배포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만


사용해주시고 꼭 다운로드는 블로그에서만 부탁드립니다.

불법 배포를 하는 것이 발견될 경우 단호히 형사 고소 예정입니다. 개인소장만 부탁드립니다.

불법 다운로드는 컨텐츠 제작의 의욕을 꺽고 웹소설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임을 꼭 인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조아라에서 연재되어 완결되었고, 조아라 습작 예정은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혹시 이 글을 제본하시는 것은 자유이나 부디 한 부만 더 만들어서 저도 보내주세요.

조아라 : https://www.joara.com/book/962831

블로그 : https://dodostorybox.tistory.com/

이메일 : doyeon11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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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둠의 블랙칩

1화

w. 도여은

오늘도 여전히 컴퓨터로 블로그를 하고 있던 나는 한 쪽지가 온 것을 발견했다. 쪽지는 바로바로 확인하는


성격이라 한 번 들어가 보니 이상한 제목의 쪽지가 와 있었다. 혹시 이 해킹 버전도 해보셨나요?라는 제목의
쪽지는 여타 블.로.그 대♣여♧ 같은 스팸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 해킹 버전 추천인 건가? 열어보니 안의
내용은 단출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킹버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서 메일로 하나 보내드렸습니다.


“어, 뭐지...?”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메일함을 찾아 들어갔다. 진짜 메일에는 낯선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제목


없음) 이라는 제목은 딱 보기에도 수상해 보였지만 보낸 이는 그 쪽지를 보낸 사람과 동일한 아이디였고 내용
하나 없었지만 분명 첨부파일은 분명 gba 파일이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쩐다...

사실 나는 남모를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포덕 즉 포켓몬스터 덕후라는 것이다. 솔직히


포켓몬스터는 초딩들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유치하다고 하니까 남들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자 몰래몰래 혹은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곧 고등학교 2 학년인 여자애지만, 어,
분명 공부해야 할 나이이지만 포켓몬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하라고...!

그 귀여운 생김새와 다양한 성격과 타입과 팀을 짜서 도장 깨기를 하고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챔피언을


도전하는...! 아아, 역시 포켓몬스터는 스토리랄까. 포켓몬스터를 어둠의 경로로 받아 플레이 했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쌈짓돈 모아 정품을 사서 닌텐도로 돌리는 지금까지 나는 포켓몬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덕질하고 있는 부분은 해.킹.버.전. 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구하기 힘든 해킹버전을 무엇이고 다 해보려고 했고 일판이든 영판이든 언어를 배워서라도 하겠다 하며


공부까지 했다. 이젠 웬만한 게임은 다 알아먹을 정도야. 아니, 쨌든 포켓몬스터 블랙스는 물론이고 모에몬,
샤이닝 골드, 애쉬 그레이, 오바람의 복수 등등 아, 디지몬 버전은 모르는 디지몬이 너무 많아서 별로였지만.
포켓몬 괴담을 바탕으로 한 블랙은 진짜 무서웠는데, 무서운 거 못 보면서도 덜덜 떨면서 클리어했었지.

스토리를 좋아하는 내가 정품판으로 모자란 나머지 이런 해킹버전으로까지 변질돼서 나타났달까. 그저


플레이하는 것으로 모자라 남들이 모르는 네이버 아이디를 만들어서 해킹 버전 후기를 적기 시작했고 그로 모자라
공략을 적기도 하고. 그래서 포덕들 사이에서 은근 이름이 있긴 했더란다. 그래서 이런 해킹 버전이 있어요,
하는 추천은 자주 받았었는데 직접 파일을 보내온 적은 거의 드물어서 놀랐다.

파일 이름은, 음... 보자. pokemonster highschool...? 포켓몬스터 고등학교...?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해킹파일인데. 좀 의심스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루알사 스토리도 마무리했겠다, 웬만한
해킹 버전은 다 해본지라 심심했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그리고 포켓몬을 좋아하는 사람 중엔 나쁜 사람 없어.
암 그렇고말고.

나는 스마트폰으로 메일로 들어가 그 파일을 다운받았다. 포켓몬스터는 닌텐도 안 된다면 스마트폰이지! 차선의
차선이 컴퓨터 에뮬인 거라고. 그러고선 난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이빙했다.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잠시
뒹굴다가 스마트폰을 천장 쪽으로 들어 다운되었는지를 확인했다. 내일은 내 생일이고 또 지금은 겨울방학이고
나른한 오후인 데다 방 안은 따뜻하니 딱 포켓몬을 할 때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화면이 나와야 할 곳에 까만 화면만


가득할 뿐이었다. 어, 이거 첫 화면부터 없는 건가? 하는 마음에 A 버튼을 연타하는데, 갑자기 흰 빛이 나를
덮쳤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 빛이 밝은 탓일까.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1-1. 웰컴 투 더 포켓몬 월드

2화

w. 도여은

나는 눈을 뜸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머리가 띵- 울렸기 때문에 잠시 눈을 감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눈을 꿈뻑꿈뻑거리면서 주변을 살피니, 음... 내 방이었다. 책상과 그 위에 컴퓨터,
베이지색의 벽지, 그리고 연한 분홍색의 커튼. 그 커튼 사이로 약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 새벽인
걸까. 이불도 안 덮고 잤던 건가.

문득 초침소리가 크게 들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다섯 시였다. 분명 마지막으로 생각났던 것이... 두시


반이었던 것 같은데. 세 시간이 지난 건 아닌 것 같고.

머리가 다시금 찡하게 울렸다. 머리 같은 거 잘 아픈 적이 없었는데. 몸 상태도 그렇고 뭔가 찝찝한 느낌이었다.


마치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꾼 것처럼 불쾌한 기분. 손으로 더듬거려서 폰을 찾으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폰은 저 바닥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폰이 왜 저기에 가있지...? 어제 나... 분명 이상한 메일을 받았고, 그건 포켓몬스터 해킹파일이었고,


그것 폰에 받았고... 실행하려고 했었는데...? 잠들었나? 나는 의아한 생각에 몸을 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끈거리던 머리는 한층 가라앉아있었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왠지 지극하게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현실인데 왜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거지?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폰을 주우러 가는 동작 하나하나가 어색했다. 마치 내 방인데 내 방 같지가 않고. 내 몸인데 내 몸


같지 않은, 이 위화감은 뭘까. 폰이 떨어져 있는 곳은 휴대폰 충전기와 함께 닌텐도와 산지 얼마 안 된 큰다수
닌텐도...가 있...어야 할? 어? 내 닌텐도! 닌텐도들이 없어졌다.

나는 재빨리 숙여 폰을 집고는 방을 둘러보았다.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닌텐도들이 없다. 뭔가 위화감을


느꼈던 정체는 이거였나? 항상 꼽아두었던 닌텐도 충전기도 없었다. 비어있는 콘센트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양 먼지가 얕게 쌓여있었다.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혹시...! 나는 책상 서랍을 확 열어젖혔다.

없다.

포켓몬스터 DP, 기라티나, 하골소실, 블화, 블화 2... 게다가 이번 6 세대 XY 는 물론이거니와


오루알사까지.... 팩이 없다...? 없어. 없다고...!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리가 멍하니, 그저 이 상황을 두 눈으로만 담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방금 일어난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그 초침이 울리는 조용한 방을 내 목소리로 울리고 나니 혹시 이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너무 감각이 생생했다. 나는 첫 번째 서랍을 닫고 두 번째 서랍에
손을 뻗었다. 이 안에는 이번에 오알루사를 사고받은 그란돈과 가이오가 피규어가 있을 거야. 만약 없다면 진짜
닌텐도도 내가 모은 팩들도 다 없어진 거다. 나는 손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서랍을 열었는데...

없었다.

나는 허둥지둥 다른 것을 다 확인해봤다. 책장에 내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문제집, 참고서, 1 학년 교과서,


컴퓨터, 가방 안에 들어있는 공책, 필통 등 없어진 건 없었다. 분명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는데. 달라진 건,
닌텐도가 없다는 것과 내 정판 칩들이 없어진 것. 공통점은 포켓몬스터...인건가? 공부 안 했다고 벌 받는 건가?
아예 손 놓은 건 아니었는데...

나는 침대에 털석 걸터앉았다. 아, 멘붕이다. 뭘까? 꿈을 꾸고 있나? 나는 다시 한번 콘센트를 확인했다.


꽂혀있는 건 폰 충전기뿐이고. 아, 폰...! 나는 폰을 켰다. 분명 어제 폰에 해킹파일을 다운받았으니까.
손가락으로 폰을 꾹꾹 누르는데 화면이 안 켜진다...? 꺼진 건가? 꾸욱 눌러보는데도 도저히 켜지질 않았다.
배터리가 없는 건가. 나는 허둥거리며 일어나 충전기로 향했다. 침대에 일어나자 휘청거려 책상 위를 짚는다는 게
그만 책들을 쏟아버리고 말았다.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쿠당탕탕 소리를 냈다. 나는 잠깐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청거리며 충전기에서 예비 배터리를 꺼내 갈아 끼우려고 했다. 아니, 손이 떨려서 몆 번 헛손질을 한


것뿐이야. 침착해. 나는 몇 차례 헤매다가 겨우 배터리를 갈았지만 폰의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뭐야...
무섭게. 무섭게 왜 그래.

나는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한 세 번쯤 반복하고 나니까.
새로운 가정이 떠올랐다. 아, 닌텐도, 엄마가 치웠구나. 몰래 하기는 했었지만 이제 고 2 니까 공부하라고 치웠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났다. 휴... 놀래라. 놀랐네 정말. 새벽이라 정신이 예민해졌던 거였어. 나는 다시금 폰을
켜려고 했지만 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파일 바이러스였던 건가. 젠장.

내 생각은 금방 컴퓨터로 미쳤다. 혹시 컴퓨터도 바이러스 먹은 건 아니겠지? 그리고 전원 스위치를 누르는데...


안 켜진다. 젠장할.

“뭐야 진짜... 안 켜지는 건가?”

나는 발로 본체를 퍽퍽 찼지만 컴퓨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 깊은 빡침이 나를 감싸고돌았다. 엄마가 나


자는 사이에 닌텐도랑 포켓몬스터 다 들고 갔다. 나 자는데 이불도 안 덮어주고. 그리고 폰이랑 컴퓨터는 수상한
메일을 받아서 바이러스 먹고. 새벽부터 깨 가지고 기분 잡치게.

나는 의자를 뒤로 최대한 젖혔다. 내 무게가 무거웠는지 의자는 끼기긱 소리를 내며 뻑뻑하게 굴었다.

“뭐야, 진짜. 아침부터 기운 빠지게.”

금방이라도 엄마한테 따지고 싶은 마음이나 엄마는 분명 자고 있을 것이었다. 잠 깨우기도 뭣하고 난 뭐한담.


아 떨어진 책이나 주워야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혀졌던 의자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다시 끼기긱하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가 너무 컸나. 엄마 깨는 거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책 한 권을 들었다. 책을 책상
위에 올리려고 숙였던 몸을 드는데 웬 낯선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다. 난 잠시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발... 소리인가? 뭔가 사뿐사뿐 내 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발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 우리 집에 아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 그런데 그런 작은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었던가?
내가 생각을 하는 와중에서도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뿐사뿐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 소리는
착각이 아니라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침입자인가? 나는 책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차하면 먼저 문을 열고 책으로 선제공격을 하리라.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나는 카운트를 세었다. 셋 하면 여는 거다.

삼. 이. 일...!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책으로 내려찍으려는데 보이는 건 노랗고... 초록...? 나는 당황해서 왼손에


있던 책을 떨어뜨려버렸다. 그 책은 노랗고 초록색인 괴생물체 옆에 바로 떨어졌다. 그 괴생명체는 소리 질렀다.

modamodamodamodamodamodadadada!!!

나도 놀라 소리쳐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며 엉덩방아 찧으며 넘어졌다. 내 눈앞에 지금 모다피가 있습니다...라는 걸까. 결국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깨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내 앞에 모다피를 두고 어버버 거리고 있었고. 모다피는 도도도 달려가 엄마 품에
안겨 모다모다하며 눈물을 훌쩍이는데. 왜 저게 나보다 더 딸내미 같지? 지금 엄마한테 울고 안기고 싶은 건
나라고.

“어... 엄마.”
“왜 새벽부터 소란이야. 모디는 왜 울고 있고?”

그 모다피 이름이 모디인건가. 이름까지 있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실사판 모다피가 우리 엄마 품에 안겨서


훌쩍이고 있어. 엄마가 나를 빤히 바라보자 나는 뭐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왠지 저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여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아니. 문을 열었는데 모...디가 문 앞에 있었어. 놀랬나 봐.”

엄마는 아 그래? 하고는 모다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너 오늘은 왜 이리 일찍 일어났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엄마는 모다피를 내려다두고는 나를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모다피.


생각보다 은근 크기가 컸다. 내 허벅지까지 오려나. 동그랗고 노란 머리통에 분홍색 주둥이. 광택이 나는 잎사귀
두 장, 얇고 호리호리한 갈색 몸통과 다리. 내가 2D 로, 그리고 요즘에는 3D 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모다피가 쫑쫑 걷는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라서 내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나는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아차 싶어서 주춤주춤 일어나 엄마를 불렀다.

“엄마. 혹시... 어제 내 닌텐도 가져갔어?”


“닌텐도? 그게 뭐니?”
“어...?”

엄마는 부엌에 들어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엄마에 대답에 황당한 나는 어버버 하다가 다시 시도했다.

“그... 게임기 있잖아. 네모나고 접히는 거. 그러니까...”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나레기. 내 표현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속으로 절망하면서 다시금
설명하려는데, 설명하려는 나 자신이 웃겨서 웃음이 났다. 엄마가 닌텐도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졸라서 샀던 건데. 그리고 이번에 큰다수 장만할 때도 진짜 사정사정을 했었는데.

내가 말을 머뭇거리자 엄마는 다른 쪽으로 해석했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우리 지은이. 이번 생일선물로 그거 가지고 싶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말을 안했네. 아침부터 깜짝 놀래 가지고. 우리 딸 생일 축하해.”

엄마는 나를 꼭 안았다.

“이제 성인이니까. 아침 먹고 나갈 준비 하자. 네가 항상 기다렸던 날이잖아? 등록해야지.”

엄마는 웃으며 나를 꼭 안더니 다시금 아침준비를 하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른 채 엄마의


뒷모습과 그런 엄마를 덩굴을 꺼내 도와주는 모다피...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뭘 기다렸다는 거고, 뭘
등록한다는 거야? 나는 뭐라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엄마가 닌텐도를 가져간 게 아닌가?
그리고 저... 그러니까 저.. 저 포..켓몬은 뭐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는 내 볼을 잡아당겼지만 진짜 아프기만 했다. 나는 속으로 신음을 참은 채 아픈 볼을 문질렀다. 아, 분명


아픈데. 저 모다피는 뭐고 나는 뭐지. 엄마의 반응으로 봐서 내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현실에 모다피가 있을 수 있냐는 말이지.

모다피는 내 눈앞에서 덩굴로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덩굴이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사실 게임에서야 어떻게 된다고 할지라도. 어떤 원리로 덩굴이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하는 건지 좀 궁금했다. 팽창과 수축인가? 그런데 어느 정도의 수준이 있지. 쓰지 않을 때는 또
몸속으로 사라지는 듯한데, 저 가느다란 몸에 넝쿨이 들어갈 자리가 있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현실의 유사한
것을 생각해봤자 청소기 전기코드가 빨려 들어갔다가 꺼내지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나는 나도 모르게 현실과 지금을 비교하고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현실과 지금을 비교하고 있다는 건 내가


지금 상황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 진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한데... 일단 나는 이과
진학 예정자란 말이야! 이렇게 눈앞에서 비과학적인 현상을 보게 된다면 이과생들 다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아마...?

나는 친구들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그 애들이 나를 미친 애 취급한대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폰을 꺼냈는데... 아, 나 폰 고장났지... 나는 엄마의 눈치를 봤다. 할부 남았는데. 6 개월 남은 거긴 하지만.
6 개월이면 봐주시려나..? 그런데 그럼 지금까지 할인해줬던 금액 다 뱉어야 하는데. 나는 조용히 엄마의 눈치를
봤다.

“엄마... 있잖아.”
“응?”

엄마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 같았다. 좋았어. 밥 먹을 때 얘기하는 것보다 지금 얘기하자.

“나 폰 고장 났어.”
“고쳐.”

아... 쿨한 우리 엄마.

.
.
.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씻은 뒤, 방으로 돌아와서 다시금 확인했지만 역시 닌텐도는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는데, 하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포켓몬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장 싫은 가정이지만 내가 미쳤다는 것이 되겠다. 하지만 역시 꿈이라는 것이 제일 타당하겠지? 나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일단 나는 말을 아꼈고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었다. 이야기를 해보니 딱히


엄마가 변한 건 아니었고. 변한 게 있다면 역시, 모다피가 포켓몬 푸드를 먹고 있었다는 거...? 그리고 그게
너무 귀여워서 그만 먹는 걸 잊을 정도로 빤히 쳐다보았다는 것... 으으... 나도 모르게 그만... 엄마가 묘한
웃음을 짓기에 안 그런 척 밥 먹는 것에 집중했지만, 그래도 너무 치명적이었다. 단춧구멍 같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맨들맨들해 보이는 이파리로 건식 푸드를 하나씩 하나씩 입에 넣는 모습은...!

안 돼, 안 돼. 정신 수습하자. 이지은.

나는 엄마의 명령대로 나갈 준비를 하고 옷을 꿰어 입었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생일이었던 거야. 아침부터


정신적인 충격으로 잊고 있었지만. 이제라도 정신 차리자!

라고 생각했지만 밖에 나오는 순간 나는 정신 차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통통코를 산책시키는 어떤 언니를 만났고, 차를 타기 전에 블루를 안고 가시는 아주머니를 만나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 포켓몬을 빤히 바라보게만 되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나서는 구구라던가, 삐삐라던가, 뚜벅초라던가...!
나도 모르게 창문에 코를 붙이고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엄마가 후후 웃으시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켓몬이 갖고 싶니? 아침부터 모다피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지나가는 포켓몬을 죽일 듯이
쳐다보고.”
“죽일 듯이는 아니고...”

나는 중얼거리며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기분이 좋은 듯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서 손을


꼼질거리고 있었고. 사실 안 그런 척 하지만 나, 조금 놀라있었다. 아니 포켓몬이 밖으로 나다니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엄마가 포켓몬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이 상황에 말이다.

포켓몬에 대해 이렇게 일상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줄이야. 사실 내가 닌텐도 하는 것도 반대하고 내가


포켓몬을 하는지 디지몬을 하는지도 모르는 엄마였는데. 그리고 일상에서 포켓몬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하긴 내가 본 이 세상이 포켓몬 월드라면 아마 포켓몬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생물일 테니까.
가까이만 봐도 모다피가.

나는 미러로 모다피를 바라봤다. 집 지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따라왔네. 하긴 저 정도면 작은 사이즈니까 데리고


다녀도 별로 상관은 없을 거야. 그런데 흐아, 발을 까딱거리면서 잎사귀 웨이브를 하는 이유는 뭐지. 엄마가
기분이 좋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은 건가. 나 한 번도 게임을 하면서 모다피가 귀엽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저건 정말... 귀... 귀여워...!

내가 모다피를 보면서 헤롱헤롱거리거나 지나가는 포켓몬을 구경하면서 입을 헤 벌리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곳은


동사무소...? 아니 이젠 주민센터라고 해야 하나. 쨌든 그곳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엄마는 가방에서 몬스터볼을 꺼내 모다피를 향했다.

“모디, 잠시 들어가 있으렴.”


moda!
어... 잠깐만 엄마 나 마음의 준비가...! 엄마는 내 생각을 모른 채 모다피를 볼 안으로 집어넣었다. 빨간
불빛이 나더니 모다피가 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엄마는 볼을 축소한 뒤 가방 안에 넣었다. 그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며 난 한숨을 쉬었다.

“왜?”

엄마가 내 한숨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차마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보겠지.

.
.
.

동사무소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공공장소에서 포켓몬은 꺼내지 않는 것이 예의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먼저 번호표를 받으러 갔고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피곤해.”

너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접했기 때문인 걸까. 엄마한테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고 숨겨서 그런 걸까.
그런데 진짜 믿을 만한 것은 아닐 거 같은데.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나쁘진 않아. 진짜
포켓몬이 현실에 나온다는 거. 정말 꿈같은 이야기니까. 너무 바라왔던 일이라 실감이 안 나고 의심스럽다고 해야
할까. 역시 너무 기뻐하면 꿈에서 깨겠지?

나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려다가 옆에 있던 식물 잎을 살짝 건들이고 말았다.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내렸는데... 잎이 저절로 움직인...다..?

“...?!”

나는 놀랐지만 잠시 시선을 돌려서 바닥을 바라봤다가 다시금 그 식물을 바라보았다. 나 지금 뚜벅쵸가 화분


흙에 반쯤 묻혀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어... 풀 포켓몬이니까 이게 당연할지도 몰라. 당황하지 말자.
생각해보니 오늘 나가는 길에 집에 못 보던 화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우리 집 모다피 전용 화분이었던 건가.

눈만 내놓고 묻혀있는 뚜벅초와 눈을 맞추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침 엄마가 이쪽으로 오고 있기도 했고.

“뚜벅쵸 보고 있었어?”
“아, 응.”

엄마는 귀엽네 하면서 이파리를 쓰다듬어주니 뚜벅초도 기분이 좋은지 잎을 연신 흔들어댔다. 아무래도 화분을
신경 쓰는 건 나뿐인가. 나는 엄마와 화분과 뚜벅초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가?
하하.

3화

w. 도여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바로 발급은 안 되더라도 신청은 바로 되는 거니까.”
“뭐...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긴 뭐야. 주민등록증 신청하러 온 거지. 겸사겸사 트레이너 신청도! 이제 너도 포켓몬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좋지? 오늘만 손꼽아 기다렸었잖아.”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3 초 후에 이해했다. 아, 리얼 포켓몬 월드는 열 살이 성인이었는데, 현실 보정판


포켓몬 월드는 성인 나이를 따지는 건가? 그러면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만 17 세가 성인으로 취급되는 거고.
오늘이 내 생일이니까. 주민등록증 발급과 동시에 트레이너가 가능하게 되는 건가...? 모르겠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주민등록 수속은 별로 어려운 일 없었다. 오른손 왼손 지장을 다 찍어야 한다는 것만 빼면. 화장실가서 지워도
잘 지워지지 않아서 애먹었었다. 근데 그곳에 있는 폼 형태의 비누가 꼬부기 모양이었어. 그런 포켓몬 굿즈가
일상에서 쓰이다니 이상하다, 라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포켓몬을 가지게 된다니... 그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꿈이니까...?

밖에서 점심을 먹고 아, 물론 모다피도 엄마가 챙겨온 포켓몬 푸드를 먹었고, 차를 타고 또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방향은 교외 쪽인데.

“엄마, 또 어디가는거야?”
“후후. 아빠 연구실.”
“혹시... 설마...!”

나는 경악했다.

“그래 포켓몬 받으러 가는 거야.”


modada!
“그래 모디, 당분간 집에 새 식구가 오겠네.”

엄마는 웃으며 내가 경악한 이유가 포켓몬을 벌써 받느냐는 것으로 이해했겠지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했지만
뭐랄까. 생물학자이셨던 아버지가 포켓몬 연구원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예감이 적중했다.

“지은아, 왔니.”
“응. 아빠!”

속으로는 심란한 마음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없는 양 평소처럼 아빠한테 매달렸다. 아빠의 행동은
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교외에 연구소가 있어서 주말에만 집에 오시는 건 그대로일 것 같은데... 음...
연구소가 더 커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역시 생물학자와 포켓몬 학자의 대우가 다른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요. 자연과학 대우가 안 좋은 한국이지만 그나마 좋은 연구소에 다니셨는데 그것보다 더 크고 최신의
시설이라니. 포켓몬 월드... 이구나.

“자. 떨리지? 안으로 들어가자.”


엄마는 주차하고 따라가겠다고 하고 나는 아빠를 따라갔다. 포켓몬 연구원인 아버지는 뭔가 달라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여기가 익숙해야한다. 왜냐하면 나는 방학 때마다 이곳에 내려와서 방학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빠가 지내는 집이 있기 때문에 방학만 하면 여기서 내려와서 지냈다. 그것도 중학생
때가 마지막이었지만.

나는 연구소로 들어가기 전에 동네를 한 번 쭉 훑어봤다. 으어, 내가 살던 그곳이 아닌 것 같은데... 도시와는


달리 산이 있고 들이 있고, 마을이라는 느낌이 강한 곳이라 포켓몬도 더 많은 것 같았다. 마치 조금만 마을을
벗어나면 앗 야생의 구구가 나타났다, 라는 상황이 될 것 같은 느낌. 엇 저기 풀숲에서 꼬리선이... 있다가
사라진 것 같은데. 땀이 삐질 났다. 이런 긴장감 넘치는 동네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건물들 같은 경우에는 눈에 익었다. 저쪽으로 길로 들어가서 쭉 가다 보면 우리 집이 나오는데. 주변에


연구소 아저씨들 집만 가득 있지. 지금 상황에선 엄청 포켓몬이 많이 보이지 않을까? 이게 꿈이라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포켓몬을 많이 봐 두자! 결심했다.

“딸. 무슨 포켓몬 받을 것 같아?”

응? 아빠는 연구원 입구에 카드를 대며 말했다. 자동문이 위잉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늘 이곳을 스캔해 본
결과 관동지방이라기엔 성도 포켓몬이 보이니... 성도지방인가? 그럼 스타팅이 치코리타, 브케인, 리아코일 게
분명한데! 나는 역시 브케인을 고르는 게 좋겠지? 리아코도 좋지만 아, 치코리타는 안 될 것 같아.
감당하기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음... 잘 모르겠는데. 고를 수 있는 거야?”

떠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빠는 껄껄 웃으면서 분명 내 마음에 들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으으... 그러면
내가 평소에 포켓몬에 대해서 떠들고 다녔다는 건가. 왠지 좀 상상이 안 가는데, 포켓몬 좋아해요 라고 떠들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란 말이야. 대부분 포켓몬 전부 좋아하기는 하는데.

연구소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아는 연구원 아저씨들이 친근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쫒아가는 건
꼬렛이라거나, 코일이라거나 작은 포켓몬이었다. 보통 포켓몬 받으러 왔니? 하면서 웃으시는 게 아빠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아는 연구소와 달라진 구조에 얼떨결에 아빠를 따라가다가 한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그 방 안에 들어가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기... 서 계신 분은 다름 아닌, 오박사님?!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포켓몬스터 적녹청옐로금은의 인트로를 담당하시는, 포켓몬계 최고의 권위자,
오박사님이라니! 나는 내 눈을 비비며 다시금 오박사님을 쳐다보았다. 흰 백발에 각진 머리, 짙은 눈썹, 조금
험악해 보일 수 있지만 인자한 표정을 지으시는... 나는 아빠를 쳐다봤다가 다시 오박사님을 쳐다보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놀란 건 알겠지만 먼저 인사부터 해야지.”

아빠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뭐죠 오늘 나 계 탄 건가요? 이거 진짜 내일되면 꿈인 거


아니야?

“네가 지은이구나. 처음 보는 걸? 너희 아버지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단다.”

나는 어설프게 네, 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포켓몬스터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조금 신기하다거나 하는 표정을 짓고 오박사님을 보고 있다는 생각 해 금방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박사님을 다시 보았다. 그래도 한 편으로 드는 생각이, 포켓몬 세계의 권위자시니 아마 연예인 보듯 하는 이런
표정 많이 보셨을 것 같다는 거랄까. 방금 내가 그랬듯이. 하하. 그래도 좀 민망한 기분이었다.
“여기 이것 받으렴.”

오박사님이 내게 무엇을 건네주셨다. 나도 모르게 오박사님만 집중해서 봤던 걸까. 나는 그제서야 박사님의


손에 들린 그것을 보게 되었다. 오박사님이 건네는 건 알이었다. 알!! 그래, 그 베이지색에 녹색 땡땡이 무늬가
있는 전형적인 알의 모양. 내가 건네받자 묵직한 무게가 내 팔을 눌렀다. 품속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걸 왜 저한테...?”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딸 자랑을 하던지, 한 번 보고 싶어서 불렀단다. 포켓몬을 많이 좋아한다고? 너희
아버지를 닮았다면 분명히 포켓몬을 아끼고 사랑할거라고 생각했단다.”

찌잉... 아빠 감동이야. 내가 그런 표정으로 아빠를 보자 아빠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저... 진짜 제가 받아도 돼요...?”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지금 꿈일 텐데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왜일까. 알이 내게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오박사님은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가는구나.”


“...네?”

나는 이해가 안 가서 되물었지만 오박사님은 끝내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에 아빠가 나를 툭툭 쳤다. 내가


아빠를 쳐다보니 마치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하는 표정이었다. 아차차. 나는 실수한 어린애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 감사합니다.”

알을 꼭 안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계산은 네 아빠가 다 했단다.”


“에...?”

계산? 얼떨떨하게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는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박사님도 참, 농담도. 애가 당황하잖아요.”


“음... 별로 안 웃겼나. 그렇다면,”

오박사님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알에서 알이 나오면 아라리!”

순간 싸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알겠다. 오박사님 스타일. 하하하... 아빠와 나, 둘 다 반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박사님... 눈에 띄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셨다. 회심의 한 방이셨나 봐...

“크흠, 박사님 무슨 말씀을... 쨌든 지은아 이 알은 박사님의 포켓몬이 낳은 소중한 알이야. 알겠니?”


“아... 응.”

나는 오박사님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왜 나에게 이 알을 주시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뭐 꿈이니까, 라고


생각하니까 그저 기뻐졌다. 나는 오박사님에게 꾸벅 인사했다.
“이제 가자. 박사님 바쁘시니까.”

나는 아빠가 떠미는 통에 알을 안은 채 문 밖으로 밀려났다.

“박사님, 저 오늘 일찍 퇴근합니다! 내일 일찍 올게요.”

아빠는 그 말만 남긴 채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격의 없는 아빠의 행동에 당황해서 물었다.

“아빠, 진짜 오늘 집에 가게? 그렇게 말하고 나와도 돼?”


“되고말고 그럼.”
“진짜? 짤리는 거 아니야?”
“아빠같이 유능한 사람을 어떻게 짤라.”

아빠가 웃으면서 평소에 더 많이 하니까 괜찮다고 나를 밀었다. 내가 아빠하고 투닥투닥하고 돌아가는데도 내


품속에는 따끈따끈한 알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게 내 포켓몬이라고? 진짜 내 손으로 부드러운 표면을
만지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알이라고 해봤자 내가 지금까지 봐온 건 계란이나 메추리알 밖에 없었으니까. 마치
공룡알 같은 이 형태는 감히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보지 못하겠구나. 이 알도... 포켓몬도.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즐거웠으면 됐어,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알에 어떤 포켓몬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모다피나 삐삐나 뚜벅초나 여러 포켓몬을 보았는걸, 정말 꿈이었지만 현실감 있고 신기했어. 그러니까 자고
일어나면 진짜 생일을 맞게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4화

w. 도여은

아침에 일어난 나는 눈앞의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어, 분명 깨어나면 현실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알이


보이는 거지? 눈곱이 낀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알은 내 침대 옆 협탁 위에 방석을 깔아뭉갠 채 고고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

나 아직도 꿈에서 안 깬 건가? 분명 생생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생일을 맞을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


맞다 폰! 나는 폰을 찾아 방을 둘러보았다. 내 폰은 책상 위에 덩그러니 있었는데 일어나서 켜보니 켜지지
않았다. 요지부동인 건 컴퓨터도 마찬가지. 닌텐도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뒤지고
책장에 책을 꺼내고 옷장을 열어젖히면서 미친 듯이 찾았지만 없었다. 이면지 뭉치 밑에 깔려있을까 생각하며
종이를 날리다가 손이 베였다.

피가 방울져 솟아났다. 쓰렸다.

“진짜... 없어.”
있는 건 저 알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작게 축소된 채 알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몬스터볼 여섯 개. 나는
찬찬히 꿈이라고 생각했던 어제를 되돌아보았다. 나는 이 알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가 준비한 생일
선물이라고 몬스터볼 여섯 개를 받았다. 그리고 알을 품에 안고 모다피랑 놀다가, 아빠가 엄마 포켓몬 하고만
논다고 삐져서 완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디를 꺼냈다.

헐, 미친 짱 귀여워. 하면서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하다가 저녁을 먹었다. 뒷발로 목을 긁는 가디를 뒤에서
껴안았다가 깜짝 놀란 가디가 불을 뿜는 것을 보았고. 아, 그렇게 많이 뿜은 건 아니라서 공중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그리고 공부하라는 엄마의 말에 싫다고 개기다가 또 잔소리 듣고. 꿈인데 뭐 어때, 공부 안 하려다가
그래도 찝찝해서 알을 품에 안은 채 수학 문제 풀다가 영어 공부하다가, 인강 듣고 잤는데.

꿈이 아니었다.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부엌으로 가보니 엄마와 모다피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거실을 바라보니 가디가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고 아버지는 나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딸, 아빠 가는 거 마-”

나는 아빠의 말을 듣다말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나도 모르게 문을 잠그고 문에 등을 기댔다. 심장은


펌프질 하면서 뛰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문밖에선 딸 왜 그래? 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고... 가디가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나는 중얼거리면서 다시금 침대로 기어가 누웠다. 이불까지 덮고 눈을 감고... 이제


자자. 자고 나면 다시 자고 나면 현실로 돌아올 거야. 분명 포켓몬 월드는 좋은 곳이야. 진짜 좋아해 포켓몬.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여긴 내가 사는 곳이 아니잖아. 말도 안 되잖아.

눈앞이 암담했다. 눈을 감고 다시금 잠을 청해보는데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카페인


쇼크가 온 것처럼 메스껍고, 머리가 띵하고, 식은땀이 났다. 나는 돌아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자.
다시 잠들고 나면 원래의 내 세상에서 일어날 거야. 그럴 거야.

.
.
.

나는 그렇게 암전되듯 잠들었고 열이 났고 어지럽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 차라리 눈을 감았다. 아, 내가


아프고 있어서 꿈을 꿨던 거구나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간호하러 내 방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모다피를 보면서 아직도 나 꿈을 꾸고 있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프지 않게 되면 이제 보이지
않겠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누워있어야겠다 생각했다. 아니, 내가 아프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그래서 자꾸 나는 침대 옆, 바로 보이는 협탁 위의 알을 모른 척했다. 하지만, 하지만 알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앓으면서 내가 살던 원래의 포켓몬이 없는 세계로 돌아가고자 했다. 여기는 꿈이라고 계속 생각했지만


반쯤은 진짜 현실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친 걸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열에 들떠 정신이 오락가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눈앞이


깜깜했다가 다시 떠보면 알이 보이고, 다시 감고, 이번엔 사라졌겠지 했지만 다시 알은 내 앞에 있었다. 수십
번을 정신을 잃고 되찾았지만 알이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발밑의 얄팍한 얼음이 깨어졌다. 나는 허공으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있었다.

몸이 무거웠다. 땀으로 범벅된 몸은 불쾌했고. 잠깐 엄마가 깨워서 먹인 죽 때문에 속이 더부룩했다. 나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눈앞에 있는 알은 지금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이거 꿈
아니었어? 아니었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있던 곳이 아닌 걸까. 왜... 눈앞에 알이 보이는 걸까.
포켓몬... 왜 세상에 포켓몬이 있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어째서? 뭐지?

나를 제외한 세상이 뒤집어져버렸다. 불안감이 밀려와 엄습했다. 두려웠다. 몸이 떨렸다. 그 내 앞에 보이는


건 알... 포켓몬 알이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 당연한데...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내
세계를 앗아간 것이 마치 그 알인 것만 같았다. 미친 소리인 것 안다. 아는데...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몸이
덜덜 떨림을 느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알고 있는 내 방이 맞나? 나를 돌봐주던 그 엄마는 내 엄마가 맞는건가? 아빠는?


생물학자로 연구를 하시던 아빠는? 그 아빠는 어디 가고 포켓몬 연구원이라니... 모다피니 가디니... 그런 거
없었잖아. 내 기억은 정말 내 기억이 맞는 걸까? 아빠가 내가 좋아하는 포켓몬을 어찌 알고 엄마는 왜 내게
포켓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앞으로도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건가?
이건 꿈인 건가? 아님 진짜 내가 미친 거야?

“말이라도 해봐.”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눈앞에 있는 알을 보면서 소리 질렀다.

“아무런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잠겨서 흉한 목소리. 하지만 어떻게 알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말을 하는 건


나뿐이었다.

“너희가 왜 이 세상에 있는지. 아니,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알을 주시했다. 하지만 알은 그림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너는 게임 속 존재잖아.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데이터일 뿐이라고!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야?


너희가 현실로 나온 거야, 아니면 내가 데이터가 돼버린 거야? 내 세상은 어디로 가버리고 나는 왜 혼자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혼자 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집 안엔 아무도 없는지 내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알은 미동도 없었고 방


안에는 기이한 적막만이 흘렀다. 나는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어 옷걸이에 걸려있는 패딩 하나를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내게 알을 주었던 오박사님이 떠올랐다. 하... 오박사님. 잘못 생각하셨어요. 저는 포켓몬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11 층인 문 밖 난간으로 보이는 것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포켓몬. 그 전날 까지만 해도


신기해하면서 쳐다보았던 그 포켓몬들이었다.

옆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었다. 포켓몬을 만날 것만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가 나를 뒤쫓아 왔다. 나는 그에 더
빨리 뛰다가 그만 쿠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마치 어제 쏟아져버린 책들처럼.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리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나는 한쪽 다리를 반쯤 끌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거리로 나섰다. 추운 거리에는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옷 바지
사이로 에일 듯한 냉기가 스치고 들어왔다. 손이 차갑게 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걸었다.

오후가 끝나 가는지 해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지만 여전히 밝은 거리였다.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의 반은


포켓몬을 데리고 있었다. 아마 포켓몬과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도 주머니 속에는 몬스터볼이 있지 않을까?

현실감 없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는 나는 이 공간에 있지만 이 공간 속에 제외된 느낌이 들었다. 날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태어나서부터 포켓몬을 접하고 함께 살아왔겠지. 강아지, 고양이처럼 평생을 함께 하자고 생각했을지
몰라. 하지만 난... 나는 포켓몬이라는 거 인정할 수 없어. 그건 게임프릭사가 개발한 게임이고 데이터고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이라고.

그리고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건 포켓몬스터 적녹 오프닝...테마. 고개를 들어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두리번거렸다. 몇 번이나 제자리에서 돌고서야 그게 내 머리 위임을
알았다. 거리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거기에서 수컷 니드리노와... 팬텀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새하얗게 질려 그 모습을 몇 초 내 눈 안에 담다가,
달음박질쳤다.

아픈 다리가 질질 끌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남들이 미친 여자 보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상관있는 건 바로 하나였다. 하나의 미친 상념이었다. 나,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걸지도 몰라, 라는 미친 상념. 그것도 해킹버전인... 분명 방금 그건 포켓몬스터 적녹의 패러디였으니까.
내가 모를 리가 없어. 나는 조금 전에 알에게 소리쳤던 말이 생각났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여기 있어선
안 될 존재는 나였다. 포켓몬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눈물이 차올라 흩어졌다. 그렇게
도망치는데,

“읏.”

누군가와 부딪혀버렸다. 마구 달려왔던 곳은 학교였다. 내가 다니는 세영 고등학교. 그리고 내가 부딪힌


사람은... 오키드-그린이었다.

.
.
.

오바람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더니 한


여자애가 부딪혀왔다. 전속력으로 뛰었는지 여자애를 붙잡고도 그가 한 두 걸음 물러나야 할 정도로. 오바람은
한눈에 그 애가 연구소에서 봤던 알을 맡아간 여자애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 몰골은 뭔지. 떡져서 산발이 된
머리 하며 잠옷 바지에 패딩 하나 걸친 모습은 마치, 씻지도 않고 자다 뛰어나온 모습이었다.

부딪히자마자 반사적으로 안았던 바람에 제 품에서 놀라 바르작되던 여자애는 갑자기 스프링처럼 떨어져 나왔다.
여자애는 죄송합니다, 하면서 다시금 어디론가 가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애가 나를 보자마자 지었던 표정은,

“너... 그린...?”

세상에 있어선 안 될 것을 본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 아, 너 연구소에서-”


오바람의 말이 끝나기 전에 여자애는 그에게 달려들어 옷에 매달렸다.

“넌... 넌, 뭘 알고 있지.”
“어...?”
“나를, 나를 포켓몬이 없는 곳으로 데려다줘. 제... 발.”

여자애가 버터플 날개짓처럼 파르르 떨었다. 우, 우는 건가, 생각하는 순간 그 몸이 허물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몸을 간신히 잡긴 했지만 오바람은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집으로 옮겨야 하나...”

포켓몬이 없는 곳이 없는걸. 병원을 데려간다고 해도 럭키가 있을 테고 경찰서에 데려가면 가디가... 여자애는


색색 되면서 잠든 것처럼 보였다. 또, 이마가 뜨거웠고. 아무래도 병원에 데려가고 싶지만 마지막 말이 걸려
그러지도 못하겠다. 일단 밖이 차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오바람은 여자애를 들쳐 업고 집으로 향했다. 실소가 나왔다. 도대체 자신이 왜 모르는 여자애를 업고 가는
건지. 분명 연구소에서 알을 가져간 애였던 것 같은데, 혹시 포켓몬을 무서워하는 건가. 포켓몬에게 트라우마가
생겨서 쇼크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애한테 알을
맡겼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오바람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오바람의 자취방은 학교 근방에 있었기에 금방 도착했다. 일단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저는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 댁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는 수준이 낮아 전학을 오게 되었는데, 역시 거기서 다니기엔
멀어서 얻은 자취방이다. 친구놈이랑 같이 살게 됐지만...

것보다 이 여자애는 연구소 직원의 딸이었다. 분명 알을 가져가는 것도 멀리서 봤었고. 그래서 업고 여기까지
왔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경찰서에 전화했을 거다. 나도 연구소에서 지나가면서 본 건데, 그 여자애는 알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을 못 봤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딱 보는 순간 그 눈동자는 아는 사람을
향한 눈동자였다. 표정이... 그래서 그렇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얘한테 알을 준 거야. 분명 자신이 잘 돌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 이 녀석 그때 봤던


거랑 확연히 다르잖아. 그렇게 좋아라 했으면서. 포켓몬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틀 새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건지.

“아. 전화.”

그제서야 오바람은 이 애의 부모님이 얘를 걱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태를 보니까 아팠던 것
같은데, 갑자기 집 밖으로 튀어나온 건가. 아마 자신에게 한 소리는 열에 취해했던 말이었던 건가. 하지만 그
표정은 좀 충격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못 본 걸 본 듯한, 있어선 안 될 걸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아,
전화 걸렸다.

“할아버지. 네. 저 바람인데요. ... 그전에 알 받아 간 여자애 있잖아요? ... 이지은..? 걔를 길에서


만났는데 쓰러져서. ... 네. 지금 자취방이요. ... 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좀 지나면 얘 부모님이 오시겠지. 이름이 이지은이구나. 지금 열은 좀 떨어졌는지


뒤척이고 있었다. 패딩도 안 벗기고 눕혀놨는데 불편하진 않으려나 싶었지만, 곧 알게 뭐야 라는 심보였다. 그냥
새로 전학 갈 학교 구경 갔는데 갑자기 마주쳐서 놀랐다고. 게다가 쓰러지기까지 하니.

“으음..,”
이지은이라는 여자애가 뒤척이자 바람의 눈길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곧 일어날 것 같은데... 얘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일어났으면 했지만, 지... 지금은 아닌데. 그는 괜히 긴장했다.

5화

w. 도여은

일어나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린...!!”

그린이 있었다.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는데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린이 뭔진 모르겠는데, 난 오바람이라고.”

나는 끔뻑끔뻑 오바람이라고 말하는 그린을, 아니 오바람을 바라봤다. 주변을 둘러보니 베이지색 벽지에 파란
커튼 하며 책이 가득 꽂히다 못해 널브러져 있는 책들, 그리고 비행기 모형 등... 어딜 봐도 남자애 방이었다.
생각해보니 나, 포켓몬이 어쩌구 무슨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음... 죄송합니다. 저, 가 봐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순간 눈앞이 휘청했다.

“잠깐만, 너희 부모님 불렀으니까. 그리고 동갑이야. 말 어렵게 할 필요 없다고.”

그도 휘청거리는 내 모습에 놀라서 일어났는지. 다시 나를 침대에 앉히고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나도 놀랐으니
오죽할까. 근데, 나 잠옷차림이잖아...! 분명 패딩을 입고 있지만.

“미, 미안.”

나는 허둥허둥거렸다. 다시 자리에 앉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깐 오바람을 쳐다보니 그도


말을 고르는 성 싶었다. 사실 좀 그렇지. 학교 앞에서 어떤 여자랑 부딪혔는데 잠옷 차림에 패딩을 입고 머리는
빗지도 않고 산발을 해서 무어라 하다가 쓰러졌으니. 나는 무안해서 손으로 머리를 빗다가 문득 생각났다.

“어, 나 어떻게 안 거야?”


“뭐?”
“아니, 부모님한테도 연락했다길래.”
“아... 너 연구소에서 나 봤...잖...? 표정을 보니까 못 본 표정인데, 너야말로 날 어떻게 알아.”

난 당황했다. 연구소에서 봤었나? 오바람을? 분명 오박사님 손자니까 이상할 건 없지만 난 그때 꿈이라고


생각했기도 하고, 아니, 지금은 현실이지만. 어, 지금 현실 맞나. 내 앞에 오바람이 있는 게 이상하잖아.
그리고 완전 그린하고 똑같다고. 딱 내 또래라면 이렇게 생겼을 거야 하는. 아, 그런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완전 의심스러운 상황이잖아. 이거. 난 얘를 못 알아봐야 하는 게 정상인 건데.

“아, 됐다, 됐어. 뭘 그리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건지.”

아, 왠지 빡친다. 싸가지는 그대로인 건가.


“일단 부모님 오실 때 까지 누워있어. 아픈 것 같던데.”
“아, 아니. 괜찮아. 그리고... 으, 고마워.”
“...”
“내가 했던 말, 그거 내가 열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어. 지금 봐도 알겠듯이. 하.. 하하.. 미안...”

나는 부끄러워서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내 고개는 점점 떨구어져 가고. 왜 쟤는 아무 말도 안 하느냐고. 무슨


말이라도 하지. 민망하게도 시계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어색해서 그런가.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아. 내가
패딩 잠바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용히 자책의 땅을 파고 있자 그 녀석도 헛기침을 하면서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그... 저... 그 말말이야.”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 그 녀석을 쳐다봤다. 오바람은 저 침대 모서리를 보고 있었는데, 뭔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마치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나 싶은 표정이랄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 말을 기다렸다.

“그, 전에 봤을 때는 별로 그런 거 없던 것 같던데, 며칠 새 포... 아니, 무슨 일 있었어?”


“...아.”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니 똑바로 쳐다보려고 했으나 눈동자가 너무 흔들려서 다시 감았다 떴다. 일부러
포켓몬이라는 말을 꺼내고 있진 않았지만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 이 녀석은 내가 알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알... 맞아.

“야, 우... 울어?”

나 잠시 잊고 있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뛰쳐나간 건지.

“나, 가봐야겠어. 지금 당장.”

내가 일어서서 가려는 것을 그 녀석이 막아섰다.

“야, 진정해봐. 미안. 내가 이 말을 꺼내서. 어디 가려는 거야. 너희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다고.”


“집에, 집에 가야 돼. 비켜.”
“내가 괜한 말을 꺼냈지... 일단 진정하고 어?”

그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힘으로 다시 앉혔다. 나는 순순히 다시 앉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슥슥 닦았다. 그런데 손을 떼자마자 또 눈물이 그 자리를 타고 내렸다.

“나, 지금 미친 것처럼 보이는 거 아는데. 뭐 좀 물어봐도 돼?”


“뭐...?”
“뭐 좀 물어봐도 되냐고.”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봤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 무슨 음식 좋아해?”
“어? 무슨...”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해줘.”

오바람은 한숨을 쉬더니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다시 한숨을 쉬는데, 일단 날 진정시킬
생각인 건지, 아니면 또 뛰쳐나갈까 봐 불안한 건지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 생각인 건 같았다.

“좋아하는 음식은 딱히 없는데, 있다면 오므라이스.”


“싫어하는 건?”
“물컹물컹한 해산물”
“혈액형은?”
“...B 형”
“좋아했던 여자애 있어?”
“뭐, 그런 것까지... 알겠어.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한 번 있었어. 야 뭐 그런 것까지-”
“가장 슬펐던 일은?”
“야, 뭘 그런 걸 물어보냐, 어? ... 아니 잠깐만.”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그가 말렸다.

“알았어. 음... 할아버지 댁에 처음 갔을 때, 그때가 젤 슬펐어. 더 자세히는 물어보지 말라고.”


“또,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

밖에서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오바람의 표정이 피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보다 더 빨리 내가 문을 열러


뛰어갔다. 문을 여니 엄마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엄마!”
“지은아. 무슨 일-”
“엄마, 빨리 집에 가자. 빨리.”

엄마는 무슨 생각인지 뒤따라온 오바람을 째려봤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요.”


“엄마. 빨리.”

나는 그의 말을 자른 채 엄마를 재촉했다.

“저, 오바람. 오늘은 진짜 미안했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엄마 빨리.”

내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엄마를 재촉하자 엄마는 알았다며 나를 이끌었다. 차를 타고 엄마가 운전하는 동안
나는 울었다. 손에 고개를 박고 울었다. 울음이 났다. 그냥 나는 막연히 깨달은 거다. 나는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살아 숨 쉬는 세상에.

차가 집 근처에 도착하자 나는 엄마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하고는 차에서 급하게 내렸다. 뛰다가 한번 휘청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에 서니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다시 한번 또렷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현관에 신발을 벗고 뛰어가려는데 앞에 모다피가 보였다. 나는 살짝 웃어주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은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이 내가 뛰쳐나간 그대로였다. 협탁 위의 포켓몬 알도...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알에게 다가갔다.

“미안, 미안해. 그런 말,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방은 조용했다.

“나, 그린... 그러니까 여기서는 오바람인 애를 봤어. 걔는 게임 캐릭터인데...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있더라. 살아있더라. 너도... 살아있지...?”

여전히 조용했다. 나는 마치 넘어질 것 같았다.

“나랑 얘기도 나눴어. 걔... 나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물어봤어.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혈액형,
추억, 기억...”

나 지금도 조금 미쳐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중얼중얼 하고 있으니. 저 알은 내 말을 듣고 있는 걸까.


몰라,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말했다.

“걔도 좋아하는 게 있고 싫어하는 게 있고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시간을 살아왔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게임에서


본 남자애가 이 세상에서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또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겪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나는 알에게 다가가며 내 말을 조곤조곤 전했다. 듣고 있으리라 믿고. 아니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 들은


거였으면... 좋겠다.

“게임의 데이터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너희도 살아가는 생명인데, 좋아하고 싫어하고 기쁘고 슬픈
그런 생명인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 알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알은, 차가웠다.

“....아.”

나는 알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워, 차가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식어있어.
나는 그 알을 들어 안았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내가 그렇게 소리 질러서.
너는 이 존재하면 안 되는 거라고 말해버려서.

손끝이 떨렸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라고 몸속에 더 가까이, 가까이 알을 꼭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너도 살아있는데, 있어서는 안 되는 건 난데, 네가 아닌데. 너는 축복받아야 하는 새로운


생명인데... 미안해... 아무리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선 안 됐는데. 아무 말도 못 하는 너에겐
무조건적인 폭력인데...”

뚝뚝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고였다. 무릎을 꿇고 알을 안은 채 계속 혼잣말로 알에게 용서를 빌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제발 살아나.

“....아.”

나는 놀래서 알을 쳐다봤다. 잘못 느낀 게 아니야. 다시 알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손끝으로 닿아있는 몸으로


알이 무언가를 전하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언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 말을 할 수 없는 게 아니구나.”

나는 알을 더 꼬옥 안았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거였어.”

그제야 나, 넘어져 다쳤던 다리가 아파왔다.

1-2. 알을 깨고

6화

w. 도여은

“엄마 나 다녀올게.”
“응, 조심해서 다녀오고.”

부엌에서 엄마의 배웅 소리를 들으며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지갑, 폰, 수첩. 오케이, 챙겼고. 그리고
알도 가방 안에 잘 넣었고. 내가 물건을 체크하는 동안 모다피가 쪼르르 달려와서 배웅해준다.

“모디, 나 갔다 올게.”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모다피도 그 한 쌍의 이파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modamoda!
“응, 알았어.”

그 날로 일주일이 지났다. 그때는 내가 세상이 바뀐 충격에... 일이 있었지만, 그날 이후 좀 받아들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낯설었던 포켓몬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포켓몬 말도 어느 정도는 알아듣게 된 것
같고. 아, 방금은 잘 갔다 오세요, 정도이려나. 아직 복잡한 말은 무리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포켓몬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도 조금 적응이 된 것 같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으스스 떨면서 누가 창문을 열어놓은 거야 투덜대며 창문을 닫는데, 그 너머로
날아가는 구구를 보면서 익숙하게 넘어갈 정도로?

지금은 오후 네시 반. 항상 이때쯤 나는 산책을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역시 이것 때문이지. 나는 옆으로 매는


가방을 툭툭 건드리다 장갑을 낀 손을 가져다 댔다. 느껴지는 울림. 그에 나는 가방을 품에 안았다.

알까기에는 자전... 아니 알을 부화시키려면 걸음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산책이다.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도 같은 게 전보다 울림이 확실해졌다고 해야 하나, 좀 더 건강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사실 좀 궁금한 게 알이 어떻게 부화할 건지이다. 애니처럼 진화하듯이 빛이 나면서 부화하는 건지 아니면


만화책에서처럼 알을 깨고 직접 나오는 건지. 만약 애니 반영이라면 분명 알도 포켓몬 모양이 나타날 텐데
게임처럼 베이지색 바탕에 연두색 땡땡이 무늬이니까 게임 반영이려나. 그런데 게임에선 어떻게 부화하는
거지...? 알이 깨지는 모션이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알까기는 잘 하지 않아서...

차가운 공기에 나는 입김을 훅 불었다. 흰 수증기가 몽글 생기더니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지극히 현실적이야.
나는 아직도 머리 한 구석에는 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꿈이라고.

아니, 나는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거다. 오박사님께 알을 받은 것도, 아픈 와중에 집을 뛰쳐나온 것도, 또


포켓몬스터 적녹의 오프닝을 패러디한 것 같은 영상을 보고, 놀라 뛰어가다 그린, 아니 오바람을 만난 것도 혹시
설마 다, 짜여진 각본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아.

그날, 그러니까 내 생일, 2 월 15 일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다. 그 하루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폰도 새로 샀고, 컴퓨터도 고쳤지만 역시 닌텐도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있었고. 휴대폰과
컴퓨터에 남아있을 내 포켓몬스터 게임, 애니, 만화 관련 자료들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 블로그는, 아니 내 블로그 아이디는 없는 아이디라고, 나타났다.

“나는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걸까?”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말을 나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분명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그래서 그 이야기는 이 알밖에 모른다. 하지만 아마 이 알이 부화하고 나면 다신 말하지 못할 거야. 아마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아니 차라리 이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해한다면 상처받을 테니까.

“그래도 나, 하나 생각하는 게 말이야. 내가 게임 속에 있더라도. 이곳에 있는 동안은 무엇이든 간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게, 살아가려고.”

알에게 나는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야기했다. 알이 약하게 진동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대충


정립됐는데 다른 문제가 또 있다.

나 돌아갈 수는 있을까, 하는 문제. 원래의 세계, 포켓몬이 없고 포켓몬스터 게임이 있는 세계로. 나는


오랫동안 이 주제 또한 생각을 해 봤는데, 아마 이 게임의 엔딩이 오르면 돌아가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을 할 수
있었다.

엔딩이라면 두 가지의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챔피언이 된다. 게임으로는 여러 번 딴 챔피언 칭호이지만
지금 이 현실로는 내가 챔피언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될 것이리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금 가능성이
있는 결말인데, 이 게임의 제목, 포켓몬스터 하이스쿨, 그러니까 졸업을 하면 혹시 엔딩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아, 모르겠다. 이제 돌아가자, 우리.”

나는 알에게 혼잣말을 했다. 어느새 해가 늬웃늬웃 지고 있었다. 가방을 살짝 열어 알을 보니 노을빛을 받아


알이 주황빛으로 보였다. 오박사님이 주신 알. 맡았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 알 도대체 어떤
알인지 알 수 없어 계속 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떤 알인지 알아야 부화 걸음수라도 대략 알 텐데.
오박사님에게 받을 때는 경황이 없기도 했고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을 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도
못해서 못 물어봤고, 아빠한테 물어보려고 해도 주말에만 집에 오는 아빠는 전화로는 계속 모르쇠에 집에 가서
알려주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마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 모양.

“넌 언제 태어나는 거야.”

분명 삼천 걸음에서 만 걸음 사이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 아니야, 많아도 팔천 걸음이었던가. 아무리 그래도


오천 걸음 이상은-

“...어라?”

알의 상태가 이상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으어어. 깨질 것 같은데, 나올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주변을 둘러봐도 도움을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으어... 아니야, 난생은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다고.
오리를 생각해봐. 진정해라 이지은.

허둥지둥거리다가 나는 일단 멈춰 서서 알이 부화하려는 모습을 관찰했다. 알 안쪽에서 자꾸 나가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밖에서 깨 주는 걸 도와줘야 하나, 줄탁동시...? 내가 어찌할까 고민하는 새에 알껍데기에 금이 가더니
툭하고 껍데기 조각이 가방 안으로 떨어졌다.

해는 지고 있고 노을빛이 가득한 공원 한가운데서 알이 깨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뭔가 신기한


기분이었다. 알 속의 무언가는 알을 벗어나기 위해 계속 알에 부딪히고 있었다. 방해할 수 없는 의식을 혼자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meeeeeeeee...!
“메...?”

새가 아니라 양이었다!

“이건 메리프...?!”

나는 가방 안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솜뭉치같이 복슬복슬한 몸집. 맨들맨들해보이는 뿔, 아니 귀인가? 그리고


단춧구멍 같은 눈동자 그리고 조그만 입으로

meeeee~

라고 말하는데 녹는 느낌이...! 나는 가방째로 메리프를 안았다. 아, 메리프라니. 아빠 감사해요! 내가


메리프 좋아라 하는 건 어찌 알고...! 대체로 전기 포켓몬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메리프는 사랑이라고. 게임
내에서도 흔들흔들하는 꼬리 하며, 도트로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빠져드는 매력. 그리고 스토리를 이끄는 그 힘!
그 저력! 스타팅 포켓몬 저리 가라 하는 3 단 진화! 얼마나 멋져. 내 골드 스타팅은 너였어! 메리프!!!

meeeee!
“아, 미안. 숨 막혔어?”

너무 흥분해서 그만, 꽉 안아 버렸나 보다.

“일단 집에 갈까?”
mee~

나는 그 울음소리에 헤롱헤롱 했다. 나는 집으로 향했다. 향하며 걷는 동안 내 신경은 계속 메리프에게


향해있었다. 몸집은 갓 알에서 나와서 그런가? 알 크기와 비슷했다. 원래 이 크기보다 두 배는 더 커야 하는데,
역시 어린 포켓몬이라서 그런가? 점점 자라는 모양이다! 아, 한 크기로 보편화되어있는 게임하고는 다르구나.
리얼 포켓몬이라는 건!

“아, 이름은 뭐라고 하지?”


me?
“너를 계속 메리프라고 부를 순 없잖아.”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많은 것 같지만. 포켓몬을 인간처럼 한 종류로 분류하는 이곳에서 포켓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꼭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았다. 그건 게임하고 비슷하기도 하고. 아, NPC 들한테
포켓몬을 교환하면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경우가 많으니 꼭 그런 건 아닌가? 예를 들면 덜덜이 같은...? 쨌든
포켓몬 종류가 워낙 많으니 어지간하면 종으로 불러도 상관없지만. 이건 애정의 문제라고!

“일단 여자아이구나. 너.”

가방에 가득 차있는 메리프를 보며 나는 말했다. 이건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부터 신기했는데, 자동적으로 얘는


암컷이구나, 수컷이구나 라는 느낌이 확연하게 나는 것이었다. 뭔가 가끔은 알기 힘든 애들도 있던 것 같지만
대부분 사람을 보면 여자, 남자가 확실하게 보이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있다.

쨌든 나는 고민했다. 항상 메리프를 잡으면 붙이는 이름이 있는데, 마침 여자 아이기도 하고. 마치 고양이를


보면 나비, 강아지를 보면 멍멍이 같은. 음...

“메리...라고 해도 괜찮아? 난 메리라는 이름이 좋은데.”


mee?
“...아.”

나는 메리프를 빤히 보다가 달아올랐던 피가 갑작스럽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나 너무 들떠버렸잖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포켓몬이 태어나버려서... 그래 버려서... 일단, 종으로 불러도 상관없으니까.

“음... 일단 메리프라고 부를게. 이름은... 차차 나중에.”


meee?

아무래도 아직도 갸웃갸웃하는 모양새가 아직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든 생각에 이름은 지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생명이 태어났다는 건 축하할 일이고 기쁜
일이었다.

“빨리 집에 갈까?”

나는 집을 향했고 걸을수록 발걸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7화

w. 도여은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내가 문을 열면서 엄마, 알에서 메리프가 깨어났어! 소리치는데 거실 소파에 아빠와
가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늘 토요일이었지?

“아빠!”

나는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메리프를 가방 채로 들어 보이면서 자랑했다. 알이 깨어났어. 메리프야! 내가


메리프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아빠 사랑해!!!

“그렇게 좋아?”

아빠는 웃으면서 물었다. 나는 메리프를 소파에 내려놓고 “응!”하고 대답했다. 내가 가방에서 메리프를
꺼내려고 하는데 아빠가 주의를 줬다.
“메리프는 정전기가 잘 일어나니까. 조심하고.”

아, 메리프 특성이 정전기였지? 포켓파를레에서도 조고만 얼굴이랑 귀, 발 빼고는 만질 곳이 없었던 기억이.


털 만지면 찌릿찌릿했다고. 현실에서도 그런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털로 손을 뻗었다.

“앗, 따가.”

나는 손에서 튀는 전기 때문에 놀라 손을 떼었다. 아, 정전기... 메리프가 미안한 듯 메에에 울었다. 왜


눈앞에 있는데 만지질 못하니... 나는 가방을 눕혀 스스로 가방 밖으로 나오게 했다.

“아직 어려서 조절을 잘 못하는 거야.”

아빠가 꼼질거리며 나오는 메리프를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아빠의 가디가 킁킁거리며 메리프를 살폈다.
그리고 저 쪽에서 엄마와 모다피도 오고 있었다. 아빠는 메리프에 털에 박혀있는 알껍데기를 떼어내고 있고.

“어, 그런데 아빠는 왜 멀쩡한 건데!”


“음... 이게 내성이라는 거겠지?”

나는 벙쪄버렸다. 전기 충격에 내성이 생길 수 있는 건가요... 아빠는 땅 타입이라던가...?

“이런 얘기는 잘 모르려나. 교과목에서도 잘 안 가르쳐주는 이야기인데.”

나는 귀를 쫑긋하며 아빠의 말을 들었다.

“일단 포켓몬이 쓰는 전기는 일반 전기랑 달라. 무슨 기운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예를 들면 노말 타입인


몸통박치기는 고스트 타입에 통하지 않잖아? 그런데 악 타입인 물기는 고스트 타입에 효과가 좋고.”
“아...!”
“그런 것처럼 일반 전기가 아닌 포켓몬이 가진 전기는 정전기처럼 아주 미약한 경우라면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길
수 있는 거야. 아빠는 연구소에서 많은 포켓몬들을 만났기도 하고.”
“혹시 아빠 연구소에서 인체 실험이라던가...”
“하하. 그런 건 절대 없단다.”
“너희 아빠가 이상한 편이지.”

가까이 온 엄마가 끼어들었다.

“너희 아빠가 이상한 거야. 어떤 사람이 포켓몬의 전기라고 내성을 가지니? 나는 그런 것 보도 듣도 못하다가
너희 아빠 보고 알았어.”
“에헤이. 당신도 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엄청 이상한 사람 같잖아. 우리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다고.”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그렇지 모디?”
modamoda!

나는 웃음이 났다.

“쨌든 기인가 뭔가 라는 건 나도 메리프를 만질 수 있는 거네?”


“아직 이름은 안 붙인 거야?”
“으응. 아직 좋은 이름이 안 떠올라서.”

내가 어물거리자 아빠는 웃으면서 천천히 지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곤 알껍데기를 다 떼어냈는지 메리프를
나에게 넘겼다.
“자, 메리프, 엄마한테로 가야지.”

가뜩이나 조그만 양인 메리프는 아빠 손안에 있으니 더 작아 보였다. 나는 조심조심 메리프를 받았다.

“천천히 받으면 괜찮아. 마찰이 일어나지 않으면 좀 덜한 편이니까.”

내 손안에 들어와 무릎에 착지한 메리프는 복슬복슬하고 따끈따끈했다. 나는 아기를 처음 안는 사람처럼 좀


어색했다.

“원래 어린 포켓몬은 이렇게 작은 건가?”

내 다리 위를 겨우 채우는 메리프의 몸집은 정말 작아서 놀랐다. 가방에 들어있을 땐 몰랐는데 너 엄청


조그맣구나.

“방금 태어났으니까 그렇지. 금방 쑥쑥 클 거라고. 너도 어렸을 때 엄청 조그맸어.”


“그럼. 얼마나 작았다고. 그때는 진짜 귀여웠었는데.”

엄마가 아빠의 말을 받았다.

“그럼 지금은 귀엽지 않다는 거지?”

내가 툴툴거리자 엄마와 아빠는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니까 메리프도 즐거운 목소리로 메에 하고 울었다. 말은


잘 못 알아들어도 이런 분위기가 좋은 거구나. 그렇지? 나도 좋아.

“그럼 메리프도 태어났으니까 연구원에도 들려야지? 오박사님한테 보여드려야지.”


“...어?”
“아참, 몬스터볼에 먼저 넣어야지.”
“아니, 그것보다 아빠. 나 오박사님 보러 간다고? 오박사님 바쁘시잖아. 내가 방해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딸. 오박사님이랑 아빠 엄청 친하다고? 동네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밑에서 일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그리고 오박사님도 궁금해하시니까.”
“으음...”

그래도 내가 가기에 좀 민망한 건 오박사님에게 폐 끼치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한몫 하지만 역시, 그 녀석


때문이다. 오바람. 진짜 애니판 이름이라 적응 안 되지만. 전에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말 하나
못 꺼내고 있다. 아무래도 그 일은 정말 정신을 놓았던 것이고, 이성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막나갔다고 해야
하나. 무튼 차마 연락을 못하겠어. 며칠 동안 자다가 이불을 뻥뻥 찼다. 혹시 갔다가 만나면 어떡해...

“일단 딸, 몬스터볼에 넣으라고.”

엄마의 재촉에 나는 메리프를 조심히 들어 옆에 내려놓고 방으로 가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발을


옮기려는데.

meeee~

내가 걸음을 옮기려니까 저 쪼꼬만 한 게 소파에서 뛰어내리더니 날 졸졸 쫓아온다. 마치 같이 가 말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저 눈빛 하며 위로 세워서 흔드는 꼬리 하며 자그마한 몸짓 하며... 날
따라오려는 몸짓에 조금 감동 먹어 버렸다. 그래서 급하게 손을 내밀었더니

“으아앗. 따가.”
파바박 튀는 정전기... 왜 너는 특성이 정전기인 거니...

.
.
.

내 방까지 졸졸 따라온 메리프를 보며 난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 아빠 앞에서야 엄청 기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나는 좀 두려웠던 걸지도. 그래서 만 보도되지 않는 걸음을 일주일에 나눠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포켓몬은 처음 본 순간 까만 눈동자에 나를, 나만을 가득히 담았고. 나도 그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아직 그걸로 충분한 걸지도 몰라.

하지만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고, 나는 이 아이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이 방에서
알이었던 이 아이에게 했던 일을 이 아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메리프는 방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메리프. 이리 와 봐.”

메리프는 짧은 다리로 쫑쫑 걸으면서 내 발 앞에 다다랐다. 나는 침대에 앉아 메리를 조심히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힌 뒤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메리프를 바라보니 메리프도 나를 바라봤다. 그 안에 적의나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선의라던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게 순수라는 걸까.

나는 일단 포기했다. 아직 알 수 없는 거야. 지금 이 아이가 무엇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뻗어 협탁 서랍에서 몬스터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메리프에게 보여주었다.

“메리프. 이게 몬스터볼이라는 거야. 너의 또 다른 집이라고나 할까. 잠시 밖에 있을 수 없을 때 들어가는


곳이고. 전송되는 데이터로 네가 내 포켓몬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야.”
mee?

메리프가 자신의 꼬리를 나에게 보이며 갸웃했다. 꼬리 끝에 달린 반짝이는 주황 구슬.

“푸흐흐. 아니. 네 꼬리에 붙은 구슬하고도 비슷한, 색깔이긴 한데. 흐하.”

나는 웃겨서 몸을 숙여 메리프를 안고 큭큭 웃다가 빵 터져서 더 크게 웃고 말았다. 방금까지 하고 있던 심각한


생각은 모두 흩어져버렸다. 메리프는 심통난 듯 메에에 거렸지만. 아, 너무 귀여워.

“어디까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네. 쨌든 네가 내 포켓몬이라는 증표가 될 거야. 한 번 등록하면 부서지지 않는


한 바꿀 수 없고.”

음... 갸웃갸웃하는 모습이 아마 잘 모르겠다는 것 같아. 아무래도 자꾸 이야기하면 많이 알아들으려나?

“일단 들어가 볼래?”


mee?

나는 조심스럽게 몬스터볼을 메리프에게 가져다 대었다. 메리프의 코에 빈 몬스터볼의 버튼이 닿자 붉은빛이


메리프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
남은 몬스터볼을 잡자 조금 묵직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알과 같은 상태인 것 같아. 볼을 축소도
해보고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애니판 설정을 따르는 건가, 이건... 만화처럼 안에 포켓몬이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이 안에는 메리프가 들어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는 몬스터볼의 버튼을 눌렀다. 그랬더니 메리프가 다시 내 무릎 위로 돌아왔다.

“뭐야, 이거. 엄청 하이테크잖아.”


meee~

나는 뭔가 놀라서 어버버 한 느낌이었고 메리프는 몬스터볼 안에 들어갔다 온 것이 신기했던지 방방거렸다. 뭔가


이 포켓몬 월드, 아니, 게임하면서도 많이 느꼈는데 이거 엄청, 엄청나게 과학이 발달한 느낌이라고. 그러니까,
과학의 힘이란 대단해...?

8화

w. 도여은

“지은아, 몬스터볼로 확인했으면 빨리 밥 먹으러 와.”


“응. 알겠어!”

엄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렸다. 나는 몬스터볼을 침대에 던져두고 방을 나갔다. 메리프는 종종 쫓아오고.
부엌에 엄마와 아빠가 식탁에 앉아있고 모다피와 가디는 식탁 옆에서 포켓몬 푸드를 앞에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메리프는 가디가 먹는 푸드 먹으면 되겠지?”


“에, 오늘 태어났는데 바로 푸드 먹어도 되는 거야?”
“난생이잖아?”

엄마가 말했다. 아... 난생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소형 포켓몬이니까 가디가 먹는 푸드 먹여도
되겠다고 말했다. 음... 소형 포켓몬인가? 나는 메리프 정도면 중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애기라서 그런
건가. 아니 가디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닌데... 저 크기면 일반 대형 개 크기 아닌가... 하지만 나는
포켓몬들의 사이즈를 대략적으로 생각하고선 마음을 바꿨다. 암... 잠만보에 비하면 이건 정말 귀여운 사이즈지
일지도.

내가 애니메이션에서 본 기억의 가디보다는, 그리고 이곳에 인터넷으로 뒤져본 가디들의 사진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빠의 가디가 평균 사이즈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그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겨서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왜 가디 진화 안 시켜?”
“음?”

나는 식탁에 앉으면서 물었다.

“아, 완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걸? 아파트에는 대형 포켓몬을 풀어두기 힘드니까. 윈디가 되면 집안에 못 두지.
그리고 이제 아빠는 배틀할 필요도 없으니까.”
“너희 아빠 포켓몬은 그래서 다 연구소에 있는 집에 있잖아.”

엄마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아빠가 이어 대답했다.


“그 애들은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키운 애들이니까.”
“아빠도 트레이너였어?”

나는 아빠가 어떤 다른 포켓몬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는 건 이상할 것처럼 보여서 모르는 척 아빠가
트레이너였음을 물었다.

“물론이지. 연구원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기본적인 포켓몬을 알아야 하니까. 그때도 가산점제가


있었기도 했고. 이 아빠는 배지를 여섯 개나 땄었지!”
“너희 아빠는 연구원 치고는 과한 편이었어. 그래도 그런 모습에 반했지만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에 있는 집에 가면 만날 수 있겠구나. 아빠의 포켓몬. 내가 자리에 앉으니까


모다피와 가디가 푸드를 먹기 시작하고 엄마가 그릇 하나를 꺼내 가디의 푸드를 담아 메리프에게 건넸다.
모다피는 잎으로 집어먹는데 가디는 코를 박고 먹었다. 손과 발의 차이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메리프를 보니
엄마가 준 푸드를 갸웃하며 보더니 한 입 맛을 봤다. 그러더니 맛있는지 메에 하고 울었다.

“메리프. 먹을 만 해?”
meeee~

메리프가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연신 흔들며 푸드를 먹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이라서 그런 건가? 그런
것보다 몸집이 작은 것 말고는 갓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게... 역시 난생이라서 그런가?

메리프가 열심히 밥을 먹는 것을 보고서야 나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고기가 없이 풀밭.


부모님에게 물어보기는 민망해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이 세계는 고기가 귀한 듯했다. 일단 야생 포켓몬은
공격성이 강한 편이고 포켓몬으로 인해 동물들이 줄어서 인간이 보호 관리하고 있는데, 가축을 기른다고 하더라도
도시에 가까이에서 키울 순 없고 교외로 나가면 야생 포켓몬이 많으니까 관리하기도 힘든 듯. 옛날 옛적에는
포켓몬을 먹기도 했었다는데 지금은 거의 금기시된 부분인 것 같다. 쨌든 그래서 고기 값이 비싼 것 같았다.

“아, 지은아. 밥 다 먹으면 메리프한테 화장실도 가르쳐주고.”


“응. 알았어. 그런데 아직 애기인데 잘 이해할까?”
“그럼. 당연하지. 포켓몬은 똑똑하다고.”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애니긴 하지만 포켓몬이 말도 할 줄 아는데 뭐... 화장실 하나 못


가리겠어? 나는 대충 수긍했다.

.
.
.

나는 밥을 다 먹고 개수대에 그릇을 담갔다. 메리프를 보니 이미 다 먹은 듯 가디와 모다피와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풀 타입인 모다피가 불꽃 타입인 가디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언뜻 보면
모다피가 더 막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가디의 특성은 위협 아니면 타오르는 불꽃일 텐데, 메리프가 가디 앞에서
쪼는 기색이 없으니까 타오르는 불꽃이려나? 아니야. 배틀 중에만 발동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 역시 아무래도 아빠보다 엄마의 서열이 높으니까 포켓몬도 그것 따라가는 걸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로 얘기하고 있는 녀석들 중에 메리프를 불렀다.
“메리프, 방해해서 미안한데 따라올래?”
meee~
“아, 메리프가 말을 잘 못 알아들을 테니까 완도 데려가. 따라가 완.”
wangwang

가디가 대답하듯 짖더니 내 뒤를 쫓아왔다. 사실 나도 포켓몬이 화장실을 쓰는 걸 보고 진짜 놀랬더란다. 아니


생물이니까 배변활동을 하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사실 그런 게 어디서 표현되는 것도 아니고. 야생에서는
어디선가 해결한다고 해도 당연히 여기는 아파트니까 그런 게 없을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미묘한 느낌?

여기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나.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모다피가 변기 위에 앉아있어서 정말 놀랬다.


모다피가 화내서 바로 문을 닫긴 했지만...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메리프와 눈을 맞췄다.

“메리프. 여기가 화장실이라는 곳인데. 음... 볼일을 보거나 씻는 곳이랄까?”

메리프가 갸웃거리자 옆에서 가디가 짧게 설명을 했다. 메리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야 그건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잖아.

“쨌든 여기서 음... 그런 거야. 어... 더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완아?”

완이 내가 답답했는지 먼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왕왕 거리더니 변기 위로 폴짝 올라가더니 자세를 잡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음... 역시 일반 강아지는 할 수 없는 것을 포켓몬은 할 수 있는구나 라는 신기한 느낌을 나는
받았고 메리프는 또 나와 다른 생각인 건지 가디에게 다가갔다.

meeeee~

메리프가 변기에 오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직 어려서 점프가 안 되는지 낑낑거렸다. 가디가 변기에서
내려오더니 저기서 조그마한 세숫대야를 물고 오더니 받침대를 만들어줬다. 메리는 거기에 올라가려는데-

“안 돼!”

내가 말렸다. 어쩔 수 없이 꼬리를 잡았는데 메리프가 갸웃하면서 돌아보았다. 아니, 그래도 세숫대야 위에


올라가면 부서져. 나는 차마 말은 못 한 채 어디 방법 없나 화장실을 둘러봤다. 아, 저 구석에 빨래할 때 쓰는
목욕의자가 있기에 들어서 변기 옆에 놔주었다.

아, 정말 현실 세계인 거구나.

.
.
.

화장실을 대충 가르쳐주고는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메리프가 쫑쫑 거리며 따라왔다. 이거 뭔가 신기한


느낌이다. 막 부화한 병아리가 뒤를 졸졸 쫓아오는 느낌이랄까?

나는 의자에 앉아 공부할 것들을 펼쳤다. 일단 오전에는 영어, 오후에는 국어를 좀 봤으니까. 이제 수학 좀


하다가 과탐을 미리... 아, 이 세계로 넘어온 후 다른 점이 생겼는데, 이게 내 참고서에도 영향을 끼쳤는지
내용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특히 생물의 경우 포켓몬에 관한 예시 같은 게 들어갔고. 아, 그래도 포켓몬에 관한
메커니즘 자체는 아직 밝혀진 게 많이 없는 것 같더라. 진화에 대한 메커니즘 같은 것도 아직 못 푼 것 같고.
일단 그거야 대학 가서 자세히 배우겠지만...

그 외에는 체육이 좀 더 비중이 커져서 배틀에 대해서도 체육시간에 배우는 것 같았다. 1 학년 체육 책을 보니


정말 포켓몬 하는 사람들은 대충 다 알고 있는 상성이라던가 대략적인 개체치라던가 유전기 같은 것들. 물론
숫자로 상세화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배틀학이었던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수능은 없어지진 않았고 별 다른
점도 없는 것 같았다는 점? 수능에 체육이 추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배지가 가산점으로 들어가는
학과가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러니까 배틀을 점수화하는 것이 배지인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이거
실전파인건가... 난 이것저것 관련된 걸 알아봤는데, 사실 왜 이런 것들을 알아봤냐면...

난 고등학생이니까.

한숨이 푹 나왔다. 마치 내가 1 학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갑자기 수능 출제 경향이 바뀐 것 같은 느낌.


내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대책을 세운다는 의미로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돌아가는 걸 포기한 건 아니야.

나는 올려달라고 낑낑 거리는 메리프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혔다. 내가 돌아가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메리프의 턱을 손으로 살살 쓸어줬다. 뺨을 쓸어주기도 하고. 메리는 기분 좋은지 눈을 감고 내 손을
느꼈다. 나는 너한테 이제 아무 말도 못 하겠지.

“아우. 일단 공부하자.”

나는 메리프를 무릎 위에 올려 둔 채 책을 펼쳤다.

9화

w. 도여은

다음 날 나는 아빠를 따라 아침 일찍 차를 탔다. 추우니까 기모가 들어간 청바지에 패딩까지 챙겨 입고. 아빠는


주말은 쉬지만 밀린 일거리가 있다며 초과 근무하러 가는 길이고. 나는 연구소 가고 싶진 않지만 메리프가
태어났기도 했고 감사한 마음에 인사를 드려야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어제 자기 전에 오바람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혼자 빌기도 열심히 빌었지만...!

“꼭 만나기 싫으면 만나게 되더라.”

내가 작게 혼잣말하는 걸 들었는지 아빠가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 아빠도 내가


전에 오바람네 자취방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면 놀랄 거야. 우리 부모님은 오바람이 날 도와줬다고 생각해서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아니, 날 안 도와준 건 아니지만... 아. 부끄럽다. 숨고 싶어.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너뿐이다. 메리프...!

메리프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꼬리는 의자 밑으로 반쯤 떨어질랑말랑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차멀미를 하는 듯 조금 괴로워하는 모습. 이걸로 포켓몬도 차멀미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 배멀미도 하려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반면에 가디는 조수석에 떡하니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끔 신기한 걸
보는 듯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아빠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아빠를 불렀다.

“아빠, 나 먼저 집 안 가고 아빠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


“응? 왜?”
“아빠 포켓몬들 좀 보고 싶어서. 좀 오래되기도 했고.”
“아아. 그럼. 당연하지.”
“음... 그럼 아빠, 그럼 나 야생 포켓몬 구경도 해도 돼?”
“음...? 교외는 조금 위험한데?”

아빠가 조금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듯 나를 봤지만 나는 당당하게 메리프가 있잖아. 라고 외쳤다. 그에 아빠는


더 얼굴이 어두워졌다.

“메리프가 무슨 기술을 쓸 수 있는지 알기나 하고?”


“아...”

나는 말을 못 하고 메리프를 내려다봤다. 너 무슨 기술 쓸 줄 알아? 물어봤자 무엇하랴. 메리프는 고개만


갸웃갸웃했다.

“음... 깊이는 안 들어갈게.”

내 말에 아빠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완도 데려가.”


“완이 있으면 나야 든든하지!”
“빌려줘도 말은 잘 안 듣겠지만... 음... 없는 것 보다야 낫겠지? 내가 말 잘해놓을 테니까 야생 포켓몬이
공격하는 건 잘 막아줄 거야.”

나는 신나서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빠에게 놀러 갈 허락은 받았고 이제 나도 풀숲에 들어갈 수 있어!


라는 생각에 조금 들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좀 무섭기도 하고. 내가 이것저것 생각하던 사이, 그렇게 연구소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연구소 아저씨들은 전에 왔을 때보다 적었지만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물론 나도 꾸벅


인사하며 예의 바르게 굴었고. 오박사님도 만나서 메리프를 보여드리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셨다. 사실
칭찬 들을 건 없었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가득이었다. 오박사님의 개인
연구실을 나가자마자 나는 급히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 이제 아빠 집에 가있어도 되지?”

사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오바람을 만날 것만 같아서. 아니, 별 의미는 없고 엄청나게 얼굴 보기 껄끄러운


상대라고 생각한다. 하하. 쨌든 아빠는 걱정되는지 연구소 밖까지 마중해 주었다.

“너무 돌아다니진 말고. 돌아갈 때 아빠 차 타고 가자.”


“응! 알겠어. 걱정하지 마요.”

아빠는 걱정되는지 나와 내 품에 안겨있는 메리프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완, 네가 가서 위험하지 않게 도와줘.”


wang! wang!

가디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짖었다. 레벨이 몇인지는 모르지만, 아빠가 맡길 정도면 꽤 강하겠지? 이 근방에
조금만 들어가는 거면 포켓몬 레벨도 많이 낮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빠 집에 포켓몬들 풀어놨으니까. 오랜만이라 다들 커진 널 보면서 좀 신기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아빠 집에서 방학을 보낸 게 중 3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1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빠 눈엔 내가 많이 자란 것으로 보이는 걸까.

“쨌든 나 갈게. 좀 있다 봐요!”

나는 아빠한테 손을 흔들고 집으로 향했다. 연구소가 커져서 놀랐지만 그래도 마을은 그대로였다. 과수원이
많고 비닐하우스도 있고. 연구원 분들이 사시는 집들도 꽤 많아서 그렇게 교외 시골 느낌은 잘 안 나기도 한다.
연구소에서 10 분 정도 걷고 나면 집이 나오는데, 다행히 도착한 집은 마당이 넓은 주택 집으로 내가 알던 집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다꼬리가 대문에 기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da...kko...?

다꼬리가 나를 보고 갸웃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의 나는 다꼬리와 어떤 사이었을까? 분명 포켓몬 좋아하니까


진짜 많이 놀기도 놀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1 년이라는 못 만난 기간이 있으니까 어색해도 좀 이해해줄 거야...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가가니까... 다꼬리 키가 나만한데...?! 잠깐만 이 현실감 어쩔 거야. 그래도,
다꼬리 진짜 귀엽다.

dakkodakko!

다꼬리가 다른 포켓몬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일단 나를 알아본 건지 다꼬리는 웃으며 대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여는 게 심히 자연스러운 게, 아빠가 일하고 돌아오면 항상 문을 열어주는 건가...?

그렇게 마당으로 발을 디뎠는데 저 멀리서 보이는 육중한 몸이 보였다. 실루엣은 대형 포켓몬인데...

magiii
“마기라스...?! 그리고 그 옆에는...!”
crooo

나는 말을 잃었다. 저거 장크로다일이잖아. 아빠 스타팅 포켓몬 들고 여행 간 거였어...? 진짜 대박이다.


아빠 배지 여섯 개라더니. 장크로다일, 마기라스, 다꼬리, 가디. 이 애들과 같이 땄구나. 마기라스와
장크로다일의 포스를 보니 내 키만 한 다꼬리와 허벅지까지 오는 가디가 상대적으로 정말 작아 보였다.

“완아 너, 소형 포켓몬 맞구나.”

가디가 왕왕 울었다. 나는 커다란 대형 포켓몬인 그 둘에게 다가갔다. 엄청 커...! 내 키보다 더 크잖아...!

cro?

장크로다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왠지 나에게 다가오는데... 야, 너 좀 무섭게 생겼다. 반면에 마기라스는 내


얼굴 봤으니 됐다는 듯 무관심하게 돌려 뒷마당으로 가버렸다.

cro? cro?

장크로다일은 나에게 얼굴을 들이대면서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하는 표정이랄까? 어... 나 들키는 건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안녕. 오, 오랜만이네.”

내가 들어도 어색한 말이었다. 하긴 이 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봐왔겠지? 내가 어색하게 굴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나는 용기를 내서 손을 들었다. 나보다 더 키가 큰 포켓몬이라 그런가, 특유의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고 장크로다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숙였던 머리에
내 손이 닿았다.

쓰다듬어주니 장크로다일은 크앙크앙거리며 기분 좋아했다. 음...? 마치 리아코 같은 모양새인데...? 이


아이도 리아코처럼 작았을 때가 있었을 거야. 장크로다일의 리아코 시절을 생각하니 왠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뺨도 만지고 머리에 깃? 같이 생긴 것도 만지고 울끈불끈한 팔도 만져보고.

crooo~

그랬더니 얘 사교성이 좋은 성격인 건지 앵겨붙는데, 와 얘도 엄청 귀엽잖아? 크기로 포켓몬을 판단하지 말라는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장크로다일하고 부비거리고 있자 옆에서 메에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응?”

어, 메리프가 털이 두 배가 됐어. 화, 화났나?

mee!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하룻메리프 장크로다일 무서운 줄 모르는 거야? 메리프가 달려들 태세를
하자 장크로다일이 메리프를 보며 겁나는 얼굴을 시전 했다. 갑자기 인상을 쓰는데 옆에 있던 내가 쫄아서
스피드가 쭈르륵.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만큼 엄청난 박력이었다.

그런데도 메리프는 물러설 생각 없이 장크로다일을 향해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메리프...!”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리프...”

아, 가슴 아파. 메리프, 넌 방금 태어난 레벨 1 이고 이분은 진화한 걸로 봐서 레벨 30 은 그냥 드신 분이라고.


그러고 보니 나보다 더 나이 많으신 분인걸.

메리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하지만 장크로다일께서는 아무런 대미지도 받지 않으신
듯. 어디 모기가 무나 하는 정도일 거야.

“메리프, 그만해. 돌아와.”

내가 안쓰러운 마음으로 부르니 메리프가 나를 돌아봤다. 으어 눈물이 그렁그렁해. 결국 메리프는 메에에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에구구. 이리 와.”

내가 맨바닥에 그냥 앉아서 메리프를 부르자 메리프가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와 안겼다. 다행히 정전기 특성은
발생한 지 않은 듯 멀쩡한 장크로다일은 애가 울어서 당황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을 했겠니.

“메리프. 에구구. 내가 장크로다일만 예뻐해서 화났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meeee meeee

“그런데 장크로다일이 아무렇지도 않아서 속상하구나.”

meeeeee

얘 우는 모습도 귀여운 건 내가 콩깍지 씌워져 있어서 인가. 하는 짓이 너무 애기 같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물론 실질적으로 애기가 맞지만. 이게 바로 엄마 미소일지도.

“응응. 뚝. 내가 잘못했어. 우리 메리프가 젤 귀여워.”

좋은 소리는 알아듣는지 정말? 이라며 올려다보며 되물어 묻는 모습이 귀여워서 꼭 안았다.

“그럼. 그럼. 우리 메리프가 젤 이쁘고 사랑스럽지.”

jang~ jang~

장크로다일도 메리프의 칭찬을 해주었다. 메리프도 장크로다일의 말이 싫지는 않은지. 팩 토라지면서도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래도 메리프. 장크로다일한테 무슨 행동이야. 너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세다구. 빨리 사과하렴.”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메리를 돌려 앉혀서 장크로다일을 보게 했다. 메리프도 조금 민망한 듯 금세 고개를


숙였다.

meeeee
cro cro jangcro~

번역하자면 뭘 그런 것 가지고 라는 말인 듯. 장크로다일은 좀 멋쩍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될


쯤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빠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응, 아빠.”
-집에는 잘 들어갔고?
“응응. 집에 포켓몬들 하고도 인사했어.”

옆에서 다꼬리가 다가와 다꼬다꼬 울었다.

-잘 왔네. 무슨 일은 없었고?
“음... 메리프가 내가 장크로다일 너무 예뻐해서 심통 났는지 싸움 걸었던 것만 빼면?”
-쟝한테 싸움을? 별일 없었고? 메리프는 괜찮아?

역시 아버지. 장크로다일은 걱정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나저나 이름이 쟝이었구나. 나는 금세 그 이름을


써먹었다.

“응응. 쟝이 애기라서 봐준 것 같아. 메리프 혼자 지쳐서 울더라구.”


-역시 어린 포켓몬은 귀엽네.
“아빠는 스타팅 포켓몬 받아서 키운 거야?”
-그럼. 아빠는 포켓몬 마스터가 꿈이었단다. 챔피언 재패를 위해서 스타팅을 신청을 했지! 결국 네 엄마를
만나서 연구직으로 전향했지만.
“아빠 마기라스 엄청 멋있어 보였어.”
-우리 철이 말이니. 철이가 강하긴 하지.

아빠의 뿌듯함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그나저나 마기라스 이름이 철인 건가. 조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쨌든 점심 먹을 때 애들 밥 좀 챙겨주렴. 푸드는 부엌에 있으니까. 반찬은 냉장고에 있는 거 꺼내먹고.


“응. 알았어.”
-나갈 거면 해 지기 전에 빨리 갔다 오고.
“응응. 걱정하지 말어. 완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아, 참. 쟝한테 덤비다니 메리프도 파이터 기질이 넘치는 것 아닌가 몰라.

아빠가 호탕하게 웃으셨다.

-쟝이 좀 무섭게 생겨서 공격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응.. 아빠. 박력 넘치더라고. 특성이 위협인 줄 알았어.

“응응. 그러게. 물 타입이라서 그런가?”

내가 능청을 떨자 아빠가 크게 웃으셨다.

-전기도 잘 못 다루면서 메리프, 고 녀석 참 맹랑하네. 쨌든 아빠 퇴근하고 보자.


“응응.”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다꼬리 이름을 못 들었네. 장크로다일은 쟝이고, 마기라스는 철이...
철이라니... 아빠의 네임 센스 만만치 않은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름 때문에 저 마기라스 삐뚤어진 걸지도?
속으로 웃는데 메리프가 메? 하고 쳐다봤다.

“아니, 아니야. 아, 아빠가 메리프 너보고 파이터 기질이 있대.”

나는 쿡쿡 웃었다.

mee?

마치 파이터가 뭐야? 하는 표정에 빵 터지고 말았다.

10 화

w. 도여은

“일단, 들어가자.”

집은 주택이라 좀 넓은 편이다. 이왕 짓는 거 넓게 짓자고 하며 할아버지 때 지은 집이라고 했다. 그래도


집안에 마기라스하고 장크로다일은 못 들어올 거야. 마당이 넓은 게 다행인 건가? 나는 부엌으로 향해 푸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반찬도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좀 있다가 밥 먹어야지 생각하며 지친 나는 조금 싸늘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메리프, 너는 몸통박치기 말고 무슨 기술을 할 줄 알아?”


mee?

사실 아빠가 물었던 말이 내심 신경 쓰였달까.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레벨 1 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몸통박치기하고 울음소리 일려나?”


mee~
“잘 모르겠다고? 음... 울음소리라는 건 아주 귀여운 소리를 내서 상대방이 공격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거야.”

메리프는 갸웃갸웃하더니 깨달았는지 가느다랗고 예쁜 목소리를 냈다.

mee~ mee~

마치 때릴꼬야? 때릴꼬야? 하는 것 같은? 예시는 좀 이상했지만 나까지 마음이 풀려서 이 예쁜 애를 어찌 때려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포켓몬 기술은 트레이너한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가. 으엉. 나는 메리프를 꼭
안았다.

그렇게 메리프랑 노닥거리며 기운을 충전한 후 몸을 움직여 포켓몬 푸드를 살폈다.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인데...
역시 포대 채로 있었다. 마치 집에 쌀 포대 하나쯤 있는 것처럼... 겉을 보니 곡류, 건과류, 과일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음.. 한 번 먹어봐도 되나? 사람 몸에 유해한 것은 안 들은 것 같아서 한 번 먹어보니
단맛이 났다. 씹히는 맛은 오독오독이려나. 사료 같은 느낌? 집에서 모다피와 가디가 먹던 것도 이런 류였다.

신기한 마음에 하나하나 다 먹어보니 대형은 단맛과 떫은맛 두 개가 있었고 중형으로 쓴맛, 소형으로는
매운맛이었다. 내가 소형 먹고는 캑캑거렸는데, 메리는 맛있는 듯 하나 받아먹었다. 이거 가디가 먹는 푸드인가.
메리프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네.

나는 계량도 잘 챙겨보고 각자 그릇에 적정량을 담아 쟁반에 올려 밖으로 나갔다. 대형은 두 포대가 맛이 달라서
각자 챙겨 왔는데 괜찮으려나? 분명 마기라스와 장크로다일 둘 중 하나일 거야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 문을 여니 마당에서 가디랑 마기라스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서 다꼬리가 구경


중이었고. 장크로다일은 별로 관심 없는지 저쪽에 햇볕 받으면서 뻗어있었다.

“얘들아, 밥 먹자.”

내 소리에 벌떡 일어나 뛰어온 건 장크로다일이었다. 뭐지, 마치 대형견을 보는 듯한 싱크로는. 내가 웃음이


나서 대형 밥그릇 두 개를 둘 다 바닥에 내려놓으니 장크로다일은 두 개의 푸드를 번갈아가면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한 그릇에는 킁킁거리다가 콧김을 킁 하고 뿜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하고 다른 하나를 익숙하게 먹기
시작했다. 먹는 건 단맛. 그럼 떫은맛은 마기라스 것이겠다.

뒹굴어서 먼지를 뒤집어쓴 마기라스와 가디의 몸을 좀 털어줬다. 가디는 내가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마기라스는 그러든지 말든지 라는 표정. 은근 나한테 관심 없는 것 같아서 조금 상처받고
있어, 나. 가디가 계속 집에서 봐와서 그런 걸까 생각하면서도 오늘 처음 본 다꼬리나 장크로다일을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갈은데... 성격 특성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포켓몬의 밥을 챙겨주고 마루에 앉아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장크로다일은 평소에 네
발이 편한 듯 땅을 짚은 채 코를 박고 와구와구 먹고, 마기라스는 그냥 밥그릇을 들더니 한입에 털어 넣더라.
그러고는 다시금 저쪽으로 돌아서 버리는 게... 나 원래 마기라스랑 안 친했을지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반면에 너무 친해서 내가 싫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입에 먹기엔 은근 양 많을 텐데.., 얘도 대단하다
싶었다.

다꼬리는 조신하게 천천히 음미하듯 먹고 있었다. 장크로다일이나 마기라스랑 비교해보면 굉장히 차분하고
고상한 느낌? 가디랑 메리프는, 누가 빨리 먹나 내기하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먹어. 체할라. 역시 메리프
꼬마애라 그런가. 아직 숙녀는 아니지. 나는 속으로 웃었다.

다꼬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난 밥그릇을 치웠다. 그리고 쫄쫄 쫓아오는 메리프의 발을


닦아준 뒤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개수대에 밥그릇들을 넣고 나도 이제 밥 먹어야지. 나는 이것저것 반찬들
꺼내서 밥솥에 있는 밥이랑 해서 대충 때웠다. 아빠 포켓몬 맛 별로 구비해둔 것 보면 애들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는데 아빠 반찬은 신경을 안 쓰시는 듯. 엄마가 보내준 반찬이 그대로 있는걸.

찬장에 다른 먹을 것이 있는지 잠깐 살펴봤었지만 찬장은 포켓몬 푸드 통조림으로 채워져 있는 걸 봤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날 포켓몬 푸드를 위한 통조림이 있는 걸 처음 알았다. 모다피는 거의 채식을
하다 보니 엄마가 가끔씩 쌈채소 같은 걸 먹이는 걸 보긴 했지만.

“밥도 먹었겠다. 이제 나가볼까?”

내가 설거지거리를 개수대에 담가놓으며 메리프에게 말을 걸자 메리프는 메에에 하는 울음으로 화답했다. 나는


메리를 이끌고 나가 마당의 가디를 불렀다.

“완아, 나가자.”

내 소리에 뛰어온 것은 가디와 장크로다일? 장크로다일이 네발로 뛰어왔다.

“쟝. 너도 같이 가게?”

장크로다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나들이가 좋은 건가? 별로 나쁘지 않겠지 싶어서 세 포켓몬을 이끌고
대문을 나섰다. 겨울이지만 해가 쨍쨍하니 날도 덜 춥고 좋았다. 바람도 덜 불고. 메리프가 아직 어린 게
걱정되지만 가디랑 장크로다일이 있는 걸?

주변의 과수원을 지나 풀숲이 있는 산의 초입으로 향했다. 등산 좋아하는 편인데 산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센 포켓몬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원래 세계의 나는 부모님과 산에도 자주 갔었는데,
이곳의 나는 어떨까... 라는 생각이 조금 들어서 좀 우울해졌다.

그런 생각과 함께 야생 포켓몬이 산다는 산 가까이에 내가 가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야생


포켓몬이라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아빠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좀 경솔했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내
생각과 달리 포켓몬들은 그저 신나는지 앞장서며 장난치는 메리프와 같이 가디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장크로다일은 내 옆에서 터벅터벅 걷는데 2 미터 정도 되는 키 때문일까. 걷는 걸음마다 땅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cro?
“아니, 든든해서.”

나는 장크로다일에게 웃어 보였다.

어느새 풀숲이 가득한 산의 초입이었다. 여기서 발 한 발자국만 들여도 특유의 브금과 함께 야생 포켓몬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끙... 진짜 야생의 포켓몬이 싸움을 걸면 어떡하지? 도망가야 하나.”


cro cro!
“아니, 널 믿지 않는 건 아닌데, 내가 무서워서 그래.”
meeee~
“사실 넌 그리...”

그래도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나는 앞으로 향했다. 몇 발자국 떼자 푸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옆을 봤더니 단지 구구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간 것뿐. 나는 겁을 먹고 다시금 발을 내디뎠다. 산이라
점점 햇빛이 안 들어오는 것 같지만 말이야. 난 겁먹지 않았어. 두렵지 않아.

meee~

두려운 것 없이 앞장서던 메리프의 소리에 나는 그쪽을 쳐다봤다. 나타난 것은 꼬렛. 두려운 것 없는 레벨 1


메리프는 털을 부풀리며 위협 아닌 위협을 했다. 아무리 봐도 넌 만만해. 내가 속으로 메리프를 보고 웃는데
옆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저 쟝...? 그러면 안 돼 쟤 작은 꼬렛이라고.”

저 쪽에 메리프를 보고 튀어나왔던 꼬렛도 뒤에 서 있는 장크로다일을 보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다리가 풀려


도망갈 생각도 못하는 표정이다. 메리프, 보고 있니? 저게 진짜 정상적인 반응이야.

결국 안 되겠다 싶은지 가디가 왕왕 짖어서 쫓아 보냈다. 아, 저게 울부짖기인 건가? 꼬렛이 깜짝 놀라 펄쩍


뛰며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쟝이 나섰으면 유혈사태가 일어났을 거야. 나는
장크로다일의 뾰족한 송곳니를 몰래 훔쳐봤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우리 그냥 돌아갈까?”
meee?

메리프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메리프... 나는 아직 유혈이 튀는 싸움을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미안,
이런 트레이너라.

“미안 미안, 저 쪽에 강가도 있잖아. 거기 들렸다가 돌아가자.”

다행히도 메리프는 나의 절충안에 신나서 뛰어 내려갔다. 너무 신나서 뛰어가는 걸 가디가 털을 잡아 물어


진정하라며 저지할 정도로. 옆에 장크로다일도 너무 눈에 띄게 좋아하는데?

11 화

w. 도여은

가까이에 있는 강은 산에서 내려온 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주 깨끗하고 맑았다. 날씨가 날씨인 만큼 가장자리는
얼음이 얼어 있었고. 하지만 그것도 포켓몬을 말리지는 못하는지 신난 장크로다일이 우다다 뛰어가서 물에 풍덩
입수했다. 역시 물 포켓몬인 건가?

메리프도 처음 보는 강이 신기한 듯 강가로 다가가 발 한쪽을 담가보았다. 나는 추워서 멀찍이 떨어져 가까이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물이 싫은 건 가디도 마찬가지인 듯 나와 꼭 붙어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디의
털에 손을 집어넣어 보았는데,

“으앙. 복슬복슬하고 따뜻해!”


역시 불꽃 타입 포켓몬인가, 다른 포켓몬보다 온도가 높은 느낌이다. 나는 가디에게 꼭 붙어있으면서도
메리프가 걱정돼서 저 멀리 강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메리프에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메리프,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분명 매운맛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메리프는 대담한 성격인 것 같은... 대담한 성격은 매운맛을 싫어하니까.
아니면 용감한 성격인 건가?

춥지도 않은지 장크로다일은 깊은 물속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가 뭘 잡는 건가? 하고 자세히
보니 물고기를 잡아?!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살폈다. 분명 방금 물고기를 잡았던 것 같은데 내 착각? 육상동물보다야 물고기들이


덜 멸종되었다지만 말이지. 나는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 하, 일일이 마음 썼다간 내 멘탈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앉아있던 바위에 다시금 털썩 앉았다. 같이 장크로다일을 보고 있던
가디의 표정이 저런 야만스러운... 이라는 느낌이었던 건 내 착각이려나.

메리프는 물이 차갑지도 않은지 어느새 네 발을 다 담그고 있었다. 찰박찰박하며 혼자 물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나는 웃으며 쳐다본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커다란 바위를 찾아 그곳으로 가 대자로
누웠다. 돌이 햇볕을 직빵으로 받아서 따뜻했다.

누워서 본 하늘은 깨질 듯이 차가운 얼음 색이었다. 가디도 내 옆자리로 와서 누웠다.

“완아. 오늘 야생 포켓몬 쫓아줘서 고마워. 사실 각오는 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까 무섭더라고.”

배틀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야 그것이 게임이기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현실로 이것이 넘어오게 되면 뭐든 생각이 많아지는 법인가 보다. 그 꼬렛을 생각해도 아마 장크로다일의 물기 한
번이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를 것이라는 게, 정말... 쉽게 상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 거 마치 투견 같잖아.
잔인하고 야만스럽고. 메리프도 그런 걸 바라는 것일까. 야생 포켓몬은 인간에게 덤비고 잡히는 것을 원하고,
포켓몬들은 배틀을 빙자한 싸움이라는 걸... 하고 싶은 걸까?

wang!

가디가 짖는 소리에 나는 가디를 돌아보았다.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일까. 마치 나를 보는


표정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 가디도 아빠와 함께 배틀을 했겠지? 내가
그런 생각으로 가디를 보는데, 가디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쿡쿡 웃고 말았다.

내 웃음에 조금 기분이 상했는지 누워있는 내게 이불처럼 위로 올라와 누르는 녀석을 나는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그렇게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장크로다일이 무언가로 입이 막혀있는 듯 킁킁하는 소리로 가까이서 나를
불렀다. 온 줄도 몰랐는데? 가디가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내가 몸을 일으켜 처음 본 것은 장크로다일 품속에
안겨있는 기절한 물고기 세네 마리와 입에 물려있는...

“잉어킹?!!!”

나는 놀라서 장크로다일에게 잉어킹을 뺏어 들었다. 충격 먹었는지 기절해버린 잉어킹은 내 품이 가득 넘치도록


커서 내 옷이 다 젖어버렸다.

“이것들 먹자고?”

끄덕끄덕
“이 잉어킹도...?”

끄덕끄덕

“...”

나는 잉어킹을 들고 물가로 향했다. 다시 물에 넣으니 살아난 듯, 잉어킹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도망갔다. 차마


잉어킹을 먹자고 할 순 없었어... 그런데 메리프는 어디...?

meeeeeeee!!
“메리프!!”

나는 메리프가 물에 빠져 허우적 되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강으로 뛰어들었다.

“으아. 차가워어어어. 기다려 메리프!”

물이 내 무릎까지 오는 얕은 물에 빠져있는 메리프를 건지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솜뭉치라서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다고...”

.
.
.

물에 엉망진창으로 젖은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옷만 갈아입고 메리프를 화장실로 옮겼다. 일단 씻기고 털의


물을 짜고 수건으로 닦고 드라이기로 말리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나니 나는 KO.
녹다운이다.

그렇게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은 채 내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니 금방 아빠가 왔다.

“지은아. 쟝이랑 강에 갔다 온 거야?”

나는 아빠가 들어오면서 하는 소리에 거실로 나왔다.

“응. 어떻게 알았어?”


“여기.”

아빠가 장크로다일이 잡은 물고기를 보여주며 금세 싱크대로 가져갔다.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닌 듯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어... 자주 그래? 난 깜짝 놀라서.”


“놀랄 만도 하지. 저 녀석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까불까불 한다니까.”

나는 부엌 식탁 앞에 앉았다. 메리프도 쪼로록 나와 의자 위로 올라가려고 낑낑 거리는 걸 내가 잡아 올려줬다.

“오늘 저녁은 매운탕이다.”


“와! 아빠 요리네. 오랜만에.”
“주말 부부가 되면 요리를 잘할 수밖에 없어진다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이람.”
시내에 집이 있는 건 학교를 다니는 오로지 나 때문이니... 나는 좀 찔끔해서 아빠에게 애교 부리기를 시전
했다.

“에이 이쁜 딸내미니까 좀 봐줘.”

내 말에 아빠는 처음부터 악의는 없었기에 쉽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생선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또 신기하게 바라보고. 아빠는 손질한 생선 하나와 포켓몬 푸드들을 챙겨서 포켓몬들 밥을 챙기러
나갔다. 역시 생선 하나는 장크로다일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데, 순간 나... 아빠의 모습에서 완전한 낯설음을 느끼고 말았다. 저
사람이 정말 내 아빠가 맞을까 하는 그런 생각.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갑작스런 충격에 조금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내 아빠가 아니면 누구 아빠겠어. 방금도 같이 이야기하면서 어색하지 않았잖아. 진정해,
요즘 예민해졌어. 나는 메리프를 꼭 안았다. 메리프가 갸웃하며 왜 그러냐며 메에 울었다.

나... 생물학자였던 아빠가 포켓몬 연구원이 된 지금 상황을 사실 나는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지도.


분명 낚시 좋아하고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하는 힘찬 아버지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산으로 가면 구구와 꼬렛이 보이고, 강에는 잉어킹이 있고, 그걸 먹겠다고
잡은 장크로다일이며... 그런 게 내가 살던 세계에는 없었으니까. 내가 숨을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아빠가 돌아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나 오늘 강에 갔을 때, 쟝이 잉어킹을 먹겠다고 건져온 거 있지?”

아무렇지 않은 척은 나, 잘하니까. 나는 유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물고기 잡은 것보다 더 놀랐어.”


“그래서 놓아줬어?”
“당연하지. 잉어킹을 먹기는... 좀... 포켓몬이잖아?”
“뭐. 쟝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지. 나도 처음 쟝의 행동에 깜짝 놀랐으니까.”

나는 아빠의 당연하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물었다.

“포켓몬도 포켓몬을 잡아먹어?”


“포켓몬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상이란다. 지은아.”

아빠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 안에는 어떤 혐오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포켓몬 월드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곳이었는데... 그러니까 일주일 전 닌텐도 속으로 보았던 그 세계는. 하지만 아빠는 이 세계는 약육강식이
살아있는 세상이라 말한다. 이상해... 하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은 변해있다. 아빠는 트레이너였고, 포켓몬 연구원이 되었고. 나도
메리프를 만나고 트레이너가 되었다.

“아빠, 나 여기서 일주일 있다가 가도 돼?”


“개학은 언젠데?”
“일주일 뒤.”

아빠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대신 공부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나는 엄마한테 책 받아오겠다고 하며 공부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에 아빠는 또 하하 웃으시고. 그리고 매운탕이 끓는 냄새가 났다.
장크로다일이 잡아온 물고기. 나는 집에 있는 것보다는 여기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 생각했다. 이 포켓몬 월드를 좀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고.

알을 깨기 위해서.

1-2.5 반쯤 전설의 그리고 아직 전설이 아닌

12 화

w. 도여은

며칠 전에 메리프와 TV 를 봤는데 채널을 돌리다가 포켓몬 배틀을 보았다. 이 세계는 포켓몬을 아주 사랑해서
해외의 포켓몬 콘테스트를 보여주기도 하고 포켓몬 강의도 한다. 포켓몬 강의만 다루는 채널도 있었는데, 마치
EBS 같았다. 그러니까 국가적인 지원이랄까? 그런 것 외에도 마치 1 박 2 일에서 상근이가 나왔던 것처럼 예능
프로그램에도 포켓몬이 나오기도 하고, 가만 보면 프로그램마다 전용 마스코트 포켓몬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현실세계에 포켓몬이 많은 만큼 드라마에도 영화에도 포켓몬은 빠지지 않았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 그래서
처음 TV 를 볼 때 많은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사실 원래 TV 를 안 보는 편이라 상관없기도 하지만. 만약 내가
TV 를 좋아해서 프로그램을 꼬박꼬박 챙겨보던 사람이었다면 정말 충격받을 정도로.

어찌 됐거나 TV 에서 본 영상은 물 포켓몬 체육관의 8 배지전이었다. 그러니까 현 짐리더 최이슬 양과 한


도전자의 배틀 영상을 방송하는 것이었다. 이걸 보고 놀랐던 것은 배지전을 녹화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해설을 붙여 방송한다는 점? 그리고 나중에 이것을 가지고 강의에 사용하기도 할 테다. 생각해보니... 돈 많이
받겠는데?

도전자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채널을 돌리다가 내가 본 부분은 최이슬 씨의 포켓몬이 하나 남은 그러니까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다. 마지막 포켓몬은 아쿠스타였고 도전자의 포켓몬은 라이츄였다. 상성 상 라이츄가
유리했지만 경기장은 수영장이었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

아쿠스타가 물속에 잠수했기 때문에 당황한 라이츄에게 트레이너가 침착하게 지시하는 것은 참 인상 깊었다.
일단 빛의 장막을 걸고 공격할 때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을 노리는 전법인 것 같았다. 화면 속의 라이츄가 화가 난
듯 볼주머니에서 찌릿찌릿한 전기가 새어나가자 나도 옆에서 찌릿찌릿한 소리가 들리는 게...

"흥분하지마, 메리프으."

나는 옆에서 잔뜩 털을 부플리고 있는 메리프를 보고 말했다. 잔뜩 전기가 튀는 털을 피해 얼굴을 쓰다듬어주니


그나마 진정되는지 털이 푸슉푸슉 가라앉았다. 라이츄의 전기에 자극됐었는 듯했다. 아무래도 전기 포켓몬이다
보니 그런 걸까.

메리프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시합을 열중해서 쳐다봤다. 반면에 나는 그 모습에 시합보다는 자꾸 메리프를 보게
되더라.
"메리프. 배틀하고 싶어?"
mee?

마치 배틀이 뭐야? 하는 표정이라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화면에서 보고 있는 거. 포켓몬 끼리 겨루면서 강하고 약함을 시험하는 거야."


meeeee?
"하면 좋지. 그래도 다칠 수 있으니까."
meee!

좋은 거면 할래! 라는 대답에 나는 좀 아연해졌던 기억이 났다. 너, 장크로다일한테 덤빌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
.
.

“그럼 나갈까. 메리프?”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아침의 찬 공기가 나를 맞았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4 일만 지나면 학교로 가게 된다.
그에 따라 메리프도 많이 컸다. 이제 가만히 서 있어도 머리가 무릎에 닿을정도. 아직 보통의 메리프 크기보단
작지만.

meee~

메리프가 아침 공기가 기분이 좋은지 얇고 가는 소리를 냈다. 마당에서 다꼬리가 어디가? 하며 나를 쳐다봤다.

“오늘도 산책!”

내 말에 다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대문까지 열어줬다. 마치 어린데 열심히 하네, 라는
눈빛이었달까. 하긴 다꼬리도 나이가 있으니까.

나는 메리프를 데리고 가볍게 달렸다. 과수원 길을 지나고 강변으로. 항상 가곤 하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까지 뛰어가는 거야. 가볍게 뛰는 조깅도 뛰다보니 숨이 찼다. 옆으로는 함께 흐르는 강물이 보이고 저 멀리서
커다란 나무의 푸름이 보였다.

‘포켓몬 훈련은 항상 함께 하는 거야.’

라고 아빠는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아빠에게 자문을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아빠도 트레이너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빠에게 훈련이라던가 배틀에 대해 물으니 아빠도 고등학교 내에서도 배틀을 하게 돼 있으니
호신쯤의 수준은 연습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이것저것 알려주셨다. 비록 배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훈련은 포켓몬과 유대를 이어주니까, 라고. 배틀은 정신력이 필요해. 강한 정신력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것이 아빠의 지론.

커다란 느티나무에 닿았다. 느티나무 옆 절벽을 내려 보면 상류의 강물이 보였다. 나는 지쳐서 헉헉거리며
느티나무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래도 꽤 오래 뛰었다. 집에서부터 과수원길을 지나 여기까지 쉬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힘들어...”
meeee
메리프도 마찬가지인 듯.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아빠한테 훈련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물었을 때
아빠는 아침 조깅을 하는 게 좋다는 말과 또 이걸 줬다. 둥글고 말랑한... 고무공. 조금 쉬었다 싶어서 나는
메리프에게 눈빛을 보냈다. 메리프도 보내오는 눈빛.

“자, 간다. 메리프.”


me!

나는 포물선으로 공을 던졌다. 그리고 우다다 뛰어서 점프 후 고무공을 무는 메리프! 가볍게 착지 후 나를


돌아본다.

“잘했어!”

메리프가 의기양양한 기세로 공을 물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주워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공중에서도 잘 잡네.”

나는 메리프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자, 간다! 하며 공을 던졌다. 그에 튀어나가는 메리프.


이번에는 공보다 먼저 뛰어가 점프 후 물고 착지. 나는 공을 물고 오는 메리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공을 던지고 칭찬하는 것을 반복했다. 마치 강아지랑 노는 것 같은데, 과연 이게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메리프가 뛰어노는 걸 즐거워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또 며칠간 연습으로 메리프는 전기도 조금 다룰
수 있게 됐다.

전기를 강하게 방출하다가 점점 약하게 방출하다가를, 그리고 약하게 방출하다가 점점 강하게 방출하기를
연습했더니 부쩍 전기를 다루는 실력이 늘었는지 전기자석파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나는 공을 물어오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랄까 레벨의 개념이 없는 곳이다 보니 사실 얼마나 메리프가
강해졌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운 점이었다. 그래서 더 트레이너는 포켓몬에게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고.
기술도 자력으로 배운다기보다는 트레이너가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걸 설명하고 연습을 해야 실전에 쓰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음... 야생으로 따지면 어미새가 새끼 새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말이다.

“메리프, 전에 전기자석파 설명해 준 것 기억나지?”


mee!
“한 번 연습 해볼까? 저기 저 바위를 대상으로. 알지?”

메리프가 털에 전기를 모으는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전기라는 건 한 번 쓸 때 중간에 소실되는 양이 많아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위력이 약해지기 십상인데, 메리프는 전기를 사용하는 것도 아직 불완전해서
대상에게 맞을 때쯤엔 많이 소실돼버려 처음 발생한 전기의 3 분의 1 로 줄어드는 듯했다.

“전기자석파!”

메리프는 바위를 향해 전기를 발사했다. 중간에 전기가 많이 날아가 보여도 상대를 마비시킬 정도의 전기는 받는
듯. 음... 실전에 쓰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메리프! 좀 더 세게 전기를 보내볼래?”


meeee!

메리프는 좀더 전격을 올렸다.

“아직 전기쇼크까지는 무리네.”


“아빠...!”

모르는 새에 아빠가 다가와 있었다. 옆에는 가디가 쫄랑쫄랑 따라오고 있었고.

“아빠, 출근은?”
“출근하러 가는 길에 들렸어. 메리프가 이제 전기를 다룰 수 있게 됐네. 전기자석파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겠어.”
“아, 정말? 실전으론 안 써봐서 난 잘 모르겠더라고.”
“그래도 아직 전기쇼크까진 무리인가보다. 겨울이라 그런가. 빨리 배우네.”
“겨울인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겨울에 가장 털이 많이 나기도 하고, 공기가 건조하니까 정전기가 많이 나거든.”

오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빠가 연구원이라 잘 아시는구나.

“추우니까 조금만 하고 들어와.”


“그래도 내일 눈이 온다고 했단 말이야. 장갑도 끼고 목도리도 했으니까 괜찮아!”
“으이그. 그래, 그럼. 아빠 간다.”

아빠는 내 머리를 헝클이더니 가디와 함께 사라졌다. 메리프가 옆에서 갸웃갸웃했다. 나는 쪼그려 앉아


메리프와 눈을 마주했다.

“아빠가 메리프 칭찬하고 갔어. 전기를 아주 빨리 배웠데.”

내 말에 메리프가 기뻐하며 뛰었다. 그리고 안아줘, 안아줘 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메리프를 꼭 안고 받쳐


든 채 일어섰다.

“우아. 메리프 너 많이 무거워졌네. 금방 쑥쑥 크는구나.”


meee~
“내일 눈이 온데. 그래서 연습하기 힘들테니까 오늘 좀 더 하고 갈까?”
meee~
“응응, 이제 말도 잘 알아듣고 기특해요.”

나는 메리프를 둥기둥기 해주었다. 메리프가 메에에 울면서 좋아하다가 갑자기 메? 하고 울었다. 갑자기
메리프가 귀를 기울이는 듯한 느낌에 나도 자연 숨을 죽였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meee~ meee~

메리프가 내려달라며 찡찡거렸다. 내가 팔에 힘을 풀자 메리프가 땅으로 뛰어내렸다.

“뭐길래 그래?”

메리프는 절벽 쪽, 그러니까 강의 상류가 보이는 곳으로 뛰어갔다. 마찬가지로 나도 따라갔고.


meee~ meee! mememeee

그러니까 강에, 뭔가가, 걸려있다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강 쪽을 내려다봤다. 갈대로 가려진 곳쯤에서 뭔가
철퍽철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메리프가 옆에서 내 바지 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구해주자고?”
mee~

그러다가 공격당하면 어떡하려고, 강한 포켓몬이면 어떡해, 라고 말하니 메리프는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절벽이라곤 했지만 가파른 언덕 수준이라서 내려가려면 내려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meee!
“알았어, 알았어.”

나는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각오하고 경사에 걸터앉았다. 이렇게 천천히 기어 내려가면,

“휴... 메리프 이리와.”

나는 한 손으로 메리프를 안고 뒷발로 흙을 긁으면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잡초 같은 것 때문에 많이 다치진 않을


거야. 장갑도 끼고 있고.
그렇게 천천히 내려와 계곡 특유의 돌멩이들에 발이 닿았다. 마치 야생 포켓몬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쫄아서 품에 안은 메리프를 더 꼭 안았다.

13 화

w. 도여은

“갈대밭 쪽이었지?”

메리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까 나에게도 소리가 들렸다. 가는 미성의 포켓몬 소리였다. 어린
포켓몬인가?

나는 갈대를 헤치고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물에 가까워 져서 갈대를 헤치고 다가가니 물속으로 무언가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들 때문에 잘 안 보여. 내가 갈대밭을 헤치고 나오니 저 바위틈에 기대고 있는 건
그물에 칭칭 감긴 미뇽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아 반쯤 전설의 포켓몬으로 불린다는 그 미뇽이었다. 그물에 걸려서 저 상류부터 떠내려온


모양인 것 같다. 반쯤 빈사상태인 미뇽은 더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바위틈에 기대 있었다.

“메리프, 내 눈이 잘못 된 거 아니지? 세상에 미뇽이라니.”

드래곤 조련사들에게도 전승되다시피 내려오는 미뇽이 눈앞에 있으니 나는 잠시 어버버 했다. 그런 나를


메리프가 다그쳤다.

“알았어. 일단 가까이 다가가자.”

미뇽이 기대고 있는 바위틈은 다행히 건너편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위가 너무 험난하다는 거? 그래도 저 큰
바위에 엎드려 팔을 쭉 내리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메리프를 목마를 태우듯 머리 위로 올린 뒤, 넘어지지 않게 이쪽저쪽 잘 중심 잡으면서 바위를 하나하나 건넜다.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미뇽이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으르렁댔다.

“쉬, 쉬, 미뇽. 도와주려는 거야.”


나는 두 손을 들고 미뇽과 눈을 맞췄다. 내 머리 위에서 메리프가 내 말을 통역해주었다. 야생 포켓몬은
아무래도 말이 잘 안통해서.

다행히 메리프의 도움으로 미뇽은 경계는 했지만 더 이상 으르렁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 눈초리를 의식하며
조금씩 다가갔다. 뒤쪽 바위 위로 올라가 엎드리니 손을 뻗으면 금방 잡힐 것 같았다. 문제는 이 녀석이 나를
믿느냐 라는 문제랄까?

내가 바위 위에서 미뇽을 내려다보는데 내 머리 위에서 내려온 메리프가 나를 툭툭 쳤다. 미뇽과 한참 눈싸움을


하던 내가 뒤를 돌아보는데. 어...

웬 피카츄죠?

나는 놀라서 일어났다. 야생의 피카츄... 인가? 야생 피카츄가 여기까진 오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피카츄를 보는데 피카츄는 나를 본체만체하면서 내가 엎드렸던 그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거기 미뇽...”
“피카츄.”

내가 피카츄를 보는 사이에 저 멀리서 누가 피카츄를 부르며 오고 있었다.

pikapi!

피카츄는 귀를 쫑긋하더니 빠른 속도로 바위들을 밟으며 뛰어갔다. 그러곤 주인의 어깨 위로 올라가서는


피카피카하는 모습이 뭔가 데자뷰같은...? 이곳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그 주인은 붉은색 패딩 조끼를 입은...
고등학생 남자애? 나는 흙이 잔뜩 묻은 데다 갈대밭을 지나오느라 잔뜩 더러워진 내 차림을 생각하고는 대충 옷을
털었다.

“너...?”

바위를 성큼성큼 건너온 남자애가 나를 보더니 아는 듯 눈이 커졌다. 그 남자애는 나와 메리프를 번갈아보더니


말했다.

“이지은...?”
“어? 나를 알아..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아는 듯하다. 그리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눈가를 찡그렸다. 뭐야, 나 보고


인상 찌푸린 거야? 나는 기분이 팍 상했지만 후...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참았다.

말이 짧은 것 같은데, 동갑 아니면 연상? 내 말은 무시한 채 바위 끝으로 가더니 밑을 살폈다. 얘도 미뇽의


소리를 듣고 온 건가?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남자애가 밑을 살피고 있는 것을 보는 동안 메리프와 피카츄는
서로 메에 피카피카 하고 있었다.

“저 아이, 경계가 심해서... 음... 저...”

나는 이 정체 모를 사람이 동갑인지 연상인지 아니면 또 어떤지 몰라서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결국 바위 위에 엎드리는 남자애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에 그 남자애가 말했다.

“오바람한테 들었어.”
“아. 응...?”
뭐라고...? 여기서 오바람이 왜...?

“이름이...?”
“한지우. 동갑.”

나는 벙쩠다. 혹시 레드..? 레드인가요?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 직모에 조금 삐죽한 머리... 픽시브 레드와
흡사하게 잘생겼... 아니, 그것보다 한지우의 탈을 쓴 레드? 아니 반대인 건가. 아니, 이름만 한지우? 왜 이리
무뚝뚝이야. 그린이 있으니까 레드가 있는 게 당연한 건데, 한지우가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어버버 하는 동안 한지우는 미뇽과 어떤 대화 같은 걸 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 있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린데 미뇽은 들리는 듯 가끔 대답하듯 울었다. 야생동물은 인간의 말 같은 거 잘 못 알아듣는
편인데. 그래서 사람 옆에서 지낸 애들이 통역해주거나 하는, 아 친하지 않은 포켓몬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짜 사람하고 말하듯 저렇게 편하게 말하는 이 녀석은 뭐죠...?

“이제 됐어.”

한지우는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한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일단 내가


바위 밑을 내려다보니 미뇽의 적대감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편안해보였다. 마치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분명 피카츄는 메리프랑 얘기 중이었는데 어떻게 대화를 한 걸까.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한지우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몬스터볼을 하나 꺼냈다.

“이상해씨.”

나온 건 이상해씨였다. 수분을 머금은 듯한 맨들맨들한 피부에 관리를 잘 한 듯 파릇파릇한 등 위의 씨앗이 예쁜


포켓몬이었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이 표가 난다고 해야 하나.

“밑에 있는 미뇽을 덩굴로 꺼내줘.”


si~ si~

이상해씨는 바위 끝으로 가더니 밑을 내려다보고는 덩굴을 꺼냈다. 휘리릭 나온 덩굴은 미뇽을 조심히 감더니
천천히 들어 올렸다. 미뇽이라고 해도 길이가 2 미터가 가까이 되기 때문에 무거울 텐데, 그것도 그물까지
감겨있는 걸 이상해씨는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상해씨가 들어 올린 미뇽의 상태는 멀리서 봤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자잘한 상처는 물론이고 바위에
찍혔는지 큰 상처가 하나 나 있었다. 그리고 그물도 꽤 꼬여있는 듯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어른들을 불러야 할까?”


“아니, 안 돼.”

한지우는 조심스럽게 이상해씨에게서 미뇽을 건네받았다. 미뇽은 생각보다 엄청 커 보여서 나는 놀랐다. 둥글게
말린 몸은 마치 뱀 같기도 했는데 굵기가 남자 허벅지만 한 게... 이거 애니로 본 그런 귀여운 미뇽만이 아닌 것
같은데...?

미뇽을 편하게 안은 한지우는 자리에 앉더니 내게 눈짓으로 앞에 앉으라는 듯 했다. 내가 그 앞에 앉자 그물에


쌓인 미뇽을 내게 다시 건넸다. 뭘... 어쩔 셈인 거야...? 나는 묵묵히 주머니를 뒤지는 놈을 보다가 다시
미뇽을 내려다보았다. 미뇽은 사람 탄 미뇽처럼 유순하게 굴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아니, 주인공 버프...? 그래도 일단,
“그물을 잘라내야 될 것 같은데.”

내가 말을 걸자 한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뒤적거리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멕가이버 칼?

“너 칼 들고 다녀?”

내가 미뇽이 놀랄까봐 크게는 말 못 하고 조용하게 경악을 드러내자 한지우는 그저 묵묵히 칼을 폈다. 비록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이긴 하지만. 남자애들은 원래 저런 걸 들고 다니는 건가.

내가 미뇽을 안고 있는 동안 그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앉더니 조심스럽게 그물을 잘랐다. 미뇽은 가끔씩 미~


하는 소리를 냈다. 이상해씨는 물론 피카츄와 메리프가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서로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서 집중하고 있는 한지우 때문에 숨 쉬는 게 불편했다.

“됐다.”

그러고는 그는 옆으로 맨 가방에서 스프레이형 상처약 하나를 꺼내서 상처난 부분에 골고루 뿌렸다. 신기하게도
자잘한 상처들은 약이 닿자마자 눈에 띌 정도로 회복되는 모양을 보였다. 바위에 찍힌 상처는 상처약이 닿으니
심각했던 것이 조금 덜 심각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 모양이었다. 포켓몬 한정으로 엄청난 하이테크를 가지고
있는 건가. 나는 갸웃했다. 다행히 미뇽도 많이 괜찮아진 모양이었고.

“그래도 포켓몬 센터에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


“안 돼.”

그 녀석은 단호했다. 이런 단호박.

“왜?”
“미뇽이니까.”

음... 아무래도 역시 보호종인데다가 미뇽을 노리는 사람도 많기 때문일까. 그래도 저 녀석 태도가 껄끄럽기
그지없다. 레드인가. 레드인 건가.

mi~

다행히도 미뇽은 기운을 차렸는지, 고맙다는 듯이 한 번 울더니 물속으로 퐁당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물속에서
빼꼼 머리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는 미뇽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지우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서야 따라 일어났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색하게 그를 봤는데 그 애도 어색한지 코를 긁더니 그냥 돌아섰다. 그 녀석이
몇 마디 하자 피카츄가 쫑쫑 올라와 그의 어깨에 자리 잡았고, 이상해씨도 몬스터볼에 돌아왔다.

“그럼.”
“아, 어. 잘 가.”

저 녀석, 잘가란 내 말도 제대로 안 듣고 혼자 가버렸다. 아, 뭐지. 실컷 무시만 당한 그런 느낌이 든다.


미뇽도 녀석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물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하...”

그런데 신경 쓰이는 건... 오바람한테 들었다는 건 뭐...지? 어디까지 들은 거지? 잠옷에 패딩 입고


돌아다녔다는 거라던가, 울다가 쓰러졌다는 거라던가, 일어나더니 이상한 질문만 하더라던가...
하하ㅎ하핳하핳ㅎ하ㅎ. 오바람 입 싼 녀석 다 말하고 다닌 거 아냐?
밤에 이불차면서 생각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하...

“위로 좀 해줘, 메리프.”

나는 메리프를 꼭 안았다. 메리프는 뭔지도 모른 체 메에 울었다.

1-3. 포켓몬 월드의 고등학생

14 화

w. 도여은

“메리프 챙겼어?”
“응!”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머니 속의 몬스터볼을 생각하며 엄마에게 대답한 후 신발을 신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는 중이고 내 앞에는 나를 마중해주는 모다피.

“엄마! 나 갔다올게. 모디도 집 잘 보고 있어.”

나는 모다피의 매끈매끈하고 말랑말랑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화창한 날씨가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나는 학교로 향하는 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 생일로부터 2 주일이 지났다는
사실을. 첫날은 꿈인 줄 알았고 둘째 날은 멘붕했고 셋째 날은 아무것도 모르는 알에게 폭언하고 오바람한테
미친년처럼 행동하고. 내가 와서 알을 받고 일주일 만에 메리프가 그 안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일주일은 연구소가
있는 마을에서 보냈다. 혹시나 걱정했지만 오바람은 만나지 않았고 그 대신에, 한지우를 만났다.

사실 내가 오바람을 어떻게 한 눈에 알아봤는지 모르겠지만 2D 와 현실은 정말 다르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오바람의 머리 모양도 2D 의 삐죽삐죽한 모양과 달리 현실판으로 많이 가라앉아있었고, 한지우도 이름을 듣거나
피카츄를 보지 못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오바람이야 머리색이 옅은 색이라고 쳐서 눈에
띈다고 해도 한지우야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이다 보니 조금 잘생긴 남자애라고 생각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일단 자각하고 나니까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린을 오바람이라고 부르고 레드를 한지우라고 부르다니.
이건 모욕이다. 모욕이야...! 그린이야 스페그린을 제외하곤 성격의 차이가 그렇게 크게 부각되진 않다고
하더라도, 역시 레드와 한지우개는 다르다고! 라고 진성 포덕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발걸음이 학교에 다다를수록 교복 입은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교문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포켓몬을
꺼내고 다니는 것은 상관없는지 여러 포켓몬이 학생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저기는 구구고, 저기는 꼬리선, 저기
꼬렛을 들고 가는 남자애도 있고. 여학생들은 삐삐 계열이 많은 것 같았다. 니드런 들고 가는 애도 보여. 음...
흔한 짧은치마 기믹인 건가? 어 단데기 들고 가는 남학생도 보인다. 반바지 꼬마들이 생각나는 건... 으음...

쨌든 아직 교문도 좀 남았겠다. 나도 주머니에서 메리프가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꺼냈다. 밖이 느껴지는 걸까


조금 흥분한 듯 몬스터볼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메리프, 나와 봐.”

내가 몬스터볼을 던지니 펑하며 메리프가 등장했다. 나는 메리프를 안아 들었다. 일주일 만에 메리프는 많이


컸다. 바닥에 두었을 때 무릎 정도도 오지 않았던 처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무릎 위로 올라오는 데다가 무게도
많이 무거워졌다. 다행히 다 커도 10Kg 은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안고 있을 수 있을 때 많이 안고 다니자
라는 생각이다. 정전기가 나는 게 흠이긴 해도 따뜻하고 보드랍고 폭신폭신한 감촉은 역시 메리프 때밖에
없으니까.

진화하면서 점점 털이 빠지는 건 좀 슬프다고 생각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메리프는 등굣길이 어색한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이 신기한 듯.

사실 나도 신기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포켓몬스터라는게 애들 게임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상 고등학생과 포켓몬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침에 엄마가 포켓몬 챙겼냐고 얘기해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등굣길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포켓몬을 한 마리씩 들고 가는 것도 이상하고. 아, 포켓몬이 없이 부럽다는 듯 쳐다보는
학생들은 신입생들인가? 나는 이제야 등굣길답지 않게 들뜬 분위기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고 2 학생들은 처음
포켓몬을 데리고 등교를 하는 거구나.

나야 이런 것이 모두 처음이고 처음 보는 광경이라 얼떨떨한 거지만 여기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법적으로 자신의


포켓몬을 데리고 다니는 게 뿌듯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 신입생들의 반짝이는 표정을 보아하니
더더욱.

뭐랄까 이런데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그래도,

“메리프, 우리도 첫 등교야.”

이 포켓몬이 있는 세계의 고등학교에 말이야. 설렘으로 치면 나도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리프가


메에 하고 울었다. 내가 안고 있어서 밑으로 쳐진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것보다 좀 걱정이 더 되는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포켓몬이 생긴 이 세상의 고등학교는 많이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 걷다 보니 교문이 가까워져 갔고 그럴수록 보이는 학생들은 점점 많아졌다. 학교
내에서 포켓몬을 풀어놓으면 안 되는 듯 학생들이 들어가기 전에 몬스터볼에 포켓몬을 넣고는 들어갔다.

“메리프. 여기서는 몬스터볼에 들어가야 하나 봐. 답답해도 좀 참어.”

나는 메리프에게 몬스터볼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제 말은 거의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우리 메리프 다른


메리프들에 비해 엄청 똑똑할지도 몰라. 나는 내가 생각해도 웃긴 생각에 조금 웃었다. 마치 딸 가진 아빠
같잖아.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웃자 메리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 메리프 귀엽다구.
메리프는 내 말에 좋은 듯 메에 울었다.

“일단 들어가야지?”
mee...

어지간히 들어가기 싫은 듯 했지만 내가 엄한 표정을 지으니 그제야 스스로 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교문으로
들어갔다. 교문 앞에는 학생 주임 선생님이 계셨는데 역시 그대로셨다. 학교 안은... 포켓몬이 없으니 그냥
학생들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있던 세계 같다, 라는 기분.

그러다가 고 1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만나고. 너는 몇 반이야? 같은 입학식날 묻는 일상적인 질문도 하고


너는 올해 포켓몬 뭐 받았어? 같은 나에게는 조금 비일상적인 질문도 받았다. 왜 연락이 안 됐어?라는 질문에
폰이 고장나버렸지 뭐야, 하며 울상 짓고 새로 번호를 받기도 했다. 안타까운 점은 내가 친하게 지냈던 애들은
다 같은 반이 못 된 것이다. 나는 이과로 진학하는데 문과로 가는 애들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이과 여자애들은 은근 적으니까.”

나는 나를 다독였다. 어느새 2 학년 건물에 들어갔다. 선생님 심부름을 빼면 2 학년 동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엄청 어색한 기분이야. 나는 친구들과 같이 층을 올라갔다. 나는 물화생반이니까 5 반인가?

5 반의 문은 열려있었다. 다들 어색한지 얼굴이 익은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나도 아는 얼굴이 있나


살펴봤지만 같은 반이었으나 별로 친하지 않은 애들만 있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싶어서 그쪽으로 가려던 참에
누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저, 이 메리프 네꺼야?”

뒤를 돌아보니 모르는 여학생이 메리프를 들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내 메리프잖아? 분명 볼 안에 넣었는데.


내가 주머니의 볼을 꺼내니, 빈볼이었다. 포켓몬이 마음대로 볼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직접 보니
신기하면서 얼떨떨하면서도 메리프가 너무하다 싶기도 하고.

“너 언제부터 나와있었던 거야, 메리프.”

여학생이 건네주는 메리프를 받아 안고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메리프를 다시 볼 안에 넣었다.

“으어, 고마워. 큰일 날 뻔했네.”


“복도에서부터 너를 졸졸 쫓아가던걸? 너무 작아서 다른 애들이 못 봤나 봐. 포켓몬 꺼내놨다가 선생님한테
걸리면 벌점이라고.”

여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첫 날부터 벌점 받으면 그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대답하면서 같이 웃었다. 친한


사람도 없겠다 우리는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이지은인데 너는?”


“난 잎새. 김잎새야.”

나는 특이한 이름에 감탄했다. 이름 예쁘다고 하자 잎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별명이 마지막 잎새라고. 은근 단명할 이름일지도 몰라.”

나는 쿡쿡 웃었다.

“그래도 막 일찍 죽지 않지 않나? 담벼락에 그림 그려서 살잖아.”


“하긴 그렇지만.”

나와 잎새는 나란히 웃었다.

“아, 너 메리프는 언제부터 키운 거야?”


“나? 생일날 알인 채로 받았어. 태어나기 전에는 무슨 포켓몬 인지도 몰랐다니까. 아빠가 말을 안 해줬거든.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됐어.”
“정말? 왠지 작더라. 그래서 더 귀여웠던 건가?”

자기 칭찬인지는 알아듣는지 몬스터볼이 흔들흔들거렸다. 나가고 싶은 듯하는 몸짓에 나는 볼에 대고 조금만


참아, 하며 중얼거렸다.
“너는 어떤데?”
“나는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친구분께서 푸크린이 알을 낳았다면서 한 달 된 푸푸린을 데리고 왔었거든.
그때부터 엄마가 내가 나이가 되면 푸푸린을 주겠다구 그랬지. 그때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해야 하나? 1 월이
되자마자 바로 엄마가 교환해줬어.”
“그럼 엄청 친하겠다.”
“너도 엄청 친하지 않아? 네가 부화시켰잖아.”
“그런가?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니까.”

나는 몬스터볼을 만지작거렸다. 잎새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그 푸푸린, 지금은 푸린이야. 진짜 귀여운데 꺼낼 수가 없네.”

잎새는 가방에서 볼을 꺼내보였다. 한 번 봐도 돼? 물으니 잎새는 선뜻 볼을 건네주었다. 몬스터볼은 따뜻하고


무게감이 있었다. 역시 빈 볼하곤 다른 느낌이야.

푸린 이야기에 들뜬 잎새가 더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앞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아, 국어선생님이었다.


작년에 배운 적 있는 선생님인데. 이번에 담임이구나 싶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가벼운 소개를 하며 프린트를
나누어 주셨다.

“자, 지금 다들 포켓몬 받았다고 신났지? 그래도 수업시간에 꺼내면 벌점이다. 쉬는 시간도 안되...지만
걸리지만 마라. 배틀도 안 되고. 알겠지?”
“배틀도 안 걸리기만 하면 되나요?”

한 학생이 말했다. 그 말에 학생들이 웃었다.

“안 돼. 체육시간 혹은 선생님을 대동한 경우가 아니면 안 된다. 알겠어?”

학생들이 입을 모아 네에, 하고 대답했다.

“일단 1 교시는 입학식으로 대체하고 2 교시부터 정상 수업하니까 준비들 하고. 아, 오늘 자리는 그대로 앉고
나중에 바꾸든지 하자.”

정상수업 부분에서 학생들 입에서 야유의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마찬가지이고. 입학식인데 7 교시까지 꽉
채운다니 너무하다. 담임은 반장 했던 경험이 있는 애를 임시 반장으로 시키고 몇몇 남자애들을 지목해
뒤따라오라고 한 뒤 나가셨다. 포켓몬이 있는 세계라 고등학교도 뭔가 다를까 했더니 별반 다른 건 없는 것
같았다.

“메리프, 점심시간까지만 좀 참아줘.”

나는 볼에 대고 속삭였다. 몬스터볼이 작게 진동했다.

15 화

w. 도여은
입학식은 강당에서 이뤄졌지만 방송부나 악대부 등 몇몇 학생을 제외하곤 다들 반에 남아있어도 되었다. 물론 TV
로 입학식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지만 모두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도 옆자리에 잎새랑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했다. 푸린의 이름이 크림이라던가, 나는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다거나. 뒷자리 여학생 하고도
인사하고 친해지는 등등.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서 나는 담임이 나눠준 프린트를 살펴봤다. 시간표랑 특활부 관련 공지, 주의사항 같은 게
적혀있었다. 주의사항 쯤이야 별 것 없었는데 인상 깊은 건 포켓몬 치료기기가 양호실에 배치되어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발규정이 파마, 염색과 혐오스러운 머리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통과될 정도로 자유로운 것이었다. 뭐,
혐오스러운 머리가 뭘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음...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어깨를 조금 넘는 단발까지였던
것 같은데... 나는 오늘 느낀 위화감 중에 하나를 이제야 알아챈 것이었다. 왠지 여자애들 머리도 길고 남자애들
왁스도 바른다더니. 나는 잎새를 갸웃거리며 살피다가 물었다.

“너 머리 자연 갈색인거야? 염색 아니고?”

잎새는 다갈색의 긴 머리를 가지고 있기에 물은 질문이었다. 내 물음에 잎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아. 학주한테 맨날 의심받는다구. 어렸을 적 사진이라든가 매일 머리 뿌리


보여준다거나 해도 잘 안 믿는 눈치야. 봐봐 눈도 갈색빛이 돌잖아. 이건 색소 부족이라고...!”

잎새는 눈을 크게 뜨고 제 눈동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긴 어두운 갈색이긴 하지만 갈색이긴 갈색이라 학주가
의심할 만도 했다. 일단 길이도 허리까지 오는 듯하니 더 눈에 띄겠어.

“나는 염색할거면 완전 환한 갈색으로 하지. 이런 어정쩡한 갈색은 하지도 않을 거라고.”


“워워. 진정해.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보네.”

잎새는 말도 마, 라고 하며 책상 위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켰다.

“너 무슨 부서 들 거야?”
“어?”
“일단 2 학년 때부터야 들어갈 수 있는 부서가 있잖아. 나 이번에 포켓몬 관찰부에 들어가려구! 너도 같이
들어가자!”

나는 내 팔을 잡고 흔드는 잎새에게 일단 뭐 있는지 좀 보자, 하면서 진정시켰다. 2 학년 때부터 들어갈 수


있는 부서라니... 금시초문이었다. 프린트를 보니 일단 원예부라던가, 독서부라던가, 영화감상부, 문예부,
검도부 등등이 1 학년 공통이었다. 내가 1 학년 때는 저게 다였었고 나는 독서부였는데... 음? 잎새의 말처럼
밑에 무언가가 더 적혀있었다.

“포켓몬 관찰부, 포켓몬 봉사부, 배틀학부, 포켓몬 육성부, 등산부, 낚시부...?”

나는 프린트를 읽다가 등산부에서 갸웃했다. 낚시부는 또 왜...?

“방금 읽은 부분이 2 학년부터 가능한 부서. 포켓몬이 있어야 되는 거거든.”


“등산부도?”
“야생 포켓몬들이 얼마나 사나운데. 트레킹 수준이 아니라 진짜 등산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의미로 낚시부도 왜인지 알게 되었다. 여기 포켓몬 월드인 것 순간 깜빡했었어.

“다른 부서는?”
“너 부서활동에 전혀 관심 없었구나? 전에는 무슨 부했었는데?”

나는 찔끔했지만 독서부였다고 말했다. 사실 오늘 처음 봤는데 알 리가 있나.

“일단 포켓몬 관찰부는 야생의 포켓몬을 관찰하는 거야. 철 따라 이동하는 포켓몬이라던가 물가에 사는
포켓몬이라던가. 낚시부도 비슷한데, 걔네는 낚시만 하는 거.”

잎새는 내가 포켓몬 관찰부에 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그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일단 배특학부랑 육성부는 뭔지 알 것 같은데, 포켓몬 봉사부는 뭐 하는 거야?”


“음... 그거. 일단 포켓몬 관련 부서는 인기가 많은 편이거든? 그런데 그 부서는 좀 적은 편이야. 봉사부니까
봉사활동 점수를 주기는 하는데... 좀 힘들거든. 그, 학교랑 맺고 있는 유기 포켓몬 센터에 봉사활동을 가거든?
그런데 그게 힘들다고 하더라구. 한 달에 한 번 쉬는 건데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 아냐. 아무리 봉사점수를
준다고 해두. 또, 우리는 학교 자체 내에서 봉사활동도 가니까. 별로 잘 신청은 안 한다고 들었거든.”
“아... 너 엄청 자세히 아는구나.”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자 잎새는 이정도 쯤이야 하면서 으쓱해했다. 나는 그 프린트를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봤다.

“유기 포켓몬이라...”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기서 동물의 개념이 포켓몬이라면 당연히 유기포켓몬도 있을 법하지만... 그래도
진짜로 그런 것이 있다고 하니까,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뭘로 할건데?”
“으음... 글쎄. 이거 언제까지 정해야 하는 거지?”
“아마 일주일 내에 정해야할걸?”

나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시간 남았네 뭐.

.
.
.

그렇게 입학식은 대강대강 끝이 났고, 사실 1 학년이 들어오는 걸 신경을 쓰진 않았다. 별로 아는 애들도 없고


하니까. 입학식보다 더 기대했던 건, 아니 정정한다, 긴장했던 건 바로 수업이었다. 분명 여기는 현실 기반
포켓몬 월드이니까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만 한 게 아니라 확인도 했다. 며칠 전에
혹시나 해서 살펴봤던 1 학년 국사 교과서에서... 하하... 마늘과 쑥을 먹으로 동굴 속에 들어간 것은 호랑이와
곰이 아니라 윈디와 링곰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오늘 담임을 따라갔던 남자애들이 가져온 교과서를 받았을 때도 확연히 드러났다. 입학식이
끝나고 2 교시는 국어였고 3 교시는 영어였다. 국어시간에 첫날이라고 쉬자고 했지만 결국 교과서는 나가지 않고
시 하나를 공부했는데, 그게 김동명의 [뚜벅쵸]였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 뚜벅쵸의 꿈을 가련하다 로 시작하는 시를 나는 보면서 어디서 봤는데 했다가... 뿜을


뻔했다. 이거, 파초잖아! 하면서

아니 분명 뚜벅쵸가 라플레시아나 아르코로 최종 진화 하는 걸로 봐서 열대우림 지방에 기원이 있는 건


알겠는데... 어...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지...

나는 당황해서 교과서를 펼쳐 대충 훑어봤는데... 역시 동식물들이 대체로 포켓몬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와...


나... 다시 공부해야 하잖아. 나는 확신했다. 분명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거라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들은...!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것보다 더 상심했던 건 영어였다. 하하... Machop 은 뭐죠? Caterpie 는 캐터피고... 다행히 만국 공용


피카츄는 Pikachu 인 건 아는데... 하하하... 내가 해킹파일을 특히 영어파일을 하기는 많이 했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는 알지만 크큭... 원래 해킹파일로는 도감 안 모으잖아요? 하하 그리고 그림으로 알아보는 거지 누가
영판 포켓몬 이름을 외워...! 난 안 외웠다고! 그런데 왜 나 영판 포켓몬 이름도 외워야 되는 거야.

욕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영어지문에 포켓몬이 나오는 것이 흔한 건 아니기에 그것을 다 외워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포켓몬 이름이 영어로 나온다는 건 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다가 과학 같은 것도 다
뒤집어 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과탐 같은 건 예습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배운 과학이 다 뒤집어져 있으면
그건 핵폭발급 충격일 것 같기는 했다.

나는 국어 수업 때 1 차 멘붕을 하고 영어 수업 때 2 차 멘붕을 하면서 점심시간에는 마치 정줄이 나간 듯 책상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잎새가 괜찮으냐고 어깨를 흔들었지만... 하하... 나 전혀 괜찮지 않아.

“지은아, 이것봐봐.”

언제 꺼냈는지 잎새가 푸린을 몬스터볼에서 꺼내 보여줬다. 나는 책상 위에 올라와있는 푸린의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동글동글한 모양에 밀면 굴러갈 듯한 모양새. 크고 땡그란 푸른 눈. 고양이처럼 세모난
귀. 그리고 이마에 귀엽게 말린 말랑하게 생긴 털...!

“저... 한 번 만져봐도 돼?”

내가 엄청 귀여운 무언가를 본다는 표정으로 푸린을 보고 있으니 잎새도 기분이 좋았는지 푸린과 한 번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푸린도 허락했는 듯 큰 눈을 감고 머리를 들이미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나는 손을 뻗어서 푸린의 이마에 살며시 얹었다. 보들보들한 이마의 털이 눌리면서 손에 감겨드는 감각은 마치
마시멜로같았다. 내가 살짝 쓰다듬자 그 귀가 움찔움찔 움직이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감상을 입으로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귀여워어어...!”

내가 남의 포켓몬을 이리저리 만지고 안고 할 수가 없어서 급히 손을 떼고 공중에서 쥐었다 폈다 하는데 갑자기


펑, 하고 내 책상 위로 메리프가 등장했다.

“꺄, 메리프 귀엽다!”

라고 잎새가 메리프를 만지려고 하는데 내가 잠시 그 손을 잡으면서 말렸다.

“아니, 지금 메리프가 화나 있는 것 같은데...?”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니 잎새도 그제야 제대로 봤는지 내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프가 지금 엄청나게 털을 부풀리고 있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닌 듯했다. 지금 만지면 감전당한다고.

“메리프... 진정해. 진정해. 여기 학교라구.”


내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보이며 손을 가까이하자 메리프는 모아두었던 전기를 다시 흘려보냈다. 다시 털이
원상복귀하는 걸 보면서 나는 메리의 복실한 털을 쓰다듬었다. 메리프가 전기를 조금씩 다루게 되고 또, 내가
전기에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내가 다치는 것은 싫은가 보다. 아이구 기특한 녀석.

내가 말을 잘 듣는 녀석에게 팔을 벌리자 메리프가 와서 안겼다. 나는 메리프를 꼭 안으며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잎새한테 변명했다.

“아니, 이 녀석 질투가 심해서... 내가 크림이보고 귀엽다고 하니까 그런가 봐”

잎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은 주인을 닮는다는데 포켓몬도 그런가. 여기를 보고 있는
푸린과 잎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모양새에 웃음이 났다. 내가 웃자 잎새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아차 싶었는지
말을 꺼냈다.

“우리 밥먹자.”

내가 마침 점심시간에 밥을 누구랑 먹어야 하나 고민했던 참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려는데, 그 뒷말이 나왔다.

“밖에서 먹자! 우리!”


“에...?”

나는 놀라서 소리를 냈다가 춥지 않을까 덧붙였다. 그에 잎새가 물었다.

“혹시 추위 많이타? 내 담요 빌려줄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안 타는 편이고 담요도 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아냐아냐, 괜찮아 괜찮아. 자리 알아봤으니까! 내가 찜해뒀던 자리 있어. 1 학년 때는 밖에서 도시락 먹으면
혼났었잖아.”

이놈의 학교는 왜 이리 1 학년에 제한이 많아? 세계가 바뀌면서 생긴 변화에 나는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2
학년이라서 다행인 걸까...

“응? 그러자아. 나 돗자리도 가져왔다구. 대형 포켓몬 키우시는 선배들은 야외에서 먹는다고 그랬단 말이야.
메리프도 전룡으로 진화하면 교실에서 못 먹을 걸? 선배들 포켓몬 구경도 하구 그러자...!”

은근 솔깃한데? 나는 내 품에 있는 메리프를 내려다봤다. 이 조그만게 언제 전룡으로 진화하려나 생각이 들긴


했지만 미리 체험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내가 추위를 많이 타는 것도 아니고 돗자리도 있는 데다
메리프도 뛰어놀 수 있으니까 괜찮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래! 하고 대답했다. 도시락을 들고 담요를 옆구리에 끼고 우리는 교실 밖으로 나섰다.


메리프는 뒤에 졸졸 쫓아오고 푸린은 잎새에 품에 안긴 채로.

16 화

w. 도여은
“오늘 영어 수업에 Machop?이라고 있었잖아. 그거 무슨 뜻이야? 포켓몬인 것 같던데.”

나는 영어시간에 봤던 단어가 궁금해서 잎새에게 물었다.

“아, 그거? 그거 알통몬이잖아. 그 지문이 알통몬이 여행을 떠나는데 그 글의 분위기 묻는 문제였었나?”


“응응... 아, 알통몬이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왜 다른 나라에서 부르는 포켓몬 이름까지 외워야 하는 건지.”

나는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잎새가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나라마다 부르는 포켓몬 이름이 다르니까. 하긴 좀 통일했으면 좋겠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포켓몬은 빨리 외워지지 않아?”
“하긴...”

나는 내가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포켓몬의 영어 이름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게 포켓몬의 이름붙이는 방식이 좀 달라서 그런 것 같아. 우리나라는 포켓몬 울음소리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에?”

나는 놀라서 잎새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뚜벅쵸는 뚜벅~ 하고 울어서 뚜벅쵸가 된 거지! 몰랐어? 하긴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니까 잘
모르려나?”

나는 입이 벌어질 만큼 놀랐다. 포켓몬 이름에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고?

“우리가 뚜벅뚜벅 걷는다고 할 때 그 뚜벅이 뚜벅쵸가 뚜벅뚜벅 울면서 걷는 모습에서 따온 말이잖아. 그래서
여러 말의 기원이 포켓몬에서 왔다고 하니까. 뭐, 울음소리에서 본 따서 이름을 만든 게 아닌 포켓몬도 있지만.”

나는 생판 처음 듣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뚜벅뚜벅 걸어 다녀서 뚜벅쵸가 된 게 아니라 뚜벅쵸가 걷는


모습을 보고 뚜벅뚜벅이라는 말이 나온 거라고...? 도대체... 포켓몬 하나 생겼는 것 빼곤 다를 것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엄청 다른 세상인 거야 여기...

나는 조금 충격 받은 채로 잎새와 같이 계단을 내려왔다. 하... 그래 이제 포기하자. 정말 하나하나 다


놀라려면 내 멘탈이 남아나질 않겠다. 하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뒤에 졸졸 쫓아오는 메리프를 안아 들었다.

.
.
.

햇볕이 따뜻해서 그런가. 밖은 그렇게 춥진 않았다. 잎새가 일학년 때부터 찜해놨다는 자리를 향해 가면서 나는
혹시 포켓몬들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두리번거렸지만 그렇게 많은 포켓몬들이 나와 있진 않았다. 역시 아직
겨울이라니까. 그러다가 삼학년으로 보이는 한 선배가 리자몽에게 푸드를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와...!”

나와 잎새는 힐끗 보고는 종종 거리며 지나갔지만 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선배에게는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말했다.

“진짜 멋있다. 리자몽.”


“응. 그러게. 엄청 박력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본 것에 불과하지만 반쯤 펼쳐진 채였지만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커다란 날개 하며,


잎을 열 때 잠깐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 하며, 그 선배의 키를 훌쩍 넘기는 체격, 꼬리에서 타오르고 있는
생명의 불꽃... 그리고 그 선배 여자분이셨어...!

“그거 알아?”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보는 리자몽의 모습에 엄청나게 감탄하고 있는데, 잎새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뭘?”
“우리 학교 학생들 드래곤 타입 좋아하는 거.”
“엥? 왜?”
“지금 챔피언으로 있는 사람 우리 학교 출신이잖아...! 김목호라고 드래곤 타입 엄청 좋아하시니까!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지?”

잎새의 의심스럽다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멍멍한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김목호라고... 내가 아는 그 용덕후가 그 사람이 맞는 건가요.

“리자몽은 드래곤 타입은 아니지만, 역시 알그룹이 드래곤이라는서 그럴까나? 목호 선배도 키우고 있다고
들었거든...!”

여기 사람들 알그룹도 알고 있어...?! 게임상에서는 관동 성도 지방에서는 아직 알이 태어나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는 설정인데, 여기... 비행기가 날아다녀서 그런가...? 과학이 더 발전했다는 설정인가? 하긴 알이
귀하다면 아무리 아빠 빽이 있다고 해도 오박사님이 나한테 알을 주시진 않으셨겠지...? 나는 혼자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잎새가 물음표를 띄우며 쳐다보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잎새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수목원 근처 나무 밑이었다. 정문으로 등교할 땐 몰랐는데 학교 구조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작년에 내가 다녔던 학교와 같은 학교가 맞는가 생각할 정도로. 일단 조경이 잘돼있었다.
잔디밭이 더 많아진 기분이랄까. 나무도 더 많아진 것 같고. 원래 없었던 작은 수목원도 생겨있었다. 둘러보니
우리말고도 몇 명이 이곳 주변에서 포켓몬을 꺼낸 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잎새는 바닥에 돗자리를 깔기 시작했고 나도 메리프를 땅에 내려다두고 같이 도왔다.

“그런데 돗자리 좀 큰 것 같지 않아?”

언뜻봐도 여섯 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펼쳐진 돗자리를 바라봤다.

“하핫. 여럿이서 먹으면 좋잖아?... 가 아니라 사실 집에 돗자리가 이것밖에 없었어.”

잎새가 민망한지 웃으면서 말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나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거 무슨 학교에서 피크닉 하는 기분인데? 나는 좀 신기한 기분을


느끼면서 도시락을 열었다. 일단 엄마가 내 도시락은 물론이고 메리프가 먹을 포켓몬 푸드도 준비해줬다.
메리프가 옆으로 쫑쫑 다가왔다. 그리고 피카츄도 쫑쫑...?

“...웬 피카츄?”

피카츄가 내 눈앞에 있...? 피카츄가 내 앞에 서서 나를 갸웃거리며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기해하는 표정인


것이... 마치 이거 데자뷰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메리프가 옆에서 메~메~ 거리니 피카츄도
피카! 하면서 같이 인사했다. 아, 역시 그 녀석 포켓몬이겠지?

“역시...”

저쪽에서 낯익은 두 인영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눈이 마주쳤다. 금방 이쪽으로 달려온 두 사람은
역시 한지우와 오바람. 나는 순간 도망칠까 생각했다가 트레이너는 등을 보일...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일어나 도망치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피카츄는 귀를 쫑긋거리며 뒤를 돌아보더니 자기
주인임을 알아채고 피카, 하고 울었다.

그들은 이곳까지 다가왔다. 한지우가 표정 없이 서있는 것에 반해 왠지 오바람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기서 나를 보게될 줄은 몰랐던 듯. 갑작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 나도 그런 비슷한
표정이려나. 아는 사이니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고민하고 있는데 한지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피카츄를 불렀다.

“...이리와.”

피카츄는 여기로 뛰어왔던 것처럼 다시 쫑쫑 그에게로 뛰어가 품에 폭 안겼다. 그리고 피카츄가 한지우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뭐라뭐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쪽 귀로는 피카츄의 말을 듣는 한편, 내게 말을 건넸다.

“미안.”

말을 건냈다고 하기에도 매우 민망할 정도로 굉장히 짧게 느껴지는 사과였다. 아마, 피카츄가 이곳으로 온 것에
대한 사과인 듯. 그리고 미련 없이, 내가 괜찮다는 말도 하기 전에 뒤돌아 가버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저거 말도 섞기 싫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몇걸음 가지도 못한 채 그 녀석은 멈춰 서서 뒤돌아봤다. 움직이지 않는 오바람을 보는 표정이 왜 거기


서 있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에 나도 오바람을 쳐다봤다. 그는 미간을 긁더니 내게 말했다. 피카츄를 쫓아온 것
아니었나...? 내가 생각하는 순간 오바람이 어물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 저기... 그날은 좀 미안했다.”

나는 심히 민망해졌다. 지금 그가 말하는 건 그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나는 어정쩡하게


올려다보기도 그래서 주춤하며 반쯤 일어섰다.

“아... 응.”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대답만 했다가 그때 나도 역시 무례했던 것 같아 이어 말했다.

“나도 그땐 진짜 미안.”
“이젠 괜찮냐?”
오바람의 시선이 내 옆의 메리프로 향해있는 것에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어색하고 민망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색한 공기에 명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가 미안한 건데? 둘이 아는 사이야?”

셋이 다 일어나있는 상황에서 잎새도 앉아있기 민망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 음. 어, 아는 사이긴 한데, 그러니까 얘는 오바람이고. 쟤는 한지우고.”

나는 나도 모르게 잎새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오바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인데, 한 발짝 뒤에서 나를


쳐다보는 한지우의 표정은... 냉기 풀풀이다. 니가 뭔데 내 소개를 해, 라는 느낌? 아니면 처음부터 나한테
자기소개를 하질 말던가.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녀석의 눈길을 피할 뿐이었다. 아, 진짜, 쟤
무섭다고...

한지우가 그러든 말든, 내가 그의 눈빛을 피하든 말든 잎새는 내가 한 단촐한 소개에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 이번에 왔다던 전학생들이구나.”


“에? 전학생?”

내가 어리둥절해서 잎새를 보는데 대답은 오바람에게서 나왔다.

“맞아. 전학생. 소문 빠르네.”

그린, 아니 오바람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현재 한국 아니, 세계 포켓몬의 권위자이자 오래되긴 했지만 전 챔피언을 지내신 오용호
박사님의 손자, 라고 소문이 파다하던걸?”

오바람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잎새의 이어지는 말에 조금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니, 그건 상관없고. 같이 밥 먹을래?”

17 화

w. 도여은

“무슨 소리야?”

내가 잎새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소곤소곤 물었다. 나 쟤네랑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라고. 내가 귀엣말로 말하자


잎새는 이제 친해지면 되지 라고 말했다. 하 참. 그래도 쟤네가 허락하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좋아. 마침 도시락도 가지고 있겠다. 자리도 널찍하겠다.”


“...야.”
옆에서 한지우가 작게 항의하는 소리를 무시한 채 오바람은 돗자리에 앉았다. 마치 제 자리처럼 앉는 그의
자태에 나는 남의 자리에 앉는 것처럼 불편해졌다. 나와 달리 잎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 앉았다. 반면
문제는 한지우였는데 그는 앉기는커녕 오바람의 뒤로 다가가더니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 들었다.

“야, 일어나.”
“뭐. 너도 밖에서 먹자고 그랬잖아.”

오바람이 고개를 젖혀 한지우를 쳐다보자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오바람을 노려봤다. 마치 내가 밖에서 먹자


그랬지 다른 사람이랑 먹자고 그랬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지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아.

“같이 먹을 수도 있지.”
“맞아, 같이 먹을 수도 있지.”
pikapikapi!

오바람의 말을 잎새가 받고 그걸 또 피카츄가 받는 모습에 한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피카츄 너 언제 거기 간


거야. 하는 표정에도 피카츄는 돗자리 위에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었다. 구를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내는 돗자리가
마음에 드는 듯.

결국 한지우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착석했다. 오바람은 그 모습을 웃으며, 아니 명백하게 비웃으며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고, 그리곤 아차 싶었는지 나한테 물었다.

“포켓몬 꺼내도 되지?”


“아... 응.”

아무래도 내가 전에 했던 말을 신경쓰는 듯 물었지만, 그냥 확인차였는지 손에는 이미 몬스터볼을 들고 있었다.


내 대답에 맘 놓고 꺼낸 포켓몬은 세 마리로 이브이와, 구구, 꼬렛이었다. 그에,

“이브이잖아?”

라며 잎새가 놀란 듯 말했다. 구구와 꼬렛은 역시 흔한 포켓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브이는 아니니까. 잎새는


나 이브이 실제로 처음 봐, 하면서 눈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복슬복슬한 털에 파묻힐 것 같은 목 갈기. 그리고
풍성한 꼬리. 자그마한 체구.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귀여움의 대명사인 녀석이다.
녀석도 자기가 귀여운 줄 아는지 브이하고 울었다. 잎새는 오바람한테 자기소개를 하면서 이브이에 대해 캐묻고
있었고 오바람도 그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도시에서 비둘기만큼 흔한 녀석인 구구도 요 주변의 녀석들보다는 확연히 큰 몸집이었다. 깃털 손질도 잘


되어있는 것 같고 눈빛도 빠릿빠릿해보이고. 그리고 꼬렛... 왜 나는 저 꼬렛한테 눈길이 가는 걸까.

mee~
“아, 맞다. 미안.”

메리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오바람의 포켓몬을 구경하는 것을 그만두고 메리프의 푸드를 챙겨주었다.
옆에 한지우도 이상해씨를 볼에서 꺼내 푸드를 챙겨주고 있었고. 나는 물론이고 잎새도 포켓몬이 하나였지만
한지우와 오바람은 각각 포켓몬이 2 마리, 3 마리이니 자리가 꽉 차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피카츄, 이브이, 이상해씨, 푸린, 메리프, 구구, 꼬렛의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 이 기분...
역시 포켓몬은 사랑이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우리 메리프가 젤 귀여운 것 같아. 라며 나는
푸드를 담은 도시락통에 코를 박고 있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나도 밥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드는데, 나를 계속 보고 있었는지 한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시 꿰뚫어보기를 당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기분이 나쁘려는데 이번에는 오바람하고 눈이 마주쳤다.

잎새하고 얘기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잎새는 푸린의 푸드를 챙겨주고 있었다. 그래도 한지우가 쳐다본 것과는
다른 눈빛이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저 난 왜 쳐다봐? 하고 오바람을 보았을 뿐.

“아니, 저 녀석한테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그의 눈빛을 따라갔다. 메리프?

“메리프한테?”

말을 꺼낸 건 내가 아니라 잎새였다. 잎새는 어느새 푸린의 푸드를 챙겨주고 자신의 밥을 꺼내 한 손에는


도시락을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아아. 응. 저 녀석 우리 할아버지 보송송의 알이거든.”

오바람은 콧등을 긁적이며 말했다. 오박사님의 포켓몬 알인 건 알았지만... 난 전룡인 줄 알았지.


보송송이라곤 생각 못했었는데.

“정말? 지은아, 진짜야? 알부터 부화시켰다더니 그게 오박사님 연구소였어?”


“응. 아버지가 오박사님 밑에서 연구하셔서.”

잎새는 놀라면서 나를 바라봤다.

“정말? 진짜? 대박! 너희 아버지 대단하시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도 앞에서 밥을 먹고 있을


오바람이 생각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사양했다. 울 아빠가 대단하다고 하면 오박사님은...
저거 오바람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라고. 나는 말을 돌리려 오바람한테 물었다.

“그럼 메리프의 아버지는?”

오바람은 소세지를 하나 집어먹으면서 말했다.

“아, 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일본에서 연구차 잠시 빌려온 보스로라 수컷이 우리 집 보송송하고 눈이


맞아가지고. 하하.”

나는 보송송과 보스로라가 같이 있는 것을 생각했다. 철갑옷을 입은 듯한 사나운 모양새에 거친 성격을 가졌다는


보스로라와 그 품에 안겨있는 분홍색 몸집의 자그마한 보송송...? 으어... 음... 좀 그림이 위험하지 않나?
싸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철컹철컹?

“그래서 흔치 않은 조합이니까 혹시나 유전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아, 목적이 있었구만. 왠지 흔쾌히 같이 밥 먹는다고 했다.

“밥 먹은 뒤에 한 번 살펴봐도 될까? 메리프?”


“응. 물론이지.”

오바람의 눈동자가 조금 더 반짝 빛나는 건 착각이려나... 아니 착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도


유전기라면 궁금하니까, 흔쾌히 대답했다. 이게 바로 윈윈이라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밥을 먹었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밥을 먹으며 다시 한번 포켓몬을 살피고 있었다. 구구는 새 포켓몬이라 일반
사료가 아니라 알곡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소형 포켓몬 사료같이 포괄적인 것이 아니라 그 포켓몬 전용사료라면
좀 더 비싸려나? 아니면 새 포켓몬들을 위한 사료인 건가?

역시 잘 사는 집 아들이라서 그런 거겠지? 왠지 조금 부러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집도 못 사는 집은


아니지만... 다행히 메리프 하나 건사할 재력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아빠 포켓몬만 해도 유지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지 않을까? 나는 마기라스와 장크로다일과 가디와 다꼬리를 생각했다. 밥값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나의 눈은 어느새 나는 구구 옆에서 오독오독 푸드를 먹고 있는 꼬렛에게 향했다. 보랏빛


털은 윤기가 흐르고 푸드가 맛있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꼬렛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귀를 쫑긋
하면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자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혹시 저 꼬렛...

설마. 나는 속으로 하하 웃었다. 아무래도 한지우라고 하지만 픽시브 레드같이 생긴 저 녀석이나 이브이를 들고
있고 구구와 꼬렛을 들고 있는 오바람이나, 마치 게임 속에 레드와 그린 같잖아. 그리고 포켓몬스터 피카츄
버전에서 레드는 피카츄를 받고 그 다음에 이상해씨, 파이리, 꼬부기를 받는 걸 생각하면... 하... 나는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잎새는... 아, 나는 순간 당황했다.

“잎새야. 너...”
“응?”

리프니...? 한 자리에 두니까 알 것 같았다.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에 앞머리는 반으로 나눠져있고 허리까지
길게 내려는 머리에 예쁜 외모... 그러니까... 뭔가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아니 진짜 이거 그런 거야? 게임에
의해서 이렇게 진행이 되고 있는 거냐고. 마치 적녹에서 풀숲에 발을 들이면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던 오박사가
튀어나와 납치해가는 것처럼... 그런 건가? 그런 거냐고...

숨이 막혔다.

“왜?”

잎새가 물어왔다. 나는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직 보류해두자고 생각했다. 어떤


근거도 없이 결론을 내리는 건 나답지 않으니까. 우연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아니 좋잖아? 게임
주인공들이 내 주변에 있다면 역시 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에 비해서 잎새는 물론이고 메리프도


오바람도 밥을 잘 먹고 있었다. 나랑 같은 느낌인 건 역시 한지우 쪽인 것 같다.

전에도 봤지만 저 녀석은 한지우의 이름을 가진 레드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레드라는 이름이 이곳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려나. 그래서 디폴트 네임이 한지우가 돼서 나타난 거려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랭하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고, 오바람이랑 꼭 붙어 다니는 게 딱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피카츄가 뭐라고 한 거야?”

오바람이 피카츄가 한지우한테 속삭였던 말이 궁금했는지 다 먹은 밥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남자들은


정말 빨리 먹는구나 생각하면서 그를 보면서도, 사실 나도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에 한지우를 빤히 볼 수밖에
었었다. 분명 피카츄가 나를 갸웃갸웃 쳐다보다가 그에게 달려가 말을 속삭였으니 내 얘기겠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까. 오바람에 말에 대답한 건 한지우가 아니라 피카츄였다.
pikapikapi!

말.. 하지 말라는 뜻인가? 대충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아무리 같은 포켓몬이라도 포켓몬에 따라 들리는


언어의 느낌이 달랐다. 어떤 애들은 잘 알아듣겠으면서도 어떤 애들은 잘 모르겠는 게... 그런데 왜 말하지
말라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피카츄는 짤막한 팔을 흔들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한지우가
아무 말도 안 하기에, 말 안 하려다 생각했다.

역시 쿨시크 레드라는 거냐, 라고 생각했달까? 하지만 그것도 아닌지 한지우는 어느새 밥을 다 먹었는지
도시락을 챙기더니 이상해씨를 볼에 넣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왜 또? 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는 그제야 말을 떼었다. 나지막하면서도 경계심이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너 이상하다고.”
pikapi!

피카츄가 펄쩍 뛰면서 한지우의 말을 막으려고 하는데, 한지우는 피카츄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한지우는 답지 않게 연달아 말을 하더니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그에 말에 벙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바람도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야, 진짜 미안하다. 아오, 저 녀석 진짜.”

그리고는 한지우를 쫓아갈 생각인지 급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남겨진 피카츄는 가버린 한지우 들으라는 듯
피카피카 소리쳤다. 그러면서 나한테 다가와 미안하다며 피카 울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살짝 웃어주었다.

“일단 메리프는 내일 점심시간에 다시 보러올게. 괜찮지?”


“아, 응.”

그렇게 내가 엉거주춤 대답하니 오바람이 한지우가 간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피카츄도 한지우를 쫒으러
가려는데 나는 잠깐 피카츄를 불렀다. 피카츄가 물음표를 띄우며 나를 돌아봤다.

“자.”

나는 후식으로 먹으려고 깎아온 사과 한 조각을 꺼내 피카츄에게 들려주었다. 아마 애니에서 피카츄가 사과를


좋아했던 것 같아서. 그런데 진짜 감동 먹었는지 피카츄가 반짝반짝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피카츄가 앞발로는 사과를 들고 서 있으면서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마치...

“사과를 들어서 네발로 뛰어가지를 못하나봐.”


“그러게.”

나랑 잎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 말았다. 그에 피카츄는 아예 먹고 갈 생각인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지우 생각에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피카츄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사각사각
사과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한지우가 야차 같은 얼굴로 이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피카츄 뒷덜미를 잡아 올려 들고 갔다. 피카츄는 피카피카 반항하고 그러면서도 쥐고 있는 사과는 꼭
쥐고 있는 게... 맛있었나 봐.

나랑 잎새는 그렇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서로를 쳐다봤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응. 그러게.”

웃고 말았다.

18 화

w. 도여은

“왜 같이 먹자고 한 거야?”

나는 사과를 푸린에게 하나 쥐어주고 잎새에게 권하면서 말했다. 옆에서 메리프가 메에 거리기에 메리프에게는
챙겨온 고추 하나를 물려줬다. 매운맛이 그렇게 좋은지 사과보다 고추를 더 좋아하는 게... 내가 고추를 들고
있으면 무슨 빼빼로 먹듯이 맛있게 와삭와삭 먹는다.

“음? 뭐 말이야?”
“오바람하고 한지우한테 말이야. 점심.”

그제야 잎새는 알겠다는 듯 사과를 베어 물면서 말했다.

“잘 생겼잖아?”
“에?”

사실 오바람하고 한지우가 좀 잘생긴 편이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준연예인 급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리지널 설정에서도, 아니 픽시브 레드는 일단 잘생겼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내가 어벙한 표정을 짓자 잎새가
농담이라면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너희가 너무 답답하게, 미안하느니 어쩌니 하니까 그랬지. 그대로 보내면 말도 안 할 것 같았는걸?”

정곡이었다. 나는 사실 오바람이 이 학교에 있을지 생각지도 못하긴 했지만... 만약에 잎새가 같이 밥 먹자고
안했으면 정말 한 학기 내내 그 녀석을 피해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첫 만남이 민망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건 뭘까?”


“어...? 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 뗐다. 짐작 가는 것이야 있지만 별로 다른 사람이 눈치 챌 거란 생각도 안 했는데...


피카츄라... 사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다른 포켓몬이 나를 보는 눈빛에서 어떤 호기심 같은 게
보였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호기심 때문에 더 바라보긴 했었지만... 그래도 그건 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좀 오글거렸어. 그치?”


나는 잎새의 말에 큭큭 웃고 말았다.

“아니,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게 말이 돼?”


“후흐하. 그러니까.”

나는 푸후흐 웃어버렸다. 맞아, 사실 포켓몬들이 아무리 그렇다고 했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거다. 어떻게
이렇게 차원을 넘어갈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야.

메리프가 고추를 다 먹고는 메에 울었다. 나는 또 하나 고추를 꺼내서 물려주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말하니 메리프는 낑낑거리면서 아껴먹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잖아, 꿈이라고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너도 나를 외면했으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다시 연구원에 보내거나 다른 좋은 집을 찾아주거나 했을
텐데. 그 반대로 메리프는 나를 따랐다. 엄마를 찾듯이. 아니 그것보다 더하게. 정도가 넘어서서 분리불안장애가
있을 정도로 나를 찾았다. 내가 마치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이.

포켓몬은 예민하고 또, 솔직하구나.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보고 또 볼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지막


고추를 남김없이 해치운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점투성이에 은근 허당에 애교쟁이에 질투쟁이고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천성 파이터다. 왠지 나를 붙잡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다는 생각은 과대망상일까? 아마 신이
있다면 말이야, 일부로 이 아이를 나에게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신이 있다면 왜 나를 이곳에 보냈겠어?

나도 잎새도 도시락을 챙겼다. 손이 시려워 라고 혼잣말하자 잎새가 내일은 안에서 먹을까? 라고 묻기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걸? 메리프도 좋아라 하고. 아, 그리고 내일 오바람이 다시 온다고 했잖아. 유전기라... 그런 게


있으려나?”

나는 주변 풀밭에서 뛰어다니는 메리프를 보다가 메리프에게 물었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메리프?”

내 말에 메리프는 고개를 갸웃갸웃 하면서 메? 그게 뭐야?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너란 메리프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표정이 귀여워 보이는 건 내 잘못이 아니리라. 나는 웃어버렸다.

“모른다네. 역시 이것저것 알아봐야 되려나봐.”


“오박사님 손자라니 아는 게 많겠지. 그런데 되게 어색한 사이처럼 보이던데 메리프에 관심 가지는 거 보니까
딱 연구원 되려나 봐.”

잎새가 하는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반면에 한지우라는 애는 정말 차갑던데?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던데 너한테 그런 소리를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아니, 스스로도 나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려나.
잎새는 자기가 그런 소리를 들은 양 기분 나쁘다는 투였다. 내가 뭐라고 변호할 양으로 입을 뻥긋거렸다가 별로
할 말이 없어서 다시 닫았다. 내가 아는 레드는 게임 속 혹은 2 차 창작 속의 레드이지 이 한지우라는 녀석은
아닐 테니까.

도시락을 다 챙기고 담요를 개서 옆구리에 끼고 우리는 돗자리를 접었다.

“소설 속에 총이 나오면 꼭 그 총을 쓰게 된다던데, 큰 돗자리가 있으니까 앉을 사람이 생겼네.”

내가 말하자 잎새가 여기는 소설 속이 아니잖아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게임 속인


걸까? 하고.

“내일 점심시간에 오바람이 올까나?”

내가 조금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자 잎새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에, 뭐. 오겠지. 보스로라는 일본에 서식하는 종이잖아? 궁금할 만도 할 것 같은데?”


“한지우도?”

내가 설마 오려나 라는 생각으로 말했다. 잎새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더니, 아마 안 오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내가 말하니 잎새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
.

나는 뻘쭘하게 손을 들었다 내렸다. 저 멀리서 체육복을 입은 채 옆의 남자애들과 떠들던 오바람이 나를 보고는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옆에서 나를 슬쩍 보다가 고개를 돌린 한지우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체육시간이고 내일까지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두 명의 남자애가 저기에 있었다.

“지은아, 너 오바람이랑 아는 사이인거야?”

옆에 서있던 여자애 몇 명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으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애들은


진짜? 정말? 하면서 신기해했다.

“쟤 오박사님 손자라고 하던데.”


“아마 포켓몬 많이 봤으니 배틀도 잘하겠지?”
“공부도 엄청 잘한다던데, 전에 학교에서 1 등이었대.”
“운동도 잘한다던데?”
“오바람이랑 친해?”

애들의 물음이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 일 때문에 얼굴만 아는 거라고 둘러댔다. 오바람 인기 많은 걸?
확실히 집안 좋고 머리 좋고 잘생겼기도 하고. 완전 엄친아구만,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학 온 첫날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고 있는 걸 보면.

저 이브이 비싸고 귀하던데 스타팅으로 받았구나, 라거나 쟤 머리색이랑 눈색이 연한 게 어머니가 외국


분이시라던데? 하는 소리까지 듣고 도저히 그 자리에 있기가 뭐해서 잎새의 옆으로 슬금슬금 도망갔다.

6 반이랑 체육시간이 겹친다더라 얘기를 들었을 땐 별로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야 쟤네가 6 반임을 알았다. 6 반이
물생지였던가 화생지였던가... 아니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건가? 나는 잎새를 툭 치며 너도 알았는지
물었지만 잎새는 자기도 보고 나서야 생각났었다며 웃어 보였다.

“알고는 있었는데 말이야. 깜빡 했지 뭐야.”

나는 따라 웃었다.

“아, 그런데 오바람 말이야. 인기 많더라? 오늘 전학 온 첫날 아니야?”

내 말에 잎새가 너 뭐 좀 모르는 구나? 하면서 웃었다.

“오바람이면 정말 말이 많잖아. 아니, 오박사님 손자라는 것부터 이미 다 된 거 아니야? 엄청 스타라고.


거기에 용모단정에 공부 잘하지. 방학 때 전학 수속 밟는 것부터 다 들켜서 그때부터 퍼졌었다고. 웬만한 얘기는
다 알걸?”

나는 오바람이 초등학생 때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 너도 잘 알겠네?”
“음... 어느정도는?”

잎새는 뭉뚱그려서 말했지만 정말, 얘 이 학교에 모르는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소문 많은


오바람 뿐만 아니라 조용했던 한지우도 통틀어 전학생들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잡담하는 건 체육 선생님이 오시자 끝이 났다. 나는 옆의 메리프를 쳐다봤다. 뭔가 수업시간에 포켓몬이


나와 있다는 게 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일반 수업시간에 포켓몬이 나와 있는 건 금지이니까. 뭐 쉬는
시간에 선생님 몰래 꺼내는 애들이 많긴 하지만.

체육 선생님은 일단 줄을 세우고는 운동장 두바퀴를 돌고 오게 했다. 줄을 맞춰서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저쪽 6


반에서도 다른 체육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는지 열을 맞춰서 이미 뛰고 있었다.

“선생님, 단데기는 어떻게 해요? 못 뛰잖아요.”

한 남자애가 한 물음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그 이유로 빠지려는 듯. 하지만 선생님의 열외 없다, 안고
뛰어라는 말에 전체가 웃음바다가 됐다.

“포켓몬하고 트레이너는 한 몸이니까 포켓몬이 느리다면 안고 뛰어라. 어여 뛰고 와.”

단데기는 물론이요, 캐터피를 가진 아이들까지 울상이었다. 더불어 뿔충이 딱충이들도. 그래도 그렇지 3~10
키로는 되는 애들을 들고뛰라니... 하지만 여러 아이들이 들고뛰더라. 나는 뛰기 시작하면서 옆에서 같이 달리는
메리프를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들고 달리라고 하면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이 세계로 온 다음 느껴진 변화이긴 했지만 말이야. 나 체력이 엄청 좋아졌음을 느꼈으니까.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던 느낌은 진짜 내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급격하게


증가한 체력은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 때라던가 달릴 때라던가, 혹은 어떤 조그만 소리를 들을 때 등 포켓몬
월드라서 그런지 인간의 신체적 능력도 더 올라갔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첫날에 모다피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도 그렇지, 다 뛰고 돌아왔을 때 벌레 포켓몬을 든 채 달린 애들은 정말 힘들어 보이긴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체육 선생님은,
“아니, 벌레 포켓몬은 빨리 진화한다니까.”

하며 태평한 소리를 하셨다.

19 화

w. 도여은

한 학생당 한 포켓몬을 들고 있으려니 학생 수가 배는 되어 보이는 기분이었다. 포켓몬은 종류도 다양했는데


캐터피는 물론이고 벌써 버터플로 진화시킨 애들도 몇몇 보였다. 스타팅 포켓몬도 있었는데, 꼬부기라던가 브케인,
치코리타 등이 보였다. 게임 상 관동 성도 스타팅이 모두 배분되는 듯했다.

그리고 날개를 파라락 떨면서 날고있는 독침붕도 보이고. 노말로는 삐삐에 블루, 잎새의 푸린, 그리고 구구.
대체로 구구가 젤 많았던 것 같다. 풀 포켓몬들도 몇 보였는데 모다피나 뚜벅초 통통코 등이었다. 물 포켓몬도
크랩이나 셀러, 발챙이가 보였던 것에 비하면...

“전기 포켓몬은 너밖에 없나봐 메리프.”

내 말에 메리프는 좋은지 메에 울었다. 체육 선생님이 타입 별로 모이라는 소리에 그런 경향은 더 짙어졌다.


음... 좋은 걸까? 좋은 것일지도? 메리프가 기분 좋아 보이기에 나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체육 선생님은 간단하게 타입별 상성이라거나 특징은 일학년 때 배웠으니까 다루지 않고 이제 2 학년이 되었기도
하고 포켓몬들도 하나씩 가졌으니 실전을 배울 것이라는 말을 하셨다. 음... 나는 일학년 때 배우진 않았지만.
진성 포덕은 역시 그런 것쯤 다 외우고 있다는 말씀...!

체육 선생님은 학생들을 타입별로 모인 학생들 무리에서 가장 많은 포켓몬이 있는 벌레 타입부터 개별적으로


익힌 기술들과 앞으로 익힐 수 있는 기술들을 설명해줄 모양이었다. 혼자 전기 타입인 나는 메리프와 순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가장 마지막일 거야.

그래도 배틀은...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수업의 일환으로 포켓몬을 배틀시키는 것이지만 야생 포켓몬도
잡아보지 못한 내가 배틀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 살아있는 생물을 가지고 싸움을
붙인다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 라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애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여기는 그런 것이 당연할 테니까. 나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 말을 아빠에게도 했었다. 야생 포켓몬을 잡아서 배틀을 시키는 것이 옳은 걸까? 배틀이라는 게 정말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까? 포켓몬들은 배틀을 원하는 걸까? 그 질문에 아빠는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말해주었다.

포켓몬들은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강함을 겨루는 것을 포켓몬들은 피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야생의 포켓몬들이 배틀을 걸고 잡히는 건 그들의 생존 방식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 옛날에는
포켓몬과 인간이 같이 살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협해 왔었고. 하지만 인간의
무리에 포켓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 마치 인간이 늑대를 길들여 개로 만들었듯 포켓몬을 길들여 같이
살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건 인간과 포켓몬이 서로 공존하며 적응한 결과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정말일까. 내 말에 메리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포켓몬들은 모르겠지만 자기는 싸우고 싶다고
강해지고 싶다고. 진화하는 모습을 꿈꾼다고. 아빠는 말했다. 마치 아이가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포켓몬들은 진화하고 싶어 한다고. 자연의 섭리이고 포켓몬의 본능이라고. 강해지면 진화하게 되는 포켓몬들이
강함을 추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걸지도 몰라, 라고 아빠는 말했다.

내가 기다리다 지쳐 메리프의 앞발을 잡고 놀면서 주변을 보니 다른 아이들은 서로 떠들썩했다. 타입 맞는


포켓몬끼리 모아두었다 보니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한지우도 피카츄를 데리고 있으니 같은 처지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피카츄는 인기 많은 애완 포켓몬인 동시에 개체가 흔하지 않으니까. 아니 걔는 전에 봤던
이상해씨를 꺼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 분류를 하기 전에 포켓몬을 두 마리 이상 데리고 온 경우는 몇 명을 빼고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개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어떻게 대입을 준비할지 생각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조심하는 것일 수도.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메리프의 앞발을 잡고 이리저리 장난치기도 하고, 흙바닥에 장난도 치고
있다 보니 체육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체육 선생님은 학생들이 운동장 바닥에 앉아 있듯이 내 앞에 털썩 앉으셨다.
그러고 보니 나 혼자니까 완전 일대일 면담이잖아.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이름이... 이지은이지?”

체육 선생님이 출석부를 한 번 확인하면서 물었다. 나는 네, 라고 대답했고 선생님이 출석부에 뭐라고 적는


것이 보였다.

“스타팅이 전기 포켓몬인 학생은 드문데, 어디서 데려온 거야? 아직 어리네.”


“아버지 연구소에서 받았어요. 알인 채로 받아 부화시킨 거라. 이제 한 1 주 조금 넘었어요.”

체육 선생님은 아아, 하며 내 품에 안겨있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는 이과니까 분명 전기포켓몬을 더 잡는 아이들이 많아질 테니까 걱정 말고. 특히 발전소 같은데


봉사활동이라도 가면 코일을 잔뜩 잡아오기도 하니까.”

엇, 메리프, 왜 시무룩하고 그래. 전기 포켓몬 친구들 많아지면 좋지.

“그럼 메리프는 어떤 기술을 익혔어? 아직 어려서 몇 개 모르려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조심히 말했다.

“일단 몸통박치기랑 울음소리 정도는 잘하는 것 같고 전기자석파는 얼마 전에 잘하게 됐어요. 전기를 다루는 건
이제 혼자 잘하구요 전기쇼크까지는 한 80 퍼센트 정도 맞추는 것 같아요.”
“이야, 벌써? 따로 훈련을 시켰어?”

체육 선생님이 놀란 표정이라 나는 좀 당황했다. 으어... 사실 아버지가 조금 가르쳐 준 것도 있고. 이 녀석이


천성이 싸움꾼인 것 같아서 조금 했기는 했는데, 일주일밖에 안 된 애가 이 정도 아는 건 좀 이상하려나...
요...? 내가 횡설수설하자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아니아니,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얘가 천성이 싸움꾼이라니. 귀엽게 생겼는데 말이야.”

아니, 장크로다일에게 덤비는 녀석이에요. 겉은 그래도. 나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벌써 기술을 익히고 하는 건 좋은 일이지. 이 녀석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훈련은 어떻게 시켰어?”
“음... 처음에는 고무공을 던지면 물어오는 정도로 했구요. 나무에 몸통박치기 연습이라거나 바위에 전기자석파
연습이랑 전기 강도 조절하는 연습을 좀 했고... 최근에는 던진 고무공을 공중에서 전기로 맞춰서 떨어뜨리는
연습 정도랄까요.”

내 말이 길어지니 체육선생님도 대단하다는 표정을 하셨다.

“훈련시키는 법은 누구한테 따로 배운 거야? 아님 혼자?”


“아, 아버지가 트레이너셨거든요. 이것저것 알려주셔서.”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체육선생님은 대단한데? 하면서 말하셨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겠는 걸? 따로 훈련을 시킬 정도면 배지를 딸 생각이겠지?”


“네...?”

내가 조금 황망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보자 선생님도 딴엔 말을 잘못하셨나 생각했는지 좀 당황하셨다.

“아니, 훈련을 시키는 것 같기에... 짐전은 한 번도 생각하진 않은 거야?”


“...네.”

사실 야생포켓몬과의 배틀도, 아니 배틀 자체가 조금 꺼려진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생각했다.

“배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돼. 안 따도 되니까. 물론 따면 좋지만. 가산점도 빵빵하고 또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으니까. 아, 배지전 신청료를 학교에서 반은 부담해주는 건 알고 있어? 대체로 학교에서 지원해줄 때
배지를 많이 따곤 하니까.”

나는 몰랐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프가 메? 하며 모르는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자 선생님은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배지라는 건 체육관에서 짐리더라는 사람의 포켓몬과 배틀해서 이기면 주는 것이란다. 음... 어려우려나?”
메리프가 반쯤은 알아들었는지 고심하는 표정을 하자 체육 선생님도 말을 골랐다. 마치 애기를 대하는 아빠 같은
표정이야. 나는 좀 웃음을 참았다.
“그러니까... 포켓몬과 그 트레이너가 강하다는 의미로 주는 거야. 강하면 강할수록 많은 배지를 가지게
되지.”

체육 선생님의 말은 조금 뻔한 말이었지만 내게도 좀 와 닿는 말이기도 했다. 포켓몬과 트레이너가 강하다는


증명이라... 나는 내 품 속의 메리프를 내려다보다 깜짝 놀랐다. 메리프의 눈망울이 별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거이거. 아무래도 체육관전을 피할 수 없겠는 걸?”

메리프, 너 먼저 앞서나가면 반칙이야. 난 아직 생각도 없다고.

“일단 훈련은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전기쇼크가 완성되면 털을 이용 해서 상대방 스피드를 떨어뜨리는


목화포자하고 전기를 모아서 다음 전기기술을 강하게 해주는 충전도 연습해보는 게 좋을 거야. 둘 다
변화기이니까.”
mee~

나대신 메리프가 대답했다. 다 알아듣긴 한 걸까. 나는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얘가 원한다면 조금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체육선생님 마음도 비슷했는지 메리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2 개 이상 포켓몬 가진 아이들을 모아 또 설명을
하시러 가버리셨다.

“대단하다, 지은아. 기술 훈련도 하고.”

나는 내게 다가오는 잎새한테 멋쩍게 웃어 보였다.

“사실 다 아빠가 가르쳐준 거고. 메리프가 하고 싶어 해 가지고.”


“그래도. 우리 크림이는 집에서 통통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만 좋아하지 무슨... 그래도 배틀을 하고 싶긴 한가
봐.”
puu~
mee~

푸린의 말에 메리프가 따라 화답했다. 그 모습에 나도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아버지가 트레이너셨어?”

잎새의 질문에 내가 배지를 여섯 개를 따셨데, 라고 말하자 대단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가?”


“배지 따는 거 어려우니까. 겨우겨우 3 배지 따는 거라고. 1 배지나 2 배지전 까지는 괜찮은 편인데 3 배지부터
힘들어지니까. 가산점도 그때부터 들어가는 거구.”
“아... 그래?”

나는 배지전이 가산점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자세하게는 몰랐던지라 고개만 끄덕였다.

“으이구.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서 어떡해.”

내 말에 답답한 잎새가 한숨 쉬듯 말하자 내가 네가 많이 아는 거라고 했다가 타박만 받았다. 세상에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데, 하면서. 나는 웃고 말았다. 메리프도 메에 하고 웃었다. 그렇게 포켓몬 월드의 등교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1-4. 배틀, 그 너머에 있는 것

20 화

w. 도여은

야생 포켓몬을 만났을 때의 행동 수칙
1. 포켓몬을 앞세우고 트레이너는 뒤로 빠진다.
2. 야생 포켓몬을 함부로 자극하지 않는다.
3. 강한 포켓몬으로 생각되면 될 수 있는 한 도망친다.
“이 세 가지 정도만 지키면 어느 정도 괜찮을 거야. 트레이너를 직접 공격하는 야생 포켓몬들은 거의 없거든.
빨리 진화하고 싶어 싸움을 거는 포켓몬이라거나 트레이너를 찾는 포켓몬이거나, 아니면 더 강한 상대를 만나고
싶은 포켓몬이 트레이너에게 싸움을 걸기 마련이야.”

지난 주말 나는 아빠와 함께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아빠는 과수원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앞으로 있을 배틀에 대해서도. 과수원 길은 겨울이라 황량해 보였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이 주제와 알맞은
배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틀이라는 건 포켓몬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트레이너의 역량이 제일 중요해.”


“에...? 정말? 그래도 약한 포켓몬이면 강한 포켓몬을 이길 순 없지 않을까?”

내 말에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트레이너의 역량만 있으면 이론적으로 캐터피로도 챔피언을 잡을 수도 있어. 그만큼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니 어떻게 캐터피로... 그래도 이론적으로 봤을 때니까, 이론적으론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일단 트레이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어. 트레이너가
감정은 그 포켓몬에게 그대로 전달돼. 트레이너가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포켓몬들도 자제력을 잃기 쉬워.”
mee~ mee~

옆에서 메리프가 배틀~ 배틀~ 하면서 신이 났다. 나는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녀석을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메리프가 많이 다치면 어떡해?”


“배틀을 하는데 다치는 걸 피할 순 없어. 하지만, 음... 메리프. 너는 다치는 게 무섭니?”

아빠가 메리프에게 물었다. 메리프는 주저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 아니, 문제없어! 하며 큰소리를
쳤다.

“메리프, 너 한 번도 안 다쳐봤잖아. 아파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는지 메리프가 째려봤다. 뭐... 들으라고 하는 말이긴 했지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mee, meeee mee!


“그래, 그래. 나 겁쟁이야. 너 잘났어, 그래.”

내가 메리프와 나누는 대화에 아빠가 크게 웃었다.

“처음에는 겁먹기 마련이지. 원래 모든 게 처음이 다 어려운 거야. 두 번쯤 하면 쉬울걸?”


“맞아. 메리프. 네가 너무 겁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야생 포켓몬과 배틀하러 가는 길이었다. 걷다 보니 내가 전에 도망쳤었던 산의 초입이


나왔다. 아빠와 나는 조용히 산으로 들어섰다. 점점 안으로 들어가니 엇, 내 마음속에 브금이 흘러나왔다.
야생의 니드런(여)가 나타났다.
“지은아, 일단 포켓몬.”
“아, 응. 가, 메리프!”

내가 팔에 힘을 풀자 내 품 안에 있는 메리프가 뛰어나와 내 발치에 섰다. 나와 아빠는 조금 뒷걸음쳐 거리를


벌렸다. 내가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는 내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빠, 배신...! 나는 당황한
채 니드런을 바라봤다. 일단 니드런은 독 타입. 상성은 일단 약점도 강점도 없다. 중요한 건 레벨이겠지. 일단
메리프가 할 수 있는 기술을 머릿속으로 돌려보았다.

“앗.”
meee!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사이, 니드런이 달려들어 메리프의 목덜미를 할퀴었다. 메리프는 그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메리프의 목 주변 털이 뜯겨나가는 게 보였다. 나는 놀라 소리치며 메리프에게 향하려는 걸
아빠가 잡아 말렸다.

“빨리, 명령.”

아, 침착해. 명령해야지. 메리프는 밀려난 채로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음소리! 그리고 방심한 틈을 타 몸통박치기!”

메리프는 얇은 미성의 소리를 내었다. 마치 나, 아파... 나 때릴 거야? 너무해... 하는 소리 같았다. 어린


포켓몬 특유의 울음소리는 더 애처롭게 들려서 효과가 굉장해 보였다. 니드런이 주춤하는 게 보였다. 분명 니드런
암컷은 모성애가 강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더 그런 것일지도 몰라.

“이때야!”

내 소리에 메리프는 안면을 싹 바꾸더니 니드런에게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몸통박치기 직격. 밀려나는
니드런을 보면서 나는 니드런이 마비에 걸렸음을 알았다. 굼뜬 행동에 나는 바로 지시했다.

“메리프! 니드런에게 달려들어서 꼭 붙잡아! 그리고 전기쇼크야!”

메리프는 바로 니드런에게 달려들어서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꼬리에서 미약하게 빛이 나면서 전기가 파르륵
튀었다. 괴로운지 몸부림치는 니드런 때문에 메리프가 도중에 떨어져 밀려났다.

meee~

그래도 전기가 잘 먹혔는지 니드런은 비척비척 되었다. 메리프도 기분은 좋은 듯. 메리프가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려는데 아빠가 내 팔을 잡았다. 내가 아빠를 쳐다보니 아빠는 내게 몬스터볼을 손에 쥐어줬다.

“에? 잡으라고?”
“응.”

나는 조금 주춤했다. 그런데 싫어하면 어떡해. 야생에서 사는 게 더 좋으면? 단지 강해지고 싶어서 싸움을 건


거라면? 그리고 나 포켓몬을 더 기를 자신이 없는데. 메리프 만으로도 벅찬데...

“한 번 던져봐.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얘기해보고 다시 놓아주면 되지.”

아빠는 가볍게 생각하라며 내 등을 밀었다.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게 이상한지 메리프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연습일 뿐이야, 라며 몬스터볼을 던졌는데,
“앗.”

보이는 건 몬스터볼이 튕겨나가 저 멀리 바닥에 구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메리프...”

던진 몬스터볼을 메리프가 꼬리로 쳐낸 것이다. 그리고 제멋대로 빈사 직전인 니드런에게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결국 니드런은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메리프는 뒤돌아 나를 보았다. 어떻게 다른 포켓몬을 잡을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라고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화가 난 표정 같기도 했고 슬퍼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아니,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지만 쉬이, 하는 소리를 내며 메리프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살펴보니 메리프 눈가가
보랏빛을 도는 게 독에 걸린 것 같았다.

“아마 이 니드런 특성이 독가시였나 보네.”

아빠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메리프와 거리를 둔 채 쪼그려 앉아서 눈을 마주했다.


메리프는 나를 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화가 났는지 털을 부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메리프, 이리와. 해독제 먹자? 응?”


mee! mee!

메리프는 단호하게 싫어, 미워 라고 외쳤다. 나는 아빠를 바라봤다. 얘 왜 이러는 걸까? 아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하라는 듯.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걸 보고 나는 아빠를 짜게 쳐다봤다. 아빠 배신.

“메리프. 왜 그래. 내가 저 니드런 잡으려고 해서 그래?”

메리프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딱 감이 왔다. 나는 발을 끌면서 천천히 메리프에게 다가갔다. 메리프 몸에 독이


퍼지는지 메리프가 얼굴을 찡그리며 조금 휘청되었다. 난 또 그게 걱정되고.

“메리프으. 친구가 생기면 좋잖아. 왜 그래.”

나는 메리프를 달래려고 한 말이었는데 메리프는 한 발 더 물러나며 전기를 파박 튀겨댔다. 메리프가 난 싫어


친구 싫어! 하면서 외쳤다. 나는 좀 아연해졌다. 메리프가 화내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아... 질투
때문인 걸까.

mee. meeeee mee mee!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이리 와”

메리프는 좀 주춤했다. 전기도 조금 약해진 것 같고. 독도... 메리프가 다시 한번 휘청하는 순간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약속할게. 너 허락 없이 다른 포켓몬 안 들이겠다구. 응? 화내지 말고.”

내가 조금씩 다가가면서 설득하자 메리프의 털의 부피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털이 일상의 상태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메리프를 안아 들었다. 메리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뚝... 우리 메리프 왜 울어.”

나는 그제야 가까이 다가온 아빠에게 해독제를 받아 메리프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메리프는 약을 삼키면서도
엉엉 울었다.

나만 있으면 되잖아. 나 잘할게. 잘할 테니까.

메리프는 저 말만 반복했다. 그 사이에 버리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왠지,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것만 같아서. 그날이 떠올라버렸다. 메리프는 사실 알이었을 때도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메리프를 꼭 안아버리고 말았다. 차마 나 어디 안 간다고 말은 못 하고.

21 화

w. 도여은

한지우가 내게 이상하다는 말을 한 뒤 다음 날 약속대로 점심시간에 오바람이 찾아왔었다. 한지우는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같이 밥을 먹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피카츄를 품에 안고 왔는데... 이 피카츄는...

“음... 그런데 그 피카츄 그, 한지우 피카츄 아니야?”

내가 그렇게 묻자 오바람은 하하, 빌려왔지 하면서

“아마, 아이언테일일 것 같아서.”

라고 덧붙였다. 나나 잎새나 헤에...? 하며 오바람을 바라봤고. 그런데 저 멀리서 엄청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거... 한지우같은데...? 내가 오바람을 툭툭 치며 뒤를 보라는 듯이 가르치자 오바람은 여상스럽게
여어~ 하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러자 얼굴이 무슨 겁나는 얼굴이나 특성 위협처럼 변했는데... 나 스피드는
물론이고 공격까지 떨어진 기분이야. 쭈륵.

“야, 오바람. 너...!”

한지우가 가까이 와서 피카츄를 달라는 듯, 손을 내미는데 자리에 앉은 채로 오바람은 한 손으로 그 손을


밀어냈다.

“진정하고 피카츄의 얘기도 들어보라고.”


pika!

피카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바람의 품에서 빠져나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더니 그 머리 위까지 올라와 서있는
한지우와 대충 눈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pika! pikapi! pikachu pika pikapika!

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내가 잎새를 쳐다보며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고 속삭이자 잎새도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며 나를 보았다. 그에 반해 오바람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막고 큭큭 거리고 있었고.
한지우는 점점 고개가 숙여지더니 마침내는 피카츄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도대체 뭘까? 하며 잎새를 보니 잎새가, 아마 혼나는 것 같은데? 하며 대답했다. 내가 메리프를 바라보며


갸웃하자, 메리프는 혼나는 거 맞아, 하고 대답했다.

pikapi!
피카츄가 나를 가리켰다. 내가 놀라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피카츄를 보다가 한지우를 보니 한지우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에 또 피카츄가 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내가 이게 무어냐고 말을 하려는데
한지우가 뭐라고 우물거렸다.

“...안.”
“...뭐?”

내가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한지우는 이를 악물더니 뚝뚝 끊어 말했다.

“미.안.”

나는 그에 또 당황해서 “...뭐가?” 라고 말했다가 한지우의 차가운 북풍 같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말았다.


히익, 자동 눈 깔게 되네요. 역시 정점...? 아니, 예비 정점?

그에 또 피카츄가 말을 떼려고 하자 한지우는 벌떡 일어나 그 말을 막더니 자기는 할 일 다 했다는 뜻으로


피카츄를 한 번 쳐다보더니 괜히 왔다 싶었는지 바닥에 돌멩이를 차면서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뭐... 뭐야?”

내 말에 오바람은 계속 참고 있었던 듯 끅끅 거리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피카츄는 그 머리 위에서


피카... 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나는 뭔 일인지 모르겠고. 그런데 잎새는 뭔가 알았는지 옆에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만 몰라...? 내가 메리프를 바라보자 메리프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피카츄는 왜 빌려온 거야?”

내가 오바람에게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말했잖아? 유전기 말이야. 이 녀석 아이언테일을 알고 있거든.”


“우아, 정말? 피카츄가? 혹시 피카츄도 유전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잎새가 물었다. 오바람은 콧등을 긁적이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걔가 그렇게 쫓아온 것도 다 그것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 엄청 어렵게 배운 거거든 기술을 유전기도 기술


머신도 없이 배우는 건 엄청 힘들걸랑.”
pikapi!

어느새 오바람의 머리 위에서 내려온 피카츄가 내 앞으로 폴짝폴짝 뛰어왔다. 그리고는 조그만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는데, 마치 나만 믿어라는 표정이었다. 귀여워, 라고 생각하며 내가 손을 내미니 피카츄가 만져도 된다는
듯이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손바닥에 닿는 짧은 털은 보들보들하고 따끈따끈했다.

“이거이거, 한지우 녀석 질투하겠는데? 너 마음에 들었나 봐. 역시 그 사과 때문인가.”


“사과?”

내가 피카츄의 이마를 긁어주면서 물었다. 피카츄 기분 좋은가봐 귀를 까닥까닥 거리는 게, 나는 손을 내려


피카츄의 턱도 긁어주었다. 피카츄가 꺄아 소리를 냈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메리프도 옆에서 나도 나도 하고
달려들고.

“어제 지우놈 손에 달랑달랑 들려온 이 녀석 손에 사과 말이야. 네가 준거였지? 역시 포켓몬은 먹을 거에


약하다니까.”
피카츄가 피카피카 하면서 오바람에게 항의하자 오바람은 농담이었다며 손을 들었다. 그 사이에 메리프가 내 품
안에 달려들어 무릎을 점령했다. 나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아이언테일 어떻게 배운 건데? 유전기도 아니고 기술 머신도 아니면?”

잎새의 물음에 오바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거 우리 연구소에 있는 롱스톤에게 부탁해서 몇 날 며칠 연습했지 아마? 그게 아까웠던지 어땠던지 우리


피카츄 안된다며 하는 거 내가 뺐들어왔더니 여기까지 따라와서는 피카츄한테 혼이나 나고 말이야. 그렇지
피카츄?”

pikapika!

“너한테 좀 미안한 마음이 있나 봐.”

오바람의 말에 나는 피카츄를 바라봤다. 아마도 전에 한지우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걸까나.

“그런데 유전기가 아예 없을 수도 있잖아.”


“사실 잘 모르지. 일본에는 전룡이 없고 한국에는 보스로라가 서식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보스로라하고 교배한
새끼들 중에 아이언테일을 유전기로 가진 포켓몬이 많아서 말이지. 이 녀석 꼬리도 있긴 하잖아?”

메리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꼬리가 있는 포켓몬은 대부분 배울 수 있는 듯하니까. 그래서 이 피카츄가 배우고 있기도 하고.”

헤에. 나는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메리프의 등을 쓰다듬었다. 오바람 저 녀석 은근 아는 게 많잖아?

“메리프, 너 아이언테일 할 줄 알아?”


mee?
“그렇게 물으면 모르지. 일단 돗자리는 접자고.”

돗자리를 접고 정리를 한 뒤 피카츄가 앞으로 나섰다. 피카피카, 하면서 피카츄는 여길 봐, 하는 듯 했다.


모두가 피카츄를 응시하자 피카츄의 꼬리가 희게 빛나는 게 보였다. 그리곤.

“우아....”

피카츄가 몸을 돌리며 꼬리로 바닥을 한번 훅 긁자 흙이 확 튀면서 바닥에 깊은 골이 생겨버렸다. 내가 박수를


짝짝 치자 피카츄는 두 손을 허리에 대며 으쓱해했다. 그에 메리프가 메에 울었다. 내가 메리프를 바라보자
메리프는 나도 할 수 있어! 라며 털을 부풀렸다. 그에 꼬리 끝 구슬에 빛이 반짝반짝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에휴, 우리 메리프가 제일 귀엽다니까.

.
.
.

포켓몬 게임 내에서는 하나의 룰이 있는데 그건 트레이너끼리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배틀!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포켓몬을 꺼내고 그 포켓몬과 트레이너의 재량으로 서로의 강함을 겨루는 그런 것. 지금 내가 닥쳐있는 상황이다.

“후우... 메리프 알겠지? 침착하게. 응?”


meee, meee

그런데 왜 내가 더 긴장되냐 이 상황이.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지금 내 머리 위에는 해가 반짝반짝


떠있었고 저 앞에는 메리프와 마주 보고 있는 해너츠가 있었다. 동글동글한 몸집에 우수에 찬 듯이 빛나는
눈동자는 인상을 쓴 채 메리프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저런 눈동자를 모른다.

저렇게 쓰러뜨리겠다는 투지를 가진 눈빛, 그러니까 너와 나.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비는 그런 싸움. 그러니까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마주보고 있는 트레이너는 같은 반 남자애이다. 그 애도 장난인 눈빛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도 진지하게 임해야겠지.

“알듯이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은 한 마리. 시합 불가능이 되면 끝난다. 알지?”

체육 선생님이 확인하듯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체육시간이니까. 아니, 체육시간에 포켓몬 배틀을 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원래 여기는 그런 세계니까 하고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야.

저기 이쪽을 보고 있는 한지우와 오바람이 보였다. 체육시간이 겹치니까. 그런 거겠지. 후아. 아니 별 것 아닌


시합인데 왜 이렇게 떨리냐. 나, 엄청 바보같이 보이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난 게임할 때도
와이파이 대전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원래 게임 자체를 해도 직접적으로 누구와 붙는다거나 하는 게임은
안 했었는데... 하더라도 pvp 가 없는 육성 게임을 주로 했지. 그래도,

“끙... 일단 시작해 볼까?”

해너츠는 풀타입. 메리프는 전기 타입으로 상성 상 메리프의 전기 공격은 반감이다. 하지만 해너츠는 그렇게
종족값이 좋지 않아. 레벨 차이가 있다고 해도 메리프가 조금은 낫다. 해너츠의 특성은 뭐였더라. 일단 잘
모르겠지만 햇빛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던 것 같다. 오늘의 햇볕은 별로 강하지 않아. 날씨도 차가우니까.
여름이면 몰라도 지금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심판을 보시는 체육선생님의 팔이 내려갔다. 시작이라는 뜻. 일단 전기


공격이 힘드니까 전기자석파를 하려는데 상대편이 먼저 선수를 쳤다.

“해너츠. 풀피리.”
“안 돼, 메리프 몸통박치기로 저지해!”

해너츠는 머리 위에 난 새싹을 입에 물었다. 스피드는 메리프가 빠를 테니까 저지할 수 있어, 내 생각대로


메리프는 빠른 스피드로 해너츠에게 달려갔지만 속도는 해너츠가 빨랐다. 뭐... 뭐지. 레벨빨인가?

해너츠의 풀피리소리에 달리던 메리프는 잠들어버렸고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지 못해 앞으로 뒹굴어 결국 해너츠를
깔아뭉개긴 했다. 대미지는 적었겠지만. 중요한 건...

“메리프! 일어나!”

메리프(은)는 잠들었다.
22 화

w. 도여은

메리프... 깰듯하면서 계속 못 깨고 있었다. 이미 상대는 성장에 메가드레인으로 메리프의 에너지를 쑥쑥


빨아들이고 있었다. 메리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악몽을 꾸는지 끙끙대고 있었고.

“메리프 일어나! 좀!”

메리프(은)는 눈을 떴다.

눈을 뜬 메리프는 눈앞에 해너츠가 자신만 하게 커져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메리프 진정하고 전기자석파!”


“해너츠, 씨뿌리기!”

메리프가 전기를 모으는 동안 메리프의 도톰한 털에 씨앗이 박혔다. 그와 동시에 전기 그물이 해너츠를 덮었다.
지금 메리프는 체력이 반쯤 떨어졌을 거야. 성장을 한다고 메가드레인 시간이 좀 짧았지만 효과는 컸어. 스피드가
더 빠른 걸로 보면 레벨이 더 높다는 증거고. 지금 해너츠는 체력이 만빵이다. 그래도 마비에 걸렸으니 스피드가
떨어지고 25%의 확률로 움직이지 못해. 그러니까,

“몸통박치기! 그리고 뛰어올라서 아이언테일이야!”

바로 코앞에서 메가드레인을 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통박치기는 바로 적중했다. 그리고 밀려난 해너츠 위로
까만 그림자가 드리었다.

“해너츠, 피해!”

제발 움직이지 마라! 내 기도 덕분인지 마비 때문인지 겁을 먹었는지 해너츠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사이


공중에서 한번 텀블링을 한 메리프의 꼬리가 해너츠를 강타했다.

“해너츠 시합 불가능. 메리프 승.”


“후... 하...”

나는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해너츠 개체치가 낮아서 다행이다 진짜. 그래도 전기는 반감이라
쓰기가 좀 그랬어. 마비 아니었으면 아이언테일 안 들어갔을 텐데 그것도 다행이고. 아니 진짜 그때 잠에서 안
깼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저기 해너츠는 땅 속에 박혀서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성장의 효과가 끝나는 듯 원래의 축구공 사이즈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옆에 메리프도 반쯤 뻗어서 헥헥거리고 있었고. 남자애는 하핫 웃으면서 져버렸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포켓몬 집어넣고, 악수.”

나는 몬스터볼을 집어 들었다. 몬스터볼은 가볍게 메리프를 빨아들였다. 음... 왠지 방금의 메가드레인이


생각나버렸어. 나는 등 뒤로 땀이 삐질 흘렀다. 그래도, 첫 승리였다. 나는 몬스터볼에 가볍게 속삭였다.
메리프 네가 최고야.

상대방과 악수를 하고 아이들이 앉아있는 돌계단 쪽으로 가니 푸린을 안고 있는 잎새가 손을 흔들었다.

“와, 대단해. 상성도 안 좋았는데!”


“아니, 뭘. 운이 좋았어. 마지막에 아이언테일, 좀 불안했으니까.”

체육 선생님이 시합으로 인해 움푹 패진 운동장 바닥을 정리하면서 우리에게 양호실 갔다 오라고 소리쳤다.


남자애는 먼저 양호실로 가버린 듯했다.

“우리도 빨리 가자.”

잎새가 나를 재촉하는데 나는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 저기 오바람이야.


내가 옆에 잎새를 치자 잎새도 봤는지 손을 흔들었다. 나도 고마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
.
.

“이젠 거의 완성된 것 같아. 그렇지?”

나랑 잎새는 양호실로 향하면서 얘기했다. 한지우가 사과하고 도망친 그날 이후로 피카츄는 점심시간마다
찾아오면서 메리프에게 아이언테일도 알려주고 전기 기술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 같았다. 지금 전기
쇼크에 누전의 양이 줄어든 것도 다 피카츄 덕분일 테니까.

주머니에 몬스터볼이 딸깍거렸다. 그러더니 메리프 스스로 볼에서 나왔다.

“피곤할 텐데 왜 나왔어. 지금 양호실 가는 중이야, 메리프.”


mee~

메리프는 나 잘했지, 칭찬해줘, 하는 눈으로 나를 똘망똘망하게 쳐다봤다. 나는 웃으며 메리프를 안아 올렸다.

“그래 우리 메리프 잘했어. 첫 시합이었는데 떨지도 않고.”


“떨기는 네가 떨었지.”

잎새가 하는 말에 내가 웃고 말았다.

“그러게. 쨌든 아이언테일 멋졌어. 메리프.”


“맞아. 잘하더라!”
puu~

잎새 품 안에 푸린도 메리프의 시합을 봤던지 메리프를 칭찬했다. 메리프, 지금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야. 그래도 기쁜 듯 메에, 울었다.

“메리프 아픈 데는 없어? 메가드레인이라서 힘만 쭉 빠지는 건가.”

하기는 품속에 안겨 있는 모양새가 나른한 정도이긴 했다. 곧 잠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이 정도면 양호실 치료기기면 괜찮겠다.”


“그런데 그 해너츠 괜찮을까? 걱정되는데.”
“괜찮을 거야. 포켓몬은 튼튼하니까.”

잎새의 말에 나는 좀 기분이 이상했다. 포켓몬은 튼튼하니까, 라... 만약에 쓰러진 게 해너츠가 아니라
메리프라면 어땠을까. 눈앞이 깜깜해지려나...

“그런데 아깝다.”

내가 뭐가? 하며 잎새를 쳐다보자 잎새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으며 보여줬다.

“에...? 돈?”
“체육 시간의 배틀에서는 돈을 안 거니까. 만약 이겼으면 3000 원은 받았을 거 아냐.”

흐에... 이런 설정까지 받아온 건가요. 이 현실... 이 정도면 정말 사행성이 짙은 거 아니야...? 좀 위험한


느낌인데...

“보통 3000 원 정도 하는 건가?”


“뭐, 주는 사람 마음이긴 하지만 보통 이 정도라는 게 있지? 아마?”

헷, 나는 배틀을 잘 안 하니까 잘 모르겠다, 라며 잎새는 혀를 빼물어 보였다. 이것저것 이야기해보니까


양호실에 도착했다. 양호실에는 작년에도 있으셨던 양호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나는 혹시나 간호순 씨가 있을까
봐 좀 긴장했었는데 말이야.

“포켓몬 치료하러 온 거니?”

우리의 체육복을 보고 그렇게 예측하신 것 같았다. 체육시간에 배틀을 하곤 하니까.

“방금 남자애 오지 않았어요?”


“아, 방금 왔다 갔지. 아, 해너츠를 이긴 학생이 너니?”
“아뇨, 얘요.”

잎새는 나를 가리켰다. 나는 메리프를 볼 안에 넣은 뒤 양호 선생님께 건넸다. 양호 선생님도 익숙하게 받아


치료기기의 동그란 곳에 몬스터볼을 얹으셨다.

“겉보기엔 다친 곳은 없어 보이던데 혹시 심한 외상은 없었지?”

양호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단지 기운이 빠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에 양호선생님은 기기를 이리저리


조작하시더니 한 버튼을 눌렀다. 그러니 몬스터볼 위로 빛이 비쳤다.

“...와아.”

내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자 옆에서 잎새가 날 놀리듯 쳐다봤다. 내가 뭐, 뭐! 하니까 아니야,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게... 마치 그거 동생 보듯 이잖아..!

빛은 삼십 초 정도 뒤에 꺼졌다. 그리곤 양호 선생님은 몬스터볼을 꺼내 내게 건네주셨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 얼떨떨하게 몬스터볼을 받았다. 묵직한 것이 메리프가 든 몬스터볼이 맞는데...

“이게 끝이에요...?”

나도 모르게 나온 어벙벙한 질문에 양호선생님은 작게 웃으셨다.


“그래. 끝이란다. 한 번 꺼내보렴.”

내가 몬스터볼에서 메리프를 꺼냈다. 메리프는 땅에 닿자마자 팔짝팔짝 뛰면서 자신의 몸이 신기한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몸을 숙여 메리프를 향하자 메리프는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안겼다.

나는 메리프를 안아 들고는 아픈 데 없어? 라고 물으니 메리프는 안 아파! 신기해! 하며 메에 울었다. 나도 그


모습에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전에 야생 포켓몬과 딱 한 번 겨루었을 때도 메리프가 다쳤던 건 집에서
치료했었는데... 아니, 그것도 상처약을 뿌리니까 금방 낫기는 했지만.

“이거... 만능인거에요?”

내가 얼떨떨하게 묻자 양호 선생님은 물론 잎새까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뭔데, 뭐! 게임에서는 다 포켓몬


센터만 가면 뭐든지 치료됐다고...! 나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23 화

w. 도여은

“크흠. 일단 외상이 심한 경우에는 기기를 사용할 수 없어. 그러니까 대체로 포켓몬 센터로 옮겨지게 되지.
예를 들어 뼈가 부러졌다거나 내상이 심하다거나 라는 것들. 하지만 가벼운 상처나 체력이 떨어진 것이나 그런 건
간단한 기기로 회복이 가능하단다. 아, 물론 상태이상인 독이나 마비도 마찬가지고 가벼운 화상 동상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화상 동상이 심하다거나 독도 맹독일 경우에는 센터로 가서 치료받아야 해요. 알겠니?”

양호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옆에서 잎새가 한숨을 푹 쉬며 내게 귓속말로 이거
일학년 체육 시간에 다 배웠었잖아, 라고 말했다. 내가 민망해서 잎새를 보자, 다 잊은 거야? 하며 잎새는 웃어
보였다.

아니, 일학년 때의 기억이 없는 걸 어떡하냐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 싫다.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져서 바보 되는 꼴이. 돌아가고 싶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는지 메리프가 메에 거리면서
왜 그래, 하고 불렀다. 나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리프가 품속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데 해너츠는 어땠나요? 괜찮나요?”

내 물음에 양호선생님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씀하셨다.

“큰 이상은 없었는 걸? 너 오기 전에 치료받고 나갔어. 이제 팔팔할 거야.”


“...다행이다.”

나는 숨을 내뱉었다.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조금 입밖에 내버리고 말았다.

“상냥하네.”

양호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하셨다. 나는 조금 민망해졌고.


“포켓몬은 튼튼하니까 쉽게 다치지 않아.”
“...정말 그럴까요?”

나는 사실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프가 다치게 되면 어떡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배틀을 했던 걸 후회해야 할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것도 나 때문에 이 작은 녀석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옆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 작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하지만...

mee!

괜찮아! 라고 말하는 이 녀석은 나보다 더 용기 있고 대담하고 강해. 나는 겁쟁이야.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도망치지 못해. 만약 내가 진짜 이 세계를 떠나고 싶었으면 이 아이를 받았으면 안 됐다. 계속 밀어내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잎새도 한지우도 오바람도 모두 밀어냈어야지.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난 주인공이 아니니까... 무언가 헤쳐나가고 그런 거 못해. 남들 다 하는 공부하고


남들이 좋다 하는 학교에 가고. 야자 한 번 빠져 본 적 없고, 일탈이라는 건 해본 적 없는 그런 모범생.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현재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 미래의 더 큰 상처를
만들어버리는 못난...

.
.
.

그래서 체육 선생님에게 붙잡혀 버렸다.

“에... 그러니까 저, 짐전이요?”


“그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게 맘에 걸려서 말이야.”

체육 수업을 마치고 우르르 반으로 들어가는 학생들 중에 섞여있던 나를 붙잡은 체육 선생님이 하는 말이 바로


짐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3 월인데도 불구하고 그 해너츠 익힌 기술이 많았어. 전기는 풀에 반감이었고. 그래서 꽤 고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아이 짐전도 생각하고 있었거든.”
“에... 그런데요?”

나는 좀 부담스러웠다. 별로 잘한 것도 없고 겨우 이긴 건데.

“일단 짐전도 생각해보라는 거지. 부모님과 상의도 해보고. 메리프랑도 얘기해보고.”


“아... 네.”
“여기 학교는 지원을 많이 해주는 편이니까. 너도 목호라고 알지? 아직도 챔피...”
“일단 아빠하고 얘기해 볼게요.”

나는 체육 선생님의 말을 끊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메리프를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기분 나빴어.


이건 다르지 않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니까 이건 마치 그것 같잖아. 수학경시대회라거나 과학경시대회라거나
무슨 상을 타오는 것 같은. 그러니까 이게 다 학교의 영광이라는 그런 거 말이야. 높은 대학을 보내고 그걸
현수막으로 걸어서 광고하고 하는 그런 거.

“그렇지 않아?”
체육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궁금해하는 잎새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나는 동의를 구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잎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게 반문했다.

“그게 뭐?”
“아니, 그게 뭐냐니. 마치 학생을 상품 대하 듯하잖아. 기분 안 나빠?”

내 말에 잎새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만 같았다. 한


참을 그렇게 날 보더니 잎새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왜에...”

내가 부르퉁해져서 말하자 잎새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토닥였다.

“아니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나 싶어서.”


“뭐가.”
“들어봐 지은아. 여긴 자본주의 사회야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여기는 사립학교고.”

끄덕끄덕

“사립고등학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문고가 되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훌륭하다는
걸 증명해 보여야 하지. 그런 의미에서 대외활동 같은 건 대내 활동에 비해 공인력이 있으니까 더더욱.”
“그런데?”
“그러니까 선생은 학교를 더 키우기 위해 학생을 이용하는 거고, 또 학생은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학교의 지원을 이용하는 거고.”
“그래도 뭔가 그건 너무 팍팍하지 않아?”

내 말에 잎새는 쯧쯧 거리며 말했다.

“원래 돈이라는 게 팍팍한 거야.”


“... 거기에 포켓몬을 이용해도?”

내 말에 잎새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잎새는 날 보더니 천장을 보더니 또 책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래.”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 담 시간 화학이었지? 책 사물함에 있는데.”

하면서 잎새는 후다닥 사물함으로 향했다. 나는 그 뒷모습에서 거짓말이라는 걸 느꼈다. 잎새는 푸린을
좋아하니까. 포켓몬에게 해가 되는 일은 못할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이 세계에서 포켓몬은 어떤 존재일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
.
.

7 교시가 끝나면 종례를 하고 야자를 하는 사람은 남고 그렇지 않을 사람은 집에 간다. 분명 내가 일학년 때는


무조건 자습이었던 것 같은데, 포켓몬 월드로 넘어오면서 많이 바뀐 것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난 물론 자습을
뺐고.

일주일 정도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 포켓몬 월드의 고등학교에 대해서 조금 적응하고 있었다. 7 교시가
마치면 나는 메리프와 같이 공원으로 가서 이것저것 연습을 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한 일곱 시
정도가 되는데, 집에서 간단하게 씻고 저녁을 먹고, 공부를 시작한다.

“하... 역시 공부하는 시간이 줄었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젖혔다. 늘 같은 모양의 방 천장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집에 돌아와서 공부


중이란 게 되겠다. 분명 내가 포덕이긴 했지만 공부를 안 한 건 아니라고. 포켓몬 덕질할 때만 빼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성적은 중상위권정도니까.

meee~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메리프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뒹굴거리고 싶어. 좀 쉬고 싶다. 솔직히 지금 상황 공부


안된다고. 머리가 복잡해.

난 돌아갈 수 있을까,로 시작되는 고민은 과연 내가 메리프를 이대로 키워도 될까, 라는 생각으로 또 그 생각은
이 포켓몬 배틀이라는 것에 대해 흘러가고 그것은 또 체육관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오늘 체육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메리프는 당연히 체육관전 하고 싶어! 라고 했고 엄마에게 물었을 때도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빠에게 전화했을 때 아빠는 일단 주말에 얘기하자는 말이 주였지만, 네 의견을 존중할 것이라는 말도 해 주셨다.
그래 내가 문제였다 내가.

이곳은 게임 안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든 생명들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냉정한 현실 속에 내가 있었다. 내가


살던 세계와 이 세계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다르면서도 같았다. 포켓몬의 존재 하나로 내 고등학교 생활은 그
궤도를 달리 했다. 학교에 포켓몬을 데리고 가고 포켓몬이 나오는 시와 소설을 배우고 체육시간에 배틀을 배우고
양호실에서 포켓몬을 치료하고...

그러면서도 같았다. 잎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학교의 위신만 생각하고 자기 안위를 챙기는, 그리고
학생의 진로보다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생들. 체육관전의 배지는 트레이너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가산점에 불과하다.

그에 포켓몬은 이용당하는 게 아닐까.

의자에 기댄 채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는 날 보고 메리프가 천천히 다가와 메에 하고 울었다. 내 발밑까지


다가온 메리프를 나는 안아 들었다. 체육관전을 한다고 하면 말이야. 나도 메리프를 가산점을 따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나. 메리프가 다치고 아프게 될까 봐. 언제 떠나 버릴지 모르는 나 때문에.
“흐아아...”

일단 그만 생각하고 공부하자. 나는 눈을 감고 메리프의 따스한 이마에 내 이마를 대었다. 내 걱정을 조금만


덜어줘. 내가 이마를 떼고 눈을 뜨자 메리프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조금 머리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메리프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우, 하아. 공부하자 이지은. 이틀 뒤, 삼월 모의고사다.

24 화

w. 도여은

“후아...”

나는 긴장했던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컴퓨터용 사인펜, 그러니까 컴싸를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


펜이 시험지 위를 굴렀다. 그리곤 맨 뒷자리 애가 OMR 카드를 걷기 시작했다.

“망했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OMR 카드를 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아니, 카드를 다 걷고
선생님이 나가자 반은 금세 웅성웅성해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진짜 내가 살던 곳과 다를 것 없는 고등학교인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상에 엎어졌다. 다른 애들하고 답 맞춰보고 싶지 않아. 아니, 그럴 기운도 없다. 곧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답지를 나눠줄 텐데 뭐. 그런데 잎새는 또 생각이 다른 듯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깐이었지만. 곧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답지와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를 나누어 주셨다. 작은 종이에는
표가 하나 그려져 있는데 한 줄에는 과목명이 그 옆줄에는 빈칸이 적혀있는, 그리고 그 표 위에 3 월 모의고사
가채점이라고 적혀있다. 한숨이 나온다.

나는 붉은 펜 하나를 꺼내서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5, 2, 1, 2, 3 그다음은 3, 1, 5, 4, 4...


그리고... 그렇게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까지 다 채점을 마치고 가채점 점수를 적는데 손이 달달달 떨렸다.
아, 놔 진짜. 점수 떨어졌다.

나는 반쯤 엎드려 가채점 점수를 적고는 어질러진 시험지를 정리해 번호순으로 앉았던 자리가 아닌 내 자리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가 돌아온 듯 잎새가 쳐져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물었다.

“왜? 망했어...?”

나는 한 손으론 가채점 점수가 적힌 종이를 쥐고 책상 위에 고개를 박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으엉. 망했어.”
“에이 망했으면 얼마나 망했다고 그래.”
“아, 진짜 망했어.”
나는 찢을 듯이 시험지를 구겼다가 다시 착착 폈다. 수리나 외국어는 그럭저럭 유지했는데, 언어에서 팍
떨어졌다. 아니, 비문학까지는 괜찮았는데... 문학에서 포켓몬들이 엄청 나왔다고...! 아니 시에 동식물이
나왔던 것이 포켓몬으로 바뀌는 것 까지는 어느 정도 괜찮겠는데 아니, 소설에 포켓몬이 나오는 건... 아무래도
읽었던 소설들이나 줄거리 봐놨던 소설들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은...

나는 옆의 잎새를 바라봤다. 저 평온한 얼굴... 분명 시험 잘 쳤을 거야. 나는 너는 어때라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분명 배 아픈 점수를 말할 것만 같아서.

나는 그저 가채점 점수를 제출하려 일어나 교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오려는데 어떤 여학생 무리가
들어오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전체 점수 중에서 1 개 틀렸다는데? 진짜 대단하다.”


“그거 언어영역이었다며? 은근 언어에서 약하려나?”
“그렇단 말은 수리 다 맞았다는 말이잖아... 완전 후덜후덜인데? 어떻게 그걸 다 맞아...”

대략 그런 얘기였다. 나는 다시 자리로 향하면서 잎새한테 말했다.

“누가 전체에서 하나 틀렸나 봐.”


“아아, 그거? 오바람이야.”
“에...?”

나는 놀라서 잎새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아?”

내가 잎새에게 물으니까 잎새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 아는 수가 있지~ 하면서 얼버무렸다.

“그럼 한지우는, 걔 점수까지 아는 건 아니겠...지?”

내 물음에 잎새는 후후후 웃더니

“글쎄~”

라는 걸 보니 분명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거야. 너 알고 있는 게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면 가히 흑막


아니야...?

“도,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아니, 내 점수까지 아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 시험지를 그러모으며 물었다.

“네 점수까지 어떻게 알아. 마음만 먹으면...!”

잎새가 천천히 뻗는 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잎새가 웃으면서 농담이야, 하는 말에 나도 웃었지만 확실히 지금


내 점수까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학교 전교생의 점수를 알고 있다거나...”


“에이, 설마.”

잎새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한다는 듯 내게 바짝 붙더니 소곤소곤 말했다.
“그 녀석들 요주의 인물이라고.”
“...왜?”

나도 잎새의 박력에 눌려 소곤소곤 얘기했다.

“그야 잘생겼으니까?”

하면서 웃어버리는 잎새 때문에 나는 김이 빠졌다.

“뭐야, 또 농담이야?”
“에이 농담까지야. 잘생기긴 했잖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엔 없었다. 레드가 잘생겼다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그렇다 쳐도 그린까지


잘생겼을 줄은 이곳에 와서 알았으니까.

“그런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다른 건 뭔데?”
“이번에 6 반 반장이 누가 됐는지 알아?”

갑자기 반장선거는 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우리 반도 반장 선거를 했지만... 그래서 잎새가


부반장이 되었고.

“이번에 6 반 반장이 오바람이래.”


“에에에...? 걔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잎새는 쯧쯧 하면서,

“전학이랑 반장이랑은 상관없지. 아니, 이번 반장선거 거의 인기투표 수준이었다는데? 은근 남자애들도 오바람


좋게 보고 있어서. 사실 여자애들이 오바람 많이 좋아들 하는데 오바람은 별로 그런데 관심 없거든. 그런데
성격도 좋으니까 남자애들하고도 좋게 좋게 지내나 보지.”
“하긴 여자애들이 오바람 좋아하긴 하겠다.”
“그렇지. 잘생겼지, 집안 빵빵하지, 공부는 물론 운동까지 잘해. 그 정도면 엄친아를 넘어서는 스펙이지.”

나는 흐음 하고 턱을 쓸었다. 역시 주인공이란 그런 스펙을 가졌던 건가? 배틀에서는 만년 이인자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엄청 뛰어난 엘리트라는 설정? 게다가 얼굴도 잘생겼어. 흐음...

“그런데 한지우는 왜 주시하는 건데?”

사실 여자애들 사이에서 오바람 얘기가 많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지우는 거의 관심들 없던 것


같던데 말이야. 아니 오바람이 너무 화젯거리라서 그런 것이려나? 그에 잎새는 간단히 대답했다.

“여.자.의.감?”
“에...?”
“뭐랄까, 오바람이 엄청 뛰어나서 가려져 있지만 말이지. 한지우 그 녀석을 보니까 은근 뭔가 있단 말이야.”

이번엔 진짜로 중요한 얘기를 하듯 잎새는 말소리를 죽였다.

“한지우랑 오바람 같이 자취해. 그리고 소꿉친구라고. 너도 계속 봤잖아 둘이 엄청 친해 보이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이언테일이다 뭐다 하면서 오바람은 우리랑 같이 밥을 먹고 있었고, 피카츄도


매번 와서 사과 한 조각씩 먹고 가고 메리프랑 놀면서 이것저것 같이 훈련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그에 한지우도
몇 번 얼굴을 비치곤 했지만 밥은 어디서 먹고 오는 건지.

“쨌든 그래서?”

내 말에 잎새는 뜸을 들이더니 이에 입을 열었다.

“무슨 냄새나지 않아?”


“무슨...”
“아니, 소꿉친구에 같이 동거에 잘생긴 두 남자...!”
“...BL...?”

내 말에 잎새가 깔깔 웃었다.

“너 뭐 좀 아는구나?”

잎새가 하는 말에 내가 당황해서 뭐, 뭐...! 라고 하며 대꾸했다. 아니, 레드그린 2 차 창작을 많이 읽긴


했지만 뭐...! 내가 어, 그런 것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해킹파일을 좋아하지만, 그렇지만 포켓몬스터
관련 동인지를 안 본건 아니지만...! 어...?! 그리고 2 차 창작에서 너랑 오바람이랑 자주 엮인다고...!

라는 말은 못 하고 말았지만... 내가 말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모양새에 잎새는 배 아파라 웃었다.

“농담. 농담이야... 흐하. 진짜 재밌다고.”

분명 날 놀려먹은 게 분명했다. 내가 잎새를 째려보자 잎새는 웃느라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닦았다.

“아니, 미안. 후흐흐 네 반응이 웃겨서 그랬어.”

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잎새는 말을 이었다.

“앞의 이야기는 농담이었지만 말이야. 한지우 라는 남자애가 심상치 않다는 건 확실해. 사실 그 녀석


연구소에서 지원받는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연구소라는건...?”
“오박사님의 연구소 말이지.”
“에...?”

내가 물음표를 띄우자 잎새가 답답한 듯이 이야기했다.

“연구소에서 지원받는 트레이너라고. 몰라? 연구소에서 연구를 위해서 트레이너를 지원하곤 하잖아. 그런데
한지우가 포켓몬 받은 지도 얼마 안 된 녀석이 연구소 지원받는 트레이너라는 거지.”

내가 헤에 하고 잎새를 보자 잎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쨌든 그래서 그 녀석한테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인 거지.”

나는 조금 소름 돋았다. 아니, 레드가 진주인공이라는 걸 꿰뚫어 본 건가? 아니 그렇게 치면 너도 반쯤


주인공인데 말이야.

“...그런데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건데.”


자취를 한다거나 연구소에서 지원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야.

“아? 그거?”

잎새는 가만히 웃었다.

“비.밀.”

25 화

w. 도여은

3 월 모의고사를 친 지 이틀이 지났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나는 메리프와 같이 하교 중. 가채점을


확인하고 난 뒤에 예상 등급표를 살폈더니 역시나... 외국어는 간당간당하게 현상유지를 했지만 수리는 한 등급,
언어는 2 등급이나 떨어지고 말았다.

“야자를 하는 게 좋으려나.”

나는 한숨 쉬듯 말했다. 하지만 메리프와 같이 훈련하는 시간도 빼기 싫고. 그렇다고 해서 짐전을 나갈 거라고


확실히 정한 것도 아니고...

3 월 모의고사를 친 뒤 교실은 더 어수선해진 기분이었다. 분명 방학 후의 그 어수선함이 아닌 앞으로에 대한


고민에 그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결정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미 스타팅 포켓몬이든 집에서 기르던
포켓몬이든 포켓몬을 받았고, 3 월 모의고사도 쳐버렸다. 그러니까 짐전을 통한 가산점을 노릴 것인지 아닐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다.

두 가지 같겠지만 사실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전략인 것이겠지. 일단 8 배지를 딴 뒤 리그에 진출하면 리그자
전형으로 아주 쉽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일단 리그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또 포켓몬
트레이너가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서 트레이너가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포켓몬
트레이너라는 것이 한 가지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포켓몬 배틀이라는 것은 정말 최고의
스포츠니까. 그리고 리그라는 것은 일 년에 한 번뿐인 아주 커다란 대회이다.

배지를 3 개만 따는 방법도 있다. 배지가 가산점으로 인정되는 것은 3 개부터. 그것에서 하나씩 늘수록 가산점은
더 높게 책정된다. 그래서 3 배지전이 1, 2 배지전보다는 더 까다롭게 시합하게 되는 것이고. 대체로 이런
전략을 택하는 경우는 내신을 신경 쓰면서 2 년 동안 여유롭게 3 배지를 딴 뒤 수시로 가는 전략, 혹은 3 배지를
빨리 딴 뒤 수능에 올인해서 가산점을 업고 정시로 가는 두 경우로 나뉜다. 이런 방법은 은근 배틀에 자신감이
붙으면 조금 더 노력해서 배지를 하나씩만 더 따도 가산점이 계속 올라가니까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3 배지를
아예 따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일단 포켓몬 배틀을 좀 할 줄 알아야 하는 편이다.

배지를 따지 않고 공부에만 올인하는 경우도 많다. 일단 이 경우에는 가산점을 받을 수 없으나 남들이 포켓몬
훈련할 동안 공부에 매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포켓몬을 키우지 않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있게
된다. 특히 3 배지를 따려고 했으나 실패한 경우의 아이들보다는 더 앞서 나갈 수 있으니 그것도 하나의 강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점으로는 아예 갈 수 없는 학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틀학과라든가 생물학과라든가
수의예과라든가 체육교육과라든가 등등... 대학마다 다르긴 하지만 배지가 없으면 내지도 못하는 과가 생긴다는
것. 그래도 그건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과 즉 국문과와 같은 문과계열이라거나 경영학과,
경제학과라든가 공과대학이라거나 대부분의 학과는 그러한 제한이 없다. 가산점은 받아도.

공대에 들어가는데 배지가 가산점이 들어간다는 건 좀 모순적이긴 하지만 마치 이건 국문과 가는 학생이 수리


점수를 따져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좀 수긍되기도 하는 결과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문제이다.

담임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상담 들어갈 테니까 부모님하고 상의해오라고 하셨는데... 나는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 대학을 준비해야 할까. 일단 남자애들은 되든 안 되든 배지 가산점이다, 라고 나서는 반면에 여자애들
중에 배지 가산점을 노리는 애들은 적은 편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체육을 하기 때문에 내신에서의 체육의 비중이
높아 배틀을 아예 안하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자애들에게는 배틀이라는 게 과시적인 부분이 있는 건지,
싸움이라는 것이 남자애들 정서에 맞는 것인지는 몰라도 배지를 시작도 안 하고 포기하는 걸 좀 자존심...?의
문제로 보고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일학년 때부터, 아니 그 전에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한 애들도 많았다. 사실 그중에 한 명이 잎새였고.


잎새는 3 배지까지 도전한 뒤 수시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지금에서야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고, 마치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라는 생각도 들고... 마치 아직도 이곳이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까.

mee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메리프가 나를 불렀다. 나는 웃어 보이며 메리프를 안아 들었다. 메리프는 예민하다.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원래 세계의 생각을 할 때마다 나를 부르곤 했다. 아니면 내
표정에 드러난다거나. 무리 생활을 하는 메리프들의 특성상 이런 것에 예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이 세계를 살았을까.

메리프를 안은 채로 터벅터벅 길을 걷다 보니 금방 아파트였다. 자동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어락을 열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모다피는 물론이고 가디까지 마중을 나왔...다...?

“왔어?”

아빠 목소리였다.

“아빠? 벌써 왔어?”

아빤 원래 주말에 집에 오기는 했지만 토요일 아침에야 왔지 금요일 저녁에 오지는 않았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서 프린트 뭉치를 보고 계셨다. 이것저것 자잘한 포스트잇 같은 게 붙어있는 게, 연구자료인가?

“내일 또 바깥 집에 올 거잖아?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이리로 바로 왔지.”

바깥 집이라는 건 연구소에 있는 집을 의미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이 집은 안집. 지난주에도 야생 포켓몬과


배틀도 그렇고 체육시간에 할 배틀 대비하는 면에서 바깥 집에 갔었는데 아마 이번 주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일찍
오신 듯했다.

“내일 나 데리고 연구소로 가게? 아직 일거리 남았나 봐?”


“뭐, 이것저것.”

나는 현관에 있는 물티슈를 한 장 뽑아 메리프의 발을 닦고는 집 안으로 들였다. 나도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 아빠 옆 소파에 앉았다.

“3 월 모의고사 쳤다며?”

아빠가 테이블에 프린트들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눈을 돌리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뭐... 전보다 떨어졌어...”


“어느 정도 포켓몬이 생기면서 신경 쓰는 게 많아졌으니까.”

아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우리 집 가풍이 자기 할 일은 알아서 하자, 라는 것이라 그렇게 큰 간섭은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짐전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라고 물어본다.

“음... 사실 담임 선생님도 부모님하고 상의하고 오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음... 생각을 해봤는데.”
“해봤는데?”

나는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나는 헤헷 하고 웃어버렸다. 아빠는 그럴 줄 알았다며 헛웃음 지었고.

“그럼 포켓몬을 연구하고 싶다는 꿈은 포기야?”

아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포켓몬... 연구...? 내가?”


“그래, 너 포켓몬 연구하고 싶다고, 아빠가 롤모델이라고 말하곤 했었잖아. 지금은 또 생각이 바뀌었다거나,
그런 거니?”

아빠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당황했다. 사실 원래의 세상에서 내 꿈은 생물학자였다. 어릴 때


아빠가 생물학자로 일하면서 어디에 놀러 나갈 때면 이 동물은 무엇이고 이 식물은 무엇이고 하며 동식물에 대해서
이것저것 가르쳐 준 게 나는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도 아빠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커서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가끔 보곤 했던 과학 잡지들들 보곤 했을 땐 동물이 그리고 식물이,


바이러스, 미생물 등등 생명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자연의 메커니즘이 신기하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더 알아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이 세계에 살고 있던 나는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나처럼 다른 세계로 건너가 버린 건지, 아니면 지금 이 몸


안에 갇혀 있는 건지. 그럼 원래 세계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나는
아빠의 앞에서 조금 고민하다 말했다.
“아니, 아직 포켓몬 연구하고 싶어.”

내가 아니라 이 세계에 살던 나,를 위해서...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지내고 있는 이 세상에 원래 지내고 있던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포켓몬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포켓몬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이 세계의 나, 라는 존재.

내가 살던 세계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다른 세상으로 온 것처럼 느꼈던 건 이곳에 남아있는 또 다른 나의


존재가 확연히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마, 이 세계에 살던 나라는
존재가 이곳으로 오게 되겠지. 그렇다면 함부로 지내고 살아갈 순 없잖아.

“그러면 뭐가 그렇게 고민인 거야? 일단 생물학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지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는 뜸을 들였다.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진 않을까? 나는 아빠를 바라봤다. 원래 세상에 살던 아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주시는 아빠가 아닌 건 아니야. 나는 조금 용기를 내서, 그래도 조금
우물쭈물하게 말했다.

“나 배틀이 싫은 건 아니야. 그리고 메리프도 그렇게 좋아하고, 강해지고 싶어 하고. 하지만 말이야. 짐전은
조금 다른 것 같아.”

아빠는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왠지 내 자신만을 위해서 배지를 따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른 애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다가온 메리프를 안아 다리 위에 올렸다.

“왠지 이 녀석을 내 사사로운 이익을, 가산점을 위해서 이용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게 좀 신경쓰여.”

아빠는 아무 말 않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런 생각이 조금 이상한 걸까 생각하며 아빠 눈치를 봤고. 아빠는


내 머리를 헝클였다.

“아니, 오박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간다고 했던 말 말이야. 이제야
그게 이해가 가네.”

나는 물음표를 띄우며 아빠를 바라봤다.

“짐전은 원래부터 가산점을 위한 건 아니었어. 정상을 추구하는 트레이너들이 리그전에 나가기 전 체육관에서
훈련하던 것이 유래가 되었지. 그때는 배지 없이도 리그를 나갈 수 있게 돼 있었거든. 아, 그러니까 아빠가
어렸을 때 말이야.”

나는 아빠가 어렸을 때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는 이런저런 게 다 혼란스러웠을 때였으니까. 배지라는 건 그 체육관 관장이 그 트레이너가 강하다는 걸


인정해 주는 것에 불과했어.”
“강하다는 것?”
“그래 강하다는 것. 내가 전에 말했었지? 포켓몬은 배틀을 통해 강해지고 그리고 진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 말이야. 그건 포켓몬들 스스로의 약육강식의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지만 배틀은 그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본능만이 판치는 그런 것은 스포츠가 아닌, 살육에 불과한 것이란 거지.”

나는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배틀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배틀이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건 포켓몬의 본능만이 아닌 트레이너와의 호흡이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체육관전에서는 포켓몬의 강함만 보는 것이 아닌 거야. 그 포켓몬과 트레이너 간의 유대, 믿음, 애정까지 보게
되는 거야.”
mee~

나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산점이니 이익이니 신경 쓰지 말고, 너 자신을 시험한다는 느낌으로 그 기분으로 메리프와 함께 나가 보는


건 어때?”
meee~ mee! me~

품 안에서 메리프가 짐전, 나도, 좋아!를 반복해서 울어댔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끝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관장이 배지를 주는 그 본래의 의도로, 최초의 마음으로.”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리프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물었다. 괜찮겠어? 메리프는 당당히
대답했다. 응, 당연하지!

1-5. 꽃봉오리가 부푸는 밤

26 화

w. 도여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내가 눈 둘 새도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야생 구구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지나갔고. 일상적으로...? 그리고 멀리서 밀탱크 목장이 보이고... 음... 쨌든 쓱쓱 풍경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 기차가 열심히 달리고 있구나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생각을 많이 하지는 말자. 하하.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메리프는 내 무릎 위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고나 할까. 사실 이제


3 주가 되었을 뿐인데. 그런데 메리프가 평화롭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자버리고 싶은데... 어,
양이기 때문이려나? 그래도 금방 도착하니까 참아야지.

나는 대신 보고 있던 폰을 들었다. 방금 가고 있다고 카톡했었는데 금세 잎새에게서 답이 와 있었다.

[잎새] 그럼지금기차타고
[잎새] 가는거야??

나는 메리프 머리 위에서 카톡 답문을 보냈다.

[ㅇㅈㅇ] 엉엉
[ㅇㅈㅇ] 이제 한 사십분
[ㅇㅈㅇ] 정도면 도착할듯
[잎새] 생각보다
[잎새] 별로
[잎새] 안머네
[ㅇㅈㅇ] 그러게
[ㅇㅈㅇ] 나도 찿아보면서 놀랐어ㅋㅋㅋ
[잎새] 그래도강원도인데
[잎새] 학기중엔
[잎새] 별로안하지안아???
[잎새] 짐전??
[ㅇㅈㅇ] 그게;;;; 아빠때매

전략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학기 중에는 짐전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어제 아빠와 상담 후 바로


그다음 날인 오늘 예정도 없이 아침부터 체육관을 향하고 있는 것이고. 아빠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주의였으니까.

[ㅇㅈㅇ] 아빠가 바로 신청해버리자고


[ㅇㅈㅇ] 해가지고
[ㅇㅈㅇ] 3 월 모평도 끝났겠다
[ㅇㅈㅇ] 겸사겸사
[잎새] ㅎ.ㅎ
[잎새] 강원대는
[잎새] 어떠려나
[잎새] 궁금하담ㅎ
[ㅇㅈㅇ] 나도ㅋㅋ

스토리 깨느라 바빴기 때문에 지나가듯 보았던 게임 속 체육관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이 세계에서는 체육관을 국가에서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국립대학교에서 하나씩 체육관을 맡고 있었다. 본래는
사적 체육관이 있었고 지금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정이 되는 건 국립대 체육관에서 발급되는
배지들뿐이라고 하더라. 리그전에 출전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내가 가는 곳은 강원도 춘천의 강원대.
황웅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짐리더로 있는 곳이다.

[잎새] 근데
[잎새] 강원대는바위타이
[잎새] 이자나
[ㅇㅈㅇ] ㅇㅇ
[잎새] 반이땅타이ㅂ이던데
[잎새] 갠찬겠어???
[ㅇㅈㅇ] ;;;;;[ㅇㅈㅇ] 그래서 아빠가
[ㅇㅈㅇ] 나고생좀하라고
[ㅇㅈㅇ] 여기로 신청한듯....

잎새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마, 대부분 첫 배지전은 약점 타입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나도


처음엔 물 타입 체육관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필드가 수영장이던데... 그것도 좀
고민이 되긴 했지만. 그건 그렇고 내가 방심하는 사이에 아빠가 덜컥 이곳으로 신청해 버리고 만 것이다. 물
타입 트레이너가 있는 부산보다는 여기가 가깝기도 하고 아이언테일도 수련하라는 명목으로...

[잎새] 아...아버지가???
[ㅇㅈㅇ] ㅇㅇㅇㅇ...ㄸㄹㄹㅠㅠㅠㅠ
[잎새] ㅠㅠㅠㅠㅠㅠ
[ㅇㅈㅇ] ㅎ....
[잎새] 그건그러고
[잎새] 대다나다
[잎새] 벌써배지전이라니
[ㅇㅈㅇ] 엥ㅋㅋ 아직 따지도
[ㅇㅈㅇ] 안았는데
[잎새] ㅋㅋㅋㅋㅋㅋ그래돜ㅋㅋㅋ
[잎새] 떨리겠담ㅎㅎㅎㅎ
[ㅇㅈㅇ] ㅇㅇ... 좀떨려ㅎㄷㄷ

나는 인터넷에서 찿아 봤던 지도를 생각하면서 그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봤다, 처음 가는 춘천도 낯설을 테고...


혼자 기차를 탄 것도 처음이라 떨리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리고 지금 가는 것이 체육관전을 위해 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더더욱. 도롱도롱 자고 있는 메리프는 아닌 것 같지만.

[잎새] 쨌든
[잎새] 힘내공
[잎새] 잘갓다오공
[ㅇㅈㅇ] 옹옹 그램~
[잎새] 파이팅!!!
[ㅇㅈㅇ] !!!!
[잎새] 갔다오ㅏ서얘기도
[잎새] 해조
[ㅇㅈㅇ] 엉엉 나중에 톡할게ㅎ

나는 그리곤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여전히 바깥은 나무들이 쌩쌩 지나가고 있었고 어느 부분은 여전히 눈이
남아있었다. 그 모습에 내리면 추울 것 같으면서도 지금 기차 안의 따뜻함에 바깥의 차가움이 허상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차가운 창문을 살짝 손으로 만져보는데, 따끈따끈 무릎을 데워주고 있는 메리프는 눈을
감은채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꼬리를 살짝씩 떨고 있었다.

이제 3 주가 조금 넘은 나이. 벌써 이렇게 배틀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제대로 된


배틀은 거의 안 했지만... 그래서 더 걱정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짐전 얘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짐전을
보내다니... 아빠가 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래도 메리프는 이제 성체 메리프의 몸집만큼 커버렸다. 무릎을 가득 채우고도 꼬리 둘 때가 없어 무릎 밑으로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꼬리를 보면서 나는 새삼 이 아이가 많이 컸음을 느꼈다. 아니, 아직 생각은 어린애지만.

언젠가 이 아이가 진화를 한다면 엄청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아니, 그 때가 되면 다르려나. 지금은 한
번도 진화라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일지도...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소형 포켓몬인 것이 좋은 것 같다. 아빠가
가디를 진화시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이려나. 기차도 같이 탈 수 있고. 아, 대형 포켓몬이 되었을 때도 자리
하나만 더 사면 상관없긴 하지만. 속으로 내 옆자리에 앉아있을 전룡을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났다.

나는 메리프가 깨지 않게 살며시 털을 쓰다듬으면서 어서 춘천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것뿐이지 자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따뜻한 생물을 품에 안고 가길 몇십 분일까. 남춘천역에 다달았다.

나는 메리프를 안고 기차에서 내렸다. 메리프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을 껌뻑껌뻑하고 있었다.


"일단 남춘천역에서 내려서..."

내가 발을 옮기는데 내가 한 발짝씩 뗄 때마다 메리프의 고개도 이리저리 왔다갔다 요동치고 있었다. 이거 다시


잠든 건가?

"메리프으. 몬스터볼에 들어가서 잘래?"

내 말에 메리프는 메에, 시러, 하면서 다시 졸기 시작했다.

"내가 못살아..."

나는 일단 메리프를 고쳐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적어온 종이를 주머니에서 겨우겨우 꺼내 버스 번호를


확인했고 버스정류장을 스마트폰의 지도로 찾았다. 아, 역시 과학의 발전으로 나 같은 길치도 낯선 길을 갈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포켓몬 세계에 온 것보다도 스마트폰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더 큰 재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닌텐도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물론 닌텐도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있는 나는 닌텐도를 사지 않은 모양이었다. 포켓몬


게임이 없으니까 굳이 닌텐도를 살 필요가 없었는 걸지도 모르지.

휴으...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저쪽에서 오고 있는 버스를 탔다. 버스카드 꺼내다가 메리프를 떨어뜨릴
뻔한 것만 빼면 괜찮았다. 하하. 그때 메리프가 잠을 확 깼다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그리고 강원대정문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말 그대로 강원대 정문을 만날 수 있었다.

27 화

w. 도여은

정문은 세 개의 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하면서 나는 정문을 넘었다. 잠 깬


메리프는 들뜬 마음으로 내 옆을 졸졸 따라왔다.

뭔가 배지를 하나 따기 위해서 서울에서 춘천까지 가야 한다는 건... 모험...일까나? 나는 게임 속의


모험이라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 각 지방을 돌아다녀야 되는 이 시스템이 참으로 존경스러우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록숲이 없는 걸. 기차를 타고 배지를 따러 간다니 얼마나 낭만이 없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진짜로 학교 때려치우고 진짜 게임처럼 모험을 다니고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으면 응... 진짜 적응 못했을지도.

낭만이 없는 건 체육관을 기차로 가는 것보단... 역시 체육관 신청을 인터넷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음... 마치 한자급수시험을 신청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고 할까나. 한국포켓몬체육협회에서 간단하게 강원대
체육관 배틀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빠가 내가 저녁 먹으러 간 사이에 신청을 해버리고 만 것이고.
아니, 아빠가 카드결제를 한다고 마음대로 컴퓨터를 만져서 그래...! 부들부들...
“아빠가 멋대로 신청해 버린 게 바위타입 체육관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그리고 비수기라 그 다음날 이렇게 오게 된 것도 그렇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강원대 교정을 걸었다.
메리프도 나와 같이 발을 맞추었다. 겨울이라 줄지어 서 있는 수목들이 황량해 보이긴 했으나 그런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대학이 많은 서울에서 자랐지만 실제로 진짜 대학에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 이상하다. 기분이.

주말이라 그리고 아침 일찍 출발한 터라 아직 오전이라 학교는 한산했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물어물어 대학 내에 위치해 있는 체육관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치 나처럼 체육관을 찾는 고등학생이 많아
익숙한 모습이었다.

체육관을 들어서니 보이는 건 안내 데스크가 있는 작은 대기실이었다. 겉에서 본 크기는 커 보였는데 사실 안은


작은 걸까? 내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데스크에 있는 두 언니가 어서오세요, 하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대학생...? 나이가 그렇게 차이나 보이진 않았다. 대학 내이다 보니 대학생을 알바로 쓴다거나?

그리고 데스크 옆으로는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게임처럼 보이는 트릭 같은 걸 기대했는데 안으로 들어가야
하려나... 생각보다는 마치 잘 꾸며놓은 병원이라던가 회사 로비라던가 박물관 로비라던가... 그런 곳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저... 가이든씨는 어디에 있죠? 현실 보정으로 사라지셨다거나...? 아니,
체육관이라면서...? 가이든 씨... 또르르

“예약하셨나요?”
“아, 네.”

한 언니의 물음에 내가 대답하자 이름, 나이, 전화번호를 묻더니 1 배지전이군요, 하면서 그 언니가 일어서며
나를 문으로 인도했다. 한 언니는 카운터를 지키는지 돌아보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단 관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문하생과 시합을 해야 하는 것 아시죠? 문하생들이 쓰는 시합장은 이 문 안에


있어요. 통과를 하신다면 관장님과 배틀을 할 수 있으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세 개의 시합장이 있었다. 비수기라 그런지 시합장이 모두 비어있었는데 그중 한 곳을


내가 쓰게 될 예정인 것 같았다. 필드는 바위가 드문드문 있는 맨 땅바닥 같은 기본 필드였다. 쨌든 세 개의
필드를 보면서 그것만으로도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저 쪽에 문이 더 있는 것을 보니 그곳이 바로 관장,
짐리더와의 시합장이 있는 모양이다. 그 너머는 얼마나 클까?

“룰은 기본 배틀 룰을 지켜요. 도전자는 여섯 마리의 포켓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 배지전이라 한 명의


문하생만 상대하시면 관장님을 뵐 기회를 얻으실 수 있어요. 곧 문하생이 올 겁니다. 아, 저기 오네요.”

언니가 말을 하는 동안에 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여기로 설렁설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를


자리에 두고 그 언니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가더니 무어라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자리를 비우는 것을
책하는 것 같았는데, 음 좀 가까운 사이려나? 같은 대학생으로 보이긴 했는데.

남자는 손을 휘저으면서 뭘 그런 걸로 그러느냐는 듯이 그 언니와 몇 마디 하더니 휘적휘적 내 쪽으로 향했다.

“아아, 고등학생 도전자이구나. 나도 고등학생 때 문하생하고 배틀을 했었는데 말이지. 포켓몬은 한 마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언니가 도전자에게 무슨 무례야, 하고 일침을 두자 뜨끔하면서 말을 바꿨다.

“에, 쨌든 잘 부탁한다. 아니 합니다.”


그러고는 내게 손을 내밀자 나는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곤 나와 문하생 오빠는 시합장의 끝과 끝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체육시간에 연습한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아. 분명 첫 배지전은 가볍게 상대한다고
했으니까. 긴장 풀자. 그 안내한 언니는 심판 자리로 향했고. 나는 하나밖에 없는 포켓몬을 보냈다. 가라 메리프!
그런데 나온 포켓몬은,

“디... 디그다?”

망했어요.

“저, 여기 바위타입 체육관 아닌가요...?”

방심했다. 맞아 포켓몬스터 적을 하다 보면 첫 번째 체육관 문하생이 디그다하고 모래두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여기 바위타입이라고 해도 말이지... 단일 바위 타입이 거의 없잖아? 땅 타입도 겸한다고 해야 하나.


원래 상록짐이 땅타입이긴 한데, 하하.”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메리프로는 힘들걸? 왜 첫 배지로 여기를 했대? 상성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 알고 있어요.”

남자의 비꼬는 듯한 말에 조금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는 디그다를 보면서 나는 좀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단일 땅 타입. 전기 타입에 두배이며 전기 타입의 공격을 무효화. 디그다는 빠른 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일단.

“그런데 전기타입 포켓몬으로 여길 올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그건 너무 여기를 만....”


“메리프, 목화포자!”
“야, 나 말하고 있...!”

아니, 시합은 이미 시작한 거잖아요? 일단 여기는 사정 봐줄 수 없거든요. 땅 타입에게는.

메리프는 몸을 부풀려 디그다를 향해 털을 날렸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 같이 털뭉치는 빠르게 날아가


디그다에게 붙었다. 당황한 디그다는 그걸 온몸으로 받았고.

“그대로 달려가 아이언테일!”


“땅으로 숨어!”

남자는 이번엔 제대로 지시했다. 메리프가 빠르게 달렸고 목화포자의 효과로 스피드가 줄었을 테지만 디그다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땅속으로 들어갔다.

“디그다 구멍파기!”

이거 맟으면 위험하다. 전기 타입한테 땅 타입은 쥐약이라고. 나는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짐전보다 더 떨린 건 뭐지. 아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라 뭔가 대책이 필요해.

메리프는 사라진 디그다 때문에 당황한 채였다. 나는 허둥지둥하는 메리프를 보면서 다시금 머리를 굴렸다.
일단 디그다는 땅 타입이고 두더지 포켓몬 어두운 굴을 파고 지내고 빛을 싫어한다. 빛을... 빛?
“메리프 빛이야!”
mee?

메리프가 무슨 소리냐면서 나를 돌아봤다.

“디그다가 나오는 순간 전기로 강한 빛을 내!”


“디그다, 이때야 바로 공격!”

디그다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메리프는 내 말대로 전기로 강한 빛을 내뿜었다. 나는 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바로 아이언테일!”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실눈을 떠서 모습을 봤다. 먼저 땅에 깊은 자국을 내며 뒤로 밀려나는 디그다가


보였다. 공격이 성공했어. 생각대로 직접 밝은 빛을 본 디그다는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그리고 대미지도
크게 받았고,

“아이언테일로 찍어내려!”
“디그다! 피해!”

디그다는 아직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메리프는 달려들었고 메리프의 전매특허가 된 덤블링 후 아이언테일로


찍어내리기가, 성공했다.

“디그다, 시합 불가능.”
“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데미지를 안 받아서 다행이다. 메리프는 조금 지쳐 보였을 뿐 끄떡없어 보였다.
마지막에 급소에 맞아서 쓰러졌을 거야... 아니, 그보다 유사 플래시가 도움이 되었던 걸까. 음... 게임
내에서는 메리프도 배운다면 플래시를 쓸 순 있던데, 그건 꼬리의 빛이려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메리프가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아직 팔팔하구나. 문하생 오빠는 쓰러진 디그다를
볼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곤

“한 마리 더 남았는걸.”

그러면서 모래두지를 꺼냈다.

“너무해...”

나는 조금 막막해졌다.

28 화

w. 도여은

“휴... 메리프 수고했어.”


나는 간호사 언니에게 메리프를 건네받았다. 메리프는 가뿐해진 몸으로 메에 울었다. 디그다가 힘들긴 했지만
모래두지는 다행히 메그니튜드를 배우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 오빠가 진작 썼을 테니까. 그랬다면...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땅 타입 기술을 쓰지 못하는 땅타입은 어느 정도 견제가 가능하다니까. 메리프는 왠지 특공형이긴 한데 왠지


공격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지난번에 해너츠랑 배틀했을 때도 그랬고. 아이언테일이 유전기라서 그러려나?
아니면 보스로라의 피가... 아, 전자 부유를 알고 있었으면 땅 타입쯤은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는데... 게임
상으론 그건 가르침으로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누가 가르쳐 줄 일은 없겠지.

“그래도...”

나는 메리프가 공중에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치 잠자기 위해 세는 양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둥실둥실


하늘의 구름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는 메리프라니... 둥둥 뜨면서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면, 그거 엄청
귀엽잖아...! 나는 메리프를 꼬옥 안았다. 메리프가 왜? 라는 듯이 메에 울었다.

쨌든 짐전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친 느낌이야. 벌써부터 땅 타입을 만나다니. 아니 일찍 만나서 다행인


건가... 모래두지가 아니라 고지가 나왔다면... 그랬으면... 진짜 불가했다. 그건 진짜 불가능이야.

나는 포켓몬센터를 겸하고 있는 2 학생회관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메리프 밥도 챙겨주었다. 문하생과의


배틀에서 겨우 이기긴 했지만 안내하시던 언니는 지금 현재 짐리더와 배틀을 하고 있는 도전자가 있는 관계로 이
주변을 구경하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걸. 다시 체육관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래서 체육관 주변이나 돌다가 들어가야지 생각했다. 그렇게 메리프를 안고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메리프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mee! mee!
“풀어줘?”

내가 팔에 힘을 풀자 메리프는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메리프...!”

메리프가 달려 나가는 방향에는 나풀나풀 날고 있는.... 나비...? 나비가 날아가고 있었고 그걸 메리프가 본
것이었다. 아니 이 시기에 나비가...? 그보다 쫓아가는 건 좋은데에에 메리프, 거기로 가면 어떡해?!

메리프는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풀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뛰어 쫓았고. 거기는 정원이잖아...!


메리프는 잔디밭을 넘어 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나비를 따라 뛰었다. 나도 열심히 달렸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고...
뒤이어 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지?

내가 놀라서 그 쪽으로 향하자 보이는 건 메리프가 앞발로 머리를 감싸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
아마 나무와 정면으로 박치기한 듯? 그리고... 음... 저건 새...? 포켓몬...? 처음 보는 새 포켓몬이
있었다.

“메,.. 메리프 이, 이리 와”

내가 메리프를 부르자 메리프는 이제 조금 아픔이 가셨는지 아직도 아픈 건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내게


뛰어와 품에 안겼다. 갑작스럽게 메리프가 나무에 부딪혀서 갑작스럽게 땅에 떨어진 듯한 포켓몬은 새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니, 구구들도 아니고... 작은 아기새 포켓몬인데... 아니 아기새 포켓몬이라곤 하지만 어엿한
비둘기 크기이긴 하지만...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가...? 어...
사실 나는 좀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그 새 포켓몬이 눈을 떠 나를 쏘아보더니 날갯짓을 했을 때 더
당황했고 메리프를 공격하려는 모습에 다시 당황해버렸다. 새 포켓몬은,

“메리프, 전기 쇼크.”

전기포켓몬한테 한방... 아니, 모든 비행 포켓몬은... 갸라도스...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품에서


빠져나온 메리프의 전기쇼크에 까맣고 작은 포켓몬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절... 한건가?”

나는 메리프와 함께 조심조심 그 포켓몬에게로 다가갔다. 까망과 회색의 깃털, 흰 배의 깃털. 주황색 부리...
그중에서도 가장 포인트는 살짝 위로 세워진 머리 깃이었다. 이건 바로...

“찌르꼬잖아?”

나는 잠시 충격으로 쓰러진 찌르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두 손에 가득찬 따뜻한 생명체는 다행히 심장이
뛰고 있었고 잠시 기절한 채였다. 그리고... 분명 찌르꼬가 분명했다. 하지만 찌르꼬는 분명 신오 지방
포켓몬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일본에서밖에 자생되지 않는데 어째서...?

jjirrrr

그것도 십여마리의 찌르꼬가...

.
.
.

잎새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책상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다. 폰 위로 뜨는 것은 지은이? 지은이가
벌써 짐전을 마쳤나? 잎새는 말소리가 울리는 독서실 계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왠지 다급해 보이면서도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뭐하고 있었어?
“아니, 뭐 공부하고 있었지. 너 강원도라며, 짐전은 끝난 거야? 벌써?"

잎새는 자신의 시계를 보았다. 아직 열두시 반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말이야, 찌르꼬라고 알아?


"알지, 그럼. 일본에 서식하는 비행 타입 포켓몬이잖아. 그건 왜?"

잎새는 지은이를 생각했다. 포켓몬을 보면 조금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하는 모습이라던가, 이것저것 서툴고


쉽게 놀라고 신기해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벙하다고 해야 하나. 모르는 것도
많고...

-그거 진짜 일본에만 서식하는 것 맞지?

지금처럼 이상한 질문도 하고 말이야. 잎새는 당연하지, 라고 말하면서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말하려는데 그다음
말에 어? 하고 지은이가 할 만한 어벙한 소리를 제가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찌르꼬가 여기에 서식하고 있는 것 갈다구. 그것도 십여 마리 정도.
"말도 안 돼..."
-진짠걸?

그리곤 전화기 너머로 찌르꼬의 울음소리로 추정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진짜면 좀 큰일인데...?"


-에, 왜? 좋은 것 아니야? 한국에 포켓몬이 더 많아지는 거잖아.

잎새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에휴... 이 멋모르는 애기야. 하나는 알아도 둘은 모른다.
연구소네 집 딸이 맡는지 궁금할 정도로. 아니 그래서 더 모르는 거려나. 이 온실 속에 뚜벅쵸 같으니라고.

"일단 타국가의 포켓몬이 한국에서 서식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포켓몬을 빼돌렸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고.
이건 외교문제가 엮여 있으니까. 여러모로 조금 신경 쓰이는 문제가 되긴 하지."

수화기 너머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잎새는 머리가 조금 아파졌다.

“일단... 분명 한국에 찌르꼬가 서식한다는 얘기는 정말 들어본 적이 없는 걸?”

국가적으로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진짜 모르는 것이거나. 그것도 국립대 안에 서식하고 십여


마리 정도라면 들키지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일단 찌르꼬는 무리 생활을 하지만 의심이 강해서 누군가에게 잘
띄진 않으니까. 그것보다,

“나 말고 혹시 말한 사람 있어?"
-음? 너한테 젤 먼저 전화했는데?
"그럼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는 게 좋겠다. 혹시 잡을 생각은 아니지?"
-아니, 아직 포켓몬을 더 키울 생각은 아니라서.
meeee!
-아니 메리프 지금 통화중이야. 쉿쉿.
"쨌든 오늘 본 건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좋을 걸? 경찰서라던가 포켓몬 보호소라던가 일본대사관이라던가 왔다
갔다 하고 싶은 거 아니라면 말이야."

설마 그것 하나로 그렇게 끌려 다니진 않겠지만 일이 복잡해지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진짜 그 말을 그대로 믿은


듯 지은은 말이 없었다. 잎새는 은근 순진한 그 모양새에 조금 웃음이 났다. 생각은 많은데 은근 허당에 마음도
약하고.

-그래도 언젠간 알게 될텐데?


"언젠간 알게 되더라도 그게 네가 되는 게 문제인 거지. 그리고 늦으면 늦을수록 찌르꼬의 수가 많아질 테니까.
많아질수록 한국에는 유리할 거야."
-에...?
“쨌든 그렇다니까. 공식적으로 발표 날 때 까지는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잡지도 말고. 몬스터볼은 정보가
바로 전송되니까.”
-몬스터볼이...?

잎새는 조금 한숨이 나왔다. 이 아이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

“그건 그렇고 짐전은 잘했어?"


잎새는 아직 짐전은 못했고 땅 타입 포켓몬을 만난 게 더 힘들었다는 지은의 얘길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
거기 문하생 땅 타입 쓰는 거 모르고 갔었구나. 하... 그래도 이겼으니 다행이다. 찌르꼬는... 아직까지
묻어두어야 할 정보이고.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면 다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잎새는 왠지 웃음이 났다.

29 화

w. 도여은

나는 메리프와 같이 체육관으로 뛰고 있었다. 늦었...어...! 분명 한시 반까지 오라고 했는데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지금 한시 이십오 분!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순 있겠다. 그래도 첫 짐전인데 짐리더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사실 찌르꼬에게 상처약을 발라주고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느라 조금 늦었다. 다른 찌르꼬 무리가 나무


위에 모여 있긴 했지만 전기 타입인 메리프 때문에 내려오진 못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무리 배틀은 면했달까.
주변에 찌르꼬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기절한 찌르꼬를 두고 가기엔 마음에 걸려서. 아, 상처약이 닿자마자
상처가 금세 나아지는 모습은 정말 만화 같았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전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찌르꼬를 눈 앞에 목도한 기분은


참으로 묘하고도 신기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의 안전과 나의 얌전한 고등학교 수험생활을 위해서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히 넘어가기로 했다. 잎새가 충고해준 건 이유가 있겠지... 사실 나보다는 이곳에서 살았던 잎새가
이곳의 생리를 잘 알 테니까.

스프레이식 상처약으로 그을린 부분을 꼼꼼하게 뿌려주고 잠시 있었더니 눈을 뜨면서 깜짝 놀라 날아가더라.


감사인사를 못들은 게 좀 찝찝하지만 음... 또 감사인사를 받기엔 병 주고 약주 고인 경우인 것 같아서 그것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지만... 아무래도 놀랐을 테니까. 음음. 그리고
오랜만에 메리프의 전기 공격을 본 건 착각...은 아닐 테다. 그래도 맨날 전기 훈련은 한다고.

어찌어찌 뛰어서 체육관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언니가 기다리고 있으셨는지 일어나셔서 나를 맞아주셨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고.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언니를 따라 들어갔다.

“이쪽으로 쭉 가면 바로 문이 나오는데 그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관장님이 기다리고 계셔요.”


“에... 저 혼자 가나요?”

언니가 가르킨 곳은 처음 들어갔을 땐 보이지 않았던 긴 복도였는데 아마 문하생들의 시합장을 둘러가는 구조인
것 같았다. 조금 긴장되는 것도 있고 혹시나 길을 잘못 들까 걱정도 돼서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언니는 쭉 가다 보면 커다란 문이 있을 테니까 길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고 내 등을 밀었다. 말은
존댓말을 쓰지만은 엄청 귀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마치 내가 중학생 아이들을 볼 때의 눈빛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나는 메리프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창문 밖으로는 돌아오면서 봤던 정원과 나무들이 보였고. 곧 커다란 문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문이 짐리더의 시합장이겠지.

“메리프 준비됐어?”
meee!
나는 양 손으로 커다란 여닫이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문하생 시합장 3 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시합장이었다. 조금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솟아있는 바위들은 바위 타입 체육관의 위용을 자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땅 타입 체육관인 줄 알았어요.

시합장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였다. 나는 한 발작씩 시합장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모습은 점점 가까워졌다. 삐죽한 더벅머리에 가늘고 처져있는 눈은 애니메이션으로 보았던 헬렐레하는
웅이를 생각나게 했지만 그 위압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서있는 땅의 높이는 같을진대 트레이너의 자리에 서서
바라본 웅의 모습은 정말 짐리더의 모습을 보이는... 그러니까 표본이라는 느낌?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꾸벅 인사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하고. 아니 처음 만났으면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짐리더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긴 하지만.

“저, 이지은이라고 합니다.”


“나는 웅이라고 한다. 여기 회색짐의 리더를 맡고 있지.”

웅은 내 옆에 있는 메리프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꼬마돌과 롱스톤을 내보낼 거야. 땅 타입도 섞여있기 때문에 전기 기술은 통하지 않는 것
알고 왔겠지?”
“네.”

나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도전자가 지닐 수 있는 포켓몬은 여섯 마리. 모든 포켓몬이 시합 불가능이 될 경우 시합이 끝나게 돼. 그럼,


시작한다.”

짐리더는 허리춤에서 몬스터볼을 꺼내 필드로 던졌다. 예상했던 대로 꼬마돌이 나왔다. 오늘 오기 전에 1 배지전


영상을 몇 개 봤었는데 초보를 상대하는 것 답게 단순한 전략이 공통되어 나타났다. 처음엔 꼬마돌, 그다음엔
롱스톤. 꼬마돌은 맨 먼저 웅크리기를 사용하고 그다음 몸통박치기였어.

“꼬마돌, 웅크리기!”

역시! 제대로 웅크리기 전에 빨리 선수를 치는거야.

“메리프, 뛰어가서 아이언테일!”

꼬마돌이 웅크리는 순간 메리프의 꼬리가 희게 빛나면서 꼬마돌을 후려쳤다. 꼬마돌은 비틀거리면서 뒤로


밀려났다. 그다음은 몸통박치기가 올 거다.

“몸통박치기!”
“오른쪽으로 빠지면서 피해! 그리고 아이언테일!”

웅의 지시와 동시에 내뱉은 내 지시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단순한 패턴에 메리프는 잘 피해냈고


가속도의 영향으로 비틀거리며 뒤를 도는 꼬마돌에게 메리프의 꼬리가 쾅, 하고 부딪혔다. 그리고 꼬마돌은
바닥에 조금 파묻힌 채 녹다운. 인터넷의 승리다.

“이거... 전기 기술을 안 쓰는 메리프구만.”

그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메리프는 그게 어때서, 라는 뜻으로 메에 울었고. 웅이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전기는 통하질 않는 걸. 사용해도 효과는 없을 테다.
짐리더는 꼬마돌을 회수하고 롱스톤을 꺼내보였다.

롱스톤은 그 크기가 거대했다. 시합장이 넓은 이유가 롱스톤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래도
역시 황웅이라는 사람의 포켓몬이라고 생각하기엔 역시 프레셔라든가 기합이라든가 그런 것이 부족한 느낌이야.
역시... 1 배지전이라 그런 걸까.

“다시 한 번 힘내 줘, 메리프.”

메리프는 커다란 몸집이 갑작스레 나타났음에도 겁먹지 않고 앞발로 바닥을 긁어대며 기합을 높였다. 그건 마치
싸움터 나가는 황소잖아. 너 양이라는 자각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일단,

“목화포자야!”

메리프가 부풀린 털을 롱스톤을 향해 뿜어냈다.

“롱스톤, 그대로 몸통박치기"

롱스톤은 다가오는 털뭉치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메리프에게 돌진해왔다. 나는 피해, 하며 소리쳤지만


메리프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롱스톤의 머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밀려나 뒹구는 모습에 나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시 똑바로 떴다. 내가 정신 차려야 해.

“메리프! 주변 바위로 뛰어올라. 그리고 롱스톤을 타고 올라가는거야!”


“롱스톤, 조이기.”
“목화포자를 뿌리면서 올라가!”

롱스톤은 온몸에 달라붙은 털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메리프가 몸통을 올라가면서 털을 더
뿌려대자 롱스톤의 바위틈 사이로 털이 촘촘히 배어들었고 그에 따라 조이기는 빠르게 롱스톤을 타고 올라가는
메리프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머리에 도달했을 때,

“아이언테일!”

쾅, 하고 단단한 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롱스톤은 괴로움에 머리를 흔들었고 그 위에
있던 메리프는 떨어지면서도 다행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쿵, 소리를 내며 롱스톤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하지만,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롱스톤이 힘을 내서 고개를 들려는 순간 나는 지시했다.

“다시 한 번 더 아이언테일!”

다시 쾅 소리가 났다. 롱스톤이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다시 일어날 수 없어 보여. 웅이 롱스톤을 몬스터볼로


회수했다. 메리프가 승리를 자축하며 길게 울었다.

.
.
.

“강하네. 공부하고 온 거지?”


메리프를 회수하고 회색짐의 리더 웅과 악수를 하는데 그가 물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1 배지전을 분석하고 온
것이 티가 났었나 보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 전날 밤에 인터넷으로 있는 대로 다 찾아 돌려봤어요.
그래서 꼬마돌이 웅크리기와 몸통박치기만을 사용한다는 것, 특히 웅크리기를 먼저 쓰고 몸통박치기를 이어
쓴다는 걸 알고 대처할 수 있었다.

롱스톤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았던 것도 오는 길에 계속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미리 준비했다고 치더라도 메리프도 덩치 차이가 많이 나는 포켓몬과 시합은 처음이었는데 당황하지 않고 잘
해주었다. 영상은 같이 보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해. 나라면 정말... 눈앞에 최홍만 같은 기분 아닐까?
조금 소름 돋는데, 그거.

“메리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거든요.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멋있네. 메리프 기량이 살아나던걸. 전략도 좋았고. 특히 목화포자. 단순한 명령만 내리는 초보는 벗어난 것
같았어.”

나는 칭찬에 조금 쑥스러워졌다. 나도 짐리더가 멋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동영상을 찾다가 어쩌다가
보게 된 8 배지전에서의 웅의 모습은, 그 롱스톤은 엄청 멋있었다고 생각했다. 더 크고 더 강해 보였어. 1
배지전이라 지금은... 만약 하골소실에서의 웅은 재시합을 해주었을까? 그래도, 지금 내 실력이 안 되니까.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짐리더는 회색배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회색배지를 두 손으로 받았다. 작은


배지가 내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몬스터볼에 들어가 있는 메리프도 조그마하게 진동했다. 첫 배지니까.

“바위는 강한 의지와 인내를 나타내지. 그래서 나는 바위가 좋다고 생각해. 앞으로 트레이너로 도전을
계속하다보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오게 돼. 승부에서 패배하거나 반복되는 훈련이 힘이 들 때 의지와
인내가 필요하다. 알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굉장한 각오를 하게 된달까. 장소가 장소라서 그런 걸까.

“이건 기술머신 참기.”

웅은 내게 CD 를 건넸다.

“요즘시대에 CD 라니 좀 구식인 것 같지만 말이야. 하핫. 기기가 구식이라 CD 밖에 안 먹거든. 이번 시합 때


보여주진 못했지만 상대의 공격을 참은 뒤 상대에게 받은 대미지의 두 배로 돌려주는 기술이다.”

나는 배지를 얼른 옷에 달고 건네는 CD 를 받았다.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둬야지.


아무리 봐도 일반 CD 인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기술 머신은 CD 케이스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배지는 몸에서 떼지 않는 게 좋아. 그것 여러모로 기능이 많거든. 회색배지는 일단 배지가 가까이 있으면
자신의 포켓몬의 공격이 올라간다. 또, 승부 중에 쓰는 플래시를 오랫동안 유지시켜주기도 하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게 되지.”

나는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게임 내에서 플래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잠깐 유지되는 것을


오랫동안 유지하게 하는 기능이었구나. 그런데 이 조그마한 배지에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게... 이상한 면에서
하이테크라거나.

“어찌 되었거나 수고 많았다. 오늘은 이상하게 아이언테일을 쓰는 전기 포켓몬을 둘이나 만나서 배지를 주게
되었군.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 아뇨. 일단 포켓몬센터에서 숙박한 뒤에 돌아가려구요.”

아이언테일을 쓰는 전기포켓몬이라는 소리에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이어지는 짐리더의 물음에 대답하는 걸로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엄마가 강원도에 갈 거면 조금 놀다 오라고 용돈도 넉넉하게 줬으니 조금 둘러보고 갈
생각이랄까.

“어디 갈 곳은 정했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지리를 잘 몰라서요.”

사실 전날 갑자기 배틀 준비한다고 강원도에 대해 아무것도 안 알아본 건 안 비밀.

“그럼 말이야. 트레이너라면 거길 한 번 가보면 어떨까?”

나는 짐리더의 추천에 귀를 기울였다.

30 화

w. 도여은

“그러니까, 종점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는 것이 삼십 분을 넘겼을 때부터 메리프는 자진해서 몬스터볼에 들어가고 말았다. 기차는 괜찮더니만
버스는 좀 멀미가 심한 듯. 원래 잘 들어가지 않는 몬스터볼에 스스로 들어가려고 하니 참으로 별일이다.

왠지 혼자 걸으려니 어색한 걸음을 옮기며 내가 도착한 곳은 옥광산이었다. 나는 춘천에 옥이 난다는 걸 처음


알기도 했거니와 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갈 이유는 없었겠지만, 회색짐의 리더가 추천하는 곳이라고 하니 안 갈
수가 없었다.

짐리더는 이곳에 오는 트레이너에게는 모두 옥광산에 가볼 것을 추천하는데, 그 이유는 옥광산 체험 갱도


안쪽으로 트레이너만 출입할 수 있는 인공동굴 즉, 갱도가 있다는 것이고 그 안에서 드문 확률이지만 야생 삐삐와
더 드문 확률로 픽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옥광산은 원래 삐삐의 서식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옥이 발견되고 그것을 채취하는 것에 열을 올릴 무렵에는


삐삐의 삐 자도 보이지 않았는데 옥의 생산량이 줄고 많은 폐쇄 갱도가 생기면서 그 안에 삐삐가 서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옥광산은 유명한 옥 생산지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달의 돌이 채취되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한다고.

포켓몬 화석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 그건 헛소문일거야. 라고 짐리더가 말한 것도 정보라면


정보였다. 잎새에게 옥광산에 가볼 예정이었다고 하니 똑같은 화석 이야기를 하긴 하던데, 정말 많이 퍼져있는
소문인가 싶었다.

사실 내가 옥광산으로 가는 것은 옥이라던가 화석이라던가 달의 돌이라던가 하는 이유는 없었다. 회색짐의


리더의 추천이라던가 잎새가 꼭 한 번 가봐, 하는 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삐삐가 궁금해서 가는 거야. 삐삐가.
삐삐라면 주변에서도 쉽지는 않겠지만 볼 수는 있지 않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그 삐삐들과 이 삐삐들은
다를 테니까. 집에서, 연구소에서 등등으로 삐로 태어나 삐삐로 자란 삐삐들은 모르는, 즉 야생의 삐삐들만의
특색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달맞이 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달맞이 춤을 추는 삐삐가 보고 싶어!

그리고 오늘은 바로 보름달이 뜨는 밤이다, 라고 운이 좋다고 짐리더가 그랬었지.

짐전을 끝내고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도 도착하니 세시였다. 일단 옥광산 체험 갱도에서 밤늦게까지 잠복,
달맞이 춤을 추는 삐삐를 보고 옥광산 찜질방에서 자는 것이 목표였다. 사실 여자애 혼자서 찜질방에서 자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찾아보니 하도 포켓몬 배지를 위한 여행이 보편화되어있어서 수험생의 숙박시설에 대한
안전적인 대책이 잘 강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뭐랄까, 수험 강국 대한민국의 파워...?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지, 쉬운 길이지만 나 은근 길치인 면이 있어서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앞을 봤다


하기를 몇 번. 결국 옥동굴 체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체험실 같은 경우에도 얌전한 소형
포켓몬은 데리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메리프를 꺼냈다. 메리프는 버스에서의 멀미가 조금 남아있는지
조금 비틀비틀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내가 안아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버스 안이 아닌 바깥공기가
시원하기는 한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흔들하며 기분 좋아하기는 하더라.

입구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완전 옥천지였다. 바닥도 벽도 장식품도 옥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다 보니 여러 설명들과 함께 옥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진짜 진품인 옥이다 보니 가격이 장난 아니긴
했지만 메리프와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가는 것은 재미있었다.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느긋하게
옹기박물관도 구경했다. 메리프가 들어가도 넉넉할만한 옹기는 물론이고 키가 나만한 옹기까지. 이것저것 보다
보니 도착한 곳이 체험 갱도였다.

채광 후 상태 그대로를 보존한 체험 갱도라고 적힌 팻말을 보며 들어가니 바닥을 닦아놓은 것만 제외하면 옆의


울퉁불퉁한 돌들이 직접 맨 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정말 동굴을 연상시켰다. 조금 어두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전구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벽에 남아있는 돌을 만져보기도 하면서 메리프와 쉼터에서 살짝 쉬기도 하면서 관광하듯 정해진 코스를 걷다
보니 나왔다. 짐리더가 말했던 트레이너만 입장할 수 있다는 폐쇄 갱도. 방금까지는 인공적으로 갱도를 일반인이
체험할 수 있도록 닦아두고 전구도 켜놓고 안전을 보장해 둔 길이지만 이 앞은 다르다고 했다. 진짜 그렇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앞을 안내원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지키고 있었다.

안내원은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셨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신분증, 트레이너 카드, 배지까지 혹시 모조품이
아닌지 확실하게 검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곤 명함 비슷한 종이를 건네주셨다.

“이 앞으로부터는 삐삐 서식지를 보호하기 위해 갱도의 상태를 훼손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어요.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곳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주셔야 합니다. 알겠지요?”

어... 그건 좀 무서운데? 내가 받은 종이를 내려다보니 안내원이 준 종이에는 번호가 세 개 정도 적혀있었다.


안내원 언니는 이곳 갱도의 지리에 빠삭한 레인저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아참, 그리고 앞의 내부에는 전등이 비치돼있지 않으니 포켓몬의 플래시를 사용하시거나 손전등을 사용하셔야
할 것인데 혹시 준비하셨나요?”

나는 그 말에 조금 당황했다.

“메리프, 너 플래시 할 수 있겠어? 가끔 꼬리에 구슬 반짝반짝하곤 했었잖아 그거.”


내가 자세히 설명하자 메리프는 금방 불빛을 내기 시작했다. 배지의 힘인가? 평소에 장난으로 켰다 껐다 했던
불빛보다 더 밝고 오랫동안 빛이 났다. 내가 이 정도면 될까요? 하고 물어보자 안내원 언니는 나를
무사통과시켜주셨다.

체험 갱도가 아닌 진짜 폐쇄 갱도의 내부는 엄청 깜깜하고 바닥도 울퉁불퉁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돌에 걸려


넘어질 것만 같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메리프가 불을 밝혀서 내 주위 2 미터까지는 밝게 보였지만 돌들
사이로 그림자가 지기 때문에 조금 위험한 면도 있었다.

“그래도 손전등보단 메리프가 플래시가 더 밝네.”

내가 옆에서 걷는 메리프를 보면서 말하자 메리프가 빛나는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역시 칭찬은 메리프도
춤추게 하는 건가? 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며 앞으로 앞으로 향했다.

아예 표지판이라든가 그런 것이 없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듣기로는 들어오는 길, 나가는 길이 여러 개가


있다고 하던데... 삐삐는 보이지 않고,

“으아악...!”

푸드드득 날갯짓 소리를 내며 빛 때문에 놀란 주벳이 날아갔다. 그리고 가끔 바닥에 꼬마돌이 박혀있기도 하고.
그에 나는 메리프를 아예 안아 들고 꼬마돌을 밟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모래두지라거나 파라스도 보였는데 전에 배틀했을 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모래두지가 너무 귀엽게
보였다.

노란 몸뚱이에 검푸른 눈동자 짤막한 팔다리에 둥글게 말리는 몸통. 그리고 그 조그마한 삼각형의 귀는 정말
귀염사할 정도라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빛에 놀라서 눈을 꼭 감은 채 귀를 쫑긋거리다 도망치는 모래두지의
모습은 정말... 후... 심호흡 좀요.

파라스는... 음... 내 동심 파괴자... 또르르. 아직도 처음 파라스의 진실을 알았을 땐 진짜 놀랬었다고


한다. 진화를 하면 몸을 빼앗기는 포켓몬이라니... 마치 원래 세계의 동물의 세계가 냉혹했던 것처럼 포켓몬의
세계도 정말 냉혹하기 그지없다. 아니 그냥 검은 닌텐도의 동심 파괴라거나.

그렇게 포켓몬을 만나기도 하고 여차하면 야생 포켓몬과 배틀을 하기도 했지만 삐삐는 만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건지...! 달맞이 춤은커녕 저녁시간이 다 되도록 삐삐를 볼 수 없어서 나는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냈다.

사실 밤까지 이 안에서 버틸 생각으로 김밥을 싸왔지롱. 도시락이라기엔 소박하지만, 그리고 김밥해븐표


김밥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아, 물론 메리프의 푸드도 챙겼다. 메리프는 내가 푸드를 내려놓자마자
전속력으로 푸드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비워낸 후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들흔들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너 여기에 묻었어. 내가 메리프 입가에 묻은 푸드를 떼주자 녀석을 메에 하며 웃어 보였다.

저녁을 먹으면 본격적으로 달이 뜰 텐데, 지금까지 숨어있던 녀석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도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타났다.

“메리프! 저기 삐삐야!”

나는 먹다만 김밥을 다시 은박으로 싸면서 메리프에게 소리쳤다. 당황해서 친 소리가 동굴을 울렸기 때문일까.
삐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니, 잘됐어. 삐삐가 가는 곳이 달맞이산 광장일 거야. 아닌가...? 그건 게임
한정일 지도? 아니, 쨌든 삐삐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운 동굴을 잘도 뛰어간다. 분홍색의 둥근 몸집에 짧은
팔다리로 뛰어가는데 날아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사뿐사뿐 펄쩍펄쩍 뛰어가는 것이 마치 허공답보 같도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꼭 보고 말 거야, 달맞이 춤!

메리프와 같이 달리며 삐삐를 쫓고 있는데 삐삐가 갑자기 코너를 돌았다. 나도 따라 토너를 돌렸는데 갑자기
코너에서 빛이 비친다...?

“으...아...”

내가 달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부딪힌 사람을 덮쳐버려 함께 구르고 말았다. 다행히도 벽에 머리는 부딪히진
않았는데... 누군지 모르겠지만 꽉 잡아버린 채로 굴러버려서 누군가에게 깔리고 말았다. 메리프는 코너를 잘
돌았는지 저 멀리 삐삐를 쫒다가 내가 없어 다시 돌아오는 듯 빛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저 멀리 손전등이 구르고
있는데...

“...이거 놓지 그래?”
“하... 한지우?!”

나는 놀래서 그의 옷가지를 잡았던 손을 놓는 것은 물론이고 몸을 반쯤 일으키려다 꽝,하고 그의 턱과 내 이마가


부딪히고 말았다.

“아우으어으....”

나는 고통에 이마를 쥐고 다시 뒤로 벌렁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녀석은 내가 놓았기 때문인지 어느새
내게서 떨어졌다. 메리프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주변이 밝아졌더니, 한지우 그놈도 대미지가 상당했는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쥐고는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야야... 나는 내 이마를 문지르면서 그 모습을 보는데, 나도 물론 아프지만 저녀석 아픈 게 왠지 쌤통인


기분이 들었다. 또 피도 안 나올 것 같은 녀석이 끙끙거리는 게 사람 같기도 하고.

나는 바로 앉으면서 한지우 때문에 놓친 삐삐를 생각했다. 분명 삐삐를 잡을 생각을 한 건 아니었고 달맞이 춤이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괜히 삐삐를 겁먹게 한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나는 다가온 메리프를 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달맞이 춤을 보는 건 포기해야 하려나 생각하는데 옆에서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아픔이 가셨는지 참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지우가 저쪽에 떨어진 손전등을 주우러 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난 다시 한번 어디 가냐고 물었는데 한지우 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으셨다.

“어디로 들어왔어? 다른 입구? 난 체험 갱도 쪽으로 들어왔는데.”


“...”
“야, 피카츄는 어딨어? 이상해씨는?”

여전히 묵묵부답.

“배지는? 배지 땄으니까 들어왔을 것 아니야. 여기 배지 있는 트레이너만....”

내가 발걸음을 옮기는 한지우의 뒤를 따라 걸으니 그는 내가 짜증 났는지 내 말도 끊고 뒤를 돌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도 그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이렌이 귀를 찢을 정도로 울리기 시작했다.
31 화

w. 도여은

“뭐, 뭐지?”

나는 메리프를 꼭 안았다. 사이렌 소리가 앵앵거리며 귀를 울렸고 아무도 보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당황한 건 한지우놈도 마찬가지였는지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아, 참. 전화”

나는 들어올 때 받았던 종이를 꺼내 그 안에 적혀있는 전화번호 중 하나에 전화를 걸었다. 한지우도 내가


전화하는 것을 보다 말고 가려는 걸 내가 옷자락을 잡아 막았다.

“야, 잠깐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같... 아, 여보세요?”

나는 한 손으론 한지우의 패딩조끼 끝자락을 잡고 한 손으론 통화를 했다.

“저기 여기 옥광산 안인데요.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아, 네. 아뇨 여기 한 명 더 있어요. 네. ...


네...? 진짜요?”

망했어요.

“진짜 로켓단이라구요?”

나는 다시 가버리려는 한지우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한지우는 째려봤지만 그, 그 정도로 내가 물러설 줄 알고.


지금 비상상황이라고. 나는 레인저 분과 통화를 끝내고 폰을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지금 로켓단이 옥광산 내를 불법 점거하고 있대. 야, 야 어디 가려고!”

그는 금세 옷자락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떨쳐내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또 쫓아가서 이번엔


두 손으로 그 녀석을 잡아 저지했다.

“야, 진짜! 레인저가 로켓단하고 안 마주치게 잘 숨어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인질이 될 수도 있다고오!


레인저들이 어찌해줄 때까지 기다리라는데 어딜 가려고!”
“이거 놔.”

한지우가 내가 잡은 옷자락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아니 내가 싫은 건 알겠는데 일단, 어디로 갈 건데. 뭐 하려고!”


“...뚫고 갈 건데.”
“아니, 레인저들이 구해준다잖아! 그리고 너 그렇게 쎄? 장난해? 지금 여기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고! 아니
일단 피카츄부터 꺼내봐. 진짜 너한테 보다 피카츄한테 말하는 게 빠르겠다아!”
그러자 그놈의 주머니에서 펑 소리가 나더니 그놈의 어깨 위에 노란 피카츄가 나타났다. 그놈은 멋대로 나타난
피카츄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듯 피카츄를 반겼다.

pikapiii~
“피카츄우우우.”

내가 피카츄에게 손을 벌리자 피카츄는 내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한지우를 힐끗 보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미간을 찌푸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후후후 쌤통이다.

“뭐야, 피카츄.”
“뭐긴 뭐야. 인질이다. 그렇지 피카츄?”
ppika!

피카츄가 내 품에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나 인질이야 하는 것처럼. 한지우는 황당한 듯 쓰고 있던


모자를 반쯤 벗었다가 다시 고쳐 썼다.

“네가 점심시간에 혼자 나돌동안 나는 피카츄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단 말이야! 그지 메리프?”


meee~

한지우는 모를 거다. 아이언테일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점심시간마다 온 피카츄가 내가 디저트로 가져온


과일을 야금야금 먹었다는 것을...! 물론 메리프도 전기 포켓몬 친구가 있어서 좋았고. 아이언테일도 배우고
전기기술도 연마하고 서로서로 좋은 일이었지, 하지만 역시 사과, 딸기, 건포도 등등 자취생인 주인 밑에서
과일에 허덕이는 피카츄를 내가 구제해준 거라고! 그러니까 피카츄는 무조건 내 편이다!

“피카츄가 있으니까 어디 도망은 못 가겠지?”

사이렌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동굴을 울리고 있었지만 왠지 한지우가 내뱉는 한숨이 들리는 듯했다. 후후
성공이다.

“그래서.”
“뭐가?”

한지우가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어쩌긴 일단 레인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디서?”

어... 일단 한지우놈을 잡아놓는다고 생각을 못하긴 했는데... 아니, 왜 그렇게 띠껍게 말하냐 기분 나쁘게.
그리고 위급상황이 닥쳤는데 만난 아는 여자애를 홀랑 두고 간다는 게 어디 나라 사람 발상이냐고. 일단 여기서
계속 있을 순 없는 노릇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끊겼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나는 조금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조금 움츠러들자 한지우놈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소리를 낮춰 말했다.

“일단 숨어있자는 거지? 하... 진짜.”

그는 따라오라는 듯이 손전등을 들고 앞서 걸었다. 나는 품에는 피카츄를 안고 옆으로는 메리프의 보디가드를


받으며 한지우를 따라 걸었다. 한지우는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짙은 붉은색의 패딩조끼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검붉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레드라서 붉은색을 좋아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역시 게임 속이라서 어느 정도
게임 캐릭터가 반영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길을 살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겠고. 폐쇄 갱도라고 해도 어느 정도


트레이너가 자주 다니다 보니 표지판도 있고 가끔 희미하게 빛나는 전등도 보였지만 한지우는 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외진 길 어두운 길로 자꾸만 들어갔다.

“이쪽으로 가는 것 맞는 거야?”

내가 혹시 누군가 있을까 싶어서 소리 죽여 물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못 믿겠으면 따로 가던가.”였다.


아오... 참자 지은아. 참아.
그 이후로도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한지우는 손전등을 앞세워 계속 걷기만 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했고. 사이렌 소리가 그친 동굴은 아주 조용하고 고요했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그 동굴을 걷고
있는 나와 그녀석의 발소리뿐이었고.

그런데 갑자기 그녀석이 제자리에 서버렸다. 갑작스런 멈춤에 내가 그의 등에 부딪힐 뻔한 걸 가까스로 멈췄다.

“뭐-”
“조용히.”

그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까지 참을 정도로 긴장해버렸다. 그는 귀를 기울이는 듯했으나


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메리프 넣어. 빨리.”

내가 메리프를 몬스터볼에 넣자 한지우는 손전등도 꺼버렸다. 그러자 나와 그의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지우는 내 팔을 잡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한지우는 척척 앞으로 나가 어느 틈 사이로 나를 밀어 넣고는 자기도 그 틈
안으로 들어왔다. 틈은 성인 한 사람 들어갈 정도로 좁아서 내 패딩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찢어졌으려나... 아무래도 갱도를 파다가 말아서 생긴 공간인 듯... 시간이 지나서 흙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면서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그 틈 안에서 숨을 죽이자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역시 한지우 짐승의 촉.

내 등은 막다른 공간의 벽인 듯 울퉁불퉁하고 거친, 차가운 기운이 내 등에 닿아있었다. 품속에는 피카츄가


살짝 바르작거렸다. 그리고 내 앞을 막아서는 한지우의 등. 저 멀리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 진짜. 여기서 화석을 찾으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냥 부려먹으려는 수작 아닐까?”


“차라리 삐삐를 찾겠다.”
“크큭, 그래 삐삐를 찾는 게 더 가망성 있긴 해? 그게 우리 전문이잖아?”

목소리와 발자국이 우리가 숨어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화석이 있었다면 이 갱도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었겠어? 이미 갈아엎었겠지.”


“뭐. 희귀종인 야생 삐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협회의 입김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럼 발굴은 내일부터 하는 건가?”

그들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혹시나 들킬까 가슴이 뛰었다. 들키면 인질이려나... 험한 꼴을 당할지도. 하,
젠장.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틈 사이로 빛이 크게 들어왔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림자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보였다. 방금 바로 앞을 지나갔나 보다.

로켓단이란 악명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많이 들었다. 전국단위로 활동하는 조폭 집단. 내부 간부들은


아무도 밝혀진 바가 없지만 사람 수로 몰아붙이는 인해전술을 쓰고 꼬리를 잘 잘라내는 통에 소탕해도 계속
이어지는 조직이라고.

“아무래도? 지금은 여기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내야지.”


“불법점거는 어느 정도나 할 수 있으려나.”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목소리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들이 지나가며 보였던 모양새는 내가
게임에서 봤던 유치 찬란한 유니폼이 아닌, 진짜 영화에서나 봤던 조폭들처럼 까만 정장 차림이었다.

“길어야 한 달?”
“그럼 그 안에 이곳을 다 파내야 되겠구만.”
“겸사겸사 삐삐도 잡아가자고.”
“잘하면 달의 돌도 나오겠네.”
“아, 그거 짭짤하지.”
“레인저들은 다 잘 처리-”

이제 점점 멀어져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죽였던 숨을 훅 하고 내뱉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내


한숨에 간지러웠는지 피카츄가 귀를 살짝 떨더니 작게 츄~ 하고 소리 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한지우는
틈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자리에 메리프를 불러냈다. 메리프가 빛을 뿜어내자 그제야 안심이 돼서 나는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았다.

32 화

w. 도여은

“안 가냐?”

그가 비스듬히 틈에 기대서 물었다.

“좀만 쉬면 안 돼? 나 지금 다리에 힘 빠졌어.”

내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틈 앞에서 주저앉는 모습이 기다려주겠다는 모양새였다. 별로 마음엔


들지 않지만 내 품에 인질이 있는 이상 너는 아무것도 못하겠지. 후후.

“쨌든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진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대로 걸렸으면 배틀하고 튀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그랬으면 안에 발칵


뒤집혔을 테고. 내 말이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그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좀 민망해져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이상해씨를 불러내는 놈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대신 나는 메리프에게 한쪽 팔을 벌렸다. 메리프는
내 품 안으로 폭 들어왔다. 하아, 오른쪽에 피카츄 왼쪽에 메리프라니... 돌바닥에 앉아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천국이로구나.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프네. 일단 메리프는 밥 먹였는데 나는 김밥 몇 입 먹다가 삐삐를 쫓는다고 또 못 먹었다.
나는 품속에 안겨있는 두 마리의 포켓몬이 불편하지 않게 조심조심 폰을 찾아서 꺼냈다. 시간을 보니 여덟 시
가까이 되는 시간. 뭘 했다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걸까.

잠금을 해제하니 보이는 건 여러 통의 문자였다. 레인저에게 현재 상황이 어떤지 문자가 와 있어서 그에 지금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서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배터리가 5 퍼센트라는 것이랄까나. 그리고 이 상황이 지금
전국적으로 뉴스가 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자를 돌려보니 내가 강원도에 있는 걸 아는 사람들이 괜찮은지
물어보고 있었다. 거기에 엄마도 잎새도 오바람...? 오바람도 문자가 왔었네.

쨌든 걱정시키는 것도 좀 아니고 이렇게 얘기하고 하는 것도 별로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다시금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은데.

“야, 한지우. 너 폰 배터리 몇 퍼야?”

나는 작지만 한지우에게 들리도록 물었다.

“...폰 없어.”
“뭐? 폰 없다고?”
“어.”

요즘에 폰 안 가지고 다니는 애들도 있구나. 나는 조금 놀라서 말을 말았다. 오바람이야 계속 점심을 같이 먹고


해서 폰번호도 교환하고 좀 친해졌다지만 이 녀석은 점심시간에 피카츄 데리러 온다거나 가끔 얼굴을 비춘다거나
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감이 있잖아?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는지 아닌지 느껴진다는 거. 저 녀석은 대놓고 나를 싫어한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으니까. 뭐. 지금도 그렇고.

쨌든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먹다만 김밥 한 줄을 가방에서 꺼냈다. 가방 속에 여분으로


한 줄 더 사 왔던 걸 기억하고는 나는 한지우에게 물었다.

“김밥 있는데 먹을래?”

그는 대답도 안 하고 손을 휘젓는 걸로 거부의 의사를 보냈다. 허, 나 혼자 다 먹을 거다 뭐. 나는 우적우적


김밥을 먹으면서 저 녀석 하는 양을 보았다. 그는 이상해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푸드를 먹이고 있었다. 자기
먹을 거는 있는 건가, 저 녀석.

메리프의 구슬에서 나오는 빛은 내가 있는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한지우의 등과 그 다리에 기대 있는


이상해씨까지 다 비추고 있었다.

“메리프, 불 켜는 거 힘들지 않아?”

내 물음에 메리프는 꼬리를 흔들어대며 별로 안 힘들어, 하며 메에 울었다. 나는 그 모습에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리프가 손에 머리를 부비는 건 너무 부들부들 거려. 피카츄도 마찬가지고. 역시 털이란 건
부들부들 거리는 맛이지...!

“피카츄, 너도 이리 와.”
pika~

피카츄가 주인의 부름에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갔다 와도 돼? 하는 모습에 왠지 민망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피카츄는 쫑쫑거리면서 한지우의 어깨 위에 올라탔고. 한지우가 가방에서 꺼내는 푸드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김밥을 다 먹고 은박지를 둥글게 말아서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나는 메리프를 품 안에 가득 안으면서 한지우의 이상해씨를 살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낯선 공간에 있으면서도 주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하긴 저
이상해씨는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뭐랄까 매끈해 보이고 촉촉해 보이고. 햇볕도 잘 쐰 것 같고. 한눈에
봐도 주인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보이는 모양새였다. 남자애답게 생김새도 잘 생겼어. 주인 닮아서 그런가?

이상해씨의 붉은 눈은 아무래도 게임 상의 레드를 떠올리게 하니까. 성격은 차분한 성격이려나? 아니면 냉정한
성격? 좀 친해지고 싶기는 한데, 저 주인놈 자체가 친하지 않으니 무리무리다. 그리고 포켓몬이라도 남자애들은
뭔가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야 할까요. 아, 피카는 성격이 밝아서 금방 친해지긴 했다만 처음 머리 만질 때는
조금 조심스러웠었지.

그래서 메리프가 여자애인 건 역시 다행이랄까?

내가 메리프를 꼭 안으니까. 메리프가 기분 좋은지 메에 하고 울었다. 아, 메리프 쉿, 쉿 조용해야지. 내가


푸후 하고 웃으니 메리프도 작게 따라 웃었다.

한지우는 내가 하는 양을 보더니 피카츄의 푸드를 다 먹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해씨를 볼 안에 넣었다.


피카츄는 한지우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지만 전처럼 날 두고 갈 생각은 아닌 듯 한지우는 가자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가자고 말이라도 하면 안 되나? 말하는 게 그렇게 쪼잔해서야.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메리프를 안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좁은 틈을 빠져나와 한지우의 뒤를 따랐다.

“계속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숨자며?”
“아니, 똑바로 가는 것 맞냐고.”

손에 지도도 없고, 여기 처음 와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휙휙 들어가니까 겁이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이상하게 저 녀석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냥 감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헤효... 그래도 그 감 때문에 살았으니.
좀 믿어도 될까나.

“...숨는 건 잘하니까.”
“어? 뭐라고?”

나는 잠시 딴생각하다가 말을 놓치고 말았다. 저 녀석 말하는 거 진짜 드문데.

“됐어, 따라오기 싫음 말던가.”

흐음...

“그래도 너 오늘 말 많이 하네.”

이것저것 대답도 해주고. 그런데 내 말에 정적이 흘렀다. 아씨, 괜히 말했나. 더 얘기 안 하잖아 저 녀석...!

그렇게 정적 속에서 나는 메리프와 소곤소곤 대화하면서 조금씩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로켓단이
보일라치면 한지우의 이상한 감으로 다른 길로 샌다거나 숨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야생 포켓몬도 몇 번 마주치긴
했었지만 배틀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한지우 저놈 포켓몬 언어 만렙 찍었나 봐. 미뇽 때도 느끼긴 했지만...
음, 중간에 길도 묻기도 하더라.

체육시간이라던가 지나가면서 복도에서라던가 한지우를 보게 되면 항상 어딘가 빠져나가려는 걸 억지로 참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치 알에서 깨어나려는 병아리를 알을 꼭 쥐고 있음으로 해서 못 나가게 하는 것 같달까.
그렇게 하면 곧 병아리는 죽어버리고 말 테고. 아, 저런 냉랭한 녀석을 병아리에 빗대는 건 좀 병아리에게
실례일 테지만.

어쨌든 말을 잘하지 않는 탓에 표정으로 짐작하긴 하지만 역시 딱딱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그런 표정이 풀릴


때가 있는데 꼭 포켓몬을 대할 때였다.

나와 한지우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할 말도 없고 친하지도 않고 게다가 저쪽에서는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나를 싫어하는 듯하다. 그렇게 뚜벅뚜벅 걸으며 오른쪽으로 돌기도 하고 왼쪽으로 꺾기도 하고
가파른 길로 내려가기도 하니 진짜 누군가가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로켓단뿐만이 아니라
누구더라도.

그렇게 걷고 있는데 막다른 길이 나왔다. 내가 에? 하는 느낌으로 한지우를 바라보자 그는 앞으로 가더니


오른쪽으로 꺾었는데 그곳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어떤 포켓몬이 이야기라도 해준 건가. 그가 막다른 벽에
기대앉자 나도 그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안고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을 켜고 있었던 것이
힘들었던지 메리프의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나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이제 꺼도 돼.”

레인저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낸 이후로 폰도 꺼졌다. 지금 몇 시 인지도 모르겠다. 남아있는 건 아직 불을


밝히고 있는 손전등이었다. 손전등 빛에 의지해서 나도 메리프도 서로를 꼭 안고 있었다.

한지우는 피카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상해씨를 꺼냈다. 이상해씨도 은근히 주인의 무릎에 턱을 대고 누웠다.
그리고... 또 저런다. 저 부드럽게 풀린 눈매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며. 마치 포켓몬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인간으로 태어나버린 가련한 생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걸까. 그리고,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로켓단이 이곳까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숨 막히게 답답한 건 내 옆에 앉아있는
저 녀석 때문일 거다. 메리프는 피곤한지 잠은 자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색색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시합도 두 번이나 했고 계속 플래시고 켜고 있었으니. 플래시라는 기술도 이렇게 오래 써본 적도 없었다. 배지가
조금 영향을 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리라.

나는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옆의 한지우를 힐끔 보았다. 손전등 불빛으로 보이는 그는 모자를 헐겁게 머리
위에 얹어놓고 조금 피로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포켓몬들은 그의 무릎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

나는 그가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폰이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시간이 아홉 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듣지 못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지만 또 대답이 없다. 피카츄가 귀를 쫑긋거리며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민망하다. 그래도
또 괜히 오기가 생겨서,

어느 쪽 길로 들어온 것인지, 배지는 딴 것인지, 회색짐에 들렀다 온 건지, 혹시 오바람도 같이 온 건지,


기차로 온 건지 버스 타고 온 건지, 아니면 차를 타고 왔는지 등등 물었지만, 그는 어느 것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온 건 피카츄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는 듯이. 나는 한숨을 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설마 이것까지 대답하지 않을까.

“너 내가 싫은 거지?”

대답도 하기 싫을 정도로. 뒷말을 붙이진 않았지만 확실히 전달되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자리에 앉은 뒤


처음으로 내 말에 대답했다.

“...어.”

라는 짧은 말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듣는 건 또 마음이 아프긴 했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 왜 싫은데? 이유라도 알자.”

이유 없는 미움을 받는데 참지 못할 사람은 없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상황에서, 그가 나를


도와줬었더라도. 내 기분이 느껴졌는지 언제부턴가 포켓몬들이 고개를 들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우도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차가운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33 화

w. 도여은

“넌... 떠나갈 사람이니까.”


“...뭐?”

내가 되묻자 그는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말을 쏟아냈다.

“가버릴 생각이잖아? 안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던가 만났던 포켓몬이라던가 다 버리고, 갈 방법만 찾으면


훌훌 다 버리고 갈 것 아니야. 지금 짐전을 치르는 것도 그걸 찾기 위함이겠지. 그런 일에 저 어린 포켓몬을
이용하는 걸 테고. 하, 네 포켓몬도 불쌍하다. 어차피 버림받-”

마찰 소리와 함께 점점 고조를 높여가던 그의 목소리가 끊겼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것이 보였다. 나는


주먹에 들어갔던 손에 힘이 빠졌다. 더 듣고 있을 수 없어 한 대 치려고 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소리치면서
그만하라고 하려 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를 친 건 내가 아니었다.

저기 한지우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메리프였다.

내 품 안에서 뛰쳐나온 메리프가 순간 꼬리를 휘둘러 그의 뺨을 쳤던 것이었다. 그의 뺨에 상처가 길게 나 피가


흘렀다. 피카츄도 이상해씨도 으르릉거리며 메리프에게 위협했지만 털을 부풀리고 있는 건 메리프도 마찬가지였다.

냉기가 지나가는 것 같은 이 상황을 진정시킨 건 한지우였다. 그는 양 볼에 파지직 전기를 튀기는 피카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공격하지 말라는 뜻. 그에 이상해씨도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메리프도 털이 축 쳐졌다.
메리프 턱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와 메리프는 한동안 눈을 맞추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내 눈에도 눈물이 뚝, 떨어졌다.

“메리프, 이리 와.”

나는 팔을 벌려 늘 그렇듯 메리프를 불렀다. 메리프는 천천히 다가와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혹시 혼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워하는 몸짓이었다. 나는 눈물을 한 방울 떨구며 웃어 보였다. 메리프는 내 품에 안겼다.

메리프를 품에 꼭 안으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말도, 그러니 안심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벙어리 죄인처럼 그저 온기를 찾는 어린 포켓몬을 꽉 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나는 영영 그 방법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마 찾아낸다면... 돌아가고


말 테니까. 차라리 벽을 치고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문을 닫고 자물쇠로 잠그고. 돌아갈 때까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침내 돌아가는 것을 포기할 때까지.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래. 나도 사람인데. 온기가 필요한데. 내 과거가 없는 이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채로 이렇게... 이렇게 외로운데, 힘드는데... 오직 나만 바라보는 눈동자를 어떻게
외면해. 현실을 외면하고 나를 합리화하고 이게 최선이라고 속이면서 이 포켓몬 하나 마음에 둔다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물에 빠진 사람은 엄청난 힘으로 주변에 아무거나 붙잡는대. 그래서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한 사람까지도 같이
죽게 만들고 말아. 하지만 그 기분을 알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어.

포기해.

돌아가는 걸 포기해.

라고 그가 말하는 것만 같아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엉엉 울다가 메리프를 안고 울다가, 울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
.
.

“-은, 이지은.”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이 부었는지 잘 떠지지 않았다. 힘을 줘서 눈꺼풀을 깜빡깜빡 떠보니
갈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나풀거렸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얼굴...

“그...린...?”
“오바람이라니까.”

아... 맞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는데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게...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서 잠들었나
보다. 메리프를 꼭 안고. 내가 가방을 베고 잤던가? 나는 머리맡에 있는 가방을 잡는데 뭔가 몸에서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붉은색 패딩조끼. 한지우...? 나는 멍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뭔가 생각해내려고 노력했다.
메리프가 부스스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울었는데, 한지우가 막말해서... 그리고 로켓단이... 로켓단?
그리고 오바람?

“에....?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오바람을 보고 놀라서 소리쳐버렸다. 그는 웃으면서 내 옆을 가리켰는데 거기엔 피카츄가 있었다.

“조용히 해야 돼. 아직 끝난 게 아니거든.”
“아... 응. 혹시 지금 몇 신지 알아? 그리고 넌 왜 여기에...”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잠들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이거 왠지 한 번 있었던 일 같은... 그것보다,

“벌써 소탕된 거야?”

내 물음에 그는 대답은 안 하고 내가 쥐고 있는 한지우의 패딩을 빤히 보더니 내게 그것을 빼앗듯 받고는 대신


내 크로스백을 건네주며 매는 것을 도와줬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아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와줬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아, 알았어. 이리 와 메리프.”

메리프는 한번 기지개를 쭉 펴더니 내 품에 폭 안겼다. 어제 일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그런


모습에 다시금 눈물이 나는 것을 꾹 참았다. 일단 덮어두자. 그건.

오바람은 한 손으로는 손전등을 비추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나를 이끌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모습이 학교에서 보았던 여유 있는 모습과는 대조되어 보였다. 아마 로켓단이 아직 남아있다고
했었나?

“지금 새벽 세시 반이 조금 넘었어. 길안내는 이 피카츄가 해줬고.”


pikapi!

피카츄가 다시금 앞장섰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한지우는... 어떻게 됐는데?”

내 물음에 그는 작은 목소리로 주위를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옥광산 폐쇄 갱도에 삐삐와 달의 돌, 그리고
포켓몬 화석을 노리고 로켓단이 갱도를 무력으로 불법 점거했다. 특히 로켓단의 경우에는 포켓몬을 무기로
사람들을 위협하기 때문에 더 진압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총과 같은 무기로 포켓몬을 살해하는 것은
불법일뿐더러 위험하기 때문이고.

또, 로켓단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일을 행한 건 드믄데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입구마다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레인저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특히 비수기 시기이기 때문에 여기를 지키는 레인저들도 많이 없었고. 경찰,
레인저들은 물론 회색짐의 짐리더와 문하생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트레이너들이 여기에 몰려왔지만 워낙
조직원들이 많아서 대치 중이었다고 했다.

“그 안에 나도 있었고.”

그는 자괴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어. 그놈들도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동태가
이상해진거-”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는 말을 멈추고 나를 다른 쪽 길로 이끌더니 벽에 바싹 붙었다. 방금까지 우리가


있었던 길에서 손전등 불빛이 보이더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우리를 못 본 채로 뛰어갔다. 나도 오바람도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부에 어떤 문제가 생겼던 거지.”
“그게... 한지우라고?”

오바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피카츄를 따라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 말에 따르면 한지우가


안에서부터 시선을 끌었기 때문에 경찰과 레인저들이 그 틈을 타서 현장에 침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도 그 틈을 이용해서 들어왔지.”


“왜 그랬어! 위험하게!”

내 말에 오바람은 웃어버렸다.

“그러게. 괜히 왔네. 울고 있을 줄 알고 구하러 왔더니만 잠만 자고 있고 말이야.”

윽...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잠들다니 나도 미쳤지. 오바람은 큭큭 웃기만 했다. 우리는


피카츄를 따라 출구로 향했다. 몇 번 로켓단과 마주칠 뻔했지만 그들은 도망치기 바빴는지 허술하게 숨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뛰어갔다.

“무슨 일 있었지?”

출구가 다와 가는지 공기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 때였다. 오바람이 뭔가 아는 것처럼 물어왔다. 나는 무슨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인지 잘 가늠하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잡혀있는 손목이 조금 불편했다.

“한지우가 분명 너한테 무슨 말을 했을 거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오바람은 나보다 한 발 앞서 걷고 있었지만 내가 끄덕이는 걸


아는 듯 조금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울었을 테고.”


“어...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뭐, 그놈 옆에 오래 있다 보니.”

그는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 녀석 말 신경 쓰지 마. 무슨 얘기를 했는 진 모르겠지만.”

동굴은 플래시나 손전등 없이도 앞이 조금은 보일 정도로 밝아지고 있었다. 출구가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그... 괜히 온 거 아니야.”
“어?”

오바람이 못 들었는지 살짝 돌아보며 물었다.

“괜히 온 거 아니라고. 와줘서, 고마워.”

나는 말하면서도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오바람이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내 손목을 좀 더 꽉 쥐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출구가 보였다.

“인사는 그 녀석한테 해. 얼마나 꼭꼭 숨겨놨는지, 난 절대로 찾지 못했을 테니까.”


밖을 나서니 어수선함이 밀려오는 듯 잠시 딴 곳에 온 느낌이 들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다.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 밑에 언덕이 있었고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기자들도 있었고 경찰들도 있었고
레인저라던가, 문하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구경 나온 마을 사람들, 그리고 끌려가는 검은 옷을 입은 로켓단...

하지만 제일 먼저 보였던 건 붉은색 모자를 쓴 소년도 청년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남자. 그가 뒤돌아서 이쪽을
바라봤다. 피카츄가 그에게 뛰어가는 걸 보고 다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볼 수 있었다. 그의 발치에서 달빛을
받고 있는 꽃봉오리. 이상해풀이었다. 어느새 피카츄는 그의 품에 안겼다. 또 저렇게 풀린 표정. 역시 포켓몬
한정이라니까. 미운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자고 나니 밉기는커녕 웃음이 나버려서, 조금 놀랐다.

그래도, 저 녀석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까, 생각하며 옆을 보니 오바람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1-5.5 그런 일이 있었지만 다시 일상

34 화

w. 도여은

옥광산에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월요일이 되니 그저 그런 일상이 반복됐다. 아니 그저 그런은


아니지만. 여전히 포켓몬이 살아있는, 같이 등교를 하는 일상인 것이지만 말이다. 벌써 일상이라고 불릴 만큼
익숙해졌다는 얘기일까?

새벽에 오바람에게 구조되고 나서 나는 나대로 그녀석들은 그 녀석들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레인저에게 내


전화번호가 남아있었기에 경찰 조사라던가 등등을 위해 경찰서에 가기는 했었지만 다행히 짐리더가 손을 써 주셔서
빨리 나올 순 있었다. 짐리더는 짐리더 나름 나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지 연신 미안해했다. 하지만 짐리더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역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랑 달리 한지우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지, 나중에 들은 말로는 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로켓단의


불법점거에 큰 도움을 줬다더라, 라던가 더 과장돼서 한 남학생이 단신으로 로켓단을 물리쳤다거나 하는 소문이
돌긴 했다.

나는 아침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엄마가 엄청 걱정했다면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나는 정말 별일 없었다고.


나도 옥광산 사건 때문에 일찍 돌아왔다고 변명했다. 왜 연락이 안 됐냐는 말에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다고
둘러댔고. 뭐, 배터리가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하하... 거짓말은 아니라구요.

하지만 잎새는 속일 수 없어서 사건의 전말을 탈탈 털리고 말았다. 물론 한지우와 했던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지우가 숨겨주고 오바람이 구해줬다는 얘기에,

“한지우 그놈 그래도 의리는 있나보네.”

하면서 다시 봤다는 듯 얘기했다. 한지우가 날 싫어한다는 낌새를 가장 먼저 차린 건 분명 잎새였을 테니 그놈을


별로 좋게 보진 않았으니까. 음... 피카츄가 인질이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좀 내가 비루하잖아.
그리고 이 얘기든 저 얘기든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며, 찌르꼬 얘기는 공식적인 무슨 얘기가 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다시 다짐받았다. 내가 전에 약속했었잖아,라고 투정하자 잎새는 아무래도 맘이 안
놓여서... 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걸까.

그리고 점심시간에 잎새가 오바람한테 “너 지은이 구해줬다면서?”라고 묻자 오바람은 “구해줬다기 보다는...”


하면서 말을 돌리더라. 그리곤 나한테 벌써 말했냐면서 장난치길래, 나는 “잎새한테밖에 안 말했거든?” 라고
대답했지만 그래도 조금 민망해졌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그 다음날이었던 화요일은 별로 일상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일상적이라는 것은 그런


거다. 잎새나 친해진 반애들이랑 수업을 하고 밖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가끔 오바람을 만나기도 하고, 이브이는
가만히 햇볕을 쐬는 반면 피카츄랑 메리프가 먼지 나도록 뛰논다거나, 푸린의 노래하기 때문에 잠든다거나 하는
그런 상황들.

그리고 내게 친근하게 구는 꼬렛을 쓰다듬기도 하고. 어느새 구구가 피존으로 진화했는데 그럼에도 메리프와
피카츄 장난에 구워지기도 하는, 그리고 수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원에서 훈련을 좀 하고 집에
들어서서 조금 늦은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드는. 그런 일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화요일은 화이트 데이었거든.

“혹시 네가 이지은이야?”

그날도 역시 평소와 같이 등교를 하는데, 등굣길에서 모르는 여자애가 말을 걸었다. 내가 당황하면서 그렇다고
하니 수줍게 작은 종이가방을 하나 건네면서 하는 말이.

“이거 바람이한테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게 아니겠는가. 어... 응?

“너 바람이랑 점심 먹는 거 봤거든... 부탁이야.”


“아... 응.”

그 여학생이 너무 수줍수줍하게 건네는 바람에 어라어라 하면서 받아버리고 말았달까. 내게 종이가방을


건네주고는 여학생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뭐, 하나쯤이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내 것도 좀 전해줄래?”
“내... 내것도.”

복도에서부터 교실 안에 들어서까지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줘야만 했다. 왠지 안 들어주면 다른 애는 들어주면서


왜 난 안 돼? 할까 봐서 또 거절을 못하겠어. 그리고 어떤 여학생은 교실 안에 있는 날 복도로 불러내더니,

“너 혹시 오바람 좋아하는 건 아니지?”

하며 물어보기도 했다. 딱 보이는 게 좋아한다고 하면 한 대 맞을 기세라... 아니 여기서는 배틀을 하려나?


무슨 싸움이 났다고 하면 몸싸움보다는 배틀!로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배틀만능주의...라고.

아니 어찌되었든 나는 전혀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어댔지만. 무서워서는 아니야, 음...


좋아하지 않는 게 사실이기도 했고. 아,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었다.

“저... 이거.”
“오바람한테 전해달라고?”
“아니, 한...지우한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 여학생을 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 포장된
선물을 빤히 보다가 받아버리고 말았다.

“저, 나 별로 그녀석이랑 안 친해서 못 전해 줄 수도 있어.”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여학생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했다. 계속 오바람 것만 받다가 한지우 것도 받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한지우도 인기가 있었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애가 기폭제가 됐는지 어쨌는지 그 이후로
한지우 몫을 많이 받아버리고 있었다.

“잘 전해줄 수나 있으려나.”

내가 전해줄 초콜렛이라던가 사탕이라던가 편지라던가 등을 한 보따리 든 채 자리에 앉자 잎새는 끌끌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안 받았어야지.”


“그러게...”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잎새는 아주 가뿐한 모양새였다. 아마 단호하게 거절했을 테다. 그런데도 잎새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실 잎새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아니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두루두루
친한 스타일이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외톨이는 아니지만. 하지만 이것저것 들어주고 거절도 잘 못하는 나와 달리
공과 사는 뚜렷하다고 해야 할까 선이 딱딱 정해져 있다고 해야 할까.

사실 나와 잎새가 같이 밥을 먹는데 오바람이나 한지우가 같이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우리와 같이 밥을 먹고 싶다는 애들이 많았었다. 뭐, 한지우와 밥 먹은 건 실질적으론 한 번뿐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였으면 어찌할지 모르고 허둥됬을테지만 잎새는 “오바람이 불편하다고 하더라고. 나 혼자 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미안.” 하며 웃어버리니 다른 아이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 아, 물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잎새가 귓속말로 무어라 말하자 얼굴이 파래지면서 물러나더라... 내가 뭐냐고 물어보니 비밀이라곤
하는데... 어쨌든 간에 오바람, 한지우와 친하다는 이유로 시기하는 아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뭍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아무래도 잎새는 인기가 많은 편이니까.

결국 오바람에게 전해줄 선물들은 5 개, 한지우에게 전할 선물은 7 개였다. 나는 그런 선물에 놀라서


화이트데이가 남자가 선물하는 날 아니냐고 잎새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잎새는 뭐 마음의 문제이니까 하며
웃어버렸지만.

그래서 결국 점심시간에 오바람을 만났을 때 그 선물들을 와르르 그 품에 쏟아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는 길에


받았는지 못 본 선물들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녀석은 조금 곤란한 표정이긴 했지만.

“이게 다 누가 준거야.”

혼잣말 같은 말이었기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잎새는 웃으며,

“우리가 주는 건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라고 말했다. 그에 오바람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포켓몬들은 와르르 쏟아진 처음보는 물건들을 보면서
이게 다 무언가 싶었는지 그 주위로 모여들어 킁킁댔다.
“아, 이것들은 한지우한테 전해달라고 하던데?”

내가 한지우 몫을 건네자 오바람은 떨떠름하게 받았다.

“내가 남의 선물까지 전해줘야 한다니.”


“으... 나는 어떻고.”

너랑 여기에 없는 한지우 몫까지 다 들고온 게 누군데. 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찡그리자 오바람은 가져온


사람이 잘못이라며 웃어버렸다. 아니, 네 선물이라도 그렇냐. 그 말을 돌릴 셈으로

“한지우도 선물 많이 받았으려나?”

라고 잎새가 묻자 오바람은 질문으로 받아쳤다.

“난 많이 받았는지 안 궁금하냐?”
“그건 별로 안 궁금한데?”

그 말에 내가 큭큭 웃자 잎새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한지우는 뭐랄까 차가워 보여서 직접 주긴... 그렇지 않으려나?”

내가 혼잣말처럼 말하자 잎새가 듣고는 대답해주었다.

“요즘 한지우 주가 상승중이던데? 뭐 직접 전하는 사람이 적긴 하겠다만.”


“주가 상승중이라니?”
“아아, 요즘 체육시간에 배틀 많이 하잖아? 한지우가 엄청 잘한다고 하더라구.”

나는 그렇냐는 듯이 오바람을 바라봤다. 이래봬도 같은 반일 테니. 내가 오바람을 보자 오바람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는데 그에 맞춰 잎새가 그를 비웃었다.

“풉, 오바람 너도 졌었다지? 한지우한테.”


“야, 그...그건!”
“그거언?”
“그건... 내가 봐준 거지. 체육시간 배틀에 그렇게 힘 뺄 필요는 없잖아?”

오바람에 어설픈 허세에 나도 잎새도 푸하핫, 하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에 오바람은 멋쩍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었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콩라인이라서...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진정한
레드의 라이벌은 그린밖에 없다고. 힘내라 오바람. 나는 속으로 응원도 해줬다. 불쌍하잖아...

“쨌든 간에 지긴 졌잖아?”

잎새에 말에 오바람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마지못해 “그래, 내가 졌다, 졌어.”하며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말을 돌렸다.

“밥이나 먹자, 그 얘긴 그만하고.”

그렇게 도시락을 풀면서 포켓몬 푸드를 챙기는데, 속으론 한숨이 쉬어지긴 했다. 에휴 화이트 데인데 내 선물은
못 받고 남 선물만 챙겨주는 꼴이라니. 나는 메리프 밥이나 챙겨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메리프용 도시락을
꺼내 주었다. 메리프가 도시락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하는데 어느 인기척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들자
눈앞에 작은 막대사탕이 보였다.
“일단은 화이트데이니까.”

내가 사탕을 받자 오바람은 잎새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어... 어, 고마워.”

나는 누군가에게 사탕을 받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좀 어정쩡한 기분으로 받아버렸다. 그에 반해 잎새는


“이놈의 인기란, 잘 받을게.”라고 너스레를 떨자 오바람이 그럴 거면 내놓던가 하면서 뺏으려했고, 잎새는 아니,
줬으면 그만이지 하며 등 뒤로 사탕을 쏙 감췄다.

“하나도 못 받을 거라 생각에 챙겨줬더니!”


“헤, 누가 할 소리람. 천하에 김잎새님을 뭘로 보고.”

물론 잎새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잎새 사탕 많이 받았거든, 남자애들한테... 하나도 못 받은 건 나였지...

옆에서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동안 나는 조그만 막대 사탕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응. 화이트데이.

35 화

w. 도여은

“아, 참 지은아. 그거 보여줘, 그거!”

잎새가 나에게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전날 잎새에게 옥광산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내가 달의 돌을 주웠다는 얘길 했고 잎새가 눈을 반짝이면서 보여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달의 돌을 꺼내 잎새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나도 내가 달의 돌을 가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니까 옥광산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집에 돌아온


날 정리한다고 가방을 열었더니 그 안에 달의 돌이 아무렇게나 들어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가방을 다시 닫으며
다시 내 가방인지 확인했지만 분명 내 가방이었다. 아니 들어있었던 물건도 다 내 거였는데 이상하게도 달의 돌이
내 가방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당황해서 왠지 뿌듯한 표정을 짓는 메리프에게 이 돌 혹시 네가 가져온 것이냐고 물으니 메리프는 꼬리를


흔들며 메에, 메, 메에에 라며 한참을 설명했다. 정리하자면 ‘옥광산에서 삐삐를 쫒았다. 삐삐가 넘어지더니
돌을 흘렸다. 삐삐를 잡고 돌아보니 내가 없었다. 그래서 돌을 물고 돌아가 보니 내가 넘어져 있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기에 가방에 넣어놓았다. 잘했지?’ 라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메리프를 칭찬했다. 아마 내가 한지우와 부딪혔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경황이 없어서


메리프가 불렀는지 아니었는지 기억도 안 났으니까.

“와, 진짜 달의 돌이잖아? 신기하다.”

잎새가 받아들고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들어 보고 내려보고 하자 오바람도 다가가 돌을 구경했다. 옆에 있던


푸린은 물론이고 메리프 털 위에서 장난을 치고 있던 피카츄도 코를 찡긋거리는 꼬렛도 관심을 가지며 몰려들었다.
아, 그날 피죤은 오바람이 데려오지 않았었고 이브이는 자기가 진화할 수 있는 돌이 아닌 걸 아는지 관심이
없었다.

“아, 달의 돌 연구소에서나 멀찍이 봤던 것 같은데.”

오바람이 신기한다는 듯이 자기도 보자며 잎새에게서 돌을 받아들려고 하자 잎새는 싫다며 손을 멀찍이 떼었다.

“내가 먼저 보여달라고 했었다고.”


“뭐? 치사하다. 김잎새.”
“지은이한테 보여 달라고 하던가. 후후.”
“이지은, 나도 좀 봐도 돼?”
“지은아 안 되지? 연구소에 많을 텐데 거기나 가서 보시지?”

깔깔거리며 웃는 잎새를 따라 나도 푸흐하 웃어버렸다. 둘이 투닥투닥 하는 사이에 어느새 달의 돌은 피카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피카츄가 달의 돌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제 머리에 꾸욱 눌렀다. 포켓몬들도 초롱초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와르르 웃어버렸다.

그에 꼬렛이 피카츄에게 달려들어 달의 돌을 캐치하는 데 성공하고, 또 그게 재밌어 보였는지 달려든 메리프에게


뺏기고 말았다. 왠지 진화의 돌은 포켓몬을 들뜨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장난을 좋아하는 푸린은 끼어들지 않는 게 아닌가? 결국 잎새가 장난치지 말라고 달의 돌을 포켓몬들에게서
빼앗았을 때 난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잎새야 너 그냥 그거 가질래?”


“...에?”
“푸린, 달의 돌로 진화하잖아. 나 달의 돌로 진화하는 포켓몬도 없고.”

놀라는 잎새에 표정에 나도 덩달아 당황해서 말을 이었지만 그럼에도 잎새는 놀라 눈만 깜빡였다가 화드득 놀라
내게 달의 돌을 건네주었다.

“아니아니,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

잎새에 반응에 의아한 내가 오바람쪽을 보자 그도 좀 얼떨떨하게 나를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너 그거 얼만지나 알아?”


“맞아, 너 그거 얼만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오바람이 묻자, 옆에서 잎새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잠시
달의 돌을 내려다보면서 이게 그렇게 비싼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들고 있는 달의 돌은 마치 뗀석기같이
울퉁불퉁한 모양새에 진한 회녹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이 회녹색이지 회색의 가까운 이 돌은 달의 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기운이라는 게 한지우처럼 감이 좋지 못한 나에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거 40 만원은 훌쩍 넘는 거야.”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달의 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 오바람이 답답한 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바람쪽을 바라봤다. 오바람은 잎새가 가끔 나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아, 라는 눈빛?
“40 만원...?”

내가 작게 읊조리자 오바람은 말을 이었는데,

“그거 최소가 40 만원이라는 거지 품질에 따라 값이 다르거든? 그건 좀 둥그런 모양새에 삐삐가 가지고 있었던
걸 주웠다고 했으니 돈이 더 나갈 거다. 아마.”
“맞아, 내가 왜 교실이 아니라 여기서 보여 달라고 했겠어.”
“그리고 불의 돌이나 물의 돌, 리프의 돌처럼 인공적으로 제작해 양산되는 진화의 돌과는 다르다고.”
“백화점 따위에서 파는 그런 돌 따위가 아니라니까.”

새로운 정보에 나는 어찔해졌다. 그러니까 이 달의 돌의 비싼 거다, 이 말인가?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계속해서 둘이 나를 지지고 볶을 것 같아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하.

“그래도 지은이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에 대한 반증 아니겠어?”

잎새가 나를 끌어안자 오바람은 코웃음을 치더니 “멋모르는 거겠지.” 하고 일갈했다. 이지은(은)는 풀이


죽어서 공격할 수 없다.

“멋모르다니, 우리 지은이는 순수한 거거든? 이 세상 물정에 찌든 놈아.”


“참나, 찌든 건 너겠지, 너.”
“어디 나 같은 숙녀에게 찌들었다 말할 수 있어? 오바람 소문 낼 거다.”
“뭐, 이 지하상가 정보상인아. 너 내 개인정보 팔고 있지? 고소한다?”

잎새가 오바람의 개인정보를 팔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오바람의 고소한다는 말은 나를 찔끔하게 했으나


잎새는 “원래 유명인의 개인정보는 공공재거든?”하고 방어했다. 그러자 오바람은 “흐음, 내가 그 정도로
유명인이란 거지? 나한테 좀 잘하든가.” 하면서 뽐내기를 사용했다.

둘이 투닥투닥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나는 그냥 모른 척 메리프의 푸드를 챙겼다. 생각해보면 오바람이


유명인이라는 사실은 맞는 말이었다. 포켓몬이 있는 이 세계에서는 포켓몬 트레이너라는 직업이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리그 챔피언의 팬카페 가입자 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음... 말하자면 유명 연예인
못지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높기도 했다. 그러니까 8 배지를 모은 트레이너는 준연예인급, 리그 예선을 통과한
32 인은 그해의 엄청난 인기인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오바람은 거의 우리 학년의 연예인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인기가 많은 남자애라고 하더라도
여자애들이 대놓고 좋다 싫다 하지 않지만 연예인이라는 건 얘도 좋아하고 쟤도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해볼까?
하는 느낌에 가까우니까. 왜냐하면 오바람은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지만 오용호 박사님의 손자에 용모 출중, 공부
잘해, 희귀한 이브이를 소지하고 있고. 또 전략적인 배틀로 승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오바람이 새로 잡은 포켓몬이 꼬렛과 구구였기에 조금 실망하는 얘기가 많이 돌았었다. 그만큼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얘기도 많았지만. 아, 그리고 이브이는 어떤 포켓몬으로 진화할까에 대한 내기도 많은
편이다. 소수지만 부스터파도 있던 것 같더라, 으음... 뭐랄까 약점이 있는 남자가 매력있다고...?

쨌든 이런 얘기들이 소문에 관심 없는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라는 건 그만큼 포켓몬 트레이너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아, 잎새가 말했던 것처럼 승승장구하던 오바람이 주춤하게 된 것이 체육시간에
한지우와의 배틀 때문이었는데 그 배틀에서 한지우가 이겼기 때문이었다.
잎새가 말했듯 주가 상승 중. 이브이를 제외하곤 희소한 포켓몬이 없는 오바람과 다르게 한지우는 포켓몬이 둘
뿐이지만 개체수가 적은 피카츄와 이상해씨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이상해풀로 진화했지만.

새로운 한지우 팬들로의 유입에 오바람 팬층은 운이었을 뿐이었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배틀
외의 체육시간에 오바람과 한지우가 다시 붙을 일이 없기 때문에 중간고사 이후의 체육대회를 다들 고대 중.
그러고 보면 잎새가 전에 말했던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그대로 실현된 셈이기도 했다. 소름...

큼큼, 쨌든 둘은 소리 높이지 않았지만 큰소리가 나는 것처럼 아웅다웅 했지만 내가 밥 먹자 하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것저것 이야기하곤 했다. 아마 그들의 대화 방식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 이래서 그린블루 지지자들이 많은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 그 둘의 만류로 달의 돌은 내 책상 서랍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뭐랄까, 로또 맞은 돈은 아무렇게나


써버리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것처럼 얼떨결에 내 손에 들어온 달의 돌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팔아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메리프가 돌로 진화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면 메리프는 옥광산 이후에 더욱더 수련하는 데에 맛을 들인 것 같았다. 보스로라의 피 때문인지


육탄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풀타입, 땅타입을 상대한다고 그랬던 거지 체육시간에 몇
번 배틀할 때는 전기 기술도 자주 쓴다. 역시 특공형 메리프. 아직 전기쇼크일 뿐이지만 위력이 조금씩 세지는
게 눈에 보인다고 해야 할까. 일주일새 충전도 배웠는데 충전 후 전기쇼크는 위력이 한층 더 강해져서 바위 위로
내리 꽂히는 전기 쇼크를 보면 내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변화기도 좋아라해서 목화 포자나 전기자석파도 열심히 수련했는데 둘 다 스피드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나중에
일렉트릭볼을 배우게 되면 연계기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아, 변화기 하면 울음소리를 뺄 수가
없는데, 왠지 메리프의 울음소리는 뭐랄까, 암컷이라서 그런가 내가 메리프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초롱초롱한 눈에 반짝이는 뿔 흔들리는 꼬리. 인사하듯 앞으로 몸을 살짝 굽히면서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는데...
왜지. 내가 공격력이 떨어져서 간식을 주게 돼버리는...

천성 파이터라는 아빠의 말답게 메리프는 물공, 특공, 변화기 가리지 않고 좋아라한다. 아빠 말로는 조금 더
크다 보면 자기 성향이 확실해진다고 하니까, 어느 쪽 위주로 갈지 기다리는 중. 하지만 아빠도 나도 걱정이
되는 건 왜 메리프가 진화하지 않을까 정도이다.

메리프도 초조해하는 걸 나는 꼭 안아주면서 진화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미 충분히 예쁘고 강하다고 했지만
만족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 수련에 몰두하고 진화하려고 애쓰고. 내 공부 시간은 뺏기고... 또르르.

그러니까,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토요일이 되었다. 첫 부서활동날이 다가왔다.

1-6 너에게 닿기를

36 화

w. 도여은
아침 날씨는 화창했다. 여전히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남아있긴 했지만 내리쬐는 햇볕에 오후가 되면 금방
따뜻해질 것 같은, 그런 봄 날씨였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문을 열었다.

“엄마, 아빠. 다녀올게요.”

문이 열리는 틈으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먼저 뛰어나갔던 메리프가 찬 공기에 몸을 푸르르


떨었다. 내가 거실을 돌아보니 주말이라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신문을 읽다 말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부엌에서
엄마가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고 우다다 달려온 모다피와 내가 신발 신을 때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가디가 문 앞에서 나를 배웅해줬다.

“모디, 완이도 집 잘 지키고 있으렴.”

나는 아빠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 두 포켓몬의 머리를 와구와구 쓰다듬어 주고는 현관을 나섰다. 사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은 익숙했다. 왜냐하면 한 달에 한 번 있는 동아리 활동은 셋째 주 토요일, 사복을 입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부서 중에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 학교 밖으로 나가는 활동이 대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일학년 때 독서부였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실 긴장되기도 해.


나는 메리프의 몸을 읏쌰 하고 들어 올렸다. 폭신폭신한 털이 내 몸에 감기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 걷다 말고 털에
얼굴을 부볐다.

“많이 무거워졌네.”
mee!

나는 칭찬으로 한 말이었는데 메리프는 기분 나쁘다는 듯 팩 쏘아붙였다. 에구구 이래뵈도 여자애라는 건가?


나는 그래도 아직 안고 다닐 만하다며 메리프를 둥기둥기 했다. 여전히 아이같이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웃어버리고 말아. 넌 왜 이리 귀엽니...!

나는 다시 한 번 메리프를 꼭 안아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작년에는 나갈 일이 없어서 항상 도서실에서 모였지만


귀동냥으로 이동하는 학생들은 학교 뒤 공터에서 모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도 다른 부서 들을
걸 하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공터로 향했다. 아무래도 첫 부서활동이다 보니 걱정이 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래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거의 다 도착했다 싶을 때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아!”

잎새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마찬가지로 공터로 향하고 있었던 모양새로 잎새가 서
있었다. 내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마찬가지로 잎새도 손을 흔들다가 그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내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왔다. 그에 따라 옆에 있던 푸린도 신나서 통통 뛰어왔다.

“지은아, 안녕안녕! 메리프도 안녕!”


“좋은 아침! 크림이도.”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푸린이 통통 튀었다. 풍선 포켓몬이라 가벼워서 그런 걸까. 평소에도 생각하지만 정말


뭐랄까... 공 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웃어 보이자 잎새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식으로 동동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오늘 어디로 가는 지 알아? 여기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파오리 서식지가 있대. 파오리 하면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어서 걱정인 포켓몬이었잖아. 여기도 마찬가지였는데,”
“파오리가 쓰는 독특한 파를 개량하는데 성공해서 개체수를 늘리는데 성공을 했다지.”

뒤에서 나타난 오바람 덕분에 잎새는 말을 끊기고 말았다.

“아씨, 오바람! 네 갈 길이나 가지?”

잎새가 짜증내도 오바람은 나는 모르오 하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웠다. 나는 쿡쿡 웃으면서 오바람에게 손인사를
했다.

“부서활동?”
“뭐, 그렇지.”

오바람은 좀 귀찮아하는 모양새로 보였는데, 왠지 모르게 조금 설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넘기는 건 똑같은데... 음...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 아무래도 첫 부서활동이라 저 녀석도 긴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나.

어찌됐거나 나는 발걸음을 맞춰 왔는지 오바람 발치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꼬렛에게도 인사했다. 꼬렛이 수염을
움찔움찔하며 눈을 맞추었다.

“이브이는?”

나는 오바람에게 물었다. 항상 꼬렛하고 엎치락 뒷치락하며 장난치듯 오던 이브이가 없던 탓이었다. 내가 묻자


오바람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귀찮다나 뭐라나. 오늘은 집에 있는다길래. 아, 피죤은 여기.”

오바람은 주머니 속을 가르켰다. 나는 끄덕이고는 푸린에게 가려고 바둥거리는 메리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수염을 씰룩거리는 꼬렛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흔들거렸는데 기분 좋을 때 꼬리가 흔들리는 것은 만국 공통 언어일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그란 구슬이 달려있는 메리프랑 달리 끝이 예쁘게 말려있는 꼬렛의 꼬리는 보랏빛으로 매끄럽게
반짝였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꼬렛에게 손을 뻗으니 꼬렛이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너 그러다가 옷에 흙 묻어도 모른다?”


“괜찮아, 이 정도는.”

나는 한쪽 팔로는 꼬렛을 받치고는 꼬렛의 턱이랑 목을 긁어주었다. 기분 좋은 듯 꼬렛이 내 손에 뺨을 비벼댔다.


부드러운 털이 손바닥을 스치는 느낌이 마치 민들레 꽃씨 같아.

“오바람, 너 꼬렛이 지은이 더 좋아하니까 질투하는 거지?”


“참나, 어이가 없어서.”
“포켓몬들이 은근 우리 지은이를 좋아하니까.”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잎새를 쳐다봤다.

“야, 그건 얘가 포켓몬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누가 자기 좋다는 사람 안 좋아하겠냐?”


“흐음...”

잎새가 나랑 꼬렛을 번갈아보더니 손을 뻗어 꼬렛의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내 생각에는 이 꼬렛이 사람을 좋아하는 탓 아닌가?”

내가 웃으며 말하자 잎새가 그려려나 하고 따라 웃었다. 아무래도 귀여운 건 메리프뿐만이 아니라 모든 포켓몬인
것 아닐까?

“오히려 말이야.”
mee~
“질투하는 건 얘인 것 같은데?”

오바람이 큭큭 웃으면서 메리프를 가리켰다. 푸린하고 놀다 말고 메리프가 내 발밑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에?”

나는 웃으며 꼬렛을 오바람에게 건네주고는 읏샤 하고 다시금 메리프를 안아 들었다. 메리프가 마치 꼬렛에


냄새를 지우려는 듯 내게 머리를 비벼대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다 모였을테니 빨리 가봐야 되지 않겠어?”


“너 혼자 가시지? 난 지은이랑 갈 거다.”

잎새가 참새 쫒듯이 오바람에게 손을 훠이훠이 휘저었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잖아, 너희 둘.”

내가 잎새에게 말하자 잎새가 나에게 안겨들었다.

“그러니까 같이 관찰부 들었어야 했는데... 오바람 따위 필요 없다구.”


“어이어이, 따위라니. 말이 심하잖아.”

다시금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은 이번에 같이 포켓몬 관찰부서에 들게 되었다. 뭐, 둘 다 그렇게


원하는 것 같진 않지만. 아니, 겉으로만 그런 것 아니야? 나는 속으로 웃으며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잎새의
등을 밀면서 공터로 향했다. 사실 나도 포켓몬 관찰부에 들까 생각도 했었다. 아니, 시도까지 했었는데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잎새가 전에 얘기했듯 포켓몬 관찰부는 인기가 많아서 우리 반에서도 여럿 지원했었다. 그래서 담임은 공정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가위바위보는 정당한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해... 잎새는 이겨서
관찰부에 들었지만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아, 오바람도 같은 관찰부라는 건 며칠 전에 알게 되었다. 잎새는 오바람하고 같은 부서 싫다고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속으론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생각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오바람 사복 사진을 찍어 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공터에는 버스들이 줄지어 있었고 버스마다 가는 부서가 다른지 여럿 아이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아쉬워하는 잎새랑 헤어지고 나도 내가 타야 할 버스를 향해 발을 옮겼다.

‘포켓몬 봉사부’

버스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관찰부에 들려다가 실패해서인지 다른 곳에 들어가기에는 늦어서 사람이 적은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 수가 적다는 건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반증. 인기가 없다는 건 또 그만큼에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지은아, 여기야.”

같은 반이면서 함께 같은 부서에 든 여자애 몇 명이 보였다. 메리프를 볼 안에 넣고는 같이 버스에 올랐다.


메리프와 함께 탈 공간도 없을뿐더러 메리프는 이상하게 차멀미를 했다. 왜죠...?

쨌든 아이들과 옹기종기 앉았고 차는 출발했다. 포켓몬 봉사부는 자매결연을 맺은 유기포켓몬보호센터로


봉사활동을 가는 부서이다. 학교 내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봉사단체는 많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신 요양원이
대부분이고 가끔 주변의 문화유적지에서 쓰레기를 줍기도 했다. 넷째 주 토요일마다 자매결연을 맺은
봉사활동지에서 의무적으로 봉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 사실상 이 동아리에 들어갈 필요는 없는 셈이었다.
봉사활동 점수는 학교에서 하는 봉사활동으로도 충분히 채워질 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부서에 들어온 학생들은 진짜로 유기 포켓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거나 나처럼 다른 부서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학생들이 학교에 남아있기는 싫고 그래도 봉사나 하자 해서 오게 된 학생뿐이었다.

삼십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목적지에 도착한 듯 멈춰섰다. 천천히 버스에서 내리니 보이는 것은 저 멀리


도시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한 건물이었다. 주변에는 키 큰 잡초들하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고, 버스가 달려온 길은 비포장도로와 포장도로의 중간 같은 모습으로 지저분했다. 건물은 마치 체육관처럼
생겼는데 페인트칠도 낡아있었고 들어가는 철 대문은 녹이 슬어 조금 음산해 보였다. 건물 안에서는 어떤
포켓몬들의 소리들 섞여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동시에 희미하게 포켓몬의 배설물 냄새가 났다.

“후... 지금이라도 부서 바꿀까?”

한 친구의 말에 주변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만큼 눈에 보이는 곳은... 뭐랄까, 고생할 것 같다 라는 느낌?
방금의 웃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조금 다운되어 있었다. 버스 내에서 포켓몬 관찰부 얘기를 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쌩뚱맞은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로 모여주세요!”

내가 그 목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니 옆에 있던 친구가 나를 툭 치더니 한 여자를 가리켰다. 염색을 했는 듯한


검푸른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깔끔한 옷차림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늘 유기포켓몬보호센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곳을 안내할 류수정입니다.”

류수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언니는 같이 일하는 봉사자들을 소개하고 아이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할 일을


정해주었다. 수정 언니는 삼사십대로 보이는 다른 봉사자들과 다르게 젊어보였다. 이십 대 후반 같은? 그
언니에게서 밝은 분위기가 나와서일까. 이곳의 봉사자들의 얼굴에도 활기가 띄어있는 것 같았다.

“... 그럼 마지막으로 주의사항을 말씀드릴게요. 첫째로 유기포켓몬들을 함부로 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친근하게 맞이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상처받아서 인간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물리지 않게
조심하셔야 됩니다.

둘째로 위급상황이 아닐 경우에는 자신의 포켓몬을 꺼내면 안 됩니다. 다들 포켓몬을 소지하고 있지요? 위험할
경우를 대비해서 유기포켓몬보호센터에서는 포켓몬을 소지한 채 봉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아이들은
한 번 버림받았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주인 있는 포켓몬을 보고는 흥분할 수 있어요. 그러니 꺼내는 건
자제해주길 바라요.

셋째로 여기서 일하시는 봉사자들의 말씀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어디를 간다거나 하지
말아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열자 시끄러운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컹컹 짖는 소리 뭔가 퍼덕이는 소리 어떤 포켓몬의 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소리들이 섞여 들어
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분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기 포켓몬은 주인에게 버려진 포켓몬을 뜻한다. 유기포켓몬보호센터는 그렇게 주인에게 버려진 포켓몬들을
국가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관리되는 곳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포켓몬을 한 마리씩 키울정도로 많은 포켓몬들이
사람들에게 길러지는 만큼 버려지는 숫자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포켓몬보호센터는 열악한 환경에서 유기
포켓몬을 보호한다.

알고 있었다. 버림받은 포켓몬, 열악한 환경. 하지만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열악한 환경이다,
버림받았다라는 말들을 그냥 그저 언어로만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반증으로 내가 직접 만난 그 단어들은 내
상상을 넘어선 심각함을 가지고 있었다.

37 화

w. 도여은

내부에는 바닥이 띄어져있는 철제 우리가 가득했다. 어떤 우리는 단층이었지만, 중간에 판막이를 댄 채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우리도 있었다. 그 우리 한 칸 한 칸에는 포켓몬이 한 마리씩 들어가 있었다. 대체로 흔한
포켓몬들이었다. 캐터피라거나 구구, 단데기, 꼬리선.

그리고, 꼬렛. 철장 안에 있는 꼬렛은 내가 오늘 아침 보았던 그 꼬렛과 같은 종류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철창 너머로 가장 먼저 보였던 붉은 눈은 흐려있었고 병이든 듯 눈곱이 잔뜩 껴
있었다. 보라색 털은 푸석푸석하고 중간중간 털이 벗겨져 맨 살이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살에는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시선이 닿았던 곳은 꼬리였는데, 붕대에 감겨있는,

“꼬리가...”

끝이 곱게 말려있어야 할 꼬리는 비정상적으로 짧았다. 누가 일부로 잘라낸 것처럼.

“학대의 흔적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안내를 해주던 수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언니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학생 모두들
이곳에 처음 와본 것이기 때문에 나처럼 내부를 살피고 포켓몬을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처음이기 때문에
관계자들도 일부로 놔두고 있었다. 수정 언니는 나를 향해 싱긋 웃더니 내가 보고 있던 꼬렛에게 시선을 옮겼다.

“알이었을 때부터 인간에게 길러진 포켓몬들은 야생 포켓몬들과 다르게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죠. 오히려 따르는
편이라... 하지만 그건 버림받은 포켓몬들에겐 비극이 될 수 있어요.”
“그럼 이 꼬리는...”
“응. 아이들에게 잡혀서 잘린 거에요.”

말도 안 돼... 나는 헛숨을 삼켰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애완 포켓몬이 야생에 나오게 되면 적응하기가 힘들어요. 특히 도시에서 자란 포켓몬일수록 그렇지. 도시의
뒷골목에도 포켓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아나요? 그 안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이 꼬렛은 어떤 누군가에게 키워진 꼬렛이었을 거에요.거예요. 꼬렛은 흔하니까 쉽게 파트너로 삼고 쉽게


버려지지. 이 꼬렛도 도시에서 버려졌을 테고, 이미 포화상태인 뒷골목에서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자잘한
상처들도 그때 당했던 것들일 거고.”
“...”
“그러다가 잡힌 거죠.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어서. 그 사실을 꼬렛은 몰랐던 거고.
친근한 손짓에 쉽게 넘어가고 말죠.”
“아...”

나는 그렇군요, 하고 말할 수 없었다. 꼬렛은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잘게 수염을 떨더니 구석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래 봤자 붕대에 감긴 꼬리가, 뭉툭한 꼬리가 더 잘 보일 뿐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철장들이
있었다. 그 안에 또 많은 포켓몬들이...

“모든 포켓몬이 그런 이유로 오는 건 아니에요. 분명 학대당한 포켓몬도, 버려진 뒤 야생에서 적응하지 못해


구조된 포켓몬도 있지만 실수로 잃어버려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언니의 손이 내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쫒았다. 그 뒷모습이


쓸쓸해보여... 나는 고개를 떨구어 바닥을 보다가 어느새 주변으로 온 친구들에 의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너무 불쌍해...”

한 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항상 웃고 재잘거리던 애들도 여기서만큼은 숙연하고


조용했다.

“아, 저기 봐!”
“siiiix~”
“식스테일이잖아?”

아이들은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에 나도 이끌려 한 철장 앞에 닿았는데, 그 안에는 정말로 여섯 꼬리를


가진 불타입 포켓몬 식스테일이 있었다.

“와... 진짜 식스테일이야.”
“여기는 야생 불포켓몬이 드문데.”
“그러게. 꼬리 봐.”
“귀여워...!”

방금 분위기와 다르게 여자애들은 금방 이 식스테일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식스테일도 여섯 개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친근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포켓몬은 알고 있을까? 자기가 버려진 건지 아니면 주인이
잃어버렸던 건지. 애타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혹은 이제 인간이 싫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
분명 여러 철장을 지나오면서 꼬리를 흔들고 반기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피하고 위협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녀석같이 인기가 많은 포켓몬인 데다가 이렇게 사람을 잘 따른다면 주인이 찾지 못해도 금방 누군가가
데려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 잘린 꼬렛같은 건 아무도 데려가려 하지 않겠지만.

유기포켓몬보호센터는 꽤 넓었다. 미진화 포켓몬들이 모여있는 구역을 지나니 포켓몬들을 풀어놓고 뛰어놀게 할
수 있는 장소가 나왔다. 여러 장난감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털도 날리고 있었다. 하긴 메리프는 은근 털이 많이
날리는 종이 아니더라. 가디는 털이 엄청 날려서 매일매일 청소하느라 바쁜데 말이야.

놀이공간을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진화한 포켓몬들이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진화했기 때문에
버려지는 포켓몬들도 있다고 했다. 진화하게 되면 외양이 바뀌게 되니까 그것에 실망해서 버려지기도 하고 혹은
크기가 커지게 되니까 기를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해서 버려지기도 한단다.

포켓몬도 내가 살던 세계의 애완동물과 비슷하게 어렸을 때부터 키우는 것이 선호되는 것 같았다. 같은 종류라고
해도 진화하기 전의 포켓몬이 입양이 잘 된다고 하니까...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아보크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내부 구경이 끝나고 우리는 이곳에 온 목적대로 봉사를 빙자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학생들이 한
달에 한 번 올 때마다 대청소를 하는 듯하다. 몇 개의 조로 나누어졌는데, 조마다 맡아서 일을 하는 것이 달랐다.
힘든 일이 있는가 하면, 쉬운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나올 만했으나 한 번 오는 것도 아니고 일 년 내내
한 달에 한 번씩 올 것인지라 일거리는 매달 돌아가면서 바뀌게 되어 있었다. 우리 조는 미진화 포켓몬 구역의
청소를 담당했다. 아직 날이 추운데 밖에서 철장 씻는 것보단 낫지만...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캐터피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바닥을 쓸고 배설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철장 안에


들어있는 담요도 세탁한 담요로 갈아주고 한데 모아서 세탁 담당 조에게 보냈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자꾸
딴생각이 든다.

포켓몬도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포켓몬스터라는 게임과 이곳이라는 현실이 다른 점이었다. 내


닌텐도 속에 있던 포켓몬들은 단지 존재했을 뿐 살아있다곤 할 수 없었다. 그저 배틀을 하라면 하고 프로그래밍
돼있는 시스템에 따라 진화하고, 포켓파를레로 만나는.

하지만 이곳의 포켓몬들은 정말 살아있다.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운다. 두려워하면서도 용기를 내고, 좋아하는


게 있으면 싫어하는 게 있고. 그러면서도 강하고 영리하다. 인간은 포켓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지만
포켓몬은 그렇지 않은걸. 가까이서만 봐도.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몬스터볼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느낌이 든다. 메리프 특유의 따뜻함이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것처럼 많은 메리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녀석은 단 하나뿐인
메리프인 것이다.

그러니까 더 안타까웠다.

작업복을 갖춰 입고 많은 포켓몬들의 배변들을 치우면서 그 냄새에 코를 찡그렸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내


표정을 일그러뜨린 건 포켓몬들이 지내는 환경이었다. 철장으로 생긴 최소한의 공간 속에서 일관화 된 푸드와
물이 지급된다. 물 포켓몬이라면 지저분한 한 대야의 물이 철장 안에 들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버리고
새로 갈아주었다.

분명 이 유기포켓몬보호센터는 국가가 관리하고 있고 그만큼 사립 센터들에 비해서 환경이 양호하다고 들었다.


또한 여기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봉사를 오기도 하고... 그러니까 많이 양호한 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라면... 다른 유기포켓몬보호센터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 진짜 힘들다.”

어느새 냄새도 적응이 돼서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가 됐을 때, 나는 허리를 쭉 폈다. 장갑에 장화에 작업복까지
입고 봉사라니... 조금 벅찬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이런 봉사라면 봉사시간 두 배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래도 포켓몬 보면서 봉사하는 게 어디야 싶갰지만... 왜 이 부서 인원이 금방 차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면 다들


알고 있었는 것 같다. 분명 사람을 반기고 꼬리 치는 포켓몬들을 보면 측은하지만 그래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만 피하고 위협하고 숨는 포켓몬들을 보면 진짜 기분이 다운되는 것이었다.

정서는 전염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시설이 열악한 것을 보면 많은 포켓몬들이 버려지고 있다는 것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포켓몬들에게 미안해지는 것이다.

일을 다 끝냈을 때는 점심시간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원래 부서활동은 오전에 끝나기 때문에 집에 갈 시간이


가까워 졌다는 말과 동일했다. 다른 조에 비해서 우리 조가 일찍 끝난 편이라 뒷정리를 끝낸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서 유기 포켓몬들을 돌봐준다거나, 다른 조에 가서 도와준다거나 혹은 꿉꿉한 센터 안에서 벗어나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가보지 못한 구역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서 센터를 더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처음 이곳에


들어와서 이곳저곳 둘러봤을 때 하나 봐둔 곳이 있었다. 대형 포켓몬이 많은 진화 포켓몬 보호구역을 지나면 그리
크지 않은 문이 하나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라면 지나칠만한 그런 구석진 곳이었지만 은근 호기심 많은 성격에 여기저기 뒤지게 되는 것이


내 습성인지라 금방 내 눈에 띄고 말았다. 마침 열어보려고 한 순간에 한 곳에 모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못
열어봤지만.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에게 길러져 버려진 포켓몬들의 모습을 보면서 찬찬히 하나하나 눈을 맞추게
되어버려서, 그런 구석진 곳까지 찾아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뭐랄까...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이 익숙해
보여서. 한 윈디의 불신의 눈초리라던가, 두코의 체념의 눈동자라던가, 혹은 매달리는, 애원하는... 그런
눈빛들이.

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문을 찾아낸 것은 무언가 이끌렸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항상


가던 등굣길 갈림길에서 마치 다른 쪽 길로 가야만 할 것 같은, 그래서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기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니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끌렸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맞닥뜨린 건 눈살을


찌푸릴정도로 강한 악취였고 내 눈을 사로잡은 한 포켓몬이었다.

38 화

w. 도여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잎새가 내 눈 앞에 손을 휘휘 저으며 내 주의를 돌려놨다.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딴생각에 젖어있던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별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딱딱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잎새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으냐앙? 너 오늘 좀 이상해. 계속 딴생각만 하고 있고? 오늘 체육시간에 피구 하다가 멍 때려서 공에 맞은


거잖아. 항상 그 정도는 가뿐히 피했으면서.”

체육시간에 항상 포켓몬 시합이라거나 포켓몬 관련 활동을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본연의 취지인 체육시간처럼
피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그러니까 포켓몬 활동 한번 체육 활동 한번 이렇게.

“수업 시간에도 자꾸 멍 때리고 있고. 점심도 깨작깨작 먹고. 맞지?”

잎새는 뒤를 돌더니 뒷자리에 앉는 진예한테 물었다. 진예도 오늘 내가 이상했던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거이거. 딱 그거야.”
“무...뭐..?”

내가 떠듬떠듬 말하자 잎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 거야!”


“에엑...?”
“정말? 진짜?”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반면에 뒷자리의 진예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거. 좋아하는 남자라니 무슨.”


“아니면 뭐야. 하루 종일 딴생각에, 밥도 깨작깨작 먹고.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오바람도 은근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눈치 보던데.”
“에...? 오바람이? 전혀 몰랐는데.”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잎새가 답답한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니가 그렇게 딴생각에 빠져있는데 알아챌 리가 있나.”


“혹시 오바람이라거나?”

진예가 말하자 나는 고개를 붕붕 저어댔다. 아니 무슨 소리야. 오바람 팬클럽에게 맞아 죽을 일 있어?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잎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오바람을 좋아한다면 더 신경 썼겠지. 오늘은 그냥 무신경이었다니까?”


“아니, 좋아하는 남자애 없다니까.”

내가 강력하게 말했지만 내 말은 무시되고 잎새와 진예는 더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한지우라던가.”
“글쎄 한지우는 좀 지은이 싫어하던데?”
“그러니까 더 그럴 수도 있지.”
“속칭 나쁜 남자라거나?”
“엇 가능성 있는데?”
“사실 지은이 주변에 아는 남자애가...”
“반 남자애일수도 있지.”

둘은 나를 앞에 두고 신나게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추리하고 있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다못해


소리쳤다.
“아니라니까!”

잎새와 진예는 내가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그 둘은 진짜로


남자는 아닌가 보다 싶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럼 뭐 때문인데?”
“맞아, 뭐 때문이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포켓몬 때문에.”


“포켓몬?”

잎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진예는 뭔가 알겠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지난 토요일에 유기포켓몬보호센터 간 것 때문에 그래?”

진예도 우리 반에서 포켓몬 봉사부에 든 아이들 중에 한 명이었다. 분명 같은 조라서 같이 청소하기도 했었고.


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진예가 갸웃하며 도로 물었다.

“음... 별 일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다, 생각해보니 버스 타고 집에 갈 때부터 좀 멍해 보이긴 했는데.”


“아,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니, 무슨 일이 있었다기 보다는...”

나는 이틀 전의 그 날을 생각했다. 청소를 끝마치고 버스를 타기 전, 그 사이의 틈을 이용해서 나는 그 문을


열었었다.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저 뒤쪽 공터로 통하는 문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 끼얹어진 악취는 평범한 게 아니었다. 배설물 냄새라기보단 좀 더 고약한 냄새라고 해야


할까나.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 비슷하기도 하고 하수구 냄새 비슷하기도 하고, 쨌든 그런 악취가 풍겼다.
분명 야외인데도 그랬다.

나는 악취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날씨가 찬 편이라 많은 포켓몬들이 실내에서 생활하는 데 비해


덩그라니 한 철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한 포켓몬이 있었는데,

“...그런 거 있잖아. 파바박, 하는 느낌이랄까. 눈을 딱 마주쳤는데 뭐랄까 눈을 뗄 수 없다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
“마치 첫눈에 반하는 느낌일까나?”

잎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철장 안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나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계속 그 모습이 자꾸


떠올라.”
“불쌍해서 그런 거 아니야?”

잎새가 묻자 진예가 대신 대답했다.

“불쌍하기는, 거기 있는 애들이 다 불쌍하지. 걔만 특별히 불쌍하다고 할 건 없다고. 이건 바로 운명이지.


영혼으로 통하는 포켓몬이 있다고들 하잖아?”
두 손을 맞잡은 진예는 로망이라며 눈을 반짝였지만 잎새는 그런 건 그닥, 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보다 어떤 포켓몬인데?”
“으음...”

내가 말을 아끼자 궁금하다는 듯이 두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희귀한 포켓몬이었다거나 그런 거야?”


“아니, 별로 희귀한 건 아니구...”

두 쌍에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냥... 냄새꼬, 였어.”


“냄새꼬?”
“내가 악취가 나고 있었다고 했잖아.”

내 말에 진예가 그 악취가 냄새꼬가 풍기던 악취였던 거냐고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뭔가 취향도
특이하다, 하는 눈빛이야. 그럴 거라 생각해서 말 안 하려고 했던 건데.

“그럼 그 냄새꼬-”

진예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그 말을 끊고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그에 진예는 책 사물함에 있다고


뛰어나갔다. 나랑 잎새는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는데 벌써부터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 수학이라니.

내가 오늘 진도 나갈 페이지를 펴는데 빨리 뛰어갔다 온 진예가 우당탕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혼자


쿡쿡 웃으면서 오늘 배울 부분을 훑는데 내 책 위로 잎새가 글을 적기 시작했다.

[입양할거야?]

나는 그 글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잎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 모습에 잎새는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봤다.
아무래도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걸로 내가 입양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더
이상 포켓몬을 늘릴 생각이 없었는걸. 게다가 메리프도 다른 포켓몬 들이는 걸 별로 반기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이 마주쳤던 그 짧은 순간에 뭔가가 내 안으로 포르르 날아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아마 그 아이도 같은 걸 느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았다. 금방 내 눈을
피해버렸으니까.

그 냄새꼬는 철장 구석에 망연히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태도 같았다. 반면에


나는 그 아이를 살폈는데, 찬바람 때문일까 꽃봉오리는 쪼글쪼글했고 그 밑으로 축 쳐진 이파리 끝은 갈색으로
타들어가 있었다. 영양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밥을 잘 주지 않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릇엔 푸드가 잔뜩
담겨있었다. 스스로 먹지 않고 있는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철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그
아이에게 다가갈수록 악취는 더 강하게 흘러나왔다. 역시 이 아이한테서 나는 냄새였구나.

내가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볼까 싶어서 입을 열려는데 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입을 다시 다물고 말았다. 등장한


사람은 수정 언니였다. 그녀는 여기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금방 표정을
지우고 웃어 보였다.

‘학생은 이름이 뭐에요?’

하는 질문에 대답했더니 그 언니는 나를 끌고 가면서 말을 걸었다.


‘지은 학생 분명 내가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었죠? 지금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던가? 별로 시간이 안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수정 언니와 나는
다시금 정문으로 나가기 위해 뒷문을 통해 센터 안으로 들어왔고 그에 따라 악취도 약간의 자취만 남긴 채
사라졌다.

다들 밖에 모여 있는지 안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와 수정 언니는 센터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화체 포켓몬들이 있는 곳을 지나 놀이공간을 지나고 또 미진화 포켓몬이 있는 곳을 지나갈
즈음에 내가 수정 언니에게 물었다.

‘저 냄새꼬는 왜 혼자 밖에 있던 거에요?’

39 화

w. 도여은

‘저 냄새꼬는 왜 혼자 밖에 있던 거예요?’

내 질문에 수정 언니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풀 포켓몬을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는데 밖에 두는 건 정말 못할 짓이지만... 강한 악취 때문에 안에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말이에요.’
‘...’
‘아마 전 주인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거겠죠.’

내가 그 말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수정 언니는 웃으며 자세히 설명했다.

‘강한 악취가 나는 포켓몬이 있죠? 예를 들어 질뻐기라든가 저 아이 같은 냄새꼬라든가 또가스 같은. 혹시 그


포켓몬을 키우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을 계속 이었다.

‘아마 나중에 볼 기회가 생기겠죠. 사실 그들의 악취는 트레이너와의 관계와 많은 상관이 있다는 걸 알아요?
야생의 포켓몬이었을 때는 악취를 그대로 내뿜고 다니지만 트레이너와 파트너가 되면 신기하게도 악취가 사라지게
된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포켓몬들을 키우기 어려웠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너와의 관계가 악취의 영향을 끼치는 거라면... 나는 마치 쓰레기장에 서있었던
것 같던 그 냄새를 떠올렸다. 얼마나 트레이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면 저런 냄새를 풍기는 걸까. 버림받은
포켓몬인 걸까.

‘여기에 온 몇몇 포켓몬처럼 단순히 잃어버린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포켓몬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버림받은 게 아니라 단지 잃어버린 거라서 다시 찾으러 왔으면 좋겠다... 라는
느낌이니까.’
그 언니의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그 씁쓸한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봉사를 해 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아왔을까. 잃어버렸던 포켓몬을 다시 찾아가는 주인도
보았을 테고, 버림받은 포켓몬이 새 주인을 찾아가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많이 다쳐서 이곳에 오는 포켓몬들도
있겠지.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기분이 처져있든 말든 시간은 지나가고 오늘의 수업도 끝이 났다.
아이들이 떠들면서 학교를 나서거나, 아니면 저녁 급식을 먹고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한다거나 하기 위해서
분주한 가운데 나도 가방을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오늘 별일 없으면 나랑 어디 갈래?”

벌써 가방을 다 챙긴 잎새가 내게 물어왔다.

“음... 뭐 평소처럼 메리프랑 놀다가 들어갈 것 같은데. 왜?”


“오늘 계속 기분이 다운이었잖아. 아무래도 너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구. 어? 오늘 하루쯤 훈련 빼먹어도
되잖아. 트레이너가 될 것도 아닌 애가 엄청 열심히 한다니까.”
“흐음... 그런가?”
“그래그래. 진짜 너도 엄청 좋아할 곳이라니까. 응? 그러자~”

잎새는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하긴 오늘 공부가 잘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수업에도 집중이


잘 안 됐으니까. 잎새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정말... 왜 자꾸 신경 쓰이는 건지. 그 아이.

내가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니 잎새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더니 날 이끌었다. 학교를 벗어나 나와 잎새는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내가 어디로 가는 거냐고 계속 물어도 잎새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천국으로 가는 거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내려서 몇 분 걸었을까. 잎새는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잎새가 가리킨 곳은 2 층에 자리 잡은 한 카페였다. HEAVEN 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물었다.

“카페 이름이 heaven 이라서 천국이라고 한 거야?”

잎새는 웃으며 나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들어가 보면 알 거야. 여긴 평범한 카페가 아니거든.”

나는 평범한 카페가 아니면 뭐 어떤 곳일까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2 층에 자리 잡은 카페는 올라가는


계단부터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계단 벽에는 작은 액자들이 걸려있었는데, 그 안에는 여러 종류의 포켓몬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2 층으로 올라온 우리는 HEAVEN 이라 적혀있는 유리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내부를
완전히 볼 수 있었는데, 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이 컨셉인듯 목재를 사용해 꾸민 내부는 포인트로
올리브 그린색을 사용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런 카페 인테리어였다. 평일에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왔기 때문에 저녁시간이라 손님은 없었지만 그 대신에,

“정말 천국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 포켓몬 카페였던 거구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달려드는
덩쿠리와 치코리타가 보였고 창가에선 캐이시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델빌과 가디가 뒹굴며 장난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나옹이 털을 고르며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일단 주문부터 할까?”


“아, 응.”

잎새가 넋을 놓은 나를 흔들었다. 카운터로 향하는 우리를 덩쿠리와 치코리타가 바쁘게 따라왔다. 아무래도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 덩쿠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니, 저건 치코리타라고...!
역시 외모는 그래도 치코리타가... 끙... 시선을 빼앗기면 안...

“너도 빨리 주문해, 지은아.”

내가 치코리타를 두고 마음의 갈등을 하고 있는 사이 잎새가 나를 불렀다. 내가 불가항력으로 치코리타를 안아


드는데, 벌써 주문을 했는지 잎새가 나를 재촉했다. 내가 치코리타를 고쳐 안고 카운터를 보는데, 어라?

“수정 언니?”
“안녕하세요, 이름이 지은이랬던가요?”
“아, 네. 맞아요.”

푸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그분은 전에 유기포켓몬보호센터에서 보았던 그 언니 었다.

“엇. 벌써 인사까지 했었던 거야? 네가 언니 아는 건 센터에서 봤다고 쳐도, 언니한테는 내가 소개해주려고


했었는데.”
“둘이 친구야? 잎새가 새로 사귄 친구가 너였구나. 주문할래요?”
“아... 저는 자몽에이드로 하나 주세요.”

예상외로 따끈따끈한 치코리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는 계산하고 진동벨을 받는데, 수정 언니가 물었다.

“포켓몬 좋아하죠?”
“네?”
“딱 보니까 포켓몬 좋아할 것 같이 생겼어. 좀 있다 음료 가져다 줄테니까 재미있게 놀다 가요.”

수정언니는 빙그레 웃어 보였고, 잎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 뒤 음료를 준비하시기 시작했다. 잎새는 내 팔을
잡고 자기 지정석이라며 한 테이블로 이끌었다. 잎새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몬스터볼을 꺼내 푸린을
꺼내놓았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푸린이 탁자 위에 턱 하니 나타나더니 하늘색 눈을 반짝반짝하며 탁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포켓몬 꺼내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포켓몬 카페인데. 처음 와보는 거야?”

푸린이 치코리타와 덩쿠리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카페 같은 데는 가


본 적이 있지만... 푸린은 이곳이 익숙한지 덩쿠리랑 치코리타와 뒹굴면서 인사를 하다가 저 멀리 델빌에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가디가 눈치챘는지 먼저 푸린에게 몸을 날리는데 참 신나 보였다.

“너도 안 꺼내고 뭐해.”


“아, 참.”

잎새에 말에 그제야 나는 메리프를 볼에서 꺼냈다.

meee~
“계속 멍하게 있는다니까.”
“하하... 그런가...”

메리프가 내 무릎 위에서 여기가 어디지 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푸린이 저 멀리서 다른
포켓몬들하고 노는 모습을 보더니 금방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상태에서 놀래, 놀래! 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mee, meee!

나는 꼬리를 흔들어대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서 어여 놀러 가라고 바닥으로 내려놓자마자 메리프는 푸린들


쪽으로 뛰어갔다. 마치 놀이터에 나온 어린애 같은 모습이라니까. 그럼 나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엄마 같은 건가?

“귀엽지?”

잎새가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귀엽다. 포켓몬이란.”
“그렇지? 오길 잘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잎새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어디서 났는지 고무공을 가지고 한 대 뛰어다니는
포켓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델빌 아이 이름은 제키고 저 가디는 켄, 저 덩쿠리는 쿠아. 치코리타 이름은 하치야. 그리고, 레빈~ 이리
와 볼래?”

잎새가 저 쪽의 나옹을 부르자 나옹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에 잎새는 웃어며 머리를 긁적였다.

“쟤가 레빈인데... 하하, 안 오네. 원래가 나옹들은 까칠하다니까. 아 그리고,”


“어...?!”

나는 갑자기 식탁 위에 나타난 캐이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얘는 후. 맨날 이렇게 나타나곤 해서 이젠 놀랍지도 않아.”

잎새가 웃으면서 캐이시를 탁자 위에서 잡아 올려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엄청 잘 아네?”
“자주 오니까.”

나는 잎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캐이시를 바라봤다. 쭉 째진 눈에 갸름한 얼굴. 뾰족한 귀에 살짝 기운 없는


모습이 영락없는 내 상상 속의 캐이시와 똑 닮았다.

“후야, 얘는 내 친구 지은이. 지은아, 인사해.”


“안녕.”

내가 조금 수줍게 말을 걸자 캐이시는 바닥을 향하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보았다. 후라는 이름의 캐이시는
캐이시라는 포켓몬 자체가 그런 것인지 이 포켓몬이 특별한 건지는 몰라도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그리고 뭐랄까
어떤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진화의 돌을 봤을 때만큼의 신기한 느낌이었다. 마치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같이 느리게 흘러가고 나 또한 그 시간에 동화되는 그런 느낌. 그래서 그 캐이시가 나를 쳐다보았을 때 순간
꿰뚫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잠시 모든 게 멈췄다는 느낌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꺼내
들었다.
40 화

w. 도여은

“후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편은 아닌데 신기하네.”

캐이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는 가까이 다가온 수정 언니가 있었다.
수정 언니는 쟁반에 가지고 왔던 아메리카노와 자몽에이드를 각각 앞에 올렸다.

“절 기억하고 있으실 줄 몰랐어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조금 무례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의외이긴 했다. 하지만 수정 언니가 한 말은 더 의외였다.

“기억하지. 이틀 전에 봉사 왔었던 학생이었잖아요? 눈에 띄었기도 했고.”


“눈에 띄어요?”
“음... 조금?”

웃으면서 말하는 수정 언니의 모습에 나는 언니는 밝게 웃으면서 되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돌아서는
수정 언니를 부르자 그 언니는 나를 되돌아봤다. 그 냄새꼬는 잘 있는 걸까. 날씨가 아직 차가운데. 밥도 잘 못
먹고 있던 것 같은데. 악취는 어떻게 됐으려나. 악취가 사라져야 안으로 데려올 수 있을 텐데.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아니에요.”

내가 웃어버리자 언니는 뭔가 알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잘


놀다가렴.” 하며 돌아가 버렸다. 그 대신 물은 건 잎새였다.

“방금 그 냄새꼬 얘기 물으려고 했던 거지?”


“응... 그냥 좀. 역시 밖에 있다는 게 신경 쓰인달까. 오늘 날씨도 좀 쌀쌀했고.”
“냄새 때문에 밖에 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나? 언니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사실 거기에 포켓몬이 한두 마리가
아니다 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사실 언니도 저렇게 보이지만 엄청 신경 쓰고 있을 걸?”
“그럴까?”
“저 언니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보장할 수 있어.”

잎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크게 마신 후에 자신있게 웃어 보였다.

“사실 저 포켓몬들 다 그 유기포켓몬보호센터에 있던 아이들이거든.”


“에, 정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멀리서 함께 뒹굴면서 뛰어노는 아이들 하며, 잎새의 품에 안겨있는 캐이시며 또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 있는 나옹도 모두 여느 포켓몬과 다름없어 보였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하며
작게 말하자 잎새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수정 언니가 애들을 엄청 사랑하니까. 그런 게 엄청 느껴지거든. 정말이야. 난 여기 자주 오니까
알아. 아, 그리고 이 카페에서 저 언니가 사장님인데, 나오는 수익들 중 일부는 유기포켓몬센터에 기부하고
있거든. 매주 주말이면 가게는 알바에게 맡기고 봉사활동도 꼬박꼬박 하시고.”
“사장님이셔?”
“그렇게 안 보이지? 나도 처음에 엄청 놀랬다니까.”
kei~
“아, 언니 얘기하는 건 어떻게 알고. 아, 이 캐이시가 일 년 전에 들어온 막낸데, 사실 캐이시는 희귀해서
입양도 잘 된단 말이야. 그런데 후는 이상하게도 매번 입양이 돼도 그 보호소로 돌아오더래.”

“왜? 입양한 사람이 뭔가 잘못했데?”


“뭔가 잘못한 건 아니고. 글쎄... 일단 이 녀석 텔레포트를 쓸 줄 아니까. 자꾸 돌아오는 거야. 입양자 분도
매번 보호소로 데리러 갔지만 그게 계속 반복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나 봐. 결국 파양했고, 계속 입양과 파양이
반복되는데. 그래서 결국 언니가 데려오게 된 거야.”
“수정 언니가 좋아서 계속 남아있었던 걸까?”
“거기 있는 포켓몬 중에 언니의 애정이 가지 않은 아이는 없을 테니까. 아마 그랬던 거 아닐까? 사실 네가
말하는 운명의 느낌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캐이시가 그걸 느꼈을지도 모르지.”
“운명의 느낌이라니...”

그런 오글거리는 거 아니라니까. 쨌든 나는 자몽에이드를 마시며 잎새의 말을 들었다. 상큼한 자몽이 탄산과


함께 톡톡 터지는 느낌. 잎새의 말은 그 느낌과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사람이 포켓몬을 선택하지, 포켓몬이 사람을 선택하진 않잖아? 뭐랄까. 에스퍼 타입 포켓몬들은 아주
똑똑하다고 하니까 다른 포켓몬들하곤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잡기 어려운 만큼 같이 살기도 어려운
걸까나.”

잎새가 무릎 위의 캐이시 머리를 마구 쓰다듬자 캐이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저쪽에 다른 창틀로 자리를 옮긴 듯했다. 잎새는 순간적으로 허공을 휘저었던 손을 머쓱하게 갈무리했다.

“다른 애들 얘기도 다 아는 거야?”


“물론이지. 제키도 다른 애들도.”

잎새는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쪼옥 마신 후 말했다.

“사실 우리 집은 포켓몬을 여러 마리 키울 형편은 아니거든. 그래서 자주 여기로 오곤 하니까. 그래서 잘 아는


거지. 언니가 봉사부 들어오라고 했는데 안 간 건 좀 죄송스럽긴 하지만.”

잎새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컵을 잡아들자 나도 컵을 들었다. 한 입 마시면서 나는 창틀에 앉아있는 캐이시와


레빈이라는 이름의 나옹 그리고 저 멀리서 이번엔 술래잡기하듯 뛰어다니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왜 입양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궁금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분명히 내가 전에 얘기했을 텐데, 나는 의아해하며 입을 열려고 하자 잎새는 말을


막았다.

“메리프가 싫어한다는 말 말고 말이야. 아니 사실 메리프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그냥 혼자 생각한 거지?”


“...”
“포켓몬 한 마리 더 못 키울 형편도 아닌 것 같은데. 아버지도 대형 포켓몬을 두 마리나 키우고 계신다며,
그러면 부모님이 반대하시지도 않을 테고. 사실 너도 계속 그 냄새꼬 생각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 주인이 잃어버렸을지도 모르잖아. 찾고 있을지도...”
“악취가 진동을 했다며. 포켓몬이 얼마나 똑똑한데 주인이 잃어버렸는지, 그냥 버렸는지도 모를까 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지?”

거의 확신을 담은 듯한 물음에 나는 뭐라고 부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나는


포켓몬이 없는 세상에서 왔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돌아가고 나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어떤 변수도 더 만들어 두고 싶지 않다고.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내가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난 메리프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어. 사실 어떻게 원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학교생활이 점점 익숙해져 가면서 또 이 포켓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면서... 사실 내가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포켓몬이란 닌텐도 속에 게임으로 밖에 만날 수 없는 곳을 살았던 꿈. 아니면 진짜
이곳이 꿈은 아닐까. 깨고 나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진짜 이곳이 꿈같은
곳이니까. 포켓몬이 살아있는 그런 곳이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잎새가 믿어줄까?

“말 안 해도 돼.”

어색한 침묵에 먼저 잎새가 말을 뱉었다. 내가 잎새를 쳐다보자 잎새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뭔 소리를 한 거람. 미안미안. 몰아붙이듯이 말해서. 그냥 네가 계속 망설이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화내는 것 같아 보였다면 미안해,”

잎새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부러워서 그랬나 봐.”

잎새는 목을 쓸어내렸다. 오늘따라 잎새가 평소답지 않게 조금, 작아 보였다.

“쨌든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면 말이지... 캐이시만큼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트레이너라면 말이야.”

41 화

w. 도여은

그러고도 잎새는 델빌인 제키, 가디인 켄과 덩쿠리 쿠아는 물론 새침한 나옹인 레빈까지 모두 소개해주었다.
델빌이나 가디나 개과답게 맞아 주는 편이었다고 해야 할까.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아직 강아지라서 그런 걸까?
사실 강아지라고 했지만 델빌을 조금 인상이 무서운 편이었기 때문에 사실 첫인상은 조금 겁먹었었다. 잎새가
먼저 델빌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보고 만져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터였다. 언뜻 거칠어 보이는 짧은
털이 엄청나게 보들보들하다는 걸! 누구라도 만져보면 금방이라도 빠져들 만큼 부드러웠다고나 할까.

가디는 집에서 많이 본 완이와 비교했을 때 덩치는 조금 작은 편이었다. 눈꼬리가 쳐져 있는 게


매력포인트였는데, 좀 더 순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나. 두 포켓몬 다 밝은 성격이었지만 델빌이 좀 더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에 풀포켓몬인 두 녀석들, 덩쿠리와 치코리타는 용케도 둘 하고 잘 어울린다 싶었다. 아무래도


풀타입이라는 게 불꽃 타입 하고는 상극이니까... 특성이라는 게 꼭 관계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구나.
으음... 마치 우리 집에 있는 모다피와 가디처럼.

나옹은 잎새가 하도 부르니 귀찮아서 인 듯 느릿느릿 다가왔다. 진짜 네발로 걸어왔는데, 애니에서 두발로 걷는
나옹이 너무 뇌리에 박혀서일까나, 조금 어색했다고 해야 할까. 컬쳐쇼크라고 해야 할까. 쨌든 금화가 박혀있는
머리를 손에 문대며 애교 부리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그렇게 포켓몬들 간식도 주고 놀아주기도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집에 돌아왔다. 방 안에서 가방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제 저녁밥을 먹으려는데... 어라? 어라라...?

지갑이 없..다...?

meee?
“아니... 메리프 지금 지갑이 없어.”

나는 주머니며 가방 속이며 허둥지둥 뒤져봤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아침에 지갑을 챙기지 않았는지
고민했지만 분명 카페에서 음료를 산다고 돈을 썼으니까, 그때까지는 있었던 건데... 메리프에게 혹시 보았냐고
물어보았지만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지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개념 자체를 모르는 듯.

흐아, 나는 한숨을 쉬며 일단 잎새한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연결음이 지나더니 여보세요, 소리와 함께 잎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응. 집엔 잘 도착했어? 웬 전화?]
“아, 그게 말이야... 나... 지갑을 잃어버린 거 같아.”
[뭐? 어디서?]
“오늘 카페에서 놔두고 온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

잎새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하하...

[돌아올 때 버스 타고 갔잖아. 그때 잃어버린 건 아니고?]


“나 버스카드 안 쓰고 폰으로 충전해서 쓰는 거 알잖아. 꺼낸 적 없으니까.”
[알겠어. 내가 수정 언니한테 물어볼게. 어이구... 정말... 안에 얼마 들었는데?]
“한... 만원 정도?”
[오키오키 알겠어. 물어보고 카톡할게.]
“응응, 땡큐.”

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카페에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참... 덜렁대다니. 나는 일단


가방을 정리하고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소리에 후다닥 식탁으로 향했다. 수저를 들고 밥을 먹으려는데, 그새
수정언니에게 연락을 끝냈는지 잎새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잎새] 찾음!카페에있대

“다행이다.”

나는 조그맣게 속삭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식탁 밑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잎새에게 고맙다는 카톡을
보냈다. 그럼 내일 찾으러 가면 되겠다. 찾으러 가면...

“찾으러...”

파란 발이, 둥글게 말린 잎사귀가 생각났다. 쪼그라들던 꽃봉오리도. 나는 금방 머리를 흔들며 그 생각을


쫓아내려고 했다.

“왜 그래?”

엄마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트레이너라면 말이야.’


‘가버릴 생각이잖아? 안 그래?’
‘왜 입양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갈 방법만 찾으면 훌훌 다 버리고 갈 것 아니야.’

잎새의 말과 한지우의 말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뺨을 타고 떨어졌던 메리프의 눈물도 생각났다. 철창 안에서


먼 곳을 보고 있던 냄새꼬도, 그 악취도...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자꾸 떠올라 샤프를 쥐다 떨어뜨렸다를 반복했다.

.
.
.

“오늘 지갑 찾으러 카페 갈거야?”

잎새의 말에 소세지 하나를 집어먹고 있던 나는 소세지를 오물오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옆에 있던


오바람이 궁금한 듯 물었다.

“왠 지갑?”
“아, 어제 포켓몬 카페에 갔었는데... 거기에 지갑을 두고 갔었거든.”

내가 대답하자 오바람은 그러냐, 말하고는 도시락에서 유부초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서 찾으러 간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잎새는 도리어 제가 더 답답하다는 듯이 보였다.

“정말 내가 넋 놓고 다닌다고 기분 전환 시켜주려고 했는데, 거기서도 또 사고를 친다니까.”


“아니, 사고 친 것까진 아니지. 지갑 좀 놓고 다닐 수도-”
“지갑 좀 놓고 다닐 수도? 하이구... 내가 우리 지은이 때문에 못 살어, 못 살어.”
잎새가 내 말을 가로채며 말했지만 그 말 안에 웃음이 가득한지라 나도 잎새를 샐쭉 째리다 말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밥을 입 안에 밀어 넣으면서 어제의 그 카페를 생각했다. 친절한 수정언니와 그곳에 있던
포켓몬들이 생각났다. 후, 제키, 켄과 쿠아, 그리고 레빈까지. 모두 밝고 건강해 보였었는데...

내가 잠시 그 때를 생각하면서 나무 그늘 잎 사이로 부서지는 하늘을 보고 있자 옆에서 뭔가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메리프가 푸드를 먹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meee? mee?

무슨 생각 해? 라는 물음에 나는 웃으며 그저 메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메리프는 금방 잊어버린 듯


눈을 감으며 내 손에 머리를 부비고. 나는 그것에 기분이 좋아서 도시락을 내려다 두고는 꼭 안아버리고 만다.
메리프의 동그란 단추 같은 눈동자는 바라보기만 해도 쓰다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니까.

“저런... 또 시작했다. 메리프 사랑.”

오바람이 끌끌 거리며 혀를 찼다.

“왜 보기 좋구만.”

잎새가 말하자 오바람은 그러려니 하면서 내게 물었다.

“그것보다 메리프, 이제 진화할 때 되지 않았어? 보니까 기술도 이것저것 많이 배웠던 것 같던데.”


“음... 그렇지?”

대체로 게임에서는 레벨만 맞으면 기술도 배우고 진화도 하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메리프를 내려다보았다. 메리프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보였다. 하긴 열심히 수련도 하고 먹기도 잘 먹고 자기도 잘
자는데 왜 진화를 하지 않는 걸까? 메리프 스스로도 빨리 진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B 버튼을 누르는
것도 아니고.

“진화를 하려면 뭔가 더 필요한가? 오바람 너도 구구를 피죤으로 진화시켰으니까 알거 아냐.”

피죤은 학교에서 내내 몬스터볼에 있었던 것이 갑갑했던지 밥을 빨리 먹어버리고는 머리 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피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오바람을 바라봤다. 그 질문에 조금 생각하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글쎄... 뭐랄까. 아직 학계에서도 진화에 대해 많이 알려진 건 아니니까. 그래도 메리프는 별다른 진화


조건이 있었던 것 같진 않던데.”
“하긴 나는 진화의 돌로 진화시키는 거고 말이야. 그렇지 크림아.”

잎새가 옆에 있는 푸린의 머리를 토닥토닥하자 푸린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통통 튀었다.

“뭐 아무래도 피죤은 진화를 빨리 한 편이지? 안 그런가?”


“그렇지 뭐. 아, 요즘 꼬렛도 곧 진화할 것 같더라.”
“에?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건데?”

잎새가 의아해하며 묻자 오바람은 먹던 유부초밥을 삼켰다. 나도 궁금해서 시선을 집중하는데, 오바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냥... 감이랄까.”

정적.
“헐... 야, 진짜 믿음직하다.”

잎새가 비꼬자 오바람은 조금 발끈한 듯 했다.

“야, 진짜 그런 거 있다고. 피죤도 구구에서 진화할 때 어떤 느낌이 왔었다니까. 그땐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데...”
“그런 뜻이 아니라, 포켓몬 연구할거라는 애가 그런 소릴 하니까 웃기다는 거지.”

잎새의 말에 오바람은 조금 웃으며 말했다.

“뭐. 과학적으론 그렇지만... 그래도 트레이너하고 포켓몬은 조금 연결되어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 않냐?”

그런가. 나는 메리프를 내려다봤다. 나도... 메리프가 처음 알에서 태어났을 때, 조금... 아니 많이, 어떤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다. 뭔가 세상에서 어떤 생명이 태어났다는 그 경외감 비슷한 감정 말고도...
뭐랄까 어떤...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

그래, 그때. 석양 진 노을 아래서 철장 속에 그 아이를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 조금


울렁거리면서도 발길을 붙잡는 그런... 조금 부드러운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헤집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다시금 그 아이 생각이 났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오늘은 날씨가 많이 풀렸으니까 좀 덜
추우려나. 푸드는 좀 먹었으려나. 전에 하나도 안 먹는 것처럼 보였는데. 잎도 많이 말랐었고. 반점이 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잠깐 봤던 거라 잘 기억이...

“-은, 야, 이지은.”
“아...? 어.”

오바람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어 물고 있던 젓가락을 입에서 떼고 바라보자 오바람은 눈썹을 조금 찡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에... 뭐.”
“또 그 생각이야? 지난 번 그 냄-”

나는 깜짝 놀라 잎새의 말을 막았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조금 소리가 컸었던가. 다른 포켓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도 나도


놀랐다. 별로 숨길만한 얘기도 아닌데...

“딴 생각했어. 딴 생각. 하하... 것보다 뭔 얘기 하고 있었는데?”

나는 말을 돌렸다. 오바람은 뭔가 궁금하다는 눈치였지만 잎새는 눈치 빠르게도 말을 돌려주었다.

“아니, 꼬렛이 언제 진화할까, 내기하고 있었지. 아니 오바람이 말이야...”

오바람은 열흘 안에 진화한다고 했고 잎새는 그보다 더 걸릴 거라고 내기했다나 뭐라나 하는 얘기에 나는 그


말에 따라 이것저것 답하고 웃고 말했다. 오바람 뭔가 신경 쓰인다는 눈초리엔 나는 얼버무리는 표정을
지어버리고 말았고.
그 눈을 피하다가 꼬렛과 눈이 마주쳤다. 꼬렛은 늘상 그렇듯 눈이 마주치자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면 덩달아
수염이 씰룩여지곤 한다. 그렇게 보다 보니 그 꼬리 잘린 꼬렛이 생각나기도 하고, 생각하다 보면 그 냄새꼬의
쳐진 눈꼬리가 생각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참. 지은아, 그래서 카페, 학교 마치고 바로 가려고?”

나는 머릿속에서 그 모습을 지워낸 다음 대답했다.

“가봐야지. 지갑 찾아야 되니까.”


“아...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일이 있어서. 혼자 갈 수 있겠어?”

잎새가 묻자 당연히 혼자 갈 수 있다고 내가 대답하려는데,


“그럼 나ㄹ...”
“물론이지. 혼자...”

오바람하고 내가 동시에 말을 꺼낸 바람에 말이 끊겨버렸다.

“뭐라고 했어? 방금?”


“아니. 아무것도.”

내가 묻자 오바람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짜 못 들어서 물어본 건데... 잎새는 뭔가 웃기다는 듯이 소매에


얼굴을 묻고 큭큭거렸다. 저기... 뭐가 웃긴 거지? 무슨 말이라도... 나만 이해 못 한 거야?

어리둥절한 내 표정에 잎새는 더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42 화

w. 도여은

혼자 갈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도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조금 헤맸다. 그래도 간판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heaven 이라고 적힌 간판을 힐긋 쳐다본 뒤 계단을 올라갔다. 어제 이곳에 왔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예쁜 포켓몬 사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의미 있게 다가왔다.

캐이시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의 사진을 보면서 아, 이때는 조금 덩치가 작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디가 뛰노는 모습이라거나 나옹이 쿠션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 있는 모습에서 그 상황이 상상이 가는 것이...
역시 알게 되면 관심 갖게 되고 관심 갖게 되면 더 주의 깊게 보게 되고, 그렇게 점점 사랑하게 되는 걸까. 나는
액자 속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유리문을 밀자 딸랑, 하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세요.”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검푸른 머리카락을 아래로 묶고 있는 수정언니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고개를 돌려 살피니 가게 안에는 어떤 커플 하나가 얘기를 나누며 포켓몬들을 보고 있는 것 말고는 한산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 지갑을 찾으려고 왔는데요.”
“지갑은 여기 찾아놨어요. 이거 맞죠?”

나는 언니가 카운터 너머로 지갑을 건네주었다. 지갑에 없어진 건 없는지 찾아보라는 언니의 말에 지갑을 살폈다.
지갑을 살피면서 나는 사실 궁금증을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아이는 잘 지내나요? 버스를 타고 오면서
계속 들었던 궁금증. 하지만 계속 억누를 수밖에 없는 건... 물어봐서 뭐. 뭐 어쩌려고.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건 없는 것 같아요.”

나는 대답하고 다시 가게를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은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했던가. 조금 우물쭈물했던 게
보였던 걸까. 돌아서서 가려는 날 수정 언니가 붙잡았다.

“잠깐 뭐 좀 마시고 갈래요?”

.
.
.

“엄마.”
“왜?”

엄마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뚝배기에 끓인 김치찌개의 맛을 보면서 내 물음에 답했다. 나는 모다피와 메리프의
푸드를 챙겨주고 있었고. 후두득 그릇 위로 푸드가 쏟아져 나왔고 나는 모다피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식탁 의자에 다리를 끌어안은 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엄마는 한 손에 국자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 뭐 그냥.”
“뭐야, 싱겁게.”

웃는 엄마를 따라 웃으려다 어색한 웃음이 나와버렸다. 엄마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는 부엌장갑을 끼고


뚝배기를 들어 식탁 위에 올렸다. 저녁식사가 다 차려졌다. 주말 부부시라 아빠는 지금 연구소에 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만. 나는 밥을 한술 떠먹으면서 조금 결심을 굳혔다. 자연스럽게 물어보자.


자연스럽게.

“엄마, 엄마는 모다피랑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내 말에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딸. 그거 물으려고 그렇게 뜸 들인 거야?”

음... 뭐랄까. 아주 간단한 질문임에도 조금 망설여졌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단 말이야. 엄마가
포켓몬 얘기를 하는 것이. 뭐랄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긴, 이런 거 물어본 게 처음이려나. 오래 전 얘기기도 하고.”

첫째론 엄마에게 엄마의 옛 이야기를 물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려나. 엄마는 내가 나서부터
엄마였으니까. 엄마의 결혼 전 이야기 같은 거. 물어볼 기회도... 아니 기회는 많았지만 그것에 대해서 궁금했던
적도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가 아마 너만 할 적이었을 거야.”

엄마는 저녁 식탁 앞에서 조금씩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가 너만 했을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갔을 때 말이야. 아, 그 당시에도 고등학생 때 자기 포켓몬을


가질 수 있었거든. 그 땐 주변에 야생 포켓몬도 지금보다 더 많았었는데, 참. 요즘은 분양받거나 주변
가정집에서 얻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는 부모님의 포켓몬을 빌려서 주변에서 포켓몬을 잡곤 했었지. 엄마는
외할머니의 노라키를 빌렸었어.”

엄마는 밥을 먹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지만 조금 그 때를 추억하는 듯 조금 아득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외할머니의 노라키도 알 수 없었다. 그 전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노라키와 엄마는 근처 뒷산 주변 풀숲에서 몬스터볼 하나를 들고 잠복하고 있었어. 사실 몬스터볼이 그


당시에는 많이 귀했었거든. 풀숲에서 몸을 숙이고 노라키도 무릎을 굽힌 채로 기다리고 있는데, 사실 마땅찮은
포켓몬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꼬렛이라거나, 아 그 당시에도 꼬렛은 정말 흔한 포켓몬이었지.”
“오바람도 꼬렛 키우더라.”

내가 잠시 끼어들자 엄마는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박사님네 손자라고 했었나? 조금 의외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마랑 나는 같이 웃었다. 엄마는 말을 이었다.

“꼬렛이나 구구나, 가끔은 꼬리선을 보기도 했고. 몬스터볼은 하나라서 망설이고 있었지. 그렇게 몇 번 허탕을
치고 돌아왔었어. 사실 그 주변에 포켓몬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서 말이지. 별 것 없었는데 말이야. 뭔가 특별한
포켓몬을 잡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특별한 포켓몬?”

젓가락을 물다말고 내가 물었다.

“으음...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는 거지. 하긴... 그래도 특별한 포켓몬이긴 하지. 그렇지
모디?”

모다피는 푸드를 다 먹었는지 쫑쫑 걸어와서 엄마 옆자리에 앉아서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제


얘기를 하고 있는 걸 아는 듯. 나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뭐랄까. 모다피가 많이 살거든 거기에. 분명 노라키하고 같이 잠복을 하면서 모다피를 많이 봤었는데. 딱


모디를 만난 거야. 눈을 마주쳤는데,”

눈을 마주쳤는데

“세상이 잠깐 정지한 것처럼-”

세상이 잠깐 정지한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야.”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아 저 아이를 잡아야겠다, 생각이 들었지. 갑자기 나타나니까 놀랐는지 모다피가 도망가려고 했는데,
노라키가 펄쩍 뛰어서 그 앞길을 막아버린 거야. 그래서 내가 모디한테 달려들었었지. 아, 모디도 그때
당황했었을걸?”
“에, 엄마가 달려들었다고?”
“멋몰랐던 거지. 지금은 그럴 경우에 야생 포켓몬이 놀라서 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땐 뭐랄까.
더 살기 좋았다고 해야 하나. 덜 경계했다고 해야 할까.”

엄마는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모디도 모르지. 엄마와 같은 기분이었을지. 아, 물어보면 되려나? 모디 그때 어땠어?”


modada!

모다피는 순간 당황한 눈치로 엄마를 보더니 부끄러운지 얼굴을 폭 가리고는 뛰어가 버렸다. 나는 크게
웃어버렸다.

“엄마 차인거야?”

엄마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건데?”


“아니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어느새 나는 밥공기를 다 비웠고 수저를 정리해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개수대에 그릇과 수저를 담그고 밥을 다 먹고 거실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메리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왜 내가 엄마에게 그 질문을 하기 어려웠는지. 왜 결심이 조금 필요했는지 두 번째 이유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다른 세상에 떨어져 버린 게,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엄마가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버려서.

그래도 조금 익숙해 진걸까. 전보다는 조금 충격이 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 탓에, 부엌을
나가면서 충동적으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포켓몬 한 마리 더 기를까?”

엄마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식탁을 치우면서 조금 생각하더니

“엄마는 새 식구가 들어오면 좋지. 왜?”


“아니 아니야.”

나는 조금 당황스런 마음으로 말을 부정하고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항상 내 발치를 따라다니던 메리프도


당연히 함께였다. 난 조금 지쳤다. 내가 침대에 털썩 눕자 메리프도 풀쩍 뛰어서 침대 위에 올라섰다.

아, 침대가 흔들릴 만큼 많이 컸구나. 메리프. 나는 내 팔과 몸통 사이에 자리를 잡는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말 편하게 해도 될까?’

한 테이블에 마주앉은 수정언니가 내게 물었다. 나는 물론 고개를 끄덕였고. 수정 언니는 내가 동생 같아서


그런다며 말을 이었었다. 조금 사소한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언니가 나에게
물은 물음이었다.

‘그 냄새꼬 신경 쓰이지?’
‘에?’
‘어떻게 알았어요? 하는 표정 짓지마. 눈에 금방 보이니까.’

나는 얼굴을 살짝 쓸었다. 내가 그렇게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나 생각하면서. 그 모습에 언니는 작게 웃었다.

‘나랑 많이 닮은 것 같아.’
‘네?’
‘아니 그냥...’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언니가 준 에이드 컵에 생긴 물방울들을 손으로 쓸고 있었다. 하나로 모인 물방울이


컵을 따라 흐를 때 언니가 말했다.

‘냄새꼬는 잘 있지 못해. 아니 잘 있을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이제 곧 죽어야 할지도 몰라.’

죽어야 할지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아니고 죽어야 할지도 라는 건 무슨 뜻일까.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금 알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들고 있던 돌덩이를 놓쳐 발등에 떨어뜨린 기분이 들었다.

‘안락사... 말씀이신 거예요?’


‘그래. 영영 보호소에 있을 순 없으니까. 특히 냄새꼬는 많이 불편함을 주기 때문에... 거기엔 포켓몬이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 안타깝게도...’

언니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니 말을 골랐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까.

‘냄새꼬를 보호하고 있다고 공고를 올렸지만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어. 그리고 최소한의 보호기간이
끝나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 그때까지 버텨줄지도 의문이네... 영 밥을 안 먹거든.’

나는 그 한 순간의 장면을 기억한다. 단지 그 한순간이 그 아이와 내가 만났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걸까. 왜 계속 생각나고. 또,

‘저한테 왜 이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 입양하라구요? 죄책감이라도 가지라는 거에요?’

순간 탁자를 쾅 치고 말았다. 목소리가 조금 컸던 것도 같다. 사실 조금 화가 났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무례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그냥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런 상황에 처한 건 그 냄새꼬 뿐만이 아니니까. 죄책감을 가지려면 한도 끝도 없는


거야. 안락사당하는 수많은 유기 포켓몬 중에 하나일 뿐인걸.’
‘......’
‘너는 그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음음... 뭐라고 해야 할까. 아, 그래. 다음 달에 네가 봉사를 하러 왔을 때 그 냄새꼬


어디 있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잘 있다고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라고 해둘까?’

고요한 방에는 시계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든 메리프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숨소리가
색색 하며 들렸다. 자세히 귀 기울이다 보면 메리프의 심장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프.”
me?

메리프는 자고 있지 않았는지 금방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자연스럽게 메리프는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어떻게 생각해? 다른 포켓몬을 들이는 거...”

나는 메리프의 눈을 피했다.

“역시 별로지? 미안, 괜한 소리-”


me.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리프를 내려다봤다.

meeeee. meeee.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메리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니, 데리러 가자. 데리고 오자.

라고.

43 화

w. 도여은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땐 덜컹거리는 커다란 상자 속이었다. 그 상자는 아주 크고 크고 또 어둡고 어두웠다.


그리고 나와 같이 알에서 깨어난 것들이 가득했다.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포켓몬들. 나는 알 껍질을
털어내고 한 대 뭉쳐있는 그들에게로 가 자연스럽게 한 뭉치가 되었다.

우리를 실은 상자는 모든 알이 다 깨어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알에서 깬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한 무리를 짓고 있었다. 이파리를 맞대고 체온을 느끼며 이상하게 느껴지는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어느새 덜컹거리던 상자가 멈추고 상자 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가득해졌다. 끼익
거리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상자의 옆면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눈부신 무언가가 새어 들어왔다.
빛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빛의 모습은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순간이었지만 내 눈엔 그 모습이 아주 느리고 느리게 보였다.


내 주변에 있던 무리는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 저 구석으로 도망쳤지만 나는 멍하니 저 밖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본 것은 네모난 틀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리고 초록색의 풀들. 멍하게 앉아있던 나는 제일 먼저
인간에게 잡혔다. 그들은 우리를 뚜벅쵸라 불렀다.

우리는 상자에 나눠 담겨졌다. 아주 크고 어둡던 바퀴 달린 상자가 아닌 작은 상자였다. 나 같은 뚜벅쵸 6


마리면 가득 찰 만한 상자였다. 상자 밖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손짓을 하며 떠들던 그들은 무언가 건네주고 건네받더니 우리가 든 상자를
나눠 가졌다. 내가 들어있는 상자도 이내 곧 닫히더니 누군가에 의해서 옮겨지고 있었다. 우리 여섯은 그저 한데
뭉쳐있을 뿐이었다. 아직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였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려고 하면 흐릿하다. 아주 어렸을 때이기도 했고 그 당시에는 말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말을 안다고 해서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신경 쓰이고 거슬린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찾아오는 여자 때문이다. 아니, 여자라고 하기도 그렇고 소녀라고 하기에도 그런 아주
어정쩡한 상태의 인간이다. 그 여자가 자꾸 말을 건다.

나는 생각이라거나 기억이라거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처음 그 여자를 보았을 때는 확실히


기억난다. 항상 철장 안에 있다 보면 눈을 감고 있어도 가까이에 있는 문이 열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문이
내가 태어났던 그 상자 안에서 들었던 날카로운 소음을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문을 여는 건 몇 명 한정된
인간이 다였는데, 처음 보는 인간이 문을 열었었다.

힐끗 눈이 갔었는데...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를 가진 인간. 아니


냄새라기보다는 느낌일까, 파장일까... 어찌되었든 신기한 사람이었다. 나는 주변 포켓몬들이 이렇게 무심한
포켓몬은 처음 본다고 할 정도로 원체 신기한 것을 모르고 사는 포켓몬이기 때문에 내가 신기할 정도면 조금
기이하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버렸는데,

마치 세찬 바람이 내 이파리와 꽃봉오리를 마구 휘졌고 지나간 느낌을 받았다. 마치,라고 말했던 것은 바람은
불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뭔가 좋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이상한 인간은 사라졌다. 나도 그 여자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후 그 여자가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 여자를 잊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 여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기운도 그대로였다. 그 여자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조금 쭈뼛쭈뼛하게 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불편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분명 내 악취 때문이리라. 나는 짜증이 났다. 그 여자는 나에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날 내버려 둬!

날카로운 소리가 나와 그 여자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나는 철장을 내리쳤던 덩굴을 회수했다. 그저 덩굴을
꺼냈던 것뿐인데 나는 생명이 한 움큼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만족스런 느낌에 짜증이 가라앉았다. 그 여자도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신경을 끄고 내 일에 집중했다.

내 일이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었다. 죽기는 귀찮지만 살기는 더 귀찮았다. 그래서 죽기로 한 거다.
죽음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나는 죽기위해 무언가 하는 것도 귀찮았기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면
언젠간 죽으리라. 내 예상은 맞았다. 점점 나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햇빛이다. 햇빛은 내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찬 바람이 몸을
에워싸고 굶주림이 나를 뒤덮어도 해가 뜨면 내 몸은 스스로 그 한 줌 빛에 의지해 영양분을 쥐어 짜낸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죽음의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도 처음부터 이런 냄새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뚜벅쵸였을 때, 그러니까 여섯 마리의 뚜벅쵸가


함께 상자에 담겨져 있었을 때 우리에게서는 갓 태어난 이파리 보송보송한 솜털에 맺힌 이슬 같은 냄새가 났다.
아니, 우리에게서 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라고 하는 말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서 조금 다른
향기가 난다고 했다. 이파리에서 구른 이슬이 떨어져 젖은 흙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별로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들에게서도 각자 미묘하게 다른 향기가 났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 서로를 구분했다.

‘저 상자 너머엔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한 녀석이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즈음 해서는 모두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


녀석은 우리 여섯 중에서 가장 말을 잘하던 놈이었다.

‘더 큰 세상이 있을 거야!’

그 녀석은 항상 상자 밖을 궁금해 했었다. 본성이 호기심이 많은 놈이었다. 상자 밖으로 나가려고 제자리에서


뜀뛰기도 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가끔 그 녀석에게 치이기도 했다. 소원대로 그 녀석은 제일 먼저 이 상자를
빠져나갔다.

누군가에게 팔린 것이다. 그걸 시작으로 해서 속속들이 한 마리씩 상자에서 사라져 갔다. 그들은 커다란 손에
의해서 상자 밖으로 나가 졌다.

‘너는 제일 늦게 나가게 될 걸?’

남아있던 세 마리 중 한 애가 말했었다. 나처럼 우중충한 놈은 인간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뭐, 별로


상자 밖으로 나가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던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남았다.

나는 조금 탁했지만 상자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좋았고 가끔씩 찾아오는 바람이 좋았다. 그뿐이었다. 의욕도
없고 호기심도 없고. 그래도 운이 좋았던지 아니, 나빴던 걸까, 어찌 되었건 나도 팔려나가게 되었다.

한 가정집이었다. 중년 여자와 남자, 그리고 남자 꼬마... 라고 하기엔 좀 큰 인간 한 명.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내 화분이 생기고 그곳에서 지내게 됐다. 상자 밖의 세상은 조금 더 큰 상자였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사실 조금 달갑지 않았다. 내 주변에 있던 뚜벅쵸들은 내가 귀염성
없는 성격이라고 했었다. 맞다. 사실 나는 그 집 아들의 생일 선물이었던 것 같지만 뭐, 곧 잊혀지고 말았다.
조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끔 내 밥을 잊기도 했지만 뭐, 햇볕만 있으면 충분했으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저건 신경 쓰여.

여자는 그 날 이후로 해가 지려하는 저녁때마다 나를 찾아왔다. 말을 걸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니다. 어디서


났는지 의자 하나를 가져오더니 전에 서 있었던 자리에 두더니 거기에 앉아있다. 첫날에는 거기 앉아서 날 지긋이
노려보더니 그다음 날은 책이라는 종이 묶음을 가져와서 보고 있다. 그 다음 날은 얇고 네모난 무언가를 들고
열심히 두드려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찾아왔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기라도 하면 어찌 알았는지 눈을 마주쳐 오면서 싱긋 웃어 보인다. 내가 급하게 시선을 돌려 보이면
뭐가 웃기는지 소리 내서 웃어버린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 흔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핀트가 어긋나고 있었다.

관심, 이라고 하면 그 집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던가. 나를 몬스터볼에 넣은 채 훈련이다 뭐다 끌고


다닌 기억이 난다. 배틀도 했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집 아들은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혈기가
앞선다고 해야 할까. 상대편의 도발에 금방 넘어가서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곤 했다. 맞춰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가끔 그 지시를 무시하거나 내 멋대로 행동하면 그는 화를 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엉뚱한 지시를 받고
상대 포켓몬에게 당할 것이냐, 아니면 멋대로 행동하고 그에게 혼날 것인가. 뭐, 귀찮다. 멋대로 하라지.

지시에 맞춰 움직이는 건 편했다. 하지만 그만큼 졌다. 뭐가 또 문제인 건지 그 집 아들놈은 성깔만 늘어났다.
그 발길질에 얻어맞기도 했다. 가끔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는 말했다.

‘소름끼친다고, 그 눈깔.’

그는 내가 뚜벅쵸같지 않다고 했다. 뚜벅쵸 같은 게 뭔가. 하지만 그렇게 배틀에서 지는데도 어느 날 진화를
하게 되어 냄새꼬가 되었다. 이제는 뚜벅쵸 같지 않다는 소리 안 들어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별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 아들은 내가 진화하자 기쁜 듯 보였다. 바로 나를 몬스터볼에 넣더니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보나 마나


뻔하지. 배틀이었다. 그리고 졌다.

누군들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하지만 갓 진화한 몸은 내 몸 같지 않았고 시야도 전과 달라 어지러웠다.


지시를 듣고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쓸모없는 새끼.’

상대방이 떠난 공터에서 나는 쓰러진 채였다. 그 목소리가 나를 비난하는 게 느껴졌지만. 뭐, 익숙했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폭발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를 어떻게 하려나. 전처럼 발길질을 해대려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잠잠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내 눈 앞으로 몬스터볼을 던졌다. 몬스터볼은 내 왼쪽 눈을 때리고는 바닥에 굴러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는 발을 들어 그 몬스터볼을 밟았다. 그것은 그 발밑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채 깨어졌다. 그 부속품이


튀어서 내 이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나는 철창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사랑한다. 내가 이대로 죽는다고 했을 때 가장 아쉬운 게 있다면 더 이상


하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일까. 하늘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했던 어떤 관계 그 이상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키웠던 것도 저 하늘이었고 죽음으로 소멸해가는 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저 하늘이다.

몬스터볼이 깨어졌을 때도 공터에 쓰러지듯 누워 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사실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집 아들에게도 어떤 관계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때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한참을
밤하늘을 보고 있었을 때, 나를 샀던 중년 여자가 나를 데리러 왔었다. 상처를 치료받고 집에 돌아왔으나 나를
반긴 건 깨어진 화분이었다.

쏟아진 흙 사이에서 깨어진 화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집 아들은 돌아온 나에게 화를 퍼부었다. 중년 여자가
그를 말렸고 깨진 화분을 치웠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몇 일 머물지 못했다. 내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이었다.
중년 여자가 나를 씻기고 씻겨도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금 버려졌다. 뭐, 몬스터볼이 깨어졌던 밤부터
나는 버려졌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는 밤하늘을 보고 있다. 그 화분 조각처럼 별이 빛나고 있다. 다섯 번의 밤이 지날 동안 계속 찾아오던 그


여자가 어제는 오지 않았다. 오늘도 오지 않았다. 사실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에게도 어떤
관계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 여자의 관심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내 몸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시 못 뜰 것 같다는 그런 느낌.

마지막에 생각나는 게 그 여자라는 게 웃기다. 세 번의 계절이 지나는 세월동안 고작 5 일 본 그 여자가


떠오르다니. 그래도 뭐, 괜찮았다. 내 눈을 보고 웃어주던 인간은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뚜벅쵸답지 않다고 했다. 징그럽고 소름끼친다고. 맞다. 뚜벅쵸다운 건 가장 먼저 상자를 빠져나갔던 그 녀석


같은 걸 말하는 거겠지. 호기심 많고 활발하고. 특히 반짝반짝 빛나던 그 생명력 넘치는 붉은 눈동자. 같은
뚜벅쵸 사이에서도 이해받지 못했다. 나를 사 갔던 주인이라던 그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여자는 나에게서 무엇을 봤던 걸까. 왜 나에게 웃어주었던 걸까. 왜 닷새간 나를 찾아온 걸까.

뭐, 이제야 그런 호기심 같은 걸 느끼더라도 늦었어. 더 이상은...

나는 눈을 감았다.

아침 햇살이 눈이 부셨다. 아직 죽지 않았던 건가. 어지간히도 살려고 노력이다. 내 몸은...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보이는 건 하늘... 그리고 저 멀리서 무언가 뛰어오고 있는 모습. 저 냄새, 저 느낌, 이상한...
멀리서도 느껴질 만한 그 파장. 그 여자는 뛰어왔는지 저 멀리서부터 뛰었다가 숨을 내쉬다가, 조금 비틀거렸다가
다시 뛰는 것을 반복하며 여기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어젯밤 생각했던 그 호기심이 발끝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왜.
왜 나를 찾아오는 거지?
왜 나를 보러 오는 거야?
왜 나에게 웃어주는 거야?
어째서?

나는 남아있는 에너지를 모아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여자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뛰어오던 그녀는 항상 멈추던 그 자리에 섰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도 나에게 눈을 맞췄다. 그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웃어 보였다.

“늦지... 않아서, 흐아... 다행이다.”

그녀는 잠시 뭄을 숙인 채 숨을 정리했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을 떼었다.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금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이제 세 걸음 남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내 모습에 용기를 내더니 다시금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언제까지나 함께 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럼에도 어떤 결심을 한 듯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순간 나와 그녀 사이에 세찬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내 이파리도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깨어진 몬스터볼, 깨어진 화분. 그런 건 다 사라지고 눈앞에 있는 이 여자만 보였다. 내 악취가 그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신 내가 뚜벅쵸였을 때, 났던 그 흙냄새가 사이를 채운 느낌이다.

나는 한 발자국 내밀었다. 그녀는 잠겼던 철장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기억의 첫 장면처럼 햇빛이 그녀의
뒤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다시금 한 발짝 내밀다가 휘쳥였다. 넘어지는 걸까 생각하는데, 그녀의 손이 날 받쳐
들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나를 품에 안았다.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하다.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걸까.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생긴 호기심을 한 번 좇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라고.

의식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44 화

w. 도여은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땐 온 세상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이 사람이 내 엄마인 거구나! 나는 그 주황색 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따뜻한 눈빛도.
그래서 내 꼬리의 구슬이 주황빛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
.
.

“메리프. 이제 거의 다 왔어.”

엄마가 나를 볼에서 꺼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많고 북적북적하다. 나는 앞발을 들며 엄마에게


칭얼댔고 엄마는 웃으면서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엄마의 등 뒤로 바퀴 달린 초록색 상자가 슝 하고 지나갔다.
인간들은 저것을 버스라고 불렀다. 버스든 자동차이든 저런 덜컹거리는 건 딱 질색이야. 뱃속이 울렁거리고
기운이 축축 빠지는 걸.

“맨날 안아달라고 하고 아주 애기라니까.”


-그래도 기분 좋은 걸.
“진화하면 잘 못 안고 다니겠지? 아무래도 무게가...”
-으응? 나 무거워?
“아니야, 보송송이 되도 들고 다닐 수 있어. 나 엄청 힘 세다구.”

엄마가 날 보고 웃어주었다. 그리곤 엄마는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내 꼬리가 엄마가 걷는 속도에 맞춰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내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 엄마가 날 안아주면 온 세상이 두둥실 한 것 같아. 걸을 때마다
흔들흔들 토닥토닥한 걸. 그러면 저 굴러다니는 상자를 몇 번을 타도 괜찮을 것 같아. 엄마가 언제나 내 옆에서
꼭 안아준다면 말이야. 하지만,

나 가끔 꿈을 꿔. 나와 엄마가 같이 지내는 방보다 더 작은 방인데 나 그 안에 갇혀있는 꿈. 처음엔 따뜻했는데


점점 방이 식어가. 추워서 추워서 문을 두드려. 두드리고 두드리고. 몸으로 밀거나 부딪혀 봐도 열리지 않아.
나는 지쳐서 울기 시작해. 메에, 메에.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나 문 앞에 주저앉고 말아. 하지만 너무
바닥이 차가워서. 그래서 몸을 더 웅크리지만. 아무도. 아무도...

그 꿈 생각에 나는 엄마의 품속에 머리를 폭 숨겼다. 엄마가 왜 그러냐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는 빼꼼 고개를


들어 엄마를 봤다. 사실 나, 엄마가 나 몰래 가끔 짓곤 하는 그 표정을 알고 있어. 내가 차가운 방에 갇혀 있을
때 나, 그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아파서, 아픈 표정을 지어. 그런데 왜? 엄마 옆에는 내가 있잖아. 왜
그렇게 아픈 표정을 지어? 난 괜찮은 걸.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줘서 난 괜찮아졌는걸. 엄마가 날 따뜻하게
안아줬는걸.

-엄마는 아픈 거야?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응? 메리프 왜 그렇게 칭얼거리는 거야? 어디 아파?”
-아니, 안 그래. 엄마아. 엄마아.
“아픈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래. 우리 메리프으.”

엄마는 나를 둥기둥기 안더니 이마에 쪽 뽀뽀해 주었다.

“메리프 저기 보여? 저기가 물 포켓몬 체육관이야. 혹시 배틀하기 싫은 거야? 그렇다면 다시 돌아갈-”

나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엄마는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아는데.

나는 몸을 비틀어 엄마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난 강해질 거야. 강해져서 엄마를... 엄마가...

나는 고개를 다시 붕붕 젓고 저기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엄마가 나를 부르며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오기 전에 엄마는 이번엔 가는 곳이 두 번째 체육관이라고 그랬다. 엄마는 지난번 커다란
롱스톤과 싸우고 이겼을 때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여줬는데, 이게 내가 강하고 예쁘고 똑똑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라고 했어. 정말 장하다고 했어. 대단하다고 했어. 그럼 내가 더 강해지고 더 대단해지면 엄마는 그런 표정을
짓지 않을 거야? 엄마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나 불안하단 말이야. 엄마가 영영 가 버릴까 봐. 날 버릴까 봐.

숨차게 달려가 도달한 곳엔 커다란 문이 버티고 있었다.


.
.
.

엄마가 커다란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온 이후로 나는 불안해졌다. 볼 속에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나 확실히 알아. 다른 포켓몬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게 냄새꼬라고? 냄새꼬는 어떤 포켓몬인데?
나보다 더 예뻐? 나보다 더 강해? 그 포켓몬을 데려오면 이제 난 쓸모없는 거야? 그 포켓몬이 나보다 더 예쁘고
더 강하면... 그럼 난 꿈속의 차갑고 차가운 방에 남겨지게 되는 걸까? 열리지 않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엄마가 이상하다고, 난 버려질 거라고 불안해하는 나에게 피카츄가 말했다.

-지은이라면 널 버리지 않을 거야.

거의 확신을 담은 말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어떤 근거로? 나는 이렇게


불안한데.

-너는 버려지는 게 아니야 남겨지는 거지. 지은이는 그저 떠날 뿐이야. 자기가 있던 곳으로.


-떠난다...고?
-그래. 떠나는 거야.
-떠나는 거랑 버리고 가는 거랑 뭐가 달라. 엄마가 내 옆에서 없어지는 건 똑같은데!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버리는 걸 막는 것과 떠나는 것을 붙잡는 건 다른 의미거든. 떠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야.
-어떻게?
-미련을 만드는 거야.
-미련...?

나는 미련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피카츄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순 없어. 하나는 약하다고. 배틀이건 그 어떤 것이건.

.
.
.

체육관전 이전의 두 번의 시합에서 나는 승리를 얻어냈다. 조금 지치긴 했지만 아직 멀쩡해. 내가 물이 가득한


부표에서 돌아올 때면 엄마는 나를 꼭 안아줬다.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꼭 이기고 말 거야.

이제야말로 체육관 관장과의 배틀이라고 했다. 한층 커다란 필드와 찰랑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부표. 나는 그


부표 위에서 중심을 잡고 상대를 기다렸다. 붉은 빛과 함께 삐죽삐죽한 모양의 포켓몬이 나타났다. 들어보니
별가사리라고 하는 포켓몬이라고 했다.

“메리프, 재빨리 전기쇼크야!”


“별가사리! 물의 파동!”

나는 엄마에 지시에 따라 바로 전기쇼크를 날렸다. 동시에 별가사리의 핵이 빛을 내더니 물의 고리를 만들어내


나에게로 날렸다. 작은 고리는 점점 커지더니 내 전기가 통과하고는 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물의 파동을 거친
전력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별가사리에게 전기가 통하는 것은 확인했어. 나도 피하지 못하고 그 물의
고리를 고스란히 맞고 말았지만.

물의 파동은 물대포 같은 것과 달랐다. 그건 진동이 되어 나를 덮쳤다. 물에 의한 공격이라기보단 몸을 떨리게


하는 진동이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헤집고 지나갔다.

meeee...!
“메리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부표 위에서 조금 밀려났지만 다행히 물에 빠지진 않았다. 눈을뜨고 보이는
별가사리는 리타이어였다. 관장이라고 불리는 여자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별가사리를 다시 몬스터볼로
돌려보냈다.

meeeeeeeeeee

나는 길게 울었다. 다음으론 아쿠스타라고 하는 포켓몬이 나왔다. 방금 그 녀석보다 더 강한 느낌. 하지만 나는


몸을 더 부풀려 전기를 만들 뿐이었다. 다행히 물의 파동이라는 그 공격 물에 젖지 않아서 좋아. 아직 정전기는
빵빵하니까.

“아쿠스타, 고속스핀”
“메리프 목화포자로 막아!”

나를 향해 물을 흩뿌리며 회전해 오는 아쿠스타에게 나는 털을 뿜어냈다. 시야가 가린 데다 무언가가 덕지덕지


달라붙는 것에 대해 당황한 아쿠스타가 느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피한다고 피했지만 결국 아쿠스타는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픔에 눈을 찡그릴 새도 없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조심해!”
“아쿠스타 이번엔 물의 파동이야!”

내가 뒤를 돌았지만 나를 맞이한 건 커다란 물이 고리. 커다란 진동이 나를 덮쳤다.

“메리프!”

버틸 수 있어. 나는 지지 않을 거야. 나는 증명해 낼 거라고. 나 혼자서도 이길 수 있어. 나 혼자만으로도...


그러는 순간, 눈앞에서 아쿠스타가 사라졌다.

아쿠스타만이 아니였다. 부표도, 엄마도, 다른 트레이너들도... 어디 있는 거지? 나는 검은 허공으로 전기를


날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나는 다른 곳으로 다시 전기를 날렸다. 혼자 우왕좌왕하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아.
난 당황한 마음에 여기저기로 전기를 날렸지만 아무것도 부딪히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가 나에게 부딪혀왔다.
둔탁한 아픔이 몸을 징하게 울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피카츄는 말했다. 하나는 약하다고. 배틀이건 그 어떤 것이건. 처음에는 부정했다.
아니라고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나 혼자서도 배틀에서 이길 수 있어. 그리고 엄마도 떠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어, 라고.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어. 엄마가 다른 포켓몬을 생각을 할 때,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기도 하고 평소와


달리 이상한 실수를 하고 다른 생각에 푹 빠져서 내 얘기를 못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곧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은 하지 않았어. 한 순간이지만 엄마가 진짜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만약 그 포켓몬을 엄마가 데려온다면... 엄마는 더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떠날 마음을 포기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건... 너무 분해!

나는 몸속의 전기를 모두 끌어 모아 사방으로 내뿜었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으면 어디든지 피할 수 없게 하면


돼. 분하지만... 분하지만... 엄마가 날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떠나지 못하게 할
거야.

그래서 나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고 또 배틀에서 이겨야만 했던 거야. 그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냄새꼬를 데려오는 것에 대한 엄마의 물음에. 데려오자고... 그것이 엄마를 이 땅에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전기가 바닥이 날 때까지 전기를 내뿜고 나서야,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나서야 나는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졌지만 확실히 보이는 게 있었다. 엄마가 필드에 뛰어들더니 내가 있는 부표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힘이 없어. 내가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엄마가 부표 위로 올라와있었다. 그리고 나를 꼭 안아줬다.
엄마의 품이 축축하면서도 뜨거워.

나, 그래서 지는 게 너무 싫어. 지금까지 나 계속 이겨왔잖아? 엄마가 나 예쁘다고 장하다고 해줬잖아.


하지만... 그래도 나 불안했어. 왜야?

나는 엄마만 있으면 되는데, 엄마는 나만으로는 안 되는 거야?

내 세상은 온통 주황빛이었지만, 이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와중에 내 몸에서 무언가 빛이 나는 것을 느꼈다.

1-6.5 학교에 가려면

45 화

w. 도여은

공원 한쪽 모퉁이에는 공터가 하나 있는데 그곳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배틀 포인트이다. 즉, 포켓몬


배틀하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나도 메리프, 아니 보송송과 같이 공원에 훈련을 하러 오곤 했으니까 자주
보던 곳이고. 하지만 이 장면은...

별로 원치 않았는데...

지금 나는 심판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려나.


한쪽에는 보송송이 한껏 으르렁대며 발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냄새꼬가 그것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유롭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한껏 무시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 네까짓
게 하는 표정이다. 그에 보송송은 더 흥분해서 미간을 찌푸리지만.

그래도 귀여운걸. 내 눈에는 둘다 어린애처럼 보일 뿐이다. 아니 사건의 발달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으니까.

.
.
.

그날 아침부터 냄새꼬를 데리러 갔을 땐 거의 아사 직전 수준이었다. 정말 품에 안는데 너무 가볍고 이파리가


버석거려서 바로 포켓몬 센터로 직행했어야만 했다. 힘이 없기 때문인지 어떤 진 모르겠지만 다행히 큰 반항은
하지 않고 진료를 할 수 있었다. 수의사 선생님 말로는 냄새꼬가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게 원인으로 기본적인
영양실조 외에는 특별한 병은 없다고 하셨다, 잘 먹이고 햇빛을 잘 쪼이고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면 빨리 낫는다며
링거를 맞고 바로 퇴원했다.

그러고 나니 시간이 오후를 훌쩍 넘기고 말아서 그 날이 일요일만 아니었으면 학교도 못 갈 뻔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사실 메리프가 아니, 이제는 진화해서 보송송이지, 참. 쨌든 보송송이 먼저 데리고 오자고
했었지만 과연 둘이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정언니 말로는 둘째를 들일 때 첫째를 예뻐해야
한다고 조언했었지만 아무래도 냄새꼬가 아픈 상황이니 또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복잡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송송이 현관 앞에 떡 하니 앉아있어서 놀랬다고 해야하나, 겁먹었다고 해야 하나.

“저... 보송송 얘가 전에 내가 말했던 냄새꼬야.”

내가 몬스터볼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냄새꼬를 불러내자 보송송은 한껏 냄새꼬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건드리기도 하고 주변을 빙빙 돌면서 탐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냄새꼬는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마치 보송송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보송송이 건드릴 때마다
표정이 찡그려지는 것 같긴 했지만...하하...

쨌든 그렇게 험한 첫 대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냄새꼬의 시선이 무언가에 향하고 있는게 보였다.
화분...?

“아, 저 화분은 우리집 모다피인 모디 껀데-”

내가 이어 말하려는데 냄새꼬에게 흥미를 잃은 보송송이 품에 안기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나는 보송송을 안아


드는데 마침 모다피가 거실로 나와 냄새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보였다.

moda?

뭐다?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내가 큭큭 웃자 두 시선이 나를 향했지만 바로 모다피가 냄새꼬에게 말을 걸자


다시 냄새꼬는 모다피를 봤다가 나를 봤다가 했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았기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뭔가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같은 풀독 타입이라서 그런 걸까 하며 흐뭇해하는데 품속에서 보송송이
바르작거렸다.

songsong!
“차, 참아. 보송송...!”
자기를 무시한 게 분한 듯 본때를 보여줄거라는 듯이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걸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song!! songsong!

저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데려온거야! 라는 듯 따지는 듯이 묻는 말에 나는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는데,


수정언니의 충고가 떠올라,

“하긴 우리 보송송이 더 예쁘고 의젓한 것 같아.”

라며 보송송만 들리게끔 귓가에 속삭였더니 그제야 마음이 풀린 듯 몸에 힘을 빼고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더라.


새침한 척 하지만 꼬리가 양쪽으로 붕붕 흔들리는 모습으로 보아 속으론 기쁜 듯했기에 나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지은이 왔니?”

앞치마에 손의 물을 닦으며 등장한 엄마는 모다피와 대화를 하고 있는, 아니 일방적으로 모다피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냄새꼬를 보더니 딸내미보다 더 반기며 맞아주었다. 인사도 하고 소개도 하다가,

“많이 야위었구나. 냄새꼬.”

하면서 엄마가 냄새꼬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만 냄새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그 손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도 엄마도 당황하면서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엄마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냥 웃어넘겼다.

“그러고 보니 집에 화분이 없는데 어떡하지?”


“아, 맞다. 화분.”

매일 유기포켓몬센터에 들락날락하면서 냄새꼬의 환심을 사는 일이나 이번에 도전했던 짐전을 준비하느라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다피도 밤에 잘 땐 화분에 뿌리를 박고 자기도 했고. 아무래도
풀타입이니까.

“엄마, 혹시 남는 화분이라도 있어?”


“글쎄... 아마 작은 것 밖에 없을 거야. 아무래도 모다피가 쓰는 건 작을 테고.”
“으음...”

내가 고민하자 엄마는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상자에 흙을 담아줄테니까 조만간 냄새꼬의 몸이 괜찮아지면 새 화분을 사러가는 게 어때?”

아빠는 그 때 연구소에 일이 많아서 집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차차 다음에 인사시키도록 하고, 일단 첫 대면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흙과 상자로 내 방에 임시 화분을 만들어줬고 냄새꼬는
하루가 고단했는지 그 위에서 금방 잠들고 말았다.

그 후로 일상은 별로 바뀐 건 없었다. 보송송과 함께 등교하기도 하고 체육이 없는 날에는 혼자 등교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학교 갈 때마다 몬스터볼에 넣고 있는 것도 그렇게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중간고사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체육도 이론 위주로 수업을 하게 되다 보니 실제 포켓몬을 데려와야 할 필요성도
없긴 했었다.

처음에는 보송송은 학교에 갈 거라고 떼를 쓰긴 했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대신에 집에서 쉬거나 아빠네 연구소
쪽으로 전송시켜 거기서 놀거나 훈련하게 끔 했다. 실은 짐전 대비를 하면서 내가 냄새꼬를 만나러 가는 동안
아빠에게 메리프를 전송시키곤 했었기 때문에 금방 적응한 것 같다. 내 생각에도 그 편이 더 보송송에게 좋았던
것 같고.

아, 처음 전송 시스템을 썼을 때는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연구원이시라 집안에도


간이 전송 시스템이 있었는데 포켓몬을 몬스터볼에 넣고 올려 둔 뒤 작동시키면 순식간에 슉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보송송에게 물어보니 약간 흔들리는 느낌이라는 것 같다. 몬스터볼 안에 있을 때는 알속에 있던 것처럼 떠다니는
느낌이라던데 밖에 소리나 여러 가지가 조금씩 들리기도 한다는 모양이다.

사실 짐전은 아빠가 날 꼬드기다시피 한 것이었다. 배지는 포켓몬들이 말을 잘 듣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한다.


이건 전의 강원대 체육관 관장님이 얘기해준 것도 있고. 마치 게임 속에서 배지를 지니면 레벨 --이하의
포켓몬은 다 말을 잘 듣게 한다 라는... 뭐 그런 식의 형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아빠 말로는 포켓몬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는 카리스마같은 게 필요하기 마련인데 배지는 그걸 조금 더 증폭시켜


주는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단 쎈 사람은 배지가 없어도 일정 수준의 포켓몬은 잘 다룰 수
있지만 배지의 힘을 빌리면 더 그 힘이 증폭되어 포켓몬에게 느껴진다는 것. 패기... 라는 걸까나.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물포켓몬 체육관까지 가서 배지를 받아오게 되었지만 그게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왠지 아빠에게 낚인 것 같기도 하고.

쨌든 생각보다 보송송과 냄새꼬의 사이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뭐... 소 닭 보듯 하다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는 뜻이라면 말이다. 한동안 냄새꼬는 수의사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햇볕 잘 쐬고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하니
조금씩 푸석푸석했던 피부도 조금씩 매끈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하고 있었고 상하고 말라붙은 이파리는 떨어져
나가고 새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쭈글쭈글 쪼그라들던 꽃봉오리도 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서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집에 잘 적응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조금 답하기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말수가 없는 편인지 모다피하고 같이


있는 걸 본 적은 많지만 주로 모다피가 말하고 냄새꼬가 듣는 모양새랄까. 나와의 관계는... 음... 일단
편안하게 눈 마주치기부터 시작해서 이파리 쓰다듬기까지는 할 수 있다! 라는 느낌? 아무래도 사람의 손 타는
것에 대해 조금 거부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처음에 으르렁 거렸던 거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물론 냄새꼬를 사랑의 라이벌 쯤으로 생각하는 보송송의 방해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냄새꼬랑 있으면
중간에 끼어든다거나 칭얼거린다거나 하는 것 같은?

그래서 냄새꼬가 많이 나아졌다싶어 같이 화분을 사러 가려고 했을 때도 끈질기게 따라붙어 같이 가기로 했다.

으음...

현관 앞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냄새꼬를 어떻게 데려갈 것인가 하는. 아무래도 보송송을 키우면서 계속 안고
다녔더니 습관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 냄새꼬와 신체접촉에 있어서 그렇게 친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볼에 넣고 가는 것도 좀 그렇고 하니 같이 걸어서 가기로 했다. 물론 냄새꼬의 걸음 속도에 맞춰야 했지만.

보송송은 그렇게 막 무거워진 건 아니라서 거뜬히 들 수 있지만 왠지 냄새꼬 눈치가 보여서 대체로 지양하게
되더라. 물론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4 족 보행을 하던 메리프에서 2 족 보행으로 진화하다 보니
초반엔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꽈당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걸 보는 게 또 걸음마 배우는 어린애 같아서 귀엽기도 해서 웃는 일도 많았지만 대체로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게 또 좋았는지 요즘엔 그나마 잘 걷는데도 손을 잡아 달라 떼 쓰는 게... 여전히 귀여워...!

큼큼... 쨌든 천천히 걸으면서 시장으로 향했다. 오른쪽엔 보송송의 손을 잡고 왼쪽으론 냄새꼬가 쫑쫑거리며
따라오고. 아무래도 냄새꼬 덩치가 작다보니 가볍게 걷는 모습이 답지 않게 귀엽다고 해야 할까. 아니 모든
포켓몬이 귀엽지만 말이지... 내 새끼는 더 귀여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거랄까?

좀 더 자세히 얘기한다면 내가 닌텐도로 봐왔던 냄새꼬와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아이다. 아무래도


리얼월드다보니 사람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각각 포켓몬들도 조금씩 외모나 성격에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냄새꼬는 조금 어벙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 냄새꼬는 뭘까 차가운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보송송하고는 다른 느낌이다. 눈도 감은 채로 축 쳐진 다른 냄새꼬들에 비해 ㅡㅡ이런 느낌이...?

하지만 귀여운 점도 있는데 침을 안 흘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하지만 자는 동안에는 침을 흘려버린다는 게 더 귀여운 점! 아침에 일어났을 때 허둥지둥 침을 닦는 모습은 더더
귀엽다...! 마치 내가 스토커 같은 기분인데, 사실 맞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다가갈 수 없는 선이 있으니 더
애닳는다고!

그러니 이번에 화분을 사면서 좀더 가까워지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보송송 vs 냄새꼬의 발단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까 그게 오늘 아침의 일이다.

46 화

w. 도여은

주말이었고 햇볕이 따사로워 기분이 좋은 날씨였다. 몸이 좋아져서 우리 집에 온 후로 처음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보니 매사 무심한 면이 있는 냄새꼬도 조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것이 아주아주 미미한 표정
변화였지만 말이다. 사실 그 표정 변화를 알아낼 정도로 스토킹 한건 안 비밀. 열심히 보송송의 눈치를 봤던 건
비밀.

나와 보송송과 냄새꼬는 함께 길을 걸었지만 별 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편히 이 날씨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는 중간고사가 일주일 남은 상황이지만... 괘... 괜찮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혹시나 냄새꼬를 잃어버리진 않을까 조심하면서 화분을 파는 가게로 갔다. 색색깔의 예쁜
화분들이 많이 있었다. 단색에 깔끔한 화분들부터 투박한 모양의 화분들까지 다양한 화분들이었다. 나는 어떤
화분이 괜찮을까 고민이 됬다. 냄새꼬 성격에는 아무래도 단색의 심플한 화분을 쓰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차라리 예스러운 것도 은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 진화하면 아르꼬나 라플레시아처럼 화려하게 될
테니까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모양은 외국종이니까. 으음... 또 색은 어떤 게 좋을까. 모양은?
둥근 게 좋으려나 각진 게 좋으려나.

“냄새꼬 생각은 어...”

어때? 하고 내가 냄새꼬를 향해서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냄새꼬가 어느 것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을 향해 나도 시선을 돌리자 한 화분이 있었다. 갈색의 도자기
화분이었는데 무늬는 마치 얽어서 만든 둥근 나무 바구니 느낌이 났다. 냄새꼬에 비해 조금 큰 화분이었지만 내
방에도 냄새꼬에도 어울릴만한 화분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화분이 좋은 거야?”

나는 냄새꼬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아 키를 맞추며 물었다. 화분을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 묻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냄새꼬는 나를 봤다가 다시 화분을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가
이번엔 땅을 쳐다봤다. 한동안 고민을 하는 모양새에 나는 내가 질문을 잘못한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저 화분이 싫어서 바라본 건지 아니면 맘에 들어서 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거나...
쨌든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냄새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다시금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화분이 좋은거구나!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저절로 활짝 웃어 보였다.

“아저씨 저 화분으로 주세요!”


“네 냄새꼬가 쓸 화분이니?”
“아, 넵!”

뭔가 별 것 아닌 말이지만 기분이 좋게 들렸다. 내 포켓몬이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크게


말해버렸다가 조금 쑥스러워 헤헤 웃어버리자 아저씨는 허허허 하고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셨다.

“그래, 알겠다. 직접 들고 갈거니?”

언뜻 보기에도 화분은 무거워보였다. 매일 보송송을 안고 다니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한쪽


머리로는 포켓몬 세계는 일반 사람들도 체력적으로 우수해지는 걸까? 하는 딴생각을 하면서 난 말했다.

“아마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길에 들리실 거에요! 전화번호라도 적어드릴까요?”

나는 화분파는 아저씨에게 메모로 아빠의 전화번호를 적고 가격을 치른 뒤 가게를 나왔다. 냄새꼬가


올려다보기에 나는 묻지도 않았지만,

“오늘 저녁엔 집에 도착할 거야, 저 화분. 아빠가 오늘 일 마치고 집에 오신다고 하셨거든.”

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버렸다. 냄새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래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무래도 수다스러운 편인 보송송에 비해 냄새꼬는 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한지우의 이상해씨도 조금 조용한 성격이었던 걸 생각해보며 풀독 타입 종특인 걸까? 생각을 했지만 수다스러운
우리 집 모다피가 생각나 다시금 그 생각은 접었다. 주변에 뚜벅쵸들이 다 활발한 성격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아마 이 냄새꼬가 좀 특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어찌되었든 사실 화분이라는 게 풀타입 포켓몬들에게는 집하고도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니까 마음에 드는 걸


사주고 싶었는데 표현을 잘 안 하는 냄새꼬다 보니 조금 걱정이 되었었다. 하지만 냄새꼬가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해 준 것 같아서 기쁘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아빠에게 연락을 넣었고 일찍 잔업을 끝난 아빠가 오후에 화분을 가져다 주었다. 내 방에
두었던 임시 화분이었던 상자를 치우고 나와 엄마는 마주 앉아 화분에 흙을 알맞게 담고 내 방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마치 햇볕에 말린 이불이 기분 좋은 것처럼 냄새꼬도 뽀송뽀송한 새 흙이 좋은지 금방 화분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오후의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햝... 아니 냄새꼬에게 내려앉는 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새 흙냄새와 함께 냄새꼬 특유의 향이 조금씩 퍼지는 느낌이었다.

“아, 이제 좀 다 정리가 된 걸까?”


나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짐전도 무사히 끝냈고 냄새꼬도 무사히 데려온 데다 아픈 것도 거의 다 나았고 이제
화분도 샀으니! 일단 구색이 맞춰진 것이 보이니까 냄새꼬도 집에 더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송송하고도 사이가 그렇게 나쁜 것 같지도 않고. 이제 마음에 짐들을 다 덜었다...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가자 벌떡 자리에 일어났다.

sooong?!!

내가 침대에 늘어지자 같이 옆에서 늘어졌던 보송송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냄새꼬도 갑작스런 움직임에 나를


쳐다보았다. 냄새꼬는 슬쩍 쳐다본 모습이었던 것에 비해 보송송은 순간 목 주변에 남아있는 털이 순식간에
부풀어지는 모습이 마치 놀란 고양이 같아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song! song!!
“알았어. 큭.. 크흠... 안 웃을게. 안 웃어.”

그래도 아직까지 실실 웃는 내 모습에 보송송은 이번엔 볼을 부풀렸다가 다시금 털을 정리 하면서 물었다.

songsong, bosong?
“아아... 맞아... 갑자기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책상 의자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곧 중간고사니까.”

계속 잊고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잠시 동안... 아주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것뿐이다. 정말이다. 어제까지도


조금은 공부했었는데, 오늘 좀 들떠가지고.

song song?
“아, 그러니까... 시험치는 거라고 해야 할까나. 요즘 같이 학교에 못 간 것도 그거 준비하느라 그랬던
거야.”
bosong! songsong!
“응응. 그래그래. 시험 끝나면 같이 학교 갈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으니 화분에서 냄새꼬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냄새꼬를 바라보니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날 보고 있었다. 으음... 학교에 대해서 궁금한 건가?

“그러니까 학교라는 건... 으음...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내가 평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이것저것 배우는 곳? 체육시간에는 포켓몬을 데려가야 하거든.”

seakko
“응?”
song?!

내가 잘못 들었나 했지만 보송송의 반응을 보니 제대로 들었나보다 싶었다. 분명 나도 갈래,라고 그랬다고.


보송송이 뭐라뭐라 막 그러자 냄새꼬는 그대로 화분에서 내려오더니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고는
발치에서 빤히 쳐다보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된다고 할 수도 없고. 옆에서는 보송송이 왁왁 거리고
있고 어쩌지 하는데 문이 쾅 열렸다. 엄마하고 아빠가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려서 와 본 것 같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어느새 보송송을 무시하던 냄새꼬도 거슬렸는지 보송송에게 약하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아아... 어쩌지.
이런 저런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저런. 배틀하고 와야겠구나.”

아빠의 웃음이 저렇게 얄미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
.
.

그러니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간단히 말하자면 냄새꼬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고 보송송은 학교에 가는 건 나야! 하면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뒤 중간고사다... 마지막이
제일 슬픈데...?

“어느 한 쪽이 시합하지 못할 때까지야. 더 심하게 하면 안 되고. 알겠지?”

두 녀석이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둘은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 안에 상처약하고 해독제, 마비치료제를 다시금 확인했다. 아빠가 챙겨주었는데, 아무래도 냄새꼬는
독타입이니까. 아, 그리고 잠듦 상태가 되면 그냥 안고 가면 될 테니까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보송송이
냄새꼬에게 달려들었다.

돌진인가? 은근히 보송송은 성격이 급한 기질이 있어서 먼저 선공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돌진이라. 괜찮으려나.
냄새꼬는 어떻게 대처하려나? 돌진은 일단 명중률이 낮으니까 피하려나, 아니면 공격? 냄새꼬 공격기술이 뭐가
있더라. 데려온 후에 배틀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아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 그런데 냄새꼬가
덩굴을 꺼냈다. 덩굴채찍?

“아...”

아니었다. 냄새꼬가 덩굴로 보송송의 발을 걸었다. 역시 아직 2 족보행이 익숙지 않았던 보송송은 꽈당 넘어져
바닥에 몇 바퀴 구르고 말았다. 냄새꼬는 그 상태로 꽃봉오리 털어내듯 흔들더니 꽃잎 사이에서 어떤 가루들이
흩어져 나왔다. 뭘까, 독가루? 저리가루? 수면가루?

보송송은 가루를 뒤집어씀과 동시에 데굴데굴 굴러 냄새꼬와 부딪혔다. 냄새꼬는 주저앉았지만 데미지는 없는 듯
보였다. 그 상태에서 냄새꼬의 몸에서 초록색의 빛이 나왔는데, 아 이거 본 적이 있다. 전에 해너츠와 시합했을
때, 아, 이거 기가드레인인가? 아니지 진화한 직후에 버려졌다면 아직은 메가드레인일 터였다.

정신을 못차리던 보송송에게서 초록빛의 덩어리가 나와서 냄새꼬에게 흡수되자 보송송은 몸을 뒤채며 급히
냄새꼬에게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보송송의 상태를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눈 밑이 보라색으로 변한 것이
냄새꼬가 뿌린 가루가 독가루였나 보다. 조금 비틀거리는 보송송과 다르게 대미지를 별로 받지 않은 냄새꼬는
툭툭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송송을 쳐다보는 눈빛이 더 덤빌 거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는데 보송송은 그에 더 열이 챘는지 온 몸에서


전기가 지지직 튀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새에 눈부신 전기가 튀더니 냄새꼬로 향했다. 전기 쇼크보단 강하지만
방전까진 아니었다. 짐전 때의 방전은 그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기술이 아니었을까.

어찌되었든 냄새꼬는 전기를 맞았다. 처음 맞는 유효타였다. 하지만 풀타입이라 전기 기술은 반감. 그 틈을


타서 보송송 아이언테일을 하려는 걸까? 냄새꼬에게 접근하려는데 냄새꼬, 다시 메가드레인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보송송 접근하지만
“보송송!”

보송송 몸에서 초록 구체가 떠오르며 냄새꼬에게 흡수되는 와중에도 보송송은 꼬리에 빛을 내뿜으며 냄새꼬에게
휘둘렀다. 냄새꼬도 메가드레인을 멈췄지만 뺨에 스치듯 상처가 났다. 대부분의 대미지는 다 땅에 꽂히고 말았다.
보송송이 독이 너무 퍼졌는지 균형을 못 잡고 발이 꼬여 넘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둘에게 달려갔다. 보송송은 리타이어. 빨리 해독제를 먹이고 다친 부분에 상처약을발랐다. 다행히


메가드레인이 기력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보니 겉의 상처는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나이도 어리고 한 번도 내 지시
없이 배틀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냄새꼬는 잠시동안이었겠지만 아무래도 야생에서 싸우기도
했을 테니... 대충 약을 바르고 센터에 들렀다 가야겠다 생각하며 반쯤 정신을 잃은 중에도 찡얼대는 보송송을
품에 안아 들었는데 옆에서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냄새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냄새꼬는 도리어 시선을 피했다. 잘못한 아이처럼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알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냄새꼬의 생각을 조금 엿본 기분이랄까.
나는 해독제를 먹고 숨이 편안해진 보송송을 몬스터볼에 넣었다. 그리고는 냄새꼬에 몸에 난 상처에 상처약을
꼼꼼히 발라주었다. 그리고 꼭 안아주었다.

“수고했어. 너 정말 강한 포켓몬이구나.”

내가 그렇게 말하니 품속에서 냄새꼬가 바스락거렸다. 답답한가 싶어서 몸을 떼어내니 눈 둘 데를 모르는


냄새꼬가 허둥지둥 대더라. 마치 칭찬을 처음 듣는 아이 같았다. 결국 내 손에서 몬스터볼을 빼앗아 스스로
들어가 버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손 안에 들어온 두 개의 몬스터볼이 묵직했다. 센터를 들려서 아이들을 치료한 뒤 돌아오니 저녁밥 먹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온 보송송은 냄새꼬를 견제하긴 했지만 시비를 걸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도 한 수 위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외에는 다른 점이 없어서 일단은 안심했다. 물론 냄새꼬는 원래가 보송송을 신경 쓰지 않았었고.

아빠 말로는 원래 포켓몬들끼리 서열을 정리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번처럼 한 번의 배틀로 우열이 결정되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자주 싸움판을 벌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배틀로 우열을 정하게 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이성을 잃고 싸우게 되면 더 많이 다친다는 모양이다.

“아빠 포켓몬들도 싸우고 그런 적 있어?”


“글쎄다... 철이가 호전적인 성격이긴 한데, 다른 애들이 그런데 관심이 있다거나 마음이 안 맞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니... 별로 싸우진 않았었지.”

머릿속에 커다랬던 마기라스가 떠올랐다. 역시 인상이 더럽... 아니 아주 세 보이더니 리더였나 보다.


서로서로 사이좋게 지냈다니... 왠지 시무룩해진 기분이었다. 냄새꼬와 보송송이 꼭 친하게 지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뭐, 시간이 해결해 줄 때가 있는 법이지.”

아빠는 신경쓰지 말라며 내 어깨를 두드리셨지만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다.

“하여튼 중간고사 끝나고 냄새꼬하고 한 번 등교해야겠네.”

아빠의 말에 잎새가 냄새꼬를 보고 무슨 말을 할지도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웃음이 났는데 그 순간 뭔가...


싸한 기분이 올라왔다. 뭔가 잊고 있는 듯한 기분...?
1-7 손 흔들어 줄게

47 화

w. 도여은

중간고사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처음 보는 시험이었지만 수업을 충실히 듣기도 했고 모르는 부분은 잎새랑 같이
공부하기도 했었다. 문제는 생뚱맞게 들어앉은 포켓몬들이었지만 그래도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아, 특히
체육은 엄청 달랐는데 거의 포켓몬학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포덕력을 측정하는 시험 같은 느낌이었다.
수행평가가 반을 차지해서 그렇게 지필이 큰 비중은 아니었겠지만 이전의 포덕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해야 할까. 하핫. 물론 체육 책에서 다 적혀있는 내용이지만.

냄새꼬와 처음으로 함께한 등굣길은 보송송과 함께 했던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보송송처럼 막 뛰고


장난치고 달려가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천천히 냄새꼬의 발에 맞춰서 걸어 나갔다.
속으로는 안고 가고 싶었지만 아직 그러기엔 너무 수줍다고 해야 할까. 남자애는 확실히 뭔가 건들이기
조심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아직 상처가 많은 아이라서 어떻게 접촉하기가 어려운 느낌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흙속에 반쯤 묻혀있는 냄새꼬와 작게 인사하고 손을 잡는 정도로 발전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등교를 하고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살짝 몬스터볼에서 꺼내 잎새한테 인사도 시켰다. 전에


데려왔을 때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달라고 잎새가 전부터 떼썼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같이 사진을 찍거나 도촬...
하기에도 부끄러워서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엄청 귀여운 걸? 네가 꼭꼭 숨겨두고 안 보여줄 만하다.”

잎새가 웃으면서 말하자 나는 별로 숨겨둔 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잎새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이 올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나는 냄새꼬는 볼로 되돌렸다.

“지난 체육관전 때 보송송이 진화했다고 했었지? 보송송 진화한 것도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부산에 물포켓몬 체육관에서 메리프는 보송송으로 진화했었다.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쨌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시험기간이라 못 보긴 했지?”


“사진으로는 엄청 귀여웠었다구. 오늘 보송송이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으으... 사실 원래는 보송송하고 오려고 했었는데, 둘이 싸우는 바람에.”
“싸워?”

잎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기에 나는 간략히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얘기들을 듣고


있던 잎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로 서열정리 같은 걸 하는구나.”


“그러니까. 나도 얘기만 들었었거든. 아빠네 포켓몬은 그런 게 없다고 했었는데.”

잎새는 큭큭 웃더니 알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보송송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보자 잎새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결국 누가 학교를 같이 가느냐 때문에 싸운 거네? 그럴 거면 둘이 같이 오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아니, 보송송은 혼자 학교를 가고 싶었나 봐. 자기 자리를 나만 학교 갈 거야 라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져버려 가지고... 같이 가자고 해도 삐져서 안 오더라구.”
“으으 우리는 학교 오기 싫어도 와야 되는데.”

잎새는 질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중간고사가 지났지만 역시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포켓몬이 있든 없든


학교는 가기 싫다.

“그러니까 말이야... 쨌든 결국 그렇게 되어서 어찌어찌 냄새꼬만 데려오게 됐어. 나랑 냄새꼬만 있는 시간도
없었고.”
“보송송이 많이 질투하나 봐?”
“그렇지 뭐. 그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 헤헤...”

내가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니까 잎새가 내 볼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아아 아퍼. 너 되게 손 맵다고. 나는


꼬집힌 볼을 손으로 문댔다.

“쨌든 다음에는 같이 데려오려구. 아무래도 한 아이만 놔두고 오니까 신경 쓰이네.”


“그래 보송송도 보여줘야지. 진화한 모습 궁금하다고. 뭐, 그런데 냄새꼬 데려온 거 좀 의외였어.”

잎새가 갸웃하는 모양새에 나도 도리어 갸웃해졌다.

“왜?”
“너 오바람한테 숨기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아...?”

내가 얼빵한 소리를 내자 도리어 잎새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전에 너 냄새꼬 얘기 오바람한테 숨기는 것 같길래.”


“내가 오바...람... 아...!”

나는 그제서야 까먹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아... 잎새야. 오늘 체육 걔네랑 겹치는 날이었던가...?”


“걔네라고 하면 오바람하고 한지우 말하는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잎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에, 왜 숨기려고 하는 건데?”


“그게... 오바람보다는-”

얘기를 하려는데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담임이 조례를 하러 들어왔다. 나는 노트에 작게 좀 있다가 얘기해줄게,
하고 적어 잎새에게 보여주었다. 잎새는 궁금한 눈초리였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조례는 오늘따라 길었고 금방 1
교시 2 교시가 지나 체육시간이 다가왔다.

진짜 싫다는 듯이 나는 밍기적 밍기적 체육복을 갈아입고 몬스터볼을 챙겨서 잎새와 같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진짜로 왜 숨기려고 하는 건데? 오바람이 뭐라 그랬어?”
“아니...”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말해버렸다.

“오바람보다는 한지우가 신경 쓰여서. 오바람한테 얘기하면 한지우도 덩달아 알게 될 것 같기도 하고.”


“한지우가 왜? 너랑 별로 친하지도 않잖아. 따로 얘기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전에... 그 옥광산에서 조금 얘기를 했었는데... 아니, 걔가 날 싫어하기도 하고...”

내 말에 잎새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냄새꼬를 입양한 거랑은 상관없지 않아?”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옥광산에서 그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를 뿐이었다.


어차피 다 버리고 갈 거면서,라고 했었던가... 사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질문이고 현실이고. 이곳으로 떨어지게 된 지 어느새 3 개월 가까이 지났다. 그래도 여전히 꿈같은 현실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잎새도 묻지 않았다. 오늘 체육시간에는 반 정도는 서로 연습 배틀을 하고 반은


구경하거나 심판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오늘은 배틀을 하진 않았는데 체육선생님이 배틀 구경도 도움이 된다면서
포켓몬과 같이 배틀을 보라는 것이었다. 잎새는 배틀을 하게 되어서 갔고 나는 몇몇 여자애들끼리 돌계단에
앉아서 냄새꼬와 같이 배틀을 구경하게 되었다.

냄새꼬는 뭔가 신기한 기분이 들었는지 여기저기 둘러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배틀 준비를
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 멀리 떨어져 운동장 일부를 쓰고 있는 다른 반에 흘끗 눈길이
가기도 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말자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생각해보니 한지우도 나한테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광산에도 나를 두고 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이후로 말도 한마디 하지 않았었고. 지나가다 마주쳐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사이었잖아? 생각해보니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서 잎새가 돌아오면 내가 예민했었던 것 같다고 얘기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마음이 편안해져서 잎새의 배틀을 지켜보았다. 잎새의 푸린은 상대와 친해지기로
공격력을 떨어뜨리고 막치기나 연속뺨치기로 상대를 때려눕혔다. 어어... 뭔가 엄청 웃는 낯으로 때리는 게...
엄청 친하게 굴어서 상대 포켓몬을 방심시킨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가 태연하게 막치기나 연속뺨치기를 하는
모습은 뭐랄까... 무시무시했다.

다른 아이들의 배틀도 구경을 했는데 그 모습에 옆에 냄새꼬도 뭔가 근질근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뭐랄까
움찔움찔한다고 해야 할까? 아쉽지만 참으렴, 하고 나도 모르게 잎사귀를 쓰다듬었는데 올려다보는 모습에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은 듯 고개를 돌린 채 꼼지락거리는 게... 부끄러워하는 걸까. 흐으 너무
귀엽다.

체육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잎새는 나에게 이번에 했던 배틀에 대해서 얘기했다. 연속뺨치기를 새로 배웠는데
이번에 잘 쓸 수 있었다는 그런 얘기. 잎새 품속에 안겨있는 푸린은 조금 상처가 나고 지친 기색이었지만
씩씩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내가 이 손으로 잘했어요! 하는 것처럼.

“나도 봤었는데 이번에 처음 배웠다고 하기엔 잘하던걸?”


내가 푸린의 머리를 쓰다듬자 푸린이 커다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노래하기를 쓰려다가 아무래도 푸린보다 스피드가 빨라 보여서. 헤헤. 아마 막치기를 배운 다음에


연속뺨치기를 배워서 그런가 봐.”

우리는 손을 씻으러 수돗가로 향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오바람이랑 한지우 얘기는 내가 그냥 예민했었나 봐. 걔가 나를 더 신경 쓸 것 같지도


않고.”

내가 헤헤 웃으면서 말하니까 잎새는 뭔가 갸우뚱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러려니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돗가에 다다라 보이는 한지우의 모습에 나는 그게 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녀석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48 화

w. 도여은

“야, 나랑 얘기 좀 해.”

그러고는 녀석은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나는 갑작스런 행동에 엉겁결에 몇 걸음 끌려가는데
뒤에서 잎새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잎새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푸린을 안고 서 있었다.
수돗가 주변이라 사람도 많았다. 이 녀석의 돌발 행동 때문에 이목이 몰려있었다. 그리고 은근 이 녀석
인기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녀석의 행동이 이상한지 저쪽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던 오바람도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으으... 잎새야 먼저 교실에 가 있어. 나중에 얘기해줄게.”

옥광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어서 얘기할 생각이면 아무래도 단둘이 얘기하는 게 편했다. 들어봐야 믿어줄 사람도
없을 테지만.

녀석은 나를 학교에서도 사람이 적은 곳으로 끌고 갔다. 체육이 끝나자마자 냄새꼬를 볼 속에 넣어놨었기 때문에
방금 보지는 못했을 거고... 아마 체육시간에 내가 냄새꼬와 있는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다. 그것 때문에 나를
끌고 가는 건가?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게 먼저였지만 뭔가 질질 끌려가는 기분에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어느 정도 사람들하고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쓰레기 처리장 근처였다. 녀석은 자기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듯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표정 변화가 큰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느껴졌다는 거다.

“뭐야.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데.”


“...뭐?”

내가 띠껍게 쳐다보자 녀석은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날 몇 마디 말에 금방 울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세게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홧김에 화가 나서 앞뒤 생각 없이 끌고 왔던 걸까.
하지만 내가 전처럼 물러나기엔 너무 짜증이 났다.

“넌 나한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그랬었지. 그리고 다음번에 마주쳤을 때는 내가 떠날 거라고


얘기했었고.”
“....그래.”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거 알아?”

녀석은 말이 없이 찡그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도 속에서 분이 올라와 거칠어진 숨을 침을 삼키며


억눌렀다.

“그래, 나도 미친 소리 좀 할게. 진짜 내가 생각해도 미친 말인 거 아는데... 나도 믿기 힘든 말인데. 하,


진짜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어.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서 녀석의 인상이 파삭 구겨졌다.

“너... 그러면서 그 포켓몬-”


“근데 그래서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 녀석은 나에게 포켓몬을 거두는 것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녀석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녀석도 내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말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생각했었던 녀석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나라고 생각 없이 애들 데려온 건 줄 알아? 누군 고민이 없었는 줄 아냐고. 나도 이 애들한테 책임질 거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야. 그리고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감정이 울컥 올라와서 잠시 숨을 골랐다. 눈가가 뜨거웠다.

“낯선 곳에서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 낯설게 느껴질 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네가... 알기나
해?”

순간 외면했던 것들이 물 위로 떠오르듯 나를 잠식했다. 생물학자였던 아빠는 포켓몬 연구원이었고,


포켓몬이라는 건 알지도 못했던 엄마에게 과거의 모다피의 얘기를 듣고.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 새로운 환경에서
바보같이 벙찔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뭔가 나에게서 다름을 감지하는 듯한 포켓몬들. 혹시 내가 미쳐서
이상한 것이 보이는 건지. 내가 생각하는 과거는 다 없던 것일지 모른다는 상상.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꿈같은... 미친 것 같은 상황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울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숨을 색색거리며 참았다.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고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 쓰레기 처리장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러고 서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꽉 쥐었던 손에서 힘이 풀리고 이제 울지 않을 자신도


생겨서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댔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는 말이.

“배틀하자”
“...?”

하?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냥 눈을 크게 뜨고 녀석을 볼뿐이었다. 황당해서 요동치는 감정도 쏙 들어가


버렸다. 녀석은 정말 배틀을 할 생각인지 나에게서 거리를 벌렸고 주머니에서 몬스터볼을 하나 꺼냈다.
“야, 정말 배틀할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허?

“선생님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마음대로 배틀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거 말 만이야.”

분명히 학기 초에 마음대로 포켓몬을 꺼낸다거나 배틀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실 잘 지켜지진 않는 것


같았다. 나도 쉬는 시간에 몰래 포켓몬을 꺼내곤 했으니까.

“으으....”

그리고 여기서 물러나기엔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교칙을 어기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냄새꼬가 들어있는
몬스터볼도 자기를 꺼내 달라는 듯이 흔들렸다.

“진짜... 배틀만능주의냐.”

나는 혼잣말을 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거리를 벌렸다. 어느 정도 서로 간에 간격이 생기자 나와 녀석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켓몬을 꺼냈다. 나도 배지가 두 개나 있는 트레이너였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이 도리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내 앞에 있는 포켓몬이 냄새꼬라는 것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싸울 태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 든든하기도 하고 처음 맞춰보는 합이라
걱정도 한가득 들었다.

pul pul

녀석이 내보낸 포켓몬은 이상해풀이었다. 냄새꼬와 같은 풀, 독타입이다. 냄새꼬와는 3 단계 진화형에


중간단계라는 것도 같고 1 세대 포켓몬이라는 것도 같다. 하지만 녀석은 스타팅 포켓몬, 나는 길가를 가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뚜벅초의 진화형인 냄새꼬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질책하는 듯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바닥을 내리쳤다. 냄새꼬가 덩굴로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일단 포켓몬을 내보낸 이상 집중하자. 나는 대치하고 있는 두 포켓몬을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냄새꼬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순식간에 촤라락 지나갔다. 달콤한 향기, 용해액, 가루기술 3
종세트, 메가드레인. 풀타입은 가루기술에 면역이 있기 때문에 안 되고 메가드레인도 같은 독, 풀타입 때문에
반감... 덩굴로 공격을 해봤자 풀타입으로 반감이 들어갈 테고 더불어 덩굴 자체가 냄새꼬는 강하지 않아.
그나마 있는 건 용해액이 1 배로 들어가... 일단 밀어붙여야...!

“이상해풀, 돌진.”

젠장... 나는 속으로 욕지기가 나왔다. 이상해풀이 먼지를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왔다. 리얼 대전에
턴제 따위. 그리고... 달달한 냄새...? 어찌 되었거나 냄새꼬!

“피해!”

내 말이 우스워지게도 냄새꼬는 피하지 못하고 이상해풀의 머리에 부딪혀 같이 굴러버리고 말았다. 쾅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부딪혔다. 분명 대미지가 크게 들어갔다. 일어서서 거리를 벌리려는 이상해풀. 다시
돌진을 쓸 생각인가.

“눈에다가 용해액을 뿌려버려!”


냄새꼬가 반쯤 쓰러진 채로 울컥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리더니 퉥하고 뱉었다. 녹색 액체가 이상해풀 눈에
철퍽하고 들러붙더니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가까운 거리라 다행히 명중. 눈에 용해액을 맞은 이상해풀은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냄새꼬는 충격이 컸는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메가드레인으로 흡수해!”

벌써 눈을 떠버리고 거리를 벌려 다시금 돌진을 준비하는 이상해풀에게서 초록빛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해풀은 다시금 냄새꼬에게로 돌진해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맡아지는 단내... 아, 이런.

“냄새꼬. 흡수를 계속하면서 덩굴로 다리를 걸어버려.”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은 달콤한 향기였다. 회피율을 떨어뜨리는 기술. 그래서 돌진을 못 피했던 걸까. 그렇다면
이번엔 피하기보단 버티기로... 제발 걸려 넘어져라.

바람과는 다르게 이상해풀은 냄새꼬의 덩굴을 우지끈 짓밟아버렸다. 그러고는 어마 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
그럼에도 냄새꼬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초록빛을 흡수했다. 제발 버틸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흡수되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포켓몬이 부딪혔다.

역시 부족했던 걸까. 내 발치까지 밀려 나온 냄새꼬는 신음을 흘릴 뿐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몸을 굽혀


흙바닥에 무릎을 대고 쓰러진 냄새꼬를 안았다. 미안했다. 같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져버렸다.

다 내 탓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냄새꼬와 함께한 첫 배틀이었고 첫 패배였다. 너무 무모하게 배틀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 자책감까지 들었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일어나서 꽃과 잎을 파르르 떨며 먼지를 떨어낸 이상해풀을 그
녀석이 몬스터볼로 회수하고 있었다. 나는 체육복을 입고 있겠다 무슨 상관이야 싶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냄새꼬의 상태를 보았다. 힘이 빠져 축 늘어져있는 냄새꼬는 돌진을 두 번 맞은 것 치고는 그렇게 큰 상처는
없었다. 다행히 메가드레인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나 보다. 그런 생각에 빨리 양호실로 가야지하는 생각에
몬스터볼에 냄새꼬를 회수하는데, 어느새 그 녀석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
“...?”

무슨 뜻이지...? 나는 냄새꼬가 든 몬스터볼을 쥐고서는 잠시 고민했다.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뜻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체육시간에 첫 배틀을 하고 난 뒤 잎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체육 시간의 배틀에서는 돈을 안 거니까. 만약 이겼으면 3000 원은 받았을 거 아냐.’

돈... 내놓으란 뜻인가? 시합 전에 얘기는 안 했지만 게임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나는 표정을 구긴 채 체육


끝나고 매점 가려고 챙겨두었던 돈 이천육백원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 손위에 얹어주었다. 삼천원은 안 되지만 더
가진 돈 없다고. 나는 혼자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양호실로 향했다. 그 녀석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49 화
w. 도여은

오늘 체육 시간이 있었기도 하고 배틀 때문에 조금 지쳐서 저녁 훈련은 하지 않고 집으로 귀가. 아 분하다 분해


분해죽겠다아아아, 하고 속은 뒤집어졌지만 나보다 더 속상해하는 냄새꼬 때문에 티도 못 내겠더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보송송은 현관문까지 도도도도 뛰어나와서는 오늘 어땠냐고 배틀 했냐고 뭐했냐고 보송송송보송송
물어왔다.

내가 냄새꼬 눈치가 보여서 뭐라 말도 못 하고 있으니까 답답했는지 냄새꼬가 쿨내 나게 무어라 말을 하니까


보송송이 피식거리면서 쨍알쨍알 말하는 것 보니 졌다는 얘기에 냄새꼬 성질을 긁는가 보다. 냄새꼬가 표정을
파삭 구기더니 방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거실에 남은 나에게 보송송은 왜 날 안 데려갔냐며 자기가 갔으면 이길 수 있었다며 누구랑 배틀했냐며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종알거렸다. 내가 그전에 냄새꼬에게 무슨 말을 했냐며 척 보기에도 비꼬는 것처럼
보였던 터라 볼따구를 잡아 늘리며 혼냈다. 그랬더니 보송송은 반성은커녕 엄마 미워 하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에구 내 팔자야.”
“왜 그래?”
moda?

내가 지쳐서 쇼파에 앉자 어느새 엄마와 모다피가 다가와서 물었다.

“오늘 냄새꼬를 데리고 처음으로 배틀을 했는데 졌어... 근데 보송송은 또 삐져버리고. 나도 져서 속상하고
분해 죽겠는데에에에.”

내가 엄마 허리를 불잡고 징징거리자 엄마는 으이그 하면서 내 머리를 토닥토닥해주었다. 덩달아 모다피도
손처럼 쓰는 잎으로 내 무릎을 토닥토닥했다.

“뭐 질 수도 있지.”
moda!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라니까. 1 배지도 따고 2 배지도 따고 지금까지 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더
속상하고. 아 배틀 건 녀석도 짜증 나는 녀석이라서 더 짜증 나고.”
“누군데?”
“있어. 그런 남 이해라는 건 못하는 놈.”

솔직히 말하면 무슨 미친 소리냐고 잡아떼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녀석한테 보인 반응들이 많아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누구한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래도 배틀은 배틀, 분한 건 분한 거였다.
엄마랑 모다피는 내 뒷말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말을 돌렸다.

“쨌든, 냄새꼬하고는 처음 합을 맞추는 건데 내가 너무 못난 트레이너라서 진 것 같아서 미안하고. 달콤한


냄새를 못 알아챈 것도 너무 바보 같고. 덩굴이 약하단 걸 알면서도 같은 풀타입한테 덩굴로 발을 걸라고 했던
것도... 실책이야. 차라리 명중률을 더 낮추도록 모래를 뿌렸어야 했는데...”
“그때는 최선을 다했잖아.”
“너무 흥분해서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복잡해.”
내가 엄마 품에서 부비적거리면서 털어놓으니까 조금 맘이 가셨다. 엄마도 조금 토닥토닥하다가 말했다.

“그건 냄새꼬도 같은 마음 아니겠어? 가서 냄새꼬도 달래줘야지. 그리고 보송송은 진화하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란다. 삐진 것도 금방 풀릴 테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가 봐.”
“응... 알겠어.”

방으로 들어가 보니 냄새꼬는 냄새꼬대로 화분 앞에 토라져 앉아있고 보송송은 우중충해서는 침대 이불 안에


머리만 박고 있었다. 들어오는 소리 들으니까 보송송 꼬리가 침대 바닥을 탕탕 치는 게 나 좀 달래줘! 하는
시위처럼 보였다. 속으로 웃으면서 일단 냄새꼬부터 달래줘야지 하는 생각에 냄새꼬에게 다가가 번쩍 들어 올렸다.

sae?

깜짝 놀란 듯 평소에 내지도 않는 소리를 내는 모습에 너무 갑작스러운 스킨십이었나 생각이 들어 뜨끔했다.


그래도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화분 위에 앉히고 이파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오늘 처음 배틀이었는데 수고했어. 다음번엔 힘내자.”

내가 방긋 웃어주니 눈을 슬쩍 피하는 게...! 부끄러워한드아 귀엽다아... 누가 냄새꼬를 냄새난다고


천시하느냐고...! 너무 귀여움 크리티컬이라서 손가락을 꼼질꼼질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꼭 안아버리고
말았다.

“아으 귀여워라. 웅웅 그래 다음번엔 더 잘하자, 우리.”

내가 바둥바둥거리는 냄새꼬를 안고 둥기둥기하자 침대에서 보송송이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song! sooong!!

침대 쪽을 돌아보니 보송송이 이불에서 머리만 쏙 내놓고는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으으... 얘는 또 왜


이렇게 귀엽게 군대...! 바둥바둥거리는 냄새꼬를 다시 화분 위에 얌전히 내려놓고 침대로 다이빙해서 보송송을
이불 채로 꼬옥 안아주었다.

“으유. 그래그래 우리 보송송도 귀여워어. 다음번엔 지우개 녀석 발라버리자고!”

그렇게 이불로 꽁꽁 싸맨 보송송을 안고 구르고 있는데 카톡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잎새] 냄새꼬는갠차나??

보송송을 배 위에 올려놓은 채로 카톡을 확인하니 잎새였다. 나는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한지우하고의 배틀은 체육 다음으로 바로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수업을 빼먹는다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지만


보건실에 들렸다가 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분명 주변에 사람들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한지우... 요즘 유명인이라 소문이 빨리 나는 건가.

쨌든 반으로 돌아왔을 땐 잎새가 다리를 동동 구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오바람도 있었는데 오바람은 가끔
점심을 같이 먹으러 찾아오는 것에서 발전해서 어쩌다 보니 아예 점심 팟 정규 멤버가 되었기 때문에 잎새와 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잎새는 내가 복도에 보이자마자 쿵쾅거리면서 뛰어와서는 무슨 얘기를 했느니, 그놈이 해코지는 안 했느니, 왜
이렇게 늦었느니 캐물어댔고 어느새 쫓아온 오바람까지 가세해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부추겨댔다. 아무래도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란 오바람한테도 그 한지우의 모습이 낯선 모양이었다. 일단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는 말로
엉거주춤 넘겼다.

보건실까지 들렀다 오느라 반 가까이 지나가버린 점심시간 덕분에 밥을 빨리 먹느라 얘기를 자세히 하지는
못했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얼버무리며 넘어갈 수 있었다. 대충 새 포켓몬을 들인 것 때문에 말다툼을
했었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자 배틀을 하게 되었고 져버렸다는 정도? 그것에 대한 추가 질문이 나왔지만
대충 스킵.

아, 내가 돈을 쥐어줬다는 얘기에 잎새가 빵 터져서 잘했다고 엄청 잘했다고 속 시원한 표정을 하던데... 정말


일으켜 세우려고 손 내민 거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행동에 후회는 없지만. 쨌든 밥 먹는 내내
시무룩했던 냄새꼬가 걱정돼서 카톡을 했나 보다.

그렇게 잎새와 카톡으로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아빠인가? 생각해서
문을 여니까 달려오는 가디가 보였다. 무릎을 굽혀서 반겨주는데 그대로 가디가 돌지이이인 해서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찍어버렸다.

wangwang!!
“에고고 그래그래 완아. 나도 반가워.”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가디의 뜨끈뜨끈한 털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드니 아빠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시고 계셨다.

“오늘 집에 왔네?”
“응. 좀 두고 온 것도 있고 얘기할 것도 있고.”
“에? 무슨 얘기?”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아빠가 앉은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어느새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도 나와서 아빠를
반겨주었다.

“아, 다다음주 주말에 야외 조사 차원에서 우파 군락지에 가게 되었는데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


“우파 군락지?”
“순천만 늪지에 여러 포켓몬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우파나 누오가 여러 무리를 지어서 살고 있거든. 거기
생태계 조사 차원으로 우리 연구소가 가게 되어가지고 말이야.”
“순천만...!!”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티비에서 보았던 순천만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분명 정말 아름다웠던 것 같은데!
흐드러지는 갈대와 빛을 뿌리며 떨어지는 해. 그리고 날아가는 철새들! 가보지는 못했지만 영상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그런 곳이 다른 세계가 된 지금 어떤 생명들이 살고 있을까. 우파라니... 누오라니...!

“연구차 가는 건데 따라가도 되는 거 맞아?”


“뭐, 아무래도 멀리 가는 것이기도 하고 관광지긴 해서 가족을 데려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물론 나나
연구원들은 일을 해야 되고. 가는 김에 같이 가자는 거지. 아, 가족이 같이 가게 되면 추가 비용도 내야 되긴
하지만.”

나는 흥분해서 두 눈을 반짝였다. 아니 순천이라니 순천이라니!! 아빠가 내 머리를 마구 헝크렸다.

“이 녀석은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당신은 어때?”


“글쎄요. 아무래도 당신도 바쁘고. 순천이라면 차도 오래 타야 될 테고...”

엄마의 완곡한 거절에 나는 시무룩해져 빨래처럼 소파 등받이에 늘어졌다. 그럼 못 가는 걸까. 가고 싶은데


순천...! 순천만 생태공원 가고 싶은데에에...!
“그럼 지은이만 데리고 갔다 오지 뭐.”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쳐다봤다. 주변에 뭔 일인가 하고 보송송이 나와 내 다리를 끌어안고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정말 가도 돼?”

내가 확인하듯 묻자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엄마 없이 혼자 놀아야겠지만 말이야. 아빠는 바쁘니까.”


“물론물론! 당연하지! 나 혼자 잘 놀아. 아니 혼자 아니지. 보송송도 있고 냄새꼬도 있는 걸.”
“아, 그러고 보니 바람이도 가지 않을까? 아마 간다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바람?”

갑자기 나온 이름에 내가 갸웃하면서 물었더니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뭐 그럼 잘됐네 뭐. 헤헤 그럼 진짜 간다. 나 준비하고 있는다?”

나는 너무 좋아서 옆에서 무슨 얘기하나 듣고 있던 보송송을 들쳐 안아 빙글빙글 돌았다. 우파라니...!


누오라니...! 아, 그러고 보니 우파가 물, 땅 타입이었나. 우리 보송송 큰일 났네. 땅타입이라니. 물론
풀타입에 4 배니까 냄새꼬가 있으면 걱정이 없지. 아, 이 말은 보송송한테 하지 말아야겠다. 자존심 상할라.

나는 방으로 들어와서 냄새꼬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냄새꼬나 보송송이나 습지도 갈대도 우파도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틀어서 보여주었다.

습지라는 건 이렇게 물이 많은 땅이고 여기서 갈대가 많이 자라. 응? 아 여기 큰 풀들 보이지? 이게 갈대야.


내 키보다 커. 갈대 속에 숨으면 나도 안보일걸? 보송송 그렇게 놀라? 네가 진화하면 나보다 더 커질 거야. 응?
진화하면 어떻게 되냐고? 잠시만, 검색해서 보여줄게. ... 아, 여기. 이렇게 늠름하게 변한다구.

응 냄새꼬는? 아 잠깐 치마 잡아당기지 마. 그렇게 궁금해? 냄새꼬는 두 가지로 진화할 수 있어. 뭐? 보송송


너도 두 가지로 진화하고 싶다고? 으음... 글쎄 이브이가 매 세대... 아니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새로운
진화형이 나오기는 하는데... 너는... 모르겠네. 포켓몬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니까...? 기대해 봐도... 아,
잠시만 냄새꼬. 지금 보여줄게. 그러니까 꽃잎이 이렇게 큰 라플레시아랑 작고 귀여운 아르꼬라고. 아니
아르꼬를 보고 찡그리는 거야? 흐하하 너도 남자애라는 거지? 하긴 이런 귀여운 모습은 잘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둘 다 충분히 강하니까.

쨌든 다시 순천 얘기로 돌아가면... 잠시만 찾아보자. 우파가 무리를 이뤄서 살고 있고. 누오도 소수 있는


모양이야. 아주 드물게 야돈이 있을 수 있다는데? 아니 순천만은 바다 아니었어? 야돈이 바다에 살아? 아,
철새들도 온다는데... 다른 나라에 사는 유토브와 적은 수의 켄호로우들이 왔다가 간다고? 잡을 순 없게
보호하고 있구나. 전에 잎새가 말했던 국가적 조항하고 비슷한 건가 봐. 아 빨리 가보고 싶다. 응응. 그러고
보니 냄새꼬도 보송송도 물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좋겠다 그지?

대략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하며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바람한테 톡해서 가는지 물어봐야지.
아, 다담주 주말이라니. 어떻게 기다리지.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50 화
w. 도여은

언제나 그랬듯이 학교에 가고 단련을 좀 하다가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 자습하고. 아, 보송송이 삐져서 같이 안
간 날 냄새꼬가 져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보송송은 냄새꼬는 믿을 수 없다면서 꼭 자기도 같이 가야 한다며 떼를
썼기에 둘 다 같이 학교에 데리고 다니고 있다. 체육시간에는 번갈아 나오고. 둘이 사이가 좋다곤 할 순 없지만
–주로 보송송이 시비 걸고 냄새꼬가 무시하는 구조- 크게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다.

아, 그리고 한지우가 체육시간 끝나고 끌고 갔을 때, 사실 배틀 만능주의인 이 세상에서 2 학년 치고는 우수한


실력과 준수한 외모를 가진 한지우가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었기에 시기나 질투를 받을까 봐 솔직히 걱정을 했었다.
지난번에 화이트데이라고 사탕을 대신 전해주기도 했고. 허나... 그때 한지우 표정이 어마 무시했는지, 다들
나를 질투하기보다는 걱정했다고... 쨌든 그 녀석은 나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는지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냥 쌩까고 지나간다. 나는 물론 옆에 있는 오바람하고는 인사하지만.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에 오바람한테 톡을 걸어서 순천에 가느냐고 물어봤었다. 생각해보니 오바람하고는 밥은


같이 먹지만 그렇게 친하다곤... 그러니까 흥분해서 톡을 보내고 보니 첫톡이었달까. 공부를 엄청 잘하는
오바람은 폰은 잘 안 볼 것 같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칼답이 왔던 것이 의외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만나서 조금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2 주가 흘렀다. 당일이 되어 아빠와 같이 도착한 연구소에는 멀리에서부터 연구소 공터 앞에


주차되어있는 여러 대의 버스와 차들과 함께 사람들로 북적했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현장 연구를 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가는 분위기 같았다. 아빠 말로는 간단한 조사라서 그렇다고. 또 거기에 있는 현직
연구원들하고 교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어찌 되었거나 이렇게 북적북적하니 회사 차원에서 같이 가는 가족 여행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


와중에서 아마 있을 텐데...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서로 안부를 묻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보는 갈색
머리카람의 오바람이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여어.”

나도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자 녀석이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톡으로도. 또 같이 밥을 먹으면서 그때


보자고는 했었지만... 막상 진짜로 만나게 되니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교복이 아니라서 그런가? 오바람은 안에 티를 받쳐 입은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중간고사 이후로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더니 하복으로 갈아입긴 했었는데 막상 사복 차림을 보니 신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학교 밖에서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으니. 아니 가끔 봉사활동 갈 때나 동아리 활동 때문에 사복 입은 걸 봤었는데...

아, 잎새가 없어서 그런 걸까. 자주 점심을 같이 먹기는 했지만 잎새 없이 둘이 보는 것은 오랜만이지 않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 옥광산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금세 다가온 오바람은 아빠에게 싹싹하게 인사했다. 아빠의 반보 뒤에서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연구실을 집처럼 하고 자랐기 때문인지 연구원 분들하고 친하다고 전에 듣기도 했었고 아빠도 오바람을
말할 때면 친근하게 불렀었지만 정작 눈으로 보니 참 이상한 기분이다.

“그래. 바람아. 잘 지냈니? 요즘 통 연구실에서 못 봤던 것 같은데 잉어킹은 잘 자라고 있니?”


“아... 네. 당연하죠. 잘 크고 있어요.”
‘잉어킹?’

오바람이 잉어킹을 길렀었나? 나는 속으로 갸웃하며 오바람을 쳐다보자 오바람하고 눈이 마주쳤다. 금방


아빠에게 시선이 갔지만 뭔가... 방금 눈치 본거지? 옆에 잎새가 있었으면 딱 알았을 텐데 나는 조금
긴가민가했다.

오바람의 포켓몬은 이브이, 피죤, 그리고 중간고사 치기 직전에 진화한 레트라. 전에 잎새가 오바람하고 꼬렛이
언제 진화할 것인가에 대해서 내기한 적이 있었는데 딱 열흘 하고 하루 뒤에 진화해서 오바람이 잎새한테 왕창
뜯겼었지.

레트라는 꽤 무서운 생김새라서 조금 놀랐지만 성격은 그대로였다. 밝고 귀였고. 보다 보니 쫑긋거리는 귀도


귀엽게 느껴졌고. 그리고... 딱히 다른 포켓몬은 본 기억이 없었다. 얘기를 들은 것도. 물론 꼭 모든 포켓몬을
학교에 데려올 필요는 없지만.

“잉어킹은 다른 포켓몬보다 진화시키기 힘들지만 조금만 더 애정을 쏟는다면 곧 진화할 게다. 야생의 갸랴도스는
흉폭하지만 잉어킹 때부터 손에서 길러진 갸랴도스는 진화시키기 힘든 만큼 주인을 잘 따르니까 말이야. 내 친구
중에서도 잉어킹을 길렀던 친구가 있었는데...”

아빠는 말을 잇지 못하더니 힘내라는 듯 오바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표정이 참 슬픈 표정이라서 내가 더


놀랐다.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길래...! 아빠의 그런 말에도 오바람은 알고 있다는 듯 얕은 한숨과 함께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것보다 지은아. 아빠는 이제 박사님에게 가 봐야 하니까 바람이랑 같이 있으렴. 그럼, 바람아
부탁한다.”
“아니, 아빠 부탁이라니...!”

아빠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쌩하니 가버렸다. 아아. 아빠. 그래도 버스는 같이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오바람이 있어서 안심하고 간다는 느낌이었어 그거. 부탁은 무슨.

“부탁할 것까지야 없지 않아? 무슨...”


“뭐, 연구소 일은 이 몸이 잘 아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개구쟁이처럼 웃는데 그것이 퍽 믿음직스러워 보이긴 했다. 하지만 역시 성격은 오키드-그린... 허세콩.
그나저나 저 멀리서 버스에 타라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는 같이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빈 창쪽에 앉고
오바람과는 어쩌다 보니 버스 옆 좌석에 앉아서 같이 가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타는 것보다는 나은가?
순천까지는 네 시간은 넘게 타고 가야 할 테니까. 나는 은근슬쩍 궁금증에 대해서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잉어킹 키웠었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어? 어... 음. 어쩌다 보니.”

가볍게 물은 질문에 깜짝 놀라서 대답하는 게 내가 뭘 잘못 물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끝을 흐리더니 이마를
긁적거리면서 눈길을 피한다?

“잉어킹 키우는 줄은 몰랐네. 어... 비밀인 거야?”


“아니, 뭐 비밀은 아닌데... 그러고 보면 너 냄새꼬 입양한 줄도 난 몰랐었지.”
“아... 어쩌다 보니...”

오바람의 말 끝에 뭔가 섭섭함이 들렸다면 착각인 걸까.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게 되어버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버스는 출발해서 덜커덩 거리는 소리나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아니, 일부러 말 안 한 건 맞긴 한데... 마치 속인 느낌이라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색한 느낌.
아아아 여기 잎새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나을 뻔 했을까. 괜히 잉어킹 얘기를 꺼냈나?
아, 오바람 조금 기분 상한 것 같지? 아니 자기도 말 안 했으면서... 아니 그전에 내가 물어본 적도 없었지만.
전에 잎새가 얘기하려는 거 내가 일부러 말 돌렸던 적도 있었지. 오바람 눈치 빠른 것 같던데 내가 말 돌린 거
알고 있었으려나? 전에 냄새꼬 처음 데려온 날은 한지우하고 싸운다고 눙쳐 넘어가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나저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돼. 이거 너무 어색하다고. 그래서 내가 아무 말이라도 꺼내려고 입을 열었는데,

“있잖아 너...”
“너 말이야...”

되려 타이밍 재려다가 동시에 말을 꺼내버렸다. 으어...

“너 먼저...”
“너 먼저...”

아, 또 똑같이 말해버렸다. 나랑 오바람은 둘 다 벙찐 채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어버렸다. 결국 이어 말하는 내 말에도 웃음기가 가득 담긴 채였다.

“뭐야.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아니, 뭐. 포켓몬 둘 다 데려왔나 물어보려고 했지.”
“아. 보송송하고 냄새꼬는 가방 안에 있어.”

나는 1 박 2 일이라 묵직해진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냄새꼬가 있어서 다행이네. 우파나 누오는 땅 타입을 겸하고 있어서 보송송 공격이 안 통할 것 아냐.”

나는 그 말에 툴툴댔다.

“자속은 아니지만 보송송 전기 기술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땅 타입 기술은 어마 무시하지.”
“윽...”

나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고 오바람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쳤다.

“강원도 체육관 첫 배지전에서는 자속 땅 타입 기술을 쓰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끔살...”


“그러게...”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보송송이 전룡이더라도 비자속 지진까지도 꽤


아프다고...

“설마 그랬었다면 아빠가 보냈겠어. 딸 첫 체육관전인데.”


“그런가.”
“그것보다 너는 그때는 다 노말 타입 데리고 있었으면서 용케 그쪽으로 갔다?”
“제비뽑기가... 그래도 노말이 전기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나도 오바람도 웃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첫 체육관 배지전 얘기가 나왔지만 우리 둘 다 옥광산에서


있었던 일들은 피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날의 일들은 너무 위험했고
또 무서웠다.

그리고 가끔 그날의 꿈을 꿔 놀라 깰 때마다 아, 내가 그때 정말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한지우나 오바람을 그 안에서 만나게 된 건 정말 소설처럼 우연한 일이었고 로켓단이라는 범죄 조직과 엮였던 일은
고등학생으로서는 전혀 현실감 없는 일이었는지라 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한지우랑 같이 국립대 제비뽑기를 해서 체육관전에 도전하고 있다는 등 그렇게 시덥지 않은 말로 얘기를


이어나가다 자연스럽게 말이 끊겼다. 방금 전 같은 침묵이 아니라서 나는 잠시 창문을 내다봤다. 어느새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51 화

w. 도여은

“그런데 처음에 하려던 말은 뭐였어?”

오바람이 물으며 내 주의를 돌렸다.

“아니 뭐, 너 이브이는 어떤 포켓몬으로 진화시키려는지 궁금해서. 너 꼬렛도 구구도 진화했으니까. 이브이도


진화하고 싶어 하지 않아?”
“그렇지, 뭐. 이브이도 빨리 진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영 뭘로 진화하고 싶어 하는지 고민하는
모양이더라고. 진화라는 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이브이즈는 진화 계통이 많잖아.”
“하긴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선택이 힘들어지는 법이지.”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라면. 나는 잠시 볼 안에 들어있는 보송송과


냄새꼬를 떠올렸다. 내 어두운 상념을 깨뜨리듯 오바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 부산에 갔다가 이수재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거든.”


“내가 생각하는 그 이수재... 말하는 거야? 티비에 나오는 이 시대의 천재?”

게임 내에서는 포켓몬 전송 시스템을 만든 사람으로 이브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왔었다, 내 기억으로는.


하지만 현실에선 좀 더 대단한 사람이더라. 내 생각보다 더 유명해서 티비에서도 자주 나오고 회자되기도 많이
회자되고. 게임에서는 이수재가 만들었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국가적으로 밀어주는 포켓몬 전송 사업
연구팀에서 최연소 참여 팀원이자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 만들어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하더라.
좀 더 현실적인 설명이랄까. 더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여기서나 저기서나 천재지만. 아, 다른 국가에서도 전송 시스템 개발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제일


처음 성공했다고 한다. 연구자로서는 오박사님 다음으로 인지도나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경력에도
불구하고 서른 줄의 미혼 남성이니 모두의 시선이 쏠릴 만 하달까. 그리고 티비에서 봤을 때 부산 사투리를 쓰는
모습이었는데... 역시 게임 고증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응... 그런데 말이야.”

녀석이 뜸 들이기에 내가 갸웃하고 쳐다봤다. 조금 지나가듯이 작게 얘기했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혹시 사람과 포켓몬이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해?”


“?!”

진짜인 거야? 아니 정말로 한지우나 오바람이나 스토리를 타고 있는 건가. 본 스토리에서는 주인공이


이수재집에 가서 꼬렛과 몸이 합쳐진 이수재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진행되는데... 스토리와는 달리 둘이 같이
찾아가서 도와준 것이었나? 그래도 이것저것 바뀌면서도 스토리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거라면...

“농담이야, 무슨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나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져봤다. 그나저나 농담처럼 안 느껴지니까 그렇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분명 오바람 웃어넘기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진짜 있었던 일임에 분명하다.
지금 눙쳐서 넘어가려는 거야. 크게 일이 커질만한 내용이니까 퍼지지 않게 얘기를 해놓았던 모양이다. 진짜로
얘기하고 다닐만한 얘기는 아니긴 하지.

“거기서 얘기를 좀 들어봤는데 거기에는 모든 이브이의 진화체들이 있어서 내 이브이한테 도움이 됐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연구자료도 받았고. 이브이는 에브이나 블래키 쪽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뭐, 친밀도 진화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이야.”

분명 원작은 쥬피썬더, 샤미드, 부스터만 알려주겠지만 아무래도 정보가 달라서인가. 그리고 연구 자료뿐만
아니라 진화체가 다 있다니... 이수재 씨, 정말 이브이를 좋아하시나 보다. 진화 얘기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며칠 전에는 또 큰 발표가 있었잖아.”


“새로운 타입 말하는 거지?”

며칠 전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사건이 발생했었다. 변함없는 돌을 지니게 한 채로 5 년 동안 이브이를 키우고


있던 유럽의 한 소녀가 이제 진화를 시키려고 변함없는 돌을 뺐더니 처음 보는 포켓몬으로 진화했다는 것이었다.
그 포켓몬은 바로 님피아. 연구 끝에 새로운 타입으로 정해졌는데 그것이 바로 페어리였다. 그리고 기존의 몇몇
노말 포켓몬이 페어리 타입으로 밝혀졌었다. 그 소식을 티비를 보다가 잎새한테 전화가 왔었다. 우리 크림이가
페어리 타입이었대!! 하고.

생각해보면 분명 1 세대 주인공들이 이렇게 있는데 이미 알 그룹도 알고 있고 친밀도 진화도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는 관동과 성도의 포켓몬들이 같이 살고 있고. 다른 나라들의 포켓몬 서식처를 보았을 때, 아마 각각
시리즈가 나라별로 조금씩 다른 시기 차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갓 페어리 타입이 나왔으니까 곧 메가 진화도 나오려나. 아님 더 시간차가 많이 나려나. 메가 전룡...


예쁘지. 털이 촤라락하고 나와서 바람에 산들산들... 왠지 헤헤,하고 실 빠진 웃음이 나왔다. 오바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얘기를 늘어놨다.

“난 님피아도 꽤 좋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드래곤 타입 대항하는 덴 최고잖아? 하지만 이브이가 님피아는


죽어도 싫다고 하더라고.”
“왜?”
“글쎄, 폼이 안 난다나 뭐라나. 쨌든 이수재 선생님 대단하시더라. 얘기가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님피아를 가지고 계셨어.”
“벌써?”
“응. 정말 이브이 쪽으로는 애정이 대단하신 것 같아. 아, 그리고...”

오바람은 말을 잠깐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몬스터볼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한 포켓몬을 꺼냈다. 덜커덩 거리는
버스 안에서 오바람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포켓몬은...!

“캐이시잖아?”
“이수재 선생님의 첫 포켓몬은 캐이시였대. 자기가 고등학생일 때도 여행을 다녔었다면서. 그리고 그때
할아버지한테 신세를 졌다고 지금 후딘의 세 번째 아이라고 주시더라고. 얼른 받아왔지.”

캐이시는 몬스터볼에서 꺼내져 오바람의 무릎 위로 올라왔는데도 불구하고 자고 있었다. 아닌가...? 눈이 안


보이다 보니까 헷갈리긴 하지만 고개를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아마 자고 있는 게 맞을 거다.

“아직 텔레포트밖에 안 배워서 실전 투입은 무리지만.”


“...귀엽다. 뭔가 이수재 선생님의 첫 포켓몬이 캐이시라니 어울려.”

역시 텔레포트인가. 나는 나지막하게 얘기하면서 손가락으로 캐이시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살짝 기우뚱하더니


다시금 꾸벅꾸벅 존다. 역시 미진화 포켓몬은 너무 귀엽다.

그보다 오바람 포켓몬이 피죤, 레트라, 이브이, 잉어킹, 캐이시까지. 점점 스토리에 맞춰서 포켓몬이 저절로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토리를 따라가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런 것까지...

“그보다 레트라는 잘 지내고 있지?”


“며칠 전에도 봤으면서 왜 갑자기?”
“아니. 딱히 그런 게 아니라.”

설마설마 이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나는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괴담일 뿐인 걸. 그저 괴담일 뿐이니까...
“잘 있지. 지금도 데려왔는걸. 남들은 꼬렛이 쉽게 잡히니까 무시하는데, 은근 이 녀석 제 몫을 톡톡히
하니까.”

오바람은 캐이시를 한 번 쓰다듬어주더니 몬스터볼로 되돌렸다.

“특히 필살 앞니는 꽤나 위협적이라고. 그리고 이 레트라 스피드도 빠르고. 그리고 따르기도 잘 따르고. 꼬렛
때부터 애교도 많았지. 좀 똑똑한 것 같기도 하고. 생긴 것도 다른 사람들은 무섭다고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뭔가 속사포로 얘기하는데 무슨 자식 잘 키운 아빠 같은 표정이었다. 분명 다른 포켓몬을 묻더라도 어떤


자랑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역시 미래의 챔피언. 진성 포덕...!

“큼큼. 그러고 보니 냄새꼬도 두 가지로 진화하잖아. 생각해뒀어?”

내가 좀 빤히 쳐다봤나. 오바람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뻔뻔한 오바람도 스스로 멋쩍었나 보다. 나는
그에 고개를 갸웃하며 얘기했다.

“응. 어제 보니까 아르꼬보다는 라플레시아 쪽으로 진화하고 싶은 것 같던 걸.”


“그럼 리프의 돌을 사야겠네.”
“그렇지 뭐. 그래도 당분간은 진화시키지 않으려고.”
“왜?”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 앞주머니를 쓰다듬었다. 그 안에 보송송과 냄새꼬가 있는 몬스터볼이 있다.

“가방 안에 있으니까 안 들리겠지?”


“아마도?”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되어서 얇은 겉옷을 벗어서 다시금 가방을 감싼 뒤 얘기했다.


“전에 간단히 얘기했었지만... 이 아이 보호센터에서 데려왔잖아. 보호센터에서 봉사하는 수정 언니가
얘기해줬었는데, 아마도 이 냄새꼬 진화 때문에 버려진 것 같다고 해서...”

아... 하는 표정으로 오바람은 내 가방을 바라봤다.

“지난번에 보니까 거부감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냄새꼬 그 자체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서 더 사랑해주고 좀 더 안정된 다음에 진화시키고 싶어. 그런데 보송송은...”

나는 괜히 숨이 차는 기분이라 깊게 숨을 들이켰다 한숨처럼 내뱉었다.

“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뭔데?”

쉽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 입 밖으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오바람은 재촉하지 않고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 보지 않아 시선이 엇갈리는 그 중간에는 책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나는 조금 안심되는 기분에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52 화

w. 도여은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돼.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싶고.”

얘기 할까 말까 생각을 잠시 했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오바람은 아무 말 없이 듣는


듯했고 고해성사를 하듯 나는 손끝만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두 번째 짐전을 갔던 건 냄새꼬 때문이었어. 냄새꼬는 입양하기 전에 마음도 몸도 안정적이지 못했거든.


억지로 데려오면 저항이 심할 것도 같고 더 상처받을 수도 있고. 그래서 매일매일 얼굴을 익히러 갔는데...
하지만 보호소에 둘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미룰 수 없는 시간이 계속 다가올수록 겁이 났었다. 따라오지 않으면 어쩌나. 강제로 데려가야 하나. 거기서
죽임 당하는 걸 볼 수 없는 걸... 나는 잠기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도 알겠지만 배지에는 포켓몬을 잘 다룰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잖아.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짐전을 하게


됐어. 나도 부산으로 갔었는데... 멀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물 포켓몬 체육관이니까. 보송송...
아니 그때는 메리프였지. 메리프의 전기 타입에 약점이 찔리는 타입이라서 갔었어. 사실 냄새꼬를 데리고 와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마음이 급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끝까지 메리프가 마음에
걸렸었어.”

나는 오바람을 잠깐 쳐다봤지만 녀석은 가만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냐고 계속 물었는데도 메리프는 괜찮다고만 말했거든. 내가 매일 냄새꼬를 만나러 가는 동안


메리프는 아빠네 집으로 전송 보내곤 했어. 거기서 아빠네 마기라스랑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고. 순전히 메리프의
의지였어. 내가 집에 돌아와서 몬스터볼을 전송받아 메리프를 밖으로 불러내면 항상 꾀죄죄한 모양새에
피곤해하는 모습이어서 안타깝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그 냉정한 마기라스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궁금한 건 차치하더라도 매일매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그렇게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메리프 전용 샴푸로 꼼꼼하게 씻겨주고 말리고 털을 빗어주다
보면 메리프는 노곤노곤한 게 기분 좋은지 품에 파고들곤 했다.

“더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또 일부러 뜯어말리려고 하니 혹시라도 내가 보호소에 있는 냄새꼬에게


더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할까봐 그러지도 못하겠더라고.”

수정언니가 둘째를 들일 때는 첫째를 더 신경써야한다고 말해줬던 것이 오히려 더 나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중간에는 짐전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메리프가 짐전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 더 눈에
보여서 그러지를 못했다. 막무가내인 자식을 보고 부모들이 이런 마음을 느낄까 싶기도 했다.

“결국 짐전을 갔어. 가서 문하생들을 이기고 짐리더의 아쿠스타를 상대로 하는데 그만 메리프가 물의 파동으로
혼란에 빠진 거야. 계속 공격을 맞았고... 이대로 지는 건가 눈앞이 깜깜했는데...”
“했는데?” 오바람이 말끝을 따라하며 말을 재촉했다.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메리프가 방전을 써버린 거야.”
“방전을?”

오바람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놀랄 만도 했다. 아무래도 방전을 배우기에는 나이도 경험도 부족했으니까.
방전이라는 기술이 게임으로 치면 레벨 30 후반에야 배울 수 있는 걸.

“분명 방전이었어. 전기타입 포켓몬 키우면서 공부를 안 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못 믿는 것 같은 오바람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득한 느낌이다. 메리프가 눈을


뜨지 못한 채 당황하며 전격을 이리저리 날렸을 때도 내가 메리프를 아무리 외쳐도 닿지 않았을 때도 결국
아쿠스타의 고속스핀에 메리프가 맞아 비틀거렸을 때도 마음이 아팠지만... 메리프가 결국 사방으로 전기를
뿜어냈을 때, 아쿠스타가 그 전기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전기를 뿜어내고
있었을 때는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쿠스타는 쓰러졌는데도 계속 전기를 내뿜다가 쓰러졌어. 내 말을 들리지 않는 것 같더라.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
“내가 이 아이를 잘못 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악을 쓰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뭐가 그렇게 메리프를 몰아세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런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내 메리프가 체내의 전기를 다 쓰고 쓰러지고 나서야,
그제야 나는 쓰러지는 메리프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아니 나도 모르게 물속에 뛰어들어서 눈을 뜨니 메리프 앞에
다다라있었다.

“쓰러지는 메리프를 물속에서 건져냈는데 메리프가 살짝 눈을 뜨더라고. 그런데 순간 내가 메리프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내가 알에서부터 키우고 돌봤는데 그 어떤 포켓몬과 트레이너 사이보다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모두


다 물거품 같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빛이 나면서 진화를 하는데... 사실 걱정도 많이 했었잖아 다들. 메리프가 진화를 할 때가 됐는데


진화하지 않아서. 이런 진화였으면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막을 수 있으면 막고 싶은
심정이었어.”
“...”
“그 아이가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을 해보면...”
“...왜 그랬을 것 같은데?”

내가 떠나갈 것 같아서, 믿음을 주지 못해서...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면 세계가 변했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바람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기다려 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로 뭉뚱그렸다. 사실은
알고 있다는 걸 오바람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남에게 말하고 보니 내가 너무 나쁜 트레이너인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오바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했을까. 내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오바람은 포켓몬을 좋아하니까 아끼니까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포켓몬을 왜 그렇게 대했냐고. 왜 그렇게 몰아붙였냐고. 그런 질책을 듣고 싶어서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비난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싶어서. 그렇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 외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보송송이 쓰러지기는 했지만 안정시키고 나니까 금방 일어났어. 그렇게 큰 상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리타이어라서-”
“-아니, 보송송 말고.”

내 말을 끊으며 말하는 오바람의 말에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내가
바라보자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너 말이야. 너. 괜찮냐고.”
“...나?”

시선을 피한 채로 오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해서 내 발 끝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나... 괜찮은가.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아. 가끔 포켓몬이라는 생명이 너무 무거워서. 그리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가끔 처음 이곳에 왔었던 날, 옥광산에서 있었던 일, 메리프가 혼란에 빠졌던
그날의 꿈을 꾸는데... 그럴 때마다 울음이 나는 걸.
하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상해.”


“...”
“널 너무 몰아세우지 마.”
“...내가 나를 몰아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여?”

내가 물으니 오바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 트레이너라면 포켓몬이 강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니까. 진화를
했다면 너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축하하고 하는 거라고.”
“하지만-”
“-실수할 수도 있고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를 수 있어. 하지만 그런 것으로 잘못 키웠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고
보는데, 난.”
“...”
“넌 냄새꼬를 데려와서 확실히 네 포켓몬으로 만들었고 보송송도 밝고 강하게 잘 자라고 있잖아. 내가
지켜보기론 그리고 네 말을 듣기로도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잖아.”
“최선...”
나는 그 말을 입으로 곱씹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악몽을 꾸고 울어버리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거야?
불안한 모습을 포켓몬들이 느끼고 있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너든 나든 완벽한 사람이 아니잖아.”

오바람이 웃어보였다. 너무 달콤한 말들이어서 나는 순간 정신을 못 차릴 뻔했다. 괜찮다는 말, 최선을


다했다는 말. 남들은 이런 것 가지고 그러냐고 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나는 힘들었다. 괴로웠다. 그래도
처음처럼 도망가지는 않았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버텼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근데,

“괘씸해.”
“엥. 뭐가.”
“너가 그렇게 말하는 건 괘씸하다고.”

오바람이 보이지 않는 물음표를 띄우면서 나를 쳐다보자 나는 장난 섞인 말투로 툴툴거렸다.

“잘 생겼지, 공부 잘하지, 운동 잘하지, 포켓몬도 잘 다뤄,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아. 그런 네가 완벽


운운하면 짜증 난다고.”

그 말에 오바람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어서 하는 말이

“내가 좀 잘났... 윽.”

더 괘씸해서 다리를 차 버렸다.

웃음이 났다. 창밖에는 햇빛이 초목들을 감싸고 있었고 그것은 쌩쌩 달리는 버스 밖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몬스터볼 안에서 잠자고 있는 두 아이들을 꺼내서 꼭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는 달리고 또 달렸다.
금방이라도 순천에 도착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53 화

w. 도여은

버스는 달려서 순천에 도착했고 나도 사람들이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보이는 파란 하늘.
정말 쾌청한 날씨였다. 굳이 쾌청을 쓰지 않아도 불 타입 포켓몬들이 마구 날뛸 수 있을 것 같은 날씨!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이 포켓몬 월드에 적응했다는 증거이려나... 어쨌든 성수기를 피해 잡은 날짜에 연구 목적으로
잠시 생태공원은 폐장해 두었기에 이런 좋은 날씨에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먼저 가볼게.”

오바람이 웅성웅성 연구원분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연구 일을 돕는 거야?”

그저 나처럼 따라온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같이 여기저기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시무룩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돌아다니면 심심하잖아. 그리고 연구 쪽이면 나도 궁금한데... 아무래도 무리이겠지.

“어이, 현장 가고 싶어서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거면... 글쎄 딱히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무슨 뜻이야?”

좋을 게 없다니 무슨 뜻이지. 아, 그것보다 내가 생각이 그렇게 얼굴로 들어나나? 아니면 내가 연구 쪽으로


관심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지레짐작한 것 같다.

“가면 초록색 고무 작업복 입고 장화 신고 늪에서 생태계 확인하고 배변 채취하고... 그러는 일인 걸. 사실


낭만 같은 거 없다고.”

장난식으로 과장되게 한숨 쉬는 모습에 나도 오바람도 같이 웃었다. 그리고 작업복이라는 건 고무로 돼서


가슴까지 올라오는 그런 거 말하는 걸까. 작업복 입고 장화를 신은 채 몸에 진흙 묻은 오바람을 상상하니 더
웃겨져서 킬킬거릴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주변 구경이나 해. 나는 열심히 노동 착취당하고 있을테니까.”


“알겠어. 고생해.”

내가 웃으며 보내니 약하게 한숨 쉬고 녀석은 연구원분들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모습을 보니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따라다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오박사님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 걸음을 옮겨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 나는 점심으로 김밥을 받고 몇 시까지 모여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구나.
머리 위에 해가 쨍쨍했다. 쨌든 이런저런 주의를 듣고 순천만 공원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들어가니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아무래도 배가 고프기도 하고 몬스터볼 속에


있는 애들이 답답할 것 같기도 해서 물레방아가 있는 연못 주위에 나무 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았다. 가방 속에서
몬스터볼을 꺼내니 보송송이 들어있는 몬스터볼은 빨리 꺼내 달라며 흔들흔들거리고 있었다.

“알겠어, 알겠어.”

나는 말로 달래며 얼른 둘을 볼에서 꺼냈다. 역시 신기해. 과학이란. 아니 포켓몬 세계인가? 몬스터볼에서


나온 보송송은 나에게 안기기부터 했다.

“많이 답답했어? 일단 주변을 봐봐. 순천만 공원이야.”


song~ sooong!

보송송을 무릎에 앉히자 신기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감탄인 듯 송송거리다가 다리를 파닥파닥
거리기에 바닥에 내려놨더니 주변 풀숲에 관심을 보이면서 킁카킁카 냄새를 맡기도 하고 이리저리 뛰기도 하고 참
바쁘다. 반면에 냄새꼬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내 옆에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낯설은
걸까? 나는 냄새꼬를 들어 올려 벤치에 앉혔다.

“아,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

나는 챙겨온 푸드를 냄새꼬에게 주고 또 보송송을 부르니 보송송은 정신 팔렸던 것은 까맣게 잊고 밥 먹으려고


두다다다 달려왔다. 그런 보송송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푸드를 챙겨주었다. 나도 김밥 먹어야지.

나는 김밥을 먹으면서 김밥을 받았을 때 같이 받았던 관광지도를 펼쳐보았다. 천문대도 있고


생태관도 있고 매점 같은 쉼터도 있고 주변에 넓은 잔디밭도 있고. 그리고 기대하고 기대했던 갈대 군락지를
가로질러서 전망대까지 가는 길이 있다. 일단 아직 시간도 많고 전망대는 해가 질 때 보는 게 좋으니까 일단 해
지는 시간을 알아봐야지. 나는 우물우물 김밥을 씹으며 스마트폰으로 해 지는 시간을 찾아봤다. 음, 시간
넉넉하다.

일단 여기 주변 좀 둘러보다가 생태관에 들렸다가 갈대 군락지를 지나 전망대에서 해 지는 걸 보면 되겠군! 나는


김밥 꽁다리까지 마저 먹고 내 포켓몬들을 돌아보았다. 보송송은 푸드를 다 먹고 벌써 다른 것에 정신 팔려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고 냄새꼬는 옆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나는 지도를 접고 냄새꼬의 꽃봉오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낯선 곳에 와서


긴장되는 걸까. 냄새꼬는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답지 않게 내 허리를 꼬옥 안았다. 팔다리가 짧아서 나를 다 안지
못하자 덩굴까지 꺼내서 나를 휘휘 감았다.

“응...?”

풀포켓몬이 덩굴을 꺼내서 안거나 비비적거리는 건 애정표현이라고 들었지만 직접 보니 놀랍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하긴 냄새꼬하고 같이 지낸 것도 한 달이 넘었으니 내가 편해졌다고 할 수 있으려나. 어리광 부리는
것이려나. 나는 냄새꼬를 마주 안았다. 촉촉한 흙냄새가 난다. 이제 누구라고 해도 냄새꼬가 악취가 난다고 뭐라
하지 못하리라. 괜히 뿌듯해서 헤헤거리는데 갑자기 다른 쪽 허리로 무언가가 퍽하고 부딪혔...

“윽... 보송송.”

보송송이 내 남은 허리에 매달려서 머리를 비비적거린다. 헤헤...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구나. 아니 질투 받는


건가? 나는 한 손으로 보송송도 꽉 안아줬다.

“얘들아. 일단 주변 산책이나 하자. 냄새꼬 이제 덩굴도 풀어줘.”

내가 얘기하자 냄새꼬는 덩굴을 스르르 풀었다. 보송송도 얼른 가자며 벤치에서 뛰어내려 앞장을 선다.

“냄새꼬, 안아줄까?”

내가 물으니 냄새꼬가 짧은 팔을 안아달라는 듯이 들어올린다. 으아... 누가 냄새꼬 안 귀였다고 했나요. 누가


냄새꼬가 안 예쁘다고 했나요. 처음 봤을 때 위협하던 냄새꼬 어디 갔을까. 어찌 이런 귀여운 짓을...!
보송송이 하는 것 보고 배운 건가. 그런 건가.

나는 주체 못하는 마음으로 냄새꼬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저 멀리 가있던 보송송이 그걸 보더니 네발로


두다다다 뛰어와서 걔를 왜 안아줘! 왜 나는 안 안아줘! 빼액! 하는 듯 송소소송송송보송보송송 하며 옆에서
빙빙 돌며 방방 뛰어댔다. 분명 진화하면 두발로 걸을 줄 알았는데 네발 두발 자유롭게 바꿔가면서 뛰노는
보송송이다.

“냄새꼬 발걸음이 느려서 그래. 우리 보송송은 빨리 뛰어다닐 수 있으니까.”

내가 변명하자 보송송은 냄새꼬를 보면서 우앙우우웅 으르르릉 하더니 막 속이 답답한지 주변을 마구 돌면서
뛰더니 그제야 속이 풀리는지 뾰로퉁하게 다시 앞장을 섰다. 이걸 보면 진짜 냄새꼬 데리러 가자고 했던 메리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아니, 진화하면 성격이 바뀐다고들 하니까. 그것보다는 진화하더니 더 에너지가
넘치고 질투도 심해진 것 같은... 내 착각이려나.

어쨌거나 냄새꼬를 안은 채 생태공원을 산책했다. 강가 주변을 걸을 때 이름 모를 철새들 사이에서 유토브와


켄호로우들이 날아오르는 것도 보았다. 내가 1,2 세대 포켓몬이 아닌 다른 포켓몬들도 보다니...! 감격!
하면서도 전에 찌르꼬 본 생각이 들었다. 그 찌르꼬 잘 있으려나. 으으음... 이런 새 포켓몬하고 인연이 있는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유토브와 켄호로우가 날아오르는 것은 장관이었는데 특히 수컷 켄호로우들의
머리깃이 날리는 모습은 정말 예뻤다!
그리고 연못 근처를 돌고 나무로 된 터널을 지나고 하면서 보송송은 신이 나는지 뛰어다니고 냄새꼬도 주변을
살펴보기 바빴다. 바닥에 내려놓으니 기웃기웃 거리면서 졸졸졸 쫓아오는 게 병아리 같기도 하고. 벌써부터 낯선
곳으로 놀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귀여운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몇 장이
아니라 수십 장... 포켓몬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아무래도 냄새꼬는 도시에서만 계속 있었는지 이런 탁 트인 자연이 있는 곳은 안 와봤던 모양이고 보송송은 아직


애기인 포켓몬이라서 이것저것 호기심 가는 것이 많은지 여기저지 둘러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혼자였으면
심심했을 것 같은 길도 이 아이들하고 걸으니 얼마나 즐겁던지. 돌아다니면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서 도착한 생태관. 입장을 하려는데,

“내부에서는 소형 포켓몬만, 그리고 한 사람당 한 마리만 대동 가능합니다.”


“아, 그래요?”

아무래도 박물관 내부이기도 해서 그런 제한이 있는가보다. 적어도 포켓몬 못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일단 진화했어도 둘 다 소형 포켓몬이긴 한데.

내가 애들을 쳐다보면서 한 포켓몬만 들어갈 수 있대, 얘기하니까 보송송이 몬스터볼에 안 들어가겠다고 떼를


쓴다. 그 모습에 냄새꼬가 귀찮은지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해서 나는 보송송을 안고 입장했다.

내부에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켄호로우 모형...! 암수의 모습에 깜짝 놀랬다. 밑에는 포켓몬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켄호로우는 암수 성별에 따라 깃모양이 다르다는 것이라던가, 콩둘기는 어리기 때문에
여기까지 날아올 수 없어 볼 수 없다거나 그런 설명들.

뿐만 아니라 길을 따라 쭉 둘러보니 여기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포켓몬들에 대한 설명도 볼 수 있었다. 오늘


연구 목적인 우파와 누오에 대한 설명도 있었고. 아, 그리고 주변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동식물에 대한 설명들도
볼 수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떨어지게 된 이곳은 포켓몬만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은 동물이 없다는 설정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조금 다른 모양이다.

학교에서 포켓몬에 관한 것은 생물시간에, 배틀에 관한 것은 체육시간에 배우게 되는데 체육 시간도 재미있지만


생물시간에 포켓몬에 대해 듣는 것은 더 재미있다. 생물 시간에 아이들이 떠들자 재미 삼아 선생님이 포켓몬에
기원에 대해 얘기해준 것이 생각났다.

원래 처음 지구가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포켓몬이라는 생명체가 없었다고 한다. 좀 더


지나서 공룡이 살던 시대에도 포켓몬은 없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화석으로만 그 시대를 상상해낼 수 있으니까. 쨌든 그래서 식물과 동물들이 번창하고 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포켓몬도 나타났다고 한다. 제일 오래된 화석이 암나이트와 투구라고.

그래서 포켓몬의 기원 중 하나는 공룡진화설로 공룡이 살아남기 위해 진화된 것이 바로 포켓몬이라는 것이다.


암나이트와 투구가 공룡이 살던 시대의 생물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 하지만 포켓몬은 일반 동물의 진화와 다른
점이 상당히 많고 그 메커니즘 또한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지지하지 않는 연구자들이 있다.

다른 하나는 외계생명체설이다. 말 그대로 포켓몬이 외계 생명체라는 것. 동물과의 차이점이 많고 포켓몬이라는


개체가 다른 모습을 띄지만 형태가 달라도 알 그룹 내에서 교배가 가능하다는 점, 일반 동물보다 비교적 높은
평균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다. 즉 포켓몬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양상을
띄기 때문에 나타나는 학설이다.

다른 하나는 최근 들어 나타난 학설인데, 바로 포켓몬신화설이다. 이건 정말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원래


포켓몬이라는 것이 기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상상과 기원이 강력한 힘이 되어 육체를 입어서 이 땅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 이건 포켓몬 신화학을 기반으로 한 학설인데 인간이 나타난 시기와 포켓몬이 나타난
시기와 일치하고 이러한 포켓몬이 그 시대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 맞물려 전설의 포켓몬뿐만 아닌 다른
포켓몬들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과학계에서는 거의 미신 취급하기도 하는데 계속 연구되고 있는 양자역학을
끌어들여서 유사과학식으로 은근히 그렇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아직도 포켓몬에 대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많다는 것이니까. 과연 어떤 학설이


맞을까. 내가 있었던 세계와 비교하자면 이러한 생태계의 역사도 사는 문화도 많이 다르다. 그래서 더더욱
신기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아,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체력이 내가 살던 세계보다 더 높다는
것이었다. 포켓몬과 지내서 그런 걸까. 생태적인 역사가 달라서 그런 걸까. 내 몸도 이전에 나보다 더 힘이
세다는 걸 느낀다. 그걸 알 수 있는 게, 내가 냄새꼬든 보송송이든 충분히 안고 다닐 수 있다는 점? 그런 것으로
보았을 때 정말로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이 세계로 영혼이 뒤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그럼 진짜 이 몸에 살던 영혼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가설일 뿐이었다. 아직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내게 일어난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가 알고 싶다. 도대체 난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것을 알고
나서야 돌아가든 말든 알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일단 즐기자!”

나는 내 속마음을 작게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안겨있던 보송송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야?


라는 눈빛에 나는 그냥, 그렇지? 하고 배시시 웃었다. 보송송은 아무 말도 않고 마주 웃어주었다.

54 화

w. 도여은

보송송을 안은 채 생태관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겸사겸사 천문대도 들여다보고 나오니 네 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천문대에서는 별자리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 건 큰곰자리가 링곰자리가 되고
작은곰자리가 깜지곰자리가 된 것과 같은 사소하지 않은 변화들...? 별자리라는 게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보니
원래는 부란다자리, 판짱자리인데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그 포켓몬들이 살지 않기 때문에 현지화돼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머릿속에 포켓몬들의 모습이 두둥실 떠올랐다. 뭐... 비슷하긴 하니까?

이제 어느 정도 둘러봤겠다. 보송송과 냄새꼬를 옆에 끼고 갈대군락지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갈대 군락지는


길고 긴 나무 길로 되어있는데 늪보다 조금 높게 떠있는 형상이다. 걸을 때마다 닿는 나무의 소리가 참 좋더라.

더 좋았던 것은 역시 갈대! 5 월이라 키가 그렇게 크진 않지만 푸르른 갈대가 높이 높이 자라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아 하고 청량한 소리가 들려왔다. 갈대 사이사이 늪에는 조그마한 게나 망뚱어가 보이기도 했다.
걸으면서 보이는 예쁜 풍경을 배경으로 보송송이나 냄새꼬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하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이게 바로 사람이 없어서 좋은 점!

걷다보니 야생의 우파를 만나기도 했다! 배틀!은 아니고 얼른 도망가 버렸다. 도망가는 쪽을 보니 저 멀리 우파
여럿과 누오 몇 마리가 무리를 지어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아, 역시 포켓몬 세계. 그 외에 흔히 보이는
포켓몬들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등 뒤로 부스럭 소리가 들려다. 야생 포켓몬인가?
하고 뒤돌아봤는데,

“어?”

아무것도 없다. 분명 소리가 들렸었는데? 내가 두리번거리자 냄새꼬가 내 다리를 툭툭 쳤다.

“응? 아, 아무것도 아냐. 가자.”

잘못 들었겠지 하고 가는데 계속 걸어갈 때마다 뒤를 따라오는지 갈대숲을 헤치고 나가는 소리가 자꾸


들린다...? 뒤돌아보면 또 조용하고. 내가 냄새꼬를 내려다보자 냄새꼬도 느낀 듯 뒤를 가리키지만 뭐,
보송송은 얼른 오라면서 불러대고 별로 위협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모르는 척 계속 걸어 나갔다.

이렇게 나무다리를 열심히 걷다보면 표지판과 함께 전망대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산속으로 들어와 산길을
올라가는데 캐터피도 보이고 뿔충이도 보이고 꼬렛, 구구 등 평소에 산에서 자주 보이는 포켓몬은 물론 커다란
버터플도 보았다...! 멀리서 그냥 지나간 것이긴 하지만 야생 버터플은 처음 봐! 최종 진화 형태가 보일 정도로
생태공원이 잘 조성되어있다는 것이려나.

어찌되었든 산길을 걷다 보니 계속 따라오던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갈대 사이에 숨어있던 녀석이 산길에서


몸을 숨기려니 마뜩잖은 듯 내가 뒤로 돌아보면 나무 뒤에 쏙 숨는데... 이거 너무 어설프잖아. 내가 빤히
쳐다보자 파란 꼬리가 움찔움찔한다.

“으음....”

나는 옆의 냄새꼬와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냄새꼬는 자기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어
보인다. 으음... 나는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저... 안녕?”

내가 말을 걸자 당황한 듯 꼬리가 심하게 요동치더니 나무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단추


구멍 같은 눈동자, 귀엽게 삐죽거리는 겉 아가미는 귀여움 크리티컬이다...! 내가 안 따라와서 무슨 일인가
돌아온 보송송이 내가 또 다른 포켓몬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보고 또 부루퉁해졌다.

“왜 따라오는 거니?”

야생 우파라 말이 안 통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보았다. 그랬더니 조금 고민하는 듯 싶더니 우파가


조심스레 나무 뒤에서 나오더니 내 쪽으로 통통 튀어왔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이,

upapapapa

어? 진화하는 걸 도와달라고...?

.
.
.

얘기를 들어보니 이렇다. 자기는 요 주변에 사는 우파인데 자기 친구 우파가 누오로 진화했다. 질 수 없어서
자기도 진화하고 싶은데 노력해도 혼자 진화하는 건 힘들더라. 주변 포켓몬들 얘기를 들어보니 포켓몬 트레이너
옆에 있으면 진화도 빨리 하고 강해진다더라. 내 트레이너가 되어줘! 우파를 품에 안고 얘기를 들으며 올라오니
벌써 전망대였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으음... 글쎄, 나는 여기에서 먼 지방에서 살고 있어서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upaupa!

그럼 여기 머물 동안이라도, 라는 말인가?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해서 신기했다. 잘 통하는 느낌? 또 야생


포켓몬 치고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다녀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으음... 내일까지 같이 있는 것 까지는 괜찮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해?”

보송송은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게 아무래도 괜찮다는 뜻인 것 같고, 냄새꼬는 상관없다는 듯. 흐음...


어차피 내일도 오전에 잠깐 여기에 있다가 떠나는 것처럼 보였으니 괜찮으려나 싶기도 했다.

“근데, 옆에 있기만으로 진화가 되나...?”


song! song!
“응? 배틀하겠다고?”

보송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 상성이...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차라리 그럴 거면
냄새꼬가 배틀하는 게 승률이 높긴 한데... 뭐, 이기려고 하는 배틀이 아니니까 상관없으려나? 진화시키려면
져줘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뭐 여긴 게임이 아니라서 지는 것뿐만 아니라 배틀을 구경 만해도 진화에
가까워지는 것 같긴 하다. 강해지면 진화한다는 그런 느낌? 그런 의미에서 포켓몬 트레이너 옆에 있으면 빨리
진화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긴 하겠다.

지금 시간을 보니까 천천히 올라와서인지 여섯시 반쯤? 한 시간 뒤에 일몰이니까 잠깐 배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한 포켓몬이 다쳐도 가방에 상처약도 있으니...! 주변에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게 다행이다.

“에, 그럼 너무 다치지는 말고 적당히 해. 적당히. 지시는 안 해줄 테니까. 알았지, 보송송?”


sooong~

보송송이 알겠다며 길게 울었다. 나는 적당해 보이는 공터에 자리를 잡고 조금 떨어진 벤치에 냄새꼬와 같이
앉았다. 보송송도 우파도 적당한 거리를 벌려 섰다. 보송송이 뒷발로 땅을 긁는 반면 우파는 좀 신나서
통통거린다. 아무래도 자기가 상성 상 우위인 걸 아는 걸까나.

“시작!”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송송이 달려든다. 아무래도 돌진은 아니고 몸통박치기인가? 하지만 대놓고
달려오는데 가만히 있을 우파가 아닌 듯 마주 달리더니 꼬리를 크게 휘두른다. 아, 저게 힘껏치기인가? 힘과
힘이 만나서 둘 다 밀려났다. 아무래도 보송송이 조금 유효타를 맞은 듯. 머리를 맞아서 그런지 밀려난 후에도
머리를 흔들어댔다.

차라리 아이언테일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강철은 물에 반감이니까. 별로이려나. 그것보다 보송송이 정신 못


차리는 동안 우파의 볼이 볼록해지더니. 앗, 뭔가 뱉어내는데. 동그란 진흙 뭉치가 빠르게 보송송을 향했다.

“진흙 폭탄인가...!”

지시를 안 내리기로 해서 크게 말도 못하고...! 진흙폭탄 정도이면 진화할 때가 가까워지긴 한 모양이다.


게임으로 진화시켰을 때 그쯤 진화했던 것 같아. 쨌든 보송송이 눈 뜨고 피하려고 했지만 무리. 배에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엉덩방아를 찧다 못해 뒤로 구르기까지 했다.

거기다 우파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푸우우우 하고 물대포! 어이구야 보송송이 쫄딱 젖어버렸다. 저러면


전기기술 대미지도 줄어든다. 꼬리에 전기를 모아두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보송송은 정전기 사용이 크거든.
전룡으로 진화하면 영향을 덜 받겠지만.

“그만!”

더 하다간 적당히가 아닐 것 같아서 여기서 말렸다. 나는 찬찬히 다가가서 우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솜씨가 대단한데?”

공격을 공격으로 막아낸다거나, 쉴 틈 없이 공격을 한다거나 꽤나 무리에서 강한 축에 들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보송송은 물대포로 진흙은 조금 씻겨나갔지만 축축히 젖은 채로 바닥에 털썩 앉아있었다.
웃음이 났다. 역시 전기타입에는 땅타입이 쥐약이라니까. 번번한 전기 공격도 못쓰고.

“보송송, 이리 와 봐.”

내가 부르자 보송송이 몸에 물을 부르르 털어내면서 털레털레 다가왔다.

“잘했어.”

나는 손수건을 꺼내 보송송을 닦아주었다. 진흙이 묻은 부분은 손수건에 물을 조금 묻혀서 닦아내니 어느 정도


깨끗해졌다. 손수건으로 닦여지는 것이 좋은지 보송송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금방 시합을 말려서 따로 상처난
부분은 없는 것 같고. 기력은 많이 떨어진 것 같다. 쨌든 해도 많이 기울었으니,

“그럼 이제 해가 지기를 기다려볼까?”


upapa!
“응?”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지? 우파의 꼬리가 냄새꼬를 가리키고 있었다.

55 화

w. 도여은

냄새꼬와 한번 붙자는 건가. 냄새꼬도 오는 싸움 안 막는다는 듯이 앞으로 나왔다. 으음... 우파가 미진화체라
이기기 힘들 텐데. 보송송 같은 경우에야 상성이 높아서 선점한 거지. 냄새꼬는 상성으로도 힘으로도... 음...

“뭐, 많이 다치기 전에 말리면 되겠지.”

했던 것이... 결국은 힘껏치기를 하려고 달려온 우파를 슬쩍 피한 뒤 다리를 걸고 넘어뜨려 못 일어나게 밟은


뒤 메가드레인으로 쭉쭉 뽑아내는 냄새꼬를 보고 나서야 말릴 수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구. 말릴 수
있었을 리가.

우파가 밟혔을 때 꼬리로 발버둥 쳤지만 역시 팔이 없으면 일어나기 힘들구나, 라는 것을 느꼈 달까. 그리고
냄새꼬 성격이 냉정한 성격이라는 것도 느꼈다. 기어오르면 가만히 안 두겠다는 느낌? 이 중에서는 냄새꼬가 제일
세려나?
뭐, 내가 그만 두라고 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그머니 발을 떼고는 내게 안기는 모습을 보면... 뭐
어떠냐 싶기도 하고. 헤헤.

.
.
.

그렇게 지쳐서 꾸벅꾸벅 조는 보송송과 금세 팔팔해진 우파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냄새꼬와 같이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동글동글하게 모여 자라는 갈대 군락의 모습과 날아오르는 새들. 그리고 점점 더 붉은빛을 내며
모습을 감추는 태양과 그에 따라 색이 변화하는 풍경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서 눈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였다.

쨌든 잠이든 보송송을 안고 모이기로 한 곳으로 걸어갔다. 사람들과 합류하기 위해 포켓몬을 몬스터볼에 넣어야
해서 우파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맡고 있을 뿐이지만 빈 몬스터볼이 가득 차는 느낌은 그 언제든 신기한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과 모이는 곳에 가니 오바람이 보였다. 녀석은 겉에 입고 있던 셔츠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속에 입고 있었던 티만 한 장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도 군데군데 진흙이 묻어있었다. 땀도 좀 흘린 것 같고.
항상 깔끔한 성격에 정돈된 모습만 봤었는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까 되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일 어리니까 잡다한 것만 시켰겠지 싶었다. 오박사님이 손자라고 봐주실 것 같지도 않고. 지난번에
뵈었을 때가 처음이긴 했지만 아빠 말 들어보면 엄청 일을 많이 시키는 것 같던데. 주말인데 가끔 아빠도 급하게
나갈 때도 있었고.

“많이 힘들었나 보네?”


“아... 켄호로우 하나가 날아드는 바람에.”

녀석은 더운 듯 티 목깃을 잡고 팔랑팔랑 바람을 넣으면서 얼른 씻었으면 좋겠다고 투덜댔다. 나는 열심히


놀기만 했기 때문에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더라.

쨌든 순천만 생태공원 담당하는 현지 연구원들과 모여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한정식이었고 순천의
특산물도 잔뜩 먹을 수 있었다. 해산물 너무 좋아. 포켓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푸드는 방에 가서 줘야겠더라.
사람이 너무 많아. 꺼낼 수가 없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벌써 밖이 깜깜해져 숙박을 하기 위해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규모가 작은 호텔인 것


같았다. 로비에서부터 깨끗하고 깔끔하다...! 역시 오박사님 연구실인 건가. 역시 포켓몬 연구라서 돈을 많이
버는 건가...! 쨌든 3 인 이상 가족분들은 거실이 있는 방을 받았는데 그 외에는 다 1 인실을 주어서 나는 아빠의
옆방에서 자게 되었다. 아빠하고 같이 방으로 올라가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조잘조잘 얘기했다. 순천이
정말 예쁘다거나 보송송은 아직도 애기인지 혼자 놀다 지쳐 잠이 들었다거나 그런 얘기들.

“아, 그리고 우파를 만났는데 진화하고 싶다고 따라온 거 있지.”


“그래서?”
“내가 너무 멀리 살아서 안 된다고 하니까 하루라도 옆에 있겠다고 해서, 지금 여기.”

나는 우파가 담긴 몬스터볼을 아빠에게 보여주었다.

“분명 경험이나 기술이나 다 진화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왜 진화하지 못하는 걸까? 으음... 메리프가
보송송으로 진화할 때에도 진화할 때가 됐었는데도 꽤 늦게 진화했었잖아.”
내가 아빠에게 묻자 아빠는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 진화라는 것이 다 밝혀진 것은 없어서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같은 기술을


가졌다고 해서 동시에 진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진화에는 외적인 강함도 필요하지만 내적인
강함도 필요한 게 아닐까?”
“내적인 강함?”
“아마, 정신적인 성숙, 이려나. 진화라는 건 성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는 말은 보송송이 진화했을 때도 정신적인 성숙이 있었다는 것일까.


경험치만 차면 진화하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게 얘기를 하며 방 앞에 도착해서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랬지만,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일단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깨끗하고 깔끔한 느낌? 쨌든 배고플 테니
아이들을 꺼냈다.

우파는 몬스터볼에 들어갔다 나온 게 처음인 듯 신기하다는 듯이 폴짝폴짝 뛰며 뱅글뱅글 돌았다. 완전 귀여워어.


우파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밥을 챙기는데 다행히 포켓몬 푸드를 넉넉히 가져와서 다행이었다. 성격이
맛의 선호와 관련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인데, 그에 따라 푸드를 주는 편이라 우파의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다.

일단 지켜본 바로는 보송송은 외로움을 타는 성격인 것 같고, 냄새꼬는 냉정한 성격인 것 같더라. 그래서 같은
소형 포켓몬 푸드를 주지만 보송송은 매운맛, 냄새꼬는 떫은맛 푸드다. 흐음 그 외에도 조금은 영양 성분이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마치 포켓몬들이 타입이나 모습이 달라도 다 같은 개체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원래 종이


다르면 번식이 불가능한 것에 반해 포켓몬들은 알그룹만 같으면 번식이 가능하니까. 또한 몬스터볼이라거나
상처약, 해독제 등등을 포켓몬끼리 공유한다. 원래 사람이 바르는 연고를 고양이가 바르면 안 되는 것처럼 개가
먹는 사료를 고양이가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런 종의 구분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 포켓몬이라는 거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 그런데도 포켓몬 사이에 먹이사슬이 있다는 건... 좀 무서운데...?

쨌든 내가 우파에게 보송송과 냄새꼬의 푸드를 맛보게 해 봤더니 떫은맛보다는 매운맛이 더 낫다는 듯. 그렇게
애들 밥을 먹이고 더러워진 보송송을 씻기고 나도 깨끗하게 씻었다. 그런 뒤 나는 머리카락을 대충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버스 타고 걸어 다니고 했더니 몸이 막 쑤셔. 내가 침대에 누우니까 나를 따라 보송송도
냄새꼬도 침대에 엎어졌다. 씻고 나니까 더 피곤한지 보송송은 금방 잠에 빠진 듯 도롱도롱 소리가 났다.

“윽.”

갑자기 배 위에 무언가 턱 얹어지는 느낌에 보았더니... 우파야. 너는 지치지도 않니.

upapa!

그러더니 내 배 위에서 다시 점프를 하려고 한다. 아아아, 안 돼!

나는 필사적으로 우파를 잡고 들어 올려 다시 내 배 위에 착지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켜 우파를 무릎에 앉혔다. 아무래도 이 우파는 오늘 하루를 함부로 낭비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하하.

“산책이라도 갈까?”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우파가 꼬리를 홱홱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야생의 우파라는 것인가 아니면 진화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인가. 반면에 보송송은 베게 한 귀퉁이를 베고 있었는데 마치 여름철 아스팔트에 붙은
껌딱지처럼 녹아있는 모습이었다. 흐물흐물해. 냄새꼬는 내가 일어나자 몸을 일으켰지만 졸린지 눈을 부비고
있었다. 아앗, 사진. 사진이야. 나는 우파를 서둘러,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내 그
모습들을 찍었다. 수정 언니가 말하기를 미진화 포켓몬 시절은 한 때라고 많이 찍어 놓으랬단 말이지! 냄새꼬의
뚜벅쵸 시절을 못 본 게 너무 한이야! 또륵또륵.

우파는 내가 사진을 찍던 오열을 하던 상관없다는 듯이 내 발치에서 통통 튀어올랐다. 산책 간다며! 얼른


가자고! 하는 시위 같아서 나는 더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냄새꼬가 따라오려고 하는 것
같길래 잠시 후에 돌아온다고 얘기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문 밖으로 나왔다.

우파와 함께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서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온도는 서늘한 게 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더불어 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천문대에서 보았던 큰고... 아니
링곰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별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이구나. 금세 포기하고 로비 앞 계단을 내려왔다. 우파가
통통통 튀면서 날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정말 미진화 포켓몬은 너무 귀여워. 물론 누오도 당연 귀엽지만...!

나는 쫄래쫄래 따라오는 우파와 함께 호텔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호텔 한 쪽에 커다란 분수가


있던 것이 기억나서 그쪽으로 향했다. 같이 걷는 게 진화에 도움이 될까 싶기는 했지만, 뭐,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다.

금방 도착한 분수는 물을 하늘 위로 시원하게 쏘아올리고 있었다. 하늘로 쏘아 올려진 물줄기는 최정점에 오른


뒤에는 물방울들로 흩어져서 후드드득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물방울들이 호텔에서 나오는 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그 너머에 누군가 있었다.

“어?”

무릎 위에 이브이를 안은 채 앉아있는 오바람이었다.

56 화

w. 도여은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오바람과 눈이 마주쳤다. 평상시와 똑같이 여어, 하고 인사하기에 나도 손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벤치에 앉고 보니 달과 분수가 어우러져 보이는 좋은 자리였다.

upapapa

“웬 우파야? 잡았어?”

우파가 통통거리며 벤치에 올라와 내 무릎까지 점령하니 오바람이 물었다. 왠지 물어볼 것 같다고 생각한 그대로
얘기해서 웃음이 났다.

“아니, 잠시 데리고 있는 거야. 진화를 하고 싶대서. 내일 다시 공원에 들를 때 무리로 돌려보내야지.”


“사람을 잘 따르는 녀석이구만?”
오바람이 손을 내밀어 우파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 주변에 관리인들도 많고 관광객들도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


“하긴 공원에 서식하는 녀석들은 산 속 깊이 있는 애들보다는 야생성도 강하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오바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사람들을 많이 보고 또 먹을 것도 얻어먹다 보면


친숙하게 생각할만하지.

“그나저나 밤중에 산책?”


“우파... 내일 보내기 전에 진화하는데 뭔가 보탬이 되고 싶어서. 너는?”
“나도, 뭐... 이 녀석이 친밀도 진화를 원하니까 계속 붙어있지. 그래도 얼마 안 걸릴 것 같아. 이래 봬도
한지우 피카츄 만큼이나 같이 지냈으니까.”

그러면서 오바람이 이브이를 콕콕 찌르니 이브이는 무슨 헛소리람, 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앙 물었다.

“앗, 이 녀석아...!”
eveee

물린 손가락이 아프진 않은지 오바람은 으이그 하면서 이브이의 털을 헝크러트렸다. 이브이는 오바람과
투닥투닥하다가 고개를 팩 돌리며 무릎 위에서 내려와 벤치 빈자리에 몸을 말아 누었다.

“진짜로 친한 거 맞아?”

내가 만담 같은 장면에 큭큭 웃으면서 말했더니 친하니까 이러는 거지, 하며 대꾸했다.

“뭐, 계속 피카츄한테 져서 그래.”


eevvveeeee!! evveeveee!

피카츄 얘기가 나오니 이브이가 제자리에서 일어나 격렬하게 항의했다.

“뭐, 사실이잖아, 이브이. 다음번엔 진화해서 꼭 이겨야지.”


vee! vee!

이런 거 보면 진짜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완전 피카츄 얘기가 나오니까 돌변하네? 라이벌 같은 건가?”


“뭐, 내가 열 살 때 그 녀석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둘은 투닥투닥했었어. 그 때부터 피카츄나 이브이나
장난으로 물고 뜯고 놀곤 했지만 진짜 시합으로 만나니까 또 지기 싫은 건가 보지. 오죽하면 이때까지 진화할
생각도 없던 얘가 진화해야겠다 마음먹기까지 했겠어.”

지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하는 말이 끝에 작게 들렸다.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었나 싶을 정도로.

“열 살 때, 한지우를 처음 만난 거야?”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가 아니라? 나는 뒷말은 안 했지만 조금 의아해서 물었다.

“그렇지. 그 놈은 열 살 때부터 말도 없고 옆에 피카츄만 끼고 사는 놈이었어. 지금도 사회성이란 눈곱만치도


없어서 친구랍시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고 하려니 피곤해.”

오바람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지만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말하곤 달라서 역시 둘은 친하긴 친한 친구구나
싶었다.

“열 살 때부터이면 거의 8 년 동안 친구인건가?”
“어, 볼 꼴 못볼 꼴 다 보고 또 모르는 건 없을 정도로 지냈지. 작년까지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려는지 훤히
보였다고.”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너 지금 올해 뭐가 바뀌기라도 했나, 하고 생각했지.”

나는 깜짝 놀라서 오바람을 쳐다봤다. 티 나나? 내 표정이 겉으로 알 수 있을 만큼 티 나는 건가? 오바람은


다시금 옆에 있는 이브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새로운 포켓몬을 가지게 된 것도, 배틀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긴 하지. 같이 학교를 전학 온 거나


자취를 하게 된 거나. 뭐 그런 것들? 그런 것 같은 건 다 예상을 했었단 말이야. 근데 그 녀석이 누군가를 신경
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그저 오바람이 하는 얘기를 듣기만 했다. 사람이 누군가를 신경 쓰는 게 이상한 건가?


나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지우라는 인물 그 자체가 누군가를 신경 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람한테 고분고분하거나 무신경한 게 다였던 놈이 갑자기 어떤 한 사람에 대해 언급을 한다거나,


쳐다본다거나... 먼저... 말을 건다거나. 그런 짓을 하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겠어? 지나가던 포켓몬이라면
모를까.”

아... 지나가던 포켓몬한테는 안 그러는 거구나. 나는 그런 한지우의 시선을 뺏어간 그 사람이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켓몬하고 비슷한 사람이려나...?

“심지어 화를 내기까지 하다니...”


“화를 냈...?”

어딘가 뭔가 익숙한데... 잠깐 나요? 나 말하는 건가?

“이제야 눈치챘냐? 너 말이야. 너, 둔탱아.”


“둔탱이라니...! 그리고 한지우가 나한테 언제 신경을...!”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오바람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것처럼 나를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을 꿰뚫어 본 것도,


옥광산에서 만났을 때 내가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지. 내가 냄새꼬를 들이니까 나한테 화를
내기도 했어. 그런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분명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옥광산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날 서게 대했었지. 원래 그런 녀석인 줄 알았는데 오바람이 이 정도로
얘기하는 것 보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바람이 물었다. 혼잣말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버려지는
포켓몬은 많다. 그만큼 버리는 사람도 많다는 거겠지. 나는 그걸 유기포켓몬센터에서도 느꼈고 냄새꼬를 보면서도
느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한지우가 나를 신경 쓰는 건 나한테서 다른 느낌이 들었기 때문었을까. 그 이질적인
느낌. 포켓몬들이나 알아차리던 그런 것을 한지우는 똑똑히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예의
주시하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메리프와 눈을 맞추던 한지우가 떠올랐다.

“나는... 모르겠어. 걔가 나를 왜 신경 쓰는지는 당사자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헤헤 거리면서 말을 마치자 오바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그래. 당사자... 그래.”

오바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제 들어갈 건데, 너는 안 들어가?”


“조금만 더 바람 쐬고.”

오바람이 이브이에게 팔을 내밀자 이브이는 익숙하게 뛰어올라 팔에 안겼다.

“그럼 난 간다.”

녀석은 터덜터덜 돌아갔고 나는 벤치에 남았다. 녀석이 멀리 떨어지자 나는 참았던 한숨을 뱉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니.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포켓몬이 없는 세상에서 왔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처음보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남아있다고. 그래서 한지우가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메리프 때도,
냄새꼬를 새로 들였을 때도 나에게 그렇게 날 서게 굴었던 것 같다고. 포켓몬을 버리지 말라고 했었지.

“너도 나한테서 이상한 느낌을 느끼니?”

나는 내 무릎 위의 우파에게 물었다.

paaa upaa

“맞아. 나는 포켓몬이 없는 세상에서 왔어. 그래서 네가 내가 신기하듯이 나도 네가 신기해. 처음에는 그것만


변한 줄 알았는데 엄마도 아빠도 다른 사람 같아. 오빠도... 분명 달라졌겠지.”

그러고보니 갑자기 세상이 바뀌고 포켓몬이 생겼다고 정신이 없어서 연락 한 번 안 했다. 물론 평소에 연락하고
살았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내가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하면 믿을까? 만약 믿는다고 해도 갑자기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야, 라고 할까 봐


겁이나. 여기의 이지은은 포켓몬을 어렸을 때부터 봐온 그, 이지은이니까. 그래도 설마... 엄마 아빠가 그렇진
않겠지만...”

uuupaaaa... upaupapa upa!

“너도 무리가 있어서 잘 알겠구나. 응응. 맞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그런데 내가 들인
애들은 아니잖아. 보송송이나 냄새꼬나. 요즘은 그냥... 이곳에서 지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내 말에 우파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나름 이해해보려고 하는 걸까. 한참을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가. 조금 우울한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알 수
있는 일도 없는 걸. 그런데 열심히 생각하던 우파가 나에게 말했다.

uppaa pa upa upapapa


“그래도 될까.”
upa!

우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음이 났다. 우파가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 때 자기가 꼭 손을 흔들어 줄 거란다.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나를 지지해 줄 거라고 말해준다. 그때가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편이 하나 있다는 게 기뻐.

upapa!

나는 나를 따라가겠다는 우파를 꽉 안았다. 새 식구가 늘었다.

1-8 서로의 세계

57 화

w. 도여은

“인천대로 가려고?”

수업이 다 끝나고 학교를 나서면서 잎새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게도 포켓몬 게임
스토리대로 체육관을 진행하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빠가 신청해버려 간 강원대는 회색시티였고, 급하게
체육관을 깨기 위해서 물 포켓몬 체육관인 부산대로 갔었지. 아마 게임 상으로 치면 블루시티 체육관이었을 거다.
그러고 나니까 왠지 순서대로 진행해야 할 것 같은 기분... 한때 포켓몬스터 시리즈 스토리를 정복한 자로서...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

“이 녀석한테 유리하기도 하고.”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우파를 살짝 들어 보였다. 결국 순천만에서 우파를 데려오게 되었다. 다행히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우파와 하루를 보낸 뒤 그다음 날 아침, 원래는 우파를 보내주기로 했었던 갈대밭에서
우파는 우파의 무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를 따라왔다. 우파 무리에서 대부분이 우파였지만 누오가 네 마리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우파의 친구였던 모양이다. 팔짝팔짝 뛰면서 꼭 진화하고 오겠다고 말하는 게 정말
귀여웠더랬다.

“아직 미진화지만 문하생들 상대하다 보면 진화하지 않을까?”


upapapa!

자신만만인 우파의 말을 들으며 웃었다. 인천대는 갈색 체육관인 것 같다. 전기 타임 포켓몬을 취급하고 또


체육관 관장이 마티스니까. 인천이 항구도시라는 것도 닮았고. 서울하고 가까운 점도 있지만 우선적으로는 우파나
냄새꼬나 상성으로 이점을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가는 것이기도 했다.

“근데 정말 대단해. 벌써 3 배지전이라니.”


“으음... 그런가.”
나는 한지우나 오바람이나 둘 다 3 배지 준비한다고 얘기하려다가 왠지 그런 말 하면 잎새가 찡그린 표정으로
그건 걔네가 이상한 거지, 하고 대답할게 뻔해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걱정되지 않아?”


“응? 당연히 걱정되지. 3 배지전은 1,2 배지전보다 좀 더 어렵다고 하니까.”
“하긴, 3 배지를 따야 진짜 트레이너로 봐준다잖아. 그래도 여전히 신참이긴 하지만.”
“그만큼 어려우려나...?”
“좀 더의 문제가 아닐걸? 난이도가 확 뛴다는데.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도 많고. 3 배지전에서 갈린다잖아.
문제는 그때부터 가산점이 들어간다는 점이지만.”
“사실 가산점 때문에 어려워지는 거 아닐까...”

내 말에 잎새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근데 그 걱정 말고. 다른 걱정 말하는 거였는데.”


“에? 무슨 걱정?”

내가 모르겠다는 듯이 묻자 잎새는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군대 말이야. 3 배지 딴 트레이너부터 군대 가야 되잖아.”

잎새가 끔찍하다는 듯이 으으으, 하면서 얘기하는 것에 나는 웃어버렸다. 내가 살던 곳과 이곳이 다른 점 중


하나가 군대 문제이다. 아무래도 분단국가이고 휴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빠질 수 없는 문제랄까.

기본적으로 남성이 군대에 의무 복무하는 것은 같지만 예외적으로 여성도 국방의 의무를 지어야 할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3 배지 이상 가지고 있는 여성 트레이너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포켓몬
트레이너는 국가에서 관리하며 군인 중에는 트레이너가 많다고 들었다. 포켓몬이 전쟁에 쓰인다는 반증이랄까.
마티스도 비행기를 몰면서 전기 포켓몬을 사용했었다고 하니까... 뭐랄까 씁쓸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전쟁에 포켓몬이 사용된다는 것부터가 끔찍한 것 같아.”

내가 우파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잎새가 동의했다.

“전쟁은 영화로밖에는 모르지만... 사람이나 포켓몬이나 모두에게 끔찍한 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세계적으로 포켓몬 시합을 스포츠라고 포장하지만...”

잎새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 또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부에서 포켓몬 체육관을 운영, 지원하고 포켓몬
센터를 운영하여 포켓몬 트레이너의 숙박과 포켓몬 치료를 무료, 혹은 값싼 가격에 제공하는 것도 사실은 다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포켓몬은 전쟁에서도 큰 전력으로 작용한다고 하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평균적으로 어린아이의 지능 수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공할만한 파워를 가진 포켓몬을 군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거지.

사실 정부에 신청을 하게 되면 받는 스타팅 포켓몬도 포켓몬 트레이너 양성의 일부이다. 신청만 하면 무료로
강하고 희귀한 스타팅 포켓몬을 받을 수 있지만 스타팅 포켓몬을 받고도 기간 안에 3 개 이상의 배지를 따지
못하면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포켓몬리그도 그렇지만 월드포켓몬리그는 뭐,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지 않아?”


“음... 아무래도 국력 자랑 같은 느낌도 좀 들고.”
포켓몬 세계라면 뭔가 꿈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일 줄 알았는데 모험은 무슨, 여전히 학교 가고 입시에 찌들고 또
군대라니.

“사실 여성 트레이너만 군대 가는 건 좀 불만이야.”

잎새는 살짝 내 눈치를 보더니 이어 말했다.

“솔직히 남녀 구분 없이 다 의무적으로 군대 가야 되는 거 아냐? 이것도 차별이야. 군대 가야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여성 포켓몬 트레이너의 장벽으로 작용하잖아.”
“하긴 그것 때문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긴 하지. 주변 사람들이 웬만하면 여자애들은 하지 말라고들 하니까.”

남성의 경우는 여성과 달리 의무적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기 때문에 어차피 가야 할 군대, 포켓몬 마스터의 꿈을
이루겠어! 하고 열성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또한 일반 군인하고 트레이너 하고 대우가 다른 점도 있고.

그래서 이곳 사람들을 보면 포켓몬과 관련 없는 곳, 경영, 행정이나 학문, 여러 다방면으로 고학력, 고위직의


여성이 많이 보이더라. 물론 포켓몬 트레이너로서 군복무 받는 여성들을 위한 부대도 많다. 하지만 포켓몬 관련된
분야에서는 남성들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예를 들면 포켓몬 연구자들 중에서 권위 있는 박사님들이 대체로
남성들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남녀 차별 없이 의무복무를 하면 그런 말은 안 듣겠지.”


“현실적인 문제도 있으니까. 군대 문화나... 남성 위주로 지어진 시설이라거나?”

여성들도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찬반이 분분하다. 실제 체육관 제도하고 트레이너 제도가
정착이 될 때 만들어졌으니 여성 트레이너들이 군 복무를 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나름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랄까.

“처음 여성 트레이너 군복무를 시키는 것도 문제가 많았다고 하던데....”


“그래도 언젠가는 여성 군복무가 의무가 될지도...? 여군이 많아지니까 여군 간부도 예전보다 많이 뽑는다고도
하고.”

생각해보면 여성이 의무복무를 하게 되면 여성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성적 고정관념 또한 깨지게 되고, 또한 국민


전부가 군대를 가게 되니까 군대 내의 비합리적인 문화가 점점 줄어들 것도 같다. 군대 가혹행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게 되고 또한 여성들도 군대 내부의 자신의 일로 생각하게 될 테니까. 또 군인의 수가 늘어나면
복무 일수가 줄어들 수도 있고. 성평등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남녀 간의 신체적 차이는 어떡할 수
없지만...

“쨌든 전쟁이나 위기 상황이 되었을 때 여자라도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여자라는 이유로 총도 쏠 줄


모르는 건 위험하지 않나. 하다못해 다친 사람 치료할 수 있는 실질적인 거라도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냐?”

나는 불퉁한 얼굴의 잎새를 보면서 킬킬 웃었다.

“근데 아직 그런 건 먼 얘기 같은걸.”

고등학교 2 학년생인 나에게는 눈앞의 공부나 수능만 보이지 대학생이니 군대니 하는 얘기는 다 까마득히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연구직으로 갈 거니까. 대학원 가게 되면 대체 복무하게 될지도? 너도 3 배지 따야 되잖아.”


“물론이지! 수의사를 하려면!”
여기도 물론 대체 복무가 있다. 3 배지를 따더라도 포켓몬 연구나 포켓몬 의학, 간호 등 방면은 대체 복무를
지원할 수 있는데, 지방이나 국가 연구소, 포켓몬 체육관, 포켓몬 센터 등에서 근무하게 된다. 사실 지방에 있는
포켓몬 센터를 국가 재정으로 운영하려면 사람이 부족하니까 대체 복무 인력이 없으면 아예 운영이 안 될지도
모른다. 체육관 주변에만 센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산골짜기나 섬으로 배정되면... 물론 대체
복무의 경우에는 기타 등등 자격 조건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대부분은 군 복무를 하게 되지만.

“나는 여름 방학 때 몰아서 다 따버리겠어!”

비장한 각오로 아자! 하고 손을 드는 잎새를 따라 나도 손을 들며 화이팅! 하고 따라 하자 서로 웃겨서 나도


잎새도 깔깔 웃고 말았다.

“그럼 이번 주 잘 다녀오구.”

잎새와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다음은 인천대, 게임 상으로 치면 갈색 체육관, 전기타입포켓몬 체육관이다.

58 화

w. 도여은

강원도나 부산에 갔던 걸 생각하면 인천은 가까운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인천대입구역에서 내리니 그것이 꽤
실감이 났다.

“멀지 않아서 좋다. 그렇지?”


song~

공공장소에서 포켓몬을 여러 마리 꺼내놓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멀미 때문에 몬스터볼에 넣어두었던


보송송만 꺼내서 걸었다. 이번에는 전기 타입 체육관이니까 배틀에서도 충분히 나서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인천대 정문으로 향하는 길은 풀과 나무가 많은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서 걷기에 보기 좋았다. 평소 같으면
여름이 가까워져 뜨거운 햇빛을 막아줘서 더 좋았겠지만 오늘은 곧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아주 흐릿한 날씨였기
때문에 얇게 입은 옷이 조금 서늘했다.

그때 보송송이 귀를 쫑긋했다.

“어, 보송송!”

보송송이 무언가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풀숲을 뛰어넘어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보송송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나무와 덤불을 지나 조금 달리니까 가로막힌 그늘진 벽이 나왔고 그 아래 웅크리고 있는
주황색 무언가가 있었다.

“파이리...?”

파이리였다. 학교에서 스타팅으로 파이리를 받았던 학생들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 파이리는 야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보송송이 갸웃거리며 가까이 가자마자
웅크리고 있던 파이리는 고개를 들며 으르릉 거리기 시작했다. 먼지투성이에 무언가에 공격당했는지 온 몸에는
긁히고 물린 상처가 가득했다. 파이리의 건강을 상징한다는 꼬리의 불꽃은 위태위태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난번 미뇽 때도 그렇고 역시 우리 보송송은 약한 포켓몬을 지나치지 않는 정의의 파이터인가. 포켓몬이 낑낑


거리는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포켓몬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거나? 쨌든 나는 가방에서
상처약을 꺼내며 멀지 않은 곳에서 몸을 낮추며 다가갔다. 파이리 옆에서 알짱거리던 보송송도 으르렁 대는 탓에
금방 내 옆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안녕. 착하지... 상처약만 좀 바르고 갈게.”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탓에 상처라도 봐주려고 했지만 파이리는 으르릉 크르릉 거리는 소리를 더 크게
낼뿐이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불이라도 뿜을 기세에 나는 파이리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또한 책임지지
못할 야생 포켓몬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119 에 구조 신청이라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만약 구조가
된다고 하더라도 마치 냄새꼬같은 처지가 될까 봐 선뜻 전화할 수 없었다.

“어쩐다...”
soong...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치하는 시간만 길어졌다. 체육관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결단은 내리지 못하고
결국 체육관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보고 그때 다시 연락을 해보거나 상처를 치료해 보기로 했다.

“저기 파이리... 나 갔다가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여기에 있어.”

말을 해도 고개를 돌리는 게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래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체육관으로 향했다. 흐릿흐릿한 하늘에 내 불안감이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
.
.

“이지은 씨.”
“네.”

센터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간호사의 부름에 데스크에 다가가 몬스터볼을 건네받았다. 체육관 문하생들을 다 이


녀석으로 쓰러뜨릴 수 있었다. 전기포켓몬 상대로 땅타입은 진리지!

우파의 등장에 문하생들은 전기 기술은 쓸 엄두를 못 냈고 대체로 물리기를 사용했는데 스피드가 상대적으로
느린 우파에게는 상대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 유리했다. 안정적으로 진흙 폭탄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머드숏을
이용해서 쓰러뜨리기! 물론 지진을 배우고 있었으면 광역기 공격을 할 수 있었겠지만. 뭐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이제 곧 배울 수 있을 거야 우파. 아니 이제 누오지.

두 번째 문하생을 쓰러뜨렸을 때, 우파의 몸이 빛나면서 몸집이 커지더니 누오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우와우와우와 하면서 감탄하며 쳐다보게 되었다. 내 생의 두 번째 포켓몬 진화의 순간이었다. 메리프의 진화가
안타까움이었다면 우파의 진화는 뭐랄까... 뿌듯함이 강했다. 우파가 진화하고 싶어 하기도 했었고 같이
노력했다는 기분일까.

팔이 생긴 우파, 아니 누오와 나는 두 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세 번째 문하생의 피카츄를 더 강해진 힘과


맷집으로 쓰러뜨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나서 잠시 체육관 관장과의 대결 시간을 앞두고 센터에서 누오를
회복시킨 것이다.

“건강한 누오네요. 방금은 문하생과 배틀한 건가요?”

간호사의 물음에 나는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우파도 귀여웠지만 맹한 눈동자의 누오도


매력적이었다. 꼬옥 안았을 때 촉촉하면서도 말랑말랑한 한 품에 가득한 느낌도 너무 좋았다. 꼬리도 더
도톰해졌고 팔이 달려있는 것도 신기하고...! 포켓몬은 진화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확확 바뀌는 것일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럼 다음은 체육관전이겠네요. 후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네?”

뭘 조심하라는 거지? 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에 그녀는 호호호 웃어 보이며 말했다.

“쓰레기통을 조심하세요.”

...?! 나는 갈색시티, 마티스, 쓰레기통...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진짜로 쓰레기통을 뒤져야 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트레이너를 가장 많이 만나는 포켓몬 센터 간호사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1 세대 쓰레기통을 뒤지던 빡침이 벌써부터 마음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 같았다.

“네... 조심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 표정에서 내가 쓰레기통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힘내라는 눈빛을 보내었다.

“아, 참. 저 혹시 여기 주변에 상처 입은 파이리가 있는 것 같던데... 아시나요?”


“상처 입은 파이리요? 그 파이리인가...”

그녀의 얼굴이 대번 어두워졌다.

“한 이주 전인가, 삼주 전인가... 그때부터 사람들이 파이리를 봤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주인 없는


포켓몬을 도심에 둘 순 없어서 이 근방 레인저들이 포획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나 봐요. 레인저 분
얘기를 들으니까 구멍파기로 도망갔다고 하더라고요.”
“구멍파기요? 파이리는 자력으로 구멍파기를 안 배우는 걸로 아는데...”
“아마 주인이 있었던 포켓몬인 것 같아요.”
“아...”

나는 내 가방 안에 있을 냄새꼬를 생각했다. 그리고 유기포켓몬보호센터의 포켓몬들을 생각했다.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저, 근데 파이리는 흔한 포켓몬도 아니잖아요. 스타팅인데...”


“그래서 더 포획하려는 것도 있죠. 일단 잡아야 어디 소속인지 알거나 할 수 있을 텐데... 며칠 전만 해도
상처 입었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 잠시만요.”

데스크에 전화가 울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켰다. 나는 더 할 얘기도 없어서 몬스터볼을 손에 쥔 채 밖으로


나갔다. 파이리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진짜로 쓰레기통이 있었다.

그것도 내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양철 쓰레기통이다. 와... 정말 관장은 양심이 있는 걸까. 쓰레기통은 다섯


개씩 세 줄로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열다섯 개인 셈이다. 게임과는 다르게 쓰레기통 사이의 거리도 한 네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니, 게임은 아무래도 용량 문제로 공간을 축소하는 편이니까 이게 현실적으로 맞다는
것일까...

그리고 맞은편에는 커다란 철문과 그 안을 절대로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의지가 보이는 전기가 세 줄로 파지직
튀고 있었다. 역시 전기타입 체육관이라 이건가. 전기를 아주 펑펑 써대는구만!

뭔가 삐딱한 마음으로 나는 들어온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줄 중앙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맞는 버튼을 두 번 눌러야 저 문이 열리고 관장과 대전을 할 수 있었다. 뒤에 기다리는 도전자가 있으면
시간제한도 있었다. 내 뒤에는 도전자가 없어서 시간에 쫓길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만...

어쨌든 쓰레기통은 구겨진 종이들로 반쯤 채워져 있었는데 그 안으로 몸을 숙여 손을 집어넣으니 버튼 같은 것이


만져졌다. 누르니 달칵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처음부터 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지만.

쓰레기통이 아주 랜덤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스토리를 해본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첫째 줄과 셋째


줄은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쓰레기통이, 둘째 줄은 두 번째, 네 번째 쓰레기통이 첫 번째 해제 버튼이
있을 것이란 말이지. 그리고 그 첫 번째 해제 버튼 주변에 두 번째 해제 버튼이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도가 되어서야 나는 첫 번째 버튼을 해제할 수 있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철문을 가로막던


전기가 픽, 하고 사라졌다. 나는 벌써 뻐근해진 허리를 펴며 자축을 했지만... 물론 두 번째 버튼이 아닌 다른
버튼을 누르고 말아서 다시 전기가 쳐지고 말았다.

“하...”

그렇게 몇 번을 삽질을 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철문이 드르륵 하는 거친 소리를 내면서 양쪽으로 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속 쓰레기통 바닥을 뒤져야 해서 허리가 빠질 것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Hahahaha! Girl 이 바로 도전자로군! 쓰레기통을 뒤져본 소감이 어떤가!”

죽을 것 같은데요. 라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내 표정이 의미를 담고 있었던 듯 마티스는 핫핫핫핫 하고 웃었다.
생각보다 큰 덩치에 장난 아닌 근육을 가진 금발 외국인이었다. 마티스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는데, 누가 군인 출신 아니랄까봐 눈빛만은 엄청 매서웠다. 나는 내심 겁먹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지우가 째려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이 trap 은 허투루 만든 게 아니다. 도전자! You 가 서있는 곳이 바로 battle field 지!”

이 쓰레기통이 있는 여기서 배틀을 한다고? 3 배지전부터는 배틀 영상을 제공하지 않아서 몰랐었다. 1, 2


배지전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도전자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 의도에 착실히 놀라버렸다.
쨌든 마티스는 문 쪽에서 벗어나 자리를 잡았다. 나도 필드 안에 서있을 수는 없어서 마티스가 보이는 맞은편에
섰다. 마티스 관장과 나 사이에 쓰레기통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마티스 뒤에 있었는지 심판도 필드 가에 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활기찬 마티스 관장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Yes! Battle 을 시작하지!”

59 화

w. 도여은

마티스가 심판에게 눈짓을 보내자 심판이 호루라기를 삑! 불면서 깃발을 내렸다. 배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와 마티스의 몬스터볼이 동시에 던져졌다. 마티스의 첫 포켓몬은 찌리리공이었다. 나는 당연히
누오를 꺼냈다. 목표는 누오로 체육관전에서 이기는 것이다. 적어도 냄새꼬까지만으로 이기는 것!

배틀이 시작됨과 동시에 마티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보였다. 등 뒤가 오싹했다. 기백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 진짜 배지전은 3 배지전부터라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1,2 배지전하고 느낌부터가 다른데?
살짝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기싸움에서 이기진 못해도 밀리진 말아야 했다.

“굴러라! 찌리리공!”

찌리리공이 구르기 시작했다. 혹시 구르기 공격인가 생각했지만 그저 찌리리공이 굴러서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쓰레기통이라는 장애물이 많아서 구르기를 사용하기에는 꽤나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꽤
스피드가 빨라 쓰레기통 사이를 누비는 찌리리공의 모습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땅타입인 누오니까
전기기술을 사용하지 못해 공격은 한정적일 테니까. 역시나!

“몸통박치기!”
“누오!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서 힘껏치기!”

꼬리로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찌리리공과 누오의 꼬리가 마주치는 순간 펑, 하는 작은 폭발음 소리와 함께 찌리리공이 강하게 날아가
쓰레기통 2 개를 연속으로 쓰러뜨리고 멈췄다.

아, 쓰레기통이 바닥에 붙어있는 건 아니었구나. 나는 잠시 깨달음을 얻었다. 쨌든 누오도 대미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 뒤로 조금 밀려난 게 보였다. 그래도 누오는 체력이 빵빵하니까 걱정은 없지.

“소닉붐!”
“진흙폭탄!”

하얀 초승달 같은 칼날이 찌리리공에서 나와 쇄도했다. 누오는 진흙을 뱉어내려고 준비하는 중에 소닉붐을


맞았지만 버텨냈다. 진흙폭탄을 뱉어내는데 찌리리공은 쓰레기통 뒤로 쏙 숨어버렸다. 갈 곳 잃은 진흙폭탄은
쓰레기통이 맞아 버렸고 진흙범벅이 된 쓰레기통은 쉽게 바닥을 굴렀다.

“Nice 찌리리공! 계속 피하면서 소닉붐!”

진흙폭탄은 한 차례 더 빗나갔다. 잽싸게 피하는 찌리리공이 얼마나 얄밉던지. 그 와중에 소닉붐은 두 차례 더


누오를 가격했다. 게임은 턴제이지만 현실은 빠를수록 많이 때릴 수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소닉붐은 대미지는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방어력에 상관없이 체력을 20 씩 받는 공격이다. 물론 게임상의 데이터지만 아무래도 계속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타입 상성을 고려해서 한 대만 더 때리면 찌리리공은 쓰러질 것 같은데...!

“머드숏으로 바꿔서 공격해!”

나는 대미지는 약하지만 대신 명중률이 높은 머드숏을 쓰라고 했다. 가까스로 맞은 찌리리공이 진흙을 뒤집어쓴
채 뒤로 밀려났다! 찌리리공은 꽤 힘들어 보이는데도 마지막까지 소닉붐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닉붐을 맞고
버틴 누오는 머드숏을 한 번 더 뿜었고 결국 찌리리공, 리타이어. 역시 상성 공격 두 배 효과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회수하는 시간을 그냥 둘 순 없지. 가뜩이나 누오는 스피드가 느린 걸?

“흙놀이야!”

심판의 깃발이 내려가자 마티스는 찌리리공을 회수했다. 중앙에 있는 쓰레기통은 다 쓰러져 널부러졌고 안에
들어있던 종이들은 진흙과 같이 굴러다니고 완전 난장판이었다. 그 사이 누오는 공중을 향해 진흙물을 뿌렸다.
필드가 진흙으로 질척질척해졌다.

“Go. 피카츄! 전광석화”

마티스의 피카츄는 나오자마자 눈 깜짝할 새에 누오에게 달려들었다. 체력이 간당간당했던 누오는 결국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누오를 회수하며 몬스터볼에서 냄새꼬를 내보냈다. 찰팍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흙 위에 냄새꼬가
섰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흙내음 때문인지 배틀 필드에 서서인지 냄새꼬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으음, 미묘한
차이지만 항상 옆에서 보는 나는 알 수 있지!

반면에 피카츄의 노란 몸은 단지 전광석화만을 했을 뿐인데 털에 잔뜩 진흙이 튀어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피카츄인데 상록숲... 아니 서울 주변 산에서 피카츄 서식지가 조금 남아있기 때문일까. 인천이 서울하고
가까워서 그런 걸까. 문하생들도 그렇고 꽤나 피카츄가 많이 보인다.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필드에서 보이는
모습은 꽤나 사납다고나 할까.

그래도 흙놀이의 여파로 당분간 전기기술은 약화될 뿐만 아니라 상성상으로도 전기 공격은 반감.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냄새꼬에게는 한 방을 먹일 공격기는 없다. 이럴 때는...!

“독가루야!”
“그림자 분신술”

냄새꼬의 꽃봉오리가 파르르르 떨리면서 보라색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피카츄의 잔상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열 마리의 피카츄로 증식했다! 독가루는? 나는 피카츄를 살폈다. 피카츄들의 눈가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됐다. 독이 먹혔어.

“피카츄, 적을 교란시키거라!”
“냄새꼬, 집중해서 공격해오는 녀석을 노려!”

피카츄들은 작은 몸집으로 냄새꼬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몸집이 작아서 쓰러져있는 쓰레기통 뒤에도
숨어가며 움직이는 모습에 본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노랗고 귀여운 몸짓으로 장난꾸러기같이 진흙이 묻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자못 깜찍한 모습이었지만 내 눈에는 얍살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그림자 분신술의 경우 분신들이 많아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정작 공격은 본체만 할 수 있기 때문에 공격하는


본체만 놓치지 않으면 어렵진 않다. 분명 문하생과의 배틀에서도 그림자 분신술을 자주 썼었으니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전광석화!”
저쪽이다! 달려드는 피카츄의 모습이 보였다.

“용해액을 뿌려!”

하지만 빠른 움직임에 전광석화를 맞는가 했는데... 전광석화를 하던 피카츄가 냄새꼬의 몸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대신,

saekko...!

냄새꼬의 등 뒤로 노란 물체가 퍽 부딪혔다. 페이크였던 건가! 이러한 바뀐 공격은 예상치도 못했다. 분신체로
시선을 교란시키고 본체로 공격한다는 거지? 어쩐다...

이런 시간에도 피카츄는 빙글빙글 돌면서 전광석화를 계속했다 잡을까 싶으면 펑 사라지면서 분신이고 옆에서
본체가 공격해오고 중간중간 그림자 분신술을 반복해 일정한 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냄새꼬도 실체를 눈으로
뒤쫓아도 금방 놓쳐버리기 일쑤였다.

저 쓰레기통만 없으면 될 것 같은데...! 쓰러지고 쏟아지고 엉망인 쓰레기통 필드 때문에 자꾸 피카츄를 놓치게
되니까. 저 쓰레기통을 없애버리면, 아니, 아니야. 그거다...!

“냄새꼬, 다음 공격하는 피카츄를 잘 봐!”

말과 동시에 페이크 공격이 날아들고 피카츄의 전광석화가 쇄도했다. 냄새꼬는 타격을 받고 살짝 뒤로


물러나면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저게 본체야!

“쓰레기통으로 덮어버려!”

냄새꼬는 내 명령에 당황하는 듯하더니 피카츄가 뒤에 숨으려 했던 쓰러진 쓰레기통을 덩굴로 먼저 들더니 바로
피카츄를 덮어버렸다.
잡았다!

“호오.”

마티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피카츄가 나오려고 애를 쓰는 듯 쓰레기통이 덜컥덜컥 움직였다.

“놓치면 안 돼! 꽉 잡고 메가드레인!”

냄새꼬는 덩굴로 꽉 잡은 채 쓰레기통으로 가까이 붙었다. 덩굴을 두겹 세겹으로 감아 눌러 덩치가 작은


피카츄로는 빠져나가기 힘드리라. 거기다가 초록색의 동글동글한 빛들이 쓰레기통 안에서 몽글몽글 피어나
냄새꼬에게 흡수되었다. 힘이 쭉쭉 빠져나갈걸?

“피카츄! 전기쇼크다!”

마티스의 명령에 덜컥거리는 것이 멈추고 전기가 노랗게 쓰레기통을 덮으면서 번쩍대기 시작했다. 냄새꼬가
찌릿찌릿한 듯 눈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아, 진흙이 거의 말라있었다. 흙놀이 효과가 끝난 것이다.
메가드레인은 계속 되고 있었고 전기 공격도 깜빡깜빡 거리며 계속되고 있었다. 피카츄가 얼마나 버틸까. 독에
걸린데다가 메가드레인까지 당하면서 전기 쇼크라. 내구가 강하지 않은 피카츄니까, 이제 곧.

전기 공격이 그쳤다 이어지기를 조금 반복하다 마지막이 가까스로 한 마지막 공격인지 안에서 아무런 공격이
일어나지 않았다. 초록빛들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피카츄, 시합 불가!”

심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냄새꼬는 지쳤는지 덩굴을 회수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광석화를 몇 차례
피하기도 했었지만 공격도 많이 받았고. 또 전기쇼크를 받느라 메가드레인으로 회복도 많이 못했을 터였다.
빨피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마티스가 피카츄를 몬스터볼로 돌려보냈다. 지금 교체를 할까?

“냄새꼬, 돌아올래?”

냄새꼬는 내 말에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더 단단히 바닥 위에 섰다. 그 든든한 모습에 나도 자세를 다시


바로하고 다음 포켓몬을 기다렸다. 노란 거구의 몸체가 필드 위에 섰다. 라이츄다.

실제로 라이츄는 처음 봤다. 생각보다 큰 몸집에 노란 뺨에서는 파직파직 전기가 튀고 날카로워 보이는 귀를
잔뜩 위로 올린 채였다. 피카츄는 한지우의 피카츄를 자주 봐서 익숙했지마는 역시 라이츄. 박력이 다르다.
전기포켓몬은 특히 애정하는 편이지만 역시 나는 피카츄보다는 라이츄파니까.

아니, 이럴 생각 할 때가 아니지. 저 귀엽고 멋있는 라이츄라도 일단 지금은 적이니까! 집중하자, 이지은.


냄새꼬가 라이츄를 이기는 건 무리야. 남은 포켓몬은 보송송. 전기타입. 그러니까 먼저.

“냄새꼬.”

냄새꼬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나는 눈짓을 줬다. 그때, 라이츄가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전광석화!”
“잡아! 그리고 독가루.”

덩치와는 달리 아주 빠른 움직임으로 라이츄는 냄새꼬에게 부딪혔다. 냄새꼬는 부딪혀 튕겨 나면서도 덩굴로


라이츄의 허리를 낚아챘다. 순간 중심을 잃은 라이츄는 냄새꼬를 덮친 채 한데 데굴데굴 구르더니 쓰레기통에 쾅,
하고 부딪히고 몇 번을 더 굴렀다.

“라이츄! 십만볼트!”
“뭐?!”
RaiiCHUUUUUU!!!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라이츄가 눈앞이 번쩍할 정도로 강한 빛을 뿜어냈다. 강력한 빛줄기.

“냄새꼬, 시합불가능.”

냄새꼬는 그을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몬스터볼로 냄새꼬를 회수했다. 나는 몬스터볼에 속삭였다.


수고했어, 잘했어. 고개를 흔들면서 뒤로 물러나는 라이츄의 눈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독가루를 들이마신
거야.

“부탁해, 보송송.”

몬스터볼을 던졌고, 보송송이 배틀 필드 위에 섰다. 잔뜩 부풀린 털에서 정전기가 파직파직 튄다.

“돌진!”

냄새꼬가 달콤한 향기를 깔아둔 필드 위에서 보송송은 튀어나갔다.


60 화

w. 도여은

“좋은 battle 이었다! 도전자여!”


“감사합니다.”

나는 마티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특히 지형지물을 사용하는 Sense 에 감탄하였다! 하하핫! 사실 쓰레기통을 뒤지게 하는 것도 battle 전에


지형지물을 잘 파악하라는 의도도 있지.”

의도도? 분명 도전자 괴롭히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시험을 통과하고 승리하다니 이 배지를 가지기 합당한 실력이다!”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명령이라 냄새꼬가 잘 이해해 주지 못했다면 이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평소에


도란도란 얘기를 많이 걸어서 그런가. 말을 잘 알아들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말려들어갔겠지.

마티스는 어설프게 웃는 나에게 오렌지 배지를 건네주었다. 내 손바닥 위에 올라온 배지는 태양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꽃처럼 보였다. 주황색인 중앙을 중심으로 노란빛이 뻗어나가는 것이 마치 십만볼트를 사용하는
전기포켓몬 같았다. 보송송도 십만볼트를 사용하면 그렇겠지?

“그리고 여기 십만볼트 기술머신이다. 훌륭한 보송송이더군.”

마티스는 CD 를 건네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전기포켓몬을 좋아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나도 마주 웃어 보였다.


보송송과 라이츄의 시합은 아주 번쩍번쩍해서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나에게도 따끔따끔 정전기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냄새꼬가 마지막까지 힘써주지 않았으면 졌을지도 모르겠다.

목표는 누오로 이기는 것이었지만 사실 냄새꼬에게도 미리 지시를 해놨었다. 만약에 보송송까지 나서게 된다면
달콤한 향기를 사용하라고. 분명 한지우에게 당했던 수법이었지만 같은 전기포켓몬끼리의 배틀에서 전기기술은
반감, 보송송의 아이언테일은 또 강철타입이라 반감, 노말기로는 몸통박치기나 돌진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달까.
진짜로 보송송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3 배지전을 내가 너무 얕보고 있었나보다.

라이츄는 강했지만 라이츄가 등장하기 전 눈치로 깔아둔 달콤한 향기는 회피율을 2 랭크나 떨어뜨리는 기술인
데다가 혹시나 하고 걸어둔 독가루가 통해서 다행이었다. 돌진을 사용하려면 스피드를 떨어뜨리는 마비가루가
좋았겠지만 전기포켓몬은 마비에 걸리지 않으니.

같은 전기타입이라 반감이라도 라이츄의 십만볼트는 강력했다. 보송송은 전기기술은 아직 조금 강한 전기쇼크


수준이라서 더 뼈아팠다. 그래도 정말 보스로라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빠의 마기라스에게 수련을
받아서일까. 육탄전으로 이기고 말았다...!

특히 몸을 돌려 아이언테일을 두른 꼬리로 발을 걸어 라이츄를 넘어뜨렸던 것은 마기라스가 가르쳤음이 분명했다.


지난번 주말에 마기라스와 수련할 때 꼬리를 쓰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았으니까.
둘 다 이족보행에다 괴수형이라서 그런 걸까. 아빠와 아이 느낌이 났던 것이 생각난다. 마기라스가 팔을 뻗으면
따라 팔을 뻗고 꼬리를 치면 따라 꼬리를 치고. 아주아주 귀여워서 꼭 끌어안고 싶었지만 훈련에 방해될까 봐
그러지 못했었지.

나는 속으로 몬스터볼에서 쉬고 있는 아이들에게 수고했다고 속삭였다. 마티스에게 오렌지배지가 포켓몬의


스피드를 보정해주는 효과가 있으며 공중날기 기술을 사용할 때 안정성을 준다는 설명을 듣고 체육관을 나섰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만 늘 어긋나던 일기예보는 이럴 때만 귀신같다. 그것도 아주 쏟아지고 있었다. 방금


시합을 하면서 정신력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일까. 조금 멍한 기분으로 비가 쏟아지는 것을 바라봤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비가 오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는데...

“파이리...!”

나는 급하게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폈다. 혹시나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챙긴 노랗고 작은
접이식 우산이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나 비가 세차게 오는지 우산을 뚫어버릴 기세였고 바닥은 벌써
웅덩이가 드문드문 생겨있었다. 센터에 들려서 포켓몬을 맡기고 난 뒤에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벌써 바짓단은
흠뻑 젖었고 우산을 썼음에도 옷이 벌써 눅눅했다.

포켓몬도 없이 파이리를 설득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생각지 않고 일단 발걸음을 향했다.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갔어야 했나. 이렇게 비가 많이 쏟아질 줄 몰랐지. 나는 나를 자책하면서 다리를 움직였다. 내가 거두지
않더라도 일단 비를 피하게 하고 치료시켜야지, 혼자서 할 수 없다면 센터로 연락하거나 경찰에 연락을 해야지,
뭐, 그런 생각도 한 줌 없이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지막엔 반쯤 뛰고 있었다.

머릿속엔 그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본 포켓몬이지만 상처 입고 몸을 웅크리며 으르렁거렸던 그


모습이, 너무나, 걱정이 되니까.

그렇게 아침의 그 장소에 도착했다. 빗물에 몸을 떠는 덤불을 넘고 물소리가 나는 잔디를 밟으며 나무가 높게
드리우고 있지만 물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지는 그곳에,

파이리는 없었다.

“흐아...”

나는 빠르게 오느라 차오른 숨을 한숨과 함께 뱉었다. 그 한숨에는 걱정, 불안, 허탈이 묻어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안도가 있었다. 아니, 안도라니. 나는 내가 느낀 감정이면서 도리어 내가 놀라고 말았다. 누가 조치를
취했을 거야,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 거야, 무사할 거야, 라는 나를 속이는 안도감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더 깊숙히, 내밀한 속내에서 떠오른 한 생각이었다.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

갑작스럽고도 불편한 깨달음에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구조해서 포켓몬 센터에 맡길 생각이었으면서 그 짧은


시간에서도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나. 포켓몬과 또, 이곳의 인연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나.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주변이라도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세찬 빗소리 사이로 선명하게 귀에 닿은 찰박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보니,
Pika?
비에 젖은 피카츄와

“한지우?”

한지우가 있었다. 뛰어오던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걸음을 늦추다 우뚝 멈춰 섰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라는 표정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말이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 아마 같은
표정일터였다.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

그나저나 녀석은 우산은 어디에 팔아먹고 왔는지 모자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있었다. 뛰어와서인지 숨도 거칠었다.
녀석은 나의 눈을 피하더니 무언갈 찾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파이리...?”

딱 맞춘 건가? 한지우는 바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봤어?”
“아니, 나도 찾고 있었어.”

녀석의 미간이 찡그려지는 게 보였다. 그렇게 가깝지 않은데도 촘촘히 내리는 비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데도
눈에 그려지듯이 선했다. 역시 포켓몬 때문이구나. 주변 여자애들 얘기를 들어보면 한지우는 무표정하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그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은근히 꽤 표정이 솔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포켓몬 한정일 때만.

Pikapi!

피카츄가 앞다리를 들고 서며 귀를 쫑긋 세우더니 무언가 소리가 났는지 앞장서며 뛰어갔다. 한지우도 뛰기


시작했고 나도 덩달아 뒤를 쫓았다.
피카츄가 멈춰 선 곳 덤불 속에 파이리가 있었다. 그 꼬리에는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미약한 불꽃이
피어있었다. 피카츄가 가까이 다가가도 으르렁댈 기운도 없는지 몸만 더 움츠리는 것이 다였다. 나도 조심히
피카츄의 옆으로 다가가 파이리에게 손을 뻗었다.

“엄청... 뜨거워.”

나는 손을 대자마자 바로 뗄 수밖에 없었다. 불 포켓몬 체온이 높은 건 가디를 자주 봐서 알지만, 이렇게 데일


듯이 뜨겁다는 건.

“여기 우산 좀 들어봐.”

나는 한지우에게 우산을 넘겨 파이리가 최대한 비 맞지 않게 비를 가렸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 젖지 않은 겉옷을


벗어 파이리를 둘둘 감싼 뒤 품에 안아 들었다. 몬스터볼에 넣어 데려간다면 좋겠지만 기절한 포켓몬은
몬스터볼로 포획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안에 반팔을 입었던 터라 찬바람에 소름이 돋았지만 품에는 불덩어리가 안겨져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파이리 꼬리를 조심하며 몸을 일으켰고 그에 한지우도 우산을 들어줬다.

“가장 가까운 센터가... 인천대 센터야. 그쪽으로 가자.”

내가 얘기하자 한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작은 불꽃을 들고뛰었다.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천리길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61 화

w. 도여은

나와 한지우가 센터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간호사는 센터 문을 부술 듯이 들어오는 소리에 한 번, 엉망이 된


나와 한지우의 몰골에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내 품 속에 있는 파이리의 모습에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럭키를 불러 이동식 침대에 파이리를 눕히면서도 기다리는 동안 씻으라며 각각 방 열쇠와 수건 그리고
담요를 챙겨주었다. 물론 한지우에게는 여분의 옷까지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야 처음부터 우산을 쓰고
있었고 파이리를 데려오는 과정에서도 비를 덜 맞았지만 녀석은 처음부터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비를 맞고
있었으니까.

간호사가 이동식 침대를 끌고 럭키와 함께 센터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도 그는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걸까. 그래도 그렇지...

나는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옷에서도 머리카락에서도 모자에서도 물방울이


뚝뚝. 입술을 짓씹은 채 찡그린 그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얼른 올라가서 씻고 와. 내가 여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Chuuu

절대 걱정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을 빗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을 더럽히면 쓰나.

그 녀석은 나와 피카츄가 한 번 더 재촉하자 마지못해 위로 올라갔다. 거칠게 올라가는 뒷모습이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2 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쭉
빠졌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파이리가 다시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
.

포켓몬은 강하다.

이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은 사실이었다. 가끔 티비에서 하는 시합 영상을 보면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포켓몬의 힘은 무한해 보였다.

마른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파도가 치고, 발을 한 번 구름에 대지가 깨어진다. 흐린 하늘을 쾌청하게 하고,
쾌청한 하늘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날리게 한다. 손도 대지 않고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은 물론,
하늘에서 유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없던 것을 있게 하고 있던 것을 없게 하는 것. 마치 기적이라고 할만하다. 나는 이러한 포켓몬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시합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이러한 작은 기적들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증이 밀려왔다. 이곳에 살던 이지은이 왜 포켓몬을 연구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포켓몬에 관한 책들을 빌려와 거실 소파에서 읽고 있었을 때, 아빠가 뭔가 궁금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생물학에 관심이 있었을 때도 그랬었다. 내가 거실에서 책을 잔뜩 쌓아놓고 무언가 읽고 있으면
아빠는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고 물었었지.

그저 동식물이 포켓몬이 된 것뿐인데도 이건 아주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차이를 삼키며 말했다.


포켓몬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

‘포켓몬의 힘?’
‘흐음... 과학과 물리학의 영향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하긴 아직까지 포켓몬을 과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했지. 이렇게 옆에 같이 살아가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옆에 다가온 가디, 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켓몬은 선사시대 때에 포켓몬과 인간이 어울려
살았다는 증거가 남아있지만 선사시대 이후, 즉 인간이 언어를 넘어 글자를 사용하고 그것을 남기게 되었을
때부터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간과 포켓몬의 반목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다시 포켓몬이 인간과 조금씩 공생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시대부터였다. 이렇게 같이 어울려 살게 된 것은


규토리로 처음 몬스터볼이 나왔을 때부터. 또 그것이 발전되어 그것이 실프 주식회사로 보급되었을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포켓몬 연구 또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빠는 웃으면서 테이블에 흩어져 있는 종이들 중에 하나에 그림을 그렸다. 물이 담겨져 있는 컵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구불구불한 선을 그어서 김이 나고 있는 것을 표현했다.

‘처음에 보송송이 태어났을 때, 아 그땐 메리프였지. 특성이 정전기라서 자꾸 따끔따끔했던 것 기억나니?’


‘응.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그때 내가 이 전기가 일반 전기하고 다르다고 얘기했었지? 기운이 있다고.’

나는 그때를 생각했다. 언뜻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메리프가 어려서 정전기가 잘 난다고 했었고.
조금씩 메리프가 자라고 보송송이 되면서 전기를 잘 다루게 되더니 이제는 시합 때만 정전기 특성이 나타나게 된
것 같다. 지금은 급하게 손을 대거나 끌어안아도 전정기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이 물잔을 포켓몬이라고 생각해 봐.’

아빠는 그려진 물잔을 가리켰다. 다른 세계에서 생물학자였던 아빠도 이렇게 그림으로 기발하고 이해하기 쉽게
지식을 가르쳐 주었었다.

‘아직 학계에서 하나로 통일된 명칭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음, 이 잔에 들어있는 뜨거운 물을 기력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이 뜨거운 김을 기운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포켓몬은 이 기운으로 힘을 사용하는 거야.’
‘기운?’

내가 아빠와 이야기하고 있으니 보송송도 소파에 다가와 내 다리에 치댔다. 모다피도 와서 무슨 얘기를 하나
기웃기웃 거렸고.
‘보송송은 전기타입이고 모디는 풀하고 독타입, 완이는 불타입이지. 이 각각의 타입이 물잔에 들어있는
티백하고 같아.’

아빠는 물잔에 티백을 그렸다.

‘그럼 향이 나겠지? 이렇게 다양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고유의 속성에 맞는 기술을 다른 속성의 기술을 사용할
때보다 더 강하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게 되는 거야.’

나는 신기하게 그 설명을 들었다.

‘또 기술을 무한정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알지? 보송송이 전기쇼크를 몇 번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전기를
사용할 때마다 이 물잔이 식어간다고 생각하면 편해.’
‘그럼 이 물은 기력라고 했었나? 그건 어떤 건데?’
‘기력은 배터리 같은 거야. 포켓몬은 공격을 할 때, 그 힘에 물리적인 힘만 실리는 게 아니야. 이 기운이
실리게 되지. 그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포켓몬의 기력이 줄어든다. 그런 식이랄까.’
‘그럼 물이 바닥을 보이면?’
‘그럼 기절하게 되는 거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메가드레인이나 기가드레인같은 흡수기술이란다.’
‘아...!’

그러니까 게임으로 치면 이 물이 체력이고 김은 PP 인건가. 냄새꼬가 메가드레인을 쓰면 아무런 상처가 없어도


상대 포켓몬이 쓰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거구나. 물리적인 외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센터에 치료기기는 이 물을 차오르게 하고 뜨겁게 해줘서 기력과 기운을 회복시켜주는 거야?’
‘그렇지. 똑똑하네.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아빠는 내 머리를 완이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보송송이 보송송송 거리니 아빠는 보송송의 머리도 쓰다듬었다.

‘대체로 시합이란 이 컵의 물을 누가 먼저 비우게 하느냐 인 거지. 포켓몬이 야생이든 어디든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건 이러한 룰이 있어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 기력과 기운은 휴식을 취하면 자연적으로
회복되거든.’

아... 그래서 배틀을 스포츠라고 하는 것이구나. 무작정 상대방의 목숨을 노리는 투견 같은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쨌든 포켓몬의 힘이 물리력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고 했지?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거야. 모디,
잎날가르기를 잠시만 보여줄래? 약하게.’

아빠가 모다피에게 말하자 모다피는 테이블 위에 올라오더니 공중에 잎사귀를 여러 개 만들어냈다. 그리고
날리려고 하는 순간

‘아, 그만.’

모다피가 힘을 빼니까 공중에 생겼던 잎사귀들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중에 아빠가 하나를 잡아채더니 내게
보여줬다. 나는 그 잎사귀를 쥐었다. 음? 그냥 나뭇잎인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이파리가 스르륵 사라졌다.

‘사라졌어...!’

‘보송송의 전기가 일반 전기와 다르다는 게 이런 뜻이야. 파도타기 기술을 보면 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라서 상대


포켓몬을 덮치지? 공격이 끝나고 몇 분이 지나면 축축했던 경기장 바닥이 금방 마르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게 기운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구나. 그래서 사라지는 거고.’
‘물론 일반적인 물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어. 포켓몬 발전소의 전기같이 말이야. 또, 주변에 물이 많으면 굳이
물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으니까 더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지. 풀 포켓몬도 마찬가지야. 주변에 풀잎을 사용하면
잎날가르기를 해도 기운을 덜 사용할 수 있지.’

나는 물타입 체육관을 떠올렸다. 수영장 필드를 사용하면 물포켓몬의 이동뿐 아니라 기술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나저나 잎날가르기를 배울 정도면.

‘그런데 모디가 잎날가르기를 배우고 있을 정도로 강한지 몰랐어. 그런데 왜 진화를 안 하지?’
‘거기에 또 다른 비밀이 숨어져 있지. 모디, 보여줘.’
‘뭘...?’

나는 깜짝 놀랐다. 모디가 팔로 쓰는 이파리를 살짝 말았다가 펼치니 그 위에 돌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았다가 펼치니 없어졌어...?

‘돌?’
‘변함없는 돌이지. 모다피는 어릴 때부터 진화하기를 싫어했거든.’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엄마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저것 구하느라 진짜 힘들었어. 알바도 하고 잔심부름하면서 용돈 받아서 샀었는데.’

아... 왜 우리집 서열 일위가 모다피처럼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보다 강한 포켓몬일지도.

‘여튼간에, 처음에는 포켓몬이 물건을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결국에는 포켓몬이 기운으로 실체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실체를 기운 즉, 에너지로 만들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거야. 물론 그 양은 손바닥만 한
크기만 가능하지만.’
‘헐... 대단해.’

나는 포켓몬에 대한 존경심이 일 정도였다. 이런 기적 같은 생명체와 함께 살고 있다니.

‘모든 것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케이시의 텔레포트 연구와 함께 차차 비밀을 알아나가고 있는 중이지.
그 결과가 이거야.’

아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몬스터볼이었다.

‘전송시스템과 몬스터볼이지.’
‘도대체 어떻게...?!’

아빠는 내가 놀라는 게 귀여운지 크게 웃어보았다. 그러면서 나중에 대학 가고 대학원 가면 알게 된다고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해주었다. 또 사실 규토리의 비밀을 다 알아내지 못했다면서 아직 해결해야 하는
연구과제가 잔뜩 있다며.

그리고 나는... 와... 비정상적인 과학의 발전에 대한 힌트를 알게 되었다. 포켓몬이 없는 세상과 포켓몬이
있는 세상은 과학의 발전이 다른 게 당연하지. 이게 포켓몬에 의해서 비롯된 거니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음, 컵도 무언가가 뜻하는 게 있는 거야?’

나는 다시금 그림을 가리켰다. 아빠는 그에 대답했다.


‘그렇지. 이 컵은 포켓몬의 육체야.’

그리고 아빠는 그 컵에 크고 진하게 가위표를 그렸다.

‘쉽게 깨질 수 있는 육체지.’

62 화

w. 도여은

“오늘은 센터에서 자고 갈 것 같아.... 아니, 배지는 땄는데 일이 생겨서.... 아니 애들이 크게 다친 건


아니고. 으음... 돌아가면 자세히 얘기할게요.”

나는 대충 엄마와의 전화를 끊었다. 나는 몸을 덮고 있는 담요를 더 단단히 여미고 간호사와 럭키가 들어간 곳을


바라봤다. 그러면 거기서 누군가가 나올 것 마냥.

대신 소리가 들린 곳은 다른 쪽이었다. 그쪽을 쳐다보니 한지우가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맨 먼저 보였던


건 센터 내에서 공용 실내화로 쓰는 슬리퍼를 신은 맨발. 그리고 점점 계단을 내려오면서 센터 마크가 그려져
있는 반바지와 검은 티, 어깨에 얹어진 수건과 덜 마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무덤덤한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그 뒤로 피카츄가 총총총 뒤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파이리는?”

다가온 녀석은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물었다. 역시 쌀쌀맞은 레드 아니랄까 봐.

“아직.”

나 또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날 배틀 이후로 서로 무시하던 사이었다. 말이 곱게 나갈 리가. 대신 내 시선은


닫혀있는 문으로 향했고 녀석도 내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사람을 더 불렀는지 몇 명이 급한 발걸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간 것 빼고는 달라진 것이 없는 문이었다.

그때, 처음의 간호사 분이 밖으로 나왔다. 녀석은 성큼성큼 그쪽으로 향했고. 나도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간호사의 시선은 자연히 우리 쪽을 향했고 다행히도 그 얼굴은, 밝았다.

“다행이에요. 아직 미열이 있지만 괜찮을 거예요. 저 앞 공원에 있던 파이리 맞죠? 오늘 지은 양 얘기 듣고


걱정했는데, 한숨 놓았네요.”

간호사와 시선이 마주쳐 나도 다행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한지우에게로 향했다.

“아, 지난번에 체육관 도전 왔던 트레이너 맞죠? 이름이... 지우 군이던가.”


“네.”

한지우는 평소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한지우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둘 다 트레이너군요. 혹시 둘 중 아무나 파이리의 임시 보호 트레이너가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센터에서 하룻밤 포켓몬을 맡기려면 등록된 트레이너나 기관이 있어야 해서. 아, 물론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주변에 유기포켓몬보호센터에 연락을 하면 되니까. 그래도 데려온 트레이너가 파이리를 데려갈 것이면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니...”

그 말은 파이리를 데려갈 의사가 있냐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내 왼쪽의 녀석을 봤고 녀석도 나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쳤고, 나는 순간 눈을 피했다.

“제가...”

한지우가 살짝 손을 들면서 의사를 밝혔다.

“그럼 이쪽으로 와서 서류를 작성해주세요. 아, 파이리 궁금하죠? 럭키. 지은 양을 병실로 안내해주겠니?”


Lucky~

럭키는 동글동글한 분홍색 몸을 움직이며 앞장을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럭키가 한 병실 앞에 섰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6 개의 침상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비어있고 파이리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파이리는 침상에
엎드려있었는데 그 위로 담요가 한 장 덮여져 있었다. 꼬리의 불꽃은 작은 유리병으로 보호되고 있었고 작은
팔에는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관을 따라 올라간 곳에서는 링거팩에서 방울방울 수액이 떨어지고 있었다.
파이리의 안정을 위해 병실에는 불이 꺼져있었기 때문에 방 안은 파이리의 불꽃만이 너울너울 밝히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졌는지 밖은 어둑어둑했다.

포켓몬의 육체는 잔과 같다고 했다.

물이 가득 찬 잔에는 물리적인 충격을 가했을 때 내부의 물이 그 충격을 흡수하기 때문에 쉽게 잔이 상하지


않는다. 독이나 화상과 같은 상태이상만이 내부의 물을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게 할 수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물이 잔뜩 비워진 잔은 쉽게 깨질 수 있다. 잔이 깨지면 그곳에는 다시 물이 차오를 수 없다.

그 안에 포켓몬의 약육강식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했다.

즉, 죽음인 것이다.

내 손이 파이리에게 닿았다. 아직 뜨거웠지만 데일 것 같았던 그 열기와는 달랐다. 손 아래로 파이리의 몸에


흐르는 맥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야. 이건 정말 파이리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의 순수한
안도였다. 처음 손이 닿았을 때는 너무 뜨거워서 곧 죽을 것만 같아서, 생명의 불꽃이라는 그 불꽃이 사그라질
것만 같아서 철렁했었다고.

마음이 놓이니까 배가 고파졌다. 여덟 시가 조금 넘는 시간. 저녁때를 놓쳐버렸다. 내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그렇게 뒤를 돌았는데 문간에 한지우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있었어?”
“방금.”

병실은 어두웠고 복도는 환했기 때문에 한지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피카츄가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파이리의 침상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그리고 살며시 침상 위에 올라섰다. 한지우도 그제야 침대 쪽으로 가까이 와
섰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이리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상상이 갔다. 평소의 모습은 깊은 바다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모르겠지만 포켓몬을 향한 모습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냇물 같았다.

Chuuu...

시무룩한 피카츄의 소리에 녀석은 피카츄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건 마치 다 괜찮다는 듯 다독이는 모습이었다.

“아는 파이리인 거야?”


“응.”
“언제부터?”
“일주일 전쯤?”

왜 그때 데려가지 않고서. 묻고 싶었지만 괜한 참견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왠지 데려가지 않은 게 아니라


데려가지 못한 것 같아서. 그래도 녀석이라면 좋은 트레이너이니까 파이리도 잘 설득하고 잘 보살펴 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데 한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한지우를 돌아보았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어.”

주어가 빠졌지만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알아들었다. 파이리의 얘기다.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병실 안까지 침범했고 그 속에 들리는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그 자리에서, 계속. 계속...”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병실을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문턱을 넘은 후 나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로비로 향하는데 저 복도에 서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분홍색
몸집에 흰 털을 가진, 그리고 반짝이는 구슬을 지닌.

“보송송!”

보송송이 뛰어와 점프하더니 내 품에 화악 안겼다. 그 순간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나는 무게를


지탱하느라 살짝 뒷걸음질 쳤지만 넘어지지 않고 그대로 안아 들 수 있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는 본심과 다른 말이 나왔다.

“센터 안에서 뛰면 어떡해.”

내가 나무랐으나 보송송은 듣는 채도 안 하고 소옹송 거리면서 나에게 얼굴을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보송송을


안은 채 로비로 가니 간호사 언니가 말을 걸었다.

“아, 포켓몬이 건강하게 되었다고 부르려던 참이었어요.”


“네에... 그새를 못 참고 보송송이 먼저 마중을 나왔네요.”
간호사 분은 입을 가리며 웃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의자에 냄새꼬와 누오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몬스터볼에 들어가 있지 않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건...
다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3 화

w. 도여은

전반부 지은 테마 BGM : 가을방학_클로버


후반부 지우 테마 BGM : Slow baby_빗소리

내가 사라지면 이 아이들도 나를 기다릴까.

낯선 곳이라서 그런 걸까.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옆구리에 자리를 잡은 보송송이 색색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도 그랬다. 늘 잠들던 화분 대신 책상 앞 의자에 자리를 잡은 냄새꼬도, 늘 방바닥에 찰싹
붙어서 잠이 드는 우파, 아니 오늘 진화한 누오도 잠에 빠져들어 있지만 나만 눈이 말똥말똥했다.

갑자기 내가 이 세계에 떨어졌듯이 갑자기 다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메리프를 품에 안고, 냄새꼬를 받아들이고, 우파가 내 방 안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었다.

‘엄마.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보송송하고 냄새꼬를 잘 부탁해. 아, 우파는 순천만 생태공원에 친구들이
있으니까 다시 돌려보내면 될 거야.’

내가 그 얘기를 하자 엄마는 웃으면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설거지나 하라고


했었지. 딸 마음도 모르는 엄마가 야속하다고 생각하면서 설거지를 했더랬다.

보송송은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엄마 어디 있냐며 난장판을 피울 수도 있겠다. 아니, 삼일 밤낮을 울지도 몰라.
집에 놔두면 더 울고 찾을 것 같은데 차라리 오바람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 거기에는 포켓몬도 많을 테고
오바람도 메리프가 알일 때 맡고 싶어 했다고 했으니까. 보송송은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그곳이 좋겠다.

저녁때를 놓쳐서 센터 안 매점에서 산 빵과 우유를 샀었다. 방 안에 앉아서 포켓몬들에게는 혹시나 해서 챙겼던


포켓몬 푸드를 나눠주고 나도 빵과 우유를 먹으면서 포켓몬들과 시합 얘기를 했다. 수다쟁이인 보송송과 누오의
말, 그리고 빤히 쳐다보는 냄새꼬의 눈빛에 들어있는 메시지들. 반은 못 알아들었지만 다 알아들은 것 같은
느낌인 건 내 착각일까.

나는 말해주었다. 오늘 진화한 누오에게는 문하생을 다 상대하느라 고생했다고 진화한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오늘 잘 싸워줬다고, 냄새꼬에게는 갑작스러운 명령일 텐데 잘 알아들어줘서 고맙다고 눈빛만 줬을 텐데 달콤한
향기를 사용했던 것도 대단했다고.
벌써부터 칭찬에 목말라 눈을 빛내던 보송송은 내가 말도 채 꺼내기도 전에 벌써 품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침대에
쓰러져 부등부등 안고 뒹굴거렸다. 정말 잘했다고 역시 파이터인 보송송이라고. 그에 누오가 합세해 나를 덮어서
같이 굴렀다.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냄새꼬는 내가 들어 올려 억지로 침대행이었다. 마지못해서 라고
말하는 듯한 냄새꼬의 표정에 절로 웃음이 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영 잠이 안 와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에 서니 사람 마음도 모르고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커튼을 걷지 않아도 그 존재가 느껴질 만큼 강하게 내리고 있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지.

방을 나서려는데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냄새꼬가 깼나 보다. 반쯤 침을 흘리며 눈을 부비는 모습이 언제 봐도


귀엽다. 나는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자고 있는 누오를 밟지 않으려 애쓰며 의자 쪽으로 가까이 갔다. 꽃봉오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잠시 나갔다 올게. 곧 돌아올 거야.

찬찬히 쓰다듬자 다시금 잠이 든 냄새꼬를 두고 뒤척이는 보송송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환한 복도에 눈을 찡그렸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환한 빛에 적응해나가듯, 나도 처음엔 한껏 찡그렸었고... 벌써
이렇게 적응해버렸다. 같이 싸우고 같이 기뻐하고. 말은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깨면 같이 깨고 잠든 서로의 이불을 덮어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발걸음은 저절로 파이리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버림받았던 걸까. 그 파이리.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면서
공원을 떠돌고 있었을까.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상처 입고 비를 맞고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병실 안에는 한지우가 있었다. 피카츄는 어디에 갔는지 혼자 덩그러니 침상 옆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유독
이 병실 안에는 빗소리가 더 잘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파이리가 누워있는 침상을 가운데 두고 녀석의
맞은편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파이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들렸을 때 간호사 언니에게 열이 내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그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나서야 걱정이 가라앉았다.

한지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왜일까. 새벽의 마법에 걸린 걸까. 전혀 불편하지도 않았다. 마치 빗물이 넘쳐
이곳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하고 평안했다. 물론 물이 가득 차면 파이리에게 위험하겠지만.

“어떻게 알았어?”

한지우의 평소의 습관처럼 주어를 빼고 말해보았다. 아무 말 없이 뒷말을 기다리는 모습에 나는 다시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얘기할 여건도 그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우연히 만들어진 이 시간, 지금이 아니면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한지우에게선 답이 없었다. 그저 빗소리만 들렸다. 나는 파이리의 꼬리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봤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 입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원래 포켓몬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어.”

한숨과 함께 뱉은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듣고는 있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나는 고해성사하듯
말을 뱉었다.
“여기는 멸종되어서 찾기 힘든 것이 동물이지만 그곳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어. 마치 여기의 포켓몬처럼.
그래서 처음 여기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무섭고 놀랐고...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닐까 자문하고... 그런
세상에서 왔으니까 포켓몬들이 내가 다르다는 걸 알 수밖에 없던 걸까?”

빗소리만 들리는 침묵의 공간. 내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아버지는 생물학자셨어. 나도 커서 동물을 연구하는 동물 생물학자가 되고 싶었지. 하지만 이곳의 아버지는


포켓몬 연구자셨어. 내가 모르는 포켓몬을 넷이나 키우고 있었지. 심지어 엄마도 모다피를 키우고 있었으니까.
같은 성격,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엄마 아빠지만, 같은 기억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 뒷모습을 보면서 흠칫하게 되었다는 걸. 손을 뻗다가 잠시 멈칫하게 된다는 걸.

“나는 여기의 나의 기억이 없어. 여기에 나라는 존재가 어릴 적 부모님의 포켓몬과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겠고
여기서의 내 꿈이 포켓몬 연구원이라는 것도 겨우 알게 되었어.”
“...”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처럼 보이더라. 분명 엄마, 아빠인데 타인처럼 느껴지더라. 심지어 그전까지 알고
지내던 친구들도 내가 알던 친구들이 아닌 것 같아서. 어느새 보니 거리를 두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많이
힘들었어. 외롭고... 진짜 내가 미친 것만 같았지.”

그게 다섯 달 전이었다. 뛰쳐나간 곳에서 오바람을 만났고. 갑자기 뒤집힌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들.

“그런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메리프 덕분이었던 것 같아. 지금은 보송송이지만. 그 애는 내가 이곳에 떨어진


뒤 처음 만난 아이니까. 내가 이곳에 있던 이전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유일한 아이었으니까. 사실 집
안에 있으면서도 조마조마했던 거지. 내가 가짜라는 것을 들킬까 봐.”

그래, 난 사실 메리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숨을 쉴 수 있었어.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찬찬히 늘어놓는다.

“그래서 오바람이나 잎새. 심지어 너마저 다른 사람들보다 편하게 느껴지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한지우를 바라봤다. 녀석은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상하지? 이상한 이야기야... 그래도 알아차려 줬던 건 고마워.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넌 항상 나를 이상하게 봤으니까 더 이상해질 것도 없겠지.”

조금 웃음이 났다.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했다.

“네 말이 맞아.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어. 하지만 벌써... 5 개월이나 지났네.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명확히 없는 것도 현실이야. 또... 내 아이들에게 마음이 많이 가버리고
말았어. 이상하지. 진짜, 웃기게도 요즘은 갑자기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겁이 날
지경이라니까.”

내 작은 웃음만 병실 안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혼자 중얼중얼한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아주 편했다. 빗소리와


시계 소리만 들렸다. 이제 졸리기도 하고 올라갈까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날도 이런 비가 오는 날이었어.”
그날이 어떤 날인 걸까. 빗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아주 낮으면서도 작았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어. 오늘처럼 비가 아주 거세게 내리는 날이었지.”

나는 저절로 숨을 죽였다.

“어머니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맞았어. 그 사람에게서는 술냄새가 났었고 나는 작은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지. 그런 날이 반복되었고. 결국 어머니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가셨어.”
“...몇 살 때였는데?”
“여덟.”

내가 생각할 때 여덟은 아주 어린 나이었다.

“비 오는 날 짐을 싸들고 나가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매달렸어. 울면서.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어머니는 꼭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하지만 결국 오지 않았지.”
“...”
“피카츄를 만난 건 그쯤이었어. 그 때는 피츄였었지만. 학교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어. 대신 뒷산에
나를 기다리는 포켓몬들이 있었지. 하지만 비 오는 날은 집 밖에 나갈 수 없었고 아버지란 사람의 폭력을 견뎌야
했어. 그러면서도 떠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어.”

나는 고개를 들어 녀석을 쳐다봤다. 그는 저 바닥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년쯤 뒤, 비 오는 날 그 사람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 하루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리고 강


하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어. 누구는 비가 와서 실족했을 거라고 하고 또 누구는 자살이었다고 하더라.”

열 살. 비 오는 날 방 안에 덩그라니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소년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고아원에 가고 오박사님을 만나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난 여전히 비 오는 날이 싫어.”


“...오늘 비 잔뜩 맞았잖아.”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이었지만 뱉어보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 말이었다. 한지우는 바람 빠지듯 웃더니 대답했다.

“내 모습 같았거든.”

그 시선이 파이리에게 닿았다.

“메리프의 모습도.”

그리고 나에게 닿았다. 나는 그가 왜 나에게 화를 냈는지,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던 거야. 떠날 것 같은 사람의 모습도 남겨지는 포켓몬의 모습도.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으니까... 물론 포켓몬들이 말해준 것도 있지만.”

나는 이게 처음 내 물음에 답임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내 물음. 그에 대한 아주 길고 긴 대답.

“나도...”

나도...?

“나도 다른 사람한텐 처음 말하는 거야. 그래야... 공평하니까.”


그는 한숨 같은 숨을 뱉더니 이어 말했다.

“전에... 말이 심했던 건 미안.”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녀석이나 나나 분명 괜찮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 무거운 분위기에


나는 자러 돌아갔다.

잠결에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싶더니 아침에는 비가 왔었냐는 듯 쨍쨍했다. 방에서 나와 내려왔을 땐 한지우도
파이리도 이미 가고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어제 일은 혹시 꿈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한
새벽이었다. 그 한지우와 남들에게 하지 못했던 얘기를 서로 나누었다는 게.

이 세계에서도 사람은 태어나고 상처 입고 상처 주고 웃고 떠들며 살아간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한 때 의심했던, 이 세계가 데이터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깨부수고 속삭인다.

이 세계는 살아있는 세계라고.

정말 살아있는 세계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의 말은 마치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만났던 오바람이,


게임 상의 그린이 아닌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내 이상한 질문에도 솔직한 그의 이야기를 했을
때처럼,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 작고 작았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새벽, 어두운 하늘에 꺼진 불에
빗소리가 들리던 그 새벽 방. 파이리의 꼬리 불꽃이 내는 불빛이 가득 찬 방 안은 바삭, 깨어지는 껍질에 비치던
노을만 같았다.

1-8.5 동류

64 화

w. 도여은

“이번에도 들었다. 어마어마한 성적이었다며.”


“대단하네. 전학이라 낯선 환경 적응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수고 많았겠구나.”
“포켓몬 다루는 실력도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3 배지를 땄다고?”
“이야, 빠르네. 웬만해선 3 배지도 힘들지.”

바람은 웃는 표정으로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뒷말을 예상했고, 또 그 말이 여전히 튀어나왔다.

역시 오박사님의 손자네.

바람은 그 말에 그저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대충 말이 마무리되었을 때 예의


바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바람은 그 뒤에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다. 오박사의 천재 손자에
대한 이야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뻔했다. 그래, 자신이 바로 그 오바람이다.

갑판에 기대 바닥의 출렁이는 바닷물을 내려다본다. 출항하지 않은 배의 선상 파티였기 때문에 물결은 파도에
맞춰서 흔들릴 뿐이다. 바다의 시원하면서도 비릿한 냄새. 뺨을 스쳐 지나가는 소금기 묻은 공기. 바닷물 표면에
바람의 그림자가 비쳤다가 흐트러지기를 반복한다. 딱 맞춰 지은 정장이 불편하다.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아
풀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바람은 잘 알고 있다.

[부탁이 있는데... 상트앙느호 선상 파티에 좀 가줄 수 있나?]


‘네...?’
[지금 연구할 게 남아있는데, 자리를 비울 상황이 아니라서... 내는 부산 아이가. 인천은 서울하고 가깝고...
부탁한데이. 두 장 보낼 테니까 지우랑 같이 가주믄... 오전에 얼굴만 비추면 되는디...]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바람은 이수재 박사의 억양 있는 부산사투리를 바람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이수재가 할아버지인 오박사와 친분이 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이브이 연구자료를 받은 것이나 여러 가지 팁을
들은 것이나... 또 캐이시를 받아버려서 아주 잔뜩 빚을 져놨기 때문이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이런 파티에
오지 않았을 테고 어울리지 않는 이런 옷을 입지 않아도 됐을 테고 또...

바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새벽의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텐데.

사실 옷 때문에 답답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면 왜 이렇게
답답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한껏 빼입은 자신의 모습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어제 공부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왔다. 한지우 그놈이었다. 갑자기 내린 폭우에 뛰쳐나간 게 이상하다 했더니만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하는 말이 인천대애? 쫄딱 젖어서어? 옷을 가져오라고오? 어디 뛰쳐나갔다가 얼토당토않는
곳에서 전화하는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라지만... 우산은 쓰고 가지. 게다가 다음날 인천에 선상파티
있다고 했는데.

바람은 어차피 다음날 새벽에 나갈 거 거기가 가까우니까 그곳에서 자고 움직이기로 하고 옷이랑 신발 등 짐을


싸서 센터로 향했었다. 밤 열시쯤 도착해서 들어가니 그놈은 열이 나는 파이리 옆에 태연히 앉아있었다. 태연히
인줄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가만히 가라앉아 있는 모양새였다.

아니 무슨 일이야? 척 보고도 알 수 있었던 건, 하나. 저 파이리가 전에 말했던 그 버림받았다는 파이리라는 것.


둘. 갑작스런 비에 파이리가 걱정돼서 뛰쳐나갔다는 것. 셋. 그 파이리를 무사히 구조해 치료를 마쳤다는 것.
넷. 이 녀석은 내일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 마지막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 그래도 다행이네. 대전이나 광주가 아니어서. 키나 내놔, 임마.’

원래 이런 녀석인지 몰랐나. 새삼스럽게. 바람은 지우가 선선히 건네는 열쇠를 받았다. 일단 로비에 뒀던 짐을
옮기고 얼른 자고 내일 아침에 가면... 계획을 생각하며 올라가려는데 놈이 말을 걸었다.

‘그 녀석이 여기 있어.’

녀석이라는 말이면 또래 사람. 또래 사람 중에 나를 제외하면 이놈이 얘기할 만한 사람.

‘그 녀석? ...이지은?’

허? 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다. 아니 이지은이 여기 왜 나와?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시 사고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인천대니까. 체육관 배지 따러왔나. 자연스런 추론이었다.

‘파이리 찾으러 갔다가 만났어.’


‘빗속에서?’
참나, 우연도 정도가 있지. 바람은 이상한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을 생각하며 로비에
있던 짐을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대체로 남자방은 2 인실이니까.

역시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층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좀 씻고 나서 이리저리 나돌아봐도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것 치고 마주치지 않았다. 열한시니까 벌써 자고 있을지도.

잠들었다 깼을 때는 새벽이었다. 윗 침대에서 자고 있던 바람은 아래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놈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분명 누워있는 걸 봤는데... 피카츄만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는데 안 자고
뭐 하고 있냐고 툴툴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었다. 분명 병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놈 포켓몬은 끔찍이
여기니까.

병실 안에 인기척이 나서 역시나 했다. 들어가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가 멈칫했다. 병실문 유리 안으로


보이는 방 안에는 한 사람 더 있었다.

‘... 돌아가고 싶은 마음... 5 개월이나... 겁이 날 지경이라니까.’

작은 목소리였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바람이 들은 그녀의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뒤에 그놈이 하는 얘기에 더 놀랐다. 한지우 그놈이 누군가에게 할 거라곤 절대 생각하지 못했던 말.
어릴 적 그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도 알음알음 주변에서 들어서만 알고 있었던 그 이야기.

‘메리프의 모습도... 떠나가는 사람... 나도... 공평하니까.’

그리고 사과.

의자를 끄는 소리에 바람은 놀라 반대편 복도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그녀는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소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병실로 들어갔다. 한지우놈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리곤 물었다.

‘어디부터 들었어?’
‘비오는 날부터.’

물론 그것보다 조금 더 앞부분도 들었지만 굳이 얘기하지는 않았다. 놈의 눈빛에 안도의 빛이 지나가는 걸


포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년 같이 살았나. 무려 열 살 때부터 얼굴 맞대며 살았다. 돌아간다니
떠나간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네 과거 얘기까지 하냐?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이놈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글쎄...’

돌아오는 건 애매모호한 말뿐이었다.

65 화

w. 도여은
상념이 깨진 건 아이들의 소리 때문이었다. 바람이 그쪽을 돌아보자 갑판 뒤에서 아이들 네다섯 명이 와르르
뛰어나왔다.

“야, 내가 불러낼 거야!”


“잠깐만, 내가 얻었다고!”

갑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중 한 명에 손에 든 건 몬스터볼이었다. 포켓몬이 들어있는가 본데 서로 자기가 꺼낼


거라며 몬스터볼을 들고 있는 아이를 쫓아 뛰어다니는 모양새였다. 갑판을 뛰어다니면 위험한데.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결국 그 아이들은 난간에 우르르 몰렸고.

“야, 잠깐.”
“앗!”

아이의 작은 손에서 미끄러진 몬스터볼이 바다로 떨어졌다. 바람은 그걸 보자마자 그쪽으로 뛰어가 손을
뻗었지만 잡지 못했고 결국 바다로 퐁당, 떨어졌다. 빈 몬스터볼은 물에 뜬다. 포켓몬이 들어있는 몬스터볼은
가라앉는다. 가라앉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떡해. 빠졌어.”

옆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쐐기를 박았다. 바람은 하는 수 없이 난간에 매달려 그의 포켓몬을 불렀다.

“갸라도스!”

그러자 바다 속에 커다란 그림자가 위협적인 몸집을 언뜻 비치더니 선체가 잠시 흔들렸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잡는 사이 촤아아 물소리가 나며 바닷속에서 고개를 든 갸라도스가 그
위협적인 얼굴을 나타내 보였다.

“히익, 갸라도스야!”
“갸라도스, 물어와!”

아이들과 사람들이 술렁거렸지만 바람은 침착하게 몬스터볼을 물어오라고 할 뿐이었다. 갸라도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잠시 선체가 술렁거렸다가 금방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날카로운 이빨에
몬스터볼을 물고서.

바람이 몬스터볼을 받자 주변에 아이들이 와글와글 몰려 “갸라도스 신기해!”, “처음 봐!”, “안 위험해?”
“무서워!” 등등 떠들어댔다.

“안 물어. 얌전하거든.”
“와아! 형! 잉어킹 때부터 진화시킨거야?”

언제부터 제 형이었는지 모르겠네. 바람은 아이들은 참 친화성이 좋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이 몬스터볼 주인이
누구냐고 갑판에서 함부로 장난치면 어떡하냐고 혼을 냈다. 아이들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는데 다행히도 저 멀리서
한 아이가 머리가 삐죽삐죽한 아저씨를 데려왔다. 몬스터볼을 뺏길 만큼 허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찌어찌 인사를 하고 몬스터볼을 돌려주고 감사인사를 받았다. 아이들의 부모도 와서는 사과와 함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몬스터볼은 높은 수압에서 깨지게 되는데 안에 든 포켓몬이 물 포켓몬이라면 상관없지만
불 포켓몬이면... 땅 포켓몬이면...
끔찍한 상상에 몸을 떨고는 바람은 갸라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 전에 진화시킨 갸라도스였다.
물어와라니. 잉어킹 때 잔뜩 시켰던 훈련이다. 잉어킹은 머리가 똑똑하지 않으니까 시합을 보거나 공을 물어오게
하거나 같이 수영을 한다거나 몬스터볼에 넣고 데리고 다니거나 해야 했는데. 그런 훈련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바람은 갸라도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바다를 처음 본 갸라도스를 잠시 풀어두길 잘 한 듯


했다. 바다를 열심히 헤엄쳤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잉어킹 키웠었어?’

바람은 지은이 그렇게 물었을 때 당황했던 제 자신을 생각했다. 물론 숨길 이유까지는 없었지만 말하기는
쪽팔렸다. 그리고 그날을 다시 이야기하긴 좀 그랬으니까.

로켓단이 옥광산을 점령하던 날. 바람은 체육관 전에서 가볍게 승리하고 첫 배지를 챙기던 중이었다. 갑자기
체육관이 술렁거리기에 물어보니 로켓단이 옥광산을 점령했다고 얘기를 들었다.

‘제 친구가 거기에 있어요!’

한지우 그놈 또 사고 친다는 생각에, 혹은 그놈이 누군지 알지마는 혹시나, 만에 하나, 불행히도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향하는 관장의 차를 얻어 타고 그곳으로 향했었다. 포켓몬과 총을 앞세워 옥광산을
불법 점거하던 로켓단은 다행히 한지우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알았으면 분명 인질극을
벌였을 테지. 하지만 그곳에서 알게 된 사실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은이 그 안에 아직 있다는 얘기였다.

이지은. 처음에는 그저 이상한 여자애였다. 처음 본 것은 그 애가 알을 받아가는 뒷모습이었다. 단발머리의


여자애. 처음 마주친 건 열에 취해 이상한 말을 했던 날. 자신을 그린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잘못 불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다시 깨어나서도 저에게 그린,이라고 말했던, 이상한 애.

그런 일이 있으니 같이 사는 그놈에게도 얘기했더니 어느 날 문득 집에 들어오면서 얘기하기를,

‘오늘 봤는데, 네가 얘기했던 그 여자애.’


‘뭐? 무슨 일로? 어떻게 알았는데?’
‘메리프라며.’
‘아... 옆에 메리프 있었구나.’

그때 잠깐 포켓몬이랑 잘 지내는 건가. 안도했었던 기억. 미뇽을 구해줬다길래 여기 주변에 미뇽이? 하고


놀랐던 기억. 그게 한지우가 처음 이지은을 언급했을 때였다.

그리고 전학 온 날 점심시간에 우연히 만났을 때. 다신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이상한 여자애가 같은 학교였다니.


첫 감흥은 그 정도. 그런데 이상하게 날을 세우는 한지우를 보고는 어라, 얘가 이렇게 사람한테 날을 세우나,
이래도 무덤덤 저래도 무덤덤하는 놈이라는 걸 보고 자랐는데. 그것보다는 그놈이 한 말이 뇌리에 남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 쫓아가서 그게 무슨 말인지 물었을 때.

‘몰라.’
‘뭐?’
‘모른다고.’

잔뜩 날선 독가시 니드런처럼 구는 그놈을 보고 허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도대체 그 여자애의 어디가 이처럼
녀석을 자극하는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건 또 뭔지, 그런 흥미가 들었다. 그렇게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면서
예의 주시하고 있던 여자애. 바람이 살펴본 바 포켓몬을 좋아하는 그냥 평범한 여자애일 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처럼.

옥광산에서 로켓단과의 대치는 길고 길게 이어졌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경찰도 레인저도 너무 적다는 느낌.


조폭들이 광산을 불법점거하고 있다는데 충원이 안 돼? 어째서?

다행인 점은 한지우나 이지은이나 잡히지 않았다는 것. 둘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 그것도 방금 전까지는


소식이 끊겼지만. 그리고 새벽이 되자 뭔가 술렁거리는 로켓단의 모습에 대치가 무너지고 공격에 들어가게 되었다.
포켓몬의 공격들. 간부들은 총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이따금씩 총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부하들은 무기나
포켓몬이니까. 나도 할 수 있다고. 뒤에만 있을 수 없다고. 그런 혈기에. 뛰어 들어가려다가 붙잡혔다.

‘어딜 들어가. 학생인 것 같은데.’

푸근한 인상에 걱정이 가득한 모습의 아저씨였다.

‘친구가 저 안에 있다구요. 또 저도 트레이너구요.’


‘안에 동굴인데 물 포켓몬은 있는가?’

그렇게 붙잡혀서 최고의 물 포켓몬을 5 만원에 사버렸고. 알고 보니 잉어킹이더라.

66 화

w. 도여은

짜증나게 잘생긴 놈. 방금의 소란에 한지우가 무슨 일인가 갑판으로 나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까만 정장에 까만
머리칼이 소름 끼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이렇게 어색한데도. 저놈 또 타이는 반쯤 풀어놨다.
답답하다고 그랬겠지.

바람은 다가가서 타이를 다시 쭉 매주고 가슴을 턱 쳤다. 처음 봤을 때는 나보다 조그맣더니 같은 걸 먹었는데


왜 더 커? 바람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목이 답답한지 놈은 인상을 찌푸렸는데 갸라도스를 보더니 표정이 다시금
스르르 풀렸다. 손을 내밀며 가까이 가더니 갸라도스를 쓰다듬는다.

이놈이 뭐가 좋다고 친구 먹어서는. 바람은 저놈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살가운 저와 말이 없는 그, 계획적이고 꼼꼼한 저와 막무가내에 저돌적인 그, 선천적으로 색이 옅은 저와
니로우처럼 까만 그.

‘이 아이가 박사님 손자입니까? 젊으실 때 모습을 빼다 닮았네요.’


‘아, 아닐세. 내 손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기 전 할아버지 사진에는 자신감에 찬 까만 눈동자와 새까만 흑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지금도
할아버지의 희끗희끗 센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머리가 드믄드믄 보이니까...
그러니까 저와 그가 갓 오박사님 댁에 지내게 되었을 때, 한지우를 오박사의 손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분한 것은 별개라고. 그때마다 저는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불리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불리기 싫었다.

이런 모순적인 감정에서 헤맬 때가 있었다. 아니 정정하건데 바람은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렇다는 걸.

처음에 그와 저는 정반대편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붙어서 지내온 건 마침내 그와 저는 정반대
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등을 맞대고 서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의 쌍둥이 형제였다. 빛과
그림자였다. 제가 빛이고 그가 그림자일 때도 있었고, 그가 빛이고 제가 그림자 일 때도 있었다. 그래, 그와
저는 신에게 버림받아 낯선 바다 위를 표류하다 같은 부표를 잡고 의지하는 동류였다.

숨어 들어간 동굴에서 본 것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몸싸움하고 있는 한지우. 밀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저도 뛰어 들어가 싸웠다. 주먹, 발길질을 피하고 도로 공격해 쓰러뜨리는 건 사실 포켓몬 시합보다 자신 있는
일이었다. 저놈도 같은 사부 밑에서 배웠으니 마찬가지겠지만.

바람은 도망가는 이들을 부러 붙잡지는 않았다. 대신 한지우 저놈을 붙잡았다.

‘이지은은?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안에.’
‘안에에? 이 자식 버리고 왔냐?’
‘버리고 온 거 아냐. 두고 왔을 뿐...이야.’
‘두고?’
‘숨겨두고...’

바람은 알고 있었다. 저놈이 숨겨두었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와 나리 누나와 저놈이 숨바꼭질을 하면


절대 저놈을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분명 제한된 공간인데 모든 사물들이 숨을 죽여서 저놈을 숨겨주는
기분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뿐 아니라 물건도 얼마나 꽁꽁 숨겨두는지 놈이 숨겨둔 물건을 찾는 내기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왜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저놈이 살기 위한 필사적인 특기 같은 거라는 걸.

그런 의미였다. 숨겨뒀다는 건.

‘찾으러 가자.’
‘...못 가.’
‘너 없으면 어떻게 찾아. 멍청아.’
‘피카츄. 부탁해.’
pikapi!

분명 가기 귀찮아서 저러는 게 아니다. 왜 저렇게 난처한 표정이야? 남들이 보면 무표정해 보이겠지만 바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게 이상할 정도로 확실히 보였다.

‘뭔 일 있었냐?’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바람은 알아챘다. 이상하게 날 서게 군다더니.

‘울렸냐?’
‘...’
‘울렸구만.’

바람은 착잡하게 제 친구이자 형제를 살폈다.

‘뭔데, 그 애가 뭘 어쨌기에 너를 궁지에 밀어 넣는데. 왜 막다른 길에 갇힌 꼬렛처럼 이를 드러내고 있어?’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서 문제지 말을 할 때는 좀처럼 뜸을 들이지 않는다는


걸 바람은 훤히 알고 있었다. 그 말인 즉 그만큼 신중하게 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자꾸 생각나게 해.’


‘뭐를?’
‘...어머니를.’

바람은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저나 그에게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저 발을 옮길 뿐이었다. 피카츄를 따라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가며 로켓단 잔당을 피해
도착한 곳.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잠든 소녀를 발견했다.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고?

바람은 그놈의 어머니를 모른다.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매정한 여자라고 잠시 생각했을 뿐. 당사자에게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 이번에 처음 들은 것이었다. 그놈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말을.

저 소녀를 깨워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지우의 붉은색 패딩조끼를 가만히 덮고서
잠들어 있는 까만 단발머리의 소녀. 저 붉은 패딩. 왠지 겉옷이 없더라니. 미안했던지 덮어준 건가. 아니면...

이상한 여자애에서 이제야 포켓몬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애라고 정정했건만 이제 한지우에게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여자애로 변하게 되었다.

어느새 바람은 쪼그려 앉아서 소녀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그놈의 어머니였으면 분명 미인이셨으리라. 빤히
쳐다본 결과, 객관적으로 그렇게 미인도 아니고 진짜 평범한 외모였다. 미인이라면 김잎새 쪽이 더 그렇긴 하지.

그놈이 괜한 소리를 해서 엄한 애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바람은 소녀를 깨우기로 했다. 그러자,

‘그...린...?’

또다. 이번에도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 정정해 줬건만.

‘오바람이라니까.’

오용호 박사님의 손자 오바람. 오바람이라니까.

한지우가 숨겨둔 공간, 한지우가 덮어둔 패딩. 괜히 짜증이 나서 뺏어 들고 손목을 끌고 나왔다. 그러곤
생각했다. 왜 너는 나를 그린이라 부르나. 그렇게 정정해 줬건만 다시 이상한 여자애로 돌아오고 말았다.
오바람인 저를 그린이라 부르는 이상한 여자애로.

그러니까 바람은 어제 들은 얘기와 지난 날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짜 맞추어 보았다.

원래 있던 곳. 5 개월 전. 저와 부딪혔던 그날. 떠나간 어머니. 메리프. 떠날 것 같은 사람.

이를 조합해서 한 문장을 만들 수 있었지만...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납득할 수 없었다. 더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 정답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어제 떠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한 셈인가. 겁이 난다고 하는 걸 보면. 한지우 그놈도 참. 어떤 맹세의


말도 믿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말의 가변성을 가장 잘 아는 그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안심이 되었나?
그 말 한마디에 대가랍시고 자기 얘기를 내어 놓을 정도로? 너에게 그 애가 무엇이기에?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뭐가.”

갸라도스를 쓰다듬던 한지우가 돌아봤다.

“너를.”

그놈은 피식 웃었다.

“네가?”

그 말에는 우리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너에게 있어서 그 녀석.”


“다 말했잖아.”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고?”

암묵적 금기어를 다시 꺼냈다. 옥광산에서 처음 꺼냈었던.

“...그래.”
“신경쓰이냐?”
“그래.”
“그래서 지켜보고, 울리고, 화내고?”
“뭐... 그런 셈인가.”

그놈은 좀 떨떠름하게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 녀석 좋아하냐?”

그놈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냐는 뜻이었다. 결국 나온 대답은,

“...글쎄.”

저 말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오바람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저놈은 좋아한다는 게 무슨


뜻일지도 모르는 놈이다. 그래,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냐. 바람은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나도 모르겠다.”

뜬금없는 그놈의 말에 바람은 물었다.

“뭐가?”
“너에게 있어서 그 녀석.”

아아. 그 말이었나?
“나도.”

바람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나도 어머니가 생각나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동류일까.

.
.
.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오전 선상파티에 얼굴을 비친 두 사람은 점심도 그곳에서 든든히 먹은 뒤 임무를


완수했다는 든든한 마음으로 상트앙느호에서 내렸다. 둘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바람이 걸으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아, 너 봤냐?”
“뭘.”
“내가 몬스터볼 건져준 남자.”

대답은 안 했지만 본 눈치다.

“국제경찰이라던데.”
“뭐?”
“좀 예상 밖이지? 엄청 헐렁해 보이던데. 아이들한테 몬스터볼도 뺏기고. 그거 엄청 큰일 날 뻔한 거 아닌가.”
“...”
“그리고 이름도 알려주던걸. 아 이름이 아니라 코드네임이지만. 그런 것 막 알려줘도 되나?”

바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코드네임이... 뭐랬더라.”

아, 생각났다.

“핸섬.”
“...?”
“웃기지 않냐?”

바람은 킬킬거렸다.

1-9 전쟁과 평화

67 화
w. 도여은

“으음...”

나는 침대에 누워서 폰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폰만 바라보고 있자 보송송이 와서 폰과 나 사이에 쏙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그대로 보송송을 꼬옥 안고 좌로 뒹굴 우로 뒹굴 거리며 고민했다.

“으아아아... 뭐라고 보내지.”


song?
“아냐 아냐...”

나는 현재 카톡창을 켜 놓은 채 뭐라고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원래 그렇게 살갑게 연락하고 사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을 해야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정신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고...
아니, 사실은 잊고 있었다는 게 맞겠지. 이건 좀 미안한데?

“에라, 모르겠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자.”

[ㅇㅈㅇ] 살아있음?

음, 자연스러워. 아주 오랜만에 보내는 톡으로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로다!

[ㅇㅈㅇ] 난 살아있는데
[ㅇㅈㅇ] (보송송이 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사과를 든 채 한입 깨물려고 하는 사진)
[ㅇㅈㅇ] (냄새꼬가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진)
[ㅇㅈㅇ] (누오가 배를 내놓고 만세 자세로 방바닥에 뻗어있는 사진)
[ㅇㅈㅇ] (보송송을 안고 양 옆에 냄새꼬와 누오를 끼고 셀카로 찍은 사진)

등등 최근에 찍은 사진 중에서 괜찮은 사진을 잔뜩 보냈다. 왜 사진 보내면서 내가 기분이 좋냐. 우리 애들


넘나 이쁜 것! 이게 바로 엄마의 마음인가!

괜히 흐믓해하면서 나는 타자를 쳤다.

[ㅇㅈㅇ] 내 포켓몬지롱
[ㅇㅈㅇ] 예쁘지? 예쁘지!!!

바쁜가? 답장이 없기에 나는 화면을 끄고 보송송을 안고 마저 뒹굴거렸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띠롱,


알람이 울렸다.

[Jihan] 응 너빼고

이 인간이...! 나는 화난 이모티콘, 물건 던지는 이모티콘을 왕왕 보냈다.

[Jihan] ㅎ
[Jihan] 잘 살아있는ㄷ
[Jihan] 아버지한ㅔ 얘기는 잘 들었다만
[Jihan] 왜 이제 연락하냐
[Jihan] 이 오빠 섭섭하다
참나.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타지에서 외롭나 이 인간?

[ㅇㅈㅇ] 자기도 연락안했흐면서


[Jihan] ㅇ... ㅇㅈ
[ㅇㅈㅇ] 그럼 생존신고ㅈ끝
[ㅇㅈㅇ] 안녕
[Jihan] 와... 동생
[Jihan] 매정하네
[Jihan] 오빠 운다
[Jihan] 흑흑

“지랄...”

핫, 본심이 나와 버렸다. 아이들 앞에서는 예쁜 말만 해야 하는데...! 이 인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나는


진짜 카톡을 끄려는 생각이었는데 좀 더 말을 걸어 주었다. 으음... 미안하긴 하니까.

[ㅇㅈㅇ] 됐고
[ㅇㅈㅇ] 올해는 한국 옴?
[Jihan] 여름방학에?
[Jihan] 잠시?
[ㅇㅈㅇ] ???
[ㅇㅈㅇ] 진짜?
[Jihan] 왜
[Jihan] 반응이 떨떠름?
[ㅇㅈㅇ] 아니 그냥? 왜오는데?
[Jihan] 와... 진짜 너무ㅅ하네
[Jihan] 오빠 진짜 운다

오빠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어렸을 때부터 오빠라는 놈 때문에 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ㅇㅈㅇ] 아니... 올거라고는 생각 못해서서


[ㅇㅈㅇ] 작년에는 안와썼자나?
[Jihan] 뭐, 친구들도 보고
[Jihan] 겸사겸사 리그도 보려고

아, 리그. 나는 포켓몬 리그가 막연히 겨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여름에 있더라. 아무래도
스포츠라는 게 동계나 실내가 아니면 여름이 시즌이긴 한데 뭐랄까... 놀랐다. 겨울이 아닌 여름이라니!

들어보니 옆 나라 일본에서는 리그가 두 개 있는데 북쪽 지방에서 한 번, 남쪽 지방에서 한 번 격년으로 번갈아


열린다고 한다. 계절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인 듯. 두 리그가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니라서 챔피언이 2 명이라고
들었다.

[ㅇㅈㅇ] 아, 응 알겠ㅇ
[ㅇㅈㅇ] 그럼 ㅃㅃ
[ㅇㅈㅇ] 곧 더워지는데
[ㅇㅈㅇ] 더위머거
[Jihan] ㅇ... 너도
나는 앱을 껐다. 이제 미안한 마음도 가셨다. 아니 친오빠 동생 사이에 뭔 정이 있다고.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나는 죄책감을 털어버리며 헤헤 웃었다.

친오빠 이름은 이지한이다. 나이는 나와 일곱 살 터울. 현재 일본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지질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중에서 세부 전공은 암석학이던가. 아닌가... 광물학이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터울이 많아서 그런가. 그렇게 엄청 친하다는 느낌은 아니다. 내가 초등학생 때 고등학생이었고 내가


중학생 때 대학생이었고. 내가 고등학생 때는 대학원을 간다며 일본으로 슝- 날아가 버렸다. 아빠가
연구원이라서 그런가. 우리 집안에 연구자의 피가 흐르나?

뭐, 오빠랑 내 관계는 뭐랄까... 일방적으로 오빠가 나를 놀려먹는 느낌? 많이 당했지... 쨌든 가끔 연락하긴


했지만 5 개월 넘게 연락 안 한 거면 좀 심했지? 게다가 새 포켓몬까지 생겼었는데. 좀 섭섭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그러고보니 겸사겸사 그거 물어볼까?

[ㅇㅈㅇ] 아
[ㅇㅈㅇ] 나 달맞이산 갔다가
[ㅇㅈㅇ] 돌 주웠는데
[ㅇㅈㅇ]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달의 돌 사진)
[ㅇㅈㅇ] 달의돌이지롱
[ㅇㅈㅇ] 삐삐 쫓다가
[ㅇㅈㅇ] 삐삐가 흘림

옆에 있는 1 이 사라지지 않다가 내가 읽어라 읽어라 텔레파시를 보내니 오빠가 읽었는지 1 이 사라졌다.

[Jihan] 뭐야
[Jihan] 포켓몬 괴롭히지
[Jihan] 마라

빠직. 이 인간 진짜 말하는 것 좀 보소.

[ㅇㅈㅇ] 안 괴롭혔거든?
[ㅇㅈㅇ] ㅂㄷㅂㄷ
[Jihan] 쨌든 그거 쓰려고?
[ㅇㅈㅇ] 아니
[ㅇㅈㅇ] 으음...
[ㅇㅈㅇ] 달의 돌로 진화하는
[ㅇㅈㅇ] 포켓몬도 없는 걸?
[Jihan] 쓰기엔 좀 아까운데
[ㅇㅈㅇ] ??
[Jihan] 잠시만

나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잔뜩 띄우며 오빠의 톡을 기다렸다. 몇 분 기다렸을까. 괴상한 톡이 나타났다.

[Jihan] 아ㅂ녀ㅏ우ㅁㅊ여ㅏ
[Jihan] ㅊㄱㅅ죄ㅅ
뭐지?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톡을 보냈다

[ㅇㅈㅇ] ?????????????

무슨 일이 있는지 1 이 생겼다가 한참 후에야 없어졌다.

[ㅇㅈㅇ] 무ㅓ야 뭐야머야


[Jihan] 아니
[Jihan] 사겠다는 사람 있으면
[Jihan] 팔래?
[ㅇㅈㅇ] ???
[Jihan] 아마 후하게 쳐줄걸
[Jihan] 아니다
[Jihan] 내가 후하게 팔아줄게

뭔 소리야 갑자기...?

[ㅇㅈㅇ] 그래도
[ㅇㅈㅇ] 언젠간 쓸수도있고?

답장이 없다가 몇분 후에 톡이 울렸다

[Jihan] 다른 달의돌도 구해다준다는데?


[Jihan] 아 글고
[Jihan] 냄새꼬 진화하려면
[Jihan] 돌 필요하지 않아?
[ㅇㅈㅇ] 으음... 그렇긴 하지?

에...? 다른 달의 돌이랑 바꿔주겠다는 건가. 게다가 다른 진화의 돌도 끼워준다고?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돌이었어? 저거?

[Jihan] 쨌든 나 갈때까지 팔지마라

으음... 일단 나는 그러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달의 돌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뭐. 나는 필요가 없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다만... 생각해보면 처음에 돌 보여줬을 때도 잎새랑 오바람이 좋아
보인다고 하긴 했으니까.

쨌든 오빠한테 다른 데에 처분 안 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고 나서야 톡을 그만할 수 있었다. 역시


지질학과인가, 주변에 돌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날씨가 많이 더워지고 있었다.

68 화

w. 도여은
삑- 휘슬 소리가 경쾌하게 파란 하늘을 갈랐다.

“마그케인 시합 불가능. 승자는 이지은.”

체육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함성 소리가 가득 찼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불에


그슬리고도 잘했냐는 듯 뛰어오는 보송송을 안아들었다. 상대방과 악수하고 난 뒤에 내 주변으로 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지은아아! 수고했어!”
“이겼다아아아!”
“다음은 2 반에 애인가?”
“아니 아직 6 반이랑 안 붙었대.”

애들이 이렇게 우승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게 바로 반 대항전 포켓몬 시합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반끼리
붙여놓으면 축구든 피구든 발야구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 으으, 시합을 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런 부담감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

갑자기 반 대항전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다 체육대회 때문이다.

‘에에? 나, 나 말이야?’
‘그럼 여기에 이지은이 또 있겠어?’

학급회의를 진행하는 반장인 잎새가 교탁 앞에서 태연히 말했다. 지지난주에 학급회의 주제는 체육대회였는데...
그래, 이제 곧 다가올 체육대회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즉 누가 반대표로 줄다리기, 줄넘기, 계주, 축구,
피구, 발야구 등등에 주전으로 나갈까 정하는 자리였다. 나는 대충 줄다리기나 피구에 나가려고 했었지만...

‘지은이 배틀 잘 하니까!’
‘맞아. 다른 반 애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는 거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 진예를 포함해서 주변 여자애들도 나보고 나가라고 성화였다. 체육대회의 꽃은 원래
세계만 같았어도 계주였지만... 이곳에서는 역시나 포켓몬 시합이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인 동시에 가장 경쟁적인
종목이었다. 그래서 체육대회 반 대항 포켓몬 시합을 학생들은 이렇게 부른다.

전쟁!
전쟁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넌지시

‘다른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지만,

‘아냐아냐, 체육시간에 진 적도 별로 없잖아? 게다가 3 배지 트레이너니까!’


‘맞아. 빼지 말고~’

으으... 생각보다 3 배지 트레이너가 없었다. 너무 열심히 달렸던 걸지도... 쨌든 반짝반짝한 친구들의


눈동자에 어쩔 수 없이 내 거절은 거절되어버렸다. 잎새는 웃으면서 포켓몬 배틀에 나갈 사람 이름을 칠판 위에
적었다. 내 이름과 또 다른 남자애의 이름이었다.

‘그럼, 이렇게 나가게 될 거라고 체육 선생님한테 전달할게.’

잎새 목소리가 즐거워보였다면 착각일까... 쨌든 여기가 포켓몬 세계인 이상 포켓몬 배틀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체육대회 종목으로 있을 줄이야. 거기다 예선을 나눠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었다.

한 반에 두 명이 출전해서 A 전 B 전으로 한 반에 한 명씩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서 준결승전을 하고 거기서


우승한 두 사람이 결승전을 하게 된다.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의 수는 세 마리. 예선은 체육대회 전까지
점심시간을 틈타 하게 되고 준결승전과 결승전은 체육대회 당일날 하게 된다. 준결승전은 체육대회를 시작하는 첫
번째 순서로, 결승전은 체육대회를 끝내는 마지막 순서로 진행된다.

이 행사는 체육대회를 기다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며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된다. 아무래도
여기서 이긴다는 건 우리 학교에서 2 학년 중에서 가장 강한 트레이너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 시합의 대상은 2 학년들인데, 1 학년은 아직 포켓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고 3 학년은 학생들 사이에
격차가 너무 많이 난다나. 게다가 고 3 은 건드리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으니... 게다가 3 학년 중에는 리그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곧 여름방학이니까 지금은 더 그렇지...?

뭐, 뿐만 아니라 3 학년 쯤 되면 포켓몬들이 강해져서 배틀하면 운동장 정리하기가 더 힘들어진다고 하더라.


하긴 파도타기 한 번만 써도 운동장이 물바다가 될 테니까. 역시 체육대회 수준으로 하려면 지금 때가 딱
좋으려나 싶다. 1 월부터 길러온 포켓몬을 다섯 달 동안 얼마나 잘 키워왔는지 겨룰 수 있으니. 게다가
포켓몬들도 아직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니까.

쨌든 반대표인 남자애는 A 전에 들어가고 나는 B 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3 번 이기면 체육대회 날에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까 방금을 포함해서 2 번 이겼으니까 이제 준결승 진출이었다. 뭐, 준결승이라기에는 참가
인원이 적은 것 같긴 하지마는...

“수고했어. 지은아.”

옆으로 잎새가 다가왔고 나와 잎새는 포켓몬을 회복하기 위해서 보건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진짜 질 뻔했어.”
“에에, 이겨놓고는 엄살은.”

잎새가 쿡쿡 웃었지만 나는 웃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아니 첫 포켓몬이 풀 포켓몬일 건 뭐야. 나는 걔가 스타팅으로 브케인을 받았다기에 젤 처음으로 꺼낼 줄


알았는데...”
“그래서 누오를 꺼낸 거였지?”
“응... 한 방에 순삭...”

잎새가 못 참겠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으으, 진짜 심각했다고. 어찌어찌 이기긴 했지만.”


“잘했어, 잘했어.”
“뭐, 내가 잘 한 게 아니라 애들이 잘 해준 건걸. 그렇지, 보송송?”
song~ song~

보송송은 털이 그을린 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아마 10 만볼트를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지난번에 인천대 체육관에서 받은 10 만볼트 기술머신을 보송송에게 사용했었다. 포켓몬 센터에서 기계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동그란 홈이 파여져 있고 투명한 플라스틱 덮개가 있는 기계였다. 작동법은 생각보다 간단해서
놀랐다. 보송송이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동그란 홈에 얹고 덮개를 덮은 뒤, CD 룸에 기술머신 CD 를 먹이고
기다리면 끝이었다...!

아쉽지만 게임 속 기술머신처럼 기술머신 사용하자마자 10 만볼트! 냉동빔! 지진! 이런 건 아니었다.


포켓몬에게 사용하게 되면 그 포켓몬이 그 기술을 배우는데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나 할까. 아하...! 라는
느낌이라던가.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힌트를 가지고 단련을 했을 때야 비로소 그 기술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모양이다. 마치
유전기가 가만히 있으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포켓몬에 비해 쉽게 습득된다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서 같은 기술머신이라고 해서 모든 포켓몬이 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아, 다행히 기술머신을 쓴다고 알던 기술을 까먹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 기술머신 CD 도 사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잘못 쓰면 진짜 백치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처음 기술머신이 나왔을 때는 일회용이었는데 지금은 최대 3 회까지 안전하게 쓸 수 있다고 하던가? 그런데 3 번


이상 써도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중고거래 같은 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초기에 3 회 이상 사용한 기술머신을 누군가 중고장터에 팔아서 피해자가 속출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믿을만한
사람의 기술머신을 사는 것 말고는 대체로 체육관에서 받거나 정품 회사에서 비싸게 사는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암암리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3 번 이상이 표가 안 나게 한다고
하기도... 진짜로 그렇다면 좀 무섭겠지만.

쨌든 기술머신을 사용한 다음에 몬스터볼에서 꺼냈을 때, 보송송이 얼른 훈련하러 가자고 얼마나 보채던지.
빨리 무언가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10 만볼트는 전기쇼크와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는
기술이었기 때문인지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술머신의 힘이란 대단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기 사용 능력이 확실히 늘었다고 해야
하나. 마치 만화책에 보면 기혈을 뚫어서 막 짱짱쎄짐! 이런 느낌? 이래서 큰 돈 주고 기술머신 사는구나 싶었다.

“얼른 점심 먹어야지. 빨리 가자!”

나는 잎새의 재촉에 발을 빨리했다. 그리고 보건실에 가서 포켓몬을 맡기고 나왔다. 생각보다 배틀이라는 건
팍팍 파바박 하면 끝나는 느낌도 조금 있는 것 같다. 오늘의 누오처럼... 또륵... 뭔가 좀 비슷해야 어찌어찌
할 수나 있을 텐데. 역시 상성과 레벨이 최고라는 건가. 포켓몬스터 게임의 본질은 역시 어디 가지 않는 걸까.

예선전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치러졌기 때문에 배틀이 끝나고 나면 보건실에 맡기고 밥을 먹으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 배틀을 하면 기술 폭이 늘어난 것과 비례해서 예전과 다르게 애들이 많이 다쳐서 슬픈 기분이야.
좀 더 과격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치료받는데 시간이 꽤 걸리게 되었다.

떨어지기 싫다고 보송송이 칭얼댔지만 잘 달래서 맡기고는 보건실을 나왔다. 이정도면 진짜 장족의 발전이야.
메리프가 태어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기까지는 거의 옆에서 떨어지지를 않으려고 했으니까. 다행히 아빠의
마기라스와 훈련하기 시작한 후로부터는 꽤 떨어져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탈의실로 가 체육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요즘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더니 어느샌가 모든


학생이 하복을 입고 있다. 햇볕이 따가워서일까. 계절이 바뀌어 벌써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게 오늘따라 새롭게
다가왔다.

잎새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 우리 반이 있는 층수에 도착했다. 저기 복도 창가에 기대서 서있는 오바람과


한지우가 보였다.

69 화

w. 도여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우리였는데, 그건 한지우가 우리 점심팸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도 같이 밥 먹고 싶다는데. 괜찮을까.’

그 날이 있었던 그 다음 날인 월요일. 씩 웃으며 나타난 오바람 옆에는 한지우가 있었다. 오바람에게


어깨동무를 당한 채 한지우는 조금 멋쩍은 표정이었는데, 반박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억지로 끌려온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었는데 솔직히 그날 새벽이 있었던 사건을 나는 반쯤 꿈처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잖은가 사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순간들. 그래서 그 순간 뭐랄까... 잠결에
무언가가 입안에 들어왔는데 그게 얼음조각이었다는 느낌? 갑자기 현실 세계로 훅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조금 민망한 느낌이었지.

그래도 한지우는 아니지만 녀석의 피카츄가 거의 맨날 이곳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사실상 점심팸이었기도


했거니와, 제일 처음에도 같이 밥 먹었지 않은가.

좀 싸웠다고 하긴 애매하고... 음... 오해가 있었긴 했지만 그날 어물어물 잘 마무리되었기도 했고. 사과도
받았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잎새가 반대했었다. 그것도 대놓고.

‘싫은데.’
‘엑, 왜.’

잎새의 싫다는 말에 당황한 건 한지우라기보다는 오바람이었는데 내 생각에는 오바람은 무난히 같이 밥 먹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싫은데, 싫은데, 시른데시른데시른데에에!’

그리고 잎새는 내 팔을 끌어당겨 안으면서

‘지은이한테 사과 안 하면 무조건 싫어!’

그렇게 말하는데, 그 순간 파아아앗 하고 잎새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지. 핫, 솔직히 설렜다...! 우으 새


내가 한지우놈에게 당했던 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 대신 화내 줬어...! 게다가 뾰루퉁한 얼굴이 미모를
감추지 못해 빛이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잎새는 여신급 미모인 것 같아.
나는 전날 어찌어찌해서 사과를 받았다고 오해가 있었던 거였다고 잎새를 설득했지만 잎새는 여전히 싫은
표정이었다.

결국 잎새가 ‘내 앞에서 사과해! 고개 숙여 사과해!’라고 한지우를 반쯤 농담조로 협박했는데, 더 놀라웠던 건


한지우가 진짜 90 도로 고개 숙여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했다는 점이었다. 그에 나도 허둥지둥 마주 고개
숙이며 ‘아닙니다.’했다는 이야기. 결과적으로 훈훈한 결말. 그렇게 해서 한지우는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

쨌든 나와 잎새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오바람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어보였다.

“배틀 잘 봤다. 축하!”

가까이 다가가자 오바람이 말하며 두 손을 들기에 나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짝 소리나게


하이파이브했다. 그에 옆에서도 한지우가 한 손을 들기에 거기에도 손을 마주쳤고 옆에서 잎새도 “나도 나도!”
하며 손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치며 같이 웃었다.

한지우라는 녀석은 생각과는 조금 다른 타입이었다. 사실 냉랭하게 노려보는 시선만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부드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인상은 차갑지만 말이지.

으음... 정말로 같이 밥을 먹게 되었을 때는 조금 긴장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까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관찰한 결과 나는 녀석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데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점. 대신 말을 적게 하는 대신 촌철살인 같은 말을 날린다거나. 또는,

‘하핫, 이 몸이 또 중간고사에서 1 등을 했다는 거 아니냐!’


‘...작작해라.’
‘뭐, 이 자식이.’

오바람이 잘난 척을 하면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준다거나 그런 것? 꽤나 오바람과 투닥투닥하면서도 잘 지낸다고


해야 할까나. 표정도 미세한 변화지만 다양하고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가식이 없는 느낌. 특히 오바람에게 짓는
비웃음은 더더욱?

정리해보면 마치 길고양이 같은 느낌이다. 친해지기 전에는 하악 거리면서 털을 세우더니 친해지고 나면


은근슬쩍 다가와 벌러덩 배를 보이는 모습? 아니, 너무 갔나? 다리에 뺨을 비빈다거나. 아니 이건 한지우하고
전혀 안 어울리는데?

뭐, 그런 건 아니겠지만 방금처럼 하이파이브를 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뭔가 서로 비밀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이제 차갑게 쏘아보지 않아서일까나. 또 잎새는 누구 하고나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점심시간의 분위기가 편했던 점도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돗자리하고 도시락 들고 올게.”

나와 잎새는 반에 들어가 도시락과 돗자리를 챙겨서 나왔다. 교실을 나오자마자 밖으로 향하면서 오바람이 배틀
얘기를 꺼냈다.

“초반엔 운이 안 좋더라?”

우으, 입을 떼자마자 그 소리냐.


“아무래도 마그케인이 먼저 나올 줄 알았지.”
“으음... 하긴 그 애 주력이 마그케인이었으니까.”
“...보송송이 나았을지도.”

한지우가 말을 보탰다. 나는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걔 포켓몬들이 풀, 노말, 불꽃이었으니까. 풀에 약점 찔리는 누오나 불꽃에 찔리는 냄새꼬보다는


보송송이 안전하긴 했지. 그래도 위험을 감수할 만했어. 걔는 보통 마그케인을 제일 먼저 꺼낸다고들 하던 걸.
예선 1 차 때에도 그랬고...”
“일부러 말 흘린 거 아냐?”

오바람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설마. 이게 뭐라고 그런 말을 흘리겠어. 그 정도면 거의 뒷공작 수준인데...”

나는 갑자기 조용해지는 분위기에 나만 앞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았다.

“속았다.”
“속았군.”

충격을 받은 듯한 잎새 그리고 그 말을 받은 오바람. 거기에 한지우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4 반 애들까지 끌어들이다니!”

특히나 잎새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4 반이면 그 애들하고 체육 시간이 겹치는 반인가...?

“그래. 왠지 수상쩍다 했어. 으으... 미안해, 지은아아아. 내가 좀 더 치밀했어야 했는데... 두 반 전체가


짜고 소문을 흘릴 줄이야...!”

치밀해져? 여기서 더 어떻게... 나는 더 치밀해지는 잎새는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 설마 그래도 그 정도까지 할까봐.”

내 말에 잎새가 나를 폭삭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은아, 너는 내가 지켜줄게...!”
“에, 왜, 뭐...! 진짜 이게 뭐라고 그래.”

거의 나를 무슨 순진함의 대명사로 보는 눈빛이야?

“아니, 그래도 체육대회일 뿐인데 그 정도까지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당황한 내 말에 대답한 건 담담한 한지우의 말이었고, 남은 두 명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전쟁이니까.”
“전쟁이지.”
“전쟁이고말고.”

아... 네...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여기가 포켓몬 월드라는 걸.


70 화

w. 도여은

그렇게 뭘 모르는 애 취급을 받으면서 점심 먹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포켓몬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참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서 상식이 부족하긴 했지만... 으으 뭔가 억울하다...!

우리는 자리를 깔고 포켓몬을 꺼냈는데 나만 아무도 없어서 외로운 느낌이었다. 보건실에 맡겨놓은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많이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이젠 조금만 옆에 없어도 허전하다니까.

나는 그런 자조를 하면서 도시락을 꺼냈다. 오바람은 오늘은 옆에 블래키만 대동했다. 이브이 얼른 진화하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래키로 진화할 수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까만 털에 노란 고리는 참 예쁘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밤이 되면 빛난다고 하는데 보고 싶다.


물론 오바람을 밤에 만날 일은 없겠지만. 나도 야자 안 하고 녀석도 안 하는 것 같으니.

한지우는 대체로 포켓몬을 다 데리고 다니는 편이라 오늘도 와글와글했다. 물론 아직 다 최종 진화는 하지는
않아서 크기가 크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지난번 한지우와 화해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파이리는 다행히도 회복이 잘 되었다. 한지우가 고개 숙여 사과한
그날 점심을 먹으면서 파이리를 볼 수 있었는데, 상처투성이에 먼지 투성이었던 파이리는 상처가 아물고 깨끗이
씻겨두자 참으로 어여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격은 내가 봤던 첫인상과 다르지 않아서 잎새가 ‘예쁘다아.’ 하면서 손을 뻗자 휙 고개를 돌리면서
그 손길을 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낯가림이 심한 새초롬한 소녀 같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파이리가 쭈뼛쭈뼛 다가와서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때 그 느낌은...! 진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느낌이었다.

‘저 녀석 나한테는 아직도 으르렁거리면서...!’

오바람이 배신감에 몸서리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파이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보송송이 질투해버려서 결국 다른 쪽 허벅지엔 보송송을 누이고 같이 쓰담쓰담 했었지. 흐아, 이게
낙원입니다!

그랬던 파이리가 그 날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화를 했었다. 리자드로 진화를 했지만 그 예쁨은 어디 가지 않았다!
위험함을 강조하는 듯한 꼬리 불꽃과 목부터 꼬리까지 잘 빠진 옆태도 그러했지만, 저 요염한 눈매가...!
포켓몬을 보면서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라 좀 놀랐었다. 마치
고양이는 다 귀엽고 예쁘지만 그중에서도 미묘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물론 성깔이 있어서 그림의 떡이라는 것도 닮았다! 그래도 내 앞에선 좀 으르렁대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행복하지만. 헤헤. 쨌든 한지우와는 사이가 많이 좋은 모양이었다. 리자드가 한지우를 올려다보는 모습에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해 보였으니까. 상처받았던 것이 많이 회복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리자몽이 되면 인기 엄청 많아지지 않을까.”

내가 리자드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말하자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리자드에게로 향했다.

“흐음... 지금도 인기 많지 않아? 연구소에서?”


“그렇긴 한데, 주변에 별로 관심은 없지.”

잎새가 말하고 오바람이 받았다. 하긴 리자드 인기 많지. 사실 어니부기도 미인계로 데려왔다고 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나는 어니부기를 봤다. 좀 터프한 어니부기인데 처음에 데려왔을 때 나나 잎새나 깜짝 놀랐었지.

‘도대체 그 구하기 힘들다는 스타팅 포켓몬을 어떻게 매번 데려오는거야?’

참으로 신기하다면서 잎새가 말하자 오바람이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었다.

‘목숨과 맞바꿔서 얻어왔지.’


‘에?’
‘며칠 전에 화재 일어났었던 거 기억나?’

화재라면 한지우가 어니부기를 데려오기 이틀 전 쯤에 크게 난 것이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에 아파트


창문 밖으로 내다보니 연기가 풀풀 올라오는 게 보였으니까 꽤 큰 화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거기에 포켓몬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그게 인연이 되서 데려왔다더라. 소방서에서 키우는 포켓몬들 중


하나라고... 에휴, 물에 쫄딱 젖고 불에 그슬린 채로 집에 와서 얼마나 놀랐는데...’

나랑 잎새가 경악에 한지우를 보니 그는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어.’
‘네가 진정 미친 건 알고 있었지만...’

나와 잎새가 그렇게 말하자 피카츄가 한숨을 내쉬더라. 사실 피카츄가 진짜 보모일지도 몰라. 트레이너 잘못
만나서 얼마나 고생이 많니. 저 녀석 막무가내인 줄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인연이라면 리자드 쪽이라서.’

한지우 말을 들어보니 반쯤은 어니부기가 리자드한테 반해서 라는 것 같더라. 리자드로 막 진화했을 때 예쁘긴
했었지. 쨌든 ‘주변에 관심은 없지만’이라는 말에는 안타깝게도 저 어니부기가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만.

쨌든 어니부기는 꽤나 성격이 활발한 편이더라. 아, 전에 예선 시합 보니까 어니부기가 시합에서는 물불 안


가리는 편에다가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 나가는 타입? 파워는 높은데 정확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분명
성급한 성격이로다!

그런 어니부기가 리자드에게도 물불 안 가리듯 대쉬하는데 별로 효과는 없는 듯했다. 쨌든 우리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어니부기를 쳐다봤는데 잎새가 진지하게 말했다.

“역시 알을 만든다면 역시 한지우가 아빠일까.”

컥, 나는 먹다가 목에 걸려서 켁켁거렸다. 아니, 포켓몬 알은 생식이라기보다는 창조에 가깝다지만 말이 심한


거 아닙니까. 콜록거리면서 보니 한지우 표정이 썩 안 좋은데... 그에 그치지 않고 오바람이 하는 말에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오! 그렇다면 유전기는 배북인가!”
“...배북이 뭔지 보여줘?”

녀석에 말에 내가 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배북. 자신의 HP 의 반을 써서 공격을 최대로 올리는 기술. 싸늘한
눈빛으로 한지우가 쳐다보는데도 오바람은 움츠리는 기색도 없이 킬킬거렸다.

“역린일지도...!”

역린. 두세 턴 동안 마구 난동 부려 공격하고 혼란에 빠지는 기술. 그에 한지우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오바람도 덩달아 일어나려 무릎을 세웠다.

“싸움이냐! 배틀이냐!”
“뭐든.”
“바라던 바다!”

씩 웃는 두 사람을 웃으며 막은 건 잎새였다.

“네, 다음 손님~ 싸움은 다른 데서 하시죠.”

온건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하핫...

“그럼 승부는 체육대회 때 가리자! 뭐, 물론 나님이 이기겠지만.”

오바람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다말고 한지우를 가리키면서 말하자 잎새가 자기 젓가락으로 그 젓가락을 탁 하고


쳐냈다.

“참나, 네가 마치 B 전 우승이라도 한 줄 알겠다? 아직 1 차전밖에 안 했으면서?”


“2 차전도 이 오바람님의 승리 아니겠어?”
“퍽이나.”

오바람이 우쭐거리며 말하고 잎새는 짜게 식은 얼굴로 쳐다봤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보고 있었는데 잎새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은아! 웃음이 나와? 저거 완전 선전포고라고!”


“에? 뭐가?”
“뭐긴 뭐야. 너가 오늘 2 차전 이겼으니까 준결승 진출이잖아! 저 녀석 지금 너 따위는 그냥 이긴다고 얘기한
거라고!”
“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오바람이 끼어들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번에 한지우랑 오바람 둘 다 체육대회에 반대표로 나가니까. 6 반 A 전
예선에 한지우가 나가고 B 전 예선에는 오바람이니까... 체육대회 때 붙는다는 건 둘이 결승에 올라가겠다는 거고
내가 준결승전에 올라가게 되었으니까...? 나 오바람이랑 시합하는 건가!

“지은아아아, 뭐가 ‘아, 맞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어어!”


“에, 오늘 시합만 생각하느라 다음 시합은 생각도 안 했...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우승을 염두해두고 왔다기보다는 등 떠밀려서 열심히 하고 있는 느낌이라서...


으음... 이긴 건 역시 포켓몬들이 강해서 인 것 같다.
“저 따위 녀석한테는 지면 안 돼!”
“아니, 저 따위라니...!”
“흥. 오바람 주제에. 2 차전에서 떨어져 버려라!”
“뭐? 참나, 다음 주 월요일에 시합이니까 떨어지는지 붙는지 구경이나 오시던가.”

다음주 월요일이면... 진짜 체육대회 별로 안 남았네. 금요일인 내일 봉사활동이 있고 다음 주 목요일은


현충일이니까, 그 다음 날인 금요일에 체육대회다. 후아, 벌써 6 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71 화

w. 도여은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와 달리 교외 활동이 많은 편이다. 자매결연 단체도 많고.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금요일


오후에 부서활동과 봉사활동을 가게 된다. 봉사활동은 양로원, 장애인 분들이 계시는 사랑의 집이나 주변 문화재
청소도 간다. 이번에는 양로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사실 가면 청소하고 빨래하고 남는 시간에는 어르신들과
얘기하고 오는 정도이다.

“흐아아아차!”

나는 빨래줄에 힘껏 이불보를 올렸다. 그리고 옆으로 착착 펴주고. 조를 나눠서 담당을 하는데 오늘 내가


들어간 조는 빨래였다. 힘들지만 다행히도 촉촉한 빨래 냄새가 좋아 그나마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잎새와 다른 애들 몇몇이 바구니를 들고 왔다. 주변에서 한숨과 탄식이 쏟아졌지만 그래도 이내 손을 움직여서
두 명씩 짝을 맞춰서 털고 널고 펴주고를 반복하니 곧 끝이 났다.

“힘들었다아.”

우리는 땡볕을 피해 건물 벽 그늘로 몸을 피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


“안에 청소 남은 것 시키려나?”

그 말에 빨래를 가지러 안에 들어갔다 왔었던 잎새가 말했다.

“안에 청소 끝났던 걸? 들어가서 버스 올 때까지 어르신들하고 얘기만 하다가 가면 돼.”


“후아... 그래도 쉬었다가 들어가자. 힘들었어...”

진예의 말에 애들은 그러자 하면서도 놀려댔다.

“우쭈쭈 우리 쪼꼬미 찐예 힘들어쪄여?”


“빨래줄이 너무 높아쪄여?”
“아씨, 놀리지 마아!”
키 작은 진예를 놀리며 애들이 낄낄대는 사이 나는 잎새한테 말했다.

“나는 여기 조금만 둘러보다 들어갈게.”


“응. 별로 상관은 없지만, 왜?”
“정원이 잘 돼 있어서 구경 좀 하다가 들어가려구.”
“알았어. 기다릴까?”
“아니아니, 애들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 알아서 들어갈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스리슬쩍 무리를 빠져나왔다. 애들이 찾으면 잎새가 얘기해줄 테니까. 하지만 이유는 정원
구경에 있지는 않았다. 물론 이 시설 자체가 산속에 있는 데다가 어르신들이 산책을 많이 하시는지 정원이 잘
꾸며져 있긴 했지만 말이지.

“분명 뭔가 지나갔었는데?”

빨래를 하던 도중에 뒤쪽에 숲에서 바스락거리면서 무언가가 쉭- 하고 지나갔던 것 같았단 말이다. 포켓몬이
아니었을까? 애들도 쉬었다가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조금 호기심을 충족하다 들어가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포켓몬이 움직였을 것으로 보이는 산 입구 근처에 어슬렁거리니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튀어나왔다?!
보라색 몸집에 뾰족한 뿔, 커다란 귀, 날카로운 눈을 가진, 니드리노다!

Niiiiiid

니드리노는 실제로 처음 봤다. 2 학년 중에 니드런을 진화시킨 애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론 보지 못해서
말이지...! 실제로는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태평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닌가?!

니드리노가 땅을 긁으면서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배틀인가...! 나는 급하게 뒷걸음쳐 거리를 벌리면서
주머니에서 몬스터볼을 꺼내는데 아차, 갑작스런 공격태세에 당황해서 몬스터볼을 셋 다 떨어뜨려 버렸다.

펑펑펑,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내 주위로 다 튀어나왔는데... 아니 나는 정정당당하게 1 대 1 을 원하는데,


다굴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니드리노는 다 덤벼, 라는 눈빛으로 씩 웃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누오, 보송송, 냄새꼬를 차례로 훑는가 싶더니,

Niiiid nidnidnid

뭐라고 하는 말이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 니드리노는 냄새꼬에게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았는데 냄새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엄청 열받은 모습인데? 뭐지, 니드리노가 뽐내기라도 사용한 건가? 도대체 뭐라고
말한 거야?

나는 냄새꼬가 앞으로 나가자 몸을 숙여 그나마 제일 말이 잘 통하는 누오에게 물었다. 쟤 뭐라고 한 거야?


그랬더니 누오가 하는 말이 니드리노가 말하기를 ‘엄청 조그만 게 니가 젤 약하냐? 너같이 작은 냄새꼬는 처음
보는구만.’ 이라고 했다고...?

발끈할 만한데?

나는 한 번도 냄새꼬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걸 깨닫게 된 건 최근의 일로, 이번 달에


부서활동으로 유기포켓몬보호센터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수정언니에게 냄새꼬가 많이 회복된 것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갔었는데, 언니가 이리저리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지 뭔가.
‘으음... 아직도 좀 작네.’
‘네? 작아요?’
‘아무래도 냄새꼬 평균키가 80 센치정도니까.’
‘네에? 그렇게 크다구요?’

나는 그 때 냄새꼬가 그렇게 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주변에 냄새꼬를 키우는 애들이 별로 없었기도 했고.
아무래도 뚜벅쵸는 귀엽지만 냄새꼬는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쨌든 평균이 80 이라면 많이 쳐봤자 65
간당간당한 우리 냄새꼬는 작은 편이긴 하지...?

‘역시 진화하고 초반에 영양공급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심각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으음,
선천적으로 작을 수도 있지만.’

하긴 메리프에서 보송송으로 진화했을 때나 우파에서 누오로 진화했을 때 보면 진화하고 난 뒤에 키가 조금씩 더


크긴 했었다. 보송송도 키가 내 허벅지 위쯤에서 이제는 골반까지 닿을 정도로 커졌으니까. 으음... 내 키가
165 정도 되니까. 보송송 키가 80 쯤 되는 건가?

걱정했지만 그래도 몸집이 작은 게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작은 게 품에도 쏙 들어오고 해서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누오가 키가 90 정도 되는구나. 내 허리쯤 오니까.

흐음... 냄새꼬가 신경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렇게 냉정한 냄새꼬가 발끈할 정도면, 게다가 저
니드리노 시비 거는 스킬이 만만찮은걸?

“냄새꼬, 진정해. 말려들면 안 된다고!”

내 말에 냄새꼬가 쉼호흡을 하며 진정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모습에서 너 죽고 나 살자의


기운이 풀풀 뿜어 나오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으으, 키 얘기는 예민하다구요...!

그래도 배틀은 배틀. 저것도 기술이다. 아마 ‘부추기기’가 아닐까. 상대방을 혼란시키고 특공을 올리는
기술이지. 그러니까 완전 혼란까지 아니니 조금은 특공이 올랐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열받아서 올랐을지도...
쨌든 일단은

“수면가루야!”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냄새꼬는 꽃봉오리를 살짝 떨며 가루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니드리노는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뿔찌르기인가? 독찌르기는 아니겠지? 독찌르기면 레벨 차이가...

“앗!”

그런 생각도 하기 전에 갑자기 옆에서 바람이 크게 불었다. 안 돼. 가루기술이...! 그 사이에 니드리노는


달려들어 냄새꼬를 가격했다. 냄새꼬는 구르듯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독찌르기까지는 아닌 듯. 뿔찌르기인가
보다.

“기가드레인!”

최근에 메가드레인을 기가드레인으로 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니드리노의 몸에서 초록 구체가 떠올라 냄새꼬에게
흡수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그 양이 적었다. 역시 반감인가. 그에 기분은 좋지 않은지 니드리노가 몸을 한 번
푸르르 떨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마구찌르기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에 겨우 피했다. 그러니까 세 번 맞았다. 나는 그


사이에 용해액을 지시했고 용해액을 맞은 니드리노가 뒤로 물러났지만 그뿐이었다.

단일 독타입인 니드리노에게 풀/독 타입인 냄새꼬의 기술은 둘다 반감이야. 하지만 독타입은 냄새꼬에게 1 배,
그리고 니드리노가 사용하는 마구찌르기나 뿔찌르기가 노말 타입이긴 해도... 벌써 냄새꼬는 지친 모습이고.

“기가드레인!”

으으, 상성 반감이 너무 뼈아프다. 한 대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상은... 아,


그런데 저 니드리노 공격이 왜 이렇게 센 거 같지. 혹시... 특성이 독가시가 아니라 투쟁심인가?! 설마 그래서
냄새꼬 도발한 건가! 누오랑 보송송은 암컷이라서...?!

잠깐, 특성? 특성이면...!

니드리노는 기가드레인에 조금 괴로워하면서도 다시금 달려들 태세를 갖추었다. 달려들기 전에, 그래, 특성이야.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냄새꼬, 악취를 내뿜어!”

냄새꼬의 뒷모습이 움찔했다.

“괜찮다니까! 얼른!”

니드리노가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뿔찌르기? 아니면 마구찌르기? 그것보다, 냄새꼬! 말 좀 들어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나는 그 전까지 냄새꼬의 특성이 엽록소인 줄 알았다. 일반적으로 뚜벅쵸 계열은
특성이 엽록소니까. 하지만 수정 언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었다.

‘특성이 엽록소가 맞냐고요? 그야... 당연히...’

생각해보니까 날이 쨍쨍한 날에 발걸음이 빨라지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도 특성이 엽록소가 아니면...

‘설마, 숨겨진 특성이요?’

드림 특성, 숨특, 드특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아주 적은 확률로 포켓몬에게 나타나는 일반 특성이 아닌 특성을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냄새꼬가 숨겨진 특성을 가졌다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분명 확률 상 적으니까.

‘냄새꼬의 숨겨진 특성은 악취지. 접촉하는 포켓몬을 가끔 풀죽게 만드는 특성이야.’


‘하지만 지금은 악취가 나지 않는 걸요. 게다가 배틀에서 그런 특성이 나타난 적도 없었구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수정 언니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살짝 눈썹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내 생각에는 냄새꼬가 일부러 특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별로 좋은 기억은 없을 테니까.’

그 말에 나는 냄새꼬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심각한 악취 때문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에 있었던


냄새꼬. 진화하자 악취 때문에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고 했던 수정 언니의 말.

언니는 아무래도 특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테니까 한 번 알아보라고 했었다. 특성은
보송송의 정전기 같이 대체로 배틀 상황에서 발생시키는데 아무래도 얘기를 들어보니까 배틀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그 말에 나도 걱정이 되서 특성을 확인하려고 아빠의 가디를 데리고 공원으로 나갔었다. 아빠 가디 쾌청까지
배우고 있을 줄이야. 쨌든 가디는 하늘을 향해 불꽃이 섞인 숨을 뱉었고 갑자기 주변 온도가 후끈해짐이 느껴졌다.

‘냄새꼬 한 번 저기서 여기까지 뛰어볼래?’

내 말의 의도를 알았는지 숨겨진 특성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건지 냄새꼬는 열심히 뛰었지만... 아무래도 특성이
악취가 맞는 것 같았다. 스피드가 별로 다르지 않은 걸? 나는 기뻐하면서 특성의 발견을 얘기했지만 냄새꼬는
싫어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악취면 배틀에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쾌청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성보다는 훨씬 좋은


걸?’

왜냐하면 쾌청을 쓰면 불 포켓몬이 날뛰기 때문에 위험하기 때문이지... 쨌든 내 말에도 냄새꼬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냄새꼬. 평소가 아니라 배틀에서는 어때? 배틀에서는 괜찮지 않을까?’

그 말에도 냄새꼬는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괜찮아. 내가 너 싫어할까 봐 그래?’

냄새꼬가 입을 꾹 다물고 바닥을 노려봤다. 정답인가보다. 나는 냄새꼬를 안아 들고 말했다. 괜찮다고,


냄새난다고 싫어질 것 같으면 데려오지 않았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냄새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었다.

나는 소리쳤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봐! 괜찮아. 싫어하지 않아.”

내 외침과 함께 니드리노가 냄새꼬에게 달려들었다. 마구찌르기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공격 빗나갔다.


휘청하더니 잔뜩 찡그리더니 뒤로 물러가는 모습. 됐다! 니드리노가 잠시 풀죽었어!

“달의 불빛!”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동시에 냄새꼬의 몸에 빛이 났다. 체력이 차오르고. 거기에다가 기가드레인이야!


냄새꼬에게 초록 구체가 쏙쏙 흡수되었다. 니드리노는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해왔지만 방금 풀죽은 것 때문일까.
처음보다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에 틈을 봐서 수면가루를 먹이고 잠든 니드리노의 체력을 쪽쪽 빨아먹었다. 결국 니드리노는 리타이어.


냄새꼬는 언제 상처가 났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역시 이 맛에 풀 포켓몬 쓰는 거지. 씨뿌리기도 배우면
참 좋을 텐데. 독 걸고 씨 뿌리고 기가드레인 쓰면 정말 좋겠다.

그런 생각은 잠시 제쳐두고. 나는 냄새꼬에게 팔을 벌렸다.

“멋졌어! 냄새꼬, 이리와!”

에, 냄새꼬가 뒷걸음질 친다? 당황한 내가 앞으로 발을 내딛으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도리질
치면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났어...?

“냄새 때문에 그래? 괜찮대두?”


공기 중에 악취가 나긴 했지만 진짜로 괜찮았다. 냄새꼬를 데려가려고 자주 갔었을 때 적응됐기도 했고. 문제는
냄새꼬가 괜찮지 않다는 걸까... 냄새꼬가 나를 거부하고 있어... 완전 상처받고 있다고...!

“이리와, 냄새꼬. 난 네 냄새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구!”

도리도리

“진짜야.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거야!”

도리도리도리

내가 울먹울먹하자 냄새꼬도 움찔했는데도 내게로 올 기미가 없다. 난 상처 난 가슴을 부여잡으며 강제로라도


안고 말겠어! 라는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옆을 보니 누오였다. 누오는 팔을 들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왜? 쨍쨍한데? 그런데 우리 위쪽에


스믈스믈 먹구름이 생겼다. 이건 며칠 전부터 누오와 함께 계속 연습하고 있던 비바라기였다. 매번 먹구름만
생기고 비가 안 왔었는데.

아, 차갑다.

쏟아지는 비까지는 아니었지만 한 방울, 두 방울씩 이슬비가 촉촉히 머리 위로 내렸다. 낮에 내리는 비가


햇볕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비가 공기 중에 있는 냄새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 누오의 뜻이 이거구나.

나는 내리는 비처럼 한 걸음 두 걸음씩 천천히 냄새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괜찮아. 네가 어떤 상태라도.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네 곁에 있을게. 지금처럼.

나는 빗물 먹은 풀 바닥에 무릎을 대고 몸을 숙여 냄새꼬를 꼭 안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 자그마한 몸을


들어 올렸다. 아직 연습 단계의 비바라기라서 그런지 이르게 비가 그쳤다.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냄새꼬의 꽃봉오리에 입을 맞췄다.

물을 머금은 흙내음이 났다.

72 화

w. 도여은

내가 헤실거리며 냄새꼬를 안고 있자 이번에는 보송송이 나를 툭툭 쳤다. 내가 보송송을 내려다보니 보송송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팔을 들어 내 옆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쪽을 보니,

“으에에에...?!”

옆에는 나인테일을 대동한 어떤 할아버지가 정자 그늘에 앉아서 여길 보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쏠렸다. 다 보신 건가! 내가 냄새꼬에게 구애하는 것도 다 보신 건가...! 으으... 심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랑 눈이 마주쳤어...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인자하게 웃으시는 할아버지... 그 옆에 지팡이가
기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윽, 도망칠 수 없다. 나는 포켓몬을 데리고 그 쪽으로 다가가 인사드렸다.

“오늘 봉사활동 온 학생인가 봐?”


“네, 맞아요. 할아버지. 저... 혹시... 다 보셨어요...?”

내가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야기 하자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럼고럼. 다 봤지. 포켓몬을 다루는 실력이 엄청나던 걸?”

흐아아앗. 다 보셨어...! 나는 다시금 얼굴이 화끈화끈 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덥냐. 내가
손부채질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말했다.

“거참. 저 니드리노 우리 나인테일한테 매번 찾아오는 녀석이거든.”


“아, 정말요?”
“아암. 매번 지지만 꼭 이길 거라고 찾아오는 녀석인데 말이야.”

니드리노는 여전히 지척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자기 얘기가 들린 건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푸드득 털더니 이쪽으로 터덜터덜 다가왔다. 온몸에 힘이 없는 듯 할아버지 발치에 풀썩
드러누웠지만.

할아버지는 발치에 엎드려있는 니드리노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할아버지 말처럼 니드리노가 여기에
찾아오는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귀여운 학생이 상대해줬으니까. 무어. 오늘도 져버렸지마는. 허헛.”

귀... 귀엽다뇨...! 나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손을 꼼지락댔다.

“학생은 트레이너인가?”
“에, 네... 이제 막 배지 3 개를 땄어요.”
“몇 학년인고?”
“2 학년이에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순수하게 감탄하시며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며 칭찬해주셨다. 그리고 훈련은 어떻게 시키는지
포켓몬들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물었고 나도 그에 우리 애들 얘기에 신나서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 성격은 어떻고 특성은 어떻고 기술은 어떻고 이런저런 점이 고민이고 얘기를 하니 할아버지도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셨다. 그에 덧붙여 말했다.

“학생은 벨트는 안 하는 건가?”


“으음...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해야 될 것 같아요. 오늘 몬스터볼 떨어뜨린 것도 있고...”

할아버지가 말하는 벨트는 몬스터볼을 고정시킬 수 있는 벨트인데, 트레이너라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필수


아이템이었다. 바지 벨트에 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에 따라 그냥 허리에 착용하는 형태도 있다. 겉옷
안에 착용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멋으로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고. 꼭 벨트가 아니라
겉옷이나 가방끈에 고리 등을 연결해서 쓰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게 벨트였다.

“포켓몬을 꺼낼 때도 문제이지만 아무래도 교체 타이밍에 그런 실수가 있으면 불리하지. 암. 기술 준비


시간이나 능력치를 올릴 시간을 줄 수 있고.”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핫, 이 할아버지 성격 보정도 다 아시고 특성들도 꿰고 계셔...! 솔직히
놀랐다.

“할아버지도 트레이너세요?”
“그랬지. 지금은 이 녀석밖에 남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나인테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인테일은 할아버지의 손길이 좋은 듯 갸르릉 거렸다. 루비같이
붉고 반짝이는 눈동자에 레몬빛 나는 금색 털들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우아한 몸짓에 크고 탐스러운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나인테일이 너무 예뻐요...!”
“고럼. 우리 나인테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말고.”
naaain~

목소리마저 우아하고 예쁘다. 아무래도 나인테일은 종특으로 예쁜 느낌이야. 나는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나인테일의 승낙을 받아 털을 쓰다듬해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감기는 느낌이 마치 비단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보송송은 양털에 맨살은 부드러운 고무 느낌이고 냄새꼬와 누오는 털이 없으니까 역시 다른 느낌이다.
뭔가 손이 녹아버릴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할아버지와 나누는데 저쪽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잎새였다.

“지은아. 왜 안 오고 있었어? 앗, 안녕하세요.”

잎새가 나를 찾으러 나왔나 보다. 그리고 내 옆에 있으시는 할아버지를 보더니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잎새가
이쪽으로 오기에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버스가 왔나 봐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허허. 그런가. 오랜만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네.”
“저도요. 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더 있는데 다음에 또 와도 되나요?”
“물론이지. 흐음... 아, 학생. 이 니드리노 데려가는 게 어떤가. 니드리노 어떠냐. 트레이너 밑에서
수련한다면 나인테일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Niiiid? nidnidnid!!

니드리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나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리타이어 했냐는 듯 앞다리를 번쩍 쳐든 채 입으로 내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온 몸으로 자신을 데려갈 것을 어필하고 있었다. 잎새는 어느새 옆에 와서는 곤란한
표정으로 버스 왔다고 다들 기다린다고 재촉하고.

나는 내 포켓몬들 눈치를 봤다. 누오나 보송송은 별로 상관없다는 느낌. 냄새꼬는 귀찮다는 표정이지만 별로
반대는 안 하는 느낌. 결국 니드리노를 데려가게 되었다아...?

어찌어찌 어떨결에 몬스터볼에 니드리노를 담았다. 게다가 빨리 버스를 타야 돼서 나와 잎새는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 버스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버스를 타고 숨을 고르는데 잎새가 말했다.

“와아. 그럼 이제 포켓몬 네 마리인 거야?”


“으음... 그렇지? 말도 안 하고 포켓몬 데려가면 엄마가 좀 놀라시겠지만.”

내 말에 잎새는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이거 좋을 수도 있겠다...!”
“응? 뭐가?”
“이 타이밍에 새로운 포켓몬이면 아무래도 허를 찌를 수 있겠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잎새는 말했다.

“체육대회 말이야! 준결승 때! 아무래도 포켓몬이 셋이니까 3 대 3 배틀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편이었잖아.
그러니까 상대방이 대비하기도 편하고. 아마 내일 누가 이기든 그 셋을 대비해서 준비해올걸?”
“아...! 그러니까 히든 카드로 니드리노를 쓰면 되겠다는 거네? 하긴 갑자기 포켓몬 엔트리가 바뀌어서 나오면
당황스럽기는 하겠다.”
“일단 이틀 뒤에 누가 준결승에 올라오는지 보면 알겠지. 그때부터 준비해도 안 늦으니까.”
“응!”

배틀을 할 생각을 하면 떨리고 긴장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지금은 조금 설레는 기분도 느껴. 이상한 기분이다.
우리 아이들이 멋지고 강하고 든든해서 어느덧 이런 배틀에 점차 적응해가고 있는 모양이다. 냄새꼬와도 오늘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고.

니드리노 덕분이려나.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의 몬스터볼을 살며시 쓸어보았다. 잠시 동맹인


느낌이지만 잘 부탁해 니드리노.

73 화

w. 도여은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는 놀라면서도 괜찮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새 포켓몬의 등장에도
엄마는 이제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역시 아빠 닮아서
트레이너라 이 말인가?

“다녀왔습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집에서 반겨주었다. 옆에서 모다피는 물론이고 엄마도 새로운 포켓몬이
궁금한지 기웃댔다.

“어디 한 번 보자.”
“으음... 일단 씻겨야 될 것 같아.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기는 하는데 야생에서 살았거든.”

일단 씻기고 기생충이나 병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만간 센터에도 가봐야지. 피부병이라도 있으면 곤란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니드리노 빼고 애들을 몬스터볼에서 꺼낸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바닥에 찰랑거리게 받았다. 그리고 니드리노를 꺼냈다. 엄마도 화장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
니드리노를 살폈다.

“와, 큼직한 니드리노네.”


“음? 그런가?”
욕실에 나온 니드리노는 몬스터볼 안에서 조금 잤는지 나른해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오늘 배틀하고 센터를 들리지
않고 와서 좀 지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물론 외상이 별로 없어 자연적으로 치료될 것 같아서 그냥 돌아온 거긴
했지만.

“니드리노. 목욕하자.”
Nid?

목욕이 뭔지 모르는 모양새에 나는 그냥 웃으며 니드리노를 번쩍 들어서 욕조에 담궜다. 20 키로는 힘들지만
잠시는 들 수 있다고! 역시 포켓몬 월드 신체 강화.

쨌든 니드리노가 커서인지 몸집이 욕조에 가득 찼다. 발만 잠깐 담가진 건데도 멍하던 니드리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쳤다. 물론 욕조가 좁아서 뒤로 갈 수 없어 헛발질이긴 했지만.

“에? 설마.”

내가 샤워기 물을 틀자 니드리노는 키에에에엑 소리를 치며 욕조를 풀쩍 뛰어넘어 도주했다!

“엄마! 잡아!”

당황한 엄마는 니드리노를 놓쳤고 니드리노는 풀쩍 욕실을 벗어나 물을 튀기며 거실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모다피에게 잡혀왔다...?

키에엥 키엥 울어대며 몸을 뒤로 쭉 빼고 절대 욕실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니드리노는 모다피의 덩굴로 꽁꽁


묶여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아니, 독타입에 풀은 반감 아닌가요. 게다가 니드리노가 저렇게 반항하는데도
가뿐하게 끌고 오는 것이... 그리고 옆에서 냄새꼬가 모다피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본다...?

“원래 풀 포켓몬의 덩굴이 저렇게 강했어?”


“모디는 덩굴채찍을 자력으로 배우니까?”

아니, 내 생각에는 모다피가 강력한 것 같은데.

쨌든 나는 모다피의 도움을 받아 다시 니드리노를 욕조에 넣고 두 앞발을 욕조 턱 위에 얹게 한 뒤 물을 조금씩


끼얹기 시작했다. 니드리노는 키엥키엥 울었지만 가차 없었다. 왜냐하면 물이 몸에 닿을 때마다 흙탕물이 되어
떨어졌거든. 그래도 특성이 독가시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근데 진화해야 땅타입이 붙는 거 아닌가?

“왜 아직 진화 전인데도 물을 무서워하는 거지?”


“글쎄, 타입보다는 야생 포켓몬이라서 그럴걸?”
“니드리노가 갑자기 뛰쳐나갈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네.”

보송송이나 냄새꼬, 우파는 한 번도 목욕으로 속 썩인 적은 없었는데. 엄청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보송송은 어려서부터 키웠으니까. 그리고 우파와 냄새꼬는 상성 때문이려나?”

엄마가 갸웃하는 모양에 나도 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 니드리노하고 냄새꼬가 붙었는데, 냄새꼬가 이겼지 뭐야. 상성도 불리한데 장하지 않아?”

내가 뿌듯하게 말하자 엄마는 내가 귀엽다는 듯 푸훗 웃었다.


“엄청 잘했네. 상성도 힘들었을 텐데.”
“응응. 냄새꼬가 특성을 잘 살릴 수 있게 되어서.”
“근데 누오가 배틀하는 게 낫지 않았어?”

나는 손에 물을 묻혀 니드리노의 얼굴을 씻겨주면서 말했다.

“아아, 이 녀석이 냄새꼬한테 작다고 시비 걸어서. 냄새꼬가 발끈했거든.”

그 말에 엄마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에 나도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괴수 타입 중에는 니드킹은 좀 작지 않나?”


NIIIID, Niiiiiiiid!!

니드리노가 반항하기 시작했다. 사실 맞잖아! 평균이 1.4 미터면 나보다도 작다고? 리자몽이 평균 1.7
미터인가? 우리집 마기라스는 2 미터가 훌쩍 넘는 걸? 그래도 팩트 폭력은 나쁘니까 순순히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 그런가. 그게 콤플렉스인건가. 그래서 오히려 냄새꼬를 자극했을지도?

“그래도 이 니드리노는 지금도 큰 편이니까. 아마 진화해서도 클 거야.”

엄마 말에 니드리노는 잠잠해졌다. 역시 아이들은 이런 걸 신경 쓰는 모양이다. 어린애 같아서 귀엽다니까.


진화하기 전의 짤막한 꼬리도 뭔가 귀여운 느낌. 전체적인 인상은 사납지만. 아, 내 생각에는 이 녀석 성격은
건방진 성격일지도.

나는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다시 한 번 물로 깨끗하게 씻어준 뒤에야 니드리노를 욕조에서 꺼내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물을 다 닦은 뒤 놓아주니 훽 달아나 거실 구석에서 나를 노려본다. 완전 배신이라는 얼굴로.

“오늘은 첫 날이니까 좀 봐주라. 다음번에는 그냥 물수건으로 닦아줄게.”

게다가 나도 녹초가 됐다고. 잠시 니드리노는 엄마에게 맡겨두고 나는 욕조도 씻고 엉망이 된 욕실과 거실을
치웠다. 후아. 목욕시키는데 애쓴 적은 처음이네. 보송송은 전기를 조절할 수 있었던 때부터 같이 목욕하기도
하고 누오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물론 냄새꼬는 뜨거운 물은 싫어해서 찬물로 따로 씻겨주긴 하지마는. 음.
이렇게 고생은 처음이다.

욕실 청소를 끝나고 나와서 나는 니드리노를 불렀다. 삐진 듯 눈도 안 마주치네. 그렇다면!

“아, 내일은 수련해야 할 텐데. 이렇게 안 친하면 어쩌나.”

슬쩍 보니 니드리노의 커다란 귀가 쫑긋 올라간 게 보였다.

“빨리 수련해야 나인테일을 이길 수 있을 텐데.”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이제 마지막 한 방.

“어쩔 수 없지. 내일은 냄새꼬하고 특훈이나 해야겠다.”

커다란 귀가 움찔움찔하더니 니드리노가 와다다 달려왔다. 아앗 돌진은 안 돼! 게다가 보송송까지 뛰어온다아아!

나는 그 둘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내 품에서 둘 다 와글와글 떠드는데 둘 다 하는 말은


냄새꼬에게 질 수 없어...! 인건가. 이상하게 내 주변에는 파이터들만 모이는 건가. 누오도 옆으로 다가오더니
반짝반짝 바라본다? 너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야, 냄새꼬 대단한데?

말로 뱉으면 애들이 째려볼 것 같아서 속으로 참았다. 에에... 하긴 냄새꼬가 한 번씩 다 이긴 셈인건가. 만약


니드리노가 니드킹으로 진화하게 되면 풀타입도 한 배로 받으니까 상성으로도 비슷하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런 생각에 웃으면서 얼른 냄새꼬도 라플레시아로 진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보정으로 솔라빔,
꽃잎댄스를 날리거나 혹은 맹독 걸고 달의 불빛으로 회복하며 깔짝으로?

쨌든 누구야, 우리 냄새꼬 배틀 못한다고 한 사람.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

74 화

w. 도여은

니드리노에게 내 방을 소개시켜주고 난 뒤 저녁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방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같이


나인테일을 무찌를 전술 계획을 짰다. 좋은 할아버지지만 승부는 승부. 지금까지의 싸움 패턴도 누오의 통역으로
어느 정도 파악해보았다. 그리고 이론으로 할 수 없는 건 실전으로...! 내일 교외에 있는 집으로 가서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곤한 하루를 마치고 애들을 재우고 굳나잇.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보니 니드리노도 야생파라 그런지 누오처럼 바닥에서 자더라. 파란 누오랑 보라색인
니드리노랑 바닥에 합체할 듯 축 늘어져서 자고 있는데 그게 또 얼마나 귀여운지. 게다가 누오 지느러미 부근
색은 보라색이니까 은근 색 조합도 괜찮고?

물론 옆에서 보송송이 도롱도롱 자고 있는 모습도 너무 천사 같고 우리집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화분 위에


냄새꼬도 정말 좋다. 내가 깨어나니 냄새꼬도 깨어나서 눈을 비빈다. 거기다가 눈가를 찌푸리며 짧은 팔로
기지개를 피는데... 하... 심쿵.

콩깍지일까. 우리 애들이라서 예뻐 보인다거나... 하긴 우리 애라면 질퍽이도 귀여울지도 몰라. 모든 포켓몬은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찌되었거나 아침 먹고 이 닦고 나갈 준비를 한 뒤, 애들을 몬스터볼에 챙기고 엄마와 집을 나섰다. 오늘 같이


걸을 포켓몬은 보송송과 니드리노. 보송송은 같이 걸어 다니는 걸 워낙 좋아하고 니드리노는 좀 주변이랑
친숙해져야 할 테니까. 물론 사람이 많아지면 둘 다 강제 몬스터볼 행이지만.

엄마와 나는 먼저 센터에 들러서 수의사 선생님에게 니드리노의 상태를 보았다. 센터에는 수의사가 따로 있고
수의 간호사가 따로 있었다. 보통 접수를 받고 안내를 하는 간호사 분들이 수의 간호사였다. 부르기는 포켓몬
의사, 포켓몬 간호사라고 하지만 정식 명칭은 그렇다고 하더라. 음, 접수와 간호, 간단한 치료는 포켓몬
간호사들이 하고 진료와 치료, 수술 등은 포켓몬 의사들이 하는 식으로 되어있는 모양이다.
한 가구에 적어도 포켓몬 한 마리씩은 키우니까 어쩔 수 없이 이 분야도 같이 컸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포켓몬
트레이너도 많고. 그제야 나는 파이리가 아팠을 때 분주히 들어왔던 사람들이 포켓몬 의사였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낯설고 신기한 포켓몬 월드라니까.

니드리노의 상태는 아주 좋다고 했다. 피부병도 없고 상처도 없고. 자잘한 흉터는 있지만 문제없다는 듯.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생충 약을 먹이고 나왔다.

그리고 주변 프렌들리 샵에서 상처약이나 해독제 등을 사고 할아버지의 조언대로 몬스터볼용 벨트도 하나 샀다.
바지 벨트 겸 허리에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샀다. 눈에 띄는 건 싫으니까 겉옷 안에도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뭐, 여름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아, 계산은 내가 할게요.”

내가 계산하려는 엄마를 만류하고 내가 트레이너 카드로 계산을 했다. 트레이너 카드로 계산하면 포켓몬 관련
용품은 할인을 해주기 때문이다. 배지 수에 따라 할인 가격도 달라진다. 높은 등급 트레이너일수록 더 지원해주는
것이려나?

트레이너 카드로 계산을 하는 건 좀 생소하긴 한데, 여기의 트레이너 카드는 통장하고 연결이 되어있었다. 처음
트레이너 카드를 발급받거나 배지를 딸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배지를 따면 나라에서 돈을 준다고.

음, 배지를 딴 날로부터 일정 기간 동안 매달 용돈 같이 트레이너 카드로 돈이 나온다. 배지의 수마다 기간과


액수도 달라서 통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1 배지 때는 푼돈 수준이었는데 3 배지정도 되니까 용돈 수준으로
올랐다...?

아마 트레이너 장려 사업의 일환이라고 생각되는데... 거기다가 괜찮은 시합이었을 경우 동의하에 녹화해둔


것을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대가로 일정 금액을 더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색짐은 도전자들 놀려먹는다고
녹화를 홈페이지에 게시하지 않는 것 같다만...

근데 3 배지부터 군대 가야 하는 거나, 트레이너가 대외적으로는 한국포켓몬체육협회 소속이긴 하지만 본래


국방부 소속인 것을 생각해보면... 트레이너 카드 왠지 나라사랑카드 같은 기분은 왜죠...?

쨌든 쇼핑을 마치고 나와 엄마는 차에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차 타는 걸 싫어하는 보송송은 냉큼 몬스터볼로


들어갔고 니드리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지나가는 풍경이 신기한 듯 차창에 거의 코를 박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우리 이사할까?”


“에? 이사?”

엄마의 말에 놀라 묻자 엄마가 대답했다.

“이사라기보다는 교외에 있는 집하고 합치자는 거지. 통학시간이 길어지긴 하겠지만 포켓몬들에게도 그 편이


좋을 것 같고. 요즘 계속 주말마다 내려가잖아?”

엄마는 운전을 하면서 물었다. 하기야 마당이 있는 집이 애들 훈련하고 마음껏 뛰놀기에도 좋고. 특히 어제는
목욕시킬 때 니드리노가 마구 울어대서 주변 이웃들에게 정말 민폐였지... 니드리노 좀 쿵쾅거리면서 뛰기도 하고.
으음 조심시키긴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되긴 한다.

“집은 세를 주고 우리는 이 집으로 내려가자. 어차피 방학 때도 여기 있을 거니까. 그렇지?”


“으응. 거기에 있었던 것도 중학생 때부터 통학하기 편하려고 한 거니까. 오빠 중고등학생 때도 거기에
있었었고. 음, 이제 고등학생 생활도 1 년 반밖에 안 남았구나.”
뭔가 벌써라는 기분도 들고 까마득한 기분도 들고.

결국 여름방학 때는 집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통학이 걱정되긴 하지만 뭐 괜찮겠지. 내 포켓몬들은 진화해도


소형 아님 중형이라 상관은 없지만 같이 지내려면 아파트는 좀 불편할 테니까.

그 외에도 이사 관련해서 이것저것 얘기를 하다 이야기는 배지로 이어졌다.

“지은아, 이제 3 배지까지 땄으니까 슬슬 고민해야 하지 않아?”


“몇 배지까지 딸 건지 말야?”
“그렇지? 뭐 어떤 선택을 해도 도와주겠지만.”

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이제 3 배지까지 따서 최소한 가산점은 챙겼으니 생물학과 가는 건 아무래도 문제는


없지만... 배지를 더 따면 가산점이 더 올라가기도 하고... 특별전형으로 빠져서 갈 수도 있고. 물론 내신도
중요하지만...

“그런데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애들이 배틀을 너무 좋아해...”

엄마는 운전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으... 난 진지한데.

“아무래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려구.”


“그것도 괜찮지. 대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공부도 틈틈이 잘해놔야 해.”
“네에~”

역시 한국의 고등학생이란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하는 운명인가보다.

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대문을 열려는데 끼익-하고 자동문처럼 문이 열렸다.


이젠 익숙해진 다꼬리의 마중이었다.

“고맙다, 희야.”

엄마의 말에 다꼬리는 수줍은 듯 웃었다. 하... 숨멎. 포켓몬들의 귀여움은 죽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문을 넘었다. 니드리노는 문 앞에서 킁킁거리며 긴장한 기색으로 대문을 넘었다.
그리고 집 옆에서 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장크로다일이 보였다. 나도 마주 달려가 폭 안겼다.
장크로다일은 나를 번쩍 들더니 빙글빙글 돌았다.

“우와아아앗. 어지러워어어어.”

장크로다일은 나를 내려줬고 나는 조금 비틀거리면서 다꼬리와 장크로다일에게 니드리노를 소개시켜줬다.


니드리노는 뭔가 다꼬리와 장크로다일의 압도감에 좀 기가 눌린 듯.

으음... 아빠 포켓몬들 아무래도 세긴 하니까. 원래 이런 반응이 당연한거지? 메리프가 당찬 거였다니까. 음,


나중에 내가 아빠와 배틀을 하면 이길 순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현관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나왔다.

“왔어?”

나는 아빠에게도 달려가 포옥 안겼다. 그리고 아빠에게 니드리노를 소개했다.


“나 니드리노를 잠시 맡아 키우기로 했어.”
“맡아서?”
“으음... 주인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뭐랄까 누오와 같은 상부상조?”

내 말에 아빠는 알겠다는 듯이 웃더니 니드리노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갑다며 인사했다. 니드리노는
조금 긴장이 풀린 모양새였는데, 아빠의 마기라스의 등장에 펄쩍 뛰더니 온 몸에 가시를 세우더라. 그 모습에
나와 엄마, 아빠는 크게 웃고 말았지만.

75 화

w. 도여은

니드리노와 이것저것 시도해보니 주말은 후딱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월요일 점심시간. 오바람이 이번 시합에서
이기게 되면 준결승 진출이다. 그런데,

“엄청 강하잖아.”

내 귀에 옆에 서 있던 학생의 소리가 들렸다. 나와 잎새처럼 2 반과 6 반의 시합을 구경 온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나도 그 말에 동감. 1 차전 시합을 구경했을 때도 느꼈었던 것이지만 진짜 또래 트레이너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고, 주변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오바람의 피죤은 물에 흠뻑 젖어 있으면서도 하늘을 날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대포를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날개치기!”
“거품광선!”

피죤의 날개가 빛이 남과 동시에 슈륙챙이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그것을 막아내려는 듯 슈륙챙이의


거품광선이 충돌했다. 그럼에도 피죤은 온몸으로 거품광선을 가르며 달려들었고. 결국 날개는 슈륙챙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피죤, 시합 불가능.”

휘청거리며 서 있는 슈륙챙이와 달리 피죤은 마지막 일격을 성공시키고는 흙바닥을 구르며 리타이어. 하지만
사실 슈륙챙이는 두 번째로 나온 포켓몬이었고 피죤은 오바람의 첫번째 포켓몬이었다는 것. 오바람은 빠른
손놀림으로 피죤을 회수하고 몬스터볼을 던졌다. 가까스로 서 있던 슈륙챙이는 튀어나간 전광석화에 바로
쓰러졌다.

“레트라다.”

옆에서 잎새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볼에서 나오자마자 엄청 빨랐지?”


“응. 엄청.”

2 반 남자애는 입술을 깨물더니 마지막 포켓몬을 꺼냈다. 어니부기. 하지만 상대의 포켓몬이 나오자마자 나는
레트라에게 무언가 파직, 튀는 것이 보였다. 설마...!

“10 만볼트.”

세상에. 레트라에게서 나온 전격이 어니부기를 향했다. 그 눈부신 일격에 나도, 구경하는 학생들도, 심지어
상대도 놀랐다. 그렇게 어버버 하는 순간, 레트라는 잔류하는 전류를 흩어버리듯 빠르게 어니부기에게 달려들었다.

“껍질에 숨어!”

레트라의 이빨이 닿기 전에 어니부기는 껍질에 숨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레트라의 이빨이 껍질을 물었을 때,
시합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들을 수 있었다.

파슥, 껍질이 깨지는 소리를.

레트라는 꽉 깨문 껍질을 몇 번 흔들더니 옆으로 휙 던졌다. 운동장 바닥을 구른 등껍질에서 어니부기의 머리와
팔다리가 나왔지만.

“어니부기 시합 불가능. 승자는 6 반의 오바람.”

꽤 많은 학생들이 경기를 보고 있었고 그만큼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레트라는 한 번 수염을 움찔거리고 앞발로
귀를 털더니 뒤를 돌아 오바람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오바람도 레트라를 안아 들었는데, 기쁜 듯 환하게 웃는
모습이 여기에서도 훤히 보였다.

승자와 패자가 악수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순간 참았던 숨을 뱉었다.

“흐아... 엄청 빠르게 승부가 났지?”

내 말에 잎새가 동의하며 말했다.

“와. 진짜. 피죤으로 마릴이랑 슈륙챙이 두 마리를 쓰러뜨린 것도 대단했지만... 10 만볼트는 깜짝 놀랐어.”
“나도. 아마 전 체육관이 인천대여서 그랬지 않을까.”
“기술머신?”
“응응. 그거.”

오바람이 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와 잎새도 손을 흔들어줬다. 오바람이 한지우와 무슨 얘기를 하더니 학교


쪽으로 들어갔다. 보건실로 가는 거겠지?

“근데 그 애 물 포켓몬만 쓰던데, 처음부터 레트라가 낫지 않았나?”

으음... 나는 잎새의 말에 조금 생각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레트라는 특공이 높지 않으니까? 상대방 허를 찌르는 용도가 아니었을까?”


“하긴 그 애 당황해서 버벅하더라. 나도 진짜 깜짝 놀랐지.”
“아마 그래서 한 번에 쓰러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 엄청 대미지이긴 했지만.”

잎새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진짜 오바람 포켓몬 흔하다고 얘기했던 애들은 진짜 혀 깨물고 죽어야 돼.”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이제 레트라 무시할 사람이 없겠네.”

나도 다음에 오바람하고 붙어야 될 테니까 조금 긴장되었다. 사실 제일 주의해야 하는 게 레트라다. 저 레트라


특성이 근성인 것 같으니까... 상태이상기를 많이 쓰게 되는 나 같은 경우에는 좀 위험하지? 니드리노도 위험할
텐데.

아, 그것보다는 궁금한 게...

“마지막에 공격, 필살앞니였을까. 깨물어부수기였을까.”

잎새는 흐음... 하며 고민하는 기색이었는데 답은 이쪽으로 다가온 한지우가 했다.

“깨물어부수기 같은 필살앞니.”

그 말에 잎새에 푸핫하고 웃었다.

“뭐야, 그게. 그나저나 오바람은 보건실?”

한지우는 도시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먼저 가 있으래.”

이미 돗자리와 도시락을 챙겨서 내려오길 잘했나 보다. 우리는 항상 점심 먹는 곳으로 향했다. 매번 그랬듯이
커다란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펼치고 포켓몬들을 꺼내고 있으니 저 쪽에서 오바람이 레트라와 함께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냄새꼬와 같이 돗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오바람보다는 레트라가 더 눈에 빨리 들어왔다.

“레트라!”

꼬렛 때부터 친했던 레트라는 귀를 쫑긋하더니 한 차례 수염을 떨고는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무릎을 굽혀


기쁘게 뛰어오는 레트라를 맞았다. 레트라는 내 코앞에서 멈추더니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잘했어, 잘했어. 멋졌어! 대단해!”

내가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크리자 녀석은 눈을 꼭 감았다가 반짝 떴다. 습관처럼 귀를 쫑긋거리고 수염을 떠는


모습은 익숙해진 만큼이나 귀여워서 나는 레트라의 자그마한 손을 한 손 한 손 잡고 작게 흔들었다.

“이 손으로 그렇게 빠른 속도를 냈던 거야? 대단하다.”


“그럼그럼. 누구 레트라인데.”

내 혼잣말에 대답한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오바람이 지척에 뿌듯한 듯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에 오바람이 삐죽한 목소리로 왜 웃냐고 묻자 내가 대답했다.

“아니, 푸흐. 아빠 같아서.”

마치 우리 아빠가 내가 장한 일을 했을 때마다 누구 딸인데, 했던 모습이 생각나서 더 웃음이 났다. 옆에서


잎새가 같이 웃다가 오바람에게 물었다.

“레트라 보건실에는 안 가도 돼?”


“뭐, 한 대도 안 맞았으니까.”

그 으쓱한 모습에 잎새는 질린다는 표정.

“아, 네, 그러세요?”

잎새는 오바람의 그런 얄미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레트라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세 번째 포켓몬은?”
“안 데려왔는데?”
“응?”

내 의문에 저쪽에 피카츄와 같이 돗자리에 앉아있는 한지우가 대신 대답했다.

“집에서 두 마리밖에 안 데려왔다. 저 녀석.”


“와...”
“헐...”

나와 잎새의 잎에서 어이가 없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잎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짜 얄밉다. 엄청 매너 없어.”


“정해진 결과에 대비를 할 필요가 있겠어?”

그 말 절대 상대방이 듣지 않았으면 좋겠구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두 마리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만 데려왔다는 그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레트라를 오바람
품에 안기면서 말했다.

“나는 쉽게 지진 않을 거니까.”

내 말에 그는 대답했다.

“뭐, 널 상대로 방심은 안 해.”

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오바람은 레트라를 건네받으면서 씨익 웃었다.

.
.
.

“그 때는 꼭 이길 거라고 얘기했어야지!”
“에?”

나는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다 말고 무슨 뜻이냐고 잎새한테 물었다. 잎새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쉽게 지진 않겠다는 게 뭐야아. 어렵게는 지겠다는 거야? 내가 너를 박살 내주겠다! 그 정도로 얘기해야지.”


“아, 그 얘기였어?”
잎새가 점심시간동안 얼마나 답답했는지 걔네들과 헤어져서 반으로 돌아오자마자 얘기를 했겠나 싶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던 것 같은데. 내가 책을 꺼내 들고는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잎새가
불통한 얼굴로 나를 막았다.

“마치 질 것처럼 얘기하는 게 뭐냐구.”


“그야...”

나는 다음 말을 뱉으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그야...?”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도르륵 눈을 굴렸다. 뭐라고 말하지. 고민하는 그 순간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아, 다음 시간 수학이야. 책 꺼내야지.”

나는 잎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샤샥- 빠져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잎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 내 옆자리로 돌아왔지만 선생님이 와서 더 말을 못 하는 듯했다.

나는 모른 척 책을 펼치고 샤프를 딸깍거렸다.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야, 레드와 그린인데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할 뻔 했다. 흐음... 나는 손에 턱을 괴었다. 나, 처음부터 질


것을 가정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진짜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이 나왔던 걸 보면 다분히 무의식적인
생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 정도면 관동의 흔한 짧은치마 정도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 체육대회. 마치 게임 속 레드와 그린의 승부


이벤트 같은 느낌이라... 음... 눈앞에 게임 속 레드와 그린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면 그런 생각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게다가 스토리도 잘 타고 있고. 리그에서 챔피언도 되겠지.

하지만 그것을 말로 내뱉기에는 잎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나는 허리춤에 있는 몬스터볼 속 냄새꼬를


생각했다. 으음... 아무래도 그런 얘기 들으면 좀 그렇지?

76 화

w. 도여은

6 월 6 일 휴일을 맞아 나는 미리 연락했었던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니드리노와 열심히 나인테일을 이길


만발의 준비를 하고.
전에 할아버지와 마주쳤던 그 곳에서 할아버지는 정자에 앉아 계시고 그 앞에 나인테일이 섰다. 그 앞에 거리를
벌려 니드리노가 섰고 내가 그 등 뒤에 섰다. 심판이 없는 배틀. 나는 먼저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오야.”

할아버지는 아무 지시도 없었지만 나인테일은 매번 그랬던 것처럼 도깨비불인 눈치. 니드리노의 첫 기술은...!

“헤롱헤롱!”
“호오.”

할아버지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니드리노는 커다란 귀를 살짝 뒤로 접고 꼬리를 흔들며


매력적인 미소를 보냈다. 거기다가 눈을 감아 보내는 윙크...! 매번 덤벼대기만 했던 열혈남아의 조금은 약한
모습. 나쁜 남자의 매력적인 미소. 거기에 윙크라지만 다른 한쪽도 조금 감아버리는 귀여움도 있다...!

헤롱헤롱을 사용한다고 도깨비불에 화상을 입긴 했지만... 걸렸다. 나인테일의 꼬리가 흐늘흐늘 움직이면서
새초롬하게 눈을 피한다아아!

사실 니드리노와 대책을 세우면서도 대책이 안 났었다. 니드리노의 특성은 투쟁심인데 이게 동성이면 기술


위력을 높여주지만 이성일 경우 위력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나인테인은 암컷이었기 때문에 기술 위력이 높지
않아서 공격형인 니드리노가 매번 당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나인테일의 레벨도 레벨이고 종족치도 종족치고.
니드킹으로 진화하면 모를까 정면승부로는 힘들 것 같은데.

그 때 생각난 게 헤롱헤롱이었다.

투쟁심이 동성의 포켓몬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이성의 포켓몬은 마성의 매력으로 녹여서 승리해버리자. 그런
생각으로 아빠에게 물어보니 아빠네 다꼬리가 헤롱헤롱을 사용할 줄 안다고 했다. 그래서 주말에 찾아갔던
것이었다.

다꼬리 헤롱헤롱 대단했지. 암컷 다꼬리인 희는 내가 헤롱헤롱을 보여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짓 한


번에 니드리노를 함락, 미소 한 번에 마기라스의 볼을 붉히고 윙크로 장크로다일의 꼬리를 흔들게 했다. 와아...
대단해. 저게 고레벨 포켓몬의 헤롱헤롱인가.

게다가 장크로다일이 와다다 달려드는 것을 힘껏치기로 날려버리기까지...! 마기라스 안 그런 척 꼬리를 슬슬


흔드는데 저런 면모가 있었던가. 우아. 엄청 새로운 모습.

뭐, 헤롱헤롱은 최면술의 일종이라고 하더라. 한 순간 콩깍지를 씌우는 느낌? 다꼬리가 손바닥을 짝 치니 모두


화들짝 착각에서 깨어났지.

쨌든 니드리노는 그 날부터 매력적인 다꼬리에게 헤롱헤롱을 전수받았습니다. 거의 6 일 동안 붙어서 기술


가르침을 받았지. 내가 학교 가있는 동안에도 아빠네로 전송시켜서 계속 연습했었다.

결국 아슬아슬하게 실전에 써먹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나인테일의 공격 확률은 50 퍼센트로 떨어집니다. 이제


공격, 공격, 공격이다. 기술머신으로 10 만볼트를 달아줄까 생각했지만 그 사이에 익힐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고
나인테일은 특방이 강하니까. 상성도 그다지 이점도 아니라서.

계속 몰아치는 뿔 공격에 나인테일은 조금 맞으면서도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화염방사를 한 번 쓰긴


했지만 명중까지는 아니고 살짝 빗겨 맞았다. 조금만 더 공격하면 되는데, 그 순간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리를 벌리렴. 그리고 눈을 감아.”

갑작스럽게 뒤로 훅 점프해 빠지는 나인테일은 우아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보지 않으면 혼란하지 않지. 기척으로 무생물을 노리듯 상대방을 노리는 거야.”

갑자기 공격 상대가 사라지는 바람에 바닥에 코를 박은 니드리노와 달리 나인테일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둥글게
곡선을 이루던 아홉 개의 꼬리를 부채처럼 앞으로 펼치고 미간을 찌푸린다.

몇 번만 더 공격하면 되는데...!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니드리노에게 뿔찌르기를 지시했지만 그보다 할아버지가


더 빨랐다.

“신통력.”

달려드는 니드리노를 보이지 않는 무엇가가 퍽, 후려쳤다. 니드리노는 키엑 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갔다.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 니드리노는... 리타이어. 와... 한방. 분명 화상과 화염방사로 대미지를 입고 있었긴
했지만 한 방일 줄이야.

사르륵 떠지는 눈꺼풀 사이로 붉은 빛이 스몄다. 니드리노의 공격을 받아 먼지를 먹었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꼿꼿이 세웠던 꼬리를 다시 둥글게 내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쓰러진 니드리노만 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착각할 뻔했다.

“우으... 저버렸네요.”

나는 가방에서 화상치료제와 상처약을 꺼내 니드리노에게 칙칙 뿌렸다. 몸에 달라붙어 있던 작은 불꽃이 꺼지고


자잘한 상처들이 조금씩 나아갔다. 반짝 눈을 뜬 니드리노는 분한 듯 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우는 소리가
이번에는 이길 수 있었는데에에! 하는 소리로 들리는 건 왜일까. 나는 괜스레 웃어버렸다.

“아깝겠구나. 니드리노.”
niiiiiiddddd

니드리노는 할아버지 쪽으로 가 우는소리를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아직 잘 못 알아듣겠지만 아무래도 하소연인듯.

나도 그쪽으로 가 정자에 앉았다.

“할아버지. 엄청 강하시네요. 제법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그 짧은 시간에 재미있는 걸 가르쳤더구나. 저 녀석은 불타입 기술만으로 상대해왔는데 에스퍼 타입을
쓰게 하다니.”

할아버지는 허헛 웃으셨고 나도 같이 웃었다.

“아무래도 이길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어서요. 아, 그런데 진짜 마지막에 눈도 감았는데 어떻게 명중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우아... 진짜.”

나는 감탄했다. 헤롱헤롱의 효과를 눈을 감는 것으로 차단해버리고 거기에 눈을 감은 채로 공격이라니...


게다가 한 방에 명중했어...!

“나인테일의 날카로운 감각은 나도 놀랄 정도니까 말이지. 이 녀석은 식스테일일 때부터 그랬어.”


할아버지는 나인테일의 갈기를 살살 쓸었다.

“방금처럼 기운을 날카롭게 벼린 것도 오랜만이었지?”


naain
“요즘에는 아무래도 평화로우니까. 예전처럼 기척을 감지할 일도 없고.”
“예전이면 트레이너 하실 때요?”

내가 의아하게 묻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때였지.”

나는 갑자기 나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니. 전쟁?

“전쟁이 끝난 후에는 트레이너를 그만 뒀으니까.”


“전쟁이면...”
“학생은 배지를 3 개나 따면서 무섭지는 않았나? 군대나 전쟁 같은 것 말이야.”
“네...? 음... 딱히 별로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남들도 다 가는 거고.”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이 현충일이라는 사실을. 매년 아무런 생각 없이 넘겼던, 그냥 빨간 날로 여겼던, 그냥


나에게는 휴일이었던 날이었던 그날이었다.

“나는 무서웠다네. 그래서 내 딸들은 물론이거니와 손자손녀에게도 절대로 배지 같은 건 딸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었지.
“아...”
“나는 잃은 게 너무 많았거든.”

.
.
.

나는 할아버지의 한숨 섞인 얘기들을 들었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고 니드리노와 같이 양로원을 벗어나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나인테인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생각났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할아버지의 말이 귓속을 쟁쟁 울렸다.

‘옆에 있는 포켓몬들을 소중히 여기게.’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세 마리의 포켓몬을 잃으셨다고 했다. 패잔병으로 흰 눈밭에 남겨졌을 때, 그 옆에는


부상당한 식스테일만이 남았다고 했다. 전쟁이 지나간 흰 눈밭을 헤매고 다녔을 때는 그때 딱 죽는구나
생각했었다고. 절대 진화는 하지 않겠다고 떼썼던 식스테일은 눈밭을 구르던 시체에서 발견한 불꽃의 돌로
진화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포켓몬이라는 이 듬직한 괴수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트레이너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긴다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아이들이 내 목숨을 나눠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괴수들이 그 자신을 살렸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반대항 포켓몬 시합을 전쟁이라 부르며 시시덕대는 이
평화로운 나날 속에서, 나는 내 허릿춤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왜 세상에는 슬픈 것들이 아주 많을까.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묵념했다.

1-10 포기할 수 없는 것

77 화

w. 도여은

‘그 녀석 좋아하냐?’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그가 물었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조금 의아해진다.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표정은 조금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냐고?

좋아한다는 말의 뜻은 안다. 나는 내 오랜 생명인 피카츄를 좋아한다. 새로 생긴 친구이자 동료인 포켓몬들도,


저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 내 형제도, 박사님도, 나리 누나도, 연구원 아저씨들, 그리고 알고 지낸 많은
포켓몬들도. 좋아한다. 사랑하는 포켓몬들. 사랑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뜻을 알 수 없었기에 말했다. 글쎄.

이지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지은. 처음 들었던 것은 바람이 내게 푸념했을 때였다. 할아버지의 보송송 알을
다른 애가 가져갔다고. 연구원 아저씨의 딸이 데려갔다고. 그 말을 바람은 불만인 얼굴로 말했다. 발로 책상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던 것 같다.

나도 그 알이 어디로 갈까 궁금했던 참이었다. 그래도 연구소에 포켓몬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쯤 지났을까. 피카츄와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가 말했다.

‘그 애, 좀 불안불안해 보이더라.’
‘누구?’
‘지난번에 알을 가져갔다는 그 애 말이야. 이름이 이지은이랬는데.’

내가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그는 좀 신경 쓰이는 듯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포켓몬을 무서워한다거나...’

그 답지 않은 괜한 신경이었다. 그 때는 그저 그가 원했던 알을 가져간 애라서 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나는 좀 의아해졌다.
‘그 아저씨 딸이라며.’

아저씨는 연구원 아저씨들 중에서도 강한 트레이너에 속했다. 매번 출근할 때마다 옆에 있는 가디도 그랬지만
연구소 내 친목 포켓몬 배틀 대회가 열리게 되면 항상 일이위를 다투던 아저씨의 마기라스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왔다.

나와 또래인 딸이 있다며 마주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저씨. 그 아저씨의 포켓몬은 한 마리 한 마리


다 떠올릴 수 있었다. 가디, 마기라스, 장크로다일, 다꼬리. 그런데 그 딸이 포켓몬을 무서워한다고?

‘그러게... 모르지, 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마주쳤다.

피카츄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에 도움을 청하는 미뇽의 소리를 따라간 곳이었다. 바위에 엎드린 채 작은
메리프를 어깨 위에 올려둔 여자애가 있었다. 메리프를 봤을 때 문득 바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무서워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일까. 하지만 그 애가 몸을 일으켜 나를 보았을 때 첫눈에 알아봤다.
아저씨 딸이구나. 분명 닮았으니까.

하지만 달랐다. 그 애는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pikapika pi~

돌아가는 길에 피카츄가 말했다. 처음 맡아본 냄새가 나. 나는 그 냄새라는 것을 맡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거기까지였다. 이상한 애, 그 정도.

전학 간 첫 날, 갑자기 귀를 쫑긋하고 냄새를 맡던 피카츄가 뛰쳐나갔을 때 나는 그 애를 두 번째 보았다.


제게로 돌아온 피카츄가 속삭였다. 진짜 이상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얼떨결에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을 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이질감을.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메리프가


엄마, 엄마, 하며 그 애를 불렀고 그 애는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슬렸다.

피카츄는 그 애를 자주 찾았다. 아니 거의 점심시간마다 매번. 내가 이유를 묻자 피카츄는 대답했다. 좋은


냄새가 나. 최초의 냄새. 그리고, 좋은 사람인 걸. 그런 말을 하는 피카츄 때문에 그리고

하필 체육시간이 겹쳐서. 하필 교실에 가려면 그 반을 지나가야 해서. 하필 메리프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계속


보게 되었다. 창가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그 위태위태한 모습.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 유리된 듯한 착각. 그런
와중에 훅- 하고 현실로 그 애를 부르는 메리프의 목소리. 그 애 발밑을 뱅뱅 돌며 하는 말이 들려서. 내 발목을
잡아 대서.

엄마 엄마
나를 봐줘
나를 사랑해줘
나를 떠나지 마요

‘엄마.’

자그마한 손으로 옷깃을 잡았던 날. 작은 빌라의 삐걱거리는 창문도, 더러운 방충망도 활짝 열어둔 채. 난간을
잡고. 건물에 갇힌 네모난 하늘을 바라보던 엄마를 보았을 때. 마치 사라질 것만 같아 그 옷깃을 잡았을 때.
그때에 어리고 낮은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던, 박제되어 흑백 사진처럼 남아있는 기억이

오버랩 되었을 때

‘넌... 떠나갈 사람이니까.’

어두운 동굴 속에서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가버릴 생각이잖아? 안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던가 만났던 포켓몬이라던가 다 버리고, 갈 방법만 찾으면


훌훌 다 버리고 갈 것 아니야.’

어정쩡한 표정을 짓는 그 애에게. 꼭 떠날 것처럼 구는 그 애에게. 나는 갈 곳 없는 원망을 쏟았다. 그리고 한


대 맞고 말았다. 메리프에게. 방울방울 서러움을 흘리는 어린 포켓몬에게.

아, 꼭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던가.

‘지우야. 엄마가 항상 널 사랑해.’

아주 작았던 손으로 엄마의 부은 뺨을 만졌을 때, 엄마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당겨 안았다. 엄마는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나도 함께 울었다. 엄마는 울음을 그치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빠가 표현을 잘 못하는 것뿐이야.’

그런 말도 이제 내게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엄마는 현관에 섰다. 비가 왔고. 엄마 옆에는 딱 내 키만 한 짐


더미가 있었다. 나는 다음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나는 매달렸다. 울었다.

꼭 메리프처럼.

‘꼭 돌아올게.’

그 말을 믿었던 때가 있었다.

‘뭔데, 그 애가 뭘 어쨌기에 너를 궁지에 밀어 넣는데.’

쫒기다 시피 그 자리를 피했을 때, 나는 바람을 만났고 질문에 맞닥뜨렸다.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이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걸. 쟤가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만큼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와 녀석은 그런 사이니까.

‘자꾸 생각나게 해... 어머니를.’

그 짧은 말에 나를 이해하고 비겁한 내 손을 놓아줄 수 있는 그런 사이니까.

그렇게 도망쳤으면서 이제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면서. 그 애의 새로운 포켓몬에 울컥했던 것도.


다짜고짜 그 손목을 끌었던 것도.
무서워서 그랬다.

겁 많은 어린 포켓몬이 더 크게 소리치고 더 가시를 세운다는 걸 안다.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내가 꼭 그런


꼴이었다. 그래, 나는 무서웠다.

내 상처를 마주 보게 하는 네가. 어린 나를 수면 위로 끌어당기는 네가. 그리고,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너가... 알기나 해?’

새로운 파문을 던지는 네가,

무서워서 그랬다.

78 화

w. 도여은

뜨거움을 실은 공기가 목덜미를 스쳐 땀방울을 안고 달아났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라 거의 한여름의


체육대회나 다름없었다. 쾌청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뜨거운 공기는 리자드든 이상해풀이든 마음껏 날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결승으로 가는 시합에서 이겼다.

pikapi!
-여기야!

아이들을 보건실에 맡기고 나오니 피카츄가 저 멀리서 나를 부른다. 피카츄가 운동장이 잘 보이는 계단 위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니 금방 품속으로 안기며 어깨 위로 올라온다.

계단에 앉으니 운동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기는 하지만 사람이 바글바글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는 가기 싫었기
때문에 딱 좋은 장소다. 곧 두 번째 시합이 시작한다.

땡볕 아래 두 사람이 서서 악수한다. 오바람과 이지은. 둘 중 누가 올라와도 재밌을 것 같다. 바람은 말할 것도


없는 녀석이고 이지은도 꽤 강한 트레이너니까. 역시 그 아버지의 그 딸인가. 뭐,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둘은 거리를 벌리고 섰고 심판인 체육 선생님의 호루라기가 삑, 울렸다. 던져지는 몬스터볼. 나타난 것은


레트라와 누오. 녀석은 이지은의 포켓몬이 대체로 상태이상기를 많이 쓰니까 레트라를 첫 포켓몬으로 잡은 것
같았다. 저 레트라 특성이 근성이니까. 안타깝게도 나온 포켓몬은 누오지만.

거리가 조금 있는지라 명령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행동은 잘 보였다. 아, 역시 처음부터 달려드는
레트라. 누오는 지진을 쓰려는 듯 발을 들었다. 하지만 벌써 가깝다. 땅이 울리기 전에 바람의 지시에 따라 도약.
지진의 효과 범위 안에 있지만 대미지는 줄어든다.

누오의 팔에 레트라의 이가 박혔다. 누오는 머드숏으로 레트라를 떼어낸다. 누오 체력도 방어도 좋고 급소도
막았지만. 방금은 분노의앞니니까 남은 체력의 반이 훅 빠져나갔을 테다. 머드숏도 상대의 스피드를 줄이니까
좋은 선택이고.

-내가 누오랑 싸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선은 여전히 운동장에 향한 채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피카츄가 귀를 까닥이며 물었다. 이 귀여운 친구가


호승심이 이는 모양이다. 입가가 절로 풀어진다.

“아무래도 피하는 게 좋겠지만. 맞붙게 된다면 속도전으로. 그림자분신술로 회피율을 높이고 전광석화나
아이언테일로 싸워야겠지.”
갈색 짐 리더는 여러 형체를 만들어 내서 회피율을 높이는 분신형 그림자분신술을 썼지만 지진에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우리 피카츄는 주로 잔상을 만들어내는 그림자형 그림자분신술로 사용하는 편이고.

pika...

“돌아가면 풀묶기라도 배워두자. 저 누오 무게에는 별로겠지만 상성이 있고. 다른 땅타입을 만나더라도 덜


무서울 거야.”

그 때 허릿춤 몬스터볼에서 어니부기가 펑, 하고 나타났다.

-형님은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파팟 하고 상대해 줄 테니까.


“물타입 공격은 안 통해. 특성이 저수라 회복해 버리거든.”
-그럼 내 로켓박치기로 파바박 하면 되지!

짧은 팔을 주먹질하듯 내지르며 전의를 다지는 어니부기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화 하는 사이에 레트라는 진흙을 맞고 날아갔지만 곧 공중제비로 착지. 반동을 이용해 다시 뛰쳐나갔다.


하지만 털에 엉킨 진흙 때문에 역시 스피드가 아까 같지는 않아.

달려드는 중 바닥을 흔드는 지진에 휘청하지만 흔들림 없이 목표물을 향해 돌진한다. 특성의 얘기가 아니라 저
레트라는 정말 근성 있다. 눈빛이 살아있다고 늘 생각하게 한다.

누오의 목에 레트라의 이가 푹, 박혔다 떨어진다. 피가 튄다. 레트라는 금방 떨어져 나갔지만. 아, 누오


풀죽었나. 아니다. 하품. 누오의 하품이 통했을까. 그전에 누오는 레트라의 전광석화로 쓰러졌다.

이지은은 지난번에 비해 회수와 교체가 빨랐다. 손을 허릿춤에 가져다 대는 것이 지난 시합과 다르게 벨트를
쓰기 시작했나 보다. 몬스터볼을 손 안에서 바꾸는 것이 연습을 꽤나 했나 보네. 저거 은근히 손에서 헛도는
감이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공모양이라. 손에 익숙해지도록 손 안에서 자주 굴리는 수밖에 없다.

다음 포켓몬은 냄새꼬였다. 역시 보송송을 마지막까지 두는 건 비행 포켓몬을 견제하기 위한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 주변이 조금 웅성댔다.

“아.”

바람이 불자 독한 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냄새꼬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것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보통의 냄새꼬들과 다른 냄새가 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도 안 한 채, 새로운 포켓몬을 들여온 것을 보고 욱해서 끌고 갔었을 때. 그 애가 울


것 같은 찡그린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그 애가 내 손을 뿌리치고 나서야 아,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 라는
생각을 가까스로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배틀을 했었던 건 저 아이를 가까이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고. 지금 또 한 번 느꼈다.

상관할 필요가 없었구나.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상처받은 포켓몬을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이. 하지만 너는 달랐다. 피나는 서로의
상처를 핥을 줄 밖에 모르는 나와 달리 너는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 파이리의 병실에 앉아 있던 새벽. 세찬 비가 창문을 두드릴 때 나는 그날을 되돌아봤다. 버림받은


파이리는 제 손을 밀어내기만 했었다. 곧 주인이 올 거라고 아르릉 대는 녀석은 나와 꼭 닮아있었다. 그래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항상 누군가 빗속을 뛰어와 주길 바랐다.

세찬 비는 나를 늘 작은 방 안에 가두었고. 비 오는 날이면 그 사람은 항상 집에 있었다. 문을 열 수 없었다.


그 자가 문 앞에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죽였고 빗소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비를 뚫고 누군가가 나를
이 수렁에서 꺼내 줬으면 좋겠다. 엄마. 당신이 떠났던 그날처럼 다시 돌아와 달라고. 그 약속을 지키라고. 아니,
그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이곳에서 건져줘. 그러니까,

나는 내 자신을 빗속에서 건져주고 싶었다.

그렇게 달려간 곳에
해가 떠있었다.

아니 노란 우산을 쓴 누군가가 있었다. 달리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우산 아래의 누군가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내 발걸음이 멈췄다. 말소리는 없다. 초목을 때리는 빗소리뿐. 그
가운데에 왜.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너는 파이리를 위해 여기로 뛰어왔다. 나에게 해를 넘겨주고 불꽃을 품 안에 가득 안았다. 비를 피해 달리는


너를 쫓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새벽. 작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불꽃을 태우는 파이리를 보면서. 여전히
차갑기만 한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때 우연처럼 네가 나타났고 마법처럼 네 이야기를 했을 때, 내가 내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의문스런 눈빛을 건네는 친구에게 나는 말을 삼켰다. 어떻게 이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주


불가역적이었던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저 소녀와 포켓몬들이.

79 화
w. 도여은

그러니까 너는 행복해질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내가 너를 보고 있으니 한숨 쉬며


바람은 나를 끌었다. 어쩌다 보니 여기가 내 자리라는 듯 돗자리 한 구석에 내 자리가 생겼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진짜 내가 봐주는 거야.’

어느 날, 우리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 김잎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앞에 오바람과 이지은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왜?’
‘지은이가 괜찮다고 하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나는 조금씩 동화되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의외네.’
‘뭐가?’

아직 뾰루퉁한 그 애에게 말했다.

‘...오바람이 너보고 마녀라던데.’


‘아! 진짜 오바람!’

김잎새는 앞서가는 바람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

‘악! 왜!’
‘너 자꾸 나 마녀라고 부를래?’
‘그래, 왜 자꾸 잎새한테 마녀라고 그래!’
‘와아, 너희들...! 내가 무슨 틀린 말 했냐?’
‘맞는 말 했지. 쳐 맞는 말.’

그렇게 왁왁거리고 웃고 떠들고. 너도 이젠 흔들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보송송도 누오도 저 냄새꼬도 너를 꽉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훅-

끼치는 더운 바람이 내 정신을 다시 계단 위로 올려다 놨다. 함성이 들리는 떠들썩한 체육대회 속으로.

누오의 하품 때문에 눈을 깜빡깜빡하던 레트라는 냄새꼬가 나왔을 때는 거의 잠들어버렸다. 기가드레인으로


레트라는 리타이어 당했고 오바람은 바로 레트라를 회수했다. 레트라 대신 나온 것은 블래키. 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 블래키 나오자마자 저주다. 단단하기가 돌 같은 블래키에게 누가 처음 저주를 사용하게 했는지...
짜증 나는 기술.

그런데 거기에 이지은은 냄새꼬에게 독가루를 쓰게 했다. 저주 중이라 피하지 못해 그대로 독가루를 뒤집어 쓴
블래키의 눈가가 보라색으로 변했다. 하긴 단단한 블래키에게 지속적으로 대미지를 주는 독이 좋을 수 있겠다.

하지만 블래키 특성은 싱크로. 물론 냄새꼬는 독타입을 겸하기 때문에 독에 걸리지 않겠지만... 냄새꼬로
블래키를 해치우지 않으면 다음 포켓몬인 보송송이 독 대미지를 받게 될 텐데.

자신 있다는 걸까.

하지만 블래키는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힘들다. 냄새꼬는 블래키를 빨리 보낼 만한 공격기는 없을 텐데.
어찌되었거나 블래키는 땅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블래키의 몸에서 방울방울 체력이 냄새꼬에게 흡수되지만 조금
비틀거릴 뿐. 날카로운 이가 냄새꼬의 몸통을 노린다.

냄새꼬는 기가드레인을 중단하고 몸을 틀지만 스쳐 지나가듯 상처가 길게 났다. 그럼에도 냄새꼬는 눈을 더


찡그리기만 할 뿐 잽싸게 뒤로 돈다. 등 뒤에 착지한 뒤 바로 뛰어드는 블래키를 향해 용해액. 눈을 노렸다.
뛰어든 상태에서 눈에 끼얹어진 산성에 블래키는 냄새꼬를 물지는 못하고 그대로 몸이 부딪었다. 그 틈을 타
바로 교체? 보송송을?

“아.”

보송송이 아니다. 블래키가 머리를 터는 사이 몬스터볼에서 보라색의 포켓몬이 튀어나왔다. 달의불빛을 지시한
듯 빛이 블래키를 감쌌지만, 스피드가 느려. 니드리노는 기다려주지 않고 달려든다. 주로 네 발로 뛰는
포켓몬임에도 유연하게 몸을 틀어 뒷발로 차고, 한 번 더 차고.

두번치기다.

운동장 모래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밀려난 블래키. 다행히 조금이나마 달의불빛 덕을 봤는지 격투기술을
받았음에도 리타이어는 아니다. 하지만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상태에서 역시나.

바톤터치.

블래키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다. 그리고 다른 포켓몬이 나오는 그 짧은 틈에 뛰쳐나가던 니드리노를 멈추게
하고 바로 독압정인가. 바닥에 깔리는 날카로운 가시들. 하지만 나타난 건.

PIIIIIIIIIGYOOOOOORRRRN ㅡ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 피죤은 바닥에 검은 그림자를 남겼다. 마치 독압정이 우습다는 듯이. 니드리노가 10
만볼트를 쓸 줄 알면 어떡하려고. 아. 비자속 10 만볼트는 우습다 이거냐, 오바람.

보송송이 나올 선택지는 없어졌다. 3 대 3 배틀이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니드리노는 10 만볼트를 아직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윤겔라를 내보내지 않은 건 아껴뒀다 나와 한 번 해보자는 거겠지. 그 선택이 독압정을 피하게
해줬지만.

NIIIIIIDDDDDDDD ㅡㅡㅡ!!!

쩌렁쩌렁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주변으로 흙먼지가 날릴 정도의 기충전. 그 순간 피죤의 몸에 힘이 훅


빠진다.

고속이동.

저주로 인한 스피드 랭크 다운이 상쇄되었다. 아니, 평소보다 더 빠를 거다.


빠른 스피드로 날개에 흰 빛을 뿌리며 쇄도하는 피죤의 모습이 겁도 안 나는지 니드리노는 눈을 부릅뜨며
도움닫기 한 후 점프.

날개와 뿔이 부딪히며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높이 뛰어오른 만큼 바닥으로 떨어지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채 바닥을 구르는 니드리노. 바닥으로 활강했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피죤. 그러나 날갯짓이 휘청거린다. 날아오르는 궤도로 잘린 깃털이
피와 함께 후두둑 떨어졌다. 왼쪽 날개가 상했다. 하지만,

바닥을 구른 니드리노는 시합불가능.

여전히 피죤은 날고 있다.

이제 이지은에게는 냄새꼬 밖에 남지 않았다. 이길 수 있을까. 던져진 몬스터볼에서 나온 냄새꼬. 나오자마자


달의 불빛으로 체력을 채운다. 그럼에도 날개치기를 막기엔 부족할 텐데? 니드리노도 한 번에 다운시키는데
풀타입에게...

그리고 허공을 선회한 후 날아드는 날개치기.

그 순간 이지은이 무슨 지시를 하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냄새꼬가 빠른 스피드로 하강하는 피죤을 향해 뛴다. 덩굴을 꺼내더니 왼쪽 날개를 칭칭 감아?
그리고 방금 달렸던 것은 도움닫기라는 듯 뛰어올라 매달린다. 아, 방금 다쳤던 왼 날개...!

눈 깜짝 할 새에 일은 일어났다.

순간 중심을 잃은 피죤이 냄새꼬를 매단 채 허공에서 핑그르르 회전했다. 그리고 고속이동으로 인한 최대의


속도로, 저주의 힘으로 올라간 최대의 강도로, 아무런 대비 없이 피죤은 흙바닥과 부딪혔다.

쾅,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나는 급히 피카츄룰 어깨에 얹고 어니부기를 팔에 끼우고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내려가 학생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피죤과 냄새꼬. 다들 냄새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겠지.
기술폭도 좁은 흔하디 흔한 풀독타입의 냄새꼬. 꽤나 사람들이 무시하니까.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피죤과 냄새꼬가 한데 엉켜 쓰러져 있었다.

삐이이이익ㅡㅡㅡㅡㅡ

숨죽인 학생들 사이로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오바람의 피죤, 이지은의 냄새꼬. 시합불가능.”

폭발적인 환호가 일시에 터져나왔다. 심판이 입을 열었다.

“이로써 시합은 무-”


“-잠깐만요, 선생님.”
오바람이 심판, 그러니까 체육선생님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작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설마, 이 녀석을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오바람이 몬스터볼을 낮게 던졌다. 그 안에서 바톤터치를 했던 블래키가 뛰어나왔다. 독에 중독된 채로, 체력도
바닥임에 조금 휘청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서 있다. 잠깐 사그라들었던 함성이 방금보다 더
크게 공간을 메웠다.

바람의 승리였다.

80 화

w. 도여은

이지은과 오바람은 심판 앞에서 악수했다. 둘 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어느 때이든 승자의 얼굴에는
승리의 달콤함이 패자의 얼굴에는 패배의 씁쓸함이 서려있기 마련이다. 심판에 의해 시합의 승패가 결정 나고
각자 반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환호를 받거나 위로를 받는다.

“이야, 오바람. 역시!”


“완전 최고다!”

남자애들이 몰려들어 그를 뭉개듯이 어깨동무하고 누르고 난리다. 주변에 여자애들도 수고했다며 꺅꺅 거린다.
물론 나도 당했었지만 나보다 더 격한 환영인 건 그만큼 인기를 반영한다는 거겠지. 뭐, 대충 고맙다고 한 뒤
빠져나온 나와 달리 오바람은 환한 얼굴로 하나하나 답하며 마주 헤드락 걸며 웃는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니 그가 알아채고 손을 든다.

“엽! 너 봤냐? 이 몸의 멋진 모습!”


“수고했다. 아슬아슬했지, 블래키.”
“꼼짝 없이 당할 뻔. 체력 많이 남았다고 방심하고 달의불빛 안 썼으면 진짜 한 방에 갈 뻔 했지? 와...
그리고 기충전 했는데 급소 안 맞은 건 진짜 천운이었다.”
“얼른 보건실이나 가봐.”
“그래야지. 너도 이긴 거 축하. 결승에서 보자고.”

녀석이 내미는 주먹에 나도 주먹을 내밀어 툭 치며 응했다. 그는 나를 지나쳐 보건실로 향했고 나는 나무 그늘이
있는 바닥에 그냥 앉았다. 반에서 두 명 다 결승에 올랐으니 체육대회는 우리 반이 당연히 일등이라며 경사
분위기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 덥다.

이제 축구하고 줄다리기, 계주만 나가면 된다. 날씨는 더워서 목깃을 흔들어 바람을 넣어보지만 여전히 덥다.
왜 반티를 검은색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저기 보이는 민트색이나 연분홍색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반
반티는 앞면에는 ‘앞’ 뒷면에는 ‘뒤’라고 크게 적혀있었다. 상대방을 앞뒤도 모르는 놈으로 매도하기
위해서인가.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형님. 그럼 저 바람 형님네랑 붙는 건가! 나 내 보내 줄 거지? 응? 응?

어니부기가 꼬리와 귀를 파닥파닥 흔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어니부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시원하다.

나는 어니부기를 불러 내 무릎 위에 앉혔다. 팔로 껍질을 안고 있으니 조금 살 것 같은 기분. 피카츄도 옆에서


어니부기의 꼬리를 꼭 안았다.

-형님들. 왜 이러는 거야.

어니부기가 키득키득거리며 바동바동거렸지만 우리는 놓아주지 않았다.

“시원하다.”
-시원해.

피카츄가 츄우- 거렸다. 더운 건 싫다. 차라리 설산에서 사는 게 나을지도. 내 생각이 닿았는지 둘 다


키득거린다.

이 어니부기. 따라오겠다고 떼를 써서 데려오긴 했지만 도대체 소방서에서 어떤 짓을 저질렀기에 그 아저씨


다행이라는 눈빛으로 선뜻 이 녀석을 건네준 건지. 분명 소방서에서 어니부기는 도움이 많이 되는 포켓몬인데.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엄청 말썽꾸러기에다가 배틀광이지. 소방서에서 감당


못할 말썽꾸러기였을지도. 게다가 이 녀석은 타고난 싸움꾼이다. 스스로 밝히지 않았나. 싸우기 위해서
태어났노라고. 타오르는 불이든 다른 포켓몬이든 자신 스스로든. 태어났을 때부터 불과 싸워온 포켓몬이었기에
강한 불꽃 그 자체인 리자드에게 이끌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니부기와 피카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보건실에 갔던 바람이 금방 돌아와 옆에 털썩 앉았다.

“포켓몬은?”
“별로 크게 다친 데는 없는 편. 오후 끝에 있을 시합에는 아-무런 지장 없을 테니까 말이야. 네가 방금 전
시합에서 압도적으로 이겼다지만 나한테는 못 당할 거다!”
“아니, 내 포켓몬.”

내 말에 바람은 썩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상해풀은 자고 있고, 리자드는 일어나서 너 찾던데.”

내가 어니부기를 안고 일어나려고 하자 바람이 팔뚝을 잡아 다시 앉혔다. 뭐, 왜. 쳐다보자 녀석이 웃는 얼굴로


이 악문 채 말한다.

“어디 가기만 해 봐. 저거 끝나면 우리 축구 시작이라고. 사라져 있으면 죽는다.”


“리자드가...”
“보건실 에어컨 때문인 거 다 알거든?”

들켰다.

“쨌든 가만히 있어. 줄다리기 때는 따로 부를 테니까. 아, 그런데 이지은이 이번에 데려온 니드리노
특성이...”
그가 말을 하던 중 반 애들 중 한 명이 그를 불렀다.

“반장! 선생님이 부르는데!”


“으, 쨌든 어디 가지마.”

그는 흙을 털고 그를 부른 여학생 쪽으로 뛰어갔다.

“그렇다네.”
-우우, 아쉬워. 에어컨.

피카츄가 너 밖에 없다며 어니부기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내 다리 위에서 어니부기와 피카츄가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그에 어니부기의 꼬리를 잡겠다며 피카츄와 어니부기가 구르듯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이리저리 바쁜 오바람이 눈에 잡혔다. 더운 와중에 땡볕에서 이것저것 바쁜
모양이다. 매년 있던 일이라 반장이 아닌 오바람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지만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녀석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즐거운 듯이 웃고 떠든다.

나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본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항상 승리를 불러온다는 비크티니, 어느 나라의 환상의 포켓몬을 생각나게 한다. 녀석의
주위에는 그만큼 사람이 모이니까. 나는 딱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귀찮아. 하지만 그런 나를 끌고
다닌 게 저 녀석이다.

‘오바람! 축구하자!’
‘에? 으으, 귀찮은데. 한지우 하면 할게.’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식으로 녀석은 나를 끌고 다녔다.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바닥에 금을 그어두고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으려 했던 나를 그 안에서 끌어낸 게 바로 저 녀석이다.

피카츄는 말하곤 했다. 지우. 넌 너무 사교성이 없어. 나는 말했다. 사교성이라는 게 꼭 필요한 걸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바람이었다. 너 이 새끼, 포켓몬하고만 살 거냐? 나는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랬다가
녀석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피카츄도 번개모양 꼬리로 불만이라는 듯 탁탁 때렸다.

“야, 한지우! 시합한다! 빨리 와.”

저 멀리서 오바람이 불렀다. 밍기적거리며 일어나니 여기까지 달려와 팔을 잡아끈다.

“내가 꼭 데리러 와야 하냐? 이 자식, 골 하나 안 넣기만 해 봐라.”

딱 지금처럼 가자며 나를 이끄는 손이 있다. 관망하는 나를 그 세계 안으로 밀어 넣는 손. 항상 그렇듯 녀석은


한 발 앞서 나가고 자신은 뒤따른다.

싫은 건 아닌데, 더워. 비바라기 쓰고 싶다.

81 화
w. 도여은

수돗가 수도꼭지의 물을 틀고 콸콸 쏟아지는 물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이 맹렬하게 머리카락을 적시고


떨어진다. 아, 살 것 같다.

한참을 머리를 식히다가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벅벅 털었다. 승부라는 건 참 이상해서 사람을 열심히
하게 만든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이 개인을 속이는 방법이 아닐까. 그런 의미로 발바닥에 땀나게 뛰었고.

이겨버렸다.

“오오. 오늘의 주역!”


“결승도 잘 부탁해!”

머리를 털고 있는데 반 친구 몇몇이 등을 치고 떠나갔다. 그러니까 오후에 있는 축구 결승전에서 또 뛰어야


한다는 말이겠지. 아, 좀 대충 뛰었어야 했는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을 맞이한 매점은 북적북적했고 체육대회 날이라서 그런지 더 어수선했다. 나는
피카츄와 어니부기를 세워두고 학생 틈바구니를 헤치고 들어가 나와 오바람 몫의 빵과 우유를 샀다. 나나
오바람이나 체육대회를 핑계 삼아 도시락을 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빵과 우유를 들고 사람의 홍수 속을 억지로 빠져나왔다.

“주먹을 냈어야 했어.”


-그러니까 내 말을 들었어야지, 형님!

점심 먹으러 향해 걷는 내 발에 맞춰 걸으면서 어니부기가 대답했다. 오바람하고 가위바위보에서 졌다. 진


사람은 매점에서 빵 사오고 이긴 사람은 보건실에서 포켓몬을 데려오기로 했다. 다음에는 주먹을 내야지. 속으로
결심하면서 도착하니 김잎새가 푸린과 함께 돗자리를 펴고 있었다.

“왔어?”
“아, 응.”

내가 몸을 숙여 돗자리 위에 양 팔로 안고 있던 빵들과 우유를 쏟아내자 피카츄도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돗자리 위에 뒹굴었다. 바스락바스락 거리고 매끌매끌한 게 마음에 든다며. 거기에 푸린도 어니부기도 가세해
같이 뒹굴거린다. 내가 돗자리에 앉자 김잎새가 묻는다.

“웬 빵? 도시락 안 쌌어?”
“귀찮아서.”

녀석은 쿡쿡 웃는다. 자세히 보니 머리띠를 하고 있다. 왜 바로 못 봤지 싶을 만큼 눈에 띄는 포켓몬 귀모양


머리띠이다. 그러고 보니 반티 색도 주황색이다.

“데덴네?”
“응. 귀엽지? 우리반 단체로 맞췄다고.”

왜인지 시커먼 남자애 몇몇이 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지은은 안 썼던 것 같은데.”
“배틀 전에는 하고 있었는데 남들 다 보는데 부끄럽다고 나한테 맡기고 갔어.”

하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데 나 같아도...

“오바람은?”
“보건실에.”
“그럼 지은이랑 같이 오겠네.”
“아마도.”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오바람과 이지은이 오는 게 보였다. 발치에 포켓몬들도 함께. 이상해풀은
몬스터볼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리자드의 모습은 보였다. 어느새 친해진 건지 이지은의 니드리노가 옆에서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내가 오바람에게 포켓몬을 받으려고 일어나는데 내 앞을 어니부기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두 발로 뛰다 못해 네


발로 뛰어가는 모습에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빠른지 내가 가까이 갔을 때는 벌써
왁왁거리고 있었다. 어니부기...

-뭐? 퍼랭이? 너 죽을래?


-퍼랭이한테 퍼렇다고 하지 누렇다고 할까. 꼬마야, 엄마 품에 더 있다가 오는 게 어때. 등딱지는 충분히
딱딱하냐?

둘이 뭐라고 하든 리자드는 내 쪽으로 뛰어왔다. 나는 얼떨결에 리자드를 안아들었다. 이지은은 어니부기가


왁왁거리며 화를 내자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오바람에게 시선을 던지니 녀석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리자드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다고.

나는 일단 리자드를 내려놓은 다음 어니부기를 들어올렸다. 그냥 놔뒀다간 싸울 것 같다. 어니부기는 이거


놓으라며 꼬리와 팔다리를 바둥바둥거린다.

-큰형님! 저 녀석이 리자드 누님한테 꼬리 쳤다고! 완전 시비 걸었다니까?


-어이고? 시비 건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 저 퍼런 자식인 것 같은데.
-뭐야?

리자드... 내가 리자드를 내려다보자 리자드는 나는 모른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돗자리가 있는 쪽으로 가버린다.
오히려 김잎새와 포켓몬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니드리노.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또 도발하는 거지. 너.”

이지은이 니드리노를 안아 올렸지만 전혀 제지가 되지 않았다. 몸싸움이 아니라서. 입을 막아야 하는 걸까.

“둘 다 그만하는 게 어때.”

바람이 제지하려는데 둘은 듣지 않는 듯하다. 나는 등 뒤로 땀이 나는 것 같다. 뭐, 어떻게 말려야 하는 거지.

-꼬리 쳤다니. 말이 이상하잖아? 나는 아가씨랑 얘기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야. 네가 아가씨의 뭐라도 되냐?
-뭐, 뭐?

어니부기가 완전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안고 있는 내가 휘청할 정도로. 그런데 절대 놓으면 안 될 것 같다.


놓으면 유혈사태가...
“그만해, 니드리노오.”

이지은이 말리지만 니드리노는 코웃음만 친다. 내가 뭘?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그에 이지은이


야단치지만... 어느새 김잎새는 물론 피카츄까지 구경을 왔다. 나도 어니부기에게 말했다.

“어니부기. 너도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진정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아가씨 뒷꽁무늬만 졸졸 쫓아다니고 있는데. 안 그래?

그러면서 니드리노가 피식 웃는다.

“니드리노!“

이지은이 빽, 소리치면서 니드리노를 탈탈 흔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나 딴청 부린다. 어니부기는...


어니부기? 발버둥을 멈춤에 내가 의아하게 내려다보니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잠... 잠깐.”

내가 어찌 하기 전에 어니부기가 니드리노를 향해 물을 뿜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니드리노를 안고 있는


이지은도...! 내 눈에 니드리노를 탈탈 털던 이지은이 물줄기에 급히 눈을 감는 것이 슬로우화면처럼 느리게
보였다. 나는 급히 몸을 틀었지만 이미 조금 늦었다. 하지만,

“어-니-부-기-!”
-저어, 바람형님...?

하아. 나는 한숨을 뱉었다. 눈앞으로 물벼락 맞은 오바람이 보였다. 가까스로 오바람이 나와 이지은 사이로
끼어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결국 물을 맞은 건 오바람.

“다행이다.”
“뭐라고? 한지우 개놈아?”

턱 아래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웃는 얼굴의 오바람이 나에게 다가왔지만 나는 무섭지 않았다. 아마도...?

82 화

w. 도여은

물줄기를 팔뚝으로 막았지만 그 물이 온통 튀어버려 오바람은 티셔츠는 물론 머리카락까지 쫄딱 젖어버렸다.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가온 바람은 양손으로 어니부기의 볼따구를 잡아당겼다.

“어어니이부우기이. 사람한테 누가 기술을 쓰래...! 응...?!”

-즈어 바라혀니임, 기수르 앙쓰고 무르 쁘링건데... 내가 잘모한게아이라, 저 니드리오노미.


어니부기는 변명했지만 사정없이 잡아당겨지는 양 볼따구에 눈물을 글썽글썽했다. 김잎새는 쫄딱 젖은 오바람을
보고 깔깔 웃었다. 꼼짝없이 물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꼭 감았다 뜬 이지은은 대신 물벼락을 맞은
오바람을 보고 사색이 되어 사과했다.

“니드리노. 너도 빨리 사과해.”

하지만 니드리노는 몬스터볼에 쏙 들어갈 뿐이었다.

“미안해, 오바람. 이 녀석이 좀 말이 험해서... 으으... 닦을 거라도.”

이지은은 허둥지둥 무언가 닦을 것을 찾았지만 바람은 괜찮다는 듯 내 목에 걸려있는 축축한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었다.

“아... 뭐, 여름이니까 금방 마르겠지. 까만 옷이기도 하고.”

이지은은 미안한 듯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니부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니부기한테도 미안해. 얘가 좀 철이 없어서.”


-뭐, 내가 용서해주지.
“어니부기. 너도 사과해야지.”
-내가 왜...!
“사람을 향해서 멋대로 물을 뿜으면 어떡해.”
Pikapika.

어느새 어깨 위로 올라온 피카츄도 품에 안겨있는 어니부기의 날개 같은 귀를 쭉쭉 잡아당겼다.

-아앗, 아프다구. 읏,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습니다.

어니부기는 이지은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나도 미안...”

내가 사과하자 이지은은 아니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젖지도 않았고. 오히려 니드리노가 성격이 나빠서... 나 대신 오바람이 쫄딱 젖었지.”

이지은이 오바람쪽을 힐끔 쳐다보자 오바람은 내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래, 나한테는 사과 안 하냐?”

나는 사과 대신 엄지를 들어올렸다.

“잘했다. 인간방패.”
“이자식이.”

오바람이 손으로 내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아, 아프다고. 어찌 되었던 나는 오바람의 응징을 받으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포켓몬 푸드를 챙기고 니드리노가 밥을 먹으러 몬스터볼에 나왔을 때 어니부기와 니드리노가 으르렁 거렸지만
다행히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잘 지나갔다. 어니부기가 저 녀석 하고 배틀해야 한다고 졸라대자 도시락을
먹으면서 이지은이 물었다.

“어니부기가 뭐라고 하는 거야?”


“니드리노하고 배틀하고 싶다고...”

이지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란다.

“지금?”
“지금은 안 되지.”

김잎새가 키득키득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 결승전 때문에?”


“응?”

김잎새는 놀란 듯 깜빡이며 이지은을 쳐다봤다.

“아니, 3,4 위전 해야지.”

이지은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이해를 못 하다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뭐? 너지 그럼 누가 해.”
“뭐어어어? 3,4 위전이 있었다고? 나는 준결승이랑 결승전만 하는 줄 알았지...!”
“처음부터 날 이기고 결승전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아냐?”

오바람이 킬킬 거리며 하는 말에 이지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아니, 그런 것보다 아무도 얘기 안 해줬는걸!”


“아이구, 지은아아아, 그걸 말해줘야 알아? 작년 체육대회 때 뭐했어!”

당연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지은은 머리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

“으어어... 쨌든 지금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얘들아 우리 한 번 더 싸워야 한대.”

그 말에 보송송은 이번에는 꼭 제가 나가야 한다고 방방 뛰고 냄새꼬는 상관없다는 듯 푸드만 먹고 있다. 아직


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누오는 자기는 금방 낫는다며 이지은의 팔을 잡아당기는데, 그로 모자라 니드리노는
앉아있는 이지은의 어깨에 발을 얹으며 어필한다. 그에 이지은이 웃으면서 포켓몬들과 장난치는 모습을 나는 빵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바라봤다.

“한지우 시합하는 거 보긴 봤는데, 그 세 마리 말고 다른 엔트리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나는 우유를 마셔 빵을 넘기고 말했다.

“레어코일하고 데구리, 야부엉.”


“힉, 풀 엔트리인 거야? 게다가 다타입?”
“별로... 딱히 강하진 않아. 지시도 단순한 편이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느낌.”

내 말에 이어 오바람이 덧붙여 말했다.


“아무래도 포켓몬이 많으면 육성하기 힘드니까 말이지. 게다가 다타입이면 더 그런 편이기도 하고.”
“레어코일하고 데구리는 특성이 옹골참이라던가?”

김잎새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얘기는 점점 이지은이 3,4 위전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로 이어졌다.
상대방 포켓몬들의 특성, 전략, 성격에 대해서나 첫 포켓몬은 누구로 꺼낼 것인가 기타 등등.

“하... 다행이다. 어느 정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알 것 같아. 고마워, 다들.”

이지은은 배시시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얘기를 나누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금방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사람이든 포켓몬이든 누군가를
인정하고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들.

오바람이라든가 나같은 사람은 그런 게 좀 있다. 눈치를 보고 사람을 분석하려 하고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상황을 파악해서 오바람은 끼어들고, 나는 피한다는 면에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심지어 김잎새도 비슷한
부류다. 선을 그어두는 타입. 누구한테는 여기까지. 다른 누구한테는 여기까지. 그런 선들을 그어두고 사람을
대하는 것.

그 때 갑작스럽게 손을 뻗어와 그 원형 선의 중앙에 있는 사람을 원 밖으로 잡아끄는 사람. 이지은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빵 두 개와 우유 하나를 다 해치웠다. 이지은의 말로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새어나갔다.

“배틀보다 문제는 6 월 모의고사라고 할까... 그게 문제지.”


“으... 그렇지.”
“아, 3 월 때 떨어져서 이번엔 올라야 될 텐데. 잎새 너는 걱정 없지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성적은 항상 올랐으면 하고... 또, 시험 자체가 싫은 거라고. 게다가 얼마 안 있으면
기말고사니까.”

잎새가 싫다는 듯 손에 얼굴을 파묻자 이지은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자자, 그래도 기말 끝나면 바로 방학이라고?”

오바람의 말에 신나는 듯 김잎새가 말을 받았다.

“맞아...! 1 학년때는 2 학년 선배들 엄청 부러웠었지. 우리는 수업 일수 채운다고 학교 꼬박꼬박 나왔는데. 2


학년은 기말 끝나면 바로 방학이잖아!”
“2 학년 조기 방학을 위해서 1 학년 때 그 고생 한 거지.”
“크으. 그거다.”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듣기만 하던 이지은이 말했다.

“잎새는 방학 때 배지 딴다고 그랬지?”


“응. 3 배지까지 따야지!”
“아무래도 2 학년 방학 길게 주는 건 배지 따라고 하는 거긴 하지.”

오바람이 덧붙인 말에 이지은은 물었다.

“오바람, 너도 배지?”
“당연하지! 이 몸은 내년도 리그 챔피언이 목표다!”
또 저런다.

“나나 이기고 말해라.”


“오늘이야 말로 발라주마.”

오바람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지난번에 체육 시간에 나에게 진 이후로 칼을 갈고 있었으니까.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녀석은 내 친구고 형제고 라이벌이니까. 나도 궁금했다. 이번 배틀이.

“한지우, 너도 4 배지 따러 가겠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잎새가 궁금증을 못 이기고 이지은에게 묻는다.

“왜? 4 배지 안 딸 거야? 내 생각에는 4 배지도 금방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니드리노도 합류했고.”


“배지... 따겠지? 아마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도 바람도 김잎새도 말문이 막혔다.

“나는 지은에 네가 리그 준비하는 줄 알았어! 훈련도 열심히 하고, 배틀도 잘하고!”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나도 김잎새와 바람의 말에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바람하고 배틀에서도 그렇고. 분명 기충전으로
인해서 급소 맞추기에 성공했었다면 전세가 역전되었음은 물론 이번 결승에서도 붙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이런 반응에 이지은은 화드득 놀라는 눈치다.

“에, 뭐... 그나저나 다들 바쁘겠네. 방학하고 나면 이렇게 점심 먹을 일도 없을 테고. 배지 따려면 여행


갈테고 뿔뿔이 흩어지니까.”
“앗, 그런가? 나는 서울 주변에서 배지 딸거라서 그렇진 않겠지만...”

두 사람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축 쳐졌다. 그에 김잎새는 뭐, 쟤네들은 쟤네들끼리 바쁘겠지! 우리끼리
놀자 얘기하는데 오바람이 끼어들었다.

“그럼 올해 리그 기간 동안 같이 놀래? 다들 리그 때 배지 따러 가진 않을 테니까. 리그도 보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뭐? 어디서?”
“연구소...?”

김잎새는 되물었다. 연구소?

“연구소에 있는 우리집. 할아버지는 연구소에만 계시고 아마 나리 누나는 괜찮다고 할 테니까. 거실에 티비


틀어놓고 놀자고.”
“오...!”

김잎새가 호응을 넣었다. 거기에 오바람이 속삭이듯 말했다.

“에어컨 틀고.”

오바람이 씩- 웃자 김잎새도 마주 씩 웃었다.

“나는 찬성!”
“나도...!”

모두의 찬성과 함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83 화

w. 도여은

“갑작스럽네.”
“뭐가?”

보건실에 아이들을 다시 맡기고 반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한 말에 바람은 깍지 낀 손을 뒷머리에 댄 채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은 매번 다 알면서 의뭉스럽게 묻곤 한다.

“누군가를 집으로 부르는 것 말이야.”


“아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매번 너랑 단둘이 리그 챙겨보는 건 질렸다고.”

바람이 팔꿈치로 툭 치면서 개구지게 웃었다.

“왜? 싫어?”
“아니, 뭐...”

싫지 않다. 얼마나 같이 있었다고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얘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해진 걸까. 그리고 그건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묻고 싶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집에 들인 적 없었잖아? 우리.

걸음이 어느 새 반에 도착하자 반 아이들이 여럿 몰린다. 나야 별말 안 한다지만 오바람 저 녀석은 뭐가 그리


신나서 떠드는 걸까 생각하곤 한다. 사실

여러 사람 두루두루 친한 것은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다는 것은 아닐까.

그와 같이 자라면서 나는 우리의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주변에는 오박사님의 이름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정말 순수하게 친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깊이 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먼저 선을 그어놓고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 선 주변을 돌다가 지나갔고 누군가는 왜


자신을 들이지 않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바람은 주변에 늘 사람을 많이 두었지만 누군가를 들이기는 적게 했다.

그러니까 놀랐다. 그 애들과 스스럼없이 웃고 아주 재미있다는 듯 내 손을 잡아끌어 같이 어울리게 되고 또,


어느새 나도 동화되고 이 시간을 편하게 느끼고 있다는 게. 거기다 순간이나마 나도 방학이 시작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게 된 것에.

뭔가 변하고 있다.

우리 둘 다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고 있었다. 원래 자기 자신의 변화보다 옆


사람의 변화가 더 눈에 잘 들어오는 법이다.

주변에서 하는 말을 듣다보면 참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사람들이 바람을 보고 역시 능력 있는


만큼 여유롭다고 말할 때가 그렇다. 원 밖에서 보는 녀석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 안에서 본
녀석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안절부절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그래, 녀석만큼 결벽적인 사람이 없다.

그는 늘 자기 자신을 통제하려 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잘해내려고 한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놓치는
법이 없다. 그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버린다. 책상 앞에는 외워야 할 것들로 잔뜩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으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작은 쪽지 하나 들고 가지 않는다.

마치 천재라고 불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장난처럼 챔피언이 되겠다고 하지만 그는 정말로 챔피언이 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훗날 위대한 포켓몬
연구자가 되고자 한다.

그의 할아버지처럼.

내가 보기에 그는 결벽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봄과 여름, 그 애매한 경계 사이에 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같이 자취하는 오피스


거실에서. 모처럼 날씨가 맑아서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놨던 날이었다. 포켓몬들은 뒹굴거리거나 낮잠을 자고
우리는 거실 테이블에서 숙제로 받은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한창 문제를 풀다가 내가 공식이 헷갈려서 책을 집어 드는데 그 사이 녀석은 다 풀었는지 ‘다 했다!’ 소리를


내며 벌렁 뒤로 누웠다. 대자로 눕든 말든 나는 그 공식이 몇 페이지에 있었는지 가물가물해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팔랑 팔랑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날 부르는 난 데 없는 진중한 목소리에 나는 힐끔 녀석을 봤다. 천장을 뚫어져라 보는 모습에 무슨 말을 하려나


하며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었는데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선을 다 했다면 괜찮다는 말...을 했어.’


‘누가?’

나는 누가 그런 시덥잖은 얘기를 했는가 물었더니 녀석은 아주 짧게 대답했다.

‘내가.’

내 손이 멈추고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멈췄다. 귓가에 열어놓은 창문 너머 도시의 소음이 들렸다. 내가 들은


소리가 맞을까. 잠시 고민했다. 천하의 오바람이 최선을 다하면 괜찮다는 말을 했다고?

‘어이가 없지, 아주? 뭐, 그 표정 뭐냐. 좀 기분 나쁘려고 하는데, 나.’


‘...누구한테 했는데?’

나는 수학 공식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바람을 쳐다봤다. 더 난해한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몸을 뒤집어 바닥에 엎드렸다. 괜한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며 녀석이 말했다.

‘이지은한테.’
‘...’
‘그, 지난주에 순천에 연구 따라갔었잖아. 걔도 왔었고. 얘기하다가 포켓몬 얘기가 나왔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포켓몬을 키우면서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최선?’
‘어... 최선을 다하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몰아세우지 말라고. 그리고...’

나는 바람의 결국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 뒷말을 기다렸다.

‘...너든 나든 완벽한 사람이 아니잖아, 라고.’

나는 놀라서 펜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펜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에 녀석은 지레 제 발 저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왁, 시발. 내가 생각해도 존나 이상한 거 알거든? 내가 매번 비웃었던 말인 거 아는데, 와... 나, 진짜...


네가 생각해도 진짜 위선적이지 않냐. 엄청 기만적이라고.’

녀석은 습관적으로 머리를 왕창 헤집었다. 하기야 평소에 그런 말들을 비웃었던 당사자였으니. 최선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최선이라든가 세상은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결과로만 따진다고 말하던 게 바로 며칠 전의
그였다.

나에게 답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는지. 녀석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굉장히 녀석 답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참 지나고 나서야 든 생각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면 괜찮지 않냐는 말도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는 말도
우리 모두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위선과 기만이 아니라 그가 그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아주 깊게


가라앉은 마음속에서 꺼내어 놓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여름 날 배
위에서.

나도 모르겠다고. 너에게 있어서 그 녀석이.

84 화

w. 도여은
내 나이 열 살 때, 박사님 댁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가 쏟아지던 날이 있었다. 사정없이 빗소리가
지붕을 때리고 창문을 두드렸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아보지만 마치 그 작은
방에 있는 것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방문이라도 열어둘까.

그러면 덜 갑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몸을 일으켜 바닥에 사뿐 내려섰다. 자박자박 몇 발자국 걷자 나는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겁이 났다. 그 사람이 밖에 있으면 어떡하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너도 봤잖아. 그 사람은 죽었어. 그래. 그 사람은 죽었다. 비에
잡아 먹혔지. 여기는 그 작은 방이 아니다. 나는 되뇌었다. 여기는 그 방이 아니야. 여기는 나를 가둔 그 작은
공간이 아니야.

pipit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문손잡이에서 떼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침대


머리맡에서 자고 있던 피츄가 깨어나 눈을 비비고 있었다.

‘피츄.’

내 작은 목소리에 그 세모난 귀가 응답하듯 움직였다. 그러더니 피츄는 깡충깡충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어?

작은 친구는 나에게 얼굴을 부비며 물었다. 그에 나는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나의 애매한 답에도 피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엇이 무섭든지 상관없어. 내가 지켜줄게.

그 말에 나는 웃었던가 울었던가. 둘 다 아니었을까. 분명한 건 나는 다시금 문손잡이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 문 밖으로 복도와 난간이 보였다. 난간 아래로는 1 층의
커다란 거실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옆의 오바람의 방을 지나 뭔가 홀린 듯 계단을 밟고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앉자


뭔가 기분이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낯설고 이상한 기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마치
깨끗하고 세련된 집 안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더러운 물건처럼.

그럼에도 이 곳이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높은 천장과 아주 넓은 공간. 피츄가 품에서 소파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나는 허전한 품에 쿠션을 끌어안았다.


1 층에는 박사님의 방과 서재, 그리고 나리 누나의 방이 있다. 여기서 잠들어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끼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눈을 비비며 나온 건 열 살짜리
소년이었다.

‘뭐야, 천둥 번개 무서워서 잠도 못자냐? 완전 애구만.’


그는 볼일이 급해서 깼는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화장실을 나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쿠션에 머리를 묻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금 문이
열렸다.

소년이 한 팔에는 배게를 끼고 한 손에는 이불을 끌며 얼굴에는 졸음을 묻힌 채 나왔다. 이불을 질질 끌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소년이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안 잘 거야? 이불이라도 가져오지?’

내가 깜짝 놀라 일어서서 2 층으로 올라갔다.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니 소년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있었다. 내가


이불과 베개를 들고 나왔을 때는 소년은 이미 누워 자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이불을 깔고 베개를 베고 누웠다.
옆에서 색색 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졸린 피츄는 배게 옆에 자리 잡고 금방 잠이 들었다. 나도
그들의 숨소리를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 비가 세차게 유리창을 때리는 날이면 소년은 거실에 이불을 깔았다. 아직도 여전히 거실에 이불을
펴는 녀석에게 내가 말한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그러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참나, 누가 너 때문에 이러는 줄 알겠네. 내가 답답해서 그런 거거든? 너나 방에서 자든가.’

그렇게 거실 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보면 어느새 비는 그쳐있고 해가 떠 있곤 했다.

그는 완벽주의자에 신경질적인 사람이다. 결벽적으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혐오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포켓몬이나 사람들에게 시간을 쓰는 것을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물론
최소한의 바운더리를 만들어서 시간을 쓸 대상과 쓰지 않을 대상을 나눈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바운더리도 꽤나 상냥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너에게 있어서 그 녀석.’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 녀석은 내 질문에 답했다.

‘나도 어머니가 생각나네.’

한 때는 그와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했고 본질적으로 같은 점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다른 사람인 것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웃으면서 한 말은 내 말과 같았지만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건 그가 사랑받았기 때문이리라. 나와 마주하기 전에, 내가 있는 땅으로 끌려 내려오기 전까지 그는 충분히


사랑받고 또 사랑받았기 때문이리라. 땅 밑에서 기고 있던 나와 다르게.

그래, 나와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오박사님의 서재 문을 두드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들어오거라.’

열 살의 나는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던 것 같다. 박사님은 내가 문을 열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모습이었다. 나는 작은 발걸음으로 서재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닫고 쭈뼛쭈뼛 뒤를 돌았다. 서재 안은 책
냄새가 났다. 아주 아늑한 냄새.

‘박사님.’

내가 부르자 박사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이런, 할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니.’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말했다.

‘오박사님.’
‘할아버지라고 부르래도?’
‘오박사님.’

내 고집에 박사님은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는 왜 그러느냐며 인자하게 물어보셨다. 나는 말했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그 당시 나에게는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들,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방, 깨끗하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화장실, 그리고 누군가 차려주는 밥.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포켓몬의 말을 듣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포켓몬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 그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으니까. 사실 포켓몬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내 착각이 아닐까. 외로움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착각.

내가 연구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신기해했다. 포켓몬의 말이 들린다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관심을 가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포켓몬의 말을 옮겼다. 대단하다고 신기하다고 말을 들었지만 며칠
지나자 이내 관심은 시들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이 능력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누구는 진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또 누구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박사님이 그런 나를 연구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조금 특이한 아이를 후원자로 받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지고 그 이후로는 그냥 진짜 오박사님의 손자인 것처럼 먹고 입고 자고 지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인 채로. 그러니까 이거 정말 이상한 거잖아. 무섭잖아.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가.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다. 그렇기에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박사님.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라면 된단다.’

진짜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그럴 거면 왜 나를 데려오신 걸까. 내 미간이 살풋 찡그려지자 박사님도 어쩔 줄


몰라하셨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거나...’


박사님의 확신 없는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그렇게 어떤 생각을 하고 나를 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박사님은 돈이 남아돌아서 나 같은 어린애를 데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 생각 없이 데려왔다면 어느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지지 않을까.

나는 박사님에게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해달라고 얘기했고 박사님은 조금 고민하시더니 말하셨다.

‘음... 그럼 연구를 조금 도와주는 것도 괜찮겠구나.’

포켓몬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다. 하지만
연구를 보조하는 데는 사용할 수 있었다. 포켓몬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포켓몬이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의 포켓몬들은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많다. 포켓몬에 대한 기본권이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포켓몬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절차도 까다롭고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제약하는 것이 많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연구였기 때문이다.

야생 포켓몬을 잡아와 키, 몸무게, 성별, 특성 등등을 알아보고 다시 그 서식지로 놓아주는 그 기초적인


과정만으로도 포켓몬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확실히 제 살던 곳에서 갑자기 잡혀와 낯선 환경에 뚝 떨어졌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 것이지.

-나를 놔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줘!

케이지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삐삐같은 포켓몬들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쉬이. 겁내지 마.’


- 넌 또 뭐야!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우리는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잠시 너희에 대해서 알고 싶을 뿐이야.’
- 거짓말. 인간은 믿을 게 못 돼.
‘내가 약속할게. 너를 꼭 네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달래고 설득하면서 나는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문제 행동을 보이는


포켓몬들을 돕거나 관리하고 기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연구소에 포켓몬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돌아갈 곳 있는 그들이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다.

85 화

w. 도여은
‘진짜 할아버지의 손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릴 적 녀석이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는 진짜 오박사님의 손자잖아. 내 말에


그 녀석은 말했다.

‘진짜 손자는 너 같은 애겠지.’

나와 그는 항상 붙어 다녔다. 집에서도 연구소에서도 새로 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녀석이 다 가졌다고


생각했다. 가족도 친구들도 연구소 사람들도 다 녀석을 좋게 대했으니까. 그 사이에서 녀석은 반짝반짝 빛이
났었으니까.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는 사람. 그런 것이 당연한 사람.
그게 내가 보던 오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야 나는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오박사님과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오박사님의 손자라는 오해를
받았을 때, 포켓몬을 돌보기 위해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할 때, 항상 옆에서 모든 것을 함께 했던 녀석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가 그 자신을 몰아세우게 된 것은.


내가 그의 뒤로 숨어버리게 된 것은.

나는 저 녀석보다 뛰어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바람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기도 했다. 학업,
운동, 사교성 등등 반장부터 학생회장까지, 대내 활동이며 경시대회 같은 대외활동까지.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목숨 건 듯 달려가는 그 뒷모습을 따라 달렸다.

그러다가 열 셋의 여름방학. 나는 뒤돌아본 녀석에게 멱살을 잡혔다.

‘넌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해?’

골목길에서 녀석은 내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쳤다. 벽에 부딪힌 등이 아팠다. 하지만 그 녀석은 더 아픈, 더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래, 그 때는 도장에서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날은 대련이 있었고 나는 녀석에게 졌다.
그뿐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내가 시치미 떼자 녀석은 더 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뭐든지... 뭐든지 넌 내 뒤에 서 있으려고 하잖아!’

그의 소리가 해질 무렵의 골목을 가득 채웠다.

‘왜 나랑 상대조차 안 하려 해?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진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거짓말 하지마, 새끼야. 운동도, 공부도, 인정도. 뭐든지 넌 하기만 하면 날 뛰어넘을 수 있으면서. 왜 하지
않는 건데? 내가 할아버지 손자라서? 네가 후원받는 처지라서? 그래서 져주는 척하면서 정신 승리하는 거냐?
내가 더 나은데 봐주는 거다 하면서?’
나는 멱살 잡은 그의 손을 쳐냈다. 그의 손은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울음으로 얼룩져있었다.

공포.

공포란 실체가 없는 것에 깃드는 법이다. 원래 추격하는 자보다 추격당하는 자가 더 마음 졸이는 법이다. 그가


거침없이 내뱉은 말에 나는 상처받았다기보다는 놀랐다. 그저 내 행동이 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진짜야.’

우리 사이에 조용히 공기가 내려앉았다. 녀석은 소리쳤다.

‘그럼 왜 안 하는 건데?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고.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자고.’

나는 생각했다. 너는 모른다.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는 것도 재능이라는 걸. 끈질기게 파고들고 아파도 계속해서


부딪히고 끝내 얻으려고 하는 그 투쟁심도 타고 나는 것이라는 걸.

열의 없는 상대방과 싸우는 것만큼 지치는 일은 없다. 또 그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다. 사실 좀 기분 좋았다고


하면 너는 화내겠지. 이런 말은 네가 나를 적수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러니까, 처음으로 인정받는
느낌이었다고. 나는 그 찡그린 얼굴에 미안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언젠가 말이야.’


‘...’
‘내가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있을 때, 그 때.’
‘...뭐?’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을 때.’

서늘한 골목의 바람이 우리 사이에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를 악물고
나를 쳐다보는 네가 보였다.

‘그 때, 전력으로 붙자.’

그 말을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아,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너 그때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거든.

“절대 안 질 거다.”

우리는 운동장 한 가운데에 마주 서있다. 흰 선으로 구분해 놓은 시합장 밖으로는 결승전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늘은 그들의 함성소리에 멍들은 듯 파랗기만 했다. 시합하기 좋은 날씨.

“나야말로.”

절대 지지 않을 거니까.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한 번 꽉 쥐고 놓았다. 서로 등을 돌려 서로의 자리로 향했다. 심판의 시합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은 이 녀석으로. 나는 허리춤의 몬스터볼을 손으로 훑다가 하나를 선택해 공중으로 던졌다. 가자, 리자드.
필드에는 리자드와 레트라가 섰다. 나오자마자 전광석화로 거리를 좁히는 레트라. 스피드를 줄일 필요가 있지.

“겁나는 얼굴. 그리고 불꽃엄니.”


“바로 필살앞니!”

전광석화로 밀려난 리자드의 겁나는 얼굴에 주춤하는 레트라.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려고 하지만 늦다. 리자드는
입 한가득 불꽃과 함께 레트라를 물어 던진다. 공중에서 한 바퀴 뱅글 돌아 착지한 레트라. 바로 달려들 준비를
한다. 그리고 화륵 타오른다. 필드 너머 바람의 씩 웃는 모습이 보인다.

젠장. 화상.

“화염방사!”
“전광석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화염방사라 위력은 약하지만 불꽃세례나 불꽃튀기기는 너무 범위가 좁아. 하지만 광범위한
화염방사 사이를 뚫고 레트라가 빠져나왔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부딪히는 전광석화.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리자드의 배에 박혔다.

전광석화의 공격력이 아니잖아. 이거.

쓰러진 리자드를 회수하고 몬스터볼을 던졌다.

“고속스핀!”
“10 만볼트!”

빠르게 회전하는 껍질이 가까스로 서 있던 레트라의 10 만볼트를 가르고 정통으로 부딪혔다. 물타입에게
전기타입 무섭지만 껍질은 마치 바위타입 같거든. 대미지는 받지만 물타입이 받는 위력까지는 아니다. 레트라를
쓰러뜨린 어니부기가 껍질에서 팟 튀어나와 자신만만하게 선다.

UNNIIII ㅡ!

상대방에게 줄 시간은 없다는 듯 빠른 교체로 레트라 자리에 윤겔라가 섰다. 바로 사이코키네시스를 난사하는
윤겔라. 보이지 않는 공격이 운동장 바닥을 푹푹 헤집지만,

“오른쪽, 왼쪽, 뛰어!”

내 지시에 따라 어니부기는 이리저리 피한다. 녀석이 이를 악문다. 넌 모르겠지만 윤겔라 시선 따라 공격이


가거든. 아직 연습중인 모양이지? 속도도 떨어지고 위력도 낮잖아. 그렇게 어니부기 접근, 그리고-

“-물어!”
“리플렉터”

윤겔라가 숟가락을 휘두르자 반짝이는 막이 생겼다. 윤겔라의 팔을 물어뜯었지만 데미지가 부족해. 윤겔라는
팔을 흔들어 떨쳐낸다. 그래도 타입 상성은 무시 못 하지만.

“사슬묶기.”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물의파동.”
“사이코키네시스!”

작은 동그라미로 시작해서 점점 크기를 키워 돌진하는 물의 파동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충돌해서 폭발이


일어난다.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가 가려진다. 이런,

“뒤를 조심해! 아쿠아테일!”


“어떻게 안 거야, 젠장. 사이코키네시스!”

어니부기가 있던 곳에서 다시금 폭발 소리가 들렸다. 흙먼지가 일어나기 전에 잠깐 윤겔라의 신형이 흐트러진 게
보였거든. 분명 이 상황에서 순간이동. 같이 살다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윤겔라가 순간이동을
한다면 확실한 뒤를 노린다는 것 정도?

쾅, 울렸던 소리 이후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운동장의 흙먼지가 내려앉자 보이는 것은 바닥에 쓰러진 두
포켓몬.

후-

한숨을 잠시 쉬고 다시금 정면을 쳐다본다. 녀석은 못 당하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우리 둘 다


몬스터볼로 포켓몬을 회수했다. 둘 다 남은 포켓몬은 한 마리.

“피카츄.”

작고 노란 포켓몬이 필드 위에 선다. 눈을 들어 보이는 것은 그 이름처럼 까만 포켓몬. 블래키. 서로 지시를


위해 입을 떼려는 그 순간.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시작할 때는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먹구름으로 뒤덮여간다. 흉포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으악, 갑자기 날씨가 왜 이래!”
“얼른 스피커 옮겨!”

심판은 시합을 중지시켰고 방송실에선 다급하게 교실로 들어가라는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Pikapi!

강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피카츄를 품에 안았다.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흩날린다. 한쪽 팔을 들어 비바람을


가리는데 블래키를 회수한 오바람이 이쪽으로 가까이 온다.

“윽, 이게 뭐야.”

쏴아- 쏟아지는 빗소리와 나무가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며 지르는 비명 사이로 오바람의 물음이 들렸다. 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건,
난데없는 폭풍이다.
1-0 어둠의 블랙칩 & 1-Epilogue

86 화

w. 도여은

3,4 위전에서 이기고 포켓몬을 모두 보건실에 맡긴 채 나는 잎새와 결승전을 보러 나왔다. 분명 3 등을 하게


되었지만 왠지 기쁘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좀 이상했다. 너무 쉽게 이겨버렸다.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다.

한지우나 오바람이나 너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진짜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실력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벌써부터 이렇게 강한데 1 년 뒤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사실은 체육대회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도 조금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은


강했으니까. 나도 지금까지 꽤 많은 시합에서 이겼고. 기대도 받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졌다.

기충전 대신 다른 것을 썼어야 했을까. 만약 50 퍼센트의 확률로 던진 도박이 성공했었다면, 그랬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졌을까. 그럼에도 지고 말았을까. 저 두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결승전. 그 판을 만들기
위해서?

“으으.”

나는 눈을 비볐다. 진짜 이런 생각하기 싫은데, 이런 생각 하고 싶지 않은데. 나를 자꾸 무기력하게 만드는데.


하지만, 하지만.

진짜 이거 정말 게임처럼 흘러가는 거 아닐까.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었던 날 보았던 인트로. 포켓몬과 배지를 순서대로 얻어가는 두 주인공들. 달맞이산에서
만난 로켓단과 그 이후 퍼진 소문들. 단신의 포켓몬 트레이너가 로켓단을 물리쳤대. 그리고 이수재를 만난 두
사람. 인터넷 상에 찾아보았던 상트앙느호, 분명 존재하고 있었던.

“왜 그래? 눈에 뭐라도 들어갔어?”


“아... 응...”

나는 잎새의 말에 눈을 비비며 고였던 울음을 닦아냈다. 그리고 나지막이 잎새에게 물었다.

“있잖아...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에...? 운명?”
“삶이라는 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 말에 잎새는 조금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 운명이라는 게 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음... 만약에 그게 존재한다고 해도 우린 모르니까 상관없는
것 아닐까. 사실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나중에 시간이 흐른 다음에 아, 이건 운명이었구나 하는 게
대부분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 말을 뱉지 못했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한지우와 오바람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나는 왠지 그 광경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잎새가 모르게 그 관중들 사이에서 벗어났다.

사실 오바람이 이긴다면 뭔가 힘이 될 것 같았다. 여기는 게임 속이 아니고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내게


말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약 한지우가 이긴다면? 어차피 이곳은 주인공이 우승하는 세상이라고 느낄 것만
같아서. 이런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이 들 것 같아서. 영영 이방인일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그런 것 보고 싶지 않았다.

보건실로 다시 돌아갈까, 하면서 뒤돌아 가려는데...

“뭐야...”

살다보면 한 번쯤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하는 소름 끼치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을 딱 멈추게 하는 그런 느낌.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느꼈던 느낌.

나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학교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 무언가 있다.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있다고 기이한 확신이 전신을 감쌌다. 나는 뛰어올라갔다. 계단을 허겁지겁 올랐다.
옥상으로 오라고 무언가가 부르고 있었다. 숨이 차도록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어가 옥상 철문을 열었을 때,

확 트인 검은 하늘.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이 보였다.

나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 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언뜻 하얀 꼬리가 보였다고 생각했을 때. 후둑,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읏...!”

아주 굵고 따가운 비가 나와 바닥을 강타하기 시작했고 그런 빗방울을 밀어낼 정도로 강한 바람이 나를 밀쳤다.


옷자락이 비명 지르듯 펄럭였다.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번개가 눈을 따갑게 했다. 온몸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다시금 보고 싶었다. 팔로 강풍을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푸든 돌기가 달린 하얗고 미끈한 꼬리가 언뜻 먹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길쭉한 다리가, 사람의
손과 닮은 매끈한 날개가 보였고. 결국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괴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루기아.”

폭풍 치는 밤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포켓몬. 아니 그가 폭풍을 몰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바다의 신이라고 불리는 포켓몬. 너는 나를 데리러 온 거니?
그가 날개를 칠 때마다 새찬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나에게 닿지 않고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바람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부서지지만 그 속에서 나, 나만 오롯이 고요했다.

나는 빗속에서 손을 들었다. 내가 그에게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이지은!”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뺨을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주 하얀 세상. 폭풍이 치는


옥상의 풍경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떨어졌다. 아니,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 여전히 날갯짓을 하고
있는 거대한 포켓몬을 코앞에 마주하고 있다.

강한 기운이 나를 내리눌렀다. 도대체 어떻게 게임 주인공들은 이런 포켓몬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거지?


도대체, 이건 수준이 다르잖아. 이게 바로 프레셔. 이래서 한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두 배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걸까.

나는 한참을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한참을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가까스로 침을 삼키고 말을 하려고 입을


떼었다.

-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온몸이 그에게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포켓몬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 나는 그 기분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돌려보내러 온 거야?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에게서 나온 묵직한 파장이 나에게 닿았다.

-돌아가고 싶은가.

도리어 그가 나에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냐고? 그런 생각을 했었을 때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잠깐 동안 그냥


이게 다 꿈이고 평범했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는걸.

하지만 내 이름이 들렸을 때, 나는 여기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돌아가게 된다면 결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사라진다면 분명 울고 말 보송송, 내가 함께하자며 안아들었던 냄새꼬, 나를 두 팔로 안아주었던


누오와 툴툴거리며 내 말을 따르는 니드리노.

그 아이들이 차례로 떠오르는 바람에 그만...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어.

-그럼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냐고? 지금 괜찮다고 묻는다면, 나는 과연 괜찮을까. 나는 나 스스로 자문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저 버티고 있을 뿐. 내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가 물었다.

-알고 싶은가.

나는 그제야 내가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응, 알고 싶다. 내가 왜 이 세상에 떨어졌는지.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지. 그리고... 나는 이곳에 있어도 괜찮은지.

-말해줄 수 있어?

거대한 포켓몬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알지 못한다. 대신,

대신?

-그 사실을 알고 싶다면 불꽃을 만나라. 모든 열망이 모이는 시간 속에서 용사여, 너는 하늘의 기원 속에


있을지니. 그리하면 하늘이 열리고 불꽃이 그에게 데려다줄 것이다.
-불꽃...? 그에게?
-타지의 사자가 모습을 드러내리니, 너에게 진실의 빛을 보여주리라.

그 말을 끝으로 툭, 무언가가 끊어진 것처럼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87 화

w. 도여은

-뭔가 이상해.

폭풍 속에서 나는 피카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봐.

피카츄가 작은 팔을 뻗어 가리킨 곳은 옥상. 나는 그곳에서 엄청난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렬하고 강력한. 축축하고 무거운 느낌.

“뭐야, 옥상? 옥상에 뭐가 있는 거냐?”

팔을 들어 비바람을 막으면서 바람이 물었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포켓몬이 있어.”
“뭐? 포켓몬? 저 폭풍 치는 먹구름 안에 포켓몬이 있다 이거야? 미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돼.”

나는 그 말을 끊고 말했다. 말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그 포켓몬이 맞다면.

“설마... 설마, 전설의 포켓몬을 말하는 거냐, 너.”

신이라고 불리는 포켓몬. 폭풍을 불러오는 포켓몬. 저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포켓몬이라면 단 한 마리밖에
없다. 폭풍과 함께 나타난다는 포켓몬.

“루기아.”
“미친, 나는 그냥 신화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존재하는 거야 그거? 와... 그런데 그런 포켓몬이 왜...
잠깐만.”

바람이 내 젖은 어깨를 잡아챘다.

“너, 이지은 봤어?”


“...뭐?”

녀석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삐 교실 안으로 피하는 학생들, 천막을
해체하고 집기를 들고 들어가는 선생님들. 그 사이에 누군가를 찾고 있는 김잎새에게로 바람은 달려갔다. 나 또한
강풍에 날아갈 것 같은 피카츄를 볼로 돌려보내고 그 뒤를 쫓았다.

“너희들 지은이 봤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김잎새의 물음에 바람이 답했다. 김잎새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분명 결승전이 시작하기 전에는 같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는 잘 모르겠다고.

설마.

내가 멈칫하는 사이 바람은 벌써 달려가고 있었다. 나도 그 뒤를 따랐고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김잎새도 따라왔다. 반으로 들어간다고 학생들로 꽉 차있는 계단을 비집고 올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그 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질감도 모습도 또, 내 안의 본능이 저 아이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했으니까.


그러니까, 돌아가려는 걸까. 원래 있던 세상으로?

3 층을 넘어가자 학생들 틈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옥상의 철문은 열린 채로
강풍에 휩쓸려 쾅쾅거리며 벽에 제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좁은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몸집의 하얗고 푸른 포켓몬과 그 아래 서 있는 이지은의 모습. 날카로운


비바람이 그녀의 주변을 피해 지나가는 기묘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 문턱을 넘는 순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라는 위압적인 기운까지 그 네모난 틀 너머로 느껴졌다.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학교 안과 저 옥상은 정말 다른 세계인 것처럼.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애를 잡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내가 손을 뻗는다면 저 애는 이곳에 남을까. 이곳에 남는다면 정말로 저 애는 행복할까.
내가 어머니를 붙잡았더라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믿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붙잡았더라면. 정말로 그것은
행복이었을까. 나만의 이기적인 생각만은 아니었을까. 나만의 행복이고 어머니의 불행은 아니었을까.

그 짧은 수 초간 머릿속을 지나간 생각 때문에 멈칫한 사이. 그 광풍을 헤치고 문턱을 넘는 바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 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한 번 거부당했었던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붙잡아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포켓몬 아래에서,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그것도 빗물로 흠뻑 젖은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하게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은

미치도록 비현실적이었다.

그 비현실을 헤치고 들어가 그 이름을 부르면 이 모든 것이 다시금 현실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이름을 불렀다.

그 소녀는 마법처럼 뒤를 돌아보았고

환상처럼 사라졌다.

깨끗하게.

비도 바람도 포켓몬도 그 소녀와 함께 사라지고. 티 없이 맑은 하늘이 눈앞을 파랗게 채웠다. 마치 폭풍은


몰아친 적 없었던 것처럼. 망연하게 서 있다가 나는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똑 떨어졌을 때

꿈에서 깨어났다. 깜빡 속을 뻔했다. 나는 비바람에 쫄딱 젖어있었고 옥상 바닥은 빗물로 가득 차 있었다.


폭풍은 몰아쳤었다. 이 하늘에서도. 내 마음에서도.

“이지은ㅡ!”

다시금 내가 그 이름을 외쳤지만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찰박찰박 소리와 함께 김잎새와 한지우가
뒤에서 다가왔다.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방금 그 포켓몬은 뭐고! 지은이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나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말에 대답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니. 이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이라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다


있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그 말들을 지우려고 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분명 무엇이든 잘 기억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아주 인상적이었으니까.

‘포켓몬이 없는 곳으로 데려다줘.’

내 품에 매달리며 얘기했던 것이 귓가에 똑똑히 들리는 느낌이었다. 네가 원래 있었던 곳은 포켓몬이 없는


세상이었나.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였다. 태어나서부터 포켓몬과 부대끼며 살았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돌아간 걸까.

영영 돌아가기로 한 걸까.

뭔가 울컥한 것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을 때, 옆에서 김잎새가 소리치는 것이 들였다.

“지은아!”

그 외침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진짜... 이게 뭐야.”

공중에서 이지은이, 그 애가 방금 전 사라졌던 모습 그대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낙하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팔을 뻗었고. 그 애는 내 품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온몸으로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에 나는 그제야 이 모든 게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축축하게 젖은 주황색
티셔츠에 체육복 반바지, 비바람에 휘날려 엉망이 된 머리카락에, 그리고...

“세상에... 지은아. 열이 펄펄 끓잖아.”

너는 왜 또 불덩이 같은 몸으로 내 품안에 쓰러지는 건지.

나는 도움을 받아 그 애를 등에 업고 옥상을 벗어났다.

방금이 미치도록 비현실적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등 뒤에 닿는 뜨거움에

그냥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영문도 모른 채 오바람과 한지우를 따라서 올라간 옥상에는 지은이가 있었다. 뭐야, 저게. 하얗고 거대한
포켓몬은. 그리고 미친 듯이 몰아치는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오바람을 보고 경악했고, 그것보다 더 놀랐던 것은
오바람의 부름에 지은이가 돌아보는 순간,

사라졌던 것이었다.

포켓몬도 폭풍우도 지은이까지도.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현대 과학으로 가능한 일인가? 순간이동인가. 포켓몬과 함께 사라진 건가?
내가 한지우나 오바람을 닦달하며 물어봐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지은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공중에서. 마치 엄청난 몰래카메라에 당한 느낌이었다. 아니면 마술이라거나. 아니면 여기가 설마 영화


속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혼란도 쏙 사라졌다.

공중에서 떨어진 지은이가 열이 펄펄 끓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이고 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일단


오바람에게 지은이를 업히고 보건실로 뛰었다.

보건 선생님은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오는 우리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셨지만 이내 침착하게 지은이의 상태를


보시기 시작했다. 침대에 눕히려는 오바람을 만류하고 바로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며 차키를 챙기셨다.

사실 침착하지 못한 건 거기서 지은이를 기다리고 있던 포켓몬들이었지. 니드리노나 누오는 물론이고 냄새꼬마저


주변을 돌면서 안절부절못했었다. 뭐, 보송송이야 당연히 패닉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울먹 했었고. 겨우
포켓몬들을 달래서 몬스터볼에 넣고 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더랬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이 암담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살면서 친구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해보겠는가. 응급실에 눕히고 얼른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보건
선생님 대신 누워서 땀을 뻘뻘 흘리는 지은이 옆을 지켰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었다. 보건 선생님 차가 좁아서 나만 따라올 수밖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오바람이나


한지우가 따라왔었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꼬치꼬치 캐묻고 말았을 것이니까. 뭐, 사실 그것들이
내가 묻는다고 해서 말해줄 것 같진 않지만.

의사와 간호사가 왔다갔다하고 지은이의 팔에 링거를 놓고 해열제를 투여하고 이것저것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잠깐


소강상태가 왔을 때. 아직 지은이의 부모님이 오시기 전 지은이가 잠깐 정신을 차린 적이 있었다.

‘잎새구나...’

지은이는 나를 보더니 그런 말을 했다.

‘나 아직 여기에 있는 거구나.’

아주 작은 말이었지만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이 다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는 것 말이다. 내 손을 잡으면서 아주 다행이라는 듯이 웃는데.
그런 얼굴을 보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구.

그렇게 내 친구는 내게 의문거리만 잔뜩 안겨준 채 다시 잠에 들었다.

그 날로부터 지은이는 꼬박 이틀을 앓았다. 월요일이 되어서야 연락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고 화요일에는 학교에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었다. 많이 아팠다고 광고라고 하듯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걸. 오바람이나 한지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어물쩍 넘어가고 나니 다시금 물어볼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얘기해주겠지, 하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간을 보냈다. 6 월 모의고사를 치고 기말고사를 치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88 화

체육대회 날 루기아를 만나고 쓰러진 나는 엄마 아빠에게 대략적인 얘기를 들었다. 다행인 점은 엄마 아빠는
체육대회 날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옥상에
있었다는 사실도 루기아를 만났다는 사실도 모르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애들은? 사실 루기아와 헤어진
이후로는 아예 생각나는 점이 없지만 그 하얀 공간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언뜻 그 셋을 본 기억은 났다.

사실 걱정했다. 학교로 돌아가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대충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한지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잎새는? 오바람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끙끙 앓았는지는 그 애들은 전혀 모를 거다. 그래도 다행일까.
내가 학교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었다. 그저 걱정했다며,
지금은 괜찮냐며 내 안부를 물었을 뿐이었다.

사실 눈물이 핑 돌아서 점심시간에 조금 울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아팠으면 우냐면서 아직도 아픈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는 애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도 언젠가는 얘기해야겠지.

그렇게 생각만 하고 나는 하루 이틀을 넘기게 되었고... 뭘까 도리어 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느낌은...


결국 기회를 잡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은 지나갔다. 공포의 6 월 모의고사를 치고 기말고사를 치고 시간은 쭉쭉
흘러가 벌써 여름방학. 전에 엄마와 상의했던 것처럼 이사짐을 싸고 본가로 옮기게 되었다.

song~ song!

보송송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마루에 앉아 있던 나는 보송송에게 시선을 옮겼다. 보송송은 다다다 도움닫기를
하더니 풀쩍 뛰어 마기라스가 내민 손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거기서 몸을 둥글게 말고 한 번, 두 번, 세 번
덤블링 후 바닥에 탁, 착지.

그러고 난 뒤 보송송이 나를 보며 어떻냐면서 반짝반짝 쳐다봤다. 으으, 귀여워. 심장에 좋지 않아. 나는


짝짝짝 손뼉을 쳐주었다.

“보송송 엄청 멋졌어!”

그 말에 보송송은 할짝 웃으며 내 품에 쏙 안겨들었다. 그러면서 얼굴을 내밀어 냄새꼬에게 메롱거리며 약을


올린다. 마치 너는 이런 것 못하지 하는 것 같다. 냄새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데 도리어
니드리노가 자기도 그런 것 하고 싶다고 방방 뛴다.

그러다가 한 번 해보라는 마기라스의 몸짓에 뛰어들다가 도움닫기하고 앞발로 손을 밟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뒷발이 마기라스의 손에 걸렸다. 결국 바로 바닥으로 쿵 떨어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누오랑 보송송은 물론 그걸
지켜보고 있던 장크로다일까지 박장대소하고.

역시 마당 넓은 집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 애들을 뒤로하고 거실로 들어가려는데


냄새꼬가 덩굴로 내 발목을 잡았다.

“응?”

나는 무릎을 굽혀 냄새꼬의 꽃봉오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방에 있을 뿐이야. 놀고 있으렴.”

냄새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놓아주었다. 사실 내가 갑자기 쓰러진 것 때문에 애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한동안은 내 주변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더랬다. 특히 아이들이 없는 동안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인지 더 그런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송송을 선두로해서 누오하고 니드리노까지 품에 안겼었지. 그런데 냄새꼬가 안 보여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자 냄새꼬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냄새꼬는 나 안 안아줄거야?’

그제서야 냄새꼬는 내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얼마나 놀랬을까. 나는 그런 아이들을 토닥토닥 안아주었다. 정말


내가 큰일 나는 줄 알았다며 보송송은 울었다. 그날도 그렇지만 그다음도 다음에도 또 울고 울었다. 틈만 나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아서 달래느라 힘들었지. 정말 울보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다. 진짜로 어디든지 졸졸 쫒아 다녔었다니까. 사랑받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지만.

그렇게 몰래 방으로 들어온 나는 달칵, 문을 잠갔다. 이사를 하고 물건들을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은


다시금 정리하면서 마음잡고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침대 위에는 앨범이 올려져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는 사진을 참 많이 찍곤 해서 두꺼운 사진


앨범이 세 개나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저 앨범을 지금 읽으려고 한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앨범 표지를 쓰다듬었다. 분명 이 안에는 많은 것들이 변해 있을 것이 안 봐도 훤했다.


하지만 나는 이 앨범을 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체육대회날,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앨범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두려워서 열어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세상의 나가 아니라는 것을


직면하고 마주하기 무서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외면해왔다. 도망쳐왔다.

사실 체육대회 때, 오바람과의 시합에서 나는 기권하려고 했었다. 기충전을 했지만 피죤을 쓰러뜨리는데


실패했다. 냄새꼬로는 피죤을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오바람의 손에는 블래키도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냄새꼬의 몬스터볼을 쥐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냄새꼬가 원했다. 나를 꺼내달라고 나는 싸울 수 있다고 몬스터볼이 진동했다. 그리고 냄새꼬를 꺼냈을
때, 눈앞에 자신을 노리는 비행포켓몬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고 있음에도 당당하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비록 나는 지고 말았지만, 냄새꼬는 지지 않았다.


냄새꼬 덕분에 나는 졌지만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않았을 때 당당할 수 있다고 알려준 냄새꼬
덕분에 나는 외면할 수 있었던 것들을 알아가고자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앞에 견딜 수 없는 신의 장난이 있더라도.

후ㅡ 하ㅡ

나는 쉼호흡을 하고 앨범의 표지를 넘겼다. 젤 처음 나오는 것은 내가 아기였을 때 사진들. 거기에 당연한 듯


보이는 모다피와 아빠의 포켓몬들이 보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돌아가셨던 외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노라키의 모습.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노라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한 장 한 장. 그렇게 앨범 하나를 다 보고 다른 앨범을 펼쳤다. 또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진들을 보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또 다른 앨범을 펼치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이를 악 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남은 하나의 앨범도 다 보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뒷 표지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그건 내 눈물방울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울음은 턱 끝까지 차올라 이미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나는 마주해야 했다. 모른다. 모른다. 나는 이런 나를 모른다. 앨범 속 사진의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왜 내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울고 있는 사진은 왜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찡그리고 있는 사진은 왜 찡그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체육관을 위해 춘천, 부산에 갔을 때는 물론 속초에 갔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포켓몬이라는 존재 하나로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다. 분명 내가 있던 곳의 풍경과는 다른 풍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나는 모른다.

이 앨범 속에는 추론과 추측만이 가득할 뿐 추억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기억만이 잔뜩 들어있었다.

나는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가 들을까 걱정되어 울음을 끅끅 거리며


참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택했다.

내 세계는 바뀌었고 사랑스러운 생명들을 얻은 대신 나는

과거를 잃어버렸다.

89 화

번외로 작성한 아르꼬 괴담은 따로 업로드 하였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나 조아라에서 확인해주세요 :D

번외. 아르꼬 괴담
90 화

외전. 누가누가 잡아먹나

w. 도여은

*본편과는 상관없는 이벤트 외전으로 블로그나 조아라에서 확인해주세요 :D

1 부 완결 기념 썰풀이 & 후기

91 화

의식의 흐름기법주의
아무말대잔치 주의
필요 없는 잡담주의

시작합니다.

1 부 제목 : 세계

지은이의 블로그는 꽤 인기가 많았다. 해킹 파일 분야에서는 조금 인기인. 게시물도 잘 쓰는 편. 파일 출처도 잘


밝혀 주어서 해킹 게임 만드는 입장에서도 좋아했다.

지은이가 트립했을 때 포켓몬 게임 관련된 것들은 다 사라졌다. 컴퓨터는 아예 복구가 불가능. 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포켓몬 게임 관련되어있는 모든 것들이 없어졌다.

지은이는 그것을 아까워하고 있다. 내 피 같은 덕질...

이 세상에서 닌텐도가 사라진 것은 설정 오류다. 포켓몬 월드에서 주인공 방에는 항상 닌텐도가 있다. 작가는
코멘트를 보다가 알아서 이사하면서 내용을 조금 수정했다.

6.

작가는 해킹 버전을 해본 적이 없다. 작가는 괴담 관련을 좋아한다. 무서운 건 싫어하지만. 포켓몬이라면 조금


무서워도 눈 딱 감고 보는 편.

그런 의미에서 아르코 괴담은 처음 만든 괴담 치고는 그럴듯해서 놀랐다. 독자님들이 꺄아아아아 거리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날 잠을 설쳤다. 그 다음날 피곤해서 죽을 뻔했다. 독자님의 저주인가 보다.

아르코는 처음에 아르꼬인 줄 알았다. 이것저것 자료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왠지 아무리 아르꼬라고 쳐도 안


나오더라.

뚜벅쵸도 마찬가지. 뚜벅초 아니다 뚜벅쵸이다. 아직 덜 고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아무도 모를


테니 상관없을 듯.

10

대체로 게임 기반으로 쓸려고 하고 있으며 배틀 같은 경우도 최대한 그 성능에 맞게 적으려고 노력하는 편. 특히


이 글을 보고 계실 내공 깊으신 분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 미흡하니 귀엽게
봐주시고 오류는 코멘트로 얘기해주시길.

11

배틀 적을 때는 주로 나무 위키와 포켓몬 위키의 힘을 빌린다.

위키 만만세다.

12

스토리 구상할 때는 포덕 분들의 블로그를 참고한다. 특히 리오메 님의 미오시티의 작은 도서관 블로그의


포켓몬스터 적 플레이 일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괴담은 고북손 님의 포스트들과 괴담은 라프라스를 타고의
옴니버스 님. 피카뉴스도 틈틈이 챙겨본다. 거기에다 포켓몬 패러디 쓰거나 그리시는 많은 작가님들.

이 글을 쓰는데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어주신다.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린다.

13

부끄럽지만 작가는 적녹을 플레이해본 적이 없다. 리메이크 포함.


14

쨌든 자료조사는 인터넷의 힘을 빌린다. 기타 여행지도 마찬가지. 인공위성 사진 만만세.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되게 어렵다. 힘내자.

15

순천만은 가본 적 있다. 여름은 아니고 가을에. 되게 좋다. 가보시기를.

16

지은이는 고등학교 1 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이 있었으나 트립 이후 폰이 고장 나서 잠시 연락하지 못했다. 폰을


고친 후에는 지은이가 이 세계에 적응한다고 연락을 거의 못 했다. 가족인 엄마 아빠도 달라져서 혼란스러운데...

17

개학 이후에는 친구들하고 얘기도 하고 했는데 실제로 친구들 인적 사항도 많이 바뀌었다. 친구들이 안다는 전제
하에 말하는 것들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고 친구가 말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모르는 이야기인 경우가
있어서...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지만 아니, 멀쩡한 척해야 덜 멘탈 깨지지...

18

개학했을 때는 친구들과 반이 갈린 게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9

1 학년 때 친구들은 대부분 문과 진학해서 반이 갈려 자연히 멀어졌다. 지나가다가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하고


안부는 묻지만 지은이는 그것도 좀 불편하다.

20

사실 스타팅이 메리프인 건 작가가 메리프 진화트리가 최애이기 때문이다. 본격 자급자족 소설.

21

지은이의 모티브는 짧은 치마 트레이너이다. 훗날 엘리트 트레이너가 된다. 원래 포켓몬 트레이너는 짧은 치마/


반바지 소년 -> 엘리트 트레이너 -> 베테랑 트레이너니까. 지은이도 이 트리를 탈 예정.

22

짧은 치마가 모티브라서 뚜벅쵸, 니드런(수)가 엔트리로 들어왔다. 물론 본작에서는 진화하고 들어오게 되었지만.

23

우파는... 작가가 우파도 좋아한다.


24

사실 전기타입 포켓몬 트레이너로 만들고 싶었는데 땅타입 견제할 자신이 없어서 기각되었다.

25

좋아하는 관동 성도 포켓몬 중에 다른 주인공들 엔트리와 겹치지 않게 짰지만 꽤 마음에 들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특히 냄새꼬는 연재하면서 애정이 많이 생겼다.

26

니드리노 성격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독자님들이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다.

27

포켓몬 이름은 대체로 종으로 불러도 이상하지는 않다. 얘네가 진화하면 인상이 확 바뀌기도 하고. 그래서 최종
진화 후에 이름을 붙여주는 편도 많은 편. 게다가 포켓몬을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건 현실로 따지면 강아지를
멍멍아라고 부르거나 고양이를 야옹아 라고 부르는 것 같이 보편적인 부름이다.

28

특히 포켓몬 울음소리가 종 이름하고 비슷하다 보니 엄마의 모다피 이름이 모디인 것처럼 이름에 주안을 둬서
짓기도 많이 짓는다.

29

그리고 배틀 할 때에는 포켓몬의 종으로 부르는 것이 암묵적 매너이다. 특히 타지방 포켓몬과 시합을 할 때.
그래서 트레이너의 경우에 이름을 나중에 익숙해지면 짓는 경우가 많다.

30

한지우나 오바람의 경우.

31

아, 같은 종의 포켓몬을 기르는 경우에는 꼭 붙여준다. 헷갈리니까.

32

포켓몬 사이즈는 보통 사람 허리만 하거나 그보다 작으면 소형 사람만 하면 중형 사람보다 크면 대형으로 분류한다.
좀 더 자세한 기준은 있지만 대체로 그런 편.

33

사실 이 소설은 메리프 때문에 쓴 게 맞다. 왜 포켓몬 패러디에 메리프는 없는가..! 이 귀염둥이 생명체를...!
왜 매번 피카츄냐 이 말이다! 나는 메리프의 귀여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34

하지만 피카츄도 넘나 귀엽다.

35

취향의 문제일 뿐...! 작가는 피카츄보다 라이츄파이긴 하지만. 취향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포켓몬은 사랑이다.

36

독자님들이 좋아한다고 어필하는 포켓몬은 한 번쯤 출연 고려의 대상이 된다. 안타깝지만 못 나오는 애들도 있고.
루카리오 같은 경우가 독자님의 성원에 힘입어 등장할 예정이다. 2 부에서 까메오로 등장하고 외전도 한 번
다뤄볼 생각.

37

타지방 포켓몬은 대체로 안 나온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작가가 1,2 세대(포.하) 이후에 계속 쓴다면 3 세대, 4
세대 등등 계속 쓸 생각이기 때문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

38

3 세대의 경우에는 현실판은 아니고 게임판. 환생물인데 로맨스로 생각하고 있다. 중편정도. 포하와는 별개의
작품. (아마도) 여주의 남주 스토킹물 로코. 남주는 여러분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다. 작가가 좀 마이너
취향이라... 음...

39

새조련사다.

40

오루알사의 새조련사... 처음에 마주쳤을 때 네임드인 줄 알았다. 심쿵당해서... 하지만 이건 아주 훗날


얘기... 3 년 뒤에나 쓸 수 있을까... 일단 포하나 끝내고 얘기하자.

41

4 세대는 빙과와 크로스물. 초절약주의 호타로가 (어쩔 수 없이)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 이것도 포하나 끝내고...
아 눈물난다.

42

이 글을 읽는 포켓몬스터 패러디를 쓰고자 하는 작가가 있다면 절대 원작을 따라가지 않길 바란다. 너무 길다.


완전 초 장편... 이 소설처럼...
43

하지만 작가는 포하가 끝나면 1 차창작물 하나 쓰고 싶기 때문에 저 위의 계획은 언젠가는... 이다.

44

사실 누가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 오루알사 새조련사 사진 찾아봐라 얼마나 잘생겼는데...! 개취향. 개존잘.

45

이 작품 내에는 동물이 존재한다. 벌레나 산짐승, 들짐승, 물고기 등등. 상위포식동물은 대부분 오랜 옛날
멸종하기는 했다. 현재는 포켓몬들과 세력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 편. 포켓몬은 번식이 느리기도 하고. 하지만
애완동물은 없다.

46

이 세계는 포켓몬 권리가 잘 갖춰져 있는 편. 하지만 지하세계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47

사실 그것에 비해 동물권은 엄청 바닥이다. 동물 실험이나 가축이나... 포켓몬에 비해 사람의 눈에 더 안 띄게


되니까. 관심도도 적고.

48

사실 우리 현실보다 조금 더 쓰레기일 뿐 생각보다 별로 다르지 않다. 현실도 시궁창.

49

상위 육식 동물은 거의 없는 편인데 여기 사람들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동물을 아는 것은 멸종되기 전에 그려진


벽화나 민화 등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거의 상상의 동물 같은 느낌.

50

지은이는 그것도 적응이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동물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물이 달라...!

51

지은이는 아버지를 닮아서 다타입 트레이너. 엔트리 남은 두 마리도 지금 애들과 타입이 다를 예정.

52

포켓몬의 수명은 포켓몬마다 다른데 평균은 50 년 정도. 그러니까 한 번 키우려고 할 때 잘 생각하고 들여야 한다.
지은이의 니드리노나 누오같은 야생 포켓몬은 다시 돌아가서도 잘 살지만 처음부터 집에서 키운 애들은 잘 적응
못하고 대체로 죽거나 유기동물보호센터로 간다.

53

그게 냄새꼬.

54

냄새꼬는 트럭에서 태어났다. 알을 단체로 부화시키기에 편하다는 이유로.

55

지우는 게임 레드를 기반으로 하고 픽시브 레드의 성격을 빌려왔다. 사실 게임 레드의 성격은 모르겠다. 아무래도
대사가 ... 뿐이기도 하고. 그래도 또래 남고생 같도록 노력하는 중. 외모는 잘생긴 게임 레드 같은 느낌.
직모이긴 한데 픽시브 레드처럼 찰랑찰랑한 직모는 아니다.

56

지우는 패션 센스가 꽝이다. 그래서 옷은 바람이가 대체로 고른다. 어쭙잖게 입지 말고 까만 티, 청바지를


기초로 포인트 색은 붉은색이 잘 받는다고 정해줬다. 그렇게 말해줘도 방심하면 썬문 레드처럼 입는다. 주의요망.

57

지우는 포켓몬과 대화를 할 정도로 잘 알아듣는데 내 상상 속 게임 레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지우가 극도로
포켓몬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은 현실 패치된 극도로 폐쇄된 어린 시절 때문이다.

58

게임 레드는 편모가정이지만 사랑받으면서 자랐다. 말수는 없지만 좀 더 자기주장 강하다.

59

사실 외전. 누가누가 잡아먹나 에서 나온 지우가 게임 레드 성격. 지은이가 현실 트립이 아니라 게임 트립


했으면 외전 같은 상황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60

바람은... 바람이는 음... 바람이는 바람이지. 그린이고. 콩이고. 쨌든 그렇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할 말이


없네.

61

성격이나 정신연령은 고등학생스럽게 적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 나이 대 특유의 세계가 있으니까. 학교나 성적


생각하고 대학 고민하고 순수하고 친구가 중요한 그런 느낌. 애들이 과거가 있어서 마냥 순수하진 않지만.
62

지은이은 좀 순수하다. 잎새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실 속의 뚜벅쵸같은. 상대를 잘 믿는 편. 고생 안 하고 커서


멘탈이 약하다. 만약에 잎새같은 성격이었으면 초반 멘붕은 적었을지도.

63

사실 포켓몬 좋아하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 트립되기도 했고.

64

배경이 되는 학교는 전에 밝혔듯이 모교를 반영했다. 작가의 모교는 좀... 특이하다. 저 봉사활동 가고
클럽활동하고 그런 것들 진짜 한 달에 한 번씩 했다. 이게 이련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학교 다닐 때는 몰랐지...

65

니드리노는 야생에 있었을 때 난봉꾼이었다. 암컷에게 약한 거 단지 특성 투쟁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인테일을 만났을 때도 추근거리다가 쳐맞았었다. 그때 꽤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데 왜냐하면 니드리노는 그
주변에서 꽤 강한 포켓몬이었기 때문. 그렇게 계속 도전해왔고 결국 지은이를 만났다. 그래도 못 이겼지만.

그래도 나인테일하고 플래그가 선 것은 아니다. 그저 배틀을 하다 보니 건전한 사이가 되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66

지은이는 사실 좀 울보다. 사실 지금까지 잘 버텨서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몇몇 독자님들은 더 굴리시길 바라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67

이 소설의 배경이 현실 고등학생이 된 이유는 작가가 고등학생인 1 세대 주인공들이 보고 싶어서이다. 넘나 로망.


그런데 이렇게 스케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68

현실 패치 은빛산은 설악산이 맞다. 코멘트에 정확히 지적해줘서 놀랐다. 설악산인 이유는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중에 흙산인 지리산보다는 바위산인 설악산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울하고 더 가깝기도 하고.
설악산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큰 산이다.

한라산이 화산이 있어서 더 어울리긴 하지만 거기는 홍련섬이라서.

69

지우는 겉으로 보기엔 냉정해 보이지만 속은 열혈


바람은 겉으로 보기엔 열혈로 보이지만 속은 냉정
70

레드라는 캐릭터는 정말 어려운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에서야 지우를 쓰는 게 편해졌다. 한지우라는


이름도 이제야 거의 적응 다 된 정도.

71

1,2 세대를 배경으로 다른 글을 쓴다면 게임 트립물이지 않을까. 파트너는 꼬렛/레트라. 엔트리는 흔하고 귀엽지
않게 생겨서 홀대받는 포켓몬들. 깨비참이라던가.

72

지우네 포켓몬들은 애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파이리라거나 소방단 꼬부기라거나. 파이리가 암컷인 이유는 매번
파이리는 수컷으로 나오니까. 아주 예쁘고 섹시하고 멋있는 리자몽이 보고 싶어서.

73

바람이네 포켓몬은 전부 수컷.

74

바람이와 잎새는 특활이 같아서 자주 부딪히곤 해서 본편에선 잘 안 나왔지만 투닥투닥 친한 편. 아니 막 대한다.

75

바람/잎새에서 조금 웃었다. 스포일지 모르겠지만... 그린블루가 패러디에서 많기 때문에 별로... 지우/잎새도


아니다. 잎새의 짝은 먼 훗날 나온다. 주인공들 다 행복하게 해줄테니까 걱정마시길. 여러분 마음 다 안다.
그러니까 지은이랑 안 이어지더라도 주식은 가지고 있길 바란다.

76

잎새가 애들을 볼 때

지은 : ♡ㅅ♡
지우 : ㅇㅅㅇ
바람 : ㅍㅅㅍ

이런 느낌.

77

애들 나이는 누오 > 니드리노 > 냄새꼬 >> 보송송

어니부기는 보송송과 비슷하지만 좀 더 일찍 태어났다.


78

지우네는 피카츄 >>> 리자드 >> 어니부기 > 이상해풀

79

4 인방의 포켓몬들 레벨은 현재 기준 30 대 중후반. 한창 고위력기 배우지만 아직 좀 미숙할 때. 최종진화 할


때가 되었지만 체육대회 때문에 조금 미뤘다. 진화하고 나면 몸이 헛도니까.

80

지은이는 얌전한 모범생...이지만 일코하는 포덕. 공부는 꽤 하는 편인데 트립되고 공부에 혼란이 왔다. 게다가
포켓몬 훈련하랴 적응하랴 바빠서 성적은 떨어지고... 하지만 덕질하던 시간이 사라져서 쌤쌤인 셈. 일상이 덕질.

81

바람이는 거의 공부 쪽은 최상위층. 잎새도 상위층이다. 지우는 의외로 중상위. 바람이가 공부시키는 것도 있고


후원받고 있는 처지라서 스스로도 신경은 쓰고 있다.

82

학교 자체가 좀 수준 높은 편.

83

사실 바람이는 천재가 아니다. 영재 정도. 머리가 좋은 것도 있지만 거기에 플러스해서 노력파다. 게다가 센스가
있어서 요령을 좀 아는 편. 쉽게 배운다.

84

지우는 그냥 천재

85

포켓몬 패치된 학교는 좀 더 프리한 편. 배지 가산점 제도가 있어서 이쪽으로도 밀어준다. 특히 이 학교


졸업생들 중 한 명이 목호. 그래서 더 그런 면이 있다. 선생님들이 체육대회 때 배틀을 보고 내년 리그는
괜찮겠는데? 라고 생각했다.

86

애니 설정처럼 여기도 체육관이 많아서 배지도 많다. 관동+성도+기타. 국립대학 수만큼 있으니까. 물론 올콜렉터
하려는 사람도 있다. 쉽지는 않다.

87
소설을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배틀. 어렸을 때 봤던 것을 빼고 애니를 못 봐서 기술이 상상 안 될 때가 있다.
대체로 게임의 애니메이션을 따라가는 편이긴 한데 섞이기도 한다. 분신형 그림자분신술은 애니판 그림자형
그림자분신술은 게임판.

88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칼춤. 칼춤은 어떻게 추는 걸까. 나비춤은 알 것 같은데. 아마 작중에 등장한다면


칼춤을 췄다. 라고 쓰고 묘사 안 할지도.

89

체육관 관장들은 도전을 받으면 도전자의 역량에 따라 봐주거나 더 세게 나가거나 한다. 사용하는 포켓몬도
도전자의 배지 수마다 다르다.

90

지은이의 1 배지전은 녹화되어 홈페이지에 게시 중. 2 배지전은 혼란에 빠지고 방전 쓰고 난리 났었기 때문에 게시


안 했고 3 배지전인 갈색짐은 원래 시합 녹화물을 게시 안 한다.

91
체육관은 대학 이름을 따서 OO 대 체육관 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냥 별명처럼 갈색짐, 상록짐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92

이 세계는 대체로 6 세대 지식까지 있다. 페어리 타입이 막 밝혀진 정도? 아직 메가진화는 나오지 않았다. 연구
중.

93

밑에는 웃자고 하는 캐릭터 설명

한지우
성별 / 남
타입 / 불, 격투
특성 / 둔감
성격 / 고집

94

오바람
성별 / 남
타입 / 풀, 에스퍼
특성 / 정신력
성격 / 냉정
95

둘은 서로 자속을 찌르기 때문에 라이벌인가 보다. 포켓몬으로 치면 번치코와 나시일까


...
그래서 매번 지는 건가.
그래도 특성이 정신력이라 풀죽지 않는다.

96

김잎새
성별 / 여
타입 / 노말
특성 / 헤롱헤롱바디
성격 / 대담

97

이지은
성별 / 여
타입 / 물
특성 / 하늘의은총
성격 / 얌전

98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99

그래도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100

항상 쓰면서 생각하는 것.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지만 재미만 있어서는 안 된다.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다면 보여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

92 화

101
지우는 휴대폰은 없지만 도감이 있어서 불편한 점은 없다. 전화는 안 되지만 카톡은 된다. 카톡을 안 열어보는
관계로 묵묵부답. 바람도 도감을 받았다.

102

지우는 성격이 더럽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아닐 경우에. 본편에서는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순해지긴 했다. 그래서 초반부에 독자들이 인성 드립이나 재수없다는 등 얘기하는 것 보면 내가 잘 적고 있구나
싶었다.

103

어릴 적 별명은 미친개

104

바람과 첫 만남은 주먹질

105

사실 지우를 사람 만든 건 팔할이 바람+피카츄. 둘 다 고생이 많다.

106

이 글은 작가의 로망의 집합체. 레드와 그린의 주먹질이라던가. 고등학생 레드와 그린이라던가. 체육 대회하는
레드와 그린이라던가. 수돗가에서 머리에 물 부어 축축이 젖은 레드라던가. 고의는 아니지만 같이 젖어버린
그린이라던가. 교복, 정장, 일상복 등등.

107

시작이 그랬다는 말이지 물론 지은이랑 잎새도 애정 한다.

108

2 세대 애들도 나오는데 그건 나아아중에. 그것도 목격자님의 포켓몬스터 폭풍같이 진행하는 만화에서 이름을
가져올 예정. 허락받았었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109

은동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귀엽달까. 정감 간달까.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을 것 같은...! 쓰면서 지우만큼
괴리감이 있어 초반에 적응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절대 싫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밑에 코멘트로 대안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다. 사실 대안이 없어서...

110

잎새는 주로 손금이나 타로카드 점을 봐준다. 꽤 잘 맞는다는 소문이 돌아서 가끔 타학년들도 찾아오기도 한다.
타로를 보다 보면 속내를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잎새의 정보의 원천은 대체로 거기. 그래도 비밀은 꼭
지켜준다.

111

백화점에서 파는 돌들은 양산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한 돌들. 그래도 가격은 비싸다. 자연산 돌들은 완전 천차만별.
최소가 40 만원이라지만 억대까지 치솟는 경우도 있다.

112

포켓몬 월드에서 트레이너는 거의 스포츠 스타급 인기를 누리는데 그런 의미로 연예인처럼 바람과 지우를 좋아하는
애들이 많다. 그래서 잎새가 가끔 사진을 팔거나 궁합을 봐주거나 하는 편. 바람이나 지우도 암묵적으로 허락했다.
별로 신경 자체를 안 쓰는 듯.

113

지은이는 눈치 못 채고 있지만 꽤 인기가 있다. 바람이 눈이 높아서 별로 안 예쁘다고 했지. 일반인이 보기엔
예쁜 편. 배틀도 굉장히 잘하고. 그런데 성격은 얌전하고. 뭔가 갭이 있달까.

114

지은이가 눈치 못 채는 건 잎새의 철통 수비 때문이기도 하다.

115

오용호 박사님은 챔피언이었다. 현역 은퇴한 뒤 연구에만 매진. 한창 포켓몬 연구가 시작될 때라 기류를 잘 타서
엄청나게 성공했다.

116

원래 성공은 운이다.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배틀도 운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운켓몬이라고 하지 않나.

117

아르코나 뚜벅쵸처럼 헷갈리는 것 중 하나가 캐이시. 케이시 아니다 캐이시이다.

118

이수재의 첫 포켓몬은 캐이시. 게임 공식 설정이다.

119

이수재는 오박사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캐이시도 오박사에게 받았다. 그 캐이시가 진화한 후딘의 아이를
바람이 받은 것.
120

도시락은 전학 전에는 나리 누나가 싸줬지만 자취하는 지금은 둘이 번갈아가면서 싸고 있다. 초반에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은 괜찮은 편. 이 경험 덕분에 기본기가 생겨서 지우는 훗날 설악산에서 살 때 먹을 걱정
덜하면서 지낸다.

121

아 전에 누오가 비바라기를 썼을 때, 누오 의젓하다, 든든하다, 어른 같다, 다정한 첫째... 이런 코멘트가


있었다. 어... 누오 성격은 여전히 장난꾸러기이다.

122

본편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일화를 살펴보면

지은은 주말에는 좀 늦잠을 자는 편인데 우파는 지은과 놀고 싶다. 장난기가 발동 침대에 자고 있는 지은에게
뛰어든다. 윽, 무거움에 깨는 지은. 그에 일어난 냄새꼬가 덩굴로 바닥으로 던지고 찰싹찰싹 때린다. 냄새꼬
덩굴은 약한 편이지만 우파는 풀에 4 배. 바닥을 뒹굴며 아파한다.

123

다음 주 주말. 우파는 냄새꼬의 눈치를 본다.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가 지은을
눌러 깨운다. 이번에는 안 맞겠지? 하면서 이불속에서 머리를 빼내는데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냄새꼬. 우파는 또
바닥을 뒹군다.

124

우파는 누오로 진화했다. 느긋한 성격이 종특이기 때문에 누오는 느긋하게 장난을 친다. 지난번에는 자는 지은의
얼굴에 물을 뿌려 깨웠다가 지은이한테 뺨을 잡아당겨지며 혼쭐이 났다. 이번에는 물 스프레이 형식으로 뿌렸다.
지은은 으으, 하면서 일어났지만 냄새꼬한테 또 맞았다. 진화했지만 여전히 아프다.

125

이 외에도 누오로 진화했더니 팔이 더 생겨서 더 많이 장난친다. 지은이 책상 앞에 앉는데 의자 잡아당기기,


지은이 일어날 때 맞춰서 바닥에서 침대 가로 굴러서 지은이가 물컹한 것이 밟히는 느낌에 놀라게 하기, 자는
마기라스 꼬리에 예쁜 리본을 묶어서 웃음거리 만들기 등등. 요즘에는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는지 툭툭 치고 뒤돌아보면 볼 찌르기를 하고 있다.

126

사실 의젓한 성격의 우파를 데려오려고 했었다. 지은이의 엄마 같은 멘탈케어 담당으로. 그런데 장난꾸러기
우파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직전에 바뀌었다. 바뀐 게 더 재미있고 좋은 듯.

127

그 성격은 우파의 친구에게 더해졌다. 순천만에서 누오를 기다리고 있는 먼저 진화한 친구 누오. 수컷에 의젓한
성격이다.

128

수컷 누오가 진화한 이유는 매번 우파가 사고 치고 돌아다니니까 그거 뒷수습한다고 쫓아다니다가 진화한 것.


원래 뒤처리가 더 힘든 법이다.

129

수컷 누오는 순천만에서 무리와 함께 우파를 기다리고 있다.

130

지은이의 포켓몬들

메리프 - 보송송
성별 / 암컷
타입 / 전기
특성 / 정전기
성격 / 외로움

131

냄새꼬
성별 / 수컷
타입 / 풀, 독
특성 / 악취
성격 / 냉정

132

우파 - 누오
성별 / 암컷
타입 / 물, 땅
특성 / 저수
성격 / 장난꾸러기

133

니드리노
성별 / 수컷
타입 / 독
특성 / 투쟁심
성격 / 건방짐
134

지우의 포켓몬들

피츄 - 피카츄
성별 / 수컷
타입 / 전기
특성 / 정전기
성격 / 의젓함
도구 / 전기구슬

135

이상해씨 - 이상해풀
성별 / 수컷
타입 / 풀, 독
특성 / 심록
성격 / 얌전

136

파이리 – 리자드
성별 / 암컷
타입 / 불꽃
특성 / 맹화
성격 / 겁쟁이

137

어니부기
성별 / 수컷
타입 / 물
특성 / 급류
성격 / 성급

138

바람의 포켓몬들

이브이 - 블래키
성별 / 수컷
타입 / 악
특성 / 싱크로
성격 / 냉정

139
구구 - 피죤
성별 / 수컷
타입 / 노말, 비행
특성 / 날카로운눈
성격 / 고집

140

꼬렛 - 레트라
성별 / 수컷
타입 / 노말
특성 / 근성
성격 / 명랑

141

잉어킹 - 갸라도스
성별 / 수컷
타입 / 물, 비행
특성 / 위협
성격 / 고집

142

캐이시 - 윤겔라
성별 / 수컷
타입 / 에스퍼
특성 / 싱크로
성격 / 차분

143

잎새의 포켓몬

푸푸린 – 푸린 (크림)
성별 / 암컷
타입 / 노말, 페어리
특성 / 헤롱헤롱바디
성격 / 개구쟁이

144

많은 분들이 루트를 궁금해하시는데... 지금쯤 오면 다들 다 아실 것 같은데...

포켓몬 루트 (+서브남주)
145

플롯을 짜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146

포켓몬을 이길 수가 없어...!

147

작가는 코멘트로 팬아트 그려줄 것처럼 얘기하는 분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기다리는 중.

148

지우는 덥다고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는데 그 여름 특유의 눅눅하고 뜨거운 느낌을 별로 안 좋아한다. 차라리
쾌청이면 습기는 없어져서 낫다고.

149

전설의 포켓몬이나 환상의 포켓몬은 벽화나 그림, 전설과 신화로 내려오고 있다. 일반인들은 타지방 신화까지는
모르지만 포덕들은 다 꿰고 있다.

150

잎새의 주도 하에 준결승 진출하는 지은이를 응원하자며 전기 포켓몬 머리띠를 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결국
데덴네로 결정되었다. 어쩌다 보니 반 남학생들도 휩쓸리게 되었다고.

151

그런데 정작 지은이는 그 머리띠를 보자 조금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뭔가... 피식자가 될 것 같은 기분.

152

바람은 잎새가 데덴네 머리띠 한 것을 보고 이게 뭐냐고 비웃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한 것을 보고는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153

지은이 반이 멀기도 하고 체육대회 시작했을 때만 잠깐 쓰고 있어서 지우는 못 봤다.

154

포켓몬이라는 말이 없었던 옛날에는 포켓몬을 마수 혹은 괴수라고 불렀다. 어르신들 중에는 아직도 그렇게
부르시는 분들이 있다.
155

도감에 따르면 루기아는 바다의 신령님. 가이오가는 바다의 화신. 루기아는 에스퍼/비행이다. 물/비행 아님 주의.

156

사실 전설의 포켓몬은 만날 수 없으니까 전설이라서... 여기 사는 포켓몬 신화학 전공 교수들도 물/비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157

체육대회에서 지우와 바람이의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다. 어차피 같은 반이기도 하고. 그래도 많은 학생들이
결판을 못 내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다.

158

전설의 포켓몬 루트...? 마음의 눈으로 보다 보면 보일 수도 있다. 허허.

159

지은이는 현재 조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인 점도 한몫했다.

160

초반에 모다피의 모다모다모다 가 무다무다무다 로 읽힌다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작가가 죠죠러는 아니라서
뭔지는 모르는데 패러디해서 넣은 것이라서.

161

지우와 바람이 잎새가 포켓몬이 없는 세상으로 간다면 아마 천애 고아로 시작해야 한다. 지은이 세상에는
실존인물인 저 주인공들이 없기 때문에. 기억은 다르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있고 살던 집이 있고 했던
지은이보다는 더 힘든 상황일 듯.

162

소설로 쓴다면 셋 다 보내진 않고 한 명만 주인공으로 잡아서 현실 세상에 떨구겠지. 그러면 주변에 둘러봐도
포켓몬이 없는 세상에 패닉. 바람이나 지우라면 연구소를 찾아갔는데 포켓몬 연구소가 아니라 일반 생물학
연구소가 있겠지.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연상의 연구원(어른판 지은이)에게 주워지고 연상/고딩 키잡물이...

163

뭐야, 재밌을 것 같아.

164
잎새라면 오도카니 산에 떨어진 잎새를 지은이 오빠인 지한이가 데려오고 지은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고등학교도
다니고... 이것도 키잡...? 세상에...

165

그래도 혼자 보내버리면 너무 안타깝고 힘들 테니까 파트너 포켓몬 한 마리는 들려 보내야겠다. 지우 – 피카츄,


바람 – 이브이, 잎새 – 푸린.

166

만약 지은이가 트립 안 했고 저 셋이 현실에도 있었다면. 지우는 완전 포덕에다가 월드챔피언십 나가고 취업은


포켓몬코리아/닌텐도 일지도. 아니면 바람이는 오박사님 따라서 생물학 연구자가 되었을지도. 잎새는 포덕이지만
소프트 유저 정도 여기서처럼 수의사를 목표로 하고 있을 듯.

167

지은이가 이쪽 세상에 남기로 결정한 건 6 개월동안의 시간이 한몫했다. 어느 정도 적응하고 체념하고 있기도
했고. 친구 먹은 셋 하고도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포켓몬들을 많이 들여 버려서.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떠나갈 수 없었다고.

168

주인공의 이름이 이지은인 것은 모 가수 때문인 것은 아니다. 연재 시작하고 나서야 아, 그 가수 이름이


이지은이었지 깨달았다. 이름이 이지은인 것은 일단 독자님들이 감정 이입하기 쉽게 하도록 가장 흔한 이름을
찾던 게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게 처음에는 드림이였어서 흔한 이름을 찾다가 그렇게 했는데....
나와 지은이는 완전 다른 인물이기에 동일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169

OO 드림물을 써야겠어! -> 주인공은 이케이케 -> 엔트리는 이렇게 -> 주제는 이것으로 -> 플롯을 짜자! ->
????

왜 너는 서브남주가 되어있니 흑흑

170
사실 지금쯤 다른 2 차창작물처럼 루트 밝히고 가려고 했는데 뭐랄까... 한 쪽 편을 들면 독자님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완결까지 이 비밀은 나만 간직하고 가야겠다. 진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171

타국 포켓몬은 아예 입수불가능인 것은 아니다. 수컷 포켓몬이라면 그 나라에서 허락을 받은 다음 데려올 수 있다.


메타몽은 이론상으로 교배로 엄마 포켓몬이 아닌 아빠 포켓몬의 외형을 따라 가지만 그건 이론일 뿐 실제로는
메타몽은 다른 종이랑 교배를 하려 하지 않는다.
172

메타몽은 자가분열로 그 개체수가 늘어난다.

173

이 세계에도 올림픽, 월드컵 등등 있다. 거기에 월드포켓몬리그가 첨가되었을 뿐.

174

지은이가 이사하고 남은 빈 집은 복도식 아파트 11 층 가정집이기 때문에 세를 둘 예정. 여러가지 다른 용도로


쓰면 좋겠지만 위치가 애매하다...!

175

이 작품 내에서는 한국을 관동+성도 포켓몬으로 구성. 일본 남쪽 지방이 호연, 북쪽 지방이 신오. 하나 = 미국,
칼로스 = 유럽, 알로라 = 하와이를 비롯한 열대지방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176

뒷 세대 애들도 존재하지만 시점은 다 제각각.

177

진화의 돌은 게임 내에서 포켓몬에게 소지하게 해도 진화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화의 돌을 사용해야 진화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진화의 돌이 방사능 비슷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인간한테는 영향이
없는 모양.

178

즉 그냥 가져다 대는 것으로는 진화하지 않고 사용하겠다는 포켓몬의 의지가 필요하다.

179

팬텀이나 강철톤 같이 조건에 의한 진화 설정도 그대로 가져간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게임을 따르니까.

180

포켓몬 교환을 할 때는 교환 기기를 사용해야 한다. 몬스터볼은 사용자의 트레이너 정보와 연동되어있고
국가적으로 관리하기 때문. 그래야 PC 박스도 사용이 가능하다. 그냥 주고받는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다.

181

기본적으로 포켓몬들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교환을 할 때, 상대방 포켓몬의 에너지나 가지고 있는
물건의 에너지가 영향을 미치는 모양.
182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는 그렇게 추측만 하고 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183

아직 포켓몬은 수수깨끼의 생명체들.

184

2 부는 여름방학이 배경이 될 예정이다.

186

전환점이 있었던 만큼 1 부와는 다른 2 부만의 느낌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187

그럼, 언제나처럼 돌아오겠습니다.

188

2 부 제목 : 성장

93 화

1 부 후기

1. 1 부 제목은 세계

왜 제목이 세계인지는 독자님들에게 맡깁니다.


2. 초반부 지은이의 트립 부분에 대해서

이 소설에서 초반부 너무 조울증같다. 감정과잉이다 얘기도 있었고 그것이 현실적이다 그래서 좋다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아니, 트립했는데 사람들이 저렇게 정신이 멀쩡할 수 있을까. 생각에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또 트립으로 인한 혼란을 다룬 글들을 몇몇 보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구요. 하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작가의 경험이었습니다.

작가는 대학교를 다닐 때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컵라면이 먹고 싶어서 방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방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겁니다. 원룸형이라 방마다 전자 비밀번호 도어락이라서.
그 때 머리가 하얘지는게 뭔지 느꼈어요. 방에 들어가야하는데... 그때 멘붕이 뭔지 직접 경험했습니다.
삑삑삑삑 누르는데 다 아니라고 하고. 결국 룸메한테 전화했는데 진짜 부끄러워 죽을 뻔했습니다. 이 때, 아
비밀번호만 까먹어도 이렇게 머리가 새하얘지는데 세상이 바뀌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까 하고 생각을...

두번째 경험은 포하를 쓰고 난 뒤었습니다. 앞의 이야기와 좀 비슷한데. 이번에는 거실형 기숙사에서 살았던
때의 일입니다. 방으로 들어가려면 1 층 입구 통로에서 혈관인식하고 자기 층수 집(거실)으로 들어가는데 또
비번입력하고 자기 방에 들어가려면 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아주 보안이 철저한 시스템입니다.

어느날 작가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조아라 보면서 방에 가는데. 분명 통로에서는 혈관인식하고 엘베타고


올라왔는데 집에 들어가는 비밀번호가 해지가 안 되는 겁니다. 이번에는 비밀번호를 잊은 것도 아니었고 분명
맞았는데두요. 그때 진짜 이게 뭐지. 왜 안 열리지(동공지진). 순간 혼란에 빠져서 자기자신을 공격...이
아니고. 머리가 하얘지고. 계단에 앉아서 한동안 지금 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뭔가
당황스럽고 서럽고 미칠 것 같더군요.

그 때 아, 이런 일상이 조금 변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당황하고 멍해지고 어이가 없고 정신이 나갈 것 같고 미칠


것 같은데 세상이 변한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 때쯤 좀 앞부분을 수정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날을 계기로 수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뭔가 쓰고 나니 부끄럽네요.

아, 결국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여기서 문제입니다. 왜 작가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덧글로


생각을 적어주세요. 컨닝금지. 여러분의 양심에 맡김. 정답은 2 부 첫편 후기에 공개하겠습니다.

3. 현재의 위치
1 부 쓰는데 2 년이 걸렸네요. 90 편 가까이 썼는데... 이제 프롤로그가 끝났군요(농담) ㅋㅋㅋ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기승전결이면 이제 기가 끝났달까. 5 단계로하면 발단-전개 까지입니다. 2 부가 위기, 3 부가 절정,
4 부가 결말 순으로 진행되고 남은 이야기들은 5 부로 뭉뚱그려서 에필로그로 적을 예정입니다. 몇몇 생각해 둔
게 있는데 길어질 것 같은 건 썰로 풀거나 따로 글을 파거나 할 듯 합니다.

본편 플롯은 다 짜놨는데 에필로그는 그 때 생각하려구여. 어찌될지 모르겠네. 그 때 여러분이 원하는 외전이


있으면 추천 받아서 필받으면 써볼 생각도 있습니다. 헷, 아직은 본편이 먼저니까 아주 먼 훗날 얘기가 되겠군여
(먼산).

지난 번에 언급한 300 편은... 아니 여러분 너무 좋아하시는 것 아닌가요. 분명 완결은 짓겠지만.... 작가는


죽을 것 같은데ㅎㅎㅎ.... 그래도 1 부는 초반이라 자세하게 적었지만 2 부부터는 주 플롯 외에는 디 오리진
식으로 확확 자르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아니, 진짜 디 오리진 식은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쨌든 한 부당
50 편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다 60? 70...? 아 적어보면 알겠죠 허허... (해탈)

4. 포켓몬 고

썰푸니까 좋네요. 후기에 너무 말을 많이 하면 또 본편 방해 되는 것 같고... 그래서 마지막 두 챕터는 후기


다이어트를 좀 했습니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ㅎ...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대신 1 부 후기에 완전
말을 많이 하는군요. ㅋ....

아, 포켓몬 고 하고싶음요 ㅠㅠㅠ 이 소설 이름 포켓몬고라고 하는 코멘트보고 빵터졌ㅋㅋㅋㅋ 진짜 포켓몬고가


나올줄 상상도 못했는데 이름이 겹쳐버렸네요ㅋㅋㅋㅋ 포켓몬고 좋아여 재밌는데... 근데 작가는 못하고 있고...
댓글 보면 몇몇 분들은 코멘트에 메리프 잡게 해주세요, 적는데... 정작 작가가 메리프 잡고싶다구여 ㅠㅠ
엉엉... 교환 거래 나오면 독자님들 작가에게 메리프 보내주신거져? 나도 메리프 파트너로 두고싶다 엉엉. 아,
작가의 팀은... 역시 전기포덕은 썬더를 지나칠 수 없었달까. 여러분, 중립국으로 오세여ㅋㅋㅋㅋ
5. 연재 주기

전에 얘기했듯이 작가가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서 1 부 마무리 지었으니까 진짜 시험 끝나고 올 겁니다. 시험은


하반기에 있는데 이것저것 수습하고 연말에 오거나 아니면 다시 시험 준비하거나... ㅎ.... 2 부 시작은 아마
적어도 2018 년도 전후로 올 것 같습니다. 재시험이면... 연재주기는 이 모양일 것 같고 합격하면 열나게 달릴
예정입니다. 제발 ㅠㅠ

사실 휴재하기 전에 1 부는 마무리하고 싶어서 무리한 부분도 어느정도 있습니다 ㅠㅠ 이제 온전히 공부에


집중해야겠지요. 으으으. 쨌든 작가는 소설을 쓰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또 깨닫고 있습니다. 쨌든
분명 이 글 완결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길지만... 길지만...(또륵)

돌아온 후에도 연재주기는 작가가 한 챕터를 다 쓰고 돌아와서 일주일동안 왕창 달리고 사라지는 패턴을 반복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글 완결성도 높아지고 스트레스도 덜 받더라구요. 그러니까 비축분 쌓아서 돌아올게요♡

6. 감사 인사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추천도 매번 찍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ㅠㅠ 닉네임을 다 적을 순 없지만 코멘트 달아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꼬박꼬박 달아주시는 분들은 거의 익숙해서 친근...♡ 장편 코멘트도
사랑입니다ㅠㅠ 개드립치는 것도 다 받아주시는 상냥한 독자님들 감사해요. 진짜 코멘트들 지금까지 30 회독은 한
것 같네요. 틈틈히 보기도 해서ㅋㅋㅋㅋㅋ 사실 본편 정주행도 10 회독 일까말까인데...

1 부 쓴 것도 독자님들의 코멘트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듯 하네요. 물론 혼자 쓰는 것도 재미있지만 같이 웃고


울고 하는 재미가 있는 거겠죠. 이번 편 올리면 독자님들이 ㅠㅠㅠㅠㅠㅠ 하겠지? 하면서 올리고 막 이번편은
ㅋㅋㅋㅋㅋㅋㅋ이다 하면서 올리고. 함께 웃고 울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그럼 해가 바뀔 때 쯤 2 부 시작으로 찾아올게요. 그때까지 항상 건강하시고 선호작 삭제는 앙대여ㅠㅠㅠㅠ 그럼


그때 보겠습니다. 안녕.
텍본 후기

안녕하세요. 도여은입니다.

원래는 텍본 하나에 다 넣으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만들다보니 너무 양이 많은 것 같아서 1 부와 나머지로 나눠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너무 옛날에 쓴 부분이라 부끄러운 점이 많아서 민망할 지경입니다만....... 그래도 개인지를


내지 않으니 텍본이라도 원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이렇게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불펌은 절대 금지하고 블로그에서 다운받아서 사용해주세요!

포하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조아라 : https://www.joara.com/book/962831

블로그 : https://dodostorybox.tistory.com/

이메일 : doyeon11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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